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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 결혼?
‘역시 이 결혼 사기였구나.’
호화로운 포치 밖으로 내던져진 보스턴백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털썩, 떨어지는 허탈한 소리만큼 기운이 빠졌다.
무려 공작 가문도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네가 우리 가문에 와서 이런 거 아니냐!”
시어머니가 근거 없이 악을 쓰는 소리도 귓가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니, 완벽한 혼처라고 구슬린 건 당신들이었잖아…….’
속았다.
남편과 결혼한 이후 뒤통수를 맞은 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죄송합니다. 저희가 대부인과 각하와 부인을 끝까지 모셔야 했는데, 화,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희들의 목숨이…….”
집사와 가정부, 시녀장이 꼭 초상집에서 나오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곤란해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는데.
차마 그들을 붙잡을 수도 없어 나는 멍하니 유서 깊은 저택의 외관을 올려보았다.
내가 3 년 전 시집온 브렌트 공작가는 갑자기 박살 났다.
작위도 잃고 개털이 되었다.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줄행랑을 치는 사이 남편의 누이인 엘로이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나는 남편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져 손 그늘을 해야 했다.
‘하아, 눈부셔…….’
너무 잘생겼어.
혼자서만 햇살을 받는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서는 언제나 광채가 났다.
우물쭈물 멋없이 어깨를 웅크리고, 여동생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소심한 저 남자.
바로 내 남편인 그는 늘 쭈물대는 성격이 사무치게 아쉬울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딜 가도 홀로 우뚝 솟아 있을 만큼 훤칠한 키에 갑옷을 입은 것같이 딱 벌어지고 단단한 어깨.
피부는 오점이 단 하나도 없는 대리석을 조각한 듯 눈이 부셨고, 영롱하게 흐트러진 흑발은 꼭 새까만
달빛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빛이 나는 건 인간이길 초월한 듯한 저 완벽한 이목구비.
작위와 저택, 땅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도, 남편의 외모는 여전히 신이
현신한 것같이 환상적이었다.
‘항상 옷을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입고 있어서 맨몸은 얼마나 더 코피를 터뜨리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
“미, 미안하다. 에, 엘로이. 나,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다 책임져! 책임지라고!”
시누이가 악을 쓰자 시어머니가 따끔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 걱정 말아라. 친척들이 설마 우릴 외면하겠니? 지금까지 우리가 지원해 준 게 얼마인데……!”
“뭐? 친척들? 설마 사촌 얘기하는 거야? 거길 가서 굽신거리느니 차라리 길바닥에서 죽어 버릴 거야!”
“…….”
남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저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 놀랄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또 내 상상을 초월할 줄이야.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브렌트 공작 자네에게 내 친히 처방을 내려 주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 미치광이 폭군이 여태 잔혹한 짓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한때 제국에 제일가는 공을 세웠던 브렌트
공작가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 된 지금, 나는 폭군의 잔혹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공작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폭군은 괜히 폭군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 * *
뭐? 엄마를 볼 수 있다고?
나는 꿈을 꾸면서 홀린 듯이 밖으로 나갔다.
‘루이제. 우리 아가.’
‘드디어 네 얼굴을 보게 되었구나.’
엄마?
나를 낳은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 코를 비볐다. 부드럽고 포근한 향이 났다.
죽기 전 꿈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일까?
그녀의 얼굴은 애를 써 봐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어머니가 이 세계로 나를 불러온 거라고 믿어
버렸다.
‘이제야 내가 있을 곳으로 오게 된 거야.’
나날이 행복했다.
존귀한 공작가의 영애로서 풍족한 사랑과 교육까지 받으며 자랐다.
모두가 내 의미 없는 몸짓과 표정에도 사랑스럽게 웃어 주었고, 입고 먹는 것에는 늘 정성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어두웠던 전생의 그늘은 점점 걷히고, 대신 내 안의 밝은 부분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열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 주변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재혼을 했고, 얼마 안 있어 남동생이 태어났다.
여동생까지 줄줄이 낳은 새어머니는 나를 집안에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며, 토끼 같은 동생들이 생기니
아버지도 점점 나에게 무심해졌다.
계모는 내가 여동생들을 안아 보는 것조차 금지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동생들을 귀여워했다. 계모에게도
깍듯하고 착하게 굴었다.
그러면 계모는 ‘너같이 뻔뻔한 년 때문에 내 속이 다 뒤집어진다.’면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앓아눕기를
일쑤.
어느 순간 계모는 그냥 나를 괴롭히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대체 넌 언제쯤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니? 내년이면 스물한 살인데 이때 아니면 결혼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 모르니?’
세상의 반은 남자인데 이게 말이 돼?
내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하는 동안 또래 영애들은 대부분 약혼을 했다.
……아, 나도 결혼하고 싶다.
누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나는 결혼에 로망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남편과의 알콩달콩에 환상이 있었다.
연애와 사랑과 결혼 같은 건 말로 만들어 봤지 한 번도 직접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나도 키스도 해 보고, 이것저것 다 해 보고 싶은데…… 흐윽.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침대 위에서 아련하게 손을 모으고 꿈속을 걸었다.
책에서 본 것처럼 정말 남자의 입술은 생크림보다 부드러운지, 첫날밤은 환상적이고 특별한지 궁금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금방 낳을 수 있겠지?’
나를 닮은 딸은 얼마나 어여쁠까?
결혼을 하면 ‘진짜 내 가족’이 생기는 거야……!
전생에서부터 꼭 갖고 싶었던 진짜 내 가족.
그런 와중 새어머니가 이웃 나라인 릴트 제국의 공작 알렉시스와의 혼담을 받아 왔다.
새어머니는 내가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못해 이 집에 말뚝을 박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왕국에서는 약혼자를 찾지 못하니 외국까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결혼하면서 받은 재물과 땅의 스무 배.
나는 결혼 열흘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썼다가 구겨 버린 편지지만 방 안에 가득 찼다.
어차피 위약금을 낼 돈 같은 건 본가에 없었다. 위약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그 집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대로 섣불리 남편을 포기하기에는…….
그는 몹시 잘생겼다.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후회하며 홀로 울던 나였으니, 그에게는 무척 의외인 말이었을 것이다.
이내 그는 나에게 여러 책들을 소 개해 주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가끔 서재에서 그에게 다양한 주제의 책을 추천받았다.
자연스럽게 같이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는 그의 풍부한 지식에 감탄할 때가
많았다.
‘이 남자, 외모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똑똑한 데다가 친절하네…….’
제국에서 신부를 구할 수도 없을 만큼 무시를 당하고 있었던 게 너무도 안쓰러울 만큼.
‘다 저놈 때문이야.’
나는 황궁에 갈 때마다 황제 악센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용암이 회오리치는 듯한 검붉은 눈동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같은 이마와 콧대, 사각으로 날카롭게 각이 서 있는 턱까지.
거칠게 손질한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은 꼭 태양이 일렁이는 것 같았고, 오만한 눈빛에는 제국을 발아래에
둔 인간 특유의 자만심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폭군은 브렌트 공작 부인이 된 나에게도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 나를 보았을 때는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팔푼이?
태어나서 저런 말은 처음 들어 봤다.
계모도 나에게 팔푼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귀족들 앞에서 팔푼이라니, 수치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생각보다 나는 초연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알렉이 이런 비하 발언을 평생 들어온 것에 비하면 나는 생채기 수준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 알렉은 황궁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황실의 초대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폭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공작가에 폭군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그는 끌려갔다.
시어머니는 나 때문에 알렉이 죽게 생겼다며 원망과 비난을 쏟아 냈지만, 나는 시어머니의 원망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폭군을 대면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폭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차마 폭군의 눈은 볼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기 싫었으니까.
이미 저런 잔악무도한 폭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만으로도 굴욕적이었다.
폭군은 나를 비웃었다.
‘가서 네 남편한테 전해라. 또다시 나를 거역하면 정말로 목이 달아날 거라고. 공작가를 예우해서
목숨이나마 살려 주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자신 때문에 덩달아 나도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먼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오랫동안 시달린 그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루, 루이…….’
‘루. 이. 제. 한 단어씩 다시 발음해 보십시오, 각하.’
‘루. 루, 루…….’
‘괜찮습니다. 다시-.’
‘루이, 루…….’
‘…….’
‘루이제.’
여관에서 쥐약을 먹기 전.
“…….”
그리고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깨어났다.
“알렉!”
남편이 눈을 떴다.
그는 극독의 함량으로 악명 높은 쥐약 한 명을 모두 마신 상태였으나, 그런 것치고는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깨어났네요! 괜찮은 거예요?!”
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그의 멱살을 잡아 버렸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찰싹!
“미쳤니, 너?”
대뜸 시어머니가 내 손등을 때렸다.
“어서 그 손 치우고 비켜라!”
메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시어머니가 나를 밀쳐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남편의 극단적인 시도에 시누이마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알렉! 이제야 정신이 드니? 여기 의사 말로는 네가 독약을 물처럼 다 소화시켰다는구나.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니. 이 어미를 두고 어떻게 그런…
…!”
“…….”
남편은 멍하니 천장만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 *
* * *
한편 루이제가 나간 방 안.
알렉은 당혹스러운 손짓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아내라는 여인은 그에게 좀 더 쉬고 있으라며 방을 나갔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가슴이 크게 쿵쾅거렸다.
난생처음 여자에게 뽀뽀를 당할 뻔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더 황당무계하게도…….
‘대체 여기는 뭐야.’
그는 낯선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곳은 그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BBC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인테리어와 의복들, 알렉이라는 낯선 이름, 초면의 가족들.
설마 차원 이동이라도 하게 된 걸까? 갑자기 왜?
27 년을 사는 동안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다 겪은 그였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알렉은 황급히 거울을 찾았다. 다행히 오래된 거울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다.
“…….”
‘최종 보상?’
마지막 전투는 시스템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퀘스트였던 걸까?
받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그는 최종 보상을 수락했다.
아무쪼록 게임 머니나 아이템이나 스킬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순간 주위가 점점 새까맣게 점멸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의식을 잃었다.
그 전에 짧게 생각했던 것은.
‘하와이로 보내 줘. 아니면 괌, 발리…….’
그는 오랜 포상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의식을 되찾은 그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알렉!’
‘정신이 드십니까, 각하? 아, 아니 알렉시스 마이어스 님!’
‘여보……?’
“…….”
뜬금없이 다른 세계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다니.
기껏해야 해외 휴가 정도를 생각한 그는 당황스러운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미친…….”
예고도 없이 사람 놀라게…….
최종 보상이라는 게 새 인생이었어?
* * *
“휴우…….”
방문을 닫고 나온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아직 혼란스러운 것 같아 더 쉬게 했다.
벽에 기댄 나는 불편하게 먹먹한 가슴을 꾹 눌렀다.
쿵쿵쿵…….
가슴 아래에서 아직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그가 쥐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가슴은 계속 이 상태였다.
짧은 사이에 충격과 절망과 안도의 롤러코스터를 탔기 때문일까?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나서 정말 다행이고 안심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많이 안도하고
있었다.
새삼 그의 존재가 이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나 싶었다.
‘알렉, 역시 내 반응에 당황했던 거구나. 얼마나 놀랐으면 물을 다 뿜어.’
하긴 나도 당혹스러운데.
나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알렉과 나는 서로 애틋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부부가 아니었다.
지금껏 그에게 원망과 실망을 품고 있었고,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안도하는 부인이라니, 아마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그가 놀라다 못해 머금고 있던 물을 다 뿜어 버린 게 이해가 갔다.
씁쓸하고 쓸쓸했다.
‘……혹시 또 나와 이혼을 하려고 할까?’
그가 다시 눈을 뜨긴 했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으니 또 나를 밀어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후계자를 낳기 전까지는 시어머니가 절대 허락해 주지 않겠지만…….
‘이혼이라니, 내가 싫어…….’
나는 등 뒤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새 정이 많이 들었나?
그가 이혼을 말하던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연했다.
그가 죽는 줄 알았을 때는 발밑이 꺼지며 가슴이 뻥 뚫리는 좌절감을 느꼈다.
나도 이런 내가 너무 낯설지만.
알렉과의 이별은 또 겪고 싶지 않았다.
* * *
* * *
‘……하아, 미쳐 버리겠네.’
한편 알렉은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입술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맞은편에는 그의 부인이 별로 입맛이 없는 안색으로 수프를 한 입 떠먹고 있었다.
순간 그를 의심한 듯했지만 그가 자신의 남편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에 그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싶은 그는 상태 창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았다.
눈앞의 부인이 게임 속 NPC 가 아닌 건 분명한 것 같았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다니 황당하네.’
심지어 빙의한 몸의 주인은 어머니와 여동생에 아내까지 있었다.
세상을 구하느라 결혼은커녕 연애도 해 보지 못한 그로서는 갑자기 아내가 생긴 이 상황이 감당하기
벅찼다.
‘여보……?’
‘갑자기 으리으리한 저택을 잃고, 공작 부인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잃어도 견뎌 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죽으려고 했다니,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아세요?’
‘좋을 리가 없잖아요. 남편이 이혼하자더니 혼자 죽으려고 했는데.’
“…….”
그러니까 작위를 잃고 가문이 몰락한 탓에 아내와 가족들을 포기하고 죽으려 했다는 건가?
원래의 알렉시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알렉이 이제 바로 그였다.
‘왜 하필…….’
지금까지 시스템이 그에게 준 보상은 늘 그와 관련된 것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었다.
알렉은 이번에도 그가 폭망한 공작 알렉시스가 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앞으로 그 이유를 찾아가야 하는 건가, 싶은 순간.
침묵을 유지하던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 * *
* * *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이 무슨 오며 가며 살 수 있는 빵도 아니고 집을 살 만한 돈을 갑자기 어디서 구한다는 건가.
그러나 나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하도 어안이 벙벙해서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까.
“…….”
새삼 원수의 이름이라도 가슴 깊이 새길 작정이었나.
남편의 말이나 행보가 아무래도 너무 불안했다.
아아.
내 신세야.
생각해 보니 쥐약을 먹고도 정신이 제대로 굴러갔다는 사람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빨리 돌아와, 알렉…….’
* * *
“…….”
악센 카이슬리.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희한하게도 딱 그런 이름의 폭군을 이미 그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느다랗게 미간을 세우고 기억 속을 헤집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그 책?’
알렉은 전생에 시스템 보상으로 받았던 책 한 권을 떠올렸다.
〈일그러진 태양〉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바로 그 주인공의 이름이 악센 카이슬리였다.
황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악센은 존재감 없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신의 상황을 끔찍하게 혐오했던 그는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권력을 늘 꿈꾸었다.
결국 악센은 자신의 운명을 피로 개척해 황위에 올랐다.
큰아버지인 황제 부부를 암살하고, 황위 후계자였던 어린 사촌 동생을 감금한 결과였다.
‘혹시 그 책 속으로 내가 들어온 건가?’
읽을까 말까 하다가 읽어 두었더니 이런 식으로 쓸모가 생길 줄이야.
놀라웠다.
하필이면 그 책 속 세계에 살게 되다니.
그러나 그는 금세 심드렁해졌다. 어차피 이 또한 시스템의 안배일 테니까.
그가 빙의한 알렉시스가 책 속에서 어땠는지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니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렇게 기억 속을 헤집던 그는 문득 초반에 죽은 엑스트라 한 명을 떠
올렸다.
쥐약을 먹고 죽은 공작이 있었다. 남편이 죽자 그의 부인이 따라 죽었었다.
‘설마 그 공작이 지금 나인가?’
힘들었던 완결 후 포상으로 얻은 그의 지상 낙원에 폭군이라니.
분명 근사했을 공작가의 저택은 구경도 해 보지 못했고, 인생 쉽게 살 수 있는 높은 신분도 누려 보기
전에 빼앗겨 버렸다.
그가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건 아니지만, 공작이 개털이 된 건 조금, 아니 많이 거슬렸다.
원래 알렉시스는 쥐약을 먹고 바로 죽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와아! 멍청한 공작 알렉시스다!”
퍽.
그의 이마로 질척한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쳤다.
“…….”
무른 과일에서나 날 법한 달콤하고 농밀한 향이 훅 끼쳤다.
단단한 씨앗은 그의 반듯한 이마를 날카롭게 찍고 추락했다.
그는 불쾌하게 얼굴을 적시는 과즙을 쓱 닦아 내며, 날 선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들었다.
대체 감히 누가 이런 짓을.
‘스킬. 살기 어린 눈빛.’
* * *
결국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도 경황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는데, 간밤에 잠은 대체 어디서 잔 걸까.
“혹시 하루 더 묵어도 될까요……?”
“대체 언제까지 있으려고요?”
여관 주인이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음, 확실하진 않지만 며칠만 더…… 혹시 이틀 이상 머물면 숙박비를 조금 깎아 주실 수는-.”
“뭐요? 이제는 깎아 달라고요?”
“네?”
“어제 그쪽 남편이 돌아오면 세 배로 방값 쳐준다고 쫓아내지 말라고 하더니만, 왜 말을 바꿔요?”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순간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남편의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했다가는 당장 쫓아낼 거 같아서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이 남자가 진짜!’
아무래도 따라갈 걸 그랬나 보다.
그렇게 초조한 날이 하루 더 지나갔다.
나와 시어머니, 시누이는 여관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따뜻한 차가 있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만큼 불안했다.
옆에서 차를 홀짝이던 시누이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무슨 수로 집을 구해 온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 쥐약 부작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엘로이.”
남편을 비하하는 시누이의 발언에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엘로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더 뾰로통해했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오라버니가 뭘 할 줄 알아. 사냥도 못 하고 승마는커녕 검술도 못 하잖아.
그런데 집 살 돈을 어떻게 구해?”
“그게 집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자기도 생각이 있으니까 나간 거겠지.”
“생각은 개뿔. 어디서 돌이나 맞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몰라.”
“…….”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로이를 응시했다.
슬프게도 시누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알렉은 그 흔한 승마나 사냥조차 하지 않았다. 절대 달리지도 않았다.
별로 격한 것도 아니었는데 움직임에 왜 그토록 민감해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사나 다른 치료사들이 원인을 찾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알렉도 이런저런 약들을 먹으며 나아지려고 했지만, 아주 약간의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상태가 결벽증처럼 심각한 강박 관념이나 정신병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의사들이 그에게 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닌지 여러 번 물었지만, 그는 그런 건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덜컹. 쿵. 덜덜덜…….
마차가 정돈되지 않은 흙길을 달렸다.
그 안에서 알렉은 속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
이거 무슨 지뢰 밟기 게임도 아니고…….
알렉시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앞으로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의심을 받을지 몰랐다.
그로서는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었다.
‘나 여기서 괜찮은 건가?’
* * *
* * *
* * *
남편이 이상하다.
나는 마치 총을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현관을 지나갔다.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쉽게 건드리지도 못하는 내 남편이, 양을 잡아 구워 준다고?
개미는 먹을 게 없어서 안 죽인다고?
도저히 내 남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싶어 머리가 다 얼얼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남편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대견한 일을 해 주었잖아.’
칭찬 스티커를 열 개나 붙여 줄 만한 일이야.
남편이 아니었다면 여관에서도 쫓겨나 정말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라고.
갑자기 이상해지긴 했어도 무척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이야, 분명…….
나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되고 불안했다.
꼭 유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도저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을 치는 농가이니 아마도 내부는 간결하고 짙은 목조로 짜여 있을 것 같았다.
오래돼 보이는 집이니 군데군데 낡은 곳도 많이 있겠지.
화려한 샹들리에와 미술품은 절대 기대할 수 없어도,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거미줄이나 먼지는
없을 것 같았다.
“…….”
마른침을 꾹 삼킨 나는 갓난아이가 처음 세상을 살펴보듯 집 안을 응시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자개처럼 오묘하고 우아한 색감이었다.
살짝 눈이 부셔 찡그린 나는 이 빛이 대체 어디서 반사된 건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택의 바닥이며 2 층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자개 같은 대리석 바닥으로 꾸며져 있었다.
외관만 봤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가 내부에 가득했다.
“이, 이게, 다 무슨…….”
전 주인이 백만장자라도 되었던 걸까?
로비의 중앙까지 다가간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는 빛이 쏟아질 것만 같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핑크빛 노을을 반사하고 있었고, 촛대와 문고리는
은색이었다.
원래 살았던 공작가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대 로의 아기자기한 부유함이
곳곳에서 흘러넘쳤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났는데, 기적처럼 다시 생긴 보금자리가 이런 저택이라니.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감명과 감탄이 마음에서 흘러넘쳤다.
양 떼가 거닐며, 풍경까지 완벽한 이 집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혹시 유령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남편이 말했다.
“역시 다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멍하니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편을 보는 순간 하마터면 눈을 감아 버릴 뻔했다.
그에게서 전에 없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외모가 눈부셨던 적은 많지만, 지금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빛이 솟구쳐 나왔다.
“알렉, 당신…….”
“…….”
“고마워요. 당신이 정말로 집을 구해 올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이렇게 근사한 집을…….”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약간 어색하게 나를 보더니 이내 어색하게나마 조금 웃어 주었다.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내 가슴에 차올랐다.
시누이는 물론이고 시어머니까지 그를 믿지 못했는데.
사실은 나도 완벽하게 그를 믿은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황홀한 집을 구하다니…….
그가 나를 내버려 두고 홀로 이 답 없는 현실에서 도망을 치려고 해서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결국 새 보금자리를 구해 온 모습에 그에 대한 실망과 서러움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끼익…….
내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와 마주 보는 사이,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누군가 싶어 심장이 철렁하려는 찰나, 빼꼼 고개를 내민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시누이였다.
……아, 돌아왔구나.
내가 채 다 안심하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소리쳤다.
“엘로이!”
“……흠!”
시누이가 겸연쩍은 얼굴로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다른 곳을 보며 들어왔다.
어디서 울기라도 한 듯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네.’
이번에는 진짜 가출하는 줄 알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시누이는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내부를 둘러보더니 이내 서서히 눈이 벌어졌다.
“뭐야, 여기……?”
그러더니 감전된 듯이 펄쩍 뛰었다.
“엄청 좋잖아!”
* * *
“…….”
다행히도 가족들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들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해서 알렉은 내심 마음이 놓였다.
하마터면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는데, 머물 곳을 해결했다.
그와 별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연약한 식구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어.’
욕실로 향하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두 번이나 정체를 들킬 뻔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했을 뿐인데 말을 잘한다고 의심을 받았고, 겨우 양을 잡아 준다고 했을 뿐인데도
루이제는 크게 놀랐다.
그때마다 엉겁결에 넘어가긴 했지만 앞으로 또 무슨 일로 의심을 받을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들킬 것이다.
‘애초에 숨긴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해.’
알렉시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흉내라도 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욕실로 들어간 그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툭, 툭.
그의 뒤로 셔츠와 바지가 길게 늘어졌다.
욕실은 꼭 박물관의 ‘19 세기의 목욕을 체험하자!’ 코너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더 과거로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 듯싶었다.
욕조의 수도꼭지부터 돌린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의 조금 흐릿한 표면에서도 알렉시스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선명하게 비춰 보였다.
다시 봐도 너무나 흡사한 외모.
그는 몸을 천천히 좌우로 틀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심하게 자신의 몸을 살피는 눈이 가느스름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역시나 다른 구석이 존재했다.
햇빛을 거의 받지 않은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란 듯 상처 하나 없이 미끈하고
깨끗한 몸.
피부색이 좀 더 짙고 근육이 더 큼직했던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작이었다더니 정말로 영의정 댁 도련님 같군.’
아내와 가족들의 반응을 보니 말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고.
사냥도 안 하고, 생명은 죽이지도 못하고,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였지?
내심 한숨이 나온 그는 어느새 물이 반 이상 차오른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의 크기가 그의 키에 비해 몹시 작은 탓에 다리를 한참 접어야 했다.
‘하아…….’
따뜻한 온도에 몸이 녹아내렸다.
지난 며칠 간의 기억들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가 빈털터리 상태로 이런 대저택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전생에 읽었던 책 덕분이었다.
일그러진 태양.
역시나 이 세계는 그가 시스템 보상으로 받았던 책 속이었다.
정보상에게 비싸게 팔 만한 지식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원작의 내용을 완전히 틀어 버리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죽었을 사람들을 살리게 될 거래였으니까.
꼭 낯선 역사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직 생소했지만, 이미 책으로 읽어 본 세계라 적응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비교적 평화로운 세계인가?’
적어도 그가 살았던 원래의 세계처럼 눈코 뜰 새도 없이 게이트가 생기지는 않았으니까.
알렉시스 마이어스.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라는 여자가 불러 줄 때마다 느낌이 이상했다.
‘알렉.’
‘알렉?’
‘알렉!’
“…….”
왜인지 가슴이 욱신, 찡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했었던 것 같은 기분.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진실을 알게 되면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남편의 영혼이 달라져 버린 이 사태의 중심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렉은 갈등이 되었다.
대뜸 난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같이 있어야 하는 거지?’
어쩌다 보니 진짜 알렉시스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가짜 가족들과 계속 함께 있을 생각이 없었다.
알렉시스라는 이름까지는 버릴 수 없겠지만, 원래 이 몸의 가족들과 진짜 가족처럼 지낼 자신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평생 가족이라고는 가져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생판 남들과 가족이라니…….
‘……뭐, 당분간은 어쩔 수 없나?’
알렉은 옅은 숨을 코로 내쉬며 몸을 좀 더 물에 담갔다.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는 여자들뿐인 식구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쥐약 때문에라도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분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
어쩐지 루이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 *
* * *
* * *
어느덧 밤이 깊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나는 부엌을 나왔다.
캔들 스틱을 든 채 홀로 둘러보고 있으니 다시 봐도 참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나는 집 안 곳곳에 밝혀 둔 촛불을 끄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사용인들의 일과 중 하나였지만, 이제 누군가 이런 일을 해 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다른 식구들은 뼛속부터 귀족이니 스스로 할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당번을 정하는 게 좋으려나……?’
별로 희망적이진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2 층으로 올라갔다.
1 층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방이 있었고, 2 층에는 나와 알렉의 방이 있었다.
알렉은 벌써 잠들었을까 생각한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알렉?”
나는 어깨에 걸친 숄을 한번 들어 올리며 상대를 확인했다.
마침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내 눈빛에 절로 반가움이 묻어났다.
달빛을 반사하는 그의 흐트러진 흑발,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또렷한 눈
“……이제 들어오십니까?”
그리고 벨벳이 흐르는 것처럼 유려한 발음.
단지 말투만 달라졌을 뿐인데, 그의 외모가 평소보다 열 배는 더 근사해 보였다.
나는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정리할 게 남아서요. 이제 좀 쉬려고요. 당신은요?”
“……저도 막 자려고 했습니다.”
반짝반짝.
그를 담은 내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제야 단둘이 있게 되었구나.’
며칠 만에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최근에는 폭군의 행패에 모두가 얼이 빠져 있어서 경황이 없었으니…….
나는 아까부터 마음에 꾹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알렉, 집을 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건 아니죠? 당신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
“아, 나는 그냥…… 걱정했다고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올지 걱정되었어요.”
“……부인께서 그리도 많이 걱정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
“아뇨. 그게 아니라…….”
그의 말을 자른 내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편의 바로 코앞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는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당신이 가주라도 난 당신이 모든 걸 홀로 짊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여관에 있는 동안 나는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그를 기다리기만 하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을.
차라리 어디서든 함께 있고 싶었다.
“실은 나도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그동안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손을 모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 말을 진작 했었어야 하는데.
폭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그가 쥐약을 마시기 전에.
그의 마음이 무너져서 죽음을 생각 하기 전에…….
왜 더 일찍 그를 보듬어 주지 못했을까.
그가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에게 더 상냥하지 못했던 내 과거가 후회되었다.
그는 경직된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입술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부인께서 그러길 원하신다면 명심하겠습니다.”
“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옅게 웃어 주었다.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본 내가 다시 황홀하게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꿈만 같네요. 당신 정말 내 남편 맞나요? 당신이 이렇게 우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거든요.”
원래도 목소리가 무척 근사한 사람이었다.
지나가다 그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스럽게 모셔진 종의 소리도 그의 목소리만큼 경건하고 고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더듬지 않으니 그의 음색이 더 빛이 났다.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 않고 감동적이라 가슴이 다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 그가 약간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
그 짧은소리에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어쩜 헛기침을 해도 저렇게 멋있을까…….’
역시 이 정도로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하면 가문이 망해도 눈과 귀가 즐겁구나.
“알렉.”
나는 두 손을 맞잡으며 영롱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안 된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우리 이제 같은 방을 쓰는 건 어때요?”
“예?”
역시나 그의 반응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큼직해진 눈과 못 들을 말을 들은 듯한 표정.
역시 그러면 그렇지.
밤일에도 소극적인 남편이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싶어 할 거라는 기대는 어차피 별로 없었다.
원래 귀족들은 부부가 한방을 쓰지 않는다.
공작가에서 쫓겨나기 전 나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의 사이가 더 끈끈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음을 시도할 정도로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고,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되는 건 꼭 막고 싶었으니까.
“……알아요. 당신이 날 옆에 두고도 잠만 재우는 걸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팔베개뿐이라고 미안해하고 자책했잖아요.”
문득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난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부부라고 해서 꼭 밤에 그걸……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가 사방팔방 갈 곳을 잃었다.
나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내 사이는 누군가 대놓고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이상 늘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물론 먼저 다가가는 건 항상 나였다.
“이제 우리 같이 있어요, 알렉. 나 사실 혼자 있기가 너무 외로워요…….”
말을 마친 내가 잠시 망설였다가 다른 쪽 팔을 뻗기 시작했다.
그는 알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조급하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나는 남편의 손길과 온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내 남편인 그에게 언제쯤 다정한 손길을 받아 볼 수 있을까?
꼭 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고 싶었다.
내 외로움이 너무 깊었나.
내 손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던 순간, 그가 흠칫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살포시 그의 허리를 안은 내가 그의 가슴 아래에 뺨을 묻었다.
‘아.’
따뜻하고 아늑했다.
내 접촉에 조각조각 나뉜 그의 복근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돌처럼 단단한 느낌이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평소보다 긴장을 많이 하네.’
그래도 아까처럼 나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안아 주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그래도 마주 안아 주는 척이라도 하더니만.
“알렉. 당신 숨은 쉬고 있는 거죠?”
내가 살짝 머리를 들며 물었다.
그래서 같이 방 쓸 거야, 말 거야.
그의 침묵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가 내 바람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서 자책을 한 거지, 그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함께 있고 싶어 하면, 그는 분명히 날 위해서 그러자고 할 것이다.
살짝 미끄러진 내 손길이 그의 척추를 스쳤다.
그의 옷 위에서 내 서늘한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 순간 내 드레스 옷감 너머로 불룩한 부피감이 부풀어 올랐다.
‘……아.’
이럴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지금처럼 어렴풋하게 존재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다 술렁였다.
그 정도로 아찔한 기대감이 들게 하는 존재였다.
‘아쉬워라. 이렇게 건강하고 정상적인데…….’
그 순간, 그가 확 물러났다.
“알렉?”
내가 아연해하는 사이 그는 약간 얼굴을 돌렸다. 어느새 뺨이 붉어져 있었다.
‘……나 밀쳐진 건가?’
“죄송합니다.”
“……?”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가 빠르게 머리를 한번 숙이더니 이내 뒤돌았다.
가까이 있던 자신의 방문을 열어 그냥 쓱 들어가 버렸다.
“…….”
금세 내려온 정적.
나는 차가운 복도에서 홀로 남은 채 눈을 깜박였다.
‘나 지금 거부당한 거야……?’
내가 아이를 만들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잠만 자자고 한 거잖아.
그것도 그렇게 싫어……?
나는 선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 *
‘이런 미친.’
알렉은 문을 닫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 만졌다.
최대한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직도 루이제가 복도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쿵.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낯선 여자가 갑자기 그런 밀접한 포옹이라니.
루이제가 닿았던 온몸에 화르륵 불이라도 지펴진 것 같았다.
척추에 닿던 서늘한 손끝, 그의 단단한 몸에 포근히 다가와 안기던 부드러운 느낌.
‘……뭐?’
부부라면서 여태 왜 잠만 잤다는 거지?
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왜 팔베개밖에 없어?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득 그는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나, 고자인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각이 멎어 버렸다.
상상도 못 한 충격에 말문이 다 막혔다.
하긴 이 몸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니까 그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그는 혼란스러워 다시 얼굴을 쓸었다. 방 안을 배회하며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진작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
몸이 달라졌어도 기본적인 기능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설마 그럴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아무래도 여긴 그가 세상을 구한 뒤 받은 보상이 아닌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어마어마한 시련이었다.
시스템 보상이라더니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작위도 잃고, 이제는 그것도…….
심지어 전생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데!
일단 그는 침착하게 창가에 손을 올렸다.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이 있었음에도 일반적인 관계를 나누지 못한 무슨 사연이…….
혹 영혼이 달라지기 전에는 정말 불능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여자와 할 수 없는 동성애자?
그것도 아니면 뭐지?
알렉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그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들어올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슬쩍 시선을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갑작스러운 포옹에 본능적으로 반응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한번 마른침을 삼키자 불거진 그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이내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생명이 느껴지는 부피감, 자아가 있을 것 같은 맥박과 살아 있는 듯 뜨거운 온도.
‘너무나 정상이잖아……?’
그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일 아침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금까지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그렇고, 지금 상태를 봐도
정상인 게 분명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그 순간 아찔한 전율이 몸서리치듯 그의 전신으로 퍼졌다.
“……!”
온몸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 듯한 예민함에 알렉은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이건 건강하다 못해 민감함 그 자체였다.
원래 이게 이렇게나 자극에 즉각적이었던가……?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침대로 향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스스로가 순간적으로 너무도 한심했다.
그렇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그가 굳은 듯 멈춰 섰다.
“…….”
정말이지 순간적인 포옹.
그 짧은 포옹에 그의 피가 어디로 몰렸던가.
마치 온몸의 혈액이 일제히 쏠린 것 같을 정도로 그는 위기를 느꼈다.
자신의 몸은 웬만해서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몸은 성욕과 관련된 자극에 그리 너그럽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이성을 봐도 끌리지 않았다. 우연한 접촉도 그에게는 모두 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작정하고 그를 유혹하려는 손길도 무척 따분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과 사랑을 할 수 없는 몸과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본능이 고개를 쳐올리게 하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이보다 쉬울 수 없을 만큼 이성의 자극에 반응했다.
믿을 수 없는 깨달음에 알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
그럼 완벽한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은 왜 한 걸까.
죽어서 유령 남편이라도 될 작정이 아니라면.
나는 괜히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이혼을 하자더니 쥐약을 먹은 그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나도 애를 쓰고 있었다.
뜻하지도 않게 그가 집을 구해 와서 다시 잘살아 볼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잠만 자는 것도 못 하겠다니…….
이쯤 되니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 내가 싫은 걸까?’
아니면 그냥 그동안 밖에서 집을 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걸까?
그래. 그럴 거야.
설마 날 싫어할 리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태 서로 좋아한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와 나는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표현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 남편이고 나는 그의 부인이니, 둘 다 그 의무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이성적인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이었다면, 그가 내게 눈길이라도 한 번 줬을까?
‘……모르겠네.’
휴우.
내심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럼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걸까?’
내 남편인 그가 완벽한 내 스타일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이게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결혼한 이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밖에 없을 뿐이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어서 남은 초나 다 끄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을 끄는 기구가 불빛에 가까워졌다.
휙.
그런데 그보다 빨리 눈앞의 촛불이 꺼졌다.
……음?
내가 팔을 올리면서 바람이 너무 크게 불었나?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몇 걸음 걸으며 다음 촛불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스너퍼를 가까이 가져가 대려고 했다.
휙.
“……?”
촛불이 또 그냥 꺼져 버렸다.
지금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나?
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람을 느껴 보았지만, 공기의 흐름은 고요하기만 했다.
창문이 열린 곳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다음 촛불을 향해 막 한 발을 뗐다.
그 순간 그새 잊고 있었던 알렉의 말이 떠올랐다.
오, 미친.
설마.
설마 아닐 거야…….
나는 뻣뻣해진 목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온 첫날 밤부터 자동으로 촛불을 꺼 주다니, 집안일에 특화된 살림꾼 AI 유령이 아니고서야
반갑지 않았다.
당장 알렉에게 뛰어가고 싶었지만, 굳어 버린 발은 차마 무정한 남편에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을 거야.’
애써 그렇게 위안하며 나는 아직 켜져 있는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가져갔다.
복도를 따라 아직 다섯 개 정도의 촛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마 이것까지 그냥 꺼져 버린다면, 정말 유령의 짓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작은 촛불이 촛농을 흘러내리며 일렁였다.
‘제발 촛불아 꺼지지 마. 내가 끄게 해 줘.’
이윽고 스너퍼가 촛불을 감싸자 불빛이 꺼졌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다행이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봐.’
남은 촛불들도 모두 끈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겉옷을 훌렁 벗어 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얼른 자자, 얼른.
그런데 왜 이리 잠이 오지 않을까.
이 집에서 처음 자는 밤.
포근한 침대는 묘하게 낯설었고, 방 안은 남의 집처럼 어색했다.
‘호텔이라고 생각해, 그냥.’
내일 일찍 일어나서 이불부터 빨아야지.
커튼도 다 뜯어내서 세탁해야겠다.
그전에 세 식구 밥을 먹여야 하니 얼마나 바쁠까.
‘자자. 어서 자야 돼…….’
그러나 머릿속에는 생각이 너무 많고, 온 사방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거부의 목소리.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
* * *
“……대박.”
다음 날 아침.
식당으로 들어온 엘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마지막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조금 흐뭇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양고기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넣은 양고기 토마토 스튜, 크림소스에 양고기를 잘게 잘라 넣은 양고기 크림
수프, 양갈비를 직화로 구운 구이, 각종 채소와 감자 샐러드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
다 헤아리기도 벅찬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며칠 만에 제대로 보는 음식인지, 우리에게 금세 다시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시누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걸 다 언니가 한 거야?”
“아니. 알렉이 도와줬어.”
“오라버니가? 어떻게?”
“그러게. 식칼도 제대로 못 들 줄 알았는데.”
나는 식탁에 접시와 식기를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오자마자 어찌나 놀랐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다 간 것처럼 부위 별로 깔끔하게 해체된 양고기가 윤기 나는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설마 싶어 알렉의 방이 있는 2 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마침 남편이 씻고 나온 듯 욕실에서 가운 차림으로
나타났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나 혼자만 다른 이유로 멍하게 있었다.
‘알렉이, 어머님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줬어……?’
세상에, 제정신인가?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싶어 머리가 다 얼떨떨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머니를 공경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거나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시어머니가 나에게 부당한 비난을 할 때도 찍소리 하나 하지 못하며 불안해했다.
그나마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 대신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쩜 저래?’
우리 알렉이 달라졌어요?
대뜸 시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해 달랬어? 언니! 언니가 말해 봐. 언니가 해 준 거잖아.”
“…….”
나는 지금 시누이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알렉의 태도에 아연해하고 있었다.
“언니가 좋다는데 왜 오라버니가 난리야? 그렇게 싫으면 오라버니는 언니가 해 주는 거 먹지 마!”
“엘로이!”
마침내 시어머니가 따끔하게 소리 냈다. 마지못해 입을 다문 시누이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런데 난 혼자 요리 독박 쓰는 게 좋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시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알렉을 응시했다.
“그래, 알렉……? 네 말뜻이 뭔지는 알겠단다. 그럼 일단 루이제의 의사부터 확인해 보고
결정하자꾸나.”
“…….”
저요?
“루이제. 네가 말해 보렴.”
나는 시어머니와 빤히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말투는 언뜻 인자했으나 눈빛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당연히 네가 계속 귀찮고 궂은일을 도맡을 거지?’라는 뜻의.
“너도 나와 엘로이가 식사 준비를 도왔으면 좋겠니?”
“…….”
어디 식사뿐이겠어요.
집 안 청소와 촛불 켜고 끄기 등등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먼지는 매일매일 털어도 계속 쌓인답니다.
“글쎄요. 저는 맛있게 드셔 주기만 한다면 못 할 게 없는걸요. 그치만 제 요리 솜씨가 부족한 탓에
오늘도 어머님께 실망을 끼쳐 드렸네요.”
“…….”
나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었고, 식구들은 잠자코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금세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요리는 포기하는 게 좋겠어요.”
“……루이제!”
“언니!”
대뜸 선언한 내 말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화들짝 놀랐다.
사실 나는 내가 식구들의 끼니를 도맡아 준비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우리 가족들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을 거라는 게 문제였지.
지금도 자기들 생각밖에 안 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보니 저들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할 일이 요리뿐만이 아니네요. 쓰레기 소굴에 살 수는 없으니 집 청소도 해야 하고, 옷과
이불도 자주 세탁해야 해요. 밤마다 돌아다니면서 촛불도 꺼야 하고요. 양도 돌봐야 하지 않나요?”
나는 안타까운 것처럼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어젯밤에 촛불 찾아다니면서 새삼 사용인들한테 너무 미안해지더라고요. 그동안 우리를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흑.”
시어머니가 혀를 찼다.
“그들은 돈을 받는 대가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잖니.”
“그래도 그들 덕에 여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어머님과 엘로이는 돈을 대가로 요리나 청소를
하실 건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것 보세요. 아무튼 제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으니 전 청소나 하려고요. 제가 하는 것보단 더
나은 음식을 드셔야 하잖아요. 흐윽.”
말끝에 내가 살짝 우는 척을 했다.
어머, 딱해라. 아쉬워라.
시어머니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누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표정이었다.
시누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당장 ‘나 안 먹어!’ 하면서 뛰쳐나갈 것 같았다.
문득 알렉이 입을 열자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스스로 필요한 요리와 청소는 각자 하는 겁니다. 양을 돌보거나 쓰레기를 태우는 험한 일은 제가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
“빨래도 힘이 많이 드니 제가 하는 게 낫겠습니다.”
정말로?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공작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우리 남편 은근히 집안 살림에 거리낌이 없잖아?
랏터렛일에 선뜻 나서겠다 어쩐지 지금 그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드르륵.
그런데 대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엘로이가 또 박차고 나가려는구나- 음?
예상과는 달리 벌떡 일어선 건 시어머니였다.
이윽고 그녀가 알렉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실망스럽구나, 알렉.”
“……?”
“그 빌어먹을 놈의 폭군에게 작위만 빼앗긴 줄 알았더니, 이제는 네 긍지까지 잃어버린 거니?”
예?
갑자기 긍지까지요……?
시어머니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난 양을 치고 빨래를 하는 공작 아들은 낳은 적이 없다.”
“…….”
“넌 누가 뭐래도 존엄한 브렌트 공작가의 가주야. 차라리 네가 명예롭게 죽는 건 보아도, 짐승들 똥을
치우고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는 꼴만큼은 절대 못 본다.”
“…….”
시어머니가 조곤조곤 분개했다.
그녀가 알렉에게 저렇게나 실망을 하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막상 시어머니가 저렇게 나오니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이쯤 되면 알렉도 놀라서 무릎이라도 꿇지 않을까?’
그러나 알렉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어쨌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집안일은 분담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거들어 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
알렉의 태도에 거듭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도 단호한 알렉의 말에 동작 그만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이를 악물더니 드레스 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붉으락푸르락, 그녀의 안색이 예사롭지 않게
일그러졌다.
붉어진 시어머니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 그녀가 소리쳤다.
“난 브렌트 공작가의 대공작 부인이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휙.
시어머니가 그냥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나가 버렸다.
“…….”
정적이 흘렀다.
시누이가 흐응 한숨을 내쉬더니 포크를 들었다.
“오라버니 그냥 사용인들을 몇 명 구하는 게 어때.”
그리 말한 시누이는 접시에 있던 고기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는 동안 다른 고기도 썰었다.
“언니, 난 어머니처럼 언니 음식이 맛없다고는 안 했어.”
“…….”
그래.
참, 잘 먹긴 잘 먹는구나…….
나는 슬그머니 알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어머니에게 반항을 해 깜짝 놀랐다.
가만히 있었으면 어머니가 그에게까지 뭐라 하진 않았을 텐데.
“……고마워요, 알렉. 날 위해 그렇게까지 말해 줘서요. 그런데 나 때문에 괜히 어머님께서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어쩌죠.”
그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식기를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양을 돌보겠다는 말이 저렇게 화를 내실 만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고……?
어머니와 누이에게 집안일을 분담시키려고 한 것도, 알렉 본인이 궂은일에 나서겠다는 말도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모두 용납 불가한 일들이었다.
“저 같아도 속상하긴 할 거예요. 당신은 그냥 평범한 아들도 아니고, 귀한 가문의 주인이잖아요. 당신이
유일한 성기사 가문의 후예라면서요.”
“…….”
“우리 가문만큼 명망이 높고, 황가와 인연이 깊은 가문이 또 있을까요?”
그것도 다 선대 브렌트 공작까지의 이야기지만.
“물론 날 위해서 어머님께 그렇게까지 말해 준 건 정말 고마워요.”
나는 시선을 내린 채 식기만 만지작거렸다.
알렉이 나를 위해 어머니를 거역하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라 놀랍고 고마웠다.
비록 시어머니는 분개하며 식탁을 박차고 나가 버렸지만, 죄송하게도 나는 처음 겪는 남편의 쉴드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 느낌 뭐지?
묘하게 든든한데?
남편이 내 편을 들어준 게 이리 좋은 일인가?
“언니, 스튜에 고기 더 있어?”
“응?”
문득 들려온 엘로이의 말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식탁을 보니 시누이가 어느새 그릇을 다 비우고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글쎄. 없을 것 같은데.”
갸웃하며 시누이에게 그리 말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스튜 냄비를 확인했다.
국자를 저어 보니 다행히 남은 고깃덩이가 서너 점 정도 있었다.
‘어차피 알렉도 거의 다 먹은 것 같은데 엘로이 다 줘 버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문득 마음이 바뀌었다.
냄비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은 나는 식탁으로 돌아가 안타까워했다.
“이런, 다 먹었네.”
“아, 알겠어.”
시누이는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남은 스튜를 휘적거렸다. 그러더니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어머니한테나 가 볼게.”
여전히 시무룩하게 말하고는 식당에서 나갔다.
알렉과 나 단둘만 남은 식탁.
다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스튜 냄비를 들고 왔다.
그의 그릇에 양고기 서너 점이 들어간 스튜를 더 담아 주었다.
“더 먹어요, 알렉.”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구나, 흐윽.
“괜찮습니-.”
“……알렉?”
그런데 왜인지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얼어붙어 버렸다.
* * *
[축하합니다!]
“…….”
“…….”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알렉?”
휙, 휘익.
루이제가 그의 시야로 손을 저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루이제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그는 일단 어서 이 장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막 몸을 돌려 다이닝 룸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경고!]
[루이제의 성의를 섭취하지 않으면 퀘스트 보상이 취소됩니다.]
[어서 맛있게 먹어 주세요!]
“…….”
뭐 이런 게 다 있지……?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분명 사라진 줄 알았던 그의 상태 창이다.
원래 푸른빛이었던 글자들이 핑크빛으로 변해 다시 나타났다.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치 끝난 줄 알았던 게임이 새롭게 다시 시작한 느낌이었다.
이내 그는 허공에 떠오른 핑크빛 글자를 모른 체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더 먹을 생각도 없었고,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완전히 다이닝 룸을 벗어나 홀까지 나갔을 때였다.
시스템이 한껏 당황했다.
[경고!]
[경고!]
‘애정도가 3 올랐습니다.’
애정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도 아니고 애정도라니…….
그는 애정도 같은 것을 위해서 일부러 양고기 스튜를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걸 왜 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가 최종 보상이라더니, 무슨 원점 같잖아.’
옅은 한숨을 내쉰 그는 살짝 얼굴을 쓸었다.
이윽고 그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
……그렇구나.
그는 그냥 방문을 열었다.
살짝 이해가 안 가는 퀘스트였다.
루이제는 그의 진짜 아내도 아니고, 그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녀와의 관계를
향상시켜야 하는 걸까?
루이제를 속이는 것 같아서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차라리 NPC 라면 모를까, 아니 아무리 NPC 여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경고!!!]
[애정도를 쌓아야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높여서 폭군 악센을 무찌르고 악의 세력을 처단하세요!]
“…….”
탁.
그는 그냥 방문을 닫아 버렸다.
시스템 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레벨을 올리려면 경험치가 아니라 애정도가 관건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금세 다시 띠링, 소리가 들렸다.
[신뢰도 -2]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신을 죽인 구원자 → 냉정한 초보 남편]
“…….”
* * *
알렉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비록 퀘스트 보상은 무효화되다 못해 신뢰도는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한번 나타난 상태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나타난 시스템에서 몇 가지를 확인했다.
레벨.
놀랍게도 1 이었다.
전생에서 마지막쯤에는 600 을 넘어 버린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다시 갓난아이가 된 것 같았다.
레벨이 갓 시작한 초급자 수준이니 스킬과 스탯의 상태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직업은 그대로인가?’
그는 전생에 그가 전직한 직업 스킬도 확인해 보았다.
만약 그의 직업 스킬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 세계의 폭군 정도는 당장 내일모레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 스킬: 개방 전]
[현재는 열 수 없습니다. 개방하려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도전! 재취업 직업 퀘스트’를 성공하거나,
중급 남편 수준의 애정도를 달성해야 합니다.]
“…….”
직업 스킬도 무용지물인가?
그렇다면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전생의 무기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인벤토리: 잠금 상태]
[현재는 열 수 없습니다. 레벨에 따라 점차 확장됩니다.]
[등장인물 일람]
등장인물?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서 저런 걸 볼 수도 있는 걸까?
호기심이 든 그는 등장인물 목록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가족들 세 명과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음표 천지였다.
그는 우선 자신이 빙의한 알렉시스에 대한 정보부터 확인했다.
[알렉시스 마이어스]
[남, 나이: 23 세]
[브레튼 공작. 외모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불세출의 미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특이 사항: 죽은 이후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
[??????????]
[??????????]
“……?”
특이 사항 이후 장식된 물음표처럼 그의 머릿속도 온통 의문이 장악했다.
알렉시스의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고?
그렇다면 죽은 후에 어딘가로 가 버렸다는 걸까?
과연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걸까?
‘그럼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온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그도 다시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지 몰랐다.
돌아갈 수 있을까?
물음표 처리된 부분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그는 다음으로 루이제에 대해 확인했다.
“…….”
설명을 모두 읽은 알렉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다시 알렉시스의 정보를 열람했다.
왜 그가 루이제와 제대로 된 부부 생활을 나누지 못했는지 쓰여 있었던가?
오늘 아침 확인해 본 바로는 이 몸의 성적인 기능은 너무도 정상이었다.
오히려 몸속의 마나가 넘치듯 들끓다가 중심부까지 꽉 채워진 탓에 평범한 수준 이상으로 크고 뜨거웠다.
……마나?
‘그래, 지금도 이 몸속에는 마나가…….’
“…….”
* * *
결국 나만 남은 식탁.
시어머니는 울먹이며 박차고 나갔고, 시누이는 자기 다 먹었다고 나갔고, 남편은 갑자기 나가 버렸다.
“…….”
‘……그래도 괜찮네, 뭐. 조용해서 이제야 좀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겠어.’
나는 알렉에게 주려고 했던 남은 스튜를 한 입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분위기였는데, 이제야 좀 맛이 느껴졌다.
‘……맛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식탁이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오늘 하루의 첫 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내 남은 음식을 다 먹은 나는 그릇을 정리했다.
‘차라리 나한테 요리를 엄청나게 잘하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나는 식사를 차리는 것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거고, 식구들도 너무 맛있어서 행복해할 텐데.
꼼꼼하게 설거지를 하면서 괜히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의 바람대로 다시 요리사를 고용할 형편은 되지 못했으니까.
돈도 문제였지만, 폭군이 브렌트 공작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우리가 비참하게 버티다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닐까?’
귀족가 중 어느 누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았던 습관과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게 뒷정리를 끝낸 나는 부엌을 나왔다.
밖으로 나가 팔을 쭉 뻗으며 햇빛을 받았다.
‘하, 날씨 좋다.’
탁 트인 경관이 너무도 밝고 평화로웠다.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가 꼭 이곳이 우리들만의 지상 낙원 같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 한구석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식구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렇다고 알렉에게 매일 양을 잡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그에게 맛있는 식사를 차려 주고 싶은데…….
‘아, 맞아. 요리사가 없으면 시장에서 먹을 걸 사 오면 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내 안색이 금세 밝아졌다.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잔뜩 사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다시 집으로 들어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뭔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풍경화가 그려진 액자는 커서 들고 가기 어려우니까 일단 두고, 크리스털 화병, 은으로 된 촛대…….
그래, 화병이랑 촛대가 좋겠어.
나는 버려진 종이를 찾아 화병과 촛대에 둘둘 말았다.
이 정도면 음식을 살 돈은 충분히 벌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무언가가 공기에 섞여 내 호흡과 함께 몸속으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내 눈이 스르륵 감기며 의식을 잃음과 동시에 그대로 쓰러졌다.
* * *
아침을 먹은 후.
알렉은 방 안에서 가만히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몸속 중심이 아니라 거의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찬 마나가 느껴졌다.
너무 오랫동안 갇힌 채 계속 억누르고 있던 마나라서 상태가 예민했다.
이런 마나는 전생에서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알렉은 알렉시스의 등장인물 일람을 다시 떠올렸다.
설마 그래서.
부인과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한 거였나.
마나 때문에 두려워서 몸이 떨리는 것을 피했다면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한 사정이 이해가 갔다.
가마히 있어도 이렇게 들끓는 느낌이 드는데, 크게 움직인다면 정말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특히나 마나를 병증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겠지.
사냥을 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칼을 쓰든 총을 쓰든 몸에 충격이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이 몸의 주인은 달라.’
알렉은 몸속에서 질서 없이 일렁대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장악하기 시도했다.
한 번도 조절한 적이 없는 상태의 마나는 순수함 그 자체이면서도 엉망 진창으로 떠돌고 있었다.
우주처럼 방대한 양, 호수처럼 심연이 보이지 않는 깊이.
물처럼 투명한 듯하면서도 너무도 맑아 푸른빛을 띠는 것 같은 기운.
지금 반드시 이 마나를 1 서클까지 성장시켜야 했다.
이 집에 정말 유령이 사는지 알아내야 했으니까.
유령을 감지해 잡으려면 마나를 조금이라도 발현할 필요가 있었다.
직업 스킬도 없으니 오로지 마나로 해결해야 했다.
유령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사람들의 말을 완전히 다 믿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알렉은 원래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이 집에 집착하는 유령인가?
살다 보면 가구를 밖으로 옮길 일이 생길 텐데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건 곤란했다.
알렉은 조금 더 집중했다.
심장에 원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마력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온몸에 퍼진 마나를 한군데로 응집시켜야 했다.
쉽지는 않았다.
몸속에 들어 있는 마나의 양이 너무나 많았고, 또 처음으로 끌어내는 탓에 그의 의지대로 수월하게
따라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렉은 심혈을 기울여 집중했다.
유령.
오로지 이 집에 사는 유령을 포획할 생각이 생각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더 강렬한 결심으로 타올랐다.
그러자 마나가 더 빠르게 그에게 반응했다.
휘이익. 휘잉.
마나가 조금씩 타원을 그리며 심장 주위를 감돌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서클 하나가 완벽하게 생성된 것은 아니었다. 흐릿하게 고리의 형태를 띠며 감돌고 있었다.
‘다. 계속 더…….’
마나의 기운이 더 장엄하고 광활하게 움직였다.
한계가 느껴질 때까지 그의 마나를 몰아붙였다.
전생에 그가 마나를 단계적으로 성장시켰을 때의 느낌을 최대한으로 되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을 파헤치고 파헤쳐 더 깊이 침투해서, 결국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마주했을 때의
그 희열.
바로 그 순간 고리가 완벽하게 완성되는 성취감.
전생에 여러 번 성공했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덕에 이번에는 비교적 쉬워졌다.
점점 심장에서 휘도는 마나가 선명해졌다.
‘거의 다 됐어.’
알렉은 그의 정신 속을 더 집요하게 헤집고 들어갔다.
전생에 처음으로 그가 1 서클을 완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마나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던 초심자의 기억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경력직의 원숙함으로 마나도 한결 안정적으로 휘몰아쳤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세졌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부풀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처럼, 전과는 달리 황홀하고도 홀가분한 느낌이 흥분처럼 그를
휘감았다.
확.
어느 순간 그는 눈을 떴다.
그의 가슴 속에서 마력이 심장처럼 살아서 쿵쿵 뛰었다.
꼭 새 심장을 얻은 것 같았다.
원석에서 다이아몬드를 제련한 듯이.
마침내 그의 마나는 1 서클의 단계만큼 강해졌다.
* * *
1 서클이 된 그는 상태 창을 확인했다.
역시나 레벨은 그대로였다.
마나는 레벨 업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마법 속성의 스킬을 더 오래, 많이 쓸 수 있게 하는 연료였으니 최대한 많이 성장시키는 게 유리했다.
상태 창을 열어 보니 역시나 마나가 필요한 스킬들이 개방되어 있었다.
따로 획득하지 않아도 되는 패시브 스킬들이었다.
확인을 끝낸 알렉은 상태 창을 다시 닫았다.
이제 유령을 감지해 볼 시간이었다.
알렉은 그의 마력을 온 저택 안으로 퍼뜨렸다.
[축하합니다!]
[사후 존재를 맞닥뜨려 ~도전! 재취업 직업 퀘스트~가 개방되었습니다.]
[직업 퀘스트에 성공해서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되찾아 보세요!]
“……!”
재취업 직업 퀘스트가 열렸어?
언제 받을 수 있는 건가 싶었는데 유령을 만나야 열리는 거였나?
……네크로맨서.
그건 시스템상 그의 직업이었다.
네크로맨서는 인간과 동물, 마물을 막론하고 유령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사역령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크로맨서는 마법 계열의 직업이라 플레이어의 마나 보유량이 능력치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다행히 그는 속칭 ‘마나 수저’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덕에
네크로맨서로서의 능력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겨우 수백만 정도의 사역령 군대를 이끌 때, 그의 능력은 홀로 수천만에 달하는
사역령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 몸의 마나는 엄밀히 말하면 0 에 해당하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가 1 서클로 성장시켰지만, 그전까지는 몸속에 가둬 놓고 한 번도 발현하지 않았으니 0 이나
마찬가 지였다.
‘사실 그래서 이 집을 고른 거였는데.’
유령이 나오는 매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했다.
시스템을 이용해서 사역령을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유령을 잡아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
유령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갓 죽은 시체에서는 특정 시간 내에 해당 영혼을 만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공동묘지에 가 봐야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승을 떠도는 유령이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알렉의 몸에는 마나가 있으니 시스템이 없어도 사역령을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렉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유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갈색 털로 뒤덮인 작은 짐승이 그의 마력에 묶인 채 낑낑대고 있었다.
“…….”
당연히 사람 유령일 줄 알았는데 작은 짐승이라니.
미처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작은 몸, 부드러워 보이는 털.
그러나 인상은 어찌나 매서운지 눈매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킁, 크릉!]
유령이 앙칼진 목소리로 그를 쏘아보며 위협했다.
별 위기감이 들지 않아 유령의 몸을 묶은 그의 마력을 풀려고 한 순간이었다.
[크르릉!]
‘너 내가 보이는 거냐!’
유령이 짖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마나 때문일 것이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그제야 소리 냈다.
“사람들을 잠들게 한 게 너냐? 어서 다 깨워라.”
[크릉!]
‘이거나 풀어!’
유령이 아까보다 더 잔뜩 화를 내며 방방 뛰었다.
잔뜩 화를 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다.
알렉은 조금 더 날카롭게 물었다.
“저 사람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크르릉!]
‘내 연기를 마신 인간은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
“…….”
그냥 평범한 유령 같은데, 사람들을 기절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마물도 아닌데, 신기했다.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진 유령일까?
그 순간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기드온?
저 유령의 이름이 기드온인 모양이었다.
알렉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저 유령, 혹시 시스템이 만들어 낸 몬스터가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기드온의 존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세계에도 폭군 때문에 나중에 마수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특수한 능력이 있는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러운 세계였다.
‘그렇다면 설마.’
새집을 구하던 그가 모르는 사이에 시스템의 설계를 찾게 된 걸까?
이 유령이 계속 전 주인들을 내쫓았던 것도 설마…….
[크르릉…….]
‘나는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집을 지켜야 한다.
[크릉!]
그러니 어서 여기서 나가라.’
[킁킁!]
‘여긴 우리 주인님의 집이야!’
“…….”
유령의 기세가 무척 사나웠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동안 이 집에 이사 오는 사람들을 왜 쫓아 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 작은 짐승은 시스템이 그를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게 분명했다.
“사람들을 잠재우는 연기 같은 건 어떻게 생긴 능력이지? 넌 단순한 유령이 아닌 건가?”
연달아 물은 그의 질문에 유령이 경계하듯 몸을 숙였다.
이런 물음을 받는 게 낯선 모양이었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 그대로, 유령이 낮게 짖었다.
[크릉…….]
‘추워서 벽난로에서 자고 있었는데 불에 타 죽었어.’
[크르릉.]
‘내가 있는지 모르고 이사 온 사람이 불을 냈거든.’
[콩!]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어!’
그때를 생각하는 듯 유령이 분개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알렉은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랬군.”
예기치 않게 불쌍한 사연을 가진 유령이었다.
여느 NPC 답게 시스템이 주입한 기억을 현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킁!]
‘너도 내 맛 좀 봐라!’
그때 유령이 양 볼을 늘리며 자신의 입김을 모았다.
그에게 연기를 마시게 해 기절시킬 모양이었다.
후우우욱……!
이윽고 희뿌연 연기가 유령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금세 그의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마나로 방어하려는 순간, 띠링 알림이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마나를 발현시켜서 패시브 스킬이 열렸지.
덕분에 그는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도 유령의 연기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욱!
후욱!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유령은 열심히 연기를 내뿜었다. 복도 안이 다 연기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이내 연기가 조금 거둬지자 유령의 눈이 다시 보였다.
유령은 멀쩡한 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킁!]
‘너는 왜 내 연기를 마시고도 멀쩡해?’
“…….”
[크릉!]
‘인간 맞냐?’
알렉은 작은 유령을 내려다보며 살짝 비웃었다.
“여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내쫓았나? 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만 포기해라.”
[킁? 크릉!]
‘뭐라고? 아니야! 우리 주인님은 꼭 돌아온댔어!’
알렉은 더욱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그만둬.”
유령이 무척 화가 난 듯 눈매를 더욱 사납게 끌어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킁…….]
유령을 속박하고 있던 알렉의 마력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유령이 몸집을 늘리기 시작했다.
알렉은 저건 뭔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팔뚝보다 작은 강아지 같았던 유령이 점점 커지더니 한 마리의 털북숭이 짐승이 되었다.
[크르릉.]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큼직해진 송곳니는 무척 위협적이었다.
기드온이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 앞 발을 까딱였다.
솜뭉치 같았던 강아지의 발은 사람도 단숨에 찢어 죽일 것 같은 흉기가 되어 있었다.
그가 마력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맞서기 꽤 까다로웠을 듯한 흉포함이었다.
그 순간 띠링, 알림이 울렸다.
* * *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내가 어쩌다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무척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나.
시장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왜 자고 있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서 일어나고 싶었는데, 쉽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양고기 요리를 하느라 힘들긴 했지.’
차라리 그냥 더 자 버릴까, 생각하며 의식을 놓으려 한 순간.
“언니! 일어나, 언니!”
이유 모를 찜찜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마치 내 의지로 잠이 든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 먹어야지. 배 안 고파? 밥 다 됐어.”
의아한 마음에 얼굴을 찡그린 나는 그제야 내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보니 시누이가 나를 향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제야 깼어?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자? 벌써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났는데.”
“……아, 엘로이.”
비몽사몽간에 나는 서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창밖을 본 나는 순간 소리 없이 경악했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밤이야?’
대체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순식간에 하루가 다 날아갔다.
놀란 내가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며 엘로이에게 물었다.
“나 얼마나 잔 거니?”
“몰라. 나도 낮잠 자다가 점심때 훨씬 지나서 일어났어.”
“…….”
“일어났으면 얼른 나와서 밥 먹어. 마침 다 됐어.”
그리 말한 엘로이는 그대로 쌩하니 나가 버렸다.
나는 무거운 이마를 손으로 받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옷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내 몸에 걸쳐져 있었다.
옷도 안 벗고 그냥 침대에 누운 건가?
분명 촛대와 화병을 챙기고 있었는데 어쩌다 낮잠을 자게 된 거지?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가 보였다.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미모, 우아하게 다리를 포갠 자세.
내가 그녀를 발견한 순간, 시어머니도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척 봐도 눈길이 곱지 않았다.
“……못 자서 죽은 유령이 붙었나, 이제 일어나는 거니?”
“그으러게요, 어쩌다 보니…….”
나는 그냥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시어머니는 더 꼴불견이라는 듯 얼굴을 구겼다.
“네가 뭉그적거리니 우리 지엄한 브렌트 공작가의 가주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게 아니냐.”
“네?”
알렉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고?
시누이가 밥이 다 됐다길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알렉이 한 거야?
시어머니를 뒤로한 나는 어서 부엌에 가 보았다.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부엌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수프 냄새가 났다.
옥수수와 감자를 푹 삶아 끓인 듯한 냄새와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토마토 향이 후각을 자극하자 불현듯
식욕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거의 다 차려진 듯한 식탁에는 엘로이가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웬일로 쟤가 식사 준비를 거드는 걸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아침에 있었던 알렉의 선전 포고가 효과라도 있었던 걸까?
하긴 내가 앞으로 요리를 안 하겠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거드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겠지.
“……아.”
알렉을 찾아 몇 걸음 떼던 나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 식당 쪽으로 들어온 알렉과 마주쳤다.
그는 은으로 된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토마토를 뭉근하게 끓인 듯한 소스와 기다란 면이……
스파게티인가?
은쟁반을 멍하니 바라본 내가 이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끝내주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니 남은 잠이 모두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깨어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 * *
* * *
* * *
띠링.
한편 식사를 하던 알렉은 하마터면 식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족들이 너무 맛있게 음식을 먹어 줘서 내심 안도하고 있었는데, 알림음 소리와 함께 상태 창 글자들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
갑자기 솟아오른 상태 창에 뜨끔한 알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식이 거의 다 비워져 가는 식탁 위로 분홍빛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애정도가 올랐어?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낼 뻔했다.
일단 그는 상태 창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셨다.
대체 왜 오른 거지?
‘설마 저녁 식사를 만들어 줘서……?’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루이제가 눈물을 글썽거릴 만큼 맛있다고 한 말은 순수한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간단한 요리였는데, 이런 걸로 애정도가 오르다니…….
사실 그는 전생에 요리를 해 본 적이 많았다.
아예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건 전생에 있었던 ‘특별 퀘스트’ 때문이었다.
요리 기능사 자격증을 하나씩 딸 때마다 특수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그 덕에 파스타 같은 간단한 음식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게 여기서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요리 중 이 세계에서 만들어도 위화감이 없는 메뉴를 고르느라 고민을 좀 해야
했다.
사실 그는 레벨을 올리는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이제에게 애정도를 얻을 자신도 없었고, 일부러 애정도를 따내려 애쓰는 것도
어딘가 찜찜한 탓이었다.
‘혹시…… 요리를 열 번 해 주면 애 정도도 10 까지 오르는 걸까?’
그는 파스타 외에도 또 맛있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뭐가 있는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 * *
“…….”
꼭 그를 둘러싼 세계가 다시 그에게 악을 무찌르고 평화를 이룩하도록 종용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왜 그 번거로운 일을 그가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진짜 게임도 아니고, 왜 힘든 일에 자꾸 부려 먹는지 모르겠군.’
알렉은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게다가 이 세계는 꿈에도 예상 못 한 방식으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왜 하필 레벨 업에 애정도가 필요한 건데.’
* * *
“계십니까?”
양털이 담긴 포대를 들고 있던 알렉이 먼저 가게의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그가 포대를 내려놓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어서오슈.”
무심코 소리 낸 주인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알렉의 얼굴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다음으로 나와 엘로이까지 차례로 쳐다보더니 낯빛이 창백해졌다.
“어, 어디서 이런 분들이…….”
“혹시 양털을 팔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알렉은 주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바로 용건을 말했다.
“아, 예, 예. 어디 보여 주시지요.”
“이겁니다.”
알렉이 가볍게 포대를 들어 선반 위로 올려놓았다.
주인은 포대를 벌려 양털을 유심히 만져 보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질이 꽤 괜찮군요. 한 10 골드 정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15 골드는 안 될까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내가 얼른 물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플러스마이너스 5 정도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한껏 자신 있게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방목한 오가닉 양털이거든요. 양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했답니다. 털도
일 년에 한 번밖에 깎지 않아서 품질도 좋고요.”
말을 마친 나는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옆에서 엘로이가 이상한 눈으로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양털 주인은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10 골드도 후하게 쳐 드린 겁니다. 원래 7 골드만 받으려다가…… 혹시 다른 것도
파실 거라면 300 골드를 드리지요.”
“네? 다른 거요?”
나와 엘로이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른 게 무엇이길래 300 골드나 준다는 건지, 우린 팔 만한 게 또 없었다.
“대체 뭘…….”
대답 대신 양털 주인은 짙은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 머리카락이었다.
은색이었지만 빛에 따라서 간혹 우아한 황금색으로도 보이기도 하는 내 머리카락에 양털 주인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 저 사람도 이게 탐나나 보네.’
그동안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가면 간혹 몇몇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에 눈독을 들였다.
* * *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
알렉은 양털 상점을 나가려다가 흠칫 멈춰 섰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루이제의 얼굴 위로 핑크빛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애정도가 또 올랐어?
그의 눈이 조금 크게 벌어진 채 얼어붙었다.
갑자기 이게 또 어떻게 된 거지?
처음 애정도가 올랐을 때는 그가 맛있는 요리를 해 줬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포인트에서 애정도가 오른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머리카락을 못 자르게 해서?
아니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애정도가 올랐을까?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알렉이 말했다.
“이만 가시죠.”
그가 루이제에게 10 골드를 내밀며 말했다.
루이제는 그 10 골드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금화를 받으며 끄덕였다. 그제야 그가 상점 밖으로
나갔다.
딸랑.
양털 상점에서 나오자 문에서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어쩌다 얻어걸린 것 같지만, 애정도가 또 오르다니.
그는 시스템에서 애정도에 대한 기본 설명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애정도란?
아내의 애정도는 당신을 더욱 강하게 해 줍니다.
애정도가 높아지거나 루이제에게 명령어를 들으면 특성화 스킬이 개방됩니다.
예시로 ‘내 남편 어디서 기죽지 마.’ 스킬은 적을 완전히 주눅 들게 해 전투 욕구를 상실시킵니다.
어서 아내의 애정도를 높이고 악의 세력을 물리치세요!]
“…….”
별로 도움이 되는 설명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걸음을 멈추고 루이제를 돌아보았다.
“루이제?”
“네?”
그는 루이제가 머리카락을 팔 생각까지 해서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정도로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나 싶었고,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와장창 깨지는 것 같았으니까.
같이 사는 여자가 돈 때문에 머리카락을 파는 건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루이제뿐만 아니라 엘로이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다시 정보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상이요?”
“예. 마차를 타는 곳까지는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거기 어디 있는 정보상인데요?”
“루덴입니다.”
“루덴이요?”
“루덴?!”
“…….”
알렉은 조금 흠칫했다.
루덴이라는 말에 루이제와 엘로이가 기겁하듯 깜짝 놀랐다.
“어디 정보상인가 했더니 루덴에 있는 곳이었어요? 당신 혼자 다녀와도 정말 괜찮겠어요?”
“……예?”
뭐, 잘못되었나?
루덴은 이 릴트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두 드나들었고, 가장 솜씨가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각 분야의 장인들이
매장을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은행, 백화점, 식료품점 등도 모두 모여 있었고,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도 루덴에 밀집해 있었다.
그가 조금 의아해하자 루이제가 말했다.
“아, 난 그냥 혹시라도 당신이 거기서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정말로 루덴 근처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런 건 이제 괜찮습니다. 전에도 다녀온 적 있기도 하고요.”
“아, 그럼 알겠어요. 그래도 이왕 나온 거 나랑 같이-.”
“아, 안 돼. 난 거기 가기 싫어.”
엘로이가 루이제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듯 들러붙었다.
루덴에 가는 게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울먹였다.
“거기 가면 다른 애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르잖아. 난 지금 드레스도 이상한 거 입었는데…….”
“…….”
루덴은 고위급 귀족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신분이 추락한 지금 상황에서는 가고 싶지 않은 엘로이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엘로이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쫓겨날 때 챙긴 듯한 옷 몇 벌로 번갈아 입고 있었다.
엘로이의 말에 루이제가 잠시 고민하더니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엘로이랑 여기서 조금 더 둘러보고 가는 게 낫겠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알렉.”
“알겠습니다.”
알렉은 나직하게 대꾸했다.
마침 내리비추는 빛에 루이제의 머리카락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관련 없는 남의 머리카락이었지만, 겨우 돈 때문에 잘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렉은 이참에 차라리 빈방 안에 금화를 상자째 쌓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드온.’
시장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의 사역령을 불러냈다.
[크릉?]
‘가족들 좀 몰래 따라다녀.’
너무 눈에 띄는 여인들이라, 무슨 일이 생길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 * *
* * *
그 걱정스러우면서도 단호했던 말.
그 순간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에게는 내가 머리카락을 팔겠다고 한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하긴 그가 내 머리카락을 팔도록 그냥 놔뒀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서운했을 것 같잖아……?
숨을 길게 내쉰 내가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빈손이어도 상관없으니 얼른 돌아왔으면-.
순간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저 멀리 어둠 속에 파묻힌 곳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잘못 본 걸까?
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집중했다.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던 탓에 사위가 뿌옇게 뭉개져 있었다.
그 희미한 공기를 뚫고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달가닥, 달가닥…….
그리고 바퀴가 습한 땅을 짓누르며 달려오는 소리.
마차일까?
어스름한 안개가 깔린 깊은 밤중에 말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꼭 환청을 듣는 것 같았다.
어렴풋했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진해지며 어두운 안개를 뚫고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은 하얀 주둥이의 주위로 안개가 흩어졌다. 그리고 휘날리는 새하얀 갈퀴.
꼭 꿈속의 한 장면인 것처럼 백마가 슬로 모션으로 내 시야에 뛰어들었다. 두 마리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두 마리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말고삐를 쥐고 위용 넘치게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알렉?”
나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몸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알렉으로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마차를 멈추더니 마부석에서 한달음에 뛰어내렸다.
어깨에 걸친 검은 망토는 꼭 기사의 것처럼 장엄하게 펄럭였다.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금화를 마음껏 쓰라는 말이 이렇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말이었던가?
모두 얼마인지 세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많은 양의 금화들이었다.
이런 걸 2 층에 있는 방에 쌓아 놓으면 바닥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자는 가족들을 깨워 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는 동안 가족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했다.
그런데 알렉의 금화 플렉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며칠째 나는 이게 다 뭔가 싶어 눈이 핑핑 돌았다.
“여기, 이쪽으로 놔주게. 호호호.”
시어머니가 새로 도착한 피아노를 응접실 한가운데에 두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사치품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접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버렸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구나. 그렇지 않니, 엘로이?”
“네, 어머니. 원래 살던 저택에 비하면 오두막 수준이지만, 그래도 많이 살 만해졌어요.”
호호호.
호호호호.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며칠 전 알렉이 금화 마차를 끌고 왔을 때도 충격적이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니.
알렉은 방문 판매를 하는 잡화 상인과 의상점 주인을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책자 속 모든 상품을 완판시켰다.
조금 머뭇거리던 나도 새 드레스를 열 벌이나 맞췄다.
원래 살던 저택에서 거의 맨몸으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라 옷과 신발이 시급했는데, 그가 이렇게 알아서
재단사를 불러 주다니…….
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은 저택과 멀지 않은 곳에 실력 좋은 요리사의 음식점을 오픈시켰다.
사실 사용인으로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폭군의 협박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이렇게 했습니다. 근처에 음식점을 운영하게 해서 배달을 시키거나 우리가 손님으로 방문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죠.’
‘알렉, 당신 천재네요…….’
* * *
[애정도: 2]
[명성: 157]
‘흐음.’
애정도를 바라고 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오를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건 완전한 그의 착각이었다.
결국 돈과 관련된 것들로는 루이제의 애정도를 얻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시스템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이쯤 되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그는 루이제에게 다른 요리를 한 번 더 해 주었다.
뇨끼라고 불리는 수제비 같은 파스타였는데, 감자와 밀가루 반죽을 섞어 노릇하게 익힌 후 크림소스를
곁들이는 요리였다.
그의 요리가 애정도를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맛에 공을 들이게 되었다.
역시나 루이제는 너무도 맛있게 먹으며 감탄을 거듭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애정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요리로 애정도를 얻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애정도가 생길 만큼 놀라운 상황이 아니어서
오르지 않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등장인물 일람에서 루이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다.
* * *
저녁을 먹은 뒤.
개운하게 목욕까지 한 알렉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지난 며칠 동안 집 안에 필요한 생필품과 의복, 사치품들을 챙겨 넣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이제야 좀 이사가 끝난 홀가분한 기분.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자니 포근한 패드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쳐 주는 것 같아 안락했다.
이불도 얼마 전 새로 세탁을 해 벽난로 근처에서 바짝 말린 것이라 유달리 포근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는 ‘애정도 2’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거 계속 올리는 게 가능한가?’
보스 몹들은 계속 공격하면 죽기라도 하지, 애정도는 공략 방법조차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애초에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막상 2 포인트라도 오르고 보니 신경이 쓰였다.
미약한 두통을 느낀 그는 손을 들어 눈 위에 올렸다.
보송보송한 침대와 이불이 너무 아늑했던 탓일까?
얼마 안 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꽤 오래, 깊이 잠들었던 순간.
‘이 쓸모없는 자식!’
툭.
아버지가 채찍을 내던졌다.
뚜벅, 뚜벅.
차갑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떠나가는데, 왜 가슴은 맞을 때보다 더 시리고 아픈 걸까?
알렉은 더 작게 몸을 웅크려 안은 채 뚝뚝 눈물을 흘렸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데 몸이 아픈 게 대수일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버지 말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화를 낼 일이 없을 것이고, 공작가가 수치스러울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자신은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건지 서러웠다.
그러나 등에 난 상처는 다시 아물 틈이 없었다.
퍽, 퍽!
‘이 평민보다 못한 놈!’
‘너 같은 놈하고 친척이라니 내 명예가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알아?’
‘죽어! 죽으라고!’
‘대체 왜 아들을 또 낳지 못하는 거요! 나더러 저 모자란 놈을 후계자로 두라고? 천박한 오페라 가수도
아니고 노래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당신이 그 허접한 씨물을 다른 계집들한테 나눠 주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또 낳았을 겁니다!’
‘시끄럽소!’
사실 어린 마음에도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도 하고 있었다.
더 기다려 달라고, 정말 훌륭한 아들이 되겠다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쑥 목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지며 먹었던 것을 왈칵 토해 냈다.
이건 식사 예절이 아닌데. 더 혼날 텐데.
참아 보려 해도 계속해서 구역질이 났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그를 향한 아버지의 눈길은 차가웠다.
그를 죽이는 건 독이 아니라 저 냉담한 눈빛 같았다.
‘……맙소사, 알렉!’
* * *
* * *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마르셀 하워드]
[남, 나이: 26 세]
[하워드 후작. 제국에서 가장 큰 방직 공장인 하워드 방직을 운영하고 있다.]
[하워드 방직의 실제 소유주는 마르셀의 남동생인 랭던 하워드이며, 마르셀은 후원자이자 비선 실세를
맡고 있다.]
[방직 공장의 후원자들은 그들끼리 연합을 만들어 ‘홀든 방직 유니언’을 세웠다. 마르셀과 개리슨
오스번 백작, 데미안 웰스 후작이 주요 멤버이다.]
[홀든 방직 유니언은 제국에서 유통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방직물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불합리한 담합으로 제국민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고 있으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반면 물품의
대금은 큰 폭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전투력: 없음]
* * *
‘아쉽게도 어쩌죠. 저는 여러분들처럼 형편없는 남편을 포기하고 일부러 정부를 찾지는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아직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군요. 같은 남자로서 브렌트 공작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푸흡.’
‘이봐, 개리슨.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알렉시스도 얼마나 노력 중이겠어. 크흐흡.’
* * *
띠링!
알렉은 개리슨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그는 개리슨 위로 떠오른 상태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또 뭐지?
그는 감히 여자를 건드리나 싶어 개리슨을 한 대 쳤을 뿐인데, 상태 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루이제의 명령어가 작동해 특성화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
[Lv.1]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특성화 스킬?
스킬 명, 내 남편 건들지 마……?
이게 뭔가 싶어 알렉의 눈동자가 흠칫 경직되었다.
순간 그는 시스템의 애정도에 관한 설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
명령어?
혹시 루이제가 ‘내 남편 건들지 마.’라는 말을 해서 ‘내 남편 건들지 마.’ 스킬이 활성화된 걸까?
그는 이내 이것이 애정도를 바탕으로 한 특성화 스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항이 열 배나 높아진다니.
‘원래 갖고 있던 저항 스킬보다 훨씬 강력하잖아?’
알렉은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특성화 스킬의 레벨이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효력은 강했다.
그러나 아직 애정도가 2 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크게 유용하지는 않았다.
[지속 시간: 30 초]
30 초.
지속 시간이 저 정도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 미쳤어?”
“너 이 새끼, 갑자기 뭐 잘못 먹었냐? 아니면 이제 뵈는 게 없는 거냐?”
데미안과 마르셀이 인상을 구기며 차례로 말했다.
알렉은 개리슨에게서 시선을 떼 루이제와 엘로이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의 물음에 루이제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한번 끄덕였고, 엘로이는 세 번이나 빠르게 끄덕였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조금 물러나십시오.”
* * *
“……!”
어쩌지?
나는 알렉의 눈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렉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인하고도 고요한 위압감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로이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는지 동그란 눈을 두 번이나 깜박였다.
그 순간이었다.
마르셀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날렸다.
“꺄악!”
엘로이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렉!”
그 주먹의 각도가 알렉의 얼굴을 정통으로 노리고 있어서 나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알렉은 휙 몸을 틀어 데미안의 주먹을 흘려 버렸다.
헛손질을 한 마르셀이 순간 고꾸라지려고 했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는 반대쪽 손으로 주먹질을 했다.
나는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알렉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놈들의 마부가 움찔거리며 다가오려고 했지만 알렉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꼼짝도 못 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그가 누군가를 때리거나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 큰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셌는지도 몰랐다.
“시발, 이 새끼가.”
그새 세 번이나 헛손질을 한 마르셀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그런 마르셀을 상대하는 알렉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마르셀만 어떻게든 한 대 쳐 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알렉은 마지못해 어울려 주는 느낌?
나는 그 모습을 희한하게 응시했다.
알렉에게 언제부터 저런 능력이 있었던 걸까?
그동안 잘 움직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힘도 잘 쓰고 유연하잖아……?
날아오는 주먹을 바로 피하는 순발력까지.
최근에 그는 죽음을 시도하기 전과 달라진 점이 꽤 있었지만, 이런 강렬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설마 그가 여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당하고 살기만 하다가 이제 와서 힘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난데없는 소란에 주위를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힐긋거렸다.
그런데 마르셀의 눈에는 알렉의 동작이 다르게 읽히는 듯했다.
“피하지 마, 새끼야. 맞을 자신이 그렇게 없어? 아플까 봐 겁나냐?”
설마 정말로 알렉이 무서워서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알렉이 같잖다는 듯 짧게 조소했다.
“이 실력으로 나를 때릴 수 있긴 한 건가?”
“뭐? 이 새끼가 근데.”
퍽!
마르셀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린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설마 알렉이 맞은 건가 싶었지만, 알렉이 마르셀의 팔을 꺾으며 발로 그 복부를 가격했다.
별로 세게 찬 것 같지 않았는데, 마르셀의 몸이 날아갔다.
“악!”
그 모습에 개리슨과 마르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렉은 마르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한 대를 더 쳤고, 마르셀은 가까스로 일어나 알렉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며 또 한 대를 얻어맞았다.
알렉이 다시 한 손으로 마르셀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때릴 수 있으면 때려 봐. 얼마든지 맞아 줄 테니까. 아,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 건가?”
퍽!
그 이후로도 마르셀은 몇 대를 더 맞았다.
“이, 이 새끼 가만 안 둬!”
꿋꿋하게 알렉을 치려고 손을 들고 발길질을 했지만 알렉의 털끝 하나도 건들지 못했다.
마르셀에 비하면 알렉은 마치 한 명의 거대한 전장의 신 같았다.
그 정도로 마르셀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목각 인형처럼 알렉의 손 위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데미안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저 자식 알렉시스 맞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개리슨마저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알렉은 맡겨 놓았던 마차를 찾았다.
마부가 없었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말을 몰았다.
마차 안에는 루이제와 엘로이 둘뿐이었다.
새삼 그는 전생에 승마를 익혀 놓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시스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여러 체력 단련 퀘스트를
매일같이 해야 했다.
다른 각성자들은 단순한 근력 운동 퀘스트만 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근력 운동과 더불어 승마, 수영, 복싱, 육상, 펜싱, 사격 등 다 말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은 종목의
운동을 익혀야 했다.
승마의 숙련도를 모두 채우면 수영 퀘스트가 시작되었고, 수영을 끝내면 또 새로 복싱 퀘스트가 시작되는
식이었다.
만약 그 퀘스트들을 하루라도 실수로 빼먹거나 포기한다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페널티를
받았다.
그랬으니 몸을 쓰는 건 일도 아닌 그에게 방금 전 그 세 놈은 인형 놀이에 불과했다.
그때 승마를 마스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말을 쉽게 다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가족들이 많이 놀랐겠어…….’
적당한 속도로 마차를 몰던 그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마차에 탈 때도 루이제는 어딘가 얼떨떨한 상태였고, 엘로이도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둘 다 조금 전의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렉시스에게는 불가능했을 힘을 내보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
‘들키려나?’
분명히 가족들은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심할 것이다.
알렉시스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아까 그놈들에게도 당하고만 살았던 듯한데, 그는 평소에 알렉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러나 방금 전 그의 행동을 납득시킬 핑계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오랫동안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일찍 진실을 밝힐 때가 온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추궁을 당한다면 알렉은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럼 앞으로 레벨 업은 물 건너가는 건가?’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이제가 알게 된다면 쫓아낼 게 분명했으니까.
어차피 처음부터 그는 회의적이었다.
애정도를 올린다니, 그런 게 그에게 가능할 리 없지.
‘나 같은 모태 솔로가…….’
처음 보는 여자한테 애정도를 어떻게 얻는단 말인가.
그저 진짜로 알렉시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가족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 * *
한편 알렉이 몰고 있는 마차 안.
나는 엘로이와 마주 앉아 입술만 벌리고 있었다.
마차가 얼마나 덜컹거리든, 바깥에 어떤 풍경이 스쳐 지나가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알렉이 양아치 삼총사를 후려 패던 장면만
되감았다.
“…….”
그 능숙하면서도 신속한 움직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던 동작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알렉이, 어떻게 된 걸까?
그의 서늘한 눈빛과 표정, 말투도 잊을 수 없었다.
위압감과 긴장이 전해져 나는 선 자리에서 조금도 미동하지 못했다.
여태 알렉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번처럼 할 말을 모두 잃어버릴 정도로 달라 보이긴 처음이었다.
“엘로이?”
“응?”
불쑥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엘로이가 화들짝 어깨를 떨며 나를 쳐다보았다.
엘로이도 아까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 알렉이…… 원래 그렇게 잘 싸웠니?”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그가 스무 살 때였다.
혹시 나를 만나기 한참 전인 어린 시절에는 그가 잘 움직인 데다가 격투도 잘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엘로이는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절대! 절대 아니야. 달리기는커녕 빨리 걷는 것도 못 했다니까? 검도 못 휘두르고, 총은 총성
때문에 사격장 근처에도 못 간다고 했어!”
“……그래?”
역시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구나.
원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그냥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그렇다면 알렉이 그렇게나 과격하게 몸을 쓴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건데.
아니, 설마 여태 혼자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모두를 속이고?
마침 엘로이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진짜 처음 싸워 보는 사람 맞아? 혹시 우리 몰래 복싱 클럽이라도 다녔던 거 아니야?”
“글쎄…….”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그 나쁜 놈들을 종잇장처럼 두들겨 팰 수가 있어?”
“나도 그게 이상하네.”
한숨을 내쉰 나는 몸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알렉이 원래 그렇게 잘 싸웠다면 진작 그런 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것도 그래…….”
“독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건 더 그래…….”
엘로이도 내 말에 동조했다. 마차 안에 다시 혼란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알렉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엘로이와 이런저런 말을 나눠 봐야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이 일을 떨쳐 버리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일단 어머님한테는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알렉이 그 홀든 방직 유니언 놈들을 마주친 거
아시면 좋아하진 않으실 거야.”
“……응, 알았어.”
“알렉하고는 내가 얘기해 볼게.”
“응.”
“…….”
“그런데 언니.”
“응?”
창밖 풍경을 보던 나는 다시 엘로이를 응시했다.
알렉이 직접 운전하는 마차를 탄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승차감이 꽤 부드러웠다.
말도 한 번 안 타 봤던 남자가 마차는 또 어떻게 이리 잘 모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로이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꽤 통쾌하지 않았어?”
“……응?”
“난 그 자식들 쥐어 터지는 거 보니까 너무 좋던데.”
“…….”
엘로이가 빙글빙글하며 웃었다.
초여름의 맑은 공기처럼 눈동자가 반짝였고, 입매는 흡족하게 올라가 있었다.
공작저에서 쫓겨난 이후로 처음 보는 엘로이의 웃음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엉망이 된 놈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못 볼 장관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들릴락 말락 훗, 하고 웃었다.
“그렇긴 했지.”
특히 흠씬 쳐 맞고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알렉을 쳐다보았을 때.
* * *
“…….”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확히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
그가 또 고민하듯 망설였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말하기 어려운 듯했다.
자기도 잘 모르는 데다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인 걸까?
아니면 미리 나한테 말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걸까?
입술을 열었던 그가 갈등하듯 다시 달싹였다.
나로서는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의 망설임이 길었다.
가만히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던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당신이 강해졌다는 건가요?”
“……예?”
그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처음에는 당신이 우릴 다 속인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 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더라고요. 당신이 폭군이나 사교계에서 당한 세월만 몇 년인데요. 거의 평생이잖아요.”
“…….”
그는 내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숨기고 있었다면, 진작 모든 것을 다 잃기 전에 드러냈을 거예요. 죽으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
“아니면 정말로 그동안 일부러 못 움직이는 척했던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지만 꽤 확고한 대답이었다.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의 단호한 부정에 나는 내심 안도가 되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갑자기 강해진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
“혹시 당신의 말투가 나아진 것처럼, 당신의 몸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달라진 건가요?”
그는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걱정스럽지만 신뢰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다 들어 줄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면, 아니 설령 지금까지 나를 속였다 한들 이제라도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사실 그대로의 일이었다.
딱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와 마주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결심한 듯 살짝 휘청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예. 강, 해졌습니다. 부인께서도 보신 것처럼.”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심장이 요동을 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말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말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들어 보니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차올랐다.
놀라 부풀어 오르려는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내가 소리 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정말로 그가 강해진 거라고?
갑자기 무적이 된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제야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직 저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요.”
석연치 않은 구석이라니…….
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하긴 느닷없이 사람이 달라졌는데, 마냥 놀랄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모았다.
“혹시 그게 당신의 수명을 대신해서 얻은 능력이라거나, 뭔가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예.”
그렇구나.
한결 안도가 되었다.
그도 심란한 듯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놀라셨군요. 부인께서 걱정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니에요.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이 놀라고,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
나는 조금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도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내 눈을 마주 응시했다.
그가 강해진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던 그의 성격에 한두 개도 아닌 변화들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숨을 들이쉰 나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나도 괜찮은걸요. 그런데 아까 보니 당신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아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네요. 당신이 견딜 수 있는 건가요?”
물론 그는 원래 겉보기에도 너무도 근사하고 건장했으며, 건강도 꽤 좋은 편이었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잘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나 낮에 본 그의 모습은 원래의 그에게서는 절대 꿈에서도 상상 못 할 만큼 강한 힘과 기술을 쓰고
있었다.
훈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나 갑자기 강해지면 적응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알렉은 무척 자연스럽게 놈들을 패 주긴 했지만…….
그는 조금 어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몇 주 지났더니 꽤 적응이 된 편이라서요.”
“그랬군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적응까지 하다니.
양을 잡아 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가볍게 손을 맞잡은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나도 안심할게요.”
물론 그가 강해진 모습을 완전히 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그가 더 나약해진 건 아니라서, 그를 괴롭게 했던 놈들에게 대갚음해 줄 수 있게 되어서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쉰 내가 다시 말했다.
“나중에라도 당신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확실히 알게 되면 말해 줄래요?”
내 물음에 그가 작게 끄덕였다.
“내가 도울 일이 있어도 알려 줘요.”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약간 눈매를 접었다.
여전히 걱정되었지만, 나에게 숨기지 않고 터놓고 이야기해 줘서 다행이었다.
* * *
달칵.
루이제의 드레스 자락이 살포시 날리며 문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알렉은 루이제가 지나간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루이제가 나가 버렸다.
차마 진짜 알렉시스는 죽었다고, 지금의 그는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알렉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대로 말 못 했어.’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루이제에게 당신 누구냐고, 내 남편 맞냐고 추궁을 당할 줄 알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영혼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고백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해시키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루이제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건 당신들의 알렉시스가 정말로 죽었다고 사망을 선고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거 곤란한데.’
그는 입술에 손을 가져가 댔다.
아니, 어쩌면 루이제가 의심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리겠다.
그 누가 사람의 영혼이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는 알렉시스가 되어야 했던 걸까?
외모가 똑같을 만큼 흡사해서?
아니면 알렉시스를 괴롭힌 놈들과 폭군에게 대신 복수하라고?
그런데 그러면 그에게 애정도는 왜 필요한 거지?
루이제의 애정을 받아야 하는 건 이미 죽은 알렉시스인데.
심지어 루이제는 알렉시스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들 부부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해도, 둘 사이의 감정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는 애틋하고 평범한 부부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몹시 불편하고 찜찜했다.
‘이놈의 시스템 환장하겠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
알렉은 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띠링.
그런 그를 독촉하듯 시스템에서 알림이 떠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레벨을 2 로 올리기 위해서는 애정도 3 과 경험치 30 이 필요했다.
그러나 애정도 1 의 장벽은 여전히 커 보였고, 아직 마물도 없는 이곳에서 경험치 30 은 대체 언제 어떻게
얻나 싶었다.
* * *
줄리아가 정부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르셀과 줄리아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잉꼬부부였다.
줄리아와 결혼한 이후로 마르셀은 팔불출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아내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리아에게 정부가 있다고?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마르셀은 개소리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떠나가지
않았다.
마르셀이 심각하게 예민해져 있는 사이, 데미안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 이번 일을 아뢰는 게 좋겠어.”
그 말에 개리슨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게. 우리가 알렉시스한테 곤죽이 되도록 쳐 맞았다고?”
“…….”
데미안이 천천히 주먹을 폈다가 다시 꽉 쥐었다.
물론 알렉시스에게 이 지경이 되도록 얻어맞은 건 숨기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마르셀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걸 말한다고 해서 누가 믿기나 하겠어? 다른 놈도 아니고 알렉시스라고. 그 새끼한테 주먹 한 대만
맞았다고 해도 다들 박장대소를 할 판에…….”
“…….”
누구도 마르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쪽팔린 건 둘째 치고, 알렉시스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셀의 눈빛에 날이 섰다.
“제기랄, 어떻게 엿을 먹이지.”
이대로 가만히 두는 건 열 받아서 참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든 보복을 해서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마르셀의 눈동자에 윤기가 돌았다.
용병단에 의뢰해서 숨만 붙어 있을 만큼 교육을 시키는 게 낫겠다.
감히 이 홀든 방직 유니언의 귀공자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하게 놔둘 수는 없지.
마르셀이 날카롭게 입매를 비틀었다.
‘우릴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어, 알렉시스.’
* * *
밤이 깊었다.
고요한 방 안에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침대에 누운 나는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갑자기 내 남편이 전사처럼 싸움을 잘하게 되다니.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것도 기적 같았는데, 상상도 하지 못한 더 어마어마한 일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다.
째깍째깍.
두근두근…….
초침이 지나가는 소리와 내 심장이 낮게 박동하는 소리가 맞물렸다.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로 보았던 알렉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많이 변한 거지…….’
소심하고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언제나 분명한 눈빛.
위축된 모습이 한 번도 없었던 표정.
더듬지 않는 말투와 웬만한 남자들은 쉽게 굴복시키는 뛰어난 운동 신경.
그리고 어딘가 많이 서늘해진 태도까지.
달라진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원래 그는 얼굴과 손 정도 외에는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부인인 나에게도 벗은 상체조차 잘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고, 등은 일부러 숨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의 알렉은 셔츠 단추를 잠그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바지만 입은 채로 거울을 보고 있지 않았는가.
‘흐음…….’
안 하던 사냥도 잘하고, 그렇게도 경외하던 어머니에게 내 편도 들어주고, 시누이에게도 단호해졌지.
낮에 그 귀족 놈들한테는 또 오죽 살벌했어?
성격이 아예 딴판이 된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싶어 나는 얼떨떨하게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건 꼭…….
‘거의 다른 사람이 된 수준 아니야……?’
차라리 변하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독약을 먹기 전과 그대로인 건 그의 외모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홀려 버리기 위해 태어난 듯한 아름답고 황홀한 얼굴과 가장 완벽한 황금 비율로
빚은 것 같은 몸만 그대로였다.
다시 두어 번 깜박인 내 눈은 이미 말똥말똥했다.
잠이 다 달아났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사람이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나면 원래 이렇게까지 많이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선뜻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알렉은 여전히 알렉인걸. 나쁘게 변한 건 하나도 없잖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알렉은 내가 평소에 그에게 바랐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대놓고 성격을 고치고 힘도 키우라고 한 적은 없지만, 내심 그가 지금처럼 달라지면 더
좋겠거니 생각했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어디서든 자신감을 갖길 바랐으니까.
그는 그저 착하고 소극적일 뿐인데 멍청하고 만만하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그가 더 단호하고 차가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해 왔다.
누구보다 알렉 본인이 그런 자신을 탓할 때가 많았다.
‘그래. 잘된 거야. 알렉도 원했던 거잖아…….’
천지가 개벽한 수준의 변화였지만, 그전에 그가 얼마나 원통해했는지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너무도 한스럽고 억울한 인생을 살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이 계속해서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는 걸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도 여전히 그는 정말 그인지.
아니면 이제 더는 예전의 알렉이 아닌 건지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 뒤늦게 잠들었다.
* * *
다음 날 낮이었다.
날씨가 맑고 햇빛이 따스했다.
피크닉 매트를 깔고 샌드위치를 먹기에 정말이지 딱 좋은 날.
나는 아침 일찍 데인에게 부탁한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를 담은 바구니를 풀어 보았다.
나와 알렉, 그리고 엘로이와 시어머니는 언덕 위에서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요리사도 꽤 하는구나.”
시어머니가 공작저에 있을 때 자주 즐기던 구운 연어 샌드위치를 먹어보며 말했다.
엘로이도 늘 먹던 수제 햄 샌드위치를 무척 맛있게 먹다가 대답했다.
“그러게, 맛있다.”
바구니 안에는 충분한 양의 샌드위치가 종류별로 가득했다.
구운 연어, 로스트 비프, 오이, 수제 햄, 닭고기 샌드위치.
그중에서 나는 으깬 감자 샐러드가 곁들여진 오이 샌드위치를 골랐다.
아삭.
적당히 소금에 절여진 오이가 내 입 안에서 산뜻하게 퍼졌다.
상큼한 주스까지 한 모금 곁들이니 없던 피로까지 사르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알렉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새 요리사의 샌드위치가 그의 입맛에도 맞을까?
알렉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에서 비프와 양상추가 보였다.
양념을 발라 구운 소고기가 한눈에 보아도 먹음직스러웠다.
‘……음?’
별일이네.
오늘따라 비프 샌드위치가 당긴 건가? 아니면 입맛도 좀 변했나?
나는 알렉의 샌드위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 가족들의 샌드위치 취향이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나는 항상 오이와 감자, 시어머니는 구운 연어, 엘로이는 수제 햄 샌드위치에 레몬커드 많이,
알렉은 닭고기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 취향이 다들 확고해서 다른 샌드위치를 고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알렉이 비프 샌드위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가 있으면 항상 닭고기 샌드위치를 먹었을 뿐이지.
그런데 왜 오늘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를 고른 걸까?
‘흐음…….’
그렇게 먹다 보니 샌드위치는 금세 동이 났다.
* * *
늦은 오후.
간단한 티타임까지 가진 알렉은 자신의 침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그가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사람을 제압하던 장면이었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가족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고 나니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온 후 활발하게 몸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의 기준에서는 크게 힘을 들인 건 아니었다.
그 세 사람은 신체에 파워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동작도 느려서 어떤 수를 쓸지 뻔히 내다보였다.
아무리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공격했어도 그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자신에게 문제를 발견했다.
‘어쩐지 주먹의 강도가 시원찮아.’
알렉은 주먹을 쥐며 손목을 돌렸다.
원래 그의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가 원하는 힘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의 힘이 나오겠거니 가늠하며 주먹을 써도 실제로는 세기가 그 반도 되지 않았다.
보기에는 건장한 몸인데, 기초 체력이 전생의 그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이거 운동해야 되겠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알렉은 옅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언가를 내리칠 때의 순간적인 힘이야 마나를 동원하면 강하게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체력이 약하면 마나를 쓰든 스킬을 쓰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이 몸 자체를 강인하게 단련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레벨을 올린다 한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은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는 이미 전생에 한 번 경험한 탓인지 체력과 관련된 퀘스트가 강제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체력 퀘스트를 시작하자 주위가 서서히 짙은 초록색의 가상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 *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린 나는 소리 나지 않게 1 층으로 내려갔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방문에 귀를 대 보니 둘 다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았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거야.’
슬그머니 부엌으로 간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와인 한 병과 안주를 챙겼다.
안주는 데인에게 부탁한 특제 새우 요리와 디저트였다.
일전에 험한 일도 겪었으니 우리 부부가 술이라도 나눠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그와 오붓하게 어딘가로 가지 않는 이상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정말이지 어려우니까…….
똑똑.
“알렉?”
나는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설마 벌써 자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 둘 걸 그랬나?
“저예요. 벌써 자요?”
방 안에서 반응이 없자 내가 다시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냥 가야 되나 생각한 순간,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제 보아도 황홀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가 내 모습을 한번 살펴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루이제?”
그런데 그는 뭐라도 하고 있었는지 조금 들떠 보였다.
희미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조각 같은 얼굴은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살며시 시선을 내려보니 방금 목욕이라도 한 듯 하얀 가운 차림이었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그의 가슴 근육이 탐스럽게 부푼 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울끈, 불끈.
그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제각기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대체 뭘 했길래 평소보다 근육이 산 낙지처럼 살아 움직이는 거야?
“다, 당신 뭐 하고 있었어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 내가 시선을 내리자 핑크빛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쓸데없이 저런 곳까지 윤기가 났다.
헉 놀란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눈을 더 내리깔았다.
이번에는 내 시선이 그의 골반에 걸렸다.
까딱 눈동자 잘못 굴렸다가는 변태로 몰릴 것 같아 그냥 몸을 틀어 버렸다.
뭐지 진짜?
그의 온몸이 다 숨을 쉬는 듯 생기가 넘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경이로웠던 완벽한 석고상이 인간의 생명을 얻게 된 느낌?
상기된 듯한 그의 목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아, 체력 단련 좀 하고 있었습니다.”
“네? 체력 단련이요?”
여기서?
상상도 못 한 말에 조금 놀란 나는 문틈 너머 그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펫이 깔린 마룻바닥 위에는 운동을 할 만한 게 없었다.
신체 능력이 갑자기 좋아져서 제자리 뛰기 같은 거라도 한 걸까?
아무튼 나는 와인 병을 살짝 들어 보였다.
“잠깐 같이 마실 수 있나요? 당신이 처음으로 그 거슬리는 놈들 혼내 준 기념으로요.”
이럴 때라도 같이 있어야지 어쩌겠어.
내 말에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다행히 문을 더 넓게 열어 주었다.
“벌써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를 한번 올려다본 나는 그의 팔 아래 문틈으로 지나쳤다.
새삼 그와의 키 차이가 실감이 났다.
“잠이 잘 안 와서요. 오랜만에 와인도 마시고 싶었고요.”
나는 테이블 위에 가져온 술과 간식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칵, 문이 닫히며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불현듯 심장이 뛰었다.
모두 잠들고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라니, 나에게는 가끔 이런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다.
남편과 결혼을 한 건지,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의가족을 맺은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무슨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 물으며 내가 그의 잔에 와인을 따르는 동안 그가 다가왔다.
“……그냥 팔 굽혀 펴기, 윗몸 일으키기, 뭐 그런 것들을 했습니다.”
“그랬구나. 정말 놀랍네요. 당신이 산책이랑 숨쉬기 운동 말고 다른 운동을 하다니…….”
그가 따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니, 엘로이가 교양서적을 읽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무척 이질적이었다.
“……그럼 앞으로 계속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알렉이 조금 어색하게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
그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쓸었다.
내 말에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도 갑자기 몸이 달라져서 당황스러웠을 텐데 너무 캐물었나?
아니면 나와 단둘이 있어서 긴장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렉은 숙맥이니까.
설핏 웃은 나는 그냥 그의 앞에 와인 잔을 밀어 주었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승마도 할 수 있을까요?”
“예?”
“당신이 말 타는 것도 안 된다고 해서 여태 많이 아쉬웠거든요.”
술잔을 든 내가 그를 향해 살짝 기울이자 그가 나와 와인 잔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내가 다시 덤덤하게 입을 열었지만 어딘가 쓸쓸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사실은 나 다른 부부들처럼 당신이랑 같이 말 타러 다니고 싶었어요. 당신이 안 되는 거 아니까
지금까지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요.”
“…….”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나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에게 건 배를 재촉하듯 술잔을 한 번 더 까딱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잔을 들어 내 잔에 맞췄다.
챙-.
와인 잔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같이 하러 가겠습니다. 승마.”
“정말로요? 고마워요.”
나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향긋한 내음과 함께 달달한 액체가 내 입 안을 감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하.
맛있다.
역시 혼술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마시는 술이 최고지.
타닥, 타닥.
안개가 부옇게 낀 이른 새벽녘.
알렉은 응접실 의자에 길게 앉아 미간에 손끝을 대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한창 자고 있는 시간이라 벽난로에 장작이 타는 소리만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이 묘한 정적이 그의 머릿속을 차갑게 가라앉혀 주는 느낌이 들어 그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알렉은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세상에 아무도 없이, 죽여야 할 마물도, 그 어떤 의무나 부담도 없는 듯한 고요하고 서늘한 새벽.
꼭 멈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편안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파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알렉.’
‘당신 이제 운동 신경이 좋아진 거면…….’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그건 미처 생각도 못 한 복병이었다.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그게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긴 부부 사이에 그런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루이제가 그녀의 남편인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는 미처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알렉시스와 루이제는 원래 부부 생활이 없었다고 하니, 나중에 또 곤란한 일이 생겨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나갈 준비를 마친 알렉은 1 층에서 루이제를 기다렸다.
근처 유원지까지 루이제와 함께 말을 타고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가만히 선 채 살짝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첫 승마 데이트로 루이제가 감동 받게 해 주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 1, 경험치 10, 신뢰도 3]
* * *
* * *
* * *
“…….”
그가 죽음을 시도한 이후에 처음으로 들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 이후로 그와 솜사탕도 나눠 먹고,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배도 탔다.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열기구에 올라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솜사탕의 맛이나 열기구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시원한 풍경은 내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알렉에게 들었던 진심 어린 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솔직히 그가 나를 두고 홀로 죽으려고 해서 배신을 당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알렉 딴에는 나를 놓아주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와 결혼한 이후에 상황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자신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가슴이 쿡 쑤시는 것 같았다.
원래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인데.
어쩌다 가끔씩 이렇게 진심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진한 충격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여간 내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이혼하자는 소리나 했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정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남편이 직접 노를 저어 배도 태워 주고, 나란히 간격을 맞춰 말도 타고, 열기구 위에서 함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이트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생애 처음 맞지?’
그 사실을 떠올리니 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화려한 공작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소소하고 충만한 행복이 가슴 속에서 넘실대는 것 같았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이 시간이 끝난다는 게 아쉬웠다.
다시 말을 찾으러 가는 길에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알렉.”
“예?”
그가 나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나도 그를 마주 보고 서서 잠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랑 단둘이 이런 시간을 보낸 것도 결혼하고 처음이네요.”
내가 살짝 흐뭇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그의 눈망울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그냥 짧은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뒤늦게 나를 따라왔다. 말을 돌려받은 후에야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잡으십시오.”
“네?”
나는 먼저 말에 오른 그와 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같이 타고 가자는 걸까?
앞뒤로 나란히?
두근, 두근…….
한 번도 누군가와 그렇게 말을 타 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알렉의 가슴에 등을 묻고 같은 말을 타고 가다니…….
‘백허그?’
이 만족스러운 데이트의 화룡점정을 찍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다 술렁였다.
그럼 나머지 말 한 마리를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와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내 몸을 들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안장 위로 앉혔다.
“…….”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느낌에 심장이 철렁했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는 동안 알렉은 금세 말에서 내려가 다른 말 위로 올라갔다.
‘음?’
왜 내리지?
그제야 나는 그가 말을 태워 주겠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말 그대로 내 몸을 말의 등 위로 올려 주겠다는 뜻이었나 보다.
“…….”
괜히 설레발을 친 것 같아 내 볼이 붉어졌다.
나 왜 설렌 거니.
그래도 남이 대신 나를 말에 ‘태워 주기만’ 한 건 꽤 편했다.
말고삐를 쥐고 내 몸을 들어 올리느라 팔 힘을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
부부가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갔다면 더 낭만적이었겠지만, 어차피 알렉과 나 사이에 그런 친근한 스킨
십은 아직 성급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말을 달리고 있는데, 문득 알렉이 고삐를 잡아 당겨 속도를 늦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갑작스럽게 말을 멈췄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치며 나뭇잎끼리 날카롭게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그린 듯한 그의 옆모습이 달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길옆으로 난 울창한 숲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조차도 근사하면서도 서늘한 선을 그려 냈다.
‘무슨 일이지?’
‘알렉.’
‘당신 이제.’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축하합니다!]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첫 승마 데이트로 루이제가 감동 받게 해 주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3 올랐습니다.]
“…….”
성공했어?
알렉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을 몰기 시작했을 때에도 머릿속이 얼얼했다.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퀘스트를 성공할 줄이야.
지금까지 총 세 번 애정도가 올랐다.
처음에는 맛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줬을 때였고,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못 자르게 했을 때였다.
세 번째는 방금 전, 말 위로 루이제를 올려 준 직후였다.
물론 오늘 하루 종일 그녀와 말, 배, 열기구 같은 것들을 함께 탔으니 유원지에서의 모든 일이 퀘스트
성공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제 레벨 2 까지 남은 건 경험치 20.
그렇게 숲의 한가운데에 난 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나무 사이에 숨은 무언가가 꼬리처럼 그들을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고 신속했지만 동시에 무척 조용하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알렉처럼 살기에 단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숙달된 사람들이 분명했다.
‘뭐지, 암살단 그런 건가?’
왜 그를 노리는 걸까?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의도로 쫓아오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알렉은 기드온을 불러내 모두 잠재워 버릴까 생각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따라오는 건지 알아보고 싶긴 했지만, 루이제도 함께 있는 와중에 딱히 흉포한 놈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기드온.’
그는 마음속으로 그의 사역령을 불러냈다.
[크르릉.]
그의 부름에 기드온이 반응하는 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알렉은 연이어 마음의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따라오는 놈들 모두 재워 버려. 모습은 들키지 말고.
[크릉!]
밝게 대답한 기드온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지금 기드온은 형체를 숨기고 있어서 루이제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띠링,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상태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흠칫 놀란 그는 하마터면 말고삐를 놓칠 뻔했다.
‘경험치가 5 씩 올라갑니다.’라는 말에 그의 눈길이 박혔다.
‘기드온.’
알렉은 다시 그의 사역령을 불렀다.
놈들을 향해 허공을 달리던 기드온이 우뚝 멈춰 섰다.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생겼는데 놈들을 모두 재워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돌아와.’
[크르릉.]
기드온은 군말 없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 짧은 찰나, 알렉은 기드온의 기억을 읽었다.
플레이어는 사역령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상태이니 사역령이 보고 들은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길의 양옆으로 각각 다섯씩 사내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얼굴에 상처 몇 개씩은 갖고 있는 흉악한 인상이었는데, 시스템의 말대로 정말로 용병들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레이브 용병단이라면…….’
이 제국에 있는 용병단 중 하나였다.
가장 규모가 큰 용병단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유로 꽤 유명했다.
바로 돈만 주면 시키는 일은 그 어떤 사악한 짓이라도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람 한 명 해치우는 건 그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긍지가 없다는 점에서 귀족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 꺼려질 때 자주 이용되곤 했다.
실력 또한 상당히 좋은 편이라 의뢰를 실패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런 용병단이 그를 쫓고 있다니.
내심 짧게 혀를 찬 알렉은 며칠 전 마주쳤던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세 사람이 그에게 보복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히이잉.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루이제도 덩달아 말을 세웠다.
알렉은 조금 스산한 눈으로 좌우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나뭇잎들이 한번 몸을 떨며 특유의 소리를 내더니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인기척을 숨기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말들도 고도의 훈련을 받았는지 조금의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저런 용병들의 전투력은 시스템상 어느 정도의 레벨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15 레벨 정도 될까?
‘일단 놈들을 감시해, 기드온.’
알렉이 기드온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말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알렉은 기드온의 눈을 통해 숲속에 정체를 숨긴 용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용병들은 때를 노리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빛이 하나같이 험악하고 우락부락했는데, 그 속에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역시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알렉?”
그때 달가닥거리며 말이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루이제가 물었다.
알렉은 루이제를 향해 말 머리를 살짝 틀며 대답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잠깐 멈췄습니다.”
“네? 이상한 소리요?”
루이제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알렉은 계속해서 용병들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기다란 바가 달려 있었다. 그 옆에는 5000 이라는 숫자도 함께였다.
붉은색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바는 체력을 알리는 표시였다.
저 체력이 5000 에서 0 으로 바닥날 때까지 공격을 해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좌우로 모두 열 명이니까 모두 성공하면 경험치가 50.
언제 또 이런 퀘스트가 나타날지 모르니 여기서 모두 쓰러뜨려야 했다.
당장 레벨을 2 로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경험치는 20 이니 레벨 업을 하고도 30 이 남을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린 거죠? 전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를 빤히 보던 루이제가 금세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에도 알렉은 기드온의 눈을 통해 용병들을 주시하면서 빈틈을 파악했다.
아직 그가 말을 멈춘 지 채 1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용병 하나의 눈빛이 달빛 때문인지 선명하게 번득였다.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카슨 마르틴]
[남, 나이: 26 세]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용병단인 그레이브 용병단의 수장이다.]
[악센과 어릴 적 함께 검술을 배워 사이가 돈독하다. 악센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의형제로 여기고 있다.]
[전투력: 15]
‘저놈이 카슨이었군…….’
그레이브 용병단장의 얼굴을 확인한 알렉은 등장인물 일람을 껐다.
동시에 카슨이 손을 움직이더니 기다란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알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저 사물의 정체를 의심했다.
* * *
알렉시스 마이어스라니.
신분과 얼굴 외에는 볼품없다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한 공작이었다.
물론 지금은 작위를 잃긴 했지만, 그 명성에 비해 신분이 상당히 높았던 탓에 쉽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어차피 브렌트 공작은 싸움 실력이 전무해서 만만한 상대였다.
‘이거 별 힘도 안 들이고 죽도록 팰 수 있겠군.’
특히 그 부인인 루이제 또한 눈부신 미모로 사교계에서 명성이 높았다.
용병단원들과 카슨의 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히 넘치는 의뢰였다.
릴트 제국에서 아름다움으로 가장 손꼽히는 귀한 분들한테 살려 달라는 애원을 받게 될 테니까.
알렉시스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제국 전체였다면 까다로웠겠지만, 북쪽으로 한정해서 수소문을 하다 보니 금세 목격자가 나타났다.
유원지에서부터 그들은 알렉시스 부부를 쫓아왔다.
‘일단 좀 놀라게 해 줄까.’
카슨은 저 고귀한 부부를 곧 비참하게 망가뜨릴 상상을 하며 총구를 들었다.
* * *
탕!
카슨이 방아쇠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알렉이 반응했다.
‘스킬. 신속.’
휙 말에서 내려온 그가 날아가듯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정말이지 순간적인 총격이었다.
기드온을 떠올릴 새도 없이 알렉은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저 멀리 총성에 기겁한 새들이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속 스킬.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그 신속 스킬은 아직 낮은 단계에 불과했다.
레벨은 아직 1 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제대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빠른 스킬이었다.
그러나 신속에서 광속까지 레벨을 올려 본 그로서는 터무니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루이제를 안은 그는 최대한 그 자리에서 먼 곳으로 반짝 이동했다.
자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간적인 이동이었다.
끼히힝!
놀란 기드온의 눈에서 보이는 장면이 알렉에게도 보였다.
총에 맞은 말이 앞발을 들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말을 노린 거였나?
털썩.
땅바닥에 부딪치는 약간의 마찰음과 함께 알렉은 머리를 들었다.
그의 아래에서 루이제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가 멈추기 직전 속도를 늦춘 덕에 땅에 부딪치는 충격은 크지 않았다.
쿵쾅, 쿵쾅.
그 대신, 누구한테 나는 건지 모를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크르릉! 크릉!]
그의 머릿속으로 기드온이 펄쩍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을 모두 재우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알렉은 루이제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기드온에게 대답했다.
‘아니. 가만히 있어.’
히히힝, 히힝.
말이 신음하는 울부짖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루이제가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았으니, 피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땅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얼마나 멀리 몸을 피한 건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어쨌든 놈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이곳은 안전했다.
“괜찮으십니까?”
알렉은 걱정스럽게 루이제를 살피며 물었다.
루이제는 하도 놀라 말문이 다 막힌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 * *
* * *
휘익. 퍽.
퍽, 퍽, 퍽.
또다시 휘익.
그레이브 용병단장 카슨은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이 들었다.
별이 콕콕 박혀 있는 밤하늘이 보였다.
‘뭐야, 제기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대체 뭐가 휩쓸고 지나간 거지?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맞은 건 얼굴 같은데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던 카슨은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한쪽 팔과 다리, 옆구리에서 어마어마한 격통이 치밀어 올랐다.
놈에게 맞으면서 표면이 살짝 언 땅에 부딪친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 새끼 뭐였지……?’
겨우 몸을 일으킨 카슨은 쓰러지기 전 있었던 일을 최대한 머릿속에서 짜내 보았다.
빛처럼 스쳐 지나가듯 보기만 했는데도 무척 키가 크고 잘생긴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얼마나 세게 처맞았는지 기억이 잠시 온전하지 않은 느낌까지 들었다.
카슨은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뇌가 요동치는 느낌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우에!”
두개골도 깨질 것처럼 얼얼했지만, 카슨은 힘겹게 기억을 떠올렸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에게 의뢰를 받아 브렌트 공작 부부를 조지러 가고 있었는데.’
카슨의 굵직하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번개처럼 날을 세웠다.
‘갑자기 공작 부부가 사라져서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단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카슨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저토록 빠른 움직임은 대체 뭔가, 황당하게 응시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만 했다.
휘익, 퍽.
퍽, 휘익, 퍽.
그런데 보면 볼수록 숨이 멎을 듯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는 줄도 모르고 기습을 당해 쓰러지는 단원도 있었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었다.
마치 번개가 지그재그로 선을 그리며 낙뢰를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모습과 같았다.
‘이, 젠장할.’
카슨은 주춤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당해 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카슨의 근처에 있던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번개 같은 공격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카슨은 허리춤에 찔러 두었던 단도로 손을 가져갔지만, 칼자루에 손끝조차 대지 못했다.
그전에 기억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얻어맞아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당장 다 일어나라고!”
카슨은 아직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생전 처음 보는 속도의 움직임과 파괴적인 괴력이었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카슨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레이브 용병단장의 육감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시발 힘도 못 쓴다며, 착해 빠져서 애새끼들이 돌 던져도 가만히 있었다며!’
알렉시스 마이어스.
분명히 사교계에서 가장 만만하기로 유명한 그 몰락 공작이었다.
한편 그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
가볍게 손을 턴 알렉의 시야 위로 상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축하합니다!]
[돌발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
[퀘스트 보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10 올랐습니다.]
[레벨이 2 로 올랐습니다!]
* * *
정말 단순한 도둑들이었을까?
피가 식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그들은 아마 마르셀 후작이 보낸 용병들일 것이다.
애초에 홀든 방직 유니언의 세 주축은 그리 도덕적인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일 년 전에 있었던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사태를 떠올렸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건 휴식 시간과 점심시간 보장, 작업 환경의 개선이었다.
공장 시설은 낙후되고 관리가 되지 않아 폐까지 면직물 조직이 들어가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근무 시간을 줄이거나, 깨끗한 공기를 마실 휴식 시간만 있어도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목소리를 내면 환풍 시설이라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홀든 방직 유니언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조장한 사람들을 물색해 쥐도 새도 모르게 반쯤 죽여
버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일은 아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그 일을 두고 시시덕거리며 떠들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바람처럼 나타난 내 남편.
그사이 쓰러져 버린 놈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내 심장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예. 강, 해졌습니다. 부인께서도 보신 것처럼.’
* * *
‘레벨이 2 로 올랐습니다!’
드디어……!
달칵.
문이 닫혔다.
방으로 들어온 알렉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살짝 허리를 굽혔다.
겨우 레벨이 1 에서 2 가 되었을 뿐인데 이렇게 기쁘다니. 그는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이런 일로 기뻐하는 게 우습긴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격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하.’
이윽고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든 그의 안색은 복잡한 심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알렉은 애써 입술을 꾹 다물며 그의 방 안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커튼이 걷힌 창문 너머에서 달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문득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새집으로 이사를 했고,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시스템이 열렸고, 마나를 활성화시킨 데다가 사역령을
처음으로 포섭했다.
번화가에 나갔다가 홀든 방직 유니 언의 세 사람을 만나기도 했으며, 그 일로 바로 오늘 경험치를 50 이나
얻었다.
그리고 루이제와는.
“…….”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대하기 편해졌다.
이 모든 일들의 결과가 겨우 레벨 2 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레벨이 600 도 넘었던 그가 겨우 레벨 1 에서 2 가 되었다고 환호하다니.
세계관의 난이도가 전생보다 훨씬 높았다.
진짜 알렉시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직 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들키면 애정도를 얻지 못할 테니까…….’
잠시 그렇게 있다가 슬며시 눈을 뜬 알렉은 시스템을 확인했다.
현재의 상태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애정도가 1? 아…….’
지금까지 그가 모은 애정도는 총 4 였다.
그러나 레벨이 오르면 레벨을 올리고 남은 애정도와 경험치만 수치상으로 표시되는 모양이었다.
신뢰도와 명성은 레벨 업에 필요한 수치는 아니어서인지 지금까지 얻은 점수가 그대로였다.
알렉은 레벨을 3 으로 올리기 위해 필요한 애정도와 경험치도 확인해 보았다.
그의 애정도와 경험치 상태를 알리는 바의 맨 오른쪽 끝에는 각각 6 과 60 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레벨이 1 이었을 때 애정도와 경험치가 각각 3 과 30 씩 필요했으니 딱 두 배가 늘었다.
애정도만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경험치도 신경이 쓰였다.
둘 다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레이브 용병단이 자신을 공격한 일을 겪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애정도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발생한다.
레벨을 올리는 데에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은 그는 퀘스트를 기다리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그가 먼저 퀘스트에 접근해야 했다.
어서 레벨을 올리고 최종 악역인 악센을 해치워야 그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알렉에게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상대로 카슨의 전투력은 레벨 15 였다. 다른 용병단원들도 10 에서 15 사이의 수준이었다.
그런 용병들 열 명을 한 번에 녹다운시켰더니 지금 그의 마나와 체력도 바닥까지 하락해 있었다.
진작 마나를 활성화시키지 않았다면 그에게 승산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회복을 기다리듯 눈을 감았다.
동난 체력과 마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차오르기 마련이었다.
회복 포션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시스템 속 상점도 닫힌 상태였다.
* * *
“뭐?”
열린 창문 밖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마르셀 하워드 후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자신의 전 재산을 훔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황당하고 험악한 표정이었다.
마르셀의 반응에 카슨은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설마 그 몰락한 공작 놈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 저한테 일부러 말도 안 하셨던 겁니까?”
“……하.”
마르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감히 내 집무실까지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그리 말한 마르셀은 내심 긴장감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아침부터 나타난 카슨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 한쪽이 눈탱이 밤탱이가 되다 못해 푸르딩딩하게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에는 염색약을 얼굴에 잘못 부어서 저렇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알렉시스에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카슨까지 알렉시스한테 당했다고?’
마르셀 자신과 개리슨, 데미안은 싸움이나 힘과는 무관한 귀족들이니 그러려니 했다.
알렉시스 그 자식이 갑자기 어떻게 돌아 버린 건지는 몰라도, 그들이 힘도 못 쓸 정도로 두들겨 맞은 건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용병이 아닌 고귀한 귀족이니까.
그런데 용병단장이기까지 한 카슨도 알렉시스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것 아닌가?
카슨은 이 릴트 제국에서 힘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카슨의 용병단은 제국에서 규모가 두 번째로 클 정도로 막강했다.
첫 번째로 큰 용병단인 ‘사자의 송곳니 용병단’과는 다르게 황제의 은밀한 비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 규모의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이 낯빛까지 파래질 정도로 얻어맞았다니 충격적이었다.
당장 마르셀 본인도 신분을 떼고 카슨과 맞붙으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겨우 숨통만 건질 것이다.
‘알렉시스, 그 새끼 진짜 뭐지……?’
카슨이 위협적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발뺌하시면 후작 각하와 신뢰 관계를 이어 가기가 제 입장에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웃기는군. 카슨 자네, 의뢰도 완수하지 못해 놓고 남 탓이나 하는 쪼잔 한 놈이었나?”
“뭐요?”
“그레이브 용병단도 이제 한물간 모양이야. 고작 평범한 몰락 귀족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우습군.”
“…….”
카슨이 말없이 이를 갈았다.
침묵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보다 더 죽일 듯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르셀은 일부러 카슨을 더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든 알렉시스를 죽지 못해 살 정도로 망가뜨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알렉시스에게 당했던 날을 떠올리면 속에서 부아가 치밀고 분노가 들끓었다.
‘개자식, 감히 우리의 자존심을 뭉개고도 멀쩡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지만, 카슨이 아니라면 딱히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카슨이 피식 웃었다.
“시치미를 떼시는 거 보니 아주 잘 알겠습니다. 우리 용병단을 우습게 여기신 거 후회하실 겁니다.”
‘저 위아래도 없는 새끼가…….’
마르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열려던 찰나, 카슨은 이미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쾅.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 있던 줄리아는 흠칫 멈춰 섰다.
남편의 집무실에서 카슨이 쾅쾅대며 나가고 있었다.
마르셀의 부인인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은 열린 문틈 사이로 마르셀의 분위기를 살폈다.
‘제기랄, 저 새끼 또 화나 있네.’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남편이 그녀의 비밀을 알아채기 직전이었다.
* * *
* * *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르셀과 줄리아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
벌써 2 년도 더 지난 일이 꿈에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캐시는 나를 가까이에서 도와주던 하녀였다.
집안이 가난해 열세 살부터 공작가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성정이 순하고 착한 데다가 말귀도 잘 알아들어서 나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얗고 귀여운, 내 이복 여동생들을 닮아 더 정감이 가는 아이였다.
‘출혈은 멎었지만 염증이 심해서 열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저 정도 상태라면
만일의 경우도 대비하셔야 합니다. 마님…….’
‘…….’
너무도 미안했다.
캐시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죄책감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캐시를 데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캐시가 안 보였을 때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기만 했어도 죄 없는
아이가 이리 허무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줄리아를 살인죄로 고소했지만, 의회에서는 그녀에게 푼돈밖에 되지 않는 벌금을 물렸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지켜 주지 못하는 게 이토록 무력하고 괴로운 느낌이었구나.
나 때문에 사람이 죽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앞날이 창창했던 맑고 순수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생명과 삶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짓밟아 버린 줄리아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캐시의 죽음 알고 난 후에도 줄리아는 비웃음과 함께 ‘저런, 안됐네요. 의사가 형편없었던 모양이에요.’
라는 말로 비아냥거렸을 뿐이었다.
‘알렉.’
* * *
* * *
깊은 밤.
알렉은 가족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집 밖으로 나왔다.
용병단은 그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어 와 잠든 그와 루이제를 납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저택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은 기드온을 공중으로 올려 보내 그 일대를 살펴보았다.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에서 세 무리가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한 조에 20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총 60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동원되다니.
용병단 전체가 동원된 건 아니었지만, 한 임무에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투입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중 용병단장인 카슨은 남쪽에서 다가오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럼 남쪽은 마지막에 처리해 볼까?’
알렉은 우선 동쪽에 있는 용병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띠링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반가운 알림음이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총 경험치가 95 올랐습니다!]
* * *
“단장님! 단장님!”
용병단원 하나가 헉헉대며 카슨을 찾았다.
“아, 아직 무사하셨군요! 빨리 여기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뭐? 저 새끼가 잠꼬대를 하나,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헉, 헉.”
중요한 말을 겨우 내뱉은 용병단원은 넘어갈 듯한 숨을 잠시 몰아쉬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려왔는지, 목 안에서 단물이 솟구쳐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카슨과 단원들은 그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어서, 어서…….”
용병단원은 자신이 본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번개 같은 빛에 당해 쓰러졌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속에서 훤칠한 키에 체격도 큰 아름다운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쓰러뜨린 빛이 그 남자의 뒤로 살벌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이제 곧 저 남자도 죽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의 눈빛을 본 순간 용병단원은 깨달았다.
저 번개 같은 빛이 바로 저 남자의 힘이었다.
어쩐지 외모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뭘까?
설마 전설 속 번개의 신 제우스?
“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요!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돌발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그레이브 용병단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2)~]
[퀘스트 보상]
[경험치가 총 300 올랐습니다.]
[명성이 100 올랐습니다.]
6. 너무 잘 맞는 키스
“으.”
어느 상쾌한 아침.
나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간밤에 무척 푹 잘 잤는지 눈을 뜨자마자 피로가 다 풀린 것처럼 기운이 났다.
침대에서 내려가자 나이트가운의 치맛자락이 내 무릎 아래로 쏟아지며 살랑였다.
나는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손을 뻗었다가 아차, 했다.
아직도 공작 부인이었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니.
어정쩡하게 허공에 뜬 손을 보던 나는 살포시 손을 말아 쥐었다.
본래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가장 먼저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들을 찾았다.
그러면 그들은 따뜻하게 데운 차와 세숫물을 가져왔고, 나는 얼굴을 촉촉하게 씻고 양치를 한 후에 따끈한
차를 마셨다.
늘 그런 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준비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홀로 커튼을 젖히고는 창문을 열었다.
산뜻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난간에 팔을 걸치고 환한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모든 것이 한가하고 고적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캐시가 나오는 꿈을 꿨기 때문일까?
나는 문득 사용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내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보살펴 주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늘 북적북적하게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들.
그들 덕분에 그나마 나는 내 일상에서 외로움을 덜 느끼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사용인들은 늘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니까.
그들이 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었다.
“휴우…….”
심호흡을 한번 한 나는 이내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같이 있을 때 더 잘해 줄 걸 그랬다.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런데 응접실로 내려가니 나보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아, 심심해 돌아 버릴 것 같아.”
“엘로이 너도 피아노를 배우려무나.”
“…….”
시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피아노 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엘로이는 쿠션을 안은 채 소파 위에서 마구
뒹굴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홀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양들은 잘 있나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현관문 아래에 웬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뭘까?
주워 보니 사교계에서 주로 쓰는 질 좋은 종이였다.
나는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이게 뭐람…….’
나는 진심으로 얼이 빠져 입술이 벌어졌다.
우리가 사는 집은 어떻게 알았는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르셀과 그 친구 놈들이 우리한테 사람까지 붙였는데, 다른 사교계 귀족들이라고 알아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알렉을 무도회에 초대할 줄이야.
이건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초대장을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것들이 심심하구나…….’
‘흐음.’
이 말은 해석해 볼 가치가 있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사교계의 분위기가 위축되었다는 말을 입에 올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교계는 늘 평화롭고 행복해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혹시 줄리아와 마르셀 부부의 일이 터진 걸까?’
얼마 전 나는 마르셀에게 줄리아의 정부에 대해 폭로했다.
마르셀 성격에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줄리아의 정부가 누군지 찾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마르셀을 두려워하는 줄리아는 속을 태웠겠지.
줄리아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마르셀에게 발각당할까 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귀부인들은…….
겉으로는 줄리아를 걱정하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귀부인들 대부분이 줄리아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필사적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서로 다 알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캐시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줄리아를 고소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하.”
나는 차가운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사교계 분위기야 안 봐도 뻔했다.
평소와는 더 비교할 수 없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긴장 가득한 시기에 나와 알렉을 무도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건…….
‘줄리아의 비밀을 폭로한 게 나라는 거 다 아는구나?’
귀부인들의 속내를 훤히 알 것 같았다.
나를 불러내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탐색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직접 줄리아의 명예에 흠집을 낼 자신은 없지만,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내 입매가 살짝 웃듯이 비틀렸다.
그들에게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 무도회는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하필 가면무도회를 열었다는 건 그만큼 자신들의 진심을 숨긴 채 상대방을 관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건 바로 내 목적과 들어맞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이 사교계를 한번 들어 올렸다가 내리쳐서 와장창 깨뜨릴 생각이었다.
그동안 알렉을 괴롭히고 업신여긴 것과 캐시의 죽음을 갚아 줄 때가 이제야 온 것 같았다.
다시 초대장을 반으로 접은 나는 여전히 응접실에 있는 두 진상을 바라보았다.
시누이는 계속 심심해 미쳐 버리려고 하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이제 다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을 같이 데려가면 도움이 되려나?
그러나 별로 괜찮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시누이는 어차피 나와 노는 물이 달랐고, 시어머니는 거의 사교계에서 은퇴한 분위기였다.
그만 몸을 돌린 나는 알렉을 찾아 나섰다.
알렉은 밖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벽난로에 불을 때야 하는 날씨라 하루에 소모되는 장작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는 춥지도 않은지 얇은 셔츠 차림으로 리듬감이 느껴질 정도로 능숙하게 도끼질을 했다.
이제 그의 숙련된 솜씨가 놀랍지도 않은 나는 한참이나 감상하며 감탄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 * *
* * *
* * *
* * *
“잠깐.”
“예?”
왈츠가 흘러나오는 무대 한복판에서 나는 파트너가 된 상대를 주시했다.
방금 저 남자의 손이 내 맨살에 닿을 뻔했다.
나는 아찔한 기분을 삼키며 우아하고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내 등에서 2cm 정도 간격을 두고 손을 대 줄래요? 아, 물론 등뿐만이 아니라 내 몸 전체를 그리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 예. 물론입니다.”
남자가 얼른 내 등에서 자신의 손을 조금 뒤로 물렸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첫 춤의 상대로 허락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제야 나는 능숙하게 음악에 맞춰 무대를 누볐다.
파트너와 손도 꽉 잡지 않았고, 허리도 제대로 감기지 않았지만 춤을 추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원래 나는 무도회에서 이렇게까지 접촉을 사양하지는 않았다.
그저 옷감을 넘어 내 피부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 바로 발을 밟았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몰상식한 신사들은 무척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몸을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건 처음이라 미리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자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이 춤이 끝날 때까지 제 눈을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른 데 쳐다보면 기분 상할 것 같으니까.
내 은은한 미소에 상대는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숙녀의 눈을 보지 않는 건 크나큰 실례죠.”
“감사한 말씀이네요.”
나는 상대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내가 저 진녹색 가면의 춤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도 이 무도회에 참석했을 확률이 높았지만 만약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바이올렛’처럼 매혹적인 여자가 나비의 날갯짓 같은 가벼운 춤과 함께 등장했다는 게 중요했다.
어차피 줄리아는 이런 큰 무도회에 빠질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화제가 될 여자가 나타났는데, 그게 누군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아가 치밀까?
그게 나라는 사실을 지금 당장 알아차려도 괜찮았다.
미모로든 뭐든 간에 줄리아를 위협하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다행히 눈앞의 남자는 잠깐 이용만 하는 건데도 불쾌하지 않을 만큼 꽤 준수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로 짐작건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부인? 아니, 영애? 아무래도 처음 보는 분 같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글쎄요. 한 번쯤은 스치지 않았을까요?”
“아뇨. 장담합니다만, 당신 같은 분은 생애 처음입니다.”
하긴 이 남자는 지금까지 나한테 춤 신청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온 제국이 무시하는 브렌트 공작의 부인이라 나에게 춤 신청을 하는 것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특히나 이 남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콧대가 높았다.
줄리아의 정부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오웬이었던가?
그중에서도 줄리아가 가장 아끼는 애인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런데 그쪽이 저와 춤을 춰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이 모습을 보고 질투하거나 분개할 부인은
없으신가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저기 당신을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여성분이 한 분 계시는 것 같은데요?”
“예?”
오웬은 당황한 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금세 다시 내 눈을 보았다.
나는 한 번 크게 돌며 곁눈질로 그쪽을 응시했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줄리아?’
역시나 여기 있었구나.
다시 한 바퀴를 더 돈 내가 힐긋 줄리아를 보았다. 그때는 줄리아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줄리아의 곁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는 귀부인들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줄리아가 멀쩡한 모습으로 무도회에 나타나다니.
아직 마르셀은 줄리아에게 정부가 확실히 있는지, 있다면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줄리아는 오웬을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르셀에게 들킨다면 죽음뿐일 테니까.
음악이 끝났다.
오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나는 살포시 허리를 굽히며 예의를 표했다.
나를 비롯해 춤을 추던 모든 여자들이 같은 동작을 취했다.
인사를 마치자 오웬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 음악이 이토록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짧은 곡인지 몰랐습니다.”
오웬의 눈빛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두 번째 춤도 저와 함께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제법 간절한 말투였다.
오웬과 두 번이나 연달아 춤을 춘다면 줄리아를 제대로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눈앞의 유희보다 장기적인 가치를 더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아쉽네요. 세 번밖에 없는 기회라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즐기려고요. 숨이 차기도 하네요.”
“그러시군요.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오웬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내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 손을 쓱 숨기듯 마주 잡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오웬의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어서 깔끔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아까 알렉이 있던 곳이 어디였지?
무도회에 오면 알렉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내가 춤을 다 추고 나면 언제든 돌아올 곳을 마련해 놓는 느낌이었다.
‘알렉도 오랜만에 같이 추면 좋을 텐데…….’
한번 물어나 볼까?
알렉이 춤에 서툴긴 했지만, 내가 그를 충분히 자연스럽게 이끌어 줄 자신이 있었다.
단단, 다다단.
새로운 춤 곡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춤을 추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얼른 그 구역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가 조금 거센 힘으로 내 허리를 한 팔에 낚아챘다.
“……!”
흠칫 놀란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크게 한 바퀴 빙 돌았다.
내 의지가 아닌 움직임이었다.
허리를 감은 팔에서 단단하고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떤 놈이야……?’
나는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뺨을 올려붙일 준비를 했다.
혹시 아까 오웬 놈일까?
이고 내 시야에 놈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검은색 실크 때문에 누군지 단숨에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손을 들었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덥석.
그런데 내 손목이 붙들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남자의 이목구비가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팔을 내리며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느긋하게 움직였다.
제 손의 각도를 틀어, 부드러운 촉감으로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
민감한 손 틈새에 정전기가 오른 듯이 아찔했다.
심장이 멎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검은 깃털 마스크, 날카롭지만 유려하고 근사한 턱선.
그는 내 남편 알렉이었다. 그가 살짝 비스듬히 턱을 기울이더니 금세 입술을 움직였다.
“원래 첫 곡은 자기 파트너와 함께 하는 거 아닙니까?”
“네?”
섬세한 가면의 실크 너머로 이제야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눈빛이 덤덤하면서도 분명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니 내 허리를 감은 팔의 감촉도 더 이상 불쾌하지 않았다.
쿵쿵쿵…….
불현듯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깜짝 놀랐네요. 하마터면 당신 뺨을 칠 뻔했어요.”
“뭐 그 정도 각오는 했습니다.”
“……네? 나랑 춤이 추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그런 각오를 해요?”
“저한테 춤 안 춘다고 하셨으니까요.”
“……아.”
그제야 나는 그에게 했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여기 댄스 구역인데.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었으니 얼마나 피해가 됐을까?
그런데 내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휙휙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서둘러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내 팔과 그의 몸을 순서 대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그의 리드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건가?
어차피 익숙한 음악과 춤이었다. 나는 이 노래에 맞춰 눈을 감고도 춤을 출 수 있었다.
갑자기 알렉이 나를 낚아채 놀란 탓에 내 발이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다니.
‘……이게 말이 돼?’
춤 실력으로 따지면 알렉과 나는 수준 차이가 심했다.
그가 안무를 외우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 실력이 너무도 월등했으니까.
나는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다시 우리의 다리와 팔, 맞잡은 손을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내가 그에게 리드당하고 있었다.
휘익.
그 순간 그가 나와 맞잡은 손을 내 머리 위로 올리더니 내 등을 살짝 떠밀며 한 바퀴 돌렸다.
“……!”
주위의 다른 여자들도 정해진 안무에 맞춰 휙 도는 게 곁눈질로 보였다.
얼결에 턴을 한 내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한두 번 돌려 본 게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솜씨인데,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만 이 상황이 낯선 거야?
“……당신, 원래 이렇게 춤을 잘 췄어요?”
“아뇨. 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잇지 못하던 내가 금세 깨달았다.
“아, 혹시 이것도 죽었다 살아난 영향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더니 계속해서 나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힘도 들이지 않고 가벼워 보였다.
처음 내 허리를 낚아챌 때의 힘과는 또 다른 박력이 느껴질 만큼 능수능란한 실력이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전신에 힘이 풀렸다.
한번 멍하니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이 움직임들을 느껴 보았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놀이기구에 탄 것처럼 모든 게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상대를 잘 만나면 무도회에서 이런 춤도 출 수 있는 거였구나.
감탄을 넘어 말문이 막혔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마저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음악이 두 개나 끝나 있었다.
* * *
쨍그랑!
줄리아가 내던진 술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 와인이 핏물처럼 깨진 유리 조각에 물들었다.
“아까 그 여자 뭐야?”
휴게실에 모여 있던 다른 귀부인들이 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서로가 누군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로즈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미소로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줄리아의 손을 살포시 감싸 쥐며 말했다.
“줄리아. 이러다가 손이라도 베이면 어쩌려고요.”
“그 여자가 여기 왔을 리 없잖아.”
줄리아의 손이 벌벌 떨렸다. 로즈는 슬쩍 줄리아의 안색을 확인했다.
화가 치미는 건지 불안한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그녀가 귀여워해 마지않는 오웬이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오웬이 줄리아가 아닌 여자에게 춤을 신청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 상대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평소 같지 않은 스타일로 치장을 하긴 했지만, 줄리아의 눈썰미는 여자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보았다.
“어떻게 그 여자가 무도회에 와? 이제 귀족도 아닌 게!”
줄리아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 줄리아는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분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마르셀에게 자신의 정부들을 들킬까 봐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스칼렛이 줄리아에게 다가가며 의아해했다.
“그러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니까요. 어디서 초대장이라도 몰래 훔치거나 주운 게 아닐까요?”
정말이지 의심이 된다는 듯 스칼렛의 눈썹이 한껏 휘어졌다.
그러나 스칼렛은 속으로 역시 이 무도회를 가면무도회로 개최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무도회가 아니었다면 루이제가 초대장을 보고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락 귀족이 무도회에 나타나는 것만큼 이목을 휩쓰는 일이 없을 텐데, 그런 거창한 주목은 루이제를
우습게 만드는 일일 테니까.
물론 줄리아에게는 이런 식으로 무도회에서 가면을 쓰자고 설득했다.
* * *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죠?”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네요.”
“원래 저 춤이 저분들처럼 저토록 근사했나요?”
알렉과 루이제는 차츰 이목을 끌더니 완전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곁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도 뭔가 술렁이는 낌새를 느끼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주위의 다른 화려한 커플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꼭 세상에 단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비로운 시간은 금세 지났다.
루이제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리더니 알렉이 적당한 거리로 물러섰다.
연달아 두 번이나 춤을 췄지만 한 번보다 짧은 것 같았다.
춤이 끝났을 때 하는 특유의 인사를 하기 위해 알렉은 절제된 자세로 한 팔을 둥글게 들고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굽혔다가 펴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루이제에게 끊임없이 닿아 있었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
이렇게 계속해서 애정도가 오르는 것만 봐도 무도회장에서 루이제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누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알림음이 들릴 때마다 그의 심장도 덩달아 조금 철렁하는 것 같았다.
정원과 이어진 숲을 보면서 들뜬 가슴을 연신 가라앉히던 루이제가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그렇게 춤에 통달한 거예요? 그냥 잘 춘다고 하기에는 너무 능숙해서…….”
“그게…….”
그제야 알렉이 입술을 뗐다.
이상했다.
그가 전생에 여러 곡의 고전적인 춤을 마스터한 건 던전 열쇠 때문이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한 던전 퀘스트가 있었는데, 다음 단계의 열쇠를 얻으려면 갖가지 기술을 마스터해야
했다.
요리와 악기 연주, 무도회 춤 같은 것들이었다.
모두 난이도가 상당해서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던전 열쇠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포기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주어져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익혀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오늘을 위해 계획된 코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쓸 일도 없는 옛날 무도회 댄스 같은 거 왜 해야 하나 싶었는데, 결국 이곳에서 쓸모가 생겼으니까.
그런 의아함을 느낀 알렉은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꼭 루이제 당신을 위해 익힌 것 같습니다.”
“네? 후후…….”
루이제가 웃는 듯한 눈으로 황홀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위스키도 두 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루이제는 조금 발그레하면서도 아련해 보였다.
어쩌면 정말로 전생의 퀘스트들이 이 세계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그가 애정도를 받아야 하는 여자를 위해……?
조금 심각한 깨달음과 함께 알렉은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가면 너머로도 그녀의 눈빛에 애틋함이 보였다.
이런 여자를 부인으로 두었던 알렉시스는 그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최고의 행운남이 분명할 것이다.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이 아내인 남자는 좋겠다는 생각.”
“세상에.”
루이제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띠링.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충격적인 감촉이었다.
밀어내야 했다.
루이제는 그를 진짜 알렉시스라고 믿고 있었다.
행여나 그의 정체를 그녀가 알고 난 이후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남녀 사이의 이런 은밀한 몸의 교감 같은
건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주저되는 걸까?
이상하게도 루이제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실망적인 남편이었고, 루이제가 충만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바로 지금 물러나
버린다면 실망 정도가 아니라 크나큰 배신이 될 것이다.
“…….”
갈등이 깊었다.
그러나 결국 알렉은 너무 늦지 않게 루이제의 허리를 감쌌다. 눈을 감으며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더 숙이니 힘겹게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루이제의 팔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입술이 미끄럽게 맞물린 깊이가 더 깊어졌다.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연주가 정원까지 어렴풋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 음악보다 더 영롱한 시스템의 알림음이 연거푸 울렸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 올랐습니다!]
[레벨이 3 으로 올랐습니다!]
* * *
쪽, 쪼옥.
나는 그의 키스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지금까지 알렉의 변한 모습들을 많이 봤지만, 심지어 키스마저 이럴 줄이야.
‘적극적인 데다가 엄청 잘하잖아……?’
정말이지 놀라운 건, 내가 그를 갈구하는 만큼 그도 내 입술과 혀를 아낌없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를 더 느껴 보려 꽉 끌어안았다.
그가 입술을 벌렸다 오므리길 반복하며 내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얽었다.
얇은 드레스 옷감 너머로 그의 단단한 근육의 굴곡이 내 피부까지 전 해졌다.
급기야 알렉이 나를 들어 안아 분수대의 난간에 앉혔다.
한 손으로는 분수대 난간을 짚더니 다른 손으로 내 턱을 받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틀자 내 안으로 더 깊이 파묻혔다.
‘하.’
뭐지.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 있어?
처음 겪어 보는 키스였다.
빈틈없고 능수능란했다.
지금까지 나 혼자 상상하고 떠올리고, 소설로 읽으며 대리 만족했던 그 모든 것들보다 지금 그와의 행위가
수억만 배는 좋았다.
그가 내 혀를 부드럽게 휘감으며 얽을수록 영혼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지금 처음 해 보는 거야?’
나는 조금 더 턱을 들어 그와의 각도를 맞췄다.
조금 전 춤도 황홀했는데 키스는 더 심각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나를 욕망한 적 없던 남자가 이런 열렬한 태도라니.
나는 속으로 눈물겹게 감탄했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거였어.’
그의 키스는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았다.
내 입술 안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이나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촉감.
그에 반해 강인하고 능숙한 움직임이 내 안의 결정적인 곳을 꾸준히 자극하는 것 같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지금까지 한 번도 자극받지 못해 서럽고 아쉬웠던 마음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돼?
지금 그는 외로움에 사무쳤던 내 두 번의 삶을 다 아우를 듯이 내 입 안을 장악했다.
“아, 알렉?”
“…….”
결국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아찔한 자극을 다 감당하지 못해 그에게서 살짝 입술을 뗐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우리 사이에 가면이 없었다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다, 당신 정말 대단하네요.”
정말 이제 못 하는 게 없는 거야?
나는 차마 그를 볼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전율했다.
그는 아직도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굳은 듯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의 입술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의 팔을 꾹 움켜쥐었다.
“나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했어요.”
“…….”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게 곁눈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박동해 나는 기절하지 않으려 정신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 순간 멀찍이서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그가 살짝 몸을 들어 그쪽을 보더니 다시 내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더 원하시면 다른 데로 옮겨도 됩니다.”
‘……세상에.’
놀란 내가 손으로 뺨을 한 번 눌렀다.
입맞춤도 과감하더니 저런 대사까지 하는 거야?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 머릿속이 아찔했다.
이윽고 그의 팔을 잡은 내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했으나 이미 그가 나를 잘 받쳐 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곧 무도회가 끝날 시간.
나는 이 가면무도회에 온 목적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헝클어진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 지금 나 당신 때문에 심장이 너무 터질 것 같은데, 좀 가라앉히고 나중에 다시 해 줄래요?”
그는 아쉬운 기색 없이 내 말에 한 번 끄덕였다.
“……가면무도회는 늘 마지막이 제일 재밌거든요.”
나는 그와의 입맞춤을 더 이어 가지 못하는 게 너무도 아쉬웠지만, 이 무도회의 피날레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
알렉은 잠시 침묵하며 내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내 심중을 깨달은 듯이 조심스레 내 얼굴로 손을
올렸다.
그는 천천히 내 가면을 벗겼고, 나도 그의 가면을 벗겨 주었다.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가면을 쓴 그도 참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는 벗은 게 훨씬 근사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며 황홀해하는 사이 곳곳에서 놀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졌다.
“세상에.”
“정말로 브렌트 공작이잖아요?”
“아까는 말씀도 잘하셨는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사람들은 알렉을 보면서도 못 믿겠다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얼굴과 체형이 똑같은 것 외에는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한 자세는 세상의 눈치 하나 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데다가 위압감까지
느껴졌고, 춤은 또 어땠는가.
주위의 모든 화려함을 압도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지금까지 이 사교계에서 알렉처럼 완벽을 뛰어넘을 만큼 능숙하게 파트너를 다루던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이자 줄리아는 보란 듯이 턱을 들었다.
“저것 봐요. 내 말이 맞았죠?”
그러나 줄리아는 분위기를 조금 다르게 파악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탄을 쏟아 냈다.
“브렌트 공작이 그렇게나 멋있는 분이셨다니.”
“왜 예전에는 몰랐던 거죠?”
“정말 대단해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락한 공작 부부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나는 입가가 매끄럽게 치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찬란한 반응을 얻게 되다니, 이것만으로도 이 무도회에 온 가치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줄리아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나는 줄리아의 눈을 주시하며 보란 듯이 알렉에게 팔짱을 낀 뒤 그의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금세 그의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초대장을 줄리아 쪽으로 휙 날리듯이 던졌다.
내 손끝을 떠난 초대장이 유려 곡선을 그리며 살포시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요?”
“…….”
“우리는 초대장을 받고 온 거랍니다. 궁금하면 몸을 숙여서 주워 봐요, 줄리아.”
“…….”
줄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에게 박힌 시선 그대로 짓씹듯이 말했다.
“주워 와요, 스칼렛.”
이름이 불린 스칼렛이 나를 혐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어서!”
줄리아가 재차 독촉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스칼렛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무릎을 굽혀 초대장을 주웠다.
초대장에는 줄리아가 스칼렛을 비롯한 자신의 시녀나 다름없는 귀부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나를 무도회에 초대해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이용하려고 했겠지만, 천만에.
나는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비록 저들과 나의 목적이 줄리아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들과 어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늘의 무도회는.
지금까지 내가 참석했었던 무도회 중 최고의 무도회인 것이 분명했다.
7. 몰락한 공작 부인의 반격
* * *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 * *
* * *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나.’
마차 안에서 나는 아직 열이 오르는 듯한 뺨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하다 끊긴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나는 내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젯밤 나는 설레는 마음을 한가득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않게 그와 만족스러운 춤과 키스를 나눈 데다가 줄리아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계획까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그와 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깔끔하게 내 방문 앞에서 그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가 붙잡는다면 마음을 바꿀 용의가 있었지만 그는 끝끝내 나를 잡지 않았다.
조금 아쉬울 뻔했는데 오늘 그와 한 번 더 입맞춤을 나눠서 기분이 꽤 좋았다.
“뭘 그렇게 실실 웃어?”
“응?”
나는 화들짝 놀라며 맞은편에 앉은 엘로이를 바라보았다.
달리는 마차 안에는 엘로이와 나 단둘뿐이었다.
알렉은 지금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집에 있었다.
우리는 지금 루덴에 있는 유명 티룸인 ‘로라’에 가는 길이었다.
지금쯤 알렉과 내가 사교계의 관심을 가득 받고 있을 테니 사람들의 눈에 띄어 줄 필요가 있었다.
로라 티룸은 부유한 귀족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돈만 있으면 평민 신분이어도 못 갈 곳은
아니었다.
엘로이도 동행한다면 브렌트 공작가의 세미 귀환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 일부러 그녀에게도 외출을
제안했다.
엘로이는 나를 보며 가느다랗게 눈을 좁혔다.
뭔가 떨떠름한 사실이라도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둘이 연애해?”
“뭐?”
나는 흡사 말이 안 되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한테 연애라니. 결혼한 지 3 년이 넘었거든?”
“에이.”
엘로이의 눈빛이 더 가느스름해졌다.
아무래도 열다섯 살의 미혼인 숙녀가 스물네 살의 유부녀에게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내가 시치미를 떼듯 괜히 창밖을 보자 엘로이가 여전히 가느다란 눈으로 눈썹을 한번 치켜올렸다.
“내가 언니랑 오라버니보다 남녀 관계는 더 빠삭하거든?”
“그것참 잘된 일이네.”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며 괜히 코 밑을 두어 번 긁적였다.
창밖으로 굵기가 가느다란 침엽수들이 일정하게 늘어선 풍경이 꽤 운치 있었다.
엘로이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갑자기 둘이 뭔가 달라. 난 촉이 엄청 빠르거든. 무도회에서 눈빛만 봐도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다
안다니까?”
“…….”
이번에는 내가 가느다랗게 좁힌 눈으로 엘로이를 응시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지 들어나 보고 싶었다.
“갑자기 우리가 뭐가 다른데?”
“엄청 다르지. 여태는 뭐랄까 그냥 서로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산다, 이런
느낌이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서로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긴장하던걸? 어제 무슨 일 있었지?”
“…….”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눈에 힘을 풀고 입맛을 다시 듯 입술을 몇 번 물었다가 놓았다.
엘로이가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아니면 우리가 너무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걸까?
잠깐 창밖을 한 번 본 내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가 올리며 엘로이를 향해 떠보듯이 물었다.
“티나?”
“엄청.”
“…….”
엘로이의 대답은 한겨울에 추락하는 고드름처럼 단칼같이 내리꽂혔다.
하여간 누가 어머니가 낳은 딸 아니랄까 봐 시리다 못해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엘로이가 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둘이 뭐 했어?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데, 3 년이나 가짜 부부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니까 궁금하잖아?”
“부부 문제에 남이 끼어드는 거 아니야.”
“설마 3 년 만에 처음으로 뽀뽀라도 한 건 아닐 테고?”
“…….”
순간 내 심장이 움찔했다.
“그것도 아니면 또 오라버니의 새로운 모습을 본 거야?”
“…….”
휴우.
뽀뽀라는 말에 잠시 긴장했던 내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3 년 만에 제대로 된 첫 키스를 한 사실을 들킬 뻔했다.
나는 엘로이의 놀림과 조롱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보긴 봤지. 새로운 모습.”
“이번엔 또 뭐였는데?”
“알렉이 이제 춤도 잘 추더라고.”
“그래?”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가 어제 가면무도회에 다녀온 사실을 다른 가족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내가 엘로이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혹시 너 아까 일부러 문 두들긴 거니?”
“…….”
엘로이는 대답 없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표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내가 조금 더 차가워진 눈매로 그녀를 응시했다.
엘로이는 대뜸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큭큭 웃었다.
나이는 나와 알렉이 더 많은데 어째 열다섯밖에 안 된 숙녀에게 진도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우리보다 엘로이가 더 활발하게 이성을 만나 본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춤도 잘 췄다니 놀랍네. 오라버니는 그런 거 영 쑥스러워했잖아.”
“…….”
뭐 이미 놀라운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겪었다.
엘로이는 시트 위에 드러누우며 흐음, 한숨을 쉬었다.
“언니랑 오라버니는 집안 망하기 전에 결혼해서 좋겠다. 난 지금 해리엇 얼굴도 못 보는데…….”
불현듯 엘로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파혼한 약혼자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해리엇은 엘로이가 오랫동안 진심으로 짝사랑한 약혼자였다.
“그런데 언니는 안 이상해?”
“뭐가?”
“오라버니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잖아. 난 솔직히 원래 내 오라버니가 맞는지도 모르겠어. 전에는
나한테 엘로이 ‘양’이라고 했다니까? 우웩.”
“…….”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이 얘기였구나.
지금까지 가족들과 터놓고 대화한 적은 없지만, 다들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렉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하고 강해졌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옅은 숨을 내쉬며 내가 대답했다.
“나는 아마 알렉이 기억을 좀 잃은 게 아닌가 싶어.”
“기억? 그런가?”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누이동생을 그냥 엘로이라고 부르는 걸 잊었을 수도 있잖아? 기억이 훼손됐다면
당연히 성격도 좀 달라질 수도 있는 거고.”
“그래? 흐음.”
엘로이는 인상까지 쓰며 조금 고민하더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인상을 풀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돌아눕더니 머리를 괴고 짓궂게 눈빛을 밝혔다.
“언니, 만약 오라버니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거면 어떻게 할 거야?”
“응?”
“달라진 게 아니라 정말 딴사람이 오라버니 흉내 내는 거면 어쩔 거냐고.”
“글쎄.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알렉 흉내를 내면서 우리랑 같이 살까?”
* * *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브렌트 공작 자네에게 내 친히 처방을 내려 주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 * *
띠링!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해리엇 워든]
[남, 나이: 16 세]
[워든 백작이자 파란 피 기사단의 기사단장. 아버지인 뉴튼 워든 백작이 젊은 나이에 죽어 최연소로
기사단을 이어받았다.]
[피도 눈물도 없고 버르장머리도 없지만 평소에는 무심한 듯 친절한 태도로 숨기고 있다.]
[엘로이 마이어스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권력을 위해 황제의 누이동생인 아나벨 황녀를 선택했다. 훗날
엘로이가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하자 괴로워한다.]
[전투력: 레벨 35]
[주 무기: 파란 피 기사단장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파란 눈의 검.]
‘파란 피 기사단……?’
새 등장인물 일람을 모두 확인한 알렉은 이내 창을 껐다.
유리 온실 안으로 기사들이 들어서자 뜻밖에 등장인물 일람이 개방되었다.
눈앞의 기사들은 꼭 만들어진 게임 속 NPC 처럼 모두 준수하고 훤칠한 데다가 매끈했는데,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기사단장인 해리엇인 모양이었다.
소년인지 청년인지 모를 외모였다.
파란 피 기사단이라면 원작에서 악센의 수하 노릇을 했던 기억이 났다.
“저희를 초대하셨다고요? 뜻밖의 소식이네요. 황제 폐하의 초청이라니 기꺼이 받들겠어요.”
그런데 루이제는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이긴 해도 별로 꺼리는 기색 없이 황명에 따랐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는 황제의 명령.
결국 그와 루이제는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엘로이까지 초대한 건 아니라서 엘로이는 티룸에 남아야 했다.
‘그나저나 루이제가 신분을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우아하면서도 영롱한 루이제의 목소리가 아직 그의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있었다.
* * *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 * *
금세 황제가 잔을 내려놓았다.
“과연 소문대로 말을 잘하는군.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없이 매끄러워. 제국의 내로라하는 달변가들도
머리를 조아리겠어.”
“…….”
나는 황제가 변한 알렉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내심 저놈도 무척 놀라운 모양이었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긴 했지만 감탄은 감춰지지 않았다.
“운이 좋았죠. 특별한 성총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알렉은 황제 앞에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앞에서까지 이 정도로 주눅 들지 않을 줄이야.
황제와 알렉 사이에 전에 없던 팽팽한 줄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언뜻 보니 올리비아도 그 묘한 긴장감을 알아차렸는지 어깨를 조금 굳힌 채 힘겹게 편안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알렉시스. 과연 나의 충격요법이 효력이 있었던 모양이군.”
황제는 날카로우면서도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나와 알렉은 뭐라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알렉도 나처럼 할 말이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 듯했다.
여기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을 심히 굽혀야 했으니까.
이윽고 황제가 손짓하자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다 싶은 순간 황제가 제 기다란 손끝을 턱에 대며 조금 비딱하게 팔걸이에 기댔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작위와 전 재산을 잃고도 멀쩡할 줄은 몰랐거든. 안 그런가, 황후?”
황제가 신기한 듯 눈빛을 밝혔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우리더러 죽으란 거였지?
황후는 폐하의 말에 동감하듯 옅게 웃었다.
“예. 도와준 사람들도 없었을 텐데 대단하네요. 모두들 얼마 안 가 공작가 분들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답니다. 폐하께 애원이라도 하면 없던 일로 해 주실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나도 그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
이것들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게 탁자 아래로 주먹을 꽉 쥐고 음식을 씹었다.
알렉은 모든 걸 잃고 절망한 나머지 죽음을 시도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찾아와 애원하길
기다렸다고?
황제의 말 한마디에 살고 죽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도 하찮고 우습게 느껴졌다.
황제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북부의 그랜드칼리라니 하필이면 척박하고 험준한 곳으로 갔군.”
“거긴 굶주린 산짐승들도 자주 출몰한다고 들었어요. 나도 몇 번 가 보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았지만 겨울에는 혹독할 만큼 춥더라고요. 지내기 괜찮은가요?”
당신들 같으면 괜찮겠냐?
오늘따라 유독 더 황제 부부가 밉상이었다.
나를 향한 황후의 시선에 나는 테이블 냅킨으로 입술을 한번 찍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아니 꼬아도 내색하면 내 손해였다.
나는 우리의 신분을 되찾아야 했으니까.
“날씨가 혹독하긴 해도 우리 릴트 제국의 땅인걸요. 이 기회에 처음 가 보는 지역에서 살게 되어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 브렌트 공작 부인이네요. 볼 때마다 현명한 말씀을 하시니 매번 감복한답니다.”
그 순간 짧게 피식 조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였다.
“그렇다니 아주 잘된 일이군. 안 그래도 그랜드칼리는 영주가 없어서 무법 지대나 다름없는 곳이었거든.”
“…….”
무법 지대가 아니라 여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알렉시스?”
황제가 날 선 태도로 알렉을 불렀다. 알렉도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할 때마다 내 심장이 다 선득했다.
알렉은 무례로 여겨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저 두 사람 사이에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자네의 병이 나았으니 황제로서 축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
“…….”
정말로 뭔가 해 주려는 건가? 그러나 그 축하가 정상적일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우리가 원래 살던 풍요로운 저택과 비옥한 영지를 돌려줄 거라고는 일부러 기대하지 않았다.
“그랜드칼리에 성이 하나 있는데 자네에게 선물로 주도록 하지. 내 오랜 친구가 평생을 앓던 병에서
해방되었는데 이 정도쯤은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윌스브룩 성 말씀이십니까?”
“잘 아는군.”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윌스브룩 성?
갑자기 성을 준다고?
그건 그랜드칼리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북부의 유일한 성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제국에서 가장 큰 성으로 한때 명성이 높았다고 했다.
그러나 수백 년 가까이 버려진 성인 데다가 드라큘라가 살았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그 안에 어떤 무시무시한 날짐승이 살고 있을지, 아니면
구렁이나 박쥐들이 떼로 몰려 들어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선물로 준다고?
내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황제의 선물은 거절할 수 없었고, 그런 성을 하사하는 의도야 뻔했다.
우리더러 가서 살라는 말이었다.
황후도 내심 충격을 받은 듯 낯빛이 좋지 않았다.
“대신 그 성에서 지내면서 주변을 융성하게 발전시켰으면 좋겠군. 그래도 한때 릴트 제국의 천혜 요새였던
곳이었는데 내버려 두기만 해서 마음에 거슬리던 참이었거든.”
“…….”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걸까.
나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앞이 어두워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황제는 우리를 또다시 폭망의 소굴로 던져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윌스브룩 성과 그 일대를 융성하게 발전시킨다는 건 온갖 암초와 잡초가 가득한 고원의 평야를 비옥한
밀밭으로 환골탈태시키라는 말과도 같았다.
말이 북부지 릴트 제국의 북쪽이 얼마나 넓은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했다.
한마디로 황제의 요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을 떼러 왔다가 더 큰 폭풍우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윌스브룩 성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죠.”
응?
잠자코 생각하던 알렉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윌스브룩 성으로 옮긴다고?
나는 눈앞이 다시 컴컴해졌지만 황제의 안색은 밝았다.
알렉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런데 작위도 없이 영지민들을 다스리는 건 좀 곤란합니다.”
“……그렇다니 자네의 작위를 돌려 주지 않을 수가 없겠군.”
……뭐?
작위도 돌려준다고?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느긋하게 치켜올렸다.
“그럼 앞으로 자네들을 윌스브룩 남작과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원래 우리가 가졌던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작위는 돌려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우리 가문은 본래 브렌트 공작이자 캐슬레이 후작이자 윈터본 백작 등 많은 작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높은 작위인 브렌트 공작가로 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랜드칼리는 국경 지역이었으니 일반적인 남작과는 다른 변경의 남작 가문이 되는 것이었다.
변경의 남작은 국경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과 인식이 일반적인 남작보다는 높았다.
그래 봤자 북쪽 변경에는 눈 덮인 산들로 이어져 있어 쳐들어올 적도 없었지만.
황제는 픽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일주일 안에 성을 복구시킨다면 자작 작위라도 더 줄 수도 있고.”
“…….”
“한 달 안에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다스리게 되면 브렌트 공작가와 영지를 모두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저 자식 한 대만 세게 치면 얼마나 좋을까.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
황제의 희망 고문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길들인다고 해도 그건 황제의 것이지 우리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들어 똑바로 황제의 눈을 보았다. 내 시선에 황제도 나를 향해 눈길을 돌려 마주 응시했다.
만찬이 시작된 이후로 황제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날카로운 각을 자랑하는 황제의 턱이 조금 경직되었다.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만일 저희가 할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나는 황제의 답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늘 자신의 답을 명령할 뿐 선택권은 주지 않았다.
“……그걸 아직도 모르나? 자네들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
“거역하면 죽음뿐이지.”
그러면 그렇지.
나는 입술을 뗐다가 도로 다시 다물었다.
어차피 황제는 귀족 중 누군가를 그랜드칼리로 보내 완벽하게 길들일 생각인 것 같았다.
이 광활한 릴트 제국에서 동서남부를 제외한 북부만 아직 황제의 영향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귀족 작위를 다시 얻게 된 건 잘된 일이야.’
나는 그 긍정적인 사실만 떠올리며 이 황명을 기회로 여겼다.
비록 영지 개발이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강제로 지게 되었지만, 이제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구해 마음대로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우리의 신분을 다 찾은 건 아니어도 이 정도면 딱히 공작위가 없어도 충분했다.
* * *
* * *
* * *
휘이잉, 휘잉.
살을 에는 듯이 공기가 차가웠다.
이런 추위는 설귀가 출몰하는 게이트에 갔을 때 말고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높은 산의 중턱에 선 그는 윌스브룩 성을 탐색하듯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홀로 이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귀곡성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사위에 휘날렸다.
그 너머에 뾰족뾰족한 첨탑이 가시처럼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
누가 봐도 살벌한 풍경.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지금은 밤과 새벽의 사이라 더 춥긴 하겠지만, 낮에도 꽤 견디기 힘들 것 같은 날씨였다.
성의 주위에는 눈 쌓인 절벽 같은 산뿐이었고,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황폐함이
자욱했다.
원작에서도 악센은 그랜드칼리에 숱하게 많은 귀족들을 보냈다.
그러나 보내는 족족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자살하거나 실족사했다.
여기까지 접근한 사람도 한 명 없었다.
남은 귀족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벌벌 떨었던 내용이 기억났다.
그럼에도 악센이 계속해서 그랜드칼리에 귀족들을 보낸 건 과연 누가 성공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악랄한
흥미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냥 둬도 상관없는 북부였는데, 악센으로 인해 아깝게 죽은 목숨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북부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악센은 자신의 마력으로 북부를 정복했다.
그때 악센은 윌스브룩 성 안에서 뜻하지 않게 초월적인 존재를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봉인된 흡혈귀 캐스다인 글렌베리 백작.
악센은 그 흡혈귀의 능력과 생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마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바로 그 이유로 윌스브룩 성은 알렉 또한 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폭군에게 그랜드칼리라는 지명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원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혹시라도 그를 북부의
영주로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경험치와 더불어 새로운 사역령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라는 감이 왔다.
악센은 정말로 그를 이곳의 영주로 보냈고, 그는 지금 자신의 새로운 사역령을 포섭하기 직전이었다.
이제 탐색은 끝난 시간.
‘스킬. 신속.’
[퀘스트 발생!]
[~윌스브룩 성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제거하세요!~]
[윌스브룩 성 안에는 여러 생명체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습니다. 해당 생명체의 등급에 따라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퀘스트 보상]
[경험치(?), 명성(?), 애정도(?), 신뢰도(?)]
* * *
아, 열쇠가 필요했구나.
문이 안 열리면 부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중한 나무 문 앞으로 다가간 그는 우선 그냥 문고리를 한번 당겨 보았다.
성문은 단단히 잠긴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잡고 다시 한번 온 힘을 실어 당겨 보았지만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부드럽게 열쇠가 밀려 들어가더니 어느 순간 철컥, 하는 경쾌한 작동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윽고 문을 연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기드온이 작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내부는 어두워서 뭐가 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무척 크고 넓다는 건 잘 알 것 같았다.
유일하게 달빛이 들어오는 저 높은 곳의 창문은 마구 깨져 있었다.
일단 여기서 그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건 보스 룸.
파바박.
강렬한 기세의 번개 같은 빛이 그의 손에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석관을 휘감자 투두둑, 단단한 돌이 빙판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조각난 석관의 뚜껑이며 몸체가 바닥으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알렉은 조금 마른침을 삼켰다.
흡혈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캐스다인은 수백 년 전에 이곳의 유능한 백작이었으니, 만약 그를 사역령으로 포섭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이런저런 유용한 정보들을 공유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그는 이 성의 영주가 되어 북부를 관리해야 했는데, 그런 것을 그가 해 봤을 리가 없었다.
후우욱.
그 순간, 누군가 수백 년 동안 멈춰 있던 호흡을 들이쉬는 듯한 증폭된 숨소리가 공동 안을 울렸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심상치 않은 호흡이었다.
띠링!
후욱, 후우욱…….
“…….”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이 크게 울렸다.
저 호흡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실존하는 흡혈귀와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윽고 캐스다인의 몸이 스르륵 일어섰다. 알렉과 바로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설귀보다 하얀 은발에 냉한 기운.
회색빛으로 보일 만큼 창백한 얼굴과 텅 빈 듯하지만 싸늘한 냉기를 풍기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한기를 뿜어내는 메마른 입술까지.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다 얼려 버릴 것 같았다.
봉인될 때의 나이가 20 대밖에 되지 않았던 듯 캐스다인은 꽤 젊은 모습이었다.
남은 시간 20 분.
캐스다인의 머리 위 HP 는 17000.
알렉의 피 냄새를 맡은 듯 캐스다인의 눈빛이 탐욕적으로 타올랐다. 그 이후 번득였던 건 살의 그
자체였다.
그 눈빛을 알렉이 알아차린 짧은 순간, 캐스다인은 알렉이 신속 스킬을 쓸 때만큼이나 빠르게 날아들었다.
휙!
캐스다인의 섬뜩한 손톱이 알렉의 눈 바로 앞에서 날카롭게 허공을 할퀴었다.
“으으악!”
“으으윽!”
“여기서 끝내 주마!”
[축하합니다!]
[최종 보스를 제거해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윌스브룩 성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제거하세요!~]
[퀘스트 보상]
[경험치가 3000 올랐습니다.]
[명성이 500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10 올랐습니다.]
[신뢰도가 100 올랐습니다.]
* * *
어렴풋하게 동이 텄다.
선잠이 들었는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다시 잘까?
황궁에 다녀온 데다가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중요한 이야기까지 나눴더니 몸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눈꺼풀이 감기려는데, 문득 쿵 소리가 들려 다시 눈이 떠졌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나와 알렉의 방이 있는 2 층에서 들린 소리 같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숄을 걸쳐 몸에 두르고는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의 방문으로 다가간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방 안의 광경에
입술이 떡 벌어졌다.
상의를 벗는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내 목소리에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루이제.”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요?”
나는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가 이 시간에 대체 어딜 다녀온 건지 의아했지만, 그것보다는 어서 저 상처를 치료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그의 셔츠를 들어 보니 송곳 같은 무언가에 찔린 상처가 세 개나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켤 정도로 크게 놀랐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전에 사 둔 긴급 처치 용품이 있어서요.”
“괜찮습-.”
나는 그의 말을 더 들어 볼 겨를도 없이 돌아서서 서둘러 나갔다.
2 층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빈방이었지만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헝겊과 치료제 따위를 챙긴 나는 부엌에 가 깨끗한 물도 받았다.
얼른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가자 그가 상의를 다 벗은 채 피를 닦고 있었다.
“내, 내가 해 줄게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지금까지 그가 다쳐서 저택에 돌아온 적은 꽤 있었지만, 이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누군가한테 얻어맞은 듯한 타박상 정도였다.
내가 그의 복부에 손을 짚고 상처 부근에 수건을 가져가 대자 그의 근육이 흠칫하며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적신 수건이 조금 차가운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몸을 걱정스럽게 훑어보았다가 말했다.
“조금만 참아요. 많이 아프겠네요. 날 밝으면 바로 의원한테 가야겠어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곧 나아질 겁니다.”
“곧 나아질 상처가 아닌데요? 감염이라도 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에 찔린 거예요?”
“…….”
“소독도 제대로 해야 하고 그냥 두면 큰일 나요.”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제야 그가 대꾸했다.
의 환부를 나는 급한 대로 치료제를 바르고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묶어 지혈했다.
그는 몇 번 나를 만류했지만 포기한 듯 가만히 내 처치를 받았다.
상처를 잘 다물려 놓았는데 환자 본인이 움직이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당신이 다쳐서 들어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그가 나에게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득 공작저에 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얼굴에 멍이 든 채 집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그의 답답한 상황을 불쾌해한다고 여겼겠지만, 사실 마음이 아픈 쪽에 더 가까웠다.
그는 얼굴에 상처가 나거나 다치면, 다 나을 때까지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의 상처를 보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던 모양이었다.
약조차 바르지 못하게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마음 아팠다.
* * *
* * *
먼저 성으로 가 버렸다.
나는 외출용 드레스를 입으며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성이 생각보다 괜찮다니 정말일까?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
그가 윌스브룩 성으로 간 이후 나는 말을 타고 홀로 북부를 둘러보았다.
윌스브룩 성이 있는 곳까지는 당연히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선은 그랜드칼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인 카나크를 답사해 보았다.
어쩌면 여기가 진짜 우리가 새 출발할 장소가 될 수도 있으려나?
새하얗게 뒤덮인 눈만큼이나 막연하고 낯선 곳이었지만 나는 긍정적인 희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비관적인 상황에서 낙담을 해 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반드시 북부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북부를 길들이려면 북부인들의 민심을 얻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그래야 그들이 영주를 신뢰하는 세금을 내든, 우리 편이 되든 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알렉은 언제 오려나.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택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던 나는 문득 내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한 감각이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 것 같지 않은 입술.
살포시 손을 들어 입술에 손을 대 보니 그간의 일들이 되새겨졌다.
키스, 댄스, 그리고 비범함 그 이상으로 특출났던 능력.
알렉은 여전히 알렉인데…….
내 가슴이 떨리는 건 의심스러운 낯섦 때문일까, 아니면 설렘일까?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66 화
* * *
* * *
“부인. 꼭 눈의 여왕 같으셔요.”
나는 브니엘이 손수 제작해서 갖고 온 드레스와 망토를 두르고 거울 앞에 섰다.
영주 부부 컨셉의 룩을 의뢰했더니 브니엘이 상당히 공을 들인 듯 평소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의복을
만들어 왔다.
거울을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브니엘. 태어나서 가죽 드레스는 처음이에요.”
검은 소가죽으로 된 부드러운 질감의 드레스에 결이 고운 하얀 털 망토를 둘렀다.
망토에는 검은색 반점이 염색되어 있었다.
가죽으로 된 드레스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막상 입어 보니 우아함과 위엄을 챙기고도 북부의 한파에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내 새 옷을 구경하던 엘로이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썩 잘 어울리는걸?”
“안감에 보온성이 좋은 원단을 덧대서 따뜻하실 거예요. 정말이지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고마워요, 브니엘. 이건 정말 내 상상 이상이네요.”
내 말에 브니엘의 눈동자가 감동받은 것처럼 일렁였다.
“아닙니다, 부인. 부인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셔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세요.”
“덕분에 얼어 죽진 않겠어요. 성에 갈 때 꼭 이걸 입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면 전 언제쯤 북부로 출발하면 될까요?”
“……!”
조심스럽게 물은 브니엘의 말에 내 눈동자가 커졌다.
* * *
* * *
* * *
줄리아도 붉은 술을 쭉 들이켰다.
“어차피 내가 가만히 둬도 넌 죽을 거야, 루이제. 폐하께서 정말로 영주 노릇을 하라고 그 먼 곳에
보내는 건 아니란 것쯤은 알잖아?”
“……내가 죽어도 혼자 죽진 않을 거라서.”
“…….”
부드럽고 낮게 내뱉은 루이제의 말에 줄리아가 잠시 정색하더니 픽 비웃었다.
“그래. 너같이 뒷배 없는 것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지. 지켜 주는 본가도 없으면서 뭘 믿고 맞서는
건지 신기해. 그런데 그거 알아? 네가 이미 졌어.”
“…….”
“태어나서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뿌듯해 보이네.”
루이제는 평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숨죽이며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을 향해 브룩스가 살짝 돌아섰다.
“이 복도에 보이는 방들이 모두 휴게실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보내시길. 그럼 저는 이만…….”
브룩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돌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알렉이 손을 뻗으며 브룩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 되시면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예상치 못한 제안에 브룩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원래 알렉시스와 브룩스는 그다지 접점이 없는 관계였다.
브룩스는 갑자기 알렉시스가 대화를 청해 내심 크게 놀란 것 같았지만 금세 허락했다.
“아, 뭐 용무가 있다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렉은 복도 안쪽을 힐긋 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예.”
알렉이 먼저 앞장서자 브룩스가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알렉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줄리아는 이제 소파에서 일어서 있었다.
“넌 여기서 홀로 죽은 채 발견될 거거든. 나랑 같이 있었던 사실은 아무도 모를 거야. 어차피 마르셀
때문에 어딜 맘대로 다닐 수가 있어야지.”
“…….”
“감히 날 얕본 거 처절하게 온몸에 새겨 줄게. 지금 네 몸에 흐르고 있는 술.”
“…….”
“그러게 아무거나 함부로 마시는 게 아니란다.”
“독이라도 탄 건가?”
루이제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묻는 질문에 줄리아가 자랑스럽게 한 번 끄덕였다.
“응. 술맛은 좋았을 거야. 내가 미리 하녀 하나한테 먹여 봤는데 맛은 그대로라고 하더라고.”
“독주를 시음까지 시켜 보고 정성이 대단하구나.”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대뜸 들린 목소리에 줄리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브룩스가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루이제!”
독을 탔다고?
루이제가 마신 술에?
알렉은 루이제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녀와 줄리아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술에 독을 탔었다니.
“알렉!”
그가 나타나자 루이제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마셨을까?
다행히 그에게는 자연 회복 스킬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기 전, 눈 깜짝할 새에 루이제가 목숨을 잃을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줄리아는 브룩스를 보고 조금 놀란 듯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브룩스는 황당한 얼굴로 술잔과 줄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사람이 마시는 술에 독을 타요?”
줄리아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독기 서린 눈빛을 밝혔다.
“브룩스 후작은 남의 일에 빠져요. 감히 간섭하지 말라고!”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니야!”
“하아…….”
그 순간 루이제가 살짝 비틀거리며 알렉의 품으로 쓰러졌다.
“루이제!”
“…….”
왜 손상이 없지?
안 마신 건가?
알렉이 의아해하는 사이, 어느새 브룩스가 술잔을 들고 근처 화초로 다가가며 외쳤다.
“뭐 합니까, 환자를 얼른 데리고 나가지 않고!”
이윽고 생명을 빼앗기듯 꽃잎이 쪼그라들었고, 브룩스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줄리아 하워드 후작 부인! 살인이라니, 당신 미친 게 분명하군! 이번에는 폐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순간 어디선가 우르르 발소리가 들리더니 귀부인들이 의아하게 웅성거렸다.
이제야 20 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
루이제는 알렉의 허리춤을 붙잡고 슬쩍 눈꺼풀을 들었다.
어두운 창문에 비친 줄리아의 일그러진 안색이 볼 만했다.
정말로 사이좋게 술을 나눠 마실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줄리아.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거 누가 모를까 봐?’
* * *
“……!”
공기를 울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줄리아는 벽으로 등을 더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 좁은 감옥 안에서 더
도망 칠 곳은 없었다.
헉헉 숨이 막혔다.
이러다 심장이 멈춰 버릴지도 몰랐다.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줄리아가 겨우 입을 움직였다.
“저, 저리 가…….”
“악!”
저리 가! 오지 마!
“아악!”
아무것도 없는 돌 감옥 안에서 줄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사교계의 퀸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8. 북부 영주 부부의 완벽한 속궁합
“…….”
캐시가 죽은 일로 루이제가 줄리아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그는 캐시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사용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대강 알게 되었다.
루이제와 엘로이, 어머니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줄리아 때문에 캐시가 죽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의 가슴이 묵직한 걸까?
루이제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마치 그도 직접 겪은 일 같았다.
알렉은 어젯밤 캐스다인을 줄리아에게 보내 조금 더 위협을 했다.
루이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줄리아에게 마지막 경고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알렉은 질끈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점점 더 이 가족들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루이제와 입맞춤을 했던 촉감도 아직 생생하게 그의 입술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마음의 무게와 서러움이 남의 것 같지 않았다.
이래도 될까?
그는 언제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점점 정이 들어도 괜찮은 걸까?
정이 든다는 표현부터가 그에게는 잘못되었다. 그는 원래 남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편이 아니었다.
알렉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도기처럼 반질반질한 얼굴에 앵두처럼 윤기가 나는 입술.
그 고결하면서도 자극적인 모습에 알렉은 세게 입 안을 깨물며 다시 창 밖을 보았다.
루이제가 깰까 봐 몇 시간째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도 낯설었다.
어느덧 마차는 하루를 꼬박 달려 북부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사람 한 명,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주위의 온도는 이미 영하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마차가 멈추더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말들 때문에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주인님!”
마부인 페드로였다.
그와 루이제를 따라 북부로 가고 있는 마차가 다섯 대 더 있었는데, 짐을 실은 마차 외에는 사용인들이
타고 있었다.
시녀장인 제인과 시종장인 제임스, 그리고 요리장인 알버트와 그레타 부인 등 사용인들 중 일부가 우선
그들을 따라 출발했다.
똑똑.
“잠시 문을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주인님?”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알렉이 문 쪽을 보았다. 제임스의 음성이었다.
“들어와.”
이윽고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더니 잠든 루이제를 발견했다. 눈이 조금 커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필요하신 게 있을까 봐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괜찮다.”
“알겠습니다. 부르실 일 있으면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군.”
제임스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사용인들도 모두 그와 루이제처럼 풍성한 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그의 주변은 많은 게 변했다.
지금까지는 루이제와 어머니, 엘로이하고만 지냈지만 앞으로는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쳐야 했다.
그런데 사용인들은 등장인물 일람에 단 한 명도 뜨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누군지 아예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알렉은 꽤 신경을 써야 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다행히 사용인들은 그의 말투와 자세가 너무도 달라진 탓에 이미 그를 새로운 기분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의심받을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알렉은 다시 한번 미간을 눌렀다.
사용인들은 이미 다른 가족들처럼 알렉시스를 오래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는 수십, 수백 명으로 늘어날 텐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축하합니다!]
[애정도가 300 올랐습니다!]
[레벨 8 로 올랐습니다]
“……?”
* * *
‘하.’
아주 연한 느낌으로 두 혀가 과감하게 얽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나 오랫동안 고대했던 것을 어루만지듯 연거푸 그를 휘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올라오는 길이 힘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윌스브룩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벌써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 * *
* * *
‘여기서 해도 돼요.’
‘여기서 해도 돼요.’
‘……우리 이제 같은 방을 쓰는 건 어때요?’
‘당신 이제 운동 신경이 좋아진 거면…… 밤에 나랑 그런 것도 가능해진 거 아니에요?’
‘여기서 해도 돼요.’
* * *
“흐읏.”
그의 손길이 내 허리를 스치고 올라왔다.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몸이 하느작거리며 무릎을 세웠다.
정말로 오늘 밤 하게 되는 걸까?
그와 결혼한 지 무려 3 년이었다.
그동안 나는 눈물이 고일 만큼 외로운 시간을 보냈고, 그런 나를 보며 그도 힘겨워했다.
나중에는 거의 체념하긴 했지만 그가 늘 나에게 미안해했던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밤 내 남편과 다시 하게 되다니…….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의 변한 모습들을 떠올렸다.
아찔했던 키스와 황홀했던 댄스.
그 모든 것들을 다 합해도 앞으로 그와 하게 될 정사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날 침대에 눕히자 그는 나를 깔고 앉은 채 팔을 들어 제 셔츠를 벗었다.
머리 위로 셔츠를 올리자 탐스러운 양감의 근육이 아무것도 가리는 것 없이 쭉 늘어나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워 나는 시트를 움켜쥐며 살짝 허리를 뒤틀었다.
그의 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눈앞이 현란했다.
그가 옷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넓게 벌어진 어깨가 내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왔다.
이윽고 내 허벅지를 감은 드레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알렉…….”
손끝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나는 불에 덴 것처럼 시트를 움켜쥐었다.
옷이 들어 올려지며 차츰 내 맨살이 드러났다.
나는 얇은 드레스 외에 다른 건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속옷도 입지 않았다.
여태껏 남편은 내 날것 그 자체인 몸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 곳곳마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긴장한 듯이 동공이 얼어붙고, 넓은 가슴은 팽팽해졌다. 그의 목울대까지 크게 울렁였다.
뜨거운 시선이 내 복부를 지나 가슴에 닿자 그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루이제.”
원래 이렇게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찔했었던 걸까?
내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각해지는 그의 반응이 나를 더 달뜨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가슴에 시선을 못 박은 채 그대로 내 드레스를 머리 위로 올려 벗겼다.
완벽한 나신이 되었다.
그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며 내 허리며 복부를 쓸어 만졌다.
“훗…….”
나는 살짝 허리를 움직였고 그는 소리 없는 숨을 토해 냈다.
“……당신 몸이 너무 여리고 차갑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찌푸리며 낮게 소리 냈다.
“추워도 참아야 할 때였으니까요…….”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얼어붙어 있던 내 살결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북부의 살벌한 추위를 거의 맨 몸으로 견딘 대가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먼저 그를 유혹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알렉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당황해하며
나를 밀어냈다.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가운을 걸쳐야 했던 순간이 생생했다.
처량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던 기억이었다.
나는 침대 시트에 살짝 팔을 누르며 소리 냈다.
“왜,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자 그가 괴롭게 신음하듯이 대답했다.
“……예뻐서요.”
……예쁘다고?
저 남자가 나한테 예쁘다는 말을 다 하다니.
확실히 지금의 그는 나를 보거나 다루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나를 더 흥분하게 했다.
나를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것보다, 함부로 대해 주길 원하고 있었으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져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당신이 더 예뻐요, 알렉.”
“…….”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목울대가 다시 한번 크게 오르내렸다.
이내 그가 고개를 내려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로 누르며 혀로 쓸고 지나갔다.
“흣…….”
나는 시트를 쥐어뜯었다.
눈이 절로 천장을 더듬었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하아.”
그가 달콤한 한숨과 함께 내 몸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빳빳하게 비틀었다.
“흐으…….”
여태 이렇게 만져 준 적 한번 없었는데…….
지금 그는 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아.”
이제야 그도 내 몸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윽하고 뭉근한 손길이 한동안 능숙하게 이어졌다. 뼈까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손길보다 더 애타는 침음을 흘리며 내 온몸 곳곳을 아찔하게 누볐다.
“하, 알렉.”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손끝으로 꾹 눌렀다.
“하아…….”
그의 신음이 몸속 깊은 속에서부터 끌려 나온 것처럼 낮게 갈라졌다.
가슴속이 술렁일 만큼 듣기 좋은 신음이었다.
내게 닿은 그의 몸도 한껏 긴장하며 단단해졌다.
나만큼이나 그도 나를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루이제.”
그가 다시 한숨 같은 침음을 흘리며 갈급하게 내 입술을 찾았다.
혀를 맞부딪히자 그의 조급한 욕망이 느껴졌다.
진해질수록 달콤하고 농밀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싸늘했던 방 안에 뜨끈한 훈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뜨거운 그의 혀에 온몸을 녹일 듯 휘감고 달라붙었다.
그만 내 침대에 있어 준다면 그 어떤 난방 장치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가 힘겹게 숨을 토해 내며 나에게 붙어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나는 혼몽한 눈으로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몸이 너무 연약해서 녹아 버릴 것 같습니다.”
나도 그만큼이나 가쁘게 숨소리를 뱉었다.
“……아뇨. 그러려면 한참 멀었어요.”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은 먼저 아프게 한 다음에 해 줘요.”
“…….”
그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말했다.
“당신 몸이 부서져라 해도 됩니까.”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가슴이 자꾸만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내 몸이 부서져라 한다는 말에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바라마지 않던 말이었다.
“……난 보기보다 튼튼해서, 그렇게 하려면 밤을 새워야 할 거예요.”
“…….”
그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더니 턱이 단단해졌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눈빛이 한번 흔들리더니 이내 힘겨운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 허벅지 사이에서 무릎으로 선 채 바지를 풀었다.
나는 마른침을 꾹 삼켰다.
어딘가 가느스름하고 진지한 그의 눈빛과 좁혀진 미간이 달콤하고 색정적이었다.
이윽고 그의 옷이 힘없이 풀어지자 내 눈길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
순간적으로 나는 놀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뻣뻣하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아, 알렉.”
저게, 원래 저랬나?
그의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2 년 전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본 건 아니었다.
그는 첫날밤부터 자신의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굳이 제대로 보여 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싫다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더 요구하면 내 마음과 자존 심에 생채기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훤히 드러낸 그는 전처럼 숨기고 싶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내 눈길에 입술을 꽉 깨물며 더욱 곤두설 뿐이었다.
그와 내 사이의 공기가 팽팽했다.
“아, 알렉.”
“…….”
나는 시트를 쥐며 겨우 소리 냈다.
그가 몸을 숙였다.
“나 오늘 윌스브룩 성을 처음 보고 정말 감탄하고 압도되었는데…… 흣.”
“…….”
“그, 그런데 당신 것이 이 성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훌륭한 것 같아요.”
“……하.”
내 말에 그가 착잡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민망해하는 걸까?
그가 팔꿈치로 내 머리 옆 시트를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아랫배를 더듬기 시작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복잡한 한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숨기지 말아요.”
“…….”
저런 걸 가지면 더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렇게 내 앞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여태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해서 창피해했던 걸까?
이윽고 그의 손이 내 배 아래로 내려갔다.
“흣.”
서늘한 추위 같은 건 이미 그의 열기에 자취를 감췄다.
내 눈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경직된 듯이 흔들렸다.
“정말,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나는 지금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나는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팔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거예요.”
내 목소리가 조금 서늘했다.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잘록한 허리 밑으로 손을 넣었다.
한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약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내 몸은 가볍게 내려갔고, 그는 힘겨운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하아.”
그 압박감에 나는 그의 팔을 더 꽉 붙잡았다.
뜨겁고 묵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무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저런 걸 품으면…….
제대로 하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사람들은 첫 경험이 아픈 기억밖에 없다고 했지만, 나는 차라리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궁금해하기만 했던 경험을 이제야 겪어 보기 직전이었다.
이윽고 그가 내 눈을 보지 않으며 괴롭게 신음하듯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그의 복근에 강한 힘이 들어간 듯 근육들이 하나가 될 것처럼 바짝 웅크렸다.
“흐읏.”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턱을 들었다.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여유롭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를 악물어야 할 줄이야.
그래서인지 만족감이 더 크게 차올랐다.
그가 내 턱을 쥐더니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루이제.”
“흐으, 알렉…….”
드디어, 우리가.
나는 조금 감동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감격스럽고 경이로웠다.
그런데 그가 허리에 힘을 주며 묵직하게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
이미 다 들어온 거 아니-.
“아!”
“……하아.”
그의 달콤한 신음이 내 귓가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끝이 아닌 듯, 그는 내 안색을 살폈다.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뜨겁고 촉촉한 입술로 내 입술을 삼켰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아직 제대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벌써부터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느껴지는 움직임에 경이로운 탄성이 나왔다.
“……아!”
그 이후에 그는 정말로 내 몸을 부술 것처럼 나를 다뤘다.
“아, 아아!”
* * *
“일어나셨네요, 마님.”
나는 힘겹게 1 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마침 제인이 나를 발견하며 반색했다.
어차피 아침 시간도 지났겠다 설렁줄로 사용인들을 부르는 대신 직접 내려왔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사용인들이 올 때까지 참을 수 없었다.
“응. 잘 잤니?”
나는 최대한 작은 보폭으로 걸으며 제인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차라리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회복이 빠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 어정쩡해 보일 것 같긴 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마님. 아직은 조금 낯설지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간밤에 잘 잤습니다.”
제인이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예. 여긴 하인들이 쓰는 방도 넓고 좋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시장하신가요? 식사를 바로 준비할까요?”
“그래 줄래? 고마워.”
“아닙니다, 마님. 그럼 어디로 식사를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응접실에 있을게.”
다시 내 방으로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7 층 계단을 내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알겠습니다, 마님.”
제인은 친절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짧게 내 몸을 훑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스러우면서도 의아한 눈치였다.
역시나 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마님,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니야. 그냥 어제오늘 계단을 너무 많이 오르내려서 그런 것 같아.”
“저런. 그럴 만해요. 성이 워낙 커야죠. 그럼 식후에 찜질이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하,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어. 안 그래도 삭신이 다 쑤시거든.”
“알겠습니다.”
이내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는 옅은 숨을 내쉬며 응접실로 향했다.
찜질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성에 사는 거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멀쩡한 몸으로 돌아다녀도 지칠 것 같은데, 지금처럼 뻐근한 상태로는 식사하러 내려오는 것도 곤욕이었다.
‘저녁은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응접실의 편한 소파에 앉아 있으니 잠시 후에 제인이 다시 나타났다.
트롤리에는 갖가지 요리가 은으로 된 뚜껑으로 덮여 있었고, 절로 식욕이 돋는 냄새가 풍겼다.
이윽고 테이블에 요리를 차린 제인이 조금 물러나며 공손하게 섰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마님.”
“고마워. 잘 먹을게.”
군침이 돈 내가 식기를 들었다. 조금 먹다가 갑자기 생각난 척 물었다.
“그런데 알렉은 어디 있어?”
“아, 주인님은 성에 안 계시는 것 같아요. 오늘은 아직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거든요. 아니, 아까
제임스가 확인했을 때 방에는 안 계셨는데 이 성 안 어딘가에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제인이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을 줄였다.
나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뜨끈한 수프를 떠먹으며 대답했다.
“그럼 아마 어디 나간 모양이야. 볼 일이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식사는 하고 가셨어야 했는데…….”
“…….”
밥도 안 먹고 어디 간 걸까?
조금 걱정되었지만, 그가 어린 애도 아니고 어련히 잘 다녀오겠거니 생각했다.
심하게 허기가 진 나머지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식사에 집중했다.
먹는 것마다 다 맛있어서 몸의 통증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마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내가 거의 다 먹었을 때쯤이었다.
제인이 줄곧 할 말이 있었는지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곳은 누가 미리 청소를 한 건가요? 아무리 봐도 청소할 곳이 없어서요. 가구들도 다 잘 관리된
것 같고요.”
“아…… 그랬구나.”
그렇지 않아도 나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 성은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성치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깨끗했다.
그동안 알렉이 혼자 여기 머물면서 준비한 걸까?
그에 대해 그가 뭐라 한 말은 없었지만, 묘한 느낌에 어딘가 불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아직 그에게 뭔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용인들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신기하더라.”
“역시 그렇죠? 주인님께서 이미 먼저 다른 사람들을 써서 성을 수리한 걸까요?”
“그런가? 이따 오면 물어봐야겠어. 뭐 아직 말 안 한 게 있겠지.”
“네.”
나는 그냥 제인에게 살포시 웃어 주었다. 그러자 제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시 내 방으로 올라가기 전 나는 제인에게 부탁했다.
“알렉이 성에 오면 알려 줄래?”
“예, 알겠습니다. 마님.”
“응.”
이윽고 몸을 돌린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역시나 내가 느낀 것처럼 사용인들도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
이 성 자체가 동화 속 같았다.
이전에 알렉이 북부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 안을 단장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완벽한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알렉은 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걸까.
‘뭐 그래도 힘든 일이 줄어서 좋은걸……?’
카나크에 가 청소를 해 줄 북부인들을 고용해 보려고 했는데, 당장 급한 일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나저나 아직 성 구경도 다 못 했네.’
죽기 전에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한 칸 오를 때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 탓에 간밤의 일이 다시 떠올라 괜히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하아…….”
윌스브룩 성 근처의 암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알렉은 그 위에 누워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해서 찬바람을 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북부의 날씨는 그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을 만큼 너무도 추웠다.
얇은 옷차림으로 이런 곳에 홀로 누워 있는 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죽으려고 환장한 짓이겠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이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아아아!’
‘읏, 흐읏…….’
간밤의 장면들이 보란 듯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그는 그런 경험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자를 안거나 입술을 맞춰 본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딱히 그런 접촉을 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보고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왜 그는 미쳐 버린 걸까?
안고 싶을 만큼 루이제가 매혹적이라?
그는 견딜 수 없이 그녀를 더 느끼고 알고 싶었다.
영원히 그만둘 수 없는 감각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의 몸에 푹 빠져 버렸다.
‘이런 미친놈…….’
그녀가 지쳐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루이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알렉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방을 따뜻하게 데우고, 옷을 입혀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밀려오는 현실 감각에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이 스르륵 눈밭으로 떨어졌다.
시스템 창은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루이제의 애정도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상승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레벨이 오르고 새로 개방된 스킬들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
처음에는 왜 여기가 그의 최종 보상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하.”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알렉은 몸을 일으켰다.
체력 단련이라도 해야 이 가슴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련을 끝내고 다시 암산의 눈밭에 누워 있자니 또다시 루이제가 생각났다.
뭘 하는지 잠깐만 볼까……?
그는 살짝 기드온의 눈을 확인했다.
그런데 눈앞에 드러난 장면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제가…… 왜 저러지?’
그녀가 이를 악물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아!”
불쑥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루이제가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알렉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루이제는 다시 필사적으로 난간을 붙잡고 무겁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알렉은 서서히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이라니, 스킬 명을 생각하니 그에게 왜 이러나 싶어 속에서 뭔가 치미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 생긴 스킬을 써서 수건을 더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스킬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유용하긴 했다.
그가 적당히 뜨거운 온도의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루이제의 다리를 감싼 순간이었다.
“흣.”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루이제가 옅은 신음을 내쉬었다.
그는 그제야 루이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뜨거우십니까?”
“아, 아뇨. 그냥 놀라서요. 생각보다 더 뜨끈해서 좋네요. 참아 볼게요.”
“아프거나 뜨거우면 말씀하십시오.”
“알겠어요.”
그제야 그는 다시 루이제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두 손으로 수건을 감싸며 그녀의 종아리 근육을 살짝 주물렀다.
그러자 루이제가 온몸을 굳히며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하.”
그녀의 숨결에 알렉의 눈동자도 처참하게 흔들렸다.
어젯밤의 열띤 숨결과 하나로 엉킨 살결이 또 향연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애써 이를 짓씹으며 다시 루이제의 부드러운 다리를 주물렀다.
“……당신이 나한테 이런 것도 다 해 주고 신기하네요.”
“…….”
“이제 날 만지는 게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봐요.”
루이제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덩달아 심장이 떨리는 것 같았다.
손에 감기는 루이제의 다리는 그녀의 가슴만큼이나 섬약했다.
알렉이 힘겹게 회복 스킬을 쓰기 시작하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따뜻하고 좋네요.”
“다행입니다.”
그는 조금 더 가볍게 마사지를 해 주다가 루이제의 오른쪽 다리도 똑같이 찜질을 했다.
계속해서 조금씩 회복 스킬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쪽 다리에는 아까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생긴 듯 멍까지 크게 들어 있었다.
역시 그녀를 너무 아프게 했다는 자책만 짙어졌다.
“죄송합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아니에요. 당신도 태어나서 그렇게 해 본 건 처음일 거 아니에요.”
“…….”
루이제는 여전히 상냥하게 소리 냈다.
“그래도 좋았잖아요. 당신은 아니었나요?”
“…….”
수건을 다시 물에 적시던 그의 손이 멎었다.
루이제의 보석 같은 눈빛이 그에게 끊임없이 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좋았냐니.
그는 좋다 못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들어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가 한껏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쓸며 말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후훗.”
루이제가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다른 부부들처럼 매일 할 수 있는 건가요?”
“예?”
갑자기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말에 알렉이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받아들이는 알렉의 마음은 평소답지 않았다.
루이제의 입술이 자꾸만 그의 시선을 끌었고, 그녀와 한 호흡으로 엉켰던 장면이 떠올랐다.
알렉은 루이제의 얼굴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이를 꽉 깨문 듯이 대답했다.
“부부라고 매일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매일 하는 게 싫은가 보네요.”
조금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와 약간 밉지 않게 흘겨보는 듯한 눈빛.
알렉은 그냥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건 아닙니다.”
“알겠어요.”
루이제가 만족스러운 듯 다시 후훗 웃었다.
남은 다리도 마저 찜질을 마친 그가 그녀의 다리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발이 바닥에 끝까지 닿고 나서야 그녀의 발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루이제가 자신의 드레스를 더 걷어 올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게 했다.
“……!”
알렉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루이제는 별일 아닌 듯 말했다.
“제인 대신 당신이 와 줘서 새삼 다행이네요. 제인이 이 몰골을 봤으면 얼마나 놀랐겠어요.”
“…….”
“아, 물론 나만큼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드디어 우리 주인님들이 성공을 했다고 좋아하면서요.”
루이제는 웃는 듯이 말했지만, 알렉은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 울긋불긋한 흔적이 피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또 묘한 기분이 그의 가슴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충족감이었다.
루이제를 저렇게까지 만든 남자가 다름 아닌 바로 그라니…….
생소한 기분에 조금 옅은 숨을 내쉰 알렉은 턱을 조금 꽉 다물었다.
의자를 더 끌어당겨 루이제와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무릎과 무릎이 닿으며 두 사람의 다리가 포개졌다.
뜨끈한 수건으로 그녀의 허벅지도 감싸 주었다.
루이제가 그에게 거리낌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어젯밤 루이제가 거의 전라로 그를 맞이한 것도 그렇고, 지금처럼 거리낌 없이 드레스를 들어 올려 보여
주는 것도 남편의 앞이니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루이제가 낯선 여자인 그로서는 그녀의 과감한 행동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알렉은 이 낯선 기분을 견뎌 내듯 루이제의 다리를 더욱 정성껏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어쩐지 루이제의 몸이 점점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녀의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숨결이 그의 눈앞을 흐리는 것 같아 알렉은 더욱 침착하게 손길을 이어 갔다.
수건을 댄 상태였지만 마른침이 넘어가고, 그의 숨소리도 귓가에 점점 더 선명해졌다.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다.
“알렉.”
“예?”
갑자기 들려온 루이제의 목소리가 꼭 귓가에 친 천둥 같았다.
루이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려던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당신이 주물러 주니까 정말로 한결 몸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
벌써부터 통증이 줄어든 것을 느낀 걸까?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의 회복 스킬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오늘 구경해 보니까 성 안이 정말 근사하고 좋은 것 같더라고요.”
“…….”
“언제 다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마른침을 한번 삼킨 알렉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어쩌면 그녀가 이 성을 놓치는 곳 없이 다 둘러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시 루이제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당분간은 구경보다는 며칠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 안을 다 돌아본 건가요?”
“예.”
“대단하네요. 힘들었겠어요.”
“…….”
“그런데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도 이렇게 내부가 훌륭했나요?”
“…….”
알렉의 손길이 다시 뚝 멎었다.
역시나 루이제가 이 윌스브룩 성의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의심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
“아니면 혼자 여기서 며칠 지냈을 때 미리 청소를 한 건가요?”
“하긴 했습니다만…….”
알렉은 계속해서 루이제의 살결을 안마하듯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네? 누가요? 당신 혼자서요?”
“…….”
“아니면 여기 북부의 다른 사람들을 쓰기라도 한 건가요?”
“…….”
그냥 그렇다고 말할까?
사실 별것 아닌 거짓말이었다.
혼자서 이 성을 청소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들에 대해 또 거짓을 말해야 할 순간이 계속해서 올
것 같았다.
데려오라고 하기라도 하면 일이 커질 텐데, 그렇게까지 피곤한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가구들도 낡은 곳이 없어서 새로 사다 놓은 줄 알았어요. 원래 여기 있었던 가구들이었나요?”
“…….”
루이제의 물음은 차분했다.
그에게 따지거나 의심하는 기색 하나 없이 순수하게 의문하고 있었다.
결국 알렉은 루이제에게 해 주던 마사지를 마무리하며 그녀의 드레스를 다시 발목까지 내려 주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 줄 때가 온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루이제의 발에 신발을 신기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신발은 왜요?”
그는 말없이 방 한쪽에 걸려 있는 털 망토까지 가져왔다.
결국 루이제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디 갈 거예요?”
“예. 잠시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알렉은 루이제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가죽끈까지 꽉 묶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제가 아까 갔던 곳입니다.”
“네?”
“별로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걸어갈 수는 없는 곳이니 잠깐 안아도 되겠습니까?”
“…….”
루이제는 아무런 말 없이 그냥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그 눈을 마주 본 알렉은 그냥 루이제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들어 올려진 루이제가 작게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를 안았다.
“아까 갔던 곳을 대체 어떻게 가길래…….”
그는 그대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북부 특유의 싸늘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아, 알렉? 갑자기 창문을 왜 열어요?”
“꽉 잡으셔야 합니다, 루이제.”
“네? 대체 이게 무슨- 꺅!”
루이제의 머리카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휘날렸다.
신속 스킬은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발을 디딜 곳이 있다면 공중이라도 지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눈 덮인 암산까지는 첨탑 몇 개와 산 몇 개를 지나 올라가면 금방 갈 수 있었다.
그는 루이제를 더 꽉 안았고, 그녀는 당황한 만큼 그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빛이 번쩍 지나가는 것처럼 몇 번 발돋움을 하자 금세 높은 곳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착지하자 주위에 쌓인 눈들이 고운 모래처럼 피어 올랐다.
사방에는 아무것도 없이 하얗기만 했다.
루이제의 은빛 머리카락은 눈보다 더 부드럽게 부유하다가 가라앉았다.
“…….”
그제야 알렉은 루이제를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하.”
루이제가 짧게 숨을 토해 내며 비틀거렸다.
그의 팔을 부여잡더니 어안이 벙벙한 듯 속눈썹을 깜박였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의 품을 벗어나 아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뽀드득, 뽀득.
다급하게 눈을 밟는 소리가 꼭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 같았다.
문득 루이제는 무언가 발견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저기 우리 성이잖아요!”
“…….”
알렉은 조용히 루이제의 뒤로 다가갔다.
절벽 아래로 윌스브룩 성의 뒤쪽이 보였다.
“바,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어떻게…….”
누가 봐도 단숨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루이제는 휙 몸을 돌려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주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불안감도 서려 있었다.
알렉은 그 눈을 흔들림 없이 똑바로 응시하며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더 다가가면 위험하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렉의 태연한 반응에 루이제는 입이 벌어졌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예요……?”
루이제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있었던 일을 다름 아닌 그가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당신이 한 거냐고요…….”
루이제가 재차 멍하니 묻는 말에 알렉은 조금 시선을 내렸다.
이내 다시 루이제를 보며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맙소사…….”
루이제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라 말할 듯 말 듯 하는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냥 입술을 다물었다.
“그럼 성은…….”
그녀가 힘겹게 운을 떼자 알렉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비슷한 일로 저렇게 됐습니다. 원래는 좀 지저분했습니다만…….”
“……세상에.”
“…….”
루이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놀란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시간을 갖는 것 같았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루이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한테 강해졌다고 말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
“우리가 처음으로 승마하러 갔던 날. 우릴 쫓아오던 사람들을 당신이 쓰러뜨렸을 때…….”
“…….”
“그때 당신이 그냥 강해지기만 한 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네요.”
“…….”
루이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울 만큼 놀란 것 같았다.
물론 알렉도 그날 루이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거라고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딱히 말이 없어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데, 역시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에서 여기까지 날아오고, 수백 년이나 버려져
있던 성이 새것 같아진다는 게…….”
“…….”
말을 마친 루이제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다가왔다.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셔츠를 들어 올렸다.
옆구리에 금세 찬 공기가 닿았다.
캐스다인에게 찔린 상처가 있었던 곳이었다.
놀란 루이제가 숨을 흡 들이켜더니 이내 다른 쪽 옆구리까지 확인해 보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어요. 간밤에는 어둡기도 했고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
아, 그러고 보니.
알렉은 조금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에는 상처가 사라진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루이제는 얼핏 본 탓에 긴가민가해 하다가 이제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당신 혹시 마법사 같은 건가요?”
“예?”
“갑자기 그런 힘이 생기기라도 한 거예요?”
“…….”
마법사라는 말에 알렉은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지만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맙소사…….”
“…….”
루이제의 눈길에 알렉은 조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힘이고 능력이었지만,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어서 그런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이 세계에 마법사라니…….”
루이제가 멍하니 그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알렉은 조금 분명한 눈으로 루이제를 마주 보았다.
“뭐 엄청 대단한 건 아닙니다. 어쨌든 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제가 가진 능력 덕분에
낡고 더럽혀진 것들이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
루이제는 말없이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비현실적인 능력을 조금 전 직접 겪어 본 그녀로서는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루이제는 쓰러질 듯이 조금 어지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겨우 정신을 차린 것처럼 말했다.
“……아, 알겠어요. 당신이 그렇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네요.”
“…….”
“그런데 정말로 이 세상에 마법사 같은 게 있다니 놀랐어요. 그것도 알렉 당신이, 내 남편이…….”
“…….”
루이제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직접 봤으면서도 그가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의심하지 않는 걸까?
문득 알렉은 그녀를 조금 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시스템의 설계 때문에 그녀가 의심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루이제.”
“네?”
“혹시 제가 많이 변해 버려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십니까?”
“…….”
루이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알렉의 새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루이제가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네요.”
“…….”
“다른 사람 같아요. 당신이 나한테 배려가 없어지고 사악하게 변했다면 더 다른 사람 같았겠죠.”
“…….”
알렉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이제야 루이제가 여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쁜 사람처럼 변해서 나한테나 다른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다면, 난 당신이 더 이상 내가 아는 알렉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
“그런데 지금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아는 알렉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당신이 내
남편인 건 변하지 않아요. 맞죠? 여전히 당신인 거…….”
“…….”
루이제가 확실한 대답을 원하듯 조금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가 루이제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한 그녀가 의심할 일이 없는 걸까?
알렉은 시선을 살짝 내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
“당신을 속인 적도 있죠. 숨기기도 했고요.”
“…….”
“저는 제가 의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마치며 다시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루이제도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예?”
“당신이 달라져서 내가 밀어낼까 봐 걱정했나요?”
“…….”
“아니면…… 여전히 나랑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요?”
“…….”
이게 뭐지.
당황한 듯 알렉의 목울대가 불거졌다.
루이제는 조금 서글프면서도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당신 의심 안 해요.”
“…….”
“겨우 당신이 힘을 숨기고 속인 걸로 당신을 탓하지도 않을 거예요. 이런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할 수 있겠어요.”
“…….”
“오히려 당신이 그동안 숨기느라 힘들었겠죠.”
“…….”
그제야 알렉은 왜 루이제가 그를 의심하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엄청난 믿음이 느껴졌다.
그때, 루이제가 그의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그러니까 난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그냥 지금처럼 당신이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다른 건 상관없어요.”
“…….”
그리고 알렉시스를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까지 느껴졌다.
원래라면 진짜 알렉시스가 들었어야 하는 말들.
루이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까지는 할 생각 없었지만,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는걸요…….”
“…….”
알렉은 심장이 조금 욱신거리며 뻐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 루이제에게는 그가 그녀의 곁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다.
만약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면, 루이제는 원작에서 그를 따라 죽었던 것처럼 공허해질 것이다.
“…….”
알렉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루이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만큼, 진짜 알렉시스인 척 루이제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루이제는 그제야 안심한 듯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고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진짜 알렉시스인 척을 하며 루이제를 안았지만.
어쩐지 그의 가슴은 조금 공허했다.
* * *
* * *
* * *
* * *
두 그림자가 벽에 짙게 드리워졌다.
달뜬 루이제의 숨소리가 그가 밀치는 대로 박자를 맞춰 끊어졌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황홀하게 흐트러진 얼굴, 그를 바싹 껴안은 부드러운 몸.
루이제의 모든 게 그를 현혹하고 사로잡았다.
안쪽으로 그를 환장하게 만드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정사의 끝은 또 한참이 걸렸다.
“아!”
루이제를 엎드려 눕혔다.
그러자 알렉의 상체가 루이제의 등 위로 쏟아졌다.
그는 루이제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몸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하.”
그의 손과 몸이 닿는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뇌까지 녹여 버릴 듯 부드러웠다.
“알렉.”
루이제가 전율을 견디지 못하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내려 그 손등을 입술로 누르고 혀로 핥았다.
“흐으.”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루이제가 손을 빼내려는 순간 그가 입을 조금 더 벌려 손등을 크게 물었다.
루이제의 손등은 그녀의 입술만큼이나 여리고 부드러웠다.
“으……!”
나는 눈을 뜨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바깥은 이미 환한 낮이었다.
잠시 덜 깬 잠이 날아가길 기다리며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희한하게 머릿속이 맑고 몸이 가벼웠다.
음?
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또 그렇게 서로를 탐했으니 몸살에 시달릴 법도 했다.
북부에 와서 할 일이 많은데, 계속 아픈 몸을 이끌고 다닐 수는 없…….
그런데 내 다리는 평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욱신거리는 근육통 하나 없이 개운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아……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꼭 정말이지 시원한 마사지를 받고 난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별일이네.’
두 번이나 밤을 불태웠더니 그새 몸이 적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주물러 주던 손길이 어쩐지 시원하다 싶더니 특효가 있었던 것 같다.
간밤에 흘러넘쳤던 황홀함과 만족감을 생각하니 괜히 또 입꼬리가 씰룩댈 것 같아 나는 안 그런 척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겉옷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한 후에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오늘은 그랜드칼리의 영주 부인으로서 처음으로 영지를 둘러보는 중요한 날이었다.
* * *
* * *
“우습군!”
킬리울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랜드칼리의 영주가 되겠다고?”
옆에서 알렉이 킬리울을 경계했다.
나는 일부러 눈도 깜박하지 않고 킬리울을 응시했다. 그가 금세 다시 말했다.
“남쪽의 황제가 이 북부를 더럽게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야. 칼라니쉬 산도 한 번 올라 보지 못한 인간들이
이 북부를 다스린다는 게 말이 될 것 같나?”
“우린 그 황제랑 상관없어요.”
“뭐?”
킬리울이 되물었고, 앤드류까지 조금 눈이 커졌다.
내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사실 우리도 앤드류처럼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이곳의 영주로 온 건 맞답니다. 북부를 완벽한 황제의
영토로 다스리라고 하셨죠.”
“…….”
“그런데 어디 북부가 황제만의 것이던가요?”
“……!”
앤드류의 눈이 더 커지고, 알렉마저 움찔 놀란 듯했다.
그런 반응들은 개의치 않으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이곳이 오래전부터 릴트 제국의 땅인 건 맞죠.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침략하는 건지, 아니면 당신들이 남의 영토를 무단으로 누리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뭐라고?”
킬리울이 단박에 내 말에 반박했다.
“여기는 우리의 영토다. 황제가 계속해서 탐을 내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전쟁? 우리가 가진 무기를 당신들도 구할 수 있나요?”
“무기……?”
그리 되묻는 킬리울의 눈빛이 조금 의심스럽게 일렁였다.
“당신들이 번개라고 말했던 그 무기 말이에요. 킬리울 당신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번쩍거리던 그 무기.”
“…….”
똑바로 마주친 시선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 * *
앤드류는 누굴까?
다시 만난 반가움에 포옹을 할 만큼 루이제와 친밀한 사이였던 걸까?
등장인물 일람도 뜨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원작에서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 같았다.
“저 자식들이 그동안 저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습니다. 도망을 쳤다가 얼마나 붙잡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그랬어요?”
“예. 여자들이 어찌나 빨래를 시키는지, 오늘 루이제와 알렉시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분명 목을
매달았을 겁니다! 으허엉, 루이제!”
“앤드류…….”
짧게 포옹한 그들은 이제 서로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알렉은 아까 들은 저 남자의 성이 뭐였는지 헷갈렸다.
몬테레이? 몬델레이?
그때 앤드류가 젖은 눈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아, 알렉시스.”
알렉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살아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앤드류.”
“흐어엉, 알렉시스.”
앤드류가 알렉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어깨에도 머리를 기댔다.
알렉은 손을 들어 살짝 앤드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음? 자네 말투가-.”
“앤드류! 이만 우리 성으로 돌아가요. 가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고 쉬어야죠.”
“아, 알겠습니다. 루이제.”
“그동안의 이야기는 가면서 하기로 해요.”
“예.”
“얼른 출발해야겠어요.”
루이제는 앤드류를 부축하며 마차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앤드류를 보는 루이제의 눈빛이 길에서 버려진 고아를 구출한 듯 무척 안쓰럽고 애틋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며 눈을 한번 깜박인 알렉도 그들을 뒤따랐다.
* * *
* * *
* * *
[퀘스트 발생!]
[~칼라니쉬 산에서 자라고 있는 힐리베리를 획득하세요!~]
[칼라니쉬 산속에는 힐리베리를 비롯한 여러 희귀한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전설 속 명약인 힐리베리를 섭취하면 열매 하나당 경험치가 50,000 포인트 업!]
[퀘스트 보상]
[경험치(?), 명성(?), 애정도(?), 신뢰도(?)]
경험치가 무려 50,000.
열매를 하나 먹는 것만으로도 경험치가 50,000 포인트나 오른다면 그보다 더 편리한 영약이 또 있을까?
지금 그는 예상치 못하게도 애정도보다 경험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루이제와 함께 이틀 밤을 보내면서 레벨이 8 에서 12 로 올랐다.
그 일로 그는 무려 303,760 에 달하는 애정도를 얻었는데, 첨탑에서 입맞춤 한 번에 애정도가 300 이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상승이었다.
더 놀라운 건 루이제와의 관계는 애정도뿐만 아니라 경험치까지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경험치는 애정도의 30%인 91,128 포인트가 올랐다.
애정도만 보면 17 레벨도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경험치가 부족해 12 레벨까지만 상승했다.
그런데 과연 힐리베리는 어디에 있을까?
알렉은 캐스다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드온.’
알렉은 다른 곳에 있던 기드온을 시스템으로 거둬들인 후에 다시 이곳에서 내보냈다.
백곰들이 그들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 백곰들을 상대할 존재가 필요했다.
“크왕!”
백곰 한 마리가 육중한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든 순간이었다.
‘크허엉!’
기드온이 순식간에 성체로 몸을 부풀리며 백곰을 후려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앞발에 얻어맞은 백곰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백곰의 머리 위에도 HP 바가 떠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을 죽여도 경험치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렉은 직접 백곰과 겨룰 생각이 없었다.
루이제도 함께 있으니 힐리베리만 찾아 얼른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크와앙, 크헝, 백곰들과 기드온이 뒤엉키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정없이 설산을 울렸다.
그 틈을 타 알렉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어디선가 튀어나와 달려드는 백곰들의 공격을 피하며 힐리베리를 찾기 시작했다.
설산에서 열매라니,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이었다.
* * *
“……!”
몇 번이나 백곰을 피하던 알렉이 이제야 멈춰 섰다.
천둥처럼 귓가를 울리던 백곰들의 포효는 조금 전에 비해서는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는 꼭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이후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아, 알렉.”
“이쪽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내려 주려고 하자 나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 땅을 디뎠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가 살짝 걱정스럽게 찡그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힐리베리는 어디 있을까?
백곰들이랑 말이 통한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힐리베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 말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옷과 그의 능력 때문인지 많이 춥지는 않았다.
“우선은 좀 둘러봐야겠습니다.”
“알겠어요.”
알렉이 걷기 시작하자 나도 그를 따라가며 그에게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알렉은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방금 전까지 계속 안고 있었는데 새삼 놀란 걸까?
나는 그의 팔을 더 꼬옥 감싸 안으며 열매 같은 게 정말로 보일까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킬리울 앵두 같은 거라고 했으니까 붉은색이겠죠?”
“크아앙! 컥!”
“……?”
갑작스레 가깝게 들린 포효에 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백곰 한 마리가 배를 보이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혼자 미끄러지기라도 했나?
다시 정면을 본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알렉도 백곰 쪽을 돌아보더니 이내 나를 빠르게 감싸 안으며 다른 곳으로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백곰들이 많네요. 쳐다보지 마십시오. 루이제한테는 접근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런 아찔한 등산도 다 해 보고 평생 못 잊을 기억이 될 것 같아요.”
나는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위험천만한 곳의 근처도 오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알렉과 함께 있으니 그나마 있을
만했다.
조금 진정이 되자 칼라니쉬 산의 공기를 크게 한 번 들이마셔 보았다.
평생 마셔 보지도 못할 높은 산의 공기였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먼지 한 톨만큼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내 몸속을 시원하게 채웠다.
“……하, 여기 정말 좋네요.”
온몸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한층 맑아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당신이랑 같이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
“크아앙!”
“꺅!”
말을 채 다 맺기도 전에 어디선가 또 백곰이 달려들었다.
휙.
그 짧은 찰나에 알렉은 나를 감싸 안고 다른 곳으로 훌쩍 움직였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금세 명을 달리할 것 같은 곳이었다.
쿵!
대뜸 알렉의 몸이 어딘가에 부딪치며 두껍게 쌓여 있던 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뭐지?
눈사태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우리의 위로 눈이 쏟아졌다.
나를 안은 그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가더니 또다시 쿵, 하며 어딘가에 추락했다.
그와 내 몸이 몇 바퀴 굴렀다.
“……!”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가 땅을 짚으며 가까스로 멈췄다.
“루이제.”
이윽고 상체를 든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상당히 쌓인 듯 등 밑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가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망연히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는 눈만 들어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달려든 곰이 너무 빨랐습니다.”
“아, 아니에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밭에서 껴안고 구르기.’
믿기지 않았다.
내가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 본 책이나 영상에서는 늘 커플들이 껴안고 눈 위를 구르며 염장을 질렀다.
부러운 마음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는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도 해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백곰들아 잠시만 공격을 멈춰 주면 안 될까?
인생에서 이뤄질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 일어났거든…….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묘한 침묵이 초를 거듭하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그가 3 초 안에 분위기를 파악 하지 못하면, 나는 깔끔하게 몸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그 이상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짧게나마 입술을 맞춰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30 초가 지나 버렸다.
백곰까지 방해하지 않아 슬슬 민망해졌다.
내 눈빛이 더 처참하게 흔들리고, 덩달아 그의 눈동자도 크게 일렁이던 찰나, 그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잡아 일으켰다.
얼결에 일어선 나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며 괜히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도 몸을 돌린 채 헛기침을 하는 게 느껴졌다.
강추위가 무색하도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뽀뽀는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나만의 바람이었나 보다.
‘빨리 열매나 찾자.’
그렇게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무언가가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작고 동그랗고 붉은 것들이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멍하니 그쪽을 가리켰다.
“아, 알렉, 저기 좀 봐요.”
“……?”
알렉이 의아한 얼굴로 내 손끝이 향한 곳을 응시했다.
아까보다 더 크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힐리베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 * *
“…….”
잠시 침묵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킬리울은 숨까지 멈추고 루이제가 들고 있는 힐리베리를 쳐다보았다.
주위에 있는 다른 야인들도 설마 진짜 힐리베리를 가져온 건가 싶어 숨을 죽였다.
알렉은 잠자코 상황을 주시했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루이제가 어떻게 상황을 풀어 갈지 기다려졌다.
루이제가 연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킬리울은 힐리베리를 직접 본 적이 없겠네요.”
“…….”
킬리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힐리베리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루이제를 응시했다.
분명 킬리울은 그와 루이제를 쫓아내기 위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전설의 영약을 가져왔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말로…… 힐리베리를 가져왔다고?”
“그럼요. 저희도 이걸 발견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칼라니쉬 산에 오를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전설의 영약이 실제로 존재할 줄 누가 알았겠나요?”
“……가까이 가져와 봐.”
킬리울이 켈즈에게 턱짓을 하자 켈즈가 다가왔다.
루이제는 힐리베리를 하나 집어 켈즈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킬리울은 심각한 얼굴로 힐리베리를 살펴보았다.
그 열매는 언뜻 보면 앵두처럼 붉고 동그랗게 생기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복숭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알렉과 루이제가 보기에도 신기하고 낯선 모양의 과일이었다.
“한평생 칼라니쉬 산을 드나들면서 이런 열매는 본 적이 없는데.”
킬리울의 말에 켈즈도 조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산이 아니라 북부의 어디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게 힐리베리니까요.”
루이제의 말에 다른 야인들도 입술을 꾹 다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열매가 있었던가?
따로 다른 열매를 구해서 힐리베리라고 속이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야인들은 그와 루이제가 진짜 힐리베리를 가져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현실을 부정하는 중인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수도에 이런 열매가 많은 거 아니야?”
“궁금하면 직접 수도에 가 보면 되겠네요.”
계속되는 의심에 루이제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힐리베리를 처음으로 획득했을 때 그의 시스템이 퀘스트 성공을 알렸으니, 저 열매의 정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한 열매인 탓에 킬리울 또한 바로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킬리울이 열매 하나를 살짝 베어 물었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알렉과 루이제도 하나씩 먹어 보았다.
복숭아와 딸기와 앵두가 섞인 듯한 식감과 맛이었는데, 먹자마자 달콤한 풍미가 신비롭게 퍼졌다.
킬리울도 방금 막 그 맛을 느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듯 루이제가 말했다.
“정말 달콤하지 않나요? 사실 나도 그 열매를 보고 많이 놀랐답니다. 저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거든요.
맛도 그렇고, 모양만 봐도 처음 보는 거라 전설의 열매인 줄 단박에 알았어요.”
“…….”
“나와 내 남편의 운이 정말로 좋았던 것 같네요. 백곰이 자꾸 달려들어서 피해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말을 마치며 루이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킬리울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루이제를 강하게 주시하기만 했다.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러나 부정하지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당장 여기서 킬리울의 인정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킬리울에게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충격적인 일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 순간 킬리울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조화가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용케 힐리베리를 구해 왔군.”
“…….”
루이제의 숨결이 조금 흐트러졌다.
이제야 킬리울이 믿는 듯한 기색을 내비쳐 살짝 안도한 모양이었다.
킬리울이 피식 비웃었다.
“칼라니쉬 산이 장난도 아니고, 거길 정말로 기어갈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
그 말에 루이제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앞으로 우리도 등산하러 자주 갈 텐데, 덕분에 미리 가 보게 되었네요.”
루이제가 어금니를 조금 꽉 깨물었다.
그녀와 킬리울 사이에 오가는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알렉의 입장에서는 소설 속 진짜 귀족과 야인이 기 싸움을 하는 생전 초면의 진귀한 장면이었다.
킬리울이 재차 비웃었다.
“우선은 약속대로 사지는 멀쩡하게 보내 주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무튼 이번에는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 주면 좋겠네요. 동료가 된 기념으로요.”
루이제의 옅은 웃음에 킬리울의 안색이 조금 구겨졌다.
어떻게 된 게 한마디도 지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루이제가 망토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실크로 감싼 뭉치 하나를 더 꺼냈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윌스브룩 성으로 찾아와요.”
루이제가 켈즈 쪽을 보자 켈즈가 잠시 흠칫하다가 다가왔다.
꽤 적지 않은 양의 힐리베리였다.
킬리울은 켈즈가 루이제에게서 힐리베리를 받아 가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과연 킬리울은 알까?
‘악센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차피 야인들도 악센에게 파멸당한다는 것.’
아쉽게도 킬리울에게 미래의 일을 믿게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이제와 함께 돌아서는 찰나, 킬리울의 눈빛이 알렉에게 닿았다.
알렉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저들의 협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훼방은 곤란했다.
그와 루이제를 방해하면 전투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힐리베리 때문에라도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는 킬리울이 야인들을 위한 결정을 하길 바랐다.
완전히 돌아서자 킬리울과 닿았던 눈길도 끊어졌다.
그들의 뒤통수에 계속해서 킬리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알렉과 루이제는 여러 야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들의 거처를 나왔다.
그제야 루이제가 조금 한숨을 돌렸다.
“역시 쉽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반감은 조금 없어진 것 같죠?”
루이제의 물음에 그가 한번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내색은 못 했겠지만 힐리베리를 가져다준 탓에 꽤 진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루이제에게 조금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조만간 성에 초대해서 수도의 음식들로 극진하게 대접해야겠어요.”
루이제가 그리 말한 순간 야인들의 거처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
“이제 여기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루이제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알렉도 그녀를 단단히 안았다.
마차가 없으니 스킬로 카나크까지 가서 마차를 빌려 탈 생각이었다.
야인들에게 많은 양의 힐리베리를 건네줬지만 아직 루이제가 갖고 있는 양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캐스다인이 어디선가 찾아온 힐리베리가 있었다.
‘스킬. 신속.’
마침내 그들의 자취가 바람보다 빠르게 흩어졌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켈즈는 헉 숨을 들이켰다.
“……!”
방금 본 게 뭐지?
켈즈는 눈을 깜박이다가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온데간데없이 귀족 부부가 사라져 버렸다.
야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바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켈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으로 황급히 킬리울에게 달려갔다.
“킬리울 님! 킬리울 님!”
킬리울은 심각하게 팔짱을 끼고 벽을 향해 서 있다가 의아하게 돌아섰
“무슨 일이지?”
켈즈는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킬리울에게 다가가 자신이 본 것을 속삭였다.
그러자 킬리울의 적갈색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깊어졌다.
그가 품었던 의혹이 이제야 확실해졌다.
“어쩐지 힐리베리를 찾아왔다 싶었더만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잖아?”
“정말로 그 사람들이 신의 대리인 같은 거라도 되는 거 아닙니까?”
“…….”
킬리울은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북부의 영주가 되겠다고 나타난 귀족 남자와 여자는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
압도적인 위압감과 기운이 그의 짐승 같은 육감으로 느껴졌다.
그러니 더욱더 그들이 북부에 해를 끼칠 사람들인지 아닌지 똑똑히 두고 볼 필요가 있었다.
정말로 동료가 될 마음이라면 괜찮겠지만, 적이라면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킬리울은 그만 켈즈에게 눈짓했다.
“저거나 갖고 나가라.”
“예? 힐리베리 말입니까?”
켈즈는 킬리울이 가리킨 곳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래. 아이와 여자부터 하나씩 나눠 줘.”
“그, 그래도 저런 귀한 걸…….”
힐리베리는 모든 야인들이 어릴 때부터 전설로 듣고 자라며 꿈에 그리던 열매였다.
그러나 그 열매를 직접 먹어 본 사람은 수백 년 전 어느 야인 말고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영주 부부가 힐리베리를 가져왔다는 소식에 다들 들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두 번 묻지 말고 가져가라.”
“……아, 알겠습니다. 킬리울 님 것도 곧 준비하겠습니다.”
“난 됐다. 아까 하나 먹었다.”
“그래도 킬리울 님께서 더 드셔야-.”
“단 거 안 좋아한다.”
“……알겠습니다.”
켈즈는 그만 힐리베리를 갖고 조용히 물러났다.
야인들에게 전설의 명약을 맛보게 해 주려는 수장의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킬리울 님의 은혜에 감복하며 무척 행복해할 모습이 벌써부터 그려졌다.
킬리울은 다시 벽을 보고 서서 영주 부부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비범한 힘을 가졌으니 동료가 될 조건은 충분했지만, 만약 적이라면 끝까지 맞설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일람]
[킬리울 칼라니쉬]
[남, 나이: 26 세]
[칼라니쉬 산에서 유래된 칼라니쉬 성을 가진 야인족의 수장. 야인족들의 수장을 대대로 킬리벡스라고
칭한다.]
[킬리벡스는 전대 킬리벡스의 자식 들 중 ‘뜨거운 힘’을 물려받은 사람이 승계한다.
뜨거운 힘은 마력의 일종이며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초인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북부를 지키려다가 악센에 의해 야인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전투력: 레벨 99]
[주 무기: 맨주먹과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강철 망치]
* * *
“주인님! 마님!”
금세 해가 저물었다.
나와 알렉이 성에 도착하자 우리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응접실에 있던 앤드류까지 놀라 뛰쳐나왔다.
“루이제! 알렉시스!”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들 좋은 하루 보냈어요?”
나는 환한 미소로 말하며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들은 사용인들이 여기저기서 한 명씩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렉과 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사히 다녀오신 건가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오늘 안에 오시지 않을까 봐 찾으러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용인들의 반응에 내가 살짝 웃어 주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우리는 무사히 잘 다녀왔어. 아주 운이 좋았거든.”
“네?”
“그렇죠, 알렉?”
내가 곁에 있는 알렉을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한번 끄덕였다.
나는 다시 앤드류와 사용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라니쉬 산에 갔다가 야인들의 거처에도 다녀오는 길이야.”
“예? 벌써요?”
“그게 정말입니까?”
앤드류의 눈이 아까부터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가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자 알렉이 입을 열었다.
“힐리베리를 주고 왔습니다. 여분이 있으니 모두 나눠 드리겠습니다.”
“뭐? 힐리베리?”
“힐리베리요?!”
앤드류를 비롯한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그걸 정말로 찾았다고?”
앤드류가 재차 묻는 말에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네. 야인들은 평생 본 적도 없다는데 어떻게 우리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운이 굉장히 좋으셨군요…… 믿기지 않습니다.”
앤드류가 놀라워하자 사용인들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레타 부인이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얼른 물었다.
“우, 우선 두 분 식사는 하셨는지요? 아니면 목욕물부터 준비할까요?”
“먼저 뭐라도 먹는 게 낫겠어요. 우리 배가 좀 고프거든요.”
“알겠습니다, 마님. 금세 준비하겠습니다.”
“우선 방에서 옷부터 새로 챙겨 드릴게요.”
“고마워, 제인.”
그레타 부인이 부엌으로 가자 제인과 제임스가 나와 알렉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앤드류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며 다시 응접실로 들어갔다.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묘하게 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우리 집이라고 성에 오니까 마음이 놓이네…….’
앞으로는 이사 가는 일 없이 영원히 여기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겨우 며칠밖에 지내 보지 않았지만 북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지긋지긋한 수도를 떠나 우리끼리만 천혜의 자연 속에서 초월적인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 꽤 짜릿했다.
오늘 처음으로 가 본 칼라니쉬 산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옷을 대충 갈아입은 나와 알렉은 다시 만찬실에서 모였다.
“세상에 이런 열매가 다 있었군요.”
앤드류는 열매 하나를 들고 연신 신기해했다.
사용인들에게도 그들이 먹을 힐리베리를 따로 챙겨 준 후였다.
나는 조금 부지런하게 음식을 먹으며 대답했다.
종일 바깥에 있다가 뜨끈한 음식을 먹으니 평소보다 훨씬 맛있었다.
“신기하죠? 어서 드셔 보세요. 맛은 더 신기할 거예요.”
이윽고 앤드류가 힐리베리를 입에 넣자 알렉도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린 엔드류의 눈이 커졌다.
“……정말 굉장하군요!”
나는 말없이 웃어 주었다.
칼라니쉬 산에서 처음 저 열매를 맛보았을 때 나도 딱 같은 반응이었다.
“야인들의 눈이 아주 돌아가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힐리베리를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지금쯤 제단에 차려 놓고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겁니다.”
“그래 주면 우리야 뿌듯하겠어요.”
생각해 보니 앤드류는 비록 노예 취급을 당한 것 같긴 했지만, 몇 달이나 야인들과 함께 생활한
사람이었다.
힐리베리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 앤드류가 말했다.
“저도 야인들과 지낼 때 힐리베리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야인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였지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뭐 힐리베리를 하나라도 먹으면 죽을 일이 닥쳐도 안 죽고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약이라 불렸나 봅니다.”
“그랬군요.”
나도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열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알렉에게도 직접 챙겨 주고 싶었지만 테이블이 워낙 넓어 그럴 수 없었다.
힐긋 보니 그도 대화를 경청하며 식사를 잘하고 있었다.
그때 앤드류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야인들이 영주 부부를 우러러 보겠군요. 야인들한테 노예로 붙잡혀서 또 새 영주가 파견될 일은
없겠습니다.”
앤드류의 자책 섞인 농담에 내가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까 보니까 킬리울이 생각보다 의심과 경계가 심하더라고요.”
“그랬습니까?”
내가 앤드류에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네. 아무래도 자기 부족한테 해가 될까 봐 우리를 쉽게 못 믿는 눈치예요.”
사실은 힐리베리를 보여 주자마자 놀라워하며 우리를 동료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하고 아주 살짝
기대했다.
그러나 역시 킬리울에게는 우리를 지켜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일단은 힐리베리로 우리들의 능력은 보여 준 셈이니, 진수성찬이라도 대접해서 우호적인 관계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수도에 가서 맛있는 재료들 좀 많이 챙겨 와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앤드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하튼 두 분 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나보다는 알렉이 고생이 많았죠.”
그리 말하며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앤드류도 알렉을 보며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네, 알렉시스.”
알렉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쓸었다.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또 칼라니쉬 산에 같이 가요, 알렉.”
“알겠습니다.”
내가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주자 그도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와중에 앤드류가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 마님!”
“제인?”
“어서 나와 보세요. 바깥에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
알렉이 의아하게 되묻자 제인이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손님이…… 손님이 오셔서요!”
“…….”
우리는 아주 짧은 찰나 동안 멍하니 제인을 응시했다.
이곳엔 손님으로 올 사람이 없었다.
알렉은 냅킨을 들어 입술을 한번 찍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앤드류도 조금 어안이 벙벙해서 밖으로 따라 나갔다.
“손님이라니 대체 누구? 여기 올 사람이 없는데…….”
“일단 나가 보셔요, 마님.”
제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성문을 나선 우리는 해자로 연결된 문까지 나갔다.
그 너머에는 놀랍게도 남자들 몇 명이 우람한 체격을 과시하며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킬리울과 야인족이었다.
“……킬리울!”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일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힐리베리가 더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해서 온 걸까?
이윽고 킬리울이 눈짓하자 다른 야인들이 말 위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저것들이 다 뭔지 살펴보았다.
결이 고운 하얀 털이 가죽끈으로 둘둘 말려져 있었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저건 내가 칼라니쉬 산에서 봤던 백곰들의 털가죽이었다.
“여기 보답이다.”
“……?”
보답?
달빛 아래 킬리울의 눈동자가 선명 면서도 깊었다.
뭔가 마음의 결단이라도 내린 눈치였다.
“우리 야인족들을 기쁘게 해 준 대가.”
“…….”
두근두근, 어쩐지 내 가슴이 뛰었다.
킬리울은 나와 알렉을 넓게 응시했다.
“오늘 당신 귀족들 덕분에 우리 야인들이 오랜만에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행복해했지.”
“…….”
정말 축제 분위기였던 거구나.
“그 전설의 영약을 구해 주고 우리 야인들에게 기적 같은 경험을 선사해 줘서 고맙군.”
“…….”
“이건 그 보답이다. 북부의 겨울을 나기에 백곰의 털 만한 게 없지.”
“…….”
나는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뭐라 말도 못 하는 사이 킬리울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처음부터 우리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던 듯 말의 머리를 돌려 휙 떠나갔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히 맴돌았다.
“…….”
내 심장도 그만큼 벅차게 뛰었다.
뭔가 이뤄 냈다는 것을 직감할 때의 박동이었다.
이미 야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쌓이고 있었다.
* * *
* * *
“하아.”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건 뭘까?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떨리면서도 열띤 기분이 들었다.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아직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부부 사이의 기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루이제는 방으로 들어갔을까?
그냥 성욕에만 눈뜬 거라면 조금 전 그녀와 함께 방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기분이었다.
루이제와 눈밭을 굴렀을 때 느꼈던 묘하게 뭉클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이 아직 그의 심장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역시 알렉시스의 감정인가? 이 몸이 진짜 알렉시스의 몸이라?’
자신과 똑같이 닮은 외모와 체격이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몸이다 보니 감정이 헷갈렸다.
알렉시스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루이제에게 이런 느낌이 들 수 있는 걸까?
이상했다.
알렉은 최대한 자신의 마음으로 루이제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양털을 팔며 유기농으로 방목했다고 우아하게 사기를 치던 모습, 엘로이에게 빼앗겼던 그의 음식을 채워
주던 미소.
가면무도회에서 그에게 부드럽게 감겨 오며 처음으로 했던 입맞춤.
황제와 황후 앞에서 과하게 예의를 차리지도, 그렇다고 굽히지도 않던 적당한 태도.
줄리아의 뺨을 가차 없이 내려치던 과감함.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지 않던 솔직한 말들과 함께 황제에게 복수를 하자고 했을 때 엿보였던 불꽃.
무서울 법한데도 야인들 앞에서 전혀 기가 죽지 않던 강인함까지…….
“하아.”
이윽고 창문을 닫은 알렉은 깊은 한숨과 함께 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돌아섰다.
잠시 이 기분을 떨쳐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루이제의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굳이 열거하지 않은 다른 장면들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물밀듯이 밀려왔다.
너무도 심란한 기분에 푹신한 의자에 앉아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건 내 마음이잖아……?’
이미 그의 몸이 루이제에게 빠져 버렸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과 뺨, 손 틈새에 감기는 살결과 한 팔에 꼭 안고도 남는 허리…….
그 모든 것들을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까지 이토록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줄은 몰랐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깨닫고 보니 루이제를 생각하는 만큼 그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는 자각도 함께
들었다.
이 공허함은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루이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러면 어쩌자는 거지.’
혼란스럽게 일렁였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눈을 덮고 있던 손을 살며시 떨어뜨리며 눈을 떴다.
그를 향한 루이제의 모든 친절과 배려,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루이제가 그를 보며 생각하는 건 진짜 알렉시스였다.
이런 상태가 괜찮은 걸까?
지금까지 계속 알렉시스인 척 속여 왔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더 복잡해진 그는 우선 이 기분을 떨쳐 내려 시스템 창을 열었다.
허공에 핑크빛 글자들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조금 전 그가 입술을 내렸던 루이제의 이마가 눈앞에 선명했다.
이를 꽉 깨문 그는 애써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힐리베리 덕분에 경험치를 상당히 많이 올린 상태였다.
12 레벨이었던 레벨은 17 까지 상승했다.
캐스다인이 어디선가 구해 온 힐리베리 70 개로 경험치를 3,500,000 이나 손쉽게 얻어 가능했던 결과였다.
이제 레벨 18 까지 남은 애정도는 89,000 포인트, 남은 경험치는 345,088.
하지만 문제는 언제 또 퀘스트가 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캐스다인과 기드온을 통해 힐리베리를 찾아 경험치를 더 높이려고 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그러고 보니 백곰들한테도 HP 바가 떴었는데.’
그런데 그의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얻으려면 수백, 수천 마리는 죽여야 하지 않을까?
레벨이 오를수록 필요한 애정도와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백곰들을 멸종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
지금으로서는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이마 키스……?’
오늘 무슨 날인가.
눈밭 구르기에 이어 이마 키스까지 하다니.
전설의 영약이라는 힐리베리도 먹고, 야인들에게 선물도 받았다.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나는 그제야 방문을 열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만져 보았다.
괜히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설렜다.
입꼬리가 치솟으려고 해 입술까지 꾹 다물었다.
‘그냥 갈 줄 알았더니 이마에 뽀뽀를 다 해 주네…….’
이런 풋풋한 기분을 느껴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거의 처음 아니야?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애가 두셋은 있어도 안 이상할 사이에 고작 이마 키스로 설레다니.
전생부터 지금까지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이 바로 결혼을 한 나로서는 굉장히 귀한 경험이었다.
침대로 들어간 나는 포근하게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눈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록 그는 예의상 해 준 거라고 해도 내가 좋았으니 괜찮았다.
역시 부부 사이의 일을 치렀더니 알렉도 이마 키스 정도는 스스럼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뿌듯하고 행복하게 잠을 청했다.
꿀 같은 잠을 잔 덕이었을까?
아침에는 꽤 산뜻한 기분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외출할 준비를 마친 나는 만찬실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은 이후에 알렉과 앤드류와 함께 카나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만찬실에는 이미 알렉과 앤드류가 와 있었다.
“어서 앉으십시오.”
“오셨군요.”
나는 가장 가까이 앉은 앤드류에게 눈인사를 했다가 알렉을 응시했다.
“잘 잤나요?”
“덕분에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잠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저 잘생긴 얼굴을 보니 오늘 하루의 시작부터 축복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에게 살짝 웃어 준 내가 금세 시선을 돌려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앤드류는요?”
“저야 뭐 죽다 살아났는데 매일이 꿈같지요.”
“이제 내일이면 벌써 수도로 가는 날이네요.”
그리 말하며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모두 착석하자 사용인들이 요리를 하나씩 나르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라도 하고 있었어요?”
“아, 알렉시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르셀이 내기로 영주 부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데에 영지와 방직 공장을 걸었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놀라서 알렉을 응시했다.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알렉이 식기를 들며 대답했다.
“장갑과 구두를 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랬군요.”
마르셀이 기어이 미쳤구나.
잠시 놀랐던 나는 애써 가슴을 진정했다.
식탁 위를 보며 뭐부터 먹을까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뜻하지 않게 우리가 하워드 후작령과 방직 공장을 갖게 되겠네요.”
귀족들 사이에서 누가 그런 과감한 내기를 하나 했더니 마르셀이었다니.
아마 우리가 수도로 돌아가면 마르셀과 친한 사람들이 내기를 물러 달라고 부탁하러 올 게 분명했다.
마르셀 본인이 없던 일로 해 달라고 애원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웬일이래. 자다 일어났더니 떡이 생긴 것 같네.’
수도에 도착할 날이 더 기대가 되었다.
사교계에서의 내기는 내뱉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아무리 내기가 흥밋거리라지만 귀족들끼리는 자존심과 명예, 평판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앤드류도 식사를 하며 말했다.
“어디 꿈에나 상상했겠습니까. 우리가 돌아가면 다들 유령 보듯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영지와 방직 공장을 안 빼앗기려고 온갖 수를 쓰겠죠.”
“그것도 그렇군요. 그 마르셀이 가만히 당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앤드류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르셀은 상류층의 적폐 1 순위 중 한 명이었다.
만약 내기를 모른 척한다면 충분히 공개적으로 들춰내서 망신을 줄 수 있었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카나크로 향했다.
카나크는 북부의 중심인 곳이었으니 시간을 들여 제대로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번화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북부의 주택과 상점들은 칙칙한 빛깔의 벽돌로 지어져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편이었다.
그러나 수도 사람들의 취향으로는 이보다 더 삭막한 거리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눈이 자주 쌓이는 곳이라 외관 인테리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도로에는 눈에 젖은 땅을 밟지 않게 하려는 듯 돌이 깔려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우리를 안내해 줄 북부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정도 걷던 내가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말했다.
내 말에 앤드류가 허허 웃었다.
“그렇다고 야인들에게 북부 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가는 주먹으로 얻어 맞을 것 같습니다.”
“그건 생각도 못 해 봤네요.”
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야인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킬리울은 우리에게 북부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려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안내인으로 고용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벌써 카나크에 세 번이나 와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내밀한 사정까지 알기는 어려웠다.
북부에서 오래 산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북부의 세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특히 내가 계획한 일들을 북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물어보고 싶어…….’
그만큼 북부를 잘 아는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일을 진행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마침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알렉이 말했다.
“아무래도 북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우리의 보좌관으로 고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래야겠죠? 그런데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조금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앤드류도 의아해하면서 약간 기대하는 눈빛으로 알렉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가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내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북부에는 신기한 게 정말 많은 것 같네요.”
내 말에 앤드류가 무척 공감하듯 감탄했다.
“저도 처음 왔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기막히게 추운 날씨도 그렇고 정말이지 새로운 세계가 아닙니까?
북부가 아니라 어디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줄 알았습니다.”
“앤드류가 보기에도 그랬군요. 주변 경관이 정말 특별하지 않나요? 눈 쌓인 산들도 그림 같고요.”
“뭐 여기서 길도 없는 성을 찾아야 한다거나 전설의 열매를 가져와야 하는 일만 없으면 관광으로 둘러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나 좋다니 다행이네요.”
앤드류의 반응에 나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황제의 명령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탓이었다.
‘대신 그 성에서 지내면서 주변을 융성하게 발전시켰으면 좋겠군. 그래도 한때 릴트 제국의 천혜 요새였던
곳이었는데 내버려 두기만 해서 마음에 거슬리던 참이었거든.’
정말로 이곳을 융성하게 발전시킨 이후에는 황제가 얼마나 많은 세금과 조공을 요구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여유 자금을 모아 놓아야 했다.
그러나 북부 안에서 황제에게 바칠 돈을 확보하는 건 북부인들을 수탈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최대한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관광은 그중 하나였다.
‘차라리 부유한 귀족들이 북부로 와서 돈을 쓰게 하는 게 좋겠어.’
꼭 세금 때문에만 거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황제를 치려면 많은 돈을 갖고 있어야 했다.
‘앞으로 사람을 써야 할 일도 훨씬 많아질 테니까…….’
그렇게 카나크를 둘러보는 동안 우리를 발견하는 행인들마다 흠칫 놀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첫 번째는 알렉의 외모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가 입은 옷이 북부인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어서
외부인인 것을 알아본 듯했다.
나는 카나크의 시장을 찾아가는 동안 이곳의 사람들이 새로 온 영주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들
거라는 다짐을 했다.
* * *
[알렉시스 마이어스]
[남, 나이: 23 세]
[브레튼 공작. 외모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불세출의 미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특이 사항: 죽은 이후 영혼이 이세계에서 구르고 있다.]
[자신의 마나를 병으로 착각했다. 몸 밖으로 마나가 터져 나올 것을 우려해 늘 몸가짐을 조심했다.]
[이세계에서 던전 브레이크로 사망했다.]
“…….”
던전 브레이크?
사망?
알렉은 시스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죽은 알렉시스가 또 죽었다는 사실도 놀랍긴 했지만, 던전 브레이크라는 말에 그의 눈을 의심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그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간혹 일어나는 일이었다.
게이트가 생성된 후 일정 시간 안에 보스 몹을 잡지 못하면 마물들이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헌터들이 파견되었지만, 간혹 헌터들의 눈에 띄지 않은
게이트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보스 몹을 잡는 것을 실패해도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런 던전 브레이크로 사망했다는 건…….
‘어느 세계로 갔나 했더니 게이트가 있는 세계였어?’
그가 살았던 곳과 동일한 세계일까?
알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마물에게 당했는지는 몰라도, 원래의 알렉시스를 생각하면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이 많았을 것이다.
알렉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가만히 누워 조금 얼떨떨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그와 영혼이 뒤바뀐 걸까?
아니.
이제 그가 살았던 세계에는 더 이상 게이트가 생기지 않았다.
그가 마수들을 인간 세계로 보냈던 신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이제 아무런 위협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아마 게이트가 출몰하는 다른 비슷한 세계에 있다가 죽은 모양이었다.
그는 진짜 알렉시스의 두 번째 죽음이 안타까운 한편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진 상황 하나를 파악했다.
‘알렉시스는 돌아올 일이 없다.’
* * *
“아아, 아!”
그여서 좋다는 말이 그에게 반향이라도 일으킨 걸까?
그가 유독 더 열렬하게 나를 탐닉했다.
그러나 마차의 움직임보다는 격렬하지 않게, 이 흔들림에 우리의 떨림을 숨길 수 있을 만큼만 절제된
힘으로 그윽하게 움직였다.
“루이제.”
“아, 알렉.”
억눌린 듯한 그의 움직임이 어쩐지 더 깊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한숨을 길게 토한 뒤 벅차게 말했다.
“당신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며 내 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흐읏.”
흐느끼듯 신음을 토한 나는 다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내 마음이 궁금했던 거구나.
그가 내 속마음에 관심을 갖는 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더욱 뜨거워진 눈으로 그가 확고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자꾸만, 당신이 욕심납니다.”
“……네?”
뭐라고?
“아.”
그가 내 신음을 삼켰다.
입술을 덮고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빈틈없이 입 안을 훑으며 녹여 없앨 것처럼 의욕적으로 핥아
뭉갰다.
방금 뭐라고…….
그의 떨림이 더욱 은밀하게 빨라졌다.
정말로 다시 느껴 보고 싶었던 감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아득해졌다.
그런데 내가 욕심난다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 걸까?
한참 늦긴 했지만 지금이나마 듣게 되어서 꽤 만족스러웠다.
욕심 좀 더 내 봐…….
눈앞이 마구 떨렸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또 부질없이 떨어져 내렸다.
“하, 아, 알, 렉…….”
침실에서처럼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어서 더 가슴이 타들어갔다.
어차피 갑자기 마차가 멈춘다 해도, 전처럼 야인들이 습격하지 않는 한 문이 벌컥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달리 내 손길은 그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더 닿고 싶고 느껴 보고 싶었다.
“루이제.”
그가 다시 한번 뜨겁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목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숨결과 입술에 작게 몸서리쳐졌다.
나를 동여매고 있던 드레스도 그의 손길에 점점 헐거워졌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손을 파묻고 움켜쥐었다.
곧 끝날 듯한 기분이 고조되었다.
아아.
그냥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마찰할수록 고여 있던 무언가가 아찔하게 해소되는 기분이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모든 게 사라지고 이 불타는 듯한 느낌과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느낌은 한순간 정점에 올랐다.
“아! 하…….”
내 입술과 뺨, 목덜미로 그의 입술이 누르며 지나갔다.
황홀한 여운의 위로 그의 숨결이 진하게 달라붙었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어지러운 귓가에 그의 열띤 속삭임이 들렸다.
그도 나만큼이나 호흡이 거칠었다.
“점점 더 당신을 욕심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뭘 고민하나요. 그래도 돼요…….”
겨우 대답한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와의 제대로 된 첫 경험이 너무도 황홀해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더 좋고 잘 맞을 줄이야.
그와 진정한 부부 생활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속궁합이 완벽하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마차의 열기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달아올랐다.
9. 그의 아내가 바랐던 것들
그의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벅차서 공기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전보다 지금의 그를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크게 하고는 너무 늦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앞으로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당신이 좋아질 것 같아요.”
“…….”
“이제는 당신이 날 만족시켜 주고 있잖아요.”
그리 말하며 살짝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해 보였다.
그가 내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뇨. 루이제를 만족시키는 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더 날 벅차게 해 주려고요?”
잠깐 눈길이 오고 가자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무척 가벼운 것을 든 것처럼 힘을 들이는 기색 하나 없이 가뿐했다.
이윽고 내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마차에만 있다가 침대에 누우니 그 부드러움과 포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절로 오늘 밤이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자 그의 셔츠 속이 은근히 드러났다. 내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괜히 시선을 피하듯 눈꺼풀을 내리며 내가 말했다.
“그런데 알렉.”
“예?”
나에게 내려오던 그의 입술이 잠시 멈췄다.
“그래도 난 변하기 전의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완벽해졌다고 해서 예전의 당신을 잊을 수는
없잖아요.”
“…….”
생각해 보니 그가 출중하게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변하기 전의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나름대로 나에게 감동을 준 적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속상하고 아쉬웠는데, 이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아파서요.”
내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밤을 새워 가며 내 이름을 연습했던 그의 모습을 나는 얼마나 많이 훔쳐보았던가?
그때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저토록 간절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 갔다.
내 몸을 집요하게 탐닉하는 지금의 그도 좋았지만, 내 이름에 끈기 있게 매달렸던 과거의 그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열렬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내 옷을 여미고 있던 끈을 풀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가 있으니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부끄러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내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다시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아뇨. 난 끝까지 기억할래요.”
“…….”
“내가 아니면 누가 당신의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해 주겠어요?”
나는 그를 향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 *
“…….”
그는 북부에서 수도로 오는 길에 루이제의 마음을 떠보았다.
어차피 알렉시스는 돌아오지 못하니 그가 그녀의 곁에서 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가 깨달아야 했던 건 진짜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진심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아니었다.
오늘 밤 그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그 말에 그는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진짜 알렉시스를 향한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았다.
가슴이 갑갑하게 타올랐다.
루이제에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새길수록 갈망만 깊어졌다.
“하아.”
다시 깊은 한숨이 나와 찬 공기를 크게 마셨다.
설마 이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녀를 만족시키는 건 그인데 여전히 루이제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왜 죽은 알렉시스일까?
루이제가 과거의 알렉시스를 이토록이나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었나?
어떤 면에서 보아도 객관적으로 지금의 그가 훨씬 더 유능했다.
시스템상의 애정도도 충실히 상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재의 그를 진짜 알렉시스보다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를 향한 루이제의 애정을 그가 껍데기만 쓴 채 대신 받고 있다는 허무한 느낌만 점점
짙어졌다.
그에게는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애정이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이 오갈 곳 없이 붕 떠 버렸다.
루이제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는 너무도 허무하고 공허해서 언제까지 이어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렉시스는, 루이제 같은 여자한테 그런 굳건한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거지?’
그동안 대체 뭘 어쨌길래?
그가 이 세계에 와서 들은 건 알렉시스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는데.
이래서 부부 문제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걸까?
복잡한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알렉시스를 능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조금 악물었다.
‘부러운 놈…….’
여기서 그가 루이제를 위해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다시 침실로 들어가 본 루이제의 모습은 그의 시야를 현혹하는 것 같아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 * *
* * *
“그 씹새…….”
브룩스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가 이내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절로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하필 황제는 다음 영주 후보로 브룩스 자신을 염두에 두었을까?
지금까지 충성스러운 행정 보좌관으로서 빈틈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황제의 목에 손톱자국이라도 내고 죽고 싶었다.
알렉시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대신 북부의 영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브룩스는
가슴을 진정시키듯 술을 마셨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제기랄.”
술맛 다 버린 브룩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부인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찾아보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먼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경쾌한 연주와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토록 듣기 거북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홀을 나가려던 브룩스는 불현듯 걸음을 멈춰 섰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이 멎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
다시 나타나길 절실히 바라긴 했지만, 정말로 살아서 또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브룩스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해 눈을 두 번이나 크게 깜박였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빛 때문인지, 아니면 저들이 유령이라도 되는 건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두 사람이 빛을 뿜어내며 팔짱을 낀 채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이제? 알렉시스?”
하도 믿기 어려워 브룩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작은 소리가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한 명, 두 명 무심코 고개를 돌려 홀의 입구 쪽을 응시했다.
시간이 무척 천천히 흘렀다.
귀에 거슬리던 밝은 음악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루이제! 알렉시스!”
결국 브룩스는 우렁차게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홀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놀라움과 반가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크게 이름을 부른 탓인지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이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루이제가 브룩스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 미소에 브룩스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저들은 유령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거야!’
으아악!
브룩스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달려가 저들을 부둥켜안고 방방 뛰고 싶었다.
“꺅!”
어느 귀부인의 비명이 무도회장의 높은 천장까지 찌르며 울렸다.
“저게 누구야?”
“세상에, 루이제와 알렉시스잖아요.”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말도 안 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요란스러웠다.
마침내 홀의 중앙 쪽으로 다다른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멈춰 섰다.
* * *
‘그래. 너 망할 것 같은데…….’
마르셀에게 영지와 방직 공장이 전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마르셀이 치기를 부린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홀 안을 가득 채우던 연주 소리도 그친 채였다.
‘당장 망하더라도 절대 사과는 하기 싫다 이거야?’
나는 작게 비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르셀을 응시했다.
“설마 진심인가요? 그 정도면 지금까지 마르셀 당신이 내 남편을 우습게 여긴 대가로 받아 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어때요?”
말을 마치며 내가 알렉을 쳐다보았다.
알렉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가 대답했다.
“루이제 당신이 그걸로 괜찮다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는 마르셀에게 영지와 공장을 빼앗는 것보다 그를 무릎 꿇리는 일이 훨씬 더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사과 대신 마르셀이 가진 전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거래였다.
“그런데 조금 아쉽네요. 나는 마르셀이 알렉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
꼭 그렇게 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잠시 알렉의 눈을 응시하는 짧은 순간 마르셀이 코웃음을 쳤다.
“착각이 심하군. 그까짓 영지와 공장을 지키려고 내가 저놈에게 사과할 줄 알았다면 크나큰 오산이야.”
“그렇다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대리인을 하워드 후작저로 보내야겠군요.”
“그러시든지.”
마르셀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그 모습에 경악한 데미안이 다급히 마르셀에게 다가갔다. 작게 속삭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렸다.
“이봐, 마르셀. 아무래도 자네 많이 취한 것 같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내가 취했다고? 난 멀쩡해.”
흠칫 이를 악문 데미안은 이제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았다.
마르셀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니 우리의 마음을 돌리려는 듯했다.
“이봐, 두 사람. 설마 장난으로 한 내기에 남의 가문을 통째로 가지겠다는 건 아니지? 아무리 내기라지만
그건 도가 지나치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거라고 믿겠네.”
빠르게 말한 데미안은 억지로 마르셀을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도 마르셀은 우리를 노려보았고, 나와 알렉도 그를 끊임없이 응시했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소란스럽게 울렸다.
“설마 정말로 하워드 후작이 내기로 영지와 공장을 잃는 건가요?”
“후작 부인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냥 사과 한 번이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존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네요.”
걱정과 놀라움이 섞인 웅성거림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도회장을 다 나갈 때까지도 마르셀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올랐고, 나 또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르셀이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놈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 * *
[공격을 감지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가 발동합니다!]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 * *
* * *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르셀은 저택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집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그는 자신의 저택과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믿기지 않는 일들을 적지 않게 겪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마르셀은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는 루이제와 알렉시스를 향해 총을 겨누던 마르셀이 아니었다.
“주인님!”
마침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가 마르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무도회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차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오다니.
“혼자 오시는 겁니까? 마부는 어디로 갔고요?”
집사는 빠르게 마르셀의 모습을 훑었다.
하얗고 멀끔한 얼굴이며 깔끔하게 정돈된 옷매무새가 저택을 나갈 때와 똑같았다.
“설마 걸어오신 건 아니지요?”
“말도 안 돼. 말도…….”
집사가 걱정스럽게 되묻는 말에도 마르셀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걷기만 했다.
집사의 목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그 어떤 외침에도 마르셀은 반응하지 못했다.
이 릴트 제국에서 가장 하찮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상상도 못 할 힘을 가졌다.
알렉시스는 그를 순식간에 죽일 수도 있었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치유할 수도 있었다.
충격에 충격을 거듭하느라 마르셀의 머리는 고장이 나 버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그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죽이라고 악을 썼지만, 마르셀은 결국 알렉시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고통과 치유의 반복을 버틸 사람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을까?
“으흑…….”
그런 치욕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수십 배는 나았다.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눈앞에 섰을 때 차라리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힌 적 없던 그의 무릎은 겨우 루이제의 발끝에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어차피 당신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꿇기나 해.’
퍽!
쿵!
‘이제 너 같은 건 우리를 평생 죽일 수 없거든.’
“으윽…….”
마르셀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서재 안 서랍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당장 약을 먹지 않는다면 이 모멸감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를 짓밟던 루이제의 날카로운 굽.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무심한 눈길과 브렌트 공작가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 꼴 좋다는 앤드류의 시선.
그런 수모를 겪고도 계속해서 머리를 들고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나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으아악!”
마르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손길들을 닥치는 대로 뿌리쳤다.
어서 약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손에 잡히는 약병을 열어 마구잡이로 입에 넣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진짜 약인 것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주인님!”
“이거 놔! 다 놓으라고!”
기겁한 집사와 사용인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온갖 약을 입에 넣었다.
수치심과 모욕감,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멸감 말고는 마르셀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짓밟았던 놈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굴욕을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았다.
* * *
“누가, 죽었다고요……?”
평범하지 않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오후였다.
화창한 한낮의 정원 안에서 나와 알렉, 앤드류는 브룩스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브룩스는 그제야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황궁에 다녀오고 나서야 마르셀 후작의 소식을 들었죠. 마르셀이 어젯밤
무도회가 끝나고 두 분을 해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에 파다합니다.”
“……그렇군요.”
그건 데미안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어젯밤 무도회장 근처에서 쓰러진 데미안을 발견했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아야 할 정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마르셀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줄 알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마르셀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사람들에게 모두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나와 알렉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밤늦게 우리를 찾아와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중에서는 브룩스도 있었다.
미수로 그친 두 사람의 행동이 사교계에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죽음이라니.
알렉은 일부러 마르셀을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말끔히 치유해서 돌려보냈다.
울긋불긋했던 멍들이 내 눈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치료해 주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뒤탈이 생길까 봐 대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알렉과 앤드류를 보았다가 말했다.
“그런데 마르셀은 어쩌다 그리된 건가요?”
브룩스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입을 축인 후에야 다시 말했다.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 말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독약을 마셨다더군요.”
“독약이요?”
“예. 애초에 저택에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두 분께서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네요.”
내 말에 앤드류도 놀란 듯 입을 열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벌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은 놈입니다. 내기대로 영지와 공장을 주겠다는 말도 허영이었겠죠.
알렉시스와 루이제를 죽여서 무마하려고 했던 겁니다.”
앤드류의 말에 브룩스가 한 번 끄덕였다.
“다들 그런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데미안이 시인하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마르셀은 일이 실패한
나머지 크게 낙담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인물 같지는 않았지만, 줄리아 일도
그렇고 원래부터 속이 말이 아니었겠죠.”
브룩스는 여전히 목이 타는 듯 다시 차를 마셨다.
심상치 않은 어젯밤을 보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어젯밤 마르셀이 우리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은 일은 알렉과 앤드류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나도 우리 식구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렇다고 독약이라니.’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말아 쥐었다.
겨우 우리에게 무릎 한 번 꿇었다고 처절하게 절망하던 마르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렉이 그동안 놈에게 무릎이 꿇린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사냥 시즌에는 사냥감 노릇까지 시키더니 정작 본인은 이렇게 쉽게 죽어?
놈을 죽이고 싶은 기분이야 나도 턱 끝까지 치밀 때가 많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알렉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마르셀이 그에게 굴복했을 때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알렉의 고통을 직접 겪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 않을 만큼 감흥 없는 눈길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브룩스가 다시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전해 들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하워드 후작의 내기에 관한 일은 별로 관심 없으신 것 같더군요.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뭐 두 분께는 잘된 일입니다. 마르셀이 무도회에서 호언장담한 것도 있으니 법적 대리인이라도
고용하시면 유리할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기에 걸었던 구두를 아침부터 보낸 사람도 있었다.
내기의 결과가 정해지면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미 나는 의회에서 빠르게 양도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 마, 마르셀. 네 방직 공장은 우리가 더 잘 운영할 거니까.’
내가 살짝 이를 가는 사이 브룩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황궁에 오라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자작 작위를 돌려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브룩스의 미소에 나도 어색하게나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얻게 된 것들이 생겼으니 그나마 조금의 성취감이 들었다.
* * *
* * *
* * *
* * *
“뭐야. 미친 거야?”
소식을 들은 엘로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주일 안에 거액을 가져오지 않으면 북부를 몰살시키겠다는 황제의 말 때문이었다.
“미친놈의 머릿속을 누가 알겠니.”
시어머니도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거들었다.
내가 한숨을 쉬듯 대꾸했다.
“그건 그렇네요.”
목숨으로 협박까지 하다니. 황제는 북부인들을 꼭 길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폭정을 휘두르는 것만큼 간단하게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알렉은 북부인들을 상대로 그런 강요를 할 수는 없었다.
북부인들이 겁을 먹고 세금을 낸다 하더라도 황제가 더 과한 요구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엘로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찡그렸다.
“그럼 이제 북부인들 집집마다 용병들을 보내야 되는 거야? 북부인들이 그만한 돈이 있을까?”
엘로이의 말에 내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했다.
“우리가 뒷골목 강도도 아니고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구해? 아, 맞다!”
엘로이가 잠자코 앉아 있던 알렉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알렉이 살짝 눈을 들었다.
“오라버니가 또 가져오면 되겠다.”
작게 손뼉을 치며 엘로이가 기쁜 듯이 말했다.
내가 알렉을 대신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렉 혼자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을 다 감당할 수는 없어. 앞으로 계속 내라고 할 텐데 더 장기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어차피 평생 이런 식으로 계속 황제의 호구 노릇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당분간은 황제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선은 저도 정보상에 다시 한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알겠어요. 당신 덕에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아요.”
“어차피 저의 일이기도 한데요.”
“그래도요.”
나는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기분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알렉도 가만히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잠시 그와 내가 시선을 주고받는 동안 엘로이가 나와 알렉을 번갈아 보더니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뭐야, 둘이 정말 수상해. 가짜 부부가 왜 갑자기 진짜 부부가 됐어? 올 때도 팔짱 끼고 오더니,
북부에서 무슨 일 있었지?”
엘로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살짝 놀란 기색으로 우리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부쩍 친밀해진 우리의 사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알렉을 향해 마저 웃어 주었고, 그는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뺨이 붉어진 듯한 건 응접실을 밝히는 불빛 탓일까?
대뜸 시어머니가 밝은 안색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후계자를 기대해도 되는 거니?”
“…….”
알렉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버렸고, 나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후계자예요.”
그와의 아이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은 나였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뒤늦게 찾아온 신혼을 조금 더 즐겨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전쟁 중에도 애는 잘 낳는다고 하더라.”
“전쟁보다 우리 황제가 더 끔찍하네요.”
“그래도 가문의 후계자는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갑자기 알렉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가문은 누가
이어 주니?”
“엘로이가 남장이라도 하면 안 되나요?”
“…….”
마치 창과 방패와도 같았던 대화에 침묵이 생겼다.
느닷없이 지목을 당한 엘로이는 은근 좋아하는 눈치로 웃었다.
물론 여자가 작위를 이을 수는 없었지만, 엘로이는 그냥 생각만으로도 좋은 것 같았다.
은근히 권력욕이 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시어머니는 무척 피곤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더니 일어서려고 했다.
엘로이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나갈 기세라 내가 얼른 시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아직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남았어요.”
“그럼 얼른 해 보렴.”
시어머니가 다시 소파에 편히 앉았다.
“어머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어서요. 어머님이 아니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내 말에 엘로이가 의아해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어?”
나는 엘로이를 짧게 흘겨보았다가 다시 시어머니를 향해 웃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식품이나 물건들을 북부에서도 팔 생각이에요. 그러니 어머님께서 점포마다 찾아가서
납품 좀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이냐?”
시어머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평생 고귀한 신분으로 살면서 이런 부탁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것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봉투 하나를 들었다.
“여기 제가 정리해 둔 상점들이 있어요. 꼭 계약해야 하는 품목도 적혀 있고요. 특히 리즈 화훼 농원은
반드시 설득하셔야 돼요. 북부에 꽃집이 한 곳도 없더라고요.”
“꽃집이 없는 곳이 있다니 그게 말이 되니?”
“저도 얼마나 놀랐다고요. 리즈 농원은 우리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온실 기술을 갖춘 곳이니 북부에서도
성공할 거예요.”
“…….”
그제야 시어머니는 나에게서 봉투를 받아 갔다. 내용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찾아가야 할 곳들이 너무도 빼곡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나서도록 마음을 돌려야 했다.
나와 알렉이 다니기에는 다른 할 일이 너무도 많았고, 엘로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상인들에게도 새 상권이 생기는 것이니 꽤 괜찮은 거래일 것이다.
“어머님께서 직접 가시면 상인들이 정말 영광스러워하겠어요. 무려 전 브렌트 대공작 부인이셨던
분이잖아요.”
“…….”
“이리도 고귀하신 분이 직접 나서 주시면 우리가 얼마나 진심인지 상인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네요.”
“…….”
정성 어린 내 말에도 시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대공작 부인이었던 체면 때문이었다.
역시 이 방법을 써야 하는 걸까.
나는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결정적인 말을 내뱉으며 웃었다.
“어차피 하루빨리 북부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폐하께서 우리 식구들의 목숨을 다 앗아 갈 거랍니다. 물론
어머님도 무사하지는 못하시겠죠.”
“…….”
“그러니 도와주실 거죠?”
완고했던 시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과연 목숨으로 협박하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황제의 방식은 꽤 유용했다.
시어머니는 어렵게 다시 얻은 호화로운 삶을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곁에 앉아 있던 엘로이가 힐긋 내 눈치를 보더니 시어머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짧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시어머니는 잠시 숨을 들이쉬며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꽃이라도 살 겸 한번 다녀와 보긴 하마.”
“감사합니다. 오늘 당장 방문해 주시면 좋겠어요.”
시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전 브렌트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성공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도의 유명한 꽃집과 식품점이 북부에 들어선다면 얼마나 장사가 잘될까?
북부에서 팔리는 물품들에 매겨지는 세금은 우리 영주 부부에게 돌아오는 돈이었다.
황제가 무리한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재산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게 다 우리의 힘이니까.’
이미 브니엘을 비롯한 몇 명의 장인들이 북부에 점포를 열어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번에 다시 북부로 돌아갈 때는 길벗들이 너무도 많을 것 같아 벌써부터 뿌듯했다.
“알렉시스! 루이제!”
그때 응접실 밖에서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그쪽을 돌아보자 앤드류가 눈망울을 글썽이며 기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도 움켜쥔 채였다.
혹시 벌써 일이 잘 풀리기라도 한 걸까?
앤드류가 우리의 대리인을 자청해 주어서 방직 공장과 관련된 일을 부탁한 상태였다.
이윽고 앤드류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워드 후작가의 영지와 방직 공장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습니다.”
“……!”
정말로?
이제 정말 우리의 소유가 된 거야?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엘로이의 눈도 커졌다.
얼른 일어나 앤드류에게 다가갔다.
“정말 잘됐네요. 고마워요, 앤드류.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이라면 금방 처리해 줄 줄 알았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곧 하워드 후작의 친척들이 소송을 걸어올 겁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죠.”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황궁에 갔더니 폐하께서 새 임무를 주셔서요.”
“뭐든지 말씀해 주시죠. 두 분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 못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럼 후작가의 영지를 더 비싼 값에 팔아 주지 않을래요? 앤드류라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해 줄 것
같아요.”
나는 이미 억만금을 가진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앤드류를 응시했다.
그 넓은 땅이 모두 팔리면 그게 다 얼마일까??
그런데 어마어마한 자금을 갑자기 선뜻 융통할 사람이 있을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앤드류는 마침 반가운 말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말했다.
“이것 참 잘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신 브로디 가르시아 공작께서 땅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조카사위인 마르셀의 소유였으니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어쩐지 일이 차근차근 진행될 것만 같았다.
브렌트 공작가의 전성기 시절로 재산을 불리는 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였다.
* * *
* * *
벌써 해가 뉘엿거렸다.
오늘의 볼일을 모두 마친 알렉은 수도의 거리를 지나며 저택으로 향했다.
정보상에서는 뜻밖의 수확이 있었는데, 미리 북부의 성에 놓고 온 참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돌바닥, 화려한 옷차림으로 거니는 귀족들과 온갖 보석으로 반짝이는 상점들.
그 사이를 걸으며 악센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일주일 안에 거액의 세금이라.’
그러나 마르셀의 영지를 매물로 내놓은 상황에서 돈은 그리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악센이 점점 그를 더 압박하는 듯했지만, 그의 레벨만 계속 높일 수 있다면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 악센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루이제와 함께 보내는 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건 이미 그도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윌스브룩 성과 마차에서 두 번 정도 크게 애정도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문득 그의 걸음이 멈췄다.
크게 자리한 꽃집과 달콤한 냄새가 그의 눈과 후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꽃?’
알렉은 잠시 발이 묶인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꽃 가게를 눈에 담았다.
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걸까?
저 싱싱하면서도 호화로운 꽃들을 보니 다시 루이제가 생각났다.
그가 꽃집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띠링!
“……”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알렉은 꽃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정말로 꽃마다 이름과 꽃말이 그 위로
떠올랐다.
적당한 꽃들을 이것저것 골라 한 다발 품에 안았다.
그러나 알렉은 얼마 걷지 않아 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쇼윈도에서 붉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을 보니 또 그의 마음이 사로잡힌 탓이었다.
루이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는 두 팔 가득 선물을 안고 있었다.
* * *
“그게 다, 뭐예요……?”
나는 가운을 여미며 현관 쪽으로 나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집에 돌아온 알렉이 웬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있었다.
오는 길에 쇼핑이라도 한 걸까?
특히 그가 꽃다발을 안고 있어서 나는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대답했다.
“오다가 보여서 샀습니다.”
“네? 이 많은걸요?”
나는 그가 들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자 겉에 찍힌 인장만 봐도 모두 명성이 자자한 공방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석과 장신구를 취급하는 곳들이었다.
“제임스?”
“예, 주인님.”
문득 그가 제임스를 불렀다.
“이것들을 모두 부인의 방으로 옮겨 줬으면 좋겠군.”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용인들이 짐들을 받아 갔다.
내 방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잠시 응시한 내가 다시 알렉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걸 다 나 주려고 샀다는 거야?
“루이제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같이 올라가서 풀어 보시죠.”
“네? 아, 알겠어요.”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나도 얼결에 그를 따라 올라갔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와 엘로이는 주무십니까?”
“아, 네. 다들 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계단을 오르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뭔가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언뜻 봐도 무슨 꽃인지 다 알 것 같은데, 제각각의 꽃마다 나에게 건네는 말들이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볼일은 잘 끝났나요?”
애써 내가 묻는 말에 그가 담담하게 한번 끄덕였다.
“예. 어머니와 앤드류는 잘 돌아왔습니까?”
“네. 정말 다행이에요. 리즈 농원에서 긍정적으로 말해 준 것 같더라고요. 북부에서 온실을 운영하는 게
정말 뜻깊은 모험이라고 했대요.”
“어머니께서도 설득을 잘해 주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내가 그를 향해 살짝 눈매를 접었다.
이제 북부에 화훼 농원을 만들 수 있다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리즈 농원 말고도 온갖 잼을 취급하는 업체와도 납품을 받기로 약속했다.
겉으로는 내키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내가 부탁한 일들을 잘 처리해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뭐 우리 가족 전체를 위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다시 알렉을 향해 웃어 주었다.
“하워드 후작저의 영지도 곧 팔릴 것 같아요. 가르시아 공작이 소식을 듣고 반색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군요.”
“앤드류 말로는 그 영지를 판 값이면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을 다 바치고도 많이 남을 거라네요.”
“잘됐습니다.”
“그렇죠?”
알렉을 응시하는 내 눈빛이 절로 포근해졌다.
황궁에 갔을 때만 해도 막막했는데,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아 마음이 많이 놓였다.
그런 얘기들을 하다 보니 금세 내 방에 도착했다.
테이블에 잘 올려 둔 고급스러운 상자들을 보니 꼭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저게 다 뭘까?
설마 내 남편이 나를 위해서 직접 고른 걸까?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그와 나 단 둘만 남았다.
“루이제.”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니 괜히 긴장이 되었다.
“제가 전에도 꽃을 자주 드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역시 기억을 좀 잃기라도 한 걸까?
그가 나에게 꽃을 안겨 주자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는 그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주긴 줬었죠. 내 생일마다 포인세티아를 보냈잖아요.”
그건 그냥 축하의 의미로 주고받는 꽃이라 매년 생일 때마다 내 방은 포인세티아로 가득 찼다.
그가 보낸 꽃이 벽걸이용, 화분용, 화병용 등으로 얼마나 많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포인세티아는
내 방에 두지도 못했었다.
그때 말고는 그가 나에게 꽃을 준 적은 없었는데…….
“……제가 그랬군요. 오늘이 생일은 아니지만 골라 봤습니다.”
“당신이, 이걸 직접요……?”
“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시선을 내려 꽃다발을 살펴보았다.
꽃으로는 축하밖에 할 줄 모르던 사람이 골랐다니, 그런 것치고는 꽃들이 건네는 말들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이 사람이 뭘 알고 이 꽃들을 고른 걸까?
아니면 우연?
다섯 가지도 넘는 꽃들이 저마다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보랏빛 라일락, 스타티스와 오니소갈룸. 붉은 튤립.
첫사랑과 영원한 사랑과 일편단심, 그리고 사랑의 고백까지 없는 사랑이 없었다.
“……알렉.”
나는 조금 글썽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꽃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여태 포인세티아밖에 주지 않았던 사실이 바로 그 증거였다.
차마 나에게 축하 외의 감정은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라니, 나는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꽃다발을 들어 올린 내가 얼굴을 반쯤 가렸다.
“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당신한테 받고 싶었던 꽃들이네요.”
“그랬습니까?”
“당연하죠.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
내 말에 그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감동에 가슴이 찡하고 먹먹했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나에게 관심을 표한 남자들은 많았지만, 정말로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사랑을 받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당장 세상이 망해도 좋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그리고.”
문득 그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나에게 가져오더니 손에 쥐여 주었다.
“풀어 보십시오.”
“알겠어요.”
그에게 한번 웃어 준 나는 꽃을 한 팔에 안고는 정성껏 포장된 리본을 풀었다.
이건 또 뭘까?
사랑 가득한 꽃다발을 받은 탓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지 이것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꽃으로는 축하밖에 하지 못했지만, 알렉은 나에게 선물로 실망을 준 적은 없었다.
그의 신분이 무려 공작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할 만큼 남다른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 몰래 지방의 영지를 준다든가, 휴양지의 저택을 생일 선물로 받았었다.
지금은 모두 잃어버렸지만 정략결혼을 한 남편에게 그만큼 스케일이 남다른 선물을 받는 건 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저택이나 땅이 아닌 이런 작은 선물이라니, 대체 뭘까?
오늘이 내 생일도 아닌데 생일보다 더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크리스털로 된 뚜껑을 여니 붉은빛의 투명한 보석에 눈이 다 부셨다.
이게, 뭐지……?
영롱한 빛에 잠시 가물거렸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헤어핀이 드러났다.
전체가 모두 오묘한 빛깔의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잖아?
“마음에 드십니까?”
조심스럽게 들려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였다.
“너무 예뻐요. 이것도 당신이 고른 거예요?”
“……예. 루이제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솔직한 말에 나는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머리핀을 산 곳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공방이었다.
장신구들이 모두 아름답긴 해도 내가 사기에는 너무 사치하는 느낌이라 직접 산 적은 없었는데, 선물로
받으니 반갑고 기뻤다.
“고마워요. 당신이 이런 걸 보고 날 떠올렸다니 그게 더 감동이네요.”
내 말에 그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살짝 눈가를 접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주는 거라면 지푸라기라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왜-.”
“내 생각을 했다는 거잖아요.”
“…….”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은 듯 그의 눈빛이 조금 차분해졌다.
나는 헤어핀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당신이 직접 해 줄래요?”
“……알겠습니다.”
그가 받아 들자 나는 꽃다발을 계속 품에 안은 채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길게 풀어 헤친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 하나를 갖다 댔다.
그의 손 위로 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남편이 내 몸을 만질 때만 좋은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을 만지니 더 풋풋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가 내 머리에 헤어핀을 꽂았다.
“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몸을 살짝 돌려 거울을 보았다. 붉은빛의 장신구가 나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남편이 줘서 그런 걸까?
“알렉.”
나는 그만 그를 향해 돌아서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꽃다발은 망가지지 않게 그의 등 뒤로 들었다.
그를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당신한테 이런 건 처음 받아 보네요.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닐게요. 평생 간직할 거예요.”
“……루이제.”
“……?”
갑자기 그가 내 몸을 떼어 내더니 헤어핀을 다시 빼냈다.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니 그가 조금 어색한 듯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사실 이건 소모품입니다.”
“네?”
“마력을 담아 놓았거든요. 위험할 때 여길 누르고 던지면 터집니다.”
“…….”
음?
알렉이 헤어핀의 안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미처 예상도 하지 못한 쓰임새에 나는 크게 뜬 눈을 두 번이나 깜박여야 했다.
그러니까 이게 마력이 담긴 물건이라는 거지.
신기해라.
나는 애써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이걸 쓸 만큼 위험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가 조금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계가 아니니 오작동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한테는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고요.”
“고마워요. 안심할 수 있겠네요. 덕분에 머리에 폭탄을 달고 다니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다이아몬드 헤어핀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이지 근사하고 특별했다.
소중한 남편의 선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건 조금 많이 아쉬웠지만
…….
“그럼 다른 것들도 풀어 봐도 되나요?”
내가 묻자 그가 한번 끄덕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의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했다.
“어머, 이건 향수네요?”
화려하게 세공된 아주 작은 병 안에 핑크빛 액체가 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휴대용 향수였다.
어쩜 이렇게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만 고른 걸까?
“어떤 향일지 정말 궁금-.”
“아, 그건 향을 맡으면 해독 기능이 있습니다.”
“네?”
향수의 뚜껑을 열던 내 손이 문득 멎었다.
“여기에도 마력을 넣은 건가요?”
“예. 남을 공격하는 건 아니니 평소에 쓰셔도 무방하긴 합니다.”
“그럼 맡아 봐야겠네요.”
설마 향수를 못 쓰는 건가 싶어 덜컥 긴장했던 내가 살짝 웃었다.
향수에서는 적당히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너무 좋네요.”
그의 물음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다른 선물들도 모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 마력이 담긴 호신용이긴 했지만 그가 날 얼마나 걱정하고 생각하는지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저도 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맞췄고, 그는 나를 한번 보았다가 내 방을 나갔다.
“하.”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꽃다발을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내 온몸에는 그가 선물해 준 것들이 가득했다.
머리에는 헤어핀을 꽂고 있었고, 반지와 목걸이도 하고 있었다.
하나는 폭탄이고 다른 하나에는 독침이 들어 있었으며, 또 다른 물건은 상대를 잠들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
사실상 살상 병기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나 로맨틱하다니.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야…….’
웃음이 번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일일이 다 마력을 넣어 놓다니, 사랑스러웠다.
* * *
띠링!
“……?”
“…….”
* * *
* * *
화창한 한낮.
올리비아는 황후 궁의 정원에서 푹신한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이제 오셨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했다.
마침 올리비아의 아버지인 브로디 가르시아 공작이 황후의 부름을 받아 찾아온 참이었다.
브로디가 올리비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 브렌트 공작가에서 하워드 후작가의 영지를 매물로 내놓았더군요.”
브로디의 안색이 보기 드물게 싱글벙글했다.
평소 딸의 안부를 묻거나 웃어 주지도 않는 사람인데, 후작저의 영지를 살 수 있게 되어 꽤 기쁜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올리비아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 * *
* * *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겠어요?’
‘……루이제.’
* * *
“꺼지라고!”
나는 한 번 더 랭던과 개리슨을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랭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더니 슬그머니 주위를 보았다.
이제 공장 안에는 기계음이 완전히 멎어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랭던을 향한 사람들의 눈총은 따끔하고 날카로웠다.
한두 해 운영한 공장이 아니었으니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과 원한이 적진 않을 것이다.
“에이 씨.”
랭던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공장을 나갔다.
랭던이 가 버리자 개리슨이 나를 향해 피식 비웃었다.
“이제 홀든 방직 유니언의 대표는 나다. 우리 조합에서 네놈들을 받아 줄 것 같아?”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소를 참지 못했다.
의기양양한 개리슨의 표정을 보니 저런 협박이 먹힐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받아 달라고 할 일도 없으니까 걱정 마. 우린 개리슨 당신과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뭐?”
“뭐, 개리슨 당신이 앞으로 우리 공장의 털끝이라도 따라온다면 모르지. 우리가 당신을 받아 줄지도.”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린 우리만의 공장과 조합을 새로 운영할 거거든. 지금까지 당신들이 하던 방식과는 너무도 다를 텐데
어쩌지?”
“…….”
내 미소에 개리슨은 질색을 했다. 이내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개리슨을 보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너무도 험악했다.
“어디 잘되나 보자!”
개리슨이 빽 소리를 치더니 이내 도망치듯 공장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비웃어 주다가 금세 몸을 돌렸다.
돌아선 순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려 있었다.
“루이제.”
그 순간 알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를 한번 보더니 눈길을 옮겨 누군가를 응시했다.
온몸에 실밥을 뒤집어쓴 여자가 어느새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불안하면서도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 공장의 관리인인 다이애나입니다.”
관리인?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등장에 나는 조금 화색이 되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다른 분들도요.”
내가 공장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기계 소리가 그치니 공장 안에는 내 목소리만 선명하게 울렸다.
내가 알렉을 응시하자 그도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렉시스입니다.”
“나는 루이제예요. 전 브렌트 공작 부부였다고 하면 알까요? 다들 들었겠지만, 우리가 이 하워드 방직의
새 주인이 되었답니다.”
사람들이 알렉과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의 눈망울이 일렁이고 얼굴빛이 약간 상기되었다.
저들에게는 주인이 바뀌고, 그 새 주인이 등장한 것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나도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랭던이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공장의 소유권은 확실히 우리 가문의 것이
되었거든요.”
“…….”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호기심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남녀노소 다양했다. 아직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도 적지 않았다.
안타까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물이 이십여 개는 더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이 공장에 달려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는 알렉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그에게 팔짱을 낀 후 다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이 공장의 이름은 브렌트 방직이 되었답니다. 앞으로 이름뿐만 아니라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우선은 공장 건물부터 바뀌어야 하겠죠.”
“…….”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설마 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이미 나와 알렉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근무 환경 문제로 공장주들과 싸워 왔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방직 공장이 싫으면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냐며 비꼬았지만, 비난받아야 할 건 노동자들이
아니라 비인간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권력 있는 고용주가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푼돈이라도 준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가?
꼭 사람을 직접 해쳐야만 폭행인 걸까?
노동자들을 탓하며 그런 악덕 고용주들을 합리화하는 세상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나도 지켜보았답니다. 아무런 타협이 되지 않아 상심이 컸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마르셀은 죽었고 랭던은 아무런 힘이 없죠. 나와 내 남편은 이런 공장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고요.”
말을 마치며 나는 한숨과 함께 공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창문은 벽의 높은 곳에 작게 주르륵 달린 채광용이 전부였다.
지금은 어딘가로 도망갔지만, 채찍을 들고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놈들도 있었다고 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으로 내가 연이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드릴 거예요. 휴식 시간도 충분히 많이 보장할
거고요. 근무 중에 필요한 식사도 제공할 거랍니다.”
“……!”
사람들의 눈이 커지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감탄과 충격이 어디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크게 울렸다.
그 모습이 나는 좋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그러나 못 믿겠다는 마음이 더 큰지, 사람들 틈에서 말도 안 돼, 저게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게, 정말인가요?”
문득 다이애나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우리는, 저희는 두 분의 공장에서 평생을 바칠 수 있어요.”
다이애나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입가를 당겼다.
“공장 건물을 손봐야 할 테니 그동안 휴가부터 드려야겠네요. 급료는 당연히…… 유급이어야겠죠?”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의 감탄이 조금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우리가 공장의 환경을 바꿀 거라는 말을 이제야 믿는 기색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어디서 이런 분들이…….”
다이애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지었다.
나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건 이토록 뿌듯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두 분은 저희들의 은인이세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꼭 갈채 같았다.
공장을 나설 때도 그들의 환호와 함께였다.
* * *
펑!
“꺄아악!”
내 헤어핀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황후의 비명이 들렸다.
황후한테 이런 힘이 있었어?
미친 거 아니야?
마치 폭탄이 내 머릿속에 터진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황후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메리엔을 일으켰다.
메리엔.
내 머리핀……!
메리엔이 정말 죽었을까 봐 겁이 났고, 알렉에게 선물 받은 다이아몬드 머리핀을 며칠도 못 써 보고
망가뜨려서 너무도 속이 상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메리엔까지 위험에 빠졌으니 더 이상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그만큼 황후에게 화가 났다.
‘저 미친 여자가 진짜……!’
나는 메리엔을 안고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메리엔. 내가 꼭 구해 줄게요.”
그리 중얼거린 나는 가까스로 응접실의 문까지 다가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박동했지만, 그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황후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려움이 내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알렉이 준 선물들을 몇 개 더 지니고 있었고,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윽!
그 순간 불길한 기운이 내 발목을 둘러싸더니 몸이 고꾸라졌다.
의식을 잃은 메리엔마저 힘없이 쓰러졌다.
“메리엔!”
내가 메리엔을 안자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돌아보니 역시나 황후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웃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황후의 목소리가 끊어질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어디서…… 이런 게 났어요? 신식 화약?”
나는 눈에 핏발이 설 만큼 그녀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덕분에 폭발에서 목숨을 건진 듯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전에도 꽤 아파 보였는데, 황궁에서 요양이나 하지 이렇게까지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메리엔을 끌어당기며 황후와의 거리를 계속해서 벌렸다.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으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황후 폐하를 대신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라고.”
내가 황후에게 쏘아붙였다.
정말 올리비아의 말대로 황제가 날 황후로 원하고 있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내 입장에서는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휘둘릴 생각도 없거니와 황후의 손에 죽을 일은 더욱더 없었다.
황후는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웃었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폐하께서는, 못 할 일이 없으세요……. 당신이나 당신
남편같이, 흔한 사람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과연 그럴까?”
내가 최대한 이를 악물며 황후를 비웃어 주었다.
듣자 하니 황제도 알렉처럼 비범한 힘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덜컥 겁이 나며 황제를 무너뜨리는 일이 더 막연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굴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모르고 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황후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황후가 조금씩 따라오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등 뒤에서 광기와 체념이 어린 황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복도 안에 울렸다.
“당신은, 모르지? 폐하께서 얼마나…… 무섭고 강하신 분인지.”
“……!”
아.
나는 순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온몸이 묶인 것 같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메리엔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다른 무기를 써야 할 것 같아 손을 움직여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반지에 있는 마력이 담긴 독침을 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죽어 줬으면 좋겠어……. 루이제 당신이, 죽는 걸 봐야…… 나도 편하게……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아.”
“……!”
아악!
나는 그만 소리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비명을 내질렀다.
무언가 내 몸속을 날카롭게 휘젓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왈칵, 하며 올리비아가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녀의 무릎이 꺾이며 풀썩 주저앉았지만, 나를 공격하는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자신의 수명이 급속도로 줄더라도 나를 꼭 죽이겠다는 열의가 느껴져 어처구니가 없었다.
올리비아가 마녀처럼 웃음소리를 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할걸……. 그냥 포기하고, 빨리 죽는 게…… 고통은 덜할 거야.”
‘……하.’
나는 필사적으로 올리비아의 힘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평범한 인간인 내가 이 비현실적인 힘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다.
온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전혀…… 그래 봐야 전혀 소용없어…….”
그래. 정말 죽을 것같이 괴롭네.
‘그래도 황후 너한테는 절대 안 져.’
나는 이를 악물었다.
황후가 날 비웃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귓가에 가득 찼다.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
“아무 힘도 없는, 네가……?”
그러나 아무리 저항해 봐도 온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만 거세졌다.
설마 이대로 정말 죽게 될까?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는데, 너무 허무한 거 아니야?
점점 시야가 가물거리고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숨이 넘어갔다.
“정말, 안달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폐하께,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야…….”
그리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도 점점 힘에 벅찬 느낌이었다.
이렇게 더 버틸 수만 있다면 황후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를 갈던 내 입술 사이에서 문득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닥쳐.”
말소리가 나감과 동시에 손가락이 까딱 움직였다.
나는 너무도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 온몸과 신경을 파고들던 황후의 힘이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된…….”
도망가려면 지금뿐이었다.
나는 손을 내린 채 반지에 박힌 보석의 방향을 몰래 황후에게 겨누었다.
알렉이 준 독침이 부디 황후에게 명중하기만을 바라며 작은 장치를 눌렀다.
“아!”
동시에 내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솟구쳤다.
황후의 힘이 다시 내 몸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가시덩굴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윽.”
거의 비슷한 순간 황후도 신음을 내뱉었다.
독침에 당했나 보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메리엔을 끌어당겼다.
황후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정말 미친 여자야.’
태어나서 이런 고통은 처음 느껴 보았다.
털썩, 황후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힘이 내 목을 둘러싸며 숨통을 끊으려 했다.
나는 결국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메리엔의 몸도 힘없이 기울어졌다.
도저히 이 이상 힘을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했지만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기운을 다한 듯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네.”
“…….”
“이렇게, 버틸 리가 없는데…….”
울컥.
황후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나를 죽이려는 건지 자신을 망가뜨리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죽기 직전이라 저 여자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내가 너무, 약했나 봐. 이제 그만 끝내자……. 난 도저히, 더 못 견딜 것 같아.”
“아니. 난, 안 죽어……. 아악!”
이번에는 누군가 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역시 마력이라 그런지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치고 너무도 무시무시했다.
이게 황후의 마지막 전력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메리엔도 이 힘에 당한 거라면 벌써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불현듯 남편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겨우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아직 내 마음을 다 보여 주지도 못했는데…….
“루이제!”
문득 내가 잘 아는 목소리가 훅 다가왔다.
동시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리더니 올리비아의 몸이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아악!”
내 심장을 옥죄던 그녀의 힘이 뚝 끊긴 것처럼 사라졌다.
더 이상 그녀가 날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며 온몸에 힘이 풀렸다.
남편?
그가 날 구하러 온 걸까?
“루이제!”
한층 가까워진 목소리와 함께 내가 잘 아는 품이 나를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나는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알렉.”
“괜찮으십니까? 안심하십시오, 루이제.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
나는 뭐라 대답할 힘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날 하염없이 안도하게 만들었다.
역시 내 남편, 날 구하러 와 줬구나.
겨우 황후에게 당하는 줄 알고 서러웠는데,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윽고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여자를 건드리면 그게 누구라도 봐주지 않는다.”
“…….”
“죽기 전에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지.”
그는 내가 처음 보는 모습으로 낮고 어둡게 분노했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17 화
* * *
* * *
* * *
“……?”
[특별 보상]
[경험치가 20 억 올랐습니다!]
뭐?
계속 우리를 저울질하다가 북부를 빼앗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뒤통수라도 휘갈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마력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
더럽고 치사했지만 나는 황제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하는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의 서거로 심기가 흐트러 지셨을 것 같아 근심이 큽니다. 저희 또한 애도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저희 브렌트 자작 부부가 북부를 폐하의 자랑으로 융성시켜 근심을 덜어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에잇, 퉤.
나는 황궁으로 갈 편지에 침이라도 한 번 뱉어 주고 싶었다.
황후에게 죽을 뻔한 일은 이미 액땜한 셈 치기로 했다.
황제의 정체를 알고 나니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을 겪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북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조금의 긴장도 늦추지 않았다.
‘앞으로 북부를 수도 못지않은 대도시로 만들 거니까.’
죽을 뻔한 뒤로 내 야망은 더 거세졌다.
우리 가문의 구역을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도시로 반드시 만들겠다는 집념이
타올랐다.
북부는 이미 그 자체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지켜 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했다.
“루이제!”
문득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가 반갑게 솟구쳤다.
“메리엔.”
나는 메리엔이 사는 저택의 응접실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리엔의 눈동자에는 반가움과 눈물, 고마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은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몸은 괜찮나요?”
메리엔이 내 두 손을 붙잡았다. 나 또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치료는 잘 받고 있었죠?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사실 이상하게도 몸은 별로 아프지 않더라고요. 그저 돌아가신 황후 폐하
때문에 너무 놀랐을 뿐이에요.”
“그랬군요. 나 때문에 험한 일 겪어서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해요…….”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날 없애기 위해 황후가 메리엔을 미끼로 이용한 탓이었다.
알렉 덕분에 메리엔도 몸의 통증은 느끼지 않는 듯했지만, 고귀한 귀족가의 부인이 겪기에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자 메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루이제가 걱정이네요.”
“네?”
메리엔의 목소리가 조금 더 작아졌다.
“황후 폐하의 말대로라면 황제 폐하께서 루이제를 원하신다는 거잖아요.”
“아…….”
메리엔도 다 들었던 거구나.
그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했고,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 듣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만약 폐하가 절 원한다고 해도 우리 남편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나도 내 남편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먼 북부로 가는 게 잘된 일이네요. 폐하께서 정말로 루이제를 원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전 두 분이 언제나 무사하기를 바라거든요.”
“메리엔…….”
“그래도 몸조심해요. 황제 폐하께서는 원하는 거라면 꼭 갖고 마는 거 잘 알잖아요.”
“고마워요.”
나는 갑작스럽게 가슴이 뭉클했다.
메리엔이 언제부터 우리 부부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었던 걸까?
그동안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아서 그녀의 말이 무척 의외였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메리엔이 작게 미소 지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루이제와 알렉시스에게 감탄하고 있답니다. 세금도 해결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누가 폐하를 상대로 이렇게나 잘 해낼 수 있겠어요?”
“……메리엔.”
“마르셀과 줄리아가 저세상에 가긴 했지만,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서 나도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
예상도 못 한 말에 내 눈망울이 일렁였다.
지금껏 사교계의 귀부인들에게 비아냥만 들었지, 이런 호감 가득한 따뜻한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덕분에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요, 메리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에요. 어쩐지 우리 부부한테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루이제…….”
“그래서 말인데, 메리엔에게 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선물 하나를 해도 될까요?”
“네?”
메리엔이 의아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내 뒤쪽에 서 있던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큼직한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새하얀 털로 된 숄 하나가 나타났다.
그 눈부신 자태에 메리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에 말씀드렸던 백곰 가죽으로 만든 숄이에요. 우리 브렌트 방직 공장의 이름을 단 첫 생산품이랍니다.
메리엔에게 드리고 싶어요.”
“루이제!”
감탄을 내뱉은 메리엔이 금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두 눈은 백곰 가죽의 털에 못 박힌 듯 박혀 있었다.
“정말로, 이걸 제가 받아도 되나요?”
“그럼요. 나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더 귀한 걸 주지 못해 아쉽네요. 북부 여행은 와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맙소사, 루이제. 정말 고마워요…….”
“…….”
나는 얼떨떨해하는 메리엔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녀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 이윽고 메리엔이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 숄은 제가 책임지고 정성껏 보관할게요. 감히 입지도 않을 거랍니다.”
“…….”
“그리고 전 이미 북부로 떠날 준비를 마쳤는걸요. 내일 출발하는 거 아닌가요?”
“예? 그건 그렇지만…….”
“저도 동행할 거예요. 윌스브룩 성에서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그리고 그곳의 근사함을 다른
분들께도 소개해 드릴 거예요.”
메리엔이 살짝 턱을 들며 웃었다.
그 미소에 나도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북부가 벌써부터 수도 귀족들의 최고의 관광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리엔이 함께해 준다니 북부행이 더욱더 기대되네요.”
* * *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황제가 해리엇을 감시자로 보내는 거였어?
나는 내심 놀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브룩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의 북부행에 동참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브룩스가 해리엇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자네까지 보냈다고? 나도 같은 명을 받고 이들과 함께 가려던 참이었는데.”
“저는 그저 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왔을 뿐입니다.”
“그렇군…….”
브룩스가 떨떠름하게 말을 흐렸다.
누가 봐도 황제의 충신이 분명한 해리엇이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브룩스와 앤드류는 이미 우리와 반역의 뜻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설마 황제의 보좌관인 브룩스마저 황제를 무너뜨리려 할 줄은 몰랐는데, 알렉이 그를 회유했다.
우리로서는 든든한 아군이 한 명 더 생긴 것이니 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브룩스는 황제의 최측근이라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해리엇을 또 보내다니, 악센이 눈치라도 챈 걸까?’
우선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한폭탄까지 데리고 북부에 가야 하다니.’
괜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겠지?
나는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이 해리엇에게 말했다.
“알겠다. 마차가 필요하다면 준비하도록 하지.”
“저희 기사단은 말을 타고 가도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타고 간다고?
기왕 같이 가기로 했으니 나는 친절한 어투로 해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이틀도 넘게 타면 그만큼 쉴 시간이 없을 텐데 괜찮겠어?”
“예, 문제없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해리엇을 향해 살짝 눈가를 접어 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긴 상대는 파란 피 기사단인데 내가 누굴 신경 쓰나 싶었다.
나는 해리엇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행이 더 많아졌네요. 곧 출발하도록 해요.”
“예, 마님.”
곳곳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며 발을 뗐을 때였다.
“언니.”
엘로이가 개미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살짝 돌아보니 엘로이가 내 뒤에 숨은 채 빼꼼 눈을 들었다.
갑자기 해리엇이 나타나서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
얼른 저택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엘로이가 속삭였다.
“나도 북부 따라갈래.”
“…….”
* * *
* * *
* * *
“세상에, 이 성은 미쳤어요!”
“우리 제국에 이런 성이 다 있었다니!”
“여긴 황궁보다 더 대단하잖아요!”
가는 곳마다 메리엔의 감탄과 극찬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손끝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차분하고 온화하던 메리엔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이야.
내가 윌스브룩 성을 지은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흐뭇해졌다.
대뜸 메리엔이 뒤를 돌더니 심각한 얼굴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말로 굉장해요, 루이제. 내가 이런 곳에 초대받아서 오다니, 정말로 꿈만 같네요. 이렇게 대단한
성의 안주인이 내 가까운 벗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네?”
가까운 벗……?
대뜸 들려온 말에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까운 벗이라고요?”
“그럼요. 난 루이제와 생사의 고비도 함께 넘긴 사이인걸요. 우리가 가까운 벗이 아니라면 뭐겠어요!”
“메리엔…….”
잠깐 눈물 좀 닦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생각했다.
그동안 사교계에서 진정한 벗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줄리아 같은 표독한 귀부인들만 상대하다가 상냥한 귀부인을 만난 것도 모자라 이런 말까지 듣게 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릴트 제국에 온 지 3 년 만에 처음으로 벗이 생겼다.
“정말 기쁘네요. 나한테 벗이 생길 줄 몰랐어요. 메리엔도 알다시피 그동안 사교계에서 나와 알렉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상황은 아니었잖아요.”
“……루이제.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많았죠.”
“아뇨. 난 이제 괜찮아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는걸요.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나도 곁에서 응원할게요.”
“메리엔.”
맞잡은 손 위로 맞닿은 나와 메리엔의 시선에 감동이 흘러넘쳤다.
가만 보자, 메리엔이 뭘 좋아하지?
릴트 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벗에게 뭐라도 퍼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만 방에서 쉬지 않을래요?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아직 남아서요.”
“그럴게요, 루이제. 앞으로 성을 다 돌아보려면 잘 쉬어야겠어요.”
메리엔의 대답에 내가 근처에 있던 사용인을 응시했다.
안내를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사용인이 메리엔을 데리고 갔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메리엔과 그 가족들이 북부에 와 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 아래에 손을 갖다 댄 나는 살짝 훌쩍이며 돌아섰다.
북부를 관광지로 발전시키려고 세웠던 계획이 벌써부터 대성공한 느낌이 들었다.
휘익.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동시에 알렉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
“……알렉?”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알렉이 지그시 내 팔을 잡으며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시선을 내려 나에게 눈을 맞췄다.
왜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까?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따라와 주십시오.”
“그게 뭔데요?”
“우선은 만나 뵙는 게 좋겠습니다.”
“네?”
누굴?
내가 되묻기도 전이었다.
알렉이 나를 향해 살짝 몸을 틀더니 내 허리를 안았다.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지하로 연결된 계단 앞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대체 누굴 만나려고 여기로 온 걸까?
윌스브룩 성의 지하는 아직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여긴 왜…….”
내가 말을 흐리자 알렉이 다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바닥에 설치된 지하의 입구를 여는 장치를 밟았다.
스르륵 바닥이 움직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
“같이 내려가시죠.”
문득 그가 말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문이 다시 스르륵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윌스브룩 성의 지하는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 하나 없이 신전 같은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홀에 다다르자 내가 입술을 열었다.
“설마 여기에 누굴 숨겨 두기라도 했나요?”
“……예.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돼서 이곳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대체 누군데요?”
아무래도 그는 그동안 수도와 북부를 오가며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걸음을 멈췄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이 크게 벌어졌다. 상대 또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일곱 살 정도 되었을까?
키가 작은 어린 남자아이였다.
새파란 하늘을 닮은 짧은 머리카락은 앞머리가 이마를 다 덮고 있었고, 총명해 보이는 은빛 눈동자는
한눈에 봐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통통한 볼살.
쓰다듬어 주고 싶은 귀여운 볼살이 내 심장에 콕 박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품에 두꺼운 책 한 권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세상에, 저 아이는 누구죠?”
너무 귀여워!
내 감탄에 아이가 화들짝 놀라 몸서리를 쳤다.
알렉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가 알렉에게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알렉의 뒤로 숨듯이 찰싹 달라붙더니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뭐야.
알렉에게 저렇게 친한 아이가 있었어?
나는 설명을 원하는 눈으로 알렉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아렉시스. 기다리고 이썻더.”
“……?”
애 발음이 왜 저래?
이윽고 알렉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온 아이입니다. 루이제에게 이제야 소개를 시켜드리네요.”
“예?”
어디서 나 몰래 입양이라도 했어??
금세 다시 들려온 말에 내 심장은 쿵 떨어졌다.
“이분이 리디트 황자입니다.”
* * *
‘해리엇.’
한편 엘로이는 윌스브룩 성 밖에서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저 멀리 해리엇과 기사들을 훔쳐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못 본 사이에 더 잘생겨지면 어떻게 해.’
메리엔을 비롯한 손님들은 윌스브룩 성을 보고 멋지다는 둥 웅장하다는 둥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러나 엘로이는 어딜 봐도 심드렁했다.
성이 무척 크고 첨탑이 날카롭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상이 들지 않았다.
‘해리엇 얼굴이 더 대단한걸?’
엘로이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수도에서 북부로 오는 내내 해리엇은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할 사이였는데 해리엇은 그녀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엘로이는 아직도 전 약혼자의 그다지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다정한 손길과 차가운 듯 따스한 눈길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해리엇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문득 해리엇이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엘로이 쪽을 응시했다.
화들짝 놀란 엘로이가 자신도 모르게 기둥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뭐야. 방금 나 쳐다본 거야?’
두근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박동했다.
엘로이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
또 해리엇과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사이 다른 기사들은 어딘가로 가 버리고 해리엇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나를 봐 주는 거야?’
덜컥 용기가 생긴 엘로이가 기둥에서 나왔다.
그러자 해리엇이 시선을 내리며 살짝 돌아섰다.
피했어?
엘로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해리엇은 다시 엘로이를 보았다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 다리가 느긋하게 움직였다.
‘혹시 따라오라는 걸까?’
엘로이는 의아했지만 이내 용기를 내 쫓아갔다.
윌스브룩 성의 뒤뜰 너머에는 끝이 어딘지 모를 숲이 자리해 있었다.
빼곡한 나무의 틈새에 성의 모습이 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걸어갔을 때였다.
그제야 해리엇이 몸을 돌려 엘로이와 마주 섰다.
“해리엇!”
“엘로이.”
“…….”
엘로이는 해리엇에게 달려갔다. 입술이 우물우물 떨렸다.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다니, 얼마 만일까?
해리엇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늘 그에게서 풍기던 풋풋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해리엇.”
엘로이는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으며 터져 나오듯 소리 냈다.
그에 반해 해리엇은 무척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도.”
응?
“정말?”
해리엇이 한 번 끄덕였다.
표정이 너무도 건조해서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해리엇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엘로이는 울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변화 없는 얼굴로 한 번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나 생기가 없었던가?
엘로이는 어딘가 묘하게 변한 해리엇의 모습에 의아했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우리 다시 약혼하면 안 돼?”
목소리가 절로 울컥했다.
다행히도 해리엇은 반감이 없는 투로 대꾸했다.
“그럼 다시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글쎄. 그분은 편한 분이 아니야. 원하는 말을 들으려면 충성심을 보여야 해.”
“어떻게 보여야 하는데?”
“…….”
“나 정말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해리엇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응.”
엘로이는 간절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낯선 위화감이 불안하게 엘로이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흐음.”
해리엇은 잠시 자신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수염 하나 없이 보송보송하고 날렵한 턱이었다.
이윽고 해리엇이 눈을 들었다.
“그럼 엘로이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뭔데?”
“브렌트 자작 부인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줘.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어.”
“응?”
루이제 언니를? 왜?
그제야 엘로이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불길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해리엇은 완전히 황제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게 분명했다.
그가 북부까지 따라온 이유는 보나마나 우리 가족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이 새끼 수상하네.’
* * *
리디트.
리디트 황자라니……!
나는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도 본 듯이 얼어붙어 버렸다.
죽었다고 알려진 리디트가 사실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렉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디트 황자를 우리의 성으로 데려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리디트를 잘 숨겨야 하는 거겠지?
우선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리디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브렌트 자작 부인인 루이제 마이어스라고 합니다.”
“…….”
리디트가 그제야 경계를 조금 풀었다.
알렉의 손을 놓더니 반듯하게 서서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눈 리디트라고 한다. 여태 고아 워네서 신부늘 숨기고 이썼지. 마룰 하면 신분을 들킬까 봐 안해떠니
발움이 조치 안타.”
“…….”
이럴 수가.
나는 황자 앞에서 실례라는 건 알지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디트 황자가 황궁에서 사라진 건 4 년 전이었다.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거라면 발음이 불명확한 게 이해가 갔다.
그런데 그동안 황자로 살지 않은 것치고는 무척 근엄한데?
마침 곁에 있던 알렉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황자님은 지금까지 계속 말을 못 하는 척하셨다고 합니다. 말투 때문에 금세 신분을 들켜서 죽을까 봐
겁이 났었다고요.”
“세상에…… 그래도 말씀을 무척 잘 하시는데요?”
알렉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누군가 고아원에 데려다줘서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었죠. 얼마 전에 정보상에서 황자님을
찾아왔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부터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리디트의 영롱하고 푸른 두 눈동자가 나를 향해 깜박였다.
너무도 맑았지만 오랫동안 젖은 듯이 수척한 느낌이 드는 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어요…….”
“…….”
“아주 어릴 때 황궁에서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자신이 누군지는 잊지 않고 있었나 봐요.”
내 말에 리디트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거시 아바마마에 유일한 유언이어따.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나므라고 하셔찌. 무승 일이 이써도
내가 누군지 이즈면 앙된다고 하셔따. 나눈…… 나눈 아바마마와 약소캐따.”
리디트가 눈물을 꾹 참는 듯이 동그란 눈에 힘을 주었다.
세 살 때 들었을 이야기를 4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지키고 있었다고?
아무리 황자라지만 어린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짐작도 다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저토록 어른스러워 보이는 걸까?
나는 리디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 후 조심스럽게 두 팔을 뻗었다.
리디트가 살짝 움찔했지만 나는 아이의 몸을 품 안에 안았다.
일곱 살 어린아이치고는 너무도 작은 몸이었다.
“……정말 잘 왔어요. 앞으로는 저희가 지켜 드릴게요. 황자님의 집으로 돌아가 황제가 되셔야 하잖아요.”
“…….”
토닥토닥.
나는 돌아온 황자의 등을 어르듯이 토닥였다.
리디트의 존재에 이 넓고 큰 성이 꽉 찬 듯한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리디트가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고맙따. 자작 부인.”
“…….”
제법 위엄이 서린 모습에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얼결에 리디트의 손을 잡았다.
어린 황자의 두 눈이 조금 더 촉촉해졌다.
“엉젠가 누군가 날 구해 주길 매일 기다리고 이썼다.”
* * *
해가 진 저녁.
윌스브룩 성 안의 만찬실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촛불은 곳곳에서 별처럼 내부를 밝히고 있었고, 평화로운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도 사람들의 대화에 웃는 눈빛으로 화답하며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리디트 황자님이라니.’
그러나 여전히 내 머릿속은 리디트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었다.
성의 지하에 리디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렉과 나, 그리고 제인뿐이었다.
리디트가 윌스브룩 성으로 온 건 우리가 수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알렉의 부탁으로 제인이 리디트에게 식사와 목욕, 책 같은 것들을 챙겨 주고 있었다.
빛도 들지 않는 지하라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리디트는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알렉과 리디트는 그동안 교류가 몇 번 있었던 탓에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긴 정보상에서 마련한 거처보다는 윌스브룩 성이 훨씬 나을 거야.’
얼른 리디트가 지하에서 나와 태양이 되게 해 줘야 하는데.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뜨거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해리엇까지 여기 있는 마당에 수상한 낌새 하나라도 들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해리엇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둘이 언제 대화를 튼 건지 엘로이가 해리엇의 옆자리에 딱 붙어서 웃는 얼굴로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 되어서야 만찬이 파했다.
포도주를 꽤 마셨는지 머리가 조금 알딸딸했지만, 적당히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저, 마님.”
“제임스?”
돌아보니 집사가 조용히 문을 닫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겉에 걸치고 있던 두꺼운 털옷을 벗어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제임스의 어조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드릴 게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대부인께서 마님께만 은밀히 전하라는 것이 있어서요.”
“은밀히?”
“예.”
제임스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단단히 밀봉된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가 웬일일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나에게 말을 잘 걸지도 않는 분이었다.
“마님과 단둘이 있을 때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나는 제임스에게 웃어 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제임스가 이만 나가 보겠다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봉인을 뜯어 내용을 읽어 보았다.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 * *
.
.
.
마치 꿈처럼 환상적이고 아득한 밤이었다.
광활한 우주같이 어둡던 사방에는 불빛이 끝없이 반짝였고, 내 남편에게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애정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황홀한 밤이 내 인생에 찾아오다니…….’
몰랐는데, 나 이런 이벤트 무척 좋아했구나…….
한적하게 내리는 작은 눈송이마다 불빛이 올라타 함께 가라앉았다.
마력을 가진 남편이 아니라면 경험하지 못할 애정 표현일 것이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내 눈에 각인되었다.
“고마워요, 알렉. 나 이런 거 처음 봐요.”
나는 그냥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경을 뒤로한 채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감격스러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조금 늦게 손을 들더니 내 등을 살포시 토닥였다.
“……다행이네요. 루이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좋습니다.”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배어 있었다.
하.
……이런 게 행복일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말했다.
“가슴이 너무 뛰어요, 알렉.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 생생하게 느껴져요.”
지금 내 주위를 밝히고 있는 이 무수하고도 아름다운 불빛들처럼.
여태까지 그에게 차곡차곡 느끼고 있었던 감정이 바로 지금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제 마음을 당신에게 반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너무 많아서 벅찬걸요?”
내가 조금 더 그를 꽉 껴안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루이제.”
그런데 그가 살짝 내 몸을 떼어 내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주위에 만개한 빛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유독 더 눈부셨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는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오늘 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그게 뭔데?
왠지 알 것 같아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었다.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닐까?
순간 그가 조금 더 깊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 곁에 영원히 함께 있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가 될 일 없도록.”
“……알렉.”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는 금세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말은 못 했지만…….”
“…….”
“사랑합니다, 루이제.”
“…….”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
어디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처음 들어 보는 사랑 고백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이미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잠시 머리가 멍했다. 반짝이던 불빛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결국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 거야?’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나 얼떨떨했다.
가슴이 너무도 벅차올라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나도.”
“…….”
“나도 사랑해요, 알렉. 당신과 내가 이제야 마음이 통하나 봐요.”
내가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더 높게 솟구칠 수도 없을 만큼 치솟았다.
그동안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을지 너무도 궁금했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느껴 볼 수 없는 감정이었고, 죽을 때까지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알게 되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두 번의 삶이 주어져도 나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제야 얻게 된 이 사랑을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늘 꿈꾸던 삶과 행복이 이제야 나에게 있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내 남편.
그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주위의 빛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오직 그의 모습만 내 눈에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루이제. 당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렉…….”
“앞으로 영원히 당신의 남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가 살짝 눈가를 접어 웃었고, 나도 눈물겨운 기분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듯이 가슴 벅차게 그에게 입술을 맞췄다.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남김없이 느낄 수 있었던 밤이었다.
10. 내 남편의 정체
“…….”
왜 갑자기 지금 그 편지의 내용이 생각난 거지.
하여간 시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밤 남편이 처음으로 해 준 이벤트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와 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시간을 보냈는지 떠올리기만 해도 배가 다 부른
느낌이었다.
‘아, 갑자기 아침 안 먹어도 될 것 같네.’
그렇게 내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제인.”
불쑥 튀어나온 내 목소리가 방문을 닫으려던 제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도 내가 왜 그녀를 불러세웠는지 순간 알 수 없었다.
“부르셨어요, 마님?”
제인이 문고리를 잡은 채 의아해했다.
나는 잠시 선 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시어머니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완벽하게 외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생활이 예전처럼 부유해진 지금, 시어머니는 제정신이었다.
제정신일 때 그녀는 꽤 예리한 면모를 보여 줄 때가 있었다.
나는 결국 제인을 향해 돌아서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볼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제인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히 마른침을 한번 삼킨 내가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인은…… 알렉을 오래 보아 왔지?”
“그럼요. 주인님을 모신지 벌써 10 년도 넘은걸요.”
“어쩌면 나보다 제인이 알렉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겠네.”
내 말에 제인이 살짝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윽고 용기를 낸 내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요즘 알렉에게 이상한 점 못 느꼈니?”
“……?”
제인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할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제인은 내가 무슨 의도로 알렉에 대해 묻는지 짐작도 안 가는 눈치였다.
“주인님께 이상한 점이요?”
문득 제인이 되묻는 말에 내가 대답했다.
“응. 혹시 알렉이 원래의 알렉답지 않다거나 하는.”
“죽을 뻔하신 탓에 기억을 조금 잃으신 거 말고요?”
“응.”
“그리고 말씀을 잘하시게 된 것과 성격이 변하신 것도 빼고요?”
“……응.”
그리 대답하며 한번 끄덕인 나는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말투와 성격.
그건 거의 전부가 아닌가?
외모가 같은 것 말고는, 하루아침에 말투가 변한 데다가 힘도 세지고 온 갖 능력이 생겼다.
심지어 이제는 그 무시무시한 황제 앞에서도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원래 그는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단 한 순간도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늘 침착하고 날카로운 데다가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에게 갑자기 마력이 생겼으니 이렇게나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게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까?
그의 선한 마음씨도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에게 느껴지는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알렉 그 자체였다.
그가 아닐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도 지어진 듯한 느낌에 내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한 기색으로 살피던 제인이 조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많이 달라지시긴 했어요. 여전히 말수는 적으시지만, 전처럼 못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말씀만 하시는 것 같고, 아니, 전에는 못하셨다기보다는-.”
“괜찮아.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죄, 죄송해요. 예전의 주인님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고, 그땐 주인님께서 그런 편이셨으니…….”
“제인 말이 맞아. 괜찮으니 계속 말해 줄래? 최근에 알렉이 뭔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은
없었는지.”
“네? 다른 사람이요?”
“……응. 혹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나 궁금해.”
나는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인은 갑자기 이런 말은 왜 하는 거지, 싶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니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알렉을 10 년이나 곁에서 본 제인마저 시어머니가 했던 의심 같은 건 조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시나 시어머니의 말은 기우일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옷에 난 보풀처럼 거슬리는 걸까?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침대에 앉았다.
제인에게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었다.
“실은 알렉이 진짜 알렉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님께서
그러시니 괜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조금 헷갈리네.”
“네? 대부인 마님께서요?”
“응.”
“직접 들으신 건가요?”
“제임스한테 편지를 전하게 하셨더라고.”
“……음,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닐까요?”
“그렇겠지?”
내가 제인을 응시하자 그녀도 나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쳤다.
제인은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대부인 마님의 편지인 건 확실한가요?”
“그분의 필체인 건 분명했어.”
“……그렇군요. 마님께서 필체를 못 알아보실 리는 없죠.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주인님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주인님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영혼이 달라진 게 아닌
이상이요.”
“…….”
영혼.
바로 그것마저 너무나 내 남편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머릿속이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주인님 몸으로 들어온다니, 너무 마법
같은 일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랬구나.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런데 혹시라도 주인님이 정말 다른 분이라면…… 너무나 큰일이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도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면 마님께 꼭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어, 고마워.”
그제야 내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인이 이렇게 확고하게 말해 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래도 시어머니에게 의사를 보내 봐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약간 치매 기운이 있으신 걸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제인에게 웃어 주었다.
“그럼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나도 대강 준비하고 식사하러 내려갈게.”
“예, 마님.”
제인이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뒤늦게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걸까?
저 묘한 분위기에 제인이 방을 벗어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님.”
“……응.”
문득 제인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은 안색이었다.
“마님께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해서요.”
“…….”
“주인님을 다시 뵌 후 평소에 즐겨 드셨던 음식은 하나도 찾지 않으셨어요. 전 그런 건 그냥 기억을
잃어버린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
“정말 다른 분 같긴 하네요.”
* * *
어휴, 심란해.
차라리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게 더 납득이 갔다.
아니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아들을 의심하는 병에 걸렸을지도 몰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알렉보다 시어머니가 더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알렉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사람이었다.
기억에도 손상이 생겼으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고기를 써는 내 나이프에 힘이 들어갔는지 조금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누가 시어머니 아니랄까 봐 정말 신경 쓰이게 한다니까.’
나는 이제야 내 남편과 서로 사랑을 고백했는데.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합니다, 루이제.’
‘…….’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
내 입꼬리가 조금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웃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입꼬리도 필사적으로 눌렀다.
만찬실 안에 나밖에 없었지만 괜히 누가 이런 내 모습을 볼까 봐 신경이 쓰였다.
차마 나도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붉어져 있을 듯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행복에 겨운 만큼 동시에 조금 위태로운 기분도 밀려왔다.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던 남편이 다른 사람이라는 상상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 언니 일어났네.”
그 순간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건지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철렁했다.
만찬실 입구 쪽에서 엘로이가 나를 향해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로이는 입구 밖을 살피더니 총총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 내가 표정을 정돈하며 대수롭지 않게 식기를 들었다.
“넌 식사했니?”
“당연하지. 북부에서는 대체 뭘 먹고 사는 건지 걱정했는데, 여기도 꽤 괜찮은 것 같아.”
“최고의 요리장들이니까 지내기에 부족한 건 없을 거야.”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어?”
“…….”
역시 봤구나.
나는 조금 태연한 태도로 테이블 냅킨을 들어 입가를 찍었다.
“그냥 내가 결혼을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침부터 혼자 갑자기?”
엘로이가 한껏 눈썹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내 말이 황당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얘는 어제부터 해리엇 옆에 딱 붙어 있더니 지금은 왜 날 찾아온 걸까?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님 어디 아프셨니?”
“응? 아니? 그건 왜?”
엘로이가 무구한 눈으로 의아해했다.
나는 다시 평온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제인이나 제임스 다음으로 엘로이에게도 물어볼 만한 일이었다.
“그냥 나한테 알렉이 알렉 같지 않다고 하셔서 의심병이라도 생겼나 싶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
엘로이의 반응이 무척이나 순수했다.
역시 우리 가문 사람들 중에 알렉의 정체를 의심하는 건 시어머니밖에 없는 게 분명했다.
엘로이는 그사이 내 말을 이해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같지 않지. 예전처럼 바보 천치같이 굴지 않잖아. 오라버니가 이제야 좀
평범해진 것 같아서 너무 좋아!”
엘로이가 활짝 웃더니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래, 내가 이 애랑 무슨 말을 할까.
그나마 엘로이가 전에 한 번 알렉의 정체를 의심한 적이 있어서 물어본 거였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버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알렉에게 말해 보면 되는 거잖아?
정말 내 남편 맞냐고.
* * *
“바로 이쪽 구역입니다. 북부에 새로운 번화가를 조성한다면 수도인 카나크에서 윌스브룩 성과 이어진
길의 초입이 제격이죠.”
발리가 윌스브룩 성 아래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알렉은 그 곁에 서서 아직 나무와 암석뿐인 황량하고 싸늘한 구역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어엿한 성주님 같네.’
발리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 옆에서 알렉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른 체격에 털이 달린 커다란 망토까지 걸치고 있기 때문일까?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광활한 북부를 제패할 유일한 영웅처럼 위엄이 흘러넘쳤다.
‘저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새삼스럽게 또 감동을 받은 내가 털 망토를 여미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새 건물을 다 짓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내 목소리에 알렉과 발리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쏟아졌다.
발리가 공손한 태도로 나를 반가워했다.
“오셨군요, 마님.”
“좋은 아침이에요, 발리.”
말을 마친 내가 자연스럽게 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리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출 듯이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 순간 알렉의 손이 발리의 얼굴을 가리듯 살며시 다가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에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닿았다.
어느새 내 시야가 알렉으로 가득 찼다.
“아침에는 잘 일어나셨습니까?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
나는 살짝 발리를 응시했다가 이내 다시 알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요. 식사도 잘 마쳤답니다. 성 안에는 아직도 구경이 한창이더라고요. 정말이지 넓은 성이
북적북적해서 좋네요.”
내 말에 발리가 살짝 놀란 듯이 시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저는 이제 손님들을 모시고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더 늦게 출발하면
해가 금방 져 버려서요.”
“그럼 그렇게 해요, 발리. 우리도 곧 따라갈게요.”
“예, 주인님, 마님.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발리가 허리를 숙이더니 이내 성의 입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발리에게는 외부인을 위한 최고의 북부 관광 코스를 계획해 달라고 미리 부탁한 참이었다.
앞으로 며칠간 나와 알렉 또한 북부에서 아직 가 보지 못한 곳들을 여러 군데 가 볼 예정이었다.
발리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알렉과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알렉이 아닐 수도 있을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문득 알렉이 나에게서 눈을 돌려 조금 전 발리가 가리켰던 곳을 응시했다.
“번화가가 다 조성되려면 3 개월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발리가 북부에서 괜찮은 인부들도 알아봐 준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고요.”
“그래요? 그것참 잘됐네요.”
“그전까지는 수도에 있는 시장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기대되네요.”
내 눈빛이 기대감으로 차오르자 알렉도 포근한 눈길로 나를 보며 내 손을 매만졌다.
브니엘의 의상점과 꽃과 잼,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북부인들에게 선보이기 직전이었다.
꽃을 재배할 리즈 농원과 잼 공장도 새로 조성하면 북부인들을 더욱 많이 고용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발리가 북부인들도 이러한 변화를 환영할 것 같다고 해서 더 기대되었다.
특히 북부에서 꽃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발리는 무척 흥분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성 아래를 넓게 내다보았다.
“얼른 시간이 지나서 이곳이 더 융성해졌으면 좋겠어요. 벌써부터 북부가 제 고향인 것처럼 애틋한 거
있죠?”
“잘될 겁니다. 절 믿고 편히 계셔 주십시오. 당신이 힘들게 해야 할 일도 없을 거고요.”
“난 이미 당신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는걸요. 늘 내가 당신을 챙겨 줘야 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당신에게
많이 기대고 있어요.”
말을 마친 순간 괜히 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원래 나는 그를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걱정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위험해지면 그가 날 구해 주었고, 매일 밤 외롭게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와 함께라면 황제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그는 안쓰럽고 나약한 남편이 아니었다.
“알렉.”
그 순간 내가 불쑥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그가 조금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가슴이 떨렸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에게 마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의심을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모든 것을 마력 때문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터놓고 대화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
“이렇게 당신이랑 나란히 서 있으니 감회가 남달라요. 너무 떨리고요.”
내가 마치 꿈꾸듯이 말하자 그가 약간 놀라듯이 대답했다.
“제가 당신보다 더 떨릴 것 같은데요. 루이제 당신을 부인으로 둔 사람의 기분을 당신은 절대 모를
겁니다.”
“……?”
그럴 리가.
나 또한 의아해하며 반박했다.
“당신은 당신을 남편으로 둔 아내의 심정을 모르잖아요. 얼마나 꿈만 같다고요.”
“지금의 저보다 더 좋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럴 리가요. 당신보다 내가 더 행복할 거예요.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잖아요.”
내 말에 그가 백기를 들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살짝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전 어차피 루이제의 행복보다 중요한 건 없어서요. 그게 제 행복이어도 루이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
이런 말 하면 반칙 아니야……?
나는 아직도 어제의 여운에 빠져 있는데 더 허우적거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애틋하게 그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렉. 우리 사이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중에서 당신이 가장 크게 달라졌고요.”
“……그랬죠.”
그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내 말에 수긍하듯이 작게 대꾸했다.
그가 변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인정하고 있었다.
“기억나요? 우리가 서로 어떤 애칭을 갖고 있었는지.”
“……애칭?”
“네.”
혹시 그가 기억할까?
우리에게는 내가 만든 애칭이 있었다.
나름 남편과 가까워지려고 결혼한 지 1 년쯤 되었을 때 만든 애칭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서로에게 불러 보지는 않았다.
그는 고민을 하듯 살짝 턱을 쓸더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기억이…….”
“…….”
혹시나 했는데 그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역시 기억을 많이 잃은 걸까?
그의 목숨을 돌려받은 대신 추억을 잃은 듯한 기분이라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앞으로 그와 함께 만들 날들이 더 기대가 되었기에 많이 속상하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기억 안 날 수도 있죠. 그래도 당신이 날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
그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문득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그의 자책을 덜어 주듯 내가 애써 웃어 보였다.
“사실 당신이 그 여관에서 죽었다가 깨어났을 때 나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거든요. 날 보는 눈빛이
너무 초면이어서요.”
“…….”
“그래도 당신이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잊어버리는 것쯤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
“그런데 당신은, 그냥 조금 기억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지만…… 그게 아닌 거죠?”
“……예?”
나는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가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걱정할까 봐 지금까지 크게 내색을 안 했던 거 아닌가요? 나는, 당신이 정말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뭐라고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그를 다른 사람 같다고 느끼는 건 기억이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보여 주었던 여러 변화는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원래 좋아했던 음식이나 책, 편하게 입었던 옷들을
모두 찾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나는 알렉이 여전히 내 남편 알렉이 맞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붙잡으며 간절하게 그를 응시했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 줘요.”
“…….”
“당신, 이미 나를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거죠?”
* * *
‘갑자기 뭐지.’
알렉은 느닷없이 마차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동안 정체를 들킬 위기가 있을 때마다 예상외로 수월하게 넘어갔기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지만, 요즘 그는 자신이 정말 알렉시스라도 된
것처럼 살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이세계에서 죽었다고 하여 돌아올 일도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어차피 그도 이 세계에 차츰 적응을 하게 되었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루이제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그의 가슴에 쌓이다 못해 터져 나올 지경이라 어젯밤 그런 고백들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루이제가 다른 남자의 여자라는 사실과 그에 대한 죄책감은 이미 잊어 버렸다.
그는 그녀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이런 것을 물어볼 거라고는 미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당신, 이미 나를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거죠?’
어차피 한 번은 듣게 되었을 말.
이미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음독자살을 시도한 이후 조금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한 뒤였다.
원래 공작가에 있던 사용인들까지 함께 살게 되면서 차라리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남편이 기억을 약간 잃은 것과 가족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린 건 천지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자라면 기억을 잃기 전과 후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입술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알렉은 애써 덤덤하게 소리 냈다.
“……예. 루이제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가 여관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
루이제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이었다.
언젠가 그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녀가 알게 될까?
지금이야 겨우 기억의 문제가 드러났을 뿐이지만, 그가 알렉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루이제가 조금 놀란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거였어요.”
“……예?”
이미 의심을 사고 있었다고?
대체 누가?
그는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이 루이제의 안색을 살피는 순간,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시 깨어났을 때 당신이 누군지도 몰랐겠네요?”
“…….”
알렉은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잘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알렉은 조금 체념한 듯이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울을 보고 알긴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저의 모습과 같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았죠.”
“그럼 나나 다른 가족들은 알아보지 못한 건가요?”
“…….”
그에게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누군지 놀랍고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루이제가 다시 생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은 잠깐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다시 내리며 조금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제 스스로도 많이 놀란 상태였습니다. 아무런 경황이 없었죠. 루이제나 어머니를 모른 척하지도
못했습니다.”
“……몰랐다는 거네요.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났나요?”
“…….”
차마 그렇다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그의 침묵을 수긍으로 알아들었는지, 루이제의 두 눈동자가 조금 아쉽게 가라앉았다.
상처.
그녀는 조금 상처를 받은 듯했다.
알고 보니 남편이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만약 반대로 루이제가 그를 다 잊어버린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잠깐 상상을 해 본 순간,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기억에서 남김없이 지워진다니, 생각보다 훨씬 가슴이 시렸다.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을 루이제도 비슷하게 겪고 있는 듯했다.
문득 루이제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야 다 이해가 가요. 그동안
기억이 없어서 당신이 정말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겠어요.”
“…….”
루이제가 그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따스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런 걱정과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던 죄책감과 알렉시스를 향한 묘한 질투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딘가로 튕겨 나간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곁에서 겉돌고 있었다.
루이제가 재차 따뜻한 시선으로 말했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
“혹시라도 예전 일이 기억날 수도 있잖아요. 우리의 애칭이나, 당신이 나한테 꽃이라고는 포인세티아밖에
주지 않았던 일들 같은 거요.”
“……제가 그랬군요.”
그는 앞으로도 평생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진짜 알렉시스가 아니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알렉시스였다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들었다.
계속 다른 사람으로 루이제와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의 욕심일까?
루이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알겠어요. 그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앞으로 하나씩 알려 줄게요. 별로
많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
“그냥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래도 당신이 날 기억하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을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
루이제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려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조금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나 이 순간 알렉은 확실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짜 알렉시스의 상태로는 루이제와 계속 함께할 수 없다.
차라리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 * *
‘……예. 루이제가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제가 여관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뭐?
진짜 기억을 다 잃었다고?
심지어 내 얼굴과 이름조차 까먹었을 정도로?
설마 했는데 역시나 싶었던 사실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있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었다.
‘정신 차려, 루이제.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디야.’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람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북부 관광과 메리엔을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득했다.
다시 깨어난 그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낯선 여자.
당시 그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이야 그때와는 달리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알렉이, 내가 아는 알렉이 맞다고 해야 하는 걸까?’
에이, 아니야.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어도 알렉은 알렉이었다.
이미 그가 날 사랑하고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이상할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이 낯선 기분을 애써 모른 척하며 메리엔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한창 화기애애하게 사담을 나누다 보니 첫 관광지에 도착했다.
발리가 가장 먼저 우리를 데려온 곳은 얼음 동굴이었는데, 온갖 예술적인 고드름과 얼음 기둥으로 가득한
환상적인 곳이었다.
“세상에.”
“겨울의 여왕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곳이네요.”
“우리 릴트 제국에 이런 곳이 다 있었다고요?”
사람들이 연신 감탄을 쏟아 내는 동안 나 또한 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발리가 설명해 주는 내용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천연 동굴임에도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장인이 조각한 것처럼 곳곳에 훌륭한 모양의 얼음덩어리가
존재해 있었다.
특히 얼음으로 된 커다란 장벽 사이를 지나갈 때는 정말로 얼음 왕국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이제.”
내 곁에서 함께 감탄을 금치 못하던 메리엔이 대뜸 심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정말 여긴 미쳤네요. 아니, 미쳤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윌스브룩 성과 이 얼음 왕국만으로도
북부에 와 볼 만한 가치는 차고 넘쳐요.”
“……저도 지금 너무 놀라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답니다.”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 얼른 수도에 가서 이 북부의 찬란함을 다른 분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 우리끼리만 보기에는 너무 아쉽네요. 그리고 제가 이곳의 영주 부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여기는 정말……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경험! 정말 딱 북부에 어울리는 말이네요. 너무 감격스러워요.”
메리엔은 심장이 떨리는 듯 가슴을 꾹 눌렀다.
나도 이 얼음 왕국에 압도되어 정신을 놓지 않으려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누군 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침 그도 이 커다란 동굴 안을 살 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알렉.’
그도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표정을 잘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이었다.
잠시 그를 보던 내가 이내 입가를 끌어 올려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뭐지?
이 어색함…….
희한하게도 나는 그에게서 조금 낯선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브룩스가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잠시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알렉은 자신이 알렉이었다는 사실도 대부분 잃어버렸어.’
그의 습관, 성격, 취향, 말투.
원래 기억을 잃으면 자신의 몸에 배어 있었던 것들도 모두 없던 것처럼 증발되는 걸까?
분명 알렉은 알렉인데, 기억을 다 잃었다고 해서 왜 이리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시간이나 더 둘러보고 나서야 관광이 끝이 났다.
방금 전까지 대체 뭘 보고 나온 건지 기분이 얼떨떨할 정도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황홀해하는 사이 사용인들이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장작을 피우고 간단히 도시락을 먹을 계획이었다.
힐긋 다른 쪽을 보니 알렉의 주위에는 브룩스를 비롯한 남자 귀족들이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에는 메리엔의 남편도 함께였다.
“메리엔.”
“네?”
같이 불가에서 몸을 녹이던 메리엔이 동그랗고 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라도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뭔데요? 루이제가 저한테 궁금한 거라니 무슨 이야기일지 정말이지 기대가 되네요.”
메리에이 반가워하자 나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만약에…… 메리엔의 남편이 사고가 나서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네?”
“그래서 메리엔까지 다 잊게 되면, 마음이 많이 아프겠죠? 만일 이런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서요.”
“아,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음…….”
“…….”
메리엔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잠자코 기다렸다.
메리엔은 남편과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두 사람 다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부부라 딱히 의견이 부딪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했었다.
과연 메리엔은 어떻게 생각할까?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메리엔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남편이 기억을 잃어서 나까지 잊어버렸다는 거죠?”
“네.”
“그건 정말 비극이네요. 남편이나 나나 너무도 불쌍한 일이에요.”
“…….”
“그래도 남편이 우리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다시 아껴 주려고 노력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절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서로 힘을 합쳐서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기억을 다 잃었어도요.”
메리엔이 말을 마치며 나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쩐지 조금 할 말을 잃은 기분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메리엔의 말이 정답이었다.
기억을 잃은 남편이 날 생전 초면의 여자라고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서로 노력해서 다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가 기억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 낯선 기분을
느끼는 걸까?
무언가, 무언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 아직도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 * *
해가 지기 전에 북부 관광은 끝이 났다.
땅이 넓은 곳이라 얼음 동굴만 갔다 왔는데도 저녁이 되었다.
북적북적한 저녁 만찬이 끝나고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무렵.
나는 적당히 차려입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성의 지하에서 하루 종일 홀로 있었을 리디트 황자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리디트 황자에게 줄 선물도 한가득 챙겼다.
‘후후후, 좋아하겠지?’
일곱 살 남자아이는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많이 챙기고 봤다.
이 중에 하나는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지하로 내려갔다.
주위에 누가 있진 않은지 살피며 조심히 움직였다.
알렉을 비롯한 남자들은 2 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듯했다.
해리엇과 기사들은 북부에서 그림자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쯤 자신들의 방에 있을 게 분명했다.
‘하여간 제일 찜찜한 것들이야.’
그래 봐야 알렉 한 명을 당해 내지는 못할 테지만.
오늘따라 너무도 많게 느껴지는 계단을 모두 내려간 나는 지하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장치를 눌렀다.
리디트가 벌써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혼자서 무서워하진 않았을까?
별로 내색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지만…….
이윽고 지하의 홀을 지나 복도를 걷자 새가 노래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갸웃하며 더 다가간 나는 그 소리가 리디트의 말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음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문득 예전의 알렉이 생각나 코끝이 시렸다.
“똑똑.”
이윽고 리디트의 방 앞까지 다가간 나는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렸다.
내 소리에 리디트가 동그란 눈을 들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바닥에는 온갖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리디트가 그 한복판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저절로 내 입가가 치솟았다.
“안녕하세요.”
“……부인!”
리디트가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금세 일어섰다.
나는 리디트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낮췄다.
아이의 손 하나를 잡아 보니 작고 말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잡아 주고 싶은 손이었던지.
괜스레 울컥하여 숨을 크게 들이쉰 순간 리디트의 눈동자도 조금 촉촉하게 일렁였다.
나를 반가워하는 눈치라 다행이면서도 안쓰러웠다.
“잘 있었나요? 더 일찍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되었네요.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어요.”
내 말에 리디트는 뭐라고 말할 듯이 동그란 입술을 벌렸다가 금세 다시 다물었다.
할 말을 참는 느낌이라 내가 살짝 갸웃했다.
“잠이 잘 안 왔나요?”
그제야 리디트가 조금 힘겹게 소리 냈다.
“……그러타.”
“그럼 마침 잘됐네요. 제가 재워 드릴게요. 그 전에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답니다.”
“……?”
리디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내가 바닥에 앉아 아이를 끌어당겼다.
내 품 안에 앉히자 리디트의 작은 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나는 개의치 않으며 갖고 온 선물들을 풀어 보았다.
아이의 작은 몸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따스해서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이런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인하고 알렉에게 황자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물어봤는데 다들 책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책 말고 이런 건
어떠세요?”
내가 주머니 하나를 풀자 바닥으로 나무 블록이 쏟아졌다.
블록을 맞춰 여러 모형을 만드는 장난감이었다.
리디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답니다.”
다음으로 내가 연 상자에는 온갖 사람 모형이 가득했다.
체스와 유사한 게임이었는데, 황궁의 여러 직책과 권력 구도를 이해하기에 이만한 게임도 없었다.
다만 특별한 건 현재 황궁에 있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
황궁뿐만 아니라 사교계 버전도 있었는데, 내가 만든 특별한 인형들이었다.
리디트가 작은 손을 뻗어 나무 인형 중 하나를 집은 순간이었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순간 들려선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엘로이가 문 앞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 * *
뭐?
어떻게 기억을 잃기 전에 보기만 했던 요리를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어?
그게 말이 돼?
심장이 더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남은 걸까?
아니면 내 얼굴과 이름이 책과 요리보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 걸까?
나는 다시 머리를 한 번 흔들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발이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책과 요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잘 탔고, 춤도 무척 능숙했다.
그게 다 마력 때문이라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에 또 어떤 마력이 사람의 위치를 알려 주고, 온갖 요리의 레시피도 알려 줄 수 있겠어?!
그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시어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 * *
‘어쩌지.’
알렉은 영주의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얼음 동굴을 관광하고 성에 돌아와 저녁 만찬이 있었다.
그 이후에 브룩스를 비롯한 사람들과 북부의 독한 술을 나눠 마셨다.
게임에 지는 사람이 원샷을 하는 내기를 했는데, 알렉은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술을 마셔야 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도무지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제가 나를 어색해한다.’
그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이후부터였다.
눈이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눌 때 묘하게 그를 낯설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에 알렉은 술에 취할 수도 없었다.
맹독처럼 쓰고 강한 북부의 술도 루이제에 대한 생각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치유 스킬이 알코올을 해독하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스킬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창가를 서성이던 그는 불쑥 걸음을 멈췄다.
‘설마.’
설마 그런 걸까?
오늘 온종일 루이제의 표정에서 엿보였던 어색함과 생소함은 단순히 그가 기억을 다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심각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
알렉은 턱에 대고 있던 자신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녀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억을 반밖에 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그가 알렉시스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 버렸으니 오히려 그는 거짓말을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그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둘러대듯 했던 말들은 그가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의 머릿속에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리디트를 찾았던 일부터 윌스브룩 성으로 향하는 길을 공작가 사람들과 함께 처음으로 지나갔을 때가 특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
‘그래.’
하긴 이제 들킬 때도 되었지.
그의 정체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 막다른 길에 내몰린 것처럼 의심을 받는 순간이 올
거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루이제 말로는 이미 사람들이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건 누구일까?
어머니와 엘로이, 그리고 사용인들까지 짐작 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알렉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동안 나름 철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는 두말할 여지도 없이 들켰다.
루이제는 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그가 지금껏 했던 말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그를 보면서 묘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던 루이제의 얼굴이 바로 그 증거였다.
‘……돌겠군.’
미간을 짚고 있던 손을 내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망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루이제가 그의 정체에 대해 확실히 알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루이제는 누구보다 알렉시스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애틋해하고 사랑하는 건 그가 알렉시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지금의 그가 보여 주는 능력과 여러 애정 표현에 무척 흡족해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가
알렉시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루이제가 모든 사실을 알고 난다면.
그녀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띠링!
순간 들려온 경쾌한 알림음에 알렉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눈을 들어 보니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퀘스트 발생!]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M[당신은 남편 전용 스킬 중 ‘초보 남편의 간지럼’과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아내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애정도와 경험치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합니다!]
[퀘스트 보상]
[경험치(?), 애정도(?), 신뢰도(?)]
[퀘스트 패널티]
[12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윌스브룩 성이 무너집니다.]
“…….”
알렉의 턱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벌어졌다.
퀘스트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의 말들에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어느새 얼어붙은 사람처럼 나는 미동도 하지 못했고, 주위에 떠도는 먼지나 촛불이 타오르는 미세한
소리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내 사방이 온통 진공 상태가 된 듯한 이 적막함.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득함…….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이 아연한 상태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나에게 여러 번 자신의 진실에 대해 넌지시 털어놓았다.
그는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내 남편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지?
내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모든 의혹이 다 해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리디트와 윌스브룩 성의 위치도 알고 있을 만큼 이 세계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 * *
* * *
“알렉.”
나는 그냥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그는 잠자코 내가 하는 양을 응시했다.
그가 약간 긴장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애써 그런 기분을 모른 척하며 나는 살짝 그를 끌어당겨 허리를 안았다.
그의 품으로 조금 더 머리를 기대자 그도 내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루이제.”
그의 낮은 저음이 내 온몸에서도 울렸다.
가벼운 포옹일 뿐인데도 내 전부를 안은 것처럼 더 바랄 게 없었다.
이윽고 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 더 이상 비밀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난 당신을 믿어요.”
나는 조금 더 그를 간절히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만약 내가 그에 대해 뭔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는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게 자신할 수 있었다.
* * *
‘퀘스트 발생!’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루이제가 잠든 지 꽤 지난 시각.
알렉은 침대에서 나와 시스템 창을 다시 한번 열어 보았다.
루이제는 얼음 동굴에 갔다가 리디트와 놀아 주기까지 해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잠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 10:38:47]
‘……하.’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알렉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안색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대체 이 퀘스트는 뭐야?’
그의 스킬 중 ‘초보 남편의 간지럼’과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루이제에게 사용하라니.
그걸 루이제에게 대체 어떤 ‘올바른 방법’으로 쓰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경험치와 애정도가 필요했다.
황후를 사역령으로 포섭한 이후 경험치가 20 억이나 올랐지만, 아직 애정도를 그만큼 얻지 못해 레벨이
크게 오른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퀘스트에 실패하면 받게 될 패널티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진짜일까?
아무리 퀘스트라고 해도 그의 새 터전이 된 윌스브룩 성을 무너뜨린다니.
선뜻 믿기지 않았다.
‘뭐 이딴 퀘스트가…….’
살짝 미간을 세운 그는 불쑥 무언가가 떠올랐다.
수북하게 쌓인 먼지와 거미줄, 온갖 벌레들로 가득했던 윌스브룩 성을 시스템이 깔끔하게 변모시키던
모습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시스템은 윌스브룩 성에 마음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무슨…….’
불쑥 전생에 겪었던 여러 퀘스트 패널티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설마 싶었지만 늘 모든 말도 안 되는 패널티들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번에도 12 시간 안에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성이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알렉은 우선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이 퀘스트를 어떻게 성공시킬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보 남편의 간지럼’ 스킬은 정말 간지럽히는 것처럼 아주 미세한 전류로 운용한다면 사람에게도 사용
가능할 것 같았다.
루이제에게 간지럼 스킬을 쓸 수 있을까?
알렉은 살짝 몸을 돌려 저 멀리 잠들어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그는 그녀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루이제가 아직까지는 크게 추궁을 하지는 않았지만 잠들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은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을 믿어요.’
[틀렸습니다!]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을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
깜짝 놀란 알렉의 눈이 커졌다.
틀렸다고?
따뜻하게 해 줄 목적으로 스킬을 썼는데 그게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니?
알렉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갑작스레 머리가 너무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이쯤 되니 설마 ‘올바른 방법’이 그런 방법을 말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살다 살다 이런 변태 같은 시스템을 다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런데 지금 루이제와 그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 그런 방법이 과연 가능할까?
알렉은 다시 고개를 들어 현재의 애정도를 확인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게 있었다.
루이제가 그의 정체에 대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음에도 그의 애정도는 그대로였다.
다만 신뢰도는 오늘 하루에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치 주식 그래프처럼 붉은색, 파란색으로 요동치는 수치를 보니 그녀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정도는 오르거나 떨어지지도 않으며 굳건한 수치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그는 더 긴장을 하게 되었다.
‘……애정도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깊은 한숨과 함께 알렉은 다시 루이제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놀라 굳어 버렸다.
언제 깬 건지 그녀가 조금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일어나 있어요? 벌써 아침인가요?”
“아, 아뇨. 아닙니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랬군요. 나도 잠을 좀 설쳤나 봐요.”
“…….”
알렉은 숨을 죽이듯 루이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그녀의 눈동자는 몽롱했다.
그 순간 신뢰도가 다시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기만 해도 믿음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아득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신뢰도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루이제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흔들리더니 신뢰도가 다시 떨어졌다.
그는 애써 손에 힘을 주며 살짝 고개를 내렸다.
루이제가 그를 밀어내려고 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두근거렸다.
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기회는 지금뿐.
오늘 밤을 놓치고 내일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는 10 시간이 다 지나 버릴 것이다.
그녀는 크게 경직된 눈으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지자 그의 눈꺼풀도 살포시 감겼다.
꼭 첫 키스를 할 때처럼 생소하고 낯선 분위기가 흘렀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려 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를 바로 밀어내지는 않았다.
알렉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턱을 벌렸다.
그녀와 입맞춤을 얼마나 했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감각이 평소보다 수십 배는 예민해진 것처럼 여린 입술의 촉감이 눈에 다 보이듯이 느껴졌다.
평생 갖고 싶은 입술이 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축하합니다!]
[‘초보 남편의 뜨거운 손길’이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용량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책정됩니다!]
“…….”
과연 스킬을 쓰자마자 떠오른 상태창에 알렉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역시나 저 ‘올바른 방법’이 어떤 분위기에서의 방법을 말하는 건지 지금에야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초보 남편의 간지럼’ 스킬 또한 이런 식으로 사용해야 퀘스트에 성공할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뜨거운 손길을 이어 나갔다.
감히 만질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하게 느껴지는 몸이 그의 손 아래에서 아찔하게 반응했다.
“……!”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평범한 상대의 체온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온도와 손길이었다.
그의 열기가 그녀의 살결 곳곳을 누르고 지나가며 매만졌다.
맨 피부로 느끼기에는 조금 자극적일 것 같은데, 그녀는 어떨까?
“뜨겁습니까?”
그 순간 그가 조금 심각하게 물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금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긴장감으로 한껏 굳어진 몸이 그에게까지 빠짐없이 전해졌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벅차게 호흡을 하며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의 열기에 그녀의 머릿속까지 뭉근하게 녹아내린 듯이, 눈빛이 몽롱해졌다.
이윽고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요. 그런데…….”
“……”
“더 뜨거워도 될 것 같아요…….”
루이제가 숨을 토해 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의 열기가 너무 버겁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알렉은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차츰 그의 전신으로 퍼뜨렸다.
그의 몸에 비하면 루이제의 체온은 너무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금세 그의 열기가 간절해진 듯, 루이제가 그에게 몸을 붙이듯이 다가왔다.
그도 그녀를 단단한 팔로 바짝 끌어안았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지나 척추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갔다.
열기 가득한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루이제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보다 더 편하게 녹아내릴 수도 없을 만큼 그녀는 점점 그에게 온몸을 맡겼다.
머릿속까지 함락되듯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열기를 갈구하듯 그에게 매달리듯이 밀착했다.
너무 뜨거울까 봐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정말 괜찮은 듯한 반응에 알렉은 내심 놀랐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이 열기를 바라고 있었던 듯했다.
설마 진작 침대에서 이 스킬을 썼어야 했던 걸까?
루이제의 살결이 빈틈없이 그에게 달라붙자 그의 심장도 뜨겁게 달구어졌다.
이보다 더 뜨거운 가슴으로 그녀를 안는다면 둘 다 녹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성은 사라지고 감각만 남는 듯했다.
“나 근데.”
“…….”
불쑥 루이제가 힘겹게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이미 가쁜 호흡 소리로 귓가가 어지러웠다.
“당신한테 안겨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분이 이상해요.”
“…….”
루이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왜 이상하지 않을까?
알렉은 지금 그녀가 그를 믿기 위해 온 마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길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두 눈은 루이제의 눈을 더욱 빼곡하게 담았다.
문득 지금이 아니면 그의 진심, 알렉시스로서가 아닌 원래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한테 제가 의심스러울 거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
“그런데 이것만은 확실하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뭔데요?”
그녀의 목이 조금 뒤로 넘어갔다.
이제는 목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힘이 모두 빠져 보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그의 열기에 저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알렉은 루이제의 두 눈을 더욱 선 명하게 응시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진심이었다는 거, 늘 당신에게 잘해 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는 거, 그리고
혹시라도 당신이 날 거부해도…… 언제나 당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
루이제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꼭 그녀에게만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알렉은 알렉시스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과연 그녀가 그를 알아봐 줄까?
알아본다면 당연히 그가 사기꾼이라며 큰 충격을 받을 텐데,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것도 우스웠다.
문득 루이제가 약하게 숨을 토해 냈다.
“……하!”
띠링!
[축하합니다!]
[‘초보 남편의 간지럼’이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용량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책정됩니다!]
“…….”
순간 강한 자극을 받은 듯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짜릿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도 알 수 있었다.
혹시 싫진 않았을까?
이로써 윌스브룩 성이 무너지는 건 모면한 것 같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녀는 분명 스킬의 전율에 휩싸였을 테니까.
띠링!
[축하합니다!]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스킬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 보세요!~]
“…….”
시스템 창의 글자들이 빠르게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레벨을 알리는 창과 여러 가지 스탯들이 빠른 속도로 숫자를 바꾸며 상승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줄곧 루이제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올리기도 힘든 레벨이 갑자기 추가로 스무 단계나 올랐지만, 순식간에 뭐가 지나간 건지 다 확인할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아연한 표정으로 루이제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방금 뭐가…….”
“…….”
“뭘 한 거예요……?”
“…….”
쿵쾅쿵쾅.
루이제의 가슴이 너무도 크게 울려 그녀의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신뢰도는 숨을 죽인 듯이 아까부터 조용했고, 애정도는 스킬 때문인지 계속해서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애정도가 오를 수가 있는 걸까?
루이제가 마른침을 삼키자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안쪽을 매만졌다.
“……!”
그녀는 어딘가에 감전된 듯 몸을 살짝 떨었다.
알렉은 방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하나 더.”
“…….”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저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주십시오.”
“……하!”
루이제가 약간 턱을 젖혔다.
폭죽이 터지듯 그녀의 눈동자에 짧은 섬광이 스쳤다.
그녀의 몸속을 자극한 그의 스킬이 비쳐 보인 것이었다.
* * *
아, 어떡하지?
온몸이 떨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손길 아래에서 나는 마치 영혼이 휘어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이게 뭐야……?’
이런 전율은 처음 느껴 보는데.
지금껏 그와 함께 밤을 보내면서 희열에 몸서리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를 덮치는 그 풍랑의 크기도 집채만 한 파도보다 더 크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더 커다란 전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차원이 다른 감각에 내 숨이 또다시 턱 막혔다.
눈앞에서 하얀 불꽃이 튀어 올랐다.
미친 거야?
이건 좋다는 느낌을 뛰어넘은 것 같아…….
나는 멍하니 이 말도 안 되는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가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한 힘을 쓰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의 체온으로는 느낄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열기 말고도 이런 아찔한 자극까지 쓸 생각을 하다니.
“……아!”
둥글게 누르는 촉감에 내 감각이 다시 예민하게 깨어났다.
전류가 튀어 오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또 내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신음이 터질 수도 없게 온몸이 오싹하게 얼어붙었다.
당혹스러울 만큼 소름이 끼쳤지만, 희한하게도 계속 느껴 보고 싶은 자극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느낌이 있을 수 있어?
이게 내 안에서 벌어지는 희열이 맞을까? 이 정도의 감도가 내 속에 묻혀 있었다고?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쾌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 알렉.”
겨우 내뱉은 내 목소리가 그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그의 뜨거운 손은 식지도 않으며 계속해서 내 몸을 데웠다.
따뜻하고 깊은 수심에 잠긴 것처럼, 내 의식이 녹아내렸다가 또 화들짝 놀라 소스라치기를 반복했다.
‘이건, 이건 도무지 못 버티겠어…….’
내 온몸의 세포와 본능이 그의 자극에 반응하며 몸서리쳤다.
몸을 움직이거나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이전까지의 내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의 이 순간만 내 인생에 남은 것 같았다.
오늘은 뭘 먹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어딜 가고 누굴 만났었지?
기억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마침내 그가 내 안으로 다가왔다.
얼른 더 깊숙해졌으면 하는 열망이 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 손끝이 그를 더 바짝 끌어당기고, 다리는 그의 몸을 휘감았다.
더는 참을 수 없는 내 안의 무언가가 그를 강렬히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어딘가로 떠나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서 지워질 정도로 저 멀리 가 버리는 것이다.
“아, 하아.”
내가 벅찬 숨을 토해 냈다.
무언가가 강하게 밀려오는 느낌과 함께 그의 입술이 내 눈가에 내려오며 숨결을 흩뿌렸다.
“루이제…….”
그의 한숨은 정신이 현란해질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 애타는 느낌에 내 머릿속이 더욱 새하얗게 타올랐다.
나는 누굴까?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지?
“루이제.”
그가 다시 한번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끝까지 장악했다.
“……!”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앞으로 느끼게 될 감각들을 나도 예상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어떤 밤보다 가장 열렬하고 찬란할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서 피어오르던 열기와 전율은 손끝에서만 타오르는 게 아니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마찰이 내 안을 달구기 시작했다.
이런 초월적인 자극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절대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까지 그가 치미는 것 같았다.
마력이 침대에서도 유용할 줄이야……!
“루이제.”
그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눈앞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탓인지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람이 강한 자극을 느끼면 심장이 터져 죽지 않을까?
내 의지를 벗어난 숨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흩날렸다.
미칠 것 같은 자극 속에서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 합니다.”
“…….”
그래.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나 잘 알겠어.
미쳐 버릴 만큼 잘 알 것 같아.
“아, 알렉.”
내가 그의 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끝나 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눈앞이 번쩍거렸다.
오늘따라 그는 힘이 넘쳤고 정성이 가득했다.
심지어 마력까지 쓰면서 나를 만족시키며 환락으로 이끌었다.
이런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
“하아…….”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가 내 안쪽과 위로 쏟아졌다.
내 목덜미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흩어졌다.
그를 안고 있던 내 팔이 스르륵 미끄러져 침대 위로 떨어졌다.
손끝까지 구석구석 다 힘이 풀려 버렸다. 아무것도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축 늘어졌다.
“루이제.”
그가 나를 꼭 감싸 안으며 품에 넣었다. 내 몸이 나부끼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아이가 어미에게 안기듯 완벽한 안온함이 나를 감쌌다.
“알렉.”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리 냈다.
그와 내 숨소리가 거칠게 귓가를 에워쌌다.
심장도 아직 격한 정사의 여운을 느끼며 쿵쾅거렸다.
누구의 심장 소리가 더 큰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깊게 포개더니 조금 떨어졌다.
가느스름한 눈빛이 어딘가 무척 그윽하고 고혹적이었다.
“아프진 않았습니까?”
“…….”
아니.
나는 뭐라고 말할 힘이 없어 대답을 속으로 대신했다.
그가 다 날려 버린 내 의식과 영혼이 이제야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목이.”
그 순간 내가 힘겹게 말했다.
“목이 아프고 마르네요…….”
너무 헐떡이고 소리를 질렀나 봐.
깊숙한 목 안까지 다 말라 버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내 말에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조금 놀란 듯이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사용인들을 부르느니 그가 물을 가져오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내 방에 물병이 있긴 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1 층까지 다녀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는 내 갈증이 무척 걱정된다는 얼굴로 빠르게 옷을 걸치더니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금세 허전함과 적막함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열기는 아직도 내 온몸에 남아 나를 데
우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무거운 머리를 받치며 몸을 일으켰다.
입고 온 옷을 찾아 겉에 걸쳤다.
아득했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후폭풍이 크게 밀려오는 밤은 처음이었다.
아직 내 몸 곳곳에는 그가 자극했던 감각들이 남아 있었다.
살면서 두 번은 못 겪을 것만 같은 기묘하고도 대단한 쾌락이었다.
지금까지 그와의 관계를 모두 무색하게 만들 만큼 굉장하고 충격적이었다.
마른침을 겨우 모아 삼킨 순간, 불쑥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었지……?
오락가락하고 갈팡질팡했지만, 결국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믿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저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주십시오.’
“…….”
나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왜 이제야 떠오르는지 모를 그의 말이 기억났다.
“…….”
차라리 처음부터 그를 믿어 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를 믿었던 결과가 지금 어떤 상황을 초래했는지 생각하니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전 느꼈던 쾌락은 마치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한없이 죄짓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내 스스로를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알렉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뭔가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 또한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죠.”
“……!”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는 불안한 나와는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요……?”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며 힘겹게 물었다.
그가 내 남편 알렉이 아니란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현기증이 나 나는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알렉시스와 제 외모가 너무도 같아서 또 다른 제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당신의 남편이 된 것도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요.”
“……?”
다른 세계?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금세 말을 이었다.
두 눈은 나를 향한 채였다.
“혹시라도 제가 알렉시스의 몸으로 들어온 이유가 있는 건지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저와 알렉시스의 연관성을 잘 모르겠더군요.”
“…….”
“지금으로서는 제가 알렉시스가 아니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달팽이관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순간 귓속에서 쨍한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입에서 알렉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두려워했던 순간을 이렇게 맞닥뜨리고 나니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내 숨도 멈추고 온 세상이 다 무음의 세계가 된 것처럼 적막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그에게, 왜 나에게……?
이제야 겨우 그와 행복해지는 건가 싶었는데, 그가 알렉이 아니었다니.
지금까지 내가 그와 함께하며 웃고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순간들이 이렇게나 내 마음속에 가득한데.
그런데 그 안에 내 남편은 없었다.
내 사랑은 길을 잘못 알고 있었고, 행복도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가 죽어 버린 게 더 나을 것 같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그럼 내 진짜 남편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는 내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을까?
정말로 알렉은 이 세상에 없는 거야? 그러면 대체 어디로 간 건데?
내 물음에 그가 대답할 듯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윽고 조금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독을 마셨던 그날 죽었습니다. 이 몸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 거고요.”
“…….”
죽었다고?
정말 그날 죽은 거구나.
결국 내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솟구쳐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때일수록 차갑게 이성을 되찾고 싶은데 눈물이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눈앞의 남자가 다른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져 버려서 진짜 내 남편은 얼마나 슬퍼했을까?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몰라줘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죽음 이후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애도도 받지 못했다.
부인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고 희희낙락 즐거워했다.
그가 하늘에서 얼마나 서글퍼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당신이, 그래도 당신이…… 내 남편 알렉시스가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아무리 이상하고 의심스러워도 믿고 싶었다고요.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라면, 내가 정말로…… 그날
남편을 잃은 게 맞는 거잖아요.”
“…….”
“나는 정말로 당신을, 아니 내 남편을 두 번이나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로 당신이 알렉이
아니라고요?”
“…….”
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내 남편은 정말 죽은 건가요? 그럼 지금까지 당신은 왜 내 남편인 척 하면서 함께 있었던 거죠?”
나는 그와 함께 부부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다.
아이만 낳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생전 초면의 여자와 함께 살면서 지켜 줬던 걸까?
그동안 나를 속인 것에 대한 원망이 치미는 한편 의문도 솟구쳤다.
그는 잠깐 침묵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숨기지 않을 듯이 입을 열었다.
“황제를 죽이려면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뭐라고요?”
“처음에는 저도 경황이 없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이 세계가 저에게는 낯선 곳이어서 섣불리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고요.”
“…….”
“그런데 황제를 죽이려면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집도 없는데 여자들뿐인 당신 가족들을 모른 척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요.”
“…….”
그는 덤덤하면서도 진중하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심장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미안해서.
진짜 내 남편을 버려두고 가짜 남편에게 푹 빠져 있던 내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고, 죽은 것도 모자라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눠서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저 남자는 내가 그의 손길에 아찔해하고 쾌락에 잠길 때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방금 전까지도 그에게 파묻혀 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고 허탈했다.
“루이제.”
문득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소스라치듯이 그에게서 조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왜 그는 그가 아닌 건지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그의 죽음을 두 번이나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와 나는 부부로서 단 한 번 행복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나 버렸다.
아니, 이미 반년도 더 전에 그의 생명은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내 결혼과 삶도 사랑도 모두 망해 버리며 끝이 났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 한번 해 보지도 못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해 줬었더라?
‘알렉.’
‘다 괜찮을 거예요. 상심하지 마세요.’
후두둑.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바닥을 빗물처럼 적셨다.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36 화
* * *
어느덧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 어렴풋한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몇 시쯤 되었을까?
사방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내 방으로 돌아와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천장만 보며 눈을 깜박였다.
눈이 아프고 뻑뻑한 느낌이 들자 그제야 내가 밤새 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울거나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괜찮아질 일이 아니지.
‘루이제.’
‘당장은 혼자 있고 싶을 거라는 거 압니다. 다만 저에게도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
진정성이 담긴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애써 머리를 흔들며 그 음성을 지워 버렸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언니!”
“……?”
고개를 들어 보니 엘로이가 문을 닫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내가 살짝 미간을 세웠다.
나는 일부러 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엘로이를 등지고 서서 겉옷을 걸쳤다.
“언니! 내가 어젯밤에 몰래 뭘 봤는지 알아? 진짜 들으면 언니도 엄청 놀랄걸! 막 칼이 말을-.”
“나중에 얘기하자, 엘로이.”
“응?”
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별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엘로이의 명랑하고 높은 목소리 때문에 머리가 더 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을 들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내 세계는 끝나 버렸으니까.
“왜 그래? 어디 아파?”
엘로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냥 나가라고 말하려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엘로이에게도 말해 줘야 하는 일이었다.
어젯밤 나는 새벽이 될 때까지 오열을 하다가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알렉이 아닌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앞으로도 함께 있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결코 그와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알렉을 잃었으니 동시에 마이어스 가문과의 인연도 끝이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시가 식구들과 계속 함께 살 만큼 정이 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지금껏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이유는, 오로지 남편 한 명 때문이었다.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우리의 아이들을 낳아 내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
그 외에 내 삶에서 중요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엘로이.”
내가 조금 단호하게 그녀를 부르며 돌아섰다.
엘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깐 여기 좀 앉아.”
내가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듯 찍소리도 내지 않으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어?”
“그래. 좀 있었어.”
“응?”
체념하듯 내뱉은 내 말에 엘로이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지 도통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조금 울먹였다.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
다른 가족들에게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많은 말들이 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으로 입 밖에 소리 내려니 어쩐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내가 입을 뗐다.
“알렉과 나는 이혼할 거야.”
“…….”
엘로이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쩐지 내 가슴에서도 싸하게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쓰러질 듯이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진짜 내 남편이 죽기 전 나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의 그도 지금의 나처럼 모든 걸 버리고 싶었던 걸까?
엘로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입술을 열었다.
“……뭐?”
“…….”
“이혼을 한다고……?”
“…….”
엘로이가 못 믿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녀나 시어머니에게는 느닷없게 들릴 거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이혼할 거야.”
“오라버니랑 싸웠어?”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왜?”
엘로이의 큰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믿기 힘들고 이해가 가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는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처음처럼 내가 이 집안에서 사라지는 것뿐이니까.
내가 엘로이나 시어머니에게 딱히 없어선 안 될 존재도 아니었다.
나는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엘로이를 등지고 섰다.
“지금 여기서 다 너한테 설명할 수는 없어. 언젠가 알게 될 일이라 말하는 거야.”
“오라버니도 언니랑 이혼한대?”
“이미 나한테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알렉이야.”
“말도 안 돼!”
대뜸 엘로이가 큰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요즘에 둘이 사이도 좋았잖아! 언니 죽을 뻔했을 때 오라버니가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언니도 오라버니가 선물한 거 나한테 지겹게 자랑했으면서!”
“…….”
나는 엘로이를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그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뒤에야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너랑 할 얘기 없어. 다 들었으면 이만 나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내 마음 하나 겨우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엘로이는 잠시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더니 생각을 바꾼 것처럼 대뜸 소리 냈다.
“아, 알겠어. 부부 사이에 남들은 모르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갑자기 이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참고로 나는 언니랑 오라버니 이혼하는 거 반대야.”
“…….”
엘로이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선포했다.
그 황당한 모습에 기가 막힐 여유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도 뭐 언니가 정 원한다면 언니의 생각을 지지해 줄게. 어차피 나도 오라버니 같은 남자랑 계속 사는
언니가 더 이상했거든. 지금이야 뭐 많이 변했긴 하지만…….”
횡설수설하던 엘로이가 문득 말을 줄였다.
이제는 정말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언니 만약에 이혼하더라도 나랑은 지금처럼 가족같이 지내는 거지?”
“……?”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내가 엘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젖은 눈동자로 생긋 웃어 보였다.
“이혼을 오라버니랑 하는 거지 나랑은 상관없잖아.”
“…….”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엘로이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 미소가 조금 어색하고 처량하게 보였다.
알렉과 이혼을 하는데 너랑은 계속 가족처럼 지내는 거냐고?
그녀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힘없이 웃었다.
“남편하고 이혼을 하는데 시누이랑 어떻게 계속 가족일 수 있어.”
“…….”
“알렉은 물론이고 마이어스 가문의 그 누구와도 앞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제인이나 제임스 같은
사용인들하고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수는 있겠지. 물론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 온다면.”
“…….”
“이혼 후에 알렉의 가족들까지 만나고 싶진 않아. 너도 마찬가지고. 결혼하기 전처럼 남남으로 돌아가는
거야.”
“…….”
나에게 팔짱을 낀 엘로이의 팔에 힘이 조금 빠졌다.
깊은 충격을 받은 듯이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나는 언니가 좋은데-.”
시누이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내 팔을 빼내 완전히 돌아섰다.
“난 할 말 다 끝났으니까 이만 나가. 나와 알렉이 이혼을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나는 문득 무거워진 이마를 받쳤다.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한참이나 엘로이는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뚝, 뚝…….
엘로이의 눈에서 큼직한 눈물방울이 떨어졌지만 차마 볼 수 없었다.
* * *
“오늘 여러분들께서 둘러보실 곳들은 북부의 상징인 칼라니쉬 산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산책로는 없지만,
조만간 우리 성주님께서…….”
윌스브룩 성의 응접실 안.
아침 식사와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친 손님들이 저마다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모여 있었다.
발리가 사람들에게 오늘의 일정을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알렉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띠링!
“…….”
아무래도 그에게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이미 그는 루이제를 위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걷고 있자니 어쩐지 방금 전 나올 때와는 느낌이 딴판이었다.
이 커다란 성 안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허망하고 허탈했다.
어떤 일에도 힘을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응접실로 향하려던 순간, 문득 알렉은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그를 발견한 엘로이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경멸하듯 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도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발을 한 걸음 내디딘 순간이었다.
“꺼져.”
“…….”
엘로이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분노를 담아 내뱉었다.
마침 응접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드넓고 높은 성의 1 층 로비가 금세 꽉 차는 듯했다.
엘로이는 누가 봐도 화난 사람처럼 쿵쿵 걸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엘로이가 성질을 부린 적은 많았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화가 나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와 루이제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웃으면서 무심코 로비로 나오던 사람들이 그와 엘로이를 발견하고는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브룩스와 발리도 그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걸음이 도미노처럼 차츰 멈춰 서던 순간, 엘로이가 대뜸 그를 향해 돌아섰다.
“대체 언니한테 왜 이혼하자고 한 거야?”
“…….”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도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라고? 방금 엘로이가 뭐라고 말한 거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사람들의 생각이 표정에서 훤히 드러났다.
알렉은 이 짧은 순간이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루이제가 엘로이에게 그가 먼저 이혼을 하자고 했다고 말한 걸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렉시스가 죽기 전에 그녀에게 이혼을 통보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엘로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금세 다시 소리쳤다.
“오라버니한테 언니같이 과분한 여자가 어딨어! 언니가 정말로 이혼하고 떠나 버리면 나 오라버니 평생
용서 안 할 거야!”
흑!
엘로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서더니 밖으로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다른 것들은 모두 정적에 휩싸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도 숨을 멈췄고, 다른 사람들도 찍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설마 루이제가 벌써 엘로이에게까지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줄이야.
성을 떠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짚자 귀족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쏟아졌다.
“이게 대체 무슨…….”
“방금 엘로이 양이 뭐라고 한 거죠?”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이혼을 한다고요?”
“말도 안 돼…….”
그사이 놀란 브룩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알렉시스! 자네 대체 무슨 일인가? 이혼이라니!”
“…….”
“어쩌자고 그런 소릴 한 거야!”
브룩스의 타박에 알렉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해리엇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 *
[퀘스트 발생!]
[~마물이 등장했습니다! 마물들을 모두 처치하고 북부의 사람들을 구해 주세-.]
* * *
“말도 안 돼…….”
어김없이 떠오른 그의 마지막 말들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로 알렉이 나를 버리고 가 버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설마 그가 그 암담한 상황에 날 버리고 홀로 가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결코 부인을 버릴 성품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실망을 해야 하는 건지, 화가 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눕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나를 버리고 그는 혼자 떠나 버렸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가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그는 날 버렸다.
홀로 남겨질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떠나 버렸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책임감 없이 그럴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래.
그저 그와 내 사이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겠지.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부부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는 단지 나와 함께해야 한다고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그리 애틋하거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조금 차오르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는 그가 힘들 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는 내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정말 법적인 부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를 원망할 자격이 없었고, 그는 나를 책임지거나 지켜야 할 의무도 없었다.
내 마음과 그의 마음이 이렇게나 달랐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또다시 온몸이 무력해지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 다시 그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몸은 남아 있었지만 그게 그는 아니었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대체 왜 그랬어?
나는 당신이 이렇게나 많이 보고 싶은데…….
집도 돈도 작위도 아무것도 없어도 난 그냥 당신만 있어도 괜찮았는데…….
‘하하…….’
허탈한 웃음이 눈물과 함께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그가 그립고 보고 싶은 걸까?
설마 내가 여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지.
그냥 정이 든 걸지도 몰라…….
내 남편이었잖아…….
내 유일한 가족…….
어떻게 흐려지는지도 모르게 의식이 차츰 사라졌다.
말을 타고 북부에서 이곳까지 바로 온 탓에 너무도 피로한 탓인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누워 있던 침대에 누우니 꼭 그의 팔을 베고 누운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이렇게 그의 흔적에 아무런 의식 없이 영원히 파묻혀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렉.’
문득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고작 두세 살 정도 어렸을 뿐인데 그때의 나는 훨씬 밝고 생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날도 알렉은 수십 번 내 이름을 소리 내며 발음을 연습했다.
‘루, 루이…….’
‘루, 루이, 루…….’
‘하아…….’
‘루, 루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각하.’
‘루, 루, 하아…….’
‘당분간 쉬는 건 어떠십니까? 꼭 공작 부인의 이름만 똑바로 부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나, 나는, 부, 부인의 이, 이름 하나는…… 제, 제대로 부, 불러 주고 싶다.’
‘……각하.’
‘그, 그거라도, 자, 잘해 주고 싶으니까…….’
‘…….’
‘루, 루이제.’
‘마님!’
‘대체 왜 또 내 이름을 연습하는 거예요? 내가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
‘나는 당신한테 루이제라는 이름보다 루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싶다고요.’
‘…….’
어떻게 알았지?
손끝으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루, 루이제의 보, 본국에 사, 사람을 보, 보냈습니다.’
‘……그걸 확인할 생각을 하다니 당신 정말 대단하네요.’
왜 내 말을 믿지 않은 거지?
순진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잖아……?
나는 그가 너무도 야속하고 아쉬웠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이 갈 텐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안 되는 거야?
내 말이면 다 들어줄 것처럼 하더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분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가 나를 내 가짜 애칭으로 불렀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썩 좋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 * *
‘루이제.’
‘이제야 내가 그동안 원했던 게 뭐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루이제.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
그 고백과 함께였던 무수하고도 황홀한 불꽃.
차라리 그가 정말로 내 남편 알렉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생각은 그저 이것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내 스스로 허용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자신의 원래 모습이 내 남편과 똑같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건 또 어떻게 믿지. 그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이윽고 나는 쉽게 깨지 않을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을 살아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나는 또 눈을 뜰 자격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
.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보니 온 사방이 어두웠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떠 봐도 새까만 어둠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두리번거리던 나는 작게 소리를 내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정말로 내가 죽게 된 걸까?
사람이 죽으면 그냥 그렇게 촛불 꺼지듯 의식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내가 나라는
자각이 있다니.
조금 이상했지만 내가 정말로 죽은 거라면 다행이었다.
다시 깨어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의식이 있으면 그의 불행과 나의 불행을 생각하게 되니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어둠 속을 조금 걸어 보았다.
이래서야 죽은 보람이 없었다.
누군가 나타나진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문득 사방이 천천히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여러 소리가 겹친 소음도 어렴풋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빵빵!
꺄악!
다들 도망치세요!
저, 저게 뭐야? 세상에.
“……?”
점점 선명해지는 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갸웃했다.
묘하게 사람들의 말소리와 소음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의아해하는 사이 주변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밝아졌다.
대낮이었다.
높은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가 시야를 가득 채웠고, 버스와 차들이 질서 없이 도로에 늘어서서 경적을
울렸다.
낯익은 현대의 의복 차림을 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다급히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건지, 내 몸을 훅 통과해 지나갔다.
그 순간 경악한 내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여기는.
여기는 내가 원래 살던 곳이잖아?
설마 죽은 게 아니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야?
더 최악의 상황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생각에 머리가 얼얼했다.
지구가 내 뒤통수로 날아와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귀도 먹먹했다.
‘말도 안 돼…….’
나 홀로 시간이 멎은 듯 서서 숨을 참았다.
하늘에는 뭔지 모를 새까만 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 사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눈앞이 핑 돌자 내 머리가 뒤로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새파란 하늘이 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그렇게 눈이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든든한 팔이 내 등을 받치는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힘이 빠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상대를 확인했다.
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내 눈이 서서히 커지는 순간.
“루, 루이제?”
남자는 더 경악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트러진 흑발, 너무도 맑아 유리알보다 투명해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
누구라도 첫눈에 반해 버릴 이목구비에 갑자기 시력이 수십 배가 좋아진 것처럼 눈앞이 선명해졌다.
남자는 내 남편 알렉의 외모와 똑같았다.
나는 이내 헉 놀라 팔을 휘저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숨을 쉬는 것도 잊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 또한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알렉?”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에 그가 흠칫 떨었다.
“루, 루이제?”
“…….”
“다, 당신이 여, 여긴 어떻게…….”
“……!”
정말?
정말로 저 사람이 알렉이야?
목소리와 더듬는 말투마저 내가 알던 알렉과 똑같았다.
나를 알아보는 저 눈빛 또한 알렉의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장비가 달린 검은색 재킷과 같은 색의 바지.
도저히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현대적인 차림새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나는 다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게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생생한 개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나는 조금 휘청거리며 손끝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가 놀라서 다가왔지만 나는 다른 손을 들어 그를 막아 세웠다.
“괜찮아요. 세상에 이게 뭐람. 이런 꿈을 다 꾸다니…….”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이야.
꿈이 너무 얄궂은 거 아니야?
나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요즘 잠이 너무 안 와서 안 먹던 약을 먹었거든요.”
“……!”
그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단정하게 그를 마주 보고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기억 속 알렉을 다시 만난 것 같아 무언가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알렉. 다신 당신을 못 볼 줄 알았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어차피 내 꿈이니까 당신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상관없겠죠.”
“……예? 우, 우선 루이제, 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조, 좋겠습니다.”
“네?”
그 순간 되물을 틈도 없이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던 주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금세 초록색으로 만연한 숲속의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뭐지? 순간 이동?
이건 가짜 알렉도 갖고 있던 능력 아니었나?
내 기억이 여러 개가 섞여서 이런 꿈을 만들어 낸 걸까?
내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한 걸음 멀어지더니 말했다.
“루이제.”
“…….”
나는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갑작스러운 재회 때문인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리 환상 속이지만 그를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밀려 나올 것 같았다.
그가 확신이 담긴 눈빛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 여긴 루이제의 꿈이, 아, 아닙니다.”
“네?”
내 꿈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요?”
“여긴…….”
그가 입을 열었다가 복잡한 숨결과 함께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곳이 내 꿈이 아닐 수가 있나요? 실은 나 죽으려고 했어요. 당신은 이미 몇 달
전에 죽었고요.”
“예?”
“…….”
“루, 루이제가, 주, 죽으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당신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걸요.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거든요.”
“……!”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듯 그가 사색이 되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죽은 직후부터 그 사람이 들어온 모양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아요?”
“…….”
그는 입술이 조금 벌어진 채 굳어 버렸고, 나는 힘없이 웃었다.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했어요. 당신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줄 알았거든요. 그 탓에 기억이 없다는
말도 믿었고요.”
“…….”
“몇 달이나 난 그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죠. 말투도 바뀌고 희한한 능력도 생겨서 많이 놀랐는데, 갑자기
마력을 각성했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어요. 대체 왜 나만 두고 죽어 버린 거예요?”
“…….”
그의 눈동자가 처참하게 흔들렸다.
나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믿었던 당신마저 날 두고 죽어 버려서……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아서 견디기 어려웠어요.”
“…….”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다신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외롭다는 생각만 해도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걸로 넘기고 싶었지만, 결국 내 마음은 나약했다.
나를 덮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고 했을 만큼.
“루이제.”
문득 그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나도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놀란 듯 얼굴에 핏기가 가신 채였다.
“제, 제가…… 아, 아무런 기억이 어, 없었습니까?”
“……네?”
“이럴 수가…….”
“…….”
그가 자신의 얼굴을 심란하게 쓸어 만졌다.
나는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갑자기 그가 무언가를 결심하기라도 한 듯 한층 선명해진 눈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루이제.”
“…….”
내 양팔까지 단단히 붙잡았다.
“지, 지금부터, 제, 제가 하는 말을, 자, 잘 들어주십시오. 시, 시간이 없어서 오, 오래 있지 모,
못합니다.”
“……뭔데요?”
“그, 그 사람은…….”
“…….”
“다, 당신이 본 그 사람은…… 제, 제가 마, 맞습니다.”
“…….”
그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확고히 말했다.
순간 귀가 고장 난 것처럼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여기가 꿈인지 뭔지도 헷갈리는데 저 말을 믿어야 되는 걸까?
“알렉.”
내가 현기증을 느끼며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더 단단해졌다.
“여, 여긴 당신의 꿈도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죽어서 이, 이곳으로 왔고…… 제, 제가 약속해,
했듯이, 와, 완벽한 남편이 되어 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
짹짹.
어디서 새 몇 마리가 울며 날아가는 소리가 하늘에서 맑게 울렸다.
꿈이라기에는 내리쬐는 햇빛이나 주변 소음이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요?”
“……예.”
그가 머리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그건…… 미, 미래의, 저, 저입니다.”
“…….”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눈을 깜박였다.
그사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아무래도 후, 훗날 사, 사고가 생겨서 제, 제가 기억을 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
설마 이거 현실일까?
아니면 꿈에서나마 내 바람을 이뤄 주려는 건 아닐까?
사실은 그가 그였다고. 그러니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고.
꺄악!
불현듯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의 괴상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이곳이 꿈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렉은 소리가 들린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서두르듯이 말을 꺼냈다.
“루, 루이제. 저, 저는 곧 가, 가야 합니다.”
“……!”
뭐?
간다고?
갑자기 현실감이 솟구치면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거짓말처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질 수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없어요? 당신한테 꼭 해
주고 싶은 말도 있단 말이에요.”
당신은 이미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그저 옆에 살아 있기만 해도 그 자체로 완벽했다고.
왜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아무리 그와 똑같이 잘생기고 훨씬 더 유능한 데다가 날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건 나와 처음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이내 얼굴을 간곡하게 두 눈에 담았다.
“루이제. 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어, 어서 깨어나십시오.”
* * *
* * *
‘이런 제기랄…….’
알렉은 짧은 욕설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물의 수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이 정도면 S 급 게이트도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다.
게이트 안에 있는 보스 몹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알렉은 달려드는 마물들을 하나둘 제거하며 안쪽으로 들어갔으나 그때까지도 게이트는 닫히지 않았다.
이미 마물들이 셀 수 없이 뛰쳐나올 정도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탓이었다.
“기드온.”
그가 사역령을 불러냄과 동시에 기드온이 나타나 집채만 하게 몸을 키웠다.
[크르릉.]
“입구를 막아라.”
[크릉!]
기드온이 금세 포효를 하며 입구로 달려갔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사역령까지 그의 시스템 밖으로 나왔다.
캐스다인은 북부를 지키며 그의 눈이 되어 주고 있었고, 황후였던 올리비아는 이미 루이제를 따라가도록
했다.
같은 여자이니 루이제 몰래 붙여 놓아도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알렉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스 몹을 얼른 잡아 이 흉측한 게이트를 닫아야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물들이 튀어나온 탓에 역대급으로 어마어마한 경험치가 쌓였다.
‘애정도가 없어서 레벨이 오르진 않았지만…….’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루이제는 지금 해리엇의 말에 탄 채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수도로 갈 것 같은데, 설마 스스로 황궁에 갈 리는 없을 테고 어딜 가려는 걸까?
수도에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
어차피 그녀가 원치 않아도 해리엇은 억지로 그녀를 황제에게 데려갈 것이다.
아무래도 올리비아를 통해 기회를 엿보다가 해리엇을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를 치는 건 우선 루이제가 안전해진 이후였다.
그렇게 다시 마물들을 해치우던 순간이었다.
띠링!
[중급 남편 승격 패키지(10)]
[[1. 중급 남편의 힐링 포션(3 병) - 비타민 첨가]
[2. 인벤토리 개방(10 칸)]
인벤토리?
알렉은 서둘러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았다. 닫혀 있던 인벤토리가 열 칸이나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낯익은 아이템들이 보였다.
전생에 그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것들 중 열 가지가 들어 있었다.
내심 놀란 알렉은 무기 하나를 꺼냈다.
지금은 스킬을 쓸 때마다 마나를 소비해야 했지만, 이 검은 마나를 소비하지 않으면서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이제 무기들을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수 있으니 훨씬 편할 것이다.
남은 보상들도 빠르게 확인하던 그는 문득 마지막 열 번째 보상에서 멈칫했다.
“……?”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
꿈에도 예상 못 한 보상 아이템에 그는 이곳이 게이트 안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얼어 버렸다.
알렉시스의 기억이라니.
지금 그에게 알렉시스의 기억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서둘러 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이 생겼다.
불현듯 가슴도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걸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 포션을 쓰면 어떤 기억을 알게 되는 걸까?
퀴에에엑!
대뜸 마물이 달려들어 알렉은 조금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어 마물들을 베었다.
우선 서둘러 보스 몹이 있는 방을 찾기 시작했다.
마물들을 처리하느라 그의 시간과 마나를 적지 않게 소모했다.
보스 몹만 잡는다면 이런 잔챙이들을 계속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
* * *
띠링!
보스 몹을 찾아 처치한 직후였다.
알렉은 게이트를 빠져나가며 서둘러 시스템의 물음에 승낙했다.
그때까지도 루이제는 해리엇의 말에 탄 채 수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북부 사람들은 하늘만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보스 몹이 꽤 까다롭고 먼 곳에 있었던 탓에 시간이 지체되어 조금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 포션을 쓰는 것도 처음이라 그런지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연 어떤 기억을 알게 될까?
1 차 기억 포션이라니, 그럼 앞으로 몇 개가 더 남아 있는 걸까?
알렉시스와 루이제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알게 되는 건 그리 끌리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기억이니 꼭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깜박였다.
루이제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그의 바로 앞에서 루이제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루이제가 그에게 말한 건가?
진짜 알렉시스는 어디 있지?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호화로운 응접실 안에는 루이제와 다른 신사 한 명뿐이었다.
루이제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불쑥 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흠칫한 그가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응접실 안에 알렉시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알렉은 자신의 의식이 알렉시스의 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이제가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
지금의 루이제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알렉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아는 루이제보다 조금 더 풋풋해 보였다.
알렉시스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이렇게나 아름답고 신비로웠구나…….
생소한 깨달음이 들었다.
그가 봐 왔던 모습보다 더 투명하고 광채가 났다.
루이제는 그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알렉시스의 눈에서 더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주변이 바뀌었다.
이번에 알렉시스는 서재에서 홀로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 루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각하.’
‘루, 루, 하아…….’
‘당분간 쉬는 건 어떠십니까? 꼭 공작 부인의 이름만 똑바로 부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나, 나는, 부, 부인의 이, 이름 하나는…… 제, 제대로 부, 불러 주고 싶다.’
‘……각하.’
‘그, 그거라도, 자, 잘해 주고 싶으니까…….’
그는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감히 욕망을 품을 수도 없고,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을 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알렉시스는 루이제에게 받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는 그가 황제의 부름을 응하지 않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루이제에게 마음을 빼앗기던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병증 같으니라고……!’
마력?
이건 그의 병증과 설명이 비슷하지 않은가?
‘설마 내가 마력……?’
알렉시스는 그 순간 사실은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게 병이 아닌 마력이라면 수련으로 나아질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대체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이상 마력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세상에 마력 같은 초현실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한 줄기 희망을 보았던 알렉시스는 또다시 절망에 잠겼다.
아무리 해도 그의 몸에서 터질 듯이 일렁이는 병증을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게 병이 아닌 마력이라면, 그가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어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해진다면 그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루이제가 그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할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숨과 함께 걷던 그는 문득 무언가가 루이제의 방문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펼쳐 보니 그녀의 일기장인 것 같아 그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히 한 글자도 더 보지 않으려는 듯 일기장을 닫고는 얼른 루이제의 방문 안쪽에 놓고 나왔다.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스치듯 보았던 짧은 일기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떡볶이?
이게 대체 뭘까?
알렉시스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요리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고국에만 존재하는 음식인 걸까?
그런데 20 년도 넘게 먹지 못했다니, 뭔가 이상했지만 할 수 있다면 그가 요리장들을 시켜서 깜짝 선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도 떡볶이라는 이름의 요리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루이제의 고국에도 존재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알렉시스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해 주고 싶은데, 하필이면 찾을 수 없는 음식이라니.
어디서 그런 걸 먹어 본 건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차마 일기장을 읽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무력감에 잠겼다.
죽기 전에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수나 있을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지 오래되었다.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아는가. 충격 요법으로 그 말 더듬는 병을 고치는 거야.
어때?’
‘내가 자네에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큰 충격을 선사하겠다.’
‘악센 이 개자식…….’
‘알렉.’
‘루, 루이제.’
‘…….’
‘미, 미안합니다. 보, 본국으로 도, 돌아가세요. 이, 이혼, 다, 다, 당신은 이, 이혼을 해, 해야
합니다…….’
더 일찍 그녀를 놓아줬어야 했는데.
결국 그와의 결혼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루이제의 본국에는 그녀의 소유로 사 놓은 저택과 땅이 있으니 돌아가도 친가에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와락.
알렉시스는 루이제의 말을 끊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지막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감싸 안았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를 안아 보고 싶었다.
그의 병증이 활활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목이 졸릴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날 밤 알렉시스는 독약을 마셨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에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부디 그때는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못다 한 것 들을 다 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남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의 그러한 열망들은 점점 강해졌다.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루이제의 여러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한다고 한 번쯤은 말해 볼걸.
아니, 그럴 자격이 없지…….
루이제에 대한 생각과 함께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알렉시스는 낯설고도 맑은 알림음과 함께 눈을 떴다.
띠링!
[축하합니다!]
[당신의 마력으로 완벽한 남편 되기 시스템이 완성되었습니다!]
[최종 전투에서 승리해 어서 완벽한 남편이 되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참고: 독약을 마신 직후로 돌아갑니다.]
* * *
[정이안]
‘하…….’
기사는 이게 전부였다.
알렉시스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띠링!
또다시 낯설고도 맑은 알림음과 함께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당신의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폭망한 공작 알렉시스 → 3 년 만에 돌아온 각성자 이안]
‘……?!’
이게 뭐지!?
알렉시스는 지금 일어난 일들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눈을 뜬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로 이동하는 걸까?
초급자 코스로 강제 이동하기 전까지 알렉시스의 시야에는 큼직한 통창 밖의 광경이 마지막으로 담겼다.
‘……!’
숨이 멎을 만큼 놀라운 풍경이었다.
땅을 넓게 가로지른 강물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반짝했고, 몇 층인지도 모를 건물들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이 치솟아 있었다.
그중 그가 있는 곳이 가장 높은 듯했다.
.
.
.
‘헉, 허억, 이번에는 성공했어.’
그래.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져서 다시 루이제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죽기 직전 바랐던 것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그를 강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악센에게 복수하고 루이제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허투루 만들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정말로 완벽해져서 돌아가는 거야. 다신 누구도 우리를 건들지 못하게, 루이제가 더는 불행한 일 없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의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죽기 전에 그녀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띠링!
[첫 레벨 업을 축하합니다!]
[지금부터 매일 근력 강화 퀘스트(초급)가 시작됩니다.]
[윗몸 일으키기 300 회]
[팔 굽혀 펴기 300 회]
[육상 20km]
[사이클 50km]
어?
시스템은 다시 알렉시스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쉴 틈도 없이 윗몸 일으키기를 시키는 곳이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금세 이 무자비한 강도의 훈련을 받아들였다.
병증이 병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움직임에도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렇게 잘 움직일 수 있는데 왜.
왜 바보같이 그녀와 말 한 번 같이 타 주지 못한 걸까?
우습고 허망했다.
일일 퀘스트가 끝난 후 알렉시스는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살펴보았다.
건물, 자동차, 사람들, 의복, 언어.
모든 게 다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마물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죽인다는 사실 외에는 그가 원래 살던 세계보다 편리한 것들도 너무도 많았다.
그는 이곳에 대한 시스템의 설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스템 배경: 이곳은 현대를 배경으로 구현된 게임 판타지 소설 속입니다. 당신은 이곳의 주인공이므로
세상을 구해야 합니다.]
소설? 주인공?
어찌 되었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곳이 어디든, 그가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하.’
[떡볶이 4,500 원]
떡볶이?!
설마 루이제가 20 년 넘게 먹지 못했다는 그 요리?
알렉시스는 경악하여 그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대체 어느 나라의 요리인가 싶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로 루이제가 찾던 음식이 맞을까?
어떤 요리인지, 무슨 맛일지 너무도 궁금했다.
이윽고 그의 테이블에 올라온 건 붉고 묽은 양념에 손가락 크기의 하얀 재료들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는
음식이었다.
그중 하나를 포크로 찍어 한입에 먹어 본 그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연거푸 기침을 해야 했다.
매콤함이 콧속을 가득 찔렀다.
‘엄청 맵잖아?’
루이제가 이런 걸 좋아했다니.
그는 하나 먹는 것조차 이렇게 버거운데, 역시 그녀는 대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루이제…….’
눈물이 핑 돌았다.
얼른 돌아가고 싶고, 보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아 알렉시스는 떡을 하나 더 먹어 보았다.
너무나 매웠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 * *
‘정이안 헌터님! 언젠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헌터님이 나타나기만을 모두가
기다렸습니다.’
‘저기-.’
‘정말 충격적인 마나 폭주였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주변의 빌딩들 몇십 개를 다 날려 보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
그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 일로 정이안은 가족들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 년이나 잠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본론을 꺼냈다.
C 급?
아직 C 급 이상은 가 본 적이 없는 데 그곳에서 싸울 수 있을까?
어차피 다른 유능한 헌터들도 함께일 테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아악! 저, 저기!’
‘아악! 살려 주세요!’
‘조심해요!’
알렉시스는 내심 감탄했다.
그도 계속 수련을 하다 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마나를 지녔으니 그도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조,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망하셨습니다.]
……어?
이게 뭐지?
죽었다고?
제대로 손 한 번 쓸 새도 없었는데?
정말일까?
안 돼. 이럴 순 없어.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알렉시스는 믿을 수 없어 몸부림쳤지만 빛 한 줌 없는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글자들을 다 읽기도 전에 알렉시스의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물속에서 빠져나오듯 크게 숨을 헉 들이쉬자 게이트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제기랄.’
……!
비상이다!
그는 당장 달려 나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30 분 뒤 던전 브레이크라니, 한 명이라도 힘을 보태 사람들을 어서 대피시켜야 했다.
헌터 워치에도 비상 게시글들이 쏟아졌다.
S 급 게이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금방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라는 말들이었다.
뉴스 속보도 함께 시작되었다.
그가 바람 같은 스킬로 몇 초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런데 줄곧 그리웠던 사람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그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제?
혹시 환영인 걸까?
그동안 너무도 그리움에 사무쳤던 탓에 환상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알렉시스는 가면까지 벗어 버리고 눈을 세 번이나 크게 깜박였다.
그럼에도 루이제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망을 치던 사람들이 그녀를 통과해 지나치자 알렉은 경악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순간 루이제가 깊은 충격을 받기라도 했는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고 했다.
가슴이 철렁한 그가 신속 스킬로 빠르게 다가갔다.
‘루, 루이제?’
‘……아, 알렉?’
‘다, 당신이 여, 여긴 어떻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루이제가 어쩌다 이곳에 나타나게 된 건지 믿기지 않았다.
루이제도 그와 딱 똑같은 심정으로 그를 훑어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말들은 더 믿기 어려웠다.
그가 죽고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탓에 루이제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가 죽어도, 아니 심지어 그의 몸 속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어도 그녀는 그와는 상관없이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형편없는 남편이었으니까.
그러나 루이제는 어쩐 일인지 수면제를 마시고는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루이제.’
문득 정신을 차린 알렉시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이제.’
‘…….’
‘지, 지금부터, 제, 제가 하는 말을, 자, 잘 들어 주십시오. 시, 시간이 없어서 오, 오래 있지 모,
못합니다.’
‘……뭔데요?’
‘그, 그 사람은…….’
‘…….’
‘다, 당신이 본 그 사람은…… 제, 제가 마, 맞습니다.’
‘……알렉.’
‘여, 여긴 당신의 꿈도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죽어서 이, 이곳으로 왔고…… 제, 제가 약속해,
했듯이, 와, 완벽한 남편이 되어 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
‘아, 아무래도 후, 훗날 사, 사고가 생겨서 제, 제가 기억을 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알렉!’
순간 루이제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부신 물결처럼 휘날리며 은은한 향기를 흩뿌렸다.
그리웠지만 감히 탐할 수 없던 그녀의 체향이 거짓말처럼 그의 주위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안아 보았다.
이미 루이제는 다 파묻힐 듯이 빈 틈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꿈만 같았다.
설마 이렇게 다시 그녀를 안아 보게 될 줄이야…….
한동안 그의 품을 느끼던 루이제가 얼굴을 들었다. 그도 그녀의 눈을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았다.
‘루이제. 호, 혹시 저는 어떤 사람이었죠?’
‘네?’
‘기, 기억이 없어도 다, 당신에게 잘해 주었습니까?’
‘…….’
‘당신한테 저, 정말 완벽한 남편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그가 무슨 말들을 듣고 있는 걸까.
그의 가슴으로 어마어마한 파도가 따스하게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
루이제가 그를 원한다.
그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그와 같은 마음인 걸까?
그런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불현듯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바랐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결코 얻을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그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루이제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야……?”
한편 알렉은 탄식을 금치 못하며 알렉시스의 몸속에서 그 기억들을 빠짐없이 목도했다.
알렉시스가 되어 그의 기억을 보는 동안 그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충격과 경악과 놀라움을 연거푸
겪어야 했다.
그는 어서 기억 포션에서 나와 루이제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지 당장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억에서 나갈 수 없었고, 기억 포션은 그를 금세 다시 충격적인 장면으로 데려갔다.
* * *
‘루이제가 나를 좋아한다.’
‘……루이제.’
[축하합니다!]
[당신의 마력이 1 서클로 성장했습니다!]
갑자기 1 서클……?
그는 그저 루이제를 다시 돌려보내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마력이 한 단계 성장했다.
어쩌다 성장시킨 건지 얼떨떨했다.
그런데 루이제는 어떻게 이쪽으로 오게 된 걸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돌려보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수백 번 죽어도 상관없었지만, 루이제는 오래오래 행복해야 했다.
그러려면 그녀의 곁에 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알게 되었다.
‘꺄악!’
‘어서 도망치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보스 몹이 나타났습니다!]
[왕자 오우거 ‘민티’]
‘……?’
의아함과 동시에 문득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대체 어디서 보스 몹이 나타났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전기가 끊겨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안.
이미 그가 죽여 버린 오우거 몇 마리의 시체 말고는 다른 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뒤쪽에서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의 위용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정상적으로 길고 근육이 무시무시한 팔과 다리.
천장에 닿을 듯한 키와 섬뜩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
어마어마한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의까지.
그리고 그 뒤로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열 몇 마리의 오우거들이 엄호하듯 늘어서 있었다.
‘……!’
알렉시스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금세 놈의 정체를 직감했다.
‘……보스 몹!’
굳이 시스템이 보스 몹의 등장을 알려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S 급 게이트의 보스 몹답게 놈의 기세가 그의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았다.
보스 몹의 크기와 그 위용에 비하면 근처의 다른 부하 오우거들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스 몹이 왜 여기에서 나타난 걸까?
띠링!
[퀘스트 발생!]
[보스 몹 ‘민티’에게 치명상을 입혀 보세요!]
[퀘스트 보상]
[성공 시 레벨이 30 단계 상승합니다!]
그가 막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주위에 있던 부하 오우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무슨 치명적인 말실수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띠링!
‘죽이겠다, 인간!’
퍽!
민티가 날 듯이 달려들더니 주먹을 날렸다.
마물의 주먹이 공기를 스치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묵직했다.
알렉시스는 그의 민첩함을 살려 빠르게 몸을 피했다.
바깥의 상황은 어떨까?
민티는 그와 싸워 이기는 게 목표인 것 같으니,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신속 스킬로 민티의 시야를 교란시키다가 어느 순간 검을 찔러 넣었다.
쉭!
쿠왕!
민티가 두꺼운 팔로 그의 검을 쳐 내자 그는 벽까지 튕겨 나갔다.
‘제기랄. 힘이 너무 세. 그래도 움직임은 둔한 놈이군.’
보스 몹이니 오죽할까.
그 순간 민티가 주문을 외웠다.
‘아바마마의 가호.’
화르르륵.
사방에 커다란 불길이 일어났다.
주차장의 차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알렉시스는 팔을 들어 코와 입을 가렸다.
살짝 치켜뜬 눈으로 민티를 똑바로 응시하며 비웃어 주었다.
‘꺄악! 이 불은 다 뭐야!’
‘크악!’
.
.
.
이게 바로 S 급 보스 몹의 힘인가……!
알렉시스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이 들었다.
겨우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엄청난 충격이 그를 휩쓸었다.
퍽! 퍼억!
성난 민티가 주먹으로 사정없이 그를 후려쳤다.
마력?
그에게 무척 강력하다는 마력이 있지 않나?
그런데 왜 지금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걸까.
그의 의지대로 마음껏 마력이 움직이는 건 아닌 듯했다.
어쩌면 간절함의 크기가 루이제와 함께 있었을 때와 너무도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정말로 또 죽고 싶지 않은데…….
알렉시스는 입술을 깨물며 반격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팔이며 다리에 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잔뼈까지 모두 으스러진 것 같았다.
안 돼.
움직여……!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이 정도의 열망이면 마력을 쓰는 법을 깨우칠 법도 한데!
‘이 멍청한 자식…….’
콰쾅!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다시 한번 처박혔다.
지금까지 겪은 마물들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민티는 다른 적수가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입에서 왈칵 피가 새어 나왔다.
페널티……?
그런 게 있었어?
이게 뭐야……?
알렉시스는 세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시스템 창의 글자를 다시 읽었다.
뭘 가져간다고? 기억?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페널티라지만 기억을 가져가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여태 다섯 번이나 사망했으니 페널티가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전부 가져가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말도 안 돼…….’
띠링!
[5 분 뒤에 페널티가 실행됩니다!]
[기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 더욱 강한 헌터가 되어 보세요!]
[남은 시간 00:04:59]
……!
이럴 수가.
당혹스러움에 알렉시스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타이머의 초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분명 이 시스템은 그의 마력이 만들어 낸 건데 정작 그는 시스템의 강제성을 거부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정말로 그가 기억을 잃게 되는 걸까?
루이제와 처음 결혼했다가 죽어서 다시 만난 오늘까지의 기억 전부?
아, 안 돼.
바로 그때.
알렉시스는 루이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기억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혼란스러웠다.
그가 얼마나 더 이곳에 있게 될지는 몰라도 적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억이 없다가 루이제의 곁에서조차 되찾지 못한 걸까?
그럼 미래의 그는 언제쯤 다시 기억이 돌아오는 거지?
알렉시스는 마치 자신이 진짜로 죽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관에서 독약을 마셨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의식과 존재가 어둠의 한구석으로 밀려나 영원히 소멸하는 듯한 느낌.
영혼과 육체는 그대로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기억이 없으면 그때의 그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렉시스는 금세 접어 두었다.
어찌 됐든 그가 강해져서 루이제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그는 너무도 형편없고 나약해서 기억이라도 사라지면 더 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 숱하게 자신을 탓하고 혐오했던 만큼 새로 태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시스템이라면 분명 그를 몇십 번이나 더 죽여서라도 강하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3 분 전.
알렉은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 마력을 운용해 보았다.
그의 미래는 루이제의 과거이니 훗날 그녀가 수면제를 먹어도 그의 힘으로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해야 했다.
그 순간 마력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 몹에게 당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마력이었다.
역시 루이제와 관련된 일에는 마력이 반응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혹시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 볼 수 있을까?
조금 전 루이제를 만난 덕에 기억이 소멸되어도 행복하기만 했다.
띠링!
남은 시간 동안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기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도, 반드시 루이제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 * *
띠링!
[‘알렉시스의 기억 포션(1 차)’의 사용이 끝났습니다!]
“…….”
‘헌터님! 제발 깨어나십시오!’
‘세상에, 그 가면을 쓰고 다니던 F 급 헌터가 정이안 회장님이었다니…….’
‘이건 정말 특종입니다. 설마 헌터 협회가 그동안 묵인하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 병실 앞에서 뭣들 하시는 거예요! 모두 나가세요! 안정이 필요한 환자십니다!’
크흠.
이안의 병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간호사의 눈치를 보았다.
보스 몹에게 끔찍하게 당해 죽을 뻔한 헌터가 유리창 너머 VVIP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바이털 사인은 일정한 속도로 소리를 내며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몇 개인지 다 세기도 어려운
기계들이 이안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위독하지만 언젠가 깨어날 것이다.
모두가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1 만 명도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일주일째.
이제는 그만 국내 최고의 마력을 지닌 헌터가 눈을 떠 사람들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스 몹은 겨우 제거되었지만 상위 랭킹의 S 급 헌터 한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순간, 이안의 손가락 하나가 까딱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모습을 포착한 기자 몇 명이 입을 틀어 막았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의사! 의사 좀 불러와!’
까딱.
이안의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잘생긴 미간이 좁혀지고, 근사한 눈썹도 휘어졌다.
눈을 뜨자 병실의 선명한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한껏 찡그린 이안은 뜻 모를 거슬림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
병원?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은 팔뚝에 달린 주삿바늘과 여러 장치들을 발견했다.
허리며 다리에도 보호대가 달려 있었다.
그 순간, 의사들이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헌터님!’
헌터……?
‘괜찮으십니까?!’
‘…….’
‘괜찮으십니까, 헌터님?!’
‘설마 헌터님의 치유력이 이 정도일 줄은-!’
‘역시 다이아몬드급 마나 수저라 불릴 만한 헌터님이시군요!’
‘치유력이 대단하십니다!’
‘이게 다 뭐-.’
‘알렉? 알렉!’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나는 심장이 철렁하여 그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세계에서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시야와 소리가
차단되었다.
깊은 적막만이 내 주위에 남았다.
‘뭐야, 사라진 거야?’
알렉!
아직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만난 남편인데!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 꼭 해야 하는 말들은 다 한 걸까?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는데, 기적처럼 나타났다가 금세 다시 사라지다니…….
가슴이 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가 있는 곳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내가 살던 세상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는 그런 곳에 있을까? 그곳에 있어도 괜찮을까?
‘그런데 가짜 알렉이 진짜 내 남편의 미래라고?’
“하.”
나는 어쩐지 심장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이 기분을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숨이 버겁게 차올랐다.
당장 그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번쩍 눈이 떠졌다.
나는 눈이 부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설마 내가 살아난 건가.
아니, 애초에 죽긴 죽었었나?
아무것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숨을 쉬고 있었고 오감이 주위의 모든 것들을 느꼈다.
광택이 흐르는 호화로운 천장, 금빛과 붉은빛으로 찬란하게 꾸며진 내부.
특유의 사치스러운 향기까지.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곳을 나는 한 군데 알고 있었다.
여러 번 와 보았으니까.
‘……황궁.’
동시에 역한 기분이 내 깊은 속 안에서 올라왔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사이에 해리엇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
낭패감이 든 내가 한 손을 들어 눈을 감쌌다.
죽지 않고 살아난 건 다행이었지만, 애초에 죽을 생각이었으니 황궁에 납치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마른침을 꾹 삼킨 나는 우선 주위를 살펴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어떻게 도망치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여기…….
‘황후 궁이잖아?’
하.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낭패감보다는 화가 날 것 같았다.
휙 이불을 걷으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던 순간, 호화로운 문이 조금 벌어졌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그쪽을 보고 있으니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무심코 침대 위를 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휘둥그렇게 눈이 커졌다.
저대로 시녀가 몸을 돌리면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할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순간 나는 시녀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시녀는 황급히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어?’
뭐야, 기다려!
내가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지만 문만 덜컹거렸다.
바깥에서 잠가 버린 듯했다.
‘젠장.’
문을 몇 번 더 열어 보려고 한 나는 한 손에 이마를 받치며 그냥 돌아섰다.
내가 깨어난 것을 시녀가 확인했으니 황제든 누구든 날 찾아올 게 뻔했다.
다른 탈출로는 없을까?
황후 궁의 침실 안을 둘러보니 정면으로 유리창이 넓게 보였다.
창가로 다가가 슬쩍 내려다보니 역시나 5 층 아래라 맨몸으로 내려가기에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밤중이라 얼마나 높은지 잘 가능도 되지 않았다.
건물과 이어진 정원에는 기사들도 군데군데 서 있었다.
.
.
.
시녀인 유리엘라가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황후 궁 앞에는 기사들이 늘어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가 깨어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귀부인.
유리엘라는 황제에게 날 듯이 달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윌스브룩 자작 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악센이 햇살을 등지며 돌아섰다.
그의 곁에는 해리엇도 함께였다.
루이제가 깨어났다고?
바라던 소식에 해리엇은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과연 황제의 힘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다.
그녀가 정말로 죽었다면 황제는 그와 그의 기사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설마 루이제가 여관에서 죽음을 시도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을까?
부부 사이의 일은 그가 모르는 세계이니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시녀의 말에 악센은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하마터면 내 황후로 적합한 유일한 인물을 잃을 뻔했군.’
루이제는 깨어났고, 알렉시스는 북부에서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그가 불러낸 마물들을 알렉시스가 당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어두운 하늘을 벌리고 나타난 마물들이 끊임없이 지상으로 쏟아져서 북부를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악센은 겉으로는 흡족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며 유리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는 윌스브룩 자작 부인이 아니라 황후 폐하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폐하.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시녀가 정정하여 다시 아뢰자 악센은 어쩐지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그에게 만족스러운 황후가 생겼다.
* * *
‘내가, 내가 알렉시스였다니…….’
알렉은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칼라니쉬 산에서 내려왔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온갖 드라마에서 난무하던 출생의 비밀을 많이 봤지만, 막상 직접 겪어 보니 충격의 차원이 남달랐다.
알렉시스의 기억이 그에게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기억 포션을 보고 자신이 알렉시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시스가 시스템에 기억을 바친 이후의 일들은 바로 그가 겪었던 삶이었으니까.
‘내가, 내가 알렉시스…….’
그런데 이 묘하게 그를 흥분시키는 안도감은 뭘까.
루이제가 그토록 원하던 알렉시스가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원래부터 루이제는 그의 여자였고, 그는 그녀의 유일한 남자였다.
그가 부러워하고 되고 싶었던 알렉시스가 바로 그였다.
누군가를 질투할 필요도 없었고, 그녀의 마음을 받지 못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 사실에 그녀를 향한 애정이 더욱 샘솟는 것 같았다.
알렉은 손으로 입가를 쓸었지만 입꼬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가려지지 않았다.
‘내가, 내가 알렉시스다…….’
루이제가 유일하게 인생의 반려로 인정하는 바로 그 알렉시스.
말을 좀 느리게 하고 만족을 시켜 주지 못해도 루이제가 믿고 의지했던 알렉시스…….
그 순간 띠링, 하는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애정도가 20 억 올랐습니다!]
“……?”
애정도?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치솟은 애정도에 알렉시스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제는 어디 있지?
‘올리비아.’
알렉시스는 서둘러 그의 사역령을 찾았다.
올리비아는 계속 루이제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알렉시스는 올리비아의 눈을 통해 루이제를 확인했다.
호화로운 방 내부에서 루이제가 의식을 잃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저곳은…….
‘황궁?’
순식간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도 짙게 가라앉았다.
기어이 악센이 루이제를 납치한 것이다.
‘루이제는 무사한가?’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무사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알겠다.’
알렉시스는 조금 안도하며 대답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분기가 실려 있었다.
아마 루이제는 지금쯤 과거의 그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에게 기억을 잃기 전의 그였다.
그때의 그는 생존에 대한 욕망보다 루이제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크고 깊어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도
마력을 다루지 못했다.
루이제를 기억에서 지우고 나서야 자유롭게 마력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억이 다 사라지자 말도 더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가 차라리 과거의 모든 기억을 버리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새롭게 태어나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렉시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 속의 알렉시스는 이 시스템 안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가 보상으로 받았던 이 세계의 원작 소설은 알렉시스의 마력으로 시뮬레이션한 미래였다.
그가 독약을 먹은 이후에 벌어졌을 미래에서 루이제는 그의 죽음으로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이 가슴 아프면서도 그에 대한 그녀의 진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띠링, 그때 다시 시스템이 울렸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
왜 또 이렇게나 많이 오르는 거지?
루이제가 과거의 그를 만나서 사랑이 폭발하기라도 한 걸까?
계속해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4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50 억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시스템 창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알렉시스는 레벨이 무섭게 치솟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애정도와 레벨이 동시에 오르기 시작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40 억 올랐습니다!]
“……!”
레벨 업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게이트의 마물들을 죽이면서 경험치를 어마어마하게 쌓아 놓은 덕에 그에게 필요한 건
애정도뿐이었다.
레벨이 다 오를 만하면 애정도가 또 올라서 레벨이 그 뒤를 쫓아가듯이 올라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애정도가 30 억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콰쾅!
전생의 그에게는 너무도 높고 두려웠던 황제 궁은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도 낮게 느껴졌다.
* * *
* * *
[공격을 감지했습니다!]
[‘특성화 스킬: 내 남편 건들지 마’가 발동합니다!]
[적들이 악의를 품고 당신을 해치려는 순간, 저항이 열 배 높아집니다.]
[사용 중 마나가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마나와 애정도에 비례합니다.]
.
.
.
악센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보냈던 마력이 그를 덮칠 듯 되돌아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눈동자가 커졌지만 악센은 빠르게 몸을 피했다.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알렉시스의 앞에 마주 섰다.
알렉시스가 멱살을 잡았던 탓에 살짝 헝클어진 옷깃 외에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 입에서 어둡고도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 정도 재주로 나에게 맞서겠다?”
감정이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아 더욱 음산한 목소리.
악센은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알렉시스를 깊이 주시했다.
놈이 어디서 갑자기 이런 힘이 난 건지 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멀긴 멀어도 그와 같은 피가 섞여 있어 늦게나마 마력이 생겨난 걸까?
알렉시스가 더욱 형형한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다 네 덕이다, 악센. 덕분에 내 힘을 깨달았거든.”
그가 허공을 움켜쥐자 어느새 생겨난 검 자루가 손에 쥐어졌다.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검이었다.
현재 악센의 힘을 레벨로 치자면 300 레벨 정도.
알렉시스의 레벨은 200 을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레벨이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이제 애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험치만 더 얻을 수 있다면 악센과 비등한 수준으로 레벨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더 이상 시스템이 그의 힘을 수치화하는 레벨 따위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시스템은 그저 그의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마력을 제어할 방도를 알지 못했던 그가 서서히 깨우치도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레벨은 그저 의미 없는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는 마력에 대해 무지했던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반드시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악센을 죽인다.
그 사실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알렉시스가 전의를 바람처럼 일으키며 검을 고쳐 들었다.
악센의 마력도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나와 맞서고 싶거든 그만한 자격을 갖춰서 와라.”
드르르, 돌들이 부딪치는 듯한 소음과 함께 황제 궁의 잔해들이 몸을 일으켰다.
부연 연기가 짙은 밤공기에 흔적도 없이 파묻혔다.
잔해들이 스스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수만, 수십만의 퍼즐이 동시에 완성되듯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쿵, 하는 소음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황제 궁이 다시 완성되었다.
그 완벽한 광경을 뒤로한 채 악센은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난 아무나 직접 상대해 주지 않거든. 살아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 맞서 주지.”
“……비겁한 놈.”
알렉시스가 이를 악물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의 검이 공중으로 솟구친 순간, 그만큼 빠르게 악센의 모습이 사라졌다.
악센은 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황후궁의 침실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폐, 폐하!”
그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루이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도망을 친 모양이었다.
악센은 해리엇을 향해 건조하게 명령을 남기며 또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서 알렉시스를 죽여라, 해리엇.”
* * *
“하, 하아.”
절로 숨이 차올랐다.
누군가 금방이라도 나를 쫓아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 궁이 무너진 탓이었는지 궁 안의 사람들도 모두 경황이 없고 어수선했다.
나는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게 황후 궁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러다 발을 헛디뎌 까마득한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힘없는 손으로 난간을 스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알렉, 알렉이 여기 있어. 어서 만나야 해.’
무언가가 속에서 울컥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당장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 *
쾅!
알렉시스의 몸이 황궁 밖으로 튕겨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황궁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눈에는 검푸르게 일렁이는 투명한 장막이 보였다.
마력이었다.
‘악센의 결계?’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진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올리비아.”
그의 사역령인 올리비아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주위에 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악센의 결계 때문에 올리비아도 루이제의 곁에 있다가 튕겨 나온 것이다.
올리비아는 그가 무슨 말을 물어볼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
알렉시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올리비아의 눈을 통해 루이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수선한 틈을 타 황궁에서 도망을 치다가 어딘가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다.
올리비아가 따라갈 수 없는 힘에 의해서였다.
“황제가 루이제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나?”
‘……예.’
올리비아가 한번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곳일 겁니다. 저도 가 본 적이 있지요. 그곳에서 황제에게 황후로서 필요한 힘을 받았습니다.’
“…….”
‘저는 그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병에 걸리고 말았지만요.’
“…….”
알렉시스의 턱에 더욱더 힘이 실렸다.
올리비아가 악센에게 마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설마 악센은 루이제에게도 똑같이 그 더럽고 사악한 힘을 부여할 작정인가?
그로 인해 루이제도 올리비아처럼 허약해져 죽을병에 걸리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곳이 어디지? 황궁 안에 있는 건 맞나?”
올리비아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나 황궁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황제가 아니면 찾아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찾아봐.”
‘예.’
올리비아가 사라질 듯 그에게 몸을 숙였다.
온화한 몸짓으로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황제가 주인님께 워든 백작을 보낼 것입니다. 그 기사단장을 조심하십시오.’
“알겠다.”
그가 대답함과 동시에 올리비아의 형체가 흩어졌다.
결계가 황궁 주위를 두르고 있는 와중에 올리비아가 루이제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황궁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어 봐야 했다.
그사이 그는 결계를 찢어야-.
순간 불현듯 그의 주위에서 범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그 기운을 압도할 듯한 기세로 검을 빼 돌아섰다.
푸른 망토와 은빛 갑옷, 짙은 금발과 청록색 눈동자.
열여섯이라는 나이답게 풋풋한 외모였지만 어딘가 그늘이 짙게 깔린 분위기까지.
해리엇이 전에 없던 살의를 가득 품은 채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해리엇의 레벨은 35.
알렉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것이다.
문제는 해리엇이 단단히 쥐고 있는 파란 눈의 검이었다.
알렉시스는 윌스브룩 성에서 엘로이가 루이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검이 막 말을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수천 년 묵은 검의 위력은 악센과도 비등할 것이다.
그 검을 한 번 스치듯 응시한 알렉시스가 해리엇의 두 눈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비켜라, 해리엇. 미성년자를 해치고 싶지 않다.”
“…….”
해리엇이 깊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성년자? 웬 어린 애 취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네가 죽을 싸움이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겠지.”
“여기서 물러나면 황제 폐하가 절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해리엇이 검을 휙 휘두르더니 고쳐 들었다.
전혀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해리엇과 싸워 그를 굴복시키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상황.
알렉시스는 사역령을 한 명 더 불러냈다.
“캐스다인 경, 결계를 찢어 봐.”
그의 말에 해리엇이 의아해하며 인상을 썼다.
불현듯 허공에서 싸늘한 한기가 눈발처럼 들이닥쳤다.
다 찢어지고 해진 망토를 휘날리며 흡혈귀가 송곳니와 기다란 손톱을 드러냈다.
달빛을 반사한 송곳니며 손톱이 밤하늘의 별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그 기운을 느낀 해리엇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해리엇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저건 무슨-.”
캬악-!
그 순간 캐스다인이 하늘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괴성을 내며 결계로 달려들었다.
결계의 표면과 캐스다인의 손톱 끝이 맞부딪치자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섬광이 튀었다.
그가 레벨이 오르는 동안 그의 사역령들 또한 함께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캐스다인이 사정없이 결계를 손톱으로 할퀴고 표면에 꽂아 넣었다.
이윽고 올리비아가 날아오르더니 그 힘에 가세하듯 듯 뻥, 하며 마력을 터뜨렸다.
악센의 결계가 크게 한 번 진동했다.
해리엇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황후 폐하-?”
생전에 황후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손질된 머리와 화려한 의복.
누가 봐도 올리비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부리는 사역령들이다. 설마 너도 죽어서까지 내 수족이 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
해리엇의 몸이 잠시 굳었다.
불꽃 튀는 살벌한 광경을 뒤로한 채 해리엇이 알렉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노라도 한 듯 눈동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언제부터 갑자기 이런 힘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모든 걸 잃고 죽었던 순간부터.”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알렉시스는 해리엇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살짝 당황했지만 해리엇은 늦지 않게 알렉시스의 검을 받아쳤다.
쾅!
성곽 하나를 통째로 떠민 듯한 충격이 해리엇의 두 팔로 전해졌다.
빙판에 금이 가듯 뼈에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헉”
해리엇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겨우 검을 손에 쥔 채 두 팔을 떨어뜨렸다.
단 한 수였다.
그 단 한 번 휘두른 검에 해리엇은 알렉시스에게서 감히 넘볼 수조차 없을 것 같은 힘을 절감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해리엇은 제국의 내로라하는 전사들은 물론이고 황제와도 겨뤄 본 적이 있었다.
황제와 검술 대련을 했을 때도 어마어마하게 초월적인 힘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결이 다른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의 힘을 다 내보이지도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어떻게 알렉시스 마이어스 공작이 이런 힘을…….
“방해하지 마라, 해리엇. 다음에는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알렉시스의 눈빛이 더없이 날카롭게 타올랐다.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순간에도 루이제가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속이 타들어 갔다.
그가 해리엇을 뒤로한 채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두두둥, 해리엇의 검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칼자루에 달린 파란 눈 장식이 안구를 한 번 굴리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눈처럼 동공과 홍채가
생겼다.
[뭐 하는 거야, 해리엇! 답답하군!]
“…….”
[어서 놈을 죽이자! 놈을 죽이고 다른 인간들도 모조리 다 죽여 버리는 거야!]
“…….”
[못하겠으면 나에게 네놈을 넘겨라! 아주 얼이 다 빠져 버렸군!]
“…….”
[……아직도 정신이 안 들었어? 이러다 나도 답답해서 죽어 버리겠다! 어서 날 받아들여! 놈을 못 죽이면
황제가 너에게서 날 빼앗아 갈 거다!]
“……닥쳐.”
그제야 해리엇이 정신을 차린 듯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는 마검이 되어 버린 성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검에게서 피에 대한 엄청난 갈망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눌려 있던 살인에 대한 욕망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들끓었다.
여느 마검들이 그렇듯 저 검도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눈에 닿는 족족 사람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누군가 저 마검에 장악된다면 이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국에 가서도 쉽게
멈추지 못할 것이다.
설마 해리엇이 마검에게 자신의 의식을 넘기려고 할까?
알렉시스의 눈길이 해리엇에게 닿은 순간, 해리엇이 검을 고쳐 들며 웃었다.
“그래, 파란 눈. 저놈만 죽이는 거야. 그러면 내 의식을 내어 주지.”
[정말이야?! 알았어!]
검에 달린 파란 눈이 반짝반짝 눈을 깜박였다.
지금껏 해리엇은 마검에 장악되지 않으려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검에게 지배되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란 눈의 도움이 없으면 알렉시스를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검은 한 번 사람의 의식을 장악하면 신이 나서 폭주할 게 분명했다.
알렉시스를 이길 승산이 있었다.
해리엇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느끼며 웃었고, 알렉시스는 빛과 같은 속도로 놈에게 다가갔다.
‘저 자식이-!’
화르륵 붉어진 해리엇의 눈동자.
해리엇의 의식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혹 사라졌다.
* * *
‘불길한 놈.’
‘악마 같은 놈!’
“……?”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목소리였다.
오래전에 들었던 선대 황제 부부의 말들이었다.
문득 그의 심장에 박혀 있던 가시가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에 악센은 살짝 소스라쳤다.
왜 이러는 걸까?
그들의 비난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도 더 이상 그에게 별다른 타격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빌어먹을.’
쾅!
악센은 이 불쾌한 광경에서 벗어나려 허공을 내리쳤다.
그러나 생전의 황제 부부는 마치 오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를 응시했고, 그 앞에서 악센은 작은
소년일 뿐이었다.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가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악센의 눈이 커지고 턱은 단단해졌다.
그의 심장에 금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이제?”
아니, 알렉시스?
악센이 마력을 터뜨렸다.
일 초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빠져나가기는커녕 더욱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그를 감쌌다.
이번에는 얼굴을 잊고 있었던 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
악센의 눈이 더없이 크게 벌어졌다.
이미 생김새를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센은 자신의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우아하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와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
저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여자의 앞에서 어린 악센이 눈물 가득한 눈동자로 서러움과 분노를
쏟아냈다.
‘왜 하필 나야?’
그래.
그녀는 그가 멸시해 마지않던 알렉시스의 여자였다.
그 사실 때문에 루이제 또한 하찮게 여기고 있었지만, 끝내 악센은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너는.”
“…….”
악센은 한 걸음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너는 완벽하다.”
“…….”
루이제의 눈빛이 더욱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악센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루이제는 천치 같은 알렉시스의 부인이 되고도 늘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결혼한 지 한 달, 아니 1 년도 되지 않아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루이제는 온화하게 알렉시스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이 놈을 괴롭히고 무시하면 그의 편이 되어 위로해 주었다.
재산과 저택, 작위를 모두 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쯤 되면 알렉시스를 버리고 떠날 줄 알았건만.
악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신경에 거슬렸다.
백 번도 넘게 도망치면 도망쳤지, 알렉시스를 탓하기는커녕 감싸 주다니.
귀족들을 자극해 알렉시스와 루이제 사이를 어긋나게 해 보려고 해도 루이제는 휘둘리지 않으며 굳건했다.
2 년 전쯤에는 알렉시스가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워 보기도 했지만, 루이제는 끝까지 놈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시시했다.
그 정도면 놈을 버릴 줄 알았기에 실망스러웠다.
어디까지 놈을 믿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알렉시스는 그의 가족들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다.
놈의 아버지는 아주 어려서부터 놈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 또한 형편없는 자식을 낳은 탓에 스스로 자책이 심했다는 것을 악센도 알고 있었다.
누이인 엘로이는 알렉시스를 우연히 마주쳐도 아는 척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결혼식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루이제는 그렇게까지 알렉시스를 감싸 줄 수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악센은 두 사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에게는 단 한 명도 무조건적으로 감싸 준 사람이 없었는데.
“……!”
악센은 손을 뻗어 화르륵 마력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런 상념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불길이 한 번 크게 일어나더니 이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그 자리를 눈부시게 투명하고 영롱한 반지 하나가 차지했다.
50 캐럿도 넘는 다이아몬드가 수천 갈래로 빛을 뿜어냈다.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기로 손꼽히는 장인에게 제작을 지시했던 반지였다.
루이제의 사나운 눈길이 그의 얼굴을 지나 반지로 내려왔다.
“…….”
그녀만이 이 반지를 가질 수 있었다.
“넌 황후에 걸맞은 유일한 여자다. 천치 같은 알렉시스의 부인으로 사는 삶에서 해방시켜 주지.”
악센은 루이제를 옭아매고 있던 마력을 풀었다.
그녀가 직접 이 반지를 받게 할 작정이었다.
루이제는 그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반지는 악센의 손을 떠나 루이제의 눈앞 허공에서 영롱한 광채를 자랑했다.
루이제의 눈길이 그 반지에 닿았다.
싸늘하게 실소하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반지를 움켜쥐었다.
“……!”
과연 그의 인정을 받아들이는 건가 싶어 악센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커졌다.
“나는.”
그러나 루이제는 혐오감 가득한 눈으로 반지를 깨뜨릴 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조강지처를 버리는 놈들이 제일 역겨워.”
쾅
루이제가 힘껏 반지를 내던졌다.
차가운 돌벽에 부딪친 반지가 섬뜩한 굉음을 냈다.
이내 구슬처럼 맑은 소리를 내며 반지가 흠 하나 없는 모습으로 돌바닥을 굴렀다.
악센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반지를 한번 보더니 다시 루이제를 응시했다.
대체 왜?
그 멍청한 알렉시스 놈보다 그가 부족한 게 뭐지?
알렉시스는 감싸 주면서 왜 그는 밀어내는 거지?
‘왜? 왜 그때 내 말을 안 믿어 줬죠?’
‘…….’
‘내가 일부러 황태자 전하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으아악! 저리 가! 내 아들은 너 같은 괴물이 아니야!’
“…….”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제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품을 내어 주세요.’
* * *
쾅!
마검이 해리엇을 지배하려는 순간, 알렉시스가 그 검을 내리쳤다.
해리엇의 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한 반동이 그를 덮쳤고, 그와 해리엇 모두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밀려났다.
알렉시스는 해리엇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붉게 물든 놈의 눈빛이 전에 없던 흡족함을 품으며 웃었고, 입가는 싸늘하게 올라갔다.
이미 마검이 해리엇의 의식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다.
“해리엇.”
알렉시스는 다시 해리엇을 향해 걸음을 뗐다.
“진정한 기사라면 검 따위에 몸을 내어 주지 말아야지.”
“…….”
“어서 돌아와라.”
그러자 해리엇이 씨익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와 검이 일체화된 것처럼 푸른 기운이 검과 함께 해리엇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해리엇이 고고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 내렸다.
“꽤 강한 인간이야. 황제와 견줄 수도 있겠어. 그런데 그거 아나? 어차피 인간들은 아무리 마력이 극에
달해도 날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난 단순한 마검이 아니거든.”
“……?”
그럼 뭐라는 거야?
의아해하는 그의 반응에 마검이 의기양양해했다.
“이제야 내 정체를 밝히게 되었군. 난 마왕이다.”
“마왕?”
뜬금없는 소리에 알렉시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냥 마족도 아니고 마왕이라니, 허언증에 걸린 검이 아닐까 싶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시스템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새 등장인물이 오픈되었습니다!]
[푸른 눈의 검]
[남, 나이: ?]
[고대의 마왕 셀바인이 인간 마법사에 의해 죽은 이후 성검으로 환생했다.
마왕이었던 기억을 되착은 이후에는 수백 년 동안 성검에서 마검이 될 기회만 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악센이 검에 깃든 성력을 제거해 그를 마검으로 탈바꿈시켰다.]
[전투력: 999]
[긴급!]
[지금 바로 고급 남편 보상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소멸시킬 수 있는 폭탄(1 회)’을 이용해서 푸른 눈의 검을 물리쳐 보세요!]
“아, 안 돼!”
마검의 푸른 눈 장식이 창백하게 번뜩였다.
그 눈에 불투명한 포션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어, 어서 다시 나를 잡아, 해리-.”
“…….”
얼빠진 채 서 있던 해리엇이 붉게 익은 자신의 두 손과 마검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느새 해리엇의 두 눈은 원래의 청록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수 있을 법한 아주 짧은 찰나.
펑!
알렉시스의 아이템이 마검의 바로 위에서 터졌다.
띠링!
[푸른 눈의 검이 소멸되었습니다!]
“셀바인.”
알렉시스가 갓 사역령이 된 검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그가 쓰던 검은 인벤토리로 사라지고 다른 검의 형체가 그의 손 위로 뻗어 올라갔다.
그의 시스템에서 마검이 정화된 듯 한층 깨끗해진 푸른 빛을 뿜어내며 나타났다.
이건 누가 봐도, 성검이었다.
마왕의 힘이 정화되면 그건 어떤 존재라고 해야 할까?
문득 궁금해진 순간 해리엇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검…… 내 검이 어떻게…….”
해리엇이 알렉시스의 검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건 그의 검인데 어떻게 알렉시스의 손에서 맑은 빛을 낼 수 있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리엇의 청록색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죠?”
“…….”
“당신은…… 당신은 누구야?”
“…….”
알렉시스는 해리엇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해리엇은 혼란스러움과 분노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알렉시스가 늦지 않게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나는 알렉시스 마이어스.”
“…….”
“살려 줄 때 이만 물러나-.”
“공격해, 멍멍아!”
불현듯 어디선가 명랑한 음성이 솟구쳤다.
알렉시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멈칫했다.
절대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해리엇도 흠칫하며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크와앙!
집채만큼 커진 기드온이 울음소리를 내며 해리엇을 향해 날아갔다.
그 등에 탄 엘로이는 전사처럼 굳세게 손을 뻗어 해리엇을 가리켰고, 그 뒤에서는 리디트 황자가 엘로이의
허리를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
엘로이? 기드온?
리디트 황자?!
기드온은 윌스브룩 성의 지하에서 얌전히 리디트 황자를 지켜 주고 있었을 텐데……?
동시에 부욱 찢기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열렸다.
마왕을 소멸시킨 덕에 레벨은 계속해서 고공 행진 하고 있었다.
* * *
한편 황궁 안.
보좌관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해리엇과 알렉시스의 싸움을 숨도 못 쉬고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꽃이 살벌하게 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황제가 아끼는 기사단장이라 그런지 파괴력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런 해리엇을 상대로 몇 수나 버티고 있는 저 사람이 설마…….
모두가 비슷한 의문을 떠올리는 와중 누군가가 힘겹게 소리 냈다.
“저, 저 사람이 정말 브렌트 공작, 아, 아니 윌스브룩 자작이 맞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그제야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 탄식을 쏟아 냈다.
그들은 오늘 여러 번 말문이 막혔다.
황제 궁이 무너졌다가 다시 마법처럼 원상 복구가 되었고, 누군가 빛처럼 나타나 황제를 패대기친 데다가
이번에는 워든 백작을 상대로 불꽃을 튀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윌스브룩 자작이라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황제가 초월적인 권능을 보여 준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들은 알렉시스의 모습에 더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순둥이 알렉시스에게 어떻게 저런 힘이?!
“말도 안 돼!”
“그냥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 아닙니까?”
“아까 폐하께서 워든 백작에게 윌스브룩 자작을 죽이라고 한 말 못 들었나?”
“윌스브룩 자작이 저럴 리가 없는데!”
마침 앤드류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심각하게 창밖을 주시했다.
“맞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는 윌스브룩 자작, 알렉시스 마이어스입니다.”
“뭐, 뭐라고?!”
귀족들이 앤드류를 돌아보았다.
앤드류는 호위대처럼 분장하고 있던 수염을 떼어 내고 무거운 모자도 벗어 내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시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앤드류 몬델리이 백작?!”
“백작이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오!”
앤드류는 조금 결연한 눈으로 알렉시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루이제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황궁의 호위대로 위장 잠입했다.
루이제를 구출하는 일에 어떻게든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먼 북부에 있어 연락이 빨리 닿지 않아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나타날
줄이야.
앤드류 또한 알렉시스의 힘이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금세 납득했다.
북부에서 알렉시스가 윌스브룩 성을 찾아내고 전설의 명약인 힐리베리를 구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제야 다 이해가 갔다.
알렉시스는 이미 더 이상 과거의 알렉시스가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 훨씬 이상으로 강해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가 반역을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콰쾅!
알렉시스의 검이 워든 백작의 검을 내리친 순간, 그 빛이 앤드류의 눈동자에도 비쳤다.
앤드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힘내게, 알렉시스. 자네는 분명 황제를 처단하고 루이제를 구할 거야.”
“……!”
앤드류는 루이제를 따라갔지만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분명 침실 밖을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봤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감쪽같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데려간 걸까?
그러나 앤드류는 알렉시스가 루이제를 구하고 끝내 황제를 물리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화, 황제 폐하를 처단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 것 같은가?!”
사람들이 거듭 경악하여 외쳤지만 앤드류는 자신의 믿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이 나라도 더 이상 예전의 릴트 제국이 아니게
되겠죠.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
확신에 찬 앤드류의 말에 사람들이 또다시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렉시스가 해리엇의 검을 소멸시켰다.
* * *
* * *
“세상이 바뀌다니!”
“그건 반역이 아닌가!”
귀족들을 비롯한 황궁 사람들이 동요했다.
앤드류의 폭탄 발언에 말문이 막혀 꼼짝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몇몇 사람들은 덜컥 겁을 냈다.
그동안 폭군의 끄나풀 노릇을 너무도 충실하게 해 온 탓이었다.
황제에게 잘 보여 특혜를 얻으려고 공을 들인 게 얼마인데 하루아침에 모두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반역자! 폐하께서 고작 윌스브룩 자작에게 당할 것 같은가!”
“당장 몬델리이 백작을 붙잡아! 폐하께서 아시면 자네는 뼈도 못 추릴 것이네!”
“자네 가족들까지 씨가 마를 줄 알아야 될 거야!”
“정말 기가 막히는군!”
앤드류가 황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이미 내 가족들은 북부에서 모두 몰살당했어! 그 빌어먹을 황제 때문에 난 모든 걸 잃었다고! 어디
나뿐만인 줄 아나? 자네들같이 썩어 빠진 관료들도 이제 다 끝날 줄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폐하께서 당할 일은 결코 없-.”
쫙!
순간 누군가가 말을 잇던 관료의 뺨을 쳤다.
근처에 있던 시녀들을 비롯하여 유리엘라 또한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살이 다 터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미쳤어?”
부엌에서 윌스브룩 자작 부인에게 줄 음식을 가져왔던 하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년 여인의 눈빛이 사납게 타올랐다.
감히 부엌 하인이 하늘 같은 관료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앤드류마저 뜨끔했다.
중년의 하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날카롭게 꾸짖었다.
“황제가 죽으면 네놈부터 도려내야겠구나! 그리 충성심이 깊으니 어디 저승까지 따라가 모시거라!”
“이런 정신 나간 여편네를 보았나!”
관료가 큼직한 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하인을 날려 버릴 것처럼 크고 두툼한 손이었다.
그 손이 하인의 머리를 날리기 직전, 앤드류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관료가 흠칫 놀라 손을 빼려고 했다.
“놔, 이거 안 놔?!”
“이분이 누군지 알고 무례를 범하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자네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을 분이네.”
“뭐?”
앤드류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하게 부엌 하인을 바라보았다.
앤드류는 그녀가 황궁에 있었던 덕에 루이제가 붙잡혀 온 사실을 늦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비록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황제의 근처에 머물면서 쓸 만한 정보가 있는지
찾아봐 준다고 했던 것이다.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언젠가 반역을 일으킬 거라는 앤드류의 말에 그녀는 놀라긴 했지만, 이내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를 더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나도 황궁을 오가면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봐야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루이제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지 말 것을.’
‘예?’
‘아니다. 그럼 앤드류 자네가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줄 수 있겠니?’
* * *
.
.
.
황제가 건물을 부수며 밖으로 튕겨나갔다.
알렉이 나를 안은 채 그 근처로 가 서서히 발을 디뎠다.
쿠쿠쿵,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성이 하늘까지 가득 메울 듯한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 같았다.
황제가 알렉의 힘에 밀려난 게 분명한데, 어떻게 됐을까?
설마 벌써 죽었을까?
그때 어둠을 뚫고 두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며 나타났다.
황제가 짧게 웃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알렉시스.”
황제의 하얀 제복이 달빛을 반사했다.
알렉은 황제를 한 번 본 후에 나를 향해 말했다.
“잠시 여기 계셔 주십시오. 올리비아가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네?”
내가 의아하게 되묻자 문득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누군가가 부옇게 빛이 나는 모습으로 내 곁에 서 있었다.
단정한 빛깔이지만 화려한 드레스에 머리를 땋아 올려 장식한 여인.
주황색에 가까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
누가 봐도 죽은 황후의 모습이었다.
“황후 폐하?”
어떻게 죽은 황후가 여기에?!
“어, 어떻게…….”
뭐라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유령? 귀신?
황제도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황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올리비아?”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황제도 이 상황이 놀랍고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올리비아가 왜 저런 꼴로 여기 있는 거지?”
황제가 재차 소리 냈다.
나 또한 놀라 알렉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내 옆에 없었다.
“그건 네놈이 제일 잘 알지 않나?”
“……!”
퍼억
알렉이 푸른 빛깔의 마력이 실린 주먹을 황제에게 내리꽂았다.
그가 황제를 정통으로 타격한 듯 큰 충돌이 일어나며 황제가 날아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덮쳐 오는 알렉의 힘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알렉이 황제를 압도하고도 남을 듯이 강해 보여서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그가 황제에게 다가가며 낮게 소리냈다.
“내가 왜 너를 단숨에 죽이지 않는 건지 아나?”
“…….”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알렉을 노려보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위로 알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난 당장이라도 네놈을 비명에 죽일 수 있어.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난 강해지고 있거든. 네가 깨운
마왕검을 단 한 번 휘둘러도 넌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겠지.”
“…….”
알렉이 우뚝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그에게서 빛나는 기운이 일렁였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의 파괴력을 내 눈으로 실감하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넌…… 남의 고통이 뭔지 모르는 놈이야. 내가 주는 고통도 생각해 본 적 없겠지.”
“……!”
퍽!
또다시 알렉이 위압적인 힘으로 황제에게 주먹을 내리쳤다.
그의 위력에 내 어깨가 흠칫 떨렸다.
황제가 그에게 반격하자 나는 두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들이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하늘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어디 똑같이 겪어 보도록 해. 내가 느꼈던 굴욕감. 고통.”
알렉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이제 황제도 전력을 다해 싸울 것만 같았다.
“힘내요, 알렉…….”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절실하게 그를 응원했다.
황제를 상대할 힘을 얻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죽었다가 돌아온 그의 의지와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나는 간곡하게 바랐다.
“알렉…….”
다치면 안 돼.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지금이 그와 나의 마지막 기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강해져서 돌아오지 않고 여관에서 그대로 죽었다면, 나도 지금쯤 이미 저승에 있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로 남은 생을 그와 함께 평범하게 누리고 싶었다.
심심할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그런 나날을 보내며 애틋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늙어 죽을 때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그런 미래를 꿈꿔도 될까?
아무런 상처 없이 같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굳건한 믿음과 응원뿐이었다.
‘힘내요. 꼭 이겨서 우리 같이 행복해져요.’
아프지도 말고요.
“다치면 안 돼요…….”
콰쾅, 퍽!
감히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위력이 오고 갔다.
어느새 사람들이 궁 밖으로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진 숲에서 이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경을 나는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알렉이 황제를 두들겨 팰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또다시 거대한 힘끼리 충돌했다.
“말해 봐. 왜 나를 그토록 짓밟으려 했는지.”
알렉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게 이유가 있을 것 같나? 개미새끼 한 마리 짓밟아 죽이는 일에?”
퍽!
쿠쿵.
황제가 멀리 밀쳐지자 알렉이 금세 그 앞으로 빛처럼 이동했다.
알렉에게 멱살이 잡히면서도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네까짓 놈 괴롭게 죽든 말든 나에게는 동정할 가치도 없지. 나한테 넌 고작 그런 존재인 거야,
알렉시스.”
쾅!
“……!”
내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철렁했다.
황제가 쓰러진 자리에 땅이 깊게 파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신 일어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괴력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기묘하게 희열에 찬 얼굴로 반격했다.
“알렉 I”
그가 맞기라도 하나 싶어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황제가 알렉에게 얻어 맞았다.
-퍼억!
“……!”
또 때렸어!
놈이 밀리는 게 내 눈으로도 보였다.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약간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저 오만하고 잔인한 황제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는 일이 다 있다니.
그게 바로 내 남편 알렉이라니……!
지금까지 놈에게 당한 일들을 알렉이 주먹으로 하나씩 대갚음하는 것 같아 속이 풀리는 듯했다.
나는 이제 그에 대한 걱정보다도 묘한 희열을 느끼며 눈앞의 광경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황제가 힘을 못 쓰는 건지 아직 덜 쓴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렉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알렉의 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왜? 이제 네가 부려 먹을 존재들이 모두 사라졌나? 네가 불러낸 마수들, 마왕 검. 앞으로 또 뭔 짓을
해도 다 소용없어.”
퍼버벅!
“제기랄!”
황제가 온몸을 불태우듯 마력을 일깨웠다.
“죽어라, 알렉시스!”
하늘과 사방이 요동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힘을 황제가 내뿜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 저게 뭐…….”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서 올리비아가 말했다.
“황제가 불리한 걸 알았나 봅니다. 온 힘을 다 써 버리고 있어요. 자신의 본체를 불러내서 모두 죽이려는
것입니다.”
“뭐, 뭐라고……?”
황제가 쏟아 내는 힘이 이곳까지 바람으로 들이닥쳤다.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멀찍이서 보이는 사람들이 나무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몇 명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지만 올리비아 덕분인지 나는 겨우 서 있기라도 할 수 있었다.
휘오오오, 바람과 마력이 뒤섞여서 부는 소리가 꼭 귀곡성 같았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을 본다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알렉은 무언가 때를 기다리듯 가만히 놈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밤하늘을 새카만 구름이 가득 채우더니 사방에 불꽃이 튀겼다.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무섭게 내 가슴을 울렸다.
동시에 차가운 빗줄기들이 자비 없이 쏟아졌다.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울지 눈앞이 다 아득했다.
불현듯 새카만 구름들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괴물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저게 뭐야?!
그 모습이 은근히 황제를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 알렉이 말했다.
“이제야 본체를 드러내셨군.”
하늘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악센과 구름이 동시에 입술을 움직여 소리 냈다.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라, 알렉시스.”
“…….”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목을 벤다고 죽지 않는다.”
“……!”
황제의 음성이 자못 의기양양하게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목을 베어도 안 죽는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비범한 존재여도 설마 저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럼 놈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황제에게 모두 당하는 건가 싶은 두려움이 들긴 했지만, 놈을 죽일 방법은 존재할 것이다.
문득 알렉이 손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신호하는 듯한 손짓에 무언가가 낡은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더니 황제의 뒤에서 정확히 목을 겨냥했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내 귓가를 자극했다.
그와 동시에 깨끗하게 베인 머리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굳건히 서 있던 몸통도 조금 늦게 쓰러졌다.
‘황제를, 베었어……?’
소름이 내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머리 위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봐야 쓸모없다고 했잖아. 난 하늘이다. 겨우 저런 육신 따위에 얽매여 있지 않아.”
“…….”
그럼에도 알렉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해 보였다.
문득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말하는 검이 다시 위용을 드러냈다.
“죽는 건 너다, 악센. 난 내가 죽고 난 이후 이 세계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거든.”
“……뭐?”
하늘에서 황제의 음성이 불쾌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널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도 알게 되었지.”
“……!”
황제의 치명적인 약점?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우르르, 시커먼 하늘이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저 경악스러운 모습이 릴트 제국의 전역을 어둡게 뒤덮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제국민들은 지금쯤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을까?
그들의 두려움을 생각하니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황제가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폭군인 줄 알았더니 악마, 아니 재앙이었잖아?
황제의 괴상한 목소리가 다시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치명적인 약점? 그런 걸 네놈이 알 리가 없지. 어디 마음껏 날 죽여 봐라, 알렉시스. 그 전에 네놈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네 심장. 그것만 찾아 베어 내면 죽는 게 아닌가?”
“…….”
불현듯 하늘의 형상이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알렉의 말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닿아 있었던 황제의 두 눈이 문득 땅 위를 넓게 내려다보았다.
“소용없어. 네놈이 내 털끝 하나 건드리기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다 삼켜 버릴 것이다. 오늘 여기서 모두
다 죽는 거야.”
“끝까지 사람들 목숨을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는군.”
알렉이 낮게 혀를 찼다.
나는 증오와 경멸을 담아 놈을 쏘아보았다.
설령 놈에게 죽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심지까지 놈이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왔다.
“이런다고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즐거워? 다 죽고 혼자만 남고 싶은 거야?”
“…….”
놈의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분노한 것처럼 먹구름이 굉음을 내며 크게 꿈틀거렸다.
그 굉음보다 더 거대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어차피 나는 혼자였다. 거기서 무력하게 내 존재를 경외해라.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두려운 존재인지
모두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마.”
결국 저런 거였어?
세상을 제멋대로 지배하고 싶어서?
빗줄기가 내 눈가를 적셨다.
새카만 하늘이 점점 짙어지고, 희미했던 달빛조차 완전히 가려졌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가득 차올랐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구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몸을 뒤트는 소리,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내
귓가를 찢을 듯이 장악했다.
세상이 종말의 날이라도 맞이한 것 같은 광경이라니.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식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로이와 시어머니, 그리고 리디트 황자와 여러 사용인들은 잘 있을까?
저 모습을 보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모두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캐스다인 경.”
문득 알렉이 누군가를 낮게 부르더니 짧은 빛이 번쩍였다.
캐스다인이라고 불린 존재가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며 유유히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의 검이 오묘한 빛을 뿜어냈고, 그 빛이 알렉을 비추었다.
그에게서도 영롱한 푸른 빛이 차츰 발산되고 있었다.
‘……알렉.’
나는 두 손을 세게 붙잡았다.
싸늘한 소름이 피부에 돋아났다.
하늘에서 지진이 나는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리고, 회오리 모양으로 점점 구름이 어둡게 겹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 무언가 검은 기운이 고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황제의 마력입니다.”
내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이윽고 올리비아가 다시 소리 냈다.
“다른 데로 피하겠습니다.”
채 대답하기도 전 을리비아가 나를 붙잡더니 어딘가로 단숨에 움직였다.
황제의 형상에서 조금 멀어진 듯했지만, 어차피 놈의 시야 안이었다.
불쑥 알렉이 휙 날아올랐다.
무언가를 발돋움 삼아 디디며 차츰 높게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 없었다.
‘황제의 심장을 찾으면…… 죽일 수 있다고?’
어디 있는 거지?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방금 전 목이 베였던 황제의 시신을 찾아봤지만 눈앞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심장을 찌른 건 아니었는데, 정말로 그 육신은 죽은 게 맞을까?
재차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가 구름 사이에서 튀어나와 알렉을 붙잡으려고 했다.
알렉은 그 위를 훅 뛰어넘더니 다시 회오리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연이어 그를 공격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스치지도 못했다.
이윽고 알렉이 황제의 얼굴을 한 형상과 마주 섰다.
두 눈이 마주친 짧은 찰나, 그는 망설임 없이 즉시 검을 쳐올리며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박.
몇 번이나 검이 쇄도한 건지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속도가 빨랐다.
황제의 형상이 알렉의 검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뒤늦게 일그러졌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입술로 황제가 웃었다.
“하하하. 소용없다고 했잖아, 알렉시스 “
알렉은 황제의 형상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놈의 심장을 찾으려는 듯했다.
회오리 중앙에 고이고 있는 마력은 어느새 아까보다 훨씬 크고 짙어졌다.
필요한 만큼 모아 한 번에 퍼뜨릴 작정인 걸까?
“내 심장은 너 따위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
“…….”
지금까지 우리 제국의 황제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 저런 괴물이었다니.
제국 전역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넌 절대 알아낼 수 없을 거다. 누구도 날 죽일 수 없어.”
“아니야. 알렉은 알고 있어.”
내가 작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리디트 황자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었고, 윌스브룩 성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절대 모를 것 같은 여러 일들을 알렉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새집을 구해 주고, 나와 식구들을 몇 번이나 지켜 주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황제의 심장을 찾아 처치할 것이다.
내 주위를 휩쓰는 폭풍에도 나는 흔들림 없이 서서 알렉을 지켜보았다.
그때 섬뜩한 크기로 회오리치던 구름이 갑자기 멈췄다.
“자, 이제 모두 사라져라. 다 죽어 버리는 거야.”
황제의 울부짖음에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놈의 마력이 순식간에 장막처럼 넓게 퍼졌다.
태풍에 휩쓸린 새들이 그 어두운 장막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귓가를 자극하던 소음들마저 멍하게 들릴 만큼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저게 정말로…… 흔적도 없이 생명을 소멸시키는구나.
황제의 마력이 퍼지는 속도가 내 눈으로 다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놈의 마력은 정말로 한순간에 세상을 다 집어삼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참혹한 어둠을 뚫고 문득 눈 부신 빛 한 줄기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모든 게 눈 깜박할 찰나였다.
황제의 장막을 앞질러 땅으로 내리꽂혔다.
눈앞이 번쩍했다.
“……!”
헉 놀란 내가 뒷걸음질 친 순간, 올리비아가 나를 붙잡고 재빨리 물러났다.
뭐지?
눈을 깜박였으나 강렬한 빛에 사로 잡혔던 시야는 금세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무척 정결하고 맑았던 빛.
나는 그게 알렉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황제의 형상이 치명타라도 입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빠르게 범위를 넓혀 가던 장막 또한 가만히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숨을 죽이자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심장 간수는 안 보이는 곳에 잘했어야지.”
“……!”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이 저 앞쪽에 서서 무언가 커다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전동건? 기계식 총?
갑자기 어디서 저런 게 난 거야?!
그 밑으로는 목이 베였던 황제의 시신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시신의 가슴에 구멍이 나 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할 왼쪽 가슴이었다.
땅바닥에 처박혀 있던 황제의 머리가 스르륵 돌더니 눈을 크게 떴다.
“……!”
경악한 내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 시신, 안 죽은 거였어?
목이 날아갔는데도?
그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으나 특유의 붉은 눈빛만큼은 시리도록 선명했다.
“뭐야. 날 속인 거냐?”
“아는 척을 했으면 네가 심장을 지키려 도망을 쳤겠지.”
“거지 같은 놈. 끝까지 넌 나에게 거슬리는구나.”
“네가 안도하고 기고만장한 탓이다.”
“개자식…… 진즉에 널 죽였어야 했는데…….”
“…….”
핏발이 날카롭게 선 황제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뭐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정말로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장만 찌르지 않는다면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생명이 붙어 있다니.
행여나 알렉에게 즉사당할까 봐 몸을 해쳐도 소용없다고 수를 쓴 듯했다.
그런데 이제.
알렉이 놈의 심장을 처치했다.
그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쿵쾅 난동을 부렸다.
살면서 이토록 크게 가슴이 박동한 적이 있었을까?
“잘 가라, 악센.”
“…….”
알렉이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빛나는 총구를 황제의 코앞에 드리웠다.
그 순간 온 세상이 숨을 멈춘 듯했다. 나 또한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정말로.
정말로 황제가 죽는구나.
드디어 사라지는 거야.
내 모든 불행의 원흉.
고통의 온상.
원수라는 말도 부족한 나와 내 남편의 세상의 재앙.
바로 그런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내 두 눈에 또렷하게 담기 위해.
나는 두 손을 굳세게 말아쥐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나에게는 불과 몇 달, 몇 년 정도 시달린 게 전부이지만, 알렉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을까?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알렉이 총구를 고쳐 들자 빛나는 마력이 그를 휘감았다.
진정한 소멸을 직감한 듯 황제가 외쳤다.
“안 돼-!”
마치 총탄과도 같은 마력이 쏘아져 나가자 황제의 육신이 모두 사라졌다.
* * *
……죽었어?
정말로 사라진 거야?
나는 황제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독하게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영원히 지옥처럼 군림하고 있을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그 오만한 육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다니.
정말로 죽은 걸까?
나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삼켜 버릴 듯하던 황제의 형상과 시커먼 구름, 회오리와 마력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지던 빗줄기도 어느새 그쳤고, 여느 새벽녘과 같이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정말로, 사라졌구나…….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겨우 의식을 붙잡고 서서 알렉을 향해 희미하게 소리 냈다.
“알렉”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루이제.”
“다 끝난 건가요?”
“…….”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에게도 쉽사리 받아들일 만한 일이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힘겹게 대답했다.
“예. 다 끝났습니다.”
“…….”
정말로 끝이 난 거구나.
그의 말에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폭군이 사라졌다.
겨우 폭군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했던 악의 존재가 소멸했다.
그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게 했던 존재가 마침내 죽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걸까?
“아, 알렉…….”
눈앞이 휘청, 기울어졌다.
밤사이에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을까?
황제가 죽고, 알렉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루이제!”
털썩.
그가 내 이름을 외치는 음성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뭐지?
내가 어떻게 되었더라?
소멸하기 직전, 악센의 영혼이 자신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잠시 고여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찌꺼기 상태.
악센은 금세 자신의 무력감을 깨달았다.
‘제기랄! 제기랄!’
진짜 죽어 버린 거야.
이 위대한 내가 겨우 알렉시스에게!
말도 안 되는 굴욕감에 악센은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일도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이 세계에서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알렉시스 따위가……!
믿지 못할 만큼 치욕스러웠다.
그렇다면 그를 압도한 알렉시스는 대체 얼마나 강했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그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모두 소멸시키지도 못했고, 그의 허전함을 채우지도 못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가 이토록 발버둥을 쳤던가.
예기치 못한 허무한 죽음에 악센은 피눈물을 흘렸다.
가슴에 뻥 뚫려 있던 구멍이 이 세상의 크기만큼 커진 듯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은데.
원했던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럴 거면 나는 왜 태어난 거지?’
왜 결국 세상은 그를 버린 걸까?
문득 사람들이 떠나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흔적이 있는 곳에 찾아와 애도하는 이도 없었다.
그때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뱃고동처럼 크게 울렸다.
왈칵, 누군가의 발이 그의 영혼을 짓밟으며 달려 나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부인!”
“어서 부인을 편한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황제 이 개새끼! 부인께서 잘못되면 죽어서도 저주할 테다!”
“드디어 놈이 사라지다니! 이, 이게 정말 다 어떻게 된 기적인지……!”
“윌스브룩 자작이 우리들의 은인입니다. 아니, 이제 원래대로 브렌트 공작이라고 불러야지요.”
“황제 새끼가 죽다니 정말이지 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
폭풍처럼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 고요함에 묻힌 듯이 악센은 보좌관들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간과 쓸개까지 다 빼 줄 듯이,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그를 모욕하다니.
놈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분노로 몸부림칠수록 남은 영혼마저 점점 꺼져 갔다.
악센이 마지막 불꽃을 필사적으로 태우듯이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들. 내가 기필코 부활해서 네놈들을 다 고통스럽게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부활할…….’
그 순간 악센의 시야에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투명한 형상이었다.
‘……올리비아.’
그래.
올리비아가 다시 나타났었지.
어떻게 된 거였지?
악센은 혼란스러웠다.
죽은 올리비아를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알렉시스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놈에게 주인님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올리비아.’
악센은 올리비아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 소리에 올리비아가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보이는 걸까?
‘그래, 올리비아. 이리 와야지, 어딜 가는 거야?’
그러나 올리비아는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그냥 돌아섰다.
‘……네, 주인님.’
낮은 대답 소리와 함께 그를 등진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당한 광경에 악센은 심장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저게 뭐 하는 짓거리지?
올리비아가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닐까?
왜 올리비아가 먼저 그에게 돌아서는 걸까?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듯한 표정 또한 믿기 힘들었다.
그를 외면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악센은 분기가 차올랐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쓸모없는 데다가 한심하고 나약한 여자였다.
제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화가 들끓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감정이 악센은 낯설었다.
어떻게 감히.
올리비아 네가 나를 등질 수 있나.
그 광경에 악센은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불현듯 깨달았다.
올리비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도 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무정한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들으셨나요, 폐하?’
‘…….’
‘루덴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더라고요. 흥미로운 소식이라도 돌고 있는 모양이에요.’
‘글쎄 하워드 후작과 그 벗들이 전 브렌트 공작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거 있죠?’
‘…….’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악센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에 놀란 악센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올리비아!’
대체 왜.
‘올리비아-!’
그의 비명이 지독하게 자신의 심장을 옥죄었다.
스스로를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도 남을 듯했다.
그의 손끝에서 죽는 순간에도 오로지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떠올랐다.
너무 뒤늦게 깨달은 걸까?
‘…….’
아.
나를 직접 낳은 어머니조차 그런 눈으로 날 봐 주지 않았지.
세상 모두가 나에게 그런 눈빛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그런데…….
‘올리비아.’
있었다니.
‘올리비아-!’
기다란 마지막 외침과 함께 황제의 남은 생명이 사라졌다.
그를 등진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처음 보는 채로.
“루이제.”
알렉시스는 루이제를 안은 채 서둘러 보상으로 받은 공간 이동 아이템을 써서 이동했다.
금세 도착한 곳은 수도에 있는 그들의 저택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알렉시스는 조심스럽게 루이제를 침대에 눕힌 후 그녀의 안색을 확인했다.
“루이제.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제.”
“…….”
다시 불러 봐도 마찬가지.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서둘러 루이제의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 걸까?
“미치겠네.”
알렉시스는 우선 루이제의 손을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사나 다른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치유 능력이 있으니 그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시스는 마력을 불어 넣어 루이제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죽은 황제 때문에 몹시 긴장을 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방금 전 황제의 마력으로 인해 뭔가 나쁜 영향이라도 받은 건 아닐지…….
문득 황제가 자신에게 마력을 주입하려고 했다는 루이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혹시라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루이제의 상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받고 있었다.
이질적인 어떤 힘에 시달리며 힘겹게 사투를 벌였다.
이 불길하고도 생소한 기운은…….
‘황제의 마력!’
“……!”
알렉시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이 검은 기운은 황제의 마력이 분명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알렉시스는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컴컴했다.
황제의 마력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어둡고 사악한 데다가 강렬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이미 그 힘이 그녀에게 스며들었으니 내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그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제기랄…….’
알렉시스는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한 거지?
다시 루이제의 손을 잡고 그녀의 상태를 느껴 보았다.
그녀의 의식은 악센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이만큼이나 버텼다니.
어두운 마력에 잠식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루이제 또한 올리비아의 상태를 보아 알고 있었다.
“루이제…….”
알렉시스는 서둘러 자신의 치유력을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괴로워하는 안색을 보니 그의 가슴도 미어졌다.
설마 이미 그의 힘으로도 손쓸 수 없는 상태는 아니겠지.
최악의 상상은 애써 미뤄 두며 알렉시스는 간절하게 그녀를 치유했다.
그의 마력으로 악센의 힘을 소멸시켜야 했다.
루이제의 이마 언저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의 기운이 점점 그녀의 안에 퍼져 들어가기 시작하자 동시에 악센의 마력이 꽤 강하게 그의 힘을
밀어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벌써 그녀를 장악했을 듯한 지배력.
알렉시스는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충돌에 루이제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의식을 놓지 않은 것도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제가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루이제.
그녀의 이름은 속으로 삼키며 알렉시스는 자신의 마력을 더 크게 퍼뜨렸다.
부디 이 빌어먹을 마력 때문에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기를.
원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랐다.
알렉시스의 청정한 기운이 루이제의 전신을 정화하듯이 퍼져 나갔다.
* * *
“……!”
알렉시스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루이제가 응접실 맞은편의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천천히 내려왔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은빛 머리, 부드럽게 흘러내린 잔머리와 신비롭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진주 같은 피부에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짙은 푸른 계열의 드레스까지.
그녀의 모든 게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광채가 사람으로 태어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알렉시스는 그녀의 자태에 눈이 콕콕 쑤시는 통증마저 느꼈다.
마치 오로라가 흘러들어 오는 것처럼 루이제가 점차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름 전 루이제는 황제의 마력 때문에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놀라울 만한 정신력으로 몸 속에 들어온 사악한 기운과 맞섰다.
그가 그녀를 치유한 후에도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루이제는 전보다 더 빛나는 모습으로
눈을 떴다.
그 변화가 알렉시스는 내심 의아하고 놀라웠다.
혹시 그의 치유력을 한 번에 다량으로 쏟아부었기 때문일까?
이윽고 루이제가 기품 있는 자태로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알렉.”
결점 하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알렉시스는 저 음성을 따라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래도 루이제는 매혹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는 확실히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신비로움을 발산했다.
“루이제.”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루이제는 아득하면서도 애틋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손님들께서 나까지 찾는다고 하여 내려와 봤어요. 그런데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손님들께 제 이야기를 끝내려던 참입니다.”
“……그랬군요.”
루이제가 손님들을 바라보자 알렉시스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다시 넓게 응시했다.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그의 옆에 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줘, 알렉시스.’
* * *
* * *
‘모두가 황자님을 사랑하고 응원할 거랍니다. 황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신걸요. 전하는 황제 폐하로
숭상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신 것을 모두 축복할 거예요.’
“…….”
이제 리디트 황자가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순간.
그가 황제로 즉위하면 마지막 남은 조각 하나가 완성된 것처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나는 그 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알렉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은 후에야 다시 사람들을 넓게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더 진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그 귀중한 분을 이런 누추한 저택에 숨겨 둘 수가 없네요. 드디어 그분이 집에 돌아가게
되었거든요.”
“……예?”
“대체 그분이 누구길래…….”
나는 제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내 눈길에 제인이 황자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제인에게 꽂혔다.
제인의 치마폭 뒤로 누군가가 가려져 있었다.
작은 키, 언뜻 푸른색으로 드러나는 머리카락, 시선을 내리고 있지만 총명한 빛이 감춰지지 않는 은색
눈동자.
“……?”
어린 남자아이?
귀족들의 시선이 그 소년에게 박힌 채 홀린 듯이 따라갔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아이가 누군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귀족들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는 누구…….”
“어쩐지 낯이 익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전혀…….”
마침내 리디트 황자가 나와 알렉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제인이 황자의 손을 나에게 건네주자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내 앞으로 오게 했다.
황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떠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리디트 황자는 작게 대답하며 나를 향해 끄덕였다.
잠시 그를 따스하게 바라본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이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답니다. 4 년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났었거든요. 그때 불과 세 살밖에 되지 않으셨죠. 모두가 이분이 죽은 줄 알고 있었어요.”
“…….”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이제야 그들의 안색에 묘한 깨달음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분의 아버님께서는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남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누군지 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과 약속한 대로…… 정말로 우리의 곁으로 살아 돌아오셨어요.”
“……!”
제각각의 색으로 빛나는 귀족들의 눈이 심상치 않게 벌어졌다.
너라도 도망쳐서 꼭 살아남으라.
4 년 전의 실종.
“서, 설마.”
“맙소사.”
“말도 안 돼…….”
여기저기서 감탄이 쏟아졌다.
‘말도 안 돼.’라고 탄식한 사람의 옆구리를 누군가 강하게 비틀어 꼬집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이 소년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듯했다.
나는 리디트 황자의 어깨를 더욱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숨을 들이쉬었다.
“이분께서는 아버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말도 포기하고 몸을 숨기셨죠.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를 모두 멸망시키려고 했던 황제의 눈을 피해…… 어린 몸으로 입을 닫고 버티셨어요. 지금까지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으며 언젠가 세상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셨죠.”
“…….”
“저는 그 역경을 견디고 살아 돌아온 황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답니다.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희망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것만 같았으니까요.”
“…….”
“폭군 때문에 감히 이뤄질 거라 확신할 수 없었던 제 희망이요.”
“……!”
황자 전하?
황자 전하.
황자 전하였다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리디트 황자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고 몸은 조금 경직되었지만 나는 감히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그를 소개할 준비는 다 된 것 같았다.
“이분은 죽은 황제에게 살해당한 선대 황제 폐하의 둘째 아들, 리디트 카이슬리 전하이십니다.”
“……!”
“이럴 수가!”
“저분이 황자 전하셨다니!”
“살아 계셨군요, 황자 전하!”
“정말 기적입니다!”
“무사하셨다니 정말로 죽은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
감탄과 반가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굳이 이 순간 말하지 않아도 리디트 황자가 곧 황제로 즉위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진정시켰다.
* * *
우리가 북부의 성으로 다시 돌아간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그동안 수도에서 우리는 리디트 황자의 황제 즉위식을 지켜보았고, 방직 공장의 가동을 축하하였으며 사교
무도회에서 온 귀족들에게 칭송의 말을 들었다.
대체 어떻게 리디트 황제를 찾은 거냐는 물음부터 알렉이 언제부터 그렇게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보았다.
‘그런데 꼭 그 춥고 먼 데로 또 가야겠니?’
‘그냥 여기서 예전처럼 다 같이 살면 안 돼? 우리 이제 자유잖아.’
“……어디 갔었어요?”
따뜻해라.
나는 그의 품에 포근하게 뒷머리를 기댔다.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갑자기 사라진 줄 알았네요.”
“제가 당신을 두고요?”
“…….”
찔리나?
그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다시는 절대.”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요. 우리 한 번씩 서로를 떠났으니 비긴 셈 쳐요. 난 당신을 몰라봤고, 당신은 내 마음을
몰랐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나는 다시 옅은 웃음소리를 냈고, 그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 그러고 보니 그 커다란 총은 갑자기 어디서 난 거예요?”
“…….”
“물어본다는 게 이제야 생각났네요.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죠? 당신이 선대 황제를 죽일 때 내 전생에서나
볼 법한 무기를 쓴 것 같아서…….”
아.
내가 이전에 알렉에게 내 전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말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순간 뜨끔했다.
그런데 알렉이 마물들과 싸우던 바로 그 세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은 저한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함 같은 게 있습니다.”
“……네? 인벤토리 같은 건가요?”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인벤토리.
그 단어에 그가 조금 어색해하며 나를 응시했고, 나도 괜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흔적을 이렇게 그와 나눌 순간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윽고 그가 여전히 어색해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왔었던 그 세계에서 쓰던 무기 중 하나였죠.”
“역시 그랬군요. 여기서도 작동하다니 놀랍네요.”
“마력을 증폭시켜서 사용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말을 마치며 그가 손을 들자 어느새 그의 손에 총이 들려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크고 무거워 보였다.
“세상에.”
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총을 한 바퀴 돌렸다.
“원래는 없었는데 마침 그때쯤 제 인벤토리가 더 넓어졌죠. 모두 루이제 덕입니다.”
“그랬군요…….”
“그리고 이렇게 금방 없어지기도 하고요.”
짠.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났던 총이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 신기해라!
박수라도 칠까?!
딱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휘둥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손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도.”
“……?”
그의 손바닥 위에 검은 벨벳으로 된 작은 상자 하나가 올라왔다.
반지나 귀걸이를 넣을 법한 작은 상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검붉으면서도 보랏빛이 나는 보석 하나가 큼직하게 반짝였다.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이윽고 그가 그 보석을 꺼내자 반지의 링이 드러났다.
“이게, 뭐예요……?”
흑요석?
처음 보는 광물이었다.
그러나 흑요석보다는 새까만 다이아몬드같이 눈이 부셨고, 다이아몬드라고 하기에는 다른 차원으로 느낌이
달랐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칠흑 같은 광물에 우주가 담긴 듯한 영묘한 기운.
“너무 신비롭고 예쁘네요…….”
“제 인벤토리에서 발견한 희귀도 SSS 급 마정석으로 만든 반지입니다. 웬만한 보석보다 구하기 힘든
것이죠.”
“네? 마정석이요?”
마정석?!
그건 설마 내가 아는 그 여느 소설 속 마정석인 걸까?
“예. 보스 마물을 처치하고 얻은 마물의 결정체입니다.”
“…….”
그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고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더니 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물의 결정체라니.
내 머릿속으로 온갖 흉측하고 개성 강하게 생긴 괴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의아한 기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그가 한 손에 그러쥔 채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
나는 내 손에 딱 맞는 반지를 응시했다. 아름답고 신비한 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내가 물었다.
“당신이 직접 처치한 마물에서 얻은 건가요?”
그가 한 번 끄덕였다.
“예. 이 마정석을 갖고 있었던 마물이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정말 끈질긴 사투였죠.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제국에서는 이 광물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이 아무도 없더군요. 지난 한 달 동안 이 반지를 만들려고
직접 제련했습니다.”
“정말로요? 고생이 많았네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알텍.”
“아닙니다. 당신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반지를 드릴 수 있어서 제가 더 기쁩니다.”
“…….”
그의 눈가가 정말로 흐뭇한 듯이 약간 흐무러졌다.
그에게는 전리품 같은 의미 있는 물건인 걸까?
이런 걸 나에게 끼워 주고 저렇게나 기뻐하다니, 새삼 그에게 있어 내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실감이 났다.
그런데…….
“그럼 혹시 이건 마수의 시체에서 얻어 내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마정석은 빛을 발산하니 그나마 쉽게 찾아낼 수 있죠. 보통 인간의 몸에 생기는 결석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결석이요?”
“예. 이 정도 진귀한 마정석이면 생식기 부근에서 발견되곤 하죠. 아주 희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아마도
이걸 갖고 있는 사람은 전생에서도 저밖에 없었을 거고, 최소 부르는 게 값-.”
“네? 어디서 나오는 결석이라고요?”
“예?”
“…….”
내가 놀라자 그는 더 당황했다.
“그럼 이 반지가.”
“……?”
흉측한 괴물의 요로 결석……!
윽.
나는 뒤로 기절할 듯이 휘청거렸다.
“루이제!”
놀란 그가 내 등을 감쌌다.
금세 중심을 잡은 나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르는 사이에 다른 세계에 다녀오더니 아예 그쪽 인물이 다 되었구나.
반지를 낀 손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내 손가락에서 SSS 급 요로 결석이 진귀한 빛을 반짝였다.
조금은 더럽고 찜찜했지만 신성하고 소중한 반지임은 분명했다.
이세계에서 그의 고난과 성장을 상징하는 물건 그 자체였으니까.
* * *
“두 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칙서를 준비해 왔으니 폐하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게
좋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나와 알렉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내가 리디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자 앤드류가 그에게 붉은빛으로 된 칙서를 건네주었다.
리디트는 잠시 그 내용을 보더니 이내 나와 알렉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사못 진중해졌다.
“나 리디트. 두 사람에게 원래의 작위를 돌려주게따.”
“……예?”
“브렌트 공작, 공작 부인.”
“…….”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자작 부부였지. 작위에 대한 건 미처 잊고 있었다.
그러나 선대 황제가 죽은 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우리를 원래의 작위인 공작으로 칭하고 있었다.
리디트가 작은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 제국의 대공 부부가 되어라.”
“……?”
음?
대공?
“이 성의 이름을 따 위스브룩 대공의 작위를 주게따.”
“……!”
나는 놀란 눈으로 리디트를 보다가 알렉을 돌아보았다. 마침 그도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 이제 대공 부부가 되는 거야?
뜻하지 않게 그런 근사한 작위를 얻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황송합니다, 폐하.”
“마지막으루…….”
리디트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지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우리에게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듯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리디트 황제는 나와 알렉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
이내 리디트가 울음을 참듯이 울컥하며 내뱉었다.
“나 리디트의 대부와 대모가 되어 주십시오.”
“……!”
“예?”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앤드류와 브룩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설마 리디트 황제가 알렉과 나에게 대부모가 되어 달라고 말할 줄은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리디트 황제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동안 고아로 지내면서 느꼈던 외로움과 서러움이 떠오른 듯했다.
……아.
왜 눈물이 나지?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리디트 황제를 와락 끌어 안았다.
작은 등을 토닥이는 내 손에서 마정석 반지가 빛났다.
“그럼요. 폐하께서 원하실 때는 언제든 저희한테 의지하세요. 우리가 늘 이곳에 있을게요. 그렇죠,
알렉?”
내가 알렉을 바라보자 리디트도 그를 응시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든든한 눈빛으로 끄덕여 주었다.
“물론입니다.”
리디트는 그에게도 가 안겼다.
“고맙따, 아렉시스. 루이제.”
흐어엉.
그제야 그 의젓하던 황제가 북받친 눈물을 터뜨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