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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선생 되다

휴란트와 카이렌을 부를 라한이 객방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과연 휴란트에게


검을 가르치는 게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
검을 배운다는 건 자신의 생명을 검 한 자루에 건다는 의미와 같다. 휴란트 역시
검을 배운다면 그때부터 자신의 검 실력자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 라한의 고만은
여가서 기안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10년 이상을 살아온 조카에가 너문 가혹한 듯 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으로 조카인 휴란트가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들었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라한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 입장이, 아니 우리 필슨 가문의 지금 입장이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하고 있어. '
엘베로에 대한 복수? 그 정도는 라한과 그의 동료들의 힘이라면 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라한은 물론이고 그 동료들의 행적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드래곤을 비롯한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게까지 현 위치와 실력이 알려질 터.
그 이후는 서로의 목숨을 건 혈투가 기다릴 게 뻔했다.
그 과정에서 자칫 라한이 죽기라도 한다면, 레테아와 휴란트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라한을 죽인 이들이 그들을 살려둘지도 의문이었고, 엘베로를 추종하는
자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자 휴란트를 마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해해다오. '
똑! 똑-!
"들어와. "
라한의 부름에 카이렌과 휴란트가 들어왔다. 카이렌은 약간 웃는 얼굴이었고
휴란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검술 수련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받지 못한
탓이다.
라한과 이야기를 끝냈던 카이렌은 그 동안 정원 구석에서 검술을 정리하며 지냈다.
짧은 시간에 필요한모든 걸 가르쳐야 하는 엄청난 속도의 수련이 될 건 당연한 일.
이 때문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반면, 휴란트는 뮬라 상단 여기저기를 다니며 세상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범죄자 마을에 갇히다시피 자랐으니 신기하기도 했으리라,
둘을 차례로 둘러본 라한이 먼저 휴란트에게 말을 던졌다.
"뭐하고 있었어?"
"그냥 상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
"그래 어떻더냐?"
"엄청 부자더군요. 정원 곳곳에 있는 석상이 정말 멋졌어요. 그 정도 석상이면 엄청
비싸겠죠?"
"그렇. 겠지. "
대답을 하던 라한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이곳이 부자라는 말. 그 자체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얘기였다. 과거를
잊고 살았다는 뜻이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이젠 과거를 되찾아야 한다. 엘베로에게서. 네가. '
라한은 엘베로에 대한 복수를 휴란트에게 미룰 생각이었다. 자신보다는 휴란트가 더
큰 피해를 봤다고 생각해서였다.
라한이 피해를 본 거라고 해봐야 어린 시절 잠깐 쫓겼던 것과 부모님, 누나의
죽음뿐이다. 반면, 휴란트는 조부모를 잃었고 과거를 잃었다. 또, 엘베로를 피해서
숨어 지내야 하는 힘든 삶을 살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인 레테아가 쉬쉬해서 모를 뿐. 실상 엘베로에게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휴란트인 셈이다.
"혹, 검을 배울 생각은 없느냐?"
"검요? .음, 삼촌. 전 검보다 활이 좋아요."
휴란트가 어깨에 메고 있던 신궁 레이시드를 툭툭 두드렸다. 얼굴 가득한 미소가
레이시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활이라.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먼저 검술을 배워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꼭
검사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검술을 배우면서 굳어 있는 네 몸을 푼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느냐?"
"그 정도라면 좋아요. "
잠깐 생각하던 휴란트가 흔쾌히 승낙했다. 적을 맞아 검을 휘두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음이다.
"카이렌!"
"알았어. 나도 활을 조금 쓰거든. 일단 기초검술을 가르치고 나서 활도 좀
가르쳐볼게. 근데, 난 아주 어릴 때 외에는 활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아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그 정도면 충분해. 휴란트에게는 계기가 필요한 거니까. "
라한의 말이 끝나자 카이렌이 휴란트를 바라봤다.
'괜찮군. '
쓸 만한 근골이었다. 직접 가르쳐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단 겉으로는 나쁘지
않은 몸 같았다. 아버지인 레테아에게 물려받은 몸이라서 그런 듯했다.
"휴란트. "
"예, 카이렌님. "
"앞으로는 선생님이 라고 불러라. "
"예, 선생님 "
휴란트의 대답에 카이렌이 밝게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선생님이라니 비록학생 시기를 거치지는 못했지만, 정규교육의 한축을 담당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럼 나가자. "
"예, 선생님. "
벌떡!
카이렌이 휴란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려 할 때,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번뜩였다.
"어? 라한 왜 그래?"
"왔군. "
"뭐가? 오긴 누가 왔다고 그래?"
쿵쾅!
카이렌이 질문을 막 던졌을 때, 객방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프라하가
어깨에 쿨샤크를 걸치고 뛰어 들어왔다. 이번 방문이 쿨샤크와 관계가 있는 듯했다.

"어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다 모여온 거야?"


카이렌의 물음에 프라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라한도 함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살기가 감도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어, 어이. 이봐. 왜 그래?"
"왔다 "
"누가 왔다는 건데?"
"있어. 엄청 음흉한자식. 쿨샤크!"
라한의 부름에 쿨샤크가 의아한 듯 눈을 멀뚱거렸다. 아직 라한1 말한 인물이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은 듯했다.
"크크크, 이놈하고 붙어 다니던 음흉한자식이거든. 언제고 한번 손보려고 했었지. "
"그래? 별일 아니네.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아라. 난 간다. 휴란트, 가자. "
"예, 선생님 "
카이렌이 휴란트의 손을 잡고 객방을 나갔다.
지금 그에게는 다른 어떤 재미있는 놀이보다 선생으로서의 임무가 더 중요했다.
평생 동안 한으로 생각했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쿨샤크. 너하고 붙어 다니던 그 음흉한 자식이 왔군. "
"데. 메크?"
Rm덕!
라한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섬뜩하게 변했다. 이 자리에 투바가 있었다면 누가
마족인지 의심스러워할 정도의 표정이었다.
"라한! "
"가자고. "
라한이 객방 문을 나섰다. 그 뒤를 쿨샤크를 둘러멘 프라하가 뒤 따랐다. 쿨샤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데메크가 머무는 곳은 상단 건물의 왼쪽 건물 구석이었다. 본래 쿨샤크가 있던 방
바로 옆방인 셈이다. 물론, 지금 쿨샤크는 그 곳이 아닌 라한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그리고 라한이 있는 방은 상단의 오른쪽 건물이었다. 데메크의 숙소와 비교하면
극과 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쾌 먼 곳을 달려서야 데메크가 머무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콰쾅!
"비켜!"
"예? 예. "
라한과 프라하의 이동은 상당히 많은 호위 무사들의 저지를 받았다.
하지만, 프라하의 도끼가 바닥을 한 번씩 두드릴 때마다 분분히 자리를 비켜줬다.
한 번의 도끼질에 대리석 바닥에 쩍쩍 갈라졌으니 두려워서 물러난 것이다.
물론, 레드리안이 라한을 극빈 대우하고 있다는 기본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막아섰을 게 분명했다.
"여긴가?"
"여기군. "
꿀꺽!
프라하의 물음에, 기에 좀 더 예민한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한 번에 데메크를
찾아낸 모습에 쿨샤크가 침을 삼켰다. 그제야 라한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에 쿨샤크는 라한을 단순히 뛰어난 마법사 정도로만 생각했다. 왕국을 뒤지면
못해도 스무 명은 나오는 그런 실력자 말이다.
헌데, 데메크의 도착을 한 번에 알아채고, 그 위치까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모습에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이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단장이 온다 하더라도 동쪽 끝 건물에서 서쪽 끝 건
물"11 있는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육안으로도 거의 안 보이는 거리이니
말이다.
헌데, 라한은 해냈다. 그것도 한 번에 정확한 곳까지 완벽하게.
똑! 똑-!
"누군가?"
"나다. "
"누구지?"
"네놈을 철저하게 괴롭혀줄 멋진 분! "
쾅- !
대답을 마친 라한이 방문을 걷어찼다. 방문의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실내가 한 눈에
보였다.
"헛!"
"허허, 이거 참. 저놈변태잖아."
실내 풍경이 요사스러웠다. 옷을 완전히 벗고 있는 여섯 명의 미인들과 중간에서
허리에 손을 짚고서 있는 데메크. 마치, 여섯 명의 미인들에게 자신의 물건으로
쇼를 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너 뭐하냐?"
"너, 너.
라한을 본 데메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라한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두렵다는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라한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단의 힘 전부를 합쳐도 라한 한 명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헌데, 자신은 그런 것도 모르고 라한에게 해코지를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패, 얼마나 소름끼쳐 했던가.
그나마 라한이 실종됐기에 안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라한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래서 지금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이곳에서 변태짓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끌고 나올까? 네가 알아서 나올래?"
"그, 그게."
데메크는 레드리안에게 라한이 있다는 언질을 받지 못했다. 레드리안을 만나기는
했으나 인사만 대충하고 나왔으니 당연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서 사온 여섯 명의 여자들. 이들과 빨리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
"이봐, 아가씨들, 그만 나가지 그래?"
프라하가 여자들을 쭈욱 훑어보며 비꼬았다. 그러자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뭔가 의논을 하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데메크의 옆으로 와서 당당하게
대꾸했다.
"흥. 대체 누가 누구보고 나가라는 거야? 우리 데메크님은 뮬라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나가려면 당신들이나 나가!"
"실질적인 주인? 오호라. 데메크 이 자식 거짓말도 수준급이잖아. 그런 거짓말로
여자들을 설득한 거야? 쯧쯧, 사내란 모름지기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시끄러.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야! 데메크. 나올래? 말래? 뭐, 결과는 어차피
같을 거야. 그냥 나오면 덜 맞는 거고, 버티면 많이 맞는 거고. 선택은 자유니까
알아서 하라고. "
말을 마친 라한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리고 손가락도 몇 번씩 꺾으며 데메크를
위협해갔다.
분명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위협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가졌던 공포가
있었기에 그 모습 정도로도 충분했다.
"나. 가지. "
"쿨샤크. 둘의 정담은 나중에 나누라고. "
라한이 나가자 쓸쓸한 표정의 데메크가 터벅거리며 뒤따랐다. 얼굴 표정만 보면
마치 단두대로 끌려가는 죄수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할 모책을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놈 참. 마음껏 머리 굴려보라고. 크크크. '
라한이 눈을 굴리는 데메크를 슬쩍 바라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흑마법에 대해 모르고 있을 때라면 데메크의 도주를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흑마법에 대해 물질계의 그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어설픈 흑마법사 데메크의 술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구멍을 만들어줘서 마음껏 패줄 수 있는 건수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약간은
가졌다.
'그래, 뭔가 생각해봐, 나도 몸이 근질거리거든.'
라한이 객방에 들어오자 투바가 반갑게 맞았다. 프라하와 라한이 없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꽤나 지루했던 모양이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 이 자식 좀 데리고 오느라고. 야! 너 저기 서 봐."
데메크가 라한의 말에 따라 객방의 구석에 섰다.
"넌 뭐하냐? 너도 가야지. "
"나도?"
"그래, 자식아. 너나 저놈이나 한 통속이잖아. "
라한의 말에 쿨샤크도 터벅거리며 데메크의 옆에 섰다.
그들의 모습에 투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누구기에 라한에게 저렇게 찍힌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프라하 대체 쟤들 뭐야? 특히 저 늙은이는 왜 쿨샤크 저 자식하고 동급으로
취급받는 거 야?"
"뭐, 별거 없어. 나하고 라한 을노렸다는 것? 뭐 그 정도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어떻게 라한을 노리냐? 차라리 마계에 사는 마왕을 노리는
게 낫지. "
투바의 말에 라한이 그를 날카롭게 째려봤다.
자신을 마족 이상의 나쁜 놈으로 치부하는 말이 분명했다. 스스로가 착하지는
않아도 나쁜 놈은 아니라고 믿는 라한. 투바의 말에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투바로서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스스로가 라한과 는 절대 적으로 서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쳇. 라한 저놈은 자기가 마족보다 나은 줄 안다니까. '
"이, 이보게. 그, 그때는 모두 쿨샤크가 시킨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네. 자네도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를 잘 알지 않나? 난 정말 어쩔 수
없었네. 용서해주게.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입을 떡 벌리며 그를 돌아봤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자신이 고용주이기는 했지만, 계략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던가. 헌데, 모든 게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평생 자신의 부관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배신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다가는 자신이 덤터기 쓸지도 모를 일. 어떻게든 수를 내야
했다.
"라, 라한. 내가 아니야. 내가했던 모든 건 데메크가 시킨 일이야. 난 정말하기
싫었는데, 이 녀석이 다 시켰다고. 제발 믿어줘. 우린 친구잖아. "
"무, 무슨 소리! 네가 상단의 후계자라면서 나한테 시킨 일이잖아. 난 저분들에게
해코지하기 싫었는데, 모두 네가 시켰잖아. 빨리 진실을 말해. "
"그, 그게 무슨. 네가 만들어낸 계획이잖아. "
라한, 프라하, 투바가 데메크와 쿨샤크의 행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놈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정말 저런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내 살다 살다 저런 놈들은 처음 본다. "
"하여간. 쓰레기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난 더러운 놈들보다 너희들처럼 서로를
팔아먹는 놈들이 더 싫어. "
프라하와 투바가 데메크와 쿨샤크를 싸잡아서 욕했다. 누가 보더라도 욕먹어 마땅한
모습이었다.
"근데, 저놈들이 나쁜 놈일까? 에펠하고 그 일당들이 나쁜 놈들일까?"
"오호, 저 놈들하고 붙으면 흥미진진하겠는데. 전에는 한 통속이 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립 상황을 만들지 못했는데. "
"에펠이라는 놈들은 모르지만, 저놈들하고 비견될 놈들이라면, 아주 제대로 나쁜
놈이겠군. 한 번 보고 싶은데. "
투바가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표해왔다. 하지만, 이건 투바만이 아닌 라한 일행
모두의 의문이나 마찬가지였다.
'흠, 전에는 서로 한 편이었던가? 나중에 적으로 만나게 해봐야겠어. '
이 결정으로 데메크의 생명은 조금 더 연장되었다. 호기심은 참지 못하는 라한의
성격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자, 일단금제부터 가해보자고. 너! 이리와!"
"무, 무슨."
"오라면 오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빨리 안 와?"
라한의 연이은 재촉에 데메크가 죽을상을 하고 다가왔다.
"손! "
착- !
라한이 데메크의 손을 잡고 제령기와 제란기를 적당히 나누어 주입시켰다.
순간 경악한 데메크가 자신의 손을 라한의 손에서 빼려 했다. 하지만, 악력에
있어서 마법만 익힌 데메크가 라한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용을 써도
라한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뺄 수 없었다.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 "
제령기와 제란기 주입을 끊은 라한이 심장에 남아 있던 마나도 조금 주입시켰다.
그리고 데메크의 심장 주변으로 세 가지 기운을 유도했다. 데메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운까지 모두 네 가지 기운이 한 곳이 모인 모양새였다.
"대, 대체 쿨럭! 뭘 하려는 건. 컥! "
말을 하려던 데메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라한이 데메크의 흑마법
기운을 본격적으로 조정한 탓이다.
라한은 자신이 주입한 세 가지 기운과 데메크의 기운을 한 가닥씩 풀어서 꼬았다.
한 번, 두 번. 라한이 기운을 꼬아갈수록 데메크의 혈색은 점점 검게 물들었다.
육체적인 충격과 정신적인 놀람의 발현이었다.
"자, 끝!"
라한이 손을 털고 데메크에게서 물러났다. 라한이 물러나자 데메크가 자신의 흑마법
기운을 움직이려 해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묶인 듯 아주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 뜻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
"뭐, 별거 아니야. 그냥 기운을 좀 꼬아놨지. 네 능력으로 그걸 다 풀려면 한 오백
년은 걸릴걸. "
털썩!
라한의 말에 데메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생 동안 연구하고 익혀온,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게 흑마법이었다. 헌데, 라한의 이상한 술수 때문에 단 한
번에 모든 걸 날려 버렸다.
죽음을 내리는 것보다 더 가혹한 처사였다.
"차라리, 차라리 날 죽이게. 날 죽이란 말일세. "
"그건 안 될 말이지. 난 누군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만큼 나쁜 놈이 아니거든.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라고. "
"이, 이."
데메크의 비참한 모습에 쿨샤크가 오줌을 마구 지렸다.
검사에게 검이 모든 것이듯 마법사에게도 마법은 생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쿨샤크 역시 검을 익혀 봤기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 데메크가
겪고 있을 좌절감과 비참함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라, 라한 설마 나도?"
"너? 훗, 네 검술은 있으나마나니까 금제고 뭐고 필요 없지. 검사가 아닌 나도
너보다는 검을 잘 쓰겠다. "
라한의 말에 쿨샤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 마음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는 게 너무 비참했다
"앞으로 데메크 너도 우리하고 같이 다닌다. "
"마음대로 하게. "
데메크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프라하마저도
약간의 측은함을 느낄 정도였다. 헌데도 라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허, 참나 "
"왜? 내가 잔인해 보여?"
"뭐, 조금은."
"악은 악으로 치료한다. 앞으로 내가 가질 신념이야. "
프라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 데메크와 쿨샤크 같은 놈들은 어지간히
다루어서는 반성하지 않을 것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라한 일행 중에는 제일 착한 이가 프라하인 모양이다.
'왔군. '
라한의 감각에 새로운 기운 두 개가 잡혔다.
"데메크, 쿨샤크. 너희들은 나가 있어. "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에 라한이 데메크와 쿨샤크를 내보냈다. 두 기운 중 하나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
"후후, 로이나. 앉아. "
방문객은 로이나와 프리미아였다.
둘은 라한을 만나기로 한 이후, 엘퐁소 지방을 몇 차례 더 돌았다. 라한이 원했던
정보 몇 가지를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보를 충분히 모은 후에야 이곳에 온
것이다.
"일 얘기는 나중에 하자. 프리미아. "
"예, 로이나님, "
"아참. 프리미아는."
"드래곤이군, 블루 일족인가? 나이는3천살아래. 지금은 엘퐁소 남작의 딸로 유희를
즐기고 있던가?"
로이나의 말을 라한이 받았다. 프리미아의 외모를 보고 한 눈에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음, 날 알고 있는 건가?"
"기억을 못하는군. 쿨샤크라는 놈한테 여자를 빼앗겼던 못난 놈이 나였거든. "
"아! 그때 그 인간이었군.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 "
그제야 프리미아가 랴한을 알아봤다. 처음부터 눈여겨보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했을
뿐. 라한이 프리미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면 한 눈에 알아봤을 터였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7"
"이 드래곤, 그러니까 프리미아? 아무튼 이 드래곤이 쿨샤크와 결혼할
사람이었더군. 맞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프리미아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라한을 바라봤다. 그에게는 라한이라는 존재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드래곤임을 알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함, 거기다 유희 중인
드래곤을 한 번에 짚어내는 비범함까지. 다른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인간이군. 요즘은 특이한 인간을 너무 많이 본단 말이야. 아, 이 일행에


껴서 조사를 해볼까? 호호호호, 아주 재미있겠어. '
"프리미아, 네가 본 카이렌과 여기 라한을 비교해봐. 어떨 것같아?"
"예? 아, 맞다. 잠시만요. "
짧게 대답한 프리미아가 드래곤하트에 있는 마나를 천천히 퍼트렸다. 그리고 그
마나를 라한의 몸에 천천히 부딪히며 반발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잠시만. 뭐하는 거야?"
"아, 맞다. 지금 프리미아는 너하고 카이렌의 실력을 비교하는 중이야. 얼마 전에
프리미아가 카이렌을 봤다고 하거든."
"그래서?"
"그래서는 뭐, 앞으로 적으로 만날 테니까 실력을 알아보는 거지. "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피식 미소를 터트렸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로이나의 마음이 고마웠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카이렌의
관계를 모르고 착각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큰 실수하고 있는 모습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로이나. "
"응? "
"카이렌은 내 친구야. 원래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내 친구가 됐어."
"그게 무슨."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고 했던가? 지금 로이나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오해의 첫 시작은 누가 뭐래도 로테마이어스였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류카라한이라고 오해했던 게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한 발단인 셈이다.
그 다음 오해는 고룡 베르타라스였다. 라한의 특이한 마법을 겉으로 마법을 드러낸
적이 없는 류카라한의 능력이라고 오해해 버린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큰 오해가
프리미아, 로이나에게까지 이어졌다.
"카이렌은 내 친구라니까. 지금 내 조카 녀석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어. 나중에
돌아오면 만나봐. "
"이. 이상하네 프리미아. "
"그게 저도 잘. 지금 카이렌은 크라이드리안에게 이긴 류카라한과 함께 있다고
분명히 들었거든요. 로드께서 한 말이니 잘못됐을 리가 없어요. "
프리미아가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로이나의 여성스러움과는
다른 앙증맞은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드래곤 중에서도 이런 보물이. 후후후, 내가 찍었다. '
투바의 음흉한 생각이었다. 하여간 여자라면 이성을 잃는 어떤 병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 상대가 비록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엥? 크라이드리안이라는 드래곤은 나하고 싸웠던 드래곤인데. 그리고 류카라한?
류카라한이라면 과거 베르첸 제국의 그 영웅 맞나?"
"어? 크라이드리안과 싸웠던 게 류카라한이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어, 그럴 리
없어. 로드께선 분명히 류카라한이라고 했단 말이야. "
프리미아가 짐짓 화난 듯 쏘아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 부끄러움을 도리어 쏘아붙이면서 해소하려는 생각이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왜 갑자기 귀여운 척이야?"
"쿨럭 !"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반면, 주변에 있던 프라하와 투바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는 듯 라한을 노려봤다.
저렇게 귀여운 외모의 프리미아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느냐는 일종의
질책이었다.
라한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느낌은 다르지만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로이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아름다움에 적응되어 있다는
게 이런 식으로 작용한 탓이다.
또, 이전 삶이었던 예원계에서 알게 모르게 인공 미인을 많이 본 것도 크게 한 몫
했음이 분명했다.
"아, 알겠다. "
"뭐가?"
"라한. 처음 이름을 지을 때, 누구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지?"
"아하, 그렇군. 하하하하. 이거 참. "
로이나의 말에 라한도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모든 오해의 발단이 자신의
이름에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카라한, 류카라한. 이름이 비슷하구나. "
"흥. 거봐요. 제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으니까 이런 오해가
생기죠. "
프리미아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라한에게 대꾸했다. 자신이 바보취급 당했던
화풀이라도 하는 듯했다.
"어이, 드래곤씨! 귀여운 척은 그만 좀 하라고. 하여간 멀쩡하게 생긴 것들은 꼭 그
외모를 이용하려 든단 말이야. "
"뭐? 이, 이. 겁 없는 인간이 감히."
"풋. 역시 라한이군. "
프리미아가 폭발하려는 바로 그때 로이나가 입을 열었다. 분노하려는 프리미아를
제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실제로도 로이나의 말에 프리미아가 분노를 억눌렀다. 자신이 존경하는 로이나의
인정을 받은 인간. 그 하나만으로도 화를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주변 분위기를 대충 마무리 지은 로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카이렌이 라한과 함께 지낸단 말이야?"
"응. 뭐, 그렇게 췄어. "
"다행이네. 그래도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됐어. "
로이나는 힘이 한쪽으로 기우는 게 걱정스러웠다. 라한에 대한 애정이 류카라한보다
더 강해서는 아니었다. 힘의 불균형은 약한 쪽의 몰락을 가져오기 마련. 자신이
인정한 라한이 그런 몰락의 한축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걱정 한 거야?"
"뭐, 걱정이라기보다. 근데, 카이렌은 어디 있는 지야?"
"나도몰라. 내 조카 녀석 데리고 어디 갔거든. 아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검술을 가르치고 있을 거야? 검사들 대체로 그렇잖아. "
"그렇지. "
로이나와 라한의 대화를 듣던 프리미아가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녀가 보기에 로이나와 라한 사이에는 뭔가 끈끈한 정이 있었다. 애정 같은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끈끈한 정, 그건
마치 평생을 맡길 수 있는 친구사이의 우애와 흡사했다.
'다른 녀석을 찾아봐야겠네. '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사람을 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지금 프리미아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로이나와 라한 사이에 싹트고 있는 끈끈한 우정에 자신도 그런 관계를
만들고 싶었음이다.
'저놈은.음, 마족이잖아. 이런, 내가 왜 마족을 지금에서야 알아 본 거지?'
마족은 마족만의 고유 기운을 풍긴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그런 기운을 감지할
수 없다. 마족의 실력이 너무 월등하기에 마음먹고 숨기면 찾아낼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미아는 드래곤이다. 마족이 기운을 숨긴다고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약자가
아니었다. 헌데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이모두가 자신을 마구 몰아붙였던 라한
때문이라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뿐이었다.
'마족은 좀 그렇고. 저, 어라? 저 녀석은 라이칸이잖아. 뭔 일행이 이 모양이이?
인간, 마족, 라이칸드로프라. 거기다 카이렌은 엘프니까 별종들이 다 모인 거네. '
라한 일행의 면모를 돌이켜보던 프리미아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빛냈다
그녀는 라한부터 시작해서 일행 모두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아참, 로이나. 엘베로는 어떻게 됐어?"
"꽤 많이 알아봤지. 근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과거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더라고. 솔직히 좀 놀랐어.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밀 조직이 사실을 숨긴
거겠지. "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까 제대로 된 정보를 구했나보네. "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웃음을 머금었다.
로이나가 라한의 생각을 잘 읽듯 라한 역시 로이나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한 번에
알아챘다. 새삼 둘이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는 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들의 모습에 프리미아가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다. 심통이 난 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로이나를 라한에게 빼앗겼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잉, 나도 괜찮은 인간 하나 찾아봐야겠다. '
"다크라이더라는 암살자 길드인데도 불구하고 엘베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더라고. 아, 참. 근데, 말해주기 전에 조건이 있어. "
"조건? "
"응. 이건 내가 건 조건이 아니고 그 쪽011서 걸어온 조건이야. "
"뭔데?"
"그곳 길드 마스터가 라한을 한 번 만났으면 하더라고. 만나겠다는 허락을 하면
말해주기로 그 인간과 약속했어. "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속에는 없는
길드였다.
거기다 정보 길드가 아닌 암살자 길드라는 것도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암살자 길드와 접촉해보지 못해서였다.
"이상하군. 날 아나? 뭐, 한 번 만나는 건 괜찮겠지 "
"그럼 말해줄게, 엘베로는 과거에."
로이나의 입에서 엘베로의 추한 과거가 마구 흘러나왔다. 얼마나 많은 귀족을
죽였는지, 또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가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필슨 백작을 죽인 곳은 뷰나로즈라는 암살자 길드야. 물론, 엘베로의
사주를 받은 거지. "
"뷰나로즈라. 아직도 있겠지?"
"응, 금방 사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직도 건재하다고 하더군. 지금은
루이나왕국 최대의 암살자 길드로 성장했어. 엘베로가 뒤를 봐줘서 가능했던 거라고
봐야겠지. "
라한이 뷰나로즈라는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사주를 한 사람이 엘베로라고는
하지만, 직접 칼을 든 곳도 간과할 수 없었다.
"아, 지금 엘베로는 어때? 그러니까 왕이 된 후 말이야. "
"지금은 대륙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어. 일단 한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현재 루이나왕국이 중앙 대륙의 패자가 되었다는 게
더 큰 문제야. 중 앙 대륙 최고 실권자가 엘베로 그 인간인 셈이지. "
"중앙 대륙의 패자라. 휴, 모르겠군. 국민들 삶은?"
"아주 좋아. 중앙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살기 좋은
나라가 그곳이거든. 밖으로 왜 많은 적을 두고 있지만, 국민들의 삶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 되어 있어. "
라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부모님의 복수?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을 처리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아, 맞다. 지금 엘베로의 나이가 몇이지? 후계자는?"
"엘베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아. 아직 까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할 정도라고 봐도 무방해. 그리고 후계자의 나이는 올해 스물넷.
본질적으로 능력이 부족해. 누군가를 다스렸다가는 같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 근데 욕심은 또 많거든. 잔인한 측면도 강하고. "
"결론은?"
"그가 왕이 됐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루이나 왕국이 무너질 거야. 갑작스럽게
대국이 된 곳이 루이나 왕국이라서 노리는 왕국이 많거든. 아마, 엘베로가 죽는 그
순간부터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올 거야 "
라한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일이 대충 그려졌다. 지금자신이 해야 할 일과 후일
추진해야 할 일까지.
대강의 판을 짠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가족은 없나? 욕심 많은 그 자식이 왕이 됐을 때 후원이 될 만한 그런 가족
말이야. "
"음, 가족이 있긴 있는데, 그게 음. 일단 엘베로는 원래 가족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하는 후계자나 가족도 모두 데리고 와서 키운 거야. 정에 의해서라기보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고 봐야겠지. "
"후대에 이름이라. 남자들은 좀 그런 게 있지. 자신이 죽고 나서도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그런 것들. 영웅심? 공명심?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되겠네. "
영웅심이나 공명심. 라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단어였다. 마음 편하게 오래 사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라한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자들의 그런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해는 하지만 그런
마음들보다 오래 사는 게 더 중요할 뿐이다.
"엘베로는 평생 두 명의 자녀를 두었어. 한 명은 엘레노아라는 여자인데, 지금
케라스 왕국의 왕인 루핀트와 결혼했어. 왕비인 셈이지. 어차피 왕국간의 관계라서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그래도 누나가 타국의 왕비라서 어느 정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엘레노아는 정에 약하고 엄청나게 착하거든, 동생이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백방으로 노력할 게 뻔해. "
"그 후계자라는 녀석 이름이 뭐지?"
"쿠벨린 드루이탄 엘베로. 루이나 왕국에서는 망나니 쿠벨린으로 통하는 것
같더라고. "
"망나니라."
희망이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엘베로 자체는 뛰어난 왕이지만, 아들인 쿠벨린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엘베로에
대한 복수는 쿠벨린에게서 시작해야 할 듯했다. 그게 라한식 복수 방법이었다.
"아, 아까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이 날 보자고 했다면서? 언제쯤 보는 게
좋을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봤으면 하더군, "
"로이나가 보기엔 어때?"
"암수를 쓸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어.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을 하고 있지만, 본성이
음흉한 것 같지는 않았거든. "
로이나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몇몇 특별한 인간이 아니면 로이나를 속일 수
없으니 말이다.
"오래 끌 필요 없겠지. 내일쯤 들러야겠다. "
"그럼 서둘러야겠네. 내가 자리를 만들어 놓을게. 그럼 내일 보자고. "
"미안해. 고생만 시켜서. "
"뭘. 내가원해서 하는일인데. 그럼 텔레포트!"
로이나가 그 자리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라한이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 당장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한 길드의 길드장을 옆집친구 만나듯 할 수는 없으니
당연했다.
"프리미아라고 했나?"
"무슨 일이지 인간?"
"대화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내가 이름을 불렀으면 너도 이름 좀 부르면 안
되냐?"
"흥. 내가 인간 같은 하등 동물의 이름을 왜 외워야 하지?"
"그래. 맘대로 해라. 첸. 하여간 드래곤들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로이나를
제외하고는 말이 통하는 드래곤을 본 적이 없어. 에잉!"
라한은 그냥 해본 말이었다. 헌데, 프리미아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 그건 자신이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로이나처럼 되기
힘들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내가 정말 그런가? 나도 꽤나 개방적인 드래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드래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존재라면 누가 뭐래도 베르네미스라 할 수 있다.
세상만물모두에게 호기심을 가진 베르네미스. 헌데, 그는 로이나와는 달리 대부분의
드래곤에게 배척당하고 있었다. 정도에서 너무 크게 어긋나서였다.
로이나는 기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방이기에 존경받는 드래곤이 되었다.
반면에 베르네는 개방성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배척받았다. 지나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던가. 로이나와 베르네가 딱 그런 입장이었다.
"이봐. 드래곤, 가려면 가고 남으려면 남고. 마음대로 해라. 드래곤이니 어디서 길
잃어버리진 않겠지. "
"쳇. "
라한은 프리미아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로이나에
대한 믿음이 그 기반이었다. 자신이 믿고 인정한 로이나이기에 그녀가 데리고 온
프리미아도 함께 인정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로이나가 라한을 찾아왔다. 부스스한 표정의 라한이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로이나를
맞았다.
"어, 왔네. "
"자는 걸 깨운 건가?"
"아니, 이제 일어나려고 했어. "
"아, 오늘 다크라이더 길드 길드장하고 만나기로 약속했어, 근데, 표정이
이상하던데. "
로이나는 전날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 본부로 날아갔다. 그리고 바로 오늘 라한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길드장인 다크시안은 로이나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보를 캐기 위해 로이나가 약간 기세를 흘린 탓이다.
드래곤인걸 알면서도 정보 제공의 대가로 라한을 원한 다크시안. 그도 보통 대담한
게 아니었다.
"아침에 만나기로 했어?"
"응. 길드장인 다크시안 외에는 너와의 만남을 모르거든 내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
"잘 했어. "
로이나가 라한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라한에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배려였다. 이에 라한도 주섬주섬 옷을 들어서 입기 시작했다.
보통 여자들은 아예 방밖으로 나갔다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그게 대륙의 문화이고 인간들의 생활 방식이다.
하지만, 둘은 그런 고정된 문화에서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둘 모두 특이하기는 특이한 존재임에 분명했다.
"끝났어. 아까 하던 얘기가 뭐였지?"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 말이야. 널 잘 아는 것 같더라고. "
"날? 흠, 이상하네. 난 암살자 길드하고는 얽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
"그래? 그럼 정말 이상하네. 라한의 과거부터 필슨 백작의 과거까지 완벽히 꿰뚫고
있더라고. "
라한과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은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되짚으며 암살자 길드의 유무를 찾는 중이었다.
로이나 역시 자신이 라한을 보살필 때, 암살자 길드원을 만난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봤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암살자와 관계된 적이 없었다.
"모르겠다. "
"만나보면 알겠지. 가자. "
"다른 일행들 안 데리고 가도 되겠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
로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한에게 말했다. 이에 라한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로이나도 참. 로이나가 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관계 된 일이면 내가 도와주기 애매한데 그쪽은 아무래도
물질계를 뒤흔들 수 있는 조직이라서 내가 손대기 힘들거든. 자칫 댔다가는.
"알아, 근데, 그쪽은 아닐 거야. 그놈들이 내 과거를 알 리 없거든. 내 가족에
대해서도 알 턱이 없고.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
"그래. 가자, 준비 끝났지?"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자신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준비가 끝났다는 걸 몸으로
답한 모습이었다.
"그럼 간다. 매스 텔레포트! "
스으윽!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라한이 텔레포트를 시전할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라한이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상당히 빨랐다. 시전 속도가 아닌 발현되는 속도에서의
차이였다.
라한이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발현되는 그 순간 완벽하게 사라져버린다. 헌데,
로이나가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발현이 느렸다. 서서히, 몸이 옅어지듯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엘퐁소 시 외곽의 숲 안.
휴란트가 카이렌의 지도에 따라 기초 검술을 휘두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몸이라서인지 작은 몸동작에도 몹시 힘들어했다.
웬만한 검사 수준으로 몸을 만드는 데도 몇 년은 걸릴 듯했다.
"헉, 헉!"
"그만. 5분간 쉬었다가 다시 한다. "
"예. 선생님. "
카이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란트가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오르내리는 가슴의
기복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쯧, 쯧. 그래가지고 검을 휘두르겠느냐?"
"전 검사가 아니라 궁수가 될 거라고요. "
"궁수든 검사든 기본은 체력이다. 지금 네 체력으로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
"하지만."
대꾸할말이 없었다. 휴란트도 체력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되는
걸 어쩌겠는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체력이 아니었기에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라한한테 마법 무구 좀 만들어달라고 해아겠다. "
"아, 그런 수가 있었군요. "
"마법 무구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려라, 당장은 마법 무구로 어떻게 한다지만,
그런 도구에 의존해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
휴란트의 고개가 또 다시 숙여졌다. 자신의 나태한 마음이 자꾸 드러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헌데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은 라한에게 마법 무구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나중에는 스케일러 링을 찾으면
그땐 네가 그걸 사용해야겠다. "
"스케일러 링요? 그게 뭐예요?"
"마법 무구다. 라한도 스케일러 링 정도의 성능을 내는 마법 무구는 만들지 못할
게다.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무구지. "
뭔가 말을 하려던 휴란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법 무구 얘기가 나을 때마다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존하고 싶은 마음. 이런 천성을 버리는 일도 휴란트에게는
버겁기만 했다.
"자, 그만. 다시 검을 휘두른다. "
"예. 선생님. "
비틀거리며 일어선 휴란트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쉬어서인지 좀 전
보다는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이런 나아진 모습도 그리 얼마가지는 않겠지만.
어찌됐든 휴란트에게는 짧은 5분의 휴식도 꿈같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라한과 로이나는 어느 여관의 뒷골목으로 이동했다. 로이나가 미리 봐둔 장소인
듯했다.
"여기가 어디지?"
"케라스왕국 중부지방이야. 여기서 남쪽으로 4, 5일 거리만 가면 루이나 왕국이
나오지 "
"수도와 가까운 모양이네. "
"저기 동쪽으로 하루 정도 저리만 달리면 수도가 나오니까 먼 거리는 아니지. "
라한과 로이나가 대화를 나누면서 여관의 입구 쪽으로 걸었다. 로이나의 이끎에
라한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응. 이미 와 있을 거야. 들어가자. "
짤랑!
로이나가 문을 열자 청랑한 종소리가 여관에 울려 퍼졌다. 이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서 담소를 나누던 손님들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라한과 로이나가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 중 남자들의 시선에 적개심이
떠올랐다. 어떤 이는 인상을마구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로이나가 얼굴을 가리지 않은 탓이다.
'이럴 줄 알았어. 차라리 엘프 모습으로 있지 왜 인간모습으로 바꿔서는.'
라한은 자신을 노려보는 인간들의 시선이 거추장스러웠다. 저들이 시비를
걸어온다면. 모르긴 몰라도 라한이 나서기 전에 로이나가 먼저 처리를 할 것이다.
헌데도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온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홀에서 보기로 한 거야? 아니면 객실에서?"
"일단 여기 있으면 데리러 올 거야. "
아니나 다를까 채 1분도 되기 전에 2층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내려왔다. 시선이
정확히 라한에게 향한 걸로 봐서 다크라이더 길드관계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홀에서도 누군가가 움직임을 보였다. 로이나에게는 포근한 미소를,
라한에게는 날카로운 살기를 드러낸 모습이 시비를 걸러온 떨거지가 분명했다.
"여기."
"이봐! "
2층에서 내려온 사내가 말을 꺼낼 즈음 시비를 걸러온 사내가 라한을 불렀다.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떠는 모양새가 심히 불량해보였다.
"실례합니다만 이분은 저희와 용건이 있는 분입니다. "
"나도 용건이 있는 건 마찬가지거든. 내 용건 끝나면 그때 보내주마.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을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만. 크크크."
그제야 2층에서 내려온 사내도 불량해 보이는 사내의 목적을 눈치 챘다. 헌데도
말리기보다는 한걸음 물러서서 관망하는 빛을 보였다. 라한과 로이나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거 참. 귀찮은데."
"내가 할까?"
"그냥 내가 할게. "
로이나를 제지시킨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이나는 일견 순하고 약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드래곤이다. 혹,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날에는 이 도시 자체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라한이 나서기로
했다.
"애송이! 일어서면 어쩔 건데?"
라한이 일어서자 사내가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한 마디하고 로이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남자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자랑하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뭐? 이, 이 자식이."
라한의 담담한 대꾸에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그는 자신의 덩치 정도면 라한을 겁먹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한이 작은
키는 아니지만 약간은 마른 몸이었기 때문이다.
헌데도 라한에게서는 긴장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긴, 굴레를 벗은 존재와 드래곤을 적으로 둔
라한이 아니던가. 동네에서 노는 불량한 건달에게 겁을 집어먹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덩치! 뜨거운 게 좋아? 찬 게 좋아?"
"엉? 난 뜨거운. 뭔, 뭔 소리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려던 사내가 뒤늦게 발끈했다. 잠깐이지만 라한에게 휘말렸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누가. 이길까?'
라한과 사내의 행동을 다크라이더 관계자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겉 모습만보면 라한의 행동이 객기로만 보였다. 라한보다 한 뼘정도 큰 키와
1.5배에 가까운 몸무게. 일단 체격적인 조건으로만 보면 어른과 아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길드장인
다크시안이 극진하게 대하는 일행이다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을 다크시안이 극진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 또, 라한의 얼굴에서 보이는 여유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런
표정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을 때에나 보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뜨거운 게 좋다고 했어?"
"닥쳐라! 누가 뜨거운 게 좋다고."
"그럼 찬 거야? 흠, 어디보자 찬 게 뭐가 있더라. 아, 그게 좋겠군. 아이스 홀!
아쿠아 실드! "
라한이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아이스 홀은 찬 기운을 빨아들이는 1서클
마법이다. 단순히 찬 기운만 빨아들이기에 공격마법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다음 마법인 아쿠아 실드가 라한이 아닌 사내의 주변에 쳐졌다. 이에 처음 발현 된
아이스 홀이 아쿠아 실드를 마구 당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내의 몸 주변을
두르고 있던 실드가 빨아들이는 힘에 의해 점점 작아졌다. 어떻게 보면
압축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모양새였다.
"좋군. "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르자 사내의 몸을 실드가 완전히 뒤덮었다. 마치 옷을 입은
모습과 흡사했다. 단단하고 차가운 옷 말이다.
"뭐, 뭐냐?"
"아직 덜 끝났어. 아쿠아 애로우!"
라한의 아쿠아 애로우가 사내의 몸을 두드렸다. 더 정확하게는 사내가 옷처럼 입고
있던 아쿠아 실드를 강하게 두드린 것이다.
채챙!
"크악! "
단단하던 실드가 라한의 아쿠아 애로우에 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사내의 몸에
실드의 파편이 마구 스쳤다. 그리고 몇몇 개의 파편은 사내의 몸에 정확하게
박혔다.
투투투둑!
사내의 몸에 박혔던 파편이 뽑히듯 사라져갔다. 과도한 충격에 의해 실드가 디스펠
된 모습이었다.
파편이 사라지자 파편이 박혔던 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근 백여 개에 가까운 수라서 처참할 지경이었다.
"더 할래?"
"이, 이."
사내가 눈을 매섭게 치떴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굽히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번에는 뜨거운 걸로 할까?"
"컥!"
털썩!
연이은 라한의 말에는 사내도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정말 두 번 당하기는
싫었다. 거기다 또 한다면 기존에 가진 상처를 안고 견뎌야 하는 게임이었다.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흠, 흠. 마법사였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근데, 절 만나기로 하신분인가요? 아니면. 그분이 보낸
사람?"
"보내서 왔습니다. 올라가시죠. "
"앞장서십시오. 따라가겠습니다. "
라한과 로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일어나자 홀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 대부분이 라한을 잠시마나 노려봤던 사람들이었다.
라한이 홀을 뒤로하고 사내를 따라갔다.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당당한걸음이었다. 라한이 2층으로 올라가자 홀에 있던 사내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긴장했던 몸이 풀려서 생긴 현상이었다. 만약 그들이 먼저 나섰던 사내보다 급한
성격이었다면 아마 쓰러진 사람은 그들이 됐을 터였다.
다크라이더 길드
대륙 북부에서 손꼽히는 암살자 길드이면서 최고의 정보 조직이다. 또,
결집력에서도 타 길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끈끈하게 묶여 있는 곳이다.
하지만, 다크라이더 길드를 진정 최고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길드장 다크시안이다.
부하들을 자신만 바라보게 만든 것도, 정보의 중요성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킨 것도
모두 다크시안의 작품이었다.
최강은 아니지만 최고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다크라이더 길드 그곳의 우두머리
다크시안. 누구 앞에서도 겁에 질려본 적이 없는 그가 지금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냥 앉아 있어. "
다크시안의 나직한 말에 로이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라한이 있는 지금
이곳에서만큼은 드래곤으로서의 대접을 받기 싫었음이다.
"예. 위대하신."
"그런 존칭도 오늘은 생략해라. "
"알겠습니다. 흠, 흠. 로이나님. "
몇 번 헛기침을 한 다크시안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몇 가지의 제약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예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라한.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해. "
"고마워. 이름이 다크시안이라고 했나요?"
라한이 다크시안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에 다크시안도 라한을 찬찬히
살피며 허실을 탐지했다.
'묘하군. 알 수가 없어. 그때의 그 아이가 맞는 건가?'
다크시안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맞먹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조직을 오랫동안 다스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사람 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이 사람이
힘을 숨기고 있는지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 혹은 진실한 사람인지 가식적으로
대하는지 같은.
헌데, 라한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둘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였다.
"날 보자고 했다더군요. 이유가 뭐죠?"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고 싶었네. "
"얼마나 성장했는지? 절 아시나요?"
"어릴 때부터 자네를 봐왔지. 후후, 그때와는 너무 다르구먼. 정말 달라졌어. "
다크시안의 표정이 아득하게 변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절 대체 언제 본 거죠? 전 당신을 본 기억이 없는데요. 또, 다크라이더라는 이름도
어제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
"모르겠지. 말을 안했으니까. 10년쯤 전에 우리 다크라이더 길드가 자네를 도운
적이 있네. 그때 자네는 엘베로가 키운 비밀 조직의 추적을 받고 있었지. "
"아! 그때 그."
그제야 라한도 상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졌던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을
도왔던 조직인 다크라이더. 그 오래전에 왜 자신을 도왔을까? 이 의문을 풀지
못하면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도왔는지 궁금한가 보구먼. "
"무려 10년도 더 된 얘기인데. 대체 왜 날 도운 거죠? 그때는 제가 누군가의 주목을
받을 만큼 강하지도 않았습니다. 혹시, 우리 집안과 관계가 있었던 겁니까?"
"잘못 짚었군. 내가 도운 건 엘베로라는 늙은이에 대한 분노가 커서일세, 할 수만
있다면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을 정도니까. "
대답을 듣던 라한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 상태로 다크시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군요. 흥미로운데요. 흠, 근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까 말했다시피 당시의 전 정말 볼 것 없는 아이였습니다. 헌데, 왜
하필이면 저를 주목했을까요? 전 이해가 안 가는데요. "
"그건 내가 자네에게 암수를 쓴 적이 있어서일세. "
"암수?"
다크시안의 말에 라한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군가에게 암수를 당한 기억이
없어서였다.
라한의 의아한 표정에 오히려 다크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분명히 암수를
썼고, 라한은 그 때문에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다크시안이 직접 지시하고 확인한
일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라한이 암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뭔가 자신이 놓친 게 있는
듯했다.
"혹, 우리 길드가 암수를 사용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당시의 암수
때문에 과거를 잃은 거?"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다크시안이 가한 암수는 백치의 풀로 불리는 셀베카를
이용한 방법 그 이전의 과거를 잃었다면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거를 잃어? 내가?'
망각의 샘물에도 내성을 가진 라한이 셀베카에 영향을 받을 리 만무했다. 상황이
이러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암수라니. 재미있군요. "
"후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난 엘베로의 의뢰를 받아 자네에게 암수를
가한 적이 있었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리라 믿네."
"그러죠. 어차피 기억도 안 나니까. "
라한은 다크시안을 쉽게 용서해주었다. 기억도 안 나는데 딴죽을 거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건 엘베로 때문일세."
"좀 쉽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난 엘베로를 파멸시키고 싶네. 자네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난 정말 많이
당했거든. "
"어떤 식의 파멸을 원하는 겁니까? 죽음?"
라한의 물음에 다크시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엘베로에게 죽음을 내리는
행동을 자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버려둬도 그리 오래 살기 힘들 정도로 늙어 버린 엘베로. 지금 그를
죽였다가는 자칫 성군에 대한 암살로 오도되기 십상이었다. 그건 이름을 대대로
떨치려는 엘베로를 돕는 결과를 나을지도 모른다. 다크시안이 바라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난 엘베로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싶네. "
"어느 정도죠?"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루이나 왕국에서 엘베로를 폭군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싶더군. 내가 생각한 최대의 복수는 그런 것일세. "
다크시안의 말에 라한이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복수와 너무
똑같았다.
"좋군요. "
"고맙네. 난 자네를 돕고 싶네, 엘베로를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네뿐일세. 자네의 능력과 로이나님의 힘이면 그리 힘들지 않겠지. 어떤가? 힘을
합하겠는가?"
"로이나는 힘듭니다. 물질계에 크게 관여할 수 없는 입장이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던 드래곤의 상식과는 좀 다르죠. 생각보다 많은 제약이 있으니까. "
"그런.가?"
다크시안이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드래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로이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엘베로는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지금 라한이 가진 힘과
세력이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지 "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얼굴에서는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뭐래도
엘베로는 중앙 대륙의 패자로 성장한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자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억지라고 생각했다.
라한의 실력을 모르고, 라한 일행의 실력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뭐, 그건 어차피 내가할 일이니까 다크시안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궁금한 건 절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뿐입니다. 앞으로 제게 어떤 도움을 주실
거죠?"
"정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일세.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대륙 그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네. "
라한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지금 라한에게 꼭
필요한 게 정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드래곤이나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비교하면 미약한 세력임에
분명했다. 개개의 실력에서는 앞서지만 수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 탓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보였다 라한은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상대가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라한이 스스로를 약세라 생각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정보라.좋습니다. 거래 성립. "
"화끈해서 좋군. 그래 무슨 일부터 할 텐가?"
"먼저 정보가 필요합니다. "
"어떤 정보인가? 아는 거라면 바로 말해주겠네. 혹, 모르는 정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서 주지. "
라한의 화통한 대답에 다크시안도 시원하게 대꾸했다. 마주 웃는 모습이 상당히
흡족한 듯했다.
그는 라한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에 여러 가지 생각을 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얼굴만 보고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적으로 만났다면 상당히 찜찜한 상대였겠지만. 하지만,
동료가 된 지금은 그 누구보다 훌륭한 아군이었다.
"먼저 잉글리아트, 제이슨, 토일렛, 루나시언, 크리퍼트, 루시펠. 이 여섯 명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름일 겁니다.
실제로그들이거든요. 제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이런 과거의 정보가 아니라 현재의
정보입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어떻게든 알아봐주십시오. "
"흠, 자네가 그들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군. 우리도 지금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많은 정보를 구해보겠네.
"
다크시안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담담하게 대꾸했다. 라한이 그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의문을 접기로 했다.
지금은 서로에 대한 허실을 탐색할 시기가 아니었다. 먼저 믿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게 지금 우선해야 할 과제였다.
물론, 라한과 로이나가 돌아간 후에는 그 여섯 명과 라한을 함께 조사하겠지만.
그건 그들이 없는 곳에서 은밀히 해결할 일이었다.
"또, 엘베로의 정확한 거처에 대해서 알아봐 주십시오. "
"정확한 거처? 그거야 당연히 루이나 왕국의 왕궁 아닌가? 국왕이니 당연히."
"일단 알아보시면 됩니다. 제가 아는 엘베로는 의심이 많은 놈이거든요. 아무런
정보가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
"알겠네. 일단 자네 말대로 조사를 해보지. 더 필요한 게 있는가?"
"지금은 없습니다. "
"그럼 먼저 말했던 정보에 전력을 다하겠네. 아, 우리와의 접선은 각 도시의
여관에서 할 수 있네. 여관의 지붕 꼭대기에 회색 천두 개가 묶여 있는 곳이 우리의
끈이 닿아 있는 곳일세. 그곳에서 이 패를 내밀면 극빈대우를 해줄 걸세. "
다크시안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푸른색 패를 내밀었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패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양에 새겨져 있었다.
'오호라. 이거 의외의 수확인걸. '
라한이 보기에 다크시안이 준 다크라이더 패는 마법 무구였다. 그곳에는 1서클
라이트 마법이 담걱 있었다. 서클만 보면 최하급의 마법 무구인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다크시안이 준 패의 재료에 흥미를 느꼈다. 1서클 정도라면 라한의
능력으로 쉽게 지울 수 있는 일. 지우고 5, 6서클 마법 몇 개를 담는다면 라한
일행에게 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마법 무구로군요. "
"역시 한 번에 알아보는군. 우리 길드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나 마찬가지 일세. "
다크시안의 보물이라는 말에 라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길드 내에서 보물로
여길 정도라면 수가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좀 많이 가지고 있다면 여러 개 얻으려고 했던 라한의 생각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쉽네. '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
"그럼 고생하게. "
다크시안의 인사를 끝으로 라한이 로이나 옆에 섰다. 함께 이동하자는 의미였다.
"매스 텔레포트!"
라한이 다가오자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라한과 로이나가 사라지자 다크시안의
몸이 축 늘어졌다 드래곤 앞이라 긴장했던 몸이 뒤늦게 풀렸다.
"휴, 힘들군. 이거야 원. 그나저나 라한이라고 했던가? 드래곤에게 아무런 위압감도
느끼지 않다니. 대단했어. 후후후. "
다크시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엘베로에게 복수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그냥 복수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고 라한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난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미아와 레테아
라한은 다시 뮬라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칩거에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흘렀을 때, 라한이 일행을 모두 불러모았다. 검술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던 카이렌도 포함해서였다. 하지만, 레테아와 휴란트, 프리미아는 이
자리에서 빠져 있었다.
일행을 차례로 훑어본 라한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프리미아는?
레테아하고 함께 있을 거야.
형하고?
응. 재미있게 노는 것 같던데.
투바의 대답에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본질적으로 드래곤을 무서워하는 레테아가 먼저 말을 걸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지루함을 못 견딘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찾아간 것이리라. 레테아는 공포에 사로잡혀
차마 거절하지도 못했을 테고.
"로이나! 프리마아 좀 불러줘. "
"알았어. "
짧게 대답한 로이나가 마나를 서서히 공명시켰다. 프리미아에게 메시지 마법을
사용해서 호출하려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메시지 마법은 서로 보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로이나와
프리미아 사이에서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같은 속성의 드래곤이기에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종족 신호이기 때문이다.
"불렀어. 곧 올 거야. "
"형하고 휴란트는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해줘. "
"알았어. "
라한은 이번 모임에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전체적인 판도를 짤 생각이었다. 어쩌면
드래곤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이 때문에
형인 라한과 조카인 휴란트는 제외시키고 싶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살았으니 이제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단, 이번에 짠 판도 중에서 엘베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휴란트를 앞장세울 생각이었다.
똑! 똑-!
"들어와!"
"인간. 날 불렀더군. "
"이 드래곤이 왜 이래? 라한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건 내 마음이다. 인간 수컷! "
프리미아의 대꾸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다만, 드래곤의 저런 똥고집이 귀찮을 뿐이었다.
"어휴, 그래 너 잘났다. 앉아."
"싫다. 그냥 서서 듣겠다. "
"그래 너 잘났다. 맘대로 해라. 서 있으면 자기만 손해지. "
프리미아를 잠깐 노려본 라한이 주변을 다시 훑었다.
이제 자신이 원했던 일행 모두가 모였다. 열사를 뒤져봐도 다시 볼 수 없는 엄청난
파티였다. 하지만, 상대할 적을 생각하자 뭔가 부족해 보였다.
'앞으로 만들어가야겠지 . '
"프리미아.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
"뭐지? 인간. "
"네가 유희를 즐길 때 사용했던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이 필요해. "
"그건 왜?"
라한이 말을 할 때 프리미아는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불량스럽게 듣고 있었다.
라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시기심 때문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로이나가 라한에게만 신경 쓰고 있으니 질투가 난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정리는 하고 가야 될 것 같아서.
"무슨 정리?"
"너 때문에 엘퐁소 남작이 열 받아 있어. 빨리 수습하지 못하면 뮬라 상단이 엄청난
피해를 받을 거야. "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프리미아가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아마 라한이 아닌 투바나 프라하가
부탁했다면 이런 반응은 아니었으리라.
"좀 도와주라. 일단 가서 정식으로 말하고 나오면 되잖아. 왜 몰래 나와 가지고
이런 분란을 일으키고 난리야. "
"그거야 내 맘이지, 내가 분란을 일으키든 분가루를 일으키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별꼴이야. 정말. "
프리미아가 팔짱을 낀 상태로 몸을 반쯤 틀었다. 얼핏 토라진 모습이라 상당히
귀엽게 보였다. 일행의 표정을 보니 '귀여워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한사람.
라한만 제외하고.
"야! "
"왜?"
"죽을래?"
기어이 라한이 분노를 터트렸다 그로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일행을 바로잡아야 했다.
'운 좋으면 둘 다를 얻겠지. '
프리미아가 하는 행동을 보면 일행을 쉽게 떠나지 않을 듯 보였다. 실제로도 일행을
만나가면서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행동이 여러 번 포착되기도 했다. 라한도
프리미아의 동행 자체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로이나가 데리고 왔으니 어느 정도의
믿음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니었다. 항상 자신의 말에 딴죽을 걸고 나오는 존재.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파티가 될 수 없었다. 사소한 결정에서도 계속 걸고 나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가 피곤할 게 뻔했다.
"이, 이. 미천한 인간이."
"그래. 오늘 누가 죽나 제대로 한 번 해보자. "
"로이나님. 저 인간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니
양해해주십시오. "
프리미아의 말에 로이나가 난감한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라한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빛을 띠웠다.
라한이 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크라이드리안에게도 힘겨워했던 실력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헌데 프리미아는 크라이드리안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의 실력. 이 싸움은 라한에게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게 거의 확실했다.
"라한. "
"괜찮아 저 미친 자식을 죽여 버리겠어. "
"이, 이놈이."
프리미아가 기운을 끌어올려 라한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객방 간에 엄청난 기류가
형성되며 대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블루 드래곤이 가진 물의 기운이 객방을 잠식한
모습이었다.
"프리미아. "
"로이나님. 이번만큼은 저도 참을 수 없습니다. "
"로이나 됐어.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야. "
로이나가 제지를 하려 하자 프리미아와 라한이 차례로 답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구우웅!
프리미아의 기운에 반응해서 라한도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예전보다조금은 강해진
기운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라한도 어느 정도 발전한 듯했다.
라한은 크라이드리안과의 싸움으로 많은 걸 얻었다. 한계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깨달음을 토대로 수시로 수련했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다.
쿠쿠쿵! 콰콰쾅!
기운이 맞부딪히자 투바와 프라하, 로이나, 카이렌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들이 보기에 라한과 프리미아는 통제 불가능의 상태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물러서서 기운의 여파를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들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프리미아는 어차피 자존심이
있으니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라한이었다. 상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라한이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우웅!
똑! 똑-!
일촉즉발.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프리미아가 약간 놀란 눈빛으로 기운을 서서히 거두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반면 라한은 부드럽고 담담하게 기운을 거두었다. 마치 방문객이 올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들어와! 형. "
찰칵!
레테아였다. 라한과 프리미아의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찾아온 모양이다. 하긴,
기사단장출신인 그가 이 정도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아까 여기서 엄청난 기운이."
"아, 아니 그냥 우리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었을 뿐이다. "
레테아의 물음에 프리미아가 먼저 대답을 해왔다. 자신이 화를 냈다는 걸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에 라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은 무슨 장난. 날 죽이겠다고 기세를 일으킨 것 아니었나?"
"그, 그게.정말장난이었어. 내가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하겠어. 절대 아니야. "
프리미아가 당황한 말투로 어렵사리 대꾸했다.
뭔가 묘한 상황이었다. 레테아가 들어온 직후부터 바꿔 프리미아의 태도. 레테아를
신경 쓰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그런 사이였군. 근데 형은?'
라한은 프리미아의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형인 레테아의 마음과 둘의
진척 정도를 몰랐을 뿐이다.
"프리미아님. 제 동생을 왜?"
"정말 아니야. 믿어줘, "
프리미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레테아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반응에 로이나를 비롯한
주변 인물 모두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들은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아끼고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음이다.
"어쩌다 둘이."
"흠, 흠. 투바 모른 척 해. "
"아, 그러지. "
주변에서 어색한 듯 헛기침을 마구 해댔다. 아직까지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처음부터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신경 쓴 건 아니었다. 로이나가 라한을 아끼듯
자신도 누군가를 아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자니 같은 인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레테아였다. 휴란트가 카이렌에게 검술을 배우느라 시간이
없었으니 레테아 밖에 남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레테아는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놓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가문의 비사.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숨어살다가 또 다시 엘베로에게
공격받았던 일까지.레테아의 말로 프리미아는 안타까움을 느꼈고, 그 안타까움이
호감으로 발전했다.
물론, 아직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호감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단점을 드러내기 싫었을 뿐이다.
"후후, 프리미아. 아까 그 기세는 대체 어디 간 거야?"
"무, 무슨 소리야? 기세라니? 좀 전에 그건 장난이었잖아, 안 그래?"
"장난 한번 살벌하군. "
라한이 프리미아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약점 잡혔으니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프리미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상황만 봐도 라한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은 명백해 보였다.
'음흉한 놈 '
좀 전에 보였던 라한의 경솔함은 모두 연기였다. 프리미아는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왜 주변 일행들이 라한을 대단하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도
완벽하게 당했으니 말이다.
"흠, 흠. 장난이었는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구나. "
"아니에요. 앉으세요. 형도 알아야할 일이거든요."
"알겠다. "
레테아가 자리에 앉자 라한이 프리미아를 다시 한번 흘겨봤다. 그 눈빛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드래곤인 자신이 라한에게 잡혀 지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성격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레테아가 최근에 가지게 된
약간의 호감마저 사라질까 걱정스러웠다.
"먼저 우리가 할 일은 엘퐁소 남작을 다독이는 일이야. 프리미아. 할 수 있겠지?"
"휴, 알겠다. 나갔다가 정식으로 나오면 되는 거지?"
"아니, 아니야. 그것보다 형하고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
"어?"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라한의 정확한 의도를
짚어내지 못했다. 그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한 까닭이다.
프리미아의 의아한 표정에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하고 같이 가서 결혼할 사이라고 해. 안 그럼 다 큰 처자가 집 나가겠다는데
허락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라한아. 그건."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반대 의견을 표했다. 프리미아의 붉어진 얼굴과 레테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라한에게는 그들의 그런 모습 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형. 미안해.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
"방법이 없잖아. 형도 생각을 해봐. 휴란트가 갑자기 집 나가겠다고 하면 대뜸
허락할 거야? 일행도 없이 그냥 가겠다고 하는데?"
"그건 안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프리미아님과 결혼이 라니. 아무리
거짓이라지만 그건 좀."
"방법이 없다니까, 지금은 서로의 체면을 따져줄 때가 아니라고. 그리고 프리미아도
어차피 유희니까 이해할 거야. 맞지?"
라한이 프리미아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마치 '좋아?'라고 묻는 모습이었다.
프리미아는 라한의 표정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 약점을 잡히자 도무지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맞.다. 어차피 유희니까. "
"하지만 프리미아님. "
"난 괜찮다. 혹시 상대가 나라서 싫어하는 건가?"
"형. 진짜로 결혼하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어때?"
"에휴, 알겠다. "
길게 한숨을 쉰 레테아가 긍정을 표해왔다. 정말 어쩔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형에겐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해. '
라한이 이런 식으로 긴 연극을 한 건 모두 레테아 때문이다. 후일, 혼자 남겨진
레테아를 도울 조력자로 프리미아를 선택한 것이다.
라한은 레테아가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헤어져야 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이니
말이다.
헌데, 아무런 도우미 없이 혼자 두는 건 너무 불안했다. 레테아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험난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미아 정도라면, 최소 그녀가 레테아의 보호자라는 유희를 끝낼 때까지는
레테아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프리미아의 유희는 레테아가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테고.
"형 프리미아. 서둘러 줘."
"알겠다. "
"알았다, 라한아. "
대답을 마친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객방을 나갔다. 약간은 어색한 듯 서로 거리를 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이 손을 잡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라한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라한이 형을 돕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일단 엘퐁소 남작 일은 다 끝났군. "
"근데, 과연 허락을 할까? 레테아는 올해 쉰 살이야. 프리미아는, 아니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은 올해 나이가 열여덟 살이잖아. 엘퐁소 남작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야 프리미아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드래곤인데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면
드래곤의 탈을 쓴 오크라고 봐야지. "
"허, 참. 그래. 알아서 하겠지."
라한도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만 보면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은 아들인 휴란트와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헌데, 과연 허락을 할까? 그건 프리미아와 레테아의 역량에 맡길 생각이었다.
"이 일을 끝내면 뭐할 거야? 마냥 도망만 칠 생각은 아니겠지. "
"후후, 도망이라 그것도 좋지. 근데, 그 전에 꼭 들를 곳이 있어 할 일도 있고. "
"들를 곳? 아, 멜카투라 산인가?"
"응. "
라한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드워프인 칼라피안 에이피라타뿐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물이 멜카투라 산에 보관되어 있다. 애초에 상단 행렬에 껴서
이동할 때부터 생각한 목적지가 그곳인 셈이다.
스크롤은 일단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 마나를 꾸준히
빨아들이는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릴이나 드래곤 본 같은 물질은
마나를 꾸준히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물질을 인챈트하면 당연히
영구적인 마법 도구가 된다.
라한이 멜카투라 산까지 가서 유물을 찾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영구적인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있는 곳. 그랜드 인챈터가 되기 위해서는
스크롤뿐 아니라 영구적인 마법 도구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 꿈. 그랜드 인챈터. 절대 포기할 수 없어.'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진 라한이 로이나를 바라봤다.
"로이나 멜카투라 산이 여기서 얼마나 돼?"
"빠르면 십 일.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
"좋아. 프리미아 일이 끝나면 바로출발하자. 나머진 그때 생각하자고. "
"알았어. "
라한의 행보가 정해졌다. 정확하게는 원래 가지고 있던 목적을 남들에게 알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로서 1차 목적지는 확실해졌다. 남은 건 프리미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뿐 이었다.
"근데, 라한. 프리미아는."
"어떻게 알았냐고?"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에 짧게 대꾸했다.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로이나에게는 그게
의문이었다. 거기다 라한은 이곳에 온 후부터 레테아를만난 적이 없었다. 스스로의
수련과 앞으로의 고민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헌데, 어떤 경로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응. 라한은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함께 있는 걸 한 번도 못 봤잖아. "
"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는 했어. "
"그래도 이상한데 보지도 않고 둘 사이가 그런 관계인지 어떻게 알아? 직접
만나봐야 느낄 수라도 있지. "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몰랐어. "
"근데 아까는?"
"아까도 몰랐어, 대신 프리미아가 로이나를 엄청 존경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그리고 나와 로이나 사이의 관계처럼 프리미아도 그런 관계가 죌 인간을 찾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 "
"그냥 찾는 것하고 사귀는 건 다르잖아. 너하고 내가 사귀는 게 아닌데. "
로이나는 아직도 라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과 라한이 사귀는 사이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럼 프리미아와 레테아도 사귀는 사이는 아니어야 정상이었다.
프리미아가 자신을 존경해서 대상을 찾은 거라면 말이다.
헌데, 결국 프리미아와 레테아는 결혼 승낙을 받으러 떠났다. 마치 중간 단계를
훌쩍 건너뛴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둘은 사귀는 게 아니야. 뭐랄까? 자신들도 모르게 휘말렸다고 할까?"
"이해가 안 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 "
"프리미아는 원래 레테아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나와 로이나의 관계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고 싶었을 뿐이지. 헌데, 내가 둘을몰아붙였잖아. 마치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처럼. 형하고 프리미아는 휘말린 거야. 형은 몰라도 프리미아는 지금
머릿속이 엄청 복잡할걸. 자신이 의도했던 것하고 너무 다르게 흘러갔으니까. "
"그렇.구나. "
그제야 로이나도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애초에 레테아와 프리미아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라한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 이 모든 게 라한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란 말이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옆에 있던 투바가 의문을 표하자 라한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이다. 그건 사람 자체에게
매력을 느꼈다기보다 라한보다 윗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에 기인했다.
휴란트는 라한의 조카, 레테아는 라한의 형 라한보다 위에 서고 싶은 마음 때문에
둘 중에서 레테아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와 사이가 좋아져서 라한과
로이나의 관계보다 윗줄이 되고 싶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프리미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라한과의 살기등등한 대립이 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레테아. 급박한 상황과 갑작스러운 레테아의
등장으로 프리미아는 심적 혼란을 겪었다. 라한은 그 상황을 자신이 유도한
방향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괴물 같은 놈. "
"마족한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라한이 프라하와카이렌, 로이나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괴물. "
"두말하면 잔소리지. "
"라한.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좀."
믿었던 로이나마저 라한을 괴물 취급했다. 로이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을
유도해낸 라한 아니던가? 수천 년을 산 자신보다 심리전에 능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괴물로 불리기 충분했다.
"쳇. 테세르.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 괴물?
"그래.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고. "
-당연하잖아. 난 처음 주인에게 소환됐을 때부터 주인이 평덤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니까. 괴물 주인 파이팅!
"쩝. "
퍽! 퍽-!
라한이 홧김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테세르가 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주인. 왜?
"시끄러! "
퍽! 퍽-!
쿠웩!
한편, 레비안 산맥을 힘들게 빠져나온 에펠 일행은 대륙의 중앙으로 향했다. "에펠.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고향으로 가보자. 숨어살더라도 고향이 편하겠지. 우리가 살던 곳이니까. "
본래 그들의 목적지는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범죄자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곳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의 비밀 조직이 공격하는 탓에 범죄자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에펠 일행의 목적지도 사라졌다.
"라한. 그 개자식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 혹시 라한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렇다 하더라도 고향에 있는 게 더 나아. 그곳은 스카라트 산맥과 가까워서
숨기도 편하잖아. 그리고 설마 우리가 고향으로 갔다고 생각하겠어?"
에펠의 설명에 베린과 카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타당한 소리로
들렸다.
어차피 라한에게 발각 당했다가는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고향
땅에서 맘 편하게 살다 죽고 싶었다. 귀소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괜히 고향땅이
그리워졌다.
"근데, 다음 마을은 언제야? 이번은 마을이 왜 이렇게 멀어?"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야. "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난 더 이상 못 가겠어. "
카류나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다리를 두드렸다. 하루 반 동안 꼬박 이어진 강행군.
비록 검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자. "
카류나의 옆에 베린파 에펠도 따라 앉았다. 다리를 연신 두드리는 모습이 그들도
쾌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카류나! 물 없어?"
"잠시만. "
카류나가 물을 건네자 에펠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에펠이 물을 다 마시자 다음은
베린이 수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남아 있던 물 전부를 비워 버렸다
"카류나! 물 얼마나 남았어?"
"세 통 정도. 더 마실래?"
"난 됐어. 너도 목 좀 축여야지, "
"그래야지. "
카류나도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크윽! 대체 마을은 어디야?"
"걱정이군. 오늘 안으로 마을을 찾지 못하면 물이 없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
에펠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일행을 일깨웠다.
그의 말처럼 마을을 빨리 찾는 게 시급했다.
남은 물이라고 해봐야 수통 두 개 반 정도. 이 정도 양으로 하루를 버티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해지기 전에 마을을 찾아야 했다.
"남은 물이 별로."
카류나가 수통을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물을 흔들어 보이며 물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어? 이상하네. "
카류나가 다시 물을 흔들었다. 헌데, 찰랑이는 듯한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기다 수통 자체가 너무 가벼웠다.
"왜? 무슨 일 있어?"
"물이. 없어. "
"무슨 소리야? 수통 두 개 남았잖아. 좀 전에 먹던 것까지 두 개 반은 남아야 정상
아냐?"
"그건 그런데."
카류나가 다시 수통을 흔들었다. 역시나 너무 가벼웠다. 거기다 좀 전에 마시던
수통마저 급격하게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뚜껑 열어봐! 빨리!"
베린의 다급한 외침에 카류나가 수통을 하나씩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뒤로
뒤집어서 탁탁 털어도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게."
뭔가 말을 하려던 에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챙-!
에펠이 검을 빼들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걸 느꼈기 때문이다. 에펠이 검을 뽑자
베린과 카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기운을 집중시키며 무언가를
느끼려고 애썼다.
"저쪽이야. "
에펠의 외침에 베린과 카류나가 바위 아래쪽을 바라봤다. 뭔가 축축한 물체가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게 뭐야?"
"몰. 몰라. "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보며 에펠과 베린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몬스터 목록에도 없는 물체였다. 얼핏 보면 젤리 같으면서도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 끔찍함에 저절로 닭살이 돋았다.
"온다. "
흐느적거리는 물체가 에펠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카류나가 들고 있는
마지막 남은 수통을 향해서였다.
"헉!"
털썩!
놀란 카류나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너무 끔찍한 모습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놀란 모양이다.
스르르르륵!
철썩!
흐느적거리는 물체가 움직일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모습에
이어 소리까지 기이한 물체, 에펠과 베린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이 요물. 받아라!"


에펠이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꽤나
날카로운 기세가 담긴 검이었다.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순간적인 검 휘두름에
익숙해진 덕이다.
스륵! 철퍼덕!
에펠이 휘두른 검은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정확히 이등분하며 지나갔다.
하지만, 갈라진 곳이 순간적으로 합쳐지며 처음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저거 뭐야?"
"같이 하자. "
베린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괴물체를 바라봤다. 그 옆에서 에펠도 검을 꼬나 잡고
살기를 일으켰다.
"지금이다. 하앗! "
"하앗! "
에펠과 베린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에펠의 검은 괴물체의 허리를 양단하기 위해
가로로 휘둘러졌다. 반면, 베린의 검은 괴물체의 머리부터 아래로 주욱 그어
내렸다. 일견하기에 베린과 에펠의 검에 의해 괴물체가 사등분된 듯 보였다.
스르르, 철퍽!
사등분 되었던 괴물체의 모습이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애초에 일반적인 검에는
타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크리릭!
괴물체가 기괴한 음성을 토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괴물체가 다가올 때마다 에펠과
베린도 한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그들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카류나!"
에펠과 베린이 계속 뒷걸음질치자 남은 사람은 카류나뿐이었다. 이미 의식을 잃은
탓에 도망가지 못한 것이다.
"베린. 다시 해보자. 하앗!"
"하앗! "
카류나를 구하기 위해 에펠과 베린이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그래도 일말의
동지애는 있는 모양이다.
철퍽!
퍼억!
"컥! "
"크륵! "
이번에는 괴물체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몸이 다시 합쳐지자마자 에펠과 베린의
머리를 강하게 두드린 것이다.
털썩!
강한 충격에 에펠과 베린이 의식을 잃었다. 카류나를 포함한 셋 모두 쓰러지자
괴물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이 공격당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크리릭!
괴물체가 카류나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수통을 빼앗아서
마셨다. 물이 조금씩 줄어들수록 괴물체의 형체도 조금씩 뚜렷해졌다
-크릭!
통통!
물을 다 마신 괴물체가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그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이
공격당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흐느적거리는 괴물체. 그는 투바가 만들어낸 물 덩어리 변이었다. 함께 텔레포트를
하지 못해서 혼자 남았던 변.
어쩔 수 없이 투바의 기운이 느껴지는 북서쪽으로 마냥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이 있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힘을 사용하면 가지고 있던
물을 조금씩 소모한다. 걷는 행위 자체도 적은 양이지만 힘을 소모하는 일. 거기다
이곳 황무지에는 물도 없었다.
-크르륵!
물 덩어리 변은 삼일 간의 강행군으로 힘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 이 때문에 몸의
크기가 쾌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물을 훔쳐서 힘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크릭?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물 덩어리 변이 카류나의 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가방 안에서 테세르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걸 느꼈다.
물 덩어리 변이 카류나의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초록빛을
띠는 자그마한 반지를 꺼냈다.
-크링? 크링?
물 덩어리 변이 반지를 좌우로 훑었다. 테세르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크리리릭!
틱-!
테세르가 아니라는 결론이 서자 인상을 찌푸리며 반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쪼로록 달려가 다시 주웠다. 버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둘 남아 있는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찾기 위해 힘을
나누었다. 류카라한과 잉글리아트, 크리퍼트가 한조, 토일렛과 루시펠이 한 조가
되어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 중 류카라한 일행은 라이칸드로프 돈네리아 미스티크를 찾기 위해 대륙의
동쪽으로 향했다. 드래곤 산맥과 인접한 숲 안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일주일은 더 가야 될 걸. "
그들의 이번 이동은 무척이나 더뎠다.
출발한 지 벌써 24일.
헌데 아직도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좀 참게. 일단 가기만 하면 대응 마법진을 설치할 테니. "
"지금 없잖아. 나중은 필요 없다고. "
계속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이는 크리퍼트였다.
검사라는 이유 때문에 일행의 모든 짐은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몫이었다. 헌데,
수련 정도에서 류카라한이 크리퍼트보다 월등했다. 다른 역량을 가지고 같은 짐을
지고 있으니 크리퍼트가 힘든 게 당연했다.
"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좀 돌아다녀볼 걸 그랬군, "
"진작 좀."
"쉿! 누가 있다. "
둘의 대화를 류카라한이 제지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가야 할 앞쪽을 바라보며 눈을
매섭게 떴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음, 인간인가?"
"그런 모양이군. "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류카라한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며 차례로 말했다.
류카라한이 느낀 기척을 뒤늦게 알아챈 모양이다.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는 검과 마법을 극성으로 익힌 실력자이다. 그들의 능력으로
기척을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물론, 그들보다 뛰어난 존재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찌됐든지 금 느껴지는 기운만
보면 그리 강한 자는 아닌 듯했다.
"정신 차려라. 만약 저들이 우리를 노리던 자들이라면 어쩔 뻔 했나?"
"아니잖아. 아니면 됐지, 뭐."
"자칫 잘못하면 다 죽는 수가 있다. 제발 정신 차려라. 크리퍼, 잉글리아트. "
류카라한이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를 질책했다.
크리퍼트의 임무는 이동하는 동안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알아채는 거였다.
대신 잉글리아트는 전면, 류카라한은 좌측과 후면을 맡기로 했었다. 혹시 모를
기습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한 것이다.
헌데, 이번에 느껴진 기척은 오른쪽 전방.
잉글리아트와크리퍼트둘모두가잡아내야하는기척이었다. 헌데, 전혀 다른 곳을 맡고
있던 류카라한이 먼저 알아챘다. 그건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잡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유는 서로 떠드느라 놓친 것이고.
"쳇. 근데 어떤 놈이야? 여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닌데. "
"글쎄. "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대륙동쪽의 황무지인 로아평이다. 곳곳에 작은 숲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메마른 땅뿐인 곳. 사람이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보이는군. "
먼 곳을 가리키며 잉글리아트가 말했다.
"별로 크지 않은데? 인간인가? 아니면 엘프?"
"인간이군. 세 명. 남자둘, 여자하나."
크리퍼트의 물음에 류카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에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놀란 눈으로 류카라한을 바라봤다.
시력이 상당히 뛰어난 크리퍼트가 겨우 크기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헌데, 류카라한은 상대의 수와종족, 성별까지 완벽하게 구분해냈다. 새삼 둘의 실력
차이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용병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지?"
"잠, 잠깐만. 류카라한. 용병이라는 말은 상대의 복장을 봤다는 얘긴가?"
크리퍼트의 물음에 류카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실력
차이가 확실해졌다.
"놀랍군. "
"내가 먼저 가지. "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전방에서 오는 인간들을 맡기 위해서였다
류카라한이 앞으로 쏘아져가자 잉글리아트와 크리퍼트가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해?"
"거짓말 같지는 않던데. "
"차이가 이렇게 컸나?"
"글쎄다. "
그들도 류카라한의 뒤를 따라 갔다. 류카라한과는 다르게 상당히 느린 걸음이었다.
걸어가면서 류카라한의 실력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물 덩어리 변은 어디에?
류카라한은 황무지를 가로 지러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던 곳까지 달려왔다. 그렇게
한참 다리던 류카라한이 뭔가 이질적인 기운에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정령인가?
류카라한의 감각에 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히 물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순수한 물 자체의 기운. 정령이 아니면 절대
풍길 수 없는 그런 기운이었다.
나와라.
짧게 외친 류카라한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눈앞에 반투명하고
물컹거리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정령.인가?
류카라한도 정령을 본 적은 있었다. 로이나와 함께 다닐 때에는 정령왕도 몇 번이나
봤었다.
오히려 류카라한에게는 하급 정령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하급 정령을 본 건
판테아를 만나기 이전 뿐. 그 이후 그 긴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탓이다.
-크링?
"정령이냐?"
-크리링?
기괴한 소리를 토한 물 덩어리 변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으로 류카라한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아본 것이다.
"흠, 하급정령이면 말을 못하겠지. 근데, 아래에 쓰러진 인간들은 누구지?"
류카라한이 쓰러진 세 명. 에펠 일행을 가리키며 물 덩어리 변을 재촉했다.
류카라한으로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정령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
하지만, 물덩어리 변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네 짓이냐?
감히 인간을 해코지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 그런 식으로만 들렸다.
"이봐. 정령. 뭐하는 거야7"
류카라한이 오른손을 들어 물 덩어리 변을 잡으려 했다. 이에 물 덩어리가 손을
빠르게 빼며 뒤로 물러났다.
챙그랑!
"응?"
뒤로 물러나던 물 덩어리 변이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손에 쥐고 살펴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류카라한이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주웠다.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은 반지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코 손에 쥐어보자 무언가 달랐다. 이런 느낌은 마법무구가 분명했다.
그것도 겉으로 마나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정도의 마법 무구라면 특급임이
분명했다.
류카라한이 순간 놀란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어?"
전방에 있어야 할 물 덩어리 변이 없었다. 류카라한이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도망간
듯했다.
"이거 참. 정령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마법 무구라."
반지를 살피던 류카라한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착용했다. 원래 약간 헐렁해
보이던 반지가 류카라한의 손에 딱 맞도록 줄었다.
"좋.군. "
류카라한이 반지를 바라보며 감탄성을 흘렸다. 정말 탐나는 물건이었다. 그냥
단순히 착용했을 뿐인데 몸이 이렇게 가벼워지다니. 시동어를 알아서 시전한다면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게 확실했다.
"어이! 류카라한! 어떻게 됐어? 인간들은?"
멀리서 크리퍼트가 크게 외치며 달려왔다.
'저놈들 손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
류카라한이 반지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의 탐욕과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두 가지 생각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어? 얘네들 벌써 뻗었네. "
"뭐, 그렇게 됐다. 가자. "
"이 녀석들은 어쩌고?"
"알아서 하겠지. "
짧게 대꾸한 류카라한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는 쓰러진 세 명의 일행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이 반지의 주인임을 주장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들과 에펠 일행, 그리고 자신까지 세 부류가 반지를
노릴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
류카라한이 앞장서서 걷자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쓰러진
세 명의 인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정이라는 감정을
초월했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10일 만에 뮬라 상단으로 돌아왔다. 하루만에 돌아올 거라는
예상보다 9일이나 늦은 복귀였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라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프리미아에게 짜증을 부렸다. 차마 형에게는 언성을 높일
수 없어서 프리미아를 몰아붙인 것이다.
시급을 다투는 이때에 10일을 허비하다니. 라한으로서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어. "
"라한아. 일이 좀 있었다. "
그들의 태도에 라한이 호기심어린 빛을 띠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늦은 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증이나 풀자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었어? 멀쩡하게 돌아온 걸로 봐서는 별일 없어 보이는데. "
"말도 마, 유희 때 아버지였지만, 얼마나 까다롭던지. 거기다 샤르비엘 후작인가?
하여간 그 늙은이하고 같이 있는 바람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니까.
"
"샤르비엘? 그렇군. "
라한도 샤르비엘 후작을 깜빡하고 있었다.
왕국의 후작이 엘퐁소 지역에 일이 있어 방문했다. 그럼 엘퐁소 영주의 집에서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레비안산맥에서 이곳으로 왔을 때, 레테아와는
안면을 익혔을 터. 영주성에서 그와의 만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너와의 관계를 묻더군. 형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놀라던데. "
"하긴, 그때는 형하고 아무런 대화도 없었으니까 몰랐겠지. "
"그리고 내가 프리미아님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입을 다물지 못하더군. "
대충 얘기만 듣고도 그곳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샤르비엘 후작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카이렌이 아닌 라한이었다.
카이렌마저 일행으로 둔 사람이 라한이기 때문이다.
'좋다고 입 찢어졌겠군. '
라한이 가진 힘과 세력이면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라한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자칫 왕국의 붕괴까지도 낳을 수 있는 일이다.
헌데, 그의 형인 레테아가 엘퐁소 영주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왔다. 좀 전의
과정과는 완벽히 다른 전개가 되는 것이다. 적이 될 사람의 형이 자국 사람이 되는
일. 왕국 측에선 잠재된 적을 없애고 힘을 얻는 결과를 가져올 게 확실했다.
"샤르비엘 후작이 개입해서인지 결혼 승낙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 오히려, 어떻게든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마저 풍기던걸. "
"그렇겠지. 근데. 샤르비엘 후작이 마냥 사람 좋은 놈이 아닌데,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
"그런 건 없던데. 오히려 그 반대였어. 우리 필슨 가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문의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나오더라고. "
"역시 그 자식은 만만하지 않군. "
라한은 도움을 주겠다는 그 자체를 샤르비엘 후작의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라한의 힘과 세력이라면 도움을 주지 않아도 복수는 쉴게 할 수 있다. 다만,
그 방법을 정하지 못해서 미루고 있을 뿐. 당장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상황임을 샤르비엘 후작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뭔가 도움을 줌으로써
구실을 만들 생각이었으리라. 후일,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대체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뭐든 다 돕겠다고 하던데. "
"허, 그놈 참. 우리 세력을 어느 정도는 꿰뚫고 있다는 얘기잖아. "
구체적인 도움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그 자체가 라한의 힘을 꽤 상세히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라한이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음, 그게 그렇게 되나? 난 그냥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좋은 뜻만 있는 줄 알았는데.
"
"에고, 뭔 드래곤이 머리에 돌만 들었나? 생각이 왜 그렇게 없어? 하여간. 그나저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지. 막연한 감만 가지고 그런 결정을 할 리가 없는데.
"
"아, 생각났다. 샤르비엘 후작 옆에 음침하게 생긴 남자가 있더군. 외모는 쾌
잘생긴 것 같은데 분위기가 너무 음침해. "
프리미아의 말에 라한이 생각을 더듬어봤다. 잠깐 생각해보자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아마, 샤르비엘 후작이 카이렌을 대적하기 위해서 구했다는 그 사람일
거였다.
'꽤 강한가보군. '
"어떻게 생겼지? 실력은?"
"잘생겼어. 검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검사 같았고. 실력은 우리 레테아보다 횔씬
강했어. 프라하라는 늑대 녀석보다 조금 약한 수준으로 보면 될 거야, "
"굴레를. 벗은 인간?"
프라하는 굴레를 벗은 존재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그보다 조금
약하다면 굴레를 벗은 인간밖에 없다.
"재수 없으면 일찍 부딪힐지도 모르겠군. 젠장. 프리미아. 형. 당장 떠날 테니까
준비 좀 해줘. "
"어? 엘퐁소 남작이 마차하고 수행인들 붙여주기로 했는데. 내일 도착하기로
했다고. "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준비해. "
일이 다급해졌다. 상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지만, 굴레를 벗은 인간이
분명해보였다. 만약 전에 만났던 그 부류라면 혼자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부딪혔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라한은 90퍼센트의 승률에서는 싸움을 걸지 않는다. 최소 95퍼센트를 넘는 승률, 할
수만 있으면 100퍼센트의 승률이 확실할 때에만 싸우는 게 라한이다. 그가 오래살기
위해 선택한 싸움 방식이기도 했다.
"아고, 수행인 없으면 귀찮은 일을 우리가 해야 되잖아. "
"프리미아! "
"알았다. 알았어. 어휴, 레테아는 그렇지 않은데 넌 왜 그렇게 다혈질이야? 쳇. "
"빨리. "
"가잖아. 간다고. "
프리미아가 투덜거리며 객방으로 들어갔다.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떠날 채비라고 해서 짐을 가지러 가는 건 아니었다. 노숙을 할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한 준비물을 갖추는 것뿐이다. 며칠 정도 먹을 간이 식량도 포함해서.
"어휴, 저 말썽꾸러기 아가씨를 어찌한다. "
-주인아. 잘하면 주인 형수 될 사람인데.
"그러게 말이다. "
라한이 프리미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질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한이 레테아라는 프리미아의 약점을 잡은 건 분명했다 헌데, 그 약점이라고
해봐야 큰일에 대한 결정에만 유효할 뿐이다. 지금처럼 사소한 움직임에서는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강해져야지. "
자신의 몸을 툭툭 턴 라한이 상단의 한 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일행들을 찾아서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다
출발준비는 근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일행을 모두
찾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탓이다.
"준비 다 됐지?"
"응. "
"저, 혹시 레이디 프리시아양?"
막 출발하려 할 때, 프라하의 뒤에 있던 쿨샤크가 말을 걸었다. 그 옆에서 데메크도
의아한 표정으로 프리미아를 바라봤다.
"어라? 쿨샤크잖아, "
"오, 맞구려. 레이디 프리시아. "
프리미아의 유희 이름은 프리시아 엘퐁소. 그 유희 때, 쿨샤크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비록 라한의 계략에 의해 깨지긴 했지만, 한때나마 서로 사랑했던
사이임은 분명했다. 물론, 프리미아의 입장에서는 유희에 한해서였다.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지?"
"흠, 흠. 레이디 프리시아. 말투가 좀."
프리미아가 프리시아 엘퐁소로 지낼 때에는 요조숙녀였다. 말투도 조신했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귀족가의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아와 결혼 약속을 한 이번 유희는 달랐다. 얽매일 수밖에 없던
귀족가의 예법을 많이 버린 상태였다.
스스로가 귀찮기도 했고, 레테아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찌됐든
지금 프리미아는 귀족가의 예법을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말투가 뭐? 근데 대체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아, 그게 저. 뭐, 그렇게 됐소. "
"그렇게 되긴 뭐가 그렇게 돼? 내가 너 인간 만들려고 데리고 다니는 거지. "
쿨샤크와 프리미아의 대화에 라한이 끼어들었다. 스스로를 변론하려는 쿨샤크가
꼴사나워서였다.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저놈을 인간 만든다고? 라한 네가? 푸하하하. 너나 잘해.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난리야? 예의도 모르는 놈이. "
"뭐, 그래도 저런 놈한테 차인 너보다는 내가 더 낫지. "
"뭐, 뭐? 이, 이게."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라한에게 한심한 놈 취급 받는 인간에게 차였다는 점. 그 하나만으로도 라한에게는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왜? 틀렸어?"
"쳇. 두고 보자. "
프리미아가 라한이 아닌 쿨샤크를 매섭게 노려봤다. 라한보다 쿨샤크가 더 만만했던
모양이다.
프리미아의 살기어린 눈빛에 쿨샤크가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어떻게 된 게 라한과
일행인 사람은 그 누구하나 만만한 존재가 없었다.
어쩌다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됐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가자. "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 "
라한 일행이 뮬라 상단을 벗어나려 할 때, 먼 곳에서 레드리안이 달려 나왔다.
라한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깜빡했다는 몸짓을 취했다.
이곳이 레드리안이 사는 곳이니 떠날 때에도 말을 해주는 게 예의였다.
거기다 쿨샤크와 데메크라는 멋진 장난감까지 허락했으니 당연히 한마디 해주고
떠나야했다. 헌데,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어서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
"아, 이거 미안하군. 깜빡했어. "
"흠, 그래. 지금 떠나려는 겐가?"
"뭐, 그렇게 됐어. "
"갑자기 떠나기로 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조금. "
라한이 어깨를으쓱하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했다. 굴레를 벗은 존재가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였다.
"말린다고 멈추진 않겠지?"
레드리안이 라한의 뒤에 있는 쿨샤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허락은 했지만, 아들
걱정이 되긴 된 모양이다.
그가 쿨샤크를 보내기로 한 건 아들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지금 정신
상태로는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고, 그러면서 머리가 좋지도 않은. 정말 그렇고 그런
인간인 쿨샤크. 괜히 잘난 척하다가 죽는 인간의 전형적인 성격 아니던가. 어떻게든
아들을 바꾸고 싶었기에 라한에게 떠맡긴 것이다.
"이미 말했잖아. "
"알겠네. 여기. "
레드리안이 두툼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는 주머니였다.
"돈인가?"
"맞네. 여행 자금으로 쓰게. "
"잘 쓰지. "
라한이 흔쾌히 돈을 받았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돈인 레드리안에게서 받는
것이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언제쯤. 돌아을 건가?"
"글쎄. 그건 돼봐야 알겠는데. 대신, 돌아올 때 저 인간은 제대로 만들어놓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
"고맙네. "
레드리안의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라한이 뮬라 상단을 벗어났다. 라한의 뒤에
있던 쿨샤크도 울상을 지으며 따라갔다.
라한이 엘퐁소 지방을 막 벗어났을 때, 뒤쪽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라한이 일행들을 옆으로 비켜 세우며 뒤를 바라봤다.
"누구지?"
"테세르!"
투바의 물음에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테세르는 라한이 뮬라 상단에 있는 동안 로브 속에서 책만 읽었다. 헌데도 아직
3서클 마법 주문을 외우지 못했다. 아니, 2서클 마법도 겨우 반을 외웠을 뿐이다.
머리가 나쁘긴 나쁜 모양이다.
-왜?
"저 끝에 먼지 보이지?"
-말이네.
"혹시, 말을 타고 오는 녀석들 중에 아는 녀석 있나?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 라한이 확인할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았기에 테세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마나가 가장 민감한 존재는 테세르였기 때문이다.
-좀 되는데.
"그 중에 핵심 인물은?"
-샤르비엘 후작하고 음, 또 한 녀석도 익숙하기는 모르겠네. 오래전에 느껴본 것
같은데.
샤르비엘이라는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은 예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젠장. "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또, 테세르가 말한 또 다른 인물의 존재도
꺼림칙했다. 예전에 만났던 존재와 최근에 만난 샤르비엘의 동행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두두두두둑!
이젠 말발굽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한도 달려오는 존재들의 기운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샤르비엘이 맞군. 근데 익숙한 기운? 모르겠는데. "
-익숙한 기운이 하나 더 있어. 확실하다고.
"그래? "
테세르에게 익숙하고 라한에게 낯선 기운. 그건 라한이 마법을 익히기 전에 만났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그 이후의 기운은 그 누가됐든 잊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테세르는 머리가 너무 나빠서 좀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흠. "
"왜?"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라한의
행동에 투바와 프라하가 의문을 표해왔다. 반면, 로이나는 라한의 옆에 서며 뒤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강하군. 프리미아!"
"왜?"
"이 기운이 맞나?"
"음, 맞는 것 같은데. "
잠시 기운을 느껴보던 프리미아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누군가의 기운을
구분하는데 서툴렀기 때문이다.
기운을 느끼는 일이라면 드래곤으로서 당연히 터득하게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기운을 구분하는 건 많은 유희를 거치면서 터득해야한다. 헌데, 프리미아는 유희를
그리 많이 거쳐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기운을 구분하는 일에 서툴렀다.
"전투 준비 할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
도끼를 잡는 프라하를 보며 라한이 제지시켰다.
라한이 느끼기에 다가오는 상대는 꽤 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 정도로 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굳이 뽑자면 레테아나 휴란트 정도? 나머지는
다가오는 그자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강한 실력자였다.
"멈췄다. "
-어? 그러네.
테세르가 예전에 느꼈던 기운이라고 했던 사람, 레테아보다 강하다고 느껴진 그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따라 오던 수행인 한 명도 함께 멈췄다. 샤르비엘
후작 일행 중에서 두 명이 뒤에 처진 것이다.
"왜 멈췄을까?"
-보고 올까?
"테세르 너 말고, 카이렌! "
"어. "
라한이 카이렌을 불렀다. 은신술의 대가인 그에게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고 오게 할
속셈이었다.
"부탁해. "
"알았어. "
테세르가 기운에 민감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실력을 구분하는 능력에는 약하다.
단순히 마나의 강도만으로 실력을 측정하기는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카이렌이라면 상대의 실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거기다 은신술의 대가이니 들키지 않고 상대를 염탐할 수 있을 터. 이런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그였다.
카이렌이 사라지고 잠시 후, 샤르비엘 후작을 비롯한 일행이 라한의 앞까지
다가왔다.
두두두둑!
"워! 워!"
말을 타고 온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중 선두에 선 사람이 샤르비엘
후작이었다. 중간에 선 나머지 세 명은 샤르비엘 후작의 부하로서 그리 강한
실력자는 아니었다. 물론, 라한과 그 일행의 기준에서 말이다.
"무슨 일이지?"
"겨우 따라잡았군. "
"그건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전에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지 않나? 그때 얘기를 못 끝냈으니 마무리하러 온
거지. "
골치 아픈 녀석이었다. 그때는 카이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싫어서 서둘러 보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라한의 심경을 샤르비엘 후작이 모를 리 없다 그래도 귀족들 사이에서
굴러먹었으니 눈치만큼은 빠를 테니 말이다. 헌데, 지금 와서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지.
"원하는 게 뭐야?"
"동행을 두 명 뒀으면 하네. "
"동행? 더 필요 없는데. "
"아니 필요할 걸세. 나오게. "
샤르비엘 후작이 뒤를 보며 말했다. 이에 샤르비엘의 뒤에 있던 부하 기사 두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뭐하자는 수작이야?"
"수작이랄 것까진 없지 않나? 허허허, 먼저 소개하지. 이쪽은 덩치는 크지만
마법사라네. 자꾸 기사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더군. 그리고 여기 곱게 늙은 이
친구는 정령사일세. 땅의 중급정령을 소환하는 꽤나 대단한 실력자이지. "
"반갑다. 난 파울이다. 단장님 말씀대로 마법사이지. 덩치만 보고 기사로 오해하지
말라고. "
마법사 헤피에타 파울. 나메라 왕국에서는 상당히 귀중한 인력으로 손꼽힌다. 겨우
서른의 나이에 5서클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흘러서 5서클 마스터가
되고, 더 노력해서 6서클이된다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가 되는 셈이다.
"해리언이다. 직업은 정령사. "
정령사 피트리아 해리언. 나메라 왕국 최고의 정령사로 꼽힌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서른 정도지만, 실제로는 쉰이 넘었다. 조화를 중시하는 정령사이기에
겉모습이 늙지 않았을 뿐이다.
"이봐. 샤르비엘 후작. 내가 저들을 일행에 넣겠다고 한 기억이 없는데?"
"뭐, 당장 어떤 힘이 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저들이 있으면 우리 나메라 왕국
내에서만큼은 통행이 자유로울 거야. 저들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거든. 아마 내가
저들의 단장이라는 위치만 아니었으면, 나도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모르지. "
"딴청 피우지마. 내가 왜 저들을 우리 일행에 넣어야 하는 건데?"
라한이 언성을 높이며 샤르비엘 후작을 노려봤다. 절대 저들을 일행에 넣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라한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샤르비엘 후작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라한의 속을 긁었다.
'뭐 저딴 녀석이 다 있어?'
"야! 내가 왜?"
"있지 이유 당연히 있지."
"이유가 있다고?"
"당연하지. 저기 있는 프리지아양은 엘퐁소 남작의 유일한 혈육일세. "
"그래서?"
라한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이에 샤르비엘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레테아는 엘퐁소 남작의 사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며칠 전에 국왕께
작위를 내려주십사 하고 주청을 올렸지. 그리고 어제 레테아에게 작위가 내려졌네.
일단은 자작일세. "
"자.작?"
"자작이라는 작위는 우리 나메라 왕국의 자산이나 마찬가지일세. 귀족의 죽음은 곧
우리나라의 손해로 이어지게 되지. "
그제야 샤르비엘 후작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레테아와 프리미아를 엘퐁소
영주성에 10일씩이나 가두어뒀던 일.
그건 시간을 끌기 위한 샤르비엘 후작의 술수였다. 그 10일 동안 국왕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레테아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리라.
"당했군. 젠장. "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프리미아를 노려봤다. 그것도 모르고 당했냐는 무언의
질책이었다.
라한의 눈빛을 받은 프리미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이 인간들에게
농락당하다니. 라한과 레테아, 로이나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모두를 죽여 입을
막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야 자신의 실수가 조금이라도 감춰질 테니 말이다.
'요즘 내 꼴이 왜 이러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지금 와서 프리미아를 질책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좋아, 좋다고. 샤. 르. 비. 엘. 후. 작.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이, 이해해주게 자네와 일행이 너무 탐나서. 정말 그게 저."
라한이 살기를 흘리자 샤르비엘 후작의 몸이 마구 떨렸다. 그의 옆에 있던 샤르비엘
후작의 수행인들도 마찬가지로 몸을 떨어댔다.
라한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수행인들,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라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최소 라한 앞에서는 말이다.
"이해? 좋다고. 까짓것 일행으로 받아주지. 대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몇 배로
되갚아 줄 테니 명심하라고.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려 앞장서갔다. 라한이 앞서가자 레테아와 프리미아,
휴란트와 로이나도 그 뒤를 따랐다.
"등장이 아주 멋지군, 앞으로 재미있겠어. "
"그러게. 요즘 장난감이 자꾸 생겨서 너무 좋은 거 있지. "
프라하와 투바가 동행이 된 파론과 해리언을 조롱했다.
이에 약간 다혈질이었던 파론이 순간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해리언이 파론의 손을 잡고 제지시켰다. 경험 많은 해리언이었기에 프라하와 투바의
힘을 대충이나마 느낀 것이다.
일행이 모두 앞서가자 샤르비엘 후작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 살았군. 파론. "
"예. 후작님. "
"저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서 알려주게. "
"염려놓으십시오. "
파론이 샤르비엘 후작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루이에의 뒤를 터벅거리며
따라갔다. 해리언도 샤르비엘에게 고개를 숙이고 파론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샤르비엘 후작도 말을 타고 돌아갔다. 그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공간을 가르며 카이렌이 나타났다.
"라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군. 후후, 어리석은."
카이렌은 벌써 오래전에 뒤에 멈춰 섰던 두 명의 사내를 살피고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뭔가 더 캘게 없나 싶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라한은 절대 죽지 않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내 마음에 든 생에 최초의
인간이거든, "
독 백을 내뱉은 카이렌이 라한이 간 곳을 뒤따라갔다.
과거 루이에를 찾아 나섰던 제이슨과 일행, 그때의 암습으로 제이슨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근 두 달 이상을 병상에서 요양하며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루이에에
대한 제이슨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때부터 루이에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게서 완벽하게 적으로 규정되었다. 직접
피해를 당한 제이슨 뿐 아니라 모두의 결정이 그러했다.
한 명의 힘이 중요한 이때에 제이슨을 병상에 두 달이나 묶어둔 루이에.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에게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심지어 뒤늦게
합류한 류카라한까지도.
"잉글리아트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어?"
"곧 올 거야. 보채지 좀 마. "
"토일렛은?"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제발 좀 진정해. "
제이슨의 말에 루나시언이 짜증난다는 듯 날카롭게 대꾸했다. 하루 온종일 이런
질문을 반복하고 있으니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은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섭외하러 갔다.
잉글리아트는 류카라한과 크리퍼트를, 토일렛은 루시펠을 대동한 채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 정말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헌데,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이 때문에 제이슨과 루이나시언 모두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넌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해. 궁금해 미치겠어. 근데, 하루 온종일 묻고 있는 네가 더 짜증나.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 나도 답답해 미치겠으니까. "
"쳇. 소심하기는. "
루나시언이 발끈하며 대꾸하자 제이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좀
심하게 보챈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매정하게 나오다니. 괜히 민망한 마음에 땅바닥만 툭툭 찼다.
"근데, 루나시언. 그들이 우리."
"왔다. "
루나시언이 제이슨의 말을 끊고 전방을 가리켰다. 제이슨도 루나시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텔레포트 해올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이미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놨기에 가능한 텔레포트였다.
은은하게 나오던 빛이 사라지자 세 명의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토일렛과 루시펠,
거대한 덩치의 라이칸드로프. 이렇게 세 명이었다.
"왔군. "
"어서 오게, "
제이슨과 루나시언이 토일렛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토일렛 일행은 꽤 험난한 일을 겪었는지 몸 전체가 먼지 투성이였다. 특히,
루시펠은 팔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처음 만났을 때 좀 싸웠지. "
토일렛의 담담한 말에 제이슨과 루나시언이 루시펠과 라이칸드로프를 차례로
바라봤다.
부상당한 루시펠에 비해 라이칸드로프의 몸에서는 그 어떤 흉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몸 전체에 먼지를 뒤집어 쓴 건 같지만, 부상이 없다는 것. 그건 루시펠이
라이칸드로프에게 완벽하게 패했다는 의미와 같았다.
"반갑네. "
"크크, 반갑다. 인간들이여."
라이칸드로프 이리아나 케이플. 그의 음침한 목소리에 제이슨이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목소리만으로 어느 정도의 공포를 느꼈음이다.
"흠, 흠. 반갑군. 난 루나시언이라고 하네. 보아하니 검을 익힌 것 같군. 나도 검을
익힌 검사일세. "
"크크크, 검? 네가? 크크크크. 인간은 검을 들기만 하면 모두 익혔다고 하나?
가소롭군. "
케이플의 말에 루나시언이 발끈하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이에 토일렛이 루나시언의
어깨를 잡으며 눈으로 제지시켰다.
"왜? "
"싸우자고 모인 게 아닐세. "
"쳇. "
"하찮은 것들. "
라이칸드로프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눈 아래로 본다. 지금의 케이플도 그런 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라한이 프라하를 만난 게 큰 행운인 셈이다.
"어떻게 된 건가?"
"보시다시피. "
처음 케이플을 만났을 때, 토일렛과 루시펠은 곧장 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루시펠은작은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몸이 멀쩡했던 토일렛이 케이플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에 그도 수긍하며 합류한 것이다.
만약 케이플이 끝까지 싸웠다면 셋 모두 큰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셋
모두가 공멸했을지도.
2대 1의 싸움, 헌데도 대등하게 싸웠다는 건 그만큼 라이칸드로프가 강하다는 걸
의미한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잉글라아트 일행도 걱정스러웠다.
"잉글리아트는 무사할까?"
"아직 안 왔는가? 흠, 골치 아프군. 케이플은 베어울프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싸웠네. 그랬기 때문이 이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지. 헌데, 만약 그쪽
라이칸이 베어울프를 대동하고 싸운다면.힘들 걸세. "
토일렛의 말에 제이슨과 루시펠, 루나시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케이플을
만났던 토일렛 일행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잉글리아트쪽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칫, 잉글리아트를 이미 제압한 라이칸드로프가 베어울프를 대동하고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지?"
"전투준비. "
"큭, 크크크크. "
제이슨과 토일렛의 대화에 케이플이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무, 무슨 의미냐?"
"내가 라이칸이라는 걸 잊었나?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그의 실력에 비해
부족하지 않을 거다. 내가 너희들을 돕기로 한 이상 그놈은 너희들의 손끝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지. "
"그렇.군. "
케이플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자신의 약세를 드러낸 발언이
부끄러웠다. "하여간 연약한 인간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
"흠. "
케이플의 도발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냐며 안도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헌데, 막상 겪고 나자
라이칸드로프가 왜 물질계 2인자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왔다. "
잠깐의 침묵이 흐를 찰나에 빛이 서서히 터져 나왔다. 토일렛 일행이 나타날 때
보였던 그런 빛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잉글리아트와 크리퍼트, 류카라한,
라이칸드로프였다.
"괜찮은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당연히 괜찮지. "
토일렛의 물음에 잉글리아트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토일렛을 비롯한
기존에 있던 인원 모두가 잉글리아트 일행을 살펴봤다.
깨끗했다. 일행의 몸 어느 곳에서도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찾아볼
수 있기는 했다. 라이칸드로프의 몸에서 꽤 많은 혈흔이 보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뭐, 보시다시피 저 녀석이 베어울프를 대동한 채로 엄청난 공세를 퍼붓더군, "
"그래서?"
"다 처리하고 잡아온 거지. 지금은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일행이 되기로 했으니까
적대하지는 말라고. "
잉글리아트의 대답에 일행 모두가 놀란 빛을 띠었다. 특히, 기존에 도착했던
케이플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 경악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있던 케이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미스티크? 돈네리아 미스티크 맞나?"
"케이플. 이로군. "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한 팔백 년 됐나?"
"그 정도 됐겠군 "
둘의 대화에 굴레를 벗은 인간 일행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아서였다.
돈네리아 미스티크와 이리아나 케이플은 라이칸드로프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동시대에 나타나서 함께 다니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탓이다.
"근데 어쩌다가?"
"휴- ! "
길게 한숨을 쉰 미스티크가 류카라한을 바라봤다. 자신이 류카라한에게
제압당했다는 의미였다.
미스티크의 행동에 케이플도 류카라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놀랍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인간이 맞긴 맞나?'
인간을 하찮게 생각했던 걸 일부 수정해야 할 듯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류카라한이
자신보다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잉글리아트 일행이 미스티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베어울프를 대동해서
공격해왔다. 이때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류카라한이었다.
그는 베어울프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베어 넘기고 미스티크를 압박했다. 그리고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그를 제압해버렸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이용한 확실하고
완벽한 승리였다.
'대단했지. 라이칸 둘과 싸워도 쉽게 패하지는 않겠어. '
그때를 떠올린 잉글리아트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류카라한과 한 배를 탄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느꼈다. 너무 압도적인 실력과 강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것이다.
"뭐, 일단은 다 모였군. "
"며칠 쉬었다가 다 같이 갈 곳이 있다. "
류카라한의 말에 일행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류카라한이 가지는 실력 때문에
발언권이 강화된 탓이다.
"갈 곳이라니? 어디지?"
"엔샬라르 신전. "
"엔샬라르 신전? 들어본 적이 없는데. "
"없는 게 당연하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테니까. "
엔샬라르 신전은 지금 인정받는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믿는 신전이다. 일종의 미신
숭배 단체의 근거지인 셈이다.
하지만, 단순이 이교도라고 규정짓기에는그 힘이 너무 강했다. 숭배한 대상이
힘이었고, 그 힘을 얻는 방법으로 골렘을 택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골렘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단체가 엔샬라르 신전의 신도들이었다.
류카라한은 엔샬라르 신전을 대륙에서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혼자
힘으로 한 건 아니었다. 제국의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를 동원해서 공격했고, 한
번으로 안 되어서 두 번 세 번 계속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동원된 정예 반 이상 잃었으니 말이다.
피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엔샬라르 신전을 붕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만약
실패했다면 대륙은 피바람이 몰아쳤을 터였다.
"거기는 왜?"
"힘이 필요하니까. "
"흠, 지금우리가 힘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미 사라진 유적에 매달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아니, 그 정도로도 부족하다. 라이칸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약했고, 너희들도
약했다. 이 힘으로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어. 여기 있는 인원 모두가 덤벼도
로드인 로테마이어스 하나를 처리하지 못한다. "
류카라한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일행 모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워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드래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류카라한이었고, 자신들보다 더 강한 존재도 그였기 때문이다.
'건방진 자식. '
'두고 보자. '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욕설을 퍼부었다. 힘이 필요하기에
참고 있을 뿐. 후일, 일이 정리된다면 처리 대상 1순위는 류카라한이 될 터였다.
다음은 라이칸드로프들이 될 테고.
"오늘은 쉬고 내일 이동한다. 여기서 두 달은 가야 할 거리이니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거다. 아, 그리고 제이슨과 크리퍼트는 이곳에 남는 게 좋겠군. 이곳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 "
"이곳을 아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는데, 굳이 지킬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홀을 나가 버렸다. 더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류카라한이 나가자 남은 일행들이 팔을 부르르 떨었다. 류카라한의 힘도
문제였지만, 지금은 지휘권이 더 큰 문제였다.
라이칸드로프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던 류카라한. 이 때문에
어느 사이엔가 류카라한이 수장처럼 되어 있었다. 어떤 큰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의 지위는 확고할 듯했다.
라한 일행의 이동은 현재까지 순조로웠다. 사소한 몇 가지 일만 빼고.
라한 일행은 이동할 때, 돌아가면서 식사를 담당했다.
라한부터 시작해서 뒤늦게 합류한 파울과 해리언까지 모두 열두 명. 한 끼에 두
명씩 해서 평균 이틀에 한 번꼴로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 물론, 장난감이 되어있는
쿨샤크와 데메크도 포함한 수치였다.
"프리미아 너 밥 안 해?"
"내가 왜 해?"
문제는 프리미아였다. 조용히 식사준비를 하면 되련만, 그마저도 귀찮은지 하기
싫다고 버티기 일쑤였다. 뮬라 상단을 출발한 지벌써 4일. 지금까지 두 번이나 이런
실랑이를 벌인 것이다.
"제발 말 좀 들어라. 나도 식사 준비하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레테아하고 같이 하게 해 달라니까. "
인원이 열두 명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원하는 사람과 식사 당번이 되는 건 아니었다.
두 명의 이방인인 파울과 해리언, 장난감처럼 되어 버린 쿨샤크와 데메크 때문이다.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네 명의 골칫거리.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일행 중 쾌 강한 축에 들어가는 존재를 당번으로 함께 둬야 했다. 문제는 그 강한
축에 들어가는 일행에 프리미아가 포함된다는 거였다.
"말했잖아. 저 녀석들 관리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
"왜 하필 나야? 우리 일행에 인재가 그렇게 없어? 나 말고도 많잖아. "
프리미아를 제외하더라도 프라하, 투바, 카이렌, 로이나, 그리고 라한. 다섯 명
정도의 강자가 존재한다. 프리미아가 빠지더라도 관리 인원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수였다.
하지만, 카이렌은 휴란트의 검술 수련 때문에 서로가 항상 붙어 다녀야 했다.
시간이 부족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차별 대우를 한 것이다.
또, 로이나는 다크라이더 길드에서 전해오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식사 당번이 되는 건 그나마 한가한 아침뿐이었다.
이런 저런 제약 때문에 두 명은관리 임무에서 빠졌다 결국, 프리미아가 포함되지
않으면 네 명의 관리자가 맞춰지지 않는 셈이다.
"프리미아. 네가 형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고집 좀 그만 피우고 말 좀 들어라. 제발. "
"좋아. 좋다고. 레테아와 함께 당번이 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그 꼬마 정령은 왜 놀기만 하는 건데?"
"꼬마 정령? 테세르?"
프리미아가 테세르를 걸고 넘어졌다. 라한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젠장. 제대로 걸렸군. '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정령이 식사 당번하는 거 본 적 있어?"
-맞아. 내가 어떻게 식사 당번을 하냐?
라한의 말을 테세르가 맞받았다. 식사 당번이 되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프리미아는 조금도 굽힐 줄 몰랐다.
"그래. 일반적인 정령이라면 그렇겠지. 근데 난 식사하는 정령도 난생 처음 봤거든.
넌 먹잖아. 먹으면 식사 당번해야지 안 그래?"
-그건 음, 그거야.
테세르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대꾸할 말이
없었으리라.
라한이 걱정한 건 테세르의 식성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던
테세르였다. 헌데, 언젠가부터 자신이 먹는 음식을 탐내기 시작했다. 테세르의
특이한 행태에 라한이 음식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테세르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식사하고 배설했다. 음식을 섭취해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취미생활로 먹는 것이다.
"프리미아.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는데 테세르는 안 돼. "
"왜 안 돼? 먹으면 식사 준비도 해야 당연한 거잖아. "
"그건 맞는데, 이 녀석은 특이한 정령이잖아. 이 녀석이 저 이방인들 눈에
발견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그렇지만. 에 또, 그래도 싫어 저 녀석이 식사준비 안 하면 나도 안 해. "
프리미아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죽어도 요리는 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어휴, 요리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버티지?'
요리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가지고온 건포를 끓는 물에 넣고 함께 끓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헌데, 그마저도 싫다고 버티다니.
"좋아. 알았어. 넌 식사당번에서 제외시켜주지."
"정말? 정말이지? 나 식사 준비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래. 안해도돼. 뭐, 형한테 말하면 형이 대신할테니까 상관없어, "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결국, 프리미아가 빠진 자리를
레테아가 메운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자신의 귀찮음 때문에 레테아를 고생시키기는
싫었다.
"야! 너, 라한. "
"왜?"
"쳇. 사악한 인간 같으니라고. "
"내가 사악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니까. "
"젠장. 됐다. 됐어 그냥 내가한다. 해."
짜증스럽게 내뱉은 프리미아가 일행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포를 대충 꺼내
물로 씻기 시작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라한이 비릿하게 웃었다.
"쯧쯧. 저렇게 단순한 드래곤이라니. "
-주인아. 내가 보기엔 저 드래곤이 단순한 게 아니라 주인이 사악한 거야.
"시끄러. 망할 정령 같으니. 너 앞으로 먹지 마 "
-주, 주인. 식사는 내 정령 생활의 유일한 취미생활이라고. 그걸 못 하게 하는 건
날 두 번 죽이는 거야. 내가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주인도 잘 알잖아.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도 약간의 긍정을 표했다. 먹을 때 보이는 행복해하는 표정.
의도적으로 지으려고 해도 안 되는 얼굴이었다.
'젠장. 뭔 정령이 이 모양이야?'
"테세르. 너 먹지 않는다고 굶어 죽는 건 아니잖아. "
-주인아. 만약 주인이 인챈트나 마법을 못하게 되면 어떨까? 나한테는 먹는 게
그거하고 같다고.
"빌어먹을. 그래 배 터지도록 먹어라. "
테세르에게 짜증을 부렸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프리미아의 입에서 다시는 식사 당번에 대한불평이 나오지 않을 터.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최소한 같은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뮬라 상단을 떠난 지 5일 째.
라한 일행이 나메라 왕국의 남쪽 국경 지역에 도착했다. 기존에 있던 라한
일행이었다면 2-3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아진 일행과 체력이 약한 휴란트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정지!"
라한 일행이 다가가자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경비원이 일행을 막았다. 검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봐. 파울, 해리언.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왜 우리가 해야 하지?"
"너희가 있으면 통행하기 편할 거라면서? 샤르비엘 후작이 그렇게 말했으니 알아서
해야지. "
"그렇.군. "
어렵사리 대답한 파울이 앞으로 나섰다. 거구의 파울이 나서자 경비원들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어렸다. 적아를 떠나서 거구의 사내를 대면하는 그 자체가 부담을 주기
충분했다.
"뭐, 뭐냐?"
"이 정도면 신분 확인이 되나?"
당황한 경비원에게 파울이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나메라 왕국 왕실에서
직접 하사한 푸른색 반지였다.
나메라 왕국에서는 귀족에게 작위를 증명할 수 있는 반지를 하사한다. 이 때문에
나메라 왕국의 귀족은 모두 반지를 하나씩 착용하고 있다.
공작은 검은색 반지를, 후작은 흰색 반지를, 백작은 푸른색 반지를, 자작과 남작은
각각 붉은색 반지와 초록색 반지를 착용한다.
그리고 귀족이되 작위가 없는 귀족과 그 가족들은 회색 반지를 착용한다.
물론, 이 모든 반지에는 나메라 왕국만의 고유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다른 일반적인
예물용 반지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파울은 작위가 없다. 하지만, 마법사라는 점과 실력을 감안해서 푸른색 반지를
하사받았다. 경비원에게 내민 반지 자체가 백작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백작님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
"수고해. "
짧게 대꾸한 파울이 고개를 돌려 라한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잘했지라고 자랑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파울의 시선을 받은 라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싸구려로 별 걸 다하네. "
"싸, 싸구려?"
"마법 재료 아니잖아. 그럼 싸구려지. "
라한이 귀한 재료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인챈트가 되느냐 안되느냐, 라한은
그 한가지만 따졌다.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강하면 강할수록 비싼 재료가 되는
것이다.
경비원을 지나친 라한 일행이 국경을 통과했다. 약 30분쯤 계속 걸어가자 또 다른
국경이 나왔다. 수아나 왕국의 국경이었다.
수아나 왕국과 나메라 왕국이 전통적으로 우방국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정치적 교류는 자유롭게 하는 편이었다. 수아나 왕국의 개방 정책의
성과였다.
대륙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인 수아나 왕국. 개방 정책 하나만으로도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라한이 수아나 왕국의 국경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일행을 제지시켰다.
"정지 ! 멈춰라. "
"파울, 해리언. 알아서 하겠지?"
"흠. "
짧게 신음을 흘린 파울이 다시 나섰다. 역시나 거구의 사내라서 그런지 경비원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안녕하신가?"
"용.건이 뭔지 밝혀라. "
"수아나 왕국의 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여행을 하는 중이었네. 아, 우린 나메라
왕국의 귀족일세. 여기. "
이번에도 파울은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자국 사람이
아니었기에 말투도 반쯤은 존대가 섞여 있었다.
파울의 행동에 경비병이 반지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빼려는 시늉을 했다.
"어?"
"으차! "
쑤욱!
결국 경비병이 파울의 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반지를 몇 번 쳐다 본 경비병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고맙소. 통과!"
"이, 이거 뭐지?"
경비병은 반지를 뇌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빼서 가졌던 것이다.
"당신들 일행은 통과됐소. 빨리 가시오. "
"잠시만. 자네 뭐하는 건가?"
"뭐가 말이오?"
"왜 내 반지를 가져가는 겐가?"
파울의 대꾸에 경비병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뇌물
받은 걸 들킬까 염려하는 듯했다
"이 반지는 내게 준 것 아니오?"
경비병이 낮은 목소리가 더 작게 변했다.
"무, 무슨 소린가? 이 반지가 어떤 반지인지 알고 그러는 겐가? 그건 나메라 왕국의
귀족임을 증명하는 반지일세. "
"아! "
그제야 경비병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경비병도 나메라 왕국의 귀족들이 특이한 반지를 착용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반지를 직접 내밀어서 신분을 증명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너무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수행하는 기사들이나 시종을 통해 신분을 증명한다. 필요하다면
귀족이라는 증서를 가지고 다니는 것 역시 수행인이 할 역할이었다.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귀족을 만났지만, 그 사람들 모두 수행인을 통해 신분을 증명했다.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쩌지?'
'이 무슨 창피냐?'
경비병과 파울 모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경비병은 귀족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겁에 질린 상태였다. 반면, 파울은 뒤에 있는 라한 일행
보기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어쩌죠?"
"반지나 돌려주게. "
경비병의 낮은 물음에 파울 역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둘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 저는."
"들어가도 되겠지7"
"예. 통과입니다. "
"오늘 일은 잊게. "
말을 마친 파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상태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경을 통과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 참 재미있군. "
파울의 뒤를 따라가던 라한이 작게 독백했다.
-난 주인이 더 재미있어.
테세르의 말이었다.
테세르는 '만약 라한이 파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를 생각했었다.
결론은 '당당하다' 였다.
뇌물을 주든지 폭력을 행사하든지 라한은 언제는 당당했다. 일단 자신이 했던
일이라면 후회하지 않는 성격. 설사 그게 실수라 하더라도 반성은 할지언정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 라한은 그런 성격이었다.
라한 일행이 수아나 왕국 국경 마을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들. 로이나와 프리미아의 외모가 불러온 일이었다.
"귀찮아. "
"흥.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는 놈.
프리미아가 라한의 말에 딴죽을 걸어왔다. 헌데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 탓이다.
라한의 조각 실력이나 미술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미적 감각은
형편없었다. 아무려면 이필리에 종합학교에 서도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렸겠는가? 라한도 자신의 미적 감각이 형편없음을 인정하기에 대꾸를 하지
않았음이다.
"저기 앉지. "
카이렌도 은신을 풀고 라한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친근하게 라한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오늘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지?"
"야, 카이렌. 네가 이런 짓 하는 게 불을 지피는 거라는 거 알지?"
"물론. "
카이렌은 분명 엘프 남성이었다. 하지만, 외모만큼은 여느 여자 못지않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라한에게 귓속말을 하는 그 자체가 홀에 앉은 많은
남성들의 질투를 유발시켰다.
'예전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
예전의 카이렌은 자신의 외모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로 오해하는
그 자에 피아구분을 가리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다.
그런 카이렌이 변했다. 투바와만난 이후부터였다. 투바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요즘은 자신의 외모를 은근히 이용하기까지 했다.
'이런 식의 변화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
라한은 카이렌과 투바의 성격이 반 정도씩 섞이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여자를
밝히는 투바의 성격이 고쳐질 거라 믿었다. 또, 카이렌의 콤플렉스도 어느 정도는
치유될 거라 믿었고.
헌데, 뭔가 변화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 카이렌만 변하고 투바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 카이렌이 투바를 너무 많이 닮아가고 있었다. 아직 여자를 밝히지는
않지만, 외모를 이용하는 정도까지 이른 것이다. 이 상태라면 투바처럼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저희 여관에는."
"식사가 될 만한 걸로 아무거나. 12인분. "
점원 꼬마가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자 라한이 말을 끊어 버렸다. 로이나와
프리미아, 카이렌을 향한 끈적끈적한 시선이 짜증스러워서였다.
이제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점원도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이곳에 묵을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질투를 받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라한. 그래도 오늘은 조용하네. "
"조용한 게 아니라 조심하는 지겠지. 그래도 인원이 열두 명이라서 쉽사리 덤비기
힘들 테니까. "
로이나의 말을 라한이 담담하게 받았다. 여관에 들를 때마다 겪어온 상황이라서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뭐, 거의 대부분 프라하나 파울, 해리언이 나서서 처리하니
신경 쓸 일이 없기는 했다.
대략 30분이 지났을 때, 예의 그 점원이 식사를 들고 나왔다. 열두 명의 식사라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해서야 겨우 식사를 다 차릴 수 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
점원의 말을 뒤로 하며 라한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라한의 나머지 일행 모두가
수저를 든 후에야 쿨샤크와 데메크가 수저를 들었다. 영락없는 노예의 모습
그대로였다.
식사를 대충 마친 라한 일행이 여관 2층으로 올라갔다. 객방이 2층과 3층에 모두
모여 있어서였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네. "
"저 파울 녀석 덕이지. "
"응? "
"저 녀석 덩치가 좀 되잖아 덩치 덕 좀 보는 거지. "
"그런가?"
파울의 덩치는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컸다. 제아무리 간 큰 인간이라도 저런
덩치가 포함된 열두 명의 파티는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라한이 파울과 해리언을
일행에 받아들이고 본 유일한 혜택인 셈이다.
"아침에 몇 명이나 기절해 있을까?"
"그래도 오늘은 조용하게 끝났으니 열 명 미만이지 않을까?"
라한 일행이 여관에 묵으면, 아침에 십여 명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밤사이에
프리미아, 로이나, 카이렌을 덮쳤던 사내들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 죽지는 않았다.
다만,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아서 병원 신세를 꽤 오래져야 할 뿐이다.
"내기 할까? 난 열 명 이상 걸지. "
"좋아. 난 열 명 미만. "
프라하와 투바가 내기를 시작했다. 프라하는 열 명 이상이었고, 투바는 열 명
미만이었다.
"좋아, 내기 성립. 내일보자고."
"크크.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
프라하와 투바가 서로 도박의 결과를 예상해보며 객방에서 잠을 청했다.
투바의 희한한 결심
다음날,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볼까?
후후후, 확인해보자고.
먼저 프라하가 객방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투바가 느긋하게 뒤 따랐다.
투바는 이번 내기에서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평소에도 기절해 있던 사람
수는 겨우 열 명에서 열두 명 사이였다. 헌데, 어제는 정말 조용하게 취침했으니 열
명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이봐! 투바! 내가 이겼다고.
먼저 나갔던 프라하의 말에 투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어제 그렇게 조용했는데 어떻게 평소보다 더 많을 수가 있지. "
밖으로 나온 투바도 홀에 쓰러진 사람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말처럼
정확히 열네 명이었다. 어이없는 마음에 프라하만 멍하게 쳐다봤다.
"내가 이겼지? 오늘 저녁식사 당번은 투바 네 담당이야. 푸하하하. "
"어떻게 더 많을 수가 있지?"
"히히히, 오늘 점심, 저녁식사 당번을 모두 투바 네가 해야겠군. "
"어떻게 더 많을 수가 있냐고. "
투바는 어떻게 더 많으냐는 물음만 연신 해댔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투바의 멍한 표정에 프라하가 설명을 해왔다.
"어제 홀에 있던 사람이 다른 여관보다 적었나? 그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우리가
들렀던 여관의 손님 수하고 거의 비슷했다고. 근데, 어제는 너무 조용하게 끝났지.
"
"그래서?"
"그들은 밤에 덮치려고 참았던 거야. 어제 파울 녀석의 표정이 좀 가관이었거든.
경비병하고 있었던 실랑이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겠지. "
"그.렇군. "
그제야 투바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들을 본 사람들의 수가 줄지 않았으니 시비를 거는 사람도 거의 비슷해야
정상이다. 평소에는 홀에서 한, 두 팀이 시비를 걸고 나머지는 밤에 덮치는
상황이었다. 헌데, 어제는 홀에서 아무런 시비가 없었으니 결국, 밤에 덮칠 사람이
많아진다는 얘기와 다름 아니었다.
"젠장. "
"바보, 투바. 넌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하는 놈이 내기만 하면 프라하한테 지냐?"
뒤늦게 내려오던 라한이 투바를 비웃었다. 항상 프라하를 가지고 놀던 투바. 헌데
내기에서만큼은 프라하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라한이 보기에는 그런 투바가
한심했던 모양이다
"쳇. "
"투바. 그건 네가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
"."
라한의 말에 투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일견 타당한 말이라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 프라하를 가지고 놀았던 건 모두 마계 바하라 성에서 하인들을 가지고 놀 때
써먹던 방법이었다. 대체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응하게 하는 그런 방식이라서
지금까지는 프라하에게 잘 먹혔다.
하지만 내기는 다르다. 그땐 프라하도 부족하나마 머리를 짜내게 된다. 그 부족한
머리를 짜낼 때, 프라하는 그간에 있었던 수많은 경험을 무의식중에 사용했다.
투바와 비교도 안될 만큼 경험이 많기에 프라하가 승리하는 공식이었다.
"라한. 경험은 어떻게 해야 쌓이지?"
"경험이라. 나도 경험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냥 내
생각으로는 시배를 가려내는 일에 많이 휘말리는 게 우선 아닐까? 그때마다 대화,
혹은 무력으로 해결하게 될 테고,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그게 다 경험이 되고
노련함이 될 것 같은데. "
"시비라."
투바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며 라한이
프라하에게 말했다.
"프라하, 넌 그 녀석들 좀 깨워라. "
그 녀석들이란 라한 일행의 장난감이 된 쿨샤크와 데메크, 불청객으로 찾아온
파울과 해리언을 이르는 말이다.
"알았어. "
프라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바와의 내기에서 이긴 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투바, 넌 식당가서 아침 준비 좀 부탁해줘. 간이 식량도 충분히 준비해달라고
하고. "
"알았다. "
투바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라한의 말에 가슴에
남아서였다.
"나머지 일행은 내가 깨울게. "
라한이 다시 객실로 올라갔다. 모두가 깨어나면 또 다시 분주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프리미아와 라한의 신경전도 계속 이어질테고.
한이 객실로 올라가자 투바가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성으로 라한이 부탁했던
걸 말해주면서 생각에 잠겼다.
'경험이라 그래, 누가 뭐래도 난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마족이었지. 그렇다고
그냥 넋 놓고 경험이 쌓이길 기다릴 수는 없는데. '
투바는 누군가에게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특히, 맞먹는 것조차 화가 나는
프라하에게는 더 더욱 그랬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마계 서열 제2위가 아니던가.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그 자체도
약간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헌데, 그런 이들에게 진다? 자존심이 무너지다
못해 짓밟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경험? 그래. 경험 그까짓 것 뭐 대충 시비 막 걸어서 많이 싸우면 되는 거 아냐?'
투바가 묘한 결심을 했다. 경험을 쌓는 방식으로 시비 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분명 라한이 말한 시비는 이런 방식으로 걸라는 말이 아니었다. 헌데, 투바는 이
정도밖에 생각이 닿지 않았다.
원래 시비를 잘 걸었던 프리미아에 이어 투바까지. 왠지 라한 일행의 행보가 상당히
시끄러워질 듯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라한 일행. 대충 몸을 추스른 탓인지 몸 상태가 좋아보였다.
어차피 체력적으로 한계를 드러낸 사람은 휴란트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마법사인
파울이 수시로 회복시켜줬기에 체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만, 강행군에 심적인
피로가 쌓였을 뿐이다.
'시작해볼까?'
음흉한 미소를 지은 투바가 라한에게 다가갔다.
그는 경험 쌓기 작전을 라한에게서 시작할 생각이었다. 일행 중 처세술에 가장 능한
존재가 라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항상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라한. 그와의 꾸준한 대결구도로 라한만큼 성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라한. 대체 옷 꼴이 그게 뭐야?"
"신경 꺼. "
"어떻게 신경 안 쓸 수가 있어? 그래도 네가 우리 일행의 리더나 마찬가지잖아.
근데 리더 옷 꼬락서니가 그게 뭐야? 리더면 리더답게 품위를.
"옷이 밥 먹여 주냐? 너나 잘 해. "
"옷이 밥 먹여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끄럽다고 했다. "
라한이 강압적으로 치고 나오자 투바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낀 탓이다.
'젠장. 역시 너무 강적이다. '
경험 쌓기 작전의 첫 시작이 너무 허무하게 마무리 되었다. 라한으로 첫 시작을
하기에는 무리였던 듯했다.
'뭐, 그럼 다른 상대로 해야지. '
생각을 마친 투바가 프리미아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 라한에게 만큼은 철저하게
당해왔던 프리미아. 그녀라면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이봐. 프리미아 아, 프리시아 엘퐁소라고 불러야겠군. "
"무슨 일이냐? 건방진 마. 흠. "
마족이라고 말 하려던 프리미아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음을 인지한 것이다.
프리미아, 로이나, 투바, 프라하. 이 네 명의 신분은 쿨샤크, 데메크, 파울,
해리언에게 비밀이었다. 카이렌과 라한 식구들만 정확한 정체가 알려진 셈이다.
"건방진 뭐?"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기보다는 그냥 심심해서 말이야. 너 요즘 퍽 하면 라한한테 시비
건다면서?"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
프리미아가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마족인 투바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찝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투바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프리미아를 말로
눌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에는 다시 라한에게 도전할 생각이었고.
'이 정도에서 무너지면 안 돼. 내가누구야? 마계 서열 2위 아냐? 겨우 드래곤
따위에게 무너진다면 종족을 갈아야지. 암. '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은 투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한한테 시비 걸어서 뭘 건졌는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
"쯧쯧, 넌 그래서 안 돼. 라한한테 덤비는 건 너한테 무리라니까. 왜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덤비고 난리야?"
투바의 빈정대는 말투에 프리미아가 눈을 부라렸다. 아무런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건만 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좋아, 분위기 탔어. '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리에서 공격이라도 할 생각이야?"
"이, 이."
"멍청하기는. 레테아하고 결혼 약속 했지? 결혼 약속 했으면 신부 수업이나 좀 더
하지 그래? 괜히 라한 붙들고 장난치지 말고. "
투바의 말이 점점 심해졌다. 본격적으로 프리미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이 미천한."
"프리시아, 무슨 일이오?"
프리미아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레테아가 끼어들었다. 좀 멀리 떨어져서도
프리미아를 계속 지켜봤던 모양이다.
"아, 아니에요. "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무슨 일이오?"
레테아가 프리미아에게 말을 놓았다. 라한 일행에 불청객이 참가해 있었기에
프리시아 엘퐁소로 대한 것이다.
이런 레테아의 말투와 호칭 때문에 둘 사이도 꽤나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드래곤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듯했다.
"투바가 저한테 신부 수업이나 하래요. "
"허허, 겨우 그런 일이었소? 투바님. "
"왜?"
"프리시아의 신분이 뭔지 잊었습니까? 굳이 신부 수업을 할 필요는 없지요. "
레테아가 프리미아의 편을 들며 투바에게 반박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아주
당연한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말이기에 오히려 투바가 할 말이 없었다.
설사 드래곤의 입장이라 하더라고 신부 수업은 별 필요가 없다. 그 막강한 힘으로
요리사 몇 명만 납치하면 되니 말이다.
또, 프리시아 엘퐁소라는 신분도 신부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자작이 된
레테아 필슨. 자작부인이 손에 물 묻힐 일이 있겠는가. 이래저래 프리미아가 신부
수업을 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쳇, 이제 2대 1로 공격하겠다 이거야? 두고 보자. "
결국 투바가 패배를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투바가 사라지자 프리미아가 레테아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투바를 사라지게 만든 레테아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사실, 투바는 2대 1이라는 것보다 레테아의 존재가 더 껄끄러웠다. 라한이 다른
면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형에게만큼은 극진했기 때문이다. 자칫,
레테아의 심기를 어지럽게 했다가는 라한이 가만히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라한을 무서워하게 됐는지. 에고, 내 신세야. '
투바가 라한을 무서워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라한을 보기만 해도 오금을 저리는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라한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사소한 일에서는 서로 장난도 잘 치는 좋은 친구사이였다. 그건 투바뿐
아니라 프라하, 카이렌을 비롯한 기존의 라한 일행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일행 모두에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아무도 라한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일행들은 문득 '이런 게 카리스마라는 거구나. ' 라고 느꼈다.

류카라한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엔샬라르 신전을 찾아 떠났다. 본진에 남은


굴레를 벗은 존재는 제이슨과 크리퍼트뿐이었다.
"아, 심심해. "
"그래도 심심한 게 귀찮은 것보다 좋지 않은가?"
"난 차라리 귀찮은 게 나아. 빌어먹을 류카라한. "
제이슨의 눈에 분노의 감정이 번뜩였다. 엔샬라르 신전을 찾는 여정에 참가하지
못한 게 화났던 모양이다.
"근데, 이상하군. 왜 정령사인 자네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망할. "
사라진 어떤 지역을 찾는 데 가장 적합한 직업은 정령사였다. 그 다음으로 마법사,
검사순서일 터. 헌데, 굴레를 벗은 존재들 중에 상급정령사는 제이슨뿐이었다.
결국, 엔샬라르 신전을 찾는데 꼭 필요한 존재가 제이슨인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류카라한은 제이슨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제이슨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자네 류카라한에게 밉보인 거라도 있는가?"
"밉보인 거? 물론 있지. "
"뭔가?"
"이놈의 입이 문제지. "
"입? 아하. 수다 말이군. "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대체로 과묵한 편이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류카라한의 과묵함은 정도가 심했다. 반대로
제이슨은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와는 달리 수다쟁이에 가까웠다.
"내가 내 입 가지고 말 하는데 왜 지가 난리야?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허허허, 자네도참. 이번 기회에 수다떠는 버릇을 고쳐보는 게 어떤가?"
"말 하라고 있는 입으로 말도 못하면 그게 사는 건가? 난 자네들의 그 무거운 입이
더 답답하네. "
"그런가? 하하하. "
크리퍼트가 웃음으로 대답을 받았다.
제이슨이 좀 시끄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제이슨의
수다를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어쩌면 로테라 숲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제이슨의 수다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지금 제이슨의 수다는
무료한생활의 청량음료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으, 으.답답해서 못 살겠군. "
"그렇게 답답하면 바람이나 좀 쐬고 오는 게 어떤가? 아, 자네 후손이라는
레드리안이나 좀 보고 오는 게 어떤가? 다른 동료들이 돌아오려면 못해도 두 달은
걸릴 걸세. 빨리 갔다 오면 충분한 시간일 거야. "
"그럴.까?"
찌푸려졌던 제이슨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후손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즐거운
듯했다.
"여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갔다 오게. 두 달 안에는 꼭 돌아와야 하네. "
"걱정 말게. 금방 갔다 오겠네. 올 때 자네 선물은 꼭 챙겨오지."
"여행 자금은 있어야겠지? 자, 받게. "
철렁! 착!
"하하하. 역시 자네뿐이구먼. 그럼 나중에 보세. "
제이슨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제이슨이 나가자 크리퍼트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제이슨의 후손은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생존해 있기는 했다. 거기다 그 후손도
쾌나 큰 상단을 꾸려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헌데, 자기 후손은 이미 2백 년 전에 멸문해 버렸다. 세상 천지에 자신의 혈육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괜스레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에 서글퍼졌다.
한편, 레드리안을 찾아 나선 제이슨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행 준비는 필요 없겠고. 일단 가자고. "
현재 그들의 본거지는 대륙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베센 왕국. 헌데, 레드리안이
있는 곳은 대륙의 북부 끝 왕국인 나메라 왕국이다. 북쪽으로 이동해서 루이나
왕국과 케라스 왕국을 거쳐 수아나 왕국을 지나면 나오는 곳이다.
"서둘러야겠군. "
수아나 왕국의 국경을 출발한 지 15일.
라한 일행이 멜카투라 산의 기슭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라한 일행은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수시로 투바와 프리 미아가 말싸움을 한 탓이다.
그 덕에 라한은 귀찮은 일 없이 조용히 이동할 수 있었다. 라한에게 만큼은 다행한
일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첨예한 설전과
대립. 그리고 불꽃 튀는 심리전. 이 때문에 라한과 프리미아의 언쟁보다 더 길고
시끄러웠다. 프리미아를 한방에 잠재울 능력이 투바에게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프리미아에게 도 투바를 한 방에 잠재울 능력이 없었다.
"쯧쯧, 공부 좀 더하라고. "
프리미아를 약 올린 투바가 자리를 떴다 이번 언쟁에서는 투바가 승리한 것이다.
'지금까지 2승 41패인가? 뭐, 이제 시작이지. '
투바가 프리미아와 말싸움을 시작한 지 이제 9일이 지났다. 헌데, 말싸움을 한
횟수는 이미 40회를 넘어섰다. 하루에 네, 다섯 번의 말싸움을 한 셈이다.
그렇게 싸운 결과가 겨우 2승 하지만, 39패를 할 때까지 단 1승도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거였다.
'2대 1만 아니면 훨씬 많이 이겼을 텐데. '
프리미아 곁에는 항상 레테아가 있었다. 잠시 안보이다가도 설전이 조금 치열해지면
은근슬쩍 나타나서 프리미아 편을 들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거의
프리미아와 레테아의 압승이었다.
헌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투바가 레테아와 프리미아의 패턴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일단 패턴을 읽자 상대의 약점과 자신의 장점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라한 말을 빌리자면 경험을 얻은 것이다.
"잠시만! 라한. 더 갈 거야? 여기가 멜카투라산 바로 아래인데. "
"음, 오늘은 여기서 쉬자. 산에는 밤에 혼자 갔다 올게. "
"혼자?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로이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라한을 만류하고 나왔다. 아무리 라한이 강해져도
로이나에게는 항상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듯했다.
"로이나도 참. 내가 몬스터 따위에게 당할 정도로 약해 보여?"
"그건 아니지만 굳이 위험을 사서할 필요는 없잖아. "
"이해해줘. 이곳은 나와 칼라피안의 추억이 시작된 곳이야. 나 혼자 간직하고 싶어.
"
"휴, 그래 그럼 조심해. "
멜카투라 산은 칼라피안이 큰 부상을 입은 장소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칼라피안이라는 마음의 스승을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이곳만큼은 다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면 했다.
-주인. 나도 가면 안 돼?
"넌 괜찮아. "
테세르도 칼라피안과의 추억에 포함되는 존재였다. 항상 칼라피안의 옷자락을 들고
이리저리 옮겼던 테세르. 그때마다 똑바로 들어달라고 호통 치던 칼라피안. 그때를
생각하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라한. "
"아, 그래. 모두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다. 시간이 이르니까 각자 자기 시간을
갖도록 하자. "
라한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좀 이른 야영 결정에 몇 명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라한의 목적지를 몰랐던 불청객들과 장난감들이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 말없이 받아들였기에 직접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일행이 멈추자 카이렌이 휴란트를 데리고 산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검술
수련을 위해서였다.
카이렌은 일행이 휴식을 취할 때마다 휴란트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지면
보통 두, 세 시간은 지나야 다시 나타났다.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휴란트와
즐거운 표정을 지은 카이렌. 휴란트와의 수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휴란트. "
"예, 선생님. "
적당한 곳까지 들어온 카이렌이 휴란트를 불렀다.
"이제 체력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정말요?"
휴란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벌써 자신의 체력이 갖춰졌다 게 믿어지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휴란트의 체력은 예전과 비교해서 몰라보게 나아졌다. 이젠 여느 기사
지망생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성 싶었다. 휴란트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카이렌의 열성적 인 지도 덕이었다.
물론, 훈련 후에 파울이 해주는 회복 마법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게 없었다면
훈련을 제대로 받더라도 이동할 수 없었을 터였다.
"후후, 녀석. 오늘부터는 체력이 아닌 눈과 관절수련을 할 생각이다. "
"눈하고 관절도 수련해요? 그런 수련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
"나만의 방식이니 의아해할 필요 없다. "
"예, 선생님. "
카이렌의 말에 휴란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현재 휴란트에게 카이렌은 검술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체력 훈련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처세술과 경험도 함께 전수받은 탓이다. 라한에게 칼라피안이 정신적인
지주이듯, 휴란트에게 카이렌도 마찬가지의 위치였다.
"눈을 수련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음, 눈을 수련하면 상대방이 휘두르는 검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는지 볼 수 있다면 대처하기도 쉬워질 것 같아요.
"
"반만 맞았다. 하지만 눈 수련은 상대방만 보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휘두르는 검의
궤도와 속도, 기세까지 함께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 내면의 상태와
상대방의 내면까지도 함께 봐야 하지. 그게 내가 가르치려는 눈 수련이다. "
"예, 선생님. "
휴란트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카이렌과의 수련에 빠져들었을 때 항상 짓는
눈빛이었다.
카이렌이 휴란트에게 검을 가르친 지 이틀 째 되었을 때, 검을 잡을 때의
마음가짐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휴란트는 그 마음가짐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추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재차 설명하고 이해시키자 휴란트도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휴란트가 수련을 할 때는 저런 눈빛을 보였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는 뜻이다.
몸에 대한 수련 이전에 마음가짐부터 가르친 카이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선생이 되고 있었다.
"관절 수련은 어떤 각도의 공격도 막거나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너 역시
어떤 각도로든 공격할 수 있게 해줄 게다. "
"팔, 다리 관절만 수련하는 겁니까?"
"아니다. 팔, 다리는 물론이고 목과 허리, 손가락마디까지.몸에 있는 모든 관절을
수련한다. "
카이렌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휴란트의 눈빛도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제 보였던
눈빛과는 또 다른 눈빛이었다.
'녀석. 마음을 열었구나. 고맙다. '
카이렌은 휴란트의 눈빛 변화를 내면세계의 발전으로 판단했다. 저런 발전은 곧
정신력 강화로 다가올 터. 그 정신력을 바탕으로 수련을 한다면, 육체 수련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눈에 대한 수련을 하기 전에 기초 수련을 하도록 하자. 앞으로 그 어떤 수련을
하더라도 그 이전에는 기초 수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선생님. "
"시작해라. "
카이렌의 명령이 떨어지자 휴란트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가로베기, 세로베기,
대각선 베기를 위아래, 좌우로 행하는 여덟 가지 동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각 백 번씩 마친 후에야 검을 멈추었다.
"수고했다. 5분간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하도록 하겠다. "
"예. 선생님. "
휴란트가 바닥에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카이렌에게 배운 명상을
통한 휴식이었다.
예전에 휴란트는 명상을 하는 5분 동안 자신의 또 다른 영혼 레비안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헌데, 수련만 시작하면 아무리 불러도 대꾸가 없었다.
그 상황에 대해 수련이 끝난 후 서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헌데, 레비안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련이 시작되면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곳으로
떨어진다고. 그곳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 후부터는 수련 때 레비안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련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타날 테니 말이다.
카이렌과 휴란트가 검술 수련을 위해 떠났을 때, 라한은 자그마한 패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다.
"라한. 뭐하는 거야?"
"아, 이거 좀 보고 있었어. "
라한이 패를 들어 로이나에게 보여줬다. 다크라이더의 길드장인 다크시안에게
받았던 그 동패였다.
"그건 왜?"
"좀 이상해서. "
"뭐가?"
"이거 동패가 아닌 것 같아. 재료가 구리처럼 보였는데, 아니더라고. "
"그래?"
"응. 이 패에 1서클 마법인 라이트가 인챈트 되어 있거든, "
라한의 설명에도 로이나의 얼굴에서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다크시안이 준 패에
라이트가 인챈트 되어 있는 건 로이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헌데, 새삼스럽게
아는 얘기를 왜 꺼내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전에도 말했잖아. "
"그랬지. 근데,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구리가 아니면 그냥 녹슨 쇠겠지. "
"한 번 봐. "
라한이 들고 있던 동패를 로이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동패를 한참 살피던 로이나가 의문을 표했다. 자신도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는
듯했다.
"모르겠지?"
"응, 미스릴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색깔이 너무 짙어. "
"미스릴 정도가 아니야. "
말을 하던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검으로 패를 힘껏 내려쳤다.
카카캉!
패는 세라 소드와 쾌 강하게 부딪혔음에도 아무런 흠집이 나지 않았다.
세라 소드의 재료는 미스릴. 그것도 칼라피안이 직접 담금질한 명검 중에 명검이다
헌데, 세라 소드로도 아주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설사 드래곤 본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닐 듯 했다.
"어때?"
"놀랍군. 거의 드래곤 본 수준이잖아. "
"응. 어쩌면 드래곤 본보다 더 단단할 수도 있지. "
"그럴지도 모르겠다. "
로이나도 패의 단단한 정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인챈트나 할까 싶었거든, 마침 카이렌이 휴란트에게
마법 무구 하나 만들어주라고 하기에 그거나 만들까했지, 근데, 아무리 긁어도
흠집이 안 나더라고."
휴란트의 체력이 많이 향상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카이렌이 원하는 수준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라한에게 마법 무구를 부탁한 건 이 때문이다. 단시간
내에 올릴 수 없는 체력을 편법을 이용해서 올려주려는 카이렌의 배려였다.
"라한. 근데, 이 금속이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건 확실해?"
"응. 그것도 아주 강해. 미스릴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야."
현 대륙에서 물질의 마나 흡수 정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라한뿐이다. 설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마나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뿐. 그 물체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지는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마계, 환계, 정령계를
통틀어서 라한만이 그런 성질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드래곤 본하고 비교하면 어때?"
"글쎄. 드래곤본을 본 적은 있는데, 마나흡수율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확인을
못해봤어. "
"잠시만. "
로이나가 주변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람 중에서는 이곳을 보는 이가 없었다.
"금방 갔다 올게. 텔레포트! "
로이나가 라한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라진 듯했다.
로이나가 사라지자 라한은 정체불명의 다. 역시나 처음 보는 금속이 분명했다.
금속에 대한 정보는 찾아낼 수 없었다.
'대체 뭐지?'
아무런 특징 없이 처음 보는 금속에 불과했다면 라한도 이렇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헌데, 이 정체불명의 금속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미스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흡수력 이었다.
'젠장, '
이 금속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기 전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룰 듯 했다. 라한 역시
드래곤만큼이나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스팟!
라한이 금속을 한참 살펴보고 있을 때, 로이나가 돌아왔다. 예의 그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인식한 탓인지 마나의 공명이 상당히 낮았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레어에 잠깐 갔다 왔어. 이것 좀. "
로이나가 상자 하나와 책 네 권을 내밀었다.
물품을 건네받은 라한이 로이나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설명을 해달라는
표시였다.
"먼저 이 책은 대륙에 있는 모든 금속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어. 그리고 이건
식물에 대한 게 적혀 있고, 이건 돌, 이건 대륙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뼈에 대한
게 적혀 있을 거야. "
"오호, 이런 책도 있었나?"
"라한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벌써 이천 년 전에 쓰인 책이거든. "
"좋은데. "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정체불명의 물체에 대한 의문도 지금 순간만큼은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다.
"그리고 이 상자에는 드래곤 본이 들어 있어. 물질계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라서
아주 조금만 담았어. 보고 돌려줘야 해. "
라한은 드래곤 본이 물질계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걸 처음 들었다. 알았다면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그 많은 드래곤 본을 그냥 두고 오지는 않았을 거였다.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것. 그건 곧 귀한 물건이라는 의미가 될 테니.
"드래곤 본은 인간들이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야. "
"그거야 그렇겠지. 근데 겨우 그 정도로 물질계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물론, 아주 작은 양이 풀리는 건 큰상관이 없어 지금도 대륙곳곳에는 드래곤
본으로 만든 마법 무구가 몇 가지는 존재하니까.
하지만, 드래곤 본으로 만든 물건이 많아지면 위험해져. "
말을 하던 로이나가 주변을 훑었다.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사일런스 에어리어(Silent A,ea) !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이곳에서 하는
얘기가 막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라한. 이 마법은 라한이 사용할 걸로 해줘. "
"그러지 뭐.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 해봐. "
로이나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그녀를 하급 용병 정도로 생각했다. 라한이 그렇게
소개를 했고, 로이나도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에 사용한건 분명 마법이었다. 하급용병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라한이
한 걸로 해두자고 한 것이다
"사실 이 얘기는 우리 드래곤들의 치부를 설명해야 하는 거라서. 뭐, 그래도 기왕
꺼낸 얘기니까 마무리해야겠지. 한4천 년 쯤 됐나? 그때 상당히 많은 드래곤들이
목숨을 잃었어. 소위 말하는 드래곤 슬레이어들 때문이지. 소수가 덤빈 거라면 그
정도로 속수 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헌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드래곤
본으로 된 무기를 들고 공격하니 대책이 없더라고. 방어구도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거라서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었고. 또, 그때는 고위 마법사도 꽤 많을 때라서
인간들의 힘이 상당히 강했어. "
"음, 드래곤 슬레이어 얘기를 듣긴 들었지 근데, 모두 거짓말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사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한다는 건 우리 드래곤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그래서 대륙에 떠돌고 있는 많은 역사를 고쳤지. 드래곤 슬레이어의
존재도 이야기 속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왜곡시켰고. "
"요지가 뭔지는 알겠어. 드래곤 본이나 스케일로 만든 물건이 널리 퍼지면,
드래곤들의 안위를 위협받는다는 거잖아 "
"맞아. 그래서 당시 로드께서 드래곤 본이나 스케일을 대륙으로 푸는 걸
금지하셨어. 그리고 대륙에 퍼져 있던 드래곤본, 드래곤스케일 무구들을 마구
모아서 폐기처분해 버렸지. "
라한은 드래곤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물건이 자신들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품이라니.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으리라
어찌 보면 자신들 스스로가 동족을 죽인 것과 같지 않은가.
'꽤나 어처구니없었겠군, '
-주인. 그럼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본 팔아서 . 푸푸풋!
라한이 갑작스럽게 끼어든 테세르의 입을 서둘러 막았다. 하지만, 이미 핵심 내용이
다 나와 버렸다. 안 하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라한. 오벨리아 팰리스라니? 전에 실종 됐을 때,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었던 거야?
그리고 드래곤 본이라면. 아, 오벨리아 팰리스의 결계를 우리 드래곤들이
유지했으니, 선조 드래곤들의 뼈가. 흠. "
테세르의 몇 마디 말로 로이나가 상황을 미루어 짐작했다.
"그게. 어, 그러니까. "
-주인! 왜 그래? 그 드래곤 본 팔아서 한 몫 챙기자니까.
"시끄러, 이 멍청아. "
-내가 왜? 주인도 돈 좋아하잖아.
"이런 젠장. "
드래곤 본은 엄청나게 좋은 인챈트 재료다. 드래곤 본에 무언가를 새길 능력이
라한에게 부족했기에 손대지 않았을 뿐.
후일, 실력이 조금 더 나아지면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본으로 인챈트를
수련할 계획이었다. 헌데, 테세르의 말실수 때문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라한. 그 드래곤 본은."
"미안.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좀 그렇네. 하하하. "
라한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의 어색한 표정에 로이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모른 척 할게. "
"진짜?"
"응. 일단은 모른 척 할게.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뭐, 그냥. "
"고마워, 로이나. 정말 고마워. "
라한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칫하면 꿈이었던 그랜드 인챈터의 길을 잃을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로이나가
눈감아 주지 않고 다른 드래곤에게 말했다면.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 본은
세상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라한에게는 잃었던 꿈을 다시 찾은 셈이었다.
-주인. 좋단다. 입 벌어진 거 봐라.
퍽-!
라한은 해가 질 때까지 로이나에게서 받은 책을 읽으며 보냈다. 책 내용 중 상당
부분은 라한이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알게 된 지식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하는 탄성을 지르며 입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런 식물도 있었나? 허, 그거 참 "
-주인. 해 졌는데 안 가?
라한이 출발할 생각을 않자 참다못한 테세르가 말을 걸어왔다.
"어? 벌써 그렇게 췄나?"
-응. 해는 아까 졌어, 주인이 워낙 열심이라서 말을 못 걸겠더라.
"그렇군. 으차! 이제 출발해볼까?"
라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들고 있던 책은 어느샌가 아공간에 넣어둔 후였다.
- 가자.
"오랜만에 한 번 달려볼까. 헙! "
라한이 순간적으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에 바로 앞에서 바라보던 테세르가 라한의
흔적을 놓쳤다.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움직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에이씨. 이놈의 주인이.


욕설을 내뱉은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어차피 달려가서는 라한을 따라잡기
힘들 터. 차라리 정령계로 돌아가서 다시 불러줄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스팡!
광견보를 시전하자 귀에서 바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이 바람을 가를 때
내는 소리였다.
라한은 거의 전력으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 정도로 빠르게 시전한 적은 과거 가짜
레드리안을 잡을 때뿐이었다. 심지어 드래곤 크라이드리안과 싸울 때에도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런 속도를 내는 건 자유로운 방향 전환이
어려워서였다.
'이상하군. 풍경이 느리게 움직여. '
라한의 속도는 가히 번개와 비견될 만큼 빨랐다. 헌데, 주변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느리게 하나씩 변하는 풍경. 그러다가 어느 순간 중간 환경을 건너뛰기 일쑤였다.
마치 주변을 찍은 사진을 띄엄띄엄 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해. '
다시 한번 의문을 느낀 라한이 몸을 세웠다.
이젠 입가로 흐르는 침도, 붉게 충혈 되는 눈도 보기 힘들었다. 라한이 광견보를
거의 완전에 가깝도록 바꾼 탓이다.
"다시 해보지 뭐. "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역시나 주변 환경의 움직임이 달랐다.
'왜 이러지?'
다시 광견보를 멈춘 라한이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휴, 모르겠군. 내 속도에 비해 주변 환경이 느리게 움직이다니. 그것 참. "
라한이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네. 테세르. "
-쳇, 맨날 자기 혼자 달려가고. 주인 사상이 꼬롬해.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라한에게 불평을 토해냈다. 자기만 남겨두고 먼저 달려간 게
섭섭했던 모양이다.
"이해해라. 근데, 꼬롬? 그런 사투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냐? 난그런 말을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
판트리아 대륙은 대륙 공용어를 사용한다. 대륙 전체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엘프나 드워프, 드래곤마저도 대륙공용어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륙전체의 억양이 완벽히 같은 건 아니었다. 특히, 각나라의 하위 계층은
약간씩 변형된 공용어를 사용한다. 통상 사투리라 불리는 그런 언어였다.
-어? 글쎄다. 내가 이 말을 어디서 배웠더라? 아, 맞다. 파울이라는 인간이 이런
단어를 쓰던데?
"파울?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그놈?"
파울은 나메라 왕국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불린다. 젊은 나이에 5서클유저 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귀족과 버금가는 위치 인 셈이다.
듣기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메라 왕국의 왕궁 내에서 마법을 배웠다고 했다.
헌데, 그런 파울이 사투리를 사용한다? 그것도 대륙 남부 지방에서나 쓸 수 있는
그런 사투리를? 뭔가 앞뒤가 맞지않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꼬롬하다는 단어를 쓰던?"
-우리 일행 전부가 주인이 가자는 대로 가고 있잖아. 파울은 라한 주인이 꼬롬해서
일행들이 끌려 다니는 거라고 하던데.
"오호라, 파울이 그랬단 말이지? 그냥 내버려뒀더니 기어오르네. 언제 한 번
밟아줘야겠군. "
-쯧쯧. 그래서 주인이 꼬롬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수틀리면 밟아줄 생각부터
하고. 에잉. 주인이 그러니까 착한 나까지 욕먹는거잖아.
라한이 약간의 살기를 담아 테세르를 노려봤다. 이에 테세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중에 두고 보자. 테세르. "
-아, 하하하. 주인. 농담이었던 거 알지?
"농담은 개뿔이 농담이냐?"
-주인, 그게. 아참. 근데 왜 부른 거야? 아무 일 없이 부를 인이 아닌데
말이 막힌 테세르가 말을 돌려 버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더 큰일이 일어날
듯해서였다.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두드렸다. "아, 맞다. 내가 네 주위를
돌아 볼테니까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좀 봐줘.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내 움직임이 어떤지만 봐주면 돼. "
-주인 화가 풀린다면야 뭔들 못하겠어? 해봐.
테세르는 끝까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라한의 화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녀석, 머리 굴리기는. 일단 봐라, "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하지만, 좀 전처럼 일직선으로 산을 오르는 건
아니었다. 테세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이었다.
'흠, 테세르도 끊어져서 보이는군. 왜 이런 거지?'
라한은 분명 테세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면 서도 테세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것이다.
헌데, 테세르의 모습이 자꾸 사라졌다. 좀 전에 주위 환경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다.
한참 돌던 라한이 테세르의 눈앞에 멈춰 섰다.
"어때?"
-뭐가?
"혹시 내 모습이 사라지지 않던?"
머리를 긁적이던 테세르가 대답했다.
-그게 잘모르겠다. 주인이 광견보를 시전하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아까도 내
주변에 주인이 입은 옷 색깔만 핑핑 돌더라고.
"색깔만 핑핑 돈다고?"
-응. 주인 옷이 진한 회색이잖아, 내 주변에도 진한 회색 빛무리만 남던데.
"빛무리라.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테세르의
말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헌데, 왜 자신의 시선에는 사물이
끊어져서 보일까? 라한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듯했다.
"모르겠군. 일단 올라가자. 테세르. "
-좋아.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속에 들어갔다. 라한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간다. 꽉 잡아!"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번에도 주변 사물이 끊어져서 보이는 현상은
여전했다.
"테세르! "
-응?
달려는 와중에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주변 풍경 한 번 봐봐. 뭔가 다르지 않아?"
-주변 풍경? 음, 우와! 빠르다. 빛으로 보이네.
" 빛으로?"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저렸다. 속도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데세르의 눈에는 사물이 빛으로 보였다. 라한의 눈에 비친 사물과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단순히 속도에 의한 변화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연구 좀 해봐야겠어.
테세르 사고 치다
꽤 오랫동안 달려서 라한이 동굴을 개조한 허름하고 작은 창고에 도착했다. 오래 전
세라 소드를 발견한 칼라피안의 보물 창고였다.
이마에 땀을 대충 훔친 라한이 창고 벽에 기댔다.
후, 후. 힘들군.
-우와. 주인 엄청 빠르다. 앞으로 말 대신 주인 타고 다녀야겠다.
시끄러. 망할놈아. 나 힘들어 하는 거 안 보이냐?
라하닝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 온종일 걸어야 오를 수 있는
멜카투라 산. 이곳의 정상까지 단숨에 달려왔으니 힘들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근데,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드워프가 만든 창고인데 당연하지.
칼라피안의 보물 창고는 작고 허름해보였다. 최고한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절대 허름하지 않다는 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맞다. 칼라피안 아저씨가 드워프였지.
"들어가 볼까?"
라한이 창고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스르륵!
창고 문은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음에도 열렸다. 역시 드워프의
작품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단하군. "
뚜벅! 뚜벅!
라한이 창고 안으로 한 발자국씩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장이 터질듯
매어왔다. 새삼 칼라피안과의 옛 추억이 떠오른 탓이다.
"저기.였지. "
라한이 창고 중앙에 있는 상자를 보며 세라 소드를 원래 세라 소드가 놓여 있던 그
상자였다.
라한이 숙연해지자 테세르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주인, 힘내.
"그래야지. "
애써 기운을 차린 라한이 상자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칼라피안이 말했던 대로
상자를 살짝 돌렸다.
끼이익!
상자 아래쪽에서 특이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돌렸던 상자도 옆으로 조금씩
이동되었다.
-주인, 신기하다.
"테세르. 쉿! "
라한이 상자의 변화를 살펴보며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 어떤 위험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드워프 장인이었던 칼라피안. 그가 자신이 만든 보물을 허술하게 관리할 턱이 없다.
그의 꼼꼼한 성격과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애착을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주인. 왜?
"조용히 좀 해봐. "
뚝! 뚜둑! 뚝! 뚝! 뚜두두둑!
상자 아래쪽에서 좀 전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뭔가 있어. "
라한이 테세르를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이목만큼은 상자
아래쪽에 조금도 떼지 않았다.
-주인 대체 뭔데 그래? 나도 좀 알자.
"입 꿰매 버리기 전에 그 입 좀 다물어. "
라한은 칼라피안의 기관장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헌데, 테세르가 자꾸
말을 걸자 자꾸만 신경이 분산되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정말 테세르의 입을 꿰매
버릴지도 몰랐다.
뚜두두둑! 뚝! 뚝!
쿠구구구궁!
마지막 뚜둑 소리를 끝으로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로는 상자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테세르. 내 허락이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
-응.
테세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말 믿음이 가지 않는 말투였다.
'저놈 사고 치는 거 아냐?'
어쨌든 테세르가 대답은 했기에 일단은 참기로 했다. 아무리 믿음이 가지 않더라도
근거 없이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볼까?"
라한이 다시 상자로 다가갔다. 처음에 있던 상자가 반으로 쪼개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흠, 이건 뭐지?"
상자는 깨져 있었지만 상자가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상자가 나타나 있었다. 푸른
색깔의 손바닥만 한 상자였다
-주인. 이 상자 예쁘다.
"야! 멈춰! "
덥썩!
라한의 제지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테세르가 상자를 잡아 버렸다. 놀란 테세르가
손을 뗐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쿠구구구구궁! 콰쾅!
"젠장. 테세르 꽉잡아!"
라한이 테세르를 로브에 집어넣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창고를 나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젠장. 늦었다. "
문이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쯤 열려 있던 문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문이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발견 할 수 없었다.
-주, 주인. 미안. 그게 난 그저. 너무 예뻐서. 그러니까.
"됐으니까 일단 주변부터 살펴봐."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창고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테세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라한이 좀 전의 푸른색 상자를 들어올렸다.
"역시 가짜군. "
상자는 한 쪽이 열려 있었다. 헌데, 안에는 아무것도 처음부터 도둑을 잡기 위해
만들어둔 미끼였던 모양이다.
-주인. 완전히 막혀 있어.
"마나가 새어나오는 곳 없어?"
-응. 그것도 해봤는데, 완벽하게 막혀 있어, 완전 통짜 쇠로 된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상자 안에는 마나가 하나도 없어.
"골치 아프군. "
라한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심법을 만들어낼 때 이후로 최고의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텔레포트 안 돼?
"마나도 없는데 텔레포트가 가당키나 하냐?"
-주인은 마나 안 쓰잖아. 제령기로 안 돼?
"다른 마법은 몰라도 텔레포트는 안 돼. 텔레포트는 제령기에 공명할 주변 기운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불가능해."
-어쩌지?
"몰라. "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에 빠졌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골치 아프네, "
-뭔가 방법이 없을까?
"글쎄. 아저씨 성격을 생각하면 통로를 만들어뒀을 리 없지. 자신이 만든 물건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
-그렇.겠지?
얼핏 보기에는 칼라피안의 성격이 상당히 너그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리고
라한에게도 그런 성격으로 대해왔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부드러운 눈빛 속에 언제나 칼을 간직하고 있던
칼라피안.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
그였다.
아니, 칼라피안뿐 아니라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가 그런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랫동안의 폐쇄적인 생활로 성격이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흠,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고. 답답하군. "
-아까 마법 쓸 수 있다고 했잖아. 날려 버려.
"해 볼까?"
라한도 마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곳이 폐쇄적인 장소만
아니 었으면 날려 버릴 자신도 있었다.
헌데, 이 창고가 너무 작다는 게 계속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하면 창고와 함께
자기 자신도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봐, 이 정도쯤은 날려 버릴 수 있잖아.
"글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헌데, 여기가 너무 좁아서 잘못하면 나까지
날아가 버린다고. "
-아, 맞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주인. 창고 부수면 그때 불러줘. 나 정령계에서
기다릴게. 간다.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자신이 마법의 여파에 당하는 건 무서웠던 모양이다.
테세르가 돌아가자 라한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주인 아니던가?
헌데, 주인을 버리고 정령계로 도망가 버리다니. 이번 기회에 테세르의 충성심을
다시금 고취시켜야 할 듯싶었다.
"테세르. 튀어나와!"
라한이 테세르를 소환했다. 그리고 테세르가 나타날 곳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기다렸다.
근데, 한참 기다렸음에도 테세르가 나타나지 않았다. 보통은 라한 눈앞에
소환되어야 정상이었다.
"어라? 테세르. 빨리 튀어나와!"
역시나 테세르가 소환되지 않았다. 이 창고의 어떤 기능 때문에 테세르의 소환이
불가능한 듯했다.
"뭐야? 좀 전까지는 있던 놈인데, 왜 소환이 안 되지?"
라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창고의 어떤
기능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젠장. 시끄러워도 함께 있는 게 좋았는데 괜히 무섭네. 아, 그렇군. 공명한 마나가
없어. "
텔레포트와 마찬가지로 소환도 주변 기운과 공명해야 가능하다. 헌데, 이곳은
공명할 기운이 전혀 없었다. 테세르의 소환이 불가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 으."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는 단순히 갇혔다는 것보다 혼자
남겨졌다는 게 더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혼자 남켜진 게 처음이구나. "
외로움을 대충 다독인 라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였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나?"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테세르의 말처럼 마법으로 부수는 방법뿐일
듯했다.
"까짓것 해보지 뭐. 파이어 실드! "
라한이 세라 소드에 인챈트 된 파이어 실드를 먼저 시전했다. 공격 마법을 사용했을
때 자신이 받을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이 얼마나 줄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튕겨나오는 공격 마법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마법이 그대로 튕켜 나오면 그땐. 죽겠지. "
창고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는 라한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공격 마법에는
라한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담을 생각이었다.
라한은 1서클 공격 마법에 7서클에 버금가는 제령기까지 담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세라 소드에 인챈트 된 파이어 실드는 겨우 4서클, 라한의 전력을 감당해낼 수 있는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
공격했던 위력 그대로 튕겨 나온다면 파이어 실드가 깨짐과 동시에 라한 역시
죽음을 맞을 게 분명했다
"후우우, 제발, 파이어 애로우!"
라한이 파이어 애로우를 시전했다. 이에 커다란 불화살이 창고의 한 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콰콰콰콰쾅!
채채챙!
"크악! "
창고를 맞고 나온 마법의 여파가 파이어 실드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라한 역시
실드를 깨고 남은 마법의 위력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멜카투라 산 아래에 야영을 하던 라한 일행. 이미 아침이 되었음에도 라한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로이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약속을 어길 라한이 아닌데. "
"올라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라한은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하던데."
레테아와 로이나, 투바, 프라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례로 말했다.
"아무래도 찾아 나서는 게 낫겠다. 라한이 좀 음흉하기는 해도 약속을 어길 놈은
아니잖아. "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어제 라한이 한 말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그러네. "
"어휴, 미치겠네.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그러게. 어쩌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으러 가고 싶은데 말이야. "
일행들이 차례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선뜻 어떻게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떠나면서 라한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서였다.
"혼자 잘난 척하더니 이게 뭐야? 하여간 인간은 어쩔 수 없다니까. "
프리미아만 유일하게 라한을 질책하고 나왔다. 그간에 쌓였던 게 많긴 많았던
모양이다.
프리미아가 입을 열자 최근에 천적이 된 투바가 끼어들었다.
"왜 거기서 인간이라는 말이 왜 튀어 나오는 건데? 레테아는 인간 아냐?"
"그, 그건."
"흠. "
레테아는 연신 신음만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멜카투라 산의 정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생 라한에 대한 걱정이 너무 커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탓이다.
"로이나. 방법 없어?"
"음 일단 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좀 옮겨주라. 보는 눈이 많으니까 마법을 못
쓰겠다."
"그건 내가 하지. "
프라하가 라한의 나머지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물론, 나머지 일행이란 장난감 두
명과 불청객 두 명이었다.
"이봐! 너희들 따라와. "
"무슨 일인가? 우리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
프라하의 말에 해리언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왔다. 일행들 사이에 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하지만 장난감이 된 쿨샤크와 데메크는 아무런 대꾸 없이 프라하를 따라갔다.
최근에 라한 일행과 다니며 많이 고분고분해진 모습이었다.
"알거 없어. 따라와. "
"라한이 안 보이는군. 어디 간 건가?"
"글쎄 알거 없다니까 그러네. 따라오기나 해. "
프라하가 해리언과 파울을 강제로 끌었다. 힘으로는 프라하의 적수가 될 수 없는
해리언과 파울. 그렇다고 이곳에서 마법과 정령을 사용해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프라하가 이끄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가 외부의 눈을 데리고 사라지자 로이나가 주변에 마나를 퍼트렸다. 혹시
다른 눈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난 일단 레어로 돌아가서 방법을 강구해보지.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
"부탁하지. "
"그럼 텔레포트!"
로이나가 마법을 사용해서 레어로 돌아갔다.
불청객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리 먼 곳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을 터. 아무래도
이곳에서 뭔가를 하기는 껄끄러웠다. 마법을 사용하든 정령을 쓰든 레어가 더
편했다.
로이나가 사라지자 일행들 사이에 또 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반 정도는 라한을
찾으러 나서자는 의견이었다. 또, 나머지 반은 이곳에서 기다려보자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단 한사람. 아니, 한 드래곤은 라한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이봐! 프리미아. 그래도 우리 일행이었다. 너도 일행이 됐으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하라고. "
"난 가식적인 행동은 못해. "
"드래곤이 그렇지 뭐. 하여간 드래곤들은 이기적이라니까. "
결국 참다못한 투바가 프리미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투바의 말에 프리미아가 눈을 부라리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항상 중재를 했던
라한도 없었고, 눈치를 봐야 하는 로이나도 없었다. 프리미아에게는 마음껏 화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내게."
"저, 저. 저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라한은 설사 일행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너하고
결혼할 사람의 동생이다. 이 망할 드래곤아! 비록 유희에 불과할지라도 너하고 한
식구가 될 사람이란 말이다. 네가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네 식구한테 그러면 안
되지?"
"식.구?"
"몰랐냐? 그러니까 나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레테아 표정 좀 봐라.
걱정하는 거 안보여? 레테아 걱정하는 거 보이면 너도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래도 네가 감정이 있는 동물이면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 그건."
프리미아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라한과 자신이 식구가 되다니. 비록
유희에 불과할지라도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유희가 끝날 때까지는.
"자, 자. 그만들 싸우고 일단 기다려보자. 로이나가 갔으니까 뭔가 방법을
강구해오겠지. "
"그래. 일단 기다려보자,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
그렇게 일단 기다리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일행들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층 어두워진 상태였다. 알 수 없는 어떤 불안한 느낌 때문이다.
레어로 돌아간다고 했던 로이나. 실상 그녀가 이동한 곳은 멜카투라 산의 정상
부근이었다. 일단 용언 마법으로 라한을 찾을 생각에서였다.
"이글 아이즈(Eagle eyes)! "
로이나가 시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마법을 시전했다. 인간에게는 없는 용언
마법이었다.
"서치 오브젝트(Search object)! "
다음 마법을 시전하며 라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하고 있는 상대를 찾는 마법이
서치 오브젝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마법도 용언 마법이었다.
그렇게 근 한 시간이 흐르고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멜카투라 산 전체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찾지 못한 것이다.
"라한. 대체 어디."
로이나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제 진정으로 라한의 안위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라한이 오지 않았을 때만해도 이 정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라한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젠 그 믿음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안 되겠어. 텔레포트! "
로이나가 레어로 돌아갔다.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자신에게도 무리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어로 돌아간 로이나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겠지. 괜찮아야 돼. 실피드! 엘라임! 샐리온! 노아스!"
로이나가 4대 원소 정령의 정령왕들을 모두 불렀다.
드래곤은 성룡이 되면 그 누가 됐든지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바람과 관련된
골드 드래곤도 물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고, 물과 관련된 블루 드래곤도 불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속성에 상관없이 정령왕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친화력에 따라 통제 능력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4대 원소 정령왕을 한꺼번에 소환하는 건 쉽지 않다. 설사 드래곤 로드라
하더라도 4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부르는 무모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힘을 급격히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헌데 로이나는 4대 정령왕을 모두 불렀다. 어찌 보면 무모한, 그러면서도 대담한
결정임에 분명했다. 그만큼 라한을 아낀다는 얘기도 되었다.
"헉, 헉."
로이나가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는 땀이 마구 흘러내리고 다리는
미약하게 떨렸다. 힘을 무리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흠, 로이나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일까? 우리 4대 정령왕을 모두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인가?
-글쎄. 내가 아는 로이나는 쾌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헌데, 4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부르다니.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긴 건가?
-부른 이유가 뭐냐?
네 명의 정령왕이 각기 성격에 맞는 물음을 던져왔다.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이 힘들어하는 로이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같은
속성이라서 정이 가는듯했다. 반대로 불의 정령왕은 뭔가 불만이 많은 듯 용건부터
물어왔다.
"헉, 헉. 사, 사. 사람을 찾아줬으면 좋겠어. "
숨을 가다듬은 로이나가 힘겹게 말했다. 로이나의 말에 오히려 정령왕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정령왕 넷을 모두 불렀단 말이냐? 미쳤군,
드래곤이 광포한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일단 누군지나 알자. 로이나.
혹시 전에 그 인간이야? 내게 찾아달라고 했던 그?
마지막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물음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전에 그 인간을 아직 못 찾은 거야?
"아니, 찾았어. 근데, 근데 또 사라졌어. "
-그 인간이 대체 뭐야? 뭔데 고룡인 로이나가 그렇게 신경 쓰는거지?
-그만. 자세한 설명은 정령계로 돌아가면 내가 해줄게. 로이나. 잠시 기운을
회복해라. 잠깐 갔다 올 테니. 가자.
실피드가 정 령왕들을 다독였다.
실피드는 전에 라한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다른 정령왕들도 한번씩은
찾아다녔지만, 라한을 직접 본 정령왕은 실피드가 유일했다.
힘겨워하는 로이나보다 실피드에게 설명 듣는 게 나을 듯했다.
-실피드가 알고 있는 모양이니 돌아가자고.
-로이나. 무리하지 마라.
마지막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염려어린 말을 끝으로 정령왕 모두가 모습을 감추었다.
정령왕들이 사라지자 로이나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4대 정령왕 모두를 소환했던 게
몸에 무리를 준 탓이다.
한 때 케라스 왕국 주변 산맥에 몸을 은거했던 루이에. 원래 그는 그곳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이슨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루이에의 집에 침입해
버렸다. 루이에로서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루이에는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며 방랑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은거 중일
때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들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대륙에 나왔다는 것과
그들이 대륙의 각 왕국과 연계하고 있다는 거였다.
루이에는 제이슨과 직접 싸워봤다. 그 때문에 그들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대륙 진출, 루이에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그들과의 정면충돌로는 승산이 없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힘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샤르비엘 후작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에게 도움을 주면서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헌데, 샤르비엘후작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을 제의받았다. 라한 일행에 대한
미행이었다. 그때가 벌써 20일 전 일이다.
"아직도 그대로인가?"
"예, 루이에님. "
라한 일행과 하루 떨어진 곳에서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와 마법사
이클리프가 야영을 취하고 있었다.
이클리프는 샤르비엘 후작이 통신을 위해 남겨 둔 마법사였다. 실력은 고작3서클
마스터. 하지만, 라한 일행이 된 파울과 통신마법을 하는 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이유는?"
"확실한 정보는 전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
"분위기는?"
"상당히 침울하답니다. 얼핏 라한이라는 리더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
이클리프의 대답에 루이에가 생각에 잠겼다. 그로서도 라한 일행이 멜카투라 산
아래에 머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멜카투라 산이라. 이 검의 주인이 살았던 곳이군. '
루이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슬쩍 쓰다듬었다. 얼핏 보기에도 명검임을 알 수
있는 소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었군. 후후후. '
루이에가 과거에 만난 한 아이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자신에게 의류상 위치를
가르쳐줬던 아이였다.
루이에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고작 열 명이 될까?
헌데, 그 중에 그 아이가 남아 있는 건 그때 풍겼던 아이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이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돌했던 아이. 그러면서도 품속에 있던 칼을 꽉 쥐고 있던
치밀함. 루이에의 평소 성격과 너무나 흡사했기에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군. '
루이에는 그 아이가 라한이라는 걸 몰랐다. 알았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미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태도로 라한의 변한 모습을 살펴봤을 게 분명했다
루이에 역시 궁금함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저, 루이에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아닐세. 다른 연락 온 건 없는가?"
"예,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기다리지. "
이클리프의 얼굴에 존경심이 어렸다. 가식이 아닌 진정이 담긴 존경심이었다.
원래 이클리프는 루이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이에를 대할 때도
건성건성 대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샤르비엘 후작의 충고가 없었다면,
높임말조차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가 후작의 후광에 힘입어 지휘권을 얻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헌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있었던 몬스터와의 격전
이후부터 이렇게 변한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과도한 존경심에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단한분. 하지만 무서운 분. '
일주일 전. 루이에와 이클리프가 베어울프의 습격을 받았다. 지금은 대륙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보였던
루이에의 검술. 마법사인 이클리프마저 반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깔끔했다.
특히, 이십여 마리의 베어울프를 모두 처치한 후에 보였던 무표정함이라니, 사선을
수없이 넘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감히 이클리프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직속상관인 샤르비엘 후작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걸 그때 직감했다.
그때부터 이클리프는 루이에를 거의 맹목적으로 존경했다. 강함에 대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눈 좀 붙여라. 구슬에 불이 들어오면 깨워주지."
"아닙니다. 루이에님부터 주무십시오. 요 며칠 계속 눈도 붙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훗,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난 괜찮다. 자라. "
한마디 더 내뱉은 루이에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 상태로 불침번을 서는
루이에였다.
"고맙습니다. "
이클리프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노숙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편안한
표정이었다. 루이에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리라.
창고에 갇혀서 자신의 마법에 의식을 잃었던 라한.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몸을
꿈틀거렸다.
"으, 으."
정신이 몽롱했다.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고 머리도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빌어먹을. 쿨럭! "
라한이 기침을 하자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충격에 의해 내장기관을 다친
듯했다.
"헉, 헉. 으.망할. 이게 무슨 망신이야?"
어렵게 몸을 추스른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현기증이 돌았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몸이 엉망이군. "
라한이 제령기와 제란기를 차례로 돌렸다. 몸 상태를 점검하고 내장 기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두 가지 기운을 모두 돌리자 몸이 어느 정도는 제 모습을 찾은 듯했다.
"미치겠네. 대체 여길 어떻게 나가지?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야? 망할 테세르가
그런 소리만 안 했어도 시험해보는 무모한 짓은 안 하는 건데. "
괜히 테세르에 대한 원망만 커졌다. 일단 테세르를 욕하기 시작하자 세상 모든 게
다 짜증났다.
보물 창고에 이런 장치를 해둔 칼라피안에게도 화가 났고, 지금 옆에 없는
테세르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또, 자신이 이곳으로 오는 걸 말리지 않은 로이나와
다른 일행에게도 분노가 치밀었다. 괜한 투정인걸 알면서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에휴, 어떻게든 나가기만 하면 뭐가될 것 같은데."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살펴 본 곳은 라한의
마법이 닿은 곳이었다.
"뭐 이래? 흔적도 없잖아. "
라한의 마법은 4 서클 실드를 깰 만큼 강했다. 헌데, 창고에는 약간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뭔데 이래?"
라한이 창고를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금 라한은 이 창고를 만든 재질이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1서클 마법이라지만 7서클 정도의 제령기를 담았던 마법이었다. 헌데,
흠집도 나지 않다니. 라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거 뭐야? 미스릴이잖아. 허, 이거 참. 꼴에 담글질까지 되어있어? 이 거대한
창고 전체가? 미치겠군. "
창고 재질을 살펴본 라한이 경악했다. 창고 전체가 하나의 통짜 미스릴이었다.
그것도 드워프의 솜씨로 잘 담금질된 그런 미스릴창고였다
"어휴,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미스릴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구적인 마법
도구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헌데, 창고의 재질이 미스릴이라는 것. 그건
이 창고 전체가 마나를 흡수한다는 얘기와 같았다. 왜 창고 안에 마나가 없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창고 안에 있어야 할 기운마저 창고의 재료가 되는
미스릴이 모조리 흡수한 탓이다.
"흠, 그럼 그냥 쳐봐?"
라한이 세라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몇 번 휘둘러 본 후, 창고의 벽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채캉!
"으윽! 젠장. "
라한의 손아귀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강하게 쳐서 손에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아, 돌아버리겠네. "
세라 소드에 맞은 창고의 벽면에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흠집의
정도가 너무 작았다.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창고의 벽. 세라 소드로 쳐서
뚫으려면 얼마나 쳐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썩을! 하앗!"
카카캉!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창고 벽면에는 아주 작은 흠집을 내는
정도로 그쳤다. 거기다 손에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 벽면을 칼로 내려쳐서 뚫다가는
손이 망가지는 게 먼저일 듯 했다.
"검 수련 좀 제대로 해 둘걸. "
흠집이 난 부분을 보던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 난 흠집이 전에 난
흠집과 다른 부분에 나 있었기 때문이다. 라한의 검 휘두르는 정확도가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
라한이 세라 소드를 집어넣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리적인 공격으로 뚫으려는
시도를 포기한 거였다.
"마법으로는 미스릴을 부수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칼질로 뚫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쩌지?"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에이씨. 칼라피안 아저씨는 왜 이딴 장치를 만든 거야? 그리고 만들었으면
말이라도 해주지. "
칼라피안도 이런 기관 장치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헌데, 라한의 성정을
생각하고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철두철미하고 세심한 성격이 라한
아니던가. 그라면 이런 장치에 당하지 않고 보물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를 깜빡했다는 게 칼라피안의 실수였다. 항상 사고뭉치였던 테세르.
그가 이번 창고에서도 크나큰 실수를 범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대처법을 알려주고 눈을 감았을 터였다.
"아, 몰라. 몰라, 검도 안 되고, 마법도 안 되고. 어쩌라고."
라한이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누워 있으니 수마가
몰려왔다. 내장기관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피곤이 몰려온 것이다.
"좀 자고. 나중에. 다시. 보."
라한이 잠을 참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정신적 육체적인 혹사가 심했는지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라한이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기절이
아닌 수면이었다.
정령왕들에게 부탁했던 로이나가 초조한 듯 레어를 서성였다.
"왜 이렇게 늦지?"
다른 이도 아닌 정령왕. 그것도 4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이용한 것이기에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헌데, 벌써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다시 불러야 하."
위이이잉!
대기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물의 정령왕 엘라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로이나가 서둘러 엘라임 앞으로 다가갔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 조금. 근데 다른 정령왕들은?"
-내가 대표로 왔다. 네가 블루드래곤이라서 내가 소환되는 게 힘의 소모가 적을
거다
"그렇.군. 찾았어?"
-미안하다. 못 찾았다.
엘라임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로이나와 같은 속성인 물의 정령왕
엘라임. 그 때문인지 로이나와의 감정 교류가 꽤나 친숙하고 흡사했다. 로이나가
느끼고 있던 다급함과 초조함을 그도 느낀 것이다.
"흔적도 없어?"
-그게 이상하더군. 인간이라면 어디를 가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설사 자신이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더라도 우리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지. 헌데, 없었다.
"멜카투라 산을 다 뒤져본 거야?"
-응.
엘라임의 대답에 로이나가 몸을 비틀거렸다. 너무 큰 실망감과 좌절감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라.한. "
-힘들어 보이는군.
"괜찮아. "
-그 인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
"말해봐 "
원래 엘라임은 용건만 전해주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자신이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로이나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4대 정령왕 모두를 부르면서
힘이 고갈된 로이나이지 않은가.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빠른 회복을
생각한다면 소환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로이나의 얼굴에 보이는 좌절감 때문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나가 신경 쓰는 그 인간에 대해 궁금함이 몰려온 것이다.
-네가 찾고 있는 그 인간의 이름이 라한이라고 했나?
"라한이 왜?"
-그 인간에 대해 설명해봐라. 그가 멜카투라 산을 오른 게 확실하다면 흔적이
남아야 정 상이다.
"그렇겠지. "
-멜카투라 산에 있는 땅의 정령에게 라한이라는 인간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
계속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그래서 우린 라한이라는 인간이 멜카투라 산에 오른
적이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엘라임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서였다.
"그럴 수도 있지. "
-그렇게 멜카투라 산에 대한 수색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한 땅의 정령이
라한이라는 인간을 봤다고 하더군. 그리고 바람처럼 나타나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럼 멜카투라 산에 갔던 건 확실해?"
-그게 확실하지 않다. 그 땅의 정령이 묘한 소리를 하더군. 공간이동 같지 않은
이동을 했다던가? 만약 공간 이동을 한 거라면 너희 마법인 텔레포트겠지.
"그래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는 건 멜카투라 산 이외의 장소에 볼일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 같은 멜카투라 산에 가는데 텔레포트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멜카투라 산에 가지 않았다는 거군. "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아까 말했듯이 그 땅의 정령은 라한이 공간 이동 같지
않은 이동을 했다고 말했다. 텔레포트가 아닌 건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더군.
다른 정령은 라한의 너무 빠른 움직임 때문에 라한을 보지 못했다. 상급 정령만
되어도 라한이 움직일 때 생기는 긴 빛무리는 봤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멜카투라
산에는 중급과 하급 정령뿐이어서 라한을 본 정령이 없었다.
엘라임이 말하는 땅의 정령도 라한이 몸을 세웠을 때, 그를 본 정령이었다. 화면이
끊어져 움직이는 게 궁금해서 라한이 몸을 세웠던 그때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텔레포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대체 어떤 이동이었기에
모른다는 거지?"
-그건 우리도 다각도로 생각해보고 있다.
로이나도 라한의 광견보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라한이 말해준 적이 없어서였다.
또, 라한은 광견보라는 신법 자체를 잘 쓰지 않았다. 로이나로서는 광견보를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셈이다.
"그럼 알아낸 게 없군. "
-로이나. 라한이라는 인간이 보였던 움직임은 쉽게 넘길 게 아니다.
"드래곤도 본체로 최고의 속력을 내면 그 정도는 나온다. "
-아니, 너희들의 움직임은 아무리 빨라도 정령의 눈을 속이지 못해, 움직이는
주체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움직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발끈한 엘라임의 말에 로이나가 머쓱해했다. 그러면서도 정령들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가? 근데 그게 왜?"
-쉽게 얘기하고 있지만, 심각한 문제다. 만약 마법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정령의 눈을
속인 거라면 우리 정령계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 된다.
"그게 왜?"
-그건 흠.
뭔가 말을 하려던 엘라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엘라임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로이나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존재도
아닌 물의 정령왕 엘라임. 그가 유도심문 따위에 넘어갈리 만무했다.
"말 하려다가 마는군. "
-드래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정령계의 존재 이유와 관계있는 건가?"
-비슷하다고 해두지.
"흠. "
라한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라한의 실종과 정령왕들의 민감한
대응,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라한을 만나면 말해줘야겠어. '
뭔지 모르지만 정령왕들이 라한에게 신경 쓰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로이나에게 큰 불안을 심어주었다.
-로이나. 그럼 우린 다시 그 인간을 찾으러 가겠다. 혹, 그 인간을 찾으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겠나?
"그래야. 하나?"
-로이나. 우리 정령들이 그 인간을 적대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를 믿어라.
"휴, 그러지. "
마지못해 로이나가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라한과 정령들을
떼어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라한을 찾고 난 후의 얘기겠지만.
-그럼 다음에 보지.
인사를 한 엘라임의 모습이 서서히 까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로이나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군.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어. 근데, 왜 라한에게 신경 쓰는 거지?'
차라리 적대감이라도 보였다면 피아구분이 확실했을 것이다. 데, 엘라임의
얼굴에서는 뭔가 갈망하는 빛만 보일 뿐. 악의로 이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정령. 그들이 가식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몰라. '
아무리 생각해도 라한과 정령왕들을 붙여놓는 건 아니다 싶었다. 일말의 불안이나마
없애고 싶었음이다.
어둠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혼자 사색을 할 때,
눈을 감고 행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자청한 어둠이 아닐 때는 크나큰 공포를 느끼게 된다.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과 고독함. 스스로에게 느끼는 절망감과 분노. 이런 감정들에
고스란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라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꼈고, 절망과 분노를
맛봤다.
"젠장. 그래도 난 나야. "
헌데 라한은 그런 감정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전생의 기억이
라한의 정신을 강인하게 만든 탓이다.
"빠져나가고 말겠어. "
라한이 다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는 안돼. 그렇다고 칼질도 안되고. 인챈트? 창고 전체를 인챈트 해
버릴까?"
인챈트에 대해 생각하던 라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인챈트가 생각나지
않은 탓이다.
라한이 이 창고의 밖에 있었다면, 인챈트 할 많은 마법들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헌데, 라한이 안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무슨 마법을 쓰든지 라한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챈트가 안 되면 뭐로 하지? 음, 마법으로 하려면 엄청난 절삭력을 가진 마법으로
해야겠지 그래야 내가 충격을 받지 않을 테니까. 절삭력이라. 그래. 만들어보자고.
어차피 지금 쓰는 마법도 다 내가 조합한 거잖아. "
라한의 결론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윈드파이어처럼 치중한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의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수 있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일단 직진성만 따지면 원드 파이어 마법이 가장 강하다. 윈드 마법에 파이어
마법을 잘 섞으면 절삭력을 올리는 데에도 좋겠지. 하지만 저 벽이 마나를 엄청나게
머금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잘못하면 잘리는 게 아니라 터져 버린단 말이야."
마나는 기본적으로 충격에 대한 반발력이 강했다. 무언가가 나를 치고 들어올 때,
튕기는 성질이었다.
라한의 절삭력 강한 마법이 창고 벽면을 쳤을 때, 자칫하면 그 파편이 라한을 덮칠
수도 있는 것이다.
"땅 속성 마법까지 함께 담아야겠어, 공격과 치지 않으면 나까지 죽을지도 몰라.
음, 그리고는 걸 막으려면 물속성도 필요하겠고. 쳇, 네 가지 속성 전부 다
이용해야 되는 거잖아. 이게 가능한가?"
물마법과 불마법은 상극이다. 이 때문에 두 속성을 섞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지금 대륙에는 그게 마법에 대한 정석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잖아. 에휴, 목숨 거는 건 내 성격하고 안 맞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마냥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라한은 식량의 대부분을 아공간에 넣어두었다. 이곳에서는 아공간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식량 거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식량이라고 해봐야 하루, 이틀 분량뿐. 굶주림을 참는다 하더라도
보름을 버티는 게 고작일 듯싶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두, 세 번 안에 성공해야 하닌 시도하는 것도 힘들고. 미치겠네.
이곳에서는 제령기나 제란가의 보충이 불가능했다. 창고의 흡수 능력이 너무
강해서였다. 결국, 라한이 지금 가지고 있는 제령기와 제란기만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라한이 가지고 있는 세라 them는 크기가 너무 작아서 하루 정도면 마나가 가득
찼다. 굳이 라한이 돕지 않더라도 자연지기만으로 하루면 재충전이 되는 것이다.
헌데, 라한이 갇힌 창고는 너무 컸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됐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채 반이 차지 않은 듯했다.
실패하면 죽는다.
결의를 다진 라한이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떠나는 일행
라한이 실종된 지 일주일. 멜카투라 산 아래에 있던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라한이 사라진지 벌써 일주일이야.
벌써 그렇게 됐군.
로이나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그렇군.
카이렌이 입을 열자 일행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카이렌은 라한이 없는 동안 은연중에 리더가 되어 있었다. 힘을 가진 이들 중 가장
진중한 성격이라서 저절로 그렇게 된 거였다.
프라미아.
말해라. 엘프.
로이나에게서 연락이 왔던 걸로 아는데?
"레어에 계신다. 그곳에서 라한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
프리미아의 대답에 일행들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로이나가 라한을 이미 찾았기를 은근히 바랐다. 약간 섭섭한 마음은
있겠지만, 라한의 안위가 더 소중한 탓이다.
헌데, 로이나 역시 아직 찾고 있다는 얘기. 고룡인 그도 라한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골치 아프군. "
"도대체 라한은 어디 있는 거야?"
"자자, 그만. 라한이 자의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그러니까 라한이 우릴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사람?"
카이렌의 물음에 일행들모두가 침묵을 고수했다. 라한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나, 난 라한이 도망갔다고 생각해. "
유일하게 프리미아만 라한을 낮게 평가했다. 일행들은 프리미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딴죽을 걸었던 프리미아. 이번도 그러려니 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내 말은 무시하는 건데?"
"네 남편한테 물어봐. "
"뭐야?"
"그만. 지금 싸우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다. "
투바와 프리미아가 대립하려하자 카이렌이 둘을 중재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라한보다 더 강한 카리스마가 풍기는 카이렌이었다.
'이상하네. 왜 저 엘프가 하는 말에는 토를 못 달겠지?'
프리미아가의아한듯고개를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을 접었다. 그도 라한의
생사에 대해 궁금했음이다. 누가 뭐래도 레테아의 동생이었으니 말이다.
"라한이 타의에 의해 실종되었다. "
"음. "
"흠. "
카이렌이 결론을 내리자 일행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임시 리더인 카이렌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남달랐다.
"라한을 납치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 말해봐. "
"라한을 납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누가 뭐래도 드래곤이겠지, 이미
라한이 드래곤 한 놈을 박살낸 적이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봐. "
프라하가 가장 먼저 용의자를 지목하고 나섰다 그 말에 카이렌도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 역시 유력한 용의자로 드래곤을 꼽고 있었음이다.
"드래곤은 아니라고 봐. 그 당시에 로이나도 우리와 함께 있었잖아. 멜카투라 산에
드래곤이 나타났으면 로이나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을 거 야. "
"그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아닐까? 그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잖아. 인원도 쾌 많고.
거기다 그들은 대륙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왕국이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정보력에 있어서는 그들이 최고일 것 같은데. "
"그럴 수도 있지. "
카이렌은 투바의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봐. 카이렌. 네 생각은 어때? 대체 누구 같아?"
"누가 더 유력한지는 중요하지 않아. 용의자가 생기면 어차피 그들 모두를 조사해야
할 테니까. "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어떤 용의자가 됐든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결국, 용의자가
된 이들 모두를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을 조사해야겠군. "
"음, 드래곤은 프리미아 네가 조사해라. "
"내가 왜?"
"너도 우리 친구니까. "
"친구?"
"그래. 라한은 우릴 친구로 생각했다. 너도 조건 없이 일행으로 받아들여졌으니
친구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 "
친구라는 말에 프리미아가 찡한 감동을 느꼈다. 언제부터 자기가 이런 감정에
약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엄숙한 순간에 들려온 친구라는 한 마디가
프리미아를 흔들었음은 분명했다.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인데, 그러니까 만약에. 라한이 이미 죽었으면 어쩌지?"
투바의 경솔한 물음에 일행들 모두가 침묵에 쌓였다. 그렇게 잠시 후, 카이렌이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누가 됐든. 설사 그가 신이라 할지라도 라한을 죽인 놈은 내가 죽여 버린다.
"
"꿀꺽 ! "
" 음. "
카이렌의 살기어린 말에 일행들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카이렌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강한 실력자인 투바와 프라하. 카이렌보다 오히려 더
강한 프리미아도 살기에 몸을 움찔한 건 마찬가지였다.
"프리미아. "
"알았어. 드래곤 쪽은 내가 조사해볼게. 로이나님하고 같이 조사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레테아. 나중에 봐! 아잉! 텔레포트! "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윙크를 하고는 마법을 사용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카이렌이 주변을 한차례 훑었다.
"그럼 나머지는 떠날 채비를 해줘. "
"어디 갈 건데?"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해 조사해봐야겠어. 다음 유력한 용의자잖아. "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자자, 준비하자고. "
프라하가 일행을 다독이며 준비를 서둘렀다.
일행 모두가 흩어지자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레테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라한아! 살아만 있어다오. "
그렇게 라한 일행의 행보가 정해졌다. 그들은 그날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에
멜카투라 산을 떠났다.
프리미아는 로이나의 레어로 바로 이동하지 않았다. 서열상 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해서였다.
바로 가는 건 상대가 낮을 때, 혹은 비슷한 위치일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프리미아는 로이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기에 레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라한이라. 모르겠군. 그 인간이 대체 뭔데 그러지?"
프리미아는 일행들이 라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신기했다. 꽤 오랫동안 살아온
프리미아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더 신기한 건 자기 자신조차도 라한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거였다. 물론,
이성적인 매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라한과 있으면 편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묘한 매력이었다.
"참 신기한 인간이기는 하지. "
"멈추십시오. "
"응?"
프리미아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눈앞에서 엘프 여섯 명이 나타나 앞을
막았다. 로이나가 레어 보호를 위해 둔 가디언이었다.
"프리미아님이시군요. 용건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로이나님. 아, 아니구나. fp이시아나님을 만나러 왔지."
"저. 급한 일입니까?"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요즘 레이시아나님이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멍하게 하늘만 보고 계십니다. "
엘프 가디언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또 한 번 놀라워했다. 천하의 드래곤이, 그것도
침착하다는 블루 일족의 고룡이 인간 때문에 넋을 놓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거 뭐야? 라한이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라는 건가? '
프리미아도 라한에게 매력이 있다는 건 인정했다. 자기 스스로 도묘하게 끌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드래곤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의 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로이나의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이건 정말 남녀사이의 일 같지
않은가? 유희가 아닌 진짜 남녀 사이의 애정 같은 그런 관계.
지금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내가 로이나님을 잘못 본 건가? 아니면 라한을 잘못 본거? 흠, 좀 더
지켜봐야겠어. '
"어?"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아!"
프리미아를 따라 뒤를 보던 엘프가 순간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꽤나 반가운 손님을
발견한 것이다.
"어이! 이게 누구야? 블루 일족의 개구쟁이 프리미아 아닌가?"
"흥. 베르네미스님. 누가 개구쟁이라는 거예요?"
"아, 하하하. 이젠 숙녀가 다 됐다 이건가?"
"뭐라구요?"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
나타난 이는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였다. 시스마란에게 마법을 가르치겠다고
종적을 감췄던 베르네미스. 그가 유희적 모습인 베르네의 형태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주세요. 베르네미스님.
"이런, 이런. 삐친 건가? 이거야원."
"제가 베르네미스님인 줄 아세요? 삐치긴 뭘 삐쳐요?"
"하하. 단단히 삐쳤군. "
"흥. "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도 꽤나 친한 사이였다. 로이나와 가장 친한 베르네미스.
로이나를 존경하는 프리미아가 그를 그냥 둘리 만무했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떤 성격 때문에 로이나가 좋아할까? 이런 생각으로 베르네미스와 친해진
거였다.
이에 반해 베르네미스는 누군가를 만날 때, 편견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 스스로가
워낙에 친구가 없어서였다. 친구가 없으니 누구라도 친근하게 대하면 최선을
다했다. 어찌 보면 정에 굶주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네미스님. 푸른 수정의 3장로 드일리프 인사드립니다.
"어, 드일리프로군. 오랜만이야. "
"네, 반갑습니다. "
로이나의 레어에는 정해진 가디언이 없다. 대신, 로이나가 돌봐주는 엘프 마을에서
장로들이 번갈아가면서 가디언 역할을 해왔다.
로이나로서는 똑똑한 가디언을 쓸 수 있고, 엘프로서도 든든한 후 원자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올해 로이나의 레어를 지키는 임무를 드일리프가 맡은 듯했다.
"마을은 어때? 아직도 몬스터가 많나?"
"아닙니다. 레이시아나님이 결계를 만들어주셔서 더 이상 공격 받는 일은 없습니다.
"
"다행이군. "
"감사합니다. "
드일리프가 진정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르네미스의 도움이 컸음을 아는 까닭이다.
로이나가 드래곤이기는 하지만, 결계를 마구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약간이지만
인챈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로이나는 인챈트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책을 살펴본다면 간단한 몇 가지는
할 수 있지만, 그런 결계는 오래가기 힘들다. 이 때문에 베르네미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르네미스도 로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만들어진 엘프 결계는 거의 반영구적이었다. 엘프 마을로서는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이다.
"근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레이시아나님 만나러 온 거 아닌가?"
"아, 내 정신 좀 봐. 베르네미스님. 가요."
"베르네미스님. 레이시아나님의 신기가 불편합니다. 좀 달래주십시오. "
"그래? 음, 왜 그럴까? 설마 아직도 못 찾은 건가?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
"감사합니다. "
짧게 대답한 드일리프가 옆으로 두 걸음 물러났다. 로이나의 레어로 가는 걸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드일리프가 물러나자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올라가면서도 서로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프리미아는 라한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베르네미스는 자신의
ㄹ11어에 두고 온 시스마란 때문에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이나가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를 맞았다. 꽤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표정만보면
심기가 불편하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레이시아나님을 뵙습니다. "
"레이시아나님. 오랜만입니다. "
프리미아와 베르네가 차례로 인사를 해왔다. 로이나가 아닌 레이시아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지금은 유희 중이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다.
"로이나라고 불러도 돼. "
"네, 로이나님. "
"그러죠. 로이나님. "
레이시아나는 베르네미스와의 유희에서 로이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또, 라한과의
유희에 프리미아가 참가했을 때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둘 모두에게
로이나로 불려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베르네미스가 누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 문제가 있었다. 베르네미스와
로이나가 친한 건 사실이지만, 호칭에서마저 허물없이 지내는 건 다른 드래곤이
모르기 때문이다. 프리미아 역시 모르고 있을 것이기에 그녀의 앞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네. 근데 무슨 일이지?"
"아, 그냥 왔습니다. "
"제자가 속 썩여서 그런 건 아니겠지?"
"로이나님. 혹시 저 미행하고 다녔습니까?"
베르네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단번에 찍어내는 안에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훗, 한 번쯤 방문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하, 그럼 해결책도 알고 계시겠군요."
"해결책이야 뻔하지. 네가 공부하는 수밖에."
"로이나님. 그, 그건."
베르네가 방문한 건 시스마란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어서였다. 그는 용언 마법과
엘프 마법이 아닌 인간 마법은 알고 있는 게 고작 이십여 개밖에 안 되었다. 그
중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공격마법을 제외하자 정말 몇 개 안 되었다. 제자라고 삼은
시스마란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는 것이다.
"왜? 배우기 싫어?"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연구하기 좋아하지만, 정작 깊이 파고드는 건 단
하나도 없지. 음, 그러고 보니 너! 마법에 대해 공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군. "
"그게. 어, 그러니까. 우리 드래곤은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마법을 익히게
되잖아요. 그래서 다른 마법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베르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 왜 마법을 공부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래. 용언은 그렇게 얻게 되겠지. 헌데, 인간마법은 어쩔 건 데? 설마 용언을
가르칠 생각은 아니겠지?"
"아이고, 로이나님도 참. 용언이 가르친다고 되는 겁니까? 인간의 정신력으로
용언이라니. 전 제 제자를 벌써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
"그럼 엘프 마법이라도 가르쳐보지?"
로이나의 연이은 말에도 베르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에휴, 벌써 해봤죠. 엘프 마법도 공격 마법 빼니까 몇 개 되지도 않던데요. 인간
마법하고 합쳐서 여덟 개던가?"
"그래? 엘프 마법 중에서도 공격 마법이 그렇게 많았나?"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엘프 마법이 열두 개밖에 안 되는지라."
"푸풋! "
베르네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프리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르네의 어벙한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마법의 종주라는 드래곤이 마법이 몰라 찾아오다니.
드래곤 역사상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희귀한 일이었다.
"야! 너 웃지마. "
"후후후. 알았어요. 근데, 베르네미스님. 아직도 베르네라는 이름을 쓰시네요. "
"그게 뭐?"
베르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프리미아 앞에서 우스운 꼴 보였던 게
민망해서였다.
"지겹지 않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난 유희 때 영웅이 되거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안 하잖아. 다른
지역으로만 가면 같은 이름으로 유희를 즐겨도 상관없어. "
"아, 그런 장점이 있구나. "
"근데, 프리미아. 너도 생각을 짜내봐."
베르네가 프리미아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고 나왔다. 지금 그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문제였다.
생애 처음으로 둔 제자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다니. 제자에게 너무 미안했다. 또,
덥석 스승이 되겠다고 나섰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뭘요?"
"내가 제자를 하나 뒀거든. 인간이야. 근데, 이 녀석한테 가르칠 마법이 없단
말이야. "
"문제는 베르네미스님이 마법을 모른다는 거군요."
"그렇지.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칠 텐데. 마법에는 영 흥미가 없어서 말이야. "
프리미아가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해결책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후, 프리미아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마법에 대한 기본 원리는 가르쳤죠?"
"물론이지. "
베르네미스가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기초부터 하나씩 가르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였다.
"그럼 책을 주세요. "
"책?"
"예. 마법의 기본 원리는 알고 있다고 하니까 주문만 알면 되잖아요. 뭐,
주문만으로 안 되는 것도 많지만, 그건 베르네미스님의 지식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
"책이라."
베르네미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희망이 보이는 모양이다.
"풋! "
이번에는 로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르네의 표정 변화가 너무 즐거워서였다.
저렇게 단순하다니. 자신과 같은 드래곤이 맞나싶었다.
'베르네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멍청하다니까. '
로이나의 생각을 눈치 챈 베르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스레 창피한 기분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프리미아가 웃을 땐 뭐라 시비라도 걸었지만, 로이나가 웃자 뭐라 말하기도
힘들었다. 누가 뭐래도 서열상 로이나가 위였기 때문이다.
'에고, 이게 무슨 꼴이냐?'
"근데, 책은 어떻게 구하지?"
"예? 그거야 베르네님이 알아서 구하셔야죠. "
"아고, 또 왕궁에 찾아가서 협박해야 하나?"
"그래도 보석을 달라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책이야 어차피 필사하면 되니까. "
"뭐, 그건 그렇지만. 알았다. 근데 넌 여기 웬일이냐?"
베르네는 일단 자기 일이 일단락되자 프리미아의 방문 이유가
궁금해졌다. 평소에 로이나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문
프리미아. 괜한 호기심에 눈이 반짝 거렸다.
"아, 맞다. 로이나님. 저."
말을 하던 프리미아가 베르네를 바라봤다. 둘이서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의견 표시였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냐?"
"괜찮아. 프리미아. 베르네는 괜찮으니까 말해."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래곤 중에서도 호기심 제왕이
베르네 아니던가? 호기심 제왕이 베르네 아니던가? 호기심을 풀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 예. 로이나님. 저기. 라한의 실종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
"그래?"
"라한? 로이나님, 라한을 찾은 겁니까?
"찾았는데. 또 사라졌어. "
"이런. "
베르네가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을 한 번 만나보려고 했던 베르네였다.
그런 기회가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저, 베르네님. 라한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십니까?"
"당연하지. 라한을 처음 본 드래곤이 바로나라고. 아마 대륙전체 종족을 통틀어도
라한을 빨리 본 순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걸."
"그.래요?"
베르네의 음성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라한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를
자랑스럽게 만든 듯했다.
헌데, 프리미아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드래곤이 고작 인간을 알고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다니. 라한이 관련된 일에 대해 서 자기 예상과 어긋나는 일이 자꾸
벌어지자 순간 짜증이 일었다.
'그 인간 대체 뭐야? 베르네님도 알고 있단 말이야?'
"프리미아. 말해봐. "
로이나의 재촉에 프리미아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예. 아마 이번 실종은 타의에 의한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럴 가능성이 높지. "
"근데, 라한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많지 않잖아요. "
"그렇지. "
프리미아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로이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미 오래전에 한
번씩 생각했던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저희 드래곤입니다. 또, 그쪽은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꽤 모인
파티라서."
"드래곤들이 그를 납치한 게 아닌가 조사해야 한다는 거로군. "
"예. 그렇게 결정 났습니다."
"드래곤은 아니야. "
로이나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로이나가 이미 생각하고 있으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회의 결과가 그렇게
났기에 말하러 왔을 뿐. 로이나에게 무언가를 충고한다거나 알려주려고 온 건
아니었다.
"이미 조사해보셨군요. "
"조사라고 할 것도 없지. 로드가 된 로테마이어스가 대륙 서쪽 끝에 가 있으니까.
다른 곳에는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거다."
로테마이어스는 베르타라스를 만난 후부터 계속 고룡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차가운
기운과 관계있는 화이트 일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만나서 크라이드리안의 상세를
살피게 했다. 조만간 로이나도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래요?"
"응. 크라이드리안이라는 녀석을 치료하느라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고 있더군. 아마,
고룡들 모두 만나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로드 밑에 있는 다른 드래곤들은 내가
이미 불러서 물어봤다. 최근에 인간을 납치한 적이 있는지 물었는데, 모두 없다고
하더군."
"아, 그렇군요. "
로이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라한에 대한 얘기를 하자 서글퍼진 듯했다.
"그럼 다른 일행들은?"
"굴fp를 벗은 존재들의 모임을 조사한답니다."
"그래.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이지. 하지만."
뭔가 말을 하려던 로이나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로이나의 애매한 태도에
프리미아와 베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성격이 아니었기에 의아했음이다.
로이나는 라한이 납치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한의 성격을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한은 자존심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 라한이 누군가 납치하려고 하는데 곱게 납치당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설사 상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하더라도 테세르를 보내
도움을 요청해야 정상이었다. 그게 로이나가 알고 있는 라한이었다.
"그럼 가서 말할까요?"
"마음대로 해. "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조사하는 건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마음대로 해. "
라한이 사라지자 로이나가 일행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다녔던 것도 라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헌데, 그
연결 고리가 사라졌다. 그들이 하는 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
"그래. 마법을 사용해서 돌아가. "
"예. 로이나님. 텔레포트. "
로이나가 마법사용을 허락하자 프리미아가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이동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베르네가 편한 얼굴로 말했다.
"누님. 근데 라한은 언제 만났던 겁니까?"
"너하고 헤어지고 바로. "
"아, 아깝네. 저도 라한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거든요."
"나중에 시스마란하고 같이 만나보도록 해."
"예. "
로이나의 얼굴에 혼자 있고 싶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를 눈치챈 베르네가
헛기침을 해댔다.
"흠, 흠. 누님. 저 가볼게요. "
"그래. 너도 마법 써서 가라. "
"예. 누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텔레포트!"
베르네까지 사라지자 로이나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 상태로 라한과 자신에
대해 생각해봤다.
'왜 라한에게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로이나 스스로도 해답을 몰랐다. 그냥 생각하면 걱정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라한은 어둠 속에서 장장 보름을 보냈다. 어둠과 외로움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일행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봤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은 '일단 일행들과 만나지 말자'였다. 자신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았나? 자신 때문에 오히려 안전할 수 있는 이들이 위험에 처한 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일행들과 떨어져 있을 결심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일행에 대한 생각만으로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행들에 대한 마음을 다잡은 건 단 며칠에 불과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이
지긋지긋한 창고를 탈출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해봤다.
"이 방법이 성공해야 할 텐데. "
라한이 그동안 주력으로 삼은 건 마법이었다. 비록 1서클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대마법사라 생각하는 라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불마법, 물마법, 땅마법, 바람마법. 네 가지를 한 마법으로 합치는 건 성공했다.
아직 시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방법이면 틀림없이 새로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과연 저 무지막지 한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마법은 만들어냈지만, 이 새로운 시도가 창고를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창고
벽면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보자.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
라한이 제령기와 제란기를 한 번씩 점검했다. 심법을 돌리는 게 아닌 단순히
점검하는 수준이었다. 자칫 심법을 돌렸다가 가진 기운마저 빼앗길 수 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좋아. 엡솔루트 레이저(Absolute laser) !"
라한이 새로 만든 마법을 눈앞에 시전했다. 이에 은빛과 금빛이 묘하게 려인 둥근
톱니가 라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라한이 만들어 낸 마법이 실체화 된 모습이었다.
시전 된 마법을 보며 라한이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론만으로 만들었던
마법이었기에 확실하지 않았던 엡솔루트 레이저. 막상 눈앞에 떠오르자 감회가
새로웠다.
"이게 내가 만든 마법이란 말이지? 멋진데. "
라한이 감탄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4대 원소 마법의 결합. 너무 감격스러워서 벽에 쏘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엡솔루트 레이저는 라한이 만든 마법의 결정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륙 그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는4대 원소의 결합. 그 한가지만으로도 이름을 떨치기
충분했다.
하지만, 라한의 능력은 단순히 엡솔루트 레이저 하나에 국한되지 않았다. 4대
원소를 한 번 결합했다는 것. 그건 다시 4대 원소를 결합할 수 있다는 말도 되었다.
지금까지 대륙에 없었던 마법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후우, 아깝지만 쏴야겠지. 엡솔루트 레이저!"
라한이 다시 한번 시동어를 외쳤다. 라한의 시동어에 눈앞에 떠있던 둥근 톱니가
벽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갔다.
위이이잉!
크카카카카카캉! 채채채챙!
마치 금속으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벽에서 울려나왔다. 톱니가 벽을 때리는
소리였다.
위이이이잉 !
카카카카캉! 채챙! 채챙!
둥근 톱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벽면을 때렸다. 이에 벽면에서 불꽃이 튀며 창고를
환하게 밝혔다.
"제발 뚫어라, "
엡솔루트 레이저는 벽면에 계속해서 흠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벽면이
서서히 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런 파임이 벽을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젠장할. 이놈의 벽은 도대체 두께가 얼마야?"
라한이 질린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 욕설이 거의 끝날 때쯤 시끄럽게 들려오던
소음도 멎었다. 라한이 시전한 마법이 힘이 다해 멈춘 상태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라한이 엡솔루트 레이저가 가격한 벽면을 보며 연신 욕을 쏟아냈다. 결국 벽면을
뚫는데 실패한 탓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벽에 근 50센티미터 깊이의 홈을 파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헌데, 아직도 밖이 보이지 않았다. 50센티미터를 훨씬 넘은
두께인 듯했다.
"돌아버리겠군. 엡솔루트 레이저는 제령기의 소모가 큰 편인데. "
사용한 힘과 남은 힘을 비교해보며 라한이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엡솔루트 레이저만 사용한다면 앞으로 대여섯 번 정도 쓸 힘밖에 남지 않았다.
헌데, 만약 그 안에 벽을 뚫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기다리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엡솔루트 레이저만 고집하는 건 너무 무모한 도박으로
보였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
결국 라한이 엡솔루트 레이저의 사용을 포기했다.
엡솔루트 레이저로 벽을 뚫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뚫었다
하더라도 라한이 빠져나갈 구멍으로는 부족한 탓이다. 결국, 뚫는 정도가 아닌
잘라내는 정도가 되어야 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대 원소까지 결합했는데. 우씨, "
한 마디 불평을 토한 라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엡솔루트 레이저보다 더 강한
마법을 만들어 내야 할듯했다. 아니면,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한참 고민하던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만으로는 안되겠군. 검만으로도 안되고. 그럼 섞어?"
라한이 묘한 발성을 해냈다. 마법과 검을 려는 방법. 지금까지 대륙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인챈트는 이미 돼 있어서 안 되니까. 음, 인챈트 아닌 방법으로 섞어야
하나?"
인챈트. 대륙에서는 연금술로 알려진 방법 외에는 검과 마법을 섞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조차 없었다. 검과
마법이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마검사라는 직업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마법에 재능 있는 사람이
검을 조금 익히거나, 검에 재능 있는 사람이 하급의 마법을 익히는 정도에 그쳤다.
그 중 마법이 주가 된 마검사는 갑자기 공격해오는 적을 상대하는 정도로만 검을
사용했다. 검을 주로 사용하는 따검사도 마법을 단순히 견제용 이상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견제용으로 써서는 가능성이 없어. 검을 돕는 마법 마법을 돕는 검이 필요해. "
라한은 애초에 검과 마법을 하나로 묶을 생각을 먹었다 아니, 서로 돕도록 만들어서
능력을 배가시킬 작정이었다.
"그럼 내가 진짜 마검사가 되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한이 마검사가 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검술 자체에 재능이
없는 탓이다.
검을 휘두르는데 재능 없는 라한이 마검사라니. 테세르가 들었다면 주인 미쳤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일단 해보자. "
라한이 검을 꺼내 들고 찬찬히 살폈다. 검에 대해 먼저 이해한 후, 그에 걸맞은
마법을 생각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한참살핀 후에야 마법 공식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륙에 없는
방법이니만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쉽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했다.
라한 일행. 지금은 라한이 빠진 일행을 따르던 이클리프가 루이에에게 다가왔다.
"루이에님. "
"무슨 일이지?"
"두 가지 소식입니다. "
샤르비엘 후작이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라한 일행에게 보낸 건 정보를 좀 더
수월하게 전하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정령사인 해리언에게도 통신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무구를 전해준 것이다.
헌데, 무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었다. 지금까지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냈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랜만이군. "
"죄송합니다. "
"자네가 죄송할 건 없지. "
라한 일행도 해리언과 파울이 누군가에게 정보를 주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동안은 별 상관없다는 생각에 통신 마법을 쓰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게 흐르고 있었기에 그들을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혹,
그들로 인해 라한이 납치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샤르비엘 후작은 두 명 정도 보내면 제대로 된 통신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 일행이 본격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자 통신할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되었다. 카이렌의 은밀함과 치밀성이 만든 작품이었다.
"먼저 확실한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게. "
"그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클리프의 말에 루이에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후, 짧게 되물었다
"음, 목적지는?"
"일단 남쪽이라는 것만 알려졌습니다. 현재 위치로 봐서는 케라스 왕국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
"케라스 왕국이 라."
루이에가 말을 길게 끌며 회상에 잠겼다. 어느 왕국을 가든 루이에가 죽인 사람은
존재했다. 이번 회상도 그런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소문보다 약했지 . '
"두 번째 소식은?"
"그들의 리더로 알려진 라한이라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
"보이지 않는다? 전에도 그런 소식을 전해 왔었지, 확실한 건가?"
루이에의 물음에 이클리프가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편하게 말하게. 내가 잡아먹지는 않으니. "
"예. 그게, 저 보이지 않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헌데, 지금까지도 수시로
모습을 감췄던 터라 일행에서 완전히 빠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답니다. "
"그렇군. "
루이에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루이에가 입을 다물자 이클리프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뒤늦게 본 루이에가 다시 말했다.

"말해보게. 내가 편하게 대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
"또 죄송하다고 하는군. 됐으니 말해보게. "
"일행에서 빠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헌데, 수시로 모습을 감췄던 사람이라서
일행에서 완전히 빠졌는지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
루이에게 침음성을 흘리며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헌데도 이클리프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도 루이에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설명을 하려했던 것 같은데?"
"아, 예. 이번에 사라진 사람은 용병이라고 합니다. 여자인데, 엄청난
미인이랍니다. "
"여자? 상황이 묘하군. "
루이에가 이채를 발했다. 거의 동시에 사라진 남녀. 뭔가 의심을 사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쪽에서도 서로 눈이 맞아 사라진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
"파울과 해리언 말인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있던 원래 일행들 말인가?"
"파울과 해리언 얘깁니다. "
"그들의 원래 일행은?"
"아무런 얘기가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 일행들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아서
묻기가 껄끄럽답니다. "
파울과 해리언은 속이 깊은 사람이다. 샤르비엘 후작이 굳이 그들을 골라서 라한
일행에게 맡긴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라한과 사라진 여자가 서로 눈이 맞았다고 평가했다. 그건 평소에도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고 봐야 했다. 헌데도 원래부터 함께 했던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루이에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뭔가 이상하군. 그들이 착각한 건가? 아니면, 기존에 일행들이 착각한 건가? 흠,
아무래도 기존에 있던 일행들이겠지. '
결국 루이에는 기존 일행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 내렸다.
단 하루만 더 생활해도 그 만큼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된다. 헌데, 파울과
해리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랫동안 지냈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파울과
해리언보다 그들의 판단을 더 믿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이라고? 설마. 죽은.건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라한이 죽었다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일행의 얼굴에
감돌았다는 비장감을 설명할 길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봐야겠어. '
"이클리프. 떠날 채비를 하게. 서둘러야겠어. "
"예, 루이에님. "
그날 루이에와 이클리프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기만 했던 루이에. 이젠 그들과 함께 할 때가 온 듯했다.
물론, 샤르비엘 후작이 의도했던 일과는 대치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루이에가
샤르비엘 후작에게 몸을 의탁한 것 자체가 정보와 재미를 위해서였다.
라한 일행이 더 궁금했고 재미있을 듯 했기에 바꿔보고 싶었다. 샤르비엘 후작에서
라한 일행으로 말이다.
라한이 마법 공식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5일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5일을 공식들을
조합하는 데 사용했다.
라한이 창고에 갇힌 지 벌써 20일이 지난 셈이다. 이미 식량은 떨어진 지 오래.
물마법으로 만들어내는 물이 없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죽음을 맞았을 터였다.
"에고, 되려나?"
라한이 축 처진 채 말했다. 이젠 일어나는 일조차도 힘에 겨웠다.
"이 방법이 실패하면 난."
차마 끝말을 잇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리기 싫었음이다.
헌데도 자꾸만 죽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잘 때도 죽는 꿈, 멍하게 있을 때도
자신이 죽어 한줌 흙이 되는. 그런 끔찍한 꿈과 상상이었다.
"세라 샤프니스(Sera sharpness) 마법뿐이군. 제발."
세라 샤프니스는 라한이 새로 만들어낸 마법이다. 90퍼센트의 윈드 마법과
10퍼센트의 나머지 원소 조합으로 만들어낸 세라 샤프니스. 라한에게는 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세라 샤프니스 마법은 대상을 날카롭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대장간에서 파는 싸구려
검도 세라 샤프니스 마법을 받으면 명검에 비견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라한이 선택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으차! "
챙-!
라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에 매달려 있던 세라 소드를
뽑았다.
"믿는다. 세라 샤프니스!"
라한이 마법을 시전하자 세라 소드가 미약한 빛에 다가 사라졌다. 라한의 마법이
검에 시전된 거였다.
"제발. 제발."
검을 휘두르기 전에 라한이 몇 번이고 세라 소드에게 빌었다 자신의 목숨이 지금
세라 소드에 달려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제발. 하앗!"
라한이 세라 소드를 벽에 내치쳤다.
채재재재쟁! 스슥!
라한의 세라 소드가 벽면을 갈랐다. 중간에 잠깐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완전히 갈라 버렸다. 라한의 세라 샤프니스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됐다. 됐어. "
눈물이 핑 돌았다. 세라샤프니스마법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벽을
가른 것으로 만족했다.
어차피 세라 샤프니스 마법은 마나 소모가 거의 없는 하위 서클의 마법. 마음만
먹으면 수십, 수백 번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앗! "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헌데, 전혀 갈랐던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갈랐다. 라한의 검술 실력이 형편없어서였다.
"젠장, 어떻게 검만 휘두르면 이 모양이냐? 조각칼은 정확하게 휘두를 수 있는데, "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잡고 휘둘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전혀 다른 방향을 잘랐다.
라한의 검술 재질이 형편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썩을. 미치겠네. 에잇! 에잇! 하앗! 하앗! 하압!"
라한이 세라 소드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이젠 방향을 잡고 어쩌고 하는 준비
동작도 없었다. 아예 벽면을 걸레로 만들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휘두를 뿐이었다.
"죽어라! 받아라! 나쁜 놈! 젠장할!"
기합에서 욕설로 바뀌었을 뿐. 라한의 휘두름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라한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얼굴에는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갇혀 지내며 쌓였던 울분을 검을 휘두르면서 푸는 듯했다.
"하앗! 이얍! 압! "
한참 검을 휘두르던 라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상태로 벽을 천천히 살폈다.
"뚫렸다. 하하하하. 뚫렸어. "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미스릴 벽면에 구멍이 뚫렸다. 비록 주먹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됐어. 하압! 압! 이얏!"
라한이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힘찬 휘두름이었다.
"하압! 아앗!"
채챙! 챙그랑!
한참 휘둘리던 세라 소드가 벽면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라한이 시전했던 세라
샤프니스의 지속시간이 다된 것이다.
"으윽! 젠장. "
손아귀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세라 샤프니스!"
아픔을 애써 지운 라한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세라 소드를 좀 전보다 더
힘차게 휘둘렀다.
"하압! 아압! 아얏!"
라한이 근 아홉 시간 동안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중간 중간 계속 마법을 시전해서
세라샤프니스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힘이 달릴 땐 쉬어가면서 체력을 아쪘다. 이제 끝이 보이는데 기력이 다해
의식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압! 후우, 후우. "
한참 휘두르던 라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벽면을 살폈다. 벽면에는 어느새 기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됐어. "
세라 소드를 허리에 찬 라한이 희열에 찬 외침을 토했다. 정말 길고 길었던
20일간의 감금생활. 이제 그 끝이 보였다
라한이 구멍에 머리를 디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이제. 자유.다. "
한마디 내뱉은 라한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홉의 칼 휘두름으로 지칠
대로 지친 탓이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계속 남아 있었다.
정령왕과의 대화
다음날 라한이 초췌한 얼굴로 눈을 떴다. 빠져나왔다는 즐거움은 가득했지만, 아직
음식 섭취를 못했던 라한. 잠을 자고 일어나도 체력 회복이 거의 되지 않았다.
아, 배고파.
비틀!
라한이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서 다시 쓰러질
뻔했다.
이러다 굶어죽겠다.
라한이 주변을 한차례 훑었다. 그 후, 의아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길이 아니었군.
라한이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예상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나온 셈이다.
라피안이 만든 창고는 원래 동굴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동굴의 입구였기에 방향을
잘 잡고 벽을 뚫었다면, 밖으로 나올 수 있어야 했다.
헌데, 라한이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입구가 있었던 쪽이 아닌 다른 쪽을
뚫었다는 의미였다.
"인생이 왜 이러냐?"
라한이 벽에 손을 짚은 채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만 더 지체해도 굻어죽을 것 같아서였다.

한참 걸어가던 라한이 작은 홀에 도착했다. 그 홀의 중앙에는 작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게. 뭐지?"
단위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선뜻 상자를 잡아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애초에 갇혔던 것도 상자를 잘못 만진 탓 아니던가, 이제 상자만 보면 괜히
겁부터 났다.
"음, 아무 이상 없지?"
라한이 주변을 돌며 상자를 천천히 살폈다. 다행히 이 상자에는 어떤 기관도
연결되지 않은 듯했다.
삐걱!
라한이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팔찌와 목걸이?"
상자 안에서 발견된 건 미스릴로 만들어진 팔찌와 목걸이였다. 칼라피안이 라한에게
남겨주려 했던 그것 같았다.
"젠장. 이게 왜 여기 있냐고! 저 창고 안에 있다면서! "
자신이 나온 창고와 이곳의 거리는 무려 백 미터가 넘는다. 기관장치 정도로 상자가
옮겨질 수 없는 거리였다. 거기다 이 상자 자체에는 연결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물이 없는 곳에서 칼라피안의 유물을 찾으려 했음이다.
"칼. 라. 피 안. 이, 이."
가만히 생각해보자 칼라피안에게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위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에휴, 믿은 내가 잘못이지. "
칼라피안도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처음 보물을 둔 곳은 라한이 갇혔던 그
창고가 분명 맞았다.
평소에 의심이 많았던 칼라피안. 왠지 불안한 마음에 보물을 한 번 더 옮겼다.
칼라피안은 뒤에 옳겼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라한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라한이 팔찌와 목걸이를 품에 대충 집어넣었다.
"일단 가자. "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동굴 통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역시나 한 쪽 손으로 벽면을
짚은 채였다.
"헉, 헉!"
한참 걷던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굴 안에서 보낸 시간만 벌써 열 시간이
넘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동굴이 끝없이 이어지자 정신적인 피로가 라한을
잠식해왔다.
"더럽게 기네. "
라한이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이젠 반쯤 체념한 듯 기대감 가득하던 표정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시 다섯 시간 정도를 걸었을 때, 동굴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동굴이 막혀 있었다. 밖이 나을 거라는 기대 하나로 힘겹게 버텼던 라한. 너무 큰
절망감에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이, 이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세라 샤프니스!"
라한이 세라 소드에 마법을 시전했다.
이, 안 돼! 그럴 리 없어! 있을 거야!
쿠쿵! 쿠루루룽! 크캉!
"아앗!"
한참 칼질을 하던 라한이 순간 손으로 눈을 가렸다. 벽면 건너편에서 빛이
쏘아져왔기 때문이다.
라한은 무려 20일 이상 햇빛을 보지 못했다. 자칫 실명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젠장. 봉사될 뻔 했잖아. "
다행히 라한의 손이 늦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을 치렀을 터였다.
한참동안 눈을 가렸던 라한이 몸을 뒤로 돌렸다. 어두운 쪽을 바라본 상태로 서서히
손을 뗐다. 일단 밝음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빛에 적응되자 몸을 천천히 돌렸다. 아직 눈이 부신 건
여전했지만, 견딜 만했다.
"살았다. 근데 낮이었군. "
라한이 찢겨진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해가 떠 있는 위치로 봐서는 오후 4시쯤 된
듯했다.
하지만, 아직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라한이 찢은 벽면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또 부수자. 하앗!"
다시 벽을 내려쳤던 라한이 검을 놓치고 손을 잡고 주저앉았다. 세라 소드가 벽을
가르지 못하고 튕겨 나온 탓이다.
"젠장. 시간 다 됐잖아. "
라한이 빛에 적응하기 위해 보낸 시간은 대략 10여 분. 이 때문에 세라 샤프니스의
지속시간이 다 된 듯했다.
"으이구, 바보. 세라 샤프니스! 하앗!"
라한이 다시 세라 샤프니스를 시전했다. 그리고 세라 소드를 들고 다시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 한 독기가 담긴 칼질이었다.
라한의 칼질은 해가 졌을 때에야 끝났다. 동굴 벽면을 뚫는 데 2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그래도 미스릴 벽면을 뚫을 때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 라한의 상태는 최악에 치달았다. 오랫동안 굶은 상태에서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다.
물론, 그동안 수시로 쉬며 힘을 충전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 인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헉, 헉. 다 했다. "
뚜벅! 뚜벅!
털썩!
한 마디 내뱉은 라한이 비틀거리며 찢은 동굴 틈으로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자리에
엎어져서 잠을 청했다.
라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한밤중이었다. 얼굴이 땅으로 향해 있어서 달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믐인 듯 어둡기 그지없었다.
으, 으.
신음을 토한 라한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라한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응? 골치 아프군. '
라한이 느끼기에 상대는 한 명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들이 몬스터가 됐든 산짐승이 됐든 라한에게는 위험한 상대였다. 상대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만 성하면.'
아직 제령기와 제란기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상태로는 단순히 일어서는 행위조차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젠장, '
"에라 모르겠다. 누구야?"
엎어져 있던 라한이 몸을 벌렁 뒤집었다. 그 상태로 하늘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죽이려면 죽여. "
-무모한 인간이로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근데 이 인간이 맞나?
-맞아. 분명 저 인간이 라한이라는 놈이다. 그때는 세심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꽤나 무모한 놈이었군.
들려온 목소리에 라한이 눈을 굴려 주변을 형체의 특이한 모습이 눈에 잡혔다.
"너희들은 뭐냐?"
-소개를 안 했군. 우린 정령계에서 왔다.
"정령?"
-후후, 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라고 한다.
-난 땅의 정령왕 노아스라고 한다.
-샐리온.
-난 전에 본 적이 있을 거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라고 한다. 네 명의 정령왕이
라한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라한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의아한 만남이었다.
"왜 찾아왔냐고! 심심해서 놀러 나온 건 아닐 거 아냐?"
-흠, 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속도를 직접 보고
싶다.
실피드가 대표로 대답했다. 한 번 익혔던 안면이라서 그가 맡기로 한 듯했다.
"놀고 있네. 지금 내 꼴 안 보여? 이 상태로 달리라고? 배 째! 난 못해. "
-상태가 어떻지? 난 모르겠는데.
"정령왕이 그것도 몰라? 뭔 정령왕이 이래? 테세르보다 못하잖아."
라한의 말에 주변 정령왕들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봤다. 자신들을 하찮게 본
것에 화가 치밀었다.
-우린 정령왕이지만 힘을 가지고 온 게 아니다.
"뭔 말이야? 알아듣기 쉽게 좀 얘기하면 안 돼?"
-정령은 소환자가 없으면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물론, 우리 정령왕들도
마찬가지로 소환자가 없으면 물질계에 나타날 수 없어.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택한 방법은 영상만 이곳으로 오는 거였다. 지금 우리는 정령계에
있다는 말이지. 네가 보고 있는 건 정령계에 있는 우리 영상일 뿐이다.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정령들.
그들도 라한처럼 정령계에서 영상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라한의 몸
상태를 알 턱이 없었다.
"쳇, 그럼 허깨비잖아.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지금 네 몸 상태가 어떻지?
"엉망이다.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꺼져!"
-우린 네가 달리는 모습을 봐야 한다.
실피드의 말을 들으며 라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허상에 불과한 이들. 더 이상 겁먹지 않고 음식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어디 가는가? 우린 네가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반드시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씨, 자꾸 귀찮게 굴래? 배고파 죽겠다니까. 보고 싶으면 음식 가져와! 음식 주면
달려주지."
-흠, 그건 힘들다 아까 말했다시피."
"영상뿐이라서 힘들다 이 말이지?"
-그렇다.
"그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얘기잖아. 기운도 없으니까. "
라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의 말처럼 말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인
탓이다.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는군. 우린 먼저 확인할 게 있어서 로이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왔다.
실피드가다시 말했지만,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하지 않았다. 이젠 나무라도 찾아서
뜯어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라한이 대꾸를 하지 않자 정령왕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렸다.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 정령계에서 하는 의논인 듯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른 후,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라한. 바라는 게 뭐지?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다.
말해라.
역시나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라한이 침묵을 고수하자 오히려
정령왕들이 더 다급해했다.
-우리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답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말이다.
"."
-바라는 게 뭐지? 드래곤과 관계된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도와겠다.
라한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비틀거리고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한시도 쉬지 않았다.
'빌어먹을. 뭔 나무 찾기가 이렇게 힘들어. '
칼라피안의 창고가 있던 곳은 돌산이었다. 라한이 창고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곳
역시 돌산이었다. 나무라도 보이면 뜯어 먹으려 했건만, 막상 찾으려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고, 죽겠다. '
라한의 침묵에 정령왕들이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라한에게는 들리지
않는 정령계에서의 회의였다
회의가 끝나자 실피드가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한. 인간들이 정령계를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는 걸 알고 있다.
"."
이번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은 솔깃한 기색이
엿보였다. 실피드의 말투에서 뭔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걸 직감한 탓이다.
'또 뭐라고 하는 거야?'
-만약 네가 전력으로 달려준다면 널 정령계에 데리고 가겠다. 물론, 오랫동안
허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네가 가고 싶은 모든 곳에 데리고 갈 것을 약속한다.
'정령계라. 별거 아니네. 지들 사는 세상을 구경시켜 준다는 거잖아. '
라한이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걸었다. 눈앞에 숲이 보이는데도 무지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한의 걸음이 너무 느리다는 게 이유였다.
'이거 언제 도착하나?'
비틀!
콰당!
"윽!"
라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옆에서 떠들어 대는 실피드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었고, 그 때문에 바닥에 있던 돌부리를 보지 못 한 것이다.
"젠장 "
-이봐, 인간. 어때? 생각 좀 해 봤나? 좋은 조건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닌 정령계다.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서 정령계를 구경한 인간은 단 두 명뿐이다.
'두 명? 있긴 있다는 얘기네. 히허, 그거 참.'
라한은 정령계에 발을 디딘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정령계에
갔다 온 사람의 얘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서였다.
헌데, 한 명도 아닌 두 명이나 존재하다니. 처음이 아니라는 말에 오히려 호기심이
강해졌다.
"좋아. 달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
-말해라. 웬만하면 다 들어주겠다.
"일단 배가 너무 고프거든. 혹시 근처에 강이나 냇가 없나?"
-음, 강이나 냇가라. 잠시만 기다려라.
실피드의 모습이 영상에서 사라졌다. 정령계 내에서 어딘가로 간 듯했다.
실피드가 사라지자 쓰러져 있던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힌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기증을 잠시마나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죽겠네. 빨리 좀 와라. '
스으응!
-저쪽으로 5백 미터 정도 가면 작은 냇가가 나온다. 근데 냇가는 왜 찾는 거지?
"배가 고파서. "
-달리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
라한이 방향을 틀어서 걷기 시작했다. 실피드가 가리킨 그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렇게 약 십여 분 쯤 걸었을 때, 물소리가 들려왔다. 급류가 아닌 듯 잔잔하고
부드러운 물소리였다.
'살았다. '
물소리가 들리고 몇 분 더 걷자 작은 시냇물이 눈에 보였다. 물이 잠시 모이는 곳인
듯 웅덩이처럼 보였다.
첨벙!
라한이 물가로 다가가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한기가 라한의 정신마저 일깨우는
듯했다
"좋군. 스파클링(Sparkling)!"
라한이 물에 담근 손에 마법을 시전했다. 불마법과 바람마법을 적당히 섞어서
만들어낸 전기마법이었다.
치치직!
툭! 툭! 툭! 툭!
라한의 마법이 시전되자 물에서 묘한 소리가 만들어낸 전기가 물과 만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물고기가 한 마리씩 배를 위로 한 채 뜨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짓이냐? 감히 물의 정령왕인 내 앞에서 물을 죽이는 일을 하다니. 네
이놈!
라한의 마법을 본 엘라임이 분노에 찬 외침을 죽음을 물의 오염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물을 죽이긴 뭘 죽여! "
-네, 네 이놈! 감히 네가. 네가.
"시끄러! "
한 마디 내뱉은 라한이 물에 뜬 물고기를 손에 쥐었다. 물고기는 아직 죽지
않았는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덥썩!
"흠냐. "
라한이 꿈틀거리는 물고기를 산 채로 입에 넣었다. 피가 입가에 튀고 비늘이 입
주변에 달라붙었다. 헌데로 라한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맛있게 먹었다.
-저, 저. 야만인.
-저거 인간 맞아? 몬스터 아냐?
-인간이 생식을 하던가? 화식하는 게 인간 아니었나?
-흠.
라한이 물고기를 뼈째 삼키자 정령왕들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생식을 한다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도 비위 상하니까 입 좀 다물어. '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입을 먹는 데에만 쓰기도
바빴다.
우물우물
꿀꺽!
라한이 연달아 아홉 마리의 물고기를 씹어 삼켰다. 그 중에는 라한의 팔뚝보다 더
굵은 물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령왕들은 놀란 음성을 토하기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 몬스터와
인간이 어떤 면에서 다른지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끄억! 으- 좋다. "
라한이 배를 두드리며 바닥에 벌렁 누웠다. 배가 부르자 서서히 수마가 몰려왔다.
라한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던 정령왕들이 라한에게 다가갔다.
-이제 달려줄 수 있겠지? 네가 원한대로 물가가 어디인지 가르쳐줬잖아.
"좀 자고 보자. "
-이봐, 인간! 비록 영상뿐이지만, 우린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실피드가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 모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신이 달리는
걸 보고 싶어 하는지 그제야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봐. 정령씨. 아니, 정령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실피드라고 불러라. 우리가 너한테 인간씨라고 부르면 어떻겠는가?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실피드. 대체 왜 달리라는 건데?"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달리면 안 되겠는가? 우리가 찾는 인물과 같은 조건이면,
그때 다 말해주지. 물론, 조건이 안 되면 해명을 듣지 못하겠지만.
"난 무려 20일 이상 갇혀 있었어. 너무 오랫동안 해를 못 봐서 날짜감각이
오락가락하지만, 대충 그 정도 갇혀 있은 것 같단 말이야. 너도 생각을 해봐. 20일
동안해가 없는 어두운 곳에서 갇혀있다가 나왔는데, 처음 만난 놈이 아니, 처음
만난 놈들이 '달려봐.' 그러는데 '어 그래.' 하면서 달릴 사람이 어디 있어? 너라면
달릴 거야?"
라한의 대꾸에 실피드가 아무 대꾸를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황당한 요구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꽤나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말해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좀 이상한 건 인정하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다. 달려줄 수 없는가?
"좋아. 좋다고. 대신 아까 말했던 조건 잊지 말라고. "
-정령계에 데려가는 일말인가? 하하하. 당장 데려가주지.
라한의 긍정적인 대꾸에 실피드가 크게 웃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아, 지금은 싫고 나중에. 지금은 생각할 게 좀 많거든. "
-알겠네. 언제든지 연락하게.
라한은 창고 안에서 연구한 새로운 마법들을 다시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대충
생각해봐도 꽤나 획기적인 연구들로 보인 탓이다.
"근데 내가 너희들한테 어떻게 연락하지? 난 정령왕하고 계약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
-음 그렇군.
라한은 이번 기회에 정령왕과 계약해볼까 하는 흑심을 품었다. 그렇다고 테세르에게
불만이 많은 건 아니었다. 힘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 때문에 계약하려 한
것이다.
'드래곤은 힘들겠지?
좀 전에도 정령왕들은 드래곤과 얽히는 걸 껄끄러워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정령은 몰라도 정령왕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사용할 수 없을 듯했다. 하지만,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는 확실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터.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뭐, 어쩔 수 없이 너희들 중 한 명하고 계약해야겠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넌 이미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나? 우리 정령계에서는
이단아 취급당하는 그 정령과 계약한 걸로 아는데.
"테.세르. "
-그래. 테세르. 그를 통하면 우리를 부를 수 있다.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정령왕과 계약 할 수 있는 건수를
놓친 것이다.
"그냥 너희들하고 계약하면 되지 않나? 그럼 쉽잖아 "
-우린 계약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그 자체가
물질계에 큰 혼란을 주기 때문이지.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칫, 전에는 로이나 꼬봉으로 잘 다니더만. "
-그건 계약이 아니다. 서로간의 배려일 뿐이지. 그래서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정령계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게 싫어서 대부분 들어주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계약은 분명 아니다.
"비싸게 굴기는."
-테세르 정도면 우리와 연락하는데 문제는 없을 거다.
라한은 더 이상 정령왕을 닦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실피드의 얼굴에서 강경한
의지를 본 탓이다.
'아깝네. '
"그렇게 하지. 아! 조건이 하나 더 있어. "
뒤늦게 생각난 듯 라한이 실피드를 불렀다.
-뭔가?
"정령계에서 테세르를 따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따돌렸다는 소식이
들렸다가는.
-알겠다. 정령계 내에서 테세르의 지위를 올려주도록 하지. 이제 됐는가?
"한 가지 더. 로이나한테 날 찾았다는 얘기를 하지 말아줘. 나중에 내가 직접 가서
말할 테니까. "
이번 물음에는 실피드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정령왕들을 둘러보며
뭔가 의논을 나누었다.
"별거 아닌 일로 무지 고민하네. "
-로이나한테는. 비밀로 하지.
실피드는 라한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줬다. 거의 대부분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령왕과의 계약은 실패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정령왕은본래부터 누군가와의 계약이 금지된 존재였으니.
"이제 달려볼까?"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잠깐쉬어서인지 몸도 많이 나아진 듯했다.
-기대되는군.
"이봐. 실피드. 근데 다른 정령왕들은 내가 싫은가본데, 표정들이 영 안 좋아.
-그, 그건.
라한의 말처럼 정령왕들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얼굴은 더 심각했다.
"뭐야?"
-그건 로이나 때문이다.
"로이나? 로이나가 왜?"
-우린 로이나한테 널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헌데, 넌 우리가 널 찾았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말했지. 그 때문이다. 네가 한말 때문에 우린 로이나와의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다. 저기 엘라임의 얼굴이 더 심하게 찌푸려진 건 그가 물의
정령왕이라서 그렇다. 로이나 역시 물을 다스리는 블루 드래곤의 고룡이니까.
"쳇,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러네. 나중에 로이나한테는 내가 말해줄게, 그럼
너희들을 혼내는 일은 없을 거야. "
실피드의 심각한 말에 라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정말 심각한 내용인줄 알았다. 헌데, 듣고 보니 겨우 약속 때문이지 않은가?
별거 아닌 일로 긴장했다는 민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으로서는 정말 중요한 얘기였다. 다른 이도 아닌 정령이 누군가와의
약속을 어기다니, 그것도 물질계 최강인 드래곤과의 약속을. 정령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자, 이제 달려보지. 근데, 얼마나 빠른 속도를 원하는 거야?"
-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
"좋아. 약속 했으니 나도 지켜야겠지. 잘 보라고. "
스팟!
라한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근 20일 만에 처음으로 시전해보는 광견보였다.
라한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자 정령왕들이 뭔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실피드 어떤가? 저 속도면 되는 건가?
-아직 좀 부족한 것 같군.
-얼마나 부족한 거지?
엘라임의 물음에 실피드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정령왕을
한차례씩 살펴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조금.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아주 조금은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한계나 마찬가지다.
-그런가?
-15만 년쯤 전이던가? 그때 어떤 드래곤도 마법 대신 본체의 속도를 올리는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드래곤도 저 정도의 속도는 냈었지.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실피드의 설명에 다른 정령왕들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오래 전에 그런 드래곤이
있었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랬지. 근데 그 드래곤이 어떻게 됐었지?
-죽었지. 생명체가 버틸 수 없는 속도니까,
-그랬군. 그럼 처음부터 저 인간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닌가?
노아스의 되물음에 실피드가 웃으며 답했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저 인간이 우리에게 바랐던 것도 쉬운
일이잖아. 로이나한테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어차피
로이나한테도 알려준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찾아보겠다고만 했지 ,
-그건 그렇지.
-돌아오는군. 자자, 이제 신경 끄자고.
라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실피드를 비롯한 정령왕들의 입에서 나오던 말소리가
사라졌다 나머지 회의는 정령계 내에서만 하는 듯 했다.
"헉, 헉 달렸다. 이제 췄지?"
-그래 됐다. 수고 했다. 그럼 나중에 테세르를 통해서 연락해라. 정령계 구경
시켜줄 테니까.
"그래. 헉, 헉."
숨을 계속 헐떡이던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 기력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라한, 좀 무리하게 달렸더니 다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실피드의 인사를 끝으로 정령왕들이 하나씩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라한이 냇가의 돌에 몸을 기대앉았다.
"싱거운 놈들. 테세르! "
피식 웃음을 터트린 라한이 테세르를 소환했다.
스르릉!
-오? 오호, 주인. 살아 있었군. 대단한데. 난거기서 굶어 죽을 줄 알았는데.
툭툭! 주욱!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라한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라한의
볼을 건드렸다가 당겼다.
데세르의 수다에 라한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뭔가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참았다. 피로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끄러. "
-오, 우리 주인. 진짜 살아있다. 말도 한다. 이야, 놀라워.
테세르의 수다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정말 라한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야! 조용 안 해? 넌 내가 죽길 빌었다는 거야? 뭐야?"
-엄마야. 놀래라. 우와, 우와! 소리도 지른다. 진짜 살았네.
"이게 진짜. 너 죽을래?"
움찔!
테세르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호들갑 떨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놀란 테세르가 몸을 슬쩍 돌렸다. 도망가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동작 그만!"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차렷 자세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몸은 그대로 있는 상태로
180도 회전하는 머리. 테세르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에헤~ 주인. 화났어?
"닥쳐. "
-난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
"됐으니까 너 불침번 좀 서라. 좀 자야겠다."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근데 너무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았다.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어도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엥? 만나자마자 자는 거야?
"내 상태 보이냐? 지금 엉망이거든. 물론, 기분도 아주 더러워. 그니까 건드리지
마라. "
-옛. 대장님.
힘차게 대답한 테세르가 몸을 조금 분리해서 칼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칼을
한 손에 든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불침번 서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테세르의 준비 동작이 끝나자 라한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드는
행동이었다.
-아참, 주인. 근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씨! "
라한이 막 잠에 빠져들려 했을 때, 테세르가 말을 걸어 왔다. 이에 라한이 분노에
찬 눈으로 테세르를 노려봤다.
-아, 맞다. 잔다고 했지. 그럼 잘 자라, 주인.
테세르의 말을 끝으로 라한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근데, 주인. 대체 얼마동안 갇혀 있었던 거야? 식사는 얼굴 보니까 배고파
보이는걸.
"야! 너 죽을래?"
-아, 맞다. 잔다고 했지. 주인 잘 자!
"너 자고 일어나서 보자. "
-근데, 주인. 아까.
라한과 테세르의 이런 실랑이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계속 되었다. 그동안 라한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던 테세르. 자꾸만 라한의 잠을 방해했다.
퍽-!
-으악!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
결국, 라한의 주먹이 한 차례 휘둘러진 후에야 테세르도 입을 다물었다.
한편,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하기 위해 로테마이어스는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드래곤들을 만나고 다녔다.
"화이트 드래곤 중에서는 널 치료할 수 있는 이가 없구나. "
"죄송합니다, 로드님. "
그나마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드래곤은 고룡 뿐이다. 이
때문에 로드의 권위로 소환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크라이드리안의 상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
"전 괜찮습니다. 로드님. 저 때문에 더 이상고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
"아니다. 아직 우린 블루 드래곤의 고룡을 만나지 않았다. "
로테마이어스는 블루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고룡을 한 번씩 만났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 블루 일족의 고룡은 만나지 않았다.
블루 드래곤 중에서는 고룡이 단 둘 뿐이다. 그 중 한 드래곤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마나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고룡 중의 고룡이었다. 그런 고룡은 만나는
행동 그 자체가 금지되는 행위였다. 그리고 남은 블루 일족의 고룡은 단 한 명.
로이나뿐이었다.
"저, 블루 일족의 고룡이면 레이시아나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
"하지만, 지금 로드님과 레이시아나님은 껄끄러운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fp이시아나님이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함께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괜찮다. 어차피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 할 상대였다. 레이시아나는 내 어릴 적
친구였으니까. "
로테마이어스로서도 정말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어쩌면 레이시아나와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다른 일족의 고룡부터 만났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크라이드리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굽힘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을 아끼는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로이나도 프리미아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굴욕을 감수할 터였다.
"지금 레이시아나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저 혼자 가겠습니다. "
"아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레이시아나는 내 어릴 적 친구였다. 이번 기회에
그녀와의 오해를 풀어야겠다. 아카폴리안! "
아카폴리안은 정보를 담당하는 드래곤이다 로테마이어스가 그를 부른 건 그에게
로이나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함이었다.
후다다닥!
잠시 후, 엘프의 모습을 한 아카폴리안이 레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 로드님. "
아카폴리안이 무릎을 꿇은 채 명령을 기다렸다.
"레이시아나의 현재 위치에 대해 말하라. "
"예? 그게 저."
아카폴리안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최근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한 달 반쯤 전에 프리미아가 정보를 모아서 한 번에
알려오겠다고 전한 후로는 레이시아나님에 대한 정보 수집을 중단해서."
"프리미아가? 그녀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보냈는데. "
"한 달 반쯤 전에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님을 만났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에
다니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와 함께?"
"예, 로드님. "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를 존경하는 건 로테마이어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을 존경하는 정도와 같다는 것도 잘 알았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를 대하는 것과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을 대하는
것에 대해 서로 비교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맡긴 임무가 있는데 내팽개치고 레이시아나를 따랐다? 그건 좀
이해가 안 되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로드였기때문이다.
거기다 프리미아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적으로 규정한 자신의 뜻에 찬성했던
드래곤이다. 물론, 뒤에 좀 이해가안간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직 추측일
뿐. 현재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길 명분이 없었다.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와 동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들어온 정보가 있느냐?"
"예, 레이시아나님이 인간들과 동행하고 있었답니다. 근데, 그 인간들 중에
크라이드리안에게 상처 입힌 인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겠다고 했습니다. "
"뭐라? 류카라한이?"
로테마이어스는 아직도 크라이드리안을 해친 인간을 류카라한이라 믿었다. 처음
미심쩍어 했던 크라이드리안조차도 지금은 자신에게 이긴 인간을 류카라한이라
생각했다. 자꾸 다니면서 계속 듣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믿게 된 거였다.
"프리미아 말로는 라한이라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
"흠, 그와 동행한 이유가 있었군. 현재 프리미아의 위치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난 한 달 반 동안 프리미아가 정보를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는
케라스 왕국을 지나 루이나 왕국으로 향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
"근거는?"
"최근에 케라스 왕국 남쪽에서 프리미아를 봤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
"음, 케라스 왕국이라."
로테마이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아카폴리안과 크라이드리안도 침묵으로
로테마이어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원래 수아나 왕국의 중부에 있던 카이렌 일행. 라한의 실종이 확실시 된후,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 결과지금은이미 수아나 왕국을 벗어나 케라스 왕국의
남부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라한과 함께 이동할 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알았다. 그만 나가보도록!"
"예, 로드님. "
한참 생각한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을 내보냈다.
"크라이드리안. "
"예, 로드님. "
"우린 루이나 왕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프리미아와 레이시아나 일행을
기다리자꾸나 ."
"알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는 레이시아나가 카이렌 일행을 떠난 걸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루이나 왕국이 아닌 레이시아나의 레어로 향했을터였다.
"꽉 잡아라. 매스 텔레포트!
위이잉! 팟!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레이시아나를 만나기 위해 레어를 떠났다.
레이시아나가 없다는 걸 생각지도 못한 채로.
굴레를 벗은 존재 중 유일한 정령사인 제이슨. 레드리안을 만나고 자신들의
은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현재 위치는 케라스 왕국의 동남부. 여기저기 여행을
하느라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흠, 마음에 걸려. "
제이슨은 레드리안을 만나면서 뭔가 묘한 기분을 느쪘다. 레드리안이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뭐래도 레드리안은 자신에게 후손이 되는 입장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뭘까?"
레드리안이 제이슨에게 숨기고 있는 건 라한에 대한 정보였다. 라한에게 쿨샤크가
볼모로 잡혀 있기에 사실을 숨긴 것이다.
라한도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쿨샤크를 납치한 것이다.
라한의 치밀함이 새삼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
애써 의문을 지운 제이슨이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예상대로라면 두 달 안에 다른굴
레를 벗은 존재들이 돌아올 터. 서두르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돌아갈 수 없었다.
라한과 떨어진 카이렌 일행도 제이슨처럼 케라스 왕국의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보다는 루이나왕국과 조금 더 먼 곳이었다. 갑작스럽게
휴란트가 앓아누워서 3일을 지체한 탓이다.
만약 휴란트가 앓아눕지 않았다면 제이슨보다 한 발 앞서서 루이나 왕국으로 갔을
터였다. 아니면, 제이슨과 만났을 가능성도 높았음이다.
"휴란트는 좀 어때?"
"다 나았다. 이제 이동해도 될 정도야. "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이동하자. "
"그러지. "
지금 여관의 객방에는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 몇 명이 모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장난감 둘과 불청객 둘은 제외된 채였다. 또, 몸살을 앓았던 휴란트도 제외되어
있었다.
어차피 일행의 행보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이들이기에 별 상관없었다.
"근데, 베센 왕국이 확실한 거야?"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보면 거의 확실해. 그곳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증거가 몇 개 포착됐거든. "
"근데."
똑 똑!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저, 여관 주인입니다. "
"무슨 일이시죠?"
레테아가 문도 열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꼭 만나야겠다고 하는데요."
"손님요?"
"예, 두 명입니다. 워낙 간절하게 말하는지라. 거기다 함께 왔던 두 분과 이미
안면이 있는 듯해서 그럽니다."
"함께 왔던 두 명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왜 덩치 엄청 큰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하고 나이 좀 들어 보이는 사람하고
아는 사이로 보여서."
"파울하고 해리언인가? 음, 알겠습니다. 곧 내려가도록 하죠."
"예, "
여관 주인이 물러나자 레테아가 일행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가보지.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놈들 같은데."
"그러자. 어차피 중요한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잖아."
카이렌의 말을 끝으로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미아도 약간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반대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루이에의 합류
객방에서 나온 카이렌 일행이 홀로 내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잠시 있자
파울과 해리언이 손을 흔들었다.
흠.
파울과 해리언 옆에 있던 사람은 두 명이었다. 헌데, 그 중 한 명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레테아보다는 몇 단계 위, 프라하보다 아주 약간 아래로 보이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때 그 자로군.
저 자였어. 레티아와 내가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을 때, 옆에 있던 인간 말이야.
바로 저 인간이었어.
그래? 음.
잠시 침음성을 흘린 카이렌이 파울과 해리언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뒤를
프라하와 투바, 레티아와 프리미아가 조용히 뒤따랐다.
"우릴 만나러 왔다고?"
카이렌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에 파울 옆에 앉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에라고 한다. "
"흠, 그래서?"
"너희들과 일행이 되고 싶다. "
"일행에 대한 건 저 두 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
카이렌이 파울과 해리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들은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세작이나 마찬가지다. "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샤르비엘 후작을 떠날 생각이다. 그리고 너희들과 일행이
되고 싶다. 받아주겠나?"
루이에의 너무도 당당한 말에 오히려 카이렌이 의아스러워했다.
저 정도 실력자라면 빈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목숨이 걸려 있거나 아주
큰일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카이렌이 뒤를 보며 일행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알아서 해. 지금은 네가 우리 리더나 마찬가지잖아. "
"흠, 알았다. "
카이렌이 다시 루이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상태로 루이에의 눈을 바라보며 진실
여부를 탐지했다.
'진정이군, '
카이렌이 루이에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의 안위가 걸린
일이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루이에라고 했나?"
"그렇다. 음, 자네가 카이렌이라는 엘프겠군. "
"아는군. 왜 우리 일행이 되려고 하는지 물어도 되겠나? 그리고 샤르비엘 후작을
떠나려는 이유도 알고 싶군. 끝으로 저들이 당신 생각을 알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

카이렌의 긴 물음에 루이에가 웃음을 머금었다.


얼핏 소심해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루이에는 카이렌의 의문에 찬 말에 오히려
믿음을 가졌다.
자신이 일행이 된다면 그때도 카이렌이 리더가 될 터. 리더가 조심스럽다는 건 일행
모두의 생명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얘기였다.
"하나씩 대답하겠다. 당신들의 일행이 되려고 하는 건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보다 강해보이니 내 실력 정도는 한 눈에 알아차렸겠지. "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평소에 잘
짓지 않는 웃음을 오늘따라 많이 짓는 듯했다.
"나 정도 실력이 되면 세상이 참 무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당신들 일행은 나보다
더 강해 보이는데도 재미있어 보이더군. 그게 부러웠다. 당신 일행이 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좀 더 커질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고. 부정하지 않겠다.
"
"솔직하군. "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이 샤르비엘 후작을 왜 떠나려고 하느냐 였던가? 그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과 비슷하다 재미가 없었거든. 또, 그와 함께 있어봐야 내가
사는데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
루이에의 솔직한 대답에 이번에는 카이렌이 웃음을 머금었다.
"마음에 드는군. 마지막 대답은?"
"저들에게도 말했으니 알겠지. 그리고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난 저들과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
루이에의 대답을 들은 카이렌이 파울 일행을 바라봤다. 역시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이에가 샤르비엘 후작을 떠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좋다. 일행으로 받아들이지. "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 역시 당신들 일행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
"마음대로. "
"그리고 저기 있는 세 명은 샤르비엘 후작에게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나? 일행에
도움이 되는 놈들은 아닌 걸로 보이는군. "
루이에의 말을 들으며 카이렌도 아차 싶었다.
어차피 샤르비엘 후작이 저들을 맡길 때 했던 거래는 라한과 한거였다 라한이
사라진 지금. 그리고 라한이 사라졌다는 걸 이제는 파울 일행도 다 아는 현
상황에서 굳이 저들을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음이다.
"그렇군. "
"직접 보내기 뭣하면 내가 보낼 수도 있다. 원한다면 죽일 수도 있지. "
루이에의 너무나 담담한 말에 파울 일행이 몸을 떨었다. 특히, 루이에와 함께
지냈던 이클리프는 몸을 떠는 정도를 넘어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직접 루이에의
실력을 봤기 때문이다.
"이봐! 이번에 새로 일행이 된 이 친구가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군. 너희들
발로 걸어갈래? 아니면 죽여서 시체를 보내줄까?"
"그, 그건."
파울이 말을 더듬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샤르비엘 후작의 명령이라 쉽게
떠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두려움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흠, 죽고 싶은 건가?"
"파울. 가세. 후작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
"예. 해리언님. "
결국 해리언이 파울에게 철수를 명했다. 파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해리언의 말을
따랐다 두렵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럼 올라가지. "
카이렌이 몸을 돌리자 파울 일행이 여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프라하와 투바가 고소하다는 듯 킥킥거렸다.
"뭐해? 올라가자고. 새 친구가 왔으니 정보를 나눠 봐야 하지 않겠어?"
"좋지. "
카이렌 일행에 한 명의 식솔이 더해졌다. 그리고 두 명의 불청객이 사라졌다.
인원수로는 전력이 줄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된 것이었다.
루이에 혼자 힘으로 파울 같은 마법사 열명은 쉽게 상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라한은 꼬박 하루 반을 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본 건 졸고 있는 테세르였다.
'이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뭔 놈의 정령이 잠만 많아서는. 에고, 내 팔자야. '
라한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고 있는 테세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
괜히 푸념을 토한 라한이 테세르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심법 수련을 위해 무념무상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라한은 제령기와 제란기를 근 스무 차례나 돌렸다. 헌데도 아직 기운이 완전히 차지
않았다. 그 동안 소모된 기운이 너무 큰 탓이다.
'흠, 이제 반? 여기 터가 너무 안 좋군. '
보통 산은 기운이 충분하기 마련이다. 헌데, 이곳 멜카투라 산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산의 정상 부근인 이곳에만 기운이 부족했다. 이 모든 게 칼라피안이 만든
거대한 미스릴 창고 때문이었다. 미스릴 창고가 자연의 기운을 꾸준히 흡수하고
있으니 기운이 충만 할 턱이 없는 것이다.
"으차! 이제 움직여야겠지. "
라한이 졸고 있던 테세르 쪽을 바라봤다. 좀 전의 소리에 깼는지 심법 수련하는
도중에 깼는지 테세르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일어났냐?"
-주, 주인. 일어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밤새 한숨도 안자고 불침번 섰는데.
"입에 침이나 발라라. "
-어? 입?
테세르가 자기 입을 스윽 훔쳤다. 진짜 침이 묻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없는데?
"너 바보냐? 정령이 침 흘리는 거 봤어? 그리고 넌 몸 전체가 마나잖아. 침이 어디
있다고 흘리겠어?"
-아, 그렇구나.
"정령은 거짓말 안 한다더니. 널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단 말이야. "
-흠, 흠. 그거야 뭐."
테세르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령계 법칙에서 많이
어긋나 있파고 느낀 듯했다.
"테세르. 근처에서 내가 수련할 만한 동굴 좀 찾아봐! "
-동굴? 전에 그 창고에서 하면 되잖아.
"거긴 미스릴 덩어리라서 안 돼. 거기선 수련하다가는 마나 고갈로 죽기 딱
좋겠더군. "
-아, 그럼 이 산을 돌아다녀야 하는 거야? 귀찮은데.
테세르가 가기 싫다는 빛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라한이 혀를 끌끌 찼다.
"내 살다 살다 너처럼 게으른 정령은 처음 본다. 머리도 나쁘지, 게으르지. 아무리
찾아봐도 장점 하나가 안보이네. 야! 너 잘하는 게 뭐야?"
-내가 잘하는 거? 당연히 있지.
"뭔데?"
-뒷다마 까기. 주인 없는 데서 욕 엄청 잘해. 아마 주인도 들으면 내 욕 실력에
감탄할 걸.
라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죽을래?"
-왜? 잘하는 거 말하라면서?
"시끄러! 맞고 찾아볼래? 그냥 찾아볼래?"
-뭐만 하면 폭력부터 휘두르고 난리야. 쳇.
"뭐야?"
-간다. 가. 치사해서 간다.
테세르가 잽싸게 날아갔다. 뒤도 안돌아보고 달리는 모양새가 꽁지에 불붙은 닭
같았다.
"저 자식을 어쩌지?"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다시 심법 수련을 시작했다.
십여 차례의 심법 수련이 끝났을 때, 테세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헉, 헉. 찾았다 찾았어.
"어떤 동굴인데?"
-원래 베어울프가 살던 곳인데, 내가 쫓아보냈어. 청소까지 끝내고 왔으니까 가서
살기만 하면 돼.
"어쩐 일로 기특한 일을 다 하냐?"
-내가 원래 준비성이 철저하잖아.
테세르는 오늘 라한에게 너무 큰 죄를 지었다. 스스로 뒤에서 욕하고 있다는 걸
발설해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던 걸 동굴을 찾으면서 깨달았다. 둔해도 너무 둔한 테세르. 그걸
뒤늦게 깨닫고 아부하는 심정으로 청소까지 끝낸 거였다.
"가자. "
-어.
"슈라! "
라한이 오랜만에 슈라를 불렀다. 보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나마 슈라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쿠구구궁!
-음, 주인. 오랜만이군.
슈라가 돌과 흙, 습기가 묘하게 섞인 채로 나타났다. 신기한 모습에 테세르의 눈도
반짝 빛났다.
본래 얼음으로만 이루어졌던 슈라. 투바의 개조로 근처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몸체를 구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이곳은 돌과 흙이 지천으로 널린 냇가. 슈라의
몸이 그런 것들로 구성된 모습이었다.
"모습이 좋아 보이네. "
-투바라는 그 마족 덕분이지.
"후후, 슈라. 나 좀 태워주라. 아직 몸이 그리 좋지 못해서 말이야. "
-그러지.
슈라카 손을 내밀어 라한 앞에 내밀었다. 그 손 위로 라한이 타자 손을 들어 어깨에
내려놓았다.
가자.
-어디로 가면 되지?
테세르 앞장 서.
-응.
테세르가 앞장서자 슈라가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전에는 걸을 때 쿵쿵거리던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구성 재료 중 흙으로 발바닥을 만든 탓이다.
오, 멋진데.
동굴에 도착한 라한은 감탄성을 토했다. 자신이 원하던 딱 그 형태의 동굴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정령계 최고의 정령이자 위대한 라한 주인의 하나밖에.
음, 둘이군. 둘 중 더 나은 소환물인 테세르란 말씀.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하여간 저놈은 띄워주면 안 돼. 슈라. 테세르. 밖에서 알아서 놀아라. 너무
멀리가지는 말고. 난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라한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대충 자리를 잡았다. 그 상태로 미스릴 창고 안에서
연구했던 걸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빠져나가기 위한 마법만 연구했던 것을 확대 시켜서 보편화시키는 연구였다.
크라이드리안은 제이슨에게, 제이슨은 카이렌에게
루이나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필사르 평야.
그리 크지도 않지만 상당히 비옥한 곳이다. 이 때문에 과거 케라스 왕국이 루이나
왕국과 적대국일 때, 계속 노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가을이면 온통 금빛으로 가득 차는 루이나 왕국 최대의 평야인 필사르 평야. 이곳에
금발 머리의 미남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를 떠난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었다.
여기가.
루이나 왕국의 북쪽 필사르 평원이다.
아.
크라이드리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과거에 이곳에 와본걸 뒤늦게
기억해낸 거였다.
"내일 오후 쯤 프리미아 일행이 이곳을 지나갈 거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자꾸나.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평원의 한쪽에 있던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추수철이 한참 지난 겨울철이라서 오두막이 텅 비어 있었다.
오두막은 보통 농사일이 많을 때, 농부들이 쉬는 곳으로 사용된다. 이곳에서 식사도
하고 참도 먹는 그런 곳. 이곳에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우우웅!
로테마이어스가 뭔가 말을 하려 할 때, 그가 차고 있던 목걸이가 울리기 시작했다.
"로드님. "
"흠, 베르타라스림이구나. 잠시 가봐야겠다. "
로테마이어스가 착용한 목걸이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고룡이 로드를 찾을 때
사용하는 거였다. 대대로 로드만 이어받는 보물이자 족쇄인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로드를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이 거의
생기기 않기 때문이다. 설사 생겼다 하더라도 고룡들의 자존심은 로드를 부르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예, 로드님. 그럼 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프리미아도 네가 가까이 있는 걸 알면 알아서
찾아올게다. 그리고 웬만하면 내일 오후까지는 오도록 노력하마. "
"알겠습니다. "
프리미아 일행이 이곳을 지난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이곳을 지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그들만의 고유기운이 있는 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음, 본체로 있는 게 좋겠구나?"
" 예?"
"넌 지금 마나가 봉인된 상태라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지금 몸으로 있다가는
하찮은 인간들에게도 당할 수 있다. "
"아, 그렇군요. "
크라이드리안의 얼굴에 서글픔이 담겼다. 자신이 힘을 잃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되새기자 절로 슬픔이 몰려왔다.
"그럼 눈을 감아라. 폴리모프 아더!"
위이이잉 !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이에 크라이드리안의 몸 주위에
금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서서히 커졌다. 본체로 변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크라이드리안은 간단한 폴리모프조차 사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좀 전에
하고 있던 엘프의 모습도 로테마이어스가 이동의 편의를 위해 마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음, 됐다. 본체로 있으면 하찮은 인간이 덤비는 일은 없을 게다. 그럼 금방 갔다
오마. "
"괜찮습니다. 볼일 다 보고 오십시오. "
"녀석. 그래 알겠다. 텔레포트! "
로테마이어스가 마법을 사용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로드가 사라지자
크라이드리안이 거대한 몸을 서서히 바닥에 눕혔다.
"내 신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
크라이드리안은 원래부터 전투에 큰 자질이 없었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실세에 가까운 권력을 구가했다. 그
상태에서 전투 능력만 일정 수준 이상 올린다면 차기 로드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헌데, 라한에게 마나를 봉인당한 후부터 세력권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스스로도
자괴감에 시달렸고, 주변 드래곤들도 크라이드리안을 은근히 멸시하기 일쑤였다.
물론, 로드가 항상 근처에 있었기에 대놓고 손가락질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깔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흠. "
크라이드리안이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치료를 위해 대륙 곳곳을 돌았던
게 내심 피곤했던 모양이다.
국경을 넘은 상급 정령사 제이슨이 이틀 전에 루이나 왕국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은 루이나 왕국 최대 옥토라는 필사르 평야에 거의 다다랐다.
"이제 거의 다 와가는군. 한 10일 정도 달리면 도착하겠어. "
제이슨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스쳤다. 지금속도면 늦지 않게 은거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응? "
그렇게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던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 곳에서 꽤나
거대한 물체를 발견한 탓이다.
"저게 뭐지?"
잠시 가진 마나를 퍼트려봤지만, 상대에게선 그 어떤 마나의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 들썩이는 걸로 봐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분명했다.
거기다 이 거리에서 보이는 물체라면 그 크기도 범상치 않을 터였다.
"설마?"
제이슨이 놀란 얼굴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 상태로 자신이 봤던 물체를 보고 또
바라봤다.
"분명해. 드래곤이야. "
제이슨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아니, 긴장감보다는 좌절감이 더 강했다.
상대에게서 그 어떤 마나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 뿐이다. 마나가 하나도 없거나
마나를 완벽히 숨길 실력이 되거나.
헌데, 물질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에게 마나가 없을 리 만무했다. 결국,
제이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실력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얼마나 강한거야? 고룡인가?"
제이슨이 그 자리에 우뚝 선채로 욕설을 내뱉었다.
"헛! "
제이슨이 어쩔 줄 몰라할 때, 앞에 있던 드래곤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정확히
제이슨을 향해서였다.
"들킨.건가? 젠장. "
제이슨이 멀리 보이는 드래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들켰으니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차라리 원 없이 싸워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어도. '
마법사에게는 최고의 도주 방법인 텔레포트가 존재한다. 물론, 대응마법진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그 정도는 은거지에 설치했으니 어렵지 않았다. 만약 제이슨이
정령사가 아닌 마법사였다면? 이렇게 달리는 대신 텔레포트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을 터였다.
"실라이론!"
제이슨이 어느 정도 다가가서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을 불렀다.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는 거였다.
제이슨이 실라이론을 부르자 앞에 있던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제이슨이 달려오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한 것이다. 마나가 봉쇄되면서 기운을 느끼는 힘까지 약해진 탓이다.
하지만, 제이슨이 꽤 가까운 곳에서 실라이론을 부르자 그제야 알아 차렸다. 그리고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
주변을 둘러본 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멀리서 동이 터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크라이드리안이 원한시간에는
한참 못 미쳤다. 로테마이어스와 프리미아가 이곳으로 오는 시간은 대략 오후 쯤.
시간이 한참 남았기에 혼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없는데. '
크라이드리안은 라한과의 전투가 드래곤으로서의 첫 전투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완벽하게 패했다 그때부터 전투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 때문이다.
"하앗! "
제이슨이 기합성을 토하며 쇄도해왔다. 또, 공중에서는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 거대한 윈드 스피어를 들고 크라이드리안을 공격했다.
-쿠오오오!
피어를 터트린 크라이드리안이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드래곤들이 전형적으로
행하는 공격 패턴이었다.
드래곤 피어는 상대를 겁먹게 만드는 방법이다. 혹, 상대가 강한 존재라 하더라도
피어를 듣게 되면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마련이다. 그때 꼬리 공격을 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헌데, 이번에 터트린 피어는 제이슨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크라이드리안의 마나 봉쇄 때문에 제 위력을 내지 못한 것이다.
채챙!
팍팟!
제이슨이 크라이드리안의 꼬리를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반면 실라이론은 옆으로
돌아 크라이드리안의 뒤로 돌아갔다.
"드래곤. 이놈! "
-쿠오오오.
처음에는 겁에 질린 마음에 허술한 공격을 했던 제이슨이다. 헌데, 막상 싸워보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피어가 이 정도밖에 안 돼?'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지워 버렸다. 지금은 눈앞에선 드래곤과 싸울
때였지 이유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쿠오오오!
부우우웅!
콰콰콰콰쾅!
이번 공격은 크라이드리안이 먼저였다. 꼬리로는 제이슨을 이빨로는 실라이론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을 실라이론은 여유 있게 피해냈다. 하지만, 평소에
몸놀림이 둔했던 제이슨은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퍽-!
"컥!"
다행히 꼬리에 정확하게 가격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땅에 부딪혀 날아오른 돌에
머리를 맞았다.
"빌어먹을. "
제이슨이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스윽 훔쳤다. 역시나 뜨끈한 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번다.
반면, 크라이드리안은 득의양앙한 웃음을 지었다. 라한과의 전투와 비교하자 너무
쉬운 상대로 보였다.
라한은 엄청난 마법 실력에 빠른 몸놀림을 가졌다. 거기다 임기응변도 능해서
정면으로 상대하는 게 상당히 껄끄러웠다. 이에 반해, 제이슨은 몸놀림도 느렸고,
전투 경험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뒤에서 윈드 스피어를 들고 있는
실라이론이었다.
'저 정령만 어떻게 하면 되겠는데. '
크라이드리안은제이슨을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대신, 뒤에 선 실라이론에게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승리의 관건이 정령에게 달렸다는 생각에서였다.
-응?
정령을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쓰러져
있던 제이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탓이다. 흘린 피의 양으로 봐서는 꼼짝없이 누워
있을 것만 같았던 제이슨. 그가 사라지자 온 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경험이라면 오히려 제이슨이 라한을 압도했다.
순간 만만하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춰서 당했을 뿐이다. 또, 제이슨의 순간적인
임기응변 능력이 약하다는 것도 그가 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대로
싸운다면 라한만큼 골치 아픈 상대가 제이슨이었다.
"하앗! "
제이슨은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중급 정령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정령을 타고 크라이드리안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기회를 보고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헛!
스파팟!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자 뒤에 있던 실라이론도 공격을 감행했다. 이젠 앞뒤가
아닌 위와 뒤에서 공격당하는 형국이었다.
-어딜.
크라이드리안이 몸을 틀고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앞발로 실라이론의 창을
막았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임기응변의 발현이었다.
-컥!
하지만, 그는 제이슨이 정령사라는 걸 깜빡했다. 또, 그가 중급정령인 실라페를
불러놓은 상태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실수의 결과가 지금 그의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였다.
쿠오오오오!
크라이드리안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를 본 제이슨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하긴. 하앗!"
크라이드리안이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할 때, 제이슨이 다음 공격이 속개되었다.
이번은 앞, 뒤, 위에서 펼쳐지는 3방향 공격이었다.
푸욱!
스핑!
크라이드리안이 제이슨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실라이론과 실라페의 공격을
막는 건 실패했다. 그가 제이슨의 공격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실라이론의 창은 크라이드리안의 오른쪽 눈에, 살라페가 만든 바람의 톱날은
크라이드리안의 목 언저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미 승부가 난 셈이다
"역시 멍청하군. "
-크오, 오오오오.
"쯧쯧. 내가 정령사라는 걸 잊었나? 정령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면 네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는 게 나다 "
이번 전투의 승패는 크라이드리안의 착각으로 결정되었다. 세 가지 공격 중
제이슨의 공격을 우선적으로 막았다는 것 말이다.
실제로 막지 않아도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게 제이슨의 공격이었다. 하잘 것
없는 공격을 막느라 정작 중요한 공격을 막지못한 바보 같은 대처였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크라이드리안이 제이슨의 공격부터 막은 건 아니었다. 다른
정령은 조용히 공격한데 반해, 제이슨은 항상 기합을 넣었다는 것. 그 때문에
크라이드리안의 시선이 제이슨에게 먼저 쏠렸다는 게 이유였다. 어찌 보면 제이슨이
치른 수많은 전투 경험이 승리를 낚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가라, 실라이론! 실라페! 끝내!"
스팟!
피잉!
실리이론과 실라페가 다시 크라이드리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크라이드리안도
몸부림치며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젠 제이슨 쪽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은 채로
정령들만 상대했다. 좀 전 제이슨의 말로 전투 방법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이미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두 눈도 잃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런 싸움이 오래 지속될 턱이 없었다.
쿠욱!
스파파파팟!
-쿠오오오.
쿠궁!
마구 발광하던 크라이드리안이 평야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숨을 몇 번 헐떡이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로드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던 한 골드 드래곤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크라이드리안이 죽자 제이슨이 시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멍청한 드래곤 같으니. 내 공격은 무시해도 네 공격은 날 향했어야지. "
어차피 제이슨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하면 소환된 정령들은 강제 역소환 당하게
된다. 죽은 크라이드리안에게 그 점을 꼬집은 거였다.
"휴, 그나저나 엄청 힘드네. 실라이론, 실라페. 돌아가."
실라이론과 실라페가 정령계로 돌아가자 제이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에 부치는
정령의 소환으로 체력이 다한 것이다.
"그래도 멋진 보물을 건졌군. 드래곤하트에 드래곤본, 드래곤 스케일. 이게 돈이
얼마야? 크크크. 그리고 류카라한. 네놈이 날 무시하지만, 이제 아무 말 못하겠지.
흐흐흐흐. "
제이슨이 탐욕에 가득한 눈으로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살폈다. 돈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 사이에서의 지위.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멋진 물건이었다.
한편, 제이슨이 크라이드리안과 한창 치열한 전투 중일 때, 카이렌 일행도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역에 도착했다. 제이슨보다 불과 한, 두 시간 간격 밖에 떨어지지
않은 셈이다.
"여기가 라한이 살았던 왕국이지?"
"그렇다고 하더군. "
카이렌의 물음에 프라하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테세르만큼은 아니어도
만만치 않게 머리가 나쁜 프라하. 전에 많이 들었던 내용임에도 잠깐 생각을 해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놈 이름이 엘베라고 했나?"
"응. 지금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라고 하더군. 근데 왜?"
이번 물음에는 투바가 대답했다. 경험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괜찮은 편인 투바
프라하와는 달리 묻자마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가는 김에 손 좀 볼까 싶어서. "
"여기 왕?"
"응. 어차피 라한은 그 놈 손보는 일을 휴란트한테 맡기려고 했잖아. 휴란트가
우리하고 있으니까 상관없을 것 같은데. "
"그게 그렇지가 않아. "
투바가 카이렌의 말에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이에 걷고 있던 일행 모두가 투바를
바라봤다.
"왜?"
"라한은 엘베로를 좀 특이하게 손보려고 했거든. 근데, 그 방식이 뭔지 모르겠어. "
"아, 맞다. 그렇지. 음, 그래도 좀 섭섭한데. 그냥 살짝 보고 오는 건 어떨까?"
"잠깐만. 지금 엘베로라고 했나?"
대화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루이에가 의문을 표해왔다. 그는 엘베로가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 맞다. 너도 루이나 왕국 출신이라고 했지. "
"아니, 난 루이나 왕국출신이 아니다. 힘이 필요해서 루이나왕국에 잠시 몸을
의탁했을 뿐이지 "
"예? 정말입니까?"
루이에의 말에 레테아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루이에를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만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루이나 황국 출신이라는 것에 일말의
의문도 품은 적이 없었다.
'놀랍군. 루이나 왕국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었던 루이에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니 .
'
"그렇다. 난 루이나 왕국 사람이 아니다. "
"그럼?"
"음. "
레테아의 연이은 물음에 루이에가 침음성을 흘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있던 루이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나라가 없다. "
"나라가 없다고요?"
"그렇다. 난 대륙 남쪽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몬스터들과 싸우며 자랐다. "
"아, 그, 그런."
레테아가 놀란 눈으로 루이에를 바라봤다. 그리고 새삼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대륙에는 큰 애정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도 큰 애정이 없지. "
"훗, 그래도 애정을 가져봐. 알고 보면 꽤나 쓸 만한종족이 인간이거든. 나도
라이칸이라서 예전에는 인간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근데, 라한과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더군. 굳이 인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이 사악하네. 어쩌네 하면서 손가락질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프라하의 의외성 짙은 말에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 프라하.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
"당연하지. 내가 이래봬도 우리 라이칸 중에서는 최고의 인재로 꼽혔다. "
"자랑이다. "
"푸풋! "
"하하하하."
투바의 짧은 한 마디에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프라하는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붉혔다. 괜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근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
"뭐가?"
"저 앞에서 뭔가 강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야. "
"그래?"
카이렌의 말에 일행들이 전방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헌데, 그 누구도 전방의 상황에
대해 알아본 이가 없었다. 카이렌이 아니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멀었기 때문이다
"카이렌. "
"왜?"
"강하군. "
"고맙군, "
루이에가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꽤 많이 만났고 싸웠다. 헌데, 그들 중 카이렌과
비견되는 이는 단한 명뿐이었다. 제스란, 그가 아니면 카이렌과 비등한 결투를 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근데, 앞에서 느껴지는 파동이 어떻."
"싸움이군. 뒤따라와라. "
카이렌이 뭔가 느낀 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걸 어느 정도
가까워져서야 깨달은 탓이다.
"카이렌! 누구야?"
"몰라. 근데, 정령 같아!"
달려가는 카이렌을 향해 프라하가 물었다. 이에 카이렌도 뒤를 슬쩍 돌아보며
답했다.
카이렌이 사라지자 레테아가 일행들을 둘러봤다. 이렇게 손놓고 있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저놈이 무모하게 덤빌 리 없거든.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간
거야. "
"그래도. "
"그리고 카이렌이 쉽게 당할 리 없잖아. 천천히 걸어가도 위험해지기 전에 만날 수
있어. "
투바가 레테아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하군 혹시 닥칠 수 있는 위험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카이렌을
믿고 있다는 거?'
루이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한 상대와 싸우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왔던 루이에. 혹, 상대가 강해보이면
암습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 아니던가. 루이에가 카이렌 입장이었다면 무조건
인원수로 밀고 나갔을 터였다. 그게 루이에가 생존을 위해 취해온 방법이었다.
카이렌은 일행과 떨어져서 계속 달렸다. 그렇게 근 2킬로미터 정도 왔을 때, 거대한
동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한없이 미약해 보이는 존재도.
"드래곤이잖아. 근데 저놈 상태가 왜 저래?"
카이렌은 한 눈에 거대한 동체가 드래곤임을 알아봤다. 헌데, 그에게서 아무런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겉모습이 분명 드래곤임에도 왠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보면 알겠지. "
카이렌이 은신술을 사용해 서서히 다가갔다. 꽤 가까이 다가가자 드래곤과 인간의
싸움을 좀 더 명확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저놈그때 그 드래곤이잖아. 근데, 마나는? 설마 라한이 했던 그때 그 금제?'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카이렌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물질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의 마나를 봉인하는 인간 라한.
새삼 라한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흠, 라한. 네 능력은 어디까지가 끝인 줄 모르겠구나. '
쿠욱!
스파파파팟!
-쿠오오오.
쿠궁!
크라이드리안의 추락과 함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승리는 제이슨. 힘의 9할을
잃었으니 패배는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거기다 싸움 경력도 제이슨과 비교도 안
되어 보였다.
'저놈. 굴레를 벗은 놈이군. '
카이렌은 제이슨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느낌 덕이었다.
'공격을 해?'
카이렌이 잠깐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왔다.
'일단 제압해야겠군. '
현재 카이렌은 라한의 실종을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라한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은 루이나 왕국을 지나야 나오는 베센
왕국이다. 헌데, 이곳은 베센 왕국과 꽤 멀리 떨어진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방
굴레를 벗은 존재가 이곳에 나타난 그 자체에 의혹이 생겼다. 이래저래 일단
생포해야 하는 셈이다.
스으윽!
카이렌이 제이슨의 근처까지 서서히 이동했다.
"휴, 엄청 힘드네. 실라이론, 실라페 돌아가."
제이슨이 정령을 돌려보내자 카이렌의 얼굴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그로서는 일을
쉽게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였다.
'일이 쉬워졌군. '
제이슨이 정령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를 잡는 건 가능했다. 카이렌의 실력과 경험이
제이슨을 압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령이 남아있을 땐, 칼을 뽑고 땀을 흘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귀찮은
상황이 수월하게 바꿔 것이다.
스스스슥!
카이렌이 제이슨의 뒤로 이동했다. 그때까지도 제이슨은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실력으로 드래곤을 잡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하하하. 내가 드래곤을 잡다니. 하하하하하. 드래곤들 별거 아니잖아. "
스르르릉!
제이슨이 대소를 터트릴 때, 카이렌이 검을 뽑았다. 제이슨의 행동 하나하나가
카이렌을 돕는 상황이었다.
"이거, 이거. 굴레를 벗었다는 다른 녀석들도 말만 그럴싸하지 형편없는 거 아냐?
저 따위 드래곤한테 겁을 먹다니. "
"과연 그럴까?"
"헉!"
카이렌이 검을 들어 제이슨의 목을 겨누었다. 순간 놀란 제이슨이 헛바람을 삼켰다.
"왜?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형편없다면서? 근데 어쩌지? 나도 굴레를 벗었거든. "
"어, 어떻게?"
"어떻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냐고? 후후후. 알거 없어 "
퍽-!
"컥!"
카이렌의 검 손잡이가 제이슨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이에 제이슨의 몸이 옆으로
서서히 쓰러졌다.
"별거 아닌 게 깝치기는."
카이렌이 제이슨 옆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 상태로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바라봤다.
'흠, 비싼 시체로군 '
카이렌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행을 기다렸다. 그는 모든 일행이 모인 후에
제이슨에 대한 심문을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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