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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현
발행처: 두산 동아
(이끄는 글)
병자년 십이월
북한산 아래에서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허울좋은 반만년 역사
4. 외래사상에 흔들렸던 세 나라
(전통사상을 버리고 수입사상에 의존한 삼국의 집권층)
외래문화의 수입
서양 문명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 아시아인들은 깊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분명 자기 고유의 문화가 있었지만, 새로 밀려온 서양문명은 그
고유 문화를 파괴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서양 문명을 배척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실용적인 측면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중국인들은 "중국적인 뿌리에 서양의
쓰임새를 결합하자"고 했고, 일본인들은 "일본의 혼과 서양의 재능을
결합시키자"고 했으며, 조선인들은 "동양적 원리에 서양문화의 기능을
결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루한 삼국시대에서 각 나라가 유학과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보여준 입장도 아마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불교를 수입할 때, 그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유학에 비해 불교는
전통문화와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기마종족의 한 갈래인 은나라 유민들이 주도한 사상이었지만,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탄생시킨 문화적 배경은 우리 겨레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유학도 중국 한족이 세운 주나라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기마종족 고유의 문화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즉
유학은 여전히 기마종족 문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기마종족 문화의
제사장적 측면을 줄이고 지식인적 기능을 늘린 것이었다.
우리 겨레는 유학은 전통문화와 특별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한자도 원래부터 동아시아의 공용어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외래문화라는
의식조차 없이 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는 유학과 다른 조건에서 우리 겨레와 만나게 되었다. 설령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불교의 창시자들도 우리 겨레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맺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의 사상적 내용성은 기마종족의
문화적 취향과 크게 다른 것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비록 중국이 먼저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경전을 한자로 옮겼으며,
삼국 각 나라는 한자로 된 경전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는 데 근본적인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들이 그것을 일러 어떤 이는 큰 밧줄이라 하고 다른
이는 큰 기둥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큰 부채 같다고 했듯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큰 사상은 현상적으로 다르게 표현될 뿐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문화적 배경에 따라 표현의
방법과 양식 및 그 깊이가 달라, 그 깊은 곳에 이르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차이를 둘러싸고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기마종족의 전통문화와
불교사상도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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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공인과 도입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
봉쇄되는 대륙진출로
'해동'이라는 말
두 개의 천리장성
9. 두 얼굴의 과거제도
(획일적인 인재 양성)
사람을 뽑아 쓰는 일
묘청의 정체
고문운동과 중국 르네상스
작은 섬의 큰 사건
한글은 어디에서부터
금서목록
나침반 없는 나라
'현대'라는 의미
한자와 한글
두 부류의 부자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