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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 화

1. 사기 결혼?

‘역시 이 결혼 사기였구나.’
호화로운 포치 밖으로 내던져진 보스턴백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털썩, 떨어지는 허탈한 소리만큼 기운이 빠졌다.
무려 공작 가문도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네가 우리 가문에 와서 이런 거 아니냐!”
시어머니가 근거 없이 악을 쓰는 소리도 귓가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니, 완벽한 혼처라고 구슬린 건 당신들이었잖아…….’
속았다.
남편과 결혼한 이후 뒤통수를 맞은 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죄송합니다. 저희가 대부인과 각하와 부인을 끝까지 모셔야 했는데, 화,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희들의 목숨이…….”
집사와 가정부, 시녀장이 꼭 초상집에서 나오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곤란해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는데.
차마 그들을 붙잡을 수도 없어 나는 멍하니 유서 깊은 저택의 외관을 올려보았다.
내가 3 년 전 시집온 브렌트 공작가는 갑자기 박살 났다.
작위도 잃고 개털이 되었다.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줄행랑을 치는 사이 남편의 누이인 엘로이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나는 남편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져 손 그늘을 해야 했다.
‘하아, 눈부셔…….’
너무 잘생겼어.
혼자서만 햇살을 받는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서는 언제나 광채가 났다.
우물쭈물 멋없이 어깨를 웅크리고, 여동생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소심한 저 남자.
바로 내 남편인 그는 늘 쭈물대는 성격이 사무치게 아쉬울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딜 가도 홀로 우뚝 솟아 있을 만큼 훤칠한 키에 갑옷을 입은 것같이 딱 벌어지고 단단한 어깨.
피부는 오점이 단 하나도 없는 대리석을 조각한 듯 눈이 부셨고, 영롱하게 흐트러진 흑발은 꼭 새까만
달빛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빛이 나는 건 인간이길 초월한 듯한 저 완벽한 이목구비.
작위와 저택, 땅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도, 남편의 외모는 여전히 신이
현신한 것같이 환상적이었다.
‘항상 옷을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입고 있어서 맨몸은 얼마나 더 코피를 터뜨리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
“미, 미안하다. 에, 엘로이. 나,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다 책임져! 책임지라고!”
시누이가 악을 쓰자 시어머니가 따끔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 걱정 말아라. 친척들이 설마 우릴 외면하겠니? 지금까지 우리가 지원해 준 게 얼마인데……!”
“뭐? 친척들? 설마 사촌 얘기하는 거야? 거길 가서 굽신거리느니 차라리 길바닥에서 죽어 버릴 거야!”
“…….”
남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저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 놀랄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또 내 상상을 초월할 줄이야.

‘세상에,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요? 어쩌다가?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결혼식 날 처음으로 남편의 얼굴을 보았을 때도 펄쩍 뛸 정도로 얼마나 놀랐던가.


이게 웬 횡재냐 싶었던 그날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든 것이 다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특히 입술.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간 야릇하고 가느스름한 입매가 내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런데…….
신혼 첫날밤에 그토록 많은 실망을 해야 했던 신부는 나뿐일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결혼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은 내가 미처 듣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우뚝 세워진 것이 무색할 만치 밤일에 숙맥이었다.
처음이라고 하기에는 여자 울렁증이 너무도 심했다.
내 옷을 제대로 벗기지도 못할뿐더러 날 만지지도 못했고, 심지어 눈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뜬눈으로 결혼 첫날밤을 지새워야 했다.
결혼한 지 3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내 안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깊이 들어온 적이나 있었나……?
그래도 나는 서로 노력하면 점점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나와 결혼한 이후에 자신의 상태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그때마다 그는 무척 미안해했다. 인내심이 필요한 굼벵이 속력으로.

‘이, 이런 하, 한심한 내, 내가…… 가, 감히 다, 당신의 나, 남편이라…… 미, 미안, 미안합니다…


….’
‘괜찮아요, 알렉. 난, 정말,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당신 동성을 좋아하는 건 아니죠?’
‘…….’

불행 중 다행인지 동성애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애써 그를 다독였지만 나는 속으로 눈물을 철철 흘렸다.
‘아아, 신님. 왜 그를 장점과 단점이 극단적인 존재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 만큼 말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부인 앞이라 경황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편은 이미 태어나 처음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말더듬이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감싸 줄 수 있었다.
‘말 더듬는 게 뭐 어때서. 사람이 젓가락질을 잘 못 하는 것처럼 말도 또박또박 못 할 수도 있지.’
말더듬증이 병이라면 이 지구에 병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브렌트 대공작은 그런 그를 가문의 극심한 수치로 여겼다.
알렉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브렌트 공작가는 감히 누구도 흠집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위세를
자랑했다.
제국에서 유일한 성기사의 후손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황궁에서도 유서 깊고 귀한 혈통으로 예우했던
가문이었다.
그만큼 브렌트 대공작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아들의 상태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너는 내 인생과 가문의 오점이고 재앙이다.’

평생 알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공작은 죽을 때까지도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렉은 점점 위축되어 사람들 앞에서 고개도 잘 들지 못하게 되었고, 말을 하는 것도 두려워했다.
3 년 전 대공작이 죽자 이 제국의 황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알렉을 멸시 하고 조롱했다.
전대미문으로 난폭하고 잔악해서, 감히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바로 그 폭군 악센.
어릴 때부터 남편을 괴롭혔다는 그는 알렉을 강제로 사교 모임에 데려가 꾸준히 괴롭히고 비웃었다.
황실과 먼 친척었던 알렉 때문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게 이유였다.

‘정말이지 자네처럼 등신 같은 게 브렌트 공작가의 가주라니 이 제국의 수치가 아닐 수 없어.’

황제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파리 목숨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황실.


폭군을 따르는 귀족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알렉을 조롱하는 데에 동조했다.
알렉의 편을 들었던 늙은 귀족은 팔이 잘리기까지 했다니, 아무도 그를 감싸려 하지 않았다.
알렉은 점점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사교계 모든 이들의 놀림거리.
어느새 그는 멍청할 만큼 착해 빠진 공작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죽은 대공작처럼 살벌하고 위엄 넘치는 존재가 사라지니 누구도 더 이상 브렌트 공작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생 굴욕을 당한 남편이 여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래도 폭군이 남편을 괴롭히는 건 그 정도가 다일 줄 알았지.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브렌트 공작 자네에게 내 친히 처방을 내려 주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 미치광이 폭군이 여태 잔혹한 짓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한때 제국에 제일가는 공을 세웠던 브렌트
공작가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 된 지금, 나는 폭군의 잔혹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공작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폭군은 괜히 폭군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 * *

‘누구 신세 조질 일 있어! 썩 꺼져!’

결국 사촌 가문의 저택에서 문전 박대를 당하고 갈 수 있는 곳은 평민 들이 이용하는 여관뿐이었다.


배정받은 방으로 향하며 시어머니가 음산하게 날을 갈았고, 시누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오늘 겪은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거지 같은 데서 어떻게 자.”
나는 말을 잃어버린 남편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사소한 일에도 자신을 탓하던 남편인데 지금은 어떤 심정일까.
‘아마 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졌을 거야.’
아아.
내 신세야.
나는 아찔한 기분을 삼켰다.
오늘 밤은 이 여관에서 지낸다 쳐도, 내일은, 내일모레는, 또 그다음 날은 어떻게…….
나는 처음으로 이 결혼에 마음 깊이 회의를 느꼈다.
오직 부부끼리만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어도, 남편이 유명무실한 공작이었어도 이토록 암담하
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빈털터리라니.
“알렉.”
좁고 간소한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나는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보다 널따랗고 탄탄한 그의 등이 이토록 작아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남편은 차마 날 바라보지도 못하겠는지 고개를 숙였다.
수심에 잠긴 그의 외모는 이런 때에도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괴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우수 짙은 눈매는 더 깊어졌고, 온 세상의 비극을 홀로 짊어진 듯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를 볼 때마다 늘 사로잡히던 망상을 털어 낸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 가만히
토닥였다.
“다 괜찮을 거예요. 상심하지 마세요.”
“…….”
내 위로에 남편의 가느스름하고 섹시한 입술이 우물우물 떨렸다.
울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눈에 힘까지 주었다.
겉으로 나는 그를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속이고 끝내 몰락해 버린 브렌트 공작가를 원망했다.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이 더 원망스러웠다.
“루, 루이제.”
여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미, 미안합니다. 보, 본국으로 도, 돌아가세요. 이, 이혼, 다, 다, 당신은 이, 이혼을 해, 해야
합니다…….”
“…….”
뭐?
이혼이라고……?
뚝, 뚝.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며 나무 바닥을 적셨다.
목울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지금 얼마나 울음을 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 냉혈하고 강할 것 같은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 그래야 다, 당신이 행복-.”
“알렉.”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금세 그가 나를 껴안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지? 이 박력…….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이제.”
그는 나의 어깨를 고통스럽게 쥐어뜯듯 끌어안았다.
“내, 내가 다, 다음 생에, 다, 다시, 태어나면…… 지, 지금보다 훠, 훨씬 더…… 와, 완벽하게 사,
사랑해 주겠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그에게 처음 들어 아연할 뿐.
“다, 당신에게 와, 완벽한 남편이 되, 될 때까지…… 난 다, 다시 태어나고…… 또, 또 다시 태, 태어날
거야…….”
“……”
그에게서 처음 느껴 보는 굳은 의지였다.
무슨 수로 완벽한 남편이 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의 집념이 이상하게도 날카롭고 강렬했다.
“그, 그래서 우, 우릴 이렇게 마, 만든 놈에게, 보, 복수하고…… 더, 더 가, 강해져서 다, 당신을
지킬 수 이, 있게…….”

다음 날 아침, 그는 나와 함께 잠들었던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발견되었다.


침대 아래로는 빈 쥐약 병이 발에 차였다고 했다.
천만, 만만 다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다.
조금 이상해졌을 뿐……?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 화


2. 샤넌 공작의 딸

‘루이제 샤넌’으로 살게 된 지도 벌 써 23 년째.


나는 이웃 나라의 샤넌 공작가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루이제가 되기 전에는 전생에서 두 번이나 입양되었다가 파양당한 고아로 살고 있었다.
외로운 삶이었다.
가장 먼저 입양이 된 집에서는 2 년도 되지 않아 친딸이 생겼다고 버림을 받았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어머니가 금세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남들은 부모님이 두 명밖에 없는데, 나는 네 분이나 있는 거니까.’
그리워하며 추억할 부모가 없는 것보다는 많은 게 낫잖아.
친부모님까지 포함하면 여섯 분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웃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은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짧게나마 내 부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후로 나를 다신 찾지 않았다.
언제나 외톨이인 건 너무 억울한데.
‘……나도 진짜 가족이 갖고 싶어.’
성인이 되고 3 년이나 지나니 외로움이 전보다 더 물밀 듯 치밀었다.
남자 친구를 만들고 싶었지만, 이성적인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외로워 죽겠는데, 내 눈은 또 왜 이리 높은 거야?’
웬만한 미남이 아니고서야 눈에 차지도 않다니.
언제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그렇게 쓸쓸히 홀로 잠들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친어머니가 꿈에 나왔다.
놀랍게도 그녀도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로 따라오렴. 그러면 나를 만날 수 있단다.’

뭐? 엄마를 볼 수 있다고?
나는 꿈을 꾸면서 홀린 듯이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진짜로 만날 수 있는 거죠? 제가 꼭 어머니 곁으로 갈게요!’

드디어 나도 가족이 생기는구나!


부드러운 맨발이 아스팔트 바닥에 스치는 감각이 아팠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진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가시 돋친 불길이라도 건널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데.
쾅-!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씀 좀 해 주시지…….’
몽유병에 걸려 밤길을 허우적거리던 나는 트럭에 치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세계에서 태어났다.
혼란스러운 만큼 나는 더 힘차게 울었다.

‘루이제. 우리 아가.’
‘드디어 네 얼굴을 보게 되었구나.’

엄마?
나를 낳은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 코를 비볐다. 부드럽고 포근한 향이 났다.
죽기 전 꿈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일까?
그녀의 얼굴은 애를 써 봐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어머니가 이 세계로 나를 불러온 거라고 믿어
버렸다.
‘이제야 내가 있을 곳으로 오게 된 거야.’
나날이 행복했다.
존귀한 공작가의 영애로서 풍족한 사랑과 교육까지 받으며 자랐다.
모두가 내 의미 없는 몸짓과 표정에도 사랑스럽게 웃어 주었고, 입고 먹는 것에는 늘 정성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어두웠던 전생의 그늘은 점점 걷히고, 대신 내 안의 밝은 부분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열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 주변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재혼을 했고, 얼마 안 있어 남동생이 태어났다.
여동생까지 줄줄이 낳은 새어머니는 나를 집안에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며, 토끼 같은 동생들이 생기니
아버지도 점점 나에게 무심해졌다.
계모는 내가 여동생들을 안아 보는 것조차 금지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동생들을 귀여워했다. 계모에게도
깍듯하고 착하게 굴었다.
그러면 계모는 ‘너같이 뻔뻔한 년 때문에 내 속이 다 뒤집어진다.’면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앓아눕기를
일쑤.
어느 순간 계모는 그냥 나를 괴롭히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대체 넌 언제쯤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니? 내년이면 스물한 살인데 이때 아니면 결혼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 모르니?’

결혼 적령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나에게 새어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결혼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셀 수 없이 무도회를 많이 다녔지만, 출석 체크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전생에도 모태 솔로로 죽었는데 여기서도 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

세상의 반은 남자인데 이게 말이 돼?
내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하는 동안 또래 영애들은 대부분 약혼을 했다.
……아, 나도 결혼하고 싶다.
누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나는 결혼에 로망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남편과의 알콩달콩에 환상이 있었다.
연애와 사랑과 결혼 같은 건 말로 만들어 봤지 한 번도 직접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나도 키스도 해 보고, 이것저것 다 해 보고 싶은데…… 흐윽.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침대 위에서 아련하게 손을 모으고 꿈속을 걸었다.
책에서 본 것처럼 정말 남자의 입술은 생크림보다 부드러운지, 첫날밤은 환상적이고 특별한지 궁금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금방 낳을 수 있겠지?’
나를 닮은 딸은 얼마나 어여쁠까?
결혼을 하면 ‘진짜 내 가족’이 생기는 거야……!
전생에서부터 꼭 갖고 싶었던 진짜 내 가족.
그런 와중 새어머니가 이웃 나라인 릴트 제국의 공작 알렉시스와의 혼담을 받아 왔다.
새어머니는 내가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못해 이 집에 말뚝을 박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왕국에서는 약혼자를 찾지 못하니 외국까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주 젊고 아름다운 공작님이란다. 릴트 제국에서 잘생기기로는 한 손에 꼽히는 분이라지. 초상화만


봐도 무척 근사하고, 네게 과분한 분인 것 같지 않니?’

나는 그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화가의 실력 부족으로 실물의 눈곱만큼도 담지 못한 초상화였다.
남들 눈에는 잘생겼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평범한 남자 1 에 불과했다.

‘……얼굴은 제가 더 과분한 것 같은데요.’


‘어휴, 그래. 참으로 잘나서 좋겠구나.’

이렇게나 흔한 외모의 남자를 별의별 수식어로 포장하다니, 새어머니는 어지간히 나를 멀리 보내고 싶은


것 같았다.
브렌트 공작가에서는 우리 가문과 혼인을 맺고 싶은 이유를 아주 간절하고 감동적인 편지로 구구절절
어필했다.
바다 건너 사돈이 생기는 게 가문의 오랜 꿈이었다, 역사와 품위를 지닌 샤넌 공작가를 고귀한 사돈댁으로
평생 모시고 싶다, 공작이 하도 잘생기고 자상해서 영애의 결혼 생활이 윤택하다 못해 황홀할 것이다,
라는 둥.

‘이런 분의 부인이 되는 것을 일생의 행운으로 알고, 당장 결혼하거라.’

그러나 만나 보지도 못한 타국의 사람과 선뜻 결혼할 수 없었다.


릴트 제국의 황제가 소문난 미치광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내 거부에 무척 드물게도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결혼해라. 네가 이 결혼을 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평화로워질 수 있다.’


우리 가문은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데다가 도박 빚까지 지고 있었고, 어머니의 사치까지 쌓여 전에 없던
위기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브렌트 공작가에서는 자신들의 부유함으로 우리 가문의 부족함을 채워 주겠다고 했다.
나는 절대, 아무리 그래도 절대 그런 이유로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줄은 몰랐구나. 네 동생들 생각은 안 하는 것이냐?’


‘너만 결혼하면 모든 일이 다 쉽게 풀릴 수 있다고! 이 배은망덕한 것!’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연달아 나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그래서 나더러 희생을 하라고요……?
물론 상대는 풍족한 공작가였지만, 나는 내 가족들이 나를 손쉽게 버리려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샤넌 공작가에 갖고 있던 마지막 정까지 모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나에게 애정이 없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구나.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딸이었구나.
어디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어떤 집구석이라도 여기보단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결혼을 하면 내 자식들이라도 생기겠지.
어차피 여태 마음에 드는 남자도 못 찾았는데, 그래도 이 초상화 정도의 남자라면 준수하잖아?
나는 내 유일한 탈출구와 손을 잡듯 결혼했다.
나 자신과 어린 이복동생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망을 넘어선 충격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새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계략에 걸려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보니 먼 타국까지 혼담을 보내신 이유가 있었네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고, 공작 각하께서


이것도 못 하고, 저, 저것도 못 한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이제 와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내 아들과 이혼하고 싶거든 혼인
계약서나 다시 한번 읽어 보거라! 네 친정에서 위약금을 얼마나 물어야 하는지!’
‘…….’

결혼하면서 받은 재물과 땅의 스무 배.
나는 결혼 열흘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썼다가 구겨 버린 편지지만 방 안에 가득 찼다.
어차피 위약금을 낼 돈 같은 건 본가에 없었다. 위약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그 집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대로 섣불리 남편을 포기하기에는…….
그는 몹시 잘생겼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 화

‘남자는 자고로 여자 하기 나름이란다. 네가 살갑게 대하지 않으니 알렉도 거리를 두는 게 아니냐.’


‘…….’
예, 예.
아이를 갖기는커녕 별도 못 보는 게 제 잘못이군요, 시어머니…….
체념하듯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 지 얼마 후.
나는 남편과의 합방이나 임신 외에 다른 것들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갑자기 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서로 노력하며 천천히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시녀장에게 들어 보니 사실은 알렉도 절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결혼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간절했던 시어머니는 릴트 제국에서 며느리를 찾지 못하자 타국에서 물색해서 나를
찾아냈다.
알렉의 외모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지만, 폭군에게 찍힐 것이 두려워 누구도 그와 결혼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은 어머니가 막무가내로 진행한 결혼을 막지 못했다.
‘그래. 알렉도 원치 않은 결혼을 해서 고통받고 있잖아. 언젠가 나아질지도 몰라.’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내가 첫눈에 반한 남자인걸?
어디서 또 이런 남자를 만나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나는 그의 아내이자 브렌트 공작 부인으로 차츰 적응할 계획을 했다.
결혼 초반에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브렌트 공작가의 서재였다.
어차피 어릴 때부터 나는 릴트 제국의 언어를 배웠기 때문에 책을 읽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공작가의 서재는 웬만한 응접실 두 세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넓었다.
그 서재에서 처음 남편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나는 그때 애써 그에게 먼저 다가 갔다.
내가 이주한 릴트 제국에 대해 알고 싶다며 책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남편의 나라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요. 이제 내 나라이기도 하잖아요.’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후회하며 홀로 울던 나였으니, 그에게는 무척 의외인 말이었을 것이다.
이내 그는 나에게 여러 책들을 소 개해 주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가끔 서재에서 그에게 다양한 주제의 책을 추천받았다.
자연스럽게 같이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는 그의 풍부한 지식에 감탄할 때가
많았다.
‘이 남자, 외모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똑똑한 데다가 친절하네…….’
제국에서 신부를 구할 수도 없을 만큼 무시를 당하고 있었던 게 너무도 안쓰러울 만큼.
‘다 저놈 때문이야.’
나는 황궁에 갈 때마다 황제 악센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용암이 회오리치는 듯한 검붉은 눈동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같은 이마와 콧대, 사각으로 날카롭게 각이 서 있는 턱까지.
거칠게 손질한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은 꼭 태양이 일렁이는 것 같았고, 오만한 눈빛에는 제국을 발아래에
둔 인간 특유의 자만심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폭군은 브렌트 공작 부인이 된 나에게도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 나를 보았을 때는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저런 등신하고 결혼을 하나 했더니, 또 껍데기만 화려한 팔푼이가 있었군.’

팔푼이?
태어나서 저런 말은 처음 들어 봤다.
계모도 나에게 팔푼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귀족들 앞에서 팔푼이라니, 수치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생각보다 나는 초연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알렉이 이런 비하 발언을 평생 들어온 것에 비하면 나는 생채기 수준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 알렉은 황궁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황실의 초대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폭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공작가에 폭군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그는 끌려갔다.
시어머니는 나 때문에 알렉이 죽게 생겼다며 원망과 비난을 쏟아 냈지만, 나는 시어머니의 원망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폭군을 대면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폭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남편을 풀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몸이 좋지 않아 준비가 늦어졌던 것뿐입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황궁의 초청에 늦는 일이 없도록 제가 맹세하겠습니다.’

차마 폭군의 눈은 볼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기 싫었으니까.
이미 저런 잔악무도한 폭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만으로도 굴욕적이었다.
폭군은 나를 비웃었다.

‘웃기는군. 공작 말로는 앞으로 다신 황궁에 오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자길 죽이라고 했다던데.’


‘…….’
‘그래도 공작 부인이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말하면 한 번쯤은 믿어 주지. 자네의 사죄에는 진심이 없거든.
어디 내 눈을 보고 진심을 표현해 봐.’

저런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황제 같으니라고…….


나는 너무도 먹기 싫은 쓴 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찬란하고도 비열한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대체 왜 보라고 하는 건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재차 남편을 구명했지만, 속으로는 폭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철딱서니 없는 황제 새끼야.
내가 얼마나 힘든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냐?
아기도 못 갖는데 남편까지 빼앗아야 속이 시원하겠냐?
선처의 말을 끝내고도 나는 폭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폭군의 눈빛은 조금 불쾌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다행히 황제는 알렉을 풀어 주었다.

‘가서 네 남편한테 전해라. 또다시 나를 거역하면 정말로 목이 달아날 거라고. 공작가를 예우해서
목숨이나마 살려 주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겨우 그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는 길, 나는 그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신 그러지 말아요. 정말 왜 그런 거예요? 황제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면서…….’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나, 나는 무, 무슨 일을 다, 당해도 괘,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루, 루이, 제, 다, 당신, 은 그,


그런 취급을…….’

……설마 나 때문에 황궁에 안 가려고 했다는 거야?


나는 그의 등을 찰싹 때려 주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고맙기는커녕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알렉. 나는 황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써요. 황제가 나한테 팔푼이라고 했다 해서 내가 정말 그런 건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그딴 놈 상관없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자신 때문에 덩달아 나도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먼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오랫동안 시달린 그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혼자 참고 있었죠? 앞으로는 나랑 같이 참아요. 황제하고 함께 있을 때만 우린 잠깐 악몽을


꾸고 있는 거예요…….’
‘…….’
‘악몽 같은 건 돌아서면 금방 잊을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를 살포시 끌어안으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되돌렸다.


그의 넓은 어깨가 가냘픈 내 품에 다 안길 리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참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폭군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는 건 더 끔찍이 싫었고, 폭군에게 맞설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 같은 시간이 휩쓸고 지나갔다.
며칠 뒤 나는 열린 문틈 안으로 그가 치료사와 발음을 교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일상 같은 일이었다.
이미 연습을 한 지 꽤 된 건지 그는 제법 지쳐 보였다.
그런데 그냥 지나가려고 한 내 발을 무언가가 붙잡았다.

‘루, 루이…….’
‘루. 이. 제. 한 단어씩 다시 발음해 보십시오, 각하.’
‘루. 루, 루…….’
‘괜찮습니다. 다시-.’
‘루이, 루…….’
‘…….’

지금 내 이름을 연습하는 거였어?


겨우 내 이름이 뭐라고, 저렇게 절박하게 연습을 하는 거지?
그냥,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도 되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서 한참이나 알렉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알렉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연습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나중에는 지친 치료사가 꼭 공작 부인의 이름만 똑바로 부를 필요가 있냐며 포기하라고 할 정도였다.
한동안 나는 모른 척 그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가 내 이름을 저렇게 열심히 불러 줄까?
이 세상에서 저토록 열심히 내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 가슴에 진한 감명과 충격이 새겨졌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하고도 알렉은 2 년 넘게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아니.
이제야 나는 단 한 번 그가 나에게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오래 걸렸지만, 그는 결국 내 이름을 한 번에 불러 주었다.

‘루이제.’

여관에서 쥐약을 먹기 전.

‘내, 내가 다, 다음 생에, 다, 다시, 태어나면…… 지, 지금보다 훠, 훨씬 더…… 와, 완벽하게 사,


사랑해 주겠습니다.’

“…….”
그리고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깨어났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 화


3. 남편이 돌아오긴 했는데

“알렉!”
남편이 눈을 떴다.
그는 극독의 함량으로 악명 높은 쥐약 한 명을 모두 마신 상태였으나, 그런 것치고는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깨어났네요! 괜찮은 거예요?!”
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그의 멱살을 잡아 버렸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찰싹!
“미쳤니, 너?”
대뜸 시어머니가 내 손등을 때렸다.
“어서 그 손 치우고 비켜라!”
메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시어머니가 나를 밀쳐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남편의 극단적인 시도에 시누이마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알렉! 이제야 정신이 드니? 여기 의사 말로는 네가 독약을 물처럼 다 소화시켰다는구나.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니. 이 어미를 두고 어떻게 그런…
…!”
“…….”
남편은 멍하니 천장만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다, 다시 태어나고…… 또, 또 다시 태, 태어날 거야…….’

도대체 그게 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죽으려고 한 거였어?


결국 그가 죽지 않아서 다행인 건 둘째 치고 나는 배신감이 들었다.
아니, 더 이상 삶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그의 심경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뭐라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으로 나는 걱정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아직 그는 나나 다른 가족들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건가……?’
쥐약을 마신 후유증으로 혹시…….
“의사 노릇을 한 지 벌써 수십 년째지만 각하 같은 체질은 처음 봅니다. 이건 기적이에요……! 정신이
드십니까, 각하? 아, 아니 알렉시스 마이어스 님!”
“…….”
의사의 물음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마른침을 꾹 삼킨 내가 다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여보……?”
그런데 그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조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보?”
꼭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크게 뜬 눈은 깜박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두 배는 더 크게 벌어졌다.
“……!”
나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이렇게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쥐약을 마신 건 둘째 치고 나를 보는 저 눈망울이 너무도 순수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설마 기억을 잃었나?
이 기묘한 착각을 애써 떨쳐 낸 내가 얼른 소리쳤다.
“여보! 정신이 드는 거죠? 당신 쥐약 마신 건 기억 나요?”
“…….”
남편의 시선은 여전히 크게 뜨인 채로 나에게 박혀 있었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은 시간이 짧게 지나가자 서서히 그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 갔다.
시어머니와 의사, 시누이 엘로이까지.
그사이 모두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그의 분위기가 무척 심상치 않아서 얼른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이를테면 ‘나는 괜찮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그 한마디를.
“여보…….”
“공작 각하…….”
“알렉…….”
기다리다 못한 우리가 그를 불렀을 때.
“읏.”
그가 고통을 느낀 듯 반듯하고 단단한 미간을 흠씬 구기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보!”
화들짝 놀란 나와 동시에 시어머니도 벌떡 일어났다.

* * *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부인. 공작 각하…… 아, 아니 알렉시스 마이어스 님께서는 금세 추스르고


일어나실 겁니다.”
의사는 여관 근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는지 남편의 호칭을 금세 정정했다.
‘그래, 이제 공작 각하가 아니지…….’
나도 공작 부인이 아니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작위보다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더 다행으로 와닿았다.
정말로 그가 영원히 눈을 감았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막상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다 망연해졌다.
아무리 외모 말고는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남편이었어도, 그래도 좋은 사람인데…….
3 년이나 알고 지내면서 그를 믿게 되었는데…….
“고마워요, 데이브. 덕분에 염려를 덜 수 있었어요.”
“예, 부인. 그럼 저는 이만…….”
“네. 조심히 돌아가세요.”
의사는 모자를 벗어 허리를 한번 숙이고는 여관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나는 이만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있는 방의 문을 두드리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차마 노크를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이 암담한 상황에서 혼자만 도망치려 했다니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죽지 않고 무사히 깨어나 줘서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한숨을 내쉰 나는 이윽고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는 어떠한 답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이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여보?”
“…….”
내 부름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날 발견했다.
그는 큰 그릇을 들고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단추를 다 풀어 헤친 셔츠가 가장 먼저 내 눈길을 끌었다.
‘?’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이 드러나는 것을 무척 꺼리던 남편이었다.
혼자 있을 때나 아플 때도 강박적으로 제 몸을 가리고 있곤 하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무심코 그의 몸을 훑었다.
언제 보아도 늘 압도적인 체형.
넓게 부푼 가슴 밑으로 짙은 그늘이 지고, 그 아래 쫙쫙 쪼개진 근육이 그림처럼 드러나 있었다.
죽었다 살아난 환자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탐스럽고 환상적인 근육이 새하얀 피부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들었을 때.
“…….”
여전히 그는 놀란 듯 정지해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 번도 남편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윤곽이 뚜렷하고 부리부리한 눈매도 어쩐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더 날카로워 보였다.
눈동자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감돌고 있었는데 나를 향한 약간의 경계심마저 보였다.
애써 생소한 기분을 떨쳐 낸 나는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괜찮은 거 맞아요, 알렉?”
“…….”
남편은 조심스럽게 그릇을 든 손을 내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안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죽을 뻔하다 살아났는데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황홀했다.
의사 말대로 다행히 멀쩡한 것 같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이긴 했다.
‘그래.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
나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위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다짐과는 달리 울컥하는 걸까?
“나 당신을 진짜로 원망할 뻔했어요.”
“…….”
“갑자기 으리으리한 저택을 잃고, 공작 부인이라는 신분을 잃어도 견뎌 보려고 했는데.”
“…….”
“남편이 죽으려고 했다니,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아세요?”
그의 얼굴을 보니 서러워 따지듯 묻게 되었다.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완벽한 남편이 되어 사랑해 준다더니, 결혼한 지 3 년이 되도록 그런 말 한번 한 적 없으면서. 그래 놓고
자긴 죽을 거면서 그런 말은 왜 한 거예요?”
“…….”
남편의 눈동자가 사방팔방 일렁였다.
내가 너무 따졌나.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사람인데…….
“아무튼 그래도.”
갑자기 미안해진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곁에 앉아 그의 팔을 둘러 안았다. 두툼한 팔 근육이 흠칫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와 나 사이에 먼저 다가가는 사람은 대부분 나였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무척 부끄러워했는데, 지금은 얼어붙은 듯 나를 내려다보는 게 좀 이상했다.
자기가 죽을까 봐 내가 슬퍼한 게 의외였나……?
“살아나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다신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또 그러면 진짜 화낼 거니까.”
말을 마친 나는 눈을 감으며 턱을 들었다.
다친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 그의 뺨에 입술이라도 맞춰 줄 생각이었…….
“……풉!”
“…….”
그런데 내 얼굴 위로 차가운 방울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콜록, 콜록!”
뒤이어 환장할 기침 소리.
“…….”
아직 남편의 입 안에 채 넘기지 못한 물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 * *

한편 루이제가 나간 방 안.
알렉은 당혹스러운 손짓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아내라는 여인은 그에게 좀 더 쉬고 있으라며 방을 나갔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가슴이 크게 쿵쾅거렸다.
난생처음 여자에게 뽀뽀를 당할 뻔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더 황당무계하게도…….
‘대체 여기는 뭐야.’
그는 낯선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곳은 그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BBC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인테리어와 의복들, 알렉이라는 낯선 이름, 초면의 가족들.
설마 차원 이동이라도 하게 된 걸까? 갑자기 왜?
27 년을 사는 동안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다 겪은 그였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알렉은 황급히 거울을 찾았다. 다행히 오래된 거울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 화

탁한 거울의 표면에도 생김새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


“…….”
순간 그는 거울 속 조각 미남의 모습에 흠칫 굳어 버렸다.
원래의 그와 몹시 달라서는 아니었다.
‘나랑 너무 닮았잖아?’
도플갱어나 평행 세계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알렉은 자신의 생김새를 눈으로 훑으며 얼굴에 손끝을 갖다 댔다.
흐트러진 짙은 흑발과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매끈한 눈썹과 반듯한 콧날, 그리고 날카로운 턱선과 야릇한 입술까지…….
묘하게 국적이 다른 것 같은 분위기 빼고는 어디 하나 비슷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의 잃어버린 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외모가 똑같았다.
“하…….”
알렉의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그건 그냥, 그였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이곳에서 눈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기억이 희미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정체와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 그는 대서사를 끝낸 현대 게임 판타지 소설 속 히어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는 게이트라고 불리는 차원의 문이 열렸고, 그 속에서 온갖 마물들이 나타나 인간을
위협하고 전염병을 퍼뜨렸다.
끝나지 않는 주위의 죽음과 멸망의 공포.
전 세계의 인류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소멸과 무력함을 실감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의 앞에 게임 상태 창 같은 푸른빛의 시스템이 나타났다.
시스템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각성시켰고, 각성자들은 끊임없는 퀘스트로 레벨을 올려
더욱 강해졌다.
알렉 또한 그런 각성자들 중 한 명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각지에서 나타나는 마물들을 해치웠다.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그의 성장에는 끝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랭킹을 차지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을 만큼, 그와 2 위의 격차가 신과 보통 인간 수준으로
벌어질 만큼 그는 강력해졌다.
등급이 SSS 급에 달하는 보스 몹은 이제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구에 흉측한 마수를 보내는 주체를 찾아내 세계를 구해야 했다.
그건 바로 지구를 점령하려 한 이세계의 신.
마침내 최종 전투에서 그는 인간도 아닌 존재와 싸워 승리했다.
더 이상 지구와 사람들은 위험하지 않았고, 그토록 바랐던 평화가 펼쳐졌다.
상태 창과 함께 종횡무진 굴렀던 그에게도 드디어 ‘끝’이라는 지점이 찾아온 것이다.
해냈다, 는 안도감 뒤에 밀려온 건 의외로 허탈함이었다.
세상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그도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걸까?
전투와 살육과는 무관한 삶을 이제 얻을 수 있을까?
세상은 구했지만.
‘내 삶도 구원받을 수 있나?’
세계의 평화 외에 그가 진짜로 원한 건 뭐였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당장은 조금 쉬고 싶었다.
그렇게 눈을 감은 그의 앞에 어김 없이 상태 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냉혹한 모태 솔로’님!]

“…….”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냉혹한 모태 솔로 → 신을 죽인 구원자]
“…….”

[21 세기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신을 죽인 구원자’님께 드디어 최종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최종 보상?’
마지막 전투는 시스템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퀘스트였던 걸까?
받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그는 최종 보상을 수락했다.
아무쪼록 게임 머니나 아이템이나 스킬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순간 주위가 점점 새까맣게 점멸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의식을 잃었다.
그 전에 짧게 생각했던 것은.
‘하와이로 보내 줘. 아니면 괌, 발리…….’
그는 오랜 포상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의식을 되찾은 그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알렉!’
‘정신이 드십니까, 각하? 아, 아니 알렉시스 마이어스 님!’
‘여보……?’

“…….”
뜬금없이 다른 세계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다니.
기껏해야 해외 휴가 정도를 생각한 그는 당황스러운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미친…….”
예고도 없이 사람 놀라게…….
최종 보상이라는 게 새 인생이었어?

* * *

“휴우…….”
방문을 닫고 나온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아직 혼란스러운 것 같아 더 쉬게 했다.
벽에 기댄 나는 불편하게 먹먹한 가슴을 꾹 눌렀다.
쿵쿵쿵…….
가슴 아래에서 아직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그가 쥐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가슴은 계속 이 상태였다.
짧은 사이에 충격과 절망과 안도의 롤러코스터를 탔기 때문일까?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나서 정말 다행이고 안심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많이 안도하고
있었다.
새삼 그의 존재가 이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나 싶었다.
‘알렉, 역시 내 반응에 당황했던 거구나. 얼마나 놀랐으면 물을 다 뿜어.’
하긴 나도 당혹스러운데.
나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알렉과 나는 서로 애틋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부부가 아니었다.
지금껏 그에게 원망과 실망을 품고 있었고,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안도하는 부인이라니, 아마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그가 놀라다 못해 머금고 있던 물을 다 뿜어 버린 게 이해가 갔다.
씁쓸하고 쓸쓸했다.
‘……혹시 또 나와 이혼을 하려고 할까?’
그가 다시 눈을 뜨긴 했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으니 또 나를 밀어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후계자를 낳기 전까지는 시어머니가 절대 허락해 주지 않겠지만…….
‘이혼이라니, 내가 싫어…….’
나는 등 뒤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새 정이 많이 들었나?
그가 이혼을 말하던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연했다.
그가 죽는 줄 알았을 때는 발밑이 꺼지며 가슴이 뻥 뚫리는 좌절감을 느꼈다.
나도 이런 내가 너무 낯설지만.
알렉과의 이별은 또 겪고 싶지 않았다.

* * *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여관의 부엌을 빌렸다.


어제저녁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집안이 쫄딱 망했으니 먹을 정신이 없기도 했고, 누군가 음식을 줬어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슬슬 남편이 배가 고플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시누이도 마침 “우리 뭐 안 먹어?”라며 찾아왔다.
“10 골드예요.”
“네?”
“부엌 빌리는 비용이요.”
여관 주인이 턱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 그렇죠. 네.”
흔쾌히 빌려준다고 해서 무상인 줄 알았더니 셈이 철저한 곳이었구나.
10 골드면 한 사람이 이 여관에서 하루는 더 묵을 수 있는 가격인데…….
나는 드레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10 골드를 건네며 말했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큰일 치를 뻔해서요.”
“……될 수 있으면 빨리 나가 주시면 좋겠군요. 황제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우리한테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으니.”
여관 주인은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냉큼 돌아서 버렸다.
치맛바람에서 풍긴 싸늘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여관 주인이 폭군의 눈 밖에 난 우리를 받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폭군 개자식…….’
그놈만 떠올리면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나 자신이 꼭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잠시 화를 삭인 나는 이내 챙겨 온 가방을 열었다.
공작가에서 쫓겨날 때 시녀장이 몰래 쥐여 준 것이었다.
안에는 캔에 든 비상식량과 빵이 들어 있었는데, 요리라고 해 봤자 그것들을 데우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우유는?”
이윽고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있는 방에 뜨끈한 빵과 수프를 가져다주었을 때였다.
시누이가 빤히 쟁반 위를 내려다보더니 우유를 찾았다.
나는 한숨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없어.”
“뭐야. 우유도 없이 어떻게 먹어!”
“싫으면 먹지-.”
“아, 아니야! 언니.”
탁!
“…….”
내가 그릇을 빼앗으려고 하자 시누이가 냉큼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나는 남편과 나의 방으로 향했다.
‘참자. 원래 세계였다면 중 2 잖아…….’
엘로이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윽고 살짝 열린 문을 당기니 남편이 조금 초조한 태도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
어제까지는 넋 빠진 사람 같더니 이제야 뭔가 우리의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는 걸까?
남편이 저리 날카롭게 고뇌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의외였다.
“알렉.”
불쑥 내뱉은 내 목소리에 그가 화들짝 몸서리치더니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 화

“배고팠죠? 드릴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요.”


나는 작은 테이블 위에 빵과 수프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남편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나와 음식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얼마나 황당할까?
이런 부실한 식사는 처음일 테니까.
식구들 중에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이러다 우리 알렉 몸에서 근육이라도 빠지면 큰일 나는데…….’
이제 남은 건 정말 건강한 몸뿐이잖아.
“……미안해요. 그래도 이런 식사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난 먹을 걸 챙길 정신도 없었거든요.
시녀장한테 고맙다는 말도 미처 못 했네요.”
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냈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그제야 남편이 다가왔다. 힐긋 보니 어색한 눈치였다.
나는 드레스 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던 병에 담긴 우유와 컵을 꺼냈다.
쫄쫄쫄.
꿀꺽.
내가 컵에 우유를 따르는 사이 그가 긴장이라도 되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 탓에 툭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아픈 사람 목젖이 저렇게 섹시할 건 또 뭔가 싶었지만, 묘하게 나와 내외하는 느낌이 들어 신경이 쓰였다.
원래도 서로 무척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어도 이 정도로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나한테 면목이 없어서 저러는 걸까?
“마셔요, 알렉. 엘로이와 어머님한테는 제가 우유 줬다는 말 하지 마시고요.”
“예?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 말한 남편은 내가 내민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놓였다.
휴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나도 빵을 찢어 입에 넣었지만 별로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슬쩍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가 따뜻하게 데운 빵을 조금 뜯어 먹었다. 빵을 먹는 건지 종이를 씹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래도 먹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배가 부르는 것 같네…….’
잠시 그렇게 먹고 있는데, 왠지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
내심 한숨을 내쉰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빵이 너무 거칠었어요? 하긴 이런 거 안 먹어 봤을 테니까…….”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맛있습니다.”
……맛있다고?
얼핏 들어도 거짓말 같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자신보다 남의 기분을 가장 우선으로 헤아리는 사람이니까.
이런 퍽퍽하고 맛없는 빵보다 더 허술한 음식이었어도 나를 위해서 맛있다고 할 사람이다.
다행히 금세 그는 진정되었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리 맛있어도 천천히 드세요.”
“……예.”
다시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침 겸 점심은 이렇게 해결하겠지만 저녁은 또 어쩌지.
살면서 다시 먹을거리 걱정은 안 할 줄 알았는데.
고아원에서 눈칫밥을 먹던 전생의 기억까지 떠오를 지경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불쑥 들려온 저음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편의 눈동자가 또 한 번 크게 일렁였다.
무심결에 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모양이었다.
“좋을 리가 없잖아요. 남편이 이혼하자더니 혼자 죽으려고 했는데.”
“…….”
이번에는 남편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는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가를 쓸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어색하긴 해도 미안하고 면목 없는 얼굴.
그 깔끔한 태도에 나는 내심 의아했다.
묘하게 낯설고 정중하다.
혀가 감전된 듯한 그 답답한 말투가 아니라 어조도 평범하고 어른스러웠다.
‘헉! 정말 말투가 달라졌잖아?’
나는 하도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한 거지?
그는 깨어난 이후로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탓에 갑작스러운 변화라도 생긴 걸까?
혹시나 싶은 내가 물었다.
“알렉, 당신 갑자기 달라진 것 같아요.”
“예?”
“당신 말투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요. 혹시 다시 말해 볼래요?”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얼른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으나 알렉은 나보다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에러 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
아닌가?
하긴 처음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랬다는데 쉽게 고쳐질 리 없지.
“아니네요. 설마 했어요. 어서 마저 드세요.”
내가 잘못 들었나?
잠시 갸웃한 나는 다시 수프에 스푼을 담갔다.
남편이 또 마른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내 얼굴을 볼 면목도 없는지 그는 의식을 되찾은 후로 평소보다 더 나를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 * *

‘……하아, 미쳐 버리겠네.’
한편 알렉은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입술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맞은편에는 그의 부인이 별로 입맛이 없는 안색으로 수프를 한 입 떠먹고 있었다.
순간 그를 의심한 듯했지만 그가 자신의 남편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에 그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싶은 그는 상태 창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았다.
눈앞의 부인이 게임 속 NPC 가 아닌 건 분명한 것 같았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다니 황당하네.’
심지어 빙의한 몸의 주인은 어머니와 여동생에 아내까지 있었다.
세상을 구하느라 결혼은커녕 연애도 해 보지 못한 그로서는 갑자기 아내가 생긴 이 상황이 감당하기
벅찼다.
‘여보……?’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얼마나 기함했던가.


갑자기 그의 인생에 훅 들어오기에는 지나치게 따뜻하고 간지러운 호칭이었다.
‘대체 이 세계가 왜 나의 최종 보상인 거지?’
그는 한 번도 가족을 원한 적이 없었다.
가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혼자 있는 편이 더 편했다.
알렉시스나 루이제는 그가 아는 인물들도 아니었다. 그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 그가 받기로 한 ‘보상’이 ‘평범한 남편의 두근두근한 일상!’이라거나 ‘귀환했다가 딸바보가 된
아빠♡’ 같은 걸까?
어떤 상황이 눈앞에 벌어져도 냉정을 유지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당혹스럽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강 지금의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가족들의 대화로 파악했다.

‘갑자기 으리으리한 저택을 잃고, 공작 부인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잃어도 견뎌 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죽으려고 했다니,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아세요?’
‘좋을 리가 없잖아요. 남편이 이혼하자더니 혼자 죽으려고 했는데.’

“…….”
그러니까 작위를 잃고 가문이 몰락한 탓에 아내와 가족들을 포기하고 죽으려 했다는 건가?
원래의 알렉시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알렉이 이제 바로 그였다.
‘왜 하필…….’
지금까지 시스템이 그에게 준 보상은 늘 그와 관련된 것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었다.
알렉은 이번에도 그가 폭망한 공작 알렉시스가 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앞으로 그 이유를 찾아가야 하는 건가, 싶은 순간.
침묵을 유지하던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 * *

“……이 여관에서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한동안 음식을 먹던 나는 혼자 숨겨 봐야 소용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에게 돈도 집도 없다는 현실 자각적인 이야기였다.
“……여관 주인이 황제 폐하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하긴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니까요.”
“…….”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 폭군이 또 무슨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요.”
나는 슬쩍 눈을 들어 남편을 응시했다.
그는 말이 없었다.
하긴 당장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는 말에 그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어차피 그에게 뭔가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마침 식사를 마친 듯 그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렇군요.”
아까보다 조금 침착해진 태도였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또 답지 않은 의젓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에 누이, 아내까지 있는데 언제까지 여관을 전전할 수는 없죠.”
그리 말하며 남편은 깨끗하게 비운 자신의 그릇들을 하나로 쌓아 놓았다.
“……?”
갑자기 웬 정리 정돈인가 싶어 내 눈이 조금 커졌다.
그의 눈빛도 다른 사람처럼 척 변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벼려진 칼날처럼 깔끔한 저 눈빛.
알렉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 화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이 묵을 곳이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자기가 해결하겠다니, 저 남자가 언제부터 저렇게 자신감이 있었지?
늘 소극적이고 나서지 않는 사람이 저리 확신에 가득 차 말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하려고요? 아,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한테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요?”
정말 가문이 몰락해서 정신이 확 든 건가?
폭군의 충격 요법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설마 그게 어느 정도 남편을 각성시키긴 한 건가
싶었다.
남편은 찬물을 마시고는 조금 진지하고도 확고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처음 보는 눈빛과 각오로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돈을 벌어서 집을 구해야겠습니다.”
“……?”

* * *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이 무슨 오며 가며 살 수 있는 빵도 아니고 집을 살 만한 돈을 갑자기 어디서 구한다는 건가.
그러나 나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하도 어안이 벙벙해서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까.

‘부인은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했다.


‘아마 나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금방 돌아올 거야.’
그리 믿으며 나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혹시나 그가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을 해서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군 이름은 왜 물어본 거지……?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데요?’
‘이름이 뭡니까? 그 폭군이라는 황제.’

“…….”
새삼 원수의 이름이라도 가슴 깊이 새길 작정이었나.
남편의 말이나 행보가 아무래도 너무 불안했다.
아아.
내 신세야.
생각해 보니 쥐약을 먹고도 정신이 제대로 굴러갔다는 사람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빨리 돌아와, 알렉…….’

* * *

여관을 나온 알렉은 한동안 돌아다니며 주위를 주시했다.


또렷하고 강렬한 눈빛, 완벽하게 각이 잡힌 콧대, 색기가 넘치는 붉은 입술.
어딜 가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훤칠한 키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도 사람들의 의복을 아닌 척 훑어보았다.
그가 살던 시대에선 보기 힘든 실크해트와 지팡이, 반들반들하게 빛이 나는 드레스와 풍부한 레이스까지.
‘18 세기? 아니 19 세기인가……?’
사람들이 오가는 밖으로 나왔더니 이곳이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게 실감되었다.
달리 말하면 역사 속 같았다.
‘한참 과거로 온 것 같은데, 원시시대가 아닌 게 다행이군.’
그러나 시스템 보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집도 없고 돈도 없는 비상 상황이었다.
정말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되는 걸까?
당분간?
아니면 평생?
알렉은 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몰락시킨 제국의 주인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 이름이요? 악센 카이슬리잖아요. 갑자기 그건 왜요?’

“…….”
악센 카이슬리.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희한하게도 딱 그런 이름의 폭군을 이미 그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느다랗게 미간을 세우고 기억 속을 헤집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그 책?’
알렉은 전생에 시스템 보상으로 받았던 책 한 권을 떠올렸다.
〈일그러진 태양〉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바로 그 주인공의 이름이 악센 카이슬리였다.
황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악센은 존재감 없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신의 상황을 끔찍하게 혐오했던 그는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권력을 늘 꿈꾸었다.
결국 악센은 자신의 운명을 피로 개척해 황위에 올랐다.
큰아버지인 황제 부부를 암살하고, 황위 후계자였던 어린 사촌 동생을 감금한 결과였다.
‘혹시 그 책 속으로 내가 들어온 건가?’
읽을까 말까 하다가 읽어 두었더니 이런 식으로 쓸모가 생길 줄이야.
놀라웠다.
하필이면 그 책 속 세계에 살게 되다니.
그러나 그는 금세 심드렁해졌다. 어차피 이 또한 시스템의 안배일 테니까.
그가 빙의한 알렉시스가 책 속에서 어땠는지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니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렇게 기억 속을 헤집던 그는 문득 초반에 죽은 엑스트라 한 명을 떠
올렸다.
쥐약을 먹고 죽은 공작이 있었다. 남편이 죽자 그의 부인이 따라 죽었었다.
‘설마 그 공작이 지금 나인가?’
힘들었던 완결 후 포상으로 얻은 그의 지상 낙원에 폭군이라니.
분명 근사했을 공작가의 저택은 구경도 해 보지 못했고, 인생 쉽게 살 수 있는 높은 신분도 누려 보기
전에 빼앗겨 버렸다.
그가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건 아니지만, 공작이 개털이 된 건 조금, 아니 많이 거슬렸다.
원래 알렉시스는 쥐약을 먹고 바로 죽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와아! 멍청한 공작 알렉시스다!”
퍽.
그의 이마로 질척한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쳤다.
“…….”
무른 과일에서나 날 법한 달콤하고 농밀한 향이 훅 끼쳤다.
단단한 씨앗은 그의 반듯한 이마를 날카롭게 찍고 추락했다.
그는 불쾌하게 얼굴을 적시는 과즙을 쓱 닦아 내며, 날 선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들었다.
대체 감히 누가 이런 짓을.

‘스킬. 살기 어린 눈빛.’

이 시선 한 번이면 잔학무도한 마수들도 잔뜩 주눅이 드는 살벌한 스킬이었다.


어떤 놈인지 가만두지 않겠…….
그러나 순간 그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아, 없구나. 스킬…….’
여기선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약간 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공격한 상대는 뜻밖에도 어린 인간이었다.
고귀한 가문의 자제처럼 차려입은 남자아이에게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자가 다가왔다.
“애덤! 아무리 착한 분이어도 이러면 못 써! 그리고 이제 저분은 공작 아니래도!”
“…….”
여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아들을 데리고 황급히 사라졌다.
알렉은 그 뒷모습을 잠시 허망하게 응시했다.
믿을 수 없었다.
‘여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산 거야, 알렉……?’
겨우 쥐방울만 한 아이에게 멸시와 폭력을 당하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알렉의 눈빛이 스킬을 썼을 때만큼이나 냉랭하게 빛났다.

* * *

결국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도 경황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는데, 간밤에 잠은 대체 어디서 잔 걸까.
“혹시 하루 더 묵어도 될까요……?”
“대체 언제까지 있으려고요?”
여관 주인이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음, 확실하진 않지만 며칠만 더…… 혹시 이틀 이상 머물면 숙박비를 조금 깎아 주실 수는-.”
“뭐요? 이제는 깎아 달라고요?”
“네?”
“어제 그쪽 남편이 돌아오면 세 배로 방값 쳐준다고 쫓아내지 말라고 하더니만, 왜 말을 바꿔요?”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순간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남편의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했다가는 당장 쫓아낼 거 같아서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이 남자가 진짜!’
아무래도 따라갈 걸 그랬나 보다.
그렇게 초조한 날이 하루 더 지나갔다.
나와 시어머니, 시누이는 여관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따뜻한 차가 있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만큼 불안했다.
옆에서 차를 홀짝이던 시누이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무슨 수로 집을 구해 온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 쥐약 부작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엘로이.”
남편을 비하하는 시누이의 발언에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엘로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더 뾰로통해했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오라버니가 뭘 할 줄 알아. 사냥도 못 하고 승마는커녕 검술도 못 하잖아.
그런데 집 살 돈을 어떻게 구해?”
“그게 집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자기도 생각이 있으니까 나간 거겠지.”
“생각은 개뿔. 어디서 돌이나 맞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몰라.”
“…….”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로이를 응시했다.
슬프게도 시누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알렉은 그 흔한 승마나 사냥조차 하지 않았다. 절대 달리지도 않았다.
별로 격한 것도 아니었는데 움직임에 왜 그토록 민감해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사나 다른 치료사들이 원인을 찾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알렉도 이런저런 약들을 먹으며 나아지려고 했지만, 아주 약간의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상태가 결벽증처럼 심각한 강박 관념이나 정신병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의사들이 그에게 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닌지 여러 번 물었지만, 그는 그런 건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 화

“그러게 나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부족한 거 없이 부유하게만 자란 알렉이 어떻게 집을 구해


오겠다는 건지…….”
시누이에 이어 시어머니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알렉이 직접 노동을 해서 돈을 번 적은 없어서 시어머니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공작인 그는 지금까지 땅에서 나오는 돈을 소작인들에게 거둬들이기만 했다.
나도 알렉에게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어디 사무실이나 회계 법인 같은데 취업이라도 하러 간 거 아닐까?’
알렉이 장부 같은 건 정말 기가 막히게 보니까.
결혼 초만 해도 브렌트 공작가의 영지는 제국 내 귀족들이 소유한 영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관리해야 할 소작인들도 몇천 명에 달했다.
알렉은 자신이 작위를 잇고 난 후 선대 공작 시절의 그 많은 장부를 모두 검토하더니 비리와 적폐를
발견해 내기도 하였다.
우리 가문에서만 소소하게 화제가 된 사건이었지만, 나는 천재 이과생 같은 그의 면모를 발견하고는 가슴
떨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사무실에 취업하게 된다면, 급료를 몇 년 치 가불해 집을 구할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꼭 집을 살 만한 큰돈이 없어도 월세를 내는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렸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등신 같은 공작을 받아 주거나 동정하는 자 그 누구라도 적발될 시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누구도 우리 가문을 받아 주지 말라는 폭군의 엄명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지만 마음이 불편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무심코 시선을 옮기자 여관의 정원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천상의 신이 강림한 듯한 훤칠한 키와 예사롭지 않은 체격.
그리고 전설로 추앙받는 장인이 섬세하게 조각한 듯한 얼굴의 윤곽선과 아름다운 목 라인.
이런 그림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번쩍 머리를 들었다.
거짓말처럼 알렉이 들어서고 있었다.
“……알렉!”
내가 벌떡 일어서자 동시에 시어머니도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알렉! 대체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온 거니!”
“여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나는 빠르게 남편의 모습을 훑었다.
정말 내 남편 맞는 거야?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또 어린아이들에게 계란을 맞아서 더럽혀진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이나 외박을 한 사람답지 않게 말끔했다.
주변의 빛들을 모두 흡수한 듯 광채가 넘치고,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조차 아름다운 연출
같았다.
나와 식구들의 호들갑이 무색하게도 그의 태도는 냉랭할 정도로 무척 차분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다들 어서 짐을 싸시죠.”
“네?”
“우리가 지낼 집을 구했습니다.”
“뭐어? 그게 정말이야, 오라버니?”
“진짜로요, 알렉?”
“그러게, 알렉 네가 어떻게…….”
우리는 모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웬만해서는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시누이까지 놀라워했다.
남편은 그런 우리의 반응을 찬찬히 응시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장면인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소리를 냈다.
“……많이들 놀라신 것 같군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의 집을 빼앗은 건 아닙니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부드럽고 우아했다.
저 진지하면서도 고고한 자태.
어깨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선 자세며, 다른 인격이 된 듯 서늘하면서도 똑 부러진 말투.
나는 망치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못 본 사이에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거 아니야……?’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시누이가 펄쩍 뛰었다.
“꺅!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오라버니 말 좀 다시 해 봐!”
그러나 그는 시누이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못 들은 체하는 건지 회중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얼른 출발해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
과연 물 흐르듯 유려한 말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턱이 동시에 벌어졌다.
“헐, 대박.”
“오, 알렉……?”
시누이는 혀까지 빠질 것 같았고, 시어머니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알렉도 굳은 듯 그들을 응시했다.
“…….”
나도 얼이 빠진 사람처럼 눈도 깜박이지 못하며 알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평생 낫지 않았던 말투였다.
‘루이제’라는 단 세 음절밖에 되지 않던 내 이름을 한 번에 발음하는 것도 3 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말 더듬는 증세가 사라졌다고?
태어나 처음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평생 지속되었던 상태였는데?
“당신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 말투가…….”
“예?”
나는 한 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쩜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유창해질 수 있는 거죠?”
“아, 그게…….”
그가 시선을 내리며 제 턱을 쓸었다.
내 물음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했다.
꽤 어려운 고민인 듯 살짝 미간까지 모았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의 발음은 거침없이 부드러웠다.
모두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한동안 입술만 달싹일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의 눈빛이 한번 흔들리더니 체념한 것처럼 소리 냈다.
“……사실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
모른다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조금씩 나아진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가 변해 버렸다. 그런데 자기 자신도 모를 정도면 대체 무엇
때문이라는 걸까?
이건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 정말로 폭군의 충격 요법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사람이 정말로 심한 충격을 받으면 전과는 다른 징조가 나타나기도 하니까.
나는 최근에 그가 큰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폭군에 의해 작위와 재산 등 모든 것을 털린 것과 가장 최근에는 스스로 쥐약을 마신 것 등등 충격적인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쥐약.
문득 나는 그가 한 병을 다 마셨던 독약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는 그 치명적인 약물을 치사량 이상으로 마시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그가 막 깨어났을 당시에는 살아났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그냥 그가 너무도 특이한 체질이라고 운 좋게 생각하며 넘겼지만, 혹시 그 독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던
게 아닐까?
이 또한 근거 없는 상상이긴 했다.
멍하니 생각하던 내가 중얼거렸다.
“당신도 당신이 왜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고요?”
“……예.”
그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망설이는 듯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결국 나는 홀로 생각했던 가능성을 털어놓았다.
“그럼 혹시 당신이 마신 쥐약 때문인 건 아닌가요?”
“……예?”
“가끔은 독이 약이 되기도 한다잖아요. 당신은 독이 치명적인 체질이 아니라니, 혹시라도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몰라요.”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 쥐를 잡은 격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알렉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이유였다.
알렉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시어머니는 내 말에 수긍하듯 탄식했다.
“오, 세상에.”
“쥐약……?”
시누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내가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을 잘할 수 있겠어요? 당신 지금까지 실수로라도
독을 마신 적 없죠?”
그렇지?
내가 알기로 그는 독약 같은 걸 접할 일이 없었다.
그제야 그가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째 뻣뻣한 태도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
역시 독을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구나!
독약 때문이 아니라면 남편의 상태를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약과 진귀한 약재 등 안 먹어 본 것이 거의 없었다.
독의 함유량이 높은 쥐약 같은 건 당연히 치료제로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시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감탄했다.
“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쥐약이 알렉 네 혀에 있던 쥐새끼 같은 병균을 죽인 거다”
“…….”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주먹을 세게 쥐고 눈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정말로 그의 증세가 나은 거구나.
한 번에 씻은 듯이 사라지다니 거짓말 같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심경으로 독을 마신 건지 내가 다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이렇게 된 것을 기뻐하기도 좀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알렉.”
나는 촉촉한 눈으로 그를 부르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안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당신 너무 힘들어했잖아요.”
나는 두 손을 뻗어 살포시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내 손길에 순간 멈칫한 알렉이 찔끔 물러섰다.
“…….”
사람들이 많은 밖이라서 놀랐나?
그가 내 포옹을 거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당황했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감동에 차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직 세상이 우릴 버리지 않았나 봐요.”
“…….”
나는 그를 안는 대신 그의 팔 한쪽을 붙잡았다.
“이제 아무도 당신을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말투 때문에 멍청하다고 오해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앞으로는 억울할 일이 예전보다는 많이 사라질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가 상처받을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죽지 말고 새로 시작해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 화


4.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이게 뭐지?’
덜컹. 쿵. 덜덜덜…….
마차가 정돈되지 않은 흙길을 달렸다.
그 안에서 알렉은 속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신 말투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요. 혹시 다시 말해 볼래요?’


‘어쩜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유창해질 수 있는 거죠?’
‘꺅!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오라버니 말 좀 다시 해 봐!’

그가 빙의한 알렉시스는 원래 말을 잘 못 했던 걸까?


그냥 평범하게 말했을 뿐인데, 가족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해 그도 당황스러웠다.
설마 말이 서툰 사람 몸에 빙의했을 줄이야.
가족들이 펄쩍 뛸 듯이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넘어가야 하나 얼결에 생각한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사실을
실토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이유로 상황은 해결이 되었다.
알렉시스가 죽기 전에 마신 쥐약 덕분이었다.

‘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쥐약이 알렉 네 혀에 있던 쥐새끼 같은 병균을 죽인 거다!’

“…….”
이거 무슨 지뢰 밟기 게임도 아니고…….
알렉시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앞으로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의심을 받을지 몰랐다.
그로서는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었다.
‘나 여기서 괜찮은 건가?’

* * *

우리는 겨우 알렉의 말투가 변한 여운에서 진정되었다.


그가 내뱉는 말마다 어쩜 발음이 유리 쟁반에 크리스털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고 황홀한지 들을수록
감탄스러웠다.
나는 두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감동에 벅차올랐고, 그럴 때마다 알렉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결국 나는 그를 배려해 조금 자중했다.
그런데 마차가 달릴수록 반신반의한 마음이 점차 강해졌다.
진짜로 집을 구한 건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다.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남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턱을 괸 채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집을 구했다면 혹시 뭔가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게 아닐까?
그런데 담보로 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장기 매매가 가능한 시대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의구심을 참지 못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렉. 그런데 정말 어떻게 집을 구한 거예요?”
내 말에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집중했다.
얼떨결에 알렉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들은 나보다 더 알렉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 그건.”
“……?”
“그냥 제가 아는 지식을 활용했습니다.”
“지식……?”
물론 그는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서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을 정도이니 그의 독서량은 내 상상 이상으로 방대할
것이다.
혹시 그중에 벼락 거지가 되어도 살아남는 방법 13 가지, 땅 파서 집 사기 뭐 이런 책들도 있었던 걸까?
그가 얼마나 똑똑한지에 대해서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 땡전 한 푼 없는 상황에서 집을 살 수 있을 만큼 똑똑할지도 몰랐다.
“마침 거의 다 집 도착했군요. 저 집입니다.”
남편이 창밖을 보자 나를 비롯한 여자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노을이 내리는 차창 밖으로는 단 하나의 집만이 존재했다.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넓은 초원 위에 자리한 목가적인 저택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로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설마 저 집이라고?”
시누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오라버니, 지금 우리한테 사기 치는 거 아니지?”
“…….”
나 또한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다.
원래 지내던 공작가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이었으니까.
화려하고 부유한 영지에서 느긋한 시골로 귀농을 온 듯한 느낌이었다.
“때마침 급하게 나온 매물이라 금방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나요?”
남편의 설명에 그리 되물으면서도 나는 아직 머릿속이 아득했다.
왠지 저곳에서라면 폭군에게 당한 기억을 잊고 남은 생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일도 없을 거고,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
‘저런 집을 정말 내 남편이 구했다고……?’
나는 남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저택을 보면서도 딱히 별 느낌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 속에서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휘몰아쳤다.
감동, 불신, 미안함, 고마움, 또 감동…….
멍한 내 귓가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네가 어떻게 저런 근사한 집을…… 그것도 며칠 만에…….”
우리의 반응에 남편이 조금 흐뭇해했다.
쥐약을 마신 이후에 처음 보는 웃음기였다.
“운이 좋았죠. 마침 저 집에 유령이 나와서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줄행랑을 쳤다고 하더군요. 어젯밤에 또
유령이 출몰해서 집주인이 살림까지 다 버리고 떠났다고 합니다.”
“…….”
“…….”
나와 시어머니는 멍하니 입술을 벌리며 할 말을 잃었다.
유령……?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엘로이의 욕설이 솟구쳤다.
“저 미친 새끼가……!”

* * *

마차는 우리를 길목에 내려 주고 서둘러 떠났다.


마부는 저택의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기는커녕 꽁무니를 빼듯 도망을 쳤다.
유령이라니. 유령이라니이!
알렉은 나와 가족들의 반응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
그때까지도 나와 시어머니는 말을 잃어버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를 따라가도 되는 건가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사이, 시누이가 또 소리쳤다.
“난 안 가! 못 가!”
“…….”
“유령 나온다며! 하여간 너처럼 쓸모없는 새끼가 웬일인가 했지! 멍청한 오라버니나 저기서 살아!”
“엘로이!”
시어머니가 타박이라도 하려는 듯 소리쳤지만, 시누이는 이미 왔던 길로 뛰어갔다.
‘저 계집애가 진짜.’
나는 엘로이의 뒷모습을 잠시 불쾌하게 응시했다.
원래도 공작인 오라버니에게 말버릇이 좋지 않은 시누이였으나 지금처럼 거침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뭐라고 핀잔하기에도 애매했다.
공작가의 귀한 영애로 태어나 짝사랑하던 약혼자와 결혼할 날만 앞두고 있었는데, 오라버니 때문에
파혼당하고 다 망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극처럼 이 남편을 함부로 대할 때마다 남편은 항상 죄지은 사람처럼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가 또 얼마나 자학하며 괴로워할지…….
나는 그런 모습이 늘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지금이야 엘로이에게 미안한 게 있으니 참는다 쳐도, 평소에는 아무 잘못 없이 동생에게 구박을 받았다.
여동생을 한 번이라도 따끔하게 혼냈으면 좋겠는데,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려서 조금은 답답했다.
그가 오냐오냐하니 시누이는 더 버릇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음?
그런데 남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누이가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자책 따위는 실오라기만큼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내 그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쩔 수 없군요.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고요. 되는 분들만 먼저 들어가시죠.”
“……네?”
나와 시어머니의 눈이 동시에 벌어졌다. 나보다 시어머니가 더 놀란 것 같았다.
“아, 알렉. 방금 뭐라고 한 거니……? 그래도 엘로이는 네 누이이지 않니? 쟤가 평소에도 버르장머리가
없긴 하지만 너도 갑자기 너무 냉정해진 것 같구나.”
시어머니는 놀란 심장을 다독이듯 가슴팍까지 지그시 눌렀다.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저리 당혹스러워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유로 숨을 멈추고 놀랐다.
‘정말 알렉 맞아……?’
내 남편 알렉이 시누이에게 저리 단호하다고?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시죠.”
남편은 먼저 등을 돌리더니 저택으로 향했다.
“…….”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시어머니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얼떨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사람이 쥐약을 먹으면 원래 다 저렇게 딴판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런 것 같구나. 목숨이나마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
우리는 한동안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말투도 저리 유창해질 줄 알았다면 진작 먹일걸…….”
“예?”
“아니다. 엘로이는 그냥 두거라. 지가 가면 어딜 가겠니.”
“……네.”
시어머니가 특유의 여리면서도 우아한 목소리로 말하며 걷기 시작하자 나도 따라 들어갔다.
어차피 시누이는 저러다가도 자존심을 꺾고 돌아오곤 하였다.
처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시누이를 달래러 쫓아가 보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상처받은 중 2 를 누가 말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눈앞에 펼쳐진 저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택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외딴곳의 농가여서 그런지 역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낡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보이는 목재 외관, 군데군데 서린 거미줄.
지금처럼 불그스름한 노을 아래에서 저 저택은 아름다웠지만, 이제 칠흑 같은 어둠이 되면…….
무서운 상상들이 절로 떠올랐다.
‘세상에, 진짜 유령 나올 것 같은 집이잖아!’
순간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오며 팔이 떨렸다.
저 저택을 둘러싼 적어도 수십 개의 사연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 여보?”
“……?”
내 부름에 앞장서 가던 남편이 뒤를 돌았다.
“그, 그런데 혹시 다른 갈 만한 데는 없는 거겠죠……?”
그리 물으면서도 조금 면목이 없었다.
아무리 유령이 나오는 집이어도 땡전 한 푼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쉽게 구할 수 없었을 텐데.
그리고 설마 진짜 유령 같은 게 이 세상에 존재할까 싶었지만, 원래 살던 사람이 유령 때문에 도망까지
갔다고 하니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일단 내부를 보시면 부인께서도 마음에 쏙 들-.”
“아, 그게 아니라…….”
유령 나온다며 이 자식아.
덜컥 들이닥친 공포에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 시간에 갈 데가 어디 있겠니, 루이제. 유령들이 산다니 오히려 잘 되었구나. 죽을 날도 머지않았는데
미리 친분이나 쌓아야겠다.”
시어머니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자 나와 남편만 남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 화

남편은 느긋하게 나를 향해 눈매를 휘었다.


그 모습이 억지로 나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답지 않게 무척 어색했다.
“일단 들어가 보시면 분명히 부인의 마음에도 들 것입니다. 이 저택처럼 가구와 살림살이까지 옵션이
완벽한 매물은 자주 나오는 게 아니죠.”
“…….”
“그리고 저기 보이는 양 떼도 우리 소유입니다.”
“예? 양들도요……?”
나는 남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보았던 수십 마리의 양이 풀을 뜯고
있었다.
“서, 설마…….”
“저 또한 부인처럼 놀랐습니다. 정말 관대하지 않습니까? 전 주인이 집을 사 줘서 고맙다면서 서비스로
주더군요.”
“…….”
그게 그렇게 찬양할 일이니.
유령과 동거할 호구에게 선심 쓴 거잖아.
어쩌면 저 양들도 유령 들린 양일지도 모른다.
나는 또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남편은 내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말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부인께 보답으로 한 마리 잡아서 구워 드리겠습니다.”
“……누가요?”
“저 말고 여기 또 누가 있습니까?”
“네?”
순간 나는 하도 놀라 유령에 대한 두려움을 다 까먹을 지경이었다.
“당신이요? 당신이 직접?”
“예.”
“알렉은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잖아요!”
그가 무기를 전혀 다루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았다.
음식으로 동물의 고기를 먹긴 먹어도 직접 죽이는 건 마음이 약한 탓인지 하지 못했다.
“……아.”
남편은 그건 미처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제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개미는 죽여 봤자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뭐?

* * *

남편이 이상하다.
나는 마치 총을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현관을 지나갔다.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쉽게 건드리지도 못하는 내 남편이, 양을 잡아 구워 준다고?
개미는 먹을 게 없어서 안 죽인다고?
도저히 내 남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싶어 머리가 다 얼얼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남편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대견한 일을 해 주었잖아.’
칭찬 스티커를 열 개나 붙여 줄 만한 일이야.
남편이 아니었다면 여관에서도 쫓겨나 정말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라고.
갑자기 이상해지긴 했어도 무척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이야, 분명…….
나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되고 불안했다.
꼭 유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도저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을 치는 농가이니 아마도 내부는 간결하고 짙은 목조로 짜여 있을 것 같았다.
오래돼 보이는 집이니 군데군데 낡은 곳도 많이 있겠지.
화려한 샹들리에와 미술품은 절대 기대할 수 없어도,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거미줄이나 먼지는
없을 것 같았다.
“…….”
마른침을 꾹 삼킨 나는 갓난아이가 처음 세상을 살펴보듯 집 안을 응시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자개처럼 오묘하고 우아한 색감이었다.
살짝 눈이 부셔 찡그린 나는 이 빛이 대체 어디서 반사된 건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택의 바닥이며 2 층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자개 같은 대리석 바닥으로 꾸며져 있었다.
외관만 봤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가 내부에 가득했다.
“이, 이게, 다 무슨…….”
전 주인이 백만장자라도 되었던 걸까?
로비의 중앙까지 다가간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는 빛이 쏟아질 것만 같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핑크빛 노을을 반사하고 있었고, 촛대와 문고리는
은색이었다.
원래 살았던 공작가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대 로의 아기자기한 부유함이
곳곳에서 흘러넘쳤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났는데, 기적처럼 다시 생긴 보금자리가 이런 저택이라니.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감명과 감탄이 마음에서 흘러넘쳤다.
양 떼가 거닐며, 풍경까지 완벽한 이 집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혹시 유령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남편이 말했다.
“역시 다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멍하니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편을 보는 순간 하마터면 눈을 감아 버릴 뻔했다.
그에게서 전에 없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외모가 눈부셨던 적은 많지만, 지금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빛이 솟구쳐 나왔다.
“알렉, 당신…….”
“…….”
“고마워요. 당신이 정말로 집을 구해 올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이렇게 근사한 집을…….”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약간 어색하게 나를 보더니 이내 어색하게나마 조금 웃어 주었다.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내 가슴에 차올랐다.
시누이는 물론이고 시어머니까지 그를 믿지 못했는데.
사실은 나도 완벽하게 그를 믿은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황홀한 집을 구하다니…….
그가 나를 내버려 두고 홀로 이 답 없는 현실에서 도망을 치려고 해서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결국 새 보금자리를 구해 온 모습에 그에 대한 실망과 서러움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끼익…….
내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와 마주 보는 사이,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누군가 싶어 심장이 철렁하려는 찰나, 빼꼼 고개를 내민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시누이였다.
……아, 돌아왔구나.
내가 채 다 안심하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소리쳤다.
“엘로이!”
“……흠!”
시누이가 겸연쩍은 얼굴로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다른 곳을 보며 들어왔다.
어디서 울기라도 한 듯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네.’
이번에는 진짜 가출하는 줄 알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시누이는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내부를 둘러보더니 이내 서서히 눈이 벌어졌다.
“뭐야, 여기……?”
그러더니 감전된 듯이 펄쩍 뛰었다.
“엄청 좋잖아!”

* * *

‘자, 이제 집을 구경하면 되겠군요. 방은 많으니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고르십시오.’


‘그럴게요, 알렉. 그전에 다들 배고플 테니 먼저 간단하게 식사부터 차려도 되겠죠?’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다행히도 가족들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들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해서 알렉은 내심 마음이 놓였다.
하마터면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는데, 머물 곳을 해결했다.
그와 별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연약한 식구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어.’
욕실로 향하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두 번이나 정체를 들킬 뻔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했을 뿐인데 말을 잘한다고 의심을 받았고, 겨우 양을 잡아 준다고 했을 뿐인데도
루이제는 크게 놀랐다.
그때마다 엉겁결에 넘어가긴 했지만 앞으로 또 무슨 일로 의심을 받을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들킬 것이다.
‘애초에 숨긴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해.’
알렉시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흉내라도 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욕실로 들어간 그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툭, 툭.
그의 뒤로 셔츠와 바지가 길게 늘어졌다.
욕실은 꼭 박물관의 ‘19 세기의 목욕을 체험하자!’ 코너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더 과거로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 듯싶었다.
욕조의 수도꼭지부터 돌린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의 조금 흐릿한 표면에서도 알렉시스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선명하게 비춰 보였다.
다시 봐도 너무나 흡사한 외모.
그는 몸을 천천히 좌우로 틀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심하게 자신의 몸을 살피는 눈이 가느스름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역시나 다른 구석이 존재했다.
햇빛을 거의 받지 않은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란 듯 상처 하나 없이 미끈하고
깨끗한 몸.
피부색이 좀 더 짙고 근육이 더 큼직했던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작이었다더니 정말로 영의정 댁 도련님 같군.’
아내와 가족들의 반응을 보니 말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고.
사냥도 안 하고, 생명은 죽이지도 못하고,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였지?
내심 한숨이 나온 그는 어느새 물이 반 이상 차오른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의 크기가 그의 키에 비해 몹시 작은 탓에 다리를 한참 접어야 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 화

‘하아…….’
따뜻한 온도에 몸이 녹아내렸다.
지난 며칠 간의 기억들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가 빈털터리 상태로 이런 대저택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전생에 읽었던 책 덕분이었다.
일그러진 태양.
역시나 이 세계는 그가 시스템 보상으로 받았던 책 속이었다.
정보상에게 비싸게 팔 만한 지식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원작의 내용을 완전히 틀어 버리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죽었을 사람들을 살리게 될 거래였으니까.
꼭 낯선 역사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직 생소했지만, 이미 책으로 읽어 본 세계라 적응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비교적 평화로운 세계인가?’
적어도 그가 살았던 원래의 세계처럼 눈코 뜰 새도 없이 게이트가 생기지는 않았으니까.
알렉시스 마이어스.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라는 여자가 불러 줄 때마다 느낌이 이상했다.
‘알렉.’
‘알렉?’
‘알렉!’

“…….”
왜인지 가슴이 욱신, 찡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했었던 것 같은 기분.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진실을 알게 되면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남편의 영혼이 달라져 버린 이 사태의 중심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렉은 갈등이 되었다.
대뜸 난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같이 있어야 하는 거지?’
어쩌다 보니 진짜 알렉시스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가짜 가족들과 계속 함께 있을 생각이 없었다.
알렉시스라는 이름까지는 버릴 수 없겠지만, 원래 이 몸의 가족들과 진짜 가족처럼 지낼 자신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평생 가족이라고는 가져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생판 남들과 가족이라니…….
‘……뭐, 당분간은 어쩔 수 없나?’
알렉은 옅은 숨을 코로 내쉬며 몸을 좀 더 물에 담갔다.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는 여자들뿐인 식구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쥐약 때문에라도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분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아무도 당신을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죽지 말고 새로 시작해요.’

“…….”
어쩐지 루이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 *

알렉이 목욕을 하고, 다른 식구들이 방을 고르는 사이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다행히 포장을 뜯지 않은 식료품과 구황 작물이 저장실에 적지 않게 보관되어 있었다.
‘최소 보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어.’
급한 대로 나는 감자를 익혔다.
왠지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식량을 축내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제 이곳은 우리 집이다.
심지어 부엌에는 없는 조미료가 없었다.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 이국적인 향신료부터 뭔지 알 수조차 없는 가루들까지.
조미료라고는 설탕과 소금, 후추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엌이 아니었다.
“우와, 엄청 고소한 냄새 나.”
불쑥 시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울리지 않게 먼지떨이를 든 채 부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 또 울었는지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언니? 맛있겠다. 그래도 언니가 양심은 있나 봐. 아무렴 밥은 언니가 해야지.
에취!”
이 깨끗한 집에서 대체 어딜 가서 먼지를 마신 건지 시누이가 재채기를 했다.
힐긋 그 모습을 본 내가 다시 화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냥 감자를 찌는 것뿐인데, 뭐.”
“응?”
나는 찐 감자를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식기는 조금도 덜어 내고, 개인 접시까지 꺼내 놓았다.
대강 식사 준비를 끝낸 내가 시누이를 향해 말했다.
“이것 좀 다이닝 룸으로 같이 옮기고, 알렉이랑 어머님 좀 불러 줄래?”
“뭐야, 이게 다야?”
시누이가 내 모습과 테이블 위를 얼빠진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수프는? 고기는? 나 자레 드 보 콩소메 먹고 싶어!”
“…….”
“우리 계속 이상한 빵만 먹었잖아.”
시누이가 다시 울 것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했다.
자레 드 보 콩소메.
이 와중에 ‘송아지 정강이 살 맑은 수프’라니, 만드는 데 며칠이나 걸리는 음식이라는 건 당연히
모르겠지?
저런 시누이가 철딱서니 없어서 얄미운데, 짠한 마음이 들다니. 이런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한 빵이라니, 다 먹을 만한 것들이었는데. 알렉은 맛있다고 했어.”
“오라버니는 입맛도 없는 바보니까 그렇지. 원래 주는 대로 다 먹잖아!”
“그래도 감자라도 많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내일은 감자를 잘라서 튀겨 줄게. 으깨서 수프를
만들어도 맛있겠다.”
“…….”
이번에는 바로 투정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힐긋 시누이의 상태를 살폈다.
붉으락푸르락.
시누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니.’
이제 네 짜증과 어리광을 받아 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하녀도 없고, 유모도 없지.
나는 저 중 2 가 얼른 우리의 현실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나…… 나…….”
“…….”
“안 먹어!”
“…….”
역시나 시누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부엌을 떠났다.
저럴 줄 알았다.
그리고 어차피 배가 고프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옅은 한숨과 함께 앞치마를 벗은 나는 다이닝 룸으로 음식을 날랐다.
갓 찐 감자에서는 뜨거운 김이 오르고, 촉촉한 꿀을 탄 따뜻한 물까지.
달콤하고 간소하게 차려진 식탁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묘했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 * *

시어머니는 감자를 꼭 날고기처럼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우리 집에 사는 유령이 선량한 영혼이라면 오늘 밤에 황제 폐하의 침소에나 날아갔으면 좋겠구나. 그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 금침이나 누렇게 적시게.”
“…….”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원한이 다이닝 룸 안에 금세 도사렸다.
오델리아 마이어스 브렌트 대공작 부인.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미모와 44 사이즈를 유지하는 데에 무척이나 공을 들이는 그녀는 원래 오페라
가수가 되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황족의 먼 친척 출신이었던 그녀는 고귀한 태생에서 벗어나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가출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붙잡혀 와 정략결혼을 했고 알렉과 엘로이를 낳았다.
그런데 알렉의 상태 때문에 부부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운명도 평범하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나이프로 감자를 잘랐다.
소금을 찍어 한 입 머금으니 짭짤하고 고소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 꿀물을 한 모금 들이켜자 입 안에 남아 있던 짠맛과 섞이면서 달달한 맛이 배가 되었다.
이런 순수한 찐 감자는 공작가에서 먹을 일이 없었는데, 꽤 담백하고 맛있었다.
“감자 껍질이 이렇게 맛있는 건 줄 왜 몰랐을까요.”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나를 보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어머니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타박했다.
“여유가 넘치는구나, 루이제. 넌 항상 속이 편해 보여서 좋겠다. 나는 고무를 씹는 건지 감자를 씹는
건지 당최 분간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내일은 알렉이 양을 잡아 준다네요.”
“뭐? 그게 정말이니, 알렉?”
두 여자의 시선이 알렉에게 모였다.
시어머니는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놀란 가슴을 꾹 눌렀다.
“세상에, 사냥도 하지 않던 네가 이제야 비로소 짐승을 잡는구나. 먹을 땐 잘 먹더니 직접 죽이는 건
불쌍하다고 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
“잘되었다. 어려우면 내가 도와주마. 보관실에 보니 총도 있던데.”
감자를 씹고 있던 남편은 목이 막히는지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꿀물이 담긴 잔을 그에게 더 가까이 옮겨 주는 사이 그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양 정도는 그리 잡기 어려운 짐승도 아니고요.”
“…….”
남편을 응시하는 시어머니의 눈동자에 또 감동의 물결이 흘렀다.
죽기 전에 저 모습을 봐서 이제 여한이 없다는 듯.
대뜸 시어머니의 눈초리가 음산하게 변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황제 놈에게도 쥐약을 먹여 주고 싶구나.”
불현듯 그녀의 눈동자에 복수심이 타올랐다.
하긴 그녀가 평생을 몸담은 가문이 몰락해 버렸는데, 내가 감히 그 기분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서 그놈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
나는 괜히 숙연해졌다.
슬쩍 남편을 올려다보니 그도 조금 진지한 안색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 화

“귀족들도 쓸모없기 이를 데가 없지. 어떻게 그런 왕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있나! 다들 나라는 어떻게


되든 자기 안위만 중요하다는 건지.”
물론 얼마 전까지 우리도 그런 귀족이었다.
폭군이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리고 할 수 없었던 귀족.
나는 시어머니의 말에 동조하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더 폐하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아요. 멀쩡한 공작가도 이 지경으로 만드시는
분이니까요…….”
“…….”
부들부들.
시어머니의 주먹이 울었다.
우리 가문은 다른 귀족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폭군에게 이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폭군에게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이 나라에 없었다.
의회마저 폭군 앞에서 무력했다.
폭군 휘하의 군대는 귀족들에게 빼앗아 흡수시킨 병력까지 가세하면서 점점 더 막강해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런 폭군 아래에서 살아야 할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체념 섞인 한탄을 흘렸다.
이제 더 이상 폭군이 나와 우리 가족들을 건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더 망가뜨릴 수도 없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하늘 아래 그런 몰지각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암담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폭정을 휘두르고 있을 테니까.
새삼 외딴곳에 떨어진 이 집이 소중한 아지트처럼 느껴졌지만, 폭군에게 시달릴 사람들이 아예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님. 폭군치고 끝이 좋은 사람 못 봤어요. 역사서를 보면 이럴 때 꼭
영웅이 나타나더라고요.”
“영웅……? 하여간 너는 이럴 때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래도 누군가 나타나서 폭군을 해치워 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그럼 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차라리 복권을 사지 그러니. 영웅이라니 다들 휴가를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시어머니는 쯧쯧 혀를 차더니 다시 감자를 퍼먹었다.
그것도 별맛이 없는지 금세 스푼을 내려놓고 꿀물을 벌컥벌컥 마시긴 했지만.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내가 무심코 남편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
남편도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아함을 담아 나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딱히 나에게 할 말은 없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아, 내가 너무 눈치 없이 말했나…….’
어차피 내가 영웅을 원한다고 한들 그는 영웅은커녕 그런 흉내도 내지 못할 텐데.
안 그래도 자신감을 다 팔아먹은 사람한테 자괴감이라도 준 게 아닐까 싶어 뒤늦게 후회되었다.
잠깐 할 말을 고르던 내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영웅이 휴가를 갔다니요, 어머님. 그러고 보니 여기 이렇게 우리의 영웅이 나타났네요.”
“응?”
내 말에 시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다가 내 시선이 향한 곳으로 따라갔다.
나는 따뜻한 눈길로 남편을 향해 웃어 주었다.
“이제 알렉은 우리의 영웅이잖아요.”
내가 더 환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어쩔 도리를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굳은 채 나를 응시했다.
‘당황했구나.’
하긴 저 남자가 그렇겠지.
나는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원망보다는 위로와 응원을 더 해 주고 싶었다.
다신 허튼 생각 하지 못하게.
그가 이렇게 보금자리도 마련해 나를 지켜 준 만큼 나도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으래…… 역시 내 아들이라…….”
시어머니가 아무리 그래도 영웅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남편은 한참이나 나와 눈길을 주고 받더니 결국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시어머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알렉? 솔직히 말해다오.”
“예?”
“혹시 네가 책에서 본 지식이 집값을 담보로 하는 부당한 노예 계약 같은 거니?”
“……?”
미처 생각도 못 한 가능성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그가 자신의 무언가를 대가로 치렀을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거면 어쩌지 싶었다.
남편은 그런 위험한 일을 저지를 위인은 전혀 되지 못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시도를 할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잖아?
“아…….”
알렉은 잠시 곤란해하는 것 같더니 포크를 살짝 내려놓았다.
설마 정말 끔찍하고 무리한 일을 하는 대가로 이 집을 구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생각보다 정보상에서 값을 후하게 쳐주더군요.”
“정보상이요……?”
“정보상……?”
나만큼이나 시어머니도 의아해했다.
“무슨 정보를 팔았는데요?”
“…….”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알려 주기 곤란한 건가?
이내 그가 어려운 말을 꺼내듯 소리 냈다.
“……황궁에 사라진 황자가 있다는 건 아십니까?”
“사라진 황자요? 혹시 리디트 황자를 말하는 건가요?”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리디트 황자는 선황제의 늦둥이 아들로, 4 년 전 선황제가 죽었을 때 1 순위 황위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그때 리디트의 나이가 불과 세 살.
선황제의 조카였던 지금의 황제 악센은 리디트를 무력으로 억압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리디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 리디트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만 자신이 황위를 대리하겠다는
이유였다.
이후 황궁 안에서 갇혀 지내던 리디트 황자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가 어떻게 된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폭군에 의해 죽었을 거라고 모두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작게 혀를 찼다.
“그 어린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리 없지.”
“대부분 죽었다고 알고 있었죠. 그런데 사실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 리디트 황자가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없어 하는 시어머니의 반응에 알렉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최근에 그 황자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리디트 황자를 이용해서 반역이라도 일으킬
계획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놀라운 말이었다.
역시 이 뒤숭숭한 나라를 견디지 못하고 들고일어나려는 사람들이 존재해 있었다.
“……우선 제가 그들에게 리디트 황자의 위치를 건네주긴 했습니다.”
“당신이요……? 당신이 어떻게 알고요?”
“그러게, 알렉 네가 어떻게…….”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건…….”
시어머니는 한참이나 알렉의 눈을 응시했다. 나도 덩달아 알렉을 빤히 쳐다보았다.
살짝 망설였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보았습니다.”
“책이요?”
내가 되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거기서 리디트 황자에 대해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랬군요. 어떤 책이었는지 신기하네요. 황실 사람 중 누군가의 일기장 같은 거였을까요?”
“글쎄요,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줄인 그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혹시 저자를 알 수 없는 책인가?
시어머니도 신기해했다.
“그렇구나. 종일 책만 읽은 네가 그렇다니 안심하마. 네 말투가 갑자기 싹 나은 것도 그렇고 하도 거짓말
같은 일이라 혹시나 하였다.”
“……아무튼 리디트 황자님이 꼭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황위 계승자이신 거죠?”
내 물음에 대답한 건 시어머니였다.
“그래, 루이제.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말거라. 그 제정신 아닌 황제 놈이 고작 어린 애 때문에
물러나겠니.”
“…….”
그런가.
그래도 나는 왠지 희망적인 방향으로 믿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어쨌든 내일은 알렉의 병이 나은 기념으로 파티를 해야겠다. 그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낫지 않던
말더듬이가 아니었니.”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어머님. 그렇죠, 알렉?”
내가 알렉을 향해 방긋 웃었다.
내일은 청소도 하고 양고기도 구워야 하니 무척 바쁠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명랑하고도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맛있어?”
시누이가 벽 너머에서 다이닝 룸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슬슬 배고플 시간이지.
나는 옆자리의 빈 의자를 드르륵 끌어내며 말했다.
“이리와 앉아. 다음부터 안 먹는다고 하면 남겨 놓지도 않을 거야.”
시누이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눈물 자국이 아까보다 더 늘어난 것 같다.
그새 허기가 많이 졌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며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다 많이 먹었네……?”
“너도 어서 먹어.”
쭈뼛쭈뼛.
시누이가 괜히 눈치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다. 그럼 마저 먹거라, 엘로이. 나는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가 방으로 돌아가자 남편도 냅킨으로 입술 양 끝을 눌렀다.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누이는 감자의 껍질을 벗겼다. 원래 그녀는 알렉이 뭘 하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네, 여보.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뒷정리만 하고 쉬려고요.”
“…….”
나는 세상 가장 행복한 여자처럼 그에게 눈매를 접어 보였다.
알렉은 말없이 그저 머리를 한번 숙여 인사해 주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 화

* * *

어느덧 밤이 깊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나는 부엌을 나왔다.
캔들 스틱을 든 채 홀로 둘러보고 있으니 다시 봐도 참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나는 집 안 곳곳에 밝혀 둔 촛불을 끄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사용인들의 일과 중 하나였지만, 이제 누군가 이런 일을 해 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다른 식구들은 뼛속부터 귀족이니 스스로 할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당번을 정하는 게 좋으려나……?’
별로 희망적이진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2 층으로 올라갔다.
1 층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방이 있었고, 2 층에는 나와 알렉의 방이 있었다.
알렉은 벌써 잠들었을까 생각한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알렉?”
나는 어깨에 걸친 숄을 한번 들어 올리며 상대를 확인했다.
마침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내 눈빛에 절로 반가움이 묻어났다.
달빛을 반사하는 그의 흐트러진 흑발,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또렷한 눈
“……이제 들어오십니까?”
그리고 벨벳이 흐르는 것처럼 유려한 발음.
단지 말투만 달라졌을 뿐인데, 그의 외모가 평소보다 열 배는 더 근사해 보였다.
나는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정리할 게 남아서요. 이제 좀 쉬려고요. 당신은요?”
“……저도 막 자려고 했습니다.”
반짝반짝.
그를 담은 내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제야 단둘이 있게 되었구나.’
며칠 만에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최근에는 폭군의 행패에 모두가 얼이 빠져 있어서 경황이 없었으니…….
나는 아까부터 마음에 꾹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알렉, 집을 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건 아니죠? 당신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
“아, 나는 그냥…… 걱정했다고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올지 걱정되었어요.”
“……부인께서 그리도 많이 걱정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
“아뇨. 그게 아니라…….”
그의 말을 자른 내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편의 바로 코앞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는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당신이 가주라도 난 당신이 모든 걸 홀로 짊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여관에 있는 동안 나는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그를 기다리기만 하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을.
차라리 어디서든 함께 있고 싶었다.
“실은 나도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그동안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손을 모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 말을 진작 했었어야 하는데.
폭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그가 쥐약을 마시기 전에.
그의 마음이 무너져서 죽음을 생각 하기 전에…….
왜 더 일찍 그를 보듬어 주지 못했을까.
그가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에게 더 상냥하지 못했던 내 과거가 후회되었다.
그는 경직된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입술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부인께서 그러길 원하신다면 명심하겠습니다.”
“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옅게 웃어 주었다.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본 내가 다시 황홀하게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꿈만 같네요. 당신 정말 내 남편 맞나요? 당신이 이렇게 우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거든요.”
원래도 목소리가 무척 근사한 사람이었다.
지나가다 그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스럽게 모셔진 종의 소리도 그의 목소리만큼 경건하고 고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더듬지 않으니 그의 음색이 더 빛이 났다.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 않고 감동적이라 가슴이 다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 그가 약간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
그 짧은소리에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어쩜 헛기침을 해도 저렇게 멋있을까…….’
역시 이 정도로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하면 가문이 망해도 눈과 귀가 즐겁구나.
“알렉.”
나는 두 손을 맞잡으며 영롱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안 된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우리 이제 같은 방을 쓰는 건 어때요?”
“예?”
역시나 그의 반응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큼직해진 눈과 못 들을 말을 들은 듯한 표정.
역시 그러면 그렇지.
밤일에도 소극적인 남편이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싶어 할 거라는 기대는 어차피 별로 없었다.
원래 귀족들은 부부가 한방을 쓰지 않는다.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전 나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의 사이가 더 끈끈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음을 시도할 정도로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고,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되는 건 꼭 막고 싶었으니까.
“……알아요. 당신이 날 옆에 두고도 잠만 재우는 걸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팔베개뿐이라고 미안해하고 자책했잖아요.”
문득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난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부부라고 해서 꼭 밤에 그걸……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가 사방팔방 갈 곳을 잃었다.
나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내 사이는 누군가 대놓고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이상 늘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물론 먼저 다가가는 건 항상 나였다.
“이제 우리 같이 있어요, 알렉. 나 사실 혼자 있기가 너무 외로워요…….”
말을 마친 내가 잠시 망설였다가 다른 쪽 팔을 뻗기 시작했다.
그는 알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조급하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나는 남편의 손길과 온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내 남편인 그에게 언제쯤 다정한 손길을 받아 볼 수 있을까?
꼭 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고 싶었다.
내 외로움이 너무 깊었나.
내 손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던 순간, 그가 흠칫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살포시 그의 허리를 안은 내가 그의 가슴 아래에 뺨을 묻었다.
‘아.’
따뜻하고 아늑했다.
내 접촉에 조각조각 나뉜 그의 복근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돌처럼 단단한 느낌이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평소보다 긴장을 많이 하네.’
그래도 아까처럼 나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안아 주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그래도 마주 안아 주는 척이라도 하더니만.
“알렉. 당신 숨은 쉬고 있는 거죠?”
내가 살짝 머리를 들며 물었다.
그래서 같이 방 쓸 거야, 말 거야.
그의 침묵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가 내 바람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서 자책을 한 거지, 그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함께 있고 싶어 하면, 그는 분명히 날 위해서 그러자고 할 것이다.
살짝 미끄러진 내 손길이 그의 척추를 스쳤다.
그의 옷 위에서 내 서늘한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 순간 내 드레스 옷감 너머로 불룩한 부피감이 부풀어 올랐다.
‘……아.’
이럴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지금처럼 어렴풋하게 존재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다 술렁였다.
그 정도로 아찔한 기대감이 들게 하는 존재였다.
‘아쉬워라. 이렇게 건강하고 정상적인데…….’
그 순간, 그가 확 물러났다.
“알렉?”
내가 아연해하는 사이 그는 약간 얼굴을 돌렸다. 어느새 뺨이 붉어져 있었다.
‘……나 밀쳐진 건가?’
“죄송합니다.”
“……?”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가 빠르게 머리를 한번 숙이더니 이내 뒤돌았다.
가까이 있던 자신의 방문을 열어 그냥 쓱 들어가 버렸다.
“…….”
금세 내려온 정적.
나는 차가운 복도에서 홀로 남은 채 눈을 깜박였다.
‘나 지금 거부당한 거야……?’
내가 아이를 만들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잠만 자자고 한 거잖아.
그것도 그렇게 싫어……?
나는 선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 *

‘이런 미친.’
알렉은 문을 닫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 만졌다.
최대한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직도 루이제가 복도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쿵.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낯선 여자가 갑자기 그런 밀접한 포옹이라니.
루이제가 닿았던 온몸에 화르륵 불이라도 지펴진 것 같았다.
척추에 닿던 서늘한 손끝, 그의 단단한 몸에 포근히 다가와 안기던 부드러운 느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 화

그러나 지금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아요. 당신이 날 옆에 두고도 잠만 재우는 걸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팔베개뿐이라고 미안해하고 자책했잖아요.’

‘……뭐?’
부부라면서 여태 왜 잠만 잤다는 거지?
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왜 팔베개밖에 없어?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득 그는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나, 고자인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각이 멎어 버렸다.
상상도 못 한 충격에 말문이 다 막혔다.
하긴 이 몸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니까 그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그는 혼란스러워 다시 얼굴을 쓸었다. 방 안을 배회하며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진작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
몸이 달라졌어도 기본적인 기능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설마 그럴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아무래도 여긴 그가 세상을 구한 뒤 받은 보상이 아닌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어마어마한 시련이었다.
시스템 보상이라더니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작위도 잃고, 이제는 그것도…….
심지어 전생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데!
일단 그는 침착하게 창가에 손을 올렸다.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이 있었음에도 일반적인 관계를 나누지 못한 무슨 사연이…….
혹 영혼이 달라지기 전에는 정말 불능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여자와 할 수 없는 동성애자?
그것도 아니면 뭐지?
알렉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그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들어올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슬쩍 시선을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갑작스러운 포옹에 본능적으로 반응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한번 마른침을 삼키자 불거진 그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이내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생명이 느껴지는 부피감, 자아가 있을 것 같은 맥박과 살아 있는 듯 뜨거운 온도.
‘너무나 정상이잖아……?’
그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일 아침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금까지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그렇고, 지금 상태를 봐도
정상인 게 분명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그 순간 아찔한 전율이 몸서리치듯 그의 전신으로 퍼졌다.
“……!”
온몸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 듯한 예민함에 알렉은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이건 건강하다 못해 민감함 그 자체였다.
원래 이게 이렇게나 자극에 즉각적이었던가……?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침대로 향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스스로가 순간적으로 너무도 한심했다.
그렇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그가 굳은 듯 멈춰 섰다.
“…….”
정말이지 순간적인 포옹.
그 짧은 포옹에 그의 피가 어디로 몰렸던가.
마치 온몸의 혈액이 일제히 쏠린 것 같을 정도로 그는 위기를 느꼈다.
자신의 몸은 웬만해서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몸은 성욕과 관련된 자극에 그리 너그럽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이성을 봐도 끌리지 않았다. 우연한 접촉도 그에게는 모두 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작정하고 그를 유혹하려는 손길도 무척 따분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과 사랑을 할 수 없는 몸과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본능이 고개를 쳐올리게 하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이보다 쉬울 수 없을 만큼 이성의 자극에 반응했다.
믿을 수 없는 깨달음에 알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도 꺼내지 말걸.’


허탈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알렉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나는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다 끄지 못한 촛불들이 2 층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창피해라. 괜히 이불킥하게 생겼네.’
설마 알렉이 내 말을 그렇게 단박에 거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너무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 일에 과하게 나선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남편의 의젓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럼 완벽한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은 왜 한 걸까.
죽어서 유령 남편이라도 될 작정이 아니라면.
나는 괜히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이혼을 하자더니 쥐약을 먹은 그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나도 애를 쓰고 있었다.
뜻하지도 않게 그가 집을 구해 와서 다시 잘살아 볼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잠만 자는 것도 못 하겠다니…….
이쯤 되니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 내가 싫은 걸까?’
아니면 그냥 그동안 밖에서 집을 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걸까?
그래. 그럴 거야.
설마 날 싫어할 리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태 서로 좋아한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와 나는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표현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 남편이고 나는 그의 부인이니, 둘 다 그 의무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이성적인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이었다면, 그가 내게 눈길이라도 한 번 줬을까?
‘……모르겠네.’
휴우.
내심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럼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걸까?’
내 남편인 그가 완벽한 내 스타일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이게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결혼한 이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밖에 없을 뿐이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어서 남은 초나 다 끄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을 끄는 기구가 불빛에 가까워졌다.
휙.
그런데 그보다 빨리 눈앞의 촛불이 꺼졌다.
……음?
내가 팔을 올리면서 바람이 너무 크게 불었나?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몇 걸음 걸으며 다음 촛불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스너퍼를 가까이 가져가 대려고 했다.
휙.
“……?”
촛불이 또 그냥 꺼져 버렸다.
지금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나?
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람을 느껴 보았지만, 공기의 흐름은 고요하기만 했다.
창문이 열린 곳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다음 촛불을 향해 막 한 발을 뗐다.
그 순간 그새 잊고 있었던 알렉의 말이 떠올랐다.

‘마침 저 집에 유령이 나와서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줄행랑을 쳤다고 하더군요.’

오, 미친.
설마.
설마 아닐 거야…….
나는 뻣뻣해진 목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온 첫날 밤부터 자동으로 촛불을 꺼 주다니, 집안일에 특화된 살림꾼 AI 유령이 아니고서야
반갑지 않았다.
당장 알렉에게 뛰어가고 싶었지만, 굳어 버린 발은 차마 무정한 남편에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을 거야.’
애써 그렇게 위안하며 나는 아직 켜져 있는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가져갔다.
복도를 따라 아직 다섯 개 정도의 촛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마 이것까지 그냥 꺼져 버린다면, 정말 유령의 짓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작은 촛불이 촛농을 흘러내리며 일렁였다.
‘제발 촛불아 꺼지지 마. 내가 끄게 해 줘.’
이윽고 스너퍼가 촛불을 감싸자 불빛이 꺼졌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다행이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봐.’
남은 촛불들도 모두 끈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겉옷을 훌렁 벗어 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얼른 자자, 얼른.
그런데 왜 이리 잠이 오지 않을까.
이 집에서 처음 자는 밤.
포근한 침대는 묘하게 낯설었고, 방 안은 남의 집처럼 어색했다.
‘호텔이라고 생각해, 그냥.’
내일 일찍 일어나서 이불부터 빨아야지.
커튼도 다 뜯어내서 세탁해야겠다.
그전에 세 식구 밥을 먹여야 하니 얼마나 바쁠까.
‘자자. 어서 자야 돼…….’
그러나 머릿속에는 생각이 너무 많고, 온 사방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거부의 목소리.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 화

* * *

“……대박.”
다음 날 아침.
식당으로 들어온 엘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마지막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조금 흐뭇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양고기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넣은 양고기 토마토 스튜, 크림소스에 양고기를 잘게 잘라 넣은 양고기 크림
수프, 양갈비를 직화로 구운 구이, 각종 채소와 감자 샐러드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
다 헤아리기도 벅찬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며칠 만에 제대로 보는 음식인지, 우리에게 금세 다시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시누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걸 다 언니가 한 거야?”
“아니. 알렉이 도와줬어.”
“오라버니가? 어떻게?”
“그러게. 식칼도 제대로 못 들 줄 알았는데.”
나는 식탁에 접시와 식기를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오자마자 어찌나 놀랐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다 간 것처럼 부위 별로 깔끔하게 해체된 양고기가 윤기 나는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설마 싶어 알렉의 방이 있는 2 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마침 남편이 씻고 나온 듯 욕실에서 가운 차림으로
나타났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보, 진짜로 당신이 양을 잡아 준 거예요?’


‘……아, 예. 벌써 보셨군요.’
‘세상에.’

나는 거짓말 같은 그의 솜씨에 감탄해 말문이 다 막혔다.


사실 양을 잡아 준다고 했어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내가 서툰 실력으로 양고기를 굽고 있으니 그가 다가와 도와주기까지 했다.

‘아니에요, 알렉. 당신이 양은 잡아 줬어도 요리까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방에 가서 좀 더 자고


있어요. 그래도 요리는 내가 좀 할 수 있으니까-.’
‘일단 구우면 되겠습니까?’
‘…….’

솔직히 고기나 안 망치면 다행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 도움을 주려는 그의 성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줄래요, 알렉?’

다행히 그는 한 번도 요리를 해 보지 못했음에도 완벽하게 내 조수 역할을 해냈다.


공작 남편과 나란히 요리를 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침내 식구들이 식탁에 모두 모여 앉았다.
“다들 밤에 별일 없이 잘 주무셨죠?”
나는 애써 활기찬 얼굴로 물었다.
지난밤에 촛불이 제멋대로 꺼지는 바람에 혹시나 다른 식구들에게도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시누이는 “응.” 한마디를 하며 평소처럼 뚱하게 끄덕였고, 시어머니도 평소처럼 별 대꾸 없이 식기를
들었다.
“차린 게 많긴 하구나. 어디 맛 좀 보자.”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다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화목해 보였다.
“정말 별일이 없었나 보네요.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과 함께 양고기 스튜를 한 스푼 떠먹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직접 한 요리.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결국 차리게 된 진수성찬.
나는 조금 눈물겨운 기분으로 한 입을 삼켰다.
“…….”
“뭐 먹을 만하네.”
“공작가에 있던 요리장들이 생각나는구나. 다시 부를 순 없는 거니?”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연달아 평가를 했다.
내 눈가에 감동에 찬 눈물이 글썽거렸다.
맛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간 보느라 하도 먹었더니 맛있는지 모르겠어…….’
직접 요리를 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래도 며칠 만에 먹어 보는 고기라 씹는 맛이 남달랐다.
나는 눈물을 꾹 참는 심경으로 알렉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어때요? 먹을 만한가요?”
그도 마침 첫 스푼을 먹은 찰나였다.
식기를 내려놓으며 그가 대답했다.
“예,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여태 맛없는 빵만 줘서 미안했는데, 그의 입에 제대로 된 식사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다 당신 덕분이에요. 양도 잡아 주고, 고기 굽는 것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잠시 그를 바라보자 그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감격스러울 정도로 고마운 건 진심이었다.
비록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만, 직접 요리를 거들 만큼 살뜰 한 공작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부인께서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오, 아니에요. 알렉. 그야-.”
“알렉? 이게 무슨 말이니?”
문득 시어머니의 음성이 내 말을 뚝 자르며 들려왔다.
알렉이 의아하게 시어머니를 응시했고, 시누이는 무슨 대화가 오가는 상관없는 태도로 음식들을 흡입하고
있었다.
이윽고 시어머니가 조금 차갑게 말했다.
“네가 요리를 도와줬다고? 양을 잡아 준 건 기특하다만, 다시는 부엌에서 음식 같은 건 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예?”
“아무리 폭군에게 작위를 빼앗겼어도 넌 공작이다. 공작이 어떻게 요리 같은 걸 할 수 있겠니.”
“…….”
“당분간은 루이제에게 맡기자꾸나. 뭐 계속 형편없는 음식을 먹을 순 없으니 고용할 요리사나 좀
알아봐야겠다.”
시어머니는 할 말을 다 끝낸 듯 다시 스튜를 한 입 먹었다. 음미하듯 삼킨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근본 없는 요리라 그런지 깊은 풍미가 없어.”
“…….”
아, 예…….
갑자기 입맛이 떨어지려고 하네.
나름 애를 쓴 내 음식에 힐난을 퍼부은 시어머니는 정작 스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나이프를 들며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요리사를 구하려 해도 걱정이네요. 어머님 입맛은 고급스럽고 우아하시니 이 외곽에서 그 정도로 유능한
요 리사를 찾을 수 있을까요?”
“…….”
“저도 정말 어머님께 이런 음식밖에 대접하지 못해서 속이 상한답니다.”
그러니까 대충 좀 드세요, 아주머니.
내가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흥 코웃음을 쳤다.
“요리사가 왜 없니? 원래 우리 공작가에 있던 알베르트를 꼭 다시 고용하고 말 거란다.”
“…….”
과연 그게 어머님 뜻대로 될까요…….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밥이나 먹었다.
아침부터 이것저것 신경 쓰고 차리느라 고단해 죽겠는데, 칭찬이나 고맙다는 말은 못 들어도 아쉬운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혼 얘기는 진짜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울컥 서러움이 치밀었다.
알렉 하나만 바라보며 참고 있었는데, 어차피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부인이니 딱 그 정도의 정중함으로 배려할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절대 어머니를 거역하지 못하는 효자이니까.
내가 시어머니에게 불쾌한 소리를 들은 지금도 입술에 꿀을 바른 것처럼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화가 치민 나는 고기를 써는 나이프에 힘을 주었다.
알렉이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불쑥 시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
나는 의아함을 담아 알렉을 응시했다.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오직 엘로이만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시큰둥하게 기다리며 포크를 들었다.
보나 마나 어머니를 두둔하겠지.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한번 닦더니 말했다.
“당분간 루이제에게 요리를 맡긴다는 말씀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뭐?”
“풉!”
시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시누이는 먹던 것을 뿜어 버렸다.
“……?”
나는 귀를 의심하며 서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 그런 거지?
어머니가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로 의아해했다.
“뭐가 부당하다는 거니? 아, 그래. 역시 너도 루이제의 요리를 도저히 못 먹겠다는 거구나. 나도 이런
상황이 무척 부당하단다. 아무렴 요리는 알베르트처럼 숙련된 고용인들이 해야-.”
“그런 말이 아닌 거 같아요, 어머니.”
여태 먹기만 하던 시누이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녀는 뾰로통하게 알렉을 쏘아보았다.
“오라버니, 설마 루이제 언니한테만 식사 준비시킨다고 뭐라 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엘로이 양의 말대로입니다.”
“뭐?”
“……?”
어머니가 놀란 만큼 내 눈도 크게 벌어졌다.
그가 우리들의 반응은 개의치 않는 투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여관에서부터 홀로 식사를 챙겨 주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어머니도 계시고 엘로이 양도
있는데, 계속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건 부당합니다.”
“…….”
시어머니의 턱이 벌어졌다.
내 입술도 벌어졌지만, 시어머니는 나와 전혀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시누이가 대뜸 인상을 찌푸리며 탁 소리가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여기서 누가 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 아니면 평생 시중만 받고 산 어머니? 우린 불과 며칠
전까지 귀족이었다고!”
“…….”
저기, 나도 귀족이었는데……?
날 선 시누이의 반박에 알렉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감정한 눈으로 여동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해서 너무 걱정 마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엘로이 양과
어머니라고 해서 못 할 건 없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
파이팅.
알렉의 조용한 눈빛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 화

우리는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나 혼자만 다른 이유로 멍하게 있었다.
‘알렉이, 어머님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줬어……?’
세상에, 제정신인가?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싶어 머리가 다 얼떨떨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머니를 공경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거나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시어머니가 나에게 부당한 비난을 할 때도 찍소리 하나 하지 못하며 불안해했다.
그나마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 대신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쩜 저래?’
우리 알렉이 달라졌어요?
대뜸 시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해 달랬어? 언니! 언니가 말해 봐. 언니가 해 준 거잖아.”
“…….”
나는 지금 시누이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알렉의 태도에 아연해하고 있었다.
“언니가 좋다는데 왜 오라버니가 난리야? 그렇게 싫으면 오라버니는 언니가 해 주는 거 먹지 마!”
“엘로이!”
마침내 시어머니가 따끔하게 소리 냈다. 마지못해 입을 다문 시누이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런데 난 혼자 요리 독박 쓰는 게 좋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시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알렉을 응시했다.
“그래, 알렉……? 네 말뜻이 뭔지는 알겠단다. 그럼 일단 루이제의 의사부터 확인해 보고
결정하자꾸나.”
“…….”
저요?
“루이제. 네가 말해 보렴.”
나는 시어머니와 빤히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말투는 언뜻 인자했으나 눈빛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당연히 네가 계속 귀찮고 궂은일을 도맡을 거지?’라는 뜻의.
“너도 나와 엘로이가 식사 준비를 도왔으면 좋겠니?”
“…….”
어디 식사뿐이겠어요.
집 안 청소와 촛불 켜고 끄기 등등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먼지는 매일매일 털어도 계속 쌓인답니다.
“글쎄요. 저는 맛있게 드셔 주기만 한다면 못 할 게 없는걸요. 그치만 제 요리 솜씨가 부족한 탓에
오늘도 어머님께 실망을 끼쳐 드렸네요.”
“…….”
나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었고, 식구들은 잠자코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금세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요리는 포기하는 게 좋겠어요.”
“……루이제!”
“언니!”
대뜸 선언한 내 말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화들짝 놀랐다.
사실 나는 내가 식구들의 끼니를 도맡아 준비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우리 가족들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을 거라는 게 문제였지.
지금도 자기들 생각밖에 안 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보니 저들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할 일이 요리뿐만이 아니네요. 쓰레기 소굴에 살 수는 없으니 집 청소도 해야 하고, 옷과
이불도 자주 세탁해야 해요. 밤마다 돌아다니면서 촛불도 꺼야 하고요. 양도 돌봐야 하지 않나요?”
나는 안타까운 것처럼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어젯밤에 촛불 찾아다니면서 새삼 사용인들한테 너무 미안해지더라고요. 그동안 우리를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흑.”
시어머니가 혀를 찼다.
“그들은 돈을 받는 대가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잖니.”
“그래도 그들 덕에 여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어머님과 엘로이는 돈을 대가로 요리나 청소를
하실 건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것 보세요. 아무튼 제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으니 전 청소나 하려고요. 제가 하는 것보단 더
나은 음식을 드셔야 하잖아요. 흐윽.”
말끝에 내가 살짝 우는 척을 했다.
어머, 딱해라. 아쉬워라.
시어머니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누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표정이었다.
시누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당장 ‘나 안 먹어!’ 하면서 뛰쳐나갈 것 같았다.
문득 알렉이 입을 열자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스스로 필요한 요리와 청소는 각자 하는 겁니다. 양을 돌보거나 쓰레기를 태우는 험한 일은 제가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
“빨래도 힘이 많이 드니 제가 하는 게 낫겠습니다.”
정말로?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공작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우리 남편 은근히 집안 살림에 거리낌이 없잖아?
랏터렛일에 선뜻 나서겠다 어쩐지 지금 그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드르륵.
그런데 대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엘로이가 또 박차고 나가려는구나- 음?
예상과는 달리 벌떡 일어선 건 시어머니였다.
이윽고 그녀가 알렉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실망스럽구나, 알렉.”
“……?”
“그 빌어먹을 놈의 폭군에게 작위만 빼앗긴 줄 알았더니, 이제는 네 긍지까지 잃어버린 거니?”
예?
갑자기 긍지까지요……?
시어머니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난 양을 치고 빨래를 하는 공작 아들은 낳은 적이 없다.”
“…….”
“넌 누가 뭐래도 존엄한 브렌트 공작가의 가주야. 차라리 네가 명예롭게 죽는 건 보아도, 짐승들 똥을
치우고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는 꼴만큼은 절대 못 본다.”
“…….”
시어머니가 조곤조곤 분개했다.
그녀가 알렉에게 저렇게나 실망을 하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막상 시어머니가 저렇게 나오니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이쯤 되면 알렉도 놀라서 무릎이라도 꿇지 않을까?’
그러나 알렉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어쨌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집안일은 분담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거들어 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
알렉의 태도에 거듭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도 단호한 알렉의 말에 동작 그만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이를 악물더니 드레스 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붉으락푸르락, 그녀의 안색이 예사롭지 않게
일그러졌다.
붉어진 시어머니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 그녀가 소리쳤다.
“난 브렌트 공작가의 대공작 부인이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휙.
시어머니가 그냥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나가 버렸다.
“…….”
정적이 흘렀다.
시누이가 흐응 한숨을 내쉬더니 포크를 들었다.
“오라버니 그냥 사용인들을 몇 명 구하는 게 어때.”
그리 말한 시누이는 접시에 있던 고기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는 동안 다른 고기도 썰었다.
“언니, 난 어머니처럼 언니 음식이 맛없다고는 안 했어.”
“…….”
그래.
참, 잘 먹긴 잘 먹는구나…….
나는 슬그머니 알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어머니에게 반항을 해 깜짝 놀랐다.
가만히 있었으면 어머니가 그에게까지 뭐라 하진 않았을 텐데.
“……고마워요, 알렉. 날 위해 그렇게까지 말해 줘서요. 그런데 나 때문에 괜히 어머님께서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어쩌죠.”
그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식기를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양을 돌보겠다는 말이 저렇게 화를 내실 만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고……?
어머니와 누이에게 집안일을 분담시키려고 한 것도, 알렉 본인이 궂은일에 나서겠다는 말도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모두 용납 불가한 일들이었다.
“저 같아도 속상하긴 할 거예요. 당신은 그냥 평범한 아들도 아니고, 귀한 가문의 주인이잖아요. 당신이
유일한 성기사 가문의 후예라면서요.”
“…….”
“우리 가문만큼 명망이 높고, 황가와 인연이 깊은 가문이 또 있을까요?”
그것도 다 선대 브렌트 공작까지의 이야기지만.
“물론 날 위해서 어머님께 그렇게까지 말해 준 건 정말 고마워요.”
나는 시선을 내린 채 식기만 만지작거렸다.
알렉이 나를 위해 어머니를 거역하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라 놀랍고 고마웠다.
비록 시어머니는 분개하며 식탁을 박차고 나가 버렸지만, 죄송하게도 나는 처음 겪는 남편의 쉴드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 느낌 뭐지?
묘하게 든든한데?
남편이 내 편을 들어준 게 이리 좋은 일인가?
“언니, 스튜에 고기 더 있어?”
“응?”
문득 들려온 엘로이의 말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식탁을 보니 시누이가 어느새 그릇을 다 비우고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글쎄. 없을 것 같은데.”
갸웃하며 시누이에게 그리 말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스튜 냄비를 확인했다.
국자를 저어 보니 다행히 남은 고깃덩이가 서너 점 정도 있었다.
‘어차피 알렉도 거의 다 먹은 것 같은데 엘로이 다 줘 버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문득 마음이 바뀌었다.
냄비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은 나는 식탁으로 돌아가 안타까워했다.
“이런, 다 먹었네.”
“아, 알겠어.”
시누이는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남은 스튜를 휘적거렸다. 그러더니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어머니한테나 가 볼게.”
여전히 시무룩하게 말하고는 식당에서 나갔다.
알렉과 나 단둘만 남은 식탁.
다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스튜 냄비를 들고 왔다.
그의 그릇에 양고기 서너 점이 들어간 스튜를 더 담아 주었다.
“더 먹어요, 알렉.”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구나, 흐윽.
“괜찮습니-.”
“……알렉?”
그런데 왜인지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얼어붙어 버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7 화

* * *

루이제가 부어 주는 국자에서 네모난 고깃덩어리가 그의 그릇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스튜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더 먹을 필요까지는 없어서 사양하려고 했지만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괜찮습니-.”
띠링.
익숙한 효과음이 들렸다.
이윽고 불투명한 글자들이 정면에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

[히든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첫 번째 히든 퀘스트를 성공함에 따라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히든 퀘스트: ~루이제에게 몰래 숨겨 두었던 양고기를 세 점 이상 받아 보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가 3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1 올랐습니다.]

“…….”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알렉?”
휙, 휘익.
루이제가 그의 시야로 손을 저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루이제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그는 일단 어서 이 장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막 몸을 돌려 다이닝 룸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경고!]
[루이제의 성의를 섭취하지 않으면 퀘스트 보상이 취소됩니다.]
[어서 맛있게 먹어 주세요!]

“…….”
뭐 이런 게 다 있지……?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분명 사라진 줄 알았던 그의 상태 창이다.
원래 푸른빛이었던 글자들이 핑크빛으로 변해 다시 나타났다.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치 끝난 줄 알았던 게임이 새롭게 다시 시작한 느낌이었다.
이내 그는 허공에 떠오른 핑크빛 글자를 모른 체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더 먹을 생각도 없었고,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완전히 다이닝 룸을 벗어나 홀까지 나갔을 때였다.
시스템이 한껏 당황했다.
[경고!]
[경고!]

그가 걷는 걸음마다 삐용, 삐용 경고음이 울렸다.


그는 계속 무시하며 계단에 다다랐다.

[어서 아내의 성의를 섭취해 주세요. 퀘스트 보상이 취소됩니다!]

그는 곁눈질로 상태 창을 보았다가 이내 서슴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갑자기 뭐야.’
조금 전 보았던 보상 알림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애정도가 3 올랐습니다.’

애정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도 아니고 애정도라니…….
그는 애정도 같은 것을 위해서 일부러 양고기 스튜를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걸 왜 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가 최종 보상이라더니, 무슨 원점 같잖아.’
옅은 한숨을 내쉰 그는 살짝 얼굴을 쓸었다.
이윽고 그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히든 퀘스 트 보상을 받아 아내와의 관계를 향상시키세요!]

“…….”

[히든 퀘스트를 통과해야 다음 퀘스트가 개봉됩니다.]

……그렇구나.
그는 그냥 방문을 열었다.
살짝 이해가 안 가는 퀘스트였다.
루이제는 그의 진짜 아내도 아니고, 그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녀와의 관계를
향상시켜야 하는 걸까?
루이제를 속이는 것 같아서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차라리 NPC 라면 모를까, 아니 아무리 NPC 여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경고!!!]
[애정도를 쌓아야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높여서 폭군 악센을 무찌르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세요!]

“…….”
탁.
그는 그냥 방문을 닫아 버렸다.
시스템 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레벨을 올리려면 경험치가 아니라 애정도가 관건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금세 다시 띠링, 소리가 들렸다.

[히든 퀘스트 종료: 실패]


[루이제가 남은 스튜를 모두 먹었습니다.]
[퀘스트 패널티]
[애정도가 3 하락했습니다.]
[경험치가 10 하락했습니다.]
[신뢰도가 3 하락했습니다.]
아까는 신뢰도가 1 오른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3 이나 하락했지?

[신뢰도 -2]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신을 죽인 구원자 → 냉정한 초보 남편]

“…….”

* * *

알렉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비록 퀘스트 보상은 무효화되다 못해 신뢰도는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한번 나타난 상태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나타난 시스템에서 몇 가지를 확인했다.
레벨.
놀랍게도 1 이었다.
전생에서 마지막쯤에는 600 을 넘어 버린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다시 갓난아이가 된 것 같았다.
레벨이 갓 시작한 초급자 수준이니 스킬과 스탯의 상태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직업은 그대로인가?’
그는 전생에 그가 전직한 직업 스킬도 확인해 보았다.
만약 그의 직업 스킬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 세계의 폭군 정도는 당장 내일모레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 스킬: 개방 전]
[현재는 열 수 없습니다. 개방하려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도전! 재취업 직업 퀘스트’를 성공하거나,
중급 남편 수준의 애정도를 달성해야 합니다.]

“…….”
직업 스킬도 무용지물인가?
그렇다면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전생의 무기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인벤토리: 잠금 상태]
[현재는 열 수 없습니다. 레벨에 따라 점차 확장됩니다.]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직업 스킬은 물론이고,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아이템도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왠지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새하얘진 피부처럼 모든 것이 표백된 듯 그의 능력도 다 사라져 버렸다.
그가 바란 건 리셋이 아니라 보상이었는데, 이건 보상도 아니고 휴식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스템 창을 닫으려는데 문득 처음 보는 메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등장인물 일람]

등장인물?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서 저런 걸 볼 수도 있는 걸까?
호기심이 든 그는 등장인물 목록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가족들 세 명과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음표 천지였다.
그는 우선 자신이 빙의한 알렉시스에 대한 정보부터 확인했다.

[알렉시스 마이어스]
[남, 나이: 23 세]
[브레튼 공작. 외모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불세출의 미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특이 사항: 죽은 이후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
[??????????]
[??????????]

“……?”
특이 사항 이후 장식된 물음표처럼 그의 머릿속도 온통 의문이 장악했다.
알렉시스의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고?
그렇다면 죽은 후에 어딘가로 가 버렸다는 걸까?
과연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걸까?
‘그럼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온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그도 다시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지 몰랐다.
돌아갈 수 있을까?
물음표 처리된 부분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그는 다음으로 루이제에 대해 확인했다.

[루이제 샤넌/루이제 마이어스]


[여, 나이: 24 세]
[브레튼 공작 부인. 본래는 이웃 나라 샤넌 공작가의 영애였다. 이 세계에서 남자 보는 눈이 제일 높다.]
[남편과 정략결혼 했지만, 한 번도 부부 관계를 갖지 못해 한이 서렸다. 남편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과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
[??????????]

“…….”
설명을 모두 읽은 알렉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다시 알렉시스의 정보를 열람했다.
왜 그가 루이제와 제대로 된 부부 생활을 나누지 못했는지 쓰여 있었던가?
오늘 아침 확인해 본 바로는 이 몸의 성적인 기능은 너무도 정상이었다.
오히려 몸속의 마나가 넘치듯 들끓다가 중심부까지 꽉 채워진 탓에 평범한 수준 이상으로 크고 뜨거웠다.
……마나?
‘그래, 지금도 이 몸속에는 마나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8 화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휘몰아치는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한 번도 끌어내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마나였다.
그가 이 몸에 마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처음으로 여관을 나와 집을 구하러 다닐 때였다.
마나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근 본적인 힘.
전생에 그도 지니고 있었기에 이게 마나의 느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법 계열의 스킬을 쓸 때마다 소비되는 힘이 마나였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발현시키지 않았지?’
골이 다 지끈거린 알렉은 질끈 눈을 감으며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이걸 발현시켜서 다룰 수 있기만 했어도 폭군에게 그리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쥐약 먹은 놈, 나약해 빠진 인간이 아니야.’
이 세계는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마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세계.
마법 같은 건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힘으로 치부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마나를 지닌 채 태어났다는 건 마력으로 세계관 최강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알렉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쓰기만 했어도 폭군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안타까웠다.
혹, 마력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던 나머지 방치했던 건 아닐까?
그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다시 서서히 내렸다.
스르륵 눈을 떴다.
시스템 창에 물음표로 표시되었던 부분이 희미하게 사라지더니 이내 처음 보는 문장으로 변했다.
[자신의 마나를 병으로 착각했다. 몸 밖으로 마나가 터져 나올 것을 우려해 늘 몸가짐을 조심했다.]

“…….”

* * *

결국 나만 남은 식탁.
시어머니는 울먹이며 박차고 나갔고, 시누이는 자기 다 먹었다고 나갔고, 남편은 갑자기 나가 버렸다.
“…….”
‘……그래도 괜찮네, 뭐. 조용해서 이제야 좀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겠어.’
나는 알렉에게 주려고 했던 남은 스튜를 한 입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분위기였는데, 이제야 좀 맛이 느껴졌다.
‘……맛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식탁이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오늘 하루의 첫 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내 남은 음식을 다 먹은 나는 그릇을 정리했다.
‘차라리 나한테 요리를 엄청나게 잘하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나는 식사를 차리는 것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거고, 식구들도 너무 맛있어서 행복해할 텐데.
꼼꼼하게 설거지를 하면서 괜히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의 바람대로 다시 요리사를 고용할 형편은 되지 못했으니까.
돈도 문제였지만, 폭군이 브렌트 공작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우리가 비참하게 버티다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닐까?’
귀족가 중 어느 누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았던 습관과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게 뒷정리를 끝낸 나는 부엌을 나왔다.
밖으로 나가 팔을 쭉 뻗으며 햇빛을 받았다.
‘하, 날씨 좋다.’
탁 트인 경관이 너무도 밝고 평화로웠다.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가 꼭 이곳이 우리들만의 지상 낙원 같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 한구석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식구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렇다고 알렉에게 매일 양을 잡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그에게 맛있는 식사를 차려 주고 싶은데…….
‘아, 맞아. 요리사가 없으면 시장에서 먹을 걸 사 오면 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내 안색이 금세 밝아졌다.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잔뜩 사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다시 집으로 들어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뭔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풍경화가 그려진 액자는 커서 들고 가기 어려우니까 일단 두고, 크리스털 화병, 은으로 된 촛대…….
그래, 화병이랑 촛대가 좋겠어.
나는 버려진 종이를 찾아 화병과 촛대에 둘둘 말았다.
이 정도면 음식을 살 돈은 충분히 벌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무언가가 공기에 섞여 내 호흡과 함께 몸속으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내 눈이 스르륵 감기며 의식을 잃음과 동시에 그대로 쓰러졌다.

루이제가 기절한 직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화병과 촛대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원위치로 돌아갔다.

* * *

아침을 먹은 후.
알렉은 방 안에서 가만히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몸속 중심이 아니라 거의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찬 마나가 느껴졌다.
너무 오랫동안 갇힌 채 계속 억누르고 있던 마나라서 상태가 예민했다.
이런 마나는 전생에서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알렉은 알렉시스의 등장인물 일람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마나를 병으로 착각했다. 몸 밖으로 마나가 터져 나올 것을 우려해 늘 몸가짐을 조심했다.’

설마 그래서.
부인과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한 거였나.
마나 때문에 두려워서 몸이 떨리는 것을 피했다면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한 사정이 이해가 갔다.
가마히 있어도 이렇게 들끓는 느낌이 드는데, 크게 움직인다면 정말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특히나 마나를 병증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겠지.
사냥을 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칼을 쓰든 총을 쓰든 몸에 충격이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이 몸의 주인은 달라.’
알렉은 몸속에서 질서 없이 일렁대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장악하기 시도했다.
한 번도 조절한 적이 없는 상태의 마나는 순수함 그 자체이면서도 엉망 진창으로 떠돌고 있었다.
우주처럼 방대한 양, 호수처럼 심연이 보이지 않는 깊이.
물처럼 투명한 듯하면서도 너무도 맑아 푸른빛을 띠는 것 같은 기운.
지금 반드시 이 마나를 1 서클까지 성장시켜야 했다.
이 집에 정말 유령이 사는지 알아내야 했으니까.
유령을 감지해 잡으려면 마나를 조금이라도 발현할 필요가 있었다.
직업 스킬도 없으니 오로지 마나로 해결해야 했다.
유령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사람들의 말을 완전히 다 믿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알렉은 원래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가, 갑자기 의식을 잃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집에 있는 뭔가를 밖으로 옮기려고 할 때요.’

혹시 이 집에 집착하는 유령인가?
살다 보면 가구를 밖으로 옮길 일이 생길 텐데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건 곤란했다.
알렉은 조금 더 집중했다.
심장에 원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마력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온몸에 퍼진 마나를 한군데로 응집시켜야 했다.
쉽지는 않았다.
몸속에 들어 있는 마나의 양이 너무나 많았고, 또 처음으로 끌어내는 탓에 그의 의지대로 수월하게
따라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렉은 심혈을 기울여 집중했다.
유령.
오로지 이 집에 사는 유령을 포획할 생각이 생각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더 강렬한 결심으로 타올랐다.
그러자 마나가 더 빠르게 그에게 반응했다.
휘이익. 휘잉.
마나가 조금씩 타원을 그리며 심장 주위를 감돌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서클 하나가 완벽하게 생성된 것은 아니었다. 흐릿하게 고리의 형태를 띠며 감돌고 있었다.
‘다. 계속 더…….’
마나의 기운이 더 장엄하고 광활하게 움직였다.
한계가 느껴질 때까지 그의 마나를 몰아붙였다.
전생에 그가 마나를 단계적으로 성장시켰을 때의 느낌을 최대한으로 되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을 파헤치고 파헤쳐 더 깊이 침투해서, 결국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마주했을 때의
그 희열.
바로 그 순간 고리가 완벽하게 완성되는 성취감.
전생에 여러 번 성공했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덕에 이번에는 비교적 쉬워졌다.
점점 심장에서 휘도는 마나가 선명해졌다.
‘거의 다 됐어.’
알렉은 그의 정신 속을 더 집요하게 헤집고 들어갔다.
전생에 처음으로 그가 1 서클을 완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마나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던 초심자의 기억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경력직의 원숙함으로 마나도 한결 안정적으로 휘몰아쳤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세졌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부풀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처럼, 전과는 달리 황홀하고도 홀가분한 느낌이 흥분처럼 그를
휘감았다.
확.
어느 순간 그는 눈을 떴다.
그의 가슴 속에서 마력이 심장처럼 살아서 쿵쿵 뛰었다.
꼭 새 심장을 얻은 것 같았다.
원석에서 다이아몬드를 제련한 듯이.
마침내 그의 마나는 1 서클의 단계만큼 강해졌다.

* * *

1 서클이 된 그는 상태 창을 확인했다.
역시나 레벨은 그대로였다.
마나는 레벨 업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마법 속성의 스킬을 더 오래, 많이 쓸 수 있게 하는 연료였으니 최대한 많이 성장시키는 게 유리했다.
상태 창을 열어 보니 역시나 마나가 필요한 스킬들이 개방되어 있었다.
따로 획득하지 않아도 되는 패시브 스킬들이었다.
확인을 끝낸 알렉은 상태 창을 다시 닫았다.
이제 유령을 감지해 볼 시간이었다.
알렉은 그의 마력을 온 저택 안으로 퍼뜨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9 화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유령의 존재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 저택 안에 유령이 존재할까?
원래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게임 속 몬스터 같은 마수들과 그 죽은 영혼들을 숱하게 접했지만, 다른
세계에서도 유령을 찾아보려니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잠시 후.
정말로 죽은 영혼의 기운이 이 집 안에서 느껴졌다.
틀림없는 누군가의 영혼이었다.
‘진짜 있었구나.’
유령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전 주인의 말은 놀랍게도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 층 응접실.
타깃의 위치를 확신한 알렉은 방에서 나왔다.
가족들이 다 깨어 있는 대낮이니 유령을 밖으로 유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마 집 안에 있는 가구를 바깥으로 들고 나가면 알아서 따라 나오지 않을까?
원래 살던 사람들이 집안 살림을 밖으로 옮기려고만 해도 튀어나왔다고 하니, 이 집에 집착이 큰 유령
같았-.
1 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순간 얼어붙었다.
루이제가 계단과 응접실을 연결하는 홀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놀란 그가 황급히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루이제.”
알렉은 그녀를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둘러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니 호흡은 하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어디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본 그는 우선 루이제를 들어 안았다.
팔에 힘을 주어 들어 올린 순간, 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무게감에 흠칫해 루이제의 얼굴을 보았다.
‘깃털?’
사람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잠시 의아해한 그는 이윽고 홀에서 가장 가까운 엘로이의 방으로 향했다.
루이제를 안은 채 문을 열어 보니 엘로이가 침대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서둘러 그 곁으로 간 알렉은 루이제를 침대에 눕히고는 엘로이의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히 정상이었다.
옆방에 있는 어머니 또한 잠든 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상태는 무사했다.
‘유령 짓이 분명하군.’
알렉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어머니의 방에서 나왔다.
다시 유령의 행방을 감지해 보았다.
조금 전까지 응접실에 있던 유령은-.
등 뒤에서 한기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언제 그의 바로 근처까지 온 걸까?
‘어떤 유령이지?’
죽은 사람?
아직 이 세계에는 마수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으니 끔찍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이 집과 관련된 죽은 사람의 영혼일 가능성이 컸다.
유령이 탐색하듯 그의 주위를 슬그머니 빙 두르는 낌새가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 같은 것들의 그의 주위의 공기에 섞여 들며 피어올랐다.
본능적으로 알렉은 숨을 참으며 그 연기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이 연기에 당한 것 같았다.
조용히 마력을 집중시킨 그는 어느 순간 유령을 붙잡아 끌어냈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 기습을 당한 유령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끌려 나왔다.
[크릉!]
‘……크릉?’
그런데 들려온 앙칼지게 짖는 소리.
이건 짐승이 짖는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동시에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사후 존재를 맞닥뜨려 ~도전! 재취업 직업 퀘스트~가 개방되었습니다.]
[직업 퀘스트에 성공해서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되찾아 보세요!]

“……!”
재취업 직업 퀘스트가 열렸어?
언제 받을 수 있는 건가 싶었는데 유령을 만나야 열리는 거였나?

‘직업 퀘스트에 성공해서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되찾아 보세요!.’

……네크로맨서.
그건 시스템상 그의 직업이었다.
네크로맨서는 인간과 동물, 마물을 막론하고 유령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사역령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크로맨서는 마법 계열의 직업이라 플레이어의 마나 보유량이 능력치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다행히 그는 속칭 ‘마나 수저’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덕에
네크로맨서로서의 능력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겨우 수백만 정도의 사역령 군대를 이끌 때, 그의 능력은 홀로 수천만에 달하는
사역령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 몸의 마나는 엄밀히 말하면 0 에 해당하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가 1 서클로 성장시켰지만, 그전까지는 몸속에 가둬 놓고 한 번도 발현하지 않았으니 0 이나
마찬가 지였다.
‘사실 그래서 이 집을 고른 거였는데.’
유령이 나오는 매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했다.
시스템을 이용해서 사역령을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유령을 잡아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
유령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갓 죽은 시체에서는 특정 시간 내에 해당 영혼을 만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공동묘지에 가 봐야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승을 떠도는 유령이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알렉의 몸에는 마나가 있으니 시스템이 없어도 사역령을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렉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유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갈색 털로 뒤덮인 작은 짐승이 그의 마력에 묶인 채 낑낑대고 있었다.
“…….”
당연히 사람 유령일 줄 알았는데 작은 짐승이라니.
미처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작은 몸, 부드러워 보이는 털.
그러나 인상은 어찌나 매서운지 눈매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킁, 크릉!]
유령이 앙칼진 목소리로 그를 쏘아보며 위협했다.
별 위기감이 들지 않아 유령의 몸을 묶은 그의 마력을 풀려고 한 순간이었다.
[크르릉!]
‘너 내가 보이는 거냐!’
유령이 짖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마나 때문일 것이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그제야 소리 냈다.
“사람들을 잠들게 한 게 너냐? 어서 다 깨워라.”
[크릉!]
‘이거나 풀어!’
유령이 아까보다 더 잔뜩 화를 내며 방방 뛰었다.
잔뜩 화를 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다.
알렉은 조금 더 날카롭게 물었다.
“저 사람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크르릉!]
‘내 연기를 마신 인간은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
“…….”
그냥 평범한 유령 같은데, 사람들을 기절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마물도 아닌데, 신기했다.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진 유령일까?
그 순간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유령 기드온을 당신의 사역령으로 포섭해 보세요!]


[남은 시간 1 분]

기드온?
저 유령의 이름이 기드온인 모양이었다.
알렉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저 유령, 혹시 시스템이 만들어 낸 몬스터가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기드온의 존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세계에도 폭군 때문에 나중에 마수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특수한 능력이 있는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러운 세계였다.
‘그렇다면 설마.’
새집을 구하던 그가 모르는 사이에 시스템의 설계를 찾게 된 걸까?
이 유령이 계속 전 주인들을 내쫓았던 것도 설마…….
[크르릉…….]
‘나는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집을 지켜야 한다.
[크릉!]
그러니 어서 여기서 나가라.’
[킁킁!]
‘여긴 우리 주인님의 집이야!’
“…….”
유령의 기세가 무척 사나웠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동안 이 집에 이사 오는 사람들을 왜 쫓아 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 작은 짐승은 시스템이 그를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게 분명했다.
“사람들을 잠재우는 연기 같은 건 어떻게 생긴 능력이지? 넌 단순한 유령이 아닌 건가?”
연달아 물은 그의 질문에 유령이 경계하듯 몸을 숙였다.
이런 물음을 받는 게 낯선 모양이었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 그대로, 유령이 낮게 짖었다.
[크릉…….]
‘추워서 벽난로에서 자고 있었는데 불에 타 죽었어.’
[크르릉.]
‘내가 있는지 모르고 이사 온 사람이 불을 냈거든.’
[콩!]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어!’
그때를 생각하는 듯 유령이 분개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알렉은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랬군.”
예기치 않게 불쌍한 사연을 가진 유령이었다.
여느 NPC 답게 시스템이 주입한 기억을 현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킁!]
‘너도 내 맛 좀 봐라!’
그때 유령이 양 볼을 늘리며 자신의 입김을 모았다.
그에게 연기를 마시게 해 기절시킬 모양이었다.
후우우욱……!
이윽고 희뿌연 연기가 유령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금세 그의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마나로 방어하려는 순간, 띠링 알림이 울렸다.

[패시브 스킬. 저항이 작용합니다.]


[마나가 소모됩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0 화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마나를 발현시켜서 패시브 스킬이 열렸지.
덕분에 그는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도 유령의 연기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욱!
후욱!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유령은 열심히 연기를 내뿜었다. 복도 안이 다 연기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이내 연기가 조금 거둬지자 유령의 눈이 다시 보였다.
유령은 멀쩡한 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킁!]
‘너는 왜 내 연기를 마시고도 멀쩡해?’
“…….”
[크릉!]
‘인간 맞냐?’
알렉은 작은 유령을 내려다보며 살짝 비웃었다.
“여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내쫓았나? 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만 포기해라.”
[킁? 크릉!]
‘뭐라고? 아니야! 우리 주인님은 꼭 돌아온댔어!’
알렉은 더욱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그만둬.”
유령이 무척 화가 난 듯 눈매를 더욱 사납게 끌어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킁…….]
유령을 속박하고 있던 알렉의 마력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유령이 몸집을 늘리기 시작했다.
알렉은 저건 뭔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팔뚝보다 작은 강아지 같았던 유령이 점점 커지더니 한 마리의 털북숭이 짐승이 되었다.
[크르릉.]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큼직해진 송곳니는 무척 위협적이었다.
기드온이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 앞 발을 까딱였다.
솜뭉치 같았던 강아지의 발은 사람도 단숨에 찢어 죽일 것 같은 흉기가 되어 있었다.
그가 마력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맞서기 꽤 까다로웠을 듯한 흉포함이었다.
그 순간 띠링, 알림이 울렸다.

[기드온이 성체로 변신했습니다.]


[대상의 전투력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기드온이 더 위협적으로 목을 긁었다.


[크르릉. 크릉.]
‘어서 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
그럼에도 알렉은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크릉!]
알렉의 말과 거의 동시에 기드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휙.
알렉은 손을 펼쳤다.
그의 손 위로 마력이 뭉치며 날카로운 칼날 모양을 만들었다.
그 푸른빛으로 빛나는 날을 움켜쥔 알렉은 그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기드온의 목덜미를 잡고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마력으로 만든 칼로 유령을 죽여서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면 직업 퀘스트의 기회도 잃어 버리게 되니, 그저 기드온의 사기를 눌러서 사역령으로 포섭해야 했다.
기드온에게 칼날을 겨눈 그가 한쪽 입가를 올렸다.
“이제 새 주인님을 모시는 게 어때. 널 버리고 간 사람의 집 같은 거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지?”
그의 말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이 기드온이 송곳니를 더욱 드러냈다.
[크르릉.]
‘우리 주인님이 날 버렸을 리 없어!’
기드온이 버둥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잽싸게 발톱을 세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큼직한 발톱을 휙 피한 그가 칼날로 기드온의 한쪽 다리를 살짝 베었다.
[크릉!]
주저앉듯 물러선 기드온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베인 상처에서 희뿌연 기운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기드온이 발끈했다.
[크르릉!]
‘너는 대체 누구냐! 인간이 어떻게…….’
상처를 입고도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큼직해진 몸으로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크헝!]
다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다니.
기드온의 발톱이 그를 할퀴기 직전, 알렉은 마력으로 기드온을 칭칭 묶었다.
[크릉! 컹!]
기드온이 발버둥을 쳤다.
확실히 성체가 된 짐승은 아까보다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알렉은 단호하게 기드온을 주시했다.
“강아지랑 놀아 주는 건 여기까지야.”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리긴 했어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성격이 못된 유령 같지는 않았다.
이 이상 상처를 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왜 네 연기에 쓰러지지 않는지 궁금한가?”
[크릉…….]
알렉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소멸시켰다.
그러고는 그 짐승의 상처에 손을 뻗었다.

[패시브 스킬: 자연 회복]


[마나가 소모됩니다.]

기드온이 그를 경계하는 사이, 그의 손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이건 플레이어가 다쳤을 때 자동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가능한 만큼 타인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레벨이 낮고 마나도 1 서클밖에 되지 않아 그리 강력하지는 않았다.
“나는 네 새로운 주인이 될 사람이니까.”
[크릉!]
‘말도 안 돼!’
[크르릉.]
‘내 주인님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기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기드온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나는 널 이대로 소멸시킬 수도 있지. 그래도 살려 주는 건 날 주인님으로 모시라는 마지막 기회다.”
[……크릉!]
‘내가 너 따위를 주인으로 모실 것 같아?’
“내가 네 새 주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네 연기에도 멀쩡할 수 있겠어? 하필 이 집으로 온 건 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킁.]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네 착각이겠지. 난 이미 네 이름도 알고 있거든.”
[……?]
“만나서 반갑다, 기드온.”
[크릉?]
‘……! 어, 어떻게 내 이름을!’
기드온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의 말에 큰 혼란을 느낀 것 같았다.
띠링.
때마침 시스템 창이 또 떠올랐다.

[기드온이 일시적으로 의지를 상실 했습니다.]


[기드온을 당신의 사역령에 포함하시겠습니까? 포함하시려면 기존의 명령어를 사용해 주세요.]
[주의! 3 초 후에 기드온이 다시 전의를 불태웁니다.]

시스템의 글자 빠른 선택을 하듯 반짝였다.


유령이 있다는 말에 선택한 집이기는 했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유령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전생에서처럼 아직 전투력이 강한 마물의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을 잠재우는 힘이라니,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몸을 떨고 있는 짐승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며 시스템의 물음에 수락했다.
전생에 그가 사역령을 포섭할 때마다 사용했던 지시어가 낮게 울렸다.
“나의 사역령이 되어라.”
[크릉!]
‘안 돼!’
시스템이 기드온을 옭아맸고, 기드온은 뒤늦게 저항했다.
부들부들.
기드온이 사역령 포섭을 거부하려 안간힘을 썼다.
레벨이 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령이었지만, 한 번에 포섭하는 것은 어려웠다.
기드온처럼 시스템과 그의 몸도 조금 진동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나는 1 서클에 해당하는 상태였으니, 이 정도의 저항은 쉽게 무효화할 수 있었다.
이윽고 기드온의 영혼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크, 릉…….]
그리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띠링.

[사역령 포섭에 성공했습니다.]


[보유 사역령 1/1]

드디어 그에게 사역령이 다시 생겼다.

* * *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내가 어쩌다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무척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나.
시장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왜 자고 있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서 일어나고 싶었는데, 쉽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양고기 요리를 하느라 힘들긴 했지.’
차라리 그냥 더 자 버릴까, 생각하며 의식을 놓으려 한 순간.
“언니! 일어나, 언니!”
이유 모를 찜찜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마치 내 의지로 잠이 든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 먹어야지. 배 안 고파? 밥 다 됐어.”
의아한 마음에 얼굴을 찡그린 나는 그제야 내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보니 시누이가 나를 향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제야 깼어?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자? 벌써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났는데.”
“……아, 엘로이.”
비몽사몽간에 나는 서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창밖을 본 나는 순간 소리 없이 경악했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1 화

‘벌써 밤이야?’
대체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순식간에 하루가 다 날아갔다.
놀란 내가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며 엘로이에게 물었다.
“나 얼마나 잔 거니?”
“몰라. 나도 낮잠 자다가 점심때 훨씬 지나서 일어났어.”
“…….”
“일어났으면 얼른 나와서 밥 먹어. 마침 다 됐어.”
그리 말한 엘로이는 그대로 쌩하니 나가 버렸다.
나는 무거운 이마를 손으로 받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옷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내 몸에 걸쳐져 있었다.
옷도 안 벗고 그냥 침대에 누운 건가?
분명 촛대와 화병을 챙기고 있었는데 어쩌다 낮잠을 자게 된 거지?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가 보였다.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미모, 우아하게 다리를 포갠 자세.
내가 그녀를 발견한 순간, 시어머니도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척 봐도 눈길이 곱지 않았다.
“……못 자서 죽은 유령이 붙었나, 이제 일어나는 거니?”
“그으러게요, 어쩌다 보니…….”
나는 그냥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시어머니는 더 꼴불견이라는 듯 얼굴을 구겼다.
“네가 뭉그적거리니 우리 지엄한 브렌트 공작가의 가주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게 아니냐.”
“네?”
알렉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고?
시누이가 밥이 다 됐다길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알렉이 한 거야?
시어머니를 뒤로한 나는 어서 부엌에 가 보았다.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부엌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수프 냄새가 났다.
옥수수와 감자를 푹 삶아 끓인 듯한 냄새와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토마토 향이 후각을 자극하자 불현듯
식욕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거의 다 차려진 듯한 식탁에는 엘로이가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웬일로 쟤가 식사 준비를 거드는 걸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아침에 있었던 알렉의 선전 포고가 효과라도 있었던 걸까?
하긴 내가 앞으로 요리를 안 하겠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거드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겠지.
“……아.”
알렉을 찾아 몇 걸음 떼던 나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 식당 쪽으로 들어온 알렉과 마주쳤다.
그는 은으로 된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토마토를 뭉근하게 끓인 듯한 소스와 기다란 면이……
스파게티인가?
은쟁반을 멍하니 바라본 내가 이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끝내주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니 남은 잠이 모두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깨어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 * *

알렉은 루이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기드온을 사역령으로 포섭한 후, 자신의 연기를 무효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바로 깨어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기드온에게 물었더니, 그냥 자고 싶어서 계속 자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드온의 연기는 그냥 잠에만 빠질 뿐, 일산화 탄소처럼 중독성은 없다고 했다.
다행히 어머니와 엘로이는 오후쯤 깨어났지만, 웬일인지 루이제는 해가 다 지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루이제를 깨우러 갔던 알렉은 침대까지 몇 걸음 남기고는 더 다가가지 못했다.
새근새근.
루이제는 풍성하고 촘촘하게 굽이진 은발을 침대 위에 늘어뜨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성스러운 그림 같아 그는 발이 묶인 것처럼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지금은 전설이 된 고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
역시 다른 세계로 와서 이런 이질감이 드는 걸까?
그것도 그렇지만, 루이제가 너무도 편해 보여 차마 휴식을 방해할 수 없었다.
‘하긴 최근에 피곤한 일이 많았겠지.’
그동안 여관의 딱딱한 침대에서 자기도 했고, 가문이 망해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테니까.
알렉은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다행히 다른 가족들은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평소처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낮잠을 너무 많이 잤네.’ 하면서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가족들에게 그가 유령을 잡았다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루이제는 괜찮을까?
알렉은 스파게티를 담은 은쟁반을 든 채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계셔서, 괜찮은가 하였습니다.”
“아, 네. 괜찮아요.”
그제야 루이제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듯 대답했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나 봐요. 여관에서 자다가 푹신한 침대가 있으니 잠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셨군요. 배고프실 텐데 어서 앉으십시오.”
알렉은 눈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루이제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도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루이제는 거의 다 차려진 식탁과 그를 번갈아 보다가 답했다.
“네. 그럴게요.”

* * *

나는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몸을 돌려 식탁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보니 식탁 위에는 많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채소와 토마토를 잘라 나란히 차린 샐러드, 일일이 껍질을 까 놓은 삶은 계란, 아침에 먹고 남은
양고기를 알맞게 구워 한입 크기로 자른 것, 옥수수와 감자를 함께 넣어 끓인 수프 등등 간단하지만
풍족한 식탁이었다.
이윽고 알렉이 들고 있던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토마토소스로 버무린 면 요리에서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알렉과 엘로이를 번갈아 보았다.
“이걸 누가 다 한 거예요?”
내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엘로이가 말했다.
“내가 계란도 삶고 토마토도 잘랐어! 다른 건 다 오라버니가 했다?”
“……응? 스파게티를 알렉이 했어?”
“응.”
놀란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정말 고생 많았네요. 그런데 알렉 당신이 어떻게 이런 걸…….”
그가 자리에 앉으며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예전에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어서 흉내만 내 봤습니다. 맛이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어디서 봤을까? 공작가의 부엌에 들렀다가 본 걸까?
아무튼 나는 얼른 대답했다.
“너무 맛있어 보이는걸요. 정말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알렉.”
알렉은 잠시 나를 보다가 이내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나는 엘로이에게도 짧은 인사를 건넸다.
“엘로이 너도 수고했어.”
누구보다 도도한 공작 영애인 엘로이가 제 손으로 계란도 삶고 토마토도 자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 맛있는 거 해 줘야 돼.”
“그래, 잘했어.”
나는 너무 밉지 않은 눈으로 엘로이를 보았다.
하여간 엘로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거들 리가 없었다.
마침 들어온 시어머니는 머리만 절레절레 흔들면서 포크를 들었다.
공작인 그가 요리를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식기를 들자 나도 먹음직스러운 면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남자가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맛은 아직 모르겠지만, 너무도 그럴듯해 보였고 또 성의가 느껴져서 무척 감동이었다.
매 끼니를 내가 차려야 할 것 같아 부담이었는데, 자다 일어나니 이렇게 풍성한 식탁이라니.
나는 울컥한 기분을 애써 삼키듯 식기를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할 때 먹어 보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만들기 어려운 특별한 요리는 없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남편이 차려 준 저녁이었다.
그와 내 결혼 생활에서 이런 성의를 받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게다가 시누이까지 웬일이람.
포크에 면을 돌돌 만 내가 뭉클한 기분으로 입에 넣었다.
과연 맛은 어떨까?
설령 맛이 없더라도 나는 그 무엇보다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마침내 한 입 먹으니 달콤하면서도 상큼하고 고소한 맛이 퍼졌다.
간이 잘된 토마토소스와 알맞게 익은 면이 너무도 잘 어우러졌다.
꿀꺽 삼킨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정말 맛있네요.”
내 찬사를 시작으로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감탄이 이어졌다.
“대박.”
“알렉 너한테 이런 재주도 있었니?”
“…….”
우리의 반응에 알렉은 잠시 어색해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맛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잘 먹을게요.”
내 남편이 요리까지 잘할 줄이야.
그동안 음식을 할 일이 없어서 몰랐을 뿐이지, 어쩌면 요리에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열심히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고, 엘로이도 말없이 먹기만 했다.
그의 요리를 못마땅해하던 시어머니까지 꽤 괜찮다는 듯 눈썹을 올리더니 그릇을 싹싹 비웠다.
나는 그에게 재차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각이 살아 움직일 정도로 맛있는 만큼, 그에 대한 애정까지 샘솟는 것 같았다.

* * *

띠링.
한편 식사를 하던 알렉은 하마터면 식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족들이 너무 맛있게 음식을 먹어 줘서 내심 안도하고 있었는데, 알림음 소리와 함께 상태 창 글자들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2 화

“……?”
갑자기 솟아오른 상태 창에 뜨끔한 알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식이 거의 다 비워져 가는 식탁 위로 분홍빛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애정도가 올랐어?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낼 뻔했다.
일단 그는 상태 창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셨다.
대체 왜 오른 거지?
‘설마 저녁 식사를 만들어 줘서……?’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루이제가 눈물을 글썽거릴 만큼 맛있다고 한 말은 순수한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간단한 요리였는데, 이런 걸로 애정도가 오르다니…….
사실 그는 전생에 요리를 해 본 적이 많았다.
아예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건 전생에 있었던 ‘특별 퀘스트’ 때문이었다.
요리 기능사 자격증을 하나씩 딸 때마다 특수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그 덕에 파스타 같은 간단한 음식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게 여기서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요리 중 이 세계에서 만들어도 위화감이 없는 메뉴를 고르느라 고민을 좀 해야
했다.
사실 그는 레벨을 올리는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이제에게 애정도를 얻을 자신도 없었고, 일부러 애정도를 따내려 애쓰는 것도
어딘가 찜찜한 탓이었다.
‘혹시…… 요리를 열 번 해 주면 애 정도도 10 까지 오르는 걸까?’
그는 파스타 외에도 또 맛있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뭐가 있는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홍차를 끓여 응접실로 향했다. 가족들과 한 잔씩 나눠 먹을 생각이었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런가 기운이 나는 것 같네.’
그렇게 쟁반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 가려던 내가 잠시 멈춰 섰다.
낮에 시장에 가 팔려고 했던 촛대와 화병이 눈에 띄었다.
분명 들고 나가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촛대와 화병은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걸까?
고개를 갸웃한 내가 다구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식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모였다.
나는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 정말 유령이 사는 집 맞을까요? 아직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요.”
아직 이사를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촛불 두 개가 제 마음대로 꺼지고 희한하게 깊은 잠에 든 것
말고는 별 이상한 일은 없었다.
촛불은 어디서 바람이 들어왔겠거니 했고, 낮잠을 오래 잔 것도 그간 너무 피곤했겠거니 했다.
“……흐음, 그러게 말이다.”
내 말에 가장 먼저 대답을 한 건 시어머니였다.
내가 그녀의 잔에 가장 먼저 홍차를 따라 주자 시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잔을 들어 홍차의 향을 맡았다.
시누이는 유령의 ‘유’ 자도 끔찍한 듯 다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유령 얘기 하지 마. 괜히 이런 말 하면 튀어나올지도 모른단 말이야.”
나는 알렉에게도 찻잔을 건네주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자코 우리의 말을 듣고 있던 알렉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였다.
“그런데 알렉 당신은 이상한 일 없었나요? 이대로 유령 같은 거 안 나 오면 정말 좋겠는데, 그래도 전
주인이 이사까지 갔다고 하니까 좀 걱정이 되어서요.”
나는 따뜻한 잔을 무릎 위로 올린 채 알렉을 응시했다.
이내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글쎄요. 아직은 우리를 쫓아내지 않으니 이대로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정말 좋겠네요. 괜히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요.”
내가 그를 향해 희망적으로 말하자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잠시 입술을 매만지더니 금세 손을 내렸다.
“아니면 이미 유령이 우리를 집주인으로 받아들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의 눈빛은 흔들리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잠시 그 눈을 바라본 나는 이내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유령이 정말로 나타나면 그때 다시 걱정하지 뭐.
나는 금세 다른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 갔다.

* * *

짧은 티타임이 끝나고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알렉은 가족들이 잠자리에 든 지 한참이 지났을 때 다시 시스템 창을 열었다.
어쩐지 긴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양을 잡았고, 아침을 먹은 이후에 기드온을 사역령으로 포획했다.
여전히 가족들은 유령이 언제 나올까 싶어 불안한 눈치였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드온이 새 집주인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상태 창을 확인했다.
기드온을 포섭한 덕에 잠금 상태였던 그의 직업 스킬이 오픈되었다.

[직업: 네크로맨서 / 레벨: 1]


[보유 사역령 1/1]

문제는 현재 그의 레벨로는 겨우 한 마리만 수용할 수 있다는 것.


직업 스킬이 다시 열린 건 유익한 일이었지만, 역시나 직업 레벨도 1 로 곤두박질쳐져 있었다.
원래 그가 갖고 있던 수천만 사역령들도 모두 사라졌다.
네크로맨서와 관련된 다른 스킬들도 무용지물인 건 마찬가지였다.
사역령의 개체 수를 늘리려면 레벨을 올리거나, 특별한 퀘스트에서 보상을 받아야 했다.
‘기드온.’
그는 마음의 소리로 그의 첫 사역령을 불러냈다.
사역령과 플레이어는 정신적으로 연결이 된 상태나 마찬가지여서 꼭 소리를 내지 않아도 전달이 되었다.
이윽고 그의 침대 아래에 작은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릉!]
‘불렀어, 주인?’
‘쉿. 조용히.’
그는 아래로 내려가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기드온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널 들키면 안 돼.’
그의 말을 알아들은 기드온이 마음의 소리로 대답했다.
[크르릉.]
‘그래.’
알렉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기드온의 등을 쓰다듬었다. 유령이지만 부드러운 털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기드온은 그의 시스템에 소속되자 정해진 대로 그를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기본적으로 유령은 사역령이 되면 플레이어에게 충성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순진한 성향의 유령일수록 플레이어에게 더욱 쉽게 감화되었다.
그런데 그의 지시를 따르다가 다른 식구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으니 미리 주의를 줘야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가족들하고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
알렉이 당부하자 기드온이 알겠다는 듯 낮게 짖었다.
어차피 사역령들은 그가 내보내지 않으면 시스템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미리 당부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나저나 직업 스킬도 열렸는데 레벨을 높여야 하나?’
얼결에 애정도까지 얻으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레벨을 높여서 폭군 악센을 무찌르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세요!’


‘그래도 누군가 나타나서 폭군을 해치워 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그럼 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이제 알렉은 우리의 영웅이잖아요.’

“…….”
꼭 그를 둘러싼 세계가 다시 그에게 악을 무찌르고 평화를 이룩하도록 종용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왜 그 번거로운 일을 그가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진짜 게임도 아니고, 왜 힘든 일에 자꾸 부려 먹는지 모르겠군.’
알렉은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게다가 이 세계는 꿈에도 예상 못 한 방식으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왜 하필 레벨 업에 애정도가 필요한 건데.’

5. 레벨에는 애정도가 필요해

“양들이 원래 저렇게 뒤뚱뒤뚱 오리 새끼처럼 걷는 거니?”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나와 시어머니는 햇빛을 받으며 소화를 시킬 겸 언덕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있었다.
우리의 새 저택과 양 떼, 저 멀리 드넓은 숲까지 보이는 곳이라 경치가 꽤 괜찮았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펑퍼짐하게 털이 불어난 양들을 보더니 한 소리를 했다.
내가 보기에도 양이 아니라 큼지막한 솜들이 굴러다니는 것 같긴 했다.
아무리 방목을 한다지만 그동안 아예 관리가 안 되고 있었던 걸까?
순간 좋은 생각이 난 내가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혹시 저랑 같이 양털 깎 실래요?”
“……뭐? 지금 나더러 그런 고된 노동을 하라는 거니?”
역시나 시어머니의 반응이 곱지 않았다.
“고된 노동이라니요. 이런 평화롭고 공기 맑은 목가적인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고급 활동인데요. 양털을
깎으면 자연히 잡생각이 사라질 테니 심신 안정에도 무척 좋을 거고요.”
“심신이 안정되기는커녕 삭신이 쑤실 것 같구나.”
“원래 적당히 몸을 움직여야 건강에 좋잖아요.”
“그리 좋으면 너 혼자 많이 하렴. 난 이만 들어가야겠다. 더 있으면 얼굴이 탈 거야.”
“……네.”
역시나 시어머니는 고민도 하지 않고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3 화

어차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언덕을 내려갔다.
둥글게 경사진 길이었는데도 시어머니의 걸음걸이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우아했다.
저게 본투비 귀족이라는 걸까?
나도 얼마 안 있어 저택으로 돌아가 양털을 깎을 만한 날과 포대, 장갑을 챙겼다.
그래도 양을 키우는 집이라 그런지 양과 관련된 도구들이 창고에 꽤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돼.’
어쩌다가 알렉이 돈을 벌어 오긴 했지만, 계속 남편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돈도 바닥이 날 것이다.
슬슬 식재료나 생필품도 사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양털은 쉽게 사고팔 수 있는 품목이었다.
엘로이나 알렉에게 함께하자고 할까 생각한 나는 이내 홀로 저택을 나왔다.
‘해 보다가 어려우면 부탁하지 뭐.’
모자를 단단히 쓰고 풍성한 드레스를 끈으로 묶어 여민 나는 양들에게 다가갔다.
제일 움직임이 둔하고 순해 보이는 양 한 마리를 골라 털을 만져 보았다.
겉은 흙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금 누렇게 변해 있었지만, 속은 무척 하얗고 보송보송했다.
나는 양을 한번 어루만져 주었다.
“언니가 안 아프게 왁싱해 줄게. 조금만 가만히 있어 줘.”
메에에-.
내 말을 알아들은 것도 아닐 텐데 양들이 특유의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큼지막한 면도기처럼 생긴 날로 양털을 주욱 밀었다. 뽀얀 털들이 점점 수북하게 쌓이는 모습을 보니
꽤 기분이 좋아졌다.
한 마리만 밀었는데도 양이 상당했다.
머지않아 나갈 준비를 마친 나는 양털을 챙겼다.
다행히 창고에 수레가 있어서 마차가 없이도 시장까지 양털을 갖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렉을 찾으러 2 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마침 그가 1 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알렉?”
“……루이제.”
동시에 나를 발견한 그가 조금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외출복 차림의 나를 보고 어디라도 가는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가십니까?”
“네. 당신은 뭐 하고 있었어요?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시장에 갈 수 있나요?”
“시장 말입니까?”
“네. 혼자 가기에는 초행길이기도 하고, 양털도 가져가야 해서요. 같이 가 줄래요?”
조금 걱정되었다.
같은 방을 쓰자고 했다가 거절을 당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짐도 있는데 설마 시장까지 동행하는 것도 싫다고 하진 않겠지?
“양털? 양털을 깎으셨습니까?”
“아, 혹시 팔 수 있을까 해서 한 마리만 깎아 봤어요.”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됩니까?”
“네. 고마워요.”
다행히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반짝.
그제야 알렉을 보는 내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이건 설마, 단둘이 하는 데이트……?
집에 있을 때는 다른 식구들이 함께 있으니 도통 단둘이 시간을 보낼 틈이 없었다.
시장 가는 길에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덜컥 기대가 되었다.
‘에휴, 진짜. 나도 주책이야.’
내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시장?!”
대뜸 알렉과 내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솟구쳤다.
“뭐야? 어디 나가는 거야?”
응접실에 드러누워 있던 엘로이가 뛰쳐나왔다.
나는 입을 다문 채 괜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뭐야. 따라오려고? 그냥 들어가. 들어가서 네 엄마랑 놀아.’
꽈악.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시누이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애처롭게 눈망울까지 일렁였다.
“나도 데려가.”
“…….”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걸까?
“나도 사람 많은 데 나가고 싶어. 여기는 너무 심심해…….”
나는 슬그머니 알렉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알렉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
그래.
알렉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거구나.
“음…….”
나는 고민하는 척 엘로이에게서 슬쩍 몸을 돌렸다. 이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여기 근처 시장은 수도처럼 깨끗하지 않을걸. 엘로이 넌 적응이 안 될 거야.”
“정말?”
내 말에 엘로이의 눈썹이 불결한 것을 본 듯이 휘어졌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넌 안전하게 집에 있으렴.”
“……알겠어.”
그제야 엘로이가 조금 시무룩하게 말하며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휴우, 하마터면 부부의 데이트를 방해받을 뻔했어.
안심한 내가 다시 나가려고 한 순간, 시누이가 내 팔을 확 움켜쥐었다.
“아니다! 그냥 나도 같이 갈래.”
“…….”
“그래도 집에만 있는 건 너무 심심해…….”
빌어먹을.
입술을 꽉 깨문 나는 가느다란 눈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차마 알렉과 단둘이 갈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 * *

오솔길을 걸어 나간 우리는 여객 마차를 탔다.


가까운 시장에 들렀다가 수도까지 이어지는 마차였다.
초면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는 마차는 처음인지 엘로이는 내 팔짱을 끼고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시장에는 도착도 안 했는데 엘로이의 눈썹이 누가 봐도 불쾌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옆 사람과는 조금도 닿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창문 쪽으로 꾹 밀어 댔다.
그렇게 짜부라지던 내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엘로이? 차라리 내 무릎에 앉혀 줄까?”
“정말? 그래도 돼?”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정 불편하면 자리를 바꿔 줄게.”
“싫어. 갑자기 이 마차가 쓰러지면 아무도 날 받쳐 줄 사람이 없잖아. 난 가운데가 좋아.”
“…….”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알렉이 나와 엘로이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내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은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한번 그의 얼굴을 보기 시작하니 시선을 돌리는 게 쉽지 않았다.
‘참, 3 년째 보는 얼굴인데 볼 때마다 잘생겼다.’
어떻게 질리지도 않니.
물론 나와는 쇼윈도 부부에 호적 메이트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만큼이나 잘생긴 남자의 실물이나마 볼 수 있다는 거?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양털을 취급하는 상점부터 찾아갔다.
엘로이는 시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 팔짱을 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 여기 왜 이렇게 사람도 많고 더러워?”
“엘로이 네가 깨끗한 곳에서만 살아서 그런 거란다.”
“내가 아는 시장이랑 완전히 다르잖아. 흐윽.”
엘로이가 눈물을 터뜨리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기분을 열심히 억누르며 대꾸했다.
“그러게 내가 넌 안 된다고 했잖아. 이제 이런 데인 줄 알았으면 다신 따라오지 말렴.”
“……흑.”
차가운 내 말투에도 시누이는 나에게서 떨어지기는커녕 더 바짝 달라붙었다.
나는 이 불청객이 끼어 버린 데이트를 떠올리며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고 눈부셨다.
이 낡고 허름한 공간에서 그는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멍하니 그에게 시선이 팔려 있었다.
서너 살밖에 되지 않은 평민 아이도 동그란 눈으로 우리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우와. 천사 같다.”
……그치?
사교계에서도 브렌트 공작가의 일원들은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 화려한 무도회장의 샹들리에와 각양각색의 드레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빛을 뿜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알렉과 나였다.
……물론 나보다는 알렉이 조금 더 많이 눈길을 끌긴 했지만.
그런 그가 귀족이라고는 근처도 지나치지 않을 이런 시장에 왔으니, 사람들이 보기엔 얼마나 충격적일까?
나는 다시 찬찬히 시장 안을 둘러보았다.
폭군에게 작위를 빼앗기고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다면 직접 걸을 일이 없었을 곳이다.
수레를 끌고 가는 여자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아이들, 짐을 들고 바쁘게 오가는 사내들까지.
혼잡한 시장 안 사람들에게서는 일상의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고단한 삶과 생계에 대한 걱정이 그들의 얼굴과 자세에 깊게 배어 있었다.
“…….”
4 년 가까이 이어진 착취와 핍박의 결과.
치안은 더 이상 백성들의 편이 아니었으며, 노동의 대가는 점점 값싸졌다.
세금은 매 분기마다 무섭게 치솟았다.
그건 귀족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라 우리 가문도 꾸준히 땅을 팔아야 했다.
알렉은 소작인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대부분의 세금을 자신이 부담했으니 재산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4 년 전 폭군이 처음 즉위했을 때와 비교하면 최근에 우리 가문의 재산은 10 분의 1 도 안 되는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피해는 일반 평민들에 비하면 출혈 수준도 되지 않았다.
정말로 삶이 고되고, 생계에 직격탄을 받은 저들에 비하면…….
“아, 저 상점인 것 같습니다.”
불현듯 그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마침 유리창에 양이 그려진 상점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4 화

“계십니까?”
양털이 담긴 포대를 들고 있던 알렉이 먼저 가게의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그가 포대를 내려놓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어서오슈.”
무심코 소리 낸 주인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알렉의 얼굴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다음으로 나와 엘로이까지 차례로 쳐다보더니 낯빛이 창백해졌다.
“어, 어디서 이런 분들이…….”
“혹시 양털을 팔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알렉은 주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바로 용건을 말했다.
“아, 예, 예. 어디 보여 주시지요.”
“이겁니다.”
알렉이 가볍게 포대를 들어 선반 위로 올려놓았다.
주인은 포대를 벌려 양털을 유심히 만져 보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질이 꽤 괜찮군요. 한 10 골드 정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15 골드는 안 될까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내가 얼른 물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플러스마이너스 5 정도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한껏 자신 있게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방목한 오가닉 양털이거든요. 양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했답니다. 털도
일 년에 한 번밖에 깎지 않아서 품질도 좋고요.”
말을 마친 나는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옆에서 엘로이가 이상한 눈으로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양털 주인은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10 골드도 후하게 쳐 드린 겁니다. 원래 7 골드만 받으려다가…… 혹시 다른 것도
파실 거라면 300 골드를 드리지요.”
“네? 다른 거요?”
나와 엘로이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른 게 무엇이길래 300 골드나 준다는 건지, 우린 팔 만한 게 또 없었다.
“대체 뭘…….”
대답 대신 양털 주인은 짙은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 머리카락이었다.
은색이었지만 빛에 따라서 간혹 우아한 황금색으로도 보이기도 하는 내 머리카락에 양털 주인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 저 사람도 이게 탐나나 보네.’
그동안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가면 간혹 몇몇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에 눈독을 들였다.

‘공작 부인, 부인의 머리카락은 그 어떤 귀한 금실, 은실보다도 세밀하고 영롱하네요. 빛을 받으면


오로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조금만 잘라서 받을 수 있을까요? 저희 침실 카펫에 수술로 달면 분위기가 정말
오묘하고 몽환적일 것 같아서요.’

장식용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달라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장식하겠다니, 제정신인가?
나는 그 귀부인들이 평범한 상식이 박힌 사람들인지 의심했다.
마른침을 꾹 삼킨 양털 주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양털 주인도 내 머리카락이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전 같았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불쾌해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다른 감정이 들었다.
이 머리카락 정도는, 약간 팔아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가진 것도 없는데 300 골드나 준다잖아.
옅은 숨을 들이쉰 내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려고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안 됩니다.”
알렉의 단호한 저음이 떨어졌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막아섰다.
“……?”
뭐지?
“양털이나 사시죠. 우리가 팔러 온 건 양털이지 머리카락이 아닙니다.”
“아, 예, 예. 실례를 범했습니다.”
양털 주인은 금세 내게서 시선을 거뒀으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알렉은 양털 주인의 제안이 불쾌한 듯 조금 강한 시선으로 주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이 틀어막힌 기분이 되어 동그란 눈으로 알렉을 보았다.
너무 단박에 냉정하게 거절하는 거 아니야?
“왜 안 돼?”
순간 엘로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솟구쳤다.
“언니 머리카락이면 300 골드나 준다잖아. 조금 잘라 드려. 우리 맛있는 거 사 먹자.”
엘로이는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 머리카락에 손을 넣었다.
시누이의 손바닥 위로 내 머릿결이 은하수처럼 흘러내렸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잖아. 그럼 우리 매달 300 골드씩 생기겠다.”
엘로이의 말에 양털 주인도 덩달아 솔깃했다.
“역시 파시겠습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다만 그 조금으로는 안 될 것 같은-.”
“지금 제정신인가, 엘로이 양?”
“응?”
대뜸 날아온 날카로운 말에 엘로이가 눈을 깜박였다.
나도 뜨끔해서 알렉을 응시했다.
방금 알렉이 말한 거야?
알렉은 불쾌한 눈으로 양털 주인을 보았다가 다시 엘로이를 응시했다.
“루이제의 뭘 팔아서 뭘 먹는다는 거지?”
“왜? 나는 그냥, 머리카락은…….”
엘로이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시누이나 나나 말문이 막힐 만큼 알렉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그의 미간에 선이 그어졌다.
“겨우 먹는 것 가지고 멀쩡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팔자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엘로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평생 상상하지 못한 반격을 당해 깊은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분위기가 더 살벌해지기 전에 내가 얼른 말을 꺼냈다.
“알렉! 사실 나도 그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300 골드면 적은 금액이 아니잖아요. 머리카락은 너무
길어지면 평소에도 잘라서 다듬기도 했고요.”
“예?”
알렉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한번 살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을 파시겠다고요?”
“언제까지 당신 혼자 우리 생활비를 책임지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양털을 파는 건 한계가 있고요. 나도
뭐라도 하고 싶어요, 알렉.”
내가 말했잖아.
당신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머리카락을 파는 것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염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
이내 그가 충격받은 듯 입을 벌리더니 말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양털을 얼마나 팔든 그건 당신의 마음이지만, 머리카락을 파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
“돈은 오늘이라도 더 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정이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부인의 머리카락까지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알렉…….”
내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또렷하게 말했다.
“같이 사는 분이 머리카락을 팔아야 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안타까운 진심이 섞인 그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을 꼭 팔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 이상 그를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내 양털 주인을 향한 알렉이 조금 차갑게 말했다.
“머리카락 팔 일 없으니 양털값 10 골드나 주십시오.”
“…….”
그 단호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심장이 울리기 시작했다.
쿵쿵…….
묘한 감동을 받은 내 심장이 계속해서 쿵쿵, 박동했다.
내가 머리카락을 파는 게 알렉에게는 저토록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나?
혹시, 내 것을 온전히 지켜 주려고……?
겨우 머리카락뿐인데도 내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알렉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알렉이 돌아서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 *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
알렉은 양털 상점을 나가려다가 흠칫 멈춰 섰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루이제의 얼굴 위로 핑크빛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애정도가 또 올랐어?
그의 눈이 조금 크게 벌어진 채 얼어붙었다.
갑자기 이게 또 어떻게 된 거지?
처음 애정도가 올랐을 때는 그가 맛있는 요리를 해 줬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포인트에서 애정도가 오른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머리카락을 못 자르게 해서?
아니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애정도가 올랐을까?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알렉이 말했다.
“이만 가시죠.”
그가 루이제에게 10 골드를 내밀며 말했다.
루이제는 그 10 골드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금화를 받으며 끄덕였다. 그제야 그가 상점 밖으로
나갔다.
딸랑.
양털 상점에서 나오자 문에서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어쩌다 얻어걸린 것 같지만, 애정도가 또 오르다니.
그는 시스템에서 애정도에 대한 기본 설명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애정도란?
아내의 애정도는 당신을 더욱 강하게 해 줍니다.
애정도가 높아지거나 루이제에게 명령어를 들으면 특성화 스킬이 개방됩니다.
예시로 ‘내 남편 어디서 기죽지 마.’ 스킬은 적을 완전히 주눅 들게 해 전투 욕구를 상실시킵니다.
어서 아내의 애정도를 높이고 악의 세력을 물리치세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5 화

“…….”
별로 도움이 되는 설명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걸음을 멈추고 루이제를 돌아보았다.
“루이제?”
“네?”
그는 루이제가 머리카락을 팔 생각까지 해서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정도로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나 싶었고,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와장창 깨지는 것 같았으니까.
같이 사는 여자가 돈 때문에 머리카락을 파는 건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루이제뿐만 아니라 엘로이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다시 정보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상이요?”
“예. 마차를 타는 곳까지는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거기 어디 있는 정보상인데요?”
“루덴입니다.”
“루덴이요?”
“루덴?!”
“…….”
알렉은 조금 흠칫했다.
루덴이라는 말에 루이제와 엘로이가 기겁하듯 깜짝 놀랐다.
“어디 정보상인가 했더니 루덴에 있는 곳이었어요? 당신 혼자 다녀와도 정말 괜찮겠어요?”
“……예?”
뭐, 잘못되었나?
루덴은 이 릴트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두 드나들었고, 가장 솜씨가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각 분야의 장인들이
매장을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은행, 백화점, 식료품점 등도 모두 모여 있었고,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도 루덴에 밀집해 있었다.
그가 조금 의아해하자 루이제가 말했다.
“아, 난 그냥 혹시라도 당신이 거기서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정말로 루덴 근처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런 건 이제 괜찮습니다. 전에도 다녀온 적 있기도 하고요.”
“아, 그럼 알겠어요. 그래도 이왕 나온 거 나랑 같이-.”
“아, 안 돼. 난 거기 가기 싫어.”
엘로이가 루이제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듯 들러붙었다.
루덴에 가는 게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울먹였다.
“거기 가면 다른 애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르잖아. 난 지금 드레스도 이상한 거 입었는데…….”
“…….”
루덴은 고위급 귀족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신분이 추락한 지금 상황에서는 가고 싶지 않은 엘로이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엘로이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쫓겨날 때 챙긴 듯한 옷 몇 벌로 번갈아 입고 있었다.
엘로이의 말에 루이제가 잠시 고민하더니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엘로이랑 여기서 조금 더 둘러보고 가는 게 낫겠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알렉.”
“알겠습니다.”
알렉은 나직하게 대꾸했다.
마침 내리비추는 빛에 루이제의 머리카락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관련 없는 남의 머리카락이었지만, 겨우 돈 때문에 잘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렉은 이참에 차라리 빈방 안에 금화를 상자째 쌓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드온.’
시장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의 사역령을 불러냈다.
[크릉?]
‘가족들 좀 몰래 따라다녀.’
너무 눈에 띄는 여인들이라, 무슨 일이 생길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 * *

알렉이 루덴으로 떠나고 나와 엘로이만 남은 시장 안.


우리에게는 루덴이 드래곤 소굴 같은 느낌의 장소인데, 혼자 떠나보낸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가서 괜히 누구한테 맞으면 어떻게 하지?
특히 알렉을 가장 많이 우습게 여기던 귀족 놈들과 마주치면?
그 비열한 놈들의 이름이 수십 명은 떠올랐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이미 한 번 사용인들 없이 혼자서도 잘 다녀온 곳이잖아…….’
나는 애써 알렉을 염려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분 탓인가 손에 든 10 골드가 무겁게 느껴졌다.
직접 번 돈이라 소중하기도 하고, 허투루 쓰면 안 될 것 같은 묵직함마저 느껴졌다.
선 자리에서 몸을 돌린 나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흠칫 굳었다.
저 멀리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어린아이 두 명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아이들은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듯, 내가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 후다닥 머리를 숙였다.
나는 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먼지와 뒤섞여 헝클어진 머리카락, 꾀죄죄한 얼굴에 메마른 입술, 흙이 잔뜩 낀 손과 허름한 옷.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었는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동그랗고 작은 그릇.
제국 안 어딜 가나 저런 아이들이 많았다.
다만 귀족들이 많이 드나드는 루덴 같은 곳에서는 쫓겨나기 일쑤였다.
혹시 저 아이들도 조직적으로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키는 집단에 속해 있는 걸까?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착취하는 조직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어떤 아이들이든 마음이 무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언니, 뭐 해. 가자.”
“아, 응.”
엘로이가 끌어당기자 마지못해 대답한 내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살 만한 식료품을 찾아 나섰다.
길거리에 군것질거리도 꽤 많이 팔았는데, 엘로이는 웬일로 사 달라는 소리를 한번 하지 않았다.
루덴에서처럼 노점 상인들이 깔끔해 보이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그나마 괜찮은 점포를 찾아 10 골드만큼의 감자와 빵, 육포를 산 나는 아까 본 아이들에게 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엘로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고, 아이들도 큰 눈을 깜박였다.
나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혀 앉고는 손에 보따리를 쥐여 주었다.
“……정말로 눈빛이 맑은 아이들이구나. 날이 추우니 일찍 들어가렴. 여기엔 육포랑 빵하고 감자가
들었단다.”
“…….”
“가, 감사합니다.”
한 아이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고, 한 아이는 얼떨떨해하며 그녀에게 고마워했다.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불현듯 이 선행과 동정이 정말로 이 아이들을 위한 건지 아니면 나를 위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나치면 마음이 계속 불편했을 텐데, 내 기분 편하자고 이런 걸까…….
아니, 아이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그냥 그걸로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공손하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렴.”
나를 다시 올려다본 아이들이 금세 어딘가로 가 버렸다.
나도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엘로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거면 양털은 왜 깎았대? 여기까지 양털 팔러 왜 나온 거냐고.”
나는 엘로이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원래 갖고 있던 돈으로 구황 작물을 더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집에 가면 양들은 또 많았다.
“또 감자야…….”
엘로이가 마차 안에서 기운 없이 조금 울먹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감자만큼 요리할 방법이 무궁무진하고 맛도 있으며 영양가도 있는 재료도 또 없었으니까.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내가 슬그머니 엘로이를 떠보았다.
“더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응?”
“그럼 내일부터 네가 양 한 마리씩 털 깎아 볼래? 열 마리면 100 골드잖아.”
“내가……?”
“그럼. 양들이 정말 순하더라. 엘로이 너처럼 곱게 자란 영애들도 안 다치고 쉽게 할 수 있어.”
“그래……?”
“당연하지.”
내가 무척 수월하다는 표정으로 두 번이나 끄덕였다.
그럼에도 엘로이가 넘어오지 않는 것 같자 미끼를 하나 더 던졌다.
“그럼 양털 판 돈 다 너 줄게.”
“진짜야?”
솔깃해하는 눈치에 내가 아까보다 더 크게 끄덕였다.
귀찮은 노동을 엘로이에게 다 떠넘기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그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참 나, 내가 바본 줄 알아. 오라버니가 정보상에 왜 갔게? 돈 구하러 간 거잖아. 언니 머리카락 못
팔게.”
“…….”
기대에 부풀었던 내 안색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여간 잔머리 굴리는 애라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내 다시 창밖을 본 엘로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서로 사랑도 안 하는 가짜 부부면서 머리카락은 소중한가 봐?”

* * *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밤이 되었다.


식구들끼리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먹은 나는 응접실에서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갔다.
‘언제 오는 거지?’
곧 있으면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 알렉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루덴이 멀긴 해도, 일이 빨리 끝나면 벌써 돌아왔을 텐데. 정보상에 간 일이 금방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보상에 팔 만한 비밀들이 더 있는 걸까?’
대체 무슨 책을 읽었길래…….
딱 한 번 정도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또 정보상에 가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가 읽었다는 책에 리디트 황자의 위치가 적혀 있었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거래를 하려는
건지…….
그렇게 팔을 끌어안으며 밖을 서성이고 있자니 낮에 알렉에게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돈은 오늘이라도 더 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정이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부인의 머리카락까지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 걱정스러우면서도 단호했던 말.
그 순간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에게는 내가 머리카락을 팔겠다고 한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하긴 그가 내 머리카락을 팔도록 그냥 놔뒀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서운했을 것 같잖아……?
숨을 길게 내쉰 내가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빈손이어도 상관없으니 얼른 돌아왔으면-.
순간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저 멀리 어둠 속에 파묻힌 곳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잘못 본 걸까?
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집중했다.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던 탓에 사위가 뿌옇게 뭉개져 있었다.
그 희미한 공기를 뚫고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달가닥, 달가닥…….
그리고 바퀴가 습한 땅을 짓누르며 달려오는 소리.
마차일까?
어스름한 안개가 깔린 깊은 밤중에 말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꼭 환청을 듣는 것 같았다.
어렴풋했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진해지며 어두운 안개를 뚫고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은 하얀 주둥이의 주위로 안개가 흩어졌다. 그리고 휘날리는 새하얀 갈퀴.
꼭 꿈속의 한 장면인 것처럼 백마가 슬로 모션으로 내 시야에 뛰어들었다. 두 마리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두 마리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말고삐를 쥐고 위용 넘치게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알렉?”
나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몸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알렉으로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마차를 멈추더니 마부석에서 한달음에 뛰어내렸다.
어깨에 걸친 검은 망토는 꼭 기사의 것처럼 장엄하게 펄럭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6 화

나는 알렉과 마차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그가 몰고 온 마차는 바퀴가 네 개, 말도 네 마리인 무척 거대한 마차였는데, 원래 공작가에서 썼던 것과
비슷할 만큼 웅장하고 튼튼해 보였다.
대여를 한 게 아니라면 어마어마한 값이 들었을 마차였다.
“루이제? 왜 나와 계십니까?”
불쑥 들려온 저음에 놀란 내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알렉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냥 바깥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당신도 언제 오나 싶었거든요. 좀 늦었네요.”
“이것저것 알아볼 게 있어서 출발이 늦어졌습니다. 이미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어떻게 그냥 잘 수 있겠어요. 그런데 저 마차는 어디서 난 거예요?”
내가 다시 마차 쪽을 보았다.
여유롭고 우아한 말들의 모습이 꼭 성기사가 몰 법한 성스러운 말들 같았다.
알렉은 한번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고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차가 없으니 다들 불편하신 것 같아서 한 대 사 왔습니다. 매 번 마차가 다니는 곳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드실 테니까요.”
“아…… 루덴에 갔던 일은 잘된 건가요?”
“그게…….”
“……?”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기 곤란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난감한 기색이었다.
으리으리한 마차를 사 온 거 보면 일이 잘 풀린 것 같긴 한데, 왜 저러는 걸까?
이내 그가 살짝 말아 쥔 손을 입가에 가져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말했다.
“잠시 마차 안 좀 봐 주시겠습니까?”
“예? 마차 안이요?”
“예.”
그가 끄덕였다.
“알겠어요.”
내가 의아해하며 마차로 다가가자 그도 나를 따라왔다.
마차 안에 뭐라도 들어 있는 건가?
내가 말들을 쓰다듬으며 마차의 출입문에 다다르자 알렉이 문고리를 잡았다.
침을 한번 삼킨 듯 불거진 목젖이 근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어쩐지 설레는 마음으로 마차 안을 들여다본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섯 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내부에 나무 박스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좌석뿐만이 아니라 바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상자째 뭘 이렇게 가득 실은 거야?
그는 내 앞쪽으로 팔을 뻗더니 상자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이윽고 드러난 물체들은 그와 내 사이로 흘러들어 온 달빛을 모조리 반사해서 눈이 부시게 했다.
살짝 찡그린 나는 곧 상자를 가득 채운 것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금화, 잖아……?’
다 셀 수도 없이 쌓인 동그란 금화들 위로 찬란한 빛이 물결처럼 넘실대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금빛에 홀린 듯 눈을 깜박였다.
왜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리고, 온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드는 걸까?
산처럼 쌓인 금화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루이제로 태어나 브렌트 공작가가 망하기 전까지 돈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물론 결혼 초 그와 이혼할 위약금이 없긴 했으나 그 일을 제외하면 나는 이 세계에서 언제나 무척
부유하게 살아왔다.
지금은 거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긴 했지만, 전생에는 훨씬 더 가난하게 산 적도 있는걸?
어차피 버티다 보면 살 만해질 테니 차츰 적응해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리도 무수하게 쌓인 금화를 보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파도가 가슴속에 들이닥친 것 같았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내가 겨우 그를 향해 물었다.
“여기 쌓인 이 상자들이 다, 금화인 건가요?”
“예.”
그가 낮게 대답하며 끄덕였다.
목소리가 다 떨리는 나와는 달리 그의 안색은 차분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이내 다시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 치며 어렵게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있는 한, 앞으로 돈 걱정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
“여기 있는 금화 모두 마음껏 써 주십시오.”
* * *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금화를 마음껏 쓰라는 말이 이렇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말이었던가?
모두 얼마인지 세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많은 양의 금화들이었다.
이런 걸 2 층에 있는 방에 쌓아 놓으면 바닥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자는 가족들을 깨워 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는 동안 가족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했다.
그런데 알렉의 금화 플렉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며칠째 나는 이게 다 뭔가 싶어 눈이 핑핑 돌았다.
“여기, 이쪽으로 놔주게. 호호호.”
시어머니가 새로 도착한 피아노를 응접실 한가운데에 두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사치품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접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버렸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구나. 그렇지 않니, 엘로이?”
“네, 어머니. 원래 살던 저택에 비하면 오두막 수준이지만, 그래도 많이 살 만해졌어요.”
호호호.
호호호호.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며칠 전 알렉이 금화 마차를 끌고 왔을 때도 충격적이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니.
알렉은 방문 판매를 하는 잡화 상인과 의상점 주인을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책자 속 모든 상품을 완판시켰다.
조금 머뭇거리던 나도 새 드레스를 열 벌이나 맞췄다.
원래 살던 저택에서 거의 맨몸으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라 옷과 신발이 시급했는데, 그가 이렇게 알아서
재단사를 불러 주다니…….
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은 저택과 멀지 않은 곳에 실력 좋은 요리사의 음식점을 오픈시켰다.
사실 사용인으로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폭군의 협박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이렇게 했습니다. 근처에 음식점을 운영하게 해서 배달을 시키거나 우리가 손님으로 방문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죠.’
‘알렉, 당신 천재네요…….’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요리하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를 포함해서 식구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특히나 이제 알렉이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요리를 먹게 되었다.
그의 피부가 상하거나 근육이 빠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여기 주문하신 채끝 등심 구이와 자레 드 보 콩소메, 해기스와 레드커런트 젤리 준비했습니다.”
마침내 요리사가 식탁을 가득 차렸다.
시누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송아지 정강이 살 맑은 수프도 식탁 한 곳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대박, 엄청 맛있겠다.”
엘로이는 가장 먼저 식탁에 앉더니 포크를 들었다. 시어머니도 한껏 기대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맛있는 식사 되십시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요리사는 금세 우리의 집을 나갔다.
“먼저들 드시고 계세요.”
그리 말한 나는 식당을 나왔다.
음식은 벌써 왔는데, 알렉은 어디로 간 걸까?
며칠 동안 그는 저택으로 여러 상인들을 불러 모으느라 무척 바빴다.
덩달아 나도 새로 사들인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돈을 얼마나 많이 쓴 거지?’
필요한 물건들을 돈 걱정 없이 사들이는 기분이 이런 거였다니.
그동안 부족한 거 없이 살아와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빈털터리였다가 부자가 된 기분이 이렇게 짜릿했어……?
“알렉!”
마침 나는 방 밖으로 나오는 알렉을 발견했다.
미소를 환히 지은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방금 식사가 도착했어요. 얼른 내려가요.”
그는 조금 어색하게 끄덕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으며 눈매를 접었다.

* * *

알렉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루이제가 아까부터 그를 향해 뿌듯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 미소를 가만히 받고 있기에는, 그의 진짜 남편도 아닌 그로서는 양심이 쿡쿡 쑤셨다.
루이제는 처음부터 그에게 잘해 주긴 하였지만, 지금은 조금 더 애틋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애정도가 안 오르는 거지?’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었을 때 1 이 오르고, 이후 양털 상점에 갔을 때 또 1 이 오른 이후로 그대로였다.
지금껏 퀘스트를 성공한 것도 아닌데 오르는 것을 보면 평소 생활도 애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지금 루이제의 태도를 보면 애정도가 한 50 은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그가 금화 마차를 끌고 왔을 때 루이제의 반응이 어땠는가.
감동에 차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애정도가 아예 오르지 않을 반응은 아니었다.
알렉은 핑크빛 시스템 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애정도: 2]

여전히 애정도는 2 였다.


겨우 2.
지금까지 그는 살면서 이렇게나 많은 돈을 한꺼번에 쓴 적이 없었다.
그러고도 많은 돈이 아직 저택에 남아 있었다.
사실 루이제가 머리카락을 잘라 판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많은 금화를 사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
그가 정보상을 통해 첩보 수준의 지식과 거액의 돈을 맞바꿀 때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킬 때마다
애정도 말고 다른 스탯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명성: 157]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올라 알림 소리가 거슬릴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애정도는 꼼짝도 안 하는 걸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7 화

‘흐음.’
애정도를 바라고 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오를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건 완전한 그의 착각이었다.
결국 돈과 관련된 것들로는 루이제의 애정도를 얻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시스템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이쯤 되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그는 루이제에게 다른 요리를 한 번 더 해 주었다.
뇨끼라고 불리는 수제비 같은 파스타였는데, 감자와 밀가루 반죽을 섞어 노릇하게 익힌 후 크림소스를
곁들이는 요리였다.
그의 요리가 애정도를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맛에 공을 들이게 되었다.
역시나 루이제는 너무도 맛있게 먹으며 감탄을 거듭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애정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요리로 애정도를 얻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애정도가 생길 만큼 놀라운 상황이 아니어서
오르지 않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등장인물 일람에서 루이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남편과 정략결혼 했지만, 한 번도 부부 관계를 갖지 못해 한이 서렸다. 남편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과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루이제가 남편인 알렉시스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너무도 적나라했다.


차마 더 볼 수 없어서 시스템 창을 내리는 사이, 루이제가 스테이크를 다 잘라 주었다.
“알렉,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그가 식기를 들었다.
아니면 혹시, 지금 그에게 잘해 주는 루이제의 태도가 모두 연기인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냥한 부인의 애정도가 고작 2 라니.
“우와, 맛있겠다.”
그가 막 스테이크 한 점을 포크로 찍으려던 찰나였다.
엘로이가 감탄의 소리를 내뱉으며 그의 고기를 가로채 갔다.
“…….”
“역시 스테이크는 가운데 부분이 제일 부드럽고 맛있어.”
냠냠.
엘로이는 세상 행복하게 오물거렸다.
알렉은 멍하니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앞니가 빠진 것처럼 스테이크 정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다.
“…….”
그 사라진 고기의 두께만큼 굵직하게 바닥이 드러난 접시 한가운데가 황량했다.
그는 딱히 먹을 것에 욕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의 식량을 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양보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가장 두툼하고 부드러운 고기를 강탈당하니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고 허탈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루이제가 탁, 소리가 나게 식기를 내려놓고는 엘로이를 쏘아보았다.
“엘로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응?”
“내가 너 가운데 것만 골라 먹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럼 어떻게 해? 내 건 다 먹었는데?”
“다 먹긴 뭘 다 먹어. 거기 네 접시에 남아 있는 가장자리들은 다 뭔데?”
“나 꼬투리는 맛없어서 안 먹는 거 몰라?”
“너 진짜…….”
“…….”
엘로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박거렸고, 루이제의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두 여자의 눈싸움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듯한 분위기.
어머니는 굉장히 익숙한 광경인 듯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수프를 떠먹었다.
“차라리 내 걸 뺏어 먹는 건 상관없어. 그런데 너 지금 네 오라버니가 만만하다고 계속 이러는 거니?”
“내 오빠 거 내가 먹겠다는데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내 남편인데 왜 상관이 없어!”
쾅!
대뜸 엘로이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접시들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엘로이, 정말 조용히 먹을 수 없니?”
그제야 어머니가 나섰지만, 엘로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남편은 무슨 개뿔. 둘이 가짜 부부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
“그러니까 여태 애도 없지!”
“저, 저…….”
엘로이는 자신의 그릇을 들더니 그냥 휙 식당을 나가 버렸다.
루이제는 엘로이가 나간 곳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갈았다.
이내 눈에서 힘을 풀며 특유의 우아한 태도로 냅킨을 들었다.
“억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네요.”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평온한 안색.
이윽고 루이제는 자신의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가운데 부분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더니, 그의 이빨 빠진 스테이크에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그를 바라보며 이보다 더 다정할 수 없는 눈빛으로 따스하게 말했다.
“여기 이거 먹어요, 알렉. 다음부터는 내가 당신 음식 꼭 지켜 줄게요.”
“…….”
움찔.
그 순간 알렉의 가슴이 움찔 움직였다.
이 기분, 뭐지?
다시 내려다본 그의 접시 위.
완벽하게 조각이 맞춰진 스테이크는 풍요로운 자태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도는 여전히 2 였다.

* * *

저녁을 먹은 뒤.
개운하게 목욕까지 한 알렉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지난 며칠 동안 집 안에 필요한 생필품과 의복, 사치품들을 챙겨 넣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이제야 좀 이사가 끝난 홀가분한 기분.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자니 포근한 패드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쳐 주는 것 같아 안락했다.
이불도 얼마 전 새로 세탁을 해 벽난로 근처에서 바짝 말린 것이라 유달리 포근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는 ‘애정도 2’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거 계속 올리는 게 가능한가?’
보스 몹들은 계속 공격하면 죽기라도 하지, 애정도는 공략 방법조차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애초에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막상 2 포인트라도 오르고 보니 신경이 쓰였다.
미약한 두통을 느낀 그는 손을 들어 눈 위에 올렸다.
보송보송한 침대와 이불이 너무 아늑했던 탓일까?
얼마 안 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꽤 오래, 깊이 잠들었던 순간.

‘이 쓸모없는 자식!’

뿌연 의식 속으로 중후하고도 매정한 음성이 솟구쳤다.


아주 오래된 기억인 듯 낯익으면서도 또 무척 생소한 음성이었다.
……쓸모없는 자식?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잠들어 있던 알렉은 의식이 들었다.
동시에 낯선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채찍이 날카롭게 작은 등을 휘갈기는 통증, 어서 이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무력감, 그리고 나는 정말
쓸모가 없는 아들이라는 절망.
세살?
아니면 네 살쯤 되었을까?
어린 알렉시스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참았다.
그 순간 알렉은 이게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꿈이구나.’
그의 기억은 아니니 이 세계의 알렉시스가 겪었던 일인 것 같았다.
알렉의 몸을 차지한 탓에 기억이 동기화라도 되는 걸까?
‘다시! 다시 말해 보아라! 얼마나 더 맞아야 똑바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아버지의 고함이 귓가에서 천둥같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서웠다.
어린 알렉은 굳게 닫힌 입술을 열지 못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를 찾아와 공부는 얼마나 했는지, 말을 더듬는 병에는 차도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실망감을 표출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랬느냐!’


‘…….’
‘너같이 모자란 놈에게 우리 가문을 맡겨야 한다는 게 참으로 개탄스럽다!’

툭.
아버지가 채찍을 내던졌다.
뚜벅, 뚜벅.
차갑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떠나가는데, 왜 가슴은 맞을 때보다 더 시리고 아픈 걸까?
알렉은 더 작게 몸을 웅크려 안은 채 뚝뚝 눈물을 흘렸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데 몸이 아픈 게 대수일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버지 말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화를 낼 일이 없을 것이고, 공작가가 수치스러울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자신은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건지 서러웠다.
그러나 등에 난 상처는 다시 아물 틈이 없었다.
퍽, 퍽!

‘이 평민보다 못한 놈!’
‘너 같은 놈하고 친척이라니 내 명예가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알아?’

그의 작은 등 위로 무수한 발길질이 쏟아졌다.


악센의 무리였다.
먼 친척 관계였던 악센은 그를 괴롭혔던 또래 중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죽어! 죽으라고!’

어린 알렉은 그냥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몸이 아픈 것에 익숙해진 지는 오래였다.
자신을 향한 여러 사람의 증오와 멸시가 더 고통스러웠다.
사용인들은 묵묵히 그를 씻기고 약을 발라 주었다.
늘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웠던 탓에 누구도 괜찮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제야 어머니를 찾아가도 마음이 아픈 일뿐이었다.

‘대체 왜 아들을 또 낳지 못하는 거요! 나더러 저 모자란 놈을 후계자로 두라고? 천박한 오페라 가수도
아니고 노래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당신이 그 허접한 씨물을 다른 계집들한테 나눠 주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또 낳았을 겁니다!’
‘시끄럽소!’

부모님의 고함에 화들짝 겁에 질린 알렉은 그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것도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8 화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 혼자 있으면 그를 비난하는 말도, 아프게 하는 폭력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어야 마땅했지만, 혼자 있는 건 더 무섭고 울적했다.
구석에 틀어박힌 그는 울음을 꾹 참고 책을 읽었다. 소리 내서 읽어 보았다.
또박또박.
이렇게 읽다 보면 언젠가 말을 잘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 교사가 말했다.
어서 말이 유창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노력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젖은 소매로 훔치며, 그는 듣고 싶지 않은 자신의 형편없는 목소리로 소리 냈다.
그러던 어느 날.
웬일로 아버지가 그를 식사 자리에 불렀다.
정말로 같이 밥을 먹으려는 걸까?
갑자기 때리지 않으실까?
불안했지만 알렉은 애써 수프를 떠 먹었다.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라니, 믿기지 않을 만큼 두려웠지만, 또 좋았다.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런 게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일까?
말없이 식기만 달그락거리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중후한 음성을 내뱉었다.

‘식사 예절이 아직도 형편없구나.’


‘……죄, 죄송 하, 합니다.’
‘사실 나와 네 접시 중 하나에 독이 들어 있다.’

불행하게도 알렉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둘 중에 한 명이 죽어야 이 고통이 사라지겠지.’

사실 어린 마음에도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도 하고 있었다.
더 기다려 달라고, 정말 훌륭한 아들이 되겠다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쑥 목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지며 먹었던 것을 왈칵 토해 냈다.
이건 식사 예절이 아닌데. 더 혼날 텐데.
참아 보려 해도 계속해서 구역질이 났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그를 향한 아버지의 눈길은 차가웠다.
그를 죽이는 건 독이 아니라 저 냉담한 눈빛 같았다.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사람으로 태어나거라.’

그리고 직후에 솟구친 어머니의 비명 같은 외침.

‘……맙소사, 알렉!’

그 순간 현실의 알렉은 눈을 떴다.


눈을 깜박이며 잠시 멍해 있던 그는 이내 거울 앞으로 향했다.
햇살이 강하게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벌써 해가 뜬 지 좀 된 것 같았다.
어쩐지 꿈이 너무도 길더라니.
손거울을 찾은 그는 자신의 등을 큰 거울에 비춰 보았다.
분명 아무 흠집 없이 새하얀 몸인 줄로 알았는데…….
“……!”
그러나 등 한복판에는 지금까지 미처 보이지 않았던 기다란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오랜 기간 누적된 듯 상처마다 색이 제각각이었다.
‘……정말로 단순한 꿈이 아니라 기억이었어.’
알렉은 내심 진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처를 등에 이고 살면서 오랫동안 온갖 멸시를 당했던 알렉은…….
괜스레 숙연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쓸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구르고 있다던데, 이곳에서보다 더 험한 일들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알렉시스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문득 가슴이 쿡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살짝 찡그린 그는 심장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꿈에서 본 알렉시스의 마음이 꼭 이 심장에 새겨진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원래의 그는 이런 통증을 지닌 적이 없었는데.
똑똑.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와 놀란 그는 손거울을 내려놓았다.
슬그머니 문이 열리더니 루이제의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방 안을 한번 둘러본 그녀가 이내 그를 발견했다.
눈부신 햇살을 몰고 들어온 것처럼, 루이제가 환하게 웃었다.
“알렉, 깨어났군요.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났네요.”
“…….”
루이제에게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달콤하게 휘어진 눈매와 보랏빛 눈동자.
그 순간 그는 왜인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데, 유독 루이제가 밝게 그의 시야를 압도했다.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꿈에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빛 같은 느낌.
두근.
저 미소에 반응하듯 그의 가슴이 욱신거리며 뛰었다.
왜 이럴까?
꼭 다른 사람의 심장이 된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 * *

알렉이 늦은 아침을 먹는 동안, 나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셨다.


시어머니는 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나는 향긋한 홍차의 향기를 맡으며 시어머니의 연주를 음미했다.
가녀린 몸에서 어쩜 저런 정열을 뿜어낼 수 있는지,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 알렉 덕분에 피아노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
그동안 피아노 없이 며칠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공작저에서 쫓겨났을 때 좋아하는 연주를 할 수 없어 무척 상심하셨을 것이다.
공작저에 있을 때도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으니까.
‘……하, 좋다.’
물론 나 들으라고 치는 피아노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창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 있는데, 엘로이가 대뜸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한 게, 뭐라도 부탁할 기세였다.
“언니-.”
“안 돼.”
엘로이가 채 나를 다 부르기도 전,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받침대 위에 살포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거부했다.
시누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또 나가자고 할 거 아니야?”
엘로이는 부정하지 못하며 얼빠진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루가 멀다 하고 무도회장이며 티 파티를 쏘다니던 엘로이가 지금 같은 전원생활에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시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여기만 있는 거 답답해. 새 옷 입고 나가고 싶어…….”
“…….”
그녀의 눈썹이 불쌍하게 축 처졌다.
웬일로 성질을 안 내고 울먹이는 거지.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긴 마차도 새로 생겼겠다, 저번보다는 편하게 외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가 볼까?
어차피 나도 북부의 이곳저곳을 다녀 보며 익숙해져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데 가 볼까?”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내가 말하자 엘로이는 낯빛이 밝아지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단박에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난 하루 종일 피아노나 치고 싶구나. 너희들끼리 놀러 가렴.”
애초에 시어머니가 같이 나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끼리 나갈 준비를 하며 나는 수수한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확실히 북부 쪽으로 와서 그런가 날씨가 춥긴 춥네요.”
이번에 우리는 전에 갔던 시장보다 더 멀고 큰 번화가로 나갔다.
싸늘한 느낌이 밀려 들어와 나는 겉옷을 조금 더 여몄다.
여기가 진짜 북부인 그랜드칼리도 아닌데, 이쪽도 꽤 북쪽이어서 그런지 수도보다 훨씬 쌀쌀했다.
“맞아. 여긴 분위기부터가 뭔가 척 박해.”
내 말에 엘로이가 동조했다.
알렉은 잠자코 내 옆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하긴 요즘 제국에 척박하지 않은 곳도 없을 거야. 사람들이 하도 먹을 게 없어서 길가에 핀 들꽃도
뽑아다 판다던데…….”
“…….”
별로 관심 있는 화제는 아닌 듯 엘로이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나도 괜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수도와 황궁의 소식을 뭐라도 들을 수 있나 싶어서였다.
공작저에 있을 때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지금은 사교계와 아예 단절된
듯한 느낌이었다.
‘리디트 황자는 정말 찾았나 모르겠네…….’
하긴 알렉이 그 정보를 거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뭔가 기대하기에는 이를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팔짱을 끼고 착 들러붙은 엘로이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상점의 쇼윈도마다 자랑스럽게 진열된 모자나 장신구 따위를 하나도 빼 먹지 않으며 구경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열다섯 살이었다.
문득 본가에 있는 이복동생들이 떠오르며 얼마나 컸을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래 봐야 부질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 꽤 괜찮아 보이는 다과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잠깐 들어갔다 갈래요, 알렉? 엘로이 너도.”
내 물음에 알렉은 끄덕였고 엘로이는 더 크게 끄덕였다.
다과점에 들어간 우리는 상큼하고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려는 길에 문제가 일어났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29 화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길이었다.


마차 보관소에 맡겨 둔 마차를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도로를 달리던 마차 한 대가 대뜸 멈춰 섰다.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새까만 마차.
언뜻 보기에도 고위 귀족의 것이었다.
새까만 창문이 열리더니 매끈한 얼굴의 남자 세 명이 우리를 보며 비웃었다.
“설마 알렉시스?”
“공작가 분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화려한 곳에 계셨군.”
“…….”
저 자식들이 여긴 왜…….
나는 세 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과 개리슨 오스번 백작, 데미안 웰스 후작이었다.
모두들 알렉과 비슷한 나이였는데,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알렉이 극도로 소심한 방구석 아웃사이더라면, 저들은 유행과 패션에 민감하고 늘 가십을 몰고 다니는
골칫거리 정도 되었다.
특히 저들의 부인들은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는 사교계의 퀸과 그 시녀들이었다.
잠시 그들을 훑어본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냥 가요, 알렉.”
“이거 그냥 가면 섭섭하지.”
“…….”
금세 마차의 문이 열리며 세 남자가 뛰어내리다시피 나왔다.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그들이 우리의 앞을 막았다.
코를 찌르는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향기에 내가 눈썹을 찌푸렸다.
“자네는 우리가 안 반가운가? 난 브렌트 공작가 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알렉시스 자네가 없으니 클럽이 어찌나 심심한지 모르겠어.”
쿡쿡쿡.
놈들이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소리를 냈다.
내 보랏빛 눈동자가 짙은 자주색으로 보일 만큼 가라앉았다.
저들이 말하는 클럽은 남성 귀족들이 모여 대화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는 공간을 뜻했다.
알렉은 억지로 끌려갈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제 발로 그곳에 간 적은 없었다.
지금 저들은 자신들이 조롱할 대상이 사라져서 심심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당신들 한가하긴 하나 보네요. 굳이 마차까지 멈추고 우리를 반가워해 주는 거 보면.”
저 안하무인 귀족 놈들이 황송하게도 가던 길을 멈추고 아는 척을 다 하다니, 그렇게 반가웠어?
엘로이는 인상을 찡그렸고, 알렉은 아까부터 잠자코 놈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래 알렉은 사람들이 괴롭히는 말들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손을 꽉 붙잡으며 그저 괴로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면 미안하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면 그를 조롱하던 무리들도 금세 흥미를 잃고 사라지곤 하였다.
자책조차 하지 않으면 답답하니 말을 하라는 이유로 뺨을 치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미는 등 무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알렉은 그 기분 나쁜 손찌검들을 모두 꾹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알렉은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넓은 어깨와 가슴을 자연스럽게 편 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한 태도로 가만히 놈들을 볼 뿐이었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생소한 모습이 묘하게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저놈들 앞에서도 안 쫄잖아……?’

* * *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한편 알렉은 등장인물 일람을 빠르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 시비를 거는 남자들이 누군가 싶었는데, 저들의 정수리 위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등장인물 중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직접 만나도 등장인물 일람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알렉은 저들 중 대장 격인 마르셀 후작에 대한 설명만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마르셀 하워드]
[남, 나이: 26 세]
[하워드 후작. 제국에서 가장 큰 방직 공장인 하워드 방직을 운영하고 있다.]
[하워드 방직의 실제 소유주는 마르셀의 남동생인 랭던 하워드이며, 마르셀은 후원자이자 비선 실세를
맡고 있다.]
[방직 공장의 후원자들은 그들끼리 연합을 만들어 ‘홀든 방직 유니언’을 세웠다. 마르셀과 개리슨
오스번 백작, 데미안 웰스 후작이 주요 멤버이다.]
[홀든 방직 유니언은 제국에서 유통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방직물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불합리한 담합으로 제국민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고 있으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반면 물품의
대금은 큰 폭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악덕 업주들이라는 거구나.


제국에서 가장 큰 방직 공장의 운영 주체가 이런 사람들이라니.
특히 유독 눈에 띄는 구절이 하나 있었다.

[황제에게 자발적으로 큰 세금을 바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폭군에게 바치는 게 많으니, 폭군과 그 주변 사람들도 불공정한 일들을 눈감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력: 없음]

그러나 몸을 쓰지 않는 귀족이라 그런지 전투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루이제의 비아냥 같은 말에 눈앞의 놈들은 꽤 즐거워했다.
“이거 부인 없으면 어쩔 뻔했어, 알렉시스. 부인의 치마폭이 부족하진 않나?”
“여전히 부인 복 많은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그래서 알렉시스 자네를 존경한단 말이야.”
“진작 도망갔을 줄 알았던 부인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비결은 뭔가?”
쿡쿡쿡.
놈들이 또 자기들끼리 시선 교환을 하며 웃었다.

* * *

“미친 새끼들…… 우리한테 관심 끄고 꺼져.”


엘로이의 상스러운 말에 내 눈이 조금 커졌다.
하긴 엘로이가 사교계의 미친 꽃다발로 불리긴 했지…….
모든 이들이 우스워하는 오라버니를 두었으면서도, 엘로이는 황제의 누이인 아나벨 황녀와 더불어 10 대
사교 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특유의 화려한 패션 감각과 불꽃 같은 사교성 때문이었다.
눈앞의 놈들은 평소에 엘로이를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성질 더러운 어린 숙녀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놈들의 안면이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이거 어쩌나. 난 네 오라비한테 볼 일이 남았는데.”
“누구보다 알렉시스를 경멸하는 건 공작 영애 너 아닌가?”
마르셀에 이어 개리슨이 빙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엘로이가 여전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언제 우리 오라버니 좋아한대? 까도 내가 까니까 꺼지라고.”
“…….”
놈들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자신들보다 열 살은 어린 여자에게 험악한 말을 들어서 자존심에 금이 간 얼굴이었다.
‘엘로이가 기분이 많이 안 좋구나…….’
잠시 놀러 나와서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가문이 망하고 파혼까지 당한 탓에 그녀는 지금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엘로이의 앞에 신경을 긁는 놈들이 나타났으니 참지 않기로 했나 보다.
그런데 상대는 빼빼 마르긴 했어도 훤칠한 체격의 후작, 백작들.
평민으로 강등당한 우리가 신분이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엘로이가 뭐라고 또 말하려고 하자 내가 팔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알렉도 흠칫하더니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놈들을 그냥 지나쳐 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 남편을 수년간 조롱하 고도 한 번도 그 대가를 치른 적이 없잖아?
알렉을 무시한 귀족들은 많았지만, 저들은 유독 더 알렉을 괴롭힌 놈들이었다.
놈들뿐만이 아니었다.
사교계의 여자고 남자고 저열한 인간들은 나와 알렉에게 온갖 추잡한 모욕을 했다.
결혼 초 귀부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했던 말들과 사교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공작 부인.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공작 각하께서 그건…… 잘하시나요?’


‘아무것도 못 하시는 분인데 혹시 그것도 못 하면 어떡하나 해서요. 그거라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면
타국에서 신부를 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잘 못 하시겠죠? 차라리 제가 대물로 유명한 분을 소개시켜 드릴까요?’
‘안타까운 마음에 부인께만 특별히 다리를 놓아 드리는 거랍니다.’

그때 나는 이미 시어머니와 엘로이를 통해 사교계 귀부인들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습득하고 있었다.


사교계에서 눈 깜짝할 새에 코를 베이지 않으려면 정보가 생명이었으니까.
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어쩌죠. 저는 여러분들처럼 형편없는 남편을 포기하고 일부러 정부를 찾지는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내 말에 귀부인들은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부부 관계가 좋지 못해 정부를 두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알렉은 원인 모를 문제가 있어서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한 것이지만, 신체적으로 정상인 부부들의 사이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0 화

결혼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제국의 귀족들이 지나치게 개방적인 건지, 유부녀가 되어 보니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을 때가 많았다.
말투만 우아할 뿐이지, 그 귀부인들은 자기들끼리 침실을 알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그 남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군요. 같은 남자로서 브렌트 공작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푸흡.’
‘이봐, 개리슨.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알렉시스도 얼마나 노력 중이겠어. 크흐흡.’

나 또한 그들의 말이 우스워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개리슨 오스번 백작께서 내 염려를 다 해 주시다니 자상하시군요. 물론 백작은 백작 부인의 만족을 위해


매일 밤 최선을 다하고 있으시겠죠?’

그래서 부인이랑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니?


내가 딱 그런 눈빛으로 미약하게 웃어 보이자 개리슨 백작은 불쾌한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썹을 휘었다.
그때를 짧게 생각한 나는 다시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아마 제대로 된 망신을 당하지 않아서 계속 우리 부부를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공작 부인도 아닌데, 나와 우리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고 몸을 사릴 필요도 없잖아?
나는 불합리와 불의의 온상인 사교계를 엉망으로 만들 생각을 떠올렸다.
그 시작이 될 정말 더러운 사실을 알려 줘야겠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
내 지칭에 마르셀이 움찔했다.
“후작 부인은 잘 있나요?”
후작 부인을 언급하자 마르셀이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내 부인은 왜 찾는 거지?”
“후작은 여전히 부인에게 일편단심인 모양이네요. 그 일은 용서했나 봐요?”
“그 일?”
마르셀이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후작 부인을 끔찍이 아끼는 마르셀이 뭔가 알았다면 개리슨 오스번 백작과 여태 함께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개리슨 쪽은 보지 않은 채 입가를 끌어 올렸다.
“모르고 계셨나 봐요. 하워드 후작 부인이 정부를 두고 있었던 일이요.”
마르셀의 안색이 돌처럼 굳었다.
엘로이도 움찔 놀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교계에는 당사자들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비밀이 많았다.
그 비밀들은 ‘이건 당신한테만 말하는 건데요.’라는 서두로 시작되며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좁다면 좁은 사교계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내가 남편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자질해 봐야 그 부부에게 원한을 사는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소문을 좋아하면서도 그 소문이 당사자들의 귀에 들어가는 건 극도로 조심했다.
자칫하다간 불똥이 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소중한 비밀을 폭로하고 있었다.
그동안 알렉은 저놈들 때문에 훨씬 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이 정도 심술은 복수 축에도 끼지 않았다.
나는 마르셀을 안타깝게 응시했다.
“정말로 모르셨나 보네요. 난 당연히 당신도 아는 줄 알았거든요. 워낙 유명한 일이잖아요?”
한참을 굳어 있던 마르셀이 이를 갈 듯 힘겹게 소리 냈다.
“……개소리. 내 부인은 그럴 여자 아니야. 이제는 남편을 두둔하려고 그런 헛소리까지 지껄이나?”
마르셀의 험상궂은 태도에 알렉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팔을 꾹 잡고 눈동자에 웃음기를
띄웠다.
“그렇군요. 듣던 대로 후작은 부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네요.”
“내 부인은 나밖에 몰라. 이간질을 하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군.”
바득바득 그리 말하면서도 마르셀의 눈동자에 약간의 불안이 스쳐 갔다.
“과연 정말로 후작 부인이 당신밖에 모를까? 아, 개리슨 오스번 백작에게 물어보면 잘 알겠네요.”
나는 눈가에 은은한 미소를 말을 마쳤다. 마르셀의 한쪽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개리슨?”
나는 그제야 개리슨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마르셀이나 개리슨이나 데미안이나 다 똑같은 놈들.
그러게 좋은 말로 꺼지랄 때 꺼졌어야지.
개리슨은 아까부터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결국 놈의 이름을 내뱉자 심장이 멎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개리슨을 한번 응시한 마르셀이 다시 나를 보았다.
“여기서 갑자기 개리슨의 이름이 왜 나와. 개리슨이 뭘 알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지. 자네가 말해 봐,
개리슨.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인가?”
“…….”
개리슨은 꿀 먹은 사람처럼 입술을 우물거리며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여태 벗의 부인과 몰래 놀아나 놓고 평생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니?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데미안 웰스 후작에게 물어도 괜찮겠네요. 마르셀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니까요.”
“…….”
마르셀의 눈길이 이제는 데미안에게 향했다.
데미안도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르셀. 이 여자의 말 같은 거 믿지 마. 우리가 자기 남편을 깔본다고 앙심이라도 품은 것 같으니까.”
“그거야 앞으로 마르셀이 차차 알아가겠지.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이, 이 정신 나간 여자가 어디서 헛소문을-!”
개리슨이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눈에 더 바짝 힘을 주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위협하듯 발음했다.
“그러니까 더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내 남편 건들지 마.”
제발 우리를 가만히 두라고.
지금까지 충분히 오래 괴롭혔잖아.
그간 쌓였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것처럼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라리 저들이 무릎이 닳도록 빌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는 게 원통했다.
그때 개리슨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그러나 무언가가 더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와 개리슨의 얼굴을 쳤다.
빡!
뼈와 뼈가 부딪치는 둔탁한 마찰음이 솟구치더니 개리슨의 몸이 붕 떠올랐다.
이내 돌바닥으로 추락한 개리슨이 두 번이나 굴렀다.
“…….”
몇 초가 지났을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콜록!
기침을 토한 개리슨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는 눈을 깜박이며 개리슨을 한주먹 거리로 날려 버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렉이 냉랭한 눈으로 개리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옅은 바람에 그의 앞 머리카락이 살포시 흩날렸다.
서서히 놀란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렉이, 사람을 쳤어?

* * *

띠링!
알렉은 개리슨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그는 개리슨 위로 떠오른 상태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또 뭐지?
그는 감히 여자를 건드리나 싶어 개리슨을 한 대 쳤을 뿐인데, 상태 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루이제의 명령어가 작동해 특성화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
[Lv.1]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특성화 스킬?
스킬 명, 내 남편 건들지 마……?
이게 뭔가 싶어 알렉의 눈동자가 흠칫 경직되었다.
순간 그는 시스템의 애정도에 관한 설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내의 애정도는 당신을 더욱 강하게 해 줍니다.’


‘애정도가 높아지거나 루이제에게 명령어를 들으면 특성화 스킬이 개방됩니다.’

‘……아.’
명령어?
혹시 루이제가 ‘내 남편 건들지 마.’라는 말을 해서 ‘내 남편 건들지 마.’ 스킬이 활성화된 걸까?
그는 이내 이것이 애정도를 바탕으로 한 특성화 스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항이 열 배나 높아진다니.
‘원래 갖고 있던 저항 스킬보다 훨씬 강력하잖아?’
알렉은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특성화 스킬의 레벨이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효력은 강했다.
그러나 아직 애정도가 2 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크게 유용하지는 않았다.
[지속 시간: 30 초]

30 초.
지속 시간이 저 정도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 미쳤어?”
“너 이 새끼, 갑자기 뭐 잘못 먹었냐? 아니면 이제 뵈는 게 없는 거냐?”
데미안과 마르셀이 인상을 구기며 차례로 말했다.
알렉은 개리슨에게서 시선을 떼 루이제와 엘로이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의 물음에 루이제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한번 끄덕였고, 엘로이는 세 번이나 빠르게 끄덕였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조금 물러나십시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1 화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엘로이가 루이제를 살짝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다시 개리슨을 응시한 알렉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더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던 길 가는 게 좋을 거다.”
개리슨은 끙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쩐지 다시 고꾸라졌다.
데미안이 알렉과 개리슨을 보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안 봐주면 네까짓 게 어쩔 거지?”
“이봐, 개리슨.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고작 이런 비실비실한 놈한테 맞고 쳐 누워 있을 거야?”
데미안에 이어 마르셀의 눈동자에도 날이 서렸다.
“잠깐. 그런데 이 자식 지금 똑바로 말하지 않았나?”
“뭐?”
개리슨의 말에 마르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똑바로 말하다니?”
“이 자식 항상 말하는 습관 있잖아. 등신같이 혀까지 덜덜 떠는 거.”
“방금도 그러지 않았나?”
“아니야. 뭔가 달랐어.”
“설마 그럴 리가.”
“자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
놈들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알렉을 훑어보았다.
그의 말투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긴가민가 헷갈리는 듯했다.
삼총사의 어딘가 덜떨어진 듯한 대화를 듣던 알렉은 옅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짚었다가 떼어 냈다.
그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위압적이었다.
“똑같은 말을 또 해야 비킬 건가?”
“……!”
“이게 무슨…….”
알렉이 재차 한 말에 놈들이 더 혼란스러워했다.
개리슨이 거듭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설마. 이번에만 우연히 안 더듬은 거겠지.”
“난 제대로 못 들은 것 같군.”
“이봐, 다시 지껄여 봐.”
“…….”
사람 앞에 두고 이게 지금 다 무슨 짓들인지 모르겠네.
말투가 변해 놀란 건 알겠지만, 알렉시스가 저들의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알렉시스는 공작이고 저들은 후작이나 백작 정도인데, 작위도 무시할 만큼 얼마나
알렉시스를 하찮게 봤는지 실감이 났다.
그가 알기로 이 제국에 공작 가문은 열 곳이 채 넘지도 않았다.
알렉의 한쪽 입꼬리가 웃듯이 짧게 비틀렸다.
이내 그가 개리슨에게 다가갔다.
“여자한테 손까지 들다니 버릇이 나쁘군. 아무래도 그 버릇 좀 고쳐 주고 가야겠어.”
꾹.
알렉이 개리슨의 손등을 지그시 밟았다.
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개리슨의 비명에 파묻혔다.
“아악! 악!”
“뭐야, 이 새끼. 죽고 싶어?”
놀란 데미안이 알렉의 멱살을 단숨에 움켜쥘 것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데미안은 알렉에게 손끝 하나 대기 전에 고통에 찬 소리를 내뱉었다.
“악!”
알렉이 개리슨을 짓밟은 그대로, 팔을 뻗어 데미안의 멱살을 움켜쥔 탓이었다.
“……!”
금세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자 당황한 데미안의 발이 허우적거렸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 느려 나-!”
데미안의 얼굴에 금세 빨갛게 피가 몰렸다.
“원한다면 친절하게 내려 주지.”
그러나 알렉은 데미안을 던지듯 놓아 버렸고, 데미안의 몸은 퍽,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들어 올린 데미안은 황급히 알렉을 찾더니 눈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 미쳤어?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던 마르셀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래, 알렉시스.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이러니까 좀 더 재미가 있잖아?”
“…….”
“이따위 짓들로 우리가 겁이나 먹을 줄 알았나? 우습군.”
마르셀이 알렉을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검지를 들더니 그의 이마를 쿡 찌르며 떠밀었다.
“등신이면 등신같이 굴어. 어차피 알렉시스 네놈 같은 건 소리 소문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으니까.”
마르셀이 이번에는 그의 어깨를 짓누를 듯 손끝을 들었다.
이런 것도 공격이라면 공격.
그 순간 알렉은 시험 삼아 처음 얻은 특성화 스킬을 발동시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

“네까짓 게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는 뜻이라고.”


“…….”
처음 써 보는 특성화 스킬이 어떤 건지 궁금했다.
마르셀이 또다시 온 힘을 다해 힘껏 그의 어깨를 눌렀다.
일반적인 저항 스킬은 이런 공격에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과연 조금 전 마르셀이 이마를 찔렀을 때와는 달리 무언가가 그의 피부를 누르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포근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온 세상이 쿠션이 되어 그를 감싸는 느낌에 알렉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대지의 여신에게 보호를 받는 듯이, 부드럽고 안락했다.
일반 저항 스킬을 쓸 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아늑한 온기였다.
그러나 금세 30 초가 지나며 싸늘한 공기가 그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러니까 몇 대만 맞고 꺼져라.”
마르셀이 손을 풀 듯 양손의 관절을 누르며 두두둑, 두두둑 소리를 냈다.
알렉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냉랭한 눈빛이 조용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 * *
“……!”
어쩌지?
나는 알렉의 눈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렉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인하고도 고요한 위압감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로이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는지 동그란 눈을 두 번이나 깜박였다.
그 순간이었다.
마르셀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날렸다.
“꺄악!”
엘로이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렉!”
그 주먹의 각도가 알렉의 얼굴을 정통으로 노리고 있어서 나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알렉은 휙 몸을 틀어 데미안의 주먹을 흘려 버렸다.
헛손질을 한 마르셀이 순간 고꾸라지려고 했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는 반대쪽 손으로 주먹질을 했다.
나는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알렉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놈들의 마부가 움찔거리며 다가오려고 했지만 알렉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꼼짝도 못 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그가 누군가를 때리거나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 큰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셌는지도 몰랐다.
“시발, 이 새끼가.”
그새 세 번이나 헛손질을 한 마르셀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그런 마르셀을 상대하는 알렉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마르셀만 어떻게든 한 대 쳐 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알렉은 마지못해 어울려 주는 느낌?
나는 그 모습을 희한하게 응시했다.
알렉에게 언제부터 저런 능력이 있었던 걸까?
그동안 잘 움직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힘도 잘 쓰고 유연하잖아……?
날아오는 주먹을 바로 피하는 순발력까지.
최근에 그는 죽음을 시도하기 전과 달라진 점이 꽤 있었지만, 이런 강렬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설마 그가 여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당하고 살기만 하다가 이제 와서 힘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난데없는 소란에 주위를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힐긋거렸다.
그런데 마르셀의 눈에는 알렉의 동작이 다르게 읽히는 듯했다.
“피하지 마, 새끼야. 맞을 자신이 그렇게 없어? 아플까 봐 겁나냐?”
설마 정말로 알렉이 무서워서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알렉이 같잖다는 듯 짧게 조소했다.
“이 실력으로 나를 때릴 수 있긴 한 건가?”
“뭐? 이 새끼가 근데.”
퍽!
마르셀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린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설마 알렉이 맞은 건가 싶었지만, 알렉이 마르셀의 팔을 꺾으며 발로 그 복부를 가격했다.
별로 세게 찬 것 같지 않았는데, 마르셀의 몸이 날아갔다.
“악!”
그 모습에 개리슨과 마르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렉은 마르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한 대를 더 쳤고, 마르셀은 가까스로 일어나 알렉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며 또 한 대를 얻어맞았다.
알렉이 다시 한 손으로 마르셀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때릴 수 있으면 때려 봐. 얼마든지 맞아 줄 테니까. 아,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 건가?”
퍽!
그 이후로도 마르셀은 몇 대를 더 맞았다.
“이, 이 새끼 가만 안 둬!”
꿋꿋하게 알렉을 치려고 손을 들고 발길질을 했지만 알렉의 털끝 하나도 건들지 못했다.
마르셀에 비하면 알렉은 마치 한 명의 거대한 전장의 신 같았다.
그 정도로 마르셀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목각 인형처럼 알렉의 손 위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데미안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저 자식 알렉시스 맞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개리슨마저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2 화

저들도 알렉이 갑자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쩐지 가슴에 얹힌 암석이 부서지는 것처럼 조금 개운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 어딘가 해소되는 듯한 느낌으로 떨려 오는 가슴을 꾹 눌렀다.
‘……하.’
이 기분 뭘까?
대뜸 데미안이 이를 꽉 깨물더니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래, 알렉시스. 이제야 좀 우리랑 수준이 맞잖아. 네놈은 너무 싱거웠거든.”
그리 말하며 개리슨에게 다가간 데미안이 개리슨의 발을 툭 쳤다.
너도 합류하라는 뜻을 알아들은 개리슨이 눈에 힘을 주며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던 대로 다시 무릎을 꿇게 해 주지.”
개리슨의 손이 재킷 속에서 다시 빠져나오자 무언가가 빛에 반짝였다.
‘아.’
짧은 칼이었다.
‘저것들이 치사하게 흉기를 써?’
칼이 드러난 순간, 엘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큼지막한 돌을 들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개리슨의 손 쪽으로 힘껏 던졌다.
“악!”
댕그랑!
정통으로 돌을 맞은 개리슨의 손에서 칼이 툭 떨어졌다.
“이 계집애가 미쳤나!”
“먼저 칼 꺼낸 게 누군데!”
엘로이가 지지 않으려는 듯 더 크게 소리쳤다.
알렉이 개리슨과 엘로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 틈을 노리듯 데미안이 다가오며 번쩍 손을 들었다. 데미안의 손에서도 반짝 빛이 났다.
“……알렉!”
칼끝이 알렉을 스치기 직전, 목이 붙잡힌 데미안의 손에서 힘없이 칼이 떨어졌다.
바닥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마르셀까지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나 놈들의 공격에도 알렉은 조금의 틈도 내어 주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조심해요, 알렉!”
놈들이 알렉을 붙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쓸데없이 매를 벌었다.
마르셀은 이미 흠씬 두들겨 맞아서 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금세 나가떨어졌고, 개리슨과 데미안은 둘이서
알렉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하며 얻어 터졌다.
“…….”
내 입술이 벌어졌다.
양아치 삼총사가 완전히 진이 빠져 바닥에서 콜록거렸다.
주먹 한 번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는데, 그들의 머리카락이나 의복이 완전히 헝클어지고 망가져 버렸다.
알렉은 숨이 차지도 않은지 아까처럼 깔끔한 태도로 그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놈들에게 단 한 번도 맞지 않았다.
놈들이 그의 옷깃을 붙잡을 수도 없었을 만큼, 그의 움직임이 너무도 신속하고 단칼 같았다.
그가 무사한 건 둘째 치고 너무도 놀라웠다.
‘이게 말이 돼?’
지금까지 수없이 싸워 본 사람처럼 너무도 능수능란하잖아.
알렉이 놈들을 두들겨 패 줘서 속이 시원했지만, 동시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알렉시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마르셀이 엉망진창이 된 꼴로 눈을 치켜뜨며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알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러게 봐줄 때 그냥 지나갔으면 좋을 뻔했어.”
“…….”
초겨울 햇살에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눈부신 빛을 물결처럼 반사했다.
나는 멍하니 속눈썹만 깜박였다.
“너, 이, 이 새끼, 어쩌다 이, 이렇게 됐는지 몰라도…… 이번 일, 그, 그냥 지나가지 아, 않을 거야…
….”
마르셀이 피가 흐르는 입술로 겨우 소리 냈다.
알렉의 고개가 조금 더 깊이 기울어졌다.
“왜 그렇게 말을 더듬지? 예전의 내가 그리도 부러웠나?”
“저, 미친 새끼가…….”
마르셀이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알렉은 차갑게 웃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이제는 알아서 꺼지지도 못하겠군.”
짧게 혀를 찬 그가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마차 앞에 서서 전전긍긍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마부 두 명이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얼어붙었다.
알렉의 눈빛이 닿자 두려움이 엄습한 모양이었다.
알렉이 눈짓으로 세 놈을 가리켰다.
“치워.”
“예? 아, 예, 예…….”
마부들이 황급히 놈들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알렉과 시선이 마주치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가 엘로이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제 가시죠.”
“…….”
나는 말없이 끄덕이며 발을 움직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내 속에서 일렁였다.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듯한 전율과 비슷했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나는 우리의 등 뒤로 분에 찬 마르셀의 외침이 들렸다.
“두고 보자, 알렉시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알렉은 맡겨 놓았던 마차를 찾았다.
마부가 없었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말을 몰았다.
마차 안에는 루이제와 엘로이 둘뿐이었다.
새삼 그는 전생에 승마를 익혀 놓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시스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여러 체력 단련 퀘스트를
매일같이 해야 했다.
다른 각성자들은 단순한 근력 운동 퀘스트만 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근력 운동과 더불어 승마, 수영, 복싱, 육상, 펜싱, 사격 등 다 말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은 종목의
운동을 익혀야 했다.
승마의 숙련도를 모두 채우면 수영 퀘스트가 시작되었고, 수영을 끝내면 또 새로 복싱 퀘스트가 시작되는
식이었다.
만약 그 퀘스트들을 하루라도 실수로 빼먹거나 포기한다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페널티를
받았다.
그랬으니 몸을 쓰는 건 일도 아닌 그에게 방금 전 그 세 놈은 인형 놀이에 불과했다.
그때 승마를 마스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말을 쉽게 다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가족들이 많이 놀랐겠어…….’
적당한 속도로 마차를 몰던 그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마차에 탈 때도 루이제는 어딘가 얼떨떨한 상태였고, 엘로이도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둘 다 조금 전의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렉시스에게는 불가능했을 힘을 내보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
‘들키려나?’
분명히 가족들은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심할 것이다.
알렉시스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아까 그놈들에게도 당하고만 살았던 듯한데, 그는 평소에 알렉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러나 방금 전 그의 행동을 납득시킬 핑계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오랫동안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일찍 진실을 밝힐 때가 온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추궁을 당한다면 알렉은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럼 앞으로 레벨 업은 물 건너가는 건가?’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이제가 알게 된다면 쫓아낼 게 분명했으니까.
어차피 처음부터 그는 회의적이었다.
애정도를 올린다니, 그런 게 그에게 가능할 리 없지.
‘나 같은 모태 솔로가…….’
처음 보는 여자한테 애정도를 어떻게 얻는단 말인가.
그저 진짜로 알렉시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가족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 * *

한편 알렉이 몰고 있는 마차 안.
나는 엘로이와 마주 앉아 입술만 벌리고 있었다.
마차가 얼마나 덜컹거리든, 바깥에 어떤 풍경이 스쳐 지나가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알렉이 양아치 삼총사를 후려 패던 장면만
되감았다.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더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던 길 가는 게 좋을 거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조금 물러나십시오.’
‘이 실력으로 나를 때릴 수 있긴 한 건가?’
‘그러게 봐줄 때 그냥 지나갔으면 좋을 뻔했어.’

“…….”
그 능숙하면서도 신속한 움직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던 동작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알렉이, 어떻게 된 걸까?
그의 서늘한 눈빛과 표정, 말투도 잊을 수 없었다.
위압감과 긴장이 전해져 나는 선 자리에서 조금도 미동하지 못했다.
여태 알렉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번처럼 할 말을 모두 잃어버릴 정도로 달라 보이긴 처음이었다.
“엘로이?”
“응?”
불쑥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엘로이가 화들짝 어깨를 떨며 나를 쳐다보았다.
엘로이도 아까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 알렉이…… 원래 그렇게 잘 싸웠니?”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3 화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그가 스무 살 때였다.
혹시 나를 만나기 한참 전인 어린 시절에는 그가 잘 움직인 데다가 격투도 잘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엘로이는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절대! 절대 아니야. 달리기는커녕 빨리 걷는 것도 못 했다니까? 검도 못 휘두르고, 총은 총성
때문에 사격장 근처에도 못 간다고 했어!”
“……그래?”
역시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구나.
원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그냥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그렇다면 알렉이 그렇게나 과격하게 몸을 쓴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건데.
아니, 설마 여태 혼자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모두를 속이고?
마침 엘로이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진짜 처음 싸워 보는 사람 맞아? 혹시 우리 몰래 복싱 클럽이라도 다녔던 거 아니야?”
“글쎄…….”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그 나쁜 놈들을 종잇장처럼 두들겨 팰 수가 있어?”
“나도 그게 이상하네.”
한숨을 내쉰 나는 몸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알렉이 원래 그렇게 잘 싸웠다면 진작 그런 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것도 그래…….”
“독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건 더 그래…….”
엘로이도 내 말에 동조했다. 마차 안에 다시 혼란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알렉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엘로이와 이런저런 말을 나눠 봐야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이 일을 떨쳐 버리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일단 어머님한테는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알렉이 그 홀든 방직 유니언 놈들을 마주친 거
아시면 좋아하진 않으실 거야.”
“……응, 알았어.”
“알렉하고는 내가 얘기해 볼게.”
“응.”
“…….”
“그런데 언니.”
“응?”
창밖 풍경을 보던 나는 다시 엘로이를 응시했다.
알렉이 직접 운전하는 마차를 탄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승차감이 꽤 부드러웠다.
말도 한 번 안 타 봤던 남자가 마차는 또 어떻게 이리 잘 모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로이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꽤 통쾌하지 않았어?”
“……응?”
“난 그 자식들 쥐어 터지는 거 보니까 너무 좋던데.”
“…….”
엘로이가 빙글빙글하며 웃었다.
초여름의 맑은 공기처럼 눈동자가 반짝였고, 입매는 흡족하게 올라가 있었다.
공작저에서 쫓겨난 이후로 처음 보는 엘로이의 웃음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엉망이 된 놈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못 볼 장관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들릴락 말락 훗, 하고 웃었다.
“그렇긴 했지.”
특히 흠씬 쳐 맞고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알렉을 쳐다보았을 때.

‘……저 자식 알렉시스 맞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결혼한 지 3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살다 살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한번 웃음이 나온 엘로이와 나는 이후로 한동안 웃음소리를 참지 못했다.
“헤헤헤.”
“후후…….”
나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가렸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볼살이 튀어 올라왔다.

* * *

집에 도착하니 해 질 무렵이 되었다.


처음 보는 알렉의 전투력에 충격을 받기도 잠시.
알렉에게 곤죽이 된 홀든 방직 유니언 놈들을 생각하며 웃었더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마차에서 내리자 그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다시 혼란스러운 느낌이 솟구쳤다.
마침 엘로이까지 마차에서 내려왔고, 어느새 다가온 그가 우리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직접 마차를 모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괜찮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괜찮았어요. 당신이야말로 오며 가며 고생이 많았네요. 고마워요.”
“저도 괜찮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네.”
그가 잠시 나를 보더니 이내 먼저 몸을 돌렸다.
뭐지.
내가 그를 신경 쓰는 만큼 그도 조금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여태 안 하던 행동을 해서 그런 걸까?
나는 마른침을 한번 꾹 삼키며 발길을 옮겼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친 듯 시어머니의 연주가 뚝 끊겼다.
시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2 층으로 올라간 나는 알렉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딸각.
내가 문을 닫자 그가 조금 흠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걱정스럽게 그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몸은 괜찮은 건가요?”
사실 이게 제일 묻고 싶었지만, 여태 그럴 경황이 없었다.
그가 다칠 틈이 없어 보였던 것도 한몫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아까 그 사람들 흠씬 때려 줬잖아요.”
하도 때려 주느라 관절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나는 그의 무릎이나 손가락 관절을 괜히 걱정스럽게 힐긋거리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조금 뒤에 그가 약간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디 맞은 곳도 없었고요.”
“그래 보이긴 했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
단정하게 두 손을 맞잡은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일부러 똑바로 올곧게 그를 응시했다.
정말로 그는 여태 우리를 모두 속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갑자기 신체 능력이 뛰어나게 향상된 건 아닐까?
나는 전생에 보았던 히어로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실험실에서 약물을 잘못 마셔 영웅의 힘을 얻게 된다거나, 벌레에게 잘못 물려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거나 하는.
쥐약을 마신 알렉도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하는 망상이 떠올랐다.
너무 만화 같은 상상이긴 했지만,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내 존재도 말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그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신,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잘 싸우게 된 거예요?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어요.”
“…….”
“당신이 그렇게 힘이 센 줄도 몰랐고요.”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그도 내가 이상하게 여길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내 그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살짝 쓸었다.
“당연히 그 일에 대해서 부인께서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안 물어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한 데다가 처음 보는 힘까지 썼으니까.
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 원래 그 남자들한테 한 번도 반격한 적 없었잖아요. 아니, 그 남자들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몸을
크게 움직이는 건 다 피했던 사람인데…….”
“…….”
“그런데 갑자기 너무 잘 싸워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
입술을 열었던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내적 갈등이라도 하는 듯한 눈치였다.
정말로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이윽고 체념한 듯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그가 소리 내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근래에 갑자기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그걸 부인께 어떻게 다
설명해야 할지도 어렵고요.”
“……그랬군요.”
“제 주변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죠. 제 자신도 달라졌고요.”
“……이해해요, 알렉. 우리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잖아요.”
이보다 더 많이 바뀔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신분,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던 영지와 저택의 부지는 더 이상 우리 가문의 소유가 아니었고,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해
주던 수백 명의 사용인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재물과 사치품도 모두 폭군의 소유가 되었다.
그는 작게 한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갑자기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중 제 스스로가 달라져 버린 게 가장 큰 변화였고요.”
“…….”
역시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었구나.
그게 다 어떤 변화들인지, 또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런 제가 낯설게 느껴지시겠죠. 실은 저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4 화

“…….”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확히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
그가 또 고민하듯 망설였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말하기 어려운 듯했다.
자기도 잘 모르는 데다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인 걸까?
아니면 미리 나한테 말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걸까?
입술을 열었던 그가 갈등하듯 다시 달싹였다.
나로서는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의 망설임이 길었다.
가만히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던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당신이 강해졌다는 건가요?”
“……예?”
그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처음에는 당신이 우릴 다 속인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 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더라고요. 당신이 폭군이나 사교계에서 당한 세월만 몇 년인데요. 거의 평생이잖아요.”
“…….”
그는 내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숨기고 있었다면, 진작 모든 것을 다 잃기 전에 드러냈을 거예요. 죽으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
“아니면 정말로 그동안 일부러 못 움직이는 척했던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지만 꽤 확고한 대답이었다.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의 단호한 부정에 나는 내심 안도가 되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갑자기 강해진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
“혹시 당신의 말투가 나아진 것처럼, 당신의 몸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달라진 건가요?”
그는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걱정스럽지만 신뢰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다 들어 줄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면, 아니 설령 지금까지 나를 속였다 한들 이제라도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사실 그대로의 일이었다.
딱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와 마주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결심한 듯 살짝 휘청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예. 강, 해졌습니다. 부인께서도 보신 것처럼.”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심장이 요동을 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말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말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들어 보니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차올랐다.
놀라 부풀어 오르려는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내가 소리 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정말로 그가 강해진 거라고?
갑자기 무적이 된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제야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직 저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요.”
석연치 않은 구석이라니…….
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하긴 느닷없이 사람이 달라졌는데, 마냥 놀랄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모았다.
“혹시 그게 당신의 수명을 대신해서 얻은 능력이라거나, 뭔가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예.”
그렇구나.
한결 안도가 되었다.
그도 심란한 듯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놀라셨군요. 부인께서 걱정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니에요.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이 놀라고,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
나는 조금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도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내 눈을 마주 응시했다.
그가 강해진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던 그의 성격에 한두 개도 아닌 변화들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숨을 들이쉰 나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나도 괜찮은걸요. 그런데 아까 보니 당신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아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네요. 당신이 견딜 수 있는 건가요?”
물론 그는 원래 겉보기에도 너무도 근사하고 건장했으며, 건강도 꽤 좋은 편이었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잘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나 낮에 본 그의 모습은 원래의 그에게서는 절대 꿈에서도 상상 못 할 만큼 강한 힘과 기술을 쓰고
있었다.
훈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나 갑자기 강해지면 적응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알렉은 무척 자연스럽게 놈들을 패 주긴 했지만…….
그는 조금 어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몇 주 지났더니 꽤 적응이 된 편이라서요.”
“그랬군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적응까지 하다니.
양을 잡아 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가볍게 손을 맞잡은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나도 안심할게요.”
물론 그가 강해진 모습을 완전히 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그가 더 나약해진 건 아니라서, 그를 괴롭게 했던 놈들에게 대갚음해 줄 수 있게 되어서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쉰 내가 다시 말했다.
“나중에라도 당신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확실히 알게 되면 말해 줄래요?”
내 물음에 그가 작게 끄덕였다.
“내가 도울 일이 있어도 알려 줘요.”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약간 눈매를 접었다.
여전히 걱정되었지만, 나에게 숨기지 않고 터놓고 이야기해 줘서 다행이었다.

* * *

달칵.
루이제의 드레스 자락이 살포시 날리며 문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알렉은 루이제가 지나간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루이제가 나가 버렸다.
차마 진짜 알렉시스는 죽었다고, 지금의 그는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알렉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대로 말 못 했어.’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루이제에게 당신 누구냐고, 내 남편 맞냐고 추궁을 당할 줄 알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영혼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고백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해시키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루이제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건 당신들의 알렉시스가 정말로 죽었다고 사망을 선고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거 곤란한데.’
그는 입술에 손을 가져가 댔다.
아니, 어쩌면 루이제가 의심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리겠다.
그 누가 사람의 영혼이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는 알렉시스가 되어야 했던 걸까?
외모가 똑같을 만큼 흡사해서?
아니면 알렉시스를 괴롭힌 놈들과 폭군에게 대신 복수하라고?
그런데 그러면 그에게 애정도는 왜 필요한 거지?
루이제의 애정을 받아야 하는 건 이미 죽은 알렉시스인데.
심지어 루이제는 알렉시스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들 부부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해도, 둘 사이의 감정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는 애틋하고 평범한 부부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몹시 불편하고 찜찜했다.
‘이놈의 시스템 환장하겠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
알렉은 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띠링.
그런 그를 독촉하듯 시스템에서 알림이 떠올랐다.

[‘냉정한 초보 남편’ 님의 현재 상태를 알려 드립니다.]


[레벨 1, 애정도 2, 경험치 0]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애정도와 경험치가 필요합니다.]
[어서 애정도와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려 보세요!]

‘이런 빌어먹을…….’
레벨을 2 로 올리기 위해서는 애정도 3 과 경험치 30 이 필요했다.
그러나 애정도 1 의 장벽은 여전히 커 보였고, 아직 마물도 없는 이곳에서 경험치 30 은 대체 언제 어떻게
얻나 싶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5 화

* * *

광택이 고급스러운 새까만 마차가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사람을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바깥은 어둠이 내렸다.
마르셀과 개리슨, 데미안은 더러워진 겉옷을 벗은 채 온몸의 욱신거리는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알렉시스에게 당한 일이 하도 말도 되지 않는 창피한 일이라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창밖으로만 시선을 고정한 마르셀이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눈동자를 불태웠다.
아직도 이가 갈렸다.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사람과 붙는다는 게 뭔지 제대로 실감했다.
그런 무력함은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굴욕적이었다.
“……말도 안 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거 아니야? 그 자식이 진짜 알렉시스일 리가 없잖아.”
마르셀의 중얼거림에 개리슨과 데미안이 눈을 들어 마르셀을 보았다.
마르셀은 여전히 어두운 창밖만 보며 으드득 이를 갈고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그만 입 밖으로 소리 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마르셀을 보던 데미안은 다리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두 손을 맞댔다.
“이번 일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 이렇게 당하기만 하고 지나가면 그 자식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알겠어?”
마르셀이 뜨끔하며 데미안을 향해 눈을 돌렸다.
개리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도 그 부인도 가만둘 수는 없지. 감히 우리를 비 오는 날 개 패듯 패?”
“…….”
개리슨의 말에 마차 안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세 사람은 알렉시스 한 명을 상대로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게다가 마르셀은 루이제가 했던 말들까지 머릿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당신의 하워드 후작 부인이 정부를 두고 있었던 일이요.’

줄리아가 정부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르셀과 줄리아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잉꼬부부였다.
줄리아와 결혼한 이후로 마르셀은 팔불출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아내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리아에게 정부가 있다고?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마르셀은 개소리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떠나가지
않았다.
마르셀이 심각하게 예민해져 있는 사이, 데미안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 이번 일을 아뢰는 게 좋겠어.”
그 말에 개리슨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게. 우리가 알렉시스한테 곤죽이 되도록 쳐 맞았다고?”
“…….”
데미안이 천천히 주먹을 폈다가 다시 꽉 쥐었다.
물론 알렉시스에게 이 지경이 되도록 얻어맞은 건 숨기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마르셀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걸 말한다고 해서 누가 믿기나 하겠어? 다른 놈도 아니고 알렉시스라고. 그 새끼한테 주먹 한 대만
맞았다고 해도 다들 박장대소를 할 판에…….”
“…….”
누구도 마르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쪽팔린 건 둘째 치고, 알렉시스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셀의 눈빛에 날이 섰다.
“제기랄, 어떻게 엿을 먹이지.”
이대로 가만히 두는 건 열 받아서 참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든 보복을 해서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마르셀의 눈동자에 윤기가 돌았다.
용병단에 의뢰해서 숨만 붙어 있을 만큼 교육을 시키는 게 낫겠다.
감히 이 홀든 방직 유니언의 귀공자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하게 놔둘 수는 없지.
마르셀이 날카롭게 입매를 비틀었다.
‘우릴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어, 알렉시스.’

* * *

밤이 깊었다.
고요한 방 안에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침대에 누운 나는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갑자기 내 남편이 전사처럼 싸움을 잘하게 되다니.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것도 기적 같았는데, 상상도 하지 못한 더 어마어마한 일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다.
째깍째깍.
두근두근…….
초침이 지나가는 소리와 내 심장이 낮게 박동하는 소리가 맞물렸다.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로 보았던 알렉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많이 변한 거지…….’
소심하고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언제나 분명한 눈빛.
위축된 모습이 한 번도 없었던 표정.
더듬지 않는 말투와 웬만한 남자들은 쉽게 굴복시키는 뛰어난 운동 신경.
그리고 어딘가 많이 서늘해진 태도까지.
달라진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원래 그는 얼굴과 손 정도 외에는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부인인 나에게도 벗은 상체조차 잘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고, 등은 일부러 숨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의 알렉은 셔츠 단추를 잠그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바지만 입은 채로 거울을 보고 있지 않았는가.
‘흐음…….’
안 하던 사냥도 잘하고, 그렇게도 경외하던 어머니에게 내 편도 들어주고, 시누이에게도 단호해졌지.
낮에 그 귀족 놈들한테는 또 오죽 살벌했어?
성격이 아예 딴판이 된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싶어 나는 얼떨떨하게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건 꼭…….
‘거의 다른 사람이 된 수준 아니야……?’
차라리 변하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독약을 먹기 전과 그대로인 건 그의 외모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홀려 버리기 위해 태어난 듯한 아름답고 황홀한 얼굴과 가장 완벽한 황금 비율로
빚은 것 같은 몸만 그대로였다.
다시 두어 번 깜박인 내 눈은 이미 말똥말똥했다.
잠이 다 달아났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사람이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나면 원래 이렇게까지 많이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선뜻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알렉은 여전히 알렉인걸. 나쁘게 변한 건 하나도 없잖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알렉은 내가 평소에 그에게 바랐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대놓고 성격을 고치고 힘도 키우라고 한 적은 없지만, 내심 그가 지금처럼 달라지면 더
좋겠거니 생각했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어디서든 자신감을 갖길 바랐으니까.
그는 그저 착하고 소극적일 뿐인데 멍청하고 만만하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그가 더 단호하고 차가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해 왔다.
누구보다 알렉 본인이 그런 자신을 탓할 때가 많았다.
‘그래. 잘된 거야. 알렉도 원했던 거잖아…….’
천지가 개벽한 수준의 변화였지만, 그전에 그가 얼마나 원통해했는지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너무도 한스럽고 억울한 인생을 살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이 계속해서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는 걸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도 여전히 그는 정말 그인지.
아니면 이제 더는 예전의 알렉이 아닌 건지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 뒤늦게 잠들었다.

* * *

다음 날 낮이었다.
날씨가 맑고 햇빛이 따스했다.
피크닉 매트를 깔고 샌드위치를 먹기에 정말이지 딱 좋은 날.
나는 아침 일찍 데인에게 부탁한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를 담은 바구니를 풀어 보았다.
나와 알렉, 그리고 엘로이와 시어머니는 언덕 위에서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요리사도 꽤 하는구나.”
시어머니가 공작저에 있을 때 자주 즐기던 구운 연어 샌드위치를 먹어보며 말했다.
엘로이도 늘 먹던 수제 햄 샌드위치를 무척 맛있게 먹다가 대답했다.
“그러게, 맛있다.”
바구니 안에는 충분한 양의 샌드위치가 종류별로 가득했다.
구운 연어, 로스트 비프, 오이, 수제 햄, 닭고기 샌드위치.
그중에서 나는 으깬 감자 샐러드가 곁들여진 오이 샌드위치를 골랐다.
아삭.
적당히 소금에 절여진 오이가 내 입 안에서 산뜻하게 퍼졌다.
상큼한 주스까지 한 모금 곁들이니 없던 피로까지 사르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알렉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새 요리사의 샌드위치가 그의 입맛에도 맞을까?
알렉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에서 비프와 양상추가 보였다.
양념을 발라 구운 소고기가 한눈에 보아도 먹음직스러웠다.
‘……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6 화

별일이네.
오늘따라 비프 샌드위치가 당긴 건가? 아니면 입맛도 좀 변했나?
나는 알렉의 샌드위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 가족들의 샌드위치 취향이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나는 항상 오이와 감자, 시어머니는 구운 연어, 엘로이는 수제 햄 샌드위치에 레몬커드 많이,
알렉은 닭고기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 취향이 다들 확고해서 다른 샌드위치를 고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알렉이 비프 샌드위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가 있으면 항상 닭고기 샌드위치를 먹었을 뿐이지.
그런데 왜 오늘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를 고른 걸까?
‘흐음…….’
그렇게 먹다 보니 샌드위치는 금세 동이 났다.

* * *

늦은 오후.
간단한 티타임까지 가진 알렉은 자신의 침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그가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사람을 제압하던 장면이었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가족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고 나니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온 후 활발하게 몸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의 기준에서는 크게 힘을 들인 건 아니었다.
그 세 사람은 신체에 파워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동작도 느려서 어떤 수를 쓸지 뻔히 내다보였다.
아무리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공격했어도 그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자신에게 문제를 발견했다.
‘어쩐지 주먹의 강도가 시원찮아.’
알렉은 주먹을 쥐며 손목을 돌렸다.
원래 그의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가 원하는 힘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의 힘이 나오겠거니 가늠하며 주먹을 써도 실제로는 세기가 그 반도 되지 않았다.
보기에는 건장한 몸인데, 기초 체력이 전생의 그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이거 운동해야 되겠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알렉은 옅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언가를 내리칠 때의 순간적인 힘이야 마나를 동원하면 강하게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체력이 약하면 마나를 쓰든 스킬을 쓰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이 몸 자체를 강인하게 단련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레벨을 올린다 한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은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는 이미 전생에 한 번 경험한 탓인지 체력과 관련된 퀘스트가 강제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체력 퀘스트를 시작하자 주위가 서서히 짙은 초록색의 가상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근력 강화 퀘스트(초급)가 시작됩니다.]


[윗몸 일으키기 300 회]
[팔굽혀펴기 300 회]
[육상 20km]
[사이클 50km]

이 정도는 초급용이라 그런지 꽤 가볍게 느껴졌다.


알렉은 느긋하게 준비 운동을 하며 앞으로 매일 이렇게 체력을 늘릴 생각을 했다.

* * *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린 나는 소리 나지 않게 1 층으로 내려갔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방문에 귀를 대 보니 둘 다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았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거야.’
슬그머니 부엌으로 간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와인 한 병과 안주를 챙겼다.
안주는 데인에게 부탁한 특제 새우 요리와 디저트였다.
일전에 험한 일도 겪었으니 우리 부부가 술이라도 나눠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그와 오붓하게 어딘가로 가지 않는 이상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정말이지 어려우니까…….
똑똑.
“알렉?”
나는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설마 벌써 자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 둘 걸 그랬나?
“저예요. 벌써 자요?”
방 안에서 반응이 없자 내가 다시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냥 가야 되나 생각한 순간,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제 보아도 황홀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가 내 모습을 한번 살펴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루이제?”
그런데 그는 뭐라도 하고 있었는지 조금 들떠 보였다.
희미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조각 같은 얼굴은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살며시 시선을 내려보니 방금 목욕이라도 한 듯 하얀 가운 차림이었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그의 가슴 근육이 탐스럽게 부푼 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울끈, 불끈.
그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제각기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대체 뭘 했길래 평소보다 근육이 산 낙지처럼 살아 움직이는 거야?
“다, 당신 뭐 하고 있었어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 내가 시선을 내리자 핑크빛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쓸데없이 저런 곳까지 윤기가 났다.
헉 놀란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눈을 더 내리깔았다.
이번에는 내 시선이 그의 골반에 걸렸다.
까딱 눈동자 잘못 굴렸다가는 변태로 몰릴 것 같아 그냥 몸을 틀어 버렸다.
뭐지 진짜?
그의 온몸이 다 숨을 쉬는 듯 생기가 넘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경이로웠던 완벽한 석고상이 인간의 생명을 얻게 된 느낌?
상기된 듯한 그의 목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아, 체력 단련 좀 하고 있었습니다.”
“네? 체력 단련이요?”
여기서?
상상도 못 한 말에 조금 놀란 나는 문틈 너머 그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펫이 깔린 마룻바닥 위에는 운동을 할 만한 게 없었다.
신체 능력이 갑자기 좋아져서 제자리 뛰기 같은 거라도 한 걸까?
아무튼 나는 와인 병을 살짝 들어 보였다.
“잠깐 같이 마실 수 있나요? 당신이 처음으로 그 거슬리는 놈들 혼내 준 기념으로요.”
이럴 때라도 같이 있어야지 어쩌겠어.
내 말에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다행히 문을 더 넓게 열어 주었다.
“벌써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를 한번 올려다본 나는 그의 팔 아래 문틈으로 지나쳤다.
새삼 그와의 키 차이가 실감이 났다.
“잠이 잘 안 와서요. 오랜만에 와인도 마시고 싶었고요.”
나는 테이블 위에 가져온 술과 간식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칵, 문이 닫히며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불현듯 심장이 뛰었다.
모두 잠들고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라니, 나에게는 가끔 이런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다.
남편과 결혼을 한 건지,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의가족을 맺은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무슨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 물으며 내가 그의 잔에 와인을 따르는 동안 그가 다가왔다.
“……그냥 팔 굽혀 펴기, 윗몸 일으키기, 뭐 그런 것들을 했습니다.”
“그랬구나. 정말 놀랍네요. 당신이 산책이랑 숨쉬기 운동 말고 다른 운동을 하다니…….”
그가 따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니, 엘로이가 교양서적을 읽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무척 이질적이었다.
“……그럼 앞으로 계속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알렉이 조금 어색하게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
그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쓸었다.
내 말에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도 갑자기 몸이 달라져서 당황스러웠을 텐데 너무 캐물었나?
아니면 나와 단둘이 있어서 긴장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렉은 숙맥이니까.
설핏 웃은 나는 그냥 그의 앞에 와인 잔을 밀어 주었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승마도 할 수 있을까요?”
“예?”
“당신이 말 타는 것도 안 된다고 해서 여태 많이 아쉬웠거든요.”
술잔을 든 내가 그를 향해 살짝 기울이자 그가 나와 와인 잔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내가 다시 덤덤하게 입을 열었지만 어딘가 쓸쓸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사실은 나 다른 부부들처럼 당신이랑 같이 말 타러 다니고 싶었어요. 당신이 안 되는 거 아니까
지금까지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요.”
“…….”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나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에게 건 배를 재촉하듯 술잔을 한 번 더 까딱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잔을 들어 내 잔에 맞췄다.
챙-.
와인 잔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같이 하러 가겠습니다. 승마.”
“정말로요? 고마워요.”
나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향긋한 내음과 함께 달달한 액체가 내 입 안을 감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하.
맛있다.
역시 혼술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마시는 술이 최고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7 화

남편과 단둘이 승마라니,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었다.


그보다 건강에 좋고 로맨틱한 데이트가 있을까?
‘알렉이 몸을 잘 움직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것도 그냥 잘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은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날아다녔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 그 간단한 승마도 같이 못 해서 아쉽고 속상했던 마음이 너무 컸었나 보다.
“팔 굽혀 펴기는 얼마나 했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러다 다치면 안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삼백 개밖에 못 해서요.”
“네? 뭐라고요?”
삼백 개?
나는 너무도 놀라 되물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다.
이내 나는 이해했다.
“하긴 이제 당신은 예전의 알렉이 아니니까…….”
어휴 놀래라.
팔 굽혀 펴기 삼백 개 하면 팔이 아예 굽어서 안 펴지겠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알렉…….”
“아닙니다. 쉽게 숨이 차는 거 보니 생각보다 몸이 허약한 것 같아서 앞으로 단련의 강도를 높일
생각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걷기 운동밖에 안 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몸이 강해졌으니 버거울 수도 있겠다.
그래도 몸은 꼭 매일 관리하는 사람처럼 근육이 잡혀 있었으니, 타고 난 미모와 체형이 역시 남다른 것
같았다.
내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자 그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치즈를 조금 먹다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제 그가 움직이는 건 다 잘할 수 있게 됐으니까 혹시……?
멍하니 그런 의문을 떠올린 나는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
“예?”
“당신 이제 운동 신경이 좋아진 거면…….”
“……?”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
내 말이 끝난 지 정확히 3 초가 지났다.
풉!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그가 마시던 와인을 뿜어 버렸다.
화들짝 놀란 내가 한쪽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기품 없이 무슨 말을…….”
괜히 좌우로 눈을 굴린 나는 그냥 어서 그의 방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이제 쉬어요, 알렉!”
그리 소리친 나는 도망치듯 그의 방을 나와 버렸다.
괜스레 뺨에 열이 올랐다.
그의 방을 나서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 그가 연신 콜록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 * *

타닥, 타닥.
안개가 부옇게 낀 이른 새벽녘.
알렉은 응접실 의자에 길게 앉아 미간에 손끝을 대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한창 자고 있는 시간이라 벽난로에 장작이 타는 소리만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이 묘한 정적이 그의 머릿속을 차갑게 가라앉혀 주는 느낌이 들어 그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알렉은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세상에 아무도 없이, 죽여야 할 마물도, 그 어떤 의무나 부담도 없는 듯한 고요하고 서늘한 새벽.
꼭 멈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편안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파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알렉.’
‘당신 이제 운동 신경이 좋아진 거면…….’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그건 미처 생각도 못 한 복병이었다.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그게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긴 부부 사이에 그런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루이제가 그녀의 남편인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는 미처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알렉시스와 루이제는 원래 부부 생활이 없었다고 하니, 나중에 또 곤란한 일이 생겨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나갈 준비를 마친 알렉은 1 층에서 루이제를 기다렸다.
근처 유원지까지 루이제와 함께 말을 타고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가만히 선 채 살짝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사실은 나 다른 부부들처럼 당신이랑 같이 말 타러 다니고 싶었어요.’

루이제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다시 되감겼다.


남편과 겨우 승마도 못 해서 그렇게 아쉬워하다니.
여태 알렉시스와 루이제는 부부였음에도 기껏해야 산책과 식사 정도만 함께했던 게 분명하다.
다행히 승마는 지금의 그가 충분히 같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는 요트를 볼 수도 있었고 패러글라이딩도 마스터했으며,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다.
장비만 있다면 수상 스키와 스노쿨링을 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루이제가 알렉시스와 함께 하지 못했던 수많은 데이트 코스가 그에게는 가능했다.
‘설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가 입술에서 손을 뗐다.
어쩌면 그런 야외 활동들로 애정도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닐까?
그가 승마를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 순간 애정도가 오른 건 아니지만, 정말로 같이 말을 탄 이후에는 애정도가 올라갈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 생각하던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애정도 같은 거 올리고 싶은 생각 없었는데…….’
어느새 그는 루이제의 애정도를 올릴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레벨 1 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탓이었다.
그가 왜 이 세계에 와야 했는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면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벨을 올려 시스템을 깨야 했다.
“알렉?”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알렉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는 무심코 시선을 들어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올려다본 곳에는 루이제가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산 옷인 듯 처음 보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벨트로 허리를 조인 코트 같은 원피스는 상체는 딱 맞는 반면, 벨트 아래로는 풍성하고 우아한
선을 그렸다.
가느다란 손에는 깔끔한 디자인의 장갑과 승마에 어울리는 구두까지.
그리고 역시 처음 보는 근사한 모자와 함께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고전 영화의 전설적인 배우로 착각할 듯한 기품 있는 자세와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알렉은 바로 그 우아한 자태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이윽고 시선을 든 루이제가 입가를 당겨 올리며 물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오로라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
알렉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루이제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그의 심장이 살짝 움찔했다.
“이제 가요. 당신이랑 처음으로 승 마도 하고 정말 기대되네요.”
“…….”
부드럽게 눈매가 휘어진 루이제의 눈동자 속에서 별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띠링.
그 순간 그의 시스템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첫 승마 데이트로 루이제가 감동 받게 해 주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 1, 경험치 10, 신뢰도 3]

* * *

먼저 말에 오른 나는 유독 싱그러운 기분이 들었다.


원래의 내 키보다 훌쩍 높아진 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건 꽤 산뜻한 일이었다.
심지어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말을 탄다니 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가 말에 오르는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말의 고삐를 잡고 안장을 밟으며 말에 올랐다.
양손으로 갈기와 고삐를 동시에 잡고 휙 몸을 올리는 짧은 순간, 팔에 붙은 근육이 단단해졌다.
“…….”
저렇게나 능숙하게 말을 타다니.
마차도 잘 몰더니, 말에 오르는 것쯤은 이제 별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저런 걸 안 배우고 그냥 갑자기 각성으로 가능하다고……?’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하긴 여태 자신이 직접 하진 못해도 보고 배운 것들이 많으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출발하시죠.”
말에 다 오른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자 내가 옅은 미소로 끄덕였다.
이윽고 우리는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적당한 속도로 한동안 달렸다.
달가닥, 달가닥.
두 말이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상쾌했다.
말발굽이 땅이 아니라 꼭 내 가슴을 치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 * *

한편 알렉은 심각한 기분으로 퀘스트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첫 승마 데이트로 루이제가 감동 받게 해 주세요~’


……감동?
그냥 나란히 말만 타고 돌아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겨우 경험치와 애정도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떴는데, 그 성공 조건이 꽤 까다로웠다.
대체 어떤 식으로 감동을 줘야 하는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여자와 단둘이 놀러 나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데이트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감동까지 줘야 한다니,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힘과 기술을 총동원해 SSS 급 보스 몹을 처치하는 게 훨씬 쉬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알렉은 문득 좋은 발상이 떠올랐다.
루이제가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의 공략 상대라는 사실은 비슷했다.
보스 몹을 처리할 때처럼 접근하면 상대의 실마리나 약점을 간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차라리 루이제가 보스 몹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8 화

알렉은 전생에 보스 몹들을 해치웠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는 순간 패배를 감지할 정도로 위압적이고 강력한 마물이어도 아주 작은 빈틈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치밀하게 관찰하고 공격하면 상대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현듯 마음이 편해졌다.
애정도를 얻어야 하는 아내에서 마음을 무너뜨려야 하는 보스 몹으로 발상을 전환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알렉은 루이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편안한 얼굴로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저 둘러보기만 하는 데도 루이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편과 함께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바로 그것들을 알아내서 하나씩 이루다 보면 애정도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승마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동안 알렉시스가 마나 때문에 겁을 먹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 중 루이제가 원했던 것들이 많을 테니까.
지금껏 공허하게 방치되어 있었던 루이제의 빈틈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가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은 유원지가 보였다.
그와 루이제도 말을 맡겨 놓고 걷기 시작했다.
가족, 연인, 친구 할 거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경 써서 차려입은 모습으로 산책을 하거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원지라 그런지 솜사탕 상인과 점 성술사 같은 사람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고, 저 멀리 열기구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곳곳에 평화로운 미소와 눈빛들이 가득했다.
“루이제.”
“네?”
강가가 내려다보이는 데크의 울타리에서 멈춰 섰을 때였다.
잔잔한 수면 위에는 배를 타고 유유히 떠도는 사람들이 있었다.
웬일로 그가 먼저 루이제에게 말을 걸었다.
“……진작 부인의 염원을 들어주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아.”
루이제가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쩐지 그는 루이제를 마주 바라보지 못하고 강물만 의미 없이 응시했다.
“아니에요, 알렉. 당신이 일부러 함께해 주지 않은 것도 아니었잖아요.”
“…….”
“그냥 나는 이제라도 평범한 데이트를 해 봐서 좋은걸요?”
루이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제야 그도 슬며시 고개를 돌려 루이제를 응시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루이제의 보랏빛 눈동자는 무엇보다 신비롭고 영롱했다.
사람의 눈에서 이토록 경이로울 만큼의 품격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아래 버선 같은 고아한 선을 그리는 콧대와 평생 달콤하고 고운 말만 썼을 것 같은 붉은 입술.
어디서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이내 그는 착각이라고 확신했다.
루이제는 오직 이 세계에만 존재할 것 같은 유일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울타리에 팔을 올리고 기댔다.
“사실 난 그동안 당신한테 아쉬운 게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
“당신이 죽는 것보다 말도 못 타고 사냥도 못 하는 게 훨씬 낫더라고요.”
루이제가 자조하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
진짜 알렉시스라면 이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웃는 듯하면서도 씁쓸해하는 듯한 루이제의 입가에서 그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알렉이 본능에 가까운 기분으로 소리 냈다.
“사실 저는, 제가 당신의 옆에 없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루이제가 다시 몸을 틀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에게는 알렉시스의 마음을 대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알렉시스가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아서, 루이제를 향한 무언가가 마음에서 차올라서 지금 이
순간 말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
알렉은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다시 한번 소리 냈다.
“당신이 저 같은 사람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으니까요.”
“…….”
가만히 그를 응시하는 루이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루이제가 그를 빤히 응시하는 만큼, 그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 *

유원지의 밤은 낮처럼 반짝였다.


두근, 두근.
내 가슴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놀러 나온 아이처럼 박동했다.
‘뭐지, 이 남자?’
아까부터 나는 알렉에게 들은 말이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사실 저는, 제가 당신의 옆에 없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저 같은 사람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으니까요.’

“…….”
그가 죽음을 시도한 이후에 처음으로 들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 이후로 그와 솜사탕도 나눠 먹고,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배도 탔다.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열기구에 올라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솜사탕의 맛이나 열기구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시원한 풍경은 내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알렉에게 들었던 진심 어린 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솔직히 그가 나를 두고 홀로 죽으려고 해서 배신을 당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알렉 딴에는 나를 놓아주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와 결혼한 이후에 상황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자신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가슴이 쿡 쑤시는 것 같았다.
원래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인데.
어쩌다 가끔씩 이렇게 진심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진한 충격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여간 내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이혼하자는 소리나 했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정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남편이 직접 노를 저어 배도 태워 주고, 나란히 간격을 맞춰 말도 타고, 열기구 위에서 함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이트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생애 처음 맞지?’
그 사실을 떠올리니 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화려한 공작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소소하고 충만한 행복이 가슴 속에서 넘실대는 것 같았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이 시간이 끝난다는 게 아쉬웠다.
다시 말을 찾으러 가는 길에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알렉.”
“예?”
그가 나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나도 그를 마주 보고 서서 잠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랑 단둘이 이런 시간을 보낸 것도 결혼하고 처음이네요.”
내가 살짝 흐뭇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그의 눈망울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그냥 짧은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뒤늦게 나를 따라왔다. 말을 돌려받은 후에야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잡으십시오.”
“네?”
나는 먼저 말에 오른 그와 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같이 타고 가자는 걸까?
앞뒤로 나란히?
두근, 두근…….
한 번도 누군가와 그렇게 말을 타 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알렉의 가슴에 등을 묻고 같은 말을 타고 가다니…….
‘백허그?’
이 만족스러운 데이트의 화룡점정을 찍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다 술렁였다.
그럼 나머지 말 한 마리를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와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내 몸을 들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안장 위로 앉혔다.
“…….”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느낌에 심장이 철렁했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는 동안 알렉은 금세 말에서 내려가 다른 말 위로 올라갔다.
‘음?’
왜 내리지?
그제야 나는 그가 말을 태워 주겠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말 그대로 내 몸을 말의 등 위로 올려 주겠다는 뜻이었나 보다.
“…….”
괜히 설레발을 친 것 같아 내 볼이 붉어졌다.
나 왜 설렌 거니.
그래도 남이 대신 나를 말에 ‘태워 주기만’ 한 건 꽤 편했다.
말고삐를 쥐고 내 몸을 들어 올리느라 팔 힘을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
부부가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갔다면 더 낭만적이었겠지만, 어차피 알렉과 나 사이에 그런 친근한 스킨
십은 아직 성급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말을 달리고 있는데, 문득 알렉이 고삐를 잡아 당겨 속도를 늦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갑작스럽게 말을 멈췄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치며 나뭇잎끼리 날카롭게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그린 듯한 그의 옆모습이 달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길옆으로 난 울창한 숲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조차도 근사하면서도 서늘한 선을 그려 냈다.
‘무슨 일이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39 화


* * *

오늘 알렉은 하루 종일 안 그런 척 루이제의 약점을 공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강가를 거닐며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그는 루이제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나도 배 타고 싶다.’
루이제의 눈빛에는 자신도 저 그림 같은 풍경에 녹아들고 싶다는 열망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왜 배를 타자는 말은 하지 않는 걸까?
벌써 강가를 산책한 지 꽤 되었다.

‘알렉.’
‘당신 이제.’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언제는 그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직설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루이제는 선뜻 먼저 나서지 않는 성격인지도 몰랐다.
‘흠.’
고심하는 것처럼 입술에 손을 댄 그의 눈썹이 살짝 날카롭게 휘어졌다.
지금이 바로 루이제에게 배 위에서의 데이트를 신청할 타이밍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자에게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 하하.
배를 타고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수면에 부서지는 투명한 포말 같았다.
부모의 품에는 갓난아기도 안겨 있었다.
루이제도 포근한 눈빛으로 그 가족들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가족들을 지켜보는 루이제의 모습이야말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루이제, 제가 배에 태워 드려도 됩니까?”
다시 강가를 보며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쉰 알렉은 무심코 내뱉듯이 툭 말했다.
“네?”
갑작스럽게 들린 말에 루이제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은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은 채로 살짝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 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태워 드리고 싶습니다.”
“아…….”
걸음을 멈춘 루이제가 말없이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밝아졌다.
과연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앞으로는 차라리 배를 한 대 사 놓는 게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알렉의 귓가로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뱃놀이는 자칫하면 물이 많이 튈까 봐 즐기진 않았는데, 당신이 태워 준다니 기대되네요.”
‘……아. 안 좋아했구나.’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분명 배를 타는 사람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던 것 같았는데…….
그때 루이제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알렉은 장갑을 낀 그 우아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곧 에스코트를 청하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알렉은 루이제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잘 잡히지도 않을 것처럼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자 루이제의 눈동자가 더욱 달콤하게 반짝였다.
알렉은 그런 루이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원했던 승마를 함께했어도 애정도는 오르지 않았다.
과연 이번에는 그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윽고 배를 빌린 알렉은 챙겨 두었던 장갑을 끼고 노를 잡았다.
어쩌면 루이제가 너무 당황하지 않는 선에서 서서히 과감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 몹 앞에서 그는 그다지 망설이는 편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얼굴과 몸에 안 반할 여자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도 주위에 오가는 다른 배에 탄 귀부인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평소 그런 눈길에 무신경한 그가 느끼기에도 노골적이고 뜨거웠다.
루이제만 평화롭게 앉아서 주위의 청명한 풍경과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의 남편을 이토록 대놓고 훑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이는 걸까?
하긴 3 년 동안 매일 봤으면 루이제의 입장에서는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진짜 알렉시스가 제대로 활용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알렉시스가 천부적인 수준의 외모를 타고나고도 자신의 부인에게 얼마나 써먹지 못했는지.
단순히 부부 관계만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무용지물 같았던 느낌이 들었다.
이내 알렉은 노골적인 시선들에 신경을 끄며 루이제를 살피는 것에만 집중했다.
루이제의 몸에 물 한 방울 튀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 노를 저었다.
한창 배를 탄 후에 알렉은 그녀와 열기구까지 타러 갔다.
그때까지도 퀘스트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효과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낯간지럽고 인위적인 유혹의 대사 같은 것들을 날릴 수도 없는 역효과가 날 게 분명했다.
옆에서 루이제는 들뜬 얼굴로 열기구 아래의 경치를 구경했지만, 알렉은 퀘스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겨우 레벨 1 에서 2 로 올리는 게 이렇게 까다로울 일인가.’
내심 한숨이 나왔다.
최하급 오크 몇 마리만 죽여도 금방 레벨 2 로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양심이 있으면 레벨 1 에게 오크 토벌 게이트 열쇠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샌드위치와 솜사탕까지 먹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금세 주위가 어두워졌다.
결국 그와 루이제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말을 찾으러 갔다.
이번 퀘스트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알렉은 낮에 집에서 출발할 때 루이제가 말에 오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루이제는 자신의 체격보다 말이 훨씬 크고 높아서 버거워했다.
그에 비해 루이제의 승마 실력은 역시 이 시대의 사람이라 그런지 수준급이었다.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잡으십시오.”
알렉은 먼저 말에 올라가 루이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그러나 루이제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그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응시했다.
묘한 침묵이 흐르자 알렉은 그냥 상체를 루이제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옆구리 위쪽을 붙들고 들어 올렸다.
놀란 루이제의 몸이 흠칫 떨렸지만, 그녀는 금세 안장 위로 안착했다.
조금의 타격이 없도록 조심히 루이제를 내려놓은 알렉은 자신도 말에서 내려왔다.
이제 집에 갈 일만 남은 하루.
다음 퀘스트를 기약하며 그는 말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띠링, 알림음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첫 승마 데이트로 루이제가 감동 받게 해 주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3 올랐습니다.]

“…….”
성공했어?
알렉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을 몰기 시작했을 때에도 머릿속이 얼얼했다.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퀘스트를 성공할 줄이야.
지금까지 총 세 번 애정도가 올랐다.
처음에는 맛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줬을 때였고,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못 자르게 했을 때였다.
세 번째는 방금 전, 말 위로 루이제를 올려 준 직후였다.
물론 오늘 하루 종일 그녀와 말, 배, 열기구 같은 것들을 함께 탔으니 유원지에서의 모든 일이 퀘스트
성공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제 레벨 2 까지 남은 건 경험치 20.
그렇게 숲의 한가운데에 난 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나무 사이에 숨은 무언가가 꼬리처럼 그들을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고 신속했지만 동시에 무척 조용하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알렉처럼 살기에 단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숙달된 사람들이 분명했다.
‘뭐지, 암살단 그런 건가?’
왜 그를 노리는 걸까?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의도로 쫓아오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알렉은 기드온을 불러내 모두 잠재워 버릴까 생각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따라오는 건지 알아보고 싶긴 했지만, 루이제도 함께 있는 와중에 딱히 흉포한 놈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기드온.’
그는 마음속으로 그의 사역령을 불러냈다.
[크르릉.]
그의 부름에 기드온이 반응하는 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알렉은 연이어 마음의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따라오는 놈들 모두 재워 버려. 모습은 들키지 말고.
[크릉!]
밝게 대답한 기드온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지금 기드온은 형체를 숨기고 있어서 루이제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띠링,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상태 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발생!]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
[한 명의 체력을 완전히 소모시킬 때마다 경험치가 5 씩 올라갑니다.]
[퀘스트 보상]
[애정도(?). 경험치(?), 신뢰도 10]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0 화

‘……퀘스트!’
흠칫 놀란 그는 하마터면 말고삐를 놓칠 뻔했다.
‘경험치가 5 씩 올라갑니다.’라는 말에 그의 눈길이 박혔다.
‘기드온.’
알렉은 다시 그의 사역령을 불렀다.
놈들을 향해 허공을 달리던 기드온이 우뚝 멈춰 섰다.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생겼는데 놈들을 모두 재워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돌아와.’
[크르릉.]
기드온은 군말 없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 짧은 찰나, 알렉은 기드온의 기억을 읽었다.
플레이어는 사역령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상태이니 사역령이 보고 들은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길의 양옆으로 각각 다섯씩 사내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얼굴에 상처 몇 개씩은 갖고 있는 흉악한 인상이었는데, 시스템의 말대로 정말로 용병들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레이브 용병단이라면…….’
이 제국에 있는 용병단 중 하나였다.
가장 규모가 큰 용병단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유로 꽤 유명했다.
바로 돈만 주면 시키는 일은 그 어떤 사악한 짓이라도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람 한 명 해치우는 건 그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긍지가 없다는 점에서 귀족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 꺼려질 때 자주 이용되곤 했다.
실력 또한 상당히 좋은 편이라 의뢰를 실패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런 용병단이 그를 쫓고 있다니.
내심 짧게 혀를 찬 알렉은 며칠 전 마주쳤던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세 사람이 그에게 보복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히이잉.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루이제도 덩달아 말을 세웠다.
알렉은 조금 스산한 눈으로 좌우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나뭇잎들이 한번 몸을 떨며 특유의 소리를 내더니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인기척을 숨기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말들도 고도의 훈련을 받았는지 조금의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저런 용병들의 전투력은 시스템상 어느 정도의 레벨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15 레벨 정도 될까?
‘일단 놈들을 감시해, 기드온.’
알렉이 기드온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말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알렉은 기드온의 눈을 통해 숲속에 정체를 숨긴 용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용병들은 때를 노리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빛이 하나같이 험악하고 우락부락했는데, 그 속에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역시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알렉?”
그때 달가닥거리며 말이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루이제가 물었다.
알렉은 루이제를 향해 말 머리를 살짝 틀며 대답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잠깐 멈췄습니다.”
“네? 이상한 소리요?”
루이제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알렉은 계속해서 용병들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기다란 바가 달려 있었다. 그 옆에는 5000 이라는 숫자도 함께였다.
붉은색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바는 체력을 알리는 표시였다.
저 체력이 5000 에서 0 으로 바닥날 때까지 공격을 해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좌우로 모두 열 명이니까 모두 성공하면 경험치가 50.
언제 또 이런 퀘스트가 나타날지 모르니 여기서 모두 쓰러뜨려야 했다.
당장 레벨을 2 로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경험치는 20 이니 레벨 업을 하고도 30 이 남을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린 거죠? 전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를 빤히 보던 루이제가 금세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에도 알렉은 기드온의 눈을 통해 용병들을 주시하면서 빈틈을 파악했다.
아직 그가 말을 멈춘 지 채 1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용병 하나의 눈빛이 달빛 때문인지 선명하게 번득였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마침 그 용병 위로 등장인물 일람이 떠올라 알렉은 빠르게 확인해 보았다.

[카슨 마르틴]
[남, 나이: 26 세]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용병단인 그레이브 용병단의 수장이다.]
[악센과 어릴 적 함께 검술을 배워 사이가 돈독하다. 악센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의형제로 여기고 있다.]
[전투력: 15]
‘저놈이 카슨이었군…….’
그레이브 용병단장의 얼굴을 확인한 알렉은 등장인물 일람을 껐다.
동시에 카슨이 손을 움직이더니 기다란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알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저 사물의 정체를 의심했다.

* * *

며칠 전 그레이브 용병단장 카슨 마르틴에게 사람을 찾아서 반쯤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흔한 의뢰였다.
고객은 그들 용병단의 단골이었다. 가장 최근에 그 고객들에게 받은 의뢰는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사건과 관련된 일이었다.
파업을 주도한 놈을 색출해 하수로의 더러운 물맛 좀 보게 해 주라는 내용이었다.
카슨은 그런 의뢰들이 시시했다.
가만히 두어도 비참한 약자들을 괴롭히는 건 그레이브 용병단이 즐기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사는 게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살려 달라는 구걸 따위를 들어 봤자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신분이 훨씬 높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협하는 건 상당히 짜릿한 일이었다.
고고한 인간이 무너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늘 즐거웠으니까.
평소에는 그들을 멸시하던 사람들이 고작 힘과 무기에 벌벌 떨며 목숨을 애원하는 모습이라니.
마치 그들과 세상에서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희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중독될 만큼
짜릿했다.
그리하여 지금처럼 제국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의 공작이었던 사람을 상대로 의뢰를 받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알렉시스 마이어스를 찾아서 반쯤 죽여 놔.’


‘어디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니 북부 쪽을 뒤져서 찾도록 해.’
‘제국에서 제일 잘생긴 놈이니 목격한 사람들 중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알렉시스 마이어스라니.
신분과 얼굴 외에는 볼품없다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한 공작이었다.
물론 지금은 작위를 잃긴 했지만, 그 명성에 비해 신분이 상당히 높았던 탓에 쉽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어차피 브렌트 공작은 싸움 실력이 전무해서 만만한 상대였다.
‘이거 별 힘도 안 들이고 죽도록 팰 수 있겠군.’
특히 그 부인인 루이제 또한 눈부신 미모로 사교계에서 명성이 높았다.
용병단원들과 카슨의 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히 넘치는 의뢰였다.
릴트 제국에서 아름다움으로 가장 손꼽히는 귀한 분들한테 살려 달라는 애원을 받게 될 테니까.
알렉시스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제국 전체였다면 까다로웠겠지만, 북쪽으로 한정해서 수소문을 하다 보니 금세 목격자가 나타났다.
유원지에서부터 그들은 알렉시스 부부를 쫓아왔다.
‘일단 좀 놀라게 해 줄까.’
카슨은 저 고귀한 부부를 곧 비참하게 망가뜨릴 상상을 하며 총구를 들었다.

* * *

탕!
카슨이 방아쇠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알렉이 반응했다.
‘스킬. 신속.’
휙 말에서 내려온 그가 날아가듯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정말이지 순간적인 총격이었다.
기드온을 떠올릴 새도 없이 알렉은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저 멀리 총성에 기겁한 새들이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속 스킬.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그 신속 스킬은 아직 낮은 단계에 불과했다.
레벨은 아직 1 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제대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빠른 스킬이었다.
그러나 신속에서 광속까지 레벨을 올려 본 그로서는 터무니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루이제를 안은 그는 최대한 그 자리에서 먼 곳으로 반짝 이동했다.
자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간적인 이동이었다.
끼히힝!
놀란 기드온의 눈에서 보이는 장면이 알렉에게도 보였다.
총에 맞은 말이 앞발을 들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말을 노린 거였나?
털썩.
땅바닥에 부딪치는 약간의 마찰음과 함께 알렉은 머리를 들었다.
그의 아래에서 루이제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가 멈추기 직전 속도를 늦춘 덕에 땅에 부딪치는 충격은 크지 않았다.
쿵쾅, 쿵쾅.
그 대신, 누구한테 나는 건지 모를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크르릉! 크릉!]
그의 머릿속으로 기드온이 펄쩍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을 모두 재우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알렉은 루이제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기드온에게 대답했다.
‘아니. 가만히 있어.’
히히힝, 히힝.
말이 신음하는 울부짖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루이제가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았으니, 피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땅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얼마나 멀리 몸을 피한 건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어쨌든 놈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이곳은 안전했다.
“괜찮으십니까?”
알렉은 걱정스럽게 루이제를 살피며 물었다.
루이제는 하도 놀라 말문이 다 막힌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1 화

루이제가 크게 뜬 눈을 두 번이나 깜박였다.


그때마다 보랏빛의 오묘한 빛 가루가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알렉은 놈들이 있는 쪽을 한번 응시했다가 얼른 루이제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누가 습격을 했습니다. 아까부터 저희를 따라온 것 같습니다.”
“네? 당신이랑 나를요?”
루이제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숲이었다. 저 멀리 주인을 잃은 백마 두 마리가 혼란스럽게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피할 걸 그랬나?
순간적으로 도망을 쳤다기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다.
이윽고 나무숲 사이에서 용병들이 의아해하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루이제의 손을 가볍게 붙잡은 채 용병들을 주시했다.
“뭐야. 이것들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여기 있지 않았나?”
용병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루이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순간 알렉이 기드온을 불러들였다.
‘이리 와, 기드온. 루이제 옆에서 지켜줘.’
[크릉.]
기드온이 허공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루이제에게는 비록 저 모습이 보이지 않겠지만, 용병들을 상대로 기드온은 충분히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다.
“루이제.”
“네?”
그의 부름에 루이제가 조금 소스라치듯 그를 돌아보았다.
금세 그녀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알렉이 먼저 선수를 치듯 소리 냈다.
“잠시 여기 계셔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게 무슨-.”
알렉은 루이제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용병들이 루이제가 있는 곳까지 오기 전에 그들을 쓰러뜨려야 했다.
저들을 누가 보냈는지 확실히 알아 내고 싶었지만, 이미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렉이 최종적으로 공략해야 할 상대는 아니었다.
악센과 루이제 외의 인물은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여기서는 경험치만 얻어 가면 충분했다.
한 명당 체력이 5000 이라면 그의 주먹에 강화 스킬과 마력을 한꺼번에 사용해 한 대씩만 쳐도 0 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스킬. 신속’
그의 주위로 바람이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더 정확히는 바람이 아니라 그가 바람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긴 했지만…….

* * *

폭발처럼 내 고막을 자극했던 총성.


그 탄환에 당한 듯 백마 한 마리의 몸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가 우리를 습격했다는 그의 말대로 나무로 둘러싸인 숲에서 정말로 웬 험상궂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설마.’
나는 문득 마르셀 후작과 그 친구 놈들이 보복을 하려고 보낸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알렉에게 두들겨 맞은 그들은 몸보다 자존심이 훨씬 더 많이 뭉개졌을 테니까.
경악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내 귀에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여기 계셔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게 무슨-.”
느닷없이 들린 말에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휘이익.
어디서 강한 바람이라도 불어닥친 건지 내 머리카락이 붕 떠오르며 흩날렸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곧 머리카락이 차분히 가라앉았지만, 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렉?”
갑자기 어디로 갔지?
방금 전까지 사람이 서 있던 곳을 허망하게 바라본 나는 이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알렉!”
몸을 돌린 내가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갑자기 내 눈과 머리로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말을 타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날아온 것도 그렇고, 총성까지.
그리고 알렉이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지기까지 했다.
‘뭐야, 이게.’
쿵쿵쿵…….
이유 모를 상황에 심장만 마구 뛰어 댔다.
히히힝.
말이 또 불안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인적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숲속을 눈으로 헤집던 내가 다시 원래 서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
그 순간 나는 발이 묶인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말들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알렉을 찾던 사내들이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금세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다가갈 듯 한 걸음을 뗐다가 이내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섰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우리를 찾던 놈들이 무력하게 쓰러져 버리다니.
다른 놈들은 더 없는 건가?
알렉은 어디에 있지?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주춤했다.
“루이제.”
그러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뜸 내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 순간 내 발이 땅에 묶여 버렸다.
듣자마자 마음이 녹아내릴 것처럼 편안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한 번 더 이어졌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집에 가도 될 것 같습니다.”

* * *

휘익. 퍽.
퍽, 퍽, 퍽.
또다시 휘익.
그레이브 용병단장 카슨은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이 들었다.
별이 콕콕 박혀 있는 밤하늘이 보였다.
‘뭐야, 제기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대체 뭐가 휩쓸고 지나간 거지?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맞은 건 얼굴 같은데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던 카슨은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한쪽 팔과 다리, 옆구리에서 어마어마한 격통이 치밀어 올랐다.
놈에게 맞으면서 표면이 살짝 언 땅에 부딪친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 새끼 뭐였지……?’
겨우 몸을 일으킨 카슨은 쓰러지기 전 있었던 일을 최대한 머릿속에서 짜내 보았다.
빛처럼 스쳐 지나가듯 보기만 했는데도 무척 키가 크고 잘생긴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얼마나 세게 처맞았는지 기억이 잠시 온전하지 않은 느낌까지 들었다.
카슨은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뇌가 요동치는 느낌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우에!”
두개골도 깨질 것처럼 얼얼했지만, 카슨은 힘겹게 기억을 떠올렸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에게 의뢰를 받아 브렌트 공작 부부를 조지러 가고 있었는데.’
카슨의 굵직하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번개처럼 날을 세웠다.
‘갑자기 공작 부부가 사라져서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단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카슨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저토록 빠른 움직임은 대체 뭔가, 황당하게 응시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만 했다.
휘익, 퍽.
퍽, 휘익, 퍽.
그런데 보면 볼수록 숨이 멎을 듯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는 줄도 모르고 기습을 당해 쓰러지는 단원도 있었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었다.
마치 번개가 지그재그로 선을 그리며 낙뢰를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모습과 같았다.
‘이, 젠장할.’
카슨은 주춤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당해 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카슨의 근처에 있던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번개 같은 공격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카슨은 허리춤에 찔러 두었던 단도로 손을 가져갔지만, 칼자루에 손끝조차 대지 못했다.
그전에 기억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얻어맞아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당장 다 일어나라고!”
카슨은 아직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생전 처음 보는 속도의 움직임과 파괴적인 괴력이었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카슨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레이브 용병단장의 육감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시발 힘도 못 쓴다며, 착해 빠져서 애새끼들이 돌 던져도 가만히 있었다며!’
알렉시스 마이어스.
분명히 사교계에서 가장 만만하기로 유명한 그 몰락 공작이었다.

한편 그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
가볍게 손을 턴 알렉의 시야 위로 상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축하합니다!]
[돌발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10 올랐습니다.]

[레벨이 2 로 올랐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2 화

* * *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말 한 마리가 총을 맞았으니 그와 나는 다치지 않은 다른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마구간에 들러 다친 말의 치료를 맡기기도 했다.
총상을 입은 말은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없었다.
“……하.”
깊은 밤이 되어서야 나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쿵쿵쿵…….
아직도 심장이 존재감을 과시하듯 크게 박동했다.
그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맞잡아 보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말을 타고 오며 알렉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까 그 사람들, 혹시 마르셀 후작과 그 친구들이 보낸 걸까요? 우리한테 보복하려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단순한 도적들 같습니다.’
‘그래요……?’

정말 단순한 도둑들이었을까?
피가 식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그들은 아마 마르셀 후작이 보낸 용병들일 것이다.
애초에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주축은 그리 도덕적인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일 년 전에 있었던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사태를 떠올렸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건 휴식 시간과 점심시간 보장, 작업 환경의 개선이었다.
공장 시설은 낙후되고 관리가 되지 않아 폐까지 면직물 조직이 들어가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근무 시간을 줄이거나, 깨끗한 공기를 마실 휴식 시간만 있어도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목소리를 내면 환풍 시설이라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홀든 방직 유니언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조장한 사람들을 물색해 쥐도 새도 모르게 반쯤 죽여
버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일은 아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그 일을 두고 시시덕거리며 떠들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방직 공장이 싫으면 다른 공장에 가서 일하면 되지 않아요?’


‘그러게요. 호밀 빵이 싫으면 다른 빵을 먹으면 되잖아요? 호호호.’
‘남편이 그러는데, 주동자가 누군지 찾아냈다네요. 곧 하수로에서 발견되겠어요.’
‘저런, 고작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설쳤다가 오수를 뒤집어쓰겠군요.’
‘호호호.’

설마 나는 저 말들이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며칠 뒤 파업 주동자가 공장 근처 하수로에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채 발견되었다.
그깟 환풍 시설 설치하는 데 줄리아 드레스 몇 벌 값밖에 안 든다고 했는데.
고작 그런 돈도 노동자들을 위해 쓰는 게 아까워서 폭력을 가하다니…….
마르셀의 부인인 줄리아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레이브 용병단은 정말 못 하는 일이 없다니까요? 얼마 전에 도망친 제 하녀도 잡아다 주었답니다.’


‘여러분들도 교육이 필요한 사용인들이 있다면 그 용병단에 몇 시간만 맡겨 보세요. 제 소개가 있으면 더
신경 써 줄 거예요.’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누를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마르셀과 줄리아는 심기가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용병단에 뒷일을 의뢰하곤 했다.
그런 행태가 귀족에겐 명예롭지 않은 일이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기에 다른 귀부인들은 마르셀과 줄리아에게 장단을 맞춰 주면서도 동시에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줄리아는 황후의 측근 시녀이자 사촌이기까지 했는데, 그런 그녀의 눈 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저 정도로 잔혹하고 매정한 사람들은 사교계에 없었다.
이번에도 왠지 그 그레이브 용병단을 고용해서 우리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단체로 쓰러져 있었던 걸까?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그레이브 용병단은 나도 잘 아는 용병단이었다.
이 제국에는 크고 작은 용병단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두 곳 중 한 군데가 그레이브
용병단이었다.
주로 상류층의 의뢰를 받아 치정이나 원한의 대상을 죽기 직전까지 패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아니면 거액의 도박 빚을 대신 받아다 주기도 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가차 없고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라는 건 분명했다.
집에 오는 동안 미처 떠올려 보지 못한 생각들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잠시 여기 계셔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집에 가도 될 것 같습니다.’

“…….”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바람처럼 나타난 내 남편.
그사이 쓰러져 버린 놈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내 심장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예. 강, 해졌습니다. 부인께서도 보신 것처럼.’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모양이었다.

* * *

‘레벨이 2 로 올랐습니다!’
드디어……!
달칵.
문이 닫혔다.
방으로 들어온 알렉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살짝 허리를 굽혔다.
겨우 레벨이 1 에서 2 가 되었을 뿐인데 이렇게 기쁘다니. 그는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이런 일로 기뻐하는 게 우습긴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격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하.’
이윽고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든 그의 안색은 복잡한 심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알렉은 애써 입술을 꾹 다물며 그의 방 안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커튼이 걷힌 창문 너머에서 달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문득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새집으로 이사를 했고,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시스템이 열렸고, 마나를 활성화시킨 데다가 사역령을
처음으로 포섭했다.
번화가에 나갔다가 홀든 방직 유니 언의 세 사람을 만나기도 했으며, 그 일로 바로 오늘 경험치를 50 이나
얻었다.
그리고 루이제와는.
“…….”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대하기 편해졌다.
이 모든 일들의 결과가 겨우 레벨 2 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레벨이 600 도 넘었던 그가 겨우 레벨 1 에서 2 가 되었다고 환호하다니.
세계관의 난이도가 전생보다 훨씬 높았다.
진짜 알렉시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직 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들키면 애정도를 얻지 못할 테니까…….’
잠시 그렇게 있다가 슬며시 눈을 뜬 알렉은 시스템을 확인했다.
현재의 상태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냉정한 초보 남편’ 님의 현재 상태를 알려 드립니다.]


[레벨 2]
[애정도 1, 경험치 30]
[신뢰도 11, 명성 337]

‘애정도가 1? 아…….’
지금까지 그가 모은 애정도는 총 4 였다.
그러나 레벨이 오르면 레벨을 올리고 남은 애정도와 경험치만 수치상으로 표시되는 모양이었다.
신뢰도와 명성은 레벨 업에 필요한 수치는 아니어서인지 지금까지 얻은 점수가 그대로였다.
알렉은 레벨을 3 으로 올리기 위해 필요한 애정도와 경험치도 확인해 보았다.
그의 애정도와 경험치 상태를 알리는 바의 맨 오른쪽 끝에는 각각 6 과 60 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레벨이 1 이었을 때 애정도와 경험치가 각각 3 과 30 씩 필요했으니 딱 두 배가 늘었다.
애정도만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경험치도 신경이 쓰였다.
둘 다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레이브 용병단이 자신을 공격한 일을 겪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애정도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발생한다.
레벨을 올리는 데에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은 그는 퀘스트를 기다리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그가 먼저 퀘스트에 접근해야 했다.
어서 레벨을 올리고 최종 악역인 악센을 해치워야 그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알렉에게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상대로 카슨의 전투력은 레벨 15 였다. 다른 용병단원들도 10 에서 15 사이의 수준이었다.
그런 용병들 열 명을 한 번에 녹다운시켰더니 지금 그의 마나와 체력도 바닥까지 하락해 있었다.
진작 마나를 활성화시키지 않았다면 그에게 승산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회복을 기다리듯 눈을 감았다.
동난 체력과 마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차오르기 마련이었다.
회복 포션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시스템 속 상점도 닫힌 상태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3 화

그의 인벤토리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상점과 인벤토리는 레벨이 훨씬 더 높아야 개방되었다.
기드온.
알렉은 그레이브 용병단장 카슨에게 붙여 놓았던 기드온의 머릿속을 확인했다.
앞으로 카슨의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분명 카슨은 자신을 고용한 사람을 찾아갈 것이고, 그들의 반응을 확인해야 앞일을 대비할 수 있었다.
곧이어 알렉은 기드온의 눈을 통해 보이는 장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카슨이 자신의 의뢰인을 찾아간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 * *

“뭐?”
열린 창문 밖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자신의 전 재산을 훔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황당하고 험악한 표정이었다.
마르셀의 반응에 카슨은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설마 그 몰락한 공작 놈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 저한테 일부러 말도 안 하셨던 겁니까?”
“……하.”
마르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감히 내 집무실까지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그리 말한 마르셀은 내심 긴장감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아침부터 나타난 카슨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 한쪽이 눈탱이 밤탱이가 되다 못해 푸르딩딩하게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에는 염색약을 얼굴에 잘못 부어서 저렇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알렉시스에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카슨까지 알렉시스한테 당했다고?’
마르셀 자신과 개리슨, 데미안은 싸움이나 힘과는 무관한 귀족들이니 그러려니 했다.
알렉시스 그 자식이 갑자기 어떻게 돌아 버린 건지는 몰라도, 그들이 힘도 못 쓸 정도로 두들겨 맞은 건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용병이 아닌 고귀한 귀족이니까.
그런데 용병단장이기까지 한 카슨도 알렉시스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것 아닌가?
카슨은 이 릴트 제국에서 힘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카슨의 용병단은 제국에서 규모가 두 번째로 클 정도로 막강했다.
첫 번째로 큰 용병단인 ‘사자의 송곳니 용병단’과는 다르게 황제의 은밀한 비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 규모의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이 낯빛까지 파래질 정도로 얻어맞았다니 충격적이었다.
당장 마르셀 본인도 신분을 떼고 카슨과 맞붙으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겨우 숨통만 건질 것이다.
‘알렉시스, 그 새끼 진짜 뭐지……?’
카슨이 위협적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발뺌하시면 후작 각하와 신뢰 관계를 이어 가기가 제 입장에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웃기는군. 카슨 자네, 의뢰도 완수하지 못해 놓고 남 탓이나 하는 쪼잔 한 놈이었나?”
“뭐요?”
“그레이브 용병단도 이제 한물간 모양이야. 고작 평범한 몰락 귀족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우습군.”
“…….”
카슨이 말없이 이를 갈았다.
침묵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보다 더 죽일 듯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르셀은 일부러 카슨을 더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든 알렉시스를 죽지 못해 살 정도로 망가뜨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알렉시스에게 당했던 날을 떠올리면 속에서 부아가 치밀고 분노가 들끓었다.
‘개자식, 감히 우리의 자존심을 뭉개고도 멀쩡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지만, 카슨이 아니라면 딱히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카슨이 피식 웃었다.
“시치미를 떼시는 거 보니 아주 잘 알겠습니다. 우리 용병단을 우습게 여기신 거 후회하실 겁니다.”
‘저 위아래도 없는 새끼가…….’
마르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열려던 찰나, 카슨은 이미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쾅.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 있던 줄리아는 흠칫 멈춰 섰다.
남편의 집무실에서 카슨이 쾅쾅대며 나가고 있었다.
마르셀의 부인인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은 열린 문틈 사이로 마르셀의 분위기를 살폈다.
‘제기랄, 저 새끼 또 화나 있네.’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남편이 그녀의 비밀을 알아채기 직전이었다.

‘내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어. 내 영원한 물망초인 당신이 나를 배신하고 다른 놈하고


붙어먹었다는 소문 말이야.’
‘뭐, 뭐라고요? 대체 누가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죠? 말도 안 돼요!’

줄리아는 공들여 다듬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마르셀은 사랑에 있어서는 순수한 남자였다.
그러나 배신을 당하면 누구보다도 잔혹하게 갚아 주었다.
그녀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손가락이 다 잘리고 머리카락도 빡빡 밀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르셀이 무서워도 줄리아는 욕망을 포기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정부가 있다는 건 사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릴트 제국의 사교계는 겉치레일 뿐인 평화와 행복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사실이어도 갈등이 될 만한 일은 그 누구도 소문내지 않았다.
그건 사교계의 철칙이고 불문율이고 상식이었다.
속으로는 썩어서 곪아 들어가고 있어도 겉으로는 누구나 동경할 만큼 화려하고 눈부셔야 했으니까.
‘어떡하지. 누구를 들킨 거지?’
그녀의 정부는 많았다.
우선 마르셀의 친구인 개리슨이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부 중 그 누구도 그녀와의 관계를 폭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녀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복수를 당할 테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아는 이내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곤 결론 내렸다.
‘이 멍청한 여편네들이 설마?’
사교계의 귀부인들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억하심정을 품은 게 분명했다.
겉으로는 하하 호호 모두가 평화로운 사이를 유지했지만, 돌아서면 서로 어마어마한 험담을 하는 것을
줄리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사교계의 퀸.
황후는 황궁에 따로 있었지만 황궁 밖에서는 줄리아가 귀부인들 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황후가 아끼는 사촌인 데다가 누구나 선망하는 화려한 미모와 사교계를 휘두를 만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편이 소유한 방직 공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어서 남들에게 아쉬울 게 없었다.
돈으로는 못 할 일이 없었기에 다른 귀부인들의 기를 쉽게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누가 그녀에게 가장 많은 적의를 품고 있을까 줄리아는 고심해 보았다.
‘내 정부들의 부인? 내가 자기들 남편한테 꼬리를 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니면 내가 능력 있는
시녀장을 빼앗아 간 부인? 그건 더 많은 봉급으로 인재를 거래한 스카우트라고! 아니면 드레스 예약을
새치기당했던 부인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선수를 치는 건 당연해!’
그 이후로도 수없이 고심하던 줄리아는 이내 포기했다.
줄리아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귀부인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 가 봐야겠어.’
줄리아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자신이 사교계에서 퇴출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대체 누가 그런 이야기를 마르셀한테 흘린 거야?”
순간, 설마 싶은 사람 한 명이 떠올랐다.
“……!”
2 년 전 그 여자가 했던 경고가 문득 생각난 것이다.
쩌저적.
평화로웠던 줄리아의 세계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 * *

“대체 누가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 까요?”


“줄리아를 상대로 간도 크네요.”
“설마 상상도 못 했어요. 영원히 들킬 일 없을 줄 알았거든요.”
“불쌍한 줄리아…….”
줄리아를 제외한 귀부인들이 호화로운 티 룸에 모여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마르셀이 줄리아의 정부를 찾겠다며 여기저기 말을 흘리고 다닌 탓에 사교계에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귀족들이 정부를 두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르셀과 줄리아는 다른 귀족들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마르셀은 진심으로 줄리아를 영원한 자신의 물망초라고 여기며 사랑했고, 줄리아 또한 마르셀에게 정성을
다했다.
두 사람은 사교계 최고의 잉꼬부부로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줄리아는 자신의 욕망과 배신을 철저하게 숨긴 채 다른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마르셀이 줄리아의 정체를 알면 과연 어떻게 될까?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마르셀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 아내에게 분노할 것이고, 줄리아는 지금 같은 부유한 생활과 평화를 잃게
되겠지.
“……정말이지 걱정되네요. 줄리아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묻힌다면 제일 좋겠지만 과연 그럴지…….”
“마르셀이 느낄 배신감도 상당할 거예요. 줄리아를 진심으로 아꼈잖아요.”
“불쌍한 줄리아…….”
차를 마시던 귀부인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근슬쩍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줄리아에게 닥쳐올 불행을 고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줄리아에게 당한 게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4 화

남편을 빼앗긴 귀부인들이 이 자리에만 세 명이 있었고, 그 외에도 줄리아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받아


주느라 염증이 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줄리아는 사교계의 퀸이자 황후의 사촌.
괜히 줄리아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황후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었고, 방직 공장에서 생산해 내는 품질 좋은
원단과 드레스는 구경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귀부인들은 줄리아에게 맞섰다가 사교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줄리아와 다툰 후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시골로 가 버린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줄리아가 없는 지금도 말을 아끼던 귀부인 중 하나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런데 정말 누가 하워드 후작에게 그런 말을 흘렸을까요?”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가 봐요. 사용인 중 하나라면 목숨이 날아갈 거고, 귀족이라고 해도 명예가 박살이
날 텐데요.”
“줄리아가 누군지 알아내서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도 시간문제네요. 그럼 정말 사교계에서 머리도
들지 못할 거예요.”
“누군지 몰라도 정말…….”
“…….”
……정말?
그 뒷말을 기다리듯 귀부인들의 눈빛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내 다들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기며 괜히 헛기침을 하거나 차를 마셨다.
겉으로는 줄리아를 한껏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솔직한 속마음을 그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줄리아의 귀에 들어가면 괜한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귀부인들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걸?’
절대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못했지만, 줄리아의 비밀을 폭로한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쩜, 줄리아가 두렵지도 않은 걸까?’
‘분명히 누군지 밝혀질 텐데, 무척 용감한 사람인가 봐.’
‘어떻게 줄리아를 엿 먹일 생각을 했지? 벌써부터 너무 통쾌해.’
‘그런데 누구지? 짐작도 안 가는 걸?’
‘평소에 줄리아의 눈치를 안 봤던 사람일까?’
‘이참에 줄리아가 망해 버려서 사교계에서 머리도 못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귀부인들은 아닌 척 찻물만 호로록 마셨다.
그러던 어느 순간, 대뜸 로즈가 말했다.
“설마 스칼렛 당신인가요?”
“네? 저요?”
“당신 남편이 줄리아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무척 상심했었잖아요. 점성술 사까지 고용해서 남편과
줄리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면서요.”
“어머, 저 아니에요!”
졸지에 지목을 당한 스칼렛이 기겁을 했다.
“나는 로즈 당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걸요? 당신이 아끼는 시녀장을 줄리아가 빼앗아 갔잖아요. 그
일 때문에 줄리아에게 원한을 품은 건가요?”
“저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 일은 어디까지나 제가 시녀장을 줄리아에게 양보한 거라고요!”
“웃기지 말아요! 당신이 시녀장을 빼앗겨서 원통하게 울었던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기가 막혀, 정말! 그러는 스칼렛 당신도 남편 빼앗기고 운 거 누가 모를 것 같아요?”
“……!”
스칼렛의 말문이 틀어막혔다.
스칼렛처럼 다른 귀부인들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찻잔을 쥔 로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우리는 모두 줄리아에게 당한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서로 솔직한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줄리아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뒷말이라도 했다가는 누가 줄리아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늘 예 외였던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줄리아는 늘 그 여자의 험담을 했고, 다른 귀부인들은 줄리아의 말에 동조하기 바빴다.

‘루이제는 다른 나라에서 와서 그런가 정말 릴트 제국에 적응을 못 한다니까요. 언제까지 루이제를 이해해


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런. 줄리아의 상심이 크겠어요.’
‘머리가 얼마나 멍청하면 매번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걸까요? 부부는 점점 닮는다더니 남편 머리를
따라가나 봐요.’

줄리아는 피곤한 듯 머리를 짚으며 힘들어했다.


그러나 줄리아는 루이제를 길들이려다가 한 방 먹었다.
그건 벌써 2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루이제. 우리 릴트 제국의 사교계에서는 매달 초 수요일에 우리 하워드 후작저에 와서 차를 마셔야


한답니다.’
‘그런데 루이제는 1 년 가까이 한 번도 온 적이 없네요.’
‘황후 폐하께서도 루이제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을 주시하고 계세요. 언제까지 우리가 당신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제국의 공작 부인이라면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법이에요. 그 의무를 다하고 싶지 않다면 공작과
이혼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지금까지 당신을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네요.’
‘대신 당신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 한 명이 교육을 받았답니다. 이쯤 하면 루이제 당신도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줄리아는 루이제 앞에 브렌트 공작가의 어린 하녀를 내던졌다.


캐시라는 이름의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하녀는 이미 채찍질에 당해 처참한 상태였다. 여린 피부에
생채기가 가득했으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공작가의 심부름을 하러 수도에 나갔다가 그녀를 노리고 있던 줄리아의 하인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캐시가 그렇게 될 때까지 다른 귀부인들은 차마 줄리아를 말릴 수 없었다.
어떻게 사용인을 저토록 잔인하게 고문할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루이제가 줄리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제의 반응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루이제는 한동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캐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담담한 듯 안쓰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이 아팠겠구나, 캐시.’


‘마, 마님…….’
‘지켜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귀부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루이제의 모습에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줄리아도 조금 굳은 눈으로 루이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루이제는 엄숙한 태도로 캐시에게서 몸을 돌리더니 줄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루이제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줄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루이제는 줄리아의 바로 곁에서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줄리아만이 들을 수 있었는데, 무척 차가운 한기가 서려 있었다.

‘괜한 짓을 했어, 줄리아. 난 당한 건 그대로 갚아 주거든.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게 될 거야.’


‘지금 무슨-.’
‘더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무는 게 좋겠어. 아니면 내가 정말 더 큰 소란을 낼지도 모르거든.’
‘…….’
‘언젠가 반드시 이 대가 치르게 해 줄게.’

줄리아의 굳은 안색에 미세한 금이 갔다.


루이제가 뭘 어쩌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 이상 자극하면 안 된다는 본능 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감히 나한테 대들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줄리아는 자신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억지로 웃어 보이며 다른 귀부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루이제가 잘못을 시인했네요. 전 너그럽게 루이제를 이해해 주기로 했답니다.’

여기서 루이제가 자신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다른 여자들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루이제가 말한 ‘더 큰 소란’이 자신에게 무척 불리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그제야 다른 귀부인들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줄리아는 배려가 넘치네요. 감탄했어요.’


‘물론이죠. 넓은 마음이야말로 정숙한 부인의 기본 소양이잖아요. 루이제가 캐시를 치료해야 할 테니
우린 이만 나가 보는 게 좋겠어요. 그럼 수고해요, 루이제.’

줄리아는 어여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속으로는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루이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협박하듯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루이제의 기세가 너무도 삼엄해서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줄리아가 마치 도망을 치는 것처럼 걸음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귀부인들은 내심 의아했다.
루이제의 얼굴을 보면 전혀 잘못을 인정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던 귀부인 중 하나가 소리 냈다.
“……혹시 루이제가 아닐까요?”
“네? 루이제는 지금 수도에 없잖아요.”
“그래도 줄리아의 약점을 마르셀에에게 흘릴 만한 사람이 우리 중에 루이제 말고 또 있나요?”
“음…….”
“그렇긴 하네요…….”
귀부인들은 차마 부인하지 못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외국에서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성격이 원래 유별난 건지 루이제는 사교계와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장 위화감이 들었던 건 루이제에게서 느껴지는 조용한 위험이었다.
줄리아가 대놓고 비아냥대도 루이제는 줄리아보다 더 고고한 눈빛으로 웃어 주었다.
다른 귀부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공작가의 위세를 믿고 줄리아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는, 줄리아의 뒷배에는 공작가보다 더
지엄한 황후가 있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마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5 화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제와 친밀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섞일 수 없다는 느낌만 강해졌다.


사교계의 여왕이나 다름없는 줄리아를 괘념치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루이제는 어쩜 저렇게 두려운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걸까?’
일부 귀부인들은 그런 루이제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꽤 부러웠다.
사교계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브렌트 공작가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 배경에 줄리아의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귀부인들은 어쩐지 루이제가 진심으로 걱정되지 않았다.
자신들에겐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왠지 루이제라면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정말로 루이제일까요?”
귀부인들이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루이제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지금, 그녀의 존재감이 문득 크게 느껴졌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부인들의 고개가 일제히 화려한 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어느 귀부인이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윽고 선포라도 하듯이 심각한 얼굴로 소리 냈다.
“누군지 알아냈어요.”
“네?”
“누군데요?”
귀부인들이 품위도 잃고 벌떡 일어날 만큼 크게 놀랐다.
“글쎄 마부 하나가 고문을 당하다 못해 줄리아에게 실토한 모양이에요. 마르셀이 절대 비밀로 하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래요?”
“그게 누구예요?”
귀부인들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냐면…….”
“……?”
누, 누군데!
귀부인들은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다그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귀부인이 두어 번 심호흡을 하더니 마침내 말했다.
“전 브렌트 공작 부인이요.”
“……네?”
“우리가 아는 루이제 말이에요!”
“…….”

* * *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르셀과 줄리아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
벌써 2 년도 더 지난 일이 꿈에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캐시는 나를 가까이에서 도와주던 하녀였다.
집안이 가난해 열세 살부터 공작가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성정이 순하고 착한 데다가 말귀도 잘 알아들어서 나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얗고 귀여운, 내 이복 여동생들을 닮아 더 정감이 가는 아이였다.

‘출혈은 멎었지만 염증이 심해서 열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저 정도 상태라면
만일의 경우도 대비하셔야 합니다. 마님…….’
‘…….’

의원은 캐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했던 의식도 잃은 채 캐시는 아픈 신음만 흘리며 고열에 시달렸다.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의식이 혼미한 캐시에게 다가갔다. 거친 손을 잡으며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힘을 내렴, 캐시. 넌 꼭 다 나아서 일어날 수 있어…….’

나는 캐시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캐시는 일주일을 꼬박 앓다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직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훗날 제국 최고의 제봉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는 그녀가 부모의 반대 없이도 학교에 갈 수 있는 열여섯 살이 되면 제봉 학교에 보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캐시가 나를 선망하며 했던 말들도 가슴에 사무쳤다.

‘마님처럼 훌륭한 분을 모실 수 있어서 저는 정말 행운아인 것 같아요.’


‘전 마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분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너무도 미안했다.
캐시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죄책감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캐시를 데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캐시가 안 보였을 때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기만 했어도 죄 없는
아이가 이리 허무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줄리아를 살인죄로 고소했지만, 의회에서는 그녀에게 푼돈밖에 되지 않는 벌금을 물렸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지켜 주지 못하는 게 이토록 무력하고 괴로운 느낌이었구나.
나 때문에 사람이 죽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앞날이 창창했던 맑고 순수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생명과 삶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짓밟아 버린 줄리아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캐시의 죽음 알고 난 후에도 줄리아는 비웃음과 함께 ‘저런, 안됐네요. 의사가 형편없었던 모양이에요.’
라는 말로 비아냥거렸을 뿐이었다.

‘루, 루이, 제.’


‘…….’

방 안에서 홀로 캐시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내 귀에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방으로 먼저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이번만큼은 왜 나를 보러 온 건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렉도 캐시의 죽음에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내 방 한가운데에서 달빛을 받고 선 그는 마치 조각상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알렉.’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이런 일들을 여러 번 겪었다고 했다.


악센은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알렉의 시종들을 대신 괴롭혔다고.
나는 그 순간 알렉이 그동안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건지 절감했다.
나름대로 그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이 참지 않으면 그 악의가 죄 없고 더 약한 사람들에게 향하니까.
나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드레스 자락이 내 손아귀 아래에서 힘껏 구겨졌다.
그 기억 속 감정이 되살아나듯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였다.
촉촉한 물기가 속눈썹에 맺혀 있는 게 느껴졌다.
불현듯 알렉이 번화가에서 마르셀과 그 친구 놈들을 패 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원지에서 우리를 미행한 용병단들이 눈 깜짝할 새에 쓰러져 있던 장면도 떠올랐다.
쿵쾅쿵쾅.
심장이 또 격렬하게 반응하고,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았다.
이제 알렉은 전처럼 참지 않는다.
내 마음속 두려움도 막강해진 그의 힘으로 차츰 부서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지켜야 할 사람들도 없으니, 더 참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야 줄리아에게 갚아 줄 때가 온 것 같았다.

* * *

알렉은 아침을 먹으며 기드온의 눈과 귀를 통해서 카슨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르셀에게 무시당한 카슨은 알렉에게 보복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동안 용병단을 정비하고 작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드디어 오늘 출정을 하는지 아침부터 용병단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먹을 만해요, 알렉?”
그때 들려온 소리에 알렉은 눈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루이제가 포근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
알렉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루이제가 입가를 당기며 살포시 그에게 웃어 주었다.
그 희미한 미소가 그 어떤 귀한 여인의 초상화보다 품위 있어 보였다.
‘흐음.’
동시에 알렉은 의아함을 느꼈다.
유원지에 다녀오는 길에 용병단을 쓰러뜨린 후 며칠이나 지났다.
그러나 루이제는 그날 일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하긴 했지만, 동시에 의아한 기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용병들을 기절시킨 사람이 누군지 루이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범상치 않아 보일 자신의 스킬을 숨기지 못했으니까.
이전에 정체를 들킬 뻔했을 때, 루이제는 알렉시스의 힘이 모종의 이유로 강해졌다고 믿었다.
거기서 조금 더 특별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으리라.
그런데 지금처럼 아예 그날 일을 언급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많이 먹어요, 알렉.”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루이제는 이내 자신의 몫의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알렉은 잠시 루이제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이며 식기를 들었다.
애정도와 신뢰도가 아직 무사한 것을 보면 딱히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다행인 일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애정도를 얻는 데에 공을 들이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이전에 경험치를 왕창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알렉은 다시 기드온의 머릿속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카슨과 함께 모인 용병단원들만 해도 60 명은 될 것 같았다.
한 명당 경험치가 5 였으니 저들을 모두 쓰러뜨리면 무려 300 에 해당하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6 화

카슨이 자신의 용병단원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몰락한 공작 놈을 잡지 못하면 우리 용병단의 명예가 갈가리 찢긴다. 지금도
후작이 내 자존심을 건드려서 이 심장이 날뛰고 있다고.”
카슨이 바득바득 이를 갈며 거친 손을 제 왼쪽 가슴 위로 올렸다.
알렉시스에게 당한 것도 분한 일인데 마르셀에게 모욕적인 말까지 들은 탓에 카슨은 전의를 불태웠다.
“우리 그레이브 용병단의 사활을 걸고 어떻게든 그놈을 잡아야 한다. 여차하면 죽여도 상관없으니 다들
죽일 각오로 임해!”
“가, 가능하겠습니까, 단장님. 사냥 한 번 안 해 봤다더니 움직임이 아주 신출귀몰했습니다.”
카슨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너 같은 놈은 이 의뢰에서 빠져라. 아니 내 용병단에서 나가.”
카슨이 부관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단원들이 겁에 질린 사내를 끌고 나갔다.
“단장님! 단장님!”
아마 무사히 내쫓지는 않을 듯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단장님! 찾았습니다!”
“뭐?”
“그놈이 머물고 있는 집 말입니다.”
“그래? 역시 북부 쪽에 있었나?”
“그렇습니다.”
“확실해?”
“멀리서 얼굴도 확인했습니다!”
“그랬군. 알겠다. 오늘 밤 해가 지면 바로 기습하는 걸로 하지.”
그런 대화들을 엿보며 알렉은 식사를 이어 나갔다.
용병단의 사활을 걸 정도라니, 겨우 그 한 명을 잡기 위해 이렇게나 정성을 기울여 줄 줄이야.
이런 정성에는 보답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알렉은 방으로 돌아가 용병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며칠 전에는 겨우 10 명이라 가능했지만 용병 수십 명을 상대하려면 현 재의 레벨로는 부족했다.
그가 직접 해치워야 경험치가 오르니 기드온을 이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스스로의 힘을 더 키워야 하는 상황.
우선 알렉은 시스템 속 체력 단련 퀘스트를 열어 기초 근력 운동을 마쳤다.
시스템의 HP 가 조금이나마 오른 것이 보였다.
아직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 알렉은 마나를 2 서클까지 성장시켰다.
1 서클을 만들었을 때보다 몇 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체력 소모도 꽤 되었다.
조만간 또 서클을 성장시키려 했다가는 소위 주화입마라도 당할 것 같았다.
알렉의 체력은 2 서클로 마나를 활성화하느라 떨어졌지만, 너무 늦지 않게 모두 회복했다.

* * *

깊은 밤.
알렉은 가족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집 밖으로 나왔다.
용병단은 그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어 와 잠든 그와 루이제를 납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저택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은 기드온을 공중으로 올려 보내 그 일대를 살펴보았다.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에서 세 무리가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한 조에 20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총 60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동원되다니.
용병단 전체가 동원된 건 아니었지만, 한 임무에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투입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중 용병단장인 카슨은 남쪽에서 다가오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럼 남쪽은 마지막에 처리해 볼까?’
알렉은 우선 동쪽에 있는 용병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띠링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반가운 알림음이었다.

[돌발 퀘스트 발생!]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2)~]
[한 명의 체력을 완전히 소모시킬 때마다 경험치가 5 씩 올라갑니다.]
[퀘스트 보상]
[경험치(?), 명성(?)]

‘역시 공격을 받을 때 퀘스트가 뜨는구나.’


알렉은 빠르게 상태 창을 훑어보았다.
이번에는 루이제가 함께 있지 않아서 그런지 퀘스트 보상으로 애정도와 신뢰도는 사라지고, 대신 명성이
생겼다.
용병단이 60 명이니까 모두 쓰러뜨리면 경험치 300.
겨우 300 밖에 되지 않는 경험치를 얻을 생각에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경험치가 300 이면 레벨을 4 까지도 올리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지금은 애정도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알렉은 레벨 2 가 되면서 새로 열린 스킬을 확인했다.
그중 공격과 관련된 마법형 스킬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초보 남편의 간지럼: 번개 같은 일격]
[인식한 적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릴 만큼 강한 전류를 발생합니다. 정전기처럼 가볍게 간지럽힐 수도
있습니다. 사용자가 강도와 경로를 제어해야 합니다.]
[마나가 소모됩니다.]

해괴한 스킬 명에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냥 전기 스킬 같은데……?’
그런데 왜 굳이 초보 남편의 간지럼…….
이름을 왜 이렇게 지은 걸까?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스킬 명을 속으로라도 읊어야 하는 그는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더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알렉은 레벨이 한 단계 더 높아진 신속 스킬로 빠르게 움직였다.
‘스킬. 신속.’
그가 지나간 자리에 흙먼지가 기습을 맞은 듯이 피어올랐다.
2 서클이 되자 1 서클일 때와는 다르게 마력이 묵직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나량도 더 많아진 덕에 마법형 스킬을 더 오래 쓸 수 있게 되었다.
용병단원들은 일정 간격을 둔 채 서로 흩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각자의 위치를 파악한 그는 순식간에 그 틈새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
휙, 파바박.
그가 조절하는 대로 섬광이 적들의 옆구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용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했다.
“……!”
그저 눈앞에 반짝이는 섬광을 마지막으로 보고 의아해했을 뿐이었다.
마치 번개가 소리 없이 지나간 것처럼, 신속하고도 눈부시며 조용한 공격이었다.
스무 명의 HP 창이 동시에 0 으로 하락했다. 의식을 잃은 용병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저들은 체력을 회복해야 깨어날 것이다.
쓰러질 때는 미처 느끼지 못한 격통과 함께.
띠링.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총 경험치가 95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올랐음을 알려 주는 알림음이 거의 한꺼번에 스무 번이나 울렸다.


‘그런데 왜 100 이 아니지? 스무 명이 아니라 열아홉 명이었나?’
알렉은 의아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경험치 95 를 확보한 대신 그의 마력이 조금 줄어든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용병단도 똑같은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기에 마력은 충분했다.
알렉은 잠시 기드온을 통해 집 안을 확인했다.
다행히 여전히 가족들 모두가 단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스킬. 신속.’
이제 그는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뒤늦게 합류하려고 했던 용병단원 중 한 명이 벌벌 떨며 황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 * *

“단장님! 단장님!”
용병단원 하나가 헉헉대며 카슨을 찾았다.
“아, 아직 무사하셨군요! 빨리 여기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뭐? 저 새끼가 잠꼬대를 하나,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헉, 헉.”
중요한 말을 겨우 내뱉은 용병단원은 넘어갈 듯한 숨을 잠시 몰아쉬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려왔는지, 목 안에서 단물이 솟구쳐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카슨과 단원들은 그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어서, 어서…….”
용병단원은 자신이 본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번개 같은 빛에 당해 쓰러졌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속에서 훤칠한 키에 체격도 큰 아름다운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쓰러뜨린 빛이 그 남자의 뒤로 살벌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이제 곧 저 남자도 죽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의 눈빛을 본 순간 용병단원은 깨달았다.
저 번개 같은 빛이 바로 저 남자의 힘이었다.
어쩐지 외모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뭘까?
설마 전설 속 번개의 신 제우스?
“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요!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7 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목숨이 위험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위협적인 힘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슨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일갈했다.
“등신 같은 소리 할 거면 내 용병단에서 나가라. 지금 이 순간부터 네놈은 퇴출이다.”
“예?”
카슨은 자신의 길을 막은 단원을 경멸스럽게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저딴 개소리를 하다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정면을 응시한 카슨은 하마터면 심장이 땅 밑까지 추락할 뻔했다.
“……!”
저 앞에 웬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다른 단원들도 깜짝 놀라 흠칫 물러서거나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둡게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위압감이 상당한 자였다.
‘뭐야 저 새끼는…….’
카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을 응시했다.
언제 나타난 거지?
육감이 뛰어나고 본능적으로 인기척에 민감한 카슨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라니.
아무리 열 받는 말을 들었다고 한들 이 정도 거리에서 감지하지 못한 건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그때 눈앞의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 구면인가?”
“……?”
카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가 다가오자 높은 콧날이 순간적으로 달빛에 번득였다.
그리고 한겨울의 차가운 호숫물보다 더 차갑게 빛나는 두 눈동자.
문득 카슨은 자신이 이미 저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다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는데.
카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알렉시스 마이어스.
그 몰락한 공작인가……?
“저, 저 남자입니다! 저 남자가 우리 단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대뜸 뒤에서 아까 그 용병단원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용병단원들이 의아한 눈빛을 밝혔다.
“……뭐?”
카슨도 귀를 의심하며 날카로운 눈매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알렉시스를 응시했다.
누가 누굴 죽여?
알렉은 겁에 질린 채 벌벌 떠는 용병단원 하나를 응시했다.
어쩐지 수가 안 맞는다 싶더니 아까 도망이라도 친 모양이었다.
용병들을 죽인 건 아니지만, 어쩌면 저 목격자 덕에 일이 쉽게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카슨이 단칼에 부인했다.
“개소리 작작 해. 누가 죽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카슨은 그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다른 단원들은 술렁였다.
“카슨 마르틴.”
알렉은 굳이 카슨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으며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는 무감할 정도로 차분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넌 절대 이 의뢰를 성공할 수 없다. 날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대체 이게 무슨-.”
어떻게 된 거지?
카슨은 자신이 습격하리란 것을 알렉시스가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던 걸까?
뭐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여기서 그는 알렉시스를 잡고, 흩어진 다른 단원들은 저택에 침입해 공작 부인을 붙잡으면 그만이었다.
카슨은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칼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어디 한번-.”
그러나 카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 바람처럼 휙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초월적인 움직임은 전에도 한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감지한 그는 곁눈질로 무언가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빛이 번쩍번쩍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툭, 쓰러지는 둔탁한 소음.
한두 명이 아닌 사람들이 땅으로 쓰러졌다.
“…….”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카슨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그레이브 용병단장인 그가 이렇게 쫄면 안 되는 건데-!
심지어 그는 이 릴트 제국 황제가 인정한 용병단장인데!
툭, 툭.
이윽고 뒤쪽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감하고 가벼운 발소리였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듯 초연하고, 두려운 것 하나 없는 듯한 소리.
이런 발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카슨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그럼에도 싸우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투지를 불태우려던 순간이었다.
“살려서 돌려보내 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다. 누구든 세 번 봐준 적은 없거든.”
“…….”
“마르셀에게 똑똑히 전하는 게 좋을 거야. 승산도 없는 의뢰에 쓸 돈이 있으면 방직 공장이나 새로
지으라고.”
“-!”
카슨은 입을 열었지만 차마 소리 낼 수 없었다.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
파바밧.
알렉의 손끝에서 밝은 빛이 튀었다.
카슨의 몸이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띠링.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돌발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2)~]
[퀘스트 보상]
[경험치가 총 300 올랐습니다.]
[명성이 100 올랐습니다.]

[불꽃 같은 돌발 퀘스트 성공으로 보너스 경험치 3000 이 추가로 지급되었습니다!]

6. 너무 잘 맞는 키스

“으.”
어느 상쾌한 아침.
나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간밤에 무척 푹 잘 잤는지 눈을 뜨자마자 피로가 다 풀린 것처럼 기운이 났다.
침대에서 내려가자 나이트가운의 치맛자락이 내 무릎 아래로 쏟아지며 살랑였다.
나는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손을 뻗었다가 아차, 했다.
아직도 공작 부인이었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니.
어정쩡하게 허공에 뜬 손을 보던 나는 살포시 손을 말아 쥐었다.
본래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가장 먼저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들을 찾았다.
그러면 그들은 따뜻하게 데운 차와 세숫물을 가져왔고, 나는 얼굴을 촉촉하게 씻고 양치를 한 후에 따끈한
차를 마셨다.
늘 그런 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준비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홀로 커튼을 젖히고는 창문을 열었다.
산뜻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난간에 팔을 걸치고 환한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모든 것이 한가하고 고적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캐시가 나오는 꿈을 꿨기 때문일까?
나는 문득 사용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내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보살펴 주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늘 북적북적하게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들.
그들 덕분에 그나마 나는 내 일상에서 외로움을 덜 느끼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사용인들은 늘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니까.
그들이 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었다.
“휴우…….”
심호흡을 한번 한 나는 이내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같이 있을 때 더 잘해 줄 걸 그랬다.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런데 응접실로 내려가니 나보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아, 심심해 돌아 버릴 것 같아.”
“엘로이 너도 피아노를 배우려무나.”
“…….”
시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피아노 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엘로이는 쿠션을 안은 채 소파 위에서 마구
뒹굴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홀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양들은 잘 있나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현관문 아래에 웬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뭘까?
주워 보니 사교계에서 주로 쓰는 질 좋은 종이였다.
나는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브렌트 공작, 공작 부인.


잘 지내고 계시나요?
그간 격조하였네요. 우연히 계시는 곳을 알게 되어 이렇게 안부를 여쭙니다.
비록 공작 부부께서는 사교계를 떠났지만, 저희는 하루도 두 분을 잊지 않았답니다.
우리 릴트 제국 사교계의 정이 그리 얄팍한 게 아니잖아요.
저희는 두 분이 더 이상 공작 부부가 아니더라도 그간 두 분과 쌓은 정을 쉽게 외면하지 못했답니다.
진심으로 두 분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두 분께서 떠나신 후 사교계의 분위기가 뜻하지 않게 위축이 되었답니다.
이럴수록 서로 힘을 북돋아 준다면 우리들의 사이가 더욱 견고해질 거예요.
시간이 되신다면 이번에 열릴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브렌트 공작 부부를 그리워하는 귀부인 일동 드림.]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8 화

‘이게 뭐람…….’
나는 진심으로 얼이 빠져 입술이 벌어졌다.
우리가 사는 집은 어떻게 알았는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르셀과 그 친구 놈들이 우리한테 사람까지 붙였는데, 다른 사교계 귀족들이라고 알아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알렉을 무도회에 초대할 줄이야.
이건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초대장을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

[우리 릴트 제국 사교계의 정이 그리 얄팍한 게 아니잖아요.]

‘웃기네. 잠자리 날개보다도 얇은 실로 엮인 관계들인걸?’

[진심으로 두 분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이것들이 심심하구나…….’

[두 분께서 떠나신 후 사교계의 분위기가 뜻하지 않게 위축이 되었답니다.]

‘흐음.’
이 말은 해석해 볼 가치가 있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사교계의 분위기가 위축되었다는 말을 입에 올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교계는 늘 평화롭고 행복해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혹시 줄리아와 마르셀 부부의 일이 터진 걸까?’
얼마 전 나는 마르셀에게 줄리아의 정부에 대해 폭로했다.
마르셀 성격에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줄리아의 정부가 누군지 찾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마르셀을 두려워하는 줄리아는 속을 태웠겠지.
줄리아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마르셀에게 발각당할까 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귀부인들은…….
겉으로는 줄리아를 걱정하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귀부인들 대부분이 줄리아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필사적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서로 다 알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캐시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줄리아를 고소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하.”
나는 차가운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사교계 분위기야 안 봐도 뻔했다.
평소와는 더 비교할 수 없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긴장 가득한 시기에 나와 알렉을 무도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건…….
‘줄리아의 비밀을 폭로한 게 나라는 거 다 아는구나?’
귀부인들의 속내를 훤히 알 것 같았다.
나를 불러내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탐색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직접 줄리아의 명예에 흠집을 낼 자신은 없지만,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내 입매가 살짝 웃듯이 비틀렸다.
그들에게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 무도회는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하필 가면무도회를 열었다는 건 그만큼 자신들의 진심을 숨긴 채 상대방을 관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건 바로 내 목적과 들어맞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이 사교계를 한번 들어 올렸다가 내리쳐서 와장창 깨뜨릴 생각이었다.
그동안 알렉을 괴롭히고 업신여긴 것과 캐시의 죽음을 갚아 줄 때가 이제야 온 것 같았다.
다시 초대장을 반으로 접은 나는 여전히 응접실에 있는 두 진상을 바라보았다.
시누이는 계속 심심해 미쳐 버리려고 하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이제 다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을 같이 데려가면 도움이 되려나?
그러나 별로 괜찮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시누이는 어차피 나와 노는 물이 달랐고, 시어머니는 거의 사교계에서 은퇴한 분위기였다.
그만 몸을 돌린 나는 알렉을 찾아 나섰다.
알렉은 밖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벽난로에 불을 때야 하는 날씨라 하루에 소모되는 장작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는 춥지도 않은지 얇은 셔츠 차림으로 리듬감이 느껴질 정도로 능숙하게 도끼질을 했다.
이제 그의 숙련된 솜씨가 놀랍지도 않은 나는 한참이나 감상하며 감탄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 * *

“예? 무도회 말씀이십니까?”


알렉은 도끼를 내려놓으며 루이제에게 되물었다.
이틀 전 밤, 그는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렸다.
카슨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용병단원들을 데리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돌아간 이후에도 카슨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서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덕분에 알렉은 경험치를 무려 600 이나 얻었다.
바닥난 마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이제 애정도를 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무도회라니.
상상도 못 하고 있었던 단어를 들어서 알렉은 내심 놀라웠다.
‘아, 나 공작이었지.’
비록 그에게는 무도회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낯설었지만, 이 시대의 귀족들에게 무척 익숙한 행사였다.
물론 알렉은 한 번도 그런 무도회에 가 본 적은 없었다.
루이제는 그에게 편지 하나를 건네 주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우리 집에 초대장을 보냈더라고요. 난 오랜만에 가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때요?”
알렉은 루이제에게서 초대장을 받아 펼쳐 보았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귀족 신분을 잃었어도 브렌트 공작 부부를 무도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퀘스트일까?
그러나 아직 퀘스트 알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은 다시 그 초대장을 루이제에게 돌려주며 가볍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승낙에 루이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마워요, 알렉. 그럼 우리 새 옷이라도 어울리게 맞출래요? 어차피 가면도 필요해서요.”
“…….”
알렉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한 번 끄덕였다.
어쩐지 이번 무도회는 레벨을 올릴 기회가 될 것 같았다.

* * *

릴트 제국의 사교계는 크게 세대별로 구분이 지어져 있었다.


가장 상위에는 루이제의 시어머니와 그 이상의 연배를 지닌 귀족들의 사교계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그들의 자녀 세대에 해당하는 부류-루이제와 알렉시스-가 친목을 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래에는 엘로이처럼 데뷔탕트를 치른 지 몇 년이 안 된 미혼의 어린 귀족들의 세계가
존재했다.
이 세 부류는 간혹 섞여서 모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연령대에 맞춰 모임을 가졌다.
오늘의 가면무도회는 모두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예상외로 규모가 큰 무도회라는 뜻이었다.
오랜만의 사교계 출정.
나는 평소의 나 같지 않게 심혈을 기울인 차림으로 입장했다.
상체는 이브닝드레스답게 어깨를 모두 드러냈지만, 가슴 윗부분을 조금 더 노출했다.
과하게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보다 보일 듯 말 듯 한 노출이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현혹해야 내 목적을 이루기가 훨씬 수월했다.
체스의 무대에서 졸이나 다름없는 폰은 무대의 끝까지 도달하면 퀸이 된다.
줄리아를 몰락시켜 당한 일들을 갚아 주고, 퀸의 자리를 빼앗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은빛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짙은 남색의 얇은 벨벳 드레스에는 투명한 보석이 밤하늘의 별보다 화려하게
총촘히 박혀 있었다.
고상한 색이지만 허리까지는 내 몸에 딱 달라붙어 둥근 가슴과 허리의 굴곡을 그대로 내비치는 자극적인
드레스였다.
평소의 나라면 굳이 이런 드레스를 입지 않았으니, 미처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나는 가면을 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바바리타조의 하얀 깃털로 장식한 가면에는 황금빛 가루를 아낌없이 뿌려 화려하게
빛을 반사하도록 했다.
눈 부분에는 아주 촘촘하고 얇은 검은색 실크가 붙어 있었는데, 내 눈동자의 색을 가려 주었다.
시야를 조금 방해하긴 했지만, 사람들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문득 알렉이 내 쪽으로 살짝 얼굴을 숙이며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당신만 보는 것 같습니다.”
알렉은 처음 목격한 사실을 전하듯 생소한 목소리였다.
“……그렇군요.”
나는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닌 듯 작게 훗 웃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슬쩍 둘러보니 주위 사람들이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비록 내가 루이제라는 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누군지는 꽤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옆의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알렉의 가면은 내 것과는 달리 검은 깃털로 기품 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가려지지 않은 곳은 멋들어지게 머리를 올린 이마와 굳게 다문 요염한 입술, 선이 날카로우면서도 근사한
턱 정도였다.
‘……참.’
저 남자는 브렌트 가문의 역작, 우리 릴트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미남이구나.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49 화

나는 알렉에게서 겨우 시선을 뗐다. 내 왼손은 여전히 알렉의 손 위에 살포시 포개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면을 쓴 알렉을 알아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알렉은 제국의 대표 미남답게 아무리 감춰도 특유의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와 잘생김이 숨겨지지 않았다.
언젠가 계란을 맞아 더럽혀진 모습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떡 벌어진 어깨와 조각한 듯한 실루엣
때문인지 3km 밖에서 봐도 알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말투와 애티튜드가 하늘과 땅 차이로 격변했다.
그의 남다른 키와 체격을 보고 혹시 알아채더라도 그와 대화를 나눠 보면 아니라고 여길 터였다.
‘뭐 모르지. 마르셀하고 그 친구 놈들이 알렉이 변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그들의 자존심상 알렉과 마주쳤다는 사실 자체를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알렉에게 얻어맞은 일까지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결국, 내 옆의 이 남자와 내가 누군지 여기서 그 누구도 쉽게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점점 음악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나와 알렉을 발견한 순간 일제히 멈추는 사람들의 시선은 꼭 환영의 몸짓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아, 그리고 걱정 말아요. 춤은 안 춰도 되니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내가 알렉을 안심시켰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이런 무도회에 셀 수 없이 참석했다.
그러나 알렉이 춤을 즐기지 않아 함께 춤을 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탓에 처음에는 혼자 덩그러니 놓인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다른 남자들이 늘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알렉이 바로 내 옆에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춤을 신청했다.
어차피 사교계에서 춤은 인사처럼 흔한 일이었다.
다만 질투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매번 보는 건 썩 괜찮은 기분은 아니었다.
역시 우리 둘 사이는 남녀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의리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으니까.
이윽고 눈앞에 눈부신 홀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샹들리에의 찬란한 빛이 내 위로 쏟아졌다.

* * *

알렉은 이토록 호화로운 공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제는 이 세계에 익숙해지고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인 사교계에 들어오니 역시나 다른 세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눈이 현란할 정도로 화려한 보석과 각양각색의 드레스, 귀를 가득 채우는 풍부한 음악 소리와 곳곳을
누비는 품격 있는 시종들까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들은 이 밝음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무수한 크리스털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말소리는 한여름의 청아한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들 같았으며, 넓은 홀의 가장 안쪽에서
배경 음악이나 다름없는 연주를 하고 있는 악단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장엄하고 완성된 연주회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그 어떤 영상과 그림에서도 구현해 낸 적 없는 충격적인 다채로움이었다.
그러나 그런 객관적인 감탄과는 별개로 속으로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홀로 영상 속에 들어온 것처럼 이 공간에 섞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현실감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거 마셔요.”
문득 루이제가 근처를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위스키 두 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에게 한 잔을 건네준 후 그녀도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이런 곳에서의 술맛은 어떨까 생각하며 그도 술잔을 입에 가져가자 루이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데 우리 여기서만 부를 다른 이름을 정하는 건 어때요?”
“예?”
“무도회 시작부터 서로 본명을 부르면 기껏 가면을 쓴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당신 이름부터 정해 볼까요?”
루이제가 그를 보며 살짝 눈매를 접는 모습이 가면 너머로 보였다.
그 눈을 마주 보며 알렉은 다른 이름이 뭐가 좋을지 짧게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예? 이안?”
알렉은 작게 한번 끄덕였다.
루이제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수긍하듯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가짜 이름치고는 꽤 멋있네요.”
엄밀히 말하면 그의 가짜 이름은 아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이 이안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이름이 진짜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끝까지 알 수 없었던 그의 출생의 비밀을 이 세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닐까?
뚜렷한 이유 없이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진짜 알렉시스와 그의 연관성은 외모가 같다는 것 말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 저는 바이올렛이라고 불러 줄래요?”
“알겠습니다. 바이올렛.”
자연스럽게 덧붙인 그녀의 가짜 이름에 루이제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지금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닌 다른 곳을 실수로라도 쳐다보지 않기 위해 꽤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 할 만큼 루이제의 모습이 너무도 현혹적이었다.
원래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자들이 모두 이 정도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이런 아름다움을 내뿜는 사람은 오로지 루이제뿐이었다.
“실례합니다.”
그 순간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 듯 낮고 낯선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알렉과 루이제는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진녹색의 가면을 쓴 남자가 마른침을 한번 꾹 삼키고 있었다.
긴장을 했지만 꽤 용기를 낸 듯한 행색이었다.
그가 루이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춤 한 곡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
춤 신청?
알렉은 루이제를 한번 보았다가 다시 진녹색 가면 쪽을 응시했다.
그 너머로 몇몇 다른 남자들도 이쪽을 힐긋거리는 낌새가 느껴졌다.
‘아.’
그 순간 알렉은 남자들이 루이제와 춤을 추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루이제의 파트너로 온 사람은 알렉 자신이었다.
저 남자들은 파트너가 없는 걸까?
그때 루이제가 진녹색 가면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체력이 그리 좋지 못해 춤은 딱 세 번만 추기로 결정했답니다.”
“예?”
남자가 의문하며 되물은 말처럼 알렉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제는 특유의 은은하면서도 위엄 있는 분위기로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소리 냈다.
“그런데 첫 상대는 처음 신청해 주신 분의 제안을 승낙할까 싶네요.”
그리 말한 루이제가 진녹색 가면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는 시늉을 하듯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의 손을 움켜쥐려고 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손은 잡지 마시고요.”
“예?”
루이제는 남자보다 더 빠르게 손을 위로 살포시 올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알렉의 눈이 조금 커졌다.
루이제에게 손끝조차 닿지 못한 남자가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손을 든 채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루이제는 고고한 자태로 입가를 끌어 올렸다.
“춤은 추지만 닿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요. 괜찮으시다면 잡는 시늉만 해 주시겠어요?”
루이제가 다시 우아한 손짓으로 남자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아, 예. 알겠습니다.”
진녹색 가면은 다시 기뻐하며 루이제의 손을 잡는 척만 했다.
이윽고 루이제가 알렉에게 술잔을 건넸고, 알렉은 얼결에 그 술잔을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리더니 나란히 홀로 향했다.
“……?”
알렉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나듯 루이제와 진녹색 가면이 걸어가자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건 뭘까?
알렉이 상황을 파악하는 짧은 순간.
주위에 있던 여자들은 루이제와 알렉을 번갈아 보며 감탄했다.
특히 늘씬한 몸을 과시하듯 딱 붙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자태는 가히 일품이었다.
지금껏 어떤 무도회를 다녀도 본 적 없는 가녀린 곡선과 우아한 볼륨을 동시에 과시하고 있었다.
대체 누굴까?
목에서 어깨, 팔까지 이어지는 여린 실루엣은 솜씨 좋은 화가가 선으로 그리지 않는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도 많은 이목을 끌 만큼 기품이 넘쳤다.
전설 속 성기사가 환생한 것처럼 능숙하면서도 절제된 자세를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사교계에 저런 사람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알렉은 잠시 미간을 짚었다가 손을 내렸다.
무심코 눈을 들었다가 자신을 힐끔 대는 여자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그대로 2 초 정도 눈을 마주 보자 여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먼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한 찰나, 알렉이 먼저 선수를 치듯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좀 여쭤봐도 됩니까?”
“예?”
불현듯 들린 물음에 여자가 흠칫 멈춰 섰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쪼르르 간격을 좁혔다.
“그럼요. 무엇이든지요.”
“여기는 원래 처음 본 아무나하고 춤을 추는 겁니까?”
“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0 화

* * *

“잠깐.”
“예?”
왈츠가 흘러나오는 무대 한복판에서 나는 파트너가 된 상대를 주시했다.
방금 저 남자의 손이 내 맨살에 닿을 뻔했다.
나는 아찔한 기분을 삼키며 우아하고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내 등에서 2cm 정도 간격을 두고 손을 대 줄래요? 아, 물론 등뿐만이 아니라 내 몸 전체를 그리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 예. 물론입니다.”
남자가 얼른 내 등에서 자신의 손을 조금 뒤로 물렸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첫 춤의 상대로 허락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제야 나는 능숙하게 음악에 맞춰 무대를 누볐다.
파트너와 손도 꽉 잡지 않았고, 허리도 제대로 감기지 않았지만 춤을 추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원래 나는 무도회에서 이렇게까지 접촉을 사양하지는 않았다.
그저 옷감을 넘어 내 피부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 바로 발을 밟았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몰상식한 신사들은 무척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몸을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건 처음이라 미리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자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이 춤이 끝날 때까지 제 눈을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른 데 쳐다보면 기분 상할 것 같으니까.
내 은은한 미소에 상대는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숙녀의 눈을 보지 않는 건 크나큰 실례죠.”
“감사한 말씀이네요.”
나는 상대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내가 저 진녹색 가면의 춤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도 이 무도회에 참석했을 확률이 높았지만 만약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바이올렛’처럼 매혹적인 여자가 나비의 날갯짓 같은 가벼운 춤과 함께 등장했다는 게 중요했다.
어차피 줄리아는 이런 큰 무도회에 빠질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화제가 될 여자가 나타났는데, 그게 누군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아가 치밀까?
그게 나라는 사실을 지금 당장 알아차려도 괜찮았다.
미모로든 뭐든 간에 줄리아를 위협하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다행히 눈앞의 남자는 잠깐 이용만 하는 건데도 불쾌하지 않을 만큼 꽤 준수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로 짐작건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부인? 아니, 영애? 아무래도 처음 보는 분 같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글쎄요. 한 번쯤은 스치지 않았을까요?”
“아뇨. 장담합니다만, 당신 같은 분은 생애 처음입니다.”
하긴 이 남자는 지금까지 나한테 춤 신청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온 제국이 무시하는 브렌트 공작의 부인이라 나에게 춤 신청을 하는 것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특히나 이 남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콧대가 높았다.
줄리아의 정부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오웬이었던가?
그중에서도 줄리아가 가장 아끼는 애인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런데 그쪽이 저와 춤을 춰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이 모습을 보고 질투하거나 분개할 부인은
없으신가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저기 당신을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여성분이 한 분 계시는 것 같은데요?”
“예?”
오웬은 당황한 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금세 다시 내 눈을 보았다.
나는 한 번 크게 돌며 곁눈질로 그쪽을 응시했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줄리아?’
역시나 여기 있었구나.
다시 한 바퀴를 더 돈 내가 힐긋 줄리아를 보았다. 그때는 줄리아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줄리아의 곁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는 귀부인들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줄리아가 멀쩡한 모습으로 무도회에 나타나다니.
아직 마르셀은 줄리아에게 정부가 확실히 있는지, 있다면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줄리아는 오웬을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르셀에게 들킨다면 죽음뿐일 테니까.
음악이 끝났다.
오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나는 살포시 허리를 굽히며 예의를 표했다.
나를 비롯해 춤을 추던 모든 여자들이 같은 동작을 취했다.
인사를 마치자 오웬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 음악이 이토록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짧은 곡인지 몰랐습니다.”
오웬의 눈빛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두 번째 춤도 저와 함께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제법 간절한 말투였다.
오웬과 두 번이나 연달아 춤을 춘다면 줄리아를 제대로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눈앞의 유희보다 장기적인 가치를 더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아쉽네요. 세 번밖에 없는 기회라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즐기려고요. 숨이 차기도 하네요.”
“그러시군요.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오웬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내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 손을 쓱 숨기듯 마주 잡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오웬의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어서 깔끔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아까 알렉이 있던 곳이 어디였지?
무도회에 오면 알렉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내가 춤을 다 추고 나면 언제든 돌아올 곳을 마련해 놓는 느낌이었다.
‘알렉도 오랜만에 같이 추면 좋을 텐데…….’
한번 물어나 볼까?
알렉이 춤에 서툴긴 했지만, 내가 그를 충분히 자연스럽게 이끌어 줄 자신이 있었다.
단단, 다다단.
새로운 춤 곡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춤을 추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얼른 그 구역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가 조금 거센 힘으로 내 허리를 한 팔에 낚아챘다.
“……!”
흠칫 놀란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크게 한 바퀴 빙 돌았다.
내 의지가 아닌 움직임이었다.
허리를 감은 팔에서 단단하고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떤 놈이야……?’
나는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뺨을 올려붙일 준비를 했다.
혹시 아까 오웬 놈일까?
이고 내 시야에 놈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검은색 실크 때문에 누군지 단숨에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손을 들었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덥석.
그런데 내 손목이 붙들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남자의 이목구비가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팔을 내리며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느긋하게 움직였다.
제 손의 각도를 틀어, 부드러운 촉감으로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
민감한 손 틈새에 정전기가 오른 듯이 아찔했다.
심장이 멎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검은 깃털 마스크, 날카롭지만 유려하고 근사한 턱선.
그는 내 남편 알렉이었다. 그가 살짝 비스듬히 턱을 기울이더니 금세 입술을 움직였다.
“원래 첫 곡은 자기 파트너와 함께 하는 거 아닙니까?”
“네?”
섬세한 가면의 실크 너머로 이제야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눈빛이 덤덤하면서도 분명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니 내 허리를 감은 팔의 감촉도 더 이상 불쾌하지 않았다.
쿵쿵쿵…….
불현듯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깜짝 놀랐네요. 하마터면 당신 뺨을 칠 뻔했어요.”
“뭐 그 정도 각오는 했습니다.”
“……네? 나랑 춤이 추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그런 각오를 해요?”
“저한테 춤 안 춘다고 하셨으니까요.”
“……아.”
그제야 나는 그에게 했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 그리고 걱정 말아요. 춤은 안 춰도 되니까.’

그건 원래의 그를 배려한 거였는데.


그의 목소리가 금세 다시 들려왔다.
“가만히 있다가는 세 번의 기회를 다른 남자들한테 다 빼앗길 것 같아서요. 뺨 맞을 각오 좀 해야
했습니다.”
“…….”
그의 말은 담백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는 내 마음은 담백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원래 이 남자가 이렇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었던가?
그의 눈빛이 열기를 띠거나 강렬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둘 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그에게 장악되는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1 화

‘아 참, 그러고 보니…….’
여기 댄스 구역인데.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었으니 얼마나 피해가 됐을까?
그런데 내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휙휙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서둘러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내 팔과 그의 몸을 순서 대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그의 리드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건가?
어차피 익숙한 음악과 춤이었다. 나는 이 노래에 맞춰 눈을 감고도 춤을 출 수 있었다.
갑자기 알렉이 나를 낚아채 놀란 탓에 내 발이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다니.
‘……이게 말이 돼?’
춤 실력으로 따지면 알렉과 나는 수준 차이가 심했다.
그가 안무를 외우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 실력이 너무도 월등했으니까.
나는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다시 우리의 다리와 팔, 맞잡은 손을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내가 그에게 리드당하고 있었다.
휘익.
그 순간 그가 나와 맞잡은 손을 내 머리 위로 올리더니 내 등을 살짝 떠밀며 한 바퀴 돌렸다.
“……!”
주위의 다른 여자들도 정해진 안무에 맞춰 휙 도는 게 곁눈질로 보였다.
얼결에 턴을 한 내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한두 번 돌려 본 게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솜씨인데,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만 이 상황이 낯선 거야?
“……당신, 원래 이렇게 춤을 잘 췄어요?”
“아뇨. 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잇지 못하던 내가 금세 깨달았다.
“아, 혹시 이것도 죽었다 살아난 영향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더니 계속해서 나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힘도 들이지 않고 가벼워 보였다.
처음 내 허리를 낚아챌 때의 힘과는 또 다른 박력이 느껴질 만큼 능수능란한 실력이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전신에 힘이 풀렸다.
한번 멍하니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이 움직임들을 느껴 보았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놀이기구에 탄 것처럼 모든 게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상대를 잘 만나면 무도회에서 이런 춤도 출 수 있는 거였구나.
감탄을 넘어 말문이 막혔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마저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음악이 두 개나 끝나 있었다.
* * *

쨍그랑!
줄리아가 내던진 술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 와인이 핏물처럼 깨진 유리 조각에 물들었다.
“아까 그 여자 뭐야?”
휴게실에 모여 있던 다른 귀부인들이 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서로가 누군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로즈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미소로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줄리아의 손을 살포시 감싸 쥐며 말했다.
“줄리아. 이러다가 손이라도 베이면 어쩌려고요.”
“그 여자가 여기 왔을 리 없잖아.”
줄리아의 손이 벌벌 떨렸다. 로즈는 슬쩍 줄리아의 안색을 확인했다.
화가 치미는 건지 불안한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그녀가 귀여워해 마지않는 오웬이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오웬이 줄리아가 아닌 여자에게 춤을 신청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 상대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평소 같지 않은 스타일로 치장을 하긴 했지만, 줄리아의 눈썰미는 여자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보았다.
“어떻게 그 여자가 무도회에 와? 이제 귀족도 아닌 게!”
줄리아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 줄리아는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분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마르셀에게 자신의 정부들을 들킬까 봐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스칼렛이 줄리아에게 다가가며 의아해했다.
“그러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니까요. 어디서 초대장이라도 몰래 훔치거나 주운 게 아닐까요?”
정말이지 의심이 된다는 듯 스칼렛의 눈썹이 한껏 휘어졌다.
그러나 스칼렛은 속으로 역시 이 무도회를 가면무도회로 개최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무도회가 아니었다면 루이제가 초대장을 보고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락 귀족이 무도회에 나타나는 것만큼 이목을 휩쓰는 일이 없을 텐데, 그런 거창한 주목은 루이제를
우습게 만드는 일일 테니까.
물론 줄리아에게는 이런 식으로 무도회에서 가면을 쓰자고 설득했다.

‘줄리아. 요즘 상심이 큰 거 알아요. 이럴 때일수록 더 화려한 시간을 보내야 줄리아의 마음이


풀리잖아요. 대신 마르셀이 눈치 못 채게 무도회에서 가면을 쓰는 건 어때요?’

다행스럽게도 줄리아는 가면무도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괜히 마르셀이 무도회를 들쑤시며 그녀의 정부를 탐색할지도 모르니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줄리아의 충복이나 다름없던 정부 하나가 루이제와 춤을 출 줄이야.
귀부인들은 줄리아의 불안을 키우려고 루이제를 초대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루이제가 줄리아를 자극할
줄은 몰랐다.
오늘 루이제는,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우아한 범 한 마리가 나타난 것처럼 그녀들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줄리아는 자신의 비밀을 마르셀에게 폭로한 루이제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당장 그 여자 내 앞으로 데려와.”

* * *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죠?”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네요.”
“원래 저 춤이 저분들처럼 저토록 근사했나요?”
알렉과 루이제는 차츰 이목을 끌더니 완전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곁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도 뭔가 술렁이는 낌새를 느끼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주위의 다른 화려한 커플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꼭 세상에 단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비로운 시간은 금세 지났다.
루이제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리더니 알렉이 적당한 거리로 물러섰다.
연달아 두 번이나 춤을 췄지만 한 번보다 짧은 것 같았다.
춤이 끝났을 때 하는 특유의 인사를 하기 위해 알렉은 절제된 자세로 한 팔을 둥글게 들고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굽혔다가 펴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루이제에게 끊임없이 닿아 있었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루이제도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드레스 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혔다.


그의 몸짓은 우아했고 눈빛은 정적이었지만, 어딘가 도발적인 느낌이 있었다.
아직도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루이제는 머릿속이 아득했다.
댄스 구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루이제는 지나가는 시종이 들고 있던 위스키를 두 잔이나 원 샷 했다.
이제야 목이 타고 숨이 차오르는 눈치였다.
“……알렉, 나 정말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결국 찬바람을 쐬기 위해 무도회장 건물을 나와 정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루이제는 자꾸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꼭 구름 위를 걷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무도회에 왔지만, 오늘 같은 춤은 정말


처음이었네요. 휴우…….”
루이제의 심호흡이 길게 이어졌다.
두근대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알렉의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
이렇게 계속해서 애정도가 오르는 것만 봐도 무도회장에서 루이제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누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알림음이 들릴 때마다 그의 심장도 덩달아 조금 철렁하는 것 같았다.
정원과 이어진 숲을 보면서 들뜬 가슴을 연신 가라앉히던 루이제가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그렇게 춤에 통달한 거예요? 그냥 잘 춘다고 하기에는 너무 능숙해서…….”
“그게…….”
그제야 알렉이 입술을 뗐다.
이상했다.
그가 전생에 여러 곡의 고전적인 춤을 마스터한 건 던전 열쇠 때문이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한 던전 퀘스트가 있었는데, 다음 단계의 열쇠를 얻으려면 갖가지 기술을 마스터해야
했다.
요리와 악기 연주, 무도회 춤 같은 것들이었다.
모두 난이도가 상당해서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던전 열쇠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포기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주어져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익혀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오늘을 위해 계획된 코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쓸 일도 없는 옛날 무도회 댄스 같은 거 왜 해야 하나 싶었는데, 결국 이곳에서 쓸모가 생겼으니까.
그런 의아함을 느낀 알렉은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꼭 루이제 당신을 위해 익힌 것 같습니다.”
“네? 후후…….”
루이제가 웃는 듯한 눈으로 황홀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위스키도 두 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루이제는 조금 발그레하면서도 아련해 보였다.
어쩌면 정말로 전생의 퀘스트들이 이 세계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그가 애정도를 받아야 하는 여자를 위해……?
조금 심각한 깨달음과 함께 알렉은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가면 너머로도 그녀의 눈빛에 애틋함이 보였다.
이런 여자를 부인으로 두었던 알렉시스는 그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최고의 행운남이 분명할 것이다.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이 아내인 남자는 좋겠다는 생각.”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2 화

“세상에.”
루이제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더욱 깊어지고 영롱해졌다.


“오늘따라 듣기 좋은 말만 하네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루이제의 입가가 행복한 곡선을 그렸다.
지금까지 루이제와 꽤 오래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아련하면서도 행복해하는 미소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 발그레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의 가슴도 이상하게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문득 둘 다 눈에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를 빼곡하게 응시하던 루이제가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 정말 사랑스럽네요.”
“…….”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린 말에 알렉의 눈동자가 채 한번 흔들리기도 전이었다.


루이제가 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싶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그의 코앞에 와 있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가 훅 가라앉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특유의 기품 있는 태도로 낮게 웃었다.
“당신 키가 커서 내가 먼저 시도하는 건 정말 어렵다니까요? 까치발도 한계가 있어서요.”
“…….”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크게 뜬 그의 눈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방금 입술이 닿은 건가?
하도 순식간에 지나가서 감촉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취라도 당한 듯 지금 그의 입술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루이제의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시 해 보게 좀 도와줄래요? 우리 키 차이 때문에 당신이 상체를 좀 숙여 줘야 할 것 같아서요.”
“…….”
루이제의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런 품위 있는 태도로 여자가 그와의 입맞춤을 바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위 귀족이었던 사람이라 그런 건지, 그냥 루이제 성격 탓인지 그녀의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은 고고한
기품 마저 느껴졌다.
루이제가 그를 보며 한번 싱긋 웃더니 두 팔을 뻗었다.
그녀가 빠듯하게 그의 목을 감싸 안자 알렉의 상체가 얼떨결에 주춤 숙여졌다.
그의 속눈썹이 한번 흔들리던 순간, 루이제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머금듯이 다시 닿았다.
“…….”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순간 벼락이라도 치고 지나간 것처럼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이 되었다.


동공은 크게 벌어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제는 한껏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찬란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루이제의 몸이 그의 몸에 짓눌렸다.
“……하.”
그녀의 숨결이 그의 입술을 적시며 터져 나왔다.
하면 안 되는 키스.
그러나 이미 입술 안쪽 점막까지 섞인 호흡.
“…….”
그는 얼어붙은 채 여기서 더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했다.
온몸의 세포가 숨을 멈추고 기립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가쁘게 뛰다 못해 폭주했다.
이러다 심장에 연결된 혈관이 다 끊어지는 게 아닐까?
그의 입술에 그녀가 닿은 지 아직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수 세월은 흐른 기분이었다.
촉촉한 혀끝이 그의 입술 안쪽을 적시듯이 닿았다.
“……!”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충격적인 감촉이었다.
밀어내야 했다.
루이제는 그를 진짜 알렉시스라고 믿고 있었다.
행여나 그의 정체를 그녀가 알고 난 이후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남녀 사이의 이런 은밀한 몸의 교감 같은
건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주저되는 걸까?
이상하게도 루이제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실망적인 남편이었고, 루이제가 충만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바로 지금 물러나
버린다면 실망 정도가 아니라 크나큰 배신이 될 것이다.
“…….”
갈등이 깊었다.
그러나 결국 알렉은 너무 늦지 않게 루이제의 허리를 감쌌다. 눈을 감으며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더 숙이니 힘겹게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루이제의 팔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입술이 미끄럽게 맞물린 깊이가 더 깊어졌다.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연주가 정원까지 어렴풋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 음악보다 더 영롱한 시스템의 알림음이 연거푸 울렸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레벨이 3 으로 올랐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알림음이 이어졌다.


* * *

줄리아는 휴게실을 나오며 구겼던 안색을 반듯하게 폈다.


어차피 남자는 오웬이 아니더라도 많았고, 루이제가 아무리 치명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봤자 이 사교계의
퀸은 줄리아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미모로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제는 그저 있으나 마나 한 체스 위 졸이나 마찬가지.
정부 하나 버리는 셈 치면 그녀에게 그리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감히 날 거슬리게 한 벌은 아주 달게 받게 해 줄게. 제까짓 게 마르셀한테 내 얘기를 해?’
어차피 곧 있으면 루이제는 그녀의 앞에 질질 끌려와 뺨을 얻어맞다가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줄리아의 기분이 좀 전보다 나아졌다.
안 그래도 루이제가 어디 사는지 몰랐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줄리아는 한껏 의연한 자세로 계단을 내려갔다. 무도회장의 댄스홀과 연결된 계단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등장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이목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줄리아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아첨하지 않으면 이 사교계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실수로 드레스에 술을 쏟거나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가슴을 펴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뭔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우러러보는 여러 눈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감탄사나 칭찬의 말들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가면 때문에 그녀를 못 알아보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흠흠.”
같이 계단을 내려가던 스칼렛이 줄리아의 기분을 눈치챈 듯 헛기침을 했다.
로즈는 눈치껏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정신없어 보이네요. 무슨 신기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
줄리아는 싸늘해진 눈을 내리깔았다.
로즈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제각각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웬이 루이제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휴게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줄리아가 계단을 다 내려가자 벨리사가 다가왔다. 벨리사는 오웬의 부인이었다.
“줄리아.”
“벨리사.”
벨리사는 들뜬 듯한 얼굴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역시 가면을 써도 줄리아네요.”
“이제 온 건가요?”
“아뇨. 조금 전에 왔어요. 그런데, 줄리아도 보셨나요?”
“뭘요?”
“정말이지 환상적인 커플이 나타났거든요. 지금 다들 한창 그 이야기 중이랍니다.”
“환상적인 커플?”
줄리아는 내심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누굴 이야기하는 걸까?
벨리사를 따라 걷듯이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자 감탄에 찬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렇게 유려하고 근사한 춤은 처음이었다니까요. 춤을 배워서 추는 게 아니라 꼭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된 것 같았어요.”
“아뇨, 그 남자 몸이 웅장한 연주를 압도하던데요?”
“정말로 춤 실력이 상당하더라고요. 남자분이 키도 크고 몸도 좋으셔서 더 그래 보였고요. 가면으로도
멋있는 분위기가 숨겨지지 않았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설렜답니다. 남자 분이 조용한 능구렁이처럼 여자분을 갖고 놀았죠?”
“갖고 놀다마다요. 아주 혼을 쏙 빼놓던데요.”
“다시 돌아오시면 좋겠네요. 저도 그런 춤 한번 같이 춰 보고 싶어요.”
“…….”
줄리아의 안색이 재차 싸늘해졌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으며 그녀가 벨리사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이 누굴 말하는 거죠, 벨리사?”
사람들이 저 정도로 감탄할 만큼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없었다.
줄리아는 도통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머나, 줄리아는 보지 못했나 보네요. 실은…….”
벨리사는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공개적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귓속말을 했다.
“제가 직접 봤는데, 루이제가 나타난 것 같아요. 그것도 끝장나게 죽여 주는 남자랑.”

* * *

쪽, 쪼옥.
나는 그의 키스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지금까지 알렉의 변한 모습들을 많이 봤지만, 심지어 키스마저 이럴 줄이야.
‘적극적인 데다가 엄청 잘하잖아……?’
정말이지 놀라운 건, 내가 그를 갈구하는 만큼 그도 내 입술과 혀를 아낌없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3 화

나는 그를 더 느껴 보려 꽉 끌어안았다.
그가 입술을 벌렸다 오므리길 반복하며 내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얽었다.
얇은 드레스 옷감 너머로 그의 단단한 근육의 굴곡이 내 피부까지 전 해졌다.
급기야 알렉이 나를 들어 안아 분수대의 난간에 앉혔다.
한 손으로는 분수대 난간을 짚더니 다른 손으로 내 턱을 받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틀자 내 안으로 더 깊이 파묻혔다.
‘하.’
뭐지.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 있어?
처음 겪어 보는 키스였다.
빈틈없고 능수능란했다.
지금까지 나 혼자 상상하고 떠올리고, 소설로 읽으며 대리 만족했던 그 모든 것들보다 지금 그와의 행위가
수억만 배는 좋았다.
그가 내 혀를 부드럽게 휘감으며 얽을수록 영혼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지금 처음 해 보는 거야?’
나는 조금 더 턱을 들어 그와의 각도를 맞췄다.
조금 전 춤도 황홀했는데 키스는 더 심각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나를 욕망한 적 없던 남자가 이런 열렬한 태도라니.
나는 속으로 눈물겹게 감탄했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거였어.’
그의 키스는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았다.
내 입술 안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이나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촉감.
그에 반해 강인하고 능숙한 움직임이 내 안의 결정적인 곳을 꾸준히 자극하는 것 같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지금까지 한 번도 자극받지 못해 서럽고 아쉬웠던 마음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돼?
지금 그는 외로움에 사무쳤던 내 두 번의 삶을 다 아우를 듯이 내 입 안을 장악했다.
“아, 알렉?”
“…….”
결국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아찔한 자극을 다 감당하지 못해 그에게서 살짝 입술을 뗐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우리 사이에 가면이 없었다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다, 당신 정말 대단하네요.”
정말 이제 못 하는 게 없는 거야?
나는 차마 그를 볼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전율했다.
그는 아직도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굳은 듯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의 입술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의 팔을 꾹 움켜쥐었다.
“나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했어요.”
“…….”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게 곁눈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박동해 나는 기절하지 않으려 정신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 순간 멀찍이서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그가 살짝 몸을 들어 그쪽을 보더니 다시 내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더 원하시면 다른 데로 옮겨도 됩니다.”
‘……세상에.’
놀란 내가 손으로 뺨을 한 번 눌렀다.
입맞춤도 과감하더니 저런 대사까지 하는 거야?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 머릿속이 아찔했다.
이윽고 그의 팔을 잡은 내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했으나 이미 그가 나를 잘 받쳐 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곧 무도회가 끝날 시간.
나는 이 가면무도회에 온 목적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헝클어진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 지금 나 당신 때문에 심장이 너무 터질 것 같은데, 좀 가라앉히고 나중에 다시 해 줄래요?”
그는 아쉬운 기색 없이 내 말에 한 번 끄덕였다.
“……가면무도회는 늘 마지막이 제일 재밌거든요.”
나는 그와의 입맞춤을 더 이어 가지 못하는 게 너무도 아쉬웠지만, 이 무도회의 피날레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나는 알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시 무도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맞춤에 함락된 정신을 추스르느라 심호흡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와 내가 조금 전 두 번의 춤을 춘 후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극찬과 호기심.
뜻하지 않게 알렉의 춤 실력이 일취월장한 덕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한 내 계획은 더욱더
성공적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무도회장을 떠나 버렸으니 지금쯤 얼마나 우리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까?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사교계 귀족들의 반응이야 단순해서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처음이라 기대가 되는 건지 가슴이 박동했다.
홀 안으로 들어서며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악은 흐르고 있었지만 이제 춤을 추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놓인 작은 테이블에 모여 술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눈으로 빈 테이블을 찾은 내가 그쪽으로 알렉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우리를 발견했는지 시선이 하나씩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를 잡은 후 조금 비스듬히 선 채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저기 좀 보세요. 저 두 사람 다시 돌아왔네요.”
“어디서 온 누굴까요?”
“…….”
정말로 몰라보는 거야?
당신들이 무시하던 브렌트 공작과 그 부인이라고.
나는 속으로 짧게 웃었다.
하긴 귀족 신분도 잃었는데, 이런 상류층의 무도회에 나타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불명예스럽게 신분을 빼앗겼는데 이런 데에 기어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마치 들렸으면 좋겠다는 듯이 크게 수군거렸다.
“저 여자분의 등 좀 보세요.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 같네요. 어쩌면 저렇게 고울까요?”
“피부를 다루는 비결이라도 있다면 들어 보고 싶어요.”
“저 두 분은 부부일까요?”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욱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며 웅성거렸다.
그중에는 알렉과 나의 미모와 춤 실력에 감탄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술잔을 입에서 조금 떼어 내며 말했다.
“기분이 어때요, 알렉?”
“예?”
“사람들이 당신인지도 모르고 당신한테 감탄하고 있잖아요.”
“…….”
“자기들이 반한 신사가 다름 아닌 그동안 무시하던 당신이라는 걸 알면, 저 사람들 얼굴 좀 볼
만하겠네요.”
“그렇군요…….”
그는 내 말에 별로 감흥은 없는 듯 짧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변한 그를 알아보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지금 탄산이 가득한 폭포수를 시원하게 맞는 것처럼 짜릿한데.
벌써부터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 것 같아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그들의 얼빠진 얼굴을 직접 이 두 눈으로 목격해야 이곳에 온 보람을 느낄 것 같았다.
그때 붉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속지 말아요.”
줄리아의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듯 어딘가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줄리아의 말에 한참 우리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옮겨 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줄리아?”
누군가가 줄리아에게 묻자 그녀가 픽 비웃으며 대답했다.
“저 사람들, 여기 있을 자격 없는 사람들이니까.”
“예?”
줄리아의 말에 휩쓸리듯 사람들은 금세 다시 웅성거렸다.
이내 줄리아는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황제 폐하가 두렵지도 않은가 봐?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
나는 느긋하게 잔을 기울여 달콤한 술을 음미했다.
줄리아가 매혹적인 목소리로 위협을 하는데도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술잔을 내리며 힐긋 본 사람들의 분위기는 아주 볼 만했다.
줄리아의 등장 자체가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수군거렸다.
“그래서 저분들이 누군데요?”
“줄리아는 알고 있는 건가요?”
“잘 알다마다요. 어디 내가 모르는 게 있던가요?”
줄리아의 태도가 달콤하면서도 고압적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날카롭게 돌변했다.
“저 사람들 얼마 전에 몰락한 브레트 공작 부부라고요.”
“예?”
“브렌트 공작 부부라면…….”
사람들은 줄리아의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의아해했다.
그들이 앞다투어 쏟아 내는 말들이 들려왔다.
“설마 그럴 리가요. 초대받지 못했을 텐데요.”
“공작 부인이 원래 저 정도로 아름다웠었나요?”
“그리고 공작 부인은 그렇다 쳐도 공작이 그렇게 춤을 잘 출 리가 없는데요?”
“말도 안 돼요.”
줄리아는 더 의기양양해져서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말 맞아요. 그러니 저 사람들한테 속지 말아요. 우리가 귀족도 아닌 천한 사람들한테 볼품없이
휘둘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
사람들은 이제 애매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침묵했다.
지금까지 입이 닳도록 칭찬했는데 막상 브렌트 공작 부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입 안이 쓴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예상도 못 한 듯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바로 내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줄리아는 훗 웃더니 들고 있던 술잔을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난 당신들을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어. 아, 아니지. 감히
릴 트 제국의 귀족들을 우롱한 죗값을 치르고 가야 하나?”
줄리아가 나와 알렉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을 것 같은 낌새를 풍겼다.
그러자 곁에 있던 스칼렛과 로즈가 얼른 줄리아에게 다가가며 부추겼다.
“줄리아. 당장 저들이 가면을 벗게 해요. 브렌트 공작 부부가 맞다면 제대로 망신을 당해야죠.”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온 거예요? 뻔뻔한 낯짝을 숨기라고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고요.”
“맞아요. 당장 벗으라고 해요, 줄리아.”
“…….”
여전히 아주 연기를 잘하는 두 사람이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이윽고 나는 알렉의 팔을 잡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알렉. 우리 가면을 벗어 볼까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우리가 브렌트 공작 부부였다는 걸 믿지 못하나
봐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4 화

“…….”
알렉은 잠시 침묵하며 내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내 심중을 깨달은 듯이 조심스레 내 얼굴로 손을
올렸다.
그는 천천히 내 가면을 벗겼고, 나도 그의 가면을 벗겨 주었다.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가면을 쓴 그도 참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는 벗은 게 훨씬 근사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며 황홀해하는 사이 곳곳에서 놀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졌다.
“세상에.”
“정말로 브렌트 공작이잖아요?”
“아까는 말씀도 잘하셨는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사람들은 알렉을 보면서도 못 믿겠다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얼굴과 체형이 똑같은 것 외에는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한 자세는 세상의 눈치 하나 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데다가 위압감까지
느껴졌고, 춤은 또 어땠는가.
주위의 모든 화려함을 압도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지금까지 이 사교계에서 알렉처럼 완벽을 뛰어넘을 만큼 능숙하게 파트너를 다루던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이자 줄리아는 보란 듯이 턱을 들었다.
“저것 봐요. 내 말이 맞았죠?”
그러나 줄리아는 분위기를 조금 다르게 파악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탄을 쏟아 냈다.
“브렌트 공작이 그렇게나 멋있는 분이셨다니.”
“왜 예전에는 몰랐던 거죠?”
“정말 대단해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락한 공작 부부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나는 입가가 매끄럽게 치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찬란한 반응을 얻게 되다니, 이것만으로도 이 무도회에 온 가치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줄리아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나는 줄리아의 눈을 주시하며 보란 듯이 알렉에게 팔짱을 낀 뒤 그의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금세 그의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초대장을 줄리아 쪽으로 휙 날리듯이 던졌다.
내 손끝을 떠난 초대장이 유려 곡선을 그리며 살포시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요?”
“…….”
“우리는 초대장을 받고 온 거랍니다. 궁금하면 몸을 숙여서 주워 봐요, 줄리아.”
“…….”
줄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에게 박힌 시선 그대로 짓씹듯이 말했다.
“주워 와요, 스칼렛.”
이름이 불린 스칼렛이 나를 혐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어서!”
줄리아가 재차 독촉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스칼렛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무릎을 굽혀 초대장을 주웠다.
초대장에는 줄리아가 스칼렛을 비롯한 자신의 시녀나 다름없는 귀부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나를 무도회에 초대해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이용하려고 했겠지만, 천만에.
나는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비록 저들과 나의 목적이 줄리아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들과 어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늘의 무도회는.
지금까지 내가 참석했었던 무도회 중 최고의 무도회인 것이 분명했다.

7. 몰락한 공작 부인의 반격

릴트 제국의 황궁은 그 주인이 바뀐 지 4 년 만에 예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낡은 옛 황궁은 모두 부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찬란한 새 황궁으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황실의 품격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격상되었다.
황궁의 주인이 바로 악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악센은 자신의 것이라면 당연히 제국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한 품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건 황제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백성은 황제를 위한 존재였다.
이제 황궁에서 황제의 격에 맞춰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할 건 딱 하나가 남아 있었다.
“들으셨나요, 폐하?”
눈앞의 황후였다.
“루덴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더라고요. 흥미로운 소식이라도 돌고 있는 모양이에요.”
기다란 탁자의 저편에서는 황후가 나무랄 데 없는 우아한 자태로 식기를 다루고 있었다.
황후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여자라고 했다.
음식을 씹을 때조차 일부러 턱을 잘 움직이지 않아 먹는 듯 먹지 않는 듯했다.
황후의 모든 동작이 저토록 인간미 없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올리비아 가르시아.
그녀의 아버지인 브로디 가르시아 공작은 올리비아를 황후로 만드는 조건으로 악센의 권력에 편승했다.
브로디는 충실히 악센의 충견 노릇을 했다.
악센이 일개 황자였을 때 그의 반역을 눈치챈 사람들을 모두 토벌해 주었다.
즉위한 이후에도 이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한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충성스러운 작자인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광활한 릴트 제국과 황궁이 전과 다른 국격을 갖추어 가자 악센의 눈에 황후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브로디의 권력욕을 기반으로 태어난 여자였다.
처음에는 악센도 올리비아에게 딱히 부족한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의 황후라면 조금 더 숭고하고 권력에 초연해질 수 있는 고고한 여자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설령 악센 자신의 앞이라 해도 두 눈을 똑바로 뜰 수 있는 기개가 필요했다.
바로 그런 여자가 그의 황후여야 했다. 그의 후대를 이을 황자를 낳아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의 계획은 시작되고 있었다.
악센은 황후 자리에 걸맞은 여자를 단 한 명 알고 있었고, 황제답게 가질 생각이었다.
“흥미로운 소식?”
그런 생각을 하며 악센은 은빛 술잔을 들었다. 따분한 눈으로 올리비아의 말에 대꾸했다.
그의 관심에 올리비아가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사교계에 나타난 모양이에요.”
“……?”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악센의 눈썹이 휘어졌다.
갑자기 리디트 황자가 나타나 황위를 되찾았다는 말을 들은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았다.
브렌트 공작 부부였던 사람들은 이제 사교계에 나타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 알렉시스가 독약을 먹고 죽음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사교계?
악센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과연 흥미로운 소식이로군.”
“아직 흥미로운 부분은 시작도 안 했답니다.”
“뭐가 더 있었나?”
“마르셀 하워드 후작이 전 브렌트 공작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요. 그런데…….”
황후가 멀쩡히 말을 하다 말고 말 끝을 흐렸다. 그의 흥미를 일으키려는 뻔한 수작이었다.
요즘 황후는 후계자 문제로 어울리지 않게 그의 관심을 끌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 줄 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 말한 악센은 확 목을 꺾어 술잔을 비웠다.
붉은빛의 독한 술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그의 가슴을 태우지도 못했다.
요즘 그는 더 강한 자극이, 더 맹렬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냥과 살육은 이미 시시해진 지 오래였다.
황후는 다시 기품 있는 미소로 입술을 열었다.
“글쎄 하워드 후작과 그 벗들이 전 브렌트 공작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거 있죠?”
“뭐?”
악센은 이 식사가 시작된 이후로 처음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볼 필요도 느끼지 못할 만큼 올리비아의 존재는 악센의 마음에서 지워져 있었다.
올리비아는 오래전부터 악센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악센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무조건 악센의 후계자를 낳아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황후로서의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악센은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다른 여자를 찾지 않았다.
함부로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이제야 자신을 봐 주는 악센의 모습을 보며 조금 슬프게 웃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답니다. 전 브렌트 공작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하다니, 상상이 잘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지금 나도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건가?”
“물론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줄리아가 제게 거짓을 고할 리도 없으니까요.”
“하.”
악센은 비딱했던 자세를 바로 하며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 자식이 사람을 쳤다고?’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 싶었다.
신분과 전 재산을 잃고 죽음까지 시도했던 탓에 어딘가 미쳐 버린 걸까?
악센은 누구보다 알렉시스를 잘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누군가를 때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견디지
못했다.
알렉시스와 가까운 누군가를 인질로 삼는 것만큼 그를 쉽게 다룰 수 있는 방식도 없었다.
사실 그래서 악센은 더 오기가 생겼다.
알렉시스는 왜 참기만 하는지, 악센은 자신을 무시하는 모든 이들을 밟아 버리고 싶어 미치겠는데 왜
알렉시스는 그렇지 못한지.
성기사 가문의 후예라더니 정말로 순결하고 착해 빠진 성기사처럼 구는 알렉시스가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알렉시스가 평소처럼 ‘내가 잘못했어.’라고 비는 게 아니라 ‘차라리 날 죽여.’라고 말할
만큼 그에게 격분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5 화

알렉시스가 악센에게 화를 낸 건 그때가 유일했다.


평소에 그가 알렉시스를 괴롭혔던 일들에 비하면 별일도 아닌 일이었다.
그저 알렉시스와 결혼한 여자에게 모욕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발언을 하나 했을 뿐이었으니까.
전에 없던 알렉시스의 분노를 보고 악센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알렉시스에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악센은 알렉시스가 원하는 대로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그는 누구든 죽일 수 있었지만, 알렉시스는 그의 권력을 넘볼 위인도 아니니 죽일 이유도 없었다.
다만 악센은 알렉시스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건드리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알렉시스에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싶었다.
겨우 신분과 전 재산을 잃었다고 죽음을 시도했다고 해서 흥미가 식을 뻔했는데.
그런데 하워드 후작을 때렸다니.
쉽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조금 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알겠으니 나가 봐.”
악센은 육중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올리비아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올리비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 * *

카슨이 악센을 찾아온 건 올리비아와의 식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카슨은 알렉시스에게 당한 충격에 빠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한 상태였다.
마르셀의 의뢰로 알렉시스에게 복수를 하러 간 것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의뢰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폐하.”
악센은 그의 전용으로 만든 으슥한 정원의 의자에서 다리를 펴고 앉아 카슨을 힐끔 보았다.
카슨은 악센의 어두웠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악센은 어린 시절부터 늘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고, 당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하 세계 용병인
카슨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황궁에도 유능한 기사들이 많았지만 당시 악센은 그들에게 배움을 구할 처지가 아니었다.
황족이었지만 황제 부부에게 천대받았던 조카가 바로 악센이었으니까.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황제 부부가 마치 오물을 보는 것처럼 그를 경멸하던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악센이 카슨의 아버지에게 전투와 살육의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황족인 악센이 일개 용병단장인 카슨과
어울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카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악센은 혀를 찼다.
“꼬락서니가 왜 그 모양이지?”
어디서 용암이라도 터져서 급히 도망을 친 건지, 카슨은 육체와 영혼이 탈탈 털린 듯한 몰골이었다.
문득 악센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제로 군림한 지 이제 꽤 되었는데 용병단 나부랭이와 교류를 하는 것도 끊는 게 좋겠다.
그나마 카슨은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 있었다.
어쨌든 그의 휘하에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카슨은 마른침을 꾹 삼키며 악센에게 다가갔다.
“폐하. 제가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과연 그래 보이는군.”
“농담이 아닙니다. 제 용병단이…… 다 번개 구이가 돼서 죽을 뻔했다고요.”
“뭐?”
악센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을 구겼다.
아까 올리비아도 그렇고 오늘따라 희한한 소리가 잇따랐다.
카슨은 꼭 부모가 죽었을 때처럼 절망스러운 눈동자로 악센에게 말했다.
“정말로 그런 힘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팔씨름을 한 이후로 감히 뛰어넘지 못할
압도적인 힘을 느낀 건 정말이지 처음-.”
“알겠으니 진정해. 악몽이라도 꾼 건가?”
“차라리 악몽이었다면 좋겠습니다.”
카슨의 손이 벌벌 떨렸다.
악센은 이런 불길함과 불쾌함은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는 날카롭게 카슨을
응시했다.
“요점부터 말하지?”
그러자 카슨이 악센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전하기 시작했다.
마르셀이 알렉시스에게 얻어맞아 보복하기 위해 카슨에게 의뢰를 한 것부터, 카슨이 알렉시스를 혼쭐내러
갔다가 두 번이나 당한 일까지.
“…….”
“그, 그런데 그 두 번째가, 너, 너무도 신출귀몰한 일이라 당하고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습니다.”
“…….”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번개처럼 이상한 전류로 공격을 하는 게…….”
카슨은 정말로 어디 하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악센은 더 들을 필요도 없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요지는 알렉시스가 마르셀을 때리다 못해 그레이브 용병단까지 모두 무력화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알렉시스가 누군가를 쳤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번개?
번개 어쩌고는 카슨의 머리가 고장이라도 나서 이상한 악몽과 섞인 것이리라.
그래도 완전히 믿지 않을 수는 없는 이야기.
‘뭐야, 알렉시스. 정말로 갑자기 정신이 확 들기라도 한 거야?’
악센은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아주 짧은 비웃음이었지만 이렇게 순수한 웃음이 나온 적은 최근에 아예 없었다.
“알겠으니 돌아가 봐.”
“폐하! 설마 전 브렌트 공작을 전처럼 건드릴 생각이시라면 그만두십시오. 정말이지 뭔가가 엄청나게,
엄청나게 불길하고 불안합니다.”
그 순간 악센의 눈빛이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카슨은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내뱉은 후였다.
악센의 앞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악센은 이 릴트 제국의 유아독존.
누구도 감히 그를 염려할 수도, 또 감히 그가 하려는 일을 만류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럴 경우에는 그 누구라도 절대 용서를 받지 못했다.
악센의 살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알렉시스한테서 살아 돌아온 의미도 없이 황궁 감옥에서 갇혀 죽고 싶은가?”
“그, 그게 아니라…….”
“겨우 그까짓 놈한테 단원들이 다 당하다니 자네의 용병단도 이제 별 볼 일 없는 모양이야.”
“폐, 폐하!”
악센은 냉랭한 얼굴로 곁에 있던 호위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카슨을 붙잡았다.
“일주일 뒤에도 운 좋게 살아남으면 용서해 주지. 끌고 가.”
악센의 명령에 기사들이 카슨을 데려갔다.
“폐하! 폐하!”
카슨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악센은 이미 그에 대해 머릿속에서 지운 상태였다.
카슨이 갇힐 감옥은 평범한 감옥이 아니었다.
그곳은 살아 있는 생명의 생기를 조금씩 빨아들여 말려 죽이는, 그래서 악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윽고 악센은 기사 한 명에게 손을 까딱였다.
어차피 카슨 말고도 알렉시스를 제압할 훨씬 뛰어난 사람들은 많았다.
“파란 피 기사단장한테 전해라. 알렉시스와 그 부인을 황궁으로 데려오라고 말이야. 오랜만에 부부
동반으로 오찬 시간이라도 가져야겠군.”
“분부 전하겠습니다.”
악센의 명을 들은 기사는 금세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악센이 다시 입을 뗐다.
“아, 혹시 반항을 한다면 공작은 죽여도 상관없어. 다만 그 부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데려와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기사가 다시 충직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절도 있고 신속한 움직임으로 정원을 떠났다.

* * *

알렉은 루이제의 입술에 집중했다.


가면무도회에 다녀온 지 불과 하루가 지났다.
그 무도회에서 그는 애정도를 총 67 이나 얻었다.
루이제와 춤을 추는 동안,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첫 키스를 하면서 미친 듯이 애정도가 오르더니 결국
그날 하루에 67 이나 올랐다.
이미 그는 그레이브 용병단 퀘스트를 통해 경험치 600 을 얻은 상태.
애정도와 경험치를 충족시킨 그의 레벨은 5 까지 올랐다.
레벨이 5 가 되니 상황은 훨씬 나아졌다.
그의 스킬들도 덩달아 레벨이 올랐고, 포섭할 수 있는 사역령의 개체수도 하나 더 늘어났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안 오를 것만 같았던 애정도가 입맞춤을 하니 그리 쉽게 오를 줄이야…….
설마 했는데, 루이제는 그동안 알렉시스와의 육체적인 교감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또한 그날 태어나서 키스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막상 해 보니 그 느낌과 전율이 생각해 보지 못한 감각 이상이라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제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심장을 계속해서 얻어맞은 듯한 데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그 탓에 무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이건 좋아도 너무 좋은 감각이었으니까.
그러나 해선 안 될 것을 한 느낌이라 마음 놓고 그 기분을 누릴 수도 없었다.
애정도가 67 이나 올라 레벨이 5 가 되었지만 마냥 기뻐하지도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질러 버렸다는 자조와 자책이 후폭풍처럼 그를 휘감았던 탓이었다.
‘정말 미쳐 버리겠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6 화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는 한 손에 얼굴부터 묻었다.


어제의 미친 짓이 조각조각 떠올라 자책의 시간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제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정오 무렵 외출 준비를 하며 루이제가 옷을 골라 주러 그의 방에 찾아왔다.
방 안에 단둘이 있자니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녀와 가만히 눈을 마주 보고 있자 긴장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이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어제의 느낌을 또 욕망하는 듯한 그의 본능이 치열하게
충돌했다.
결국 루이제가 부드럽게 그를 안으며 다가왔고, 그는 그녀를 피하지 못했다.
루이제가 만족스러워하는 게 그의 온몸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반응까지 빼곡하게 들켰지만 서로에게 몰두하고 있는 와중에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쪽, 쪼옥.
그는 루이제의 입술을 삼키며 깊이 제 것을 담고 휘감았다.
하나의 호흡처럼 그녀도 그를 감싸며 미끄러졌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두 이런 아늑한 느낌을 함께 나누고 있었던 걸까?
경험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처음 해 보니 지금까지 큰 무언가를 놓치며 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심지어 루이제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심장과 본능이 그녀의 촉감에 일일이 반응했다.
가족들이 응접실에서 그와 루이제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서로 누가 먼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된 것처럼 가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하, 알렉.”
루이제가 황홀한 신음을 터뜨리며 그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언니! 언니! 여기 있어?”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졌다.
그는 근처 창문의 난간을 짚었다.
금세 문이 열리더니 엘로이가 그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준비 다 했어? 이제 나가자.”
“아, 응.”
루이제가 어색한 미소로 대답하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얼른 나와요.”
이윽고 루이제도 방을 나서자 그는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그는 진하게 밀려오는 현실감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기다란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여태 뭘 한 거지.’

* * *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나.’
마차 안에서 나는 아직 열이 오르는 듯한 뺨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하다 끊긴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나는 내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젯밤 나는 설레는 마음을 한가득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않게 그와 만족스러운 춤과 키스를 나눈 데다가 줄리아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계획까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그와 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깔끔하게 내 방문 앞에서 그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가 붙잡는다면 마음을 바꿀 용의가 있었지만 그는 끝끝내 나를 잡지 않았다.
조금 아쉬울 뻔했는데 오늘 그와 한 번 더 입맞춤을 나눠서 기분이 꽤 좋았다.
“뭘 그렇게 실실 웃어?”
“응?”
나는 화들짝 놀라며 맞은편에 앉은 엘로이를 바라보았다.
달리는 마차 안에는 엘로이와 나 단둘뿐이었다.
알렉은 지금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집에 있었다.
우리는 지금 루덴에 있는 유명 티룸인 ‘로라’에 가는 길이었다.
지금쯤 알렉과 내가 사교계의 관심을 가득 받고 있을 테니 사람들의 눈에 띄어 줄 필요가 있었다.
로라 티룸은 부유한 귀족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돈만 있으면 평민 신분이어도 못 갈 곳은
아니었다.
엘로이도 동행한다면 브렌트 공작가의 세미 귀환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 일부러 그녀에게도 외출을
제안했다.
엘로이는 나를 보며 가느다랗게 눈을 좁혔다.
뭔가 떨떠름한 사실이라도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둘이 연애해?”
“뭐?”
나는 흡사 말이 안 되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한테 연애라니. 결혼한 지 3 년이 넘었거든?”
“에이.”
엘로이의 눈빛이 더 가느스름해졌다.
아무래도 열다섯 살의 미혼인 숙녀가 스물네 살의 유부녀에게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내가 시치미를 떼듯 괜히 창밖을 보자 엘로이가 여전히 가느다란 눈으로 눈썹을 한번 치켜올렸다.
“내가 언니랑 오라버니보다 남녀 관계는 더 빠삭하거든?”
“그것참 잘된 일이네.”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며 괜히 코 밑을 두어 번 긁적였다.
창밖으로 굵기가 가느다란 침엽수들이 일정하게 늘어선 풍경이 꽤 운치 있었다.
엘로이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갑자기 둘이 뭔가 달라. 난 촉이 엄청 빠르거든. 무도회에서 눈빛만 봐도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다
안다니까?”
“…….”
이번에는 내가 가느다랗게 좁힌 눈으로 엘로이를 응시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지 들어나 보고 싶었다.
“갑자기 우리가 뭐가 다른데?”
“엄청 다르지. 여태는 뭐랄까 그냥 서로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산다, 이런
느낌이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서로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긴장하던걸? 어제 무슨 일 있었지?”
“…….”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눈에 힘을 풀고 입맛을 다시 듯 입술을 몇 번 물었다가 놓았다.
엘로이가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아니면 우리가 너무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걸까?
잠깐 창밖을 한 번 본 내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가 올리며 엘로이를 향해 떠보듯이 물었다.
“티나?”
“엄청.”
“…….”
엘로이의 대답은 한겨울에 추락하는 고드름처럼 단칼같이 내리꽂혔다.
하여간 누가 어머니가 낳은 딸 아니랄까 봐 시리다 못해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엘로이가 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둘이 뭐 했어?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데, 3 년이나 가짜 부부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니까 궁금하잖아?”
“부부 문제에 남이 끼어드는 거 아니야.”
“설마 3 년 만에 처음으로 뽀뽀라도 한 건 아닐 테고?”
“…….”
순간 내 심장이 움찔했다.
“그것도 아니면 또 오라버니의 새로운 모습을 본 거야?”
“…….”
휴우.
뽀뽀라는 말에 잠시 긴장했던 내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3 년 만에 제대로 된 첫 키스를 한 사실을 들킬 뻔했다.
나는 엘로이의 놀림과 조롱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보긴 봤지. 새로운 모습.”
“이번엔 또 뭐였는데?”
“알렉이 이제 춤도 잘 추더라고.”
“그래?”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가 어제 가면무도회에 다녀온 사실을 다른 가족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내가 엘로이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혹시 너 아까 일부러 문 두들긴 거니?”
“…….”
엘로이는 대답 없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표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내가 조금 더 차가워진 눈매로 그녀를 응시했다.
엘로이는 대뜸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큭큭 웃었다.
나이는 나와 알렉이 더 많은데 어째 열다섯밖에 안 된 숙녀에게 진도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우리보다 엘로이가 더 활발하게 이성을 만나 본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춤도 잘 췄다니 놀랍네. 오라버니는 그런 거 영 쑥스러워했잖아.”
“…….”
뭐 이미 놀라운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겪었다.
엘로이는 시트 위에 드러누우며 흐음, 한숨을 쉬었다.
“언니랑 오라버니는 집안 망하기 전에 결혼해서 좋겠다. 난 지금 해리엇 얼굴도 못 보는데…….”
불현듯 엘로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파혼한 약혼자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해리엇은 엘로이가 오랫동안 진심으로 짝사랑한 약혼자였다.
“그런데 언니는 안 이상해?”
“뭐가?”
“오라버니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잖아. 난 솔직히 원래 내 오라버니가 맞는지도 모르겠어. 전에는
나한테 엘로이 ‘양’이라고 했다니까? 우웩.”
“…….”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이 얘기였구나.
지금까지 가족들과 터놓고 대화한 적은 없지만, 다들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렉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하고 강해졌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옅은 숨을 내쉬며 내가 대답했다.
“나는 아마 알렉이 기억을 좀 잃은 게 아닌가 싶어.”
“기억? 그런가?”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누이동생을 그냥 엘로이라고 부르는 걸 잊었을 수도 있잖아? 기억이 훼손됐다면
당연히 성격도 좀 달라질 수도 있는 거고.”
“그래? 흐음.”
엘로이는 인상까지 쓰며 조금 고민하더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인상을 풀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돌아눕더니 머리를 괴고 짓궂게 눈빛을 밝혔다.
“언니, 만약 오라버니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거면 어떻게 할 거야?”
“응?”
“달라진 게 아니라 정말 딴사람이 오라버니 흉내 내는 거면 어쩔 거냐고.”
“글쎄.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알렉 흉내를 내면서 우리랑 같이 살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7 화

* * *

로라 티룸은 루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티룸답게 많은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원 같은 컨셉 꾸며진 온실 안에는 띄엄띄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제각기 화려한 꽃 장식으로 꾸며졌다.
“우와아. 너무 오고 싶었어.”
엘로이는 그리워하던 고향에라도 온 듯 감탄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알렉이 새로 사 준 화려한 드레스까지 잘 어울리게 차려입고 있었다.
노란빛의 쉬폰으로 겹겹이 주름을 잡은 사랑스러운 드레스였다.
저 정도 드레스가 없었다면 아마 루덴은커녕 수도 근처로도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알렉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가 살짝 입술을 떼며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아마 그가 이렇게 사랑스럽고 근사해서 엘로이에게 내 마음을 일찍 들킨 것 같았다.

‘언니, 만약 오라버니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거면 어떻게 할 거야?’


‘달라진 게 아니라 정말 딴사람이 오라버니 흉내 내는 거면 어쩔 거냐고.’

문득 마차 안에서 엘로이가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알렉이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도 여태 떠올려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만약 알렉의 몸에 누군가 빙의했다면?’
아마 그랬다면 이미 그 누군가는 혼자 떠나지 않았을까?
진짜 알렉도 아닌데 생판 알지도 못하는 우리와 알렉인 척하며 계속 같이 지낼 이유가 없었다.
알렉이 강해진 것 외에도 묘하게 다른 사람 같은 이질감이 드는 건 아마도…….
기억을 살짝 잃어서 그런 듯한 느낌이었다.
닭고기 샌드위치가 아니라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를 고른 것도 그 이유 같았다.
‘아니면 알렉이 정말로 죽었다가 회귀한 거 아니야?’
우스운 발상이긴 했지만 전생에 내가 읽었던 소설에는 그런 주인공들이 많았다.
고귀한 신분을 갖고 태어났지만 악랄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어 버린 주인공.
그, 혹은 그녀가 먼치킨으로 다시 돌아와 원수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스토리였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망상을 하던 나는 이내 짧은 웃음으로 그 가능성 지워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했지만 만약 그가 회귀한 거라면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렉으로 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차라리 독약의 부작용으로 온몸의 신경이 초월적인 힘으로 강해졌다는 가능성을 믿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우리는 금세 로라 티룸의 출입구 쪽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섰다.
자주 오던 곳이라 익숙했다.
한창 담화를 나누고 있던 귀부인 중 한 명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이내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이 커지더니 서둘러 옆 사람을 톡톡 건드렸다.
그때부터 도미노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알렉에게 속삭였다.
“알렉?”
“예?”
“이따 나랑 말 좀 맞춰 줄래요?”
“무슨-.”
나는 알렉이 미처 다 되묻기 전에 얼른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난 오늘 여기서 우리 신분을 되찾을 생각이거든요.”
“예?”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았고, 곁에 있던 엘로이도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정면을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지나 보면 알겠지.”
알렉과 엘로이는 나에게 무언가 더 묻지 못했다.
곧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향한 귀부인들의 눈빛과 안색은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전 브렌트 공작가 분들이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가면무도회에서 보았던 두 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요즘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사람들의 질문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눈앞의 귀부인들은 소위 티룸 죽순이였다.
어제 무도회장에서 그들을 알아본 나는 오늘 일부러 이곳에 들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엘로이는 아직 내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듯했고, 알렉은 잠자코 내 옆에서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들고 있던 겨울용 부채를 왼손 옮거 넓게 펼쳤다.
스무 겹으로 이뤄진 진보랏빛 깃털이 우아함을 과시했다.
순간 귀부인들의 눈동자에 탐미가 감돌았다.
이 부채가 귀부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할 바바리타조의 깃털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듯했다.
황제에게 재물과 땅을 모두 빼앗긴 내가 어떻게 이토록 값비싼 물건을 손에 쥘 수 있었을까?
아마 지금쯤 저들은 나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을 것이다.
눈웃음을 지은 나는 그 부채로 살짝 입술과 코끝을 가렸다.
이건 귀족들끼리만 통하는 부채로 하는 대화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악의가 전혀 없으며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였다.
과연 내 뜻을 알아들은 듯 귀부인들의 낯빛이 밝아졌다.
“저희는 북부로 이사를 했답니다. 원래 살던 곳만큼 비옥하지는 않아도 우리 식구끼리 단란하게 지내고
있어요.”
부채를 내린 나는 살짝 접으며 부채의 끄트머리로 오른손 위를 톡 건드렸다.
이건 ‘궁금한 건 뭐든지 물어봐.’라는 뜻.
귀부인들의 안색이 더욱 환해졌다.
“공작가 분들끼리 단란하게요? 설마 사용인 한 명 없는 건가요?”
“아쉽게도 그렇답니다. 폐하의 지엄한 명령이니 거스를 수는 없죠. 저희를 위해 일하거나 지낼 곳을
마련해 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셨죠.”
귀부인들이 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저희는 전 공작가 분들께서 어디 절벽에 몸이라도 던지는 건 아닐까 많이 걱정했답니다.”
“작위와 전 재산을 잃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저 같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전 브렌트 공작가 분들은 여전하신 것 같아 정말이지 대단하네요.”
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진심으로 감탄하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하긴 그 고난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귀족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시 사교계에 나타날 생각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일 것이다.
나는 우아하게 굽힌 손을 살짝 입술에 갖다 대며 안타깝게 말을 이었다.
“저희도 처음에는 많이 막막했답니다. 길바닥을 침대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허리가 저리는 것
같았어요.”
“저런. 이런 날씨라면 아침에 입이 돌아갈 거예요.”
어느 귀부인의 맞장구에 내가 다시 구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터전을 구할 수 있었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어느 부인들께서 무도회 초대장까지
보내 주셨었죠.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잘 오셨어요. 어제처럼 사교계에서 모두가 크게 주목한 건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 아닌가요?”
“전 공작 각하는 어쩐지 더 멋있어지신 것 같고요.”
“무도회에 한 번 더 와 주실 수 있나요? 초대장을 또 보낼게요!”
불현듯 여자들이 부채를 펼쳐 들더니 깃털을 휘날리며 경쾌하게 부치기 시작했다.
한겨울에 더운 건 아니었다.
박수를 치는 대신 그 의미를 담아 부채질을 하는 거였다.
그 박수갈채에 화답하듯 나도 능숙한 손놀림으로 부채를 휙 펼치고는 휘휘 저었다.
엘로이도 질세라 비장한 눈빛을 하고는 절도 있게 부채질을 했다.
소리 없는 박수가 티룸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부채질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쯤 내가 소리 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줄리아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폐하의 눈에도 거슬릴 거고요.”
“아…….”
갑자기 사람들이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 폐하의 눈치를 봐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듯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필 줄리아가 오늘부터 요양을 시작했다고 해요.”
“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나요?”
“아뇨. 오웬 백작하고 싸웠다가 백작이 마르셀 후작을 찾아가 자기가 줄리아의 정부였다고 폭로한 거
있죠?”
“어머나, 웬일이람.”
나는 영혼 없이 감탄사를 두 개나 내뱉었다.
“줄리아는 아니라고 했는데 어쨌든 마르셀 후작하고 크게 싸운 모양이에요.”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벌을 더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 캐시의 목숨값의 반의반도 치르지 않았잖아?
어쨌든 줄리아와 마르셀의 관계가 틀어지고 있다니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아무쪼록 여러분, 어제의 무도회는 초대장이 있었지만, 저희가 예전처럼 다시 사교계에 돌아올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많이 아쉽네요. 더 이상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에요, 루이제. 졸부도 초대만 받는다면 어떤 모임이든 올 수 있는 걸요?”
“맞아요. 꼭 작위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사교계는 모든 분들께 문이 열려 있다고 줄리아도 늘 말했는걸요?”
“…….”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꽤 우호적이었다.
나는 흡족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렸다가 다시 아쉬워했다.
“그렇긴 하지만, 폐하께서 좋아하시지도 않을 거예요.”
“…….”
사람들이 다시 슬픈 눈으로 말을 잃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으며 내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마 폐하께서 저희에게 작위를 되돌려 주실지도 모르겠네요.”
“네?”
내 말에 사람들이 조금 동요했다.
알렉과 엘로이도 미세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으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우리의 작위와 재산을 손수 취하신 건 우리 남편의 말투를 치료해 주려던 깊은 뜻이었거든요.
그렇죠. 알렉?”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8 화

나는 말을 마치며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알렉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나와 말을 맞추라는 당부를 떠올린 듯 근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
그러자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어머, 정말로 말씀을 잘하시잖아?”
“어떻게 갑자기 습관을 고치게 된 걸까요?”
“대단하네요, 정말.”
사람들이 대놓고 웅성웅성하며 감탄을 쏟았다.
나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황궁에 갔을 때 황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브렌트 공작 자네에게 내 친히 처방을 내려 주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분명 황제는 알렉의 언어 습관을 고쳐 주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는 거라고 말했다.


물론 진심은 알렉을 골탕 먹이고 괴롭히려는 것이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알렉을 고쳐 주겠다는 이유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듯 귀부인들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분명 그런 말씀을 하긴 하셨죠.”
“맞아요. 전 공작 각하께 큰 충격을 선사하면 말 더듬는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설마 정말로 충격이 깊어서 말씀하는 방식이 달라진 건가요?”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알렉의 말투가 나아졌다는 이유로 폭군이 우리의 작위를 돌려줄 거라는 희망은 별로 크지 않았다.
사악한 소년이 개미를 밟아 죽이듯 의미도 없는 행동에 우리가 밟힌 거였으니까.
신분을 돌려줄지 말지는 오로지 폭군에게 달린 일이었다.
나는 처연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렇게 되어서 저희는 희망을 품게 되었답니다. 폐하께서 저희 가문에 자비를 베풀어 주실 거라는 분명한
희망이요.”
“…….”
실은 지금 이대로도 나는 살 만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기에는 억울한 기분이 자꾸만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귀족들도 억울하게 몰락한 우리 가문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저들 중 또 누군가의 가문이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듯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폐하께서 또 다른 가문의 일도 해결해 주려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보니 폐하의 대안이
성공적이었잖아요?”
“아…….”
부인들이 탄식했다.
다음 폭망의 차례가 자신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위세가 등등했던 브렌트 공작저마저 한순간에 몰락했는데, 다른 가문들이라고 뭐가 어려울까?
그동안 우리 가문의 경우처럼 귀족가가 눈에 띄게 당한 적이 없어서 이제야 귀족들은 슬슬 폭군의
불합리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이어서 소리 냈다.
“부디 여러분들의 가정에는 아무 일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 말하며 큰 동작으로 부채를 휙 펼쳐 눈 바로 아래까지 가렸다.
귀부인들을 주시하는 내 눈빛이 고요하면서도 단단했다.
이건 ‘두고 보겠다.’는 뜻이었다.
주로 남편의 정부를 향해 휘두르는 부채의 언어였지만, 내 의도를 알아들은 듯 부인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요.
그러나 아직은 이 말을 대놓고 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폭군에게 당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만 풍길 수 있을 뿐이었다.
찬란하고 화려한 온실 티룸 안에 어울리지 않게 숙연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절도 있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뭔가 싶어 의아하게 고개를 돌린 엘로이의 눈이 유령을 본 것처럼 커졌다.
“해리엇!”
해리엇?
나는 부채를 접으며 엘로이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티룸 안으로 파란 망토를 휘날리며 기사들이 열 맞춰 들어서고 있었다.
“…….”
나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시누이와 결혼할 뻔한 사람이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파란 피 기사단과 그 기사단장인 해리엇 워든 백작.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나타난 차가운 기사들의 모습에 귀부인들이 살짝 떠는 게 느껴졌다.
해리엇은 릴트 제국의 10 대 숙녀들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잘생긴 외모로 우리의 앞에 마주 섰다.
그는 엘로이를 못 본 척하는 건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해리엇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황제 폐하께서 전 브렌트 공작 부부를 황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
벌써 우리를 부르는 거야?
우리에 대한 소식을 생각보다 빨리 들었구나.
지금보다 더 소문이 나야 그제야 들은 척이라도 해 줄 줄 알았다.
어쨌든 모든 게 계획대로라 나는 한쪽 입가가 씰룩대려는 것을 꾹 눌러야 했다.

* * *

띠링!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해리엇 워든]
[남, 나이: 16 세]
[워든 백작이자 파란 피 기사단의 기사단장. 아버지인 뉴튼 워든 백작이 젊은 나이에 죽어 최연소로
기사단을 이어받았다.]
[피도 눈물도 없고 버르장머리도 없지만 평소에는 무심한 듯 친절한 태도로 숨기고 있다.]
[엘로이 마이어스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권력을 위해 황제의 누이동생인 아나벨 황녀를 선택했다. 훗날
엘로이가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하자 괴로워한다.]
[전투력: 레벨 35]
[주 무기: 파란 피 기사단장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파란 눈의 검.]

‘파란 피 기사단……?’
새 등장인물 일람을 모두 확인한 알렉은 이내 창을 껐다.
유리 온실 안으로 기사들이 들어서자 뜻밖에 등장인물 일람이 개방되었다.
눈앞의 기사들은 꼭 만들어진 게임 속 NPC 처럼 모두 준수하고 훤칠한 데다가 매끈했는데,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기사단장인 해리엇인 모양이었다.
소년인지 청년인지 모를 외모였다.
파란 피 기사단이라면 원작에서 악센의 수하 노릇을 했던 기억이 났다.
“저희를 초대하셨다고요? 뜻밖의 소식이네요. 황제 폐하의 초청이라니 기꺼이 받들겠어요.”
그런데 루이제는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이긴 해도 별로 꺼리는 기색 없이 황명에 따랐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는 황제의 명령.
결국 그와 루이제는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엘로이까지 초대한 건 아니라서 엘로이는 티룸에 남아야 했다.
‘그나저나 루이제가 신분을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우아하면서도 영롱한 루이제의 목소리가 아직 그의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있었다.

‘난 오늘 여기서 우리 신분을 되찾을 생각이거든요.’

설마 루이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루이제 또한 신분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하고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득 부드럽고 연약한 무언가가 알렉의 손등을 감쌌다.
“긴장하지 말아요. 황제 폐하를 만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예요.”
내려다보니 루이제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고 있었다.
상냥하면서도 가녀린 감촉.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알렉은 창 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루이제의 손 때문에 없던 긴장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는 잠깐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부인께서 그런 계획을 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네? 아…….”
이대로 그냥 살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신분을 되찾겠다는 말을 하면서 보인 눈빛에는 즐거운 희망과 흥분 같은 것들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의외인 데다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포기하고 체념하려고 하지 않을까?
온실에서 만난 귀부인들의 반응도 우리 가족들을 놀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루이제가 자조하듯 웃었다.
“……알렉, 나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런데 왠지 이상하게 희망을 품게 되더라고요.”
“…….”
“당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점점 용기가 생기고 목표를 갖게 됐어요. 당신이 더 이상 참기만 하지
않잖아요.”
“…….”
그건 그냥……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루이제를 마주 응시했다.
“당신이 변하지 않았다면 나도 어제 갔던 무도회 같은 곳,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예요.”
“…….”
“그래서 나도 한번 우리의 것들을 되찾아 보려고요. 물론 무리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여태 당한 게 있다 보니 하는 데까진 해 볼 거예요.”
“…….”
알렉은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뗐다가 그냥 다시 다물었다.
루이제의 보랏빛 눈동자가 새벽녘 물방울처럼 투명하면서도, 동시에 강화 유리처럼 단단해 보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59 화

* * *

이윽고 마차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진입했다.


길이 흙 한 톨 없이 매끈하게 마련된 데다가 주변의 분위기가 삼엄해서 황궁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것 같았다.
‘……그러면 곧 악센의 실물을 보게 되는 건가?’
문득 그런 깨달음이 들었다.
악센을 실제로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소설 속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는 것도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악센은 지금 그의 원수이자 적.
꼭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악센은 이 제국의 입장에서도 악의 축이었다.

‘레벨을 높여서 폭군 악센을 무찌르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세요!’

그러나 당장은 악센을 죽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의 레벨은 5 였고, 악센은 300 레벨쯤 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악센은 이 제국에서 유일한 흑마법사였고, 장차 온 제국을 어둠으로 물들일 악의 세력 그 자체였다.
알렉은 원작의 내용을 다시 짧게 떠올려 보았다.
어린 악센의 불길하고도 기이한 힘에서부터 첫 장이 시작되었다.
.
.
.
여느 때처럼 악센이 부모님을 따라 황궁에 간 어느 날이었다.
당시 황태자였던 브룩스 카이슬리는 악센이 황궁에 올 때마다 학대와 같은 장난을 일삼았다.
그날따라 도가 지나쳐 악센은 브룩스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고, 자신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마력을 터뜨렸다.
마력에 당한 브룩스는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며 쓰러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악센 자신도 몰라 어안이 벙벙한 순간, 마침 그 모습을 악센의 큰아버지인 황제
부부가 목격하게 되었다.
브룩스는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겨우 의식을 되찾았으나 몇 년이나 앓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사이 황제 부부는 불길한 힘을 가진 악센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힘이라 도움을 청할 곳도 찾을 수 없었다.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악센은 매일매일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떻게 된 건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울며 사죄했다.
그러나 황제 부부뿐만 아니라 황제의 아우인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에게도 두려움과 경멸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황태자 전하를 해칠 수가 있어?’


‘사람은 죽이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넌 어떻게 된 애가…….’

악센은 분하고 억울했다. 친부모님마저 자신을 혐오할 줄은 몰랐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용서해 주지 않았다.
브룩스가 죽은 해에 그는 수도를 떠났다.
그에게 갑자기 무슨 힘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더 강해지리라.
이 분노를 키우고 갈고닦아 자신을 무시한 황제 부부에게 당한 것을 갚아 주고, 모든 것을 제 발아래에
두겠다고 다짐했다.
악센은 당시 그레이브 용병단장이었던 카슨의 아버지에게 전투와 살육의 기술을 배웠다.
자신의 분노를 연료로 삼아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들끓는 마나를 성장시켰다.
그는 스스로가 제국에서 유일하게 기적 같은 힘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던 흑마법사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강해진 악센을 이길 수는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악센은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대놓고 만천하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던 탓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마력을 사용해 목숨을 앗아 갔다.
악센의 마력은 7 서클 정도로 전생의 알렉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7 서클까지 성장시킨 건 놀라운 능력이었다.
악센은 1 년 만에 다시 수도로 돌아와 황족으로서의 삶을 이어 가며 마력을 키웠다.
그동안 황제 부부는 브룩스 황태자를 잃은 아픔을 딛고 리디트 황자를 낳았지만, 그 이후에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악센이 황위를 찬탈했다.
.
.
.
원작의 내용을 곱씹어 보는 동안 금세 마차는 멈췄다.
과연 악센은 그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의 그는 예전의 알렉시스가 아니었다.

* * *

“부인은 변함없이 영롱하고 아름답네요.”


인사를 마친 내가 황후를 바라보자 그녀가 흐뭇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황후를 공손하게 응시했다.
황후인 올리비아는 늘 그렇듯 병약해 보였다. 희미하게 지은 미소에도 힘이 없었다.
저런 맥없는 모습 때문인지 황후는 황제와는 다르게 부드럽기로 꽤 평판이 놓았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황후가 얼마나 계산적인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적절한 품위와 친근함을 갖춰 말했다.
“이렇게 황후 폐하를 다시 뵈니 오래된 고향의 벗을 만난 것 같습니다.”
“나 또한 그렇답니다. 본의 아니게 힘든 일을 겪게 해서 미안했어요. 사실 나는 루이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이미 3 년 전부터 제 나라는 릴트 제국뿐이었답니다, 폐하.”
나는 약간의 안타까움을 담아 답했다.
물론 시댁이 망했을 때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
상처를 가득 품고 떠나온 곳인데, 아무리 처지가 나빠지더라도 기댈 곳은 아니었다.
“그랬군요. 황제 폐하께서도 전 브렌트 공작가 분들의 이런 애국심을 알아주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
황후의 말에 나는 그냥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 황후 폐하께서 대신 말씀 좀 전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차분하게
비즈니스용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제 황후는 알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 브렌트 공작. 그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죠?”
황후는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고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알렉은 잠시 그런 황후를 바라보다가 옅은 숨을 내쉬며 깔끔한 태도로 대답했다.
“헤아려 주시어 감복할 따름입니다.”
넓은 황궁 안이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더욱 근사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너무 공경을 표하지도, 그렇다고 전혀 무례하지도 않은 흠 잡을 데 없는 어투였다.
황후는 내심 움찔한 기색으로 알렉을 응시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소리 냈다.
“나는 다른 분들에게 전해 듣기만 했는데,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네요. 목소리만 들으면 그대가 전
브렌트 공작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말끝에 황후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 황후가 금세 다시 말했다.
“그럼 폐하를 더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으니 이만 날 따라오도록 해요.”
“예, 황후 폐하.”
가뿐한 대답과 함께 따라간 곳은 만찬실이었다. 마침 저녁을 먹을 시간이기도 했다.
황궁의 만찬실은 너무도 휘황찬란하고 눈이 부셔서 늘 입맛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우리의 세금을 얼마나 처바른 건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다린다던 황제는 역시나 없었고, 황후를 비롯한 우리가 한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는 인기척만으로도 재수 없는 존재감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아, 이 새끼가 진짜 짜증 나게 하네…….’
황제는 귀족들과 만찬이 있는 날이면 늘 한 시간은 늦게 나타났다.
굳이 그런 정치적인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제가 사실은 얼마나 본심이 심약하고, 불안정한 놈인지 깨달을 뿐이었다.
이미 소문난 폭군인 놈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압감을 각인시키려고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니 말이다.
나는 진저리가 쳐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별로 놈의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깐 내가 살짝 드레스 자락을 들고 예를 표했다.
굽혔던 무릎을 다시 펴는 사이 알렉이 똑같은 말로 인사를 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만찬실 안으로 들어서던 황제가 그제야 고개만 돌려 알렉을 눈에 담았다.
변한 알렉의 말투를 단번에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황좌로 다가가며 짧게 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서 좋은 소식이 들리길래 축배라도 들까 해서 불렀는데, 축배가 아니라 축탄을 준비할 걸 그랬군.”
그 축탄이 폭죽인지 폭탄인지 똑바로 말해 줄래?
황제는 원래 늘 날이 서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도 매섭기 그지없었다.
평범한 사람 같지 않게 상대방을 움츠러들게 하는 어두운 기운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앉도록 해.”
이윽고 황제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알렉과 나도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긴 탁자의 끝에 앉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등장하자 식탁이 아니라 알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던 사치스러운 황좌의 빛깔이 모조리 무색해졌다.
황제는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공간을 압도하는 남자였다.
거칠게 손질한 듯한 금발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때문인지 이목구비가 더욱 강렬해 보였다.
외모만 보면 못나지는 않았지만 행실로 그 장점을 다 깎아 먹는 놈이었다.
“그래, 지금은 어디에서 지내고 있지?”
황제가 은색 잔을 들며 물었다.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술을 삼키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형형한 눈동자는 알렉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알렉이 턱 끝에 살짝 손을 대며 은근한 여유가 느껴지는 톤으로 말했다.
“북부의 그랜드칼리라는 곳입니다.”
“…….”
무심한 듯 완벽한 발음.
입을 축이던 황제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그 짧은 찰나 주위에서 대기하던 시종들도 눈 하나 깜짝하지 못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0 화

금세 황제가 잔을 내려놓았다.
“과연 소문대로 말을 잘하는군.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없이 매끄러워. 제국의 내로라하는 달변가들도
머리를 조아리겠어.”
“…….”
나는 황제가 변한 알렉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내심 저놈도 무척 놀라운 모양이었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긴 했지만 감탄은 감춰지지 않았다.
“운이 좋았죠. 특별한 성총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알렉은 황제 앞에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앞에서까지 이 정도로 주눅 들지 않을 줄이야.
황제와 알렉 사이에 전에 없던 팽팽한 줄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언뜻 보니 올리비아도 그 묘한 긴장감을 알아차렸는지 어깨를 조금 굳힌 채 힘겹게 편안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알렉시스. 과연 나의 충격요법이 효력이 있었던 모양이군.”
황제는 날카로우면서도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나와 알렉은 뭐라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알렉도 나처럼 할 말이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 듯했다.
여기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을 심히 굽혀야 했으니까.
이윽고 황제가 손짓하자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다 싶은 순간 황제가 제 기다란 손끝을 턱에 대며 조금 비딱하게 팔걸이에 기댔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작위와 전 재산을 잃고도 멀쩡할 줄은 몰랐거든. 안 그런가, 황후?”
황제가 신기한 듯 눈빛을 밝혔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우리더러 죽으란 거였지?
황후는 폐하의 말에 동감하듯 옅게 웃었다.
“예. 도와준 사람들도 없었을 텐데 대단하네요. 모두들 얼마 안 가 공작가 분들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답니다. 폐하께 애원이라도 하면 없던 일로 해 주실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나도 그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
이것들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게 탁자 아래로 주먹을 꽉 쥐고 음식을 씹었다.
알렉은 모든 걸 잃고 절망한 나머지 죽음을 시도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찾아와 애원하길
기다렸다고?
황제의 말 한마디에 살고 죽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도 하찮고 우습게 느껴졌다.
황제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북부의 그랜드칼리라니 하필이면 척박하고 험준한 곳으로 갔군.”
“거긴 굶주린 산짐승들도 자주 출몰한다고 들었어요. 나도 몇 번 가 보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았지만 겨울에는 혹독할 만큼 춥더라고요. 지내기 괜찮은가요?”
당신들 같으면 괜찮겠냐?
오늘따라 유독 더 황제 부부가 밉상이었다.
나를 향한 황후의 시선에 나는 테이블 냅킨으로 입술을 한번 찍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아니 꼬아도 내색하면 내 손해였다.
나는 우리의 신분을 되찾아야 했으니까.
“날씨가 혹독하긴 해도 우리 릴트 제국의 땅인걸요. 이 기회에 처음 가 보는 지역에서 살게 되어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 브렌트 공작 부인이네요. 볼 때마다 현명한 말씀을 하시니 매번 감복한답니다.”
그 순간 짧게 피식 조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였다.
“그렇다니 아주 잘된 일이군. 안 그래도 그랜드칼리는 영주가 없어서 무법 지대나 다름없는 곳이었거든.”
“…….”
무법 지대가 아니라 여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알렉시스?”
황제가 날 선 태도로 알렉을 불렀다. 알렉도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할 때마다 내 심장이 다 선득했다.
알렉은 무례로 여겨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저 두 사람 사이에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자네의 병이 나았으니 황제로서 축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
“…….”
정말로 뭔가 해 주려는 건가? 그러나 그 축하가 정상적일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우리가 원래 살던 풍요로운 저택과 비옥한 영지를 돌려줄 거라고는 일부러 기대하지 않았다.
“그랜드칼리에 성이 하나 있는데 자네에게 선물로 주도록 하지. 내 오랜 친구가 평생을 앓던 병에서
해방되었는데 이 정도쯤은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윌스브룩 성 말씀이십니까?”
“잘 아는군.”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윌스브룩 성?
갑자기 성을 준다고?
그건 그랜드칼리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북부의 유일한 성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제국에서 가장 큰 성으로 한때 명성이 높았다고 했다.
그러나 수백 년 가까이 버려진 성인 데다가 드라큘라가 살았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그 안에 어떤 무시무시한 날짐승이 살고 있을지, 아니면
구렁이나 박쥐들이 떼로 몰려 들어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선물로 준다고?
내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황제의 선물은 거절할 수 없었고, 그런 성을 하사하는 의도야 뻔했다.
우리더러 가서 살라는 말이었다.
황후도 내심 충격을 받은 듯 낯빛이 좋지 않았다.
“대신 그 성에서 지내면서 주변을 융성하게 발전시켰으면 좋겠군. 그래도 한때 릴트 제국의 천혜 요새였던
곳이었는데 내버려 두기만 해서 마음에 거슬리던 참이었거든.”
“…….”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걸까.
나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앞이 어두워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황제는 우리를 또다시 폭망의 소굴로 던져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윌스브룩 성과 그 일대를 융성하게 발전시킨다는 건 온갖 암초와 잡초가 가득한 고원의 평야를 비옥한
밀밭으로 환골탈태시키라는 말과도 같았다.
말이 북부지 릴트 제국의 북쪽이 얼마나 넓은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했다.
한마디로 황제의 요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을 떼러 왔다가 더 큰 폭풍우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윌스브룩 성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죠.”
응?
잠자코 생각하던 알렉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윌스브룩 성으로 옮긴다고?
나는 눈앞이 다시 컴컴해졌지만 황제의 안색은 밝았다.
알렉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런데 작위도 없이 영지민들을 다스리는 건 좀 곤란합니다.”
“……그렇다니 자네의 작위를 돌려 주지 않을 수가 없겠군.”
……뭐?
작위도 돌려준다고?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느긋하게 치켜올렸다.
“그럼 앞으로 자네들을 윌스브룩 남작과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원래 우리가 가졌던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작위는 돌려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우리 가문은 본래 브렌트 공작이자 캐슬레이 후작이자 윈터본 백작 등 많은 작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높은 작위인 브렌트 공작가로 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랜드칼리는 국경 지역이었으니 일반적인 남작과는 다른 변경의 남작 가문이 되는 것이었다.
변경의 남작은 국경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과 인식이 일반적인 남작보다는 높았다.
그래 봤자 북쪽 변경에는 눈 덮인 산들로 이어져 있어 쳐들어올 적도 없었지만.
황제는 픽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일주일 안에 성을 복구시킨다면 자작 작위라도 더 줄 수도 있고.”
“…….”
“한 달 안에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다스리게 되면 브렌트 공작가와 영지를 모두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저 자식 한 대만 세게 치면 얼마나 좋을까.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
황제의 희망 고문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길들인다고 해도 그건 황제의 것이지 우리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들어 똑바로 황제의 눈을 보았다. 내 시선에 황제도 나를 향해 눈길을 돌려 마주 응시했다.
만찬이 시작된 이후로 황제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날카로운 각을 자랑하는 황제의 턱이 조금 경직되었다.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만일 저희가 할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나는 황제의 답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늘 자신의 답을 명령할 뿐 선택권은 주지 않았다.
“……그걸 아직도 모르나? 자네들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
“거역하면 죽음뿐이지.”
그러면 그렇지.
나는 입술을 뗐다가 도로 다시 다물었다.
어차피 황제는 귀족 중 누군가를 그랜드칼리로 보내 완벽하게 길들일 생각인 것 같았다.
이 광활한 릴트 제국에서 동서남부를 제외한 북부만 아직 황제의 영향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귀족 작위를 다시 얻게 된 건 잘된 일이야.’
나는 그 긍정적인 사실만 떠올리며 이 황명을 기회로 여겼다.
비록 영지 개발이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강제로 지게 되었지만, 이제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구해 마음대로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우리의 신분을 다 찾은 건 아니어도 이 정도면 딱히 공작위가 없어도 충분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1 화

* * *

러플로 가득한 나이트가운으로 갈아 입은 황후는 황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돌아간 이후 황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황후는 애써 숨을 들이쉬며 웃어 보였다.
“사실 전 아까 많이 놀랐답니다. 그들에게 그랜드칼리를 맡겨도 괜찮은 건가요?”
올리비아의 말에 악센의 입가가 웃듯이 조금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황제는 어두워진 창밖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은색 잔에 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늘 저 술을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술 냄새를 한 번도 풍기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희박해 보이지만 혹시라도 영지 개발에 성공이라도 하면…… 없던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해서요.”
황제가 북부도 장악하려고 한다는 건 이미 황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릴트 제국의 중심과 동서남부는 이미 황제가 강력하게 쥐고 있었다.
그러나 북부는 반역이 일어나든 말든 황제가 바뀌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무법 지대라 황제도 여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윌스브룩 성과 그랜드칼리를 재개발한다면, 그만큼 찬란하고 광활한 눈의 도시도 없을 것이다.
땅속에서 고드름이 솟아오른 듯 하늘을 향해 내질러진 날카로운 산들, 그 산들이 비호하듯 두르고 있는
윌스브룩 성.
황궁에서는 몇 달 전부터 북부의 윌스브룩 성과 그 일대로 탐사를 보내기도 했는데 희한하게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윌스브룩 성이 드라큘라의 거처라는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그곳은 보는 이를 조아리게 하는 위압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런 곳에 전 브렌트 공작가를 보내다니…….’
올리비아는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가자마자 죽을 확률이 높았지만, 혹시라도 성공한다면?
북부인들이 그들을 영주로 섬긴다면?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브렌트 공작가는 전과는 다른 위세를 갖게 될 테고,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제는 올리비아의 그런 걱정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짧게 웃었다.
“과연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어차피 윌스브룩 성의 방 하나 제대로 치우지도 못할 거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 불안감은 뭘까.
황제는 평소처럼 느긋했지만 올리비아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올곧고 반듯한 전 브렌트 공작 부부를 만난 이후라?
아니.
올리비아는 자신의 이 초조함이 어디에서 온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타인에게는 무관심 아니면 죽임으로 양분된 태도를 보이던 황제가 브렌트 공작 부부에게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 신분과 재산을 빼앗았다가 다시 또 다른 쳇바퀴에 넣어 굴리다니.
이건 명백한 흥미이자 관심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저런 관심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올리비아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런데 영지민들이 쉽게 따를지 모르겠네요. 오랫동안 방치된 곳이라 중앙의 영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잖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더욱더 릴트 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나?”
“…….”
“부디 알렉시스가 내 예상을 깨고 성공했으면 좋겠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든 황제의 눈동자에 짧게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오늘 악센은 알렉시스의 달라진 태도를 보고 묘한 불쾌감에 휩싸였지만, 딱히 그 모습을 대단하게 여길 건
아니었다.
등신에서 겨우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니까.
‘이번에는 살려 달라고 구걸하러 오려나?’
그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때가 올지 꺾을 수 있을 때까지 꺾어 보고 싶었다.
오늘 그를 똑바로 응시하던 보랏빛 눈동자를 보니 더 고대하게 되었다.
“폐하.”
문득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낮고 연약한 목소리가 악센의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가 돌아볼 틈도 없이 여린 팔이 그의 허리를 감으며 다가왔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채 다 닿기도 전에 악센은 손끝으로 황후의 팔을 잡아 떼어 냈다.
“피곤하군.”
“…….”
옷에 묻은 벌레를 떼어 낼 때도 이보다는 온기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럴 때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녀를 밀어낸 지 몇 달이나 되었을까.
황제가 이미 거절했으니 올리비아는 더 다가갈 수 없었다.
그에게 두 번 똑같은 말을 하게 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이미 잘 아는 탓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와의 관계를 피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침실로 들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몇 달이나 그 이유를 살피던 올리비아는 어쩐지 지금 이 순간 확신이 들었다.
설마 윌스브룩 남작 부인이 될 여자를 가지려고 그들 부부를 괴롭히고, 황후인 그녀까지 밀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옷자락을 세게 쥔 올리비아의 눈빛이 짧게 타올랐다.

* * *

“뭐? 윌스브룩 성? 말도 안 돼!”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엘로이의 경악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납득할 만한 설명으로 이 두 진상을 이해시켜야
했다.
시어머니는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나는 성을 다 깨끗이 쓸고 닦으면 그때 가마.”
“…….”
정말이지 다들 개성 넘치는 반응이구나.
엘로이는 금방이라도 울 듯 끔찍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냥 여기서 계속 살면 안 돼? 거기서 어떻게 살아. 거미줄도 엄청 많을 거고 먼지도 백 년이나 묵었을
텐데!”
“사용인들을 한 천 명쯤 고용하면 깨끗해지지 않겠니?”
어휴.
언제는 여기가 오두막이라며.
시누이는 울먹였고, 시어머니는 여전히 내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우아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윌스브룩 성의 장점을 찾아 엘로이를 위로했다.
“무려 성에 살게 돼서 기쁘지 않아? 원래 우리가 살던 공작저보다 방이 삼백 개는 더 많을걸.”
“길 잃어서 굶어 죽으면 누가 구해 주는데? 자다가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면? 거기 지하실에 막 거지들이
살고 있는 거 아니야?”
“…….”
이러다 내가 설득당하겠다.
나는 조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철없는 이야기 좀 그만하셨으면 좋겠네요.”
“뭐?”
“대박…….”
시어머니는 불쾌하게 눈썹을 찡그렸고, 시누이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리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할 때예요. 지금 우리 상황이 장난이 아닌 건 아시죠? 차라리
공작저에서 처음 쫓겨났을 때가 더 나을 정도라고요.”
“……그럼 우리더러 뭐 어떻게 하라고?”
엘로이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찡그렸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정확히 말하면 그랜드칼리로 가기 직전의 북부였다.
그랜드칼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윌스브룩 성이 있는 깊숙한 곳으로 가면 가혹한 날씨에 쉽게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북부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의 텃세도 문제였다.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영주랍시고 나타난다고 해서 우리들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엘로이가 기죽은 목소리로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다시 황궁에 가서 빌자, 언니.”
“뭐?”
“오라버니랑 우리가 어떻게 북부를 다스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엘로이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힘들겠지.”
“그러니까 차라리 다시 황제 폐하를 찾아가서 못하겠다고 빌면 안 돼? 무조건 그냥 잘못했다고 해.”
“……그럼 북부 대신 형장에 가서 목을 내밀어야 할 거야.”
“…….”
내 말에 엘로이가 할 말을 잃었는지 입술만 우물거렸다.
무엇보다 나는 다시 황제를 찾아가 북부행을 취소해 달라고 빌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그렇게는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우리를 도와줄 조력자들이 필요해요.”
“조력자?”
“응.”
엘로이의 말에 나는 가볍게 끄덕였다.
시어머니는 소파에 기대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우선 귀족 신분은 되찾았으니 원래 브렌트 공작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을 불러야겠어요.”
브렌트 공작가의 사용인들 중에는 오랫동안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숙달된 사용인들이라 저택의 일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었으며,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사불란 하게 움직여 주는 센스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나는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돌아와 줄까?
무려 그랜드칼리로 와야 했으니 아무도 돌아오려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기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용인들을 되찾고 싶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장 브렌트 공작가답게 지낼 수 있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으니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2 화

“그 사람들이 백 년 묵은 성을 청소하러 올까?”


“아니. 청소는 성 근처 사람들을 단기로 고용해 보는 게 좋겠어.”
“그럼 사용인들도 그냥 성 근처 사람들로 쓰면 안 돼?”
“안 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우리의 사람들이 필요해. 그러니까 엘로이랑 어머님이 사용인들마다
찾아가서 설득 좀 해 주세요.”
“……맙소사.”
“…….”
엘로이는 이제 두 팔을 들며 소파에 몸을 묻었고, 시어머니는 딱히 말이 없었다.
나는 조금 단호한 투로 설명을 이어 갔다.
“루덴에 집을 하나 구할 거예요.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거기 머물면서 반드시
설득하셔야 돼요. 이번 일 성공하면…… 원래 우리의 공작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
반쯤은 거짓말이었지만, 저 답 없는 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조금의 미끼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두 분 다 할 수 있죠?”
“…….”
시어머니는 내 눈을 피하며 기품 있게 새끼손가락을 올려 찻잔을 들었다.
엘로이는 체념한 것처럼 한참을 시무룩해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해리엇이랑 다시 약혼할 수 있을까?”
“…….”
그러고 보니 낮에 티룸에서 해리엇을 마주쳤지?
해리엇은 엘로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엘로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엘로이는 해리엇도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조금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해리엇보다 더 좋은 남자랑 결혼할 수 있어.”
“그런 남자는 없어.”
“없긴 왜 없어. 네가 아직 그런 남자를 못 만나 봐서 그래.”
“루이제?”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뜸 시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녀를 응시하자 시어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날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어쨌든 루덴에서 제일 큰 저택을 구해 줬으면 좋겠구나.”
“…….”
어련하시겠어요…….
시어머니가 만족할 만한 집을 구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제 돈 걱정 같은 건 전혀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 * *
휘이잉, 휘잉.
살을 에는 듯이 공기가 차가웠다.
이런 추위는 설귀가 출몰하는 게이트에 갔을 때 말고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높은 산의 중턱에 선 그는 윌스브룩 성을 탐색하듯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홀로 이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귀곡성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사위에 휘날렸다.
그 너머에 뾰족뾰족한 첨탑이 가시처럼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
누가 봐도 살벌한 풍경.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지금은 밤과 새벽의 사이라 더 춥긴 하겠지만, 낮에도 꽤 견디기 힘들 것 같은 날씨였다.
성의 주위에는 눈 쌓인 절벽 같은 산뿐이었고,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황폐함이
자욱했다.
원작에서도 악센은 그랜드칼리에 숱하게 많은 귀족들을 보냈다.
그러나 보내는 족족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자살하거나 실족사했다.
여기까지 접근한 사람도 한 명 없었다.
남은 귀족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벌벌 떨었던 내용이 기억났다.
그럼에도 악센이 계속해서 그랜드칼리에 귀족들을 보낸 건 과연 누가 성공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악랄한
흥미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냥 둬도 상관없는 북부였는데, 악센으로 인해 아깝게 죽은 목숨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북부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악센은 자신의 마력으로 북부를 정복했다.
그때 악센은 윌스브룩 성 안에서 뜻하지 않게 초월적인 존재를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봉인된 흡혈귀 캐스다인 글렌베리 백작.
악센은 그 흡혈귀의 능력과 생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마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바로 그 이유로 윌스브룩 성은 알렉 또한 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폭군에게 그랜드칼리라는 지명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원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혹시라도 그를 북부의
영주로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경험치와 더불어 새로운 사역령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라는 감이 왔다.
악센은 정말로 그를 이곳의 영주로 보냈고, 그는 지금 자신의 새로운 사역령을 포섭하기 직전이었다.
이제 탐색은 끝난 시간.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

그는 저항에 특성화된 ‘내 남편 건들지 마.’ 스킬의 효력을 발생시켰다.


휘이익.
특성화 스킬 특유의 안온한 느낌이 그의 몸을 감싸자 칼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스킬. 신속.’

그는 금세 신속 스킬을 써서 윌스브룩 성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깃털 같은 온기와 함께 그는 윌스브룩 성의 성문 앞에서 가볍게 멈춰 섰다.
그 순간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띠링!

[퀘스트 발생!]
[~윌스브룩 성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제거하세요!~]
[윌스브룩 성 안에는 여러 생명체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습니다. 해당 생명체의 등급에 따라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퀘스트 보상]
[경험치(?), 명성(?), 애정도(?), 신뢰도(?)]

[제한 시간: 1 시간]


[시간 내 성공한 경험치만 인정됩니다.]

[최종 보스를 제거할 시 모든 생명 체가 자동으로 제거됩니다!]

* * *

알렉은 우선 한눈에 성을 살펴볼 수 있는 성문 위로 올라가 섰다.


다행히 그는 성으로 오기 전에 집에서 마나를 3 서클까지 성장시킨 상태였다.
5 라는 레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높은 마력이었다.
3 서클까지는 전생의 경험 덕분에 비교적 쉬운 편이었지만 4 서클부터는 조금 조건이 까다로웠다.
“기드온.”
[크르릉.]
“저 안으로 먼저 들어가 봐.”
[크르릉…….]
“…….”
기드온은 성의 분위기에 압도된 듯 조금 두려운 기색이었지만 그의 명을 어기지 못했다.
작은 짐승이 허공 위를 박차고 달려간 곳에는 백 년간 한 번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역사 속 유적 같은
성이 압도적인 규모로 펼쳐졌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첨탑의 끄트머리가 겨우 눈에 들어왔다.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져 희미했다.
[크헝!]
그런데 기드온이 건물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펄쩍 뛰었다.
[크르릉.]
기드온이 왜 못 들어가는 거지?
설마 퀘스트 때문일까?
그러나 어차피 기드온은 그의 직업 스킬이나 마찬가지여서 퀘스트에 동행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그냥 높은 성문 위에서 단숨에 뛰어내렸다.
성문으로 다가가자 손에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만져지기 시작했다.
펼쳐 보니 안에는 오래된 열쇠가 하나 보였다.
도금인지 진짜 금인지는 몰라도 세공이 무척 섬세한, 예사롭지 않은 열쇠였다.
띠링!

[‘윌스브룩 성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윌스브룩 성의 열쇠’는 당신이 윌스브룩 성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줍니다.]
[획득 레벨: 에픽]
[특징: 윌스브룩 성의 어느 문이든 열 수 있는 마스터키. 영주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아, 열쇠가 필요했구나.
문이 안 열리면 부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중한 나무 문 앞으로 다가간 그는 우선 그냥 문고리를 한번 당겨 보았다.
성문은 단단히 잠긴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잡고 다시 한번 온 힘을 실어 당겨 보았지만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부드럽게 열쇠가 밀려 들어가더니 어느 순간 철컥, 하는 경쾌한 작동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윽고 문을 연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기드온이 작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내부는 어두워서 뭐가 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무척 크고 넓다는 건 잘 알 것 같았다.
유일하게 달빛이 들어오는 저 높은 곳의 창문은 마구 깨져 있었다.
일단 여기서 그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건 보스 룸.

‘최종 보스를 제거할 시 모든 생명체가 자동으로 제거됩니다!’

보스 몹만 잡으면 다른 것들은 자동으로 제거되니 보스 몹을 최우선으로 잡아야 했다.


보스니까 영주가 쓰는 방에 있을까?
그런데 영주가 쓸 만한 방이 여기서 대체 어디지?
우선 알렉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작에서 악센이 그 보스를 잡았을 때의 장면을 최대한 자세히 되새겨 보았다.
악센은 성 안을 마구 부수다가 보스와 맞닥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은 차마 이곳을 훼손할 수는
없었다.
깨끗하게 탈바꿈해서 루이제를 데려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3 화

‘악센이 어딜 부수고 있었더라?’


생각해 봐야 별 쓸모는 없을 것 같았다. 악센은 그저 파괴하는 그 행동 자체에 미쳐 있었으니까.
파드득.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을 응시하니 박쥐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아.
‘저것들을 쫓아가면 되겠군.’
이 성의 보스 몹은 흡혈귀이니 박쥐들이 보스 몹을 중심으로 모여 있으리라는 건 마물 퇴치의 상식이었다.
“기드온.”
[크릉…….]
기드온이 주눅 든 기색으로 소리 냈다. 성 안의 기세가 너무도 흉흉한 탓에 꽤 겁에 질린 듯했다.
알렉은 기드온을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어차피 넌 사역령이라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안 보이니 겁먹지 마라. 저 박쥐들을 쫓아가자.”
[크릉…….]
기드온은 여전히 자신 없는 투로 대답하더니 이내 성체로 몸집을 키웠다.
[크허엉!]
그러자 자신감을 얻은 듯 포효를 내질렀다.
이윽고 알렉은 박쥐들이 날아간 곳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만약 흡혈귀가 죽은 유령이었다면 그의 마력으로 위치를 탐지할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존재라
불가능했다.
넓지만 어두운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 방향의 벽 너머로 HP 바가 붉게 떠올라 있었다.
[크헝!]
기드온은 거대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달려들더니 사납게 발톱을 휘둘렀다.
쥐가 찍찍 우는 소리와 함께 HP 바가 바닥을 치더니 모두 사라졌다.
사역령들이 벽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어서 숨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기드온이 앞길을 치워 준 덕분에 그는 조금 더 쉽게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어둠과 먼지에 가려져 있었지만 성의 내부는 말문이 막힐 만큼 크고 높았다.
샹들리에를 밝히고 깨끗한 카펫과 꽃으로 장식하면 꽤 봐 줄 만할 공간이었다.
푸드득, 파드득.
2 층으로 올라가니 박쥐들이 수십 마리는 되는 듯 거센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복도를 마주한 알렉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벽마다 매달린 박쥐 떼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성이 아니라 어디 동굴이나 동물원에 온 것 같았다.
‘……이거 청소가 아니라 리모델링 수준으로 공사를 해야 되겠는데?’
[크헝!]
금세 기드온이 천장에 매달린 박쥐들에게 달려들었다.
크허형, 파드득, 기드온이 포효하고 박쥐들이 놀라 도망을 치는 소리가 사납게 울리더니 붉은 HP 바들이
빠르게 소멸되었다.
파스스.
죽은 박쥐들의 몸이 가루처럼 흩어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렉은 얼른 복도를 지나 도망친 박쥐들을 쫓아갔다.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잠깐. 흡혈귀는 햇빛을 싫어하지 않나?’
계속 올라가는 게 맞을까?
낡은 창밖으로 바깥이 훤히 보였다.
서둘러 남은 시간을 확인한 알렉은 다시 몸을 돌리며 기드온에게 말했다.
“기드온. 넌 올라가서 보스 방을 찾는 게 낫겠다. 난 내려간다.”
[크르릉.]
그때부터 알렉은 기드온을 통해 보이는 장면을 동시에 살피며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스슷.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

전기 같은 스킬이 피어나며 그의 앞길에 가득한 HP 바들을 소멸시켰다. 동시에 죽은 잔해들도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다.
규모가 거대한 성이라 그런지 지하로 이어진 계단마저 장엄했다.
다 내려간 그의 눈에 홀처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보스가 있을 만한 방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스슷.
그 와중에도 그의 스킬이 박쥐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번개 같은 스킬 덕분에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아도 주위가 환하게 보였다.
그렇게 홀을 가로지르는데 딸각, 그의 발이 어떤 장치를 밟은 듯한 소리가 났다.
내려다보니 바닥 타일 문양 하나가 아래로 눌려 있었다.
드르륵, 쿠쿵.
모자이크처럼 둥글게 짜여져 있던 타일이 작동음을 내며 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홀 한가운데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알렉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칵.
그가 밟았던 장치가 다시 튀어나오며 바닥 장치가 드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렸던 공간이 다시 닫혔다.
알렉은 다시 스킬을 써서 내부를 밝혔다.
그러나 이곳에는 박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보스 방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느낌이 왔다. 보스 방이 나타날 때 늘 느꼈던 적막한
긴장이 내부에 도사려 있었다.
돌계단을 다 내려가 좁은 복도를 꽤 지나니 둥글고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바닥과 천장, 벽이 모두 석재로 짜여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긴 육각형의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띠링!

[최종 보스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퀘스트 보스]
[윌스브룩 성의 흡혈귀, 캐스다인 글렌베리 백작]
[남, 나이: ???]
[캐스다인은 수백 년 전 윌스브룩 성의 주인이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변경백으로 영지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애완용으로 키우던 박쥐에게 물려 흡혈귀가 되었습니다.
백 년 가까이 영지민들의 피를 빨아 먹던 어느 날, 흡혈귀를 쫓던 성기사가 그를 성의 지하에 봉인하고
탈진해 죽었습니다.]
[특징: 인간의 피 외에는 먹지 않습니다. 피 맛을 가리느라 피 냄새로 사람을 잘 구분합니다.]
[주요 무기: 평소에는 숨기고 있는 송곳니와 날카로운 손톱.]
[전투력: 50]

설명을 모두 읽은 알렉은 석관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잠금장치를 찾아보았다.


캐스다인을 죽여야 이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으니 일단 관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잠금장치는 보이지 않았고, 알렉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관을 부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동시에 안에 있는 사람까지 모두 부술 수 있을 만한 강도를 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만한
세기가 나오지 않았다.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

파바박.
강렬한 기세의 번개 같은 빛이 그의 손에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석관을 휘감자 투두둑, 단단한 돌이 빙판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조각난 석관의 뚜껑이며 몸체가 바닥으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알렉은 조금 마른침을 삼켰다.
흡혈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캐스다인은 수백 년 전에 이곳의 유능한 백작이었으니, 만약 그를 사역령으로 포섭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이런저런 유용한 정보들을 공유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그는 이 성의 영주가 되어 북부를 관리해야 했는데, 그런 것을 그가 해 봤을 리가 없었다.
후우욱.
그 순간, 누군가 수백 년 동안 멈춰 있던 호흡을 들이쉬는 듯한 증폭된 숨소리가 공동 안을 울렸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심상치 않은 호흡이었다.
띠링!

[캐스다인 글렌베리 백작이 봉인에서 깨어났습니다!]

후욱, 후우욱…….
“…….”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이 크게 울렸다.
저 호흡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실존하는 흡혈귀와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윽고 캐스다인의 몸이 스르륵 일어섰다. 알렉과 바로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설귀보다 하얀 은발에 냉한 기운.
회색빛으로 보일 만큼 창백한 얼굴과 텅 빈 듯하지만 싸늘한 냉기를 풍기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한기를 뿜어내는 메마른 입술까지.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다 얼려 버릴 것 같았다.
봉인될 때의 나이가 20 대밖에 되지 않았던 듯 캐스다인은 꽤 젊은 모습이었다.
남은 시간 20 분.
캐스다인의 머리 위 HP 는 17000.
알렉의 피 냄새를 맡은 듯 캐스다인의 눈빛이 탐욕적으로 타올랐다. 그 이후 번득였던 건 살의 그
자체였다.
그 눈빛을 알렉이 알아차린 짧은 순간, 캐스다인은 알렉이 신속 스킬을 쓸 때만큼이나 빠르게 날아들었다.

“원수의 냄새가 난다.”

그사이 핏빛 글씨체 같은 섬뜩한 목소리가 공동 안에 울렸다.


눈을 한번 깜박였을 뿐인데 백작의 이리저리 찢긴 낡은 망토가 금세 알렉의 눈 바로 앞에서 펄럭였다.
스르륵.
알렉은 칼날 모양으로 형상화된 푸른 마력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목덜미에 어금니를 박을 것 같았던 캐스다인의 목을 쥐고 강한 힘으로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알렉의 왼팔 근육이 단단하게 부풀었다.
콰쾅!
알렉이 한 손으로 캐스다인을 날려 버렸다.
캐스다인이 부딪친 공동 한구석이 둥글게 패며 돌 부스러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캐스다인의 레벨은 50.
5 레벨인 알렉이 압도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지만, 알렉의 마나는 3 서클이었다.
“날 봉인한 마이어스의 후예로군. 죽여 버리겠다.”

흉악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공동 안을 섬뜩하게 울렸다.


캐스다인은 흡혈귀라 그런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4 화

휙!
캐스다인의 섬뜩한 손톱이 알렉의 눈 바로 앞에서 날카롭게 허공을 할퀴었다.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

번개가 순식간에 살벌하게 빛을 튀기며 캐스다인을 휘감았다. 그사이 알렉은 캐스다인의 등 뒤로 공간


이동을 하듯이 빠르게 이동했다.
마이어스의 후예.
그의 정체를 이렇게나 빠르게 알아보다니.
캐스다인을 봉인한 성기사가 바로 알렉시스의 조상이었던 것 같았으나, 그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하고
봉인에 그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알렉시스 몸에 있는 마나는 성력의 일종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 하기에는 전생의 그가 가졌던 마나와 양과 재질이 너무도 비슷했다.

“으으악!”

알렉이 캐스다인의 목 뒤에서 손에 쥔 마력의 칼을 쳐든 순간이었다.


캐스다인이 괴성과 함께 그의 스킬을 모두 뿌리쳤다. 그가 다시 알렉에게 날아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크허헝!]
그 순간 육중한 무언가가 날아들더니 캐스다인의 허리를 물고 뒹굴었다.
“기드온!”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캐스다인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러들이진 않았는데, 기드온이 도와주니 조금 더 쉬워질 것
같았다.
알렉은 기드온이 캐스다인을 물어뜯는 사이 다시 마력을 칼날처럼 세우고 바람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쉭!
콰지직.
알렉의 칼끝이 캐스다인의 심장을 정확히 찔러 비틀었다. 팽팽한 심장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남은 HP 3000.

“으으윽!”

캐스다인이 신음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캐스다인은 거의 모든 인간을 종잇장 찢듯이 죽일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였다.
방직 공장의 귀족들이나 용병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기드온의 무시무시한 주둥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캐스다인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용서하지 않겠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다, 마이어스의 후예.”

아까보다 더 끔찍하고 흉포한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알렉을 노려보는 시린 눈동자가 차갑다 못해 뜨겁게 타올랐다.
우우웅.
벗어나려는 캐스다인과 그 심장을 비트는 알렉이 충돌하자 공동이 울렸다. 후두둑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이러다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순간, 캐스다인이 입을 크게 벌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푹.
……아.
알렉은 문득 옆구리에서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
다시 빼는 캐스다인의 날카로운 손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헝!]
기드온의 포효와 동시에 알렉은 캐스다인에게서 훌쩍 떨어졌다.
남은 모든 마력을 들이부어 칼의 크기를 긴 장검까지 키웠다.
“미안하지만, 이제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 줘야겠어.”
그의 검에 마력이 단단히 실리며 묵직하게 진동했다.

“여기서 끝내 주마!”

순식간에 캐스다인이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알렉이 푸른 빛의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HP 0

[축하합니다!]
[최종 보스를 제거해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윌스브룩 성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제거하세요!~]
[퀘스트 보상]
[경험치가 3000 올랐습니다.]
[명성이 500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100 올랐습니다.]

[퀘스트가 종료됨에 따라 윌스브룩 성이 쾌적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퀘스트 보너스로 ‘위치 이동권(1 회)’을 제공합니다.]

[패시브 스킬: 자연 회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나 회복이 필요합니다.]

* * *

어렴풋하게 동이 텄다.
선잠이 들었는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다시 잘까?
황궁에 다녀온 데다가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중요한 이야기까지 나눴더니 몸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눈꺼풀이 감기려는데, 문득 쿵 소리가 들려 다시 눈이 떠졌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나와 알렉의 방이 있는 2 층에서 들린 소리 같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숄을 걸쳐 몸에 두르고는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의 방문으로 다가간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방 안의 광경에
입술이 떡 벌어졌다.
상의를 벗는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내 목소리에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루이제.”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요?”
나는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가 이 시간에 대체 어딜 다녀온 건지 의아했지만, 그것보다는 어서 저 상처를 치료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그의 셔츠를 들어 보니 송곳 같은 무언가에 찔린 상처가 세 개나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켤 정도로 크게 놀랐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전에 사 둔 긴급 처치 용품이 있어서요.”
“괜찮습-.”
나는 그의 말을 더 들어 볼 겨를도 없이 돌아서서 서둘러 나갔다.
2 층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빈방이었지만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헝겊과 치료제 따위를 챙긴 나는 부엌에 가 깨끗한 물도 받았다.
얼른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가자 그가 상의를 다 벗은 채 피를 닦고 있었다.
“내, 내가 해 줄게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지금까지 그가 다쳐서 저택에 돌아온 적은 꽤 있었지만, 이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누군가한테 얻어맞은 듯한 타박상 정도였다.
내가 그의 복부에 손을 짚고 상처 부근에 수건을 가져가 대자 그의 근육이 흠칫하며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적신 수건이 조금 차가운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몸을 걱정스럽게 훑어보았다가 말했다.
“조금만 참아요. 많이 아프겠네요. 날 밝으면 바로 의원한테 가야겠어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곧 나아질 겁니다.”
“곧 나아질 상처가 아닌데요? 감염이라도 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에 찔린 거예요?”
“…….”
“소독도 제대로 해야 하고 그냥 두면 큰일 나요.”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제야 그가 대꾸했다.
의 환부를 나는 급한 대로 치료제를 바르고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묶어 지혈했다.
그는 몇 번 나를 만류했지만 포기한 듯 가만히 내 처치를 받았다.
상처를 잘 다물려 놓았는데 환자 본인이 움직이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당신이 다쳐서 들어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그가 나에게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득 공작저에 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얼굴에 멍이 든 채 집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그의 답답한 상황을 불쾌해한다고 여겼겠지만, 사실 마음이 아픈 쪽에 더 가까웠다.
그는 얼굴에 상처가 나거나 다치면, 다 나을 때까지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의 상처를 보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던 모양이었다.
약조차 바르지 못하게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마음 아팠다.

‘그럼 아내가 아니면 누가 당신한테 약을 발라 주나요? 아직 내가 낯설어서 이러는 거 알지만, 이런 것도


못 하게 하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그제야 못 이긴 척 상처를 보여 주긴 했지만, 한 번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나도 그냥 그에게 보채지 않았다.
다만 다쳐서 들어올 때마다 그가 나를 멀리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이제 다 됐어요.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요.”
매듭을 깔끔하게 갈무리한 나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윌스브룩 성에 다녀왔습니다.”
뭐?
대뜸 그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딜 가서 이렇게 다쳤나 했더니 윌스브룩 성이었어?
“설마 내가 아는 그 윌스브룩 성 말하는 거예요?”
“예.”
“…….”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거길 갔다 왔다고?
윌스브룩 성이라는 이름의 다른 곳을 갔다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말을 엄청 빠르게 달리면 가능하려나?
“……역시 거긴 쉬운 곳이 아니었군요. 당신이 이렇게나 다쳐서 오다니.”
설마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험한 일을 겪은 게 아닐까?
황제의 명을 받고 윌스브룩 성에 갔던 모 귀족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죽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알렉은 옆구리를 찔린 것 말고는 꽤 멀쩡해 보였다. 무척 추웠을 텐데도 딱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왜 혼자 갔어요. 이런 위험한 시간에…….”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조만간 루이제도 모셔 가겠습니다.”
“…….”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5 화

* * *

“망했어요, 어머니. 우리가 사용인들을 어떻게 다시 찾아와요?”


릴트 제국의 영광이 넘치는 수도 루덴.
엘로이는 다시 공작가의 영애가 된 것처럼 레이스와 러플로 화려하게 장식된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채
또 각또각 걸었다.
드레스가 옷 주인을 잡아먹을 듯한 화려함이었지만, 어차피 엘로이의 성질머리가 드레스의 기세를 늘
압도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델리아가 뒤지지 않을 듯한 호사로움으로 무장한 채 유려하게 걷고 있었다.
오페라 가수를 꿈꿨던 귀부인답게 부드럽고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오델리아는 엘로이와는 달리 별걱정이 없었다.
“어떻게 다시 찾아오긴, 당연히 다들 돌아오지 않겠니?”
“네?”
어머니의 말에 엘로이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어머니는 정말로 사용인들이 모두 돌아올 거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브렌트 공작가는 이제 윌스브룩 남작가가 되어 버렸고, 저택은 무려 그랜드칼리의 험준한 곳에
마련 된 성이었다.
접근조차 어려운 데다가 드라큘라가 산다는 윌스브룩 성.
엘로이는 이미 절대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어차피 오라버니 부부만 가서 산다면 그녀와 어머니까지는 안 가도 될 것이다.
심지어 수도에 새로 구한 타운하우스가 원래 공작가였을 때 가졌던 수도의 집만큼이나 좋은 곳이라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 많은 사용인들을 어떻게 한 명 한 명 일일이 다 찾아가요. 정말 루이제 언니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엘로이가 다시 한탄했다.
사용인들을 모두 헤아리면 몇백은 될 것이다.
부엌에서 요리와 베이킹을 하는 사람들,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 수많은 하녀와 집사, 시종과 하인들까지.
술과 잼만 따로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따로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찾아가서 설득을 하라는
걸까?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엘로이는 적당히 세 명만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오델리아가 말했다.
“뭐 하러 그들을 다 찾아가니?”
“네?”
엘로이는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냥 시녀장 한 명만 만나면 될 것 같구나.”
“……네?”
“시녀장이나 얼른 만났다가 오페라하우스에 들러서 공연을 보고 오면 좋겠어. 날씨가 너무도 좋지 않니?”
“…….”
어머니의 안색이 너무도 환해서 엘로이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녀장 한 명만 찾아가는 건 사용인들을 설득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 아닌가?
“그럼 루이제 언니가 난리 치지 않을까요?”
“난리를 왜 치니. 어차피 사용인들은 다 돌아올 텐데.”
“…….”
아.
어머니는 아무런 생각이 없구나.
엘로이는 그냥 입을 다물고 어머니를 따라갔다.
어머니가 먼저 시녀장 한 명만 찾아간다고 말했으니, 이건 엄밀히 따지면 엘로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새언니가 화를 낼 사람이 일단 엘로이 자신은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백작 가문의 타운하우스였다.
시녀장이었던 제인 무드모어가 새로 일하기 시작한 곳을 루이제가 알아다 주었다.
오델리아는 마침 그 저택에서 나오던 어린 시종 하나에게 물었다.
“혹시 제인 무드모어라는 사용인이 여기 있니?”
“제인 님이요? 네. 무슨 일이세요?”
“그럼 지금 바로 이 쪽지를 전해 줬으면 좋겠구나.”
오델리아는 쪽지와 함께 금화 몇 개를 손에 들어 보였다. 금화를 발견한 시종이 잠시 생각하더니 냉큼
대답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안에 계실 거예요!”
쪽지와 금화를 챙긴 시종이 서둘러 백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델리아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제인에게 준 쪽지에는 약속 장소인 디저트 가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페라를 보러 가기 전에 꼭 먹어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지금까지 북부 쪽에 사느라 가 보지 못했는데, 이제 수도에서 계속 살 수 있어서 오델리아는 흡족했다.
이윽고 약속 장소에 제인이 나타났다.
제인은 40 대 초반의 젊고 상냥한 시녀장이었는데, 통솔력이 뛰어나고 일머리가 좋아서 브렌트 공작가의
시녀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인품이 선하고 눈치가 좋아서 제인을 존경하지 않는 시녀들이 없었다.
“안녕!”
제인이 디저트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자 엘로이가 손을 들었다.
엘로이는 한창 달콤한 디저트들을 흡입하고 있었다.
제인은 오델리아와 엘로이를 번갈아 보았다가 어깨를 크게 떨었다.
“대공작 부인, 공작 영애.”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보듯 눈썹을 좁히며 제인이 다가가자 엘로이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여기 앉아.”
제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자를 끌어내 앉는 동안, 오델리아는 홍차를 음미하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제인은 숨도 돌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너무 깜짝 놀라서 일하다 말고 달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고마워, 기다리기 힘들었거든.”
제인의 말에 엘로이가 그리 대답하며 디저트가 예쁘게 쌓인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너도 먹을래?”
그때 점원이 제인의 앞에도 찻잔을 놓고 멀어졌다.
그러나 제인은 뭔가 먹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가 분들께서 귀족 신분을 다시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벌써? 소문이 빠르구나.”
의외라는 듯 오델리아가 한쪽 눈썹을 우아하게 들었다가 내렸다.
“예. 실은 황궁에 아는 하녀가 있는데, 중요한 소식이 생기면 전해 줬거든요. 공작가 분들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간 걱정이 많았어요.”
“나도 우리가 금방 죽을 줄 알았어.”
“살아서 다시 보니 반갑다.”
제인의 말에 엘로이와 오델리아가 순서대로 말했다. 오델리아는 다시 찻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루이제가 그러던데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더구나.”
“예?”
오델리아의 말에 제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엘로이도 내심 놀라웠다. 이렇게 갑자기 본론을 시작하는 건가?
“공작저에서 떠날 때 네가 챙겨 준 음식이 아니었다면 우린 아마 다들 굶어 죽었을 거라고 말이다. 제인
네 덕에 버틸 수 있었다고 전해 달라고 하였다.”
“아…… 마님…….”
제인의 눈동자가 글썽글썽했다.
“역시 마님께서는 저희를 잊지 않고 계셨군요.”
“…….”
오델리아는 못 들은 척 평소와 같은 안색으로 시선을 내리며 찻물을 머금었다.
감동받은 듯한 제인의 분위기가 오델리아는 낯설고 어색했다.
일단은 루이제가 당부한 대로 말하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인들을 되찾을 수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왠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에 오델리아는 분위기를 빠르게 바꾸었다.
“그래서 백작가의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네?”
“사실 난 루이제처럼 신뢰나 정 그런 건 모르겠다. 다만…….”
“……?”
“우리 가문을 다시 따른다면 지금 받는 봉급의 다섯 배를 주마.”
“……!”

* * *

시어머니랑 시누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우리의 새 타운하우스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황궁에 다녀온 지 3 일째.
우리는 다른 귀족들처럼 수도에 집을 따로 구했다.
그리고 알렉은…….

‘며칠 동안은 저 혼자 윌스브룩 성에 머물면서 주변을 정리하겠습니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수도에 계셔


주십시오.’

먼저 성으로 가 버렸다.
나는 외출용 드레스를 입으며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성이 생각보다 괜찮다니 정말일까?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
그가 윌스브룩 성으로 간 이후 나는 말을 타고 홀로 북부를 둘러보았다.
윌스브룩 성이 있는 곳까지는 당연히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선은 그랜드칼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인 카나크를 답사해 보았다.
어쩌면 여기가 진짜 우리가 새 출발할 장소가 될 수도 있으려나?
새하얗게 뒤덮인 눈만큼이나 막연하고 낯선 곳이었지만 나는 긍정적인 희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비관적인 상황에서 낙담을 해 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반드시 북부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북부를 길들이려면 북부인들의 민심을 얻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그래야 그들이 영주를 신뢰하는 세금을 내든, 우리 편이 되든 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알렉은 언제 오려나.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택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던 나는 문득 내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한 감각이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 것 같지 않은 입술.
살포시 손을 들어 입술에 손을 대 보니 그간의 일들이 되새겨졌다.
키스, 댄스, 그리고 비범함 그 이상으로 특출났던 능력.
알렉은 여전히 알렉인데…….
내 가슴이 떨리는 건 의심스러운 낯섦 때문일까, 아니면 설렘일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6 화

* * *

루덴에는 여러 의상점들이 즐비했다.


릴트 제국의 수도였으니 각지의 실력 있는 재단사들이 루덴에 모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루덴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점 거리를 걸었다.
쇼윈도마다 지금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의 드레스와 남성복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의상들을 구경했을 텐데, 왠지 지금은 조금 긴장되듯 가슴이 떨렸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북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곳에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뗄 생각이었다.
잘될 거라고 믿고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쉽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이윽고 내 눈에 ‘브니엘 의상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브니엘 의상점은 브니엘 멜프레라는 이름의 20 대 여성이 운영하는 의상점이었는데, 루덴에서 장사가 그리
잘되는 편은 아니었다.
의상점 주인인 브니엘의 취향이 조금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 달 전 상점이 오픈한 이후 이곳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딸랑.
내가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격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명랑한 목소리가 솟구쳤다.
“어서 오세요!”
“…….”
조용히 문을 닫은 나는 의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역시나 이곳 안에는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사이에 브니엘의 취향이 바뀌지는 않은 듯, 내가 알고 있던 스타일의 의상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양털로 된 긴 후드 망토, 흔한 옷감이 아니라 깃털 같은 조직으로 된 보송보송한 드레스.
복슬복슬한 꽃 모양으로 장식한 털 모자와 설산에서나 신어야 할 것 같은 털 달린 부츠까지.
온통 부드러운 털 천지였다.
짧게 가게 안을 둘러본 나는 그제야 브니엘을 응시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는 브니엘을 향해 다가가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밝고 귀여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 브렌트 부인이시죠?”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브니엘의 안색이 밝아졌다.
브니엘은 반색을 하며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오랜만에 와 주셨네요.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네. 브니엘도 들었나 보네요. 설마 내가 여기 방문했다고 해서 목숨이 달아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아, 아니에요. 따뜻한 차라도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브니엘의 말에 내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가게의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깃펜마저 부드러운 분홍색 털로
감싸져 있었다.
브니엘은 어쩜 모든 사물에 털을 씌울 생각을 하는 걸까.
‘북부에 사는 여자들이 참 좋아하겠어…….’
한쪽 다리를 다른 쪽 허벅지 위로 포개며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카나크에 갔을 때 나는 번화가 또한 자세히 돌아다녔다.
그랜드칼리 사람들은 북부에서만 재배되는 농산품이나 순록 같은 추운 지역에 사는 동물들을 키워 꽤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솜씨를 가진 장인은 부족한지 제대로 된 상점가가 별로 없었다.
돈이 있어도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북부인들의 특징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카나크를 살펴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루덴처럼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가득한 번화가를 만들면 어떨까?’
사계절이 겨울이니 길목마다 루미나리에 같은 장식을 하면 매일 크리스마스 같은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랜드칼리의 핫한 플레이스로 거듭난다면 북부인들의 새로운 행복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곳에 스카우트하고 싶은 인재들을 몇 명 염두에 두었고, 그중 첫 번째로 브니엘을 찾아왔다.
이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의상점 주인과 아동복점 주인을 만나 볼 계획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부인께서 방문을 다 해 주시고, 긴장돼서 다시 찻물을 끓이느라 늦어졌어요.”
“괜찮아요. 잘 마실게요.”
나는 브니엘이 테이블에 놓아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브니엘도 내 맞은편에 앉아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밝혔다.
“그럼 지금은 어디에서 지내시는 거예요?”
“황명을 받아서 북부로 가게 되었답니다. 그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나요?”
“네? 북부요?”
“폐하께서 우리 남편에게 윌스브룩 성의 영주가 되라고 하셔서요.”
“세상에…….”
브니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나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우리의 북부행이 충격적이긴 한 것 같았다.
하긴 그곳은 윌스브룩 성이 아니더라도 하도 추워서 수도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는 곳이었다.
그러나 직접 카나크에 가 보니 수도인들이어도 따뜻하게 껴입으면 못 지낼 곳은 아닌 듯했다.
한 다섯 겹 정도?
북부 이야기에 놀란 듯하던 브니엘이 이내 조금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 순록이 무척 많지 않나요? 순록의 털이 얼마나 곱고 부드러운지 몰라요. 부들부들하고 따뜻해서
몸에 닿는 촉감이 그만한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털로 된 옷 좀 미리 주문할까 싶어서 와 봤답니다. 브니엘의 드레스처럼 추운 날씨에도 따뜻하고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의상을 취급하는 곳도 별로 없잖아요?”
“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브니엘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조금 기가 죽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 의상들은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찾아 주시는 분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
자기도 알고 있었구나.
의상점을 연 지 세 달이 된 시점에라도 장사가 잘되지 않는 이유를 눈 치채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한겨울이어도 귀족들은 보온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행을 따라 반들반들한 윤광이 나는 화려한 옷감에 최대한 풍부한 레이스와 리본, 러플 장식으로
치장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 위에 부드러운 털로 된 두꺼운 숄을 두르는 게 보온의 전부였다.
브니엘의 취향처럼 깃털과 솜털로 된 원단으로 전신을 두르는 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난 희한하게 브니엘이 만든 옷을 입으면 같은 털 옷이어도 더 따뜻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원단
자체에서 열이 난다고 해야 하나?”
전생에 특수 처리된 보온 내복을 입었을 때처럼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 핫팩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온기가 나는 건지 한참을 신기해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 더 브니엘 의상점을 방문해서 다른 옷도 사 보았는데, 역시나 자체 발열 기능이
미세하게 있는 것 같았다.
이 시대에 이게 가능해?
마법이 아닌 이상.
“그냥 내 착각일까요? 아니면 브니엘이 쓰는 원단에는 뭔가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는 건가 싶어서요.”
“아, 실은 그게…….”
브니엘은 아까보다 더욱 얼굴을 붉혔다. 곤란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브니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물어봐 주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사정이 있어서 여태 손님들에게 말씀드리진 못했지만, 실은
제가 개발한 특수 원단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랬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아니에요. 다만 소문이 나면 비결을 여쭤보는 분들이 계실까 봐 대놓고 홍보는 하지 못했어요. 그게,
저만의 비밀이거든요…….”
“…….”
영업 노하우구나?
그래도 그런 대단한 기술은 동네방네 자랑하면 장사가 정말 잘되었을 텐데 왜 숨기고 있는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하긴 여기저기서 브니엘의 기술을 알아내 따라 한다면 그게 더 골치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런 우려를 하고 있었는지, 브니엘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나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리하시네요. 안 그래도 세 번이나 제 의상점에서 드레스를 사 주신 분은
부인이 유일해서 내심 언제 한번 들르지 않으실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제야 브니엘이 조금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 미소를 마주 보며 웃어 주던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니엘.”
“네?”
“앞으로 난 윌스브룩 성의 주인으로서 그랜드칼리를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이 있어요.”
“……네?”
“내 사활을 걸고 그곳에 루덴처럼 번화한 상점가를 만들 생각이에요.”
“…….”
가만히 잘살고 있는 북부인들에게는 미안하긴 했지만, 나는 폭군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환심을 사야
했다.
어차피 폭군의 목적은 세금.
폭군이 원하는 것을 바치는 척이라도 한다면 내 노력을 눈감아 주지 않을까?
방직 공장의 성행을 가만히 두고 보는 것처럼.
그러니 나는 최선을 다해 그랜드칼리를 번듯한 도시로 발전시켜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고 1 년만 북부에서 의상점을 운영해 줄 수 있나요?”
“부인…….”
“브니엘이 마음 편히 옷만 만들 수 있도록 최상의 지원을 약속할게요. 상점의 규모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좋을 거예요. 지낼 곳도 내 집처럼 근사하게 지을 거고요.”
“…….”
“지금은 본의 아니게 우스워졌지만, 전 브렌트 공작 부인으로서 공작가의 모든 명예를 걸고
제안하겠어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7 화

브니엘은 생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은 듯 얼떨떨하게 입을 벌렸다.


그럴수록 나는 흔들림 없는 확고한 태도로 브니엘을 응시했다.
“제, 제가요? 저같이 명성도 없는 작은 의상점 주인이 어떻게 그런 제안을…….”
브니엘은 하도 놀랐는지 손도 약간 떨었다.
아무리 북부라고는 해도 전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상점을 새로 차려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부탁 해서 정말 미안하네요. 곤란하면 편하게 거절해도 난 괜찮답니다.”
“부인…….”
“그런데 브니엘이 명성도 없는 작은 의상점 주인이라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브니엘은 이미 아무나 하지
못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잖아요?”
“그건 그냥…….”
브니엘은 생각 외로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난 진심으로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런 브니엘이 북부로 와 준다면 정말이지 기쁠 거예요. 북부인들에게 브니엘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재단 사가 만든 의상을 선보일 수 있어서 자랑스러울 거고요.”
“아, 아니에요. 제가 가면 부인께 실망만 끼칠 거예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제 의상점은 망했는걸요…
….”
“…….”
생애 처음 의상점을 오픈하고 자신감이 많이 줄어들었구나.
“그런데 그거 알아요, 브니엘?”
“네?”
“그랜드칼리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죠?”
브니엘이 두 번이나 끄덕이자 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거긴 루덴과는 많은 부분이 다른 곳이랍니다. 부인들의 취향이나 유행도 루덴 같지 않아요.”
“…….”
“루덴은 개성보다는 하나의 유행만 따르는 곳이죠. 그게 곧 의사의 표현이라 어쩔 수 없어요. 정치적인
지역이잖아요. 여긴 튀는 사람을 반기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랜드칼리는 훨씬 다양하고 자유롭답니다. 북부에 가면 브니엘의 옷들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거예요.”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듯, 브니엘의 눈동자가 조금 글썽이듯이 일렁였다.
루덴에서 장사가 잘되지 않아 내심 상처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더 생각해 보고 여기로 연락해 줄래요?”
나는 손가방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브니엘에게 건네주었다. 내 이름과 타운하우스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쪽지를 받아 들며 브니엘도 덩달아 일어섰다.
“아, 알겠습니다. 부인. 좋은 제안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올 때 나와 내 남편이 북부에서 입을 만한 근사한 옷 몇 벌도 부탁할게요. 윌스브룩 성의 영주 부부
룩으로요.”
“알겠습니다, 부인.”
브니엘이 밝은 웃음을 터뜨리자 루이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선금이에요.”
나는 준비해 온 실크 주머니도 잊지 않고 브니엘에게 내밀었다.
잠시 후 의상점을 나오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웠다.
이제 어디를 가 볼까?
그동안 눈여겨보고 있던 전문직 종사자들이 꽤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파티셰, 셰프, 건축가 등 여러 장인들과 미팅했다.
그리고 북부에 갔던 알렉이 마침내 나를 데리러 돌아왔다.

* * *

알렉은 다시 돌아온 그랜드칼리의 산 중턱에 서서 윌스브룩 성과 그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윌스브룩 성은 그가 최종 보스를 죽인 이후 놀랍도록 깨끗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낡고 깨져 있던 유리창은 고드름 같은 단단함과 영롱함으로 설산의 빛을 반사했고, 거미줄과 세월에
뒤덮여 있던 외관은 갓 지은 성처럼 새것 같았다.
윌스브룩 성의 내외부는 따로 청소할 것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성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숲과 험준한 바위, 산짐승들, 눈밭.
윌스브룩 성은 온갖 암초와 장애물로 고립된 지역이었다. 이래서야 아무도 성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성의 더 남쪽으로는 그랜드칼리의 수도나 다름없는 카나크가 있었고, 카나크에서 더 남쪽으로 한참을 가면
그들이 살던 집이 나타났다.
윌스브룩 성과 외부로 연결되는 길만 정돈해도 접근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길을 정돈하려면…….
‘스킬로 다 부숴야겠어.’
마나 소모와 회복을 반복해야 할 테니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어차피 그동안 혼자 성에 머물면서 내부를 먼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 그 길에 루이제가 말했던 상점가를 조성하면 되겠군.’
흡사 신도시를 건설하는 기분이 들었다.
“캐스다인.”
이윽고 그는 새로 포섭한 사역령을 처음으로 불러내 보았다.
캐스다인을 죽이고 사역령으로 포섭한 이후에 바로 집으로 돌아갔던 탓에 이제야 처음으로 불러냈다.
금세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캐스다인 경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군, 주인.]
“……그래, 캐스다인 경.”
흡혈 백작은 죽기 전의 상태와 유사한 모습으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다 찢어진 망토와 목을 두르는 높은 깃, 어딘가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문양이 수놓인 차림새까지.
캐스다인의 짧은 은발이 눈발에 사정없이 휘날렸다.
죽기 전에는 원수의 후손인 그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사정없이 달려들었지만, 사역령이 된 지금은 오직
그를 주인으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사역령이 되면 이전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알렉이 물었다.
“원래 윌스브룩 성과 그랜드칼리는 어떤 곳이었지?”
그의 물음에 캐스다인의 눈빛이 꼭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듯 깊어졌다.
찬 공기를 생명수처럼 들이쉬며 캐스다인은 눈 아래 보이는 광경을 넓게 훑어보았다.
수백 년간 봉인되어 있었으니 무척 오랜만에 보는 풍경일 것이다.
[인간의 피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 원래는 인간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옛날에는 성 근처에도 사람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캐스다인이 흡혈을 해서 대부분 죽지 않았을까?
[……언제 내 성이 이렇게 된 거지? 눈과 함께 번성했던 곳이었는데 날카로운 절벽만 남아 버렸군.]
“그 번성했던 시절에 길은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나?”
[물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 그때의 길을 그려 봐. 기왕이면 원래의 흔적을 되살릴 거니까.”
오랫동안 사람들이 밟았던 길이야말로 안전하고 이유 있는 길이었다.
수백 년 전 번영했던 지역의 원형을 되살리면 더욱 빠르게 그랜드칼리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캐스다인은 박쥐의 날개 같은 찢어진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윌스브룩 성의 영화를 기억하는 자는 그에게 그 시절의 길을 그대로 그려 주었다.
막연했던 눈밭 위에 청사진이 떠올랐다.
이내 알렉은 마나가 모두 소모될 때까지 ‘초보 남편의 간지럼’ 스킬을 써서 파묻혀 있던 길을 복원했고,
그의 마나가 허용할 때까지 사역령들도 거들었다.
다행히 사람이 사는 카나크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저 멀리 윌스브룩 성 쪽에서 번개처럼 번쩍이는 빛을 보고 조금 두려워했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자 수백 년 전의 유적지가 드러나듯 반듯한 돌로 이뤄진 넓은 길이 완전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수백 년 전에 조성된 도로치고는 꽤 공을 들인 듯한 완성도였다.
성의 첨탑 위로 올라가 보니 더욱더 장관이었다.
알렉이 감탄하자 캐스다인이 말했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장인들을 그랜드칼리로 불러 모았다. 돌 하나하나 대충 깎은 게 없었지.]
“과연 대단하네.”
[고맙군, 주인.]
“…….”
이제 수도로 돌아가 루이제를 데려와도 될 것 같은 상태였다.
알렉은 사역령들을 시스템 안으로 되돌렸다.
슬쩍 상의를 들어 옆구리의 상처를 보니 다친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연 회복 스킬 덕분이었지만, 지금은 좀 곤란했다.
‘이거 루이제가 보면 바로 의심하겠는데.’
살짝 미간을 누르며 알렉은 첨탑에서 내려왔다.
다시 루이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왜 이렇게 심장이 욱신거리고 불편한 걸까?
* * *

“부인. 꼭 눈의 여왕 같으셔요.”
나는 브니엘이 손수 제작해서 갖고 온 드레스와 망토를 두르고 거울 앞에 섰다.
영주 부부 컨셉의 룩을 의뢰했더니 브니엘이 상당히 공을 들인 듯 평소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의복을
만들어 왔다.
거울을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브니엘. 태어나서 가죽 드레스는 처음이에요.”
검은 소가죽으로 된 부드러운 질감의 드레스에 결이 고운 하얀 털 망토를 둘렀다.
망토에는 검은색 반점이 염색되어 있었다.
가죽으로 된 드레스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막상 입어 보니 우아함과 위엄을 챙기고도 북부의 한파에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내 새 옷을 구경하던 엘로이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썩 잘 어울리는걸?”
“안감에 보온성이 좋은 원단을 덧대서 따뜻하실 거예요. 정말이지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고마워요, 브니엘. 이건 정말 내 상상 이상이네요.”
내 말에 브니엘의 눈동자가 감동받은 것처럼 일렁였다.
“아닙니다, 부인. 부인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셔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세요.”
“덕분에 얼어 죽진 않겠어요. 성에 갈 때 꼭 이걸 입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면 전 언제쯤 북부로 출발하면 될까요?”
“……!”
조심스럽게 물은 브니엘의 말에 내 눈동자가 커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8 화

그동안 장인들을 만나고 다닌 지 5 일째.


내 제안을 설명하고 이 저택의 주소를 뿌리고 다녔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의 동의를 받았다.
나는 놀라움과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정한 건가요, 브니엘?”
브니엘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아, 네. 좋은 제안 해 주셔서 정말 영광이고 감사드려요. 부인의 곁에 있으면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을 것 같아서요.”
“……그랬군요. 북부행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나야말로 너무 고마워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큰 꿈을 품고 수도에 왔는데 그런 인정은 처음이었거든요.”
“…….”
브니엘이 더욱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뭉클하게 응시하다가 말했다.
“브니엘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인걸요. 앞으로 브니엘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브니엘은 미소를 참으려는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똑똑.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응접실 안 모든 여자들의 눈길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엘로이는 얼른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더니 금세 반갑게 소리쳤다.
“제인!”
제인?
나는 드레스 자락을 들고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엘로이의 외침에 우르르 발소리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 앞을 꽉 채울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찼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남녀노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너무도 익숙해서 눈동자가 촉촉하게 일렁였다.
“대부인, 부인, 영애.”
가장 앞쪽에 있던 시녀장, 제인이 공손한 태도로 우리의 앞에 마주 섰다.
나는 입 안에 많은 말들이 맴돌았지만 쉽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부인과 영애는 며칠 전에 뵈었는데, 부인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제야 내가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제인…… 그리고 여러분…….”
나는 조금 더 다가가며 그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았다.
제인과 일부 메이드들을 비롯해 알렉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 시종 제임스, 요리장 알버트와 그레타
부인, 마부 페드로까지…….
다신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브렌트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밝은 안색으로 나를 향해 있었다.
제인이 금세 다시 말했다.
“실은 더 일찍 뵈러 오고 싶었는데, 이미 다른 지역으로 가 버린 사용인들도 있어서 소식을 전달하느라
조금 늦어졌어요.”
“뭐?”
“저희는 전부 주인님들께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했답니다. 받아 주시는 거죠?”
“…….”
할 말을 잃은 내 입술이 벌어졌다.
북부로 가게 된 마당에 사용인들이 과연 돌아오려고 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 돌아오기로 했다니, 이거 꿈 아니고 현실 맞을까?
문득 시어머니가 소파에서 일어나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과연 급료의 다섯 배를 줄 만한 결단력들이구나.”
네? 다섯 배요?
“몇 명은 수도에 남아 주지 않겠니? 나는 북부에 오페라 하우스가 생길 때까지 수도에 있을 거란다.”
오페라 하우스라니, 나는 순간 인상이 구겨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애써 사용인들을 향해 감동의 미소를
지었다.
시어머니가 급료 다섯 배로 미끼를 던진 것 같은데, 열 배를 줘도 모자를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다들 정말이지 너무 고마워. 이렇게 다시 보니 꼭 여기가 브렌트 공작가 같아.”
“부인…….”
“진짜로 우리 식구들이 다시 모인 것 같네. 이 고마움과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결국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제인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아니에요, 마님. 저희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주셔서 저희야말로 기뻤어요. 작위를 찾으신 것도
축하드려요.”
“고마워, 제인.”
나도 손을 잡은 손등을 감쌌다.
비록 공작 작위는 없지만, 원래의 브렌트 공작가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사용인들까지 돌아와 준다니, 북부가 아무리 추워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다신 흩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알렉이 성으로 답사를 갔어. 안전한 거 확인하면 그때 데려갈게.”
“감사합니다, 마님. 북부가 많이 춥다지만 마님과 주인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뜻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루이제?”
그때 근사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틈을 뚫고 들려왔다.
과연 언제 돌아올지 기다렸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에 사용인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처럼 알렉을 발견하고는 앞다투어 그를 반겼다.
“……각하!”
“주인님!”
“…….”
현관문 앞에 선 그에게 많은 눈길이 쏟아졌다.
고작 공작가에서 3 년 살았던 나도 이렇게 감동적인데, 알렉은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
갑작스러운 사용인들의 방문에 그는 많이 놀란 듯 조금 아연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사용인들을 응시하기 시작하자 내가 말했다.
“알렉, 성에는 잘 다녀왔나요? 우리 사용인들이 모두 돌아와 준다고 했어요. 윌스브룩 성으로요.”
“……예?”
그제야 입을 뗀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조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그는 이런 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약간 어색해 보였다.
그럼에도 저택 안에는 감동적이고 반가운 분위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 *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겠어…….”


줄리아는 어두운 방 안을 서성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화려했던 그녀의 인생에 갑작스럽게 불안과 불행이 닥쳤다.
마르셀 때문에 겁을 먹은 줄리아의 정부들은 그녀를 슬슬 피하고 있었다.
줄리아에게 분개한 마르셀은 당분간 그녀를 보지 않겠다고 선포한 이후였다.
‘이러다가 이혼을 당하면 내 명예와 평판은 어떻게 되는 거지?’
줄리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릴트 제국에서 이혼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결점으로 여겨졌다.
황후의 시녀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은 분명했고, 계속해서 사교계의 퀸으로 군림하려고 한다면 이의를
제기하는 귀부인들이 생길 것이다.
이혼은 죄악이었다.
이번 일을 이유로 신뢰가 깨졌다면서 마르셀이 이혼을 원한다면 황후도 말리지 못할 것이다.
정부를 두는 데 부부가 동의했다면 상관없지만, 줄리아는 마르셀을 속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한 고민을 하던 줄리아는 어느 순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악!”
이게 다 누구 때문인가.
루이제만 마르셀에게 정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가면무도회 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서로의 가면을 벗겨 주던 루이제 부부의 모습의 눈앞에 선했다.
알렉시스의 다른 사람 같은 능숙한 면모도 기함할 일인데, 루이제의 그 의기양양한 모습이라니.
망가뜨리고 싶고 할퀴고 싶어서 치가 떨렸다.
“죽여 버릴 거야…….”
감히 내 인생을 망치고 무사할 것 같아?
애초에 겁 없이 그녀에게 도전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줄리아는 한 번 당하면 열 배로 갚아 주었다.
묘하게 루이제 부부를 대단한 듯이 여기는 일부 귀부인들의 태도도 마음에 들리지 않았다.
이 기회에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의 눈에 똑똑히 새겨 줘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줄리아가 소리쳤다.
“누구야.”
“마, 마님…….”
이윽고 조금 겁에 질린 듯 들어온 건 그녀의 전담 하녀였다.
하녀는 줄리아에게 한눈에 보아도 귀한 봉투를 내밀었다.
“황후 폐하께 전언이 왔습니다.”
“나가 봐.”
손톱을 길게 관리한 줄리아가 휙 봉투를 빼 들며 말했다. 하녀는 군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더니 문을
닫았다.
황후의 전언이라니.
줄리아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황후는 그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줄리아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북부로 떠나기 전에 송별회 겸 사교 모임을 개최하라는 당부였다.
편지에는 하얀 가루가 담긴 작은 봉투도 함께였다.
‘역시 황후 폐하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아신다니까.’
피식 웃은 줄리아는 그 가루를 물컵에 조금 섞어 화분에 뿌려 보았다.
조금 지나자 꽃잎이 타들어 가더니 재처럼 맥없이 추락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9 화

* * *

“윌스브룩 성의 영주가 되신다면서요?”


북부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끽하는 화려한 수도의 밤이었다.
물론 수도와 북부를 왔다 갔다 해야 하겠지만, 내일 당장 윌스브룩 성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오늘 밤은
감회가 남달랐다.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 한창인 레버런트 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푹신한 벨벳 의자에 앉은 채 한 손으로 위스키가 든 잔을 들며 사람들의 관심에 대꾸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게 되다니, 내심 기대가 된답니다.”
나는 애써 초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황제가 우리 부부가 죽든지 말든지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여기 있는 귀부인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를 걱정한다면 자칫 황제를 모욕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귀족이라면 응당 그런 임무도 한 번쯤 맡아 봐야죠.”
“변경의 영주라니 너무 근사하네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이 애써 웃었다.
지금 이 모임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전 브렌트 공작 부부의 북부행인 터라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알렉을 비롯한 남자들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2 층의 공간에서 따로 모여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귀부인이 말했다.
“윌스브룩 성이 가는 길에 죽는 사람들이 많긴 해도 얼마 유서 깊은 성이라고요. 정말이지 부럽네요,
루이제.”
호호호, 그럼 네가 대신 갈래?
나는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살짝 미소를 짓다가 대답했다.
나도 그렇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도 애를 쓰고 있는 게 보여서 눈물겨웠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에 누가 그림으로 그려 놓은 성의 모습을 확인했답니다. 뭐가 성이고 뭐가 암산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장관이더라고요.”
“그런 곳에 눈까지 많이 내린다니 천혜의 절경이네요.”
“언제 한 번 모두들 초대할게요.”
“그래 주신다면 영광이에요.”
“말씀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루이제.”
호호호.
귀부인들이 소리 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상황을 비꼬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티룸에서 나눴던 부채의 대화 때문일까?
내가 이번에 북부에 가서 성공적으로 북부를 길들인다면, 아니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이
귀부인들의 환심을 완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사용인들을 포함한 우리 가문의 일원들은 무사히 윌스브룩 성에서 정착할
것이다.
홀로 성에 다녀온 알렉이 바로 그 산증인이었다.
알렉은 윌스브룩 성까지 이어진 길이 꽤 괜찮고, 수백 년이나 방치된 성치고는 내부도 많이 낡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이 의외이긴 했지만, 믿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윌스브룩 성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왜 죽었을까?
실상은 폭군의 무리한 명령에 질려 도망친 걸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었거나 실수로 발을 헛디디기라도 했던 걸까?
떠오르는 의문이 많았지만 나는 일단 사교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그 성으로 가면 다신 루이제를 못 보는 거 아닌가요?”
귀부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스칼렛과 로즈 등 줄리아의 주요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에요. 루이제 당신과 당신 남편이 어떻게 그 험한 북부를 다스린다는 거죠?”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해졌다.
내가 가면무도회의 초대장을 줄리아에게 공개한 일로 저들의 기분이 단단히 상한 것 같았다.
나는 소파의 등받이에 조금 더 몸을 묻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스칼렛은 폐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가요?”
“어떻게 감히 폐하의 안목을 의심하겠어요. 저는 그저 그분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뿐이랍니다.”
스칼렛이 나를 향해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스칼렛과 로즈 등이 줄리아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냥 자존심을 굽히고 줄리아 대신 나에게 우호적으로 굴면 좋으련만, 아직 줄리아를 저버리지 않은 걸까?
이런 기 싸움이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한 수 굽히면, 저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꼭 우리 가문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물론이죠. 당신은 폐하의 눈 밖에 난 사람이잖아요? 당신들의 신분을 빼앗을 만큼이요. 그러니 루이제
당신은 분명히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까지 내 안위를 염려해 주다니 정말로 고맙네요, 스칼렛.”
“…….”
여유로운 내 미소에 스칼렛과 그 주변 귀부인들의 안색이 조금 움찔했다.
내가 울기라도 할 줄 알았나?
나는 별로 괘념치 않은 얼굴로 손끝을 살짝 코에 가져갔다.
“만약 내가 윌스브룩 성에 가다가 죽으면…… 그다음에는 폐하께서 어떤 분들을 영주로 보내실지
궁금해지네요.”
“…….”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내 말은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황제는 다른 귀족들을 보낼 것이다.
스칼렛은 나더러 죽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다른 정상적인 귀부인들이라면 내가 무사히 윌스브룩
성을 다스리길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미소를 은은하게 유지한 채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줄리아는 아직도 요양 중인 건지 어쩐지 보이지 않았다.
손가방까지 든 내가 귀부인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잠시 휴게실에서 머리 좀 식히고 와야 할 것 같네요. 좋은 시간 보내고 계세요.”
“예. 그렇게 하세요, 루이제.”
짧게 머리를 숙인 내가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어차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가야 할 곳이 다른 데도 아니고 그 험한 북부의 윌스브룩 성이었으니까.
내 죽음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스칼렛과 로즈 무리가 절대로 줄리아를 저버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내가 줄리아에게서 사교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알렉은 다른 남자들이랑 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문으로 나가려는데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부인, 어떤 분이 쪽지 하나를 전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내려다보니 시종이 든 은쟁반에 잘 접힌 종이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쪽지를 집어 펼쳐 보며 물었다.
“누가 전했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다른 하인에게 받아서요.”
시종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쪽지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베르가못 방으로 와.]

아무래도 줄리아가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사교 모임 죽순이라 해도 당분간은 이런 곳에 못 다닐 줄 알았는데, 휴게실에서 혼자 독한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둘이 있을 시간을 가진다면 서로 더 솔직해질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시종에게 말했다.
“전해 줘서 고맙다. 혹시 20 분 정도 뒤에 다른 부인들도 불러 주지 않을래? 재미있는 모임이 될 것
같거든.”
“알겠습니다. 부인.”
“부탁하마.”
시종에게 희미하게 웃어 준 나는 이윽고 가장 호화로운 휴게실인 베르가못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내부를 둘러보니 고급스러운 소파에 줄리아가 다리를 꼰 채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아는 힐긋 나를 보더니 픽 웃으며 일어섰다.
역시나 꽤 술을 마신 듯 나에게 다가오는 걸음이 위태로웠다.
“안녕, 루이제? 네가 너무 반가운데 뺨에 하이파이브라도 해도 될까?”
쫙!
“…….”
줄리아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내 눈앞이 번쩍했다.
얼굴 한쪽이 금세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이를 악문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줄리아도 웃고 있었다.
줄리아의 얼굴이 꽤 처절하고 광기에 차 있어 보였다.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쳐진 여자의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 새삼 조금 반가웠다.
“그래. 우리 사이에 악수는 시시하지.”
짝!
이번에는 줄리아의 고개가 비틀어졌다.
저 여자에게 맞은 뺨만큼이나 내 손바닥이 얼얼했다.
줄리아는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얼굴로 나를 향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들더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줄리아의 뺨이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졸릴 뻔했는데 술 깨워 줘서 고맙네. 한잔할래?”
“얼마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로 다가갔다.
더 잃을 것도 없다는 느낌이 이렇게 홀가분한 거였구나.
줄리아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그녀를 파멸시키고 싶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0 화

* * *

사교 모임장의 2 층은 남성들의 전유물 같았다.


저녁용 예복을 말끔하게 입은 채 알렉은 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현실을 관망하듯 술잔을 살짝 빙 돌리고
있었다.
수갈색의 액체가 은근하고 깊은 향내를 풍겼다.
그런데 게이트만 전쟁터인 줄 알았더니 이 점잖은 듯 퇴폐적인 신사들의 모임도 피만 안 튀기는
싸움터였다.
“푸훗,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떤가. 과연 알렉시스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말이야.”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나는 오늘 이 알렉시스를 보는 마지막 날이라는 데 내 장갑을 걸도록 하지.”
“난 구두를 걸겠어.”
“……하.”
알렉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김빠진 웃음소리를 짧게 흘리고 말았다.
사실 여기 모인 귀족들이 아무리 그를 우습게 여겨도 남의 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아니라 진짜 알렉시스를 대하는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알렉은 실소가 나왔다.
알렉의 웃는 듯한 소리에 남자들이 그에게 시선을 주며 조금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알렉에게 도발을 당한 듯하여 기분이 더러워짐과 동시에 위화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너무도 능숙하게 변해 버린 알렉의 말투는 일단은 모두가 가까스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러나 정반대로 달라진 자태와 성격은 평생 적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알렉은 반쯤 담긴 술잔을 다시 테 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 내기에 책임은 질 수 있나?”
“못 질 건 뭐지?”
“그런데 책임감의 무게 치고 장갑과 구두라.”
“…….”
“내 목숨을 건 내기라 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해서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알렉은 다시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주위의 귀족들을 살펴보았다.
자존심을 정확히 건드렸는지 남자들의 안색이 경직되어 있었다.
여기 있는 귀족들은 릴트 제국의 최고 상류층이었다.
그만큼 자존심과 위세가 하늘을 찌르리라는 건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렉이 바로 그 자존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으니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다친 자존심을 세울 만한 누군가의 통 큰 발언이 필요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거만하게 앉아 이쪽을 보고 있던 마르셀이 꼬고 있던 구둣발 하나를 까딱였다.
“그럼 나는 수도에 있는 저택 하나를 걸도록 하지.”
대뜸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마르셀 쪽을 응시했다.
마르셀은 아까부터 알렉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알렉이 몹시 거슬렸지만 전처럼 무력을 쓰지는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레이브 용병단장인 카슨까지 학을 뗄 정도였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 이후로 카슨은 어찌 된 영문인지 소식이 끊겼다.
알렉시스에게 감히 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는데, 마침 황제 폐하의 북부행
명령이라니.
마르셀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알렉시스 자네가 윌스브룩 성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는 쪽에 건 거야.”
그제야 귀족들의 안색도 만족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겨우?”
“…….”
그러나 알렉은 실망스러운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마르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의 방직 공장쯤은 걸어야 하지 않나?”
알렉은 마르셀을 끊임없이 응시했다.
이렇게까지 쓸데없이 저들의 승부욕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지만, 잠자코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은 자존심이 생명인 귀족들이니 자신들의 말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가 갈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마르셀은 알렉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알렉과 마르셀의 눈빛이 조용히 충돌하는 동안 아무도 소리를 내거나 끼어들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조금 흐르자 마르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 방직 공장뿐이겠어? 내 영지도 걸 수 있을 만큼 나는 늘 내 말에 확신이 있다고.”
그제야 사람들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감히 누구도 마르셀을 말리진 못했지만, 도가 지나쳤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셀은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어 내심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방직 공장.
알렉이 원했던 단어가 마침내 나오긴 했지만, 영지까지 끌려 나올 줄은 몰랐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데미안이 말했다.
“이봐, 마르셀. 적당히 해. 우리 내기가 언제 장난이었던 적 있어?”
“난 지극히 진심이야.”
“…….”
“저 새끼가 무사히 윌스브룩 성까지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알렉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살짝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때도 그의 눈길은 마르셀에게 무심하게 닿아 있었다.
그동안 진짜 알렉시스가 얼마나 원통했을지 생각하니 요란하게 금의환향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그가 윌스브룩 성에 다녀온 건 루이제와 가족들, 일부 사용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내기를 물러 달라고 빌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들은 귀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설마 그런 비신사적인
번복을 한다면 실망스러울 것 같거든.”
“그전에 얼어 죽거나 빙판에 미끄러져 머리가 깨질 걱정이나 해야 할 거야, 알렉시스.”
알렉은 입가에 살짝 웃음기를 머금었다.
이제 자리에서 벗어날 듯이 알렉이 등받이에서 몸을 조금 떼어 냈다.
“걸 만큼 건 모양이니 축하는 이만하면 될 것 같군.”
“명복을 빈다.”
마르셀의 비웃음을 끝으로 알렉은 몸을 일으켰다.
가죽 소파를 돌아 나오자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띠링!

[새 등장인물 일람이 오픈되었습니다.]


[브룩스 헤이츠]
[남, 나이: 23 세]
[헤이츠 후작. 악센의 행정 보좌관 중 한 명이다.]
[능력이 출중해 악센이 믿고 아끼는 신하이지만, 악센을 암살하려다가 들켜 형장의 이슬이 된다.]
[전투력: 5]

‘저 사람이 브룩스 헤이츠…….’


브룩스처럼 알렉도 마주친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브룩스는 원작에서 악센의 악행을 참다못해 암살을 다짐한 사람이었다.
등장인물 중 드물게 정의롭고 선량했으며, 분명히 지금도 악센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룩스는 실패한 인물이었다.
알렉은 지금까지 딱히 조력자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브룩스를 마주치고 보니 사람들을
미리 포섭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안타깝게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 휴게실이 어디였습니까?”
알렉이 브룩스에게 다가가며 묻자 움찔 놀란 듯 브룩스가 대답했다.
“아, 따라오시죠.”
“감사합니다.”
가볍게 대답한 알렉은 브룩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특히 브룩스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죽게 놔두기에는 더 아까운 인물이었다.
[크헝!]
그런데 대뜸 루이제에게 붙여 놓은 기드온이 다급한 신호를 보냈다.
알렉은 기드온이 보고 있는 장면을 바로 확인했다.
쫙!
“그래. 우리 사이에 악수는 시시하지.”
쫙!
“그렇지 않아도 졸릴 뻔했는데 술 깨워 줘서 고맙네. 한잔할래?”
“얼마든지.”
“……!”
알렉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잠시 멈칫했던 그가 다시 침착하게 브룩스의 뒤를 따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루이제가 줄리아에게 뺨을 맞고 있어서 심장이 철렁했는데, 루이제도 똑같이 반격하더니 두 사람이 웃으며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이 레버런트 홀 안에 있는 어느 방인 것 같았다.
알렉은 얼른 기드온의 기억을 읽어 경로를 확인함과 동시에 루이제의 상황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기드온이 루이제를 보호할 수 있었다.
줄리아는 썩어 들어가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내가 망했으면 좋겠나 본데,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나 가르시아 가문의 장녀
줄리아거든.”
오뉴월 한기 같은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루이제가 살짝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걸 누가 모르니? 그 거창한 신분에서 더 추락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다 버리고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미쳤다고 여기서 물러날 것 같아?”
줄리아가 애써 분노를 억누르듯 말하며 루이제의 앞에 술잔을 밀어 놓았다.
그러더니 루이제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건배를 청하듯 술잔을 들었다.
자신의 술잔을 든 루이제가 줄리아의 잔에 한번 부딪히더니 이내 입술에 가져갔다.
살짝 잔을 머금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알렉은 지금 루이제가 있는 곳이 브룩스를 따라가면 나오는 방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1 화

줄리아도 붉은 술을 쭉 들이켰다.
“어차피 내가 가만히 둬도 넌 죽을 거야, 루이제. 폐하께서 정말로 영주 노릇을 하라고 그 먼 곳에
보내는 건 아니란 것쯤은 알잖아?”
“……내가 죽어도 혼자 죽진 않을 거라서.”
“…….”
부드럽고 낮게 내뱉은 루이제의 말에 줄리아가 잠시 정색하더니 픽 비웃었다.
“그래. 너같이 뒷배 없는 것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지. 지켜 주는 본가도 없으면서 뭘 믿고 맞서는
건지 신기해. 그런데 그거 알아? 네가 이미 졌어.”
“…….”
“태어나서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뿌듯해 보이네.”
루이제는 평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숨죽이며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을 향해 브룩스가 살짝 돌아섰다.
“이 복도에 보이는 방들이 모두 휴게실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보내시길. 그럼 저는 이만…….”
브룩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돌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알렉이 손을 뻗으며 브룩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 되시면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예상치 못한 제안에 브룩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원래 알렉시스와 브룩스는 그다지 접점이 없는 관계였다.
브룩스는 갑자기 알렉시스가 대화를 청해 내심 크게 놀란 것 같았지만 금세 허락했다.
“아, 뭐 용무가 있다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렉은 복도 안쪽을 힐긋 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예.”
알렉이 먼저 앞장서자 브룩스가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알렉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줄리아는 이제 소파에서 일어서 있었다.
“넌 여기서 홀로 죽은 채 발견될 거거든. 나랑 같이 있었던 사실은 아무도 모를 거야. 어차피 마르셀
때문에 어딜 맘대로 다닐 수가 있어야지.”
“…….”
“감히 날 얕본 거 처절하게 온몸에 새겨 줄게. 지금 네 몸에 흐르고 있는 술.”
“…….”
“그러게 아무거나 함부로 마시는 게 아니란다.”
“독이라도 탄 건가?”
루이제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묻는 질문에 줄리아가 자랑스럽게 한 번 끄덕였다.
“응. 술맛은 좋았을 거야. 내가 미리 하녀 하나한테 먹여 봤는데 맛은 그대로라고 하더라고.”
“독주를 시음까지 시켜 보고 정성이 대단하구나.”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대뜸 들린 목소리에 줄리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브룩스가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루이제!”
독을 탔다고?
루이제가 마신 술에?
알렉은 루이제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녀와 줄리아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술에 독을 탔었다니.
“알렉!”
그가 나타나자 루이제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마셨을까?
다행히 그에게는 자연 회복 스킬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기 전, 눈 깜짝할 새에 루이제가 목숨을 잃을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줄리아는 브룩스를 보고 조금 놀란 듯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브룩스는 황당한 얼굴로 술잔과 줄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사람이 마시는 술에 독을 타요?”
줄리아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독기 서린 눈빛을 밝혔다.
“브룩스 후작은 남의 일에 빠져요. 감히 간섭하지 말라고!”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니야!”
“하아…….”
그 순간 루이제가 살짝 비틀거리며 알렉의 품으로 쓰러졌다.
“루이제!”

[패시브 스킬: 자연 회복]


[마나가 소모됩니다.]

알렉은 루이제의 몸을 받아 들자마자 스킬을 썼다.


“알렉…….”
조금만 참아.
그녀가 얼마나 많은 독을 마신 건 지는 몰라도 말끔히 사라질-.

[패시브 스킬: 자연 회복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회복이 필요한 손상이 없습니다.]

“…….”
왜 손상이 없지?
안 마신 건가?
알렉이 의아해하는 사이, 어느새 브룩스가 술잔을 들고 근처 화초로 다가가며 외쳤다.
“뭐 합니까, 환자를 얼른 데리고 나가지 않고!”
이윽고 생명을 빼앗기듯 꽃잎이 쪼그라들었고, 브룩스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 살인이라니, 당신 미친 게 분명하군! 이번에는 폐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순간 어디선가 우르르 발소리가 들리더니 귀부인들이 의아하게 웅성거렸다.
이제야 20 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
루이제는 알렉의 허리춤을 붙잡고 슬쩍 눈꺼풀을 들었다.
어두운 창문에 비친 줄리아의 일그러진 안색이 볼 만했다.
정말로 사이좋게 술을 나눠 마실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줄리아.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거 누가 모를까 봐?’

* * *

“이 문 열어! 당장 날 내보내 달라고! 나 줄리아 가르시아야! 황후 폐하의 친척이라고! 나 누군지


몰라?!”
줄리아는 감옥의 두꺼운 창살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생 갇힐 리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믿기지 않았다.
“이 문 열라고! 날 풀어 줘!”
목소리가 점점 상해 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세상이 그녀에게 이럴 수 있을까?
고작 루이제에게 독이 든 술을 줬다고 해서 그녀를 감옥에 가둘 일인가?
루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다.
남편도, 결혼한 가문도 이제는 보잘것없이 추락했다.
황제에게 단단히 찍힌 남자의 부인이었다.
그런 하찮은 여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리아는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어떤 일을 벌이더라도 누구도 그녀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앞으로도 평생 그럴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문 열어!”
줄리아의 날카로운 비명이 감옥 안을 사정없이 울렸을 때였다.
“……정말 실망스럽구나, 줄리아.”
어디선가 연약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황후가 머리까지 망토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폐하!”
“…….”
“살려 주세요. 절 풀어 달라고요. 단 몇 초라도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
줄리아 앞에 마주 선 올리비아는 수척한 얼굴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게 아니란다.”
“네?”
줄리아의 눈동자가 처참하게 흔들렸다.
이건 그녀가 기대했던 올리비아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녀더러 실망스럽다고 한 건가?
올리비아는 처연한 안색으로 다시 소리 냈다.
“죽이지도 못하고 걸리기나 하다니…….”
정말이지 올리비아는 그녀의 사촌 동생인 줄리아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줄리아에게 권력을 실어 준 건 어디까지나 올리비아가 사교계 전체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줄리아는 그 몫을 톡톡히 해냈지만, 이제는 이 인형의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눈감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갑자기 브룩스 헤이츠 후작하고 그년의 남편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런 핑계는 통하지 않아, 줄리아. 앞으로는 감옥에서나마 살아갈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렴.”
“네? 제가 왜요?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었잖아요!”
“……그 말을 입에 올리면 감옥에서나마 살 수 없을 거란다.”
“말도 안 돼…….”
감옥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줄리아의 가슴도 곤두 박질쳤다.
“제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으실 거예요!”
올리비아는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지금까지 여러 번 널 구제해 주셨지. 전 브렌트 공작가의 하녀가 죽었을 때부터 수도 없이
네 악행을 눈감아 주었어.”
“악행? 악행이라고요?”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더 이상 널 구명할 명분이 없단다. 네 아버지에게도, 나도.”
“…….”
“그러게 두 사람을 동시에 죽이려고 하진 말았어야지.”
“…….”
줄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머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니 죽은 듯이 있어.”
황후는 분명한 눈빛으로 줄리아를 노려보았다. 이내 몸을 돌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빠르게 걸어
나갔다.
“폐하! 올리비아!”
쾅쾅!
줄리아는 황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창살을 두들겼다.
완벽한 절망감으로 온몸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2 화

“아니야. 마르셀이 올 거야. 마르셀이 날 구하러 오지 않을 리가 없어.”


한참이 지나자 줄리아는 다시 정신을 차리며 어두운 감옥 안을 서성였다.
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남편이었다.
물론 줄리아의 정부들도 그녀를 아끼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정부들의 존재는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마르셀만이 그녀를 구해 줄 유일한 존재 같았다.
“마르셀. 마르셀 뭐 하는 거야…….”
“줄리아.”
그 순간이었다.
낮은 음성이 거짓말처럼 들려와 줄리아가 머리를 들었다.
“개리슨?”
“줄리아.”
개리슨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줄리아도 창살로 다가갔다.
“개리슨! 여태 어디 있었어? 날 빼내 줘!”
“못해. 마지막으로 보러 왔어.”
“뭐?”
“……다들 그냥 널 버린 것 같아. 폐하의 장난감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 더라.”
“그런 소리나 할 거면 꺼져!”
“난 너 안 버렸어. 사랑해, 줄리아.”
“꺼지라고!”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
그 순간 기다렸던 마르셀의 음성이 험악하게 들려왔다.
“누가 누굴 사랑해?”
“…….”
줄리아는 너무도 깜짝 놀라 창살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지금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밀어내듯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야, 마르셀. 개리슨이 자기 멋대로 날 사랑한 거야…….”
“마, 마르셀…….”
개리슨마저 당황한 듯 조금 뒷걸음질 쳤다.
줄리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머리통을 움켜쥐는 손끝이 더 처절해졌다.
“내가 설마설마했지. 일단 저 자식 끌어내.”
“아니야, 오해라고! 마르셀!”
마르셀과 개리슨의 외침이 연달아 들려왔다. 줄리아는 이 꿈 같은 상황을 모조리 거부하고 싶었다.
둘만 남은 감옥 안에서 마르셀이 이를 악물고 창살을 움켜쥐었다.
“줄리아. 내 배신감이…… 어떤 줄이나 알아?”
“……살려 줘.”
“아니. 여기서 평생 날 그리워해. 날 배신한 죗값을 치르라고!”
“그럴 거면 너도 망해 버려!”
아, 아니야.
아이들이 있잖아?
줄리아는 문득 유모들에게 맡겨 놓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어린 아이들이 생각났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듯 줄리아가 마르셀에게 다가갔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날 보고 싶어 할 거야. 여기서 나 좀 꺼내 줘!”
“웃기지 마. 엄마가 누군지도 까먹을 정도로 찾아가지 않은 게 누구지?”
“…….”
“내 영원한 물망초 줄리아. 평생 여기서 반성해. 네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놈들 만나는 것보단
여기 갇혀 있는 게 난 훨씬 좋거든.”
“미친 자식! 다 꺼져!”
욕설을 퍼붓고 돌아선 줄리아는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구해 주려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게 다 루이제 그년 때문이야…….’
줄리아의 눈에서 살기가 타올랐다. 줄리아 자신까지 삼켜 버릴 듯한 살기였다.
‘어떻게 내가 그딴 년한테 당할 수 있어?’
눈물이 철철 흘렀다. 그녀는 허공 어딘가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언가가 줄리아의 시야 안으로 떠올랐다.
“……?”
사물을 비치는 투명한 형상. 은색 머리카락과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
보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을 만큼 섬뜩한 모습이었다.
헉 놀란 줄리아는 기겁하며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눈도 깜박하지 못할 만큼 온몸이 굳어 버렸다.
여기가 몇 층인지는 몰라도, 아니 사람이라면 저런 모습으로 벽을 통과 해 나타나지 못할 텐데…….
유, 유령?!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

“……!”
공기를 울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줄리아는 벽으로 등을 더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 좁은 감옥 안에서 더
도망 칠 곳은 없었다.
헉헉 숨이 막혔다.
이러다 심장이 멈춰 버릴지도 몰랐다.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줄리아가 겨우 입을 움직였다.
“저, 저리 가…….”

[캐시를 죽인 대가를 치러라.]

“악!”
저리 가! 오지 마!

[너의 속죄를 내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아악!”
아무것도 없는 돌 감옥 안에서 줄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사교계의 퀸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8. 북부 영주 부부의 완벽한 속궁합

북부를 향해 마차가 달렸다.


얼마나 달리기 시작했을까?
루이제는 알렉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알렉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알렉. 캐시가 이제 원한이 풀렸을까요? 줄리아가 그렇게 됐으니 하늘에서나마 덜 억울하겠죠?’

“…….”
캐시가 죽은 일로 루이제가 줄리아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그는 캐시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사용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대강 알게 되었다.
루이제와 엘로이, 어머니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줄리아 때문에 캐시가 죽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의 가슴이 묵직한 걸까?
루이제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마치 그도 직접 겪은 일 같았다.
알렉은 어젯밤 캐스다인을 줄리아에게 보내 조금 더 위협을 했다.
루이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줄리아에게 마지막 경고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알렉은 질끈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점점 더 이 가족들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루이제와 입맞춤을 했던 촉감도 아직 생생하게 그의 입술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마음의 무게와 서러움이 남의 것 같지 않았다.
이래도 될까?
그는 언제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점점 정이 들어도 괜찮은 걸까?
정이 든다는 표현부터가 그에게는 잘못되었다. 그는 원래 남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편이 아니었다.
알렉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도기처럼 반질반질한 얼굴에 앵두처럼 윤기가 나는 입술.
그 고결하면서도 자극적인 모습에 알렉은 세게 입 안을 깨물며 다시 창 밖을 보았다.
루이제가 깰까 봐 몇 시간째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도 낯설었다.
어느덧 마차는 하루를 꼬박 달려 북부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사람 한 명,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주위의 온도는 이미 영하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마차가 멈추더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말들 때문에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주인님!”
마부인 페드로였다.
그와 루이제를 따라 북부로 가고 있는 마차가 다섯 대 더 있었는데, 짐을 실은 마차 외에는 사용인들이
타고 있었다.
시녀장인 제인과 시종장인 제임스, 그리고 요리장인 알버트와 그레타 부인 등 사용인들 중 일부가 우선
그들을 따라 출발했다.
똑똑.
“잠시 문을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주인님?”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알렉이 문 쪽을 보았다. 제임스의 음성이었다.
“들어와.”
이윽고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더니 잠든 루이제를 발견했다. 눈이 조금 커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필요하신 게 있을까 봐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괜찮다.”
“알겠습니다. 부르실 일 있으면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군.”
제임스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사용인들도 모두 그와 루이제처럼 풍성한 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그의 주변은 많은 게 변했다.
지금까지는 루이제와 어머니, 엘로이하고만 지냈지만 앞으로는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쳐야 했다.
그런데 사용인들은 등장인물 일람에 단 한 명도 뜨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누군지 아예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알렉은 꽤 신경을 써야 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다행히 사용인들은 그의 말투와 자세가 너무도 달라진 탓에 이미 그를 새로운 기분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의심받을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알렉은 다시 한번 미간을 눌렀다.
사용인들은 이미 다른 가족들처럼 알렉시스를 오래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는 수십, 수백 명으로 늘어날 텐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3 화

‘차라리 죽었다 살아난 탓에 기억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제 입으로 거짓말을 하는 건 마음에 걸리는 탓이었다.
카나크 부근에 도착하자 루이제도 잠에서 깨어나 바깥을 구경했다.
북부의 새벽은 시릴 만큼 차갑고 청아했다.
이윽고 윌스브룩 성으로 이어진 길의 초입이 나오고, 저 멀리 높은 곳에 뾰족한 성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미리 그가 지도에 길을 그려 준 대로 마부는 잘 찾아가고 있었다.
“알렉! 저것 좀 봐요.”
놀란 루이제가 감탄과 함께 창문으로 더 바짝 몸을 붙였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한참이나 성을 보더니 말했다.
“신기하네요. 그림으로 보고 상상만 했는데 저게 정말 윌스브룩 성인가요? 생각보다 훨씬 멋있는 것
같아요.”
“가까이에서 보면 더 괜찮을 겁니다.”
“그럴 것 같네요. 얼른 들어가 봤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루이제는 꽤 기대를 하는 듯했다.
그도 창밖으로 작게 보이는 성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던 그 어떤 고성보다도 윌스브룩 성은 크고 근사했다.
도로를 정돈한 이후라 주변이 깔끔해져서 성의 위용이 더욱 극대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부는.
‘시스템이 먼지 한 톨 없이 만들어 놨던데.’
이건 뭐 대놓고 의심받으라고 떡밥을 던져 주는 것도 아니고, 수백 년간 버려진 성이 깨끗한 게 말이 될까?
아쉽게도 그에게는 일부러 더럽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나마 성을 방치한 최근 며칠 동안 먼지가 최대한 많이 쌓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문득 루이제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지 의아해하며 말했다.
“알렉. 그런데 지금 마차가 조금 덜 흔들리지 않나요? 갑자기 왜 이렇게 길이 부드러운 것 같죠?”
“아, 이 길이 원래 윌스브룩 성주가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만든 길이라고 합니다.”
“예? 뭐라고요?”
루이제가 얼떨떨해하자 알렉은 종을 울려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와 루이제가 내리자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사용인들도 모두 내렸다.
낮은 암산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기하학적인 무늬로 짜여진 돌길이 무척 넓고 평편하게
깔려 있었다.
대부분 눈으로 뒤덮여 있어 원래의 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루이제는 입술까지 조금 벌린 채 감탄한 눈으로 길을 만져 보았다. 그녀도 그처럼 가죽으로 된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런 게 여기 있었다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 만들어진 걸까요?”
“수백 년 전일 겁니다.”
“세상에. 수백 년 전에 이런 정성스러운 길이라니…….”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도 덩달아 놀라워하고 있었다.
루이제가 몸을 일으키며 도로를 넓게 응시했다.
“이런 길이 있었는데 그동안 저 성으로 파견된 귀족들은 왜 돌아오지 못한 걸까요?”
“……글쎄요. 아마 이 길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파묻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길이 수백 년 동안 무사할 수 있었던 건 특유의 공법 때문이었다.
돌을 얇은 판으로 만들어 깐 게 아니라 무척 길고 큰 바위의 표면을 반질반질하게 다듬은 후에 땅에
깊숙이 박았다.
수백 년 전 캐스다인은 근처의 암산에서 돌을 구해 이 길을 만들었는데, 오로라 빛이 나는 대리석
산지였다.
“그런데 알렉은 어떻게 발견한 거예요?”
그를 돌아본 루이제의 눈동자에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예상 질문 중 하나.
사용인들까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모두 그를 주목했다.
잠시 턱 끝을 매만진 알렉은 이내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무척 오래된 고서에서 읽었습니다.”
“역시.”
루이제가 감격한 눈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사용인들도 감탄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님처럼 책을 많이 읽으신 분도 이 세상에 없을 거랍니다. 모두 이렇게 복으로 돌아오는군요.”
그레타 부인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렉은 차마 그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루이제도 그렇고 사용인들까지 쉽게 믿는 기색이라니.
‘이거 혹시 다 시스템 설계 아니야?’
괜히 그런 의심이 들었다.
성으로 가면 더 못 믿을 광경이 펼쳐질 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혼자서 그 넓은 성을 닦았다고 해 봤자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미리 고용해서 살 만하게 리모델링을 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말았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루이제는 우아한 자태로 앉아 손을 맞잡고는 조금 황홀해하고 있었다.
“알렉, 나 떨리네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요. 정말로 내가 그 윌스브룩 성에 가게 되는 걸까요?”
“…….”
“당연히 안에는 박쥐나 뱀이나 산짐승이나 거미 소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그런 거 하나 없이
깨끗하다고 하니 기대가 되어서요.”
“……원래 무척 추운 곳에 있는 성은 밀폐되어 있으면 먼지도 잘 안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문이란 문은 다 닫혀 있더군요. 열쇠를 구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큰 고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날 일이었다.
“열쇠가 어디 있었는데요?”
“……성문 기둥 위에서 주웠습니다.”
더 정확히는 성문의 기둥 위에 서 있다가 내려가는 길에 영주의 마스터 키를 획득한 거였다.
“성문 기둥 위요? 거길 올라갈 생각을 다 했군요…….”
“…….”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알렉은 그냥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이미 루이제는 그에 대해 내심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지 몰랐다.
문득 알렉은 온화해 보이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루이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버런트 홀에서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래. 우리 사이에 악수는 시시하지.’


쫙!
“……!”
다시 떠올려도 살벌한 그 불꽃 싸대기에 알렉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루이제는 훨씬 무서운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홀로 조용히 신분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품은 것도 그랬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친 여자에게 뺨을 때리기도 하고, 그 여자가 술에 독을 탄 것을 미리 알고 마신
척만 했던 것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언젠가 줄리아에게 갚아 주려고 했다던 복수도 이루지 않았는가.
이런 루이제에게 그가 그녀를 속이고 입맞춤까지 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뺨 한 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려고 할 때 마차는 윌스브룩 성에 한 층 가까이 달려가고 있었다.

* * *

“……하. 여기가…… 윌스브룩 성…….”


루이제는 더 젖힐 수도 없을 만큼 높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성문 앞에는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성 전체가 한눈에 담기지 않았다.
사용인들도 차례로 감탄했다.
“하늘에 그림을 펼쳐 놓은 게 아닐까요? 보고도 믿기지 않네요.”
“성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절벽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백 년 전에 어떻게 저런 성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요? 경이롭고 대단하네요.”
알렉이 보기에도 수백 년의 세월을 벗은 윌스브룩 성은 이 세상 것이 아닌 초월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건축물이라기에는 너무도 웅장해서 차라리 거대한 암산이 번개를 맞아 우연히 생긴
성이라고 하면 더 믿길 것 같았다.
이곳을 천혜의 요새라고 하며 융성하게 발전시키라고 했던 악센의 말도 어느 정도는 진심일지도 몰랐다.
‘나중에는 다 파멸시켰지만…….’
짧게 생각한 알렉이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그럼 이만 들어가시죠.”
“아, 알겠어요.”
그가 먼저 앞장서자 루이제와 사용인들이 그를 따라 걸었다.
인공 해자의 위에 놓인 다리마저 육중한 크기와 길이를 자랑했다.
문득 무언가가 그의 팔을 감으며 들어왔다.
살짝 내려다보니 루이제가 그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보온성이 좋은 가죽과 털로 된 옷을 입고 있는데도 루이제의 팔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알렉은 영주의 마스터키를 꺼내 성문을 열었고, 그 문을 지나면 나오는 진짜 성에 달린
문을 또 열었다.
그가 열쇠를 밀어 넣을 때마다 철컥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혹시 몰라서 걸레를 한 300 장쯤 챙겨 왔답니다.”
“그랬구나, 제인. 정말 준비성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당장 내일부터 청소를 해 줄 북부 사람들 좀
고용해야겠어. 어차피 여기 사람들도 만나 봐야 하니…….”
제인을 향해 말하던 루이제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하며 크게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루이제에 이어 다른 사용인들도 놀란 듯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차례로 울렸다.
성의 홀은 천장이 무척 높아서 그들의 놀란 숨결이 하늘까지 닿을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4 화

알렉은 조용히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루이제?”
“네?”
루이제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은 그가 아는 더 대단한 것의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이 성은 안보다 안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는 게 훨씬 더 멋있습니다.”
“이 안보다 더 멋있다고요?”
루이제가 되묻는 말에 알렉이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제는 조금 글썽거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알렉. 이 세상에서 이 윌스브룩 성보다 더 굉장한 건 없을 거예요.”
“일단 올라가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거기는 어디로 가면 되죠?”
루이제가 벅찬 감정을 가라앉히듯 가슴을 꾹 누르며 되묻자 제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주인님, 마님. 그럼 저희는 우선 둘러보다가 짐을 풀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아, 잠시만.”
돌아서려는 사용인들을 붙잡은 알렉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성의 내부 도면이니 참고가 될 것이다.”
“아, 지도가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제임스가 그에게서 도면을 받아 갔다. 그가 도로를 되살리느라 성에 있을 때 찾은 그림이었다.
이윽고 그는 루이제를 향해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이쪽입니다.”
“알겠어요.”
루이제가 한층 더 기대되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애써 기대감을 억누르듯 그녀의 작은 뺨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그 윤기 나는 볼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알렉은 첨탑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30 분을 넘게 계단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 계단은 계속 좁아지는 데다가
가팔라지기까지 했다.
루이제가 드레스 자락과 난간을 꽉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당신 멱살을 잡고 싶어지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힘들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알렉은 겸연쩍게 시선을 내렸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첨탑까지 가는 길이 꽤 고행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 길을 혼자 여러 번 올라갔지만 1 분 컷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놓고 그런 스킬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죠?”
루이제가 어금니를 더 꽉 깨물며 웃었다.
“힘드시면 그냥 내려가셔도 괜찮습니다. 생각해 보니 꽤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넘게 올라가야 했다.
이대로 그냥 등반을 하게 했다가는 내일 엄청난 몸살을 앓지 않을까?
“아니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은 올라가 봐야죠.”
“그럼 업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 좁은 곳에서 업히면 내 머리가 천장에 계속 닿을 것 같네요.”
루이제는 이를 악문 듯한 미소로 그를 지나쳐 올라갔다.
“어휴, 더워라.”
갑자기 털 망토까지 벗더니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
잠시 생각하던 알렉이 말했다.
“그럼 안아 드리겠습니다.”
“……!”
그 말과 동시에 그는 루이제의 앞으로 다가가 들어 안았다.
그녀가 내려놓았던 털 망토까지 들더니 조심히 덮어 주었다.
“…….”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숨이 많이 찼었는지 루이제의 심장이 쿵쿵쿵 울리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 안아서 놀란 걸까?
그는 루이제의 머리까지 안전하게 손으로 감싸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올라가는 와중에 루이제는 숨죽인 듯 반응이 없었다.
“……진작에 들어 드릴 걸 그랬네요. 죄송합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다리가 똑 부러질 것 같았어요.”
그제야 루이제가 그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러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
“전 괜찮습니다.”
알렉은 입술을 조금 깨물며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루이제의 전신이 그의 품에 쏙 들어오고도 남았다.
무척 포근한 이불을 안은 것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그럼 잠깐만 신세 좀 질게요…….”
이상하게도 10 분이 1 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사람 한 명을 들어 안고 있는데도 힘이 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첨탑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계단은 점점 사라지고 계단 흉내를 낸 발디딤들이 가파르게 경사진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겨우 한 명이 지나기도 어려운 공간.
알렉은 루이제를 한 팔로 안고 기둥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루이제를 내려놓자 그녀가 바닥에 발을 디디며 주위를 넓게 둘러보았다.
출입구 밖으로는 첨탑의 전망대가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눈도 내리지 않고 안개도 많이 끼지 않은 상태.
탁 트인 사위는 구름을 타고 올라온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알렉, 망망대해가 바다에만 있는 건 아니었나 봐요.”
감탄한 루이제가 첨탑 난간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녹도 슬지 않은 고풍스러운 난간을 붙잡고 탄성을 냈다. 보랏빛 눈동자가 한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런 풍경은 처음 봐요.”
알렉은 루이제에게 다가가 털 망토를 어깨에 감싸 준 후에 나란히 섰다.
숨을 들이쉬자 들어오는 공기는 티끌도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완벽 신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감이 정화되는 듯한 공간이었다.
“그랜드칼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그렇군요. 그렇겠어요. 뭐라고 말도 안 나오네요.”
첨탑 뒤쪽으로는 뾰족뾰족한 산이 구름을 찌르고 있었지만, 앞쪽으로는 마차를 타고 지나왔던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더 먼 곳에는 여러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카나크가 넓은 분지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 아래의 모든 것이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제는 한참이나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대자연의 광활한 위엄에 완벽하게 압도된 것 같았다.
“알렉,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예?”
“여기 관광지로 소개하면 대박 나겠네요. 분명히 전국에서 귀족들이 몰려올 거예요.”
“…….”
“아, 물론 한 시간도 넘게 폐소 공포증에 시달려야 하고 암벽 등반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꽤
대담해서요. 유행을 위해서라면 척추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허리를 조이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군요.”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북부를 살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녀가 감동을 받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곳에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에요.”
루이제는 금세 웃으며 다시 말했다.
“물론 진담도 반쯤 섞이긴 했지만요.”
“…….”
루이제는 난간을 붙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루이제가 이곳에 와서 첨탑의 전망을 봐 주니 이곳이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루이제가 몸을 돌려 완전히 그를 마주 보고 섰다.
알렉은 자석처럼 따라붙듯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루이제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렉.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 북부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예?”
“이렇게 높은 데서 내다보니까 너무도 광활하고 신비로워서 두려워지네요.”
두렵다고?
아직 그가 그녀를 많이 겪어 본 건 아니었지만, 왠지 루이제에게 두려움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조금 생각하던 알렉이 대답했다.
“제가 본 루이제라면 못 할 없을 것 같던데요.”
“네?”
그의 말에 루이제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더니 이내 시선을 내렸다.
“아니에요. 난…… 할 수 없는 게 많아요.”
그녀는 다시 슬쩍 첨탑 밖을 응시했다.
“여태 계속 실패하고 망하기만 했는걸요.”
“…….”
루이제의 진지하고 어두운 기색에 알렉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뭔가 이야기를 잘못 꺼낸 걸까?
“부담을 드리려고 모셔 온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그게 아니라 내 말은…….”
“…….”
“지금까지 당신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난 버림받은 적도 많아요. 정말 절망한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어요.”
“…….”
알렉은 제가 루이제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행복해지고 싶어서 금세 털어 버렸죠. 내가 낙담하지만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괜찮은
거잖아요.”
“…….”
“그런데 계속 털어 내도 내가 혼자라는 사실은 쉽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
남편이 있는 여자가 혼자라는 말을 하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진짜 혼자인 것보다 더 혼자 같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탓일까.
여태까지 그는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마음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남남
같았다.
루이제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함께이니까 괜찮은 거죠?”
나 혼자인 거 아니지?
조금 처량한 루이제의 눈빛이 그에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또 이 세계에 시험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5 화

“이 높은 곳에 올라오니 지금 내가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서요.”


그리 말한 루이제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첨탑 아래를 내다보았다.
“다행히 당신 덕에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죽을 만큼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루이제가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렉은 그녀에게 약속할 수 있었다.
루이제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제.”
문득 내뱉은 그의 부름에 루이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알렉은 입술을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조금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소리 냈다.
“저는 반드시 폭군을 물리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네?”
“그게 제가 이 세계에 온 목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폭군을 죽이고 임무를 끝낸 뒤에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진짜 알렉시스가 돌아온다면 아마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약속해 드리죠.”
“…….”
“제가 반드시, 황제를 무너뜨리고 루이제가 원래 가졌던 것들을 모두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공작 부인이라는 신분, 비옥하고 따뜻한 영지, 그리고 폭군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
그의 최종 퀘스트를 성공시킨다면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복수도 대신할 수 있었다.
루이제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에게 두 걸음 정도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어요?”
“…….”
어느새 그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속에서 없던 불꽃이라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래요, 알렉. 우리 꼭 폭군을 무너뜨려요.”
“…….”
“우릴 여기로 보낸 거 황제가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거예요.”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루이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모든 게 부드러우면서도 강해 보였다.
그를 붙잡은 손이나 가까이 붙어오는 몸도 연약했지만 동시에 약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입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꺼지지 않을 듯한 숨결이 이어졌다.
띠링!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300 올랐습니다!]

[레벨 8 로 올랐습니다]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냉정한 초보 남편 → 성욕에 눈뜬 초보 남편]

“……?”

* * *

‘하.’
아주 연한 느낌으로 두 혀가 과감하게 얽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나 오랫동안 고대했던 것을 어루만지듯 연거푸 그를 휘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올라오는 길이 힘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윌스브룩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벌써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제가 반드시, 황제를 무너뜨리고 루이제가 원래 가졌던 것들을 모두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알렉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황제의 손끝에 달린 가벼운 목숨.
그냥 죽는 것보다 뭐라도 해 보고 죽는 게 덜 억울하잖아?
줄리아가 감옥에 갇히면서 나는 내 안의 불씨가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하는 기분을 느꼈다.
영원히 사교계에서 군림할 줄 알았던 줄리아가 모두에게 버림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더 불가능한 희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렉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를 수백 번 쓰다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아, 정말…….’
나는 벅차오른 만큼 그의 등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의 혀가 강한 힘으로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고개를 비틀어 내 입 안을 휘젓고, 혀를 훑다가 매끄럽게 입술을 문질렀다.
넓은 그의 가슴 근육이 뜨겁게 부풀며 그가 열띤 숨결을 신음처럼 흘렸다.
그의 손이 내 손이 닿지 않는 나의 등 한복판을 꾹 눌러 바짝 끌어안았다.
나와는 크기와 형태가 전혀 다른 그의 가슴 근육의 굴곡과 넓이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너무 달콤하잖아…….’
나는 점점 더 깊은 것을 갈구하듯 그와 혀를 섞고 그의 등허리를 쓸어 내렸다.
숨이 차고 호흡이 불편했지만 이 휘말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와 완벽히 같은 상태인 듯 그도 조급한 숨소리를 내며 내 등을 더듬었다.
가죽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그의 손길이 진득하게 들러붙는 곳마다 맨살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아.”
가슴을 태우는 듯한 그의 신음이 달콤하게 흩어지더니 내 입 안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갈증을 채우려는 듯이 내 혀를 수십 번 끄집어내 얽고, 타액을 섞었다.
이러다 서로가 뜨겁게 녹아내려서 한 몸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가 뭘 원하는지, 그의 손길이 어딜 향해 애를 태우고 배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알렉.”
벅찬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눈이 가물거리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내 몸이 무너져 내리려고 하자 그가 내 허리를 더 단단히 감고 팔꿈치를 붙들었다.
“루이제.”
나는 쓰러질 것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그의 가슴에 손 하나를 올렸다.
“여기서 해도 돼요.”
거친 숨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절로 미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래 놓고 안 하면 넌 유죄야.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와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그의 큰 손이 파르르 떨며 다가오더니 내 뺨을 뜨겁게 감싸며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내 시야 안으로 다 들어오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려와 혀로 내 입술을 짙게 핥았다.
‘하.’
너무 좋잖아……?
역시 나만큼 그도 날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나를 뭉개질 듯이 꽉 안았다.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리며 진하게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런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싶은 순간, 그가 힘겹게 끊어 내듯 내 입술에서 멀어졌다.
이윽고 나를 번쩍 들어 안더니 내 눈을 보지도 못하며 괴로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만 내려가죠, 루이제.”
“…….”

* * *

“주인님, 마님. 어떠신지요. 입맛에 맞으십니까?”


월스브룩 성의 만찬실 안.
브렌트 공작가의 수석 요리장인 알버트와 그레타 부인이 나란히 서서 나와 알렉을 향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식기를 내려놓은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정말로 눈물이 고였다.
“……너무 맛있어. 오랜만에 알버트와 그레타의 요리를 먹으니까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으흑.
나는 테이블 냅킨으로 눈가를 살짝 찍었다.
그러자 알버트도 조금 울먹였다.
“평소에 두 분께서 즐겨 드시던 것들로만 차려 보았습니다. 다시 두 분을 위한 요리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드시고 싶은 게 있으셨다면 뭐든지 말씀해 주시지요.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레타. 처음 와 보는 성에서 이 정도 차려 준 것만 해도 정말 고생이 많았을 거야.”
“마님…….”
그레타 부인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 당분간은 적응이 안 되어서 많이 불편할 거야. 최대한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도록 나도
노력할게. 그러니까 다들 조금만 힘을 내 줘.”
“명심하겠습니다.”
사용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응시했다.
이내 맛있는 식사 시간이 되라는 말과 함께 만찬실에서 물러났다.
나는 높이 고개를 들어 이 넓은 만찬실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벽이며 천장이 모두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윽고 내 눈에 들어온 건 탁자의 끝에 앉아 있는 알렉이었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내 시선에 움찔하며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속에서 천불 같은 한숨이 나왔다.
‘밥이 입에 들어가니?’
대체 저 남자는 뭐가 문제일까.
이제 입맞춤도 잘하겠다 한 번 시도를 해 볼 법도 한데 왜 거부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 심층 대화라도 나눠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와인 잔을 들었다.
“윌스브룩 성에서 지내는 첫날 밤이네요. 우리의 첫 성 생활을 위해 건배라도 해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6 화

* * *

영주의 방은 성의 중심에 있었다.


만약 이곳이 고급 호텔이었다면 하룻밤에 몇백만 원은 할 듯한 고상한 분위기로 내부가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알렉은 지금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 하나에 얼굴을 묻고 어두운 방 안을 심란하게 서성였다.

‘여기서 해도 돼요.’

마른침을 삼킨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하마터면 정말로 할 뻔했다.
첨탑 위에서 뜨겁게 지펴진 가슴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날아갈 뻔한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루이제의 입술에서 자신의 것을 떼어 냈다.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를 더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용한 미소로 그와 식사를 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게 더 무서웠어…….’
서성이던 그가 멈춰 섰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애초에 입맞춤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 감촉과 기분을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나니 다가오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온기를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그는 여자가, 그것도 루이제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안는다는 게 이토록 애틋하고 환장할 일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남자의 여자.
심지어 그는 그녀를 속이고 그녀의 남편인 척하고 있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루이제와 입술을 맞출 때마다 양심에 가책이 차곡차곡 쌓였다.
동시에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은 욕망이 들었으며, 그 순간의 행복한 감정에 함께 휩싸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루이제가 조금만 더 다가오면 그는 무너져 버릴 게 분명했다.
‘안 돼.’
그는 마지막 선은 넘지 않으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똑똑.
그 순간 들리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누구지?”
“제임스입니다, 주인님.”
“……아, 들어오도록.”
조금 안도하며 그가 대답하자 금세 문이 열리며 제임스가 들어왔다.
제임스 로허트는 40 대 초반 정도의 시종장이었는데, 굴지의 대기업 회장 비서 같은 노련함과 중후함이
있었다.
그동안 알렉시스와 가문의 일로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테니, 알렉은 사용인들에게 쓸모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방은 지내기 편안하십니까?”
“난 아무렴 상관은 없는데, 자네들은 지낼 만할지 잘 모르겠군.”
“저희야 이런 유서 깊은 성에서 주인님들을 모실 수 있어서 큰 영광입니다.”
“그렇다고 큰 무리는 하지 말도록 해.”
“말씀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한 제임스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조금 망설였다. 알렉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그제야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런 멋있는 성에서 주인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말이지요.”
“…….”
제임스의 눈빛이 꼭 십수 년을 되돌아보는 것같이 깊었다.
그동안의 알렉시스를 떠올려 보는 듯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알렉은 짧은 숨을 들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도 많은 일들이 믿기지 않아.”
진심이 섞인 한숨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사용인들의 생경함을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낯선 곳인 만큼 더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군.”
“아직도 주인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
무슨 은혜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알렉시스가 사용인들에게도 무척 잘해 준 것 같긴 했다.
그제야 제임스는 용무를 꺼냈다.
“다름 아니라 마님께서 잠시 마님의 방으로 들르시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부인이……?”
“예.”
“…….”
알렉의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잘 일만 남은 이 야심한 시간에 왜…….
그의 목울대가 한번 오르내리더니 이내 가까스로 대꾸했다.
“……알겠다. 곧 방문하도록 하지.”
“예, 주인님.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임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그의 방에서 나갔다.
그 순간 알렉은 다시 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쩐지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 그는 실내용 망토를 걸쳤다.
어차피 루이제는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을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영주 부인의 방은 영주 방의 반대편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루이제는 뭘 하고 있을까? 왜 그를 부른 걸까?
이윽고 그녀의 방에 다다르자 어스름한 불빛이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가 슬그머니 문을 열어 들어섰다.
“루이…….”
그러나 알렉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보인 광경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방 안을 채운 따스한 불빛보다 더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루이제가 창가에 서 있었다.
풀어 내린 은빛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금을 녹여 낸 듯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고, 오밀조밀한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붉은 윤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녀린 턱과 목선이 부드럽게 떨어지며 아담한 어깨로 이어졌으며, 그 아래로는…….
“……!”
알렉은 정수리에 번개라도 맞은 듯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얇은 나이트가운 안으로 봉긋한 가슴이 그대로 비쳐 보이고 있었다.
불빛은 그녀의 나신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실루엣을 더 선명하게 했다.
마치 사고라도 당한 것 같았다.
알렉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창밖을 보던 루이제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발견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 언제 왔어요?”
“…….”
아직 그의 눈동자가 봐서는 안 될 곳에 묶여 있었다.
알렉은 가까스로 눈을 들어 루이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랜드칼리는 혹한의 지역인데, 왜 이렇게 그의 가슴은 타 버릴 것처럼 뜨거워지는 걸까?
루이제가 완전히 그를 향해 돌아서자 그녀의 실루엣이 더 완벽하게 그의 시야를 자극했다.
둥글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몸의 굴곡이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잘 쉬고 있었나요?”
“…….”
알렉은 살짝 미간을 짚으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탁 닫았다.
“여기서 그런 차림은 추우실 텐데요.”
지금 그를 유혹하고 있는 걸까?
위험한 덫에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하긴 남편의 앞이니 그녀로서는 이런 일이 거리낄 건 아닐 것이다.
일부러 루이제는 보지 않으며 다가가자 그녀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거의 나신을 드러내는 차림이면서도 루이제는 거리낌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끔 추워도 참고 싶을 때가 있더라고요.”
“…….”
후읍.
괜스레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되었다. 그의 가슴이 팽팽하게 당겼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무려 이 북부의 추위까지 감수하고 있다고?
이 정도로 그를 원하는 여자를 앞에 두니 현혹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라는 사실을 보기 좋게 알려 주듯 루이제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북부에서 자는 첫날이니까 이 추위를 고스란히 느껴 보고 싶었어요.”
“…….”
“우리가 다스려야 할 곳의 날씨까지 사랑해야죠.”
“…….”
루이제의 목소리가 경건하면서도 차분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알렉은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했다.
조금 긴장이 풀렸지만 동시에 조금 묘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저건 생각도 못 한 이유였다.
“……그러셨군요. 더 사랑했다가는 독감에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그는 루이제의 옷자락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그녀가 있었지만 루이제는 거기서 더 다가오지 않았고,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문득 루이제가 몸을 떨었다.
“하, 그러게 정말이지 너무 춥네요.”
그녀는 팔을 감싸 안으며 제 몸을 문질렀다. 정말로 추운 것 같았다.
가냘픈 어깨를 웅크리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제 옷을 입는 건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든 그는 또다시 충격적인 모습을 맞닥뜨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7 화

엉덩이가 둥근 사과처럼 아담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앞모습과는 다른 의미로 그의 온 감각을 사로잡았다.
원래 사람의 몸이란 게 저렇게 유려하고 아름다운 선을 그릴 수 있는 거였나?
알렉은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욕망이 불쑥 솟구치려는 것 같아 다시 소리 없는 심호흡을 했다.
그의 몸을 감싼 셔츠가 터질 듯이 팽팽해졌고, 꽉 깨문 턱은 툭 불거졌다.
루이제는 소파 위에 올려놓은 푹신한 숄을 들어 몸을 감쌌다.
“이리 와서 앉아요, 알렉.”
움직일 수 있을까?
알렉은 겨우 발을 떼 방 한쪽에 마련된 소파로 다가갔지만, 여기서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가 맞은편에 앉자 루이제가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뜨겁게 끓인 포도주예요. 북부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려고 거의 반쯤 취해 있는 시간이 많은가 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가 애써 덤덤하게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술 종류는 많은 것 같지 않더라고요. 독한 술은 많은데 맛있게 독한 술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북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요. 당신이 없을 때 카나크에도 다녀왔는걸요.”
“예?”
알렉이 고개를 들어 루이제의 얼굴을 그제야 눈에 담았다.
기다란 다리를 포개고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술잔을 든 루이제는 꼭 한 마리의 우아한 새 같았다.
그리고 흘러내린 숄이 그녀와 한 몸인 것처럼 어우러졌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눈이 어릿할 정도로 완벽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대로, 루이제가 입술을 벌렸다.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짧게 구경했거든요. 도저히 궁금해서 안 가 볼 수가 있어야죠.”
“…….”
루이제가 말을 마치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주변 공기가 향기로 물들 만큼 매혹적인 눈빛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카나크에 다녀온 사실은 기드온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말을 타고 카나크에 가서 꽤 놀랐었다.
어쩐지 감시하는 것 같아 기드온에게 늘 그녀를 지켜보게 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혼자 먼 길을 가는 건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혼자 간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예?”
루이제가 부드러운 미소로 물은 말에 알렉은 뜨끔했다. 이내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엘로이와 어머니는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니까요.”
“그러네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오히려 그럴 때는 혼자 가야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잖아요.”
“…….”
알렉은 대답 대신 따뜻한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달큰하면서도 진한 액체가 그의 혀를 감고 입 안을 채우는 촉감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루이제와 키스를 할 때처럼…….
‘하, 미치겠군.’
괜히 머릿속을 달구는 상상에 알렉은 술을 원 샷 했다.
뜨끈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흐르며 그의 혈관을 자극했다.
온몸의 근육과 혈관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해도 돼요.’

혹시 또다시 루이제가 그와 하려고 할까?


자신의 방으로 그를 부른 그녀의 목적에 유혹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지금 그녀가 또 그에게 입술을 붙인다면…….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릴 것이다.
그 너머의 느낌을 알고 싶고, 느껴 보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을 알고 나니 더 많은 것에 욕심이 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루이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가 흠칫 긴장하자 균형 있게 쪼개진 복부 근육이 수축했다.
하다 하다 이제는 루이제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행동에도 자극을 받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오려는 걸까?
알렉은 루이제가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아 팔짱을 끼며 눈을 감은 채 살포시 턱을 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입술을 삼키고, 그 몸을 단단히 붙들어 안으면…….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성욕에 눈뜬 초보 남편.’

왜 그에게 저딴 칭호가 생겼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도 할 말이 없었다.


“하암, 벌써 피곤한 것 같네요.”
그런데 불현듯 들려오는 하품 소리.
루이제는 그의 옆자리가 아닌 침대로 향하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알렉도 이만 돌아가요. 난 일찍 자야겠어요.”
“……예?”
소파에 앉은 채 알렉은 루이제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냥 가라고?
“당신은 안 졸려요?”
루이제가 정말로 조금 피곤한 눈으로 담백하게 물었다.
“아…….”
지금까지 그는 홀로 무슨 망상을 한 걸까?
루이제가 여태 늘 그에게 먼저 다가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제는 닿을 수 없는 몽환적인 여신처럼 먼 곳에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한 알렉은 이내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문 쪽으로 가자 루이제가 친히 문까지 열어 주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요, 알렉.”
루이제의 인사에 알렉도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루이제도 좋은 꿈 꾸십시오.”
“고마워요.”
“…….”
눈길이 조금 더 오고 갔다. 그런 후에야 알렉은 시선을 돌리며 몸을 비틀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건 1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쩐지 가슴이 싸하게 뜨겁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돌아가도 되는 걸까?
1 초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고 발걸음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완전히 문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에도 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환청처럼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제 같은 방을 쓰는 건 어때요?’
‘당신 이제 운동 신경이 좋아진 거면……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여기서 해도 돼요.’

몸은 루이제의 방을 나왔지만 어쩐지 그의 가슴은 그를 그녀의 방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정도로 욕망이 크게 그를 지배한 적은 처음이었다. 꼭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큼 루이제도 그를 원하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아직도 닫히지 않는 문.
그를 그냥 보내려 한 건, 그를 더 조급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을까?
그랬던 거라면 그녀의 의도대로 그는 지금 가슴이 다 터질 만큼 그녀를 먹어 삼키고 싶었다.
이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몇 걸음이면 그녀의 방 안이었다.
“루이제.”
“알렉.”
방 안으로 들어가니 루이제가 아직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현실적으로 신비로운 얼굴, 그를 녹여 버리는 입술.
그녀의 눈동자도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후우.”
다급한 숨을 들이쉰 그가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입술을 붙였다.
“흐.”
고개가 꺾이며 루이제의 입술에서 신음이 짧게 흘렀다.
루이제의 가냘픈 손이 그의 등을 힘주어 붙잡았다.
작은 입술이 그의 혀가 문지르는 대로 이리저리 뭉개졌다.
루이제가 손끝으로 문을 밀어 닫으며 살짝 몸을 돌렸다.
알렉은 그대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그녀의 등을 짙게 쓸어 만졌다.
살이 비치는 얇은 드레스 한 겹 너머로 루이제의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그 등을 당기자 그녀의 섬약한 가슴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애틋한 촉감으로 뭉개졌다.
혀와 혀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애를 태우며 서로를 얽어맸다.
“하, 알렉.”
“하, 하…….”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맞닿은 눈동자와 입술이 열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정말로 그냥 가 버렸으면 실망할 뻔했어요.”
“……정말로 그냥 보내려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냥 보낼 리가 없잖아요.”
“…….”
루이제의 눈썹이 안타깝게 휘어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그의 심장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이럴 거면서 왜 자꾸 나를 밀어내요? 못 할까 봐 걱정되는 건가요?”
“저랑 하면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아뇨. 난 후회 안 해요.”
“지금은 안 해도 나중에 할지도 모릅니다.”
“난 나중보다 지금 이 순간이 늘 중요해요.”
“…….”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닥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해야 하나요? 난 지금 당신한테 안기고
싶다고요.”
“…….”
“그리고 애초에 내가 후회를 왜 하겠어요. 당신은 내 남편인데.”
루이제가 숨을 몰아쉬며 벅차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부풀며 그를 자극했다.
알렉은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8 화

“당신 혹시…… 이런 상황에 아기를 갖는 게 너무 무모한 것 같아서 그런 건가요?”


“……예?”
“그래서 후회한다는 거예요?”
“…….”
알렉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아기라니,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제가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알아요. 우리가 이런 상황에 아기를 낳으면…… 그 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난 지금 당신을 안고 싶어 했던 마음을 후회하겠죠.”
“…….”
“당신은 원래부터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도 않았잖아요…….”
“…….”
아이를 거부했다고?
처음 듣는 알렉시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알렉시스가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아이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데 공작이 후계자를 안 낳아도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후계자는 친척 중 누군가여도 상속이 가능하니 친자 욕심만 없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제는 등장인물 일람에 나와 있을 정도로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와 그녀가 폭군에게 복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니 아이를 가지는 건 무모한 일일 것이다.
“혹시 그래서 후회할 거라고 한 거면, 지금은 최대한 안 생기게 하면 되는 거죠?”
“예?”
루이제가 조금 더 눈썹을 좁히며 그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알겠어요. 나는 지금 당장 꼭 안 가져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그러니까 우리 반드시 폭군한테 복수해요. 그러면 그땐 마음 놓고 가질 수 있으니까.”
“…….”
루이제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루이제를 보던 그는 어느 순간 번쩍 그녀를 들어 안았다.
“흣!”
놀란 신음을 내뱉은 루이제의 몸이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그의 상체에 쏟아지며 달라붙었다.
그녀의 작고 납작한 등을 감싸며 알렉은 침대로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 뜨겁고 열렬한 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침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격렬하고, 정신이 수백 번 뒤집히는…….

* * *

“흐읏.”
그의 손길이 내 허리를 스치고 올라왔다.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몸이 하느작거리며 무릎을 세웠다.
정말로 오늘 밤 하게 되는 걸까?
그와 결혼한 지 무려 3 년이었다.
그동안 나는 눈물이 고일 만큼 외로운 시간을 보냈고, 그런 나를 보며 그도 힘겨워했다.
나중에는 거의 체념하긴 했지만 그가 늘 나에게 미안해했던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밤 내 남편과 다시 하게 되다니…….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의 변한 모습들을 떠올렸다.
아찔했던 키스와 황홀했던 댄스.
그 모든 것들을 다 합해도 앞으로 그와 하게 될 정사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날 침대에 눕히자 그는 나를 깔고 앉은 채 팔을 들어 제 셔츠를 벗었다.
머리 위로 셔츠를 올리자 탐스러운 양감의 근육이 아무것도 가리는 것 없이 쭉 늘어나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워 나는 시트를 움켜쥐며 살짝 허리를 뒤틀었다.
그의 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눈앞이 현란했다.
그가 옷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넓게 벌어진 어깨가 내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왔다.
이윽고 내 허벅지를 감은 드레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알렉…….”
손끝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나는 불에 덴 것처럼 시트를 움켜쥐었다.
옷이 들어 올려지며 차츰 내 맨살이 드러났다.
나는 얇은 드레스 외에 다른 건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속옷도 입지 않았다.
여태껏 남편은 내 날것 그 자체인 몸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 곳곳마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긴장한 듯이 동공이 얼어붙고, 넓은 가슴은 팽팽해졌다. 그의 목울대까지 크게 울렁였다.
뜨거운 시선이 내 복부를 지나 가슴에 닿자 그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루이제.”
원래 이렇게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찔했었던 걸까?
내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각해지는 그의 반응이 나를 더 달뜨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가슴에 시선을 못 박은 채 그대로 내 드레스를 머리 위로 올려 벗겼다.
완벽한 나신이 되었다.
그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며 내 허리며 복부를 쓸어 만졌다.
“훗…….”
나는 살짝 허리를 움직였고 그는 소리 없는 숨을 토해 냈다.
“……당신 몸이 너무 여리고 차갑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찌푸리며 낮게 소리 냈다.
“추워도 참아야 할 때였으니까요…….”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얼어붙어 있던 내 살결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북부의 살벌한 추위를 거의 맨 몸으로 견딘 대가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먼저 그를 유혹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알렉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당황해하며
나를 밀어냈다.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가운을 걸쳐야 했던 순간이 생생했다.
처량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던 기억이었다.
나는 침대 시트에 살짝 팔을 누르며 소리 냈다.
“왜,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자 그가 괴롭게 신음하듯이 대답했다.
“……예뻐서요.”
……예쁘다고?
저 남자가 나한테 예쁘다는 말을 다 하다니.
확실히 지금의 그는 나를 보거나 다루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나를 더 흥분하게 했다.
나를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것보다, 함부로 대해 주길 원하고 있었으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져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당신이 더 예뻐요, 알렉.”
“…….”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목울대가 다시 한번 크게 오르내렸다.
이내 그가 고개를 내려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로 누르며 혀로 쓸고 지나갔다.
“흣…….”
나는 시트를 쥐어뜯었다.
눈이 절로 천장을 더듬었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하아.”
그가 달콤한 한숨과 함께 내 몸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빳빳하게 비틀었다.
“흐으…….”
여태 이렇게 만져 준 적 한번 없었는데…….
지금 그는 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아.”
이제야 그도 내 몸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윽하고 뭉근한 손길이 한동안 능숙하게 이어졌다. 뼈까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손길보다 더 애타는 침음을 흘리며 내 온몸 곳곳을 아찔하게 누볐다.
“하, 알렉.”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손끝으로 꾹 눌렀다.
“하아…….”
그의 신음이 몸속 깊은 속에서부터 끌려 나온 것처럼 낮게 갈라졌다.
가슴속이 술렁일 만큼 듣기 좋은 신음이었다.
내게 닿은 그의 몸도 한껏 긴장하며 단단해졌다.
나만큼이나 그도 나를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루이제.”
그가 다시 한숨 같은 침음을 흘리며 갈급하게 내 입술을 찾았다.
혀를 맞부딪히자 그의 조급한 욕망이 느껴졌다.
진해질수록 달콤하고 농밀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싸늘했던 방 안에 뜨끈한 훈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뜨거운 그의 혀에 온몸을 녹일 듯 휘감고 달라붙었다.
그만 내 침대에 있어 준다면 그 어떤 난방 장치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가 힘겹게 숨을 토해 내며 나에게 붙어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나는 혼몽한 눈으로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몸이 너무 연약해서 녹아 버릴 것 같습니다.”
나도 그만큼이나 가쁘게 숨소리를 뱉었다.
“……아뇨. 그러려면 한참 멀었어요.”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은 먼저 아프게 한 다음에 해 줘요.”
“…….”
그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말했다.
“당신 몸이 부서져라 해도 됩니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79 화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가슴이 자꾸만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내 몸이 부서져라 한다는 말에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바라마지 않던 말이었다.
“……난 보기보다 튼튼해서, 그렇게 하려면 밤을 새워야 할 거예요.”
“…….”
그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더니 턱이 단단해졌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눈빛이 한번 흔들리더니 이내 힘겨운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 허벅지 사이에서 무릎으로 선 채 바지를 풀었다.
나는 마른침을 꾹 삼켰다.
어딘가 가느스름하고 진지한 그의 눈빛과 좁혀진 미간이 달콤하고 색정적이었다.
이윽고 그의 옷이 힘없이 풀어지자 내 눈길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
순간적으로 나는 놀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뻣뻣하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아, 알렉.”
저게, 원래 저랬나?
그의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2 년 전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본 건 아니었다.
그는 첫날밤부터 자신의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굳이 제대로 보여 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싫다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더 요구하면 내 마음과 자존 심에 생채기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훤히 드러낸 그는 전처럼 숨기고 싶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내 눈길에 입술을 꽉 깨물며 더욱 곤두설 뿐이었다.
그와 내 사이의 공기가 팽팽했다.
“아, 알렉.”
“…….”
나는 시트를 쥐며 겨우 소리 냈다.
그가 몸을 숙였다.
“나 오늘 윌스브룩 성을 처음 보고 정말 감탄하고 압도되었는데…… 흣.”
“…….”
“그, 그런데 당신 것이 이 성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훌륭한 것 같아요.”
“……하.”
내 말에 그가 착잡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민망해하는 걸까?
그가 팔꿈치로 내 머리 옆 시트를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아랫배를 더듬기 시작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복잡한 한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숨기지 말아요.”
“…….”
저런 걸 가지면 더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렇게 내 앞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여태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해서 창피해했던 걸까?
이윽고 그의 손이 내 배 아래로 내려갔다.
“흣.”
서늘한 추위 같은 건 이미 그의 열기에 자취를 감췄다.
내 눈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경직된 듯이 흔들렸다.
“정말,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나는 지금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나는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팔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거예요.”
내 목소리가 조금 서늘했다.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잘록한 허리 밑으로 손을 넣었다.
한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약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내 몸은 가볍게 내려갔고, 그는 힘겨운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하아.”
그 압박감에 나는 그의 팔을 더 꽉 붙잡았다.
뜨겁고 묵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무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저런 걸 품으면…….
제대로 하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사람들은 첫 경험이 아픈 기억밖에 없다고 했지만, 나는 차라리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궁금해하기만 했던 경험을 이제야 겪어 보기 직전이었다.
이윽고 그가 내 눈을 보지 않으며 괴롭게 신음하듯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그의 복근에 강한 힘이 들어간 듯 근육들이 하나가 될 것처럼 바짝 웅크렸다.
“흐읏.”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턱을 들었다.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여유롭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를 악물어야 할 줄이야.
그래서인지 만족감이 더 크게 차올랐다.
그가 내 턱을 쥐더니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루이제.”
“흐으, 알렉…….”
드디어, 우리가.
나는 조금 감동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감격스럽고 경이로웠다.
그런데 그가 허리에 힘을 주며 묵직하게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
이미 다 들어온 거 아니-.
“아!”
“……하아.”
그의 달콤한 신음이 내 귓가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끝이 아닌 듯, 그는 내 안색을 살폈다.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뜨겁고 촉촉한 입술로 내 입술을 삼켰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아직 제대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벌써부터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느껴지는 움직임에 경이로운 탄성이 나왔다.
“……아!”
그 이후에 그는 정말로 내 몸을 부술 것처럼 나를 다뤘다.
“아, 아아!”

* * *

나는 눈을 뜨고도 한참을 멍하니 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밖은 완연한 낮인 듯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방 화로에는 누가 언제 피운 건지 숯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내 몸에는 두꺼운 잠옷까지 입혀져
있었다.
“하아…….”
알렉이 다 해 주고 나간 건가?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넓고 육중한 침대에서 대자로 팔을 뻗고 멍하니 천장만 보았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그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경험이었다.
그는 수십 년 만에 터진 봇물처럼 너무도 건강한 데다가 힘이 좋았고, 나는 아직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침대가 흔들리며 끼익끼익 연거푸 돌바닥을 긁는 소리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의 힘에 압도되어 몇 번이나 영혼이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게 이런 거였구나…….’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목이 아팠다.
온몸이 타오를 것 같았던 그 감각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생전 처음 겪어 본 정사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충격적이면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나를 더 만족스럽게 한 건 내 안의 자극보다 그의 반응이었다.
그동안 그와의 정사를 갈망했던 나보다 오히려 그가 훨씬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
긴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던 그의 목젖.
땀이 송골송골하게 맺혀 더 탐스러워진 그의 근사한 근육들.
오로지 나를 향해 온 힘을 쏟아붓던 열렬한 움직임.
한 팔로 내 몸을 종잇장처럼 뒤집던 장악력.
나와 하는 내내 미쳐 버리려고 하던 그의 정신없는 흥분…….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뺨을 꾹 눌렀다.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믿기지 않을 만큼 환상적인 꿈을 꾼 기분이었다.
나도 좋았지만 남편이 그토록 환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더 꿈같이 환상적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진정한 첫 경험의 여운을 느끼던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
허리를 세우자마자 절로 아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한 운동이라도 하고 난 다음 날처럼 삭신이 쑤셨다.
막상 그와 할 때는 더 격렬하기를 원했는데 그 후폭풍이 이 정도였다니.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린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렇게 한 걸음 내딛던 순간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무릎이 꺾이며 넘어졌다.
“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다니.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나는 이 처참한 상태에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서는 것조차 힘들어도 꽤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온몸에 힘을 풀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시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그의 흔적이 내 온몸에 근육통으로 남아 있었다.
조금 뿌듯했다.
결혼 생활 3 년을 독수공방하면서 참고 살았는데.
그동안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모두 온데간데없이 씻겨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보다 더 몸이 아프고 쑤셔도 행복할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아련하게 통증을 느끼다가 이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겨우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입고 있던 나이트가운을 머리 위로 벗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내 몸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거울 속 전신을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한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아.”
내 몸 맞니?
조금 더 거울에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키스 마크인지 옅은 멍인지 모를 흔적들이 붉게 피어 있었다.
지난밤 그가 얼마나 나를 탐했는지 알 수 있어 뿌듯했다.
‘이 남자 엄청 좋았나 보네…….’
괜히 보기 민망해서 나는 불그스름해진 얼굴을 슬그머니 내리며 다시 옷을 입었다.
처음 겪는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움찔거릴 것 같아 꾹 눌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0 화


* * *

“일어나셨네요, 마님.”
나는 힘겹게 1 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마침 제인이 나를 발견하며 반색했다.
어차피 아침 시간도 지났겠다 설렁줄로 사용인들을 부르는 대신 직접 내려왔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사용인들이 올 때까지 참을 수 없었다.
“응. 잘 잤니?”
나는 최대한 작은 보폭으로 걸으며 제인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차라리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회복이 빠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 어정쩡해 보일 것 같긴 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마님. 아직은 조금 낯설지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간밤에 잘 잤습니다.”
제인이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예. 여긴 하인들이 쓰는 방도 넓고 좋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시장하신가요? 식사를 바로 준비할까요?”
“그래 줄래? 고마워.”
“아닙니다, 마님. 그럼 어디로 식사를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응접실에 있을게.”
다시 내 방으로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7 층 계단을 내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알겠습니다, 마님.”
제인은 친절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짧게 내 몸을 훑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스러우면서도 의아한 눈치였다.
역시나 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마님,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니야. 그냥 어제오늘 계단을 너무 많이 오르내려서 그런 것 같아.”
“저런. 그럴 만해요. 성이 워낙 커야죠. 그럼 식후에 찜질이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하,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어. 안 그래도 삭신이 다 쑤시거든.”
“알겠습니다.”
이내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는 옅은 숨을 내쉬며 응접실로 향했다.
찜질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성에 사는 거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멀쩡한 몸으로 돌아다녀도 지칠 것 같은데, 지금처럼 뻐근한 상태로는 식사하러 내려오는 것도 곤욕이었다.
‘저녁은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응접실의 편한 소파에 앉아 있으니 잠시 후에 제인이 다시 나타났다.
트롤리에는 갖가지 요리가 은으로 된 뚜껑으로 덮여 있었고, 절로 식욕이 돋는 냄새가 풍겼다.
이윽고 테이블에 요리를 차린 제인이 조금 물러나며 공손하게 섰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마님.”
“고마워. 잘 먹을게.”
군침이 돈 내가 식기를 들었다. 조금 먹다가 갑자기 생각난 척 물었다.
“그런데 알렉은 어디 있어?”
“아, 주인님은 성에 안 계시는 것 같아요. 오늘은 아직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거든요. 아니, 아까
제임스가 확인했을 때 방에는 안 계셨는데 이 성 안 어딘가에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제인이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을 줄였다.
나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뜨끈한 수프를 떠먹으며 대답했다.
“그럼 아마 어디 나간 모양이야. 볼 일이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식사는 하고 가셨어야 했는데…….”
“…….”
밥도 안 먹고 어디 간 걸까?
조금 걱정되었지만, 그가 어린 애도 아니고 어련히 잘 다녀오겠거니 생각했다.
심하게 허기가 진 나머지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식사에 집중했다.
먹는 것마다 다 맛있어서 몸의 통증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마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내가 거의 다 먹었을 때쯤이었다.
제인이 줄곧 할 말이 있었는지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곳은 누가 미리 청소를 한 건가요? 아무리 봐도 청소할 곳이 없어서요. 가구들도 다 잘 관리된
것 같고요.”
“아…… 그랬구나.”
그렇지 않아도 나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 성은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성치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깨끗했다.
그동안 알렉이 혼자 여기 머물면서 준비한 걸까?
그에 대해 그가 뭐라 한 말은 없었지만, 묘한 느낌에 어딘가 불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아직 그에게 뭔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용인들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신기하더라.”
“역시 그렇죠? 주인님께서 이미 먼저 다른 사람들을 써서 성을 수리한 걸까요?”
“그런가? 이따 오면 물어봐야겠어. 뭐 아직 말 안 한 게 있겠지.”
“네.”
나는 그냥 제인에게 살포시 웃어 주었다. 그러자 제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시 내 방으로 올라가기 전 나는 제인에게 부탁했다.
“알렉이 성에 오면 알려 줄래?”
“예, 알겠습니다. 마님.”
“응.”
이윽고 몸을 돌린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역시나 내가 느낀 것처럼 사용인들도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
이 성 자체가 동화 속 같았다.
이전에 알렉이 북부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 안을 단장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완벽한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알렉은 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걸까.
‘뭐 그래도 힘든 일이 줄어서 좋은걸……?’
카나크에 가 청소를 해 줄 북부인들을 고용해 보려고 했는데, 당장 급한 일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나저나 아직 성 구경도 다 못 했네.’
죽기 전에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한 칸 오를 때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 탓에 간밤의 일이 다시 떠올라 괜히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하아…….”
윌스브룩 성 근처의 암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알렉은 그 위에 누워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해서 찬바람을 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북부의 날씨는 그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을 만큼 너무도 추웠다.
얇은 옷차림으로 이런 곳에 홀로 누워 있는 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죽으려고 환장한 짓이겠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이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아아아!’
‘읏, 흐읏…….’
간밤의 장면들이 보란 듯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그는 그런 경험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자를 안거나 입술을 맞춰 본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딱히 그런 접촉을 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보고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왜 그는 미쳐 버린 걸까?
안고 싶을 만큼 루이제가 매혹적이라?
그는 견딜 수 없이 그녀를 더 느끼고 알고 싶었다.
영원히 그만둘 수 없는 감각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의 몸에 푹 빠져 버렸다.
‘이런 미친놈…….’
그녀가 지쳐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루이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알렉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방을 따뜻하게 데우고, 옷을 입혀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밀려오는 현실 감각에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이 스르륵 눈밭으로 떨어졌다.
시스템 창은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루이제의 애정도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상승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레벨이 오르고 새로 개방된 스킬들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21 세기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신을 죽인 구원자’님께 드디어 최종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
처음에는 왜 여기가 그의 최종 보상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하.”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알렉은 몸을 일으켰다.
체력 단련이라도 해야 이 가슴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련을 끝내고 다시 암산의 눈밭에 누워 있자니 또다시 루이제가 생각났다.
뭘 하는지 잠깐만 볼까……?
그는 살짝 기드온의 눈을 확인했다.
그런데 눈앞에 드러난 장면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제가…… 왜 저러지?’
그녀가 이를 악물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아!”
불쑥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루이제가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알렉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루이제는 다시 필사적으로 난간을 붙잡고 무겁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알렉은 서서히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1 화

또다시 자책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인 그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뜨겁게 치미는 깨달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루이제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와 너무 격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 연약한 몸을 새벽까지 물고 핥았으니 근육통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지.
‘대체 얼마나 한 거야.’
스스로에게 욕설을 읊조린 그는 이내 눈 쌓인 암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간밤에 그녀는 힘들어하긴 해도 더 원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루이제는 첨탑을 오를 때 30 분만 걸어도 힘들어했었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한 몸이었다.
이윽고 그는 순식간에 성의 입구에 다다랐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 주인님.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
“루이제는 어디에 있지?”
조금 전 심란해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알렉이 평소의 서늘한 태도로 물었다.
“아, 마님은 아마 방에 계실 거예요. 마침 제가 찜질을 해 드리기로 했거든요.”
“……그렇군.”
시선을 내려다보니 제인이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과 수건을 들고 있었다.
아까 어딜 올라가나 했더니 자신의 방으로 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낯뜨거운 이유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어 그 이후에는 기드온의 눈을 확인하지 않았다.
알렉은 제인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거 나한테 줘도 될 것 같은데.”
“네?”
“찜질은 그냥 수건을 따뜻하게 해서 주무르면 되는 건가?”
“……아, 네. 주인님께서 직접 하시려고요?”
“…….”
알렉은 잠시 제인을 보다가 아주 살짝 끄덕였다.
제인은 그런 그를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얼른 그에게 찜질 도구들을 내밀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인님. 마님께서 이렇게 큰 성에서의 생활은 처음이시라 많이 아픈 것
같으셔서요.”
“……생각해 보니 그렇군.”
그는 조금 겸연쩍은 기분으로 제인이 건네는 것들을 받아 들었다.
제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워낙 가녀린 분이시잖아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무척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방을 옮기는 것도 좋겠네요.”
“물어보도록 하지.”
“네. 그럼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고맙다.”
“예, 주인님.”
그제야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는 어딘가로 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본 알렉은 신음 같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스킬을 써 단숨에 루이제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신속 스킬의 여파로 그의 옷자락이 펄럭이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뜨거운 물은 여전히 김을 뿜어내며 잔잔한 파동만 일으켰다.
똑똑.
이윽고 그가 문을 두드리자 금세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이니? 들어와.”
“…….”
맨정신으로 루이제를 다시 보게 되다니.
그는 조금 면목 없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꽉 깨물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며 애써 덤덤한 어조로 소리 냈다.
“제인 아닙니다.”
“……어? 알렉?”
“…….”
알렉은 몸을 돌려 문을 닫고는 루이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루이제는 그와 그가 가져온 것을 조금 의아하게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근처 산에 있었습니다.”
“……산이요?”
“예.”
“아…… 그러고도 산에 갈 힘이 또 있었나요?”
“…….”
만약 지금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조금도 남기지 않고 뿜어 버리지 않았을까?
힘겹게 제정신을 유지한 그는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루이제는 침대에 앉아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은 콘솔 위에 뜨거운 김이 나는 그릇과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의자 하나를 가져와 루이제 근처에 앉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제인을 만났습니다. 마침 당신한테 온다고 해서 제가 대신 받아 왔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럼 당신이 대신 내 다리 주물러 주려고요?”
“제인보다는 제 손힘이 더 도움 될 것 같습니다만, 제가 해 드려도 됩니까?”
“…….”
그는 아직 루이제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가느다란 다리를 들어 그의 무릎에 얹었다.
이내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그럼 부탁할게요.”
루이제는 두 손으로 침대를 짚더니 등을 조금 뒤로 기울이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회복 스킬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만져야 했다.
그러나 한 번에 그녀를 낫게 한다면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니 매일 조금씩 치유할 생각이었다.
시선을 내린 그는 조심스럽게 루이제의 발목을 움켜쥐고는 무릎 아래로 내려온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한 손에 다 움켜쥐고도 남을 희고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겨우 종아리인데 그의 눈동자가 또 처참히 흔들렸다.
하얀 피부에 그의 흔적이 남은 것 같아 내심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길을 돌렸다.
“……너무 아프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마음이 무거웠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뇨. 난 괜찮아요. 결혼 3 년 만에 이렇게 삭신이 쑤실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걸요.”
“…….”
알렉의 눈동자가 잠시 멈칫했다.
루이제는 우아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심장에 연이어 돌을 던졌다.
“하마터면 평생 수절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수건의 물기를 짰다.
루이제의 목소리에는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간밤의 일이 루이제도 만족스러웠던 건 분명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양심에 가책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이건 서로 좋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에는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이윽고 그는 수건을 들어 물에 적셨다.
그런데 그새 조금 식었는지 미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레벨이 오르면서 새로 개방된 스킬이 몇 개 있었다.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 열화와 같은 불길]


[열을 내거나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식한 적들을 단숨에 태워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
사용자가 강도와 종류를 제어해야 합니다.]
[마나가 소모됩니다.]

“…….”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이라니, 스킬 명을 생각하니 그에게 왜 이러나 싶어 속에서 뭔가 치미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 생긴 스킬을 써서 수건을 더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스킬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유용하긴 했다.
그가 적당히 뜨거운 온도의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루이제의 다리를 감싼 순간이었다.
“흣.”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루이제가 옅은 신음을 내쉬었다.
그는 그제야 루이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뜨거우십니까?”
“아, 아뇨. 그냥 놀라서요. 생각보다 더 뜨끈해서 좋네요. 참아 볼게요.”
“아프거나 뜨거우면 말씀하십시오.”
“알겠어요.”
그제야 그는 다시 루이제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두 손으로 수건을 감싸며 그녀의 종아리 근육을 살짝 주물렀다.
그러자 루이제가 온몸을 굳히며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하.”
그녀의 숨결에 알렉의 눈동자도 처참하게 흔들렸다.
어젯밤의 열띤 숨결과 하나로 엉킨 살결이 또 향연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애써 이를 짓씹으며 다시 루이제의 부드러운 다리를 주물렀다.
“……당신이 나한테 이런 것도 다 해 주고 신기하네요.”
“…….”
“이제 날 만지는 게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봐요.”
루이제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덩달아 심장이 떨리는 것 같았다.
손에 감기는 루이제의 다리는 그녀의 가슴만큼이나 섬약했다.
알렉이 힘겹게 회복 스킬을 쓰기 시작하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따뜻하고 좋네요.”
“다행입니다.”
그는 조금 더 가볍게 마사지를 해 주다가 루이제의 오른쪽 다리도 똑같이 찜질을 했다.
계속해서 조금씩 회복 스킬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쪽 다리에는 아까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생긴 듯 멍까지 크게 들어 있었다.
역시 그녀를 너무 아프게 했다는 자책만 짙어졌다.
“죄송합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아니에요. 당신도 태어나서 그렇게 해 본 건 처음일 거 아니에요.”
“…….”
루이제는 여전히 상냥하게 소리 냈다.
“그래도 좋았잖아요. 당신은 아니었나요?”
“…….”
수건을 다시 물에 적시던 그의 손이 멎었다.
루이제의 보석 같은 눈빛이 그에게 끊임없이 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좋았냐니.
그는 좋다 못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들어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가 한껏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쓸며 말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2 화

“……후훗.”
루이제가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다른 부부들처럼 매일 할 수 있는 건가요?”
“예?”
갑자기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말에 알렉이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받아들이는 알렉의 마음은 평소답지 않았다.
루이제의 입술이 자꾸만 그의 시선을 끌었고, 그녀와 한 호흡으로 엉켰던 장면이 떠올랐다.
알렉은 루이제의 얼굴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이를 꽉 깨문 듯이 대답했다.
“부부라고 매일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매일 하는 게 싫은가 보네요.”
조금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와 약간 밉지 않게 흘겨보는 듯한 눈빛.
알렉은 그냥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건 아닙니다.”
“알겠어요.”
루이제가 만족스러운 듯 다시 후훗 웃었다.
남은 다리도 마저 찜질을 마친 그가 그녀의 다리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발이 바닥에 끝까지 닿고 나서야 그녀의 발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루이제가 자신의 드레스를 더 걷어 올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게 했다.
“……!”
알렉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루이제는 별일 아닌 듯 말했다.
“제인 대신 당신이 와 줘서 새삼 다행이네요. 제인이 이 몰골을 봤으면 얼마나 놀랐겠어요.”
“…….”
“아, 물론 나만큼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드디어 우리 주인님들이 성공을 했다고 좋아하면서요.”
루이제는 웃는 듯이 말했지만, 알렉은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 울긋불긋한 흔적이 피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또 묘한 기분이 그의 가슴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충족감이었다.
루이제를 저렇게까지 만든 남자가 다름 아닌 바로 그라니…….
생소한 기분에 조금 옅은 숨을 내쉰 알렉은 턱을 조금 꽉 다물었다.
의자를 더 끌어당겨 루이제와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무릎과 무릎이 닿으며 두 사람의 다리가 포개졌다.
뜨끈한 수건으로 그녀의 허벅지도 감싸 주었다.
루이제가 그에게 거리낌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어젯밤 루이제가 거의 전라로 그를 맞이한 것도 그렇고, 지금처럼 거리낌 없이 드레스를 들어 올려 보여
주는 것도 남편의 앞이니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루이제가 낯선 여자인 그로서는 그녀의 과감한 행동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알렉은 이 낯선 기분을 견뎌 내듯 루이제의 다리를 더욱 정성껏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어쩐지 루이제의 몸이 점점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녀의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숨결이 그의 눈앞을 흐리는 것 같아 알렉은 더욱 침착하게 손길을 이어 갔다.
수건을 댄 상태였지만 마른침이 넘어가고, 그의 숨소리도 귓가에 점점 더 선명해졌다.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다.
“알렉.”
“예?”
갑자기 들려온 루이제의 목소리가 꼭 귓가에 친 천둥 같았다.
루이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려던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당신이 주물러 주니까 정말로 한결 몸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
벌써부터 통증이 줄어든 것을 느낀 걸까?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의 회복 스킬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오늘 구경해 보니까 성 안이 정말 근사하고 좋은 것 같더라고요.”
“…….”
“언제 다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마른침을 한번 삼킨 알렉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어쩌면 그녀가 이 성을 놓치는 곳 없이 다 둘러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시 루이제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당분간은 구경보다는 며칠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 안을 다 돌아본 건가요?”
“예.”
“대단하네요. 힘들었겠어요.”
“…….”
“그런데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도 이렇게 내부가 훌륭했나요?”
“…….”
알렉의 손길이 다시 뚝 멎었다.
역시나 루이제가 이 윌스브룩 성의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의심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
“아니면 혼자 여기서 며칠 지냈을 때 미리 청소를 한 건가요?”
“하긴 했습니다만…….”
알렉은 계속해서 루이제의 살결을 안마하듯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네? 누가요? 당신 혼자서요?”
“…….”
“아니면 여기 북부의 다른 사람들을 쓰기라도 한 건가요?”
“…….”
그냥 그렇다고 말할까?
사실 별것 아닌 거짓말이었다.
혼자서 이 성을 청소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들에 대해 또 거짓을 말해야 할 순간이 계속해서 올
것 같았다.
데려오라고 하기라도 하면 일이 커질 텐데, 그렇게까지 피곤한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가구들도 낡은 곳이 없어서 새로 사다 놓은 줄 알았어요. 원래 여기 있었던 가구들이었나요?”
“…….”
루이제의 물음은 차분했다.
그에게 따지거나 의심하는 기색 하나 없이 순수하게 의문하고 있었다.
결국 알렉은 루이제에게 해 주던 마사지를 마무리하며 그녀의 드레스를 다시 발목까지 내려 주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 줄 때가 온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루이제의 발에 신발을 신기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신발은 왜요?”
그는 말없이 방 한쪽에 걸려 있는 털 망토까지 가져왔다.
결국 루이제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디 갈 거예요?”
“예. 잠시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알렉은 루이제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가죽끈까지 꽉 묶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제가 아까 갔던 곳입니다.”
“네?”
“별로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걸어갈 수는 없는 곳이니 잠깐 안아도 되겠습니까?”
“…….”
루이제는 아무런 말 없이 그냥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그 눈을 마주 본 알렉은 그냥 루이제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들어 올려진 루이제가 작게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를 안았다.
“아까 갔던 곳을 대체 어떻게 가길래…….”
그는 그대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북부 특유의 싸늘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아, 알렉? 갑자기 창문을 왜 열어요?”
“꽉 잡으셔야 합니다, 루이제.”
“네? 대체 이게 무슨- 꺅!”
루이제의 머리카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휘날렸다.
신속 스킬은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발을 디딜 곳이 있다면 공중이라도 지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눈 덮인 암산까지는 첨탑 몇 개와 산 몇 개를 지나 올라가면 금방 갈 수 있었다.
그는 루이제를 더 꽉 안았고, 그녀는 당황한 만큼 그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빛이 번쩍 지나가는 것처럼 몇 번 발돋움을 하자 금세 높은 곳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착지하자 주위에 쌓인 눈들이 고운 모래처럼 피어 올랐다.
사방에는 아무것도 없이 하얗기만 했다.
루이제의 은빛 머리카락은 눈보다 더 부드럽게 부유하다가 가라앉았다.
“…….”
그제야 알렉은 루이제를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하.”
루이제가 짧게 숨을 토해 내며 비틀거렸다.
그의 팔을 부여잡더니 어안이 벙벙한 듯 속눈썹을 깜박였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의 품을 벗어나 아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뽀드득, 뽀득.
다급하게 눈을 밟는 소리가 꼭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 같았다.
문득 루이제는 무언가 발견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저기 우리 성이잖아요!”
“…….”
알렉은 조용히 루이제의 뒤로 다가갔다.
절벽 아래로 윌스브룩 성의 뒤쪽이 보였다.
“바,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어떻게…….”
누가 봐도 단숨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루이제는 휙 몸을 돌려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주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불안감도 서려 있었다.
알렉은 그 눈을 흔들림 없이 똑바로 응시하며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더 다가가면 위험하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렉의 태연한 반응에 루이제는 입이 벌어졌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예요……?”
루이제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있었던 일을 다름 아닌 그가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당신이 한 거냐고요…….”
루이제가 재차 멍하니 묻는 말에 알렉은 조금 시선을 내렸다.
이내 다시 루이제를 보며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맙소사…….”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3 화

루이제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라 말할 듯 말 듯 하는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냥 입술을 다물었다.
“그럼 성은…….”
그녀가 힘겹게 운을 떼자 알렉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비슷한 일로 저렇게 됐습니다. 원래는 좀 지저분했습니다만…….”
“……세상에.”
“…….”
루이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놀란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시간을 갖는 것 같았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루이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한테 강해졌다고 말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
“우리가 처음으로 승마하러 갔던 날. 우릴 쫓아오던 사람들을 당신이 쓰러뜨렸을 때…….”
“…….”
“그때 당신이 그냥 강해지기만 한 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네요.”
“…….”
루이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울 만큼 놀란 것 같았다.
물론 알렉도 그날 루이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거라고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딱히 말이 없어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데, 역시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에서 여기까지 날아오고, 수백 년이나 버려져
있던 성이 새것 같아진다는 게…….”
“…….”
말을 마친 루이제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다가왔다.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셔츠를 들어 올렸다.
옆구리에 금세 찬 공기가 닿았다.
캐스다인에게 찔린 상처가 있었던 곳이었다.
놀란 루이제가 숨을 흡 들이켜더니 이내 다른 쪽 옆구리까지 확인해 보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어요. 간밤에는 어둡기도 했고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
아, 그러고 보니.
알렉은 조금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에는 상처가 사라진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루이제는 얼핏 본 탓에 긴가민가해 하다가 이제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당신 혹시 마법사 같은 건가요?”
“예?”
“갑자기 그런 힘이 생기기라도 한 거예요?”
“…….”
마법사라는 말에 알렉은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지만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맙소사…….”
“…….”
루이제의 눈길에 알렉은 조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힘이고 능력이었지만,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어서 그런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이 세계에 마법사라니…….”
루이제가 멍하니 그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알렉은 조금 분명한 눈으로 루이제를 마주 보았다.
“뭐 엄청 대단한 건 아닙니다. 어쨌든 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제가 가진 능력 덕분에
낡고 더럽혀진 것들이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
루이제는 말없이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비현실적인 능력을 조금 전 직접 겪어 본 그녀로서는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루이제는 쓰러질 듯이 조금 어지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겨우 정신을 차린 것처럼 말했다.
“……아, 알겠어요. 당신이 그렇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네요.”
“…….”
“그런데 정말로 이 세상에 마법사 같은 게 있다니 놀랐어요. 그것도 알렉 당신이, 내 남편이…….”
“…….”
루이제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직접 봤으면서도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의심하지 않는 걸까?
문득 알렉은 그녀를 조금 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시스템의 설계 때문에 그녀가 의심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루이제.”
“네?”
“혹시 제가 많이 변해 버려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십니까?”
“…….”
루이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알렉의 새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루이제가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네요.”
“…….”
“다른 사람 같아요. 당신이 나한테 배려가 없어지고 사악하게 변했다면 더 다른 사람 같았겠죠.”
“…….”
알렉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이제야 루이제가 여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쁜 사람처럼 변해서 나한테나 다른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다면, 난 당신이 더 이상 내가 아는 알렉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
“그런데 지금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아는 알렉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당신이 내
남편인 건 변하지 않아요. 맞죠? 여전히 당신인 거…….”
“…….”
루이제가 확실한 대답을 원하듯 조금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가 루이제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한 그녀가 의심할 일이 없는 걸까?
알렉은 시선을 살짝 내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
“당신을 속인 적도 있죠. 숨기기도 했고요.”
“…….”
“저는 제가 의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마치며 다시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루이제도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예?”
“당신이 달라져서 내가 밀어낼까 봐 걱정했나요?”
“…….”
“아니면…… 여전히 나랑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요?”
“…….”
이게 뭐지.
당황한 듯 알렉의 목울대가 불거졌다.
루이제는 조금 서글프면서도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당신 의심 안 해요.”
“…….”
“겨우 당신이 힘을 숨기고 속인 걸로 당신을 탓하지도 않을 거예요. 이런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할 수 있겠어요.”
“…….”
“오히려 당신이 그동안 숨기느라 힘들었겠죠.”
“…….”
그제야 알렉은 왜 루이제가 그를 의심하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엄청난 믿음이 느껴졌다.
그때, 루이제가 그의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그러니까 난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그냥 지금처럼 당신이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다른 건 상관없어요.”
“…….”
그리고 알렉시스를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까지 느껴졌다.
원래라면 진짜 알렉시스가 들었어야 하는 말들.
루이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까지는 할 생각 없었지만,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는걸요…….”
“…….”
알렉은 심장이 조금 욱신거리며 뻐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 루이제에게는 그가 그녀의 곁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다.
만약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면, 루이제는 원작에서 그를 따라 죽었던 것처럼 공허해질 것이다.
“…….”
알렉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루이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만큼, 진짜 알렉시스인 척 루이제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루이제는 그제야 안심한 듯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고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진짜 알렉시스인 척을 하며 루이제를 안았지만.
어쩐지 그의 가슴은 조금 공허했다.

* * *

“전 브렌트 공작 부부는 윌스브룩 성으로 잘 출발했는지 모르겠구나.”


올리비아는 푹신한 털 망토에 둘러싸이다시피 한 차림으로 따끈한 차를 마셨다.
황후의 주위에는 스칼렛과 로즈 등 내로라하는 권세가의 귀부인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줄리아가 영영 감옥에 갇힌 지금, 귀부인들은 줄리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후와 사담을 나눌 수 있었다.
귀부인들의 낯빛이 사뭇 밝았다.
대신 올리비아의 심기를 생각해 줄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줄리아가 황제의 비위를 거슬러 황후에게까지 불똥이 튈 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북부를 맡긴 사람에게 독을 먹이면 대체 어쩌자는 거지.’


‘…….’
‘대신 말해 봐, 올리비아. 하워드 후작 부인에게는 내 황명이 자신의 사심보다 우스운 건가?’

황제가 황후에게 싸늘하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4 화

올리비아는 살면서 그토록 납작 엎드린 적이 없었다.

‘줄리아에게 책임을 물어 단두대에 올리겠습니다. 루이제가 무사하여 천만다행입니다, 폐하.’

황제의 심기가 불편한 것만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그의 기분이 나빠지면 그녀가 황제를 자신이 유리한 대로 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줄리아를 처형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전 카슨이 갇혔던 감옥이었다.
한 번 갇히면 음식을 먹어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기이한 감옥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버려도 일주일을 넘기는 사람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직접 가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기분 나쁘고 불쾌 한 한기에 치가 다 떨렸다.
줄리아도 그곳에서 카슨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끔찍한 수맥이라도 흐르는 거야, 뭐야.’
그 기이한 감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소문이 난다고 해서 딱히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황궁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가는 황제가 불쾌해할 게 분명했고, 그런 일은 막고 싶었다.
어차피 줄리아는 죽으면 그만인 목숨.
올리비아는 줄리아보다 황제의 반응이 더 신경에 거슬렸다.
어차피 죽으라고 루이제 부부를 북부로 보낸 게 아니었나?
그곳에서 알아서 살아남든 말든 신경 쓸 것도 아니면서, 왜 루이제를 죽이려 했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올리비아는 자신의 심증만 더 굳혔다.
악센은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굽히고 숙이도록 길들이려는 게 분명했다.
이미 온 제국이 황제를 향해 엎드리고 있는데, 루이제와 알렉시스는 늘 황제가 먼저 고꾸라뜨리던
사람들이었다.
‘줄리아가 성공했었어야 했는데.’
올리비아는 테이블 아래로 손톱이 살을 짓누르도록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루이제 부부에 대한 황제의 집착은 분명 그녀에게 해가 될 것이다.
귀부인들이 계속해서 사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눈 쌓인 산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요?”
“지도도 제대로 없을 텐데 길을 헤매고 빙빙 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추운 날씨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요.”
“폐하의 분부대로 무사히 성을 찾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벌써 출발한 지 이틀도 넘게 지났죠?”
“듣자 하니 마차 다섯 대에 사용인들과 짐만 신고 간 모양이에요. 용병이라도 고용해야 했던 게
아닐까요?”
“그 말이 제 말이랍니다. 사용인들을 다시 고용할 돈으로 당연히 기사나 용병들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크게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번에 가셨던 분들도 호위를 대동하긴 했잖아요?”
“결국 그냥 다시 돌아와서 명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겠죠. 도착하면 우리를 성으로 초대할 거라고 하더니
꼴이 우스워지겠네요.”
후후훗.
귀부인들이 낮게 웃었다.
황후의 앞에서 대놓고 다른 귀부인의 험담을 하다니, 그녀를 줄리아 대신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을 피하려고 병약하고 자애로운 흉내를 냈더니 이제는 이런 별것도 아닌 귀부인들까지 황후를
업신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줄리아가 사교계를 제대로 휘어잡아 주긴 했는데…….’
줄리아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두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황제에게 돌아와 목숨을 구걸하면,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른 거래를 제안하지 않을까?
그 거래라는 것이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미 황제의 관심을 잃어버린 황후의 자리를 위협받을 만큼.
이윽고 올리비아는 어지러운 듯 머리를 잡으며 일어섰다.
놀란 귀부인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폐, 폐하!”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픈 것 같네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그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귀부인들이 양쪽에서 황후를 부축했다.
힘없이 여인들에게 의지하며 황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만약 이번에도 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면.
분명히 황제는 또 다른 위기에 그들을 빠뜨릴 것이다.
‘황제가 원하는 걸 쥐여 줄 수는 없지.’
올리비아는 황제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장난감을 길들이기 전에 반드시 부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 * *

“……세상에. 이 성은 지하까지 너무 근사하네요.”


루이제는 알렉에게 안긴 채 성을 구경하다가 감탄했다.
성의 지하는 마치 성전처럼 더욱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제 보니 윌스브룩 성으로 이어진 길에 깔린 대리석으로 전체를 장식했다.
이곳에 수백 년간 흡혈귀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으며 알렉은 돌아섰다.
설산에 다녀온 이후에 알렉은 루이제가 아직 가 보지 못한 성 안의 곳곳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물론 지금 루이제는 걷기 힘든 상태였으니 줄곧 그가 안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 나 계속 안고 있는 거 안 무거워요?”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은 채 루이제가 물었다.
알렉은 조금 더 든든하게 고쳐 안으며 대답했다.
“무겁다고 안 안을 것도 아닙니다.”
“…….”
그의 말에 루이제는 약간 포근하게 눈가를 접었다.
알렉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루이제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또 입술만 보일 것 같았다.
“오늘은 이만 방으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아까 찬바람까지 쐬셨으니 따뜻하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루이제가 또다시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다시 1 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어디선가 와장창,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머나!”
그레타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식기들을 모조리 떨어뜨렸다.
조금 늦게 그레타를 발견한 루이제가 말했다.
“어머, 그레타. 무슨 일이에요? 괜찮나요?”
그레타는 놀란 듯 가슴을 꾹 눌렀다가 떨어진 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의아하게도 그레타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그레타?”
루이제가 재차 묻자 그레타가 연신 가슴을 누르며 조금 다가왔다.
“두, 두 분께서 그리 친밀하신 모습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
루이제는 무슨 기분인지 알겠다는 듯 살짝 입술을 벌렸고, 알렉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타가 조금 더 감격에 찬 눈으로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못 보던 사이에 두 분의 사이가 무척 좋아지신 건가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레타. 실은 내가 걷는 걸 조금 줄이려고 하고 있어서 알렉이 도와주고 있었어요.”
“오, 그러셨군요. 못 보던 모습이라 제가 너무 놀랐나 봅니다. 두 분께서 가깝게 지내시기를 저희들이
얼마나 바랐었는지…….”
“…….”
급기야 그레타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알렉은 점점 더 할 말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레타는 그가 더 머쓱해지기 전에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지요.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레타.”
루이제가 눈웃음을 지어 주자 그레타는 서둘러 떨어뜨린 것들을 줍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
알렉은 조금 멈칫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겨우 들어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런 감격에 찬 반응이라니.
결혼한 지 3 년이나 되었어도 원래의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얼마나 데면데면했으면 저리 놀랄까?
아무리 마나 때문에 부부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알렉시스가 루이제에게 다가가지도 않은 것 같아
그건 좀 이상했다.
문득 루이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알렉?”
“예?”
“사용인들도 우리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아, 예.”
“그레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다 뿌듯하네요. 다른 사용인들도 그렇고 그동안 우리가 잘 되길
오죽 바랐잖아요.”
“…….”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사용인들이 응원할 만큼 친밀하지 않았던 걸까?
만약 그에게 이런 부인이 생겼다면 멀리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역시 알렉시스는 뭔가
이상했다.
‘정말 동성을 좋아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루이제에게는 완벽한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을 했던 걸까?
어쨌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흐음.
그런 의아한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올라간 그는 루이제의 방문을 열었다.
계속 화로를 피워 놓아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방 안에 그녀를 눕혀 주었다.
루이제의 등이 살포시 침대에 닿으며 머리까지 내려놓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보랏빛 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이며 그를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알렉은 차마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한 번 삼켰다.
문득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알렉.”
혀를 달콤하게 움직이며 그의 이름, 아니 진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나 당신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5 화

* *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내 위에서 그는 나를 깔고 엎드려 누운 채 무척 공을 들이고 있었다.
내 안을 끝없이 넓히며 채우고, 나를 다 삼킬 듯 꾸준하게 핥는 키스는 하면 할수록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아…….’
이제야 정말 부부 같은 느낌이 드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를 내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 꼭 세상을 가진 것처럼 뿌듯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아침에는 진짜 쓰러질 것 같았는데 또 해도 괜찮잖아?’
살살 하면 된다고 했더니 정말 살살해서 그런 걸까.
가만히 있어도 쿡쿡 쑤시던 온몸의 근육들도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진통제를 먹었어야 했는데.
“아, 하아……!”
문득 깊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황홀감에 내가 낮은 숨을 토해 냈다.
내 상태 때문인지 그는 어젯밤에 비해 부드럽고 그윽했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지만, 이런 유영을 하는 듯한 깊은 움직임도 좋았다.
이제 숨 쉬듯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이지 결혼 생활이 꿀단지에 빠진 것처럼 달콤하지 않을까?
가슴이 아련해지는 것 같았지만, 내 숨은 연거푸 벅차게 쏟아졌다.
단단한 몸은 내 몸을 다 녹일 듯이 빈틈없이 맞붙었고, 그가 반복할 때 마다 살결끼리 따라붙었다.
나에게 힘을 쓰는 만큼 바짝 끌어 안은 그의 등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특별한 몸.
‘……내 남편이 마력을 쓴다니.’
아주 조금 그런 의심을 하긴 했지만, 설마 했다.
이곳은 마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 알렉 말고도 다른 마법사들이 더 있는 게 아닐까?
나 또한 흔치 않은 비밀을 품고 이 세계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어마어마했다.
“아! 흣…….”
그가 살짝 상체를 세우자 달라진 각도에 내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괜찮습니까, 루이제?”
조금 찌푸리며 물은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입술을 손으로 쓸었다.
다른 손은 내 몸을 말랑하게 쥐고 어루만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죠?”
“……네?”
나는 가물거리는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눈매는 깊었고, 더없이 진지하게 가늘어져 있었다.
달빛을 받아 그늘이 진 몸은 볼륨이 두드러지며 평소보다 더 탐스러운 윤기가 났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힘겹게 대답했다.
“난 아직, 두 번째 밤밖에 안 해 봐서…… . 더, 더 해 봐야…… 뭐가 좋은지, 알 것 같아요…….”
“…….”
그의 눈동자가 살짝 경직된 듯이 굳었다.
나를 장악한 눈빛이 사뭇 진지해서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남편에게 이렇게까지 설렌 건 결혼식 때 그의 얼굴을 본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내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진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귓가로 따끈하고 간지러운 한숨이 느껴졌다.
“그럼 앞으로 하나씩 다르게 해 볼 테니까…….”
“…….”
“천천히 다 느껴 보십시오.”
“하…….”
얼마나 하려고…….
그의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할 만큼 하얗게 물들었다.

* * *

두 그림자가 벽에 짙게 드리워졌다.
달뜬 루이제의 숨소리가 그가 밀치는 대로 박자를 맞춰 끊어졌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황홀하게 흐트러진 얼굴, 그를 바싹 껴안은 부드러운 몸.
루이제의 모든 게 그를 현혹하고 사로잡았다.
안쪽으로 그를 환장하게 만드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정사의 끝은 또 한참이 걸렸다.
“아!”
루이제를 엎드려 눕혔다.
그러자 알렉의 상체가 루이제의 등 위로 쏟아졌다.
그는 루이제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몸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하.”
그의 손과 몸이 닿는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뇌까지 녹여 버릴 듯 부드러웠다.
“알렉.”
루이제가 전율을 견디지 못하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내려 그 손등을 입술로 누르고 혀로 핥았다.
“흐으.”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루이제가 손을 빼내려는 순간 그가 입을 조금 더 벌려 손등을 크게 물었다.
루이제의 손등은 그녀의 입술만큼이나 여리고 부드러웠다.

‘나 당신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를 자극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녀의 안을 더욱 막힘없이 뜨겁게 달궜다.


부딪치는 소리에 틈이 별로 없었다. 움직임이 떨림 같았다.
“하아.”
정수리부터 달콤한 충격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그는 루이제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딜 만지든 어떻게 하든 몸을 뒤틀며 아찔해했다.
“으으…….”
뭉근해질수록 루이제가 몸서리쳤다.
불현듯 그가 자신의 상체를 세웠다.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 하얗고 매끈한 등. 달빛처럼 이리저리 일렁이는 머리카락.
루이제의 살결이 닿을 때마다 그는 시력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루이제.”
겨우 정신을 붙잡고 밭은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에 공을 들였다.
“……!”
루이제의 비명이 고조될수록 그의 심장도 터질 듯이 뛰었다.
그녀가 멈추기 전까지는 그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회복 스킬을 조금씩 그녀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지금처럼 접촉을 할 수 있을 때 조금씩 치유해야 했다.
루이제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아파지더라도 금세 사르르 풀어지며 오로지 쾌감만 느꼈다.
그가 느끼는 아찔함도 점점 무르녹았다.
“……!”
어느 순간 그녀의 교성이 정점에 치솟았다가 뚝 멎었다.
휘둘리던 몸까지 녹아내리는 것처럼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루이제.”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루이제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모든 힘이 풀려 버린 듯했다.
그녀의 이름이 연신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루이제.”
“하아, 하, 알렉…….”
루이제의 호흡이 격했다.
동이라도 트고 있는지 방 안이 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거 다 어디서 배웠어요.”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그리 대답한 그는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루이제를 꽉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며 뺨,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이러지 않으면 아직도 그의 가슴을 불태우는 여운을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오늘은 더 할 수 없었다.
“난 몰랐다고요.”
“……앞으로 알면 되죠.”
“당신…… 흐읏.”
루이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깊은 각도로 고개를 비틀며 루이제의 몸을 어루만졌다.
맨살끼리 닿는 느낌만으로도 머릿속이 녹아내렸다.
루이제가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으며 더 바짝 그에게 안겼다.
“알렉.”
혼몽해진 보랏빛 눈이 더듬더듬 그를 찾아 헤맸다.
그는 그 순간에도 루이제의 온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좋은 걸까?
그렇게 하고도 루이제라는 여자를 더 느껴 보고 싶었다.
부드럽게 맨살을 만지고 들끓는 갈증을 함께 풀고 싶었다.
“고마워요.”
“…….”
루이제도 벅차게 그를 감싸며 어루만졌다.
그의 가슴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췄다.
“……오늘 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서.”
“…….”
루이제는 행복한 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잠들었다.
* * *

“으……!”
나는 눈을 뜨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바깥은 이미 환한 낮이었다.
잠시 덜 깬 잠이 날아가길 기다리며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희한하게 머릿속이 맑고 몸이 가벼웠다.
음?
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또 그렇게 서로를 탐했으니 몸살에 시달릴 법도 했다.
북부에 와서 할 일이 많은데, 계속 아픈 몸을 이끌고 다닐 수는 없…….
그런데 내 다리는 평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욱신거리는 근육통 하나 없이 개운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아……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꼭 정말이지 시원한 마사지를 받고 난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별일이네.’
두 번이나 밤을 불태웠더니 그새 몸이 적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주물러 주던 손길이 어쩐지 시원하다 싶더니 특효가 있었던 것 같다.
간밤에 흘러넘쳤던 황홀함과 만족감을 생각하니 괜히 또 입꼬리가 씰룩댈 것 같아 나는 안 그런 척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겉옷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한 후에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오늘은 그랜드칼리의 영주 부인으로서 처음으로 영지를 둘러보는 중요한 날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6 화

북부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영주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 정식으로 나서기에는 시기상조였지만, 시간을 두고 접근한다고 해도 어차피 쉽게 반기지도 않을 것
같았다.
“다 끝났습니다, 마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내 어깨에 망토를 둘러 준 제인이 조금 물러나며 흐뭇하게 거울 속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살짝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끼며 거울을 응시하다가 금세 돌아섰다.
“이제 나가 볼까?”
“예, 마님. 주인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주인님…….’
알렉을 지칭하는 말이 들리자 괜히 내 얼굴이 붉어지려고 했다.
나는 장갑 낀 손으로 뺨을 한 번 눌렀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고 떨리는 걸까?
영지를 둘러볼 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건지, 함께 밤을 보내고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돼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나는 사뿐한 걸음으로 1 층에 내려갔다.
인기척이 들리자 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알렉.”
나는 애써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의 눈망울이 조금 흔들렸다.
나도 딱 같은 기분이었지만 힘겹게 그의 눈길을 응시했다.
‘세상에, 민망해라.’
남편의 얼굴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나처럼 그도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괜히 심장이 다
화끈거렸다.
어젯밤에 너무 서로를 본능적으로 대해서 그런 걸까?
결혼한 지 3 년이나 되었어도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욕망으로 가득한 번식 행위 같았던 일을
함께 치르고 나니 꽤 부끄러웠다.
나는 그만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따뜻하게 껴입은 옷에 털 망토까지 해서 그런가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루이제.”
우리가 탄 마차가 막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속눈썹을 떨며 눈을 들었다.
“네?”
그가 나를 조금 진지한 눈매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몸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아…….”
사실은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아픈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난 탓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몸이 된 것 같아 나는 두 팔로 살짝 상체를 끌어안았다.
“어, 어제보다는 훨씬 괜찮아졌어요. 그새 적응이 된 걸까요?”
“…….”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또 흔들렸지만, 금세 마음을 추스른 듯 대답했다.
“괜찮으셔서 다행입니다.”
“…….”
나는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지난 3 년 동안 그가 해 주지 못한 남편의 의무는 어제와 그저께 밤의 일로 인정해 줄 수 있었다.
3 년 치는 용서할 수 있을 만큼 그가 너무도 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려 마차의 창밖을 보았다.
나도 뭔가 그에게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딱히 좋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원한 것은 많았지만 그가 나에게 바라는 건 하나도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하얗고 거친 풍경을 보던 내가 살포시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북부인들이 우리를 영주로 인정할까요?”
“예? 아, 그건…….”
그가 살짝 턱에 손을 대며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영주는 아니더라도 그랜드칼리 사람들이 이미 지도자처럼 따르는 사람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도자?
지도자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 고민한 내가 물었다.
“혹시 카나크 쪽 설산에 사는 야인들을 말하는 건가요?”
카나크 근처에는 아무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높은 설산인 칼라니쉬 산이 있었다.
산이 아니라 산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신이 만든 장벽처럼 높고 거대했다.
심지어 얼마나 첩첩산중인지 저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설산에 정체도 다 확인되지 않은 짐승들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끔 그 짐승들이 산 아래로 내려와 잔혹하게 사람들을 해치거나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다행히 칼라니쉬 산 아래에 사는 야인들이 짐승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북부의 사정을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카나크에 갔을 때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알렉도 야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야인들의 수도 꽤 많고, 북부인들이 그들에게 의지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를 별로 반기지 않겠네요.”
반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대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북부인이어도 알아서 잘살고 있는데 갑자기 중앙에서 영주를 보냈다고 하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수도에는 기껏해야 그냥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여기 사는 야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혹시 알렉은 알고 있을까?
수백 년 전의 길이 표시된 오래된 고서까지 섭렵했을 정도이니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서 그런지 별로 선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그래요?”
“예. 본래 살인을 즐기던 사람들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꽤 오래전부터 사람 대신 짐승들을 토벌했다고
하던데요.”
“…….”
뭐?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질 만큼 무서웠다.
살인이라니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야인이어도 사람들을 지켜 준다고 하길래 괜찮은 집단인 줄 알았는데, 이름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에 카나크에 왔을 때 듣기로는, 사람들이 꽤 야인들을 우호적으로 이야기하던데요. 어차피
이제 사람을 죽이진 않을 테니 대화가 통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 야인들부터 사로잡지 못하면 북부를 다스리기는커녕 상점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거래할 자신이 있었는데 살육이라는 말을 듣자 조금 두려워졌다.
야인들에게 유용한 것들을 제공하면 우리를 눈감아 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평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분명히 원하는 게 있을 거예요. 아니면 의외로 우리가 이곳의 영주가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고요…….”
너무 나만의 희망 사항인가?
나는 살짝 알렉의 안색을 확인했다.
남쪽에서는 황제가 우리를 끊임없이 사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북부에서는 또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막연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기적적인 건 그에게 마력이라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몰랐을 때보다 조금 더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오로지 그의 힘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에게만 부담을 지게 할 수 없었고, 한 지역을 통솔하는 데에 무력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황제처럼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복종시킬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런 권력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영주의 부인으로서 가능한 한 사람들의 두려움보다는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던 알렉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총 같은 신식 무기를 주면 야인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예? 그걸로 우릴 쓸 일은 없는 거죠?”
북부가 수도에 비해 발전이 훨씬 느린 곳이니만큼 야인들의 생활도 생각보다 꽤 낙후되어 있긴 하였다.
칼라니쉬 산 근방을 잘 벗어나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우선은 그전에 대화부터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신문물로 회유해야 할 것
같고요.”
“……알겠어요, 알렉.”
나는 조금 걱정스럽게 대답하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쨌든 야인들을 무시하고서는 북부를 다스릴 계획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야인들이 이곳의 지도자나 마찬가지이니, 조금 둘러보다가 찾아 가서 인사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온 거 그들이 벌써 알고 있을까요? 아직 모르겠죠? 북부는 워낙 크니까-.”
덜컹!
“꺄악!”
“루이제!”
갑자기 마차가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그가 나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안았다.
무언가 휙 하고 내 머리 위를 쏜살같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이게 갑자기 뭐지?
“주인님! 마님!”
마부 페드로의 경악에 찬 외침이 마차 밖에서 들려왔다.
이미 마차는 멈춰 선 채였다.
마부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7 화

* * *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이런 길이 있었지?”


“알 게 뭐야.”
그랜드칼리의 야인들은 윌스브룩 성으로 이어진 길에서 매복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이 나올 때까지 꼬박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들이 매복하던 곳에 마차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야인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쏴서 마차를 세웠다.
십수 명에 달하는 야인들은 일반적인 화살보다 더 무시무시해 보이는 화살과 큰 날로 된 무기들을 갖추고
있었다.
거친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그들의 가슴에는 상체만 가릴 정도의 갑옷도 둘러져 있었다.
야인보다는 중세의 군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렉은 높은 곳에 있는 그들을 보며 정말 혹한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답다고 생각했다.
“아, 알렉.”
루이제가 그의 뒤쪽에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페드로도 그의 곁에 서서 두려운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설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하긴 이 도로를 복구하는 동안 번개 같은 불빛이 번쩍거렸을 텐데, 그 일이 야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무슨 일인지 탐색이라도 하려 했을 것이다.
알렉은 우선 루이제와 페드로를 안심시켰다.
“루이제. 페드로와 함께 먼저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당신만 두고요?”
“어, 저기 보십시오!”
그 순간 페드로가 암산 쪽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알렉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인들이 저 높은 암산 위에서 휙휙 뛰어내렸다.
날카로운 바위 위로 몇 번 발돋움하더니 금세 그들이 서 있는 길까지 내려왔다.
“……!”
그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루이제가 헉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산짐승들을 잡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기동력이 비범했다.
새삼 릴트 제국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이 났다.
저런 중세 시대의 야인 같은 사람들과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는 수도가 한 나라에 공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야인들은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악센에게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악센에게 야인들의 힘은 그저 개미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악센은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며 손쉽게 죽였다.
아직은 악센이 그렇게까지 흑화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제국을 장악한 이후의 지루함과 염증을 깨달으며
온 제국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마력을 가진 이상 그 초월적인 힘을 쓰지 않고는 욕망이 해소되지 않는 탓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야인들 중 가장 앞에 선 남자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물어 뭐 해. 또 남쪽의 황제가 얼굴만 멀끔한 귀족들을 보냈군.”
“가진 거나 빼앗아서 죽이면 안 되나?”
“안 돼. 그건 킬리울 님께서 선택하시는 거다.”
“…….”
야인들이 저들끼리 이쪽을 힐끔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핏 보아도 하나같이 몸통이 두껍고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들이었다.
‘킬리울이라면 야인들의 수장인가?’
킬리울을 직접 만난 건 아니라서 등장인물 일람이 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킬리울은 원작에서 악센이 칼라니쉬 산을 날려 버릴 때 선두에서 대항하던 야인일 것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이런 길이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안 거냐.”
여기 모인 야인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물었다.
“설마 이게 저 윌스브룩 성까지 이어진 길이냐?”
“…….”
야인 남자의 태도가 퍽 심각했다.
윌스브룩 성이 가기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저들도 잘 아는 것 같았다.
“희한한 일이군. 얼마 전에 여기 번쩍이는 낙뢰가 쳤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이지?”
야인의 눈빛에 의심과 경계가 가득했다.
저들도 이곳에 멀쩡하게 사람이 다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렉은 이만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킬리울을 보러 가려는 길이었는데.”
“뭐? 킬리울?”
“저 자식이 감히 우리의 킬리벡스 님을!”
야인들이 발끈하자 아까부터 진지하게 그를 노려보던 남자가 그 앞을 막았다.
“기다려.”
“켈즈!”
보아하니 켈즈라고 불린 남자가 야인들의 부대장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야인들을 단번에 진정시킨 켈즈가 다시 알렉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킬리울 님께서도 네놈들을 보고 싶어 할 거다. 여긴 어떻게 왔고 또 윌스브룩 성은 어떻게 한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야 할 거야.”
어지간히 그들의 등장이 희귀한 모양이었다.
알렉은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만 킬리울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으면 좋겠는데.”
“뭐? 저 자식이 계속-!”
“그만해.”
켈즈가 재차 야인들을 진정시키더니 뚫어질 듯 알렉을 노려보았다.
“우리의 위대하신 킬리벡스인 킬리울 님 앞에서도 계속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지 두고 보지.”

* * *

이윽고 마차가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인들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듯 사정없이 산을 넘으며 뛰어갔고, 그들의 경로를 따라 페드로가 마차를
몰았다.
알렉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조금 전에 비하면 꽤 차분해진 상태였다.
내가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킬리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않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치며 길게 심호흡까지 내뱉었다.
‘그 사람들 진짜 사람 맞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야인들이 산에서 훌쩍 내려오는 모습은 묘기에 가까웠다.
그들 자체가 아예 산짐승인 것처럼 날것의 흉포한 기운을 풍겼다.
내가 금세 다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영주로 파견된 귀족 중에 야인들에게 당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죽였는지는 모르겠고요.”
“……그러게요. 살려 두지 않았겠죠?”
그 귀족들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아까 야인 중 한 명이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서 죽이자고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들에게 굴하거나 당하지 않을 것이다.
떨리긴 했지만 이럴수록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어쩌면 알렉의 힘이 야인들을 모두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폭군까지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가 당장 폭군에게 맞서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황궁에 갔을 때 황제와 마주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아무런 복수나 공격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우선 나는 그와 나를 믿었다.
이미 야인들을 만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준비한 대로만 하면 킬리울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알렉이 조심스럽게 소리 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알렉.”
나는 그를 보며 슬며시 웃어 주었다.
어쨌든 그와 함께 있으니 야인들을 만나러 가도 안심이 되었다.
마차는 또 한참을 달려 카나크를 지났다.
원래는 카나크와 그 주변부터 둘러보려고 했지만, 야인들이 먼저 나타나 준 덕에 일부러 길을 묻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편하긴 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니 이미 야인들이 우리를 향해 서 있는 게 보였다.
“따라와라.”
켈즈라는 남자가 차갑게 내뱉고는 돌아섰다.
나는 한 걸음 떼기 전에 우리의 마부를 향해 말했다.
“페드로, 이리 와요. 내 옆에만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네? 아, 마님…… 감사합니다.”
페드로가 애써 두려움을 숨기는 기색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페드로에게 살짝 웃어 주며 다시 몸을 돌렸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곳에서 알렉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예기치 못하게 눈이 마주친 듯 살짝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네.”
짧게 대답한 내가 차분히 걸어갔다. 야인들의 거처는 돌로 낮게 지은 움막 같은 집들과 울타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깃발이 휘날리고 사방에는 높은 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석재 보초 탑들이 있었다.
양식 자체는 조금 오래돼 보이긴 했지만, 나름 튼튼하고 위엄이 있는 곳이었다.
간혹 보이는 핏자국은 그냥 모른 척했다.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내가 알렉을 향해 작게 말했다. 알렉도 수긍하듯 끄덕이는 게 보였다.
걸을 때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야인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저들을 보니 꼭 판타지 소설 속 등장인물들 같아 신기했다.
나만큼이나 저들도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켈즈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야인들의 거처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8 화

내부로 들어가니 붉고 화려한 휘장과 장막이 가득 걸려 있었다.


딱 보아도 야인들의 수장이 지낼 법한 곳이었다.
‘킬리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춥고 험준한 북부의 지도자 격이니 분명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 야인들의 태도도 그렇고 우리에게 바짝 경계심을 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윽고 켈즈가 멈춰 서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와 알렉도 걸음을 멈추자 조금 뒤쪽에서 페드로도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켈즈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무릎을 꿇어라.”
“…….”
……뭐?
아직 킬리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무릎을 꿇어야 우리의 위대하신 킬리벡스인 킬리울 님을 뵐 수 있다.”
“…….”
킬리울은 근처 어딘가에서 수장답게 고고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무리의 수장을 보려면 예우를 갖추는 게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야인의 수장, 우리는 일단은 황제의 대리인인 영주.
우리는 킬리울에 비해 신분이 밀리는 것도 아니었고, 야인들과 싸울 생각도 없었다.
절대 무릎을 꿇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평소처럼 목과 허리를 세우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처럼 알렉도 무릎을 꿇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의 침묵에 켈즈가 이를 짓씹었다.
“왜? 못 끊겠나? 도가니를 끊어서 영원히 꿇게 해 줘?”
그 순간 나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켈즈를 응시했다.
“여기서는 친구끼리도 무릎을 꿇나요?”
“뭐?”
“우리는 벗이 되려고 왔거든요.”
“…….”
말을 마치며 내가 살짝 입가를 당겼다.
켈즈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고, 옆에서 알렉은 흠칫 굳었으며 페드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감히, 킬리울 님께 친구?”
켈즈의 눈빛이 살벌하게 타올랐다.
한 주먹으로도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야인이 저런 살기를 내뿜으니 조금 주눅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시 입가를 살짝 당겨 가볍게 웃었다.
“어디 이 세상에 친구가 없는 사람도 있던가요? 혹시 킬리울 님께 벗이 없다면 저희 부부가 최초로 친구가
되고 싶네요.”
“…….”
켈즈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혹시 이 미친 여자는 뭐지, 하고 생각하는 걸까?
“하, 하.”
그때 어디선가 김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몸통이 무척 두꺼운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육중한 저음.
붉은 장막이 걷히며 상체를 거의 벗다시피 한 복장의 남자가 나타났다.
저 남자는 춥지도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 순간 남자가 정면을 보며 섰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완벽한 짐승남 그 자체였다.
상체는 얇은 가죽으로 겨우 가슴만 가리고 있었고, 팔뚝에는 금으로 된 장신구가 달랑거렸다.
다행히 하의는 제대로 입은 상태였다.
‘안 추운가?’
가장 먼저 그게 의아했다.
다른 야인들은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몇 겹이나 꽁꽁 싸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한파에 상체 노출 정도는 해 줘야 이 살벌한 그랜드칼리에서 우두머리를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만만치 않겠는걸?’
킬리울로 추정되는 짐승남이 나와 알렉을 뜨거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나와 알렉도 킬리울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분명하게 직시했다.
여기서 기가 꺾이면 상대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켈즈가 조금 당황하더니 서둘러 킬리울에게 다가갔다.
“킬리울 님, 죄송합니다. 저 사람들을 당장 엎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킬리울이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켈즈를 만류하듯 손을 들었다.
“됐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사람에게 무력을 가할 수는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킬리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우리를 한 손으로 으깨 버릴 듯했다.
“그런데 그거 아나? 난 우정을 잘 모르는데 말이야. 나와 친구 같은 걸 해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킬리울이 피식 짧게 웃었다.
이윽고 그는 붉은 천이 깔린 돌로 된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때까지도 알렉과 나는 킬리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켈즈.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예, 킬리울 님.”
킬리울이 손짓하자 켈즈가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우리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켈즈가 자세를 바로 하자 킬리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을 들은 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우리를 향한 의심과 경계가 더욱 짙어졌다.
금세 킬리울이 입술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 그곳은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었다.”
“…….”
“뿐만 아니라 성은 수백 년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지. 잘 닦인 도로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런데 그런 곳에 길도 멀쩡히 있고, 저런 희멀끔한 인간들이 성에 마차까지 타고 납신다고?”
“…….”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군.”
그러게 부하들을 보내지 말고 직접 와 보지 그랬니.
나는 조금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 윌스브룩 성에 한번 방문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정말 경치가 장관인 곳이랍니다.
킬리울을 우리 성의 첫 손님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요?”
“…….”
내 말에 킬리울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의 이름을 그냥 불러서인지 켈즈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문득 킬리울이 명령했다.
“앤드류를 데려와.”
음? 앤드류?
낯설지 않은 이름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렉도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야인들이 누군가를 끌고 들어왔다.
어디서 본 듯한 백금발에 키가 크고 선한 외모.
흙바닥을 굴렀는지 얼굴은 더럽혀져 있었고, 옷도 낡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를 알아본 나는 그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
내 외침에 앤드류가 혼란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곧 나를 발견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루이제! 아, 알렉시스!”
“마, 맙소사, 앤드류 백작!”
살아 있었어?
앤드류는 6 개월 정도 전에 폭군에게 잘못 걸려 북부의 영주로 파견된 백작이었다.
이름의 철자가 A 로 시작해서 재수없게 걸렸다.
그러고 보니 알렉시스의 이름도 A 로 시작했다.
‘혹시 그냥 다 순서대로 보내서 죽이려던 거였나.’
아무튼 앤드류는 반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아 모두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살아 있었다니.
나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정말이지 천만다행이고 반가웠다.
앤드류는 알게 모르게 알렉을 위로해 주고 챙겨 주던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너무 놀라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내가 서둘러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당신 혼자인 건가요?”
“다, 다른 사람들은…….”
앤드류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윌스브룩 성으로 가려는데 아무리 봐도 길이 안 보였습니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고 이쪽
칼라니쉬 산으로 왔죠. 그런데 그만 웬 흉포한 짐승들이 튀어나왔고, 저는 여기 있는 야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세상에…….”
“이게 다 황제 그 미친 개자식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 죽을 줄 알았다면 그 새끼 목에 흠집이라도 내고
죽는 거였는데!”
“앤드류…….”
그 순간 킬리울이 눈짓하자 켈즈가 앤드류의 오금을 발로 쳐 무릎을 굽혔다.
“윽!”
“앤드류!”
내가 앤드류에게 다가갈 듯 한 걸음을 떼자 킬리울이 말했다.
“들었나? 이 희멀건 놈도 윌스브룩 성에 가려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기사단까지 대동하고 있었던데, 반은
윌스브룩 성으로 이어진 암산을 넘다가 얼어 죽었다더군.”
“…….”
“거긴 원래 그런 곳이야. 이 북부는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번개가 며칠이나 이어지더니
길이 솟아나고 사람이 산다고?”
킬리울이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지?”
“…….”
“인간이 아닌 건가? 아니면…… 신의 대리인?”
……뭐?
신의 대리인?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발상인가 생각했지만 킬리울은 진지했다.
킬리울에게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엿보였다.
야인들이 산에 사는 사람들이라 조금 더 샤머니즘을 믿는 경향이 있는 걸까?
윌스브룩 성에 진기한 일이 일어나 믿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또 동시에 어딘가 경외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더욱 분명한 눈으로 킬리울을 직시했다.
아주 살짝 턱을 들고, 한쪽 입꼬리를 여유롭게 끌어 올렸다.
“우리는 앞으로 이 그랜드칼리의 영주로 자리매김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우리와 친구가 되는 건 어떨지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9 화

“우습군!”
킬리울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랜드칼리의 영주가 되겠다고?”
옆에서 알렉이 킬리울을 경계했다.
나는 일부러 눈도 깜박하지 않고 킬리울을 응시했다. 그가 금세 다시 말했다.
“남쪽의 황제가 이 북부를 더럽게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야. 칼라니쉬 산도 한 번 올라 보지 못한 인간들이
이 북부를 다스린다는 게 말이 될 것 같나?”
“우린 그 황제랑 상관없어요.”
“뭐?”
킬리울이 되물었고, 앤드류까지 조금 눈이 커졌다.
내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사실 우리도 앤드류처럼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이곳의 영주로 온 건 맞답니다. 북부를 완벽한 황제의
영토로 다스리라고 하셨죠.”
“…….”
“그런데 어디 북부가 황제만의 것이던가요?”
“……!”
앤드류의 눈이 더 커지고, 알렉마저 움찔 놀란 듯했다.
그런 반응들은 개의치 않으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이곳이 오래전부터 릴트 제국의 땅인 건 맞죠.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침략하는 건지, 아니면 당신들이 남의 영토를 무단으로 누리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뭐라고?”
킬리울이 단박에 내 말에 반박했다.
“여기는 우리의 영토다. 황제가 계속해서 탐을 내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전쟁? 우리가 가진 무기를 당신들도 구할 수 있나요?”
“무기……?”
그리 되묻는 킬리울의 눈빛이 조금 의심스럽게 일렁였다.
“당신들이 번개라고 말했던 그 무기 말이에요. 킬리울 당신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번쩍거리던 그 무기.”
“…….”
똑바로 마주친 시선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가 며칠이나 이어지더니 길이 솟아나고 사람이 산다고?’

그 번개는 아마도 알렉의 힘인 모양이었다.


알렉은 어느 고서를 통해 옛길을 발견했다고 했었는데, 혹시 자신의 힘을 동원해서 찾아낸 게 아닐까?
고서에 길이 그려져 있었다고는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났을 테니 발견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힘을 지목당한 알렉이 약간 당황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의 힘을 폭로하려는 건 아니었다.
기왕이면 그의 힘을 숨겨 주고 싶었다.
지금은 야인들을 혹하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건 순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는 물질이에요. 필요에 따라 폭탄이 되기도 하고 폭죽이 되기도 하죠.”
“폭죽……?”
킬리울이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알렉이 어떤 힘을 썼는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번개 같다고 했으니 폭죽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나와 알렉은 야인들을 힘으로 억압할 수 있어도 그럴 수 없었다.
황제의 명령 때문에 이곳에 왔지만, 북부인들의 입장도 헤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야인들과 정말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상생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환심을 얻으며 신뢰 관계를 쌓아야 했다.
폭죽처럼 신기한 물건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윌스브룩 성까지 가는 길을 발견한 건 그 폭발물의 도움도 있었죠. 산을 조금 부숴야 했거든요.”
“그랬군요…….”
갑자기 잠자코 듣고 있던 앤드류가 혼잣말처럼 소리 냈다.
성을 찾으려다가 다 죽고 홀로 남은 앤드류의 입장에서는 지금 내 이야기가 놀라운 모양이었다.
앤드류가 조금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말했다.
“저, 저희는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산이 부서진다니…….”
하긴 이 세계에서는 쉽게 떠올릴 발상은 아니었다.
전생의 나처럼 흔하게 터널을 가로질러 산을 통과했던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나는 다시 킬리울을 향해 말했다.
“릴트의 수도에는 그런 무기들이 많답니다. 원한다면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충분히 구해다 줄 수도 있죠.
물론 돈은 좀 필요하지만요.”
“…….”
킬리울의 얼굴이 굳었다.
제안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렇다면 또 들이밀 다른 것들은 많았다.
뭘 원할지 정확히 모르니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나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우리가 정말로 당신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정복을 목적으로
우리를 보내셨다고는 하지만, 나와 내 남편은 정말로 북부를 정복할 생각이 조금도 없거든요.”
“…….”
“지금까지의 당신들의 삶을 방해할 의도도 없어요. 그저 북부인들이 조금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에요.”
“…….”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킬리울을 응시했다.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은 눈빛이었다.
혹시 여기서 이야기가 잘되더라도 킬리울에게 배신을 당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야인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 진심은 숨기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킬리울도 우리를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꼿꼿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던 킬리울은 잠시 후에야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걸 나더러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모르겠군.”
역시나 의심하는구나.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
“…….”
“쓸데없이 친구 같은 건 만들지 않아. 강한 자만 동료로 삼을 뿐이다.”
“…….”
일단 오늘은 물러서야 하는 걸까?
우선은 앤드류라도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은 있지. 그렇게도 나와 동료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그게 뭐죠?”
킬리울이 차갑게 웃었다.
“우리들의 방식으로 네놈들의 힘을 증명해라.”
설마 아까 야인들처럼 산을 제집 침대처럼 뛰어다니라는 걸까?
아니면 같이 짐승 사냥을 하라고 한다거나?
이윽고 킬리울이 내뱉은 말은 무척 뜻밖의 이야기였다.
“칼라니쉬 산에는 앵두처럼 생긴 영약이 있다.”
“……영약이요?”
“웬만해서 찾기 힘든 약이지. 전설에 따르면 힐리베리라고 불리는 열매다. 칼라니쉬 산을 동산처럼
드나드는 우리의 눈에도 잘 띄지 않더군.”
“…….”
“만약 그걸 찾아온다면 내 동료로 인정해 주지.”
“…….”
나는 잠깐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보고 저 히말라야산맥 같은 설산에 가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전설 속 열매를 찾아오라고?
우리와 동료가 될 생각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까지 돌려 하나 싶었다.
“하나 실패할 시에는 북부에서 사지 멀쩡히 나갈 수 없을 거다. 어때. 하겠나?”
“…….”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알렉을 바라보았다. 내 인기척에 알렉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킬리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린 나는 일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수락하는 대신 앤드류 좀 풀어 줄래요?”

* * *

“아무래도 킬리울은 우리랑 동료 같은 거 할 마음이 없는 것 같네요.”


야인들의 거처를 나와 마차로 가는 동안 루이제가 말했다.
알렉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라니쉬 산에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열매를 찾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킬리울이 그와 루이제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폭죽이라는 신무기도 통하지 않다니.
혹시 캐스다인이라면 힐리베리에 대해서도 알까?
야인들은 수백 년 전에도 이곳에 살았던 탓에 캐스다인도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정말로 힐리베리를 찾아오면 조금 더 우호적으로 대화를 해 볼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리 물으면서도 루이제는 희미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안 되는 미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직접 만나 보니까 야인들이 우리 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선은 제가 한번 열매를 찾으러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같이 가면 방해만 되겠죠?”
루이제가 조금 아쉬운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함께 가고 싶은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알렉이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에서 안전하게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애써 옅은 미소로 대답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눈치였다.
가고 싶은 걸까?
어차피 그가 함께 있으니 데려가지 못할 건 없었지만-.
“루이제! 알렉시스!”
“앤드류!”
갑작스러운 외침에 루이제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알렉도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야인들에게서 풀려난 앤드류라는 남자가 이제야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킬리울은 앤드류를 데려가겠다는 루이제의 말을 들어주었다.
윌스브룩 성으로의 초대를 한번 받아들이겠다는 조건 또한 걸려 있었다.
“루이제! 살아서 다시 만날 줄 몰랐습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앤드류,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앤드류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루이제의 손을 잡으려다가 말았다.
루이제도 반가운 마음으로 글썽거리며 앤드류를 안을 듯 말 듯 팔을 뻗었다가 다시 되돌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이 덥석 안았다.
“루이제! 흐어엉.”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앤드류!”
“…….”
……포옹?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0 화

앤드류는 누굴까?
다시 만난 반가움에 포옹을 할 만큼 루이제와 친밀한 사이였던 걸까?
등장인물 일람도 뜨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원작에서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 같았다.
“저 자식들이 그동안 저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습니다. 도망을 쳤다가 얼마나 붙잡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그랬어요?”
“예. 여자들이 어찌나 빨래를 시키는지, 오늘 루이제와 알렉시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분명 목을
매달았을 겁니다! 으허엉, 루이제!”
“앤드류…….”
짧게 포옹한 그들은 이제 서로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알렉은 아까 들은 저 남자의 성이 뭐였는지 헷갈렸다.
몬테레이? 몬델레이?
그때 앤드류가 젖은 눈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아, 알렉시스.”
알렉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살아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앤드류.”
“흐어엉, 알렉시스.”
앤드류가 알렉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어깨에도 머리를 기댔다.
알렉은 손을 들어 살짝 앤드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음? 자네 말투가-.”
“앤드류! 이만 우리 성으로 돌아가요. 가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고 쉬어야죠.”
“아, 알겠습니다. 루이제.”
“그동안의 이야기는 가면서 하기로 해요.”
“예.”
“얼른 출발해야겠어요.”
루이제는 앤드류를 부축하며 마차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앤드류를 보는 루이제의 눈빛이 길에서 버려진 고아를 구출한 듯 무척 안쓰럽고 애틋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며 눈을 한번 깜박인 알렉도 그들을 뒤따랐다.

* * *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쯤에는 주위가 어스름했다.


확실히 북부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편이었다.
그동안 앤드류는 윌스브룩 성을 둘러보더니 턱이 빠져라 감탄을 하다가 목욕을 했다.
그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만찬실로 모였다.
“너무 맛있습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앤드류는 차려진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다가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거렸다.
“앤드류, 물도 마시면서 천천히 들어요. 그러다가 체하겠어요.”
루이제도 울컥하더니 제인에게 눈짓을 해 물을 가져다주게 했다.
알렉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며 식사를 했다.
보아하니 앤드류는 루이제와 알렉시스와 사이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귀족들 틈은 꼭 사방이 적 같았는데, 앤드류는 루이제와 그가 생명의 은인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처음부터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알렉시스, 자네의 병이 나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역시 사람은 죽지 말고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것 같아.”
앤드류가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알렉도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내리며 적당한 말로 응수해 주었다.
“고맙군.”
앤드류의 눈에 계속해서 눈물이 고였다.
“자네와 루이제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이 은혜는 평생 갚겠네.”
“아니에요, 앤드류. 우린 며칠 있으면 다시 수도에 갈 거예요. 들를 일이 있거든요. 그때 같이
돌아가요.”
“고맙습니다, 루이제. 제 저택과 작위는 무사히 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말아요. 사람들이 앤드류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 것 말고는 모든 게 그대로거든요.”
“다행입니다. 그동안 수도에 새로운 소식은 없었습니까?”
“있었죠. 줄리아가 감옥에 갇혔거든요.”
“예?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 말입니까?”
“맞아요.”
“그 여자가 어쩌다가…….”
“많은 일이 있었어요. 나한테 독주를 먹여 죽이려다가 사람들한테 걸렸거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앤드류의 턱이 끝없이 벌어졌다.
줄리아가 몰락한 일이 사교계에서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인 것 같았다.
잠시 놀라워하던 앤드류가 이내 날카롭게 말했다.
“그 여자가 루이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까? 당해 주지 않아서 정말 고맙습니다, 루이제. 줄리아가 감옥
신세라니 아주 꼴좋군요.”
“나도 면회 가고 싶은 심정이네요. 오래 살아도 못 볼 일이잖아요?”
“…….”
듣자 하니 앤드류는 사교계의 주류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앤드류가 다시 타오르는 눈으로 말했다.
“수도에 돌아갈 날이 기대됩니다.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만큼 제 목숨을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일에 쓰고
싶습니다.”
“네?”
“루이제와 알렉시스 앞이니 하는 말입니다만, 황제는 정말 죽일 놈입니다.”
“…….”
“물론 제가 직접 죽인다는 건 아니고요. 그럴 힘이 어디 있겠습니다.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
앤드류는 빠르게 꼬리를 내리더니 다시 우걱우걱식사를 했다.
혹시 앤드류도 브룩스 헤이츠 후작처럼 반역에 흥미가 있는 걸까?
앤드류를 보는 루이제의 눈빛이 조금 그윽해졌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루이제가 말했다.
“앤드류. 당신은 사교계에서 덕망이 높은 분이죠.”
“예?”
“두루두루 잘 지내시잖아요. 당신을 싫어하는 분들도 별로 없고요. 나와 알렉을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어요.”
“그, 그건…….”
“앤드류 백작이라면 분명 수도에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예요.”
“……루이제.”
앤드류가 홀린 듯이 루이제의 눈을 응시했다.
그럴 만한 것이, 루이제의 눈빛이 너무도 확고해 보였다.
이미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앤드류.”
루이제가 다시 한번 결연한 얼굴로 앤드류를 불렀다.
그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수도에 가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무척 많겠죠. 당장 황제를 없애진 못하더라도 그 비슷한 사람들은
우리가 도려낼 수 있지 않을까요?”
“……!”
“황제만 혼자 남을 때까지요.”
꿀꺽.
앤드류의 눈동자가 조금 전과는 다른 의욕으로 일렁였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듯한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두 분의 눈과 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며 앤드류는 루이제와 알렉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제야 루이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잘됐네요. 이렇게 건배가 하고 싶은 순간도 오랜만이에요.”
앤드류도 흡족해하며 술잔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알렉까지 술잔을 들자 모두 한가운데로 잔을 기울였다.
테이블이 넓은 탓에 직접 잔을 맞댈 수는 없었다.

* * *

뜨끈한 포도주를 기분 좋게 마셔서 그런 걸까?


나는 죽은 줄 알았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엄밀히 말하면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은 친구처럼 친했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적의 없이 친절했다.
사교계에서 적이 아니라는 건 친하지 않아도 친구인 것 같은 친밀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나는 알렉 때문인지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늘 갖고 있었다.
‘그나저나 앤드류가 황제한테 복수심을 제대로 품은 것 같네.’
야인들의 거처에서 앤드류가 황제를 욕하며 눈빛을 활활 태워서 깜짝 놀랐다.
늘 서글서글했던 사람이 그토록 흥분한 모습이라니.
죽을 위기를 겪어서 그런지 앤드류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유능한 데다가 사교계에 적도 없는 사람이니 앞으로 우리의 좋은 조력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앤드류만큼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침대에서 쉬고 있던 나는 그만 방에서 나왔다.
실내용 털 망토를 걸치고 알렉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쯤 칼라니쉬 산으로 가려나?’
해가 떠야 가겠지?
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없을까 봐 조금 신경이 쓰였다.
똑똑.
이윽고 영주의 방에 도착한 내가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더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
내 얼굴이 절로 화사해졌다.
방금 전까지는 술기운에 조금 몽롱했는데 알렉의 잘생긴 얼굴을 보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루이제. 들어오십시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리 물으며 나는 어깨에 걸친 망토를 벗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입가가 저절로 싱글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침대에 앉자 그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말했다.
“내일 칼라니쉬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체력 단련이라도 한 걸까?
칼라니쉬 산이라니, 사실은 나도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그에게 피해만 끼칠 것 같아서 같이 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또 날 안고 다니면 얼마나 번거롭겠어.’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을 품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일 언제쯤 출발할 거예요?”
“아무래도 해가 뜨기 시작할 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있다가 저 혼자 갈 생각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인께서 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앤드류도 온 김에 첨탑 구경이라도 시켜
줘야겠네요.”
“…….”
내 말에 그가 살짝 경직되더니 이내 입술을 만지며 뭔가 생각하듯 침묵했다.
내가 약간 갸웃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제.”
“네?”
“내일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1 화

* * *

“정말로 칼라니쉬 산에 가시는 건가요?”


다음 날 새벽녘.
알렉과 루이제를 배웅하기 위해 모든 사용인들과 앤드류가 홀에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전설의 열매를 찾으러 산짐승과 강추위와 눈으로 뒤덮인 험악한 산으로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조난당할 게 분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알렉은 힐리베리가 칼라니쉬 산에 실존한다는 사실을 이미 캐스다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루이제는 그들을 안심시키듯 웃었다.
“걱정 마요. 전설의 열매가 아니더라도 칼라니쉬 산에 있는 지푸라기라도 뜯어 올 거니까요.”
“네? 지푸라기요?”
제인이 되묻는 말에 루이제가 차분히 대답했다.
“뭐라도 가져가서 킬리울한테 성의를 보여 주긴 해야 할 것 같아. 우리가 정말로 그 험한 산에 가서 죽을
뻔한 걸 알면 조금은 마음을 열지 않을까?”
비록 루이제가 처음에 준비해 간 선물은 킬리울이 보지도 않고 거부했지만 말이다.
“아…… 그래도 두 분이 정말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문득 앤드류가 간절하게 외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그런 고생을 하는데 저만 여기서 놈팡이처럼 쉬고 있을 순 없죠. 저도 가서
돕겠습니다!”
“네?”
“그런 거라면 저희도 다 같이 가서 힘을 합치고 싶어요.”
앤드류에 이어 사용인들까지 간절하게 눈망울을 글썽거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알렉은 살짝 시선을 내리며 입술에 손끝을 가져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영주 부부가 사지로 가는데 그냥 보내지 못할 것이다.
문득 루이제가 울컥하더니 앤드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여러분.”
“……?”
“앤드류도 그렇고 다들 말씀만이라도 너무 고마워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산으로
데이트하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예? 데이트?”
루이제의 말에 다들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루이제가 데이트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위험하지 않게 다녀올게요. 그러니까 앤드류도 편하게 쉬고 있어요. 첨 탑이라도 올라가서 구경하면
정말 좋을 거예요.”
“루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위험한 일은 피해 다닐게요. 그럼 돌아올 때 다시 만나요.”
“……알겠습니다, 마님, 주인님.”
“무탈하게 다녀오세요.”
그제야 사람들이 마지못해 그들을 보내 주었지만, 걱정스러운 기색은 여전했다.
루이제의 말이니 그냥 더 토 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알렉과 루이제는 성에서 나왔다.
칼라니쉬 산의 능선 중 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만 마차를 타고 갔다.
기다리겠다는 마부를 겨우 돌려보내고 나서야 루이제는 어마어마한 장벽 같은 산을 넓게 응시했다.
“정말 장대하네요.”
산의 규모를 실감하는 만큼 루이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실 나 여기 꼭 와 보고 싶었거든요. 북부에서 안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어느 정도 설산을 둘러본 루이제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알렉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 팔로 그녀를 들어 올리자 루이제가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루이제는 목을 반 정도 가리는 가죽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브니엘이라는 재단사가 만든 옷이었다.
상체는 전신에 딱 붙듯이 감싸고 있었고, 허리 아래로는 풍성해서 바람을 몇 겹으로 차단했다.
알렉도 브니엘이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쩐지 희미하게 마력의 기운이 풍겼다.
‘마법사인가?’
그러나 아직 발현된 마력을 완전히 감추지 못하는 초급 마법사 같았다.
브니엘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던 인물인데, 하필 루이제가 그녀를 스카우트한 건 우연일까?
악센은 자신의 마력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 마법사들의 마력을 갈취해 왔다. 만약 악센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브니엘은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다.
“꽉 잡으십시오.”
“알겠어요.”
루이제가 그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감자 알렉은 신속 스킬을 썼다.
그들의 몸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그의 레벨이 오른 덕에 신속 스킬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동시에 알렉은 자신의 사역령들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캐스다인, 기드온. 더 먼 곳으로 흩어져서 힐리베리를 찾아봐.’
‘크릉!’
‘알겠다, 주인.’
기드온은 경쾌한 대답과 함께 사라졌고, 캐스다인은 한기를 내뿜으며 사라졌다.
반드시 그 열매를 찾아야 했다.
킬리울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 칼라니쉬 산에 도착한 순간 퀘스트가 열렸다.

[퀘스트 발생!]
[~칼라니쉬 산에서 자라고 있는 힐리베리를 획득하세요!~]
[칼라니쉬 산속에는 힐리베리를 비롯한 여러 희귀한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전설 속 명약인 힐리베리를 섭취하면 열매 하나당 경험치가 50,000 포인트 업!]
[퀘스트 보상]
[경험치(?), 명성(?), 애정도(?), 신뢰도(?)]

[제한 시간: 1 시간]

경험치가 무려 50,000.
열매를 하나 먹는 것만으로도 경험치가 50,000 포인트나 오른다면 그보다 더 편리한 영약이 또 있을까?
지금 그는 예상치 못하게도 애정도보다 경험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루이제와 함께 이틀 밤을 보내면서 레벨이 8 에서 12 로 올랐다.
그 일로 그는 무려 303,760 에 달하는 애정도를 얻었는데, 첨탑에서 입맞춤 한 번에 애정도가 300 이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상승이었다.
더 놀라운 건 루이제와의 관계는 애정도뿐만 아니라 경험치까지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경험치는 애정도의 30%인 91,128 포인트가 올랐다.
애정도만 보면 17 레벨도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경험치가 부족해 12 레벨까지만 상승했다.
그런데 과연 힐리베리는 어디에 있을까?
알렉은 캐스다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힐리베리는 백곰의 서식지에서 자라는 열매라고 들었다.’

백곰은 칼라니쉬 산에 사는 짐승이었다.


원래 그가 살았던 세계의 북극곰과 유사한데, 북극곰이 지상 최강의 포식자 중 하나인 것처럼 백곰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사람도 찢어 먹겠지……?’
그 백곰의 서식지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캐스다인은 생전에 직접 칼라니쉬 산에 와 본 건 아니어서 백곰의 서식지가 어디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
그가 속도를 늦추자 그 반동에 루이제가 낮은 소리를 냈다.
그들이 착지한 나무가 흔들리며 후두둑 눈이 떨어졌다.
휘이잉.
바람이 공기처럼 주위를 에워쌌다.
영하 50 도? 아니면 60 도일까?
“흐읏…….”
뼈까지 얼릴 듯한 추위에 루이제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늦지 않게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 스킬로 그녀의 몸에 열을 불어 넣었다.
“루이제. 곧 따뜻해질 겁니다.”
“고마워요, 알렉. 그런데 여긴 어디-.”
루이제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눈발이 날리는 상황이라 주변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크아앙!”
문득 집채만 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안개 속에서 웅장하게 울렸다.
툭.
한순간이었다.
알렉이 딛고 있던 나무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금세 쓰러질 듯 기울어졌다.
백곰이 사람의 피 냄새도 맡았던가?
“어? 알렉!”
머지않아 추락할 것임을 깨달은 루이제가 그를 안은 순간 알렉도 그녀를 꽉 붙들었다.
순식간에 뿌연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떨어졌다.
휙!
알렉은 쓰러지는 나무를 딛고 그 반동으로 몸을 피했다.
“크와앙!”
“크앙!”
다시 한번 사방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설마 여기가 백곰의 서식지일까?
우선 아무 곳이나 와 본 거였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짧은 추락 후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러나 발이 채 다 닿기도 전에 백곰이 공중으로 날아들며 앞발을 할퀴었다.
“크앙!”
“……헉!”
루이제가 짧은 신음을 터뜨린 순간, 알렉은 백곰보다 빠른 속도로 위치를 옮겼다.
백곰의 공격력과 순발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저, 저게 백곰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오, 그럼 힐리베리가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
루이제는 겁이 나지 않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보였다. 그러나 루이제는 그러면서도 살짝 몸을 떨며 그를 더 단단히 안았다.
알렉은 주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에게 안긴 채 그의 뒤쪽을 보던 루이제가 그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저기 멀리, 백곰들이 무척 많아요…….”
“…….”
“보기에는 너무 하얗고 예쁘네요.”
신기해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2 화

‘기드온.’
알렉은 다른 곳에 있던 기드온을 시스템으로 거둬들인 후에 다시 이곳에서 내보냈다.
백곰들이 그들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 백곰들을 상대할 존재가 필요했다.
“크왕!”
백곰 한 마리가 육중한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든 순간이었다.
‘크허엉!’
기드온이 순식간에 성체로 몸을 부풀리며 백곰을 후려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앞발에 얻어맞은 백곰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백곰의 머리 위에도 HP 바가 떠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을 죽여도 경험치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렉은 직접 백곰과 겨룰 생각이 없었다.
루이제도 함께 있으니 힐리베리만 찾아 얼른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크와앙, 크헝, 백곰들과 기드온이 뒤엉키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정없이 설산을 울렸다.
그 틈을 타 알렉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어디선가 튀어나와 달려드는 백곰들의 공격을 피하며 힐리베리를 찾기 시작했다.
설산에서 열매라니,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이었다.

* * *

“……!”
몇 번이나 백곰을 피하던 알렉이 이제야 멈춰 섰다.
천둥처럼 귓가를 울리던 백곰들의 포효는 조금 전에 비해서는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는 꼭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이후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아, 알렉.”
“이쪽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내려 주려고 하자 나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 땅을 디뎠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가 살짝 걱정스럽게 찡그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힐리베리는 어디 있을까?
백곰들이랑 말이 통한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힐리베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 말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옷과 그의 능력 때문인지 많이 춥지는 않았다.
“우선은 좀 둘러봐야겠습니다.”
“알겠어요.”
알렉이 걷기 시작하자 나도 그를 따라가며 그에게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알렉은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방금 전까지 계속 안고 있었는데 새삼 놀란 걸까?
나는 그의 팔을 더 꼬옥 감싸 안으며 열매 같은 게 정말로 보일까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킬리울 앵두 같은 거라고 했으니까 붉은색이겠죠?”
“크아앙! 컥!”
“……?”
갑작스레 가깝게 들린 포효에 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백곰 한 마리가 배를 보이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혼자 미끄러지기라도 했나?
다시 정면을 본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알렉도 백곰 쪽을 돌아보더니 이내 나를 빠르게 감싸 안으며 다른 곳으로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백곰들이 많네요. 쳐다보지 마십시오. 루이제한테는 접근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런 아찔한 등산도 다 해 보고 평생 못 잊을 기억이 될 것 같아요.”
나는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위험천만한 곳의 근처도 오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알렉과 함께 있으니 그나마 있을
만했다.
조금 진정이 되자 칼라니쉬 산의 공기를 크게 한 번 들이마셔 보았다.
평생 마셔 보지도 못할 높은 산의 공기였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먼지 한 톨만큼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내 몸속을 시원하게 채웠다.
“……하, 여기 정말 좋네요.”
온몸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한층 맑아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당신이랑 같이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
“크아앙!”
“꺅!”
말을 채 다 맺기도 전에 어디선가 또 백곰이 달려들었다.
휙.
그 짧은 찰나에 알렉은 나를 감싸 안고 다른 곳으로 훌쩍 움직였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금세 명을 달리할 것 같은 곳이었다.
쿵!
대뜸 알렉의 몸이 어딘가에 부딪치며 두껍게 쌓여 있던 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뭐지?
눈사태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우리의 위로 눈이 쏟아졌다.
나를 안은 그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가더니 또다시 쿵, 하며 어딘가에 추락했다.
그와 내 몸이 몇 바퀴 굴렀다.
“……!”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가 땅을 짚으며 가까스로 멈췄다.
“루이제.”
이윽고 상체를 든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상당히 쌓인 듯 등 밑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가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망연히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는 눈만 들어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달려든 곰이 너무 빨랐습니다.”
“아, 아니에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밭에서 껴안고 구르기.’
믿기지 않았다.
내가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 본 책이나 영상에서는 늘 커플들이 껴안고 눈 위를 구르며 염장을 질렀다.
부러운 마음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는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도 해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백곰들아 잠시만 공격을 멈춰 주면 안 될까?
인생에서 이뤄질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 일어났거든…….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묘한 침묵이 초를 거듭하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그가 3 초 안에 분위기를 파악 하지 못하면, 나는 깔끔하게 몸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그 이상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짧게나마 입술을 맞춰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30 초가 지나 버렸다.
백곰까지 방해하지 않아 슬슬 민망해졌다.
내 눈빛이 더 처참하게 흔들리고, 덩달아 그의 눈동자도 크게 일렁이던 찰나, 그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잡아 일으켰다.
얼결에 일어선 나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며 괜히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도 몸을 돌린 채 헛기침을 하는 게 느껴졌다.
강추위가 무색하도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뽀뽀는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나만의 바람이었나 보다.
‘빨리 열매나 찾자.’
그렇게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무언가가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작고 동그랗고 붉은 것들이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멍하니 그쪽을 가리켰다.
“아, 알렉, 저기 좀 봐요.”
“……?”
알렉이 의아한 얼굴로 내 손끝이 향한 곳을 응시했다.
아까보다 더 크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힐리베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 * *

힐리베리는 그와 루이제가 부딪친 절벽 같은 암석 근처에서 자라고 있었다.


설산의 강추위에서도 자라는 열매가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캐스다인이 했던 말과 퀘스트 때문에 힐리베리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신기했다.
루이제와 그는 힐리베리를 획득하자마자 산에서 내려갔다.
백곰이 흉포하게 날뛰는 곳에 더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까 그건…….’
아직도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뛰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심장이 반응했다.
눈 위에서 몇 바퀴 구르고 루이제와 마주 안은 채 눈길이 오고 갔을 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그의 눈동자가 헝클어지고 심장은 묘하게 뭉클했다.
지금까지 루이제를 보면서 느꼈던 기분 중에 그런 건 없었다.
애써 그 기분을 잠시 잊어버리며 야인들의 거처에 도착했다.
눈밭을 굴러 조금 헝클어진 모습 그대로 킬리울이 있는 곳에 들어섰다.
“킬리울.”
루이제가 특유의 은은한 말투로 다가갔다.
킬리울은 야인들의 수장만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오만하면서도 의문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또 무슨 볼일이지?”
아무래도 너무 빨리 왔나?
힐리베리는 산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던 야인들의 눈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와 루이제가 벌써 그 열매를 가져왔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루이제는 숨을 조금 들이쉬었다가 살짝 입가를 끌어 올렸다.
“칼라니쉬 산에 있는 백곰들이 정말이지 빠르고 씩씩하더라고요.”
“……?”
킬리울의 미간이 더욱 불쾌하게 깊어졌다.
“하마터면 그 앞발에 맞아서 흔적도 없이 죽을 뻔했답니다.”
“…….”
킬리울이 정색했다. 곁에 있던 켈즈의 눈빛도 조금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루이제는 힐리베리를 감싸고 있던 잎을 들어 올리며 조금 고고한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힐리베리의 붉은 빛깔이 드러난 순간, 야인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정도면 당신들의 동료가 될 수 있나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3 화

“…….”
잠시 침묵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킬리울은 숨까지 멈추고 루이제가 들고 있는 힐리베리를 쳐다보았다.
주위에 있는 다른 야인들도 설마 진짜 힐리베리를 가져온 건가 싶어 숨을 죽였다.
알렉은 잠자코 상황을 주시했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루이제가 어떻게 상황을 풀어 갈지 기다려졌다.
루이제가 연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킬리울은 힐리베리를 직접 본 적이 없겠네요.”
“…….”
킬리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힐리베리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루이제를 응시했다.
분명 킬리울은 그와 루이제를 쫓아내기 위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전설의 영약을 가져왔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말로…… 힐리베리를 가져왔다고?”
“그럼요. 저희도 이걸 발견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칼라니쉬 산에 오를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전설의 영약이 실제로 존재할 줄 누가 알았겠나요?”
“……가까이 가져와 봐.”
킬리울이 켈즈에게 턱짓을 하자 켈즈가 다가왔다.
루이제는 힐리베리를 하나 집어 켈즈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킬리울은 심각한 얼굴로 힐리베리를 살펴보았다.
그 열매는 언뜻 보면 앵두처럼 붉고 동그랗게 생기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복숭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알렉과 루이제가 보기에도 신기하고 낯선 모양의 과일이었다.
“한평생 칼라니쉬 산을 드나들면서 이런 열매는 본 적이 없는데.”
킬리울의 말에 켈즈도 조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산이 아니라 북부의 어디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게 힐리베리니까요.”
루이제의 말에 다른 야인들도 입술을 꾹 다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열매가 있었던가?
따로 다른 열매를 구해서 힐리베리라고 속이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야인들은 그와 루이제가 진짜 힐리베리를 가져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현실을 부정하는 중인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수도에 이런 열매가 많은 거 아니야?”
“궁금하면 직접 수도에 가 보면 되겠네요.”
계속되는 의심에 루이제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힐리베리를 처음으로 획득했을 때 그의 시스템이 퀘스트 성공을 알렸으니, 저 열매의 정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한 열매인 탓에 킬리울 또한 바로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킬리울이 열매 하나를 살짝 베어 물었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알렉과 루이제도 하나씩 먹어 보았다.
복숭아와 딸기와 앵두가 섞인 듯한 식감과 맛이었는데, 먹자마자 달콤한 풍미가 신비롭게 퍼졌다.
킬리울도 방금 막 그 맛을 느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듯 루이제가 말했다.
“정말 달콤하지 않나요? 사실 나도 그 열매를 보고 많이 놀랐답니다. 저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거든요.
맛도 그렇고, 모양만 봐도 처음 보는 거라 전설의 열매인 줄 단박에 알았어요.”
“…….”
“나와 내 남편의 운이 정말로 좋았던 것 같네요. 백곰이 자꾸 달려들어서 피해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말을 마치며 루이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킬리울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루이제를 강하게 주시하기만 했다.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러나 부정하지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당장 여기서 킬리울의 인정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킬리울에게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충격적인 일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 순간 킬리울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조화가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용케 힐리베리를 구해 왔군.”
“…….”
루이제의 숨결이 조금 흐트러졌다.
이제야 킬리울이 믿는 듯한 기색을 내비쳐 살짝 안도한 모양이었다.
킬리울이 피식 비웃었다.
“칼라니쉬 산이 장난도 아니고, 거길 정말로 기어갈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
그 말에 루이제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앞으로 우리도 등산하러 자주 갈 텐데, 덕분에 미리 가 보게 되었네요.”
루이제가 어금니를 조금 꽉 깨물었다.
그녀와 킬리울 사이에 오가는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알렉의 입장에서는 소설 속 진짜 귀족과 야인이 기 싸움을 하는 생전 초면의 진귀한 장면이었다.
킬리울이 재차 비웃었다.
“우선은 약속대로 사지는 멀쩡하게 보내 주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무튼 이번에는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 주면 좋겠네요. 동료가 된 기념으로요.”
루이제의 옅은 웃음에 킬리울의 안색이 조금 구겨졌다.
어떻게 된 게 한마디도 지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루이제가 망토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실크로 감싼 뭉치 하나를 더 꺼냈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윌스브룩 성으로 찾아와요.”
루이제가 켈즈 쪽을 보자 켈즈가 잠시 흠칫하다가 다가왔다.
꽤 적지 않은 양의 힐리베리였다.
킬리울은 켈즈가 루이제에게서 힐리베리를 받아 가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과연 킬리울은 알까?
‘악센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차피 야인들도 악센에게 파멸당한다는 것.’
아쉽게도 킬리울에게 미래의 일을 믿게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이제와 함께 돌아서는 찰나, 킬리울의 눈빛이 알렉에게 닿았다.
알렉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저들의 협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훼방은 곤란했다.
그와 루이제를 방해하면 전투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힐리베리 때문에라도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는 킬리울이 야인들을 위한 결정을 하길 바랐다.
완전히 돌아서자 킬리울과 닿았던 눈길도 끊어졌다.
그들의 뒤통수에 계속해서 킬리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알렉과 루이제는 여러 야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들의 거처를 나왔다.
그제야 루이제가 조금 한숨을 돌렸다.
“역시 쉽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반감은 조금 없어진 것 같죠?”
루이제의 물음에 그가 한번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내색은 못 했겠지만 힐리베리를 가져다준 탓에 꽤 진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루이제에게 조금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조만간 성에 초대해서 수도의 음식들로 극진하게 대접해야겠어요.”
루이제가 그리 말한 순간 야인들의 거처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
“이제 여기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루이제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알렉도 그녀를 단단히 안았다.
마차가 없으니 스킬로 카나크까지 가서 마차를 빌려 탈 생각이었다.
야인들에게 많은 양의 힐리베리를 건네줬지만 아직 루이제가 갖고 있는 양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캐스다인이 어디선가 찾아온 힐리베리가 있었다.
‘스킬. 신속.’
마침내 그들의 자취가 바람보다 빠르게 흩어졌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켈즈는 헉 숨을 들이켰다.
“……!”
방금 본 게 뭐지?
켈즈는 눈을 깜박이다가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온데간데없이 귀족 부부가 사라져 버렸다.
야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바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켈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으로 황급히 킬리울에게 달려갔다.
“킬리울 님! 킬리울 님!”
킬리울은 심각하게 팔짱을 끼고 벽을 향해 서 있다가 의아하게 돌아섰
“무슨 일이지?”
켈즈는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킬리울에게 다가가 자신이 본 것을 속삭였다.
그러자 킬리울의 적갈색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깊어졌다.
그가 품었던 의혹이 이제야 확실해졌다.
“어쩐지 힐리베리를 찾아왔다 싶었더만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잖아?”
“정말로 그 사람들이 신의 대리인 같은 거라도 되는 거 아닙니까?”
“…….”
킬리울은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북부의 영주가 되겠다고 나타난 귀족 남자와 여자는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
압도적인 위압감과 기운이 그의 짐승 같은 육감으로 느껴졌다.
그러니 더욱더 그들이 북부에 해를 끼칠 사람들인지 아닌지 똑똑히 두고 볼 필요가 있었다.
정말로 동료가 될 마음이라면 괜찮겠지만, 적이라면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킬리울은 그만 켈즈에게 눈짓했다.
“저거나 갖고 나가라.”
“예? 힐리베리 말입니까?”
켈즈는 킬리울이 가리킨 곳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래. 아이와 여자부터 하나씩 나눠 줘.”
“그, 그래도 저런 귀한 걸…….”
힐리베리는 모든 야인들이 어릴 때부터 전설로 듣고 자라며 꿈에 그리던 열매였다.
그러나 그 열매를 직접 먹어 본 사람은 수백 년 전 어느 야인 말고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영주 부부가 힐리베리를 가져왔다는 소식에 다들 들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두 번 묻지 말고 가져가라.”
“……아, 알겠습니다. 킬리울 님 것도 곧 준비하겠습니다.”
“난 됐다. 아까 하나 먹었다.”
“그래도 킬리울 님께서 더 드셔야-.”
“단 거 안 좋아한다.”
“……알겠습니다.”
켈즈는 그만 힐리베리를 갖고 조용히 물러났다.
야인들에게 전설의 명약을 맛보게 해 주려는 수장의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킬리울 님의 은혜에 감복하며 무척 행복해할 모습이 벌써부터 그려졌다.
킬리울은 다시 벽을 보고 서서 영주 부부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비범한 힘을 가졌으니 동료가 될 조건은 충분했지만, 만약 적이라면 끝까지 맞설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일람]

[킬리울 칼라니쉬]
[남, 나이: 26 세]
[칼라니쉬 산에서 유래된 칼라니쉬 성을 가진 야인족의 수장. 야인족들의 수장을 대대로 킬리벡스라고
칭한다.]
[킬리벡스는 전대 킬리벡스의 자식 들 중 ‘뜨거운 힘’을 물려받은 사람이 승계한다.
뜨거운 힘은 마력의 일종이며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초인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북부를 지키려다가 악센에 의해 야인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전투력: 레벨 99]
[주 무기: 맨주먹과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강철 망치]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4 화

* * *

“주인님! 마님!”
금세 해가 저물었다.
나와 알렉이 성에 도착하자 우리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응접실에 있던 앤드류까지 놀라 뛰쳐나왔다.
“루이제! 알렉시스!”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들 좋은 하루 보냈어요?”
나는 환한 미소로 말하며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들은 사용인들이 여기저기서 한 명씩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렉과 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사히 다녀오신 건가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오늘 안에 오시지 않을까 봐 찾으러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용인들의 반응에 내가 살짝 웃어 주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우리는 무사히 잘 다녀왔어. 아주 운이 좋았거든.”
“네?”
“그렇죠, 알렉?”
내가 곁에 있는 알렉을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한번 끄덕였다.
나는 다시 앤드류와 사용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라니쉬 산에 갔다가 야인들의 거처에도 다녀오는 길이야.”
“예? 벌써요?”
“그게 정말입니까?”
앤드류의 눈이 아까부터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가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자 알렉이 입을 열었다.
“힐리베리를 주고 왔습니다. 여분이 있으니 모두 나눠 드리겠습니다.”
“뭐? 힐리베리?”
“힐리베리요?!”
앤드류를 비롯한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그걸 정말로 찾았다고?”
앤드류가 재차 묻는 말에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네. 야인들은 평생 본 적도 없다는데 어떻게 우리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운이 굉장히 좋으셨군요…… 믿기지 않습니다.”
앤드류가 놀라워하자 사용인들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레타 부인이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얼른 물었다.
“우, 우선 두 분 식사는 하셨는지요? 아니면 목욕물부터 준비할까요?”
“먼저 뭐라도 먹는 게 낫겠어요. 우리 배가 좀 고프거든요.”
“알겠습니다, 마님. 금세 준비하겠습니다.”
“우선 방에서 옷부터 새로 챙겨 드릴게요.”
“고마워, 제인.”
그레타 부인이 부엌으로 가자 제인과 제임스가 나와 알렉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앤드류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며 다시 응접실로 들어갔다.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묘하게 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우리 집이라고 성에 오니까 마음이 놓이네…….’
앞으로는 이사 가는 일 없이 영원히 여기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겨우 며칠밖에 지내 보지 않았지만 북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지긋지긋한 수도를 떠나 우리끼리만 천혜의 자연 속에서 초월적인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 꽤 짜릿했다.
오늘 처음으로 가 본 칼라니쉬 산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옷을 대충 갈아입은 나와 알렉은 다시 만찬실에서 모였다.
“세상에 이런 열매가 다 있었군요.”
앤드류는 열매 하나를 들고 연신 신기해했다.
사용인들에게도 그들이 먹을 힐리베리를 따로 챙겨 준 후였다.
나는 조금 부지런하게 음식을 먹으며 대답했다.
종일 바깥에 있다가 뜨끈한 음식을 먹으니 평소보다 훨씬 맛있었다.
“신기하죠? 어서 드셔 보세요. 맛은 더 신기할 거예요.”
이윽고 앤드류가 힐리베리를 입에 넣자 알렉도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린 엔드류의 눈이 커졌다.
“……정말 굉장하군요!”
나는 말없이 웃어 주었다.
칼라니쉬 산에서 처음 저 열매를 맛보았을 때 나도 딱 같은 반응이었다.
“야인들의 눈이 아주 돌아가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힐리베리를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지금쯤 제단에 차려 놓고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겁니다.”
“그래 주면 우리야 뿌듯하겠어요.”
생각해 보니 앤드류는 비록 노예 취급을 당한 것 같긴 했지만, 몇 달이나 야인들과 함께 생활한
사람이었다.
힐리베리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 앤드류가 말했다.
“저도 야인들과 지낼 때 힐리베리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야인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였지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뭐 힐리베리를 하나라도 먹으면 죽을 일이 닥쳐도 안 죽고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약이라 불렸나 봅니다.”
“그랬군요.”
나도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열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알렉에게도 직접 챙겨 주고 싶었지만 테이블이 워낙 넓어 그럴 수 없었다.
힐긋 보니 그도 대화를 경청하며 식사를 잘하고 있었다.
그때 앤드류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야인들이 영주 부부를 우러러 보겠군요. 야인들한테 노예로 붙잡혀서 또 새 영주가 파견될 일은
없겠습니다.”
앤드류의 자책 섞인 농담에 내가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까 보니까 킬리울이 생각보다 의심과 경계가 심하더라고요.”
“그랬습니까?”
내가 앤드류에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네. 아무래도 자기 부족한테 해가 될까 봐 우리를 쉽게 못 믿는 눈치예요.”
사실은 힐리베리를 보여 주자마자 놀라워하며 우리를 동료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하고 아주 살짝
기대했다.
그러나 역시 킬리울에게는 우리를 지켜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일단은 힐리베리로 우리들의 능력은 보여 준 셈이니, 진수성찬이라도 대접해서 우호적인 관계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수도에 가서 맛있는 재료들 좀 많이 챙겨 와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앤드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하튼 두 분 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나보다는 알렉이 고생이 많았죠.”
그리 말하며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앤드류도 알렉을 보며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네, 알렉시스.”
알렉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쓸었다.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또 칼라니쉬 산에 같이 가요, 알렉.”
“알겠습니다.”
내가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주자 그도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와중에 앤드류가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 마님!”
“제인?”
“어서 나와 보세요. 바깥에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
알렉이 의아하게 되묻자 제인이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손님이…… 손님이 오셔서요!”
“…….”
우리는 아주 짧은 찰나 동안 멍하니 제인을 응시했다.
이곳엔 손님으로 올 사람이 없었다.
알렉은 냅킨을 들어 입술을 한번 찍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앤드류도 조금 어안이 벙벙해서 밖으로 따라 나갔다.
“손님이라니 대체 누구? 여기 올 사람이 없는데…….”
“일단 나가 보셔요, 마님.”
제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성문을 나선 우리는 해자로 연결된 문까지 나갔다.
그 너머에는 놀랍게도 남자들 몇 명이 우람한 체격을 과시하며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킬리울과 야인족이었다.
“……킬리울!”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일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힐리베리가 더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해서 온 걸까?
이윽고 킬리울이 눈짓하자 다른 야인들이 말 위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저것들이 다 뭔지 살펴보았다.
결이 고운 하얀 털이 가죽끈으로 둘둘 말려져 있었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저건 내가 칼라니쉬 산에서 봤던 백곰들의 털가죽이었다.
“여기 보답이다.”
“……?”
보답?
달빛 아래 킬리울의 눈동자가 선명 면서도 깊었다.
뭔가 마음의 결단이라도 내린 눈치였다.
“우리 야인족들을 기쁘게 해 준 대가.”
“…….”
두근두근, 어쩐지 내 가슴이 뛰었다.
킬리울은 나와 알렉을 넓게 응시했다.
“오늘 당신 귀족들 덕분에 우리 야인들이 오랜만에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행복해했지.”
“…….”
정말 축제 분위기였던 거구나.
“그 전설의 영약을 구해 주고 우리 야인들에게 기적 같은 경험을 선사해 줘서 고맙군.”
“…….”
“이건 그 보답이다. 북부의 겨울을 나기에 백곰의 털 만한 게 없지.”
“…….”
나는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뭐라 말도 못 하는 사이 킬리울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처음부터 우리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던 듯 말의 머리를 돌려 휙 떠나갔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히 맴돌았다.
“…….”
내 심장도 그만큼 벅차게 뛰었다.
뭔가 이뤄 냈다는 것을 직감할 때의 박동이었다.
이미 야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쌓이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5 화

* * *

루이제는 야인들에게 받은 백곰 가죽 중 하나를 성 1 층 한쪽에 장식해 놓았다.


다른 사용인들과 더불어 무척이나 뿌듯하게 보송보송한 털가죽을 올려다보았다.
“북부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동료의 선물이네요.”
손까지 맞잡은 루이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녀의 말에 제인도 감탄하며 동조했다.
“성에 저런 걸 걸어 놓으니까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따뜻해 보이기도 하고요.”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마님. 저런 걸 잡다니 야인들은 정말로 강한 사람들인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아.”
제임스의 말에 루이제가 대답했다.
야인들의 기동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이미 직접 봐서 루이제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제는 조금 더 백곰의 가죽을 감상하다가 알렉을 돌아보았다.
마침 루이제를 보고 있던 알렉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제 올라갈까요?”
“알겠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루이제는 살짝 입가를 끌어당기며 그에게 팔짱을 꼈다.
곁에 있던 앤드류가 그 모습을 보더니 동그래진 눈으로 그와 루이제를 훑어보았다.
“그럼 앤드류도 들어가서 쉬어요.”
“아,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앤드류가 길을 비켜 주듯 물러나자 알렉도 그에게 짧게 눈인사를 건넸다.
루이제와 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괜찮을까?
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야인들에게 습격을 당해 칼라니쉬 산에 다녀왔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야인들의 거처까지 갔다가 또 마차를 타고 돌아왔으니 꽤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며 루이제가 조금 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킬리울이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거 있죠? 이제 우리가 북부에서 무얼 하든
일단 야인들의 텃세는 모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잘되었습니다. 야인들이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모두 루이제 덕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답이라고 선물을 주고 가다니 그가 생각해도 의외였다.
킬리울이 꽤 인정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난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당신이야말로 그 험한 산에서 날 안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
그게 고생이었을까?
퀘스트 제한 시간 내에 힐리베리를 찾지 못할까 봐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러나 루이제를 안고 다닌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제의 촉감과 체온이 지금까지도 그의 몸에 부드럽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가슴도 계속해서 미약하게 두근거렸다.
“루이제.”
“네?”
그의 부름에 루이제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3 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걸음을 멈춘 알렉은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루이제에게 말했다.
“방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
알렉은 루이제를 당겨 끌어안았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박한 순간, 흩날린 머리카락이 가라앉으며 영주 부인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알렉.”
그의 품이 느슨해졌다.
루이제는 그의 옷을 꽉 붙잡으며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은 그녀를 서서히 놓아주었다.
따뜻한 몸이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졌다.
“고마워요. 덕분에 고생을 덜었네요.”
“다행입니다.”
“…….”
말없이 눈길이 맞닿았다.
그 묘한 분위기에 루이제의 눈망울이 한번 일렁였다.
조금 더 서로를 마주 본 순간, 잠시 망설인 알렉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루이제의 등을 감싸며 이마에 살짝 입술을 내렸다.
그녀의 몸이 약간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겨우 이마에 입술을 맞췄을 뿐이지만 그의 심장도 뭉클하게 욱신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오래되지 않아 멀어졌다.
“……그럼 좋은 꿈 꾸십시오, 루이제.”
“…….”
남겨진 루이제가 느낄 아쉬움을 그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 * *

“하아.”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건 뭘까?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떨리면서도 열띤 기분이 들었다.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아직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부부 사이의 기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루이제는 방으로 들어갔을까?
그냥 성욕에만 눈뜬 거라면 조금 전 그녀와 함께 방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기분이었다.
루이제와 눈밭을 굴렀을 때 느꼈던 묘하게 뭉클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이 아직 그의 심장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역시 알렉시스의 감정인가? 이 몸이 진짜 알렉시스의 몸이라?’
자신과 똑같이 닮은 외모와 체격이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몸이다 보니 감정이 헷갈렸다.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루이제에게 이런 느낌이 들 수 있는 걸까?
이상했다.
알렉은 최대한 자신의 마음으로 루이제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양털을 팔며 유기농으로 방목했다고 우아하게 사기를 치던 모습, 엘로이에게 빼앗겼던 그의 음식을 채워
주던 미소.
가면무도회에서 그에게 부드럽게 감겨 오며 처음으로 했던 입맞춤.
황제와 황후 앞에서 과하게 예의를 차리지도, 그렇다고 굽히지도 않던 적당한 태도.
줄리아의 뺨을 가차 없이 내려치던 과감함.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지 않던 솔직한 말들과 함께 황제에게 복수를 하자고 했을 때 엿보였던 불꽃.
무서울 법한데도 야인들 앞에서 전혀 기가 죽지 않던 강인함까지…….
“하아.”
이윽고 창문을 닫은 알렉은 깊은 한숨과 함께 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돌아섰다.
잠시 이 기분을 떨쳐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루이제의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굳이 열거하지 않은 다른 장면들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물밀듯이 밀려왔다.
너무도 심란한 기분에 푹신한 의자에 앉아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건 내 마음이잖아……?’
이미 그의 몸이 루이제에게 빠져 버렸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과 뺨, 손 틈새에 감기는 살결과 한 팔에 꼭 안고도 남는 허리…….
그 모든 것들을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까지 이토록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줄은 몰랐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깨닫고 보니 루이제를 생각하는 만큼 그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는 자각도 함께
들었다.
이 공허함은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루이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러면 어쩌자는 거지.’
혼란스럽게 일렁였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눈을 덮고 있던 손을 살며시 떨어뜨리며 눈을 떴다.
그를 향한 루이제의 모든 친절과 배려,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루이제가 그를 보며 생각하는 건 진짜 알렉시스였다.
이런 상태가 괜찮은 걸까?
지금까지 계속 알렉시스인 척 속여 왔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더 복잡해진 그는 우선 이 기분을 떨쳐 내려 시스템 창을 열었다.
허공에 핑크빛 글자들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조금 전 그가 입술을 내렸던 루이제의 이마가 눈앞에 선명했다.
이를 꽉 깨문 그는 애써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힐리베리 덕분에 경험치를 상당히 많이 올린 상태였다.
12 레벨이었던 레벨은 17 까지 상승했다.
캐스다인이 어디선가 구해 온 힐리베리 70 개로 경험치를 3,500,000 이나 손쉽게 얻어 가능했던 결과였다.
이제 레벨 18 까지 남은 애정도는 89,000 포인트, 남은 경험치는 345,088.
하지만 문제는 언제 또 퀘스트가 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캐스다인과 기드온을 통해 힐리베리를 찾아 경험치를 더 높이려고 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그러고 보니 백곰들한테도 HP 바가 떴었는데.’
그런데 그의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얻으려면 수백, 수천 마리는 죽여야 하지 않을까?
레벨이 오를수록 필요한 애정도와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백곰들을 멸종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
지금으로서는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의 눈빛이 흔들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6 화

* * *

‘이마 키스……?’
오늘 무슨 날인가.
눈밭 구르기에 이어 이마 키스까지 하다니.
전설의 영약이라는 힐리베리도 먹고, 야인들에게 선물도 받았다.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나는 그제야 방문을 열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만져 보았다.
괜히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설렜다.
입꼬리가 치솟으려고 해 입술까지 꾹 다물었다.
‘그냥 갈 줄 알았더니 이마에 뽀뽀를 다 해 주네…….’
이런 풋풋한 기분을 느껴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거의 처음 아니야?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애가 두셋은 있어도 안 이상할 사이에 고작 이마 키스로 설레다니.
전생부터 지금까지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이 바로 결혼을 한 나로서는 굉장히 귀한 경험이었다.
침대로 들어간 나는 포근하게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눈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록 그는 예의상 해 준 거라고 해도 내가 좋았으니 괜찮았다.
역시 부부 사이의 일을 치렀더니 알렉도 이마 키스 정도는 스스럼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뿌듯하고 행복하게 잠을 청했다.
꿀 같은 잠을 잔 덕이었을까?
아침에는 꽤 산뜻한 기분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외출할 준비를 마친 나는 만찬실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은 이후에 알렉과 앤드류와 함께 카나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만찬실에는 이미 알렉과 앤드류가 와 있었다.
“어서 앉으십시오.”
“오셨군요.”
나는 가장 가까이 앉은 앤드류에게 눈인사를 했다가 알렉을 응시했다.
“잘 잤나요?”
“덕분에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잠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저 잘생긴 얼굴을 보니 오늘 하루의 시작부터 축복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에게 살짝 웃어 준 내가 금세 시선을 돌려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앤드류는요?”
“저야 뭐 죽다 살아났는데 매일이 꿈같지요.”
“이제 내일이면 벌써 수도로 가는 날이네요.”
그리 말하며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모두 착석하자 사용인들이 요리를 하나씩 나르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라도 하고 있었어요?”
“아, 알렉시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르셀이 내기로 영주 부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데에 영지와 방직 공장을 걸었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놀라서 알렉을 응시했다.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알렉이 식기를 들며 대답했다.
“장갑과 구두를 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랬군요.”
마르셀이 기어이 미쳤구나.
잠시 놀랐던 나는 애써 가슴을 진정했다.
식탁 위를 보며 뭐부터 먹을까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뜻하지 않게 우리가 하워드 후작령과 방직 공장을 갖게 되겠네요.”
귀족들 사이에서 누가 그런 과감한 내기를 하나 했더니 마르셀이었다니.
아마 우리가 수도로 돌아가면 마르셀과 친한 사람들이 내기를 물러 달라고 부탁하러 올 게 분명했다.
마르셀 본인이 없던 일로 해 달라고 애원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웬일이래. 자다 일어났더니 떡이 생긴 것 같네.’
수도에 도착할 날이 더 기대가 되었다.
사교계에서의 내기는 내뱉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아무리 내기가 흥밋거리라지만 귀족들끼리는 자존심과 명예, 평판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앤드류도 식사를 하며 말했다.
“어디 꿈에나 상상했겠습니까. 우리가 돌아가면 다들 유령 보듯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영지와 방직 공장을 안 빼앗기려고 온갖 수를 쓰겠죠.”
“그것도 그렇군요. 그 마르셀이 가만히 당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앤드류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르셀은 상류층의 적폐 1 순위 중 한 명이었다.
만약 내기를 모른 척한다면 충분히 공개적으로 들춰내서 망신을 줄 수 있었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카나크로 향했다.
카나크는 북부의 중심인 곳이었으니 시간을 들여 제대로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번화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북부의 주택과 상점들은 칙칙한 빛깔의 벽돌로 지어져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편이었다.
그러나 수도 사람들의 취향으로는 이보다 더 삭막한 거리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눈이 자주 쌓이는 곳이라 외관 인테리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도로에는 눈에 젖은 땅을 밟지 않게 하려는 듯 돌이 깔려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우리를 안내해 줄 북부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정도 걷던 내가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말했다.
내 말에 앤드류가 허허 웃었다.
“그렇다고 야인들에게 북부 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가는 주먹으로 얻어 맞을 것 같습니다.”
“그건 생각도 못 해 봤네요.”
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야인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킬리울은 우리에게 북부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려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안내인으로 고용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벌써 카나크에 세 번이나 와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내밀한 사정까지 알기는 어려웠다.
북부에서 오래 산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북부의 세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특히 내가 계획한 일들을 북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물어보고 싶어…….’
그만큼 북부를 잘 아는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일을 진행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마침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알렉이 말했다.
“아무래도 북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우리의 보좌관으로 고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래야겠죠? 그런데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조금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앤드류도 의아해하면서 약간 기대하는 눈빛으로 알렉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가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내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북부에는 신기한 게 정말 많은 것 같네요.”
내 말에 앤드류가 무척 공감하듯 감탄했다.
“저도 처음 왔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기막히게 추운 날씨도 그렇고 정말이지 새로운 세계가 아닙니까?
북부가 아니라 어디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줄 알았습니다.”
“앤드류가 보기에도 그랬군요. 주변 경관이 정말 특별하지 않나요? 눈 쌓인 산들도 그림 같고요.”
“뭐 여기서 길도 없는 성을 찾아야 한다거나 전설의 열매를 가져와야 하는 일만 없으면 관광으로 둘러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나 좋다니 다행이네요.”
앤드류의 반응에 나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황제의 명령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탓이었다.

‘대신 그 성에서 지내면서 주변을 융성하게 발전시켰으면 좋겠군. 그래도 한때 릴트 제국의 천혜 요새였던
곳이었는데 내버려 두기만 해서 마음에 거슬리던 참이었거든.’

정말로 이곳을 융성하게 발전시킨 이후에는 황제가 얼마나 많은 세금과 조공을 요구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여유 자금을 모아 놓아야 했다.
그러나 북부 안에서 황제에게 바칠 돈을 확보하는 건 북부인들을 수탈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최대한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관광은 그중 하나였다.
‘차라리 부유한 귀족들이 북부로 와서 돈을 쓰게 하는 게 좋겠어.’
꼭 세금 때문에만 거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황제를 치려면 많은 돈을 갖고 있어야 했다.
‘앞으로 사람을 써야 할 일도 훨씬 많아질 테니까…….’
그렇게 카나크를 둘러보는 동안 우리를 발견하는 행인들마다 흠칫 놀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첫 번째는 알렉의 외모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가 입은 옷이 북부인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어서
외부인인 것을 알아본 듯했다.
나는 카나크의 시장을 찾아가는 동안 이곳의 사람들이 새로 온 영주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들
거라는 다짐을 했다.

* * *

카나크에서 윌스브룩 성으로 돌아온 건 해 질 무렵이었다.


북부가 워낙 넓은 탓에 이동하는 데에만 왕복으로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
저녁을 먹고 자신의 방으로 간 알렉은 그제야 시스템 창을 열었다.
낮에 루이제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슬슬 북부인 중에 조력자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알렉은 캐스다인을 불러냈다.
‘캐스다인 경.’
이윽고 안개 같은 한기와 함께 그의 사역령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를 찾았나.’
방 안을 울리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와 은발의 날카로운 생김새, 이리저리 찢어진 망토.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피를 빨아먹다가 초췌해지지만 않았어도 생전에 꽤 사랑스러운 외모였을 것 같은
이목구비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7 화

캐스다인은 주인인 알렉의 레벨이 오르면서 덩달아 레벨이 올랐다.


기드온도 마찬가지로 더 강해진 상태였다.
‘기드온.’
생각난 김에 알렉은 기드온도 불러 냈다.
‘크릉…….’
의자에 앉은 뒤 기드온을 무릎 위에 놓고 작은 몸을 쓰다듬으며 캐스다인에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다.”
‘분부하라.’
“북부인들 중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보좌관으로서 북부인들을 대표해 줬으면 좋겠는데, 넌
이곳의 영주였을 때 보좌해 준 사람이 따로 있었나?”
알렉은 살아 있는 북부인 중에 북부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캐스다인은 이곳의 영주였긴 했지만 수백 년 전의 일이라 지금의 북부인들의 의견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선대 영주로서 받을 수 있는 조언은 많았다.
이미 야인들과 힐리베리에 대해서도 캐스다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주인을 보좌할 사람이 필요한 거군.’
“맞다.”
‘나는 보좌관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주인을 잘 보필할 만한 사람을 한 번 찾아보겠다.’
그리 말한 캐스다인이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냄새로 무언가를 감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피 냄새라도 맡는 걸까?
갑자기 왜 냄새를 맡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캐스다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희한하군. 카나크 어딘가에서 내 후손의 냄새가 난다.’
“……후손?”
캐스다인에게 후손이 있었나?
놀라운 마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후손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봉인된 지 수백 년이나 지난 시점에 피 냄새로 자신의 후손을 찾다니.
알렉은 캐스다인이 인간의 피 냄새를 아주 잘 구분할 수 있다는 시스템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게 이 정도로 특출난 능력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생전에 자식이 있었나?”
‘내가 박쥐에 물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인과 어린 아들이 성에서 도망쳤다.’
“……그랬군.”
조금 안쓰러운 이야기였지만 캐스다인의 안색은 평소처럼 냉랭하고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주인을 돕기에 아주 제격인 피 냄새로군. 내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주인을 잘 보필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비록 캐스다인은 흡혈귀이긴 했지만 그랜드칼리의 영주였던 사람의 후손이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일단 누군지 알아보고 싶군.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찾아가서 자세히 보고 오도록 해.”
‘알겠다, 주인.’
이윽고 캐스다인이 찢어진 망토를 휘날리며 벽을 통과해 밖으로 날아갔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알렉은 이만 기드온도 시스템 안으로 넣었다.
이미 늦은 밤이니 캐스다인은 내일이 지나야 돌아올 것 같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알렉은 이만 겉에 걸친 옷을 벗었다.
벌써 이 세계에 많이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원래 살았던 곳을 떠올리지 않은 지 얼마나 된 걸까?
이렇게까지 익숙해질 줄은 몰랐는데, 지금 그는 마치 정착할 것처럼 이 세계의 일에 점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루이제.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 반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게 다른 남자의 여자일 거라고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알렉시스의 영혼이 다시 돌아올지 말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이 이상 더 깊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은 또 그렇지 않았다.
옅은 한숨을 쉰 알렉은 우선 오늘은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스템 창을 다시 켰다.
무심히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있는데 등장인물 일람이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언제부터 저랬던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등장인물 일람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정보가 갱신되어 있었다.
원래는 물음표였을 내용이었다.

[알렉시스 마이어스]
[남, 나이: 23 세]
[브레튼 공작. 외모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불세출의 미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특이 사항: 죽은 이후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
[자신의 마나를 병으로 착각했다. 몸 밖으로 마나가 터져 나올 것을 우려해 늘 몸가짐을 조심했다.]
[이세계에서 던전 브레이크로 사망했다.]

“…….”
던전 브레이크?
사망?
알렉은 시스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죽은 알렉시스가 또 죽었다는 사실도 놀랍긴 했지만, 던전 브레이크라는 말에 그의 눈을 의심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그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간혹 일어나는 일이었다.
게이트가 생성된 후 일정 시간 안에 보스 몹을 잡지 못하면 마물들이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헌터들이 파견되었지만, 간혹 헌터들의 눈에 띄지 않은
게이트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보스 몹을 잡는 것을 실패해도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런 던전 브레이크로 사망했다는 건…….
‘어느 세계로 갔나 했더니 게이트가 있는 세계였어?’
그가 살았던 곳과 동일한 세계일까?
알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마물에게 당했는지는 몰라도, 원래의 알렉시스를 생각하면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이 많았을 것이다.
알렉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가만히 누워 조금 얼떨떨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그와 영혼이 뒤바뀐 걸까?
아니.
이제 그가 살았던 세계에는 더 이상 게이트가 생기지 않았다.
그가 마수들을 인간 세계로 보냈던 신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이제 아무런 위협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아마 게이트가 출몰하는 다른 비슷한 세계에 있다가 죽은 모양이었다.
그는 진짜 알렉시스의 두 번째 죽음이 안타까운 한편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진 상황 하나를 파악했다.
‘알렉시스는 돌아올 일이 없다.’

* * *

수도에 도착하면 어떻게 등장하는 게 가장 좋을까?


나는 수도로 출발하는 새벽부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우리가 정말로 북부에서 무사히 윌스브룩 성까지 가는 길을 찾고, 수도로 돌아올 거라는 건 누구도 쉽게
기대하지 못할 일이었다.
앤드류까지 데려가게 됐으니 그 충격이 더 클 것이다.
‘마르셀부터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마르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귀환을 놀라워하고 반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길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성에 남을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님. 오시는 길에도 무탈하셨으니 가는 길에도 별 일 없을 거예요.”
“응. 고마워, 제인.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사용인들도 함께 올 거야. 그동안 처음 와 보는 성에서 애써
주느라 너무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마님. 오히려 재밌었는걸요. 그럼 마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고마워.”
내가 제인에게 살짝 웃어 주자 제인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 밖으로 나가니 알렉과 앤드류, 다른 사용인들이 짐을 실으며 수도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 때보다는 마차도 세 대로 줄고, 짐도 훨씬 간소했다.
“루이제.”
“알렉.”
마침 그가 날 발견하자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려오셨군요. 이 마차에 타시면 됩니다.”
그리 말하며 알렉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한번 그를 보았다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 올랐다.
“고마워요, 알렉.”
그의 얼굴을 보니 어젯밤에 그의 방으로 찾아갈까 말까 고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혹시 그가 날 보러 오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내가 잠들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아직은 역시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걸까.’
조금 아쉽긴 했지만 3 년이나 나에게 철벽을 치던 남자가 한순간에 매일 밤 날 원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성급한 욕심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의 문밖을 보고 있는데 마침 앤드류가 웃으며 다가왔다.
“앤드류!”
“왔군요, 루이제! 드디어 수도로 출발한다니 정말 기대가 됩니-.”
탁.
“…….”
갑자기 마차의 문이 닫혔다.
문밖에 서 있던 알렉이 닫은 것 같았다.
그가 왜 문을 닫았나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다시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앤드류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알렉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마차에 올랐다.
그는 문을 닫고 걸쇠를 걸며 말했다.
“곧 출발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앤드류는요?”
“다른 마차를 탄다고 하던데요.”
“그렇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같이 탈 것 같았는데,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걸까?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마차를 타고 어련히 잘 오겠거니 싶었다.
“새벽부터 일어났는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가는 길에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깨 좀 빌려줄래요?”
“……무릎도 괜찮고요.”
무심한 듯 담백한 그의 말에 나는 입가를 조금 당겨 웃었다.
원래 같았으면 어깨를 빌려 달라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을 텐데, 지금은 무릎도 내어 준다니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가 마차 한쪽에 놓인 푹신한 담요를 들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옆 자리로 옮겼다.
앞으로 꼬박 하루가 넘게 그와 단둘이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8 화

그의 바로 곁에 앉은 나는 잠시 애틋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에 알렉도 털 담요를 들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차의 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 무릎에 앉으면 무거울까요?”
“…….”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려면 루이제를 세 명쯤 앉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손으로 살짝 입술을 가리며 볼을 붉혔다.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엘로이 말대로 정말 연애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나를 들어 안아 자신의 다리 위로 앉혔다.
팔 하나로 내 등을 단단히 받치고,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대며 너무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머리가 그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크고 듬직했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당신 다리에 쥐가 날까 봐 걱정이긴 하네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불편하면 말씀하십시오.”
“알겠어요.”
나는 사랑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도 나를 응시했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꼭 이 순간 속에 갇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 흡족함을 그에게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 내가 웬만해서 정말 좋은 의자에 많이 앉아 봤는데, 당신 품이 나한테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
보기만 해도 좋았던 남자였는데, 그런 남편이 적극적으로 날 안아 주기까지 하다니.
꼭 꿈결인 것처럼 뭉클했다. 그의 눈빛도 조금 진지하게 깊어졌다.
내가 살포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자 그가 가깝게 내려왔다.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을 느껴 보았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진짜 부부 같아…….’
수도에서 북부로 올 때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데면데면했는데, 지금은 눈빛만 오고 갔는데도 입술이 닿았다.
그토록 꿈꾸던 사이가 된 것 같아 경이로웠다.
그가 내 입술을 머금으며 틈새를 가르고 들어왔다.
나는 상체를 더 세우며 그의 목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내 뒷머리를 받친 그의 손은 내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탓에 내 입술은 옴짝달싹할 곳 없이 점점 벌어지기만 했다.
내 입 안 가득 그와 내 혀가 엉키며 부드럽게 뭉개졌다.
“하…….”
달콤해라.
절로 벅찬 숨결이 새어 나왔다.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얽히는 호흡에 빈틈이 없었다.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그 길이 무척 짧게 느껴지지 않을까?
사랑스러운 감촉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잠시 그와 내 입술이 떨어졌다.
조금 혼몽해진 시야로 그의 짙은 눈동자도 약간 헝클어진 게 들어왔다.
평소의 그도 멋있었지만, 저렇게 열 띤 눈으로 흐트러진 모습은 더 볼 만했다.
“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예?”
“왜 서로 혀를 맞대면 좋은 걸까요?”
“…….”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그를 더욱 애틋하게 응시했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아요? 난 이게 왜 좋은지 궁금하더라고요…….”
생애 처음 해 보는 제대로 된 키스는 그 몽환적인 자극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와 부드럽게 엉킬수록 가슴 속이 녹아내렸다.
저절로 숨이 달뜨며 그 이상을 바라게 되었다.
입맞춤에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이윽고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그냥 계속 하고 싶은 생각만 들던데요…….”
“…….”
아.
그건 미처 예상 못 한 말인데.
그는 열을 품은 눈으로 고요하게 내 얼굴을 한번 살피더니 다시 턱을 기울이며 고개를 내렸다.
나도 슬며시 눈을 감으며 살짝 입술을 열었다.
꼭 숨을 쉬는 당연한 일처럼 입맞춤이 오래 이어졌다.
“하.”
점점 기울어지던 내 몸이 푹신한 의자의 표면에 닿았다.
그의 상체도 내 위로 쏟아졌다.
“루이제.”
올려다보니 그가 한층 뜨거워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른침을 꾹 삼킨 내가 조금 젖은 입술로 물었다.
“여기서 하면…… 들킬까요?”
“…….”
왜 이렇게 마차 안이 더울까?
뺨이 익는 것 같았다.
그는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금세 다시 내 눈을 응시했다.
“너무 많이 흔들리지만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
심장이 철렁했다.
내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자 다시 입술이 짙게 포개졌다.
그와 나는 도저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망토를 풀었다.
아직 출발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갑자기 마차가 멈출 일은 없을 것이다.
마부석과 연결된 자리에는 창문도 나 있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 이상 우리의 소리는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에 묻힐 것 같았다.
차체에 난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다 벗기거나 나 또한 다 벗을 생각은 없었다.
입술과 혀가 어떻게 섞이고 얽히는지도 모르게 가쁜 호흡이 오고 갔다.
진득한 손길로 그가 내 몸을 훑고, 나도 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마음이 급했다.
마차의 좁은 좌석 때문에 괜스레 더 조바심이 났다.
내 한쪽 무릎이 들린 순간 그의 손이 내 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누가 누구의 옷을 푸는지도 모르게 조급하게 손끝이 움직였다.
“하아.”
드레스 자락이 올라간 다리에서 마차 안의 공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누르자 화들짝 몸이 떨렸다.
이를 꽉 깨물었으나 그의 손길에 벅찬 숨결이 연거푸 토해졌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나는 가느다란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푹신한 시트를 쥐었다.
낯설면서도 자극적인 감각에 동공이 얼어붙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반응을 빼곡하게 응시하면서도 다른 손으로 내 드레스 앞쪽의 여밈을 풀었다.
단단하게 동여맨 옷이 느슨해지자 가슴이 여유롭게 풀어졌다.
그러나 그 해방감을 채 다 느끼기도 전에 그의 손이 옷을 비집고 들어왔다.
뜨겁고 강렬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주는 자극을 버텼다.
오히려 날 만지는 그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 알렉.”
이제 그만 애태워도 될 것 같아.
“루이제.”
그가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신음 같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프면 말하셔야 합니다.”
“아, 안 아파- 하!”
“……루이제?”
“아, 괜찮아요. 그냥, 좋아서요…….”
“…….”
그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심장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아직 다 된 게 아니라는 걸 이제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하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끝에 바짝 힘을 주었다.
버거웠지만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때 마차가 덜컹거렸다.
“……흐읏!”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차가 덜컹거린 충격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그는 내가 미끄러져 떨어질까 봐 내 머리 옆쪽 의자를 붙잡고 상체를 세웠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둔 채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알렉…….”
마치 난간처럼 그의 팔이 내 몸을 지탱했다.
마차가 흔들리는 탓에 부드러운 시트 위에 누운 내 몸도 덩달아 작게 나부꼈다.
가만히 있어도 아찔한 자극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는 기껏 하나가 된 우리의 몸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만 있는데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우, 우리 잠깐 가만히 있어 볼까요?”
“…….”
“당신을 품고 있으니까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가만히 느껴 보고 싶어요.”
“…….”
이 남자가 언제 이렇게 나한테 소중해진 걸까?
그를 다시 담고 있으니 너무도 애틋했다.
꼭 알을 품은 어미 닭이라도 된 것 같이 사랑스럽고 귀중했다.
잠자코 그를 느끼는 동안 그의 눈빛도 깊어졌다.
이윽고 그는 지금까지 나에게 한 번도 물은 적 없는 말을 했다.
“……제가 당신의 남편이라서? 아니면, 제가 저이기 때문에 소중합니까?”
“…….”
설마 이 남자가 내 마음을 궁금해 하는 걸까?
나는 약간 놀랐지만 이내 손 하나를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왜요? 내가 나랑 결혼한 남자면 다 좋아하는 걸까 봐 걱정했나요?”
“…….”
정말로 그래서 물어본 듯 그의 눈빛이 살짝 경직되었다.
여태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전보다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걱정 말아요. 난 당신이라서 좋은 거니까.”
“…….”
“애초에 난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첫 결혼기념일이 되기도 전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고요…….”
“…….”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조금 불거졌다.
내 말에 심경의 변화라도 찾아온 걸까?
“……하아!”
방심한 순간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99 화

“아아, 아!”
그여서 좋다는 말이 그에게 반향이라도 일으킨 걸까?
그가 유독 더 열렬하게 나를 탐닉했다.
그러나 마차의 움직임보다는 격렬하지 않게, 이 흔들림에 우리의 떨림을 숨길 수 있을 만큼만 절제된
힘으로 그윽하게 움직였다.
“루이제.”
“아, 알렉.”
억눌린 듯한 그의 움직임이 어쩐지 더 깊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한숨을 길게 토한 뒤 벅차게 말했다.
“당신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며 내 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흐읏.”
흐느끼듯 신음을 토한 나는 다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내 마음이 궁금했던 거구나.
그가 내 속마음에 관심을 갖는 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더욱 뜨거워진 눈으로 그가 확고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자꾸만, 당신이 욕심납니다.”
“……네?”
뭐라고?
“아.”
그가 내 신음을 삼켰다.
입술을 덮고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빈틈없이 입 안을 훑으며 녹여 없앨 것처럼 의욕적으로 핥아
뭉갰다.
방금 뭐라고…….
그의 떨림이 더욱 은밀하게 빨라졌다.
정말로 다시 느껴 보고 싶었던 감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아득해졌다.
그런데 내가 욕심난다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 걸까?
한참 늦긴 했지만 지금이나마 듣게 되어서 꽤 만족스러웠다.
욕심 좀 더 내 봐…….
눈앞이 마구 떨렸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또 부질없이 떨어져 내렸다.
“하, 아, 알, 렉…….”
침실에서처럼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어서 더 가슴이 타들어갔다.
어차피 갑자기 마차가 멈춘다 해도, 전처럼 야인들이 습격하지 않는 한 문이 벌컥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달리 내 손길은 그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더 닿고 싶고 느껴 보고 싶었다.
“루이제.”
그가 다시 한번 뜨겁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목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숨결과 입술에 작게 몸서리쳐졌다.
나를 동여매고 있던 드레스도 그의 손길에 점점 헐거워졌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손을 파묻고 움켜쥐었다.
곧 끝날 듯한 기분이 고조되었다.
아아.
그냥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마찰할수록 고여 있던 무언가가 아찔하게 해소되는 기분이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모든 게 사라지고 이 불타는 듯한 느낌과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느낌은 한순간 정점에 올랐다.
“아! 하…….”
내 입술과 뺨, 목덜미로 그의 입술이 누르며 지나갔다.
황홀한 여운의 위로 그의 숨결이 진하게 달라붙었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어지러운 귓가에 그의 열띤 속삭임이 들렸다.
그도 나만큼이나 호흡이 거칠었다.
“점점 더 당신을 욕심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뭘 고민하나요. 그래도 돼요…….”
겨우 대답한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와의 제대로 된 첫 경험이 너무도 황홀해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더 좋고 잘 맞을 줄이야.
그와 진정한 부부 생활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속궁합이 완벽하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마차의 열기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달아올랐다.

9. 그의 아내가 바랐던 것들

마차가 수도에 있는 우리의 저택 앞에서 멈췄다.


이틀에 가까운 시간을 꼬박 달린 후였다.
중간에 마차에서 내려서 쉬기도 했지만, 역시나 수도와 북부는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쩐지 수도를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시간이 지난 느낌이 들었다.
마차 안에서 지루할 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쳐 잠들면 다음 날이었고, 그다음 날도 그와 단둘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좀처럼 식지 않는 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윽고 뿌듯하고 벅찬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난 후였다.
북부에 있었던 건 채 열흘이 되지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수도의 저택을 한번 크게 올려다본 나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갔다.
“……헉, 주인님! 마님!”
“안녕? 우리 왔어.”
“세상에, 두 분 어서 들어오세요! 다들 어서 나와 보세요! 주인님과 마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우리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용인이 정신없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와 알렉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몰랐던 탓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물씬 느껴졌다.
이윽고 사용인들이며 엘로이가 어디선가 우다다 뛰쳐나왔다.
“주인님!”
“마님!”
“이제 오는 거야?”
엘로이가 휘둥그런 눈으로 나와 알렉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나는 여전히 알렉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있었니? 어머님은?”
“이제야 오는구나.”
마침 홀에서 2 층으로 연결된 중앙 계단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시어머니가 실크로 된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우아하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얼굴만 봐도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편하게 지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매끈한 얼굴에 광이 다 날 정도였다.
‘팔자 늘어지게 편히 쉬셨군.’
그래서인지 나를 보는 눈빛에 웬일로 못마땅한 기색이 없었다.
그 순간 나와 알렉의 뒤쪽에서 따라 들어오던 앤드류가 앞으로 나섰다.
앤드류는 당분간 우리 저택에서 머물기로 했다. 어차피 저택으로 돌아가 봤자 사용인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상황일 게 분명했다.
앤드류는 모자를 벗고 시어머니를 향해 짧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렌트 대공작 부인.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앤드류 몬델리이입니다.”
“……꺅!”
비명을 지른 건 엘로이였다.
앤드류가 누군지 알아본 듯한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도 잠깐 움찔했으나 이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알고 말고요. 몬델리이 백작. 북부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군요.”
“모두 알렉시스와 루이제 덕분입니다.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었지요…… 흐윽.”
야인들의 거처에서 우리를 만난 기억이 불쑥 떠오른 듯 앤드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엘로이는 눈만 크게 뜬 채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고, 시어머니는 평소의 도도한 태도로 사용인들에게
지시했다.
“손님을 모실 방 좀 마련하거라.”
“알겠습니다, 대부인.”
“그래서 모두들 식사는 한 거니?”
“아뇨, 어머님. 저희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옷 좀 갈아입고 만찬실에서 모이자꾸나. 우리도 아직 식사 전이란다.”
“알겠어요.”
나와 알렉은 우리의 침실이 있는 2 층으로 올라갔고, 앤드류는 사용인을 따라갔다.
엘로이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우리와 앤드류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뒤에 만찬실에서 다시 모인 우리는 풍족한 식사를 시작했다.
북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흘렀다.
윌스브룩 성을 실제로 보면 드라큘라는커녕 그 장엄함에 압도된다는 사실과 야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잡혀갔다가 앤드류를 만난 일.
야인들이 힐리베리라는 전설의 열매를 요구해서 가져다주었다가 백곰의 가죽을 보답으로 받은 이야기까지.
수도와 북부를 왕복한 날들을 빼면 북부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그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엘로이의 입은 떡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북부가 아니라 어디 다른 세계라도 다녀온 거 아니야?”
“북부가 좀 그런 곳 같더라.”
“정말로 릴트 제국에 그런 데가 있다고?”
“궁금하면 너도 와 볼래?”
내가 한쪽 입가를 당겨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엘로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슬그머니 내리깔았다.
내가 생각해 봐도 어디 꿈속에서 모험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비현실적인 일들이긴 했다.
북부에서의 일들을 어느 정도 이야기했을 때였다.
“그래서 두 분은 저희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내 물음에 시어머니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우리야 별일 있었겠니. 역시 수도에 있으니 살 만한 것 같구나.”
“…….”
왠지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어떻게 지냈는지 알 것 같긴 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수도의 분위기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 분위기는 어때요? 여전한가요?”
이번에는 엘로이가 대꾸했다.
“여기는 뭐 평소랑 똑같았지. 언니랑 오라버니가 백작님도 구하고 백곰한테 맞아 죽을 뻔했을 때도
하루하루가 똑같이 지나갔는걸?”
“그래? 티룸이나 무도회에도 갔었니?”
“어머니랑 티룸하고 오페라 극장에만 갔었어. 사람들이 언니랑 오라버니 이야기는 많이 하더라. 돌아올지
안 올지 궁금했나 봐.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그런 얘기도 쏙 들어가고 안 들리던데?”
“그랬구나. 사람들한테 우리가 돌아올 거라는 말은 안 했어?”
“누가 말 걸길래 하긴 했지. 그런데 별로 안 믿는 것 같긴 하던데.”
“그렇긴 하네.”
나는 엘로이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북부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사교계에서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였었던 모양이다.
엘로이가 아무리 확신에 차 돌아올 거라고 말했어도 가족으로서 품는 헛된 희망 같은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대충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온 나는 그동안 밀린 우편물을 확인했다.
알렉은 앤드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접실에 술을 마시러 간 참이었다.
사교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에 적당한 초대가 있을까?
최대한 빠른 날짜가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편물들을 살펴보던 내 눈길이 어느 초대장 하나에 머물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0 화

마침 내일 저녁에 열리는 무도회였다.


개최자와 장소를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일 듯했다.
일단 그 무도회의 초대장을 챙긴 나는 나머지 우편물은 다시 보관함에 넣었다.
이제 목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돌아선 순간, 대뜸 보인 엘로이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엘로이는 내가 놀라든 말든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한 걸음 다가왔다.
“언니, 나 물어볼 게 있는데.”
“응?”
“그 백곰 가죽은 어떻게 생겼어? 가져왔어?”
백곰 가죽?
엘로이가 백곰 가죽은 왜 찾는 거지?
눈빛을 보아하니 백곰의 털가죽으로 자신의 숄이라도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그 귀한 걸 그렇게 허비할 수는 없지.
나는 엘로이를 쉽게 단념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알렉한테 물어보렴.”
“오라버니랑 말 섞기 싫으니까 언니한테 물어봤지.”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백곰의 가죽을 가지려고?”
“아니. 안 가질 건데? 나는 그냥 보기만 하려고 했어.”
엘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치미를 뗐지만, 속마음은 전혀 안 그래 보였다.
나는 엘로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행동을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쟤가 백곰 가죽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혹시 이거 뜻밖의 수확인 걸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엘로이가 북부에 와서 도와줄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엘로이 또래의 북부 소녀와 소년들을 영주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그녀만 한 존재도 없기
때문이었다.
백곰 가죽으로 엘로이를 북부로 꾀어낼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윌스브룩 성에 오면 볼 수 있어. 아니지, 엘로이 네가 북부에 온 기념으로 하나 줄 수도 있겠다.”
말을 마치며 웃는 눈으로 엘로이를 응시했으나 엘로이의 표정은 식어 버렸다.
“나 북부 절대 안 가. 혹시 모를까 싶어서 다시 말하는데, 절대로 안 갈 거야. 시골인데 춥기까지 한 거
제일 싫어.”
“그렇구나. 안타까워라.”
나는 아쉽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가 조금 더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엘로이 네가 백곰 가죽으로 치장을 하고 다니면 확실히 또래 영애들 기를 죽이고 다니겠네.”
“……뭐?”
“무려 북부에서 가장 영험하고 두려운 산인 칼라니쉬 산에 사는 백곰의 가죽이잖아. 우리가 살면서 백곰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보자마자 죽을걸?”
“…….”
“북부에서는 백곰 가죽을 사고팔지도 않으니 돈이 있어도 못 사더라. 빼앗고 싶어도 야인들하고 싸워서
이겨야 돼. 엘로이 네가 그런 백곰 가죽으로 숄이라도 해 입으면 아나벨 황녀도 못 갖는 걸 갖는 거
아니야?”
“……!”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던 듯 엘로이의 눈이 커졌다.
역시 이럴 때는 꽤 단순한 아이라니까.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안타깝다는 듯이 더 불을 지폈다.
“그럼 아나벨 황녀가 너한테 얼마나 배가 아플까? 황제 폐하 무서워서 백곰 잡아 달라고 말도 못 할 텐데,
네가 영애들 관심을 한 몸에 얻는 거 보고 잠도 못 잘 거야.”
“……대박.”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은 엘로이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벌써 혹했구나.
나는 한쪽 입꼬리가 치솟아 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엘로이는 또래 귀족들의 관심을 먹으며 사는 아이였다.
구하기 힘든 드레스나 장신구에 늘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나벨 황녀보다 돋보일 수 있는 것이라면 알렉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얻어 냈다.
주로 사용인들에게 ‘엘로이 아가씨께서 고가의 백조 깃털이 갖고 싶어 앓아누웠다.’는 식의 이야기를
알렉에게 전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아나벨 황녀는 황제의 누이였지만 딱히 황제와 친밀한 것도 아니라 백곰 가죽만큼은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일에 황제가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다.
다른 귀족들 중에 황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백곰 가죽을 구해다 바칠 사람이나마 있을까?
앤드류 백작도 노예처럼 부려 먹은 야인들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엘로이를 자극했다.
“어때? 북부에 한번 가 보는 대가 치고는 꽤 괜찮지 않아? 가문이 망했다가 다시 귀환한 귀족 영애가
두를 만한 것으로 백곰 가죽처럼 위풍당당한 것도 없겠다. 네 또래들이 무척 신기해할 거야.”
“…….”
엘로이가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녀도 백곰 가죽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관심이 사교계에서 한 3 일 치는 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그러나 엘로이는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시, 싫어! 그래도 북부는 절대 안 가!”
엘로이가 휙 몸을 돌려 도망을 쳤다.
나는 너무 밉지 않은 눈으로 엘로이가 사라진 쪽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역시 한 번에 넘어오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엘로이가 북부에 가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욕실로 가기 전에 의복을 담당하는 사용인을 불렀다.
좋은 생각이 난 김에 마침 수도로 가져온 백곰 가죽으로 길이가 긴 숄을 만들도록 했다.
“내일 저녁 전까지 완성하는 건 힘들까?”
“아, 아닙니다, 마님. 그냥 재단하고 박음질만 하면 돼서 간단합니다.”
“그럼 다행이네. 부탁할게.”
“네, 마님.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헬렌도 잘 자.”
그제야 나는 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욕조에 한참이나 몸을 담그며 피로를 풀었다. 마차를 오래 탔더니 찌뿌듯해진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 침대에 누우면 1 초 안에 잠들겠어…….’
욕조 안에서 졸던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킨 후 나이트가운을 입고 침실로 향했다.
알렉은 아직도 앤드류와 술을 마시고 있으려나?
우리는 오늘 밤 내 침실에서 같이 있기로 약속했다.
아직도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의 여운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죽이고, 움직임까지 극도로 제한하면서 하려니 더 긴장돼서 좋으면서도 애가 탔었다.
그래도 나름 그가 마차 안에서 그 넓은 어깨를 구기며 집요하게 굴었던 건 평생 못 잊을 경험이었다.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던 내가 애써 꾹 참으며 내 방의 문을 열었다.
별 기대 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알렉?”
그가 길고 훤칠한 다리를 과시하듯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루이제.”
마침 그도 나를 발견하고는 일어섰다.
나는 문을 꼭 닫고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잘 때 입는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셔츠 사이로 가슴 근육이 살짝 비쳐 보였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까이 마주 서자 그에게서 산뜻한 목욕제의 향이 났다.
“여보.”
내가 그를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자 그도 내 허리를 감았다.
그의 몸이 보송하면서도 부드럽고 단단해서 안겨 있기에 딱 편안했다.
“많이 기다렸나요?”
“저도 방금 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랬군요. 술은 얼마나 마신 거예요?”
“두 잔도 안 마신 것 같습니다.”
“앤드류는요?”
“기절해 버려서 사용인들이 업고 갔습니다.”
“세상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하긴 살아서 수도에 왔으니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더 마시지 않고요.”
“……더 마시면 당신한테 술 냄새를 풍길 것 같아서요.”
“……정말로요?”
살짝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한 번 끄덕였다.
나를 생각해서 술을 적게 마셨다는 말을 들으니 놀랍고 조금 감동이었다.
어차피 그는 술을 거의 안 마시긴 했다.
누가 주는 건 사양하지 못했지만, 술을 먼저 찾지는 않았다.
나는 까치발을 높게 들어 그의 입술 아래에 코를 대 보았다.
그가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크게 숨을 들이쉬며 그의 체취를 느껴 보았다.
아주 미세하게 술기운이 느껴졌다. 살짝 아찔하면서도 달콤한 내음이었다.
다시 발꿈치를 내린 내가 웃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나는 술 냄새는 근사해서 좋은데요? 더 나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 말이 의외인 듯 그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말했다.
“그럴 줄은 생각 못 했는데요.”
“나도 지금 알았어요. 그동안 당신 냄새를 맡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도 했었고요.”
“…….”
그의 눈빛이 조금 측은하게 깊어졌다.
거의 항상 따로 잔 데다가 같이 있어도 지금처럼 가까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체취를 느껴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그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한 건 내가 불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를 더 꽉 껴안았다.
그러자 그도 내 몸을 으스러질 만큼 힘주어 안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당신이 날 욕심내서 좋아요.”
“지금도 탐이 나는데요.”
나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에게 품는 욕심은 어떤 걸까?
같이 몇 번이나 진하게 밤을 보내서 내 몸에 욕망이 생긴 걸까?
아니면 전에는 없던 마음이 이제야 생기기라도 한 걸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당신, 이제 날 사랑하는 건가요?”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역시 사랑은 아닌가?
아무래도 서로 맨살을 섞은 탓에 생긴 애욕 같았다.
우리는 그런 희열을 처음 겪어 봤으니 그럴 만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든든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꿈결 속을 걷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우리 같이 사랑도 해요. 그래 줄 거죠?”
“…….”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깊어졌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던 내 손을 떼어 내 꽉 움켜쥐었다.
흔들림 없이 확고한 눈으로 말했다.
“당신이 전보다 지금의 저를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1 화

그의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벅차서 공기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전보다 지금의 그를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크게 하고는 너무 늦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앞으로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당신이 좋아질 것 같아요.”
“…….”
“이제는 당신이 날 만족시켜 주고 있잖아요.”
그리 말하며 살짝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해 보였다.
그가 내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뇨. 루이제를 만족시키는 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더 날 벅차게 해 주려고요?”
잠깐 눈길이 오고 가자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무척 가벼운 것을 든 것처럼 힘을 들이는 기색 하나 없이 가뿐했다.
이윽고 내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마차에만 있다가 침대에 누우니 그 부드러움과 포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절로 오늘 밤이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자 그의 셔츠 속이 은근히 드러났다. 내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괜히 시선을 피하듯 눈꺼풀을 내리며 내가 말했다.
“그런데 알렉.”
“예?”
나에게 내려오던 그의 입술이 잠시 멈췄다.
“그래도 난 변하기 전의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완벽해졌다고 해서 예전의 당신을 잊을 수는
없잖아요.”
“…….”
생각해 보니 그가 출중하게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변하기 전의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나름대로 나에게 감동을 준 적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속상하고 아쉬웠는데, 이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아파서요.”
내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밤을 새워 가며 내 이름을 연습했던 그의 모습을 나는 얼마나 많이 훔쳐보았던가?
그때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저토록 간절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 갔다.
내 몸을 집요하게 탐닉하는 지금의 그도 좋았지만, 내 이름에 끈기 있게 매달렸던 과거의 그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열렬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내 옷을 여미고 있던 끈을 풀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가 있으니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부끄러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내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다시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아뇨. 난 끝까지 기억할래요.”
“…….”
“내가 아니면 누가 당신의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해 주겠어요?”
나는 그를 향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 *

밤이 깊이 무르익다가 새벽으로 이어졌다.


루이제는 금세 기절하듯 잠들었다.
알렉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나왔다.
“하아.”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와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루이제는 만족스럽게 잠에 빠졌지만, 그는 도통 잘 수 없었다.
북부에서부터 점점 더 기분이 심란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나신이었던 탓에 얇은 로브 하나를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저택의 안뜰 정원으로 이어진 테라스였다.
하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차라리 칼라니쉬 산 정상의 찬 공기가 간절했다.
“정말 미쳐 버리겠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한번 쓸었다.
애정도는 점점 어마어마하게 늘어가고 있는데, 이게 온전히 자신에 대한 애정이라 볼 수 있을까?
루이제에게 들었던 말들이 혼란스럽게 앞다투어 떠올랐다.

‘왜요? 내가 나랑 결혼한 남자면 다 좋아하는 걸까 봐 걱정했나요?’


‘걱정 말아요. 난 당신이라서 좋은 거니까.’

“…….”
그는 북부에서 수도로 오는 길에 루이제의 마음을 떠보았다.
어차피 알렉시스는 돌아오지 못하니 그가 그녀의 곁에서 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가 깨달아야 했던 건 진짜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진심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아니었다.
오늘 밤 그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당신이 전보다 지금의 저를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루이제의 대답이 어떠했는가.


그가 아닌 다른 남자만 생각하는 여자 같았다.

‘그래도 난 변하기 전의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완벽해졌다고 해서 예전의 당신을 잊을 수는


없잖아요.’
‘난 끝까지 기억할래요.’

그 말에 그는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진짜 알렉시스를 향한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았다.
가슴이 갑갑하게 타올랐다.
루이제에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새길수록 갈망만 깊어졌다.
“하아.”
다시 깊은 한숨이 나와 찬 공기를 크게 마셨다.
설마 이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녀를 만족시키는 건 그인데 여전히 루이제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왜 죽은 알렉시스일까?
루이제가 과거의 알렉시스를 이토록이나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었나?
어떤 면에서 보아도 객관적으로 지금의 그가 훨씬 더 유능했다.
시스템상의 애정도도 충실히 상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재의 그를 진짜 알렉시스보다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애정을 그가 껍데기만 쓴 채 대신 받고 있다는 허무한 느낌만 점점
짙어졌다.
그에게는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애정이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이 오갈 곳 없이 붕 떠 버렸다.
루이제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는 너무도 허무하고 공허해서 언제까지 이어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렉시스는, 루이제 같은 여자한테 그런 굳건한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거지?’
그동안 대체 뭘 어쨌길래?
그가 이 세계에 와서 들은 건 알렉시스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는데.
이래서 부부 문제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걸까?
복잡한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알렉시스를 능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조금 악물었다.
‘부러운 놈…….’
여기서 그가 루이제를 위해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다시 침실로 들어가 본 루이제의 모습은 그의 시야를 현혹하는 것 같아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 * *

다음 날 수도의 아침이 밝았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나는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 무도회에 갈 준비를 했다.
오늘 가게 될 무도회는 데미안 부부가 주최하는 모임이었다.
데미안과 의가 두터운 마르셀이 빠질 리가 없었다.
행여나 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었다.
“다 된 것 같습니다, 마님.”
“고마워. 알렉은 어디 있어?”
“주인님께서도 방에서 준비 중이실 거예요.”
“그럼 최근에 새로 맞춘 예복 좀 가져가야겠다.”
“네. 준비해 드릴게요.”
나는 내 침실에서 나와 알렉을 찾아갔다.
마침 오늘처럼 특별한 날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그의 옷이 있었다.
내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의 머리를 만져 주던 사용인들이 막 마무리를 끝낸 듯 물러섰다.
“알렉.”
“루이제.”
거울 앞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나도 그에게 다가갔다.
내 권유대로 머리를 올려 손질한 그는 유독 더 근사했다.
그가 조금 놀란 듯한 나를 서서히 한번 훑어보는 동안 사용인이 그의 예복을 가져왔다.
“당신도 거의 다 준비를 마친 것 같네요. 옷은 내가 입혀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한번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가 사용인들에게서 옷을 받아 들었다.
내가 입은 드레스도 화려한 밤의 무도회에 걸맞게 눈부셨지만, 그의 예복도 금사와 은사로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서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이윽고 다 입힌 후에 그의 옷깃을 정돈해 주며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역시나 놀라운 모습이었다.
“당신 이목구비에 이 화려한 옷이 빛을 다 잃는 것 같네요. 오늘 무도회에서 당신만큼 눈에 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앞으로는 어디서도 기 죽지 말아요.”
“…….”
나는 눈가를 한번 접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동자는 나를 보면서도 다른 곳을 보는 듯했다.
“그럼 이제 나가 볼까요? 지금 출발하면 적당히 늦을 수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그가 다시 나를 보며 깔끔하게 대답했다.

* * *

무도회장 안에 경쾌한 웃음과 음악 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마르셀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다른 세상인 듯 어두운 기운이 짙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르셀은 줄리아가 감옥에 갇힌 이후 계속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벗들은 마르셀의 주위에서 이것저것 아무 이야기를 던졌다.
그러나 마르셀은 좀처럼 웃지 않았고, 남자들은 다시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알렉시스가 북부로 출발한 지 벌써 열흘도 넘게 지났군.”
“이미 죽었다고 봐야지.”
“다른 사람들도 실패한 일을 알렉시스가 해낼 수나 있겠나?”
그제야 마르셀이 한쪽 입가를 비죽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2 화

지금 마르셀을 웃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알렉시스 부부가 북부에서 죽었을 거라는 뻔한


사실이었다.
누구보다도 마르셀은 그들 부부의 죽음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것들만 아니었어도 줄리아가 황궁 감옥에 갇힐 일은 없었을 거라고…….’
마르셀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겨우 루이제 하나를 죽이려다가 이 사달이 났다.
이제 줄리아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황궁 감옥에서 줄리아의 면회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 같은 거 죽이고 싶었으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마르셀은 눈빛을 불태우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줄리아를 감옥에서 만났을 때 홧김에 화를 냈지만, 지금은 그녀가 보고 싶었다.
차라리 후작저에 가두는 게 낫지 다시 갈 수도 없는 황궁 감옥에 갇히는 건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줄리아가 그를 두고 다른 남자들과 정을 나눴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정에 증오가 덧붙여지니 줄리아에 대한 마음이 더 크게 불어났다.
증오도 애정도 어느 것 하나 버릴 수가 없었다.
‘줄리아. 그래도 걱정 마. 너보다는 알렉시스 부부가 더 일찍 저세상에 갈 테니까.’
만약 루이제가 수도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 줄리아의 복수를 했을 것이다.
줄리아가 아무리 바람을 피웠어도 그녀는 하워드 후작 부인이니 남편으로서 대신 대갚음을 해 주는 건
당연 한 일이었다.
마르셀은 독한 술이 담긴 잔을 들어 들이켰다.
주위에서 알렉시스의 개죽음에 관해 떠들며 희희낙락했지만 굳이 그 대화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알렉시스와 루이제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원한을 품기도 처음이었다.
마르셀이 앙심을 불태우는 한편, 무도회의 분위기는 한층 화목하게 무르익고 있었다.
알렉시스 부부에 대해 가십처럼 떠들던 귀족들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대화를 주고받았고,
곳곳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평화로운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 한쪽에서 브룩스 헤이츠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알렉시스 부부는 잊혀지는 걸까?
보름 정도 전에 알렉시스가 그를 따로 만나 하려고 했던 말은 뭐였을까?
그날 줄리아가 루이제를 죽이려다가 걸린 탓에 알렉시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브룩스는 알렉시스 부부가 반드시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딱히 그들에게 악의가 없기도 했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던 황제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리 준비하는 게 어떤가, 브룩스.’


‘예? 무엇을-.’
‘석 달 후에도 알렉시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누군가 대신 윌스브룩 성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
‘…….’

“그 씹새…….”
브룩스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가 이내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절로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하필 황제는 다음 영주 후보로 브룩스 자신을 염두에 두었을까?
지금까지 충성스러운 행정 보좌관으로서 빈틈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황제의 목에 손톱자국이라도 내고 죽고 싶었다.
알렉시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대신 북부의 영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브룩스는
가슴을 진정시키듯 술을 마셨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제기랄.”
술맛 다 버린 브룩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부인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찾아보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먼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경쾌한 연주와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토록 듣기 거북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홀을 나가려던 브룩스는 불현듯 걸음을 멈춰 섰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이 멎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
다시 나타나길 절실히 바라긴 했지만, 정말로 살아서 또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브룩스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해 눈을 두 번이나 크게 깜박였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빛 때문인지, 아니면 저들이 유령이라도 되는 건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두 사람이 빛을 뿜어내며 팔짱을 낀 채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이제? 알렉시스?”
하도 믿기 어려워 브룩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작은 소리가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한 명, 두 명 무심코 고개를 돌려 홀의 입구 쪽을 응시했다.
시간이 무척 천천히 흘렀다.
귀에 거슬리던 밝은 음악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루이제! 알렉시스!”
결국 브룩스는 우렁차게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홀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놀라움과 반가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크게 이름을 부른 탓인지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이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루이제가 브룩스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 미소에 브룩스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저들은 유령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거야!’
으아악!
브룩스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달려가 저들을 부둥켜안고 방방 뛰고 싶었다.
“꺅!”
어느 귀부인의 비명이 무도회장의 높은 천장까지 찌르며 울렸다.
“저게 누구야?”
“세상에, 루이제와 알렉시스잖아요.”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말도 안 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요란스러웠다.
마침내 홀의 중앙 쪽으로 다다른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멈춰 섰다.

* * *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나는 무도회장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사람들이 나와 알렉을 꼭 죽었다가 살아난 좀비 보듯 했다.
이 무도회장 안의 모두가 우리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대뜸 힘찬 목소리와 함께 브룩스가 나와 알렉의 앞으로 다가왔다.
브룩스는 황제의 최측근이었으나 나는 그가 줄리아를 파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증언을 해 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헤이츠 후작.”
알렉이 브룩스의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건넸다.
브룩스는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지금 알렉시스와 루이제를 보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의 물음에 다른 사람들의 눈빛도 덩달아 간절하게 빛났다.
이렇게나 보고도 못 믿다니.
나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가 대답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헤이츠 후작.”
“……이럴 수가!”
브룩스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다른 사람들도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가슴을 꾹 누르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터 황제는 윌스브룩 성을 찾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냥 와도 문제였고, 정말 성에 다녀왔다고 해도 놀랄 일이었다.
“북부에는 다녀온 겁니까?”
브룩스가 금세 다시 묻자 알렉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브룩스. 우리는 어제 늦게 북부에서 수도로 도착했습니다.”
알렉에 이어 나도 말을 덧붙였다.
“윌스브룩 성도 찾아서 며칠 머물렀답니다.”
“맙소사…… 그 윌스브룩 성에 들어갔다고요? 거길 갈 수 있는 겁니까?”
“아뇨. 길을 찾느라 고생을 많이 해야 했어요. 산도 부수고 암석도 부수고 뭐 그런 것들이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말을 지어냈다.
내가 고생을 한 건 하나도 없었다.
무도회장 안은 이미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군!”
대뜸 들린 소리에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의 뒤쪽으로 마르셀이 오물이라도 입에 문 표정으로 앉아 나와 알렉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조금 더 다가오더니 험악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그런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거지? 북부에 가긴 갔었나? 황명이 그리 우스워? 우리가 북부에 갈
일이 없다고 해서 다들 속아 넘어갈 줄 알아?”
“…….”
하여간 조금도 예상을 비껴가지 않는구나.
사실 저들이 믿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데미안이나 마르셀한테 명령을 받아서 북부로 간 것도 아니잖아?’
그 순간 알렉이 무심한 듯한 어조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데미안 웰스 후작을 가장 먼저 윌스브룩 성으로 초대해야 하나?”
“뭐?”
데미안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런 데미안을 향해 나도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꼭 와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이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인가 보네요.”
그리 말하며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앤드류도 함께 왔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우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앤드류?”
생각도 못 한 이름에 데미안과 브룩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찡그렸다.
“네, 앤드류-.”
내가 막 대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등 뒤로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의 눈길이 그리로 향했다.
그들의 눈이 아까만큼 크게 벌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이잖아요?”
“죽은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루이제! 알렉시스!”
앤드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옆으로 마주 서더니 곧장 데미안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오랜만이군, 데미안. 반년만인가?”
“뭐야, 자네 죽은 거 아니었어?”
“죽을 뻔했지.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날 구해 주지 않았다면 말이야.”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3 화

사람들이 손이나 부채 따위로 입을 가리며 다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앤드류 백작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는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데미안은 아까보다 더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뭐? 저들이 널 구해 줬다고?”
“그래. 난 윌스브룩 성의 근처를 가기는커녕 설산을 넘다가 동료들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았지. 그마저도
야인들한테 붙잡혀서 몇 달 동안 노예 생활을 해야 했어.”
세상에, 맙소사.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다들 앤드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듯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앤드류는 사교계에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라 적이 없었다.
마르셀이나 데미안과도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앤드류가 그들을 일부러 가까이한 적은 없었다.
인망이 두텁기로는 손꼽히는 사람이었으니 나와 알렉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앤드류의 이야기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야인?”
“아, 야인에 대해서 처음 듣나? 북 부에 사는 아주 험악한 놈들이야. 여자들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다 드센 종족들이지. 도망을 쳐도 육감이 짐승 같아서 금세 붙잡혔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나? 그런데…….”
앤드류가 금세 눈가를 적시며 말을 흐렸다.
앤드류의 말을 경청하던 사람들도 손을 꼭 부여잡으며 그를 안쓰럽게 응시했다.
앤드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금세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나타났더군! 그 무시무시한 야인들을 상대로 나를 구해 줬어! 그런데
이들이 북부에 간 게 거짓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앤드류의 일침이 홀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사람들은 차마 조금의 소리도 내지 못했고, 데미안과 마르셀의 안색은 더욱 불쾌하게 구겨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싶었는지 브룩스가 한 걸음 다가오며 어색하게 웃었다.
“북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설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세 분 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이제와
알렉시스도 그렇지만, 앤드류 백작까지 다시 보게 되어 정말 놀랐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고맙군, 후작.”
앤드류가 여전히 데미안을 노려보며 대답하자 브룩스가 나와 알렉을 보았다.
“윌스브룩 성까지 가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폐하께서도 이제 북부에 대해 한시름을 놓으시겠군요. 두
분께서 큰일을 해내신 겁니다.”
“……별말씀을요.”
나는 브룩스를 향해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해요.”
“그런 일을 해내서 돌아올 줄 몰랐어요!”
그 외에도 많은 감탄이 내 귓가에 쏟아졌다.
앤드류와 브룩스의 인정이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이제 우리가 한 일을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알렉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우리 부부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힐긋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별생각 없는 사람처럼 무심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까?
아니면 겸연쩍은 걸까?
사실은 나도 좋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막상 이런 일을 겪으니 무안하고 걱정되었다.
무엇보다도 황제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렉에게 팔짱을 낀 채로 그의 옷자락을 더 세게 쥐며 말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황제 폐하의 명령이셨는걸요. 어떻게든 성공하는 것만이 폐하에 대한 충심을 표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죠, 알렉?”
내가 그를 향해 눈을 들자 그도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브룩스가 살짝 웃어 주었다.
“과연 두 분이십니다. 과연 윌스브룩 남작 부부라고 불릴 만하군요. 폐하께서 이 기쁜 소식을 아신다면
정말이지 두 분께 거는 기대가 더 크실 겁니다.”
“이제 막 성을 청소했을 뿐이에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성이니 공들여서 복구해야죠.”
“그렇군요. 내일 날이 밝자마자 폐하를 찾아뵈어야겠습니다. 두 분의 기쁜 소식은 제가 전해 드리도록
하죠.”
“고마워요, 브룩스 후작.”
내가 살짝 웃어 주자 브룩스와 앤드류도 미소를 지었다.
홀 안의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힐긋 마르셀을 쳐다보았다.
마르셀의 얼굴에 아까보다 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그랬으니 영지와 방직 공장을 내기에 걸었을 것이다.
지금쯤 얼마나 부아가 치밀고 속이 뒤집어졌을까.
저 썩어 들어가는 표정만 봐도 마르셀이 어떤 상태인지 훤히 보였다.
내가 그만 마르셀에게 시선을 뗀 순간이었다.
앤드류가 마르셀을 향해 갸웃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대단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
사람들이 금방 다시 앤드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마르셀 자네, 알렉시스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내기에 영지와 방직 공장을 걸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
안도할 새도 없이 무도회장 안의 분위기가 다시 심각해졌다.
데미안의 눈이 커지고, 브룩스도 경악한 표정으로 마르셀을 돌아보며 외쳤다.
“맞아! 그랬지 참. 자네 어쩌자고 그런 내기를 건 거야?”
나는 이 순간 앤드류와 브룩스가 천군만마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와 알렉이 먼저 그 일을 꺼내기에는 명예에 조금 금이 가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우리는 방직 공장 같은 것에 욕심 없는 듯 고고하게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얻어 낼 생각이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지금의 우리에게 그 공장은 무척 쓸모가 많았다.
‘갖고 싶다, 방직 공장.’
그게 마르셀의 공장이라면 더 갖고 싶었다.
앤드류는 마르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 들은 귀가 많으니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 정말 안타깝게 되었구만, 마르셀.”
쯧쯧.
앤드류가 한껏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과연 마르셀이 순순히 인정할까?
마르셀이 평소에 얼마나 겉멋을 중시했는지 생각하면 자신이 했던 말을 부인하며 비굴하게 굴진 않을 것
같았다.
마르셀이 픽 비웃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그런 내기를 걸었다.”
역시 부정은 안 하는구나.
“저 멍청한 자식이 윌브릭 성인지 뭔지에 정말로 갔다 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그리 말하며 다가오던 마르셀이 멈춰 섰다.
“다른 놈들보다 더 빨리 뒤질 줄 알았지.”
나는 마르셀의 험악한 입을 한 대 쳐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애써 옅은 한숨과 함께 웃어 보였다.
“말이라도 품위 있게 하면 우리가 그 내기를 못 들은 걸로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마르셀의 입가가 불쾌하게 비틀렸다.
나는 조금 더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당신에게 영지와 공장을 빼면 뭐가 남겠어. 아니면 정말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넘길 생각이야?”
“…….”
순간 마르셀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앤드류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이봐, 마르셀. 어서 이 두 사람에게 실수였다고 사정이라도 해. 진짜로 영지와 공장을 넘겨줄 생각은
아니지?”
겉보기에 앤드류는 진심으로 마르셀을 염려하는 것 같았지만, 이건 전략이었다.
마르셀은 자존심과 허세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곧 죽어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극을 받았을 때는 충동적으로 홧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상황을 주시하던 브룩스가 냉큼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마르셀. 어서 사과라도 해. 설마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정말로 자네의 공장과 영지를 달라고
하겠나?”
“…….”
의도치 않게 브룩스까지 아까부터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서 주고 있었다.
저런 말을 들으면 마르셀은 사과는커녕 더욱더 자신의 여유로움을 과시할 것이다.
데미안도 불길함을 느꼈는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마르셀을 응시했다.
무도회장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조하게 숨을 죽이며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정말로……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봐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알렉을 숱하게 무시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잖아?
나는 마르셀이 알렉에게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래야 내 가슴속 응어리와 분노가 풀릴 것 같았다.
그동안 쌓인 것들이 다 녹아내리진 않겠지만 아주 조금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마르셀을 응시했다.
“마르셀 후작? 우리는 당신 것에 관심 없어요. 우리 것도 아닌데 뭐 하러 탐내겠어요? 그런데 방금 전 내
남편을 깔보며 한 말은 사과해 줬으면 좋겠네요.”
“……!”
순간 주위 분위기가 조금 얼어붙었다.
내가 마르셀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이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와닿은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르셀은 사교계의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내가 다신 내 남편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새 잊었나요? 한 번만 더 우리에게 말을 가려 하지
않으면, 내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가진 않을 거예요.”
이 개자식아.
나는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거리를 겨우 참았다.
마르셀이 꼿꼿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를 악물 듯이 말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나더러 저 등신한테 사과를 하라고? 나 하워드 후작이야. 차라리 내 공장과
영지를 주고 말지. 그깟 것 없다고 내가 망하기라도 할 것 같아?”
“……!”
어머나, 세상에.
사람들의 탄성이 소리 없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우리의 미끼가 제대로 통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4 화

‘그래. 너 망할 것 같은데…….’
마르셀에게 영지와 방직 공장이 전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마르셀이 치기를 부린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홀 안을 가득 채우던 연주 소리도 그친 채였다.
‘당장 망하더라도 절대 사과는 하기 싫다 이거야?’
나는 작게 비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르셀을 응시했다.
“설마 진심인가요? 그 정도면 지금까지 마르셀 당신이 내 남편을 우습게 여긴 대가로 받아 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어때요?”
말을 마치며 내가 알렉을 쳐다보았다.
알렉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가 대답했다.
“루이제 당신이 그걸로 괜찮다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는 마르셀에게 영지와 공장을 빼앗는 것보다 그를 무릎 꿇리는 일이 훨씬 더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사과 대신 마르셀이 가진 전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거래였다.
“그런데 조금 아쉽네요. 나는 마르셀이 알렉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
꼭 그렇게 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잠시 알렉의 눈을 응시하는 짧은 순간 마르셀이 코웃음을 쳤다.
“착각이 심하군. 그까짓 영지와 공장을 지키려고 내가 저놈에게 사과할 줄 알았다면 크나큰 오산이야.”
“그렇다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대리인을 하워드 후작저로 보내야겠군요.”
“그러시든지.”
마르셀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그 모습에 경악한 데미안이 다급히 마르셀에게 다가갔다. 작게 속삭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렸다.
“이봐, 마르셀. 아무래도 자네 많이 취한 것 같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내가 취했다고? 난 멀쩡해.”
흠칫 이를 악문 데미안은 이제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았다.
마르셀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니 우리의 마음을 돌리려는 듯했다.
“이봐, 두 사람. 설마 장난으로 한 내기에 남의 가문을 통째로 가지겠다는 건 아니지? 아무리 내기라지만
그건 도가 지나치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거라고 믿겠네.”
빠르게 말한 데미안은 억지로 마르셀을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도 마르셀은 우리를 노려보았고, 나와 알렉도 그를 끊임없이 응시했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소란스럽게 울렸다.
“설마 정말로 하워드 후작이 내기로 영지와 공장을 잃는 건가요?”
“후작 부인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냥 사과 한 번이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존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네요.”
걱정과 놀라움이 섞인 웅성거림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도회장을 다 나갈 때까지도 마르셀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올랐고, 나 또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르셀이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놈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 * *

‘하찮은 자식들. 감히 나를 건드려?’


마르셀은 장총에 화약을 장전했다.
영지나 공장을 정말로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지금 그를 돌아 버리게 만드는 건 루이제와 알렉시스 따위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치 같은 놈에게 사죄를 하라며 우습게 만들었지!
감히.
‘감히 날 뭐로 보고!’
마르셀은 이를 악물며 손을 벌벌 떨었다.
무도회장에서 마차들이 나오는 길목의 숲속에 숨어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면서 이토록 거대한 분노에 휩싸인 적도 없었다.
저 멀리서는 데미안이 신호를 주기 위해 무도회장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마차를 기다렸다가 타는 공간이 보이는 곳이었다.
줄리아를 다신 만나지 못하게 된 원흉이자 원수인 줄만 알았는데, 심지어 그를 두 번이나 우습게 만들었다.
지금이야말로 루이제와 알렉시스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때였다.
용병단에게 의뢰를 해도 알렉시스를 죽일 수는 없었지만, 그라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반드시 죽일 거니까.
어두운 밤이었지만 마르셀의 눈동자는 극렬하게 타올랐다.
두 사람을 죽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데미안이 살짝 흠칫하더니 마르셀이 있는 쪽으로 손짓을 했다.
심각한 분위기로 보아 곧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탄 마차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놈들에게 총알을 박는 것쯤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직접 나선 적은 없었지만, 제 손으로 놈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어서 오히려 더 만족스러웠다.
마르셀의 입꼬리가 웃듯이 치솟아 올랐다.
“기대하라고, 알렉시스.”
기껏 북부에서 살아 돌아온 의미도 없게 해 줄 테니까.
마르셀이 낄낄 웃는 사이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건너편에서는 데미안이 마차에 화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에 폭탄이 터지면 놈들이 밖으로 나올 것이고, 바로 그때 그가 총을 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루이제에게 발사한 뒤에 알렉시스가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면 놈도 죽일 것이다.
마르셀이 희열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상을 하는 동안 마차가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데미안이 다가오는 길을 따라 나뭇잎이 흔들렸다.
데미안은 짧은 순간 서둘러 화약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이 마차까지 호를 그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처에서 급하게 구한 것이라 화력이 기대만큼 세진 않겠지만, 마차의 한쪽을 다 날려 버릴…….
그러나 기대에 차올랐던 마르셀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치 화약이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듯 마차의 표면에서 퉁 튕겨 나갔다.
왔던 방향을 따라 날아가더니 데미안의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펑!
데미안이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화약이 터졌다.
“으아악!”
순간적으로 번쩍한 불빛 너머로 데미안이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을 쳤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말들이 날뛰고, 마부는 다급히 말들을 제어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르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문이 뻥 열리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싸고 나왔다.
알렉시스와 루이제였다.
“……!”
마르셀은 황급히 총구를 들었다.
데미안이 던진 화약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냥이라면 지겹게 했으니 무언가를 겨냥하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팡!
마르셀이 화약을 발사했다.
정확히 루이제를 향해 탄환이 날아갔다.
‘그래. 이제 네놈들은 다 끝났어.’
피식 웃은 마르셀이 빠르게 다음 화약을 장전하기 위해 약간 시선을 내린 순간이었다.
그때 알렉의 특성화 스킬이 다시 한번 실행되었다.

[공격을 감지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가 발동합니다!]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저항 스킬이 알렉과 루이제를 감쌌다.


그동안 그의 레벨과 애정도가 오른 탓에 특성화 스킬의 효력도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진 상태였다.
탄환은 방금 전 화약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고 저항 스킬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알렉은 놀란 루이제를 감싼 채 마르셀이 몸을 숨기고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무도회장을 떠나는 마르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기드온을 붙여 놨더니 그들을 죽이려고 할 줄이야.
이미 용병까지 그에게 붙였던 마르셀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헉!”
탄환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놀란 마르셀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처럼 폭탄을 위한 화약은 아니라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다.
놀란 마부가 그들에게 뛰어왔다.
“주인님! 마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알렉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초 안에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 알렉. 갑자기 무슨 일이죠? 누가 비명을 질렀는데.”
루이제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짧게 마차 상태를 확인한 알렉은 루이제에게 말했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는 길은 안전할 겁니다.”
“네?”
“저는 잠시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것만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루이제는 의아하게 그를 보더니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뭔지는 몰라도 몸조심해요.”
“알겠습니다.”
루이제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한 번 더 응시했지만,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그를 이해하듯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그의 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르셀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두 눈을 번득이며 총을 발사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빛보다 더 빠르게 마르셀의 앞에 나타나 총을 박살 냈다.
마르셀이 채 다 놀라기도 전에 알렉은 놈의 멱살을 잡았고, 놈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순간 장소가
달라졌다.
더 멀고 인적이 없는 숲속이었다.
“아악!”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며 마르셀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의 뼈가 어긋나는 듯한 통증이 그를 꿰뚫었다.
알렉은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이봐, 마르셀.”
“……! 아, 알렉시스. 너 이 새끼!”
마르셀의 눈에 핏기가 서렸다.
일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어쩐지 한기와 같은 공포가 그를 감싸는 것 같아 뼈가 시렸다.
불현듯 알렉시스의 등 뒤에서 집채만 한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사자? 아니면 곰?
그 정체 모를 짐승의 번쩍이는 눈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
마르셀은 저 짐승이 평범한 동물은 아니라는 직감에 소스라쳤다.
그보다 더 음산한 웃음기로 알렉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쉽게 사과할 마음이 없는 모양인데, 내 부인 앞에서 나한테 무릎을 꿇을 마음이 들
때까지 맞아 줘야겠어.”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르셀의 외침은 그의 마음속에서만 울렸다.
차마 소리 낼 수도 없을 만큼 초월적인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루이제가 바로 그걸 원하는 것 같거든.”
크허엉!
으아악!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5 화

* * *

“혼자 들어오시는 건가요, 마님?”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사용인들이 의아하게 내 뒤쪽을 힐끔거렸다.
같이 나갔던 알렉과 앤드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앤드류는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난 탓에 밤새 어울리다가 올 것 같았다.
알렉은 아까 있었던 이상한 폭발음을 해결하고 올 모양이었다.
‘설마 마르셀이 우리가 탄 마차에 폭탄이라도 던졌나?’
누군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 거라면 마르셀이 가장 유력했다.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텐데, 알렉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겠지?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둘 다 볼일이 남아서 나만 먼저 들어왔어. 엘로이도 집에 왔니?”
“네. 아가씨께서도 조금 전에 들어오셔서 방에 계세요.”
“어머님은?”
“벌써 주무신답니다.”
“하긴 시간이 늦었지. 그럼 난 엘로이한테 들렀다가 방으로 들어갈게.”
“알겠습니다, 마님. 목욕물을 미리 준비할까요?”
“응. 그래 주면 좋을 것 같아.”
“예, 마님.”
사용인들과 옅은 미소를 주고받은 후에야 내가 돌아섰다.
무도회장에서 나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는 몰라도 알렉은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집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엘로이의 방으로 향했다.
엘로이도 오늘 다른 곳에서 열린 무도회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백곰 가죽까지 두르고 갔는걸?’
똑똑.
이윽고 엘로이의 방문을 두드린 나는 금세 문을 열었다.
엘로이는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드레스를 벗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오는 거야?”
“나만 먼저 왔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글쎄. 아직 잘 모르겠네.”
“뭐야, 그게.”
애매한 대답에 엘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식 웃은 나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오늘 무도회는 재밌었니?”
내 물음에 엘로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이 되었다.
옷을 벗다 말고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 백곰 가죽 더 많이 있어?”
“그건 왜?”
“다른 애들도 사고 싶다.”
엘로이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저 반응을 보니 오라버니 부부가 북부에서 무사히 돌아온 사실과 그 전리품인 백곰 가죽을 얼마나
자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애들이 누군데?”
“음, 그냥 여러 애들? 다들 백곰 가죽을 처음 봐서 엄청 신기해했어!”
“그랬구나. 기분 좋았겠네.”
내 눈동자도 조금 반짝였다.
과연 귀족 영애들이라 진귀한 사치품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 탐을 내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이 구역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했던 엘로이가 걸치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관심을 끌었을까?
나는 살다 살다 엘로이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귀족들이 백곰 가죽을 원한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내심 좋은 기분을 감추며 내가 조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쩌지. 그게 돈 받고 팔 만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
“내가 그 얘기도 했지. 그런데 얼마든 상관없대.”
“그래? 그 정도로 백곰 가죽이 마음에 든대?”
“그냥 갖고 싶은 거지. 신기하잖아?”
“하긴 돈이 문제인 사람이 어딨겠어. 백곰을 못 잡는다는 게 문제지.”
그리 말하며 나는 소파에 걸쳐 놓은 백곰 가죽 숄을 가져다 쓸어 보았다.
칼라니쉬 산 정상의 매서운 한파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털이 두껍고 빳빳했다.
“앗, 따가워.”
나는 금세 숄에서 손을 뗐다.
보기에는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추운 날씨에 백곰들의 체온을 유지해야 했으니 촉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엘로이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불만스럽게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백곰이니까.”
“아무튼 이건 팔 수 없을 것 같아. 아쉽지만 그렇게 전해 주렴.”
“뭐? 왜에? 비싸게 팔면 되잖아.”
엘로이의 눈썹이 축 처졌다.
자기가 대신 구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이라도 한 걸까?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슬퍼했다.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쉽게 팔 수 있겠어. 엘로이 너한테는 며칠 더 빌려줄게.”
“너무해!”
나는 일부러 엘로이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그녀의 방을 나왔다.
엘로이가 뾰족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타격 하나 없이 우스울 뿐이었다.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사실을 알면 귀족 영애들이 더 안달이 나지 않을까?
그 부모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목욕을 마친 나는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셨다.
알렉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깜박 잠이 들었던 나는 대뜸 들려오는 소음에 번쩍 눈을 떴다.
집에 누구라도 왔는지 어수선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어김없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내가 대답하자 사용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의아한 찰나 사용인 한 명이 말했다.
“마님. 주인님과 함께 손님이 오셔서요. 응접실로 내려오시랍니다.”
“손님? 그게 누군데?”
“그게…….”
말하기 곤란한 사람인가?
나는 바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나갔다.
어쨌든 그가 너무 늦게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응접실로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나를 발견한 알렉이 다가왔다.
“루이제. 내려오셨군요.”
“알렉. 일찍 왔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은 나는 다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손님을 응시했다.
아까 전 무도회에서도 분명히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 누추한 곳에 하워드 후작같이 고귀한 분이 오시게 될 줄은 몰랐네요.”
“…….”
마르셀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수치심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마르셀의 안색에 역력했다.
나는 조금 더 자세히 마르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까 전 무도회장에서 번지르르하게 차려입고 있던 의복은 같은 옷인 줄도 모르게 망가져 있었고, 얼굴은
푸른빛, 붉은빛으로 찬란했다.
입술도 터져서 핏물이 비쳐 보였다.
그에 반해 알렉은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도 헝클어지지 않은 채 말쑥했다.
나는 알렉과 마르셀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가 물었다.
“손님이 많이 다친 것 같네요.”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저런.”
안쓰럽다는 듯한 내 눈빛에 알렉은 내 곁으로 나란히 마주 서더니 마르셀을 주시했다.
“마르셀 후작이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 보고 싶네요.”
내 말에 마르셀의 눈동자가 한번 흔들렸다.
무도회장에서 살의로 가득 찼던 눈빛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체념과 공포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존심을 꺾은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알렉한테 죽기 직전까지 흠씬 두들겨 맞은 모양이야.’
그러니 저렇게 기가 죽었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지?”
알렉의 말에 마르셀이 흠칫 떨더니 소파에서 일어섰다.
나와 알렉의 앞쪽으로 다가오더니 차마 우리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겠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르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므, 므은흐군.”
“뭐라고?”
나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되물었다.
마르셀은 다시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를 잃은 듯이 소리 내지 못했다.
알렉이 아까보다 조금 더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도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이 하고 싶은가?”
“아, 아니네.”
마르셀이 기겁하듯 대꾸했다.
“……!”
나는 내심 놀라웠다.
놈의 저런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니, 죽을 때까지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거만하고 고고하던 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리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차라리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알렉? 마르셀 우리 앞에서 머리까지 다 숙이고요.”
“쉽게 자존심을 굽히진 않더군요. 여기서 사죄를 하느니 죽는 게 낫다고 하길래 설득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긴 했습니다.”
“당신이 겁을 정말 많이 줬나 봐요.”
“놈이 굴복하는 모습을 루이제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네? 정말로요?”
내 물음에 그가 한 번 끄덕였다.
물론 마르셀이 우리에게 무릎 꿇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긴 했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복수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 마르셀을 죽사발로 만들어 데려오다니.
그냥 한 말이었는데 마음에 두고 있었나?
나는 살짝 감동받아 잠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이런 식으로 들어주려고 할 줄은 몰랐다.
“고마워요, 알렉.”
“어차피 가만히 두면 우리에게 또 폭탄을 던질 겁니다.”
“악랄한 놈들.”
대뜸 마르셀이 이를 짓씹으며 내뱉었다.
눈가가 촉촉하기까지 했다.
그래.
엄청 수치스럽지?
마르셀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 눈에도 힘이 들어갔다.
“이런 상황이 모욕적인가요, 마르셀?”
“…….”
“내 남편은 당신들 때문에 오랫동안 이런 시간을 겪어야 했는데.”
“……제기랄.”
마르셀이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절망감이 놈의 온몸에서 흘러넘쳤다.
겨우 이 정도로 낙담하면 안 되지 않을까?
마르셀만큼이나 내 속도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무슨 소란이니?”
불현듯 시어머니와 엘로이까지 응접실로 내려왔다.
어느새 앤드류까지 저택에 와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뭐라 대꾸하지 않으며 마르셀에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어차피 당신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
“그러니까 그냥 꿇기나 해.”
냉랭하게 말한 나는 뾰족한 구둣발로 놈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퍽!
방심한 사이 마르셀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쿵 부딪쳤다.
놀란 시어머니와 엘로이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날카로운 굽으로 마르셀의 무릎을 짓밟아 주었다.
“이제 너 같은 건 우리를 평생 죽일 수 없거든.”
지난 3 년 동안의 분노가 내 가느다란 굽에 실렸다.
이걸로 내 원한이 다 풀리지도 않았고,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다만 앞으로 우리를 건드리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는 똑똑히 전하고 싶었다.

다음 날 마르셀은 자신의 저택에서 음독 상태로 발견되었다.


방직 공장과 영지를 우리에게 넘긴다고 했던 무도회에서의 유언은 법적인 효력이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6 화

* * *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르셀은 저택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집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그는 자신의 저택과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믿기지 않는 일들을 적지 않게 겪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마르셀은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는 루이제와 알렉시스를 향해 총을 겨누던 마르셀이 아니었다.
“주인님!”
마침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가 마르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무도회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차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오다니.
“혼자 오시는 겁니까? 마부는 어디로 갔고요?”
집사는 빠르게 마르셀의 모습을 훑었다.
하얗고 멀끔한 얼굴이며 깔끔하게 정돈된 옷매무새가 저택을 나갈 때와 똑같았다.
“설마 걸어오신 건 아니지요?”
“말도 안 돼. 말도…….”
집사가 걱정스럽게 되묻는 말에도 마르셀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걷기만 했다.
집사의 목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그 어떤 외침에도 마르셀은 반응하지 못했다.
이 릴트 제국에서 가장 하찮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상상도 못 할 힘을 가졌다.
알렉시스는 그를 순식간에 죽일 수도 있었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치유할 수도 있었다.
충격에 충격을 거듭하느라 마르셀의 머리는 고장이 나 버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그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죽이라고 악을 썼지만, 마르셀은 결국 알렉시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고통과 치유의 반복을 버틸 사람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을까?
“으흑…….”
그런 치욕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수십 배는 나았다.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눈앞에 섰을 때 차라리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힌 적 없던 그의 무릎은 겨우 루이제의 발끝에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어차피 당신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꿇기나 해.’
퍽!
쿵!
‘이제 너 같은 건 우리를 평생 죽일 수 없거든.’

“으윽…….”
마르셀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서재 안 서랍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당장 약을 먹지 않는다면 이 모멸감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를 짓밟던 루이제의 날카로운 굽.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무심한 눈길과 브렌트 공작가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 꼴 좋다는 앤드류의 시선.
그런 수모를 겪고도 계속해서 머리를 들고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나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으아악!”
마르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손길들을 닥치는 대로 뿌리쳤다.
어서 약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손에 잡히는 약병을 열어 마구잡이로 입에 넣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진짜 약인 것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주인님!”
“이거 놔! 다 놓으라고!”
기겁한 집사와 사용인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온갖 약을 입에 넣었다.
수치심과 모욕감,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멸감 말고는 마르셀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짓밟았던 놈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굴욕을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았다.

* * *

“누가, 죽었다고요……?”
평범하지 않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오후였다.
화창한 한낮의 정원 안에서 나와 알렉, 앤드류는 브룩스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브룩스는 그제야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황궁에 다녀오고 나서야 마르셀 후작의 소식을 들었죠. 마르셀이 어젯밤
무도회가 끝나고 두 분을 해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에 파다합니다.”
“……그렇군요.”
그건 데미안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어젯밤 무도회장 근처에서 쓰러진 데미안을 발견했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아야 할 정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마르셀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줄 알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마르셀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사람들에게 모두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나와 알렉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밤늦게 우리를 찾아와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중에서는 브룩스도 있었다.
미수로 그친 두 사람의 행동이 사교계에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죽음이라니.
알렉은 일부러 마르셀을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말끔히 치유해서 돌려보냈다.
울긋불긋했던 멍들이 내 눈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치료해 주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뒤탈이 생길까 봐 대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알렉과 앤드류를 보았다가 말했다.
“그런데 마르셀은 어쩌다 그리된 건가요?”
브룩스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입을 축인 후에야 다시 말했다.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 말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독약을 마셨다더군요.”
“독약이요?”
“예. 애초에 저택에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두 분께서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네요.”
내 말에 앤드류도 놀란 듯 입을 열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벌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은 놈입니다. 내기대로 영지와 공장을 주겠다는 말도 허영이었겠죠.
알렉시스와 루이제를 죽여서 무마하려고 했던 겁니다.”
앤드류의 말에 브룩스가 한 번 끄덕였다.
“다들 그런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데미안이 시인하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마르셀은 일이 실패한
나머지 크게 낙담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인물 같지는 않았지만, 줄리아 일도
그렇고 원래부터 속이 말이 아니었겠죠.”
브룩스는 여전히 목이 타는 듯 다시 차를 마셨다.
심상치 않은 어젯밤을 보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어젯밤 마르셀이 우리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은 일은 알렉과 앤드류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나도 우리 식구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렇다고 독약이라니.’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말아 쥐었다.
겨우 우리에게 무릎 한 번 꿇었다고 처절하게 절망하던 마르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렉이 그동안 놈에게 무릎이 꿇린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사냥 시즌에는 사냥감 노릇까지 시키더니 정작 본인은 이렇게 쉽게 죽어?
놈을 죽이고 싶은 기분이야 나도 턱 끝까지 치밀 때가 많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알렉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마르셀이 그에게 굴복했을 때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알렉의 고통을 직접 겪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 않을 만큼 감흥 없는 눈길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브룩스가 다시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전해 들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하워드 후작의 내기에 관한 일은 별로 관심 없으신 것 같더군요.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뭐 두 분께는 잘된 일입니다. 마르셀이 무도회에서 호언장담한 것도 있으니 법적 대리인이라도
고용하시면 유리할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기에 걸었던 구두를 아침부터 보낸 사람도 있었다.
내기의 결과가 정해지면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미 나는 의회에서 빠르게 양도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 마, 마르셀. 네 방직 공장은 우리가 더 잘 운영할 거니까.’
내가 살짝 이를 가는 사이 브룩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황궁에 오라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자작 작위를 돌려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브룩스의 미소에 나도 어색하게나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얻게 된 것들이 생겼으니 그나마 조금의 성취감이 들었다.

* * *

‘일주일 안에 성을 복구시킨다면 자작 작위라도 더 줄 수도 있고.’


‘한 달 안에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다스리게 되면 브렌트 공작가와 영지를 모두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하며 황제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북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는 열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중 수도에서 북부까지 왕복한 날들을 제외하면 북부에서는 딱 일주일을 보냈다.
황제도 그 사실을 감안해 자작 작위를 돌려주려는 걸까?
그러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공작위를 잃기도 했는데 이제 작위가 무슨 소용일까?
황제를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게 물거품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홀로 내려가자 마침 나와 있던 엘로이,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엘로이는 무심코 나를 보았다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였고, 시어머니는 평소처럼 머리를 들고 있었지만
어딘가 묘한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왜들 그러세요?”
그새 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희한하게 여긴 내가 다가가자 엘로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응? 아, 아니야. 언니.”
엘로이는 괜히 자신의 무릎 쪽을 문질렀다.
내가 마르셀을 걷어찬 위치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7 화

웬일로 엘로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나는 싱겁게 웃으며 홀로 내려갔다.


마침 알렉도 내려오자 엘로이와 시어머니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조심히 다녀와. 폐하한테 잘 보여야 돼.”
“뭐 노력은 해 볼게.”
엘로이의 당부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 내가 마차에 올랐다.
이제 와 잘 보이려고 해 봤자 통하지도 않겠지만, 우리가 힘을 키우기 전까지 굳이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나는 내 옆에 앉은 알렉의 손을 살포시 감쌌다.
내 접촉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브룩스가 다녀간 이후로 마음에 걸렸던 것을 조심스럽게 소리 냈다.
“알렉. 나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혹시 마르셀이 죽은 게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평소 알렉의 성품을 생각하면 죄책감을 느끼고도 남을 것이다.
어제의 그를 떠올려 보면 내가 아는 알렉과는 정반대로 냉랭해지긴 했지만, 설마 자책하고 있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는 내 물음에 잠깐 놀란 듯하다가 이내 딱 잘라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정말로요?”
“예.”
“그럼 다행이에요.”
내가 그에게 조금 편안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의 손을 조금 더 포근하게 쓸어 만지며 다시 말했다.
“혹시 그럴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동안 당신은 더 많이 죽고 싶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버텨 줘서
정말 고마워요.”
“…….”
그는 잠시 나를 마주 응시하더니 나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 내 손을 움켜쥐었다.
확고한 눈빛으로 나를 단단히 안심시켰다.
“앞으로는 제 걱정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예전의 제가 아니니까요.”
“알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잔잔한 웃음을 터트렸다.
곧 만날 황제에게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몰라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앞으로는 마르셀이 아니라 황제가 당신에게 무릎을 꿇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의 우리라면 꼭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침내 나와 알렉이 황제의 앞에서 살짝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섰다.
살포시 눈을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조금 떨어진 거리의 호화로운 황좌에 앉은 채 이 넓은 알현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도 나와 알렉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치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무사히 살아 돌아왔군.”
이윽고 황제가 비딱해 있던 고개를 다시 바로 세우며 말했다.
우리가 돌아온 게 별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과 말투였다.
하긴 우리보다 능력이 뛰어난 앤드류도 몇 달 만에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알렉과 내가 불과 열흘 만에
성공해 돌아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까지 알렉은 사교계에서 가장 무시당하던 존재였다.
나는 알렉이 여러모로 변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황제는 아직 아는 게 없었다.
겨우 말투가 달라진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 황제가 알렉에 대해 알아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 딱히 내색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와 알렉을 꼼꼼히 훑어보는 그 눈빛만으로도 불결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눈부시군. 그 험 난한 북부의 윌스브룩 성에 다녀온 사람들답지 않게 멀쩡해 보여.
그대 들이 보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황제의 물음에 알현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던 재상이나 보좌관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브룩스도 황궁에서 입는 고상한 예복 차림으로 우리와 황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팔 하나라도 다쳐서 와야 더 자연스러웠을까?
어쨌든 우리는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 북부를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힘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었다.
알렉이 덤덤하게 소리 내기 시작했다.
“명성이 자자한 대로 만만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폐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성을 찾아내지 못했겠죠.”
알렉이 끊임없이 황제를 올려다보는 만큼 황제도 그를 응시했다.
어느새 주위는 수군거림 하나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오가고 있었다.
이윽고 내가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만 살짝 입가를 당겼다.
“릴트 제국에 그런 천연의 세계가 있는 줄은 몰랐답니다. 폐하의 명이 아니었다면 평생 한 번 가 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
“날씨가 가혹하고 제대로 된 길 하나 없었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토록 장관인 곳도 없었습니다. 특히
윌스브룩 성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었죠.”
말을 마친 내가 공손한 태도로 입가를 정돈했다.
근처에 있던 재상과 보좌관들은 작은 감탄과 웅성거림을 감추지 못했다.
내 말이 저들이 갖고 있던 북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거칠고 범접할 수 없는 영토인 북부.
그 북부를 천연의 세계와 장관이라고 표현을 했으니 생소할 만했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황제가 비웃듯이 짧게 실소했다.
“이제 보니 북부에 제격인 사람들이 여기 있었군.”
“…….”
“아주 대단해. 자네들보다 훨씬 뛰어난 앤드류 백작도 실패한 일을 해낸 것 아닌가.”
황제가 우리를 비꼬듯 말하더니 금세 다시 소리 냈다.
“희한한 일이야. 자네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대답을 기다리듯 황제가 침묵하자 내가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북부를 다스리는 건 운으로 될 문제는 아니지.”
“…….”
황제가 강렬하고 붉은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건 뭘까.
시키는 대로 했더니 너희가 어떻게 해낸 것이냐며 오히려 따지는 분위기?
이런 황제의 반응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우리 또한 당연히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거나, 도중에 실패하고 돌아와 북부행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며
애원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심상치 않은 침묵 속에서 황제가 등받이에 조금 더 몸을 기댔다.
“노력은 가상했으니 약속대로 자작 작위는 돌려주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브룩스도 좋아하는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예를 표하듯 살짝 무릎을 굽혔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조금 기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황제의 말에 나는 다시 웃음기를 거두어야 했다.
“그래도 뭔가 미덥지가 않군.”
“…….”
“윌스브룩 성에는 나중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자네들이 일주일 내로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막상 우리가 무사히 성공해서 돌아오니 금세 다른 시련을 주려는 것 같았다.
“잘 알다시피 난 성미가 급하거든. 북부인들을 살려 둘 만큼 그들이 내게 충성심이 있다는 걸 재물로
증명해 와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모두 사라지는 게 낫지 않나?”
황제의 눈동자에 흥미가 감돌았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소년의 장난기와도 같았다.
정말이지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액수는 수도인들의 일주일 세금 정도 되었으면 좋겠군.”
그게 도대체 어느 정도의 거액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까지 알렉이 가져다 준 재물의 몇 배에 달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북부를 왕복하는 데에만 나흘 가까이 걸리는데, 일주일 안에 그 어마어마한 금전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실패하면 북부인들을 몰살하겠다니, 농담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힘겹게 억눌렀다.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명을 거둬 달라고 간청해.”
“……?”
황제의 눈빛이 어느새 날카로워져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청을 받아 주도록 하지. 기껏 살아 돌아온 목숨이 가상해서 주는
기회다.”
“…….”
설마 지금 우리보고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라는 걸까?
이제 보니 북부인들을 몰살하겠다는 건 핑계고, 우리의 기세를 꺾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빛이 확고한 만큼 나도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알렉의 눈동자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브룩스는 놀란 눈으로 황제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우리를 향해 심각하게 눈짓을 했다.
얼른 황제에게 빌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핑계라고는 하지만 황제는 정말로 북부인들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놈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깟 놈한테 빌 거였으면 진작에 공작가에서 쫓겨날 때 울며불며 읍소를 했겠지.’
그런 속내는 감추며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기회를 주신다면 시도는 해 보고 싶습니다.”
“…….”
황제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 * *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황궁을 떠난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악센은 아직도 두 사람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절로 주먹이 쥐어지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 거지?
북부인들이 모두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신분과 영지, 재산을 모두 빼앗았을 때도 살려 달라는 구걸을 하기는커녕 다시 나타나 줄리아를
망가뜨렸다.
이번에는 북부로 보내 보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이런 고고한 귀환이라니.
이 제국에서 일관되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루이제가 유일했다.
악센은 이제 그들을 길들여 보려는 시시한 수작은 관두기로 생각했다.
더는 탐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해리엇.”
그의 부름에 아까부터 곁에 있던 해리엇이 몇 걸음 다가갔다.
“분부하십시오.”
“네가 데려올 사람이 있다.”
“…….”
문 너머에 서 있던 올리비아는 손을 움켜쥐었다.
결국 이런 순간이 와 버린 걸까?
황제가 그녀를 대신할 다른 여자를 얻는 것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8 화

* * *

“뭐야. 미친 거야?”
소식을 들은 엘로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주일 안에 거액을 가져오지 않으면 북부를 몰살시키겠다는 황제의 말 때문이었다.
“미친놈의 머릿속을 누가 알겠니.”
시어머니도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거들었다.
내가 한숨을 쉬듯 대꾸했다.
“그건 그렇네요.”
목숨으로 협박까지 하다니. 황제는 북부인들을 꼭 길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폭정을 휘두르는 것만큼 간단하게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알렉은 북부인들을 상대로 그런 강요를 할 수는 없었다.
북부인들이 겁을 먹고 세금을 낸다 하더라도 황제가 더 과한 요구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엘로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찡그렸다.
“그럼 이제 북부인들 집집마다 용병들을 보내야 되는 거야? 북부인들이 그만한 돈이 있을까?”
엘로이의 말에 내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했다.
“우리가 뒷골목 강도도 아니고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구해? 아, 맞다!”
엘로이가 잠자코 앉아 있던 알렉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알렉이 살짝 눈을 들었다.
“오라버니가 또 가져오면 되겠다.”
작게 손뼉을 치며 엘로이가 기쁜 듯이 말했다.
내가 알렉을 대신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렉 혼자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을 다 감당할 수는 없어. 앞으로 계속 내라고 할 텐데 더 장기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어차피 평생 이런 식으로 계속 황제의 호구 노릇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당분간은 황제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선은 저도 정보상에 다시 한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알겠어요. 당신 덕에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아요.”
“어차피 저의 일이기도 한데요.”
“그래도요.”
나는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기분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알렉도 가만히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잠시 그와 내가 시선을 주고받는 동안 엘로이가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더니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뭐야, 둘이 정말 수상해. 가짜 부부가 왜 갑자기 진짜 부부가 됐어? 올 때도 팔짱 끼고 오더니,
북부에서 무슨 일 있었지?”
엘로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살짝 놀란 기색으로 우리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부쩍 친밀해진 우리의 사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알렉을 향해 마저 웃어 주었고, 그는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뺨이 붉어진 듯한 건 응접실을 밝히는 불빛 탓일까?
대뜸 시어머니가 밝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후계자를 기대해도 되는 거니?”
“…….”
알렉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버렸고, 나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후계자예요.”
그와의 아이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은 나였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뒤늦게 찾아온 신혼을 조금 더 즐겨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전쟁 중에도 애는 잘 낳는다고 하더라.”
“전쟁보다 우리 황제가 더 끔찍하네요.”
“그래도 가문의 후계자는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갑자기 알렉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가문은 누가
이어 주니?”
“엘로이가 남장이라도 하면 안 되나요?”
“…….”
마치 창과 방패와도 같았던 대화에 침묵이 생겼다.
느닷없이 지목을 당한 엘로이는 은근 좋아하는 눈치로 웃었다.
물론 여자가 작위를 이을 수는 없었지만, 엘로이는 그냥 생각만으로도 좋은 것 같았다.
은근히 권력욕이 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시어머니는 무척 피곤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더니 일어서려고 했다.
엘로이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나갈 기세라 내가 얼른 시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아직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남았어요.”
“그럼 얼른 해 보렴.”
시어머니가 다시 소파에 편히 앉았다.
“어머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어서요. 어머님이 아니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내 말에 엘로이가 의아해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어?”
나는 엘로이를 짧게 흘겨보았다가 다시 시어머니를 향해 웃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식품이나 물건들을 북부에서도 팔 생각이에요. 그러니 어머님께서 점포마다 찾아가서
납품 좀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이냐?”
시어머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평생 고귀한 신분으로 살면서 이런 부탁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것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봉투 하나를 들었다.
“여기 제가 정리해 둔 상점들이 있어요. 꼭 계약해야 하는 품목도 적혀 있고요. 특히 리즈 화훼 농원은
반드시 설득하셔야 돼요. 북부에 꽃집이 한 곳도 없더라고요.”
“꽃집이 없는 곳이 있다니 그게 말이 되니?”
“저도 얼마나 놀랐다고요. 리즈 농원은 우리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온실 기술을 갖춘 곳이니 북부에서도
성공할 거예요.”
“…….”
그제야 시어머니는 나에게서 봉투를 받아 갔다. 내용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찾아가야 할 곳들이 너무도 빼곡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나서도록 마음을 돌려야 했다.
나와 알렉이 다니기에는 다른 할 일이 너무도 많았고, 엘로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상인들에게도 새 상권이 생기는 것이니 꽤 괜찮은 거래일 것이다.
“어머님께서 직접 가시면 상인들이 정말 영광스러워하겠어요. 무려 전 브렌트 대공작 부인이셨던
분이잖아요.”
“…….”
“이리도 고귀하신 분이 직접 나서 주시면 우리가 얼마나 진심인지 상인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네요.”
“…….”
정성 어린 내 말에도 시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대공작 부인이었던 체면 때문이었다.
역시 이 방법을 써야 하는 걸까.
나는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결정적인 말을 내뱉으며 웃었다.
“어차피 하루빨리 북부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폐하께서 우리 식구들의 목숨을 다 앗아 갈 거랍니다. 물론
어머님도 무사하지는 못하시겠죠.”
“…….”
“그러니 도와주실 거죠?”
완고했던 시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과연 목숨으로 협박하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황제의 방식은 꽤 유용했다.
시어머니는 어렵게 다시 얻은 호화로운 삶을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곁에 앉아 있던 엘로이가 힐긋 내 눈치를 보더니 시어머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짧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시어머니는 잠시 숨을 들이쉬며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꽃이라도 살 겸 한번 다녀와 보긴 하마.”
“감사합니다. 오늘 당장 방문해 주시면 좋겠어요.”
시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전 브렌트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성공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도의 유명한 꽃집과 식품점이 북부에 들어선다면 얼마나 장사가 잘될까?
북부에서 팔리는 물품들에 매겨지는 세금은 우리 영주 부부에게 돌아오는 돈이었다.
황제가 무리한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재산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게 다 우리의 힘이니까.’
이미 브니엘을 비롯한 몇 명의 장인들이 북부에 점포를 열어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번에 다시 북부로 돌아갈 때는 길벗들이 너무도 많을 것 같아 벌써부터 뿌듯했다.
“알렉시스! 루이제!”
그때 응접실 밖에서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그쪽을 돌아보자 앤드류가 눈망울을 글썽이며 기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도 움켜쥔 채였다.
혹시 벌써 일이 잘 풀리기라도 한 걸까?
앤드류가 우리의 대리인을 자청해 주어서 방직 공장과 관련된 일을 부탁한 상태였다.
이윽고 앤드류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워드 후작가의 영지와 방직 공장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습니다.”
“……!”
정말로?
이제 정말 우리의 소유가 된 거야?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엘로이의 눈도 커졌다.
얼른 일어나 앤드류에게 다가갔다.
“정말 잘됐네요. 고마워요, 앤드류.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이라면 금방 처리해 줄 줄 알았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곧 하워드 후작의 친척들이 소송을 걸어올 겁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죠.”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황궁에 갔더니 폐하께서 새 임무를 주셔서요.”
“뭐든지 말씀해 주시죠. 두 분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 못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럼 후작가의 영지를 더 비싼 값에 팔아 주지 않을래요? 앤드류라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해 줄 것
같아요.”
나는 이미 억만금을 가진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앤드류를 응시했다.
그 넓은 땅이 모두 팔리면 그게 다 얼마일까??
그런데 어마어마한 자금을 갑자기 선뜻 융통할 사람이 있을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앤드류는 마침 반가운 말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말했다.
“이것 참 잘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신 브로디 가르시아 공작께서 땅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조카사위인 마르셀의 소유였으니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어쩐지 일이 차근차근 진행될 것만 같았다.
브렌트 공작가의 전성기 시절로 재산을 불리는 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였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9 화

* * *

앤드류는 영지를 거래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어마어마한 땅과 수확물들을 한 번에 팔아 버리는 게 아쉽긴 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거금을 만들기
위해 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었다.
곧이어 알렉과 시어머니도 각자 정보상과 화훼 농원에 가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언제 올까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온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어머, 메리엔 부인?”
“안녕하세요, 루이제. 이렇게 제가 찾아뵌 적은 처음이죠?”
메리엔 자작 부인이 청초한 미모를 밝히듯 환하게 웃었다.
30 대 중반인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갓 데뷔탕트를 치른 숙녀처럼 풋풋한 외모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왜 우리 저택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과연 누가 올까 기대가 되었는데, 마침 이런 귀인이라니.
“잘 오셨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메리엔 부인을 응접실로 안내한 나는 사용인들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엘로이도 곁에 앉아 메리엔 부인과 짧은 인사를 나누자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엘로이 양, 요즘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아쉽게도 난 보지 못했지만, 정말로 백곰 가죽으로 만든 숄을
갖고 있나요?”
역시나 메리엔의 용무는 백곰 가죽이었다.
엘로이가 흔쾌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럼요. 잠시만요. 금세 가져다 보여 드릴게요.”
“어머나, 고마워요.”
엘로이가 눈짓하자 사용인들이 재빨리 응접실을 나갔다.
그들이 숄을 가져오자 메리엔이 연신 쓰다듬으며 감탄을 했다.
“이게 백곰의 털이라니 너무 신기하네요.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어요. 이것만 있으면 어떤 한파라도
끄떡없겠는데요?”
메리엔의 말에 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 이번에 처음 얻게 되었답니다. 아마 북부에 가지 않았다면 백곰의 털로 치장을 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정말 특이하네요. 백곰이라면 잡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구하셨어요?”
메리엔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듯 살짝 찡그렸다가 대답했다.
“정말 우연한 기회였어요. 북부에서 백곰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과 잠시 연이 닿았거든요.”
“혹시 그들이 앤드류 백작을 붙잡고 있었다는 야인들인가요?”
“예. 잘 알고 계시네요. 어렵게 야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더니 이런 걸 다 주더라고요.”
“그랬군요…….”
메리엔이 동경하는 듯한 눈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메리엔은 어디선가 백곰 가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우리 집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의상에도 관심이 많긴 했지만 저명한 수집가이기도 했다.
이국적인 사치품이나 희귀품이 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늘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백곰의 가죽으로 몸을 치장한다는 건 누구도 상상 못 할 일이었으니 메리엔도 상당히 혹한 듯한 눈치였다.
“백곰 가죽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조심스럽게 들려온 메리엔의 물음에 내가 살짝 웃어 주었다.
“저도 고민이 많았답니다. 귀한 물건을 그냥 보관만 하고 있기에도 아깝잖아요.”
“그렇죠.”
“혹시 저희가 이번에 방직 공장을 인수하게 된 건 아시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에요.”
그리 말하며 메리엔도 눈을 접었다. 나도 짧게 마주 웃어 주다가 말을 이었다.
“공장 이름도 새로 바꿀 생각이에요. 그때 첫 상품으로 백곰 가죽을 재단한 뭔가를 출시해 보려고
한답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요?”
메리엔이 두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놀라워했다. 이내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황급히
물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루이제를 찾아오길 잘했네요. 혹시 예약을 받아 주진 않으실 건가요?”
“그게…….”
내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과연 예상대로 메리엔은 백곰 가죽을 얻고 싶은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쉽게 줄 수는 없어 나는 조금 더 곤란한 척 눈썹을 휘었다.
그러자 메리엔이 다급히 말했다.
“금액이라면 얼마든 상관없어요. 감히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거든요.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대가일 거예요. 백곰을 본 적은 없지만, 무척 흉포하고 힘이 세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
“어디서 백곰 사체를 발견하지 않는 한 얼마나 구하기 힘들겠어요? 백곰이 얼어 죽을 일도 없을 거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백곰 가죽의 가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나는 약간 감동을 받았다.
메리엔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백곰 가죽을 넘겨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자신의 컬렉션을 가진 수집가이니 얼마나 소중히 여겨 줄까?
나는 옅은 한숨이 섞인 미소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량이 하나로 한정되어 있어서요. 많은 수의 상품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답니다.
방직 공장의 소유주가 바뀌고 처음으로 출시하는 제품이다 보니 그 기념에 중점을 두려고요.”
“……물론 그러실 거예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메리엔이 이해하듯 말했지만 눈빛에는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과연 메리엔은 백곰 가죽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메리엔 정도의 귀족이 사치품을 위해 엄청난 거금을 지불하는 건 사실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돈을 내는 것만큼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메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메리엔 부인께서 백곰 가죽의 가치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동이네요. 팔려고 생각해도 차마 팔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셨군요. 저라도 그럴 거예요.”
메리엔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다시 초롱초롱했다.
백곰 가죽을 얻고 싶어 초조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이만 내 의중을 꺼냈다.
“그래서 저도 첫 상품을 누군가에게 팔아야 한다면,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일에 보답하고 싶답니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일이요?”
메리엔이 의아하게 갸웃하자 엘로이도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정말 고마운 분이라면 기꺼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루이제와 가족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생각보다 메리엔은 직설적인 사람인 듯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말이 이렇듯 빠르게 통하면 나로서도 편리했다.
그런데 과연 메리엔은 내 제안에 동의할까?
처음으로 선보이는 백곰 가죽이니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의지를 시험하듯 묻기 시작했다.
“혹시 저희 쪽에서 준비가 다 되면 북부에 한번 와 주시지 않겠어요? 북부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메리엔
부인께서 꼭 봐 주셨으면 해서요.”
“어머, 제가요?”
미처 예상도 못 한 말이었는지 메리엔이 크게 놀라워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수도의 귀족에게 북부로 와 달라는 건 원래 내가 살았던 곳의 현대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자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엘로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메리엔을 안심시키듯 살짝 웃어 주었다.
“위험한 일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우리가 북부에 머물면서 길도 만들고 성도 깨끗하게 청소했거든요.”
“그렇군요…….”
“가는 길에 마차를 좀 오래 타야 하지만, 거리는 남부의 해안가로 여행할 때와 비슷하답니다. 숙소는
윌스브룩 성의 호화로운 방으로 마련할 거고요.”
“그러고 보니 그 성…….”
“맞아요. 릴트 제국에서 윌스브룩 성만큼 유서 깊은 성은 없지 않나요?”
“…….”
메리엔의 입술이 벌어졌다.
메리엔처럼 희귀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 윌스브룩 성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 성의 첨탑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도 무척 장관이랍니다. 메리엔이 가족분들과 먼저 와 보시고 괜찮다면
…… 다른 분들께도 추천해 주시겠어요?”
그리 물은 내가 산뜻하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메리엔은 내 의도를 알아들은 듯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메리엔 부인 정도로 사교계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북부 관광을 유행으로 만드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메리엔이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눈빛을 정돈했다.
“……알겠어요. 윌스브룩 자작 부인께서 처음으로 초대한 북부의 손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죠.”
말을 마치며 메리엔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미소에 화답하듯 나도 웃어 보였다.
메리엔의 북부 여행을 최고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 * *

벌써 해가 뉘엿거렸다.
오늘의 볼일을 모두 마친 알렉은 수도의 거리를 지나며 저택으로 향했다.
정보상에서는 뜻밖의 수확이 있었는데, 미리 북부의 성에 놓고 온 참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돌바닥, 화려한 옷차림으로 거니는 귀족들과 온갖 보석으로 반짝이는 상점들.
그 사이를 걸으며 악센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일주일 안에 거액의 세금이라.’
그러나 마르셀의 영지를 매물로 내놓은 상황에서 돈은 그리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악센이 점점 그를 더 압박하는 듯했지만, 그의 레벨만 계속 높일 수 있다면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 악센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루이제와 함께 보내는 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건 이미 그도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윌스브룩 성과 마차에서 두 번 정도 크게 애정도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문득 그의 걸음이 멈췄다.
크게 자리한 꽃집과 달콤한 냄새가 그의 눈과 후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꽃?’
알렉은 잠시 발이 묶인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꽃 가게를 눈에 담았다.
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걸까?
저 싱싱하면서도 호화로운 꽃들을 보니 다시 루이제가 생각났다.
그가 꽃집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띠링!

[꽃말 사전이 오픈되었습니다!]


[꽃을 선물할 때에는 꽃말을 고려해야 진정한 사교계의 신사라 할 수 있습니다.]
[어서 눈으로 꽃을 스캔해 보세요!]

[주의! 루이제는 걸어 다니는 꽃말 사전이니 꽃 선물에 유의해야 합니다.]

“……”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알렉은 꽃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정말로 꽃마다 이름과 꽃말이 그 위로
떠올랐다.
적당한 꽃들을 이것저것 골라 한 다발 품에 안았다.
그러나 알렉은 얼마 걷지 않아 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쇼윈도에서 붉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을 보니 또 그의 마음이 사로잡힌 탓이었다.
루이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는 두 팔 가득 선물을 안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0 화

* * *

“그게 다, 뭐예요……?”
나는 가운을 여미며 현관 쪽으로 나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집에 돌아온 알렉이 웬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있었다.
오는 길에 쇼핑이라도 한 걸까?
특히 그가 꽃다발을 안고 있어서 나는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대답했다.
“오다가 보여서 샀습니다.”
“네? 이 많은걸요?”
나는 그가 들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자 겉에 찍힌 인장만 봐도 모두 명성이 자자한 공방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석과 장신구를 취급하는 곳들이었다.
“제임스?”
“예, 주인님.”
문득 그가 제임스를 불렀다.
“이것들을 모두 부인의 방으로 옮겨 줬으면 좋겠군.”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용인들이 짐들을 받아 갔다.
내 방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잠시 응시한 내가 다시 알렉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걸 다 나 주려고 샀다는 거야?
“루이제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같이 올라가서 풀어 보시죠.”
“네? 아, 알겠어요.”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나도 얼결에 그를 따라 올라갔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와 엘로이는 주무십니까?”
“아, 네. 다들 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계단을 오르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뭔가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언뜻 봐도 무슨 꽃인지 다 알 것 같은데, 제각각의 꽃마다 나에게 건네는 말들이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볼일은 잘 끝났나요?”
애써 내가 묻는 말에 그가 담담하게 한번 끄덕였다.
“예. 어머니와 앤드류는 잘 돌아왔습니까?”
“네. 정말 다행이에요. 리즈 농원에서 긍정적으로 말해 준 것 같더라고요. 북부에서 온실을 운영하는 게
정말 뜻깊은 모험이라고 했대요.”
“어머니께서도 설득을 잘해 주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내가 그를 향해 살짝 눈매를 접었다.
이제 북부에 화훼 농원을 만들 수 있다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리즈 농원 말고도 온갖 잼을 취급하는 업체와도 납품을 받기로 약속했다.
겉으로는 내키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내가 부탁한 일들을 잘 처리해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뭐 우리 가족 전체를 위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다시 알렉을 향해 웃어 주었다.
“하워드 후작저의 영지도 곧 팔릴 것 같아요. 가르시아 공작이 소식을 듣고 반색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군요.”
“앤드류 말로는 그 영지를 판 값이면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을 다 바치고도 많이 남을 거라네요.”
“잘됐습니다.”
“그렇죠?”
알렉을 응시하는 내 눈빛이 절로 포근해졌다.
황궁에 갔을 때만 해도 막막했는데,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아 마음이 많이 놓였다.
그런 얘기들을 하다 보니 금세 내 방에 도착했다.
테이블에 잘 올려 둔 고급스러운 상자들을 보니 꼭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저게 다 뭘까?
설마 내 남편이 나를 위해서 직접 고른 걸까?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그와 나 단 둘만 남았다.
“루이제.”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니 괜히 긴장이 되었다.
“제가 전에도 꽃을 자주 드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역시 기억을 좀 잃기라도 한 걸까?
그가 나에게 꽃을 안겨 주자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는 그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주긴 줬었죠. 내 생일마다 포인세티아를 보냈잖아요.”
그건 그냥 축하의 의미로 주고받는 꽃이라 매년 생일 때마다 내 방은 포인세티아로 가득 찼다.
그가 보낸 꽃이 벽걸이용, 화분용, 화병용 등으로 얼마나 많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포인세티아는
내 방에 두지도 못했었다.
그때 말고는 그가 나에게 꽃을 준 적은 없었는데…….
“……제가 그랬군요. 오늘이 생일은 아니지만 골라 봤습니다.”
“당신이, 이걸 직접요……?”
“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시선을 내려 꽃다발을 살펴보았다.
꽃으로는 축하밖에 할 줄 모르던 사람이 골랐다니, 그런 것치고는 꽃들이 건네는 말들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이 사람이 뭘 알고 이 꽃들을 고른 걸까?
아니면 우연?
다섯 가지도 넘는 꽃들이 저마다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보랏빛 라일락, 스타티스와 오니소갈룸. 붉은 튤립.
첫사랑과 영원한 사랑과 일편단심, 그리고 사랑의 고백까지 없는 사랑이 없었다.
“……알렉.”
나는 조금 글썽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꽃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여태 포인세티아밖에 주지 않았던 사실이 바로 그 증거였다.
차마 나에게 축하 외의 감정은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라니, 나는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꽃다발을 들어 올린 내가 얼굴을 반쯤 가렸다.
“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당신한테 받고 싶었던 꽃들이네요.”
“그랬습니까?”
“당연하죠.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
내 말에 그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감동에 가슴이 찡하고 먹먹했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나에게 관심을 표한 남자들은 많았지만, 정말로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사랑을 받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당장 세상이 망해도 좋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그리고.”
문득 그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나에게 가져오더니 손에 쥐여 주었다.
“풀어 보십시오.”
“알겠어요.”
그에게 한번 웃어 준 나는 꽃을 한 팔에 안고는 정성껏 포장된 리본을 풀었다.
이건 또 뭘까?
사랑 가득한 꽃다발을 받은 탓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지 이것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꽃으로는 축하밖에 하지 못했지만, 알렉은 나에게 선물로 실망을 준 적은 없었다.
그의 신분이 무려 공작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할 만큼 남다른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 몰래 지방의 영지를 준다든가, 휴양지의 저택을 생일 선물로 받았었다.
지금은 모두 잃어버렸지만 정략결혼을 한 남편에게 그만큼 스케일이 남다른 선물을 받는 건 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저택이나 땅이 아닌 이런 작은 선물이라니, 대체 뭘까?
오늘이 내 생일도 아닌데 생일보다 더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크리스털로 된 뚜껑을 여니 붉은빛의 투명한 보석에 눈이 다 부셨다.
이게, 뭐지……?
영롱한 빛에 잠시 가물거렸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헤어핀이 드러났다.
전체가 모두 오묘한 빛깔의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잖아?
“마음에 드십니까?”
조심스럽게 들려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였다.
“너무 예뻐요. 이것도 당신이 고른 거예요?”
“……예. 루이제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솔직한 말에 나는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머리핀을 산 곳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공방이었다.
장신구들이 모두 아름답긴 해도 내가 사기에는 너무 사치하는 느낌이라 직접 산 적은 없었는데, 선물로
받으니 반갑고 기뻤다.
“고마워요. 당신이 이런 걸 보고 날 떠올렸다니 그게 더 감동이네요.”
내 말에 그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살짝 눈가를 접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주는 거라면 지푸라기라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왜-.”
“내 생각을 했다는 거잖아요.”
“…….”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은 듯 그의 눈빛이 조금 차분해졌다.
나는 헤어핀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당신이 직접 해 줄래요?”
“……알겠습니다.”
그가 받아 들자 나는 꽃다발을 계속 품에 안은 채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길게 풀어 헤친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 하나를 갖다 댔다.
그의 손 위로 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남편이 내 몸을 만질 때만 좋은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을 만지니 더 풋풋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가 내 머리에 헤어핀을 꽂았다.
“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몸을 살짝 돌려 거울을 보았다. 붉은빛의 장신구가 나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남편이 줘서 그런 걸까?
“알렉.”
나는 그만 그를 향해 돌아서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꽃다발은 망가지지 않게 그의 등 뒤로 들었다.
그를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당신한테 이런 건 처음 받아 보네요.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닐게요. 평생 간직할 거예요.”
“……루이제.”
“……?”
갑자기 그가 내 몸을 떼어 내더니 헤어핀을 다시 빼냈다.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니 그가 조금 어색한 듯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사실 이건 소모품입니다.”
“네?”
“마력을 담아 놓았거든요. 위험할 때 여길 누르고 던지면 터집니다.”
“…….”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1 화

음?
알렉이 헤어핀의 안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미처 예상도 하지 못한 쓰임새에 나는 크게 뜬 눈을 두 번이나 깜박여야 했다.
그러니까 이게 마력이 담긴 물건이라는 거지.
신기해라.
나는 애써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이걸 쓸 만큼 위험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가 조금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계가 아니니 오작동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한테는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고요.”
“고마워요. 안심할 수 있겠네요. 덕분에 머리에 폭탄을 달고 다니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다이아몬드 헤어핀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이지 근사하고 특별했다.
소중한 남편의 선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건 조금 많이 아쉬웠지만
…….
“그럼 다른 것들도 풀어 봐도 되나요?”
내가 묻자 그가 한번 끄덕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의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했다.
“어머, 이건 향수네요?”
화려하게 세공된 아주 작은 병 안에 핑크빛 액체가 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휴대용 향수였다.
어쩜 이렇게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만 고른 걸까?
“어떤 향일지 정말 궁금-.”
“아, 그건 향을 맡으면 해독 기능이 있습니다.”
“네?”
향수의 뚜껑을 열던 내 손이 문득 멎었다.
“여기에도 마력을 넣은 건가요?”
“예. 남을 공격하는 건 아니니 평소에 쓰셔도 무방하긴 합니다.”
“그럼 맡아 봐야겠네요.”
설마 향수를 못 쓰는 건가 싶어 덜컥 긴장했던 내가 살짝 웃었다.
향수에서는 적당히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너무 좋네요.”
그의 물음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다른 선물들도 모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 마력이 담긴 호신용이긴 했지만 그가 날 얼마나 걱정하고 생각하는지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저도 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맞췄고, 그는 나를 한번 보았다가 내 방을 나갔다.
“하.”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꽃다발을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내 온몸에는 그가 선물해 준 것들이 가득했다.
머리에는 헤어핀을 꽂고 있었고, 반지와 목걸이도 하고 있었다.
하나는 폭탄이고 다른 하나에는 독침이 들어 있었으며, 또 다른 물건은 상대를 잠들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
사실상 살상 병기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나 로맨틱하다니.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야…….’
웃음이 번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일일이 다 마력을 넣어 놓다니, 사랑스러웠다.

* * *

띠링!

[애정도가 100,000 올랐습니다!]

한편 알렉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다가 흠칫 놀랐다.


‘십만?’
아까 꽃다발을 줬을 때는 이십만이 올랐는데 또 십만?
이건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낼 때 말고는 본 적 없는 숫자였다.
겨우 선물에 이런 어마어마한 수치의 애정도가 오르다니.
알렉은 사용인들이 미리 준비해 둔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는 얼굴을 쓸어 만졌다.
점점 애정도가 올라가는 수치가 눈덩이 불어나듯 늘어났다.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그와 그녀는 윌스브룩 성과 마차 안, 수도의 저택에서 밤을 보냈는데,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양의 애정도가 올랐다.
설마 그를 향한 루이제의 애정이 할 때마다 더 깊어지는 걸까?
그녀의 애정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한 그로서는 앞으로 여유를 부릴 틈도 별로 없었다.
할 때마다 늘어난다면 하룻밤이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알렉시스를 늘 원 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윽고 욕실을 나온 그는 셔츠를 걸쳤다.
이 세계에 온 이상 그가 먼저 루이제를 유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띠링!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

[성욕에 눈뜬 초보 남편 → 아내의 욕망을 아는 초보 남편]

“…….”

* * *

나는 알렉이 준 꽃다발을 화병에 꽂았다.


어디에 둘까 고민을 하다가 곧 잘 시간이니 침대 옆 콘솔 위에 올려 두었다.
뿌듯하게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지금 이 느낌을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을 박제할 수는 없으니 일기라도 써 두면 더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콘솔 의자에 앉은 나는 아무 수첩을 꺼내 일기를 적었다.
원래 쓰던 일기장은 브렌트 공작저의 내 방에서 먼지를 맞고 있을 듯했다.
한참을 적다가 그가 준 꽃들의 모양까지 따라 그리다 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유명한 화가한테 의뢰를 해 볼까?’
저 꽃들이 시들기 전에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 주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내 일기장을 서랍에 넣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문과 내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알렉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다시 내 방으로 오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너무 매달리듯 구는 것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똑똑.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에 놀란 내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들어오라고 대답을 하자 빼꼼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제임스였다.
“마님.”
“제임스?”
“주인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방으로 오시랍니다. 따뜻한 와인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따뜻한 와인? 그거 좋겠네.”
뜻하지 않게 들려온 말에 나는 불현듯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한 술이라니 벌써부터 온몸이 달콤하고 몽롱하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알렉의 방은 같은 층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테라스 난간에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의아해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알렉.”
“루이제.”
내 목소리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옷을 여미며 테라스로 나갔다.
“안 추워요?”
“괜찮습니다. 들어갈까요?”
“아뇨. 나도 잠깐 찬 바람이 쓰고 싶어서요.”
“……그럼 이리 오십시오.”
그가 나를 살포시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벌어진 셔츠 안으로 조각 같은 몸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의 체온은 나보다 훨씬 뜨거워서 난로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내 등을 감싸며 말했다.
“벌써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잠이 잘 안 와서요. 당신한테 너무 좋은 선물을 몇 개나 받았잖아요.”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다면 진작 드릴 걸 그랬네요.”
“아니에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당신도 갖고 싶은 게 있나요?”
“예?”
“나도 보답하고 싶어서요.”
내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눈매를 접었다.
그가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있긴 있습니다.”
“뭔데요?”
“당신의 동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뭐든지 말해 봐요.”
“…….”
흔쾌한 내 대답에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약간 쌀쌀했던 날씨는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한 손으로 내 등허리를 쓸어 내리기 시작하자 그의 손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망설임 없는 유혹처럼 그가 말했다.
“실은 그동안 저는, 당신을 안으면 안을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네?”
이건 무슨 말일까?
생애 처음 애욕을 나누게 된 기쁨에 힘이 난다는 걸까?
나도 같은 마음인 것처럼 웃어 주었다.
“저도 요즘 더 힘이 나요. 당신이 날 채워 주고 있잖아요.”
“……아뇨. 저는 정말로, 루이제 당신에게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필요하고요.”
“…….”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확고하고 분명했다.
그와 내가 눈을 마주 보는 사이 그가 살짝 내 몸을 들어 안더니 방 안으로 순식간에 움직였다.
내 머리카락이 작게 나풀거릴 정도의 바람이 불었다.
남편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다음 순간 다시 눈앞이 휙 변하더니 그가 나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
“내가 원하는 만큼 하려면 당신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
나는 문득 그와의 첫날밤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고대했던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아 견뎠지만, 쾌락 다음에는 통증이 온몸을 괴롭혔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 몸은 빠르게 회복했고, 그 이후에는 금세 적응이 된 건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
마차에서도 이성은 잠시 내려 둔 채 그를 느껴 보았지만 평소처럼 몸은 가뿐했다.
불현듯 알렉이 마르셀을 치유해 주던 장면이 떠오른 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그동안 당신이 날 낫게 한 건가요?”
그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긍정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해로운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허락 없이 치유했다는 걸 알면 반기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
내심 놀라움에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동안 왜 의심하지 못했던 걸까?
하루 이틀 정도면 몸이 가벼워져서 그저 내가 그만큼 회복이 빠른 줄 알았다.
잠시 생각한 나는 손 하나를 들어 그의 뺨 한쪽을 감쌌다.
“……난 아픈 것보다 편한 게 더 좋아요.”
“…….”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만큼 나도 당신을 원하고 있거든요.”
내 말에 그는 더 깊고 가늘어진 눈으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마든지 괜찮습니까?”
그리 물으며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
나는 긴장되어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그러니까 게임 속 힐러처럼 나를 계속 낫게 하면서 밤을 새우겠다는 거지…….
벌써부터 그 안락하고 황홀한 시간을 떠올리니 기절할 것 같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2 화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근사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에 짓눌려 황홀함에 잠긴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능력을 써야 할 만큼 몸에 힘이 빠지거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와 체온을 나누는 느낌이 이전보다 더 아늑하고 몽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기만 해도 온몸이 물에 잠기는 기분이었는데, 오늘 밤은 왠지 더
나른했다.
달콤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의 입술과 손길이 너무도 섬세하고 정성이 넘쳤던 덕분이었을까?
따스한 휴양지의 바닷가에서 그와 함께 수영을 하는 듯했다.
어떤 형로 물속을 누비는 그의 실력은 능숙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후에는 아침을 먹고 또 방 안에 틀어박혔다.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우리는 깊이 온기를 섞었다.
꼭 내 몸이 그의 것 같았고, 그의 몸은 내 것같이 밀착했다.
내가 상상하던 완벽한 관계라 감탄과 행복이 속에서 넘쳐흘렀다.
“……여보. 그거 알아요?”
결국 나는 가슴이 너무도 벅차오른 나머지 도저히 이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지금의 당신을요.”
사랑이 아니라면 이토록 평생 붙어 있고 싶은 열망은 대체 뭘까?
나만큼이나 그도 나를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마음을 숫자로 표현한다면 바닷물에 비친 밤하늘의 별의 수정도 되지 않을까?
딱 그런 마음으로 애틋하고도 아득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행복해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인 것만 같았다.

* * *

화창한 한낮.
올리비아는 황후 궁의 정원에서 푹신한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이제 오셨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했다.
마침 올리비아의 아버지인 브로디 가르시아 공작이 황후의 부름을 받아 찾아온 참이었다.
브로디가 올리비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 브렌트 공작가에서 하워드 후작가의 영지를 매물로 내놓았더군요.”
브로디의 안색이 보기 드물게 싱글벙글했다.
평소 딸의 안부를 묻거나 웃어 주지도 않는 사람인데, 후작저의 영지를 살 수 있게 되어 꽤 기쁜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올리비아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해리엇. 네가 데려올 사람이 있다.’

그날 이후로 올리비아는 루이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황제가 루이제를 원한다.
그 사실을 직접 황제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속이 다 끓다 못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노발대발하며 이 격한 분노를 다른 사람 앞에서 터뜨리지는 못했다.
속으로만 삭이는 그녀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화낼 힘조차 없을 만큼 온몸에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죽지 않을까?
올리비아는 황궁의 감옥에 갇힐 때마다 점점 말라 가는 죄수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신세가 그 죄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왠지, 황제의 짓인 것만 같았다.
그가 줄리아처럼 그녀마저 천천히 말려 죽이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폐하께서 루이제를 눈여겨보고 계세요.”
“예?”
대뜸 들려온 올리비아의 말에 브로디는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굴 눈여겨본다고요?”
올리비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브로디는 서글퍼 보이는 올리비아의 안색을 의아하게 여겼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올리비아는 황제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저런 청승맞은 표정을 짓곤 하였다.
그런 올리비아가 브로디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녀만 낳고 여태 황자는 낳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그 황녀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버렸다.
그런데 다른 여자를 눈여겨보고 있다면, 이제 올리비아와 가르시아 가문은 내쳐질 게 분명했다.
브로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전 알고 있었어요. 여태 저처럼 그분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도 없는걸요. 그런데 이제 때가 온 것 같아요.
폐하께서 워든 백작에게 루이제를 데려오라고 하셨거든요.”
“그게 무슨…….”
브로디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선뜻 올리비아의 말을 믿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체념 섞인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는 보지 못하셨나요? 황궁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여자를 보는 폐하의 눈빛이 남달랐는데요.”
“그게 정말입니까?”
고개를 한번 끄덕인 올리비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줄리아가 루이제를 독살하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꼭 자신의 것을 남이 가로채려고 한 것처럼 날을
세우셨어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요.”
문득 올리비아는 손톱이 살을 짓누르도록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기운 없는 눈동자에 뾰족하게 힘이 실렸다.
그들이 북부에서 정말 죽기라도 했다면 이토록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돌아왔다.
브로디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찡그렸다.
“그런 여자를 죽을지도 모르는 북부로 보냅니까?”
“그렇게 하면 루이제가 알렉시스와 이혼이라도 할 줄 아셨던 거예요.”
“…….”
브로디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올리비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올리비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
“벌써 줄리아에 이어 마르셀까지 죽었어요. 그들이 가졌던 전부는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소유가 되었죠.”
“…….”
“다음에는 누가 망가질까요? 저는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요…….”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게 일렁였다.
그들은 신분과 재산을 다 빼앗고 길바닥에 내쫓아도 화려하게 살아 돌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극하는 사람들마저 뒤끝이 좋지 못하기까지 했다.
비록 마르셀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긴 했지만, 그 일에 루이제와 알렉시스 부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알던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벌이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하루빨리 없애 주세요.”
“뭐라고요?”
“후환을 그냥 두실 건가요?”
“올리비아.”
“해 주실 거죠?”
올리비아는 간절한 눈으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브로디라면 굳이 올리비아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루이제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로디는 완고한 눈으로 이를 갈 듯이 말했다.
“폐하께서 눈여겨보는 여자라면 우리도 몸을 사려야지요. 사사로운 감정은 거두십시오. 신중치 못하게
나섰다가 가문이 멸족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올리비아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후계자 때문에라도 황제에게 조금씩 다가가 보긴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제 황제는 그녀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더 이상 그녀에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도록 분명했다.
“그래서 저를 버리시겠다고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브로디는 애써 예를 표하고는 휙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올리비아는 힘없이 의자에 기댄 채 브로디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폐하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거였다.
이런 상황에 그녀를 지켜 주기는커녕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벌일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문을 위해 한 일이 얼만데…….’
이를 악문 올리비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시녀들이 다가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를 대신해 나서 줄 사람이 이제 없는 걸까?
그래 봤자 루이제 하나 세상에서 치워 버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하녀 한 명을 골라 지시했다.
“오늘 전 브렌트 공작 부인의 일정 좀 알아봐 주렴.”
“명 받들겠습니다, 황후 폐하.”
올리비아는 그녀에게 조아린 하녀를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타올라 보지 못하고 싱겁게 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 * *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무척 홀가분한 기분으로 저택을 나섰다.


몸도 마음도 너무도 산뜻하고 가벼웠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끝없는 희열에 몸서리쳤는데, 온몸이 통증 하나 없이 가뿐하다니.
‘알렉의 힘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거야.’
새삼 그의 능력을 떠올린 내가 미소를 금치 못했다.
내 이름을 포기하지 않고 연습하던 과거의 알렉도 좋았지만, 지금의 변한 알렉도 가슴이 술렁거릴 만큼
좋았다.
내가 마차에 오르자 사용인들이 배웅해 주었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마님. 하워드 방직 공장의 사람들이 두 분을 무척 반기실 거예요.”
“고마워. 조금 긴장됐는데 덕분에 안심이 될 것 같아.”
“감사합니다, 마님.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이윽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내가 알렉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짓자 그도 나를 보며 내 손을 어루만졌다.
앞으로 그와 나는 마르셀의 방직 공장에 가 새로운 주인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공장주의 빈자리가 길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귀족들도 무시하던 귀족인 데다가 방직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니 그들은 곧 공장이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마르셀과는 달리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환풍 시설을 넘쳐날 만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3 화

* * *

하워드 방직 공장으로 향하는 길.


알렉은 자꾸 입꼬리가 움찔대려는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지금의 당신을요.’

루이제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지금까지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애정은 적지 않게 느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알렉시스가 아니라 그를 향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너무 놀라 되묻기까지 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겠어요?’
‘……루이제.’

살다 살다 여자의 고백에 감동을 받을 줄이야…….


그녀에게 바라 마지않던 말이었다.
가슴이 희한하게 일렁이고 봄 공기가 속에서 차오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세상을 다 가지면 이런 느낌일까?
그 순간 또 어마어마한 애정도가 올랐다.
그만큼 루이제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고 설렜다.
마차 안에서 작게 헛기침을 한 그는 괜히 입을 가리듯 입술에 손을 얹었다.
지금 그의 레벨은 22 였다.
수도로 오는 마차 안에서 애정도가 약 50 만이 올랐고, 수도로 온 이후에는 오늘까지 약 100 만 정도의
애정도가 상승했다.
함께 밤을 보낸 시간들과 선물을 주었을 때, 그리고 평소에도 오른 애정도를 모두 합한 수치였다.
루이제는 하면 할수록 더 좋아해서 오늘 아침에도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스템은 그가 얻은 애정도와 경험치에 특별 포인트를 더 올려 주었고, 기존에 애정도의 30%가 오르던
경험치의 비율은 50%로 늘어났다.
심지어 시스템은 마르셀이 죽었을 때도 경험치를 정산해 주었다.
마르셀이 그의 마차에 화약을 던졌을 때부터 적으로 인식한 덕분이었다.
시스템은 마르셀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보유하고 있던 재산 등을 모두 계산하더니 경험치의 점수를
매겼다.
뜻하지 않게 경험치가 대폭 오른 그는 레벨이 22 가 되었다.
그러나 레벨이 이쯤 되자 레벨 업에 필요한 애정도와 경험치의 숫자가 더 말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레벨을 23 에서 24 로 올리려면 필요한 경험치가 약 1 억 2 천, 애정도는 약 1 천 2 백만이었던 것이다.
엄두도 나지 않는 숫자였지만 그리 막연하지는 않았다.
그가 얻고 있는 애정도와 경험치의 규모도 점점 늘고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시스템도 그에게 특별한
보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
문득 묘한 느낌이 들어 알렉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루이제가 했던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와 더불어 그의 힘 또한 착실히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성장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한 터라 조금
감개무량하 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은 이미 힘보다는 루이제의 사랑에 더 관심이 가고 있었다.
.
.
.
방직 공장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알렉과 루이제는 드디어 하워드 방직 공장을 두 눈에 담았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드넓은 공장은 한눈에 다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컸다.
겉보기에는 꽤 낡았지만,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직물의 양은 릴트 제국의 방직 공장 중 1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이 세계에서는 방직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런 방직 공장을 그와 루이제가 갖게 되었다는 건 릴트 제국의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곳이네요. 이제 이 공장이 우리의 소유라니…….”
문득 루이제가 감회가 남다른 표정으로 공장의 외관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꼭 꿈을 꾸는 것처럼 아련했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알렉은 이제 루이제가 얼마나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겨우 폭군을 해치우는 게 목적의 전부였으나 루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는 더욱 원대하고 긍정적인 희망과 꿈이 느껴졌다.
잠시 루이제를 응시하던 알렉은 다시 공장을 바라보았다.
릴트 제국의 방직 공장 중 마르셀과 개리슨, 데미안이 소유한 세 고장이 전 제국의 유통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합인 홀든 방직 유니언은 이제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르셀은 죽었고, 데미안은 마르셀에게 의가 상했다.
개리슨은 감옥에 갇힌 줄리아를 찾아갔다가 마르셀에게 들켜 피 터지게 얻어맞았다고 했다.
마침 루이제가 손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봐요, 알렉. 간판에 오물이 묻어 있네요.”
“……?”
알렉은 루이제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하워드 방직이라는 간판에 웬 검은 칠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몰래 더럽힌 흔적이었다.
“그동안 노동자들이 마르셀에게 쌓인 게 많았나 봐요. 하긴 환풍 시설 하나 만들어 주기 싫어서
시위대장을 죽기 직전까지 때린 놈이니까…….”
루이제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려도 고전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움이 여전했다.
알렉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실까요?”
“알겠어요.”
루이제가 산뜻한 미소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공장 안으로 다가가기 시작하니 루이제는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두꺼운 철문 앞에 다다르자 함께 온 사용인들이 다가와 얼른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열렸다. 여기저기 녹슨 흔적이 보였다.
이윽고 공장 안을 들여다본 알렉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루이제도 심상치 않은 눈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방직 공장 특유의 먼지와 솜털들이 내부를 가득 채운 채 뿌옇게 부유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콜록거리는 소리가 참담할 정도로 흘러넘쳤다.
“……알렉.”
루이제가 그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충격과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예상했던 현실을 직면한 것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여태 이런 환경에서 근무를 했던 걸까?
이내 루이제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더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점차 그와 루이제를 발견하기 시작했지만, 의아해하다가도 다시 일에 집중했다.
모두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알렉시스! 루이제!”
그때였다.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공장 안을 둘러보던 그와 루이제가 의아하게 뒤 쪽을 돌아보았다.
대뜸 큰 소리가 나 놀란 노동자들도 힐끔 그쪽을 응시했다.
남자 두 명이 적의를 가득 품고 공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등장인물 일람은 저들이 개리슨과 랭던 하워드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랭던은 마르셀의 남동생이자 이 공장의 전 소유주였다.
랭던이 지팡이를 들더니 그와 루이제에게 삿대질을 하며 침을 튀겼다.
“당장 내 공장에서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마음대로 들어와!”
루이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랭던의 옆에서 개리슨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찡그리고 있었다.
“어쩐지 여태 랭던 하워드 씨가 가만히 있는다 싶었어요.”
“나가란 소리 못 들었어?!”
“나갈 거면 당신이 나가야지. 공장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이 공장은 내 거야. 누가 뭐래도 내 거라고! 마르셀 그 등신 같은 놈이 무슨 짓을 했든 내 거다 이
말이야!”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면 의회를 찾아가든가. 남의 공장에서 더 행패를 부리면 제 발로 못 나갈 줄
알아.”
“……저런 미친 여자를 다 보겠군!”
“후후후.”
루이제는 랭던의 고함에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여유롭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느슨해졌다.
사람들은 그와 그녀가 새 주인이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품은 듯했다.
루이제는 이제 웃음을 그치고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에 날리는 실밥들을 손으로 휘휘 날렸다.
“고양이 털도 아니고 공장 안이 이게 뭐야? 정말 숨도 못 쉬겠어.”
“저, 저 여자가……!”
“마침 전 주인이 나타나 줘서 다행이네요. 대체 누가 자기 공장을 이따 위로 더럽게 운영하나 싶어서 얼굴
한번 보고 싶었거든.”
“뭐?”
“자기 거라면서 왜 이렇게 방치했던 거죠? 자신의 것은 아끼고 소중히 여겨 줘야 하지 않아?”
“…….”
랭던이 할 말을 잃었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루이제가 다시 특유의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제 사람들은 넋을 놓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랭던을 향한 루이제의 눈빛이 조금 살벌해졌다.
“난 아니거든. 내 것이 더러워지면 깨끗하게 닦을 거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두지 않지. 어디 가서
이런 공장의 소유주라고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어?”
“…….”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주인이 바뀌었으니 이제 이곳의 근로자들은 내 사람들인데 시원한 공기 한 번 마실
수 없도록 일만 시킨다는 게 말이 돼?”
“저, 저 미친……!”
루이제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창피한 줄 알고 이만 꺼져 줬으면 좋겠어. 이 공장에 새로 손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당신
같은 쓰레기 상대할 시간이 없거든.”
“…….”
알렉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랭던과 개리슨이 루이제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왠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공장의 실밥 섞인 먼지들이 그의 호흡기로 들어와 간지럽히기 때문일까?
공장 안의 무수한 사람들도 입을 벌리고 그처럼 루이제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 주인의 말에 놀란 듯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그 순간 노동자들은 새 공장주가 랭던과 마르셀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4 화

* * *

“꺼지라고!”
나는 한 번 더 랭던과 개리슨을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랭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더니 슬그머니 주위를 보았다.
이제 공장 안에는 기계음이 완전히 멎어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랭던을 향한 사람들의 눈총은 따끔하고 날카로웠다.
한두 해 운영한 공장이 아니었으니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과 원한이 적진 않을 것이다.
“에이 씨.”
랭던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공장을 나갔다.
랭던이 가 버리자 개리슨이 나를 향해 피식 비웃었다.
“이제 홀든 방직 유니언의 대표는 나다. 우리 조합에서 네놈들을 받아 줄 것 같아?”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소를 참지 못했다.
의기양양한 개리슨의 표정을 보니 저런 협박이 먹힐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받아 달라고 할 일도 없으니까 걱정 마. 우린 개리슨 당신과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뭐?”
“뭐, 개리슨 당신이 앞으로 우리 공장의 털끝이라도 따라온다면 모르지. 우리가 당신을 받아 줄지도.”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린 우리만의 공장과 조합을 새로 운영할 거거든. 지금까지 당신들이 하던 방식과는 너무도 다를 텐데
어쩌지?”
“…….”
내 미소에 개리슨은 질색을 했다. 이내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개리슨을 보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너무도 험악했다.
“어디 잘되나 보자!”
개리슨이 빽 소리를 치더니 이내 도망치듯 공장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비웃어 주다가 금세 몸을 돌렸다.
돌아선 순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려 있었다.
“루이제.”
그 순간 알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를 한번 보더니 눈길을 옮겨 누군가를 응시했다.
온몸에 실밥을 뒤집어쓴 여자가 어느새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불안하면서도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 공장의 관리인인 다이애나입니다.”
관리인?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등장에 나는 조금 화색이 되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다른 분들도요.”
내가 공장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기계 소리가 그치니 공장 안에는 내 목소리만 선명하게 울렸다.
내가 알렉을 응시하자 그도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렉시스입니다.”
“나는 루이제예요. 전 브렌트 공작 부부였다고 하면 알까요? 다들 들었겠지만, 우리가 이 하워드 방직의
새 주인이 되었답니다.”
사람들이 알렉과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의 눈망울이 일렁이고 얼굴빛이 약간 상기되었다.
저들에게는 주인이 바뀌고, 그 새 주인이 등장한 것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나도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랭던이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공장의 소유권은 확실히 우리 가문의 것이
되었거든요.”
“…….”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호기심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남녀노소 다양했다. 아직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도 적지 않았다.
안타까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물이 이십여 개는 더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이 공장에 달려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는 알렉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그에게 팔짱을 낀 후 다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이 공장의 이름은 브렌트 방직이 되었답니다. 앞으로 이름뿐만 아니라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우선은 공장 건물부터 바뀌어야 하겠죠.”
“…….”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설마 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이미 나와 알렉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근무 환경 문제로 공장주들과 싸워 왔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방직 공장이 싫으면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냐며 비꼬았지만, 비난받아야 할 건 노동자들이
아니라 비인간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권력 있는 고용주가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푼돈이라도 준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가?
꼭 사람을 직접 해쳐야만 폭행인 걸까?
노동자들을 탓하며 그런 악덕 고용주들을 합리화하는 세상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나도 지켜보았답니다. 아무런 타협이 되지 않아 상심이 컸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마르셀은 죽었고 랭던은 아무런 힘이 없죠. 나와 내 남편은 이런 공장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고요.”
말을 마치며 나는 한숨과 함께 공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창문은 벽의 높은 곳에 작게 주르륵 달린 채광용이 전부였다.
지금은 어딘가로 도망갔지만, 채찍을 들고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놈들도 있었다고 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으로 내가 연이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드릴 거예요. 휴식 시간도 충분히 많이 보장할
거고요. 근무 중에 필요한 식사도 제공할 거랍니다.”
“……!”
사람들의 눈이 커지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감탄과 충격이 어디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크게 울렸다.
그 모습이 나는 좋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그러나 못 믿겠다는 마음이 더 큰지, 사람들 틈에서 말도 안 돼, 저게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게, 정말인가요?”
문득 다이애나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우리는, 저희는 두 분의 공장에서 평생을 바칠 수 있어요.”
다이애나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입가를 당겼다.
“공장 건물을 손봐야 할 테니 그동안 휴가부터 드려야겠네요. 급료는 당연히…… 유급이어야겠죠?”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의 감탄이 조금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우리가 공장의 환경을 바꿀 거라는 말을 이제야 믿는 기색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어디서 이런 분들이…….”
다이애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지었다.
나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건 이토록 뿌듯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두 분은 저희들의 은인이세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꼭 갈채 같았다.
공장을 나설 때도 그들의 환호와 함께였다.

* * *

‘……하. 기분이 이상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약을 잘못 먹은 사람처럼 희한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렸다.
그저 공장에 다녀왔을 뿐인데 이렇게 벅차오르다니.
그 많은 사람들에게서 행복한 기운을 얻었기 때문일까?
저택에 도착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제임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정말 대단하십니다. 공장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다고요.”
“……아니야. 당연한 일이었을 뿐인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마셨다.
어쨌든 방직 공장은 앞으로 우리의 주요 수입원이 될 것이고, 나는 평생 팔자에 없을 줄 알았던 사업을
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 아직 누군가의 감탄을 받기에는 일렀다.
‘그 큰 공장으로 기본만 해도 온 제국의 돈을 쓸어 모을 텐데…….’
겨우 내기 하나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방직 공장을 얻게 되었다니 아직도 얼떨떨했다.
제임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앞으로 정말 많은 분들의 존경을 받게 되실 겁니다.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의 존경은 릴트 제국민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곳 아닙니까.”
“……후후.”
나는 그냥 작게 웃었다.
제임스의 칭찬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러나 브렌트 방직 공장에 다수의 근로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내가 알렉을 불렀다.
“알렉.”
“예?”
“그러고 보니 당신이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었네요. 당신 장부를 보는 거나 계산을 정말 잘하잖아요.
방직 공장에서 가져온 장부 좀 봐 줄 수 있나요? 물건값이나 근로자들 급료를 새로 책정해야 하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알렉의 흔쾌한 대답에 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공장의 회계를 다시 봐 준다니 이보다 믿음직스럽고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차를 다 마신 나는 내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알렉은 장부를 잠깐 보더니 공장에 재고를 확인하러 다시 나간 후였다.
지금은 갓 공장주가 된 중요한 시기였으니 처음 한 번은 직접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해가 졌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용인 한 명이 들어왔다.
“마님.”
“응?”
“메리엔 부인께서 편지를 보내셔서요.”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나는 사용인에게 다가가 편지를 건네받았다.
메리엔 부인과는 백곰 가죽을 주는 대신 북부로 여행을 오라는 약속을 했었다.
나는 편지를 펼쳐 보았다.

[루이제. 당신과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따로 만날 수


있을 까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5 화

나는 잠시 물끄러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메리엔이 나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라니, 그게 뭘까?
편지의 하단에는 약속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
북부 여행 때문일까?
잠시 갸웃한 나는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꼭 비밀로 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아서 어딜 가냐는 사용인들의 물음에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뭘까?’
혹시 메리엔이 나에게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걸까?
드디어 나에게도 사교계의 친구가 생기려나?
지난번에 만났을 때 느꼈던 거지만 메리엔은 꽤 괜찮은 귀부인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귀부인들과도 진심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메리엔과는 마음이 잘 통할 것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약속 장소는 수도와 근교의 경계에 있는 어느 저택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인. 어서 들어오세요.”
사용인의 안내에 나는 저택의 외관을 잠시 올려다보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척 유서 깊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과연 저택 안도 오래된 조각상과 골동품들로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메리엔이 수장고로 사용한다는 저택이 몇 군데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가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참 메리엔 부인답다는 생각을 하자 사용인이 어느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에 문을 열더니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섰다.
“들어가 보십시오, 부인.”
“고마워.”
이윽고 내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척 큰 응접실이었는데, 방 안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 같았다.
조금 어두운 내부 탓에 더욱 운치가 있었지만 약간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다가가니 창 쪽에서 메리엔의 실루엣이 보였다.
“메리엔.”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살짝 의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위화감은 뭘까?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이 불길하게 내 발치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밤에 느낀 추위처럼 약간의 소름이 내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메리엔이 후드가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메리엔치고 체구가 작아서?
“으으…….”
문득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 내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심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주저앉아 결박을 당한 채 나를 향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절박한 표정, 두려움에 잔뜩 잠식당한 듯한 눈동자.
“……메리엔?”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메리엔이었다.
나는 황급히 창가 쪽에 선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여자는 내 쪽을 바라보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오랜만이네요, 루이제.”
“…….”
“북부에 잘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황궁에도 자자하더라고요.”
황후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답지 않게 무척 이질적이었다.
나는 메리엔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황후를 향해 물었다.
“폐하께서 메리엔을 저렇게 하신 건가요?”
황후가 왜 이러는 걸까?
평소에도 황후에게서 싸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지금 같은 일을 벌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표정이나 분위기도 내가 알던 황후가 아닌 것 같았다.
황후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네요. 황제 폐하께 눈속임을 해야 했거든요.”
“…….”
“폐하께서 내게 무관심하시긴 하지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
나는 잠시 말없이 황후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그녀의 상태가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잘 알 것 같았다.
평소처럼 병색이 완연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광기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쩐지 저를 안내한 사용인이 황궁의 하녀더라니, 그새 직업을 바꾼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를 알아봤나요? 눈썰미가 좋네요.”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나는 조금 강렬한 눈으로 황후를 주시했다.
그녀는 나에게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메리엔을 인질로 뭔가 협박할 생각인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잘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화가 날 것 같았다.
“당장 메리엔을 풀어 주세요. 저와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닙니까?”
“맞아요. 루이제 당신한테 볼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메리엔을 풀어 주지 않을 거예요.”
“…….”
“……잠깐 여기 와서 앉을래요?”
황후가 그리 물으며 소파에 앉았다.
나는 메리엔을 바라보았다가 미안함을 느끼며 소파로 향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황후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황후는 촛불 하나를 들어 다른 초에 불을 옮겼다. 테이블 주위가 조금 더 밝아졌다.
이윽고 고개를 든 황후는 조금 아련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루이제는 정말로 아름답네요.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광채가 나요.”
“…….”
그건 내 머리카락이 은발이라 빛을 반사하는 탓이었다.
칭찬은 고맙지만 지금은 별로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루이제 당신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당신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당신만 쳐다봤거든요.”
“…….”
“높은 곳에 앉아 있으면 다 보인답니다. 그리고 폐하의 옆에 있으면 그분이 어딜 보는지도 알 수 있죠.”
“……?”
나는 도통 황후의 의도가 짐작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황제까지 거론하는 걸까?
어서 메리엔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저 할 말이 있는 거라면 황궁으로 불러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이런 곳으로 몰래 불러내 메리엔까지
납치한 건지 너무도 불길했다.
“슬프게도 그분은 나를 봐 주진 않으셨답니다. 나는 늘 그분의 옆모습을 봐야 했어요.”
황후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설마 황제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별로 알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폐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폐하께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으셨다
한들 내가 계속 그분의 황후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거든요.”
“…….”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날 버리려고 하시네요. 살려 둘 필요도 없을 만큼 날 거추장스러워하시죠.”
황후가 손을 꽉 말아 쥐는 게 보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를 술술 하다니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그건 다…… 루이제 당신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대뜸 들려온 말에 나는 황당한 눈으로 황후를 응시했다.
나를 향한 황후의 눈빛에는 어느새 분노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겨우 당신 때문에, 폐하께서 날 버리셨다고요.”
“…….”
나도 흔들림 없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울분에 찬 황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폐하 때문에 난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데……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폐하께서는 이제 다른 여자를
황후로 원하시죠.”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황후가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그녀가 미친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황제가 나를 황후로 염두에 두었다는 말을 하는 걸까?
이미 결혼한 몸인 나를?
상상만 해도 역겹고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알려 줘요? 내가 어떻게 됐는지.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나도 폐하께 처음
알았거든요.”
“으으……!”
문득 메리엔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만 소파에서 일어나 메리엔에게 다가갔다.
“메리엔!”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메리엔의 입을 묶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제정신이 아닌 황후와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황후라지만 죄 없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으……!”
문득 메리엔의 두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 버렸다.
곧이어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며 의식을 잃은 것처럼 고개가 기울었다.
“메리엔!”
나는 너무도 놀라 그녀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봐요, 메리엔!”
갑자기 왜 이러지?
문득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느낌이 엄습했다.
환호가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메리엔을 끌어안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를 응시했다.
“지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죠?”
황후는 기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이게 바로 다 황제 폐하의 힘이랍니다. 그걸 나한테 주신 지 벌써 2 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그게 나를
갉아 먹고 있었어요.”
“…….”
“차마 쓰지는 못했죠. 나와는 맞지 않는 힘이라 몸에 담고 있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미쳤군요!”
몸을 일으킨 나는 황후를 마주 보고 섰다.
멀쩡하던 메리엔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설마 죽은 걸까?
황후에게 이런 힘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 했는데.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었다.
저 여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루이제 당신이 사라지면 폐하께서 어떤 기분일지 정말 궁금하네요. 내가 죽기 전에 당신 하나 없앨 힘은
낼 수 있을 것 같거든.”
“……!”
황후가 웃는 듯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무언가 선득하고 불안한 기운이 내 숨통을 꽉 조였다.
알렉에게서 느꼈던 마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보통 여자가 아니었구나.
순간적으로 나는 머리에 달려 있던 다이아몬드 헤어핀을 빼내 황후를 향해 던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6 화

펑!
“꺄아악!”
내 헤어핀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황후의 비명이 들렸다.
황후한테 이런 힘이 있었어?
미친 거 아니야?
마치 폭탄이 내 머릿속에 터진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황후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메리엔을 일으켰다.
메리엔.
내 머리핀……!
메리엔이 정말 죽었을까 봐 겁이 났고, 알렉에게 선물 받은 다이아몬드 머리핀을 며칠도 못 써 보고
망가뜨려서 너무도 속이 상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메리엔까지 위험에 빠졌으니 더 이상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그만큼 황후에게 화가 났다.
‘저 미친 여자가 진짜……!’
나는 메리엔을 안고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메리엔. 내가 꼭 구해 줄게요.”
그리 중얼거린 나는 가까스로 응접실의 문까지 다가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박동했지만, 그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황후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려움이 내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알렉이 준 선물들을 몇 개 더 지니고 있었고,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윽!
그 순간 불길한 기운이 내 발목을 둘러싸더니 몸이 고꾸라졌다.
의식을 잃은 메리엔마저 힘없이 쓰러졌다.
“메리엔!”
내가 메리엔을 안자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돌아보니 역시나 황후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웃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황후의 목소리가 끊어질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어디서…… 이런 게 났어요? 신식 화약?”
나는 눈에 핏발이 설 만큼 그녀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덕분에 폭발에서 목숨을 건진 듯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전에도 꽤 아파 보였는데, 황궁에서 요양이나 하지 이렇게까지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메리엔을 끌어당기며 황후와의 거리를 계속해서 벌렸다.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으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황후 폐하를 대신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라고.”
내가 황후에게 쏘아붙였다.
정말 올리비아의 말대로 황제가 날 황후로 원하고 있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내 입장에서는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휘둘릴 생각도 없거니와 황후의 손에 죽을 일은 더욱더 없었다.
황후는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웃었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폐하께서는, 못 할 일이 없으세요……. 당신이나 당신
남편같이, 흔한 사람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과연 그럴까?”
내가 최대한 이를 악물며 황후를 비웃어 주었다.
듣자 하니 황제도 알렉처럼 비범한 힘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덜컥 겁이 나며 황제를 무너뜨리는 일이 더 막연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굴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모르고 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황후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황후가 조금씩 따라오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등 뒤에서 광기와 체념이 어린 황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복도 안에 울렸다.
“당신은, 모르지? 폐하께서 얼마나…… 무섭고 강하신 분인지.”
“……!”
아.
나는 순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온몸이 묶인 것 같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메리엔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다른 무기를 써야 할 것 같아 손을 움직여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반지에 있는 마력이 담긴 독침을 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죽어 줬으면 좋겠어……. 루이제 당신이, 죽는 걸 봐야…… 나도 편하게……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아.”
“……!”
아악!
나는 그만 소리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비명을 내질렀다.
무언가 내 몸속을 날카롭게 휘젓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왈칵, 하며 올리비아가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녀의 무릎이 꺾이며 풀썩 주저앉았지만, 나를 공격하는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자신의 수명이 급속도로 줄더라도 나를 꼭 죽이겠다는 열의가 느껴져 어처구니가 없었다.
올리비아가 마녀처럼 웃음소리를 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할걸……. 그냥 포기하고, 빨리 죽는 게…… 고통은 덜할 거야.”
‘……하.’
나는 필사적으로 올리비아의 힘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평범한 인간인 내가 이 비현실적인 힘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다.
온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전혀…… 그래 봐야 전혀 소용없어…….”
그래. 정말 죽을 것같이 괴롭네.
‘그래도 황후 너한테는 절대 안 져.’
나는 이를 악물었다.
황후가 날 비웃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귓가에 가득 찼다.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
“아무 힘도 없는, 네가……?”
그러나 아무리 저항해 봐도 온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만 거세졌다.
설마 이대로 정말 죽게 될까?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는데, 너무 허무한 거 아니야?
점점 시야가 가물거리고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숨이 넘어갔다.
“정말, 안달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폐하께,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야…….”
그리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도 점점 힘에 벅찬 느낌이었다.
이렇게 더 버틸 수만 있다면 황후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를 갈던 내 입술 사이에서 문득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닥쳐.”
말소리가 나감과 동시에 손가락이 까딱 움직였다.
나는 너무도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 온몸과 신경을 파고들던 황후의 힘이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된…….”
도망가려면 지금뿐이었다.
나는 손을 내린 채 반지에 박힌 보석의 방향을 몰래 황후에게 겨누었다.
알렉이 준 독침이 부디 황후에게 명중하기만을 바라며 작은 장치를 눌렀다.
“아!”
동시에 내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솟구쳤다.
황후의 힘이 다시 내 몸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가시덩굴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윽.”
거의 비슷한 순간 황후도 신음을 내뱉었다.
독침에 당했나 보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메리엔을 끌어당겼다.
황후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정말 미친 여자야.’
태어나서 이런 고통은 처음 느껴 보았다.
털썩, 황후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힘이 내 목을 둘러싸며 숨통을 끊으려 했다.
나는 결국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메리엔의 몸도 힘없이 기울어졌다.
도저히 이 이상 힘을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했지만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기운을 다한 듯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네.”
“…….”
“이렇게, 버틸 리가 없는데…….”
울컥.
황후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나를 죽이려는 건지 자신을 망가뜨리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죽기 직전이라 저 여자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내가 너무, 약했나 봐. 이제 그만 끝내자……. 난 도저히, 더 못 견딜 것 같아.”
“아니. 난, 안 죽어……. 아악!”
이번에는 누군가 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역시 마력이라 그런지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치고 너무도 무시무시했다.
이게 황후의 마지막 전력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메리엔도 이 힘에 당한 거라면 벌써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불현듯 남편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겨우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아직 내 마음을 다 보여 주지도 못했는데…….
“루이제!”
문득 내가 잘 아는 목소리가 훅 다가왔다.
동시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리더니 올리비아의 몸이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아악!”
내 심장을 옥죄던 그녀의 힘이 뚝 끊긴 것처럼 사라졌다.
더 이상 그녀가 날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며 온몸에 힘이 풀렸다.
남편?
그가 날 구하러 온 걸까?
“루이제!”
한층 가까워진 목소리와 함께 내가 잘 아는 품이 나를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나는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알렉.”
“괜찮으십니까? 안심하십시오, 루이제.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
나는 뭐라 대답할 힘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날 하염없이 안도하게 만들었다.
역시 내 남편, 날 구하러 와 줬구나.
겨우 황후에게 당하는 줄 알고 서러웠는데,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윽고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여자를 건드리면 그게 누구라도 봐주지 않는다.”
“…….”
“죽기 전에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지.”
그는 내가 처음 보는 모습으로 낮고 어둡게 분노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7 화

* * *

의식을 잃었던 올리비아가 눈을 떴다.


메리엔의 사저에서 그렇게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을 뜨다니.
주위를 둘러보는 올리비아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가고 물기가 고였다.
이곳이 어딘지는 금방 알아차렸다. 황후의 침실이었다.
‘죽을힘을 다했는데.’
혼자 죽고 싶지 않아서 정말 죽을 때까지 힘을 냈는데.
그러나 올리비아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타격을 입은 채 실패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예기치 않게 루이제가 강하게 저항을 한 탓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래 봤자 결국에는 그녀와 함께 죽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렉시스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랬을 텐데.
‘뭐지? 그 공작…….’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처참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힘에 반항한 루이제도 놀라웠고, 빛처럼 나타나 루이제와 메리엔을 데리고 떠나 버린 알렉시스는
더 의아했다.
‘역시 그들에게 뭔가 있었어.’
이를 조금 악문 올리비아는 마력에 대해 떠올렸다.
황제만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
“올리비아.”
불현듯 서늘한 한기와 함께 몰려든 목소리.
그 짧고 나직한 한마디에 온몸이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차마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지금은 황제를 볼 자신이 없었고,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왜 다 죽어 가는 꼴로 황궁 안에 쓰러져 있었던 거지? 겨우 그 정도에 의식을 잃을 만큼
허약했나?”
말끝에 황제가 짧게 비웃었다.
그 웃음이 수천 개의 가시가 되어 올리비아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차갑고, 날카롭고, 매정하고.
황제는 원래부터 늘 그런 사람인데 어쩐지 지금만큼은 그런 그의 모습을 견디기 힘겨웠다.
한 번이라도 다정할 수는 없는 걸까?
올리비아는 겨우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역시 폐하께서, 절 이렇게 만드셨던 거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특별한 감옥에만 갇히면 말라비틀어진 몰골로 죽어 버리는 사람들.
올리비아는 황제가 그들의 기력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그러면 저도…… 줄리아처럼, 폐하의 일부가…… 되는 건가요?”
“…….”
금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만 등 뒤에서 느껴졌다.
그녀가 눈치챘을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온기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는, 서서히 죽여서 얻을 때야말로 쓸 만해지거든. 특히나 악행을 저지르거나
증오를 품은 인간의 기운은 내 힘과 더 잘 어우러지지.”
황제는 그런 짓을 들키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설명했다.
올리비아는 황제가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힘이 이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더 우러러보고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올리비아. 넌 너무 연약하군. 내가 널 강하게 해 주마. 내 황후라면 그래야 해.’

아직도 2 년 전의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처음 느껴 보는 기운이 그녀의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황제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강하게 하려던 황제의 목적은 실패했다.
크게 연약하지 않았던 몸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허약해졌다.
황제는 그녀의 상태를 보더니 혀를 찼다.

‘실망이군, 올리비아. 이래서야 후계자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겠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황제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의 몸을 탓했다.
그의 마음에 들었어야 했는데, 왜 그녀는 그를 실망시킨 걸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황제의 힘을 잘 받아들여 강해질 수 있었을까?
자책이 되고 한이 되었다.
그래도 황제는 정해진 날에 합방하는 것을 피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녀를 멀리한 지 몇 달은
되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다른 여자한테 후계자를 얻으려고?’
올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손을 꽉 움켜쥐며 그제야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힘겹게 몸을 돌려 황제를 응시했다.
찬란한 태양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 붉은색인 것치고는 열기가 조금도 서려 있지 않은 눈동자.
깎아지른 듯한 콧날과 입술.
황제의 얼굴을 마주하니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리우면서도 원망스러웠고, 동경하면서도 증오스러웠다.
그렇게나 마음에 들고자 했는데 그녀는 그의 손에 죽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저는…… 폐하께,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입술을 깨물고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에도 황제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저에게까지,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꾹 다문 입술과 감정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
방 안의 의자나 테이블 따위를 보듯 무감정한 저 눈빛이 올리비아의 심장을 할퀴었다.
루이제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결국 올리비아는 자신의 넋을 조금도 위로하지 못했다.
“바라는 게 많았군, 올리비아.”
“…….”
“내가 바라는 건 이제 그대가 이 침실을 비워 주는 것뿐이다. 주인이 바뀔 거거든.”
“…….”
손톱이 살을 짓눌렀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눈물이 철철 흘렀다.
쓰레기라고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황제는 겨우 그런 말로 정의할 수 있는 악인이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바라시는 대로 조용히…… 죽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제가 바라는 걸 들어주세요.”
“…….”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이 마음이 자존심을 이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마지막을 직감하고 나니 그녀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역시 그의 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올리비아의 눈에서 증오가 사라지고 그리움만 떠올랐다.
“제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품을 내어 주세요.”
과연 그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까?
그저 한 번 안아 준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올리비아 네 기운이 언제부터 이렇게 칠흑 같았는지 모를 일이군.”
“…….”
“더없이 유용하겠어.”
올리비아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 짓밟힌 것처럼 가슴이 무너지고 발밑이 꺼졌다.
왜 그것도 안 돼?
‘내가 누구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올리비아의 증오가 한밤중 태풍처럼 짙게 휘몰아쳤다.
그제야 흡족해진 황제는 황후의 기운을 거둬 갔다.

* *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몸속은 가시가 다 할퀴고 지나간 듯이 고통스러웠고, 의식과 기억도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드문드문했다.
분명 그런 격통과 함께 의식을 잃었는데, 다시 눈을 뜬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몸이 산뜻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여 보니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도 맑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알렉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척 걱정하고 기다린 모습이었다.
“이제 깨어나셨군요.”
“……알렉.”
“괜찮으십니까?”
알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표정에 나는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계속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
그가 나를 치유해 줬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내가 금방 다시 말했다.
“그런데 메리엔은요?”
“무사합니다.”
“정말로요?”
“예. 내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죠. 조금만 늦었다면 금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내가 무사한 것보다 메리엔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안심했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이 몇 시죠? 메리엔은 어디에 있어요?”
내가 살짝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
“이튿날 밤입니다. 꼬박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죠. 메리엔은 손님방에서 잠들었다가 아침에
돌아갔습니다.”
“벌써 다음 날 밤이라고요? 메리엔은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예.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정말 다행이다.
알렉의 치유력이야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 한시름 덜게 되었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잠시 뭉클하게 알렉을 응시했고, 그도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미안함이 느껴졌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나는 어젯밤 보았던 황후의 모습을 다시 생생하게 떠올렸다.
꿈 같을 정도로 뜻밖의 일이었다.
“황후는 어떻게 됐어요?”
“…….”
“그 여자, 보통 인간이 아니었어요.”
황후에게 듣자 하니 황제는 더 보통이 아닌 듯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8 화

그래서 그렇게 세상 두려울 것 없이 폭정을 휘두른 거구나.


황제는 그렇다 쳐도 황후까지 그런 비현실적인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알렉은 살짝 턱을 매만지더니 심상치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황제의 짓일 겁니다.”
“황제요? 아…….”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가 자신의 힘을 황제에게 받았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리고 황후는 죽었죠.”
“……죽었어요?”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는데 죽었다니.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본 황후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처럼 위태위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나나 메리엔 같은 죄 없는 사람들을 위협할 일이 없어
다행이면서도 조금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를 죽이려 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으니까.
“어쩌다 죽었어요?”
내 말에 그는 생각을 하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선은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 황후를 황궁으로 돌려보냈죠. 밖에서 발견되면 무슨
일로 이렇게 됐는지 황제가 추궁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황후를 그 자리에서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여러모로 걸리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메리엔과 당신이 의심받을지도 모르고, 그게 당신을 죽이려 한
죗값도 아닌 것 같아서요.”
“잘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황후가 지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황궁에서 나왔죠. 제가 마지막에 봤을 때는
희미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결국 죽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네요…….”
문득 나는 황제가 자신을 버렸다는 황후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그래서 목숨을 버릴 생각으로 날 죽이려 했던 걸까.
그러나 황후는 이미 죽어 버렸고, 나와 메리엔이 무사하니 이 이상 더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혹시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나요? 황제가 당신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는 거요.”
내 물음에 그는 살짝 망설이더니 이윽고 흔쾌히 대답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후까지 그랬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황제에게 받은 마력이라 티가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황제에 비하면 무척 약한 수준이었지만요.”
“……그랬군요.”
나는 조금 걱정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단순한 폭군인 줄 알았던 황제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황후에게 공격받았을 때, 그 기운이 한밤중에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이라 덜컥
겁이 났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보다 더 강한 마력을 갖고 있다니.
황제를 무너뜨리겠다고 목표를 세웠던 것이 조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음의 준비를 더 단단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썹을 조금 안타깝게 휘며 알렉의 눈을 다시 응시했다.
“……알렉.”
내 손을 잡은 그의 손등을 나의 다른 손으로 감쌌다.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고 안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당신이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난 아무 희망도 갖지 못했을 거예요.”
“루이제…….”
“당신이 강해지는 일에 내가 필요해서 정말 다행이기도 하고요. 내가 뭐라도 도울 수 있잖아요.”
“그건…….”
알렉은 뭐라고 말하려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윽고 옅은 한숨과 함께 일어서더니 테이블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상자를 풀어 보니 내가 아는
물건이었다.
“……어? 그거.”
내가 황후에게 던졌던 것과 똑같은 붉은 머리핀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새로 산 걸까?
“새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직접 내 머리에 핀을 꽂아 주었다.
그 손길과 가까워진 거리에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핀을 다 꽂은 그가 살포시 내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품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내가 늘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앞으로는 이걸 쓸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루이제.”
나도 두 팔 가득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 * *

알렉은 루이제가 다시 잠드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초조했는데,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니, 실은 아직도 철렁했던 가슴이 안정되지 않았다.
‘루이제가 공격을 당하다니.’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라 알렉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늦지 않게 루이제를 구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녀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방직 공장에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저택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던 루이제는 이미 나간 뒤였다.
메리엔이 보낸 편지는 그녀의 침실 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알렉은 무심코 그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단둘이 따로 만나자고?’
무슨 일일까?
이미 출발한 지 좀 되었다는데, 데리러 가는 게 좋을까?
별일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알렉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루이제가 갔다는 곳으로 향했다.
마차는 느리니 스킬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벌어진 상황에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황후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약했나 봐. 이제 그만 끝내자……. 난 도저히, 더 못 견딜 것 같아.’


‘아니. 난, 안 죽어……. 아악!’

그 고통에 찬 루이제의 비명.


가냘프고 날카로운 소리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그의 심장도 날카롭게 베였다.
그는 단숨에 황후의 마력을 억제했다.
분노가 솟구친 탓에 순간적으로 힘이 조절되지 않아 황후의 몸이 날아가 버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던 그 순간의 기분이 살아나는 것 같아 알렉은 왼쪽 가슴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정말로 루이제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뿌리째 뽑히는 것 같았다.
그의 새까만 눈빛이 어느새 차가운 빛을 밝혔다.
‘캐스다인 경.’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의 부름에 캐스다인의 음성이 금세 돌아왔다.
알렉은 이쯤 되면 끝났을 것 같은 일을 물었다.
‘황후의 영혼은 찾았나?’
황후의 사망 소식이 들리자 알렉은 가장 먼저 캐스다인에게 그녀의 영혼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미 죽었어도 볼일이 남아 있었다.
캐스다인은 충직하게 그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대답을 했다.
[예.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붕 위에서 만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캐스다인과의 연결을 끊은 알렉은 저택의 천장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의 방 테라스의 커튼이 뒤늦게 휘날렸다.
지붕 위에서 수도를 내려다보니 깊은 밤이라 집집마다 불을 끄고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서늘한 기운과 함께 캐스다인의 찢어진 망토 자락이 부유하며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창백한 낯빛의 황후가 무릎이 꿇린 채 두 손이 결박되어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황후의 눈동자는 더 없는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고, 공작?”
알렉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찬찬히 황후를 살펴보았다.
황후는 덜덜 떨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불현듯 사납게 그를 쏘아보았다.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용케도 힘을 숨기고 있었군!”
알렉은 황후를 유심히 살펴보던 눈길을 거두며 옅은 한숨으로 물었다.
“어쩌다 죽었지? 내가 살려서 보냈는데.”
“그건 알 필요 없다. 어서 날 풀어 줘!”
“뭐 그쪽의 사정이야 곧 나한테 술술 털어놓게 되겠지.”
“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유령이 된 황후는 친절하고 자애로웠던 가면을 아예 벗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황후다운 위엄은 남아 있었다.
알렉은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를 알려 주었다.
“너에게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을 주려고 한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어서 날 풀어 줘! 왜 내 영혼을 불러낸 거야! 난 이만 죽고 싶다고!”
그녀가 울부짖듯이 애원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 죽여 줘. 난 살고 싶지 않아. 죽지 않으면, 계속 생각난단 말이야. ……그분의
눈빛, 목소리.”
“…….”
“잊고 싶어. 너무 차가워. 제발 날 보내 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황후가 숨이 넘어갈 듯이 목멘 소리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알렉은 그녀의 애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 여자를 건드리면 봐주지 않는다고.”
“……안 돼. 으아악!”
황후가 결박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런 식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루이제가 또 위험에 빠지게 될까?
알렉은 황후의 등장인물 소개를 다시 한번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후의 마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원작에서 황제는 황후가 병으로 죽은 후 다른 황후를 또 들일 틈도 없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황후가 황제에게 마력을 받았다는 내용은 원작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는 설정이었다.
그만큼 악센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널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지. 황제에게 가졌던 충성심보다 더 따르게 될 것이다.”
“……뭐?”
“혹시 모르지. 앞으로 루이제를 천 번쯤 지켜 준다면 내 생각이 바뀌어서 널 풀어 줄지도. 내 여자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나도 가까이 두고 싶지 않거든.”
“대체 그게 무슨 말…… 싫어. 내가 왜 그 여자를! 싫다고……!”
경악한 황후가 그를 피하려는 듯 뒤쪽으로 물러났다.
원작보다 훨씬 이른 죽음이었다.
어차피 곧 다른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 그와 루이제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동안 황제와 있었던 일을 공유받고 다시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알렉은 황후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낮게 지시어를 읊었다.
“나의 사역령이 되어라.”
“……아악!”
띠링.

[사역령 포섭에 성공했습니다!]


[보유 사역령 3/5]
[축하합니다!]
[제국의 특급 셀러브리티 로열 패밀리: 황후를 포섭한 보상으로 다량의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

[특별 보상]
[경험치가 20 억 올랐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9 화

황후가 죽은 지 3 일 정도가 지났다.


그사이 우리는 황제가 요구한 거액의 세금을 모두 지불했고, 다시 북부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아
냈다.
그러나 황제의 서신을 보니 그가 우리의 북부 경영에 간섭할 것 같아 달갑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군. 조금 더 두 사람을 지켜보도록 하지.]

뭐?
계속 우리를 저울질하다가 북부를 빼앗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뒤통수라도 휘갈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마력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
더럽고 치사했지만 나는 황제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하는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의 서거로 심기가 흐트러 지셨을 것 같아 근심이 큽니다. 저희 또한 애도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저희 브렌트 자작 부부가 북부를 폐하의 자랑으로 융성시켜 근심을 덜어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에잇, 퉤.
나는 황궁으로 갈 편지에 침이라도 한 번 뱉어 주고 싶었다.
황후에게 죽을 뻔한 일은 이미 액땜한 셈 치기로 했다.
황제의 정체를 알고 나니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을 겪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북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조금의 긴장도 늦추지 않았다.
‘앞으로 북부를 수도 못지않은 대도시로 만들 거니까.’
죽을 뻔한 뒤로 내 야망은 더 거세졌다.
우리 가문의 구역을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도시로 반드시 만들겠다는 집념이
타올랐다.
북부는 이미 그 자체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지켜 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했다.
“루이제!”
문득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가 반갑게 솟구쳤다.
“메리엔.”
나는 메리엔이 사는 저택의 응접실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리엔의 눈동자에는 반가움과 눈물, 고마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은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몸은 괜찮나요?”
메리엔이 내 두 손을 붙잡았다. 나 또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치료는 잘 받고 있었죠?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사실 이상하게도 몸은 별로 아프지 않더라고요. 그저 돌아가신 황후 폐하
때문에 너무 놀랐을 뿐이에요.”
“그랬군요. 나 때문에 험한 일 겪어서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해요…….”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날 없애기 위해 황후가 메리엔을 미끼로 이용한 탓이었다.
알렉 덕분에 메리엔도 몸의 통증은 느끼지 않는 듯했지만, 고귀한 귀족가의 부인이 겪기에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자 메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루이제가 걱정이네요.”
“네?”
메리엔의 목소리가 조금 더 작아졌다.
“황후 폐하의 말대로라면 황제 폐하께서 루이제를 원하신다는 거잖아요.”
“아…….”
메리엔도 다 들었던 거구나.
그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했고,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 듣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만약 폐하가 절 원한다고 해도 우리 남편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나도 내 남편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먼 북부로 가는 게 잘된 일이네요. 폐하께서 정말로 루이제를 원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전 두 분이 언제나 무사하기를 바라거든요.”
“메리엔…….”
“그래도 몸조심해요. 황제 폐하께서는 원하는 거라면 꼭 갖고 마는 거 잘 알잖아요.”
“고마워요.”
나는 갑작스럽게 가슴이 뭉클했다.
메리엔이 언제부터 우리 부부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었던 걸까?
그동안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아서 그녀의 말이 무척 의외였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메리엔이 작게 미소 지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루이제와 알렉시스에게 감탄하고 있답니다. 세금도 해결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누가 폐하를 상대로 이렇게나 잘 해낼 수 있겠어요?”
“……메리엔.”
“마르셀과 줄리아가 저세상에 가긴 했지만,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서 나도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
예상도 못 한 말에 내 눈망울이 일렁였다.
지금껏 사교계의 귀부인들에게 비아냥만 들었지, 이런 호감 가득한 따뜻한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덕분에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요, 메리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에요. 어쩐지 우리 부부한테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루이제…….”
“그래서 말인데, 메리엔에게 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선물 하나를 해도 될까요?”
“네?”
메리엔이 의아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내 뒤쪽에 서 있던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큼직한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새하얀 털로 된 숄 하나가 나타났다.
그 눈부신 자태에 메리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에 말씀드렸던 백곰 가죽으로 만든 숄이에요. 우리 브렌트 방직 공장의 이름을 단 첫 생산품이랍니다.
메리엔에게 드리고 싶어요.”
“루이제!”
감탄을 내뱉은 메리엔이 금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두 눈은 백곰 가죽의 털에 못 박힌 듯 박혀 있었다.
“정말로, 이걸 제가 받아도 되나요?”
“그럼요. 나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더 귀한 걸 주지 못해 아쉽네요. 북부 여행은 와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맙소사, 루이제. 정말 고마워요…….”
“…….”
나는 얼떨떨해하는 메리엔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녀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 이윽고 메리엔이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 숄은 제가 책임지고 정성껏 보관할게요. 감히 입지도 않을 거랍니다.”
“…….”
“그리고 전 이미 북부로 떠날 준비를 마쳤는걸요. 내일 출발하는 거 아닌가요?”
“예? 그건 그렇지만…….”
“저도 동행할 거예요. 윌스브룩 성에서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그리고 그곳의 근사함을 다른
분들께도 소개해 드릴 거예요.”
메리엔이 살짝 턱을 들며 웃었다.
그 미소에 나도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북부가 벌써부터 수도 귀족들의 최고의 관광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리엔이 함께해 준다니 북부행이 더욱더 기대되네요.”

* * *

이번 북부행은 뿌듯하게도 동행이 몹시나 많았다.


메리엔과 그 가족들, 브룩스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
그리고 꽃을 키우는 리즈 농원과 잼 공장의 사람들, 브니엘 의상점의 브니엘을 비롯한 여러 장인과
상인들이 우리와 함께였다.
사용인들까지 여럿 동행하게 되었으니 마차만 해도 서른 대가 넘었다.
‘이렇게 떠나면 아마 한동안 수도로 돌아올 일은 없겠어.’
나는 떠날 준비가 한창인 마차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와 알렉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정말로 북부를 수도 부럽지 않은 곳으로 키워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언니.”
문득 들려온 명랑한 목소리에 내가 몸을 돌렸다.
엘로이와 시어머니가 평범한 외출복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죽어도 북부에 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배웅 나와 주신 건가요?”
내 물음에 시어머니는 무심하게 눈길을 돌렸고, 엘로이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물었다.
“또 언제 와?”
“글쎄. 한 몇 달은 거기서 바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가끔 편지할게.”
“편지 말고 직접 북부로 와도 괜찮아.”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엘로이가 웃는 얼굴로 단박에 거절했다.
나도 정말 진심으로 물은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수도에 우리 식구들 중 누군가는 있는 게 나았다.
방직 공장의 운영은 앤드류가 대행해 주기로 했는데, 곧 북부까지 납품 지역을 확대할 생각이었다.
수도에서 만든 질 좋은 옷을 보면 북부인들도 반드시 좋아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저기 좀 봐, 언니!”
“……?”
문득 엘로이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와 시어머니가 의아하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다른 사람들도 그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십수 마리의 말이 동시에 땅을 박차며 늠름하게 다가왔다.
허공을 스치는 푸른 망토와 은빛 갑옷.
나는 저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파란 피 기사단?’
그 선봉에 있는 기사단장의 짙은 금발이 찬란하게 흩날렸다.
해리엇이 아닌 이상 저토록 잘생긴 소년은 이 제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십 대라서 그런지 볼 때마다 풋풋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
엘로이가 헉 숨을 들이켜더니 내 등 뒤로 숨었다.
난데없는 전 약혼자의 등장에 숨이 막힐 만큼 경악한 듯했다.
놀란 건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브렌트 자작, 자작 부인.”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해리엇이 나와 알렉을 눈으로 찾았다.
브룩스와 대화를 하던 알렉이 의아한 얼굴로 갸웃했다.
“워든 백작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해리엇은 그대로 알렉에게 곧바로 다가갔다.
내 뒤에서 엘로이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고 숨도 쉬지 못했다.
엘로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이윽고 해리엇이 단정한 품새로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브렌트 자작 부부와 동행해 북부를 살펴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0 화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황제가 해리엇을 감시자로 보내는 거였어?
나는 내심 놀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브룩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의 북부행에 동참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브룩스가 해리엇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자네까지 보냈다고? 나도 같은 명을 받고 이들과 함께 가려던 참이었는데.”
“저는 그저 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왔을 뿐입니다.”
“그렇군…….”
브룩스가 떨떠름하게 말을 흐렸다.
누가 봐도 황제의 충신이 분명한 해리엇이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브룩스와 앤드류는 이미 우리와 반역의 뜻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설마 황제의 보좌관인 브룩스마저 황제를 무너뜨리려 할 줄은 몰랐는데, 알렉이 그를 회유했다.
우리로서는 든든한 아군이 한 명 더 생긴 것이니 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브룩스는 황제의 최측근이라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해리엇을 또 보내다니, 악센이 눈치라도 챈 걸까?’
우선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한폭탄까지 데리고 북부에 가야 하다니.’
괜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겠지?
나는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이 해리엇에게 말했다.
“알겠다. 마차가 필요하다면 준비하도록 하지.”
“저희 기사단은 말을 타고 가도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타고 간다고?
기왕 같이 가기로 했으니 나는 친절한 어투로 해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이틀도 넘게 타면 그만큼 쉴 시간이 없을 텐데 괜찮겠어?”
“예, 문제없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해리엇을 향해 살짝 눈가를 접어 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긴 상대는 파란 피 기사단인데 내가 누굴 신경 쓰나 싶었다.
나는 해리엇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행이 더 많아졌네요. 곧 출발하도록 해요.”
“예, 마님.”
곳곳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며 발을 뗐을 때였다.
“언니.”
엘로이가 개미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살짝 돌아보니 엘로이가 내 뒤에 숨은 채 빼꼼 눈을 들었다.
갑자기 해리엇이 나타나서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
얼른 저택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엘로이가 속삭였다.
“나도 북부 따라갈래.”
“…….”

* * *

약 3 일이 지난 후, 드디어 우리는 윌스브룩 성에 도착했다.


뜻하지 않게 해리엇을 비롯한 기사들과 엘로이까지 동행한 상태였다.
물어보나 마나 엘로이는 해리엇이 보고 싶어서 북부까지 따라온 게 분명했다.
‘참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해리엇이 좋아?
“주인님! 마님! 오셨군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성에 있던 사용인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중에서 드라큘라처럼 창백한 낯빛의 낯선 남자가 눈에 띄었다.
‘누구지?’
내가 의아해하자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저는 발리스키데인 글렌베리라고 합니다. 오래 전 이곳 윌스브룩의 성주
캐스다인 글렌베리 백작의 후손이죠.”
“뭐라고요? 여기 성주의 후손이라고요?”
나는 놀란 눈으로 내 곁에 있던 알렉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오래전 성주의 후손이라니, 어디서 나타난 건가 싶었다.
그러나 알렉은 이미 발리스키데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번에 북부의 사정을 잘 아는 보좌관을 고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수도로 출발하기 전에
알아보았습니다.”
“아, 맞아요. 그런 얘기를 했었죠.”
앤드류와 함께 북부를 구경하면서 우리는 북부를 잘 아는 보좌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발리스키데인이 우리의 보좌관이 되는 걸까?
어느 틈에 벌써 사람을 구한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알고 보니 예전 성주인 캐스다인의 후손이 오랫동안 북부에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마침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잘됐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발리스키데인.”
내가 손을 내밀자 발리스키데인이 허리를 숙이며 내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차가운 인상만큼이나 입술도 서늘했지만 딱히 반감이 들지는 않았다.
알렉이 받아들인 사람이니 나 또한 믿고 그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발리스키데인이 허리를 다시 세우며 말했다.
“발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알겠어요, 발리.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가 살짝 미소를 지어 주자 발리도 약간 입가를 당겨 웃었다.
창백하고 차가운 인상이어도 미소를 지으니 나름 따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송곳니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길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어쨌든 북부인이 우리의 보좌관이 되었다니.
어쩐지 성에 도착하자마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뿌듯한 마음을 한가득 품고 알렉을 향해 돌아섰을 때였다.
“알렉.”
알렉이 놀란 얼굴로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닙니다.”
방금 내 손등을 쳐다본 거 아니었나?
나는 뭐라도 묻었나 싶어 내 손등을 괜히 한 번 보았다가 이내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팔짱을 꼈다.
사람들이 성안으로 짐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알렉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알렉. 혹시 수도에 있는 동안 북부를 오가기라도 했던 건가요? 발리와 이미 만났던 것 같아서요.”
“……아, 예. 보좌관을 구하는 일로 잠시 들렀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수도에서도 바빴을 텐데 여기까지 들르고, 고생이 많았네요. 수고했어요.”
나는 사랑을 가득 담아 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살짝 포근한 눈빛으로 웃었다.
“고맙습니다.”

* * *

윌스브룩 성은 오십 명도 넘는 손님들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방의 수가 많았다.


성에 처음 온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알렉은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성주의 방으로 올라갔다.
루이제는 이미 메리엔, 엘로이와 함께 어딘가로 간 이후였다.
손으로 입가를 감싼 그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손등 키스.’
……정말 뭐지?
아무리 봐도 이 세계에는 적응이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남자들이 하나같이 여자의 손등에 인사의 의미로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저 인사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볼 때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여자도 아닌데 왜 손등에 입을 대는지도 모르겠고, 생전 초면인 남자에게 손등을 내어 주는 것도
과감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발리와 루이제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가 원래 이렇게 보수적이었나?’
알렉은 책상에 걸터앉으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 평생 외간 남자들이 루이제의 손등에 입술을 대는 장면을 봐야 하는 걸까?
그에게는 너무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사와 경의의 의미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알렉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경
쓴다는 사실이 무척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심지어 루이제와 같은 귀부인들은 늘 장갑을 끼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이 그의 여자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까지 맞추는 건 그의 상식으로는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깊은 생각을 하던 알렉은 이내 설렁줄을 두 개나 잡아당겼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제임스와 제인이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제임스와 제인이 차례대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렉은 잠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리며 팔짱을 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두 사람을 불렀는데.”
“예, 주인님.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
알렉은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말하는 스스로가 너무도 낯선 탓이었다.
이윽고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소리 냈다.
“원래 모든 귀부인들이 남자들에게 손등 키스를 받아야 하는 건가?”
“예?”
“손등 키스요?”
“…….”
제임스와 제인이 이런 물음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알렉은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역시 이 시대의 사람이라면 굳이 물어보는 게 이상할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분명했다.
제인이 눈치 빠르게 되물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알렉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는 최대한 능숙한 태도로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얼마 전 황후의 일도 그렇고, 부인의 안전이 신경 쓰이는데. 아무래도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아, 그렇군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주인님!”
그의 말에 제임스와 제인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화색이 되어 손뼉을 쳤다.
그제야 알렉은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이제가 황후에게 죽을 뻔한 일로 사용인들도 그녀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의욕 넘치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군가 마님께 다가오면 제가 반드시 물리치겠습니다.”
“저도 주시하고 있을게요, 주인님! 마님은 저희가 지켜야죠! 손등 키스는 앞으로 절대 아무도 할 수 없을
거예요!”
“고맙군.”
알렉은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입가가 치켜 올라가려고 하자 그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해야 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1 화

* * *

“세상에, 이 성은 미쳤어요!”
“우리 제국에 이런 성이 다 있었다니!”
“여긴 황궁보다 더 대단하잖아요!”
가는 곳마다 메리엔의 감탄과 극찬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손끝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차분하고 온화하던 메리엔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이야.
내가 윌스브룩 성을 지은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흐뭇해졌다.
대뜸 메리엔이 뒤를 돌더니 심각한 얼굴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말로 굉장해요, 루이제. 내가 이런 곳에 초대받아서 오다니, 정말로 꿈만 같네요. 이렇게 대단한
성의 안주인이 내 가까운 벗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네?”
가까운 벗……?
대뜸 들려온 말에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까운 벗이라고요?”
“그럼요. 난 루이제와 생사의 고비도 함께 넘긴 사이인걸요. 우리가 가까운 벗이 아니라면 뭐겠어요!”
“메리엔…….”
잠깐 눈물 좀 닦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생각했다.
그동안 사교계에서 진정한 벗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줄리아 같은 표독한 귀부인들만 상대하다가 상냥한 귀부인을 만난 것도 모자라 이런 말까지 듣게 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릴트 제국에 온 지 3 년 만에 처음으로 벗이 생겼다.
“정말 기쁘네요. 나한테 벗이 생길 줄 몰랐어요. 메리엔도 알다시피 그동안 사교계에서 나와 알렉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상황은 아니었잖아요.”
“……루이제.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많았죠.”
“아뇨. 난 이제 괜찮아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는걸요.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나도 곁에서 응원할게요.”
“메리엔.”
맞잡은 손 위로 맞닿은 나와 메리엔의 시선에 감동이 흘러넘쳤다.
가만 보자, 메리엔이 뭘 좋아하지?
릴트 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벗에게 뭐라도 퍼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만 방에서 쉬지 않을래요?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아직 남아서요.”
“그럴게요, 루이제. 앞으로 성을 다 돌아보려면 잘 쉬어야겠어요.”
메리엔의 대답에 내가 근처에 있던 사용인을 응시했다.
안내를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사용인이 메리엔을 데리고 갔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메리엔과 그 가족들이 북부에 와 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 아래에 손을 갖다 댄 나는 살짝 훌쩍이며 돌아섰다.
북부를 관광지로 발전시키려고 세웠던 계획이 벌써부터 대성공한 느낌이 들었다.
휘익.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동시에 알렉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
“……알렉?”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알렉이 지그시 내 팔을 잡으며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시선을 내려 나에게 눈을 맞췄다.
왜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까?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따라와 주십시오.”
“그게 뭔데요?”
“우선은 만나 뵙는 게 좋겠습니다.”
“네?”
누굴?
내가 되묻기도 전이었다.
알렉이 나를 향해 살짝 몸을 틀더니 내 허리를 안았다.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지하로 연결된 계단 앞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대체 누굴 만나려고 여기로 온 걸까?
윌스브룩 성의 지하는 아직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여긴 왜…….”
내가 말을 흐리자 알렉이 다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바닥에 설치된 지하의 입구를 여는 장치를 밟았다.
스르륵 바닥이 움직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
“같이 내려가시죠.”
문득 그가 말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문이 다시 스르륵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윌스브룩 성의 지하는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 하나 없이 신전 같은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홀에 다다르자 내가 입술을 열었다.
“설마 여기에 누굴 숨겨 두기라도 했나요?”
“……예.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돼서 이곳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대체 누군데요?”
아무래도 그는 그동안 수도와 북부를 오가며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걸음을 멈췄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이 크게 벌어졌다. 상대 또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일곱 살 정도 되었을까?
키가 작은 어린 남자아이였다.
새파란 하늘을 닮은 짧은 머리카락은 앞머리가 이마를 다 덮고 있었고, 총명해 보이는 은빛 눈동자는
한눈에 봐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통통한 볼살.
쓰다듬어 주고 싶은 귀여운 볼살이 내 심장에 콕 박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품에 두꺼운 책 한 권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세상에, 저 아이는 누구죠?”
너무 귀여워!
내 감탄에 아이가 화들짝 놀라 몸서리를 쳤다.
알렉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가 알렉에게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알렉의 뒤로 숨듯이 찰싹 달라붙더니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뭐야.
알렉에게 저렇게 친한 아이가 있었어?
나는 설명을 원하는 눈으로 알렉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아렉시스. 기다리고 이썻더.”
“……?”
애 발음이 왜 저래?
이윽고 알렉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온 아이입니다. 루이제에게 이제야 소개를 시켜드리네요.”
“예?”
어디서 나 몰래 입양이라도 했어??
금세 다시 들려온 말에 내 심장은 쿵 떨어졌다.
“이분이 리디트 황자입니다.”

* * *

‘해리엇.’
한편 엘로이는 윌스브룩 성 밖에서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저 멀리 해리엇과 기사들을 훔쳐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못 본 사이에 더 잘생겨지면 어떻게 해.’
메리엔을 비롯한 손님들은 윌스브룩 성을 보고 멋지다는 둥 웅장하다는 둥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러나 엘로이는 어딜 봐도 심드렁했다.
성이 무척 크고 첨탑이 날카롭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상이 들지 않았다.
‘해리엇 얼굴이 더 대단한걸?’
엘로이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수도에서 북부로 오는 내내 해리엇은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할 사이였는데 해리엇은 그녀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엘로이는 아직도 전 약혼자의 그다지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다정한 손길과 차가운 듯 따스한 눈길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해리엇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문득 해리엇이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엘로이 쪽을 응시했다.
화들짝 놀란 엘로이가 자신도 모르게 기둥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뭐야. 방금 나 쳐다본 거야?’
두근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박동했다.
엘로이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
또 해리엇과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사이 다른 기사들은 어딘가로 가 버리고 해리엇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나를 봐 주는 거야?’
덜컥 용기가 생긴 엘로이가 기둥에서 나왔다.
그러자 해리엇이 시선을 내리며 살짝 돌아섰다.
피했어?
엘로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해리엇은 다시 엘로이를 보았다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 다리가 느긋하게 움직였다.
‘혹시 따라오라는 걸까?’
엘로이는 의아했지만 이내 용기를 내 쫓아갔다.
윌스브룩 성의 뒤뜰 너머에는 끝이 어딘지 모를 숲이 자리해 있었다.
빼곡한 나무의 틈새에 성의 모습이 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걸어갔을 때였다.
그제야 해리엇이 몸을 돌려 엘로이와 마주 섰다.
“해리엇!”
“엘로이.”
“…….”
엘로이는 해리엇에게 달려갔다. 입술이 우물우물 떨렸다.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다니, 얼마 만일까?
해리엇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늘 그에게서 풍기던 풋풋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해리엇.”
엘로이는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으며 터져 나오듯 소리 냈다.
그에 반해 해리엇은 무척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도.”
응?
“정말?”
해리엇이 한 번 끄덕였다.
표정이 너무도 건조해서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해리엇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엘로이는 울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변화 없는 얼굴로 한 번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나 생기가 없었던가?
엘로이는 어딘가 묘하게 변한 해리엇의 모습에 의아했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우리 다시 약혼하면 안 돼?”
목소리가 절로 울컥했다.
다행히도 해리엇은 반감이 없는 투로 대꾸했다.
“그럼 다시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글쎄. 그분은 편한 분이 아니야. 원하는 말을 들으려면 충성심을 보여야 해.”
“어떻게 보여야 하는데?”
“…….”
“나 정말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해리엇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응.”
엘로이는 간절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낯선 위화감이 불안하게 엘로이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흐음.”
해리엇은 잠시 자신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수염 하나 없이 보송보송하고 날렵한 턱이었다.
이윽고 해리엇이 눈을 들었다.
“그럼 엘로이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뭔데?”
“브렌트 자작 부인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줘.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어.”
“응?”
루이제 언니를? 왜?
그제야 엘로이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불길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해리엇은 완전히 황제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게 분명했다.
그가 북부까지 따라온 이유는 보나마나 우리 가족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이 새끼 수상하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2 화

루이제 언니를 어쩌려고 이 수작인 걸까?


설마 황제가 납치라도 해 오라고 시킨 걸까?
엘로이도 황제가 루이제를 탐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쾌하고 끔찍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가 잘생기긴 했어도 소름이 끼쳐 죽겠다고.’
릴트 제국의 비호감 1 위가 있다면 그건 바로 황제였다.
엘로이는 해리엇을 그녀의 목숨보다 더 좋아하지만, 새언니를 팔아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얼마 전 황후 때문에 루이제가 죽을 뻔한 일로 이미 그녀와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십년감수했구나. 앞으로 루이제가 없으면 북부는 어떻게 다스리고, 황제의 괴롭힘은 누가 다


감당하겠어.’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긴 루이제와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그녀와 어머니는 벌써 죽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루이제 언니는 안 돼.’
엘로이는 숨을 들이쉬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루이제 언니는 왜?”
해리엇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건 지금은 좀 말하기 곤란한데.”
“혹시 위험한 거야?”
해리엇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아니. 그냥 말만 전하면 되는 거야.”
“그렇구나.”
“…….”
엘로이는 해리엇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리엇의 얼굴을 보니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엘로이는 해리엇이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대뜸 엘로이가 소리 냈다.
“해리엇.”
“……응?”
해리엇의 고개가 느슨하게 기울어졌다.
“우리 그냥 도망가면 안 돼?”
“…….”
그 순간 미세하게 해리엇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엘로이는 개의치 않으며 한층 더 간절해진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언제까지 폐하의 명만 들으면서 살 거야? 우리 그냥 도망가서 결혼하자. 계속 폐하의 곁에 있어 봤자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아니. 폐하는 좋은 분이야.”
“뭐가 좋은데?”
“날 더 강하게 해 주시거든.”
“…….”
엘로이는 조금 할 말을 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해리엇이 강해지고 싶어 했던 걸까?
해리엇은 어릴 때부터 그 자체로도 눈부시고 출중했다.
비록 해리엇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지만, 제국의 최연소 기사단장이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폐하는 그냥 널 이용하는 거야.”
“그만큼 날 믿으시는 거겠지. 자, 이제 선택해, 엘로이. 네가 브렌트 자작 부인을 내 앞으로 데려다줄
건지 말지.”
“…….”
흐음, 이 새끼 봐라.
이건 뭐 우리한테 경고해 준 황후 폐하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나.
황후가 루이제에게 황제의 관심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리엇에게 당했을
것이다.
엘로이는 안타깝게 눈썹을 휘며 해리엇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벼운 포옹이었지만 해리엇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건조한 태도에 가슴이 조금 욱신거렸다.
“알겠어, 해리엇. 너와 다시 약혼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몇백 번이라도 할 수 있어.”
“…….”
“그냥 너와 이야기할 수 있게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응.”
“알겠어. 나한테 맡겨.”
엘로이가 밝게 웃으며 조금 더 해리엇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차피 은빛의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의 체온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함께 있는 시간이라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리엇. 정말 보고 싶었어…….”
이런 마음을 해리엇은 과연 조금이라도 알아줄까?
그러나 엘로이는 오래 걸리지 않아 금세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흐응, 그래도 우리 언니는 아무도 못 건드릴걸?’

* * *

리디트.
리디트 황자라니……!
나는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도 본 듯이 얼어붙어 버렸다.
죽었다고 알려진 리디트가 사실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렉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디트 황자를 우리의 성으로 데려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리디트를 잘 숨겨야 하는 거겠지?
우선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리디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브렌트 자작 부인인 루이제 마이어스라고 합니다.”
“…….”
리디트가 그제야 경계를 조금 풀었다.
알렉의 손을 놓더니 반듯하게 서서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눈 리디트라고 한다. 여태 고아 워네서 신부늘 숨기고 이썼지. 마룰 하면 신분을 들킬까 봐 안해떠니
발움이 조치 안타.”
“…….”
이럴 수가.
나는 황자 앞에서 실례라는 건 알지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디트 황자가 황궁에서 사라진 건 4 년 전이었다.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거라면 발음이 불명확한 게 이해가 갔다.
그런데 그동안 황자로 살지 않은 것치고는 무척 근엄한데?
마침 곁에 있던 알렉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황자님은 지금까지 계속 말을 못 하는 척하셨다고 합니다. 말투 때문에 금세 신분을 들켜서 죽을까 봐
겁이 났었다고요.”
“세상에…… 그래도 말씀을 무척 잘 하시는데요?”
알렉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누군가 고아원에 데려다줘서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었죠. 얼마 전에 정보상에서 황자님을
찾아왔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부터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리디트의 영롱하고 푸른 두 눈동자가 나를 향해 깜박였다.
너무도 맑았지만 오랫동안 젖은 듯이 수척한 느낌이 드는 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어요…….”
“…….”
“아주 어릴 때 황궁에서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자신이 누군지는 잊지 않고 있었나 봐요.”
내 말에 리디트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거시 아바마마에 유일한 유언이어따.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나므라고 하셔찌. 무승 일이 이써도
내가 누군지 이즈면 앙된다고 하셔따. 나눈…… 나눈 아바마마와 약소캐따.”
리디트가 눈물을 꾹 참는 듯이 동그란 눈에 힘을 주었다.
세 살 때 들었을 이야기를 4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지키고 있었다고?
아무리 황자라지만 어린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짐작도 다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저토록 어른스러워 보이는 걸까?
나는 리디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 후 조심스럽게 두 팔을 뻗었다.
리디트가 살짝 움찔했지만 나는 아이의 몸을 품 안에 안았다.
일곱 살 어린아이치고는 너무도 작은 몸이었다.
“……정말 잘 왔어요. 앞으로는 저희가 지켜 드릴게요. 황자님의 집으로 돌아가 황제가 되셔야 하잖아요.”
“…….”
토닥토닥.
나는 돌아온 황자의 등을 어르듯이 토닥였다.
리디트의 존재에 이 넓고 큰 성이 꽉 찬 듯한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리디트가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고맙따. 자작 부인.”
“…….”
제법 위엄이 서린 모습에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얼결에 리디트의 손을 잡았다.
어린 황자의 두 눈이 조금 더 촉촉해졌다.
“엉젠가 누군가 날 구해 주길 매일 기다리고 이썼다.”

* * *

해가 진 저녁.
윌스브룩 성 안의 만찬실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촛불은 곳곳에서 별처럼 내부를 밝히고 있었고, 평화로운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도 사람들의 대화에 웃는 눈빛으로 화답하며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리디트 황자님이라니.’
그러나 여전히 내 머릿속은 리디트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었다.
성의 지하에 리디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렉과 나, 그리고 제인뿐이었다.
리디트가 윌스브룩 성으로 온 건 우리가 수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알렉의 부탁으로 제인이 리디트에게 식사와 목욕, 책 같은 것들을 챙겨 주고 있었다.
빛도 들지 않는 지하라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리디트는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알렉과 리디트는 그동안 교류가 몇 번 있었던 탓에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긴 정보상에서 마련한 거처보다는 윌스브룩 성이 훨씬 나을 거야.’
얼른 리디트가 지하에서 나와 태양이 되게 해 줘야 하는데.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뜨거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해리엇까지 여기 있는 마당에 수상한 낌새 하나라도 들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해리엇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둘이 언제 대화를 튼 건지 엘로이가 해리엇의 옆자리에 딱 붙어서 웃는 얼굴로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 되어서야 만찬이 파했다.
포도주를 꽤 마셨는지 머리가 조금 알딸딸했지만, 적당히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저, 마님.”
“제임스?”
돌아보니 집사가 조용히 문을 닫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겉에 걸치고 있던 두꺼운 털옷을 벗어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제임스의 어조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드릴 게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대부인께서 마님께만 은밀히 전하라는 것이 있어서요.”
“은밀히?”
“예.”
제임스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단단히 밀봉된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가 웬일일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나에게 말을 잘 걸지도 않는 분이었다.
“마님과 단둘이 있을 때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나는 제임스에게 웃어 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제임스가 이만 나가 보겠다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봉인을 뜯어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난 이상하게 내 아들이 내 아들 같지 않더구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야. 내 의심은 틀린 적이


없단다.]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3 화

나는 시어머니의 편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봉투 안까지 뒤져 보아도 시어머니가 남긴 말은 저 세 문장이 다였다.
‘알렉이 알렉이 아닌 것 같다고……?’
이런 말은 갑자기 왜 하시는 걸까?
편지에는 그녀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로서는 누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닷없이 느껴졌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렉과 나에게 이제 아이를 갖는 거냐며 기대를 하기도 했었다.
‘흐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글씨는 시어머니의 것이 맞는데?
제임스가 나와 알렉을 상대로 장난을 칠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우선 편지를 접어 손에 쥐고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몰래 보낸 이유는 뭘까?
‘알렉이 진짜 알렉이 아니니 나보고 알아보기라도 하라는 건가?’
시어머니는 꽤 확신에 찬 어투였다.
그런데 그 확신은 아직 ‘의심’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시어머니는 나에게 알렉의 정체를 파헤쳐 보라는 뜻으로 이런 편지를 보낸 것 같았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의 생모가 한 말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열 달을 품어서 낳은 아들이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어머니의 의심대로 알렉이 정말 알렉이 아닐 수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 진짜 남편은 어디로 간 거고?
머릿속에 치밀어 오르는 여러 의문에 내 미간이 점점 찡그려졌다.
지금의 알렉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알던 알렉과 외모가 똑같았다.
근육의 모양, 솜털의 느낌, 머릿결과 속눈썹의 길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알렉의 쌍둥이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토록 외모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영혼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까?
‘아, 모르겠어.’
나는 문득 치미는 두통을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머릿속이 쿡쿡 쑤시고 무거웠다.
알렉이 내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심장까지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에 불현듯 숨이 찼다.
똑똑.
그 순간 들려온 노크 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
“들어가도 됩니까?”
마침 문 너머로 들려오는 나지막하면서도 그윽한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반응했다.
“……알렉.”
스르륵 문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훤칠한 알렉의 모습이 드러났다.
멀리서도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또렷하고 근사한 얼굴과 침 대보다 더 편한 그의 넓은 어깨까지
…….
그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펴보더니 이내 문을 닫고 다가왔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그럼요. 벌써 자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잖아요.”
나는 애써 입가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 순간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난 이상하게 내 아들이 내 아들 같지 않더구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피곤하지 않은가요?”
“전 괜찮습니다. 혹시 잠깐 시간이 되신다면 성 뒤쪽에 있는 산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전에 가 봤던
곳입니다.”
“네? 이 시간에 거길요?”
그가 한 번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성 뒤쪽에 있는 산이라면 내가 그의 능력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곳이었다.
“거긴 왜요?”
“잠깐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알렉의 눈빛이 차분했다.
저토록 진솔하고 확고한 눈빛을 보여 주고 있는데, 저 사람이 내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그런 감정을 밀어내며 알렉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이보다 더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따스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요. 당신이 뭘 보여 줄지 정말 궁금하네요.”

* * *

설산 위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이 소름 끼치는 추위를 더 느낄 틈도 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쌌다.
나는 그게 알렉의 능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알렉. 하마터면 칼바람에 피가 날 뻔했네요.”
쪽.
내 입술이 그의 근사한 뺨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그가 살짝 멈칫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놀라기는.’
당황하는 모습도 이렇게나 사랑스럽다니.
요즘 부쩍 그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느껴 보지 못했을 애틋함이었다.
그는 뺨을 붉힌 채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헛기침을 한번 했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뿌듯하게 그를 보는 사이 그가 나를 산의 절벽 쪽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뭘 보여 주려는 건지 의아 하면서도 꽤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건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이미 다들 잠들었는지 북부의 수도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조용히 내리는 눈송이들이 시야를 가렸다.
잔뜩 낀 구름 탓에 별과 달조차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야경은 정말 볼 게 없네요.”
“……루이제.”
그 순간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 손을 꼭 붙잡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떨림 하나 없이 분명하고 확고했다.
무슨 일이기에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진지한 걸까?
“북부에 오면 루이제 당신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리디트 황자님보다 더 놀라운 게 남아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놀라실지도 모릅니다.”
……뭐지?
내가 의아해하자 그가 내 남은 손까지 들어 감쌌다.
“루이제 당신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요. 물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건
루이제 당신이지만, 그럼에도 제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뭔지 궁금하니까 빨리 보여 줘 봐요.”
“…….”
내 재촉에 그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보챈 걸까?
괜스레 가슴이 부풀고 떨렸다.
묘하게 긴장되고 설레는 분위기가 그와 내 주위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설마.
설마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나는 이미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아직 그는 한 적이 없었다.
온갖 사랑의 꽃말을 가진 꽃들로 가득한 꽃다발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이라면 왠지 그도 진심을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이 이미 다 느껴질 만큼 흘러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서로 통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마음으로 먼저 알게 되는 그런 것.
나는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그의 감정에 지지 않을 만큼 그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제 와서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순간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또다시 내 머릿속으로 솟구쳤다.
그 멍한 의식 속으로 그의 음성이 파고들어 왔다.
“루이제.”
그의 손끝에서 불꽃 같은 것들이 파지직 튀어 올랐다.
어둠 속이라 유독 선명한 빛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불꽃 같은 사람입니다.”
“…….”
“눈부시게 아름다운 데다가, 뜨겁고 강하죠.”
“…….”
주위를 가득 채우며 내리던 눈송이들마저 그의 말에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짙게 쓸어 만졌다.
“그리고 난 그런 불꽃이 마음에 박혔습니다. 지금도 내 가슴을 애태우는 것 같죠. 당신을 알기 전에는 텅
비어 있었는데요. 이제야 내가 그동안 원했던 게 뭐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
가슴이 뛰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가슴을 다 얽매듯이 장악하는 것 같았다.
만일 이게 휘말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라면, 나는 거부할 힘이 없었다.
“루이제.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
문득 주위가 확 밝아진 느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작고 하얀 불꽃들이 온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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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처럼 환상적이고 아득한 밤이었다.
광활한 우주같이 어둡던 사방에는 불빛이 끝없이 반짝였고, 내 남편에게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애정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황홀한 밤이 내 인생에 찾아오다니…….’
몰랐는데, 나 이런 이벤트 무척 좋아했구나…….
한적하게 내리는 작은 눈송이마다 불빛이 올라타 함께 가라앉았다.
마력을 가진 남편이 아니라면 경험하지 못할 애정 표현일 것이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내 눈에 각인되었다.
“고마워요, 알렉. 나 이런 거 처음 봐요.”
나는 그냥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경을 뒤로한 채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감격스러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조금 늦게 손을 들더니 내 등을 살포시 토닥였다.
“……다행이네요. 루이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좋습니다.”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배어 있었다.
하.
……이런 게 행복일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말했다.
“가슴이 너무 뛰어요, 알렉.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 생생하게 느껴져요.”
지금 내 주위를 밝히고 있는 이 무수하고도 아름다운 불빛들처럼.
여태까지 그에게 차곡차곡 느끼고 있었던 감정이 바로 지금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제 마음을 당신에게 반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너무 많아서 벅찬걸요?”
내가 조금 더 그를 꽉 껴안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루이제.”
그런데 그가 살짝 내 몸을 떼어 내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주위에 만개한 빛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유독 더 눈부셨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는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오늘 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그게 뭔데?
왠지 알 것 같아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었다.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닐까?
순간 그가 조금 더 깊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 곁에 영원히 함께 있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가 될 일 없도록.”
“……알렉.”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는 금세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말은 못 했지만…….”
“…….”
“사랑합니다, 루이제.”
“…….”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
어디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처음 들어 보는 사랑 고백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이미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잠시 머리가 멍했다. 반짝이던 불빛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결국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 거야?’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나 얼떨떨했다.
가슴이 너무도 벅차올라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나도.”
“…….”
“나도 사랑해요, 알렉. 당신과 내가 이제야 마음이 통하나 봐요.”
내가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더 높게 솟구칠 수도 없을 만큼 치솟았다.
그동안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을지 너무도 궁금했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느껴 볼 수 없는 감정이었고, 죽을 때까지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알게 되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두 번의 삶이 주어져도 나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제야 얻게 된 이 사랑을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늘 꿈꾸던 삶과 행복이 이제야 나에게 있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내 남편.
그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주위의 빛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오직 그의 모습만 내 눈에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루이제. 당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렉…….”
“앞으로 영원히 당신의 남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가 살짝 눈가를 접어 웃었고, 나도 눈물겨운 기분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듯이 가슴 벅차게 그에게 입술을 맞췄다.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남김없이 느낄 수 있었던 밤이었다.

10. 내 남편의 정체

오랜만에 깊게 잠들어서 그런 것일까?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뜬 나는 팔이 빠져라 기지개를 켰다.
“으, 정말 잘 잤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몸도 개운하고 머릿속도 맑아졌지만, 오늘 아침은 유독 시원했다.
지난밤에 정말 환상적인 밤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몇 걸음도 채 걷기 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내가 스트레칭을 하면서 대꾸했다.
“누구?”
“마님. 제인입니다.”
“아, 들어와.”
이윽고 문이 열리며 제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제인.”
“일어나셨네요. 잘 주무셨어요?”
“그럼.”
“오늘은 늦잠을 주무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다가 혹시 깨셨을까 싶어 와 봤어요.”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내가 살짝 고개를 빼 창밖을 확인했다.
바깥은 확실히 이른 아침의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침 식사를 먼저 마치셨답니다. 북부에 처음 오신 분들은 발리가 주변 구경을 시켜 드린다고 준비
중이에요.”
“잘됐네. 북부인이 우리 일을 도와주니 한결 나은 것 같아.”
“저도요. 평소에 궁금했던 것도 발리가 많이 알려 주고 있어요.”
“다행이네. 그리고 혹시…….”
리디트 황자는 잘 잤을까?
지하에서 지내고 있는 황자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물었다.
“황자님은?”
“아, 네. 아까 식사를 챙겨 드리러 갔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의젓하게 책을 읽고 계시더라고요. 식사도
잘하셨고요.”
“……그랬구나.”
괜스레 콧잔등이 찡했다.
아무래도 이따가 리디트를 한번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알렉은 어디 있어?”
“아침부터 다른 분들과 일을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럼 나도 곧 식사하러 내려갈게. 목욕물은 나중에 준비해 줘.”
“네, 마님.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내가 눈웃음을 지어 주자 제인이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무심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난 이상하게 내 아들이 내 아들 같지 않더구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야.’

“…….”
왜 갑자기 지금 그 편지의 내용이 생각난 거지.
하여간 시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밤 남편이 처음으로 해 준 이벤트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와 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시간을 보냈는지 떠올리기만 해도 배가 다 부른
느낌이었다.
‘아, 갑자기 아침 안 먹어도 될 것 같네.’
그렇게 내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제인.”
불쑥 튀어나온 내 목소리가 방문을 닫으려던 제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도 내가 왜 그녀를 불러세웠는지 순간 알 수 없었다.
“부르셨어요, 마님?”
제인이 문고리를 잡은 채 의아해했다.
나는 잠시 선 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시어머니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완벽하게 외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생활이 예전처럼 부유해진 지금, 시어머니는 제정신이었다.
제정신일 때 그녀는 꽤 예리한 면모를 보여 줄 때가 있었다.
나는 결국 제인을 향해 돌아서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볼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제인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히 마른침을 한번 삼킨 내가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인은…… 알렉을 오래 보아 왔지?”
“그럼요. 주인님을 모신지 벌써 10 년도 넘은걸요.”
“어쩌면 나보다 제인이 알렉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겠네.”
내 말에 제인이 살짝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윽고 용기를 낸 내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요즘 알렉에게 이상한 점 못 느꼈니?”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5 화

“……?”
제인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할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제인은 내가 무슨 의도로 알렉에 대해 묻는지 짐작도 안 가는 눈치였다.
“주인님께 이상한 점이요?”
문득 제인이 되묻는 말에 내가 대답했다.
“응. 혹시 알렉이 원래의 알렉답지 않다거나 하는.”
“죽을 뻔하신 탓에 기억을 조금 잃으신 거 말고요?”
“응.”
“그리고 말씀을 잘하시게 된 것과 성격이 변하신 것도 빼고요?”
“……응.”
그리 대답하며 한번 끄덕인 나는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말투와 성격.
그건 거의 전부가 아닌가?
외모가 같은 것 말고는, 하루아침에 말투가 변한 데다가 힘도 세지고 온 갖 능력이 생겼다.
심지어 이제는 그 무시무시한 황제 앞에서도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원래 그는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단 한 순간도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늘 침착하고 날카로운 데다가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에게 갑자기 마력이 생겼으니 이렇게나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게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까?
그의 선한 마음씨도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에게 느껴지는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알렉 그 자체였다.
그가 아닐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도 지어진 듯한 느낌에 내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한 기색으로 살피던 제인이 조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많이 달라지시긴 했어요. 여전히 말수는 적으시지만, 전처럼 못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말씀만 하시는 것 같고, 아니, 전에는 못하셨다기보다는-.”
“괜찮아.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죄, 죄송해요. 예전의 주인님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고, 그땐 주인님께서 그런 편이셨으니…….”
“제인 말이 맞아. 괜찮으니 계속 말해 줄래? 최근에 알렉이 뭔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은
없었는지.”
“네? 다른 사람이요?”
“……응. 혹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나 궁금해.”
나는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인은 갑자기 이런 말은 왜 하는 거지, 싶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니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알렉을 10 년이나 곁에서 본 제인마저 시어머니가 했던 의심 같은 건 조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시나 시어머니의 말은 기우일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옷에 난 보풀처럼 거슬리는 걸까?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침대에 앉았다.
제인에게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었다.
“실은 알렉이 진짜 알렉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님께서
그러시니 괜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조금 헷갈리네.”
“네? 대부인 마님께서요?”
“응.”
“직접 들으신 건가요?”
“제임스한테 편지를 전하게 하셨더라고.”
“……음,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닐까요?”
“그렇겠지?”
내가 제인을 응시하자 그녀도 나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쳤다.
제인은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대부인 마님의 편지인 건 확실한가요?”
“그분의 필체인 건 분명했어.”
“……그렇군요. 마님께서 필체를 못 알아보실 리는 없죠.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주인님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주인님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영혼이 달라진 게 아닌
이상이요.”
“…….”
영혼.
바로 그것마저 너무나 내 남편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머릿속이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주인님 몸으로 들어온다니, 너무 마법
같은 일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랬구나.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런데 혹시라도 주인님이 정말 다른 분이라면…… 너무나 큰일이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도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면 마님께 꼭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어, 고마워.”
그제야 내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인이 이렇게 확고하게 말해 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래도 시어머니에게 의사를 보내 봐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약간 치매 기운이 있으신 걸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제인에게 웃어 주었다.
“그럼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나도 대강 준비하고 식사하러 내려갈게.”
“예, 마님.”
제인이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뒤늦게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걸까?
저 묘한 분위기에 제인이 방을 벗어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님.”
“……응.”
문득 제인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은 안색이었다.
“마님께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해서요.”
“…….”
“주인님을 다시 뵌 후 평소에 즐겨 드셨던 음식은 하나도 찾지 않으셨어요. 전 그런 건 그냥 기억을
잃어버린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
“정말 다른 분 같긴 하네요.”

* * *

어휴, 심란해.
차라리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게 더 납득이 갔다.
아니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아들을 의심하는 병에 걸렸을지도 몰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알렉보다 시어머니가 더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알렉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사람이었다.
기억에도 손상이 생겼으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고기를 써는 내 나이프에 힘이 들어갔는지 조금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누가 시어머니 아니랄까 봐 정말 신경 쓰이게 한다니까.’
나는 이제야 내 남편과 서로 사랑을 고백했는데.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합니다, 루이제.’
‘…….’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
내 입꼬리가 조금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웃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입꼬리도 필사적으로 눌렀다.
만찬실 안에 나밖에 없었지만 괜히 누가 이런 내 모습을 볼까 봐 신경이 쓰였다.
차마 나도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붉어져 있을 듯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행복에 겨운 만큼 동시에 조금 위태로운 기분도 밀려왔다.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던 남편이 다른 사람이라는 상상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 언니 일어났네.”
그 순간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건지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철렁했다.
만찬실 입구 쪽에서 엘로이가 나를 향해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로이는 입구 밖을 살피더니 총총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 내가 표정을 정돈하며 대수롭지 않게 식기를 들었다.
“넌 식사했니?”
“당연하지. 북부에서는 대체 뭘 먹고 사는 건지 걱정했는데, 여기도 꽤 괜찮은 것 같아.”
“최고의 요리장들이니까 지내기에 부족한 건 없을 거야.”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어?”
“…….”
역시 봤구나.
나는 조금 태연한 태도로 테이블 냅킨을 들어 입가를 찍었다.
“그냥 내가 결혼을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침부터 혼자 갑자기?”
엘로이가 한껏 눈썹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내 말이 황당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얘는 어제부터 해리엇 옆에 딱 붙어 있더니 지금은 왜 날 찾아온 걸까?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님 어디 아프셨니?”
“응? 아니? 그건 왜?”
엘로이가 무구한 눈으로 의아해했다.
나는 다시 평온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제인이나 제임스 다음으로 엘로이에게도 물어볼 만한 일이었다.
“그냥 나한테 알렉이 알렉 같지 않다고 하셔서 의심병이라도 생겼나 싶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
엘로이의 반응이 무척이나 순수했다.
역시 우리 가문 사람들 중에 알렉의 정체를 의심하는 건 시어머니밖에 없는 게 분명했다.
엘로이는 그사이 내 말을 이해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같지 않지. 예전처럼 바보 천치같이 굴지 않잖아. 오라버니가 이제야 좀
평범해진 것 같아서 너무 좋아!”
엘로이가 활짝 웃더니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래, 내가 이 애랑 무슨 말을 할까.
그나마 엘로이가 전에 한 번 알렉의 정체를 의심한 적이 있어서 물어본 거였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버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알렉에게 말해 보면 되는 거잖아?
정말 내 남편 맞냐고.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6 화

* * *
“바로 이쪽 구역입니다. 북부에 새로운 번화가를 조성한다면 수도인 카나크에서 윌스브룩 성과 이어진
길의 초입이 제격이죠.”
발리가 윌스브룩 성 아래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알렉은 그 곁에 서서 아직 나무와 암석뿐인 황량하고 싸늘한 구역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어엿한 성주님 같네.’
발리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 옆에서 알렉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른 체격에 털이 달린 커다란 망토까지 걸치고 있기 때문일까?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광활한 북부를 제패할 유일한 영웅처럼 위엄이 흘러넘쳤다.
‘저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새삼스럽게 또 감동을 받은 내가 털 망토를 여미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새 건물을 다 짓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내 목소리에 알렉과 발리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쏟아졌다.
발리가 공손한 태도로 나를 반가워했다.
“오셨군요, 마님.”
“좋은 아침이에요, 발리.”
말을 마친 내가 자연스럽게 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리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출 듯이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 순간 알렉의 손이 발리의 얼굴을 가리듯 살며시 다가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에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닿았다.
어느새 내 시야가 알렉으로 가득 찼다.
“아침에는 잘 일어나셨습니까?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
나는 살짝 발리를 응시했다가 이내 다시 알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요. 식사도 잘 마쳤답니다. 성 안에는 아직도 구경이 한창이더라고요. 정말이지 넓은 성이
북적북적해서 좋네요.”
내 말에 발리가 살짝 놀란 듯이 시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저는 이제 손님들을 모시고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더 늦게 출발하면
해가 금방 져 버려서요.”
“그럼 그렇게 해요, 발리. 우리도 곧 따라갈게요.”
“예, 주인님, 마님.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발리가 허리를 숙이더니 이내 성의 입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발리에게는 외부인을 위한 최고의 북부 관광 코스를 계획해 달라고 미리 부탁한 참이었다.
앞으로 며칠간 나와 알렉 또한 북부에서 아직 가 보지 못한 곳들을 여러 군데 가 볼 예정이었다.
발리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알렉과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알렉이 아닐 수도 있을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문득 알렉이 나에게서 눈을 돌려 조금 전 발리가 가리켰던 곳을 응시했다.
“번화가가 다 조성되려면 3 개월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발리가 북부에서 괜찮은 인부들도 알아봐 준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고요.”
“그래요? 그것참 잘됐네요.”
“그전까지는 수도에 있는 시장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기대되네요.”
내 눈빛이 기대감으로 차오르자 알렉도 포근한 눈길로 나를 보며 내 손을 매만졌다.
브니엘의 의상점과 꽃과 잼,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북부인들에게 선보이기 직전이었다.
꽃을 재배할 리즈 농원과 잼 공장도 새로 조성하면 북부인들을 더욱 많이 고용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발리가 북부인들도 이러한 변화를 환영할 것 같다고 해서 더 기대되었다.
특히 북부에서 꽃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발리는 무척 흥분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성 아래를 넓게 내다보았다.
“얼른 시간이 지나서 이곳이 더 융성해졌으면 좋겠어요. 벌써부터 북부가 제 고향인 것처럼 애틋한 거
있죠?”
“잘될 겁니다. 절 믿고 편히 계셔 주십시오. 당신이 힘들게 해야 할 일도 없을 거고요.”
“난 이미 당신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는걸요. 늘 내가 당신을 챙겨 줘야 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당신에게
많이 기대고 있어요.”
말을 마친 순간 괜히 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원래 나는 그를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걱정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위험해지면 그가 날 구해 주었고, 매일 밤 외롭게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와 함께라면 황제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그는 안쓰럽고 나약한 남편이 아니었다.
“알렉.”
그 순간 내가 불쑥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그가 조금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가슴이 떨렸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에게 마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의심을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모든 것을 마력 때문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터놓고 대화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
“이렇게 당신이랑 나란히 서 있으니 감회가 남달라요. 너무 떨리고요.”
내가 마치 꿈꾸듯이 말하자 그가 약간 놀라듯이 대답했다.
“제가 당신보다 더 떨릴 것 같은데요. 루이제 당신을 부인으로 둔 사람의 기분을 당신은 절대 모를
겁니다.”
“……?”
그럴 리가.
나 또한 의아해하며 반박했다.
“당신은 당신을 남편으로 둔 아내의 심정을 모르잖아요. 얼마나 꿈만 같다고요.”
“지금의 저보다 더 좋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럴 리가요. 당신보다 내가 더 행복할 거예요.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잖아요.”
내 말에 그가 백기를 들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살짝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전 어차피 루이제의 행복보다 중요한 건 없어서요. 그게 제 행복이어도 루이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
이런 말 하면 반칙 아니야……?
나는 아직도 어제의 여운에 빠져 있는데 더 허우적거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애틋하게 그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렉. 우리 사이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중에서 당신이 가장 크게 달라졌고요.”
“……그랬죠.”
그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내 말에 수긍하듯이 작게 대꾸했다.
그가 변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인정하고 있었다.
“기억나요? 우리가 서로 어떤 애칭을 갖고 있었는지.”
“……애칭?”
“네.”
혹시 그가 기억할까?
우리에게는 내가 만든 애칭이 있었다.
나름 남편과 가까워지려고 결혼한 지 1 년쯤 되었을 때 만든 애칭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서로에게 불러 보지는 않았다.
그는 고민을 하듯 살짝 턱을 쓸더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기억이…….”
“…….”
혹시나 했는데 그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역시 기억을 많이 잃은 걸까?
그의 목숨을 돌려받은 대신 추억을 잃은 듯한 기분이라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앞으로 그와 함께 만들 날들이 더 기대가 되었기에 많이 속상하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기억 안 날 수도 있죠. 그래도 당신이 날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
그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문득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그의 자책을 덜어 주듯 내가 애써 웃어 보였다.
“사실 당신이 그 여관에서 죽었다가 깨어났을 때 나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거든요. 날 보는 눈빛이
너무 초면이어서요.”
“…….”
“그래도 당신이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잊어버리는 것쯤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
“그런데 당신은, 그냥 조금 기억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지만…… 그게 아닌 거죠?”
“……예?”
나는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가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걱정할까 봐 지금까지 크게 내색을 안 했던 거 아닌가요? 나는, 당신이 정말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뭐라고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그를 다른 사람 같다고 느끼는 건 기억이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보여 주었던 여러 변화는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원래 좋아했던 음식이나 책, 편하게 입었던 옷들을
모두 찾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나는 알렉이 여전히 내 남편 알렉이 맞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붙잡으며 간절하게 그를 응시했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 줘요.”
“…….”
“당신, 이미 나를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거죠?”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7 화

* * *

‘갑자기 뭐지.’
알렉은 느닷없이 마차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동안 정체를 들킬 위기가 있을 때마다 예상외로 수월하게 넘어갔기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지만, 요즘 그는 자신이 정말 알렉시스라도 된
것처럼 살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이세계에서 죽었다고 하여 돌아올 일도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어차피 그도 이 세계에 차츰 적응을 하게 되었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루이제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그의 가슴에 쌓이다 못해 터져 나올 지경이라 어젯밤 그런 고백들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루이제가 다른 남자의 여자라는 사실과 그에 대한 죄책감은 이미 잊어 버렸다.
그는 그녀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이런 것을 물어볼 거라고는 미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당신, 이미 나를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거죠?’

어차피 한 번은 듣게 되었을 말.
이미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음독자살을 시도한 이후 조금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한 뒤였다.
원래 공작가에 있던 사용인들까지 함께 살게 되면서 차라리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남편이 기억을 약간 잃은 것과 가족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건 천지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자라면 기억을 잃기 전과 후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입술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알렉은 애써 덤덤하게 소리 냈다.
“……예. 루이제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가 여관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
루이제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이었다.
언젠가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녀가 알게 될까?
지금이야 겨우 기억의 문제가 드러났을 뿐이지만, 그가 알렉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루이제가 조금 놀란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거였어요.”
“……예?”
이미 의심을 사고 있었다고?
대체 누가?
그는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이 루이제의 안색을 살피는 순간,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시 깨어났을 때 당신이 누군지도 몰랐겠네요?”
“…….”
알렉은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잘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알렉은 조금 체념한 듯이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울을 보고 알긴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저의 모습과 같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았죠.”
“그럼 나나 다른 가족들은 알아보지 못한 건가요?”
“…….”
그에게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누군지 놀랍고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루이제가 다시 생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은 잠깐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다시 내리며 조금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제 스스로도 많이 놀란 상태였습니다. 아무런 경황이 없었죠. 루이제나 어머니를 모른 척하지도
못했습니다.”
“……몰랐다는 거네요.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났나요?”
“…….”
차마 그렇다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그의 침묵을 수긍으로 알아들었는지, 루이제의 두 눈동자가 조금 아쉽게 가라앉았다.
상처.
그녀는 조금 상처를 받은 듯했다.
알고 보니 남편이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만약 반대로 루이제가 그를 다 잊어버린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잠깐 상상을 해 본 순간,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기억에서 남김없이 지워진다니, 생각보다 훨씬 가슴이 시렸다.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을 루이제도 비슷하게 겪고 있는 듯했다.
문득 루이제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야 다 이해가 가요. 그동안
기억이 없어서 당신이 정말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겠어요.”
“…….”
루이제가 그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따스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런 걱정과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던 죄책감과 알렉시스를 향한 묘한 질투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딘가로 튕겨 나간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곁에서 겉돌고 있었다.
루이제가 재차 따뜻한 시선으로 말했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
“혹시라도 예전 일이 기억날 수도 있잖아요. 우리의 애칭이나, 당신이 나한테 꽃이라고는 포인세티아밖에
주지 않았던 일들 같은 거요.”
“……제가 그랬군요.”
그는 앞으로도 평생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알렉시스였다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들었다.
계속 다른 사람으로 루이제와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의 욕심일까?
루이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알겠어요. 그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앞으로 하나씩 알려 줄게요. 별로
많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
“그냥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래도 당신이 날 기억하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을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
루이제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려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조금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나 이 순간 알렉은 확실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짜 알렉시스의 상태로는 루이제와 계속 함께할 수 없다.
차라리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 * *

“주인님, 마님! 출발할 시간이에요!”


멀리서 사용인들이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걷던 나는 문득 그들의 외침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수도에서 함께 온 귀족들과 장인들이 한껏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마 차에 오르고 있었다.
“루이제!”
그중에서 메리엔이 가장 밝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메리엔의 손을 맞잡았다.
“메리엔. 드디어 북부 여행의 첫날이 시작되겠네요.”
“정말 너무 기대가 되는 거 있죠! 다 루이제 덕분이에요. 너무 고마워요.”
“아직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이르죠. 윌스브룩 성도 다 둘러보지 못했잖아요.”
“성만 봐도 북부가 정말 대단한 곳이라는 게 느껴져요. 정말이지 가슴이 콩닥거려서 간밤에 잠도 잘 수
없었답니다.”
“앞으로 북부에서 보름이나 있을 건데요. 충분히 자도 구경할 시간은 많을 거예요.”
어차피 해가 지면 어디 가기에도 애매했다.
윌스브룩 성의 첨탑에서 야경을 보는 것 정도?
그마저도 구름이 낀 날에는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볼만한 야경도 없었다.
알렉이 마력으로 불꽃 이벤트를 해 주지 않는 이상…….
불쑥 떠오른 알렉의 생각에 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돌아보니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에는 해리엇과 엘로이도 마차에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리엔의 명랑한 음성이 금세 다시 들려왔다.
“그럼 같은 마차에 타지 않을래요? 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답니다.”
“그럴게요, 메리엔. 이제 곧 출발하겠어요.”
“고마워요, 루이제.”
나는 메리엔에게 끌려가듯 마차에 올랐다.
곧이어 마차가 출발하고, 메리엔이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어쩐지 내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예. 루이제가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제가 여관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뭐?
진짜 기억을 다 잃었다고?
심지어 내 얼굴과 이름조차 까먹었을 정도로?
설마 했는데 역시나 싶었던 사실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있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었다.
‘정신 차려, 루이제.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디야.’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람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북부 관광과 메리엔을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득했다.
다시 깨어난 그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낯선 여자.
당시 그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이야 그때와는 달리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알렉이, 내가 아는 알렉이 맞다고 해야 하는 걸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8 화

에이, 아니야.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어도 알렉은 알렉이었다.
이미 그가 날 사랑하고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이상할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이 낯선 기분을 애써 모른 척하며 메리엔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한창 화기애애하게 사담을 나누다 보니 첫 관광지에 도착했다.
발리가 가장 먼저 우리를 데려온 곳은 얼음 동굴이었는데, 온갖 예술적인 고드름과 얼음 기둥으로 가득한
환상적인 곳이었다.
“세상에.”
“겨울의 여왕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곳이네요.”
“우리 릴트 제국에 이런 곳이 다 있었다고요?”
사람들이 연신 감탄을 쏟아 내는 동안 나 또한 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발리가 설명해 주는 내용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천연 동굴임에도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장인이 조각한 것처럼 곳곳에 훌륭한 모양의 얼음덩어리가
존재해 있었다.
특히 얼음으로 된 커다란 장벽 사이를 지나갈 때는 정말로 얼음 왕국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이제.”
내 곁에서 함께 감탄을 금치 못하던 메리엔이 대뜸 심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정말 여긴 미쳤네요. 아니, 미쳤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윌스브룩 성과 이 얼음 왕국만으로도
북부에 와 볼 만한 가치는 차고 넘쳐요.”
“……저도 지금 너무 놀라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답니다.”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 얼른 수도에 가서 이 북부의 찬란함을 다른 분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 우리끼리만 보기에는 너무 아쉽네요. 그리고 제가 이곳의 영주 부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여기는 정말……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경험! 정말 딱 북부에 어울리는 말이네요. 너무 감격스러워요.”
메리엔은 심장이 떨리는 듯 가슴을 꾹 눌렀다.
나도 이 얼음 왕국에 압도되어 정신을 놓지 않으려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누군 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침 그도 이 커다란 동굴 안을 살 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알렉.’
그도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표정을 잘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이었다.
잠시 그를 보던 내가 이내 입가를 끌어 올려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뭐지?
이 어색함…….
희한하게도 나는 그에게서 조금 낯선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브룩스가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잠시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자신이 알렉이었다는 사실도 대부분 잃어버렸어.’
그의 습관, 성격, 취향, 말투.
원래 기억을 잃으면 자신의 몸에 배어 있었던 것들도 모두 없던 것처럼 증발되는 걸까?
분명 알렉은 알렉인데, 기억을 다 잃었다고 해서 왜 이리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시간이나 더 둘러보고 나서야 관광이 끝이 났다.
방금 전까지 대체 뭘 보고 나온 건지 기분이 얼떨떨할 정도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황홀해하는 사이 사용인들이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장작을 피우고 간단히 도시락을 먹을 계획이었다.
힐긋 다른 쪽을 보니 알렉의 주위에는 브룩스를 비롯한 남자 귀족들이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에는 메리엔의 남편도 함께였다.
“메리엔.”
“네?”
같이 불가에서 몸을 녹이던 메리엔이 동그랗고 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라도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뭔데요? 루이제가 저한테 궁금한 거라니 무슨 이야기일지 정말이지 기대가 되네요.”
메리에이 반가워하자 나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만약에…… 메리엔의 남편이 사고가 나서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네?”
“그래서 메리엔까지 다 잊게 되면, 마음이 많이 아프겠죠? 만일 이런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서요.”
“아,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음…….”
“…….”
메리엔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잠자코 기다렸다.
메리엔은 남편과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두 사람 다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부부라 딱히 의견이 부딪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했었다.
과연 메리엔은 어떻게 생각할까?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메리엔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남편이 기억을 잃어서 나까지 잊어버렸다는 거죠?”
“네.”
“그건 정말 비극이네요. 남편이나 나나 너무도 불쌍한 일이에요.”
“…….”
“그래도 남편이 우리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다시 아껴 주려고 노력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절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서로 힘을 합쳐서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기억을 다 잃었어도요.”
메리엔이 말을 마치며 나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쩐지 조금 할 말을 잃은 기분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메리엔의 말이 정답이었다.
기억을 잃은 남편이 날 생전 초면의 여자라고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서로 노력해서 다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가 기억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 낯선 기분을
느끼는 걸까?
무언가, 무언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 아직도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 * *

해가 지기 전에 북부 관광은 끝이 났다.
땅이 넓은 곳이라 얼음 동굴만 갔다 왔는데도 저녁이 되었다.
북적북적한 저녁 만찬이 끝나고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무렵.
나는 적당히 차려입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성의 지하에서 하루 종일 홀로 있었을 리디트 황자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리디트 황자에게 줄 선물도 한가득 챙겼다.
‘후후후, 좋아하겠지?’
일곱 살 남자아이는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많이 챙기고 봤다.
이 중에 하나는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지하로 내려갔다.
주위에 누가 있진 않은지 살피며 조심히 움직였다.
알렉을 비롯한 남자들은 2 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듯했다.
해리엇과 기사들은 북부에서 그림자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쯤 자신들의 방에 있을 게 분명했다.
‘하여간 제일 찜찜한 것들이야.’
그래 봐야 알렉 한 명을 당해 내지는 못할 테지만.
오늘따라 너무도 많게 느껴지는 계단을 모두 내려간 나는 지하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장치를 눌렀다.
리디트가 벌써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혼자서 무서워하진 않았을까?
별로 내색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지만…….
이윽고 지하의 홀을 지나 복도를 걷자 새가 노래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갸웃하며 더 다가간 나는 그 소리가 리디트의 말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음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문득 예전의 알렉이 생각나 코끝이 시렸다.
“똑똑.”
이윽고 리디트의 방 앞까지 다가간 나는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렸다.
내 소리에 리디트가 동그란 눈을 들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바닥에는 온갖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리디트가 그 한복판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저절로 내 입가가 치솟았다.
“안녕하세요.”
“……부인!”
리디트가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금세 일어섰다.
나는 리디트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낮췄다.
아이의 손 하나를 잡아 보니 작고 말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잡아 주고 싶은 손이었던지.
괜스레 울컥하여 숨을 크게 들이쉰 순간 리디트의 눈동자도 조금 촉촉하게 일렁였다.
나를 반가워하는 눈치라 다행이면서도 안쓰러웠다.
“잘 있었나요? 더 일찍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되었네요.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어요.”
내 말에 리디트는 뭐라고 말할 듯이 동그란 입술을 벌렸다가 금세 다시 다물었다.
할 말을 참는 느낌이라 내가 살짝 갸웃했다.
“잠이 잘 안 왔나요?”
그제야 리디트가 조금 힘겹게 소리 냈다.
“……그러타.”
“그럼 마침 잘됐네요. 제가 재워 드릴게요. 그 전에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답니다.”
“……?”
리디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내가 바닥에 앉아 아이를 끌어당겼다.
내 품 안에 앉히자 리디트의 작은 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나는 개의치 않으며 갖고 온 선물들을 풀어 보았다.
아이의 작은 몸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따스해서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이런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인하고 알렉에게 황자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물어봤는데 다들 책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책 말고 이런 건
어떠세요?”
내가 주머니 하나를 풀자 바닥으로 나무 블록이 쏟아졌다.
블록을 맞춰 여러 모형을 만드는 장난감이었다.
리디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답니다.”
다음으로 내가 연 상자에는 온갖 사람 모형이 가득했다.
체스와 유사한 게임이었는데, 황궁의 여러 직책과 권력 구도를 이해하기에 이만한 게임도 없었다.
다만 특별한 건 현재 황궁에 있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
황궁뿐만 아니라 사교계 버전도 있었는데, 내가 만든 특별한 인형들이었다.
리디트가 작은 손을 뻗어 나무 인형 중 하나를 집은 순간이었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순간 들려선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엘로이가 문 앞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29 화

엘로이가 여기 어떻게 온 거지……?


놀란 리디트가 숨을 들이켰고,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를 내 뒤쪽으로 숨겼다.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
“엘로이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
엘로이의 눈길이 리디트를 찾을 듯이 내 뒤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녀의 시선이 닿을 수 없도록 드레스 자락을 조금 더 펼치자, 엘로이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저 꼬맹이 누구냐니까? 방금 황자님이라고 한 거 다 들었어.”
“혹시 나 따라온 거니?”
내 물음에 엘로이가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부러 몰래 따라온 건 아니야. 그냥 언니 보러 갔다가 언니가 어디 가길래 쫓아간 거지.”
“인기척도 안 내고?”
“내가 원래 좀 조신하잖아.”
엘로이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저거 일부러 쫓아왔구만.
무척 조심하면서 왔는데 어떻게 엘로이가 따라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혹시 엘로이는 첩자의 기질을 타고난 게 아닐까?
“설마 너 여기 오는 거 다른 사람한테 들키진 않았어?”
“아니. 절대. 아무도 없던데?”
“…….”
저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잠시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리디트를 보호하기 위해 알렉이 이곳에 마력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력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엘로이가 접근할 때 위험을 감지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우선 리디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갑자기 불청객이 들이닥쳤네요. 그런데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엘로이는 알렉의
동생이거든요. 저희와 생사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랍니다.”
내가 리디트에게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눈에 서린 경계심이 조금 수그러드는 듯했다.
나는 리디트의 손을 잡고 엘로이를 볼 수 있도록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리디트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자 엘로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리디트의 정체를 밝혔다.
어차피 들켰으니 리디트를 다른 고아라고 둘러대도 엘로이의 추궁을 피하진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가 우리의 비밀을 지켜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예를 표하렴, 엘로이. 오래전에 황궁에서 사라지신 리디트 황자님이란다.”
“……!”
내 말에 엘로이의 두 눈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처음 리디트를 보았을 때 딱 저 정도로 깜짝 놀랐었다.
이제 슬슬 엘로이가 무릎을 굽히고 예의를 갖추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엘로이가 리디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말도 안 돼! 저 애가 황자님이라고?!”
“…….”
“갑자기 황자님이 여기에 왜 있어? 언제부터?”
“……엘로이? 놀란 건 알겠는데, 황자님께 더 이상 무례하게 굴면 곤란해.”
내가 단호하게 야단치자 엘로이가 입을 다물었다.
리디트는 여전히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엘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우선은 엘로이에게 단단히 당부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훨씬 엄해진 표정으로 엘로이에게 말했다.
“엘로이, 너 이 비밀 지켜 줄 거지? 황자님을 지키지 못하면…… 너도 죽고, 우리도 다 죽을지도 몰라.”
내 말에 엘로이는 눈을 크게 뜨더니 어처구니없어했다.
“언니는 날 뭐로 보고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해!”

* * *

“그럼 조만간 또 올게요, 황자님. 좋은 꿈 꾸셔야 해요.”


쪽.
내가 리디트의 동그랗고 잘생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어쩐지 나에게는 황자가 아니라 귀여운 조카 같아서 굿 나잇 입맞춤을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디트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색해하기는.’
너무 귀여워!
내가 배시시 웃어 주자 리디트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지금까지 엘로이와 셋이 황궁 놀이를 한 참이었다.
리디트는 무척 똘똘해서 한 번 들은 이름을 까먹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인물들인지도 잘 기억했다.
이 정도면 당장 내일이라도 황궁에 가 신료들 출석 체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엘로이는 이미 문 앞으로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이제 가자. 나 졸려.”
“응.”
두 시간 가까이 리디트와 게임을 하느라 힘들었는지 엘로이는 적잖이 피곤한 기색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리디트를 두 눈에 담았다.
우리가 지켜 줘야 할 소중한 보물.
리디트가 작은 손을 들어 우리에게 흔들었다.
조금 어색하게 얼굴을 붉히며 앵두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조은 밤 되십씨오.”
.
.
.
이제야 좀 속이 편하네.
리디트가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내 마음속 걱정 하나가 조금 희미해졌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지하에 가둬 놓아서 신경이 무척 쓰였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자주 가서 놀아 주고 싶은데, 차라리 엘로이가 알게 돼서 다행인 걸까?’
제인과 알렉도 틈틈이 리디트를 찾아가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아까 보니 엘로이가 의외로 리디트와 잘 놀아 주는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럼 들어가서 잘 자렴, 엘로이.”
“응, 언니도.”
엘로이가 무척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렇게나 추운 북부에 와서 여기저기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니 조금 기특하기도 했다.
‘해리엇한테 계속 붙어 있는 것만 빼면…….’
엘로이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복도에는 불빛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올라가던 나는 어김없이 알렉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엘로이와 함께 리디트를 만난 일을 그에게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리디트.
그러고 보니 리디트는 우리가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을 때 집을 살 수 있게 해 준 정말 고마운 존재였잖아?
알렉이 리디트의 위치를 알려 주는 대가로 정보상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알렉은 자신이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리디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까지 적혀 있는 책이라니 정말 신기…….
문득 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 알렉은 내 이름과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을 만큼 기억을 다 잃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예전에 본 책의 내용은 떠올릴 수 있었던 걸까?
불현듯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매듭의 정체를 이제야 맞닥뜨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또 다른 의심이 내 의식 속에서 끌려 나왔다.
요리.
그는 우리 가족들에게 직접 여러 번 요리를 해 주기까지 했었다.
어떻게 이런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었는지 묻는 말에 그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어서 흉내만 내 봤습니다. 맛이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뭐?
어떻게 기억을 잃기 전에 보기만 했던 요리를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어?
그게 말이 돼?
심장이 더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남은 걸까?
아니면 내 얼굴과 이름이 책과 요리보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 걸까?
나는 다시 머리를 한 번 흔들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발이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책과 요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잘 탔고, 춤도 무척 능숙했다.
그게 다 마력 때문이라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에 또 어떤 마력이 사람의 위치를 알려 주고, 온갖 요리의 레시피도 알려 줄 수 있겠어?!
그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시어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0 화

* * *

‘어쩌지.’
알렉은 영주의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얼음 동굴을 관광하고 성에 돌아와 저녁 만찬이 있었다.
그 이후에 브룩스를 비롯한 사람들과 북부의 독한 술을 나눠 마셨다.
게임에 지는 사람이 원샷을 하는 내기를 했는데, 알렉은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술을 마셔야 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도무지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가 나를 어색해한다.’
그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이후부터였다.
눈이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눌 때 묘하게 그를 낯설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에 알렉은 술에 취할 수도 없었다.
맹독처럼 쓰고 강한 북부의 술도 루이제에 대한 생각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치유 스킬이 알코올을 해독하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스킬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창가를 서성이던 그는 불쑥 걸음을 멈췄다.
‘설마.’
설마 그런 걸까?
오늘 온종일 루이제의 표정에서 엿보였던 어색함과 생소함은 단순히 그가 기억을 다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심각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
알렉은 턱에 대고 있던 자신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녀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억을 반밖에 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그가 알렉시스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 버렸으니 오히려 그는 거짓말을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그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둘러대듯 했던 말들은 그가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의 머릿속에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리디트를 찾았던 일부터 윌스브룩 성으로 향하는 길을 공작가 사람들과 함께 처음으로 지나갔을 때가 특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거기서 리디트 황자에 대해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랬군요. 어떤 책이었는지 신기하네요. 황실 사람 중 누군가의 일기장 같은 거였을까요?’
‘글쎄요,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길이 있었는데 그동안 저 성으로 파견된 귀족들은 왜 돌아오지 못한 걸까요?’


‘아마 이 길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렉은 어떻게 발견한 거예요?’
‘……무척 오래된 고서에서 읽었습니다.’
‘주인님처럼 책을 많이 읽으신 분도 이 세상에 없을 거랍니다. 모두 이렇게 복으로 돌아오는군요.’

“…….”
‘그래.’
하긴 이제 들킬 때도 되었지.
그의 정체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 막다른 길에 내몰린 것처럼 의심을 받는 순간이 올
거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루이제 말로는 이미 사람들이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건 누구일까?
어머니와 엘로이, 그리고 사용인들까지 짐작 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알렉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동안 나름 철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는 두말할 여지도 없이 들켰다.
루이제는 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그가 지금껏 했던 말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그를 보면서 묘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던 루이제의 얼굴이 바로 그 증거였다.
‘……돌겠군.’
미간을 짚고 있던 손을 내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망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루이제가 그의 정체에 대해 확실히 알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루이제는 누구보다 알렉시스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애틋해하고 사랑하는 건 그가 알렉시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지금의 그가 보여 주는 능력과 여러 애정 표현에 무척 흡족해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가
알렉시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루이제가 모든 사실을 알고 난다면.
그녀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띠링!
순간 들려온 경쾌한 알림음에 알렉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눈을 들어 보니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퀘스트 발생!]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M[당신은 남편 전용 스킬 중 ‘초보 남편의 간지럼’과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아내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애정도와 경험치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합니다!]
[퀘스트 보상]
[경험치(?), 애정도(?), 신뢰도(?)]

[퀘스트 패널티]
[12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윌스브룩 성이 무너집니다.]

“…….”
알렉의 턱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벌어졌다.
퀘스트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

‘말도 안 돼. 너무나 말이 안 되잖아…….’


나는 7 층으로 이어진 계단의 난간을 붙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가 기억을 다 잃었다고 한 말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여태 책에서 봤다고 했던 말들이 거짓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거짓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나를 포함한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고 했고, 굳이 그런 거짓을 나에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리디트의 위치나 요리 레시피, 그리고 윌스브룩 성까지 가는 길을 알아낸 방법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그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도저히 맞지 않는 상황이 모두 진실처럼 느껴져서 문득 두통이 엄습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당신은…… 대체 뭐야?’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난간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세게 붙잡았다.
힘겹게 계단을 하나하나 밟을 때마다 지금껏 보아 온 그의 모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던 모습들이었다.

‘……당신, 원래 이렇게 춤을 잘 췄어요?’


‘아뇨. 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아, 혹시 이것도 죽었다 살아난 영향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당신이 아내인 남자는 좋겠다는 생각.’

‘저는 반드시 폭군을 물리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네?’
‘그게 제가 이 세계에 온 목적인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많이 변해 버려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네요. 다른 사람 같아요.’
‘…….’
‘그런데 지금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아는 알렉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당신이 내
남편인 건 변하지 않아요. 맞죠? 여전히 당신인 거…….’

‘이미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
‘당신을 속인 적도 있죠. 숨기기도 했고요.’
‘…….’
‘저는 제가 의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의 말들에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어느새 얼어붙은 사람처럼 나는 미동도 하지 못했고, 주위에 떠도는 먼지나 촛불이 타오르는 미세한
소리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내 사방이 온통 진공 상태가 된 듯한 이 적막함.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득함…….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이 아연한 상태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나에게 여러 번 자신의 진실에 대해 넌지시 털어놓았다.
그는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내 남편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지?
내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모든 의혹이 다 해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리디트와 윌스브룩 성의 위치도 알고 있을 만큼 이 세계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1 화

* * *

‘북부에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봐라.’


해리엇은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성을 응시하며 황제의 지시를 상기했다.
릴트 제국에 이런 성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웅장한 성이 어둠 속에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가 봐도 숨이 멎을 만큼 대단한 성이었다.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존엄한 생명이 저 성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그의 검이 보채듯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지루해.]
“…….”
[배고파.]
“…….”
아, 이 자식 때문에 여기까지 나왔지.
그의 검은 뭔가를 베지 못하거나 피 맛을 느끼지 못하면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귀찮게 했다.
알겠으니 조용하란 말이 턱 끝까지 치밀었지만 해리엇은 이를 악물었다가 검을 빼 들었다.
“그래. 등이라도 긁어 주마.”
쾅!
검을 내려치자 섬광과 함께 나무가 우지끈 부러졌다.
월스브룩 성과 이어진 깊은 숲에서 몸서리를 치듯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해리엇이 다시 검을 집어넣으려던 순간, 검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채식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나는 육식-!]
“시끄러워.”
달칵.
해리엇은 그냥 검을 검집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성질 같아서는 두 동강 내고 싶을 정도로 그를 성가시게 하는 검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검은 워든 백작가의 파란 피 기사단장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적인 가보, ‘파란 눈의 검’이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의 검은 가장 숭고하고 강력한 성력을 담아 만들어진 검이었다.
이 제국에서 파란 눈의 검 말고는 다른 성검은 없었다.
아주 오래전 과거 어느 때에는 이 검에 깃든 영혼이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긴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수백 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다른 평범한 검과 마찬가지로 사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리엇이 물려받은 파란 눈의 검은 말 그대로 눈을 떴다.
검 자루 아래에 있는 눈 모양의 장식이 진짜 눈을 뜨며 파란색 안구를 드러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해리엇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파란 눈의 검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다름 아닌 황제였다.

‘보았느냐. 이제 이 검은 우리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이 될 것이다.’


‘폐, 폐하.’
‘누구도 이 검을 이기지 못하겠지. 앞으로 최강의 기사가 되어 내 제국을 이끌어라, 해리엇.’

그 순간 해리엇은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황제에게 이런 힘이 있었나?
이토록 특별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이 우리 제국의 새 황제라고?
그야말로 경이롭고 충격적이었다.
해리엇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할 성품은 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황제와 함께하기 시작한 후로 해리엇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검이 생명을 얻은 이후 검과 연결된 그의 힘이 시간이 지날수록 치밀해졌기 때문이었다.
해리엇은 검을 ‘파란 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파란 눈을 능가할 검은 이 세상에 없었다.
이제는 검이 곧 그였고, 그가 곧 검이라고 여겨질 만큼 파란 눈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를 성가시게 하는 탓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분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파란 눈이
없으면 그도 모든 힘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리엇은 굳이 검을 없애서 자신까지 파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 검 새끼를 죽이고 싶지?
“성검이면 성검답게 채식도 좀 즐겨 보라고.”
쾅! 쾅!
해리엇은 금세 다시 검을 꺼내 사정없이 내리쳤다.
섬광이 번개처럼 솟구치며 숲속을 종이 찢듯 갈가리 할퀴었다.
검의 몸체가 멀미를 하듯 크게 진동했다.
[으아아. 맛없어-!]
“검이면 검답게 굴어야지 감히 인간한테 이래라저래라! 나무 맛 좀 봐라, 이 개자식!”
[으아악! 풀 싫어!]
검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해리엇의 손목에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나무를 몇십 개나 베어 버렸다.
지금처럼 파란 눈과 기 싸움을 하는 건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에게 건방지게 구는 검을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파란 눈이 그를 탐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이 검은 그의 의식을 모조리 집어 삼켜 살육을 벌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란 눈의 능력이라면 릴트 제국의 온 사람들을 다 죽이고도 모자라 미쳐 날뛸 것이다.
제 능력을 주체하지 못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검 주제에 그를 능가하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주인님!]
파란 눈이 기겁을 하며 빌었지만 해리엇은 난도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불타오르다 못해 재가 될 것 같았다.
그 머릿속으로 황제의 또 다른 명령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북부를 살펴본 후에, 자작 부인을 황궁으로 데려와라. 새 황후로 삼을 것이다.’

북부에 더 머물 만큼 이곳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이제 남은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파란 눈이 그토록 원하는 피 맛을 보여 줄 일도 곧 생기지 않을까?

* *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내 침대에 앉았다.


리디트에게 갔다가 내 방까지 어떻게 오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말이 아니었다.
‘알렉…… 정말로 다른 사람일까?’
나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나 진심으로 느껴지는데.
나는 가슴팍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내 가슴 속에서 뜨겁게 느껴졌다.
그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털어놓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속에서는 이렇게 장작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불꽃 같은 열망이었다.
이제야 내 안에 불같은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잠시 초점 없이 허공만 응시하던 나는 문득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보며 확인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창밖을 보니 짙은 구름과 함께 어둠이 적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금쯤 그의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내 방을 나섰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분으로 그를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떨렸지만, 모른 척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한 복도 안에서 내 발걸음 소리는 거의 잘 울리지도 않았다.
폐가 체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걸음마다 조심스러웠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루이제.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에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그의 방이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
벌써 도착한 그의 방문 앞에서 나는 문을 두드릴 듯이 손을 들었다.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킨 후에야 노크를 했다.
똑똑.
그는 방에 있을까?
어쩌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벌써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잠깐의 적막 끝에 내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더니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짧게 숨을 들이켰다.
고대의 훌륭한 조각품처럼 완벽한 비율에, 보는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켤 정도로 잘생긴 얼굴.
언제나 그는 누가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뛰어난 외모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내 심장을 더 철렁하게 했다.
“……루이제?”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나를 한 번 살펴보더니 문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네. 당신도 방에 있었네요.”
애써 자연스럽게 대꾸한 내가 그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또한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조금 비켜 주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숨길 듯이 내가 조금 힘겨운 미소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방으로 돌아갔나요?”
“예. 저도 조금 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랬군요. 즐거운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 말하며 나는 그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방에 올 때면 내가 늘 앉는 곳이었다.
그도 나와 가까운 곳에서 콘솔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나는 금세 할 말을 떠올렸다.
“방금 전에 리디트 황자님께 다녀왔어요.”
그는 조금 놀란 듯이 되물었다.
“잘 계십니까?”
“그럼요. 같이 게임도 했는걸요.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엘로이가 저를 따라왔더라고요. 눈치도 못 챌 만큼 은밀히 쫓아왔어요. 결국 황자님의 정체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 괜찮습니다. 엘로이도 많이 놀랐겠군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사실 내가 조금 잘못한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아닙니다. 안 될 것 같았으면 엘로이가 지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공격 받았을 겁니다.”
“네? 아, 그렇군요…….”
그의 마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가 마력을 쓸 수 있는지 몰랐을 때도 그에게 의혹을 품었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아 줄까?
계속되는 의심에도 나는 도무지 그에 대한 믿음이 깨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2 화

“알렉.”
나는 그냥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그는 잠자코 내가 하는 양을 응시했다.
그가 약간 긴장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애써 그런 기분을 모른 척하며 나는 살짝 그를 끌어당겨 허리를 안았다.
그의 품으로 조금 더 머리를 기대자 그도 내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루이제.”
그의 낮은 저음이 내 온몸에서도 울렸다.
가벼운 포옹일 뿐인데도 내 전부를 안은 것처럼 더 바랄 게 없었다.
이윽고 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 더 이상 비밀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난 당신을 믿어요.”
나는 조금 더 그를 간절히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만약 내가 그에 대해 뭔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는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게 자신할 수 있었다.

* * *

‘퀘스트 발생!’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루이제가 잠든 지 꽤 지난 시각.
알렉은 침대에서 나와 시스템 창을 다시 한번 열어 보았다.
루이제는 얼음 동굴에 갔다가 리디트와 놀아 주기까지 해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잠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한테 더 이상 비밀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난 당신을 믿어요.’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그녀의 말들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의 시스템 창 한 구석에서는 타이머가 작동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 10:38:47]

‘……하.’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알렉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안색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대체 이 퀘스트는 뭐야?’
그의 스킬 중 ‘초보 남편의 간지럼’과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루이제에게 사용하라니.
그걸 루이제에게 대체 어떤 ‘올바른 방법’으로 쓰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경험치와 애정도가 필요했다.
황후를 사역령으로 포섭한 이후 경험치가 20 억이나 올랐지만, 아직 애정도를 그만큼 얻지 못해 레벨이
크게 오른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퀘스트에 실패하면 받게 될 패널티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12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윌스브룩 성이 무너집니다.’

이건 진짜일까?
아무리 퀘스트라고 해도 그의 새 터전이 된 윌스브룩 성을 무너뜨린다니.
선뜻 믿기지 않았다.
‘뭐 이딴 퀘스트가…….’
살짝 미간을 세운 그는 불쑥 무언가가 떠올랐다.
수북하게 쌓인 먼지와 거미줄, 온갖 벌레들로 가득했던 윌스브룩 성을 시스템이 깔끔하게 변모시키던
모습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시스템은 윌스브룩 성에 마음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무슨…….’
불쑥 전생에 겪었던 여러 퀘스트 패널티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설마 싶었지만 늘 모든 말도 안 되는 패널티들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번에도 12 시간 안에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성이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알렉은 우선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이 퀘스트를 어떻게 성공시킬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보 남편의 간지럼’ 스킬은 정말 간지럽히는 것처럼 아주 미세한 전류로 운용한다면 사람에게도 사용
가능할 것 같았다.
루이제에게 간지럼 스킬을 쓸 수 있을까?
알렉은 살짝 몸을 돌려 저 멀리 잠들어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그는 그녀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루이제가 아직까지는 크게 추궁을 하지는 않았지만 잠들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은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을 믿어요.’

그건 자신에게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준 게 아닐까?


이런 와중에 그녀 모르게 스킬을 써서 간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은…….’
그건 이전에도 루이제에게 썼던 적이 있었다.
북부에서는 공기가 코끝에만 닿아도 눈물이 핑 돌 만큼 춥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잠들어 있으니 조금 따뜻해진다고 해서 알아챌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렉은 잠시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과연 될까 싶은 의구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잠든 루이제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그의 눈길을 끌었다.
새벽이슬처럼 청초하고 투명한 안색, 아담하면서도 우아한 이마, 버선 같이 오뚝한 코, 그리고 무언가
바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롱하고 붉은 입술.
마지막으로 영묘한 달빛을 끌어다 실로 엮어 낸 것처럼 흐트러진 은색 머리카락까지…….
빨려 들어갈 듯 그는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되찾았다.
12 시간, 아니 10 시간 후면 이성이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윌스브룩 성을 잃으면 루이제가 얼마나 상심할지 상상도 다 가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루이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에 다 담기지도 않는 가녀린 손목이었다.
‘스킬.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
이윽고 마음속으로 읊조리기 무섭게 따뜻한 기운이 그의 손에서 루이제의 피부로 옮겨 갔-.
삑!

[틀렸습니다!]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
깜짝 놀란 알렉의 눈이 커졌다.
틀렸다고?
따뜻하게 해 줄 목적으로 스킬을 썼는데 그게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니?
알렉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갑작스레 머리가 너무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이쯤 되니 설마 ‘올바른 방법’이 그런 방법을 말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살다 살다 이런 변태 같은 시스템을 다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런데 지금 루이제와 그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 그런 방법이 과연 가능할까?
알렉은 다시 고개를 들어 현재의 애정도를 확인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게 있었다.
루이제가 그의 정체에 대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음에도 그의 애정도는 그대로였다.
다만 신뢰도는 오늘 하루에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치 주식 그래프처럼 붉은색, 파란색으로 요동치는 수치를 보니 그녀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정도는 오르거나 떨어지지도 않으며 굳건한 수치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그는 더 긴장을 하게 되었다.
‘……애정도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깊은 한숨과 함께 알렉은 다시 루이제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놀라 굳어 버렸다.
언제 깬 건지 그녀가 조금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일어나 있어요? 벌써 아침인가요?”
“아, 아뇨. 아닙니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랬군요. 나도 잠을 좀 설쳤나 봐요.”
“…….”
알렉은 숨을 죽이듯 루이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그녀의 눈동자는 몽롱했다.
그 순간 신뢰도가 다시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기만 해도 믿음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아득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신뢰도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루이제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흔들리더니 신뢰도가 다시 떨어졌다.
그는 애써 손에 힘을 주며 살짝 고개를 내렸다.
루이제가 그를 밀어내려고 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두근거렸다.
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기회는 지금뿐.
오늘 밤을 놓치고 내일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는 10 시간이 다 지나 버릴 것이다.
그녀는 크게 경직된 눈으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지자 그의 눈꺼풀도 살포시 감겼다.
꼭 첫 키스를 할 때처럼 생소하고 낯선 분위기가 흘렀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려 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를 바로 밀어내지는 않았다.
알렉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턱을 벌렸다.
그녀와 입맞춤을 얼마나 했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감각이 평소보다 수십 배는 예민해진 것처럼 여린 입술의 촉감이 눈에 다 보이듯이 느껴졌다.
평생 갖고 싶은 입술이 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3 화

그의 깊숙한 침투에 루이제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녀가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지는 꽤 되었지만, 지금은 꼭 처음처럼 그를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루이제의 반응에도 알렉은 애써 과감하게 혀를 얽었다.
작은 살결을 매끄럽게 휘감고, 부드러운 안쪽을 지그시 훑었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고, 그 자극에 그의 심장도 불쑥 떨렸다.
“하.”
루이제의 입술 사이에서 조금 힘겨운 숨이 작게 터져 나왔다.
그 연약하게 들뜬 신음이 그의 귓가를 현혹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루이제의 드레스 여밈을 풀었다.
한 번 그녀의 촉감을 탐닉하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문득 그녀가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그의 목으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포개진 입술이 더욱더 깊어졌다.
두 입술과 숨결이 하나로 섞일 듯이 엮이고, 호흡은 가빠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의심하지 않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도 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루이제는 잠시 정신을 반쯤 잃은 걸지도 몰랐다.
귓가에 그와 루이제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울렸다.
왜 그녀는 그의 여자가 아닐까?
이렇게 그를 향한 사랑과 욕망이 느껴지는데, 왜 그녀는 그가 가질 수도 없고,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모르는 거지?
그리고 그는 이제 대체 누구일까?
그의 원래 이름을 잊고 산 지도 오래였다.
불쑥 떠오른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그녀와 그의 옷이 앞다투어 벗겨졌다.
“루이제.”
그는 조금 숨을 몰아쉬며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약간 혼몽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번져 보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루이제를 바라보며, 알렉은 녀를 쓸어 만졌다.
“……!”
루이제의 동공이 흠칫 커지며 턱이 살짝 들렸다.
몸에 따뜻함이 스며들었기 때문일까.
아니, 조금 뜨거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이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용량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책정됩니다!]

“…….”
과연 스킬을 쓰자마자 떠오른 상태창에 알렉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역시나 저 ‘올바른 방법’이 어떤 분위기에서의 방법을 말하는 건지 지금에야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초보 남편의 간지럼’ 스킬 또한 이런 식으로 사용해야 퀘스트에 성공할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뜨거운 손길을 이어 나갔다.
감히 만질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하게 느껴지는 몸이 그의 손 아래에서 아찔하게 반응했다.
“……!”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평범한 상대의 체온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온도와 손길이었다.
그의 열기가 그녀의 살결 곳곳을 누르고 지나가며 매만졌다.
맨 피부로 느끼기에는 조금 자극적일 것 같은데, 그녀는 어떨까?
“뜨겁습니까?”
그 순간 그가 조금 심각하게 물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금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긴장감으로 한껏 굳어진 몸이 그에게까지 빠짐없이 전해졌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벅차게 호흡을 하며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의 열기에 그녀의 머릿속까지 뭉근하게 녹아내린 듯이, 눈빛이 몽롱해졌다.
이윽고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요. 그런데…….”
“……”
“더 뜨거워도 될 것 같아요…….”
루이제가 숨을 토해 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의 열기가 너무 버겁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알렉은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차츰 그의 전신으로 퍼뜨렸다.
그의 몸에 비하면 루이제의 체온은 너무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금세 그의 열기가 간절해진 듯, 루이제가 그에게 몸을 붙이듯이 다가왔다.
그도 그녀를 단단한 팔로 바짝 끌어안았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지나 척추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갔다.
열기 가득한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루이제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보다 더 편하게 녹아내릴 수도 없을 만큼 그녀는 점점 그에게 온몸을 맡겼다.
머릿속까지 함락되듯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열기를 갈구하듯 그에게 매달리듯이 밀착했다.
너무 뜨거울까 봐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정말 괜찮은 듯한 반응에 알렉은 내심 놀랐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이 열기를 바라고 있었던 듯했다.
설마 진작 침대에서 이 스킬을 썼어야 했던 걸까?
루이제의 살결이 빈틈없이 그에게 달라붙자 그의 심장도 뜨겁게 달구어졌다.
이보다 더 뜨거운 가슴으로 그녀를 안는다면 둘 다 녹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성은 사라지고 감각만 남는 듯했다.
“나 근데.”
“…….”
불쑥 루이제가 힘겹게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이미 가쁜 호흡 소리로 귓가가 어지러웠다.
“당신한테 안겨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분이 이상해요.”
“…….”
루이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왜 이상하지 않을까?
알렉은 지금 그녀가 그를 믿기 위해 온 마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길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두 눈은 루이제의 눈을 더욱 빼곡하게 담았다.
문득 지금이 아니면 그의 진심, 알렉시스로서가 아닌 원래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한테 제가 의심스러울 거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
“그런데 이것만은 확실하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뭔데요?”
그녀의 목이 조금 뒤로 넘어갔다.
이제는 목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힘이 모두 빠져 보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그의 열기에 저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알렉은 루이제의 두 눈을 더욱 선 명하게 응시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진심이었다는 거, 늘 당신에게 잘해 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는 거, 그리고
혹시라도 당신이 날 거부해도…… 언제나 당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
루이제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꼭 그녀에게만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알렉은 알렉시스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과연 그녀가 그를 알아봐 줄까?
알아본다면 당연히 그가 사기꾼이라며 큰 충격을 받을 텐데,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것도 우스웠다.
문득 루이제가 약하게 숨을 토해 냈다.
“……하!”
띠링!

[축하합니다!]
[‘초보 남편의 간지럼’이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용량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책정됩니다!]

“…….”
순간 강한 자극을 받은 듯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짜릿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도 알 수 있었다.
혹시 싫진 않았을까?
이로써 윌스브룩 성이 무너지는 건 모면한 것 같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녀는 분명 스킬의 전율에 휩싸였을 테니까.
띠링!

[축하합니다!]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퀘스트 성공으로 스킬 ‘초보 남편의 간지럼’이 ‘중급 남편의 간지럼’으로 승격됩니다!]


[스킬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이 ‘중급 남편의 뜨거운 손길’로 승격됩니다!]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아내의 욕망을 아는 초보 남편 → 아내를 만족시켜 주는 중급 남편]

[중급 남편 승격 보상으로 레벨이 추가로 스무 단계 상승합니다!]

“…….”
시스템 창의 글자들이 빠르게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레벨을 알리는 창과 여러 가지 스탯들이 빠른 속도로 숫자를 바꾸며 상승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줄곧 루이제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올리기도 힘든 레벨이 갑자기 추가로 스무 단계나 올랐지만, 순식간에 뭐가 지나간 건지 다 확인할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아연한 표정으로 루이제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방금 뭐가…….”
“…….”
“뭘 한 거예요……?”
“…….”
쿵쾅쿵쾅.
루이제의 가슴이 너무도 크게 울려 그녀의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신뢰도는 숨을 죽인 듯이 아까부터 조용했고, 애정도는 스킬 때문인지 계속해서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애정도가 오를 수가 있는 걸까?
루이제가 마른침을 삼키자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안쪽을 매만졌다.
“……!”
그녀는 어딘가에 감전된 듯 몸을 살짝 떨었다.
알렉은 방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하나 더.”
“…….”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저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주십시오.”
“……하!”
루이제가 약간 턱을 젖혔다.
폭죽이 터지듯 그녀의 눈동자에 짧은 섬광이 스쳤다.
그녀의 몸속을 자극한 그의 스킬이 비쳐 보인 것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4 화

* * *

아, 어떡하지?
온몸이 떨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손길 아래에서 나는 마치 영혼이 휘어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이게 뭐야……?’
이런 전율은 처음 느껴 보는데.
지금껏 그와 함께 밤을 보내면서 희열에 몸서리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를 덮치는 그 풍랑의 크기도 집채만 한 파도보다 더 크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더 커다란 전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차원이 다른 감각에 내 숨이 또다시 턱 막혔다.
눈앞에서 하얀 불꽃이 튀어 올랐다.
미친 거야?
이건 좋다는 느낌을 뛰어넘은 것 같아…….
나는 멍하니 이 말도 안 되는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가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한 힘을 쓰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의 체온으로는 느낄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열기 말고도 이런 아찔한 자극까지 쓸 생각을 하다니.
“……아!”
둥글게 누르는 촉감에 내 감각이 다시 예민하게 깨어났다.
전류가 튀어 오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또 내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신음이 터질 수도 없게 온몸이 오싹하게 얼어붙었다.
당혹스러울 만큼 소름이 끼쳤지만, 희한하게도 계속 느껴 보고 싶은 자극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느낌이 있을 수 있어?
이게 내 안에서 벌어지는 희열이 맞을까? 이 정도의 감도가 내 속에 묻혀 있었다고?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쾌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 알렉.”
겨우 내뱉은 내 목소리가 그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그의 뜨거운 손은 식지도 않으며 계속해서 내 몸을 데웠다.
따뜻하고 깊은 수심에 잠긴 것처럼, 내 의식이 녹아내렸다가 또 화들짝 놀라 소스라치기를 반복했다.
‘이건, 이건 도무지 못 버티겠어…….’
내 온몸의 세포와 본능이 그의 자극에 반응하며 몸서리쳤다.
몸을 움직이거나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이전까지의 내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의 이 순간만 내 인생에 남은 것 같았다.
오늘은 뭘 먹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어딜 가고 누굴 만났었지?
기억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마침내 그가 내 안으로 다가왔다.
얼른 더 깊숙해졌으면 하는 열망이 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 손끝이 그를 더 바짝 끌어당기고, 다리는 그의 몸을 휘감았다.
더는 참을 수 없는 내 안의 무언가가 그를 강렬히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어딘가로 떠나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서 지워질 정도로 저 멀리 가 버리는 것이다.
“아, 하아.”
내가 벅찬 숨을 토해 냈다.
무언가가 강하게 밀려오는 느낌과 함께 그의 입술이 내 눈가에 내려오며 숨결을 흩뿌렸다.
“루이제…….”
그의 한숨은 정신이 현란해질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 애타는 느낌에 내 머릿속이 더욱 새하얗게 타올랐다.
나는 누굴까?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지?
“루이제.”
그가 다시 한번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끝까지 장악했다.
“……!”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앞으로 느끼게 될 감각들을 나도 예상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어떤 밤보다 가장 열렬하고 찬란할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서 피어오르던 열기와 전율은 손끝에서만 타오르는 게 아니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마찰이 내 안을 달구기 시작했다.
이런 초월적인 자극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절대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까지 그가 치미는 것 같았다.
마력이 침대에서도 유용할 줄이야……!
“루이제.”
그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눈앞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탓인지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람이 강한 자극을 느끼면 심장이 터져 죽지 않을까?
내 의지를 벗어난 숨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흩날렸다.
미칠 것 같은 자극 속에서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 합니다.”
“…….”
그래.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나 잘 알겠어.
미쳐 버릴 만큼 잘 알 것 같아.
“아, 알렉.”
내가 그의 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끝나 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눈앞이 번쩍거렸다.
오늘따라 그는 힘이 넘쳤고 정성이 가득했다.
심지어 마력까지 쓰면서 나를 만족시키며 환락으로 이끌었다.
이런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
“하아…….”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가 내 안쪽과 위로 쏟아졌다.
내 목덜미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흩어졌다.
그를 안고 있던 내 팔이 스르륵 미끄러져 침대 위로 떨어졌다.
손끝까지 구석구석 다 힘이 풀려 버렸다. 아무것도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축 늘어졌다.
“루이제.”
그가 나를 꼭 감싸 안으며 품에 넣었다. 내 몸이 나부끼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아이가 어미에게 안기듯 완벽한 안온함이 나를 감쌌다.
“알렉.”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리 냈다.
그와 내 숨소리가 거칠게 귓가를 에워쌌다.
심장도 아직 격한 정사의 여운을 느끼며 쿵쾅거렸다.
누구의 심장 소리가 더 큰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깊게 포개더니 조금 떨어졌다.
가느스름한 눈빛이 어딘가 무척 그윽하고 고혹적이었다.
“아프진 않았습니까?”
“…….”
아니.
나는 뭐라고 말할 힘이 없어 대답을 속으로 대신했다.
그가 다 날려 버린 내 의식과 영혼이 이제야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목이.”
그 순간 내가 힘겹게 말했다.
“목이 아프고 마르네요…….”
너무 헐떡이고 소리를 질렀나 봐.
깊숙한 목 안까지 다 말라 버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내 말에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조금 놀란 듯이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사용인들을 부르느니 그가 물을 가져오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내 방에 물병이 있긴 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1 층까지 다녀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는 내 갈증이 무척 걱정된다는 얼굴로 빠르게 옷을 걸치더니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금세 허전함과 적막함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열기는 아직도 내 온몸에 남아 나를 데
우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무거운 머리를 받치며 몸을 일으켰다.
입고 온 옷을 찾아 겉에 걸쳤다.
아득했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후폭풍이 크게 밀려오는 밤은 처음이었다.
아직 내 몸 곳곳에는 그가 자극했던 감각들이 남아 있었다.
살면서 두 번은 못 겪을 것만 같은 기묘하고도 대단한 쾌락이었다.
지금까지 그와의 관계를 모두 무색하게 만들 만큼 굉장하고 충격적이었다.
마른침을 겨우 모아 삼킨 순간, 불쑥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한테 제가 의심스러울 거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맞아.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었지……?
오락가락하고 갈팡질팡했지만, 결국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믿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것만은 확실하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뭔데요?’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진심이었다.는 거, 늘 당신에게 잘해 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는 거, 그리고
혹시라도 당신이 날 거부해도…… 언제나 당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그리고 하나 더.’
‘…….’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저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주십시오.’

“…….”
나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왜 이제야 떠오르는지 모를 그의 말이 기억났다.

‘당신이 전보다 지금의 저를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가슴에 선득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원히 뜨거울 것 같았던 그의 열기가 내 피부에서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대신 서늘한 소름이 살결에 돋아났다.
남편이 내 남편을 질투한다.
“루이제.”
문득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다녀왔는지 조금 달뜬 목소리였다.
물을 가지러 간 지 1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찬물이 좋을지 따뜻한 물이 좋을지 몰라 우선 둘 다 가져왔습니다.”
조금 걱정스럽게 말하며 그가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이 찢어질 것처럼 마르고 아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목이 아프든 말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살며시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내 눈빛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는 사실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역시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안색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완벽하다 못해 놀라웠던 방금 전 그와의 정사를 떠올렸다.
더 이상 그를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내가 내 남편이 아닐 수도 있는 남자와 앞으로 계속해서 밤을 보낼 수는 없는 거니까.
“당신 정말 내 남편 맞아요……?”
“…….”
“아니죠?”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5 화

그와 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꼭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크게 박동했다.
내 물음에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과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저히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이토록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나는 왜 그를 믿어 보려고 했던
걸까?
정말로 그의 입에서 자신이 알렉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까 봐?
정말 그래 버리면 그때야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닥쳐 버려서?
심장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많이 갈라지셨습니다.”
“…….”
“우선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내 근처에 있는 콘솔 위로 물잔이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거리감이 드는 태도였다.
나는 두 개의 물잔을 보다가 다시 그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해요. 정말로 내 남편 알렉이 맞는지.”
“…….”
“기억을 잃었다는 말로는 이제는 날 속일 수 없어요. 당신은 그런 것치고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까보다 더 분명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목에서 피가 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가 주는 걸 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그에게서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말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남편 알렉이 아니라면, 상상만으로도 그 상황이 너무도 암담하고 막막해서.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가 리디트 황자의 위치와 윌스브룩 성으로 향하는 길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미래에 다녀온 거야?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다른 기억을 잃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는 자신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날 속인 것도 이미 한참 전에 스스로 인정했다.

‘저는 반드시 폭군을 물리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가 이 세계에 온 목적인 것 같습니다.’
‘당신을 속인 적도 있죠. 숨기기도 했고요.’

“…….”
차라리 처음부터 그를 믿어 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를 믿었던 결과가 지금 어떤 상황을 초래했는지 생각하니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전 느꼈던 쾌락은 마치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한없이 죄짓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내 스스로를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알렉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뭔가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 또한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죠.”
“……!”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는 불안한 나와는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요……?”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며 힘겹게 물었다.
그가 내 남편 알렉이 아니란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현기증이 나 나는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알렉시스와 제 외모가 너무도 같아서 또 다른 제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당신의 남편이 된 것도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요.”
“……?”
다른 세계?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금세 말을 이었다.
두 눈은 나를 향한 채였다.
“혹시라도 제가 알렉시스의 몸으로 들어온 이유가 있는 건지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저와 알렉시스의 연관성을 잘 모르겠더군요.”
“…….”
“지금으로서는 제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달팽이관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순간 귓속에서 쨍한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입에서 알렉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두려워했던 순간을 이렇게 맞닥뜨리고 나니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내 숨도 멈추고 온 세상이 다 무음의 세계가 된 것처럼 적막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그에게, 왜 나에게……?
이제야 겨우 그와 행복해지는 건가 싶었는데, 그가 알렉이 아니었다니.
지금까지 내가 그와 함께하며 웃고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순간들이 이렇게나 내 마음속에 가득한데.
그런데 그 안에 내 남편은 없었다.
내 사랑은 길을 잘못 알고 있었고, 행복도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가 죽어 버린 게 더 나을 것 같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그럼 내 진짜 남편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는 내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을까?
정말로 알렉은 이 세상에 없는 거야? 그러면 대체 어디로 간 건데?
내 물음에 그가 대답할 듯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윽고 조금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독을 마셨던 그날 죽었습니다. 이 몸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 거고요.”
“…….”
죽었다고?
정말 그날 죽은 거구나.
결국 내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솟구쳐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때일수록 차갑게 이성을 되찾고 싶은데 눈물이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눈앞의 남자가 다른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져 버려서 진짜 내 남편은 얼마나 슬퍼했을까?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몰라줘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죽음 이후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애도도 받지 못했다.
부인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고 희희낙락 즐거워했다.
그가 하늘에서 얼마나 서글퍼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당신이, 그래도 당신이…… 내 남편 알렉시스가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아무리 이상하고 의심스러워도 믿고 싶었다고요.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라면, 내가 정말로…… 그날
남편을 잃은 게 맞는 거잖아요.”
“…….”
“나는 정말로 당신을, 아니 내 남편을 두 번이나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로 당신이 알렉이
아니라고요?”
“…….”
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내 남편은 정말 죽은 건가요? 그럼 지금까지 당신은 왜 내 남편인 척 하면서 함께 있었던 거죠?”
나는 그와 함께 부부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다.
아이만 낳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생전 초면의 여자와 함께 살면서 지켜 줬던 걸까?
그동안 나를 속인 것에 대한 원망이 치미는 한편 의문도 솟구쳤다.
그는 잠깐 침묵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숨기지 않을 듯이 입을 열었다.
“황제를 죽이려면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뭐라고요?”
“처음에는 저도 경황이 없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이 세계가 저에게는 낯선 곳이어서 섣불리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고요.”
“…….”
“그런데 황제를 죽이려면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집도 없는데 여자들뿐인 당신 가족들을 모른 척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요.”
“…….”
그는 덤덤하면서도 진중하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심장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미안해서.
진짜 내 남편을 버려두고 가짜 남편에게 푹 빠져 있던 내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고, 죽은 것도 모자라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눠서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저 남자는 내가 그의 손길에 아찔해하고 쾌락에 잠길 때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방금 전까지도 그에게 파묻혀 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고 허탈했다.
“루이제.”
문득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소스라치듯이 그에게서 조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왜 그는 그가 아닌 건지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그의 죽음을 두 번이나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와 나는 부부로서 단 한 번 행복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나 버렸다.
아니, 이미 반년도 더 전에 그의 생명은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내 결혼과 삶도 사랑도 모두 망해 버리며 끝이 났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 한번 해 보지도 못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해 줬었더라?

‘알렉.’
‘다 괜찮을 거예요. 상심하지 마세요.’

후두둑.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바닥을 빗물처럼 적셨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6 화

* * *

어느덧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 어렴풋한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몇 시쯤 되었을까?
사방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내 방으로 돌아와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천장만 보며 눈을 깜박였다.
눈이 아프고 뻑뻑한 느낌이 들자 그제야 내가 밤새 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울거나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괜찮아질 일이 아니지.

‘지금으로서는 제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독을 마셨던 그날 죽었습니다. 이 몸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 거고요.’

머릿속이 또 깨질 것처럼 조여 왔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버티기 힘겨운데, 지금껏 남편이라고 믿었던 남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는 정말이지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질끈 눈을 감은 나는 힘겹게 침대를 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보나 마나 내 얼굴이 엉망일 것 같아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털 실내화가 보이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맨발을 내린 순간, 불쑥 가짜 알렉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어젯밤 내가 그의 방을 나갈 때 그가 나에게 남기듯이 했던 말이었다.

‘루이제.’
‘당장은 혼자 있고 싶을 거라는 거 압니다. 다만 저에게도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
진정성이 담긴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애써 머리를 흔들며 그 음성을 지워 버렸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언니!”
“……?”
고개를 들어 보니 엘로이가 문을 닫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내가 살짝 미간을 세웠다.
나는 일부러 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엘로이를 등지고 서서 겉옷을 걸쳤다.
“언니! 내가 어젯밤에 몰래 뭘 봤는지 알아? 진짜 들으면 언니도 엄청 놀랄걸! 막 칼이 말을-.”
“나중에 얘기하자, 엘로이.”
“응?”
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별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엘로이의 명랑하고 높은 목소리 때문에 머리가 더 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을 들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내 세계는 끝나 버렸으니까.
“왜 그래? 어디 아파?”
엘로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냥 나가라고 말하려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엘로이에게도 말해 줘야 하는 일이었다.
어젯밤 나는 새벽이 될 때까지 오열을 하다가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알렉이 아닌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앞으로도 함께 있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결코 그와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알렉을 잃었으니 동시에 마이어스 가문과의 인연도 끝이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시가 식구들과 계속 함께 살 만큼 정이 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지금껏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이유는, 오로지 남편 한 명 때문이었다.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우리의 아이들을 낳아 내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
그 외에 내 삶에서 중요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엘로이.”
내가 조금 단호하게 그녀를 부르며 돌아섰다.
엘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깐 여기 좀 앉아.”
내가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듯 찍소리도 내지 않으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어?”
“그래. 좀 있었어.”
“응?”
체념하듯 내뱉은 내 말에 엘로이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지 도통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조금 울먹였다.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
다른 가족들에게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많은 말들이 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으로 입 밖에 소리 내려니 어쩐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내가 입을 뗐다.
“알렉과 나는 이혼할 거야.”
“…….”
엘로이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쩐지 내 가슴에서도 싸하게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쓰러질 듯이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진짜 내 남편이 죽기 전 나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의 그도 지금의 나처럼 모든 걸 버리고 싶었던 걸까?
엘로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입술을 열었다.
“……뭐?”
“…….”
“이혼을 한다고……?”
“…….”
엘로이가 못 믿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녀나 시어머니에게는 느닷없게 들릴 거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이혼할 거야.”
“오라버니랑 싸웠어?”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왜?”
엘로이의 큰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믿기 힘들고 이해가 가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는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처음처럼 내가 이 집안에서 사라지는 것뿐이니까.
내가 엘로이나 시어머니에게 딱히 없어선 안 될 존재도 아니었다.
나는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엘로이를 등지고 섰다.
“지금 여기서 다 너한테 설명할 수는 없어. 언젠가 알게 될 일이라 말하는 거야.”
“오라버니도 언니랑 이혼한대?”
“이미 나한테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알렉이야.”
“말도 안 돼!”
대뜸 엘로이가 큰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요즘에 둘이 사이도 좋았잖아! 언니 죽을 뻔했을 때 오라버니가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언니도 오라버니가 선물한 거 나한테 지겹게 자랑했으면서!”
“…….”
나는 엘로이를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그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뒤에야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너랑 할 얘기 없어. 다 들었으면 이만 나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내 마음 하나 겨우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엘로이는 잠시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더니 생각을 바꾼 것처럼 대뜸 소리 냈다.
“아, 알겠어. 부부 사이에 남들은 모르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갑자기 이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참고로 나는 언니랑 오라버니 이혼하는 거 반대야.”
“…….”
엘로이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선포했다.
그 황당한 모습에 기가 막힐 여유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도 뭐 언니가 정 원한다면 언니의 생각을 지지해 줄게. 어차피 나도 오라버니 같은 남자랑 계속 사는
언니가 더 이상했거든. 지금이야 뭐 많이 변했긴 하지만…….”
횡설수설하던 엘로이가 문득 말을 줄였다.
이제는 정말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언니 만약에 이혼하더라도 나랑은 지금처럼 가족같이 지내는 거지?”
“……?”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내가 엘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젖은 눈동자로 생긋 웃어 보였다.
“이혼을 오라버니랑 하는 거지 나랑은 상관없잖아.”
“…….”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엘로이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 미소가 조금 어색하고 처량하게 보였다.
알렉과 이혼을 하는데 너랑은 계속 가족처럼 지내는 거냐고?
그녀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힘없이 웃었다.
“남편하고 이혼을 하는데 시누이랑 어떻게 계속 가족일 수 있어.”
“…….”
“알렉은 물론이고 마이어스 가문의 그 누구와도 앞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제인이나 제임스 같은
사용인들하고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수는 있겠지. 물론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 온다면.”
“…….”
“이혼 후에 알렉의 가족들까지 만나고 싶진 않아. 너도 마찬가지고. 결혼하기 전처럼 남남으로 돌아가는
거야.”
“…….”
나에게 팔짱을 낀 엘로이의 팔에 힘이 조금 빠졌다.
깊은 충격을 받은 듯이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나는 언니가 좋은데-.”
시누이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내 팔을 빼내 완전히 돌아섰다.
“난 할 말 다 끝났으니까 이만 나가. 나와 알렉이 이혼을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나는 문득 무거워진 이마를 받쳤다.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한참이나 엘로이는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뚝, 뚝…….
엘로이의 눈에서 큼직한 눈물방울이 떨어졌지만 차마 볼 수 없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7 화

* * *

“오늘 여러분들께서 둘러보실 곳들은 북부의 상징인 칼라니쉬 산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산책로는 없지만,
조만간 우리 성주님께서…….”
윌스브룩 성의 응접실 안.
아침 식사와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친 손님들이 저마다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모여 있었다.
발리가 사람들에게 오늘의 일정을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알렉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알렉은 조금 거칠게 얼굴을 쓸어 만졌다.


어젯밤 루이제가 절망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밤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알렉시스가 맞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나았을까?
아니, 가장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자신은 알렉시스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미쳐 버리겠네.’
그는 심각하게 찡그린 얼굴로 이마를 꾹 눌렀다.
루이제는 아침 식사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어디 안 좋기라도 한가?”
문득 그의 곁에 있던 브룩스가 물었다.
알렉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꾸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잠시 위층에 다녀와야겠군. 루이제가 아침도 먹지 않아서 말이야.”
“……호오.”
그의 말에 브룩스의 눈동자가 조금 기묘하게 밝아졌다.
금슬 좋은 부부를 놀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서 다녀오도록 하게. 출발도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으니.”
“…….”
알렉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리가 한창 말하는 와중에 그가 일어서자 사람들이 힐긋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메리엔과 해리엇까지 잠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응접실을 나갔다.
아마도 지금 루이제는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인에게 루이제의 안부라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 레벨이 대폭 올랐지만 지금 그에게는 루이제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애정도와 신뢰도는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주인님!”
막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려 보니 제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나와 계셨네요.”
제인이 웃음기 없는 차분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마님께서 잠깐 뵙자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셔서요.”
“……루이제가?”
“예. 성 뒤쪽에 있는 온실에 계세요.”
“……알겠다.”
낮게 대답한 알렉은 잠시 제인을 응시했다.
루이제의 상태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몸을 돌려 온실로 향했다.
온실은 이번에 새로 구축한 곳이었는데, 리즈 농원에서 임시로 성안에 온실을 만들어 놓고 꽃을 재배하고
있었다.
북부에 왔으니 이제 이곳의 날씨를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연구는 순조로웠고, 그 외에도 북부의 많은 사업들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온실의 문을 여니 온갖 색의 장미들의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었다.
발리의 말로는 그도 장미는 여기서 처음 본다고 했었다.
“……루이제.”
이윽고 그가 낮게 그녀의 이름을 소리 냈다.
루이제의 이름을 입에 담으니 가슴이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를 돌아볼 것처럼 멈칫하더니 아예 완전히 돌아서 등을 졌다.
은빛 머리카락만 온실 밖의 햇살과 쌓인 눈밭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녀는 아예 그를 보려 하지도 않는 걸까?
알렉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살 짝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식사는 하신 겁니까?”
“…….”
루이제에게서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잠시 흐른 뒤에야 그녀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단단하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
“당신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
“엘로이나 어머님께 어떻게 말할지는 당신이 해야 할 몫이니 난 관여하지 않겠어요. 이대로 그냥 알렉으로
살든 정체를 밝히든 당신 마음대로 해요.”
“…….”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목소리에 그녀가 이미 마음을 다 정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불현듯 루이제가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밝은 온실 아래 드러난 그녀의 신비로운 모습에 잠시 그의 시야가 어릿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북부의 추위보다 차갑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황제를 죽이는 게 목표라고 했죠? 그러니 어디 잘해 봐요. 나는…… 이제 이 결혼 생활을 끝낼 거예요.”
“……예”
그가 조금 당혹스럽게 되물었다.
결혼 생활을 끝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비록 그가 진짜 알렉시스는 아니지만, 그녀와 이 집안을 둘러싼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그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황제가 그녀를 언제 노릴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한테는 당신과 내가 이혼하는 거라고 말해 주세요.”
“지금 무슨 말씀을-.”
“내가 당신과 이혼하고 당신의 곁을, 그리고 이 성을 떠나겠다는 말이에요.”
“…….”
문득 주변의 희미한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과연 루이제가 앞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여러 상황을 그려 봤지만,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조금 놀란 듯이 되물었다.
“어딜 떠나신다고요?”
“…….”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루이제는 긍정하듯이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은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
“지금 당신이 여길 벗어나는 건 위험합니다.”
“…….”
“저를 보는 게 싫으시다면 일부러 마주칠 필요 없습니다. 상황이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계십시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루이제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문득 루이제가 조금 울컥하듯 입을 열었다.
“위험이요?”
“…….”
“내가 지금 겁날 게 있어 보이나요?”
“…….”
“난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잃어버렸어요. 그동안 내가 행복이고 기적이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게 다 거짓이었다고요.”
“…….”
“이런 내가 그깟 위험 같은 거 무서워하면서 당신 보호를 계속 받을 것 같나요?”
“…….”
“하나도 필요 없어요. 난 지금 겁나기는커녕 뭐든 다 부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북받쳐 오르듯 루이제의 맑은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알렉은 더 이상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루이제에게는 이 정도로 알렉시스가 소중했던 걸까?
그녀가 알렉시스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그도 느끼고 있었지만, 다 버리고 떠나려 할 만큼 그녀의
가슴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당장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워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는 듯했다.
알렉은 일단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지금 루이제를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당장 떠날 수는 없을 테니 당분간 여기서 필요한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엘로이와 어머님께는 제가 설명드리죠.”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제야 루이제가 대답했다.
건조하고 감정 없는 말투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차가운 분노조차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에게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가 온실을 나갈 듯이 몇 걸음 움직였다.
그를 지나치려는 순간 문득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 대체 어디를 말하는 거예요?”
루이제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알렉은 잠시 입을 열지 못한 채 시간이 멈춘 듯 서 있었다.
이 순간이 정말로 그와 그녀의 마지막 시간 같았다.
차라리 지금 따져 보기라도 해 볼까?
지금까지 당신을 지키고 행복하게 한 건 그라고, 진짜 알렉시스가 당신을 위해서 한 건 뭐가 있냐고.
음독자살?
그렇게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루이제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알렉은 이 순간 그의 속에서 터져 나오는 다른 말을 꺼냈다. 깊은 한숨과 함께였다.
“사실 저는 당신 앞에 원래의 제 모습으로 서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게 알렉시스가 아닌 진짜
나이길 바랐죠.”
“…….”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제가 진짜 알렉시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과 다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간절히.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8 화


* *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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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온실에서 나오는 길.


어김없이 시스템 창이 울리기 시작했으나 알렉은 헛웃음만 나왔다.
중급 남편?
그보고 중급 남편이라고?
‘이혼당하게 생겼는데 중급 남편은 무슨…….’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은 알렉은 얼굴을 쓸어 만졌다.
루이제는 한참 전에 온실을 먼저 나갔다.
차라리 진짜 알렉시스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당신은 절대 그가 될 수 없어요. 내 남편은 당신처럼 누굴 속이는 사람은 전혀 아니거든.’

“…….”
아무래도 그에게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이미 그는 루이제를 위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걷고 있자니 어쩐지 방금 전 나올 때와는 느낌이 딴판이었다.
이 커다란 성 안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허망하고 허탈했다.
어떤 일에도 힘을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응접실로 향하려던 순간, 문득 알렉은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그를 발견한 엘로이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경멸하듯 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도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발을 한 걸음 내디딘 순간이었다.
“꺼져.”
“…….”
엘로이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분노를 담아 내뱉었다.
마침 응접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드넓고 높은 성의 1 층 로비가 금세 꽉 차는 듯했다.
엘로이는 누가 봐도 화난 사람처럼 쿵쿵 걸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엘로이가 성질을 부린 적은 많았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화가 나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와 루이제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웃으면서 무심코 로비로 나오던 사람들이 그와 엘로이를 발견하고는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브룩스와 발리도 그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걸음이 도미노처럼 차츰 멈춰 서던 순간, 엘로이가 대뜸 그를 향해 돌아섰다.
“대체 언니한테 왜 이혼하자고 한 거야?”
“…….”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도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라고? 방금 엘로이가 뭐라고 말한 거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사람들의 생각이 표정에서 훤히 드러났다.
알렉은 이 짧은 순간이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루이제가 엘로이에게 그가 먼저 이혼을 하자고 했다고 말한 걸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렉시스가 죽기 전에 그녀에게 이혼을 통보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엘로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금세 다시 소리쳤다.
“오라버니한테 언니같이 과분한 여자가 어딨어! 언니가 정말로 이혼하고 떠나 버리면 나 오라버니 평생
용서 안 할 거야!”
흑!
엘로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서더니 밖으로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다른 것들은 모두 정적에 휩싸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도 숨을 멈췄고, 다른 사람들도 찍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설마 루이제가 벌써 엘로이에게까지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줄이야.
성을 떠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짚자 귀족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쏟아졌다.
“이게 대체 무슨…….”
“방금 엘로이 양이 뭐라고 한 거죠?”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이혼을 한다고요?”
“말도 안 돼…….”
그사이 놀란 브룩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알렉시스! 자네 대체 무슨 일인가? 이혼이라니!”
“…….”
“어쩌자고 그런 소릴 한 거야!”
브룩스의 타박에 알렉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해리엇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 *

북부에 다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턱에 걸터앉아 구름이 달을 가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지금쯤이면 성 안의 사람들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은 칼라니쉬 산에 다녀온 탓에 어제보다 훨씬 더 힘들어했다.
망원경으로 백곰들을 생전 처음 구경한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도 그들은 내가 없어도 놀라운 경험을 많이 할 것이고, 북부의 발전도 순조로울 것이다.
이미 모든 준비가 완벽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죽 드레스 차림이던 나는 겉에 털 망토를 걸쳤다.
딱히 챙겨야 할 짐도 없었다.
메리엔에게 남길 쪽지만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메리엔.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지만, 남은 일정을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메리엔이


북부에서 정말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가득 담아, 루이제.]

쪽지를 다시 접은 나는 문득 지하에 있는 리디트 황자가 떠올랐다.


엘로이도 관광에 따라오지 않고 하루 종일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한시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의 내 착각과 오해와 실수와 거짓 행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나는 이를 악물 듯 방에서 나왔다.
3 층으로 가 메리엔의 방문 아래로 쪽지를 밀어 넣은 후 성의 다른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 해리엇과 파란 피 기사단이 묵고 있었다.
어둡고 긴 회랑을 지나자 이윽고 방문 여러 개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기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보초도 서지 않고 잠을 잤던 걸까?
해리엇이 어느 방에 있는지 몰라 살짝 멈칫한 나는 이내 아무 방이나 열어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방 안의 풍경에 잠시 멈칫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혹스러움을 떨쳐 낸 나는 이내 다른 방도 열어 보았다.
그러나 다섯 개도 넘는 방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기사들이 다, 어디로 간 거지……?’
오늘 수도로 떠날 거라는 말은 없었는데.
의아해하던 순간 불현듯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북부의 차가운 기운과는 전혀 다른 소름이 내 몸을 에워쌌다.
살짝 돌아서자 내 눈에 보인 건 어둠 속의 금발 기사 한 명이었다.
“부인?”
“……해리엇.”
“…….”
“네 기사들은 다 어디 갔어?”
“여긴 왜 오셨습니까?”
해리엇이 약간의 의문을 담아 무감정하게 나를 응시했다.
잠시 그 눈을 마주 보던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체념하듯 소리 냈다.
“설마 나 따라다니고 있었니?”
“…….”
“그래.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넌 언제 수도로 돌아갈 거야?”
내 물음에 해리엇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금세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나랑 가면 되겠네.”
“……예?”
해리엇의 반응에 나는 약간 씁쓸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나 황궁으로 납치해 가려고 북부까지 온 거 아니야?”
“…….”
“우리가 바보는 아니거든.”
“…….”
내 눈빛은 조금 더 날카로워졌고, 해리엇의 정적은 조금 더 길어졌다.
나는 해리엇을 향해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약간 위협적인 눈으로 놈을 올려다보았다.
“네 기사들이 지금 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들 해칠 생각은 집어치워.”
“…….”
“내 발로 조용히 따라가 줄 테니까.”
나는 살짝 짓씹듯이 말을 마쳤다.
아침에 엘로이가 해리엇의 검이 말을 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태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몰랐던 사이에 해리엇이 전보다 강해진 모양이었다.
설마 전설의 성검이 눈이라도 뜬 걸까?
어찌 되었든 그 정도면 알렉을 막기에 충분할지도 몰랐다.
해리엇은 내 말에 어느 것도 부정하지 못했고, 나는 한 걸음 멀어지며 다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만 나와 알렉은 정말로 이혼할 거야. 그런데 문제가 있어. 알렉이 날 쉽게
보내 주지 않을 것 같거든.”
“…….”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과 헤어질 거고. 다신 알렉과 만나고 싶지 않고 북부도 지긋지긋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나를 북부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도까지 데려다줄 사람은 해리엇뿐이었다.
해리엇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소리 냈다.
“여기서 나가면 황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
“황궁으로 가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거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 날 방해하지만 마.
어차피 황궁에 가게 되면 감금이나 다름 없이 지내게 될 텐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해리엇을 향해 있던 내 눈동자가 무정하게 빛났다.
북부를 떠난다고 해서 정말로 황궁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나는 해리엇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9 화


* * *

북부의 깊고 차가운 밤길을 말 몇 마리가 빠르게 달렸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건지, 나는 것처럼 몸이 무척 가벼워 보이는 백마들이었다.
알렉은 성의 첨탑 위에서 그 모습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해리엇의 말을 중심으로 사방에 다른 기사들이 몸을 숨기듯 은밀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출중한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밤이 깊을 무렵부터 해리엇의 기사들은 윌스브룩 성과 그 주변에 잠복한 채 루이제를 납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루이제가 먼저 해리엇을 찾아간 탓에 기사들은 어려움 없이 그녀와 함께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설마 루이제가 야반도주까지 실행할 줄이야.
‘스킬. 신속.’
알렉은 그들과 조금 더 가까운 거리로 이동했다.
루이제는 해리엇과 같은 말에 탄 채 그의 옷자락을 단단히 붙잡았다.
“다시 말하지만 억지로 날 바로 황궁으로 데려갔다가는 폐하께서 내 시체를 마주하게 될 거야.”
“…….”
“대답해.”
“……예.”
루이제의 단호한 말에 해리엇이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그제야 루이제는 조금 마음을 놓았지만, 경계를 그칠 수는 없었다.
윌스브룩 성과 이어진 길을 벗어난 지는 한참이 되었다.
불쑥 해리엇이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엘로이가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요.”
“……?”
갑작스레 들린 말에 루이제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해리엇이 먼저 엘로이에 대해 묻다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이윽고 루이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옅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삐칠 일이 있으면 늘 그러는 애야. 어차피 배고프면-.”
히이잉!
그때 갑자기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해리엇이 말을 급하게 멈춘 탓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존재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알렉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꼭 가셔야겠습니까?”
“…….”
그제야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루이제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말에서 뛰어내리듯이 내려왔다.
알렉은 해리엇과 기사들을 차례로 살펴보다가 어느새 그와 마주 선 루이제를 응시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비켜요.”
“해리엇이 당신을 황궁으로 데려갈 텐데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거길 스스로 끌려가겠단 겁니까?”
“…….”
알렉이 놀란 듯이 되물었다.
루이제는 딱히 대답하지 않으며 그를 조금 강렬한 눈빛으로 주시하기만 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은 알겠지만, 해리엇은 그녀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황궁으로 끌려갈 게 뻔한데 해리엇과 동행이라니.
“제가 싫으신 거 이해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무모하게 구는 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날 방해하죠? 이건 내 선택이에요.”
“당신이 죽게 되어도요?”
“내가 왜 죽는다는 거예요? 말해 봐, 해리엇. 날 죽이려고 했니? 폐하께서 내가 죽길 원해?”
“……그건 아닙니다.”
대뜸 이름이 불린 해리엇은 순간 조금 뜨끔했지만 이내 사실대로 대답했다.
오히려 자작 부인이 다치기라도 하면 황제가 그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혼한다는 자작 부부의 다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숨이 막혔다.
원래 부부 싸움이 이렇게나 살벌한 걸까?
해리엇의 뒤쪽에 있는 다른 십 대의 또래 기사들도 괜스레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시스는 어떻게 이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날 수 있었던 걸까.
해리엇이 의아해하는 사이 루이제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소리 냈다.
“비켜요. 당신은 더 이상 나한테 관여할 자격 없어요.”
“…….”
정말로 그를 피해 황궁에 가겠다는 건가?
알렉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하는 일이 생겼다 하지만 루이제가 이렇게나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황궁은 절대 안 될 곳이었다.
그곳에는 그녀를 탐내는 이가 있었다.
차라리 해리엇과 기사들을 모두 저지하고 루이제를 다시 성으로 데려가야 할까?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루이제에게 더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알렉은 조금 뒤쪽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지금 제가 비켜서도 당신을 완전히 보내 드리는 건 아닙니다.”
“…….”
“정말로 황궁에 가신다면 그 즉시 쳐들어가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조금 더 분명한 빛을 내며 짙어졌다.
이제야 황제를 처리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녀가 그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대신 황궁으로 가는 건 잠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황제와 황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야 말지.
그건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알렉과 루이제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치열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돌아서더니 다시 해리엇의 말 위로 올랐다.
.
.
.
히이잉!
해리엇과 기사들의 말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은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쏜살같이 암산 위로 이동했다.
해리엇의 말은 금세 저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보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을 그가 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일방적인 마음이었으니 그녀에게는 원하지 않는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니 스스로가 너무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다만 악센을 무너뜨리는 건 루이제도 잘 알고 있는 그의 목표였다.
이제 그는 애정도를 얻을 수 없으니 레벨을 더 올릴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 악센의 레벨과 큰 격차가 있었지만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쩌저적.
어디선가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잠들어 있는 모든 것들을 깨울 정도로 크고 섬뜩하게 갈라지는 소리였다.
알렉은 이 소리가 어쩐지 익숙하다
는 생각을 하며 그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번개와 비슷한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리며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온 사방이 다 밝아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아니, 눈부시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차 없이 번쩍거렸다.
그와 동시에 카나크의 여러 집에서도 산발적으로 불이 켜지는 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막까지 찢을 듯한 굉음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도 깨어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윌스브룩 성의 여러 창문에도 불이 켜졌다.
알렉은 온 북부의 사람들이 잠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다가 다시 하늘 높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 몇 시간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설마.
설마 지금 그 일이 북부에 일어나려는 걸까?
책 속에서 보았던 북부의 전멸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했다.
퀴에에엥!
불쑥 장막을 찢듯 게이트를 열어젖히며 마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한 마리는 금세 십여 마리가 되었고, 십여 마리는 수십 마리로 늘어나 허공에서 추락하듯 내려앉았다.
그 충격에 칼라니쉬 산에 두껍게 쌓여 있던 눈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백곰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하늘 높은 곳까지 메아리쳤다.
“……!”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집과 성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의아함과 두려움을 담아 입을 틀어막았다.
저 멀리서 떨어지는 게 대체 뭘까?
얼어붙은 듯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 목격하는 광경에 마치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선이 하나씩 끊어진 것 같았다.
기어코 북부를 전멸시키려는 거구나.
해리엇이 루이제를 데리고 가자마자 북부를 버리다니.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의 짓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게이트는 그의 전생에서 지겹게도 많이 보았지만, 지금처럼 열리자마자 쏟아지듯이 마물들이 튀어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띠링!

[퀘스트 발생!]
[~마물이 등장했습니다! 마물들을 모두 처치하고 북부의 사람들을 구해 주세-.]

알렉은 시스템 창을 강제로 종료한 후 금세 칼라니쉬 산까지 이동했다.


백곰들이 시커먼 마물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중급 남편의 간지럼.’
그의 스킬이 찌지직 번개처럼 내리치며 수십 마리의 마물들을 정확히 공격했다.
동시에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마물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백곰들은 날아오를 듯이 마물들에게 주먹을 날리려다가 어리둥절하게 두리번거렸다.
알렉은 백곰들을 뒤로한 채 다시 쏜살같이 윌스브룩 성으로 이동했다.
그의 등장에 바람인지 빛인지 모를 여파가 일어나며 성 밖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와 함께 멈춘 건 뜻밖에도 알렉이었다.
“영주님?”
“지금 대체 어떻게…….”
설마 날아오기라도 한 걸까?
말도 되지 않는 상상에 사람들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알렉이 눈으로 발리를 찾으며 걷기 시작했다.
메리엔과 브룩스는 물론이고 여러 귀족들과 사용인들도 성 앞에 나와 있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저마다 불안하고 의아하게 일렁였다.
이윽고 알렉의 눈이 발리와 마주쳤다.
혹시 모르니 사람들을 조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발리.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예?”
“성 밖으로 아무도 나오지 말도록.”
“……영주님!”
알렉은 더 들을 새도 없이 다시 신속 스킬을 썼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경악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윌스브룩 성주의 초월적인 능력이 처음으로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0 화

* * *

“뭐지,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어렴풋하게 들린 천둥소리에 내가 살짝 뒤쪽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번개 같은 빛이 하늘을 가르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북부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칼라니쉬 산만큼 아득하게 먼 하늘이었다.
해리엇은 계속해서 말을 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벼락이라도 친 것 같습니다.”
“…….”
그래. 그런 것 같네.
대답할 힘도 없어 속으로만 중얼거린 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윌스브룩 성에서 꽤 많이 멀어진 상태였다.
설마 그가 날 말리러 오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는 내가 북부를 떠난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쫓아왔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나를 그냥 보내 줘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와 해리엇이 싸움이라도 벌였다면 정말이지 너무 피곤했을 테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있다가 눈을 떴을 때 바로 수도에 도착하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나는 알렉과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장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쉴 새 없이 달리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한 여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신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곳이었다.
“브, 브렌트 공작 부인? 여기까지 어떻게, 아니,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하더라…….”
나를 발견한 여관 주인이 무척이나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알렉이 음독자살을 시도했던 바로 그 여관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빈털터리였는데 말이야…….’
앞으로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삼 그때의 일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관 주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예? 제 이름이요?”
여관 주인이 놀라 되묻자 내가 한 번 끄덕였다.
그녀가 금세 대꾸했다.
“저, 저는 마리라고 합니다만…….”
“그래, 마리.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 당신이 그때 우리 가족들을 받아 줘서 아직도 많이 고마워하고
있었거든.”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마쳤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예?”
우리를 받아 준 건 맞지만 그녀는 얼른 쫓아내고 싶어 했다. 심지어 부엌을 빌리는 돈까지 받았었지.
그러나 나는 그런 건 개의치 않으며 여관 주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품에 갖고 있던 작은 가방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관 주인은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조금 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갈 곳 없었던 우리 가족들을 받아 줘서 정말 고마워. 이건 그때의 보답인데, 이 정도면 여관을 새로
짓고도 남을 거야.”
“예에? 갑자기 이게 무슨…….”
여관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내 가방을 받지 않으려는 듯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방 안에 든 금덩이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관 주인에게 더 많은 돈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의 돈은 내 드레스 몇 벌 값밖에 되지 않아. 그러니 어려워하지 말고 받아 주겠어?
당신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거든.”
“부인…….”
“대신 그때 내 남편이 묵었던 방을 나한테 반나절만이라도 빌려줄 수 있을까?”
내가 한층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방 외에 다른 곳은 없었다.
내 말에 여관 주인은 약간 놀란 듯하더니 이내 안타까워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방에는 손님이-. 아니,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깨끗하게 준비를 해 드리지요. 머물고
싶으신 만큼 지내셔도 됩니다.”
여관 주인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제야 나도 마음을 놓으며 옅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고마워.”
여관 주인은 직원을 찾으며 서둘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미소를 띠고 있던 내 안색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쉽게도 나는 이곳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할 것이다.
해리엇과 기사들 몇 명이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감시하듯 서 있었다.
.
.
.
이윽고 다시 들어와 본 여관의 방 안은 그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오래된 목제 가구의 냄새가 밴 특유의 공기, 낡았지만 깔끔하고 아늑한 내부.
내 기억 속 그날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조금 숨이 막혔다.
“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침대에 앉아 시트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여기서 내 남편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실감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내 뼛속까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파고들었다.
믿어야 하는 사실이지만 믿기지 않았다.
그가 날 버릴 리가 없었으니까.

‘미, 미안합니다. 보, 본국으로 도, 돌아가세요.’


‘내, 내가 다, 다음 생에, 다, 다시, 태어나면…… 지, 지금보다 훠, 훨씬 더…… 와, 완벽하게 사,
사랑해 주겠습니다.’

“말도 안 돼…….”
어김없이 떠오른 그의 마지막 말들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로 알렉이 나를 버리고 가 버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설마 그가 그 암담한 상황에 날 버리고 홀로 가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결코 부인을 버릴 성품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실망을 해야 하는 건지, 화가 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눕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나를 버리고 그는 혼자 떠나 버렸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가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그는 날 버렸다.
홀로 남겨질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떠나 버렸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책임감 없이 그럴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래.
그저 그와 내 사이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겠지.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부부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는 단지 나와 함께해야 한다고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그리 애틋하거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조금 차오르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는 그가 힘들 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는 내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정말 법적인 부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를 원망할 자격이 없었고, 그는 나를 책임지거나 지켜야 할 의무도 없었다.
내 마음과 그의 마음이 이렇게나 달랐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또다시 온몸이 무력해지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 다시 그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몸은 남아 있었지만 그게 그는 아니었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대체 왜 그랬어?
나는 당신이 이렇게나 많이 보고 싶은데…….
집도 돈도 작위도 아무것도 없어도 난 그냥 당신만 있어도 괜찮았는데…….
‘하하…….’
허탈한 웃음이 눈물과 함께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그가 그립고 보고 싶은 걸까?
설마 내가 여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지.
그냥 정이 든 걸지도 몰라…….
내 남편이었잖아…….
내 유일한 가족…….
어떻게 흐려지는지도 모르게 의식이 차츰 사라졌다.
말을 타고 북부에서 이곳까지 바로 온 탓에 너무도 피로한 탓인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누워 있던 침대에 누우니 꼭 그의 팔을 베고 누운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이렇게 그의 흔적에 아무런 의식 없이 영원히 파묻혀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렉.’

문득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고작 두세 살 정도 어렸을 뿐인데 그때의 나는 훨씬 밝고 생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날도 알렉은 수십 번 내 이름을 소리 내며 발음을 연습했다.

‘루, 루이…….’
‘루, 루이, 루…….’
‘하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 만졌다.


한 번에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해 스스로를 너무나 한심해했다.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내 이름을 연습할 생각인 걸까?
나는 몇 달이나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식은땀을 흘리며 몇 달이나 내 이름을 연습하는 걸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겠거니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애써 밝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걸었다.

‘알렉. 혹시 당신한테도 어릴 때부터 불리던 애칭이 있나요?’


‘예?’
‘그래도 우리가 부부 사이인데 그 정도는 알고 싶어서요.’
내가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는 조금 긴장한 듯이 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한 번 더 재촉을 하고 나서야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저, 저는 애, 애칭 같은 건 어, 없었,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조금 아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정말로 그의 어릴 적 애칭이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내 목적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의 고통을 없애 주는 거였으니까.
나는 그의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으며 따스하게 그를 응시했다.

‘사실 난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루이제라고 불린 적은 거의 없어요.’


‘……예?’
‘그러니 여기서도 나를 그 애칭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네요.’
‘무, 무슨-.’
‘루, 내 애칭은 ‘루’랍니다. 그러니 당신도 앞으로 나를 ‘루’라고 불러 줄래요?’
‘…….’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1 화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그가 괴롭게 내 이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지?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나는 루이제라고 불리는 것보다 루를 더 좋아해요. 나와 다르게 발음이 귀엽잖아요. 이제 결혼한 지 1


년이 다 되었으니 당신도 날 애칭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그, 그러셨군요.’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그가 힘겹게 내 이름을 연습하지는 않을 것 같아 속이 다시 원했다.
‘루’라니, 급조한 애칭이라 그런지 유치한 데다가 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부디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마침내 그다음 날.
그는 정말로 내 이름을 연습하지 않았다.
내 계획이 통한 걸까?
더 이상 그가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으나, 뜻밖에도 며칠 후.

‘루, 루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각하.’
‘루, 루, 하아…….’
‘당분간 쉬는 건 어떠십니까? 꼭 공작 부인의 이름만 똑바로 부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나, 나는, 부, 부인의 이, 이름 하나는…… 제, 제대로 부, 불러 주고 싶다.’
‘……각하.’
‘그, 그거라도, 자, 잘해 주고 싶으니까…….’
‘…….’

그는 힘겨운 안색으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치료사는 말문이 막혔는지 말을 잇지 못했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왜?
내가 ‘루’라는 한 음절의 쉬운 애칭까지 알려 줬는데 왜 계속해서 내 이름에 매달리는 거지?
나는 애칭이 더 좋다고, 루라고 불러 달라고까지 말했는데…….
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응접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깜짝 놀란 알렉과 치료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루, 루이제.’
‘마님!’
‘대체 왜 또 내 이름을 연습하는 거예요? 내가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
‘나는 당신한테 루이제라는 이름보다 루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싶다고요.’
‘…….’

내 원망에 치료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알렉도 당혹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 가망 없는 노력을 관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이름을 특별하게 여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정말로 누군 가에게는 무척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 세상에 누가 또 저렇게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싶어 할까 싶은 마음에…….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그는 한참이나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머리를 숙였다.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낼 것처럼 망설이더니 힘겹게 소리 내기 시작했다.

‘제, 제가 알아보니…… 루, 루이제는…… 루, 루라는 애칭이, 어, 없었습니다.’


‘……?’

어떻게 알았지?
손끝으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루, 루이제의 보, 본국에 사, 사람을 보, 보냈습니다.’
‘……그걸 확인할 생각을 하다니 당신 정말 대단하네요.’

왜 내 말을 믿지 않은 거지?
순진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잖아……?
나는 그가 너무도 야속하고 아쉬웠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이 갈 텐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안 되는 거야?
내 말이면 다 들어줄 것처럼 하더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분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가 나를 내 가짜 애칭으로 불렀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썩 좋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 거짓말했어요. 당신이 매일 너무 힘들어 보였거든요. 내 이름을 한 글자로 바꾸면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 그건 지, 진짜 이름이-.’
‘그게 중요한가요? 그냥 나는 당신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냥 힘없는 인사를 남기고 응접실을 나와 버렸다.


그때를 생각하니 또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다시 보고 싶다.
모자라 보여도 순수하고 귀여웠는데.
서툴러도 나를 배려해 주는 게 느껴졌는데…….
내 이름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던 그의 목소리도 다시 듣고 싶고, 날 여러 번 부르다가 땀까지 맺히던
그 간절한 모습도 다시 보고 싶었다.
“알렉.”
나는 이불을 살짝 움켜쥐고는 그를 부르듯이 작게 소리를 내어 보았다.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렉.”
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러 보았다.
여기서 더 크게 불러 봐야 그에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알렉!
차라리 크게 외쳐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그를 부를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두고 가 버린 사람이었다.
한때 부부였지만, 그와 나는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온 세상이 다 들리게 부른다고 해서 그가 다시 나에게 와 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턱 끝까지 치미는 그의 이름을 꾹 삼켜 버렸다.
우리의 인연이 그다지 깊지 않았으니 또다시 만나는 건 결코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말고, 사랑하는 부인과 귀여운 아이들도 낳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이번 생은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각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또 다음이 있을까?
“……흐윽.”
나는 결국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이 들썩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살아갈 희망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내 안에 못 이룬 사랑과 외로움이 흘러넘칠 만큼 차올랐다.

* * *

한 번에 조금씩만 마셔야 한다는 수면제 한 통을 다 마셔 버렸다.


다시 깨어나지 못할 정도의 양이었다. 나는 이대로 내 의식이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차피 깨어나 봐야 끔찍한 황제에게 끌려가거나 아니면 가짜 알렉이 날 데리러 올 것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 내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남편의 흔적이 남은 곳에서 나도 편하게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과다 복용한 탓인지 내 의식이 끊기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득 그 마지막 순간을 비집고 어떤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루이제.’
‘이제야 내가 그동안 원했던 게 뭐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루이제.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
그 고백과 함께였던 무수하고도 황홀한 불꽃.
차라리 그가 정말로 내 남편 알렉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생각은 그저 이것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내 스스로 허용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자신의 원래 모습이 내 남편과 똑같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건 또 어떻게 믿지. 그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이윽고 나는 쉽게 깨지 않을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을 살아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나는 또 눈을 뜰 자격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
.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보니 온 사방이 어두웠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떠 봐도 새까만 어둠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두리번거리던 나는 작게 소리를 내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정말로 내가 죽게 된 걸까?
사람이 죽으면 그냥 그렇게 촛불 꺼지듯 의식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내가 나라는
자각이 있다니.
조금 이상했지만 내가 정말로 죽은 거라면 다행이었다.
다시 깨어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의식이 있으면 그의 불행과 나의 불행을 생각하게 되니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어둠 속을 조금 걸어 보았다.
이래서야 죽은 보람이 없었다.
누군가 나타나진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문득 사방이 천천히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여러 소리가 겹친 소음도 어렴풋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빵빵!
꺄악!
다들 도망치세요!
저, 저게 뭐야? 세상에.
“……?”
점점 선명해지는 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갸웃했다.
묘하게 사람들의 말소리와 소음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의아해하는 사이 주변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밝아졌다.
대낮이었다.
높은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가 시야를 가득 채웠고, 버스와 차들이 질서 없이 도로에 늘어서서 경적을
울렸다.
낯익은 현대의 의복 차림을 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다급히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건지, 내 몸을 훅 통과해 지나갔다.
그 순간 경악한 내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여기는.
여기는 내가 원래 살던 곳이잖아?
설마 죽은 게 아니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야?
더 최악의 상황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생각에 머리가 얼얼했다.
지구가 내 뒤통수로 날아와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귀도 먹먹했다.
‘말도 안 돼…….’
나 홀로 시간이 멎은 듯 서서 숨을 참았다.
하늘에는 뭔지 모를 새까만 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 사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눈앞이 핑 돌자 내 머리가 뒤로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새파란 하늘이 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그렇게 눈이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든든한 팔이 내 등을 받치는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힘이 빠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상대를 확인했다.
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내 눈이 서서히 커지는 순간.
“루, 루이제?”
남자는 더 경악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2 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트러진 흑발, 너무도 맑아 유리알보다 투명해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
누구라도 첫눈에 반해 버릴 이목구비에 갑자기 시력이 수십 배가 좋아진 것처럼 눈앞이 선명해졌다.
남자는 내 남편 알렉의 외모와 똑같았다.
나는 이내 헉 놀라 팔을 휘저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숨을 쉬는 것도 잊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 또한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알렉?”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에 그가 흠칫 떨었다.
“루, 루이제?”
“…….”
“다, 당신이 여, 여긴 어떻게…….”
“……!”
정말?
정말로 저 사람이 알렉이야?
목소리와 더듬는 말투마저 내가 알던 알렉과 똑같았다.
나를 알아보는 저 눈빛 또한 알렉의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장비가 달린 검은색 재킷과 같은 색의 바지.
도저히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현대적인 차림새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나는 다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게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생생한 개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나는 조금 휘청거리며 손끝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가 놀라서 다가왔지만 나는 다른 손을 들어 그를 막아 세웠다.
“괜찮아요. 세상에 이게 뭐람. 이런 꿈을 다 꾸다니…….”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이야.
꿈이 너무 얄궂은 거 아니야?
나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요즘 잠이 너무 안 와서 안 먹던 약을 먹었거든요.”
“……!”
그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단정하게 그를 마주 보고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기억 속 알렉을 다시 만난 것 같아 무언가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알렉. 다신 당신을 못 볼 줄 알았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어차피 내 꿈이니까 당신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상관없겠죠.”
“……예? 우, 우선 루이제, 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조, 좋겠습니다.”
“네?”
그 순간 되물을 틈도 없이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던 주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금세 초록색으로 만연한 숲속의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뭐지? 순간 이동?
이건 가짜 알렉도 갖고 있던 능력 아니었나?
내 기억이 여러 개가 섞여서 이런 꿈을 만들어 낸 걸까?
내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한 걸음 멀어지더니 말했다.
“루이제.”
“…….”
나는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갑작스러운 재회 때문인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리 환상 속이지만 그를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밀려 나올 것 같았다.
그가 확신이 담긴 눈빛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 여긴 루이제의 꿈이, 아, 아닙니다.”
“네?”
내 꿈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요?”
“여긴…….”
그가 입을 열었다가 복잡한 숨결과 함께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곳이 내 꿈이 아닐 수가 있나요? 실은 나 죽으려고 했어요. 당신은 이미 몇 달
전에 죽었고요.”
“예?”
“…….”
“루, 루이제가, 주, 죽으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당신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걸요.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거든요.”
“……!”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듯 그가 사색이 되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죽은 직후부터 그 사람이 들어온 모양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아요?”
“…….”
그는 입술이 조금 벌어진 채 굳어 버렸고, 나는 힘없이 웃었다.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했어요. 당신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줄 알았거든요. 그 탓에 기억이 없다는
말도 믿었고요.”
“…….”
“몇 달이나 난 그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죠. 말투도 바뀌고 희한한 능력도 생겨서 많이 놀랐는데, 갑자기
마력을 각성했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어요. 대체 왜 나만 두고 죽어 버린 거예요?”
“…….”
그의 눈동자가 처참하게 흔들렸다.
나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믿었던 당신마저 날 두고 죽어 버려서……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아서 견디기 어려웠어요.”
“…….”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다신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외롭다는 생각만 해도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걸로 넘기고 싶었지만, 결국 내 마음은 나약했다.
나를 덮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고 했을 만큼.
“루이제.”
문득 그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나도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놀란 듯 얼굴에 핏기가 가신 채였다.
“제, 제가…… 아, 아무런 기억이 어, 없었습니까?”
“……네?”
“이럴 수가…….”
“…….”
그가 자신의 얼굴을 심란하게 쓸어 만졌다.
나는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갑자기 그가 무언가를 결심하기라도 한 듯 한층 선명해진 눈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루이제.”
“…….”
내 양팔까지 단단히 붙잡았다.
“지, 지금부터, 제, 제가 하는 말을, 자, 잘 들어주십시오. 시, 시간이 없어서 오, 오래 있지 모,
못합니다.”
“……뭔데요?”
“그, 그 사람은…….”
“…….”
“다, 당신이 본 그 사람은…… 제, 제가 마, 맞습니다.”
“…….”
그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확고히 말했다.
순간 귀가 고장 난 것처럼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여기가 꿈인지 뭔지도 헷갈리는데 저 말을 믿어야 되는 걸까?
“알렉.”
내가 현기증을 느끼며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더 단단해졌다.
“여, 여긴 당신의 꿈도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죽어서 이, 이곳으로 왔고…… 제, 제가 약속해,
했듯이, 와, 완벽한 남편이 되어 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
짹짹.
어디서 새 몇 마리가 울며 날아가는 소리가 하늘에서 맑게 울렸다.
꿈이라기에는 내리쬐는 햇빛이나 주변 소음이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요?”
“……예.”
그가 머리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그건…… 미, 미래의, 저, 저입니다.”
“…….”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눈을 깜박였다.
그사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아무래도 후, 훗날 사, 사고가 생겨서 제, 제가 기억을 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
설마 이거 현실일까?
아니면 꿈에서나마 내 바람을 이뤄 주려는 건 아닐까?
사실은 그가 그였다고. 그러니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고.
꺄악!
불현듯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의 괴상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이곳이 꿈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렉은 소리가 들린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서두르듯이 말을 꺼냈다.
“루, 루이제. 저, 저는 곧 가, 가야 합니다.”
“……!”
뭐?
간다고?
갑자기 현실감이 솟구치면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거짓말처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질 수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없어요? 당신한테 꼭 해
주고 싶은 말도 있단 말이에요.”
당신은 이미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그저 옆에 살아 있기만 해도 그 자체로 완벽했다고.
왜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아무리 그와 똑같이 잘생기고 훨씬 더 유능한 데다가 날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건 나와 처음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이내 얼굴을 간곡하게 두 눈에 담았다.
“루이제. 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어, 어서 깨어나십시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3 화

* * *

허공에 정체불명의 구멍이 생긴 지 3 시간이 지났다.


하늘이 갈라지는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셀 수 없이 떨어지는 괴물들의 모습에 북부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칼라니쉬 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산에서 거리가 떨어진 학교로 대피했고, 사람들은 두려움을 품은 채
하늘의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무서워, 엄마.”
한 아이가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산 위에서는 번쩍번쩍한 빛이 가로지르며 괴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여인은 아이를 다독이며 브룩스와 야인들을 향해 물었다.
“저분이 정말로 우리 북부의 새 영주님이라고요?”
“그렇다.”
브룩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다들 경황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저 흉측한 구멍과 괴물들은 대체 뭐지?
마음 같아서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수도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두려워할 북부의 많은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록 빌어먹을 황제 밑에서 일하고 있긴 했어도 그는 나라와 백성들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행정
보좌관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괴물과 싸우고 있는 알렉시스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마법사? 초인?’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브룩스는 심장이 떨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다시 내리며 서성였다.
알렉시스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데다가, 마법 같은 힘으로 괴물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언제부터 그런 힘이 있었던 걸까?
설마 여태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아무런 힘이 없는 척을 했던 걸까?
브룩스는 알렉시스를 유독 괴롭히고 모욕했다가 저세상에 간 마르셀을 떠올렸다.
마르셀뿐만 아니라 개리슨과 데미안도 쫄딱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알렉시스가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이제야 복수를 시작하려는 게 아닐까?
브룩스는 손이 덜덜 떨렸다.
‘어쩐지…… 알렉시스가 반역을 한다고 하더니……!’
이제야 브룩스는 그간의 일들이 모두 짜 맞춰지듯 이해가 갔다.
알렉시스는 특별한 힘이 있으니 황제를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황제는 우리의 알렉시스처럼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할 거고, 저런 수백, 수천 마리의 괴물들을
상대로 혼자 싸우지도 못할 테니까!!
“알렉시스!”
브룩스는 감격에 겨운 듯 알렉의 이름을 외치며 창문 난간을 내리쳤다.
“힘내게, 알렉시스!”
“…….”
곁에서 야인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브룩스는 개의치 않았다.
저 멀리서 알렉시스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괴물들을 한 마리씩 밟아 처리하며 드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죽은 괴물들이 칼라니쉬 산 위로 힘없이 추락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섬뜩한 불빛이 알렉시스를 엄호하듯 따라붙고 있었다.
“정말, 정말 대단하군! 알렉시스가 없었다면 여긴 다 저 괴물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을 거야!”
“…….”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브룩스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 순간 야인들 무리에 있던 켈즈가 침착한 모습으로 브룩스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역시 저 영주는 신의 대리인이 분명해.”
“……신의 대리인?”
브룩스가 켈즈를 돌아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야인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키와 체격이 몹시도 컸다.
저 말의 허벅지 같은 팔로 한 대만 맞아도 두개골이 다 깨질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씨는 선한 사람들인지, 야인들은 수도의 귀족들과 함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칼라니쉬 산 바로 밑에서는 킬리울이라는 야인들의 수장이 괴물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켈즈가 먼 하늘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 야인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이다. 언젠가 신의 대리인이 나타나 우리를 지켜 준다면 우리 일족이
영원히 대를 이어 갈 거라는 전설이지.”
“……아.”
“그런데 저 영주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데다가 전설의 영약인 힐리베리까지
찾아왔어. 지금도 저 흉측한 불청객들을 무시무시하게 죽이다니, 대단한 인간이다. 아니, 인간이
아니야.”
“…….”
브룩스는 다시 마른침을 삼키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야인들은 알렉시스의 위대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말로 그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십년감수한 듯한 느낌이 들어 등줄기가 다 서늘했다.
“……알렉시스가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이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그 순간이었다.
알렉시스가 새까만 구멍의 바로 아래에서 괴물 하나를 해치우더니 그 안으로 휙 들어갔다.
“……?!”
브룩스는 화들짝 놀라 창밖으로 머리를 뺐고, 야인들도 놀란 숨을 들이켰다.
저길 왜 들어간 거지!?
“알렉시스-!”
브룩스가 온 힘을 다해 외쳤으나 그 소리가 알렉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 * *

‘이런 제기랄…….’
알렉은 짧은 욕설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물의 수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이 정도면 S 급 게이트도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다.
게이트 안에 있는 보스 몹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알렉은 달려드는 마물들을 하나둘 제거하며 안쪽으로 들어갔으나 그때까지도 게이트는 닫히지 않았다.
이미 마물들이 셀 수 없이 뛰쳐나올 정도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탓이었다.
“기드온.”
그가 사역령을 불러냄과 동시에 기드온이 나타나 집채만 하게 몸을 키웠다.
[크르릉.]
“입구를 막아라.”
[크릉!]
기드온이 금세 포효를 하며 입구로 달려갔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사역령까지 그의 시스템 밖으로 나왔다.
캐스다인은 북부를 지키며 그의 눈이 되어 주고 있었고, 황후였던 올리비아는 이미 루이제를 따라가도록
했다.
같은 여자이니 루이제 몰래 붙여 놓아도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알렉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스 몹을 얼른 잡아 이 흉측한 게이트를 닫아야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물들이 튀어나온 탓에 역대급으로 어마어마한 경험치가 쌓였다.
‘애정도가 없어서 레벨이 오르진 않았지만…….’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루이제는 지금 해리엇의 말에 탄 채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수도로 갈 것 같은데, 설마 스스로 황궁에 갈 리는 없을 테고 어딜 가려는 걸까?
수도에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
어차피 그녀가 원치 않아도 해리엇은 억지로 그녀를 황제에게 데려갈 것이다.
아무래도 올리비아를 통해 기회를 엿보다가 해리엇을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를 치는 건 우선 루이제가 안전해진 이후였다.
그렇게 다시 마물들을 해치우던 순간이었다.
띠링!

[지금 바로 중급 남편 승격 보상 아이템들을 확인하세요!]

오늘 하루 종일 몇 번이나 울렸던 알림.


알렉은 달려드는 마물들을 처리하면서 중급 남편 보상 리스트를 확인했다.

[중급 남편 승격을 축하드립니다! 보상 패키지와 함께 폭군 악센을 무찌르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세요!]

그런데 혹시 시스템은 지금 그가 이혼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곧이어 여러 개의 창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급 남편 승격 패키지(10)]
[[1. 중급 남편의 힐링 포션(3 병) - 비타민 첨가]
[2. 인벤토리 개방(10 칸)]

인벤토리?
알렉은 서둘러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았다. 닫혀 있던 인벤토리가 열 칸이나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낯익은 아이템들이 보였다.
전생에 그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것들 중 열 가지가 들어 있었다.
내심 놀란 알렉은 무기 하나를 꺼냈다.
지금은 스킬을 쓸 때마다 마나를 소비해야 했지만, 이 검은 마나를 소비하지 않으면서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이제 무기들을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수 있으니 훨씬 편할 것이다.
남은 보상들도 빠르게 확인하던 그는 문득 마지막 열 번째 보상에서 멈칫했다.

[10.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1 차)]

“……?”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
꿈에도 예상 못 한 보상 아이템에 그는 이곳이 게이트 안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얼어 버렸다.
알렉시스의 기억이라니.
지금 그에게 알렉시스의 기억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서둘러 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이 생겼다.
불현듯 가슴도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걸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 포션을 쓰면 어떤 기억을 알게 되는 걸까?
퀴에에엑!
대뜸 마물이 달려들어 알렉은 조금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어 마물들을 베었다.
우선 서둘러 보스 몹이 있는 방을 찾기 시작했다.
마물들을 처리하느라 그의 시간과 마나를 적지 않게 소모했다.
보스 몹만 잡는다면 이런 잔챙이들을 계속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4 화

* * *

띠링!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1 차)을 사용 하시겠습니까?]

보스 몹을 찾아 처치한 직후였다.
알렉은 게이트를 빠져나가며 서둘러 시스템의 물음에 승낙했다.
그때까지도 루이제는 해리엇의 말에 탄 채 수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북부 사람들은 하늘만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보스 몹이 꽤 까다롭고 먼 곳에 있었던 탓에 시간이 지체되어 조금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 포션을 쓰는 것도 처음이라 그런지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연 어떤 기억을 알게 될까?
1 차 기억 포션이라니, 그럼 앞으로 몇 개가 더 남아 있는 걸까?
알렉시스와 루이제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알게 되는 건 그리 끌리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기억이니 꼭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1 차)을 사용합니다!]

금세 다시 떠오른 시스템 창과 함께 그의 시야에 어두운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보스 몹을 처리하긴 했으나 게이트가 닫혔다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군가 게이트를 소멸시킬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을 텐데 얼마나 놀라울까?
그가 더 끔찍한 파멸을 몰고 오기 전에 먼저 쳐들어가야 했다.
어느새 사방이 완전히 다 어두워졌다.
그의 육체와 의식이 어둠 속에 파묻히자 시야가 다시 서서히 밝아졌다.
궁전같이 부유한 귀족가의 내부가 펼쳐졌다.
묘하게 익숙한 이 집은 뭘까?
그 순간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 내 애칭은 ‘루’랍니다. 그러니 당신도 앞으로 나를 ‘루’라고 불러 줄래요?’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깜박였다.
루이제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그의 바로 앞에서 루이제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루이제가 그에게 말한 건가?
진짜 알렉시스는 어디 있지?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호화로운 응접실 안에는 루이제와 다른 신사 한 명뿐이었다.
루이제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루이제라고 불리는 것보다 루를 더 좋아해요. 나와 다르게 발음이 귀엽잖아요. 이제 결혼한 지 1


년이 다 되었으니 당신도 날 애칭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그, 그러셨군요.’

불쑥 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흠칫한 그가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응접실 안에 알렉시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알렉은 자신의 의식이 알렉시스의 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이제가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해 줄 거라고 믿을게요.’

“…….”
지금의 루이제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알렉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아는 루이제보다 조금 더 풋풋해 보였다.
알렉시스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이렇게나 아름답고 신비로웠구나…….
생소한 깨달음이 들었다.
그가 봐 왔던 모습보다 더 투명하고 광채가 났다.
루이제는 그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알렉시스의 눈에서 더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주변이 바뀌었다.
이번에 알렉시스는 서재에서 홀로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루이제 이름을 연습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설마 나 때문에 일부러 자기 이름을 한


글자로 알려 준 건가?’

알렉시스는 놀랍고 혼란스러웠다.


그와 그녀는 결혼한 지 1 년이 다 되었지만 애칭으로 서로를 부를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글자로 된 애칭이라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일부러 상냥하게 짓던 미소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곧 사람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고, 며칠 뒤 보고를 받았다.

‘알아보니 공작 부인께서는 애칭이 아예 없으셨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애칭으로 불릴 만큼 가족들과


화목하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 그게 무슨 소, 소리지? 화, 화목하지 않았다니…….’
‘부인의 새어머니가 학대를 많이 하신 듯합니다. 아버지는 거의 방관하셨다고 하고-.’
‘……!’

알렉시스는 큰 충격을 받아 얼어붙었다.


루이제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을 줄이야.
그저 가문의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못해 먼 타국까지 와 결혼을 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학대와 방관이라니.
지금의 루이제를 보면 온실 속 꽃처럼 살아왔다고 해도 모두가 믿을 정도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문득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설마 루이제에게 아픔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대체 이게…….
그리고 역시나 ‘루’라는 애칭은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그를 배려하기 위해 없는 애칭을 지어낸 건 잘 알 것 같았지만, 알렉시스는 루이제를 결코 가짜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루, 루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각하.’
‘루, 루, 하아…….’
‘당분간 쉬는 건 어떠십니까? 꼭 공작 부인의 이름만 똑바로 부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나, 나는, 부, 부인의 이, 이름 하나는…… 제, 제대로 부, 불러 주고 싶다.’
‘……각하.’
‘그, 그거라도, 자, 잘해 주고 싶으니까…….’
그는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감히 욕망을 품을 수도 없고,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을 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알렉시스는 루이제에게 받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는 그가 황제의 부름을 응하지 않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루이제에게 마음을 빼앗기던 순간이었다.

‘다신 그러지 말아요. 정말 왜 그런 거예요? 황제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면서…….’


‘나, 나는 무, 무슨 일을 다, 당해도 괘,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루, 루이, 제, 다, 당신, 은 그,
그런 취급을…….’
‘알렉. 나는 황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써요. 황제가 나한테 팔푼이라고 했다 해서 내가 정말 그런 건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그딴 놈 상관없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요.’
‘…….’
‘지금까지 혼자 참고 있었죠? 앞으로는 나랑 같이 참아요. 황제하고 함께 있을 때만 우린 잠깐 악몽을
꾸고 있는 거예요…….’
‘…….’
‘악몽 같은 건 돌아서면 금방 잊을 수 있는 거잖아요…….’

루이제가 그를 감싸 줄 듯이 손을 뻗었다가 다시 서서히 되돌렸다.


태어나서 그토록 빛나고 부드러우며 따스한 것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알렉시스는 깊은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마치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다가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차마 그를 안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의 품에 온몸과 영혼이 다 안긴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넓고 포근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광대한 포용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그의 친아버지와 어머니조차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루이제는 어떻게 그를 이렇게나 광활하게 감싸 줄
수 있는 걸까.
그녀에게 남편으로서 해 주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데다가, 그 때문에 그녀는 황제에게 모욕을
받기까지 했는데…….
왜 그녀는 그에게 분노하지 않는 걸까?
그날 밤 알렉시스는 어두운 침실에서 홀로 숨죽여 울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포용심에 죽었던 그의 세상이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빌어먹을 병증 같으니라고……!’

그럴수록 알렉시스는 자신의 몸 안에 일렁거리는 병을 고치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했다.


제국의 전설이나 오래된 이야기를 적은 고서를 전국적으로 찾아 빠짐없이 검토했다.
이 터질 것 같은 병증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의 병증에 대한 실마리를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알렉시스는 마력에 대한 서술을 맞닥뜨렸다.

[아직 발휘되지 않은 마력은 몽글몽글한 안개처럼 몸속에 엉켜 있다. 마치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도 같은


이 힘은 오직 수련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으며,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온전히 쓸 수 있는 건 사용자의
의지와 재능에 달려 있다.]

마력?
이건 그의 병증과 설명이 비슷하지 않은가?
‘설마 내가 마력……?’
알렉시스는 그 순간 사실은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게 병이 아닌 마력이라면 수련으로 나아질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대체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이상 마력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세상에 마력 같은 초현실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한 줄기 희망을 보았던 알렉시스는 또다시 절망에 잠겼다.
아무리 해도 그의 몸에서 터질 듯이 일렁이는 병증을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게 병이 아닌 마력이라면, 그가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어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해진다면 그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루이제가 그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할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숨과 함께 걷던 그는 문득 무언가가 루이제의 방문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펼쳐 보니 그녀의 일기장인 것 같아 그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히 한 글자도 더 보지 않으려는 듯 일기장을 닫고는 얼른 루이제의 방문 안쪽에 놓고 나왔다.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스치듯 보았던 짧은 일기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떡볶이 못 먹은 지 20 년도 넘었네. 너무 먹고 싶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5 화

떡볶이?
이게 대체 뭘까?
알렉시스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요리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고국에만 존재하는 음식인 걸까?
그런데 20 년도 넘게 먹지 못했다니, 뭔가 이상했지만 할 수 있다면 그가 요리장들을 시켜서 깜짝 선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도 떡볶이라는 이름의 요리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루이제의 고국에도 존재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알렉시스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해 주고 싶은데, 하필이면 찾을 수 없는 음식이라니.
어디서 그런 걸 먹어 본 건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차마 일기장을 읽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무력감에 잠겼다.
죽기 전에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수나 있을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지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혼자 참고 있었죠? 앞으로는 나랑 같이 참아요.’


‘그래요, 나 거짓말했어요. 당신이 매일 너무 힘들어 보였거든요. 내 이름을 한 글자로 바꾸면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

알렉시스는 가슴이 미어졌다.


루이제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욱신거리고 묵직했다.
그가 결혼을 하자 주변 사람들은 얼마 안 가 부인이 도망을 칠 거라고, 아니면 다른 멀쩡한 남자를 금세
정부로 둘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알렉시스 또한 그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는 남편 노릇을 할 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나 루이제는 결혼한 지 3 년이 되어도 다른 귀부인들처럼 어린 정부를 두기는커녕 다른 남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귀족들이 그를 무시하면 참지 않으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간혹 남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루이제라면 눈빛 한 번으로도 이 나라의 모든 남자들을 다 사로잡고도 남을 텐데…….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원한다면 다른 남자를 만나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이 그녀를 더 실망스럽게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시스는 그동안 마음에만 품고 있었던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3 년이나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 떠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도 좋다는
말이었다.
‘루, 루이제.’
‘네?’
‘우, 우리가 겨, 결혼한 지도, 버, 벌 써 3 년이 되, 되었습니다.’
‘그렇죠. 시간이 참 빠르네요. 아니, 느린 건가요?’
‘…….’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예? 아, 아니…….’

그러나 막상 루이제와 마주하고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거나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상상을 하니 문득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루이제를 만족시켜 주지도 못하면서 감히 그녀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런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루이제가 보던 책을 덮었다.
‘공작 부인의 화끈한 외출’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난 지금이 좋아요, 알렉.’


‘……예?’

알렉시스는 내심 화들짝 놀랐다.


루이제는 꼭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금세 그녀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평생 당신과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이 가문은 나를 더 부유하고 자유 롭게 해 주거든요. 다른 부인들 얘기를 들어 보면 남편들이 얼마나
간섭을 하는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에요.’
‘…….’
‘당신은 내가 늦게까지 밖에서 놀아도 잔소리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도 게으른 여편네
취급하지도 않잖아요.’
‘…….’
‘나한테 땅도 사 주고 저택도 선물로 주고, 얼마 전에는 섬도 줬죠. 당신처럼 모든 부유한 남자가 이런
통 큰 선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주고도 생색을 내는 인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
‘이 여자 저 여자 쉽게 만나고 다니는 남편들도 있고요. 혹시 당신 나말고 다른 여자도 만나 보고
싶나요?’
‘예? 아, 아니, 저, 절대 아닙니다!’

그가 극구 부정하자 루이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요. 그래서 난 지금도 좋아요, 알렉.’


‘…….’
‘아이가 없어서 자유로운 삶도 누군가는 평생 겪어 볼 수 없는 소중한 삶이거든요.’
‘…….’

알렉시스는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설마 루이제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여기고 있을 줄 알았다.
이번에는 그를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대체 루이제에게 얼마나 더 고맙고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루이제가 만족해했던 공작 부인으로서의 삶마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황제의 장난 같은 비웃음 한 번에 그는 모든 작위와 영토, 재산을 잃어 버렸다.


루이제에게 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부유함이 사라졌다.
더 이상 그가 루이제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원래도 한참이나 부족한 남편이었던 그가 무일푼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악센 이 개자식…….’

알렉시스는 자신의 치아를 다 으깨 버릴 것처럼 이를 짓씹었다.


눈물이 철철 흐르고, 주먹을 너무 꽉 움켜쥔 탓에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살면서 절망하고 분노했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참고 삭이느라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지금처럼 온몸이 다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들끓은 적은 없었다.
몸속에서 일렁이는 그의 병증도 뜨겁게 폭주하듯이 들끓었다.
터지든 말든 이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죽이고 싶었다.
원래는 그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체념해 있었지만, 지금은 황제를 죽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 재앙 같은 자식의 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은 뒤에 심장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세상을 다 부수고 싶을 만큼 분노했던 적이 있었을까?
몸속의 병증이 태풍처럼 둥글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황제를 죽일 힘이 있었으면.
황제에게 복수하고 그와 그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있을까?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나마 가졌던 것들도 모두 잃어버렸고, 이런 허름한 여관방조차 겨우 들어오게 되었다.
더 이상 루이제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게 그를 가장 괴롭게 했다.
알렉시스는 완전한 무력감과 패배감을 절감했다.
그 순간이었다.

‘알렉.’

방 안으로 루이제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흠칫 몸이 떨렸으나 차마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화를 낼까?
그를 원망하고 탓하며 이 결혼을 후회할까?
루이제가 그에게 다가올수록 그는 그녀를 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는 가만히 토닥였다.

‘다 괜찮을 거예요. 상심하지 마세요.’


‘……!’

입술이 우물우물 떨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질 것 같아 눈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루이제가 이런 순간에도 그를 따뜻하게 다독여 줄 줄이야.
더 이상 그녀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스며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그의 탓을 하며 화를 내고 원망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 루이제.’
‘…….’
‘미, 미안합니다. 보, 본국으로 도, 돌아가세요. 이, 이혼, 다, 다, 당신은 이, 이혼을 해, 해야
합니다…….’
더 일찍 그녀를 놓아줬어야 했는데.
결국 그와의 결혼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루이제의 본국에는 그녀의 소유로 사 놓은 저택과 땅이 있으니 돌아가도 친가에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그래야 다, 당신이 행복-.’


‘알렉-.’

와락.
알렉시스는 루이제의 말을 끊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지막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감싸 안았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를 안아 보고 싶었다.

‘내, 내가 다, 다음 생에, 다, 다시, 태어나면…… 지, 지금보다 훠, 훨씬 더…… 와, 완벽하게 사,


사랑해 주겠습니다.’

이번 생은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단 하루라도 그녀에게 완벽해 지고 싶은 마음을 루이제는 알까?


그녀가 20 년 넘게 먹지 못했던 요리도 해 주고, 그 외에도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루이제에게 이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다, 당신에게 와, 완벽한 남편이 되, 될 때까지…… 난 다, 다시 태어나고…… 또, 또 다시 태, 태어날


거야…….’
‘…….’
‘그, 그래서 우, 우릴 이렇게 마, 만든 놈에게, 보, 복수하고…… 더, 더 가, 강해져서 다, 당신을
지킬 수 이, 있게…….’

그의 병증이 활활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목이 졸릴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날 밤 알렉시스는 독약을 마셨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에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부디 그때는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못다 한 것 들을 다 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남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의 그러한 열망들은 점점 강해졌다.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루이제의 여러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한다고 한 번쯤은 말해 볼걸.
아니, 그럴 자격이 없지…….
루이제에 대한 생각과 함께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알렉시스는 낯설고도 맑은 알림음과 함께 눈을 떴다.
띠링!

[축하합니다!]
[당신의 마력으로 완벽한 남편 되기 시스템이 완성되었습니다!]
[최종 전투에서 승리해 어서 완벽한 남편이 되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참고: 독약을 마신 직후로 돌아갑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6 화

* * *

‘무, 무슨 시스템? 마, 마력……?’

알렉시스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앞에 떠오른 글자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공에 글자가 빛나는 것도 마법처럼 놀라운 일이었지만, 저게 다 무슨 말일까?
그는 비틀거리듯 한 걸음 물러섰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입술이 벌어지자 그제야 주위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낯선 양식의 인테리어.
블랙과 화이트로 꾸며진 말끔한 실내였다.
벽면에는 무척 사실주의적인 화풍의 초상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상당히 낯익은 얼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알렉시스는 홀린 듯이 그 액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정이안]

액자 밑에는 이름표가 각각 다른 크기로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처음 보는 언어인데, 어떻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이윽고 알렉시스는 극사실주의적인 초상화를 쭉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솜씨를 가진 화가가 다 존재하다니.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 때부터 십 대 초반,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모습까지 살펴보았다.
소년은 크면 클수록 웃음이 근사해졌지만, 그 모습을 보던 알렉시스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그를 그렸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그와 생김새가 너무도 흡사했다.

‘어, 어떻게 이, 이런 일이!’

사색이 된 그가 뒷걸음질을 쳤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거울 속 조각 미남의 모습에 흠칫 굳어 버렸다.
‘이건 완전히 나잖아?’
아니, 그가 아니라 초상화 속 정이안이라는 사람인 걸까?
그는 조심스럽게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흐트러진 짙은 흑발과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매끈한 눈썹과 반듯한 콧날, 그리고 날카로운 턱선과 야릇한 입술까지…….
어딘지 묘하게 국적이 다른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와 외모가 너무나도 흡사했다.

‘하…….’

알렉시스의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도플갱어나 평행 세계도 아니고 이게 다 어떻게 된…….
이건 어쩐지.
그와 외모가 99% 흡사한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알렉시스는 여전히 숨을 쉬는 것을 잊은 채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문득 신문 기사를 여러 개 잘라 붙여 놓은 벽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그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굵직한 글씨의 헤드라인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국내 1 위 기업 유성전자의 후계자 정이안, 헌터 각성! 마나 폭주로 함께 있던 정유신 회장 및 가족들


모두 사망, 충격!]
[고아가 된 17 세 최연소 회장 정이안, 해외파 CEO 까를로스 가르델에게 유성전자의 경영권 넘겨. 슬픔
딛고 헌터로 거듭나나?]
[유성전자 정이안 회장, 연락 두절로 헌터 협회에서 수색 중. 국내 유일의 SSS 급 마나 보유 헌터 이대로
잃을 수 없어…….]
[천재 각성자 정이안 회장, 3 년째 행방불명. 과연 그의 행방은?]

기사는 이게 전부였다.
알렉시스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띠링!
또다시 낯설고도 맑은 알림음과 함께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폭망한 공작 알렉시스 → 3 년 만에 돌아온 각성자 이안]

‘……?!’

[10 초 뒤에 초급자 코스로 이동합니다! 마물들을 죽이고 어서 레벨을 한 단계 올려 보세요!]


[남은 시간: 3 시간]
[실패 시 패널티 존으로 이동합니다.]
[10, 9, 8…….]

이게 뭐지!?
알렉시스는 지금 일어난 일들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눈을 뜬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로 이동하는 걸까?
초급자 코스로 강제 이동하기 전까지 알렉시스의 시야에는 큼직한 통창 밖의 광경이 마지막으로 담겼다.

‘……!’

숨이 멎을 만큼 놀라운 풍경이었다.
땅을 넓게 가로지른 강물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반짝했고, 몇 층인지도 모를 건물들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이 치솟아 있었다.
그중 그가 있는 곳이 가장 높은 듯했다.
.
.
.
‘헉, 허억, 이번에는 성공했어.’

알렉시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초보자 레벨 업 코스에서 빠져나왔다.


패널티 존에 세 번이나 떨어진 후에야 레벨을 1 에서 2 로 올릴 수 있었다.
대체 그 괴물들은 왜 있는 건지, 이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깊게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그가 죽이지 않으면 마물들이 먼저 그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알렉시스는 여전히 자신의 몸속에서 일렁이는 병증을 느꼈다.
아니, 이건 병증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부엌으로 가 찬물을 마셨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었지만, 어쩌면 이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완벽한 남편이 되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그래.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져서 다시 루이제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죽기 직전 바랐던 것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그를 강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악센에게 복수하고 루이제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허투루 만들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정말로 완벽해져서 돌아가는 거야. 다신 누구도 우리를 건들지 못하게, 루이제가 더는 불행한 일 없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의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죽기 전에 그녀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띠링!
[첫 레벨 업을 축하합니다!]
[지금부터 매일 근력 강화 퀘스트(초급)가 시작됩니다.]
[윗몸 일으키기 300 회]
[팔 굽혀 펴기 300 회]
[육상 20km]
[사이클 50km]

어?
시스템은 다시 알렉시스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쉴 틈도 없이 윗몸 일으키기를 시키는 곳이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금세 이 무자비한 강도의 훈련을 받아들였다.
병증이 병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움직임에도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렇게 잘 움직일 수 있는데 왜.
왜 바보같이 그녀와 말 한 번 같이 타 주지 못한 걸까?
우습고 허망했다.
일일 퀘스트가 끝난 후 알렉시스는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살펴보았다.
건물, 자동차, 사람들, 의복, 언어.
모든 게 다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마물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죽인다는 사실 외에는 그가 원래 살던 세계보다 편리한 것들도 너무도 많았다.
그는 이곳에 대한 시스템의 설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스템 배경: 이곳은 현대를 배경으로 구현된 게임 판타지 소설 속입니다. 당신은 이곳의 주인공이므로
세상을 구해야 합니다.]

소설? 주인공?
어찌 되었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곳이 어디든, 그가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어? 정이안 회장님 아니십니까?’

그 순간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알렉시스는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니 젊은 남자 한 명이 그를 알아보는 것처럼 반갑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저는 우리일보의 박수찬 기자입니다. 유성전자의 정이안 회장님 맞으시죠?’


‘예?’
‘이런 미남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 리가 없죠.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사람들이 회장님을 얼마나
찾았다고요!’

남자가 덥석 그의 손을 잡으며 기쁨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놀란 알렉시스가 자신의 손을 휙 빼 버렸다.

‘아, 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회장님!’

알렉시스는 빠르게 걸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자가 쫓아오자 신속 스킬을 썼다.


한참을 멀리 이동하고 나서야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각성자가 아닌 건지 여기까지 쫓아오지
않았다.

‘하.’

알렉시스는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 만졌다.


벌써부터 누군가를 만날 만큼 이 세계에 적응을 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돌린 순간 포장마차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파는 메뉴였다.

[떡볶이 4,500 원]

떡볶이?!
설마 루이제가 20 년 넘게 먹지 못했다는 그 요리?
알렉시스는 경악하여 그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대체 어느 나라의 요리인가 싶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로 루이제가 찾던 음식이 맞을까?
어떤 요리인지, 무슨 맛일지 너무도 궁금했다.
이윽고 그의 테이블에 올라온 건 붉고 묽은 양념에 손가락 크기의 하얀 재료들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는
음식이었다.
그중 하나를 포크로 찍어 한입에 먹어 본 그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연거푸 기침을 해야 했다.
매콤함이 콧속을 가득 찔렀다.

‘엄청 맵잖아?’

루이제가 이런 걸 좋아했다니.
그는 하나 먹는 것조차 이렇게 버거운데, 역시 그녀는 대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루이제…….’

눈물이 핑 돌았다.
얼른 돌아가고 싶고, 보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아 알렉시스는 떡을 하나 더 먹어 보았다.
너무나 매웠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걸까?’

돌아가는 길에 가져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로부터 6 개월 뒤, 거짓말처럼 루이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7 화

* * *

알렉시스는 퀘스트가 떠오를 때마다 충실하게 성공시켰다.


실패할 때가 많았지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계의 최종 보상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루이제에게 다시 돌아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브렌트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알고 보니 그가 엄청난 마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도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퀘스트들은 하나같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점점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잠적 중이던 정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그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렸다.
알고 보니 외신 기자들마저 정이안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실력만 연마한다면 이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상급 헌터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나 폭주를
일으킨 탓이었다.
불시에 생겨나는 게이트 때문에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을 지켜 줄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알렉시스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안되었군. 끔찍한 마물들이 나타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니. 어서 이 세계의 비극도 끝내야 해…
….’

약 두 달 동안 레벨을 10 까지 올린 그는 이제 실전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게이트 전투에 합류하려면 신분증과 헌터 협회 회원증을 보여 줘야 했다.
아직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는 어쩔 수 없이 헌터 협회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만한 위조 신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등장에 헌터 협회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이안 헌터님! 언젠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헌터님이 나타나기만을 모두가
기다렸습니다.’
‘저기-.’
‘정말 충격적인 마나 폭주였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주변의 빌딩들 몇십 개를 다 날려 보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

그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 일로 정이안은 가족들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 년이나 잠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본론을 꺼냈다.

‘지,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내 위, 위조 신분이나 마, 만들어 주시죠.’


‘예? 아니, 헌터님 말투가 원래-?’

알렉시스는 협회장의 말을 끊으며 더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 앞으로 게이트에 드, 들어갈 겁니다. 내, 내가 정이안이라는 사, 사실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드,


들어가는 순간…… 그, 그때는 협회장이 내 폭주에 다, 당할지도 모릅니다.’
‘……!’

도대체 이 말버릇을 언제 고칠 수 있는 건지.


협회장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할 것처럼 치밀었다.
다행히도 협회장은 그의 요구대로 F 급 헌터의 위조 신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심하셨나 봅니다. 이것 참 S 급도 넘어설 분에게 F 급이라니 면목이 없군요.


대신 더 강해지셔서 우리들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고맙군.’

알렉시스는 신분증을 휙 받아 돌아섰다.


갑작스러운 하대에 협회장이 조금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날부터 알렉시스는 바로 하급 게이트 위주로 다니며 레벨을 올렸다.
게이트는 헌터 협회의 회칙상 다른 헌터들과 함께 다녀야 해서 보상으로 받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이안은 국내 1 위인 대기업의 회장인 데다가 무척이나 젊고 잘생긴
탓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다행히 유성전자의 경영은 까를로스라는 CEO 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으로 경영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정이안이 잠적하기 전 그를 찾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한동안 그는 D 급이나 E 급 이하의 게이트 위주로 다니다가 일이 끝나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체력 단련 퀘스트와 검술 퀘스트로 수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띠링!
[C 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어서 다른 헌터들과 협력해서 보스몹을 처리하세요!]
[10 초 뒤에 이동합니다.]
[10, 9, 8…….]

C 급?
아직 C 급 이상은 가 본 적이 없는 데 그곳에서 싸울 수 있을까?
어차피 다른 유능한 헌터들도 함께일 테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래. 가는 거야. 내 한계를 깨뜨려야 해.’

알렉시스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절망해 봤는데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이윽고 처음 가 본 C 급 게이트는 확실히 다른 하급 게이트에 비해 범상치 않은 긴장감이 도사렸다.
C 급 게이트라고는 해도 A 급 헌터와 S 급 헌터들이 동행할 만큼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여기선 어떤 마물이 나올까?
다른 헌터들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문득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저, 저기!’

헌터들의 고개가 모두 그쪽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우두두두, 무언가 힘차고 빠르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알렉시스는 뭐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거미 마물들의 길고 날카로운 다리들이 사방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처음부터 이렇게 큰 마물들이 나온다고?
대체 안쪽에는 얼마나 더 큰 게 있는 거지?
알렉시스는 침착하게 마물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여파로 그의 팔에 아릴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엄청나게 단단한 다리였다.
목.
목을 노려야 해.
알렉시스는 눈으로 빠르게 거미의 목을 찾으며 일단 다리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거미의 다리를 타고 몸통까지 올라가서 목을 찌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악! 살려 주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D 급 힐러 한 명이 쓰러져 있었고, 거미의 날카로운 다리가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꿰뚫을 듯이
높게 쳐들렸다.
알렉시스는 거미의 눈을 향해 황급히 검을 던졌다.
뀌에에엑!
거미 마물이 괴로운 신음을 내며 난동을 부렸다.
명중?!
그는 황급히 힐러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거미의 다리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조심해요!’

문득 그의 뒤쪽에서 A 급 힐러의 외침이 들리더니 뜨거운 기운이 확 퍼졌다.


동시에 거미 마물의 육체도 불에 타오르더니 잿더미로 가라앉았다.
‘……! 이게 A 급 헌터의 힘!’

알렉시스는 내심 감탄했다.
그도 계속 수련을 하다 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마나를 지녔으니 그도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조,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알렉시스는 D 급 힐러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힐러도 C 급 게이트가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떨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차분하게 힐러를 다독였다.

‘우, 우린 무사히 나갈 겁니다. 거, 겁먹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괜히 왔나 봐요. 피해만 끼치고 있네요.’

힐러가 한껏 미안해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게이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죽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헌터들도 꽤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을 테니 즐기지는 못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그의 머리 위로 살벌한 어둠이 또다시 덮쳐 왔다.
힐러의 뒤쪽으로 샛노랗게 빛나는 두 눈과 알렉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또 튀어나온 건지, 거미 마물이 퀴엑 하는 단발마와 함께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안 돼!
알렉시스는 힐러를 휙 끌어당기고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미의 다리가 그의 심장을 꿰뚫는 속도가 더 빨랐다.
띠링!

[사망하셨습니다.]

……어?
이게 뭐지?
죽었다고?
제대로 손 한 번 쓸 새도 없었는데?
정말일까?
안 돼. 이럴 순 없어.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알렉시스는 믿을 수 없어 몸부림쳤지만 빛 한 줌 없는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사망으로 시스템 재가동합니다.]

?!
글자들을 다 읽기도 전에 알렉시스의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물속에서 빠져나오듯 크게 숨을 헉 들이쉬자 게이트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울음 섞인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돌아보니 힐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치유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신, 다신 죽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게이트는 훨씬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그는 인간에게 짓밟히는 개미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강해져야 했다.
알렉시스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일어나 수련 퀘스트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또 두 번이나 더 죽고 말았다.
한 번은 심하게 다친 헌터 한 명을 두고 갈 수 없어 힘겹게 부축하다가 마물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그다음은 게이트 안에서 헌터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는데 중재하다가 휘말려 죽고 말았다.

‘제기랄.’

그의 시스템 덕에 정말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만큼 그가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언젠가는 진짜로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난 강해져야 하는데, 완벽한 남편이…….’

문득 헌터 워치에 알림이 울렸다.


이 소리는 S 급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울리는 음성이었다.
동시에 그의 시스템 창도 떠올랐다.
띠링!

[도심 한복판에 S 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던전 브레이크 30 분 전입니다!]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헌터들과 힘을 합쳐 보스 몹을 물리치세요!]

……!
비상이다!
그는 당장 달려 나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30 분 뒤 던전 브레이크라니, 한 명이라도 힘을 보태 사람들을 어서 대피시켜야 했다.
헌터 워치에도 비상 게시글들이 쏟아졌다.
S 급 게이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금방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라는 말들이었다.
뉴스 속보도 함께 시작되었다.
그가 바람 같은 스킬로 몇 초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런데 줄곧 그리웠던 사람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그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제?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8 화

혹시 환영인 걸까?
그동안 너무도 그리움에 사무쳤던 탓에 환상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알렉시스는 가면까지 벗어 버리고 눈을 세 번이나 크게 깜박였다.
그럼에도 루이제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망을 치던 사람들이 그녀를 통과해 지나치자 알렉은 경악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순간 루이제가 깊은 충격을 받기라도 했는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고 했다.
가슴이 철렁한 그가 신속 스킬로 빠르게 다가갔다.

‘루, 루이제?’

이 얼굴, 은빛 머릿결, 보라색 눈동자, 은은한 향기.


루이제가 아닐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녀는 단 한 명뿐이니까.
그녀도 그를 알아본 듯 경악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알렉?’
‘다, 당신이 여, 여긴 어떻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루이제가 어쩌다 이곳에 나타나게 된 건지 믿기지 않았다.
루이제도 그와 딱 똑같은 심정으로 그를 훑어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이게 뭐람. 이런 꿈을 다 꾸다니…….’


‘…….’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요즘 잠이 너무 안 와서 안 먹던 약을 먹었거든요.’
‘……!’
‘실은 나 죽으려고 했어요. 당신은 이미 몇 달 전에 죽었고요.’
‘예?’
‘…….’
‘루, 루이제가, 주, 죽으려고-.’

알렉시스는 루이제의 말에 소스라치 게 놀랐다.


루이제가 죽으려고 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녀는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의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면 그의 곁에서보다는 훨씬 행복해질 것 같았으니까.
더 이상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은 그에게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가 없다면 그녀가 더 불행해질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루이제가 죽으려고 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 버린 건지…….
이윽고 루이제가 꺼낸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당신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걸요.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거든요.’
‘……!’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했어요. 당신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줄 알았거든요. 그 탓에 기억이 없다는
말도 믿었고요.’
‘…….’
‘몇 달이나 난 그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죠. 말투도 바뀌고 희한한 능력도 생겨서 많이 놀랐는데, 갑자기
마력을 각성했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어요. 대체 왜 나만 두고 죽어 버린 거예요?’
‘……!’

그의 눈동자가 처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조금 서글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문이 막혀 버린 사이 루이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믿었던 당신마저 날 두고 죽어 버려서……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 아서 견디기 어려웠어요.’


‘…….’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말들은 더 믿기 어려웠다.
그가 죽고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탓에 루이제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가 죽어도, 아니 심지어 그의 몸 속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어도 그녀는 그와는 상관없이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형편없는 남편이었으니까.
그러나 루이제는 어쩐 일인지 수면제를 마시고는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루이제.’
문득 정신을 차린 알렉시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 제가…… 아, 아무런 기억이 어, 없었습니까?’


‘……네?’
‘이럴 수가…….’

그는 자신의 얼굴을 심란하게 쓸어 만졌다.


그의 몸에 들어왔다는 다른 사람의 영혼은 분명히 그의 미래일 것이다.
끝내 그는 이 세계의 최종 전투에서 승리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희한한 능력과 마력 각성.
그건 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없지?!’
도무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 같았다.
아무튼 알렉시스는 루이제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루이제.’
‘…….’
‘지, 지금부터, 제, 제가 하는 말을, 자, 잘 들어 주십시오. 시, 시간이 없어서 오, 오래 있지 모,
못합니다.’
‘……뭔데요?’
‘그, 그 사람은…….’
‘…….’
‘다, 당신이 본 그 사람은…… 제, 제가 마, 맞습니다.’
‘……알렉.’
‘여, 여긴 당신의 꿈도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죽어서 이, 이곳으로 왔고…… 제, 제가 약속해,
했듯이, 와, 완벽한 남편이 되어 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
‘아, 아무래도 후, 훗날 사, 사고가 생겨서 제, 제가 기억을 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루이제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릴 거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믿어야만 했다.
꺄악!
불현듯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물의 울음소리까지 어렴풋하게 들렸다.
기어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듯하여, 알렉시스는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루, 루이제. 저, 저는 곧 가, 가야 합니다.’


‘……!’

화들짝 놀란 루이제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안 돼요. 가지 말아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없어요?


당신한테 꼭 해 주고 싶은 말도 있단 말이에요.’

루이제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그녀에게 그가 이토록 애틋한 존재였었나?
낯설고 놀라웠다.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그녀의 말들이 낯설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부재가 그녀를 외롭게 만들고 끝내는 목숨을 버리게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가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걸까?
어쨌든 지금의 그에게는 루이제가 다시 살아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루이제. 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어, 어서 깨어나십시오.’

그녀의 영혼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는 몰라도 돌려보내야 했다.


그의 마력으로 할 수 있을까?
아직 마력을 운용하는 건 자신이 없었지만, 알렉시스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자 한 순간에도 그가 강렬히 원했던 기회를 만들어 낸 마력이었다.
그의 마력이 가진 잠재력은 그 스스로도 짐작이 다 가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알렉!’

순간 루이제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부신 물결처럼 휘날리며 은은한 향기를 흩뿌렸다.
그리웠지만 감히 탐할 수 없던 그녀의 체향이 거짓말처럼 그의 주위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안아 보았다.
이미 루이제는 다 파묻힐 듯이 빈 틈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꿈만 같았다.
설마 이렇게 다시 그녀를 안아 보게 될 줄이야…….
한동안 그의 품을 느끼던 루이제가 얼굴을 들었다. 그도 그녀의 눈을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그 사람이 정말로 당신이에요?’


‘…….’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왜 이런 데에 있어요. 이렇게 무서워 보이는 곳에서…….’
‘…….’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알렉시스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 릴 만큼 강해지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 알렉시스는 다른 말을 꺼냈다.

‘루이제. 호, 혹시 저는 어떤 사람이었죠?’
‘네?’
‘기, 기억이 없어도 다, 당신에게 잘해 주었습니까?’
‘…….’
‘당신한테 저, 정말 완벽한 남편이 되고 싶었는데…….’

설마 미래의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해 지켜 주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진 않았겠지?


그랬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루이제는 그의 옷자락을 쥐고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더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지금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
‘나도 완벽한 사람이 아닌걸요. 당신도 꼭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그냥…….’
‘…….’
‘그냥 당신이 나와 함께 오랫동안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

지금 그가 무슨 말들을 듣고 있는 걸까.
그의 가슴으로 어마어마한 파도가 따스하게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
루이제가 그를 원한다.
그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그와 같은 마음인 걸까?
그런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불현듯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바랐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결코 얻을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그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루이제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당신과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해도, 우리가 함께 말을 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늘


비웃음만 당했어도…… 당신은 항상 내 소중한 남편이었어요.’
‘…….’
‘너무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해요.’
‘…….’

루이제가 눈물 젖은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렉시스는 순간 눈앞이 너무나 눈이 부셨다.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 루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가슴에 사랑을 한가득 안겨준 채…….

“이게 다 뭐야……?”
한편 알렉은 탄식을 금치 못하며 알렉시스의 몸속에서 그 기억들을 빠짐없이 목도했다.
알렉시스가 되어 그의 기억을 보는 동안 그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충격과 경악과 놀라움을 연거푸
겪어야 했다.
그는 어서 기억 포션에서 나와 루이제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지 당장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억에서 나갈 수 없었고, 기억 포션은 그를 금세 다시 충격적인 장면으로 데려갔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9 화

* * *

알렉시스는 서둘러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마물들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는데 왜 그의 기분은 좋은 걸까?
루이제가…….

‘루이제가 나를 좋아한다.’

알렉시스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세상을 다 가져도 이렇게 벅차오르진 않을 것이다.
설마 진짜로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저 게이트와 마물들, 시스템과 그의 마력,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타난 루이제마저 모두 그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최종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서 죽을힘을 다할 것이다.
반드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루이제.’

다시 함박웃음을 지은 알렉시스는 하마터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자 방금 전 떠올랐던 시스템 창이 희미하게 사라지려고 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마력이 1 서클로 성장했습니다!]

갑자기 1 서클……?
그는 그저 루이제를 다시 돌려보내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마력이 한 단계 성장했다.
어쩌다 성장시킨 건지 얼떨떨했다.
그런데 루이제는 어떻게 이쪽으로 오게 된 걸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돌려보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수백 번 죽어도 상관없었지만, 루이제는 오래오래 행복해야 했다.
그러려면 그녀의 곁에 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메마른 한숨이 나왔지만 알렉시스는 우선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게이트에서 나온 오우거들이 눈 닿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꺄악!’
‘어서 도망치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도심 한복판의 스크린에서도 정신없이 속보를 내보냈다.

「충격! 7 년 만에 발생한 S 급 게이트 던전 브레이크!」


「헌터 협회와 특수부대, 시민들 대피에 온 사활을 쏟고 있어.」

알렉은 검을 크게 휘둘러 마물들을 처리했다.


도대체 몇 마리나 활개를 치고 있는 건지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수천? 수만?
이런 광경은 게이트 안에서나 봤지, 사람들이 많은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힘없는 사람들은 금세 목이 꺾여 죽을 것이다.
마물들은 마구잡이로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 숨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쉭!
끄에엑.
알렉시스는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마물 한 마리를 더 베어 냈다.
띠링!

[경험치가 500 올랐습니다!]

그동안 레벨 업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루이제에게 고백을 받았기 때문인지 훨씬 힘이 났다.


루이제가 그를 필요로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게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서 강해져서 최종 전투를 끝내고 싶다는 열망만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러다 보스 몹마저 튀어나오면, 정말 큰 일이다.’

알렉시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뛰어난 헌터들이 보스 몹을 잡기 위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보스 몹이 지상까지 나오게 되는 최악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상에 있는 마물들이라도 최대한 많이 처치해야 했다.
헌터 한 명의 몫은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오우거 한 마리를 더 죽이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띠링!

[보스 몹이 나타났습니다!]
[왕자 오우거 ‘민티’]

‘……?’
의아함과 동시에 문득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대체 어디서 보스 몹이 나타났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전기가 끊겨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안.
이미 그가 죽여 버린 오우거 몇 마리의 시체 말고는 다른 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뒤쪽에서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의 위용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정상적으로 길고 근육이 무시무시한 팔과 다리.
천장에 닿을 듯한 키와 섬뜩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
어마어마한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의까지.
그리고 그 뒤로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열 몇 마리의 오우거들이 엄호하듯 늘어서 있었다.
‘……!’
알렉시스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금세 놈의 정체를 직감했다.
‘……보스 몹!’
굳이 시스템이 보스 몹의 등장을 알려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답게 놈의 기세가 그의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았다.
보스 몹의 크기와 그 위용에 비하면 근처의 다른 부하 오우거들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스 몹이 왜 여기에서 나타난 걸까?
띠링!

[퀘스트 발생!]
[보스 몹 ‘민티’에게 치명상을 입혀 보세요!]

[퀘스트 보상]
[성공 시 레벨이 30 단계 상승합니다!]

어김없이 떠오른 퀘스트에 알렉시스는 살짝 이를 악물고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놈은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
그가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알렉시스가 보스 몹을 강렬하게 노려보는 사이 예기치 못하게도 놈이 소리 냈다.

‘그래. 저 인간이 가장 강한 인간이군.’

민티가 그의 주먹만 한 코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기운을 맡아 보는 것 같았다.
설마 그의 마나를 느끼고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알렉시스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 그런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머,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하고 있지 않겠지?’

그리 말하며 알렉시스는 몰래 헌터 워치의 비상 버튼을 눌러 보스 몹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는 마치 눈빛만으로도 죽일 수 있다는 듯 보스 몹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의 기세만큼은 보스 몹 못지않게 강렬했다.

‘모, 목숨을 낭비하기는 싫을 테니 지, 지구를 조용히 떠날 기, 기회를 주지.’

알렉시스는 시간을 끌어 볼 생각이었다.

그가 보스 몹을 붙잡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안전할 것이다.

‘자신감이 과하군, 인간.’


‘…….’
‘네가 인간 중에 가장 강하다고 했지, 이 민티보다 강하다고는 안 했다.’
‘…….’
‘나와 싸우자. 너는 이 민티와 싸워도 될 만큼 강하다.’
‘…….’

알렉시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과 단둘이 싸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른 헌터들이 와도 저놈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무조건 가능하게 해야 했다.
알렉시스는 최대한 직접 부딪치는 건 피하면서 치명상을 입힐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가 민티를 보며 짧게 비웃었다.

‘이, 이름이 민티라고? 덩치는지, 집채만 하면서 아이처럼 구는 게 아직 서, 서너 살밖에 안 된 건가?’

그가 막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주위에 있던 부하 오우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무슨 치명적인 말실수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띠링!

[왕자 오우거 ‘민티’가 내상을 입었습니다!: 마음의 상처]

민티가 격노한 눈으로 들고 있던 무기를 땅에 내리쳤다.


쩌저적, 바닥이 각설탕 부서지듯 갈라졌다.

‘죽이겠다, 인간!’

퍽!
민티가 날 듯이 달려들더니 주먹을 날렸다.
마물의 주먹이 공기를 스치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묵직했다.
알렉시스는 그의 민첩함을 살려 빠르게 몸을 피했다.
바깥의 상황은 어떨까?
민티는 그와 싸워 이기는 게 목표인 것 같으니,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신속 스킬로 민티의 시야를 교란시키다가 어느 순간 검을 찔러 넣었다.
쉭!
쿠왕!
민티가 두꺼운 팔로 그의 검을 쳐 내자 그는 벽까지 튕겨 나갔다.
‘제기랄. 힘이 너무 세. 그래도 움직임은 둔한 놈이군.’
보스 몹이니 오죽할까.
그 순간 민티가 주문을 외웠다.

‘아바마마의 가호.’

화르르륵.
사방에 커다란 불길이 일어났다.
주차장의 차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알렉시스는 팔을 들어 코와 입을 가렸다.
살짝 치켜뜬 눈으로 민티를 똑바로 응시하며 비웃어 주었다.

‘자, 자신이 없나? 비겁하게 스, 스킬을 쓰는군.’


‘크와앙!’

민티가 더 성이 나 외치자 불길이 천장에 닿을 듯이 더욱 거세졌다.


마침 헌터들이 도착한 듯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꺄악! 이 불은 다 뭐야!’

헌터들은 주차장 안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금방이라도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은 열기를 느꼈지만 애써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아, 아빠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과 싸우지도 못하나? 여, 역시 어린애군.’


‘크왕!’

민티가 또다시 노여운 듯 울음소리를 내자 순식간에 주먹이 그의 코앞까지 날아와 박혔다.


쩌적, 소리와 함께 그의 가면에 금이 갔다.
절대 깨지지 않는 보브라늄 소재라고 들었는데, 설마 불량인 건가.
깨진 가면을 치워 버린 알렉시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민티의 멱살을 잡고 그의 위로 올라탔다.
다른 오우거들이 주차장에 도착한 헌터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티가 몸부림치자 알렉시스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매달려
결국 민티의 목덜미에 단도를 박아 넣었다.

‘크악!’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아니, 지금 당장은 그가 죽이지 못하더라도 놈에게 죽지는 말아야 했다.
그러나 아직 레벨이 23 밖에 되지 않는 그에게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을 상대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였다.
바드득.
그때, 암석처럼 단단한 손이 알렉시스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으드득, 콰쾅!
알렉시스는 뼈가 으스러진 채 불구덩이를 날아 벽으로 곤두박질쳤다.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0 화

.
.
.
이게 바로 S 급 보스 몹의 힘인가……!
알렉시스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이 들었다.
겨우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엄청난 충격이 그를 휩쓸었다.
퍽! 퍼억!
성난 민티가 주먹으로 사정없이 그를 후려쳤다.
마력?
그에게 무척 강력하다는 마력이 있지 않나?
그런데 왜 지금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걸까.
그의 의지대로 마음껏 마력이 움직이는 건 아닌 듯했다.
어쩌면 간절함의 크기가 루이제와 함께 있었을 때와 너무도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정말로 또 죽고 싶지 않은데…….
알렉시스는 입술을 깨물며 반격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팔이며 다리에 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잔뼈까지 모두 으스러진 것 같았다.
안 돼.
움직여……!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이 정도의 열망이면 마력을 쓰는 법을 깨우칠 법도 한데!
‘이 멍청한 자식…….’
콰쾅!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다시 한번 처박혔다.
지금까지 겪은 마물들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민티는 다른 적수가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입에서 왈칵 피가 새어 나왔다.

‘싱겁다, 인간! 인간은 모두 이렇게 민티의 한주먹 거리인가!’


‘…….’
‘헌터님!’

다른 헌터들이 그를 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귓가에 들렸다.


누가 무슨 스킬을 쓴 건지 그들의 주위로는 불길이 밀려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들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부디 그들은 민티를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
.
.
‘또 죽어 버리다니.’
알렉시스는 어두운 의식 속에서 한참을 탄식했다.
마물에게 얻어터진 건 처음이 아니라 그리 비참하거나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이 가진 힘을 실감하긴 처음이라 너무도 허탈했다.
보스 몹 한 마리도 그렇게 강한데 이 세계의 최종 전투에서는 얼마나 더 어마어마한 상대와 맞붙어야 할까?
그는 또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지 도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스스로가 개미만큼이나 몹시 작고 나약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제기랄…….’
다시 눈을 뜨면 이번에는 반드시 S 급 보스 몹만큼은 강해질 것이다.
그리 다짐하며 알렉시스가 이를 간 순간, 마침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사망 5 회 차로 페널티 부과됩니다!]

페널티……?
그런 게 있었어?

[더욱 강한 헌터가 되기 위해 당신의 기억을 시스템이 가져갑니다. 기억 포션에 당신의 기억을 전부 담아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세요!]
[주의! 거부 시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주의! 한 번 버린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게 뭐야……?
알렉시스는 세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시스템 창의 글자를 다시 읽었다.
뭘 가져간다고? 기억?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페널티라지만 기억을 가져가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여태 다섯 번이나 사망했으니 페널티가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전부 가져가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말도 안 돼…….’

띠링!
[5 분 뒤에 페널티가 실행됩니다!]
[기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 더욱 강한 헌터가 되어 보세요!]
[남은 시간 00:04:59]

……!
이럴 수가.
당혹스러움에 알렉시스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타이머의 초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분명 이 시스템은 그의 마력이 만들어 낸 건데 정작 그는 시스템의 강제성을 거부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정말로 그가 기억을 잃게 되는 걸까?
루이제와 처음 결혼했다가 죽어서 다시 만난 오늘까지의 기억 전부?
아, 안 돼.
바로 그때.
알렉시스는 루이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기억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정말로 여기서 기억을 다 잃고 루이제에게 돌아간 거였어.’

혼란스러웠다.
그가 얼마나 더 이곳에 있게 될지는 몰라도 적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억이 없다가 루이제의 곁에서조차 되찾지 못한 걸까?
그럼 미래의 그는 언제쯤 다시 기억이 돌아오는 거지?
알렉시스는 마치 자신이 진짜로 죽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관에서 독약을 마셨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의식과 존재가 어둠의 한구석으로 밀려나 영원히 소멸하는 듯한 느낌.
영혼과 육체는 그대로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기억이 없으면 그때의 그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렉시스는 금세 접어 두었다.
어찌 됐든 그가 강해져서 루이제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그는 너무도 형편없고 나약해서 기억이라도 사라지면 더 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 숱하게 자신을 탓하고 혐오했던 만큼 새로 태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시스템이라면 분명 그를 몇십 번이나 더 죽여서라도 강하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3 분 전.
알렉은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 마력을 운용해 보았다.
그의 미래는 루이제의 과거이니 훗날 그녀가 수면제를 먹어도 그의 힘으로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해야 했다.
그 순간 마력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 몹에게 당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마력이었다.
역시 루이제와 관련된 일에는 마력이 반응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혹시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 볼 수 있을까?
조금 전 루이제를 만난 덕에 기억이 소멸되어도 행복하기만 했다.
띠링!

[곧 초보자 모드를 종료하고 일반 모드가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00:00:03]

남은 시간 동안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기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도, 반드시 루이제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 * *

띠링!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1 차)’의 사용이 끝났습니다!]

“…….”

‘헌터님! 제발 깨어나십시오!’
‘세상에, 그 가면을 쓰고 다니던 F 급 헌터가 정이안 회장님이었다니…….’
‘이건 정말 특종입니다. 설마 헌터 협회가 그동안 묵인하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 병실 앞에서 뭣들 하시는 거예요! 모두 나가세요! 안정이 필요한 환자십니다!’

크흠.
이안의 병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간호사의 눈치를 보았다.
보스 몹에게 끔찍하게 당해 죽을 뻔한 헌터가 유리창 너머 VVIP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바이털 사인은 일정한 속도로 소리를 내며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몇 개인지 다 세기도 어려운
기계들이 이안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위독하지만 언젠가 깨어날 것이다.
모두가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1 만 명도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일주일째.
이제는 그만 국내 최고의 마력을 지닌 헌터가 눈을 떠 사람들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스 몹은 겨우 제거되었지만 상위 랭킹의 S 급 헌터 한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순간, 이안의 손가락 하나가 까딱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모습을 포착한 기자 몇 명이 입을 틀어 막았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의사! 의사 좀 불러와!’

까딱.
이안의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잘생긴 미간이 좁혀지고, 근사한 눈썹도 휘어졌다.
눈을 뜨자 병실의 선명한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한껏 찡그린 이안은 뜻 모를 거슬림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
병원?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은 팔뚝에 달린 주삿바늘과 여러 장치들을 발견했다.
허리며 다리에도 보호대가 달려 있었다.
그 순간, 의사들이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헌터님!’

헌터……?

‘괜찮으십니까?!’
‘…….’

의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이안을 살펴보았다.


이안은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의 팔을 들어 보고 다리도 움직여 보았다.
멀쩡한 몸에 이것들은 다 웬 것들인가 싶었다.

‘괜찮으니 어서 이것들 좀 풀어 주시죠. 거추장스럽습니다.’


‘예?’

이안이 링거 주사를 뽑아 버리려고 하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아,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

그러나 이안은 전혀 아픈 사람답지 않은 얼굴과 자세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실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역시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헌터의 생명력에 의사들끼리도 감탄하고 있었다.
갈비뼈가 다 으스러진 데다가 사지에도 멀쩡한 뼈가 없었고 장기의 손상도 극심했다.
이틀 동안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매달려 치료를 했지만 어딜 어떻게 손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뇌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런데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깨어나다니!
분명 얼굴에 멍투성이였는데!

‘괜찮으십니까, 헌터님?!’
‘설마 헌터님의 치유력이 이 정도일 줄은-!’
‘역시 다이아몬드급 마나 수저라 불릴 만한 헌터님이시군요!’
‘치유력이 대단하십니다!’

사람들은 감탄했고, 숨죽여 주시하던 기자들도 신이 나서 찰칵, 찰칵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

이안은 손을 들어 살짝 얼굴을 가렸다.


그가 어쩌다가 병원에 있는 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얼마나 오래 과거의 장면들을 보고 있었던 걸까?
알렉은 눈을 깜박였다.
새하얀 하늘과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폐부로 들어오는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
칼라니쉬 산의 어딘가에 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던 알렉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새끼 백곰들 몇 마리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알렉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휘청했다.
그 탓에 새끼 백곰들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알렉은 백곰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뽀드득, 눈이 짓밟히는 소리가 유독 귓가에 크게 울렸다.
“…….”
그리고 그의 호흡 소리도 거칠게 증폭되었다.
내가.
“내가 알렉시스였어……?”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1 화


11. 엇갈린 부부의 결말

‘알렉? 알렉!’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나는 심장이 철렁하여 그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세계에서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시야와 소리가
차단되었다.
깊은 적막만이 내 주위에 남았다.
‘뭐야, 사라진 거야?’
알렉!
아직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만난 남편인데!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 꼭 해야 하는 말들은 다 한 걸까?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는데, 기적처럼 나타났다가 금세 다시 사라지다니…….
가슴이 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가 있는 곳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내가 살던 세상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는 그런 곳에 있을까? 그곳에 있어도 괜찮을까?
‘그런데 가짜 알렉이 진짜 내 남편의 미래라고?’
“하.”
나는 어쩐지 심장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이 기분을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숨이 버겁게 차올랐다.
당장 그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번쩍 눈이 떠졌다.
나는 눈이 부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설마 내가 살아난 건가.
아니, 애초에 죽긴 죽었었나?
아무것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숨을 쉬고 있었고 오감이 주위의 모든 것들을 느꼈다.
광택이 흐르는 호화로운 천장, 금빛과 붉은빛으로 찬란하게 꾸며진 내부.
특유의 사치스러운 향기까지.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곳을 나는 한 군데 알고 있었다.
여러 번 와 보았으니까.
‘……황궁.’
동시에 역한 기분이 내 깊은 속 안에서 올라왔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사이에 해리엇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
낭패감이 든 내가 한 손을 들어 눈을 감쌌다.
죽지 않고 살아난 건 다행이었지만, 애초에 죽을 생각이었으니 황궁에 납치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마른침을 꾹 삼킨 나는 우선 주위를 살펴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어떻게 도망치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여기…….
‘황후 궁이잖아?’
하.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낭패감보다는 화가 날 것 같았다.
휙 이불을 걷으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던 순간, 호화로운 문이 조금 벌어졌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그쪽을 보고 있으니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무심코 침대 위를 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휘둥그렇게 눈이 커졌다.
저대로 시녀가 몸을 돌리면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할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순간 나는 시녀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시녀는 황급히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어?’
뭐야, 기다려!
내가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지만 문만 덜컹거렸다.
바깥에서 잠가 버린 듯했다.
‘젠장.’
문을 몇 번 더 열어 보려고 한 나는 한 손에 이마를 받치며 그냥 돌아섰다.
내가 깨어난 것을 시녀가 확인했으니 황제든 누구든 날 찾아올 게 뻔했다.
다른 탈출로는 없을까?
황후 궁의 침실 안을 둘러보니 정면으로 유리창이 넓게 보였다.
창가로 다가가 슬쩍 내려다보니 역시나 5 층 아래라 맨몸으로 내려가기에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밤중이라 얼마나 높은지 잘 가능도 되지 않았다.
건물과 이어진 정원에는 기사들도 군데군데 서 있었다.
.
.
.
시녀인 유리엘라가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황후 궁 앞에는 기사들이 늘어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가 깨어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귀부인.
유리엘라는 황제에게 날 듯이 달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윌스브룩 자작 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악센이 햇살을 등지며 돌아섰다.
그의 곁에는 해리엇도 함께였다.
루이제가 깨어났다고?
바라던 소식에 해리엇은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과연 황제의 힘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다.
그녀가 정말로 죽었다면 황제는 그와 그의 기사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설마 루이제가 여관에서 죽음을 시도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을까?
부부 사이의 일은 그가 모르는 세계이니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시녀의 말에 악센은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하마터면 내 황후로 적합한 유일한 인물을 잃을 뻔했군.’
루이제는 깨어났고, 알렉시스는 북부에서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그가 불러낸 마물들을 알렉시스가 당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어두운 하늘을 벌리고 나타난 마물들이 끊임없이 지상으로 쏟아져서 북부를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악센은 겉으로는 흡족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며 유리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는 윌스브룩 자작 부인이 아니라 황후 폐하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폐하.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시녀가 정정하여 다시 아뢰자 악센은 어쩐지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그에게 만족스러운 황후가 생겼다.

* * *

나는 서둘러 침대보며 베갯잇을 찢어 길게 묶었다.


창문 아래에 기사들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창밖뿐이었다.
알렉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진짜로 내 남편 알렉시스인 걸까?
머릿속에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생각들이 뒤엉키고 떠돌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이런 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바퀴 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한 나는 길게 만들고 있던 끈을 이불 아래로 숨겨 넣었다.
어김없이 잠금장치가 풀리며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뒷걸음질을 쳐 입구에서 물러났다.
내 손에는 천을 찢던 작은 칼도 단단히 들려 있었다.
불현듯 열린 문 사이로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어와 내 후각을 자극했다.
뭐지?
음식?
내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시녀들이 은빛 트롤리를 매끄럽게 끌고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호화로운 뚜껑이 덮인 은접시들이 가득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그쪽을 보고 있자니 시녀들의 뒤로 황금빛 머리카락과 검붉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금색 견장이 달린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
황제를 알아본 순간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말대로 정말로 황제가 나를 탐내고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애써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폐하가 아니십니까? 제가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는 분명히 허름한 여관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제야 황제도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얼굴을 살피듯이 쳐다보더니 짧게 비웃었다.
“잠을 잘 못 자는 모양이군. 약까지 마시다니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
황제의 두 눈동자가 꼭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살얼음을 밟은 듯이 가슴이 선득하고 소름이 끼쳤다.
한번 숨을 들이쉰 내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돌아가겠습니다.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위에 늘어선 시녀와 기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침도 삼키지 않았다.
황제와 나의 시선은 서로에게 향한 채 끊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황제가 담담하게 음식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저것들을 먹어라.”
“여기서 더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여긴 앞으로 네가 있게 될 곳이다.”
“……?”
내가 조금 황당하게 황제를 응시했고, 그는 여전히 무감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내 의사를 확고하게 전했다.
“전 황후 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후 궁 침대에 누워 있다가 황제에게 식사 대접을 받다니,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아찔했다.
한순간도 더 이곳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대뜸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에 비해 조금 살벌해진 음성이었다.
“네가 있을 곳은 내가 정한다.”
“……?”
저 쓰레기 놈이……!
“넌 황후 궁에 제격인 사람이니 평생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여자들은 감히 내 황후가 될 수 없어.
너여야 한다.”
“……!”
무척이나 낮고 집요한 말이었다.
나는 말문이 다 막혔다.
그 순간 대뜸 콰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유리창이 흔들리고,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나도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어리둥절하게 밖을 확인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눈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나 또한 보고도 못 믿을 장면이 펼쳐졌다.
밤이라 바깥이 어두웠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황제 궁이 차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알렉과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정말로 황궁에 가신다면 그 즉시 쳐들어가겠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2 화


* * *

‘내가, 내가 알렉시스였다니…….’
알렉은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칼라니쉬 산에서 내려왔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온갖 드라마에서 난무하던 출생의 비밀을 많이 봤지만, 막상 직접 겪어 보니 충격의 차원이 남달랐다.
알렉시스의 기억이 그에게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기억 포션을 보고 자신이 알렉시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시스가 시스템에 기억을 바친 이후의 일들은 바로 그가 겪었던 삶이었으니까.
‘내가, 내가 알렉시스…….’
그런데 이 묘하게 그를 흥분시키는 안도감은 뭘까.
루이제가 그토록 원하던 알렉시스가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원래부터 루이제는 그의 여자였고, 그는 그녀의 유일한 남자였다.
그가 부러워하고 되고 싶었던 알렉시스가 바로 그였다.
누군가를 질투할 필요도 없었고, 그녀의 마음을 받지 못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 사실에 그녀를 향한 애정이 더욱 샘솟는 것 같았다.
알렉은 손으로 입가를 쓸었지만 입꼬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가려지지 않았다.
‘내가, 내가 알렉시스다…….’
루이제가 유일하게 인생의 반려로 인정하는 바로 그 알렉시스.
말을 좀 느리게 하고 만족을 시켜 주지 못해도 루이제가 믿고 의지했던 알렉시스…….
그 순간 띠링, 하는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애정도가 20 억 올랐습니다!]

“……?”
애정도?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치솟은 애정도에 알렉시스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제는 어디 있지?
‘올리비아.’
알렉시스는 서둘러 그의 사역령을 찾았다.
올리비아는 계속 루이제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알렉시스는 올리비아의 눈을 통해 루이제를 확인했다.
호화로운 방 내부에서 루이제가 의식을 잃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저곳은…….
‘황궁?’
순식간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도 짙게 가라앉았다.
기어이 악센이 루이제를 납치한 것이다.
‘루이제는 무사한가?’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무사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알겠다.’
알렉시스는 조금 안도하며 대답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분기가 실려 있었다.
아마 루이제는 지금쯤 과거의 그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에게 기억을 잃기 전의 그였다.
그때의 그는 생존에 대한 욕망보다 루이제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크고 깊어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도
마력을 다루지 못했다.
루이제를 기억에서 지우고 나서야 자유롭게 마력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억이 다 사라지자 말도 더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가 차라리 과거의 모든 기억을 버리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새롭게 태어나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렉시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 속의 알렉시스는 이 시스템 안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가 보상으로 받았던 이 세계의 원작 소설은 알렉시스의 마력으로 시뮬레이션한 미래였다.
그가 독약을 먹은 이후에 벌어졌을 미래에서 루이제는 그의 죽음으로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이 가슴 아프면서도 그에 대한 그녀의 진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띠링, 그때 다시 시스템이 울렸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
왜 또 이렇게나 많이 오르는 거지?
루이제가 과거의 그를 만나서 사랑이 폭발하기라도 한 걸까?
계속해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4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50 억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시스템 창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알렉시스는 레벨이 무섭게 치솟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애정도와 레벨이 동시에 오르기 시작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40 억 올랐습니다!]

“……!”
레벨 업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게이트의 마물들을 죽이면서 경험치를 어마어마하게 쌓아 놓은 덕에 그에게 필요한 건
애정도뿐이었다.
레벨이 다 오를 만하면 애정도가 또 올라서 레벨이 그 뒤를 쫓아가듯이 올라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계속해서 레벨이 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던 알렉은 문득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설마 이 애정도…….
‘루이제가 아니라 내 것인가?’
“……”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알렉시스는 애정도가 언제 어떻게 올랐는지 처음부터 되새겨 보았다.
그가 만들어 준 토마토 소스 파스타를 루이제가 처음으로 맛있게 먹어 주었을 때.
고작 300 골드에 루이제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판다고 하여 괜히 그가 울컥했을 때.
처음으로 루이제의 허리를 들어 안아 그녀를 말 위에 앉혔을 때.
루이제와 함께 있을 때 기습을 한 그레이브 용병단을 한 방에 처리했을 때.
무도회에서 루이제와 처음으로 서로의 허리와 손을 붙잡은 채 춤을 추던 시간.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느꼈던 충격적인 첫 입맞춤.
캐스다인을 죽여 루이제가 머물러야 하는 윌스브룩 성을 깨끗하게 청소했을 때.
그리고 또 그녀와의 뜨거웠던 입맞춤.
시베리아보다 추운 북부에서 처음으로 서로의 온기를 빈틈없이 누렸던 날의 정사.
끝나지 않았던 윌스브룩 성의 밤과 길고 길었던 마차 안…….
온갖 사랑한다는 꽃말의 꽃다발과 함께 마력을 넣은 보석을 루이제에게 선사했던 순간과 그녀의 미소.
그리고 루이제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까지.

‘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지금의 당신을요.’

한 번도 애정도는 하락한 적이 없었다.


그의 속에서 차오르고 차올라 가득 흘러넘쳤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고, 그녀가 기뻐하는 것들을 그가 직접 해 주며, 그녀의
입술과 허리와 손끝까지 느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 주고,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그는 자신이 알렉시스인 줄 몰랐던 사이 이미 다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여자라는 죄책 감이나 양심의 가책, 그녀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좌절감도 모두
사라졌다.
더는 거리낄 것이 없으니 그의 애정이 끝도 없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띠링!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렉시스는 순식간에 몸을 돌리며 바람같이 사라졌다.


서둘러 루이제가 있는 황궁으로 가야 했다.
마침 그녀가 있는 방으로 황제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북부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 그 끔찍한 마물들을 풀어 버린 폭군.
남의 부인을 마음대로 데려가서 자신의 황후로 만들겠다는 파렴치한.
그리고 그의 인생을 짓밟아 버린 철천지원수.
그리고 이제야, 이제야…….
전생의 죽음을 넘어 7 년간의 레벨업을 마치고 얻게 된 복수의 순간.
이 순간이 바로 그가 죽기 전부터 온 영혼을 다해 원했던 최후의 전투였다.
알렉시스는 속에서 분노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제 궁의 상부를 날려 버렸다.

‘스킬. 고급 남편의 간지럼.’

콰쾅!
전생의 그에게는 너무도 높고 두려웠던 황제 궁은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도 낮게 느껴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3 화

* * *

와르르, 황제 궁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발밑이 당장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곧 도망을 칠 것처럼
물러났지만 이내 주춤거렸다.
황제의 눈치가 보이는 탓이었다.
나 또한 황제 궁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마 정말로 알렉이 이곳에 온 걸까?
나를 찾으러?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황제는 창밖의 광경을 서늘한 눈으로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저런 짓을 하는 거지?”
“폐하!”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보좌관들이 들어왔다.
보좌관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너지고 있는 황제 궁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말했다.
“부, 북부가 무사하다고 합니다. 마물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그런데 어,
어서 대피를…….”
“……뭐? 그럴 리가.”
황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나는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쪽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죠? 북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마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신비로운 곳에 마물?
그런데 왜 황제와 보좌관들은 북부가 무사해서 낭패라는 반응인 건지…….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황제는 비스듬히 나를 돌아보았다.
“북부가 걱정되기라도 하나? 이제 더는 쓸모가 없는 곳이다. 알렉시스와 함께 모두-.”
“폐하.”
창문 가까이에 서 있던 해리엇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소리 냈다.
내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증폭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만큼 불현듯 숨이 너무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북부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금세 차분해진 해리엇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폐하, 윌스브룩 자작입니다.”
“누구?”
황제의 두 눈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의아하게 찡그리며 그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였다.
와장창, 커다란 창문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정 없이 휘날렸다.
놀란 사람들이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빛과 같은 속도로 황제의 멱살을 붙잡고 다시 창밖으로
날아갔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정원 위로 패대기를 쳤다.
쿠쿵, 하는 굉음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흙먼지가 드넓은 황궁 정원과 상공까지 가득 피어올랐다.
정원수까지 뽑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추락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들이켰다.
아무도 찍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관리되고 있던 정원 한복판이 분지처럼 둥글게 파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가 순식간에 유리창을 깨고 정원까지 파괴한 것이다.
문득 보좌관 한 명이 화들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폐하가 사라지셨다!”
그제야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눈으로 황제를 찾았다.
1 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 있던 황제가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 설마 저기……!”
시녀인 유리엘라가 창밖을 보며 삿대질하더니 주춤 물러났다.
부옇게 허공을 채웠던 흙먼지들이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훅 꺼진 정원 한복판에 사람의 형체가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멀리서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 제국의 황제.
황제가 분명하다는 사실에 소리 없는 경악이 내 주위를 가득 채웠다.

* * *

악센은 이를 악물고 눈꺼풀을 들었다.


난데없이 까만 밤하늘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입 안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살짝 상체를 들어 올렸다.
대체 어떤 놈이 그를 이렇게 쥐잡듯이 내팽개친 건지 살의가 솟구쳤다.
목숨이 두 개인가?
정면으로 키가 크고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등졌기 때문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살짝 눈을 찌푸린 악센은 곧이어 놈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저렇게 생긴 놈은 이 나라에 단 한 명뿐이었다.
하하하, 악센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알렉시스?”
대체 저놈이 어떻게.
악센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와 흥미를 담으며 살벌하게 타올랐다.
알렉시스의 두 눈도 오랜 분노를 담아 어둡게 가라앉았다.
두 눈빛이 팽팽하게 허공에서 맞닿았다.
알렉시스는 아직 전생의 기억을 다 알진 못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악센이 그를 괴롭히고 짓밟던 장면이었다.
알렉시스는 악센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드디어 그의 발아래 놓인 이 세계를 불행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흉.
알렉시스는 악센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생각이었다.
쉬운 죽음은 벌이 아니라 용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전생의 그가 느꼈던 무력감, 비참함, 수치심,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그 모든 것들을 악센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 억눌러 왔던 분노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이글거렸다.
오랜 시간을 갈고닦은 그는 이제야 놈을 박살 낼 수 있게 되었다.
악센은 특유의 고고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네놈이 제대로 돌아 버렸군. 감히 나를 종잇장처럼 패대기를 쳐? 설마 네가 황제 궁도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겨우 황제 궁 하나 부수러 왔을까 봐?”
악센의 턱이 더욱 단단해졌다.
“목숨도 하나뿐이면서 이 무례를 어떻게 다 감당하려고 해, 알렉시스.”
알렉시스의 눈빛도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야. 내 목숨이 아니라 네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 같지 않나?”
“…….”
악센이 이를 악물었다.
알렉시스가 저런 식으로 그에게 적의를 품으며 반항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지금이 두 번째인가?
악센은 루이제를 처음 보았던 날 그녀를 모욕했다며 알렉시스가 화를 냈던 일을 떠올렸다.

‘누가 저런 등신하고 결혼을 하나 했더니, 또 껍데기만 화려한 팔푼이가 있었군.’

‘차,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해! 다, 다신 황궁에 오, 오지 않을 거다.’


‘나, 나는 무, 무슨 일을 다, 당해도 괘,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루, 루이, 제는, 루, 루이제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면 화, 황제라도 용서할 수 없어…….’

악센의 눈빛에 살기가 한층 더 강렬하게 일렁였다.


정말로 그때 그냥 알렉시스를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벌 떠는 모습이 퍽 볼만해서 살려 주었더니 이런 뒤통수라니.
“……주제도 모르는 놈. 너는 절대 날 능가할 수 없다. 겨우 이까짓 힘으로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고?”
악센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앞으로도 점점 강해질 거고, 지금까지도 계속 그의 힘을 키워 왔다.
어쩌다 간혹 마력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가 찾아내 잡아먹었다. 그게 어린아이여도 개의치 않았다.
또 다른 누가 절대 그의 힘을 능가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가장 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사람은 오직 그여야만 했다.
모두의 두려움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저 머저리 등신 같은 알렉시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분명 알렉시스 따위 그의 발끝에 밟히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한데, 지금의 알렉시스에게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놈에게 어떻게 이런 힘이 생긴 건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탓이었다.
그 사실이 악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악센 카이슬리.”
알렉시스가 낮게 부르며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악센의 멱살을 붙잡고 가까이 눈을 부딪쳐 왔다.
악센도 지지 않을 듯이 알렉시스의 눈을 꿰뚫을 것처럼 주시했다.
“내 여자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생각 하지 마라. 고통스럽게 짓밟아 줄 거니까.”
악센은 한쪽 입가를 비뚤게 끌어올렸다.
“난 원하는 건 한 번도 갖지 못한 적이 없어. 날 방해한 대가를 치러라, 알렉시스.”
악센이 한 번 비웃자 그의 마력이 강하게 퍼져 나갔다.
닿기만 해도 녹아 버릴 듯한 마력이 온갖 풀들을 태우고 알렉시스까지 순식간에 뒤덮었다.
곧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토록 쉽게 놈을 죽이는 건 조금 아까웠지만, 황궁에 루이제가 있었다.
드디어 그녀를 얻게 된 날 다른 방해는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
띠링!

[공격을 감지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가 발동합니다!]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저항 스킬이 알렉시스의 몸을 감쌌다.


알렉시스를 향해 내뿜었던 마력이 튕겨 나가듯 돌아오는 모습에 악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4 화

.
.
.
악센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보냈던 마력이 그를 덮칠 듯 되돌아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눈동자가 커졌지만 악센은 빠르게 몸을 피했다.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알렉시스의 앞에 마주 섰다.
알렉시스가 멱살을 잡았던 탓에 살짝 헝클어진 옷깃 외에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 입에서 어둡고도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 정도 재주로 나에게 맞서겠다?”
감정이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아 더욱 음산한 목소리.
악센은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알렉시스를 깊이 주시했다.
놈이 어디서 갑자기 이런 힘이 난 건지 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멀긴 멀어도 그와 같은 피가 섞여 있어 늦게나마 마력이 생겨난 걸까?
알렉시스가 더욱 형형한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다 네 덕이다, 악센. 덕분에 내 힘을 깨달았거든.”
그가 허공을 움켜쥐자 어느새 생겨난 검 자루가 손에 쥐어졌다.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검이었다.
현재 악센의 힘을 레벨로 치자면 300 레벨 정도.
알렉시스의 레벨은 200 을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레벨이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이제 애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험치만 더 얻을 수 있다면 악센과 비등한 수준으로 레벨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더 이상 시스템이 그의 힘을 수치화하는 레벨 따위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시스템은 그저 그의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마력을 제어할 방도를 알지 못했던 그가 서서히 깨우치도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레벨은 그저 의미 없는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는 마력에 대해 무지했던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반드시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악센을 죽인다.
그 사실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알렉시스가 전의를 바람처럼 일으키며 검을 고쳐 들었다.
악센의 마력도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나와 맞서고 싶거든 그만한 자격을 갖춰서 와라.”
드르르, 돌들이 부딪치는 듯한 소음과 함께 황제 궁의 잔해들이 몸을 일으켰다.
부연 연기가 짙은 밤공기에 흔적도 없이 파묻혔다.
잔해들이 스스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수만, 수십만의 퍼즐이 동시에 완성되듯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쿵, 하는 소음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황제 궁이 다시 완성되었다.
그 완벽한 광경을 뒤로한 채 악센은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난 아무나 직접 상대해 주지 않거든. 살아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 맞서 주지.”
“……비겁한 놈.”
알렉시스가 이를 악물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의 검이 공중으로 솟구친 순간, 그만큼 빠르게 악센의 모습이 사라졌다.
악센은 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황후궁의 침실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폐, 폐하!”
그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루이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도망을 친 모양이었다.
악센은 해리엇을 향해 건조하게 명령을 남기며 또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서 알렉시스를 죽여라, 해리엇.”

* * *

“하, 하아.”
절로 숨이 차올랐다.
누군가 금방이라도 나를 쫓아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 궁이 무너진 탓이었는지 궁 안의 사람들도 모두 경황이 없고 어수선했다.
나는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게 황후 궁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러다 발을 헛디뎌 까마득한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힘없는 손으로 난간을 스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알렉, 알렉이 여기 있어. 어서 만나야 해.’
무언가가 속에서 울컥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당장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당신의 남편이 된 것도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요.’


‘지금으로서는 제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여기서만 부를 다른 이름을 정하는 건 어때요?’


‘그럼 저는 이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다른 세계, 이안이라는 이름.


그가 있었다는 다른 세계는 내가
원래 살던 세계와 똑 닮은 바로 그곳이었을까?
그와 헤어지기 전 누군가 그를 향해 ‘정이안 헌터님!’이라고 외치던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정말 기억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어서 그가 내 남편 알렉이라는 사실을 알려 줘야 했다.
어떻게 해야 그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
‘알렉, 알렉이었어…….’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발밑으로 평탄한 바닥이 밟혔다.
아직 한참 더 내려가야 했는데 이상했다.
바닥을 둘러본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내려왔던 계단들이 온데간데없었다.
불쑥 고개를 들어 보자 순식간에 주변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호화롭고 눈부시던 황후 궁 내부가 아니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삭막한 돌벽.
심장이 철렁한 내가 주춤 움직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순식간에 공간 이동?
나는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저벅, 저벅.
그때 어디선가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넓은 공동 안을 가득 울리며 소리가 점점 증폭되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느낌.
나는 치아가 부서질 듯이 이를 악물고 소리가 다가오는 쪽을 응시했다.
주먹도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왔다.
이윽고 익숙한 형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루이제.”
“내 이름 부르지 마.”
절로 바드득 이가 갈렸다.
“그쪽 입에서 내 이름 듣고 싶지 않아.”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나와 마주 선 채 붉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놈의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놈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내 남편 어떻게 했어.”
“…….”
놈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바닥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바닥의 돌들이 덜컹 움직이더니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다.
마치 황좌처럼 위엄 있어 보이는 돌의자였다.
놈이 다가가 앉으며 여유롭게 등을 기댔다.
“……곧 죽겠지.”
싸늘한 주위의 온도만큼이나 황제의 눈빛도 무감했다.
공동 안으로 소리가 울려서인지 놈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선명하게 내 귀에 꽂혔다.
“애초에 알렉시스가 나를 상대로 피 한 방울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황궁 안에 들어올 수조차도 없을 거다.
내 힘으로 결계를 쳐 놓았거든.”
“…….”
“놈이 부숴 놓은 내 궁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안타깝게 되었군. 제 딴에는 전력을 다해서 날
도발한 것일 텐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서.”
“…….”
“지금쯤 해리엇이 가진 마검에 난도질당해 죽었을 거다. 그 마검은 수천 년 묵은 영물이라 나와 필적할
만큼 강하고 사납거든.”
“…….”
“놈에게 아무리 마력이 있어도 그 수준이 아직 애송이에 불과해 어쩐다.”
황제의 눈빛에 전에 없던 흥미로움이 실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치가 떨렸다.
놈이 하는 말이 모두 엉터리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애써 외면하며 또박또박 짓씹듯이 소리 냈다.
“알렉은 절대안 죽어.”
“…….”
“적어도 네가 죽기 전에는.”
나는 엄지손톱으로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 있던 반지를 밀어냈다.
언젠가 알렉이 나에게 준 선물 중 하나였다.
이 반지에 어떤 마력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놈을 공격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반지가 내 손끝까지 빠져나온 순간, 나는 황제를 향해 그것을 힘껏 내던졌다.
죽는 건 너야, 이 개자식아.
동시에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두운 복도 안으로 들어간 순간, 폭발음이 들리며 벽이 흔들렸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5 화

* * *

쾅!
알렉시스의 몸이 황궁 밖으로 튕겨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황궁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눈에는 검푸르게 일렁이는 투명한 장막이 보였다.
마력이었다.
‘악센의 결계?’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진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올리비아.”
그의 사역령인 올리비아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주위에 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악센의 결계 때문에 올리비아도 루이제의 곁에 있다가 튕겨 나온 것이다.
올리비아는 그가 무슨 말을 물어볼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
알렉시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올리비아의 눈을 통해 루이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수선한 틈을 타 황궁에서 도망을 치다가 어딘가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다.
올리비아가 따라갈 수 없는 힘에 의해서였다.
“황제가 루이제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나?”
‘……예.’
올리비아가 한번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곳일 겁니다. 저도 가 본 적이 있지요. 그곳에서 황제에게 황후로서 필요한 힘을 받았습니다.’
“…….”
‘저는 그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병에 걸리고 말았지만요.’
“…….”
알렉시스의 턱에 더욱더 힘이 실렸다.
올리비아가 악센에게 마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설마 악센은 루이제에게도 똑같이 그 더럽고 사악한 힘을 부여할 작정인가?
그로 인해 루이제도 올리비아처럼 허약해져 죽을병에 걸리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곳이 어디지? 황궁 안에 있는 건 맞나?”
올리비아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나 황궁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황제가 아니면 찾아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찾아봐.”
‘예.’
올리비아가 사라질 듯 그에게 몸을 숙였다.
온화한 몸짓으로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황제가 주인님께 워든 백작을 보낼 것입니다. 그 기사단장을 조심하십시오.’
“알겠다.”
그가 대답함과 동시에 올리비아의 형체가 흩어졌다.
결계가 황궁 주위를 두르고 있는 와중에 올리비아가 루이제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황궁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어 봐야 했다.
그사이 그는 결계를 찢어야-.
순간 불현듯 그의 주위에서 범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그 기운을 압도할 듯한 기세로 검을 빼 돌아섰다.
푸른 망토와 은빛 갑옷, 짙은 금발과 청록색 눈동자.
열여섯이라는 나이답게 풋풋한 외모였지만 어딘가 그늘이 짙게 깔린 분위기까지.
해리엇이 전에 없던 살의를 가득 품은 채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해리엇의 레벨은 35.
알렉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것이다.
문제는 해리엇이 단단히 쥐고 있는 파란 눈의 검이었다.
알렉시스는 윌스브룩 성에서 엘로이가 루이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검이 막 말을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수천 년 묵은 검의 위력은 악센과도 비등할 것이다.
그 검을 한 번 스치듯 응시한 알렉시스가 해리엇의 두 눈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비켜라, 해리엇. 미성년자를 해치고 싶지 않다.”
“…….”
해리엇이 깊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성년자? 웬 어린 애 취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네가 죽을 싸움이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겠지.”
“여기서 물러나면 황제 폐하가 절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해리엇이 검을 휙 휘두르더니 고쳐 들었다.
전혀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해리엇과 싸워 그를 굴복시키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상황.
알렉시스는 사역령을 한 명 더 불러냈다.
“캐스다인 경, 결계를 찢어 봐.”
그의 말에 해리엇이 의아해하며 인상을 썼다.
불현듯 허공에서 싸늘한 한기가 눈발처럼 들이닥쳤다.
다 찢어지고 해진 망토를 휘날리며 흡혈귀가 송곳니와 기다란 손톱을 드러냈다.
달빛을 반사한 송곳니며 손톱이 밤하늘의 별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그 기운을 느낀 해리엇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해리엇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저건 무슨-.”
캬악-!
그 순간 캐스다인이 하늘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괴성을 내며 결계로 달려들었다.
결계의 표면과 캐스다인의 손톱 끝이 맞부딪치자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섬광이 튀었다.
그가 레벨이 오르는 동안 그의 사역령들 또한 함께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캐스다인이 사정없이 결계를 손톱으로 할퀴고 표면에 꽂아 넣었다.
이윽고 올리비아가 날아오르더니 그 힘에 가세하듯 듯 뻥, 하며 마력을 터뜨렸다.
악센의 결계가 크게 한 번 진동했다.
해리엇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황후 폐하-?”
생전에 황후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손질된 머리와 화려한 의복.
누가 봐도 올리비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부리는 사역령들이다. 설마 너도 죽어서까지 내 수족이 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
해리엇의 몸이 잠시 굳었다.
불꽃 튀는 살벌한 광경을 뒤로한 채 해리엇이 알렉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노라도 한 듯 눈동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언제부터 갑자기 이런 힘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모든 걸 잃고 죽었던 순간부터.”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알렉시스는 해리엇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살짝 당황했지만 해리엇은 늦지 않게 알렉시스의 검을 받아쳤다.
쾅!
성곽 하나를 통째로 떠민 듯한 충격이 해리엇의 두 팔로 전해졌다.
빙판에 금이 가듯 뼈에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헉”
해리엇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겨우 검을 손에 쥔 채 두 팔을 떨어뜨렸다.
단 한 수였다.
그 단 한 번 휘두른 검에 해리엇은 알렉시스에게서 감히 넘볼 수조차 없을 것 같은 힘을 절감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해리엇은 제국의 내로라하는 전사들은 물론이고 황제와도 겨뤄 본 적이 있었다.
황제와 검술 대련을 했을 때도 어마어마하게 초월적인 힘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결이 다른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의 힘을 다 내보이지도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어떻게 알렉시스 마이어스 공작이 이런 힘을…….
“방해하지 마라, 해리엇. 다음에는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알렉시스의 눈빛이 더없이 날카롭게 타올랐다.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순간에도 루이제가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속이 타들어 갔다.
그가 해리엇을 뒤로한 채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두두둥, 해리엇의 검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칼자루에 달린 파란 눈 장식이 안구를 한 번 굴리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눈처럼 동공과 홍채가
생겼다.
[뭐 하는 거야, 해리엇! 답답하군!]
“…….”
[어서 놈을 죽이자! 놈을 죽이고 다른 인간들도 모조리 다 죽여 버리는 거야!]
“…….”
[못하겠으면 나에게 네놈을 넘겨라! 아주 얼이 다 빠져 버렸군!]
“…….”
[……아직도 정신이 안 들었어? 이러다 나도 답답해서 죽어 버리겠다! 어서 날 받아들여! 놈을 못 죽이면
황제가 너에게서 날 빼앗아 갈 거다!]
“……닥쳐.”
그제야 해리엇이 정신을 차린 듯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는 마검이 되어 버린 성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검에게서 피에 대한 엄청난 갈망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눌려 있던 살인에 대한 욕망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들끓었다.
여느 마검들이 그렇듯 저 검도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눈에 닿는 족족 사람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누군가 저 마검에 장악된다면 이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국에 가서도 쉽게
멈추지 못할 것이다.
설마 해리엇이 마검에게 자신의 의식을 넘기려고 할까?
알렉시스의 눈길이 해리엇에게 닿은 순간, 해리엇이 검을 고쳐 들며 웃었다.
“그래, 파란 눈. 저놈만 죽이는 거야. 그러면 내 의식을 내어 주지.”
[정말이야?! 알았어!]
검에 달린 파란 눈이 반짝반짝 눈을 깜박였다.
지금껏 해리엇은 마검에 장악되지 않으려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검에게 지배되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란 눈의 도움이 없으면 알렉시스를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검은 한 번 사람의 의식을 장악하면 신이 나서 폭주할 게 분명했다.
알렉시스를 이길 승산이 있었다.
해리엇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느끼며 웃었고, 알렉시스는 빛과 같은 속도로 놈에게 다가갔다.
‘저 자식이-!’
화르륵 붉어진 해리엇의 눈동자.
해리엇의 의식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혹 사라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6 화

* * *

폭발음과 함께 악센의 주위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루이제가 뭘 던진 거지?
‘이건 무슨-.’
악센의 미간이 깊어진 순간, 낯익은 음성들이 불현듯 솟구쳤다.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목소리였다.
오래전에 들었던 선대 황제 부부의 말들이었다.
문득 그의 심장에 박혀 있던 가시가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에 악센은 살짝 소스라쳤다.
왜 이러는 걸까?
그들의 비난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도 더 이상 그에게 별다른 타격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빌어먹을.’
쾅!
악센은 이 불쾌한 광경에서 벗어나려 허공을 내리쳤다.
그러나 생전의 황제 부부는 마치 오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를 응시했고, 그 앞에서 악센은 작은
소년일 뿐이었다.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가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악센의 눈이 커지고 턱은 단단해졌다.
그의 심장에 금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이제?”
아니, 알렉시스?
악센이 마력을 터뜨렸다.
일 초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빠져나가기는커녕 더욱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그를 감쌌다.
이번에는 얼굴을 잊고 있었던 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황태자 전하를 해칠 수가 있어?’


‘사람은 죽이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넌 어떻게 된 애가…….’

“……!”
악센의 눈이 더없이 크게 벌어졌다.
이미 생김새를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센은 자신의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우아하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와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
저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여자의 앞에서 어린 악센이 눈물 가득한 눈동자로 서러움과 분노를
쏟아냈다.

‘어머니야말로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죠? 제, 제가 일부러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요!’
‘…….’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어머니만큼은 제 말을 믿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시끄러워! 아무 말 하지 마. 넌, 넌…… 무엇으로도 이 잘못을 만회할 수 없어. 너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모두 고통스러워졌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분노에 찬 어머니가 파르르 떨었다.


늘 완벽하게 아름답고 신비롭던 어머니의 얼굴이 저렇게나 환멸에 가득 차 일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왜?
왜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지?
그는 지금 제국의 모든 이들을 발아래에 무릎 꿇린 황제였다.
더 이상 아무도 그에게 상처 줄 수 없었고, 그 어떤 일에도 마음이 다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악센은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아물었던 틈새가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더없이 불쾌했다.
이런 기분을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다시 깨우치고 싶지 않았건만……!
어린 악센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와 마력을 키웠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내가 사실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면 부모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까? 아니, 부모 같은 거 이제 나도


필요 없어.’
‘아무도 날 사랑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야말로 관심 없으니까.’
‘모두가 날 두려워하게 만들 거다.’

어린 악센은 이를 갈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 몸을 웅크렸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를 멸시하고 상처 주는 사람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는 흑마법사였다.
하늘이 선택한 특별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쾅!
마침내 악센은 루이제가 던진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이 이상 환각으로 그를 자극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루이제라도 목을 끊어 버리고 말 것이다.
도망치려고 해 봤자 어차피 혼자서는 길도 찾을 수 없는 공간.
악센의 손짓 한 번에 바닥에서 벽돌들이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치 제단과도 같은 높고 기다란 단을 만들어 냈다.
루이제가 어디선가 끌려와 그 제단 위로 충돌하듯 떨어졌다.
“아!”
돌들이 작게 튀어나와 루이제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옥죄었다.
그녀가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지만 괜한 짓이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루이제가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악센은 몇 걸음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주 흥미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군.”
“……가까이 오지 마.”
루이제가 날카롭게 이를 갈며 말했다.
그녀는 가시 돋친 모습마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악센은 엷은 웃음이 나왔다.
“너에게 선택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도망치려고 해 봤자 내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루이제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왜 하필 나야?”
“…….”
루이제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네가 그토록 멸시하고 경멸하던 알렉의 부인인데 자존심도 안 상해?”
“…….”
악센은 이를 악물었다.
새파랗게 돋아난 핏줄이 그의 이마를 비스듬하게 가로질렀다.

‘왜 하필 나야?’

그래.
그녀는 그가 멸시해 마지않던 알렉시스의 여자였다.
그 사실 때문에 루이제 또한 하찮게 여기고 있었지만, 끝내 악센은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너는.”
“…….”
악센은 한 걸음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너는 완벽하다.”
“…….”
루이제의 눈빛이 더욱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악센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루이제는 천치 같은 알렉시스의 부인이 되고도 늘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결혼한 지 한 달, 아니 1 년도 되지 않아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루이제는 온화하게 알렉시스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이 놈을 괴롭히고 무시하면 그의 편이 되어 위로해 주었다.
재산과 저택, 작위를 모두 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쯤 되면 알렉시스를 버리고 떠날 줄 알았건만.
악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신경에 거슬렸다.
백 번도 넘게 도망치면 도망쳤지, 알렉시스를 탓하기는커녕 감싸 주다니.
귀족들을 자극해 알렉시스와 루이제 사이를 어긋나게 해 보려고 해도 루이제는 휘둘리지 않으며 굳건했다.
2 년 전쯤에는 알렉시스가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워 보기도 했지만, 루이제는 끝까지 놈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시시했다.
그 정도면 놈을 버릴 줄 알았기에 실망스러웠다.
어디까지 놈을 믿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알렉시스는 그의 가족들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다.
놈의 아버지는 아주 어려서부터 놈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 또한 형편없는 자식을 낳은 탓에 스스로 자책이 심했다는 것을 악센도 알고 있었다.
누이인 엘로이는 알렉시스를 우연히 마주쳐도 아는 척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결혼식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루이제는 그렇게까지 알렉시스를 감싸 줄 수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악센은 두 사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에게는 단 한 명도 무조건적으로 감싸 준 사람이 없었는데.
“……!”
악센은 손을 뻗어 화르륵 마력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런 상념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불길이 한 번 크게 일어나더니 이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그 자리를 눈부시게 투명하고 영롱한 반지 하나가 차지했다.
50 캐럿도 넘는 다이아몬드가 수천 갈래로 빛을 뿜어냈다.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기로 손꼽히는 장인에게 제작을 지시했던 반지였다.
루이제의 사나운 눈길이 그의 얼굴을 지나 반지로 내려왔다.
“…….”
그녀만이 이 반지를 가질 수 있었다.
“넌 황후에 걸맞은 유일한 여자다. 천치 같은 알렉시스의 부인으로 사는 삶에서 해방시켜 주지.”
악센은 루이제를 옭아매고 있던 마력을 풀었다.
그녀가 직접 이 반지를 받게 할 작정이었다.
루이제는 그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반지는 악센의 손을 떠나 루이제의 눈앞 허공에서 영롱한 광채를 자랑했다.
루이제의 눈길이 그 반지에 닿았다.
싸늘하게 실소하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반지를 움켜쥐었다.
“……!”
과연 그의 인정을 받아들이는 건가 싶어 악센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커졌다.
“나는.”
그러나 루이제는 혐오감 가득한 눈으로 반지를 깨뜨릴 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조강지처를 버리는 놈들이 제일 역겨워.”

루이제가 힘껏 반지를 내던졌다.
차가운 돌벽에 부딪친 반지가 섬뜩한 굉음을 냈다.
이내 구슬처럼 맑은 소리를 내며 반지가 흠 하나 없는 모습으로 돌바닥을 굴렀다.
악센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반지를 한번 보더니 다시 루이제를 응시했다.
대체 왜?
그 멍청한 알렉시스 놈보다 그가 부족한 게 뭐지?
알렉시스는 감싸 주면서 왜 그는 밀어내는 거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7 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시스에 비해 그가 부족한 거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센은 애써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루이제 너에게 저 정도 반지는 볼품없었던 모양이군.”
“…….”
“저런 것보다 더 화려한 건 얼마든지 더 만들어 주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 어떤 걸로도 난 네 사람이 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설마 알렉을 버리고 너
같은 놈의 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안 될 건 뭐지?”
악센이 이를 갈며 되물었다.
지금 그는 루이제의 무례함을 많이 봐주고 있었다.
심지어 고작 알렉시스의 부인으로 사는 것과 황후가 되는 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허울뿐인 황후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루이제는 황후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게 될 테니까.
“넌 내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황후가 될 것이다. 전처럼 널 무시하는 사람들도 없을 거고,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겠지. 그동안 널 불쾌하게 만들었던 이들은 손짓 한 번으로 처형을 시킬 수도 있고 말이야.”
“…….”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말하는 건 뭐든 들어 줄 수 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이상적인 황제 부부가 되는 거야. 온 세상의 백성들이 우리를 우러러보고 또 두려워하도록.”
“…….”
“그러려면 너밖에 없다. 이래도 안 되겠나?”
싸늘히 되물은 악센은 순간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걸까?
낯설고 껄끄러웠다.
분명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진심이었지만, 이렇게 입 밖에 내고 보니 전혀 그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런 기분을 겪으려고 루이제를 원하는 건 아니었는데.
불현듯 루이제가 낮게 소리 냈다.
“올리비아는 왜 버렸어?”
“……올리비아?”
악센은 살짝 찡그렸다.
지금 올리비아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다.
루이제가 서늘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후가 질투에 미쳐서 날 죽이려고 했어. 정말 대단한 여자야.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
“…….”
악센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불쾌하고 거슬리는 기분을 참으며 조금 굳어 있었다.
문득 올리비아가 다 망가진 몰골로 황후 궁 정원에 쓰러져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가 올리비아의 기운을 모두 빼앗아 완전히 죽이기 전이었다.
루이제가 차갑게 조소했다.
“나 같으면 당신 곁에서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올리비아는 당신을 너무도
사랑했나 봐. 그저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고 했어.”
“…….”
“세상에 어떤 여자가 당신을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어? 그런데 올리비아가 죽어 버렸으니
어쩐다.”
“…….”
“당신을 사랑할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루이제가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 눈빛이 꼭 가시처럼 그의 내면을 할퀴는 것 같았다.
꼭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왜 죽었더라?
아.
악센은 뒤늦게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고행 끝에 마력을 발현시킨 그는 자신의 힘을 시험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특별한 힘을 얻게 된 자신의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왜? 왜 그때 내 말을 안 믿어 줬죠?’
‘…….’
‘내가 일부러 황태자 전하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으아악! 저리 가! 내 아들은 너 같은 괴물이 아니야!’

악센은 또다시 크게 실망했다.


늦게라도 그를 믿어 주는 부모의 모습 같은 건 끝내 볼 수 없었다.
와드득.
악센은 손짓 한 번으로 부모의 목을 부러뜨렸다.
죽어 버린 부모의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들도 내 부모가 아니야.
이런 부모라면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것이다.
악센은 그의 부모를 죽였던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올리비아.
올리비아도 제 손으로 죽였지만 단 한 번 다시 떠올린 적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그의 귓가로 불현듯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저는…… 폐하께,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제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품을 내어 주세요.’

그 처량했던 눈빛과 목소리.


그때 그녀에게서 이토록 그리움이 가득했었나?
악센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올리비아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랑 같은 게 아니야.”
“…….”
“이제 내 힘을 받아 강한 황후로 새로 태어나라, 루이제.”
악센은 이제야 꿈에 그리던 것을 얻은 사람처럼 웃었다.
비록 올리비아는 실패했지만 루이제는 그의 힘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강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에게 그녀는 너무나 과분한 여자이고, 그의 옆자리야말로 루이제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꺼져. 꿈도 꾸지 마.”
악센은 짧게 웃으며 루이제를 다시 결박했다.
그녀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원했던 완벽한 여자인가.
이미 그는 그 혼자만으로도 흠결 하나 없는 특별한 존재였지만, 루이제 같은 여자를 황후로 둔다면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황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선대 황제 부부나 그의 친부모보다도 완벽하고 강한 부부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부부의 아이는 세상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겠지.
상상만 해도 악센은 희열이 차올랐다.
“기대되지 않나? 넌 우리 제국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되는 거다. 나처럼 초월적인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지.”
루이제가 그의 결박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래 봐야 헛수고일 뿐이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려 입술을 벌렸지만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실패했지만 루이제 너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악센은 손을 들었다.
루이제에게 줄 마력이 그의 손 위에 고이기 시작했다.
“……!”
루이제가 경멸로 가득 찬 눈으로 뭐라 소리쳤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특별히 너에게는 과거의 기억도 모두 잊게 해 주지. 완전히 새로 태어나 오로지 내 황후로서 순종하게 될
거야. 알렉시스 같은 건 이제 버리는 것이다.”
악센의 입가에 웃음기가 고였다.
누구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그의 힘까지 나눠 받은 루이제.
그런 그녀가 영원한 그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희열이 느껴졌다.
그렇게 마력을 흘려보내던 악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를 향한 루이제의 눈빛이 문득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원망과 분노, 경멸이 거대한 태풍처럼 그녀의 두 눈에 가득 고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루이제를 결박하던 힘이 느슨해 졌다.
그가 원했던 루이제의 모습이 저런 것이었나?
루이제가 짓씹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 남편을, 모욕하지 마.”
“…….”
“당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순수한 사람이니까.”
“…….”
“알렉은…… 이유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도 않고, 남의 재산과 작위를 마음대로 빼앗지도 않아.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남의 부인을 함부로 납치하지도 않는다고.”
“…….”
“당신처럼…… 끔찍한 사람은 절대 날 못 가져.”
“…….”
악센의 심장이 빙판 깨지듯이 사방으로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불현듯 과거에 보았던 루이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렉시스에게 상냥한 눈빛으로 웃어 주던 장면이었다.
그 앞에서 알렉시스는 그녀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악센은 높은 곳에서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내려다보았다.
꼭 그런 눈길로 알렉시스가 아닌 그를 봐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가.
누군가 거울이라도 들이밀어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본심을 마주한 악센이 살짝 이를 악물었다.
루이제는 그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하고 마음이 넓은 여자이거늘.
정작 그는 그런 그녀를 갖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깨달음이 처음으로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될 것이다.
악센은 다른 마력을 화르륵 일으켰다.
“내 것이 되지 않겠다면 죽어라.”
“…….”
살의로 가득 찬 그의 마력이 온 사방을 뜨겁게 달궜다.
그럼에도 루이제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8 화

* * *

쾅!
마검이 해리엇을 지배하려는 순간, 알렉시스가 그 검을 내리쳤다.
해리엇의 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한 반동이 그를 덮쳤고, 그와 해리엇 모두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밀려났다.
알렉시스는 해리엇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붉게 물든 놈의 눈빛이 전에 없던 흡족함을 품으며 웃었고, 입가는 싸늘하게 올라갔다.
이미 마검이 해리엇의 의식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다.
“해리엇.”
알렉시스는 다시 해리엇을 향해 걸음을 뗐다.
“진정한 기사라면 검 따위에 몸을 내어 주지 말아야지.”
“…….”
“어서 돌아와라.”
그러자 해리엇이 씨익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와 검이 일체화된 것처럼 푸른 기운이 검과 함께 해리엇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해리엇이 고고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 내렸다.
“꽤 강한 인간이야. 황제와 견줄 수도 있겠어. 그런데 그거 아나? 어차피 인간들은 아무리 마력이 극에
달해도 날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난 단순한 마검이 아니거든.”
“……?”
그럼 뭐라는 거야?
의아해하는 그의 반응에 마검이 의기양양해했다.
“이제야 내 정체를 밝히게 되었군. 난 마왕이다.”
“마왕?”
뜬금없는 소리에 알렉시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냥 마족도 아니고 마왕이라니, 허언증에 걸린 검이 아닐까 싶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시스템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푸른 눈의 검]
[남, 나이: ?]
[고대의 마왕 셀바인이 인간 마법사에 의해 죽은 이후 성검으로 환생했다.
마왕이었던 기억을 되착은 이후에는 수백 년 동안 성검에서 마검이 될 기회만 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악센이 검에 깃든 성력을 제거해 그를 마검으로 탈바꿈시켰다.]
[전투력: 999]

알렉시스는 등장인물 일람을 빠르게 훑었다.


놀랍게도 마왕이었다는 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해리엇이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드디어 인간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온 거야! 어린놈들까지 모두
도륙 내 주마!”
눈 깜짝할 새에 칼날이 알렉시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를 내리쳤으나 알렉시스는 그보다 빠르게 몸을 피했다.
갑자기 마왕?
설마 이곳에서 마왕을 상대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악센도 성가신데 마왕까지 그의 앞을 막다니.
알렉시스는 지금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루이제가 그녀를 탐내는 놈에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검을 두고 간다면 죄 없는 백성들이 별안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셀바인?”
마검의 이름을 부르며 알렉시스가 해리엇의 뒤로 조용히 나타났다.
그 낮은 목소리에 해리엇의 두 눈이 얼어붙은 듯이 살짝 커졌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마검의 기운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모를 텐데 듣게 되어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 틈을 노리듯 알렉시스가 다시 마검을 내리쳤다.
해리엇의 손에서 검만 떼어 낸다면 그 이후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띠링!

[긴급!]
[지금 바로 고급 남편 보상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소멸시킬 수 있는 폭탄(1 회)’을 이용해서 푸른 눈의 검을 물리쳐 보세요!]

시스템 창이 그를 독촉하듯 떠올랐다.


마검과 그의 레벨 차이 때문인 듯했다.
이미 보상 아이템에 대해서는 그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검과 해리엇이 일체화된 지금 ‘무엇이든 소멸시킬 수 있는 폭탄(1 회)’을 써서 마검을
물리친다면 해리엇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해리엇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아는 놈인가?”
마검이 그리 물으며 그에게 반격했다.
꽤 신이 난 모습이었다.
맞부딪친 두 검에서 번개도 빛을 잃을 법한 어마어마한 섬광이 번쩍였다.
알렉시스는 전력을 다하는 심정으로 검 자루와 가까운 부분을 내리쳤다.
“오래전에 인간에게 죽어 놓고.”
콰쾅!
하늘이 깨질 듯한 굉음과 함께 또다시 빛이 튀었다.
“또 당하고 싶어서 나타난 건가?”
알렉시스의 도발에 마검의 파괴력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바로 이게 악센이 노렸던 것인가?
악센은 해리엇이 검에게 몸을 내어 주는 순간을 위해 마검을 일깨웠을 것이다.
해리엇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원작에서는 악센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해리엇이 마검에 지배당할 일도 없었다.
“깨어나라, 해리엇.”
쾅!
“어차피 황제는 내 손에 죽는다.”
콰쾅!
다시 검신끼리 맞붙었다.
그의 마력에 손상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레벨이 999 인 검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문득 해리엇의 목소리가 눈부신 빛을 뚫듯이 낮게 들려왔다.
그 순간 알렉시스는 이 목소리가 마검이 아닌 해리엇의 의지로 나오는 소리라는 사실을 느꼈다.
“……해리엇?”
마검에 몸을 주고도 의식이 있었어?
“알렉시스 당신은 내 검에 죽고 말 거야.”
해리엇이 낮게 웃으며 뛰어오르자 마검이 알렉시스의 머리 위를 덮쳤다.
“내 검은 다름 아닌 마왕이거든.”
휙!
해리엇이 검을 휘둘렀다.
‘스킬. 고급 남편의 뜨거운 손길.’
알렉시스는 자신의 검에 스킬을 덧씌웠다.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그의 검 끝까지 화르륵 피어올랐다.
검이 맞부딪히자 마검까지 불길이 퍼졌다.
어쩌면 용암보다 수만 배는 더 뜨거운 열기였다.
“아, 뜨거!”
순간 해리엇이 검을 놓쳤다.
챙,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알렉시스가 아이템을 썼다.
띠링!

[‘무엇이든 소멸시킬 수 있는 폭탄(1 회)’을 사용합니다!]

“아, 안 돼!”
마검의 푸른 눈 장식이 창백하게 번뜩였다.
그 눈에 불투명한 포션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어, 어서 다시 나를 잡아, 해리-.”
“…….”
얼빠진 채 서 있던 해리엇이 붉게 익은 자신의 두 손과 마검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느새 해리엇의 두 눈은 원래의 청록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수 있을 법한 아주 짧은 찰나.
펑!
알렉시스의 아이템이 마검의 바로 위에서 터졌다.
띠링!

[푸른 눈의 검이 소멸되었습니다!]

흙바닥에 있던 검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렉시스는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파란 눈의 검의 형태가 아직 그에게는 보이고 있었다.
마검의 영혼이었다.
알렉시스는 그 위로 손을 뻗으며 지시어를 낮게 읊었다.
“나의 사역령이 되어라.”
“…….”
마검의 형체가 스르륵 사라지며 그의 시스템으로 들어왔다.
아직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탓에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마검이 된 마왕을 사역령으로 부릴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는데.
띠링!

[사역령 포섭에 성공했습니다!]


[보유 사역령 4/230]

“셀바인.”
알렉시스가 갓 사역령이 된 검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그가 쓰던 검은 인벤토리로 사라지고 다른 검의 형체가 그의 손 위로 뻗어 올라갔다.
그의 시스템에서 마검이 정화된 듯 한층 깨끗해진 푸른 빛을 뿜어내며 나타났다.
이건 누가 봐도, 성검이었다.
마왕의 힘이 정화되면 그건 어떤 존재라고 해야 할까?
문득 궁금해진 순간 해리엇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검…… 내 검이 어떻게…….”
해리엇이 알렉시스의 검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건 그의 검인데 어떻게 알렉시스의 손에서 맑은 빛을 낼 수 있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리엇의 청록색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죠?”
“…….”
“당신은…… 당신은 누구야?”
“…….”
알렉시스는 해리엇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해리엇은 혼란스러움과 분노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알렉시스가 늦지 않게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나는 알렉시스 마이어스.”
“…….”
“살려 줄 때 이만 물러나-.”
“공격해, 멍멍아!”
불현듯 어디선가 명랑한 음성이 솟구쳤다.
알렉시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멈칫했다.
절대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해리엇도 흠칫하며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크와앙!
집채만큼 커진 기드온이 울음소리를 내며 해리엇을 향해 날아갔다.
그 등에 탄 엘로이는 전사처럼 굳세게 손을 뻗어 해리엇을 가리켰고, 그 뒤에서는 리디트 황자가 엘로이의
허리를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
엘로이? 기드온?
리디트 황자?!
기드온은 윌스브룩 성의 지하에서 얌전히 리디트 황자를 지켜 주고 있었을 텐데……?
동시에 부욱 찢기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열렸다.
마왕을 소멸시킨 덕에 레벨은 계속해서 고공 행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59 화

* * *

한편 황궁 안.
보좌관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해리엇과 알렉시스의 싸움을 숨도 못 쉬고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꽃이 살벌하게 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황제가 아끼는 기사단장이라 그런지 파괴력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런 해리엇을 상대로 몇 수나 버티고 있는 저 사람이 설마…….
모두가 비슷한 의문을 떠올리는 와중 누군가가 힘겹게 소리 냈다.
“저, 저 사람이 정말 브렌트 공작, 아, 아니 윌스브룩 자작이 맞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그제야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 탄식을 쏟아 냈다.
그들은 오늘 여러 번 말문이 막혔다.
황제 궁이 무너졌다가 다시 마법처럼 원상 복구가 되었고, 누군가 빛처럼 나타나 황제를 패대기친 데다가
이번에는 워든 백작을 상대로 불꽃을 튀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윌스브룩 자작이라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황제가 초월적인 권능을 보여 준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들은 알렉시스의 모습에 더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순둥이 알렉시스에게 어떻게 저런 힘이?!
“말도 안 돼!”
“그냥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 아닙니까?”
“아까 폐하께서 워든 백작에게 윌스브룩 자작을 죽이라고 한 말 못 들었나?”
“윌스브룩 자작이 저럴 리가 없는데!”
마침 앤드류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심각하게 창밖을 주시했다.
“맞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는 윌스브룩 자작, 알렉시스 마이어스입니다.”
“뭐, 뭐라고?!”
귀족들이 앤드류를 돌아보았다.
앤드류는 호위대처럼 분장하고 있던 수염을 떼어 내고 무거운 모자도 벗어 내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시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
“백작이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오!”
앤드류는 조금 결연한 눈으로 알렉시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루이제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황궁의 호위대로 위장 잠입했다.
루이제를 구출하는 일에 어떻게든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먼 북부에 있어 연락이 빨리 닿지 않아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나타날
줄이야.
앤드류 또한 알렉시스의 힘이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금세 납득했다.
북부에서 알렉시스가 윌스브룩 성을 찾아내고 전설의 명약인 힐리베리를 구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제야 다 이해가 갔다.
알렉시스는 이미 더 이상 과거의 알렉시스가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 훨씬 이상으로 강해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가 반역을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콰쾅!
알렉시스의 검이 워든 백작의 검을 내리친 순간, 그 빛이 앤드류의 눈동자에도 비쳤다.
앤드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힘내게, 알렉시스. 자네는 분명 황제를 처단하고 루이제를 구할 거야.”
“……!”
앤드류는 루이제를 따라갔지만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분명 침실 밖을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봤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감쪽같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데려간 걸까?
그러나 앤드류는 알렉시스가 루이제를 구하고 끝내 황제를 물리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화, 황제 폐하를 처단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 것 같은가?!”
사람들이 거듭 경악하여 외쳤지만 앤드류는 자신의 믿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이 나라도 더 이상 예전의 릴트 제국이 아니게
되겠죠.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
확신에 찬 앤드류의 말에 사람들이 또다시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렉시스가 해리엇의 검을 소멸시켰다.

* * *

알렉시스는 빠르게 기드온의 기억을 훑어보았다.


성의 지하에서 훌쩍이던 엘로이를 리디트가 토닥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루이제가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하실에 숨어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드온은 그의 지시대로 작은 강아지의 모습으로 리디트와 함께 있었다.
알렉시스는 금세 기드온의 기억을 꺼 버렸다.
어떻게 저 셋이 함께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그는 얼른 루이제에게 가야 했다.
“……기드온, 엘로이. 조심해라. 황자 전하를 잘 지켜 드려.”
“해리엇은 나한테 맡겨!”
“으아악!”
엘로이의 외침에 기드온이 앞발로 해리엇을 후려쳤다.
해리엇은 비명을 내질렀고, 리디트 황자는 엘로이에게 매달린 채 응원이라도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짧게 황자를 바라본 알렉시스는 그들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기드온이 있는 이상 해리엇이 엘로이와 리디트를 위협하진 못할 것이다.
‘스킬. 광속.’
루이제는 어디 있지?
그가 빠르게 허물어진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 올리비아에게서 신호가 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올리비아가 어딘가로 향했다.
알렉시스는 올리비아의 눈을 통해 길을 확인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오래된 성이 나타났다.
더 이상 황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성 주위에는 어김없이 악센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유독 짙고 단단한 결계였다.
‘스킬. 고급 남편의 간지럼.’
알렉시스는 망설임 없이 성을 향해 스킬을 날렸다. 그러자 금세 결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루이제.
설마 그가 늦은 건 아닐까?
무사해야 하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처럼 뛰었다.
문마다 겹겹이 결계가 쳐져 있어 알렉시스는 결계와 함께 문들도 모두 날려 버렸다.
콰콰쾅.
육중한 성이 다 무너질 듯한 충격과 굉음이 연거푸 귀를 찢을 듯 울렸다.
눈 깜짝할 새에 알렉시스는 성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루이제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든 순간,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넓고 둥근 천장으로 이루어진 공동.
사방에 차갑고 어둡게 배어 있는 마력.
“알렉시스?”
누군가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어느 것도 그의 눈이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루이제만이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알렉?”
“루이제.”
낮게 그녀의 이름을 읊은 그는 빠르게 루이제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알렉!”
반가움과 놀라움,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채 그녀가 외쳤다.
그가 아는 눈부신 생김새와 보랏빛 눈동자, 은빛 머리카락.
루이제가 마침내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무사했구나.
알렉시스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그녀가 무사하여 정말로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리 말하려 그가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무사했군요, 당신.”
“…….”
루이제가 글썽거리며 제단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일렁였다.
그가 그녀를 걱정한 만큼 그녀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절감되었다.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왜 전에는 몰랐을까?
알렉시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목소리가 다 떨릴 만큼 심장이 뛰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루이제.”
“…….”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가 차원을 넘어서.
그 얼마나 하고 싶던 말이었던가.
그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는 그의 염원과 약속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하며 괴로워 했었는지 그의 피부와 영혼으로 처절하게 느껴졌다.
기억 포션 그 이상의 감정과 기억들이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정말.”
“…….”
루이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정말로 당신이에요……?”
“…….”
“이제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당겨 와락 껴안았다.
“……!”
“……루이제.”
이 부드럽고 애틋한 품과 감촉.
처음 이 세계로 온 이후 그녀를 수없이 안아 보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가 원했던 포옹이었다.
“당신이 제가 있던 세계에 다녀간 뒤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억을 버려야
했죠. 이제야 되찾아서, 당신이 삶을 버릴 만큼 외롭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알렉.”
루이제가 안도하듯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 당신이군요.”
“…….”
알렉시스도 그녀를 더 바짝 감싸 안았다.
그의 불행을 나눠 가져야 했다는 사실 말고는 완벽한 여자.
그래서 그는 그녀를 두고 목숨을 끊었지만, 이제는 루이제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당신이 나와 함께 오랫동안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당신은 항상 내 소중한 남편이었어요. 너무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해요.’

“……다신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알렉시스는 앞으로는 이 품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빼곡하게 감쌌다.
이제야 그는 비로소 그녀와 함께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뭣들 하는 거야. 루이제에게서 떨어져라, 알렉시스.”
문득 돌아본 곳에는 악센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0 화

* * *

“세상이 바뀌다니!”
“그건 반역이 아닌가!”
귀족들을 비롯한 황궁 사람들이 동요했다.
앤드류의 폭탄 발언에 말문이 막혀 꼼짝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몇몇 사람들은 덜컥 겁을 냈다.
그동안 폭군의 끄나풀 노릇을 너무도 충실하게 해 온 탓이었다.
황제에게 잘 보여 특혜를 얻으려고 공을 들인 게 얼마인데 하루아침에 모두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반역자! 폐하께서 고작 윌스브룩 자작에게 당할 것 같은가!”
“당장 몬델리이 백작을 붙잡아! 폐하께서 아시면 자네는 뼈도 못 추릴 것이네!”
“자네 가족들까지 씨가 마를 줄 알아야 될 거야!”
“정말 기가 막히는군!”
앤드류가 황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이미 내 가족들은 북부에서 모두 몰살당했어! 그 빌어먹을 황제 때문에 난 모든 걸 잃었다고! 어디
나뿐만인 줄 아나? 자네들같이 썩어 빠진 관료들도 이제 다 끝날 줄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폐하께서 당할 일은 결코 없-.”
쫙!
순간 누군가가 말을 잇던 관료의 뺨을 쳤다.
근처에 있던 시녀들을 비롯하여 유리엘라 또한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살이 다 터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미쳤어?”
부엌에서 윌스브룩 자작 부인에게 줄 음식을 가져왔던 하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년 여인의 눈빛이 사납게 타올랐다.
감히 부엌 하인이 하늘 같은 관료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앤드류마저 뜨끔했다.
중년의 하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날카롭게 꾸짖었다.
“황제가 죽으면 네놈부터 도려내야겠구나! 그리 충성심이 깊으니 어디 저승까지 따라가 모시거라!”
“이런 정신 나간 여편네를 보았나!”
관료가 큼직한 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하인을 날려 버릴 것처럼 크고 두툼한 손이었다.
그 손이 하인의 머리를 날리기 직전, 앤드류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관료가 흠칫 놀라 손을 빼려고 했다.
“놔, 이거 안 놔?!”
“이분이 누군지 알고 무례를 범하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자네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을 분이네.”
“뭐?”
앤드류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하게 부엌 하인을 바라보았다.
앤드류는 그녀가 황궁에 있었던 덕에 루이제가 붙잡혀 온 사실을 늦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비록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황제의 근처에 머물면서 쓸 만한 정보가 있는지
찾아봐 준다고 했던 것이다.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언젠가 반역을 일으킬 거라는 앤드류의 말에 그녀는 놀라긴 했지만, 이내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를 더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나도 황궁을 오가면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봐야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루이제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지 말 것을.’
‘예?’
‘아니다. 그럼 앤드류 자네가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줄 수 있겠니?’

물론 그녀는 부엌 하녀의 의복이 자신의 기품과 맞지 않는다며 불만이 많았다.


“저분이 대체 누구길래?”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앤드류는 붙잡고 있던 관료의 손목을 확 떠밀었다.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녀의 정체를 보호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와 그녀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황궁으로 루이제가 납치당한 순간부터 가만히 참을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알렉시스가 어마어마한 힘으로 황제와 워든 백작을 공격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지금…….
오델리아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가발을 벗었다.
머리를 몇 번 흔들자 그녀의 원래 머리 색이 구불구불한 머릿결에 반짝였다.
진회색 가발이 사라지고 붉은빛이 감돌자 사람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누구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부엌 하인인 줄 알았을 때는 누구도 볼 생각 하나 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앤드류는 그들이 설마 하며 떠올리는 인물의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오델리아 마이어스 전 브렌트 대공작 부인. 알렉시스의 어머니이시다.”
“……!”
사람들의 턱이 일제히 크게 벌어졌다.
오델리아는 그런 반응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평소보다 한층 진지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 박힌 자들이라면 우리 가문의 뜻에 협력하겠지? 브렌트 공작가가 건재했던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 황제 놈의 장난질에 영원히 무너질 줄 알고?”
“……부인!”
그녀의 일침에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사실 오델리아는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지금의 알렉은 정말로 그녀의 아들 알렉시스가 맞을까?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오델리아는 그가 황제와 맞설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했다.
그가 정말로 그녀의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황제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자리에 모여 있던 관료들이 말없이 동요했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워든 백작이 붙잡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이 동시에 그쪽으로 눈길을 향했다.
“뭐? 워든 백작이?!”
“저 커다란 짐승은 대체-!”
앤드류는 서둘러 다시 창밖을 유심히 확인했다.
엘로이 영애가 크고 복슬복슬한 짐승을 쓰다듬으며 나무에 칭칭 묶인 워든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뭣들 하는 거야. 루이제에게서 떨어져라, 알렉시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황제를 응시하는 내 눈길이 곱지 않았다.
알렉과 나를 향해 있는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줄 알았는데 용케 여기까지 왔군. 해리엇은 어떻게 됐지? 자네가 쉽게 물리치지 못했을 텐데.”
“……이것 때문인가?”
문득 알렉이 싸늘하게 대꾸하며 나를 등지고 섰다.
그가 손을 아래로 펼치자 금세 그의 손에서 웅장한 분위기의 검 하나가 나타났다.
검신에서 청명한 기운이 일렁였다.
검에서 이토록 성스럽고 존엄한 분위기가 나다니.
누가 보더라도 예사 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검 자루 쪽에 달린 파란 눈 장식이 깜박이더니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소리 냈다.
“기분이 이상해. 깨끗한 물로 몸을 씻은 것 같아. 이게 바로 내 주인님의 힘인가? 대단해…….”
“……!”
검이 말을 했어?
나만큼이나 황제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벌어졌다.
“셀바인.”
황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주인님이라니. 저 검이 어떻게 네놈에게 있는 것이냐.”
눈빛만으로도 뭐든 뚫어 버릴 것처럼 사나웠다.
알렉은 여유롭게 검을 두어 번 휘둘렀다.
스릉, 그의 검에서 강한 파동이 일어났다.
“악센 네놈이 아주 위험한 검을 각성시켰더군. 덕분에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검이 생겼지만 말이다.”
“너 이 자식 어떻게…….”
황제가 험악한 얼굴로 이를 짓씹었다.
알렉이 가진 검이 무척이나 놈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해리엇이 가지고 있던 검 같은데, 알렉이 그 검을 사로잡을 거라고는 황제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래. 내 남편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지?
뒤통수 맞은 기분이 어때?
나는 딱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기분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의 안색이 꽤 볼만했다.
알렉은 황제를 주시하다가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
“루이제. 황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나는 잠시 알렉을 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나한테도 올리비아처럼 마력을 주려다가 갑자기 죽이려고 했어요.”
“…….”
알렉은 말없이 다시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이 너무도 섬뜩하여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루이제가 무사한 걸 천운으로 여겨야 할 거다, 악센.”
“……!”
그 순간 엄청난 힘이 그에게서 솟구쳐 나왔다.
동시에 황제도 새카맣게 빛나는 기운을 뿜어냈다.
쿠쿠쿵, 주위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나는 진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알렉과 황제의 대립에 집중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마치 어두운 달빛과 맑은 햇빛의 싸움 같은 광경.
여기서.
정말로 여기서 그는 황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할까?
아니면, 그가 다치는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그를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여기서 황제를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황제의 힘이 밀리더니 어느 순간 다시 놈이 알렉을 압도했다.
그러나 알렉은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힘을 끌어 올렸다.
황제가 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넌 절대…… 날 죽일 수 없어.”
“…….”
“아무도, 아무도 날 능가할 수 없다!”
“……!”
황제의 힘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힘은 희한하게도 역류하듯 다시 황제에게 엄습했다.
동시에 알렉의 마력이 엄청난 파동을 일으키며 뻗어 나갔다.
너무도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발밑이 약간 기우뚱한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쿠쿵,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음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1 화

.
.
.
황제가 건물을 부수며 밖으로 튕겨나갔다.
알렉이 나를 안은 채 그 근처로 가 서서히 발을 디뎠다.
쿠쿠쿵,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성이 하늘까지 가득 메울 듯한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 같았다.
황제가 알렉의 힘에 밀려난 게 분명한데, 어떻게 됐을까?
설마 벌써 죽었을까?
그때 어둠을 뚫고 두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며 나타났다.
황제가 짧게 웃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알렉시스.”
황제의 하얀 제복이 달빛을 반사했다.
알렉은 황제를 한 번 본 후에 나를 향해 말했다.
“잠시 여기 계셔 주십시오. 올리비아가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네?”
내가 의아하게 되묻자 문득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누군가가 부옇게 빛이 나는 모습으로 내 곁에 서 있었다.
단정한 빛깔이지만 화려한 드레스에 머리를 땋아 올려 장식한 여인.
주황색에 가까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
누가 봐도 죽은 황후의 모습이었다.
“황후 폐하?”
어떻게 죽은 황후가 여기에?!
“어, 어떻게…….”
뭐라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유령? 귀신?
황제도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황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올리비아?”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황제도 이 상황이 놀랍고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올리비아가 왜 저런 꼴로 여기 있는 거지?”
황제가 재차 소리 냈다.
나 또한 놀라 알렉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내 옆에 없었다.
“그건 네놈이 제일 잘 알지 않나?”
“……!”
퍼억
알렉이 푸른 빛깔의 마력이 실린 주먹을 황제에게 내리꽂았다.
그가 황제를 정통으로 타격한 듯 큰 충돌이 일어나며 황제가 날아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덮쳐 오는 알렉의 힘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알렉이 황제를 압도하고도 남을 듯이 강해 보여서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그가 황제에게 다가가며 낮게 소리냈다.
“내가 왜 너를 단숨에 죽이지 않는 건지 아나?”
“…….”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알렉을 노려보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위로 알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난 당장이라도 네놈을 비명에 죽일 수 있어.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난 강해지고 있거든. 네가 깨운
마왕검을 단 한 번 휘둘러도 넌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겠지.”
“…….”
알렉이 우뚝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그에게서 빛나는 기운이 일렁였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의 파괴력을 내 눈으로 실감하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넌…… 남의 고통이 뭔지 모르는 놈이야. 내가 주는 고통도 생각해 본 적 없겠지.”
“……!”
퍽!
또다시 알렉이 위압적인 힘으로 황제에게 주먹을 내리쳤다.
그의 위력에 내 어깨가 흠칫 떨렸다.
황제가 그에게 반격하자 나는 두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들이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하늘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어디 똑같이 겪어 보도록 해. 내가 느꼈던 굴욕감. 고통.”
알렉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이제 황제도 전력을 다해 싸울 것만 같았다.
“힘내요, 알렉…….”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절실하게 그를 응원했다.
황제를 상대할 힘을 얻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죽었다가 돌아온 그의 의지와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나는 간곡하게 바랐다.

‘내, 내가 다, 다음 생에, 다, 다시, 태어나면…… 지, 지금보다 훠, 훨씬 더…… 와, 완벽하게 사,


사랑해 주겠습니다.’
‘다, 당신에게 와, 완벽한 남편이 되, 될 때까지…… 난 다, 다시 태어나고…… 또, 또 다시 태, 태어날
거야…….’

“알렉…….”
다치면 안 돼.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지금이 그와 나의 마지막 기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강해져서 돌아오지 않고 여관에서 그대로 죽었다면, 나도 지금쯤 이미 저승에 있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로 남은 생을 그와 함께 평범하게 누리고 싶었다.
심심할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그런 나날을 보내며 애틋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늙어 죽을 때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그런 미래를 꿈꿔도 될까?
아무런 상처 없이 같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굳건한 믿음과 응원뿐이었다.
‘힘내요. 꼭 이겨서 우리 같이 행복해져요.’
아프지도 말고요.
“다치면 안 돼요…….”
콰쾅, 퍽!
감히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위력이 오고 갔다.
어느새 사람들이 궁 밖으로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진 숲에서 이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경을 나는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알렉이 황제를 두들겨 팰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또다시 거대한 힘끼리 충돌했다.
“말해 봐. 왜 나를 그토록 짓밟으려 했는지.”
알렉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게 이유가 있을 것 같나? 개미새끼 한 마리 짓밟아 죽이는 일에?”
퍽!
쿠쿵.
황제가 멀리 밀쳐지자 알렉이 금세 그 앞으로 빛처럼 이동했다.
알렉에게 멱살이 잡히면서도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네까짓 놈 괴롭게 죽든 말든 나에게는 동정할 가치도 없지. 나한테 넌 고작 그런 존재인 거야,
알렉시스.”
쾅!
“……!”
내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철렁했다.
황제가 쓰러진 자리에 땅이 깊게 파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신 일어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괴력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기묘하게 희열에 찬 얼굴로 반격했다.
“알렉 I”
그가 맞기라도 하나 싶어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황제가 알렉에게 얻어 맞았다.
-퍼억!
“……!”
또 때렸어!
놈이 밀리는 게 내 눈으로도 보였다.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약간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저 오만하고 잔인한 황제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는 일이 다 있다니.
그게 바로 내 남편 알렉이라니……!
지금까지 놈에게 당한 일들을 알렉이 주먹으로 하나씩 대갚음하는 것 같아 속이 풀리는 듯했다.
나는 이제 그에 대한 걱정보다도 묘한 희열을 느끼며 눈앞의 광경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황제가 힘을 못 쓰는 건지 아직 덜 쓴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렉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알렉의 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왜? 이제 네가 부려 먹을 존재들이 모두 사라졌나? 네가 불러낸 마수들, 마왕 검. 앞으로 또 뭔 짓을
해도 다 소용없어.”
퍼버벅!
“제기랄!”
황제가 온몸을 불태우듯 마력을 일깨웠다.
“죽어라, 알렉시스!”
하늘과 사방이 요동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힘을 황제가 내뿜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 저게 뭐…….”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서 올리비아가 말했다.
“황제가 불리한 걸 알았나 봅니다. 온 힘을 다 써 버리고 있어요. 자신의 본체를 불러내서 모두 죽이려는
것입니다.”
“뭐, 뭐라고……?”
황제가 쏟아 내는 힘이 이곳까지 바람으로 들이닥쳤다.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멀찍이서 보이는 사람들이 나무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몇 명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지만 올리비아 덕분인지 나는 겨우 서 있기라도 할 수 있었다.
휘오오오, 바람과 마력이 뒤섞여서 부는 소리가 꼭 귀곡성 같았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을 본다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알렉은 무언가 때를 기다리듯 가만히 놈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밤하늘을 새카만 구름이 가득 채우더니 사방에 불꽃이 튀겼다.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무섭게 내 가슴을 울렸다.
동시에 차가운 빗줄기들이 자비 없이 쏟아졌다.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울지 눈앞이 다 아득했다.
불현듯 새카만 구름들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괴물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저게 뭐야?!
그 모습이 은근히 황제를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 알렉이 말했다.
“이제야 본체를 드러내셨군.”
하늘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악센과 구름이 동시에 입술을 움직여 소리 냈다.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라, 알렉시스.”
“…….”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목을 벤다고 죽지 않는다.”
“……!”
황제의 음성이 자못 의기양양하게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목을 베어도 안 죽는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비범한 존재여도 설마 저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럼 놈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황제에게 모두 당하는 건가 싶은 두려움이 들긴 했지만, 놈을 죽일 방법은 존재할 것이다.
문득 알렉이 손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신호하는 듯한 손짓에 무언가가 낡은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더니 황제의 뒤에서 정확히 목을 겨냥했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내 귓가를 자극했다.
그와 동시에 깨끗하게 베인 머리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굳건히 서 있던 몸통도 조금 늦게 쓰러졌다.
‘황제를, 베었어……?’
소름이 내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머리 위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봐야 쓸모없다고 했잖아. 난 하늘이다. 겨우 저런 육신 따위에 얽매여 있지 않아.”
“…….”
그럼에도 알렉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해 보였다.
문득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말하는 검이 다시 위용을 드러냈다.
“죽는 건 너다, 악센. 난 내가 죽고 난 이후 이 세계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거든.”
“……뭐?”
하늘에서 황제의 음성이 불쾌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널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도 알게 되었지.”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2 화

“……!”
황제의 치명적인 약점?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우르르, 시커먼 하늘이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저 경악스러운 모습이 릴트 제국의 전역을 어둡게 뒤덮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제국민들은 지금쯤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을까?
그들의 두려움을 생각하니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황제가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폭군인 줄 알았더니 악마, 아니 재앙이었잖아?
황제의 괴상한 목소리가 다시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치명적인 약점? 그런 걸 네놈이 알 리가 없지. 어디 마음껏 날 죽여 봐라, 알렉시스. 그 전에 네놈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네 심장. 그것만 찾아 베어 내면 죽는 게 아닌가?”
“…….”
불현듯 하늘의 형상이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알렉의 말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닿아 있었던 황제의 두 눈이 문득 땅 위를 넓게 내려다보았다.
“소용없어. 네놈이 내 털끝 하나 건드리기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다 삼켜 버릴 것이다. 오늘 여기서 모두
다 죽는 거야.”
“끝까지 사람들 목숨을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는군.”
알렉이 낮게 혀를 찼다.
나는 증오와 경멸을 담아 놈을 쏘아보았다.
설령 놈에게 죽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심지까지 놈이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왔다.
“이런다고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즐거워? 다 죽고 혼자만 남고 싶은 거야?”
“…….”
놈의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분노한 것처럼 먹구름이 굉음을 내며 크게 꿈틀거렸다.
그 굉음보다 더 거대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어차피 나는 혼자였다. 거기서 무력하게 내 존재를 경외해라.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두려운 존재인지
모두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마.”
결국 저런 거였어?
세상을 제멋대로 지배하고 싶어서?
빗줄기가 내 눈가를 적셨다.
새카만 하늘이 점점 짙어지고, 희미했던 달빛조차 완전히 가려졌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가득 차올랐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구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몸을 뒤트는 소리,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내
귓가를 찢을 듯이 장악했다.
세상이 종말의 날이라도 맞이한 것 같은 광경이라니.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식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로이와 시어머니, 그리고 리디트 황자와 여러 사용인들은 잘 있을까?
저 모습을 보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모두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캐스다인 경.”
문득 알렉이 누군가를 낮게 부르더니 짧은 빛이 번쩍였다.
캐스다인이라고 불린 존재가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며 유유히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의 검이 오묘한 빛을 뿜어냈고, 그 빛이 알렉을 비추었다.
그에게서도 영롱한 푸른 빛이 차츰 발산되고 있었다.
‘……알렉.’
나는 두 손을 세게 붙잡았다.
싸늘한 소름이 피부에 돋아났다.
하늘에서 지진이 나는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리고, 회오리 모양으로 점점 구름이 어둡게 겹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 무언가 검은 기운이 고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황제의 마력입니다.”
내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이윽고 올리비아가 다시 소리 냈다.
“다른 데로 피하겠습니다.”
채 대답하기도 전 을리비아가 나를 붙잡더니 어딘가로 단숨에 움직였다.
황제의 형상에서 조금 멀어진 듯했지만, 어차피 놈의 시야 안이었다.
불쑥 알렉이 휙 날아올랐다.
무언가를 발돋움 삼아 디디며 차츰 높게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 없었다.
‘황제의 심장을 찾으면…… 죽일 수 있다고?’
어디 있는 거지?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방금 전 목이 베였던 황제의 시신을 찾아봤지만 눈앞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심장을 찌른 건 아니었는데, 정말로 그 육신은 죽은 게 맞을까?
재차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가 구름 사이에서 튀어나와 알렉을 붙잡으려고 했다.
알렉은 그 위를 훅 뛰어넘더니 다시 회오리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연이어 그를 공격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스치지도 못했다.
이윽고 알렉이 황제의 얼굴을 한 형상과 마주 섰다.
두 눈이 마주친 짧은 찰나, 그는 망설임 없이 즉시 검을 쳐올리며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박.
몇 번이나 검이 쇄도한 건지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속도가 빨랐다.
황제의 형상이 알렉의 검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뒤늦게 일그러졌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입술로 황제가 웃었다.
“하하하. 소용없다고 했잖아, 알렉시스 “
알렉은 황제의 형상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놈의 심장을 찾으려는 듯했다.
회오리 중앙에 고이고 있는 마력은 어느새 아까보다 훨씬 크고 짙어졌다.
필요한 만큼 모아 한 번에 퍼뜨릴 작정인 걸까?
“내 심장은 너 따위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
“…….”
지금까지 우리 제국의 황제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 저런 괴물이었다니.
제국 전역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넌 절대 알아낼 수 없을 거다. 누구도 날 죽일 수 없어.”
“아니야. 알렉은 알고 있어.”
내가 작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리디트 황자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었고, 윌스브룩 성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절대 모를 것 같은 여러 일들을 알렉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새집을 구해 주고, 나와 식구들을 몇 번이나 지켜 주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황제의 심장을 찾아 처치할 것이다.
내 주위를 휩쓰는 폭풍에도 나는 흔들림 없이 서서 알렉을 지켜보았다.
그때 섬뜩한 크기로 회오리치던 구름이 갑자기 멈췄다.
“자, 이제 모두 사라져라. 다 죽어 버리는 거야.”
황제의 울부짖음에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놈의 마력이 순식간에 장막처럼 넓게 퍼졌다.
태풍에 휩쓸린 새들이 그 어두운 장막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귓가를 자극하던 소음들마저 멍하게 들릴 만큼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저게 정말로…… 흔적도 없이 생명을 소멸시키는구나.
황제의 마력이 퍼지는 속도가 내 눈으로 다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놈의 마력은 정말로 한순간에 세상을 다 집어삼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참혹한 어둠을 뚫고 문득 눈 부신 빛 한 줄기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모든 게 눈 깜박할 찰나였다.
황제의 장막을 앞질러 땅으로 내리꽂혔다.
눈앞이 번쩍했다.
“……!”
헉 놀란 내가 뒷걸음질 친 순간, 올리비아가 나를 붙잡고 재빨리 물러났다.
뭐지?
눈을 깜박였으나 강렬한 빛에 사로 잡혔던 시야는 금세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무척 정결하고 맑았던 빛.
나는 그게 알렉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황제의 형상이 치명타라도 입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빠르게 범위를 넓혀 가던 장막 또한 가만히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숨을 죽이자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심장 간수는 안 보이는 곳에 잘했어야지.”
“……!”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이 저 앞쪽에 서서 무언가 커다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전동건? 기계식 총?
갑자기 어디서 저런 게 난 거야?!
그 밑으로는 목이 베였던 황제의 시신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시신의 가슴에 구멍이 나 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할 왼쪽 가슴이었다.
땅바닥에 처박혀 있던 황제의 머리가 스르륵 돌더니 눈을 크게 떴다.
“……!”
경악한 내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 시신, 안 죽은 거였어?
목이 날아갔는데도?
그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으나 특유의 붉은 눈빛만큼은 시리도록 선명했다.
“뭐야. 날 속인 거냐?”
“아는 척을 했으면 네가 심장을 지키려 도망을 쳤겠지.”
“거지 같은 놈. 끝까지 넌 나에게 거슬리는구나.”
“네가 안도하고 기고만장한 탓이다.”
“개자식…… 진즉에 널 죽였어야 했는데…….”
“…….”
핏발이 날카롭게 선 황제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뭐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정말로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장만 찌르지 않는다면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생명이 붙어 있다니.
행여나 알렉에게 즉사당할까 봐 몸을 해쳐도 소용없다고 수를 쓴 듯했다.
그런데 이제.
알렉이 놈의 심장을 처치했다.
그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쿵쾅 난동을 부렸다.
살면서 이토록 크게 가슴이 박동한 적이 있었을까?
“잘 가라, 악센.”
“…….”
알렉이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빛나는 총구를 황제의 코앞에 드리웠다.
그 순간 온 세상이 숨을 멈춘 듯했다. 나 또한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정말로.
정말로 황제가 죽는구나.
드디어 사라지는 거야.
내 모든 불행의 원흉.
고통의 온상.
원수라는 말도 부족한 나와 내 남편의 세상의 재앙.
바로 그런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내 두 눈에 또렷하게 담기 위해.
나는 두 손을 굳세게 말아쥐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나에게는 불과 몇 달, 몇 년 정도 시달린 게 전부이지만, 알렉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을까?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알렉이 총구를 고쳐 들자 빛나는 마력이 그를 휘감았다.
진정한 소멸을 직감한 듯 황제가 외쳤다.
“안 돼-!”
마치 총탄과도 같은 마력이 쏘아져 나가자 황제의 육신이 모두 사라졌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3 화

* * *

……죽었어?
정말로 사라진 거야?
나는 황제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독하게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영원히 지옥처럼 군림하고 있을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그 오만한 육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다니.
정말로 죽은 걸까?
나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삼켜 버릴 듯하던 황제의 형상과 시커먼 구름, 회오리와 마력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지던 빗줄기도 어느새 그쳤고, 여느 새벽녘과 같이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정말로, 사라졌구나…….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겨우 의식을 붙잡고 서서 알렉을 향해 희미하게 소리 냈다.
“알렉”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루이제.”
“다 끝난 건가요?”
“…….”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에게도 쉽사리 받아들일 만한 일이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힘겹게 대답했다.
“예. 다 끝났습니다.”
“…….”
정말로 끝이 난 거구나.
그의 말에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폭군이 사라졌다.
겨우 폭군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했던 악의 존재가 소멸했다.
그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게 했던 존재가 마침내 죽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걸까?
“아, 알렉…….”
눈앞이 휘청, 기울어졌다.
밤사이에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을까?
황제가 죽고, 알렉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루이제!”
털썩.
그가 내 이름을 외치는 음성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뭐지?
내가 어떻게 되었더라?
소멸하기 직전, 악센의 영혼이 자신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잠시 고여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찌꺼기 상태.
악센은 금세 자신의 무력감을 깨달았다.
‘제기랄! 제기랄!’
진짜 죽어 버린 거야.
이 위대한 내가 겨우 알렉시스에게!
말도 안 되는 굴욕감에 악센은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일도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이 세계에서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알렉시스 따위가……!
믿지 못할 만큼 치욕스러웠다.
그렇다면 그를 압도한 알렉시스는 대체 얼마나 강했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그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모두 소멸시키지도 못했고, 그의 허전함을 채우지도 못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가 이토록 발버둥을 쳤던가.
예기치 못한 허무한 죽음에 악센은 피눈물을 흘렸다.
가슴에 뻥 뚫려 있던 구멍이 이 세상의 크기만큼 커진 듯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은데.
원했던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럴 거면 나는 왜 태어난 거지?’
왜 결국 세상은 그를 버린 걸까?
문득 사람들이 떠나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흔적이 있는 곳에 찾아와 애도하는 이도 없었다.
그때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뱃고동처럼 크게 울렸다.
왈칵, 누군가의 발이 그의 영혼을 짓밟으며 달려 나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부인!”
“어서 부인을 편한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황제 이 개새끼! 부인께서 잘못되면 죽어서도 저주할 테다!”
“드디어 놈이 사라지다니! 이, 이게 정말 다 어떻게 된 기적인지……!”
“윌스브룩 자작이 우리들의 은인입니다. 아니, 이제 원래대로 브렌트 공작이라고 불러야지요.”
“황제 새끼가 죽다니 정말이지 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
폭풍처럼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 고요함에 묻힌 듯이 악센은 보좌관들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간과 쓸개까지 다 빼 줄 듯이,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그를 모욕하다니.
놈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분노로 몸부림칠수록 남은 영혼마저 점점 꺼져 갔다.
악센이 마지막 불꽃을 필사적으로 태우듯이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들. 내가 기필코 부활해서 네놈들을 다 고통스럽게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부활할…….’
그 순간 악센의 시야에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투명한 형상이었다.
‘……올리비아.’
그래.
올리비아가 다시 나타났었지.
어떻게 된 거였지?
악센은 혼란스러웠다.
죽은 올리비아를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알렉시스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놈에게 주인님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올리비아.’
악센은 올리비아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 소리에 올리비아가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보이는 걸까?
‘그래, 올리비아. 이리 와야지, 어딜 가는 거야?’
그러나 올리비아는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그냥 돌아섰다.
‘……네, 주인님.’
낮은 대답 소리와 함께 그를 등진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당한 광경에 악센은 심장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저게 뭐 하는 짓거리지?
올리비아가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닐까?
왜 올리비아가 먼저 그에게 돌아서는 걸까?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듯한 표정 또한 믿기 힘들었다.
그를 외면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악센은 분기가 차올랐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쓸모없는 데다가 한심하고 나약한 여자였다.
제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화가 들끓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감정이 악센은 낯설었다.
어떻게 감히.
올리비아 네가 나를 등질 수 있나.
그 광경에 악센은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불현듯 깨달았다.
올리비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도 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무정한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들으셨나요, 폐하?’
‘…….’
‘루덴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더라고요. 흥미로운 소식이라도 돌고 있는 모양이에요.’
‘글쎄 하워드 후작과 그 벗들이 전 브렌트 공작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거 있죠?’

‘바라시는 대로 조용히…… 죽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제가 바라는 걸 들어주세요.’


‘…….’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제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품을 내어 주세요.’

‘…….’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악센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에 놀란 악센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올리비아!’
대체 왜.
‘올리비아-!’
그의 비명이 지독하게 자신의 심장을 옥죄었다.
스스로를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도 남을 듯했다.
그의 손끝에서 죽는 순간에도 오로지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떠올랐다.
너무 뒤늦게 깨달은 걸까?
‘…….’
아.
나를 직접 낳은 어머니조차 그런 눈으로 날 봐 주지 않았지.
세상 모두가 나에게 그런 눈빛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그런데…….
‘올리비아.’
있었다니.
‘올리비아-!’
기다란 마지막 외침과 함께 황제의 남은 생명이 사라졌다.
그를 등진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처음 보는 채로.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4 화


11. 대공 부부의 탄생

“루이제.”
알렉시스는 루이제를 안은 채 서둘러 보상으로 받은 공간 이동 아이템을 써서 이동했다.
금세 도착한 곳은 수도에 있는 그들의 저택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알렉시스는 조심스럽게 루이제를 침대에 눕힌 후 그녀의 안색을 확인했다.
“루이제.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제.”
“…….”
다시 불러 봐도 마찬가지.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서둘러 루이제의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 걸까?
“미치겠네.”
알렉시스는 우선 루이제의 손을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사나 다른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치유 능력이 있으니 그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시스는 마력을 불어 넣어 루이제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죽은 황제 때문에 몹시 긴장을 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방금 전 황제의 마력으로 인해 뭔가 나쁜 영향이라도 받은 건 아닐지…….
문득 황제가 자신에게 마력을 주입하려고 했다는 루이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혹시라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루이제의 상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받고 있었다.
이질적인 어떤 힘에 시달리며 힘겹게 사투를 벌였다.
이 불길하고도 생소한 기운은…….
‘황제의 마력!’
“……!”
알렉시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이 검은 기운은 황제의 마력이 분명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알렉시스는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컴컴했다.
황제의 마력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어둡고 사악한 데다가 강렬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이미 그 힘이 그녀에게 스며들었으니 내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그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제기랄…….’
알렉시스는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한 거지?
다시 루이제의 손을 잡고 그녀의 상태를 느껴 보았다.
그녀의 의식은 악센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이만큼이나 버텼다니.
어두운 마력에 잠식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루이제 또한 올리비아의 상태를 보아 알고 있었다.
“루이제…….”
알렉시스는 서둘러 자신의 치유력을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괴로워하는 안색을 보니 그의 가슴도 미어졌다.
설마 이미 그의 힘으로도 손쓸 수 없는 상태는 아니겠지.
최악의 상상은 애써 미뤄 두며 알렉시스는 간절하게 그녀를 치유했다.
그의 마력으로 악센의 힘을 소멸시켜야 했다.
루이제의 이마 언저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의 기운이 점점 그녀의 안에 퍼져 들어가기 시작하자 동시에 악센의 마력이 꽤 강하게 그의 힘을
밀어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벌써 그녀를 장악했을 듯한 지배력.
알렉시스는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충돌에 루이제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의식을 놓지 않은 것도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제가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루이제.
그녀의 이름은 속으로 삼키며 알렉시스는 자신의 마력을 더 크게 퍼뜨렸다.
부디 이 빌어먹을 마력 때문에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기를.
원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랐다.
알렉시스의 청정한 기운이 루이제의 전신을 정화하듯이 퍼져 나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걸까?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바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처럼 그때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릴트 제국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사람들은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가 사악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로 악마였을 줄 누가 알았겠나.”
“정녕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죽는 줄 알았다고요. 살다 살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을
줄이야……!”
“난 아직도 하늘이 악령으로 뒤덮인 악몽을 꾼다네. 다 죽이겠다는 황제 놈의 목소리가 지금도 천지를 다
울리는 것 같아.”
“우리 집 아이들도 걸핏하면 웁니다. 정말이지 어찌나 무섭고 끔찍했다고요.”
“설마 황제가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일은 없겠죠? 꿈에도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놈의 황제 이야기는 앞으로 하지도 않는 게 좋겠어. 영 불결하고 꺼림칙한 것이 지금이라도 갑자기
나타날 것 같지 않나? 하늘에도 대문짝만하게 제 얼굴을 전시하는 놈인데 어딘들 못 나타나겠어?”
“듣고 보니 으슬으슬 오한이 드는군요. 앞으로는 차라리 죽은 황제를 ‘그놈’이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겠군. ‘그놈’을 직접적으로 칭하기에는 껄끄러웠는데 아주 잘됐어.”
그리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것을 느꼈다.
초현실적으로 흉흉한 일을 겪은 탓이었다.
살면서 그런 일을 겪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누군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세상이 다시 밝아져서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브렌트 공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놈’ 때문에 우린 다 죽고 말았겠지요.”
“제 말이 바로 그 말 아니겠습니다.”
“어휴…….”
사람들은 십년감수한 듯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늘이 시커멓게 뒤덮여 죽을 뻔한 일도, 이렇게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그날 황제의 형체 안에서 쏟아져 나오던 한 줄기의 빛을 떠올렸다.
그 빛이 압도적인 힘으로 황제를 처치했다는 건 제국민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둘 다 믿지 못할 존재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번에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그건 바로 이 제국의 구원자.
그 경이롭고 찬란하며 강력한 존재의 모습이 그들의 심장을 벅차도록 뛰게 했다.
.
.
.
“주인님, 저택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또?”
제임스의 말에 알렉시스가 그쪽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대체 이번엔 어떤 손님인지 물어보기도 지칠 정도였지만, 그는 옅은 한숨만 내쉬며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번엔 누구지?”
“지금까지 오셨던 분들이 모두 함께 다시 오신 것 같습니다.”
“…….”
알렉시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살짝 얼굴을 쓸어 만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재를 나서기 시작했다.
“다들 응접실에 있나?”
“예, 주인님. 손님들께서 주인님과 가족분들 모두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군.”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감사 인사라면 지겹게도 많이 받았다.
황제를 처치해 주어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가 지금도 제국 전 영토에서 발송되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부터 먼 지방의 평민들까지.
다 읽어 볼 수나 있을까?
저택의 근처에는 하루가 다르게 꽃다발이 쌓이고 있었다. 감사와 경의의 의미였다.
이윽고 그가 응접실에 훤칠한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 각하!”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스무 명쯤 될까? 대부분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중에는 앤드류와 브룩스도 섞여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알렉시스가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다가갔다.
그들의 의복 또한 평소의 정장이 아닌 격식을 갖춘 예복이었다.
이윽고 그가 사람들 앞에서 멈춰 섰다.
“감사 인사라면 문턱이 닳도록 받은 것 같은데 어쩐 일이십니까.”
알렉시스는 귀족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를 향해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반짝반짝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앤드류와 브룩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과거에 그를 멸시하던 사람들이었다.
얼마 전 그는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을 5 차까지 모두 사용하여 사교계 일원들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귀족들의 얼굴을 다시 한 명 한 명 보고 있자니 옛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그를 외면하고 괴롭히던 사람들이 저토록 간절한 눈으로 그를 찾아오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묘한 기분이 속에서 휘몰아치는 것 같았지만 알렉시스는 의외로 덤덤하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이런 일로 반응하기에는 그는 이미 온 생명을 다해 간절히 바라던 소원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문득 고위급 귀족 한 명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름이 루카스였던가?
알렉시스에게는 죽은 마르셀과 다를 게 없는 인물이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요, 각하?”
“…….”
“우리는 바로 그날 멸망과 기적을 동시에 보았습니다. 멸망이 이 영토에 드리운 순간 동시에 기적이
태어났죠.”
“…….”
다른 귀족들이 동의한다는 듯 한 번씩 끄덕였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단 한 명도 이런 기적이 우리
제국에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죠.”
“…….”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후회하고 자책하고, 통탄하였습니다. 속이 짓무를
정도로 탄식하였죠.”
루카스가 안타까워하자 다른 귀족들 또한 괴롭고도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스는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저들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귀족들은 그에게 그간의 일들에 대해 사죄를 하러 온 게 분명했다.
루카스가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감히 각하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
“그동안 각하를 괴롭게 하고, 각하의 고통을 외면한 것. 그 모든 일들을 용서해 주신다면 각하께서
바라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귀족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그의 앞에서 몸을 낮췄다.
알렉시스는 순간 움찔했다가 몸이 굳어 버렸다.
뭐라고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귀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용서해 줘, 알렉시스. 다른 변명은 하지 않겠어. 우린 그동안 자네를 무시하고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네는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 그 사악한 황제로부터 세상을 지켰어. 지금껏 우리가 ‘
그놈’의 밑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믿기지 않아. 정말 미안했네.”
“…….”
알렉시스는 눈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것처럼 핏발이 선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기분은 뭘까?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슬픔과 분노와는 전혀 다른 이 감정.
알렉시스는 지난 평생 동안 그의 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몸을 뒤트는 듯한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계속 켜켜이 쌓여 굳어 있기만 했던 그 울분이 이제야 와르르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절벽이 부서지듯 속에서 요동이 쳤다.
아.
이 또한 그가 바라던 것이었구나.
모두와의 화해.
악의 없는 평화로움.
어딜 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고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늘 겉돌기만 했던 그는 이제야 이 제국의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
그 순간 그의 뒤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알렉.”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5 화

“……!”
알렉시스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루이제가 응접실 맞은편의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천천히 내려왔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은빛 머리, 부드럽게 흘러내린 잔머리와 신비롭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진주 같은 피부에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짙은 푸른 계열의 드레스까지.
그녀의 모든 게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광채가 사람으로 태어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알렉시스는 그녀의 자태에 눈이 콕콕 쑤시는 통증마저 느꼈다.
마치 오로라가 흘러들어 오는 것처럼 루이제가 점차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름 전 루이제는 황제의 마력 때문에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놀라울 만한 정신력으로 몸 속에 들어온 사악한 기운과 맞섰다.
그가 그녀를 치유한 후에도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루이제는 전보다 더 빛나는 모습으로
눈을 떴다.
그 변화가 알렉시스는 내심 의아하고 놀라웠다.
혹시 그의 치유력을 한 번에 다량으로 쏟아부었기 때문일까?
이윽고 루이제가 기품 있는 자태로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알렉.”
결점 하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알렉시스는 저 음성을 따라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래도 루이제는 매혹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는 확실히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신비로움을 발산했다.
“루이제.”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루이제는 아득하면서도 애틋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손님들께서 나까지 찾는다고 하여 내려와 봤어요. 그런데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손님들께 제 이야기를 끝내려던 참입니다.”
“……그랬군요.”
루이제가 손님들을 바라보자 알렉시스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다시 넓게 응시했다.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그의 옆에 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줘, 알렉시스.’

이렇게 과거의 일들을 지나간 일로 묻어 두게 되는 걸까?


앞으로는 새로운 일들만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루이제의 손이 그의 손 안에 있는 한, 그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이윽고 알렉시스가 낮게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일어나게.”
귀족들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윽고 한 명씩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다 일어섰을 즈음 알렉시스가 소리 냈다.
“모두 외면할 줄 알았는데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고맙군. 하나 나에게는 이미 잊어버린 일이야.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나 마찬가지거든.”
“…….”
“그래도 자네들에게 사과의 말을 들으니 내 과거가 위로받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이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알렉시스…….”
모두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는 알렉시스도 기분이 남달랐다.
이걸로 전생의 고통이 완벽하게 모두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아는 한 마지막 남은 찌꺼기가
모두 말끔히 씻겨져 내려간 건 분명했다.
깨끗하게 앞만 볼 수 있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알렉시스.”
알렉시스는 소리가 난 쪽을 찾아보았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인물 한 명을 발견했다.
“……개리슨.”
마르셀과 한패이자 방직 공장에도 나타나 ‘어디 잘되나 보자!’라며 큰소리를 뻥 치고 사라졌던 개리슨.
개리슨의 곁에는 마르셀의 남동생인 랭던도 함께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개리슨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네를 업신여겼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자네는 그리도 대단한 놈이었는데…….”
“…….”
알렉시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개리슨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과거에 저들이 그를 괴롭힐 때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이 아주 작은 먼지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많은 것들을 초월하고 극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브룩스가 앞으로 나섰다.
“알렉시스.”
“…….”
“우리가 자네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네.”
“……?”
알렉시스가 의아해하자 루이제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브룩스는 그와 루이제를 번갈아 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알렉시스, 루이제.”
“…….”
약간의 침묵 후, 브룩스가 떨리는 숨결과 함께 정점을 찍듯이 내뱉었다.
“우리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

* * *

수도의 저택은 북부의 정원과는 전혀 다른 산뜻함과 따스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정원의 그늘 아래에 앉아 한층 포근해진 날씨와 햇살을 한껏 만끽했다.
어느새 봄이 온 걸까?
이런 여유와 평화를 느껴 본 지가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 몸 속 한가득 봄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하나 없이 속 안이 개운하고 가벼웠다.
‘……하. 이런 게 진짜 행복이지.’
나와 내 남편을 괴롭게 했던 근원이 모두 사라진 후에 누리는 해방감.
죽은 황제가 나를 위협하는 힘을 남겨 놓긴 했지만, 그 사악한 기운은 알렉이 물리쳐 주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것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알렉시스, 루이제. 우리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어김없이 어제 나와 알렉을 찾아왔던 귀족들의 제안이 떠올랐다.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라면 황제와 황후를 말하는 거겠지.
그런 자리에 대한 가능성은 지금껏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루이제.”
불쑥 들려온 알렉의 음성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알렉.”
왔구나.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머리를 말쑥하게 넘기고 깔끔하게 제복 차림을 한 그는 우리 제국의 유일무이한 빛과 희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근사했다.
‘누구 남편인지 정말 보면 볼수록 멋있다니까…….’
그가 맞은편 의자에 앉자 내가 물었다.
“준비는 다 끝난 건가요?”
“예.”
알렉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도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어쩜 이렇게 눈만 마주쳐도 좋은지.
오늘 브룩스와 몇몇 관료들이 우리의 저택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어제 그들이 했던 제안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가 조금 떨리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아니, 사실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거든요.”
“…….”
“당신은 어때요?”
“…….”
알렉은 잠시 말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과연 우리의 마음이 같을까?
어느 쪽이든 나는 그와 내가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남편과 함께 우리의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매일 같이 꾸려 나가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알렉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란 내가 움찔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 경건한 행동에 어쩐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알렉.”
“루이제.”
그가 깊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내렸다.
내 손등에 한동안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내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관료들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합니다.”
“…….”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가 조금 늦게 되물었다.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도요?”
“…….”
“이번에 황제가 되면 추대된 거지만, 다음에 되려고 하면 반역이 될 거예요.”
“…….”
“명예롭게 황제가 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텐데 정말 거절할 건가요?”
“…….”
내 덤덤한 물음에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나처럼 그 또한 확고하다는 게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건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닙니다.”
“…….”
“루이제 당신의 옆자리에 영원히 머무는 것. 그것 외에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
내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당연하게도 그와 나는 같은 마음이었구나.
우리에게는 리디트 황자가 있었지만, 황자와는 별개로 황위에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 황관의 무게를 지는 대신 오로지 사랑만을 품에 가득 안고 싶었다.
“그래요. 나도 당신이 황제가 된다면 정말 쓸쓸할 것 같았어요. 나와 우리의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 줬으면 좋겠거든요.”
그의 눈가에 행복한 웃음이 지어졌다.
두 눈에 우주를 품은 것처럼 하염없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가 말했다.
“드디어 당신과 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군요.”
“……그렇네요. 그래서 아이는 몇 명이 좋겠어요? 둘, 셋?”
“다섯?”
“……열?”
“…….”
“…….”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도 웃음소리를 냈다.
평화로운 세계의 평범한 부부들처럼 이렇게 마주 웃을 수 있다니.
그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품에 안았다.
나 또한 온 세상을 끌어안듯 벅차게 그를 마주 안았다.
내 세상 전부가 바로 여기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6 화

* * *

“먼저 여러분이 꼭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 이 저택에 계세요.”


“예?”
“그게 누굽니까?”
1 층 홀에 모인 귀족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물음표가 떠올랐다.
꼭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라니, 내 말에 도통 아무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나와 나란히 선 알렉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도 내 눈길을 느끼고 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지금쯤 그 아이는 얼마나 떨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리디트 황자가 의연하게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금 전 내가 리디트 황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모두가 황자님을 사랑하고 응원할 거랍니다. 황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신걸요. 전하는 황제 폐하로
숭상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신 것을 모두 축복할 거예요.’

“…….”
이제 리디트 황자가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순간.
그가 황제로 즉위하면 마지막 남은 조각 하나가 완성된 것처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나는 그 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알렉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은 후에야 다시 사람들을 넓게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더 진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그 귀중한 분을 이런 누추한 저택에 숨겨 둘 수가 없네요. 드디어 그분이 집에 돌아가게
되었거든요.”
“……예?”
“대체 그분이 누구길래…….”
나는 제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내 눈길에 제인이 황자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제인에게 꽂혔다.
제인의 치마폭 뒤로 누군가가 가려져 있었다.
작은 키, 언뜻 푸른색으로 드러나는 머리카락, 시선을 내리고 있지만 총명한 빛이 감춰지지 않는 은색
눈동자.
“……?”
어린 남자아이?
귀족들의 시선이 그 소년에게 박힌 채 홀린 듯이 따라갔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아이가 누군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귀족들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는 누구…….”
“어쩐지 낯이 익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전혀…….”
마침내 리디트 황자가 나와 알렉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제인이 황자의 손을 나에게 건네주자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내 앞으로 오게 했다.
황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떠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리디트 황자는 작게 대답하며 나를 향해 끄덕였다.
잠시 그를 따스하게 바라본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이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답니다. 4 년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났었거든요. 그때 불과 세 살밖에 되지 않으셨죠. 모두가 이분이 죽은 줄 알고 있었어요.”
“…….”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이제야 그들의 안색에 묘한 깨달음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분의 아버님께서는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남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누군지 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과 약속한 대로…… 정말로 우리의 곁으로 살아 돌아오셨어요.”
“……!”
제각각의 색으로 빛나는 귀족들의 눈이 심상치 않게 벌어졌다.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남으라.
4 년 전의 실종.
“서, 설마.”
“맙소사.”
“말도 안 돼…….”
여기저기서 감탄이 쏟아졌다.
‘말도 안 돼.’라고 탄식한 사람의 옆구리를 누군가 강하게 비틀어 꼬집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이 소년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듯했다.
나는 리디트 황자의 어깨를 더욱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숨을 들이쉬었다.
“이분께서는 아버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말도 포기하고 몸을 숨기셨죠.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를 모두 멸망시키려고 했던 황제의 눈을 피해…… 어린 몸으로 입을 닫고 버티셨어요. 지금까지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으며 언젠가 세상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셨죠.”
“…….”
“저는 그 역경을 견디고 살아 돌아온 황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답니다.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희망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것만 같았으니까요.”
“…….”
“폭군 때문에 감히 이뤄질 거라 확신할 수 없었던 제 희망이요.”
“……!”
황자 전하?
황자 전하.
황자 전하였다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리디트 황자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고 몸은 조금 경직되었지만 나는 감히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그를 소개할 준비는 다 된 것 같았다.
“이분은 죽은 황제에게 살해당한 선대 황제 폐하의 둘째 아들, 리디트 카이슬리 전하이십니다.”
“……!”
“이럴 수가!”
“저분이 황자 전하셨다니!”
“살아 계셨군요, 황자 전하!”
“정말 기적입니다!”
“무사하셨다니 정말로 죽은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
감탄과 반가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굳이 이 순간 말하지 않아도 리디트 황자가 곧 황제로 즉위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진정시켰다.

* * *
우리가 북부의 성으로 다시 돌아간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그동안 수도에서 우리는 리디트 황자의 황제 즉위식을 지켜보았고, 방직 공장의 가동을 축하하였으며 사교
무도회에서 온 귀족들에게 칭송의 말을 들었다.
대체 어떻게 리디트 황제를 찾은 거냐는 물음부터 알렉이 언제부터 그렇게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보았다.

‘그런데 꼭 그 춥고 먼 데로 또 가야겠니?’
‘그냥 여기서 예전처럼 다 같이 살면 안 돼? 우리 이제 자유잖아.’

시어머니와 엘로이는 우리의 북부행을 아쉬워했다.


이제 폭군도 죽었는데 굳이 그 험한 곳을 또 갈 필요가 있냐는 게 이유였다.
특히 엘로이는 우리가 떠나는 날까지도 오열했다.
그러나 알렉과 나는 북부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북부의 사람들과 했던 약속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꼭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그와 내가 평생 정착할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윌스브룩 성의 꼭대기에서 들이마시는 북부의 공기는 세상에서 가장 청결한 샘물처럼 티 없이 맑았고,
높고 빽빽한 산과 그 위를 눈이 뒤덮은 광경은 판타지 소설 속처럼 이국적이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어딜 가도 새롭고, 어느 땅을 밟아도 내 첫 발자국이 새겨졌다.
신비한 책 속에서나 볼 법한 식물들의 모습도 경이로웠다.
이곳에서 태어날 나와 그의 아이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축복받은 땅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너-무 춥고 수도에 비해 번화하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반해 버렸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콰앙!”
“손!”
내가 새끼 백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칼라니쉬 산에 알렉과 함께 피크닉을 왔다가 마주친 새끼 백곰이었다.
크기가 내 팔뚝만 했다.
“크와앙.”
새끼 백곰은 손을 주기는커녕 연거푸 둥실한 몸으로 나에게 앞발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울음소리는 나름 위협적이지만 생김새며 통통한 몸집이 너무도 깜찍했다.
나는 새끼 백곰의 발톱을 이리저리 피하며 그 작은 짐승을 끌어안았다.
“안 돼. 언니 잡아먹는 거 아니야. 먹이 아니란다.”
나와 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날 잡아먹으려고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짐승의 몸부림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행복해.’
품 안의 작은 짐승은 복슬복슬하고, 북부에 대한 고민거리들마저 너무나 즐거웠다.
“정말 귀엽네요. 안 그래요?”
그리 물으며 내가 알렉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알렉이 보이지 않았다.
음?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
“알렉?”
나는 새끼 백곰을 놓아주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을 두리번거렸지만 눈 쌓인 침엽수와 새하얀 눈밭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루이제.”
불현듯 뒤에서 그윽한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눈발이 부드럽게 일어났다.
내가 그를 채 돌아보기도 전에 등 뒤에서 그가 나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저 여기 있습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7 화

“……어디 갔었어요?”
따뜻해라.
나는 그의 품에 포근하게 뒷머리를 기댔다.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갑자기 사라진 줄 알았네요.”
“제가 당신을 두고요?”
“…….”
찔리나?
그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다시는 절대.”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요. 우리 한 번씩 서로를 떠났으니 비긴 셈 쳐요. 난 당신을 몰라봤고, 당신은 내 마음을
몰랐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나는 다시 옅은 웃음소리를 냈고, 그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 그러고 보니 그 커다란 총은 갑자기 어디서 난 거예요?”
“…….”
“물어본다는 게 이제야 생각났네요.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죠? 당신이 선대 황제를 죽일 때 내 전생에서나
볼 법한 무기를 쓴 것 같아서…….”
아.
내가 이전에 알렉에게 내 전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말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순간 뜨끔했다.
그런데 알렉이 마물들과 싸우던 바로 그 세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은 저한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함 같은 게 있습니다.”
“……네? 인벤토리 같은 건가요?”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인벤토리.
그 단어에 그가 조금 어색해하며 나를 응시했고, 나도 괜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흔적을 이렇게 그와 나눌 순간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윽고 그가 여전히 어색해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왔었던 그 세계에서 쓰던 무기 중 하나였죠.”
“역시 그랬군요. 여기서도 작동하다니 놀랍네요.”
“마력을 증폭시켜서 사용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말을 마치며 그가 손을 들자 어느새 그의 손에 총이 들려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크고 무거워 보였다.
“세상에.”
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총을 한 바퀴 돌렸다.
“원래는 없었는데 마침 그때쯤 제 인벤토리가 더 넓어졌죠. 모두 루이제 덕입니다.”
“그랬군요…….”
“그리고 이렇게 금방 없어지기도 하고요.”
짠.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났던 총이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 신기해라!
박수라도 칠까?!
딱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휘둥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손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도.”
“……?”
그의 손바닥 위에 검은 벨벳으로 된 작은 상자 하나가 올라왔다.
반지나 귀걸이를 넣을 법한 작은 상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검붉으면서도 보랏빛이 나는 보석 하나가 큼직하게 반짝였다.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이윽고 그가 그 보석을 꺼내자 반지의 링이 드러났다.
“이게, 뭐예요……?”
흑요석?
처음 보는 광물이었다.
그러나 흑요석보다는 새까만 다이아몬드같이 눈이 부셨고, 다이아몬드라고 하기에는 다른 차원으로 느낌이
달랐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칠흑 같은 광물에 우주가 담긴 듯한 영묘한 기운.
“너무 신비롭고 예쁘네요…….”
“제 인벤토리에서 발견한 희귀도 SSS 급 마정석으로 만든 반지입니다. 웬만한 보석보다 구하기 힘든
것이죠.”
“네? 마정석이요?”
마정석?!
그건 설마 내가 아는 그 여느 소설 속 마정석인 걸까?
“예. 보스 마물을 처치하고 얻은 마물의 결정체입니다.”
“…….”
그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고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더니 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물의 결정체라니.
내 머릿속으로 온갖 흉측하고 개성 강하게 생긴 괴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의아한 기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그가 한 손에 그러쥔 채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
나는 내 손에 딱 맞는 반지를 응시했다. 아름답고 신비한 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내가 물었다.
“당신이 직접 처치한 마물에서 얻은 건가요?”
그가 한 번 끄덕였다.
“예. 이 마정석을 갖고 있었던 마물이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정말 끈질긴 사투였죠.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제국에서는 이 광물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이 아무도 없더군요. 지난 한 달 동안 이 반지를 만들려고
직접 제련했습니다.”
“정말로요? 고생이 많았네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알텍.”
“아닙니다. 당신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반지를 드릴 수 있어서 제가 더 기쁩니다.”
“…….”
그의 눈가가 정말로 흐뭇한 듯이 약간 흐무러졌다.
그에게는 전리품 같은 의미 있는 물건인 걸까?
이런 걸 나에게 끼워 주고 저렇게나 기뻐하다니, 새삼 그에게 있어 내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실감이 났다.
그런데…….
“그럼 혹시 이건 마수의 시체에서 얻어 내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마정석은 빛을 발산하니 그나마 쉽게 찾아낼 수 있죠. 보통 인간의 몸에 생기는 결석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결석이요?”
“예. 이 정도 진귀한 마정석이면 생식기 부근에서 발견되곤 하죠. 아주 희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아마도
이걸 갖고 있는 사람은 전생에서도 저밖에 없었을 거고, 최소 부르는 게 값-.”
“네? 어디서 나오는 결석이라고요?”
“예?”
“…….”
내가 놀라자 그는 더 당황했다.
“그럼 이 반지가.”
“……?”
흉측한 괴물의 요로 결석……!
윽.
나는 뒤로 기절할 듯이 휘청거렸다.
“루이제!”
놀란 그가 내 등을 감쌌다.
금세 중심을 잡은 나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르는 사이에 다른 세계에 다녀오더니 아예 그쪽 인물이 다 되었구나.
반지를 낀 손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내 손가락에서 SSS 급 요로 결석이 진귀한 빛을 반짝였다.
조금은 더럽고 찜찜했지만 신성하고 소중한 반지임은 분명했다.
이세계에서 그의 고난과 성장을 상징하는 물건 그 자체였으니까.

* * *

“여기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나는 윌스브룩 성 앞에서 눈을 의심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곳에 나타날 리 없는 존재가 앤드류와 브룩스, 여러 말들을 대동한 채 성을 찾아왔다.
내 뒤쪽에서 알렉도 적잖이 놀란 기색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황제 폐하.”
“……미리 전언도 없이 이 먼 곳까지 어떻게.”
마차도 없잖아?!
나는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 작은 몸으로 북부까지 말을 타고 왔다고?
“……부인, 아렉시스. 보고 시펐다.”
우리의 반응에 리디트 황제는 반갑게 웃어 보였다.
앤드류와 브룩스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루이제! 알렉시스!”
나는 우선 서둘러 그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만찬실의 식탁 다리가 다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리고 알렉의 마력으로 내부를 따뜻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들 보고 싶었답니다. 황제 폐하께서 잘 지내고 계실지 너무 궁금했어요. 오신 김에
따끈한 음식도 많이 드시고, 편하게 지내다 가세요.”
“고맙따.”
“…….”
리디트 황제가 스푼을 들며 대답했다.
아이의 미소가 포근하고 따뜻했다.
왜 이렇게 눈물이 핑 돌지.
먼 길을 달려 우리를 찾아와 준 사람들을 보니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앤드류와 브룩스는 그동안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리디트 황제는 발음 연습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고, 승마와 검도 같은 훈련뿐만 아니라 여러 책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 북부까지 온 것도 체력 훈련과 승마 연습의 일환이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더 많을 나이인데 너무 혹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폐하의 성장을 해칠까 염려가
됩니다.”
내 말에 리디트가 조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눈 어서 크고 싶다. 우리 아바마마처럼, 그리고 아렉시스처럼 어서 강한 어른이 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신걸요. 폐하처럼 살아남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요. 너무 의젓하고 강하셔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네요.”
“루이제.”
나는 눈물을 참는 연기를 하며 손바람을 부쳤다.
리디트와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금세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는 나와 알렉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브룩스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브룩스가 뭔가 생각난 듯
일어섰다.
“아, 실은 폐하께서 여기까지 납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예? 뭔데요?”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68 화

“두 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칙서를 준비해 왔으니 폐하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게
좋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나와 알렉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내가 리디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자 앤드류가 그에게 붉은빛으로 된 칙서를 건네주었다.
리디트는 잠시 그 내용을 보더니 이내 나와 알렉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사못 진중해졌다.
“나 리디트. 두 사람에게 원래의 작위를 돌려주게따.”
“……예?”
“브렌트 공작, 공작 부인.”
“…….”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자작 부부였지. 작위에 대한 건 미처 잊고 있었다.
그러나 선대 황제가 죽은 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우리를 원래의 작위인 공작으로 칭하고 있었다.
리디트가 작은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 제국의 대공 부부가 되어라.”
“……?”
음?
대공?
“이 성의 이름을 따 위스브룩 대공의 작위를 주게따.”
“……!”
나는 놀란 눈으로 리디트를 보다가 알렉을 돌아보았다. 마침 그도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 이제 대공 부부가 되는 거야?
뜻하지 않게 그런 근사한 작위를 얻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황송합니다, 폐하.”
“마지막으루…….”
리디트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지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우리에게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듯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리디트 황제는 나와 알렉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
이내 리디트가 울음을 참듯이 울컥하며 내뱉었다.
“나 리디트의 대부와 대모가 되어 주십시오.”
“……!”
“예?”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앤드류와 브룩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설마 리디트 황제가 알렉과 나에게 대부모가 되어 달라고 말할 줄은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리디트 황제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동안 고아로 지내면서 느꼈던 외로움과 서러움이 떠오른 듯했다.
……아.
왜 눈물이 나지?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리디트 황제를 와락 끌어 안았다.
작은 등을 토닥이는 내 손에서 마정석 반지가 빛났다.
“그럼요. 폐하께서 원하실 때는 언제든 저희한테 의지하세요. 우리가 늘 이곳에 있을게요. 그렇죠,
알렉?”
내가 알렉을 바라보자 리디트도 그를 응시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든든한 눈빛으로 끄덕여 주었다.
“물론입니다.”
리디트는 그에게도 가 안겼다.
“고맙따, 아렉시스. 루이제.”
흐어엉.
그제야 그 의젓하던 황제가 북받친 눈물을 터뜨렸다.

* * *

“졸지에 큰아들이 생겼네요.”


손님들이 하루 만에 모두 북부를 떠난 직후였다.
나와 알렉은 이름 없는 산 위에 앉아 황제가 떠나는 길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에 구름이 흐를 만큼 높은 곳이었다.
알렉은 머리를 넘겼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콧대가 이 높고 눈부신 곳에서 더욱 근사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직 일고여덟 살이라 그럽니다. 사춘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르죠.”
“그럴까요?”
후후.
내가 웃자 알렉도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다시 북부를 넓게 응시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가 벌써 그만한 아들이 있을 나이는 아니네요. 그냥 숙부와 숙모 정도로 했으면
더 좋을 뻔했…….”
“…….”
나는 본의 아니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예고 없이 내 입술에 닿았고, 그의 큼직한 손은 내 뒷덜미를 감쌌다.
……아.
기습 키스?
모르고 하는 게 더 두근거리고 좋구나…….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내 긴장을 풀었다.
손을 뻗어 그의 다부진 허리를 안았다.
내 손 아래로 셔츠 차림을 한 그의 굴곡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휘감자 그 어떤 시럽이나 솜사탕보다도 달콤한 맛이 났다.
녹아내릴 듯한 감촉에 눈꺼풀마저 힘이 풀리려던 순간, 그의 입술이 조금 물러났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자 열띤 숨결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지난밤에 앤드류와 브룩스한테 붙잡혀 있는 바람에, 당신과 입술을 맞추지 못한 지 10 시간도 넘은
것 같아서요.”
“벌써 그렇게나 됐어요?”
나도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예. 하마터면 애가 탈 뻔했습니다.”
“어쩐지 나도 초조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하하…….”
내 진심 섞인 농담에 그가 달콤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나에게는 얼마나 기적 같은 행복인지 그는 알까?
그동안의 괴로웠던 기억들이 모두 다 꿈처럼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곳. ……당신이 있었던 곳.”
“…….”
“원래 내가 전생에 살았던 곳과 너무 똑같아요.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된 거예요?”
“…….”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금세 내가 듣고 싶은 답을 들려주었다.
“당신의 비밀을 제가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이해하고, 또 당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늘 꿈꿨었죠. 그리고 제 힘이 바로 그런 곳을 찾아내 구현했고요.”
“……그런 거예요? 신기하네요.”
“…….”
“너무 대단하고요.”
그리 말하며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는 내 세계를 알고, 나는 그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없었다.
이제 그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그와 나 사이를 그 누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당신이 나에 대해 잘 알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처럼 당신이 날 사랑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요.”
“저는 처음부터 루이제 당신뿐이었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당신은 빛이 나고요.”
“……그거 알아요? 그게 다 알렉 당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마음이 다 시들어
버리겠죠.”
“…….”
“내가 숨 쉴 수 있고, 또 당신의 눈에 빛나 보이는 것도 모두 다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루이제…….”
“…….”
나는 포근하게 눈가를 접었다.
서로에 대해 안다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되는 일이었구나.
나 혼자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그도 이해하고 있으니 꼭 그가 내 영혼의 반쪽인 것만 같았다.
그건 사랑보다 더 깊고 끈끈하며 운명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아득한 눈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사랑해요. 알렉. 그보다 더 깊은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그의 눈동자가 휘청 흔들렸다.
내 고백이 그의 가슴속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는 게 느껴졌다.
“루이제.”
그가 목이 멘 소리로 애틋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심장이 얼마나 묵직해지는지 아십니까?”
“그랬어요?”
“사랑보다 더 깊은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전 가슴이 벅차서 터져 버렸을 겁니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사랑만 해 주십시오. 더 깊은 건 제가 하겠습니다.”
“…….”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빼곡하고도 깊숙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래서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말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많다는 거구나.
오히려 나는 그의 손끝과 몸짓에서 지독할 만큼 깊은 사랑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조금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방금 전처럼 기습 키스도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불쑥 해 줬으면 좋겠어요.”
“매 순간순간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
그가 한숨 같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숙이자 나와 코가 겹쳤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다.
숨결만으로도 심장이 떨렸다.
“사랑합니다, 루이제.”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세상 모든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깊이.
마치 그리 속삭이듯이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겹쳐졌다.
비로소 우리 부부의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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