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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가지 남성 콤플랙스

여성을 위한 모임 지음

책머리에
"남자들 그냥 살게 놔두소."
"남성을 연구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어떤 분이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엔 "힘겹게 살아가는 남자들 건드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으나, 다음
순간"여자가 남자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함축적인 의미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랬다. 남성은 모든 집단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면서도 실상
연구 대상에 오른 적은 드물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보다는 열등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난다. 남성의 삶도 마찬가지여서 사회 조사의
대상에서 비껴 나 있던 것은 그들이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사회 변화를 보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제도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남성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서구에서는 남성들이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정하는 용기를 보이고, 여성의 의식 변화를 이끌었던
여성학자들이 남성 문제를 진지하게 짚어 보고 있는데, '남성 우월 신화'
'남자가 되어라' '남성다움 벗기기' '남성 기계' '남성의 마음' '변화하는
남성' '해방된 남성' '가부장제를 넘어서'같은 남성 연구 책자가 쏟아져
나오는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한편에서는 고통받는 남성들이 권위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돌고 남자로서 예정된 활동과 성공하여 인정받는 일에만
몰입해 있을 뿐 변화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회의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련의 변화를 거치면서 남성다움도 조금씩
흔들리며 변화해 왔다.
남자라면 독립심과 책임감, 냉정함, 가족 부양, 성적 능력, 무엇이든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이러한
남성다움은 경쟁과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한 산업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구체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의 덫에 빠진 남성들은 경쟁, 성취, 업적에 따라 평가받으며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 치열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에게는 여성과의 관계보다 오히려 남성끼리 경쟁하며 생기는 문제가 더
크고 절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남성다움이라는 하나의 규준과
척도에 남성이 무리하게 매인것은 아닌지, 이로 인해 인간다운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개성을 상실한 채 고단한 삶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권력을 낳는 남성다움은 여성뿐 아니라 대다수 남성을
지배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남성들은 어려서부터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고
과묵에 길들여져, 많은 남성이 자신의 굴레를 벗고 홀가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눈으로 남성의 삶을 다시
보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물이나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객관적인 자리가 필요하듯, 여성이라는 상대적인 위치를 떠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남성의 삶과 의식,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남성 스스로도 자신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후에야 남녀가 함께 인간이라는 공동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인터뷰와 실제 조사를 통해 콤플렉스라는 이름의 복잡한 남성
의식 세계를 알아보았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역사 속에서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남성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조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콤플렉스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성 콤플렉스는 전통적으로 굳어진
남성다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산업 사회 이후 더욱 복합적이고 다양한
변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연구에 앞서 예비 조사와 역사적 변화에 따라 남성다움을 유형화시켜 본
결과, 사내 대장부, 성, 장남, 온달, 지적, 외모, 만능인 등 일곱가지
콤플렉스로 남성의 의식과 문제를 압축시키게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중세라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데도 여전히 스러져가는
기사도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를 내세워 시대착오적인 사람에게 사회의 변화를
바로 보고 부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제 이 시대는 남성의 삶을 지상에
올려놓고 바로 보아야 할 때다. 남성 스스로 현재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연구도 시작되었다.
이제 남성과 여성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잘라
오리 다리에 잇거나, 산을 헐어 골짜기를 메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도 어느 한 쪽을 다른 쪽에 맞춘다고 서로 평등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틀에 자신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사실에 대한 '위대한
거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루어 낸 결과물이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설문과 인터뷰에 응해 준 남성들과 출판인이 아닌 한 남성으로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고 연구를 지켜보아 준 현암사 조근태 사장과 형난옥
편집장과 편집부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94년 4월
여성을 위한 모임

차례
책머리에
남자 그 왜곡된 삶 속에서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
온달 콤플렉스
성 콤플렉스
지적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
장남 콤플렉스
만능인 콤플렉스
함께 사는 우리를 위하여

남자, 그 왜곡된 삶 속에서


이제 남성과 여성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잘라 오리 다리에 잇거나, 산을 헐어 골짜기를
메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도 어느 한 쪽을 다른 쪽에 맞춘다고 서로 평등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성다움과 남성 콤플렉스
남성다움의 이상형
우리 옛말에 "아들은 이리 같은 아이를 낳아도 오히려 질약할까 두렵고,
딸은 쥐 같은 아이를 낳아도 오히려 범처럼 사나울까 두렵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우리는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문화적 틀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특히 남자가 된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전투와도 같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는 공격적이고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며 합리적이고 적극적,
모험적이어야만 '남자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되도록 나약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남성다움'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여성다움이나 여자답다는 개념과는 정반대의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남자다우려면 여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과는 결별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성격과 개성을 타고난다. 그러므로 남자다움의 규정이
모든 남성에게 적용될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강요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의 많은 남성들이 마지못해서든 스스로 원해서든
이상화된 남성다움이라는 허구를 걸치고 살아간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요구하고 많은 남성이 스스로 도달하려고
애쓰는 남성다움이란 무엇인가? 남성이 생각하는 남성다움을 설문지를 통해
조사하고 그들이 직접 응답한 내용을 바탕으로 유형을 구분해 보았다.

유형 정의 예
단단한 차돌이 되어라 굳건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매사에 당당하고 씩씩하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확실히 행동한다. 큰
뜻을 품고 실천에 옮긴다. 뜻한 바를 꼭 이루려는 의지력이 있다. 모든 일에
침착하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자신감을 가지고 처리한다. 강한 신념을
지닌다. 확고한 세계관을 지닌다.
거물이 되어라 성공과 권력으로 평가받으므로 우월함을 인정받는 지위를
얻어야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추진력과 지도력이 있다.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진다. 타인의 신뢰를 받는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된다. 모든 일에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 여성다움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감정, 나약함,
여성다운 역할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희로애락을 표현하지 않는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여성이 하는 일(간호사,
보모)은 금물이다.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쫀쫀하지 않고 대담한
성격을 지닌다.
불도저처럼 밀어 붙여라 정신적,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며,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다른 사람보다 강해야 한다. 원하는
대로 밀어 붙여라. 당당하고 도전적이며 싸움을 잘한다. 스릴과 모험을
즐긴다. 배짱과 진취성이 있다. 과감하고 거칠고 공격적이고 반항적이다.
성인군자가 되어라 외유내강으로 아량이 넓고 관대해야 한다. 이해심이
많고 돈에 인색하지 않다. 포용력으로 여성과 약자를 보호한다. 인내와
분노를 조절할 줄 안다. 사랑을 줄 수 있으며 따뜻하다. 강할 때 강하지만
부드럽고 너그럽다. 자상하다.
(위의 남성다움에 대한 유형은 본 조사에서 "당신이 생각하기에
남자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응답과 데이비드 데보라와 로버트
브래넌이 분류한 남성의 역할 유형을 고려해서 만들었다. 이는 남성다움에
대한 이상형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의 남성다움은 브래넌이 분류한
서구의 남성다움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지만 "남자란 무릇 가슴이 넓어야
한다"는 군자상도 남성다움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브래넌은
남성다움 유형을 첫째, 여성적인 것은 받아들이지 마라(no sissy stuff),
둘째, 큰 수레바퀴(저명인사)가 되어라 (big wheel), 셋째, 견고한
참나무처럼 독립심과 자신감을 가져라(sturdy oak), 넷째, 공격적인 성격을
가져라(give'em hell)등으로 나누었다. 위의 표에서 예는 응답자들이 직접
기입한 내용을 유형에 맞게 분류하였다)

남성다움과 콤플렉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성이 추구하는 남성다움은 서구의 남성다움과
유사한 면이 나타나고 있어 지구상의 남성들에게 남성다움은 보편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길러낸 특수한 유교
중심의 전통적인 남성상인 여유있고 너그로운 군자상도 포함되어 복합적인
남성다움을 보여 준다.
남성다움은 보통 이상적인 요인들이 모여 만들어지기 마련이어서, 실제로
대부분의 남성이 남성다움의 특징들을 두루 갖추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남성, 겁이 많아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남성, 나약한 남성 등 흔히 여성다움으로 일컬어지는 성향을
지닌 남성도 허다하다.
남성다움이라는 집단적 이상과 남성 개인의 실제적인 삶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상형에 자신을 맞추어 보라고 노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형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패배감을 느끼기도 한다. 남성 세계가 치열한 경쟁, 업적 중심의 성향,
야심, 적극성 등을 남성적인 기질로 규정할수록 남성다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더욱 사로잡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남성 콤플렉스가 생긴다. 이런
콤플렉스는 남성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감정을
발산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삶이 콤플렉스에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콤플렉스란 사고의 흐름을 훼방하고 당황케 하거나 화를 내게 만들거나
마음을 찔러 목메게 하는 어떤 것이다. 약점에 찔리면 사람들은 곧잘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흥분하게 되는데, 콤플렉스는 바로 그 약점에
자리잡는다. 그런 뜻에서 흔히 콤플렉스를 열등 의식으로 생각하지만
열등감으로 생기는 불쾌한 감정뿐 아니라 우월감과 희로애락 같은 다양한
감정도 포함한다.
우리 나라 남성이 가지고 있는 남성 콤플렉스는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
온달 콤플렉스, 만능인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 성 콤플렉스, 지적
콤플렉스, 장남 콤플렉스 등 일곱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콤플렉스를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 콤플렉스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가 매혹의 대상일 때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거나 깨닫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오히려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도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콤플렉스를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불쾌감과
고통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남성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역할과 사회적 위치를 더 이상 무리 없이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부여한 남성다움으로 인해 많은 남성이 심리적인 갈등에 싸이고 콤플렉스에
빠져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남성 콤플렉스는 여성과는 반대로 남성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마초(macho) 이미지와
마치스모(machismo)현상이다. 마초란 신체적, 성적, 심리적, 또는 지적으로
남성은 우월하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남성으로 권위주의적인 남성 또는 남존
여비 신봉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나약한 감정이나 불안정한 성
정체감을 감추기 위해 초남성다움(hyper-masculinity)을 더욱 드러내려
한다. 마초 이미지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남성에게 이 이미지는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우월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편견에 힘입어 남성에게 부과된 억압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성다움에 자신을 잃은 남성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로 마치스모
현상을 들 수 있다. 자신을 잃고 불안해진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일삼거나 구타하는 등 무모한 짓을 함으로써 남자임을 과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월감을 과시하는 마초와 달리 마치스모는 남성이 자신의 우월감을
받쳐 주고 확인할 수 있는 기제가 없을 때 느끼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결국
마초와 마치스모 현상은 남성 우월 신화의 음과 양이라 할 수 있다.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흔히 여성적이거나 남자답지
못한 점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되면 움츠러들거나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유교적 권위주의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남성 콤플렉스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보는 계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먼저
남성다움의 역사적 변모 과정과 그 신화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도 많은 남성이 신기루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상화된 남성상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탐색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남성 우월 신화 다시 보기
남성다움이란 남성으로 태어난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질, 자격,
해야 할 도리 및 역할 수행과 밀접하다. 이는 남성 특유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오랜 공동 생활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져
정착되어 온 것이라 하겠다. 즉 남성다움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부장 사회를 떠받쳐 온 신화, 종교,
생물학, 심리학, 유교 및 금기담 등에서 남성다움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영웅 신화에 나타난 남성다움
칼라일이 역사를 영웅의 전기라고 말했듯, 역사는 전쟁의 시대, 철인의
시대, 강력한 지배자의 시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남성 영웅을 탄생시켰다. 영웅 신화에서 우리는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누르고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남성이 어떠한 성격을 이상으로 삼았는지
추측할 수 있다.
세계 영웅 신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영웅은 대부분 혈통이 고귀한
사생아나 고아로 태어나 온갖 영웅적이고 무용적인 시련을 겪는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의 성취와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거나 이루어낸다.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 주며, 인간의 삶의
범주를 벗어난 힘겨운 체험을 하고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돌아온다.
영웅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날 나이가 될 때까지 어머니에게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는다. 영웅 신화의 중심 테마인 아버지를 찾는 여정은 자기
자신과 운명을 탐색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몸과 마음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지만 개성과 운명은 아버지에게 물려받는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영웅에게 자신의 이력과 이름 및 근본을 찾는 일이다.
이러한 영웅 신화는 남자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지고 삶의 정력을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과정을 통과의례라고 하는데, 입사, 성년, 취임, 결혼, 죽음 등 생의
전환점에서 묵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맞는 의례다. 남성에게 통과의례란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한국 신화의 주인공도 시련을 극복하고 뛰어난 지도자로 성장하는 영웅의
전형을 보여 준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인 헤모수와 물을 다스리는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기이하게도 알에서 깨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활을 잘 쏘아 파리를 백발백중 쏘아 맞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개, 돼지, 말, 새,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물들이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등 그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
능력 때문에 그를 키워 준 금와왕의 아들들의 시기를 받아 집을 떠나게
된다. 유화는 오곡 종자와 좋은 말을 주몽에게 주었고 그는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주몽 외에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나 4대
석탈해왕, 가락국의 수로왕도 역시 알에서 태어났으며 이들의 아버지는
천제나 태양 등 신적인 존재다.
이 신화에서 영웅의 능력과 성품은 무사로서의 힘, 활쏘기와 말타기,
지도자로서의 너그러움, 강직함, 용맹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석탈해와
주몽이 술법으로 힘을 겨루는 내용은 전사로서 영웅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웅을 더욱 이상적으로 신격화하기 위해 여성의 지혜와 힘을
왜곡시키거나 아예 빼 버림으로써 남성 중심의 신화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곡식과 풍요의 여신인 유화 부인은 조력자로 축소되어 있고
부계를 강조하기 위해 여성에게서 태어난 사실을 알로 상징하기도 한다.
여성의 능력을 축소하는 현상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는 제우스와 헤라클레스를 들 수 있다.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우스는 일족의 수호신, 보호자로서 우주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이었으며, 자신의 머리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허벅지로 주신 디오니소스를 낳는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방하고 불요
불굴의 정신과 인내성을 가졌으며 또한 정직하다. 약한 자를 돕고 부정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는 격노하며, 반면 다정다감하면서 호색적이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아르고스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질투에 사로잡힌
아내 헤라가 책략으로 이를 방해한다. 이로 인해 헤라클레스는 왕이 되지
못하고 비천한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열두 가지 시련을
극복하여 불사신임을 보증받고 신들의 대열에 끼인 걸출한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이 영웅 신화에서 여성은 질투와 책략으로 영웅을 괴롭히는 방해자로
등장한다. 영웅은 방해자인 여성을 집어 삼킴으로써 능력이 더욱
강대해진다. 제우스가 아테나를 낳은 것은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던
메티스(지혜)를 삼켰던 것으로, 디오니소스를 낳은 것도 그를 임신하고 있던
달의 여신 셀레네를 죽이고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집어넣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해서 남성은 여성의 출산과 지혜를 소유한 완벽한
인간으로 탄생한다. 아마도 여성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감추고 신의
모습을 가장하고 싶은 남성의 심리가 남성 영웅의 탄생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역사에서 여성은 사라지고 남성은 세계를 지배하는
영웅의 모습이 되었다.
세계의 주인이 된 남성은 한 시대의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다양한
영웅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웅의 유형에는 전사, 지배자,
성인, 현자가 있다. 그들은 역발산 기개세의 초인적인 요소와 용맹과
지혜로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지닌다. 이들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로 대중에게 전파되어 왔다. 신화는 한 집단의 성원이 행동하는 데서
모범으로 기능하며, 그 집단의 제도에 위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힘을
지닌다. 어린시절 동화에서 잃었던 영웅의 모험은 남성의 삶에서 인생의
좌표가 되기도 하고 가치관의 혼란에 부딪힐 때 남성은 영웅의 행적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한다.
현대에 와서 고대 영웅 전설이 영화화되고 전쟁 영화와 갱 영화가
흥행하는 데에는 전사적인 영웅상을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여기서 그들의 용맹함과 지혜로움, 강한 완력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남성의 꿈으로 등장한다. "남자만의 고독"을 쓴 로버트 블라이는
신화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상을 현대의 왜소해진 남성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의도를 밝히고 있다. 평원을 달리던 자연인, 악을 물리치고 지배자가
된 전사의 꿈이 현대 남성을 고독과 소외에서 건져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사형 영웅의 화려함에 가려진 뒷면을 생각해 보자,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나폴레옹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평범한 농민 출신으로 호탕함과 솔직성을 지닌 그는 사병들의 신뢰를 받고
프랑스 대중을 흥분시켰지만, 점차 이기적인 지배욕과 권력 의지로 전쟁과
파괴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매료되었던 베토벤이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라고 후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징기스칸, 시저, 광개토대왕
등도 남성이 흔히 떠올리는 세계의 지배자가 된 전사들이다. 그러나 세계를
통합한다는 이들의 빛나는 신조는 모든 군사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이 된다. 따라서 영웅의 빛 뒤에는 파괴와 많은 대중의 희생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대중속에 묻혀 기계형 인간이 되어 버린 오늘의 남성에게 전사형 영웅은
이상화된 꿈이다. 수렵 시대의 사냥꾼처럼 호전적인 남성상을 부추기고
여성에 대한 우월 의식을 더욱 굳히는 남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는 남녀
불평등으로 얼룩진 기나긴 인류의 역사가 이제 막 남녀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적인 흐름을 거슬러, 남성 홀로 독주하며 주도하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일 뿐이다.
종교가 만든 남성 우월
기독교의 경우 남성은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는 의식이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신화에서부터 개입된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한
인간은 아담이며, 그 남자의 갈비뼈로 그를 돕는 배필인 이브라는 여자를
만들었다. 이브는 호기심 많고 유혹에 약하여 낙원을 잃게 만든 원죄의
장본인이며 출산의 고통과 남편의 지배를 받는 벌을 받는다. 아담도 일생
동안 땀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경제적
책임을 지는 대신 집안을 이끄는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유대교의 탈무드도 남녀를 분리시켜, "남자와 여자는 신이 이미 그들에게
정해 준 그들의 이상적인 삶을 추구함에 서로 다른 길을 따르도록
기대"되었다고 명시하였다. 남성은 영적 영역을 담당하여 공동의 예배
의식을 갖고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세 번 기도를 하며 종교적 학습을 통해
전통을 지키는 반면 여성은 종교적 의무에서 면제되는데, 그 이유는 가사와
아내 역할로 종교적 수행에 충실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슬람교의 코란에도 "신이 남성을 여성보다 우수하게 만들었고, 남자는
여자를 부양하는 데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므로 여자는 남자에 귀속된다"고
써 있다. 남성은 가정을 다스리는 것을 포함한 세속과 종교 영역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거의 제약 없이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성의 임무는
남편의 시중을 들고 집을 지키고 자식을 많이 낳아 이슬람의 방식대로
교육시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탁월하므로 여성을 보호해야 하고 자기
재산으로 여자를 부양하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여성은 타이르고 채찍질을
하라고 쓰여 있다.
기독교에서 규정한 남녀 역할은 사도 바울의 교시에 더 잘 나타나있다.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교회의 장이나 신학자들에 의해
남성의 우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종의 교훈서라 할 수 있는 구약성서의
잠언에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누어 소수의 남성만을 지혜로운
자로, 대다수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을 어리석은 자로 나누고 있다.

?(표)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법을 지킨다. 주님을 두려워한다. 우상을 만든다.
교육을 받을수록 이로워진다. 교육이 족쇄와 같다.
신중히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생각한다. 생각에 앞서 말하고 바보스런
말을 되풀이 한다.
부지런해서 재산을 모으고 남을 다스린다. 게을러 가난하고 남의 부림을
받는다.
자식을 엄격히 기르고 아이에게 매를 아끼지 않는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기쁨) 자식을 귀여워만 하다가 큰 화를 당한다. (버릇없는 아들은
아비의 수치)
다른 여인에게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다. 탕녀의 유혹에 넘어간다. 술과
고기를 탐한다
입에 재갈, 비밀을 지킨다. 비밀을 흘린다. 말이 많아 실수한다.
분수를 지킨다. 인색하여 오히려 궁해진다.
인심이 후해 더욱 부자가 된다. 잘난체하다 창피를 당한다.
행동을 삼간다. 오래 참는다. 멋대로 날뛴다. 성급하게 군다.
한눈 팔지 않는다. 향락을 좋아한다.
보상으로 어진 아내를 얻는다. 보상으로 악처를 얻는다.
(집과 재산은 선조에게서 물려받지만 현명한 아내는 하나님한테 받는다)
(주책없는 아내는 등뼈를 갉아먹는 벌레이다)
집이 흥한다. 집이 기운다.
없는 척해도 돈이 있다. 있는 척해도 빈털터리다.
장수한다. 병이 있다.
지혜로운 자기 되기위해 남성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신중함, 엄격함,
금욕, 인내심 등이다. 이는 종교가 만들어 낸 남성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도자다운 금욕과 절제, 자기 통제력은 영웅 신화가 주는 전사
이미지와 결합되어, 현대 남성들은 자신의 힘을 정신력으로 다스릴 수 있을
때 진정한 남성다움을 형성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는 성을 금기시하고 여성을 성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로
비하시키는 한편 남성을 우월한 구도자로 부각시켰다. 불교의 문헌에 보면
여성은 종교 수행의 장애물로, 성적으로 굶주리고 탐욕과 질투심을 갖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성적인 절제를 강요하고 기혼 여성의
자유를 제한했다.
기독교 역시 수도자의 고행을 높은 가치 체계로 놓고 여성을 위험한
존재로 만들었다. 성은 남성의 힘을 약화시키므로 생산을 위해서만 허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성서를 통해 퍼졌다.
(나는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듬어 찾아
알아보려고 거듭 애써 보았다.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 나는 또 여자란 죽음보다도 신물나는
것임을 알았다. 여자는 새 잡는 그물이다. 그 마음은 올가미요 그 팔은
사슬이다)
성행위는 생식의 목적 이외에는 피하고 독신이나 금욕적인 삶을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올려놓았다. 교부 성 오거스틴은 "부부의 즐거움은 언제나
용서되는 죄이지만 폐경 후처럼 생식이 불가능할 때 성행위는 무서운
죄이다. 남자는 아내의 영혼을 소중히 하되 육체는 적을 보듯 미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힌두교에서는 나쁜 업의 결과 때문에 여자로 태어나므로 어떤 여성도
현세에서는 구제받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내세에 남성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아내가 되어 남편에게 충실해야 구제될 수 있다고 한다. 마누
법전은 여성은 사악한 존재이며 구도하는 남성은 여성을 혐오하라고
가르친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남성을 유혹한다 ?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결코
방심해서는 안된다 ? 왜냐하면 이승에서 바보뿐 아니라 배운 사람까지도
유혹해서 그들을 욕망과 분노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도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 또는 딸과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매우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서 배운 사람조차도 정복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부는 나쁜 업 탓으로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격리되어 땅바닥에서
자고 금욕과 금기, 삭발, 남편의 재생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감시당하며, 순장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슬람교에서는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여성의 음핵을 떼어내는 할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가 부여한
남성의 우월성, 신성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도덕적 우월자로서의 남성상이
신이 내린 천부의 권리인가는 의심스럽다. 최근의 종교학자들은
가부장제적인 종교가 확립되기까지 여성신이 이단으로 사라져 갔던 과정과
여성성을 인정했던 그노시스파의 이단 재판,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마녀
재판으로 제거된 여성 신의 세계를 재해석하려 노력한다. 이 과정은 현대의
종교가 가부장적 종교로 성립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남성은 정신,
여성은 성으로 분리시켜 부정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해 왔음을 보여 준다. 현대에 와서 금욕적 이미지는 많이
변색했지만 남자는 강한 정신적 힘과 성의 주체로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도덕적 우월자라는 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교와 금기담에 나타난 남성 우월
신화와 종교에서 나타나는 남성다움이 보편적인 남성의 특질을 규정한다면
유교는 한국의 특수성을 만들어 냈다. 유교는 집약 농업적 생산 양식을
경제적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이었다. 집약 농업은 일정
기간에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협력이 강조 되었고, 남녀의 성 역할
구분이 뚜렷해서 남자는 생산자로서 그 위치가 커지고 여성은 어머니로서
출산과 양육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는 근본적으로 친족 중심적이며 수직적인 인간 관계가
이루어졌고, 국가 조직은 친족 집단 연장자가 행하던 권위가 확대되어 남성
중심적 연대를 강화했다. 따라서 남성은 국가에 대한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었다. 피지배 집단 남성도 한 집안의 대표자였고, 남성적 가치를
평가받았다. 그러나 여성은 비주체적인 존재로 권력을 통합하기 위한 혼인
동맹의 매개물로 이용되었고 생산물에 대한 권리와 성인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생산 능력조차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유교적 덕치주의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한 양반들은 필연적으로
현세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관의 유교를 신성시했으며, 유교는 생활의
원리이자 행동의 규범으로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양반층이
비대해지자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교 윤리를 더욱 형식화하였고,
양반들은 문중 중심의 조직과 기존의 득세 가문끼리 뭉쳐 신분 확보를
꾀했다. 17세기 이후에 일반화되기 시작한 족보 간행,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 결사체의 활성화, 동족 부락의 형성은 이러한 양반 지배
질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순수한 부계 혈통을 확보하고 가부장권을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그 실례로 가족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던 윤회 봉사가 장자에게
넘어갔고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던 것도 장자를 우대하고 남녀를
차별하여 상속하게 되었다. 족보도 형제 서열순으로 기록되던 방식이 남녀
순으로 바뀌었고, 사위와 외손의 가계도 기록되던 것이 사위와 외손의
이름만 올리는 식으로 변화하여 딸은 출가 외인이라는 의식이 강해졌다.
결국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남성은 가정의 중심이
되고 여성은 집에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는 삼종지도로 집약되었다. 또한 남녀 칠세 부동석, 사랑채와
안채의 분리, 여자와 남자가 함께 상을 받지 못하는 관습, 바깥 양반과
안사람 구분 등 남녀를 격리시켰다. 소학의 내칙에서는 "일곱살이 되면 사내
아이와 계집 아이가 자리를 같이 하지 않게 하며 함께 먹지 않게 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배워서 바깥방에 거처하고 잠자며 글씨와
셈을 배우게 한다"고 하였다. 사소절에서는 "남자가 오래 집안에 거처하면서
자주 규방에 들면 행동에 실수가 많고 명령이 잘 행해지지 않는다"고 경계할
정도였다.

(안으로 네 가지 마음가짐(사단: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과 밖으로 아홉 가지 몸가짐(구용: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입은 신중하게, 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똑바르게, 숨소리는 고르게, 설
때는 의젓하게, 낯빛은 단정하게) 및 다섯 가지 떳떳한 윤리(오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임금과 신하의 의리, 남편과 아내의 분별,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 벗과 벗의 믿음)는 하늘이 마련한 근본 도리여서, 이를 잘 닦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어기면 곧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남자가 갖추어야 할 성품과 행실을 통해 남성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었다. 군자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소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남성의 이상형이 바로 군자였다.

군자 소인
사람의 도리를 안다. 사람의 도리를 깨닫지 못한다.
덕과 대의를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두루 통하고 공정하다. 편파적이다.
참고 견딘다.
마음이 평정하고 너그럽다. 항상 겁내고 두려워한다.
배불리 먹고 편한것을 구하지 않으며 일에 민첩하고 말은 신중하며 도를
좇아 바르게 고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경망하고 은혜받기를 좋아한다.
남자는 군자가 될 수 있다. 여자는 소인이므로 남자의 가르침에 따른다.
군자는 소인을 가르치고 이끈다.

이러한 남성다움은 명분적이고 문사 중심적이어서 자연히 육체 노동을


천시하였다. 대부분의 육체 노동은 남성답지 못한 사람에 속한 소인과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은 양반이라 해도 군자의 도를 익히고 체면을
지키느라 실생활에 무능했던 남성 대신 농사나 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국 이 시대의 남성다움은 상하 위계 질서를 나타내는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유교 윤리는 특히 금기담을 통해 일반적인 사회 풍습과 윤리에 적용되어
지방 구석구석으로 퍼져 상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비유의 기능을 가진
속담과 마찬가지로 금기담은 일상 생활을 규제하고 통제하여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남성에 대한 금기담은 주로 남자의 우월감을 담아 의젓하고 체통을 지키게
하는 내용이다. 특히 여성에게 남자의 존귀함을 알게 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기담에 보이는 남성다움은 크게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강함을 나타낸 금기담
남자는 죽어도 전장에 가서 죽어라.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
둘째, 남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금기담
장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내 행실은 다홍치마 때부터 버릇을 가르쳐 휘어잡아야 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눌리면 집안이 망한다.
남아 일언 중천금
사내 아이가 열다섯이면 호패를 찬다. (남자 나이 열다섯이면 한 사람
몫의 자격이 있으니 떳떳한 구실을 한다)
남자가 셋이 모이면 없는 게 없다
셋째, 남성들의 여성적 외모나 행위를 금하는 내용의 금기담.
남자가 빨래를 널면 재수 없다.
사내가 부뚜막 맛을 알면 계집을 못 거느린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출세하지 못한다.
남자가 바가지로 물을 떠먹으면 수염이 나지 않는다.
넷째, 여자에게 남자의 존귀함을 알리는 금기담.
남자는 떡의 귀를 먹지 않는다.
남자의 옷으로 걸레를 만들지 않는다.
남자가 길을 떠날 때 여자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재수가 없다.
남자가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으면 가난해진다.
남자가 밥상 귀퉁이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 출세를 못 한다.
이러한 금기담은 가부장제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와
있어서 아무런 비판이나 반대하는 태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불가피하게 남성과 여성의 행동을 제약한다. 특히 유교 전통의
영향으로 남녀 차별이 음양의 원리인 것으로 여겨졌다. 즉 음인 여자가 양인
남자를 따르며 그것이 땅이 하늘을 따르는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우주의 원리인 음양은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 여름과 겨울,
죽음과 삶 등 중국 만다라를 의미했다. 그림처럼 검은 물고기 무늬에 흰
점이 있고 흰 물고기 무늬 안의 검은 점이 있는 음양 이미지는 상하 개념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상대적이면서 좌우 대칭의 동등한 원리를 나타낸다. 또한
이 음양 이미지는 남성과 여성은 각각 하나의 우주로서 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교적 남녀 차별 문화가 완성된 주역에 와서 음양의 원리는 상하, 지배
피지배 관계로 바뀌어 남녀 차별을 거역할 수 없는 천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 유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주 만물은 음양의 적절한 배합과 유전에
따라 형성되며 남녀의 교합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여성과 남성은 각각 음과 양의 원리를 드러내는 상징이며 이 양자는 결코
뒤섞일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하나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동등하게 중요하다.
과학적 논의를 통해 본 남성다움
생물학적,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 능력과 감정 조절 능력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는 과학의 이름으로 뒷받침되어 왔다.
몇몇 과학자는 남녀의 신체의 크기, 무게 및 근육의 힘과 두뇌의 크기 등을
비교하여 남성의 강인함과 지적 우월성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프로이드는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우성이며 음경이 있어서
자신감과 만족감이 있다고 하였다. 남근기라 하여 네다섯 살쯤 된 남자
아이는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탓에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아버지에게 가졌던 적대 감정을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로 바꾸는데, 이
과정에서 남자 아이는 아버지의 가치관을 택하여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며
공정성과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또한 정자는 능동적으로
헤엄쳐 난자의 세포막을 찢어 결합하지만 난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는
점을 들어 남성의 능동성과 우월성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능동성은 외부로
향한 활동성과 공격성으로 이를 남성다움의 특징으로 보았다.
골드버그도 고환에서 생기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 의해 남자
아이의 두뇌는 훨씬 센 자극을 받으며 여자 아이보다 더 강한 공격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공격성은 남성다움에 속하고 동정과 연민 같은 감정은
본질적으로 여성다움에 속하여 여성에게는 공격성이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호르몬 이외에 남녀간의 차이는 없으나, 이 남성 호르몬은 가부장
제도와 남성의 지배, 남성의 지위와 역할을 획득하고, 여성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세함을 남성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물학적 요인이 사회
제도를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양상이 다를 뿐이지 여성에게도 공격적이 충동이 있으며 단지 주위
환경에 따라 남성과는 다르게 공격성을 드러낸다. 직선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만을 공격성으로 규정하여 언어로 공격하거나 침묵으로 맞받아치는 것
같은 완곡하고 간접적인 대응을 공격 현상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가 심리적 성향을 결정한다는 논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뇌의 크기와 지능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총괄적인 결론이다. 1901년 앨리스 레이는 뇌 무게는
지적 능력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후 신경 해부학과 신경
생리학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뇌에서 아무 차이도 측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19세기 프랑스의 신경 외과 의사이자 자연 인류학자인 폴 브로카는 전두엽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 뇌반구를 100으로 하여 남성이 427인 데 비해서 여성은
431이라고 밝혀, 실제 뇌의 크기, 모양, 지능을 감싸고 있는 전두엽은
여성이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과거에 힘과 완력이 필요했던 전쟁이나 근육의 힘에 의지했던 일들이
기계로 처리되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남성의 건장한 체구와 완력이
사회 생활이나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될는지는 의심스럽다. 프로이드조차도
후에 양성은 능동적인 목표와 수동적인 목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하여
초기의 남녀의 심리적 차이와 특성에 대한 주장을 번복하였고, 남성의
특성은 가부장적인 사회 관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남자든 여자이든 모두 두 개의 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남녀의 성격
차이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녀는 두 개의 성을 모두
갖고 있다. 생식기관 조차도 한쪽의 성은 다른 한쪽의 성 기관을 축소시킨
형태를 갖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남녀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남자도
수동성을 보여 주고 여자도 능동성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심리학적으로도
남녀는 두개의 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인간은 독특한 유전적 체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사람의 형태, 얼굴
특징, 신체적, 성적 발달 속도, 기질은 대부분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허약한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힘드는 활동을 잘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어린아이의 성향, 외모, 발달 속도는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공격적인 성향을 높이 평가하는 공동체에서 태어난
아이는 대부분 적극적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힘차게 투쟁하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나약한 아이라면 제대로 현실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똑똑한 아이, 둔하고 못생긴 아이, 매력적인 아이,
약한 아이, 건강한 아이 등에 대해 제각기 달리 대한다. 그리하여 그 반응에
따라 어린아이의 자아가 다르게 형성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오늘날 어떠한 타고난 특성이나 유전적 기제도 인간의 심리적, 성적
차이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남성과 여성은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많고 오히려 동성끼리의 차이가 남녀 양성간의 차이보다 훨씬
큰 편이다. 생물학적 요소들이 남성이나 여성의 성 역할 행동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증거는 어느 과학적 연구에서도 그 타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생물학적 요소들과 사회 문화적 환경 조건이 상호 작용하여 일정한
행동 유형을 만들어 낸다. 남녀 모두가 남성적, 여성적 행동 능력을 다 갖고
있으며, 그러한 생물학적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데는 일정한 환경적
조건이 필요하다.
와이젠슈타인의 말처럼 과학을 통해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려는
갖가지 학설은 남성과 여성의 성격이나 욕구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사회에 맞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만들어
믿도록 해 왔다. 남성다움은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영향을 더 크게
받으며,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 따라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양상이 다르다.
생물학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배경이 될 수는 있으나 한
사회에서 남녀를 차별하고 남성다움을 미리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남성다움을 뇌의 세포 조직, 호르몬, 생리학에서 증명해 낼 수 없었으며,
해부학과 생물학에서 증명된 사실만 가지고 사회적 역할을 남녀에게 서로
다르게 할당하거나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남성다움-그 역사적 변화 과정
한 시대가 만들어 낸 남성다움은 그 시대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남성다움은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인 힘의 그물을 통해 만들어지고
다져지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성다움의 기준도 변하므로
남성다움의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선 남성의 삶을 남성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살펴보고 사회변화와
더불어 남성다움의 의미가 변해 온 과정을 보고자 한다.

남성 우월 굳히기
남성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좀 더 험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수렵 채취
사회에서 남성은 주로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과 자녀 양육을 담당했다.
공동체를 위해 남녀가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았을 뿐 역할에 따른 우열 구별은
없었고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 따라서 사냥을 맡은 남성이 무기로 다른
남성이나 여성을 공격하거나 지배한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은 대부분 여성이 담당했다. 언제나 사냥에 성공할 수는
없었으므로 사냥을 통해 음식물을 공급받는 것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동 생활을 마치고 정착 생활을 시작한 농경 사회가 되자
남성다움에 변화가 생겼다. 농경 사회 초기에는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동시에 남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재배와 수확을 맡았다.
일터와 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성도 농사를 지었으므로 남녀의 역할
구분은 오늘날처럼 뚜렷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필요하자
여성들은 더 많은 아이를 낳고 길러야 했다. 여성의 역할이 커지고 중시된
이 사회에서는 어머니나 대지와 같은 위대한 여신을 섬겼다.
인간은 농경 사회에 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으나. 한편으로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렵 채취 시대와는 달리 오랜 기간 노동을 해야 생산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예기치 못한 재해가 일어날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침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영토를 넓히고, 노동력을 늘리기 위해 여성을 약탈했다. 결국 각 사회에서
용맹한 전사 집단이 만들어지고 사회 공동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용맹성을
발휘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남아들은 여성과 떨어져 전사가 되었고,
용맹성, 공격성, 호전적인 전사상이 남성다움으로 장려되었다. 그럴수록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고 성별 역할의 우열을 나누어 남성다음을 강화하였다.
오늘날처럼 이 사회에서는 결투를 싫어하고 전쟁에 겁이 많은 남성을
여성화된 남성이라 하여 따돌려졌다.
대개 수렵 채취 사회인 원시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고 훨씬 후기로 내려와
농경 사회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가부장제가 형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남성다움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시 사회와 초기 농경 사회를
주도했던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신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여성적인 속성은
타락이나 악의 근원이 되었다. 그 대신 남근 숭배 사상이 생기고, 남신이
등장하여 여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남성상이
확립되었다.
농사는 일정한 시기에 공동으로 작업을 해야 하므로, 무엇보다 성원끼리의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대립이나 이견은 농사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누군가의 통솔 아래 이러한 일들이 조정되어야 했다. 이러한
요건을 만족시키는 생산 단위가 가족 공동체였고 이 공동체의 삶을
지속시키는 조직 원리가 가부장제였다. 즉 가부장 사회 조직의 기본 속성은
남성 가장의 통솔 아래 아내와 자녀가 식량을 생산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다. 잉여 생산물, 가족 구조의 형성,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농경 사회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남성다움의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에 생산 활동에서
남성끼리의 위계가 정해지고 남성이 여성을 다스리는 사회적 관계의 틀이
잡혔던 것이다.
초기 경작 상태에서 벗어나 가축을 이용하거나 쟁기 같은 농기구가
발달하자 잉여물이 생겼고 이러한 부는 사유재산제를 낳는 근원이 되었다.
특히 남성은 생계의 원천인 가축과 노동 수단인 노예를 소유하여 부를
소유하고 축적함으로써 가족의 우두머리인 가장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부와 권력에서 틈이 벌어지고 전쟁에 패한 종족을 노예로 삼는 동안
사회는 서로 다른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여러 계층으로 갈라졌다. 이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 지배 관계를 이루고, 국가 조직의 법과 체계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제 아래서 여성과 많은 남성이 노예였고
자유민이라 해도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남성 모두가 가부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 자녀, 친족 및 신분이
낮은 집단의 남녀는 모두 가부장권을 절대시하는 이념과 제도의 지배를
받았다. 결국 불평등한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공격적이고 용감한 기질을 남성다움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우월한 신분과 부를 지니게 된 소수의 남성은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새로운 남성상을 만들어 냈다. 일반 남성에게는 용맹함을 강조하고
부추겼으나 자신들은 지식을 소유하고 도덕의 결정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만들려 했다. 서구의 성직자상이나 우리 나라의 군자상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지배 계급의 군자상은 용맹한 전사상과 함께 오랜 기간 남성의
우월성을 지키는 전통이 되었다.
특히 군자상을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아 왔던 우리 나라에서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남성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개화기-산업 사회의 남성상 출현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신분제가 붕괴되고 밖으로부터 외래 문물이 밀려
들어와 전통 의식과 새로운 근대 의식이 갈등하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에
중인으로 성장한 평민은 기술관이라 하여 역관, 의관, 관상감원, 서원 등의
직업을 가지고,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사무역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모작이 보급되어 부농이 생기고 사상의 활동이 확대되어
부유한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실학과 동학이 새로운 사상적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서구에서 흘러 들어온
자유주의적 평등 의식의 영향을 받아 신구 세력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위태로워진 국권의 회복과 개화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를 풀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과거의 군자상만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자성이
일고, 부국강병을 위해 실리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개화 의식이 싹텄다.
실용주의에 대한 주장으로 공업과 상업의 진흥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를
위한 기술 교육이 강조되었다.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집안을 보존하고 나라를 흥케 하고 외국의 업수이
여김을 안 받으려면 무엇이든지 배워 자기 손으로 벌어먹을 도리를 하고
자식들을 아무쪼록 학교에 보내어 외국 말을 배우든지 제조하는 법을
배우든지 무슨 장사를 배우게 하는 것이 곧 전장을 많이 장만하여 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
사농공상이라 하여 노동을 천시하고 기술보다는 도를 깨우치는 '앎'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아 기술을 가르치고 육체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 착실한 일꾼으로서의 근면함과
기술 소유, 강장한 체력, 합리주의 등을 남성이 갖추어야 할 덕성으로
꼽았다.
당시 신사상을 기반으로 설립된 근대식 학교의 교육 이념과 교과 과정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였다. 1907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면서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 정신이 강한 민족 운동자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강장한 체력의 훈련 등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같은 해 문을 연
오산학교의 학과목은 수신,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대수, 헌법 대의,
물리, 천문학, 생물, 광물, 창가, 체조 훈련 등으로 기술 교육과 신체
단련이 중시되었다. 애국 계몽 의식의 일환으로 근대화가 모색되면서 산업
사회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일꾼으로서의 남성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군자상의 연장인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남성상에
흡수되는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전통적 남성다움의 변화-남성의 부재


조선 말기부터 일제 시대, 6,25전쟁과 건국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온
근대에는 나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공식적, 제도적인 영역이 크게
축소되거나 붕괴된 채 생존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 와중에서도 점차
공업화, 도시화 및 일본식 근대 교육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남성은
전장에 나가거나 징용으로 일본, 만주 등지로 가거나, 노동력을 팔러 또는
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공식적, 제도적 영역을 일본이 장악한 식민지 아래서
남성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나약해지거나 항일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가
되기도 했다.
어느 경우이건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여성의 역할은
커졌고 집에 있다 해도 무능해진 남성을 대신해 여성은 강인하고 억척스럽게
변했다. 많은 여성이 남성의 부재를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고, 남성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질수록 여성들은 대를 잇고 씨를 보존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래서 실제 남성이 곁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남성이 부재한 이 시기에
남성은 더욱 존귀한 존재가 되고 정신적 기둥이라는 실제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남성의 허상을 지키기에는 가장은 무능했고,
그와 더불어 남성다움은 서서히 흔들렸다. 특히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많은 공장이 건설되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공장으로 끌어들였다. 여성이 돈을 벌게 되면서 전통적 남성상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도 공업화와 핵가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해 생계
부양자로서의 남성상이 전통적 남성상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지도자로서의
군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한 남성 아니면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시기의 남성상의 대의 명분을 추구하는 대장부가 될 것인가,
생계 부양자가 될 것인가를 갈등하는 남성상이라고 하겠다.

현대-도전받는 남성다움
1960년대 우리 사회는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 등으로 급격하게 변했다.
특히 도시의 공업화로 대규모의 임금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였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하면서 인구 이동이 심해지자, 기존의 대가족 형태는 이동하기에 편리한
핵가족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 제도의 변형은 남성과 여성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일터와 가정이 분리되자 남성은 경쟁적인 일터에서 성실한 직장인이자,
가정 경제를 이끄는 생계 부양자가 되었다. 자수성가, 출세, 책임 있는
가장이라는 말은 흔히 남성다움을 보증하는 말이 되었다. 사회인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데 적합한 책임감, 지배적이고 강한 행동,
결단력, 독립성, 성취 지향, 힘, 합리성을 두루 갖춘 남성이 이상형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남성다움은 정치를 중심으로 놓았던 조선 시대와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벼슬로 의를 실천한다는 군자상과
자본주의에 적합한 남성상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가족의 생계보다는 대의
명분을 중시하고 가족 관계에서도 아버지가 중심이 되었던 전통적인
남성상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도구적 역할로 전락하고 가족 관계에서도
남편이 중심이 되는 현대 남성상이 결합되어, 우리 나라 남성상은 서구
남성보다 더 무거운 남성다움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제를 심화시키면서도 한편에서는 가부장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녀의 성
역할 분업이 확고해진 상태에서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가 부여되고
산업화와 기계화로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많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립하였다. 남성은 생계 유지자로서의
위치는 확고하면서도, 가정에서의 위치는 줄어들어 가부장적 위치가
불안해졌다. 거기다 여성의 자율성 회복을 강조한 여성 운동까지 가세하여
가부장제를 위협하고 남성다움의 토대를 흔들어 남성의 입지는 더욱
좁혀졌다.
1960년대 이후 여성 운동은 당연시해 오던 남녀의 존재 방식과 그 관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남녀의 성격과 태도, 남성은 직업노동, 여성은 무보수
가사노동만을 한다는 성별 역할 분리, 남녀 관계의 기본 조직인 가족의
가부장적 성격 등이 재검토되었다. 70년대 이후 여성 해방 운동은 교육,
노동, 가족법에서의 성 차별을 폐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 후 가족법
개정, 남녀 고용평등법, 탁아입법 제정 등의 성과를 올렸으며 곧 부부 재산
공유제도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성 평등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여성 운동은 남성에게도 영향을 미쳐
남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남성다움의
위기로 나타났다. 남성들의 위기는 당연히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여성들의
능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다.

변화하는 사회, 변화를 요구받는 남성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을 통해 조선 사회 신분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
주었다. 신분이나 남녀 관계가 주종의 위계 질서로 이루어진 유교 사회에서
양반은 상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매사에 상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양반이란 선비, 대부, 군자라 칭하며 결코 비천한 행동을 하지 말며 옛
사람의 높은 행적을 본받아 이를 따를지어다. 양반은 굶주림을 참고 손에
돈을 쥐지 말 것이며,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못하며, 밥상을 대할 때
반드시 의관을 갖추어야 한다. 아무리 분하더라도 홧김에 기물을 발로 차면
안 되며 추워도 화롯불을 쬐어서는 안 되며 남과 이야기할 적에 침이 튀지
아니 하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이러한 행동 양식은 양반이라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삶을 속박시키는
굴절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꺼이 이러한 삶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그들은 사소한 행동 규범에서 사회 활동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우월성을 습득하고 실행하는 가운데 양반 문화를
만들어 전수시켰다. 양반은 양반 지배 문화 아래에서 편한 입장이었다.
자질구레한 노동은 상민에게 떠넘기고 이들을 부리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설혹 선비가 군색하여 낙향을 할지라도 아직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법이니 이웃 소를 빌려 자기 논밭을 먼저 갈게 하며 동리 사람에게 김을
매도록 하느니라. 만약 그 누구라도 양반을 업신여겨 말을 듣지 아니 할
적에는 그 놈의 코에 잿물을 부으며 상투를 잡아 내고 수염을 뽑는다 해도
감히 원망조차 못하리라)
따라서 양반은 약간의 고통이 따르지만 더 큰 보상이 있는 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알 필요가 없었다. 그 후 많은 민란과 동학 농민 전쟁을
겪고 앞서 발전한 서구의 평등 사상을 접하는 동안, 상민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양반의 논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신분제는 양반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없앤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와 자신들이 우월성을 비추어
보던 대상인 상민에 의해 차츰 무너졌다.
20세기는 사회 질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성, 인종, 신분에 의해 차별을
받아 온 피지배 집단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는 시기로, 특히 여성의
지위는 19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충격 속에서
우리 사회는 남녀의 성 역할을 엄격하게 요구하며 전통적인 성 역할
이미지를 계속 유지시키는 한편, 부분적으로나마 여성의 역할 변화를
허용하였다. 산업화로 인해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평등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성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비춰 보던 여성에게서 남성
고유의 행동으로 여기던 남성다움의 특성들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드러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남성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의식 속에서 여성이 열등하다는 신화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와 함께 치열한 경쟁, 업적, 능력 중심의 사회에 맞는 남성다움에
대한 강박 관념과 입신 양명, 금의 환향, 수신 제가 같은 표현에서처럼
인생에서 뭔가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서구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까지 이렇게 남성다움이 '문젯거리'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이래 남성은 인간의 모델이었고 그들의 삶만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남성의 삶은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소수 지배층의 이해 관계에 따라 강화된 것일 뿐,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표현도 아니고 대다수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대다수
남성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만한 힘도, 여성이 생각하는 만큼의 사회적인
권력도 없다. 그런데도 남성은 사회적으로 우월한 입장이어서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성은 행동에 다소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을 추구할 때 일정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남성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꿈이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자신이
짊어진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성은 영웅의 꿈에 안주할 것인가
현실적인 변화의 요구에 부응할 것인가를 놓고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갈등에 싸여 있다.
그러면 변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 자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지 남성의 콤플렉스를 통해 살펴보고, 그 해결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책머리-주
'남성우월신화': "Myth of Male Superiority", S. Parker and H. Parker,
?American Anthropologist 81
'남자가 되어라': Be a Man!, Peter N. Stearns, Holmes and Meier
Publishers Inc. 1990.
'남성다움 벗기기': Unmasking Masculinity, David Jackson, Unwin Hyman,
1990.
'남성 기계': Male Machine, Marc Feign, Fasteau, Dell Publishing Co.
1975.
'남성의 마음': Hearts of Men, B. Ehrenreich, Anchor Books, 1983
'변화하는 남성': Changing Men, Michael S. Kemmel ed, Sage,1987
'해방된 남성': The Liberated Men, W. Farrel, Random House, 1974
'가부장제를 넘어서': Beyond Patriarchy: Essays by Men on Pleasure,
Power, and change, M Kaufman e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1) 이상형(ideal type)이란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 유사점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 척도의 구실을 한다. 남성다움의 이상형은 생활 세계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개개의 현상들을 종합하여 만든 것으로 여성다움과
대비되는 남성다움의 보다 본질적인 특성을 알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상형은 개인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나기도 한다.
2) R. Brannon.?/ S. Juni, "A Scale for Measuring Attitudes about
Masculinity" in M. S. Kimmel eds., Changing Men, London: Sage, 1987,
25--35쪽.
3) 이부영, '분석 심리학' 일조각, 1991, 32--33쪽.
4) 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문학과 지성사, 1991, 233쪽.
5)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이윤기 역, 고려원, 1992,
246쪽.
6) 김부식, '삼국사기'.
7) 이헌구 편, '현대의 인물', 삼성 문화사, 1983, 49쪽.
8) 장덕순, '설화 문학 개설', 선명 문화사, 1974, 45쪽.
9) 조셉 캠벨, '세계의 영웅 신화', 이윤기 옮김, 대원사, 1991, 332쪽.
10) 고린도전서, 11: 3--10.
11) 전도서, 7: 25--28.
12) 마누 법전, II, 213--215. D. L 카모디 저, '여성과 종교', 강돈구 역
서광사, 1992, 63쪽에서 재인용.
13) James A. Doyle, Sex and Gender, Iowa: Wm C. Brown Publishers,
1985, 236--267쪽과 Claire M Renzetti/ Daniel J. Curran, Women, Men,
and
Society, London: Allyn and Bacon, 1989, 259--284쪽 참조.
14) 조옥라, '가부장제의 이론적 고찰', '한국 여성학' 2집, 한국 여성
학회, 1986, 15쪽.
15) 김종택, '전통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여성 문제 연구' 18집,
효성여대 한국 여성 문제 연구소, 1990, 90--92쪽.
16) 이덕무, '사소절'.
17) 박용옥, '유교적 여성관의 재조명', '한국 여성학' 1집, 1985, 18쪽.
18) S.프로이드, '여성다움', P. 스트럴/A. 재거, '여성 해방의 이론
체계', 풀빛, 1983, 163--174쪽
19) S. 골드버그, '가부장제의 불가피성', P. 스트럴/A. 재거, 윗책,
174--181쪽
20) 스티븐 로우즈/R. C. 르윈틴/레온 J. 카인, '우리 유전자안에 없다',
이상원 옮김, 한울, 1993, 175쪽.
21) E. 몬타규, '여성은 남성보다 우월한가', '인간과 비인간', 예지원,
1976, 146쪽.
22) 미즈타 다마에, '청바지 여성학', 소나무, 1993, 34--35쪽 재인용.
23) 와이젠슈타인, '과학 법칙으로서의 자녀, 부엌, 교회' 미즈타 다마에,
윗책 43쪽 재인용.
24) 조옥라, '인류 사회에서의 폭력의 대두', '또 하나의 문화' 4호,
1992, 69쪽.
25) Peter N. Steams, Be a Man!, Holms and Meier Publishers, Inc.,
1988, 18--23쪽.
26) 조옥라, 앞의 글, 74쪽.
27)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앞의 책, 322쪽.
28) 조형, '남성 지배 문화-오늘의 위기', '또 하나의 문화' 4호, 1992,
34--35쪽.
29) 서재필, 독립신문, 제2권 110호 잡호.
30) 오산 칠십년사 편집 위원회, '오산 70년사', 1978.
31) 조혜정, 앞의 책, 92쪽
32), 33) 박지원의 '양반전'요약
?) B. Walker, The Woman's Encyclopedia of Myths and Secrets,
Harper
and Row, 1983, 1095쪽. 한국 문화 상징 사전 편찬 위원회, '한국 문화 상징
사전', 동아 출판사, 1992, 595쪽, 499쪽.

자료의 수집과 분석
1. 자료 수집 및 조사 절차
"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는 질문지법을 사용해서
19세 이상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수집되었다. 표집 절차는 SES(Social
Economic Status)와 연령 등을 고려하여 할당표집(Quota Sampling)을
하였다. 조사 시기는 1993년 5월초에 100부를 예비 조사하여 측정 도구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검증하였고 예비 조사에 따른 설문지 수정 및 보완을
마친 후, 1993년 5월 21일부터 6월 15일까지 본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지역으로는 서울 및 대도시(K, S시)와 중소 도시(A, M, S, W시)등이다.
설문지를 1,100부 배포하여 850부를 회수하였으나 기재 미비로 99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751부를 본 연구의 최종 분석 자료로 사용하였다.
2. 조사 대상자의 일반적 특성
<표> 조사 대상자의 일반적 특징
배경변수 구분 빈도(%) 배경변수 구분 빈도(%)
연령 25세이하 26--30세 31--40세 41--60세 합계 211(28.0) 205(27.3)
232(31.0) 103(13.7) 751(100) 직업 사무관리전문직 판매반미숙련직 학생
무응답 합계 419(55.9) 160(21.4) 160(21.4) 12(1.3) 751(100)
결혼여부 미혼 기혼 무응답 합계 376(50.3) 366(48.7) 9(1.0) 751(100)
소득 90만원미만 91만--149만원 150만원이상 합계 328(43.7) 261(34.7)
162(21.6) 751(100)
학력 고졸이하 대학재학 대졸이상 무웅답 합계 181(24.1) 167(22.2)
397(52.9) 6(0.8) 751(100) 형제서열 첫째(장남) 장남이외 합계
316(42.1) 435(57.9) 751(100)
<표>에서 보듯, 본 연구의 조사 대상자는 총 751명으로 41세 이상의
연령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고른 분포이며, 미혼 376명(50.1%), 기혼
366명(48.7%)으로 거의 같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학력별로는 대졸 이상이
397명(52.9%)으로 비교적 높은 학력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직업별로 보면
사무, 관리, 전문직이 419명(55.9%), 판매 및 반, 미숙련직 160명(21.6),
학생 160명(21.5%)이었다. 또한 소득은 90만원 미만이 328명(43.7%)으로
가장 많았고 91만원--149만원 34.7%, 150만원 이상 21.6%의 순이었는데
90만원 미만의 소득자가 가장 많은 것은 표집 대상 중 학생이 21.5%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형제 서열은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였는데,
장남이 42.1%, 장남 이외가 57.9%로 이 중 둘째가 30.6%로 가장 많았다.
3. 질문지의 구성과 신뢰도
질문지 작성은 기존 문헌 분석 및 Edward H. Thompson과 Joseph H.
Pleck의 "Male Role Norm Scales"과 윤진의 "남성 성역할 스트레스"척도를
기초로 예비 조사를 거쳐 수정, 보완하였다. 개방형 질문을 포함하여 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에 대한 질문은 총 73문항으로 구성되었다. 질문지의
내적 일치도(Cronbach 계수)는 0.758로 질문지 문항의 신뢰도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
남자가 20대에 잘나지도, 30대에 건장하지도, 또 40대에 치부하지도,
50대에 현명하지도 못하다면, 그는 결코 잘난 용모도 건강도 재산도 지혜도
가져 볼 수 없다.
G. 호버트 '명궁'중에서

남자를 칭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남자야"라거나 "역시 사내


대장부야"라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옛부터 군자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아 온 우리나라 남자에게는 대범함, 강직함, 신중함, 과묵함 등이
남성다움의 덕목이라는 의식이 깊이 뿌리 내려 있다.
그래서 남자는 대부분 남성다움의 완성체인 사내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모든 남자가 한결같이 사내 대장부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남자답지 못하고 군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면 샌님이라느니 꽁생원, 졸장부, 소인배라는 비웃음과 멸시를 받는다.
그럴수록 남자다운 품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허세를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르며 강한 남자인 양 자신을 위장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클수록 자신의 개성이나 감정 및 욕구를 감춘 채
'남자답다는 것'에 집착하면서 힘겹게 삶을 견뎌 간다.
(나는 집안의 가장이자 직장의 중견 간부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어 왔다. "나는 남자다, 나는 강하다"는 믿음을 삶의 추진력으로 삼으며
살아 온 것이다. 올 겨울에는 모피 외투를 꼭 사 달라는 애교 섞인 아내의
투정과 대전 엑스포에 데려가 달라는 아이들, 대학 동창회에 참석해 달라는
친구, 완벽한 서류를 넘겨 달라는 직장 상사 등 나의 생활은 나에게
의지하는 아내, 아이들, 직장, 그리고 동료들을 위한 '보람 있는 일'로 꽉
차 있다. 돌이켜보면 주위 사람으로부터 책임감 있고 완벽한 남자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 눈코뜰사이 없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직장에서
인사 이동이 있었다. 당연히 승진할 것으로 믿었는데 탈락되고 말았다.
아내나 아이들, 동료는 날 무능력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앞만 보고
좇았던 내 자신이 인정받고 있지 못했다는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러자 전에
비해 사소한 일에도 큰소리를 치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친구들을 만나서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거나 무의식중에 허세를 부리게 되었다. 그 동안
성실히 살아 왔던 내 생활이 너무나도 벅차게 느껴지고 벗어나고 싶기만
하다. 그러나 좌절과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더욱 더 삶에 대한 무기력과 우울함에 짓눌려 사람 대하기조차 두렵다.
(46세, 회사 중견 간부))
(학교 행사가 있을때면 내게 맡겨진 일뿐 아니라 무거운 짐을 들거나 못질
등 힘이 필요한 일은 도맡아 한다. 밤늦게 귀가할 때는 "내가 데려다 주지.
밤길에 여자들끼리는 위험하거든" 하며 앞장을 서곤 한다. 사실 나도 밤길은
무섭다. "깡패라도 만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사나이인데 이 일을 피하면 친구들이 나를 우습게 볼 것같아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행동한다. (23세, 대학생)
위의 두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사내 대장부라는 말을 들으려고 자신의
감정이나 하고 싶은 일은 꾹 참아 낸다. 하지만 남자답다는 칭찬은 아무런
보수도 없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며, 더욱 무거운 짐을 안겨
줄 뿐이다. 남성다워지려고 발버둥치는 쉼없는 과정속에서 사내 대장부의
환상은 깨어지고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그리고 무의식 속에 있던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가 겉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남성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 대중 매체, 군대, 직장을 통해 "사내
대장부는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 "큰 일을 할 사람인데", "역시 사나이
중의 사나이야" 같은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란다. 남자다움이라는 사회
규범에 매여 사회와 주변 사람의 기대에 따라 세상의 상식이나 규칙에 맞춰
사는 데 익숙해진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강인하고 의연한
자세를 보이고, 사소한 일에는 간섭치 않으며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자신을 절제한다. 눈물을 보이면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면 소심하다고 타박을 받고, 기가 약하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거칠고
공격적인 이미지를 보이려 애쓴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성공을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긴장에서 자신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한다.
남성은 대부분 대대로 유산처럼 물려받은 지배와 권위에 대한 환상으로
사내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역시 사나이야"라는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 타인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성공한 남자,
믿음직한 남자, 대범한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희생하거나 지나치게 과장하면서까지 턱없는 우월감을 갖거나 한없는
열등 의식을 갖는데, 이를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라 부른다.

남자는 반드시 사내 대장부가 되어야 하는가


예로부터 군자의 도를 이룬 이상적인 남자를 사내 대장부라 하였다.
맹자의 경춘장을 보면, 참다운 대장부란 천하의 넓은 보금자리인 인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인 예를 지키고 또 천하의 대도인 의를 행하고, 뜻을
얻어 도를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면 백성들과 함께 선도를 따르게 하며,
뜻을 얻지 못하여 초야에 있더라도 홀로 선도를 행한다. 부귀에 의해 마음이
타락하는 일이 없고 빈천에 의해 절조를 변조하는 일이 없으며, 어떠한
위세나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람을 일컬었다.
의리 있고 강직하며 관용이 있는 군자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아온 우리
나라에서는 군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거나 못 하는 사람은 남자로서의 권위와
존경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남성이 남자다운 품위와 체면을
지키려고 허풍이나 허세를 부리곤 했다. 다음 일화는 군자다운 행동을
해야만 남자다운 남성으로 인정하는 현실에서 무능력한 남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제나라의 한 사람이 본처와 첩을 거느리고 한 집에 살았다. 그는
매일같이 나가 으레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돌아오곤 했는데, 본처가
누구하고 먹고 마셨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부자나 세도가와 먹었다고 했다.
한 번도 이름난 사람이 집에 찾아온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긴
본처가 몰래 남편을 뒤쫓았다. 그는 도성 안을 온통 헤매고 다니다 동쪽
성곽 밖 무덤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얻어먹으며 다녔다.
그러고는 아내가 안다는 사실도 모르고 신바람이 난 듯 들어오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군자라는 이상형에 매달린 남성들은 무능력할 때면 얼어 죽을망정 겻불은
쬐지 않겠다는 식으로 위신과 체면을 앞세운다. 결국 실속은 없으면서
체면치레에 신경을 쓰지만 무력감으로 인해 그의 삶은 안으로 곪는다. 흔히
겁먹은 개가 잘 짖듯 일부러 호탕한 체하며 남성다움을 과시하지만,
속마음은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녀의 역할이 성 차별 때문에 확실히 구분되던 과거에는 "남자가
남자답지 않아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으므로 다만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대체
남자다운 행동이란 어떤 것인지, 여성과는 다른 독특한 남성 행동이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가족 구조가 변화하면서 바깥 양반이라는 상징적
존재인 가장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예전과 달리 돈 벌어 오는 일이나 직업을
갖는 것은 남성만이 할 수 있는 힘든 일이라는 의식은 줄어들었다. 일 그
자체가 남성적 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이 점차 많아진 것이다. 가정,
직장, 어디서나 남성의 지배와 남성 우월은 점차 무너져, 직장에서 여성과
승급, 승진을 다투어야 하며, 더 이상 집안의 신성한 주인도 지배자도
아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과 부양자 역할이 남성의 의무이고, 출세해야
권위를 차지할 수 있는 사회에서 남성은 지배와 권력, 성공에 대한 욕구를
키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남성은 직장이라는 조직에 매인
봉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내 대장부를 의식해야 했던 남성은
어느덧 왜소해져 버린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심하게 갈등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에서 남성의 생존 가능성 여부를 재는 잣대인 '사내
대장부 기질과 남성다움'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성 스스로는 '남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또 "사나이는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어느만큼 받아들이고 있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 우리 나라 남성은 대부분 서구의 남성상과 전통적인
군자상이 결합된 사내 대장부상을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삼고 있다. 즉 "사내
대장부라면 거물이 되어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진짜 남성이 되려면
힘세고 강하고 경쟁적이 되어 지위를 획득하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늘 타인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덜미 잡혀 남성답다는
것은 곧 성공과 권력이라는 믿음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사내 대장부 기질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자기 규정에 따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남성다움의 미덕을 행하지 못할 때 남자는 고통받고 남성
역할이라는 무게에 눌려 회의에 빠진다. 극단적으로 이들은 사내 대장부에
대한 요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물렁한 남자'라거나 이른바 여자 치마폭에
싸인 나약한 '마마 보이'로 불리며 '실패한 남자'로 몰이 당한다.
줏대를 잃은 이들 남성은 어떻게든 자신을 지탱해 줄 버팀목을 쌓아
현실을 보상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진정한 삶의 중심에서 멀어지거나
비뚤어지기 쉽다. 그들 중에는 자유로운 휴식 시간도 없이 개미같이 일에만
매달려 일 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이들은 타인의 존경어린
시선에 의지하려 하고 남들과 견주어 뒤처지지 않는 사회적 성공을
추구한다. 또는 자기의 남성다움을 과시하려는 수단으로 여성 편력을 일삼아
많은 성 경험을 하며 삶을 허비하거나, 육체미 운동이나 각종 운동 등으로
신체를 단련시켜 허물어진 내적 실추를 메우려 애쓴다.
사내 대장부라는 이상형은 너무 멀리 있고 거기에 다다르기에는 현실 속의
자신이 보잘것없을 때 남성들은 변화의 욕구를 느끼면서도 마지못해 자기
소신을 죽이고 권위에 복종한다. "욕을 들어도 당감투 쓴 놈한테
들어라"라는 속담처럼 차라리 남성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무난한 삶에
편승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사내 대장부의 허상을 좇으며 더욱 단단한
갑옷을 지으려 하는 동안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는 더욱 깊어져, 남성은
열등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도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을까


다음 설문지의 문항을 읽어 내려가면서 체크하다 보면 자신이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에 어느 정도 빠져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좌우되며,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각 문항은 전혀
그렇지 않다 1점, 대체로 그렇지 않다 2점, 대체로 그렇다 3점, 매우 그렇다
4점으로 평가한다.
1. 나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2. 나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3. 나는 과중한 일도 서슴없이 한다.
4. 남자는 가족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5. 남자는 주장을 굽혀서는 안된다.
6. 나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다.
7. 남자는 항상 자부심이 강해야 한다.
8. 남자는 사소한 일에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
9. 나는 고통스러워도 내색하지 않는다.
10. 나는 남 앞에서 걱정거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11. 거칠어 보이는 남자가 좋다.
12. 남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을 쓸 수 있다.
13. 나는 약해 보이는 것이 싫다.
14. 남자는 육체적으로 강해야 한다.
15. 남자는 모험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16. 나는 "여자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다.
17. 요리나 바느질하는 남자는 매력 없다.
18. 남자는 간호사, 보모 일을 해서는 안된다.
19. 파마, 액세서리 등 치장하는 남자는 보기 흉하다.
20. 남자가 남 앞에서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점수를 계산해 보아 41점 이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알게 모르게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남성이다. 특히 60점 이상인 경우에는 '사내
대장부형'에 속하는 남성으로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주변에서 '사내 대장부'라거나 "늠름하고
남자답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워 여성이 저자세로
나오지 않거나 대등한 입장에 서면 긴장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착하고 의존적인 여성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41점에서 59점 사이의 남성은 '갈등형'으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남성형을 알고는 있으나 속으로는 남성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갖가지 부담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겉으로는 사내 대장부형을 따르지만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개성을
죽이고 주어진 역할만 무난히 좇아 가지만, 자신을 살릴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느낀 채 자기 속마음을 감추고 갈등한다.
40점 이하는 '수용형'으로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여성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협력하는 삶을 추구한다. 가정과 직장, 경쟁과 화합, 합리성과 정감을
양립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도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으로 살며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서 의논해 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 증상이 실제로 우리 나라 남성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문 조사 결과와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사 대상자의 과반수가 훨씬 넘는 89.3%의 남성들이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고, 그 중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콤플렉스에
완벽하게 빠진 사내 대장부형은 16.6%, 자신의 상황을 고민하는 갈등형은
72.7%였다. 그리고 40점 이하의 콤플렉스를 초월한 수용형은 10.7%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 나라 남성 대부분이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에 깊게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공과 자부심에 산다
대부분의 남성은 일에서 성공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일은 남자가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이며, 남성에게 자기 확신과
사회적 신분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 중 "나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질문에 87%가 그렇다고 응답을 했고, "나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에 91%이상이 그렇다고 답했으며 그 중 30.1%는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또 88.2%의 응답자가 "나는 과중한 일도 서슴없이 한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3남 중 장남인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일류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중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쉽게 생각했던 사법 고시에 두 차례나
실패했다. 가정 환경 때문에 고시를 포기하고 은행에 입사하였고, 얼마 후
결혼했다. 나는 땅에 떨어진 사내 대장부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직장에서 성공하여 돈을 버는 것이라고 믿고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나 아내는 일하고 결혼하지 왜 나와 결혼했냐며 일에 빠져 있는 나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내 대장부야,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을 위해 나는 희생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지친 몸을 추스르곤
한다. (ㅇ씨, 은행원, 35세))
ㅇ씨처럼 대다수의 남성은 존경받고 인정받는 문제가 전적으로 성공
여부에 달려 있으므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 있다. 게다가
남자는 가장으로서 자신이 집안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한다는 긴장감과
절박감으로 더욱 일에 쫓겨 심지어 일 중독증에 걸리기도 한다.
"남자는 가족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에는 95.7%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고
이 중 42.6%의 응답자가 매우 그렇다라고 했으며, "남자는 항상 자부심이
강해야 한다"라는 항목에도 93.6%가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특히 대졸
이상의 고학력 남성과 사무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일수록 다른 계층의
남성에 비해 그렇다라는 응답에 더 긍정적이었다.
거의 모든 남성들이 오로지 성공과 가족 부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부담을
짊어지느라 자기 실현에서 오는 즐거움을 가질 여유가 없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무상 술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하며, 내키지 않아도
조직이나 동아리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취미 생활마저도 함께 어울려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가족의 존경을 받는 것만을 삶의 보람으로
느끼고 자부심을 갖지만, 현실적으로 과중한 일과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남자가 무너지는 것은,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그 계기는
보통 끝없는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하면서이다. 삶이란 곧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며 인생의 모든 가치는 성공에 있다고 배워 온 남성들에게 뒤처진다는
것은 삶에서 실패하는 것이자, 인생의 낙오자로 밀려나는 것을 뜻한다.
박력 있고 야성적이며 주먹도 정당하다
"남자는 육체적으로 강해야 한다"라는 항목에는 95.4%가 그렇다라고
응답했고, "나는 약해 보이는 것이 싫다"에는 94.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남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을 쓸 수 있다"라는 질문에서는
그렇다는 대답이 69.7%였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강한 부정에도 11.7%나
응답하였다. "거칠어 보이는 남자가 좋다"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53.9%만이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특히 매우 그렇다에 2.9%만이 응답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 에는 17%의 응답자가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내
대장부 문항에 비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남자만이 남성이며, 그렇지 못한 허약하거나
불구인 남성은 이미 남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 그래서 연약하게
태어난 남성은 온갖 훈련과 연습으로 신체를 단련시키려고 애쓰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상적인 남성의 체격을 가질 수 없는 많은
남성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나는 팔과 다리에 털이 나기 시작한 사춘기 무렵부터 아무리 무더운
여름에도 긴소매의 남방이나 잠바를 입는다. 친구들의 건강해 보이는 털있는
근육질의 팔에 비해 나는 뼈가 앙상한 하얀 팔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비리비리해 보여 창피할 때가 많다. (ㄱ씨, 학생, 24세))
신체적인 건강함은 곧 정신적인 강인함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따라서
"남자는 주장을 굽혀서는 안 된다"에 75.4%가 긍정했고, "남자는 모험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라는 질문에는 93.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으면 남이
자기를 깔보거나 얕잡아 보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더군다나 어려서부터
위험한 일에 주저없이 달려들어 담력을 시험하고 사내 대장부임을 남에게
보여 온 남성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남자답다는것은 곧 모험적이라는
걸 즐겨 보여 주려 한다.
(나는 회사를 정년 퇴직할 때까지 스킨스쿠버 서클의 회장을 할 정도로
모험을 즐겼다. 주위 사람들한테 "나이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인다",
"체격이 좋다"라는 칭찬을 들어 왔다. 2년 전 친구들과 하와이로 여행을
갔다가 젊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스킨스쿠버를 함께 하며 건장함을 한껏
뽐냈다. 그런데 무리했는지 폐에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ㅎ씨, 63세, 경제인협회 고문))
감정은 금물, 이성적이어야 한다
"나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다"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 11.6%, 대체로
그렇다 73.9%, 대체로 그렇지 않다 2.5%로 85.5%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사소한 일에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에는 90.3%가
긍정했으며, "나는 고통스러워도 내색하지 않는다"는 항목에는 그렇다는
대답이 83.2%를 차지했고, "나는 남 앞에서 걱정거리를 늘어놓지
않는다"에서는 82.9%가 그렇다고 답했다.
남성은 언뜻 솔직 담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남성이 그렇지 못하다.
어릴 때부터 남자답게 행동하도록 교육받아 왔으므로 여러가지 "하면 안
되는 것"에 얽매여 자기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친구들과 영화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영화 내용이 서정적이고 슬퍼 자꾸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런
장면에서는 더 큰 소리로 떠들고 팝콘을 씹곤 하였다.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놀림받을 것 같아 아예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나 혼자였다면
소리내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ㅈ씨, 21세, 학생))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남자는 말이 많거나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사내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금기에 익숙해진 자들은
감정에 도용되지 않고 짐짓 무뚝뚝하게 보이려 노력한다.
여성다운 것은 부끄럽다
"나는 여자 같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다"는 문항에 90%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 중 35.6%나 되는 응답자가 매우 그렇다고 하였고, "파마,
액세서리 등 치장하는 남자는 보기 흉하다"에는 89.2%가 그렇다는 응답을
했다.
흔히 남자는 떡두꺼비같이 생겨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며 예쁘장하거나
곱살한 남자는 기생 오라비니 샌님이니 하는 빈정대는 말을 듣는다.
더군다나 몸 치장은 여자나 할 행실이지 남자가 요란스럽게 몸단장을 하면
놀림감이 된다. 그래서 여자 같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 상하고, 치장하는
남자를 보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되도록 거칠어 보이려고 한다.
남성답게 과묵하고 강해야 한다는 문화에 지배되어, 두려워도 빈말로나마
호기를 부리고 말없이 행동하며 울음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태연자약한
척한다. "남자가 남 앞에서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는 질문에 75.4%의
응답자가 정말 그렇다고 답하여, 대다수의 남성이 자기 감정을 절제하며
나약하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하게 보이는 남성이라도 겁쟁이일 수 있다. 누구라도 무서울
때는 겁이 나는 법이다. 애써 겁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할 때 그만큼
자신을 조이고 감정을 가두느라 삶 자체에 치이게 된다.
설문 조사 중 특이한 결과로 "요리나 바느질하는 남자는 매력 없다"에
60.4%가 그렇다라고 했으며, "남자는 간호사, 보모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에는 56.9%의 응답자만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여성적인 행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정적인 면은 심하게 거부하면서도 여성의 역할이라고 여겨 온
요리나 바느질, 간호사, 보모 같은 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한 응답자가
눈에 띄게 많았다. 특히 젊은 층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많아 남자는 일,
여자는 주부라는 성 역할에 대한 경직된 생각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에서 남녀별 역할
분리가 느슨해지고 가정과 사회에서 남녀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떻게 남자가 되는가


고추 달린 아이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말로 성 차별은 시작된다. 사내 아이는 뱃속에서 노는 것부터
계집 아이보다 힘차고, 태어날 때 울음소리도 우렁차다는 경험담을 듣고,
용이나 호랑이가 꿈에 나타난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사내 아이이기를
바라는 기대는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 않게 강하다. 뱃속의 아이에게 "우리
장군", "이 자식 튼튼한가", "태어나면 내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야지" 같은
말을 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닮은 아들이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고추 달린 아이는 환호와 웃음 속에서 태어난다. 이
때부터 사내 아이는 일생 동안 남성으로서 여성과 철저히 구별되어 자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남자로서의 예정된 삶의 방식에 맞추어
남자답게 키운다. 아이는 갓난애 때는 이성적이고 냉철함을 상징하는 파란색
옷과 푸른색 이불에 싸이고, 좀 커서는 거칠게 뒹굴며 놀 수 있는 편하고
단순한 옷을 입게 된다. 행여 여자 아이가 아랫도리를 내놓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고 가르치지만, 고추를 내놓는 남자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대견한 눈길을 보내기 마련이다.
사내답게 길러 보려는 부모의 배려와 의지는 놀이감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자 아이의 방에서는 여자 아이에 견주어 훨씬 많은 갖가지
장난감을 볼 수 있다.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동차, 탱크, 총,
로봇을 가지고 놀며, 모험심을 부추기는 람보와 닌자 거북이 같은 비디오와
컴퓨터 게임을 즐기거나, 신체를 단련하는 자전거와 롤러 스케이트, 권투
글러브 같은 운동 기구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어른들은 장난감을
부숴뜨리거나 조립하는 사내 아이를 보면 "사내 녀석이라 역시 별수
없어"라고 중얼대며 대견해한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은 얌전하고 조용한 남아에게 "남자는 씩씩하고
용감해야 해요", "남자가 울면 안돼요", "남자니까 괜찮아"라며 사내
대장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역할 놀이를 할 때도 남아와 여아에게
상반된 것을 연습시킨다. 선생님이 "병원 놀이를 할 거예요. 철수는 의사를
하고 영이는 간호사를 하세요"하고 지시한다. 아이들이 "왜 철수가 간호사를
하면 안 되나요"하고 물으면 선생님은 "철수는 남자니까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라고 말한다. 남자 아이들은 "커서 무엇이 될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통령, 군인, 의사, 과학자, 장군이 될 거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여섯 살만 되면 서로 짝짓기를 거부한다. 여자
아이들이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고 인형 놀이나 소꿉 장난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남자 아이는 남자끼리 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편을 나누고 규칙을
정하여 공놀이와 패싸움을 한다. 그러면서 집단적인 생활을 배우고,
적이었던 싫던 친구도 자기 편이 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대범한 사내
대장부의 면모를 키워 간다.
"사내 녀석은 절대 계집애처럼 굴어선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으므로, 아무리 얻어 터지고 상처가 나도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몸에 익힌다. 설거지나 방 청소 같은 집안일은
어머니나 누나, 여동생이 할 일이지, 남자가 곰살ㄱ게 부엌에 들어가 '고추
떨어질'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남자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
곁이나 밖으로 내쫓긴다. 그렇게 해서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안다. 그 나이에 벌써 남자 아이는 젊은 주인처럼 굴며, 어느
때 '사내 대장부'라거나 '장군감'이라는 칭찬을 듣는지 알아채고 거기에
걸맞게 행동한다.
일그러진 영웅 사이에서의 남성다움
학교는 남자 아이에게 잠재한 남성다움을 갈고 닦아 '진짜 남자'로 만들어
내기 위한 훈련장이다. 반을 통솔하는 반장은 남자가 맡아 이끌고 여자는
그를 돕는 부반장 역을 맡는 걸 당연시한다. 어쩌다 여자 아이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활달해서 반장이 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낀다.
더군다나 교과서나 교과 과정은 전통적인 남녀 성 역할을 뚜렷하게 나누고
있어서, 학생들은 무의식중에 여자는 앞치마를 두르고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역할을 맡고 남자는 넥타이를 매고 일터로 나가 돈 버는 역할을 맡는 것을
이상적이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 사춘기로 접어들면 남학생은 교실에서보다
그들끼리 어울리며 이루어지는 하위 문화 속에서 더욱 더 남성다움을
배운다. 차츰 집에서 멀리까지 나가 가족보다는 동네의 '불량기 있는
남자애들'이나 '큰 애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통해서 남자 세계에서는 주먹의
힘으로 우열이 가려진다는 걸 깨닫는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얌전하거나
소극적으로 굴면 "창피하다, 이 계집애 같은 녀석아!"라는 놀림과 따돌림을
받는다. 성적이야 겨우 턱걸이를 할망정 행동이 거칠고 주먹이 센 남학생이
영웅이 되며, 그리하여 반 학생들이나 동료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는 것은
반장이 아니라 주먹 센 학생이기 쉽다. 이들 '일그러진 영웅'들은 상처나는
것쯤 두려워 않고, 오히려 상처를 남자다운 증거로 생각하여 자랑으로
삼는다.
혼자 조용히 노는 여자 아이들과는 달리, 남자 아이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무리 지어 다니며 우열을 경쟁한다. 누가 더 용감한가 내기하거나 담력을
시험하는 위험한 놀이에 열중한다. 열차가 달려오는 철길을 건넌다던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린다거나, 주먹 싸움, 담배 피우기, 한밤중에 공동 묘지
갔다 오기 등의 시험을 거쳐야 어울리는 무리에서 남자임을 인정받는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도 서슴없이 나서야만 힘있는 남자애들 틈에 낄
수 있다. 그래서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남자다운 남자,
진정한 남자가 되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더 거칠고 강해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허약한 남자 아이들은 계집애 같다는 모욕을 듣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다 사춘기가 찾아 오고 온밤을 꼬박 세워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를
경험한다. 여자애들이 여자다운 몸매로 변하고, 그 변화는 남자에게도
찾아온다. 손가락이나 발톱처럼 그저 그곳에 달려 있을 뿐이었던 성기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칠판 앞에 불려 나가 있을
때조차도 불쑥불쑥 솟는 성기 때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이 무렵부터 남학생은 교사나 어른들 몰래 '빨간책'이나 잡지책을 돌려
보며 성에 눈 떠 간다. 여자 아이들이, 결혼 전까지 육체적 순결을 지켜야
하고 성을 밝히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더욱 여자다워지고 있는
동안, 남자 아이에게 성은 또 다른 남성다움을 보여 주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누가 빨리 여자 경험을 했느냐"라든가 "누가 더 빨리 멀리
사정하는가"를 가지고 남자다움을 재고, 무용담 같은 성 경험 얘기가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무성해진다. 그러나 은밀할수록 이런 변화를 능숙하게
해치우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서, 나이 들고 경험 있는 노련한 남자애를
흉내내고 몇몇은 매매춘 같은 비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동정을 잃기도 한다.
남자라는 무거운 갑옷
이제 고등 학교 졸업 무렵, 진로 선택을 앞두고 남학생은 너나없이
심각해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자라는 갑옷이 처음으로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보다는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장래를 생각해서 평생 보장되는 직업이나 학과를 택한다. 문학이나 예술
분야는 '여자나 할 학문'이며 '밥벌이 하기 힘들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도록
주위 사람들로부터 종용받는다.
남녀 공학의 대학 생활은 남자에게 국민학교 이후 여자와 또다시 경쟁하는
자리지만, 의식적으로 여학생을 지적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학과나 서클에서 남학생이 언제나 리더가 되고 여학생은 보조하는 역을
맡는걸 당연하게 여긴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활달한 여학생은 "드세고 매력 없는 여자"로 생각하고, 똑똑한 여자들과
학문이나 지적인 논쟁을 벌여 피곤하고 부담스러워지기보다는 자기 말에 잘
따르고 다소곳하며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 데이트하고 싶어한다. 아냇감
역시 이상적인 여성상인 현모 양처형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고, 단지 상식과
교양 수준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배운 여자를 원한다.
사회와 여자, 장래 문제 등으로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며 술집을 자주 찾고
담배를 배운다. 이 때부터 술은 또다시 남자다움을 측정하는 도구가 된다.
신입생 환영식이라든가 동창 모임 후 술좌석에서는 이른바 '폭탄주'를
거절하지 않고 호쾌하게 마셔야 한다.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신체적으로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이므로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더욱 많이 마시고
끝까지 버텨 낼 수 있어야 한다. 술 몇 잔에 얼굴이 벌개지거나 비틀거리면
가련한 남자 취급을 받고, 그래서 술을 못 마셔서 한 수 접히고 들어가느니
무리하더라도 푹음을 한다. 흔히 남성들은 초심자로 직장에 나가거나 군대,
혹은 어느 집단에 들어 갈 때는 마치 통과의례처럼 술 마시기를 거쳐 그
마시는 양으로 얼마나 남자다운지 판단한다.
술과 섹스와 주먹은 불문율처럼 남자 세계에서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도구로 통용되며,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여기에 매달려 거칠고 적극적이고
경쟁적이고 강한 '남자다운 기질'을 익히기 예사다.
막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남자는 그럴 뜻이 전혀 없어도 어쩔 수 없이
군대라는 낯선 세계에 던져진다. 징집 영장을 받고 입영하기 전까지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해야 하고,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군대라는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친구들에 떠밀려
폭음을 하고 매매춘 지역을 찾아 '거추장스러운 동정'과 사회에 대한 갖가지
미련을 버리기도 한다. 자신을 감싸고 돌보아 주었던 익숙한 집을 떠나
남자만의 세계에서 철저하게 혼자 모든 것을 견디며 온갖 훈련을 통한 고된
시련을 겪어야 하는 시기를 거친다.
군복을 입으면서 대부분의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명령에 복종하며
폭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몸에 배인다. 각개 전투, 외줄타기, 포복 등
고된 유격 훈련을 통해서 남자답지 못했던 여성적인 취향이나 허약한
면모들을 하나씩 벗겨 낸다. 그리고 남자들만의 공통된 경험을 나누고 빳다
세례와 기합을 받으며 남성다움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간다. 그리하여 갖가지
폭력 체험을 통해 승자가 아니면 패자, 좋은 놈이 아니면 나쁜 놈, 성취한
자가 아니면 빼앗긴 자일 수밖에 없으며, 권력과 지배력을 장악해야만
살아남는다는 걸 터득한다.
제대 후 사회 생활도 군 시절과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군에
복종해야 할 권위가 있고 때로는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시인해야 할 규율이
있듯, 사회는 그 나름의 위계와 남성다움이라는 규범의 틀 속에 남성을 끼워
넣어 남자만의 삶을 강요한다.
동화와 신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남자들은 집을 떠나 시련과 훈련을 겪고
입대 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하여 사회로 귀환한다. 그러나 군대라는
남성다움의 관문을 거친 남자들은 신화 속의 영웅처럼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하는 대신 경직된 견고한 남성다움을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사회로 돌아온다.
돈벌이꾼으로서의 남성
이렇게 해서 남성은 어렵사리 일과 여자가 기다리는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 옮겨 간다. 여자와 남자가 하는 일은 다르다는
고정 관념에 젖어 여자는 당연히 가정을 지키는 주부 역할을 맡고 남자는
의당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사회와 주변 사람이 기대하는 남자 노릇을 해내기 위해, 평생 안주할
일자리를 찾아 취직한다. 직장에서 자리가 잡히면 살뜰히 집안 살림을 해 줄
'순결하고 참한' 여자와 결혼을 서두른다. 혼전 성 관계나 결혼 후 외도를
남성다운 것으로 여기면서도, "여자와 접시는 내돌리면 깨진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자기 아내가 될 여자만큼은 결혼 전엔 순결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일부종사하며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시대가 변해서 결혼한 여자도 직장 생활을 하여 맞벌이를 하기도 하지만,
여자의 직업은 어디까지나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만
허용된다. 거의 모든 남자가 결혼 후 '사랑받는 아내, 성공한 남편'이라는
이상적인 부부상에 걸맞게 사는 것을 꿈으로 여긴다. 아내는 가정에서
집안일을 하며 자녀를 기르는 현모 양처가 되고, 자신은 직장에서 출세와
성공을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 '아내와 집안 단속'을 하는 가부장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과 가정 생활의 터를 잡는 긴장의 시기에, 남자는 오직 성공에 자신을
몰아넣는다. 싫든 좋든 직장 동료들과 술 좌석, 포커, 고도리 판에
어울리거나 혹은 골프나 볼링 등을 해야 한다. 사무실보다는 사적인 공간인
'뒷방'에서 여러가지 일이 이루어지는 풍토여서, 그 속에 어우러지지 않으면
회사의 중요한 일이나 인간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 남성은 남을 밀치고 출세해야 하며,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늘 긴장 상태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어 보려고 하지만 술이나 오락, 취미
생활마저도 더 이상 휴식이 되지 못한다.
남자는 의리나 우정을 앞세워 서로를 감시하면서 남성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다움을 벗어나거나 남성 연대에서 발을 빼면, 남자라는
권위와 지배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소외되는 벌을 받기도 한다.
황혼으로 스러져가는 남성다움
출세로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남성에게, 능력과 가능성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중년의 시기는 초조와 불안 그 자체이다.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으로 도전적인 의지와 활력을 지니고
가장, 직장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다. 하지만 50대가 되면
신체적으로 힘이 쇠퇴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상적인 남성상과는 너무 멀리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내 대장부로서 자신의 삶은 일에서의 성공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만족감에 있었으므로, 늙어 가면서 인생에서 뭔가 잃어버린 허망함과
일벌처럼 평생 일만 해온 자신이 폐물이 되었다는 위기 의식을 느낀다.
사회에서 물러나 가정으로 돌아왔어도 여성 중심의 가족 속에서 그가 설
곳은 그다지 마땅치가 않다. 그러면서도 어느덧 아버지가 되어 자신이
쓰디쓰게 경험해 왔던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아들을 사내답게 키우려 하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사회가 남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한 전통적인
남성다운 이상형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는 실패했어도
아들만큼은 이 사회에서 적극적이고 경쟁적이고 이성적인 사내다운 기질의
성공한 남자로 살아남길 바란다. 그러나 간혹 자신의 남성다움을 증명해 줄
마지막 희망인 아들은 사내 대장부를 거부한다. 이른바 신세대하고 불리는
젊은 남성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만의 방식에 맞게 살겠다고 한다.
생의 대부분을 밖에서만 보냈기 때문에 아내가 평생을 지켜 온 가정에서
정작 남자는 할 일도 없고 마음 편하지도 않은 주변적인 존재로 떠돌게
마련이다. 집안에서 두 손 놓고 있느니 경로당을 찾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다른 노인들에게 '남자답게 용감무쌍했던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허세를
부리고, 마지막까지 남자로서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일을
찾으려 하지만 때가 너무 늦은 것이다. 그리고 평생 남자다우려고 애써
왔지만, 남자다운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여전히 의아해하며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장애물을 넘듯 가족, 또래 집단, 학교, 군대, 직장,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비마다 놓인 숱한 통과의례를 거쳐 남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남성은 인생을 통해 모든 삶의 현장에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사내 대장부의 허상을 좇다가 비틀거리는 남성다움을 안고 황혼으로
스러져 간다.

참고 문헌
1) 여성을 위한 모임, '일곱가지 여성 콤플렉스', 현암사, 1992.
2) 김동일, '성의 사회학', 문음사, 1991.
3) J. 빅터 볼드릿지, '사회학', 이효재/장하진 공역, 경문사, 1990.
4) 애버트 월레이스, '여성 사회학', 박민자 역, 경문사, 1991.
5) 또 하나의 문화, '지배문화, 남성문화', 청하, 1988.
6) 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문학과 지성사, 1988.
7) 이영자 외, '성 평등의 사회학', 한울, 1993.
8) 엘리자베트 바뎅테, '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최석 옮김, 민맥,
1993.
9) 우에노 치즈코, '90년대의 아담과 이브', 이재호/야노 유리코 옮김,
동풍, 1991.
10) Michael S. Kimmel, Changing Men, Sage Publications, Inc.,
1987.
11) Peter N. Stearns, Be a Man!, Holmes and Meier Publishers,
Inc.,
1990.
12) Jules Feiffer, Courtesy Publishers-Hall Syndicate., 1971.

온달 콤플렉스
모든 성공의 배경은 자랑스러운 아내와 놀라운 장모이다. -서구 속담
양반은 어려서는 외가덕, 젊어서는 처가덕, 늙어서는 사돈덕으로 산다.
-우리 속담

두 얼굴의 사나이 - 대장부와 온달


"보리쌀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말에는 사내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처가 덕을 보느냐는 항간의 통념이 담겨 있다. 진짜 남자는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처가의 도움은 절대로 받지 않아야 한다는 계명이기도 하다.
"처갓집 세배는 살구꽃 피면 간다"라든지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는
속담도 같은 맥락에서 쓰이곤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는
남자가 처갓집을 자주 찾는다거나 처가 덕분에 생활하는 것을 남자답지 못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친정덕을 보면 여자가 남편을
우습게 알고 기세 등등해 진다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어렵게 사는 딸에게
양식이라도 대어 주는 친정 어머니는 "사내 기죽으니 남편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부부 관계에서 물질에 기죽지
않으려는 남자의 오기와 사내의 자존심을 잃지 않겠다는 결단이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이어져 왔다.
전통적으로 남편을 하늘에, 아내를 땅에 비유할 만큼 우리 나라 부부
관계는 상당히 성 차별적이었다. 얼른 생각하면 남성은 아내의 순종과
처가와의 거리를 척도로 가장으로서의 능력과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재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아냇감으로 '복 있는 여자'를 꼽았고
스스로 '처 복 있는 남자'이기를 바랐다. "집안이 흥하려면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한다"든가 "처 덕으로 산다"라는 말에는 한 집안의 흥망이나 한
남자의 일생은 여자의 복에서 비롯된다는 뜻이 풍긴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젊은이가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뜻을 펴기도 하고, 모자라고 경솔한 남편이
현명하고 능력있는 아내를 만나 훌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은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적지 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서로 대조되는 가치관들이 공존하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남자는
혼돈을 경험하며 살아 왔다. 아내를 비롯하여 가족 위에 군림하려는 사내
대장부다운 가장의 모습 뒤에, 처 덕이 있어서 아내의 재산이나 지혜를
바탕으로 발돋움하려는 또 다른 얼굴이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남자의 두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 혼자 생계를 부양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남성의 정체성을 흔드는 갈등 요소가 되었다.
설문 조사 결과 "보리쌀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속담은
옛말이다"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전체 응답자 중 26세 부터 30세 까지의
남성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72%) 결혼을 하거나 사회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아 가는 시기에 있는 남성에게는 옛 속담은 별 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에 비해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친구들 중에 주택 조합 아파트를
분양받고 모자라는 돈은 처가에서 내 주거나 입주할 때까지 아예 처가에
들어가 사는 녀석이 많다. 불편이야 하겠지만 못나서가 아니다. 형편이
그러면 당연하다. 오히려 가 있을 만한 처가가 없는 녀석을 안됐다고
위로하는 판이다. (28세, 은행원))
많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한다고 해서 무능한 사람이라거나 못난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가의 형편이 어려워 들어가 살만한
여유가 없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남성이 더러 있다. 현대 사회를 잘 살아
가려면 남보다 빠르게 부와 지위를 얻고 앞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므로 비빌
언덕으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또한 남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는 우리 사회의 외적인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산업화 이후 급격한 경제 개발의 조류 속에서, 출세하여
더 나은 부와 권력, 명예를 얻는 것이 이상적인 남성상이 되었다. 고향 땅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대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서울 등 대도시에 와서
보란 듯이 사는 것이 더 나아 보였고 부나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사고가 생겨났다. 출세하려면 필수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했고,
첨단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배워야 했다. 형편이 어려워
딸은 국민학교만 보낼지언정 아들은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보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부모 심정이었다. 아들의 성공은 곧 집안을 빛내고 그 동안
고생한 부모의 노고를 단번에 씻어 줄 수 있는 청량제였다.
그러나 성공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남성이 군대 생활 3년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는 나이는 스물 예닐곱, 바로 취직을 한다고 해도 그는 이제
막 자립의 출발선에 선 박봉의 신입 사원이다. 그런데 이미 나이는 혼기에
들어선다. 가정을 꾸미는 데 드는 비용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힘들다. 더 심각한 것은 이른바 고학력 신랑감이다. 세칭 '사자 신랑감'들은
서른 살이 훨씬 넘어도 자립은 커녕 자신의 용돈도 충당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결혼할 상대 여자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싹튼다.
게다가 치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집 값은 어떠한가? 내 집 마련은 커녕
전세라도 변변한 것을 얻으려면 지금껏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아들 하나 믿고 공부시키는 데 평생을 바치신 부모에게 면목도
없고 결국 장가라도 잘 들어 효도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잣집
딸', '돈 잘 벌고 능력 있는 여성'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 편안한 출발을 해서 남보다 일찍 성공해 보자는 심리도 한몫 거든다.
그리고 그것은 한 여성을 평생 책임지는 데 대한 대가이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까지 여긴다.
(선배들 가운데는 우직하게 사랑만으로 연애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의 여자를 만나서, 면허를 따면 월급쟁이 생활을
하기보다는 병원을 지어 개업하기를 원한다. 처음에는 우직한 선배가 훨씬
인간적이고 멋있어 보였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
살림 걱정하는 것까지 들으니 가치관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꼭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려울 때 일단 도움받기가 편하지
않은가. 우선 자리부터 잡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든다. (28세,
인턴))
이렇게 남자로서 생존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 그것은 아내를 인격체로 보지 않고 결혼이라는 미명하에 부를
바탕으로 한 권력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가를 잘 들어
장군이 되었던 바보 온달이 사실은 바보가 아니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싶은
남성이 많을 것이다. 90년대 들어와서 곧잘 들려오는 신 온달족이라 불리는
신세대 남성들의 이야기도 같은 배경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남성의 심리는 오늘날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사내 대장부 얼굴 이면에 숨어 있던 온달의 얼굴이 사회 구조와 가치관이
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온달형 남성상은 여성의 능력이나 물질에 의존해서 살아가든가 출세하려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내 대장부 남성상과 모순된다. 자의건 타의건
처가나 아내 덕을 보고자 하는 남성의 의존 심리가 온달 콤플렉스이다.
단순히 의존심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 정도면 능력 있고 복 많은 아내를
만나 출세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젖어 들다가도 때로는 여성을 통해 성공을
꿈꾸는 자신이 사내 대장부답지 못하다는 열등감이 생기기도 한다. 온달
장군처럼 아내 덕에 성공하기를 원하는 반면 남자답지 못한 바보 온달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갈등하는 동안 온달 콤플렉스는 점점 깊어진다.
오늘날 남성에게 온달 콤플렉스는 병인가 약인가? 여기서 우리는 온달
이야기의 뿌리를 캐어 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남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숨겨진 전통-장가 잘 간 남자
남성이 장가를 잘 들어서 일평생 편히 살았다거나 출세하였다는 이야기는
기존의 남성다움에서 보면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사실로 숨겨져 왔다. "모든
성공의 배경은 자랑스러운 아내와 놀라운 장모이다"라는 서구의 속담에
맞먹는 우리 속담으로 "양반은 어려서는 외가 덕, 젊어서는 처가 덕,
늙어서는 사돈 덕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과거 급제를 못 하거나 몰락한
양반층은 양반의 위신과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선비를 자처하며 글읽기를
일삼았는데, 이것은 중요한 생존 방법이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양반 체통을
유지한 집안의 아들은 경제력있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 덕을 보는
일이 흔했다.
남성이 처가 덕을 보는 일은 멀리 고구려 시대 데릴 사위 풍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자가 결혼할 여자의 집으로 가서 머슴으로 3년을 산
후에야 살림을 날 수 있었다는 이 풍습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결혼한 딸이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이 태어나서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서 살았다. 때로 어린 신랑은 처가에서 성장하기도 했는데
다시 시가로 올 때까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24년 동안이나 처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는 조선 세종 시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가족 구조가 남녀 동등한 관계이며, 혼인한 아들과 딸의 가족이 동거하는
복합적인 가족 구성을 보여 준다.
오늘날에도 흔히 쓰는 "장가 간다"라는 말이 사실은 "장인, 장모의 집으로
간다"는 뜻인 것을 보면 당시 이러한 풍습이 보편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데릴사위제는 점차 폐해가 심해져 가난한 집에 딸이 태어나면
딸이 일찍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정도전은
'주자가례'에서 데릴사위제 혼인 풍속을 혼인한지 3일 후에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가는 '친영'으로 바꿀 것을 제기하였다.
이후 '처가살이'는 '시집살이'로 바뀌게 되었지만 장가 잘 들어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는 민담이나 설화의 형식을 빌어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평강
공주가 바보이며 가난뱅이인 온달과 결혼하여 그를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흔히 "귀하고 능력 있는 아내 덕에 출세한 남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 왔다. 공주라는 귀한 몸으로 천하고 신분이 낮은 남편을 섬기며
훌륭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강 공주는 더없이 이상적인 아냇감이었다.
보잘것없고 가난한 남성이 복 많고 현명한 여성과 결혼하여 그 내조로
출세하거나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는 평강 공주가 온달과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운명을 부여받은 것에서 시작한다. 고구려 25대 임금인 평원왕은 밤낮으로
울어대는 어린 딸을 달래려고 입버릇처럼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라고 말하였다. 공주 나이 열여섯이 되어 평원왕이 귀족 고씨에게
딸을 시집 보내려 하자 공주는 왜 두 말씀을 하시느냐고 항언한다. 화가 난
평원왕은 딸을 궁궐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쫓겨난 공주는 온달을 찾아간다.
가난뱅이인 온달과 함께 살게된 공주는 온달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이
가져온 금비녀를 주어 온달에게 말을 사 오도록 시킨다. 공주는 그 말을
정성껏 먹이며 온달에게 말타기와 사냥술을 익히도록 한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이름난 사냥꾼들을 거느리고서 사냥을
하여 그것으로 제사 드리던 풍습이 있었는데, 온달은 마침내 사냥을 제일
잘하고 말을 잘 달려 왕의 눈에 띄게 되었다. 왕은 "과연 짐의
사위로다"하는 칭찬과 함께 온달에 높은 벼슬을 내렸다. 아무도 더 이상
그를 바보라 하지 않았다. 후에 온달 장군은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아차성에서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장례지내려 해도
움직이지 않았고, 소식을 들은 공주가 와서 "남자로서 할 일은 다 끝났으니
편히 눈을 감으셔요"하니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과 선화 공주 이야기는 과부의 아들인 서동이 왕이
되는 출세담이다. 마를 캐어 팔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
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꾀어서 동요를
만들어 부르게 한다. "선화 공주님은 남 그스기 얼어 두고 서동 방으로 밤에
몰래 안겨 간다"라는 노래가 퍼져서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백관들이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 왕후가 내어 준 순금 한 말을 지고
가는 공주에게 서동이 나타나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백제로 와서 공주는 왕후가 준 금을 팔아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날 서동은 자신이 마를 캐는 곳에 금이 흙처럼 쌓였다고 말하자
공주는 그것이 천하의 귀한 보물이니 부모님 계신 궁중으로 실어 보내자고
말한다. 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루 밤에 금을 신라의 궁중으로 실어다 놓아
진평왕의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올라 백제 30대 무왕이 되었다. 서동은
절묘한 계략으로 공주를 얻었고 그렇게 얻은 공주를 통해 세상물정에 눈을
떠 성공하였다.
공주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을 한 바보 온달이나 마장수 서동 이야기는
후대에 이르러서는 '복 많은 며느리' 이야기로 이어진다. "복 있다"는 말을
최고의 찬사로 여겨 온 우리 민족은 복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꿈과
소망을 민담에 담고 있다. 복 많은 며느릿감을 유독 강조한 것도 복 있는
아내를 얻는 것이 남성에게는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갈림길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복 많은 며느리 이야기는 몰락한 양반이 자기 아들을 복 많은 백정의 딸과
혼인시켜 집안이 흥했다는 민담이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은 아내를
백정의 딸이라고 구박하여 내쫓았다. 쫓겨난 여자는 산중을 헤매던 중
노모와 숯 굽는 총각이 사는 외딴 집에서 묵고 그 집 총각과 부부의 정을
맺었다. 그 총각이 숯 굽는 곳에 가 보니 이맛돌이 금덩이여서 그것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백일 동안 거지 잔치를 하는데, 마지막 날 거지가 된 전
남편을 만나 부모가 정해 준 남편을 버릴 수 없다며 전 남편을 따라가 다시
부자가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백정 딸이
정승 집안을 돕는다"라든지 "제 복에 먹고 산다"라는 속담으로 전해 온다.
세 설화에서 우리는 온달 콤플렉스의 기본 골격을 이해하고, 남성이 왜
갈등하게 되는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들에는 남다른
능력으로 남편을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거나 부자로 만드는 여성과, 아직
자립하지 못한 가난한 남성이 등장한다. 이들 남성은 아내의 능력으로 금을
발견하여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 즉 온달 콤플렉스는 아직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남성이 부를 쌓아 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데서 나타난다.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치 않는 딸이 집을 나와
시련을 겪는 데 비해, 남성은 영웅 설화에서처럼 통과 의례나 시련을
거치지도 않고 자손에 대해서도 특별히 집착하지 않아 후손이 없다. 또 처음
여성의 도움으로 자립하는 과정에서 이들 남성에게서는 공통적으로 가부장적
권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평강이나 선화가 공주의 신분이었으나 복 많은 며느리는 백정의 딸로
천한 신분이며, 온달과 서동은 미천한 평민이지만 정승의 아들은 양반의
자손이다. 여기서 여성들이 남성을 키워 주고 부를 가져다 주는 역할은
같지만, 후대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복 많은 며느리 얘기에서는 남녀의
신분이 바뀌어 남성의 신분은 높아지고 여성의 신분은 낮아져 '못나도
남자'라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논리는 곧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능력으로 성공했어도 '자수성가'했음을
드러내고 여성을 잘 만나는 것도 남성의 능력이라고 믿고 싶은 심리에서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갖춘 여성과 모자란 남성의 결합
?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 서동과 선화 공주 복 많은 며느리 바보 사위
선녀와 나무꾼
남성 가난뱅이 마 파는 총각 돈 없는 양반집 아들, 숯굽는 총각 바보
나무꾼
여성 공주 공주 돈많은 백정의 딸 현명한 아내 선녀
주인공 남성의 결과 장군이 된다 왕이 된다 부자가 된다 노력없이
지시 대로 흉내내다 실수한다 천상구경까지 하나 경솔함으로 처자를 다
잃는다
그러나 이러한 발복 설화의 결말이 언제나 남성의 출세나 성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일본, 중국에까지 퍼진 '바보 사위' 설화는
현명한 아내와 바보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처가에 다니러 가는 바보 사위가
장인 앞에서 실수를 할까 봐 아내가 음낭에 줄을 매고 한 번 잡아 당기면
"진지 잡수십시오"하고 두 번 잡아 당기면 담배를 넣어서 "연초
피우십시오"하라고 가르친다. 남편은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잘 해서 장인을
감동시켰으나 아내가 줄을 북어 대가리에 매어 두고 잠시 나간 사이에
고양이가 북어 대가리를 물고 줄을 잡아 뜯자 바보 사위는 "진지
잡수십시오"와 "연초 피우십시오"를 쉴 새 없이 반복하였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성의 능력이나 현명함만을 믿고 따르다가는 우습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처나 처가 덕을 보려는 온달형 남성에게 교훈이 되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금강산에 목욕하려 내려온 선녀의
날개 옷을 감춘 가난한 나무꾼이 선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둘 낳은 후 사실을
말하고 날개 옷을 돌려주자 선녀는 아이를 양 팔에 끼고 하늘로 올라간다.
후에 나무꾼은 하늘에서 물 길러 내려 보낸 두레박을 타고 처자를 만나지만
노모를 보고자 내려와서 말에 탄 채 뜨거운 팥죽을 먹다가 엎지른다. 말이
뛰는 바람에 지상에 떨어진 나무꾼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매일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하다가 수탉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나무꾼이
어여쁜 선녀와 결혼하다"라는 주제는 늘 사람들에게 주목되었다. 여기서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릴 수 있는 선녀의 날개 옷은 선녀가 높은 신분 상승을
하려 했으나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민담들은 가난하거나 어리석은 남편이라도 현명하고 겸손하게
지성으로 섬기는 여성상을 부각시켰다. 그뿐 아니라 어리석고 능력이 없는
남성도 지혜롭고 부유한 아내를 얻어 출세할 수 있다는 꿈을 은연중에 심어
주기도 했다. 또 평강 공주에서 선화 공주나 복 많은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여성들은 현명하여 남자를 부유하게 만들지만 여성의 현명함은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만 쓰이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남성에게 "장가 잘 간다"는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의 출세나 성공,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남자의 무능함,
비천함, 바보스러움은 열등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성공한다는
가능성을 강조하며, 현명한 아내나 귀한 신분의 공주는 남자의 성공을 더
화려하게 빛내 주는 존재이다. 흔히 이러한 이야기에서 보듯 온달이기를
꿈꾸며 아내에게 의존하려는 남성은 기반을 잡기 이전에 막 일어서려는
단계에 있거나 아직 생활력이 없는 남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기반을 잡은 후에는 아내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거추장스러워하고
여성을 비하시키려 한다. 남자가 오죽 못 났으면 처가 덕을 보겠느냐는 말은
여성을 통해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남자의 자기 합리화이거나 여성의
도움을 바랄 처지가 못되는 남성들을 위로하는 말에 불과하다. 복 있는
아내, 현명한 아내, 집안 좋은 아내,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성공하는 것은
곧 사나이의 능력이요 권리처럼 인식되고 있다.
장가 잘 들어 출세한 남성의 이야기는 재미 있고 아름다운 설화의 모습을
띠고 주로 어린이 대상의 이야기로 전해 오면서 가부장제를 굳히는 데
기여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아내를, 평강 공주처럼 현명하고 바보
남편일망정 잘 보필하여 장군으로 만드는 대모 같은 존재로 그리는가 하면,
아름다운 선화 공주를 취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한
서동의 거짓말이나 나무꾼처럼 선녀의 날개 옷을 훔치는 절도 행위도 장가를
잘 들기 위한 남성의 호기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남편의 성공이 곧 여성의 행복'이라는 가부장적인 공식 뒤에는 처덕을
보기 원하는 남성들의 심리가 숨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야기는 남성
우월주의를 비춰 주는 거울과 같아서 대체로 남성의 성공으로 결말을
맺는다.

온달 컴플렉스의 양상
혼자는 힘들어서
남성은 강하고 능력 있어야 한다는 남성 우월주의 이면에는 앞서의 설화나
민담처럼 남성의 의존 심리가 깊숙이 깔려 있다. 이러한 의존 심리는 여자의
타고난 복이 곧 남편 복이라는 또 다른 논리를 내세워 여성을 교묘하게
억압하고 비하시킨다. "보리쌀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라는 결단과
오기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여자에게 손 내밀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고자 하는
남성의 자존심과 기개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떤 아내를
만나느냐가 흥망을 가르는 지름길로 생각하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성
자신이 모자라고 게을러 일을 그르치고도 아내가 복이 없어서, 여자가
재수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푸념하기도 하고, 복 많고 현명한 여성이
순종적이고 내조 잘 해서 남편을 출세시킨 얘기를 들먹이기도 한다.
산업화 이후 사회가 복잡해지고 남성이 가족을 책임지는 생계 부양자
노릇이 힘들어지면서 사내 대장부 남성상에 가려진 온달형 남성상이 서서히
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설문 조사에서 "잘 사는 집안의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다"는 남성은 66.7%(508명)였다. 특히 결혼 적령기라고 할 수 있는 20대
후반에서 30세까지의 남성이 74.5%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대졸 이상의
고학력 남성(73.3%)과 사무 전문직 종사자(71.9%), 그리고 월소득이
90만원에서 150만원의 중간 소득자일수록(70.1%) 잘 사는 집 딸과 결혼하고
싶어했다.
혼자 벌어서는 작은 아파트 한 채도 사기 어려운 세상에서, 물가와
교육비의 증가, 게다가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상대적인 빈곤감에 눌리며
기댈 곳이 없는 남성은 고된 삶에 대한 불만을 아내에게 돌리곤 한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를 무능력하게 보고 살림살이가 시원치 않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새삼스레 지참금이니 혼수를 못 해 왔느니 시비를 걸기도
한다. 그것은 종종 도움을 주지 않는 처가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까지
확대된다.
(결혼 6년 만에 조합 아파트를 분양받게 되었는데 융자를 얻고도 돈이
부족했다. 방 한 칸을 전세 놓으며, 아내에게 "너는 그동안 비상 통장 하나
마련하지 못했냐"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솔직히 동생이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처가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처가가 부자인
것이 좋긴 좋구나"하는 부친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36세, 회사원))
설문 조사에서 "처가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문항에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42.5%였는데, 특히 41세 이상의 남성이
53.6%로 다른 연령층에 비해 높았다. 40세 이상이면 세상 물정을 알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고 능력에 대한 한계도 느낄 나이로 처가 덕이나 처
덕으로 도움을 입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또
대학에 재학중인 남학생의 70.6%는 처가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 전혀
부럽지 않다고 대답하여, 사회를 경험한 남성과 하지 않은 남성 간에 상당한
견해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내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
대부분의 남성은 '집에만 있는 현모 양처'도 '능력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도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온달이 되기를 꿈꾸는
남성에게 '일등 신붓감'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설문 조사에서
72.5%(544명)의 응답자가 "직업적으로 성공한 아내는 나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문항에 그렇다고 응답했다. 25세 이하의
남성은 74.4%가 이에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 나이가 젊을수록 아내가
맞벌이를 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고졸
이하의 남성 중 75.7%가, 월 소득 90만원 이하의 남성 중 75.7%가
직업적으로 성공한 아내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와 주목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 처가에서는 내가 아내보다 학벌이 낮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였다. 아내는 무작정 집을 나와 당시 지방에 있던 나와 사흘을 함께
있었다. 장인은 노발대발하여 딸의 뺨을 때리고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고
하셨지만 결국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는 어렵게 나를 택해 준 아내가
고마워 직장 생활을 하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고 아이도 낳지
않았다. 우수한 그녀가 승진하려면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여, 아내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동안 나는 사업을 해 보려고
남미에 갔으나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늘 빨리 포기했고, 뭘 해
보고 싶은 의욕도 점점 사그라졌다. 똑똑한 아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사는 것이 그리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의 무능을 탓하지 않고 매사에
나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아내가 고맙다. (45세, 사업)
개방형 질문인 '당신이 바라는 여성상'에 많은 남성이 '똑똑하고 능력
있지만 다소곳하고 상냥한 여성'이라고 답한 것을 볼때 대부분의 남성이
평강 공주 같은 여성을 꿈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착하지만 남편만 믿고
사는 현모 양처나 매사에 따지고 튀는 자기 주장이 분명한 여성보다는, 현대
사회에 걸맞게 똑똑하고 생활력이 있으면서도 남자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여성을 선호하는 것이다.
결국 자동차, 아파트, 빌딩의 열쇠 3개에 걸맞는 혼수와 지참금을 갖추어
와서 신혼의 출발을 유망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자신의
개성이나 능력을 감추어 남편을 기죽이지 않고 남편을 키워 줄 수 있는
여성이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관은 다분히 세태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집안에서 살림도 잘 하고 재산도 늘려 주는 여자가 좋다"는 문항에
응답자 남성의 89.8%가 그렇다고 답했다. 특히 40대 이후의 남성이 가장
높게 나타나 나이가 들수록 여성에게 기대는 비율도 높아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고졸 이하의 학벌과 판매직이나 노동자의 경우에 그 비율이 높아
생활의 어려움을 아내의 활동이나 내조를 통해 극복하려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장군인가. 바보인가-동전의 양면
많은 현대 남성이 처가나 아내에게 대놓고 도와 달라기엔 자존심이 허락치
않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는 남보다 빨리 자리 잡기도 출세하기도 힘든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온달처럼 처 복이 있는 남자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바보 온달로 보일 것인가. 온달 장군이 될 것인가가 갈등이자 고민거리이다.
이는 바보 온달처럼 무능하고 못난 탓에 처가나 아내 덕에 산다는 열등감과
자신 정도면 충분히 온달 장군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 사회적인 역할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능력 있는 아내나 비빌 언덕으로 잘 사는
처가가 필요하다는 우월감이 남성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데서
비롯된다.
한편 아내나 처가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남성은
자신이 전통적인 사내 대장부 남성상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지 은근히
갈등한다. 부잣집 딸과 결혼해 처가 덕을 보거나 아내의 능력으로 물질적
걱정이 없는 남성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바보 사위 이야기에서처럼
"남들이 자신을 못난 남자로 보지 않을까"하는 피해 의식이 항상 뒤따른다.
이처럼 온달 콤플렉스는 현실적으로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남성을 괴롭힌다.
(총각 시절 사랑하던 여성이 있었지만 그녀는 내가 도와 주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나는 나를 도와줄 여성이 필요했다. 대학원 진학도 하고 싶었고
유학도 가고 싶었다. 맞선도 많이 보았지만 배경 좋고 돈 있는 여성들은 한
수 더 떴다. 미국에서는 여자 간호사가 수입이 좋다기에 외모도 나쁘지 않은
종합 병원 간호사와 몇 개월 교제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부모 없이 여섯
명의 동생을 둔 장녀였다. 결국 시골 국민학교 교사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지만 3년 후
실의만 안고 돌아왔다. 취직도 해 보고 사업도 벌여 봤지만 신통한 게
없었다. 언제나 아내의 경제력에 의존했지만 우리 부부는 남편이 큰소리
치고 아내는 순종하는 세대여서 그나마 내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할머니 소리를 들을 만큼 겉늙어 버린 아내가 아직도 국민학교
교사를 한다는 사실이 나의 무능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차라리 아내가 경제적 능력이 없었더라면 내가 좀더 가장의 책임을 절감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아내
신세를 너무 져 왔다는 회한과 콤플렉스때문에 그렇다. (54세, 무직)
다른 한편 자신을 온달 장군으로 만들지 못하는 아내의 무능을 탓하며
불만에 싸이기도 한다.
(나만 믿고 있는 두 아이와 마누라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모두들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사느냐고 한다. 맞벌이를 하고 처가에서 집까지 사 주는
친구들을 보면 저 놈은 무슨 복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른
여자들은 부동산 투기도 잘만 하던데 저 여자는 왜 저리 무능한가 하는
생각까지??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이 사람을 점점 치사하게 만드는
것 같다)
별소리를 다했다는 듯 겸연쩍어하는 30대 후반의 ㅈ씨는 이것이 온달
콤플렉스냐고 반문한다. 남성은 자립 능력이 없는 사내 취급을 받기
싫어한다. 동시에 막연한 부러움이나 기대 뒤에는 처가나 아내의 도움을
받은 남자는 남자로서 기가 꺾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혹 정말로
바보 온달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최근 한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사무직 남성들 중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는 1위가 "가장이나 아들로서
능력이 없다는 평을 들을 경우"(27.8%), 2위가 "처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경우"(23.0%), 3위가 "아내가 다른 남성과 비교하여 불평할 경우"(19.6%)로
나타났다. 1,2위가 모두 경제적 능력과 관련하여 남성들이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자립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처가의 도움을
받는 현실과 모순된다.
온달 콤플렉스가 지니는 양면성 때문에 남성은 온달이 되어도, 되지
못해도 괴롭다. 회계사인 ㅇ씨는 많은 맞선 끝에 제법 큰 사업을 하는
집안의 맏딸과 결혼을 했다. 그는 외아들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처가에서 사 준 35평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과다하리만치 많은 혼수와 중형차, 지참금 등을 가지고 부족함 없이
자란 부잣집 딸의 기질을 발휘하며 산다.
(사는 데 걱정은 없지만 늘 기가 죽은 기분이다. 남자가 큰 소리 칠 일이
없을 때 그 기분?? 친구들과 술을 먹어도 기분은 마찬가지다. 돈이라면 나도
많이 버는 편인데도 그게 아내에게는 용돈 정도라는 게 영 입맛이 쓰다. 돈
받아 들고 고마워하는 여자 모습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40세,
회계사))
어느 경우에든 물질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또는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사고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혼으로는 조건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룰 수 없다. 결혼하고 몇
해를 산 부부들이 난데없이 혼수감을 적게해 왔느니 처녀 시절에 모은 것
없이 뭐했느냐느니 하는 문제로 다투고, 이혼을 하는 파행적인 삶을 걸을
수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물질에 바탕을 둔 남녀 관계는
이처럼 위기를 맞고 있다. 게다가 가부장의 권위를 고집하고 사내 대장부의
허상을 좇는 남성일수록 끊임없이 온달형 남성상과 사내 대장부형 남성상
사이에서 흔들리며 자신의 정체를 상실해 갈 것이다.


1) 최성애, "혼수전쟁", 청산, 1993, 322--323, 341쪽.
2) 서진영, "여자는 왜", 동녘, 1991, 27쪽.
3) 최재석, "한국 가족 제도사 연구", 일지사, 1986, 209--211쪽.
4) 이효재, "한국 가부장제의 확립과 변형", "한국 가족론", 여성 한국
사회 연구회 편, 까치, 1990, 15쪽.
5) 윗글, 17쪽.
6) 이야기 한국사 편찬회 지음, "울보 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
한국사", 풀빛, 1985, 231--236쪽.
7) 이상옥, 최근학 편, "한국 고사의 샘", 경학사, 1969, 51--52쪽.
8) 이승균, "복 많은 여자계 민담 연구", 계명대 석사 논문, 1981, 3쪽.
9) 김대숙, "여인 발복 설화 연구", 이대 박사논문, 1988, 128쪽.
이들 설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부를 가져다 주는 여신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금이 부의 상징이 된 시대는 인류 역사상 철기 문화 시대에
와서인데, 그런 면에서 이들 설화는 능력있는 여신이 자신보다 문화 수준이
낮은 남자를 대장장이로 만들어 획기적인 번영을 이루는 것으로 보는 철기
문화 신화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10)손진태, "한국 민족 설화 연구", 을유 문화사, 1954, 160쪽.
11) 위글, 193--194쪽.
12) 이부영, "한국 민담의 여성 원형상", "한국 여성의 전통상", 민음사,
1985, 96쪽.
13) 여성신문, 93년 10월 22일.

성 콤플렉스
인간은 성욕을 사회 봉사적 충동, 종교적 충동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전 생애를 통한 완전한 금욕이란 있을 수 없다.
-마르쿠제
@FF
성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고 불가피한 부분인데도 이제껏 합리적 사고와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성은 될수록 덮어 두어야 할 비밀스러운 것으로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만 여겼다. 그렇게 은폐된 성
문화는 자연히 남성 우월주의와 남성 본위의 성 관습을 정착시켜 왔다.
남성과 여성에게 부과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특성은 성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남성의 성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이고 능동적이지만, 여성의
성은 소극적이고 순종적이고 방어적이므로 남성이 성 행위의 주도권을 갖고
이끌어야 한다고 여긴다. 또 여성을 만족시키고 성적으로 남성답기 위해선
남자의 성기는 되도록 크고 강한 것이 좋다고 믿기도 한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91.6%가 전통적으로 굳어져 온 성
의식을 그대로 내면화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성의 신화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성적으로 남자답다고 믿는 남성은 28.1%이고 그 기준에
미달한다는 생각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남성은 63.9%였다. 그에 비해 성에
대한 고정 관념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남성은 8.4%에 불과했다.
사회가 변하여 여성도 동등한 교육을 받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고
여성 해방 운동의 외침이 심심찮게 들려오자, 많은 남성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성의 신화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사회나 가정에서 의기 소침해진 남자 중에는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 행위에 집착하거나, 여성을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한다고 하면서도 짐짓 여성의 성을 억압하고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늘어 가고 있다.
성 콤플렉스는 그릇된 성 규범과 성 문화를 받아들여 성을 통해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성적 욕구와 능력에 집착하는 심리, 혹은 자신의 성적
능력이 그러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위축되고 갈등하는 심리를 말한다.
성이란 다양한 성적 표현과 행동을 비롯하여 성을 둘러싼 사회적 심리적
요소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다. 성기 중심으로만 성을 이해하거나 잘못된 성
관념으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동안 성 콤플렉스는
더욱 깊어진다.
성에 대한 갖가지 신화와 편견 및 허위를 살펴보는 일은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첫 번째 조건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남성은 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켜 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성 고정 관념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성의 역사를 통해 그 원인을 캐어 보았다.
남성, 금욕과 방종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다움이 흔들린 시대일수록 성적 능력은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고,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확고할수록 성은 절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남자의 욕구나 욕망을 위주로 여성에 대해서는
성의 표현을 억압하였으며 남성의 성욕과 성의 충족은 공공연히 인정하였다.
푸코는 "성의 역사"를 통해 남성에게 성이란 자기 확인과 자신의 주도권
확립에 필요한 자기의 기술 체계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쾌락의
관리법이라든가 양생술이라 하여 성적 활동과 건강과의 관계에 관심을 모아
의학을 발달시켜 왔다. 건강하고 훌륭한 자손을 얻기 위해 부모의 나이,
부모의 양생, 임신 계절을 고려하여 되도록 성 행위를 절제하는 것을 도덕적
미덕으로 삼았다. 대개 남자는 성욕이 강하고 힘이 세지만 여자에게 빠지면
힘을 잃고 마는 위험을 겪으므로, 여자를 성적 존재로 받아들이는 한 자신이
상해받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의 강한 성적 욕망과 성적 능력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데릴라의 유혹 때문에 힘을 잃은 삼손
이야기의 경고에서 보이듯, 전통적으로 남자가 힘을 보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여자와 성 관계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자유인인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 사회였던 그리스 시대는 의학과
철학을 통해 남성의 성적, 육체적 우월성을 입증하고 성을 토대로 여자와
노예를 권력에서 배제시켜 남성들이 주도권을 확고하게 잡은 시기였다.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는 생명과 열기와 빛의 근원인 남근은 인간의 제
7지로서 인간의 중심이며, 남근을 중심으로 팔, 다리, 척추, 머리가
생겨나고 머리에서 형성된 정자는 척추를 따라 내려가 제 8지로 불리는
여자에게 옮겨 간다고 하였다. 또한 아레테는 '활기를 주는 체액인 정액'의
유익한 효과를 기술하면서, "금욕하고 자신의 정액을 지키면 그로 인해
건강하고 용감하며 자신의 힘을 가장 사나운 짐승들의 힘에 견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대담해진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정액은 생명의
근원이고 자식을 낳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겼다. 따라서
금욕을 통해 생명인 정자를 몸 안에 축적하고 자신의 영혼을 생기로
충만하게 하거나 자식을 낳기 위해 정액을 쏟아 내는 방식들이 논의되어
왔다.
생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남성의 성적 우월성은 19세기 과학과 발견의
시대에 들어와 턱없는 억측이었음이 드러났다. 과학은 난자의 XX와 정자의
XY가 결합하여 XX나 XY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즉 X염색체가
유전적으로 더 강하고 본질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은 생명의 상징이라는 사회 문화적인 고정 관념이 퍼져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심리적인 압박감을 갖고 있었다. 성적인 표현을 금기시했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특히 자위 행위를 위험한 것으로 여겨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습관적으로 자위하는 남아의 체격은 위축되고 허약하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생기가 없으며, 혈색은 창백하고 기운이 없고 여드름으로 뒤덮여
있다. 손은 축축하며 차갑고 살갗에는 습기가 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피하며 혐오감을 갖는다.??그의 지능은 둔하고 쇠약하게 된다. 이런
사악한 습관이 지속된다면 그는 결국 천치가 될지도 모른다.)
당시 자위를 막기 위해 남성의 생식기에 날카로운 못으로 둘러싸인 쇠로
만든 자물쇠를 채우는 남자 정조대가 고안되었다. 자위에 대한 금기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쳐 남성은 은연중에 자위 행위를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거나 혹은 정상적인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거나 머리가 나빠지지 않을까
겁을 먹기도 한다. 대부분의 남성은 자위 행위를 하면서 성적 욕구를
풀지만, 그 횟수가 늘어나면 남 몰래 사정을 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충효 윤리와 반상의 엄격한 신분 제도를 바탕으로 혈통의
순수성과 가문의 도덕적 우월성을 보장하는 방편으로 여성의 정절
이데올로기를 중시했다. 재가한 여성의 자식에게는 벼슬을 금하는 '재가녀
자손 금고법'이나 여필 종부, 부부 유별, 부창 부수, 칠거지악 같은 사회적
규범에 의해 여성은 남편에게 예속되었다. 또한 열녀를 뽑아 상을 내렸는데,
열녀의 정표는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 과중한 호역의 부담을 면제받거나
면천을 통해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어, 정절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경"을 보면 성에 관심이 없고 정절을 지킨 여자는 덕녀로,
음탕하며 성을 즐겨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자는 악녀로 나누어, 여성에게
성을 밝히지 않는 정숙한 여성상을 받아들여 따르도록 하였다. 남성은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고 여성을 요조 숙녀와 현모
양처로 구분하여 이를 합리화하고 여성과 남성의 성은 본래 다르다는 이중
규범을 만들어 냈다.
유교는 성의 생식적 기능을 중시하여, 성은 혈통의 순수성과 가문의
계승을 위한 방편일 때만 가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욕을 되도록
절제하고 글읽기와 나랏일에 몰두한 사람을 군자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자식을 얻기 위한 축첩 제도는 남성의 특권으로 인정이 되어 첩을
거느리거나 외도하는 것이 수치이기보다 남성다움과 권세를 과시하는 일로
여기는 전통이 존재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상처한 지 3년이 지나야
장가들 수 있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1년도 못 되어 장가드는 경우가
허다했고 또 40세가 넘어도 자식이 없는 자 이외에는 첩을 두는 것을
금하였으나 별로 지켜지지 않았다. 대다수 남성은 엄격한 내외법과 부부
유별, 조혼과 가문혼으로 이루어진 결혼 생활에서 애정과 성적 쾌락을
아내에게서 얻지 못하고 이중적인 성 생활을 하였다. 여성과 달리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즐기는 호색한이라 해도 사회에서는 호기 있는
사람으로 여겼지 비난하지는 않았다.
영웅은 호색이라는 말처럼 여성 편력과 강한 성적 능력은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미화되어 왔다. 백제의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세종대왕이
무려 28명의 자녀를 두었다거나, 주색잡기에 능한 남성이 첩을 여럿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윤리적으로 지탄받기보다는 호걸 남아임을 입증하는
사례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군자와 호색한은 현대의
남성 안에 공존하고 있어서, 성 행위 때는 호색한처럼 굴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성인 군자마냥 성을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오늘날의 성 관습은 과거처럼 전적으로 남자의 욕구만을 채울 수는 없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 모두가 서로의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이 되어, 여자는
젊음과 외모에 따라 평가되며, 남자는 사회에서 갖는 신분과 부에 따라
평가된다. 이런 태도 때문에 결국 성은 성숙하고 완전한 관계가 아니라
권력을 과시하는 게임이 되었고, 남자에게 성욕은 정복 행위가 되어 버렸다.
(나는 남성 지배의 마지막 성벽을 붙들고 매달렸다. 나는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고자 하면서도 성 관계는 예외로 했다. 성 관계에서는 아직도 여성을
대상화하고 정복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나는 남성의 마지막 유산을
버리기보다는 대상화할 수 없는 여성을 거부했다. 나는 이들이 성적으로
나를 자극하거나 흥분시키지 못하게 방어했다. 음경이 발기하지 못하게
억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상황에서 나는 남성 우월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나의 발기 결여가 남성 사회화의 마지막 유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
이와 같이 여자와 대등한 성 관계를 맺기보다는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더구나 남성의 역할과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성은 더
이상 금욕과 절제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다움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된 것이다. 따라서 성적 능력이 강한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존경을
받으며 동료들 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성의 자유화 물결이 밀려 오고 성을 상품화하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성
풍습은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잔존하는 유교적 성 문화와 함께 우리
나라만의 특수한 성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 남성들이 성에 대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양상과 태도 및
반응을 모아 보고 이에 대한 원인을 파헤쳐 봄으로써 그릇된 성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아보았다.
성에 대한 신화
성욕은 반드시 풀어야
남성은 감정적 표현보다는 육체의 접촉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이를
사랑의 증거로 간주하므로 성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성은
궁극적으로 결혼을 통해 지위를 얻지만, 남성은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지위를 얻을 수 있으므로 남성은 여성만큼 사랑과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혼 시절 성 경험을 한 남성 중 44.7%가 매매춘 여성이나 유흥업소
종사자와 성 관계를 한다고 한다. 여성의 혼전 성 경험을 금기시한 채
남성의 성만 허용하는 구조에서 남성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은 자연히
매매춘업이나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남성은
생리적으로 성 충동을 자제할 수 없다는 구실로 남성에게만 허용하는 성
문화를 정당화시킨다.
(1년 전부터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 그 여자와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가벼운 애무나 신체적 접촉으로 인해 성 관계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지만 감히 그 여자 앞에서 나의 욕망을 말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결혼할 때까지 여자의 순결을 지켜 주는 그런 멋진 남자로 남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고 집에 바래다 준 뒤에는 자극받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매매춘 여성을 찾곤 했다. 물론 자제할 수도 있지만
돈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유흥업소가 주택가까지 널려
있어 굳이 자제할 이유가 없다. (22세, 대학생))
그러나 위와 같은 조사에서 77.5%의 남성이 "성 충동은 자제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성의 성 충동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편의상 하는 말이다. 남성은 자기 아내가 될
여자의 순결을 지켜 주려는 반면, 그렇지 않은 여자에 대해서는 편의에 따라
충동을 자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남성은 여성을 데리고 놀 수 있는 연애
대상과 순결한 결혼 대상이라는 두 집단으로 이분화 해서 생각한다.
남성들 사이에 오가는 '참는 놈이 병신'이라는 속어 속에는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임을 보여 준다. 이는 설문 조사에서
"남자는 자위 행위를 해서라도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는 문항에 그렇다는
응답이 71.4%(536명)나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남성의 성욕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고 충동적이므로 풀어야만 한다고 믿는 남성들은 동정은 꼭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30대 후반의 한 회사원은 결혼전에 동정을 지키는 남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거라면서 성 경험이 없는 남자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유경험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동정을 지키는 남자는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고 스스로도 자격지심을 갖는다.
(혼전에 여성과 관계한 일이 없었다. 직업적 여성과는 불결해서 싫었고 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신혼 첫날 밤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능숙하지
못해서 나나 아내나 재미없는 밤을 보냈다. 진작 연습을 좀 해 둘걸 하는
생각도 한동안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테크닉이 부족한 것 같아서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30세, 회사원))
남성에게 남성임을 확인할 수 있는 통과의례의 하나인 성 경험은, 개인을
균질화시키고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해야 하는 군대 시절 동안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군대를 다녀 온 남성은 거의가 동정을
떼었다고 보는 통념이 만연한 가운데 부대 안팎으로 성은 일종의 훈련과
같다. 예를 들면 상사가 부하에게 성 경험이나 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부하는 경험이 있든 없든 꾸며 내놔야 한다. 이런 경우 경험이 전혀
없거나 순진해 보이는 남성은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다. 동시에 군대 내에서
억눌린 심리적,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사병들은 외출이나 휴가를
나가서 부대 근처의 여인숙이나 매미집에서 술을 마시고 흔히 매매춘
여성들과 성 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러면서 남성은 배우자가 이미 다른 사람과 성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심한 결벽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때가
묻었으니까 여자는 깨끗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스로 모순된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가 이율 배반적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박혔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데 이는 남성이 성에 관한 이중 규범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남성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으로 여기는 사회 통념은 사랑과
성행위에서도 남성의 주도권과 적극성을 인정하여 남성 중심의 일방적인 성
관계를 규정한다. 성기 중심적이고 남근 숭배적인 속성을 지닌 성 문화는
인격적인 상호 교류보다는 남성 위주의 생리적이고 신체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이러한 성 문화는 성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남성의 삶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까지도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남성은 성 관계의 주도자
남성은 대체로 자신을 성행위의 주체라고 생각하며 거침없고 적극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데 익숙하다. 남성은 성적인 욕망이나 성적인 표현이
자신의 남성다움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므로 공격적으로 성 관계를 주도해야
남자답고 상대적으로 여성은 소극적으로 남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성 관계는 남자가 주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는
질문에 대해 81.6%에 달하는 남성이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남성이 남성 주도적인 성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전혀 그렇지 않다"에 응답하여 남성
주도적인 성 관계를 부정하는 남성은 40대 이상이 단 1명에 불과하며 25세
이하의 남성 중에는 19명 뿐이었다.
실제 부부 관계에 대한 개인 인터뷰를 했을 때, 50대 초반의 한 남성은
부부 관계를 하기 전에 아내가 먼저 옷을 벗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서
욕망이 사라졌다고 고백했다. 주부 대부분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은 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쉽게 표현하지 못하거나
표현을 하더라도 남편의 반응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고 한다. 한 주부는
언젠가 평소와 다르게 먼저 성 관계를 요구하고 체위를 달리 하자는 요구를
했더니 남편이 자신을 음탕한 여자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고
말했다. '중년 남성의 전화'에 상담해 온 남성 중 70--80%가 반드시 남자가
성 관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한 신문 기사는 이
같은 성 관념이 부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잘 말해 준다. 남성만이
일방적으로 성 관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자체가 남성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은 대부분 성 관계 때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에
민감한데 이는 성 관계에서 상호 만족을 통해 애정을 확인하기보다는 남성
자신의 성적인 능력과 연결지으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에서
"남자는 성 관계 때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한다"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이
93.2%((700명)로 나타나 대부분의 남성이 이를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들어 성 행위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아내의 소감을 묻는 버릇이
생겼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냐, 몇번이나 오르가즘에 도달했는가를 만족한
만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물어 본다. 성 관계에서는 반드시 함께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혹시 아내가 그렇지
못할까 봐 늘 신경이 쓰인다. 그렇지만 아내에게 성적으로 능력 있는
남성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을 다 말할 수는 없다. (42세, 상업))

대다수의 남성이 성적으로 여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가장 친밀한 정서적 관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
관계에서조차 남자는 남성다움을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만족하지
못하면 남성은 자신이 남성으로서의 능력이 없다고 여긴다. 서로의 애정으로
인해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진정한 성적 만족이 생기게
마련인데도 남성은 '남성다운 성'을 과시하려고 하고, 여성은 만족하는
척하여 남성의 자존심을 살려 주려 함으로써, 건강하고 자연스러워야 할
성의 즐거움은 부담스럽고 강제적인 것으로 바뀐다. "여성을 황홀경으로
몰아 넣기 위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성은
애정이나 인격적인 관계를 무시한 도구적이고 성기 중심적인 발상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은 부부 관계에서 쌓인 불만스러운 성생활을 풀기 위해 또 다른 길을
찾는다. 남자들이 가볍게 바람이라고 부르는 외도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도
남성의 외도는 "어쩌다 실수로 그럴 수도 있다"고 가볍게 받아들인다.
한 조사에 의하면 남성의 혼외 성 경험율은 63.6%로 연령별로 보면 20대인
경우 21.4%만이 유경험자인데 비해 30대는 58.2%, 40대는 75.3%로 나이가
들수록 경험율이 급속하게 높아짐을 알 수 있다. 미혼 남성도 72.9%가
자신도 결혼하면 외도를 안 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응답을 했고 나머지는
"아마 외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혼외 성 경험의 동기로는 74.4%가 "우연히 기회가 되어서"였고, 우연한
기회의 구체적인 상황은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니",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면 특별히 나만 먼저 빠질 수가 없어서" 등이었다.
이처럼 남성의 혼외 성 관계는 한 순간의 행동이라고 보기 때문에
도덕적인 죄책감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외도에 대해서는 "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장담할 수 없다"는 모호한 행동을 취하면서도 아내의
외도에 대해서는 "끝장이다", "생각하기도 싫다"고 단호하게 거부감을
표시한다.
남성의 외도는 이중적인 성 윤리와 상업화된 성 문화 탓이 크다. 특히
우리 나라 특유의 남성 놀이 문화와 어우러진 퇴폐 유흥 업소는 남성의
외도를 부채질한다. 요즘엔 연애 결혼과 핵가족이 늘어나면서 이혼 사유
중에 남편의 외도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혼한 부부중 42%가 결혼한
지 3년 안에 파경을 맞고 이혼 사유 중 약 44%가 간통 등 배우자의 부정
행위로 나타났다. 젊은 세대일수록 남성의 외도가 부부간의 심각한 불화의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발기 불능은 남자의 수치
남성에게 성기가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남성은 목욕탕에서 서로
성기가 얼마나 큰지 훔쳐보기도 하고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오줌의 세기로
정력을 재기도 한다. 남성들에게는 성기가 곧 남성다움의 실체이며
상징이다. 특히 어른이 된 후 크고 힘있게 발기된 성기는 완전한 남자임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설문 조사에서 "발기 불능은 남자로서 수치스럽다"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남성은 93%(698명)로 나타났다. 반면 그렇지 않다는
남성은 6.7%(50명)에 불과했다. 90%이상이 '크고 강하게 발기된 성기'를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그넌과 사이몬은 청소년들이 자위 행위를 하면서 '발기와 오르가즘'을
통해 생식적인 성 이외에 성취감이나 또래 집단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 등
남성적인 성 역할을 획득하므로 발기 능력은 남성다움을 나타내는 중요한
핵심이라고 하였다. 발기가 되지 않는 남성은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남성은 대부분 발기 부전의 가능성이 있어서 일생 동안 언젠가 한번쯤은
성 기능 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 미묘하고 복잡한 삶의 과정이나 성과
관련된 정서적인 긴장들을 염두에 둔다면 가끔 기능 장애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성 기능 장애는
30%내지 40%정도 있다고 한다. 남성의 발기 불능은 10%정도가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으로 인한 물리적 요인 때문이고 대부분이 성행위에 대한 불안과
분노 등 정서적 갈등 같은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과로한다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 일시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여자와 잠자리를 하게 됐죠. 호스티스였는데 둘 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대뜸 내 물건을 보고 "어머, 이게 다 부푼 거예요?"하는 순간 그만
쪼그라들고 말았어요. 그 여자는 바람 빠진 내 것을 별 짓을 다해가며
살리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어요. 그 후론 시도할 때마다 놀림을 당할 거란
걱정 때문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37세, 조각가))
여성의 성적 만족은 남성 성기의 크기에 좌우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남성은 열등감에 빠지거나 자신감을 잃는다. 대다수의 남성은 발기 불능을
심리적 원인으로 보기보다는 신체적 결함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불안을 느끼는 남성은 좋다는 정력제를 찾고 심지어 기구로 남근을
부풀리거나 음경 호르몬제를 맞는 경우도 있다. 정력을 키우기 위해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호스를 집어 넣어서 쓸개즙을 마시는 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여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남성의 성기가 반드시 커야 할 이유는 없다
여성의 질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정도로 신축성이 있고 감각이 둔해서
삽입한 성기의 크기는 오르가즘과 거의 관련이 없으며, 음핵과 대음순 및
소음순이 마찰되었을 때 성적 흥분을 느낀다. 어려서부터 성기가 작다거나
힘이 없다고 하여 놀림받던 남성이 어른이 된 후에도 불안감이 남아 발기
불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남성이 발기를 중시하는 이유는 배우자로서
의무를 완수하고 자식을 낳는 생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남성다움의 상징인
우위, 지배, 군림 등이 발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콤플렉스의 유형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 정력과 성욕의 강하고 약한 정도는 남성
개개인마다 다르다. 정력적인 남성과 정력이 약한 남성, 성적 욕구가 강한
남성과 거의 느끼지 못하는 남성 등 여러 부류가 있을 것이다. 많은 남성이
정력을 과시하거나 부족한 정력과 성욕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여러 양상의 성
콤플렉스를 드러내게 된다.
성 콤플렉스나 성 불구를 낳는 원인을 추적해 보면 성기나 성적 취향보다는
정체성 탓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이러한 남성들을
물렁한 남성과 냉혹한 남성으로 나누었다. 물렁한 남성이란 남성적 특권을
포기하고 공격적 성향을 억제하는 등 대체로 나약하고 소극적인 성향을 지닌
남성을 말하고, 냉혹한 남성은 남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기존의 성 관습에
묶여 있으며 권력이나 부와 같은 객관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타인한테
인정받으려는 남성이다. 남성이 바라는 이상적인 성 능력과 실제의 상태를
기준으로 성 콤플렉스의 유형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네 유형으로
나뉜다.
변강쇠형
이 유형은 정력도 왕성하고 성욕도 강해서 성은 당연히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하의 음남 변강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떤 여자도 당해 낼
수 없는 정력을 타고난 그는 천생배필 옹녀를 만나 지리산에서 살게 되지만
장승을 잘라다 불 땐 동티로 죽는다. 이 야기는 도덕군자형과는 달리 성의
자유를 만끽하던 서민들에게는 남성다운 남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무절제한
성을 경계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변강쇠는 최고의 정력가, 남성 상징으로 불려진다. 남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성 이외에는 돈도 없고 학력도 보잘것없어서 남성임을 입증할 대체물이
없는 사람일수록 성에 더 탐닉하게 된다. 더구나 성은 다른 대안물과 달리
가장 빠르고 단순하게 남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어서 성적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성이 '얼마나 남자다운가'를 재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성도 상품화되어 돈을 매개로 성 관계가 이루어진다.
남성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성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성은 진정한 애정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므로 아무리 많은 성 관계를 가져도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반대로 성기 중심의 성행위가 아닌 진정한 성의
대상을 만날 경우 오히려 불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유형은, 성을
통해 남성임을 증명하려면 체력이 따라 주어야 하므로, 정력이 쇠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갖가지 정력제를 찾거나 심지어는 술이나 마약의 힘을 빌어서
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서화담형
정력은 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부류로 성을 추구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로 치부하고 성을 밝히는 남성을 경멸한다. 성을 통해 남성임을
증명하기보다는 도덕적 훈련과 절제, 수양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하의 명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쳐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 삼절에
낀 서화담처럼, 사회적으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거나 성이 아니더라도
남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남성은 대체로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욕을 누르고 있어야 하므로 겉으로는 자제력 있는 남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여간한 참을성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도 크다. 당대의 도덕군자로 알려졌으나 황진이에게 결국 넘어가
파계한 지족 선사나 벽계수가 그렇다. 성의 절제를 이상적 가치로 여기던
시절에는 사회적인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현대처럼 광고와 향락
산업 등이 성의 방종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성을 절제하기란 그야말로 인내와
극기가 필요하다. 여성에게 낮에는 요조 숙녀, 밤에는 요부이기를 바라는
남성의 심리 이면에는, 자신 또한 사회 활동을 하는 낮에는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이성적인 서화담이 되고자 하지만 밤에는 변강쇠처럼 성을
추구하려 하는 강한 욕구가 존재한다. 특히 사회적인 체면을 중시하는
지식인 남성 중에는 세상의 이목을 피해 유흥 업소나 매매춘 여성을 찾아
성적 쾌락을 남몰래 즐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용두사미형
성적 욕구는 강한데 정력이 약하여 내심 여성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
여성에게 의존하는 모성 콤플렉스를 가진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의 약한
체력을 의식하고 심리적으로 여성에게 집어 삼켜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먼저 여성을 버리거나 여자를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기고
끝없이 여성 편력을 일삼는다. 여성에 대한 책과 얘기, 여자 친구를 바꾸는
등 모든 관심이 여성에게 쏠려 있지만 막상 결정적 순간에는 여성 앞에서
주눅이 들게 된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유혹할 수 있었지만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상당히 자상한 남자로 여자의 생일도 잊지
않고 무거운 짐 같은 것도 곧잘 들어 준다. 헤어 스타일이 조금만 바뀌어도
예쁘다고 말해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는 성욕은
느꼈으나 여자라는 존재는 좋아하지 않았고 마음 깊은 곳에는 증오심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면의 싫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여자에게 지나칠 만큼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한 것이다. )
남성이 여성을 경멸하는 데에는 강렬하게 선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강박 관념이 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이클 크뤼거는 이를
모성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이고 아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증오로
열병을 앓는, 정체성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무기력한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버팀목을 찾아 성 경험에 의지하여
현실을 보상하려고 한다. 확신에 차고 단호한 티를 내며 호기를 부리지만
그럴수록 내적으로는 불확실하게 흔들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성에
사로잡혀 있으나 사랑하는 여성과 함께 사는 데 어려움이 많아, 결혼에
실패하거나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자신의 분노를 여성 탓으로
돌리곤 한다. 플레이보이라고 불리는 남자들 중에는 이런 타입이 흔하다.
씨없는 수박형
정력도 모자라고 성욕도 약한 유형이다. 이들은 스스로 왜소하고 약한
성기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성 이외에 다른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성향이
짙다. 성욕이 약한 대신 물욕이나 권세욕이 남달리 강하여, 때로는 재력과
권력을 잡아 성적인 열등감을 극복하기도 한다. 우리 말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표현은 이들을 위로하는 말이자 이들의 콤플렉스를 다른 것으로
보상하게끔 부추겨 주는 말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환관들이 권세를 누린 것은 그들이 성 불구자여서 성적인 것이
아닌 다른 일에서 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환관은 성기를 절단함으로써
일체의 연애 감정을 억제하고 호색한 탓에 저지를 수 있는 반역의 우려를
저지당한 인간이다. 거세는 질투심, 시기심에 대한 결백한 신분 증명서와
같은 것이었다. 구한말의 세력 있는 환관들은 만석이 넘는 재산들을
모았다고 한다. 생식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종교적 수행이나 예술에 힘써 거기서 기쁨을
맛보는 것도 이들에게는 욕망의 새로운 분출구를 찾는 셈이 된다.
오늘날 여성에게는 무관심하고 컴퓨터나 증권, 학문에 지나칠 정도로
몰입한 남성 중에는 의외로 이런 유형이 많다고 한다. 또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이 실상 성적으로는 불감증을 나타내기도 한다.
남성을 성으로만 정의하는 한 이들 유형의 남성은 진정한 남성으로
대접받기 어렵다. 현대는 옛날처럼 내시나 환관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말
그대로 성 불구자일 뿐이다 오늘날 성 불감증 유형의 남성이 늘어가고 있다.
한 예로 자가 운전을 하는 남성이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성욕이 떨어진다는
통계가 있는데,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성욕은 저하된다고 한다. 인간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현대 사회에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남성은 성욕과 정력이 모자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려하기라도
하듯, 성 문화는 남성의 성욕을 부추기고 정력제에 대한 광고는 늘어 가지만
그럴수록 남성은 더더욱 성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곡된 성 문화
남성 위주의 성에 길들여진 남성은 성을 통해 남성다움을 과시하려하는
한편, 자신의 성적 능력과 권위를 잃게 될까 봐 불안해한다. 남성은 가정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남성에게 부여된 성적 관용과 이점을 통해
해소하려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성이 상품화되어, 향락을
제공하고 수익을 얻으려는 성 산업이 번창하고, 성 문화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음성적으로 돌아다니는 외설적인
잡지나 변태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포르노 비디오를 보면서, 남성은
여성을 종속적인 존재로 보고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순간의 욕구를
해소하는 먹이라고 생각하는 비뚤어진 성 관념을 내면화한다.
남성들에게 음담 패설은 경쟁에서 오는 긴장이나 공격성을 등을 완화시켜
서로간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ㄱ이 뻐기면서 "한번이 뭐야,
두번은 해야지"라고 하면 이에 ㄴ은 "나는 한 번 했다 하면 날밤을 새야
직성이 풀려"하고 응수한다. 서로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런 성적 농담을
통해 그들은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드러내지 못해서 생기는 불안이나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주로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비하하여 공격하는 내용의 음담 패설을
하면서 남성은 여성이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우월감을 맛본다.
여성을 대등하고 인격적인 개체가 아닌 남성의 성욕을 채우는 데 필요한
도구로 보고 우월해지려는 남성의 심리는, 여성과 성 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정복했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 "먹었다", "따먹었다"라고 표현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즉 남자에게 성행위는 단지 내가 해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남자다'라는 만족감을 갖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혹시 남들이 그 정복에 대해서 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 첨가될 뿐이다.
"매매춘 제도는 가정에 던져진 어두운 그림자로서 문명 속까지 인류를
따라다닌다"는 모르간의 말처럼, 남성은 이중적인 성 규범을 가지고 자신의
아내가 정숙하기를 바라지만 정작 자신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그 제도에
포함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남성은 사랑과 성을 자연스럽게 분리시키고,
성기 중심적이고 성을 돈으로 사는 매매춘 행위와 성 폭력까지도 공공연하게
합리화한다. 우리 나라에서 매매춘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사창이 묵인되고
더구나 룸살롱이나 스텐드바, 카페, 안마 시술소, 퇴폐 이발소 등 향락
업소의 성적 서비스 제공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향락
업소는 30만에서 40만을 헤아리며 이곳에서 일하는 매매춘 여성은 120만명을
웃돈다.
남성의 매매춘 경험율은 조사 대상자의 63.7%가 매매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경험 횟수가 2회에서 4회인 경우가 33.4%, 5회 이상이 18.6%로
전체의 52%가 한 차례 이상 빈번한 경험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동기를
물었더니 역시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니'가 62.7%로 가장 많고 다음이 '성적
욕구 해소'로 31.6%이다. 그 밖에 '스트레스 해소(2.3%)', '이성에 대한
관심 혹은 성 지식의 습득을 위해(1.7%)'등이 있다. 우리 사회의 향락
문화는 남성들의 성을 부추기고, 욕구를 느끼면 배설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게 만든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성 폭행 했던 남성을 21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살해한
김부남 사건이나, 12세부터 자신을 농락했던 의붓 아버지를 남자 친구와
함께 살해한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 폭력은 남성의
왜곡된 성의 신화가 불러 온 사회 문제로 드러났다. 더군다나 여성은 강간을
당하고 싶어한다는 속설로 남성의 강간을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여성에게 성 폭력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경우도 있다. 남성은 섹시한 차림의
여성을 보면 성욕을 느끼므로 미니스커트 대신 바지를 입으라든가, 여자는
밤에 다니면 안 된다든가 하는 말이 그 예이다. 이는 여성을 오로지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성적 도구로만 여기고 강간이 범죄가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
성 폭력은 불쾌감이나 공포, 불안 등을 주는 모든 성적 행위, 그 밖에
지하철 같은 공공 장소에서의 추행, 성기 노출, 음란 전화, 인신 매매,
강요된 매매춘, 포르노 등을 포함한다. 직장에서 여성들이 경험한 폭력
중에는 언어 폭력이 84%, 물리적 폭력이 24%, 성 폭행이 15%이며 가해자는
주로 남성인 직장 상사나 동료라고 한다.
결국 남성은 가장 남자다운 기질로 성적인 능력을 통해 불만, 적개심,
불안을 감추려고 한다. 또 여성과의 성 관계가 목적이 아니라 여성을
모욕하는 성교와 강간을 통해 우월성이나 지배욕을 과시하고 자존심을
살리려 한다.

새로운 성을 위하여
우리는 갖가지 왜곡된 성 문화를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하고 발뺌하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애정에 기초한 남녀 관계를 이루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마르쿠제가 성적 금욕에 관한 글에서 "인간은 성욕을
사회 봉사적 충동, 종교적 충동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전 생애를 통한
완전한 금욕이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듯이 성의 범람은 도덕성
회복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구조가 필연적으로 성을 상품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건강한 성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성 역할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남성에게는 남성다움만을 여성에게는 여성다움만을 강조하는 성 역할
사회화는 결국 남성과 여성을 잠재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로 교육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남성은 사회화 과정에서 성적 욕구를 잘 처리하는 방법 등 올바른
성교육도 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자마자 쉽게 성을 팔고 사는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남성은 생계 부담자로서의 역할과 성공에 대한 강박
관념,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서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자들끼리의 놀이 문화인 술자리 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가정과 직장 생활의 완충 지대로서 놀이 문화는 남성의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해소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성 윤리를
조장하는 부정적인 현상을 낳는다. 이중적 성 규범은 부부 결합의 열쇠인 성
관계를 바르게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잘못된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하는
기회를 허용하여 결국 남녀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성이 상품화되면 인간 관계로서의 성이라는 개념은 설자리를 잃는다. 함께
나누는 성이 아니라 남성만이 독점하는 성이 될 때, 남녀의 진정한 관계는
불가능하다. 남녀의 성과 사랑이 올바르게 세워지려면 기존 사회가 성과
사랑에 부여한 남성적, 여성적 편견과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즉 남성
중심적인 성 문화에서 벗어나 남녀가 성과 사랑의 대등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남성의 이기주의와 권위주의에 휘둘려 일방적으로 주도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성과 자발성이 존중되는 남녀 관계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하며, 결혼이란 성적인 순결을 사회적
계약으로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과 남성의 성 윤리가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며 동일한 의무를 가져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남녀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온전한 것이듯, 남성 역시 순결을 지키는 것을 의무이자
덕목으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외도에 대한 관용이나 처벌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부의 성 생활에서
성적 욕구를 서로 정직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이규헌 옮김, 나남, 1990, 10쪽.
2) 한국 문화 상징 사전 편찬 위원회, "한국 문화 상징 사전",
동아출판사, 1992, 157쪽.
3) 미셸 푸코, 앞의 책, 140쪽.
4) A. G.카플란/M. A.세드니, "성의 사회학", 이대 출판부, 1992, 206쪽
재인용.
5) 한국 여성 연구회, "여성학 강의", 동녘, 1991, 111쪽.
6) 잭 리테우카, "사회화된 남성의 성", "여성 해방의 이론 체계", P.
스트럴/A. 재거 편집, 신인령 역, 풀빛, 1983, 141쪽.
7) 장필화/조형, "한국의 성 문화-남성 성 문화를 중심으로", "여성학
논집" 8집, 이대 출판부, 1993, 141쪽.
8) 한겨레 신문, 1989년 8월 23일자 기사.
9) 장필화/조형, 앞의 글, 146쪽.
10) 1990년 이혼 재판 통계.
11) Michael S. Kimmel, Changing Men, Sage Publication, Inc., 1991,
165쪽.
12) 데이비드 루벤, "18cm 여행", 김명희 옮김, 희성 출판사, 1993, 25쪽.
13) 엘리자베트 바뎅테,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최석 옮김, 민맥,
1993, 201--201쪽.
14) 아사노 마코토, "그래도 남자는 울 수 없다", 김현일 옮김, 디자인
하우스, 1993, 86--101쪽.
15) 엘리자베트 바뎅테, 앞의 책, 100--103쪽.
16) 이이화, "마지막 내시", "숨어사는 외톨박이", 뿌리 깊은 나무, 1992,
14쪽.
17) 서울 YMCA 시민 자구 운동 본부, "향락 문화 추방 시민 운동 보고서"
1991, 29쪽.
18) 장필화/조형, 앞의 글, 158쪽.
19) 한국 성 폭력 상담소 엮음, "일그러진 성 문화", "새로 보는 성",
동아일보사, 1992, 184쪽 재인용.
20) 이병주, "에로스 문화사" 하권, 원음사, 1987, 239쪽 재인용.
참고 문헌
1) 레이 탄나힐, "성의 역사", 김광만 옮김, 김영사, 1987.
2) 콜린 윌슨, "성과 지성", 장문평 역, 현암사, 1979.
3) 재크린 살스비, "낭만적 사랑과 사회", 박찬길 옮김, 민음사, 1985.
4) 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6.

지적 콤플렉스
오늘날 남성은 "지적인 남자가 남자답다"는 과제를 안고 여성이라는 새로운
도전자와 남성만이 우월하다는 신화의 경계선에 서 있다.
@FF
남성은 지적으로 우월한가
남성은 지적이며 분석력이나 창의력이 여성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져 왔다.
현대에 와서는 여성이 생리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나쁘다거나 뇌의 크기가
작아서 남자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지적인 영역에서 남성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우월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남성은 여전히 여성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지니며 여자가 감정적인 데
비해 남자는 지성적이라는 통념 또한 절대적이다. 집안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더 높은 학식과 더 많은 새로운 정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직장이나
사회기관을 대표하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종이나 존경받는 자리를
주인처럼 차지한 사람은 언제나 남성이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가운데
거대한 문명을 창조하고 훌륭한 사상을 전해 준 이도 남성이라는 믿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어떻게 남성은 인류 역사와 지식의 주인이 되었을까? 시몬느 드
보브와르는 여성의 출산이 여성을 자연 상태에 머물게 하였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남성은 지식을 쌓고 문명을 낳았다고 한다. 또는 엥겔스처럼
사유 재산을 소유한 소수의 남성이 사유재산을 물려 줄 상속자를 낳기 위해
여성을 속박하고, 권력과 지식을 독점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여자는 유한을 설명하고 남자는 무한을 얻으려 한다.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각기 지닌 운명이다.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고통은
있다. 여자는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낳고, 남자는 고민하면서 사상을 만들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남성은 지적 영역에서 우월한 위치를
지켜 왔고 지적인 남자는 남자다운 남자로 칭송을 받아 왔다.
"지적인 남자가 남자답다"라는 명제는 남성에게 영원한 매력이자
숙제이다. 남자답기 위해 지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진 탓에
경쟁심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 경쟁에서 승리하여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성공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누리기 위해서는 애써 지식과
학식을 쌓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실력이나 능력은 학력이나
학벌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일류 대학에 가려 하며,
할 수만 있다면 유학까지 다녀온 후 그에 걸맞는 지위와 권위를 얻으려
한다. 미국의 박사 학위를 돈을 주고 샀다는 이야기나 남편이 가짜 박사라고
이혼하는 사례는 '남성은 지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라는 신화가 낳은 서글픈
결과이다. 이러한 신화의 뒤안길에서 '지적인 우월감'을 지니지 못한
남성들의 고뇌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 지방대에
진학한 한 남학생은 이른바 서울의 명문대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들어서 잘 만나지도 않는다고 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토로하였다.
(방학 때 내려오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기가 괴롭다. 평상시에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던 여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팅하느라고 바쁘다. 속은
상하지만 지방에 있는 회사들도 지방대 출신은 잘 뽑지 않는 판이니
여학생들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뭘 믿고 나 같은 사람을 택하겠나
생각하니 우울해진다. (22세, 대학생))
대학 입시에 실패한 경우는 더 심각하다. 학력과 학벌이 곧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첫 관문이자 성공의 지름길이 된 사회에서 거의 반 정도의 남성이
좌절감을 안고 방황해야 한다는 사실이 문제의 심각함을 보여 준다. 이
외에도 취업, 승진 등 끊임없는 경쟁의 관문이 놓여 있고 그러한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눈돌릴 틈 없이 뛰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 어느 직장에 들어가느냐,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등 모두가
남성의 지적인 수준과 연결된다. 지적인 수준이란 지식과 실력과 학벌,
학력, 그리고 지성과 지혜 모두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직장과 지위의
높낮이, 일의 귀천이 남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자연히 경쟁이 일게 마련이다. 이기기 위해서 누군가를
짓밟고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 누군가를 열등한 위치에 떼어 놓아야 하는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이길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모두 동원되기도 한다.
무슨 수를 쓰든지 이겨야 하므로 그 이면에는 부패와 심리적인 압박감이나
불안이 따른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 남에게 꿀리지
않으려 하며, 결국 무모한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는다.
남성들간의 문제로 보였던 지적 우월감 경쟁은 현대에 와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지식이나 학문은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것이 아니며,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집안이나 집단을 다스리고 통솔하던 결정자로서의 권위도 이제
전 같지 않다. 가정에서 자녀 교육의 전담자는 아내이며 직장에서는
남성들보다 더 높은 학력과 지성을 지닌 여성 상사를 모시기도 한다. 아직은
적은 수이지만 고위 정책 결정자나 사회 단체의 장, 전문의나 교수직에도
심심치 않게 여성이 등장하였다.
남녀간에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들려오는가 하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성은 속속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 현재 전체 여성의 절반
가량이 직장 생활을 하며, 이들은 경제 활동 인구의 40.4%를 차지한다.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나면서 많은 여성이 그 동안 남성의 영역이라고
알려져 왔던 전문 영역에 도전하는가 하면, 직종이 세분화되고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여성 인력 진출의 기회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남성만이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혀 벼슬을 하던 시대에 남성은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였지만, 이젠 잘못하다가는 '여자만도 못한' 남자가 될 우려도
있다. 이러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아직도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를
굳게 믿는 남성은 고민스럽다. '남자들 살기도 어려운' 사회에 여성의
진출이나 취업, 승진은 남성에게 또 하나의 벽이며, 어쩔 수 없이
인정하자니 남자로서의 체면을 잃게 되는 괴로움에 빠진다. 회사에서도
집안에서도 자신이 권위를 잃었다고 느낄 때 남성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남성은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천부의 권리가 깨어진 순간부터 남성의 지적
신화는 남성의 삶을 얽어맨다.
남성은 자신의 지적인 우월감이 손상될 때 스스로를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
여기고, 지적인 우월감이 채워지지 않을 때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같은
남성끼리, 또는 여성과 겨뤄서라도 꼭 이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지니게
되는데 이를 남성의 지적 콤플렉스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 남성은
'지적인 남자가 남자답다'는 과제를 안고 여성이라는 새로운 도전자와
남성만이 우월하다는 신화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렇다면 확실하고도 필연적인 변화의 추세 속에서 남성만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사회적인 신념은 왜 달라지지 않는가? 어째서 남성은 그들의
지적 우월 신화를 힘겹게 지키려 하는가?
현대의 사회 제도나 법, 그리고 눈에 띄는 필연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여성은 감성적이고 정서적이라는 식으로
남녀의 기질을 구분하는 관념이 강하다. 갖가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또는
대중 매체의 영향력을 통해서 은연중에 남성의 지적 우월 신화는 강화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에게 지적 우월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심어 주고 강화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교육의 역사와 교육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남성의 지적 우월성을 만드는 교육


전통 교육-책 속에 길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 사회의 지배층은 다른 성원을 지배하기 위하여 대다수
피지배층의 교육 기회를 차단하였다. 교육이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힘을 주므로 행여 피지배층이 지배 계급에게 도전하는 발판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소수의 지배층에 속한 이만이 교육을 받고 지식을 지닐 수 있었다.
'학교(School)'라는 말은 원래 여가 혹은 오락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세 서구에서는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소수층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으며, 그들은 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지식이
필요했던 종교 지도자나 성직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농사를 짓거나
도제 생활을 통해 손 기술을 터득하고 사회적 관습을 배웠으므로 굳이 읽고
쓰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시대까지 성균관, 향교, 서당 등에서 소수
양반층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성현이 하던 일을 본뜨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교과서는 소학, 사서, 삼경이었고, 공자, 맹자, 주자를
숭앙하였으며, 실천 항목은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학문의 목적은 부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책속에는
절로 곡물이 있고, 황금의 집이 있고, 책 속에 수레와 말과 활과 화살이
많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옛 사람들은 책을 읽음으로써 의식주뿐
아니라 공명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귀공명을 꿈꾸는 양반집
자제라면 너나 없이 글을 익혔다.
또 "아녀자와 소인배는 가르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에 따라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기껏 양반집 여자들이 한글로 된 내훈서, 삼강행실도,
열녀도를 읽어 문맹을 면했지만 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배우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한글을 '암클'이라 하여 여성들이나 쓰는 것으로 천히 여기고 한자를
진서로 받들었으며,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한글 스물 일곱 자로는 심오한
학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문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는 "언문
27자로 세상에 출세할 수 있다면 어찌 애써 머리를 싸매어 성리학을 공부할
것입니까"하고 상소를 올렸다 한다. 벼슬을 하거나 출세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며, 그것도 어렵고 심오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양반들은 시서와 육례를 공부하고 과거를 보아 벼슬 길에
나아가기도 하고 행여 과거 시험에 떨어져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높은
학식을 가지고 향약과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의 도덕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거나 권위를 인정 받았다. 그만큼 지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소수의 남성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근대 교육-추상화된 남성의 지적 권위
서구에서는 19세기 초 근대적인 국민학교 제도가 만들어질 때까지 귀족과
부유층 자제만 개인 교사를 통해서 교육을 받았을 뿐 평민은 여전히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가 팽창하고 이에 따라
전문적인 학교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직종이 다양해지고 전문화되면서
직업에 관련된 기술을 직접 전수받는 도제식 수업은 한계에 이르렀다.
형식적, 제도적으로 교육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졌고,
신분이나 성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사라졌다. 소수의 남성만이 누리던
입신양명의 길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 모두에게 그 가능성이 열리자
남성만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평등 의식이 대두되었고, 이
영향으로 여성 교육이나 기술 교육에 치중하는 교육관이 나오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여성과 새로운 지식을 익힌 계층이 등장했는데, 특히
신여성은 기존의 현모 양처 교육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작가나 교육자, 여성 운동가로서 남성의 지적 영역에
도전했다. 예전과는 달리 교육의 기회에서나 지식의 장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근대적 성장을 왜곡시켰으며, 그들이
시행한 교육은 효율적인 조선인 통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우리
나라에 온 총독인 테라우찌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들의 속셈을 드러냈다.
(오늘날 한국 사람에게 고상한 학문을 급히 시킬 정도에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보통 교육이나 베풀어서 한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눈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학교는 이 목적으로 교육을
진행시키고 졸업한 자가 집에 돌아가 선진자로서 동포를 지도할 수 있는
지식이나 주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통 교육에서도 실업에 대한 지식을
부어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적당한 기술
교육만 시켰다. 다행히 소수의 남성이 일본 유학을 다녀와 근대적 지식인의
대열에 낄 수 있었으나 그나마 배운 지식을 펼 수 있는 기반은 없었다. 친일
관료가 되지 않는 한 식민지 지식인은 실업과 가난, 부양자로서의 무능함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독립 운동에 투신하거나
만주로 황금을 찾아 떠나거나 징용을 갔고, 여자들은 부재한 아버지나
남편의 상징적인 권위에 기대어 살아 갔다.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성의 지적 우월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렇듯 여성을 통해
상징적으로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지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남보다 높은
학식과 학력을 얻으려는 남성의 지적 욕구는 폭발했고, 그것은 '배워야
출세한다'는 입신 양명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육-사회는 지적인 엘리트를 원한다
현대 교육의 목표는 한 인간을 성숙한 인격체로 만드는 전인 교육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학교 교육은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시
위주의 경쟁 교육과 남성과 여성에게 교육의 목표가 달리 적용되는 성
차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 과정을 통해서 여성은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켜 바람직한 사회의 성원이 되기보다 현모 양처가 되기를
주입받고, 여자는 남성보다 처진다는 지적 열등감을 갖게 마련이다. 반면에
남성은 반드시 공부를 잘해서 엘리트가 되어야 하고, 사회의 주역으로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려면 학식과 학력으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배운다.
남성은 이처럼 성 차별적인 교육 속에서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지적
우월감과 경쟁심을 기른다.
이를 부추기는 기제는 교육 현장 곳곳에 숨어 있다. 먼저 교과서를 보면
거기에는 이 세상에 남성만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남성이 등장한다. 이는 학생에게 학교 교육을 받을수록 남자는 지성적이고
사회적이며 여자는 감정적이며 가정적이라는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펴보면 문장 속에서 남성을 언급하는
부분이 국민학교는 60.8%이지만 중학교 교과서에는 68.1%, 고등학교는 무려
90.6%로 상급 학교일수록 더 많아진다. 교과서 속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의 비율은 국민학교는 72.1%, 중학교 88.3%, 고등학교 91.3%로
더욱 높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위인들이 거의가 남자여서
아이들은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전통적인 성 차별 관념이나
편견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 속에 키워 간다.
예를 들어 국민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분들을
말할 때 '한글을 만드신 세종 대왕', '교육에 헌신하신 남강 이승훈 선생',
'민족의 역사 의식을 일깨운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남성만이 등장하여
위인들의 삶에 동화되기 어려운 여자 아이들에 비해 남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위인의 삶을 자신의 꿈으로 삼는다.
국민학교 6학년 체육 교과서에는 남녀의 신체 변화에 따른 정신적 변화에
대해서, "남성은 믿음직스럽고 용감한 남성으로 성장하고 여성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성으로 성장"한다고 기술하여, 인위적으로 정한 남녀 기질을
내면화하게 만든다. 사회 과목에서도 '남성이 곧 집안의 가장'임을 강조하는
가부장적인 관념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예를 들어 1990년 현재 46.8%에
이르는 취업 주부나 일하는 여성, 모자 가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여성의 역할은 어머니나 아내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교과 집필진이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국어 교과서의 저자는 중학교 93.3%,
고등학교 93.5%로 대부분이 남성이다. 따라서 교과서는 집필자의 주관에
따라 남성 중심적인 시각과 세계관을 담을 수 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남학생과 여학생은 배우는 과목이나 내용이 다르다. 여학생이
가정 관리나 의식주 등 소비와 관련된 과목을 배우고, '직업과 진로'에서도
남학생은 지적이고 현대적인 분야와 관련된 직업 세계에서 생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사회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주입된다.
교과서 밖의 학교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국민학교의 여교사가
72.5%를 넘어 학생의 여성화가 걱정된다며, 교육부에서는 군필자에게 임용
가산점을 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장이나 교감 등 고위직은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유치원과 국민학교는 여자 선생님이 많다
해도 대학에는 남자 교수가 훨씬 많다. 이러한 현실은 학생들이 접하는 역할
모델에서 높은 교육적 위신과 권위가 따르는 지위는 남성이 가져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 주며 남성은 학교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도자, 주인,
리더가 곧 자신임을 배운다.
학교에서 남학생은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남성다움을 갖기를
바라고 여학생에게는 순결하고 참을성 있고 봉사적이며 겸손하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체육 시간에 남학생은 격렬한 운동이나 남성적인
자질로 여기는 공격심과 경쟁심을 기를 수 있는 단체 경기를 자주 한다.
이 외에도 급훈이나 교훈, 교사의 학생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성
차별적인데 남학생에게는 "진짜 사내 대장부라면..."이나 "너도 사내냐?"는
식의 말로써 남자다운 것이 뭐라는 고정 관념을 갖게 만든다. 교사들의
이러한 태도는 교사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의 성적이 더 좋다는 이유로 남녀를
분리해서 내신 성적을 내서 화제가 되었다. 이는 사회에서 큰 일을 해야 할
남학생의 대학 진학이 중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남학생을 배려한 것이었다.
이처럼 공정성이 결여된 교육 과정은 남성의 지적 우월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남성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당연스레 여기는 과정은 진리 탐구의
산실이라는 대학에서 두드러진다. 클럽의 회장을 맡을 남학생이 없자
남학생이 입회할 때까지 회장 선거를 미룬다든가 여학생이 많은 어느
학과에서는 남학생 조교를 뽑기 위해 다른 학과 남학생을 빌려 오는 사례도
있다. 흔히 대학의 교수는 열 명의 여자 제자보다 한 명의 남자 제자가
낫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이는 여자는 결혼을 하면 그만이지만 남자는
사회 생활이나 연구를 계속하는 비율이 높아 자주 찾아오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포부를 맘껏 펴도록 교육받은 남학생은 자신감과
우월감을 가진다. 학업 성취도를 보면 국민학교와 중학교 초기에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성취도가 높으나, 그 이후로는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남학생의 50.6%, 여학생의 37.0%가 "남자는
커서 직업을 가져야 하므로 남자가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더 느낀다"고
답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학에서도 어렵다고 하는 과학, 공학, 의학은
주로 남학생이 주도하고 있으며, 통념상 남자가 해야 더 어울린다고 본다.
이처럼 성 역할 고정 관념이 강한 학교 교육을 받는 남성은 자신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전문적인 기술을 익힐
기회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성공을 위해
정부나 기업체 또는 전문 직종에 투신하여 권력과 일정한 지위를 얻기 위한
길을 걷는다. 남성은 교육을 통해서 일찍부터 지식이 곧 부와 명예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학교 교육이 남학생에게 베풀어 준 시혜로 그들은 성 차별적이고
비현실적인 엘리트가 된다. 학력이 높고 학벌이 좋아야 인정받고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야 성공하고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져야만 남자다운 남자가
된다는 통념은 남성을 끝없는 상승의 노예로 만든다. 무조건적인 상향
의식은 개인의 진실한 능력이나 적성보다 학력과 같은 외적인 요소를
중시하게 만든다. 어느 고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이 그 기준에 못 미칠 때는 심한 좌절감과 열등감을 갖는다. 또
여성은 현모 양처여야 하고 지적인 능력이나 지위는 여성답지 않다는 성
차별 교육을 받아 온 남성은 눈에 보이는 여성의 지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월성을 지키려는 안간힘


교육을 통해서 남성은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배우지만 그 권위가
모든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란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앎의 의지'와 '권력'이 공모된 관계라고 분석한 미셸 푸코의 말처럼
지식은 권력과 밀착되어, 지배자는 권력의 지지 기반으로 소수 지식인이나
관료층을 옹호해 왔다.
사실 지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고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하층보다는 상층의 사람에게 훨씬 더 많이 주어진다. 이처럼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에게 유리한 목표를 다수의 사람에게 적용시켜 똑같은
모양으로 성취하라는 것은 모순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남성은 자신의 삶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지위나 경제적, 정치적 능력이나 힘을 지니지
못한 채 '성취'나 '성공'에 대한 부담만을 가진다. 이러한 교육을 받을수록
남성은 스스로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에 더욱 얽매이고 지적 콤플렉스는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낮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내비치려 한다.
많은 남성이 지적 콤플렉스는 치열한 경쟁을 하는 직업 세계에서 지위를
얻고 성공하려면 지적인 능력과 학벌이 필요해서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지
여자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도 교육이 남성 우월 신화를
낳는다면, 결국 남성의 지적 우월 신화는 여성을 상대적으로 낮춤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설문 조사에서도 이와 같은 결과를 보여 주었는데, 많은 남성이
똑똑한 여자에게 자존심이 상하고 불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남성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남성 우월 신화가 깨어지고,
남자다운 남자로서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의 지적 콤플렉스는 남자다움을 드러내고 남성의 우월성을 지키려는
안간힘으로 나타난다.
암탉을 울지 못하게 하라
남성은 지식이나 학문 등 지적인 분야나 직업, 일의 세계를 곧 남성의
능력을 펼치고 실력을 겨루는 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 속에
여성이 진출해 오는 것을 싫어하며 여성은 남성을 수발하는 내조의 자리를
지키고 남성은 지적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문 조사에서 "남자와
맞서 자기 주장을 하는 여자는 재수없다"는 문항에 55%가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그 중 40세 이상의 남성이 69.1%나 되어 나이가 든 남성일수록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벽녘 울음 시각을 지키지 못하면 신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는
수탉을 위하여 암탉은 잠을 자지 않고 지키고 앉아서 수탉의 잠을 깨워
주었다는 우리의 민화가 있다. 닭도 이러하거늘 천하의 여인들이여 내조의
미덕이 어떤 것이란 것을 조용히 생각하며 반성하라. 내분비 기관의
이상으로 수탉 시늉을 하는 못난 암탉을 종종 보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이런 암탉들은 잘 낳던 알도 갑자기 낳지 않게 되고 머리볏이 수탉마냥
커지며, 수탉 울음 소리며, 암탉 등에 이상한 관심을 가지는 등...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닭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내들은 기억하라.
이 세상엔 의외로 고장난 여인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남성들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일의 세계에서 여성과 겨룬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여성이 직속 상사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을 때 기분은 더 복잡하다. 설문 조사에서 "여성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라는 문항에 응답자의 65.7%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20.8%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13%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문항은 특히 연령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여 주는데, 25세
이하에서는 그렇다라고 답한 응답자가 56.6%, 26--30세에서는 61.8%,
31--40세에서는 71%, 41세 이상은 82.5%로 나타나 나이가 많을수록 여성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많은 남성일수록 여성 상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승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기 때문이다. 즉 남성끼리 겨루기도 힘겨운데
여자까지 끼여든다면 그야말로 남자로서 상처받은 자존심은 회복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남성은 여성 상사가 술자리나 로비 활동을 함께 하기가 어렵고 성격이
깐깐해서 원만하게 상하 관계를 풀어 나가지 못하므로 상사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어떤 이유로든 상사에 대한 불만은 있게
마련이다. 남성이 여성 상사를 싫어하고 그 밑에서 일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에는 직장이나 일, 사회의 여러 전문적인
분야를 남성 세계로 유지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방어 심리가 깔려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남성끼리의 경쟁 속에서 지적인 우월감을 갖기는 커녕
남자로서의 위신을 지키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여자에게까지 밀린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자보다는 낫다"는 남자로서의
우월감은 사회 체계 속에서 남성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그래서 남성은 연인이나 성적 쾌락을 나누는 대상이 아닌 여성
동료나 여성 거래자, 또는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여성을 대할 때에도
끊임없이 자신은 남자요, 상대방은 여자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오퍼상을
경영하는 한 남성이 거래 회사 여성과 나눈 대화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남: 결혼은 하셨습니까?
여: 아뇨, 아직. 얼마나 주문하시겠습니까?
남: 천 벌이요, 사귀는 사람 있어요?
여: 아뇨, 가격은 적당하십니까?
남: 네, 미팅해 봤어요?
여: 네, 기한은 언제까지면 되겠습니까?
남: 연말쯤, 시간 날 땐 뭐 해요?
여성이 화를 내고 나가 버려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그는 도대체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남성들은 일을 부드럽게
처리하게 위해 그런 농을 건넨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 여성을 동등한
지적인 경쟁자로 인정하기보다는 성적 대상으로만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잘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를 들어 "이 대리, 오늘은 더 예쁜데,
남편이 잘해 주나 봐"라든가, "저 앵커우먼은 갈수록 예뻐지는데 연애하나",
"저 여자는 출세가 빠른 걸 보니 무슨 빽이 있는 게 틀림없어"라는 식의
말에는 여성의 능력을 비하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의 편견이 담겨
있다.
특히 남성들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유대를 돈독히 해 주는 음담패설
속에서 여성은 성적 대상이 되기 일쑤이다. 남성은 음담 패설을 나누면서
집단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환상을 즐기며 남자로서 우쭐함까지 느낀다고
한다. 여성 상사를 성적 상상의 대상으로 삼거나 비난하면서 남성은 남성
문화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여성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남성은 집단의 힘을 빌려 내적으로 분열된 자신의 갈등과 불안감을
숨기거나 벗어나려 한다.
똑똑한 여자는 좋으나 나보다 유능한 아내는 싫다
설문 조사에서 현대의 대다수 남성은 이상적인 아냇감으로 "예쁘고 능력
있지만 다소곳한 여성"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이 많아지면서 능력 있고 똑똑한 여성을
배우자로 원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남성들은 아이의 양육을
전담하는 어머니의 자질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여성의 지적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로 직장으로 진출하는 우먼
파워를 막을 수 없음을 실감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남성도
있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37세의 ㅇ씨는 이렇게 말한다.
(요즈음에는 정말 똑똑한 여자가 많습니다. 남자가 사회 생활을 잘 하려면
이제는 여자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성을 무시하고서는 절대로 사회 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여성이 똑똑한 것은 좋지만 남편을 능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조사에서 "결혼한 여자의
학력은 나보다 높지 않은 것이 좋다"라는 문항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63.4%,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18.6%,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
사람이 17.6%로 나타나 약 2/3 정도의 남성이 아내의 학력이 자신보다 높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학 강사 부인을 둔 어느 40대 남성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를 낳은 후 늦게 대학원에 진학한 아내는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회사에 다니는 나는 집안 일과 아이 보기를 열심히 도와 주며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우리 부부는 잘해 나갔다. 그런데 박사 과정에
진학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아내의 생활은 더욱 바빠졌고, 사사건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아내가 점점 부담스럽다. 아내를 찾는 전화가
잦아질수록 나 자신이 뒤처진다는 느낌이 들지만 말을 꺼내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공부방은 아내의 책으로 가득찼고, 한 구석에 꽂힌 내 책 몇 권은
왠지 내 모습인 것 같아 불안하다. )
설문 조사에서 "똑똑한 여자는 부담스럽다"라는 문항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60.8%, 대체로 그렇지 않다가 22.5%, 전혀 그렇지 않다에 15.8%가
답하여, 많은 남성이 지적인 여성을 만나는 것을 편치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은 능력 있고 똑똑한 아내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대개 호의적이고 외조를 잘 하던 남성도 아내가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지면 석연치 않은 반응을 보인다. 자신을
얕보는 듯한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만 사소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남자답지 못한 것 같아 이리저리 참다 보면 부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이혼이나 외도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남성이
여성의 지적인 능력이나 똑똑함을 인정하는 기준은 바로 남성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아내가 더 나아 보이기 시작하면 남성은 당황하고 불만을
느낀다. 이 때 남성의 불만은 대부분 아내가 살림이나 육아 등 여자로서의
의무를 잘 못한다든지 남편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식으로
나타난다.
남성이 여성 앞에서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 못할 때
열등감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문적인 일의 세계에서 학력이나
학벌, 지식 수준을 가지고 돈 잘 벌고 출세한 가장의 권위를 지킨다고
생각하므로 가장이나 남편으로서 위신을 세우기 어려워지면 "여편네가 뭘
안다고 나서"라는 식의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심한 경우 아내를
구타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의 육체적인 힘은 지적인 능력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불의에 맞서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데 쓰여질 때 더욱 추앙받는다. 그러나
남성은 스스로 지적으로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 종종 폭력을 사용하여
육체적 힘을 과시함으로써 남자다움을 드러내려 하는데, 이는 곧 그 남성의
지적 콤플렉스의 깊이를 알려 준다.

여성이 열등하다는 신화가 깨어져야


언제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던 여성이 남성의 지적 능력과 동등한
경쟁자로 떠올랐을 때 '남성은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는 현실적인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우리 문화 속에서 여성의 지적 열등성이 강조되어
자연스럽게 그 반대 편에 있는 남성의 지적 우월 신화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남성의 지적 성취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남성은 버거운 경쟁의 길로
나선다. 더욱이 여성은 감성적이고 남성은 지성적이라는 구별이, 지식의
세계에서 감성은 지성보다 열등하다는 차별로 이어져, 남성세계에서도
우열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나는 외아들로 태어났다.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신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한 분이셨다 위로 누나 둘은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했고 유일하게 나만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공부를 잘 했던 누나들과 달리 내 성적은 겨우
전문대에 진학할 정도였는데,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조리학과에
지원했다. 이 사실을 아신 아버지는 합격 통지서를 찢어 버리고
노발대발하셨지만 큰 호텔의 조리사가 되겠다는 서약 끝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아마 내 꿈이 조그만 가게를 차려 소박하게 살려는 것인 줄 알면
당장에 그만두라고 하실 것이다. (21세, 학생))
요리사나 미용사, 보모, 간호사 등 여성의 직업으로 구분되는 영역에
남성이 종사하기는 쉽지 않다. 이 남학생이 조리학과를 들어가기까지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것처럼, 남성들이 여성적인 섬세함이나
따뜻한 감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에 뛰어들려면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만 한다.
여성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관념에서 여성적인 일은 열등하고 사내
대장부가 하기에는 적합치 않다는 편견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다보니 남성의
직업 사이에도 철저한 위계질서가 만들어져, 진짜 남성으로 지적 권위를
가지려면 남성은 자신의 다양성을 포기하고 몇몇 이상형에 속하는 지식과
직업으로 편입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남성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1) 김주성, "경쟁의 미학: 현대적 삶의 원류를 찾아서", "철학과 현실",
1993년 가을, 37쪽.
오늘날 남성의 경쟁은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과도 같다고 한다.
이는 이긴 것과 진 것을 합하면 제로가 되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패배한
자의 손실만큼이 승자의 몫이 되므로 더욱 철저히 남을 누르고 승리하게
위해 가리지 않고 덤벼들 수밖에 없는 무모한 경쟁을 의미한다. 이런 경쟁
속에서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되고 경쟁이 과열될수록 부정한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2) 한국 여성 개발원, "여성 백서", 1991.
3) 여성을 위한 무임, "일곱가지 여성 콤플렉스", 현암사, 1992,
179--180쪽.
4) 앤터니 기든스, "현대 사회학", 김미숙 외 옮김, 을유 문화사, 1992,
377쪽.
5) 송나라 진종 "권학편".
6) "배제 80년사", 배제 학원, 1965, 367쪽.
7) 한국여성개발원, "초, 중등학교 교육 과정에 나타난 남녀 역할 연구",
1993, 40--48쪽.
8) "체육" 6학년, 10--11쪽, 한국 여성 개발원, 윗책.
남자 어린이는 여자 어린이에 비하여 성장의 변화가 늦게 와 준비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이 빠른 사람은 근육, 골격이 발달하고, 턱에 수염이
돋아나며, 목소리가 굵어지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감정의 변화가 심해져서
충동적인 행동이 자주 나타나고, 이성의 친구에게 관심을 갖게 되며, 희망과
포부에 부플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차츰 믿음직스럽고 용감한 남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자 어린이는 남자 어린이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엉덩이가 넓어지며, 몸에 부드러운 곡선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정신적으로는 감정의 변화가 심해집니다. 이성의 친구와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는 등 감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여자는 월경과 같은 생리현상이
시작되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9) "불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성차별 교육", "여성" 1집, 56쪽.
10) 조동화, "사내들이여, 암탉을 울지 못하게 하라", "가정의 벗", 1993,
1월호.
참고 문헌
1) 이종성, "개화기 근대 교육 수용 과정에 나타난 교육 갈등에 관한
연구", 고대 대학원 석사논문, 1981.
2) 양소영, "개화기의 서재필 사상 연구", 숙대 역사교육 석사논문, 1992.
3) 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문학과 지성사, 1991.
4) 이만규, "조선교육사" 2권, 거름, 1991.
5)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이규현 옮김, 나남, 1990.

외모 콤플렉스
나보다 키가 큰 여성을 만나면 부담스럽다.
나는 신체적으로 강한 람보형의 체격을 갖고 싶다.
세련미는 좋지만, 여자같이 치장하는 남자는 꼴불견이다.

남성에게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을까. 외모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남성과 외모는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치장하는 남성'은 언제나 꼴불견 남성의 순위에 올라가는 명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남성도 예외일 수는 없으며,
그와 함께 수수하고 털털한 남성이 남성답게 여겨지던 시대는 지났다.
성공하는 비즈니스맨의 조건으로 적극성, 자신감, 육체적 엘리트를 꼽으며,
대통령 후보들의 외모 가꾸기 역시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다.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능력을 보여 주어야 했던
아버지들에게 외모는 부차적인 문제였지만, 이른바 영상 세대에게 외모는
능력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외모에 관심을
쏟는 일은 여자나 할 일이지 대범한 남자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으로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는 외모 가꾸기에 매진하는 여성과는 다른
복잡한 양상을 띤다.
예쁘장하다는 말을 들어서도 안 되고 남자답지만 아무렇게나 생겨서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남성은 어떠한 외모를 이상형으로 생각하는가. 왜 많은
남성에게 외모가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는가. 이들의 외모
콤플렉스는 여성의 외모 콤플렉스와 어떻게 다른가 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일은 남성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외모 콤플렉스의 내면화-숨겨진 진실
기존의 남성들은 못생겨도 능력과 재담, 또는 돈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그렇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상형의 외모를 부추긴다 해도 실제 이들이 없다면, 굳이 이상형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형이 어떤 이익을 준다면, 그
순간부터 외모는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남성이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원인이다. 특히 이러한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는
세대에 따라 그 양상이 다양하며, 열등한 외모를 보상하는 방법 또한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가슴앓이형-소극파
분명 잘생긴 외모가 부럽지만 쩨쩨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모르는 척하고
살아 온 남성. 이들은 비교적 구세대에 속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눈은 치켜 올라가서
사납게 보이는 데다, 키도 작은 편이어서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국민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는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도 잘했지만 큰 키에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그게 부러워서 남몰래 흉내내 보기도 했지만 영 내 꼴은 고쳐지지 않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된 ㄱ씨는 항상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지만.
"그게 어디 드러내 놓고 떠들 일입니까.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를
닮아서..."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는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속병이 될 확률이 더 높아서 자신의 외모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추형 공포증은 남성이 여성보다 3배 정도 많다고 한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 오히려 강한 집착증을 만들어 낸 결과이다.
보통 사람들은 수려한 얼굴, 탄탄한 육체의 남성을 능력 있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마르고 왜소한 체격은 허약하고 신경질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한 국민학교 여교사는,
뚱뚱하거나 왜소한 남자 아이들은 인기가 없고 늘 침울하게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커서도 자신감이 없고 적극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특히 키가 작은 남성은 절망적이다. 해결할 방법도 없이
열등감을 마음 속에 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모가 절대적인
여성과는 달리, 남성들은 여러 가지 보상 방법을 찾아 낸다. 탁구나
바둑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준다든가, 학문으로 승부한다든가 나름대로
최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히틀러나 나폴레옹, 로트렉과 바이런,
강감찬이나 한명회 등의 인물들이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한 영웅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도 남성의 가치가 외모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미인 밝힘형-보상파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미인 아내를 얻음으로써 보상받고 싶어한다. 2세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아내의 미모는 그의 능력을 말해 주며 사교에 도움을
준다. 이들은 재벌과 여자 연예인의 스캔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본다.
(나는 정주영 콤플렉스가 있다. 연탄 배달부에서 대재벌로 성장한
입지전적 인물인 그가 외모는 볼품없지만 돈의 위력으로 예쁜 여자들을
얻었다는 소문은 평범한 날 기죽인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권력과 돈만 있으면 못생겨도 미인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
22세인 이 대학생은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애인을 동반하고 걸어 갈
때면 그가 능력 있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잘생긴 남자가 못생긴 여자와
걸어가는 모습은 어색하게 생각한다. 실제 조사에서도 이상적인 아냇감으로
'예쁘고 섹시한 여성'을 원하는 남성이 상당히 많았다.
여성의 미모를 밝히는 남성은 대체로 외모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자신의 외모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외모는 여성이나 가꾸는
것이지 남성과는 무관하다는 성별 고정 관념이 강해서, 선뜻 외모 가꾸기에
나서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남성은 미인을 소유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대리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여성을 상품처럼 소유하고자 할 때
남성 자신도 능력에 따라 상품화되는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공작새형-신세대 적극파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데 여자와 남자가 따로 있는가. 이른바 신세대는
파마와 무스, 성형 수술 등으로 외모를 가꾼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금기는
있다. 계집애 같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며, 취직을 하게되면 빨간
블라우스는 더 이상 입을 수 없다.
라이어넬 타이티에 의하면, 요즈음 남성들의 외모 가꾸기는 배우자를
골라야 하는 필요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자유 연애가 보편화되고 지배적인
남성보다는 부드러운 남자를 선호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성도 자신의
외모를 박력이나 거칠음만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경상도 청년인 김군은 미팅에서 번번이 실패의 쓰라림을 당한 후 하숙집
동료의 충고를 귀담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박력 있다. 남자답다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남성다운
박력이 여성에게는 오히려 무례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옷이나 머리 모양
이야기나 하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도 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따라 해 보기도 합니다. )
이 경우처럼 여성들은 상대의 외모가 스마트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이제는 거꾸로 남성들의 외모를
밝히고 지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앞둔 여성은 남성의 외모를
첫째로 꼽지는 않는다. 물론 잘생긴 것이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능력과 책임감, 유머와 포부를 더 중시한다. 그것이 외모 가꾸기에
나서야 하는 남성의 고민인 것이다.
스포츠 맹신형-관리파
운동으로 건강과 탄탄한 육체를 유지하려는 유형으로 가장 많은 남성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체로 남성은 신체적 건강 관리가 남성으로서의 자기
관리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운동은
줄넘기나 아령 따위의 운동이 아니라 테니스와 헬스, 골프 등 부와 여유를
상징하는 운동이다.
"배가 나오고 뚱뚱한 외양은 남자로서 큰 약점이다"는 문항에 79.3%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15.4%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4.8%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흔히 금복주라고 말하는 불룩한 배가 동양에서는 복과 지혜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불룩한 배는 나태함과 무기력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용모가 중역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꼽힌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경영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역 세계에서 경쟁이 심화되면서 용모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또 다른 요인으로 첨가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빈번한 대인 관계가
필수인 비즈니스에서 개인의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
생활을 하는 남성들에게 외모 콤플렉스는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 정문 앞에 10분만 서 있으면 요즈음 엘리트 사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거의 획일적으로 보이는 말끔한 그들의 외모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신체적인 엘리트다운 외모를 갖추었다고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너무 작아도, 험상ㄱ게 생겨도 엘리트 대열에 끼기 어렵다.
설사 외모가 그렇게 크게 작용하지 않더라도 사회생활에 득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한 남성들의 외모에 대한 갈등은 심화된다.

남성외모의 변천사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시대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오늘에 와서 남성의 외모가 더욱 문제시되는가. 다른 시대에는
남성의 외모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적 가치가 본질이 아니었던 남성의 몸은 여성의 몸보다는 중시되지
않았으며, 그래서인지 언제나 똑같았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의
몸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어떤 때는 건장한 육체미의 아폴론을, 또
어떤 시기에는 연약한 몸매에 창백한 미소년을 남성의 이상으로 만들어
냈다.
남성미의 상징인 아폴론, 여성미의 상징인 비너스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 즉 남자는 어떠해야 하고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그 시대의
외모의 이상을 반영한다. 대충이나마 다양한 아폴론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한 남성상과 그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은 아름다운 성
남성미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아폴론은 그리스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원래 그는 점술과 예언을 주재하며 지성과 도덕, 율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숭상받았다. 고대 그리스 귀족 청년의 이상이었던 그의
모습은 당시 만들어진 나체 조각상에서 보듯, 넓은 가슴팍과 강한 허리의
완강한 육체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단정한 이목구비와 넓은 이마가 조화된
용모였다.
남성만이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도덕적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이
시기에는 아름다움 역시 남성의 것이었다. "영혼 속에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육체 속에 조화를 세울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운동으로 단련된 힘과 영혼이 조화된 상태를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다.
그림이나 조각에서 여성이 미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이었다.
그리스의 아폴론을 이상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시기의 남성상도 떡벌어지고
힘 있는 어깨와 가슴, 튼튼한 허리와 팽팽한 허벅지를 소유한 전사형의
남성이었다. 힘과 에너지가 뛰어난 남자가 찬양받던 이 시기는 특히 신
중심주의의 금욕을 거부하고 인간의 관능을 중시하여 남성미도 상당히
관능적인 면이 두드러졌다. 근육과 성기를 드러내기위해 달라붙는 옷을
입었으며, '라츠'라는 앞주머니를 달아 성기를 커 보이게 만드는 옷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도 고대인은 대체로 기골이 장대한 남성미를 숭상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무령왕은 신장이 팔척이요 눈과 눈썹이 그림 같으며,
구수왕은 신장이 칠척이요 위엄 있는 몸가짐이었다고 한다. 비교적 자세한
인물 형상은 고려가요에 나타난 처용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복이
성왕하여 내밀은 턱에?/ 칠보에 겨워서 숙어진 어깨에/ 길경에 겨워서
늘어진 소맷길에/ 슬기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복과 지가 모이어 포만한
배에/ 동락태평하여 긴 정강이에..."라고 묘사되어 있다.
처용이 당대의 미남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큰 턱,
긴 팔과 다리, 두툼한 가슴과 불룩한 배를 복과 지와 덕의 상징으로
숭상하였음을 보여 준다. 탄탄한 근육질의 아폴론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지와
덕을 상징하는 남성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 때의 남성들은 예복으로
치마를 입기도 하고 화장을 했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은 미모남자장식이라
전하는데, 머리에는 관을 쓰고 금은 주옥으로 장식한 무복을 입고 금동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허리띠에는 칼을 차는 장식과 패물을 달고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로 치장하고 얼굴에 화장하니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대의 남성은 기골이 장대한 육체를 숭상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리라 짐작된다.
연약한 소년다움이 이상
남성이 가장 아름다운 시대를 꼽으라면 서구의 절대 왕조 시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억센 것은 추하게 생각하던 귀족 사회에서 남성도 사치한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남성은 여성을 숭배하는 연애쟁이가 되어 화려하게
치장하고 소년의 미성숙함, 연약함을 이상으로 삼았다. 거친 지배자의
성욕보다는 섬세한 기교가 향락적인 생활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남성은 연약한 몸매에 알롱쥐페뤼케(남성용 긴 가발)를
늘어뜨리고, 백분으로 화장한 창백한 안색에 에스카르팽(무도화)을 신었다.
이러한 모습은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절세의 미소년인 아도니스와 흡사한
이미지였다. 성적 자극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남성은 정복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였다.
우리 나라도 육체 노동을 천시한 양반 사회에서는 중세 서구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연상시키는 힘을 추하게 여겼다. 조선 시대 남성은 옥골 선풍이라
하여, 살결이 희고 연약한 이미지를 선호했다. 춘향전의 이도령도 백옥 같은
고운 얼굴에 분세수 곱게 한 미남자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러한 유교적
선비상이 남아 종종 귀공자 같은 남자에게 '깎아 놓은 밤 같다'거나, '밤에
만져도 선비'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화려한 서구의 남성상과 달리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의
남성상은 성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분리된다. 남성의 치장은 유교의 전통
속에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육체보다 정신을 중시하여, 남성의 몸이
성적인 이미지로 보이는 것은 천박한 일로 여겼다. 사소절에 이르기를,
군자가 거울을 보는 것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보는 태도를 존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눈썹과 구레나룻을 다듬으며 날마다 요사스럽게 몸단장을
일삼는 것은 남의 첩이 된 여인이나 할 짓이라고 하였다. 다채로운 색과
모양은 아녀자의 것이지 남성의 것은 아니었다. 남성은 큰 도포로 육체의
선을 완전히 가리고 예의와 격식을 표현하는 긴 소맷자락과 지배를 상징하는
갓으로 위엄을 갖추었다.
아름다운 여자, 강한 남자
서구의 남성이 아름다운 성이기를 거부하고 여성만을 유일하게 아름다운
성으로 규정한 시기는 19세기로 추측된다. 1830년대 말경에 남성은 파마와
향료, 실크, 성적인 밝은 색깔의 옷입기를 그만두었다. 자본가 상이 남성의
이상으로 떠올랐다. 이제 남성은 사랑받는 미소년이 아니라 광포한 정복자로
변한 것이다. 정력적인 눈매, 긴장한 똑바른 자세, 의지를 내보이는 몸짓,
자신에 찬 음성, 활기찬 걸음걸이와 힘에 넘치는 근육을 갖추어야 했다.
자본가들은 합리적인 이성과 차가운 논리를 보여 주고자 자신의 육체를
가려 성적이고 육체적인 이미지를 갖추었다. 회색 양복, 헐렁한 바지로
탄탄한 허벅지와 성기를 가리고 넥타이로만 남성임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력은 일하기 위한 에너지로 표현되었다.
오늘날의 남성상은 이러한 자본가상에 근거하여 강인한 육체와 냉철한
지성의 조화를 이상으로 한다. 육체가 곧 정신의 강인함을 보여준다고
규정되면서 남성은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대신 일에서의 성공을 얻을 수 있는
도구적인 외모를 추구하고 여성은 성적인 아름다움을 본질로 삼게 된
것이다.
현대의 우리 나라 남성상도 이러한 자본가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화기
이후 남성의 기본 의상인 양복은, 어깨는 넓고 바지는 헐렁하며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강인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더욱이 유교의
전통으로 치장에 대한 금기가 엄격하고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시하는 사고가
강해 남성 외모는 더욱 감추고 모른 척해야 하는 일로 여겼다.

남성 외모의 이상형
남성과 여성의 외모는 그 의미와 모양새가 상당히 다르다. 여성의 외모가
성적으로 규정되는 반면, 남성의 외모는 기능적으로 규정된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애인이나 아내로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요구된다면,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할 보호자로서의 외모가 요구된다. 즉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신념과 관대함, 친절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힘을 보여
주는 동시에 직장인으로서 자기 확신, 경쟁, 경험, 공격, 야망 등을
표현하는 외모여야 한다.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은 큰 눈, 높은 코, 가는 허리, 날씬한
각선미 등 구체적인 형태로 규정되지만, 남성의 몸은 기능이나 사회적 지위,
우월성 등을 상징하는 육체의 이미지가 더욱 중시된다. 따라서 남성의
외모는 인상 좋은 얼굴, 큰 키와 넓은 어깨,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로
나타난다. 남성이 꿈꾸는 이상형의 체격을 설문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나보다 키가 큰 여성을 만날 경우 부담스럽다-58.9%
우리 속담에 "키 큰 사람치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거나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위로에도 불구하고 큰 것은 강하며, 작은
것은 약하다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남성에게 큰 키는 첫째 가는 외모의
조건이다. 설문 조사에서도 "자신보다 키가 큰 여성을 만날 경우
부담스럽다"는 문항에 58.9%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대체로 그렇지 않다
22.4%, 전혀 그렇지 않다 18%의 응답이 나왔다. 이 결과로 보면, 2/3 정도의
남성이 "남자는 여자보다 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혼의
경우는 63.4%가 그렇다고 답해 52.7%인 기혼의 경우보다 키가 커야 한다는
압박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여성은 자기보다 키가 큰 남성을 원하고, 남성이 여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여자가 건방져 보이거나 어쨌든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때 부유층에서는 키가 작은 아들에게 천만원이 넘는 성장
호르몬을 맞추는 사례로 떠들썩했다. 남자에게 큰 키는 재산보다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남자는 키가 커야 할까. 몸으로 표현하는 의사 소통에서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분석한 낸시 헨리는 큰 키로 내려다보는 자세는 우월함의 표시라고
말했다. 대체로 여성들은 남성보다 작으므로 남성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데에서 이미 열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흔히 키가 큰 사람은 고용될 기회가
많고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의장으로 선출될 확률이 크며, 키가 큰 남자에게
특권과 높은 신분을 부여하는 데 익숙해서 자동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남성들은 키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다'는 곧 '우월하다'로, '작다'는
'열등하다'로 가치가 정해져 큰 것은 남성다운 성격에서 지배자로서의
대범함과 관련해서 생각하며, 작은 것은 무능력이나 소외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남자는 큰 것이다." 작은 일에 언제까지나 고민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상황이 자기 앞에 펼쳐진다 해도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자의
가슴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새겨 넣을 수 있을 만큼 넓고 큰 것이다. )
나는 신체적으로 강한 람보형의 체격을 갖고 싶다-77.3%
남성다움은 힘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힘은 냉정하기를 은연중에 요구하는
감정적인 힘인 동시에, 위험한 운동에 필요한 신체적인 힘을 포함한다.
근육은 신체적으로 강인함을 보여 주며, 연약한 여성과는 다르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근육형의 대명사라면 역시 람보를 손꼽는다. 영화 '람보'시리즈는
속편까지 계속 흥행에 성공할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영화에서 주인공
람보는 억센 근육과 뛰어난 전투력, 정의를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 약한
자의 위험에 뛰어드는 휴머니티 같은 요소들로 남성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이 영화를 보며 람보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남성은
드물 것이다.
"신체적으로 강한 람보 형의 체격을 갖고 싶다"라는 문항에 대해서
응답자의 77.3%가 그렇다, 13.8%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8.9%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대부분의 남성이 근육질의 람보형 체격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육질의 체격은 넓은 어깨와 가슴으로 약한 자를 감싸는 보호자
이미지이다.
(원래가 갈비씨인 나는 여름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다. 몸이 약해 여름을
타기 때문이기도 하니만, 여름철에는 빈약한 몸뚱어리를 옷으로 감출 수가
없어서다. 겨울엔 그래도 옷으로 깡마른 몸을 가릴 수가 있다. 그러나
여름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름은 그야말로 외로운 계절이다. 흔히
가을을 고독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 가을과 겨울엔
두둑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서면 내 풍채도 웬만큼의 볼륨을 갖추어,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가도 어느 정도 포근한 포옹을 해 줄 수 있지만, 여름에는
안아 줄 자신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이다. )
이 작가의 말처럼 근육질의 풍채는 여성을 감싸 주는 남성의 표상이므로
골체미 소유자는 여성 앞에서 자신감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러나 최근 남성의 패션은 스타일에서 중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 오늘날
남성의 체격은 근육질이면서도 늘씬한 신체를 지향하게 되었다. 벗으면
람보, 입으면 안성기 즉, 힘과 지적인 매력이 겸비되어야 하는 이중의
가치를 이상형으로 삼기 때문에 도달하기에는 더욱 까다로운 조건이 되고
있다.
"남자는 육체미를 해서라도 근육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문항에 대해서
대졸 이상 75.8%, 대학 재학 72.4%, 고졸 이하 65.8%가 그렇다고 대답해
대부분 사무 전문직에 종사하는 대졸 이상의 남성이 근육을 키우려는 의지가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일정 정도의 능력과 시간을 소유한 남성이
금상첨화격으로 외적인 힘까지 두루 갖추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근육질의 체격은 실제 일을 하기위해 힘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남성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적인 능력과 힘의 조화는, 육체를 가꿀 만한 돈도 시간도 없는 남성에게는
설상 가상의 어려운 목표가 되는 것이다.
잘생긴 이목구비, 좋은 인상
남성의 외모를 이야기할 때 얼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하지 않는 편이다.
잘생긴 얼굴은 타고나는 것이고 미적인 면과 밀접해서 여성스러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예쁜 얼굴이 중요하지만 남성의 신체적
매력은 얼굴 생김보다는 기능적인 몸매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위한 인상을 중시하는데, 이는 얼굴 생김까지도
기능적으로 보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예쁘다'는 말 대신 '인상이 좋다'는 말을 쓰지만 결국 잘생긴 얼굴을
선호한다. 최근에 늘어나는 관상 성형은 실력 못지 않게 외모가 중시되는
요즘의 풍조를 말해 준다. 쌍꺼풀 수술을 받은 고교 2년생 이군은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가 인상이 험하다는 놀림을 많이 받아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로 말한다. 명동의 유명 성형외과 병원에는 이런
남학생이 하루에 10여 명씩 찾아온다고 한다.
기업체에서는 면접에서 관상가를 데려다 놓고 신입 사원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취업을 앞둔 대학 4년생 박 군은 "저는 입술이
두꺼워 고민입니다. 결단력이 부족해 보인다고 하는데 수술을 하자니
쑥스럽고..."라고 말끝을 흐린다. 여성만의 문제였던 얼굴이 관상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에게도 강조되는 것이다.
세련미는 좋지만, 여자같이 치장하는 남자는 꼴불견이다-91.2%
남성다운 외모에 덧붙여지는 항목은 여자같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에 우리는 남성이 아름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남성
패션의 변화를 소개한 한 기사에서는 그 동안 사회적 인습과 편견에 갇혀
미처 누리지 못했던 옷입기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남성의 치장을 '공작새
혁명'이라고 말한다. 숫공작의 화려한 깃털처럼 남성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대라는 것이다. 분명 남성의 외모는 변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성의
전용물이었던 화장품, 무스, 파마, 다이어트 상품 등이 남성과도
친숙해졌으며 더 이상 수수하고 털털함이 남성미의 대명사도 아니다.
그런데도 91.2%의 남성이 "여자같이 치장하는 남성은 꼴불견이다"라는
의견에 동의하였다. 6%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고, 2.5%만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25세 이하에서는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가 87.2%, 26--30세에서는 91.7%, 31--40세에서는 94.4%, 41세
이상은 91.8%로 나타나 신세대라 불리는 20대는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지만
대부분의 남성이 여성다운 외모는 거부함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남성 외모의 이상형을 큰 키, 강인한 근육, 좋은 인상에
세련되지만 여자같지 않은 외모로 설명하였다. 여성의 외모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설명되는 데 견주어 남성의 외모는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여성은
구애받는 존재로 몸의 아름다움이 본질적 가치이지만 남성의 외모는
기능적인 면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남성미는 단순히
이지적이고 강인한 자본가상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 이미지인 큰
키와 강한 근육에 남성에게 금기였던 치장이 세련미 또는 자기 관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고, 관상이라는 형태로 얼굴 생김새도 중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남성의 외모가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외모 콤플렉스를 부추기는 대중 매체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 외모에서도 남성다움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중 매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TV, 영화, 광고, 잡지 등의 대중 매체는 대중적 신화를 만들어 내고
전파하는 중요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러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으나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를 확대하여, 생활
양식, 이념, 취미, 패션에 이르기까지 획일화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되어 남성의 몸도
여성의 몸만큼이나 상품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운 람보의 탄생-영화
사회학자 거즌은 남성다움의 다섯 가지 원형으로 군인, 개척자, 전문인,
부양자, 지배자를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나 부양자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개척자의 시대도 지났다. 그러자 전통적인 남성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남성은 무엇으로
위대함을 보여 줄 것인가. 영화는 그 대안의 하나가 되었다.
미국 영화와 홍콩 영화의 범람은 영웅이 되고 싶은 남성의 꿈을 대변한다.
서부 영화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람보의 실베스타 스탤론, 홍콩 무협
영화의 주윤발에 이르기까지 이들 영웅은 큰 키에 수려한 용모,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 의리를 위해 싸우는 전사이다. 군인으로 표현되는
남성다움이 이상형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이른바 남성다움을 몸으로 보여
주는 일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나이 학교라 할 수 있는 군대의
경험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짓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 전사적인 힘을
이상형으로 삼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의 영웅들은 좀 더 세련되고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초근육형의 우직한 힘만이 아니라 지적인 전사이다. '범죄와의 전쟁', '기업
전쟁', '지식 전쟁'에서 승리하는 새로운 영웅의 외모는 말쑥하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강인한 신체와 힘을 지닌 전사라는 면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스포츠 신화-TV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러 나간 아버지 대신 TV는 남성다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맡는다. 함민복 시인은 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텔레비젼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
테레비가 가족을 침묵시키고 둘러앉게 한다
가족 중 텔레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
어머니 테레비를 갖다가 버릴까요
독서가 잘 안되서 그러는데요
나는 요따위로 싸가지 없이 불효막심하게
말할 수도 없다 테레비가 정말 나의 아버지인가 )
이 시인의 말처럼 아버지 대신 남성다움을 가르쳐 주는 TV에 등장하는
스타는 쉽게 시청자가 동일시하는 모델이 된다. TV가 만들어 낸 많은 스타
중에서도 스포츠 스타는 남성들이 열광하는 대상이다. 스포츠에서 나타나는
가치는 주로 신체적 건강, 공격성, 경쟁, 인내, 자기 수양, 무리에의 귀속
등이다.
수렵 시대 초목을 달리던 사냥꾼으로, 영토를 넓히고 종족을 보호하던
전사로서 힘의 지배를 보여 주었던 남성다움이 이제는 스포츠속에서
이루어진다. 스포츠는 남성의 가치를 과시하는 문화적 상징으로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는 '마지막 요새'인 것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거친 공격으로 스포츠 스타들은 남자 아이들의 영웅으로 숭배되며, 그들의
빛나는 군육질의 몸매는 뭇 남성들을 매료시킨다. 휴일을 스포츠 관람으로
보내고, 아침 출근길의 전철에서 스포츠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운동
선수들의 멋진 모습을 매일 대하는 남성들이 그들의 신체를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성다움과 세련미의 조화-광고, 남성 잡지
멋있는 남자란 남성다움을 세련미로 포장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특히 광고는 상품으로 남성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어 낸다.
최근 남성은 상품의 판매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광고는 남성의 외모를
남성다움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광고들을 눈여겨보면,
남성용품의 광고가 강조하는 특징을 알 수 있다. 남성용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계, 양복, 화장품 광고에서 몇가지 실례를 들어 보자.
1. 성공의 상징, 시계
시대를 앞서가는 진정한 자신감의 표현-피에르 가르뎅에는 섬세한
디자인과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앞설 것인가, 뒤따를 것인가... '성공의 상징' 보메 메르시에
테크 호이어의 강인함과 정밀도 그리고 내구성, 긴장된 승부의 세계에서도
거침없는 승부를 거머쥐는 오직 승자만이 발견한다.
2. 명예의 상징, 양복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명사의 정장 하이 에이미,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세계 유일의 기사 디자이너 하이 에이미, 18세기 수상 관저가
들어선... 다우닝가 10번지, 이 거리의 주인이었던 쳄벌레인, 로이드 그리고
처칠의 체취와 만난다.
자기 표현의 진정한 자유 까르뜨 블랑슈. 나는 예의와 격식을 존중하는가?
나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신적 여유를 중시하는가? 까르뜨 블랑슈는 이 두
가지 물음에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신사, 바로 그들을 위한
새로운 트래디셔널 웨어입니다.
정상에서 만납시다, 크리스찬 디오르
3. 성적 매력의 상징, 남성 화장품
뭔가 있는 남자, 카리스마. 다가오면 가슴이 멎을 것만 같은 그의 향취.
말로는 표현 못 할, 그러나 까닭 모를 매력으로 다가오는 뭔가 있는 남자.
그 이름 카리스마.
이러한 광고가 성공과 명예, 지배력 같은 남성적 가치를 상품으로 보여 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한 최성애는 이 시대를 도금 시대라고
비판한다. 남성다움을 도금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남성들의 외모 가꾸기를
부추긴다. 자신이 진정한 남자라는 정체성을 지니기 어려운 오늘날, 상품이
남성다움을 대신해 줄 수 있다는 광고는 상당히 유혹적이다.
남성 잡지 역시 남성의 외모 가꾸기를 강조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남자의 외적인 미의 최고는 역시 탄탄한 육체이다. 뚱뚱한 사람이
여유있어 보이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군살이 붙지 않은 단단한 몸은
그야말로 여자들이 요구하는 근사한 남자의 모습이다. 남자들이 늘씬하게
뻗은 여체를 동경하듯이. )
상업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은 긍정적 가치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광고나 잡지는 남성의 가치를 몸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성공이나 명예, 남성의 매력을 화려한 상품으로 보여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시계, 양복, 구두, 화장품이나 다이어트 식품에 이르기까지
남성용 상품도 다양하고 화려해지고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 곧
우리다"라는 한 사회학자의 분석처럼 남성 역시 자신의 가치를 외모로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남성이 새로운 소비 시장으로 떠오르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던 광고가 남성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런 광고의 영양으로
남성의 외모 가꾸기는 더욱 부추겨 질 것이다.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는 평등화의 징조인가
그렇다면 남성의 외모 쿰플렉스는 남녀가 평등해지는 징조인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구분이 불필요해진 측면도 남성이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요인이다.
그러나 인습과 편견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성다움을 확인하기 어려워진 현대 남성에게 외모로 남성다움을 증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한,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는 남성다움에 부과된 또
하나의 짐이 되기 쉽다.
한 잡지의 기사에서는 남성의 아름다움을 공작새의 우아함에 비유하면서
남성의 삶을 품위 있게 이끌어 가는 모습이 진지한 남성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남자의 아름다움을 꿋꿋이 지켜 나가는 남자야말로 남자"이며
"아름다운 삶을 과시하는 것이 남자의 자부심"이라는 것이다. 남성용품의
광고에서도 세련된 남자야말로 성공과 개성을 표현하는 진정한 남성이라고
말한다.
결국 남성의 세련미는 여성다움과는 구별되는 남성다움의 확장이며,
남성에게 외모가 남성다움의 한 형태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남성은 능력과 외모를 겸비한 만능인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성고정
관념에 따라 여성으로서 남성으로서 대상화되고 장식된 외모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파괴하고 남녀의 관계를 힘겹게 만들수 있다.
남녀에게 서로 다른 고정된 외모를 강조함으로써 키가 작고 여성스러운
생김새를 지닌 남성에게 깊은 좌절감을 주기도 하고, 힘 세고 키가 큰
여성에게 공연히 열등감을 주기도 한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차츰 변화되어
나갈 것이다. 또한 시대에 따라 남성미도 변화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외모도 언제까지나 주어진 남성다움의 표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며 점차 자유로운 표현으로 바뀌어 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1) 한국일보, 1993. 11월 8일자.
2) 죠이스 브러더스, "남자 그는 누구인가", 정용택 역, 본당, 1991,
117쪽
3)우에노 치즈코, "90년대의 아담과 이브", 이재호/야노 유리코 역, 동풍,
1991, 37쪽.
4) 미셸 푸코, "성의 역사"2권, 문경자/신은경 역, 나남, 1990, 120쪽.
5) 고려가요 "처용가" 중 일절.
6) 전완길, "한국인, 여속-멋 5000년", 교문사, 1980, 155--156쪽.
7)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이기웅/박종만 역, 까치,
1987,14쪽.
8) Una Stannard, "The Mask of Beauty", Women in Society, Basic
Books,
Inc., 1972, 191쪽.
9)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이기웅/박종만 역, 까치, 1986,
22--41쪽.
10) 낸시 M. 헨리, "육체의 언어학", 김쾌상 역, 일월서각, 1990, 116쪽.
11) "맨즈라이프", 1990년. 11월.
12)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자유문학사, 1989, 54쪽.
13) 일간 스포츠, 1990. 8월 2일자.
14) 일간 스포츠, 1993, 9월 10일자.
15) 조형, "남성 지배 문화-오늘의 위기", "또 하나의 문화" 4호, 1988,
41쪽.
16) 함민복의 "텔레비젼: 오우가" 중에서, "TV 가까이 보기 멀리서 읽기",
현실 문화 연구, 1993, 148쪽.
17) 오기애, "스포츠 보도와 정치적 신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석사논문, 1987, 13쪽.
18) 최성애, "혼수전쟁", 청산, 1993, 54쪽.
19) "요즘 여자들은 피지컬 엘리트를 좋아한다", "맨즈라이프", 1990,
11월.
20) P. 스트럴/A. 재거 편집, "여성 해방의 이론 체계", 신인령 역, 풀빛,
1983, 38쪽.
참고 문헌
1) 이덕무, "사소절", 김종권 역, 명문당, 1985.
2) 김성배, "한국의 금기어, 길조어", 정음문고, 1974.
3) 김부식, "삼국사기", 이병도 역, 을유 문화사, 1983.
4) 고석주, "광고의 성 차별주의에 대한 소비자 의식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1985.
5) Michael S. Kimmel, Changing Men, Sage, 1987, 3장, 10장 참조.

장남 콤플렉스
나느 한 번도 가족에게 나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장남으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나를 맏고 의지하는 가족의
기대를 꺾는 것이 두려웠다. 어깨가 무겁고 힘들지만 장남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장남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나는 장남이니까 결혼해서 부모를 모셔야만 한다."
"그 청년은 다 좋은데 장남인 것이 마음에 걸려요. 아무래도 책임이
막중할 텐데... 우리 딸은 맏며느리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넌 우리 집안의 장남이니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
"형만한 아우 없다"
"장형 부모라는데 형님 말씀에 따라라"
우리 사회에서 장남은 자타가 공인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는다. 형제
가운데 맨 먼저 태어난 맏아들은 부계 가족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가 지속되는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뿐 아니라 한
남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가령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데에 장남이라는 형제 서열상의 명칭은 중요하다. 그래서 장남인가
아닌가는 연애나 결혼을 할 때 상대 여성이나 처가의 큰 관심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장남을 결혼시키는 시어머니 입장에서도 맏며느리는 좀
특별하다.
장남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때로 한없는 신뢰와 기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겁고 힘겨운 부담을 안겨 주기도 한다. 딸은 결혼하면 호적을 달리 해
나가지만 아들은 죽을 때까지 한 식구로 지낼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장남은
부모의 희망이요 기대이다.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서 장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집안의 후계자이자 예비 가장이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장남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는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똑똑한 아들 하나 잘 키워서 못 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뤄 주고 노후에 편히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부잣집의 장남은
가업이나 재산을 상속받는 대가로 부모의 명을 쉽게 거역하지 못하고 되도록
집안의 기대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한다. 다른 형제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하고 직업이나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도 부모의 의견을 쉽사리 뿌리칠
수 없다.
어려서부터 가족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관심을 받아 온 장남은 대부분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 한편으로는 희생한 만큼 가족이 보상해 주길 바란다.
동생들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보스 기질을 내비치기 일쑤고,
집안의 독보적 존재로 여겨 주길 원한다. 행여나 이러한 자의식이 충족되지
않으면 무시당한 듯싶은 피해 의식을 갖기 쉽다.
다행히 부모의 기대대로 그야말로 믿음직하게 장남 노릇을 잘 하고 있어도
가족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욕구를 버리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불만이 쌓이기도 한다. '장남이니까', '집안의
계승자이니까', '동생에게 본이 되어야 하므로', '부모를 모셔야
하니까'라는 책임감과 강박 관념이 장남의 삶을 따라 다녀, 함부로 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부모의 바람을 저버리고 자기 뜻대로 살아도 장남
노릇을 못한다는 자책감을 끝내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부모를 모시지
않는 불효자', '동생을 돌보지 않는 장남', '욕심 많은 장남'이라는 비난을
들을 때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장남의 삶은 전통적인 부계 가족 제도에 얽혀서 그를 바라보는 가족의
감정이나 이해와 이어져 있다.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장남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문의 기둥이자
계승자로서, 시집살이를 감내한 어머니의 한을 풀어 줄 자궁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와 신뢰를 한몸에 받는 동생들의 본보기로서의 역할과 함께
단란한 핵가족을 꿈꾸는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보호자라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이처럼 장남은 대가족과 핵가족이 엇갈리는 과도기적인 가족 제도속에서
훌륭한 계승자와 능력있는 생계 부양자라는 두 역할을 맡아야하는 고된
위치를 지키고 있다.
가족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자질과 욕구대로 자율적인 삶을 찾아나서든,
가족에 둘러싸여 힘겨운 장남 노릇을 하든, 장남은 대부분 "모든 면에서
장남 노릇을 잘 해야 한다"거나 "장남 노릇을 잘 못 한다"는 장남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장남 콤플렉스는 장남의 삶에서 풀 수 없는 숙명인가? 장남은
어떤 위치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고 있으며 우리 나라 가족 제도가
어떻게 장남의 삶을 힘겹게 하는지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살펴보았다.

장남 노릇, 권리와 희생의 이중주


권리와 보상을 누리는 장남
장남은 그 역할이 어렵고 힘들어서 장남 콤플렉스에 걸린다고 하면 많은
차남이나 딸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남은 언제나 가장 좋고 귀한
것만 먹고 가지며, 부모한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아 왔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는 동생 야곱이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채기 위해 눈 먼
아버지를 속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동생이 부러워하리만큼 장남의 권리는
좋은 것이고 당연히 장남은 천부적으로 주어진 권리에 보답하듯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장남은 실제로 어떤 권리와 보상을 누릴가? 재산을 물려받은 장남은
부모를 모시고 더러는 재산을 동생에게 나누어 주어야 너그럽고 훌륭한
장남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 장형 부모라 하여 가족에게 특별히
존경받고 부모가 없으면 가족을 통솔하는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부모
노릇을 할 만한 책임감과 능력을 갖추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족의 기대에
따라야 한다.
"흥부전"에서 원래 심술꾸러기요 마음씨 나쁜 형 놀부는 장남으로서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려고 흥부와 그 식속들을 내쫓는다. 게다가 "세간
전답을 모두 차지하고 저 혼자 호의호식하며 제 부모 제사를 지내어도
제물은 아니 장만하고 돈을 대신 놓고 지내는..." 기득권만 누리고 책임을
저버린 '욕심 많고 못된 장남'의 상징이다. 물론 놀부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가 화폐 중심적인 상업 사회로 변하면서 유교적인 덕목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장남의 모습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인륜적인
도리보다는 돈이나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더 크게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흥부는 못된 형이나마 의지하고 따르는 착한 동생이다. 먹을 것이 없어 형
집에 찾아갔다 형수에게 맞고 돌아왔지만 부자가 된 후에 놀부가 찾아와
비아냥거릴 때에도 제비 덕에 부자가 되었노라고 알려 준다. 또 패가한
놀부가 이웃에게 매질을 당할 때에도 급히 가서 "이 동생의 말을 듣고
그리한 것이고 부모 같은 장형이오니 형 대신 소인을 먼저 죽여 주오"하고
말할 정도로 지극한 우애가 있다.
장남은 어려서부터 동생들에게는 특별한 존재이다. 공자도 최고의
도덕으로 효제를 들었다. 효는 부모에 대한 효도이고 제는 형에 대한
우애로, 우리의 전통 가족 속에서 장남의 지위나 권한은 감히 다른 형제들이
넘볼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부모가 장남에게 쏟는 사랑과
관심을 지켜보면서 다른 형제는 장남을 아버지와 같은 권한을 지닌 존재로
알았다. 장남은 다른 형제보다 배울 기회도 더 많고 좋은 옷이나 물건도
먼저 가질 수 있다. 형이 입던 옷을 안 입으려는 동생들의 투정이나, 형이
쓰던 물건이 아닌 새 것을 가져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차남의 푸념이나,
일등만 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간 모범적인 형과 속만 썩이는 골칫거리 둘째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애와 갈등은 우리가 흔히 겪는 삶의 주제이기도
하다.
희생과 의무를 다하는 장남
(나는 막일을 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의 기둥이었다.
영리하고 공부를 잘 하던 나는 못 배워서 가난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어려운 집안 형편을 뒤로 하고 일류 대학에 진학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어려움을 견뎠다. 동생이나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자 이제는 살았다며,
생활비를 대고 그간의 빚을 청산해 주기를 바랐다. 융자를 받아 빚을 갚고
저축할 겨를도 없이 꼬박꼬박 월급을 집에다 들여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도 했지만 아내와 집안 사이에서 겪는 갈등으로 행복하지 않다. 전세
사는 집이 좁아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괴로움도 크지만 번번이 일이 있을
적마다 손을 내미는 가족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불평하는 아내가
원망스럽다가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면 내 신세가 서글퍼졌다. 어쩌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지, 변변한 취미 생활 하나도 못
하고 그저 가족과 돈에 매여 살아야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불쌍하다.
(40세, 회사원))
장남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경제적 책임을 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설문 조사에서 " 부모님이 무능력할 때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은
장남이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69.2%(751명 중 520명)로 높게
나타났다. 장남이 가족의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보다 장남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례의 주인공인 40세 회사원은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여자는 최소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의 자기 신세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남의 신화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나 무능력할 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매사에 모범적인 장남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경우 집안을 위해 자신의 개성과 욕구와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장남이라 다르다"는 칭찬은 그의 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차츰 자신의 삶에서
기쁨이나 희망을 잃어 간다.
(나는 한 번도 가족에게 나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장남으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나를 믿고 의지하는 가족의 기대를
꺾는 것이 두려웠다. 어깨가 무겁고 힘들지만 장남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묵묵히 살아갈 수 밖에... (41세, 공무원))
핵가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회적으로 노후 복지가 빈약한 우리 사회에서
장남은 당연히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책임자로 여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부모를 누가 모시는가" 하는 문제로 형제 사이에 입담이 오가는 경우는
흔하다. 장남을 굳게 믿고 살아 온 부모는 "장남이 있는데 왜 차남에게 얹혀
사느냐"고 생각하고, 차남이나 딸은 "맏아들이 있는데 왜 내가 부모를
모시느냐"고 주장하곤 한다. 핵가족이 일반화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맏며느리 여성들은 "요즘 세상에 꼭 장남만 부모 모시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속에서 장남은 스스로 장남의
책임이라는 굴레에 매여, 또는 주변에서 부여한 장남의 의무를 지고 도리
없이 희생의 길을 간다.

장남 콤플렉스를 낳는 가족 제도
앞에서도 보았듯이 장남은 그 권리와 보상을 누리기도 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에 허덕이는 가운데 다른 형제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장남 콤플렉스라는 내면적인 갈등과 고민을 갖게 된다.
장남의 탯줄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집안과 가문을 지키는 부계 직계 가족의
계승자요, 그를 낳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보답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이어져 있다. 형제 중 맏이로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동생을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자신의 욕심이나 의지를 잘못 펴다가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장남은 어떻게 가족과 집안의 테두리 안에 묶여 있는가? 권리와 보상을
누리면서 그와 상반된 희생 의식이나 책임감으로 깊어 가는 장남 콤플렉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인지 알아보았다.
순종하는 아들-부계 가족의 계승자
설문 조사에서 "장남은 자신의 욕구를 앞세우기보다 집안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성은 85.3%로 641명이나 되며, 이는 장남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92.2%가 긍정하여 훨씬 높았다. 특히 "장남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 진학, 직업을 피해야 한다"라고 답한 장남은 절반이 넘는
56.2%였다.
(나는 나 혼자라고 느낄 때가 거의 없었다. 내 등 뒤에는 휘장처럼 집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날 따라 다녔다. 행여 집안의
기대를 어길까 봐 다른 친구들처럼 데모에 앞장서지도 못했고, 취하는 것이
두려워 술도 마음껏 마시지 않았다. 나는 장남이요 종손이므로 언제나
자신을 잘 보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자유롭게 사는
친구들이 사실 부러웠다. (35세, 교수))
우리 나라 사람은 가족 의식이 유별나게 강하다. 전통적인 가족 의식을
지배하는 효 사상은 모든 인간 관계에 우선하는 절대적인 가치이자 생활
규범이었다. 곧, 자식은 부모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되며 비록 부모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모를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은 혈연, 학연, 지연을 중요시하는 사고와
연결되는데 이는 개인의 개성과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가족 속에 매몰시켜
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대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경 사회도 아닌데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하다. 가족 계획으로 한두 자녀를 낳는 추세지만 "적어도 아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은 많을수록 좋더라", "아들
낳아 야구팀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심각하다.
설문 조사에서도 "장남은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69.6%(523명)이었다. 장남을 집안이나 가문과 연결지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계승자로 생각하는 사고는 여전히 강한 편이다.
(옛날 인도의 사밧티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는 딸만 다섯이고 아들이
없었다. 당시 그 나라에는 아들이 없이 가장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나라에
바쳐야 하므로 아들 없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아내가 마침 임신을
하였을 때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부자의 재산은 아이가 태어난
후 처리하기로 하였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아기의 몸은 눈과 귀가 없고,
입에는 혀가 없으며 손도 발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남근이 제대로
달린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큰딸이
결혼하여 남편을 상전처럼 극진히 섬기자 이웃 사람이 그녀에게 어찌 그리
남편을 극진히 섬기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많은
재산이 모두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딸이 다섯이나 되었지만 자식
구실을 못한 거지요. 그러나 남동생은 눈도 귀도 혀도 손발도 없는
두루뭉수리였지만 아들이기에 우리 재산을 지킬 수 있었지요. 많은 딸이 한
사내만 못하다는 걸 알고서 바깥 어른을 받드는 것이랍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인도의 설화에 나오는 이 얘기에서 우리는 아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들 중에서도 특히 장남은 가문을
대표하는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가문이란 남자 어른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직계 가족을 말하는데, 이는 가장이 가족을 대표할뿐만 아니라 가족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체제이다. 가족 내의 남성들 사이에도 저절로 위계가
세워지는데, 전통적으로 직계 가족 중 차남이하는 따로 나가 새로운 가정을
형성하였지만 장남은 본가에 남아 가문을 계승하였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가문을 이끌며 재산을 물려받아 관리하는 일은 장남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였다.
전통 사회에서 장남은 책임감 못지 않게 권리와 권위가 확고했다. 한나라
때 허무라는 사람은 자신은 벼슬에 올랐으나 동생들이 아직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았음을 걱정하였다. 그는 동생들을 분가시키면서 집과 재산을 나누어
주는데, 일부러 자신이 제일 좋은 집, 기름진 전답, 힘세고 일 잘하는
종들만을 가려서 차지해 탐욕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형에게 순종하는 미덕을
보인 동생들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고, 그 후 형은 자신의 재산을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이들의 우애는 세상 사람의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륜행실도"에 나오는 형제간의 도리와 우애를 강조하는
미담이다. 장남이 형제를 돌보고 모범을 보이는 이면에 동생들의 분가나
재산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고, 동생들은 장남의 권위에 순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장자 상속이 확고해진 후부터는 장남이 제사를 지내고
그에 상응하는 재산을 물려받았다. 오늘날에도 '있는 집 장남'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문의 부와 권위는 흔히 장남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가족 제도가
변하고 남녀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장남의 권위와 권리는 불안해졌다.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부계 직계 가족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장남에게
상속이나 우선적인 지원을 하려 하지만 법적으로는 호적상 호주 상속권이
남아 있을 뿐이며, 상속 제도는 장남 우대 상속에서 아들 딸이 똑같이 받는
균분 상속으로 변하였다.
가족 형태도 직장이나 교육 문제 등으로 사실상 부모와 떨어져 핵가족으로
살아 가는 경우가 많으며, 딸과 함께 사는 부모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장남은 분가라 생각지 않고 분거라 생각하므로 불안함을 씻지 못한다.
겉으로는 핵가족으로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부계 직계 가족을 이어 가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개별화된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배적인
사회이다. 가족 구성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전처럼 동생들을 직접
다스리기가 어려워졌고, 몇 안 되는 동생도 장남에게만 잔뜩 의무를
떠넘이곤 한다. 따라서 사회와 의식의 변화는 장남에게 보상보다는 의무와
희생을 더 많이 안겨 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리 나라는 효도를 중시하여 사회 관계까지도 효를 바탕으로
맺어져 왔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구체적으로 존경하고 시중 들고 부양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이 효도였다. 효도 윤리 위에
아들을 낳아 가문의 핏줄을 이어 가야 한다고 믿었던 전통 사회의 가족주의
가치관은 변화한 가족 형태와 사회 구조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와서
장남에게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어머니와 장남
아들을 낳는 일은 여성에게 단순히 대를 잇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 온 삶의 열매이며 살아 가는 희망의 등불이다. 장남은 실제로
집안에서 어머니의 지위를 굳혀 주고 힘을 부여해 준다. 결혼하고서
시댁에서 무시당하고 살다가 자신을 "사람 대접 받게해 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집념은 자신과 아들의 삶을 동일시하고 아들을 통해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많은 여성이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희생자이면서,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제의 철저한 신봉자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어머니는 참으로 내게 극진했다. 위로 누나 셋을 낳고 3년이나 아이가
없다가 나를 낳으신 이후로 할머니나 아버지께 처음으로 식구 대접을
받았다고 하신다. 별로 잘나지도 못한 나를 자랑으로 여기시고 한 번도
내게는 "안 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 어머니 앞에 서면 나는 그 뭣도
거역할 수 없다. (22세, 대학생))
과거에 여성은 사내 아이를 낳아야만 진정한 여자요, 어머니일 수 있었다.
여성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던
것이다. 딸을 낳으면 딸에게 남복을 입혀서 기르거나 남자 이름을 지어 주면
사내 동생을 본다는 속설을 믿고 그것을 행하였던 것도 아들을 낳으려는
욕망이 매우 컸다는 증거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에서나 사회에서 여성은 공식적인 대표나 지위를 갖지
못한 채 혼인한 날로부터 오로지 시집의 대를 이어 주는 역할만을 맡았다.
순수한 양반의 자손으로만 대를 잇기 위해 여성의 정조를 중요시하는 바람에
여성은 바깥 출입도 마음대로 못하는 등 구속을 받았다.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며느리의 임무를 완수한 대가로 사람 대접을 받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는 남편이 첩을 들여 함께 살기도 하고 시어른들의 구박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다 남편이 먼저 죽어도 재가를 할 수 없었고 한 번
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출가외인 대접을 받아
친정으로 되돌아올 수도 없이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삶을 살다가 여성은 노후에야 자기의 권리를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들이 장성하여 어머니의 고생과 희생을 알아 주고
자식을 통해 그간의 한을 푸는 것이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자식한테 효도를 받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젊은 시절에
어려움을 잘 참으면 언젠가는 자식들에게 보상을 받고 한 집안의 당당한
조상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아들을 낳으려는 욕망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아들을 통해 자신의 고생을 보상받으려 했다. 오늘날에도
산부인과나 한의원에서 양수 검사나 체질 바꾸기 등으로 아들을 낳는 일이
흔하다고들 한다.
(임산부의 입장에서 태아가 딸인지 아들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기가 정상적이고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막달이 되어 갈수록
주위에서는 아들인지 딸인지를 점치며 궁금해했다. 두 달 차이로 임신한
여동생은 초음파 검사 결과 딸이라고 하였다. 친정 엄마는 낳아 보아야 알
수 있다며 동생을 위로하셨다. 나마저도 딸을 낳는다면 "딸 많은 집
딸들이라 둘 다 딸을 낳는구나"하는 말을 듣게 될 엄마가 안쓰런 생각이
들면서 아들이기를 기대했다. 막상 아들을 낳자 주위에서 크게 기뻐했다.
아이를 데리고 공원이라도 가게 되면 어떻게 첫아들을 낳았냐며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모두 여자였고 같은 여자 입장에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딸을 낳은 사람을 끊임없이 소외시키고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들은 피해 의식 속에서 자신을 무능력하게 여기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30세, 주부))
전통적으로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 점은 도처에
깔려 있는 기자속에서 알 수 있다. 달의 정기 마시기, 달밤에 바닷가에서
운모 성분이 많은 모래로 찜질하기, 돌부처 코를 가루 내어 먹기 등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이들은 산천을 찾아 제사를 올리며 초인간적인 힘을 빌리려
하였다.
양갓집에서는 아예 관상 보는 이에게 돈을 주고 점 찍어 놓은 규수집에
머물게 하여, 규수의 상이 아들을 잘 낳을 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냈다고
한다. 처녀의 상이 좋아야 매파를 넣어 혼담을 건넸는데, 혼담이 오가면
거의 성혼이 되고 못 되면 두 집 모두 큰 수치로 알았으므로 미리 이런
방법을 썼다. 결국 며느릿감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들 잘 낳을 상인지
아닌지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또 여자가 심성과 덕성이 후덕하고 교양을
갖춘 사람이어야 자식 복이 많다고 하여, 남의 싸움에 끼여들지 않고,
어려워도 원망치 않고, 음식을 절제하고, 무슨 이야기나 들어도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들을 바라고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기를 소원하는 욕구는 태몽이나
태점을 거의 절대시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해나 달을 삼키거나 안거나 치마
밑에 감추는 꿈은 큰 인물이 될 아들을 낳고 학, 용, 범, 밤, 호도, 고추,
큰 물고기, 큰 돼지, 소, 거북, 말 등 큰 짐승을 보거나 좁쌀, 입던 옷,
관대, 신주, 부처, 금 패물, 술잔을 보아도 아들 태몽이라고 했다. 그러나
꽃, 뱀, 작은 물고기, 보리 이삭, 금반지, 앵두 등 작은 과일은 여자 아이를
볼 꿈이라고 했다.
태점이라고 하여 경험에 의해 태아 성별을 점치는 것도 흔했는데,
임신부의 배가 뾰족하게 불러 오거나 입덧이 심하여 고통스러워하면 딸을
낳을 것이라고 하고 배가 펑퍼짐하고 입덧도 순하면 아들이라고 한다.
또 임신부가 특별히 고추를 즐겨 먹거나 임부의 나이를 합해서 홀수이면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만 아니라 동생 볼 아이가 끄나풀을 목에 걸고
논다든가 허리를 앞으로 굽혀 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넣고 서서 모친을
바라보면 남동생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진다. 태아가 여아라고
판단되면 남태로 바꾸는 묘방을 사용하는 것이 "동의보감", "규합총서",
"조선박물지"등에 나온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에는 "임신 3월은 시태라고
하는데, 혈맥이 흐르지 않고 형이 상하며 변하나니, 이 때에 남녀가 미정한
고로 복약과 방술로서 변화하여 남을 낳을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아들을 임신하거나 아들의 태로 바꾸는 방법으로 임산부가 계속
왼쪽으로만 누워 자고 고추를 많이 먹어야 한다든가 남의 아들 태몽을 사고
도기나 수탉의 긴 꼬리, 남편의 손톱과 발톱을 임부 몰래 침상 밑에 두는
풍습이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몸통과 꼬리가 붉은 수탉을 죽여 매달아
터럭과 발과 내장을 땅에 묻고, 머리까지 고아서 임부 혼자 먹고 뼈를 땅에
묻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풍습도 있다.
이렇게 온갖 노력을 다해 낳은 아들이 말을 안 듣거나 기대에 어긋나게
굴거나 어머니 자신에게 무관심하면 서운해할 수밖에 없다. 딸을 여럿 낳은
후에 아들을 둔 여성 중에는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나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라는 회한이 담긴 말을 하면서 아들의 효도나 애정을 강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아들에게 부담감과 갈등을 심어
준다.
(나의 어머니는 마치 나 때문에 살고 계신 것 같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는 속옷까지 챙기시고 어디를 가는지도 소상히 말해야만 한다.
장가 갈 나이인데 아내 될 여자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앞선다. 결혼하면
따로 나가 살고 싶지만 어머니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실 게 분명하다.
아마 기절 초풍하실지도 모르겠다. (28세, 회사원))
매사에 어머니의 대리 성취자가 되어 자라난 아들은 어머니를 떠나는 것에
죄책감을 갖기 쉽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장남의 경우 특히 심한데, 결혼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결혼한 후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힘들다. 장남으로 집이나 어머니에게
신경을 쓰면 아내가 싫어하는 것 같고, 아내의 말만 듣다 보면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 나 때문에 고생하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는 것을 여자들은
왜 싫어할까? 남자들은 중간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요즘 들어 절감하고
있다. (31세, 은행원))
어머니를 완전히 떠나지 못한 아들은 헌신적이었던 어머니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 어머니가 끊인 된장찌개는 맛있었는데", "우리
어머니에게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었다"는 등 아내를 자기 어머니와 견주며
어머니의 이미지에 맞추려 한다. 그것은 때로 아내와의 사이에 심각한
갈등으로 나타나며 고부간의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핵가족주의나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아내가 시가와 친정을 동등하게 대하길
원하거나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장남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고단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동생들의 본보기
장남이 모범적인 형으로서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동생보다 여러 모로 나아야 하고 동생들의 약하고 철없는 면까지도
위사람답게 감싸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알게 모르게 규정한다.
(동생이 어려울 때 도와 주지 않는다고 집안에서는 나를 욕하는 것 같다.
나는 어려울 때 누구에게 손 내밀지도 못하지만 가족은 나를 바라보고 내가
어떻게 해 주겠거니 믿는 것이다. 장남인 것이 무슨 죄인가?. (48세, 교사))
예로부터 장형 부모, 형우 제공이라 하여 형은 동생을 우애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해야 하다고 가르쳐 왔다. 현대에 와서도 형제의 우애가 중시되는
만큼, 장남이 동생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강하다. 설문 조사에서
"장남은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93.4%나
되었다.
헐록은 아기의 성격은 유전적인 것보다 출생 서열에 따른 환경적인 면이
더 크게 좌우한다고 하였다. 즉 형제간의 서열에 대한 문화적인 인식이나
기대감, 아기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나 대우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남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크므로 부모가
원하는 모범형을 자기와 동일시하려 노력한다. 따라서 어른스럽고 책임감이
강하고 양심적이며 성취 동기가 강하고 협조적이다. 그러나 동생들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자만심이 강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부모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너무 많은 기대와 요구를 할 경우 장남은
심한 열등감을 느끼거나 도피적 행동을 하기도 한다. 때로 혜택은 누리지만
책임은 회피해 버리는 이기적인 장남이 이야기되는 것도 그 부담이
무거워서이다.
동생들이 형을 언제나 좋게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형의
권위를 탐내고 형보다 늘 처진다고 생각하는 반감을 갖기도 하여 형이
권위적으로 대할 때 그대로 참기도 하지만 때로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형은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하여 수재라는
말을 들어 왔다. 형제라고는 단 둘뿐인 우리 집에서 형과 나는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었고 형이 결혼한 지금에도 온 식구가 모이면 어린 시절 형의
영특함을 이야기하며 듣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나는
한 번이라도 형을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운동을 할 때에도
형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이기고 싶다는 생각에 온 힘을 쏟게 된다.
(30세, 회사원))
"형보다 못하다"든가 "형을 본받아라" 하는 말들은 동생들에게도 형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게 하는 한편, 장남도 그 역할과 지위를
감당하기 위한 인내와 노력을 들여야 할 때가 많다. 장남의 역할을 다하려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으로 힘겹기만 하다.

새로운 가족 관계
최근 들어 가족은 점차로 해체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이상형, 즉 장남이 결혼하여 부모를 모시는 부계 직계
가족과 현실과는 차이가 크다. 그런데도 부계 직계 가족을 전통적인
미풍으로 여기므로 장남의 갈등은 심각하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부계 직계 가족이 진정한 전통이고 미풍인가를
문제삼았다. 조선 중기까지 직계 가족은 10%가 안 되었으며, 핵가족은 65%
정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실제 전통 사회에서 직계 가족은 넓은 집과
충분한 재산, 신분을 소유한 상류 지배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공동체의 원리보다는 서열 의식, 지배와 복종의 원리가 훨씬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족 제도는 장남과 차남을,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접하는 차별로 이어졌고, 대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 형태를
인정하지 않아 그렇지 못한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의 대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차별이나 가족
이기주의가 아닌 평등한 공동체로서 가족이 자리 매김될 때 장남이 느끼는
부담감도 다른 형제가 느끼는 소외감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형편이
여의치 못한 장남이 있는가 하면 장남이 아닌 다른 아들이나 딸이 부모를
모시고 살 수도 있다. 장남이기 때문에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누구나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
가족의 안정된 삶이 가족 중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집안의
기대를 위해 희생하며 가족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과
적성에 따라 삶의 방향을 정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도 새로워져야 한다. 어머니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아들이 더 이상 젊은 날의 고생을 보상해 주는 대상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힘 겨루기는 아들만 힘들게 만든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에도 여자만이 자신의 가족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심리적으로 그의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결혼함으로써, 자립적인
남성과 여성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형제 사이에서도 장남은 실수하지 않는 모범생이 아니라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인 것을 알려야 한다. 형의 과도한 책임감은 동생들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 능력을 기르는 기회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형제간의
우애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책임감 강한 형이 무능한 동생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문학과 지성사, 1988, 79쪽.
(울프(wolfe)에 따르면 남편의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젊은
여성은 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집안에 더해 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해 간다. 자궁 가족 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 특히 아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여성에게는 일정
기간 어려움을 이겨 나가기만 하면 자신의 권력 기반인 자궁 가족을 이룰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응분의 보상을 누릴 수 있다.
2) 남명희, "흥부전에 나타난 골계의 양상과 기능", 경북대 석사논문,
1986, 14쪽.
3) 조동일, "흥부전의 양면성", "계명논총" 제5집, 1968, 44--45쪽.
4) 설성환, "흥부전의 필연성과 당위성", "연세 국문학" 제3집, 38집.
5) 법정, "인연 이야기", 불일 출판사, 1992, 149--150쪽 요약.
6) 조은, "한국 사회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 연구소 발행, 1983,
183쪽.
7) 윤태림, "한국인", 현암사, 1991, 198쪽.
8) 이광규 외, "한국 민속학 개설", 학연사, 1983, 74--76쪽.
9) 유안진, "한국 여성 우리는 누구인가", 자유문학사, 1991, 316쪽.
(노랑 머리나 붉은 머리, 눈의 흰자위가 붉거나 노란 기가 있고, 눈이
깊이 빠진 얼굴과 눈썹이 없는 것처럼 생긴 얼굴, 콧대가 꺼진
납작코이거나. 이마가 높고 얼굴이 꺼지거나, 이마에 주름살이 많거나,
미간에 마디가 있거나, 얼굴이 길고 입이 크거나, 얼굴이 크고 입이 작거나,
콧속에 수염이 있거나, 귀가 뒤로 뒤집히고 귀에 굴곡이 많거나, 입주둥이가
불붙듯이 생겼거나, 잇몸이 희거나, 목소리가 우레치듯 깨진 음성이거나,
어깨가 처졌거나, 허리가 너무 가늘거나 몸이 너무 가법거나, 등이 꺼지고
복부가 좁거나, 엉덩이가 약하거나, 눈이 희고 검은 것이 선명치 않거나,
살가죽이 얇고 살이 항상 차갑거나, 입술이 창백하거나 혀가 희거나, 배꼽이
작고 얕으며, 살이 솜같이 보드랍거나, 적이 오똑하고 젖꼭지에 흰 빛이
돌거나, 사타구니의 살이 메마르거나, 입술에 검은 빛이 도는 여자는
무자상이므로 며느리로 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얼굴이
너무 예쁘면 목이 여리고, 투정이 심해도 아이를 못 낳으며, 투정이 심한
것은 월경이 불순한 탓이므로 월경 불순은 불임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그 생김새의 어여쁨이 문제가 아니라, 눈빛이 초롱거리고,
입술이 붉고, 배가 두텁고, 배꼽이 깊으며, 허리가 바르고, 체격의 틀이
잡혔으면 귀한 자식을 낳는다고 보았다. 또 몸은 여위었지만 입술이 붉으며
인당이 바르고 평평하며 피부빛이 빛나고 결혼할 때쯤에는 붉은 빛이 돌면
산근이 끊어지지 않아 신랑의 양기를 돕게 하므로 자식을 낳을 여자로
인정되었다. )
10) 유안진, "한국 전통 육아 방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145--150쪽.
11) 최광선, "재미있는 남성 심리", 기린원, 1990, 83쪽.
12) 윤영애, "자녀의 출생 순서에 따른 어머니의 기대 수준",
이대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8.
13) 김경희, "아동 심리학", 박영사, 1986, 218쪽.
14) 이영자 외, "성 평등의 사회학", 한울 아카데미, 1993, 127쪽.

남자는 대부분 세상에 나아가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술자리에서, 심지어 취미 활동에서까지 어느
자리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하여 원숙하고 유능한 인물로
성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능인은 누구인가
전통 사회에서 남성은 집안일을 함께 의논하는 가족 내의
참여자라기보다는 과묵하고 엄격하게 가족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어른이었다.
남성은 집안에서 힘과 권위를 지닌 가장이며 대들보 같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 때문에 전쟁에 나가거나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때에도, 더
나아가 그가 죽은 뒤에도 어머니나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멀리 돈 벌러 간
아버지'나 '좀 더 크면 만날 수 있는 아버지' 얘기를 들려 주며 남성의
위치를 자신들을 지켜 주는 보호자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남자도 빨래를 하자"라든가 "접시를 깨뜨리자"는 광고 문안과
유행가 가사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남자가 바깥 양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남자의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은
남성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큰소리치기에는 이미 세상이 달라졌으며, 오랫동안 자신을 남자답다고
믿어왔던 남성들은 이러한 변화 앞에서 당황하고 갈등한다.
오늘날 많은 여성이 이상적인 배우자로 넉넉한 수입이 보장된 부양자이자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는 친구이며, 함께 아이를 돌보고 종종 온 가족과 함께
여행이나 쇼핑을 즐기는 남성을 꼽는다. 또 여성들은 아내의 취미나 기호를
이해하고, 돈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척척 해결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한다.
오늘날 남성들에게 '열두 가지 재주에 저녁거리가 없다'는 말은 옛말일
뿐이며, 오히려 '사내는 도둑질 빼고 다 배우라'는 속담이 절실해진다. 이는
'진짜 남자라면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만능인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져 되살아나고 있다.
남자는 대부분 세상에 나아가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뜻을 품는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술자리에서, 심지어 취미 활동까지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원숙하고 유능한 인물로
성공하고자 한다. 만능인은 현대 사회의 남성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된 것이다.
설문 조사 결과, 우리 사회의 남성은 높은 학력을 지니고 남보다 많은
돈을 벌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있어, 무엇보다도 지위와 명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을 만능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완벽한
만능인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남성은 설문 조사
대상자 751명 중 735명(97.8%)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대다수 남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만능인에 대한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일할 때는 프로-사람인가 기계인가
비교적 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만능인에 대한 환상은 산업화의 진행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 초기에 산업 전사로 일터에 뛰어들어야 했던 남성은
사회 활동에서 성공과 업적을 쌓는 동안 자신이 '남자답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만으로도 존경받고 가정에서의
위치가 확고했다.
점차 서비스 산업이 증가하고 여성들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유일한 생계 부양자로 남성이 느끼던 우월감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생계
부양자로서의 자부심이 없어졌다고 해서 남성이 일 자체를 놓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직장에서는 남녀의 일의 구분이 점차 사라질수록 오히려
까다롭고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전문인과 숙련인을 이상적인
직업인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남성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능한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 직장일에 매달렸다.
복잡한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한다든지,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킨다든지,
기술적인 노하우를 개발한다든지 하는 능력이 때로는 남성다움을 재는
잣대가 된 것이다.
특히 경제 구조가 변화하면서 남성은 예전의 사업 세계에서 요구하던
남성적인 힘이나 도전적인 기질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어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야 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남보다 앞서
많은 정보와 실력을 갖추는 것이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그 때문에 현대 남성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외국어나 콤퓨터를 배우는 등 각종 재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나의 꿈은 남들처럼 조그만 오퍼상을 차려 독립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꿈은 전문 경영인이다. 전문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8시 10분까지 학원에 나가 영어 회화를 배우며 여기에 박봉을 쪼개
매달 16만원을 투자한다. 무역 정보 수집에도 열성이어서 PC에는 각종 무역
관련 통계와 자료가 가득하다. 전문가가 되어야만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료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밤
10시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에도 평복 차림으로 출근하여 일을 본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딸이 있지만 회사도 내 집 같은 느낌이 든다. 정보화
사회에 자신과 동료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포쳔(FORTUNE)",
"타임(TIME)"등을 구독하며 무역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직원 열람용으로
사무실에 비치하기도 한다. 가히 초인적이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다보니
주변에서 "잘 보이려고 환장했다", "명문대 출신이라고 재는 거냐" 하는
오해도 받는다. (30세, 회사원))
남성은 일을 하면서 능력을 발휘하거나 일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는
열정적인 모습에서 자신이 남자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이나 출세는
더없는 이상향이고 그리하여 리더가 되는 비결을 담은 '인간 경영'이나
'손자 병법'등의 처세술 안내서는 늘 인기가 있다.
설문 조사에서도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문항에 94.8%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특히 26세에서 40세까지의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중
97.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학벌과 소득이 높고 전문적에 종사하는
남성일수록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싶어하였다. 이들 중에는 최고 경영자와 전문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으며,
때로 일 중독자로 불릴 정도로 직장의 안팎이 불분명하고 심지어 일을
집으로 가져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일 이외에서는 자기를 찾지 못하고
일과 인생이 뒤바뀌어 일 중독으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는 편이다. 이들은 부를 쌓는 일은 물론, 전문인으로서 장을
꿈꾼다. 현대 사회의 엘리트란 곧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을 의미하며,
일을 하나의 게임처럼 여기고 능란하게 처리한다.
이들 소수 전문가와 경영자들은 전문적인 직업을 통해서 삶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일로써 남성다움을 보여 주는 이상적인 남성상으로서
대다수 남성들에게 만능인의 환상을 품게 만든다.
'남성은 곧 일'이라는 등식을 계속 유지해 온 이들에게 퇴직이란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이들은 퇴직을 싫어하며 퇴직 후에도 가능한 한
활동하기를 바란다. 일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이들에게 문제는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를 해야 하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철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
결근하는 법도 없고 건강 관리도 철저했다. 언제까지나 그럴 줄 알았다.
지금 퇴직을 해야 하다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억울하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그만두라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교수로 정년 퇴임한 ㅇ씨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최고의
지성인이고 엘리트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은퇴를 앞둔 무렵에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 되기도 한다. 말로 푸는 증상 외에 아무 이유 없이
건강이 급속도로 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일이 없어지면 여가도 건강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소수 남성과는 달리 대다수 남성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너나없이 하는 일이
비슷비슷하고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산 수단을 소수가 독점하고 회사 경영을 위한 다양한 전문
경영자나 관리자층이 형성되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의 성질은 책상 위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도장을 찍는 등 일로써 남성임을 증명하는 것이 우스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많은 중간 관리자들은 지위가 높고 낮은 것으로,
수입이 많고 적은 것으로, 그리고 이에 걸맞는 소비 생활에 따라 그럴
듯하게 남성다움을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 도전해 볼 가치가 있던 사업 세계는 이제는 마치 쥐들의 경주와
같이 되어 버렸다. 대다수 남성은 다니기 싫어도 직장에 매일 수 밖에 없다.
일터는 군대식의 권위적인 통제가 늘 도사리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남성은 점차 '기계형 남성(Male Machine)' 이 되어 간다. 직장
분위기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내 일을 딴 사람이 모르고 나도 그 일을 모르는
속에서 나중에는 서로가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코 앞에 떨어진
자기 일만 해야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다른 사람이 손놓고 있어야
하고 결국 전체가 정지되어 버리는 컨베이어 시스템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하겠다.
기계의 원리는 사람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적용된
기계의 원리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관료제는 융통성 없는
의식주의를 낳고 무자격자의 보호, 조직의 비대화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고
비합리적인 권력의 발생으로 파벌과 증오심을 낳기도 하였다. 현대의
관료제적인 직장 분위기는 인간 관계를 약화시키고 스스로 일하려는
자율성을 누르며 해고나 파면, 승진 누락등의 불안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40대 남성들에게서 보여지는 '책상 신드롬'은 이러한 불안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며칠째 책상 꿈에 시달렸다. 장정 네 명이 내 책상을 들어내려는 것을
내가 다리 하나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다가 깨어나곤 한다. 속도 모르는
아내는 수험생인 아들에게 꿈을 팔라고 한다.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한 나는 가슴이 출렁했다. 문간에 책상 두 개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순간 머리에서 "아, 드디어 짤렸구나.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
퇴직금은 또 얼마나 적을 것인가... " 수만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다. 평소
상관이 '자네 그렇게 멋대로 하다간 언젠가 책상 치워질 날이 올거야'
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 책상은 그대로 있었다. 평소 나를 쪼아 대던
상관의 책상이 없어진 것이었다. 미웠던 사람이지만,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40대 남성의 고백, 교통방송, 1994. 3. 29))
잠자는 시간 외에 하루의 2/3를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과도한 노동시간과
끝없이 이어지는 업무의 연속으로 남성은 천하 장사 로봇이 되어야 할
판이다. 기계인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장시간 반복된 노동은 스트레스를 준다. 당연히 남성은 신경질적이 되고
화가 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남성답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남성은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다.
사회나 직장이 남성을 인간 기계로 여긴다면 남성은 병이 나면 안된다.
기계도 오래 쓰면 마모되어 폐기 처분 되듯이, 앞만 바라보며 뛰다가 병으로
쓰러지면 남자라는 존재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점차 기계형
남성을 요구할 때 대다수 남성은 여기서 점점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직장에서는 창의성이나 주체성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만 잘 해 내는 기계적이고 분업화된 인간을 요구하고 업무를
내세운 교제나 접대에서도 인간 관계는 비정해졌다. 대폿집에서 오가는
남성의 대화는 거의 직장 상사에 대한 불평 불만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의
경영이 능력주의로 되면서 인간적 유대가 얇아지는 데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다. 비교적 구세대들이 해 온 일의 방식은 인간 관계로 맺어져 있어
실력이나 학력이 좀 떨어져도 부하 직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의 차질이 있으면 필요할 때 밤 새워 일을 시켜도 큰
불평이 없다. 해외 현장에서 한국 기업이 환영받았던 것도 이러한 시간 외
근무가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냉정할 만큼 합리적이고
능력 위주인 서구식 경영 구조에서는 있을 수도 없다.
서구식 경영 구조에 비교적 익숙한 사람들은 인간 관계보다는 원칙을
적용시켜 급한 일이 있어도 근무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몫에 해당하는 휴가도 잘 챙긴다. 이들은 목표량을
정확히 달성할 수는 있지만 목표량 초과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진 않는다.
문제는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서구식 경영 체제를 취해 감에 따라 구세대
방식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점차 밀려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경영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서열을 높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적 유대를 더 중시해 온 우리 사회의
직장구조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거나 늦게 입사한 다른 남성이 먼저
승진한다면, 설혹 그가 자신보다 더 유능하다 하더라도 불평 불만을 느끼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성의 유대는 승진과 포상에 대한 강박 관념으로
상호간에 순수한 동료애적인 유대를 맺는 경우는 드물고 주고받는 식의 일
중심적이며 '볼 일이 없으면' 언제라도 끊어지게 마련인 관계에 불과하다.
옛부터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아도 정승이 죽으면 오는 사람
없다"는 말은 높은 사람에게 잘 보여서 빌붙다가도 세력이 없어지면 돌아서
버리는 비인간적인 유대를 암시한다.
때로 노동조합이나 취미 동호회에서 친해진다고 해도 영구적인 돈독한
우애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형성하는 아군 의식일 뿐이다. 그것을
견디고 받아들여야만 승진도 하고 출세도 쉽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해고되거나 승진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다. 일류 대학인
ㅅ대 경영학과를 나와 ㅅ기업에서 근무하다가 8년 만에 독립하여 오퍼상을
차린 ㅇ씨의 상황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처음에 입사했을 때 내가 승진이 안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이 회사에 전 생애를 걸고 포부를 펴 보고자 했으니까. 대리된 지
5년이 지나 미련을 버리고 나왔다. 그 후 한동안 아내까지도 나를 능력이
없어 쫓겨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경기가 나빠 사업이 어려워도
지금은 자존심이 산다. 그래도 남 보기에는 사장이니까. )
기계 부품 같은 소모품 인생은 지식이나 학벌 없이 육체가 전 재산인
노동자들에게는 더 심각하다. '다 된 건전지 갈듯'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일터에서 명예도 풍족한 돈도 만지지 못하는 그들에게 노동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할 고역일 뿐이다. "유능한 사람이요? 그건 배운
사람들 얘기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는 한 자동차 정비공의 말은 우리 사회의
계층적 위화감과 일에서의 소외를 여실히 보여 준다. 결국 일에서
남성다움을 찾으려는 남성은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서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술과 능률이 떨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숙련 분야로 밀려난다.
그렇다면 일에서 남성임을 확인하지 못하는 대다수 남성이 갈 곳은
어디인가?
즐거운 집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가장은 피로와 싸우면서도 희생을 통해, 가정이라는 작은 나라의 왕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한다. 가족을 아끼고 보살핀다는 자부심은
일에서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은 남성이
직업 못지않게 가정이 중요하며, 휴식처로서도 가정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남성에게 가정은 직장에서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휴식처이다.
여성이 서비스나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데, "아내가
편안해야 집안이 편안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집안에서 남성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등 넓은 소파에 기대어 아이들과 함께
텔레비젼을 보며 이야기하거나 옆에서 과일을 깎는 아내의 미소를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장면에서 남성 대부분은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연상한다.
젊은 부부들은 서로 친구처럼 지내며 남편은 권위 대신 아내의 관심을
공유하고자 하며, 부부가 함께 여가 활동을 즐기고 외식을 하거나 인스턴트
식품을 이용하여 가사 노동의 부담을 줄이려는 경향이다. 그러나 일의
세계에만 매달려 왔던 가장이 여성의 공간이던 가정으로 돌아온다 해도 그의
위치는 애매하기만 하다. 아내와 자녀와 더불어 어떻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인지가 남성에겐 또 하나의 일이다. 가정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남성의
능력을 측정하는 또 하나의 사업 공간이 되었다. 피곤해도 가족이 원하면
야외로 나가거나 외식하는 일을 선뜻 거절할 수 없다.
대부분 남성은 '가족에게 충실하고 다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 가족의
요구를 잘 들어 주는 책임 있는 가장이 되려고 한다. 설문 조사에서 "휴일날
쉬고 싶어도 가족이 원하면 외출하는 것이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91.3%(686명)에 이르고 20대와 30대 남성의
비율이 40대 이상의 남성보다 더 높았다(26--30세 94.6%(193명), 31--40세
88.8%(205명), 41세 이상 86.6%(84명)). 젊은 세대는 사회 초년생으로
직업에서 아직 뚜렷한 자부심을 느낄 만한 나이가 아니므로 가정에서
남성다움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데다가 점차 가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사회적 분위기 탓으로 보인다. 슈퍼우먼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여성다움을 간직한 채 직장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데서 갈등하듯, 만능인은
유능한 직업인인 동시에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라는 여러 역할 사이에서
갈등한다.
오늘날 완벽한 가장 노릇을 하는 데는 돈이 필수적이다. 가능하면 돈을
많이 벌어 내 집을 갖고 좋은 차를 사서 때때로 가족을 데리고 교외에 나가
여가를 즐기는 것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방법이 된 것이다. 가족
단위의 휴가가 늘자 남성은 여가 비용을 마련하는 사람이 되었다. 돈은
가정에 봉사하는 가장의 권위를 확인시켜 준다. 돈이 있어야 가장 노릇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저소득 남성에게 더 강한데 위의 설문 조사 결과 월
수입 90만원 이하의 남성이 이 문항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반응(94.2%)을
보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생활 수준과 얼마를 쓰는가로
부가 측정되는 사회 분위기, 엄청난 물가와 생활비는 이들을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가장으로 만들어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흔든다. 살아 가기에도 빠듯한
저소득 가장의 괴로움이 여기에 있다.
(이 집 저 집 차를 끌고 놀러 가는 것을 보면 애들은 왜 우리는 차가
없느냐고 야단이다. 마치 아버지는 왜 그렇게 돈이 없느냐는 말로 들린다.
봉급 받아서 꼬박꼬박 저축하고 융자금 이자 물면서 술 생각이 나도 참고
변변한 취미 생활 하나 못하고 사는데 어떤 때는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도
무능해 보인다. (39세, 회사원))
한편 돈만 있다고 완벽한 가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수입이
좋은 광고 회사 프로듀서인 ㅈ씨의 경우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없어
고민이다.
(이러다 아이가 크면 얼굴도 몰라 볼 것 같다. 어쩌다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는 평소에 못 해 준 집안일을 도와 주거나 밖에 나가 외식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촬영 때 못 들어가도 덜 미안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
쉬는 날 하루종일 가족을 데리고 외식에 나들이에 피곤해진 몸을 오히려
다음 날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푸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가족에게 행여
소홀히 하지나 않았는지 염려하게 되고 가족의 요구를 좀처럼 거절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잠시라도 조용히
집에서 마냥 늘어져 쉬고 싶다"고 말한다.
핵가족에서 부부 관계는 낭만적인 사랑의 결합으로 시작하지만 부부가 된
남녀는 결혼한 후에야 비로소 아직도 살아 있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체험한다. 많은 젊은 남편들이 아내를 자기 집안의 식구로 편입시키는 데서
어렵고 곤혹스런 일을 겪는다. 특히 아들을 정신적으로 떼어 보내기도 전에
현실적으로 분가시켜야 하는 어머니와, 그런 시어머니를 어렵게 생각하는
아내 사이에서 남성은 샌드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는 남성은 밖에서 큰 일 하기 글렀다"는 옛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많은 남성이 가정을 직업 이상으로 중시하고 자신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가정의 불화는 손톱 밑의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ㅎ기업의 영업부장인 ㄱ씨의
말이다.
(요즘 회사에서 벙어리 냉가슴이다. 15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가 부부
싸움 끝에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술김에 뺨 한 대를 때렸을 뿐 아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은 없는데도 아내는 다 잊혀져 가는 신혼 시절 아픈
기억까지 끄집어 내서 더는 못 살겠다고 한다. 이혼이라니, 이제 겨우
회사에서 인정받아 탄탄대로가 눈앞에 보이가 시작하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괜히 가정 생활에 문제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다. 그
여편네, 조금만 참으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깐깐하게 나오는 건지
답답하다. )
아이가 병이 나거나 말썽을 부리고 부부 사이가 원만치 않을 때 남성은
그것을 출세와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여긴다. 밖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가정 불화나 가정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느낀다. "가정
밖에서 아무리 능력을 발휘해도 가정 불화가 생기면 타인의 존경을 받기가
어렵다"는 문항에 95%의 남성이 그렇다고 하였고 대졸 이상이 96.4%, 사무
전문직 종사자가 96.7%, 월 소득이 151만원 이상인 남성이 97.8%로 가장
높았다.
현재 우리 나라 부부는 네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는 추세이다.
결혼이나 가정에 대한 환상이 높아진 반면 이혼율이 늘어가는 것은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남성은 겉으로는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만 사실은 '편안한 쉼터'를 찾으려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1981년 부터 1990년까지 남성의 가사
참여율은 중가도 감소도 아닌 상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남성이 집안일을 하는 것을 예전처럼
금기시하지는 않지만, 육아나 가사의 책임은 아직도 여성이 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 역할 고정 관념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성이 바라는
이상적인 가정이란 여성이 잡다한 가사일을 다 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꿈이다. 그러므로 평등한 인격적 관계가 아닌 상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에 결혼해도 결혼 관계가 깨질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설문 조사에서 "남자는 직장에서 유능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다정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문항에 95.2%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로 보아 일터와 가정에서 모두 성공하고 싶은 만능인의 꿈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 처한
직장이나 업무 현실, 그리고 성별 분업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남성의 갈등은 깊어진다. 많은 남성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목적을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파렐은 직업에 헌신적인 남성일수록
가족들에게서 소외되어 있다고 하였다. 직업을 통해 남성의 소득이 많아지고
지위가 오르는 것은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요소인 동시에
직업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가정에 쏟은 것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정과 직장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는 면을 보인다. 전문직, 관리직 남성은 승진을 통해 유능하고
모범적인 가장으로 보이지만 책임이 부과되는 업무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하므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육체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더 많은 수입을 위해 야근이나 교대 근무 등을
하다 보면 가족을 등한시하게 된다. 그래서 어렵게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는 남성은 시간이 많이 드는 가사 활동이나 양육에는 그리 깊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자녀의 공부나 학교 생활, 취미에는 될수록 관심을 보여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시키고자 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곧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잃어버린 자아를 확인하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은 가정에서 여가 비용을 마련하고 좋은 아버지 역할을 함으로써
남성다움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이미
여성 영역으로 굳어진 가정에서 남성은 가정의 지배자로 만족감을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이 가정에서 남성다움을 확인하려는 만능인의 한계이다.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
포커에서는 올 어라운드 맨(all around man)이나 올 마이티 맨(all mighty
man), 농구에서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all round player)라고 하여 전천후
인물을 가리키는 말들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만능인의 신화는 포커, 스포츠 등 놀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설문 조사에서 "나는 직장, 가정, 스포츠, 취미활동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95.2%로 나타났다.
직장과 가정에서 인정받는 이상형을 추구하는 남성은 스포츠나 취미 활동
등에서도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때로는 직장과 가정에서 만족할 수 없는
남성이 여가 활동에 더욱 몰입하기도 한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 결과
무엇이든 잘하고 싶어하는 남성은 26세에서 30세(97%)가, 그리고 미혼
남성(95%)이 다른 연령대(41세 이상:89.7%)나 기혼자(93.4%)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여가 자체가 젊은이 위주로 이루어져 있고 가정에서 부양자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미혼자가 더욱 더 여가에 매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업무상 혹은 개인적으로 갖는 술자리나 회합에서
남성만의 세계를 만끽하기도 하고, 남성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격렬한
스포츠나 취미를 통해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남성들만의 격리된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놀이를 개발해
남성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한다. 이런 남성들은 일만 하고 가정만 챙기는
남성을 경멸한다. 진짜 남성이라면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가 활동 중 스포츠는 남녀의 성 역할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수렵 시대 이후 입증할 기회가 거의 없는 남성의 신체적 용맹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이 되었고, 80년대 초 프로 야구를 시작으로 프로 씨름,
프로 축구 등이 생겨나서 남성들의 불안한 정체성을 다잡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 참여하든 수동적으로 관람을 하든, 자신이 남성임을 확인하며,
구호나 기합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발산시키고 남성끼리 유대를 다지기도
한다. 경기를 보다가 실수를 한 선수에게 "저 병신, 그것도 못해?"하고
소리치면서 남성은 평소 억제했던 감정을 유감 없이 표출한다.
남성들이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축구가 전통적으로 남자다운
기질로 여겨온 거칠고 공격적인 힘을 드러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
몰두하는 동안은 자신이 처한 무력하고 불안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내 보여서는 안 되는 남성 세계에서 술은 긴장을 풀어 주는 특성
때문에 업무상의 교제를 위한 도구로, 희노애락을 발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남성들은 술기운을 빌어 자신의 내부에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술을 마시면
소원하고 서먹서먹한 관계도 금방 부드러워지고 바이어 접대나 사업상의
교제나 업무를 원활히 하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정보가 오가기 때문이다. 또
술기운에 감정적인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골치 아픈 일상사를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군대 경력과 함께 술은 남성만의 공통
요소로, 술좌석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자리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폭탄주와 2차, 3차로 이어지는
음주 문화에서는 먼저 일어나면 '분위기 깬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자리를 털고 갈 수도 없다. 게다가 다음날 출근을 늦게 하면 출세에
감점이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란 친밀을 가장한 비방이나 유언 비어,
음담 패설로 이어지고 대부분 당구장이나 고스톱, 포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왕이면 따야 하는 부담감에다가, 당구장에 가도 진 사람이 돈을
내니 이겨야 한다. 그럴 때 잡기에 능한 사람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대개 남성의 여가는 직업에서의 경쟁적 가치가 그대로 적용되어, 곧 일을
더 잘 하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충전으로 생각한다. '퇴근후 한잔'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호프나 소주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나 업무상의 교제를
위한 술자리, 그리고 테니스 라켓이나 헬스 기구를 사들이는 충동적인 장비
구매가 그러하다. 낚싯대나 골프채, 테니스 라켓 등을 사들임으로서 남보다
열심히 산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소득 수준에 따라 여가 양식도 다양해져, 60년대에 바캉스, 테니스,
텔레비젼 등이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효과를 내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자가용, 스키, 골프, 콘도미니엄, 해외 여행이 이를 대신하였다. 여가
생활에는 돈이 들게 마련이고 또 자유 시간을 갖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인 계층이 나뉘고 성공 수준이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장시간 심한 노동을 하고 최저 임금을 받는 이들은 시간을 내기
어려워 여가에서도 소외된다. 그래서 하층 계급은 비용이 많이 드는 개인
운동보다는 축구나 농구 등 주로 집단 운동을 통해 신체적인 긴장을 풀고
동료애를 다독이고, 상층 계급은 여가 생활로 주로 조깅이나 테니스, 골프
등 개인 운동을 한다.
이렇듯 남성의 여가는 오락과 휴식, 업무가 병행되는 남성끼리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여가는 가지
계발과 자기 완성, 자아 실현을 위해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일의 연장으로서 쫓기듯이 여가를 즐기거나 돈이 없어 아예
꿈도 못 꾸는 경우, 그리고 끊임없이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여가는 더이상 휴식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요새 웬만한 사람이면 승용차에 콘도 회원권과 스키, 골프채 정도 있는
것이 보통이라 우리 같은 사람은 소외감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돈 없으면
갈 만한 곳도 별로 없다. 자연 농원이나 롯데월드 같은 곳에 입장료내고
들어가도 놀이감들은 모두 따로 돈을 내야 하니...(45세, 회사원))
노동자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자는 게 남는 거'라는 표현이 있다.
이 짧은 말 안에 그들이 처해 있는 시간과 돈의 제약이 그대로 생활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휴일날요? 잡니다. 특근 없는 것만도 다행이죠. 자다가 깨서 밥 먹고
텔레비젼 보다가 또 자고... 결혼한 지 3년짼데 마누라 눈치 보여도
어떡합니까. 모른 척하고 잡니다. 그래야 또 일 나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움직이면 돈 들어요. 그렇게 참고 참다가 월급날 한
번 때려먹고 기분 나면 흔드는 데까지 갔다가... 또 마찬가지죠.)
남성에게 여가는 휴식이 되지 못한다. 생계부양자로 일을 해야만 했던
남성들은 일에서 손을 놓거나 노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계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남성들은 여가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쉴 수가 없다. 오히려 여가에서마저 이상적인 남성다움을 추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가는 구체적으로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에
이 둘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 남성들에게는 여가를 통해 만능인이 되려는
꿈은 요원할 뿐이다.
만능인이 설 곳은 어디인가
만능인은 후기 산업 사회에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남성이 만능인이 되기는 쉽지 않다. 돈과 시간과 정력과
힘을 지니고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유능하면서도 가정적인 가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만능인, 그러나 그 이상이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갈등과 불안을 안겨 준다.
현대 사회는 고도로 분업화된 전문 사회이다. 전문적인 지식 하나를
얻기도 힘드는데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만능인 환상은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이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킬
만한 남성을 배우자로 선택하고자 한다면 한 명의 남성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물질적 생존에 쫓기며 사는 우리나라 남성의 삶을 반영하듯, 우리 나라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이다. 이러한 기록은 웅담과 녹혈, 하다못해
피로회복 간장약까지, 남성을 건강과 정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존재로
만든다. 우리가 한 남성에게 이 모든 것을 기대한다면, 그리고 남성이 그
기대에 맞추려 노력할 때, 40대 남성 사망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만능인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남성은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그럴수록 건강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광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혹 자신이 삶이 그래왔던 것은 아닌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90년 동안 나는 오로지 건강만을 위하여 살아 왔다.
사슴뿔에서 지렁이 꼬리에 이르기까지 몸에 좋다는 것은 안 먹어 본 것이
없다. 이렇듯 건강은 내 삶의 지상목표인 동시에 내 인생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건강을 위해서라면 나는 가족과 재산과 신앙과 국가를
희생할 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


1) "30대 진보적 직장인들의 고민이야기", 월간 "말" 1993년 9월, 141쪽.
2) 김효선, "회사원 생활을 통해 본 한국 남성의 적응과 소외", 이대 석사
논문, 1987, 23쪽.
효율과 합리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관료제적이고 경쟁적인 산업 사회의
공공영역에 알맞는 이상적인 남성상. 이들은 남자다운 기질을 중심으로 업무
수행에 충실하며 내면적인 인간 유대를 맺지 않고 성공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의 냉정한 경쟁 원리와 이윤추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합리적이고 결단력을 요구받기는 하지만, 이미 기계의 부속품으로 남은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3)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1, 신원 문화사, 1990, 44쪽.
4) 안병철, "한국 남성의 가족 역할 변화", "오늘의 한국 사회", 임희섭,
박성길 편, 나남, 1993, 357쪽.
5) 김효선, 앞의 글 25쪽 재인용.
6) 김효선, 앞의 글 91쪽.
7) 한겨레 신문, 1990, 1월 20일자 기사.
8) 김광규 시, "오래살기",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학과 지성사, 1983,
44쪽.
참고문헌
1) Peter N. Steams, Be a Man!, Holmes and Publishers, Inc., New
York,
1990.
2) Michael S Kimmel, Changing Men, Sage Publications, Inc., 1987.
3) 엘리자베트 바뎅테,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최석 옮김, 민맥,
1993.
4) 김문겸, "여가의 사회학", 한울 아카데미, 1983.
5) "또 하나의 문화" 4호, 청하, 1988.

함께 사는 우리를 위하여
껍질뿐인 지배 의식을 움켜쥔 외로운 남성보다는, 울 수 있고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남성이 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FF
남성은 왜 남성다움을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남성다움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그것을 이상으로 삼는
남성이 겪는 콤플렉스의 유형을 이야기했다. 사실 남자답게 산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많은 남성이 불현듯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여자로 태어나 부담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갈등을 겪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대부분 남성은
다시 태어나도 남성이고 싶다고 말한다. 개방 설문을 중심으로 왜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가를 정리해 보면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남자가
편하다", "남자에게 기회와 가능성이 많다", "여자는 생활에 구속과 제약이
심하다", "여자는 약하고 남자는 강하다" 등으로 남성이 누리는 혜택이
많다는 이유를 든다. 기회와 가능성을 잡지 못하고 실패한 남성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남자로 태어나기를 원한다.
실제 남성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할 가능성은 적다. 중산층에서
입지전적인 대재벌로 상승하기는 어려우며, 노동자 출신이 학자나 자본가로
성공할 확률도 희박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능성과 자유는 같은 계층의
여성에 비해 열려 있다는 것일 뿐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꿈을 이루기 보다는 "여자보다는 낫다"는 지위를 지키려는 동안 남성은 더
많은 질병과 사고, 죽음을 맞이한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여성보다 7,8년
적고 과로사의 위험도 많다. 그렇지만 남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실패했을
때, 또는 가장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때 엄청난 두려움과 좌절을 겪게
되어도 그것이 남성다움이 주는 압력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운명일 뿐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성다움을 굳게 믿는 사람은 남성만이 아니다. 여성도 자신의 종속성과
남성의 우월성을 믿으며 강화시킨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남성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믿어 온 여성은 남자만큼이나 '모름지기
사내란 어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여성도 자립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신보다 키가 크고 학벌도 높은 남성을 택하려 하고, 남편의
사회적 지위는 아내보다 높아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아내가 직장에 나가는 부부가 있다면 어떻겠는가를
물었을 때 여성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실패할지도 모르고, 이 사회에서 아직은 남성이 유리하므로 남성이 든든한
안전 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성이 여성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문제는 그의
성공 여부와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남성 소설에서는 이기적이고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내몰아 버리는 아내가 자주 등장한다. 만화
블론디처럼 아내의 끝없는 요구를 채우기 위해 허덕이는 남성상은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 남성의 전형으로 떠오르고,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표현도 여성에게 쫓기는 듯한 남성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그
대신 그가 성공했을 때 남성은 가족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다. 부양자로서
누리는 권위와 지배의 매력은 남성을 경쟁의 세계에 빠지게 만드는
촉매이다. 이는 남성이 남성다움을 추구했을 때 얻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보상은 일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남성은 창의적인 세계에서 성공한다든가, 권력자가 되어
아름다움을 소유함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작은 키를 불만스럽게
여겼던 히틀러는 자신의 사진을 밑에서 올려 찍도록 명령할 수 있었고,
곱추였던 로트렉은 무희들의 그림을 그려 예술가로 성공했다. 지적 열등감이
심한 남성은 부로써 열등감을 보상할 수 있다. 돈으로 학위를 사고, 직함을
사서 권위를 치장하는 예는 드문 일도 아니다. 남성은 부와 성공, 학식과
지위 등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일종의 권력을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남성은 화가 나고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데,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텨
온 자신에게 보상이나 권력을 꿈꾼다는 말은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큰 것만이 권력은 아니다. 좁은 전철 의자에서 다리를 떡
벌려 앉고, 먼저 장난을 걸고, 성적인 농담을 건네고, 큰 소리로 말하고,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남자다. 집에서도 상석에 앉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어머니보다 먼저 배려되는 것은 아버지이다. 얼마 전 고3
자녀의 간식을 먹는다고 아내에게 눈총을 받은 아버지가 땅에 떨어진
아버지의 권위를 개탄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물론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이의 이기심을 조장한다는 면에서 그 아버지의 뜻은 공감하지만 지금까지
어머니는 한 번도 아이의 간식이나 남편의 보약을 먼저 먹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남성들은 자신의 우선권을 천부의 권리로
알았으므로 그 권리가 약간 손상됐다는 사실에 그토록 놀라움을 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우두머리가 훨씬 더 넓은 공간을 활보할 수
있고 먹이를 먼저 먹는다고 한다. 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펼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넓은 공간을 지니는
것이라고 할 때 남성은 확실히 여성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편하다"라는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누리는 이러한 권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힘들어도 여성이 되고 싶지 않은 반면에 여성은
흔히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한다. 개방 설문에서 극소수의 남성만이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이유도 남자의 삶이 힘들어서이지, 여자의 삶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부양자로서의 절대 권위도 점점 퇴색하고, 사회적 성공의 가능성도 잘
보이지 않아 오늘날 남성들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그 대안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외침에서부터
현실에 적응하여 요령껏 살자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남성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는 그들의 여성관에 잘 나타난다.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은
한쌍을 이루는 상대적인 의미로 형성되므로 전통적인 남성은 보수적인
여성관을, 실리적인 남성은 실리적인 여성관을 주장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남성의 성 역할 관념을 개방설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변화를 느끼는 남성의 대응
보수주의-권위형
권위형은 무너진 남성의 권위를 되찾고 강한 남자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유형이다. 이들이 바라는 여성상은 '마음씨 착하고 살림 잘 하고 어른
공경하고 자녀 잘 키우고 형제 친척과 원만하며 순종적인 여성'으로
나타났다. 봉건 시대의 부부 유별, 삼종 지도를 금과 옥조로 삼는 사내
대장부 콤플렉스의 전형으로 남성의 우월성을 천부의 권리로 인정한다.
초남성다움을 추구하는 이들 '사나이'들은 실제로는 불안한 성 정체감을
은폐하려는 사람이라고 한다. 즉 마음 속에 나약함을 숨기고 "나는 여자가
아니다""나는 아이가 아니다"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이런 남성은
자신의 부드러움이나 수동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경쟁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지적인 성취와 성적인 정복과 우월감에만 집착한다.
따라서 사회와 가정에서 항상 남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여성은
나약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을 권위주의자라 부를 수 있는데, 권위주의는 인습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거나 강자에게는 복종적이고 약자에게는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또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에 냉소적이고 자신의
그릇된 충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적 충동을
되돌아보는 일을 싫어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자주적,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 이러한 유형은 사회에서 강조되는 강한 남성상과 맞물려 있어서
가능하면 대부분 남성은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소망은
람보를 거쳐 터미네이터에 이르기까지 강한 남성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남아들이 여성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강인한 여성을 생물학적인
변종으로 의심하는 목소리를 돋운다. 그러나 이들은 남성이 터미네이터처럼
기계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기계화된 이들 남성은 큰 일에
부딪혔을 때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터미네이터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남성의 불행이다. 이러한 남성은 일에서 실패하거나 자신이 더 이상
부양자가 되지 못할 때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신보수주의-합리형
합리형은 맹목적으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집착하거나 성 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남녀
관계에서 기득권을 주장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흔히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서로 이해하며 살아 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지나치게 평등만을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 무너지고 혼란스럽게 되지 않을까요"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이러한 남성은 성별 문화를 양성간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로 생각하며, 음양론과 같은 양성 조화론을
근거로 삼는다. 이들이 원하는 여성상은 '상황에 잘 적응하고 의지가 있지만
순종적인 여성', '자기 생활을 하며 가정에 충실한 여성', '자신을
성숙시키고 주변과 조화시키는 여성', '적극적이고 편안한 사람'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변화를 수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조화를 위해선 남녀
차별이 당연하다고 믿으므로 가부장제 문화에서 길들여진 남성 본위적
사고를 마치 합리적인 사고인 양 착각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가부장적
지배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스럽다.
이러한 유형은 지식인이나 교육 수준이 높은 남성들이 많다. 의식적으로는
평등을 지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남성의 일이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남성이 문명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며, 그에 못지않게 여성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존경받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여성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여 자신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아내나 어머니 역할이
위태롭다면 일을 포기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들이 이혼하게
되거나 남편에게 어떠한 사고가 생겼을 때 여성의 권리는 거의 전무한
현실에 부딪힌다. 개인적으로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해도 항상
남성은 우월하다는 사회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남성은 경쟁적인 남성 사회에서 버텨 나가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는 아량을 보이랴 고된 만능인이 되기 쉽다. 성공도 하고 싶고
가족에게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아버지이고 싶지만 세상살이는 그리 만만치
않다. 탁아 문제로 아내와 부딪치고 야근으로 '공수표 아빠'라는 눈총을
받기 일쑤다. 진퇴양난인 상황에 '어떻게'라고 묻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한다.
신세대-실리형
실리주의형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성의 위치와 기득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이들은 '능력 있으나 튀지 않는 여성', '생활력 있고
적극적이지만 나만을 사랑하는 여성', '미모와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
'산소 같은 여자', '남자를 밀어 줄 수 있는 여자', '능력있고 집안 좋은
여자'를 원한다. 주로 신세대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전통과 현대의 여성상
양쪽에서 남성에게 유리한 것들만을 최대한 취하려는 유형이다. "집에서
밥만 하는 여자는 싫다"는 대답처럼 이들의 생각에서는 "남자는...",
"여자는..." 하는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이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하고, 자기 개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신세대의 실리주의는 장점을 가지고
있고 다가올 후기 산업 사회에 적합한 인간 모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변화된 의식이 남성다움을 진지하게 고민한 어떤 해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8--25세를 대상으로 한 의식 조사에서 이들의 가치관이 물질 만능, 성취
지향에 젖어 있다는 결과를 보면, 다양성이나 개성이 이기심의 포장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성공의 척도이다"라는 문항에
72%가 동의했으며, "일하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것"에 80%, "목적을
위해서는 편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에 61%,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에 83%가 그렇다는 응답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선택은 뭐가
옳은지 알 수도 없는 세상살이, 그저 쉽고 편한 게 좋은것이라는 편리한
선택이기 쉽다.
최근 급증하는 온달형 남성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고 이기적인 여성과 만났을 때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여성도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자기 편의 대로 남성상을 빚어내므로
이들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이혼율의 증가, 혼수 문제로 인한 싸움 등 남녀
관계가 심각한 혼란을 빚는 것도 이때문이다.

변화의 가능성
우리는 현대 남성이 선택하는 여러 남성상을 살피면서 이상적으로 믿고
있던 남성상, 즉 부양자와 가장으로서 독립성, 냉철함, 능력, 힘, 책임감,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는 신념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실제 남성은 기존의 이상과 부딪치면서 권위와 실리 사이에서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한다. 권위와 실리의 간격이 커질수록 다양한 남성상이 나타나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남성다움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성들은 남성다움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다.
80년대 들어 서구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여성에게 호의적이고 남자답지
못한 남성을 '물렁한 놈(wimp)'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새로이 생겨났다.
우리 사회에서 '애처가'나 '공처가'라는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남편은 하늘이요, 아내는 땅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부부 관계를 중시해 온
우리 나라에서는 아내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남편을 남자답지 못하다는
의미로 '애처가'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요즈음에 여러가지 변화 속에서
'애처가'는 모범적인 남편이라는 의미로 바뀌었지만, 그보다 더 물렁하게
아내 앞에서 쩔쩔매는 남편을 가리켜 '경처가'(아내 앞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남편)라고 부르는 등 신조어를 계속 만들어 내면서 남자답지 못하게 변하는
남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남성다움에 대한 구시대의 기준이 어느
선까지 유지되는지, 새롭게 허용되는 것은 어느 정도인지를 구분시켜 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남성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남성의 위기를 느낄수록, 남성다움이라는 틀이 남녀 모두의 삶을 얽매는
갑옷이 아닌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성과 함께
대화하려는 열린 남성이 등장하고 새로운 남성다움을 모색하는 서적과 대중
매체, 가족의 요구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기업들의 움직임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열린 남성이 등장한다
하루 아침에 자신이 살아 온 역사를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남성들은 새로운 남성상의 등장을 예고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신의 상황을 함께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남성이 생기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이들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다른 성장 과정을 거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음을 인식하며
평등을 가장하는 남성의 내면에는 사내 대장부의 우월감이, 자립을 주장하는
여성의 내면에는 신데렐라의 의존심이 숨겨져 있어서 쉽사리 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 때문에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억눌린 삶을
살았다는 김재형씨는 "나는 어릴 때 내가 남자로 태어난 걸 엄청난 행운으로
여겼다. 여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내가 여자가 아닌 데 대해 쾌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철이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로 태어난 건 결코 행운이 아니며,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운은 더욱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차피 운명에 따라 정해진 성이므로 모든
면에서 동등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 아버지의 부성적 체험담도 가족 속에 참여하는 남성이 느끼는 새로운
삶을 제시해 준다.
(내가 이 세상에서 두 아이들을 만나게 된 이후 내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따금 생각하게 된다. 이 아이들로 해서 내가 분만 때에 겪은 두
번의 병원 체험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원 방문 때문에 빼앗긴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아내와 나는 우리들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졌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나의 생활을 더 진지하게 살게
되었다. 그들은 항상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아서 내가 의식하든 안하든 그들은
내 속에서 나를 지켜 주었다. )
직접 육아를 담당했던 그는 아이들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더 진지해졌다고 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가족 회의를 실천하는
아버지들의 모임'은 '돈버는 사람'으로만 인식되는 아버지의 자리 찾기를
시작하고 흩어져 버린 가족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그 외에도
'부자 모임'이나 '아버지 참관의 날', '아버지 교실', '부자 캠프' 등의
모임에서 그 동안 침묵 속에서 가족과 멀어졌던 남성의 자리 찾기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움직임들은 아직 방향 찾기의 출발선에
놓여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며 그림 동화
작가인 강우현 씨는 한 신문기사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이렇게 말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도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좋은
아버지니까 좋은 남편이기도 하겠군요." 하지만 나는 아직 새로운 답변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좀 다른 모양입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허허." 좋은 아버지와
좋은 남편, 언뜻 생각해 보면 개념은 비슷한데 양립하기가 어쩐지 쑥스러운
단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쑥스러운 모순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이 말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쌍두마차처럼
남녀의 분리된 역할과 경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려는 운동이 자녀 양육이라는 부부 공동의
관심사에서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남녀 관계를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아버지 찾기를 현재 남성이 겪는 혼란과 피해
의식의 대안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시작되고 있는 아버지
모임이 남성 해방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기득권을 포기하고 경쟁과 성공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직장과 가족 사이에서 늘
긴장하는 만능인 콤플렉스만 더욱 깊어질 것이다.
사회가 변하고 있다
'고독한 아버지' 이미지는 산업 사회의 아버지상이었고 남성다움의
신화이기도 했다. 고독은 성공의 대가이며 남성의 운명이었다. 일만이
남자를 증명하는 길이며, 성공은 최고의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신념이 바뀌지 않는다면 '가족 속에서의 자리 찾기'는 오히려 가사와
직장일을 모두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될 뿐이다.
남성이 남성다움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의 세계에서 "남성만이
완벽한 사회적 노동력이다"라는 논리가 바뀌어야 한다. 한 남성이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집안일에 참여하고자 해도 사회가 남성을 이윤 전쟁의 전사로
여긴다면 불가능하다. 아이의 출산이나 육아에 참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여건에서 개인의 노력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몇몇 기업에서는 가족으로부터의 고립을 원하지 않는 남성의 요구에
부응하여 약간의 변화를 시도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배우자 출산시
휴가를 주는 회사는 인천의 기일 전자, 마산, 창원 지역의 동경 전자, 한국
웨스트, 한국 동광 등으로 출산시 1일 또는 2일이 휴가와 약간의 수당을
지급한다. 대우와 신탁은행은 결혼 기념일 휴가를, 삼성은 가정의 날을
지정하여 일찍 귀가하는 제도를, 금성은 격주간 휴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핵가족화되는 현실에서 아버지 부재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기업이 시혜적으로 실시하는 약간의
변화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유럽 국가에서는 부부의 출산 휴가 제도가 시행되며, 남녀가 공동으로 가정
경제를 담당하고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탁아 제도가 보장되어 있다. 남녀가
함께 생산과 재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은 새로운 남녀 관계의
전제 조건이 된다.
요즘 서점가에서는 남성 해방 관련 서적이 중년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 책들은 주로 남성은 강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는 주제의 책과 남성용 육아 서적으로,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아내에게 비난받고 아이들에게 불신당하는 현대
남성들에게 바친다"는 연민의 시선에서부터 "가부장제를 극복하자"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감과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남성 독자들이 사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이러한 책들은 우리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 다른 시작
우리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남성다움이 변해 왔고 오늘날 또 다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지금까지의 변화는 아직 한계가 많은
것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면 앞으로의 남성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할아버지의 부엌"은 팔순 할아버지의 홀로서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본
재미있는 책이다. 아내가 죽고 갑자기 홀로 살게 된 이 할아버지는 낯선
주부의 세계에 힘겹게 들어서는데, 그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체험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볼 수 있다. 그는 건강을 위한 일, 꽃과 열매를 맺는 화단
가꾸기는 잘 해내지만 목적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 청소나 빨래 같은
자질구레한 일에는 도무지 적응하지 못한다. 가치 중심적이고 성취
지향적으로 살아 왔던 이 남성에게 그 외의 생활은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은 눈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여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고 배웠다. 남성이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한 '새로운
남성상' 역시 또다시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될 우려도 있다. 새로운
남성상의 대안이 성취의 대상으로 매력을 갖지 못한다면, 보통쟉생할 용기는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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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는 봉?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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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잎 이로 보아 일터와 가정에서 모두 성공하고 싶은 만능인의 꿈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 처한
직장이나 업무 현실, 그리고 성별 분업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남성의 갈등은 깊어진다. 많은 남성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목적을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파렐은 직업에 헌신적인 남성일수록
가족들에게서 소외되어 있다고 하였다. 직업을 통해 남성의 소득이 많아지고
지위가 오르는 것은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요소인 동시에
직업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가정에 쏟은 것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정과 직장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는 면을 보인다. 전문직, 관리직 남성은 승진을 통해 유능하고
모범적인 가장으로 보이지만 책임이 부과되는 업무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하므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육체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더 많은 수입을 위해 야근이나 교대 근무 등을
하다 보면 가족을 등한시하게 된다. 그래서 어렵게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는 남성은 시간이 많이 드는 가사 활동이나 양육에는 그리 깊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자녀의 공부나 학교 생활, 취미에는 될수록 관심을 보여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시키고자 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곧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잃어버린 자아를 확인하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은 가정에서 여가 비용을 마련하고 좋은 아버지 역할을 함으로써
남성다움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이미
여성 영역으로 굳어진 가정에서 남성은 가정의 지배자로 만족감을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이 가정에서 남성다움을 확인하려는 만능인의 한계이다.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
포커에서는 올 어라운드 맨(all around man)이나 올 마이티 맨(all mighty
man), 농구에서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all round player)라고 하여 전천후
인물을 가리키는 말들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만능인의 신화는 포커, 스포츠 등 놀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설문 조사에서 "나는 직장, 가정, 스포츠, 취미활동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95.2%로 나타났다.
직장과 가정에서 인정받는 이상형을 추구하는 남성은 스포츠나 취미 활동
등에서도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때로는 직장과 가정에서 만족할 수 없는
남성이 여가 활동에 더욱 몰입하기도 한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 결과
무엇이든 잘하고 싶어하는 남성은 26세에서 30세(97%)가, 그리고 미혼
남성(95%)이 다른 연령대(41세 이상:89.7%)나 기혼자(93.4%)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여가 자체가 젊은이 위주로 이루어져 있고 가정에서 부양자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미혼자가 더욱 더 여가에 매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업무상 혹은 개인적으로 갖는 술자리나 회합에서
남성만의 세계를 만끽하기도 하고, 남성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격렬한
스포츠나 취미를 통해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남성들만의 격리된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놀이를 개발해
남성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한다. 이런 남성들은 일만 하고 가정만 챙기는
남성을 경멸한다. 진짜 남성이라면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가 활동 중 스포츠는 남녀의 성 역할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수렵 시대 이후 입증할 기회가 거의 없는 남성의 신체적 용맹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이 되었고, 80년대 초 프로 야구를 시작으로 프로 씨름,
프로 축구 등이 생겨나서 남성들의 불안한 정체성을 다잡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 참여하든 수동적으로 관람을 하든, 자신이 남성임을 확인하며,
구호나 기합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발산시키고 남성끼리 유대를 다지기도
한다. 경기를 보다가 실수를 한 선수에게 "저 병신, 그것도 못해?"하고
소리치면서 남성은 평소 억제했던 감정을 유감 없이 표출한다.
남성들이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축구가 전통적으로 남자다운
기질로 여겨온 거칠고 공격적인 힘을 드러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
몰두하는 동안은 자신이 처한 무력하고 불안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내 보여서는 안 되는 남성 세계에서 술은 긴장을 풀어 주는 특성
때문에 업무상의 교제를 위한 도구로, 희노애락을 발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남성들은 술기운을 빌어 자신의 내부에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술을 마시면
소원하고 서먹서먹한 관계도 금방 부드러워지고 바이어 접대나 사업상의
교제나 업무를 원활히 하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정보가 오가기 때문이다. 또
술기운에 감정적인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골치 아픈 일상사를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군대 경력과 함께 술은 남성만의 공통
요소로, 술좌석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자리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폭탄주와 2차, 3차로 이어지는
음주 문화에서는 먼저 일어나면 '분위기 깬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자리를 털고 갈 수도 없다. 게다가 다음날 출근을 늦게 하면 출세에
감점이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란 친밀을 가장한 비방이나 유언 비어,
음담 패설로 이어지고 대부분 당구장이나 고스톱, 포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왕이면 따야 하는 부담감에다가, 당구장에 가도 진 사람이 돈을
내니 이겨야 한다. 그럴 때 잡기에 능한 사람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대개 남성의 여가는 직업에서의 경쟁적 가치가 그대로 적용되어, 곧 일을
더 잘 하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충전으로 생각한다. '퇴근후 한잔'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호프나 소주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나 업무상의 교제를
위한 술자리, 그리고 테니스 라켓이나 헬스 기구를 사들이는 충동적인 장비
구매가 그러하다. 낚싯대나 골프채, 테니스 라켓 등을 사들임으로서 남보다
열심히 산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소득 수준에 따라 여가 양식도 다양해져, 60년대에 바캉스, 테니스,
텔레비젼 등이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효과를 내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자가용, 스키, 골프, 콘도미니엄, 해외 여행이 이를 대신하였다. 여가
생활에는 돈이 들게 마련이고 또 자유 시간을 갖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인 계층이 나뉘고 성공 수준이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장시간 심한 노동을 하고 최저 임금을 받는 이들은 시간을 내기
어려워 여가에서도 소외된다. 그래서 하층 계급은 비용이 많이 드는 개인
운동보다는 축구나 농구 등 주로 집단 운동을 통해 신체적인 긴장을 풀고
동료애를 다독이고, 상층 계급은 여가 생활로 주로 조깅이나 테니스, 골프
등 개인 운동을 한다.
이렇듯 남성의 여가는 오락과 휴식, 업무가 병행되는 남성끼리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여가는 가지
계발과 자기 완성, 자아 실현을 위해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일의 연장으로서 쫓기듯이 여가를 즐기거나 돈이 없어 아예
꿈도 못 꾸는 경우, 그리고 끊임없이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여가는 더이상 휴식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요새 웬만한 사람이면 승용차에 콘도 회원권과 스키, 골프채 정도 있는
것이 보통이라 우리 같은 사람은 소외감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돈 없으면
갈 만한 곳도 별로 없다. 자연 농원이나 롯데월드 같은 곳에 입장료내고
들어가도 놀이감들은 모두 따로 돈을 내야 하니...(45세, 회사원))
노동자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자는 게 남는 거'라는 표현이 있다.
이 짧은 말 안에 그들이 처해 있는 시간과 돈의 제약이 그대로 생활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휴일날요? 잡니다. 특근 없는 것만도 다행이죠. 자다가 깨서 밥 먹고
텔레비젼 보다가 또 자고... 결혼한 지 3년짼데 마누라 눈치 보여도
어떡합니까. 모른 척하고 잡니다. 그래야 또 일 나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움직이면 돈 들어요. 그렇게 참고 참다가 월급날 한
번 때려먹고 기분 나면 흔드는 데까지 갔다가... 또 마찬가지죠.)
남성에게 여가는 휴식이 되지 못한다. 생계부양자로 일을 해야만 했던
남성들은 일에서 손을 놓거나 노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계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남성들은 여가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쉴 수가 없다. 오히려 여가에서마저 이상적인 남성다움을 추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가는 구체적으로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에
이 둘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 남성들에게는 여가를 통해 만능인이 되려는
꿈은 요원할 뿐이다.
만능인이 설 곳은 어디인가
만능인은 후기 산업 사회에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남성이 만능인이 되기는 쉽지 않다. 돈과 시간과 정력과
힘을 지니고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유능하면서도 가정적인 가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만능인, 그러나 그 이상이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갈등과 불안을 안겨 준다.
현대 사회는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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