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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지원
역자: 어효선
출판사: 예림당
어효선
글읽기를 그만두다.
며칠이 지났다.
허생은 느닷없이 칼, 호미, 베, 명주, 솜 따위를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그것을 챙겨
가지고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농사짓는 기구와 옷감이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허생이 가지고 간 물건들이 매우
필요한 것들이었다.
물건은 며칠 새에 다 팔려 나갔다.
제주도에서도 수만 냥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주도의 특산물인 말총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말한다.
허생은 사람들을 써서 값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주고 말총을 사들였다.
허생은 여기서도 곳곳에 곳간을 마련해 두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나라 안 가서 나라 안에 말총이 동이 났다.
제주도의 말총은 모조리 허생의 곳간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말총은 갓이나 망건 따위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따라서 말총이 없으면 갓이나
망건을 만들 수가 없다.
갓이나 망건은, 예의를 갖추는 양반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말총을 사들인 허생은 혼잣말로
"몇 해만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상투도 틀지 못하게 될걸."
했다.
말총값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갓 장수, 망건 장수들은 갖고 있던 것들을 비싼 값에 팔았지만 말총을 다시
사들일 수가 없었다.
과연 허생의 생각대로 되었다.
이젠 웬만한 돈을 주고도 말총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이지만, 할 수 없이 헌 갓과 망건을 꿰매어
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제주도에 있는 허생이 말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갓, 망건 장수들은 앞을 다투어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몸이 달아 말총을 팔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허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사치들은 값을 높여 부르며 흥정하였다.
마침내 허생이 사 모은 말총은 열 곱 이상의 비싼값으로 팔리게 되었다.
허생은 백만 냥을 손쉽게 손에 쥐었다.
이렇듯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허생은 제 몸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초라한 모습 그대로 였다.
허생은 먹고 입는 것에 조금도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쥔 허생은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허생의 머릿속에서 생각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뜻있고 좋은 일이 무엇일까?'
허생은 골똘히 생각했다. 밤에도 자지 않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날을
밝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을 찾아서
이튿날
도적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허생은 삼십만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배에 싣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들 입을 딱 벌린 채 다시 다물 줄을 몰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
볼을 꼬집어 보는 도적도 있었다. 모두들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허생에게 큰절을 하였다.
"이제부터 오직 나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허생은 큰 소리로
"여기 있는 이 돈을 어디 너희들이 질 수 있는 대로 맘껏 가지고 가 보아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적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다. 저마다 가지고 온 자루에 돈을 가득
가득 담았다.
그러자 제아무리 기운 센 도적일지라도 백 냥을 짊어지지 못했다.
"쯧쯧, 돈 백 냥도 짊어지지 못하면서 무슨 도적질을 한다고 그러는가? 답답하고
딱한 이 사람들아, 정신차리게나!"
허생의 말에 도적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리, 그 동안 저희들이 못된 짓을 너무도 많이 했습니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못되게 굴고, 남의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많은 돈을 저희들에게 거저
주시니, 그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허생은
"자, 내가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았으니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맘껏
들게나."
하고 말했다.
모두들 취하도록 많이 마셨다.
도적들은 허생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의 눈에 고마움의 눈물이
가득하였다.
허생이 도적들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자네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평민이 되어 살고자 하여도 너무 늦었네.
자네들의 이름이 도적의 명부에 올라 있으니, 관가에서 가만 있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따로이 갈 곳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잘됐네. 우리 이렇게 한번 행동으로
옮겨 보세. 조금 전에 자네들이 각자 자루에 담은 백 냥씩을 가지고 가서 마음씨
착하고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삼아 장가를 들고, 소 한 마리씩을 사 가지고 오게나.
자네들의 솜씨를 한번 구경해 보겠네. 난 여기서 자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네. 그러니, 혹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다른 도적들을 만나거든 이 소식을 알려
주게나. 나는 예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나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나누어 주겠네."
허생의 말을 들은 도적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도적의 무리 속에 들어간 뒤로는 늘 숨어 지내며 떳떳하게 살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몰래 마을로 내려가 남의 것을 훔쳐 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돈과 소를 그냥 주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도적들은
"예, 잘 알겠습니다."
하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돈 자루를 짊어지고 흩어졌다.
그들이 떠나자 허생은 섬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우선 그들이 타고 갈 배를 마련했다. 그러고는 이천명의 식구가 일 년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가 하면, 살림과 농사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사들였다.
세간, 농기구, 씨앗들, 가축의 새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연장, 옷감, 책 따위를
마련하여 배에 실었다.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허생은 도적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도적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허생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하였다.
"모두들 약속을 지켜 주어 참으로 고맙네. 내 자네들이 살 만한 좋은 곳을 보아
두었다네. 우리 모두 그곳에 가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히 살아 보세. 착한
마음으로 서로서로를 아껴 주세나.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세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힘써 보세나!"
"좋습니다요!"
도적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자, 떠나자!"
허생은 배에 짐을 싣고 사람을 다 태우자, 그 섬으로 행했다.
허생은 이렇게 도적들을 이 땅에서 모조리 몰아간 것이다.
이 때부터 온 나라 안이 조용해졌다.
살기 좋은 섬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