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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법국의 톱 최고신관장

종파의 최고책임자인 신관장 여섯명

사법기관장, 입법기관장, 행정기관장 세명

마법의 개발, 연구의 핵심인 연구관의 장

군사기관장 ㅡ 대원수

총 12명인 이 모임이 바로 최고집행기관

법국의 최고권력자의 모임이자, 국가의 앞날을 좌우하는 자리이다.

그다지 넓지도 호화롭지도 않은 이 방에, 밝은 표정인 사람은 없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쾌활하게 행동하는 자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법국에 봉사하는 동지이며, 이야기 도중 가벼운 유


머를 주고받을 만큼 오래 알고 지냈다.

원래는 좀 더 편한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긴장된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

"마도국이 왕국에 침공을 개시했다. 라기보단, 한참전에 개시했다. 참으로 무섭군


마도국...... 당사자인 왕국조차 그걸 한 달 동안 눈치채지 못했으니. 우리도 귀와
눈인 바람과 물이 당했다. 만약 [점성천리]가 없었다면 눈치채는게 더 늦어졌겠
지. ......왕국의 운명은 정해졌다 봐야겠소.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아. 모험자를
권유하는걸 서둘러야 해"

최고신관장이 토신의 신관장 ㅡ 레이몬・자그・로랑생을 봤다.

"전력으로 진행중입니다"
대답한 레이몬에게 연구관장이 질문했다.

"그 나라에 있는 매직아이템을 마도국이 가져가는걸 뻔히 보고만 있기엔 아깝다.


어떻게 가져올수 없겠는가? 특히 그 나라의 비보. 불멸의 부적(아뮬렛 오브 이모
탈), 수호의 갑옷(가디언), 활력의 건틀릿(건틀릿 오브 바이탈리티). 그리고 ㅡ 체
도칼날(레이저 엣지)"

손가락을 접으며 세던 연구관장이 천천히, 다시말해 가장 중요하다고 어필하면서


말했다.

"무리입니다. 그쪽까지 커버할 수 없습니다. 부릴 수 있는자도 한도가 있습니다.


왕국에 있는 법국민을 안전히 피난시켜야 되니까요"

"......마도국이 쳐들어가는거다. 그 전사장이 죽은 뒤엔, 다음 전사장 후보인 앙


그...라.... 흠흠. 어쩌구라는 남자가 장비하고 있는것 아닌가?"

대원수가 묻자 다시 연구관장이 말했다.

"브레인・앙그라우스군요. 맞소. 그를 납치해버리면 돼. 벼랑으로 달리는 말에 그


대로 타고 있을 어리석은 자는 아니겠지?

처음엔 불쾌해하겠지만, 곧 우리에게 감사하겠지"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런 분이라곤 생각되지 않았지만 말이죠"

화신의 신관장 ㅡ 베레니스 나그아 산티니.

최고집행기관에 둘 있는 여성 중 한명이다.

"높게 평가하고 있나보네"

다른 한 명의 여성인 사법기관장의 말에 그녀는 미소지었다.

"맞아요. 우리들 신관장은 그분을 높게 평가함과 동시에, 이쪽의 기대에 답해주지


않을거라 판단해서, 그와의 접촉은 피하라고 지시를 내렸어요"

"그 전사장과 같단..... 말입니까. 대국을 보지 못하고, 불합리하게, 감정에만 지배


당한 그들 같은 생각은 이해 할 수 없군요"

그렇게 중얼거린 입법기관장에게 몇몇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이 날아들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말이 약간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목숨을


소홀히 여기는건 앞으로를ㅡ인류의 미래를 고려하면 좋은 행동이라고는 생각되
지 않는군요. 이것만큼은 누가 뭐라하더라도,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부정하지 않네"

나지막이 말한건, 불쾌한 시선을 보냈던 인물 중 하나인 도미니크 이레 파르트슈


ㅡ 풍신의 신관장이다.

"하지만, 우리도 양보할 수 없는게 있지않나? 그는 그것이었다는 말이네"

"게르휘 선생님도 그 생각에 동의하신 겁니까?"

약간 불만인 듯 말하는 연구관장에게 마른 나무같은 노인ㅡ 물의 신관장, 제네딘


데란 게르휘가 수긍했다.

"......그렇다면, 이 건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우리나라에 와주는건 기쁘지만, 그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미 법국에는 몇몇 모험자 팀이 와있다.

대부분 미스릴 이상이지만, 수명성전의 정보수집 결과, 장래성이 있어보이는 자


들도 초대되었다.

"그닥 좋지는 않.. 아니, 않습니다" 접수를 담당하고있는 광신(光神)의 신관장, 이


반 쟈스나 드라크로와가 말했다.

"납득하고 왔다고는 해도, 많은 자들을 버리고 왔다는 가시가 마음에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참가자들은 굳이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러자 이반은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는건 당연하다"며 의연한 모습으로 대답하
고는, 황급히 "당연합니다"라며 고쳐 말했다.

확실히 신관장들만의 회의에선, 그도 존댓말을 썼다가 안썼다가 한다. 하지만, 그


건 더 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ㅡ저희는 그 가시를 어떻게든 처치하는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사법기관장의 질문에 답한건 레이몬이다.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생긴 가시라면, 구하는걸로 아물거라 판단했습니다. ㅡ우


선 용왕국에 보내, 그 땅에서 비스트맨들과 싸우게끔 생각중입니다"

"그렇군"

용왕국에 마도국이 접근하여, 언데드를 구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와있다.

대단히 강한 언데드라는 얘기도.

이대로 방치하면, 용왕국에 대한 법국의 영향력이 저하되고, 다른 한편 마도국의


영향력은 강해질 것이다.

그걸 방지한다는 의미에선 좋은 수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이 권유한 전 왕국의 모험자를 감시가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에 보내면,


그들의 입에서 마도국과 왕국의 전쟁중, 물밑에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었다는걸
마도국에게 알아채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그들을 얼마간 국내에 머무르게 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 부분은 괜찮겠지. 왕국의 상황을 알아버린 그들이... 버렸다는걸 후회하는 자


들이, 그런 잔인한 나라를 편들거라곤 생각되지 않네.

....정신조작계 마법을 써서 그들의 입을 열게 만들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아니, 문제는 그것보다, 전이를 쓸 수 있는 매직캐스터를 우리나라가 갖고 있다
고 마도국에 알려지는건 아닌가?"

".,..확실히, 그건 그렇군"

"매직아이템으로 전이했다고 해두었지만, 실제론 아니라고 모험자가 간파했을 가


능성이 있네. 입막음을 한다해도, 어디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갈지 알 수 없어.
...우리의 패가 1장, 마도국에게 빼앗길법한 일은 피하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어흠, 어흠, 기침하며, 지네딘 데란 게르휘가 말한다.

"...음, 음. ...미안하네. 그 생각도 알고있네. 하지만 상대에게 패를 눈치채인다는


건, 상대에게 경계심을 심어주어, 단락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끔ㅡ 억제할 수도
있지 않나, 싶네 나는"

"저도 선생님 생각에 찬성합니다. ...그 삼중마법영창자(트라이어드)라는 예도 있


습니다.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겠죠"

"어머. 그걸 아는자가 몇이나 될까? 제국의 대 매직캐스터가 어느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는지는 불확실한 정보밖에 돌아다니지 않잖아?"

"그런 사람들이라면 <전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경안쓰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교차하지만, 이대로는 결론이 나지 않을거라 판단한 최고신관


장에 의해, 다수결을 하게되었다.

결과, 모험자들을 용왕국에 지원보내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스카우트한 모험자들은 법국에게 용병과 다름없기에, 충성을 기대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법국 수뇌부는, 모험자들이 파견되는 용왕국에 그대로


눌러앉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왕국에서 데려온건 인간이라는 종족의 강자를 아깝게 잃지 않기 위해서이


며, 법국의 강대화는 주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제5위계 이상의 스크롤의 작성방법만 개발했다면, <전이(텔레포테이


션)>도 쓰기 쉬워질 텐데 말이죠......"

"수백년 들여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조금씩 연구를 진행하면 된다"

법국에는 비밀기술의 하나 제4위계까지의 스크롤을 만드는 기술이 있다. 이것은


주변 국가에는 없는 기술이다.

이런 비밀기술을 법국은 몇 개나 갖고 있다.

수백년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보다 뛰어난 종족을 쓰러트릴 기술을 개발


해왔다.

예를 들면, ‘신의 피’라 불리는 포션의 생성도 성공했다.

하지만 비용대 효과가 나빠서, 날마다 더욱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마도왕은 그런 학살행위를 하게 된건가?

아무리 성왕국 지원물자를 빼앗겼다고는 해도, 저건 지나치지 않나. 군은 어떻게


분석하고 있나?"

"첫째는 시위행위"

손가락을 하나 세운 대원수의 말에 몇몇이 수긍했다.

"둘째는, 마도왕은 어차피 언데드니까"

"산 자에 대한 증오에 지배당했다, 라는 견해일지 모르지만, 그것에는 반대일세.

만약 개전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해도, 지금까지 마도왕의 행동을 보면, 이번


일은 위화감이 들어"

"네, 저희 군부에서도, 그렇지는 않을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원수가 진지한


척 말하자

"그럼 빨리 말하라고" "전에 레이몬을 흉내내고 싶었을 뿐이겠지" "자네는 때와 장


소를 구분못하는 때가 있어" 라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어흠...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게 셋째"

세개째 손가락이 섰다.

"카체 평야처럼, 언데드 다발지역을 만들기위해"

있을 법 하다며 누구 할 것 없이 신음했다.

법국 ㅡ 신앙계 매직캐스터가 많고, 이 나라의 최고위에 속하는 멤버는 대원수의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했다.

부정한 대지를 넓혀, 그곳에 출현하는 언데드를 자국에 흡수할 계획이겠지.

통상적으론 불가능하지만, 같은 언데드가 왕인 마도국에겐 가능한 수단이다.

똑같이 부정한 토지인 카체 평야를 지배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어쩌면 거기서 뭔


가를 얻었기에,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ㅡ마도국의 다음 수는 예측이 가는군요"

"어째서, 인가?"

"부정한 대지를 평의국과의 사이에 가로막듯이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 그곳이 평


의국을 막는 방패가 될테니 말이죠ㅡ"

"ㅡ법국과 싸울 수 있다는, 건가"

실내가 조용해졌다. 각각이 여러 분야에서 자국과 마도국을 비교하고 있는거다.


특히 군사력을.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태연한 표정을 보이는 자는 없다.

전에 열린 회의로 알려진 정보를 떠올리면 무리도 아니다.

카체 평야에서 왕국과 전쟁시, 마도국이 보여준 힘은 누가봐도 명백히 강대하기


그지없고 너무 사악했다.
법국의 히든카드, 신인을 포함한 칠흑성전을 동원해도 처리는 지극히 곤란.

거기에 마도국의 저력은 아직 모이지 않고, 조사하면 할수록 시커먼 심연을 보게


될 뿐이었다.

"아무리 병력이 있어도 모자라다. 여기선 역시 평의국과 전면적인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나"

"그렇게 하면 여차할 때, 원군을 보내는 주겠지만"

모두의 얼굴에 조소와 비슷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라를 구하기 충분한 원군이 올 리가 없다. 뻔한 일이다.

주의주장, 목적이 전혀 다른 국가간이 진정한 의미로 협조할 수 있을리 없다.

동맹을 맺었으니 원군이 오는걸 기대해도 될지 모르지만, 백금용왕 본인이 올리


는 절대 없겠지.

한쪽 나라가 멸망했을 경우, 남은 나라는 마도국의 압력을 전면적으로 받게된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전력으로 협력을 주고받아 두 나라가 마도국과 적대하는게


현명하다.

하지만, 만약ㅡ 정말 만약의 얘기지만, 두 나라의 연합군으로 마도국에 쳐들어가,


승리를 거머쥐었을땐 어떻게 될것인가.

그 다음 순간 평의국과 법국은 가상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전후의 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상대국에게 한명이라도 많은 마도국 병사를


보내도록 행동할거고, 동맹을 맺어 인류가 늘어난다면,

오히려 첩보전은 지금보다 격해질 것이다.

이처럼 평의국과 동맹을 맺더라도 전면적으로 신뢰한다는건 불가능하다.

법국만으로 승리하는걸 생각하는게 그나마 현실적이다.


그리고 만약 마도국과 싸우게 된다면, 양측이 공멸하는 전면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것 또한 평의국의 이익이 되버릴테니까.

이상적인건 삼자가 견제하는 상태지만, 그것도 힘이 비슷할때나 되는 일이다.

"마도국에 굴복하는것도 나쁘지 않다. 수십년, 수백년이라도 칼을 갈며 기다려서,


내부에서 마도국을 붕괴되도록 행동하면 된다.

그쯤에는 마도국의 내정도 알고있을테니 말이지"

"제국이 속국이 되었으니 절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제국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까지 비참하지는 않은 모양이고"

"하지만, 그걸 국민에게 납득시킬수 있나?"

"어렵겠죠. 일반시민들이 납득할 리 없습니다. 잘못하면 폭주할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따위 탄압하면 되지"

"어이, 너무 극단적이야.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애초에, 시민은 우리처럼 모든 정


보를 알고 있는게 아니니까 말이지"

"그럼, 우리와 같은 정보를 줄텐가? 옛날 그렇게 하다가 시민이 폭주한 역사가 있


기 때문에, 지금같은 형태가 된 것 아닌가"

"그리 시비조로 말하지 말게. 마도국이 왕도를 함락했다해도, 인심을 위로하고 점


령통치등에 시간을 빼앗길 터.

그 뒤의 일을 생각한다면 좀 더 시간이ㅡ"

"ㅡ아니, 그렇다고 단정할순 없네. 마도국은 몇몇 도시나 마을을 철저하게 부쉈


네. 왕도를 그렇게 안 할 거라곤 단정할 수 없네"

왕도에 있는 주민은 많다.

그걸 몰살한다는건 현실미가 없지만, 마도국이라면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


다.

"생명을 증오하는 언데드인가"

"......에란텔에선 쓸데없이 사망자를 내지 않았기에 약간 방심했군"

"마도국은 이미 제국을 속국으로, 성왕국과 용왕국에 손을 뻗어, 이번엔 왕국을


유린하고 있다. 그럼 다음엔 우리들 차례라고 생각해야겠지. 복종인가 죽음인가.
더 없이 진부하고, 피할 수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겠지. 그 때문이라도ㅡ마도국과
싸우더라도 우리의 문제를 하나 해결해야 한다"

"음. 저 썩을 엘프를 당장 멸망시켜야해. 마도국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전장을 두 개나 만드는건 어리석은 일"

엘프의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마도국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쭉 공들여왔다. 마


도국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던건 그 때문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마도국을 정면으로 적으로 돌리는건 최악의 사태지만,


그 최악을 상정하고 키를 잡는게 우리의 역할이다.

놈들은 단기간에 모든걸 끝내는게 좋겠지"

"왕국에 군을 보내고 있을동안엔 마도국이 우리에게 간섭할리는 없다고 생각하지


만, 사태가 급변한 우리가 움직이는걸 견제해올 가능성은 있다. 양동으로, 자연발
생을 위장하여 국경 근처에 언데드를 출현시킬 지도 모른다. 그쪽에 어느정도는
준비를 해둬야 겠지"

"그렇군...... 동시에...조금이라도 인간이란 종의 가능성을 남겨야 한다"

몇몇이 신묘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일부 시민을 피난시킨다. 우리의 희망의 땅. 아니 절망의 흔적에"

피난이라 한들 법국 바깥에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있는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


민으로 만든다는것도 아니다.

법국은 국외에 하나뿐인 피난장소를 갖고 있다.


숨겨진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건 원래ㅡ 600년전, 그저 도망치며 떨기만 했
던 인간이라는 종족이 살고 있던 장소다.

그곳을 지키는게 육색성전중 하나, 토신성전이다.

"......피난한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겠지. 누가 부를거지?"

"아무나 부를순 없다. 우리가 남는건 당연하다치고, 각자가 서로 대표자를 선출해


서, 그 인물에게 고르게 하는건 어떤가?"

"아니, 로랑생 공은 가야겠지"

"뭐?"

"만에 하나, 우리가 망했을 때, 예전 칠흑싱전에 속해있던 자네라면 남겨진 자들


을 지키고, 교도할 수 있겠지?"

"지금 난 예전의 강함은 없다. 게다가 어느때라도 남아야할 인물들, 조직의 상위


자가 남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불신을 품을거야"

"하지만ㅡㅡㅡ"
"아니ㅡㅡㅡ"
"내가 볼때ㅡㅡㅡ"

의론이 뜨거워지기 시작해, 최고신관장이 역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뜨거워진들 별 수 없네. 중요한 안건이지만, 잠시 유예가 있지않나"

이론은 없었다.

"좋네. 그럼ㅡ가장 중요한 안건을. 엘프놈들은ㅡ놓쳐도 좋다. 하지만, 그 빌어먹


을 엘프왕만은 확실히 몰아넣어서ㅡㅡ"

최고신관장의 사람이 바뀐 듯 증오에 가득찬 표정을 보고, 레이몬이 수긍했다.

"절사절명에게 선택할 찬스를 주겠습니다"

"음. 그 아이가 국외로 나간걸 백금용왕이 감지했다한들, 지금 상황에선 세게 나


오지 않겠지. 개인적으로는 엘프왕에게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가하고, 그 뒤에
죽이고 싶지만ㅡ 그 아이의 행복이 우선이다.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1장 유급휴가를 쓰기 위해

아인즈는 보고있던 두꺼운 바인더의 서류를 끝까지 보고는, 첫 페이지로 돌아가,


구석에 자신의 도장을 꾹 찍었다.

그 후, 조금 망설이다 승인도장 역시 꾸욱 찍었다.

이걸로 이 바인더에 기재된ㅡ아인즈에겐 초 하이레벨인 정치적 문제의 해결법은


승인되어,

앞으로 알베도가 인원을 선출해, 목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아인즈는 바인더를 곁에있던 류미엘에게 건넨다.

이걸로 오늘 마지막 일이 끝났다.

아인즈는 시선을 시계로 보낸다.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10시 30분.

아인즈의 업무 개시는 10시다.

즉, 일하기 시작해 30분밖에 경과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이런식이다.

원래, 아인즈의 일은 오전중에 끝나는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빠르다.

회사원 시절 스즈키 사토루였다면, 이렇게 늦게 일이 시작되는 일은ㅡ늦은 당번


같은걸 제외하면ㅡ없다.

그저, 이건 사토루의 상식이지, 거대기업 등에 다니는 자에겐 늦은 시각의 업무시


작도 드물지 않아서,

반대로 우르베르트가 말하길, 근무시간의 변경제도가 있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것이라 한다.
그럼, 이 세계에 사는 자들ㅡ예를들면 엔리나 운필레아같이 마을에서 일하는 자
들은 어떤가 하면,

그들은 아침해가 뜨면 행동을 개시하여, 해가 질 무렵에는 잠드는게 일반적이다.

이건 도시부의 평민도 대체로 같지만, 아침은 좀더 늦고, 밤에도 마을보다 약간


늦는 모양이다.

그리고, 밤이 늦는 만큼, 일의 시작도 늦는 모양이다.

나자릭은 블랙기업중의 블랙기업이다.

우선 일반 메이드들은 아침반과 저녁반으로 나뉘어, 장시간 일하고 있다.

똑같이 9계층을 경비하고 있는 코큐토스의 부하들도 그렇다.

휴식시간은 애매하고, 짧은 휴식 같은건 거의 없다.

간식 시간도, 담배 피우는 시간도 없다.

하지만, 대우에 대해 불평불만이 없는자가 9할이었다.

화이트한 직업환경을 바라는 아인즈는, 그 얘기를 일반 메이드에게 들었다.

듣고 떠오른건 ‘이놈들 머리 이상해’였다.

아니, 충성심이 높다고 해야할까.

아이템에 의해 피로해지지 않으니 무한히 일하는게 당연하죠, 진지한 얼굴로 말


할 때 아인즈는 소름끼쳤다.

거기에 대우에 불만이 있다고 답한 나머지 1할의 요구가 ‘더 일하게 해주세요’ 였


을 정도다.

그러나ㅡ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얘기다.

억지로 밀어붙였을지 모르지만, 아인즈는 복리후생을 후하게 해주고싶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러기 위해 아인즈가 특히 주목한건 역시 일반 메이드들이었다.

우선 그녀들은 매우 레벨이 낮다.

그리고, 아리따운 여성의 외견을 가진점도 컸다.

편애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아무래도 코큐토스 등과 비교하면 무르게 대해버린


다.

아인즈가 명령하면 이 나자릭내의 거의 모두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들의 의욕이 꺾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잘 구슬려야 했기에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일반 메이드가 인간 메이드들의 위에서서 지도할 때가 올지 모른다. 그때


평소 자신들이 그렇다고해서 너무 일 시키지 않게끔 해야한다.

이걸로 마지못해였지만, 노동시간을 감소시켜, 휴가를 늘리는데 성공했다.

전에는 41일에 하루였던 휴가가, 무려 두배.

이틀이 된 것이다.

ㅡ전혀, 바뀌지 않았잖아, 라고 아인즈도 생각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저항이 상


당히 심해질 것 같았다.

라기보단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므로 거기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되어 휴가 시스템ㅡ유급휴가, 하계휴가, 공휴일 등의 휴가를 아직 도입하


지 못했다.

이런 휴가라는 시스템을, NPC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라도 넣고


싶었던건,

어쩌면 메이드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즈키 사토루가 그런 휴가를 거의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동경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인즈는 다른 수단을 쓰기로 했다.

나자릭의 정점인 아인즈가 그다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톱이 별로 일하지 않으니, 자신들도 그렇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하


는 의식변혁을 노린 것이다.

물론, 우수하지 않은 자신이 솔선해서 움직이면, 나자릭이 엉망진창이 될거라는


예감도 이유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건 실패였다.

아인즈가 일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그만큼 자신들이 열심히 해야지, 라는 방향으


로 나자릭내의 멤버들 생각이 변해버렸다.

그 결과, 안 그래도 승인이 대부분이었던 아인즈의 적은 일이, 지금은 더 적어졌


다.

이건 정말 좋은 일이다.

우수하지 않은 아인즈가 여러 가지 일을 안고 있는 건 나자릭에 절대 좋지 못하


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키는건 마음이 무겁다.

‘하아......’

아인즈가 곁눈질로 보고있는건, 또렷하고 진지한 얼굴로ㅡ인상이 매우 강한ㅡ이


쪽을 응시하고 있는 메이드 두명이다.

오늘의 아인즈 당번과 방 당번으로, 둘다 눈이 맞으면 금방 "시키실 일 있습니까"


라고 묻기에, 그걸 피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진지하게 안해도 되는데...... 좀더 어깨에 힘을 뺐으면 하는데...... 이 팽


팽한 분위기 때문에 위가 조금 아프다......’

메이드들의 웃는얼굴을 본게 언제였을까, 라고 생각하는 아인즈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쉰 아인즈는 옆에 선 메이드에게 말을 걸
었다.

"......그럼, 류미엘“

"네, 아인즈님"

"확인하겠다만, 오늘 내 일은 이걸로 끝인가?"

"네, 아인즈님. 이걸로 끝입니다"

오늘의 아인즈 당번인 메이드에게 물어본건, 알베도가 없을때엔 비서같은 일도


이젠 일반 메이드들이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알현, 교섭. 같은 일은 오늘의 예정에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갑자기 일이 들이닥칠 가능성은 있고, 결코 방심할 순 없다.

또한, 엔토마의 <전언(메세지)> 등으로 호출되는 식으로 갑작스런 안건은 대단히


성가시며,

없을 터인 위가 찌릿찌릿 아프게될 문제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아인즈는 시선을 움직여, 이 방에 있는 또 하나의 책상을 본다.

알베도의 강한 요구로 놓여진 자리지만, 그곳에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대체로, 알베도는 이 방에서 아인즈와 함께 집무를 보지만, 왕도를 함락시키고 아


직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은 상당히 바쁜 모양이라,

자주 나자릭 안을 돌아다니고, 때로는 현지에 가 교섭하기도 해서 있는게 드물게


되었다.

자신이 없을 때 알베도의 모습을 메이드에게 물어보자, 상당히 예민한 것 같았다.


역시 일이 너무 많은건가, 아니면 아인즈와 만날 수 없기 때문일까.

‘후자라면 만나는 시간을 늘리는게 제일이겠지’

그걸로 그녀의 기분이 풀어진다면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을것이다.

"..........“

아인즈가 아무말도 안하면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방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본심을 말하자면, 좀 더 잡담이 많은 그런 직장이야말로 아인즈가 원하는 바지만,


그녀들이 그럴일은 결코 없다는걸, 이 수년간 잘 알았다.

정말 외롭다.

‘평생, 이렇게 섬겨지는 생활이 계속 되겠지......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그저, 좀


더 환경을 바꿀 필요는 있겠지’

평소 아인즈는 남는 시간을 다양하게 이용한다.

승마훈련.

학술서를 보는척하며, 비즈니스 책을 읽는다. 그리고 정치책도.

ㅡ그다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건 대충 훑어봐서겠지.

결코 아인즈의 머리가 텅 비었기 때문이 아닐 터다.

여러 마법의 실험도 한다.

최근에는 코큐토스가 있는 곳에서 무기를 쓰는 훈련에, 판도라즈 액터와의 훈련


도 추가했다.

"그럼ㅡㅡ"

집무실에서 혼잣말처럼ㅡ실제론 일부러ㅡ말했다.

슬슬 행동해도 문제되지 않겠지.


지금부터 시작하는건 아우라와 마레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다는 계획. 그 사전준
비다.

둘에게 어떤 친구를 만들어줄까, 하니 역시 다크엘프가 제1후보다. 이어서 근친


종인 엘프 등.

세계의 장래를 내다본다해도, 갑자기ㅡ최초의 친구로ㅡ리자드맨이나 고블린은


조금 허들이 높다.

우선 가까운 종족부터다.

시선을 류미엘에게 옮겼다.

"ㅡ지금부터 제6계층에 간다.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따라오지만, 말해두는게 좋겠지.

아인즈는 류미엘을 데리고, 반지의 힘으로 제6계층에 전이한다.

류미엘에게 명령하면 말한 인물들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올테고, 나자릭의 최고지


배자로서는 만나고 싶은 인물들을 불러들이는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건, 원만히 일을 진행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아인즈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성의를 보여야겠지.

갑자기 불러내는것보다 이쪽이 찾아가는게, 더 존중받는다고 느끼거나 친밀함을


느껴줄 터.

수고스럽게 이 땅의 지배자가 나타났다고 좋은 방향으로 프레셔가 되준다면, 더


욱더 쉽게 진행될 것이다.

이 만나고 싶은 인물들이라는건, 예전에 모험자들을 나자릭에 끌어들였을 때, 포


로로 삼은 엘프 3명이다.
‘......엘프들을 제6계층에 둘 때 좀더 자세한 정보를 물어봤어야 했나...... 무리였
으니 말이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만났을 때 최저한만 얘기했을뿐, 엘프들의 나라라던


가 개인적인 정보까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도 그 후로도 아인즈는 노예로 학대받던 엘프들을 구해준 우호적


인 언데드라고 여겨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집의 위치나, 엘프라는 종족에 관한 정보를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선의


로 구해줬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지금 물어보는 것도 그게그거 아닌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자릭 지하대분묘 하나뿐이었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다양한 종족을 흡수한 나자릭 지하대분묘ㅡ아인즈 울 고운 마도국이, 엘프들의


나라와 국교를 열기위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으려 하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얼마든지 그런 변명이 가능하니 말이지. 그 둘이 폭력적으로 다루고 있다


는 얘기도 없고...... 마음을 열어준다면 최고지만,

뭐, 너무 기대는 안하기로 할까. 그때부터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좀 더 잘 명령했


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우라와 마레가 아인즈의 명령을 받아, 그 엘프들에게 거


짓으로 친절하게 대한다는것도 왠지 싫다.

이게 데미우르고스나 알베도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겠지만.

좀전의 일반 메이드와 코큐토스 얘기도 그렇다.

상대의 용모로 판단이 좌우되는건 위험한 일이지만, 아무리해도 용모로 판단하게


되는건 아인즈가 일반인이기 때문이리라.

류미엘을 데리고, 아인즈는 어두운 통로를 걷는다.

통로끝에는 거대한 격자문이 있어, 틈새로부터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앞은 제6계층의 원형투기장이다.

반지를 쓰면 쌍둥이의 집 근처까지 전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건ㅡ

ㅡㅡ마치 자동문처럼 격자문이 힘차게 올라갔다.

아인즈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 세계에 왔던 첫날에도 이렇게 이곳을 찾아와, 작은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아인즈님, 어서오세요!“

소녀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음. 아우라, 조금 볼일이 있어서 말이다ㅡ잘 부탁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우라가 대기하는 차례인가보다.

운이 좋군.

마도국이 거대해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각 계층수호자들이 하게 되었다.

당연히, 나자릭 바깥에서 활동하는것도 늘었다.

하지만, 어떤때라도 알베도, 데미우르고스, 마레, 아우라, 코큐토스, 샤르티아 중


2~3명은 나자릭에 남도록 하는 모양이다.

대체로 알베도에 코큐토스와 샤르티아로 3명이지만, 코큐토스는 리자드맨의 마


을 등에 가는 경우가 있고,

샤르티아는 드래곤들을 사역하기 위해 나가있는 때가 있다.

그런때는 다른 멤버가 남는 모양이다.

이건 아인즈의 명령이 아니다.

확실히 아인즈는, 이 나자릭의 방어책임자로 코큐토스를 두고, 부책임자에 샤르


티아를 두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지배영역의 넓이가 다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수호자가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다른 멤버는 밖에서


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저, 그걸 자신이 말할 수는 없었다.

수호자들이 자주적으로 행동하고 있는데, 아인즈라는 절대자가 의견을 내는 것으


로, 그것이 우선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역시 수호자들의 자주성을 존중하고싶다.

애초에 아인즈보다 훨씬 현명한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가 찬성한 단계에서, 아인


즈의 생각따위 무의미하겠지.

평범한 사람 이하인 아인즈의 생각보다 수호자들의 생각이 분명 올바를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아인즈님.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ㅡㅡ음“

웃음띈 아우라에게, 아인즈는 든직하게 답했다.

솔직히, 지금, 그렇게 든직하게 말할 의미는 없었다.

평소하듯 지배자같은 태도로 "음" 하고 자연스레 답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저, 왠지 모르게 지금부터 할 일을ㅡ잘 될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든직하


게 말해버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극적이었는지 아우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위험해, 뭔가 분명히, 또 착각할거야.

"위험ㅡ"
위험해, 라고 할뻔했다. 하지만 뭐가 위험하냐고 의문을 가지면 답이 없다.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면 여기저기 연기가 붕괴되어, 허둥지둥 대응할 자신이 있


다.

"ㅡㅡ우선, 그래, 우선 엘프들과 만나러 왔다“

"......확인하고 싶은데, 엘프들이라는건 포로 엘프들이 맞나요?“

‘미안하다. 역시 이상하게 얼버무리는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보지 말아줘...... 아까 그 미소를 한번 더......’

"......그래. 현재,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그리고 다음 한 수를 위해 여러 가지로


얘기를 들어두고 싶어서, 말이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이럴줄 알았다. 그보다 나자릭에 속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지금 아우라와 같


은 대응을 하겠지.

그렇기에 아인즈는 준비해둔 설득의 말을 이었다.

ㅡㅡ구슬린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 아니 그럴필요는 없다. 두 가지 노리는게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나, 요? 포로와 만나는데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역시, 라는 눈으로 보고 있다. 아뇨 아우라나 마레에게 이론무장하고 있을 뿐인데


요, 라고는 말할 수 없는 아인즈는 약간 시선을 돌리고 만다.

"하나는 내가 직접 간다는걸로 상대에게 프레셔를 주기위해.

또 하나는......엘프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토브 대삼림을 완전히 지배하


에 둔걸로, 다양한 자들이 이 제6계층에 왔다.

어떤식으로 되있는지, 이 눈으로 보고싶어서 말이다. 어떠냐 아우라. 괜찮다면,


가장 변화된 곳을 안내해줬으면 한다만, 괜찮나?"
기본적으로는, 각 계층은 수호자들에게 맡기고, 아인즈가 참견하는 일은 거의 없
다. 그러므로, 자신의 눈으로 변화를 직접 확인한적은 없었다.

그건 신뢰한다는 증거다. 부하들의 일이 잘 굴러가고 있다면, 옆에서 상사가 참견


하는건 귀찮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모처럼이고, 덤으로 봐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아우라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라고 할까. 긴장한 느낌이다.

"ㅡㅡ알겠습니다. 우선, 이란건 그런 뜻이었군요"

아우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괜찮나?’ 같은 질문은 필요없습니다, 아인즈님! 아인즈님은 나자릭의 절


대적인 지배자.

어딜 가더라도 그곳의 관리자의 의견같은걸 물어볼 필요는 전혀 없어요!"

"응......? 으, 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고맙다는 것도 좀...... 어, 꽃밭이 가장 변화된 곳이라고 생각되니, 그곳으로 안


내할게요"

"꽃밭ㅡㅡ"

아인즈는 기억을 뒤졌다.

"ㅡㅡ일부 식물계 몬스터들이 이주한 곳이었지"

"네, 맞아요. 그리고 지성이 없는 식물계 몬스터를 옮겨둔 격리 에리어, 지혜있는


식물계 몬스터가 사는 에리어,

개중엔 예전에 만든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 마치 인간처럼 살고있는 자들도 있으


니, 그곳도 안내해드릴까요?"
마을은 나자릭 내에서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든ㅡ

장래, 혹시 다른 플레이어와 만났을 때, 나자릭에서도 사람과의 공존공영을 도모


하고 있다는 변명을 위해 만든 것으로, 몇몇 작은 집이 놓여진 곳이다.

밭 같은것도 있지만, 솔직히 마을이라 할만한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그 외에 좋은 호칭이 없었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드라이어드 피니슨을"

"......아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거의 거짓말이다.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모양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게 있었다는 기억은 있다.

그 후의 전투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는게


맞겠지만.

확실히 말해서 아인즈는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명함이 있으면 뒷면에 만났을때의 인상을 적어놓는 타입이다.

"그게 마을에선 촌장같은 일을 하고있어요“

듣자하니, 식물계 몬스터들은 상당히 기분파인 자들이 많은 모양으로, 피니슨이


촌장의 위치라해도 어디까지나 자칭이라한다.

하지만, 나자릭에 처음 온ㅡ다른 식물계 몬스터들과의 중개역할을 했다는것도 있


어서, 어느정도는 인망이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나자릭 바깥에서 온 식물계 몬스터들의 대표자라고 할까.


피니슨보다 강한 식물계 몬스터도 있어서, 좀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때도 있다지
만, 아우라와 마레라는 뒷배가 있어서, 지금은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다고 한다.

나자릭에 온 식물계 몬스터는 아우라와 마레의 환영을 받았다.

환영이라는건 단순히 두명의 전투능력을 직접 보고, 그들을 따르는 몬스터를 보


여준 것이다.

그걸로 서로의 전투능력 차이를 깨달은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둘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또, 과금 몬스터인 삼림용(우드랜드 드래곤)을 마레가 거느리고 있는걸 본 몬스터


는, 마레가 신이 아닌지 두려워하게 됐다고 한다.

결정적인건 비를 내리거나, 대지의 영양분을 무서울정도로 높이는걸 본뒤라고 한


다.

"하지만, 정말 모든 몬스터에게 신이라 여겨지는건 아닌 것 같아요. 드루이드의


마법이라고 알고 있는 몬스터도 있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찬양하는 존재같은...... 뭐라 해야 할까요....."

아우라가 으음~ 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인즈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요컨대 굉장한 아바타를 만든 플레이어를 [신]이라 찬양하는것과 비슷한 거겠지.

혹은 아이돌같은, 또는 둘다 섞였거나.

"ㅡㅡ과연 대체로 이해했다. 우선 둘이 별일없이 데리고 있다면 문제없다. 그게


어떤 수단, 방법이라도 말이지. ......아, 음. 그런거다"

아인즈는 두명이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걸 잘 표현하지 못한걸 후회했다.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지 말고, "훌륭하다" 고 솔직히 칭찬하면 될 것을.

아우라의 표정을 훔쳐보니, 딱히 신경쓰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심을 겉으로


내비치고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아랫사람의 의욕을 꺾을만한 말은 하는게 아니라고, 몇권이나 비즈니스 책에 써


있었잖아......’

아인즈는 말을 좀더 주의해야겠다고 반성한다.

그리고 똑같이 어조나 목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도.

"......으흠. 마을에도 가서 보고싶긴 하다만, 이번엔 꽃밭에만 가자. 기껏 제안해


주었는데 미안하구나, 아우라"

아우라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시, 신경쓰지 마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아인즈님은 이 나자릭의 절대통치자! 이


계층을 아인즈님 원하시는대로 가시면 됩니다. 잘난 듯 제안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왜 사과하는거야? 그보다......아까부터 아우라 답지않은 이상한 반응인데?


혹시 처음 봤을 때 얼버무린게 이상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나?

내가 뭔가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던가?’

아인즈가 당황하고 있는 도중에도 아우라의 말은 멈출줄 몰랐다.

"아인즈님이 가선 안되는곳 같은건 이 나자릭ㅡ아니,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어


요!"

아니, 세계에 가선 안되는곳 같은건 잔뜩 있다고 아인즈는 생각한다.

특히,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곳 등 얼마든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


자, 아우라는 들어가도 될걸요 라고 말하겠지.

분명 어색한 상황이ㅡ아인즈에게ㅡ생길 것 같으므로, 다물고 있었다.

슬쩍 류미엘을 보니 "그럼요" 라고 말하듯 수긍하고 있었다.


이젠 뭔가 이런저런 변명하는게 귀찮다.

하지만 그런 내면의 감정이 겉으로 비치지 않게 주의하며, 아우라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그럼 안내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아우라가 자신의 가슴을 퉁 두드렸다.

"그래서ㅡ이동은 어떻게 할까요? 뭔가에 타시겠어요?"

"그렇구나. 맡겨도 될까?"

"네! 맡겨주세요!"

아우라는 전혀 다른곳을 바라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뭔가에 집중한다.

그 시간은 고작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더 가까운 곳에 다른 마수가 있습니다만, 제가 멋대로 펜과 쿼드라실을 불렀어


요. 괜찮았을까요?"

"여기서 나에게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아우라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난 이의


가 없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래, 잘 부탁한다"

아인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투기장을 바라본다.

나자릭 지하대분묘를 산책하며 즐거운건ㅡ9계층이나 10계층의 즐거움과는 조금


다르다ㅡ 제6계층과 제5계층이다.

특히 아주 드물지만, 타이밍에 따라선 제5계층에선 오로라라는 발광현상을 보기


도 한다.
그저, 그 출현확률은 대단히 낮게 설정되있는 모양이다.

그런의미에선 평범히 걸으며 즐거운건 제6계층이겠지.

거길 돌아다니는거다. 아인즈는 미소를 띄우며, 약간 위가 편안해지는걸 느꼈다.


"실례합니다"

아우라는 주인과 류미엘에게서 약간 떨어져, 목걸이를 벗었다.

쌍둥이의 목걸이는 쌍방향 통신이 가능한 레거시 아이템이다.

그다지 강한 아이템이 아닌데도 항상 그걸 착용하고있는건, 착용 후 2일이 경과


하지 않으면 능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 아이템은 그런만큼 강력한 것이 많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게다가 사용하기 위한 조건으로, 기동하는 쪽ㅡ정확히는 말을 거는 쪽은 목걸이


를 쥐고 있어야해서,

하드한 전투를 하는 도중에는 사용하기 어렵다.

그저, 제한이 그것뿐이라, 무한히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아이템이지만, 우수한지 아닌지, 슬롯 하나를 쓸 가치가 있는지 의견이 갈라


지겠지.

"ㅡ마레. 아인즈님이 오셨어"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레의 목소리가 뇌내에 울렸다.

『에, 에? 아인즈님이 직접, 여기에? 대체 무슨일이야?』

"뻔하지. 시찰이야, 시찰"

『에에!?』

"우리나 영역수호자들이 계층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나 확인하러 오신거라 생각


해.

......이번엔 새로 만든 꽃밭만 시찰해주신다고 했지만......영역수호자들에게 요


즘 늘어지진 않았나 확인해보는게 좋겠어"

『이 계층이 가장, 외부인이 많아서 그렇다는...거야? 아니면 순서가 있는걸까?』

"ㅡ아아, 그럴지도 몰라"

아우라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연결됬다.

물론, 아우라가 멋대로 상상한걸지도 모르지만 틀리진 않았겠지.

"아인즈님은 두 가지 노림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아인즈님이니까... 두 가지


뿐일 리가 없어.

.....어쩌면 이렇게 우리들을 더 열심히 하게끔 만드는게 말씀하지 않으셨던 세 번


째 노림수일지 몰라"

『아아..... 바깥일이 많아졌지만, 가장 중요하며 기본적인 일도 잘 하고 있는가를


확인한다는거?』

그런걸 왜하는지, 어렴풋이 짚이는 점이 있다.

예전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가 분단위 스케줄로 일하던 모습을 부러움이 묻어나


는 시선으로 보고 있던 자들

ㅡ예를들면 샤르티아나 코큐토스도, 지금은 나자릭 바깥의 임무가 늘었다.

특히 왕국을 멸망시킬때는, 그 무력으로 충분히 충성을 증명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들뜬 상태를, 주인은 알아챈걸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아우라 일행은 나자릭의 계층수호자.

자신에게 주어진 계층을 방어하고,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절대불변의 직책이 있


다.
새로운 일에 몰두해서, 본분을 잊지는 않았는지 묻고싶은 것 아닐까.

하지만, 주인의 입으로 아우라 일행들의 일처리가 불안하다고 말씀하게 두는건,


계층수호자 실격이다.

혹시 이번일을 다른 계층수호자ㅡ특히 수호자 통괄인 알베도가 안다면, 눈에 쌍


심지를 켜고 질책할게 틀림없다.

그러니,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건 주인의 상냥함이리라.

『어쩌면 모두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우리들이 다른 수호자에게 이런일이 있었다


고 전하게 하는것도 노림수일지도.....』

"그럴지도. 그러면 그걸로 4개째, 려나? 아직 더 있을거 같은데......"

아우라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마레도 마찬가지 같았다.

데미우르고스나 알베도라면 알지 모른다 생각하니 조금 분했다.

"아무튼, 준비시켜놔"

『......응? 준비 시키라고?』

"아, 미안. 깜박했네. 아까 두가지 노림수가 있다고 했잖아. 첫째가 시찰이고, 다


른 하나가 그 빈집에 있는 엘프들을 만나러 오신거야"

『아아, 그 사람들...... 그 사람들 왕족이 어쩌구 시끄럽단 말이지. 아인즈님, 데려


가 주시지 않으려나』

마레가 정말 싫은 듯 말했다.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는걸 좋아하는 마레는, 그 세명이 보기엔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는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라,

아우라와 비교해서 몇 배나 돌봐주고 있다.

이불을 널어버리거나, 옷을 입혀주거나, 때로는 목욕시중까지.


마레에겐 제법을 넘어 상당히 귀찮은 모양이지만, 주인의 명령으로 데리고 있는
이상, 함부로 ‘시중’을 거절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ㅡ아, 펜이랑 쿼드라실이 가까이 왔나봐. 거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마레, 곧장 준비해둬"

『응. 알았어』

마레와의 교신을 끊고, 아우라는 주인과 류미엘에게 돌아갔다.

나자릭의 제6계층의 여러 가지 색의 꽃이 만발한 꽃밭을 여기까지의 지옥을 겪어


본 침입자들이 보면,

어딘가에 의태한 몬스터나, 치명적인 함정이 숨겨져 있을거라 생각할게 틀림없


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건 없다.

이런 ‘아무리 봐도’ 있을법한 장소지만, 사실 침입자에 대한 장치는 아무것도 없


다.

위그드라실에선 꽃으로 의태한 식물계 몬스터나 곤충계 몬스터 등이 있었지만,


여기엔 배치되지 않았다.

거기에 이런 특별한 곳에 대체로 있을법한 영역수호자도 없다.

어떤 의미론 아우라와 마레의 직할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정말 아름답기만


한 꽃밭이다.

분명 원래는 함정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제6계층까지 쳐들어온 침입자가 이곳을 단순한 꽃밭으로 볼리 없다.

경계하여 다가오지 않던가, 선수를 쳐 불타 오르는 부가효과를 가진 공격으로 태


워버리곤 하겠지.
그때를 위해 주위에 불에 반응하는 맹독이나 마비독을 뿜는 꽃을 두려는 아이디
어가 있었다.

하지만 여성진 3명의 거센 반대로 다시 만들었던 경위가 있다.

그 결과, 이곳은 평범한 꽃밭이 되었다.

그런 장소가 아인즈가 알고있는 제6계층의 꽃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 하나 정도는 삼킬법한 꽃봉오리가 꽃밭에 떡하니 튀어나와있다. 그 수는 12


개.

척봐도 수상한ㅡ아니 분명 뭔가 있는 느낌이었다.

아인즈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 세계엔 아인즈가 모르는 몬스터도 많지만, 위그드라실에도 있던 저 형태의 몬


스터를 떠올렸다.

"저건 아를라우네, 맞나?"

"네! 맞아요!"

나자릭내에는 배치되지 않았었고, 이 세계에 온 이후 소환된 자들도 아니다.

그 후에 외래종ㅡ토브 대삼림에서 데려온게 틀림없다.

그리고 꽃밭의 중앙엔 삽이 하나 꽂혀있었다.

신기급 아이템, 어스 리커버다.

어스 리커버는 신기급 무기로 내구성은 엄청나게 높지만 반면에, 공격성능이 매


우 낮다.

대부분의 데이터가 부가효과에 집중되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꽃밭에 있는건 거대한 앙골라토끼를 닮은 마수ㅡ스피어 니들.


꽃밭에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당근을 냠냠대는 모습은 대단히 목가적이며, 메르
헨스러웠다.

하지만, 저게 여기에 배치된 이유는 그런게 아니겠지.

아우라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감시역일 것이다.

저래뵈도 레벨은 60후반.

아를라우네들이 뭔가 하려 해도 간단히 섬멸할 수 있을거다.

"참고로, 저 애가 먹고있는 당근은 밭에서 딴 거예요.

피니슨 같은 식물계 몬스터들이 각각 힘을 써서, 영양을 많이 줘서, 일반적인 당


근을 저렇게 거대하게 변질시켰어요"

"기른게 아니라 변질시켰다고? 먹여도 괜찮은거냐? 뭐, 확실히 저 레벨이면 어중


간한 독은 효과가 없겠다만......"

"독은 없어요. 요리장에게 확인해봤는데, 식재료로 쓸만하다 그랬어요.

그래도 원래 나자릭에 있던 식재료처럼 버프효과를 늘리는 효과는 없다는게 아쉬


운점이라,

그저 단순히 커지고, 단맛이 늘었다는 정도지만요"

"그건 식재료로서 상당히 성공한게 아니냐? 마도국에 있는 평범한 농민도 만들


수 있나?"

"무리예요. 식물계 몬스터들이 협력해도 대량으로 기르는건 어렵다는게 현실이예


요.

어스 리커버의 힘을 써도, 당근 하나가 땅의 영양분을 상당히 빨아들이는 모양이


라......

사막화까진 아니지만, 땅의 영양분을 회복시키는 마법같은걸 쓰지 않으면, 최저


1년은 밭을 쉬게해야되서......"
아인즈 일행이 바라보자, 그 중 하나ㅡ가장 큰 꽃봉오라기 천천히 열렸다.

"ㅡ아를라우네 로드. 여기있는 아를라우네 14체의 대장이예요"

아우라가 소곤소곤 소개해주었다.

저 열리고 있는 아를라우네를 말하는 거겠지.

"14체?"

재빨리 한 번더 수를 세어본 아인즈도 소곤소곤 질문했다.

"12체가 아닌가?"

"네. 남은 2체는 태어난지 얼마안되서 저 꽃밭속 꽃에 숨어있어요. 꺼낼까요?"

"......아니, 안해도 된다"

이 나자릭 안에서 태어났다는건 나자릭의 몬스터로서 카운트 되는건가, 아닌건


가, 성능은 어떤가

여러 질문이 떠오르지만, 그걸 아우라에게 묻기전에 꽃이 완전히 열렸다.

안에는 상상대로 여성같은 몬스터가 있다.

위그드라실에서 본 모습과 흡사하다.

로드라고 했는데, 크기 말고는 다른점이 없다.

머리와 눈 색은 꽃 색과 같고, 온몸은 줄기와 같은 녹색이다. 옷은 입고 있지 않지


만, 피부가 얇은 줄기로 형성되있어, 약간 징그럽다.

눈이 치켜올라가 있어, 우호적인 얼굴로는 안보인다.

화가 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득 아인즈는 그리움을 느꼈다.


성왕국의 위압적인 눈매의 소녀를 떠올린 것이다.

아인즈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눈만은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


다.

그 몬스터의 얼굴이 사악하게 일그러졌다.

"안녕하십니까, 아우라님. 오늘도 굉장한 빛을 내려주셔서, 초록 종족을 대표해


감사올립니다"

방울소리처럼 맑은 목소리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심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방금 미소는 순수하게 환영하는 의미였겠지.

지금도 그 웃는 얼굴은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밖에 보이지 않지만.

로드 이외의 꽃잎이 크게 움직이지만, 꽃이 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머리를 꽃잎으로 다 숨기지 못하고, 힐끗힐끗 이쪽을 보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실례라곤 할 수 없다.

어쩌면 아를라우네의 문화에선, 저런 태도가 가장 경의를 표하고 있는걸지도 모


르니까.

"그래서ㅡ"

로드의 시선이 힐끗 아인즈를 향했다.

"ㅡㅡ이 분이야말로 나자릭 지하대분묘의 지배자이자, 저 숲뿐 아니라 여기 일대


를 완전히 지배하에두고

다양한 종족을 받아들인 마도국을 건국하신 왕중의 왕. 절대적인 군림자 아인즈


울 고운 마도왕 폐하야!"
아우라가 자랑스레 말하자, 로드의 얼굴이 왠지 사악하게 변했다.

다른 아를라우네의 꽃잎은 떨리고, 조금씩 얼굴을 숨기고 있다.

이건 경계하고 있어서인가 무서워서 인가. 또는 탄복해서 일까.

그녀들의 표정으론 단언할 수 없지만, 아인즈는 2번째라고 생각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이 땅의 지배자시며, 마도국의 통치자. 그리고 무엇보다 아


우라님, 마레님의 주인님인 아인즈 울 고운 마도왕 폐하"

양손을 벌린건 인사한거겠지.

"저는, 무라사키(보라색)라고 합니다.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머리색이잖아. 아인즈는 생각했다.

뭐라고 할까 정말 그대로인 이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부모에게ㅡ아마ㅡ받은 이름을 직설적으로 무시하는건 최악이다.

"음. 기억해두마. 하지만 이 땅은 아우라와 마레에게 맡겨두었다.

내가 직접 지시를 내리는일은 거의 없겠지. 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도록"

이 아를라우네들을 둘이 어떤식으로 관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대충 둘


러댔다.

사장과 부장이 말하는게 엇갈리면 상당히 성가시다.

아인즈에게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를라우네들이 어떤 역할이며, 어떻게 대우되고 있는지 모르므로, 할 말


이 없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마도왕 폐하"


숲에서 자란 것 치고는 예의가 있구만, 아인즈는 감탄했다.

그녀의 지식은 언제 어디서 베운걸까.

둘에게 지도받은걸까 아니면ㅡ

‘ㅡ그런 뉘앙스로 말하고 있을 뿐이고, 실제론 아를라우네만 아는 소릴 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예를들면 아인즈 커다란 꽃봉오리다 같은 소릴 하고 있는지도 몰라’

말이 통한다는건 상당히 좋지만,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적도 있지 않을까. 뭐, 실


제로 큰 꽃봉오리라 부른들 아무렇지 않지만.

아인즈는 꽃밭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막는 아를라우네가 조금 방해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머진 예전에 본 그대


로다.

아인즈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미소를 띄우며ㅡ물론, 얼굴은 움직이지 않는다ㅡ최


대한 멋있는 척 로브를 펄럭이며, 발길을 돌렸다

그곳엔 펜릴과 이참나, 그리고 류미엘이 있다.

걷기 시작하자 아우라가 나란히 서서, 질문했다.

"이제 되셨나요? 다른 아를라우네에게 배알할 기회를 줄까요?"

"아니, 그럴필요는 없다. 보고싶은건 봤다. 다음은 엘프들에게 안내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대답한 아우라와 함께 펜릴에 탄 아인즈는 제6계층을 나아간다.

이윽고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올려다보니 나무들에서 뻗어나간 가지들 사이로, 아우라와 마레가 살고있는 약간


못생긴 나무가 보였다.

몇 초 만에 나무들 사이를 빠져나가니, 전방에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초원 중앙에, 세로보다 지름이 더 큰 땅딸막한 나무가 있고, 무성한 가지가 대지


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나무에 뻥 뚫린 구멍 앞에, 마레와 엘프 3명의 모습이 있었다.

아인즈를 마중나온 거겠지.

아우라와 마레가 언제 연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 계층에 오자마자 연락


했다면, 꽤 기다리게 한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약속한건 아니니, 아인즈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령 아인즈가 지점장이라 하고, 시찰온 본사의 사장이 가까운 역에 도착


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곧장 회사앞에서 기다리겠지.

마중 나가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몇 시쯤에 간다고 말해두지 않은 아인즈가 잘못했다 할 수 있


다.

아인즈 본인은 이곳에 도착할 때 까지 그 생각을 미처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싶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걸까.

게다가 얼마나 기다리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기다리지 않아도 됬는데" 라고 말하는 놈은, 상대의 입장이나 기분을 좀 생각해


주란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마레는 평소의 복장으로, 엘프들은 검소한ㅡ그게 좋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ㅡ동일한 작업복을 입고 있다.

솔직히, 조금 그렇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아우라와 마레가 좋다고 생각한


거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ㅡ메이드 복 같은거였으면 류미엘 일행이 불만을 품을지도 모르니까 말


이지’

아인즈를 섬기는 메이드라는걸 일반 메이드들은 자랑스레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니, 예를들어 외부에서 메이드 후보를 데려오면 직접적으로 왕따시키진 않아


도,

간접적인 괴롭힘ㅡ일을 가르쳐주지 않거나ㅡ은 있었다고 세바스가 말한적이 있


다.

아우라나 마레를 섬기는 메이드라면, 그렇게까지 불쾌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그럴거라 볼수는 없다.

게다가 자신들과 같은 코스튬을 입고 있어선 싫어할지 모른다. 그녀들에겐 메이


드복이야말로 전투복이니까.

펜릴이 4명의 앞에 도착했다.

"ㅡ일부러 마중나오다니 수고했다. 너희들의 깊은 충성심에 나는 매우 만족한다"

아인즈는 펜릴에 탄 채로, 선수를 쳐 위에서 말을 건넸다.

마레의 마중인사를 듣고나서 할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이쪽이 먼저 감사한다고


하는게 좋은 사람이라 생각될거라고 판단했다.

"가, 감사합니다"

마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세명의 엘프들도 따라서 금방 고개를 숙였


다.

'좋아’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했다고 느낀 아인즈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인즈는 고개를 든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얼굴은커녕 몸 전체가 굳어있었다.

그런 그녀들은 아인즈의 시선을 받아, 꿀꺽 침을 삼켯다.

누가 어떻게 봐도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다.

즉, 실례되는 짓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감정 때문인지, 유명인을 만나


서 긴장하고 있는지다.

만약을 위해, 아인즈는 자신이 오라를 발동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적의나 살의같은 감정을 엘프들에게 품고있지는 않으므로, 그걸로 무서워하고 있


는건 아니겠지.

'이게 은근히 성가시단 말이지.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인즈 같은 강자가 강한 감정을 가지면, 상대가 민감하게 알아채고, 공포에 지배


당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의미로는 이쪽의 생각을 읽었다는 뜻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코큐토


스와의 훈련에서 여러모로 주의를 받기도 했다.

한편, 상대의 살기 등 기척을 아인즈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한다.

대단히 싫어하는 코큐토스에게 명령해서, 억지로 그런 감정을 품어보라고 했지


만, 분명 위압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살기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언데드라는건 그런걸 느끼는 능력이 낮은 것 아닐까.

언데드는 정신작용에 대한 완전내성을 가졌다.

살기를 느낀다는건 넓은 의미로 정신에 작용한다고 못 할 것도 없다ㅡ라는 생각


도 든다.
하지만, 샤르티아는 살기를 느낄 수 있다하니,

코큐토스가 말하길 "전사로서 더욱 실력을 키우면 그런 감정도 느끼기 쉬워지는


것 아닌가" 라고 한다.

그러니 장래적으로 그런것들을 느낄 수 있게끔 수행하는건 나쁘지 않겠지.

어쩌면, 단순히 아인즈가 둔감한 걸지도 모르지만.

'어이쿠ㅡ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아인즈가 정신을 차린것과 마레가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그ㅡ 그게, 말이죠, 아인즈님은 오늘, 이, 이 자들을 만나고 싶다시는데, 어쩐


일이시죠?"

평소보다 쭈뼛대는 마레지만, 역시 아우라에게 얘기는 들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빠르다.

아인즈는 마레에게서 얼굴을 크게 움직여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그걸 피하듯 지면에 시선을 떨구었다.

척보면 알만큼 떨고 있었다.

'이건 무서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우라와 마레라는 다크엘프 애들을 부하로


두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경계하고 있다는 걸까?

솔직히, 산 자인 두 명이 충성을 맹세하고, 여기서 평범히 살고 있으니, 본인들이


아는 언데드와는 다르다고 알아줄 법도 한데......

뭐, 외모가 이러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납득하는건 어려우려나’

이 세계에서 언데드는 산 자를 증오하는 존재로, 모든 산 자의 적이라는 입장이


다.

그런 존재를 앞에 두고 그녀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


지.

어쩌면 그녀들이 샤르티아 밑에서 언데드를 쭉 봐왔다면, 익숙해져 반응이 달랐


을지도 모르지만, 이 제6계층에는 언데드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ㅡ백문이 불여일견, 이었지’

위그드라실에서도 그랬다.

플레이어 스킬에 관한 테크닉 같은 건, 말로 설명받기보다 눈앞에서 보여주는 게


알기 쉬웠다.

물론, 그 후에 스스로 몇 번이나ㅡ아니, 몇 백회나 반복해 연습해야 겨우 익숙해


지는 거지만.

"ㅡ그래. 맞다, 마레. 뒤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그래, 간단한 볼일이 있어서 말


이다"

엘프들의 호흡이 짧고 빨라졌다.

너무 무서워말라구, 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무서워 말라구~♪" 이렇게 밝게 말할 수는 없다.

나자릭의 지배자인 아인즈 울 고운의 연기를 무너뜨릴 순 없다.

하지만 안심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너무 걱정하지마라. 너희들을 해치려고 여기 온게 아니다"

이어서 "그러니 안심해라" 고 말하려다가, 나였다면 무서운 상대가 그렇게 말한다


고 납득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말할 수 없었다.

사장이 야자타임이라 했다고, 정말 입장을 무시할 수 있는 사원이 있을까.

'하아. 귀찮다......'
좋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지배(도미네이트)>같은 정신조작계 마법을 쓰고 싶어
진다.

설득하거나, 안심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은 효과가 끊어진 후에도, 들은 말이나 한 일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은 정신조작계 마법을 써서 뭔가 시키는걸 만행이라 보는 듯


하다.

엘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달갑게 생각지는 않겠지.

실제로, 아인즈도 나자릭 멤버들에게 그런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치명적인 일격


을 주려고, 호시탐탐 상대의 틈을 노릴 것이다.

물론,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런 수단을 쓰는것에 조금의 주저도 없다.

오히려 <기억조작(컨트롤 암네시아)> 까지 거리낌없이 쓰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녀들이 뭔가 나쁜짓을 하고 있다던가, 정보를 감추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건 아


니다. 그리고ㅡ

'ㅡ젠,벨이었나 그때와는 다르니. 얘길 들어보면 끌어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


해 마법을 써버리면

아우라와 마레가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모른다고ㅡ나아가선 둘의 능력을 의심쩍


어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쌍둥이, 아니, 나자릭 지하대분묘에 속하는 자들 모두가, 아인즈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옳다고 여긴다ㅡ솔직히, 위험한 사상이다ㅡ

충성심이 매우 높은 집단이라는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인즈가 관리하기 어려워한다고 생각한다는 오해를 받을 짓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무엇보다, 아인즈는 결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애초에, 정신조작계 마법을 쓸거라면 좀더 전에 썼으면 됐다.

그녀들을 붙잡았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은건, 호의적으로 이쪽의 아군으로 삼고싶


다ㅡ고통받던 그녀들을 구했다는 평판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선행투자를 고려하면, 마법적 수단으로 강제하는건 너무 성급하


다.

"ㅡ음. 우선, 여기서 얘기하는것도 뭐하니 장소를 옮기자"

말로 안심시킬 자신이 없다면, 다른 수단으로 안심시키면 된다. 우선 장소다.

"그러시다면 위로!"

"마, 맞아요! 그렇게 하세요!"

"아ㅡ"

아인즈는 시선을 위로ㅡ거목에 옮겼다.

그녀들과 얘기할 장소로, 여긴 어떤걸까.

여긴 어떤 의미로 그녀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가 그녀들이 얘기하기 쉽지 않을까.

근데 그러면 마실건 누가 준비하는걸까.

아우라나 마레가 하는걸까.

아니, 데려온 류미엘이 하면 문제없다.

'나쁘지 않아. 결국 얘기를 부드럽게 할까, 긴박한 분위기속에서 할까다.

즉,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정보를 불게 할지, 위압해서 불게 할지.


으음, 시간이 없어. 이상해, 전에는 제대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해서, 반응
이나 질문도 예상했었는데......

드워프 때나, 성왕국 때처럼..... 요즘, 조금 조잡해졌나?'

상대에게 초대받았으니 가능한 빨리 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고보니, 일반 메이드가 스스로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한 적은 없네. 아,


아니, 한 번 정도는.... 있었.... 나’

준비된 음료수가 없, 지는 않을 거다.

전에 아인즈가 명령했을 때는 주스를 필두로 여러 음료수를 말해주었다.

즉, 아인즈의 방 어딘가에 준비되있겠지.

일반 메이드들은 완벽한 메이드가 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고 있다.

잊고 있거나,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는건, 역시 지배자인 아인즈가 음료를 마시지 않으니, 다른 자들이 마시는


건 좋지 못하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마시지 않는데 부하만 마신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것과 마찬가지다.

아마, 가장 옳은건ㅡ마시지 못하더라도ㅡ아인즈에게도 음료를 준비하고, 방문한


상대에게도 음료를 주는거겠지.

'여태까지의 손님들에겐 좀 미안하네......‘

아인즈는 돌아가면 그런걸 페스토냐에게 말해둬야겠다고 생각하곤, 지금 안 해도


될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것에 당황한다.

'아니아니, 그게 아냐. 지금 생각할건 어디서 마실까야.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아우


라와 마레의 집에서 차마시기 싫다는 오해를 받을거야.
그건 위험해. 하지만ㅡ!'

곤란한 아인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우라가 "아!" 하고 소리를 지르자, 아인즈는 어깨가 들썩이는걸 꾹 참았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강제적으로 마음이 진정된걸지도 모른다.

"혹시 여기말고, 제6계층 어디 다른곳에서 얘기하려 그러세요?"

"으, 음. 그렇다. 날씨도 좋고, 밖에서 얘기하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그러시다면 준비할게요. 파라솔이나 테이블도 있어요! 저희들도 쓰고 있는 거라


지금도 쓸 수 있어요.

만든 마을에 쓰지 않는 집도 있고, 안내해드리진 않았지만 이 계층엔 정자도 있어


요!“

"그래, 모두와 가본적이 있다"

아인즈는 문득, 동료들과 실없이 얘기하던 때를 떠올렸다.

'ㅡ옛날보다, 떠올리는 횟수가 줄어든 느낌이 드네’

그건 동료들의 그림자를 NPC에게서 못보게 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옛 동료들을 잊어가고 있는걸까, 아니면 NPC를 독립된 존재로 보게 된 걸까.

후자라면 좋지만, 전자라면 상당히 쓸쓸한 일이다.

스즈키 사토루의 모든 것ㅡ지금도 떠올리면 찬란히 빛나는, 모든 즐거움은 그들


과 함께했다.

'ㅡ아냐! 추억같은게 아냐! 아인즈 울 고운은 여기 있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아인즈는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조금씩 마음이 타들어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우라와 마레를 바라보았다.

'......옛날엔......여길 떠날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니, 그때의 NPC는 말그


대로 NPC였어. 만약 그때, 어이쿠......‘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이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이번 계획을 확실히 실행해야지.

주위의 표정을 둘러보자, 딱히 수상쩍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아우라의 제안을 어떻게 할까 고심하고 있다 생각한거겠지.

그럼, 지금은 모든 생각을 덮어놓고.

"그렇구나...... 이 계층도 나쁘진 않다만...... 모처럼이니. 다른 곳에서 얘기하자


꾸나.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다른 곳을 봐두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완전히 우호적으로 진행하려면, 그들에게 익숙한 곳도 좋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곳을 떠나고 싶다.

그렇다면, 어디서 얘기할까. 후보는 둘.

하나는 에란텔. 다른 하나는 나자릭 지하 제9계층이다.

현재 에란텔을,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고 있는걸 보여주는건, 분명 엘프들에게 매


우 좋은 인상을 주겠지.

하지만,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거라 단언할 순 없다.

폭력같은 직접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고, 엘프들을 구슬릴 수도 있겠


지.
하지만 엘프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는 짓을 당하면 귀찮다.

예를들면 마도왕 때문에 고통받고 있어요,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략의 일환으로, 정신조작계 마법을 써서 다수의 인간을 조종해, 데모하게 만들


면 엘프가 의심스레 여기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애초에 아인즈는 에란텔에선 공포의 대상이다.

탄복하는 자도 있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다.

유감이지만 7대3 정도일까.

그러니 두려워한다는걸 보여주는건 역시 마이너스겠지.

거기에ㅡ엘프들이 보기에, 에란텔에 사는 여러 종족들은 노예처럼 끌려왔다고 착


각하면 완전히 망한다.

'그럼 역시 제9계층. 어디가 제일 좋을까?‘

아인즈는 생각했다.

사장실에서 음료를 대접받는것과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는 것.

자신이라면 어느쪽이 안심될까.

"답은 하나구나. 달리 뭐가 있겠느냐. 그래. 제9계층에 가자. 그곳에 식당이 있으


니 거기서 가볍게 식사라도 하면서ㅡ이미 했나?“

"아, 아뇨, 아, 아직이예요“

"그렇구나. 그럼 딱 좋은 타이밍이구나"

실제론, 살짝 노리고 있었다.

배가 부르면 마음도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려서, 식사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것 아닌
가 걱정했지만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아니, 이 계층에 아인즈가 도착했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으니 언제 올지 모르는데,


식사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겠지.

"좋다. 그럼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자꾸나“

아인즈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어떠냐?"고 물었다.

엘프들은 당황하면서, 셋이 서로 바라보면서, 누가 말할까 눈치를 보더니 가운데


엘프가 답했다.

대표가 됐다기보다는 좌우에서 강요된 느낌이다.

"네, 네. 아우라님과 마레님이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부탁합니다"

아인즈는 확실히 둘을 무시하고 결정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인즈도 둘에게 물었다.

"문제 없다면 식당에 데려가고 싶은데 어떠냐? 너희도 왔으면 좋겠다만?"

"저희들은 괜찮아요! 그치, 마레"

"으, 응. 아, 아니, 네. 누나 말대로, 괘, 괜찮아요"

"그거 다행이구나. 그럼ㅡ"

아인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ㅡㅡ<전이문(게이트)>을 발동하겠다"
우선 <전이문(게이트)>로 제6계층의 게이트 앞까지 이동, 거기서 <전언(메세지)>
를 날려,

게이트를 관리하는 오레올에게 제9계층으로 이어지게끔 명령했다.

당연하지만, 제8계층에서 제9계층으로 가는 게이트도 문제없이 기동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아리아드네에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는 없다.

링 오브 아인즈 울 고운으로 인한 전이에는 인원제한이 있어서

이곳에 있는 전원을 한 번에 옮길수는 없지만, 두 번 왕복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런데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이유는, 엘프에게 가짜정보를 주려는, 아인즈의 경


계심때문이었다.

또한 가능하면 반지의 힘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제9계층의 게이트를 넘어가니 코큐토스의 부하들이 경비를 서고 있으며, 나타난


아인즈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ㅡ수고하는구나“

아인즈는 지배자다운 태도로, 대범하게 그 한 마디만을 건넸다.

아우라, 류미엘에 이어 엘프 세 명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인즈에게 신하의 예를 보이는 몬스터를 보자마자 얼어붙은 듯 멈췄다.

코큐토스의 부하들이 엘프들에게 적의를 보이며 위압한 건 아니다.

그저, 숲을 걷고 있던 일반인 앞에 야생 호랑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우선


경직되기 마련이겠지.

엘프들도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엘프 중 한 명이 뒤에서 가볍게 밀렸다.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멈춰있었기 때문에 가장 뒤에 있던 마레에겐 방해물 그 자


체였다.

그러니ㅡ그래도 참으며 가볍게ㅡ밀어낸 모양이지만, 한계치까지 긴장하고 있던


엘프에겐 넘어질만한 일격이 되었나보다.

"히이......"

측은한 소리를 내면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며 좌우의 엘프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보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일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두려워 마라. 이 나자릭 안에서 너희들을 헤치는 자는 하나도 없다"

"네, 네에..........."

아인즈의 말을 의심하는건 아니겠지만, 극도의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좌우에 선 엘프들이 상당히 빠르게 끄덕이고 있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저앉은 엘프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이래선 앞으로 곤란하다고 아인즈는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

"......식당에 가기 전에 잠깐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전이문>. 아우라, 그 애를


안아 올려주거라"

"네!“

"아, 아뇨, 아우라님이 그러실ㅡ"

"ㅡ괜찮아, 괜찮아, 자, 들게"

주저앉아 있는 엘프의 말을 무시하듯, 아우라가 엘프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멨


다.

엘프가 입고있는건 작업복이라 치마가 들춰지는 이벤트는 없었다.

검은 반구형 구체 ㅡ <전이문> 너머엔 익숙한 아인즈의 방이었다.


세명의 메이드 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게 보였다.

그녀들의 발밑엔 청소도구.

"수고한다. 나는 조금 쉬고 떠날거다. 청소를 계속해도 좋다"

메이드들이 "알겠습니다"며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자 동시에 뒤에 있던 자들이 <


전이문>을 빠져나왔다.

엘프들이 입을 반쯤 벌리고, 두리번두리번 방안을 살피고 있다.

꽤 바보 같은 표정이다.

아우라와 마레의 집과는 상당히 달라 신기한 모양이다.

게다가 아까보다는 조금 편안한 모양이다.

몬스터 같은 코큐토스의 부하들보다는 일반 메이드들이 받아들이기 쉽고, 무섭지


않은 거겠지.

"아우라, 거기 의자에라도 앉혀주거라"

아인즈가 알베도의 자리를 가리키자, 아우라는 힘차게 대답하며 엘프를 의자에


앉혔다.

알베도의 책상 위는 그녀를 나타내듯 매우 깔끔했다.

덧붙여 아인즈의 책상 위도 다른 의미로 깔끔했다.

"가, 감사합니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엘프에게, 아인즈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뭐, 네가 놀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안심해라.

이 나자릭에 너를ㅡ너희들을 헤치는 자는 없다. 그러니 편안히 있어도 좋다"


뭐, 이렇게 말한들 금방 편해질리는 없지만.

아인즈는 그녀들에게 등을 돌리고 메이드 한 명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명령을 내


렸다.

"......이제부터 식당에 갈 거다. 도중에 너희들 메이드 이외의 자들과 만나지 않도


록 다른 자들이 없게끔 하라. 식당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아니, 아니다. 식당은 평소대로 써도 좋다. 아니, 오히려 너희들이 쓰고 있는게


좋겠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일하던 중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잘 부탁한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인즈님"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동료들에게 희미한ㅡ승리의ㅡ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동료들은 분함을 도저히 감출 수 없는지 약간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메이드는 동료의 시선을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아인즈는 자신의 등에 메이드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걸 예민하게ㅡ아인즈 치


고는 대단히 드물게ㅡ눈치 챘다.

틀림없이, 자신들에게도 특별한 일이 없는지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참고로 아인즈 당번은 특별한 일에 속하는 듯, 류미엘에게선 그런 기색이 느껴지


지 않는다.

바늘방석에 앉은ㅡ물론, 메이드들은 그럴 생각은 아니기에, 아인즈가 불편해할


뿐이지만ㅡ

아인즈는 애써 메이드들의 시선을 피해, 의자에서 쉬고 있던 엘프를 보았다.


숨소리가 고른걸 확인하고는

"이제, 문제 없겠지? ......그럼 가자"

강제라 생각할지도 모르니 그다지 재촉하고 싶진 않지만,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진


않다.

엘프가 걷는걸 확인하고는 아인즈가 선두에 서서, 방을 나왔다.

메이드의 아쉬운 듯한 시선은 모르는 척 했다.

식당에 가던 도중, 때때로 엘프가 무심코 내뱉은 감탄사가 들렸다.

"굉장해"라던가 "예쁘다" 같은 칭찬의 말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인즈는 꾹 참고 돌아보지 않은 채 나아갔다.

이윽고 식당에 도착했다.

도중엔 서번트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조금 시간이 걸린ㅡ제9계층의 모습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보는 엘프의 걸음은 느


려지기 일쑤였고,

아인즈도 특히 자랑하고 싶은 곳에선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ㅡ것 외엔 특히 문제


도 없었다.

나자릭 제9계층의 식당은, 회사나 학교의 식당을 이미지해서

ㅡ아인즈의 학교나 회사엔 그런게 없었기에,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ㅡ만


들어진 곳으로, 레스토랑 같은 느낌은 아니다.

이곳에 온건 이 세계에 온 직후 나자릭 내부 시설들을 둘러봤을 때 이후 처음이지


만, 언뜻 보기에 인테리어가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안에선 즐겁게 수다떠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나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마 일반 메이드들 중심으로, 9계층과 10계층에서 일하던 자들이겠지.

어쩌면 영역수호자도 왔을지 모른다.

점심 시간이라기엔 늦었지만 시프트제이기 때문일까, 북적거렸다.

메이드 들이 화목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엘프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


주겠지.

어쩌면 부외자이기에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일상적인 분위기라면


다소 기분이 편해질거다.

그런 이유로 식당을 쓰고 있게끔 했다.

하지만, 아인즈가 식당에 들어간 순간, 방금까지 있던 화목한 분위기는 급변했다.

우선 소리가 없어졌다.

방금까지 있었던 즐거운 소리, 식사할 때 나는 생활감있는 소리, 그런것들이 사라


졌다.

이어서, 식당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긴장된 분위기.

그리고ㅡ식당에 있던 모든 자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웨이다.

마치 알브헤임에 들어간 마이너스 카르마의 이형종을 보는 느낌이다.

"ㅡ우리들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 그대로 식사를 계속하거라"

넓은 식당 여기저기에 있는건 거의 전원이 일반 메이드들이지만, 아인즈의 말을


듣고 다시 식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잡담이 시작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침묵의 식사다.

식사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아인즈는 약간 쓸쓸해졌다.

그저, 뭐ㅡ 조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의 기분을 모르는건 아니다.

지금껏 오지 않았던 사장이 갑자기 식당에 나타나면 이런 분위기가 되기도 하겠


지.

스즈키 사토루 였다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이게 좀 더 작은 회사라, 사장과 부하의 거리가 가까웠다면 이렇지 않았겠지만.

'무리겠지......‘

존경하고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절대지배자 아인즈님에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


인즈 씨로 평판이 급격히 바뀌기는 어렵기 그지 없겠지.

어쩌면 정체가 들켜, 무능하다 알려지면 그렇게 될지 모르지만, 비웃음 받는ㅡ아


마 괜찮겠지만ㅡ입장이 되면 끝장이다.

"그럼, 들어갈까"

일행을 둘러보며 말을 걸면서, 엘프들에게 의심받지 않게 관찰한다.

아니, 관찰할 필요도 없다.

척봐도 명백히 위축되있다.

무리도 아니지.

아인즈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화목했던 식당을 그녀들도 봤을테니.

그런데 갑자기 이형종 in 알브헤임 (저런) 상태가 됐으니.

해결책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곧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아인즈는 식당을 나아갔다.

적당한ㅡ이 이상 메이드 들을 긴장시키는건 원하지 않으므로, 그녀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반대자리를 가리켰다.

"자, 거기에 앉아라"

엘프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아인즈 정면에 앉는건지 서로 미루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 그건 사실이겠지.

"......과연. 확실히 엘프들과 우리들은 예의작법이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여기선 예의를 따지지 않기로 하자꾸나. 상대가 자신들이 아는 예의에 완


전히 어긋나더라도 신경쓰지 않도록 하자꾸나"

호의적으로 보고 있단다, 라는 식으로 커버해본다.

지나친 사양도 그다지 좋지 않고, 아우라와 마레가 엘프들의 애매한 태도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무섭다.

"자. 내 앞에 앉거라"

아인즈는 가장 뒤에 있던 엘프를 가리켰다.

떠올려보면, 그녀는 가운데에 섰던 적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 꽝을 뽑게 하는게 공평하다.

솔직히, 자신을 꽝이라 인정하는건 좀 그렇지만, 그녀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


므로,

애써 사무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후로는 빠르게 진행됬다.

지목받은 엘프의 좌우는 금방 정해졌다.

아우라와 마레는 아인즈의 좌우에 앉았다.

류미엘은 아인즈 뒤에 서있었다.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여기선 꾹 참자.

"그럼ㅡ 미안하지만 실은 나도 여길 이용하는건 처음이라 말이다.

그러니, 지금 시간대에 이곳을 이용하는 법을 조금 설명해주거라"

류미엘에게 물어본건, 동료 메이드들이 여길 쓰고있으니,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


을거라 생각해서다.

"우선ㅡ그렇구나. 음료를 주문하고 싶다만, 메뉴 같은게 있나?"

"이 시간에는 프리 드링크 & 뷔페입니다. 저기있는 음료, 간단한 반찬은 먹을만큼
가져오면 됩니다"

류미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음료가 들어있을 것같은 피쳐가 몇 개나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체이핑 디쉬가 여러개 놓여져있다.

"그리고 여기있는 런치 메뉴에서 한 가지 고를 수 있습니다"

"과연......"

"주방에는 요리장도 있으니, 아인즈님이 원하신다면 어떤 요리라도 준비해 드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런치 메뉴가 정해져있다면, 그 중에서 고르도


록 하지"

류미엘에게 받은 용지를 들었다.


일본어로 메뉴가 써있었다.

이러면 엘프들은 읽을 수 없겠지. 거기에ㅡ

"......카츠동이란게 뭔지 알고있나?"

엘프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우라, 마레, 평소 엘프들은 뭘 먹고있나?"

"평범한 식사인데요?"

"네, 네. 보, 보통, 그, 그게, 저희들이랑, 같은 걸 먹어요"

그럼, 아우라와 마레도 카츠동같은건 먹어본적이 없는걸까.

아니, 그녀들은 배달 서비스로 요리를 받을테고, 스스로 조리할 수도 있겠지.

"카츠동은 먹어 본 적 없나?"

"아뇨, 먹어봤어요. 그저 이름을 모를 뿐이라 생각해요"

"아아, 그런건가......"

메뉴에까지 홀로그램 포토그래프가 첨부되어 있지는 않아서 실물을 볼 수는 없었


다.

"추천 메뉴......." 라는 말에, 전부 추천합니다, 라는 답이 돌아오면 곤란하다 생각


한 아인즈는, 그 뒤의 말을 삼켰다.

"이번엔..... 그렇구나. 고기 요리는 먹을 수 있나?"

엘프들이 끄덕인걸 확인하고, 아인즈는 메뉴 중 하나를 골랐다.

"햄버그 정식을 사람 수만큼"

"소스가 데미그라스, 일본풍, 크림머스타드 3종류 중 고를 수 있고, 밥과 빵 중에


고를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빵과 데미글라스는 어떤가?"

일본풍과 데미글라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크림 머스타드는 어떤 맛일까.

맛을 확인할 수 없는 이 몸이 원망스럽다.

"괜찮아요!"

"아, 네, 그, 저도, 괜찮아요"

아우라와 마레의 힘찬 대답에 이어, 엘프들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의견은 없어보이는군.

"그럼 그렇게 부탁한다"

아인즈는 후우 숨을 내쉰다.

하지만 류미엘이 주문을 주방에 전하러 가는 기색이 없다. 어떻게 된걸까.

혹시 여기서 일하는 자가 주문을 받으러 오는걸까.

"아인즈님,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ㅡ아아, 그랬구나. 각자가 원하는걸 가져 오는걸로. 괜찮겠나?"

"네. 그럼 아인즈님의 음료는 제가 가져올게요. 뭘로 하실래요?"

"적당히ㅡ아, 아니, 핫커피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아우라를 선두로 일행이 음료가 늘어진 테이블로 걸어갔다.

한편, 류미엘은 주방에 가서 뭐라고 했는지, 안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보자니, 주방 옆쪽에서 나오는 자가 있었다.

거대한 고기 자르는 식칼을 허리에 걸치고, 거대한 중화냄비를 등에 지고, 근육


없는 상반신은 알몸이다.

거기엔 '신선한 고기!!' 라는 커다란 문신이 새겨져있었다.

쇠로된 체인이 목에 걸려 있었다.

얼굴은 오크와 닮았지만, 더 야수같은 근친종인 오크스다.

머리엔 새하얀 셰프모자.

허리엔 새하얀 앞치마.

이 남자가 바로 식당의 영역수호자이며 요리장.

시호우츠 토키츠다.

시호우츠 토키츠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아인즈 앞까지 달려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인즈는 그걸 보며, 앞치마가 더러워지는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인즈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구나, 시호우츠 토키츠여. 변함없어보여 기쁘다“

"네엡!"

변함없다고는 했지만, 그를 본 건 전이한 후 NPC들을 거의 전원 면회했을 때 이


후 처음이다.

상당히 전이라 뭔가 변했다한들 눈치챌 자신은 없다.

"아니, 조금 살이 빠졌나?"

"아인즈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분명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냐.

아인즈는 그런 기분을 꾹 참았다.

"그래서, 방금전 그녀에게 주문을 받았습니다만, 아인즈님 것은 없군요. .....잘 알


고 있습니다!"

시호우츠 토키츠는 씨익 남자다운 미소ㅡ오크계의 표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 그


럴거다ㅡ를 띄웠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인즈는 "전혀 모르고있어" 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한 번 이라도 이해받은 적이 정말 있었을까.

슬프게도 아마 없겠지.

"제가 아인즈님ㅡ이 나자릭의 절대적 지배자, 지고의 존재에 어울리는 요리를 준


비하겠습니다!"

아인즈가 속으로 "그것봐" 하던 사이, 기세를 몰아 시호우츠 토키츠가 휙 하고 일


어났다.

그리고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사지로 향한다! 아인즈님에게 어울리는 요리! 일주일이 걸려


도 끝나지 않을 음식의 축제를 시작한다!"

오오, 이쪽을 엿보던 메이드 들이 탄성을 질렀다.

"어이, 기다려라“

"네엡!"

시호우츠 토키츠가 다시, 아인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난 할거다! 할거라고! 같은 기백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 같은 환영마저 보이는 상


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괴롭다.
NPC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항상 어울려주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이
건 아인즈도 수긍해줄 수 없다.

"...뭔가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만약을 위해 말해두겠다만, 나는 언데드라 식


사를 할 수 없다"

"네! 다시말해 눈, 코로 즐길 수 있는 요리로 해라! 라는 말씀 이시군요! 알겠습니


다!"

일어서려 하는 시호우츠 토키츠에게 말했다.

"어이, 기다려라"

"네엡!"

"서두르지마라. 내가 식사를 할 수 없다는건 식재료를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인즈님! 아인즈님을 위해 쓰는 식재료가 낭비라니요! 안그


러냐!"

일어선 시호우츠 토키츠가 돌아보며, 식당에 있는 전원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그리고 박수가 들려왔다.

식당에 있던 메이드 뿐 아니라, 아우라와 마레까지 박수치고 있다.

엘프들도 황급히 따라했다.

그런 눈치는 안봐도 된다고, 아인즈는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그럼, 곧장!"

"어이, 기다려라"

"네엡!"

또 한 쪽 무릎을 꿇은 시호우츠 토키츠에게 아인즈는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여기에 식사하러 온게 아니다. 여기서ㅡ그래, 잡담이나
좀 하러 온 것이다.

네가 환영해준다는 건 정말 이해한다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조용히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이해했나?"

시호우츠 토키츠가 과도하게 의욕이 넘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여기에 오지는 않을거라 생각한 지배자가 갑자기 방문 한 것이다.

자신이 가능한 최선의 환영을 하고 싶은거겠지.

그저, 아인즈는 그런걸 원해서 여기 온게 아니다.

"네엡! 그럼 여기를 바로 전세내는걸로 하겠습니다!"

"어이, 기다려라"

"네엡!"

"너무 일을 크게 만들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잠깐 얘기나 하러 온 것뿐이다. 그


럴 필요는 전혀 없다는걸 이해했나?"

아인즈가 힐끗 다른 자들ㅡ특히 엘프ㅡ을 살펴보니, 전원이 이쪽을 진지하게 보


고 있었다.

메이드들은 언제든지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반 쯤 일어났고, 아우라와 마레는 태연


한 모습

엘프들은 왠지 굉장한 사태가 된 것마냥 떨고 있었다.

엘프들이 저런 생각하지 않게끔 여길 골랐는데ㅡ

"ㅡ사양하고 있는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왔다. 너희들은 평소대로를 나


에게 보여주면 된다. 괜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네엡! 하지만! 지고의 존재인 아인즈님을 다른 자들과 같은 대우를 하다니!"


약간 비겁하지만 할 수 없지.

아인즈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무거운 어조로 바꾸었다.

"ㅡ시호우츠 토키츠여"

"네엡!"

"나는 이곳의 평상시를 보고싶다고 했다. 네가 평소에 충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


다면 특별한 일을 할 필요도 없겠지?

아니면 뭔가 숨기고 싶은게 있어서, 평소와 다른 너를ㅡ이곳을 보여주려 하는건


가?"

시호우츠 토키츠가 숨을 들이키고, 각오를 정했다는 얼굴을ㅡ아마도ㅡ했다.

"외람되지만 아인즈님! 저, 시호우츠 토키츠에게 이곳을 맡겨주신 지고의 존재인


아마노마히토츠님께 부끄러울 행위는 지금껏 한 번도 한 적이 없사옵니다!"

"그렇겠지"

아인즈가 즉시 대답하자, 시호우츠 토키츠는 의아한 표정 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네가 맡은일에 충실하며, 너희들이 지고하다는 존재에게 충


성을 바치고 있다는건 충분히 알았다.

조금 전 말은 폭언이었다. 조금 전 했던 말을 전부 철회하고, 사죄하겠다"

아인즈는 고개를 숙였다.

"오오! 아인즈님! 이러지 마십시오! 지고의 존재인 당신께서 제가 고개를 숙이시


다니! 부디 그 존귀한 얼굴을 들어주시옵소서!"

아인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호우츠 토키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ㅡ시호우츠 토키츠여. 나의 사죄를 받아주어서 감사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알
았으면 하고,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너희들의, 그리고 이곳의 평상시 모습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수다를 즐기고 싶다.
그저 한 명의 손님으로 평범하게 대해다오"

으으음. 시호우츠 토키츠는 잠시 갈등했지만, 곧 마음속에서 타협이 된 듯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가, 기쁘다. 이윽고, 이 나자릭에 많은 귀빈ㅡ지위가 높은 자들을 초대할 때


가 올 것이다.

그때 너의 전력을 보여다오. 부탁한다"

"네엡! ㅡ하, 하지만, 저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

"너를 모욕한 것에 대한 사죄가 가장 크지만, 너를 믿고 이곳에 배치한 아마노마


씨에게 한 사죄도 있다고 생각하거라"

시호우츠 토키츠는 곤란한 듯 쓴웃음 지었다.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별 수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도 한 순간.

곧장 일하는 자의 얼굴로 돌아왔다고 아인즈는 추측했다.

"ㅡ그럼 아인즈님. 저는 주문받은 요리를 하러 가겠습니다"

등을 보이며 떠나는 시호우츠 토키츠를 배웅하고, 아인즈는 식당에 있는 전원이


들을 수 있도록 약간 크게 말했다.

"모두, 소란스럽게해서 미안했다. 자, 신경쓰지 말고 식사를 계속해다오"

시호우츠 토키츠와 교대하듯 아우라 일행이 돌아왔다.

곳곳의 테이블에 있던 메이드들도 식사를 재개했는데, 아까보다 긴장감이 해소됐


다고 느껴졌다.
시호우츠 토키츠의 등장은 좋은 의미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준 모양이다.

돌아온 아우라 일행은 각자의 음료를 들고있어, 류미엘이 아인즈 앞에 커피를 놓


았다.

커피의 향기로운 향기가, 아인즈에게까지 닿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신기한 느낌으로 베리같은 과일과 비슷한 향기가 섞여 있었


다.

특정한 가게와의 콜라보 같은건 위그드라실에는 없었지만, 이 게임은 이상할만큼


데이터가 많았다.

식재료도 그 중 하나다.

보통 게임이라면 단순히 '커피콩'이란 명칭으로 끝날 것을, 위그드라실에선 몇 종


류나 되는 커피콩이 있었다.

그리고 일일이 등급이 있어, 등급이 더 높은 콩을 쓰면 요리효과가 좋아졌다.

그래서, 나자릭 안에 보관된 커피콩은 등급이 높은 것이라, 분명 이 커피도 맛있


을 것이다.

'아마, 비싼 커피라는건 이런 향이 나는거겠지. 그럼 맛도 베리같은 맛일까?'

항상 그렇듯 마시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원망하면서, 아인즈는 전원이 자리에 앉


는걸 기다리다 말했다.

"자, 마시면서 얘기하자꾸나"

엘프들은 두 명이 멜론소다, 남은 한 명은 얼음을 띄운 녹차.

아인즈의 말을 따라서 한 입 마시더니 멜론소다를 마신 둘은 눈을 끔뻑거리며, 입


가를 눌렀다.

입에서 넘치는걸 막는 듯한 모습은, 맛이 없지는 않았나보다.


"와, 맛나"

"달다"

그렇게 말한 둘의 잔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 타이밍에 아인즈는 상냥히 말했다.

"ㅡ한잔 더 하는게 어떤가?"

"아, 네. 그럴게요"

엘프 두명은 곧장 수긍하고, 일어나서 음료가 있는곳으로 향했다.

둘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ㅡ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구나"

"아, 네"

자리에 남은 엘프에게 아인즈가 말했다.

그녀도 둘이 마시던 음료가 궁금했겠지.

차를 기세좋게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덧붙여 아우라와 마레는 콜라, 이쪽은 익숙한 맛인지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여러가지 예상밖의 일도 있었지만, 엘프들의 긴장은 많이 풀어진 것 같으니, 언데


드라고 무조건 모든걸 의심해오진 않을 것 같다.

'역시 단 것이 효과적인가. 단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그리고 단 걸 참을 수 있


는 여자는 더 없다.

.....팥고물떡 씨의 말은 진실이었군. 본인의 폭식을 정당화하려는 말인줄 알았는


데......'

아인즈 울 고운 여성진 중 나머지 둘은 고개를 갸웃ㅡ슬라임에게 고개는 없지만


ㅡ거렸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엘프들의 마음이 풀어진 모습을 보니 이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녀


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뭐, 지금도 의심스럽긴 하지만.

'자, 지금부터다. 몇 가지 시뮬레이션은 했지만, 엘프의 나라 얘기로 화두를 잘 옮


길수 있을까......'

그녀들을 처음 만났을 때 들은 얘기를 떠올렸다.


남방의 대삼림 안에 있다는 엘프의 나라는, 나라명이 없다.

타종족과 국교를 열 필요가 없고, 다른 나라가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베도


는 추측했다.

서로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라라는 호칭만으로도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이


다.

일단 오랫동안 왕이 통치하고 있으니 왕국이 되겠지만, 그 왕은 대단히 강하다고


한다.

얼마나 강한지, 어떤 클래스인지 같은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하며 아우라와 마레를 바라본건 둘은 모르는건가 하는 의문이겠


지.

그런 엘프의 나라는 현재, 법국과 적대관계이며 그녀들은 법국에 붙잡혀 팔려나


갔다고 했다.

무슨 원인으로 전쟁상태인지, 언제부터인지 같은 정보도 그녀들은 갖고 있지 않


았다.

이건 엘프의 나라에 제대로된 교육제도가 없기때문이겠지.

그녀들도 그런걸 알고 싶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엘프의 생활을 들어보니, 더 중요한 기술이나 지식ㅡ오로지 몬스터에 관한


것들ㅡ은 전수하고 있어서,

그런 역사를 가르치는, 혹은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게 이유의 대부분이


겠지.

엘프의 나라에서 다크엘프를 본적은 없냐는 질문에, 본 적은 없지만 있다고는 한


다.

그녀들이 실제로 다크엘프를 본건 아우라와 마레가 처음이라 한다.

엘프의 나라에서 다크엘프는 소수민족인거겠지.

하지만, 차별받는다는 얘기는 들어본적이 없는 것같다.

그래도, 그녀들의 지식량을 고려하면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리고ㅡ이 정도 뿐이었다.

이것들이 아인즈가 얻은 지식이다.

당시엔 미심쩍어하지 않도록 그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위한 대의명분을 갖추고 있다.

때는 무르익은 것이다.

‘자, 슬슬 정해야지. 나라끼리 국교를 열고 싶다는 방침으로 물어볼까?

아니면ㅡ아우라와 마레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으니 다크엘프의 마을에 가고


싶다는건 어떨까?'

나라끼리, 라는 말을 들으면 스케일이 너무 커서 주저하게 될지 모른다.

그보다는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그녀들의 입도 가벼워지는 것 아닐


까.

게다가 아인즈도 후자를 노리고 있으니, 거짓을 말하지 않는 만큼 마음도 편하다.


아인즈는 얼마든지 거짓말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거짓말을 좋아하는건 아니다.

이익을 얻기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 그녀들이 진실을 알게됬을 경우를 생각하면, 거짓말을 하


지 않는게 메리트가 크다.

'그게 간단하겠지만....아우라와 마레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간단 말이지'

두 명이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탈지도 모른다.

솔직히, 친구라는건 취미등을 공유하는 정도로 생기는거지, 명령받아 생긴걸 친


구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아인즈는 위그드라실에서의 친구ㅡ옛 길드 멤버를 떠올렸다.

우연한 만남이나,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알게된 동료들을.

그저, 애들에게 친구가 필요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인즈ㅡ스즈키 사토루에겐 없었고, 그래서 문제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아인즈가 왜 친구를 만들어주고싶다 생각했냐면, 야마이코가 그런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들은 우르베르트가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나 말하는 몽상 같은


얘기다" 라며 빈정거리듯 웃었던걸 동시에 떠올렸다.

아인즈는 어느쪽이 옳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손해는 없을 것이다.

'그럼 친구를 만들어준다는건 하지말고, 얘들에게 다크엘프에 지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건 어떨까?

친구가 될지 말지는 얘들에게 맡기면 돼. 물론 친구가되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
하지만, 강함이나 입장이 너무 다르면 친구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위그드라실에선 모두가 대등했다.

ㅡ갑자기, 뇌리에 몇 명의 친구들이 떠오르고, 아인즈는 살짝 우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젓더니, 떠오른 기억이나 감정을 떨쳐버렸다.

대등하지 않은 현실세계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

그리 생각하면 처음에는 최대한 엘프의 나라에 사는 다크엘프와 대등한 입장으로


다가가야 한다.

결코 마도국의 간부인 다크엘프와, 엘프국의 소수민족인 다크엘프여선 안된다.

'신분은 최대한 감춘다쳐도.....으음. 아버지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나 보


통?

터치미 씨는 어땠을까? 좀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나?‘

아인즈가 뭐라고 얘기할지 고민하고 있자, 엘프들이 같은 음료를 가지고 돌아왔


다.

전원, 콜라다.

'큰일났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역시 즉흥적으로 하면 안되는구


나.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어. 두 명이 여기 있는 이상,

여기선 단순히 흥미가 있다, 국교를 열고 싶다는 방향으로 얘기하자. 혹시 잘 유


도하지 못하면 실은 이러저러했다고 하자.

아니 일단은 구체적으로 다크엘프와 친해지고 싶다고 하는것도 좋을지 몰라'

아인즈는 엘프들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럼ㅡ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정말 열심히 음료를 마시던 엘프들의 손-목일까-이 멈췄다.

"우리는 현재, 마도국이란 나라를 만들고 있다. 여러 종족들과 함께 사는걸 목표


하고 있다.

이미 인간이나 드워프에 고블린, 오크나 리자드맨 등이 찬성하여 우리나라의 국


민이 되어 주었다.

엘프가 찬성할지는 제쳐두고, 엘프국과 국교를 열거나, 무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


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의 나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협력해주겠나?"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엘프국과 국교를 열겨나, 무역을 개시하는건 그닥 나쁘


진 않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사자가 아인즈여선 분명 좋지 않다.

타국의 외무장관과 회담하거나, 국교를 여는 협정을 맺는건 아인즈의 능력으론


무리다.

분명 드워프 때에는 잘 됐지만, 또 성공할 거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반대로 정반대의 결과로 끝날 가능성도 크다.

그러니, 실제로 국교를 열더라도 나름대로 지혜로운 자를 보내고 싶다.

알베도가 적임이지만 그녀는 왕국의 점령통치로 대단히 바빠보여서, 얼마간은 새


로운 일을 맡기고 싶지 않다.

알베도에게 명령하면 그녀는 괜찮다 할테고, 실제로 가능하겠지.

그저, 그건 무리하는게 아니라곤 할 수 없다.

그러니, 일을 과도하게 끌어안고 있지 않도록 아인즈는 부하의 컨디션이나 멘탈


을 제대로 파악해둬야 한다.
그러니 너무 큰 안건이 아니라, 다크엘프들과 개인적으로 교류 하고 싶다는 정도
로 해두면 아인즈로서는 대단히 기쁠 것이다.

"어, 그, 그 아인즈 울 고운님. 혀 협력이라는건 대체. 뭘하면 될까요?"

경계심이 섞인 목소리로 질문하자 아인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선ㅡ얘기를 듣고싶다. 그리고 아인즈면 된다“

"저희가 알고 있는거라면ㅡ"

각오를 정한 듯 엘프가 말했다.

"ㅡ얘기 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아인즈라 부르는건 조금, 사양하게 해주셨으면.


....."

아우라와 마레, 그리고 주변에ㅡ거리는 있지만ㅡ아무래도 엿듣고 있는 메이드 들


이 복잡한 표정이다.

혹시 엘프들이 아인즈라 부르면 "건방지게" "입장차이를 생각하라고" ,

부르지 않으면 "아인즈님의 말씀을 거절하다니" 같은 말을 들을거라 확신했기에


어떤게 엘프들에게 옳은 태도인지 딜레마에 빠진거겠지.

엿듣고 있는 메이드들을 혼낼 생각은 없다.

딱히 악의나 호기심 때문에 듣고 있는 게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선 무슨일이 있으면 "저를 써주세요" "저를 써주세요" "저를 써주세요"


같은 불가사의한 기백을 느낀다.

"......그런가. 아쉽구나. 그래서 뭘 듣고 싶냐면. 엘프국은 어떤 상태인가? 숲속에


있다면 몬스터 같은건 어떻게 방비하고 있지?"

이상한 말을 들은 듯 엘프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희는 숲 속에 살고 있지만,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지면은 위험하니까"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나무들을 변화시켜 집을 만들어요"

"마법으로 그런 마법에 적합한 나무를 길러요. 저희는 그런 나무를 엘프트리라 불


러요"

그녀들의 얘길 들어보니, 엘프는 드루이드의 마법을 써서 나무를 형태변화 시킬


수 있나보다.

예를 들면 나무 내부에 공동을 만들거나, 나무와 나무 사이 허공에 간소한 현수교


를 만드는 등.

그렇게 수십 그루의 엘프트리의 집합체를 숲속에 만드는게 엘프의 마을이란 거


군.

이 엘프트리를 변화시켜 뭔가를 만드는건 엘프들의 문화의 중심인 모양으로, 집


이나 가구뿐만 아니라 무기나 방어구도 만들어낸다고 한다.

사냥에 쓰이는 화살이나 탄도, 철에 필적할정도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


다.

아인즈가 알기로, 이건 위그드라실에는 없던 마법이어서, 그녀들에게 한 번 써달


라고 부탁했더니 놀란 모양이다.

아우라나 마레가 살고 있는 나무가 그런 것 아니냐면서.

그녀들은 그게 엘프트리의 변종ㅡ형태가 전혀 다르기에ㅡ이며, 두 명이 아니면


형태를 바꿀 수 없는 특별제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또한 엘프의 그 마법은 엘프트리 전용이라, 다른 나무들에겐 전혀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살고있어서 뱀이나 거미처럼 등반능력이 매우 뛰어난 몬스터는 엘


프에게 천적이라 한다.

한편, 그렇게 뛰어난 등반능력이 없는 몬스터 들은 반격 받기 쉬워서, 그다지 습


격해오지 않는다고 한다.
엘프의 왕도ㅡ엘프가 애초에 인구가 많지 않아, 도시라 할만한 규모의 도시는 하
나 뿐 이라 한다ㅡ만은,

숲이 끊어진 평지, 초승달 모양의 호수 근처에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있는 것 같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건, 왕도에서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던 그녀들


은, 들어본 적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왕도만 평지에 있는가 하면, 호수에는 거대한 수생 몬스터가 있어서,

대형 몬스터는 포식당할까 두려워 접근하지 않는 게 이유중 하나라 한다.

아인즈는 과연 그렇군 싶었다.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물 같은것도 만들 수 있을테니, 나무들 위라는건 상당히 좋


은 환경이라 생각됐다.

날 수 있는 몬스터에겐 엘프트리의 무성한 가지가 방패가 될 테고, 몸을 숨길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살 수 없었겠지.

'이 세계의 기술습득ㅡ클래스를 얻는다는 게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없는 점이 많지


만,

농민 등이 적은 엘프는 인간보다 싸울 수 있는 자의 비율이 높다는 거겠지’

계속해서, 수명이나 인구 등을 물어봤다.

수명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들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흥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마을에 살던 가장 나이 많은 엘프는 추측이지만 300살을 넘었


을 거라 했다.

참고로 그녀들은 자신의 나이조차 모른다고 한다.

생일 같은것도 없다고 한다.


그저, 긴 수명을 가진건 확실한 탓인지, 인구는 많지 않은 모양으로 인간처럼 순
풍순풍 애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얘기를 듣자하니, 아이를 꽤 만드는거 아닌가 싶었다.

'위그드라실의 엘프의 설정으로는 분명 수명은 천년...처음 10년간의 성장속도는


꽤 빠르고, 마지막 10년간 늙는게 빨랐던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그랬나? 아닌가? 그래서 10년에 한 명 정도를 낳는다고 했던


가......

200살 정도를 성인으로 치고...... 400살 까지 낳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20


명? 장래적으론 그런걸 잘 아는 사람에게 듣고 싶구만'

"그래서ㅡ너희를 살던 마을로 돌려보낸다면, 어디로 가야하나?"

엘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과연. 아무래도 거기까진 알려주지 않나. 중요한 정보니 말이지'

조금 시간이 흐르고, 엘프 중 한 명이 쭈뼛쭈뼛 질문했다.

"그, 저기..... 저희들 집에 돌아가야 하나요?"

"......응?"

아인즈는 말하는게 좀 이상한데? 싶어, 스스로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랬구나. 마을이 법국 인간들에게 습격받았다 했지"

그녀들은 딱히 병사도 아니고, 마을에서 살고 있었더니 법국 인간들에게 습격받


아, 붙잡혔다고 했다.

그러니 마을에 돌아가는건 싫을테고, 안전하지도 않겠지.

"좋다. 살던 마을이 아니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주마. 아는곳은 있나? 친척이
있는 마을도 좋고, 혹시 없다면 왕도는 어떠냐?"
"왕도.....말입니까"

"죄송해요. 저희들 마을 근처밖에 몰라서......"

"어디가 안전할까......"

그녀들은 마을 바깥의 정보에 어둡다.

하지만 이건 그녀들만 그런건 아니다.

왕국이나 제국도 그랬다.

이 세계의 사람은 대체로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마친다.

특히 교육 받지 못한 자는, 가까운 도시나 알지, 멀리 있는 도시는 같은 나라에 속


해도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다.

"흠..."

고심하는 아인즈에게 엘프들이 말했다.

"저기..... 역시 저희들은 여기서 나가야 하나요?"

"그러려고 생각중이었다. 엘프국과 국교를 열게되면, 너희들을 여기에 두는건 상


대가 싫어할테니. 너희도 알겠지?

지금까진 긴급조치로서 데리고 있었다만, 앞으로는 어렵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법국의 지배영역에 내팽개칠 만큼 비정하진 않다.

그래서 안전한 곳을 물어봤다만ㅡ"

아인즈가 주도하여 국교를 열 생각은 없지만, 이 셋을 무사히 돌려보내는 건 장래


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엘프들이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아인즈는 질문했다.

"ㅡ왜그러나?"
"저희들 이대로 여기에 있으면 안될까요?"

"...........흐음"

아인즈는 그녀들 앞에 놓인 음료를 봤다.

설마 이걸ㅡ아니, 그럴리 없지.

"......어째서냐? ......말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다만, 가능하면 말해다오"

"저기ㅡ"

대표격인 엘프가 힐끗힐끗 아우라와 마레를 보았다.

"......아우라, 마레. 다 마셨나 보구나. 뭔가 가져오는게 어떠냐?"

"네?"

"네! 알겠습니다, 아인즈님. ㅡ가자. 마레"

훌륭하다.

아인즈는 아우라의 눈치에 감탄했다.

자신이 반대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순식간에 상대가 자리를 비켜줬으면 한다고


말하는 거란 걸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사회인 경험을 살려 즉시 깨달았을까.

어쩌면 아우라는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보다 분위기를 잘 읽는 거 아닐까.

데미우르고스가 "그런거군요, 아인즈님" 하며 엷게 웃는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둘은 내 진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으니 말야...... 일부러 그러는건가 싶을 정


도로. 아니면 정말 일부러그러나?'

"어, 어?"
일어난 아우라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마레의 팔을 끌어당겨 데려갔다.

둘이 충분히 멀어지자 아인즈는 물었다.

"이제 말할 수 있나?"

"아, 네"

둘과의 거리를 힐끗 재보더니, 엘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크엘프인 둘의 청각은 인간보다 좋고, 아우라처럼 레인저는 더욱 좋다.

눈 앞의 엘프도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 목소리를 낮춘 것 같지만, 그래도 아우라라


면 듣고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 생활에 익숙해지니,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순 없어요.... 여기..... 아우라님과


마레님의 집은 최고예요"

"응?"

아인즈도 엘프처럼 목소리를 낮추려 했으나, 놀란 나머지 평소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순간, 농담인가 싶었지만, 다른 두 엘프들이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니 진심임을 알았다.

우선 식사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

엘프들은 과일, 고기, 야채 등을 굽거나 데쳐서 먹는다.

요리 전반에 임하는 열의가 다르다 한다.

나자릭의 식사에 익숙해진 지금, 돌아가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그녀들은 단언


한다.

참고로 그녀들은 피자를 좋아한다고 한다.


'과연...... 음식을 외교에 쓰는건 나쁘지 않아. 이렇게 맛있는걸 먹을 수 있단다
라는건 큰 어필 포인트군. ...... 드워프인가!'

그녀들의 얘기는 그 외에도 있었다.

안전함이 다르다 한다.

나름 안전성을 높인 장소ㅡ마법으로 만든 나무ㅡ에서 생활하고 있다고는 해도,

몬스터 등에 의한 사망자가 1년에 1명도 나오지 않는 건 아니라고.

그에 비해 나자릭은, 밤에도 불침번을 세우지 않고 잘 수 있다.

여러모로 할 말은 많지만, 그런 얘기라면 아우라와 마레가 있어도 문제는 없을


터.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을거라 아인즈가 생각하고 있으니,

"게다가 저 둘을 섬길 수 있는건 행복하니까요"

"ㅡ아아"

아인즈는 납득이 갔다고 깊이 수긍했다.

저 둘은 엘프의 근친종이고, 귀여운 애들이다.

애들을 섬기는데 당황할일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아우라와 마레의 인덕이 우선됐


으리라.

아인즈도, 계층수호자들 중 누구를 가장 섬기고 싶은가 질문받으면, 아우라와 마


레를 고른다.

아니, 물론, 실제로 누가 물어보면 "전원 훌륭한 수호자니 고를 수 없다"고 겉치레


를 말하겠지.

하지만, 본심으로는 저 둘. 다음으론 코큐토스다.

그 외엔 별로 섬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저 둘이 없어야만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뭔가 있는건가 싶었지만, 엘프들이 하고 싶은 말은 그걸로 끝인 모양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 저 둘이 있었어도 괜찮은거 같은데. 방금 전 얘기에 저 둘


에게 혼날만한 내용이 있는건가? ......뭐, 좋아'

"좋다. 그럼 나자릭에서 지금처럼 일해줬으면 한다"

그녀들이 원하는걸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아인즈가 말하자 엘프들은 기뻐했다.

결코 겉으로만 연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정식으로 채용하게 되면 급료나 대우에 관해 자세히 상담할 필요가 있겠구나. 그


건 나중에 누군가에게 맡기마"

아인즈의 말을 엘프 세 명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건 대단히 중요하다.

어쩌면 엘프국의 다크엘프들과 친해졌을 때, 이 엘프 세 명의 대우는 중요하다.

노예였던 그녀들을 해방시켜, 돌봐주었던 것에 대한 대가를 노동으로 지불하게끔


했다고 변명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급료도 지불하지 않는 지금은, 블랙기업중의 블랙기업이다.

앞으로 이곳에 올지도 모르는 다크엘프들에게 그렇게 여겨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역시 이 세 명이, 나자릭은 화이트한 훌륭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두는게 좋다.

아인즈는 슬쩍 주변의 메이드들을 보았다.

아인즈 일행이 목소리를 낮추어 들리지 않았는지 귀 뒤에 손을 대고 열심히 엿듣


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충성심의 증거라 생각하니, 혼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좀 더 잘 숨겼으면 했다.

'빨리 엘프들과 계약서를 주고받아야겠네. 이참에 엘프들에게 해줄 좋은 근로 대


우를 일반 메이드들에게도 적용할 수 없을까?'

가능해 보이지만 실행하면, 아무튼 일하고 싶다는 메이드들의 원망이, 휴가가 늘


어나게 된 원인인 엘프에게 쏟아지는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엘프들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메이드들에게 적용할거면 경


계 해두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그럼 그건 제쳐두고, 엘프국에 가기 위해 너희들의 힘을 빌리고 싶다.

가능하면ㅡ안내를 부탁하고 싶다. 물론, 아우라와 마레도 동행할 예정이다.

그저, 엘프들의 예의작법은 잘 모르니, 중개같은것도 맡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다"

엘프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안내해드릴 자신은 없어요. 중개도..... 옆마을에 가본적은 있


지만, 예의작법 같은건..."

"그런가......"

"죄송해요!"

"아니다,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미지의 장소에 안내없이 가는건 상당히 귀찮지만, 그녀들이 정말 도움이 될지도


확실치 않다.
되는대로 갈 수 밖에 없다면, 억지로 동행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반대로 데려가면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아인즈는 돌아보며 뒤에 서있는 류미엘에게 손짓했다.

얼굴을 가까이한 그녀의 귓가에 "조금 더" 라고만 말하고, 컵을 들었다.

물론, 내용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시선만을 아우라 일행에게 향했다.

조금 알기 어려웠나 싶었지만, 그녀는 금방 이해한 듯 "실례합니다" 라고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ㅡ다크엘프라는건 너희들 엘프에게 어떤 존재지?"

"굉장한 분들입니다"

즉시 득달같은 대답에, 없는 눈썹을 찡그렸다.

다크엘프가 그런 평가를 받는 건 기쁘지만, 그녀들의 대답은 왠지 다른 의미가 있


는 것 같다.

아인즈는 그 이유를 곧 알아챘다.

아우라와 마레다.

"ㅡ아니, 아니다. 나는 다크엘프라는 종족이 너희들 엘프라는 종족과 어떤 관계인


지를 알고 싶은거다"

"굉장한 분들입니다"

"아니......."

이렇게 멋대로 짐작하는건 어떻게 안되겠지.

아우라와 마레의 종자 같은 존재로서 여러모로 우대 받고 있으면서 "다크엘프는


하등종족이죠" 같은 말을 할 수는 없겠지.

그보다 말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무섭다.

"나는 방금 말한대로, 엘프국과 국교를 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걸 저 애들에게


맡기고 싶다고도.

그러니 엘프라는 종족 전체가 다크엘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엘프 사회가 다크엘프를 별로 좋게 보고 있지 않다면, 저 애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그닥 좋지 못하니 말이다.

어떠냐? 솔직하게 말해다오"

세 명이 마주 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들의 마을에는 다크엘프가 없었기에, 여기에서 처음 봤


을 정도예요.

그래서 딱히 뭐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모두 다크엘프라는 근친종이 북쪽에서 왔


다고만 들었을 뿐이예요"

"들은적은 있지만, 피부가 검다는게 진짜였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마을 사람들도 다크엘프를 욕하는건 들어본적이 없어요. 그저, 저희 마을에서는


그랬다는걸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더는 넘겨짚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젊은ㅡ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ㅡ엘프는 다크엘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고 봐야겠지.

그럼, 소수민족이라도 학대받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엘프국이 바깥에ㅡ법국이라는ㅡ적을 갖고 있기에, 내분할 여유가 없기 때문


일까.

아니면 숲이라는, 살기 힘든 환경이기 때문일까.


"......참고로 언데드는?"

"숲을 더럽히는 적입니다"

"끔찍한 존재요"

"그래도 자주 보는건 아닙니다만"

"아, 네"

즉답이었다.

얘네는 왜 아우라와 마레의 주인인 내 눈치는 안보는걸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말할 순 없다.

분명 아까 솔직하게 말해달라고는 했다.

하지만 너무 솔직하다.

그녀들은 사장이 말하는 '야자타임'을 믿다가 좌천될 타입이다.

하지만, 이걸로 아인즈가 국교를 여는 대사가 될 수 없는건 결정적이다.

아니, 반대로 이건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니 역시 국교를 여는 건 무리겠지? 라고 변명할 수 있다.

결코 아인즈의 능력이 부족해서 국교를 열 수 없었던게 아니라고.

아니면 엘프국에 가는 건, 순서대로ㅡ외교관을 파견하고, 국교를 여는 것부터 천


천히 스타트해야 되는걸까.

'그런 외교관 없는데요..... 인간 내정관 중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는게 약점이


네.....

내가 모를 뿐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러면 모험자를 보내는걸 알베도에게 제안


해보면 어떨까?
아니...... 모험자를 나라의 대표로 삼는건 아직 불안해......내 추측이니 틀렸을지
도 모르지만.....'

알베도에게 말하면 모험자여도 괜찮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ㅡ

'ㅡ애초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까?'

엘프국은 법국과 적대하고, 상당히 침략당한 모양이다.

그녀들이 붙잡히기 전부터 그랬다.

자칫하면 지금쯤 붕괴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엘프국이 함락당하는건, 아인즈에게 나쁘진 않다.

구제의 손을 내밀었을 때, 효과가 커질테니까.

그럼 기다려야 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상황을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러다 아우라와 마레의 친구가 될 자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특히 소수민족인 다크엘프는, 귀중한 목숨들이다.

'아니면 둘만 먼저 보내ㅡ아니, 그건 안 되겠어. 미지의 장소에 둘만 보내는건 너


무 불안해.

저 애들은 100레벨 NPC고, 애는 아니란걸 알고 있지만...... 국교를 열 생각은 말


고 친구 만들기에 전념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역시 나도 따라가야겠지'

엘프국과 법국의 싸움에 개입해서, 엘프국을 구할 생각은 아직 없다.

아인즈의 생각만으로 법국과 마도국 사이가 완전한 적대관계가 되는건 피하고 싶


기 때문이다.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만,

그걸 물어보면 아인즈가 아무 생각 없다는걸 들킬거란 두려움도 있다.

무엇보다, 얘기를 잘 유도하지 못하면 멍청한 아인즈의 의견이 우선되어, 장래적


으로 나자릭에 손해가 날지도 모른다.

'엘프국에 가서, 다크엘프만 피난하게끔 말하는것도 좋을지 모르겠네. 그러면.....


저 둘 외에 데려갈 필요는 없나?'

데려간다고해도 군을 끌고 가기보다는, 한조같이 잠복능력이 뛰어난 호위가 제일


좋겠지.

드워프 나라에 갔을 때처럼.

"과연......"

아인즈는 엘프 세 명을 보았다.

이 세 명이 그때 리자드맨 대신이다.

"왜, 왜그러시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혼잣말이다"

가령 이 셋 중에 한 명을 데려간다.

물론 나머지 둘은 여기에 남긴다.

그렇게 하면 인질을 잡힌 이상, 아인즈가 불리해질 일은 하지 않겠지.

나쁘지 않다.

인질이라 그녀들이 느끼더라도, 이쪽에는 그럴 의도는 없다고 뻗대면 그만이다.

아인즈는 아우라 일행을 보았다.


돌아와도 좋다는걸 눈치 챘겠지.

아우라와 마레, 그리고 류미엘이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너희들 엘프는 어떤 선물을 들고가면 기뻐하나? 금은보석 같은건


가?"

"마을에선 금속동전 같은건 안쓰니 금이나 은은......"

"저희 마을이라면 식재료가 가장 기뻐할거예요. 또 자주 채집할 수 없는 약초일까


요.

얕은 상처라면 마법으로 간단히 낫게하지만, 독이나 병에 걸리면 실력좋은 드루


이드가 아니면 고칠 수 없어요.

그래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약초는 소중합니다"

"옷도 마법으로 엘프트리로 만들 수 있으니 말이죠"

"주거지에 화살과 탄알, 옷도 만들 수 있나...... 엘프 드루이드가 쓰는 마법은 만


능이구나. 마레는 그렇게까진 못하지 않나?"

"에? 아, 네, 네. 그런 마법은 못써요"

그런 신기한 드루이드의 마법이야말로 엘프가 진화한 형태인거겠지.

가능하면 그 기술은 갖고싶지만, 아마 나자릭에 속하는 자는 쓸 수 없을거다.

그리 생각하니 역시 이 세계의 주민을 지배하에 두어,

모두가 나자릭에 꿇어 엎드리게 만드는건 다른 길드를 상대할 때 승패를 가를 한


수가 될 수 있다.

아니ㅡ

'이미 그런ㅡ예전에 전이해온 길드가 있다고 상정해야겠지.

이 정보는 알베도에게 전해, 국가 전략을 다시 짜는것도 검토시켜야지'


아인즈가 생각할법한 건 다른 플레이어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해야 한다.

자신만이 특별하다 생각하는 건 어리석다.

우호적으로 마도국의 훌륭함을 알리기 위해,

엘프의 마을에 도착하면 <전이문(게이트)>를 써서 요리를 배달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드워프때에도 효과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겪은 일을 떠올리며,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

'그때도 도망치고 싶었지......'

"......우선 초승달 호수라는 곳을 찾아, 그곳에 있다는 엘프의 왕도에서 정보를 모


으고 다크엘프의 마을로 가는게 제일 좋겠지"

"다크엘프의 마을에 가는건가요?"

아우라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엘프 세 명의 앞이니, 아마, 더 자세한 질문을 하지 못하는 거겠지.

아인즈도 다크엘프의 마을에 가는 건 둘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곤 할


수 없다.

명령으로 친구를 사귀길 바라지 않으니까.

"그래. 그럴 생각이다. 거기서 너희 둘도 조금 도와줬으면 한다"

일부러 아우라의 생각은 눈치채지 못한 척했지만, 두 명은 힘차게 알겠다고 대답


했다.

'다음은 어쩌면 좋을까...... 설득인가.... 드워프 때처럼 되지는 않을테고.....'

다음 난제를 돌파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하는 수 밖에.

이번 일을 포석으로 나자릭에 유급휴가를 도입하기 위해서라도.

타이밍 좋게ㅡ어쩌면 얘기가 일단락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르지만ㅡ요리가


나왔다.

"자, 먹게나"

아인즈가 권하자, 엘프들은 눈을 빛내며 요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할까.

여러 가지 방법ㅡ그 난관에 적합한 방법이 있겠지만, 이번에 아인즈가 그 중에 고


른 건 수와 지리적 이점.

아우라와 마레를 자신의 좌우에 세우고, 수호자들이 준비한 알현실의 옥좌에 앉


았다.

한 손에는 오랜만에 진짜 스태프 오브 아인즈 울 고운을 들었다.

말하자면 나자릭의 절대지배자, 길드장인 아인즈 울 고운의 모습.

하지만, 이만한 준비를 해도 지금부터 올 상대에게 이길거라 단언하지 못한다.

상대는 그야말로 최종보스다.

구요세계식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최종보스.

아인즈는 있지도 않는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했다.

상대의 여러 반응을 상정하고, 자신이 해야할 완벽한 답을 모색했다.

하지만ㅡ그래봤자 아인즈는 범인.

상대의 사고에 발 끝도 못미치겠지.


즉ㅡ

'운에 맡길ㅡ수 밖에 없어!!'

애드리브를 기대한다.

아마, 미래의 아인즈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류미엘이 상대가 왔다고 알렸다.

"ㅡ좋다. 들라하라"

"알겠습니다, 아인즈님"

상대는 바로.

계층수호자 통괄 알베도(최종보스)이다.

그녀는 아인즈를 본 순간, 평소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바뀌었다.

"기다리게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입구에서 깊이 고개 숙인 알베도를 보고,

아인즈는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신경쓰지마라, 알베도. 늦을거란 보고는 받았다. 그렇다면 시간대로가 아닌가"

알베도에게 <전언(메세지)>로 연락하니, 빙결뇌옥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아


인즈를 만날 행색이 아니라고 했다.

몸단장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걸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던 아인즈는 알베도가 말했던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


춰, 이 곳에 오게끔 지시했다.

그 시간보다 10분이나 빨리 온건 알베도의 성격때문인가. 사회인의 철칙인걸까.


알베도는 고개를 들어, 옥좌앞에 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인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베도여. 나는 지금부터 유급휴가를 쓰겠다"

어떻게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이제껏 그랬을 때 걸핏하면 얘기가 이상하게 진행


됐다.

그러니 여기선 목적을 솔직하게 말하는게 좋겠지.

이번엔 데미우르고스도 없다.

예상을 한참 초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진 않을거다.

아인즈를 올려다보던 알베도의 눈썹이 약간 움직이고, 시선도 좌우로 움직였다.

아우라와 마레의 반응을 확인했을거다.

알베도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피고 있자, 알베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나자릭을 포함해, 마도국의 모든 것이 아인즈님의 것이옵니다"

'ㅡ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어떻게 비약하면, 어떤 사고를 거쳐서, 그런 결론을 말한걸까.

아인즈는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금방 떠오른 대답은 2개.


하나는 뭔 소리야?

다른 하나가 네 말이 맞다 이다.

물론, 좀더 지배자답게 포장해서 말할 생각이긴하다.

아인즈는 공상속 뇌세포가 터질 듯이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알베도가 말해주었으니 최대한 빨리 답해야한다.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알베도. 내가 하고 싶은건 그런말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껏 아는척해서 잘된적이 있었을까.

ㅡ아니, 있었다.

우선 나자릭 절대지배자, 아인즈 울 고운은 존경받는 존재를 유지해왔다.

스즈키 사토루의 마음을 희생해서.

알베도가 뭔가 눈치챈 듯 표정을 바꿨다.

"죄, 죄송합니다, 아인즈님"

그리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화내고 있는게 아니다. 그러니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전혀 잘못하지 않은 상대를 고개 숙이게 하는걸 기뻐하는 놈은 인간 중 쓰레기다.

"유급휴가라고 하니 착각한 모양이구나"

나자릭엔 제대로 된 급료 시스템도, 휴가 시스템도 없다.

블랙기업중 블랙기업이다.
어떤 은유적 표현이라 착각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건 여지껏 좋은 근로 대우 시스템을 만들어두지 않은 아인즈가 잘못한거다.

당연히 아인즈는, NPC들이 그걸 반대하고, 아무튼 일하고 싶다고해서 그랬을 뿐


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덧붙여 이건 스즈키 사토루의 경험칙인데, 대우가 아무리 최악이어도 인간관계가


좋으면 꽤 참을수 있게 되는 법이다.

반대로 훌륭한 대우를 받더라도 인간관계가 최악이면 상당히 빨리 마음이 병든


다.

그런 의미로 나자릭은 인간관계가 최고라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ㅡ내 실수다. 용서해다오"

아인즈도 고개를 숙인다.

"아, 아인즈님!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알베도가 황급히 말하자, 아인즈는 고개를 들었다.

"......우선, 이걸로 서로 고개를 숙였다는걸로 용서해주겠나?"

"제가 감히 용서라니요ㅡ"

"ㅡ너희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게되면 끝이다. 그런건 내가 아니다"

숨을 삼킨 알베도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좌우에 선 두명이 움찔대는건, 알베도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란거겠지.

아인즈가 "왜그러냐!?"고 묻기전에 알베도는 고개를 들었다.

"유급휴가라고 하셨는데, 그 둘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실 예정이옵니까?"

역시 알베도다.
유급휴가라는 말에 바로 어디 갈거란걸 알아채다니 대단하다.

아인즈가 알베도의 입장이었다면 두 명과 같이 있으니, 제6계층에서 쉬실 생각이


냐고 물어봤을거다.

"이 둘을 데리고 남쪽에 있다는 엘프국에 갈 예정이다"

"엘프국 말입니까......"

알베도가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뭐가 그렇다는거냐.

엘프국과 외교라도 하려고 했던걸까.

확인해둬야겠다.

".....지레짐작 하지마라. 외교를 하려는게 아니다. 상황을 보려는거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넘어갔군. 뭐라 할줄 알았는데ㅡ.

반대로 그래서 무섭다.

뭔가 그, 치명적인 엇갈림이 이미 발생한 것 같은 예감이다.

"......그러니 나는 유급휴가를 써서, 이 둘을 데리고 엘프국까지 여행을 다녀올거


다.

그러니, 급한 용건이 있으면 <전언(메세지)>으로 내게 연락해라. 금방 돌아올테


니.

......다른 의미가 있는건 아니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정말. 진짜라구?"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시는겁니까?"

"아, 그래. 그렇다"

바로 가려는 생각까진 안했지만, 법국일을 고려하면 바로 가는게 좋을지도 모른


다.

"그럴 생각이다만, 아우라와 마레가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둘다 문제 없다 생각합니다. 아인즈님이 즉시 떠나시길 원하신다면, 바로 준비하


는 것이 당연할진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아인즈는 생각했지만, 알베도의 말에 둘다 동의했다.

"흠ㅡ"

둘이 문제 없다면 아인즈가 뭐라 할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ㅡ나는 확인하고 싶다. 알베도뿐 아니라 아우라와 마레. 너희들에게 질문이다.

나자릭 지하대분묘는 마도국을 건국하고 제국을 속국으로 황야에 있는 아인들을


지배하에 두어, 얼마전엔 왕국을 궤멸시켰다.

지배영역은 점점 커지고, 조직 또한 커졌지.

그래서ㅡ나는 약간 불안하다. 조직은 커졌는데 그에 걸맞은 인재들이 자라고 있


는지를 말이다"

한 두명이 쉰다고 돌아가지 않는게 조직일까.

분명 아우라와 마레는 조직의 간부.

회사에서 말하는 중역이다.

평사원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중역 정도 되면 그렇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두 명이 쉰다고 해서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문제다.


혹시 그렇다면, 계획을 중단하거나 변경해야 한다.

"ㅡ나는 그걸 걱정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야겠지"

"문제없다고, 전 생각하옵니다. 그리고 여차할땐 저나 데미우르고스가 있습니다.

또 판도라즈 액터에게도 협력을 구하면 무엇 하나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과연 알베도. 나 따위의 걱정은 이미 해결했구나. 이 나자릭 최고의 지


혜자중 한 명이며 수호자 통괄.

그 이름에 걸맞은 일솜씨. 그야말로 훌륭하다. 감복했다“

전력으로 알베도를 칭찬했다.

아인즈와는 다르게 제대로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칭찬하지 않고 어쩌겠는가.

"ㅡ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깊이 숙였던 알베도가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하지만, 알베도의 표정은 조금 굳어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의문이 생긴 아인즈는 다시 물었다.

"이번엔 아우라와 마레지만...... 알베도와 데미우르고스가 휴가를 보내도 조직이


문제없이 돌아가겠지?

알베도는 순간 우물거렸지만 곧 대답했다.

"저희들이 없더라도 다른 자들이 분명 아인즈님이 원하는 수준으로 일하여, 구멍


을 메워줄거라 믿고있사옵니다"

"으음..... 알베도여.... 믿고있냐는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건 문제없이 가능한가


다.
......확실히 너도 각 계층수호자ㅡ동료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기는
어려울 테고, 괴롭겠지.

하지만, 실제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감정을 섞지 않고 판단해, 정확히 답해주지 않


겠나?

만약 불가능하다면 여유가 있을 때 훈련하여, 조직 개편에 착수해야 할 거다.

아니.....뭐, 알베도라면 나 같은 게 생각할 법한 건 예전에 생각하고 있겠지"

"저, 저기, 아인즈님...... 말씀중에.....저, 저기 죄송합니다"

"왜그러냐, 마레"

"어, 그, 죄, 죄송합니다. 저, 제가 알베도 씨처럼 굉장한 일을 처리할 자신은 없어


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알베도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ㅡ그게 전부, 니?"

뭘까.

방금 마레의 발언에, 알베도가 화낼만한 내용이 있었다곤 생각지 않는다.

아니, 아인즈로서는 "그렇겠지" 라며 납득할 내용이었다.

"어, 어, 어, 네....."

"마레!"

알베도의 호통소리에, 마레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알베도는 대단히 사납게, 진심으로 화났다는게 전해진다.

아인즈가 말릴 틈도 없이, 알베도가 말했다.

"영광스러운 계층수호자가 지고의 존재께서 원하시는걸 못한다고 하는거니!"


"알베도! ㅡ소리 지르지마라. 못하는걸 못한다고 하는게 무슨 문제냐. 못하는걸
할 수 있다고 하는게 문제다"

"ㅡ외람되오나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인즈가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알베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크다.

그저, 아까와는 다르게 마레에게 하는게 아니라, 아인즈는 묵인했다.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는게 문제인게 아닙니다! 못한다면 어떻게하면 가능한지


를 제안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고의 존재가 원하는걸 못하겠다, 그걸로 끝나다니 계층수호자로써 용서받을 일


이 아닙니다!"

아인즈는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알베도의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확실히 그런 시점에서 보면 마레의 발언이 좋지는 않다.

"......아인즈님, 알베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마레는 발언을 철회해야 합니다"

아우라가 차갑게 말했다.

자신의 누나에게 책망받자 마레가 아우, 아우 측은한 소리를 냈다.

"계층수호자로써ㅡ"

"그만!"

이어서 혼내려는 알베도의 말을 아인즈는 노성으로 가로막았다.

물론, 연기이고 정말 화난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감정이 제어당하지도 않았다.


아인즈는 동시에 오라를 뿜었다.

시각효과로 인한 연출로 주도권을 강제로 가져오기 위해서이며, 결코 디버프를


가하기 위해서 아니다.

오히려 알베도나 아우라, 마레는 물론, 류미엘도 정신작용을 무효하는 아이템을


장비하고 있으니

영향 받지 않을거란걸 알고한 행동이다.

알베도가 이어서 무슨말을 하려 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알베도가 마레를 상냥히 타이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으니, 아인즈는 끼어들 수 밖


에 없었다.

"......마레여. 알베도의 말은 확실히 이해가 간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책


을 말해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알베도여.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억지로 시키는 상사도 문제


가 있는 것 아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사옵니다"

"이번 일은 양측 모두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난 생각한다. 알베도여. 너의 충성심


에는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다.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실수를 숨기지 않


도록, 처음엔 상냥히 타이르도록"

실제로 알베도는 충성심도 능력도 너무 높아서, 다른 사람들을 금세 엄하게 대하


고 만다.

그저, 그런것들을 아인즈가 대부분 각하했기에, 어떻게든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


고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알베도에게 전권을 맡기면, 숙청의 폭풍이 부는 것 아닐까.

'아니. 역시 기우라고는 생각하....지만...'

"네. 확실히 약간 성질이 급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줘, 마레"

"어, 어, 아, 아뇨, 아니예요. 알베도 씨의 말이 맞아요. ......제가 틀렸어요. 죄송


합니다"

두 명이 고개를 숙이고ㅡ마레는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ㅡ이걸로 한


건 해결된거겠지.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아, 그렇지. 유급휴가로 둘을 데리고 엘프


국에 갈거니,

둘은 그 동안의 할 일을 제대로 인수인계하라는 얘기였다. 우선..... 사흘안에 인


수인계를 마치거라.

가능하면......계층수호자 들에게 맡기지 말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맡겨보도록. 불


가능 하다면ㅡ"

왕국을 함락한 직후이니 알베도는 어렵겠다고 생각한 아인즈는.

"ㅡ판도라즈 액터에게 상담하도록. 알겠나 둘다"

"네“

둘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서 아인즈님의 수행원은 어떻게 하실건가요? 한조들 입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라기엔 한조들은 놀랄정도로 쓰기 편하다.

솔직히 말하면, 금전이나 데이터에 여유가 있다면 더 부르고 싶을 정도다.

한조의 데이터는 다 써버렸지만, 도서관에는 다른 닌자계 몬스터의 데이터가 있


다.
그걸 쓰면 되겠지만ㅡ

'ㅡ보물전에 있는 재보들은 별로 손대고 싶지 않고, 내 돈이 모이기 전까지는 참


을 수 밖에 없나.

아니, 아니면 나자릭의 강화를 우선하는게 좋나? 엘프국에 가는 동안 조금 생각


해볼까.

아아, 돈이 필요해......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어디 보물좀 모아놓은 녀


석 없으려나... 빼앗아도 뭐라 못하는 상대가......'

"......아인즈님?"

"응? ......아아, 미안하다. 조금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그렇구나ㅡ"

한조들이 좋겠지라고 말하려던 아인즈는 입을 닫았다.

우수한 사회인은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지만 일반적인 사회인인 아인즈


자신도 이 순간만큼은 운이 좋았는지,

그 의견에 찬성하는건 조금 기다리라고 직감이 속삭였다.

알베도의 말에 숨은 평소와는 다른, 얼마 안되는 감정을 눈치챘다.

"ㅡ아니, 한조를 데려갈 예정은 없었다만, 한조들에게 뭔가 시킬일이라도 있는게


냐?"

"아, 아니오, 이번엔 데려갈 예정은 없다고 하시니..... 아인즈님의 판단에 이의가
있는건 아니 옵니다만....."

약간 머뭇거리는 알베도가 눈치를 보듯 말했다.

"한조들만 중용하신다는 말들이 있어서......아인즈님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자들


이 많으니,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으면 해서"

고심하는 아인즈에게 알베도가 황급히 말했다.


"기회가 있다면 자신을 써줬으면 한다는 의견이 있다는걸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

"음"

아인즈는 답하면서 마음속으로 머리를 싸맨다.

아인즈ㅡ스즈키 사토루는 어차피, 평범하다.

그러니 이런 문제가 있을거라고 생각도 못해봤다.

분명 한조를 중용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현상은 상당히 안 좋다.

회사에 편애는 분명 존재한다.

다소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윗선의 눈에 든 인간이 승진하기 쉬운건 당연하다.

하지만, 사내의 인간관계가 악화되는건 피할 수 없다.

그래선 안된다.

블랙기업 나자릭은 인간관계가 좋아서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다고 아까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 "역시 한조를 데려갈게" 라고 할 수는 없다.

"뭐, 누가 동행할지는 나중에ㅡ아니, 금방 연락 하도록 하마.

누가 선택될지, 누가 선택받더라도 괜찮게끔 준비 해두는건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인즈는 씨익 웃었다.

마음속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알베도가 "그렇군요, 과연 아인즈님"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나자릭 지하대분묘에 속하는 모든 자에게 연락해두겠습니다"

"음. 잘 부탁한다"

아인즈는 일어서서 류미엘 만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일을 마친 샐러리맨처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알베도는 깊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든 두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있잖아, 알베도. 묻고 싶은게 좀 있는데"

"뭔데?"

일어서면서 아우라에게 답했다.

"아인즈님은 유급휴가를 쓴다면서 엘프국에 가신다고 말씀하셨는데.....목적이 뭐


라고 생각해?

설마 진짜로 여가를 즐기실 뿐인 건 아니겠지?"

"ㅡ그렇겠지"

"어? 그, 그런거예요?"

아인즈 울 고운이라는 나자릭 최고지배자는 한 수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는 지모


의 왕.

최소 3개는 목적이 있을거라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왕이라는 지위는 가볍지 않다.

마치 코트를 벗듯이, 기분 내키는대로 탈착 가능한게 아니다.


스스로 휴가라 한들ㅡ설령 그 뜻을 타국에 전한다 해도ㅡ타국이 보기에는 버젓한
마도국의 왕이다.

그 일거수 일투족에는 마도국의 의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건 어떤 바보라도 아는 뻔한 것.

그러니, 엘프국에 휴가를 보내러 간다는 말에는 다른 의미, 다른 의도가 있는게


틀림없다.

"그럼 아인즈님의 진짜 목적은 뭐라고 생각해?"

"말씀하셨듯 조직 개편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목적은 정보수집이겠지"

알베도는 생각하면서 말했다.

"이 주변은 나보다 데미우르고스가 정확히 답해주겠지만......아마 지금, 엘프국에


법국이 대대적으로 침공하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어"

"버, 법국, 이요?"

법국에 관한 지식은 어느정도 나자릭내에 공유되있다.

그러니, 최저한의 설명은 생략해도 문제는 없다.

"그래. 가상적국인 마도국이 왕국과 전쟁을 시작했다고 알면, 자신들도 싸우고 있


는 엘프들과의 문제를 서둘러서 해결하려 들거야"

"2개의 전선을 껴안고 있는건 좋지 않아서 였나?"

"맞아. 현시점에선 법국이 마도국과 전쟁상태가 아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북쪽


과 남쪽에 부대를 나누는짓은 하고 싶지 않을테니 말야.

그러면 엘프국과의 문제를 끝내려고, 대공세를 펼칠 가능성은 매우 높아.

아무래도 이 상황에 강화를 맺는건 생각하기 어렵지만, 절대 아닐거라고도 못하


겠네"
알베도는 법국이 엘프국을 멸망시켜도 문제없다.

반대로 엘프를 노예로 삼게 하는게 엘프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

장래, 법국에게 쓸 수가 늘어나 순조로울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니면 그런걸 조사하기위해 정보를 얻으러 가는걸까.

데미우르고스라면 확신을 갖고 단언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베도는 내정으로는 데미우르고스에게 이기지만, 군사관계가 되면 한 수 밀린


다.

그래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한편,

데미우르고스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미우르고스가 우리 모르게 뭔가 하고 있나?

엘프국의 정보를 비밀리에 모으면서, 그걸 이쪽에 알리지 않는걸로 뭔가 꾸미고


있는걸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나자릭을 떠나, 여러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수호자들보다 더 많


은 재량권을 갖고 있다.

그보다 다른 수호자들은 그다지 그런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하는게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얻은 정보나 했던 행위는 나중에 주인에게 보고할테니,

서면ㅡ대체로 상당히 상세히 쓰기에 두꺼워서 읽기가 힘든ㅡ으로 남기기에, 그걸


통해 알베도에게도 전해진다.

그러니 데미우르고스의 행동에 모르는 점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엘프국에


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숨기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어쩌다 그곳을 손대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허나, 자신을 돌아보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것도 사실.

여길 떠나 바로 데미우르고스를 만나러 가야겠다.

아니ㅡ불러야 겠다.

상대의 영역에서 그런 얘길 해선 안된다.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을 옆에 두고 얘기하면 데미우르고스가 내 생각을 간파할


가능성도 있어.

'그래도, 데미우르고스가 악마들을 데려오면......아니, 그런 단락적인 행동을 할


까?

날 의심하고있나? 아직 움직이진 않았으니 문제는ㅡ'

"버, 법국과 싸우게 될까요?"

"ㅡ어? 어, 어어, 그렇네.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어. 어쩌면 아인즈님도 단언할 수


없어서, 휴가라고 말씀하셨는지 몰라"

마레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 알베도는 황급히 답했다.

생각에 깊이 잠겨버렸지만 둘의 눈동자엔 의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데미우르고스에 관한걸 일단 머리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주인은 이번에, 나자릭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휴가중인 한 명의 언데드로서 행


동하는거라 생각하는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악의 경우에도 나자릭에 피해가 미치지 않게끔 하시려는 걸


까.
"......이번만큼은 아인즈님에게도 불확실한 요소가 있어서 나자릭과 관계없는척
행동하시려는 걸지도 몰라"

"거짓말!"

"에에? 그, 그 아인즈님이, 정말요!?"

두 명이 큰 소리로 놀람을 표현하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알베도를 쳐다봤다.

우리 주인의 지모는 이제껏 모든걸 파악하고, 흐름을 완전히 지배해왔다.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한 수가, 결정적인 일격이 되는걸 몇 번이나 봐왔다.

듣자하니 대강 천년 앞의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고 있다 한다.

그런 주인이 판단을 그르칠지 모른다고 하면, 그렇게 생각한 알베도야말로 틀렸


다고 생각되는게 당연하다.

"......역시 알베도여도 아인즈님의 생각을 간파할 수는 없었나ㅡ"

머리 뒤로 손을 깍지낀 아우라에게 알베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아인즈님의 심려원모를 완전히 간파하는건 일단 불가능해. 그건 여지껏 잘


알고 있던거야.

......솔직히, 아인즈님이 무슨 생각으로 유급휴가라는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어.

그저, 엘프국으로 간다면 법국과 싸울 가능성이 매우 높아, 알아둬"

수호자 두 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저, 저기, 개인적인 부하를 데려가는건 안될까요....."

"아인즈님이 고르신 자 이외에, 라는 의미구나......"

마레의 제안에 알베도는 생각했다.

주인이 고른 부하 이외를 데려가는 건 불경하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자주적으로


준비해뒀다고 기뻐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인즈님이 소수정예를 원하신다면......아니, 잠깐만"

알베도는 더욱 생각했다.

"우선 소수일 때와 다수일 때의 경호병을 선별해둬.

......나도 아인즈님의 목적을 데미우르고스와 상담해보고 나중에 연락할게"

'아인즈님은 나자릭 내의 조직력 저하를 대단히 걱정하고 계신 모양이야. 그것도


이번 이유와 관련이 있는걸까?'

안심하셔도 좋다는 말에 주인에게 돌아온 말은 비꼬듯 한 칭찬이었다.

아마도 주인의 불안을 알베도가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완벽히 신뢰에 응하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그걸 상당히 걱정하고 계신 모양이야......'

일단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에 필적하는 지혜로운 자가 한 명 부하로 들어왔다.

그래도 부족하다는 걸까. 아니면ㅡ.

두 명의 대답을 듣고, 알베도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우라, 마레. 아인즈님이 누구를 데려가느냐에 따라 생각하시는 바를 조금은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이번일은 상당히 하이레벨의 일이라고 생각해.

온갖 일에 신경써서 방심하지 않도록, 항상 머리를 쓰면서 행동하도록 해"

수호자 두 명이 알베도에게 힘차게 대답했다.

둘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주인을 지키지 못할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방


심해서는 안되겠지.
데미우르고스에게도 상담해서, 상황에 따라선 나자릭 총출동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왕국의 잔당 처리를 조금 늦추더라도, 만약을 준비해둬야겠어'

앞으로 할 일의 순서를 생각하면서, 알베도는 둘과 함께 방을 나왔다.


2장 나자릭식 풍경

엘프국이 있는 에이버셔 대삼림에 험한 곳으로 불리는 곳은 없다.

분명 다수의 위험한 몬스터가 있는 장소나, 아인 등이 있는 소규모 국가,

방향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인 지형자체가 험한 곳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요새라 불릴만한 건축물도 사람이 답파할 수 없을만한 험한 지형도 없다.

하지만 지나가기 어려운 곳은 존재한다.

그건 한 개체가 원인이다.

화멸성전 부 리더 슈엔은 드문드문 자란 나무들 뒤에 숨어서, 그 너머를 보고 있


었다.

겉모습이 8세가 될까 말까한 엘프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엘프는 인간보다 몸집이 작아서 더 어려 보였다.

소녀는 언덕 위에 작은 의자를 두고,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작은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활을 들고, 의자 옆에 높인 화살통에는 화살


몇 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화살통은 크지 않고, 보이는 화살 수는 양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

하지만 화살통 속 화살은 아무리 쏴도 변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틀림없이 매직아이템이다.

주위에는 소녀밖에 없다.

오직 한 명.

아이 하나.
ㅡ그게 무섭다.

영웅은 혼자서 전세를 바꿀 수 있다.

1만의 장병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이 소녀에게 이미 천에 가까운 법국병사의 목숨을 빼앗겼다.

결과적으로 작은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소녀를 앞에두고, 법국침공군 4만이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전술의 상식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적 전력은 회피하는게 바람직하다.

꼭 여기를 지나가야 되는것도 아니고 대삼림은 그 자체가 자연의 요충지이나, 우


회 할 수 없는곳도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는 군세가 아니라, 혼자다.

적이 많았다면, 그 움직임을 예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녀는 전투력뿐 아니라 기동력도 뛰어나서 한 번 놓쳐버리면 다시 포


착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일군에 필적하며 포착하기 힘든 적 전력이 대삼림안에 모습을 감추면

ㅡ그건 오랜 게릴라전이 시작되는걸 의미하고, 전선에 선 병사들의 사기가 현저


히 꺾일거란걸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병력을 나누어 소녀에게 보내 지체전투를 하는 도중 본진이 나아가게 하는 수도


있다.

나쁘진 않겠지.

적지에서 전력을 분단한다는 치명적인 문제에 눈을 돌린다면 말이지만.

그렇다면 상대가 당당히 포진ㅡ그저 의자에 앉아 있는걸 포진이라 할 수 있다면


ㅡ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라 할 수 있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때, 아군의 희생을 각오해서라도 배제해야 한다고 상층부
는 판단했다.

영웅에는 영웅을.

어중이떠중이를 아무리 보낸들,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다.

이번 법국침공군에,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화멸성전의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화멸성전에도 영웅은 없다.

예전엔 있었지만, 그는 칠흑성전으로 옮겨갔다.

애초에 법국에서 영웅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는, 거의 전원이 칠흑성전에 스카우


트 된다.

슈엔도 아쉽지만 영웅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래도 화멸성전이 떼로 덤벼들면 영웅도 죽일 수 있을거라며, 이 전장에 보내졌


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슈엔을 포함한 화멸성전은 영웅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영웅의 영역에 발을 막 들인 자와 일탈자에 가까운 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자라면 승산은 있어도, 후자에겐 없다.

그렇기에 슈엔은 진지하게 소녀를 관찰한다.

일반병, 강병, 정병, 영웅, 그리고 일탈자......

여러 존재들을 보아온 슈엔은 지식과 경험이 있다.


표적인 엘프 소녀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정확히 가늠해, 부대에 피해가 나오지 않
게끔 해야한다.

칠흑성전 정도는 아니지만, 화멸성전의 구성원들도 추려낸 정예인

ㅡ육색성전에 속하는 모두를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ㅡ건 틀림없고, 쓸데없이


잃어선 안되기에.

그래서 분석 결과에 따라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병사들을 투입하여 붙잡아두


는 사이

본국에서 칠흑성전을 부르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

슈엔은 숨을 작고 길게 천천히 쉬었다.

나무 뒤에 숨어, <불가시화(Invisibility)>와, <정적(Silence)>

ㅡ보통, 마력계 마법에 <정적>은 없지만, 마력계 매직캐스터도 쓸 수 있게끔 개발


된 것ㅡ

두 개의 마법을 썼는데도 숨 한번 쉬는것에 신경을 소모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 싶지만, 모든 동작이 죽을 위험이 있다 생각하니 쓸데


없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슈엔은 마력계 매직캐스터로 능력이 높지만, 마법을 쓰지 않으면 일반인보다 잠


복을 조금 잘한다는 수준이라 노력이 필요하다.

엘프 소녀가 가진 클래스는 아마 궁병계나 레인저계다.

후자라면 감각을 예민하게 할 수 있는 클래스라, 슈엔이 2개의 마법으로 지켜지


고 있어도 간파당할 위험이 있다.

물론, 정확히 어디있는지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범위공격ㅡ있다는건 확인했다ㅡ


으로 찾아낼지도 모른다.

설령, 표적이 영웅이어도 일격으로 슈엔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겠지.


하지만, 상처 입은채로 도망칠 자신은 없다.

슈엔은 죽는다는 공포 이상으로, 지금 얻은 정보를 가져가지 못하는ㅡ개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ㅡ그건 그렇고 기분 나쁜 꼬맹이군'

표적의 표정은 관찰하기 시작하고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우울한 표정으로 조형물 같았다.

하지만 그게 조형물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있다는걸 슈엔은 알고 있다.

관찰하고 몇 분 지났을까.

표적이 움직였다.

슈엔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표적이 노리는 사냥감이 자신인건 아닌가 걱정해서다.

표적이 바라보는 곳에 슈엔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정말 뛰어난 달인은 시선으로 페인트를 쉽게 걸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무투기가 있다는걸 슈엔도 지식으로 알고 있다.

그때, 제2위계마법 <코끼리귀(Elephant Ear)>로 강화된 청력이, 후방에서 접근


해오는 여러명의 발소리를 들었다.

표적은 이걸 감지한 것 같다.

틀림없이 동포ㅡ법국의 병사들이다.

슈엔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이 온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다.

병사들에게 경고하지는 않는다.

그건 슈엔이 할 일이 아니다.

놓치지 않는다. 그저 그뿐.

표적의 능력ㅡ강함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건, 역시 그 전투력을 실제로 봤을 때다.

그러는 데 필요한 산제물을 약속대로 상층부가 보낸 것이다.

동포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하는거다.

눈치채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돌아봤다.

제2위계 <매의눈(Hawk Eye)>로 강화된 시력이 화살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쏘아진 화살 하나가 나무들 사이를 넘실거리듯 빠져나가는게 보였다.

그리고 공중에서 확산.

수 십개의 화살비로 변해 대지에 쏟아졌다.

노리고 쏜건 아니겠지.

설령 소리로 목표가 있는 곳을 정확히 감지했다해도, 여긴 숲 속이다.

나무들이 방해되어 제대로 저격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게 <화염구(Fire Ball)>같은 마법이었다면, 불길이 엄폐물 너머까지 태


워버리겠지.

그와 비슷한 걸, 나무들을 꿰매듯 활을 쏘는 능력과, 화살을 확산시키는 기술을


조합해서 한 것이다.

슈엔의 강화된 청각이 병사들의 비명을 들었다.


멀쩡한 자는 없는 것 같다.

'ㅡ비명? 살아있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격받은 병사들은 혼란하고 두려웠다.

거기엔 활을 쏜 방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는지, 전원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의따위 더는 없었다.

틀리진 않았다.

아니, 가장 적합한 답이겠지.

전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면 살상영역에서 빠져나올 자도 생기겠지.

소녀가 다시 활을 쐈다.

나무를 피해 날리는 능력을 발동시킨 화살은 적확한 위치에 이동하여, 다시 확산


하는 화살로 바뀌었다.

빗발치는 소리에 병사들의 비명은 지워져, 잔디를 밟는 소리도 끊어졌다.

병사들의 죽음으로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병사를 일격에 죽이지 못했다.

확실히 공격을 확산시키는 능력ㅡ무투기 등ㅡ을 발동하면, 위력도 명중도도 떨어


지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웅이라면 일반병 따위는 한 방에 전멸 시켰겠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ㅡ영웅이 아니다. 저 꼬맹이는 영웅의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했어'

슈엔은 그렇게 판단했다.

칠흑성전 제3석차 [사대정령]의 라이벌로써 자신을 단련해왔던 그이기에 잘 안


다.

표적의 강함은 슈엔 이하다.

하지만 그건 여유가 생겼다던가, 안심할 수 있겠다는 말이 아니다.

궁병과 매직캐스터의 싸움방식은 차이가 있다.

종합적인 능력이 높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게다가 감시당하는걸 들켜 궁술을 억제하고 있을 가능성도 0은 아니다.

하지만 감시를 계속하던 슈엔은 확신했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다.

법국에게 방해되는 돌을 치울뿐.

<마법무영창화(Silence Magic) : 화살막이의 방벽(Wall Of Protection From


Arrows>을 발동했다.

준비가 만전이라 할 순 없지만, 이 거리에서 마법을 더 발동했다간 위화감을 느끼


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각오를 정해야 한다.

"ㅡ<마법무영창최강화(Silent Maximize Magic) : 마법화살(Magic Arrow)>"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능력을 썼다.

화멸성전에 속하는 매직캐스터들이 필수로 습득해야 하는 클래스, 아케인 디보티


의 하루 한번 쓸 수 있는 히든카드를 발동.

습득하고 있지 않은 마법강화를 가능케 한다.

고른건 당연히, 마법삼중화(Triplet Magic).


합계 12개의 마법화살이 일제히 날아갔다.

필중의 화살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저, 대미지량은 아쉽지만 그리 높지 않은게 현실.

비록 마법최강화를 썼어도, 서로의 전투력 차이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죽이는건


불가능하다.

단ㅡ그게 한 명 뿐이었다면.

부하들은 모두 <불가시화시인(See Invisibility)>을 써서 슈엔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표적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슈엔의 공격으로 대미지를 입어 고통을 참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ㅡ슈엔의 뒤에서 날아오는 총 100개 이상의 마법화살을 보았기 때문일까.

화멸성전의 일은 암살이나 카운터 테러 등 임기응변이 요구되는 일이라, 여러 가


지 클래스를 습득한 자들로 최소 4명의 팀을 구성한다.

이는 왕국과 제국 등의 모험자라 불리는 집단과 비슷하다.

애초에 모험가조합이라는 조직 자체가, 법국이 각국에 숨어들어 만든 것으로, 형


제라 해도 좋겠지.

그래서 이번 작전에는 한 직종, 그중에서도 특정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로 구성


했다.

그건 <불가시화>를 쓸 수 있는 마력계 매직캐스터.

착탄.

착탄.
착탄.

착탄.

마치 빛의 날개가 하늘을 달리는 것 같았다.

엎어져 쓰러진 표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가가는건 슈엔 뿐이다.

궁병인 표적이 쓸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죽은 척하는 환술도 있다.

아직 방심할 수 없다.

몸 밑에 발을 넣어, 뒤집었다.

전신에 쏟아진 마법화살의 구타로, 어린 몸에 멀쩡한 곳이 없다.

슈엔은 얼굴을 들여다봤다.

부풀어 오른 눈꺼풀 때문에 반쯤 열린 눈동자에 빛은 없었다.

확실히 죽었다.

"흥. ㅡ당했구나, 망할 꼬맹이"

<마법화살>을 선택한건 보복을 위해서 아니다.

범위마법의 경우, 레인저같이 민첩성이 뛰어난 상대라면 확실한 대미지로 이어지


지 않을 때가 있다.

정신작용에 영향을 주는 마법 등은 때로는 일격필살이 되지만, 저항당해 무효화


될 우려도 있다.

그래서 동료도 있으니 확실하게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마법을 골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활에 맞아 사살된 법국 동료들의 원수를 갚기엔 최적의 마법


이었다.
어린 엘프의 죽은 얼굴에 슈엔은 눈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안도하고 있는 듯 했다.

잘못 본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단히 불쾌하다.

이 엘프 하나에게 법국을 섬기는 동료를 천 명 가까이 살해당했다.

좀 더 고통에 몸부림쳐,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고 죽었으면 했다.

슈엔은 소녀의 시체에 침을 뱉으려다 그만두었다.

표적이 가진 장비는 빼앗아야 한다.

주위에 적은 없으니, 여기서 발가벗길 예정이지만 자신의 침이 묻으면 조금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발가벗기고 하면 되겠지.

우선 활이다.

법국군을 고작 혼자서 잡아둔 자가 쓰던 무기다.

그만한 물건일 터.

"이런이런"

태평한 남자 목소리에 슈엔은 활에 손을 뻗은채 굳었다.

재빨리 반응해야할 상황인데도 완전히 허를 찔려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슈엔이 시선을 보낸 곳에는 한 명의 엘프가 있었다.

아무도 없었을 터.
틀림없었다.

표적 이외의 엘프는 없었다.

표적에 접근할때는 <불가시화시인>까지 썼었다.

"알고있나, 인간. 목숨을 건 극한상황에서 강자와 싸우는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강해질 수단이란걸?

어쩌면 성공작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어미에게서 떼어내 보내봤다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경멸하는 눈빛으로 소녀의 시체를 보고 있다.

"무능한 것. 날 귀찮게 하다니 다른 실패작보다 뒤떨어지는군. 역시 왕의 증거가


없는 자는 쓰레기일 뿐인가"

엘프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다.

좌우의 색이 다른 그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다.

법국의 최종표적.

증오스러운 대범죄자.

엘프왕이다.

즉ㅡ 슈엔은커녕 영웅도 이길 수 없는, 일탈자도 넘어선 존재.

승산은 전혀없다.

<마법무영창화 : 불가시화>

슈엔은 황급히 마법을 발동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엘프왕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 앞에 있는건 슈엔.

불가시화한 후 약간이지만 움직였는데, 엘프왕의 시선은 슈엔을 정확히 포착했


다.

슈엔은 그걸 알아챔과 동시에 엘프왕에게 등을 보이고 달렸다.

<불가시화>와 <정적>이 걸려있어도 발밑의 풀이 꺾이는건 숨길 수 없다.

그래도 달리는걸 멈추지 않았다.

엘프왕의 시선은 약간 흔들리긴 했다.

슈엔의 위치를 <불가시화시인> 같은 마법을 써서 완벽히 포착하고 있는건 아니


다.

하지만 그 괴물같은 지각력으로 <불가시화>나 <정적>으로 보호받는 슈엔을 찾아


내고 있다.

그래서 슈엔은 거리를 벌렸다.

간파계의 능력으로 보고 있는게 아니라면, 거리는 슈엔의 아군이며, 상대의 탐지


를 어렵게 만든다.

<비행(Fly)>을 써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슈엔이 습득한 클래스.

어뎁트 오브 스루샤나의 특수능력에 하루에 사용횟수 제한은 있지만

유효시간이 정해진 마법을 마력을 계속 소비하면서 지속시키는 게 있다.

그걸로 다른 마법을 유지시키고 있어, 마력이 점점 줄어들어 <비행>에 쓸 마력이


없었다.

게다가 엘프왕에 한 걸음이면 닿는 거리에 멈춰서, 무방비한 상태로 <비행>을 발


동하는건 광기와도 같은 각오가 필요했다.

아무리 슈엔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거리를 두고, 나무 그림자에 숨어서 쓰는게 그나마 현실적이다.

"ㅡ핫"

뒤에서 엘프왕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을 죽이는 의미는 요만큼도 없다만ㅡ모처럼 내가 왔으니. 빈 손으로 돌아


가는것도 재미없지"

슈엔은 마력계 매직캐스터여서, 몸을 움직이는건 결코 특기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영웅에 거의 가까이 도달한 슈엔의 각력이라면, 아주 잠깐 질주해도 거리


를 상당히 벌릴 수 있다.

순식간에 거리를 확보한 슈엔의 귀에, <코끼리귀>로 엘프왕의 목소리가 명확히


들렸다.

"자아ㅡ죽여라, 베히모스"

대지가 흔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거대한 뭔가가 나타났다는걸 알았다.

"흩어져!"

부하들에게 명령이 들리도록 <정적>을 해제하고 말했다.

여태껏 이렇게 크게 소리쳐본 적은 없다.

이걸로 엘프왕의 표정이 구겨진다면 만만세다.

부하들은 있는힘껏 노력해줘야 한다.

누구를 희생해서, 누구를 버리더라도.


얻은 정보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돌아가는 게, 잃어버린 귀중한 목숨에 보답할 유
일한 방법이기에.

엘프왕과 가까운 슈엔은 도망치지 못하고 확실히 죽는다.

그렇기에ㅡ슈엔은 뒤돌아본다.

부하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건 그리 나쁘지 않다.

슈엔은 흙의 정령을 본적이 있다.

인간보다 작은 크기로, 팔이 묘하게 두껍고 땅딸막한 겉모습은 약간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 뒤에 서있는 건 그런 평범한, 귀여운 게 아니었다.

바위나 광석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같은 볼품없는 거체는 주위의 나무들과 비슷


해서, 그야말로 흙의 정령왕이라 부를만 했다.

굵고 긴 팔과, 굵고 짧은 다리.

스케일이 조금 작았다면 유머러스하게 느꼈을 손발은, 다른 어떤 몬스터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차원이 다른 힘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엘프왕은 싱글싱글 웃으며 팔짱을 끼고, 슈엔의 발버둥을 보고 있었


다.

그 모습은 불쾌하기만 했다.

목숨을 걸지도 않고, 목숨을 빼앗으려는 그 오만한 자세.

하지만 그런 슈엔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발을 움


직이지 않는 자세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흙의 정령ㅡ베히모스는 이상하게 굵은 양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ㅡ와라! 빌어먹을! <석벽(Wall Of Stone)>"


마법의 영창에 엘프왕과의 사이에 돌로된 벽이 막아섰다.

다음 순간, 돌벽이 일격에 아주 간단히 부서졌다.

부숴진 돌벽은 허공에 사라졌다.

매직캐스터의 역량에 따라 벽 마법은ㅡ경우에 따라ㅡ강도나 내구도가 달라진다.

그래도ㅡ아니, 그만큼 엘프왕의 정령이 강하다는 거겠지.

곧장 베히모스가 왼주먹을 치켜들었다.

슈엔은 엘프왕이 빙그레 비웃는걸 시야 한구석에 포착하고, 그 생각을 눈치 챘다.

알고 있다.

다음 공격으로 슈엔을 죽일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슈엔이 다음 마법을 발동하는 것 보다 빠르게, 베히모스의 공격은 슈엔에 닿고,


슈엔은 죽는다.

그래도ㅡ

'ㅡ조금은 시간을 벌었다'

겨우 몇 초, 상대를 귀찮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

그렇다.

충분하다.

이걸로 아무도 나라에 돌아가지 못하는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럼 그건 슈엔의 패배일 뿐, 법국의 패배는 아니다.


"하핫!"

그리고 베히모스의 왼주먹 일격에 맞은 슈엔은 웃으면서 지면과 일체화됬다.

엘프왕ㅡ데켐 호우간은 성문을 넘어, 불쾌감에 숨을 내뱉었다.

성에 돌아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게 불쾌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피로하지 않는 베히모스에 타고 귀환했으므로, 어떤 수단보다 빨리 돌아


오긴 했다.

그래도 쓸데없이 시간을 썼다는 정신적 고통에 참을 수 없었다.

실패작에 빌려준 무구의 회수자체는 결코 쓸데없지 않다.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다.

빌려준건 자신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누구도 만들 수 없을만한 무구다.

결코 가치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넘겨도 될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ㅡ작업을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문제는, 무구의 회수뿐 아니라, 여러 작업을 신뢰하여 맡길만한 부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것도 약자밖에 없는 탓이다.

이놈도 저놈도 쓸모없는 놈들이다.

엘프는 굉장한 종족이다.

그건 데켐의 아버지가 증명해주었다.

어떤 생물보다 강해질 수 있는 종족이란걸.

어쩌면 데켐이 특별한 엘프ㅡ가칭 하이엘프라던가 엘프로드 라던가ㅡ라면 다른


자들은 열등한 것들이라 간주하고 끝났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데켐도 그 아버지도 단순한 엘프다.

그렇다면, 어느 엘프라도 굉장한 강자가 될 수 있을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른 자들은 약할까.

어떻게 하면 엘프가 최고의 종족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누가봐도 알만한 결과를 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우수한ㅡ강자인 모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모체가 우수한지는,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지 않으면 판단하기 어렵


다.

그래서, 아이를 전원 전쟁터에 보내왔지만, 거의 모든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데 아직도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현상에, 머리가 아


파온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험악한 표정의 데켐에게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ㅡ왕이여"

"뭐냐?"

분노가 여자를 향했다.

그리고 데켐은 놀라서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다.

강자(데켐)의 강한 감정ㅡ 특히 살기 등의 적의ㅡ를 담은 시선은 그것만으로 약자


의 심신에 부담을 준다.

분명 살의는 아니라 분노였다.


그래도 약자에겐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여자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견뎌냈다.

대단히 약한ㅡ실패작인 모체중 하나가.

그렇다면 자신의 노기를 어떻게 견딘걸까.

어쩌면 자신이 피곤한 탓일까.

무시해도 상관없었지만, 견뎌냈으니 상을 주어야 겠지.

그래서 발을 멈췄다.

데켐은 자비로우니까.

"그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가 누굴까.

애초에, 일하러 여길 떠났던 왕의 노고를 치하하지않고, 돌아오자마자 그런 영문


모를 질문을 하다니 무슨 생각일까.

마음이 급격히 식어버렸다.

"루기를 말하는겁니다"

루기

그런 이름은 역시 기억에 없다.

분명 데켐은 남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할 가치 있는 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데켐이 보기에 자신에게 가치 없는ㅡ쓸데없는 이름을 기억하는건, 기억력의 낭비


다.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고는 안하겠지만, 중요한 것 외에 기억력을 쓰는 의미는 없
다.

반대로 의미 없는걸 기억하는 자가 많다는게 이해가 안간다.

여자의 시선이 데켐이 쥔 활을 향했다.

"죽은, 거군요"

그걸로 겨우 무슨 얘기인지 알았다.

그 실패작을 말하고 있다는걸.

모처럼 귀한 무구를 빌려주었는데, 죽어버린 어리석은 자.

그런게 자신의 피를 절반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워졌다.

아니ㅡ피를 절반밖에 이어받지 않았기에 인간 따위에게 죽은거겠지.

"그래, 죽었다"

"그, 렇습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이 여자도 실패작과 피가 이어져있다는걸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겠지.

하지만, 이 여자보다 그 실패작이 더 강했다는건 사실이다.

더더욱 수치스러워 해야겠지.

하지만 찬스를 주는게 왕의 책무.

무능한 자에게도 자비를 내려주는 자신은 이 얼마나 상냥한가며 데켐은 감동했


다.

"지금부터 방으로 와라. 찬스를 주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데켐은 걸어갔다.

우선 이 무구를 보물전에 돌려놓는게 최우선이다.

보물전에서 돌아온 데켐은 전장에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자신의 침실에 누웠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실례합니다"라며 들어온건 남자였다.

뒤로 시선을 보냈지만 그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뭐냐?"

"보고드립니다. 왕께서 부르신 뮤기가 자해했습니다"

"자해?"

"네. 성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죽어......아니, 너희들은 그 정도 힘밖에 없었


지"

데켐은 조금 생각했다.

여자가 죽은 이유를 모르겠다.

애초에 방금전 자신의 침실에 불린 것이다.

기꺼이 올 것이다.

어쩌면 자살한게 아니라, 질투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게 아닐까.

"......정말 자살한거냐?"

"네.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내리는걸 본 자가 있습니다"

그 녀석이 범인인거 아닌가 싶었지만, 정말 자살이라면 뭐가 원인일까.

조금 생각하더니, 유일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과연...... 그런건가. 알았다. 실패작인 딸을 낳았다는걸, 내게 사죄하기 위해 자
해했다는 게로구나?"

"......그녀의 기분은 그녀만 알겠지만, 그럴지도 모릅니다, 왕이여"

남자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거라면 그 시체는 정중히 묻어주거라. 자신의 목숨으로 내게 사죄했으


니 용서해주는 것이 왕의 책무겠지"

"왕의 관대한 배려에 감사드리옵니다"

남자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진지한 태도에 데켐은 대범하게 수긍했다.

역시 이렇게 왕의 자비라는건 무가치한 자들에게도 내려 주어야한다.

무척 인자해진 기분이 된 데켐은, 우선 눈 앞에 있는 충신에게ㅡ역시 이름은 모르


지만ㅡ온정을 베풀기로 했다.

"너에게 딸은 있나?"

".........네......있습니다"

"그거 잘됐구나. 성인이라면 여기에 불러라. 아직이라면 너의 아내라도 좋다"

남자는 감동에 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신을 강하게 떨더니, 목 깊은 곳에서 짜내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이여......"

남자가 방을 떠나자 데켐은 죽은 여자를 잊어버렸다.

쓸모없는 한 명이 어찌 됐다 한들 데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도국에서 남쪽ㅡ법국의 남서ㅡ에 펼쳐진 대삼림의 아득한 상공.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아인즈는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삼림은 무슨. 이런게 수해...... 그래, 대수해지"

한밤중이라 저 멀리 펼쳐진 선명한 녹색 융단도, 지금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나무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숲 전체가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바다 같았고,

이 땅이 대수해라 불릴만한 곳이라고 생각됐다.

실제로, 이 땅은 토브 대삼림에 아제를리시아 산맥을 합친 것보다 훨씬 광대하다.

아마 왕국보다 넓지 않을까.

'마도국에서는, 여길 대수해라 부르기로 하자'

터무니없는 넓이의 대수해는 보기에는 나무밖에 없었고, 특징있는 뭔가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 숲에선 여러 종족이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올려, 생활권을 넓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하늘 위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건ㅡ

'ㅡ숲을 방패막이 삼고 있는 건가. 하늘을 나는 몬스터도 있으니, 하늘에서 보이


는 곳에서는 살지 않는 문명으로 발전했겠지'

그런와중, 발견한건 두 가지.

하나는 엘프의 왕도가 있다는 초승달 호수.

상당히 큰 호수라, 상공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ㅡ법국에서 이어진 길.

그 정체는, 법국이 진군 루트의 나무를 베어서 만든, 침공루트.


숲이 거대하기에 실처럼 얇게만 보이지만, 실제론 폭이 100M를 넘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고고도에서 발견하지도 못했을거다.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이란 생각도 들지만, 이 대수해에서 어느 수준 이상의 안전


을 확보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동시에 들이부은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하면, 엘프국을 어떻게든 멸망시키고 싶다


는 법국의 강한 집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네. 어째서 저것들 말고 눈에 띄는 곳이 없지? 법국은 엘프


국 침공을 멈춘건가?'

엘프의 마을을 간단히 공략하는 방법은, 주위의 나무를 베어 넘기고, 불을 지르면


되는 거 아닐까.

건조하진 않지만, 온도가 대단히 높은 것도 아니다.

주변을 주의하며 불을 지르면, 마을같은건 순식간에 함락할 수 있겠지.

'엘프를 노예로 삼고 싶어서 불을 쓰지 않는 걸까?

그런거라면 상당히 여유가 있다는 소린데...... 어쩌면 그만한 전력차가 있다는 얘


길까?'

상공에서 보기엔 나무들을 엄청 태운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선 상당히 거리가 멀기에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이 자리에 아우라가 있었다면 다른 의견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법국의 전초기지는 불빛이 보이는 저 근처려나.....'

인간의 눈으론 깜깜한 밤을 훤히 볼 수 없다.

그래서 야영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불빛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아인즈는 법국의 전초기지라 보이는 곳을 찾아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ㅡ특히 상공이라는 위치에선ㅡ여기서 엘프의 왕도
까지 정확한 거리를 파악하는건 어려워서,

숲을 저렇게 벌채하면서 진군하면 얼마나 걸려야 법국이 도착할지도 전혀 모르겠


다.

그래도 볼건 다 봤다고 생각한 아인즈는 <상위전이(Greater Teleportation)>를


발동했다.

하늘처럼 어떤 차폐물도 없는 곳은 아래에서 발견하기 쉽다.

밤이라곤 해도, 시력이 뛰어난 자는 많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환경이다.

물론 상대가 밑에서 수천M 이상 상승해온다면, 그 사이에 여유롭게 도망칠 수 있


겠지.

하지만, 상대에게 아인즈가 왔다는 정보를 주는건 메리트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러니 아인즈가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를 해제할 리는 없었


다.

얻은 정보를 분석한 바로는, 이 세계의 사는 자들은 약자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가 없는 곳에 아인즈에 필적하는 강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있을거라 상정하고, 상대에게 이쪽의 정보를 주지 않도록 행동해야겠지.

이쪽의 패를 한 장 들키면, 대처법이 생겨나 패배에 한 발 가까워질 테니까.

'.....그럼, 이번엔 엘프의 왕도를 볼까'

ㅡ심야.

숲속은 쏟아지는 달빛도 별로 없어, 어둠의 세계다.


하지만 아인즈에겐 아무 문제도 없다.

<비행(Fly)>을 써서 하늘에서 내려온 아인즈는, 그대로 잔디를 밟지 않을 아슬아


슬한 고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목적지로 향했다.

법국의 군세가 얼마나 멀리있는지는 알았다.

다음은 엘프의 왕도에서 정보수집이다.

이윽고 전방이 서서히 열렸다.

엘프의 집은 엄청나게 두껍고 땅딸막한 나무들ㅡ통칭 엘프트리ㅡ로 만들어져, 그


것들이 모인 왕도는 거대한 숲처럼 보인다.

구조 자체는 어느 마을도 같았지만, 주민의 수가 적은 마을과 많은 엘프의 왕도는


그 차이가 현저했다.

왕도는 밀집해있는 탓인지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아인즈는 그걸 보고 현실의 회색세계를 떠올리고 기피감을 느꼈다.

엘프 왕도의 주변엔 엘프트리말고 다른 나무는 전혀 없었고, 잔디가 자란 초원이


있을 뿐이었다.

이건 자연현상이 아니라, 방위적 관점으로 엘프가 작위적으로 만든거다.

접근해오는 존재를 발견하기 쉽도록, 아니면 적이 은밀하게 접근하는걸 피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이건 한편으론 엘프트리의 생존전략일지도 모르겠네'

처음엔 엘프가 엘프트리를 마법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얘기를 딱히 의심쩍게 생각


지 않았지만,

어쩌면 엘프트리가 종을 번영시키기 위해 엘프를 이용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

엘프트리가 실은 몬스터라는 경우도 있으니, 정신을 가진 생물인지 확인해봐야겠


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마레에게 맡기면 될까 생각하던 아인즈는 전방을


노려봤다.

눈 앞에 펼쳐진 숨을 곳이라곤 없는 초원을 경계하기 위해, 틀림없이 감시병이 있


을거다.

마법을 쓰지 않고 돌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우라 수준의 고위 레인저의 기술이면 가능하다.

고위 레인저는 몸을 숨길곳이 없어도 잠복하는 능력이 있어, 레벨차이가 압도적


이면 시선이 마주쳐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레인저의 기술을 단련한 잠복은, 상대가 이쪽을 돌맹이라고 인식시키는것과 마찬


가지라고 아우라가 말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정말 그럴까 하면 약간 의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우라를 잠복시켰지만,

아인즈는 평범하게 원래 아우라ㅡ매직 아이템이나 특수능력에 의한 부스트를 쓰


지 않은ㅡ를 어떻게든 찾아내고 있다.

이건 아우라가 레인저와 비스트 테이머 양쪽의 레벨을 올렸기에 순수한 레인저의


기술이 뒤떨어진 상태고,

또 아인즈 자신의 레벨이 높아서 기본 능력치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우라의 말이 그다지 실감되지 않는게 아쉽다.

그건 그렇다치고, 아인즈의 능력으론 엘프의 왕도에 은밀히 접근하는건 불가능하


다.

그래서 <완전불가지화>를 쓰고, 거기에 환술을 써서 엘프로 변했다.

환술까지 쓴건 하늘을 날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일반적인 강함을 생각하면 <완전불가지화>를 간파하는 건 어렵겠지만
만약을 위해서다.

이 세계의 모든 기술이나 특수능력 같은걸 이해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인즈의 지식은 결국 위그드라실 시절 얘기고, 그조차 완벽하지는 않으니까.

아인즈가 불가시 상태를 간파하는 능력을 항상 발동하고 있듯이, 상대도 그런자


가 있을거라 생각해야 한다.

매직 아이템인 기리기리 망토를 입고 있는것도 그 일환이다.

이렇게 자신이 발견될 확률을 낮추면서, 들켰을 때 얼버무릴 수단을 준비하여 주


의에 주의를 기울인다.

'자, 가볼까'

초원과 숲의 나무들의 경계선ㅡ더 가면 숨을 나무가 없다ㅡ까지 접근한 아인즈는


왕도쪽을 살폈다.

왕도를 구성하는 나무들의 가장자리에 걸린 다리를 경계하는 엘프의 모습이 보였


다.

저게 도시벽에 해당하는 곳이고, 다리가 통로다.

<완전불가지화>로 인해 사라진 아인즈를 발견할 기술이 없는건지

애초에 그렇게까지 주의하고 있지 않은건지 모르겠지만 병사들이 알아챈 것 같지


는 않다.

뭐, 이렇게 여러 대책을 썼는데, 바로 발견되면 끝장이다.

아인즈는 엘프 초계병이 보지 못하도록,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마법을 발동하려다 망설였다.

한번 더 망설였다.
여기 오기전에 결심하긴 했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다른 수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스크롤로 마법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 등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망설이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는ㅡ여유롭다는


게 망설임의 원인이었다.

잠시 후 아인즈는 생각을 비우는데 성공해, 스크롤을 소비해서 마법을 발동했다.

다른 생각을 하면 계속 망설일 것 같다.

발동할 마법은 <신의 눈(God Eye)>.

제9위계 마법으로, 불가시 상태의 실체가 없는 마법의 눈을 날린다.

이 마법을 쓰는건 리자드맨 때 이후 처음일지 모른다.

<원격시(Remote Viewing)>와 다른 점은 더 멀리 보낼 수 있고, 보통 벽이라면


통과할 수 있는 점이다.

이 마법은 잠입정찰의 수단 중에서는 상당히 우수하지만,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불가시화이기 때문에 제2위계 수준의 간파마법으로 간단히 꿰뚫어볼


수 있다.

게다가 실체가 없다지만 대미지를 받아 파괴되면 그 대미지가 피드백된다는 디메


리트도 있다.

그 밖에도 정보계 마법에 속하기에, 대정보계 마법으로 상대에게 이쪽이 어디 있


는지 특정 당할 가능성도 있고,

공성방벽에 걸려 공격 마법이 이쪽으로 날아올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 눈 자체의 HP는 없으며, 무엇보다 아인즈의 레벨이나 방어력을 참조하


지 않는다는게 치명적이다.
그래도 본인이 직접 가는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기에, 상황에 따라 편리하게 쓴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채ㅡ아인즈가 보기엔 느려터진 속도로ㅡ드디어 도시벽에


도착했다.

엘프 초계병은 3인 1조로, 전원 활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대놓고 접근한


<신의 눈>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놈들에게는 불가시화를 간파하는 힘은 없는 모양인데...... 엘프 중 그런 특별


한 직업을 가진자가 없다고 단언할 순 없지'

못본 척 할 이유도 없을테니 그렇게 생각하는게 좋겠지.

하지만 방심하진 않는다.

미지의 장소에서 하는 첫 정보수집이니.

아인즈가 만들어낸 <신의 눈>은 다리밑에 숨어가듯 엘프의 왕도에 잠입했다.

아인즈는 왕도에 들어간 <신의 눈>을 되돌려 왕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방금전 3명의 초계병 앞으로 움직였다.

서로 얘기하는 그들이 신의 눈을 눈치챈 기색은 없었다.

'후우 다행이다......'

아인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자릭 지하대분묘도 그렇지만, 길드홈에 있는 함정엔 침입한 시점에 일부 마법


효과를 막거나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들면 <불가시화(Invisibility)>를 없애거나, 신성속성 마법효과를 저하시키는


등.

엘프의 왕도에도 그런 효과가 없는지 확인한 것이다.


왕도의 주요시설은 다시금 확인해야겠지만, 일반적인 시설에 잠입할 뿐이라면 문
제는 없어보인다.

<완전불가지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다지 시간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이후의 마력 소비량을 생각하면, 여유는 없다봐야 한다.

아인즈는 <신의 눈>을 점점 왕도 안으로 침입시켰다.

목적은, 상품이 놓인 가게라 생각되는 나무에 사는 엘프다.

보통 마을이라 하면 그런 가게들은 모여있을테고, 평범한 나무보다 커다란 나무


를 쓰고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인즈는 속으로 외쳤다.

'ㅡ안보이잖아!'

수천 그루의 나무로 구성된 마을은, 인간의 가치관으로 보면 단순히 숲이라 불린


다.

심야여서 인지 간판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나무에 명찰이 달린것도 없었다.

표지판 하나 없는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가 방금 본 나무가 아니라 단언할 수 없었다.

인간의 마을이라면 대로변이나 중심가가 있어, 그 좌우에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혹은 광장 주변에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그런 상식이 엘프의 왕도에서는 통


하지 않았다.

우선 대로변이나 광장같은게ㅡ얼핏 본 느낌으론ㅡ 없다.

그래서 지금껏 쌓아온 경험이 아니라, 감으로 찾아야 했다.

여행자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마을이다.


이래선 가게를 찾는건 거의ㅡ아니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늘 모든걸 끝낼 필요는 없다.

일을 서두를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 안전히 진행해야한다.

그래도 아인즈는 그 뒤에 더 찾아보았다.

모처럼 <신의 눈>을 썼으니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더 찾아본 아인즈는 한숨을 쉬었다.

'ㅡ이거 주민들이 자고 있을 땐 몇 번을 똑같이 해도 소용없겠는데'

무턱대고 해선 절대 안되겠다.

위험하지만, 밝을 때 조사하러 와야겠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가는 거로 알아볼 수 있을 터.

안 그러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지 상상이 안 된다.

아인즈는 적당한 집에 <신의 눈>을 보냈다.

엘프들이 나무에 걸린 다리 건너 살고 있어서, 엘프트리의 출입구는ㅡ인간의 집


으로 말하면ㅡ2층 혹은 3층에 있다.

보낼때는 1층부터다.

도둑이 옷장을 뒤지는 것처럼.

2층부터 하면 동선이 나쁘다.

벽을 통과한 아인즈ㅡ<신의 눈>이 그대로 올라가자 3층에서 엘프들을 발견했다.

이 집은 가족이 함께 사는 모양으로, 아버지, 어머니, 남자애 두 명이 자고 있다.

'얘기는 들었지만......무슨 야만인인가......'


침실인 것 같다만, 대량의 풀잎과 함께 넷이 기분좋게 자고 있었다.

인간의 마을에서도 건초를 매트리스 대신 쓰는걸 생각하면, 비슷한걸지도 모른


다.

나자릭에 있는 엘프들의 얘기로는, 이게 일반적인 엘프의 침실이라 한다.

이만한 풀잎들을 모으는 건 힘들겠지만, 한 번 모아두면 오래 쓸 수 있어 문제 없


다고 했다.

벌레는 꼬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법을 써서 괜찮다고 했다.

아이ㅡ남자 애가 둘, 기분좋은 듯 쿨쿨 숨소리를 내고 있다.

'잠이라...... 어떤 감각이었지'

이런 몸이 된지 꽤 시간이 흘렀다.

3대욕구가 거의 없어지고 고통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된 이 몸이 되었기에 여기


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잃어버린게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편안하게 자는 얼굴을 보면, 그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그런 기분이 들 때는,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눈앞에 뒀을 때지만.

아인즈는 행복해보이는 가족을 보면서, <신의 눈>을 해제했다.

'이런이런......'

어깨를 으쓱한 아인즈가 <상위전이>를 발동시키자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어,

덩굴이 얽혀 만들어진 커다란 베일같은 것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주위와 잘 동화된 그것은 분명 숲 속에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자


세히 살펴보면 작은 오두막을 감싸 숨기고 있는게 보였다.
이것이 매직 아이템ㅡ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사용해 만든 아인즈 일행이 며칠 사
용한 거점이다.

그린 시크릿 하우스 옆에 앉아있던 펜릴이 천천히 일어나 코를 킁킁거리며 아인


즈 쪽을 바라ㅡ아니 노려본다.

하지만 시선이 약간 틀어졌다.

그 때의 아우라처럼 아무리 펜릴이어도 <완전불가지화>로 보호받는 존재를 완벽


히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아니, <완전불가지화>를 발동했음에도 아인즈가 왔다는걸 감지했다고 칭찬해야


될까.

아인즈는 <완전불가지화>를 해제했다.

아인즈를 본 펜릴이 황급히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말은 못 하지만 펜릴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다.

고개를 숙인 건 어쩌다가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아인즈에게 사죄하는 의미가 담


겨있다.

허나, 아인즈는 펜릴이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펜릴이 보기엔, 미지의 누군가가 갑자기 출현한 것이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경계하는건 당연하고 반대로 방금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문제겠지.

이번에 한조대신 경호원으로 데리고 온건 이 펜릴 뿐이다.

밖에 나갈땐 고레벨 서번트를 여럿 데리고 가라고 했던 아인즈였지만, 이유가 있


어 스스로 규칙을 깼다.

그건 둘에게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계획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외


부에 정보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수호자를 혼자 보낸적은 샤르티아 세뇌 사건 이후 없었지만 그 결과.

적이 나타날 기색이 전혀 없다.

낚은건 아인즈ㅡ판도라즈 액터지만ㅡ가 혼자였을 때, 리쿠 아가네이아라는 백금


색 풀 플레이트를 입은 남자뿐,

그 밖에ㅡ샤르티아를 세뇌한 존재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다.

한조를 주변에 배치하지 않았던 그때 리쿠가 낚였으니, 어쩌면 적은 한조 같은게


주변에 있다는걸 어떤 수단으로 감지하고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세계급 아이템의 힘으로.

어쩌면 탤런트라 불리는 이 세계 고유의 힘으로.

그래서 위험할지 모르지만 한조를 데려오지 않는 실험에 나선 것이다.

일단, 두 번째 이유를 알베도에게 말하긴 했지만, 딴지 걸데가 많다는건 아인즈도


알고 있다.

그녀는 평소처럼 웃으면서 납득해준 것 같았지만, 실제로 납득했는지는 모르겠


다.

어쩌면 돌아가서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

"ㅡ수고했다"

약간 마음이 무거워진 아인즈는 그렇게만 말하고,

그린 시크릿 하우스의 문ㅡ모르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된ㅡ을 가볍게 밀


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 매직 아이템에는 열쇠라는게 없ㅡ일곱문의 분쇄자(Epigonoi)같은


특수한 매직 아이템으로 강제적으로 열수는 있다ㅡ어서,

잠겨있을땐 안에서 누가 열어줘야 한다.

아인즈는 노커를 두드렸다.

그린 시크릿 하우스는 내부에서 문을 반투명하게 바깥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어, 어, 서... 오세요..."

힘차게 말한건 아우라.

늦게 말한게 마레고, 눈이 완전히 가물가물했다.

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마레는 아예 나이트캡마저 쓰고 있었다.

시간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둘다 이런 시간까지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하구나"

아인즈는 들어가면서 말했다.

안에는 따뜻한 빛이 켜져 있었고, 외관보다 훨씬 넓었다.

우선 들어가면 거실.

거기서 부엌이 보였다.

개인실로 통하는 문이 4개.

"아뇨, 늦는다고 하셨으니, 더 늦으실거라 생각했어요"


"그럴거라 생각했다만......여기 서서 얘기하는건 좀 그러니 저기서 얘기하자꾸나"

아우라도 이제 자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려 했는데,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


지만 정보는 공유해둬야겠지. 가능한 빨리.

아인즈가 자신의 기억력에 그리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인즈의 사정으로 둘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에 약간 사로잡히면서, 경험한걸 들


려주려고 둘을 거실로 권했다.

의자에 앉은 아우라는 들을 자세가 제대로 됐지만, 마레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자세로 입은 반쯤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다.

숨소리를 내던 아까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이 한층 강해졌다.

'어쩌면 난 본인이 못 잔다고, 수면이 필요한 자들을 배려해주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안좋은데......'

"마레는 재워도 되지 않을까? 아우라가 내일이라도 얘기해주면 되겠지"

"정말......"

아우라가 머리를 퍽하고 때렸다.

"일어나. 아인즈님 앞에서 실례잖아"

"어, 어서오세요"

마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건 이미 했다고 딴죽을 걸진 않는다.

그 모습에 아우라는 "얘는 진짜"라며 상당히 화난 것 같다.

"억지로 깨어 있어도 좋을 건 없다. 내일에 영향을 미칠 일은 가능한 피해야ㅡ"


문득, 위그드라실을 하던 시절 자신을 떠올리고, 아인즈는 말이 막혔다.

물론, 그래도 회사일에 영향을 준 적은 없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게다가 자신이 재밌어서 무리하는것과, 타인의 사정에 휘둘리는건 다르겠지.

아인즈ㅡ스즈키 사토루도 상사의 사정으로 귀가가 늦어졌을때는 푸념했었다.

애초에 애들과 어른을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렇지만 100레벨 NPC로써 경이적인 성능의 육체를 가진 아이(마레)와,

단순한 일반인인 어른(스즈키 사토루)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도 잘못된 거


같은데.

졸려서 반쯤 뜬 눈으로, 마치 노려보는 듯한 마레를 둘이서 바라보았다.

마레의 머리가 휘청거리고 당황한 듯 눈을 뜨면서 머리위치를 원래대로 한다.

재워야겠다.

"ㅡ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하자꾸나. 마레는 내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재우자


꾸나.

억지로 깨어 있어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테고, 좋은 것 하나 없다. 아까 말했듯


이,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내일 아우라가 전해주지 않겠느냐?"

아인즈의 명령에는 따르겠지만, 마레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건 수호자로써


늘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우라가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은 한 순간 뿐.

곧 마음속으로 납득했는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마레는 바로 침실로 데려갈게요. ......설 수 있어?"

"으, 으응?"

아우라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한다. 무리같다.

"ㅡ흠. 내가 옮기마"

아우라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아인즈는 그걸 무시하며 일어서서 마레를 안았다.

잠옷으로 갈아입어, 최소한의 무장만 해서인지, 마레는 굉장히 가벼웠다.

아니, 보통 아이의 무게는 이런거겠지.

'무장을 벗어두지 않았다면 꽤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네. 뭐, 못들진 않았겠지만.


..... 그거, 진짜 무거우니까 말야......

어쩌면 수호자가 드는 무기중에 제일 무거운거 아닐까?'

양손이ㅡ한 손으로도 들 수는 있지만ㅡ가득차있기에, 아우라에게 먼저가서 문을


열어두라고 시켰다.

방에 놓여진 침대에 마레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옮기는 도중에 이미 자고 있었는지, 이미 눈을 감고 숨소리를 내고 있다.

아인즈는 조용히ㅡ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방을 나왔다.

역시 레인저인지 아우라는 아인즈 이상으로 소리 없이 나왔다.

둘은 거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아우라가 바로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아인즈님이 일하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마레를 대신해 사죄드립니다.

화내시는 건 당연하고 수호자의 업무가 불안하다 느끼시겠지만, 야간 업무 때는


수면을 없애는 장비를 착용하여 이런 실태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된 거냐면, 수면을 없애는 장비를 착용하면 전투용으로 장비


하고 있는 아이템을 벗어야 해서 전투력이 다소 저하됩니다.

그래서 아인즈 님의 경호라는 이번 임무를 고려해 수면을 없애는 아이템을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해서......"

아우라가 재빨리 설명했다.

평소 아우라 답지 않은 말투와 태도인건, 그만큼 속으로 초조해하고 있다는 증거


겠지.

"아니, 아니, 신경쓰지마라. 여기 온것도 말한대로 휴가다. 먼저 자고 있어도 나쁠


건 없다. 그보다 아우라는 눈이 또렷하구나. 졸리지 않나?"

"아, 아니오, 저는 저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아인즈 님에게 보이는건ㅡ"

"ㅡ괜찮다 괜찮아. 딱히 화나지 않았으니. 그보다 평소와는 다른 마레의 모습을


보게 되서, 나는 꽤 기쁘단다?

아무래도 너희는 내 앞에선 정중해지니 말이다. 평소의ㅡ다른 자들도 어떨지 상


당히 신경쓰이는구나. ㅡ코큐토스는 어떠냐?"

"......코큐토스는 별로 변함이 없어요"

평소 아우라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냐. 그럼 이번에 몰래 <완전불가지화>를 써서 평소에ㅡ혼자 있을 때를 보러


가볼까?"

아인즈가 씨익 웃어ㅡ표정은 움직이지 않지만, 목소리로 알아 들었겠지ㅡ보이자


아우라가 심술쟁이같이 웃었다.

"자, 그래서 아우라는 정말 졸리지 않는거냐?"

"저는 평소에도 이 시간에 깨어 있기도해서, 별로 안졸려요"


아우라의 얘길 듣자 하니 야행성 마수들과 놀아주곤 해서 자주 밤을 샌다고 한다.

이 놀아준다는 것도 비스트 테이머에겐 중요해서, 놀아주지 않으면 마수에게 스


트레스가 쌓여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수면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밤을 새웠을 땐 점심까지 잔다고 한다.

즉, 일을 늦게 시작할 뿐이다.

참고로 쌍둥이 중 누군가가 나자릭 바깥에 나가 있을 땐, 아까 말한 아이템을 써


서 잠들지 않고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음~, 이거 괜찮은건가? 책임자가 대기하고 있는건 당연하지만, 수면이 필요한


종족은 제대로 자는게 좋은거 아닐까?

특히 아이의 성장에 수면은 반드시 필요할테니. 알베도와 상담해볼까.....자, 그


럼!'

아인즈는 한 호흡 기다렸다가, 처음 대수해에서 본 법국의 군세가 어디있는지 전


했다.

하지만 그게 엘프의 왕도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병력이 동원


된건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법국과 싸우는게 이번 목적이 아니기에, 침공중이란걸 알았으니 충분하


다.

그리고 더 중요한ㅡ아까 엘프의 왕도를 관찰하러 갔을 때를 말해주었다.

숨김없이 전부 말했다.

숨겨봤자 소용없고, 얼버무릴 필요도 없다.

무리였다는건 솔직히 무리라고 말할 뿐이다.

게다가 아우라는 그 둘과는 다르다.

솔직히 받아들이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해줄지도 모른다.


"그랬나요......"

설명을 들은 아우라가 묵묵히 끄덕였다.

"그러면, 아인즈 님이 말씀하신대로 오전에 조사하는게 좋겠네요"

"그래. 나는 그럴 셈이다만, 그 사이에 너희들은 어떡하겠나"

"그러네요...... 저도......잠입하지 않는게 좋겠죠?"

"그렇구나. 아우라가 발견될 간으성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만, 아


직 모르는 것 뿐이다.

정체가 들킬지도 모르는건 지금은 안하는게 좋겠지"

"그럼, 마레가 뭘할지는 내일 얘기해봐야겠지만, 저는 아인즈 님을 도와드리려고


해요.

그 도시의 주변을 조사해서, 엘프들의 발자국을 수색하는건 어떨까요?"

과연.

아인즈는 끄덕였다.

왕도에 뭔가를 옮기고 있다면, 비록 얼마 안되는 흔적이라도 남아있을터.

흔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건 길이라 부를 수 있겠지.

그걸 발견할 수 있다면ㅡ그 앞에는 빈번히 가야 하는 장소, 마을 같은 다른 부락


이 있을거라 추측할 수 있다.

엘프들이 숲을 이동할 수 있는 뭔가를 쓰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아우라


의 제안은 정말 훌륭하다.

아인즈가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훌륭한 제안이구나. 이 주변을 돌아보고 오는데에......아우라라면 하루도 안걸리


겠지.

마레와 협력해서 발자국을 조사해다오.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내일ㅡ시간적으로는 오늘이다만, 낮에 한 번 더 정보수집을 다녀오마"

"그럼, 전 오전에는 눈에 띌지도 모르니 밤에 할게요"

"음, 부탁한다. 자, 이제 우리도 자도록 하자. 잘자거라, 아우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인즈 님"

아인즈가 일어나자 아우라도 일어났다.

자신의 방 앞에서 아우라와 헤어져, 안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래도 언데드인 아인즈에게 수면은 필요없다.

그러니 아이템 박스에서 책을 꺼냈다.

자주 읽는 비즈니스 책이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라는 타이틀이 적혀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책을 읽어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읽지 않는것보


다는 좋겠지.

아인즈는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첫날 심야에 잠입, 둘째 날 낮에 잠입.

소중한 스크롤을 2장이나 헛되이 잃게 되어 충격받은 아인즈였지만, 3일째 낮에


운 좋게도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가게 같은 나무를 몇 개 발견했고, 대충 지형을 파악했다는 것 정도지만.

남이 보기엔 별 것 아닌 한 걸음이었지만, 아인즈에게는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정신이 억제될 만큼 기뻐했을 정도다.

그래서 이 정보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상당한 시간을 들여 가게까지의 루트를


공들여 기억했다.

아인즈는 여기서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마법의 효과 시간은 아직 남아있다.

<신의 눈(God Eye)>를 이상하게 두껍고 키가 큰 나무인 왕성에 보내, 안을 들여


다보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참았다.

인간사회의 왕은 꼭 강자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유는 두 가지겠지.

하나는 강한 자보다,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를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타 종족의 먹이일 뿐인, 취약하며 수가 많은 종족의 생존전략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거주지가 안전하다는 것.

성왕국과 왕국, 제국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타 종족과 격전 중인 땅에서 사는 종족은,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엘프왕도 강자인 거겠지.

그러니 여기서 쓸데없는 위험은 피해야 한다.

지금껏 이 세계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아왔지만, 아인즈에 필적하는 몬스터 이


외의 강자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리쿠라는 정체불명의 전사를 몰랐다면 엘프왕도 별것 없는 존재라


고 방심했겠지.

하지만 리쿠와 만난 지금, 아인즈의 경계심은 더욱 높아져 있었다.


마법을 해제하고, 아인즈는 <상위전이(Greater Teleportation)>를 발동했다.

거점으로 돌아온 아인즈는, 먼저 돌아온 두 명ㅡ오늘은 마레의 눈이 똘망똘망했


다ㅡ과 정보를 교환했다.

알아낸 건, 두 명도 몇 개의 길ㅡ나무를 써서 자주 이동한 모양으로, 둘째 날은 수


확이 없었다고 한다ㅡ을 발견했다고 한다.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조사하는 건 거리에 따라 필요한 시간이 바뀔 거라 했


다.

아인즈는 낮에 이동하면 엘프가 그 길을 쓸 때 들키지 않겠냐는 불안을 전했다.

그러자 펜릴에 타고 길과 나란히 달리기 때문에, 숲속이라면 그리 간단히 발견되


지 않을 거라고 아우라는 자신 있게 답했다.

아인즈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바로 허가를 내리지는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게 했다.

어쩌면 오늘, 상당히 좋은 정보를 손에 넣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3일째 심야.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를 쓴 아인즈는 다시 엘프의 왕도에 접


근했다.

당연하지만 여태껏 전부 다른 곳에 잠복하여 마법을 썼다.

어쩌면 엘프의 우수한 레인저가, 아인즈의 흔적을 이미 발견했을 가능성도 없다


고는 할 수 없다.

아인즈는 <비행(Fly)>를 써서 지면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행동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복/탐색의 초보인 아인즈가 보기에 그런 것.


공중을 이동하면서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나뭇잎을 이상하게 흩어놓는 등 근소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이동했다고 단언할


자신은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정체 모를 존재가 나타났


다고 주변 마을들이 경계하면 귀찮으니까.

특히 엘프가 법국의 포로가 됐을 때, 법국에 누설되면 성가셔'

정체 모를 존재와 마도국을 한패라 생각할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하지만,

근처에 제3세력이 있다는 걸 지금 법국이 알게 되면 위험해.

그렇게 됐을 때 법국이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하면 무섭다.

예상 밖의 행동에 나선다면 여러 계획이 파탄 난다.

'......일단 돌아가서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에게 상담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면 아우라와 마레의 친구계획이 귀찮아질지도 몰라'

그래서 아인즈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아인즈는 스크롤을 꺼내 이번엔 바로 발동했다.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온다는 전제가 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신의 눈>을 노리던 엘프트리에 잠입시킨 아인즈는 작게 내뱉었다.

"좋아!"

목표인 엘프가 잎사귀에 파묻혀 자고 있었다.

남자다.

기본적으로 엘프라는 종족은 날씬하고, 인간과 비교해 키가 작다.


인간의 8할에서 9할 정도려나.

게다가 체모는 별로 없었고, 수염도 없었다.

청년기가 긴 탓에, 나이를 판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대부분이 젊어 보인다.

그래서 아인즈가 원하는 정보를 이 엘프가 갖고 있다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 엘프를 노리게 된 커다란 이유가 있다.

그건 이곳에, 이 남자 엘프 외에 자고 있는 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일가를 납치하면 뒤처리가 귀찮지만, 한 명이라면 쉽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이 있지만, 그건 나중에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이 장소를 기억한 아인즈는 <상위전이>로 단숨에 노리는 집에 침입했다.

아인즈가 침입했지만 엘프가 일어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소리도 기척도 없는 아인즈를 눈치채는 건 상당한 고레벨도 어려울 테니 당


연한 반응이다.

그리고 아인즈는 제4위계 <전종족 매료(Charm Species)>를 발동했다.

레벨 차이 이전에 수면상태였기에, 마법이 무난히 효과를 발휘했다.

"일어나라"

말을 걸었다.

<완전불가지화>는 아인즈가 타인에게 악의 있는 마법ㅡ더 정확히 게임적으로 말


하면,

저항 판정이 발생하는 마법ㅡ을 건 시점에서 해제되었기에


말을 걸면서 고통을 주지 않도록 살살 엘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적지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ㅡ어어?"

얼빠진 목소리였지만 지금껏 자고 있었으니 할 수 없지.

"저항하지 마라?"

아인즈는 그렇게만 말하고 남자의 손을 잡아, <상위전이>를 발동했다.

이 마법은 타인과 같이 이동할 수 있지만, 동의한 자만 그렇게 되며, 저항하는 자


와는 함께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매료상태는 동의했다고 간주되어 전이할 수 있다.

지배상태여도 똑같이 이동할 수 있겠지만, 더 고위의ㅡ저항하기 어려울 텐데 그


걸 쓰지 않은 건 어떤 점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유괴다.

그야말로 일류 범죄자라 할 수 있겠다.

'좋아, 계획대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기뻐지는 법이다.

아인즈가 해골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자ㅡ

"ㅡ와! 대, 대체, 뭐야? 뭐, 뭐냐고!"

엘프는 대지의 감촉과 시야가 갑자기 바뀐것에 놀라, 펄쩍 뛰듯 일어났다.

완전히 눈이 떠졌는지 자신이 아직 꿈나라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는 문화는 엘프에겐 없는 건가.


아인즈가 시선을 보내자, 어제와 그저께 있었던 펜릴의 모습이 없었다.

아마 엘프가 볼 수 없는 곳에 숨어있겠지.

"너무 큰소리 내지마라"

"아, 아니, 내지마라 해도......"

"내가 전이마법을 썼다. 조용히 해다오. 널 헤칠 자는 아무도 없다"

"ㅡ저, 전이마법?"

눈을 깜빡거리며 엘프가 조용해졌다.

매료가 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 이쪽이다"

반쯤 열린 문을 밀어젖힌 아인즈는 그린 시크릿 하우스의 안으로 엘프를 안내했


다.

아우라와 마레는 자기 방의 작은 틈새로 이쪽을 엿보고 있을 터.

다크엘프인 둘을 보여줘서 입을 가볍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둘을 만나게 하는 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케이스도 예상됐기에 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구해준 엘프 세 명에게 다크엘프는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고, 왕도에선 다크엘프가 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설령 그렇더라도 아인즈가 둘은 적이 아니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여긴 대체...... 설마 신목의 세계인가......"

신목의 세계라는건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신화나 전설에 있는 걸


지도 모른다.
아니, 혹은ㅡ

'위그드라실 플레이어에 관한 정보인가? 들어두고 싶지만......그다지 시간을 들


이고 싶진 않은데. 나중에 해야겠다'

아인즈는 남자를 거실의 소파에 앉혔다.

동시에 메모를 꺼냈다.

거기엔 남자에게 질문할 것들이 조목조목 쓰여 있었다.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실패하면 이 남자를 죽여야 하고 그러면 엘프 왕도에서 갑자기 행방불명자가 나


오기 때문에,

굉장히 낮은 확률이지만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친구인 내게 네가 알고 있는걸 여러모로 알려주게. 최대한 간결하게"

남자가 대답하기 전에 아인즈는 계속했다.

"어떤 마법이나 수단으로 정보를 흘리면 스스로 자살할 가능성이 있나?"

"뭐어? 그럴리 없잖아?"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이지만, 그가 모른다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분명 그때엔 질문 3개로 끝났다만......'

아인즈의 메모에는 그것까지 포함해 시뮬레이션 해놓은 질문이 순서대로 3개 적


혀있었기에, 위에부터 순서대로 질문을 계속했다.

"다크엘프의 마을은 어디 있는지 알고있나?"

"......정확한 장소까지는 모르지만 대충 어디쯤인지는 알아"

왕도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있다고 한다.


자세히 물어봤지만, 삼수(三樹)라 불리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이라는데 이곳 지
형을 잘 모르는 아인즈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 건 얘기를 듣고 있는 아우라에게 기대한다.

"그럼 다음으로ㅡ"

질문을 메모할 때 아우라와 마레가 이건 안 물어보냐고 의아해했던 질문이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중요하긴 하니, 세 번째로 적은 질문을 던져봤다.

"ㅡ법국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걸 알려다오"

"법국......아아, 그 밉살스러운 인간들의 나라! 그놈들, 우리들이 아무것도 안 했


는데 쳐들어왔다구!"

"갑자기 쳐들어온 악랄한 나라로, 엘프들을 몇백 명이나 납치한 악독한 놈들이다"


라며 시작한 법국에 대한 욕설은,

아인즈가 황급히 말릴 때까지 굉장한 기세로 이어졌다.

하지만, 법국이 현재 어디까지 쳐들어왔는지는, 결국 일반인인 그는 모르는 모양


이다.

엘프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저, 예전과 비교해서 순회하는 자들이 예민하기에 상황이 좋지는 않을 거라 일


반 엘프들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걸로 질문 3개가 끝났지만, 남자가 이상해진 기색은 없다.

역시 그게 예외였던 거겠지.

그러니 질문을 계속 던지고 싶었지만, 그다지 시간을 들일 수도 없다.

"다크엘프와 엘프의 관계는 어떠냐? 나쁜가?"


"그렇지는 않은......데?"

약간 뜸 들인 대답의 이유를 아인즈가 묻기 전에, 그가 입을 여는 게 빨랐다.

"나도 그렇지만, 내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다크 엘프를 싫어하거나, 악감정을 가


진 녀석은 없어.

우리에겐 꽤 먼 친척 같은 거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봤을 때 얘기고, 그쪽이 어떻


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전혀 만나질 않으니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마도국에 대해 아는게 있나?"

"뭔데, 그게?"

즉답이었다.

예상했던 답이라 놀라진 않는다.

하지만 이걸로 둘에게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계획이 현재로선 마이너스 요소가 없


다는 걸 알았다.

"묻고 싶은 건 끝이다. 감사한다"

"이런 걸 가지고, 친구잖아?"

남자의 대답에 무심코 조소를 띄었다.

아까 자신이 말했으면서 제멋대로지만, 타인이 자신을 친구라 부르면, 뻔뻔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아인즈에게 친구는 길드 멤버들 뿐이다.

"이제 끝이다"

아인즈가 신호를 보내자, 남자 뒤에 살짝 열린 문에서 마레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


다.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인즈는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엘프의 문화 같은 달리 여러모로 알고 싶은 게 있었다만, 너와 얘기하는


데 너무 시간을ㅡ"

남자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곧 소파에 누웠다.

쿨쿨 숨소리를 내고 있다.

급하게 잠든 이 모습은 마레가 쓴 <샌드맨의 모래(Sandman's Sand)>로 인한


것.

아인즈는 마레와 함께 나온 아우라에게 확인했다.

"......아우라. 이 남자의 설명대로, 다크엘프의 마을까지 갈 수 있겠느냐?"

"아마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근처에 도착하면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지만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인즈는 <기억조작<(Control Amnesia)>을 발동했다.

이게 혼자 사는 남자를 데려온ㅡ고른ㅡ큰 이유였다.

엘프의 나이는 구별하기 힘들어, 성인 같은 엘프를 데려왔다 해도 지식이 풍부


한 어른 엘프라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왕도에서 나가본 적이 없는 대단히 젊은 엘프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있는 엘프를 납치하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거라는 건 확실하지만,

그 후에 어찌할 거냐는 문제가 가족의 사람 수만큼 발생한다.

귀찮아서 처분하자니 일가가 한 번에 행방불명ㅡ저항한 흔적 하나 없다는 이상한


행방불명이 돼버리면,

상당히 귀찮은 소동이 벌어지겠지.


야반도주라 생각해주진 않을거다.

이 남자처럼 <기억조작>을 걸고 싶어도 마력이 버티지 못한다.

그런 이유에서 아인즈는 혼자 살던 이 남자를 골랐다.

아인즈는 그의 기억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자세히, 앞뒤가 맞게끔 기억을 바꾸는 건 대단히 어렵지만, 단숨에ㅡ별 생각 없이


없애버리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게다가 없앨 기억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건 이 때문이었다.

<기억조작>으로 없애려 하지 않았다면 좀 더ㅡ

매료 상태가 풀릴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혹은 풀려도 한 번 더 <전종족매료>를 걸


어서라도 질문을 던졌으리라.

질문을 줄이고, 시간을 짧게 한 덕분에 그가 잠든 순간까지의 기억을 문제 없이


지웠다.

아니, 조금 많이 지워버려, 잠자리에 들어간 순간까지 지워버렸다.

단숨에 지웠기에 생긴 실패지만, 천천히 지우자니 아인즈의 마력이 모자랐을지도


모른다.

지금 남은 마력을 고려하면 여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끝났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와서 돌이킬 수 없으니, 엘프는 다소 의뭉스레 여길지 모르지만, 스스로 앞뒤


를 맞춰주길 기대할 수밖에.

마력은 상당히 소모했지만, 철저히 준비해 실수 없이 진행했기에, 이후 계획에 지


장이 없을 만큼 남았다.
"그럼 다녀오마. 아우라와 마레. 계획대로 도와주겠나?"

"네! 맡겨주세요!"

"아, 네, 네. 열심히할게요"

아인즈를 선두로, 아우라와 마레는 각각 남자의 손발을 잡고 흔들 듯 남자를 옮겼


다.

둘의 완력을 생각하면 혼자서도 들겠지만, 어디에 부딪혀서 대미지 판정이 나면,


마법이 풀려 잠에서 깨버린다.

그럼 또 <기억조작>을 써야 하니 아인즈의 마력이 모자라게 될 우려가 있다.

물론ㅡ그렇게 되면 그런대로 다른 계획을 생각해뒀으니 문제는 없지만'

아인즈는 먼저 혼자 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나와<완전불가지화>를 발동했다.

그리고 <전이문(Gate)>를 썼다.

당연히 게이트 너머는 엘프의 침실.

아인즈는 우선 혼자 게이트를 넘어 남자의 침실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주위를 경계하며 귀를 기울였다.

'......후우. 안심했다'

<전이문>이 나타난걸 경계하거나, 여기서 도망친 자는 없어보인다.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문제, 없어보이네'

아우라처럼 뛰어난 레인저라면 아인즈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죽여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아우라도 항상 그러는 건 아니다.


그 짧은 시간에 남자의 집에 생긴 이변을 눈치채고, 다시 무슨 일이 있을 거라 판
단해 잠복하는 베테랑 레인저가 있을,

거라는 악의에 가득찬 운 나쁜 이벤트가 일어날 리도 없다.

사실상 아무도 없다 봐도 되겠지.

아인즈는 <완전불가지화>를 해제했다.

그리고 게이트를 넘어 얼굴만 내밀고 기다리던 둘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쌍둥이가 남자를 흔들거리며 문을 빠져나왔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계획대로 행동했다.

우선 아우라와 마레가 남자를 잎사귀 침대에 신중하게 내려놨다.

여기서 대미지를 받아 눈을 뜨게 만드는 건 너무 멍청한 실수다.

<샌드맨의 모래>는 <수면(Sleep)>보다 강한 잠기운에 빠지게 한다.

<수면>은 세게 흔들면 잠에서 깨지만, <샌드맨의 모래>는 대미지를 받지 않는 한


깨지 않는다.

이대로 방치해 이 남자를 발견한 자가 대미지를 주어 깨우지 않으면, 남자는 쇠약


사하게 된다.

그건 이렇게까지 소동이 벌어지지 않게끔 주의해 행동해온 아인즈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침대에 남자를 눕히고, 남자를 깨울 준비를 했다.

아인즈는 실내를 살펴, 아까 들어왔을 때 눈여겨본 장식품을 찾았다.

불룩한 배를 가진 두더지인지 개구리인지 모를 기묘한ㅡ아마ㅡ생물의 목조상으


로, 요 며칠 숲에서 생활할때 본 적 없는 겉모습이었다.
어쩌면 엘프의 신화나 전승에 등장하는 공상속 생물일지도 모르겠다.

아인즈는 그 조각상을 들었다.

'역시 나무네. 그런데......생각보다 꽤 무겁네. 나쁘진 않지만......혹시 치명상이


되면......뭐, 그때는 별수 없지'

살인사건으로 조사되어도, 아인즈와의 관계를 의심받을 가능성은 낮겠지.

아인즈가 그걸 든 모습을 본 두 명이, 장식품이 있던 선반 아래까지 엘프를 들고


왔다.

아우라와 마레에게 끄덕이자, 둘은 먼저 <전이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어서 아인즈도 <전이문>앞에 섰다.

그리고 기묘한 목상을 천장에 던졌다.

이게 엘프가 원인 모르게 죽게 되면 곤란한 아인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던져진 조각상을 지켜보지 않고 아인즈는 <전이문>에 뛰어들었고 <전이문>을 바


로 없앴다.

"좋아. 마지막 확인을 하겠다. 둘 다 잠시 기다려다오"

"네! 알겠습니다! 이제 금방이네요! 힘내세요, 아인즈님!"

"그, 저기, 아인즈님이라면 괜찮, 을거라 생각하지만......, 마, 마력이 적어졌을테


니 주의하세요"

둘의 응원을 받고, 아인즈는 다시 <완전불가지화>를 써서 <상위전이>를 발동했


다.

방금까지 있었던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 씨! 아파! 왜 갑자기 떨어지는건데! 애초에, 왜 여기서 잔거야! 술......은 안마


셨는데...... 아오 아퍼......"
엘프가 눈을 뜨고 장식품에 화풀이 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남자를 보며 아인즈는 씨익 웃었다.

'좋아! 완전범죄 성공'

남자는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낌새도 없었다.

ㅡ아니, 자기 위에 떨어진 장식품은 의심쩍어 했지만, 누가 실내에 침입해서 장식


품을 던졌다고는 생각지 않겠지.

"......잠깐만"

남자의 의심스런 목소리에 <상위전이>를 발동하려던 아인즈의 움직임이 멈췄다.

'뭔가 눈치챘나? 우리라고는 모르겠지만 침입자가 있다는걸?

가게를 차리고 있었으니 어떤 감시장치......매직 아이템이라도 있었나? 난 못 찾


았는데......'

"......츤고구아 님이 내게 뭔가 전하려는건 아닐까?"

'츤고구아 님? 위그드라실에 그런 이름의 몬스터는 없었는데......'

"츤고구아님. 츤고구아님. 무슨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바닥에 무릎꿇고 고개를 숙이며, 손에 든 목상을 들어올렸다.

신앙 깊은 자가 숭배하는 모습이었다.

'......단순한 토착신앙인가? 그것보다 이놈은 무슨 혼잣말이 이렇게 많은 거야?

누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들려주는건가? 츤고구아라는 신에게 기도하나?'

방금까지 이용했을 뿐인 남자가 정체모를 인물로 변했다.

한 번더 데려가서 죽여야하나 망설이다 그만 두기로 했다.


아직까진 단순한 신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는 해둬야 겠지.

가능하면 감시를 위해 뭔가 남겨두고 싶었지만, 아인즈도 그러기는 어려웠다.

유효한 마법이 없었기에.

가끔, 마법으로 감시하는 정도다.

아인즈는 혀를ㅡ혀는 없지만ㅡ차고 <상위전이>를 발동해, 그린 시크릿 하우스


앞에 돌아왔다,

<완전불가지화>를 해제한 아인즈가 엄지를 세우자, 기다리던 두 명이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마지막에 불안함이 남았지만, 대응하기 어려우니 쓸데없이 불안


해하지 않도록 말하진 않았다.

"네. 여러분, 여러모로 협력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업무는 이걸로 끝입


니다"

아인즈가 연극조로 말하자, 두 명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웃는 얼굴


로 돌아왔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주무시고, 아침에 피로를 남기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둘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럼 이미 오늘이 됐습니다만, 아침에 일어날 시간을 정하겠습니다. 네~아무때


나 일어나도 좋지만, 점심까지 자는 건 안됩니다.

어디보자. 9시까지 일어나면 아침식사는 제가 나자릭에서 가져오겠습니다"

"네!"

다시 두 명이 소리를 높이며, 아우라가 마레의 옆구리를 가볍게 팔꿈치로 찔렀다.


비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네, 그럼ㅡ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인즈의 인사에 이어 두 명이 말했다.

"그럼 해산!"
다크엘프 마을로 출발했다.

엘프의 얘기대로 지상을 펜리르에 올라타 달렸다.

하늘에서 목적지가 보였다면 단숨에 갈 수 있었겠지만, 아쉽지만 아우라도 발견


하지 못했다.

숲속을 달리자 후텁지근한ㅡ초록내음 가득한 공기가 아인즈의 안면을 스쳤다.

숲 특유의 아주 진한 향이 비강을 자극했다.

아인즈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토브 대삼림의 공기와 다르게 느껴졌다.

이게 아인즈 혼자만의 기분 탓이 아니라면 세계는 비슷해 보여도 크게 다르고, 가


지각색의 변화가 넘치는 곳인 거겠지.

그런 생각을 멀거니 하고 있자, 이 광대한 세계를 돌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을


약간 자극했다.

일반인이 길다운 길이라곤 없는 대수해를 나아가면, 처진 덩굴이나 여기저기 뻗


은 나무가 방해되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건 어렵고, 어느새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겠지.

남자에게 들은 얘기론, 다크 엘프 마을은 1주일 정도 가면 된다고 했다.

숲에 적응한 엘프도, 이 수해를 하루에 15km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겠지.


그럼 거의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소리다.

그 거리를 아인즈 일행은 1시간 남짓으로 답파했다.

주위를 확인하고 오지 않았다면 더 일찍 도착했겠지.

그만큼 펜리르가 우수하다는 뜻이다.

특히 숲 건너기라는 펜리르의 능력이 유용했다.

나무들이나 깊은 늪 등이 마치 펜리르를 피하듯 움직여주어, 거의 일직선으로 올


수 있었다.

아무리 펜리르라도 이 능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ㅡ

"이 근처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인즈 앞에 타고 있던 아우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의 마을은 나무로 구성돼있어서, 숲 속에서 발견하기 상당히 어렵다.

물론, 그렇기에 나무를 써서 마을을 만드는 문명으로 발전했겠지.

주변의 나무를 베어 넘겨둔 엘프의 왕도가 예외다.

그렇다 한들 나름 높은 레인저 능력을 가진 아우라가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


하게 숨기는건 불가능할 터.

오면서 놓쳤을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려우니, 목적지인 마을에 아직 도착하지 않


은 것이리라.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틀린 게 아니라면 아무 문제 없다. 뭣보다 너무 접근하면


또 곤란하다"

아인즈는 쓰고 있던 가면을 만졌다.


"먼저 이쪽이 마을을 발견하고 싶고,

가능하면 주변의 다크엘프에게 발견되지 않는 곳에 잠복해서 상대의 정보를 캐고


싶으니 말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전혀 다른 곳으로 왔다는 건데.

하지만 그런 걱정은 거의 안하고 있다.

분명 이런 수해를, 표지판도 없는 곳을 헤매지 않고 가보라 한들 아인즈는 절대


불가능하다.

엘프에게 들은 바로는, 대충 2500걸음 걸으면 큰 바위가 있고,

거기서 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방향으로 3000걸음 걸어가라고 했다.

아인즈는 이런 걸 설명이라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우라는 달랐다.

아우라 역시 가끔 당황하여 주변을 수색하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다.

'레인저는 다들 이렇게 대단한가, 아니면 아우라가 대단한 걸까......'

드워프 나라로 향했을 땐 그리 실감하지 못했지만 아인즈는 이번 여행을,

레인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마저 내리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에도 이런 밀림은 있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별거 아니었다


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정글이란 게 이렇게 두려울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두근두근한 맛이 있는 것도 사실.

'이런 오지에......뭔가 있을 거라 미지를 원하는 기분을 알겠네...... 월드 서쳐즈


였나......'
탐험가는 그 두근두근함을 추구하는 거겠지.

아인즈가 원하는 진정한 모험자의 모습이다.

'......모든걸 버리고, 이 세계를 탐색하고 다닌다.....라'

다시 그런 생각을 멀거니 하며, 아인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나자릭 지하대분묘의 절대적 지배자, 아인즈 울 고운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을 짓


이다.

하지만ㅡ조금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나자릭을 버리지 말고, 이번처럼 유급휴가를 쓰는거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몇 번씩 하고 있네.

솔직히, 무거운 짐을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다는 기분이 원인이 아니라고 단언


할 순 없단 말이지......

결국, 난 성장하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네.

언데드라 성장할 수 없다던가? 아니면 나라서 성장하지 못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니 한숨밖에 안 나오네...... 하아. 슬픈 생각 해봤자 소용없어.

우선...... 이번엔 아우라와 마레지만, 다음엔 코큐토스와 데미우르고스를 데려오


는건 어떨까?

......그 때 이후 처음인가'

아인즈는 카체 평야의 육지배를 손에 넣었을 때를 떠올렸다.

'좋아!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혹시 또 여행을 간다면


레인저 없이는 상당히 힘들겠지만,
지혜와 번뜩임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건 상당히 재밌을지도 몰라'

이번엔 아우라가 있었기에 순조롭게 왔지만, 그만큼 아인즈가 아무것도 안했다는


게 약간 재미없었다.

물론, 자신이 하겠다고 나설수도 있고, 그러면 아우라는 신경써주며 물러나겠지.

아인즈가 틀렸을 땐 분명 기분나빠하지 않게 배려해주면서 알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ㅡ

'ㅡ그런건 절대 안돼. 안그래도, 마도국의 운영을 방해하고 있는거 아닌가 싶으니


말야!'

그러니 역시 아우라가 없을 때 모두와 왁자지껄 머리를 쓰면서 모험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건 아인즈가 모험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설령, 미지의 장소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더라도 전이로 어디로든 돌아갈


수 있다.

설령, 덤불에서 미지의 마수가 덤벼든다 해도,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을 테고, 최


악이어도 나자릭에 도망칠 수 있겠지.

'모험자를 미지의 세계에 보내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어. 아인잭도 찬성했으니.

하지만 날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되겠네.

이런 곳에서 아우라의 활약을 보니 정말 모험자를 제대로 단련시켜야겠다는 생각


이 드네'

딱히 아인즈는 모험자들이 죽길 바라는 건 아니다.

'토브 대삼림에서 훈련 시키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나자릭이 지배한 토브 대삼림과 여기는, 위험도가 매우 다르리라.

토브 대삼림에서 경험을 쌓아, 여기서 최종시험을 보면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다.


마레와 상담해봐야겠지.

"저, 저기, 아인즈님?"

"응?, 아, 미안하구나, 아우라. 그만 생각에 빠져버렸구나. 무슨일이냐?"

"아, 아뇨, 이제 어떡하시겠어요?"

아인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지에 초록잎이 무성하여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붉게 물들기 시작한 태양이 지상에 그 빛을 내리쬐고 있다는건 잘 알았다.

"흠. 저번처럼 다크엘프 같은 지적생물의 행동 반경에서 벗어난ㅡ

발견하기 어려운 곳을 찾아, 거기에 머물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물론"

아인즈가 대답하자 아우라가 펜리르에서 휙 뛰어내렸다.

하지만, 달려가려는 아우라를 아인즈는 황급히 불러세웠다.

"기다려라, 아우라. 펜리르도 데려가라. 우린 여기서 기다리겠다만 걱정할 필요


없다.

펜리르를 대신할 몬스터를 소환해두마. 알겠니, 마레"

"네, 네, 아인즈님"

황급히 아인즈 뒤ㅡ즉, 펜리르의 머리부터 아우라, 아인즈, 마레의 순서로 타고


있었다ㅡ에서 마레가 답했다.

펜리르의 지각력으로 누군가 접근해와도 금방 감지할테니, 그런 능력이 부족한


아인즈와 마레에겐 상당히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그러면 아우라가 단독행동이 되버린다.

아인즈처럼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면 모를까, 아우라는 그런 능력이 없다.

이런 미지의 땅에 방패도 없이 보내는건 걱정된다.

매직 아이템으로 대신하는 방법도 있지만, 바로 소환할 수 없고, 제한시간 같은


걸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너무 걱정하나 싶지만, 펜리르를 데려가는 게 아우라의 일도 빨리 끝나겠지'

아우라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알겠다고 답해주었다.

아인즈와 마레가 내리자 그대로 펜리르에 타고 달려갔다.

아우라와 펜리르는 숲의 나무들에 가려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 마레. 우린 여기서 최대한 발견되지 않게 숨자꾸나. 우리들이 발견되면 아


우라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테니 말이다"

"네, 네. 그, 저기, 그럼, 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쓰실건가요?"

"그래도 좋지만, 그 전에 한가지 해둬야겠지"

아인즈 혼자라면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가 가장 효과적이겠지


만, 그 마법은 타인에게 걸 수 없다.

마레는 쓸 수 없으므로, 다른 수단을 써야겠지.

그게 아까 말한 몬스터 소환이다.

아인즈는 아이템 박스에서 작은 조각상ㅡ매직 아이템을 꺼냈다.

마수 조각상(Statue Of Magical Beast): 명부의 삼두견(Kerberos).

예전에 썼던 동물 조각상(Statue Of Animal):전투마(War Horse)와 같은 제작


자가 만든 매직 아이템이다.

근육의 융기도 자세히 세겨져 약동감 넘치는 훌륭한 조형으로 예술품같다.

아인즈가 사용하자 단 숨에 부풀어 올라,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보인건 물론 케르베로스.

개나 사자처럼 보이는 세 개의 머리로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고, 꼬리의


독사로 물어뜯고

모든 공격에 화염 대미지를 추가하며, 불이나 독에 완전내성을 가졌다.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대형 고위 마수다.

<제10위계 괴물소환(Summon Monster 10th)>으로 소환할 수 있는 몬스터라고


하면 그 강함을 이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인즈 수준의 플레이어라면 별 고생하지 않을 몬스터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소환 몬스터의 역할은, 적의 약점을 찌르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행동 수를 늘리거


나 방패 역할을 하는 등,

다른 플레이어를 혼자 쓰러뜨리지는 못한다.

분명 특수기술로 케르베로스를 마구 강화하면 더 싸울 수 있겠지.

예를들면 아인즈가 소환하는 언데드는 약간, 한 단계 강해진다.

그래도 같은 레벨대의 전투직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떨어지는 전투력이라,

어지간히 상성이 나쁘거나 불합리한 빌드가 아닌 이상, 1대1에서 플레이어가 지


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인즈가 백안시체(Eyeball Corpse)같은게 아니라, 케르베로스를 고른건


우선 첫째로 짐승계 몬스터라면 감지능력이 뛰어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시각보다 청각이나 후각이 뛰어나야 수해의 탐지역을 더 잘하


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르베로스는 레벨은 펜리르보다 낮지만, 뭐니뭐니해도 머리가 세 개나 있다.

후각은 3배일 것이다ㅡ아마.

"우와아"

마레가 처음 본 마수에 놀란 듯 소리냈다.

결코 강해보여서 그런 게 아닐 터.

실제로 마레가 케르베로스와 싸우면, 케르베로스에게 승산은 없다.

아마 완력만 가지고 쓰러뜨리겠지.

"자, 케르베로스여.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가 접근해오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에


게 알려다오"

케르베로스의 머리들이 각각 그르릉 댔다.

의욕과 자신감에 넘치는 으르렁소리다.

아인즈는 "맡겨주십시오" 라는 기색에 기뻐하며, 마레에게 자랑스러운 표정ㅡ아


마, 마레는 모르겠지만ㅡ을 보였다.

"그래서, 몇백m 정도 냄새를 구분할 수 있나?"

케르베로스들ㅡ머릿수대로 세야겠지ㅡ의 움직임이 멈췄다.

"왜그러나?"

"위험해" "뭐?" "잠깐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몇백m요?" 같은 불안함이 느껴졌다.


아인즈가 그렇게 느꼈을 뿐으로, 실제론 전혀 다를 가능성도 충분하다.

"ㅡ그래. 머리가 세 개나 있으니 펜리르보다 뛰어나겠지?"

케르베로스가 끼잉 귀엽게 울더니, 배를 발라당 깠다.

아마 강아지가 이랬다면 귀엽다고 느끼고, 아인즈도 무방비한 배를 쓰다듬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케르베로스.

확실하게 말해서 귀엽지 않다.

몸이 크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얼굴이 무섭다.

아인즈가 케르베로스를 보고있자, 눈치를 써줬는지 마레가 케르베로스의 배를 쓰


다듬었다.

"......응? 뭐하는거냐?"

아인즈의 질문에, 배를 쓰다듬던 마레를 주의하며, 천천히 일어난 케르베로스는


결심한 표정으로 짖었다.

"열심히 하겠슴다" "하겠슴다" "무리임다" 3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아인즈가 주목한 점은 부정적 감정이 3분의 1이라는 것.

"......무리라면 무리라 해도 괜찮다. 억지로 시켜서 실패하는게 더 안좋다.

......주변의 냄새를 맡아서 모르는 자가 왔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겠지?"

아인즈도 스스로 말해놓고 뭐하지만, 아무래도 몇백m는 무리 아닐까 싶었다.

"에헤헤......그 정도는 할수 있슴다" "가능함다" "할 수 있슴다" 라는 기색에 아인


즈는 끄덕였다.

"그럼, 해라"
케르베로스가 울부짖었다.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런 명령들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정적(Silence)>같은 마법을 써도, 소환 몬스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소환자와 피소환자의 연결을 방해하고 싶다면, 대 소환사에 특화된 대단히 마이


너한 클래스를 구성해야 한다.

말로 명령한 건 케르베로스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면 뭐하고 있는지 마레가


모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엔 역시 아까 마레가 말했듯 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만들어, 그 안에 숨


자꾸나.

우리가 발견되지 않는 게 제일이다.

"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마레는 기뻐보였다.

실제로 마레의 제안은 틀리지 않았다.

아인즈도 마레도 자신이 지나온 흔적을 지우는 은폐기술은 없다.

그러니 부주의하게 돌아다니면, 야외활동 전문가가 한 눈에 어디있는지 알 수 있


을 만한 흔적을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게 현명하다.

<미채(Camouflage)>같은 드루이드나 레인저가 쓰는 마법으로 조용히 있는게


가장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는 그 마법을 쓸 수 있는자가 없다.


마레는 분명 드루이드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특이한 빌드의 특화형 드루이드다.

마법은 대량학살에 치우쳐있어,

일반적인 드루이드의 마법은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으면 몇 가지 강화계를 제외하


면 거의 습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꺼내, 그 안에 숨어ㅡ이동하지 않아 흔적을 남


기지 않도록 잠복장소로 쓰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아우라는 열심히 일하는 중인데, 자신만 편하게 있어도 되는걸까.

아니 물론, 아인즈도 적재적소란 말 정도는 안다.

과거에 귀찮은 일을 떠맡겨졌을 때 들은 말로, 조사해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직장인의 무능이야말로 가장 귀찮다는 뽕실모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이건 올바른 행위다.

하지만, 이게 마도왕으로써 부하인 계층수호자에게 맡긴거라면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ㅡ아인즈는 어떤 이유로 여행을 떠났던가.

유급휴가다.

게다가 제안한 어른이 놀고, 데려온 애들을 일시키다니 죄책감이 커졌다.

아인즈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우라를 도울 순 없었고, 여기서 다른


할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레와 놀아주고 있었다는 변명 정도 밖에 없다.

'애를 돌봐주고 있었다며 자신을 속이......는건 도피인가. 하지만 그 정도밖에.


.....아우라를 지원해줄 수단이 떠오르지 않아.
......그럼 뭘 하고 있어야, 나도 할 일을 하고 있었다며 존경받을......아니 최소한
의 의무는 다한 어른이 되는걸까?'

지금은 들키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스스로 납득해야 되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침울해진 아인즈는 마레에게 말했다.

"......그럼 그린 시크릿 하우스 안에서 아우라가 돌아오길 기다리자꾸나"

"네!"

마레의 명랑한 대답에, 아인즈는 약간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연갑곰(Ankyloursus)라 불리는 마수가 있다.

멀리서 보면 곰처럼 보이지만, 그 차이를 빨리 알아채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길이는 2m에서 3m.

2개씩 총 4개의 앞다리와, 2개의 뒷다리를 가졌다.

앞다리 4개중 2개는 오직 전투에만 쓰여서, 날카로운 60cm를 넘는 발톱이 달려


있었고, 경도는 강철마저 능가했다.

허리에는 두껍고 기다란 꼬리가 나 있었고 끝부분은 해머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몸 대부분을 딱딱한ㅡ비늘에서 발달한ㅡ장갑이 지키고 있다.

거체가 지닌 파워는 굉장했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톱과 뛰어난 완력으로 인한


일격은 인간을 갑옷째 양단하는것도 쉽다.

하지만ㅡ경계할건 그것 뿐이다.

굉장한 특수능력을 가진것도, 강대한 마법을 쓸 수 있는것도 아니다.


안킬로우르수스가 쓸 수 있는 마법은 <방향(Fragrance)> 뿐, 전투에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해에선 상위 포식자에 속하지만, 결코 최강종은 아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건 길이 4m를 넘고 그 신체능력만 가지고

무서운 특수능력을 가진 몬스터도, 강대한 마법을 쓰는 몬스터도, 죽일 수 있는


존재.

모르는 자가 보면 다른 종이라 착각해도 이상할 것 없는ㅡ그야말로 로드라 부를


만한 안킬로우르수스였다.

지금껏 걸신들린 듯 먹던 생물의 배에서 머리를 든 그것이,

듣는 자의 마음을 공포로 가득 채울 중저음으로 작게 으르렁거렸다.

입에선 긴 내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숨을 내쉬고, 공기중의 냄새를 맡았다.

얼굴은 피로 범벅됐지만,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두 개 있다는건 감지할 수 있었


다.

서로의 냄새가 섞여있었기에 한 쌍, 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배는 불렀다.

무시해도 되겠지.

하지만ㅡ그건 불쾌감에 천천히 걸어갔다.

이 주변은 자신의 영역이다.

그곳에 들어와, 마음껏 돌아다니는걸 용서할 순 없었다.


두꺼운 뒷다리로 서서, 나무에 발톱으로 흠집을 내고 자신의 몸을 문질렀다.

자신의 영역이라는 걸 명확히 새기고, 그것은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도중에 <방향>을 썼다.

이걸로 자신의 체취나 달라붙은 피냄새를 지웠다.

이렇게 거구인 안킬로우르수스는 동물에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지 않으면 이 숲속에서 동물을 잡는 건 상당히 어렵다.

냄새가 강해졌다.

이쪽을 눈치챈 기색은 없다.

눈치챘다면 다른 움직임을 보였으리라.

예를들면 멈춰서서 소리를 살피거나 일직선으로 도망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두가지 모두 하지 않았다.

아니면ㅡ 두 마리 있으니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걸까.

냄새 근처까지 최대한 가까이 접근했다.

아직 나무에 가려 상대를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사냥감을 죽일 땐 항상 그랬다.

이쪽이 볼 수 있다는 건 저쪽에서도 보인다는 뜻.

서로가 보일 때까진 절대 서두르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냄새를 분간하며 은밀하


게 접근해,

단숨에ㅡ그 순발력으로 거리를 좁히는 게 그것의 사냥법이다.


가까이까지 도착했다.

냄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ㅡ그것은 평소 하던 사냥처럼, 단숨에 달려나갔다.

커다란 몸뚱어리가 나무들 사이를 바람처럼 질주했다.

숲 건너기 같은 편리한 능력은 없어서 이 주변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때

자신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방해되는 나무들은 전부 쓰러뜨려두었다.

물론, 나무가 있어봤자 돌진이 막히지는 않겠지만 상대가 날렵하면 그 틈을 타 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압도적 강자이긴 하나, 사냥을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준비해놓은 것이다.

전방에 냄새의 근원이 있었다.

검고 작은것과, 검고 큰 것.

큰 것 위에 작은 것이 있었다.

한 쌍이 아니라 아마도 다른 생물이다.

신기하진 않았다. 그런 생물도 있다.

서로를 도우며 사는거겠지.

그것 같은 포식자에게서 몸을 지키는 피식자의 지혜.

윗놈이 특수한 힘을 쓰고, 아랫놈이 달려서 도망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보기에, 어느 쪽도 단순한 먹이다.


그것이 웃었다.

이 거리라면 이미 놓치지 않는다.

작은 것은 별로 먹을 데가 없어 보이지만, 아랫놈은 상당히 크다.

지금은 배가 부르니 땅에 묻어 보존해두면 된다.

그런데ㅡ뭔가 이상하다.

이쪽은 세차게 발을 구르며 돌진하고 있다.

아무리 둔한 놈이라도 눈치챘을테고, 그랬다면 어떤 행동을 보일 터.

그런데 어째서, 검은 것은 떨지 않는걸까.

왜, 도망치지 않는걸까.

그것을 만난 대부분의 생물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

예외는 동족 정도밖에 없었다.

아니면 두려워서 멈춰서있는걸까.

그것은 달리면서 생각했다.

공포에 얼어붙은 사냥감의 고기는 별로다.

그것이 좋아하는건, 반쯤 죽여놓고 서서히 죽어갈때ㅡ부드러워 지는 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산채로 내장을 먹힌 후, 사는걸 포기한 고기가 가장 맛있다.

"구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이 일어서서 사냥감 앞에 포효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공포를 주는 것이다.


ㅡ자 도망가라, 아직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너의 고기를 더 맛있게 해다오.

마음속으로 내뱉었다.

이 거리라면 이미 놓칠수가 없었다.

사냥이 성공하리라 확신했기에 여유를 보였다.

"헤~ 처음 보네. 귀여운 곰씨"

작은 것이 놀란 듯 소리냈다.

그것은 생각해보니 이 작은 것과 비슷한 게 나무 위에 있던 걸 최근 본 적이 있었


다.

안킬로우르수스는 나무도 오를 수 있지만, 그것은 몸이 너무 커서 나무를 잘 오르


지 못했다.

그래서 나무 위에 있는 먹이를 잡을 땐 그 나무를 쓰러뜨려 지면에 떨어뜨려 잡아


먹곤 했다.

하지만 배도 불렀고, 멀리 있었기에 귀찮아서 놓아줬다.

하지만, 지금 지상에 있으니 먹지 않을 필요는 없다.

밑에 있던 검은 놈은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다.

커다란 발톱이 달린 앞다리를 휘둘렀다.

도망치지 못하게 우선 밑에놈이다.

키잉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휘두른 앞발이 뜨거워졌다.

그리고ㅡ격통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세가 무너져 뒤로 엉덩이부터 쓰러졌다.


허둥대며 아픔이 느껴진 앞발을 봤다.

있다.

없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 아파 움직일 수 없었다.

"그으으으......"

보니 위에 있던 작은 것이 긴 뱀처럼 구불거리는 걸 손에 들고 있었다.

저걸로 공격당한 건가.

어쩌면 독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거대한 독사에게 물렸을 때와, 이 얼얼한 감각이 비슷했다.

"자아. 가만있어. 가만있어"

작은 것이 손을 휘두르자, 가까이 있던 나무에 팡 큰소리가 났다.

손에 쥔 뱀 같은 물건이 나무를 때렸다.

그 충격으로 나무 껍질이 튀어,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자신도 저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싹함이 전신에 흘렀다.

이놈은 정말 작은걸까.

그것이 보기엔 서서히 서서히, 매우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착하지, 착하지. 무섭지 않아요~, 무섭지 않다구요~"

위에 작은놈이 밑에 있던 큰놈과 떨어지며 말했다.


지면에 내려와 양쪽 앞발을 벌리며 다가왔다.

역시, 너무 작다.

자신과 얼마나 차이나는 걸까.

자신이 포식자고, 상대는 피식자일 터.

그럼ㅡ왜, 이건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걸까.

다가오는 작은 것에서 큰 것에 눈을 돌렸다.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놈도 이해가 안간다.

그것을 만난 어떤 생물도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정체 모를 공포에,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어릴 적ㅡ어미와 떨어져 둥지를 틀 무렵,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상대에게서 몇 번


이나 도망쳤다.

그래서, 잘 모르는 것에게서 도망치는걸 수치스럽다 여기진 않는다.

"으쌰"

시야가 한바퀴 돌았다.

끌어당기듯 갑작스런 부유감이 느껴지고, 등뒤로 충격을 느꼈다.

왠지, 자신이 반 바퀴 돌아 지면에 넘어졌다.

몸을 일으켜보니, 당겨진 뒷발에 긴 뱀 같은 것이 얽혀있었고, 작은 것이 그 끝을


잡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저 작은 것이 자신을 넘어뜨린 걸까. 저렇


게 작은데ㅡ
"정말~ 도망치면 안된다니까"

작은 것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틀림없이, 널 먹을거라는 울음소리다.

이 작은 것은, 털이 곤두서는 기운을 뿜지 않고도 사냥감을 덮칠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매복형 포식자일지도 모른다.

그때 봤던 나무 위에 있던 놈도 이렇게 강했던 걸까.

"으음 역시 안되나. 아인즈 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도 없고......잡기보다, 죽여서


벗기는게 나으려나~

그래도 아까우려나~ 내 실험에도 쓸 수 있겠는데. 으음......아인즈님도 죽이는건


마지막 수단이라고 하셨으니......"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다.

혹시 움직임이 둔한걸까.

그래서 손에서 뻗은 뱀 같은 걸 써서 사냥감을 포박하는 거겠지.

그것은 발에 얽힌 뱀 같은걸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안 된다.

착 감겨있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자랑하는 발톱을 썼다.

이걸로 잘리지 않는게 있을리 없다.

'구?'

그것은 당황했다.
안 잘린다.

지금껏 모든걸 잘라온 발톱인데 자를 수 없었다.

"그래그래. 저항하지마"

몸이 질질 움직였다.

얽힌 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지면에 자국을 남기며, 점점 끌려갔다.

이젠 틀림없다.

저 작은 것은 엄청난 힘을 지녔다.

"할 수 없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한 번 해보고...... 안되면 죽여야겠다"

발에서 뱀 같은 게 떨어졌다.

도망쳐야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구오오오오!"

계속해서 고통이 느껴졌다.

팔, 다리, 얼굴, 배, 꼬리ㅡ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ㅡ몸을 움츠리니 등.

몸을 비트니 콧등에 고통이 느껴졌다.

아픔을 참으며 도망치려하자, 엄청난 힘으로 몸을 짓눌렀다.

보니 큰 것이 한발로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점점 땅속까지 들어갈 정도의 힘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자신을 월등히 뛰어넘는 힘을 가진 자가 두 마리나 나타나다니.

고통은 계속됐다.

소리가 날때마다 어딘가에 고통이 느껴졌다.

게다가 빗소리처럼 멈추질 않았다.

더는 저항할 기운이 없어졌을즈음, 겨우 소리가 그쳤다.

몸에는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신이 뜨거웠고, 2배, 3배나 부은 느낌 조차 든다.

"자, 얌전해졌네"

이제 잡아먹히겠지.

이제껏 해온 게 자신에게 돌아온 것뿐이다.

"좋아. 그래그래. 누가 위인지 알았어? 그럼 가볼까"

그런데 이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저 작은 것이 자신을 전부 먹을 수 있는걸까.

아니면 밑에 놈과 나눠먹을 생각인걸까.

살기를 포기한 지금 자신은, 틀림없이 맛있으리라.


그린 시크릿 하우스 안에서 아인즈와 마레는 협력해서 작업중이었다.

우선 마법으로 만들어낸 흑요석 같은 테이블 위에 요리를 늘어놨다.

따뜻한 스프도 있지만 이건 보온 가능한 용기에 넣어 먹기 전에 덜어낼 거다.

얼음이 들어간 글라스도 3명분 준비하여 주스를 담은 병을 테이블 가운데에 놨


다.

그린 시크릿 하우스는 문을 닫아놓아도 환기가 완벽하지만, 마법으로 소리도 냄


새도 안에서 새어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문을 열면 그 마법의 효과가 끊어지기에,

두 명이 여기에 틀어박혀 있어도 아우라가 돌아왔을 땐 요리 냄새가 밖에 샐 것이


다.

냄새는 의외로 멀리까지 전해진다.

아우라가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 거점에 돌아오는 실수를 저지를 리는 없


지만,

아우라의 지각범위 바깥까지 날아간 냄새를 다른 누군가가 감지할지도 모른다.

이런 숲속에서 맛있는 요리 냄새가 나면, 지성과 문명을 가진 자라면 의심스레 여


기겠지.

다크엘프는 짐승같은 후각이 없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클래스 구성에 따라서는 그것이 가능해진다.

본인이 못하더라도 마수를 사역해 그 마수와 의사소통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다.

다시말해 지금 아인즈 일행은, 열심히 아우라의 일을 헛되이할 짓을 저지르고 있


다는 뜻이다.

아인즈도 잘 알고 있다.

그럼 왜 둘이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느냐면

결국 아인즈의 텅 빈 해골머리를 풀회전 시켜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아이디어가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일하고 지쳐 돌아온 아우라를 맛있는 밥으로 맞이해준다는 작전.

당연히 아우라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지도 모르는 행위로 격려하다니 본말전도다.

그래서 아인즈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렇다, 다른 자에게 들키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냄새가 주변에 퍼진다는 것, 그로인해 누군가를 유인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다면 냄새가 퍼지지 않게하면 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접시만 내놓고, 아우라가 들어오면 문을 닫고 요리를 접시에


담는 것.

하지만 그러면 임팩트가 부족하다.

그러니, 문을 열면 요리가 짠 나와야 한다.

서프라이즈함이 가장 큰 의미이며 의의다.

그래서 나자릭에 돌아가 요리장에게 최대한 냄새가 약한 요리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마레가 매직 아이템으로 소환한 바람의 정령으로 주변 공기를 하늘 위로


올린다.

냄새와 함께 나무 위까지 보낸 공기는 거기서부터 확산하기 시작한다.

냄새 입자는 공기보다 무겁지만 이 세계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내려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상에 내려왔을 땐 상당히


옅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승기류를 만들면 아주 약간ㅡ아인즈는 신경 쓰이지 않는 정도였지만ㅡ


잎이 흔들리기에,

눈썰미가 좋은 자가 상공에서 보면 위화감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 아인즈가 고고도에서 관찰할 때는 하늘을 날던 건 평범한 새밖에


없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겠지.

"저, 저기, 아인즈님. 이제, 이거 돌려드릴게요"


준비가 끝나가자 마레가 아까 아인즈에게 받은 오브를 건넸다.

가챠엘레라는 이름의 최상급 매직 아이템이다.

투명한 유리 같은 보주 안에 4개의 빛이 빙빙 돌고 있다.

이건 하루에 4번, 정령을 소환해 1시간 사역하게 해준다.

소환되는 정령은 불, 물, 바람, 흙.

불과 흙의 복합정령인 용암, 물과 바람의 복합정령인 눈보라, 흙과 물의 복합정령


인 습지,

불과 물의 복합정령인 뜨거운물, 흙과 바람의 복합정령인 모래먼지, 불과 바람의


복합정령인 화풍 등이다.

이 중 불, 물, 바람, 흙의 정령은 40레벨 초반대 상급정령, 20레벨 중반대의 중급


정령, 한 자릿수대 레벨인 하급정령이 나온다.

이때, 상급정령은 하나.

중급정령은 1~3체 랜덤.

하급정령은 3~6체 랜덤이다.

그에 비해 복합정령은 50레벨 초반의 상급정령, 30레벨 초반의 중급정령,

10레벨 초반의 하급정령이 나오지만 복합정령은 하나씩만 소환된다.

이렇게만 들으면 상당히 좋아보이지만, 아쉽게도 소환되는 정령은 랜덤이며 강한


정령은 약한 정령보다 잘 안뜬다.

상급정령은 거의 유성의 반지(Shooting Star)를 뽑는 수준이다.

상대나 상황에 적합한 걸 소환할 수 없다는 건 전략적으로 너무 낭비다.

하늘을 날고 있는데 흙의 정령 같은 걸 소환했다간,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될 뿐


이다.
실제로, 마레는 바람의 정령을 소환할 때까지 이 아이템을 3번 썼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건 마레에게 주마. 알고 있겠지만 약간 미묘한 아이템이


니 방해되지 않는다면 가져가주는 게 좋겠다.

최상급 정령이나 부정 정령, 신성 정령 같은걸 소환할 수 있다면 조금 다르겠지


만......

게다가 그건 원래 드루이드만 쓸 수 있다는 제한이 있어서 말이다.

마레가 가져가지 않으면 보물전의 장식밖에 안되는 아이템이다"

레벨이 낮을 때는 쓸모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인즈나 마레 정도가 되면 방패로도


못쓰는 아이템이다.

그래서, 원래부터 레벨이 낮은 누군가에게 주려고 아이템 박스에 넣어놨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그래, 괜찮다. 보물전에 썩혀두느니, 마레가 써주는게 100배는 가치가 있겠지"

"가, 감사합니다! 저, 저기......이걸로 소환하면 그 속성 마법을 썼다고, 간주되는


건가요?"

"응?"

"어어, 저도 정령을 소환하는 아이템을 갖고 있는데요, 그건 대응하는 속성, 쓰기


전에 부가속성이 같은 마법을 써야 해요"

다시말해 마레가 아이템으로 불의 정령을 소환했을 경우, 부가속성이 불인 마법,

예를들면ㅡ마레는 쓸 수 없지만ㅡ<화염구(Fire Ball)> 같은걸 그 전에 써야만 한


다는 말이다.

"아마 전제조건은 충족했다고 생각한다만,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시험해보는


게 어떠냐?"
"네, 네! 그럴게요"

예전에 모든 NPC의 능력을 조사했ㅡ완전히 신뢰하기 전 얘기다ㅡ었는데, 그때


장비도 조사했다.

마레가 말한 정령을 소환하는 아이템은, 분명 고레벨 정령을 하나 소환하는데 24


시간에 한 번 뿐이고, 소환시간도 10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템 자체의 가치는 낮다.

그래도 그 장비를 바꾸지 않는 건, 부글부글찻주전자가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NPC가 그렇다는걸 아인즈는 알고 있다.

더 좋은 아이템이 있더라도 NPC들은 자신의 아이템을 바꾸지 않는다.

바꾸는 건 원래 갖고 있던 다른 아이템으로 바꿀 때 뿐.

물론 지금처럼 아인즈가 주면 그 아이템을 쓰지만, 스스로 장비를 골라 바꾸고 싶


다고 요청한 적은 없었다.

유일하게 알베도만이 전투 훈련 때 여러 가지를 빌려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얽매여있다.

대단히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건 자신도ㅡ

"ㅡ저, 저기, 무슨일 있으신가요?"

마레의 걱정스런 표정에, 아인즈는 현실로 돌아왔다.

의미 없는걸 생각해버린 모양이다.

"응? 아, 아니다,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마레라면 그 아이템을 어


떻게 쓰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단다.
역시 미리 정령을 소환해두는 정도 밖에ㅡ"

문 너머에 있는 케르베로스가 움직였다.

아인즈가 문을 열자 케르베로스가 짖으며 머리 세 개를 한 방향으로 향했다.

이건 "누가 왔슴다"라는 뜻이리라.

아인즈는 마레와 얼굴을 마주쳤다.

"냄새는 안날텐데......들켰나?"

"그, 그렇지는 않을거라 생각......하는데요......"

케르베로스는 아우라나 펜리르와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아인즈나 마레에게 밴 아우라 일행의 냄새를 감지하고 있으니, 이런 반응


은 보이지 않을 터.

둘은 케르베로스가 노려보는 곳을 봤다.

나무들에 가려 뭔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마레가 귀 뒤에 손을 대고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아, 그, 확실히 뭔가, 이쪽으로 오고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아우라 일행이 아닌게냐?"

아우라와 펜리르는 떠날 때 거의 소리없이 떠났다.

"죄, 죄송해요. 전 그것까진.....모르겠어요...... 그, 그래도, 말이죠. 아인즈 님 말


씀처럼 누나라면 더 조용히 올 거라 생각해요.

......그, 그저......이 주변을 조사해서 문제 없다는걸 알았으니, 돌아왔다는걸 알


려주려고 일부러 소리내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즉, 모르겠다는 소리다.
"그럼 할 수 없구나. 원래 예정대로 내가 나가마"

아인즈는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를 발동하고 케르베로스에게


따라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말로 명령할 필요할 때와는 다르게, 머릿속으로 내리는 명령은 <완전불가지화>


로 방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케르베로스도 아인즈는 볼 수 없어서, 배치는 중요하다.

자칫하면 케르베로스에게 차일 수도 있다.

'으음. <완전불가지화>는 역시 편해. 이걸 쓸 수 있는 게 나로 변한 판도라즈 액터


뿐이라는게 아쉽네.

뭐, 스크롤을 억지로 쓰면 가능한 자도 있지만, 재료나 제한시간 같은 여러 문제


가 있으니 말이지'

마음속으로 툴툴거리던 아인즈는 케르베로스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아인즈의 귀에도 풀을 밟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곰?'

하지만 단순한 곰과는 다르다.

다리는 전부 6개였고 털은 흠뻑 젖어있어 몸에 착 달라 붙어있었다.

물을 뿜는 어떤 특수능력을 가진 마수인걸까.

아인즈는 그것보다 등에 아우라가 앉아 있는 것에 눈길을 끌렸다.

손에는 채찍을 쥐고 있어, 가끔, 휙 휘두르니 곰 같은 마수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 옆에는 펜리르가 붙어있었다.

'......저런 마수, 아우라의 부하 중엔 없었지? 어떻게 된거지?'


아니, 그런건 물어보면 된다.

아무래도 저쪽은 케르베로스를 눈치챈 모양이고, 방심하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


다.

하지만, 바로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야생 케르베로스인지, 아인즈가 소환한 케


르베로스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겠지.

아인즈의 서번트는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소환된 몬스터는 다


른걸까.

아인즈는 <완전불가지화>를 풀었다.

"아인즈님!"

바로 경계를 푼 아우라가 기뻐하며 소리질렀다.

"야! 가자!"

아우라는 이쪽으로 오는 걸 상당히 싫어하는 곰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동물 학대라 여겨질 법한 비명을 지른 곰이 떨면서 아인즈 앞까지 걸어왔다.

아우라는 아인즈 앞에 도착하자 곰에서 내려왔다.

"어서와라, 아우라"

"다녀왔습니다, 아인즈님! 음, 궁금하실테니 먼저 답할게요. 이 곰 같은 마수는 이


주변의 주인 같아 보여서 지배했어요!

채찍으로 제가 위라는 걸 알려줬어요. 왜 그랬는지 아인즈님께 말하는건 좀 그렇


겠죠?“

좀 그런게 뭔데, 싶었지만 상상은 간다.

"......솔직히, 나는 그 마수가 어느정도 강한지 모르겠다만......다크엘프 같은것


들이 경계할 정도냐?"
"아, 그러네요. 아인즈님처럼 강하면, 이 정도 잔챙이의 강함은 잘 모르시겠죠.

어어, 확실히 그렇게 강하진 않은데요, 그래도 이 주변 영역을 자기구역으로 지배


하기엔 충분히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평범한ㅡ일반적인 다크엘프라면 접근하지 않을거라 생각해요.

실제로, 이 녀석이 무서워서 이 일대에 접근해오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 여길 임시 캠프지로 삼는 건 침입자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네


요"

"그거 훌륭하구나"

아인즈는 그런거였나 싶었다.

분명 죽이기보다 지배하는게 메리트가 크다.

왜냐면 여길 거점으로 삼아 다크엘프의 수색이나 관찰에 시간을 얼마나 써야 할


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자기구역의 주인을 죽여버리면, 주변이 거칠어져, 다크엘프들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우하는 걸 피한다는 의미로도 살려두는게 좋다.

하지만ㅡ

"아우라여. 네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만, 이미 한계치까지 마수를 지배하고


있지 않나?

이 마수를 지배함으로써, 나자릭 내의 마수가 너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일은 없


나?"

대체로, 스스로 골라서 해방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해방될 때는 오래된 순서부터


자유로워 지는게 상식이다.
이건 소환이나 창조 등도 그렇다.

경고문이 뜨거나, 스스로 해방할 자를 고르는 경우가 위그드라실에선 적었다.

"괜찮아요! 비스트 테이머는 지배하에 둔 마수와 이어져있는데, 이거랑은 이어져


있지 않아요,

다시 말해 완전히 지배한 게 아니에요. 단순히 제가 더 강하다고 알려줬을 뿐이에


요.

그러니, 능력을 향상시키는 비스트 테이머의 능력도 못써요"

"그렇구나......그럼 완벽히 안전한것도 아니구나"

야생의 본능에 눈을 떠, 갑자기 덮쳐들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우라가 그 가능성을 간과할 리 없다.

여기 있는 자들은 아주 약간의 상처도 입지 않을거라 판단했겠지.

허나, 만약을 위해 확인해두어야 한다.

몇 레벨 정도일까 생각한 아인즈는, 문득 거대애완동물의 모습을 떠올렸다.

"......덧붙여서 햄스케와 비교하면 누가 강한가?"

아우라가 죄송한 듯 표정을 흐렸다.

'아니, 그렇게 괴로운 표정은 안해도...... 척봐도 곰이 더 강하다고 확실히 알겠구


만'

"솔직히 답해도 될까요?"

"물론. 햄스케의 주인인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없다. 기탄없는 의견을 들려다


오"

"그러면......단순한 육체능력만 보면 예전 햄스케보다 강해요.


그, 그래도! 햄스케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것까지 생각하면 두 마리가 싸웠을
때 누가 이길지 예상하기 어려워요.

마법이 통하면 전황이 순식간에 기울어지니까요.

그리고......지금 햄스케는 전사직을 얻었으니 그 갑옷을 입으면 틀림없이 햄스케


가 이길거라 생각해요"

아인즈의 뇌리에 뒹굴뒹굴 잠만 자는 햄스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째선지 옆에는 데스나이트가 있었다.

확실히 애완동물 역할이니 뒹굴거려도 상관없고, 모몬과 함께 걸어다니는 것 만


으로 일하는 중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사직을 습득하는 등 노력하는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는 옆에서 놀고 있는 놈을 보면 화가 나는법이다.

그저, "그렇게 열심히 햄스케를 옹호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우라" 라는 말은 꾹 삼


켰다.

아우라의 심정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결코 햄스케를 좋게 평가해서가 아니다.

"그렇구나ㅡ"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햄스케도 대단하구나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아인즈는 곤란함에 무시했다.

"ㅡ우연히 여기에 그 정도 마수가 있었다니. 아니면 이 정도 마수가 이 수해엔 널


려있는건가. 자세히 조사해보고 싶구나.

여태 온 경로에선 고레벨 마수를 본적이 없었지 않나?"

"네. 지나쳤을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지 못했어요. 혹시 찾아보면 발견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이런 마수를 찾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알겠습니다, 아인즈님. 하지만 조금 탐색해보고 싶긴 해요. 이런 곰같은 마수는


토브 대삼림에도 없었어요.

그러니 특유의 약초나, 이곳에서만 자라는ㅡ이 환경에 최적화된 동식물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또 뭔가 특별한 현상을 일으키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

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선,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존재한다.

밑에서 위로 흐르는 폭포나, 우박이 내린 날에만 무지개색 빛기둥이 솟는 언덕,

몇십 년에 한 번 사막에 생기는 거대한 회오리, 그런 기묘한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마도국의 영토에 그런 신기한 지역은 아직 없었다.

위그드라실에서 이런 곳들은 특수한 효과가 있거나, 귀한 재료나 몬스터가 발견


되기도 했다.

이 세계도 그런 법칙이 적용될까, 예를 들면 일곱 색 빛기둥이 사라진 뒤, 그 빛이


모여 무지개색 돌이 떨어져 있다는 등.

매직 아이템 작성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으로 유명하다 했다.

그런 특별한 지역을 마도국의 영토로 삼으면, 나자릭의 강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엘프들이 이 대수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구나.

그러니 아우라 말대로 앞으로 여길 탐색하는 목적으로ㅡ그렇구나, 모험자 들을


보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인즈가 만든 언데드로는 신종 약초를 발견하지 못한다.


역시 짐꾼 언데드를 포함한 모험자 팀을 보내야겠지.

"그럼ㅡ돌아가자. 마레가 기다리고 있다"

"네! ......그런데 아인즈님. 일단 확인하고싶은데요, 그 케르베로스는 아인즈님이


소환하신 건가요?"

"그래, 물론, 그렇단다. 펜리르 대신 소환한 몬스터다"

아인즈는 아우라와 함께 걸어갔다.

물론 펜리르, 케르베로스도 같이.

마수곰은 가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아우라가 채찍을 한 번 휘두르자 묵묵히 따라


왔다.

"......그런데 아우라여. 저 마수는 어쩔셈이냐? 완전히 지배하지 않은 점도 고려


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만?"

"네. 그래서 질문이 있는데, 나자릭에 데려가도 될까요?"

"제6계층에서 방목한다는 거냐"

햄스케처럼 대화할 정도의 지성이 있다면 모를까, 지성이 낮은 마수를 방목시킬


순 없다.

이 정도 레벨의 마수라도, 일반 메이드는 죽일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일부 NPC는 제6계층에 보내지 못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제6계층에는 다른 식물계 몬스터 들이 있다.

그 자들의 안전은 어떡하냐는 문제도 있다.

"방치할 생각은 없지만, 비스트 테이머의 특수능력을 쓰지 않고 마수를 지배해보


고 싶다고 생각해왔어요.

그 실험에 써볼까 해서요"


"으음. 그런 거라면 협력해주고 싶다만......"

위그드라실에선 불가능했다.

이 세계의 힘을 얻는 게 성장하지 않는 자신들의 능력을 높여줄 거라 생각하는 아


인즈가 보기에,

아우라의 제안은 수용해야 했지만ㅡ

"꼭 이 마수여야 되는것도 아니겠지? 더 약한......1레벨 정도의 마수부터 시작해


보는건 어떠냐?"

그 정도 마수라면 NPCㅡ일반 메이드가 습격받더라도 장비의 힘으로 어떻게든 되


겠지.

"그래도 괜찮지만요......"

아우라가 납득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인즈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ㅡ"

"ㅡ아니, 그렇지는 않다. 그저, 왜, 그 곰인가 해서 말이다? 실은 곰을 좋아하나?"

갑자기 아우라가 뒤를 돌아봤다.

"......펜. 화낸다"

조금 차가운 어조로 한 마디 하고는 금방 앞을 돌아봤다.

"ㅡ죄송해요, 아인즈님. 펜이 이상한 짓을 하려해서......"

뒤돌아봤지만, 뭘 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우라가 말했으니 그런거겠지.

시선을 돌려, 아우라에게 물었다.


"아아, 뭐, 신경쓰지마라. 그래서 왜 저 곰인거냐?"

"네. 햄스케처럼 말은 못 하지만, 꽤 지성이 높다고 느꼈어요. 펜도 말은 못 하지


만 굉장히 똑똑하잖아요.

말할 수 있다는게 지성의 전부는 아니라고 봐요. 아무래도 어느 정도 머리가 좋아


야 조교하기 편해요"

분명 펜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적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스즈키 사토루는 펫을 길러본적은 없지만, '똑똑한 개' 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수는 다를거라 말하면 그만인 얘기지만.

"그래서 펜은 마레의 말도 들어주고, 역시 조교하기엔 어느 정도 머리가 좋거나


아기 때부터 기르던가 해야되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말이구나. 그럼 개처럼 짧은 시간에 성장하는......

아아, 그러면 마수들의 조교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단 말이구나"

마수를 조교하기위해, 마수를 써서 시험해보는건 당연하다.

그리 생각하니 아우라의 제안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자릭 바깥이 좋겠구나. 그, 지금, 왕도에서 데려온 인간들이 사는곳


이 있었지? 거긴 어떠냐?"

"제가 만든 가짜 나자릭 말이죠. 거긴 모험자들이 쓰고 있어서......

제6계층에 방목하지 않고, 조교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될 때까지 격리해두는 건


어떨까요?"

"......그 정도면 괜찮겠구나"

"네! 감사합니다, 아인즈님.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고개를 숙인 아우라를 보며 아인즈는 웃었다.

"아니다 아냐. 알베도가 전투훈련을 하듯이, 자기개발에 힘쓰는 건 아주 훌륭하


다.

너희들 모든 NPC는 내ㅡ아니, 아인즈 울 고운의 자랑이다"

아우라가 눈을 크게 뜨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 변화에 아인즈는 자신이 무언가 실언했나 싶어 초조해졌다.

그런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ㅡ

'ㅡ난 그럴 생각 없었지만, 아우라가 불쾌하게 느낄 뭔가를 말해버렸나?

찻주전자 씨가 자랑스러워하는게 전부일 뿐, 다른 자들은 아무래도 좋다던가? 아


니면 기뻐하는......건가?

웃는 얼굴은 아닌데...... 으음. 최선을 기대하기보단 최악을 예상해서 행동해야겠


지'

하지만, 잘 모르면서 사과하는건 더 위험하다.

그러니 아인즈에게 가능한 수단은 하나 뿐이다.

"그래그래. 너희들에게 줄 포상으로 식사를 준비해놨단다. 마레와 함께 준비했다.

물론, 우리는 요리를 할줄 모르니 나자릭에서 가져왔을 뿐이다만"

얼버무렸다.

하하하 웃으며 아우라의 눈치를 살폈다.

'응? 화난게 아닌가? 억지 웃음일지도 모르고 비웃는걸지도 모르지만 웃고 있는


데?'

아우라가 눈치 보며 웃는게 아닌 미소를 띄고 있다.


식사를 준비해뒀다니 기뻤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인즈에게 칭찬받아 기쁜걸까.

'아무튼, 좀더 NPC들을 많이 칭찬해줘야지'

아인즈는 굳게 결심했다.

감정은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법.

알거라 생각해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 아내의 불만이 터무니없이 쌓


일 거라고,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하던 길드 멤버가 있었던 것 같다.

'터치미 씨 였던가?'

필사적으로 떠올리던 사이 그린 시크릿 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바깥을 살피던 마레가 문을 열었다.

"누, 누나, 어서와"

"그래. 다녀왔어"

마레 뒤에는 세팅이 끝난 식탁이 보였다.

아우라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훓었고 아인즈도 긴장했다.

"와아, 맛있어보여요"

웃는 아우라를 보며, 아인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ㅡ, 오늘은 카츠동 먹고 싶었는데......" 같은 말을 하면 어쩌나ㅡ그런말은 절대


안할거라 생각하면서도ㅡ약간 불안했다.

다른 사람과 식탁에 앉는 적이 별로 없기에, 자신이 음식취향에 극단적으로 둔감


해진건 아닐까하는 걱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니 요리장도 기뻐할거다. 그리고 펜리르가 먹을 것도 준비
했다만......"

거점 옆에 준비한 그루터기 위에 펜리르가 먹을 거대한 고기덩어리가 놓여있었


다.

축산용으로 쓰는 소로 방금 도축하여 피가 철철 흐르는 신선한 고기다.

목장은 나자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광대한 부지에서 거의 방목하고 있다.

요리장이 말하길 "그 품종은 풀을 주식으로 먹이는 것 보다 곡물을 먹여 키우는게


개인적으로 맛있다"고 한다.

그의 영향력이 큰 건지, 아니면 다른 자들도 똑같이 생각하는건지, 나자릭 안에선


그다지 인기가 없는 고기였다.

원래는 방목할게 아니라, 더 맛있게 키워야 되는거겠지.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다.

에란텔에서ㅡ통칭ㅡ아인지구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쫓아낸 자들 중에는 축산 기


술을 가진 자가 거의 없었고,

있었다 해도 모두 개척촌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그런건 맛에 까다로운 자들 얘기고, 마수의 먹이라면 아무 문제 없다.

"......그 마수곰은 어떡하지?"

"안먹어도 되요. 절 만나기 직전까지 식사하고 있었으니.

게다가 완전히 이쪽을 위라고 이해하고, 따르기 전까지는 밥을 주지 않는 것도 조


교 중 하나라고 하니까요"

"그런건가...... 아니, 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인간도 정신적으로 몰아넣


어야, 이쪽 말을 잘 들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3명은 그린 시크릿 하우스에 들어갔다.

"먹어도 돼"

문이 닫히기 전에 아우라가 말하자, 지금껏 참고 있던 펜리르가 고기를 덥석 물었


다.

마수곰은 멀거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은 확실히 인간 같아서 아우라의 말대로 나름대로 지성


이 있는 것 같았다.

참고로 케르베로스는 식사가 필요 없다.

소환 몬스터에게 줘도 소용없다.

버프가 걸리는 요리를 주어 강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그렇게 할 필요


는 요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인즈에게 케르베로스는

"어? 정말임까?" "왕따는 좋지 않슴다" "배고픔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기분탓이리라.

아인즈가 준비한 테이블에 3명이 앉았다.

"자, 먹자꾸나"

"잘 먹겠습니다"

두 명이 소리내서 말했다.

당연히 아인즈는 먹을 수 없다.

먼저 요리를 먹은건 아우라였다.

"아인즈님! 맛있어요!"
마레도 누나의 말에 끄덕끄덕.

아인즈는 둘을 보며 웃었다.

"다행이구나. 요리장에게 전해두마.

......둘 다 먹으면서 들어줬으면 하는데, 이곳에 임시거점을 만들어도 좋다는 아


우라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그린 시크릿 하우스를 옮길 장소를 고르고, 그게 끝나면 다크엘프의 마을


을 찾아다니려고 한다"

둘은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아인즈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뭐, 확실히 스즈키 사토루도 상사가 업무 얘기를 시작하면 먹던 손을 멈추겠지.

"그 뒤에, 다크엘프와 우호관계를 구축할거다. 그러기 위한 계획으로ㅡ

아우라가 괜찮다면 레드 오거 크라이드 미션을 하고 싶다"

아인즈는 씨익 웃었다.

예전에 동료들과 했었고, 동료가 이름붙인 비겁한 책략.

원래는 자신이 소환한 몬스터를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아우라가 마침 마수를 데


려왔다.

그녀가 허가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완전히 지배하지 않았다는 불안요소는 있지만, 반대로 리얼함을 더해주겠지.

개체별로 다른지 종족마다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연기력은 차이가 있


다.

분노의 마장은 발군의 연기를 보여줬지만, 시즈는 "두관의 악마(Circlet)는 발연


기"라 했다.

신분이나 강함을 숨기고 싶었지만, 슬쩍 끼어들기에는 이쪽이 더 좋겠지.


몇 년 걸려도 좋다면 다른 수단이 있을지 모르지만, 법국을 고려하면 시간이 그다
지 많지는 않다.

"Cry? 아니, Clyde인가요? 아인즈님, 그 계획은 어떤거죠?"

의아해하는 아우라를 보며 아인즈는 다시 씨익 웃었다.

예전에 동료가 가르쳐준 작전 중 하나다.

작전명에는 본래 출처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인즈는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

하지만, 그 작전이 어떤 것인지는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해줄 수 있었다.

아인즈는 입을 열어ㅡ

"ㅡ아! 우는 붉은 오니군요! 전에 그 책, 읽었어요!"

작전명의 출처를 처음 안 아인즈는 입을 닫고,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광활한 푸른 하늘이 보였다면,

자신의 무지함을 아이에게 깨우쳐진 아인즈의 마음도 약간 구원받았을지 모른다.

세계에 비해 자신은 정말 작다는 위로를 받으며.

하지만 보이는건 그린 시크릿 하우스의 천장뿐.

재미라곤 없는 천장을 조금 바라보다가, 마레의 순진무구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아직 마레의 지레짐작이라는 가능성도 남아있다.

"......그렇단다. 마레는 대단하구나. 난 그 책 읽은적이 없단다. 우는 붉은 오니라


하는구나......"

"네! 그 책대로 한다는건ㅡ누나가 데려온 저 곰을 쓴다는 거군요!"

어, 아마, 이건 맞다.
아인즈는 확신했다.

"......응. 응. 마레는 대단하구나......"

그리고 아인즈는 둘에게 미소를 보였다.


3장 아우라의 분투

대수해에 있는 다크엘프의 마을.

그곳은 엘프의 마을과 다를 바 없다.

예를 들면 와일드 엘프라 불리는 종족은 전에는 평범한 엘프였지만,

생활권을 초원으로 옮겨서 문화형태뿐 아니라 육체도 변하여, 지금은 새로운 종


이라 인식되고 있다.

그럼 다크엘프는 어떠냐면, 원래 같은 종족이면서 같은 환경에서 살기에, 육체적


/마법적인 변화는 없었다.

문화도 거의 차이가 없고, 엘프트리 중심의 생활양식도 같다.

그래서 다크엘프가 습득하는 클래스도, 엘프처럼 레인저나 드루이드가 대부분 이


었다.

다른 점은 피부색과 짐승을 쫓아내는 방법 등 세세한 습관뿐이다.

다크엘프 마을에선 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냄새를 써서 기피감을 이용해왔다.

이건 다크엘프가 대수해에 이동하기 전 숲에서 살았을 때, 트렌트 같은 숲의 주민


이 가르쳐준 소중한 지혜였다.

향이 강한 허브를 마을 주변에 심거나, 짐승이 싫어하는 특수한 약을 만들어 뿌리


거나,

드루이드의 마법ㅡ효과시간도 유효범위도 한정적이라, 상당한 능력을 써야 하지


만ㅡ을 썼다.

이 방법은 대수해에서도 유효했고, 다른 엘프의 마을ㅡ왕도를 제외한ㅡ과 비교해


다크엘프의 마을은 안전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엘프는 모른다.

널리 퍼지면 냄새로 인한 기피감도 약해진다.


마수뿐 아니라 짐승들은, 멍청해 보여도 그렇지 않다.

반대로 그 냄새 앞에 먹이가 있다고 알려지면 위험해진다.

그런 이유로 받아들인 친척에게도, 이 방법을 쉽사리 알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이 믿던 안전함이 살얼음판 위였다는걸 알게


됐다.

짐승의 난폭한 울부짖음이 멀리서 들렸다.

대수해에선 일상다반사.

아침 일찍 혹은 늦은 심야에,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은 없다.

게다가 체구가 작은 생물도 놀랄 만큼 크게 짖는 종족도 있다.

짖는 소리 좀 들렸다고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다.

포효는 확실히 무섭다.

짖는 소리로 특수한 힘을 쓰는 마수도 그럭저럭 있었고, 여러 종류가 있었다.

들은 자를 공포에 빠뜨리거나 혼란시키거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며, 때로는 완


력을 상승시키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벌리면 그런 특수한 능력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멀리서 들린 울부짖음 하나가 위험하다 여겨지는 일은 없었고, 자연스러운 일상


풍경일 터였다.

하지만 이날은, 다크엘프 남자 한 명이 마을에 경계를 촉구했다.

남자의 키는 다크엘프의 평균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날씬하게 뻗은 나긋나긋한 사지가 가벼우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이는


모습은 내부가 탄탄하다 느껴져,
남자는 실제 키보다 더 커 보였다.

시원시원하게 잘생겨서, 마을에서도 여성진에게 인기가 많다.

대수해에서 사는 다크엘프중 이 남자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예전에 대이동 때, 중심적 존재였던 가문ㅡ시작의 13가문 중 하나, 유서 깊은 블


루베리가 이며, 많은 경험을 쌓아온 일류 레인저다.

남자ㅡ블루베리・에그니아는 그 손에, 마을에도 몇 개 없는 다크엘프식 복합궁을


들고 있었다.

베코아 꽃이 피는 시기ㅡ3년에 1번ㅡ열린 궁술대회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활을.

에그니아의 외침에, 다크엘프들의 병사가 즉시 모였다.

병사라곤 해도 전업 병사가 아니라, 사냥에 나가지 않는 레인저들이다.

에그니아가 사는 마을은 근처에 있는 다크엘프 마을 중 가장 크다.

그래도 주민은 200명을 넘는 정도이며, 전업 전사를 배치할 여유는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모여든 동료들 앞에서, 에그니아는 긴 귀를 살짝 움직여ㅡ먼 곳


의 소리에 집중하면서ㅡ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를 모이라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방금 들린 포효. 전에 한 번 들어본 적이 있


어.

저건 성체, 충분히 성숙한 우르수스의 포효소리야"

에그니아는 그들이 순식간에 긴장했다는 걸 느꼈다.

당연하다.

숲에 사는 다크엘프라면, 아이라도 안킬로우르수스ㅡ무서운 마수의 이름을 모르


는 자는 없으리라.
이 마을 주변에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는 몇 종류나 있지만, 안킬로우르수스는 가
장 위험한 존재다.

어린 우르수스라면 모를까, 어른ㅡ충분히 자란 어른에 손대는 건 죽음을 의미한


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살도 튕겨내는 장갑에, 다크엘프를 간단히 양단하는 완력.

신체능력 전반이 높아서, 달려서 도망치기도 어려운, 무서운 몬스터다.

"......분명 포효소리가 들렸지만, 정말 우르수스 맞아? 잘못 들은 거 아니고?"

다크엘프 여자가 의심스레 질문했다.

이 마을에 3명 있는 부 수렵장 중 한 명으로, 손에는 에그니아와 같은 복합궁을 쥔


실력 좋은 레인저다.

그런 그녀도 포효소리만으로는 우르수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예를 들면 하울링 버드라는 귀여운 새는, 특수한 능력으로 몇 종류의 몬스


터 울음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진 생물은 이 숲에 더 있다.

그런 생물이 사는 숲에서, 포효 하나로 정체를 특정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그녀의 질문은 당연했다.

하지만 에그니아는 이 숲에서 가장 뛰어난 레인저.

활 솜씨 뿐 아니라, 날카로운 감각이나, 그 감각으로 얻은 정보의 분석력까지 뛰


어났다.

그녀의 질문은 에그니아를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반쯤은 제발 아니었으면 하는


희망에서 나온 것이다.

"정말 안타깝지만 틀림없어.


털이 곤두서는듯한ㅡ압도적 역량 차이를 느끼게 하는 포효 소리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있을 리 없어.

지금도 귀에 새겨져 있다고, 잘못 들을 리 없어"

다음에 말한 건 수렵장이었다.

이 마을의 권력중추는 장로회, 수렵장, 약사장, 제사장이다.

장로회는 3명으로 구성되어, 총 6명.

그중 하나였다.

그의 손에는 복합궁이 없었다.

그는 함정 사냥이 전문이어서 그걸 제외하더라도 종합적인 능력은 에그니아보다


크게 뒤떨어진다.

하지만 레인저로서 실력자인 건 틀림없었고, 에그니아보다 나이는 적지만 침착한


모습은 수렵장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성숙한 우르수스가 짖었다는 건......영역에 들어간 자가 있다는 말이군?"

포효를 지르는 건 대체로, 강적이나 적대적인 동족과 싸울 때.

혹은 승리를 확신했을 때나 자신의 영역임을 알릴 때 등이다.

또는, 번식할 때.

하지만 그 중 우르수스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안킬로우르수스는 한 번 영역을 정하면ㅡ성장함에 따라 그 영역이 넓어지지만ㅡ


왠만한 일이 아니면 그걸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사냥하러 나가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 누군가 들어갔을 거라 보는 게 타당하다.


"하아......정말 민폐네. 어느 몬스터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평화를 깨는 덜렁
이는 우르수스의 먹이가 됐으면 좋겠다"

수렵장의 불평에 주위의 다크엘프들은 동의했다.

그런 동료들에게 에그니아는 쓴웃음 지었다.

안킬로우르수스의 성질상, 괜히 자극하지만 않으면 어떤 의미로 근처의 밸런서가


되어준다는 건 상식이다.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영역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야.

내가 전에 우르수스가 짖는 걸 들었을 땐, 우르수스끼리 싸울 때였으니까. 게다가


그 싸움은 영역 바깥에서 하고 있었어"

"저기, 죄송합니다, 에그니아 씨. 질문이 있는데요......

저는 거의 안 들렸지만, 에그니아 씨가 말씀하시니 우르수스가 짖은 건 사실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 영역은 여기서 상당히 멀잖아요? 왜 우릴 불러 모은거예요?"

이 자리에 있는 가장 젊은 남자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은 무언으로 찬성하는 듯했


다.

"아아, 우르수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포효할만한 사태가 벌어진


건 확실하니까.

어쩌면 영역이 바뀔지도 모르고, 영역의 주인이 바뀔지도 몰라. 어쩌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예를 들면......그래"

에그니아는 한 호흡을 두고 계속 말했다.

"우르수스에게 졌지만, 도망은 칠 수 있는 강한 마수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거나.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게끔 마을을 경계하면서, 내일이라도 소리가 들


린 곳으로 가서 숲의 상태를 살펴보는 게 좋겠지"
일동은 납득했다.

숲의 변화는 빠르게 감지하여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숲의 은혜를 받아 사는 자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ㅡ오늘 사냥은 중지네. 사냥은커녕 숲에 들어가지 않는 게 무난하려나. 식재료는


아직 있지?"

"괜찮다. 전에 큰 사냥감을 잡아 왔어. 하지만 바로 제사장에게 얘기해서, 과일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며칠 걸릴지 모르니까"

"그리고......그래. 장로들에게도 얘기를 전해두는 게 좋겠어. 지금 일을 모르는 자


가 숲에 들어가지 않도록, 장로들이 모두에게 신신당부하게끔 말이야"

에그니아의 경고에 촉구되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누구도 지나친 생각이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숲은 은혜를 주지만 갑자기 재난이 닥쳐올 때도 있다.

수해에서 살려면 사소한 흏조도 놓치지 않고, 조심조심하는 게 중요하다.

숲의 치안이 악화됐을 가능성을 빨리 마을에 널리 퍼뜨려야 한다.

"다른 마을은 어쩌지? 상황을 조금 파악하고 알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 아는


것만이라도 전해주는 게 좋을까?"

"둘 다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그건 장로에게 전부 맡겨도


되지 않을까?"

"이봐, 기다려, 우리는 우리대로 의견을 정해두는 게 좋아. 그 융통성이라곤 없는


꼰대들이 이상한 말을 꺼냈을 때,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야 논파하기 편해"

"......꼰대는 심했어, 가넨. 확실히 융통성이 부족하지만, 장로들은 나름 경험이


풍부해. 그 지식으로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길을 고를 뿐이야"
부 수렵장 중 하나인ㅡ프람・가넨을 수렵장이 타일렀다.

"그ㅡ"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가넨이 입을 크게 열려 했을 때, 에그니아가 손으로 막았


다.

"ㅡ그쯤 해라. 내가 모두를 불렀다는 걸 고려하고, 지금 필요한 얘기를 하자고. 우


르수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잖아?"

가넨이 입을 닫자 에그니아가 손을 뗐다.

에그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장로들과 대립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묵인해줬지만, 때와 장소를 구별해줬


으면 좋겠군'

"그래. 꼰대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할 건 마을 경계를 어떻게 할까지. 아무래
도 전원이 가는 건 너무 많지?"

"오늘 하루 경계서는 거라면 3교대제가 좋겠지. 내일도 생각하면 더더욱"

하루종일 경계를 서는 것도 익숙하고, 피로를 없애는 마법을 받으면 다음 날 행동


에도 영향은 없다.

하지만, 우르수스의 영역 가까이까지 조사하러 간다면, 조금이라도 감각이 둔해


질 일은 피해야 한다.

"그렇네. 그ㅡ"

포효가 들렸다.

모두 긴장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노려봤다.

"......꽤 가까이서 들리지 않았어?"

모두가 생각한 불안을, 한 명이 말했다.


에그니아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ㅡ아까 에그니아 씨가 말했듯, 영역에 들어간 누군가가 도망쳐서, 그걸 쫓아오는


건 아닐까요?"

안킬로우르수스는 사냥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사냥감으로 정한 생물이 도망치면, 영역 바깥까지 쫓아가겠지.

짖으며 쫓아가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패배해 영역에서 쫓겨났다는 것보단 납


득됐다.

"그럼 우르수스가 사냥감을 잡게 되면 배도 부를 테니, 이 마을은 안전해질지도


몰라.

......도망치는 사냥감이 있다면 우리가 가서 쏴죽일까?"

"관둬! 우르수스를 괜히 자극하게 돼.

애초에 사냥감은 우르수스에게서 도망칠만한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사


냥감이 여기로 오면, 쫓아내기만 해야 해"

"아니, 기다려. 마을 가까이 우르수스가 오면 귀찮아져. 여기를 사료밭이라 생각


하게 되면 골치 아파.

몇 명이 마을을 나가서 이쪽으로 올 것 같으면 우르수스나 사냥감을 다른 방향으


로 유도하는 게 좋겠어"

여러 의견이 나오는 건 좋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더는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가만있을 수도 없다.

에그니아는 손뼉을 한 번 치면서 모두를 집중시켰다.

"어떤 상황이라도, 이변이 일어난 건 확실해. 빨리 움직여야겠지. 우르수스가 영


역으로 돌아가준다면 좋고.

돌아가지 않는다면......영역 바깥까지 나왔는데 사냥감을 잃어버린다면ㅡ"


에그니아가 모두를 바라봤다.

"ㅡ게다가, 마을 가까이에서 놓쳐버린다면, 긴, 최악의 하루가 될 거야"

어떻게 될지 상상한 자들이 표정을 구겼다.

"우선 중요한 건, 여기 있는 사람뿐 아니라, 마을 사람 전원의 힘을 빌리는 거야.

특히 드루이드의 힘은 반드시 필요해. 그리고 약사장이 우르수스에게도 통하는


독을 갖고 있을지 몰라"

우르수스 같은 짐승형 마수는, 물리공격으로 쓰러뜨리기보다,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두꺼운 피부나 지방, 근육으로 화살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마법ㅡ예를들면 드루이드가 소환하는 불의 정령은 다가가기만 해도 불로 대미지


를 줄 수 있다ㅡ같은 수단으로, 화살보다 더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다.

정면에서 싸우면 이길 수 없겠지만, 마법 같은 걸 쓰면, 예전에도 우르수스에 필


적하는 마수에게 힘겹게 이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여서 얘기만 하고 있으면 시간이 낭비될 뿐이야. 주도권은 우리가 쥐


는 게 좋지만ㅡ"

에그니아는 수렵장을 봤다.

"ㅡ맡겨도 될까?"

"하아......"

수렵장은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할 수 없지. 좋아, 너희들. 실력 좋은 놈들부터 차례로, 절반은 마을


방위를 다져.

남은 절반은 마을 전원에게 경고하고 다녀. 경고가 끝나면 싸우지 못하는 자들을


피난시켜. 분배는 베니리 너한테 맡긴다.

그리고 가넨은 약사장, 오베이는 제사장에게 말하러 가라. 장로회는 내가 간다.


자,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에그니아도 움직이려 했으나 수렵장의 눈치에에 그를 따라 달렸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실력 좋은 네가 장을 맡아야 되는 거 아니


냐?"

"그럼 더 귀찮아질 텐데? 내 이름은, 가문 덕도 있어서 다른 마을까지 조금 알려


졌어"

조금이 아니잖아? 라는 수렵장의 말은 무시하며 에그니아가 계속 말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다른 마을들까지 대립이 퍼지게 될 거야"

"......아ㅡ, 머리아퍼. ......장로들이 조금만, 정말 조금만 물러나 주면 바뀔 거라


생각해?"

"절대 무리겠지. 물러나면 물러난 만큼 더 요구하겠지. 장로들이 전부 은퇴해도,


다른 마을로 문제가 퍼질 뿐이야.

장로들이 융통성 없이 버티고 있는 게 더 잘 돌아가는 거라 할 수 있어"

"어떡해야 해결되는 걸까?"

"해결될 리 없지. 뭔가 크게 파탄 나지 않는 이상"

수렵장은 다물어 버렸다.

"나는 마을을 방위할게. 부탁한다"

"그래, 너도 부탁한다"

수렵장과 헤어진 에그니아는 포효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며 대기하는 사이,


마을에 급속히 정보가 퍼진 모양이었다.
레인저들이 알리고 다녀서가 아니라, 위험한 몬스터 바로 옆에서 사는 마을이기
에, 평소부터 정보전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제사장은 마법으로 식재료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약사장은


에그니아에게 강력한 독과 만약을 위해 해독제를 전해주었다.

경계를 시작하고 조금 시간이 경과했다.

우르수스의 소리는 그 이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모인 레인저들도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에그니아도 마찬가지로 어깨에 힘을 빼고, 활을 쥔 손의 뻣뻣함을 주물렀다.

우르수스는 사냥감을 잡았는지, 아니면 놓쳐서 영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때, 수렵장이 옆에 섰다.

"......혹시 모르니 급히 영역까지 가서 조사해야겠지. 너에게 맡겨도 될까?"

"ㅡ그럴거라 생각했어. 내게 맡겨"

이미 머릿속에선 영역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고 있었다.

시선 끝에 있을 우르수스의 모습을 포착한 듯, 영역 쪽을 노려본 에그니아는 숲속


나무들 뒤에 뭔가 커다란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칫!"

에그니아는 입술을 떨어, 새울음 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그저 소리가 아니다.

에그니아가 습득한 클래스로 인해 내는 특수한 소리로, 들은 동료들에게 경계하


라는 소리다.

이 소리를 들은 아군은 가만히 서 있는 등 기습받지 않게 된다.


풀리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에그니아는 주목받으면서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방금 본 그림자의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기분탓이었으면.

잘못 봤기를.

착각이기를.

그림자를 포착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잠깐 이었다.

몇 그루나 되는 거목 뒤에 있던 그림자를 우연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봤을 뿐


이다.

잘못 봤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실력 좋은 레인저인 에그니아의 뛰어난 시력은, 자신의 기대를 쉽게 배신


했다.

"......안킬로우르수스다......"

누군가의ㅡ무심코 뱉은 성량이었음에도, 그 소리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귀에


유달리 확실히 들렸다.

그렇다. 이미 누가 봐도 확실했다.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

거기 있는 건 대수해의 파괴자ㅡ안킬로우르수스다.

하지만ㅡ

"저, 저기. 블루베리 씨. 저거.....크지......않아? 우르수스가 저렇게 컸나?"

젊은 레인저가 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숲의 나무들에 가려, 거리도 있었기에 체구를 확실히 인식할 순 없었지만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해서 예상은 됐다.

그건 너무나 컸다.

아니, 너무 거대했다.

"......스모모. 내가 전에 본 우르수스는 저렇게 크지 않았어. 커지지도 않았어. 성


장속도가 이상하게 빠른, 돌연변이......자칫하면......"

에그니아는 쥐어 짜내듯 말했다.

"......로드"

분위기가 오싹해졌다.

털색이 다르거나 보통보다 커지는 것처럼, 특수한 변화나, 특이한 능력을 보유한
자를 돌연변이라고 이 마을에선 부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월등히 강하게 진화해, 종의 정점에 군림하며, 때로는 그 전


투력으로 넓은 범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자가 있다.

그래서 그런 개체를 로드라 부른다.

다시 말해 눈앞의 안킬로우르수스가 정말 그렇다면, 보통 안킬로우르수스보다 훨


씬 강하다는 것.

보통 안킬로우르수스도 성가신 상대이긴 하나, 마을 전체가 싸움에 나서면 쓰러


뜨리지 못하진 않겠지.

하지만 눈앞의 마수가 우르수스의 왕이라면, 정면으로 싸워서 살아남을 거란 생


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로드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그건 더 북쪽이잖아!"

레인저 한 명이 침을 튀기며 순식간에 말했다.

하지만, 우르수스를 자극하지 않도록 소리는 낮춰 말했다.


"아쥬 마을은 어떻게 된거야!"

같은 다크엘프 마을ㅡ아쥬 마을 근처에는 로드가 있다고 전해 들었다.

로드는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아쥬 마을 근처에 있던 로드와 동일개체일거라 생각됐다.

"ㅡ당한건가?"

로드가 영역을 바꾸는 등, 이 마을 쪽으로 움직였다면, 아쥬 마을의 누군가가 경


고하러 왔을 터.

하지만 아무도 안왔다.

그런데 로드는 저기 있다.

침묵이 장소를 지배했다.

포효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나아가면 아쥬 마을이 있다.

'......아쥬 마을이 먹이 밭으로 변해서 다크엘프라는 먹이를 알게 된 우르수스가,


냄새 같은걸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답에 도달했다.

긴장된 분위기에 절망의 색이 섞였다.

설령 아쥬 마을에서 다크엘프의 맛을 기억했다해도, 여기에 신선한 먹이가 있다


는 건 아직 알지 못했을 터.

안킬로우르수스는 입맛이 까다롭다.

잡식이긴 하지만, 특정한 먹이를 즐겨 먹는 경우가 있다.

다크엘프를 맘에 들어한다면 이 마을을 버려야 하고, 그렇게 한들 쫓아오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니, 유도해서 이 마을에서 떼어내야 한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

"아니, 아쥬 마을이 당했다고 단언 할 순 없어"

에그니아에게 시선이 모였다.

"원래 내가 목격했듯, 이 주변을 영역으로 삼은 우르수스가 있었어. 만약 로드가


아쥬 마을에서 일직선으로 왔다면, 그 우르수스의 영역에 들어갔을 거야.

그럼 포효소리가 2개 들렸어야 해. 즉......원래 이 주변을 영역으로 삼던 우르수


스가 성장해서, 로드가 된 거겠지"

아쥬 마을의 로드일 가능성도 아직 있다.

로드와 이 주변을 영역으로 삼던 우르수스의 성별이 다르면 싸우지 않을지도 모


른다.

또 두 마리가 만나 부딪혔더라도, 한 쪽 우르수스ㅡ아마도 로드ㅡ가 포효하지 않


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쥬 마을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이 마을에 로드가 오고 있는건 변함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


는가, 뭐가 최선인가.

그렇다면ㅡ

"ㅡ로드와 싸우는건 자살행위야. 여기선 정령을 소환해서 시간을 버는 사이 도망


칠 수 밖에 없어"

"그게 되겠냐! 숲에서 저것에 습격받는 건 틀림없어! 그보다 저장해둔 고기 같은


걸 실컷 먹여서 배를 채우는게 나아"

"그래! 우르수스는 곰과 성질이 비슷해. 꿀도 좋아하잖아!? 저것도 바르고 싶을테


니 주ㅡ"
그때, 대지가, 대기가, 숲이, 몸 안쪽에서 떨리듯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천천히 걸어오는 안킬로우르수스의 왕이 거기 있었다.

다크엘프들의 숨이 빠르고 짧아졌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금 나온 어떤 아이디어도 이미 날아가버렸다.

힘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고, 위축돼버렸다.

조금 전 포효에 특수한 효과가 있어, 공포 같은 정신적 작용을 일으킨게 아니다.

그저 단순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다크엘프들이 생물로써 격의 차이를 이해했기에


나온 반응이다.

즉, 그만큼 역량차이가 크고, 다크엘프는 그저 유린될 뿐인 무력한 존재라는 말이


다.

'ㅡ위험해'

대부분의 다크엘프가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확신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아직 이르다.

에그니아는 외쳤다.

"ㅡ움직여!!"

자신을 질타하며, 분발시키는 외침이기도 했다.

"우, 우, 움직이라니, 뭘 하면 되는데!"

"내가 알겠냐!"

다크엘프 여자의 비명 같은 질문을, 에그니아는 도끼처럼 무거운 한마디로 답했


다.

"아, 알겠냐니......"

"적반하장......"

"나한테 기대ㅡ아니! 나라고 이런 상황에서 뭐가 정답인지 알 리가 없잖아!

그래도 움직여야 해! 굳어있으면 되겠냐고! 적어도 아까 아이디어를ㅡ"

이쪽에 공포를 줄 목적이라도 있는지, 우르수스 왕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마을 주변에 심어진 꽃들에서 다크엘프의 냄새를 맡으려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모습은 왠지 힘이 없어 보여서, 뭔가 한심해 보였다.

상처가 있나, 아니면 병이나 독에 걸려있나.

희망적 관측에 달려들고 싶지만, 그런 건 극한상황에 으레 있는 현실도피가 틀림


없다.

'쏠까? 이미 화나게 하고 말고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저게 이쪽으로 오는 건 확


실해.

그럼 선수를 쳐서......활은 닿을 거야. 게다가 모두 각오를 정했겠지. 저놈이 날


보기 시작하면,

마을에서 떨어지도록 움직이면......있어봐? 다른 방법도......'

"......기름, 이야"

에그니아가 중얼거리자, 주변에 있던 레인저들이 순간 의심쩍어 했지만, 곧 의도


를 이해했다.

"그래! 기름을 뿌려 불의 정령으로 불을 붙이는 거야!"

"저렇게 거구니까. 기름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주변에 불이 퍼지지 않게 물의 정령도 같이 불러서!"

마을엔 기름이 별로 없다.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쓰임새가 한정적이라, 일부러 쌓아두진 않는 물건 중


하나다.

내가 간다고 외치며 다크엘프 한 명이 마을 중앙 쪽으로 달려갔다.

창고에 있을 드루이드에게 전할 생각이겠지.

현재 상황을 모른 채 모든 마력을 식재료로 바꿔버리면 위험하다.

그때, 우르수스 왕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아까처럼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꼈지만, 각오를 정한 다크엘프들은 이제 동요


하지 않았다.

"뭐지?"

다크엘프 한 명이 신기한 듯 말했다.

에그니아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레인저들 모두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안킬로우르수스의 성질상, 모습을 보인 시점에 단숨에 돌진해올 텐데 그럴 낌새


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의욕이 없는 것 같은ㅡ아니, 왕쯤 되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거겠지.

눈치를 살피고 있자, 이번엔 우르수스 왕이 일어서서 짖었다.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해 상대를 위압하는 건 야생 짐승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그저, 이해되지 않는 건, 왜 덤벼들지 않는가다.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마수인 우르수스 왕은 상당히 지혜로운 존재. 그런데 확실


히 약자인 이쪽을 봤으면서 왜 아직도 위협하는 걸까.
애초에, 아까부터 반복되는 포효는 무슨 의미일까.

"저기, 혹시 이거 애한테 사냥을 가르쳐주는 거 아냐?"

누군가가 말하자, 에그니아도 저 이상한 행동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동의했다.

부모 짐승은 아이를 데리고 사냥에 나가, 아이는 부모의 사냥을 보고 사냥감의 종


류별로 요령을 배운다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냥기술을 익히지 못하고 둥지를 떠나 금방 죽어버리는 경


우가 많다.

우르수스 왕의 이상한 행동은, 다크엘프라는 먹이를 어디선가 보고 있을 아이에


게 가르쳐주려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를 생각할 때 다크엘프는 반격하기도 하는 만만치 않은 상대


라고 아이에게 인식시키는 게 좋겠지?

그저 먹이라고 인식되면 귀찮아질 거야"

"......아이를 죽이면 로드가 날뛸지도 모르는데?"

"애라면 꿀을 바른 고기로......속이진 못하겠네. 사냥 연습이라면 생고기 뿐일테


니. 그래도, 해볼 가치는 있는 거 아냐?"

갑자기, 우르수스 왕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크엘프들에게 달려왔다.

방금까지의 의욕 없는 모습은 이미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다른 뭔가가, 있었다.

에그니아는 순간적으로 우르수스 왕의 후방에 시선을 보냈다.

쫓기는 짐승 특유의 필사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지만ㅡ


'ㅡ있을 리 없나. 애초에, 우르수스 왕을 쫓아낼 존재가 있을 리 없지'

"뭐냐고......전혀 모르겠어......"

에그니아 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안킬로우르수스 왕의 행동을 전혀 읽을 수 없다.

숲의 왕인 마수를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틀렸을지 모르지만, 레인저의 경험과 감


이 이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만큼 혼란스러워도 다크엘프들은 민첩하게 다리를 타고 후퇴했다.

우르수스 왕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

조금이라도 늦게 행동하면 우르수스 왕의 먹이가 된다.

아무도 없는 엘프트리의 뿌리까지 다다른 우르수스 왕이 일어섰다.

거대하다.

다리 높이까지 여유롭게 닿을 크기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엘프트리의 줄기가 터지듯 파였고, 충격이 나무를 격하게 흔들었다.

나무를 이어준 다리가 휘어, 다크엘프들은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주위에


매달렸다.

바깥의 엘프트리는 특히 강고하게 만들어졌다.

몇 번이나 마법으로 성장을 촉진했고, 대량의 영양분을 주어 두껍고 크게 자란 특


별제.

어떤 몬스터의 돌진을 받아도 튕겨낼 강도를 가진 거목이, 한순간에 이 꼬락서니.


지금껏 이 나무에 온 어떤 몬스터보다 우르수스 왕의 힘이 강하다는 틀림없는 증
거였다.

"괴물자식......"

"생각대로라면 생각대로지만......엄청 세다......"

"ㅡ감탄하고 있을때냐. 어떡하지? 어떡해야 제일 희생이 적지?"

일격만으로, 전의를 상실한 자들이 투덜거렸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자신들은 절대 못 할 일격을 눈앞에 두니, 어쩔 수 없는 일


이리라.

우르수스 왕은 아까부터 미친 듯 같은 엘프트리를 공격하고 있다.

너무 이상한 행동이지만, 마법으로 자신을 잊고 미친 것 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엘프트리에 원한이라도 있는걸까, 생각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가끔, 손을 멈추고, 에그니아와 다크엘프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공격을 시


작한다.

'아이에게 먹이를 어떻게 잡는지 알려주는, 것 같진 않은......데......'

우르수스 왕 주변에 아이의 모습은 없다.

에그니아는 허리에 찬 화살통에 들어있는 화살을 슬쩍 봤다.

'어디서 다크엘프가 녀석을 공격해, 건드렸나? 그래서 엘프트리에 원한을 가졌


나?'

엘프트리에 냄새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다크엘프 뿐, 안킬로우르수스 같은 몬스


터는 뛰어난 후각으로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마을을 포기하면 당장은 안전하겠지.

'아니, 그렇게 잘 풀릴 것 같지 않아. 어느정도 날뛰면 배고파질테고......우리들


냄새를 맡고 따라올지도 몰라.

여기선 역시 꿀을 바른 고기를 줘서 만족해주길 바랄 수 밖에. 하지만, 가끔 이쪽


을 살피는 게 불안한데......관찰하는 것 같아'

우르수스 왕은 역시 힐끔힐끔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그때마다 엘프트리를 공


격했다.

"어쩌면......우릴 묶어둘 생각인가?"

"다른 개체가 다른 방향에서 마을로 오고 있다고? ......그럴 필요가 있나? 우르수


스 왕이?"

"우리를 마을에서 쫓아내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잖아? 도망친 곳에 다른 우르수


스가 매복하고 있다던가"

"우르수스가 그렇게 사냥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면 말


이 안 되나.

그럼 전원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는데? 모두 고기 같은 걸 가져가면,


먹고 있을 때는 얌전해질 거 아냐?"

"ㅡ그 방법 밖에 없는걸까?"

"그런 얼굴 하지마. 마을을 버린다는 게 아냐. 우르수스가 없어지면 돌아오면 돼"

위로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렇게 잘 풀릴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우르수스 왕이 으드득으드득 소리를 내며 엘프트리를 깎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여길 영역으로 삼고 싶은 것 아닐까.

그럼 에그니아 일행은 모든 걸 남겨둔 채 마을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마법의 효과로 엘프트리의 성장은 엄청나게 빠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렇게 크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엘프트리와 함께 살아가는 다크엘프에게, 그걸 잃는다는 건 모든 걸 잃는 것과 마
찬가지.

다시 큰 나무를 키울 때까지 다른 마을에 얹혀살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좋아. 꿀을 바른 고기를 우르수스에게 주면서 마을에서 떨어지자"

수렵장의 말에 모두 끄덕였다.

"우선 스모모와 프룬이 꿀 바른 고기를 가져와. 나머지는 여기 남아서 우르수스


왕이 마을 안으로 가지 못하게 주의를 끌자"

젊은 레인저 두 명이 마을 중심으로 달렸다.

이미 엘프트리 한 그루를 갈기갈기 찢고, 다음 나무로 옮겨간 우르수스 왕이 그


발톱을 휘두르는 걸 갑자기 멈췄다.

에그니아 일행이 뭘까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우르수스 왕은 움직였다.

마을 중심 쪽으로.

"막아!!"

에그니아는 즉시 화살통에서 화살 2개를 꺼내, 활에 매겼다.

시야 한구석에, 에그니아의 명령을 받은 동료들도 놀란 듯 활을 겨누는 게 보였


다.

특수기술을 사용해 동시에 두 발 쐈다.

우르수스 왕의 커다란 몸 양쪽에 화살이 맞았고ㅡ둘 다 튕겨졌다.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은 우르수스 왕의 머리나 앞다리에 맞고 튕겨 나갔고, 눈앞의 지면이나 나무


에 박혔다.
맞추지 못한 게 아니다.

이동하기 시작했어도 저만큼 거대하니.

못 맞추는 게 더 어렵다.

활을 쏜 건 대미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의 주의를 끌어,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하지만, 우르수스 왕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이쪽을 힐끔 살펴봤을 뿐.

"뭐야!"

'ㅡ상대는 생태계의 정점인데? 하등한 우리들에게 공격받고, 완전히 무시하다니


어떻게 된 거지?

약자를 약자로 보고 있지 않나? 무슨 목적이 있는 듯한 행동......다른데서 다크엘


프 마을을 습격해본 적이 있는 건가?

마을 중앙에 애들 같은 약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나? 그래서 위협해서 그 장소를


좁히려 한 건가?

우르수스 로드가 우리들을 무시하고 더 약한 목표를 노리는 건, 어쩌면 녀석이 약


했을 때 이런 사냥을 배웠기 때문인가!?'

예전에 이렇게 사냥을 성공했기에 같은 걸 반복하는 거라면 말이 된다.

그게 설령 왕이라 불리는 강한 존재여도.

그렇게 생각하면, 엘프트리를 계속 공격한 건 자신 주변에 싸울 수 있는 자를 모


이게 하려는 의도였겠지.

그럼 저 이상한 행동의 모순은 사라지고, 이해가 간다.


분명 그마저도 이전 사냥에서 잘 됐다는 성공체험에 기인한걸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추측했다 한들, 에그니아 일행이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우르수스 왕을 중앙ㅡ애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지 않는 것.

"쫓아가!"
수렵장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리에서 뛰어내려 지면을 달렸다.

엘프트리에 걸린 다리를 달려가면 조금이지만 멀리 돌아가게 된다.

우르수스 왕의 손이 쉽게 닿을 곳을 달리는 건 대단히 위험하지만, 할 수밖에 없


다. 게다가ㅡ

에그니아는 앞에서 달리는 우르수스 왕을 노려봤다.

ㅡ혹시, 우르수스 왕이 뒤돌아서 공격해온다 해도, 시간은 끌 수 있을 테니까.

거구인 우르수스 왕이, 마을 안을 달리는ㅡ엘프트리가 늘어선 곳을 달리는 건 어


려운지,

달리는 힘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더라도, 떨쳐지진 않는다.

반대로 다크엘프 중 가장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에그니아는,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앞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당한 건 아니다.

마을 중앙에 있던 자들도 우르수스 왕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젠장!'

마을 중앙엔 광장이 있는데, 지면에 있는 게 아니다.

나무들에 걸린 다리로 고정되어 허공에 떠 있는 쟁반 같은 곳이다.


우르수스 왕은 광장에 도착하자 몸을 일으켜, 그 두껍고 무서운 양팔을 벌리고는
다시 울부짖었다.

아까보다 큰 포효소리는,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 박력이


었다.

광장은 일단 지면과 떨어져 있지만, 거대한 우르수스 왕이라면 간단히 닿을 것이


다.

생물로써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포효와, 보는 자를 두렵게 만드는 거구.

그것들이 전력으로 셀 수 없는 자들ㅡ숙련도가 낮은 레인저나 애들을 경직시켰


다.

에그니아는 들고 있던 다크엘프식 복합궁을 버리고, 양손을 비웠다.

이 활은 다크엘프의 보물.

이 활에 쓰인 여러 재료는 이 숲이 아니라, 원래 있던 땅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


졌다.

수리용 부품은 적어, 다시는 만들 수 없다.

그걸 이렇게 막 다루면 장로들이 한소리 하겠지.

하지만, 활을 정성스레 집어넣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우오오오오!"

우르수스 왕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에그니아는 외


쳤고, 뛰어들었다.

그 거체에 매달려 울퉁불퉁한 피부를 잡고 올라갔다.

"ㅡ고오오!"

우르수스 왕이 날뛰어, 몸을 비틀어 에그니아를 떨쳐내려 했다.


순간, 몸이 떠올라 원심력에 끌려 날아가 버릴 뻔했지만 견뎌냈다.

그대로 후두부까지 도달했다.

우르수스 왕의 발버둥이 한층 격해졌다.

당연하다.

다크엘프도 목 근처에 벌이 윙윙거리면 똑같이 행동하겠지.

매달리듯 왕의 목에 몸을 딱 붙이고, 에그니아는 떨어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버텼


다.

지면을 구르거나, 발톱으로 할퀴지 않는 건 이상했지만, 에그니아에겐 행운이었


고 감사할 일이었다.

그대로 버텼다.

흔들리는 시야에, 마을 사람들ㅡ특히 애들이 이쪽을 보는걸 알아채고, 에그니아


는 짜증 났다.

"뭐해! 도망쳐!"

소리 내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리에 반응한 듯 우르수스 왕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그걸 막듯이 화살이 날아왔다.

숙련된 실력이라면 이 상황에서도 에그니아에게 거의 맞지 않는다.

하지만, 에그니아가 쏜 활도 피부를 뚫지 못했다.

우르수스 왕은 다친 것 같지 않았다.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면, 독을 발랐더라도 소용없다.

에그니아는 양손에 힘을 꽉 줬다.


지금, 우르수스 왕에게서 떨어질 순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우르수스 왕의 움직임이 약간 느려


졌다.

계속 날뛰었으니 약간은 지쳤겠지.

하지만 상대는 로드.

터프함도 상식의 범주와는 다를 터.

금방 회복해서, 다시 날뛸 게 틀림 없다.

에그니아의 손은 저렸다.

다음엔 버티지 못하리라.

이게ㅡ마지막 찬스다.

한 손을 허리에 뻗어, 단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우르수스의 약해보이는ㅡ눈이나 코에 닿을 거리까지 단숨에 다가갔다.

목덜미 같이 등딱지가 없는 부분은 있었지만 거긴 두꺼운 피부밑에 두꺼운 근육


이 있다.

갖고 있던 단검으로 대미지를 줄 자신은 없었다.

그때, 에그니아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한 손을 뗀 순간, 우르수스 왕이 몸을 격하게 비튼 것이다.

안 그래도 온몸으로 매달려있었는데, 한 손을 뗀 자세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야가 휙 돌아가며,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이런ㅡ'
무슨 일인지 깨닫고, 즉시 단검을 버리고 허리에 손을 뻗었다.

꺼낸 건 작은 가죽 자루.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충격으로 폐에서 공기가 튀어나와, 순간적으로 호흡곤란에 빠졌다.

아팠지만, 그 이상으로 초조함이 컸다.

지면을 구른 에그니아는 정면에서 쳐다보는 우르수스 왕과 눈이 마주쳤다.

움직일 수 없다.

눈앞의 우르수스 왕의 압박에, 몸이 굳었다.

괜히 움직이면 그게 최후라는 걸 알아버렸다.

우르수스 왕의 입김이 닿았다.

몹시 좋은 향에, 놀람을 넘어 승천할 수준이었다.

에그니아는 웃을 뻔했다.

생각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

이미 각오는 정했다.

'덤벼라. 내 고기와 함께 이것도 먹여주마'

우르수스 왕에게 먹히는 건 최악이다.

다크엘프의 맛을 알게 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다크엘프가 맛없다면 어떨까.

움켜쥔 가죽 자루를 열었다.


사전에 받은 독약이다.

우르수스 왕의 사이즈를 생각하면, 너무 적다.

하지만 독살하지 못하더라도, 독 맛은 알려줄 수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덤벼들면, 팔과 함께 독이 든 가죽 자루를 입에 넣어 버린다.

발톱으로 공격받으면 끝.

물어뜯기는 것도, 아마 팔 하나로 끝나지 않겠지.

에그니아는 각오를 정했다.

아니, 한참 전부터 정했었다.

이 마을을 위해 살고, 죽겠다고.

자신이 남보다 강한 건, 분명 이날을 위해서였다.

'ㅡ자 와봐라. 이 마을의 다크엘프는 네가 토하고 싶을 정도로 맛없다고!'

우르수스 왕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ㅡ뭐지?'

포효한 우르수스 왕은 꼬리와 팔을 흔들며, 짜증을 부딪치듯 주위에 있던 엘프트


리를 계속 공격했다.

마치 에그니아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실제로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으니까.

"에그니아! 빨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에그니아는 동료 레인저의 말에 정신을 차


렸다.
먹힐 각오는 있지만, 좋아서 먹히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우르수스 왕은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무슨 목적이 있는 걸까.

'도망치는 게 정답ㅡ인가?'

잘 모르겠다.

상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에그니아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자,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마수 앞에 있던 엘프


트리에 박혔다.

콩! 하는 날카롭고, 소름 돋을 정도로 맑은 소리가 퍼졌다.

모든 다크엘프ㅡ우르수스 왕조차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


해졌다.

그때, 귀여운 소리가 들렸다.

"어......그만해ㅡ"

세계가 빛났다.

엘프트리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건 다크엘프 아이였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이 아니다.

굉장히 귀여운 남자아이로도, 여자아이로도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놀랄 만큼 귀여운 여자애였다.

무심코ㅡ
"ㅡ가, 가련해"

에그니아는 소리 내서 말해버렸다.

이렇게 귀여운 소녀가 있다니.

아침 이슬이 잎에서 방울이 되어 떨어질 때, 새벽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


을 훨씬 뛰어넘는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안쪽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게 아까 세계가 빛났다고 생각된 원인이리라.

게다가 생명의 반짝임이 그 움직임에서 풍겨오는 듯했다.

이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향기로운 향이 풍겨왔다.

에그니아는 저도 모르게 코를 실룩실룩 거렸다.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자신의 폐에 집어넣어, 혈액을 통해 자신의 온몸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 좋은 향이 있다니.

세포 하나하나가 환희에 춤추는 것 같았다.

그런 절세 미소녀의 손에는ㅡ장갑을 끼고 있어, 그 손가락을 볼 수 없는 게 분했


다ㅡ

"저럴 수가......"

놀랄 만큼 훌륭한 활을 쥐고 있었다.

경탄할만한 만듦새는, 결코 겉만 번드르르한 게 아니라,

에그니아가 본 어떤 활보다도 강하다고 레인저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소녀가 그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활을 들고 있다는 언밸런스함이 그 가련함을 더


해주는 요소였다.

모든 것이 매력적이었다.

반짝반짝했다.

"이봐이봐, 몬스터. 자, 떨어져있어ㅡ. 더 날뛰는 건 내가 절대 용서 못 해"

목소리가 귀엽다.

엄청 귀엽다.

아까도 들었지만, 그땐 미모에 넋이 나가 목소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뇌가 목소리에 반응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리플레이했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으려 했다.

절세 미소녀가 휙 손가락을 우르수스 왕에게 들이댔다.

왜, 그 손가락을 자신에게 향해주지 않는 걸까.

분했다.

원통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게 슬펐다.

"그르르르르"

우르수스 왕이 으르렁거렸다.

그건 사냥감을 위협하는 게 아닌, 두려움.


우르수스 왕은 저 절세 미소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이런 절세 미소녀가 눈앞에 나타나면, 누구라도 위축될 것이다.

혹시 여신이 아닐까 하며.

물론, 마수가 그런 미적센스를 가졌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너무 어리석은 생각이다.

에그니아는 강하게 부정했다.

부정할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마수는 아름답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 절세의 미소녀가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그래.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우르수스 왕이 움직이려는 기색을 뿜은 순간ㅡ에그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절세 미소녀는 이미 활에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에그니아는 절세 미소녀가 나타났을 때부터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


다.

깜박임조차, 아까워서 한 번도 하지 않았을 터.

그런데 활을 메기고 있었다.

아니, 놀랄 일은 아니다.

세계가 만들었을 법한 절세 미소녀다.


그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으리라.

에그니아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섬광이 번쩍ㅡ

"구오오오오!"

ㅡ우르수스 왕이 비명을 질렀다.

날아간 화살이 어디에 맞았는지 아무래도 좋다.

그런것보다 한순간이라도 절세 미소녀에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 ■■■■■■■■!?"

"■■■!"

"■■■■■■!?"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고 있다.

성가셨다.

'닥쳐봐! 저 절세 미소녀가 뭔가 말했을 때 안들릴거 아냐!'

절세 미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에그니아에겐 너무나 성가신 잡음이었


다.

우르수스 왕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것도 아무래도 좋다.

"■!? ■■■■■■■■■■■■■■■■■■!?"

'그니까 시끄럽다고! 너희들 때문에 저 애의 목소리를 못 들으면 어떡할 거냐고!'


"......무사해?"

절세 미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이다!

에그니아는 흥분에 몸이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호흡조차 힘들어졌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반드시 실례이리라.

산소 부족으로 생각이 흐트러지면서도, 온몸의 힘을 동원해 에그니아는 최적의


답을 짜냈다.

"기, 여, 어"

"......응? ......어? ......뭐?"

절세 미소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도, 엄청나게 귀여웠다.

아니, 그녀라면 어떤 표정도 귀여울 게 확실하다.

"미, 미안해. 아무래도 에그니아는 우르수스 왕이 무서워서 혼란한 것 같아"

"흐응"

수렵장에 말에, 절세 미소녀가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겨우 약간 제정신을 차린 에그니아는, 자신의 실태에 얼굴을 붉혔다.

"네! 줘서, 마워!"


"..................? 아아, 활을 쏴줘서 고맙다는 거구나"

주위에 있던 레인저들도, 절세 미소녀에게 처음 해야 할 말을 떠올렸으리라.

앞다투어 나무에서 내려와 절세 미소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네에. 천만에요"

아니다.

그래, 아니다.

구해준걸 감사한 게 아냐.

여기에ㅡ자신 앞에 모습을 보여줘서 감사하다고 전해야 한다.

"네!"

"......너, 정말 괜찮아? 날아가 버렸을 때 머리라도 세게 부딪혔어?

신관에게......여기선 드루이드일까? 치료받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마수가 어떤


특수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네. 머리를 세게 부딪친 모양이고, 에그니아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

막대기 2개와 로프로 만들어진 들것을 가져왔다.

날려졌을 때의 고통 같은 건 없었지만,

절세 미소녀를 보고 있던 흥분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


다.

극한상태일 때 사람은 아픔을 잊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 절세 미소녀를 보면 아픔을 못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솔직히 말하면, 그녀를 따라가고 싶다.


여기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하지만, 혹시 상처가 있다면, 절세 미소녀가 마음 아파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귀여우니, 마음씨도 상냥할 게 틀림없다.

그건 반드시 피해야 할 사태다.

자신의 욕망을 이성이 필사적으로 납득한 결과, 에그니아는 얌전히 들것에 실리


기로 했다.

절세 미소녀가 수렵장과 얘기하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에그니아는 생각했


다.

'......이 심장의 고동은 뭐지......설마......사랑!!'

블루베리・에그니아.

254살의 첫사랑이었다.
아우라는 앞에 걸어가는 다크엘프ㅡ수렵장이라던 남자 뒤를 따라갔다.
이 마을에서 레인저들을 통솔하는 남자라는데, 아까 쓰러진 남자가 더 강한 것 같
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가 대표일까.
인간사회에서도 전사 같은건, 대부분 가장 강한 놈이 대장이었다. 아니ㅡ

'ㅡ클래스가 다른가? 아까 걔는 전사고 이쪽은 레인저. 아니면 빅팀같은 걸까?'

나자릭 제8계층의 계층수호자를 떠올리며,

어떤 역할이 있으리라 생각한 아우라는 등 뒤의 기척을 살폈다.


있다.
그리고, 계신다.
아우라와 수렵장의 뒤를, 상당한 수의 다크엘프가 따라오고 있다.
마을에 보낸 마수곰에게 당한 피해는 거의 없을 터.
그래서, 한가했기에ㅡ아니면 호기심을 자극받아 손님 뒤를 따라오고 있는거겠지.
그들에게선 적의나 살기는 당연히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아우라에게 들키지 않을 수준으로 교묘하게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아우라의 직감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그런 수준의 실력자가 있었다면 저 정도 마수쯤, 아우라가 나타나기 전에
여유롭게 죽여버렸겠지.

'......들킨 것 같진 않네'

지금은 마수곰을 보낸 게 이쪽이라는걸 마을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아~'
아우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인즈님은 왜 이 마을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하셨을까?'

주인의 지시를 요약하면 이 마을에 들어가, 우호적인 입장을 만들어두라고 했다.


더 많은 다크엘프가 쓰러졌을 때 도와주는게 더 감사받았을 텐데.
어쩌면 더 빨리 와줬으면 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불평만 하는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불평불만만 말하겠지.
그런 아우라에게ㅡ나아가서는 나자릭에 해롭기만 한 대상은, 처분한다는 판단이
서면 재빨리 없애버리면 된다.
예를들면 한 번더 마수곰을 보낸다던가.

'으음. 그래도, 아인즈님의 생각을 모르겠네. 지시를 생각하면,


역시 좀 더 절망에 빠뜨리는 게 구출해줄 때가 극적이라 효과적이라 생각하는데.
.....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였다면 아인즈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우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지혜로운 지배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건 누구라도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고를 멈추고 멈춰서선 안된다.
주인은 우리들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나자릭 최고 간부인 계층수호자는 나자릭에 속하는 모든 자의 모범이 돼야
한다.

'으음. 으음....... 죽여버리면 필요할 때 귀찮아진다는 것도 있겠지만, 아인즈님이


라면 더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된단 말이지'
게다가 그 마수곰도 그렇다.
다크엘프들 앞에서 죽여버릴까요 했더니 아깝고, 큰 디메리트가 있다고 하셨다.
분명 본 적 없는ㅡ레어한, 이 세계에선 나름 강한 개체다.
비슷하게 강한 녀석을 발견하지 못한 지금은 주인의 판단에 동의할 수 있다.
자신도 유효활용할 방법을 제안했지만, 그래도 죽여버리는 게 '한패'라고 의심받
을 가능성이 낮을 터.
그건 주인도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주인은 아우라가 마수곰을 직접 죽이는 행위 자체는 원하지 않는 분위기
였다.
그때, 디메리트가 뭔지는 알려주시지 않았기에, 지금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아인즈님은 머리가 좋으니까, 명령을 그대로만 따르면 아무 문제도, 잘못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만 하면 좀 그렇지......'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이류.


그 명령의 의도나 진의를 이해하고, 그 이상의 결과를 내려고 행동해야 일류다.

'알베도나 데미우르고스는 아인즈님이 칭찬하실 정도로 일처리가 일류니까......


나도 질 수 없지.
그래도......으음...... 이 마을 근처에 있던 약한 마수곰을 죽이지 말고 썼어야 했
나? 그럼 완벽했을까?'

아우라는 앞에 있는 수렵장의 등을 봤다.


이 남자는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었다.

'보통, 궁지를 구해준게 나같은 아이면, 여러모로 물어볼거라 생각하는데...


이름도 대지 않았고. 다크엘프는 보통 이런가? 그렇지는 않은거 같은데......'

나와 말하는게 싫다던가, 말할 기운도 없는 느낌은 아니다.


등에선 그런 거절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우라에 맞춰 보폭을 좁게, 걷는 속도도 늦춰주고 있다.
이랬는데 실은 아우라를 싫어하는거라면,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할 수 밖
에 없다.
아마 과묵하거나 아우라 같은 아이와 얘기하는게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솔직히 말하면 접대역(호스트)으로선 실격이지만, 딱히 그런걸 원했던 건 아니었
기에 그걸 지적해선 안된다.
굳이 말하자면, 더 상성이 좋은 다크엘프를 고르지 않은 아우라의 미스다.
'ㅡ할 수 없지. 내가 말을 걸어볼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서론부터 시작하는게 좋을지 모르지만,


목적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생각해, 아우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
다.

"장로였나? 마수곰이 왔을 때도 안 보이던 사람들한테, 지금 가고 있는 거지?"

"마수곰? 안킬로우르수스를 그쪽은 그렇게 부르나?"

"응. 우린 그렇게 불러"

아우라는 자연스레 거짓말을 했다.

"그것보다 장로 얘기를 들려줄래?"

"아아. 그렇군. 지금, 장로들에게 가는 중이야.


장로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갈 필요 없었겠지만, 자신들의 엘프트리로 기름을 만
들고 있었다는 모양이라"

"흐응. 그래서 몇 명 정도 있어?"

수렵장이 처음으로 어깨너머로 돌아봤다.


"아아, 그쪽은 다른가? 3명이야"

아우라는 조금 빨리 걸어서, 수렵장과 나란히 섰다.

"내가 살던ㅡ여기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선, 장로회 같은 건 없었어"

"그렇군. 우리들 같은 마을과는 다르군. 엘프들의 도시도 왕이 있다고 하던데.


......도시란건 사는 사람이 많아진 마을이라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이 늘면 3명
의 장로로는 모자라다는 소린가?"

"글쎄? 우리나라에선 다크엘프가 거의 없어서, 그런건 잘 모르겠어"

상대의 정보는 원하지만, 이쪽의 정보는 그다지 주고 싶지 않은 아우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장로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고,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으니 적절한 답을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 수가 적으니 도시를 운영할 수 없다고 단언 할 수도 없다.
자신들의 주인같은 예가 있으니.

'아인즈님이 3명 있으면 세계를 완벽히 지배해서, 우리들이 필요 없어질 가능성


도 꽤 높고......'

아우라가 주인을 생각하고 있자, 수렵장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다크엘프 나라에서 여기까지 여행온게 아니었나?"

"응? 아닌데? 내가 살던 나라는, 아까도 말했지만 다크엘프는 거의 없어"

정확한 숫자라는 정보를 상대에게 알려주는 건 손해니, 대충 둘러댄다.

"있는 건 다른 종족들. 인간, 고블린, 리자드맨, 오크, 기타 등등이란 느낌이야.

우리들은 이 숲에 동족인 다크엘프가 있다고 듣고 온거야"

"그랬나......"

무거운 대답엔 무슨 의미가 담긴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서두르는 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아우라는, 더 깊이 물어보
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들'에 대해 물어봐줬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종족들과 함께 살 수 있다니......놀랍군"

"그래?"

절대적인 존재가 위에 있으면 아무리 종족이 많아도, 그 존귀함에 자연스레 고개


를 숙이게 되는 법.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 세계는, 다시말해ㅡ진정한 절대자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아인즈 울 고운을 세계에 널리 퍼뜨려야한다.

'절대적 지배자인 아인즈님에게, 이 세계의 모든 생물이 지배받아야 해'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 평화.
그걸 원하는 자가 있다면, 지고의 존재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우라는 자신의 주인을 모르는 다크엘프를 불쌍히 여겼다.
무지한 야만인에게 문명인이 품는 것 같은 연민이었다.

'알베도였다면 모른다고 했을 때 화낼 것 같고, 그건 좀 심하겠지? 중요한 건 알


았을 때 무릎꿇는 거니까'

하지만, 알았더라도 어리석음 이외의 이유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건 위대한 존재와 동격인 자나, 그 자의 지배를 받고 있을 경우.
지고의 존재들은 신에 필적하는 존재지만, 그와 동격인 존재도 분하지만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지고의 존재들은 상위의 존재다.
일찍이 나자릭을 더럽히러 온 자들은 전부 당해버렸고, 지고의 존재 중 한 명은
세계에서 3번째로 강하다고 했다.
하지만, 달리 존재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아주신 지고의 존재인 주인이 경계하는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아인즈님이라 걱정하시는 건 알겠지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아인즈님이 경계하는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돼지
만......'

지고의 존재에 필적하는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교묘하게 숨어있어도 타인과 연결돼있다면 다소는 명성이나 지명도를 갖


고 있겠지.
그런 존재가 역사에 새겨졌듯이.
그런데, 지금은 그런 존재의 소문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있는 여기는 변경이라, 정보가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을지도 모른다.

'데미우르고스는 아직 경계해야 된다고 했었지......'


데미우르고스는 마도왕의 탄생과 그 힘은 아무리 정보봉쇄를 해도 타국에 흘러갈
테니,
대륙 전체에 널리 퍼졌을 때가 플레이어의 존재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거라 했다.
그러니, 계층수호자로써 주인의 경고를 염두에 두어 나름대로 주의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상대가 개입해올 때는 전란 같은 과도한 혼란이 벌어졌을 때이니, 그때가
반대로 상대를 발견할 찬스라고 했다.
"분명 우리도 다른 종족과 우호적까지는 아니지만, 격하게 싸우지는 않아.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다고 해야되나.
몬스터라는 공통의 적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안전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대립하
는 면도 있고,
협력해야 되는 면도 있어...... 숲 바깥의 몬스터는 강한가?"
남자의 말에는 "그래서, 너는 강한가?"라는 질문이 포함된 것 같았다.

"ㅡ아, 응. 강하. 지? 나한텐 별로 강하지 않지만?"

남자가 뭐라고 하기전에, 아우라는 반대로 질문했다.

"숲 바깥을 모른다는데, 바깥에 나가지 않은지 얼마나 된거야?"

"이 숲에 온 건 300년 이상 전, 이라는 얘길 장로들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숲 바깥으로 나갔다는 다크엘프는 들은적이 없어"

"300년? 들은 적이 있어? 이상한 말투네......아저씨, 300년 전이면 이미 태어난


거 아냐?"

수렵장의 표정이 처음으로 크게 바뀌었다.


"ㅡ난 아직 200년 정도 밖에 안 살았어"

아우라는 수렵장의 얼굴을 보고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200년? 나이를 속이고 있나? 아니면, 이 주변 다크엘프는 나이를 세는법이 다른


곳과 다르다던가......'

거짓말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 뱉진 않는다.


대답한 남자의 분위기가 확실하게 알 정도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아마, 아니, 분명 신경쓰고 있다.
딱히 아우라가 위로해줄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면 무
슨 말이라도 건네야 겠지.

"아ㅡ, 응. 멋진 어른.....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야"

"......아니, 신경쓰지마. 그만큼 숲에서 생활하는데 고생하고 있단 뜻이야"


아우라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납득하고 있다면야, 납득하려 한다면, 아무말 않는게 상냥함이다.

"흐응. ......그럼, 숲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어? 내가 사는 나라 라던가"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봐 두는게 손해는 아니겠지.


아이의 말이라면,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라면, 멋대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혼낼 주인은 아니다.
게다가 정말 안된다면 <전언(Message)>로 연락하시겠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별로 의욕이 안나나보네. 우리나라, 상당히 좋은 나라라구? 꽤 안전하고, 다크엘


프를 먹는 저런 몬스터는 없으니까.
분명 우리나라에 와도 다른 고생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여러모로 서포트 받을
수 있을거야. 지금 같은 고생은 안하게 될걸"

"멋진 나라구나. 네 말투에서 얼마나 멋진 나라인지 알겠어. 그래도 불안을 해소


하기엔 어렵네.
새로운 장소로 간다는 불안, 거기서 지금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불안......
그럴거면 지금 이대로 사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건 내가 보수적이라 그런걸까
"

아이의 거리낌없는 말에 비해, 꽤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원래 진지하고 선량하기 때문일까, 그만큼 아우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걸까.
어느쪽이던 더 파고들면 계속 답해줄 것 같다고 아우라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그럼 시험삼아 몇 명 와보는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확실히 나쁘지 않군. ......갈지 말지. 간다면 몇 명 갈지.

그걸 정할땐, 장로들의 의견도 크겠지만......그 3명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도 적지


않겠지......"

"응? ......혹시 지금부터 만날 장로는 별로 구심력이 없는거야?"

수렵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난 싫어하지 않지만. ㅡ여기야"

나무 한그루 앞에 도착했다.
주변 엘프트리와 비슷했다.

"알고 있겠지만, 안은 그렇게 넓지 않아서. 장로들을 부를게. ㅡ장로들이여, 손님


이 왔습니다!"

약간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나무에 난 구멍에서 한 명 씩, 3명의 다크엘프가 모습을 드러내며 내려왔
다.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이다.
장로라 해도 겉보기엔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30대 중반 정도려나.

'다크엘프의 나이는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어려우니 말야... 이미 아저씨라고 실패


해버렸고......
아, 오빠라 부르는게 좋았으려나? 장로와 비교해봐도 별로 달라보이진 않지만'

아우라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뒤에 따라오던 다크엘프들이 아우라를


둘러싸듯 반원 형태로 퍼졌다.

"손님이여, 이 3명이 우리 마을의 장로들이다. 그리고 장로들이여, 소개하지.


이 분이 우르수스 왕을 쫓아내 주었다, 숲 바깥에 있는ㅡ다양한 종족이 사는,

다크엘프는 거의 없는 나라에서 왔다는 여행자다"

수렵장의 소개에 아우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숙인다해도 가볍게 끄덕인 정도다.
자신이 섣불리 행동하면, 이 마을에 장래 자신의 입장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는 생각 때문이다.
아우라는 아이지만, 이 마을을 구해준 입장.
그럼에도, 나이만 가지고 아랫사람이라 착각당하면 곤란하다.

'아인즈님은 친해지라고 지시했으니, 내가 압도적으로 위인것도 안 좋으려나?'

"......아우라 벨라 피오라입니다. 잘 부탁해요"


"음. 잘 오셨네, 멀리서 온 젊은 나무, 아우라 벨라 피오라"

가운데 선 남자ㅡ아마도 그가 장로 3명의 대표역이겠지ㅡ다크엘프가 무겁게 답


했다.
그래도 그렇게 나이 들어보이진 않았기에, 무거운 어조와의 갭이 약간 우스꽝스
러웠다.
주변에 있던 다크엘프 중 누군가가 나직이ㅡ모두에게 들릴만한 소리로ㅡ말했다.

"마을을 구해준 분에게 처음 말해야될 건 감사잖아요. 게다가 어떻게 은인에게,


태연히 반말하는 걸까"

"그래, 맞아. 고마움을 느낀다면 저렇게 인사할 순 없지. 상대가 여자애라고 건방


떠는 걸까?"

여자들의 소리다.
솔직히 말하면, 장로의 발언이 그렇게 실례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행동이라도 좋아하는 상대라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상대라면 불쾌하게 여긴다더니, 그 말대로였다.


장로대표의 표정이 구겨졌다.

"흥. 이제부터 감사를 표하려 했었다.

ㅡ아우라 벨라 피오라 공. 마을 구하고, 안킬로우르수스 왕을 쫓아내주어, 정말


감사하오"

"그래. 젊은 것들은 급해서 탈이라니까. 얘기엔 순서가 있는거야"

장로 대표 옆에 선 여자 장로의 말에, 다른데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순위를 모른다고 하는건데 말야. 나이를 먹으면 뇌가 딱딱해져서 곤란하네"

아우라가 수렵장을 힐끗 보자, 속이 쓰린 표정이었다.


"누구 편이야?" 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거겠지.
오른쪽 남자 장로도 같은 표정이다.
다른 두 명의 장로는 험악한 표정으로, 여자 장로는 거의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
다.
'이거......내가 어느 위치에 설지, 제대로 생각하고 태도를 정해야겠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어느 파벌도 아우라라는 외부의 강대한 힘을 갖고 싶어 하겠


지.
그 때 아우라는 어떻게 행동해야 나자릭에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일일이, 주인에게 판단을 물어보는게 가장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주인의 지시 없이, 아우라의 판단으로 움직여야 할 때도 있을 터.

'아인즈님이 답을 알려주시면 간단할텐데......'


목적을 가르쳐주지 않으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계층수호자를 포함한,
"아인즈 울 고운"에 소속한 자들의 성장을 바라고, 각자의 자주성을 기대하고 계
시기 때문이리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기대하고 계신다.
하지만ㅡ아우라에겐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내가 실수해도 나중에 평소 같은 굉장한 책략으로 어떻게든 해주실 생각이시겠


지만......'

그렇다고 실수해도 될리 없다.


주인이 뒤처리를 해준다고 부주의하게 행동하는건 불충한 것이다.
계층수호자로서,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아우라는 진지하게 생각해서 나자릭에 가장 큰 이익을 발생시킬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각오를 정한 아우라가 보기에,

눈앞에서 벌어진 다크엘프들의 말싸움은 손님앞에서 집안싸움이라니 바보들 아


닌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이 대립을 어떻게 살릴지.
어쩌면 이게 중요해질 가능성도 있다.

'......아인즈님은 이걸 노리고?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니겠지. 이 마을이 이런 문


제가 있다는 정보는 얻지 못했을 테니.
그래도 이 마을에 들어가 우호적 입장을 만들어 두라는 명령을 생각하면 여기선.
.....'

"저기ㅡ 멀리서 왔는데 일부러 후회하게 만드는거야? 그런 게 아니면 나 없는 데


서 해줄래?
돌아갔을 때, 다른 종족의 지인에게 다크엘프 마을은 좋은 곳이었다고 자랑할만
한걸 보여줬음 좋겠는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당연하다.
자신들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걸 다른 종족에까지 알리고
싶진 않겠지.
아우라는 솔직히 너무 세게 말했나 싶기도 했다.
아무리 마수곰ㅡ안킬로우르수스를 쫓아냈다고는 해도, 애가 건방지게 말하고 있
으니.
양쪽 파벌 모두를 적으로 돌렸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꼭 실패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우라는 마을의 위기를 구해준 여행자.
그걸 잊고, 자신들의 추태는 모르는 체 아우라를 배제하려 하는 자는 인격파탄자
다.
그런 인물이 아군이 아닌, 적이 되어주면 오히려 고마운 것이다.
분명 주인에게 받은 지령은 우호적인 입장을 만들어두란 거였지만, 모든 다크엘
프와 친해지란 말은 아니다.
계획의 전모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나자릭에 부적절한 다크엘프는 없는게 좋
을 것이다.

'게다가 파벌 하나를 적으로 돌리면, 원래 적대하던 다른 파벌은 날 아군으로 삼


으로 할테니.
그래도 상관없고, 어쩌면 날 중심으로 제3파벌을 만들어도 좋으려나'

설령 두 파벌을 적으로 돌려도, 수렵장처럼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다크엘프


가 있다는걸 어렴풋이 알았다.
최악이라도, 그들을 아군으로 삼으면 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주인에게 사죄해야 되겠지.

"으흠. 그래서 아우라 벨라 피오라 공은 대체, 이 마을에 뭐하러 오셨는가?"

"피오라가 성이니까 그렇게 불러줘. 음, 눈치는 챘겠지만, 이 숲에 다크엘프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래,서 동족을 만나러 왔어. 내가 사는 곳엔 다크엘프가 거의 없어서 말야.

그래서 혹시 허락해준다면 이 마을에 잠깐 머물러도 될까?"


"그건 상관없다만ㅡ혼자인가?"

"지금은 혼자야"

"지금은?"

"응. 나는 숲을 다니는게 특기라, 먼저 가라고 부탁받았어.

원래 예정대로면 앞으로.....늦어도 3일정도? 있으면 남동생과 아저씨가 올거야"

말할 것도 없이 아저씨는 주인, 아인즈 울 고운이다.

"아저씨?"

"응. 친ㅡ부모는 행방불명이라"

마음속으로 부글부글찻주전자에게 아우라는 사죄했다.

"아저씨가 길러줬어"

거짓말하는게 얘기는 빨리 진행되겠지만,

나중에 거짓말이라 들키면 귀찮으니 최대한 사실과 동떨어진 말은 안하기로 했


다.

"그런가...... 실례되는 말을 물어봤군.

그래서 혼자 온건가ㅡ안킬로우르수스를, 그것도 로드를 쫓아낼 실력이 있다면 가


능하겠지"

좀더 위로해줄줄 알았던 아우라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긴 위험도가 높은 대수해.
부모를 잃는 아이 같은 건 드물지도 않기에 위로할 정도는 아니란 거겠지.,

"여기 머물러도 우린 전혀 상관없다. 원한다면 엘프트리를 빌려줄텐데 어찌할텐


가?"
"응. 부탁합니다"

"알겠다. 누구ㅡ아플. 빈 엘프트리까지 피오라 공을 안내해주게. 괜찮나?"

대답한 건 수렵장이었다.

"물론. 맡겨주게.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엘프트리로 안내하지"

"그리고, 3일 정도 뒤에 아저씨와 동생분이 온다면, 환영식은 같이 해도 되겠지?"

"물론. 그렇게 부탁해요!"

"그럼 피오라 공. 나중에,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그리고 다크엘프가 없다는 피오라공의 나라 얘기도 들려줬으면 좋겠네.


우리는 이 숲 바깥을 전혀 몰라서 말이야. 물론, 괴롭다면 무리하게 말하지 않아
도 좋네"

자, 어떡할까.
아우라는 생각했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이쪽의 신원을 밝히는 메리트는 없다.
이목을 끌기 위해 말해도 좋지만, 이미 역량을 보여줬으니 역시 의미는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정보를 흘리는 것도 좋지 않겠지만, 비밀주의로 밀고 나가도 좋지
않다.
그럼 거짓말을 할까, 아니면 옳은 정보를 조금씩 풀까, 허실을 조금씩 섞을까......

'장래적으로 얘기가 어긋나지 않게끔,

아인즈님과 마레와 상담해서 말을 맞춰야 할 텐데, 아무말도 안한다는 선택지는


없겠지.
나중에 올 아인즈님한테 물어보고, 라고 말하고 싶지만, 왜 그렇게 숨기는걸까 여
길거 같으니......'

이 상황에 상대에게 의심받아 좋을게 없다.


특히 주인의 최종목적을 간파할 때까진, 우호적으로 헤어지는것도 고려해야 겠
지.

'으음. <전언>이 오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 답하라는 생각이시겠지. 그래


도 아인즈님은 어떻게 해야 좋아하실까?'

"ㅡ피오라 공, 무슨, 일인가?"

약간 침묵이 길어진 모양이다. 아우라는 웃었다.

"아아, 말해도 믿어줄까 싶어서, 뭐, 여행이나 사는 곳 얘기를 조금은 해도 되겠


지. 요정의 작은길 이라던가"

"요정의 작은길!? 그건 전설이 아니었나?"

주변에 있는 다크엘프가 말했다.

"......달의 길이나, 요정의 작은길은 실제로 있어"


나자릭 제6계층에는 말이지만.

"그래서, 요정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겐 장소같은 구체적인 얘기는 못하겠어"

"후후. 미안해요, 피오......아니, 아우라 공이라 불러도 될까요?"

여자 장로가 눈을 빛내고 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다.
왠지 싫지만, 주인의 명령을 생각하면 거절할 순 없으니까.

"괜찮아"

"그래. 아우라 공.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좋은 이름이네"

"고마워"

아우라는 방긋, 사심없이 웃었다.


지고의 존재가 자신에게 붙여준 이름을 칭찬하고 있으니 그걸 부정할 수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아첨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 더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 반응에 여자 장로는 만족한 모양이다.
기분 좋은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우라 공도 요정에게 선택받은 다크엘프구나. 훌륭해. ......이 마을엔 선택받지


못한 자가 많아.
그래서 우리들ㅡ예전에 북쪽에 살던 다크엘프들이 어떻게 이동해왔는지를 모르
는거야"

'......요정의 작은길로 다크엘프들이 여기까지 온건가? 그게 그런 능력이 있던


가?'

나자릭 안에 있는 요정의 작은길은 그렇게 먼 거리를 전이하는 힘은 없다.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요정의 작은길일지도 모른다.
정보를 얻어낸건 좋았지만, 조금 실수 했으려나.
아니, 다시 생각했다.
정보를 잘 이끌어내서. 그리고ㅡ

'아인즈 님에게 칭찬받아야지!'


마음속으로 아우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우라가 수렵장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를 써서, 계속 아우라의 뒤를 따라온 아
인즈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동격의 적대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다크엘프와 아우라의 첫 만남이
대단히 잘 풀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좋은 인상이 진심일거라 단언할 순 없다.
일부러 멀리서 왔다는 아이에게 냉담한 대응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자는 인간
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다.
환영하지 않더라도, 보통 조심스레 숨기겠지.
그러니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연기인지 아닌지 확신을 얻고 싶다.
전에 엘프처럼 납치해, 매료계 정신조작을 쓰면 간단하지만,
<기억조작(Control Amnesia)>까지 쓰면, 후처리가 귀찮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두고싶다.
죽여버릴거라면 얘기는 빠르지만.

우선 이대로 마을의 상황을 살펴야겠지.


변화라곤 없을 것 같은 마을에, 아우라라는 새로운 화제가 날아들었으니.
지금쯤 마을 사람은 아우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안달 났을 것이다.
아우라가 없을 때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솔직히 감정을 토로하고 있을지.
<완전불가지화>상태인 아인즈에게 지금은, 거짓 한점 없는 생생한 정보를 모을
찬스다.
장로 3명은 방금전 나무로 돌아가, 모여있던 다크엘프들도 제각각 흩어졌다.
문제는 어떤 다크엘프를 따라가 얘기를 들어볼까 라는건데.
아까 모인 아우라와 비슷한 나이대의ㅡ키로 추측했을때ㅡ아이들이 있었다.
사실은,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고 싶다.
그들이 말하는 아우라의 평가를 듣고싶다.
그런데ㅡ"저 여자애"라는 소리가 아까 그 나무에서 들려온다.

'젠장! 저 장로들 얘기를 훔쳐들어야 되잖아!'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은ㅡ둘의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의미와는 다르지만ㅡ


장로들의 얘기를 들어야한다.
아인즈는 <비행(Fly)>를 유지하면서, 장로들이 들어간 나무 입구까지 둥실둥실
떠올랐다.
머리를 들이밀자 3명의 장로는 없었다.
계단이 있어, 윗층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도 들리지만 만약을 위해, 계단을ㅡ<비행>으로ㅡ올랐다.

"그래서 저 소녀의 말, 어디까지 진실이라 생각하나? 요정의 작은길로 여행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만"

가장 나이 많은 장로의 어조가 아까와는 약간 다르다.


이정도는 평범하다.
아인즈도 말할 상대와 관계에 따라 어조는 얼마든지 바꾼다.
반대로 바꾸지 않는게 조금 무서울 정도다.
즉, 그가 친구와 말할땐 이런 느낌이란 소리겠지.

"전부 거짓말은 아니라고 봐요. 요정의 작은길을 쓰지 않으면 저런 작은 애한테


여행은 힘들잖아요?"

"그렇게 단언할 순 없겠지. 저 우르수스 왕을 쫓아낼 정도의 힘을 가졌는데?"

"어머, 그건 그 무기의 힘 아닐까요? 봤잖아요? 그 빛나는 활을! 그건 분명 엄청난


물건이예요!
어쩌면 요정에게 받은걸지도 몰라요"

아우라가 들고 있던 활은, 아인즈가 갖고 있던 것으로 위그드라실에선 별로 강하


지 않은 부류였다.
하지만, 분명 화려함은 톱클래스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도 룬을 선전해야 되려나......'


아인즈가 생각하는 사이에도 장로들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 아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일까. 가능하면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건 어렵겠지. 나중에 올 아저씨와 동생분이 합류하면 금방 여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걸?
여기 말고도 다크엘프의 마을은 몇 개나 있어. 다른 마을도 돌아보면서 교우관계
를 넓히고 싶을지도 모르니.
그 아이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ㅡ동족을 만나러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에 집
착할 이유도 없을테니"

"그렇군. 우리ㅡ동족을 어떤 이유로 만나러 왔는가, 그걸 제대로 들어둬야 겠군.


그러기 위해서라도 환영 잔치는 크게 벌여야겠어"

"그래, 그 말대로야. 다른 마을에 가더라도 이 마을이 가장 인상에 남게끔, 마을의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잔치를 열고 싶구만.
3일후를 대비해, 식재료 보존에 힘써야겠어"

"젊은 녀석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마을을 구해준 그 아이의 가족을 위한 잔치인데? 협력하지 않


을 순 없다고 젊은것들도 알고 있을거야"

"그래. ......잔치 때 요정의 작은길 같은것도 아저씨라는 분께 물어보면 되겠지.


우리가 환영한다 기분이 전해지면, 입도 다소 가벼워질거야"

"맞아요. 그건 그렇고 이 마을에 남아줬으면 좋겠네요"

"......꽤 집착하는 군. 그렇게 요정에게 선택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매력적인가?


"

"그래요. 맞잖아요. 우리들ㅡ아니, 이 주변 마을의 최초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요정의 축복을 잃어버렸다구요.
혹시, 저 아이가 여기 남아준다면......"

"다른 마을에 세게 나갈 수 있겠다 같은걸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그럼 자네가 하


는 모든일에 반대할거야"
"그런 말은 안 해요. 하지만 어떻게 요정의 축복을 받았는지 알면, 우리들도 되찾
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얘기를 들어보니, 요정이란건 종족이 아니라 정령에 가까운 요정을 말하는 것 같


다.
그런 요정 또는 축복받은 요정(Seelie Court)이나 저주받은 요정(Unseelie
Court)을 친구로 삼는 클래스를 가졌다는 소리일까.
그건 특수능력 중 하나로, 요정의 작은길 같은 전이계 능력도 쓸 수 있는 클래스
였을 터.

'확실히 확인해두는게 좋겠다'

그리고 아우라와 정보를 공유해 둬야지.


아인즈가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에도 장로들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렇게 되면 저 젊은것들도 우리들을 다시 볼거예요"

"억지로 얘기를 꺼내려고 하지말게. 그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아저씨나 동생


분에게도 경의를 표해.
그들이 원래 나라로 돌아갔을 때 이 마을의, 다크엘프의 악담이 퍼지는 건 참을
수 없다"

아인즈는 눈을ㅡ공허한 눈가에 떠오른 붉은 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흠...... 이 마을은 실패였나? 아우라가 마을 내부 대립의 도구로 쓰이는 건 딱 싫


은데'

부글부글찻주전자가 맡긴 아이의 마음을 상처입히다니 용서할 수 있을리 없다.


여자 장로에게 아인즈는 짜증이 났다.

'......어른과는 친해지지 않게......여기선 아이들이 순수하길 바라볼까'

3명의 얘기가 잔치 얘기로 이어져,


아우라가 의심받지는 않는 것 같다고 안도한 아인즈는 <상위전이(Greater
Teleportation)>를 썼다.
그리고 전이한 곳에서 <완전불가지화>를 해제했다.
"아, 아인즈님. 어서오세요"

그린 시크릿 하우스 밖에서 기다리던 마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다, 마레. 여긴 아무일 없었나 보구나"

마레 옆에는 상위 언데드 작성으로 만든 백안시체(Eyeball Corpse)가 떠다녔다.


아인즈는 시선을 돌려, 그 거체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구나, 펜리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네, 네. 아직이예요"

펜리르에겐 다크엘프 마을에서 도망친 안킬로우르수스를 여기까지 데려오게 시


켰다.
다크엘프들에게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우라라는 히든카드를 손에 넣었으

안킬로우르수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흔적을 쫓아오겠지.
그러니, 임시 거점에 안킬로우르수스를 데려올땐, 다크엘프 토벌대의 눈을 속여
야했다.
하지만 안킬로우르수스는 거대해서, 은폐나 이동에 관한 특수능력이 없었기에,
흔적을 스스로 없애게 하는건 어렵다.
그럼 안킬로우르수스 말고 다른 누군가가, 어떤 수단으로 그걸 숨겨야 했다.
그래서 펜리르에게 시킨 것이다.
펜리르에겐 숲 건너기라는 능력이 있다.
안킬로우르수스를 등에 태워버리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아인즈가 그곳까지 가서 <상위전이>로 이동하거나, 나베랄처럼 <비행>으
로 들어서 옮겨서 여기까지 데려와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인즈는 아우라와 함께 다크엘프 마을에 들어가 정보를 전력으로 수집하
면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아우라의 도주를 돕거나,
적을 섬멸한다는 역할이 있었기에, 펜리르에게 맡겼다.

'약간 예상이 틀어졌네...... 도망친 안킬로우르수스를 토벌하려고, 즉시 아우라를


포함한 부대가 쫓아올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내가 그쪽으로 갔어도 괜찮았겠네...'

"그러냐. 그럼 여기서 조금 기다릴까. 우선 걱정하고 있었을테니 말해두마


......뭐, 내가 혼자 돌아온 걸로 알았을테고, 아우라에게서도 아무말 없었겠지?"

아인즈의 질문에 마레가 끄덕였다.

"그런거다. 무사히 다크엘프 마을에 잠입한 모양이다"

마레와 아우라는 아이템으로 쌍방향 통신이 가능하다.


마레에게 아우라가 SOS를 보내지 않았으니 그녀는 안전하겠지.
하지만 아우라가 긴급사태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력화되는 일도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방심할 순 없다.
게다가 잠입시킬 때, 아우라의 장비를 변경했기에, 평소보다 훨씬 약해졌다.
지금 아우라를 죽이는건 평소보다 훨씬 쉽겠지.
그걸 알면서도, 몰래 호위를 붙이지 않은 건 당연히, 아인즈 혼자 그걸 결정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라와 마레와 상담한 결과, 아우라 주변에는 아무것도 배치하지 않기로 했다.
아인즈에게 위가 있었다면 고통에 혼절했을지도 모를 불안을 가진 채 결정했다.
아인즈는 지금도 이 결정이 틀린 것 아닐까, 고민했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지 않았을까.
예를들면 아인즈가 만드는 언데드 중엔 비실체 존재도 있었다.
그런걸 어딘가에 숨겨두던가.
아우라 주변에 아무것도 배치하지 않는 메리트는 2개.
하나는 비상사태에 상황에 따라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ㅡ나자릭 사람들, 부하가 없는 곳이라면, 아우라도 나자릭을 잊고,


어깨에 힘을 빼고 느긋한 기분으로 다크엘프들과 접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러면.
.....'
ㅡ아우라에게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아우라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아우라가 마을의 구세주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는 것.
우는 붉은 오니 작전이 나빳냐면, 그렇지는 않다.
그 이상으로, 빨리 쉽게 아우라를 마을안에 녹아들게 할 수단은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지나쳤다.
처음에, 대등하지 않은 현실세계에서 만났다면, 스즈키 사토루는 "아인즈 울 고운
"의 멤버들과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
그것처럼, 지금 아우라는 마을을 구한 은인이라는 입장이며, 그냥 마을 어린아이
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걸 대등하게 만드려면 아인즈가 움직여야 한다.
그래.
아인즈는 아우라를 단순한 어린아이로 끌어내려야 한다.
아인즈는 마레를 봤다.
아우라에겐 친구를 만들 기회를 주었는데, 마레에게 주지 않으면 불공평하겠지.
아우라 뿐 아니라 마레에게도 친구를 만들 찬스를 주고싶다.
아우라도 마레도 부글부글찻주전자에게서 맡아둔 아이들이다.
그 둘에 차이를 둬선 안된다.
분명 서로의 개성을 고려해 키우는게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찬스는 공평히 주어져야겠지.

'애를 길러본 적도 없는 내가 뭔 생각인지. 아버지는 어떤 건지 누구한테 물어봐


야......'

문득, 운필레아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쁘진 않겠는데. 그는 제대로된 아버지니까. 하지만ㅡ'

그렇다. 하지만, 마레에겐 하나 문제가 있었다.


마레의 쭈뼛대는 성격은 아니다.

'부글부글찻주전자 씨의 취미로 마레는 여장하고 있으니...'

다크엘프의 마을을 보고 왔지만, 대부분의 마을사람은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끔, 긴 치마를 입은 다크엘프도 있었지만,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그 여자들은 밑에 긴 바지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치마를 들춰 볼순 없었기에,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건 타이츠였을지도 모른다.
숲에서 살 때는 피부를 드러내면 별로 좋지 않다고 아우라가 설명해주었기에, 여
성도 긴 바지를 입는건 그런 이유겠지.

'<완전불가지화>는 상대를 공격하면 마법이 풀려. 아니, 상대에게 위해를 가한다


는게 정확해.
그럼......치마를 조금 들쳐 엿보는 건 공격에 해당하는 걸까?'

지금까지 그런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아인즈는 슬쩍 마레의 얼굴을 봤다.
"아, 어, 왜, 왜그러세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바보냐! 뭔 생각 하는거야!'

멀쩡한ㅡ아니, 지극히 정상인 자신이 질책했다.


물론, 그런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마법 분야에서 자신이 모르는 걸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강하게 자극됐다.

'ㅡ그만둬! 아인즈! 뭔 생각 하는거냐! 마레의 치마를 들춰보고 싶다니 정신 나간


정도가 아니라구!'

마레는 말하면 용서해주겠지만ㅡ

'ㅡ나는 뭘 상상하고 있는거냐!'

"무, 무슨일이세요?"

"ㅡ아니, 너무 멍청한 생각을 해버려서 말이다. ......장래적으로 실험할지도 모르


지만, 지금은 아니고, 대상도 다르겠지"

의아한 듯한 표정의 마레에게 더 말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마레보다 알베도에게 하는게ㅡ좋다고 할까, 정상이다.
아인즈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근본적으로 다를거라며 쿡쿡 자극되는 호기심을 머
리에서 떨쳐냈다.

'어쨌든, 여장하고 있는 마레는 이상하게 생각되서, 소외될지도 몰라. 그렇게 될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하지만......왜 여장일까......
아니아니, 그게 아냐. 지금 생각할건 그게 아냐. ......찻주전자씨가 입혔으니 내가
한마디해서 그만두게 하는건 틀림없이 잘못됐어.
잘못됐지만......내가 일단 관두라해도 되는건가? 만약 마레가 여장을 그만두면
아우라와 함께 마을에서 생활하게 해도 괜찮을테고...... 하지만.......'

설마 예전 친구의 취미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나 고뇌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저기, 마레. 물어볼게 있는데......"

"네"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마레.

'......찻주전자씨. 난 틀린걸까?'

아인즈의 뇌리에 핑크색 덩어리가 떠올랐다.


어째선지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고 있어 짜증났다.

"저, 저기......"

"......미안하다, 마레. 조금 생각에 빠져버렸구나......"

폐도 없는 몸으로 후우~ 숨을 내쉰 아인즈는 마레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마레여. 그 여장을 일단 그만뒀으면 좋겠다"

말이 부족하다.
아인즈는 그걸 이해하고 있기에, 마레의 표정이 변하기 전에 빨리 덧붙였다.

"들어다오 일단이라 말했듯이 영원히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아우라의 서포트를 위해 마레도 마을에 갔으면 좋겠다는 건 알고있겠지?그러기
위해 저 다크엘프 마을에 있을때만이다.
이건 어떤 의미로 잠입공작의 일환으로 그 옷으로는 눈에 띄니까 다른 옷을 입고
임무를 수행하면 어떨까"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마레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왜, 나만, 이란 거겠지.
아우라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아인즈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여장은 이상하지만, 남장은 이상하지 않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나. 부글부
글찻주전자는 거기까지 생각해ㅡ

'아니, 취미ㅡ혹은 성벽이야. 페로론 씨의 누나잖아'


그러니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행운이게도, 나자릭에 있을 때의 장비는 너무 눈에 띄니 아우라의 장비도 상당히
변경했다.
그게 이때 도움이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우라도 약간 의상을 바꿨잖니? 너무 강한 옷이면 의심받으니 말이다. 어떠냐?


"

'치사하......다. 마레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건, 마레에게 책임을 강요한다는 거야'

"아,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아인즈님"

"괜찮나?"

"네, 네. 잠입을 위해서라면, 그, 부글부글찻주전자님도 분명 알아 주실거예요"

"그, 그러냐. 음. 분명 알아 줄거다"

여장을 통해 마레가 부글부글찾주전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아인즈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옛 친구를 떠올렸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마레에게 괴로워하며 사과할 것 같아...... 아니, 반대일 확률


도 상당히 높나......?'

하지만, 이걸로 아우라와 마레의 친구 계획은 최종단계에 들어섰다. 고 생각해도


되겠지.

"좋다. 그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아우라와 합류하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런 활을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잡아당겼다.
이건 원래 마을에 있었던, 가장 힘이 센 자도 당길 수 없었다는 강궁이다.
그걸 아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당기는 모습을 본 다크엘프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
레 뜨더니 곧 납득했다는 표정을 띄웠다.

"ㅡ보관상태가 상당히 나쁘네. 소리가 나는 건 여기저기가 열화돼서 그런 거야,


아무도 당길 수 없었던 건 단순히 망가져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으음, 빗나갈 거
같은데. 노린 데로 쏴질까......"

아우라는 지금 기가혼 엘크라는 이름의 말코손바닥사슴 같은 마수를 노리고 있


다.
이상하게 큰 뿔을 가졌으나, 숲 건너기 능력으로 숲 속에서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마수다.
그 능력을 살린 돌진공격의 파괴력은 굉장하다고 한다.
여기서 아우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다면, 일류 사냥꾼 같
아 멋지겠지만,
아인즈에게 보이는 아우라의 옆모습은, 뭐랄까 평소의ㅡ어떤 의미로 긴장감이 없
는 표정이었다.
주변에 있는 작은 돌을 적당히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아우라 옆에서 같은 사냥감을 노리는 다크엘프 마을의 레인저 3명ㅡ남자 둘, 여
자 하나ㅡ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였고, 자신의 존재를 사냥감에게 감지되지 않도록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인즈는 모르겠지만, 분명 감정을 죽여 기척도 죽이고 있는 거겠지.
그런 그들은, 한손에 활을 들고는 있지만, 당기고 있진 않다.
원래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혹은 격렬한 반격을 피하기 위해, 일제히 활
을 쏘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러지 않는 이유는 아우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건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로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전원이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사냥은 기본적으로 사냥감의 반격을 우려해,
최대한 안전한 나무 위에서 손쉬운 사냥감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매복형 사냥이
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있는 건 아우라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냥 멤버들과 함께, 가장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떨어지는 아인즈는 어떡하


고 있냐면,
평소처럼 <완전불가지화(Perfect Unknownable)>를 쓰고 있다.
너무 많이 써서 "이거만 써도 괜찮은걸까" 하는 불안함이 생기기도 한 마법으로
완벽히 기척을 숨기고 있어, 사냥감도ㅡ다크엘프 들도 눈치챈 기색은 전혀 없었
다.
이 사냥중 계속 뒤를 따라왔지만, 눈치챈건 아우라 뿐이었다.

아우라가 활을 쐈다.
아주 조금ㅡ한 번 깜박일 정도였을까ㅡ정말 조금 늦게, 기가혼 엘크가 주위를 확
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활을 쏠 때, 자연계에선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그걸 들은 걸까.
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게다가 표적과의 거리는 충분했고, 상식적으로는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기가혼 엘크가 반응한건 어째설까.
우연이라는 답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터.
아니면 특수한 능력이 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공격한 순간 쏘아진 기척ㅡ아인즈의 추측이지만ㅡ을 민감하게
감지했겠지.
하지만, 아주 조금 반응하는 것조차 예상한 듯, 움직인 기가혼 엘크의 머리에 아
우라의 화살이 육체의 저항을 무시하고 꽂혔다.
기가혼 엘크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지만ㅡ쓰러지지 않는다.
뇌를 화살로 뚫렸는데도.
마수, 야수를 통틀어 짐승들은 생명력이 왕성하다.
아우라가 평소 장비하는 위그드라실의 활이라면 틀림없이 치명상이었겠지만,
다크엘프들에게 빌린 활로는 일격에 죽일 수 없었나 보다.

‘이렇게 보니 장비나 무기의 성능이 주는 영향이 크네.


뭐, 아우라 자신도 그렇게 강한 특수기술은 쓰지 않은 것 같으니, 썼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

사냥감은 머리에 화살을 깊게 박힌채 튀어 오르듯 움직였다.


큰 상처를 입었기에, 싸우지 않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우라가 한 발 더 쐈다.
다시 머리를 뚫려, 기가혼 엘크는 마침내 대지에 쓰러졌다.

"뭐, 이정도려나"

"역시 대단합니다, 피오라님!"


당연한 결과라는 아우라의 태도에, 진심으로 반한 듯 소리를 높인 건 아우라와 가
장 가까이 있던 다크엘프 남자.
프람・가넨이라는 부 수렵장의 지위에 있던 자였으며, 이번 아우라의 사냥 멤버
중 리더였다.
그 반응도 표정도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고, 아우라에겐 큰 아군이 생긴 것 같았
다.
하지만 아인즈는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반응이 너무 좋다.
그 남자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존경과 동경과 경의와 열망이 섞여있어ㅡ
성왕국에 있던 눈이 무서운 소녀가 되살아난 뒤 보여준 것과 비슷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겉모습이 띠동갑 차이나는 아이를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이걸로 이 멤버의 사냥은 두 번째지만,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분명 아우라는 안킬로우르수스를 쫓아냈다.
하지만 그건 전투력이 높다는 의미였을 뿐, 사냥의 재능은 또 다를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우라에게 동행을 제안했을 때엔 레인저로써의 실력은 어떤지 시험해보
겠다는 얘기를
<완전불가지화>를 쓴 아인즈 앞에서 했었다.
하지만ㅡ대수해를 걷는 아우라의 명민함에 전율하고, 기척을 죽이는 기술에 경악
하며, 활을 쏘는 모습에 놀라버린 것이다.
멍해진 듯 입을 벌린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지금은 아마 다크엘프 마을에서 아우라의 제일가는 신자일 것이다.
하지만, 아인즈의 목적을 생각하면 그의 존재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존재가 있으면 아우라를 한 명의 아이로 되돌리기 힘들어진다.
이게 아우라를 이용하기 위해 들러붙는 거였다면 그나마 다루기 쉬웠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대응하기 곤란했다.

'죽이는 건 마지막 수단이고......'

"이봐이봐, 칭찬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빨리 해체해"

"네! 알겠습니다, 피오라님!! 가자, 얘들아!!"

프람을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나머지 다크엘프 두명ㅡ


아우라를 존경은 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태도를 보이는 프람 탓에 냉정함을 유지
하고 있다ㅡ도 움직였다.
기가혼 엘크의 다리에 로프를 감아, 가까운 나뭇가지에 걸어 그 몸을 거꾸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기가혼 엘크는 거대해서, 3명이 달려들어도 그 몸을 들어올리는건 상당
히 어려운 모양이다.
아우라는 손을 뻗어 로프를 잡더니 "얍!" 가볍게 소리내며, 동시에 로프를 당겼다.
3명이 달려들어도 고생하던 사냥감이 간단히 올라갔다.

"역시 대단합니다! 피오라님!"

프람의 칭찬을 받자, 아우라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이해한다.
나자릭의 부하들을 떠올리면서, 아인즈는 크게 끄덕였다.
엉뚱한 걸로 칭찬받는것도 기분 나쁘지만, 간단한 걸로 과장된 칭찬을 받는것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바보 취급하나 의심하게 된다.
아인즈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그런건가 생각중에도 해체는 계속 진행됐다.
다크엘프 남자가 사냥감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게 나왔다.
사냥감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가진 특수한 힘같다.
하지만, 아인즈가 아는 한, 단순한 레인저에게 이런 능력은 없었기에 드루이드나,
이 다크엘프가 습득한 다른 클래스의 힘이겠지.

그 후 목을 자르고, 흘러내린 피를 밑에둔 그릇에 모았다.


피를 빼는 건 혈액속에 있는 잡균의 번식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방금 다크엘프의 힘만으론 이런 거구를 냉각하기에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
그릇에 담은 피는 요리 등에 쓰인다고 한다.
피를 들고 이동하면 육식 짐승을 끌어들이기에 다크엘프들만 나가는 사냥에선,
거의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첫 번째 사냥때 아인즈도 들었다.
머리와 내장은 파둔 구멍에 전부 버리고 간다.
평소엔 내장 중 일부를 가져갔지만, 이번엔 기가혼 엘크의 몸만으로도 충분히 무
겁기 때문이다.
지금은 여기까지.
가죽을 벗기는 등 나머지는, 마을에 가져간 후에 하는게 다크엘프류.
아는체 한 아인즈였지만 그럼 일반적으론 어떤 순서인가요 라고 물으면,
사냥 지식 같은 건 모르기에 전혀 모른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다크엘프류가 평범한건지도 모른다.
다크엘프들은 사냥감을 지면에 내리고, 막대기에 동여맸다.
그리고 동시에 "영차" 소리를 맞추어, 들어올렸다.
상당히 무거워 보인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도체율이 50%이상 정도 되려나.
아우라는 그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
아우라의 역할은 주변 경계다.
일행은 다크엘프 마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사냥은 매복형이라 사냥감을 죽이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이번엔 아우라 덕분에 빨리 사냥감을 가져갈 수 있게 되어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숲에서 사는 다크엘프라도, 안전한 마을을 벗어나는 건 신경이 소모되는 거겠지.

"ㅡ이야, 역시 피오라님. 오늘도 훌륭한 활솜씨 였습니다"

걷기 시작해 처음 입을 연건 프람이다.
아첨하는게 아니라, 마음 깊이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 뭐, 너희들보단 대단할지 몰라도......위에는 위가 있어.


그......친척......음~. 실례려나. 뭐, 대단한 사람이 있어. 아! 삼촌 말고"

"......삼촌분과 동생분이 곧 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역시 둘 다 실력 좋은 레인저


입니까?"

"아니, 둘다 레인저가 아냐"

"그렇습니까? 이 숲을 둘이서 오신다니 상당히 실력 좋은 레인저라 생각했습니다


만...... 그럼 어떤 분들 인가요?"

"......실력이 좋은건 사실이야. 뭐 어떻게 실력이 좋은지는, 곧 알게 될테니까. 기


대하고 있어.
그보다 미안한데, 경계에 집중하게 해줄래? 나 혼자라면 여유롭게 도망칠 수 있
지만,
모두를 생각하면 1초라도 빨리 발견할 수 있냐 없냐가 생사를 가르잖아?"

아마 아인즈나 마레의 능력을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지 망설였기에,


선수를 쳐 상당히 훌륭한 변명으로 대화 자체를 막아버린 거겠지.
하지만 그걸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분 좋게 말걸었는데 상대가 대화를 꺼려했을 때, 비록 납득가는 이유를 들었어
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불쾌해하는 자도 있지 않을까.

'아우라의 신자니 괜찮을것 같지만, 상대는 그 마을에서 나름 권력자.


괜한 미움으로 아우라의 평판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땐 여러모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

지금 아우라의 평판이 떨어지는 게 반드시 나쁜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예상보


다 더 나빠지는건 곤란하다.
하지만, 아인즈의 걱정은 예상대로 의미없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굉장한 기세로 프람이 고개를 숙였다.

만약 사냥감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바닥에 엎드려 숙이ㅡ것과 비슷한 엘프류 사


죄ㅡ지는 않았을까.
이런 과한 반응이 바로 신자라 생각하는 이유다.

"아ㅡ. 뭐, 나름 실력이 좋으니까, 평소라면 알아챘겠지?


내가 같이 있으니 약간 긴장이 풀린 거 같은데, 그만큼 내 실력을 높게 사준다는
거잖아?
그건 기쁘지만, 때와 장소를 조금 생각해줬음 한다는거야"

'호오~ 상위자로서 상당히 잘 위로하네......계층수호자의 경험이 도움이 된 걸지


도 몰라.
NPC가 성장한다는 증거라 생각하니 조금 기쁘네. 아니면......부글부글찻주전자
씨에게 이어받은 무언가 일까.
그런거면 그건 그거대로 기쁘네. 아우라 마음속에 찻주전자씨가 살아있다는 증거
니까'

아우라 뒤에 핑크색 덩어리를 떠올리며ㅡ그다지 좋은 그림은 아니지만ㅡ아인즈


는 움직이지 않는 표정으로 웃음지었다.
일행은 아우라에게 들은대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입을 닫은채 돌아갔다.
그대로 한 번도 맹수와 만나지 않고, 무사히 마을까지 도착.
그리고 안전지역까지 돌아왔다고 확신한 프람이 소리를 질렀다.

"ㅡ모두! 기뻐해라! 이번에도 피오라님이 거대한 사냥감을 잡았다구!!"

아인즈는 혀를 찼다.
이 전개는 예상했지만, 그걸 막을 수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위험한 곳으로 나간 사냥꾼이, 사냥한 사냥감을 자랑하는건 당연했고, 그게 누구
의 공인지 알리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아우라는 외부인이니, 그 입장을 좋게 만들어주려는 행동이겠지.
하지만, 아인즈는 그 호의를 벼로 바라고 있지 않았다.
엘프트리에 걸린 다리를 건너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거대한 사냥감을 감탄의 눈
길로 바라봤다.

"그럼, 난 돌아갈게"

"네! 뒷일은 맡겨주십시오, 피오라님!!"

프람에게 뒷일을 맡기고, 아우라는 모여든 마을사람들을 지나쳐 마을에서 빌린


집으로 걸어갔다.
혼자 돌아가는 아우라를 따라가고 싶다.
하지만, 아우라의 입장 변화 등 세세한 정보 입수는 반드시 필요해서, 아우라를
따라갈 순 없었다.
아우라가 고개만 돌려, 공중에 멈춘 아인즈쪽을 바라봤다.

'외로워 보여......'

아인즈의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걸지도 모르지만, 아인즈에겐 아우라의 옆모습이


그렇게만 보였다.
다크엘프 중엔 아우라를 두려운 눈으로 보는 자도, 경의를 품는 자도 있다.
하지만 아우라에게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여행하는 소녀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상위존재로 간주되어, 존경받고 있다.
반복하지만, 그 입장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하지만, 아인즈의 목적을 생각하면 나쁘다.

'아우라를 마을의 영웅에서 단순한 아이로 만들어야 하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워.
내가 도착할때까지 굳어진 그 입장을 부수려들면, 반대로 내가 배척당할 우려가
있어.
......그야 그렇겠지. 육친이라 해도, 나중에 나타난 놈보단 마을에 공적이 있는 아
우라를 중시하겠지'

아인즈가 그곳에 남아 있자, 마을의 다크엘프가 잇달아 모여들었다.


그 중엔 당연히 아우라 정도의 키를 가진 다크엘프 아이도 있었다.
해체된 사냥감이 식재료로 변해,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졌다.

"자아, 잡아준 피오라님에게 감사하도록!"


받을 때마다 다크엘프들은 가볍게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숙련된 사냥꾼인 다크엘프들이어도 매번 반드시 사냥감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
라,
이렇게 훌륭한 고기를 얻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말을 저번에였나 저저번에였나 들은적이 있다.
대량이던 고기가 점점 적어졌다.
나눠줄때마다 신자인 프람이 말했다.
피오라님에게 감사하라고.
아까부터 반복하지만, 아인즈는 그 자체엔 불만이 없다.
아우라가 사냥감을 잡은 건 사실이고, 그걸 감사하지 않는 놈이 있다면 그게 더
불쾌하다.
하지만ㅡ

"역시 피오라님은 대단해. 역시 저런 분에게 마을을 맡기고 싶어"

"그래, 맞아. 우르수스 왕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사냥꾼으로서 실력도 일류.


저분이 있어 준다면 이 마을도 평안할 텐데......"

"맞아. 맞아"

프람 주변에 모인, 5명의 다크엘프 어른들이 말했다.


아우라의 평가가 점점 높아진다.
그리고 그걸 모인 아이들도 듣고 있다는 건 상당한 문제다.

"......그래도, 피오라쨩은 애인데?"

풀냄새가 나는 다크엘프 남자가 불쑥 말했다.


신자집단의 표정이 변했다.

"그건 장로들의ㅡ영감탱이들의 생각이야!"


호통이었다.
몇 초 전까지 싱글벙글 웃던 프람이 표변해,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이가 어때서. 나이가 많으면 대단한 건가!? 아냐!


확실히 오래 살면 경험을 쌓아, 대단한 능력을 갖추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저 나이를 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냐. 나이는 절대적인 지표가 될
수 없어.
ㅡ하지만! 하지만, 능력만은 절대적인 지표가 될 수 있어!!"

아인즈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영업 현장에서 수 없이 봐왔다.
유능한 자는 처음부터 유능하고, 무능한 자는 몇 살이 되어도 무능하다.

"뛰어난 재능! 그것이야말로 이 위험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 될 힘!


능력이야말로 절대적인 지표! 설령 아무리 어리더라도!"

"그래도......피오라쨩은 너무 어리지 않아?"

반대의견을 내놓은 여자에게, 다른 신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건 저 장로들의 생각과 같잖아? 넌 저것들과 동류구나"

"ㅡ뭐어?"

여자가 적의에 가득찬 시선을 그 다크엘프에게 보냈다.


장로들이 상당히 미움받는다는걸 잘 알겠다.

'솔직히, 그렇게 미움받을 짓을 한것 같진 않았는데......'

젊은이들이 이정도로 악감정을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아인즈는 이 마을을 감시한 지 아직 이틀째고, 모든 걸 감시하지도 못했
다.
그러니, 아인즈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장로들의ㅡ나이만 우선하는 생각을 무찌르기 위해 피오라님 같은 우수한 다


크엘프를 따르고,
여차하면 지도자가 되어 주시길 행동해야 되지 않을까!"

그만둬.
아인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목적으로 이 마을에 아우라를 보낸게 아냐.
이 얘기를 아우라가 들으면, 자칫하면 찬성해서 마을을 지배하는 흐름이 될지도
모른다.
나자릭의 세력 확대로는 유익한 수단이다.
하지만, 아인즈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아인즈는 어른들의 다툼을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방금까지 있던 진수성찬에 대한 기쁨은 없고, 불온한 분위기에 표정이 어두웠다.

'이게 문제라고......'

아인즈는 아우라와 마레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스즈키 사토루가 살던 세계의 아이와는 다르게,
이 세계의ㅡ대표적으로 네무라는 소녀처럼ㅡ아이라면, 천진한 호기심에 아우라
에게 다가올 수도 있었을터.
하지만 아인즈가 훔쳐보는 한, 그리고 아우라에게 들은 얘기엔 그런 애는 한 명도
없었다.
대수해라는 위험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호기심 같은 게 억눌려 있는 걸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어른들의 대응을 느껴,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겠지.
아우라는 애지만 애가 아니라고, 완전히 받아들였다.
차라리, 평판이 떨어지면 아이들도 가까이 오기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어른들이 존경하는 상대를, 친한 척......아니, 친밀하게 다가오는 건 어렵겠지.


.....
설령, 그게 자신과 비슷한 나이여도...... 아니, 비슷하기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가.
.....?
훔쳐 들은 바로는 부모가 애한테 아우라에게 다가가지 말라거나 예의를 갖추라던
가 말하진 않았는데,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하아......"

한숨을 쉬어버렸다.

지금 이대로면 역시 친구는 생기지 않겠지.

'그럼...... 여기선 내가 움직여서, 부탁해볼까. 하지만,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거라 단언할 순 없고......
그래도 상황이 변하는 걸 기대해볼까. 세상 부모들은 이렇게나 고생하는 걸까.
.....'

아인즈는 전에도 생각한 의문을 깊게 품은 채, <상위전이(Greater


Teleportation)>을 발동했다.
마지막에 들린 소리에 머리를 감싸 쥐면서.

"ㅡ애초에, 피오라쨩이 뭐냐! 피오라님, 이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꿈이다.
꿈을 보고 있다.
꿈이란 걸 알았다.
뭐라 그랬지.
맞아. 자각몽.
꿈이란 걸 아는 꿈.
거기서 난 아이였다.
그리고ㅡ맞아서 날려졌다.
꿈속에서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아프지는 않다. 그래. 꿈이니 아프지 않다.
하지만 아프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충격으로 입안이 찢어졌겠지.
입안엔 피 맛이 잔뜩이었다.
꿈인데 맛이 났다.
신기하다.
이건 정말 꿈인걸까.
손이 보였다.
흙으로 더러워진 작은 손.
역시 꿈이다.
지금 난 이렇게 손이 작지 않다.
안심했다.
이건 꿈이구나.
시야가 움직였다.
ㅡ싫어. 일어서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일어섰다.
떨어져있던 자신의 막대기를 붙잡고, 다시 섰다.
내 앞에는 어머니가 서있었다.
무표정이다.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 같다.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손에는 날 때려눕히기 위한 막대기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막대기를 휘둘렀다.
지금 나라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무리였다.
고통과 함께 공중에 떴다.
지면에 내리박혀, 더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다.
문득, 자신이 눈물 흘리지 않게 된 건 언제쯤이었을까 생각했다.
시야가 움직였다.
어머니가 뭐라 말하고 있다.
어느새 손에서 놓쳐버려 지면에 굴러다니는 막대기를 바라봤다.
일어서, 라고 어머니가 말한거겠지.
하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아프고, 괴로웠다.
난 우는 소릴 했을거다.
어머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보란 듯이 막대기를 들이밀었다.
소리가 났다.
시야가 움직이고, 통통한 여성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집에서 가사일을 도와주는 여성이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줬다.
나즈루 아줌마다.
부드러운 오믈렛이 훌륭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녀의 요리가 내 추억의 맛이었고, 맛있음의 기준이었다.
안타까운 건 이미 죽었다는 것.
기왕이면 어머니와의 훈련 같은게 아니라, 그녀의 요리를 먹는 꿈이면 좋았을텐
데.
어머니는 보통 요리를 한다고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니의 요리를 먹어본 적은 없
다.
나를 단련시키는 게 최선이었을 거라 누군가가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땐 무지했어서 그말에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은ㅡ어른이 된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난 어머니와 함께 식사한 기억이 별로 없다.
혼자 먹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세계에 색이 살아났다.
깨어나는 걸까.
그럼 좀 더 빨리 깨워주면 좋았을걸.

내가 잊어버린게 아니다.
그래, 알고 있다.
난 어머니께 미움받았다.
범해져 밴 아이같은건 불쾌하기 짝이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생일을 축하받은 적도 없다.
어머니에게선 온갖 축복을 받지 못했다.
고맙다던가.
축하한다던가.
잘됐네라던가.
그런 흔해빠진 축복조차.
애초에ㅡ난 어머니께 이름을 불린 적이 있었을까.
이 이름은 누가 지어준걸까.
하지만, 정말 싫었다면 죽여버리면 되지 않았을까.
간단히 죽였겠지.
하지만 살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난 미움받지 않았다.
그건 내 불쌍한 소망에 지나지 않는걸까.

"자, 잠깐만요, 파인님. 아직 어린아이예요. 더 훈련하는 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거예요"

어머니가 쳐다봤지만, 나즈루 아줌마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나즈루 아줌마도 보통은 아니었으리라.

"스, 슬슬 휴식이 필요해요. 마실 걸 준비하겠사오니......"

"괜찮아요"

"파인님이 마시고 있을 사이에 상처를 치료할테니......"

"괜찮아요"
어머니가 손을 내밀자 모든 상처가 나았다.

"괜찮,지?"
어머니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유리같은 눈동자로, 감정이라곤 없는 얼굴. 기분나쁘다.

"......응. ......괜찮아"

"그래"

어머니가 나즈루 아줌마를 바라봤다.

"......알았죠? 아직 괜찮아요. 게다가 이건 죽어도 소생 가능한 실력은 이미 있어


요. 그쵸? 문제는 하나도 없죠?"

"............네. 알ㅡ"

"ㅡ안녕하세요. ......저기ㅡ, 절사님, 계십니까?"


흠칫흠칫이란 표현이 딱인, 여자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꿈 속 소리가 아니었다.
현실의 소리였다.
의식이 각성했다.
천장이 보인다.
내 방 천장이다.
옆방에 기척이 하나 있다.
아직 머리가 돌아가지 않지만 적의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니 좀더 맥락없는 걸 보여주면 좋을텐데......"

투덜대며, 한숨을 내쉬고,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눈물을 흘렸는지 손가락이 젖었다.

"ㅡ지금, 일어났어. 조금 기다려줄래?"

"네에! 저 같은건 신경쓰지 마세요! 얼마든지 기다릴테니 천천히 하시길!"

위협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여자는 대단히 떨고 있었다.


다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둔 의자에 걸어놓은 상의를 걸쳤다.
방에 누가 왔는지 소리로 알았다.
상대는 동성인 동료니 너무 제대로 차려입지 않아도 되겠지.
게다가 아무래도 제대로 입을때까지 그녀를 옆방에서 기다리게 하는건 좀 그렇
다.
문을 열고 옆방에 가자, 그녀는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둘바를 모르는것처럼 미덥지 못했다.

"ㅡ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앉아서 기다려도 됐는데"

"아뇨아뇨, 기다리다니요. 그보다, 에헤헤. 절사님이 주무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


합니다. 용서해주시면 기쁠거예요"
비굴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그녀.
거기에ㅡ무의식으로 하는건 아니겠지만ㅡ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법국의 히든카드인 칠흑성전 제11석ㅡ"무한마력"이란 이명을 가진, 인류의 영웅
적 존재치곤 너무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럼, 앉아줄래?"

"아뇨아뇨아뇨아뇨. 그러실 것 없습니다. 얘기가 끝나면 바로 돌아갈테니, 절사님


의 소파에 앉는다니......"

그녀는 파닥파닥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절사는 그렇게까지 거절하지 않아도 되잖아 싶었다.

"앉아도 아무일도 없을테고, 화내지 않는다니까? 아니, 진짜로......그렇게 비굴하


게 굴지 않아도......동료잖아?"

그러자 그녀는 역시 아양떨 듯 웃었다.

"에헤헤, 저같은 벌레새끼가, 절사님과 동료라니 죄송해서"

"아니, 진짜 그렇게까지...... 있잖아.


내가 맡은ㅡ나랑 모의전한 칠흑성전 멤버 중에, 당신이 가장 비굴하거든? ......전
엔 좀더 건방졌는데"

칠흑성전은 영웅이다.
그래서, 때론 콧대가 높아 기어오르는 자가 있다.
그런 자들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게 절사절명의 역할 중 하나였다.
그래서 칠흑성전의 동료여도, 그녀를 아는 자는 오만해졌었던 자 뿐이다.
하지만, 이건 거만해진 칠흑성전 멤버에게 대체로 하는 일이다.
그녀만 특별한 게 아니다.
그녀 이상으로 훈련을ㅡ좀 지나쳤나 싶어 후회했을 정도ㅡ베풀었던 대장도, 지금
은 평범하게 대해준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그녀 뿐이다.
그녀의 경우엔 콧대를 꺾는 과정에서 너무 지나쳤겠지.

'앞으로는 좀 더, 상대의 성격 같은 걸 고려해서 해야겠네'


"거만해지는 건 안 좋지만, 좀 더 당당해져도 되는데?"

"에, 에헤헤. 절사님 앞에서 그럴 순 없어요"

두 손을 더 격하게 비볐다.

'그렇게까지 하게 만들진 않았는데...'

그저 그녀의 마법을 정면으로 받으며 전진해, 땅에 눕히고 깔고 앉아,


계속해서 얼굴을ㅡ훈련이란 명목이었기에ㅡ죽지 않게 주의하면서 때렸을 뿐이
다.
밑에 깔렸음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마법을 쓰던 모습은, 조금 근
성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노력을 거듭해, 지금은 아픔을 참으면서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정도로 향
상심 있는 사람이었다.
나름 높게 평가했던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약간 슬퍼졌다.

"......그래서 오늘은 뭔데? 대충 상상은 가지만"

"네, 네에. 역시ㅡ"

"ㅡ아ㅡ, 아첨은 됐어"

"아, 네, 네. 엘프 토벌군이 추가 침공을 시작했으니, 슬슬 절사님이 떠날 채비를


하셨으면 좋겠다고 전령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렇구나......"

절사가 미소짓자 눈앞의 인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은데.
평소처럼 웃고 있을 터.

"드디어 목에 걸린 뼈 하나가, 빠지려나"


막간

더 방대한 마력을 흡수해, 엘더리치를 넘어선 존재는 나이트리치라 불린다.


역사를 살펴봐도 확인된 개체는 지극히 적었고, 그 사실에 감사하는 산 자는 많았
다.
나이트리치는 강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역을 넘어선ㅡ제6위계라는 초고위마법 들.
그 힘이라면, 나이를 많이 먹은 고위 드래곤과 정면에서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이
다.
게다가 다수의 특수능력을 가지고, 수많은 언데드를 부리며,
높은 지성으로 겹겹이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자리 잡는다.
그건 그야말로 일국의 지배자, 언데드의 왕이었다.
사실, 널리 이름을 퍼뜨린 3체의 나이트리치ㅡ

드래곤 나이트리치 "크판테라=아고로스"


거신인(Titan) 나이트리치 "휴에이온"
나이트리치ㅡ아마ㅡ이며,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그림자왕 "공포(Fear)"

ㅡ들은 소국에 필적하는 영토를 지배하며, 주변국가에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나이트리치라는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만 전해져, 천재지변과 같은 신
화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누구나 두려워하는 나이트리치이며 세계엔 알려지지 않은 한 개체ㅡ
"심연"이란 이명을 가진, 바네지에리・안샤스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거대한
방에서 나왔다.
6개의 팔과 2개의 머리를 가진 나이트리치,
제6위계의 마력계마법과 제6위계 계통외 마법을 구사하는, 사람이 결코 이기지
못할 두려운 존재.
만약 바깥으로 나간다면 앞에 소개한 저명한 나이트리치는 3체가 아니라 4체가
됐을 존재이며,
조직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내진에 앉아계신 최고참 언데드였다.

"심연의 주검"이란 조직이 있다.


언데드 매직캐스터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원래는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할 목적으로 시작한 집단이다.
언데드라는 무한의 수명을 가진 자들이 마법을 연구하면 아무래도 다른 동등한
존재들과 부딪혀 버린다.
3대욕구가 없는 언데드는 다른 강한 욕구를 가진 경우가 많았고,

그게 매직캐스터면 지식욕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지식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을 때,

서로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섬멸전에 돌입해 한쪽이 멸망할때까지 싸우게 되기


쉬웠다.
산 자가 3대욕구에 쏟을 욕망 전부를 하나가 되니,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욕망이
강대해지는 거겠지.
그렇게 멸망한 언데드는 나름 있었고, 게다가 어부지리를 노리는 산 자에게 싸우
던 양측이

함께 멸망하는 전개까지 일어나는 꼴이었다.


그래서 지식이나 마법의 아이템을 독점하려고 양보하지 않고 서로 싸우는 것보
다,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건 협력하고, 거래할 건 하는 게 현명하다고 깨달은 자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명단 하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나중에 "그라니에조 비문"이라 불리게 된다.
마력을 담지도 않았는데 어느샌가 마력을 띄게 된 참가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이다.

그 무렵엔 4체의 나이트리치와 3체의 엘더리치의 이름 밖에 없었고,


몇 가지 룰이 있었을 뿐, 위반했을 땐 다른 멤버에게 혼날 뿐인 가벼운 모임이었
다.
그 후로 200년 정도 경과했을 땐 나름대로의 룰이 생겨 조직으로 변했다.
동시에 소속된 언데드의 수가 늘어, 내진에 7명, 외진에 48명.
합계 55명인 커다란 조직이 되었고, 내진 7명은 모두 난이도 150에 이르는 언데
드들이었다.
하지만, 이 조직을 아는 자는 적었다.

이 조직에 속한 언데드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산 자들도 세력에 더해, 그들을 부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자.
또 하나는 산 자들에겐 간섭하지 않고, 세계의 뒤에서 조용히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이다.
전자는 매우 적었고,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산 자의 세계에서 대놓고 활동해
오진 않았다.
게다가 전자처럼 산 자들로 세력을 키우려하면, 그에 비례해서 적이 늘어나는 법
이다.
특히 언데는 산 자 전체의 적이었기에, 때로는 산 자들이 국가와 상관없이 협력하
여 멸망하곤 했다.
그렇게 전자는 더욱 줄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산 자의 세계 속 어둠에 둥지를 튼 자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우수한 언데드는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심연의 주검"은 소문으로만 들리는 조직이 되었다.
앞서 말한 3체의 강대한 힘을 가진 나이트리치를 조직에 권유하지 않았던 것도,

가입해서 눈에 띄는걸 피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앉은 자리에서 밖에 나가자 거대한 통로가 펼쳐졌고 그 옆에는 작은 불빛
이 켜진 방이 있었다.
그것과 면회하기 위한 자들의 대기실이다.
그게 이런 준비를 할 리 없었ㅡ그런 상냥함은 전혀없다ㅡ기에, 탄원하여 허가를
얻고,

바네지에리 일행이 만든 방이다.


그곳에 있던 자가 바네지에리에게 말했다.

"돌아왔나. 그럼 다음은 내 차례군"

방금까지 바네지에리도 그곳에 있었기에 누가 말을 걸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여기엔 불리지 않으면 와선 안되기ㅡ오면 저것의 분노를 산다ㅡ 때문이
다.
오늘 불린 건 내진 멤버들 뿐이다.
조직 설립부터 이미 400년 가까이 경과해, 내진에 속하는 언데드는 현재 9명.
"심연" "하얀 성녀" "죽음을 타는자" "부패의 왕" "홍안공" "현랑" "만군의 노인" "먹
는자" "황색 망령"
방금 전까지 전원이 모여, 순서대로 불렸다.
남은건 마지막 한 명.

"하얀 성녀" 그라즌・로커다.


흰 피부를 가진 여성 언데드다.
흰색 베일에 흰색 드레스로 온통 흰색으로 꾸몄다.
누구보다 먼저 제8위계에 도달해, 지금은 제9위계를 노리는 그 언데드는,
연구자로서 바네지에리도 자신보다 위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현재 조직의 지배자로부터 높게 평가받아 편애받는 인물이다.
아니ㅡ

'ㅡ그건 누구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쾌하지만 참고 쓰는 것뿐이다'

그건 저것과의 대화 중 구석구석에서 알 수 있었다.


저건 그걸 결코 감추려 하지 않는다.
바네지에리 일행이 쓰는 마법을 더럽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그라즌도 중히 쓰이더라도 기뻐하진 않는다.
아니, 빼앗기만 할뿐 별다른 이익을 돌려주지 않는 저것 따위에게 기쁨을 품을 리
없다.
특히 연구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라즌은 더더욱 그럴지 모른다.
물론, 그런 생각을 저것 앞에서 겉으로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
조직의 전원이 저것에 반기를 들어도, 아쉽지만 승산은 없으리라.

"......그래, 다음은 너다. 끝나면......얘기라도 할까? 오랜만에"

"......뭐라고? ......그렇군. 알았다. 알았다고. 물론, 기꺼이 참가하지. 평소 그 장


소지?"

"그래. 먼저 간다"

바네지에리는 그라즌과 헤어져, 잠시 어둠속을 걸었다.


언데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기실에 불이 켜져있는건 거의 의미가 없다.
누가 놓았는진 모르지만 아마 그저 장식이겠지.
바닥은 마법으로 닦여져 한 장의 널빤지 같았지만, 벽이나 천장은 거칠게 파인 바
위 그 자체였다.
여긴 거대한 동굴이지만 자연스레 생긴 건 아니다.
조직의 지배자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자신의 손으로 파낸 것이다.
이 동굴엔 몇 년에 한 번ㅡ혹은 저것이 부를 때마다ㅡ오지만,
매번 이렇게 커다란 동굴을 파낸 그 노력을 생각하면 비웃어 버리곤 했다.
마법이 뛰어난 나이트리치이기에 물리적 수단을 경시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자신들 앞에서 그토록 오만하게 행동하는 저것의 겁많은 모습을 비웃은거다.

어느 정도 떨어졌음을 확인하자 바네지에리는 <전이(Teleportation)>를 두 번


써서, 목적지에 이동했다.
내진의 한 명인 "홍안공" 크루누이・로그・엔테시・나의 거성인, 산속에 세워진
성 앞이다.
크루누이는 내진 멤버중 가장 깨끗한걸 좋아하고, 몸에는 일급품만 걸쳤다.
그건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종족에게 보수ㅡ마법의 지식, 매직아이템, 보석을 포함한 보물ㅡ를 지불하
여 만들어낸 성의 장엄함은,
미적 센스가 없는 자들조차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내진 멤버들이 모여 회의를 열때는, 크루누이의 거성이 쓰이고 있었다.
바네지에리가 성문앞에 전이하자, 바로 크루누이를 모시는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
내 성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안내된 곳에 가니, 그라즌을 제외한 내진 전원이 모여있었다.

"ㅡ기다리게 했군"

"저것을 상대하느라 수고했어"

말을 걸어준 건 성주인 크루누이.


청백색 피부를 가진 인간형이다.
자연스레 발생한 언데드가 아니라, 원래 인간종이었는데 마법으로 스스로를 언데
드로 바꾼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주변 물건에 집착한다는 예전 모습이 남아있었다.
다른 멤버들이 항상 같은 모습ㅡ강대한 마력을 지닌 매직아이템ㅡ인 와중, 혼자
서 매번 다른 세련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옷에 담긴 마법의 힘은 없는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옷은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지만, 크루누이에게는 몸을 치장하는
것이리라.

"그라즌이 오면 시작할 생각인데 괜찮겠나?"

바네지에리는 방에 몇 개나 놓인 긴 의자에 앉으며, 동포들에게 질문했다.


반대의견은 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건 몇 번씩 열린 저것에게 반역할 준비를 위한 회의다.
애초에 저걸 인정한 건 단순히 강하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주검"이란 조직의 존재를, 외진 구성원에게서 들은거겠지.
모두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 그 압도적인 힘을 보였다.
바네지에리 일행이 도망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건,

그것이 이 세계 최강의 존재들에 대한 억지력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확대 같은걸 노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지배자로서 최악이었다.
첫째로, 대륙 중앙에 소란을 일으키려고 "심연의 주검"이 생긴게 아니다.
저들의 협정을 위해 빌릴 수 있는 전력같은거라 생각되면 곤란하다.
그럼ㅡ저것에 대항할 새로운 억지력을 준비해야 한다.
그게 내진에 속하면서 저것과 만날 기회가 많은 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보통 참가자가 늘어나면, 동료를 배신해 정보를 흘리는 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
아진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자가 없다는게, 저것에게 충성하는 자는 없다는 증거다.
그리고 확실하게, 지금 배신자는 없다.
바네지에리 일행이 무사한게 그 증거다.
만약, 배신이 들통났다면, 바네지에리 일행은 이미 멸망했겠지.
저건 조직을 지배해, 바네지에리 일행의 연구결과를 얻어, 자신을 강화하는데 쓰
고 있다.
말하자면 바네지에리 일행에게 기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바네지에리 일행이 살금살금 움직여도 자신의 메리트가 더 크다고 생
각해 내버려 둔다는 판단을 하진 않는다.
틀림없이 바네지에리 일행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저것에게 지배자로서의 관용이나 도량 같은 건 없다.
아니, 경계심이 강하다고 해야할까.
그러니 바네지에리 일행이 무사하다는 건, 저게 눈치채지 못했다는 뜻이다.
행운인건, 저것이 언데드를 지배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역량차를 고려할때, 그 능력을 특화했다면 바네지에리 일행을 지배할 수도 있었
을테니.

'언제까지나 우리가 너에게 착취당하기만 하는 존재라 생각하지 마라!'


바네지에리는 아까 만났던 거대한 그것의 모습을 뇌리에 그리며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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