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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저자: 박지원
역자: 어효선
출판사: 예림당

(고전은 영원히 낡지 않는 좋은 읽을 거리)

전래 동화도 그렇지만, 고대 소설은 재미있으면서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뉘우치게 한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고 있어서 영원히 낡지 않는 좋은 읽을
거리이다.
(허생전)은 조선조 정조 때 연임 박지원이 지은 한문 소설로, 희생의 장사를
통해서 그 때 우리 나라의 경제 제도를 깨뜨려 버릴 것을 주장하고, 하는 일없이
먹기만 하는 양반들의 능력 없음을 풍자하였다.
주인공 희생은 살림에 시달려 10년 작정한 공부를 7년만에 덮어 버리고, 변씨에게
꾼 돈으로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과 도적들을
구제했는데 이 사실을 안 이완이라는 대신이 그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벼슬에 올려
쓰려고 희생을 찾아가 정치를 의논하다가 희생의 호통에 혼이 나 달아났다가,
이튿날 다시 찾아가니 희생은 간 곳 없더라는 이야기다.
박지원은 문학자에다 실학자로서, 아름다운 문장과 앞서가는 생각으로 이름을
떨치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학이란 이론보다 사물을 중히 여기는, 실제로 소용이 되는 학문으로 실생활과
동떨어진 학문에 맞서서 백성이 쓰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입는 것과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해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생전)은 연암의 이러한 생각을 이론으로서가 아닌 이야기로서 깨우치려는 계몽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소설은 전래 동화와 함께 길이길이 전해질 값진 보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대소설은 모조리 읽기를 권한다.
우리의 조상이 남겨 준 크나큰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옳고 바르게 남을 위하는
생각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주기 바란다.

어효선
글읽기를 그만두다.

옛날, 서울 남산 밑 묵적골에 허생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묵적골은 예로부터 선비들만 살아서 선비 마을로 알려진 동네다.
산 밑 골짜기로 곧장 올라가면 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오래 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다.
허생의 집 사립문은 은행나무를 마주 보고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집이라고 해야 조그만 초가 삼간으로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였다.
그러나 허생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붕이 썩어서, 방 안에 빗물이 새는
날이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가락삼아 들으며 글을 읽었다.
이 곳 남산 밑 묵적골 선비들은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글만 읽었다. 그
밖에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생 또한 밤낮으로 책상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오직 글읽기만을 즐겨했던 허생은
배가 고픈 것도 세상일도 모두 잊은 채 마음편히 지냈다.
허생이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자 아내가 삯바느질을 해서 그날 그날 겨우 입에
풀칠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어려움이 많은 법이다. 남의 바느질 품을 파는 것조차도
일감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감이 떨어질 때에는 끼니를 굶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끼니 건너뛰기를 먹기보다 자주 하였다.
그런데도 허생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책만 읽었다.
허생의 아내는 마음씨가 착했다.
글만 읽는 허생에게 불평 한 마디, 듣기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는 것도 분수가 있는 법. 하루는 허생의 아내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훌쩍훌쩍 울며
"당신은 한평생 과거도 보지 않으시면서 읽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허생은
"내 아직 글읽기가 서툴러서 그런가 보오."
하고 껄껄 웃어 넘겼다.
아내가 다시
"밤낮없이 글을 읽으시고도 과거를 못 치르시겠다면 목수나 대장장이 같은
막일이라도 하실 일이지 왜 이러고 계십니까?"
하자, 허생은 겸연쩍어하면서
"막일은 배우지 못했으니,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소?"
하였다.
아내가 다시
"그럼, 하다못해 장사라도 하셔야지요." 했다.
허생은 낯이 화끈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어떡하오."
하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마침내 허생의 아내는 뾰로통했다.
"당신은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만 겨우 '어떡하오' 하는 것만 배우셨군요. 그래,
목수나 대장장이 노릇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 하시면 돈 안 드는 도둑질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매우 화난 말투로 대들었다.
허생은 책장을 탁 덮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참, 안타까운 일이로다. 내 애초에 글읽기를 시작할 때부터 십 년을 한하고 그걸
채우려 했는데, 이제 칠 년밖에 되지 않았거늘^5,5,5^."
하고는, 두루마기를 떼어 입고 갓을 쓰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가세가 매우 어려운 처지라 갓은 찌그러지고 두루마기는 낡아 하릴없는 비렁뱅이
모습이었다.
칠 년 만에 바깥 나들이를 해 보니 장안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크고 좋은 집들이 곳곳마다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옛 모습이 아닌 데에 허생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도 새로 뚫리어 어리벙벙해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한참을 헤매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허생은 이 골목 저 골목을 가까스로 돌아 나와 종로에 이르렀다.
종로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허생은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종로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생판 모르는
길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여보시오. 한양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누구요?"
그 사람은 얼떨떨해 가지고 장안에서 첫째가는 부자라면 아무래도 '변씨' 라고
일러 주었다.
"변씨요? 그래, 그 변씨 집이 어디요?"
그랬더니 길가던 사람은 차근차근 자세히 일러 주었다.
허생은 그 길로 변씨 집으로 향했다.
장안의 으뜸 부자

길을 물어 물어 찾아 낸 변씨의 집은 장안에서 으뜸가는 부잣집답게 솟을대문부터


으리으리했다.
보아하니, 큰 곳간들이 여러 채 있었고, 넓은 마당에는 쌓아 놓은 곡식더미가
여기저기 있었다.
일하는 하인들도 수십 명이나 되는 듯했다. 많은 하인들이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생은 변씨의 집 대문 앞에서 큰기침을 하며
"어험,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게 하인을 불렀다.
일하던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으나 허생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인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허생은 이내 눈치를 챘다. 더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나서
"에끼, 이놈들! 괘씸하구나. 감히 뉘 앞이라고 이리도 박대하느냐? 손님이
오셨는데 냉큼 너희 주인앞으로 모시지 못할까!" 하고 호령했다.
허생의 말은 매우 위엄이 있었다.
변씨 집 하인들은 그만 기가 꺾여 쩔쩔매었다.
하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예, 예, 죄송합니다요, 나리. 저희주인 어른께 뭐라고 여쭐까요?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생은 또 헛기침을 하고 나서
"그냥 어떤 이가 돈을 좀 빌리러 왔다고만 여쭈어라. 어디서 찾아온 누구라는 건
알릴 것 없느니라."
하고 점잖게 일렀다.
하인은 속으로 '별사람 다 보겠네' 하면서
"하지만 나리, 주인 어른께서는 누구시라 분명히 말씀드려야 손님을 만나실
텐테요." 했다.
허생은 이 말에 발끈 화를 내며 큰소리로
"어허, 버릇없는 놈들이로고. 손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따를 일이지, 어찌 그리
잔말이 많으냐!"
하고 또 호통을 쳤다.
하인은 호통 소리에 놀라 움찔하며
"그럼 이르신 대로 주인 어른께 전해 드리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사랑채로 달려갔다.
"주인나리, 구지레한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러 왔다면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하인이 변씨에게 아뢰었다.
"어디 사는 누구라고 하더냐?"
주인 변씨가 물었다.
"자세히 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큰 소리로 야단만 칩니다요. 차림새는
초라하지만 위엄을 갖춘 별스런 사람 같습니다요."
하인의 말을 듣고, 변씨는 참 별난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쨌든 이리로 모셔라."
하고 하인에게 일렀다.
잠시 뒤, 허생이 변씨의 사랑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허생은 변씨 앞에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굽힌 다음
"내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나 집이 가난하여 밑천이 없소그려. 그러니, 돈 만
냥만 빌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아니, 만 냥씩이나!'
변씨는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담이 큰 허생의 사람됨에 끌렸다.
비록 차림새는 볼품이 없지만,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빛하며 위엄 있는 말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변씨는
"좋소, 그렇게 하리다."
하고 선뜻 승낙하고는 그 자리에서 돈 만 냥을 허생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허생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물러가는 것이었다.
변씨의 집에는 그의 아들들과 손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문 밖으로 나가는 허생의 모습을 보아하니 비렁뱅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제딴에는 선비라고 실띠를 허리에 둘러매기를 했으나 술은 다 빠지고 없었으며,
가죽신이라고 발에 꿰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뒤꿈치가 다 닳아빠져 신으나마나 한
것이었다.
찌그러지고 망가진 갓에다가 땟국이 줄줄 흐르고 군데군데 기워진 두루마기하며
말간 콧물까지 훌쩍훌쩍 하는 모습이 비렁뱅이 중에서도 으뜸가는 비렁뱅이였다.
허생이 돌아간 뒤에 모두들 궁금해하며
"어르신, 그 손님 혹 잘 아시는 분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야."
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그러시다면 어찌하여 그렇게 큰돈을 꾸어 주셨습니까? 꾸어 주신 게 아니라 거저
주신 게 아닙니까? 더군다나 그가 사는 데는커녕 그의 이름 석 자도 묻지
않으시다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자기의
속마음을 숨기고 그럴 듯 하게 말을 꾸며서 언제까지 갚겠다고 하느니라. 으레 이
말 저 말 길게 늘여놓는데 그 사람은 다짜고짜 꿔달라더구나. 언제까지 갚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떳떳한 게야. 그 손님은 옷이며
신발이 비록 다 해지고 닳아, 그 모습이 초라하긴 했지만 우선 말이 간단하고
분명하더군. 사람을 대하는 눈가짐도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하고. 그러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재산 모으는 일에는
별로 생각이 없고, 벌써 오래 전부터 스스로의 살림에 만족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기 드물게 별스럽고 이상한 사람인 듯했으나, 지난 뜻이 꽤 큰 것 같았다.
모르는 나를 찾아와, 처음 보는 자리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아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야. 그만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꼭 이루리라고 생각되더군. 그러니, 모르긴 해도 아마 그가 한 번 해
보려고 하는 일이라는 것도 작은 일은 아닐게야. 나 또한 그 사람을 한 번 시험해
보려는 뜻도 있고."
하고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아들들은
"아무리 그리하더라도 이름은 알아 두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변씨는
"돈을 건네 주지 않았으면 모르려니와, 이미 만 냥을 내주었는데, 굳이 그의 이름
석 자는 물어서 무얼 하겠느냐."
하고 타일렀다.
"과연 장안에서 제일 가는 부자답게 통이 큰 어르신이십니다!"
사람들은 감탄했다.
한편, 만 냥을 쉽사리 얻은 허생은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곰곰 생각했다.
'저 안성 땅은 경기와 충청의 갈림길이지. 또한 삼남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라, 나라 안의 갖가지 산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삼남이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허생은 곧 안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일 장사로 십만 냥을

허생은 안성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그 근처에 거처할 만한 집을 정해


놓았다.
또 같이 일할 일꾼도 후한 삯을 주기로 하고 십여명 구했다.
허생은 이튿날부터 시장에 나가서 대추, 밤, 감, 배, 감자, 석류, 귤, 유자 따위
과일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또 놀고 있는 빈 땅을 여기저기 사서 넓은 곳간을 군데군데 지어 놓았다.
갖가지 과실을 사는 대로 허생은 그것을 곳간에 차곡차곡 잘 쌓아 놓았다.
당장 안성 과일이 동이 났다.
과일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랐다.
이렇게 해서 얼마 안 가, 나라 안의 과일이란 과일은 동이 나고 말았다.
집집마다 잔치나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과일이 없어서, 상차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라 안이 과일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허생이 과일을 깡그리 긁어모았다는 소문을 들은 과일 장수들이 허생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과일 장수들은 허생에게 과일을 팔아 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그러나 허생은 곳간 문에다 빗장을 지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값은 달라시는 대로 드릴 테니, 제발 과일을 팔아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과일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이제부터 슬슬 장사를 시작해 볼까.'
허생은 그제야 마음이 움직였다.
허생은 곳간에 쌓아 둔 과일들을 조금씩 조금씩 내놓았다.
산 값의 열 곱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그래도 과일 징수들은 서로 다투어 그 비싼 과일을 사 갔다.
과일을 다 팔고 나니 십만 냥이란 엄청난 돈이 생겼다. 그로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구경하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러나 허생은 여기에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직도 할 일은 많다고 생각했다.
과일 장사를 해서 제일 처음 뜻한 바를 이루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또 있었다.
허생은
"어허, 겨우 만 냥으로 온 나라 안의 살림을 기울이게 할 수 있다니^5,5,5^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알 만하구나!"
하면서 걱정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허생은 십만 냥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을까 하고 곰곰
생각했다.
말총 장사

며칠이 지났다.
허생은 느닷없이 칼, 호미, 베, 명주, 솜 따위를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그것을 챙겨
가지고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농사짓는 기구와 옷감이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허생이 가지고 간 물건들이 매우
필요한 것들이었다.
물건은 며칠 새에 다 팔려 나갔다.
제주도에서도 수만 냥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주도의 특산물인 말총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말한다.
허생은 사람들을 써서 값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주고 말총을 사들였다.
허생은 여기서도 곳곳에 곳간을 마련해 두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나라 안 가서 나라 안에 말총이 동이 났다.
제주도의 말총은 모조리 허생의 곳간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말총은 갓이나 망건 따위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따라서 말총이 없으면 갓이나
망건을 만들 수가 없다.
갓이나 망건은, 예의를 갖추는 양반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말총을 사들인 허생은 혼잣말로
"몇 해만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상투도 틀지 못하게 될걸."
했다.
말총값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갓 장수, 망건 장수들은 갖고 있던 것들을 비싼 값에 팔았지만 말총을 다시
사들일 수가 없었다.
과연 허생의 생각대로 되었다.
이젠 웬만한 돈을 주고도 말총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이지만, 할 수 없이 헌 갓과 망건을 꿰매어
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제주도에 있는 허생이 말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갓, 망건 장수들은 앞을 다투어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몸이 달아 말총을 팔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허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사치들은 값을 높여 부르며 흥정하였다.
마침내 허생이 사 모은 말총은 열 곱 이상의 비싼값으로 팔리게 되었다.
허생은 백만 냥을 손쉽게 손에 쥐었다.
이렇듯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허생은 제 몸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초라한 모습 그대로 였다.
허생은 먹고 입는 것에 조금도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쥔 허생은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허생의 머릿속에서 생각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뜻있고 좋은 일이 무엇일까?'
허생은 골똘히 생각했다. 밤에도 자지 않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날을
밝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을 찾아서

어느 날 허생은 나루터에 나가 늙은 뱃사공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여보게, 혹시 바다 밖에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공은 눈을 끔벅이며 한참 생각하더니
"예, 예, 있습지요. 제가 언젠가 바람에 휩쓸려 줄곧 서쪽으로 사흘 밤낮을
떠내려갔었습죠. 그러다가 어느 한 섬에 닿았습지요. 그 곳은 아마 사문과 장기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인 듯합니다요. 그 섬은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온갖 꽃과
풀들이 저절로 피어나고, 과일과 오이가 절로 나서 자라고 여물어 떨어지고
있습니다요. 어디 그뿐입니까요? 고라니와 사슴이 떼지어 다니고, 헤엄쳐 노는
물고기조차도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군입쇼.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입니다요."
하고 알려 주었다.
사공의 말을 들은 허생은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잘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생은 그 뱃사공을 조용히 불러
"아까 얘기한 그 섬을 찾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뱃사공은 이내
"예, 여기서 동남쪽으로 배를 곧장 저어 가면 그 섬에 닿을 겁니다요."
하고 대답했다. 허생은
"거참, 자네를 잘 만났네. 나를 그 섬으로 데려다 주게나.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오래도록 길이길이 넉넉함을 누리도록 해 주겠네."
하고 청하였다.
"좋습니다요!"
사공은 허생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드디어 허생과 사공은 그 섬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바람이 알맞게 부는 날을 기다려, 끝없이 너른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허생은 가슴이 설레었다.
그 섬은 과연 어떤 곳일까? 사공이 말한 대로 아름다운 곳일까? 갖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바람이 때마침 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솔솔 불었다. 그리하여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육지를 떠난 지 며칠이 흘렀다.
푸른 섬이 눈앞에 아른아른 보였다.
"저깁니다요. 바로 저 섬입니다요!"
사공은 소리 높여 말했다.
"그래, 저 섬이 틀림없나?"
허생은 반가워 다시 물었다.
"틀림없습니다요!"
사공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잠시 뒤 배가 섬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허생은 곧장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서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과연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허생은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그러더니
"땅이 천리가 채 못 되는 좁은 곳이니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나 땅이 기름지고
수풀이 우거진 데다가 물맛 또한 기막히게 좋구나! 이 곳에서 산다면 부잣집 늙은이
노릇쯤은 할 수 있겠다."
하고는 아쉬워했다.
옆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공은
"아니,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는 텅 빈 이 섬에서 누구와 더불어 살아 부자가
된단 말씀입니까요?"
하고 물었다.
허생은 껄껄 웃었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드는 법일세. 덕이 없는 것이
근심이지, 내 어찌 사람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허생의 말에 사공은 더욱더 궁금히 여기어,
"이 섬은 비록 살기 좋은 곳이라 해도 뭍과 많이 떨어져 있어 너무 외집니다요.
그러하니 사람이 와서 살기도 쉽지 않겠는뎁쇼."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생은
"좋은 방법이 있을 걸세. 곰곰 생각해 보세나."
하면서 뱃사공과 함께 섬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비록 좁은 땅이긴 하나 기름지고 아름다운 이 섬, 이 곳에 살 백성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나라에 도움이 되고 어려운 사람도 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아! 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라 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뭇 도적들을 잘
달래서 이 곳으로 데리고 오자. 먹을 것, 입을 것이 해결된다면 그들도 본시 악한
사람들은 아니리라.'
허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무렵 변산 지방에 수천 명의 도적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 도적들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몽땅 털어 갔다.
백성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고을에서는 도적을 잡기 위해 군사를 풀었으나 도적들은 쉽게 잡히질
않았다.
도적의 무리를 찾아가다.

허생은 이 소문을 듣고 돈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를 변산 바닷가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변산 지방에 있다는 도적의 소굴로 찾아들었다.
그 곳은 매우 험하고 가파른 산이었다.
허생이 숲 속을 한참 헤매고 있자니 서너 명의 도적이 불쑥 나타났다.
"꼼짝 마랏!"
도적은 칼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사람들은 도적을 만나면 무서워 벌벌 떨고 심지어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허생은 오히려 반가웠다.
허생은
"자네들, 마침 잘 만났네. 나를 얼른 우두머리에게로 데려다 주게."
하고, 반갑다는 듯 말했다.
도적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런 괴짜는 처음
이었다.
도적들은 기가 막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는가? 얼른 앞장서게!"
허생이 큰 소리로 재촉했다.
도적들은 허생의 위엄에 눌려 꼼짝 못하고 그를 우두머리에게 데리고 갔다.
허생은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반갑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내가 이 곳을 찾아온 것은 해치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말게. 다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으니 알려 주길 바라네. 자네들 천 명이 돈 천 냥을 도적질해서 서로 나누어
갖기로 한다면, 한 사람 앞에 얼마씩 돌아가겠는가?"
그러자 도적의 우두머리는
"그야 한 사람 앞에 한 냥이지."
하고 얼른 대답했다.
허생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래 겨우 한 냥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고 그 짓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로군. 왜 그렇게들 속이 없는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허생은 계속해서
"그럼, 자네들에게는 아내가 있는가?"
하고 묻자, 도적들은
"없소이다."
하고 말했다. 허생은
"거참, 안됐군."
하며 계속 물었다.
"그럼, 논밭은 있겠지?"
그 말에 도적들은 와르르 웃어 댔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구먼! 생각 좀 해 보슈. 우리에게 농사지을 땅이 있고
마누라가 있으면 도적이 왜 됐겠수? 이토록 힘들고 고달프게 도적질을 왜 하겠느냔
말이오."
"그럼, 그렇고말고!"
도적들이 대답했다. 그러자 허생은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을 짓고 소를 사서 농사를 짓지 않나? 그렇게
살아간다면 도적놈이란 더러운 이름도 듣지 않을 게 아닌가. 그뿐 아니라
살림살이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고^5,5,5^ 또 밖으로 여기저기 나다닌다 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을 테니 그 얼마나 좋은가? 오래도록 잘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하고 말했다.
도적들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우두머리 도적은
"허허,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겠소. 그것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바이지. 다만
돈이 없어서 그렇지 않소."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허생은 껄껄 웃으며
"도적질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돈이 없는 것을 걱정한단 말인가? 참으로 그것이
자네들의 바람이라면, 내 자네들을 위해서 돈을 마련해 주겠네. 내일 저 바닷가에
나가 보게. 붉은 깃발을 단 배들이 여러 척 보일 걸세. 그것은 모두 돈을 가득 실은
배라네. 물론 돈의 임자는 나일세.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자네들이 가지고 싶은
만큼 마음껏 챙겨 가게."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떠났다.
도적들은 허생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단지 미친 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나 떳떳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꾀죄죄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영 미덥지가 않았다.
만약 그가 그처럼 가진 돈이 많다면 그런 낡아빠진 옷은 안 입었을 것이 아닌가.
제 모습이 초라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겠다니, 그것은 도적들의
머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적들은 허생의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을 담을 자루를 만들기에
바빴다.
도적들을 데리고 섬으로

이튿날
도적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허생은 삼십만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배에 싣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들 입을 딱 벌린 채 다시 다물 줄을 몰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
볼을 꼬집어 보는 도적도 있었다. 모두들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허생에게 큰절을 하였다.
"이제부터 오직 나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허생은 큰 소리로
"여기 있는 이 돈을 어디 너희들이 질 수 있는 대로 맘껏 가지고 가 보아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적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다. 저마다 가지고 온 자루에 돈을 가득
가득 담았다.
그러자 제아무리 기운 센 도적일지라도 백 냥을 짊어지지 못했다.
"쯧쯧, 돈 백 냥도 짊어지지 못하면서 무슨 도적질을 한다고 그러는가? 답답하고
딱한 이 사람들아, 정신차리게나!"
허생의 말에 도적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리, 그 동안 저희들이 못된 짓을 너무도 많이 했습니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못되게 굴고, 남의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많은 돈을 저희들에게 거저
주시니, 그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허생은
"자, 내가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았으니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맘껏
들게나."
하고 말했다.
모두들 취하도록 많이 마셨다.
도적들은 허생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의 눈에 고마움의 눈물이
가득하였다.
허생이 도적들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자네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평민이 되어 살고자 하여도 너무 늦었네.
자네들의 이름이 도적의 명부에 올라 있으니, 관가에서 가만 있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따로이 갈 곳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잘됐네. 우리 이렇게 한번 행동으로
옮겨 보세. 조금 전에 자네들이 각자 자루에 담은 백 냥씩을 가지고 가서 마음씨
착하고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삼아 장가를 들고, 소 한 마리씩을 사 가지고 오게나.
자네들의 솜씨를 한번 구경해 보겠네. 난 여기서 자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네. 그러니, 혹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다른 도적들을 만나거든 이 소식을 알려
주게나. 나는 예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나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나누어 주겠네."
허생의 말을 들은 도적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도적의 무리 속에 들어간 뒤로는 늘 숨어 지내며 떳떳하게 살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몰래 마을로 내려가 남의 것을 훔쳐 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돈과 소를 그냥 주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도적들은
"예, 잘 알겠습니다."
하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돈 자루를 짊어지고 흩어졌다.
그들이 떠나자 허생은 섬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우선 그들이 타고 갈 배를 마련했다. 그러고는 이천명의 식구가 일 년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가 하면, 살림과 농사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사들였다.
세간, 농기구, 씨앗들, 가축의 새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연장, 옷감, 책 따위를
마련하여 배에 실었다.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허생은 도적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도적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허생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하였다.
"모두들 약속을 지켜 주어 참으로 고맙네. 내 자네들이 살 만한 좋은 곳을 보아
두었다네. 우리 모두 그곳에 가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히 살아 보세. 착한
마음으로 서로서로를 아껴 주세나.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세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힘써 보세나!"
"좋습니다요!"
도적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자, 떠나자!"
허생은 배에 짐을 싣고 사람을 다 태우자, 그 섬으로 행했다.
허생은 이렇게 도적들을 이 땅에서 모조리 몰아간 것이다.
이 때부터 온 나라 안이 조용해졌다.
살기 좋은 섬을 만들다.

허생이 거느린 수백 척의 배들은 긴 항해를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났다.
배는 목적지인 빈 섬에 별 탈 없이 무사히 닿았다.
허생이 먼저 뭍에 올랐다.
"자, 여기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갈 보금자리일세. 모두 배에서 내려 둘러보게."
사람들은 모두 섬에 올라가 두루 살피고 다녔다.
숲에서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흙이 매우 보드랍고 땅이 아주 기름진
곳이었다.
동물들은 낯선 사람들을 보아도 달아나지를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섬을 두리번거렸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들의 마음은 무척
설레면서도 굳게 다져졌다.
허생은 그 곳에서 할 일을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세웠다. 모두들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하였다.
마을 터를 닦고 우물도 파고 길도 내었다. 그리고 논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하나 살지 않던 섬에 큰 마을이 생겼다.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니 워낙 기름진 곳이라 밭갈이와 김매기를 하지 않아도
곡식 이삭이 알차게 여물었다.
이제 이 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예전에 남의 것을 빼앗던 나쁜 도적들이었지만, 모두들 넉넉한 생활을 하고 보니,
그 누구도 남의 물건을 넘보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맑고 따뜻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갔다.
섬은 점점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어느덧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었더니 대풍작이었다. 삼 년 동안 먹을 식량을 쌓아
놓고도 양식이 남아돌아, 나머지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장기도에 갖다 팔기로 했다.
장기도는 일본에 딸려 있는 섬으로, 집들이 삼십만 호나 되었다.
때마침 그 곳은 여러 해 동안 큰 흉년이 들어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허생은 곡식을 실은 수백 척의 배들을 이끌고 장기도를 찾았다.
그 곳 사람들은 비싼 값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곡식을 다투어 사갔다.
허생은 곧 백만 냥이란 많은 돈을 챙겨 가지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왔다.
허생은 모든 것이 뜻하던 대로 되었으므로 마음이 흐뭇했다.
허생은 이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정말 뭘 좀 해 본 것 같구나."
허생은 섬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처음에 자네들과 더불어 이 섬으로 들어올 때에는 먼저 부자가 되게 한
다음에 글도 가르치고 옷이며 갓 따위를 입고 쓰게 하려고 했네. 그러나 땅이 좁고
내 덕 또한 부족하니,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려 하네. 그 전에 몇 가지 일러 둘
말이 있네. 무릇 사람이란 예의를 알아야 한다네. 자네들은 어린애가 태어나고
자라서 숟가락을 잡을 만하거든 수저는 오른손으로 잡아야 하고, 또 하루라도 일찍
태어난 사람이 수저를 든 다음에 먹어야 한다는 따위의 예의를 가르쳐 올바르게
키워야 하네."
그러고는 다시
"이 섬에서 다툴 일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 버려야 하네."
하고 단단히 일렀다.
허생은 자기가 타고 떠날 배 한 척만 남겨 두고 나머지 다른배들은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가지 않으면 또한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드나들게 되면, 나쁜 점만 배우게 될 거야. 그리하면 서로 속이고 다투게 될테니까.
이렇게 하는 것일세."
그리고 은 오십만 냥도 바닷속에 던져 버렸다.
"바다가 마르면 이것을 얻는 자가 있을 걸세. 백만 냥이라고 하면 나라 안에서도
쓸 데가 없는 엄청난 돈인데, 하물며 이렇게 작은 섬에서 어디다 쓰겠는가? 그냥
두었다가는 자칫 다툼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겠네."
허생은 마지막으로 그들 가운데 글을 아는 사람을 모두 불러 내어 배에 태웠다.
"나는 이제 뭍으로 돌아가겠네. 이 섬에서 다툴 일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
버렸네. 부디 서로서로 힘을 모아 부지런히 일하며 사이좋게 지내야 하네. 지나친
욕심은 갖지 말게. 모두의 행복을 진심으로 비네."
허생은 뭍을 향해 배를 띄웠다.
섬사람들은 허생과의 헤어짐을 슬퍼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섭섭해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든 만나면 헤어지는 법, 슬픔을 억누르며 서로의 안녕을 빌
수밖에 없었다.
뭍으로 돌아온 허생은 돈을 싣고 온 나라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변씨를 찾아가다.

허생은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십만 냥이란 큰돈이 남았다.


허생은
"인제는 변씨에게 빌린 것을 갚아야겠군."
했다.
지난날 변씨에게 빌린 돈은 만 냥이었으나, 그 동안 그 돈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그 열 곱을 갚으려 한 것이다.
허생은 변씨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어험, 이리 오너라!"
변씨의 집 하인은 대번에 허생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낙망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5년 전에 비렁뱅이 꼴로 찾아왔던 사람이 그 때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 않은가!
하인은 변씨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주인 나리, 바로 그 사람이 왔습니다요!"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이냐?"
"오 년전에 초라한 차림으로 찾아와서 만 냥을 꿔갔던 그 선비 말입니다요."
하인의 말에 주인 변씨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 어서 안으로 모시어라."
그러잖아도 변씨는 허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잠시 뒤, 허생이 변씨 앞에 앉았다.
변씨는 퍽 반가웠다. 그런데 허생을 보니 예전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사실 변씨는 허생을 큰 인물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은근히 실망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변씨를 만난 허생은 대뜸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물었다.
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다만, 인사가 없어서 이름을 모를
뿐이오. 그러나 저러나 그대의 모습이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소 그려. 혹시 빌려 간
만 냥을 몽땅 날려 버린 것 아니오?"
그러자 허생은 껄껄 웃으며
"돈과 물질로 해서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그대들에게나 있는 일이오. 만
냥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어찌 도리를 살찌울 수 있단 말이오."
하고는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척 건네 주었다.
변씨는 허생의 말을 듣고 기슴이 뜨끔했다. 그리고 낯이 뜨거웠다. 허생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내 한때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글 읽던 것을 끝마치지 못했소. 그대에게 만
냥 꾼 것을 부끄러이 여길 따름이오."
허생은 이렇게 말하고는 곧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변씨는 다급히 일어서서 얼른 허생을 붙잡고는
"내가 꾸어 준 돈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십만 냥이란 너무 많은
돈이오. 제발 이러지 마시오. 부탁이오. 매우 난처하구려. 예전에 빌려준 만 냥에다
십분의 일의 이자를 쳐서 만천 냥만 받겠소이다. 나머지는 돌려 드릴 테니, 다시
거두어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도로 받아 챙길 허생이 아니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렇게 돌려드리는 것이오. 그러니 다른 말씀일랑 아^36^예
하지 마시오. 십만 냥 그냥 받아 두시오."
"안 되오. 그렇게는 나도 할 수 없소. 이 일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내 처지가
어떻게 되겠소이까?"
변씨는 허생을 붙잡고 통사정하듯이 했다. 그러자 허생은 벌컥 화를 내며
"그대는 어찌 나를 장사치 대하듯 한단 말이오?"
하고는 소매를 홱 뿌리쳤다.
허생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변씨는 더 말해야 소용이 없을 줄을 알았다. 그래서 조심조심 허생의 뒤를
밝았다.
도대체 허생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변씨, 허생의 뒤를 밝다.

허생은 곧장 남산 밑 골짜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의 쓰러지게 된


오막살이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변씨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저것이 바로 저 선비의 집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 많은 돈을 마다한 채 저토록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사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게다가 저리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큰 용기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갔다. 하지만 허생의 뒤를 따라 들어갈
용기는 차마 없었다.
변씨는 할 수 없이 도로 내려오다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노파를 보고는 다가가
"할머니, 저 작은 집은 뉘 댁입니까?"
하고 물었다.
"허 생원 댁이지요. 허 생원이란 분, 가난하지만 글읽기를 무척 좋아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훌쩍 집을 나갔다지요, 아마. 나간 지 벌써 다섯 해가
되었군요. 마음씨 착한 허 생원의 아내가 홀로 남아 삯바느질을 하여 하루하루 겨우
목숨을 이어 나가고 있지요. 허 생원이 집을 나가고는 아무 소식이 없어 집 나가던
날을 제삿날로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변씨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허생의 집 형편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도 알았다.
변씨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이었다.
변씨는 허생에게 받았던 돈 가운데서 만 냥을 빼놓고 그 나머지 구만 냥을 모두
꾸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허생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의 집 사립문 앞에 온 변씨는 낮은 목소리로
"허 생원, 계십니까?"
하고 불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변씨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불렀다.
"허 생원, 계십니까?"
"누구시오?"
허생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나요."
변씨가 대답하니 허생은 곧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변씨를 보고도 별로
반가워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변 생원이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그리고 내 집은 어떻게 알았소?"
변씨는 허생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다짜고짜 고개를 숙이며
"허 생원, 참으로 훌륭하시오! 이토록 어렵게 사시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돈을
모으실 수가 있소? 대단하시오. 또 어쩌면 그토록 성인과 군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단 말이오!"
하고 탄복했다.
그러자 허생은
"여보시오, 거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이오. 듣기에 민망하구려. 당치 않소. 자, 그
고개 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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