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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오메가의 빛
레이 에드윈은 알파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극우성 부모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는 세상에 그의 존재
가치를 드높여주었고, 뛰어난 외모와 두뇌는 그가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를
영리하게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메가였다. 아무리 ‘극’을 달고 나왔다 해도, 수 세기 동안 차
별되온 오메가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그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이 빌어먹을 세상을 바꾸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에게 알파는 알파가 오메가를 정의하듯 성욕 풀이 자신의 목표를 위한 도
구에 불과했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 세간에서 기대하는 빌어먹을 극우성
알파와의 영혼 각인은 더더욱 개나 줘버리면 딱 어울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뭐야?”
“루스.”

불과 몇 초 만에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꾸만 떠올랐다.


환청이 들리듯 남자의 이름이 머릿속을 점령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
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기로 했다. 자신의 심장을 마음대로
움직여 버린 베타 남자를….
그런데 찾고 나니 더한 갈증이 시작돼 버렸다.
충동이 일었다.
혀를 넣고 싶은데 입 좀 벌려줄래?”

무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오메가버스 #발현공(베타→극우성 알파) #재벌 #재회 #까칠공 #적극수 #
유혹수 #3인칭시점
목차

1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CHAPTER 5.
CHAPTER 1.

“레이, 나랑 이야기 좀 해.”


갑작스레 팔이 잡아 당겨지자 손에 쥔 술잔이 찰랑거렸다. 연분홍빛 액체
가 하얀 손에 덧씌워지는 순간, 줄곧 웃음을 띠던 금빛 눈동자에 짜증이 스
쳤다. 홀 안은 일시에 깊은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손을 깨끗이 하고 싶은데.”
정작 정적을 깨트린 건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였다.
아 미안.”
“ ,

당황한 알파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무심코 사과


를 뱉어냈다.
미안하면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지.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알파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무안하게 뒷걸음치
는 놈을 외면한 채,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찐득한 손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이들이 집중했다. 현재 열리고 있는
파티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 그러니까, 그쪽 성함이…….”
비서에게 도로 손수건을 건넨 그가 드디어 알파를 향해 정중히 입을 열었
다.
“ 마네토 가문소속인 닉키 마네토 님이십니다.”
비서가 재빨리 덧붙였다. 레이는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아, 맞다.’ 하곤
눈을 가늘게 휘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시선은 한층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난 또 누군가 했네. 이제 말해봐.”
“……여기서?”

알파가 진심이냐는 듯 시선을 보내자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 코웃음 쳤다.


“어차피 이곳에서 우리가 한 번 잤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을 텐데. 새삼
장소를 가릴 필요가 있나?”
일순 장내가 술렁였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었
다. 속내를 들킨 자들의 당황이었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알파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넓은 세상
속에서 좁고도 견고한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이
상 비밀은 언제나 공유되었다.
요 몇 년간 그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건 레이 에드윈에 관한 모든 것이
었다. 당황도 잠시, 사람들의 시선은 흥미로 가득 채워졌다.
“나가서 이야기해.”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알파가 명령조로 작게 속삭여왔다. 레이의 나른
한 입술에 조소가 어렸다.
이곳에서 가장 늦게 상황을 파악한 저 머저리는 여전히 주제 파악만큼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실, 레이는 놈이 누군지 몰랐다. 고작 몇 시간 뒹굴
고 나면 끝날 대상을 일일이 기억하기엔 그의 삶은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가
고 있었다. 흔한 일이었다. 한번 잤다는 것만으로 주제넘게 소유권을 행사하
려는 멍청한 알파 새끼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녀석은 거의 그쪽이었다.
한마디로 상대할 가치가 없는 새끼란 소리지.
레이는 적당히 끝낼 마음으로 비서에게 손짓하며 닉키라고 불린 알파를
향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다음을 기약하지. 알다시피 내가 시간이 없거든.”
가벼운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레이는 멍청해진 그를 지나 파티장 출
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주변은 온통 아쉬운 탄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몇몇은 소란을 피운 알파를 향해 비난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 사이로
레이의 최측근이자 비서실장인 로이가 한발 다가서 명함을 건넸다.
“제 명함입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언젠가는 시간을 잡아보도록 하겠
습니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끝낸 알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야 너 거기 안 서! 기껏 해봤자 암캐 주제에 감히 알파를 무시해!”
“ !

건네진 명함이 무참히 구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로이는 내쳐진 제 손을 주


무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주 작게 ‘멍청이’라는 말을 내뱉은 듯 보
였지만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표정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몇 초간 홀
안은 성난 알파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암캐라…….”
레이는 자신을 지칭했을 단어를 입안에 천천히 굴리다 픽 웃었다.
출구를 향해 멎었던 시선이 알파에게로 향했다. 돌아선 얼굴에선 표정 하
나 잡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를 호위해왔던 경호원들의 낯빛에 난처함이
물들었다. 페로몬 하나 느껴지지 않음에도 훅 끼쳐오는 위압감에 성내던 알
파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담담한 건, 비서 로이 뿐이었다.
그때였다. 가만히 알파를 응시하던 금빛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지고 붉은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감동으로 바뀌는 순
간이었다.
숨결마저 참고 있던 알파와 오메가들의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
다. 방금까지 분노하던 알파 또한 너무나 쉽게 표정을 허물어트렸다. 단지
미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레이에게서 나온 거라면 얘기는 달랐다. 인
류의 최상위 포식자라고 불리는 알파를 다루는 건 극우성 오메가에게 하품
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여튼 좆질도 못하는 새끼들이 꼭 더럽게 밝혀댔다.
레이는 방금 내보낸 페로몬의 양을 가늠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몇 번을 닦
았음에도 오른쪽 손가락은 여전히 찐득한 단내를 풍겨대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시달리다 오래간만에 찾은 파티장이었다. 이곳에서 적당
히 한 명 골라다가 그동안 쌓인 욕구 좀 풀어볼까 하고 있었는데, 저 머저리
때문에 일을 망쳐버렸다.
저걸 어떻게 할까?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적당한 예의와 정중함을 곁들어 가주로서 처
신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 훨씬 조용하고 품위 있었지만, 이제 그러
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어쩌긴 어쩌겠어. 지옥까지 밟아줘야지.
우아함을 가장했던 미소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가까이 서 있던 로이가 그
의 변화를 눈치채곤 살짝 얼굴을 굳혔다.
뒤로 물러서.”

로이는 경호원들에게 손을 뻗어 지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도


절제하고 있던 레이의 페로몬이 짙은 향기를 풍기며 홀 안을 장악했다. 작정
하고 시작된 극우성 오메가의 유혹을 견뎌낼 알파는 세상에서 손에 꼽힐 정
도로 귀했다. 그리고 그 귀한 알파는 이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 꼭 이렇게까지 냉정할 필요는 없잖아. 그때 일은 실수였다고.”

그의 미소를 허락으로 알았는지 알파는 단번에 걸음을 좁혀왔다. 비실대


는 모습에는 이미 조금 전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실수?”
“그래, 알파가 본능만 남은 상태에서 그걸 조절하는 건 쉽지 않다고. 그런
건 너도 알고 있…….”
“지랄도 아주 좆같게 하는군.”
“……뭐?”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제 레이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역겨움이 묻어났다.


그래. 네놈의 구린 페로몬을 맡으니 이제야 확실히 기억나네.”

한동안 일 때문에 쌓인 터라 눈앞에 얼쩡대는 녀석을 들여 몇 시간 적당히


풀고 보내려고 했는데 감히 자신에게 노팅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반쯤 죽여
쫓아 보내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하도 괘씸해서
날을 잡아 제대로 죽여 놓으려 했으니까 말이다.
“네놈의 그 있으나 마나 한 좆을 마음대로 부풀려놓고 본능이다 실수다
치고 끝내면 그걸로 되는 건가? 당한 오메가는 그렇구나 하면서 개새끼한테
웃어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뭐 개, 개새끼? 감히…….”
“ …
“뭘 그리 분노해? 방금 암캐라며? 그 암캐의 배를 빌려 태어난 새끼한테
그에 합당한 명칭을 써준 것뿐인데.”
암캐라는 단어가 오메가를 비하하는 것인지 모르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
무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걸핏하면 개 짖는 소
리를 해대는 천치(天癡)들 또한 천지(天地)에 널린 곳이 바로 알파의 세계
였다. 레이는 반박하지 못한 채 부들거리는 놈을 응시하며 싸늘히 중얼댔다.
“로이. 내가 저 개새끼에 대해 뭔가 더 빠트리고 있는 것 같은데?”
“현재 저희 에드윈 가문에서 투자하고 있는 델핀 캐피탈에 닉키 마네토님
이 공동 창업자로 명단에 올라 계십니다.”
로이가 기다렸다는 듯 친절한 설명을 내어놓았다.
“그럼 당장 거기 투자한 자금 전부 회수해. 짐승 새끼하고는 같이 일 할 수
없으니까.”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알파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레이… 자, 잠깐만 내 말 좀…….”
참 그리고 마네토 가주한테도 연락 넣어둬. 가문에 있어서는 안 될 멍멍
“ .
이 한 마리가 가문 이름을 사칭하고 돌아다녀 심히 불쾌하다고 말이야.”
서늘한 금빛 눈동자에 진심 어린 웃음이 차올랐다. 닉키는 황급히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레이 에드윈을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그를 도와줄 알파는 없었다.
자업자득.
그들에 시선에 담긴 의미는 그게 전부였다. 철저히 고립당한 알파의 얼굴
이 수치로 붉어졌다. 아무리 극우성 이라지만 고작 하찮은 오메가일 뿐이었
다. 그런데 어째서 녀석은 당당하고 알파인 자신은 이렇게 처참해질 수 있단
말인가?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자존심이 구겨진 알파의 두 눈이 색을 달
리했다. 사나운 페로몬이 사방에 흩어지자 오메가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
들을 지켜줄 알파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정작 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오메가였지만 알파들의 생리
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홀 안을 가득 채운 건 소위 잘났다는 가문의 알
파들이었다. 자기편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살기 어린 페로몬을 내보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짐작대로 알파는 페로몬으로 자신의 기분만
내보인 채 그 자리에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보잘것없는 모
습이었다.
그러게 나를 건드리긴 왜 건드려?
레이는 조소를 흘리며 놈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짙
은 페로몬에 알파가 멈칫했을 때, 기울여진 고개 위로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
었다.
“네놈이 하찮게 생각하는 그 오메가 중에 가장 미친놈이 바로 나라는 걸
제대로 파악했어야지.”
살짝 벌려진 아름다운 입술에서 달콤 살벌한 언어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이 철없는 쓰레기야.”

***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차에 올라탄 로이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파티장은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닉키 마네토는 기어이 미쳐 날뛰었
고 그를 제압하는데 경호원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그 바람에 로이는 단 두
명과 함께 레이를 호위하며 밖에 깔린 기자들을 막아야 했다. 방금 상황을
되새긴 로이는 끔찍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자금회수 관련해서 언론에 흘릴 때 그 니키인지 뭔지 하는 놈 과거도 몇
개 같이 터트려놔.”
측근의 고생은 안중에도 없는 무심한 상사의 태도에 로이는 울컥할 새도
없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는 듯하더니, 혹시 그 녀석 과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도 있
어?”
그러자 차창 밖을 심드렁하니 바라보던 레이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하룻밤 상대를 내가 왜 일일이 기억해야 하지? 그냥 딱 보면 견적
나오는 일 아닌가?”
주제 파악, 상황파악도 못 하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녀석이었다. 그런
놈이 다른 데서라고 멍청하지 않았을까, 그게 더 의문이었다.
“어설프게 하지 말고 확실히 밟아놔.”
“알았어. 일단 아론한테 연락해뒀으니 그쪽으로도 이야기가 바로 들어갈
거야.”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더욱 불쌍해질 놈을 향해 새 눈물만큼의
동정을 보냈다. 레이는 고작 하룻밤이라 했지만, 밤도 아닌 대낮 그것도 한
시간도 채 안 돼 쫓겨났던 녀석이었다. 나름 레이와 어떻게 해보려고 한 결
과는 처참했다. 이제 아론과 마네토 가주까지 나서면 당분간 놈의 얼굴은 사
교계에서 볼일이 없을 듯싶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의 뒤안길로 사라진 알파
들이 이미 몇이나 있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알파, 오메가, 베타 중에 가장 나
약하고 천한 종족이 오메가라 하지만 레이 에드윈에게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된 그는 전 세계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7대 알파 가
문 중 하나인 에드윈 가(家)의 가주였다. 레이가 열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
에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알파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러나 전대
가주이자 알파의 지배자인 그의 부친이 내린 결정을 꺾을 수 있는 자는 아무
도 없었기에 표면적인 반발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 후, 우려와 달리 레이는 에드윈 가(家)의 가주로서 물려받은 절대적인
권리를 영리하게 누렸고 이행해야 할 모든 의무를 훌륭하게 처리해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고 신변을 위협하는 알파들은 현재까지도
널리고 널려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가 오메가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자신이 오메가인 것을 걸고넘어지는 인간들을 가장 혐오했다. 그
렇기에 오늘처럼 자신을 건드린 알파는 공개적으로 지옥까지 밟아주었다.
덕분에 가주 자리에 올랐을 때보다 해코지하는 녀석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의 신변은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불과 이주 전 만에도 한 건이 터졌지.
로이는 설핏 미간을 좁히며 레이를 바라봤다.
“괜한 참견일지 모르지만 슬슬 제대로 된 연애를 좀 해보는 게 어때? 고작
하룻밤 지나면 면상도 생각나지 않을 것들 말고 제대로 기억에 박힐 놈으로
말이야.”
그의 살벌한 인간관계에서 적어도 치정으로 인한 위험요소라도 줄여보고
자 로이는 슬쩍 말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
그냥 일이나 하자.
로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빠르게 포기했다. 태블릿을 꺼내 처리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어느새 차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이
는 차장 밖을 스치는 불빛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에 다채로운
빛이 한참을 뒤섞이다 떠나간 어느 시점, 드디어 굳게 닫혔던 입이 달싹였
다.
“한 명 있긴 하지.”
“…….”
“고작 채 일 분도 되지 않았는데 제대로 박힌 놈이 있긴 있었어.”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로이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대꾸해야 할지 몰
라 잠시 고민했다. 그 사이 레이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분명 루―,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게 잘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려는데
이번엔 목적을 가진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로이, 누굴 좀 찾아야겠어.”
***

살짝 고개 들어 마주했던 검은 눈동자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혹여 충격이


라도 받았을까 싶어 햇살 아래로 이끌던 커다란 손은 다정했고 체온은 따스
했다.
「앞으로 조심해」
뒤돌아선 남자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넓고 단단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
습에 안정을 느꼈다. 동시에 초조했다.
「이름…… 뭐야?」
「루스」
그 묵직한 대답 한마디에 레이는 그만 마음을 놓을 뻔했다. 가슴으로 저릿
한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루스…….”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이름이었다. 레이는 그날 일을 떠올


리며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리 여왕님께서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실까? 설마 나랑 한 게 별로였다
는 건 아니겠지?”
귓속을 파고든 음성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알파에
게서 느껴지는 열기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하루 전 뒤집어
쓴 칵테일만큼이나 찐득거렸다.
내가 분명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레이는 짜증스레 그를 흘기며 머리에 엉킨 손가락을 쳐냈다.


이런, 차가워라.”

섹스 할 때는 그 어떤 발정 난 오메가보다 아찔하고 교태로우면서 막상 절


정에 다다르고 나면 웬만한 알파보다 싸늘해지는 그의 태도에 헨리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내가 이 나쁜 오메가를 계속 만나야 할지 수십 번도 고민이 된단 말
이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레이는 무슨 개소리냐며 코
웃음을 쳤다.
“그 나쁜 오메가 아래서 발정 난 개새끼 마냥 헉헉대던 게 누구더라? 수십
번 고민할 필요도 없어, 지금 끝내도 난 아쉬울 거 없으니까. 나가.”
그리곤 레이는 잠깐 잊고 있던 서류에 미련 없이 시선을 보냈다.
하여튼 성질은.
헨리는 곧 표정을 바꿔 싱글거렸다.
“농담이야. 농담은 그냥 농담으로 끝내자고. 아직 진짜 본론은 들어가지
도 못했는데 이렇게 보내면 섭섭하지.”
본론이란 말에 바쁘게 서류를 넘기던 손길이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능글
맞은 푸른 눈과 마주쳤다.
“아론에게 연락받았어. 바로 네가 불러낼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야.”
그러자 레이는 입술을 비틀며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그 개자식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그 목욕가운은 다른 알
파가 차지하고 있었겠지. 가문 사람이 그 계획을 망쳐놨으면 책임은 가주가
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그렇지.
그 책임을 지게 된 가주 헨리 마네토는 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이건 뭐, 몸으로 갚아 버전도 아니고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엄청 적극적
이더라. 그동안 꽤 쌓였나 봐?”
“회사 매입 건 때문에 바빴거든. 누구와 달리 말이야.”
“너무한걸. 나도 나름 바쁘다고. 오늘부터는 누구 때문에 더 바빠질 예정
이고 말이지.”
“바쁜 게 좋은 거지. 가주가 놀고먹었단 소리 들으면 얼마 못 가 쫓겨나기
밖에 더해? 괜한 꼬투리 잡히지 말고 빨리 일이나 해서 돈이나 불려놔. 닉 인
가 뭔가 하는 그 녀석은 우리 쪽에서 처리할 거니까 너는 너희 가문 입단속
만 철저히 하면 될 일이야. 간단하잖아?”
레이의 속사포 같은 훈계에 헨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닉키야. 이름 정돈 기억해주라고. 이제 너 때문에 인생 종 치게 생겼는
데.”
“자업자득이지.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빨리 꺼져.”

레이는 손에 들고 있던 회사 자료의 마지막 장을 넘기곤 탁자에 놓인 벨을


울렸다. 그러자 방문을 열고 그의 수행비서 앨런과 베타 사용인 한 명이 그
가 입을 옷을 들고 들어왔다. 헨리는 자신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는 그들을
무심히 스치곤 다시 레이를 바라봤다. 가운을 벗고 하얀 나신을 드러낸 그의
뒷모습은 신화에 나올법한 완벽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 하얀 살결의 감
촉이 얼마나 음란했는지를 상기하던 헨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아까도 느낀 거지만 요새 부쩍 마른 것 같은데. 아직도 이명인
가 환청인가 하는 게 들리는 건가?”
“당신 신음보다도 정확히 들리던데.”

얄궂은 대꾸에 헨리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눈빛에 흥미가 감돌


았다.
“여전히 기억도 생생하고?”
셔츠에 팔을 끼우던 레이가 잠시 멈칫하다 다시 옷을 입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전부 기억나. 아주 선명하게 말이야.”

이번엔 얄궂은 웃음기는 없었다. 레이는 앨런이 셔츠 단추를 채우는 동안


잠시 시선을 흐리며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어느 가문 알파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
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알파 무리는 역시나 무례했고 추접스러웠다. 레
이는 불쾌함을 느끼며 평소처럼 빨리 놈들을 해치우고 사랑스러운 막내 동
생 레이든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그가 나타났다.
남자가 그곳에 있던 알파들을 전부 해치우고 앞에 섰을 때까지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고작 십 초. 그리고 자신의 손을 이끌어 햇빛 아래 놓아두고 떠
나갔을 때까지를 생각하면 고작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난다 뿐일까, 그가 이름을
말한 즉시 뇌는 필사적일 만큼 남자의 모든 것을 머리에 새겨놓기 시작했다.
마치 절대 잊지 않겠다는 각오라도 다지듯 레이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의
이름과 얼굴을 강제적으로 떠올려야 했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그의 형상
에 밤잠을 설친 적도 많고 이명과도 같은 환청에 자칫 일을 그르칠 뻔한 적
도 수두룩했다. 에드윈 가문의 주치의인 한스가 매일같이 방문해 그의 상태
를 점검했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반복될 뿐이었다.
그렇게 이주가 흘렀다.
“몇 시간을 함께 뒹굴어댄 섹스 파트너도 침실을 나서는 순간 까맣게 잊
고 마는데, 단 몇 십 초의 인연이 왜 이렇게 선명히 뇌리에 박혀있는 걸까?”
레이는 이상하지 않냐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 무렵 그 몇 시간을 함께 침실에서 뒹군 헨리는
뒤에서 너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의 웃음을 입에 담았다.
정말 재밌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실제로 그에게서 이 이야기
를 처음 들었을 당시만 해도 헨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이유는 단순
했다. 그 말을 꺼낸 이가 바로 레이 에드윈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사랑을 받을지언정 사랑을 하지는 않았다. 첫 히트사이클 이후로
그에게 알파란 존재는 그저 성욕을 풀어낼 섹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그는 기
본적으로 알파는 물론이고 인간을 싫어했다. 마치 사회가 오메가를 핍박해
온 세월만큼이나 혐오가 깊은 것 같았다. 사람과 몸을 섞는 것 말고는 마음
을 섞는 법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 저런 말들이 나왔다는 것은 듣고도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물론 본인이 더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레이, 혹시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운명?”

손목시계를 착용하던 레이가 헨리의 말을 곱씹더니 이내 피식거렸다.


“꽤 낭만적인 이야기네. 아직도 그런 어린애 감성을 가지고 있었나?”
무척 유치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비웃음이 익숙한 헨리는 여유롭게 되
받아쳤다.
글쎄, 우리 순정 오메가님께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순 금빛 눈동자에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 알파 가문끼리 공유되는 그


와 세간에서 알고 있는 레이 에드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랐다. 우습게도 일
반인들 사이에서 그는 지금껏 연애 한 번 못 해본 순진한 오메가로 알려져
있었다.
순정 오메가.
레이의 친형제들과 에드윈 가문의 비서실에서 이룩해낸 쾌거이기도 했지
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빌어먹을 영혼 각인 때문이었다. 레이의 부모인
레오 에드윈과 그의 짝 이든의 영혼 각인은 모든 이들의 이상적 로맨스로 분
류되어있었다. 그 상황에 타이밍 좋게 태어난 극우성 오메가 레이는 당연히
부모님의 낭만적인 러브스토리를 이어받아 마땅히 극우성 알파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될 존재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있었다.
“순정 오메가라니, 정말 좆같은 믿음이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난 그 지랄
같은 정조를 지키다 진즉 말라비틀어졌을 게 분명한데 말이야. 안 그래?”
재킷을 걸친 레이는 가운데 단추를 잠그며 조소를 머금었다.
우성일수록 성욕 또한 왕성했다. 그럼 ‘극’을 달고 나온 오메가는 어떻겠
는가? 체질 때문에 제대로 받지 않는 억제제를 먹고 언제 어디서 발현될지
도 모르는 극우성 알파를 위해 독수공방하기엔 그는 너무나도 음란했다. 게
다가 몇 초만 눈을 마주하고 있어도 금세 지겨워지는 데다 오메가를 개떡으
로 아는 알파 새끼들과 어떻게 영원이란 말을 섞을 수 있단 말인지.
각인 따위 개나 주라지. 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각인할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오메가
였으니까 말이다.
헨리. 낭만적인 건 좋은데 말이야…….”

앨런이 건넨 포켓치프를 재킷 앞가슴에 꽂은 레이가 말끝을 늘어트리며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런 건 침대 안에서나 좀 더 힘써보라고. 알았지?”

레이는 무심하기 그지없던 방금과 달리 매력적인 미소를 아낌없이 던져


주었다. 저 미소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완벽히 다 마른
금발을 흩날리며 떠나가는 그를 멍하니 놓쳐버린 헨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못 당하겠군.
그리곤 재빨리 몸을 돌려 복도로 막 넘어가려는 레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수행비서 앨런이 멈칫한 사이 헨리는 레이의 뒷덜미를 끌어 짧게 키스했다.
그리곤 달콤하게 속삭였다.
“혹시 두근거렸어?”
“미쳤어?”
갑작스런 키스에 멈칫했던 레이가 바로 인상을 구겼다. 건조하기 짝이 없
는 반응에 헨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의 두근거림은 한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나 보군.”
“누가…….”
“내가 아닌 게 좀 씁쓸하긴 하지만 뭐 이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헨리는 그의 손등에 키스하며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에 경의를


표했다.
너의 운명을 꼭 찾길 바라지. My Queen.”

레이가 타기 위해 잡아둔 엘리베이터에 성큼 올라탄 헨리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복도엔 잠시 당황스런 침묵이 감돌았다. 주
인의 눈치를 살피던 앨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이님. 괜찮으십니…….”
“지랄하네.”

레이가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는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운명은 얼어 죽을. 그는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돌려
앨런을 향해 물었다.
“로이는 어디 있지? 슬슬 결과 보고를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결과 보고라면 혹시 어젯밤 말씀하셨던 그거 말씀이십니까?”

겨우 12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어느 정도의 결과


를 내어놓은 상태일 것이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어디 있지?”
“로이님께서는 오전에 아론님과 카페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카페?”
“네. 본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M&L 빌딩 1층에 일주일 전 카페가 오픈했
습니다. 그래서 한번 맛보러 가신다고.”
“하여튼 특이한 녀석들이야.”

그냥 사무실에서 얌전히 타주는 커피나 마실 것이지 굳이 카페까지 찾아


가 마시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나 레오 펜덴 대표인 놈이 그런 공
공장소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여러 사람에게 민폐였다. 레이는 쯧 혀를 차
며 못내 중얼거렸다.
“알았어, 그럼 그리로 가지.”
***

에드윈 가문의 가주를 모시는 최측근으로서 사람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전 세계 인구 중 고작 1%를 차지하는 우성 알파 오메가라면 당
장 반나절 만에도 끝낼 수 있었다. 열성 우성 할 거 없이 알파 오메가 전체 인
구에서 찾아야 한다면 아마 이삼일 정도의 여유만 두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만약 그 대상이 베타라면? 뭐,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기본적인 정보만 확실하다면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데…….
“충분한 시간도 정보도 없었단 말이지.”
로이는 갈색 눈썹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그 녀석이 사람 찾으라고 던져준 정보가 고작 이름하고 성별 그리고 생
김새 정도가 다였다고.”
그리곤 유리잔에 담긴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단맛보다 신맛이
훨씬 강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주문한 탓에
불평은 할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비타민 섭취를 해줘야지 안 그러면 과로사
한 최초의 우성 알파가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베타라는 것도 말해줬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로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
던 아론이 무심히 대꾸해왔다.
시키는 놈보다 거드는 형제가 더 얄밉다고 누가 그랬던가. 글로벌 기업 레
오 펜덴사의 대표 이사이자 레이의 친형제인 우성 알파 아론 에드윈을 바라
보는 로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 눈가가 떨리는 건 뭐가 부족한 거라고 그랬지? 마그네슘? 철분? 아무
튼 차로 돌아가면 바로 영양제부터 챙겨 먹어야지.
로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아차 하며 그에게 소리 높였다.
“그게 문제잖아! 너 생각해 봐. 전 세계에 자그마치 97%를 차지하는 베타
중에 그 이름과 그 머리, 그 눈동자 색을 가진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될 것 같
아? 내가 테라 내에 거주 중인 녀석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말 안 하지. 근데 그
것도 아닌 것 같데. 거기다가 뭐라고 한 줄 알아? 한술 더 떠 베타인 것도 의
심스럽단다.”
로이는 레모네이드 잔에 꽂힌 빨대를 뽑아 손에 끼워 아론 쪽으로 흔들거
렸다.
“내가 그 녀석이 열성이면 그러려니 하지. 근데 아니잖아? 일 미터 떨어져
있는 얼굴도 모르는 누구 씨 알파 냄새가 구리다고 하는 녀석이 그걸 몰라?
이건 그때 내가 같이 안 따라갔다고 엿이나 먹으라는 거라고.”
“글쎄? 녀석이 널 엿 먹이려고 굳이 몇 초 만에 스쳐 간 놈을 찾으려 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너 혈압 높아지니까 진정하고 그거나 더 마셔.”
로이는 아론의 권유를 즉시 받아들였다. 레모네이드 잔을 들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신 그는 답답하다는 듯 재차 중얼거렸다.
“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뭘까? 네 말대로 몇 초도 안 돼서 사라진 놈을 왜 찾
느냐고? 차라리 그때 깡패 놈들의 배후나 더 파보라고 했다면 납득이 가겠
어.”
솔직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엿 먹이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 슬슬 올라왔지만, 아론은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
다. 대신 그는 카페 바에 있는 직원을 향해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의 일에 대한 보은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아, 여기 레모네이드 한잔
하고 커피 더 리필 해줘요.”
“아론, 네 형은 아직 곱게 미쳐있으니까 걱정 마. 하늘이 두 쪽 나도 정상
으로 돌아갈 가망성은 없어 보이니까”
“고작 9개월 차이 가지고 그 녀석이 형이란 말 듣기 싫으니까 집어치우라
고 했을 텐데.”
아론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 고작 일 초 가지고도 서열이 갈라진 쌍둥이 녀석들에 비하면 넌 할 말 없
어. 그나저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이 일은 그때 같이 안 있었던 나를
엿 먹이려는 네놈 형의 치사한 복수라고!”
로이의 목소리가 히스테리적으로 높아졌다. 아론은 아차 하면서 부드럽
게 표정을 풀며 그를 진정시켰다.
“알았어. 충분히 네 말은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만 진정해. 또 혈압 높아질
라.”
부친의 이복동생 오메가 벤자민 폭스의 아들로 태어난 사촌 로이는 레이
와 자신보다 한살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에드윈 형제들과 함께 자라오며
자연스레 레이의 측근으로 키워진 그는 다혈질이긴 해도 좀처럼 자신들에게
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진짜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할 때
였다.
혹시라도 그가 스트레스로 미쳐버리면 레이의 뒤치다꺼리는 고스란히 자
신에게 넘어오게 되어있었다. 아론은 그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소리를 좀 낮춰주시겠습니까?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
하십니다.”
두 알파의 고개가 목소리를 따라 올라갔다. 곤란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남자는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두 알파는
경계의 빛을 띠었다. 만약 그의 손에 들려진 쟁반을 보지 않았다면 자신들에
게 태클을 걸어온 어느 가문의 알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씀하신 레모네이드와 아메리카노입니다. 커피는 새 잔에 다시 담아왔
으니, 빈 잔은 치워드리겠습니다.”
아론만큼이나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남자의 어조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깔끔했다.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알파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테이블 세팅을 마치곤 마지막으로 치즈케이크 두 조각이
담긴 작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건 저희 가게 오픈 기념으로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그럼 조용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입 좀 닥치고 있으라는 말을 참 그럴듯하게 전달하는 남자가 재밌어진 아
론은 자신과 똑같은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여기 사장인가?”
“그렇습니다만?”

그런 건 왜 물어보느냐는 말투였다. 아론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일 아니


라는 듯 답했다.
“커피가 훌륭해. 좋은 원두를 쓰나 보군.”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에 갓 볶아둔 원두를 사용했습니다.”

아론은 평소 원두커피를 즐겨 마셨다. 좋아하는 것에는 애착을 두고 정보


를 모으는 습관을 지녔기에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로스팅은 누가 한 거지?”

“제가 했습니다.”
“직접?”
“네, 일단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만, 곧 솜씨 좋은 로스팅 전문가가 올 겁니
다.”
“흠…….”

아론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할 일을 마친 남자는 고개를 까


딱하곤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아론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난 지금 커피가 무척 마음에 들어. 그러니 계속 당신이 로스팅을 해줬으
면 좋겠군. 우리 회사와 가문에 원두 납품을 제안하지. 자네 생각은 어떤
가?”
아론의 제안에 맞은편에 있던 로이가 놀란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
봤다. 레이가 과감하고 공격적인 경영을 펼친다면 아론은 거래 하나에도 매
사에 꼼꼼하고 치밀함을 발휘하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신을 양말 하
나 고를 때조차 그 까다로움을 발휘해 매번 비서 루크의 골머리를 썩이는 그
런 놈이 오늘 처음 들어온 카페에서 고작 커피 한잔 마시고는 망설임 없이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감사하지만 저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혼
자 드실 만큼의 원두는 카운터에서 팔고 있으니 그쪽을 이용해주시길 바랍
니다.”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한 남자의 태도가 훨씬 충격이었던 로이의 두 눈
이 휘둥그레졌다.
근데 잠깐, 가만있어봐.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어디선가…….
“그럴 거면 이런 곳에다 카페를 차리지 말았어야지. 여기는 뭘 해도 일이
크게 벌어질 곳이거든.”
남자의 태도에 불쾌해 하기보단 재미있다는 듯 아론은 입꼬리를 말아 올
리며 중얼거렸다. 일주일 전 오픈한 이 카페가 자리한 빌딩은 목이 좋아 아
론도 나름 탐내고 있었던 곳이었다. 끈질기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한 달
전 건물주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름도 얼굴도 모르는 지금의 건물주한테 어이없이 뺏겨버린 것이다. 그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패배감에 눈이 돌아버리는 줄 알았지.
어쨌든 이곳은 뭘 해도 대박 날 곳이었다.
아론은 카페 안 전체를 눈으로 가볍게 훑고는 그렇지 않냐며 남자를 바라
봤다.
“어쨌든 잘 생각해 보라고. 일단은 나갈 때 원두를 사 가도록 하지.”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런데, 알파?”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만큼 마무리가 끝나기도 전에 돌아갔던 몸이 다시


아론을 향해 돌려졌다.
“ 베타입니다.”
이제 슬슬 짜증이 나는지 남자에게서 튀어나오는 말이 그리 곱지는 않았
다.
“ 그래, 베타란 말이지…….”
말을 흘리는 아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은근히 불편함을 드러내면서도 예의를 지키려는 태도는 몸에 밴 듯 자연
스러웠다. 제대로 된 예절교육을 받고 자랐음이 분명했다. 거기에 몸짓 말투
표정까지 성깔 있는 가문 알파 특유의 느낌이 묻어나 헷갈리는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균형 잡힌 몸매는 물론이고 단정한 검은 머
리카락과 조금 신경질적인 검은 눈동자의 조합은 아론과 꽤 닮은 구석을 가
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베타치곤 웬만한 우성 알파만큼이나 잘난 외모였다.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페로몬 때문이었다. 알파의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파 중에는 페로몬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
는 이들도 있었기에 섣불리 판단할 기준은 되지 못했다. 물론 아주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뭐,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지.
슬슬 회사로 출근할 시간이었다.
“ 걸음을 잡아둬서 미안하게 됐군. 내가 궁금한 건 못 참아서 말이야.”
아론이 싱긋 웃으며 이제 가보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그 순간 와장창 파
열음이 공간을 울렸다. 장소는 바로 그들의 테이블 아래였다. 남자와 아론의
시선이 절로 로이를 향했다.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고 있는 형태가 컵을
잡고 있는 모양 같았지만 정작 컵은 손에 없었다. 아무래도 소리의 범인은
로이인 듯싶었다. 그의 발밑에 깨진 파편들이 확실한 증거였다.
조용히 해달라니까.”

남자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엔 이제 조금의 부드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손님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황급히 달려온 직
원에게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받아 묵묵히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로이.”

아론은 대체 무슨 얼빠진 행동이냐며 질책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도


로이의 시선은 아론과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를 닮은 적색
눈동자는 오로지 바닥을 정리하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이?”

아론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때 로이가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 ……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죠?”
유리 파편으로 채워진 쓰레받기를 들며 막 일어서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얼굴에 남자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성급히 움직인 탓에 쓰
레받기에 담아두었던 유리 파편이 도로 바닥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정말 귀찮아 죽겠군.”

나직하게 뇌까린 남자는 짜증스레 혀를 찼다.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그냥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

무척이나 절박한 목소리였다. 정말 이상하고도 성가신 알파였다. 남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달싹였다. 이름이고 뭐고 빨리 내던져주고 보내고
싶은 표정이었다.

“ …….”

그때 카페 문이 스르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남자는 대답하다 말고 자


동으로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그에게 집중하던 아론과 로이도
남자의 시선을 따랐다. 그리고 두 알파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이곳은 테라에서도 알파 가문이 경영하는 본사가 밀집되어있는 지역이었
다. 그렇기에 여기선 가문 우성 알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연히 최상의 것들로 꾸며져 있었다. 로이와 아론도 그
런 부류였다. 방금 문으로 들어온 남자 또한 그러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
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인간 같았다.
남자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몸에 둘러쓴 고급 슈트나 선글라스 그리고 손
목시계 같은 액세서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도 충분히 값비싼 명
품이었지만 화려하다기보다는 점잖은 편이었다. 화려한 건, 사람 자체였다.
단정히 묶어 왼쪽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트린 금빛 머리카락과 서늘한 하얀
얼굴은 큰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선글라스가
얼굴 절반을 가린 탓에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날렵한 콧날과 턱선은 꽃 같
은 남자의 표본 그 이상을 따르고 있었다. 그 아래로 그려진 붉은 입술 또한
하얀 피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며 더욱 눈길을 끌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의 등장에 주변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 알파
또한 한목소리를 냈다.
레이?”

재차 확인할 것도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앨런과 시커먼 경호원들까지 합


세하자 저 화려한 인간이 레이 에드윈임은 분명해졌다. 두 알파의 얼굴은 아
주 심각해져 버렸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심상치 않은 기분에 아론이 먼저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문 앞에
서 그들을 바라보던 레이가 거침없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이 있는
쪽이긴 했다. 그런데 방향과 선글라스 안에 가려진 시선 처리가 묘했다. 그
가 걸음을 멈췄을 때, 아론과 로이는 또다시 의외의 상황에 마주해야 했다.
그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카페 사장이었다. 남자 또한 무척 놀란 얼굴이
었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일행이십니까? 함께 자리에 앉아계시면 곧 메뉴를…….”
“너 나 알지?”
“……네?”

남자가 놀라 되묻자 레이는 답답하다는 듯 선글라스를 벗어들었다. 그 사


이로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
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술렁거림은 더욱 커졌다. 그러든 말든 레이의 시선은
오직 남자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이곳엔 자신과 남자밖에 없다는 듯
이.
이름, 말해봐.”

레이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름…… 뭐야?」
당혹스러운 빛을 띠던 남자의 두 눈이 짧게 동요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
았다. 숨 막힐 정도로 진지하게 마주해온 레이를 한참 응시하던 그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그게 왜 궁금한 거야?”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이름이라면 그때 가르쳐주지 않았나?”
그 순간 금빛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그려낸
미소는 봄날에 핀 어느 꽃보다 순수해 보였다.
“그래 기억하고 있어. 아니, 그때부터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
었지.”
레이는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섰다. 남자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마
주한 까만 눈동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가까
워진 그와의 사이에서 레이는 그토록 갈증을 일으킨 이름을 달콤하게 속삭
였다.
보고 싶었어. 루스."
"

레이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며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러움에 경직된 입술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졌다. 순간 주변은 비명 어린 소리와 로이의 절규
로 뒤덮였다.
잠시 후 레이가 입술을 떼며 그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 혀를 넣고 싶은데 입 좀 벌려줄래?”
***

「일행이십니까? 함께 자리에 앉아계시면 곧 메뉴를…….」


묵직한 저음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레이는 지독한 전율을 느꼈다.
빌어먹을 환청이 들릴 정도로 수천, 수만 번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던 목
소리였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정말 꿈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어차피 차에서 카페 간판을 내다본 순간부터 제정신은 아니었
다.
L – U – Z…… 루스.
입에서 굴린 그 소리가 너무 현실적이지 않았기에 저 남자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이름 뭐야?」
그날의 일이 겹쳐졌다. 이대로 그가 답을 내놓지 않고 사라질까 봐, 혹은
원하는 답을 내어놓지 않을까 봐 레이는 처음으로 초조해졌다. 곤란에 빠진
듯한 까만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름은 그때 가르쳐주지 않았나?」
찾았다!
두 번째 전율이 일었다. 그것은 섹스할 때 느꼈던 그 어떤 쾌감보다 짜릿
한 감각을 선사하고 있었다. 문득 헨리의 말이 주르륵 떠올랐다.
운명.
레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띄워졌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한다면 꽤 괜찮
을 듯싶었다. 이 주 동안 늘 그랬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고동이 느껴
졌다. 이번에는 답답함이 아닌 희열을 맛봤다.
「보고 싶었어, 루스.」
그다음은 본능이었고 충동이었다. 남자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주변은 시
끄러울 정도로 들썩였다. 그러나 레이는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세계에는 오
직 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감정은 너무나 자연스
럽게 흘러갔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술은 의외로 달콤해 참을 수 없는 기분
이 들었다.
“혀를 넣고 싶은데 입술 좀 벌려줄래?”
어이없는 속삭임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루스는 잠시 잃었던 정신을 되
찾았다. 그는 소스라치며 뒤로 한 걸음 물렀다. 등 뒤로 벽처럼 단단한 무언
가 부딪쳤다. 곧 그것이 자신과 저 녀석을 둘러싼 경호원들이라는 사실을 깨
달았다. 루스는 그제야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꺄악! 레이 에드윈이야!”
“진짜잖아! 대―박!”
스쳐간 꿈에서 확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고막이 먹먹했다. 그때까지도 이
렇게나 많은 사람이 카페 안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눈
앞에서 지독히 반짝거리는 인간 때문이었다. 루스는 잠시 그에게 시선을 뺏
겼던 자신을 질책하며 창가 쪽을 바라봤다. 이미 창밖 거리도 한여름 철 개
구리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게 무슨…….
“레이! 제발 미친 짓 좀 작작해!”
루스의 못다 한 심경을 대신 외치는 남자는 가게에서 시끄럽게 굴고 사유
재산까지 깨먹은 로이란 알파였다. 방금까지 보였던 멍청한 얼굴을 치워버
린 그는 심각할 정도로 진지해져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벌써 네가 한 짓이 벌써 SNS에 쫙 퍼졌어. 곧 기자
들도 몰려올 거야.”
언론이야 아론이 전화 한번 돌려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
나 일반인들이 퍼트린 정보는 아무리 돈과 권력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완벽
히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론은 레이가 사고치는 즉시 자리를 뜬 상태였다. 상황만 보면 저 혼자만
살겠다는 배신이었지만 이성을 들고 보면 누구라도 빨리 이 난리를 수습해
나가야 했다. 지금 상황이 한편의 해프닝으로 끝날지 스캔들이 될지는 이제
부터 시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짐작만으로도 수백 대가 넘는 카메라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로이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정신을 수습하며 레이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레이는 루스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담담히 중
얼거렸다.
“로이, 이 녀석도 데려가.”
“뭐?”
“제길! 무슨 헛소리야!”

동시에 튀어나온 로이와 루스의 언성에도 레이의 얼굴은 뻔뻔할 정도로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기분이 들뜬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카
페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에게서 어이없는 여유로움
까지 느껴지자 루스의 인상은 기어이 일그러졌다.
“장난도 정도껏 해. 빨리 꺼져.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어차피 내가 사라져도 넌 여기 못 있어. 못 들었어? 방금 우리가 그 짓 한
사진이 이미 전 세계에 뿌려진 것 같고, 로이 말처럼 기자들도 몰려들 거야.
예쁘게 사진 찍고 인터뷰 잘할 자신 있으면 여기 있던가.”
“누가 너랑 그 짓을… 하! 미치겠네, 그보다 내가 왜 너랑 가야 하는 거
지?”
“내가 원하니까.”
“…….”
루스는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보다 못한 로이가 옆에서 침
착하게 말을 보탰다.
“ 원래 저런 인간이에요. 그래도 일단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
늘 카페에서 보신 손해는 꼭 보상은 해드릴게요. 집에도 꼭 모셔다드리고
요.”
원래부터도 생각했지만, 오늘에서야 확실히 미친놈이라는 것을 재차 확
인한 로이는 노선을 틀어 그나마 알아먹을 것 같은 루스에게 간절히 부탁했
다.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저 남자가 적어도 정이 흘러넘치는 베타이길 바라
면서 말이다.
“…… 보상은 꼭 다 받아내고 말 겁니다.”
다행히 루스는 길지 않은 망설임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
서 괜한 고집 부려 봤자 상황만 더 악화할 뿐이었다. 카페 바를 힐긋 바라보
니 직원들은 이미 사색이 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저희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여기서 정리해줄 인원이 필요합니
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론이 곧 사람을… 아! 저기 오네요.”
그들을 둘러싼 경호원들의 몇 배가 되는 수행원들이 카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열린 길
사이로 역시 알파로 보이는 단정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그들 앞에 다가왔다.
“ 루크!”
로이는 백 년도 더 된 형제와 상봉이라도 한 듯 환희에 젖어 그를 맞이했
다.
“ 고생하셨습니다. 로이님. 여기 마무리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의 부친을 모셔왔던 그는 현재 아론의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라
면 이곳 상황을 적절히 마무리할 수 있을 거였다.
“이곳 직원들에게 피해가지 않게 가게 잘 정리하고 여기 보상 건도 정리
해서 나중에 아론에게 넘기도록 해. 나머지는 알아서 하고.”
레이는 루크에게 당연한 듯 지시를 내리며 루스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잠깐…….”
“이제 됐지? 그럼 우린 가도록 하지.”

그를 향해 걸린 레이의 환한 미소가 무서울 정도로 반짝였다. 루스는 확신


했다.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는 저 아름다운 인간을 따라가는 순간, 자신은
결코 평온을 되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

“이 넓은 저택에는 그 흔한 응접실 하나 따로 없나 보군.”


루스는 그냥 반말을 선택했다. 굳이 그와 자신의 나이 차이를 따져서가 아
니었다. 그냥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혈압에 문제가 생겨버릴 것만 같았
다. 적어도 예의를 차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왜 긴장돼?”
“ ?

뻔뻔한 건 둘째 치고 은근한 미소에 담긴 의미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루스는 뻐근해지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레이의 눈빛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뭐지?”
“뭐가?”
“방금 시선이 별로 유쾌하진 않군.”

유독 신경이 날카로워진 루스의 대꾸에 레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잠시 감상한 것뿐이야. 생각보다 네가 꽤 섹시해서 말이야.”
“…….”

그냥 입을 닥치고 있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호화로운 엔틱 가죽 소파에 기대 거만하게 앉아 있는 레이 에드윈은 고전
미 넘치는 방 안 분위기와 완벽히 어우러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진작
넋을 놓았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루스에겐 그런 감상 따위를 가진다는 것 자
체가 무언가를 기어이 잃게 할 것 같은 위험한 함정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면 정조라던가.
남자가 정조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실제로 체감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루스는 분명 이곳에 반강제로 끌려 들어오면서 응접실이라 추
정되는 방을 질릴 정도로 여러 개 목격했다. 그런데 하필 안내를 받고 들어
선 곳은 침실이었다.
방안으로 떠밀려 들어오기 직전, 동행했던 로이라는 비서의 얼굴에서 떠
오른 건 괴이함이었다. 그제야 루스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문이 닫히고 눈앞에 성인 남자 다섯은 끄떡
없을 대형 침대를 보는 순간, 오랜만에 목숨을 위협받는 수준의 위기감을 느
껴야만 했다. 루스는 자꾸만 침실로 돌아가는 눈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정말 베타 맞아?”

드디어 감상을 끝마쳤는지 레이가 재차 말을 건네 왔다. 오늘만 두 번째로


받은 질문에 루스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되받아쳤다.
보면 알지 않나?”

“ 그러니까 말이야. 이래봬도 나는 스스로의 감각을 꽤 신뢰하는 편이거
든. 그런데 일단 두 눈으로 본 게 있어서 자꾸 의심이 든단 말이지.”
그를 주시하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네가 베타라면 그때 알파를 어떻게 해치운 거지?”
역시 그 얘기인가?
루스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게 궁금해서 이 난리를
피우며 나를 데려온 건가?”
“아니, 굳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니
까.”
“그럼 도대체 내게 볼일이 뭐야? 그때의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기에
는 오히려 보복 같은 기분이 드는군.”
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태도에 루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말에 감정을
실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싱글거리던 레이의 얼굴에 의아함이 섞여들었
다.
“어째서 보복이 되는지 알 수 없군. 오히려 영광 아닌가? 나와 이렇게 마
주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알파들만 해도 아우스 강을 채우고도 넘치는데 말
이야. 그리고 그때는 솔직히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어.
그걸로 감사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는데, 해줬으면 하는 건가?”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었지만 무심한 음성에 깃든 오만함은 진짜였다. 참,
사람 속을 잘도 뒤집어 놓는 녀석이었다. 루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퉁명스
레 대꾸했다.
아 그러시군. 그럼 너와 나 사이에 더는 볼일은 없는 것 같으니 이만 일
“ ,
어나지.”
“볼일은 많아. 그러니 가만히 앉아 있어.”

레이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루스를 단호하게 제지했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볼일이야?”
일어나려다 도로 앉은 루스는 자꾸만 좁혀지는 미간을 주무르며 짜증스
럽게 혀를 찼다. 슬슬 한계였다. 애초부터 보답 따위를 바라본 적은 단 한 번
도 없었다. 그래도 구해준 인연이라도 있으니 뭔가 할 말이라도 있겠거니 싶
어 얌전히 여기까지 따라와 줬는데, 저리 남의 속을 뒤집는 소리만 해대니
더는 여기서 이럴 이유가 없지 않나 싶었다.
루스는 한마디만 더 헛소릴 지껄이면 그대로 일어나 무슨 일이 있어도 문
을 박차고 나갈 다짐을 하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눈앞에 언제 다
가왔는지 황금빛 눈동자가 들이밀어 졌다. 곧고 부드러운 손이 와인 잔을 감
싸 들어 올리듯 루스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가까이 마주한 금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확인하듯 샅샅이 얼굴을 살폈다.
“뭐야, 이 손 놔…….”
“진짜 설레네.”

레이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고동 소리를 인식했다. 역시 이 심장은 그에


게만 반응하는 것이 분명했다.
원래는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역시 제대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이내 루스의 얼굴에서 손을 거둔 레이가 허리를 세우며 재킷을 벗기 시작


했다. 타이를 풀고 조끼를 벗어 던지는 망설임 없는 행동을 지켜보던 루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섹스.”

돌아온 레이의 대답에 잠시 멍했던 검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섹스…… 누가?”
“너랑 나.”
어느새 바지와 셔츠만 남긴 레이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방심한 그의 허벅
지 위에 주저앉았다. 묵직해지는 무게를 느끼면서도 루스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이 상황에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레이가 그의 입술 가까이서 다급히 중얼거렸다.
“내가 제대로 설 것 같지도 않은 베타와 섹스하는 건 진짜 처음이거든. 그
러니까 키스하게 입 좀 벌려봐. 어떻게든 세우고 들어가야 할 거 아니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난잡한 언어에 그제야 멍했던 얼굴에 경악이 떠올
랐다.
뭐 잠깐 멈춰, 지금 무슨…… 어이! 옷은 벗지 말고!”
“ !

레이는 어느새 마지막 단추를 풀어내고 본격적으로 셔츠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 아래로 훌러
덩 벗겨지는 셔츠 앞섶을 끌어 움켜쥐며 엑스 자로 겹쳤다. 다행히 드러났던
살색이 제대로 천에 가려졌다. 다시 옷이 입혀진 상황에 레이는 처음으로 당
황스러운 빛이 띠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도대체 저 인간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슬슬 궁금해졌다. 루스는


적반하장을 시연하는 그를 향해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무례한 건 당신이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랑 키스하고 싶지
않아. 섹스도 마찬가지고.”
“나랑…… 하기 싫다고?”

어째서라고 되묻는 레이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 ,
“알아. 테라에서 레이 에드윈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연한 대꾸에 레이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런데도 나 레이 에드윈과 섹스하기 싫다고?”
“그래.”

지금껏 살아오면서 레이 에드윈과의 잠자리를 거부한 알파는 감히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는 베타이긴 했지만 또한 남자였다. 이 방에 들어오면
서부터 유혹의 페로몬을 강하게 흘려보냈다. 오메가의 페로몬은 남자들에게
최음제나 다름없었다. 페로몬을 인지 못 하는 베타라 해도 달달한 공기 정도
는 인지했을 것이다. 이정도의 강도면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내 미모를 보고도 싫다고 한다면…….
당신 혹시 고자야?”

레이의 시선이 그의 허벅지 사이 어딘가로 향했다. 루스는 진심으로 딱 한
대만 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끈질긴 정조 위협만으로도 무례
한데, 거기다 남자의 자존심까지 짓밟고 있으니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다다
라 있었다. 아마 예전 이십 대 때였다면 이런 고민 따윈 하지도 않고 바로 주
먹을 날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서른을 넘겨 중반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리숙하게 감정에 휘둘리기엔 눈앞에 있는 존재는 너무나 거대한
산이었다.
오메가지만 현재 테라에서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는 레이 에드윈을 때리
는 순간 그 누구라도 멀쩡히 살아 돌아갈 확률은 아예 없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녀석’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난 내가 사귀는 사람 아니면 섹스 안 해.”
루스가 바닥난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 모으며 중얼거렸다. 레이는 어이없
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요즘 시대에 너무 촌스러운 발상 아닌가? 그냥 서로 가볍게 하루 즐
길 수도 있는 거잖아? 한번 욕구 풀자고 서로를 구속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하는데.”
참 저 녀석 다운 발상이다 싶었다. 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럼 그러고 싶은 녀석들이랑 해. 난 구속당하는 게 좋으니까.”
“당신 변태야?”
저 녀석도 사내인데 그냥 한 대 때리고 생각하면 안 될까?
루스는 인생 뭐 있냐는 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를 시켜봤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차라리 그때 그 골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자신의 오지랖을 탓하
는 게 훨씬 현실적인 것 같았다. 솔직히 그때 그 일에 개입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이 그를 구하러 골목에 들
어갈 것이다.
단지, 저 녀석에게 홀라당 이름을 가르쳐준 그때의 자신에 대한 욕이 나올
뿐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왜 나랑 하고 싶은 건데?”

루스는 잠깐의 자아 성찰을 끝낸 뒤 깊은 고뇌의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대낮에 미친 변태 놈이 날뛰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
다. 인연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이 녀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의 물음에 대꾸는커녕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 한순간 분
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침묵의 간극은 의외로 길었다. 그렇다 해도 워낙 어
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기에 루스는 고집스레 그의 셔츠 앞섶을 움켜쥐
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는 무릎 위에서 내려갈
생각도 대답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역시 힘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건가?
허벅지 위로 눌러지는 무게에 체온이 더해져 자꾸만 위험한 기분이 들었
다. 달짝지근한 정체불명의 공기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안 그러면 정말로 저 녀석의 뜻대로 휩쓸려 갈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탐탁스럽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행동에 옮기려 할 때였다.
루스.”

이름이 불리자 자동으로 모든 행동이 멎었다. 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


다. 눈이 마주쳤다. 방금까지 보인 뻔뻔스러움 대신 아련함이 깃든 시선이었
다.
네가 보고 싶었어.”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 버렸다. 그 안으로 아득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 머릿속에 줄곧 네 이름이 환청처럼 맴돌아서 내내 잠을 거의 자지 못했
어. 그렇게 떠올릴 때마다 여기도 수시로 욱신거렸다. 무척 당황스럽더군.
그래서 널 찾았어. 다시 만나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까.”
레이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누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더 복잡해져 버렸군.”

그저 다시 만나기만 하면 자신에게 벌어진 생소한 현상들이 전부 설명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답을 얻기는커녕 그 순간 느낀 건 충동이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마주한 순간 어떻게든 그에게 닿고 싶은 충동이 곧 본능으
로 전이되었다.
하고 싶은데.”

레이는 여전히 자신의 앞섶을 움켜쥐고 있는 손등 위로 손을 살며시 포갰


다. 움찔하고 미세한 거부가 있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것이 무척 마
음에 들었다.
키스해도 될까?”

레이는 가깝게 얼굴을 맞대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움찔, 포개진 손이 또


한 번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부는 아니었다. 어떤 말에서 심
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순진해 보이는 이 베타 남자에
게는 솔직함이 최고인 것 같았다.
야릇하게 휘어진 입술이 은밀히 달싹였다. 더운 숨이 훅 끼치자 남자의 눈
꺼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떨림이 무척 야하게 느껴졌다. 레이는
완벽히 포개질 수 있는 각도로 고개를 틀어 조심스레 루스의 입술로 다가갔
다. 드디어 한 끗 차이를 남겨두었을 때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안 돼.”

다시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본 남자의 눈빛은 한없
이 진지했다. 분명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너와는 키스도 섹스도 할 수 없어. 이번만
봐줄 테니 다시는 이런 짓 저지르지 마.”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경고였다.
루스는 손을 움직여 그의 풀어진 셔츠의 윗단추부터 차례로 잠그기 시작
했다. 마지막 단추가 잠가질 때까지 레이는 멍하니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속은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잠근 루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레이의 몸도 자연스레 일으켜졌다. 그
과정에서 조금 휘청거렸지만 단단한 손이 조심스레 허리를 받치고 있어 안
정적으로 카펫을 밟고 설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다정했던 손길이었다. 레이
가 자리에 바로서자 루스는 미련 없이 떨어졌다.
“오늘 있었던 소동과 찍힌 사진은 네 쪽에서 잘 수습해줄 거라 믿지. 보상
은 필요 없어.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카페도 아니니까.”
레이를 향한 시선과 말투 모든 것이 무척 부드러웠다.
이제 집에 가고 싶은데, 보내줄 수 있겠지?”

처음 만난 그날, 햇살 너머 비추던 미소가 겹쳐 떠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레이의 얼굴에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레이! 너 이 자식!”

그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성난 목소리가 잔잔했던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인상을 한껏 굳힌 아론과 뒤따라 방으로 들어오는 로이를 보며 레이
는 찰나에 내비쳤던 감정을 지워버렸다.
아론. 손님 앞이야. 무례한 언행은 삼가 해.”

아론의 시선이 즉시 루스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에서 느껴지는 위


압감에 루스는 무심코 몸을 경직시켰다.
“ 아론. 쓸데없는 페로몬은 빨리 거둬. 그리고 로이. 앨런에게 이야기해서
루스를 집에 데려다주도록 해. 혹시 모를 주변 정리도 철저히 해두라고 말하
고.”
방금까지의 가벼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익히 언론을 통해 알고 있
던 레이 에드윈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루스를 향했다.
“네 말대로 뒤처리는 우리 몫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대신 머리가 있으면
당분간 가게는 근처도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쨌든 완벽히 정리해 둘 테
니 테라를 뜰 생각일랑 일절 하지 말고.”
사고 친 녀석이 참 뻔뻔스럽군.”

아론의 비꼬움에도 레이의 신경은 온통 루스의 다음 반응에 쏠렸다.


이만 가보지.”

그러나 요구한 대답 대신 건네진 건 짤막한 작별 인사뿐이었다. 그것을 마


지막으로 루스는 미련 없이 문을 나섰다. 대기하던 로이가 그 뒤를 따랐다.
루스.”

복도로 발을 내딛던 걸음이 멈췄다. 돌아간 고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레


이를 향했다.
또 보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스는 질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솔


직한 반응에 레이는 피식 웃었다. 루스는 끝내 대꾸하지 않은 채 누가 잡을
세라 서둘러 복도로 나가버렸다.
곧 문이 닫히고 방안에는 아론과 레이 둘만 남았다. 대화는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루스가 나간 문을 응시하던 레이는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
다.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 너머로 저택 입구가 보였다. 그곳에는 이미 차가
대기 중이었다.
“ 벌써 한 건 하진 않은 것 같고…….”
등 뒤에서 한결 누그러진 음성이 탐색하듯 늘어졌다. 레이가 코웃음을 쳤
다.
“그랬으면 내가 옷을 입고 있었겠어?”
“너무 제대로 입고 있어 더 문제지. 네가 단추를 성실하게 목 끝까지 채우
고 있는 건 처음 봤거든.”
아론이 입술을 비틀며 그의 상의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레이는 그제야 입
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녀석 말처럼 단정하다 못해 금욕주의자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에 레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 미간에 주름을 늘
리며 진지하게 목 끝까지 단추를 잠가대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자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아론은 괴이한 것을 보았
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도대체, 오늘 왜 그래?”
“뭐가?”
“진짜 이 상황을 몰라서 그래?”

아론은 기어이 참아왔던 짜증을 토해냈다.


“네놈이 사고 친지 근 한 시간이 지났어. 그동안 벌써 각종 SNS에는 네놈
이 카페 사장과 그 짓 한 사진과 동영상이 가늠할 수 없는 단위로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있다고.”
“그 짓은 얼어 죽을. 거기서 섹스한 것도 아닌데 다들 웬 난리야?”
“걱정 마, 조만간 섹스한 거로 끝내주게 포장될 테니까.”

스캔들이란 원래 한편의 드라마였다. 정상적인 스토리도 부풀려지고 각


색되어 듣고 보는 이들의 사상까지 제대로 이입되고 나면, 끝내 진실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한편의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억울해 죽겠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레이가 입술을 비죽거리자 아론은 기가 찬다는 듯 따져 물었다.
“억울은 얼어 죽을…… 태평한 소리 그만해.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네
놈 속을 알아야 수습 방향을 잡을 거 아니야?”
일단 언론사에 전화를 넣어 최악의 사태는 막아두었지만, 일반인들의 손
을 거쳐 탄생한 막장 드라마는 전문기자들과 차원이 달랐다. 아마도 퍼져나
간 동영상은 나중에 교묘하게 편집되어 [오메가 모 군의 대범한 대낮 XXX
동영상] 따위로 불법적 사이트에 오르락내리락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올린 이는 물론이고 0.1초라도 관람한 인간들 전부 이 세상에
서 지워질 테지만 말이다.
「여기는 뭘 해도 일이 크게 벌어질 곳이거든」
정말 일이 크게 벌어져도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아론은 두 시간 전
그 베타 사장에게 뱉어낸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저주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때마침 루스의 배웅을 마친 로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바로 입을 뗐


다. 평소에는 꼬박꼬박 잘만 하던 노크도 빼먹은 상태였다. 그만큼 지금 사
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비서실 쪽은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래.”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언론사에서 전화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원래


이런 일일수록 초기 대응이 중요했지만 정작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야
할 장본인이 저리도 태평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루스는?”

언제부터 봤다고 이름까지 친근하게 부르며 챙기는 레이의 행동에 로이


는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잔소리를 밀어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 곱게 잘 보내드렸어. 원래는 이곳에 있었던 일에 대한 비밀 엄수 서약서
도 받아 두려 하다가 그냥 말로 끝냈어. 그쪽에서도 쿨하게 알았다고 하더
라.”
아론은 로이의 대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당분간 감시인 붙여둬. 혹시 언론하고 접촉해 무
슨 말을 터트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경호원을 붙여두는 게 좋겠군. 질투로 해코지하는 인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두 알파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석연치 않은 시선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왜 그러지?”
“너야말로 왜 그래? 어째 네 녀석 말이 그 베타 놈을 지키겠다는 말로 들
리는 거지?”
아론이 설마 하며 내던진 물음에 레이가 여상히 대꾸했다.
“나를 추종하는 녀석들이 한둘이야?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그놈
들이 가만히 있겠어?”
“애인?”
“애인?”
두 알파가 이구동성으로 되묻자 레이는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로이는 가서 그저께 나랑 인터뷰했던 아만다 불러와. 그때 했던 인터뷰
새로 짜고 거기를 통해서 기사 먼저 터트릴 거니까. 렉스한테도 연락해둬.
그리고 아론은 언론에다가 그 녀석 신상을 파헤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둬. 만에 하나 루스에 관한 기사가 한 줄이라도 뜨는 날에는 지구에서
짐 쌀 각오들 하라고 단단히 경고해두라고.”
레이는 이어 아론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녀석 신상 좀 자세히 알아와 봐. 어디서 자는지 삼시 세끼 뭘
먹는지 까지 말이야.”
언론은 안 되고 자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말을 내뱉는 걸 보니 눈앞에 있
는 저 남자가 확실히 레이 에드윈이 맞긴 맞았다. 아론은 갑자기 지치는 기
분을 느꼈다. 우성 알파 주제에 로이가 왜 영양제를 챙기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 나는 네 말대로 언론 정리만 해둘 테니까 나머진 네가 알아서 잘
처신해. 단, 네가 에드윈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만 절대 잊지 마. 넌 우리 가문
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론은 더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레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복잡한 낯
을 띠고 있는 로이의 어깨를 툭 치며 밖으로 퇴장하자 이제 방안은 레이와
로이 단둘이만 남았다. 로이는 눈알을 굴리며 그의 말뜻을 필사적으로 파헤
쳤다.
레이가 당장 불러오라고 한 아만다는 레이의 셋째 여동생 렉스가 설립한
글로벌 미디어 기업 소속 LK 여성 매거진 편집장이었다. 그녀는 열성 오메
가였다. 레이가 가주에 오르고 이 년이 지났을 어느 무렵, 레이의 큰 도움을
받고 현재는 에드윈 가문에 충성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뭔가
를 짜고 치겠다는 이야긴데…….
너 설마…….”
“ ,

문득 깨달았다는 듯 로이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시선을 맞춘 금안


이 사악하게 반짝이는 걸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게 맞긴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알파들이 봤을 때는 그저 매혹적인 붉은 입술 사이로 로이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계략이 던져졌다.
타이틀은 운명적인 만남. 어때? 제법 낭만적이지 않아?”

***

방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아론은 걸음을 멈췄다. 착각일 리는 없을 것 같


았다.
불쌍한 녀석. 고생 좀 하겠군.
나오기 직전 새하얗게 질려있던 로이를 떠올리며 아론은 쯧 혀를 찼다. 대
충 무슨 일을 벌일지 예상은 갔다. 문제는 레이 에드윈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어머니 말고는 처음이라는 거였다. 그것도 하필 베타 남자라니.
지금껏 녀석이 일으킨 사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싫은 예감이 들었다.
아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곤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저택을 벗어나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으로 향했던 고개를 돌리며 다시 걸음
을 떼려는 순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레이의 수행비서 겸 경호를 맡고 있는 앨런 에드윈이었다.


기척은 내고 다녀.”

괜한 민망함에 아론은 평소보다 목소리에 무게를 더 실었다.


죄송합니다. 제 기척을 느끼지 못하실 리 없으실 거로 생각하고 그만.”

차분한 어조는 무감했다. 자칫하면 우성 알파 주제에 기척 하나 못 느꼈냐


고 비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저 남자의 성격상 그럴 일은 절대 없
다는 것을 아론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딴 생각하느라 몰랐군. 그자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인가?”
“네, 레이님께 보고 드리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 봐. 분명 그 녀석의 안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론이 문을 가리키며 옆으로 비켜섰다. 앨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따라가던 아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슬슬 그때가 되지 않았나?”

“…….”

노크하려던 앨런의 손이 멈칫했다. 무심한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던 아론의 입가
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제대로 체크 하라고. 안 그러면 피차 곤란해지니까.”
“……아론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숨소리만큼이나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론은 전부 알아들었다.


너 지금 뭐라고…….”
“ ,
“그럼, 저는 이만.”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앨런은 서둘러 노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


다. 순식간에 열린 문이 다시 굳게 닫히는 것을 바라보던 아론은 얼굴이 무
섭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두고 워낙 무심한 게 괘씸해 좀 흔들 요량으로 툭
던진 말이었는데 더 괘씸한 말을 듣고 말았다. 누구의 부하 아니랄까 봐, 아
주 똑같이 알파 속을 썩이는 녀석들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마음에 안 드는군.”

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무섭게 노려본 아론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


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 방을 나올 때보다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CHAPTER 2.

낡아 녹슨 현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둔탁하게 열렸다.


루스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거실 창가로 향했다. 창문으로 비치
는 오전 햇살은 완연한 봄을 담고 있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었
다.
지어진 지 20년도 넘은 낡은 베타 전용 아파트는 남향으로 지어져 오전과
낮이면 햇볕을 온전히 방안으로 들여놓았다. 루스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
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어둡고 음침한 공간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곳 꼭대기
11층에 매물이 나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집을 계약했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테라에서 20평 남짓한 이 공간은 루스에게 가장 평온한 보금자
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작은 화분 옆에 밖에서 사 온 따끈한 빵 봉투와 조간신
문 한 부를 내려놓았다. 변장용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볕 좋은 창가에 배
치해둔 커다란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며 늘어지자 그제야 한숨이 돌려졌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긴장을 탄 건지 어깨가 뻐근했
다. 루스는 목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차 소리와 근처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 이외
에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카페에서 그 난리가 난 지 하루가 지났다. 혹시나
싶어 아침거리를 사러 밖을 나갔을 때 주변을 유심히 경계했지만 에드윈 가
문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 빼고는 따로 목적 있는 접근은 없었다. 확실히
가문의 명성답게 일 처리는 깔끔했다. 감시인이 따라붙은 건 불쾌한 감이 없
진 않았지만 일부러 그쪽과 접촉해서 또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
냥 이렇게 앉아 이른 봄볕의 평온함을 좀 더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루스는 아득히 의식을 가라앉혔다.

[…….]

여긴 어디지?
루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낯익은 풍경이었다. 문득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버석거림에 고개를 내렸다. 맨발 아래 깔린 것은 부드러운 흙이었
다. 다시 고개를 들자 울창하게 솟은 나무들이 빽빽이 시야를 두르고 있었
다. 나뭇잎으로 가려져 띄엄띄엄 보이는 하늘은 푸르렀다. 그러나 빛은 느껴
지지 않았다. 왠지 허망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 그렇구나.
루스는 그제야 낯익은 기억을 떠올렸다. 이곳은 어릴 적, 힘을 키우기 위
해 그에게 훈련받았던 장소와도 비슷했다. 아니면 진짜 그곳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꿈인가?
자신은 분명 테라에 있는 베타 아파트 조그만 거실에 있었다. 잠시 이른
햇볕의 노곤함이 밀려와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째서 숲이 펼쳐진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꿈임이 틀림없었다.
살다 살다 별일도 다 있군.
지금껏 이렇게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꿈은 처음이었다. 루스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리만치 생명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작은 흐느낌과
닮아있었다. 이런 숲에서 울음소리라니. 기묘하면서도 섬뜩함이 동시에 가
슴을 스쳤다.
루스는 흙바닥을 쓸며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 느껴지는 발바닥 감촉이 너
무나도 선연했다. 얼마 가지 않아 냇가가 나타났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큰 바위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건 작은 아이였다. 아
무리 꿈이라지만 소리의 본체가 아이라는 것에 놀란 루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봐, 괜찮은……!]
[

그의 기척에 아이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


간, 루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나른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스쳐 갔다. 아득해졌던 공원


의 아이들 소리도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멍한 시선에
빛이 스며들었다.
꿈…… 이었지?
기억은 선명했다. 잠에서 깨기 직전 분명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건 자
신의 어릴 적 모습과 똑같았다. 정말 별일이었다. 어째서 꿈에 등장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자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
이 아니었다. 얼핏 나이를 가늠해보면 열 살을 기점으로 이전 나이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시절이 마음에 남아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루스는 양손으로 마른세수
를 하곤 깊은 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커피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듯싶었다.
쿵쿵 쿵.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쿵
쿵 쿵 정확히 세 번을 두드려대는 노크 소리에, 멍하니 현관을 향했던 두 눈
에 기어이 짜증이 담겼다. 루스는 느릿하게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새를 못 참고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불쑥, 이사 오면서 제거한
초인종이 절실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벨 소리가 과할 정도로 우렁차서
불쾌했던 것을 떠올리곤 곧바로 후회를 접어버렸다. 현관에 도착했음에도
소리 내어 대꾸하지 않았던 터라 현관문은 다시 쿵쿵대기 시작했다. 누군지
참 힘도 좋았다. 이곳에 올 사람은 아예 없었기에 인터폰도 설치하지 않았
다. 그냥 무시할까 했지만 꿈을 꾸고 난 직후의 불쾌함에 이상한 오기가 생
겨버렸다. 루스는 현재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누군지 면상을 꼭 보겠다는 일
념 하나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런, 문을 열 때는 사람을 확인해야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나긋한 음성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한소리 하


려던 입이 도로 할 말을 잃었다.
중후한 멋을 낸 클래식 슈트 위로 가지런한 금발이 허리까지 늘어져 봄볕
에 반짝이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 복도에 아름다운 금발 미남자라니. 어쩐지
녹슨 쇠 냄새만 가득해야 할 공간에 묘한 달큼함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지
독히도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루스는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귀여운 얼굴로 바라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해도 돼?”

나긋한 속삭임과 함께 한 걸음이 성큼 내디뎌졌다. 루스는 그제야 퍼뜩 정


신을 차렸다.
가까이 오지 마. 그보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근 이십 사년 만에 귀엽다는 말을 들은 건 둘째 치고 좁혀진 거리가 거북


했다.
루스는 먼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를 경계했다. 그러자 레이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담겼다.
아깝군. 방금 그 멍청한 얼굴이면 충분히 키스할 수 있었는데.”

“…….”

더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제 순순히 자신을 보내주며 또 보자는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구나 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바로 그다
음 날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어제 일은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어제일…… 아, 섹스.”

섹스를 말하는 음성이 무척이나 야릇했다. 잠시 그의 시선이 입술에 스친


것 같은 기분에 루스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괜히 힘을 주었다. 만약 어
제처럼 수작을 부릴 생각이면 당장 문을 닫아버릴 태세를 갖추고 있던 그때
였다.
어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러 왔어.”

루스는 방금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과? 아까부터 키스니, 섹스니 헛소리를 지껄인 녀석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
농담과 진담 정도는 구분해 줘야지.”

아까보다 경계가 더욱 심해진 루스를 향해 레이는 긴장 풀라며 태연스럽


게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
“할 거면 그냥 여기서 해.”
“시끄러울 텐데. 이런 곳은 자재가 싸구려라 벽이 얇다고 들었거든.”

그제야 루스는 아래층 계단 너머를 힐긋 주시했다. 아직은 별 기척은 못


느꼈지만 어차피 낡은 아파트라 집 안에 있어도 들릴 건 다 들리는 구조였
다. 확실히 소란을 피워 레이 에드윈이 이곳에 있다는 걸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선뜻 들이기 망설여졌다.
어차피 나도 길게 못 있어. 조금 이따 회의 들어가야 하니까.”

그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자 레이는 일부러 보라는 듯 자신의 손목시계


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를 보기 위해서 아침도 걸렀거든. 회의는 아홉시부터 바로 시작이야.
여기서 차를 타고 회사까지 가면 삼십 분이 걸리고, 아마 보고를 받으며 사
무실로 들어가면 벌써 십 분이 소요되어 있겠지. 그리고 거기서 한차례 보고
를 더 받고 회의실로 들어가면 정확히 아홉시. 그러면 내 손에 먹을 것이 쥐
어지는 시간은 아마 한시 이후나 될 거야. 그리고 지금은 여덟시군.”
천천히 자신의 스케줄을 읊던 레이는 잠시 입을 닫고 루스와 시선을 맞췄
다. 딱 일초 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난처함이 머물렀다.
배가 고픈데.”

“…….”
목도 마른 것 같군.”

제기랄.
루스는 낮게 욕을 뇌까리곤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몸을 비켜
섰다.
십분. 그 이상은 안 돼.”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는 기다렸다는 듯 루스를 지나 집안으로 발을 들였


다. 제집인 양 거침없이 거실로 직진한 그가 두 눈에 즐거움을 담았다.
정말 작군. 그래도 다 허물어진 외관보다는 훨씬 훌륭한데?”

레이는 주변을 두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간은 생각했던 것보


다는 훨씬 컸다. 거실에는 작은 소파와 테이블 창가 쪽에 놓인 안락의자와
화분이 전부였다. 이사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모든 것에 새것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정갈하고 깔끔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레
이는 그래도 혹시나 하며 중얼거렸다.
“설마 쥐벼룩 같은 건 없겠지?”
“있어. 아주 많이 득실거리니까 그만 가봐.”

가까이서 들리는 타박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부엌이 들어왔다. 거실과 부


엌이 한 공간에 붙어있다는 사실에 놀란 레이는 바로 루스를 찾았다. 그는
찬장에서 원두를 꺼내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내내 까칠했던 반응과 달
리 착실하게 커피라도 대접하려는 모양이었다.
레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주변을 탐색했다. 집안은 얼핏 원룸처럼 느
껴졌지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침실로 추정되는 작은 문이 굳게 닫혀있
었다. 그의 두 눈이 문을 향해 고정됐다.
나는 연하게 부탁하지. 쓴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커피에 자기 취향을 확고히 어필하자 루스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 그러다 한숨을 쉬곤 원두를 분쇄기 쪽으로 가져갔다.
원두를 곱게 갈기 시작하자 그것만으로도 구수한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워
나갔다. 살짝 기분이 누그러진 루스는 곱게 갈아낸 원두 가루를 드리퍼에 적
당량을 넣어 커피를 내릴 준비를 마쳤다. 포트에 올려놓은 물이 끓었는지 확
인하러 고개를 돌리는 순간 평온했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잠깐!”

그는 황급히 부엌을 뛰쳐나와 방문 고리를 움켜쥔 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막 문이 열리기 직전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안도하기도 잠시, 겹쳐진 손
으로 스며드는 체온을 인지한 순간 루스는 후회를 짓씹었다. 그리고 눈이 마
주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상대도 당황했는지 느리게 깜빡이던 금빛 눈
동자가 이내 상황파악을 끝내고 가늘게 휘어졌다. 한순간 섬뜩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루스는 얼른 손을 떼며 뒷걸음질 쳤다.
너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 ,
“방금 키스할 분위기 아니었나?”

사과하러 왔다고 했을 때보다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아쉬운 말투였다. 루


스는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너 진짜 사과하러 온 거 맞아?”
“맞아. 이성은 그런데 자꾸만 본능이 꿈틀거려. 그러니 좀 더 떨어져 줬으
면 좋겠군. 내가 이성적으로 참을 수 있게 말이야.”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레이의 낮게 내리깐 두 눈이 곧바로
루스의 입술을 농도 짙게 훑었다. 그 즉시 그들의 거리가 멀찍이 벌어졌다.
아쉬운 시선을 들자 마치 희롱이라도 당한 듯 벌게진 얼굴이 들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나 태연한 표정에 루스는 뭔가를 말하려
던 입술을 꾹 닫고 소파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저기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어. 커피 정
도는 대접할 테니까.”
“흠―, 저기가 네 침실인가 보군.”

아무래도 저 문 너머가 무척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루스는 그가 궁금해 하


는 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강행할까 싶어 불안한 마
음에 문 앞을 계속 지켜서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가 먼저 순순히 물
러났다. 소파로 걸어가 앉는 것까지 확인한 루스는 그제야 다시 부엌으로 향
했다. 어째 아침부터 피곤이 눈처럼 쌓이는 기분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갑자기 훅 끼쳐오는 달짝지근함에 온몸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기분이었
다. 소름 끼칠 정도로 짜릿한 전율이 더해져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했다.
역시 오메가라서 그런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루
스는 이미 끓어오른 물을 핸드드립 포트에 담아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필
터에 담긴 원두 가루에 세심한 원을 그리며 물을 붓자 신선한 거품이 일었
다. 구수한 커피 냄새가 곧 온 방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레이도 기분이 좋았
는지 한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향이 근사하군. 배도 고픈데 뭐 먹을 건 없나?”
“사용인이 근사하게 차려놓은 아침은 어쩌고 여기 와서 밥 타령이야?”
“아까도 말했을 텐데? 지금이 겨우 여덟시야. 오늘 아침만 해도 다섯 시에
일어나서 급히 일하나 처리하고 나오기 바빴어.”
에드윈 가(家)의 가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건 세상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루스 또한 레이 에드윈에 대해서는 남들만큼의 정보는 가
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 그 이상까지도 잘 알게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배고프다는 사람을 굶겨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창가로 넘어가 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왔다. 그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레이가 창가에 놓인 신문을 발견하곤 물었다.
“요즘은 거의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보지 않나?”
“그냥 나갔다가 눈에 들어와서 사 온 것뿐이야. 일부러 내 손으로 검색해
가며 찾아보고 싶진 않으니까.”
“기사는 봤어?”
“아직.”
“궁금하지 않아?”
“나중에 볼 거야.”
“보고 화는 내지 말라고.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

따끈한 크루아상과 샌드위치를 접시에 올리던 루스는 동작을 멈추고 그


를 쳐다봤다. 마주 보자 레이는 싱긋 웃어 보였다. 다른 이들에겐 설렐법한
장면이었지만 루스는 대신 미간을 좁혔다.
“얼마나 최선이기에 내가 화를 낼 거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한 거지?”
“다른 수컷들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최선이지. 그런데 슬프게도 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도달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어.”
“알면 제발 싫어할 짓 좀 하지 마.”
“그럼, 나를 좋아해 줄 건가?”

가볍게 툭 던진 어조와 달리 가늘어진 눈에서는 짙은 은밀함이 묻어났다.


어쩐지 방안에 깔린 커피 냄새를 비집고 달달함이 다시 침범해오는 기분이
었다.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대화를 섞으면 섞을수록 그가 쳐놓은 올가미
에 걸려드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야했다. 루스는 대화를 끝낼 요량으로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따뜻하게 데워둔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반쯤 붙고
방금 내린 커피 원액을 붓자 커피가 완성되었다. 그것과 함께 접시를 들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루스는 최대한 그와 시선을 피하며 빵과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에 먼저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그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미안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이 마주쳤다. 루스는 굽혔던 허리를 도로 세우며 레


이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심에 미간이 좁혀
질 때쯤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지.”
“너 왜 그래? 커피에 독이라도 들었어?”
“아직 마셔보지 못해서 그건 모르겠군.”

아, 내가 내렸지.
아직 건네주지도 앉았다. 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머그잔을
의식하며 당황한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미안, 네가 순순히 말로 사과할 줄 몰랐어. 돈이나 다른 보상 이야기라도
꺼낼 줄 알았지.”
이번에는 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더 무례하군. 이래봬도 어머니한테 제대로 예의 교육받은 몸이라

고.”
“어머니?”
“그래.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한테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씀하셨거
든. 보상 계획안부터 내미는 순간 아버지처럼 된다고 말이야.”
레이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그건 정말 최악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루스는 내심 놀랐다. 베타였지만 지금껏 알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아왔기에 그들의 가족관계라던가 교육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꿰고 있었
다. 어머니라면 베타에서 발현됐다던 그 극우성 오메가 일 텐데…… 아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 녀석과는 이제 정말
끝난 인연이었다.
“어쨌든 사과는 받도록 하지. 그러니 이제 더는 여기 오지 마.”
“받을 것만 받고 차버리는 건가? 정말 나쁜 남자군.”

레이는 너무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의외로 표정 변화가 참 솔직한 녀


석이었다.
“네가 나한테 고백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섹스 드립이나 쳤었지. 빨리 이
거나 마셔.”
루스는 다시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였다. 레이는 눈앞에 가까워진 머그잔
을 가만히 응시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의 짙은 향이 뜨겁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머그잔이 테이블에 닿기 직전 레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나랑 섹스 할 생각 없어?”
미처 내려놓지 못한 머그잔이 다시 허공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
리 길지 않았다.
“안 해. 그 이유는 분명히 말했어.”
“아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
그럼 어쩔 수 없지.”

너무나도 쉽게 포기를 선언하는 모습은 지금껏 녀석이 보여줬던 태도보


다 더욱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알았으면 됐어. 빨리 이거나 마시고 나가.”

얼른 상황을 끝내려 루스는 이번엔 망설임 없이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


려놓았다. 잔이 바닥에 닿기 직전 갑작스레 다가온 손이 머그잔을 끌어당겼
다.
“이리 줘. 내가 받을게.”
“자, 잠깐 뜨거……!”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헐거워진 손의 악력이 반대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허무하게 풀려졌다. 루스는 결국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컵은 아직도
뜨거웠다. 온도를 이겨내지 못한 레이의 양손이 컵에서 떨어져 나갔다. 허공
에서 길을 잃은 커피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추락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레
이의 손목과 다리였다.
“……!”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지만 옷 위로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만으로


그의 고통은 충분히 전해졌다.

“ …….”

억눌린 신음소리에 루스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단숨에 그를 들어 안았다.


의외로 들리는 무게가 가벼워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자잘한 감상은 집어
치우고 욕실로 향했다. 문을 박차고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아예 샤
워기를 쥐고 레이의 허벅지와 손에 찬물을 집중적으로 쏟아 붓기 시작했다.
“제정신이야! 딱 보면 뜨거운 거 몰라? 빨리 옷 벗어!”
옷에 스며든 뜨거운 물이 찬물의 기능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몸을 떨어 댈 뿐 움직이지 못했다.
“아파…….”
“제길!”

루스는 샤워기를 레이 쪽으로 맞춰 걸어두고 직접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


했다. 재킷을 벗기자 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전부 벗기는 데는 시간이 걸렸
다. 루스는 대신 화상 입은 부위 쪽 소매를 잡고 힘껏 잡아 찢어 버렸다. 원래
는 하얬을 손등과 손목 부근이 붉게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흐 다리가…….”
“ ,
레이의 흐느낌에 루스의 심각해진 눈길이 그의 허벅지로 향했다. 값비싼
바지에 드리워진 커피 자국은 꽤 넓은 견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빨리 벗겨내
야 했다. 루스는 손을 뻗어 그의 벨트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찰나에 망설임
이 머리를 스쳤다. 피차 같은 남자끼리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오메가였다. 그것만으로도 망설임은 더해갔다. 그때 레이의 붉어진 손이 벨
트에 닿은 손위로 포개졌다.
뜨거워.”

달아오른 피부 온도만큼이나 화끈거리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미칠 것 같으니까 빨리 벗겨줘.”

***

고운 피부에 하얀 붕대가 촘촘히 감겨지고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광


경이 연출되고 있었지만 정작 루스를 제외한 세 남자의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로이와 그보다는 조금 더 늦게 도착한 레이
의 주치의 한스 박사 그리고 루스와 레이.
이렇게 네 남자의 침묵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이 님. 치료는 다 끝냈습니다.”

붕대를 전부 감은 한스 박사가 레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
다.
“ 병원은 안가 봐도 되는 겁니까?”
루스가 심드렁한 장본인과 그의 비서를 대신해 물었다. 그러나 박사는 고
개를 저으며 가볍게 답했다.
“ 아닙니다. 일반 베타에게는 심한 상처가 맞긴 하지만, 저분에게는 그
리…….”
“한스 박사. 난 무척 아팠는데. 지금도 그렇고.”

그렇지 않으냐는 레이의 시선에 한스 박사는 재빨리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무리 레이님께서 오메가라 하셔도 최대 하루… 아니, 이
트…… 아니, 일주일은 안정을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낸 한스 박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최대한 입술을 딱 붙여
끌어올린 어색한 미소에 루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 그렇다는데, 로이. 오늘 회의는 어떻게 하지?”
참 빨리도 묻는다.
회의가 시작되기 오 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물어오는 자신의 보스를
향해 로이는 숙련된 측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미 아론님께 보고를 드린 상태입니다. 그래도 오늘 워낙 중요한 회의
라 저라도 반드시 가서 나중에 보고를 드려야 하니, 레이님께서는 여기서 잠
시 쉬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이러면 됐냐는 로이의 시선에 레이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
이며 루스를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좀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루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와 마주친 시선을 돌려버렸다. 자신


을 노골적으로 피해버리는 주치의를 스치며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로이
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녀석 옷이라도 가져다주시죠. 명색이 에드윈 가문의 가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제 허름한 옷을 마냥 입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있는 레이의 모습은 확실히 어색했다. 상처를 치료
하느라 하체는 브리프 한 장 걸치고 있어 그의 매끈하고 건강한 다리를 고스
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왼쪽 허벅지 위로 감긴 붕대에 잠시 불편한 시선을
보내던 루스가 다시 로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속옷도 가져다주십시오. 아무래도 저건…….”
“패스. 지금 바빠서 들고 올 사람도 없어. 옷도 속옷도 조금 큰 것 빼면 새
것이니 불편할 거 전혀 없고. 아니면…….”
수줍음 따윈 모르는 미소가 레이의 입가에 걸쳐졌다.
“다시 손수 벗겨주고 입혀 줄 건가?”
“큿, 흠… 흐흠!”

루스가 반박하려는 동시에 터져버린 로이와 한스 박사의 헛기침이 방안


을 울렸다. 민망한 기운이 공간을 휩쓸었다. 솔직히 민망할 것도 묘해질 것
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욕실에 처박힌 채 반쯤 넝마가 된 레이의 고급 슈
트와 널브러진 속옷만 본다 치더라도 그 과정이 충분 상상이 되고 남을 터였
다. 하지만 루스에게 그건 단순한 응급처치 과정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묘하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저들의 어이
없는 행태에 억울함이 왈칵 치밀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어정쩡한 상황
에서 결국 선택지는 침묵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레이가 현장을 정리
하기 시작했다.
“한스 박사는 그만 가보고 로이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밀린 업무를 전부
천천히 보고 오도록 해.”
아량 넓은 상사처럼 굴어대는 그의 태도에 로이의 얼굴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이 스쳤다. 그러다 레이의 시선을 받고나서야 재빨리 표정을 지우며 말
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이는 한스 박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루스도 그들을 뒤따랐다. 박사가
먼저 나가고 로이가 현관 입구에 섰을 때 루스가 물었다.
“언제 데리러 오실 겁니까?”
다른 건 몰라도 꼭 시간에 대한 확답만큼은 받아놔야 했다. 그의 의지를
엿본 로이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늦어도 오늘 안에는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마도요. 그때까지는 무사
히…… 아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로이의 솔직한 마음은 무사히, 라는 말에 모두 들어있었다. 그는 루스와
레이의 어제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레이가 작심하고 유혹하면 루스
도 당연히 끔뻑 넘어갈 남자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운명적 만남이라…….
로이는 오늘 아침 홍보실에서 내보낸 기사 타이틀 문구를 떠올리며 루스
를 바라보았다. 운명적 만남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단단히 잘못 걸린
것만은 분명한 듯싶었다.
참 콘돔은 기본으로 갖고 있으시죠? 없으시면 사람을 통해 가장 질 좋은
“ ,
상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꼭 착용하세요. 안 그러면 인생 정말 끝장날 수
도 있으니까요.”
적어도 그가 오늘 안에 홀라당 잡아먹힐 거라는 굳은 믿음은 있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막 남자의 자존심? 그런 거 저 녀석
앞에서 괜히 내보인다고 객기 부리지 마시고요. 진짜 복상사 당할 수도 있습
니다. 아직은 그런 사람은 없지만 당신은 베타고 저 녀석은 극 우성 오메가
잖아요. 웬만한 우성 알파도 레이는 힘들어했으니까 조심하세요.”
“이보세요. 누가 뭘 한다고…….”
“아, 도착했네요. 그럼 저는 이만.”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로이는 한스 박사와 함께 힘내


라는 듯 응원의 시선을 보내곤 불안한 소리를 내는 고철 상자와 함께 사라졌
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기가 차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보내라던 옷은 바빠서 못 보내겠다
더니 엉뚱한 건 잘도 보내준다는 소리도 어이가 없어 죽겠는데 거기다 더 어
이가 없어지려니 한도 끝도 없었다. 루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쥐며 집
안으로 시선을 보냈다.
세상 마음 편안한 보금자리가 한순간 거북한 공간으로 바뀌어있었다. 짜
증이 확 치솟았다. 그렇다고 마냥 복도에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거실로 들어서자 활짝 열린 방문이 보였다. 그리 고운 시선이 보내
질 리 없었다.
그냥 혼자 둘까 하고 잠시 고민하던 루스는 짜증스레 제 머리를 헝클어트
렸다. 그래도 환자였다. 조금 전 자기네들끼리 오고 간 수작질이야 괘씸하지
만 분명 그의 화상은 진짜였고 거기에 자신의 책임도 절반은 있었다. 그놈의
사과 한 번에 어이없이 경계를 허물어트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니 환자라고만 생각하자. 루스는 마음을 다스리며 방문으로 들어섰다.
“일반인의 방은 무척 좁네. 침대도 한 명이 누우면 꽉 차겠어.”
제 침대인양 편히 앉아 있던 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또 마음에 약해진 루스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혼자서 자는 공간에 이 정도면 충분해.”
“확실히 밀폐된 공간에서의 섹스는 더 흥분되긴 하지. 어때? 같이 누울
래?”
“…….”

대답 대신 그가 또다시 경계의 빛을 띠자 레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고. 농담이니까.”
“농담도 농담같이 해. 네 녀석의 그런 말 때문에 자꾸 의심이 들잖아.”

상당히 날 선 그의 반응에 레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내가 일부러 이랬다고 생각하는 건가?”
“…….”

허를 찔린 표정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억울한데? 내가 그렇게 자학적인 인간은 아니거든. 나도 나름 곱
게 자라서 아픈 건 끔찍이 싫어. 물론 쾌락을 동반한 아픔은 환영하지만.”
“너, 또…….”

살짝 미안해졌던 마음이 도로 사라져버리자 전신에 힘이 쫙 빠졌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 모습에 레이가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띠었
다.
“알았어. 더는 안 할게.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경계하지 마. 자꾸 그런 반
응이면 더 하고 싶잖아.”
자신의 본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알파 같았다. 얼핏
하면 알파로 의심받는 자신도 그러했지만, 저 녀석도 만만치 않게 정체성이
의심되는 녀석이었다. 그것이 보기 좋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본
능이 자꾸 자신을 향한다는 거였다.
남성 성( 性 )과 짝을 이루는 오메가라 한들 녀석은 자신과 똑같은 남자였
다. 거기다 일곱 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었다. 베타 기준에서는 한참 어린놈
한테 수시로 유혹받는 상황이 루스에겐 불편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
렇게 됐는지…… 사과와 용서로 마무리될 인연은 아닌 듯싶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 원래 아플 땐 자는 거야.”

루스는 레이에게 손을 까딱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투정 부


리듯 중얼거렸다.
“잠은 안 와. 대신 배는 고픈데.”
“배는 무슨…….”

그러고 보니 그 난리를 치르는 통에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저 녀석은 분


명 아침도 거르고 찾아왔다 했다. 그건 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
하자 허기가 지는 듯했다.
“그럼. 얌전히 있어 준비해 줄 테니까.”
“커피도 새로 내려줘.”

레이의 요청에 그가 질렸다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이라면 커피 근처는 당


분간 가기도 싫을 건데 정작 호되게 당한 장본인은 너무나 태연했다. 뭐, 본
인이 괜찮다는데 상관은 없겠지. 괜한 참견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루스는 부
엌으로 몸을 틀며 방문을 닫으려 문고리를 끌어당겼다.
문은 닫지 마. 어두운데 혼자 있는 건 딱 질색이야.”

의외로 약한 소리에 루스는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정말 싫은 모양이었
다. 싱글거리던 얼굴에 잔뜩 심각함이 어려 있었다. 루스는 무심코 피식 웃
었다.
“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방금과 달리 다정한 음색을 내비친 그가 문을 활짝 열어두며 부엌으로 걸
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마지막으로 그의 미소를 봤던 때가 바로 이주 전이었다. 햇살이 눈부셔 그
마저도 희미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방금 기습적으로 보여준 미소에 심장이
또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버렸다. 레이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기
웃거렸다.
“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레이는 왼손 전체와 손목 그리고 왼쪽 허벅지에 감긴 붕대로 시선을 옮겼
다.
“ 아프긴 더럽게 아프네.”
오메가의 치유력은 뛰어났다. 특히 레이는 극우성이라서 그런지 웬만한
우성 알파만큼의 탁월한 치유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상처쯤은
내일이면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없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녀석의 침실에 들어왔다는 거였
다.
거기다 침대까지 허락받았고.
레이는 침대 위에 듬뿍 배인 그의 체취를 느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
다. 고작 상처 하나로 쉽게 허락된 문이었다. 철벽같던 그의 방어도 연약한
짐승 앞에서는 한 번에 무너졌다. 어려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쉬운 녀석이
었다. 한마디로 그는 착했다. 샤워실에서 오메가인 자신의 옷을 벗기는 동안
에도 그의 손길에선 성적인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상대를 향한
걱정이 듬뿍 배인 절박한 손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한결같았다.
약한 자에 대한 걱정.
다른 알파들이었다면 자신의 상태 따윈 상관없이 진작 일을 치렀을 게 분
명했다. 어차피 자신도 그럴 목적이 다분했으니, 만약 그가 그랬다 해도 괜
찮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은 별로 좋지
는 않았다. 비록 어색하긴 해도 티셔츠 하나 걸치고 좁은 방에서 이렇게 처
량히 앉아 있는 편이 더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내심 놀라웠지만
현재로선 그랬다.
큰일 났군.”

단지 섹스 한 번으로 끝내려 했던 상대가 자꾸만 마음에 들고 있었다.


레이는 고개를 들어 지겹게 훑었던 방안을 이곳저곳 다시 관찰하기 시작
했다. 작았지만 거실처럼 깔끔하고 단조로운 방이었다. 문득 침대 옆 작은
탁자로 시선이 멈췄다. 서랍은 새끼손톱만큼의 크기로 살짝 벌려져 있었다.
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열린 틈새로 무언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
을 확인한 레이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 직전 손은 누군가에 의
해 강제로 걷어졌다.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레이는 두 눈을 크
게 뜨며 잡힌 손목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루스?”

그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있었다. 레이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다시 서


랍 쪽 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바라봤다. 그걸 방해하듯이 머리 위로 굵직한
저음이 끼어들었다.
가자. 준비 다 해뒀어. 또 쏟을 수 있으니까 테이블에서 먹어.”

루스는 손목을 붙잡은 채로 거칠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른발까지는 괜


찮았지만 왼발을 내딛는 순간 레이는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 !”

잊고 있던 통증이 일었다. 레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루스도 놀라


며 그의 왼쪽 상처 부위를 바라봤다. 이미 늘어난 미간의 주름이 더욱 짙어
졌다.
좀 살살 다뤄줄 수 없어? 이래봬도 환자…!”

레이가 못마땅한 시선을 들었을 땐 이미 허공이었다. 루스는 품에 끌어당


긴 허리를 감싸 안고 나머지 한쪽 팔은 무릎 밑으로 집어넣어 그를 가뿐히
들어올렸다. 성인 남자의 훌륭한 표본이 되는 큰 키와 잘 빠진 몸매는 겉보
기에는 기본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실제로 들어본 녀석은 놀랄 만큼
가벼운 몸이었다. 여러 가지로 화를 낼 수 없는 조건만 갖춘 녀석이었다. 루
스는 오늘만 몇 번째 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걸어갔다.
부엌과 거실을 구분 짓는 길게 이어진 테이블 위로 따끈하게 데워진 빵과
샌드위치 그리고 커피가 놓여있었다. 언제 갖다 놓았는지 그 앞에 안락의자
가 놓여있었다. 루스는 그곳에다 조심히 레이를 내려놓았다. 잠깐이지만 전
신에 닿았던 따스한 체온이 사라져가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레이는 머그
잔을 쥐었다. 그러자 루스가 살짝 긴장하며 말했다.
덜 뜨겁게 했어. 그래도 마실 때 조심해.”

아무래도 그는 레이에게 조심성 없는 이미지를 하나 추가해 둔 것 같았다.


좀 데인 거 가지고도 이 정도인데 부러졌으면 아예 업고 다녔겠군.
레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문득 말해주고 어떻게 반응을 하나
보고 싶은 장난이 올라왔지만, 이런 평화로움을 깨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손
에 감싸 쥐니 미지근한 온기가 사람을 무척 기분을 좋게 했다. 레이는 천천
히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맛있어. 전혀 쓰지 않아.”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느끼며 레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스팅만 잘해두면 충분히 맛있어. 원래 좋은 커피는 쓰기만 한 게 아니
거든.”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 집 집사가 내려준 커피는 이 맛이 안 나거든.”
“내리는 기술도 중요하지.”

친절한 설명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레이는 재밌다는 듯 눈을 휘


며 물었다.
“가게를 차리려고 배운 건가?”
“아니, 어릴 때 배워서 계속하다 보니 잘하게 된 것뿐이야.”

어릴 적이란 주제가 떠오르자 레이의 눈에 호기심이 띠워졌다.


“어릴 때면 부모님?”
“아니.”
“그럼?”
“…….”

아무래도 그는 본인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닫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의 인간관계쯤이야 이미 아론의 손에 서류로
쥐어져 있을 거였다. 자고로 가능성 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오히려 그 시간에 맛있는 커피를 음미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
런데도…… 굳이 녀석의 입으로 듣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건 왜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만나고부터는 이성이 어딘가 고장 난 듯싶
었다.
아까 그 서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거지?”

결국 레이는 충동에 손을 들어줬다. 건너편에 서 있던 루스의 얼굴이 급격


히 어두워졌다.
“남의 서랍을 함부로 뒤지려던 것도 모자라서 뭘 그리 당당하게 물어봐?”
“억울하군. 그냥 열려있어서 닫아주려 한 것뿐이야.”
“내 눈에는 열어보려고 한 거였어.”

루스의 확신에 레이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설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 물건을 마구 뒤져볼 파렴치범으로 보이는 건

가?”
“파렴치 맞잖……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주춤한 목소리에 당황이 배였다. 레이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


다 혹시나 하고 중얼거렸다.
“어제 말한 그 좋아한다는 사람 거였어?”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제기랄! 이런 바보 천치!
그제야 본인의 착각을 깨달은 루스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머리까지 열
이 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이란 단어에 정신이 팔려 말한 주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도 설마 하고 던져본 말인데 얻어걸린 격이 되었다. 그런데 그
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 거란 말이지.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루스의 모습에 레이는 비릿하게 중얼
거렸다.
짝사랑인가 보군.”

“…….”

그는 역시나 묵비권을 행사했지만 이미 표정을 무너트린 얼굴엔 정답이


전부 쓰여 있다. 레이의 시야에 살짝 붉어진 귓불이 들어왔다.
짝사랑이 맞네.”

이건 정말 재미가 더럽게 없었다.


누구지? 베타 여잔가?”

“너한테 말해줄 의무는 없어. 이제 다 먹었으면 방에 가서 얌전히 잠이나
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방어가 철벽같았다. 속이 더욱 뒤틀리는 기분이
었다. 레이는 이 불쾌한 기분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었다.
얌전한 짓도 끝이군.
레이는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심상치 않은 그
의 분위기에 루스가 가늘게 눈을 접으며 입을 달싹였다.
너 지금 뭐 하는…….”
“ ,

쿵쿵 쿵!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쿵쿵 쿵!
거침없는 두드림에 진동이 부엌 테이블까지 도달했다.
이러다 문을 다 부숴놓겠군.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시 초인종을 달아야 할 듯싶었다. 루스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에게 석연찮은 눈길을 주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번
엔 또 어떤 미친놈이 난리치는가 싶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성난 목
소리가 덮쳐왔다.
“그 새끼… 아니, 레이 에드윈은 어딨지?”
아론 에드윈이었다. 무시무시한 그의 얼굴에선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다.
“안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
“비켜.”

아론은 그를 밀치며 순식간에 거실로 발을 들였다. 루스는 옷에 고스란히


찍힌 손자국에 당황한 시선을 주다 바로 뒤를 따랐다.
회의는 어쩌고 여기 온 거야?”

아론과 달리 레이는 그의 등장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회의 걱정인 녀석이 이따위로 땡땡이를 쳐?”

아론은 그의 앞에 준비해온 코트를 던지며 치솟는 화를 억누르듯 낮게 중


얼거렸다.
빨리 입어. 회의는 그렇다 치고 가봐야 할 데가 있으니까.”

발아래 팽개쳐진 코트를 보며 레이가 여상히 물었다.


옷은?”

“중간에 들르셔서 바로 갈아입으실 수 있도록 의상실에 지시해두었습니
다.”
어느새 뒤따라 달려온 앨런이 코트를 주우며 덧붙였다. 그리곤 그의 발아
래 간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내려놓았다. 레이는 신발과 코트 그리고
방해꾼들을 느긋하게 훑고는 마지막으로 루스를 바라봤다.
“괜찮겠나?”
곁에 다가온 루스의 얼굴엔 걱정이 담겨있었다. 과연 본인은 자신이 저렇
게 다정한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레이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나 없다고 설마, 카페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제야 본인의 처지를 상기했는지 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가 있든 없든 갈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정말 대단한 철벽이야.”

말 하나까지 잡아내 거부하고 밀어내는 그의 태도가 분명 불쾌해야 할 텐


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갈증이 더 심해져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레이는 루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일주일 정도는 그냥 집에서 쉰다고 생각해.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 금방 준비해 줄 테니까.”
애초에 필요도 없었지만 연락처도 주고받은 적이 없으면서 연락 운운하
는 그의 뻔뻔한 행동에 루스는 실소를 흘렸다.
“좋아. 필요하면 연락하지.”
연락처 따위 모른다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본인 번호가 저장된 새 핸드폰
을 쥐여 주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루스는 그냥 가볍게 대꾸하며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쁜 것 같으니 이만 가봐. 몸조리 잘……!”
뒤에서 잡아당긴 힘에 상체가 휘청거렸다. 뒷목이 감싸 끌어 당겨져 뺨에
부드러운 것이 쪽,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작별 인사야, 루스.”
레이는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일 또 올게.”
***
“그놈하고 한번 해보겠다고 일부러 그런 거야?”
아론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레이의 상처에 눈길을 보냈다.
“알아서 생각해. 시나리오 잘 쓰잖아?”
무성의한 대꾸에 아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늘 직설적이던 녀석이 회피하
고 있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지금 녀석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현실 인
식이었다.
자 네놈이 그토록 원하던 거다.”
“ ,

아론이 건넨 서류를 받아든 레이는 곧바로 앞장을 넘겼다. 맨 윗줄에 적혀


진 루스의 이름에 담담하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도 잠시, 서류를 훑어 내
린 눈동자가 살벌해졌다.
“이게 뭐지? 나한테 지금 시위라도 하겠다는 건가?”
딱 한 장으로 끝나는 루스의 정보는 지극히 단조롭다 못해 짧았다. 오히려
레이가 이틀 동안 알게 된 그의 정보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아론은 이미 돌
아올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야말로 나한테 시위할 거 아니면 제대로 머리 굴려. 저게 무슨 뜻인지
몰라?”
알고 있었다. 이건 ‘보여주기 용’ 이었다. 한눈에 봐도 꾸며진 정보를 상대
가 마음껏 공유할 수 있게 풀어놓은 일종의 ‘경고용’이었다.
지금 당장 이자에 대해 알아보기를 그만두라는 경고.
이건 흔히 힘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본인, 아
니면 그만큼 알파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뒷배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만
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뒷배는 알파 가문일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베타치곤 범상치 않았어. 돌이켜 생
각해보면 이주 전 너를 구한 타이밍도 기가 막혔지.”
이 모든 게 의도적인 계획이라면 자신들은 완벽히 놈의 손에 놀아난 꼴이
되는 거였다. 검은 눈동자에 잔인한 빛이 스쳤다. 아론은 레이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꽂혀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
는 표정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현실을 밀어 넣어줬음에도 여전히 태평한 반응에 아론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그냥 두고 보겠다는 건 아니겠지?”
“ ,
“맞아, 그냥 둘 거야. 그러니 너도 절대 건들지 마.”

일순 아론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레이, 가문과 연관된 녀석이라면 네가 위험할 수도 있어. 잊었어? 지금까
지 녀석들이 보낸 알파들 때문에 네놈이 죽을 뻔한 횟수라도 다시 불러줘?”
“그 녀석은 아니야. 그건 내가 잘 알아.”
“레이!”

일순 사나운 페로몬이 밀폐된 공간을 휩쓸었다. 알파의 위협에도 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입가에 조소를 담았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아까 그 난리를 피면서 쳐들어온 건가? 그 녀석이
날 어떻게 할까 봐서?”
“…….”

정곡을 찔린 아론의 표정에 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녀석이 들었다면 아주 억울해 죽는다 하겠군.”

어떻게 해보려는 건 레이 자신이었다. 거기다 완벽히 철벽을 쳐댄 건 바로


그 녀석이었고.
레이는 서류를 다시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나도 감이라는 게 있어. 그 녀석은 절대 아니야. 그건 너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 보는 눈도 떨어졌으면 그만 경영진에서 물러나.”
“제길! 누군 몰라서 그래? 하지만 레이, 우리는 신이 아니야. 모든 것이 전
부 우리 느낌대로 맞아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아론 또한 그 베타 녀석이 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 특이하
고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
거였다.
“넌 에드윈 가문의 가주고 내 가족이야. 난 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 단 0.001%의 위험한 상황도 배제해야겠어. 그러니 이제 그 녀석은
만나지 마.”
“아니, 만날 거야.”
“너, 진짜…….”

아론은 기어이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형제였


다. 그의 고집은 아버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 녀석은 한다면 하는 녀
석이었다. 아론은 입을 끔뻑이다 결국 시트에 몸을 기대며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넌 알파보다 더한 새끼야.”
“최고의 욕이군.”
레이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저 녀석은 왜 아버지를 닮고 지랄인 걸까? 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성격


을 가진 알파를 그대로 복사해놓은 오메가라니. 아론은 그들과 가족이 된 자
신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나 들어보자.”

아론이 레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녀석이 너한테 뭐기에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글쎄, 뭘까?”

레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각이 끼어들었다. 힐긋 창밖을 바라보니 루스


의 아파트는 점점 멀어져 이제 작은 점처럼 보였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
다.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그 녀석이 나에게 뭐가 될지 말이야.”

CHAPTER 3.

모니터 화면 세 대가 나란히 늘어졌다. 깨알 같은 글자들과 숫자들 이지러


진 수많은 점과 선들로 이루어진 화면을 검은 눈동자가 빠르게 훑어 내렸다.
이윽고 정신없이 세 대의 모니터를 배회하던 시선이 멈추었다.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듯 풀어졌을 때, 갑자기 피곤이 밀려들었다. 요즘 들어 계속 지치
는 기분이었다. 원인은 분명했다.
루스는 자신을 향해 싱글거리던 금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벌써 레이 에드
윈과 어이없이 얽혀버린 지도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그는 뻔
질나게 이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걸 또 거절 못 하고 매번 집으로 들이는
자신이 바보 같긴 했지만 하얀 손에 감긴 붕대를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절로 한숨이 차올랐다.
루스는 시선을 돌려 반대편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바라봤다. 작업실까지
들고 오긴 했지만 아직도 기사는 읽지 못했다. 시도는 해봤다. 그러나 기사
타이틀을 보는 순간 보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 에드윈 가의 여왕님. 드디어 운명적 첫사랑에 빠지다 >
사내자식한테 여왕이라니.
불편한 문구를 떠올리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오메가가 임신
하고 같은 성(性)과 섹스를 한다지만 성별은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었다. 레
이 에드윈 또한 대단한 미인이긴 해도 말하는 투, 움직이는 몸짓 전부 사내
의 것이었다. 아랫도리도 확실히 달린…….
멍하니 생각을 흘리던 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째서인지 샤
워실에서 그의 옷을 벗기던 장면이 고스란히 생각 나버렸다. 공간을 가득 채
웠던 달짝지근한 열기, 살갗을 스치던 부드러운 감촉, 차가운 물에 파리하게
질린 하얀 피부. 그리고…….
「미칠 것 같으니까 빨리 벗겨줘.」
하 진짜 미치겠군.”
“ ―

낮게 뇌까린 어조에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섞여들었다. 루스는 곧바로 생


각을 떨쳐버리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 피곤이 가득 차 있었는지 잡념은 아득
히 멀어져갔다. 그때 어디선가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감긴
눈꺼풀은 떠질 줄 몰랐다. 나른해진 몸이 빠르게 잠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
신이 아득해졌다.

[……]

또다시 꿈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울창한 숲의 서늘한 감각은 여


전히 선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저 하늘은 무언
가를 가두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창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만으
로도 속이 거북해졌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자꾸 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루스는 짜증스레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작게 몸을 돌돌 말은
물체가 눈앞에 들어왔다.
[…….]

저번 꿈에서 봤던 아이였다. 여전히 어릴 적 자신과 똑 닮은 소년은 오늘


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일순 짜증이 올라왔다.
[ 사내새끼가 왜 자꾸 울고 그래?]
머리 위로 뚝 떨어진 엄한 음성에 작은 어깨가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렸
다. 드디어 고개가 들려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루스는 크게 동요했다. 역
시나 얼굴은 닮아있었다. 하지만 눈은 아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맑은 파란
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왜 하필…….
루스는 자리에 털썩 쪼그려 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왜 하필이면 저 조합이란 말인가?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아니 이미 그 단
계를 넘은 지는 한참이었지만 정말 낯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꿈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면 싶었다.
[ 밖은 위험해.]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루스는 자책을 멈추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
다.
밖은 위험하니까 나랑 있어.]
[

소년이 젖은 눈을 맞추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디작은 손은 마음을 약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 손을 잡기는 왠지 망설여졌다. 루스는 그냥 소년
이 앉은 바위 옆을 비집고 앉으며 말했다.
왜 밖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잖아.]
[

그러자 소년이 빈손을 거두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알 수 있어. 밖의 인간들은 욕심이 가득해. 나가면 나를 전부
뜯어먹으려 들 거야. 그리고…… 밖은 나를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어.]
아, 빌어먹을.
녀석은 분명 루스 자신이었다.
몇 살이지?]
[

오로지 착취만 당하던 시절은 그들을 만나기 이전이었으니 아마 생각 보


다 훨씬 어린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몰라. 그냥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
[그것참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눈을 감으니 여기인 건가?
루스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러
나 소년은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마치 맞을 것처럼 진저리치며 몸을 피했
다. 심장이 덜컹했다. 잠시 머릿속에 스친 어린 시절을 회상한 그의 눈이 낮
게 가라앉았다.
안심해. 난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아]
[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년을 달랬다.


[……정말?]
[그래.]

진심이 전해졌는지, 아이가 슬그머니 움츠렸던 몸을 피며 동그란 눈을 깜


빡였다.
그럼 나랑 있어.]
[

아이의 천진한 요구에 루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힘들어, 나는 할 일이 있거든.]
[할 일? 무슨 할 일? 밖은 위험하다니까.]
막상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밖은 위험하지 않으니 같이
나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어렸고 자신은 이미 그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어른이었다. 이해를 할 수 있는 범위 자체가 달랐다. 루스는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 즉시 머릿속이 울리기 시작했다.

“…….”

멍하니 눈을 뜨자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


었다. 무심코 폰을 들어 화면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그의 얼
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흔들린 검은 눈동자가 끈질기게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통화버튼은 누르지는 않았다. 결국, 진동이 뚝 끊
겼을 때야 루스는 천천히 핸드폰을 탁자 위에 도로 올려두었다.
여행에서 벌써 돌아온 건가?
그늘진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도 잠시, 재차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흠칫 경직된 시선이 다시 화면을 향했다. 이번에 화면에 뜬 건 다른 이름
이었다. 루스는 자연스레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을 든 그의 손
이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귀에 가져가기도 전에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진짜 욕해도 됩니까?]

“ .”
[당신은 진짜 양심도 없는 새끼입니다.]

루스는 실소를 터트렸다.


며칠 동안 씨발, 씹, 좆 이런 말을 들어와서 그런지 저걸 욕이라고 허락까
지 받는 녀석이 참 싱겁게 느껴졌다. 가문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보다 길거리
태생인 녀석이 욕을 더 못한다는 게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개과천선인가?
녀석도, 자신도 말이다.
지금 웃었습니까? 사람을 가차 없이 버려놓고 잘도 웃음이 나온다 이거
[
네요?]
진짜 너무하다는 듯 울먹이는 녀석의 절절함에 루스는 여상히 대꾸했다.
“애초에 주운 적도 없어. 어느 똥강아지가 뒤를 졸졸 따라온 거지. 그래서
좋은 집에 데려다 놨는데 왜 이리 낑낑거려?”
[좋은 집은 얼어 죽을입니다. 전 예전 집이 좋습니다. 그러니 다시 데려가
세요. 안 그럼 과로사에 스트레스 받아서 죽을 지경이니까요.]
“알파가 과로사로 죽는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군.”
[알파도 급이 있는 겁니다. 전 열성이라고요! 열성! 무슨 알파는 전부 신인
줄 아십니까? 그건 우성 놈들이나 그런 거라고요.]
“그러게. 우성 놈들도 꼭 그런 건 아니더라고.”
루스는 카페에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으니 레몬 꽉꽉 채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달라던 레이의 비서를 떠올렸다.
[ 루스님? 이제 사람 무시하십니까?]
잠시 딴 생각에 빠져 녀석과의 통화를 잊고 있던 차였다. 루스는 혀를 차
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 좀 징징대.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 바냐,
네 도움이 좀 필요하거든.”
그 말에 죽을상이었던 목소리가 조금은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그럼 저 여기 그만둬도 되는 거죠?]
“아니, 그만두진 말고. 제발 좀 진정해.”

달래주려고 꺼낸 말에 저렇게 죽자고 달려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


다. 그러나 바냐는 이제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뭘 도와드려야 하는데요. 아니! 잠깐!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곧 갈 테니
까 그때 말해요.]
“뭐? 바냐 잠깐…… 바냐? 바…….”
루스는 이미 끊어진 핸드폰을 황당하게 바라보다 그만 픽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정신없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타이밍 좋게 전화를 걸어준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암담한 늪으로 빠질 뻔한 마음이 건져진 기분이었다. 그
때 또다시 진동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울리는 신호의 의미는 하나였다. 루스의 시선이 퍼뜩 현관으로 향했다. 누군
가 자신의 집으로 오고 있었다.
그의 생활공간은 누가 접근하든 상관이 없었지만 이쪽은 되도록 숨기고
싶었다. 건물 주인에게 낡은 엘리베이터를 수리해 준다며 몰래 설치한 센서
였다. 누군가 1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면 신호는 곧바로 이 방으로 오게
되어있었다.
설마 바냐가?
루스는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곧 오겠다며 끊어진 전화였다. 정황상
충분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루스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오든 여기는 더는 있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복도 너머 맞은편에 익숙한 철문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층수 화면을 보니 벌
써 10층이었다. 루스는 재빨리 건너편으로 넘어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저 너
머 익숙한 거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미 문
너머 대상의 정체에 확신을 내린 상태였기에 의심은 싹 사라진 후였다. 루스
는 단단히 한소리 해줘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방비하게 문을 벌컥 열어젖혔
다.
안녕?”

“…….”
레이는 돌아오는 인사가 없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그러지? 내가 온 게 엄청 의외라는 표정이군. 다른 누가 오기로 했
나?”
“아니.”

이번엔 바로 대답이 돌아왔지만 어째 변명처럼 느껴지는 말투였다. 금빛


눈동자가 일순 서늘해졌다.
“혹시 짝사랑?”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녀석의 헛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정신이 차려지는 기분이었다. 루스는 요


며칠째 한없이 무방비한 자신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
루스는 열린 현관문을 그대로 둔 채 집안으로 몸을 돌렸다. 레이의 얼굴에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다. 벌써 이 집에 들락날락한 지도 일주일이 다 되어가
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매일같이 들렸지만 그는 한결같이 레이를 집에
들이기 꺼려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선뜻 들어오라고 현관문까지 활짝 열어
두고 있었다.
“열심히 얼굴 보인 보람이 있었나 보군. 오늘은 잘하면 키스도 성공하겠
어.”
짓궂은 중얼거림에 반쯤 돌려졌던 루스의 몸이 다시 그를 향했다.
“안 들어 올 거면 빨리 가. 괜한 시비 걸지 말고.”
귀찮다는 듯 잔뜩 찌푸려진 미간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살짝
당황한 빛이 섞여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걸 깨달
은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참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데려가는 것
도 쉬울 것 같았다.
“오늘은 날씨가 꽤 좋아.”
레이가 곁눈질한 쪽으로 루스의 시선이 무심코 따라갔다. 복도 계단 쪽 작
은 창문으로 새어든 햇살이 무척 따사로웠다. 봄이었다. 이런 날은 역시 밖
으로 나가 햇볕을 쬐는 게 최고였다. 루스는 그런 일상을 무척 좋아했다. 하
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로 자유를 누리기엔 무리였다. 그것이 누구 오메가씨
때문이란 걸 상기하자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햇빛의 온도
와 비슷한 체온이 그의 손목을 감싸왔다. 천천히 내려간 루스의 시선이 깨끗
하고 하얀 손으로 향했다.
너 그 손…….”
“ ,
“다 나았어. 완벽하지?”
애처로울 정도로 붉은빛을 띠던 손등과 손목은 티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
히 나아있었다. 곱고 부드러운 손이 루스의 손을 감싸 쥐었다. 움찔하면서도
냉정하게 밀어내지 못하는 그를 향해 레이는 햇살보다 화사한 미소를 보냈
다.
오늘은 나가자.”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좋은 곳에 데려가 줄 게.”

***

아무래도 레이 에드윈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언론의 말을 의심할 때


가 온 것 같았다. 루스는 삐딱한 시선을 들어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일 안 나가나?”
“오전 스케줄은 전부 취소했어. 저녁에 몰아서 힘쓸 일이 생겼거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스의 양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 반사


작용이었다. 상대도 그걸 느꼈는지 야릇한 시선을 띠며 말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걸까?”

“…… 무슨 생각이라니?”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히 던진 말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레
이는 입꼬리를 말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착각인가? 내가 힘쓸 일이 생겼다니까 네 눈빛이 꽤 야해진 것 같아서 말
이야.”
“오해한 건 맞지만 내 눈빛은 멀쩡해. 네가 지금껏 했던 짓을 생각해봐. 괜
한 말 한마디에도 예민해진다고.”
정색을 하면서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생긴 거와 달리 솔직한 반응에 레이
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뭐 좋아. 어쨌든 네 머리에 나는 섹스 할 수 있는 상대로 박힌 것 같으니
“ ,
그 정도로 만족하지.”
“누가…….”
“그래서 말인데, 힘은 좀 쓰는 편이야? 나랑 하려면 하루 이상은 버텨야
할 텐데.”
“…….”
“뭐야? 하루도 못 버텨? 덩치만 보면 며칠은 거뜬할 것 같더니.”
시선을 내린 레이가 그의 어딘가를 쳐다보며 쯧, 혀를 찼다.
“일 치르기 전에 체력부터 키워놔야겠군. 하다가 중단되면 정말 좆같은
기분이니까.”
좆같다니. 참 어울리지 않는 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 사람
은 루스였다. 그러나 그는 그럴 마음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녀
석의 질문에 얼떨결에 고민해 버린 스스로가 어이없을 뿐이었다.
루스는 자신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않는 레이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햇살 아래 놓인 금발은 빛과 어우러져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그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루스 또
한, 다른 이에게 온전히 마음을 내어준 상태가 아니었다면 혹했을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물론 저 외모에서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오만함과 무례한 말들, 거기다 자
연스레 섞여지는 욕은 정말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게끔 했지만 그것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아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마 녀석이 더한 말로 속을 뒤집
어 놓는다 해도, 자신은 그를 절대 미워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루스는 잘 알고
있었다.
“음담패설 좀 그만 날려. 이런 곳에서까지 그러고 싶어?”
루스는 벌써부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곳이 어때서?”
“주위 좀 둘러보지 그래? 순수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저절로 죄책감이 느
껴질 테니까 말이야.”
그들이 있는 곳은 사방이 나무와 꽃들로 둘러싸인 정원이었다. 뒤쪽으로
끝도 없이 늘어진 높고 큰 나무들이 담을 쌓듯 둘러쳐 외부와 완벽한 차단을
이루고 있었다. 앞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꽃나무들이 색색깔로 어우러져 있
어 봄날의 햇살과 완벽한 조화를 자아냈다. 실제 숲속을 축소해 놓은 듯한,
그러면서도 무척 잘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이 공
간은 정말 가만있어도 치유가 될 것 같은 기분을 갖게 했다.
그런 이곳이 루스는 내심 마음에 들었다. 요 며칠 답답하게 집에만 있었던
탓인지 녀석의 묘한 행동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외출이었다. 그러나 레이
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원래 본능은 자연 그 자체야. 오히려 역사는 이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
이지.”
이곳은 에드윈 가문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마련한 테라 근교의 별
장이었다. 차를 타고 온 두 사람은 입구부터 말을 타고 들어와야 했다. 그러
고도 이십 여분을 들어와야 마주할 수 있는 이곳은 유명세를 타는 그들만의
은밀한 휴식처였다. 한마디로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들 마음이라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말이다.
레이는 울창하게 숲을 이룬 어둑한 공간에 잠시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날 것이 그대로 공존하는 이곳이야말로 하나 되기 최적의 장소이지. 그
런 곳에서 순수하게 뛰어놀기엔 우리가 너무 커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지 않냐는 시선에서 은근한 열기가 묻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루스는
경계를 보냈다.
“…… 너 설마, 그러려고 날 여기 데려온 거야?”
“설마, 오해는 금물이야.”

레이는 긴장 풀라는 듯 싱글거렸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끝맺음이 영 수상쩍었지만, 붉은 입술에 걸린 매혹적인 웃음 덕에 계략은
충분히 가려졌다. 물론 상대에게 전해질 위화감까지는 막지 못한 것 같지만
곧 착각으로 치부해 버릴 터였다.
옷이 잘 어울리네.”

가늘어진 금빛 눈동자가 부지런히 루스의 전신을 훑었다. 봄날의 햇볕 아


래 몸 라인을 섬세하게 드러낸 캐주얼 셔츠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몸매는 만날 때부터 의도하지 않게 시선
을 머물게 만들었다.
“다음에 슈트를 맞추러 가지. 이탈리안 스타일이 어울리겠어, 몸이 좋아
서 부드럽게 선을 드러내는 쪽이 훨씬 섹시할 것 같거든. 선물하지.”
웬 뜬금없이 옷이야?”

루스는 정말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레이가 비즈니스 자리에서 오가는


인사치레 이외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줬다면, 그건 자신의 어머니 이든과 막
내 동생 레이든 뿐이었다. 거기에 저 베타 남자가 추가되는 거였다. 그런 그
가 선물을 주겠다는데 기뻐하기는커녕 큰 재앙이라도 닥친 얼굴이라니. 절
로 혀가 차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자꾸 저러면 상대는 더 얄궂어진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당연히 이유야 뻔한 거 아니겠어? 선물한 옷을 너에게 입힌 다음 네가 내
앞에서 벗는 모습을 보면 무척 섹시할 것 같거든.”
반쯤은 놀려볼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기분은 고
양되고 있었다. 레이는 흥분될수록 짓는 특유의 미소를 흘리며 그를 바라봤
다.
“안타깝겠지만 네 앞에서 옷 벗을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까 제발 그 시선
좀 치워.”
바싹 경계하는 그 모습마저도 섹시했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베타 남자에게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정말 의문이었다. 마치 히트사이
클을 내내 맞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오메가는 이성을 내려놓은 채 철저히 본능대로 행동
한다. 거기에는 계획이 낄 수가 없었다. 오메가에게 있어 본능이란 선택사항
이 아니었다. 레이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긴다는 주의로 생활하고 있지만 발정
기 이외의 모든 것에는 철저히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섹스 또한 마찬가지였
다. 그러니 이건 그의 기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충동과도 닮은
자신의 모든 행동과 감정들은 도저히 이성적이지 않았다. 운명이란 단어가
어느 정도 이해를 돕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느
낌이었다.
“전 세계 최고라 손꼽히는 비스포크 장인 에이드 카라에게 부탁하지. 돈
이 아무리 많아도 그자가 만든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거든. 어때,
이제 선물 받고 싶지 않아?”
“사양하지. 나도 옷 많아. 원하는 만큼 살 정도의 돈도 충분하니 너에게 받
을 일 따윈 없어.”
레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꼬드기려 내민 사탕에 달콤한 꿀을 더 뿌려대
도 빨지 않는다니.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녀석의 태도에 불쑥 의문이 뒤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철벽같은 녀석을 가문에서 보낸 게 과연 맞을까?
정황상으로는 확실히 가문 급의 알파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레이로서는 도무지 계획적인 접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을 어떻게 해보려고 자신이 계략을 부리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돈이 많으면 내 옷도 선물해주던지. 나도 능력 있는 인간이 좋거든.”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맞은편으로 다가갔다. 점점 다가오는 자
신을 보며 루스는 일어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러
나 레이는 그럴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의자 팔걸이에 두 손을 짚어 덩
치를 가둔 채 상체를 숙여왔다.
“꼭 보답하고 싶으면 섹스도 좋아. 여기서 할래? 어차피 한번은 할 거 아
닌가?”
어차피 가주의 사주를 받았더라도 암살은 아니었다. 지금껏 알파들이 보
낸 이들은 전부 레이를 죽일 목적이 아닌 오메가로서 수치를 줄 목적으로 보
내진 인물이었다. 알파들에게 최고의 도구인 극우성 오메가를 죽이는 짓은
아까워서라도 못할 녀석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메가인 제 주제를 깨닫
고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것. 어쨌든 루스가 가문에서 보낸 거라면 결국
후자일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수치가 아니라 내게 준 선물 같지만.
레이의 시선이 다시 그의 몸에 머물렀다. 어찌 보면 자신을 어찌하기에는
가장 최적의 인물일지도 몰랐다. 녀석만 보면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건 정작
자신이었으니까.
애가 타는 것도, 녀석을 갈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자신.
도대체 너의 정체는 뭘까?
나에게 너는 무엇이 되어있는 거지?
루스.
레이는 이제는 뇌리에 아로새겨진 그의 이름을 혀끝에 굴리곤 슬쩍 페로
몬을 흘렸다. 역시나 달큼한 기척을 느낀 건지 루스가 흠칫하며 얼굴을 굳혔
다. 베타는 페로몬을 맡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확신할 수 없는 기척에 대한 어설픈 감지는 인간을 더욱
흥분케 하는 요소였다. 한 주 내내 그를 만날 때마다 페로몬을 뿌렸다. 그러
나 정신력이 강한 것인지 그는 매번 이성적이길 선택했다. 그럼에도 분명 반
응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레이는 이번에도 정색하는, 그럼에도 밀어내지 못하는 루스의 태도에 묘
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어때? 지금 할…….”
“너, 얼굴이 왜 그래?”
“…….”
무슨 일 이라도 있었던 건가?”

불쾌해하며 화라도 버럭 낼 것 같던 그의 얼굴엔 의외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이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레이는 당황하며 무심코 되물었다.
내 얼굴이 어떻다고…….”

그가 정말 모르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좀 아파 보여.”
“……뭐?”
“아직 다리 쪽은 상처가 덜 아문 건가?”
루스는 아픈 쪽으로 거의 확정 짓는 듯했다. 레이는 일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극우성 오메가의 유혹을 병적으
로 취급해버리는 인간이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열이 머리끝
까지 오른 기분이었다. 레이는 그만 뇌를 거르지 않은 채 속에 담긴 말을 지
껄이고 말았다.
“너 말이야. 어디 가문에서…….”
“레이 그러면 안 돼.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섹스를 들이미는 건 예의가
아니지.”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훅 끼쳐온 나긋한 목소리가 레이의 말을 차단해 버
렸다. 소리는 그들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루스였다. 그
의 시야에 레이의 만큼이나 화사한 금발이 들어왔다.
“누구…….”
루스가 무심코 던진 물음에 그녀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렉스에요. 레이의 단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죠.”
“렉스 에드윈?”

루스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의 풀 네임을 뱉어냈다.


“어머. 저를 아시나 봐요?”

“ …… 일단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렉스 에드윈은 레이만큼이나 유명 인사였다. 그녀는 극우성 만큼 귀하다
는 여성 알파로 태어났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미모를 물려받아 아
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녀는 타고난 유전자 덕분인지 이미 20살 때 에드
윈 가문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설립. 불과 오 년만의
알파 가문에서 이끄는 거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을 제치고 당당히 매출 상
위권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꽤 유능한 경영자였다.
영광이네요. 저야말로 만나게 돼서 무척 기쁘답니다.”

그녀는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물로 보니 훨씬 더 미남이시네.”

루스에게 향한 그녀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노골적인 호기심은 불편


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뒤에서 날아든 레이의 서늘한 목소리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에 관심 꺼. 여긴 어쩐 일이지?”

물론 그의 단어 선택만큼은 달가울 수가 없지만 말이다. 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을 바라봤다. 레이의 눈빛에선 우연히 만난 형제끼리의 반가움
보단 불쾌함이 더 큰 느낌이었다. 상대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일부러 레이 보러 온 건 아니니까 너무 눈에 힘주지 마. 그 예쁜 눈에 핏
줄 생기는 건 별로잖아?”
그녀의 능청스런 모습은 과연 레이와 형제라는 걸 새삼 실감케 했다.
“오늘 자회사 매거진 화보 촬영이 여기로 잡혀있었어. 봄에는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으니 내가 특별히 허락해 줬거든.”
누구라도 방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미소와 목소리였다. 하지만 상대
는 레이였다.
“눈 코틀 새 없이 바쁜 기업 대표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을 텐
데? 누구의 부탁이 아니면 말이야.”
여전히 싸늘한 경계에 렉스는 곤란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감 하
나는 귀신같이 좋았다. 레이가 저 수상한 베타와 외진 별장에 간다는 소식에
아론이 감시를 부탁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십 오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레이의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거기
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원래라면 저 베타 남자
에 대해 당장이라도 파고들었겠지만 일절 관심을 끄라는 레이의 살벌한 경
고 때문에 지금껏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이 그런 경고를 내렸다
면 코웃음 치며 감히, 라는 말을 내뱉었겠지만 상대는 레이였다. 그가 한번
화를 내면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기에 형제들도 웬만하면 그와 부딪치는
것을 피해왔다.
그래도 그 스캔들이 아름답게 끝을 맺도록 잡지회사까지 동원해 줬고 방
금 저 베타에게 말실수할 뻔한 것도 막아줬으니 크게 지랄은 안 하겠지 했는
데 역시 레이였다. 그렇다고 쉽게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고로 뭐든지 우
기면 끝나는 법이었다.
“진짜 아니니까 의심하지 말아 줄래? 오늘 화보 촬영하는 모델이 떠오르
는 신인 열성 알파인데 드물게 몸매가 끝내준단 말이야. 그러니 당연히 참관
할 수밖에.”
솔직히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역대 최초 오메가 가주를 형제로 두고 있는 그녀는 알파, 베타, 오메가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 취향 또한 편견 없이 작
용하고 있어서 때때로 알파들 사이에서는 레이보다 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전에 만났던 오메가는 어쩌고?”

경계가 약간 허물어진 그의 반응에 렉스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


를 내저었다.
“헤어졌어. 자꾸 각인해달라고 질척대잖아. 요즘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알파들도 강제 각인에 대해 조심하는 판인데 그런 말이나 해대니 정이 확 떨
어지더라고. 그리고…….”
그녀는 루스를 바라봤다.
“요즘은 여리한 남자보다 근육 잡힌 남자들이 좋더라. 그렇다고 울룩불룩
한 거 말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몸을 훑어 내리는 시선에 루스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똑같았다.
얼굴도 그렇고 몸매도 완벽하고, 당신 정말 베타 맞아요?”

이제 아예 그에게로 몸을 가까이 숙인 렉스가 노골적으로 품평을 시작했


다. 레이 때와 다른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요염하게 휘어진 갈색 눈이 어째
색을 달리한 기분이 들자 루스는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렉스. 떨어져.”

루스에게로 기울었던 몸이 레이의 방해로 인해 다시 세워졌다. 팔을 끌어


멀찍이 물러나도록 종용하는 그의 행동에 한참 본능에 젖어있던 렉스의 시
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도 잠시, 섬뜩할 정도로 아버지를 닮은 황금빛 눈동자
와 마주한 순간 그녀는 흠칫하며 표정을 지웠다. 밀려드는 위압감에 몸이 한
차례 떨렸다. 역시 레이가 오메가로 태어난 건 분명 신의 착오임이 분명했
다.
아아, 너무 좋아!
그녀는 그런 레이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렉스의 나직한 탄성과 함
께 흥분이 찾아들었다. 갈색 눈동자가 입술에 발린 립스틱만큼이나 새빨간
빛을 띄웠다. 한순간 압도적인 알파의 페로몬이 공기를 장악하자 고요했던
숲이 술렁거렸다. 보다 못한 루스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레이 그만해. 당신도 진정하시고요.”

저렇게 보여도 렉스는 알파, 레이는 오메가였다. 저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루스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알파의 페로몬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오메가에게 좋지 않았다.
레이.”

루스는 여전히 렉스의 팔을 움켜쥔 레이를 쳐다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가 이번에는 순순히 그녀의 팔을 내려놓았다. 일순, 흥분을 가라앉힌 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이 녀석 상태가 별로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 몸매 좋다던 모델한
테나 가보시죠.”
루스는 레이를 자신의 뒤 쪽으로 살짝 밀어내며 렉스를 향해 정중하게 말
했다. 렉스의 갈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끈질기
게 루스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두 뺨에 발그레 홍조가 일었다.
“너무 멋지잖아!”
그녀가 들뜬 탄성을 내질렀다.
“레이 너 끝내주게 잘 골랐다. 역시. 그 눈은 일할 때만 발휘되는 게 아니
었구나.”
인재를 보는 안목은 탁월했지만 섹스 파트너는 늘 뽑기 하듯 막 골라 대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이만저만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던 것 같
았다. 알파인 자신에게서 레이를 지키려던 루스의 행동을 되새긴 렉스는 흥
분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멋진 남자한테 사랑에 빠지다니, 우리 레이에게도 드디어 봄이 왔
구나.”
“사랑?”

레이는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히려 렉스의 말에 반응


한 건 루스의 심장이었다. 마치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철렁거린 심장이 쿵
쿵거리기 시작했다. 렉스는 흥분하며 제 말을 늘어놓았다.
“레이, 잘 들어. 섹스 파트너하고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엄연히 다르게 대
해야 하는 거야. 아까처럼 섹스 드립치고 그러면 조만간 차여.”
“차여? 내가?”
멀리서 보니까 조만간 차일 것 같아서 말이야.”

레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정작 기가 막혀야 할 건


루스였다.
이미 차인 거 아닌가?
분명 지난 일주일 내내 확실히 의사 표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는 그
의 말을 죄다 씹어 먹은 듯 보였다.
“아까부터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군. 사랑? 차여? 너 설마 기사 이야기
를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거야? 난 단지 저 남자하고 섹스하고 싶은 것뿐이
라고.”
루스는 처음으로 레이에게 응원을 던졌다. 물론 서로의 인간관계가 그의
말처럼 섹스 욕구뿐이라면 절대 사양하고 싶지만 레이와 자신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사랑까지 끼어드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될 말이었다. 일
단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루스는 그들 사이에서 비켜나 멀찌감치 빈 의
자에 앉았다. 느긋이 앞에 준비된 디저트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을 그때였
다.
“레이 잘 생각해봐. 지금껏 만난 알파들한테서 먼저 섹스하고 싶다는 느
낌 받은 적 있어?”
렉스가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짓 잘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 있지.”

레이가 무심히 대꾸했다.


그럼 여긴?”

렉스가 가리킨 건 루스였다. 이번에는 레이가 잠시 머뭇거렸다.


“…… 솔직히 베타한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지 않나?”
마뜩잖은 눈길이 그에게 꽂히자 입으로 향하던 쿠키가 손에서 바스락 부
서졌다. 루스는 일순 항의할 뻔한 자신을 어떻게든 다독이며 달래보았지만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저 몇
번째일지도 모르는 무심한 행태는 섹스하자고 들이대는 것보다 몇 배로 불
쾌했다.
“그렇지! 우리보다 몇 배로 정력이 달리는 베타에게 그런 생각은 안하지.
근데, 그럼에도 넌 섹스하고 싶잖아.”
저쪽도 무례하긴 마찬가지군.
루스는 방금까지 둘이 싸움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자신의 오지랖에 욕
을 퍼부었다.
그녀의 열변이 통했는지 레이의 얼굴에 변화가 일었다.
어째 좀 쌔 한데?
자존심에 선이 그어진 건 둘째 치고 루스는 그제야 이 대화의 본질이 무엇
이었는지를 다급히 떠올렸다. 그러나 때는 늦어버리고 말았다. 렉스는 이미
레이에게 결론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것도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레이 생각해봐. 너의 그 치솟는 정력을 희생하면서까지 저 남자하고 섹
스하고 싶다는 그 마음. 그게 사랑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루스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절절한 마


음을 경험했던 그로서는 저런 숭고하지 못한 사랑의 정의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급한 문제는 이게 아니라는 생각에 퍼뜩 고개가 돌아갔
다. 레이의 얼굴은 이미 혼돈 그 자체였다. 저기서 더 이상 생각을 정리해 나
가는 건 위험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대화 자체를 끝내야 했다.
“둘 다 그만 끝내…….”
“레이 잘 들어. 너 저 남자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
다며. 떠오를 때면 심장이 막 반응하고. 다시 만나자마자 키스까지 했잖아.”
“혀도 안 집어넣었는데 무슨 키스…… 어쨌든 입은 맞췄지.”

문득 레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헨리는 그걸 운명이라고 하던데…….”
“그게 그거지.”
우리 레이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 렉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
다. 어떻게든 기필코 그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의욕적인 얼굴에 루스
또한 다급해졌다.
“렉스 씨, 이제 그만…….”
“당신은 좀 가만있어. 지금 중요한 대화중이잖아.”

앙칼진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역시 우성 알파다운 기세였다. 루스는 결


국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레이의 무심함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아침도 거르고 저 베타 집에 찾아갔다며. 너 지금껏 다른 알
파한테 그런 적 있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이의 정색에 렉스는 만족스러운 듯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 남자 앞에서 성질낸 적은?”
“만나면 좋은데 성질은 왜 내?”
“그래 그거야. 자꾸 보고 싶고 만나면 좋고 뭔가 해주고 싶은 그런 거. 그
게 바로 사랑에 빠진 증거라고.”
“사랑의… 증거?”

레이의 혼란스러운 되물음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루스는 다시 용기 내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제발, 이제 그만 끝내…….”
“그래. 이 바보 오메가야. 그게 바로 사랑이란 감정이라고. 그것도 넌 처음
이니까 첫사랑이겠네.”
미치겠군.
루스는 망했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첫사랑…….”
금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냉철한 가주도 능
력 있는 경영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가십지에 실린 기사에서나 그려질 법한
순정 오메가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빤히 바라보던 금안에 반짝 이채가 어렸다.
이젠 확실히 알겠다는 듯 레이가 흠, 하고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악해 보였다.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야.”
루스는 불안한 눈빛을 그에게 고정하며 천천히 고개 가로저었다. 그러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레이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
정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사랑이었어?”
***

[ 하하하. 그 레이란 사람 진짜 웃긴다.]


소년은 루스의 한풀이에 가까운 얘기를 듣더니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
트렸다. 그 모습에 루스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왜 자신은 또 이곳에서 저
녀석과 마주하고 있으며 왜 쓸데없이 이 녀석에게 조금 전 일을 주절거리고
있었는지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레이와 그의 형제를 만나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던 루스는 지금
무척 지쳐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잠깐 눈을 감았는데 또 이 녀
석이 눈앞에 있었다. 그 뒤로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리 한풀이를 한 것 같았
다. 문득, 꿈에서 대화 상대를 찾을 만큼 자신은 참 외로운 녀석이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 그럼 사귀는 거야?]
한참을 웃던 소년이 그에게 불쑥 물어왔다.
[ 내가 왜?]
루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정색하자 소년이 움찔하며 눈을 피해 중얼거렸
다.
그치만 난 레이가 마음에 드는걸.]
[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직접 보지도 못한 주제에 뭐가 마음에 들고 말고야?]
[

루스의 타박에 소년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레이한테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단 말이야.]
[

이건 또 무슨 변태 같은 소린가 싶어 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무척 달콤했는데.]
[

내가 어릴 때 달달한 걸 좋아했었나? 확실히 녀석에게서는 무언가 달큼한


냄새가 났다. 한입 베어 물면 무척 맛있을 것 같은…… 아니, 내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 거야?
루스는 아득해 지는 의식을 잡아 퍼뜩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어쨌든 그 사람하고는 사귈 수 없어.]
[왜?]

이 자식은 왜 남의, 아니 미래의 자기 연애에 이렇게 참견이 많은 건지 몰


랐다.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

어쨌든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자 파란 눈이 한차례 일렁이더니 곧 시무룩


해졌다.
난 레이가 좋아.]
[

고집스레 중얼대는 소년의 모습에 루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말이야. 밖이 무섭다고 여기서 찔찔대고 있는 주제에 누굴 좋아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안 돼. 누굴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도 동반되는
거라고.]
[그럼 너는 그런 사람 있어?]
[말했잖아, 좋아하는…….]

루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를 박박


긁어댔다.
아 진짜 모르겠다. 내가 왜 너하고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 ,
정말 우울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루스는 흘깃 소년을 바라보았다.
파랗고 커다란 눈망울이 그를 곧게 향하고 있었다. 소년이 말했다.
지키고 싶어지면 좋을 텐데.]
[
[……?]
네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어진다면…… 그러면 나도 ―할 텐데.]
[

***

“아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진짜 조그마하네요. 루스님 전에 살던 욕실만


한데요?”
방에 들여놓는 놈들 족족 예의가 없는 인간들뿐이었다. 루스는 화분 옆에
열쇠꾸러미를 올려놓으며 바냐를 바라봤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타
이밍이 조금 어긋났을 뿐이었다.
바냐는 그가 레이와 나간 뒤 십 분 후에 이곳에 도착해 아예 문까지 따고
당당히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떻게 들어 왔는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
다. 열쇠 하나면 끝나는 허술한 보안 따위 녀석에겐 눈 깜빡하는 것보다 깨
기 쉬운 일일 터였다. 그나마 다행은 일단 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완
전히 끝내고 온 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루스의 안도는 곧 바냐의 태연한 중
얼거림으로 끝이 났다.
“짐은 호텔 방에 갖다 놨어요. 제가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못 자는 거 아시
잖아요.”
결국 이렇게 되는군.
순간 쌓였던 짜증이 확 치솟았다.
“올챙이 시절은 그새 다 까먹었나 보지?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도 감사할
판 아닌가?”
루스의 날 선 반응에도 바냐는 꿋꿋이 받아쳤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열심히 번 제 돈으로 제가 큰집에서
자겠다는데 웬 시비입니까?”
“그럼,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돈 잘 주는 직장 때려치우고 온 녀석한
테 말이 곱게 나가겠어?”
“그건 루스님도 마찬가지 십니다.”

바냐는 루스의 작은 살림 공간을 둘러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베타가 살기에 훨씬 넓고 좋은 곳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도 좋은 곳이야. 햇살도 잘 들어오고 너 같은 놈들만 안 나타나면 조
용하고 안락한 곳이지.”
남의 심정도 모른 채 무심한 소리를 해대는 그를 보며 바냐가 입술을 비죽
거렸다.
“말처럼 그리 조용하게 살고 계시진 못하잖아요. 가출한 지 이주 만에 전
세계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 되셨으니까.”
“……기사를 본 거야?”

루스가 주춤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에 바냐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삼십 년간 루스님을 모셔왔습니다. 옆모습이긴 해도 그 얼빠
진 표정을 제가 모를 리 없죠. 제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세요? 뻔히 루스님
얼굴 떴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비참한 기분을요. 비서실
사람들도 이사님 아니냐고 어찌나 술렁이던지.”
얼빠진……, 루스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바보 같았나 하고 떠올려보다
바로 포기했다. 쓸데없이 떠오른 건 그 녀석의 입술 감촉이나 얼굴 따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기 얼굴을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됐어. 에드윈 가문에서 수습 잘하는데 너까지 왜 손을 보태?”

그러자 바냐가 발끈했다.


제 상사는 제가 책임지는 게 맞죠.”

이놈이고 저놈이고 주변에 고집 센 인간들 천지였다.


“그건 그렇고 저 배고파요. 오랜만에 루스님께서 만들어주신 음식 먹고
싶습니다.”
거기다 뻔뻔하기까지 한 인간들로 말이다.
“여기가 무슨 식당이냐? 죄다 밥 타령이야?”
“저 말고 누구 밥해주셨어요?”
“……아니, 없어.”

그냥 사다둔 걸 데워준 것밖에 없으니 해줬다고 말하기는 어폐가 있었다.


어쨌든 잠시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나 버렸다. 루스는 현재 최대의 골치
아픈 일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눈앞에 무언가 들이밀어졌
다.
오픈하고 오늘까지 카페 매출입니다.”

바냐는 방금까지와 달리 제법 비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서


류를 건네받은 루스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서 확인하셔야죠. 궁금하셨을 건데.”
“케릴 녀석 제대로 혼쭐 한번 내야겠군. 믿고 카페 매니저 자리를 맡겨놓
았더니 아무한테나 이런 중요한 서류를 건네다니 말이야.”
서류를 대충 훑어 내리며 투덜대는 그의 반응에 바냐는 예상했다는 듯 가
볍게 대꾸했다.
“그 카페 인테리어 공사부터 재료 공수, 사람 고르는 것까지 누가 다했는
지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시죠?”
루스가 회사를 나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유일한 녀석이었다. 마지막으
로 본인이 하고 싶다며 우기는 바람에 카페와 관련된 모든 일을 무심코 넘기
고 말았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일 줄 알았기에 그냥 놔둔 건데, 결국 이렇게
됐으니 어찌 보면 녀석의 숨은 계략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켈리 그 녀석 힘들어 죽으려 하더라고요. 사장님은 일 터
진 그 날 저녁 딱 한 번 전화 통화 후 더는 연락이 되지 않는데다가 카페가 방
송을 탄 탓에 사람들이 하도 몰려 쉴 새 없이 일만 했다고요. 빨리 연락 안 하
시면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겠답니다.”
“고작 일주일인데 확실히 매출은 어마어마하군.”
“그게 다 루스님께서 몸 바쳐 광고한 덕이겠죠.”

잠시 풀렸던 루스의 얼굴이 도로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고생


이 이만저만 아닌 듯싶었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레이 에드윈과의 스
캔들이라니. 바냐 역시 여전히 믿기지 않을 노릇이니 장본인은 오죽하랴. 기
사가 터지고 난 후 그 나름대로 미친 듯이 자료를 모았지만 결론은 더럽게도
잘못 걸렸다는 거였다. 알파의 세계에서 레이 에드윈의 영향력은 현존하는
두 명의 극 우성 알파 다음으로 대단했다. 아마 그분이 오신다 해도 쉬이 처
리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루스의 얼
굴이 수척해 보였다.
그러니까 왜 가출은 해가지고.
바냐는 그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때 루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
내 내밀었다.
“ 내일부터 삼 일정도 문 닫고 쉬라고 해. 이걸로 녀석들 보너스 좀 챙겨주
고.”
역시 피하고 싶은 주제였는지 그는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렇다 해도 바냐
는 기뻤다. 자신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받아주겠다는 허락의 의미나 다름
없었다.
“ 역시, 전 여기가 훨씬 좋네요. 루스님과 함께하는 쪽이 적성인 것 같아
요.”
카드를 받아들고 좋아라하는 녀석의 모습에 루스는 찹찹한 심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 네가 여기 와 봤자 이렇게 커피집 매출 계산밖에 할 거 없어.”
루스가 진지하게 나가자 한풀 꺾인 바냐가 주춤하더니 어깨를 늘어트렸
다.
“……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또 저 버림받은 개새끼 행세였다.
“도대체 왜 알파가 베타 밑에 있는 걸 좋아해? 자존심도 없어?”
“네, 그런 자존심 없어요. 단언컨대 어느 우성알파가 와서 저를 스카우트
한다 해도 전 루스님 옆에 있을 겁니다.”
“…….”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바냐는 약자에게는 한


없이 물러터진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측근 중 하나였다. 그걸 이용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가 뱉은 말이 진심이라는 건 루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데리고 있을까?
지금은 사정상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슬슬 가게도 신경 쓰이고 누군가는
옆에서 처리해줄 녀석이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바냐는 그가 아는 인물 중
가장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루스는 한숨 섞인 시선을 주며 한 번 더 그에게
여지를 주었다.
“너 그러다간 평생 내 뒤치다꺼리만 하다 끝날지도 몰라.”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평생 은인에게 은혜 갚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
이니까요.”
은혜는 무슨. 그저 안면 있는 길거리 동무라 따라오는 것을 막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걸 진흙탕에서 자기를 건져준 은인이라 생각했는지 알파 주제
에 꼬박꼬박 베타인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녀석이었다. 어쨌든 녀석과의
인연은 아직 끝이 아닌 듯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무리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며 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밥은?”
“다음에요. 루스님 지금 무척 피곤해 보이시는 거 아세요?”
“…….”
그럼 푹 쉬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루스는 바냐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현관문이 닫히고 고요한


정적이 한차례 흘렀을 쯤에야 그는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안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젖히자 그제야 깊은 한숨이 터
져 나왔다. 확실히 피곤하긴 했다. 정확히는 육체가 아닌 정신이 말이다. 고
개를 젖히며 눈을 감자 자연스레 생각이 따라붙었다.
「이게 사랑이었어?」
사랑이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달큼한 웃음을 짓던 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살짝 벌
려진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곧 다시 입매를 굳힌 루스는 표정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말해 루스는 레이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 일을 저지르는
인간을 제일 싫어했다. 그럼에도 첫날 녀석이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도저히
그를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
「네가 보고 싶었어.」
그 순간 알아버렸다. 레이 에드윈은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 그 이상으로.
운명적 첫사랑.
그 기사 문구가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며 섹스를 들먹이는 녀석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인간이 그 나이
먹도록 본인의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를 수가 있는 건지. 항간에 소문처럼 정
말 인간관계는 일 아니면 섹스 그 이상은 없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그러
다 문득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깨달아버린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루스는 레이가 본인 마음에 쭉 바보처
럼 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랬는데 그것도 오늘로써 다 틀려먹었다.
하 미치겠군.”
“ ―

짓씹듯 뇌까린 어조에 곤란함이 잔뜩 묻어났다.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루


스는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한쪽 팔로 덮어버렸다. 왜 하필 그 상대가 자신
인 건지. 이쪽이야말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호감을 내비친 건 단 한
번 골목에서 알파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오메가를 도와준 그때뿐이었다.
루스에게 오메가는 측은한 존재였다. 평생을 비참한 삶을 살다간 그의 어
머니는 열성 오메가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오메가를 만나면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앞섰다. 그 당시 역시 레이 에드윈 또한 자신에겐 그저 안쓰러
운 오메가일 뿐이었다.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와준
일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걸 보고 지인들은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
한 오메가를 만나면 아예 살림까지 차려주겠다면서 빈정대기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전부 내어버린 뒤였으니까.
루스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에 다시 눈길을 건넸
다. 시선이 머문 곳은 창가에 걸린 작은 열쇠고리였다. 그 끝에 동그랗고 파
란 펜던트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근심으로 가득했던 눈빛이 한순간 아
련해졌다.
그는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으로
건너가 침대 옆 작은 탁자까지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멈췄을
때, 고개가 절로 아래로 떨궈졌다. 굳게 닫힌 작은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일
전에 레이가 건드리려 했던 곳이었다.
「그 서랍에 뭐가 들어있는 거지?」
루스는 조심스레 서랍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물
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짙은 회색 목도리였다. 잠시
망설이던 손이 가지런히 접혀진 목도리를 소중히 들어 올렸다. 루스는 그것
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미 자신의 체취로 잔뜩 채워진
그곳에는 원하는 이의 흔적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장은 어김
없이 반응했다. 이제는 그것이 기쁨보다 옥죄는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말이
다.
「짝사랑인가 보군.」
짝사랑.
혼자 하는 사랑.
그것은 그 어떤 마음에도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보답 받지
못한다고 해서 멈춰 설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설령 가벼운 감정으로 시
작했다 하더라도 호감으로 결정 내려진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만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깊어져만 가는 그것은 종착점이
라고는 없는 달콤한 지옥행 티켓을 끊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전 시작된 루스의 마음은 여전히 끝을 모르는 지옥을 내달리고 있었다. 문득
헤어지기 전 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내일 또 오지.」
아니, 오지 마.”

루스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향한 일방적인 마음 따윈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마음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날 찾지 마. 어차피 난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할 테니까.
레이 에드윈.
***

레이에게 사랑이란, 알파의 각인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각인이 육체적 속박이라면 사랑은 오메가를 정신적으로 속박하기 위해
놈들이 무심히 흘려대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그렇게 믿어왔고 그렇기에
사랑이란, 자신의 인생에서는 전혀 고려조차 해볼 일 없는 불필요한 것이었
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그것도 첫사랑.
깊은 생각에 잠기느라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현실감이
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루스와의 운명을 인정했던 것
처럼 사랑이란 단어도 딱히 거북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 그래서 말인데, 이 책에서는 사랑이란 아주 갑작스레 찾아온다고 하는
군. 그럼 운명이랑 사랑은 같은 거란 말인가?”
레이는 잡고 있던 책 페이지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원래 대부분 사람은 사랑에 운명을 꼭 붙여. 그래야 자신들의 사랑이 더
그럴싸해 보이거든.”
몇 번째일지 모르는 질문에 이골이 난 로이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류를
훑어 내려갔다. 레이도 그의 대답을 그리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운명인 건 확실한 것 같고…… 사랑은,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여기 상
대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는 건 무슨 소리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소리야.”

이번에도 로이의 심드렁한 답변이 날아왔다.


“뵈는 게 없어?”
“한마디로 모든 게 마냥 좋은 바보가 되는 거지. 그건 약도 없어.”
“…….”

이쯤 되면 또 다른 질문이 날아들어야 했다. 그러나 뒤따른 건 침묵뿐이었


다. 로이는 드디어 서류에서 눈을 들어 그가 앉아있는 책상을 바라봤다.
“레이?”
“사랑이군.”
“응?”

레이는 더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책을 덮어버리며 말했다.


“사랑이 맞아.”
“뭔 헛소리야?”
로이의 어이없는 시선이 닫힌 책으로 향했다.
보고만 있어도 오글거리는 핑크빛 일색인 책을 두 손 곱게 들고 온 게 바
로 레이였다. 일하라고 만든 집무실에서 하라는 일은 않고 주구장창 저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속이 터지는데, 전 애인한테 차인지 한 달도 되지 않
는 로이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댄 결론이 사랑이란다. 로이는 더는 못 참겠
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항의했다.
“맞기는 뭐가 맞아? 맞는 건 사랑이 아니라 네 눈앞에 산처럼 쌓인 그 서
류들을 보고 도장을 찍는 게 맞는 거야. 아니면 너 나 차인 거 알고 일부로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로이, 내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

로이는 정확히 눈을 세 번 깜빡이곤 다시 레이를 바라봤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단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해코지한 알파를 정성스레
족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즐거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설마.
“사랑에 빠지다니…… 누구하고…….”
“누구긴 누구겠어?”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로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최근 그와 만남을


가졌던 인연들을 모조리 뽑아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음에도 외면하고 싶
은 걸지도 몰랐다. 그건 성격 더러운 망나니 알파와 엮이는 일 보다 더 충격
적인 사건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형 진짜야?”
“ ,

두 사람 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드윈 가문의 막내 레이든이 서 있


었다.
“레이든?”
“미안, 노크해도 반응이 없기에 그냥 들어왔어.”

레이든은 그제야 조심스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의 집무실은 일


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곤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평소엔 레이든도 들어
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이지만 오늘 만큼은 꼭 그를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레이든, 이리와.”

다행히 레이는 흔치 않은 다정함을 내보이며 막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레이든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냥, 형 보고 싶어서.”
막내다운 애교에 레이의 얼굴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레이든은 레이와 7
살 차이가 났지만, 형제 중 가장 우애가 좋았다. 우성 오메가인 그는 생김새
뿐 만아니라 차분한 성격도 어머니 이든을 닮아 레이는 물론 다른 형제들에
게도 가장 호감의 대상이었다.
그새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레이가 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한창 성장기니까. 앞으로 형보다 더 클 자신 있어.”

이십대 초반에 성장을 끝내는 베타와 달리, 알파와 오메가는 스무 살에서


길게는 서른 살까지 성장기간의 폭이 넓었다. 그 이후에는 그 모습 그대로
생을 마쳤다. 올해 갓 스무 살을 넘긴 레이든은 아직 십대처럼 어린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기대하지. 넌 이든을 닮아서 분명 멋지게 클 거야.”

레이는 자신을 향해 해사하게 웃는 막내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을 보


냈다. 첫 히트사이클을 보내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
아 한동안 까칠했었는데 이제 다시 적응하는 분위기라 다행이었다.
그래서 할 말은?”

아 맞다.”
“ ,

레이든은 아차 하며 잠시 잊고 있던 궁금증을 꺼내들었다.


형 아까 한말 진짜야?”
“ ,
“뭐가?”
“그러니까, 사랑…….”
“아아, 그거?”

레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이든은 토끼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 대박! 혹시 상대가 이번에 형이랑 기사에 나왔던 남자야?”
“ !
“루스?”
“이름이 루스구나. 그 사람 맞지? 그때 형 구해줬다던.”
“맞아.”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두 눈에 흥분이 떠올랐다. 레이와 달리 레이든은 연


애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럼 그 사람하고 사귀는 거야?”

들뜬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렸다. 레이는 그 귀여운 모습을 음미하며 성


실히 대답해주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러자 레이든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어째서?”
“그쪽은 날 사랑하지 않거든.”

말하고 보니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문득 별장의 일이 떠올랐다.


「이게 사랑이었어?」
녀석은 그 말을 듣는 즉시 노골적으로 곤란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게 그렇게 반응할 일인가?
레이 에드윈의 마음을 얻고 싶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알파들이 전 세계
에 줄을 서 있는 마당에 그 마음을 건네준다 해도 싫다고 거부하다니 여러모
로 무례한 녀석이었다. 뒤틀린 속만큼이나 레이의 입술도 살짝 비틀렸다. 그
모습에 로이가 움찔했다.
형 그럼 짝사랑인거야?”
“…… ,

이내 레이든이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짝사랑?”

뜻밖의 소리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되나?
확실히 서로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
“ ,

레이는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형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있지?”
“그치만…… 짝사랑은 아픈 거라고 하던데.”
“누가?”
“앨런이.”
“…….”

일순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이든은 어리둥절하며 조용한 두 사람


을 번갈아 바라봤다. 곧 레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레이든. 사랑도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는 굳이 사랑이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형이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건데?”
“만족감이겠지.”
어차피 사랑이란 단어 하나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스를 향한 정의
는 언제나 간단했다. 처음으로 먼저 섹스하고 싶은 상대.
그 이외에 또 뭐가 필요할까?
레이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는 베타였
고 알파와의 만남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단지 사랑이 추가됨으로써 그를
대하는데 좀 더 큰 즐거움이 늘었다는 것 정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어
차피 사귈 것도 아니고.
레이는 여전히 그 누구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속박당하고 싶은 마음이 없
었다. 루스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구속하려 한다면 그건 알파와의 관계와 다
를 바 없었다. 아쉽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그와의 인연도 끝이었다.
“ 지금 그와의 관계는 무척 만족스러워. 그러니 그걸로 된 거야.”
레이는 자신의 사랑스런 동생에게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확실히 그는 즐
거워 보였다. 그렇기에 레이든은 더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
다. 그건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사랑에 빠지다니.
로이는 이 괴이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
기다 녀석이 말하는 사랑은 뭔가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로이의 시선이 책상
으로 향했다. 핑크색 표지 위에 뚜렷이 적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그건 바로 사랑! }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

아무래도 조만간 무슨 일이 크게 터질 것 같아.”


로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잘게 잘라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짓뭉갰다.


“레이가 사랑이라니. 차라리 이든님이 네놈들 동생을 임신했다는 말을 듣
는 게 훨씬 현실적일 거야.”
“그건 나도 동감…… 이든이 임신했대?”

물음도 아닌 경악이었다. 갑작스레 소리를 높인 아론의 행동에 로이는 무


심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함부로 막 던지지 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아론의 표정에 로이는 짓궂은 미소를 떠올렸다.


“혹시 모르지. 발정기에 드신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니 끝나고 나면 진짜
네 동생이 생겨있을지 누가 알아?”
“집어치워. 그랬다간 이번엔 진짜 세계 멸망이니까.”
요즘 시대에는 다섯도 많았다. 레이도 아론도 자신들 밑으로 같은 핏줄이
셋이나 딸려 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했지만 그보다 더한 건 아버지 레오 에
드윈의 히스테리였다. 오메가에게는 각인도 모성애를 이길 순 없었다. 자식
들에게 자신의 짝을 뺏긴 극우성 알파의 짜증이란 지구멸망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우성 알파로서 아버지와 함께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아론은 그 짜증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희생자 중 하나였다. 아론은 인상을 구기며 후식으
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곤 더욱 썩은 얼굴이 돼 버렸다.
“원두가 썩었군. 이건 쓴맛을 넘었어.”
“전에는 마실만 하다며?”

로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원래 입맛이 까다로운 아론은 한번 아니다 싶


은 식당은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곳에 온건 벌써 세 번째
였다.
“인간은 원래 더 좋은 것을 접하는 순간 그 아래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기
마련이야.”
아론은 커피 잔을 테이블 끄트머리로 밀어내며 답했다. 그제야 로이는 수
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 베타 커피집이 확실히 맛있긴 하지.”
로이도 그 집 커피를 마신 다음부터는 웬만한 커피도 그저 그랬다는 사실
을 떠올렸다.
“밥 먹고 가볼까?”
“문 닫았어. 오늘 아침 사람을 보냈는데 원두가 다 떨어져서 며칠 쉰다고
하더군.”
“그렇구나.”

치사한 자식 저 혼자만 사 먹고 다녔군.


하기야 누굴 탓하리. 레이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탓에 회사 한번 들
어가 보지 못했다. 아론의 사무실이나 가야 그 집 원두가 있을 텐데 말이다.
“원두 남은 것 좀 있어?”
“없어.”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단칼에 잘라버리자 로이는 진짜 치사하다며 눈


을 흘겼다. 그의 의심을 알아차린 아론이 반박했다.
“아까 사람 보냈다고 했잖아. 내가 있으면서 욕심부릴 인간으로 보여?”
“혹시 모르지. 쟁여두려고 한 걸지도 모르잖아.”

로이는 고집스레 의심을 이어나갔다.


“이번 일로 카페 장사는 대박이 났으니 원두야 빨리 떨어질 테고, 로스팅
할 줄 아는 녀석은 나올 수 없으니까 당연히 지금쯤은 떨어질 걸 네가 예상
못 했겠어?”
그렇지 않냐는 시선에 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승리의 미소
를 지은 로이가 다시 스테이크를 썰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녀석도 곤란하겠네. 그쪽 빌딩 임대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것
도 보상을 해줘야 하나? 이럴 때 바짝 벌어놔야 할 거 아니야.”
로이의 걱정에 아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 그 녀석이 돈에 허덕거릴 놈으로 보이나?”
“아니…… 뭐, 정체야 가문과 연계된 건 확실한 것 같다지만 그걸로 돈이
있고 없고를 따질 수는 없는 문제잖아. 집도 허름한 베타 전용 아파트고.”
“아니, 그 녀석 분명 돈맛을 아는 놈이야. 베타치고는 크게 벌어본 놈이겠
지.”
아론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로이가 스테이크를 꿀꺽 삼키며 나직
하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감.”
다른 이들이 그랬다면 실컷 비웃어 줬겠지만 가문과 회사를 경영하면서
어마어마한 세를 불리고 있는 에드윈 형제들에 한해서는 그냥 넘겨들을 순
없는 일이었다. 감도 능력이었다. 녀석이 그렇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로이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곤 다시 고기를 썰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제 기사 어떻게 된 거야?”
“기사? 아, 그 자식 말하는 거군.”

아론은 어제 아침 그의 비서 루크가 건네준 화제성 기사를 떠올렸다.


유서 깊은 가문 마네토 가문의 닉키 마네토가 어젯밤 괴한의 습격으로 큰
부상을 당해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전 폭로된 그의
추잡한 사생활로 인해 오메가와 베타 여성 인권 단체가 움직이고 각종 언론
과 SNS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관련된 보복성 습격이지 않
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나오고 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가 공동 창업자로 있는 델핀 캐피탈은 투자자들의 자금회
수 요구로 상장된 지 일 년 만에 위기를 맞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놈의
과거사를 언론에 터트리고 인권 단체를 움직인 건 아론과 로이의 합작품이
지만 놈의 부상은 계획해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놈의 병원 행은 카일 짓일 거야. 물론 사주한 건 렉스일 테고. 파티
장 사건 이후 렉스가 놈의 좆을 끊어버릴 거라고 했거든.”
아론의 중얼거림에 로이가 질겁했다.
“ 진짜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하잖아.”
언론에서는 순화된 표현을 들어 큰 부상으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같은 알파로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랑이 사이에
그것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완전히 터지고 뭉개져 더는 영원히 제구실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했다면 분명 렉스의 쌍둥이
동생 카일이 직접 한 짓일 것이다. 겉보기엔 순수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걸 생각하니 없던 입맛도 전부 떨어질 지경이었다.
“ 그 녀석은 도대체 생긴 거와 하는 짓의 갭이 왜 그렇게 큰 거야?”
끔찍하다며 혀를 내두르는 로이의 모습에 아론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
다.
“동정하는 건가? 너도 기사에 난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
잖아? 거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성년자도 건드렸다는데, 레이는 몰랐던
거야?”
“그냥 입 닫고 있었어. 레이가 알았으면 녀석 아랫도리는 진즉에 파티장
에서 사라졌어. 그뿐이었겠어?”
“아, 어쩐지. 잘했어. 공개적인 살인 뒤처리는 꽤 복잡하니까.”

아론은 여상히 대꾸했다. 실제로는 복잡할 것도 없지만 그따위 녀석한테


들어가게 될 뒤처리 비용 따윈 아깝기만 할 뿐이라는 게 그의 감상이었다.
“그래, 뭘 하든 알아서 해. 난 레이 녀석 뒤치다꺼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니까.”
전부 귀찮다는 듯 심드렁해진 로이를 보며 아론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너 요즘 너무 나한테 떠맡기는 거 아니야? 솔직히 델핀 캐피탈 자금회수
도 네가 해야 할 일이었어.”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에드윈 가의 서열 2위 왕자님을 부려먹을 수 있겠
어? 그건 레이가…… 참, 근데 자금회수 때문에 우리 쪽에서 손해 본 건 없는
거야?”
본인도 미안한 건 아는지 로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아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어차피 처음에도 가문끼리의 의리 정도로 조금 투자한 거야. 애초
에 기회 봐서 발 빼려고 했어. 그리고 그 당시 ‘W & M 하우스’에서 델핀 캐
피탈에 대해 했던 부정적인 이야기도 신경 쓰였으니까.”
“그때, 그 CEO가 올렸던 글말이지?”

「W & M 하우스」 는 전 세계에서 단 두 명뿐인 극우성 알파 중 한 명인


울프가 세운 투자 금융회사였다. 원래 소유하고 있던 그의 거대한 자본과 가
주 때부터 발휘해왔던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불과 이십여 년 만에 7
가문이 소유한 은행들을 제치고 금융자본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
로는 여덟 번째 가문이 세워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향력은 대단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였다. 오년 전 그곳 CEO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앉
혀졌다. 많은 이들이 극우성 알파에게 인정받은 유능한 인재가 누군지 일제
히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B라는 이니셜만 남기고 일절 정체를 드러내지 않
고 있었다. 알파들은 어떻게든 그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 했지만 감히 울프
의 사람을 파헤칠 수는 없었다.
일부 고객들은 정체를 모르는 놈에게 어떻게 믿고 돈을 맡길 수 있겠냐고
반발했지만, B가 투자하는 사업마다 족족 큰 수익을 거두면서 고객들은 신
뢰를 넘어서 그를 완전히 맹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작년 델핀 캐피탈
창립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을 때, 당연히 많은 이들이 그곳에 투
자하기를 꺼려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결국 가문끼리의 의리를 들어 7가문의
가주에게 간신히 투자를 받아 시작한 사업인데 창업자 한 사람의 멍청한 실
수로 이제 망조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B라는 녀석 대단하단 말이야. 레이와 녀석의 사건은 예측 불가한
상황이었잖아. 그 일만 아니었어도 몇 년은 회사가 유지됐을 텐데. 녀석은
일 년 안에 흔들릴 거라고 했었지.”
“감이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몰라도 같은 경영인으로서 인정할 만한
놈이긴 해. 그 면상을 한번 꼭 봤으면 하는데.”
아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로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
다.
울프님은 왜 그렇게 꼭꼭 숨겨두는 걸까? 그 B를.”

울프는 아론과 레이의 대부이기도 했기에 그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걸 이용해 두 사람은 울프에게서 B의 정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그것만큼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숨긴다기보다 보호한다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르지.”

아론의 조심스런 예상에 로이가 되물었다.


“보호한다고? 무엇으로부터?”
“당연히 우리 알파들 아니겠어?”

로이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론은 설명을 덧붙였다.


“ 일단은 그 녀석이 울프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극우성 알파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거잖아? 그러니 우리 알파들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우성인지 열성인지. 그리고 어느 가문의 알파인지 본가와 피가 짙은지 옅은
지. 이런 시시한 것들을 말이지.”
정말 시시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알파 세계의 현실은 그랬다. 순수
알파가 가진 고유의 힘으로 서열을 나누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알
파의 개체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특히 우성 알파는 더더욱 귀해지고 있
었다. 그리고 그나마 태어난 우성알파들도 열성보다 시시한 인간들이 많았
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나름의 힘의 원리를 키
워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가문이었고 그중에서도 혈연을 따지고 드는 알파
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렇기에 오메가인 레이보다도 인정받
지 못하는 게 바로 마네토 가문의 가주 헨리였다. 순수 힘만으로는 마네토
가문에서 최강이지만 가문의 피가 옅다는 이유만으로 혈연에 밀려 가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럼 B가 그것들을 충족하지 못하는 알파일 수 있다는 거네.”

로이가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7가문의 자제들치고 W & M 하우스의 고객이 아닌 놈들이 없었다.
말이 고객이지 실질적으로 사업과 투자 재정의 모든 문제에서 B의 조언을
받고 움직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그런 조언자가 자신들보다 낮은 신
분에 속한다는 걸 알면 알파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였다. 레이 에드윈이
아무리 뛰어난 가주라 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처럼.
혹시, 그 녀석도 오메가 아니야?”

로이의 물음에 아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확실한 건 몰라.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
“아론?”
설마…….”

말을 흐린 아론이 이내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닫았다. 왜 이 순간에 그 커


피 사장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이 나갔어. 아무리 그래도 베타
가 그럴 수는 없지.
아론은 여전히 혀끝에서 느껴지는 쓴맛과 함께 엄습하는 불안감을 지워
버리려 탄산수로 짧게 입을 헹궜다. 그리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 다 됐어. 한풀이도 충분히 들어줬으니 이제 상사 앞에서 가식적인
미소 정돈 띨 준비는 되었을 거라 믿지. 이만 일어나자고. 나도 이제 일해야
하니까.”
아론은 슈트 재킷을 걸치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리곤 여전히 일어
설 기미도 보이지 않는 로이를 재촉하며 물었다.
뭐해? 데려다줄 테니까 빨리 일어나. 그 녀석 지금 어디 있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로이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곧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심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디겠냐. 그 잘난 첫사랑한테 납시셨지.”

***
[ 저희 L. U. Z. 는 삼 일간 휴무입니다.]
입구에 걸린 문구를 훑은 시선이 내부를 응시했다. 이른 새벽이었다. 선글
라스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고급스러운 카페 앞에 우두커니 서 있
는 모습은 퍽 수상해 보였다. 그러나 밤 서리가 내려 축축한 새벽, 그늘진 빌
딩가 주변엔 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루스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의 기척을 살핀 후 가게 입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건물 끝 모퉁이를 돌아 비좁은 틈새로 들어가자 작은 조명과 정갈
한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관리된 골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옮겨 작은
문 앞에 도달한 루스는 선글라스를 벗고 허리를 굽혔다. 눈높이보다 좀 더
아래에 있던 작은 센서가 곧 제 주인의 홍채를 인식했다. 보안 시스템이 해
제되며 찰칵, 문이 열렸다. 주변의 기척을 살핀 그가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
에 발을 들이자 자동으로 환한 불이 켜졌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곧게 뻗은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원 휴게실과 식품창고를 지나 또 하나의 문을 열
고 들어선 공간 역시,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 불을 밝혔다. 마지막으
로 홀 안에 빛이 떨구어졌다.
은은하게 떨어지는 조명 아래 요 며칠간 주인 대신 스캔들에 시달렸을 바
와 그 너머로 수십 개의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를 가리는 블라인드
틈새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어와 정리된 테이블과 바닥 위로 수많은 선
을 그어 내리고 있었다. 곧 아침이 밝아 올 것이다.
루스는 바에 가방과 점퍼를 벗어 올려둔 후 바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다
가갔다. 가게에 들인 후로 줄곧 켜져 제 할 일을 해왔을 이 녀석만은 휴무가
없었다. 기특하다는 듯 여전히 따끈한 기계에 잠시 손을 대어본 루스는 작은
수건에 물을 적셔 스팀 노즐을 감싼 후 밸브를 열었다. 칙―! 칙―! 몇 번의
스팀 뿜는 소리와 함께 수건이 금세 뜨거워졌다. 수건으로 능숙히 노즐을 몇
번 문질러 닦은 후, 큰 손으로 작은 수건을 야무지게 접어두는 그의 모습은
제법 카페 사장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추출구에도 버튼
을 눌러 물을 내려 본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살짝 옮겼다. 그라인더에 담긴 원두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새로 해두어야겠군.”
카페 오픈한지 일주일 만에 갓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 맛을 못 잊고
단골이 되기로 한 고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었다. 로스
팅 전문 직원도 이미 스카우트 해둔 상태였지만 아직 전에 다니던 카페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이번 달 동안은 루스가 해야 할 몫이었다. 일부러 이
른 새벽에 방문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위 선반엔 로스팅한 날짜와 원두 이름이 적힌 병들이 진열되어 있었
다. 그것을 죽 훑은 루스는 ‘espresso’라고 적힌 병을 꺼내 그라인더 뚜껑을
열어 원두를 부었다. 촤르르륵 원두들이 그라인더 안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감각을 깨우는 듯 조용한 홀 안을 요란하게 메웠다. 전원을 켜고 원두를 갈
자 기분 좋은 음(⾳)들이 한차례 깨어진 감각 속을 휘젓고 사라졌다.
레버를 당겨 다 갈려진 원두 가루를 포터 필터에 담기 시작하자 홀 전체에
향긋한 향이 진동했다. 고르게 템핑한 포터 필터를 에스프레소 머신에 장착
하고 버튼을 누르니 안에서 미세하게 ‘틱’하며 작동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손이 바빠졌다. 순간에 고른 에스프레소 잔을 추출구 밑에 두니 간발의 차로
에스프레소가 내려왔다. 또 한 번의 묵직하고 진한 향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
다. 30초의 마법이다. 루스의 입술에 흡족한 미소가 걸쳐졌다. 에스프레소
잔을 한 손에 들고 얼굴 가까이 가져가자 향기롭고 진한 내음이 코끝에 감돌
았다. 호불호가 갈리는 진하고 쓰디쓴 맛은 언제나 그의 감각을 강렬히 일깨
워 주었다. 그래서 루스는 이쪽을 더 선호했다.
그 녀석은 질색하겠군.
문득 든 생각에 루스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졌다. 곧 자각이 밀려들었다.
“…….”

방금 자신이 누구를 떠올린 건지 인지하자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무심코


들고 있던 잔에 시선을 보내자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 황금색 크레마가 들어
왔다. 이곳에 들어와 내내 평온하던 루스의 인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재
차 떠오른 누군가를 크레마와 함께 휘휘 저어버리고 한 모금, 그리고 단번에
잔을 비워냈다.
더럽게 쓰군.”

짓씹듯 중얼거린 소리가 공간을 울린 그때였다.


행복하단 얼굴로 직접 만들어 놓곤 왜 그리 성이 나셨을까?”

루스의 고개가 퍼뜩 직원 전용복도로 통하는 입구로 향했다. 그가 들어왔


던 길목에 예기치 못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문
가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싱글거렸다.
뒷문이 열려있었어. 항상 문단속은 철저히 해야지. 꼬맹이 안 그래?”

루스는 남자의 말에 동의해줄 수 없었다. 자동문이었다. 무슨 수작질을 부


린 건지 모르지만 결국 업자를 불러 고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기분이
바닥을 쳤다.
“문이 열려있든 안 있든 남의 소유지에 무단 침입하는 건 범죄입니다. 사
유재산을 부수는 것도 말이죠. 헨리 마네토씨.”
그의 적대적인 반응에도 회색 체크무늬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한껏 여유
를 부렸다.
“너무 섭섭한 소리는 말라고. 그래도 누구처럼 남의 것을 훔치는 짓은 하
지 않으니까.”
얄궂은 대꾸에 루스의 낯빛이 무섭게 굳어졌다. 덩달아 헨리의 웃음은 더
욱 짙어졌다.
이런, 아직도 놀려먹는 재미가 남아 있다니.
오랜만에 재회라 좀 놀려준 것뿐인데 어두운 과거만큼은 여전히 무심해
질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헨리는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에 구르고 굴려졌음에
도 모럴관념으로 가득 찬 그에게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손만 뻗으면
바로 주먹이 날라 올 것 같은 얼굴 앞에서 헨리는 싱긋 웃었다.
“얼굴 풀라고. 설마 웃자고 한 농담에 죽자고 달려들건 아니겠지?”
“제가 농담을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이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
조심하시죠. 정말 죽자고 달려들기 전에 말입니다.”
무거운 목소리는 가볍기 그지없는 헨리의 태도를 눌러버리기 충분했다.
어이구. 무서워라.”

말은 가볍게 했어도 실제로 헨리는 나름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파 중


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가문의 가주로서 저 어린 베타에게 위압감을 느끼
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 베타를 괴물로 만들어 놓으신 건지.
헨리는 속으로는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
을 유지했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밤을 새웠더니 좀 피곤하네. 오랜만에 네가 내린 커피 좀 마셔보지.”

바를 나와 테이블 위에 걸쳐진 의자 하나를 내려 앉은 그는 정말 예나 지


금이나 한결같이 뻔뻔한 인간이었다. 그런 놈에게 괜히 힘써봤자 제 살만 깎
아 먹을 뿐이라는 걸 옛적에 습득한 루스는 결국 주먹을 쥐는 대신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남은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을 적당히 채워 그가 앉은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자 헨리는 접대에 성의가 없다며 투덜거리곤 태연히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그리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집사가 내려준 커피는 영 써서 마시질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가
끔씩 이 커피가 그리웠지.”
그러자 루스가 입술을 비틀며 비꼬듯 말했다.
“그래도 요즘은 그 집 음식을 입에 대긴 하나 봅니다.”
“아아, 요즘은 그들이 방법을 바꿨거든. 미친놈은 독으론 죽이지 못한다
는 걸 슬슬 자각한 모양이야.”
“…….”

묘하게 바뀐 루스의 표정에 헨리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이제 슬슬 끝나가고 있으니까.”
“누가 당신을 걱정합니까?”

루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우리의 전직 길거리 사기꾼이 알고 보면 정이란
정은 죄다 가진 순수한 꼬맹이라는 걸 알만한 이는 다 알고 있는데.”
정은 얼어 죽을.
이십칠 년 전 현 알파 수장 레오 에드윈이 얽힌 일렬의 사건으로 가주가
죽은 뒤 마네토 가문은 몰락 직전에 이르렀다. 가문을 부흥할 인재가 없어
새로운 가주를 세우는데 난항을 겪자 수장이 직접 나서서 뽑은 녀석이 바로
헨리 마네토였다.
그는 남아메리카 변방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었다. 마네토 가문
의 직계 자손들에 비하면 피도 옅고 모든 조건에서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때
문에 수장이 그를 데려와 가주자리에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을 때
는 가문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나 그를 가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마
네토 가문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수장의 엄포에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헨리를 마네토 가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가주는 가문의 생존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
존과도 싸워나가야 했다. 지금은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쌓으며 안정을 잡아
나가고 있지만, 루스가 헨리를 처음 만났을 즈음에는 고작 열다섯 살인 어린
아이가 보기에도 그의 뒤편엔 시커먼 죽음이 따라붙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의 생명도 루스 자신과의 인연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으니 미운 정도 정이
긴 했다. 루스는 굳혔던 얼굴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태도에 헨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안 변한 것 같으면서도 정말 많이 변했단 말이야. 특히 건방짐이 많이 줄
었어. 처음 만났을 때는 눈에 힘을 주고 어른한테 반말이나 찍찍해대던 녀석
이었는데 말이야. 안 그래?”
“추억 팔이 하러 오신 거면 이만 가주시길 바랍니다. 요즘 가주들은 할 일
이 그리 없으십니까?”
“왜 다들 내가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나도 한시가 아쉬
운 몸이라고.”
잠깐의 인내심을 끝내고 다시 까칠해져 버린 루스를 향해 이번에는 헨리
가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분이 네가 테라에 있는 동안 신경 좀 쓰라고 하셨으니 어쩔 수 있나?
시간을 쪼개서라도 살펴야지.”
그분이란 말에 루스의 얼굴에선 단숨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즉각적인
거부반응에 헨리는 낮게 혀를 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 같으면 고맙다고 넙죽 받을 것들을 전
부 내동댕이쳐버리고 시시한 가출 따위나 하다니.”
“그럼 당신이 가서 넙죽 받으시죠.”

서늘하게 굳은 목소리는 방금까지 두었던 대화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


고 있었다. 루스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알파를 두고 뒤를 돌
리다니 정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었다.
거기서, 루스.”

헨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게를 달았다.


“내가 베타인 너 하나 통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당
장 이 가게를 부숴버리고 널 강제로 데려다가 처박아놓고 신경 써주는 방법
도 있어.”
공간을 가득 채운 위압적인 분위기에 루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
만 그뿐이었다. 더는 그의 표정에 아무런 위협도 찾아들지 못했다. 오히려
무심한 눈빛에 스며든 건 조소였다. 헨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얕보였
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빛이 이채를 띠며 색을 달리했다.
해봐.”

“…….”
“…….”

일촉즉발의 상황을 무너트린 소리는 루스의 것이 아니었다.


“한번 해보라고. 그다음엔 감히 내 것에 손댄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에
대해서 똑똑히 알려 줄 테니까. 헨리 마네토.”
위협적인 경고조차 우아하게 날리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레
이 에드윈이었다. 그는 헨리에게 싸늘한 경계를 보내며 루스에게 다가갔다.
뜻밖의 등장에 잠시 당황했던 헨리가 곧 페로몬을 수습하며 나긋하게 중얼
거렸다.
“우리의 여왕님께서 직접 행차하셔서 왕자님을 구하다니. 소문이 사실이
었나 보네?”
“다 알고 있으면서 말 돌리지 마. 네가 여긴 왜 있는 거지?”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야?”

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화에 끼어든 루스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들었다.
당연히 네가 이곳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왔지.”

평소와 달리 싸늘한 금빛 눈동자가 루스를 향했다.


“내가 분명 아직은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거기다 개구멍까지 활
짝 열어놓았더군.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 개구멍으로 당당히 들어온 게 본인이면서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거
기다 대놓고 감시자를 붙였다는 소리를 당연시하는 놈의 행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덕분에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화가 단숨에 식어버렸다. 마치 급속 냉
각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빼낸 기분에 갑작스레 두통이 몰려들었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루스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자 재차 한소리 퍼부으려던 레이가


멈칫하며 손을 뻗었다.
은근슬쩍 손대지 마.”

루스는 상체를 뒤로 빼며 다가오는 그의 손을 거부했다. 레이가 불쾌하다


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돼서 열이라도 짚어보려는 건데. 무례하군.”
“그래도 안 돼. 너무 가까우니까 뒤로 떨어져.”
“그런 말 하면 더 하고 싶어진다는 걸 왜 모를까?”
“변태냐?”

그들이 투덕거리는 사이, 공간에서 잠시 잊혀버린 헨리는 대단한 발견이


라도 한 듯 두 사람을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이거 정말 놀랄 일이군.”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레이는 잠시 잊


고 있던 헨리를 인지했다.
왜 아직도 거기 있는 거지?”

아직도 지옥으로 꺼지지 않았냐는 눈빛이었다. 헨리는 일순 파고드는 한


기를 느끼며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아 미안. 방해꾼은 이제 사라져 주지.”
“ ,
“빨리 꺼져.”
“너도 가.”

루스는 진심으로 둘 다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그러나 레


이는 사라질 놈은 한 명뿐이라는 듯 태연하게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헨리가 재밌다는 듯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두 사람 다 다음에 보지. 물론 따로 말이야.”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개소리 말고 이 녀석에게 접근할 생각 따윈
집어치워.”
낮게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에서 보내는 매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역시 세상이 요지경이 될 모양이었다. 알파를 위협하
는 베타와 오메가라니. 알파의 입장에서는 무척 곤란한 존재들임이 분명했
다. 그럼에도 헨리는 저 두 사람을 무척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쪽은 사랑스럽기까지 하고 말이야. 헨리는 오늘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
운 레이를 바라보며 야릇한 시선을 날렸다.
그럼 셋이 같이 볼까? 그편이 좀 짜릿하긴 하지.”

순간 잡아먹을 듯 날뛰던 레이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럴 마음 있으면 연락하라고.”

헨리는 서둘러 윙크를 날리곤 열린 문으로 사라졌다. 놈이 사라지자마자
레이는 루스를 다그쳤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녀석과 아는 사이였나?”
“몰라.”

그의 무성의한 답변에 레이의 눈빛이 다시 가라앉았다.


“날 바보로 아는군.”
“그러는 너야말로 저 녀석과 잘 아는 것 같던데?”
“…….”

아무래도 헨리 마네토는 서로에게 말하기 곤란한 존재인 듯싶었다. 루스


는 한숨을 쉬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거기 앉아. 커피 타 줄 테니까 마시고 출근해.”

루스는 그를 지나쳐 에스프레소 기계로 걸어갔다. 레이는 그가 가리킨 자


리를 힐긋 바라보았다. 헨리가 앉았던 자리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린 그는 그대로 탁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곤 루스를 바라봤다.
능숙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모습은 집과는 또 다른 색다름을 선사해 주
었다. 왠지 멋있게 섹시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조금 전 상황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지금은 조용히 이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새벽을 넘어선 이른 아침의 공기는 서늘한 적막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리 춥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레이가 흐뭇한 감상을
즐기는 사이 어느새 손에 커피잔을 들고 온 루스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의자에 앉지 않고 여전히 서 있는 레이를 발견하곤 한마디 하려던 루스는 곧
깨달은 바가 있는지 우선 커피잔을 내밀었다.
받아.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은 루스는 레이가 잔을 받아들자 그의 곁을 지나


쳐 다른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곤 새 의자를 꺼내 레이 앞에 내려놨다.
“어차피 바로 갈 것 같진 않으니까 앉아서 마셔.”
“너는?”

레이는 그가 끌어다 준 의자에 순순히 앉으며 물었다.


“나는 원두 로스팅해야 해. 그거 하려고 일부러 여기 온 거니까.”
“그럼 기다리지. 볼일 마치고 나면 나랑 갈 데가 있어.”
“이 정도면 그냥 백수 아니야? 정말 출근 안 해?”

루스는 블라인드 너머를 힐긋 바라봤다. 이미 새벽빛이 물러나고 이른 아


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자신과 있으며 그는 오전 오후를
가뿐히 날려 먹고 있었다. 헨리만큼이나 주변 알파들로부터 여전히 가주로
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땡땡이를 밥 먹듯
이 치고 다니는 모습이 주변에 좋게 보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너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루스는 살짝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아니, 안 괜찮아.”

심각할 법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레이의 모습에 오히려 심


각해진 건 루스였다.
“그러니까…….”
“짝사랑이잖아?”
“…….”
난 너를 사랑하지만,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루스를 향해 레이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내 동생이 짝사랑은 아픈 거라더군. 그러니 동지끼리 너무 매몰차게 밀
어내지 말자고. 너무 아픈 건 싫으니까.”
거짓말. 즐거워 죽는 표정을 한 주제에.
루스는 말과 달리 싱글거리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잡지 한 귀퉁이 연애 칼럼의 뻔한 충고와도 같은 여동생의 몇 마디에 사랑


을 확신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사랑에 관한 책을 봤지.”
“책?”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홀짝이는 레이를 바라


보고 있자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스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 책을 보고 네 마음을 결정지었단 말이야?”
“책은 수많은 이들의 경험을 담아내지. 아닌 것도 있지만 대다수 의견이
비슷하다면 그건 맞는다고 할 수밖에 없어. 대부분 증거가 내가 너를 사랑하
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거든.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지.”
“참 가벼운 사랑이군.”

루스가 기막히다는 듯 말했다.


무거울 필요는 또 뭐 있지?”

레이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물론 책을 보니 사랑의 시작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데는 수천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더군. 그렇다면 사랑의 기준에는 애초에 정
답이란 없는 것일 테고 내가 지금 느끼는 사랑 또한 다를 이유는 전혀 없다
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너는 정말 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가?”
“그럼 안 되는 건가?”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

여유롭던 레이의 입가에 살짝 웃음기가 지워졌다. 루스가 진지하게 말했


다.
“ 레이. 나는 앞으로도 너에게 보답해 줄 마음이 없어.”
어찌 보면 참으로 칼같이 냉정한 소리였다. 그런데도 레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낮게 깔린 진지함 속에서 제일 먼저 느껴진 감정 때문이
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자신을, 곤란해 하면서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
는 이유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레이 에드윈이 받을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는 다정함이었다. 레이는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거리가 좁혀지고 서로가 마
주 보자 루스는 자동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은근슬쩍 가까이 오지 말랬잖아.”
“만지지 말랬지 접근 금지라는 말은 안 했어.”
“접근 금지도 머릿속에 넣어둬.”
“진짜 비싼 녀석이군.”

레이는 투덜대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


였다.
“네 말은 잘 알았어. 그런데 내 짝사랑은 너와 달리 가벼우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루스의 두 눈이 살짝 커지다 곧 곤란함이 어렸다.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레이는 속으로 뿌듯한 희열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꽉 막힌 스케줄에 잠시 쉬어가는 섹
스하고도 같은 거야.”
또 그 소리냐는 듯 진지했던 루스의 얼굴에 한숨이 차올랐다.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섹스라는 건가?”
“나에게 사랑의 정의는 기분 좋은 것.”

섹스는 본능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머릿속을 꽉 채운 일에서 벗어나 본능


에 의해 자연스레 움직이는 행위를 끝내고 나면 좋은 운동을 한 것처럼 개운
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것이었다. 물론 이성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알파를
보는 건 썩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루스와는 다를 것 같았다.
너와 섹스를 하면 확실히 기분도 좋아질 것 같아.”

이성을 되찾고 선명해진 시야에 그가 있다면 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은 확


신이 들었다. 레이는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혀 움찔하는 그의 귓가에 나직하
게 속삭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고 싶다는 마음은 잘못된 게 아니잖아?”

섹스 이전에 마음을 중요시하는 루스에게도 이제 레이의 섹스 발언은 정


상적인 동기를 만들어 줄 터였다.
하지만 네 사랑이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주지 않아.”

그러나 루스는 단호했다. 레이의 어깨를 살짝 뒤로 밀어낸 그가 다시 거리


를 넓혔다.
“상대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은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일 뿐이지. 그래야만 하고.”
다시 벌려진 거리와 경고에 레이는 설핏 눈매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말에
는 동의했다.
“알고 있어. 너에게 강요 따윈 안 해. 내가 알파 새끼들 같은 짓을 할 리 없
잖아?”
금빛 눈동자에 한순간 경멸이 내비쳤다. 그가 알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를 잠깐 엿본 기분이 들자 루스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
“하지만 네가 스스로 그런 마음이 들게 할 수는 있겠지.”

잠시 내비쳤던 살기가 사라지고 그의 시선에 당당한 여유가 깃들어 있었


다. 몇 번이고 단호해지자던 루스의 마음에 다시 균열이 일었다. 도로 난처
해지는 그의 낯빛에 레이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밀어낼 거였으면 애초에 자신을 집에 들이면 안 되는 거였다. 말로는 보답
해 줄 마음이 없다는 그의 마음은 본인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발정 난 알파
와의 섹스보다도 더 짜릿했다.
“사랑해. 루스.”
레이는 그와 눈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 눈빛, 표정 그 어느
것 하나 달콤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나 녀석의 사랑은 너무도 가벼웠다.
루스는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을 막을 권리 따윈 자신에게 없었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저 사랑이 가볍게 끝이 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루스는 눈을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를 언제까지 사랑할 거지?”

레이는 질문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글쎄? 내가 너와 함께 있어도 더는 즐겁지 않을 때 까지겠지.”

CHAPTER 4.

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루스는 몇 번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그도 잠시, 밤을
새워버린 두 눈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초점을 흐려버렸다. 달각 거리
던 소리가 멈췄다. 안경을 벗어 키보드 위에 던지듯 올려놓은 손이 일 시작
전 타두었던 커피 잔을 움켜쥐었다. 손잡이를 잡자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
려주듯 서늘함이 먼저 느껴졌다. 다 식어 빠진 커피는 역시나 맛이 없었다.
루스는 미간을 좁히며 커피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밤을 샌 탓에 건조해진
얼굴을 쓸어내리자 턱수염이 까끌거렸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
느새 어둠은 사라지고 이른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스쳐 간 자리에
서늘한 공기가 아직 머물러있었다. 속이 쓰렸다.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루스는 곧바로 부엌으로 걸어가 전기 포트 뚜껑을 열었다. 반쯤 물이 남아
있었다. 도로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눌렀다. 커피를 새로 내릴까 고민하다 무
심코 선반을 열어젖힌 그의 시선이 잠시 멎었다. 망설이던 손이 곧 무언가를
꺼내 싱크대로 가져갔다. 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홍차를 끓일 때는 물의 온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랜 시간 방치해 먼지가 가득 쌓인 홍차 티팟과 잔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
고 마른행주로 닦아냈다. 어느새 물이 끓기 시작했는지 포트가 들썩이는 소
리를 내고 있었다.
「물의 온도가 적당해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적당하지 않으면, 맛은
별질 될 수 있는 법이죠.」
주전자 뚜껑을 열어 펄펄 끓은 물을 붓고 몸통을 한번 휘이, 돌려주었다.
그 물을 찻잔에 다시 옮겨 똑같이 해주자 티팟과 잔이 모두 따끈히 데워졌
다.
「차 한 잔 마시는데 뭐가 그리 까다로워?」
「까다로운 만큼 정성이 들어가면 더 맛이 좋은 법입니다.」
역할을 마친 물은 버리고 따끈한 김이 살포시 오르는 찻주전자에 찻잎을
티스푼으로 한 스푼 가득 떠 넣었다. 그리고는 한 김 식혀낸 물을 찻주전자
에 쪼르륵 붓자 홍차의 향이 방안 가득 채워졌다. 루스는 진한 차향을 잠시
느끼곤 뚜껑을 덮었다.
「너무 빨리도, 너무 오래도 지나선 안 됩니다. 그럼 맛이 덜 우러나거나
지나치게 우러나 써지기도 하거든요.」
시계를 잠깐 바라보곤 찻잔 위에 거름망을 올려두었다.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한 루스는 묵직한 찻주전자를 조심스레 들어 찻잔에 기울였다. 잘 우려
진 붉은빛 액체가 찻잔에 채워졌다.
「자, 마셔보세요.」
루스는 더욱 깊어진 향을 느끼며 입술에 잔을 기울였다.
「맛있어.」
입안 가득히 퍼지는 향이 머리를 적시며 따스했던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잘 기억해 두셨다 저도 타주시길 바랍니다. 이 티팟 세트는 선물로 드리
겠습니다.」
감겨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다시 떠졌다.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손
에 쥐어진 푸른 찻잔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윤이 나는 몸통 가운데 띠 벽
지처럼 하늘빛이 둘려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하늘의 풍경과도 같
았다. 맑은 푸름은 그를 닮아 있었다.
「내 짝사랑은 너와 달리 가벼우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처음에는 가벼웠었나?
루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가볍다기보다 그랬을 수밖에 없었다
는 게 맞을 것이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내린 한 줄기의 빛에 눈멀지 않을 이
가 누가 있을까? 그것은 이 홍차처럼 따스했고 향기로웠으며 동시에 쓰디쓴
끝 맛과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래서. 언제까지 나를 사랑할 거지?」
「글쎄? 내가 너와 함께 있어도 더는 즐겁지 않을 때 까지겠지」
입가에 쓴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자신 또한 이 마음이 더는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만둘 수 없는 걸까? 녀석의 말의 무게만큼이나 차라리
이것 또한 끝까지 가벼웠으면 좋았을 것을.
루스는 여전히 따스한 홍차를 내려놓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도로 입에 가
져갔다. 그것을 단번에 비워낸 그가 방으로 들어가 점퍼를 입고 열쇠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들어가기 직전 열쇠고리 끝의 파란 보석이 반짝 흔들렸다.
***

루스는 아파트 근처 공원을 미친 듯이 달렸다. 몇 번이고 돌고 돌아 옷이


땀에 흠뻑 젖어 들 무렵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는 고개를 젖히고 거칠어진 숨을 여러 번 골랐다. 한결 머리가 맑아지
는 기분이었다. 역시 복잡한 머리를 털어버릴 때는 달리는 게 가장 좋은 방
법이었다. 루스는 셔츠로 적당히 땀을 훔치며 점퍼를 걸쳐둔 의자로 걸어갔
다.
“……?”

분명 여기다 뒀을 텐데.
텅 빈 의자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가져갔나 보군.
없어진 건 점퍼였다. 무방비로 던져둔 제 잘못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CCTV가 잔뜩 달려있는 공원에서 대담하게 훔쳐간 놈도 참 머리가 없었다.
루스는 점퍼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핸드폰, 지갑 그
리고…… 열쇠.
혹시나 싶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루스는 이를
악물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공원 울타리 밖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작은 아이가 수상쩍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루스는 쏜살같이 달려 울타리를 단번에 뛰어
넘었다.

“ !”

하늘에서 갑자기 쿵 떨어진 커다란 덩치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


빠졌다. 훌러덩 벗겨진 모자 안으로 긴 갈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아야…….”

앓는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아이 쪽으로 그가 손을 뻗었다.


힉 가, 가까이 오지마!”
“ !

다가오는 손길에 아이는 도망치려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결국 목덜미가


잡혀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이거 놔! 소리 지를 거야!”
“질러. 경찰이 오면 누가 불리해질지는 두고 보면 될 일이니까.”

바동거리던 아이의 모든 동작이 흠칫 멎었다. 제법 눈치는 있는 놈인 듯싶


었다. 되도록 조용히 끝내고 싶었기에 루스는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곤 아이
가 움켜쥔 점퍼를 가져갔다. 작은 손이 아쉬운지 잠시 따라붙었다.
꼬마야. 남의 것에 욕심내면 안 되지.”

아이가 즉시 손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주머니


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열쇠고리 끝에 파란 펜던트가
반짝거렸다. 그것을 응시하는 시선에 안도가 담겼다. 루스는 열쇠고리를 바
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뭘 봐요? 아저씨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요?”

일부러 낮추려 애쓰지만 가는 목소리는 여성스러웠다. 거기까지 확인한


루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런 단어를 잘도 아는 녀석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내가 나쁜 마음이
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테라가 문화 수준이 높다곤 하지만 인간이 사는 건 어디나 똑같았다. 오히
려 이런 곳에서 잘못 걸렸다간 지능적인 변태를 만나 인생이 더 처참하게 꼬
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아이는 끔찍한 소리를 들은 양
사색이 되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치만 아저씨는 베타인 것 같아서…….”
“베타라도 인간 이하의 쓰레기들은 얼마든지 있어. 알파라고 위험하고 베
타라고 덜 위험하다는 그런 잣대를 가지고 있다간 네놈 인생은 돌이킬 수 없
게 끝장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지.”
계속 무섭게 다그치자 결국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울어?”
“ ,

당황한 루스는 얼른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가 더 크게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참 서럽게도 울었다. 루스는 당혹 반,
짜증 반 섞인 한숨을 내쉬며 아이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바냐. 어디야? 이쪽으로 좀 와줬으면 하는데.”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아이는 여전히 울
고 있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울고 있는
여자아이는.
참으로 매너가 꽝인 남자군.”

그때 머리 위로 한심스럽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기도 전


에 아이가 먼저 허공으로 올려졌다.
“ 착하지. 이렇게 예쁜 숙녀를 길거리에서 울리다니 정말 최악인 것 같은
데, 오빠가 아저씨 좀 혼내줄까?”
이른 아침 레이 에드윈을 마주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아이를 달래는 다정스러운 그의 모습은 전혀 낯선 광경이었
다. 거기다 영원히 울어 젖힐 것 같던 아이는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허무하
게 눈물을 뚝 그치곤 대답까지 곧잘 해왔다.
“아저씨 잘못은 아니에요. 제가… 잘못해서…….”
“그래? 그럼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해야겠지?”

부드럽게 떨어진 재촉에 아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


덕였다.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안 훔칠게요.”
“어? 어… 그래…….”
애초에 사과를 받을 생각조차 없었던 루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까딱거렸
다. 영 불편함에 시선을 돌려버리자 마주한 금빛 눈동자가 즐겁게 휘어졌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울컥한 루스는 무
심코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아이에게 선수를 뺏기고 말
았다.
오빠도 오메가에요?”

아이는 이제 언제 울었냐는 듯 활기차 보이기까지 했다.


맞아. 예쁜 꼬마 아가씨도 그런 것 같은데…….”

뒷말을 흐리며 아이를 주시하는 레이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까지 탐색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그래서 문제에요.”
“…… ,

이번에도 아이는 곧잘 대답했지만 표정은 도로 시무룩해져 버렸다. 레이


와 루스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혹시 조직에 있는 건가?”

루스가 먼저 심각하게 물어왔다. 그리곤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만약 조직


에서 데려다 앵벌이라도 시키는 거라면 감시자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이
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조직이요? 그게 뭐예요?”

주변에 별다른 기척도 없고, 아이의 모습을 보자니 일단 어딘가에서 착취


당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심 안도하는 사이 이번에는 레이가 아이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엄마는 도망갔어요. 아빠는…….”

아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레이는 옷깃을


움켜쥔 작은 손의 떨림을 느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알파인가 보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아빠는 무서워요… 아빠는…….”
“루스님?”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차에서 내린 바냐가 어느


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
고 바들바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바냐, 거기서.”

루스가 서둘러 그를 제지했다. 바냐가 주춤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


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눈길을 보냈지만 대답을 듣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내가 데려가지. 자세한 상황을 알고 나서 보내든지 말든지 결정해
야겠어.”
루스는 아이의 상태를 살피며 레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협조적일 줄 알았
던 그에게서 돌아온 건 조소 어린 비아냥거림이었다.
정말 오지랖도 태평양 급이군. 이제는 애라도 키울 생각인가?”

그럼 그렇지.
꼬맹이 한정이긴 했지만 너무 다정스럽다 싶었다. 한순간 까칠해진 레이
의 태도에 멈칫했던 루스는 정색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내 오지랖에 보태줄 거 아니면 아이 이리 줘. 넌 그만 가보고.”
“이런, 내가 여기에 산책이나 하러 온줄 알았나 보군.”

이번에도 비꼬는 투였지만 그 속에는 어쩐지 알 것만 같은 서운함이 뒤섞


여있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문제들이 다시 루스의 머릿속에 떠올려졌다. 잔
뜩 골이 나있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시선에 복잡함이 섞여들었다. 루스는
이내 아이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나를 보러 온 거겠지.”

“…….”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루스의 입에서 내뱉어지자 레이의 눈빛에 묘


한 기색이 스며들었다.
내일 다시 와. 오늘은 이 아이하고 먼저 선약이 잡혔으니까.”

본인도 말해놓고 민망했는지 루스는 괜스레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잠시 멎었던 금빛 눈동자에 조소가 차올랐다.
알파 새끼한테는 못 줘.”

날카로운 시선이 루스 너머에 서 있던 바냐에게로 꽂혔다. 그가 움찔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돌아온 시선이 다시 루스에게로 고정되었다.
“물론 내 것이 다른 오메가와 단둘이 있는 걸 용납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말이야. 앨런!”
반대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앨런이 서둘러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아이 저택에 데려놔. 제대로 상황 파악하고.”

레이는 앨런에게 아이를 떠넘기듯 건넸다.


잠깐만 그 녀석은……!”

루스는 다급히 소리쳤다. 바냐를 보고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던 아이였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앨런의 품에 안긴 아이는 조금 어색해할 뿐 무서워하지
는 않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상황에 루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앨런은 오메가야.”

그의 의아함을 읽어낸 레이가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루스와 덩달아 뒤


에 있던 바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녀석의 수행 비서라고 해서
당연히 알파일 거로 생각했는데 오메가라니…… 자동적으로 루스의 시선이
앨런을 향했다. 그도 잠시, 턱이 잡혀 다시 고개가 돌려졌다. 불쾌함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 말고 다른 오메가에게 눈길 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거친 손길에 잠깐 당황했던 루스가 바로 표정을 구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말 돼. 내 짝사랑은 질투가 심하니까 행동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레이의 목소리가 사납게 공간을 울렸다. 무슨 오메가가 이리도 힘이 센지.


잡힌 턱이 아리는 느낌이었다. 루스는 턱을 움켜쥔 손을 짜증스레 잡아떼어
냈다. 그리곤 한마디 하려다 주변의 웅성거림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일단 타지. 슬슬 보는 눈도 많아지니까.”

레이는 어느새 무심해진 얼굴로 앨런을 바라봤다.


“내 차로 움직여. 나는 다른 걸 타고 갈 테니까.”
“네? 하지만…….”

갑작스레 아이를 떠안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앨런이 놀라 말했다. 그


러나 레이는 그에게 볼일은 끝났다는 듯 시선을 돌려 다른 이를 불렀다.
너 바냐 라고 했나?”
“ .
“저… 저요?”

이름이 불리고도 멍하니 있던 바냐는 재차 내리꽂힌 매서운 눈빛에 놀라


대답했다.
“네놈 차로 이동할 테니까, 준비해.”
“어, 어딜.”
이번에도 레이는 그의 물음 따윈 무시하고 다시 루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일단 타지.”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매번 독해지자 다짐을 해도 상황은 늘 녀석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레이 에드윈은 신에게 단단히 사랑을 받는 녀석인 듯싶었다. 거기에 제물로
바쳐진 건 바로 루스 자신이고 말이다.
루스는 한숨을 내쉬며 먼저 바냐의 차로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라 레이
가 차에 올라탔다. 얼떨결에 운전석에 자리한 바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후회를 삼켰다.
그냥 알아서 운전하라고 하고 도망칠걸.
혹시나 하며 힐긋 백미러를 바라보았지만 루스가 아닌 레이와 눈이 마주
쳐버렸다. 순간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냐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좌석 옆의 버튼을 눌렀다. 분리 칸막이가 올라와 운전석과 완전
히 차단되자 레이는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네놈 비서가 눈치 하난 빨라서 다행이군.”
“너 말이야. 사람 좀 어디로 홀라당 데려가는 것 좀 그만해.”

언짢아하는 루스에게 레이의 시선이 닿았다. 코끝에 짙은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냄새.”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루스는 그제야 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금빛 눈동자가 확대
됐다.
뭐 뭐야?”
“ ,

루스는 화들짝 놀라 무심코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벌어


지지 않았다. 상체를 기울인 레이가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듯 코를 킁킁댔다.
그의 엉뚱한 행동에 당황한 루스는 엉덩이를 좀 더 뒤로 뺐다. 그러자 레이
가 또다시 따라붙었다.
“너 뭐 하는…….”
“냄새가 나.”

그제야 루스는 제 몸에 냄새를 맡았다. 코끝을 찔러올 만큼 시큼한 땀 냄


새였다.
운동하던 중이었어.”

조금 민망해진 그가 슬쩍 몸을 더 뒤로 물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집으로 가야겠어. 씻어야 하니까.”

“그래서인가? 수컷 냄새가 강해졌어.”
“수컷…….”

당혹스러워하는 루스를 두고 레이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남


자다운 굵은 선을 그리는 단단한 살결에 땀이 송글 맺혀있었다. 레이는 붉은
혀를 드러내 제 입술을 핥았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더워진 느낌이었다.
냄새. 흥분돼.”

잠시 방심한 사이 레이가 그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땀이 배어 축축한


목덜미에 부드럽고 물컹한 것이 닿는 순간 루스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자 잠깐! 레이……!”
“ ,

말릴 새도 없이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벌려져 한순간 단단한 살을 깨물어


버렸다.

“ !”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근육이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혀가 깨물린


부위를 진득이 핥자, 데워진 타액이 덧칠되며 상처가 화끈거렸다. 일순 머리
가 아찔해졌다.

“ ―.”
뜨거운 숨이 한 번 더 살결에 내리는 순간, 루스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레이를 밀어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거리를 벌리자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나른했던 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리


며 선명한 빛을 떠올렸다.
“…….”
정신 좀 들어?”

“…….”
“레이… 너…….”
“미안.”
“…….”

선뜩 그에게 사과를 던진 레이가 스스로 몸을 물려 반대편 창문에 몸을 바


싹 기댔다. 그리곤 마치 냄새를 맡지 않으려는 듯 손으로 제 입과 코를 가리
는 낯빛에는 당황과 곤란함이 잔뜩 어려 있었다. 연속적으로 의외의 반응을
목격하자 루스는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전투력이 상실되는 것을 느꼈다.
상황 설명해.”

루스는 화를 내는 대신 그에게 변명을 요구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발정기가 다가오는 것 같아.”
“발정기?”
“오메가들이 한 달에 한 번 겪는 히트사이클이야. 들어는 봤겠지? 열성은
그렇지 않은데, 우성이나 나같이 오메가의 성향을 짙게 가지고 태어난 경우
는 주기가 다가올 때쯤부터 가끔 이성을 놓을 때가 있어.”
“그거, 괜찮은 건가?”

루스의 얼굴이 심각해진 반면 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


렸다.
뭐 딱히 강하게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상 제어는 가능한데…….”
“ ,

그리곤 슬쩍 루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한테는 좀 많이 끌리긴 하나 봐. 이렇게 실수한 거 보면.”

“…….”

루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그를


향해 레이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데려가려 했는데. 일단 집에 가서 좀 씻는 게 좋겠어. 네 몸에서 지
금 페로몬이 많이 분비되고 있거든.”
“그냥 운동해서 땀을 뺀 것뿐이야.”

다시 묘해진 대사에 루스는 어쩔 수 없이 아직은 어색한 반응을 내보였다.


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 다른 의도는 없다는 거. 너야 건전한 땀일지 모르겠지만 오메가의
후각은 동물 수준이라고. 예민해진 나한테는 지금 그건 무척 매혹적인 냄새
라서 그래.”
설명을 덧붙여가며 간간이 눈썹을 찡그리는 레이는 여전히 괴로운 것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루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너희들도 곤란한 게 많겠군.”
레이가 멈칫하더니 이내 입술을 끌어당기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생긴 게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루스는 그 말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그에게 물린 건 목덜미인데
어째 다른 곳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
“ 이렇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는 레오님과 아론님 이후로 오랜만이네
요. 어쩜, 레이님은 남자 고르는 눈썰미도 최고이신지. 이분 정말 베타 맞아
요?”
세계 최고라 손꼽히는 비스포크 장인 에이드 카라는 흥분한 목소리로 연
신 루스의 주변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자네가 그리 극찬을 해주니 뿌듯하군.”

레이에게 칭찬은 어릴 때부터 늘 들어온 익숙하고도 시시한 것이었다. 그


러나 이번만큼은 그 대상이 루스라는 점에서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는 사이
즈와 디자인을 보기 위해 블랙 수트 한 벌을 임시로 입고 있었다. 맞춤이 아
니라 만족스러울 만한 건 아니었지만, 색다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 레
이의 두 눈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까
운 일이었다.
레이는 긴 소파에 앉아 준비된 샴페인을 마시며 루스의 발아래부터 천천
히 몸을 훑어 올라갔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신체조건을 가진 알파라도 꾸준
히 관리하지 않으면 당연히 볼품없는 몸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
서 베타인 그는 엄청난 노력가임이 틀림없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신체 비율은 타고났다 하더라도 성실히 관리된 태가
나는 탄탄한 근육과 피부는 슈트의 금욕적인 본연의 멋을 십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금욕의 묘미란 자고로 벗겼을 때 가치가 배가 되는 법이었
다.
레이는 저 옷들을 벗겨냈을 때 드러날 육감적인 몸매가 무척이나 탐이 났
다. 관찰의 시선이 좀 더 진득해지고 있었다. 카라로 가려진 목덜미로 올라
갔을 즘, 거기서 멈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부근에 분명 자신의 흔적이 남
겨져 있을 터였다.
아까는 실수였지.
레이의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걸쳐졌다. 처음으로 맛본 그의 살맛은 무척
자극적이었다. 탄력적인 살을 씹는 순간, 훅 끼쳐오는 수컷의 진한 체취는
그를 통째로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을 일게 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절
로 입맛이 다셔졌다. 무심코 제 입술을 핥으며 목덜미를 응시하던 시선을 좀
더 위로 움직인 그때였다. 망상에 빠진 탓에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

방금 뭐였지?
눈이 마주친 건 알겠는데 즉시 고개를 홱 돌려버린 루스의 행동에서 뚜렷
하지 않은 묘한 분위기가 스친 기분이었다.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시선을 피해버리자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레이님, 그럼 의상은 이걸로 마무리할까요?”

꼼꼼히 체크를 마친 에이드 카라가 물어왔다. 레이는 표정을 지우곤 고개


를 끄덕였다.
“기본 슈트는 방금 입어본 블랙과 네이비, 그레이로 세 벌 맞추고 곧 여름
이니까 린넨 소재로 된 슈트도 한 벌 맞추도록 하지. 카키색이 좋겠어. 그리
고 턱시도 한 벌도 맞춰놔. 이건 좀 서둘러서 제작해주고 구두는 코르테로
주문 넣어둬.”
갑자기 쏟아진 주문에 루스는 당황했다.
“잠깐…….”
“네. 알겠습니다. 턱시도는 미국에 가실 때 입으실 거죠? 레이님과 같은
디자인으로 맞춰볼게요. 아, 액세서리는 어떻게 할까요?”
“직접 고를 테니까 여기로 가져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루스의 의사는 제외하고 대화를 끝낸 에이드


카라는 바로 직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레이.”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루스가 침착하게 그를 불렀다.


일단 가만히는 있어 주긴 하지만 내가 분명 필요 없다고 말했어.”

이미 예상했던 뻔한 반응이었다. 레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것 참 고마워라. 앞으로도 나를 위해 끝까지 참아주길 바라지.”

그리고는 그의 앞에 나열된 타이들을 훑어보며 덧붙였다.


정 불편하면 내건 네가 사주면 되겠네. 돈 많다면서?”

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돈 뜯기는 건 처음이군.”

오늘은 뭐든 뜯기는 날인 것 같았다.


뭐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되고.”
“ ,

레이가 짙은 군청색 타이를 들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직접 그


의 카라에 두르며 말했다.
“이왕 내 짝사랑에 협조할 거면 그냥 받아둬.”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동안 참고 있었던 만큼 되묻는 어조가 삐딱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레이


의 표정은 부드럽고도 은밀해졌다.
“네가 거절할수록 내 사랑이 더욱 불타오르는 것 같거든.”
협박과도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협박에 먹힌 건지 고백이 당황스러웠던
건지 루스는 더는 아무런 불평도 내비치지 않았다. 레이는 능숙하게 그의 목
에 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힐긋 카라 안으로 비치는 목덜미로 시
선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열흘 뒤에 미국에서 가문 파티가 열려. 그곳에 가기 전에 어차피 턱시도
하나 새로 맞출 생각이었어.”
타이의 매듭을 정리한 그가 루스를 향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네가 선물 해주는 옷을 입고 가면 무척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넌 어떨 것
같아?”
결국엔 사내라는 이야기였다. 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애인이 준 거라고 자랑이라도 할 생각인가?”
“당연히.”
“너 말이야…….”
“그 오메가 아이는 나한테 맡기고 신경 꺼.”

레이가 불쑥 끼워 넣은 주제에 루스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여자아이를 떠


올랐다.
“그 아일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앨런이 상황을 자세히 알아볼 거야. 그 아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조치
해두지.”
“그러니까 무슨 조치를 어떻게 할 건지 설명해.”

경계하는 목소리에 레이가 입술을 뒤틀었다.


누가 보면 내가 네 딸이라도 납치한 줄 알겠어.”

레이의 얼굴에 스친 불쾌함을 읽어낸 루스는 멈칫했다. 레이가 다시 시선


을 내려 타이에 손가락을 걸며 말했다.
“삼 년 전,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 보호받지 못하는 오메가들을 케어하기
위한 센터를 만들었어. 오메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내 쪽에 훨씬 전문
가가 많아. 그러니 그 아이에게도 더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네놈한테 그 어린아이가 배울 게 있을지 궁금하군.”

루스가 살짝 비아냥거리자 레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섹스 잘하는 법이라도 가르쳐 줄까 봐?”
“ ?

반듯이 매어졌던 타이가 도로 그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 졌다. 루스는 무슨


짓이냐며 눈썹을 치켜떴다.
“확실히 차분한 색이 잘 어울리네.”
“뭐 하는 거야?”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레이는 손을 뻗어 그의 셔츠 깃을 젖혀버렸다. 위 단추가 튕겨 나가며 가


려졌던 목덜미 안쪽에 붉은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누가 보면 키스 마크인 줄 알겠어.”

끈질긴 시선만큼이나 끈적거리는 음성이 따라붙었다. 루스는 입을 달싹


였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달큼한 향기가 코끝을 찔러왔다. 이상
하게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
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상처는 치유가 빨라서 흔적을 남겨도 오래가지 않아.
그렇기에 알파는 자신의 것이라 불리는 오메가에게 각인을 새겨 영원히 사
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지.”
목덜미를 더듬는 길고 가는 손이 붉은 상흔을 건드렸다.
“지금도 여전히 각인 따윈 지랄이라 생각하지만…… 왠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
상처를 스치는 체온이 델 듯 화끈거렸다. 목 근육이 줄기를 따라 꿈틀거렸
다.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이 묘하게 감질났다.
여기 내 냄새가 잔뜩 묻어 있어.”

레이는 무심코 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선명하던 금안의 초점이 흐릿해져 있었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스는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불쑥 떠올렸다.
그만 만지고 떨어져.”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며 마주한 시선을 피해버렸지만 곧 턱이 잡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도로 끌려가 마주한 눈빛은 열기로 가득했다.
“아까부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무슨…….”
“뭐랄까… 마치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느낌이랄까?”
“…….”
루스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내뱉지 않았다. 정말 엿
같았다. 차라리 정색하며 따지는 쪽이 훨씬 나았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것 같은 그의 태도는 레이의 기분을 한없이 사납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건
사냥 본능일지도 몰랐다. 자꾸만 도망치는 상대에 대한 사냥 본능이 알파에
게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일순 금빛 눈동자에 위험한 기운이 스
며들었다. 그때였다.
레이님, 준비되었습니다.”

사람의 인기척에 견고했던 무언가 박살나듯이 공기가 바뀌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직원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얼굴을 붉혔다.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가…….”
“됐어, 가져와.”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과 손길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소파로


돌아가는 레이를 보며 루스의 입에서 숨이 터져 나오듯 짧게 내쉬어졌다. 짓
눌렸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것도 페로몬 영향인 건가?
차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순간 완벽한 무기력에 빠져버렸다. 빠르게 전
신을 지배해온 감각들을 다시금 떠올리자 루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
워졌다. 그사이 에이드 카라가 나머지 직원들과 함께 액세서리를 테이블 위
에 나열했다. 일렬로 늘어선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고르며 지시를 내리는 레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스가 걸음을 옮겼다.
나도 같이 보지.”

“…….”
거기서 네 것도 골라. 주고받는 거라도 확실히 해두자고.”

자연스레 자신의 옆자리로 다가선 루스를 바라보며 살짝 뜨인 두 눈이 부


드러운 미소를 담은 그때였다.
「이년이 미쳤나!」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얼른 발을 뗐지만 그보다 루스가 한 발 빨랐다. 레이가 바로 그를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VIP룸을 벗어나 숍 입구에 도착하자 누가 봐도 알
파와 오메가로 보이는 두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알파에게선 난폭한 기운
이 느껴졌고 바닥에 주저앉은 오메가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도 주변의 직원과 수행원은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루스의 눈빛이 싸늘
해졌다.
야 내가 분명히 다른 새끼한테 꼬리치고 다니지 말랬지? 이 발정 난 암
“ ,
캐가 어디서!”
아직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알파는 제 분에 못 이겨 다시 오메가에게
손을 올렸다. 그러나 즉시 루스에게 제지당했다.
너 너 뭐야?”
“ ,
“그러는 당신은 뭐지?”

묵직하게 깔린 위압적인 목소리에 알파는 잠시 주춤했다.


도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 ,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저 남자를 때리냔 말입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알파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자격 있지, 저년은 내 건데.”

또 ‘년’이군.
아무래도 알파 놈들은 오메가의 성별 따윈 무시하기로 한 듯했다. 루스는
불쾌함을 느끼며 중얼댔다.
“한 인간을 네 것, 내 것 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만.”
“웃기지 마! 네놈도 저년에게 홀라당 넘어간 것 같은데, 쟤는 이미 나한테
각인된 년이야.”
“그 ‘년’이란 말 좀 그만 쓰시죠. 듣기 안 좋군요.”
한층 매서워진 목소리에 알파는 또다시 움찔했다. 저놈은 도대체 정체가
뭔데 자꾸 밀리는 기분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딱히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를 보내왔
다. 알파는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정체도 모를 놈
때문에 체면을 구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으레 그랬듯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 눈의 색을 달리했다. 한순간 알파
의 페로몬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오메가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제 공포까지 느껴지는 오메가의 모습에 루스의 눈빛이 가
라앉았다. 그사이 페로몬으로 무장한 알파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그에게
경고를 날렸다.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웃기는 새끼네. 너 뭐야? 어디 가문 소속이
야? 감히 나, 티오네…….”
“뭐긴, 뭐야? 내 거지.”

뒤에서 들려온 오만한 음성에 루스는 그제야 룸에 두고 온 누군가를 떠올


렸다. 알파는 저건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다 곧 경악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레 레이… 에드윈… 님?”
“ ,

이름까지 부르다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금빛 눈동자에 알파는 재빨


리 ‘님’자를 붙였다. 루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금까지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무례하게 굴던 놈이 태도를 달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자신을 희롱해대는 저 남자가 알파의 지배세력
가문 중 하나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라는 것을 말이다.
루스, 일단 그 손 놔.”

레이를 명령조에 루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처음엔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의 얼굴엔 단둘이 있을 때의 장난스러움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자신
을 향한 눈빛에 깃든 무심함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레이 에
드윈은 진심이었다. 루스는 결국 알파의 손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대신 쓰러
진 오메가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자 오메가는 당황하며 알파의 눈치를 살폈다.


이 새끼가, 너 손 안 치워!”

잠시 누그러졌던 알파의 기운이 다시 사나워졌다. 레이가 쯧, 혀를 차며


재차 녀석에게 상기시켰다.
“그 새끼가 내 거라니까.”
“하, 하지만…….”
알파가 다시 기를 죽이며 눈치를 살폈다. 일주일 전, 레이 에드윈에게 밉
보인 알파가 완전히 매장당했다. 그러니 그를 대함에 있어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화내랴 눈치 보랴 알파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레이는 루스 곁으
로 다가갔다.
비켜.”

그리곤 대신 오메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 …….”
“차가운 곳에 오래 앉아 있는 건 좋지 않아.”

망설이던 손이 그제야 내밀어졌다. 레이는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우곤


붉게 부어오른 뺨을 살폈다.
이건 좀 별로군.”

혀를 차며 알파를 향해 돌려진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제 제가 좀 화가 날 일이 있어서.”
“ ,

변명이라고 내어놓은 머저리 같은 소리에 레이는 차게 웃으며 중얼댔다.


조심해야지. 같은 오메가로서 이런 대접은 마음이 편치 않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각인까지 했으면 그 마음이 무척 애틋할 거 아닌가?”
“그럼요. 하하하…….”

어색하게 들리는 가증스러운 웃음에 루스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


다.
왜 저런 놈과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레이의 대화는 여전히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옷을 맞추러 왔나 보군.”
“아, 네. 그렇습니다. 이번 가문 파티 때 입고 갈 의상을 맞추러 왔습니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그런데.”
“그, 그렇습니까? 이거 영광이군요.”
“이왕 온 김에 이 아이의 옷도 한 벌 맞춰주는 게 어떤가?”
“아, 그렇군요. 역시 같은 오메가시라 세심하십니다. 이리 오거라.”

알파가 오메가를 향해 다정스레 손짓했다. 루스는 일순 헛웃음을 칠 뻔했


다. 레이가 흘리는 달콤함에 푹 빠진 건지 알파는 홀라당 벗겨 먹어도 기뻐
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를 힐
긋 바라본 오메가가 알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
다다랐을 즘 얼굴에 살짝 두려움이 스치는 걸 목격한 루스가 무심코 발을 내
디뎠다.
우리는 이제 가보도록 하지.”

그의 걸음을 막아선 건 레이었다.
“액세서리는 에드윈 본가로 보내주면 그때 고르도록 하지. 나머지는 그대
로 진행해.”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에이드 카라에게 지시를 내린 레이는 뒤에 있
는 루스를 눈짓하며 말했다.
“내 의상은 이 사람 이름으로 청구해 놓고.”
“네… 알겠습니다.”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에이드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마지막으


로 알파와 오메가를 바라봤다.
“에드윈 가주는 언제나 가문 알파에게 무한한 관심을 보낸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이름뿐만 아니라 평소 행실에 관한 것들도 아주 꼼꼼히 말
이지.”
금빛 눈동자가 서늘한 웃음을 날렸다.
“나는 그대들과 되도록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하하…… 그렇죠. 그래야죠.”
한껏 풀어졌던 얼굴에 긴장이 내비친 걸 보니 말귀는 알아들은 듯싶었다.
레이는 루스를 힐긋 쳐다보았다. 착 가라앉은 얼굴에는 잔뜩 불만이 어려 있
었다. 레이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며 무심히 말했다.
“가지.”
옆에서 당황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레이는 그가 뭐라 하기 전에 곧장 건
물을 빠져나왔다. 한정된 고객만이 이용하는 곳이었기에 출구까지 비밀스러
운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 건물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쯤 레이는 줄곧
움켜쥐고 있던 루스의 손목을 툭 내려놓으며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기다려!”
빠르게 앞질러가는 레이를 따라잡은 루스가 그를 돌려세우며 따지듯 물
었다.
“저걸 가만히 두고 가겠다는 건가?”
“안 그러면?”

레이가 무심히 되물었다.


“저러고 가면 저놈이 다시 폭력을 쓰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
지?”
“장담 못 하지. 원래 개새끼는 죽어도 개새끼니까.”
일단 지켜보겠다고 언질을 줬으니 조심 정도는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뀌
는 건 크게 없을 거였다.
왜 이번에는 저 오메가도 책임질 생각이었어? 참 대단한 오지랖이야.”
“ ?

레이의 비꼬는 태도에 루스의 얼굴이 기어이 일그러졌다.


“너는 같은 오메가로서 저 녀석이 걱정되지 않는 건가?”
“뭘, 모르면 가만히 닥치고 있어. 저 오메가는 이미 강제 각인 된 상태야.”

그의 손을 뿌리친 레이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루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포기하겠다고? 저놈 것이니 더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참 네놈들은 웃기는 논리에 파묻혀있군.”
“저놈을 족친다고 해서, 저 아이가 자유로워질 것 같아?”

한층 사나워진 목소리가 공간을 낮게 울렸다.


“잘 들어. 강제 각인은 세포 하나까지 한 놈만을 기억하는 거야. 마음은 그
렇지 않다고 해도 육체는 오직 그만을 원하게 되지. 그걸 거부하는 순간 기
다리는 건 오직 죽음뿐이야. 그렇기에 저 오메가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긴
커녕 먼저 그 새끼 눈치를 본 거다. 버림받을까 봐.”
이게 바로 오메가들의 현주소였다.
“…… 풀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건가?”
너무나도 그 다운 질문에 레이는 웃음이 났다.
있을 리 있나. 있어도 알파들이 퍽이나 알려주겠군.”

애초에 연구실을 차려도 우성알파를 어떻게 하면 더 생산할 수 있는 지에


나 돈을 퍼붓는 녀석들이었다. 그나마 제 것에 대한 집착의 대가로 만들어
놓은 게 억제제였다.
“내가 오메가들을 위한 센터를 짓기 전까지 그 어디에도 오메가를 위한
시설 따윈 제대로 있지도 않았어.”
형식적으로는 정부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여러 가지 법과 제도
를 만들었다지만 그것들로는 힘과 권력을 가진 놈들로부터 절대 오메가를
보호할 수 없었다.
“각인하든 않든 오메가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육체에 대한 권리 따윈
없었어.”
오직 원하는 사람에게만 발정할 권리,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해서 함께할
권리 따윈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그 누가 됐든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해
야 했고 때가 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발정하며 누군가의 품에 안겨야만 했
다. 그걸 거부하는 순간 뒤따르는 고통은 처참할 정도로 끔찍했다.
“ 그 빌어먹을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 무력감
을,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태를 네놈들이 한 번이
라도 겪어 본다면 왜 포기 하냐는 그따위 말은 절대 꺼낼 수 없을 거다.”
“레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알파들에게 오메가가 천한 취급을 받을 때 베
타인 너희들도 똑같은 시선으로 우릴 봐왔지. 발정 난 암캐, 알파의 씨받이,
저들이 저렇게 된 건 다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라면서 말이야.”
“…….”
“말해봐. 오메가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지를.”
루스는 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침묵한 채 괴롭게 이지러지는 얼굴
을 보고 있자니 레이는 불편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화풀이
였다. 누구에게도 뱉어내지 못한 끔찍한 말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놈한테
쏟아 붓고 있는 거였다. 멈춰야 하는 걸 아는데 이미 시꺼메진 속은 멈출 줄
몰랐다.
최악이군.
레이는 실소를 터트리며 머리를 짜증스레 쓸어 넘겼다. 긴 금빛 머리카락
이 바람에 한숨과 함께 마구 흐트러졌다.
레이님.”

그들 곁으로 다가온 건 앨런이었다. 대화가 들렸을 것 임에도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지금 본가로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앨런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루스의 곁


을 지나치듯 다가섰다.
“어차피 너희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가져야 하는 오메가의 삶
의 공포를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러니…….”
레이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끝내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어설픈 연민 따윈 집어치워.”

***

어 루스님. 살아 돌아오셨네요.”
“ ?

그 말에 루스가 두 눈을 매섭게 치켜뜨자 바냐는 흠칫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살아오실 줄은 알았지만 그분이 워낙 루스님 바라보는 시선이 뜨
거워서 홀라당 잡아먹힐 줄 알았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집에나 가.”

루스는 거실로 성큼 걸어가 점퍼를 테이블에 짜증스레 던지곤 안락의자


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무슨 일 있었네.
잡아먹히진 않았어도 저 자존심에 크게 찔린 일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릴걸.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홀라당 튀어버린 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바냐
는 슬며시 눈치를 보며 루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그의 목덜미에 시선이
꽂혔다.

“ !”

얼른 입을 막았지만 루스의 날 선 시선은 이미 바냐에게로 꽂혔다.


“또 뭐야?”
“아니, 그게… 혹시 커피 타드릴까요? 아님, 홍차?”

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제대로 탈 수 있는 게 있었나?”
“왜요? 저도 잘 탑니다. 이래 봬도 마틴님께… 흡!”
반박하던 바냐가 다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를 바라보던 루스의 눈이 한
층 더 매서워졌다. 하여튼, 이 입이 방정이지. 지금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금기
어를 꺼낼 뻔한 바냐는 입을 막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역시 화제전환
에는 일 얘기였다.
“루스님, 요새 증시상황에 대해서 보고 드릴까요?”
투자를 전문적으로 해왔던 루스에게는 제일 솔깃한 이야기일 것 같았다.
바냐는 어떠냐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
다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알고 있어.”
“네?”
“전부 체크하고 있었다고. 어차피 카페도 못 나가니 심심해서 한번 둘러
봤지.”
바냐가 의외라는 듯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델핀 캐피탈 주식이 완전 똥이 되었더군.”
루스가 스치듯 중얼거렸다. 그쪽으론 투자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지만 이
유는 궁금했다. 다시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바냐가 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
다.
“초기 투자자였던 7가문에서 전부 자금을 회수했거든요. 조만간 상장 폐
지 될 거고 그러면 휴지 조각될 날도 얼마 안 남았죠.”
바냐의 설명에 루스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놀라 물었다.
“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거야? 몇 달 전만 해도 상태는 괜찮았잖아.”
“루스님은 그 유명한 사건도 모르십니까?”
“몰라서 묻잖아.”

바냐가 루스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체크하고 계셨다면서 인터넷 뉴스도 안 보고 아예 도를 닦고 계셨나 봅
니다. 누구는 무책임한 인간 덕분에 일 더미에 파묻혀 죽는 줄 알았는데요.”
저걸 그냥 다시 보내버려?
루스의 찰나의 갈등을 읽었는지 바냐가 재빨리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델핀 캐피탈 창업 멤버 중 한 명이 나흘 전 레이 에드윈에게 큰 실수를 저
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실수?”
“자선 파티에서 그에게 암캐라고 모욕을 줬답니다.”

루스의 얼굴에서 일순 표정이 사라졌다.


“암캐라니. 요새도 그런 말을 쓴단 말이야?”
“뭐, 줄긴 했지만, 딱히 법적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암흑가나 오
메가를 천대하는 가문 알파들에게는 종종 담기는 언어죠.”
하긴 그 자식도 쓰곤 있었지.
루스는 조금 전 의상실에서 만난 놈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그의 심기
를 아직은 알아채지 못한 바냐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어쨌든 레이 에드윈이 그 자리에서 알파에게 개 쪽을 주고 비서한테 자
금회수를 명했다고 합니다. 그 뒤 한 시간 후 바로 회수가 이뤄지고 다른 가
문들도 너도나도 따라서 회수한 거죠. 그 결과 회사가 개 망한 겁니…… 루
스님? 듣고 계신 거죠?”
그제야 바냐는 루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루스님?”
“이름.”
“네?”
“레이 에드윈에게 모욕을 줬다는 그 머저리 이름말이다.”

서늘하게 굳은 그의 눈빛에 바냐는 움찔하며 대답했다.


“닉키…… 마네토입니다.”
닉키.”

루스는 놈의 이름을 뇌까리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 자식 내가 말한 쓰레기 아니야?”

바냐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미성년 오메가까지 건드려 임신시켰던 쓰레
기죠. 그래서 루스님이 거기다 투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러고 보
니 놈이 저질렀던 짓이 이번에 투자회수건과 함께 신문에 났더라고요. 완전
생매장 급이죠. 들리는 이야기엔 지금 병원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몹쓸
아랫도리가 아주 박살이 나서 말이죠.”
루스가 투자할 때 가장 먼저 조사하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누구냐, 였다.
CEO든 이사급이든 창업자든 상관없었다. 그들의 인간성에 용납되지 못하
는 부분이 있다면 아무리 이득이 나는 투자라도 루스는 과감히 포기했다. 돈
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기본적인 그의 가치관 문제였다.
“그때 루스님이 델핀 캐피탈에 대해 언급했던 말을 기억하고 투자를 포기
했던 일부 투자자들에게 감사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희야 감정적으로 처리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았네요.”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 돈을 쥐는 꼴이 보기 싫어 경제주간지 인터뷰에서
일 년 안에 델핀 캐피탈은 망할 거라는 말을 흘렸었다. 루스는 코웃음을 치
며 말했다.
“운도 실력이야. 내가 이거라도 없었으면 알파들 사이에서 돈이나 벌 수
있었겠어?”
자신감 넘치는 그의 발언에 바냐는 바로 수긍했다.
그렇죠. 루스님의 눈물겨운 성공기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길거리 소년이었던 루스와 바냐를 거둬 키운 사람은 알파였다. 그가 가진


부와 권력 명예는 감히 그 어떤 가문의 알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
났다. 그는 두 사람이 자라는 동안 모든 것을 베풀었지만 모든 것을 쉽게 쥐
어 주지는 않았다. 베타인 루스가 현재 웬만한 가문 알파보다 어마어마한 재
산을 보유하고 있는 건 온전히 그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베타라는 이유
로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바냐는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일단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많은 일이 있으셨던 것 같으니 푹
쉬세요.”
바냐는 얼른 인사를 마치고 현관으로 몸을 틀었다.
바냐, 부탁이 있어.”

바냐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누굴 좀 조사해줬으면 하는데…….”

뒷말을 삼키며 주저하는 그의 모습에 바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말씀하세요.”
“그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간관계나 살아온 환경 같은 거면 돼. 그
냥…… 깊이 파고들지 말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정도로만 알면 되는
데…….”
바냐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늘 말에 걸림이 없던 그가 저렇게나 조심스러
워하는 상대가 도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누굴 조사하면 되는 거죠?”

루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레이 에드윈.”

***

레오 펜덴 기업 본사 맨 꼭대기 층.
아론의 집무실로 레이가 쳐들어온 건 막 해가 저물 즘이었다. 쳐들어온다
는 게 고상한 표현은 아니긴 했어도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그에게는 이보다 더한 말을 붙여도 상관없을 듯싶었다. 레이는 들어오자마
자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아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까지 지켜본 아론
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로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가문 회의.”

로이가 입을 움직여 대답하곤 불안한 눈빛으로 레이를 곁눈질했다. 아론


은 그제야 알겠다며 그들이 들어 올 때부터 내내 지었던 짜증을 지워버렸다.
그리곤 약간의 걱정을 보탠 시선으로 레이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
“기분은 어때?”
“좆같지.”

역시나.
몇 세기를 넘게 명맥을 유지해오는 7가문을 지탱하는 것은 각 가문을 통
치하는 가주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알파 가문은 각 국가마다 당
주가 따로 있었다. 전체 가문을 통솔하는 테라 가주만큼의 영향력은 아니지
만, 각국에 있는 에드윈 가의 사업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는 그들은 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참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 에드윈이 가문의 가주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그들의 참견할
권리는 쓸데없이 남용되고 있었다. 알파의 수명이 평균 이백년인 것을 생각
하면 세대교체는 거의 한 세기에 한 번꼴로 이루어질까 말까 했다. 그러나
전대 가주이자 현 알파의 수장인 레오 에드윈이 고작 몇 십 년 만에 레이에
게 가주자리를 물려준 상태였고 현재 각국의 에드윈 당주들은 거의 백세를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오래된 자일수록 전통과 관습을 앞세운 고
지식함은 대단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오메가가 가주자리에 오르는 것에 처음부터 반발했었고 현재도
레이를 가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전대 가주가 역임하는 동
안에 전혀 갖지 않았던 회의를 밥 먹듯이 가지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아
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테라를 방문해 레이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 이유는
뻔했다. 레이의 이번 스캔들을 빌미로 모인 자리였을 게 분명했다.
아론 또한 그 일로 인해 레오 펜덴 회사의 주식이 떨어지고 있다는 둥 가
문의 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둥의 항의 전화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가문
이름을 앞세워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작자들이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당하는 당사자의 기분이 달라지는 건 아닐 터였다.
아론은 한숨을 쉬며 서류에서 아쉬운 손을 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기
등등한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으니 그때까지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있
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감히 천한 베타와 붙어먹느냐며 난리도 아니더군. 저들 눈에는 자신들
빼면 모든 인간이 천해 보이나 봐.”
“그래서. 너 설마 거기다 난리 치고 온 건 아니겠지?”

차분하던 아론의 목소리에 불안이 일었다. 그제야 레이는 눈을 뜨며 정면


을 바라봤다. 깊게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론은 전
신에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옆에 서 있던 로이 또한 숨을 삼켰다.
“살기 좀 거두고 진정해. 순간 주먹 날아갈 뻔했잖아.”
지금껏 녀석을 봐왔지만 이럴 때면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게 적나라하게
와 닿아 섬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에 녀석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날이었다. 아론의 날 선 경계에 레이가 코웃음 쳤다.
“해봐. 누구 하나 물어뜯고 싶었는데 그게 너라면 주변 시끄러울 일은 없
겠네.”
“너 가끔씩 그렇게 막 나가는 거 고치라고 했지. 네가 힘으로 정말 나한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레이가 알파들 사이에서 지금껏 당당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페로몬이었다. 어릴 적부터 극우성 알파인 그의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페로몬을 제어하고 쓰는 법을 훈련받아온 레이는 현재 오메가의 페로몬으로
알파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핏줄이 진하게 섞인 가족끼
리는 서로의 페로몬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이의 페로몬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아론으로서는 극 우성 알
파 다음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알파일지도 몰랐다. 물론 아론이
형제에게 힘을 쓸 일은 절대 없었다. 그건 레이도 잘 알고 있었다.
“빨리 가문 알파하고 결혼해 애나 낳으라고 하더군.”
“…….”
아론은 즉시 로이를 쳐다봤다. 저 말이 진짜냐고 묻는 눈빛에 로이는 착잡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지랄도 풍년으로 해댔나 보군. 그래서 진짜 한바탕 한 거야?”

아론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


어들이 총출동했으니 이번에 난리를 치고 왔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
는 상황이었다. 하긴, 녀석의 성격에 지금까지 참아온 것도 용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현재까지 가문과 기업을 운영하는데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쥐고 흔들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다른 곳에서 부리는 지랄을 오직 늙은 구렁이들이 모인 곳에서
만큼은 내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에 있는 가문을 통합하고 이끌기 위해서는
아직은 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물론 레이는 그동안 겪은 수모를 꼬박꼬박
기억해 이자까지 불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을 것이 불 보
듯 뻔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걱정 마. 고분고분 잘 새겨듣고 대답도 잘 하고 왔으니까. 그리고 나보고
당장 루스를 정리하라고 하더라고.”
루스.
지금 이 모든 사달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이 나오자 아론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가장 신중하게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정체
불명 베타의 등장은 모든 일을 흩트려 놓고 있었다. 오늘 일만 보더라도 아
론은 그 베타 남자를 그리 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한 건가?”
“했지. 내 눈앞에 싱싱한 극우성 알파를 데려오면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
는 애도 낳아준다고 하니까 입을 싹 닥치더군.”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살기는 노골적인 분노보다 훨씬 음침했다.
아론은 로이를 향해 잠시 나가있으라 눈짓을 보냈다. 심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로이가 조용히 몸을 물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론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너 그러다 정말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
“ ,
“여태껏 소식도 없던 놈이 잘도 나타나겠군.”

레이의 비꼬는 어조에 아론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언제는 발현자가 예고하며 나타났는지 알아? 역대 극우성 알파들의 시
기는 아무도 종잡을 수 없는 법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어디선가 발현될지 모
르는 일이라고.”
극우성 알파와 오메가는 태어날 때부터 그 자격을 가지지 않았다. 오직 발
현으로 세상에 나오기 때문에 어릴 때 그들은 베타일 수도 아니면 열성 우성
의 유전자를 가진 알파 오메가일 수도 있었다. 레이만이 온전한 극우성으로
세상에 태어난 가장 최초의 오메가였다.
발현에 관해선 7가문의 가주와 그 후계자만이 알 수 있는 극비사항이었
다. 서열로 따지면 원래 아론도 몰라야 했다. 그러나 가주가 가문 최초 오메
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아론은 함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자랐다. 그렇기에 레이와 이 사실을 공유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측
근임에도 로이를 밖으로 내보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아주 모를 일은 또 아닐 수 있지.”
아론의 주장에 레이가 반문하고 나섰다.
“아버지도 스무 살, 가장 늦었던 울프도 서른 살에는 발현을 마쳤어. 내 나
이 벌써 스물일곱 살이야. 그동안 많은 녀석을 만났지만 그런 낌새를 보이는
놈 따윈 눈에 띄지도 않더군. 극우성 알파와 극우성 오메가가 정말 운명의
상대라면 이때쯤엔 나타나 줘야 예의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있는 생에는 나타날 운명이 아닐지도 모르지.”

운명이란 소린 질겁하던 인간이 요새 기사에 한 번 써먹더니 아주 걸핏하


면 부르짖고 있었다. 아론은 피로한 기색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때는 정말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 그때는 베타 그 녀석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문제야.”
“그때는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일이야.”
“레이.”
“걱정 마. 어차피 그 녀석도 한번 자고 나면 더는 볼일 없어.”

이건 또 무슨…….
아론은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레이를 쳐다봤다. 이른 아침
부터 베타 녀석 집에 드나들며 조식까지 얻어먹었다는 녀석의 행동을 일주
일째 비서를 통해 듣고 있었다. 거기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옷을 바
쳤다는 보고까지 들었다. 최근 들어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이는 녀석을 보면
서 레이가 사랑에 빠졌다는 로이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저리 태연한 얼굴로 무슨 개 소리란 말인지.
“그럼 녀석과 그 짓 한번 하기 위해 지금 이런 골치 아픈 짓을 벌이고 있다
는 거야?”
“…….”

레이는 침묵한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이미 녀석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다면 아론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만 했다. 그의 잔
소리는 다시 시작되었다.
“레이. 그 녀석은 베타야. 알파와 다르다고. 지금껏 네가 이놈 저놈 하루에
몇 번씩을 갈아타도 그 대상이 알파니까 문제가 없었던 거야. 하지만 베타는
달라. 우리보다 인간의 정에 쉽게 휩쓸리는 녀석들이라고. 너 요즘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 정성을 쏟던데, 그러다 그 녀석이 널 진짜로 좋아하기라도 하
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고 극우성 알파가 나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갈아탈 거라고? 이든은 어떻게 볼 거야?”
지금까지 무심한 반응을 보이던 그가 어머니의 이름에 움찔했다. 아론은
그럼 그렇지 하며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레이. 이건 너답지 않은 짓이야.”
“나 다운 게 어떤 건지 모르겠군. 오메가답기라도 해줘야 하는 건가?”

조소하던 레이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과학이 말도 안 되는 곳까지 발전하고 베타들은 남녀평등을 외치고 동물
의 권리까지도 보호받고 있는 시대야. 그런데 오메가에 대한 인식은 빌어먹
을 원시시대에 여전히 머물러 있지. 정말 웃기지 않아?”
“…….”
“좆도 모르는 인간들은 내가 가주자리에 올라 오메가의 위상이 달라졌다
고 말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정작 바뀐 건 하나도 없어. 여전히 알파와 베타
심지어 같은 오메가조차 오메가는 여전히 발정 난 암캐 그 이상 이하도 아니
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리고 자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투자와 사업을 성공시키고 재산을 불려줘도 저들은 내 앞에
서 고상한 척 나를 예우해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내가 누구와 그 짓을 할지
아니면 언제 누구의 소유물로 전락할지, 과연 내 뱃속에서 나올 아이는 극우
성일지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는 게 좆같은 현실이야.”
이렇게 좆으로 시작해 좆같이로 끝나는 게 바로 오메가의 현실이었다. 그
러니 알파가 아닌 이상에야 극을 붙이고 태어났다는 것이 운이 좋다고 볼 수
없었다. 아버지 레오 에드윈의 절대적인 힘과 자신을 정상적으로 사랑해준
어머니 이든 그리고 그의 품에서 그나마 정이란 걸 배우며 커온 자신의 형제
들이 없다면 레이는 진즉에 실험대 위에 올려져 수시로 피가 뽑히고 씨받이
가 되어 죽을 때까지 아니면 자신을 구해줄 극우성 알파를 기다리며 세상을
저주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런 세상이었다면 애초에 극우성 오메
가로 태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내용과 달리 담담하기 그지없는 레이의 말투는 자칫 마음을 담지 않을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면을 향한 금빛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들
끓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오메가에 대한 알파들의 인식이 몇 십
년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레이를 가만히 마주하던 아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네가 살고 있는 가문의 세계가 유독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면도 없지 않아. 분명 세상은 오메가들에 대한 인식이 좋
아지고 있고 그들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젊은 알파들도 점점 많이 늘어나고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진작 이 세계에서 끌려 내려졌을 거다.”
아론은 그 분노에 동의했지만 결코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들
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분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레이 모든 게 좋을 순 없어. 네가 말하는 이런 좆같은 상황에서 너는 충분
히 많은 것을 이뤄왔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들에겐 방황 따윈 사치였다. 시간은 금이었고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처럼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그걸 알기에 레이는 바로 아론
을 찾은 것이다.
“아론, 이리와.”
레이가 손을 뻗자 아론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레이
는 아론의 뺨을 사랑스럽게 감싸며 아이를 어르듯이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 난 너와 함께 많은 것을 이루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하지만
한계는 있어. 그건 너도 잘 알겠지?”
“그래, 그래서 이 좆같은 계획을 세운 거잖아?”
“맞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만약 극우성 알파가 나타나면 우린 계
획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야.”
레이는 아론을 바라봤다. 자세히 뜯어보면 아버지를 닮은 얼굴이었지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 성격을 가진 그는 현존하는 우성 알파 중 가
장 뛰어난 힘을 지닌 알파였다. 그건 알파 가문의 가주들 또한 어느 정도 인
정하고 있는 바였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극 우성 알파로 발현되는 건 너일 수도
있겠지. 그게 아니라도 아버지 다음으로 알파의 수장이 될 확률은 가장 높은
건 바로 너야.”
레이는 아론의 목을 끌어안으며 애틋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되면 넌 꼭 약속 지켜.”
“알고 있어.”
“다음 대의 지배자는 꼭 나를 위해 존재해줘야 해.”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그 녀석은 어쩔 거지?”

루스가 거론된 순간 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아론의 집요한 눈길


에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루스를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그
도 나로 인해 상처받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아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가 나를 좋아할 리는 절대 없을 테니까.”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라 창문을 열어둔 상태였다. 루스는 서둘
러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들이친 빗물이 선반에 고이고 있었다. 덕분에 작
은 정화식물은 물기를 머금고 싱싱한 푸른빛을 뽐내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걸어두었던 열쇠는 수난이었다.
루스는 창문을 닫고 젖어 든 열쇠고리를 들어 올렸다. 파란 펜던트가 물기
에 반짝였다. 그리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그냥 열쇠가게 길 옆 가판대에
진열돼 있던 것을 충동적으로 집어 든 것뿐이었다. 파란 돌조각에 고인 빗물
이 손바닥으로 흘러 기어이 소매를 적셔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찹
찹함이 어렸다. 저것은 단순한 빗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끈적거리고 무거울 수 있을까?
저것은 마치 자신의 몸속에서 집착과 미련으로 점철된 끈질긴 미련 덩어
리가 만들어낸 점액질과도 같았다. 그것이 기어이 차올라 살갗을 뚫고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어떻게 하면…….”

루스는 뒷말을 삼키고 손에 들린 열쇠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쿵쿵쿵.
“…….”

시끄럽지도 조심스럽지도 않는 두드림이었다. 늦은 밤이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짐작 가는 이는 한 명 있었다.
시간의 예의와는 연을 두지 않는 이.
그렇지만 오늘은 아닐 수도 있었다. 오전에 헤어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루스는 열쇠고리를 젖은 창가에 도로 올려두며 현관으로 걸어
갔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도 한번 울린 문소리는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루스는 늘 그랬듯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안녕.”

루스의 얼굴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이다 사라졌다. 처음에는 어색하


기 그지없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낡은 복도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만
큼은 다른 감상을 안겨주고 있었다.
늘 완벽하던 슈트와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젖어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당
당하던 모습 대신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레이의 위태함은 루스의 마
음을 슬며시 건드려왔다. 어딘가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 들어와.”
루스는 문을 완전히 젖히며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이번에도 쉽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쉽게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다.
다 젖어버렸는데.”

그의 발아래로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차를 타고 온 게 아닌가?”
“내리자마자 비가 내렸어. 그래서 좀 맞았지. 잔뜩 비 맞은 고양이 새끼는
누구라도 들여보내 주기 마련이거든.”
루스의 눈가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습관처럼 한마디 보태려 했지만 정말
비 맞은 고양이 새끼 같은 얼굴에 한숨만 내쉬어졌다.
일단 들어가. 바닥이야 다시 닦으면 되니까.”

턱짓으로 거실을 가리키자 레이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을 내며


유유히 거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자기 집인 양 무척 익숙했다. 그것을 뒤에서
심란하게 바라보던 루스가 걸음을 빨리해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수건을
갖고 나와 레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안쪽 욕실로 바로 들어가 씻어. 갈아입을 옷은 앞에 둘 테니까.”

레이는 이번에도 순순히 수건을 받아들고 방안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따


라 조용한 그의 행동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문득 떠올린 오전 일이 모든 것
을 합리화시켰다. 문이 닫히고 곧 샤워기 물소리가 들렸을 때야 루스는 옷장
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속옷과 간편한 티와 바지
를 꺼내 욕실 앞 바구니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리곤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다 멈칫한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방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부지런히 움직여 창고에서 밀대를 꺼내온 루스는 거실 바닥까지 길게 늘
어진 젖은 발자국을 응시했다.
「잔뜩 비 맞은 고양이 새끼는 누구라도 들여보내 주기 마련이거든.」
루스는 쯧, 혀를 찼다.
사람이 어떡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지를 귀신같이 아는 녀석이었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측은하게 볼 수 없는 인물이 정말 측은해져버린 순
간 루스는 더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미간에 잔뜩 잡힌 주름이 그 수를 늘
려갔다. 어느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샤워기 소리가 방안을 더욱 크
게 울리고 있었다. 루스는 묵묵히 바닥의 물기를 닦아나갔다.
***

“마셔.”
루스는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그의 앞에 무심히 내려놓았다. 레이는
자신 앞에 놓인 홍차 잔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커피가 아니네?”
“ 곧 잠잘 시간이야. 가볍게 마셔.”
무심한듯해도 세심한 그의 배려에 레이는 옅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청색 띠를 두른 그 위로 아기자기한 문양이 새겨진 잔은 고급스러웠다.
“비싸 보이는데.”
“선물 받은 거다.”

가벼운 대꾸에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제로 그는 이 홍차 잔의 브랜드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직계는 아니지만
300년 전 폭스 가문의 사람이 설립한 홍차 전문 회사에서 나오는 도자기 제
품이었다. 에드윈 본가에도 이곳에서 맞춤으로 제작한 티팟세트를 여러 종
류 소유하고 있었다. 조금 낡긴 했지만 이것도 맞춤으로 제작된 찻잔이 분명
했다. 이곳 회사에서 티팟 세트를 맞추려면 그 자격이 최소 알파 가문 소속
은 되어야 했다.
“ 이걸 선물해 준 사람도 저 서랍 물건의 주인과 동일 인물인가?”
부엌을 정리하던 루스의 손길이 뚝 멈췄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반응이었
다.
“ 최악이군. 자기를 짝사랑하는 사람한테 이런 물건이나 건네주고 말이
야.”
“그냥 찻잔일 뿐이야.”
정말 무정한 베타라니까.”

도대체 뭐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루스의 눈가가 기어이 파르르


떨렸다.
“더운물 끼얹고 따끈한 게 뱃속으로 들어가니까 살만해졌나 보군. 그럼
이제 비서한테 전화해서 네놈 데리고 가라고 해.”
“재워줄 거 아니었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대꾸해오자 루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누가 그래?”
“목욕에다 속옷에 티까지 친절하게 건네주기에 그런 줄 알았지.”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까 봐 그런 것뿐이야. 그리고 바지도 줬는데 왜
그 모양이야?”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던 부분이 기어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자 레이가 야
릇한 미소를 띠며 셔츠 아래로 드러난 하얀 다리를 보란 듯이 내보이며 말했
다.
“바지가 너무 커서 흘러내리더라고. 난 몸매가 좋은 거지 덩치가 큰 게 아
니거든.”
“고무 바지야. 꽉 묶어서 입으면 괜찮아.”
“그러다 벗겨지면 그때야말로 분위기가 이상해질 텐데?”
레이는 꼬았던 한쪽 다리를 좀 더 들어 보였다. 허벅지에 걸쳐졌던 티셔츠
가 아슬아슬하게 밀려 올라가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 같았
다. 루스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딱 잘라 말했다.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빨리 비서한테 전화나 넣어둬.”
“오늘은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오늘은 본가에 있고 싶지 않거든.”

장난기가 사라진 목소리에 루스의 시선이 다시 레이에게로 돌아갔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퍽이나 낯설었다.
무슨 일 있어?”

일이라면 오전에도 한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러진 않을 거란 예


감이 들었다.
오후에 노인네들이 쳐들어와서 결혼하라고 난리를 쳤거든.”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루스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노인네들은 누구고 결혼은 또 뭐야?”
“각 나라에 있는 에드윈 가문의 당주들이지. 참고로 전부 백 살이 넘은 늙
은 구렁이들뿐이야.”
루스는 그제야 예전에 알파 가문에 대해 교육받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
올렸다.
“결혼은 무슨 소린데?”
“극우성 오메가가 애를 낳으면 분명 극우성 알파가 태어날 거라는 쓸데없
는 믿음을 반영한 거지. 그들에게 나는 다음 가주가 나오기 전까지 어쩔 수
없이 세워두는 임시 같은 거니까.”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네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알았다고 했지.”
“…뭐?”
“아무리 내가 가주 노릇을 잘 한다고 해도 그들의 협조 없이는 아직은 힘
들거든.”
믿기지 않는다는 루스의 시선에 레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론에게는 말했던 극우성 알파와의 결혼 언급은 대화에서 제외시켰다. 설명
은 이정도가 적당했다. 그래야 저렇게 연민이 깃든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너는 그런 소린 안 듣고 살 줄 알았어.”

루스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레이는 적당한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그때였
다.
“ 오전 일은 미안했다.”
“…….”
“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가 너를 몰아붙인 것 같군.”
에이드 카라 의상실에서 레이의 대처는 옳았다. 솔직히 같은 오메가로서
느낀 분노는 그곳에 있었던 그 어떤 누구보다 가장 컸을 게 분명했다. 그걸
건드려 폭발시킨 건 루스였다. 그러니 먼저 고개를 숙이는 건 자신이 되어야
했다.
“ 미안.”
루스가 내뱉은 언어의 무게는 의외로 무거웠다. 그만큼 와 닿는 진심 또한
깊고 분명했다.
처음이었다. 저런 진짜 사과는.
“ 네가 미안할 건 없어.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가면을 덧씌우길 포기한 레이가 어색하게 중얼거리며 움켜쥔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감춰진 시선을 따라 그의 홍차 잔을 응시하던 루스가 나직하
게 읊조렸다.
내 어머니는 오메가였어.”

찻잔에 비친 금빛 눈동자가 짧게 일렁였다.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단지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는 건 알파니 정보
는 그것뿐이야. 키워진 건 다른 알파의 손에서였어. 정확히는 쓸모 있게 써
지기 위해 사육당한 거지. 그러다 운이 좋게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처럼 인
간답게 살아온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의 과거 이야기에 레이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내
용도 내용이었지만 평소에 본인의 이야기를 물으면 칼같이 끊어버리거나 침
묵으로 일관해버리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본인의 이야기
를 들려주는 건지 레이의 입장에선 당연히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시
선을 읽은 루스가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알파에게 착취당하면서 살아온 나는 그들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을 매일같이 안고 살아왔어. 그러니 전부는 아니겠지만 네 마
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아.”
결국엔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뺏기기까지 했었다. 오랜만에 떠올린 감정
에 루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그 당시 느꼈던 절망과 무력감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기에, 되도록 피하고 싶은 과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꺼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유가 저 녀석 때문이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따뜻한 것
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먹 쥐어진 손등에 닿았다. 타인의 체온이었다. 루
스는 어느새 숙여졌던 고개를 들어 레이를 바라봤다. 자신을 담은 선연한 금
빛 눈동자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것이 걱정이
라는 것을 깨달은 루스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 지를 떠올리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밀려드는 민망함에 레이의 손길을 미끄러트리며 재
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너 애썼다고.”

어떻게 뒷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루스는 결국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어냈다.
어쨌든 이 지랄 같은 세상에서 잘 살아남느라 애썼어.”

스스로 듣기에도 낯부끄러웠는지 루스는 간신히 마주쳤던 눈을 슬며시


비켜났다. 그동안에도 레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전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백지 같은 느낌이었
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몇 번이고 깜빡이더니 점차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
다.
그런가…….”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린 소리가 몇 번이고 되뇌어졌다.


“그러게. 확실히 애썼군.”
이내 살짝 벌려진 입가에서 깊은숨이 내쉬어졌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
은 듯한 평온한 숨결이었다. 그 뒤를 따라 가늘게 지어진 미소는 마치 아이
가 칭찬받은 것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수줍음이 보태져 있었다. 그것을 본
루스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몸을
기울여왔다.
뭐 뭐야?”
“ ,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루스가 살짝 경계의 빛을 보냈다. 레


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애썼다며, 그러면 상을 줘야지.”
“잠…….”

입술이 닿은 건 그의 왼쪽 뺨이었다. 볼록한 살이 레이의 입술에 꾹 눌러


졌다. 순간 그의 모든 동작이 멎었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지는 순간, 쪽 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에 맞댔던 입술이 떨어지자 눌렸던 뺨이 봉긋 솟아
올랐다. 한결 색이 진해진 그곳을 쓰다듬은 레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침대는 내가 쓰지.”
레이는 그대로 굳어버린 루스를 두고 몸을 돌렸다.
참 내가 정신없을 때는 웬만하면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아.”
“ ,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멈춰 선 레이가 그를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띄웠다.


“‘ 무슨 일’ 이 일어나길 바란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그가 침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몇 번의 바스
락거림 끝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제야 루스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왼쪽 뺨
을 건드렸다. 손에 진득한 타액이 묻어났다. 순식간이었지만 영역표시까지
확실히 끝내놓은 놈의 행동에 그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
욱 기가 막힌 건, 루스는 그 순간 녀석을 밀어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는 것
이었다.
이게 뭐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반응뿐


이었다. 자꾸만 심장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CHAPTER 5.

[ 어디 아픈 거야?]
소년의 걱정스런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 그냥.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마음이 심란해졌거든.]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아이를 향해 루스는 가느스름
한 미소를 띄웠다.
어느새 이 상황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더니 딱 그 짝이 맞았다. 문제는 이 꿈이 언제까지 지속될 거냐는 것이었다.
[ 너는 여전히 밖이 무섭나?]
소년이 당연하다는 듯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는 쓰게 웃었다.
[그러게. 너 같이 약한 자들에게 세상은 왜 그리 무섭게 구는 걸까?]
[너는 안 무서워?]

조심스레 건네진 물음에 루스가 잠시 멈칫하다 생각에 빠지듯 중얼거렸


다.
나는 무섭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거든. 그런데, 여전히 나도 저
[……
들에게는 약자인 것 같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써서 겨우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오늘 한
오메가의 울부짖음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여전히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
무것도 없는 베타인 것을.
[이상하지? 힘이 있다면 당연히 약한 자들을 보호해야 마땅한 건데, 왜 그
들은 힘으로 약자를 짓누르는 걸까?]
루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소년이 무심히 말
했다.
[너는 힘이 약한 자를 보호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네가 말하
는 힘의 용도인 거야?]
[…….]

루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늘 울먹이던 파란 눈동자가 지금은 무척 깊


어 보였다. 그가 다시 물었다.
힘을 가지게 되면 무얼 하고 싶은 건데?]
[

***
힘을 가지게 되면 무얼 하고 싶은 건데?]
[

무얼 하고 싶냐니. 베타 주제에 과분한 힘을 가졌었지만 결국 쓰지도 못하


고 폐기 처분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기로 선택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루스는 착잡한 웃음을 지으며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근
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요 몇 년간 제대로 된 침실 이외에는 잠을 청해본 적
이 없었던 터라 어찌 보면 호사스러운 비명이었다.
확실히 몸이 많이 편해졌군.
루스는 예전의 고단했던 시절을 잠시 떠올리며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
로 했다. 그리곤 건너편 자신의 방을 바라보았다.
결국, 여기서 재우고 말았다.
점점 녀석에게 허용되는 자신의 영역이 넓어지는 기분이라 심란함이 먼
저 앞섰다. 잠시 흘기듯 방을 쳐다보던 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안을
들여다봤다. 아직 자고 있는지 침대에는 고요한 숨소리만 가득했다. 저런 걸
성격이 좋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물질적으로는 호사
스러운 생활을 누려왔을 그가 저 좁은 침대에서 잘도 자고 있다는 사실에 혀
가 절로 내둘러졌다. 루스는 무심코 걸음을 옮겨 레이의 머리맡으로 다가갔
다. 깊이 잠이 든 탓인지 그의 기척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파는 아니군.
그냥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기백만으로는 정말 알파가 아닌지 수십 번 의
심이 들 정도였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마주하니 확실히 남자치곤 몸
의 선이 가늘었다. 아마도 전체적으로 단단한 골격은 스스로가 무던히도 노
력해서 다져놓은 결과물일 터였다. 알면 알아갈수록 녀석은 자신과 여러모
로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았다. 문득 그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루스는 무심코 손을 내려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겼다.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기분이 좋아진 탓
에 루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마저 지어질 무렵 흠칫, 시선이 멎었다. 퍼뜩
손을 치우며 뒷걸음질 친 루스의 얼굴에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무방비한 사람의 신체를 건들다니.
루스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때 레이가 낮은 신음
을 뱉더니 몸을 뒤척였다. 고개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동시에 굳게 감
겨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그 속에 자리한 금빛 눈동자가 나른
하게 움직이더니 곧 루스를 발견하곤 정지했다.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 순간 뻗어 나온 손이 루스의 멱살을 가로챘다.
“……!”

엄청난 힘이었다. 몸이 휘청하는가 싶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푹신한 감촉


이 등에 닿고 배 위가 묵직해졌다.
이게 무슨 짓…….”

루스는 항의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그의 배 위에 올라타 내려


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나른함을 넘어서 야릇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자세도
예감도 영 좋지 않았다.
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를 불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백치미가 느껴
지는 그의 표정은 마치 아직도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몽롱함이 어려 있었
다.
섰어.”

“……?”

루스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찡긋거리다 곧 복부 아래로 실리는 무게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자 잠깐만! 너 뭐 하는 거야!”
“ ,

얇은 브리프에 감싸진 볼기가 루스의 중심을 꾹 눌러버렸다. 갑작스런 자


극에 허리가 튀어 올랐다. 레이와 달리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해도 두 겹의 천
으로도 민감함이 가려지지 않는 이른 아침이었다. 남자라면 제 욕망과 무관
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아침의 발기 현상은 루스 또한 피해갈 수 없는 불가
항력이었다.
확실히 크네.”

레이가 자신의 둔부에 닿는 단단한 형체를 슬쩍 볼기에 비벼댔다.


너 하지, 마… 큿!”

예민한 아래가 마찰하는 순간 루스는 제 의지와 상관없는 신음을 담아야
했다. 레이가 그의 반응에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비 켜…….”
“ …

루스가 이를 사리물며 말했다. 레이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섰어.”
그리곤 티셔츠를 들어 입에 물었다. 루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드러난
브리프엔 이미 발기한 성기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는 보란 듯이 브
리프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성기를 밖으로 꺼내 들었다. 하얀 피부와 어우러
지는 옅은 핑크빛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곧바로 허리를 숙여왔다.
달콤한 체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복부에 닿는 발기한 형체가 적나
라한 감촉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루스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레이가 어르듯 속삭였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조금만 도와주자.”
한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조금 전 느껴졌던 달콤함이 팽창하듯 공간
을 가득 메웠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전신이 마비된 감각. 더는 반항하지 못
하는 루스의 목덜미 위로 레이가 고개 숙였다. 어제 자신이 새겨둔 상흔을
찾아낸 그가 다시 한 번 이를 세웠다.

“ !”

살이 씹히는 소리와 함께 어제처럼 혀가 그곳에 타액을 입히고 떨어졌다.


그 순간 혈관을 타고 내려간 자극이 심장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레이가 상체
를 들며 그의 중심을 둔부 사이로 비벼대기 시작했다.
하아, 좋아……!”

거침없는 탄성을 내뱉은 그가 능숙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평소 우아하고


매끄러운 손가락 위로 젖은 욕망이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매끈하게 관리된
복근이 꿈틀대며 붉게 물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유
두가 아래와 마찬가지로 핑크빛을 띠며 가늘게 떨리자 루스의 목울대가 무
심코 움직였다. 둔부를 감싼 천이 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래에서 솟아오른
살덩이를 뒤집어쓴 천이 축축하게 젖어 마찰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다. 살
갗이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뜨거운 열기는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 !”

레이가 더는 못 참겠는지 한 손을 배 위에 올리곤 꼿꼿이 세웠던 허리를


다시 숙여왔다. 마주한 금안이 흐릿하게 젖어 루스를 담았다. 늘 오만하던
시선에 애타는 갈증이 담겨있었다. 하얀 양 볼에 붉은 열기가 간드러지게 떨
림을 일으켰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움찔거리는 모습은 이른
아침을 무색하게 만들만큼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내뱉은 더운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히자 달콤함에 이어 음란한 냄새가 전신을 압박했다.
몰아치는 감각을 밀어내지 못한 검은 눈동자에 음험함이 드리워졌다. 어
느새 숨결마저 가까워진 붉은 입술에 루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달싹였다. 레
이가 때를 맞춰 좀 더 고개를 숙여왔다.
안 돼!
아슬아슬한 찰나 루스는 이를 악물며 가까스로 손을 올렸다. 입술을 막은
굵은 손가락에 레이가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하마터면 정말 끝장날 뻔했
다. 루스의 이성은 지금 이 상황을 멈추어야 한다고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모든 것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지
배당한 기분이었다. 어제와도 같이.
「내가 정신없을 때는 웬만하면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아.」
일순 루스의 머릿속에 어젯밤 그가 했던 말들이 스쳐 갔다.
「 ‘무슨 일’ 이 일어나길 바란다면 상관없지만.」
그 말이 이거였나?
루스의 당혹스러운 시선에 금빛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마치 이미 늦
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레이는 보란 듯이 입술을 가로막는 루스의 손
가락을 혀로 핥아 버렸다. 악착같이 주었던 힘이 허무할 정도로 사라져버렸
다. 레이는 자신의 입을 막았던 손을 움켜쥐어 시트로 눌렀다. 뭉툭한 살덩
이가 복부에 닿아 빠르게 움직였다.
살과 살갗의 마찰이 불처럼 뜨거웠다. 선단에서 흘러나오는 액이 루스의
복근 위로 진득하게 늘어지는 감각이 선연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잠깐의 여
백이 밀려나고 재차 머리가 뜨겁게 들끓었다. 아래로 맞붙은 욕망이 폭발할
듯 세를 부풀렸다. 이제는 흥건히 젖어버린 레이의 브리프 아래로 질척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쾌감과 괴리감에 루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흥분한 레
이가 이를 세워 그의 턱을 깨물었다. 그 순간 시야가 번쩍했다. 나직한 신음
과 함께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들썩였다. 둔부에 닿은 바지가 비릿한 내음
을 풍기며 축축이 젖어 들었다. 동시에 그의 복근에 뜨거운 것이 투툭 떨어
졌다. 한동안 서로의 시선과 숨결이 얽힌 채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다 서
서히 짓눌러졌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탕에 처박혔던 모든 감각
이 장막에 걷히듯 선명해졌다.
“하아―”
레이의 입에서 가는 숨이 터져 나왔다. 루스는 그제야 자신 또한 거친 숨
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가 드디어 그에게서 떨어졌을 때
루스의 배 위로 하얀 정액이 뭉근하게 뒤덮여 있었다.
루스는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른하던
금안이 천천히 휘어졌다. 야릇한 웃음에 불길함이 엄습했다. 레이가 엉덩이
를 들며 허리를 뒤로 뺐다. 그리곤 정액이 묻은 복부 향해 혀를 내밀었다. 그
순간 루스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


“ …….”

루스는 목에 두른 젖은 수건을 내던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친 새끼.”

스스로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봤지만 그것만으로는 속이 달래지지


않았다.
정액을 핥으려는 레이를 제지한 순간, 흐릿하던 금빛 눈동자가 선명한 이
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른 건 당황이었다. 잠시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그가 처음으로 곤란한 웃음을 띠웠을 때 루스는 끓어오른 분노를
단번에 상실했다.
「그러니까 내가 경고했잖아.」
루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샤워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심란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지독한 자괴감과 수치심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누굴 탓하리. 애초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상황에 등신같이
휩쓸린 건 자신이었다. 요 몇 년간 나름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욕망에 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음란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은 도저히…… 안
돼.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말자.
루스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생각을 떨쳐냈다. 어찌 됐든 그 발정기
라는 건 심각한 것 같았다. 건장한 남자를 한순간 무력화시킨 것이 오메가의
페로몬 때문이라면 당분간 끝날 때까지 만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래, 끝날 때까지…….
문득 내뱉은 언어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럼 끝나면 다시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야?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이없는 설정에 루스는 경악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
어났다.
커피를 내려야겠어.”

환기를 시켰음에도 여전히 달짝지근한 냄새가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것 탓에 판단력이 더 흐려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원두의 진한 향기로 집안
의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때, 현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스는 걸음을 멈추며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곧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
올랐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릴 위인은 지금
욕실에 있는 녀석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비서 정도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커피고 뭐고, 저 녀석이 욕실에서 나오면 바로 비
서 녀석한테 데리고 가라 할 생각이었다. 루스는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걸어
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

우습게도 그의 예상은 요즘 들어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었다. 기세


좋게 문이 열리자 상대도 놀랐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잠시
루스를 향한 파란 두 눈에 따스한 빛이 스며들었다.
금방은 안 열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
잘 지냈어?”

잠시 멎어있던 루스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 들어도 단정한


목소리였다. 아침마다 저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가 있을 법한 곳을 뛰어다녔
던 적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먼저 건네진 목소리에 마음은 저 멀리
달음질치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당혹으로 채워지다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지
켜보던 파란 눈동자에 살짝 난처한 기색이 깃들었다.
“연락도 없이 와서 놀랬나 보구나.”
“왜…….”

간신히 입을 뗐지만 이번에는 목이 메여와 루스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


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상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루스…….”
“누구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거실 쪽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샤워를 끝내고 나온 모


양이었다. 루스는 도망칠 구석을 마련한 듯 얼른 고개를 돌려 레이를 찾았
다. 그러나 그쪽도 딱히 좋은 탈출구는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루스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떠올랐다.
너 그 차림.”
“ …

레이는 허리에 수건을 두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젖


은 금발이 창가에 스며든 햇살에 반짝였다. 막 샤워를 마친 젖은 피부는 적
당한 열기를 품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너 도대체 옷은…….”
“ ,
“네가 안 줬는데 어떻게 입어?”

그제야 루스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여전히 복도


에 서 있는 존재 또한 다시 떠올렸다. 고개가 퍼뜩 정면을 향했다. 상대도 역
시 놀랐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만 이건…….”
루스는 혹시나 생겼을 오해를 막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틴 블레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이의 입에서 상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또다시


루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현관문을 여
는 순간부터 부정했던 현실이 그 이름 한마디에 자리에 주저앉혀지는 기분
이었다. 그들 가까이 다가온 레이 또한 의외의 등장인물에 잠시 당황한 기색
을 내비쳤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파란 눈을 휘며 묘한 미
소를 띠었다.
“놀랍네요. 아무래도 기사가 사실이었나 보군요.”
“아니야.”

루스가 재빨리 부정했다.


그건 저 녀석이 멋대로 지어낸 거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격한 부정을 들이밀자 마틴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


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부정할 것까진 없지 않나? 반은 사실이니까.”

레이가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헛소리 좀 작작해.”

루스가 바로 정색해왔다. 그리고 매섭게 흘기는 눈초리가 보아하니 아무


래도 닥치고 있으라는 경고 같은 데, 그는 아직도 레이 에드윈을 몰랐다.
저럴수록 더 불타오른다는 걸 알아야지.
레이는 한순간 시커메진 속을 느끼며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하는군. 오늘 아침에도 내 아래에서 그렇게나 뜨겁게 굴더니, 벌써
잊은 거야?”
그리고 내리깐 노골적인 시선이 그의 다리 사이를 건드렸다. 갑자기 던져
진 폭탄에 벙 쪄버린 표정은 상당히 봐 줄만했다. 조금 달아오른 것 같은 얼
굴은 귀엽기까지 했다.
그러게 내 앞에서 감히 딴 눈을 팔면 안 되지.
당분간 회생이 불가능한 루스를 제친 레이는 만족스럽게 다음 먹잇감에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나를 만나러 온 건 아닐 테고. 여긴 어쩐 일이지?”

자신을 만나러 굳이 루스 집을 찾지는 않았을 터였다. 에드윈 가문의 충성


스런 부하였던 그와는 오래전부터 가족 같은 친분을 이어오곤 있었지만 그
렇다고 애써 따로 만날 만큼의 애틋함은 없었다. 레이는 이런 어쭙잖은 상황
은 싫었다. 특히 그를 향한 루스의 멍청한 반응은 무척이나 거슬렸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에 마틴은 잠시 말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드디어 입
을 열었다. 그러나 대신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인간의 것이었
다.
어 문이 열려있었네요.”
“ ,

복도로 모습을 드러낸 건 로이였다.


으악! 레이, 너 그 꼴이 뭐야…… 어? 마틴 님?”

달랑 타월 하나 두른 레이의 모습에 경악스런 표정을 짓던 로이가 마틴을


발견하곤 곧바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틴 님이 여기 왜…….”
“그러게. 내가 막 그걸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려던 참이었거든.”

맞받아친 건 레이였다. 그제야 로이는 자신이 등장할 타이밍을 더럽게 못


맞췄다는 걸 확인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 소란 통에도 루스는 여전
히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더 난리 칠
인간이 말이다.
레이는 이 상황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마틴에
게 시선을 보냈다. 만날 때면 늘 보이던 반가움 대신 내비친 경계에 마틴은
살짝 눈빛을 흔들었다. 그도 잠시, 마주한 파란 두 눈이 차분히 레이와 마주
해왔다.
“레이님께 드리는 인사는 에드윈 본가에서 정식으로 나누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여기 집 주인한테 있으니까요.”
단정한 시선이 루스를 향했다. 줄곧 그를 피하던 검은 눈동자가 흠칫 떨리
며 다시 도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틈을 주지 않았다. 마틴은 파
란 눈을 다정히 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루스, 우리 얘기 좀 할까?”

***

“확실히 냄새가 난단 말이야.”


“발정 난 거면 저리 꺼져.”

계속되는 로이의 되뇜에 레이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로이는 억울


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아무리 네놈이 히트사이클이 다가와도 너한테는 죽어도 흥분할 일 없거

든!”
“직계 혈족도 아니면서 잘도 지껄이는군.”
“정신력도 포함시켜. 이십 년 넘게 너의 지랄을 계속 보고 살면 정나미가
떨어져서라도 발정 따윈 안 해.”
“그것참 편리하군.”
레이는 코웃음을 치며 소매에 커프스 링크를 끼우곤 능숙하게 타이를 둘
러맸다. 그 틈을 타 로이가 슬며시 말을 흘렸다.
그나저나 저 두 사람 확 느낌 오는 거 없어?”

타이의 매듭을 지던 레이의 손짓이 멈춰 섰다.


“… 뭐가 말이지?”
로이는 싸늘해진 그의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채 답답하다는 듯 주저리
떠들었다.
그 러. 니. 까. 울프님 말이야.”
“ .

얼마 전 아론과의 대화를 떠올린 로이에게 마틴과 루스의 관계는 그쪽으


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W & M 하우스」
만약 저 베타의 배후에 세워진 알파가 울프님이라면 다른 의문들도 자연
스럽게 풀리게 된다. 그렇게 단서를 맞춰가고 있으려니 레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로이는 멍하니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쳐다보다 걸치지도 않은 재
킷을 들고 서둘러 뒤따랐다.
가는 건가?”

거실 소파에는 루스와 마틴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로 보이는 커
피잔에 잠시 눈길을 주던 레이가 문득 화분 옆에 걸린 파란 펜던트로 시선을
보냈다. 그것을 잠시 응시하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

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루스가 재차 그를 불렀다. 하지만 레이의 대


답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마틴, 본가에는 언제 방문할 생각이지?”
“오후 두 시쯤 연락드리고 가겠습니다.”

시간까지 확인한 레이는 그제야 루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


미 마틴에게로 돌아서 있었다. 조금 전 느꼈던 불쾌함이 다시 엄습했다. 레
이가 성큼 루스에게로 다가갔다. 그제야 기척을 느낀 루스가 다시 고개를 돌
리는 순간 눈앞이 어두워졌다.
“……!”

모두가 놀란 가운데 레이의 입술이 루스의 이마를 꾹 누르고 떨어졌다. 휘


둥그레 굳어버린 그와 눈을 맞추며 레이는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저녁에 만나러 올 테니까 씻고 기다리고 있어.”

“…….”

레이는 달콤한 속삭임을 그에게 듬뿍 안기곤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두 분 결국 그런 사이가…… 크흠,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 볼게요. 마틴
님 나중에 봬요.”
로이는 엄청난 오해를 안고 레이를 뒤따랐다. 문이 닫히자 태풍이 쓸고 간
듯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루스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기분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
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마틴의 입가에 흠―, 하고 느릿한 감상이
뱉어졌다. 그제야 루스가 퍼뜩 마틴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비서도 그렇고
이쪽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뭐가 말이지?”
“방금 그거, 아니… 녀석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아무 사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는 루스의 말보다 본 것을 더 믿는 듯했다. 문득 억눌러왔던


화가 울컥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해도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지.”

“…….”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루스의 날 선 반응에 여유롭던 마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씁쓸함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불과 한 달 전만해도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던 아
이였다. 그런 그가 자신들이 여행을 떠난 동안 돌연 회사를 나가버렸다. 삼
주 전, 테라에 처음으로 함께 왔을 때만 해도 그에게서 아무런 낌새도 느끼
지 못했다. 그러니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복잡해진 감정을 감
추며 최대한 담담히 말을 꺼냈다.
회사는 어떻게 된 거야?”

“…….”
“루스.”
“더는 내가 거기 있을 이유가 없어졌기에 나왔을 뿐이야.”
“이유가 없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무책임한 건 당신들이지.”

싸늘한 대꾸에 마틴이 내렸던 시선을 들다 멈칫했다. 바라본 루스의 눈빛


이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애초에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베
타가 어떻게 알파들을 통솔해?”
“그들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너를 받아들인 거고.”
아니, 이제 내가 버거워. 싫어.”

마틴이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욕적이던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루스가 정말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드네. 아, 당신들도 역시 알파구나 하고 말이야.”

비릿한 음성은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마틴의 복잡했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설마, 회사를 나온 이유가 혹시 그것 때문이니? 내가…….”
“그만해.”

루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낮게 으르며 벌떡 일어섰다. 다리에 부딪힌 테이


블과 컵이 흔들거렸다.
나가.”

마틴은 분노에 찬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


다. 감정에 감정을 부딪쳐 봤자 해결 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대
화는 조금 미뤄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나중에 다시 들릴게.”
“아니, 오지 마.”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함에 마틴은 살짝 동요했지만 곧바로 표정


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을 외면한 넓은 등을 바라봤다. 그는 끝내 돌아
보지 않았다.
커피 잘 마셨다.”

마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건넨 뒤 몸을 돌렸다. 곧 현


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봤지
만 문은 다시 굳게 닫힌 후였다. 혼자 남은 공간에 빠르게 적막함이 밀려들
었다.
제길!”

루스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소파에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눈


앞에 아직 열기도 채 앗아가지 못한 커피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맛있네.」
한 모금 마시며 잔잔한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멈칫했던
인상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당신들은 정말 잔인해.”

루스는 소파 뒤로 고개를 젖히며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은은한 커피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늘 기분 좋았던 냄새건만 지금은 그 무엇으로도
좋아질 기분 따윈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

세상이 요즘 같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겠어.”


사마 가문의 페이가 은빛용 담뱃대를 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조각용


이 내뿜는 연기가 그녀의 청색 치파오를 스치고 옆에 있던 티오네 가주 얼굴
로 길게 늘어졌다.
뭐 정말 태평한 세상이죠. 그래서 조금 지루하기도 하지만요.”
“ ,

모로스는 얼굴을 덮쳐오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아쉽다는 듯 말


했다.
“모로스 님. 지루하시면 저희 구역에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라
면 분명 지루하실 틈이 없으실 겁니다.”
루시 가문의 가주 세르게이였다.
“아니, 사양하지. 자네 구역은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모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미소년의 태를 벗어던지고 완연한 남성체로 거듭
난 세르게이 루시는 이제 극우성 알파 둘을 제외한 나머지 알파 중에서 가장
위험한 포식자로 인식되고 있는 자였다. 달달한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무는 그
의 몸에서는 아직도 옅은 피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구역
에서 왔을 터인데, 아침부터 뭘 하고 온 건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모로스는 예전의 천사를 그리며 우울하게 주변
을 훑었다. 메토 크누크, 헨리 마네토, 프레딕 폭스. 가주들도 세대교체가 이
뤄진 건 좋았는데, 영 시커먼 알파들뿐이라, 즐길 맛이 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알파 세계를 지배하는 수장과 7가주들의 회의가 열렸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알파들의 동향을 살피고 문제가 있다면 그에 따른 처벌
과 해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삼십 년 전만 해도 회의가 시작되기 전
부터 무슨 또 큰일이 터졌는지 긴장과 대화의 연속이었다면, 요즘은 태평한
나날들의 연속이라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딱히 서로 간에 공유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완벽한 개인플레이였다. 아무리 가주로서 바쁜
일이 한가득 이라지만 요즘 알파들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이러니 자신이 애타게 그를 찾는 게 아닌가.
모로스는 독백연기라도 하듯 과장된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태평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직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은 최상의 꽃이 현존하는데 어디 수컷끼리 피를 보고 싸울 맛이 있
겠냔 말이죠.”
모로스는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능글맞은 미소
를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마 페이가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한마디 하려던 입술이 벌컥 열린 문소리에 도로 다물어졌다.
“모로스 님. 한 번만 더 그딴 말을 지껄이시면 성희롱으로 고소하겠습니
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 에드윈의 첫마디였다. 무심한 눈빛에서 느
껴지는 날카로움에 모로스는 움찔하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냥…… 칭찬으로 한 말일세.”
“모로스 님. 누가 당신의 모가지를 꺾네 마네하고 있으면 참 기분 좋으시
겠습니다.”
싸늘한 비아냥에 모로스는 모가지가 아니라 꽃을… 하고 얼버무리다가
옆에서 그의 발을 밟아버린 페이의 눈치에 미안, 하곤 입을 닫았다. 사과까
지 듣고 나서야 레이는 헨리 옆자리에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헨리가
옆에서 눈을 찡긋거리며 시선을 보냈지만 레이는 깔끔히 무시하곤 사마 페
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번에 페이님께서 오메가 케어 시설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렉스가 자랑하더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페이가 연기를 내뿜는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달싹이며 말했다.
“내가 비록 알파로 태어났지만 육체는 여성의 것이니, 그저 마음이 훨씬
가는 곳에 돈을 쓰고 싶었을 뿐이야. 바보 같은 알파 남자들한테 투자해봤자
별로 남는 게 없거든.”
7가문의 가주로서는 이제 최연장자 자리에 오른 사마 페이는 느긋하게 다
른 알파 가주들을 훑으며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레이도 공감하며 피식 웃음
을 흘렸다.
“나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말이지. 레이, 사랑하는 삼촌한테는 하고 싶
은 말 없나?”
레이는 가볍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눈썹을 치켜들었
다. 적색 눈동자에 즐거움을 한가득 담은 폭스 가문의 가주 프레딕 폭스였
다. 레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삼촌께서는 당연히 저의 사업에 돈을 쏟아부으셔야죠. 우리 에드윈 가문
의 유능한 연구원을 홀라당 빼가셨으면 그만큼의 대가는 치르셔야 할 것 아
닙니까.”
“여전히 부려먹고 있으면서 새삼 뻔뻔하군.”

프레딕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본인의 의지입니다.”

레이는 간결하게 대꾸하곤 더는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세르게이와 눈이 마주쳤다.
“…….”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세르게이가 눈을 휘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레이라도 피하고 싶은 상대는 있었다. 세르게이 루시. 그는 거죽만큼이나


알파 중에서도 비현실적인 성격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가 두려운 건 아니
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본능적으로 꺼림칙스러운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레이가 슬쩍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세르게이가 타이밍 좋게 입을 열
었다.
그러고 보니, 울프님께서 곧 테라에 방문하실 예정이십니다.”

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게 사실인가?”

모로스의 시선이 크누크 가문의 가주 메토에게 닿았다.


사업차 의논하실 게 있어 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주제가 잡히자 모로스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울프님께서도 이제 여기에 참석하셔야 되는 거 아니신가? 그
분이 지난 이십여 년 간 이룩해내신 사업 규모와 영향력만 봐서도 이미 가문
을 새로 하나 세우신 거나 다름없는데 말일세.”
“그럼 자네가 빠지면 되겠군.”

대화에 끼어든 음성은 또다시 활짝 열린 입구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자리


에서 기립했다.
언뜻 보기엔 레이가 한 번 더 들어오는 착각을 할 법도 했지만 그 압도적
인 기운만은 확연히 달랐다. 알파의 수장 레오 에드윈의 등장만으로 회의실
의 공기는 무거운 긴장감에 휩싸였다. 언뜻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갈색 눈
이 회의실을 훑다 레이에게 잠시 멈춰 섰다.
“ 아니면, 요즘 연애 놀음에 정신이 빠진 녀석이 대신 빠져도 되고 말이
야.”
일순 모로스는 제 발등이라도 찍힌 듯 흠칫했다. 정작 연애 놀음의 장본인
인 레이는 평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연애 놀음에 일주일씩이나 쏟아부으시는 분께서도 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짝과 장장 일주일의 발정기를 끝내고 온 레오에 대한 비꼬음이었다. 그
를 바라보던 갈색 눈에 일순 황금빛이 무섭게 일렁였다.
또 시작이군.
살벌해진 공기에 가주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 그래. 일주일간 자식 얼굴을 못 본 탓에 할 말은 많을 것 같군.”
날 선 눈빛을 보내던 레오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 비틀린 웃음이 그려졌
다.
“ 동감입니다. 아버지.”
레이도 따라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짙게 웃음을 띄웠다.
회의 때마다 꼭 한 번은 거치는 부자간의 대립은 이제 가주들을 그러려니
하게 만들었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웃는 모습까지 똑같은 저들을 계속 지켜
보고 있자면 간혹 두 명의 수장을 모시고 있는 기분에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 모인 알파의 가주들은 각 가문의 알파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오메가와 나란히 지위를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알파의 수장과 팽팽하게 맞서는 레이 에드윈이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이 레이 에드윈을 가주로서 인정받게 하기 위한
연출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적어도
지금껏 그들을 지켜봐왔던 가주들 눈에는 저 부자가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
한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회의를 시작하지.”

어느새 다시 지배자의 위엄을 갖춘 레오 에드윈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

레이! 잠깐, 잠깐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헨리는 레이에게 멱살이 잡혀 복도로 끌려갔다. 코너


를 돌아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선 순간 벽에 강하게 밀쳐졌다. 레이가 기세
좋게 벽을 짚으며 눈을 맞추자 헨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여긴 좀 곤란하지 않을…….”
“지금부터 내 말에 즉각 대답해.”

낮게 깔린 음성이 지독히도 냉랭했다. 방금까지 수장님을 뵙고 나와서 그


런지 저 금빛 눈동자가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헨리는 가까스로 부드러
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레이, 일단 진정해. 침대도 아닌데 왜 이렇게 격정적이야?”
“루스하고 울프, 두 사람 무슨 관계야?”
“…….”

뜻밖의 질문이 날아들자 헨리의 눈빛이 살짝 동요했다. 대답은커녕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자 레이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다. 그가
한쪽 무릎을 세웠다.
어이!”

헨리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날아오는 무릎을 두 손으로 막았다.


“손 치워.”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 이 손을 치웠다간 내 소중한 그곳이 박살이 날
것 같아서 말이야.”
헨리는 정확히 가랑이 사이에 꽂힐 뻔한 무릎을 보면서 생각만 해도 끔찍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걱정 마. 그렇게 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는 알파로 전락하는 것뿐
일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겨우 너한테는 딜도 역할 밖에는 안 된다는 거군.”
“새삼?”

레이의 무심함에 헨리는 너무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러면 나 상처받는다고.”
“무슨……!”

레이가 방심한 틈을 타 헨리는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움켜쥐


었다. 잽싸게 몸을 비틀며 레이를 벽으로 밀어붙이자 자세는 역전됐다.
“비켜!”
“일단 진정해.”

헨리는 주먹 쥔 레이의 손을 붙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재차 위협


해오는 그의 무릎을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좀 더 밀착시켰다. 빠듯하게 맞닿
은 거리에 레이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죽고 싶어?”

제발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나도 그 둘의 관계에 대해 확실히는 몰라.”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에 헨리가 서둘러 덧붙였다.


“솔직히 울프님이 그 녀석을 내 누구누구라고 딱 집어서 말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러니 네 질문을 좀 바꿔봐.”
레이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네가 루스를 처음 만난 게 언제야?”
“그가 열다섯, 나는 막 스무 살이 넘었을 때였지.”

그때면 녀석이 마네토 가주 자리에 오르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마틴도 함께였나?”
“마틴? 마틴 블레어를 말하는 건가?”

한순간 헨리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 눈빛은 뭐야?”

레이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헨리가


그렇군, 하고 깨달음의 웃음을 흘렸다.
“우리 여왕님께서 진짜로 궁금한 게 꼬맹이와 울프의 관계인지 아니면 마
틴과의 관계인지 그게 잠시 헷갈려서 말이야.”
일순 레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됐다는
듯 헨리가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 그 녀석 어릴 때는 꽤 건방진 꼬마였거든. 울프님한테도 예외는 아니었
지. 그런데 마틴만 등장하면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꼬리를 쳐대더라니까. 마
치…… 꼬맹이의 세상엔 ‘마틴 블레어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야.”
무감한 것 같았지만 찰나에 스친 동요가 분명 있었다. 철저한 녀석에게서
가끔 균열을 발견할 때면 헨리는 무척 사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키
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것은 제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사그라져야 했
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세상에서 없어지는 방법도 있지. 헨리 마네토.”

말장난도 정도에 따라 웃음이 나는 거였다.


떨어져.”

단호하다 못해 위협적인 음성에 헨리는 웃음을 싹 지우며 얼른 레이와 거


리를 두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
다.
“알파의 지배자시여. 이건 오해…….”
“오해? 그럼 지금까지 들려온 말들도 전부 오해인가?”

뒤틀린 음성에 나른한 살기가 담겼다. 좁은 공간으로 밀려든 압박감에 헨


리는 괴로운 숨을 쥐어짰다. 그때, 비슷하지만 훨씬 뒤틀려 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부모님에게 섹스 파트너에 관한 것까지 참견 받을 나이는 이미 지
났죠.”
레이 제발.
기어코 두 부자가 자신을 죽이려는 모략을 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다. 헨리는 더욱 몸을 움츠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레오가 코웃음을
쳤다.
“설마. 난 그저 내가 있는 공간에서 이런 담대한 짓을 벌이기에 곧 상견례
라도 잡아야 하나 싶었지.”
“하하하, 상견례라뇨. 제가 어찌 감히 수장님의 귀하신 아드님께…….”
“아님, 이쪽이 아니라 그 운명이라는 베타 놈과 봐야 하는 건가?”

헨리에게 닿았던 싸늘한 시선이 다시 레이를 향했다. 레오는 그의 눈앞에


무언가를 툭 내던졌다. 일주일 전 루스와 찍힌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린 신
문 기사였다. 레이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자식 연애놀음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엔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레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

레이는 발끝에 걸리는 신문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곤 순순히 그의 뒤를 따


랐다. 빈방으로 들어가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비난 어린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래. 베타라니, 참 재밌긴 하더군. 네 놀음에는 오직 알파만 허용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글쎄요.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예전에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베타에게 운명을 느끼니까 말이죠.”
레이의 도발에 레오의 한쪽 눈썹이 들썩여다. 하지만 곧 재밌다는 듯이 입
술을 비죽거렸다.
“이든이 들으면 참 좋아하겠구나.”
“…….”

어머니의 이름에 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레오가 낮게 으르며 말했다.


“네놈이 누구와 무슨 짓을 하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녀석
에게 걱정은 끼치지 말아야지. 그리고 가문에 대해서도 말이야.”
이것 때문이었군.
첫 히트사이클이 지난 이후로 무수한 알파들과 섹스 스캔들을 일으킨 레
이의 사생활을 레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가 오늘 처음으로 참견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이 자식 걱정일 리는 절대
없었다.
“어머님도 아십니까?”
“내가 그렇게 둘 것 같나?”

단칼에 날아든 대꾸에 레이는 그럼 그렇지 하며 조소를 흘렸다.


아마 이 일을 알았다면 이든은 바로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게 싫은
것일 테지. 지독하게 이기주의적인 저 알파는 자신의 짝을 누군가와 공유하
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것이 자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차피 따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도 그를 받아들이느라 며칠은 지쳐있
을 게 분명했다. 레이는 조만간 이든이 좋아하는 거라도 사들고 찾아가야겠
다고 생각하며 다시 레오를 바라봤다.
금발을 더욱 빛내주는 하얀 피부와 아름다움을 그리는 완벽한 이목구비,
평범한 갈색 눈을 찰나에 뒤덮는 금빛 눈동자, 지독한 이기주의 성격까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모든 것이 판박이였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피해 볼
심사로 머리를 기른 거지만 그 생김새나 성격만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
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알파가 아닌 걸까? 이렇게나 닮았는데 왜 자신의 몸은
오메가인 걸까?
울컥하는 마음에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쳤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레오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뗀 건 레이였다.
“어머님께 걱정을 끼쳐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가문은 또 무슨 소
린지 모르겠군요.”
“분명 네놈이 가주자리에 오를 때 나에게 말했을 거다. 자신이 오메가이
기 때문에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랬죠.”
“그런데 장로들이 요새 난리더구나. 극 우성 알파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
르는 일인데 저렇게 베타와 노닥거리는 것은 결코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말이야.”
기어이 노친네들이 난리를 쳐댔군.
하여튼 좋게 넘어가려 해도 그 대상들이 너무 멍청했다. 레이의 눈빛에 살
벌한 기가 스쳤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왜 그 노친네들의 쓰잘 데 없는 잡음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만드냔 말이다. 네놈 선에서 제대로 처리했었어야지.”
레오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노친네들 하나 처리 못 하는 네놈이 뭘 바꿔보겠다고 난린지. 정말 웃기
지도 않는 일이군”
“…….”
“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데.”
해볼 테면 잘 지껄여보라는 그의 표정에 레이의 입가에 찬웃음이 지어졌
다.
“ 주위에서는 그러더군요. 아버지는 약자에게 참으로 관대하시다고 말입
니다. 특히 오메가에게 말이죠. 예전에는 말입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
다.”
뒤 끝에 따라붙는 비릿한 어조에 레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
고 싶은 거냐는 시선에 레이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알파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 선에서 제가 오메가의 권리를 위해 센터를
세우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법을 바꾸는 그 모든 행위에 감동할 때도 있
었죠. 그래도 자식이니 돌보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잘 알고
있죠.”
“네놈이 뭘 안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은 그저 어머니께 잘 보이고 싶은 것뿐이잖아.”

비난조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내가 무엇을 바꾸려고 하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해해
보려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아니, 없겠지. 당신이 이해하고 싶은 건
오메가가 아니라 오직 어머니, 이든뿐이니까.”
“당연한 말을 길게도 지껄이는군.”

레오는 기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레이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


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그 녀석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 택한 게 바로
너다. 네놈이 아직 우는 것밖에 못 할 때 그 녀석은 매일 네놈을 걱정하기에
약속했지. 네 녀석이 오메가로서 당당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만
들어 주겠다고.”
한순간 그의 눈에 황금빛이 번뜩였다.
“나는 이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해줄 거다. 만약 이 세상의 알파
를 전부 죽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거란 말이다.”
저 광기와도 같은 집착. 영혼 각인이 심장에 새겨진 알파만이 낼 수 있는
마음이었다.
레이도 집착은 있었다. 그러나 저 알파가 어머니에 대해 보이는 집착은 그
도 가끔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것이 너무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
다. 이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극우성 알파인 저 남자라면 정말로 이든을 위
해서 세상조차 바꿔버릴 터였다. 그러나 레이는 저 알파가 바꾼 세상 따윈
원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잘도 지껄여지던 입이 더는 열리지 않았다. 말을 잃어버린 레이
를 향해 레오가 성큼 다가서 눈을 맞췄다.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극우성 알파
의 기세에 레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죽을 만큼 노력해도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만큼은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었다. 뼛속까지 밀려드는 복종
의 언어에 지독하게 새겨지는 건 완벽한 패배뿐이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머리 위로 떨어진 무감한 어조에 레이는 허탈하게 웃었다.
“장난쳐? 그 페로몬이나 집어치워.”
하여튼 기백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물론 저 정도도 없었다면 아예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거였다. 거기다 이런 성가신
짓도 하지 않았겠지. 레오는 혀를 차며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러니까 해줄 때 제대로 받아먹어서 빨리 독립해. 내가 있는 위치는 다
른 극 우성 알파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서서히 무너진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새로운 지배자를 맞을 준비를 시작하겠지. 그렇게 되면 역대 알파의 수장들
모두가 그랬듯이 나 또한 더는 네 입맛에 맞는 모이 따윈 내어 줄 수 없어.”
“나올 것 같아?”
대뜸 던져진 질문에 레오가 멈칫했다. 레이가 덧붙여 재차 물었다.
“극 우성 알파가 아버지 대에 나올 것 같냐고.”
“언젠가는 나오겠지. 늘 그래왔으니까.”

레오의 입가에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슨한 웃음이 걸렸다.


너도 그걸 바라고 있는 거 아니었나?”

허를 찔린 듯 레이의 얼굴은 단번에 흐트러졌다. 레오는 쯧, 혀를 차곤 나


직한 경고를 날렸다.
“독해질 거면 제대로 독해지는 게 좋을 거다. 어설프게 연애놀음 따위 하
고 있다간 결국 너도 평범한 오메가로 전락해버리고 말 테니까.”
레오는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나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레오님. 이든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가 나오자 복도에서 대기하던 측근 알렌이 반가운 보고를 올렸다. 날카


롭게 반짝이던 눈매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문을 나온 직후까지도 살벌했던
기운이 누그러지자 알렌은 바로 보고 올리기 잘했다며 내심 안도했다.
레오는 걸음을 옮기기 전 고요히 굳게 닫힌 문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 여
기까지였다. 이 정도로 인내심을 베풀어 줬으면 뭐라도 바뀌는 게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걸로 끝이었다.
집으로 간다.”

그는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리며 곧바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베타라…….
레오는 기사에 레이와 함께 찍힌 베타의 얼굴을 되새기다 결국 걸음을 멈
추었다.
“알렌, 지금 당장 내 앞에 네놈 아들 녀석을 데려와라.”
“네? 로이 말씀이십니까?”

알렌은 자기 아들을 데려오라는 소리에 흠칫,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


의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울프 녀석한테 연락 넣어둬. 얼굴 좀 봐야겠어.”

***

어설픈 연애놀음이라.
레이는 걸음을 옮기다 픽 실소를 흘렸다.
그 어설픈 연애놀음도 그 녀석하고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진도가 좀 나갔나 싶었더니, 불
청객으로 인해 도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레이는 응접실에 아론과
마주 보고 있는 마틴을 바라봤다.
어쩌면 완전히 후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에드윈 가문의 자식들은 기본적으로 마틴 블레어란 인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한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던 그는 그 공을 인정받
아 에드윈 가문의 정식 가족으로 입적된 상태였다. 물론 마틴은 여전히 블레
어라는 성을 썼고 한때 아버지의 라이벌이었던 울프 크누크의 사람이 되었
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교류는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록된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극우성 알파의 알파 연인이었
다.
레이, 잘 왔어. 마틴하고 이야기 중이었다.”

마틴의 방문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온 건 아론이었다. 아마도 로이를 통해


서 상황을 전달받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도 궁금했겠지.
마틴은 레이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곧게 서 있었다.
가주 회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레이님.”

단정한 몸짓,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정중하고도 눈치 있는 인사. 우성


알파치곤 담백한 느낌이 드는 그는, 레이가 호감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알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참 간사했다. 그들 사이에 공통된 인물
이 끼어든 것만으로도 마틴을 향한 레이의 마음은 현재 껄끄럽기 그지없었
다. 오로지 심증만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앉지.”

레이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의자에 앉았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마틴


의 앞에 놓인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이 끼어들기도 전에 아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루스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그건 너와 함께 있을 때 이야기 하고 싶
다고 하더군.”
“그렇다 해도 제가 해드릴 말씀은 별로 없을 겁니다.”

루스의 집 현관에서처럼 마틴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자 아론이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마틴, 우리 사이에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아무래도 레이님과 저희 사람이 얽힌 일이다 보니 어느 정도 오해는 풀
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뵌 것뿐입니다.”
단정한 웃음 뒤에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알파치곤 단정한 인상
이지만 저래 보여도 역대 극 우성 알파를 세 명이나 가까이 모셔 본 유능한
실력자였다. 정보를 캐내기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오해라면 어떤 오해를 말하는 거지?”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해하려는 알파 가문을 배후에 둔 수상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오해 말인가? 아니면 당신과 루스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걸까?”
끝말은 무척 비릿했다. 눈치로 생존해온 이들만 모인 자리에서 당연히 레
이를 향한 두 사람의 시선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론은 저놈이 뭘
또 잘못 처먹고 왔나 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든 말들 레이는 마틴에게서 시선
을 떼지 않았다. 오전, 현관에서 보였던 경계의 눈빛이 내비치자 마틴은 이
내 곤란하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띄웠다.
“우선 두 번째 오해부터 풀어드려야 할 것 같군요. 루스는 저희 가족입니
다.”
아마도 ‘저희’에는 울프도 포함되어 있을 거였다. 자연스레 서로를 묶어
부르는 단어에서조차 그들의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
는 더욱 속이 불편해졌다. 마틴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적 그와 인연이 되어 지금껏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오
해도 어느 정도 해소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의심을 거둬내기에는 무리 없는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
러나 두 번째 오해만큼은 여전히 레이의 마음속에 걸리적거리고 있었다. 어
쨌든 첫 번째 오해만큼은 오해가 확실했다. 레이가 아론에게 시선을 주며 말
했다.
어때? 이제 믿겠어?”

물론 레이는 애초에 첫 번째 오해 따윈 한 적이 없었다. 매번 자신에게 조


금이라도 상처를 준 것 같으면 지레 심각해져서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녀석
이었다. 그리곤 마음을 풀어주려고 다정한 빛을 보이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해하려는 인물이라는 건지. 웃음이 날 뿐이었다.
아론은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레이의 시선에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가다
듬었다.
“아직 전부는 아니야. 물론 당신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해주러 온 것만으
로 신뢰는 생기지만 녀석은 영 수상쩍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어떤 부분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가능한 선에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마틴이 흔쾌히 대답하자 아론은 눈을 반짝이며 즉시 물었다.


“W & M 하우스의 현재 CEO가 혹시 루스인가?”
옆에 있던 레이가 쯧 혀를 찼다.
“그는 베타입니다. 그가 알파를 고객으로 하는 투자기업에 오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마틴의 되물음에 아론이 낯을 찌푸렸다.
“그 녀석 베타 맞기는 맞는 거야?”
“보시면 아실 텐데요.”
“알파를 쓰러트리는 베타는 흔치 않지.”

보다 못한 레이가 그들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번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을 터였다. 레이는 두 눈으
로 루스가 알파 대여섯을 거뜬히 쓰러트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렇다
면 결코 평범한 베타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마틴도 동의했다.
“베타가 알파를 제압하는 건 확실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레이와 아론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하더군
요.”
뒤끝의 어감이 묘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지?”
“울프님이십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아론은 자신의 추측에 확신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틴은 처음부터 루스와 그들이 함께 살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냥 후원을 해주는 것과 울프가 직접 그를 훈련시킨 것과는 엄연히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거봐, 역시 그 녀석이 CEO 맞는 거지?”

그러자 마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 아론님, 루스가 아무리 울프님께 훈련을 받았어도 그는 베타입니다.”
“그럼 아니라는 건가?”
“거기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대답도 드릴 수 없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
다. 원칙은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아론의 입은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기업 간의 비밀 보장 원칙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기본 상도덕
이었다.
“어쨌든 루스의 신상 이력 또한 저희 쪽에서 손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
분에 대해서는 레이님께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틴은 레이를 바라봤다. 이제 자신이 할 말은 전부 끝났다는 듯 정리된
표정에 레이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반대는 안 하는가 보군.”

“…….”

의아해진 마틴에게 레이는 친절한 설명을 보탰다.


“어릴 때부터 데리고 있었으면 나름 정이 들었을 건데, 내가 그를 만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이지 않나?”
마틴 또한 오랜 세월 레이를 지켜봤다. 그렇기에 그에게 연애 대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도 레이가 진심을 가지고 루
스를 만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제가 참견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틴은 애매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그건 그 아이의 자유니까요.”
“아이라…….”
레이는 웃었다. 저 단어만으로도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알
려주고 있었다.
그래, 가족이라 했던가?
레이는 마틴을 가만히 응시했다. 단정한 얼굴에는 그 어떠한 망설임도 찾
아볼 수 없었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전부 진심이었다. 예상 밖의 결과였다.
레이는 시선을 내려 처음부터 거슬렸던 홍차 잔을 바라봤다.
“그가 차를 잘 끓이더군.”
“…….”
“직접 가르쳤나?”
다시 올라간 시선이 마틴과 마주했다. 이번에는 파란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곧 동요를 감추듯 내리깐 두 눈이 레이가 훑었던 홍차 잔을 바라봤
다.
“손재주가 좋은 아이입니다.”
에둘러 말해도 명료함이 느껴지던 지난 대화와 달리 이번 대답은 애매했
고 또한 아련함까지 느껴졌다. 마치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을 엿본 느낌이었
다.
“그렇군.”
레이는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틀었다.
“난 이만 가보지.”
“벌써?”

아론의 눈이 당황으로 얽혔다. 그는 아직 할 말이 많았다. 일이 산더미 같


은데도 일부러 본가까지 찾아온 건 마틴에게 분명 물어야 할 말이 있어서였
다.
베타답지 않은 베타 루스.
녀석의 의심스러웠던 정체가 지금 마틴의 입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
다. 울프와 엮여있는 거라면 거기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결과물들은 엄청났
다. 그걸 지금부터 캐물어야 하는데 저렇게 시답지 않은 차 이야기나 던지고
가버린다니. 속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가게? 이후로 스케줄도 없잖아.”

아론이 한 번 더 그를 잡자 레이에게서 짤막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 녀석 보러 갈 거야.”

이제 레이가 그 녀석이라면 자동으로 베타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걸 보니


확실히 저 녀석의 중심이 그쪽으로 심하게 치우쳐있긴 한 것 같았다. 아론은
낮게 신음하며 어떻게 해보라는 듯 마틴을 바라봤다. 그러자 가만히 레이를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님.”

레이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진지하기 짝이 없는 파란 눈과 마주


쳤다.
“루스는 우리와 달리 정이 많은 베타 아이입니다. 고작 추운 날 목도리 한
번 둘러줬다고 마음을 내어놓는 아이죠. 그러니…….”
“거기까지.”

레이가 다시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말했지 않았나? 참견하지 않겠다고.”

레이는 마틴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럼 그대로 멈춰서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직한 음성에 경고가 담겼다. 그리고 음험한 계략도 함께.


이번에는 그 목도리 내가 둘러 줄 테니까.”

***
전기 포트가 뜨거운 수증기를 뱉어냈다. 그 옆을 멍하니 지키고 서 있던
루스는 그제야 눈에 초점을 맞췄다. 다 끓은 포트를 들어 올리며 필터에 담
긴 원두 가루에 시선을 보냈다.
「커피 잘 마셨다.」
포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하아…….”

요 몇 주간 간신히 잡아두었던 마음이 오늘부로 다시 술렁이는 파도 속으


로 던져져 버렸다. 루스는 메마른 원두 가루를 거칠게 싱크대로 밀어 넣었
다. 확 퍼지는 가루 향이 평소와 달리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했다.
술이나 한잔할까?
역시나 맨 정신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긴 무리였던 것 같았다.
루스는 싱크대 위로 흩어진 원두 가루를 외면하며 선반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들려온 휴대폰 진동 소리에 술병을 집던 손은 도로 거둬졌다. 잠
시 망설였지만 또 오겠다던 마틴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연스레 거실 테이
블로 걸음이 옮겨졌다. 굳은 낯으로 불이 반짝이는 액정에 시선을 보냈다.
[레이]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루스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무심하게 던져둔 핸
드폰에 어느새 이름까지 새겨둔 모양이었다. 한순간 어깨에 올려둔 긴장이
탁 풀렸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의 연락에 안도를 느낀다는 사실이 어색했지
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건 사실이었다. 루스는 핸드폰을 들어 이번엔 망
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와. 오늘은 밖에서 한잔해.]

루스는 방금 건너온 부엌 선반 위로 시선을 보냈다. 집어 들다 도로 내려


놓았던 술병을 잠깐 바라보다 무심코 주변을 훑었다.
“ , 너 혹시 여기다 몰래카메라도 설치해 둔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딱 들어맞은 타이밍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핸
드폰 너머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생각 못 했군. 다음에는 꼭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아니, 됐어.”

실언을 내뱉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루스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파트 입구 너머로 레이가 늘 타고 다니던 고급 리무진 한 대가 세워져 있었
다.
[ 앨런을 보내뒀어. 나는 술을 준비하고 기다리지.]
제 할 말만 하고 뚝 끊긴 통화음에 루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이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신
이 거절할 수 있는 모든 상황 또한 전부 차단해 버렸다. 돌이켜보면 레이 에
드윈과 인연이 시작된 이후로는 언제나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
었다. 아예 인지 못 한 건 아니었으나 어째서인지 녀석과 함께 있을 때면 어
느 순간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럴수록 머리 한구석에선 끊임없이 위험 신
호를 보내왔다. 여기서 멈춰야했다.
하지만…….
루스는 창가로 눈을 돌렸다. 파란 열쇠고리 펜던트에 잠시 눈길을 준 그가
재킷과 함께 그것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에는 망설임 따
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앨런과 함께 도착한 곳은 에드윈 가문에서 운영하는 레오 펜덴 호텔이었


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루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호텔에 방만
있는 건 아니었기에 순순히 앨런을 따랐다. 그러나 주차장에 내려서 들어간
작은 공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보았을 때, 열린 그 안으로 올라타 앨런이
누른 층수 버튼을 보는 순간 그는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난 그저 술 한잔하자는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가장 편안하게 한잔 기울이실 수 있는 곳이라 하셨습니다.”

앨런은 침착하게 응대하곤 더는 말이 없었다. 더는 대꾸할 수 없는 분위기


에 루스는 일단 가보기나 하자며 입을 닫았다. 짧은 침묵 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이쪽입니다.”

앨런이 호사스러운 복도 너머에 있는 커다란 문으로 그를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다시 긴 복도가 이어졌다. 현대식과 고전미가 어우러진 화
려한 공간을 지나 어느 문 앞에 멈춰선 앨런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제
역할을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루스는 머뭇거리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의 야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창가에 그가 있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먼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레이는 평소 입던 정장이 아닌,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세팅된 테이블 위에는 각종 안줏거리와 고급진 술병
이 늘어서 있었다. 한잔하자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싶었다. 루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말을 걸었다.
“술 마시는데 꼭 호텔 방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나?”
“굳이 필요는 없지만 다른 곳이었다면 너와 나는 몇 분 뒤 술이 아니라 카
메라 세례를 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그가 말을 걸 때까지도 야경을 즐기던 레이가 그제야 가까이 다가온 루스
를 바라보았다.
앉아. 편하게 마시자고 내 영역으로 널 부른 거니까.”

레이는 술잔을 든 손을 흔들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여전히 상황이 마뜩잖았지만 루스는 늘 그랬듯 순순히 자리했다. 앞에 준
비된 잔을 바로 뒤집으며 레이 앞에 놓인 반쯤 비운 술병을 들었다.
술은 잘하는 편?”

레이가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가져가 도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루스는 뺏


겨버린 술과 빈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답했다.
“취하지는 않아.”
“잘됐네.”

루스 가까이 놓인 술병을 고른 레이가 그의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담배도 필요하면 말해. 준비해 놓지.”
“필요 없어.”
“의외군. 당연히 피울 것 같은 얼굴인데.”
“오래 살고 싶었거든.”

현재도 아니고 과거형 발언에 레이는 잔을 채운 술병을 내려놓으며 재밌


다는 듯 피식거렸다. 이미 루스는 채워진 잔을 기울여 단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고 있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화한 뜨거움에 그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꽤 독한 술인가 보군.”

거기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었다.
“알파 가문에서 특별히 제작한 술이야. 아무나 맛보긴 힘들지.”
“그럼 알파 전용 술 아닌가?”

알파들에게는 베타용으로 나온 술은 그저 탄산수 마시는 느낌 정도밖에


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만의 전용 술이 따로 있었다.
오메가 전용으로 나온 거야. 베타 술이랑 도수가 별다를 게 없어.”

태연한 답변에도 루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레이가 그의 빈 잔


에 도로 술을 채우곤 잔을 뺏어갔다. 그리곤 보란 듯이 술을 들이켰다.

“ !”

루스가 화들짝 놀라며 술잔을 도로 뺏어갔다. 그러나 이미 절반이나 비운


상태였다.
“오메가는 술에 약하다며?”
“오메가 전용이라니까.”

레이가 입술에 묻은 술을 혀로 핥으며 싱긋거렸다. 다행히 하얀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더 의심할 순 없는 노릇이었
다. 루스는 술잔에 고인 황금색 액체를 잠깐 바라보다 나머지를 전부 마셔버
렸다. 그리곤 살짝 미간을 구기는 그의 모습에 레이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
라갔다. 다시 빈 잔에 술이 채워졌다.
“그나저나 오래 살고 싶다니. 그런 욕심은 없을 줄 알았는데.”
“글쎄. 돌이켜보면 나처럼 욕심 많은 인간도 없을 거다.”

스스로 자조하는 모습에 레이가 그런가, 하고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럼 너는 우리들이 부러울 만도 하겠군.”
“엄청 부러워했지.”

단번에 인정한 그가 이번엔 느릿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레이의 얼굴을 찬


찬히 훑었다. 정장을 걸칠 때는 제 나이 같더니 저렇게 입고 있으니 훨씬 어
려 보이는 기분이었다.
“너도 그 얼굴로 이백 살 가까이 사는 건가?”
“살아있다면.”
“네 녀석은 이백 꽉꽉 채울 것 같은데?”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에 레이가 비식거렸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술을 한 모금 넘기고 나서 말을 덧붙였다.
“베타에게는 알파와 오메가의 삶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생처럼 바라보
겠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형국
이지. 특히 극우성 알파를 제외한 나머지 알파들은 힘이 서로 비등하거든.
그렇다 보니 거기서 약자와 강자를 나누려면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을 치
러야 하지. 거기에는 혈육도 제외되지 않아.”
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안달이야? 원하는 건 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그런 거야. 다 가지고 있는데 그걸 끝까지 지키며 이백 살 가까
이 살아야 하는 거잖아?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는 거지. 어쨌
든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각오가 필요한 거다.”
잃지 않기 위해서라.
알파는 인간이 가진 욕망의 집결체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솔
직히 루스는 그런 삶 따윈 피곤해서 싫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생존 서바이벌
에 뛰어들었던 불우한 시절 탓인지 몰라도 그는 그저 욕심 없는 편안한 삶을
희망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걸 목표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단
순했다.
“그럼에도 난 너희들이 부럽더군.”
루스는 위선적인 자신의 마음을 비웃으며 손에 든 술잔을 흔들었다.
“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모습을 바꿔 가는데 상대는 어릴 적 봤던 모
습 그대로라니, 어느 순간부터 그게 무척 힘들게 와 닿더군. 내가 살아갈 삶
보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나갈 거란 사실을 깨닫는 순
간, 무척 외로워져 버렸지.”
같은 공간에 있으나 서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단지 같은 시
간을 살고 있노라 착각하고 있었을 뿐.
“그 순간 자연스레 바라게 되더라. 나도 너희들처럼 이 모습 그대로 오랫
동안 살고 싶다고.”
찰랑거리는 황금색 액체를 바라보던 루스의 얼굴에 쓰디쓴 감정이 삼켜
졌다. 레이의 표정이 한순간 차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곧 기울어
진 술잔에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그럼 다른 걱정을 해야 하겠군. 내 짝사랑은 베타니까 말이야.”

비워진 술잔만큼이나 가벼운 소리가 루스에게로 건네졌다. 진지함으로


가득 채워졌던 그의 입가에 웃음이 차올랐다. 레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런, 내 진심을 비웃는군.”
“내가 죽기도 전에 딴 놈하고 스캔들 낼 녀석에게 뭐 하러 감동해?”
아닐 수도 있지.”

의외로 진지한 대꾸에 루스의 웃음이 뚝 끊겼다. 레이가 어깨를 으쓱거리


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각인이라도 하면 내 삶은 너의 생에 귀속되어 죽음까지 함
께 할 테니 말이야.”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마.”

웃음을 완전히 걷어버린 그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사랑하면 죽음도 같이한다니, 그런 엿 같은 소리 꺼내지도 말라고.”

나직한 음성에 분노가 짓씹어졌다. 갑작스러운 격한 반응에 잠시 멈칫했


던 레이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그려졌다.
엿 같다라…… 아니, 그건 좆 같은 거지.”

“…….”
네 말대로 영혼 각인 따윈 정말 끔찍한 소리일 뿐이야.”

레이가 루스의 빈 술잔을 채우며 반갑게 말했다.


간만에 마음이 맞는 대상이 생겨서 기쁘군. 마셔, 마시자고.”

루스는 터프하게 잔을 비우는 그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방금 들었
던 말을 곱씹었다.
“영혼 각인?”
“그래. 정말 지랄 맞지 않아? 어떻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한 놈하고 죽을
때까지 공유해야 한다는 건지. 생각만 해도 좆 같은 일이야.”
정말 싫다는 표정으로 잔을 채우는 그를 보며 루스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
다.
“ 정말 너다운 이야기군.”
레이도 웃었다.
“맞아. 나다운 이야기지. 호르몬 작용만으로도 서로에게 쉽게 흥분하는
알파와 오메가가 애초에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아?”
“……하지만 너도 각인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나?”
“나는 각인 따윈 하지 않아.”

레이가 아름다운 눈매를 휘며 중얼거렸다. 루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나는 가능한 것 같더군.”
루스의 얼굴에 살짝 충격이 떠올랐다. 레이는 아차 했다. 방금 건 알파의
가문을 이끄는 가주조차 알지 못하는, 오직 극 우성 오메가를 손에 쥐었던
알파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었다. 확실히 술을 마시니 지껄여지는 게 많은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처음에 뺏어 마신 술이 가장 문제인 듯싶었다. 레이
는 속으로 혀를 차며 슬쩍 화제를 변경했다.
오후에 마틴을 만났어.”

“…….”
“솔직히 아론도 그렇고 나도 너의 정체가 꽤 궁금했는데 하나도 가르쳐주
지 않더군.”
“그런 건 나한테 직접 물어.”

루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레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가르쳐줄 건가?”
“나이 34살, 카페 사장에 평범한 베타 남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 것 치곤, 어려 보이고 평범해 보이지도 않지.”

능청스레 받아치자 술을 기울이던 루스가 픽 웃었다. 레이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거기다 커피에 홍차도 잘 타는 불쌍한 짝사랑 꾼이지.”

“…….”
루스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빈 술잔에 고정된 두 까만 눈동자가 아득해졌
다. 침묵하는 루스를 힐긋 바라본 레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천천히 마셔. 시간은 많으니까.”
그에게 따라주던 술병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자 거의 깔끔히 비워진 상태
였다. 레이는 새 술을 따서 루스의 빈 잔에 채워주었다. 조금 전과 달리 잔을
채우는 액체가 투명했다. 루스의 시선이 병으로 닿았다. 순금과 다이아몬드
로 화려하게 장식된 병을 보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 년 동안 숙성시킨 술이야.”
루스의 시선에 설명을 붙여준 레이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마셔봐. 이건 맛있을 거야.”
백 년이란 말에 살짝 놀란 루스가 술잔을 바라봤다. 무색의 투명한 액체가
미세한 파동을 일으키며 잔잔한 냄새를 전달했다. 은근한 달콤함이 그의 미
각을 자극했다. 루스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한 모금 기울였다. 방금까지 마
신 술이 뜨거웠다면 이건 차가웠다. 폐부까지 들어차는 서늘한 부드러움에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마음에 드나 보군.”
레이는 뿌듯함을 느꼈다. 만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밌는 점이 있다면
이제는 어림짐작해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가 보인다는 거였다.
함께 있으면 그의 눈짓, 표정,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눈길이 갔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속 깊이 만족감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궁금한데.”

레이가 어느새 나른해진 루스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렸을 때 너는 어떤 아이였지.”
“글쎄…….”

살짝 취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아련히 중얼거렸다.


“다들 내가 건방진 꼬맹이였다더군.”
“지금의 너만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
“그때는 남은 게 악밖에 없었으니까. 바뀐 건 전부 그 녀석을 만나고 나서
부터야.”
“그 녀석이라면?”
“…….”

루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입에서 몇 번이고 굴려지는 발음이 좀처럼 뱉어


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레이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의 입술을 쫓았다. 그러나
그는 달싹이던 입안으로 술을 넘길 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리듯이.
다시 테이블로 내려오는 술잔이 비워진 것을 확인한 레이가 곤란한 표정
을 지었다.
“천천히 마셔. 그 술…….”
“두 사람을 만난 건 열 살 때였어.”

분명 얼굴은 멀쩡해 보이는데 늘 선명하던 검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장


막을 한 겹 덮어씌우고 있었다.
취했군.
술기운에 드디어 저 입의 잠금장치가 해제된 모양이었다. 원래는 바랐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영 마뜩지가 않았다. 저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는 막
연한 경고가 머리에 울렸다. 그러나 호기심이 먼저였고, 그것보다 먼저는 술
주정이었다.
“첫인상은 무척 까칠해 보여서 별로였어. 한껏 찌푸려진 파란 눈이 정말
차가웠거든. 차라리 그 옆에 있던 울프에게 눈길이 가더군.”
“그래서?”
“울프의 지갑을 훔쳤어.”

레이는 일순 귀를 의심했다. 그의 반응을 눈치 챈 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


으며 덧붙였다.
“난 그 당시 길거리 소매치기였거든. 지금은 울프가 모두 정리해서 살만
한 동네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겔룬에는 범죄 조직에 활용되는 아이들로 넘
쳐났지.”
겔룬은 원래 크누크와 루시 가문이 관리하는 구역이었다. 그러다 이십여
년 전 극우성 알파 울프가 그곳을 장악하면서 빠르게 조직들이 통합 정리되
고 지금은 새로운 그림자를 자리에 앉혀둔 상태라고 들었다. 레이가 말했다.
“그럼 네 고향은 겔룬 인가 보군.”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다시는 가고 싶지 않겠네. 안 좋은 추억들만 가득할 테니까.”
“그렇지는 않아.”

고개를 젓는 루스에게 망설임 따윈 없었다.


“ 삶을 시작하고 십 년은 지옥이었지만 그들과 함께한 그곳에서의 십 년은
무척 행복했어. 어린 나이에 길거리 도둑으로 사는 삶은 정말 절망밖에 없었
지. 미래가 보이지 않았거든. 평생 이렇게 착취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하
고 포기가 될 무렵 내 앞에 나타난 그는 구원이었어.”
그들에서 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리깐 그의 눈빛에 그리고 입가에 아련하고도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나
갔다.
“무척 따뜻했는데…….”
목소리가 아득히 잦아들었다. 그는 이제 이곳에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과거의 그때로 넘어간 루스의 옆에 있는 것은 다른 이가 분명했다. 그것이
레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추운 날 목도리라도 둘러줬나 보지?”

뒤틀린 음성에 루스가 멈칫하며 그를 바라봤다. 다시 자신을 보게 한 것까


지는 좋았는데 마주 보는 시선에 깃든 미묘함이 자꾸만 거슬렸다.
서랍, 봤군.”

고작 목도리에 대해 돌아온 답변이 서랍이라니. 곧바로 따져들 것 같은 눈


빛에 레이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마틴이 그랬거든. 고작 추운 날 목도리 한번 둘러줬다고 마음을 내어놓
는 아이라고 말이야.”
그나마 단단했던 낯이 사정없이 이지러졌다. 이내 고개를 떨어트린 그는
마치 버림받은 짐승처럼 측은해 보였다. 레이는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리
며 웃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꼴
은 더는 보기 싫었다.
마셔.”

레이는 루스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곧바로 무채색 액체가 그의 입안
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지러운 듯 루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눈꺼풀이 무겁게 아래로 떨어져 기어이 눈이 감겼다. 살짝
벌려진 입술에서 길게 늘어지는 나직한 숨결에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이제 슬슬 그만해야겠군.”

여기서 잠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은 그


의 옆에 앉았다.
루스, 일어나.”

그가 젖혀진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레이를 바라봤다. 흐릿한 시선에 오른


나른한 취기가 점철되어 있었다. 그것만 빼면 얼굴은 핏기가 없어 보일 뿐이
지 멀쩡해 보였다. 술이 세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레이가 힐긋 거의 비워진 술병을 바라봤다. 100년 동안 숙성시킨, 병조차
값비싼 저 술은 가문 알파들조차 구하기 어려운 에드윈 가문의 전통 술이었
다. 당연히 알파 전용이었다. 이곳에 있는 나머지 술들 또한 알파 전용이었
다. 보통 베타는 한 모금만 마셔도 바로 기절할 도수였다. 그렇기에 적당히
희석해 가져다 두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잘 버틸 줄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도
과했다.
루스.”

레이는 그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나긋하게 말했다.
“아직은 정신을 놓을 때가 아니야. 그러면 내가 좀 억울하잖아?”
왜? 라는 의문을 담는 나른한 눈빛에 레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왜냐고?
물론 술을 먹인 건 진도를 좀 빼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도 모처럼 착한 마음을 낸 것도 사실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그는 금
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해 보였다. 자기와 있으면 단단한 철벽같은 주
제에 다 허물어져 가는 벽돌처럼 아슬 해서 약간의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그러면서 분위기도 타보려고 한 건데…….
“처음이었어.”
갑자기 그가 레이에게 몸을 기울여왔다. 가까이 맞닿은 거리에 짙은 술 냄
새가 달큼하게 풍겨왔다.
“나를 위해 누군가 그런 따스함을 준건…… 그런 건…… ‘고작’이 아니
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 레이는 당황했다.
“그건 내게 처음 내리는 빛이었으니까.”
차라리 꼬시기만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레이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그의 뺨을 살짝 두드렸다.
정말 매정한 베타란 말이지. 안 그래?”

빛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뱃속 깊이 새까만 감정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난동을
부렸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당장에라도 저 녀석을 가두고는 오로
지 자신만 보게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세뇌라도 시켜야 속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물론 머릿속에 그린 충동을 실현해버리면 지금껏 쌓아왔던 녀석과의 관
계는 정말 끝이었다. 그리고 그런 알파들이나 하는 짓 따위를 할 생각도 없
었다.
그래도 억울하니 보상은 받아야겠지.
레이는 루스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바싹 대며 말했다.
루스. 입 벌려.”

“…….”
“벌리라고.”
“왜…….”

확실히 취하니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진작 뒤로 물


러나 화를 냈을 녀석이 순진하게 이유를 물어오고 있었다. 레이는 살짝 기분
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다정히 속삭였다.
“기분 좋은 거, 하려고.”
“기분 좋은 거?”
“응.”
“그게 뭐지?”
“여기를 벌리고.”

레이는 루스의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살짝 벌려진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


어넣었다. 말캉한 혀가 만져졌다.
이걸로 네 입안을 맛보는 거지.”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주는 야릇함에 레이의 목소리가 더욱 간드러


졌다. 루스의 시선이 홀린 듯 레이의 입술로 향했다. 적당히 젖어 든 매끄러
운 붉은 입술이 무척 탐스럽게 느껴졌다. 검은 눈동자에 은근한 욕망이 찾아
들었다. 그것을 알아챈 레이의 눈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하고 나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러면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건가?”
“…….”
“아무런 고통도 괴로움도 안 느껴지는 거야?”
“그래.”
애처로울 정도로 절박한 목소리에 레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곤 코끝을 맞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페로몬을 옅게 풀어냈다.
말했잖아. 기분 좋은 거라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곧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다.


부드러운 살이 맞닿는 순간 레이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카페에서 처음
맛본 달콤함을 기억했다. 최초의 감각은 그가 인내한 시간과 더해져 극적 효
과를 가져다주었다. 다시 맛본 입술의 감촉만으로 레이는 갈 것 같은 황홀경
에 빠져들었다.
붉은 살을 가르고 침범한 혀가 갈증을 채우듯 능숙하게 점막을 헤집었다.
눅눅한 열기가 빠르게 안을 질척였다. 제 영역표시를 확실히 해대는 기특함
에 레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캉한 살덩이를 이빨로 깨물었다. 동시에 나직
한 신음이 울렸다. 고통과 쾌감이 범벅된 소리는 야했다. 금욕적인 상대가
갭을 보이면 더 흥분되기 마련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더욱 짙어졌다. 동
시에 루스의 몸에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 레이는 그를 끌어당겨 몸을 뒤집
었다. 단단한 몸 위에 올라타며 섞여든 타액을 그의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레이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이자 입맞춤
이 더욱 진해졌다. 그의 혀를 낚아챘다. 힘껏 빨아들인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야릇한 숨결이 녹진해진 입술에 툭 떨어졌다. 타액으로 매끈해진 입술이
탐스럽게 부어올랐다. 레이가 아득한 그의 시선과 맞추며 교태로운 웃음을
흘렸다.
어때? 기분 좋아졌지?”

굳이 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새까만 눈에 점철된 욕망과 수컷의 흥분을


알리는 증거가 또렷이 몸을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좀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레이는 상체를 일으켜 허리를 꼿꼿이 들었다. 한 손을 뒤로하며 곧고 긴


손가락으로 루스의 바지 앞섶에 볼록해진 부분을 찾아 덧그렸다. 살짝 단단
해진 열기가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거야.”

레이의 미소는 한층 음란해졌다. 앞섶을 더듬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자신


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씩 단추가 풀어질 때마다 드러나는 살결
에 루스의 젖은 눈동자가 새까맣게 일렁였다. 한층 짙어진 욕정이었다. 드디
어 마지막 단추를 풀어낸 레이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셔츠를 완전히 뒤로 젖
혔다. 상체의 새하얀 속살이 완연히 드러나자 루스의 반쯤 내려간 검은 눈동
자가 크게 떠졌다.
한순간 시야가 전복됐다. 레이의 등이 소파에 닿는 순간 루스의 몸이 그를
덮쳐왔다. 그리고 목덜미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금빛 눈동자가 고통에
일그러지는 반면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드디어, 하는 생각에 드러난
이가 짜릿한 신음을 뱉어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참았던 만큼 키스로 전해진 쾌감은 극에 달해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느낄
쾌락은 어떠할지, 상상만으로도 전율에 몸이 떨렸다. 레이는 목덜미를 더듬
는 저돌적인 입술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욕망을 가둬둔 그의 벨트에 버클을
끌어내는 순간이었다.
안 돼.”

버클을 푸르던 손이 루스의 손에 의해 거둬졌다. 레이가 황망한 시선을 보


내자 밤하늘을 닮은 까만 눈동자가 깊게 시선을 맞춰왔다. 그리고 탐욕을 담
던 입술이 담백하게 달싹여졌다.
안 돼. 그러면…….”

풀썩, 어깨 위로 떨어진 건 루스의 묵직한 몸뚱이였다. 축 늘어진 육체의


무게에 짓눌린 레이는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눈을 깜빡였다.
안 돼?”

멍하니 말을 되뇌던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이, 일어나!”
레이는 묵직한 몸을 밀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며 루스의 뺨을 두들겼
다.
“ 루스, 일어나.”
하지만 굳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설마, 지금 자는 거야?”
이 상황에서?
레이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실소를 흘렸다. 방안에는 오메가의 페로몬
이 평소보다 더 진하게 뿌려진 상태였다. 이 정도 농도면 알파 새끼들은 이
미 미쳐버리고도 남을 양이었다. 거기다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키스에다가 영역표시까지 해 놓고는 잔다고?
레이는 문득 안 된다며 자신을 마주 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거기다 슬쩍 만져본 아래
는 분명히 서 있었다.
남자가 섰으면 뭐라도 하고 떨어져야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위기감이라곤 전혀 없는
녀석은 품에서 아주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
왔다. 저 감긴 눈꺼풀은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는 열리지 않을 듯싶었다.
술이 너무 과했나?”

자동으로 그가 마시던 술병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술 냄새


가 지독하긴 했다. 주량 조절의 실패라면 그건 그거대로 억울한 일이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처구니없이 날려버리다니.
정말 어려운 놈이군.”

자존심이 퍽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되면 저 녀


석 눈에 자신이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레이는 씁
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를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잘 다듬어진 검은 눈썹과 잘생긴 눈매가 들어왔다. 날렵한 콧날을 따라 내려
가자 방금까지 격렬히 맞붙은 입술은 적당히 부어올라 탐스럽게 익어있었
다.
아론 말처럼 베타치곤 참 잘생긴 귀족적 얼굴이었다. 품에 전부 들어오지
못한 단단한 육체는 만지는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저번에 슈트를 맞추러 갔
을 때도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의상이 없을 만큼 옷맵시도 훌륭한 몸매였
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레이는 더욱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 잠시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 확 덮쳐버려?
그러다가도 조금 전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읊던 놈의 말이 떠올랐다.
「안 돼. 그러면…….」
분명히 그는 욕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말 한마디와 주름진 미간에서
느껴졌던 건 그 이상의 죄책감이었다.
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오메가를 탐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녀석은 아무도 없


었다. 모두 당연한 본능으로 치부해 버릴 뿐.
아무래도 이 녀석은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았다.
레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힘을 빼고 늘어져 버렸다.
아직 들끓는 욕정을 잠재우려면 찬물에 샤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
했지만, 그럴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몸을 끌어안은 레이는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술
냄새를 파헤친 그 속에 은은한 살 내음이 묻어났다. 한껏 들이키자 심통 났
던 마음도 들끓던 욕정도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매번 발정열에 의지
해 욕망만 후딱 풀어버리고 방을 나섰던 터라 누군가와 이렇게 체온 맞대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맞닿은 체
온이 주는 따스함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고동 소리
가 안정적인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감각은 어쩐지 그리
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마치 그날의 햇살과 같이.
빛이라…….
어쩐지 조금은 루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네가 극우성 알파였다면 좋았을 건데.”

레이는 아주 작게 속삭이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눈꺼풀이 열리는 순간 시야가 와장창 깨지듯 두통이 밀려왔다. 나른함도


잠시 루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몸을 틀면서 앓는 소리를
내자 급격하게 갈증이 밀려왔다.
마셔.”

타이밍 좋게 내밀어진 유리컵에 투명한 물이 찰랑거렸다. 무심결에 뻗은


손이 컵을 잡기 전에 멈칫했다. 투명한 액체가 마치 어제 마셨던 두통의 원
인을 떠올리게 했다.
그냥 물이니까 안심하고 마셔.”

그의 심중을 읽고 덧붙여진 소리에 그제야 멈칫한 손이 유리잔을 가져갔


다. 물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자 메마른 목구멍이 시원하게 적셔졌다. 그
제야 루스의 얼굴에 살만한 표정이 지어졌다. 손에 들린 빈 잔이 도로 치워
졌다. 텅 빈 손을 바라보던 멍한 눈이, 걷어지는 유리컵을 따라 천천히 옮겨
졌다. 작은 탁자에 얹어지는 유리컵을 떠나는 하얀 손이 무척 곧았다.
잠은 푹 잘 잤나?”

비릿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심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루스는


퍼뜩 몸을 일으켰다.
와 아침부터 서비스가 좋은걸?”
“ ,

무심하던 시선이 탄탄한 상체를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시트마저 걷어


진 그의 몸은 알몸이었다. 레이의 눈가에 야릇한 웃음이 담기는 순간 루스의
입에서 소리가 질러졌다. 시트를 도로 끌어다 몸에 두른 그가 수치 가득한
얼굴로 레이를 노려봤다.
“이거 뭐야?”
“뭐가?”
“내 옷은,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말까지 꼬이며 횡설수설하는 멍청한 모습을 바라보던 금빛 눈썹이 꿈틀


거렸다.
기억 안 나나?”

낮아진 목소리가 무척 비틀려있었다. 의미심장하게 내던져진 말에 루스


는 크게 동요했다. 그것이 기억이 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놀라고 있
는 건 다름 아닌 레이의 모습이었다.
막 샤워하고 나온듯한 젖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스가운 하나만 입은
채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모습은 영 심상치 않았다. 루스의 눈이 빠르게
그의 모습을 훑다가 어느 순간 목덜미 부근에 멈춰 섰다.
너 그거…….”
“ ,

차마 다음 말을 뱉지 못하는 경악한 시선을 따라 레이가 목덜미로 시선을


내렸다. 붉게 부어오른 흔적은 아직도 옅은 이빨 자국을 내고 있었다. 지금
껏 싸늘하던 레이의 입가에 심상치 않은 미소가 짙게 그어졌다.
정말 기억이 안 나나 보네?”

무슨 기억!
루스는 혀끝까지 굴러온 외침을 도로 삼키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을 돌려봤지만 아무리 돌려도 새까만 필름만 난무할 뿐이었
다. 그나마 흐릿하게 떠오르는 건 마지막으로 들이킨 투명한 술이었다.
충격으로 잊고 있던 지끈거림이 다시 밀려들었다. 이마를 감싸며 신음을
뱉어냈다. 그 찰나, 무언가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메마른 혀끝에 찌릿한 감
각이 파고들었다. 자동적으로 침을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미끈한 타
액의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도대체…… 어제, 우리가 뭘… 한 거야?”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허망함이 가득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
부는 아니지만 오해할 정도의 파편들은 떠올린 것 같았다. 레이의 입술에 짙
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것은 무척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애가 탈
정도로 느릿하게 열린 입술이 엄청난 말을 쏟아낸 건 그때부터였다.
“ 혹시나 해서 말이야. 오메가는 임신도 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지?”
급격히 창백해진 루스의 얼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시커멓게 죽어버렸
다.
“그러니까, 그 말을… 꺼내는…… 의도가…….”
“그냥 그렇다고. 어쨌든 어제는 무척 즐거웠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허리를 집으며 살


짝 미간을 찌푸렸다.
“ 어젯밤 누가 끈질기게 달라붙은 덕분에 무리했더니 허리가 아프군.”
최후의 한방이었다. 영혼이 반쯤 떠나간 루스의 얼빠진 표정에 레이는 입
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어제 일이 괘씸하긴
했지만, 술 때문에라도 그의 탓만 할 수는 없었다. 대충 키스 한 걸로 퉁치고
놈의 반응이나 구경하려 했는데 기억까지 싹 지워버린 녀석을 보자 심사가
확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저 오해를 쉽게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룸서비스 시켰으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레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스의 필사적인 외침에도 레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


았다. 엄청난 걸 들어버린 이상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루스는 자신의 상
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침대에서 튀어나가 막 나가려는 그를 낚아채 몸을
돌렸다. 눈앞에 갑작스레 드리워진 녀석의 모습에 레이가 살짝 당황하며 시
선을 아래로 내렸다.
너 완전히 알몸인 건 알고 있지?”

급했는지 시트조차 바닥에 내팽개치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본


인이 더 기겁해 난리 칠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수치 따윈 외면할
만큼 절박해 보였다.
그렇게 싫은가?
절망적일 정도의 반응에 레이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 말 진심이야?”

루스가 다시 물어왔다.
“무슨 말?”
“네가 했던 모든 말.”
“진심이지.”

레이는 딱 잘라 말했다. 사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다. 오메가가 임신할


수 있다는 건 세상 누구나 아는 당연한 진실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녀석을
침실로 데려가 옷을 죄다 벗기고 침대에 눕히는 것까지 혼자 하느라 허리가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상대의 문제였다.
그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면 내 억울함은 누가 책임져?
레이는 당당하게 그를 쳐다봤다. 루스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장난치는 거면…….”
“맞으면, 책임이라도 질 생각인 건가?”
“…….”

흠칫한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오히


려 루스는 레이가 도망이라도 갈까 싶은지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팔목에 실리는 힘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얼굴이라니.
레이는 미간을 좁혔다. 절로 혀가 차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
도 녀석은 생판 모르는 오메가가 네 놈 애라고 데리고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임질 녀석인 듯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재미가 없어졌다.
원래는 호텔을 나가기 전까지 오해는 풀어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 네가 책임질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일을 치렀다 해도 베타와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작 한번


잔 걸로 책임지라 했으면 지금쯤 레이의 남편은 아마도 산을 이루고도 남을
판이었다. 솔직히 말해줬건만 인제 와서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루스가
아니었다.
“진짜야?”
“그래.”
“그러면 목덜미에 있는 그건 뭐지?”
“아, 이건 네가 한 거 맞아.”

다시 루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도대체 뭔데? 하는 시선에 레이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거짓말은 한 적 없다고.”
“그럼.”
“섹스는 안 했어.”
“…….”
나머지는 알아서 기억해내. 일일이 내가 말하는 것도 뭐하지 않나?”

레이는 잡힌 손을 뿌리치며 이제 귀찮다는 듯 말했다.


옷은 침대 옆에 갖다 뒀어. 배고프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와.”

***

씻고 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루스의 머리는 계속해서 어제의 일을 헤


집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어째서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베타 중에서는 주량이 꽤 강한 편이었다. 지금껏 술을 마시고 단 한 번도
필름이 끊긴 일은 없었다. 아무리 독하다 해도 어제 마신 주량은 평소 그가
마시던 거에 비해 택도 없는 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필름이 잘려나간 듯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문득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알파 전용 술.
딱 한 번 술을 마시고 죽을 뻔한 기억이 있었다. 호기심에 울프의 사무실
선반에 있던 술을 한번 몰래 꺼내 먹었었다. 그때는 아직 십 대일 터라 그가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그 뒤 마틴에게 호되게 혼
나고 다시는 알파 전용 술은 기웃거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도 분명 마셨었는데…….
오메가는 베타보다도 주량이 약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만약
그랬다면 녀석도 분명 힘들었을 거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마시던 술과 자
신이 마신 술병이 언뜻 다른 것도 같았다.
혹시 그 녀석…….
「여기를 벌리고― 이 걸로 네 입안을 맛보는 거지.」
“…….”

「하고 나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루스는 무심코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입안에서 혀의 움직임이 의식적으
로 그려졌다. 입안을 훑어내던 선연한 감각에 절로 침이 고여 목구멍으로 넘
어갔다. 순간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하아…….”
아무래도 키스까지는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이었다.
「섹스는 안 했어.」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군.
거기까지 생각하자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최악이었다. 기억이 안 난다
는 핑계를 지고 일어난 일에 회피를 시도하는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
껴졌다. 루스의 시선이 문에 닿았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아까 녀석이 식
사 어쩌고 했던 걸 떠올렸다. 지금도 충분히 시간이 많이 지났을 터였다.
루스는 한결 정리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늦게 나올 것 같아서, 새로 세팅해 달라고 했어.”

펼쳐 든 잡지를 넘기던 레이가 그의 기척을 눈치 채곤 나직하게 중얼거렸


다. 어느새 그의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가운 대신 단정
한 진회색 슈트가 그의 몸에 걸쳐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실 감각
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루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카라에 가려진 목덜
미 쪽에 닿았다.
아쉽게도 가려지더군. 보였으면 좋았을 건데.”

레이가 그의 시선을 눈치 채곤 얄궂게 바라봤다. 평소라면 뭐라도 한 마디


던졌겠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루스는 멋쩍은 얼굴로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
서 앉았다. 그리곤 앞에 놓인 포크를 들고 아직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오믈
렛 한 조각을 떠먹었다.
네가 내린 커피를 맛보고부터는 영 다른 커피가 성에 차지 않아.”

레이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내 가게에서 원두 사서 마셔.”

오믈렛 한 조각을 삼킨 그가 무뚝뚝하게 내뱉자 레이가 싱긋 웃었다.


“그럼 원두를 사서 네 집으로 가야겠군. 네가 내린 커피가 맛있는 거니
까.”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보란 듯이 내려놓았다. 루스는 폭신한 빵을
뜯어 입에 넣다가 잡지 표지에 시선을 멈췄다.
“몇 주 전에 인터뷰했던 잡지 샘플이 나왔어. 이번 주 내로 출간된다 하더
군.”
LK 매거진 여성 잡지였다. 표지를 장식한 건 레이였다. 모델이나 지을 법
한 포즈를 취한 그의 발아래 커다랗게 ‘레이 에드윈의 첫사랑 스토리 단독
인터뷰.’라는 문구도 실려 있었다. 루스는 얼마 전, 드디어 읽은 그와의 스캔
들 기사가 언급되었던 잡지라는 것을 알아봤다.
“기분이 어때?”
“무슨 기분?”
“레이 에드윈의 첫사랑이 너라잖아.”

간신히 피고 있던 얼굴이 결국 일그러졌다.


“읊어줘? 지금껏 내내 너한테 개인 입장 발표해왔을 건데? 뭣하면 정리해
서 다시 알려주지.”
루스는 정색하며 오믈렛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음식을 씹느라 오물
거리는 그의 입술을 응시하던 레이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 중얼거렸다.
근데 말이야. 짝사랑하면서도 할 건 다 했나 봐?”

열심히 포크를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야?”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너무 잘 하길래.”

어제의 키스를 떠올린 레이는 슬며시 제 입술을 핥았다. 그 즉시 루스가


포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요하게 눈을 맞추며 물었다.
“솔직히 아무리 머리를 헤집어도 어젯밤 일은 기억이 잘 안 나.”
“대화 내용도?”
“목도리.”
“…….”
“ 너에게 마틴이 말해줬다는 그 목도리 이야기. 거기까지가 내 한계야. 그
뒤에는 마치 조각난 필름을 보는 기분인데 그게 진짜 기억인지는 모르겠
어.”
살짝 눈빛을 굳혔던 레이가 표정을 풀며 수긍했다.
“그렇겠지. 많이 취해있었거든.”
루스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진지하게 물어왔다.
“어제 내가 너에게 사과해야 할 만한 일을 했었던 건가?”
“아니, 없었어.”

예상한 질문에 레이가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말했잖아. 섹스는 안 했다고.”
“그것만이 아니잖아?”

루스의 시선이 다시 목덜미에 닿았다.


“이것도 괜찮아. 너의 흔적이 그리 나쁘진 않거든.”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쨌든 내 말은 믿어도 좋아. 만약 그때 일을 치렀다면 네 옆에서 내가 가
운을 입고 너를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라 침대 위에서 맨몸으로 너와 나란히
누워있겠지. 혹시 몰라서 일부러 잠도 따로 잤다고. 이 정도면 내 참을성에
칭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그렇게까지 설명해주는 거지?”

대뜸 물어온 질문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설명해주지 않고 내가 마음껏 오해하게 만들어서 너를 책임지게
할 수도 있었잖아?”
“아아, 그거?”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이는 한껏 진지한 루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마음이 들겠어?”

기억이 안 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회


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있었다. 설령 그
상대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말이다. 정말 어떻게도 독하게 대할 수 없는 인물
이었다.
“그리고 난 누군가가 나를 책임져주길 바라지 않아. 나는 내가 알아서 잘
책임지고 있거든.”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 따윈 레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아니
었다. 레이는 여전히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루스를 내버려 둔 채 다시 커피
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맛이 별로였다.
커피잔을 도로 내려놓았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앨런이 들어
왔다. 그의 손에는 몇 개의 상자가 들려있었다.
이만 가지. 오전에 회의가 있어.”

레이는 자리에 일어서서 앨런이 가지고 온 상자 하나를 열더니 루스를 향


해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봐.”

루스는 못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레이가 그의 머리


에 모자를 씌웠다.
잘 어울리네.”

흐뭇한 눈웃음에 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게 뭐지?”
“아마도 우리가 나가면 기자들이 한가득일 거야. 어젯밤 우리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이미 쫙 퍼졌거든.”
그럼 그렇지.
루스가 한숨을 쉬며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따로 나가. 네가 먼저 나가면 나는…….”
“난 내 첫사랑이랑 함께 나가고 싶은데?”

레이는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꺼내 그의 눈에 씌워줬다. 한 겹 덧씌워진 어


둑한 시야 너머로 꽤나 즐거워하는 모습이 비쳤다. 루스가 설마 하며 물었
다.
“일부러 사진 찍으라고 네가 퍼트린 거 아니야?”
“당연하지.”

마지막으로 꺼내든 건 얇은 은사로 만들어진 머플러였다. 여름이 다가오


는 탓에 털실로 짠 목도리는 아니지만 이른 아침의 서늘함은 충분히 따뜻하
게 만들어 줄 터였다.
“명색이 베타, 오메가 연인끼리 한 번쯤 다정한 모습도 보여줘야 하지 않
겠어? 슬슬 의심들이 난무할 텐데 말이야.”
레이는 머플러를 루스의 목에 정성스레 감아주었다. 목에 감기는 얇은 촉
감이 무척 부드러웠다. 선글라스 너머에 눈빛이 살짝 일렁였다. 멋들어지게
머플러 매듭까지 정리한 그가 루스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달콤하고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 나갈까? My Daring.”

***

< 레이 에드윈, 베타 연인과 L. P. 호텔에서 짜릿한 밀애를 즐기다>


약자로 해둔다고 그 호텔이 어디라는 것을 모를 알파는 세상 어디에도 없
었다. 그만큼 레이 에드윈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알파들에게 놓칠 수 없는
필수 정보였다. 레이 에드윈이 그 빌어먹을 베타 자식의 어느 팔에 팔짱을
끼었는지, 놈을 향해 사랑스러운 웃음을 몇 번 지어 보였는지, 그의 귓가에
몇 번 달콤한 속삭임을 전했는지 까지도 전부 알파들의 귀에 들어가 있는 상
태였다.
단지 기사를 화면에 띄웠을 뿐인 핸드폰이 알파의 분노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맞아. 감히 베타 따위한테 뺏기려고 우리가 지금껏 천한 오메가 따위한
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잖아?”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군. 베타 따위로는 만족 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모여 있던 가문의 알파 중 일부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성난 페로몬을 내뿜


으며 제 성질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어리석은 자들을 바라보며 러신은 한심
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저러니 레이한테 지금껏 간택 한번 받지 못한 거였다.
<알오 플러스 클럽>은 가문의 자제 중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알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백 년 가까이 삶을 이어가는 알파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
하고 모두 이십 대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살아온 삶이 다른 만큼
세대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인맥과 서로의 이해관계에
필요한 커뮤니티의 구축 의도도 갖추고 있었지만, 이 클럽의 목적의 가장 첫
번째는 같은 세대 간의 친목 도모였다. 그렇기에 오래전부터 알파들은 나이
를 적당히 구분 지어 모임을 만들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나이 따라, 수준 따
라 끼리끼리 그룹이 만들어져있었다.
제 페로몬 하나 제대로 제어 못 하고 발정 난 수컷처럼 분개하는 이들과
달리 담담하게 저들의 분노를 무심히 흘려버리고 제 할 일을 하는 알파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저들이라고 레이 에드윈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아니
었다. 단지 드러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알파라면 평생 시달려야 하는 욕망의 갈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최
상의 꽃이 바로 극 우성 오메가였다. 그런 귀한 존재를 어느 수컷이 마다할
수 있겠는가? 러신의 눈빛에 찰나의 흥분이 스쳤다.
러신, 너도 말해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군가가 대화의 방향을 그에게로 바꾸어 놓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잠시


고양되었던 감정이 찬물 끼얹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방해가 못내 짜증스
러웠지만 러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저 무심하게 대꾸했다.
“온전히 레이 에드윈의 선택이야. 거기에 대해 우리가 뭘 어쩌겠어?”
“하지만…….”
“괜히 레이의 사생활에 개입했다간 다치는 건 너희들이 될 거다. 그걸 모
르는 자들은 여기 없겠지?”
레이 에드윈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알파의 세계에서 발을 붙이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권력은 단순히 에드윈 가주라는 위치에서 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알파의 수장 레오 에드윈을 시작으로 우성 알파 중 다음 대
수장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둘째, 아론 에드윈. 사마 가문의 가주 페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있는 여성 알파 렉스와
에드윈 가의 사병 타르타로스의 군대를 물려받아 어마어마한 세를 불리는
미치광이 카일. 그리고 레이의 대부를 자청하는 극우성 알파 울프 크누크.
레이 에드윈을 건드리는 순간 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을 이
곳에서 모르는 알파는 없었다. 새삼스레 그의 뒷배를 인지한 알파들의 얼굴
에 일순 공포가 떠올랐다. 위협하는 적도 없는 상황에서 방안은 팽팽한 긴장
감이 감돌았다.
그 그래도 분하다고.”
“ ,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이야 종종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새삼스러운 일


을 깨달은 지금 상황에서도 미련스레 고집을 부리는 머저리가 누군가 싶어
러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의 것을 뺏어간 그 베타 녀석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클럽에 입회한 지 얼마 안 되는 티오네 가문의 철부지 도련님이었다. 아무
래도 클럽의 유일한 오메가 회원 레이 에드윈을 보기를 학수고대한 모양이
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클럽에 들리던 그가 도통 보이질 않으니 심통이
난 거겠지.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러신은 가만히 테이블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그 베타 놈의 사진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 한 번쯤 손은 봐줄 필요가 있겠지.”
“ ,

러신의 발언에 홀 안의 모든 알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어차피 건들


지 말아야 할 건 레이 에드윈뿐이었다. 러신이 입술을 뒤틀며 비릿하게 중얼
거렸다.
“감히 베타 주제에 넘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려줘야 하지 않
겠어?”
***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마네토 가주로 가기 전에 울프님 자택에서 몇 가지


주워들었을 뿐이지.”
헨리가 레이에게 샴페인 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정 궁금하면 세르게이님께 물어보지 그래? 울프님이 처음
꼬맹이와 만났을 시기에 그도 함께였다고 했으니까.”
“내가 그 녀석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래? 그리고 치워. 술은 꼴도 보
기 싫으니까.”
레이는 눈앞에 드리워진 잔을 짜증스레 밀어냈다. 헨리가 거부당한 잔을
도로 물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일에 관해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우리 여왕님께서
그분은 왜 그렇게 꺼리시는 걸까?”
“기본적으로 생명 존중 사상이 제로인 녀석이 싫을 뿐이야. 말 자체를 섞
고 싶지 않아.”
“하긴, 가문 알파들조차 어려워하는 분이시니. 어쩔 수 없지.”

레이의 감은 정확했다. 헨리도 세르게이와 함께 있으면 온몸에 신경이 쭈


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의 주변에선 희한하게도 생명의 온기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아, 저 알파 옆에 있으면 결국은 죽
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나, 나도 딱히 해줄 말이 없는데…….”
헨리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필립 박사가 있었군.”
“ !
“필립 박사는 왜?”
“그 당시 그 녀석이 루스를 치료해줬다는 소리를 들었어. 아니다, 그의 아
버지가 그랬나?”
“그 녀석이 다쳤었다고?”
“그 당시에 거의 죽을 뻔했다고 들었어.”

한순간 레이의 낯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의 반응에 헨리는 살짝 놀라다가


피식,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지금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진지해?”
“누가 심각했다고 그래?”

바로 발뺌을 해버리는 태도와 달리 레이의 낯은 여전히 어두웠다. 자기 목


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태연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과거 일일 뿐인, 남의 사연에 과민한 반응을 내보이고 있었
다. 재밌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
었다. 이십여 년 가까이 치열한 가주의 삶을 보내면서 한줄기 위안이 되어준
이가 바로 레이 에드윈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자신의 여왕님에 마음이
그쪽을 향했다면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헨리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
다.
어쨌거나 필립한테 물어봐, 그쪽이 더 정확할 거야.”

그를 바라보는 헨리의 눈빛에 애틋함이 듬뿍 담겼다. 그 시선을 상대가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 느글거리는 시선 좀 치워.”
“어떤 시선?”

헨리가 능글맞게 물어오자 레이가 입을 다물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


렸다.
“부끄러워하긴.”
“시끄러워. 네놈은 너무 질척거려.”
“그렇게 만드는 게 누군데.”
“난 이만 가지.”

레이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냥 가게? 자고 가.”

헨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제로 그와 다시 마주 보게 된 레이의 인


상이 일그러졌다.
“요즘 들어 자꾸 기어오르는 것 같은데.”
“히트사이클 다가오는 거 맞지? 페로몬이 제어가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
허를 찔린 그가 침묵했다. 레이 에드윈과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가며 알아
낸 사실 중에는 의외의 것들이 몇 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을 연 상대에
게는 거짓말을 잘 못 했다. 헨리는 자신이 그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무척 흡
족했다. 그러나 자신 또한 그에게 마음을 내어 준 지 오래였다. 문제는 여기
서 발생했다. 마음을 내어준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채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헨리가 한숨을 삼키며 그를 어르듯 말했다.
“적당히 풀고 가. 그 꼬맹이 만나고 부터서는 다른 알파하고도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누가 그래? 한 번도 안 했다고.”

레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순간 헨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격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동안 힘이 빠져버린 손을 레이가 가차 없이 쳐내
버리곤 몸을 돌렸다.
너 그 녀석이랑 했어?”

경악스런 그의 질문에 레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했다고 하고 가버리


면 그만인데 차마 그 말까지는 입에서 뱉어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꾸가 없
자 헨리가 그럼 그렇지,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레이.”
“자꾸 개새끼처럼 부르지 마……!”
어느새 가까워진 헨리가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턱을 움켜쥐었다. 고개
를 숙여 입을 맞추는 순간 레이의 눈이 커졌다. 방심한 입술을 빨아들이는
헨리의 행위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짧은 애무를 끝내고 떨어지는 순
간에도 레이의 입술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금빛 눈동자
는 잔인할 정도로 무심했다. 헨리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걸릴 때쯤 손이
날아들었다.
어이쿠. 아무리 열 받아도 폭력은 안 되지. 네 손이 망가지잖아?”

뺨을 향해 날아온 손을 재빠르게 막아선 헨리가 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곤 그를 근처 테이블로 밀어붙였다.
오늘따라 웬 지랄이야? 미쳤어?”

레이의 눈빛엔 분노보다 의아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와 만난 이후로 헨리


는 늘 모든 것을 레이의 뜻에 맞췄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자기의 주장을 밀
어붙이고 있었다.
너야말로 답지 않은 짓 그만하고 그냥 즐겨.”

이렇게 말이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섹스는 그저 성욕 풀이 도구일 뿐이라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널 보고 있으면 님을 위해 정조를 지키는 순정 오메가처럼 보
일까?”
“무슨 개소리야?”

레이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떠올랐다. 헨리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섹스만 할 게 아니라 연애 수업도 좀 시킬 걸 그랬다.”
“그냥 안 내킬 뿐이니까 헛소리 작작해.”

레이가 낮게 으르며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순순히 뒤로 물러난


헨리의 뺨을 레이가 가차 없이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다시 한번 이딴 식으로 기어오르면 그때는 정말 죽을 줄 알아.”

마지막 경고를 날린 레이는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한번 힐긋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레이, 너 손.”

알파의 피부는 오메가에게 돌덩이와 마찬가지였다. 헨리는 다급히 그의


손을 확인하려 뒤따랐다.
따라 오지마, 그땐 정말 끝이니까.”

진심이 느껴지자 그에게 다가서려던 헨리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때 레이
의 핸드폰이 울렸다.
“ 곧 내려가.”
전화를 받은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다 이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기라도 한 듯 일그러진 눈빛에서 사나운 기운이 스쳤
다.
“ 제길!”
레이가 낮게 욕을 뇌까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헨리는 그가 사라진 문에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저 정도로 초조해하는 녀석은 본적이 없었다. 오늘따
라 여러모로 새로운 모습만 선보이는 녀석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지경
이었다.
“ 이러다 새롭게 반하겠군.”
헨리는 혀를 차며 테이블 위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드윈 가주가 방금 전화를 받고 뛰쳐나갔는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어?”
그러자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방금 루스님 쪽에 배치해둔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가 알파들의
[
습격을 받았답니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 그 녀석이 알파에게 노출될 일이 없는…… 아!”
헨리는 방금 뛰쳐나간 레이를 떠올리다 혀를 찼다.
어리석은 것들. 건들 상대를 건드려야지.
“ 알았어. 이만 끊지.”
종료 버튼을 누른 헨리의 눈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으로 향했다. 메인
신문에 노출된 두 사람의 사진은 사랑이 넘치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꼬맹이를 바라보는 레이 에드윈의 눈빛이 딱 그랬다. 거기에 겹쳐진 건 조금
전 밖으로 뛰쳐나가던 레이의 모습이었다.
“ 조만간 제대로 차이겠군.”
헨리는 그가 흩뿌리고 간 페로몬을 음미하며 쓸쓸히 중얼거렸다.
***

잠깐이면 끝나.”

잠깐이면 끝난다는 놈이 여태껏 떠들어대고 있었다. 루스는 한숨을 내쉬


며 하늘을 바라봤다. 조만간 비가 내릴 것같이 희끄무레한 하늘이었다.
곤란한데.
제 목에 두른 머플러가 신경 쓰였다. 살결에 감기는 부드러움 속에 따뜻한
온기가 여태껏 머물러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척 값비싼 물건이었다. 그
러니 이걸 제대로 돌려주려면 비가 내리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
다. 그의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눈앞에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 다수
의 알파였다. 전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살
기가 루스를 향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얌전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원한 질 만한 일은 없었
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회사를 경영하면서 엮인 인연일 건데, 그들
은 루스의 정체를 절대 알지 못했다. 그럼 남은 건 단 하나였다.
루스는 오늘 아침 머플러를 둘러주며 사랑스럽게 웃음 짓던 레이를 떠올
렸다. 아무래도 오늘 나간 기사가 그의 추종자들에겐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
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올 정도면 말이다.
저들을 보낸 것은 한마디로 자신들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소리일 테
고.
“그러니까 주제를 알았어야지. 감히 천한 베타 주제에 어디서 알파의 소
유물을 넘봐!”
그리고 자존심이 퍽도 상했다는 거겠지.
낮게 그르렁거리는 위협에 루스는 웃음이 났다. 당연히 그의 태도에 알파
들의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웃어? 저 베타가 미쳤나.”
“아, 미안. 너무 되지도 않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야.”

손을 내젓는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조롱이


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새끼가! 우리가 누군지 몰라!”

루스는 놈들에게 한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협박이라 내세울게 자신


들의 정체성뿐인 걸 보니 잔챙이들이 분명했다. 하기야 가문 인간들이 제 손
을 더럽힐 리는 없었다. 저들은 어느 조직의 열성 패거리들일 게 분명했다.
어차피 목적을 정해놓고 몰려든 이들이었다. 의미 없는 대화를 지껄이고 있
다가는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대화는 이쯤에서 하지. 어차피 섞일 수준이 아닌 것 같으니.”

까만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네놈들 할 일이나 하고 꺼져.”

뭐 뭐야, 저 녀석…….”
“ ,

순간 등골을 스치는 섬뜩한 오한에 알파들은 몸을 떨었다. 찰나에 녀석에


게서 느껴진 건 분명 살기였다. 그들의 얼굴에 혼란이 일었다.
야 저 녀석 정말 베타 맞아?”
“ ,

패거리 중 누군가 자신들의 리더를 향해 중얼거렸다. 루스를 노려보던 놈


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이 머저리들! 딱 보면 몰라!”

녀석에게서 느끼는 위압감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알파의 페로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베타가 분명했다.
빨리 안 할 건가? 아니면 내가 먼저 가?”

루스가 슬슬 인내심 다한 얼굴로 소리쳤다.


베타 주제에 뭐가 저리 당당해?
자꾸 저러면 알면서도 혼란스러운 법이었다. 보통 알파 앞에서는 베타는
끽소리도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저놈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위협하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어
온 의뢰의 내용은 적당히 밟아주고 레이 에드윈 곁에서 일찌감치 떨어지라
는 협박 정도였지만 그거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패거리 리더의 눈
빛이 색을 달리했다.
“너희들, 저 새끼 사정 봐주지 마.”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그거야 저 새끼 팔자지.”

어느 정도 목표가 정해졌는지 알파들이 얼굴에 시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파가 눈의 색깔을 달리할 때는 페로몬을 사용하겠다는 거지. 그러면


신체적 활동성이 몇 배로 강화되거든.」
「그걸 어떻게 이겨? 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어차피 알파도 인간이야. 인간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집중하지 못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지. 잘 들어. 알파가 페로몬을 끌어내는
데 집중하는 순간,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약점이 생기고 말아. 그걸 잘 관찰
하는 눈을 키우면 충분히 승산은 있어.」
「당신도 약점이 있어?」
「아니, 난 예전에 훈련으로 모든 약점을 없애버렸지.」
「뭐야? 그럼 방금 건 거짓말 아니야?」
「걱정 마. 이 세상에는 본인의 타고난 힘을 믿고는 별로 노력을 안 하는
알파들이 대부분이니까.」
야 저 새끼 죽여 버려!”
“ ,

알파들이 루스에게 덤벼들었다. 먼저 그에게 접근한 알파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루스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그의 왼쪽 다리를 걸고 넘어트렸다. 허
무할 정도로 바닥으로 쓰러진 놈의 왼쪽 무릎을 짓밟아 버리는 순간, 아래에
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에게 덤벼들던 다른 알파들이 모두 헛것을
본 사람처럼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루스는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열성 알파 총 다섯 명. 저들이 시끄럽
게 지껄이는 동안 모든 관찰은 끝내두었다. 이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힐긋 하늘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진 하늘이 금방이라
도 비를 쏟아낼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루스가 다시 시선을 내려 멈춰선 그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지. 비가 오기 전에 말이야.”

***

말 도, 안, 돼…… 큭!”
“ …

루스는 녀석의 오른쪽 어깨를 짓밟으며 조소를 흘렸다.


“그러게 평소에 훈련 좀 하지 그랬어. 페로몬만 믿고 날뛰니까 걸음마 수
준을 못 벗어나잖아.”
담백한 충고를 남긴 그가 주변을 훑었다. 미약한 신음을 내며 쓰러져있는
녀석들을 전부 확인했다.
“이제 끝인가.”
그제야 루스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골목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한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
고 있었다. 루스는 쯧, 혀를 차며 모자를 벗어 풀어낸 머플러를 쑤셔 넣고 재
킷 안에 돌돌 말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파트까지 뛰어가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으아아―!”
한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트는 순간 오른팔에 날카
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들고 있던 재킷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제길!”
쓰러졌던 알파 한 명이 악을 쓰며 칼을 다시 그에게 휘둘렀다. 루스가 손
을 들어 칼을 막으려던 순간이었다. 챙강! 그를 위협하던 칼이 바닥으로 떨
어짐과 동시에 알파가 건너편 벽으로 날아가 처박혀졌다.
“아직도 한참 멀었군.”
“…….”

루스의 귓가에 묵직한 중저음이 파고들었다.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쥔 그


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내가 분명 마무리가 중요하다 했을 텐데?”
“당신…….”

크게 떠진 검은 눈동자가 상대를 담았다. 그 순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


가 쏴아 물길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플러를 감싸고 있던 재킷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다 젖겠군.”

상대가 허리를 숙여 돌돌 말린 재킷을 집어 들어 그에게로 던졌다. 얼떨결


에 받아든 옷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던 루스는 먼저 재킷 안을 확인했다. 다
행히 머플러는 무사했다. 그도 잠시 그 위로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 얇은 천
위로 금세 퍼지는 붉은 선혈에 루스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이런, 조심했어야지.”

옆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추임새에 루스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울프. 현존하는 극 우성 알파 중 한명이자 자신을 거둬 키운 사람이었다.
루스의 날 선 반응에도 그는 무심히 웃으며 제 할 말을 던질 뿐이었다.
“꼬맹이 잘 지냈나?”
“내가 꼬맹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지긋지긋한 애 취급 좀 그만
해.”
“그럴 거면 제대로 어른스럽게 처신했어야지.”

울프의 장난스럽던 웃음이 한순간 비난으로 채워졌다.


“회사에 가보니 쿤 녀석 혼자 고생하고 있더군. 네 녀석 기분 하나 불편하
다고 회사를 무책임하게 나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떡하라는 거
냐?”
“당신이 있잖아.”

그의 말에 잠시 동요가 있었지만 루스의 대꾸는 싸늘했다. 그러자 울프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현재 회사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너라는 사실을 잊은 거냐.”

“…….”
“그런 기본도 모르는 꼬맹이가 어른 대접은 퍽이나 받고 싶어 하는군.”
“닥쳐!”
루스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상처 입은 팔이 위로 들리자 빗물과 뒤섞
인 핏물이 아래로 빠르게 흘러내렸다. 서슬 퍼런 반응에 잿빛 시선이 가늘어
지다 이내 조소를 머금었다.
“고작 몇 마디에 그렇게 욱하니 내게 꼬맹이란 소릴 듣는 거다.”
“닥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지. 그건 네놈 문제일 뿐이니까.”

분노로 일그러졌던 루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그건 그 녀석과 나의 문제라고. 아니, 그 녀석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앞으로 그 마음을 바꾸는 것도 바꾸지 않는 것도 온
전히 그 녀석의 문제다. 그러니 네놈이 가출하고 아무리 시위를 한다 해도
거기에 너 같은 꼬맹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아, 정말 싫었다.
늘 모든 것을 전부 꿰고 있다는 듯이 상대를 내려다보는 저 눈빛과 말투를
한때는 멋있다고 동경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들이 전부 그를
화가나 미쳐버리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결국, 제 분에 못이긴 루스는 그를 벽으로 밀치며 주먹을 들었다. 당장에
라도 얼굴에 한 방 먹일 것 같던 주먹은 울프의 머리 옆을 비켜 아슬하게 벽
에 내리꽂혔다. 반쯤 박살 난 벽에서 투둑 시멘트 가루가 뒤섞인 핏물과 함
께 아래로 떨어졌다. 울프의 시선이 핏물을 따라가다 다시 그를 향했다. 이
를 악물고 바라보는 그의 서슬 퍼런 기운이 알파처럼 아주 팔팔하게 날뛰고
있었다.
하여튼 별 희한한 녀석을 키웠단 말이지.
울프는 입술을 끌어당기며 씩 웃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웃음기 가득한 잿빛 눈동자에 위험한 이채가 번뜩인 그때였다.


둘 다 그만하십시오!”

다급히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살벌한 분위기가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마틴.”

언제 그랬냐는 듯 살기를 감춘 울프가 다정스레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돌


아온 반응은 정작 차갑기 그지없었다.
다친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겁니까?”

뜻밖의 화살에 울프가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뭐야. 나만 혼내는 거야? 이 녀석이 먼저…….”

시끄럽습니다.”

칼같이 그의 말을 잘라버린 마틴이 피로 얼룩진 루스의 팔을 내려다봤다.


괜찮아?”

그제야 루스는 외면했던 시선을 들었다. 걱정 가득히 자신을 향한 파란 눈


동자에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애매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
물며 울프의 멱살을 풀었다.
이 녀석이나 데리고 꺼져.”

루스는 곧장 몸을 틀어 그들에게서 등을 졌다.


“하여튼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아무래도 눈물겨운 예절 교육도 죄다 까
먹었나 보군.”
울프가 혀를 내두르자. 마틴이 입 좀 다물라며 눈을 흘겼다.
“왜 나한테만 그래? 잘못은 저 녀석이…….”
“조용히 좀 하십시오. 애초에 루스를 도발한 건 당신이잖습니까.”
“뭐야, 다 보고 있었던 거야?”
“멀리서도 다 들립니다.”
마틴은 멀어지는 루스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다시 울프를 타박했다.
“그런 말은 분위기 봐가면서 차분히 타일렀어야죠.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게 잘못입니다.”
“장소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마틴의 단호한 대꾸에 울프는 입을 닫았다. 여전히 억울함 가득한 그의 표


정에 마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댔다.
“일단 울프님은 여기나 정리하십시오. 저는 가서 루스 상처를 좀 봐야겠
습니다. 어차피 병원은 안 갈 테니까요.”
“내가 정리를 왜 해? 저기 숨어있는 놈들보고 하라고 해야지.”

울프가 골목 너머 한 곳을 가리키자 그곳에 숨어있던 이들의 기운이 당황


으로 술렁거렸다. 제대로 들었으면 알아서 기어 나올 터였다.
“그리고 저 녀석이 잘도 너를 집에 들여보내 주겠군. 따지고 보면 네가 원
인인데 말이야.”
심통이 난 건지 곱지 않게 던져진 울프의 말투에 마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급격히 가라앉은 그의 표정에 울프가 당황하며 입을 뗐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래도 어떡합니까, 가족인데요.”
그 말에 섞인 애틋함을 울프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녀석을 쫓아 먼 곳을 응시하는 파란 눈을 바라보며 울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마무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봐. 나는 어차피 일 끝내고 레
오 녀석한테 가봐야 하니까.”
“레오님께서 왜…….”

그제야 놀라 시선을 맞춘 마틴을 향해 울프는 애매한 웃음을 띄웠다.


“그거 아닐까? 자기 자식 옆에 있는 놈 출처를 알고 싶은 거겠지. 아니
면…….”
그가 루스가 사라진 쪽을 잠시 응시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냄새를 맡은 걸 테지.”
***

어 루스님…… 피! 헉! 뭐예요, 그게!”


“ ,
현관 앞에서 루스를 맞이한 바냐의 두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오늘
아침에 실린 기사가 신경 쓰여 바로 달려와 기다렸건만, 날벼락도 이런 날벼
락이 없었다.
“호들갑 떨지 마, 별일 아니니까.”
“별일 아니긴요. 피가 이렇게 많이 났는데, 일단 치료를…… 어?”

허둥지둥하던 바냐가 루스의 어깨너머를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틴 님?”

바냐가 뜻밖의 이름을 부르자 루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역시나, 바냐도 여기 있었구나.”

마틴의 한숨 어린 중얼거림에 바냐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루스님께서…….”
“일단 그 얘긴 따로 만나서 하자.”
“따로! 차라리 지금 여기서…… 아닙니다…… 따로 만나셔야죠.”

횡설수설하던 바냐는 마틴의 매서운 시선에 빠르게 입을 닫았다. 바냐는


어릴 적부터 마틴의 밑에서 비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렇기에 그가 진심으
로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었다. 특히 한번 가르쳐준 일에 대
해 실수를 하는 날에는 세포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통에 바냐는 세상에서 제
일 무서운 사람이 바로 마틴이었다.
어쨌든 한번은 죽겠구나.
바냐는 눈을 질끈 감으며 슬그머니 루스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루스의 면박에도 마틴은 그의 상처 난 오른팔을 주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상처부터 확인하자. 정 심하면 의사를 부르고.”
“됐어.”
“루스님. 그건 아니다. 상처는 치료하셔야죠.”

바냐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마틴을 거들었다. 그러자 매서운 시선


이 이번엔 바냐를 향했다.
너도 가.”

까칠하시긴.
마틴이 와있으니 저러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오기도 상황에
맞게 부려야 했다. 여전히 출혈이 있는지 피가 복도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처보다도 처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저 일단 마틴님은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루스님 상처는 제가 보겠습
“ ,
니다.”
보다 못한 바냐가 슬그머니 마틴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쪽도 오기가 생
긴 건지 미동도 하지 않고 루스를 직시했다.
루스.”

마틴이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고집스레 시선을 피하던 루스가 살짝 동


요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도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마틴은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
렸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현관 복도로 향했다. 구둣발 소리 몇 번에 모
습을 드러낸 인물을 확인한 바냐가 또 한 번 탄성을 내질렀다.
어 레이… 님…?”
“ !

이번에는 알파보다 더 무서운 오메가의 등장이었다. 레이는 곧바로 루스


곁으로 다가가 피로 흥건히 젖은 팔을 잡아 올렸다. 루스는 건드려진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큭 이거 놔…….”
“ !
“누가 이랬어.”
살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루스는 골
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레이, 내가 좀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
“어느 좆같은 새끼냐고!”

처음으로 높아진 레이의 목소리에 루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마틴이 끼


어들었다.
“레이님, 일단 들어가시지요. 일단 루스의 상처를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당신…….”

그제야 마틴의 존재를 알아챈 레이가 멈칫 표정을 굳혔다. 심상치 않은 분


위기에 루스가 바로 상황정리에 나섰다.
“일단 문 닫아. 바냐, 너는 돌아가.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넵.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냐는 그제야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현관


문을 닫아버렸다. 그제야 루스는 잡힌 팔을 흔들었다.
이제 이것 좀 놔. 진짜 아프니까.”

“…….”
그러나 레이는 묵묵부답이었다. 루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걸음
을 옮겼다. 팔은 놓지 않는 주제에 레이는 그가 가는 대로 이끌리듯 따라 걸
어갔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틴은 길게
늘어진 핏자국을 보곤 퍼뜩 뒤를 따랐다.
“구급상자는?”
“내가 가져올 테니까 둘 다 가만히 앉아있어. 레이, 이제 팔 좀 놔.”

루스가 좀 더 단호한 시선을 보내자 레이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언뜻 떨어져 나간 손을 바라보자 피가 묻어있었다. 손을 응시하던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린 그가 멈칫 눈을 크게 치켜떴다.

“ !”

이번에는 루스가 레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 올렸다. 피에 젖은 손은 벌겋


게 부어있었다.
별거 아니야. 누굴 좀 팼거든.”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챈 레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알파라도 때리신 겁니까?”

덩달아 심각해진 마틴의 물음에 레이는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러
자 루스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팼으면 그만이지 다치긴 왜 다쳐?”
“내 말이. 왜 다치고 지랄인 걸까?”

레이는 루스의 상처를 쳐다보며 맞받아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보다 못한 마틴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단 두 사람, 아니 레이님도 그렇고 루스 너도 그만해.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심각한 건 너야.”
여전히 팔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 깊이 베인 듯싶었다.
마틴은 한층 어두워진 낯빛을 들어 루스에게 말했다.
“빨리 지혈부터 해. 구급상자 어딨는지 가르쳐 주면 내가…….”
“치료는 내가 해.”

레이는 당당히 마틴의 말을 낚아챘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에


루스는 어이없어했다.
“넌 집에 가서 네놈 치료나 받아.”
“네가 치료받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솔직히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놈이 순순히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기에 별로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루스는 마틴을 힐긋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도 레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따라와.”

루스는 한숨을 내쉬며 움켜쥐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그를 바라본 레이의 낯에 만족스런 빛이 띠었다. 뒤따라 부엌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루스가 서랍에서 구급상자와 수건 한 장을 꺼내 싱크대 옆에 올
려두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먼저 네 손부터 씻게 소매 걷어.”

레이는 순순히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었다. 루스는 싱크대에서 대충 손을


씻고 옆에서 대기하는 그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이끌었다. 부은 손을 조심스
레 바치고 미리 받아둔 찬물에 담그자 피부가 살짝 경련했다. 루스는 행동을
멈추며 그를 바라봤다.
너무 차가워서 놀랐을 뿐이야.”

레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의 상처에는 격렬한
반응을 내보이던 녀석이 제 상처에는 저리도 무심했다. 루스는 복잡해진 시
선을 다시 내려 부은 손에 묻은 핏물을 조심스레 씻어냈다. 그 모습을 하나
하나 담으려는 듯 금빛 눈동자가 바쁘고도 고요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나 보군.”

그새 상태까지 살폈는지 중얼대는 루스의 음성에 안도의 기색이 느껴졌


다. 레이의 입술에 가는 호선이 그려졌다. 물은 차가웠지만 닿는 손길은 따
뜻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지금의 감상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다정한 배려가 점점 익숙해지
다 못해 중독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끝은 너무도 빨리 오
고야 말았다.
다됐어. 수건으로 살살 닦아.”

루스는 레이의 손을 미리 펼쳐진 수건으로 올리며 이제 자신의 팔에 묻은


핏물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레이는 손에 물기를 닦으면서 그에게서 아쉬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어느 정도 핏물이 씻겨가자 그의 상처가 적나라한 형태
를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시선을 가라앉혔다. 잠
깐의 달콤함에 취해 저걸 깜빡 잊고 있었다. 반짝, 그의 눈에 살기가 스치고
사라졌다.
팔 내밀어봐.”

어느 정도 핏물을 씻어낸 루스의 앞에 레이가 양손에 펼쳐 든 수건을 내밀


었다.
이리 줘. 내가 닦을 테니까.”

그러나 레이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내민 팔을 끌어당기며 수건으로 물기


를 닦기 시작했다. 루스는 살짝 몸을 뒤로 빼며 움찔했지만 더는 거부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독이는 수건에 옅게 배인 피가 스며들었다. 살갗에 천
이 스치자 쓰라린지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레이는 남은 물기를 전부
닦은 뒤 수건을 내려놓고 상처를 살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오는 피의
양에 비해 그리 깊게 베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내가 할 테니까…… 큭!”

레이는 포기를 모르는 녀석의 상처 위로 소독약을 전부 부어버렸다. 한꺼


번에 밀려드는 쓰라림에 루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프기는 한가 보군.”

레이가 비아냥거리듯 웃음을 흘렸다.


하는 행동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말이야.”


“ …….”
“녀석들은 우리가 전부 회수했어. 제대로 족쳐 둘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됐어. 일 크게 만들지 마… 윽!”
“그럴 수는 없지. 감히 내 것에 손을 댄 놈들을 내가 가만히 놔둘 것 같
나?”
레이가 그의 상처 주변을 닦던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내리찍으며 음산하
게 중얼거렸다.
“특히 네놈 팔을 이렇게 만든 놈은 똑같이, 아니 그 몇 배로 돌려주지.”
“야, 너 손…… 떼…….”

얼마 되지 않은 생채기를 도로 벌리는 듯한 격통에 무심함으로 일관하던


루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레이는 엷은 미소
를 지며 피로 물든 솜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확실히 신경은 살아있나 보군. 수술까진 안 해도 될 모양이야.”
“너 일부러…….”
“그러기에 누가 자꾸 본인 상처에 무심하래?”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 말을 하는 건지.


루스는 그의 부은 손을 보란 듯이 흘겼다. 시선을 알아차린 레이가 능청스
레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거든. 내일이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런데 넌 아니지.”

아무래도 저 녀석의 뻔뻔함을 이겨 먹기는 그른 것 같았다. 어쨌든 맞는


말이기도 했기에 결국, 침묵은 루스의 몫이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레이는
깨끗해진 피부 위로 그어진 상처를 다시 응시했다. 실제로도 상처는 그리 깊
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베타였다. 하루만 지나면 거의 아물고 며칠이 지나
면 흉터조차 남지 않는 자신들과 달랐다. 전문가에 의한 제대로 된 치료는
필요했다.
“내 주치의 불러뒀어. 일단 대충 처치만 하고 오면 제대로 검사받아.”
“괜찮…….”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그대로 덮쳐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상처를 담는 성난 눈빛에는 짙은 속상함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따지고 보


면 이렇게 된 것도 녀석의 추종자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막상 저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간질거렸다. 루스의 입가에 그도 모르는 은근한 미
소가 배어 나왔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틴의 두 눈에 기묘함이 어렸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린 루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멎은 검은 눈동자에 당황이 배어났다.
완전히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심한 상처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마틴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아니, 그…….”

루스의 얼굴에 한층 당황이 짙어졌다.


이렇게 가까이나 그를 옆에 두고도 어떻게 까맣게 잊을 수가 있는 거지?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루스는 혼란스러우면서도 얼굴
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어설프게 붕대를 감고 있던 레이의 목소리
가 마틴을 향했다.
“그런데 마틴도 루스가 습격당한 걸 알고 온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를 만나러 가다가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망설임 없는 마틴의 대답에 레이가 피식거렸다.


그래? 난 또 당신도 루스를 감시하고 있는 줄 알았지.”

마틴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 숨어있던 알파들은 레이 님 사람이었군요.”
“그러니 놈들을 바로 회수한 거 아니겠어?”

당당히 불법을 얘기하는 레이의 발언에 루스는 이제 기도 차지 않았다. 마


틴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럼 레이님께서는 울프님이 오신 것도 아시겠군요.”
“뭐, 그런 셈이지. 여기 오면서 실시간으로 보고 들었거든.”

무심히 대꾸하던 레이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담겼다.


어쩐지 이상하다했어. 울프가 당신을 혼자 떨어트려 둘리 없잖아?”

마틴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보는 사람마저도 화끈


거리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루스가 고요히 고개를 돌려 표정을 숨겼다. 레이
는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보고는 다시 붕대가 감긴 팔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
곳엔 아까는 없었던 핏줄이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은 레오님께 가셨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이 친절히 보태졌다. 레이의 시선이 다시 마틴을 향했다.


담담한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모르는 건가?
레이가 아는 마틴은 무척 섬세한 알파였다. 오랫동안 극우성 알파를 모셔
온 그는 모시는 이의 감정과 상태를 정확히 잡아내 최상의 충성을 바치는 걸
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그가, 제 삼자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루스의 마음
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마틴이 의아해하며 물어왔다. 레이는 아무


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루스를 마주 바라봤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속에서 새까만 감정들이 들끓었다. 정
불안하다면 자신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는 아직도 레이 에드윈이란 사람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루스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군.”

충동적으로 뱉어진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꽤 볼만하게 바뀌었다.


“덕분에 내가 매번 차이고 있는 상태야. 나처럼 완벽한 애인을 마다하다
니 정말 안타까운 일 아닌가?”
“레이!”

그제야 루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레이의 시선은 여전히 마


틴에게 머물렀다. 동요가 일기 시작한 파란 눈을 응시하던 그가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물었다.
“마틴은 알고 있었나?”
“아니요. 그런…….”
마틴은 얼떨떨한 눈으로 루스를 쳐다봤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가 시선을 피해버린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묘해지고 말았다. 파란 눈동자에
서 혼란을 읽어낸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모르고 있었나 보군.
아무래도 마틴 블레어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 할 듯싶었다. 레이는 누
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한숨을 삼키며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아쉽네. 마틴은 눈치가 빠르니까 분명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몰
라?”
“레이, 그만해.”

루스가 경고하듯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저린 통증에 레이는 설핏 눈


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에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감아
놓은 붕대에서 피가 옅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힘을 너무 준 탓에 상처
가 벌어진 것 같았다. 레이는 혀를 찼다. 기껏 깨끗이 해놨는데 다시 더럽혀
지는 모습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속만큼이나 뒤틀린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거 알아? 루스가 그 첫사랑인지 짝사랑인지의 물건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더라고.”
“레이!”

옅게 배어 나오던 피가 이제는 붕대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만큼


녀석의 아픔도 분노도 아마 극에 달했을 것이 분명했다.
레이님. 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틴도 루스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그를 제지해왔다. 레이는 결


국 실소를 흘렸다.아주 쌍으로 웃기고 있었다. 이럴수록 더욱 불타오른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레이는 애초에 사람 말을 들어먹을 순종적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을 덮어버린 시커먼 감정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고작 낡은 목도리일 뿐인데 말이야.”

“……!”

그 순간 마틴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루스도 더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침묵을 깬 건 마틴이었다. 찰나의 동요를 감춘 얼굴은 살짝 어둡다뿐이지
방 안의 공기만큼이나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는 재밌다는 듯 그에게 싱
긋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내 주치의가 오면 루스 상태도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보고 가

지.”
“아닙니다. 레이님도 계시고, 한스 박사도 워낙 유능하신 분이시니 제가
굳이 함께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마틴은 마치 누군가를 의식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울프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레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틴을 응시하느라 굳이 루스를 의식하지 않았
지만 어쩐지 피 냄새가 짙어진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가봐야지. 다음에 울프와 함께 보도록 하지.”
레이는 입술 끝을 끌어당겨 아주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
자 마틴은 한 번 더 정중한 인사를 마치고 걸음을 돌렸다. 잠시 루스 쪽을 향
해 시선이 돌아가는 듯싶었지만, 그의 걸음은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직진했
다.
가끔씩 잊고 있었지만 저 단정한 이가 인간의 정점에 서 있는 우성 알파라
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자 레이는 침묵을 깨고 대단
하다는 듯 빙글거렸다.
“역시 마틴 블레어야.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니.”
“왜…….”

옆에서 들려온 신음과도 같은 소리에 레이의 웃음이 거둬졌다. 마주한 검


은 눈동자에 스며든 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분노였다.
도대체 왜 그런 거지?”

그런데도 루스는 화를 누르고 대화를 하려하고 있었다. 정말 인내심만큼


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다. 레이는 기꺼이 그 대화에 응해주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말이다.
알고 싶어? 그러면 나랑 섹스 해.”

번쩍 공간에 불빛이 스며들었다. 한순간 쏴아 하고 내리는 빗소리가 침묵


이 깔린 공간을 장악했다. 동시에 검은 눈동자에 깃든 분노가 더욱 사나워졌
다.
“레이 에드윈, 난 지금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군. 나도 장난칠 기분 아닌데.”

레이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왜 나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러면 마틴 블레어와
“ ?
는 하고 싶다는 소리군.”
루스의 얼굴에 일순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일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은 아예 나락으로 떨어졌다.
베타가 알파를 좋아한다니, 알고 보니 박히고 싶었던 거야?”

레이의 빈정거림에 크게 떠졌던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만해.”
“아니다. 그는 극우성 알파의 애인이니 박히는 쪽이었지?”
“그만하라고 했어.”
“그 녀석에게 박고 싶었나 보군. 역시 대단한 베타야.”

그와 동시에 멱살이 잡혀 테이블로 밀어 붙여졌다. 구급상자가 내용물을


쏟아내며 쓰러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흐릿한 눈을 찡그리며 간신히 초점을
맞추자 죽일 듯한 분노와 마주했다. 전신을 휘감는 압박감에 속눈썹이 파르
르 떨렸다.
이러고도 알파가 아니라고?
마틴한테 일단 녀석이 정말 베타가 맞는지부터 캐물었어야 했나 하는 후
회가 문득 들었다. 목을 죄어오는 압박감에 괴로웠지만, 레이는 악착같이 이
를 드러내 웃으며 입을 달싹였다.
“어지간히도 찔렸나 보네? 이렇게 발악하는 걸 보니까.”
“닥쳐!”

머리 위로 짐승 같은 위협이 떨어졌다.
도대체 네가 그를…… 어떻게 안 거지?”

레이는 순간 진심으로 웃을 뻔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걸 모르면 등신이지.
「고작 추운 날 목도리 한번 둘러줬다고 마음을 내어놓는 아이입니다.」
목도리.
그의 방에서 처음 잠을 청했을 때, 호기심에 열어본 서랍에 있었던 건 목
도리였다.
「 처음 이었어…… 나를 위해 누군가 그런 따스함을 준건…… 그런
건…… ‘고작’이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누가 확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확신하는 순간 시커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속을 휘저어 놓았다. 거기엔
분명 배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잘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순간 측은함에 호의를 베푼 마틴도, 그저 그 따스함 한 번으로 가
득 채워질 텅 빈 가슴을 가졌던 어린 그도 그리고 그들 사이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자신도.
그래서 레이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그런 걸 다 따져가며 놈을
사랑할 만큼 무거운 마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고백하지 않은 거지?”
“…….”
“왜 저 녀석이 네 앞에서 자꾸 얼쩡거리게 하는 거지? 저 두 사람 보는 게
힘들어서 떠나온 게 아니었나?”
루스는 잠시 멈칫거리다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지?”
“고백 한 번이면 모든 게 끝날 일이야. 마틴은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적어
도 네놈을 힘들게 할 일을 만들지 않겠지.”
이 세상에 극우성 알파의 짝을 뺏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
다나 서로의 마음이 같다면 말이다. 마틴은 울프를 사랑했다. 극우성 알파의
눈에 들어 강제로 오메가처럼 삶을 사는 게 아니었다. 온전히 그의 의지라는
것을 레이도, 주변 모든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살았던 루스 또한 그 사
실을 모르지 않을 거였다. 그러니 마틴의 곁이 아닌 이곳 낡은 베타 아파트
에 있는 것일 터. 가엽게도 그가 해왔던 건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
한 사랑이었다.
루스는 반박하지 못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감정을 죽이는 까만 눈
동자가 순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레이는 문득 그 어떠한 욕망도 담지 못하
는 저 마음이야말로 정말 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정은 자신이 아니라 이자에게 갖다 붙여야 하는 말이었다.
멱살은 여전히 잡힌 채였지만, 이미 그의 손에선 힘이 빠져나간 후였다.
레이는 이제 얹어만 있는 손을 치우며 그의 붕대 감긴 팔을 어루만졌다. 흠
칫하면서도 루스는 주박에 걸린 사람처럼 레이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붕대, 다시 갈아야겠군.”

기어이 하얀 붕대가 핏빛으로 끈적끈적하게 적셔 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


는 한층 잔인한 기분이 들게 했다. 울프의 이름이 마틴의 입을 통해 나오는
즉시 루스의 얼굴에 떠오른 건 고통이었다. 그것은 칼날로 쑤셔진 상처보다
더 깊고 지독한 냄새를 피워댔다. 쇠붙이에 살이 갈리고 피가 났을 때도 무
심하던 그가 진짜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 상처를 낸 게 나였으면 좋을 텐데.”

그랬다면 이 상처가 고통을 일으킬 때마다 떠올리게 될 건 바로 자신일 터


였다.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또다시 흠칫하는 그의 반응을 느끼며 레이는 쓴
웃음 지었다. 아쉽게도 이 상처도, 그의 보이지 않은 진짜 상처도 모두 자신
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몸뚱이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루스. 네 사랑을 부정하라는 게 아니야. 그저 서로의 욕망에 조금만 솔직
해지자는 거지.”
레이는 페로몬을 풀며 그의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페로몬의 영향 때문
인지 무섭게 굳어있던 까만 눈의 초점이 아득해졌다. 레이는 반짝이는 금빛
눈을 가늘게 떠 교태를 가득 머금으며 속삭였다.
“ 지금 괴롭잖아? 본능에 솔직해지면 그것 또한 잊을 수 있어. 내가 도와줄
게.”
“난…….”
“어젯밤. 내가 말한 거 기억해?”

「하고 나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럼… 아무런 고통도 괴로움도 안 느껴지는 거야?」
「그래.」
아득히 울리는 기억의 조각에 루스의 눈이 혼란으로 점철되었다. 레이는
웃었다.
“ 목도리 따위 없어도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페로몬을 더욱 풀어낸 레이는 다시 한번 그의 귓가에 달콤한 유혹을 건넸
다.
“ 그러니 루스, 나를 안아.”
그 순간 레이는 다시 싱크대로 밀어 붙여졌다. 몸이 돌아가고 셔츠 깃이
뒷덜미에서 잡아 당겨져 단추가 뜯겨 나갔다. 곧바로 목덜미에 따끔한 통증
이 느껴졌다.

“ .”

레이의 목덜미에 세워진 단단한 이빨이 가차 없이 살을 씹어버렸다. 보이


지도 않건만, 뒤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웬만한 알파보다 더한 것 같았다.
휘청거린 몸을 누르며 루스는 그의 바지 버클을 풀어 끄집어내렷다. 배려 없
는 움직임에 레이는 눈을 찡그렸다. 바지가 내려가고 엉덩이에 메마른 손이
닿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풀지는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
아, 이대로 하면 진짜 아픈데…….
오랜만에 피를 보겠다며 레이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

그러나 뒤를 따른 건 고요한 침묵이었다. 이윽고 등을 짓누르던 체온이 떨


어져 나갔다. 레이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루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
었다.
루스?”

레이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

얼굴에 닿기 직전 나직한 중얼거림에 뻗은 손이 애매하게 멈췄다. 루스에
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절망스러운 나락으로 떨어지는 울부짖음과 같았다.
레이는 그의 발아래로 고인 엄청난 양의 핏물을 응시했다. 그제야 정신이 차
려지는 듯했다.
“ 루스!”
멈췄던 손이 이번엔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곧 매정하게 뿌리쳐졌
다.
“ 제발 나가줘.”
“…….”
“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
어떠한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목소리였다. 루스는 멈춰선 그에게
서 등을 지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레이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옷도 추스르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기에는 방금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왜? 어째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이들이 극 우성 오메가의
몸을 원했다. 그런데 저놈은 이 육체보다 고작 따스함 한번이 좋다고 저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방문까지 늘어선 핏자국을 따라가다가 곧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변태 새끼.”

최상의 달콤함을 맛보게 해준다 해도 아픈 게 좋다니 정말 웃긴 놈이었다.


문득 저 녀석이 자신을 사랑할 일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비참함이 밀려들었다.
옷을 추슬러야 하는데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끝에서는 여전
히 떨림이 느껴졌다. 녀석이 짓눌렀던 힘의 크기가 이제야 절절하게 느껴지
는 기분이었다. 그가 있는 공간은 너무 어둡고 적막했다. 레이는 벽에 머리
를 기댄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두운 건 딱 질색이라니까.”

중얼거린 소리가 적막 속으로 감춰졌다. 레이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환하게 불이 켜졌다. 발걸음 소리가 몇 자국
들리더니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자 루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
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에서 평소의 루스가 느껴졌다. 왠지 반가운 기
분이었다. 레이가 멍하니 그를 향해 입을 달싹였다.
몸이 안 움직여져.”

그 말 한마디 하고 나자 정말로 힘이 쫙 빠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그를 내


려다보던 검은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곧 곤란한 한숨이 떨어졌다. 루스
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레이는 흠
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덩달아 뻗어오던 손이 멈췄다. 그도 레이도 본인의
행동에 당황했다. 아무래도 몸이 아까의 난폭함을 기억한 듯싶었다.
지금껏 무수한 알파들에게 위협을 받아본 그였다. 고작 이 정도 힘에 반응
하다니, 한심함에 혀가 차졌다. 그때였다.
미안.”

“…….”
난폭하게 굴어서 미안해.”

루스는 죄책감에 젖어 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레이는 이 상황이 당황스


러웠다. 일부러 그를 흥분하게 하려고 최악으로 밀어붙인 건 바로 자신이었
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힘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미안하다는 그 말이 가슴을 울렸다.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레이는 입술을 깨
물며 손을 뻗었다.
일으켜 줘.”

루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뻗어온 손이 조심스레 레이를 안아


들었다. 단단한 가슴과 팔이 전신을 감싸자 빠르게 안도감이 밀려드는 기분
이었다. 어느새 떨림도 멈춰있었다. 루스는 레이를 소파에 앉히고 옷을 정리
해주었다. 내려온 속옷과 바지를 도로 입혀주고 셔츠를 정리해주려 손을 올
리다 뜯겨 나간 단추와 자신의 피가 묻은 옷깃을 보곤 멈칫했다.
옷은 변상해주지.”

미안함이 잔뜩 묻어난 어조에 레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루스는 자리에
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구급상자를 들고 와 소독약과 솜을 꺼냈
다.
고개를 살짝 돌려봐.”

레이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알코올 솜이 목덜미에 닿자 따가운 감


각에 눈매를 찡그렸다. 그제야 방금 그가 그곳을 물어뜯었다는 것을 상기했
다. 레이는 바로 루스의 손을 치웠다.
됐어. 하루만 지나면 없어질 거야. 좀 아깝기는 하지만.”

뒷말을 장난스레 흘렸는데도 루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쓸데


없이 진지함에 레이는 혀를 찼다.
“그만 미안해해. 계속 말하지만, 네놈 상처나 살펴. 상처가…….”
“피는 멈췄어.”

루스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피에 젖은 붕


대는 그대로였지만 씻고 나온 건지 손은 그런대로 말끔했다.
차는 어디 있지?”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치료가 끝나면 쫓아낼 생각인 것 같았다. 레이는 한숨을 쉬며 중
얼거렸다.
밑에서 앨런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자 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왜 고백을 안 했는지 물었나?”

“…….”
나에겐 그럴 자격 따윈 없거든.”

힘없이 중얼거린 목소리가 레이의 심장을 쿵 쿵 두드렸다. 문득 불길한 예


감이 들었다. 어쩐지 저 이야기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달갑지
않은 놈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왜 마틴이 눈치채지 못했는지 궁금해?”
“됐어.”
“녀석은 오직 울프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내 마음 따위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루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짙어졌다.
“다 알고 있었어. 다 알고도 시작한 마음이었어. 네 말대로 그는 울프의 연
인이야. 그리고 나에게 기회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 하지만 말이
야…….”
그가 웃고 있었다. 아주 슬프게 그리고 미안하게.
“가질 수 없다고 해서 나에게 최초로 빛이 되어준 존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

레이는 입을 달싹이다 도로 닫아버렸다. 딱히 어떤 말로 놈의 입을 틀어막


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심장에서 퍼져나가는 저릿함에 저절로 이가 악
물어졌다. 그때 강제로 시선이 얽매였다. 마주한 눈빛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
다.
“레이,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는 너에게 보답해줄 마음 따윈 없다고 말이
야.”
담담하던 목소리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어쩐지 지금까지에 비할 바 되지
않는 분노가 치밀었다. 금빛 눈동자만큼이나 사나워진 목소리가 공간을 울
렸다.
“누가 그딴 거 바란대?”
“레이.”
“더는 듣기 싫으니 입 닥쳐.”
“그만 끝내자.”
“…….”
“내일부터는 여기 오지 마. 너에게 다시는 문을 열어주는 일은 없을 거
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레이는 멍해진 얼굴로 루스를 바라봤다. 찰나에 거둬
진 다정한 미소 대신 그의 두 눈엔 냉랭함이 가득했다. 등을 돌려 현관 밖으
로 걸어가는 그가 퍽 낯설게 느껴졌다.
“멈춰!”
레이는 빠른 걸음으로 녀석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곧 움켜쥔 손이
아프게 내쳐졌다. 부어오른 손이었다. 저릿하게 밀려드는 격통에 경련이 일
었지만 그걸 신경 쓰고 있을 겨를 따윈 없었다. 레이는 이를 악물며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뭘 끝내자는 거지? 우리가 언제 시작한 적이나 있었나?”
“우리는 아니겠지만 너는 이미 시작했지.”
“뭐?”

그를 향한 검은 눈동자는 아프게 차가웠다. 순간 언제나 내비쳤던 놈의 다


정함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 레이 에드윈.”
레이가 정신을 놓친 사이 눈빛과 똑같은 싸늘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
다.
“ 가벼운 마음일 때 가볍게 끝내.”
이번에야말로 쾅! 문이 닫혔다. 동시에 거실 창가로 번쩍 불빛이 침범했
다. 잊고 있었던 빗소리가 천둥과 함께 한순간 레이의 머릿속으로 들쳐왔다.
뭐지? 이 상황은…….
레이의 손이 무심코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느덧 손가락에서 시작된 통증
이 가슴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낯선 감각이 온 신경
을 장악하며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그것은 결코 기분이 좋지도 가볍
지도 않았다. 묵직한 덩어리가 심장에 얹혀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기
분이었다. 순간 지나간 기억이 머리를 울려댔다.
「그래서. 언제까지 나를 사랑할 거지?」
「글쎄? 내가 너와 함께 있어도 더는 즐겁지 않을 때 까지겠지.」

<1 권 끝. 다음권에 계속>


오메가의 빛 1권
ⓒ 2018, 달빛유령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
를 금합니다.
발행일 2018년 3월 14일
지은이 달빛유령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년 3월 25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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