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8

원숭이 손

W. W. Jacobs

부드러운 솜털의 이야기 (blog.naver.com/kangjh0543)

바깥에는 이미 밤이 내려 춥고 눅눅했지만, 래버남 빌라의 작은 거실에서는 블라인드가 쳐진 채 난


롯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 과감하게 말을
옮기는 스타일이라, 굳이 무릅쓸 필요 없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킹을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난
롯가에서 잠자코 뜨개질을 하고 있던 백발의 노부인이 조심하라고 참견하고 나설 정도였다.
“바람 소리가 참 거칠구나.” 화이트 씨가 말했다. 엄청난 패착을 둬버린 것을 알아차린 뒤 아들이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이었다.
“듣고 있어요.” 아들이 말했다. 아들은 찬찬히 판을 훑어보고는, 손을 뻗어 말을 옮겼다. “체크.”
“이런 날씨에 그 친구가 오기는 힘들겠지.” 아버지가 판으로 손을 옮기며 말했다.
“체크메이트라니까요.” 아들이 대답 대신 말했다.
“이래서 이런 구석탱이에 살면 안 좋다는 거야.” 화이트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진흙탕 변두리 지역 중에서도 이보다 더 안 좋은 곳은 없을 게다. 길인지 수렁인지 구분도 안 가고,
급류를 헤치면서 다녀야 하잖느냐. 공무원들은 뭐 하나 모르겠어. 셋집 두 채밖에 없으니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건지!”
“여보, 괜찮아요.” 아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음에 이기면 되죠.”
화이트 씨는 재빨리 위를 올려다봤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모종의 눈빛이 오갔다는 게 느껴졌
다. 그는 꺼내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는 얇은 회색 수염 아래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셨나 보네요.” 쾅 하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으로 걸어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
를 듣고 허버트 화이트가 말했다.
노인은 반가움에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오는 길이 얼마나 불편했겠냐는 노인의 위로와, 거
기에 맞장구를 치는 손님의 말이 들려왔다. 화이트 부인은 쯧쯧 혀를 차고는, 화이트 씨가 다시 거
실로 돌아오자 나지막이 헛기침을 했다. 화이트 씨와 함께 들어온 건장한 남자는 부리부리한 눈에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드려라. 모리스 상사님이다.” 화이트 씨가 남자를 소개하며 말했다.
모리스 상사는 악수를 한 뒤 화이트 씨가 권하는 대로 난롯가 옆의 자리에 앉아, 노인이 위스키와
잔을 꺼내오고 난로 위에 작은 구리 주전자를 얹는 걸 만족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세 잔쯤 술이 들어가자 모리스 상사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그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
러나왔다. 그는 이내 어깨를 쭉 펴 몸을 의자에 기대고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담을 늘어놓기 시
작했다. 이 이방의 모험가가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기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허버트 씨의
가족은 그를 옹기종기 둘러싸고 앉아 눈을 반짝거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벌써 21년 전이구먼.” 화이트 씨가 아내와 아들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그때 헤어질 때는
창고에서 일하는 풋풋한 애송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사람이 됐군 그래!”

1
“몸이 많이 상하신 것 같지도 않아요.” 화이트 부인이 거들었다.
“인도에 나도 언제 한번 가보고 싶구먼.” 노인이 말했다. “그냥 여행 삼아서 말이야.”
“집 떠나면 고생입니다.” 모리스 상사는 고개를 젓더니, 빈 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
고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오래된 사원이나 승려들, 마술사들을 보고 싶단 말일세.” 노인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모리스
상사, 자네가 일전에 내게 원숭이 손인가 뭔가 하는 것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지 않나?”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리스 상사가 당황했다는 듯 말했다. “딱히 들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시시한 겁니다.”
“원숭이 손이라고요?” 화이트 부인이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음, 여러분들이 흔히 ‘마법’이라고 부르는 거죠.” 모리스 상사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관객 세 명은 모두 궁금하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님은 멍하니 빈 잔을 입에 갖다 대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화이트 씨가 이내 잔을 다시 채웠다.
상사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말라 비틀어져서 미라가 다 된 손입니
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어 보였다. 화이트 부인은 표정을 찡그리며 몸을 움츠렸지만,
아들인 허버트 화이트 씨는 그 손을 받아들고는 신기하다는 듯 요리조리 살펴봤다.
“그러면 그 손이 뭐가 특별하다는 거요?” 화이트 씨가 아들에게서 원숭이 손을 넘겨받아 살펴본
뒤 탁자에 다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상사가 대답했다. “옛날에 한 고승이 거기에 마법을 걸었답디다. 성자였죠. 그 고승은 운명이 삶
을 지배하며, 운명으로 장난을 치려 하는 사람은 결국 비참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원숭이 손에다 마법을 걸어, 총 세 명에게 각각 세 개의 소원을 이뤄주도록
만들었죠.”
상사는 너무도 진지한 태도로 말해, 이야기를 들은 관객들이 터뜨린 나지막한 웃음이 약간 어색
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 왜 손님이 그 소원 세 번을 비시지 않고요?” 허버트 화이트 씨가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상사는 나이든 이가 버릇없는 젊은이를 훈계하듯 대답했다. “이미 빌었지요.” 그 말을 나지막하
게 꺼냄과 동시에 그의 얼룩덜룩한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정말 소원이 셋 다 이뤄졌던가요?” 화이트 부인이 물었다.
“네.” 상사가 대답했다. 술잔이 그의 이빨에 닿는 소리가 났다.
“그럼 또 소원을 빈 다른 사람이 있나요?” 화이트 부인이 캐물었다.
“네, 처음으로 이 손을 얻은 사람도 소원을 세 개 빌었습니다. 처음 두 개가 뭔지는 저도 알 도리
가 없지만, 세 번째 소원은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발바닥을 얻었죠.”
상사의 목소리는 너무도 진지해, 잠시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모리스 상사, 자네가 소원을 세 개 빌었다면 이제 그 손은 자네에겐 무용지물이 아닌가.” 노인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왜 계속 가지고 있나?”
상사는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처음에는 팔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아마 그런 일
은 없을 것 같습니다. 벌써 이 마물이 일으킨 불행은 충분하니까요. 게다가 사람들이 사려 하지도 않
을 겁니다. 지어낸 얘기라 생각하거나, 설령 조금이라도 믿을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단
소원 하나를 빌어본 다음에 돈을 주겠다는 식으로 말하거든요.”
“소원을 세 개 더 빌 수 있다면, 또 빌 건가?” 노인이 그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상사는 원숭이 손을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몇 번 흔들더니, 갑자기 벽난로의
불길에 던져 넣었다. 화이트 씨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혀서는 불길 속에서 원숭이 손을 꺼냈다.

2
“그대로 태워버리는 게 나을 겁니다.” 상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가 쓰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내게 주게나.”
“안 됩니다.” 상사의 뜻은 확고했다. “저는 이미 그 손을 벽난로에 던져 넣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걸 굳이 꺼내셨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를 탓하시면 안 됩니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분
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냥 태워버리시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하지만 화이트 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손에 들어온 원숭이 손을 유심히 살펴봤다. “소원은
어떻게 비는 거요?”
“오른손에 그걸 쥐고 크게 소원을 외치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과는 책임 못 집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같군요!” 화이트 부인이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
금 저녁을 준비하려면 손이 여덟 개라도 모자랄 텐데, 한번 그렇게 소원을 빌어볼까요?”
화이트 씨가 주머니에서 영물을 꺼내자, 상사를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모리스
상사는 크게 당황하며 화이트 씨의 팔을 붙잡았다.
모리스 상사가 황급히 말했다. “정 소원을 비실 거면, 적어도 좀 정상적인 걸로 비십시오.”
화이트 씨는 원숭이 손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의자를 꺼내 모리스 상사더러 식탁 앞에 앉
으라고 손짓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원숭이 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혀 갔다. 식사
를 마친 뒤 모리스 상사는 인도에서의 모험담을 이어나갔고, 화이트 씨네 가족은 이야기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마지막 기차를 타러 모리스 상사가 나간 뒤, 문이 닫힘과 동시에 허버트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이 들려준 모험담만큼이나 원숭이 손의 마법 이야기도 진짜면 좋겠네요. 안 그러면 쓸모없는 고물에
불과할 테니까요.”
“답례로 그분께 뭐라도 드렸나요?” 화이트 부인이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화이트 씨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여비를 조금 챙겨줬지. 안 받는다고
사양하는 걸 굳이 챙겨주느라 애 먹었다오. 그 와중에도 꼭 버리라고 한 번 더 신신당부를 하더군.”
“아유, 무서워라.” 허버트가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유명한 부자가 돼서 행복
하게 사는 것만 남았군요. 첫 소원으로는 황제가 되게 해달라고 빌어 봐요, 아버지. 지금처럼 바가지
긁히는 건 면해야죠.”
약이 오른 화이트 부인은 의자 등받침을 들고 허버트를 쫓아 식탁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화이트 씨는 주머니에서 원숭이 손을 꺼내 의심스레 바라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군. 딱히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데 말이야.”
“집 문제가 해결되면 더 좋지 않겠어요?” 허버트가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200
파운드만 생기게 해 달라고 빌어 보세요. 그 정도면 남은 빚은 다 갚을 수 있잖아요.”
아들의 말에 솔깃해 영물을 집어든 아버지는, 순간 자신의 귀가 얼마나 얇은지 새삼 느끼며 비시
시 웃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윙크에 약간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비장한 느낌의 배경음악을 살짝 깔았다.
“200 파운드가 생겼으면 좋겠다.” 노인이 또렷이 말했다.
아들도 연주 도중 노인의 말에 맞춰 쾅 하고 스포르찬도를 넣었다. 그러나 갑자기 노인이 두려움
에 떨며 비명을 질렀고, 아내와 아들은 황급히 달려왔다.
“움직였어!” 허버트 씨가 바닥에 떨어진 원숭이 손을 징그럽다는 듯 바라보며 소리쳤다. “소원을
외치니까 갑자기 뱀처럼 손 안에서 꿈틀거렸단 말이다.”
“글쎄요, 적어도 제 눈에 하늘에서 떨어진 돈이 보이진 않네요.” 아들이 원숭이 손을 집어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제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요.”
“그냥 착각한 거겠죠.” 아내가 걱정스레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누가 다친 건 아니니 됐다. 그래도 너무 놀랐다.”

3
허버트 부자는 다시 난롯가에 앉아 피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밖에는 아까보다도 심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위층의 문이 바람에 쾅 닫히는 소리에 노인은 몸을 움찔했다. 한동안 허버트 씨네 가
족을 감싸던 어색하고도 침울한 적막은, 노부부가 잠자리에 들러 위층에 올라갈 때까지 거실에 남아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면 침대 한가운데에 커다란 돈 자루가 놓여 있을 거예요.” 허버트가 안녕히 주무
시라는 말과 함께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그 부정한 재물을 정신없이 쓸어 담는 동안
옷장 위 컴컴한 곳에 악마가 쪼그리고 앉아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겠죠!”
이내 홀로 남은 허버트는 어둠 속에서 차츰 꺼져가는 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숯들 사
이에서 이런저런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인 얼굴은 원숭이의 꼴을 하고 있었는데, 그 끔찍한
모습에 허버트는 깜짝 놀라 한동안 멍해졌다. 원숭이의 얼굴은 숯들 사이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떠
올랐고, 결국 그는 불안한 듯 웃으며 마지막 불씨를 끄기 위해 탁자 위의 물컵을 찾으려 손을 움직
였다. 그러던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원숭이 손이었다. 몸에 소름이 돋은 허버트는 손을 코트에 닦고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겨울 날씨를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은 식사가 차려진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 허버트는
어젯밤 자신이 얼마나 실없는 일 때문에 떨었는지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어젯밤과는 달리 조용하
지만 꽉 찬 느낌이 방에 감돌았다. 말라비틀어지고 더러운 원숭이 손은 찬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더 이상 그 손에 걸려 있는 ‘마법’을 믿는 이는 없어 보였다.
“늙은 군인은 다 똑같나 봐요.” 화이트 부인이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듣고 있었던
우리도 우습지! 요즘 세상에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이 어디 있어요? 만에 하나 그런 마법이 진짜 있다
해도, 200 파운드를 달라고 빌었다고 누가 다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늘에서 돈 자루가 아버지 머리 위에 쾅 떨어질 수도 있죠.” 허버트가 장난스레 말했다.
“모리스 상사의 말로는, 소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더라.” 아버지가 말했다. “원하기만 하
면 우연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어쨌든 제가 퇴근하기 전까지 돈 자루 열어보지 마세요.” 허버트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어서
며 말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갑자기 고약한 구두쇠 영감으로 변해서 부자의 연을 끊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화이트 부인은 웃으며 허버트가 문을 나서는 것을 배웅했고, 길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한동
안 쳐다보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얼마나 남의 말을 쉽게 믿는지 생각하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집배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화이트 부인은 헐레벌떡 문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집배원이 들고 온 게 옷값 청구서라는 게 밝혀지자, 그녀는 ‘그 늙은 군인의 술버릇에
나도 영향을 받았나 보다.’ 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녁식사를 하며 화이트 부인이 말했다. “허버트가 퇴근하면 또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죠.”
화이트 씨는 잔에 맥주를 따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진짜로 그 원숭이 손이 내 손바닥
안에서 움직였다니까.”
“그냥 기분 탓이겠죠.”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진짜요! 움직일 거라 생각도 않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 있소?”
화이트 부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쉽사리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문 앞을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화이트 부인의 머릿속에 문득 200
파운드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미지의 신사가 반짝거리는 새 모자까지 쓴 채 말쑥이 차려입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세 번이나 들어오려다 말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문을 벌컥

4
열고는 현관문 앞까지 걸어 들어왔다. 화이트 부인은 황급히 앞치마를 끌러 앉아 있던 의자의 쿠션
밑에 집어넣었다.
화이트 부인은 안절부절 못하는 신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신사는 부인의 눈치를 보며,
집안이 정리가 안 돼 있다느니 남편이 정원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느니 하는 부인
의 변명을 건성으로 흘리고 있었다. 부인은 말을 마친 뒤 점잖은 여자답게 신사가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사는 어색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그, 저, 다름이 아니라, ‘모 앤 머긴스’에서 왔습니다.” 신사는 바지에 묻은 보풀까지 떼어내
고서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인은 깜짝 놀라 말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화이트 씨가 끼어들었다. “진정해, 여보.” 그는 급히 말을 이었다. “여기 앉으셔서 찬찬히 말씀해
보십시오. 나쁜 소식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말을 마치며 화이트 씨는 신사의 낯빛을 살폈다.
“정말 유감입니다만,” 손님이 다시 입을 뗐다.
“우리 아들이 다쳤나요?” 부인이 다그쳐 물었다.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하게 다치셨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시
지 못하십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인이 두 손을 감싸 쥐며 소리쳤다. “그래도 아파하고 있진 않다니!
불행 중 다행…….”
그때 손님의 마지막 말의 진짜 의미가 와 닿았고, 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길 피하는
손님의 태도는 그녀의 불길한 예감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헙 멈추고, 아직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한 남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아드님께서 기계에 끼이셨습니다.” 손님이 마침내 말을 이었다.
“기계에 끼였다.” 화이트 씨는 멍하니 말을 반복했다. “그렇군요.”
화이트 씨는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앉아, 아내의 손을 꽉 쥐었다. 40년 전 부부가
연애하던 시절 종종 그랬듯.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이라.” 노인이 손님에게 말했다. “마음이 많이 힘들군요.”
손님은 헛기침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회사에서는 이번 비극에 대해 두
분께 진심으로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신사는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갔다. “더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제가 회사의 입장을 전하는 전령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
다.”
부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눈은 멍했으며, 숨소리는 들
릴락 말락 했다. 노인의 얼굴에는 모리스 상사가 첫 전투에서 지었을 법한 표정이 서려 있엇다.
손님이 말했다. “모 앤 머긴스 사는 이번 사고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고, 책임을 질 의무도 없습
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드님께서 성실하게 근무해주신 점을 고려해, 회사 측에서 조금의 위로금을
마련했습니다.”
화이트 씨는 그때까지 꼭 쥐고 있던 아내의 손을 놓고는, 천천히 일어서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손님을 바라봤다.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가 말했다. “얼마죠?”
“200 파운드입니다.”
아내의 비명소리는 노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화이트 씨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손을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 바닥에 쓰러졌다.

5
3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큰 공동묘지에 시신을 묻은 뒤, 노부부는 어둠과 침묵만이 가득한 집


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처음에는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아직도 화이트 부부
는 뭔가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늙은 두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이 고난을 덜어줄
수 있는 무슨 기적이라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대는 체념으로 변해갔다. 때로 무감각함으로 오해받기도 하는, 희망을
잃고 지쳐버린 노인의 체념이었다. 하루 내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더 이상 이야
깃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권태로운 하루는 너무도 길었다.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밤에 문득 잠에서 깬 노인은 옆에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두운
침실의 창가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시 침대로 올라오구려.” 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춥잖소.”
“아들은 더 추울 거예요.” 부인을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져갔다. 이불 속은 따뜻했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노인
은 다시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그를 벌떡 깨운 것은 아내의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였다.
“손!” 아내가 외쳤다. “원숭이 손!”
노인은 경계심에 몸을 일으켰다. “어디? 원숭이 손이 어디 있소? 무슨 일이오?”
아내는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줘요. 아직 안 버렸죠?”
“거실 찬장 속에 있소.” 노인이 당황해 말했다. “그건 왜 찾소?”
화이트 부인은 울다가 웃다가 하며 화이트 씨의 뺨에 입을 맞췄다.
부인이 흥분해 말했다. “나도 참 멍청하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당신은 왜 그 생각을 못 했
어요?”
“무슨 생각을 말이오?” 그가 물었다.
“아직 소원이 두 개나 남았잖아요.” 부인이 답했다. “아직 하나밖에 안 빌었으니까.”
“아직도 부족하오?” 그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부인은 신이 나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소원을 하나 더 비는 거예요. 내려가서 빨리 가져
와요. 아들을 살려내 달라고 소원을 빌면 되잖아요.”
노인은 가느다란 팔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던져버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신, 미쳤구려!”
그가 공포에 질려 외쳤다.
“빨리 가져와요. 빨리 가져와서, 아들을 살려내라고 소원을 빌란 말이에요. 오, 우리 아들! 사랑
스러운 우리 아들!”
노인은 성냥을 그어 양초를 켰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빨리 다시 침대에 누워요.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나 하오?”
하지만 부인도 지지 않았다. “첫 번째 소원을 이뤄졌는데, 두 번째라고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그, 그건 우연이오.” 노인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빨리 가서 들고 와요.” 부인은 이미 들떠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노인은 몸을 돌려 아내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떨렸다. “벌써 죽은 지 열
흘이나 지났소. 그리고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옷이 아니었다면 나도 우리 아들인 줄 몰랐을 정
도로 참혹한 몰골이었소. 죽은 직후에도 보기 끔찍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어떻겠소?”
“살려 내요.” 부인은 남편을 문으로 끌고 갔다. “내가 젖 먹여 키운 애를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요?”

6
노인은 어둠 속을 내려가 거실에 있는 찬장에 손을 집어넣었다. 원숭이 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직 소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빈 소원 때문에 자신이 거실에서 나
가기도 전에 갈가리 찢긴 아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잠깐, 문이
어디 있었더라?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손으로 더듬거리며 탁자를 빙
돌아 벽을 따라 움직이다보니, 노인은 어느새 불결한 영물을 든 채 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있는 자신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침실에서 기다리던 아내의 얼굴도 그새 변해 있었다. 창백하지만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약간 부
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듯했다. 노인은 덜컥 겁이 났다.
“이제 소원을 빌어요!” 부인이 소리쳤다.
“여, 여보, 어리석고 부정한 짓이오.”
“빌라고요!” 아내의 대답은 똑같았다.
노인은 손을 들어올렸다. “아들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원숭이 손은 바닥에 떨어졌고, 노인은 그 영물을 두려움에 차서 쳐다봤다. 그가 두려움에 떨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을 동안, 부인은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노인은 가만히 앉아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아내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촛불은 이미 다 타 불이 촛대까지 내려가 있었고, 천장과 벽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 번 만들더니
한번 화르르 타오른 뒤 이내 꺼졌다.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안 노인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노인은 침대에 다시 들어갔고, 얼마 뒤 부인도 조용하고 차갑게 침대에 들어와 그의 곁에
누웠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계단이 삐걱거렸고, 쥐 한
마리가 벽 사이로 돌아다니는 게 들렸다. 둘을 짓누르는 어둠을 견디다 못한 노인은 용기를 끌어 모
아 성냥 하나를 켜고는 촛불을 찾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 도착할 무렵 성냥불이 꺼졌다. 노인은 성냥 하나를 더 켜려고 잠깐 멈춰 섰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너무 조용하고 나지막해서 들릴락 말락 했다.
성냥이 바닥에 떨어졌다. 노인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로 돌아 침실로 재빨리 돌아와, 침실 문을 닫았다. 세 번째 노크 소리는 집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7
“뭐예요?” 부인이 일어나 물었다.
노인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쥐, 쥐요. 계단을 내려가는데 내 앞으로 지나갔소.”
아내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똑똑, 다시 집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퍼졌다.
“허버트다!” 그녀가 소리쳤다. “허버트야!”
부인은 문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화이트 씨는 그녀를 막고 서서 팔을 단단히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그가 거의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아들, 허버트잖아요!” 부인이 팔을 빼려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3 킬로미터나 떨어진 거
리라는 걸 까먹고 있었어요. 왜 나를 막는 거예요? 놔요, 문을 열어야 해요!”
“제발, 그러지 마오.” 노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젠 자기 아들도 두려워하는 건가요? 어서 놔요. 허버트, 엄마가 간단다. 잠시만 기다려!”
노크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부인은 순간 강하게 힘을 줘 몸을 빼내고는, 침실 밖으로 달려나
갔다. 노인은 아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아내의 뒤에다 대고 다급히 외쳤다. 문 잠근 체인이 끌러
지는 소리, 아래쪽의 뻑뻑한 자물쇠가 천천히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갑자기 부인의 힘겨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자물쇠!” 그녀가 크게 외쳤다. “좀 열려라, 손이 안 닿잖아!”
노인은 네 발로 바닥을 헤집으며 원숭이 손을 찾고 있었다. 저 밖에 있는 뭔가가 들어오기 전에
찾아야 했다. 똑, 똑, 똑, 똑, 일정한 노크 소리가 집안에 계속 울렸고, 아내가 의자를 끌고 와 문 앞에
놓는 소리가 들렸다. 위쪽 자물쇠가 열리며 끼익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노인은 원숭이 손을 찾았고,
황급히 그의 세 번째 소원이자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멎었다. 아까 들리던 노크 소리의 메아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의자를 뒤로
물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계단을 타고 밀려들어왔다. 실망과 절망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아내의 길고도 큰 울음소리를 듣고, 노인은 용기를 내 그녀 옆으로 달려가 대문
너머를 바라봤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거리, 가로등 하나만이 반대쪽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