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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유령) 오메가의 빛 1권 PDF
(달빛유령) 오메가의 빛 1권 PDF
오메가의 빛
레이 에드윈은 알파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극우성 부모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는 세상에 그의 존재
가치를 드높여주었고, 뛰어난 외모와 두뇌는 그가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를
영리하게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메가였다. 아무리 ‘극’을 달고 나왔다 해도, 수 세기 동안 차
별되온 오메가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그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이 빌어먹을 세상을 바꾸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에게 알파는 알파가 오메가를 정의하듯 성욕 풀이 자신의 목표를 위한 도
구에 불과했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 세간에서 기대하는 빌어먹을 극우성
알파와의 영혼 각인은 더더욱 개나 줘버리면 딱 어울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뭐야?”
“루스.”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CHAPTER 5.
CHAPTER 1.
***
그냥 입을 닥치고 있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호화로운 엔틱 가죽 소파에 기대 거만하게 앉아 있는 레이 에드윈은 고전
미 넘치는 방 안 분위기와 완벽히 어우러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진작
넋을 놓았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루스에겐 그런 감상 따위를 가진다는 것 자
체가 무언가를 기어이 잃게 할 것 같은 위험한 함정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면 정조라던가.
남자가 정조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실제로 체감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루스는 분명 이곳에 반강제로 끌려 들어오면서 응접실이라 추
정되는 방을 질릴 정도로 여러 개 목격했다. 그런데 하필 안내를 받고 들어
선 곳은 침실이었다.
방안으로 떠밀려 들어오기 직전, 동행했던 로이라는 비서의 얼굴에서 떠
오른 건 괴이함이었다. 그제야 루스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문이 닫히고 눈앞에 성인 남자 다섯은 끄떡
없을 대형 침대를 보는 순간, 오랜만에 목숨을 위협받는 수준의 위기감을 느
껴야만 했다. 루스는 자꾸만 침실로 돌아가는 눈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정말 베타 맞아?”
“
***
[…….]
여긴 어디지?
루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낯익은 풍경이었다. 문득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버석거림에 고개를 내렸다. 맨발 아래 깔린 것은 부드러운 흙이었
다. 다시 고개를 들자 울창하게 솟은 나무들이 빽빽이 시야를 두르고 있었
다. 나뭇잎으로 가려져 띄엄띄엄 보이는 하늘은 푸르렀다. 그러나 빛은 느껴
지지 않았다. 왠지 허망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 그렇구나.
루스는 그제야 낯익은 기억을 떠올렸다. 이곳은 어릴 적, 힘을 키우기 위
해 그에게 훈련받았던 장소와도 비슷했다. 아니면 진짜 그곳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꿈인가?
자신은 분명 테라에 있는 베타 아파트 조그만 거실에 있었다. 잠시 이른
햇볕의 노곤함이 밀려와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째서 숲이 펼쳐진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꿈임이 틀림없었다.
살다 살다 별일도 다 있군.
지금껏 이렇게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꿈은 처음이었다. 루스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리만치 생명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작은 흐느낌과
닮아있었다. 이런 숲에서 울음소리라니. 기묘하면서도 섬뜩함이 동시에 가
슴을 스쳤다.
루스는 흙바닥을 쓸며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 느껴지는 발바닥 감촉이 너
무나도 선연했다. 얼마 가지 않아 냇가가 나타났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큰 바위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건 작은 아이였다. 아
무리 꿈이라지만 소리의 본체가 아이라는 것에 놀란 루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봐, 괜찮은……!]
[
제기랄.
루스는 낮게 욕을 뇌까리곤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몸을 비켜
섰다.
십분. 그 이상은 안 돼.”
“
아, 내가 내렸지.
아직 건네주지도 앉았다. 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머그잔을
의식하며 당황한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미안, 네가 순순히 말로 사과할 줄 몰랐어. 돈이나 다른 보상 이야기라도
꺼낼 줄 알았지.”
이번에는 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더 무례하군. 이래봬도 어머니한테 제대로 예의 교육받은 몸이라
“
고.”
“어머니?”
“그래.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한테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씀하셨거
든. 보상 계획안부터 내미는 순간 아버지처럼 된다고 말이야.”
레이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그건 정말 최악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루스는 내심 놀랐다. 베타였지만 지금껏 알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아왔기에 그들의 가족관계라던가 교육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꿰고 있었
다. 어머니라면 베타에서 발현됐다던 그 극우성 오메가 일 텐데…… 아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 녀석과는 이제 정말
끝난 인연이었다.
“어쨌든 사과는 받도록 하지. 그러니 이제 더는 여기 오지 마.”
“받을 것만 받고 차버리는 건가? 정말 나쁜 남자군.”
***
제기랄! 이런 바보 천치!
그제야 본인의 착각을 깨달은 루스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머리까지 열
이 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이란 단어에 정신이 팔려 말한 주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도 설마 하고 던져본 말인데 얻어걸린 격이 되었다. 그런데 그
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 거란 말이지.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루스의 모습에 레이는 비릿하게 중얼
거렸다.
짝사랑인가 보군.”
“
“…….”
쿵쿵 쿵!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쿵쿵 쿵!
거침없는 두드림에 진동이 부엌 테이블까지 도달했다.
이러다 문을 다 부숴놓겠군.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시 초인종을 달아야 할 듯싶었다. 루스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에게 석연찮은 눈길을 주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번
엔 또 어떤 미친놈이 난리치는가 싶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성난 목
소리가 덮쳐왔다.
“그 새끼… 아니, 레이 에드윈은 어딨지?”
아론 에드윈이었다. 무시무시한 그의 얼굴에선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다.
“안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
“비켜.”
[……]
“…….”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좋은 곳에 데려가 줄 게.”
“
***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직접 보지도 못한 주제에 뭐가 마음에 들고 말고야?]
[
***
***
[ 저희 L. U. Z. 는 삼 일간 휴무입니다.]
입구에 걸린 문구를 훑은 시선이 내부를 응시했다. 이른 새벽이었다. 선글
라스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고급스러운 카페 앞에 우두커니 서 있
는 모습은 퍽 수상해 보였다. 그러나 밤 서리가 내려 축축한 새벽, 그늘진 빌
딩가 주변엔 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루스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의 기척을 살핀 후 가게 입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건물 끝 모퉁이를 돌아 비좁은 틈새로 들어가자 작은 조명과 정갈
한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관리된 골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옮겨 작은
문 앞에 도달한 루스는 선글라스를 벗고 허리를 굽혔다. 눈높이보다 좀 더
아래에 있던 작은 센서가 곧 제 주인의 홍채를 인식했다. 보안 시스템이 해
제되며 찰칵, 문이 열렸다. 주변의 기척을 살핀 그가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
에 발을 들이자 자동으로 환한 불이 켜졌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곧게 뻗은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원 휴게실과 식품창고를 지나 또 하나의 문을 열
고 들어선 공간 역시,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 불을 밝혔다. 마지막으
로 홀 안에 빛이 떨구어졌다.
은은하게 떨어지는 조명 아래 요 며칠간 주인 대신 스캔들에 시달렸을 바
와 그 너머로 수십 개의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를 가리는 블라인드
틈새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어와 정리된 테이블과 바닥 위로 수많은 선
을 그어 내리고 있었다. 곧 아침이 밝아 올 것이다.
루스는 바에 가방과 점퍼를 벗어 올려둔 후 바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다
가갔다. 가게에 들인 후로 줄곧 켜져 제 할 일을 해왔을 이 녀석만은 휴무가
없었다. 기특하다는 듯 여전히 따끈한 기계에 잠시 손을 대어본 루스는 작은
수건에 물을 적셔 스팀 노즐을 감싼 후 밸브를 열었다. 칙―! 칙―! 몇 번의
스팀 뿜는 소리와 함께 수건이 금세 뜨거워졌다. 수건으로 능숙히 노즐을 몇
번 문질러 닦은 후, 큰 손으로 작은 수건을 야무지게 접어두는 그의 모습은
제법 카페 사장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추출구에도 버튼
을 눌러 물을 내려 본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살짝 옮겼다. 그라인더에 담긴 원두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새로 해두어야겠군.”
카페 오픈한지 일주일 만에 갓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 맛을 못 잊고
단골이 되기로 한 고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었다. 로스
팅 전문 직원도 이미 스카우트 해둔 상태였지만 아직 전에 다니던 카페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이번 달 동안은 루스가 해야 할 몫이었다. 일부러 이
른 새벽에 방문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위 선반엔 로스팅한 날짜와 원두 이름이 적힌 병들이 진열되어 있었
다. 그것을 죽 훑은 루스는 ‘espresso’라고 적힌 병을 꺼내 그라인더 뚜껑을
열어 원두를 부었다. 촤르르륵 원두들이 그라인더 안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감각을 깨우는 듯 조용한 홀 안을 요란하게 메웠다. 전원을 켜고 원두를 갈
자 기분 좋은 음(⾳)들이 한차례 깨어진 감각 속을 휘젓고 사라졌다.
레버를 당겨 다 갈려진 원두 가루를 포터 필터에 담기 시작하자 홀 전체에
향긋한 향이 진동했다. 고르게 템핑한 포터 필터를 에스프레소 머신에 장착
하고 버튼을 누르니 안에서 미세하게 ‘틱’하며 작동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손이 바빠졌다. 순간에 고른 에스프레소 잔을 추출구 밑에 두니 간발의 차로
에스프레소가 내려왔다. 또 한 번의 묵직하고 진한 향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
다. 30초의 마법이다. 루스의 입술에 흡족한 미소가 걸쳐졌다. 에스프레소
잔을 한 손에 들고 얼굴 가까이 가져가자 향기롭고 진한 내음이 코끝에 감돌
았다. 호불호가 갈리는 진하고 쓰디쓴 맛은 언제나 그의 감각을 강렬히 일깨
워 주었다. 그래서 루스는 이쪽을 더 선호했다.
그 녀석은 질색하겠군.
문득 든 생각에 루스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졌다. 곧 자각이 밀려들었다.
“…….”
분명 여기다 뒀을 텐데.
텅 빈 의자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가져갔나 보군.
없어진 건 점퍼였다. 무방비로 던져둔 제 잘못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CCTV가 잔뜩 달려있는 공원에서 대담하게 훔쳐간 놈도 참 머리가 없었다.
루스는 점퍼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핸드폰, 지갑 그
리고…… 열쇠.
혹시나 싶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루스는 이를
악물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공원 울타리 밖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작은 아이가 수상쩍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루스는 쏜살같이 달려 울타리를 단번에 뛰어
넘었다.
왁
“ !”
그럼 그렇지.
꼬맹이 한정이긴 했지만 너무 다정스럽다 싶었다. 한순간 까칠해진 레이
의 태도에 멈칫했던 루스는 정색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내 오지랖에 보태줄 거 아니면 아이 이리 줘. 넌 그만 가보고.”
“이런, 내가 여기에 산책이나 하러 온줄 알았나 보군.”
방금 뭐였지?
눈이 마주친 건 알겠는데 즉시 고개를 홱 돌려버린 루스의 행동에서 뚜렷
하지 않은 묘한 분위기가 스친 기분이었다.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시선을 피해버리자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레이님, 그럼 의상은 이걸로 마무리할까요?”
“
또 ‘년’이군.
아무래도 알파 놈들은 오메가의 성별 따윈 무시하기로 한 듯했다. 루스는
불쾌함을 느끼며 중얼댔다.
“한 인간을 네 것, 내 것 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만.”
“웃기지 마! 네놈도 저년에게 홀라당 넘어간 것 같은데, 쟤는 이미 나한테
각인된 년이야.”
“그 ‘년’이란 말 좀 그만 쓰시죠. 듣기 안 좋군요.”
한층 매서워진 목소리에 알파는 또다시 움찔했다. 저놈은 도대체 정체가
뭔데 자꾸 밀리는 기분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딱히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를 보내왔
다. 알파는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정체도 모를 놈
때문에 체면을 구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으레 그랬듯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 눈의 색을 달리했다. 한순간 알파
의 페로몬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오메가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제 공포까지 느껴지는 오메가의 모습에 루스의 눈빛이 가
라앉았다. 그사이 페로몬으로 무장한 알파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그에게
경고를 날렸다.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웃기는 새끼네. 너 뭐야? 어디 가문 소속이
야? 감히 나, 티오네…….”
“뭐긴, 뭐야? 내 거지.”
***
어 루스님. 살아 돌아오셨네요.”
“ ?
***
레오 펜덴 기업 본사 맨 꼭대기 층.
아론의 집무실로 레이가 쳐들어온 건 막 해가 저물 즘이었다. 쳐들어온다
는 게 고상한 표현은 아니긴 했어도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그에게는 이보다 더한 말을 붙여도 상관없을 듯싶었다. 레이는 들어오자마
자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아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까지 지켜본 아론
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로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가문 회의.”
“
역시나.
몇 세기를 넘게 명맥을 유지해오는 7가문을 지탱하는 것은 각 가문을 통
치하는 가주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알파 가문은 각 국가마다 당
주가 따로 있었다. 전체 가문을 통솔하는 테라 가주만큼의 영향력은 아니지
만, 각국에 있는 에드윈 가의 사업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는 그들은 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참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 에드윈이 가문의 가주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그들의 참견할
권리는 쓸데없이 남용되고 있었다. 알파의 수명이 평균 이백년인 것을 생각
하면 세대교체는 거의 한 세기에 한 번꼴로 이루어질까 말까 했다. 그러나
전대 가주이자 현 알파의 수장인 레오 에드윈이 고작 몇 십 년 만에 레이에
게 가주자리를 물려준 상태였고 현재 각국의 에드윈 당주들은 거의 백세를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오래된 자일수록 전통과 관습을 앞세운 고
지식함은 대단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오메가가 가주자리에 오르는 것에 처음부터 반발했었고 현재도
레이를 가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전대 가주가 역임하는 동
안에 전혀 갖지 않았던 회의를 밥 먹듯이 가지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아
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테라를 방문해 레이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 이유는
뻔했다. 레이의 이번 스캔들을 빌미로 모인 자리였을 게 분명했다.
아론 또한 그 일로 인해 레오 펜덴 회사의 주식이 떨어지고 있다는 둥 가
문의 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둥의 항의 전화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가문
이름을 앞세워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작자들이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당하는 당사자의 기분이 달라지는 건 아닐 터였다.
아론은 한숨을 쉬며 서류에서 아쉬운 손을 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기
등등한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으니 그때까지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있
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감히 천한 베타와 붙어먹느냐며 난리도 아니더군. 저들 눈에는 자신들
빼면 모든 인간이 천해 보이나 봐.”
“그래서. 너 설마 거기다 난리 치고 온 건 아니겠지?”
이건 또 무슨…….
아론은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레이를 쳐다봤다. 이른 아침
부터 베타 녀석 집에 드나들며 조식까지 얻어먹었다는 녀석의 행동을 일주
일째 비서를 통해 듣고 있었다. 거기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옷을 바
쳤다는 보고까지 들었다. 최근 들어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이는 녀석을 보면
서 레이가 사랑에 빠졌다는 로이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저리 태연한 얼굴로 무슨 개 소리란 말인지.
“그럼 녀석과 그 짓 한번 하기 위해 지금 이런 골치 아픈 짓을 벌이고 있다
는 거야?”
“…….”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라 창문을 열어둔 상태였다. 루스는 서둘
러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들이친 빗물이 선반에 고이고 있었다. 덕분에 작
은 정화식물은 물기를 머금고 싱싱한 푸른빛을 뽐내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걸어두었던 열쇠는 수난이었다.
루스는 창문을 닫고 젖어 든 열쇠고리를 들어 올렸다. 파란 펜던트가 물기
에 반짝였다. 그리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그냥 열쇠가게 길 옆 가판대에
진열돼 있던 것을 충동적으로 집어 든 것뿐이었다. 파란 돌조각에 고인 빗물
이 손바닥으로 흘러 기어이 소매를 적셔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찹
찹함이 어렸다. 저것은 단순한 빗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끈적거리고 무거울 수 있을까?
저것은 마치 자신의 몸속에서 집착과 미련으로 점철된 끈질긴 미련 덩어
리가 만들어낸 점액질과도 같았다. 그것이 기어이 차올라 살갗을 뚫고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어떻게 하면…….”
“
“마셔.”
루스는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그의 앞에 무심히 내려놓았다. 레이는
자신 앞에 놓인 홍차 잔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커피가 아니네?”
“ 곧 잠잘 시간이야. 가볍게 마셔.”
무심한듯해도 세심한 그의 배려에 레이는 옅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청색 띠를 두른 그 위로 아기자기한 문양이 새겨진 잔은 고급스러웠다.
“비싸 보이는데.”
“선물 받은 거다.”
[ 어디 아픈 거야?]
소년의 걱정스런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 그냥.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마음이 심란해졌거든.]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아이를 향해 루스는 가느스름
한 미소를 띄웠다.
어느새 이 상황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더니 딱 그 짝이 맞았다. 문제는 이 꿈이 언제까지 지속될 거냐는 것이었다.
[ 너는 여전히 밖이 무섭나?]
소년이 당연하다는 듯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는 쓰게 웃었다.
[그러게. 너 같이 약한 자들에게 세상은 왜 그리 무섭게 구는 걸까?]
[너는 안 무서워?]
***
힘을 가지게 되면 무얼 하고 싶은 건데?]
[
하
“ …….”
***
프레딕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본인의 의지입니다.”
“
***
어설픈 연애놀음이라.
레이는 걸음을 옮기다 픽 실소를 흘렸다.
그 어설픈 연애놀음도 그 녀석하고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진도가 좀 나갔나 싶었더니, 불
청객으로 인해 도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레이는 응접실에 아론과
마주 보고 있는 마틴을 바라봤다.
어쩌면 완전히 후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에드윈 가문의 자식들은 기본적으로 마틴 블레어란 인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한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던 그는 그 공을 인정받
아 에드윈 가문의 정식 가족으로 입적된 상태였다. 물론 마틴은 여전히 블레
어라는 성을 썼고 한때 아버지의 라이벌이었던 울프 크누크의 사람이 되었
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교류는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록된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극우성 알파의 알파 연인이었
다.
레이, 잘 왔어. 마틴하고 이야기 중이었다.”
“
***
전기 포트가 뜨거운 수증기를 뱉어냈다. 그 옆을 멍하니 지키고 서 있던
루스는 그제야 눈에 초점을 맞췄다. 다 끓은 포트를 들어 올리며 필터에 담
긴 원두 가루에 시선을 보냈다.
「커피 잘 마셨다.」
포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하아…….”
“
빛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뱃속 깊이 새까만 감정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난동을
부렸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당장에라도 저 녀석을 가두고는 오로
지 자신만 보게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세뇌라도 시켜야 속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물론 머릿속에 그린 충동을 실현해버리면 지금껏 쌓아왔던 녀석과의 관
계는 정말 끝이었다. 그리고 그런 알파들이나 하는 짓 따위를 할 생각도 없
었다.
그래도 억울하니 보상은 받아야겠지.
레이는 루스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바싹 대며 말했다.
루스. 입 벌려.”
“
“…….”
“벌리라고.”
“왜…….”
무슨 기억!
루스는 혀끝까지 굴러온 외침을 도로 삼키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을 돌려봤지만 아무리 돌려도 새까만 필름만 난무할 뿐이었
다. 그나마 흐릿하게 떠오르는 건 마지막으로 들이킨 투명한 술이었다.
충격으로 잊고 있던 지끈거림이 다시 밀려들었다. 이마를 감싸며 신음을
뱉어냈다. 그 찰나, 무언가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메마른 혀끝에 찌릿한 감
각이 파고들었다. 자동적으로 침을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미끈한 타
액의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도대체…… 어제, 우리가 뭘… 한 거야?”
“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허망함이 가득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
부는 아니지만 오해할 정도의 파편들은 떠올린 것 같았다. 레이의 입술에 짙
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것은 무척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애가 탈
정도로 느릿하게 열린 입술이 엄청난 말을 쏟아낸 건 그때부터였다.
“ 혹시나 해서 말이야. 오메가는 임신도 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지?”
급격히 창백해진 루스의 얼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시커멓게 죽어버렸
다.
“그러니까, 그 말을… 꺼내는…… 의도가…….”
“그냥 그렇다고. 어쨌든 어제는 무척 즐거웠어.”
루스가 다시 물어왔다.
“무슨 말?”
“네가 했던 모든 말.”
“진심이지.”
***
이렇게 말이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섹스는 그저 성욕 풀이 도구일 뿐이라고.”
“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널 보고 있으면 님을 위해 정조를 지키는 순정 오메가처럼 보
일까?”
“무슨 개소리야?”
잠깐이면 끝나.”
“
***
말 도, 안, 돼…… 큭!”
“ …
까칠하시긴.
마틴이 와있으니 저러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오기도 상황에
맞게 부려야 했다. 여전히 출혈이 있는지 피가 복도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처보다도 처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저 일단 마틴님은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루스님 상처는 제가 보겠습
“ ,
니다.”
보다 못한 바냐가 슬그머니 마틴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쪽도 오기가 생
긴 건지 미동도 하지 않고 루스를 직시했다.
루스.”
“
머리 위로 짐승 같은 위협이 떨어졌다.
도대체 네가 그를…… 어떻게 안 거지?”
“
레이는 순간 진심으로 웃을 뻔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
그걸 모르면 등신이지.
「고작 추운 날 목도리 한번 둘러줬다고 마음을 내어놓는 아이입니다.」
목도리.
그의 방에서 처음 잠을 청했을 때, 호기심에 열어본 서랍에 있었던 건 목
도리였다.
「 처음 이었어…… 나를 위해 누군가 그런 따스함을 준건…… 그런
건…… ‘고작’이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누가 확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확신하는 순간 시커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속을 휘저어 놓았다. 거기엔
분명 배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잘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순간 측은함에 호의를 베푼 마틴도, 그저 그 따스함 한 번으로 가
득 채워질 텅 빈 가슴을 가졌던 어린 그도 그리고 그들 사이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자신도.
그래서 레이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그런 걸 다 따져가며 놈을
사랑할 만큼 무거운 마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고백하지 않은 거지?”
“…….”
“왜 저 녀석이 네 앞에서 자꾸 얼쩡거리게 하는 거지? 저 두 사람 보는 게
힘들어서 떠나온 게 아니었나?”
루스는 잠시 멈칫거리다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지?”
“고백 한 번이면 모든 게 끝날 일이야. 마틴은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적어
도 네놈을 힘들게 할 일을 만들지 않겠지.”
이 세상에 극우성 알파의 짝을 뺏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
다나 서로의 마음이 같다면 말이다. 마틴은 울프를 사랑했다. 극우성 알파의
눈에 들어 강제로 오메가처럼 삶을 사는 게 아니었다. 온전히 그의 의지라는
것을 레이도, 주변 모든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살았던 루스 또한 그 사
실을 모르지 않을 거였다. 그러니 마틴의 곁이 아닌 이곳 낡은 베타 아파트
에 있는 것일 터. 가엽게도 그가 해왔던 건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
한 사랑이었다.
루스는 반박하지 못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감정을 죽이는 까만 눈
동자가 순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레이는 문득 그 어떠한 욕망도 담지 못하
는 저 마음이야말로 정말 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정은 자신이 아니라 이자에게 갖다 붙여야 하는 말이었다.
멱살은 여전히 잡힌 채였지만, 이미 그의 손에선 힘이 빠져나간 후였다.
레이는 이제 얹어만 있는 손을 치우며 그의 붕대 감긴 팔을 어루만졌다. 흠
칫하면서도 루스는 주박에 걸린 사람처럼 레이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붕대, 다시 갈아야겠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