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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작은 지식상자

장애학, Why & What?

쿨하지 못해 미안 통계
2018. 5. 5. 12:59 ・ 이웃

안녕하세요, 『 비마이너 』 발행인 김도현입니다. 공식적인 지면을 통해 처음


인사를 드립니다. 『비마이너』를 아껴주시고 자주 방문해 주시는 애독자들께
서는 홈페이지 하단에 표기된 ‘편집인’과 ‘발행인’의 이름이 어느 순간 변경되
었다는 걸 혹시 인지하고 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2015년부터 김유미 기
자와 제가 각각 새롭게 편집인과 발행인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비마이너』는 발로 뛰며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의 자치적인 논의를 통


해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며, 저는 그저 이름만 올려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렇지만 발행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나니, 『비마이너』의 운영과 발전을 위
해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구성원들의 요구와 정당한 압박(?)으
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있는 장애학의


내용을 정리해서 독자 여러분들과 공유하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
었습니다. 사실 이후 연재될 내용에 대해 장기적인 밑그림을 그려놓은 상태
는 아닙니다. 또 한 명의 현장활동가로서 이런 저런 일들에 관여를 하다 보
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한정되어 있기도 합
니다.

하지만 어쭙잖은 내용이나마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라는 비판적 학문의


성찰과 고민을 이 연재 꼭지를 통해 함께 나누고, 그러한 과정이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비마이너』가 새롭게 접속하는 계기로 이어진다면 참 많이
기쁠 것 같습니다.

『비마이너』의 식구들은 저를 ‘김발’(김 씨 발행인의 줄임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번 연재의 타이틀은 그냥 ‘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로 잡아 보았습
니다. ‘김발’이라는 애칭이 친근하게 느껴져 마음에 들기도 했고, ‘연구노트’라
는 단어는 결코 완성된 무엇이 아닐 저의 글들에 대한 얼마간의 변명거리가
되어주지 않을까하는 얕은 계산도 있었습니다.

우선 연재의 시작은 장애학이 왜 필요하며 어떤 학문인지를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을
0 하려 합니다(장애학, Why & What?). 이어서 현재 노들장애인야학에
서 ‘노들 인문학 세미나: 책 읽는 수요일’이라는 타이틀 아래 진행 중인 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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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優生學, eugenics) 관련 세미나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보완하고 제 자신
의 고민을 덧붙여서 기술을 해볼 예정입니다(우생주의의 역사와 생명권력 시
대의 장애). 그 다음으로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정의론을 장애 정치의 시선으로 읽어보는 작
업을 시도해 볼까 합니다(프레이저의 정의론과 장애 정치).

이후에는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루게 될지, 혹은 연재 자체가 이어질 수 있을


지 아직은 미확정의 상태에 있기는 합니다만, 독자 여러분들과 소통하고 고
민을 나누면서 힘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연재
글을 통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이제 만 5살이 된 『비마이너』가 앞으로의 5년, 10년도 진보적 장애인언론으
로서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분들이 ‘1천 인의 마이너’에 동참
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존의 장애 관련 학문에는 장애인의 삶이 담겨 있는가

이번 글에서는 우선 제가 어떤 계기를 통해 장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왜


장애학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를 개인적인 경험 두 가지를 통해 설명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74년생 범띠인데요, 제 또래들보다는 조금 늦게 96학번으로 단국대


학교 특수교육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의 갈등이 좀 심
했고, 그래서 아예 집을 나와 3년 정도 학습지 외판원, 환경미화원, 호프집 주
방일 등을 하며 완전한 독립을 위한 자금과 학비를 모았거든요. 나름 어렵게
원했던 학과에 들어갔기 때문에 초기에는 특수교육이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의욕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학과 소모임에서 선배들과 세


미나를 하나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거기서 무척 충격적인 사실을 한 가지 접
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나라 장애인 두 명 중 한 명이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이하라는 것, 그러니까 학교를 아예 안 다녔거나, 초등학교를 다니
다가 그만두었거나, 초등학교까지만 다닌 장애인이 전체 장애인의 절반을 차
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최근 자료를 살펴봐도 이러한
현실은 크게 변함이 없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 펴낸 『 2011년 장애인실태조
사』에 따르면 지금도 전체 장애인 중 44.7%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저는 당시엔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된 지 오래고 세계적으로도 교육열이
높기로
0
유명해서,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보면 초등학교 취학률이 99%가 넘
고, 초등학교 졸업생의 99% 이상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 졸업생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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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상이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그리고 그 고등학교 졸업생 4명 중 3
명은 대학에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은 절반이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이하라고 하니 납득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통계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 의
심도 했지요. 이미 제 세대만 해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등학교 정도까지 다
니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 이후 수업을 듣고 학교생활을 계속해 가면서 조금은 이상하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적인 장애인 교육의 현실에 대해, 왜
그런 현실이 발생하고 유지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어떤 함의
를 갖는지에 대해, 제가 대학을 다니며 특수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샀던 수십
권의 책 속에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록 40명 정원 중 끝에서 두 번째의 성적으로 졸업을 할 만큼 공부를


제대로 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교재는 꼬박 꼬박 다 샀는데 말입니다. 교재
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들 중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 무언가 문제의식을 느끼
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들 속에는 장애인의 ‘삶’이 담겨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장애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장애와 관련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가게 되는 학과가 크게 세 군데가 있습니다. 흔히 장애 관련
3대 학과라고 해서 특수교육과, 재활학과, 사회복지학과를 꼽지요. 장애 관련
정책을 다루는 토론회에 나오는 소위 ‘전문가’도 대부분 이런 학과의 교수들
이거나 전공자들이고요. 그런데 과연 그런 학문들에 장애인들의 삶이 녹아들
어가 있는 것인가, 그런 학문을 배우면 장애문제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인가,
즉 기성의 장애 관련 학문들이 장애문제를 진정성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해 얼마간 회의감을 느끼고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류 공론장과 담론에는 장애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가

어쨌든 저는 이런 저런 계기로 인해 학과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데


모만 열심히 하다가 4학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바다복지회 비
리재단 퇴진 투쟁 때 알게 된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 선생님의 꼬임에
넘어가 연봉 600만 원에 스카우트가 되어, 2학기 때부터는 아예 학교에도 나
가지 않고 노들야학의 첫 상근교사 겸 사무국장으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가 2000년 8월이지요.

그리고
0
2001년 2월에 오이도역에서 발생한 장애인용 수직형 리프트 추락 참
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부활을 알린 이동권 투쟁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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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당시에는 장애인운동의 상황이 매우 열악해서 현장 투쟁을 이끌 만
한 제대로 된 장애인운동 단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운동단체도
아닌 노들야학이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간사 단체를 맡게 되었고, 노들야학의
유일한 상근자였던 저는 좋으나 싫으나 이동권 투쟁에 실무자로서 열심히 참
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지하철 선로 점거, 버스 점거, 도로 점거 등 점거를 참 많이도 해


서 시민들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장애인이동권연대에 함께했던 다른
사회운동단체의 활동가들도 사실 조금 우려 섞인 조언을 하곤 했지요. 우리
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고 힘 있게 투쟁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전술이 반
복되다 보면 여론의 악화 등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
러나 그때마다 박경석 교장선생님은 “야, 욕을 바가지로 먹든 한 트럭을 먹
든, 욕을 더 많이 먹어서라도 우리 문제가 「100분토론」에 한 번 나와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더 열심히 점거 투쟁을
조직하셨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동권 투쟁 이후 우리나라의 장애인 대중들은 자신


들의 억눌렸던 요구를 폭발적으로 쏟아내며 수없이 많은 투쟁을 벌여왔고,
또 일정한 성과들도 만들어 왔습니다. 굵직굵직한 것만 몇 가지 언급해 보더
라도, 2005년에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되었고, 2007년에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내는 것과 더불어 활동보조서비스(현 활동지원서비스)의 전
국적 시행을 일구어 냈습니다.

또한 기만적인 형태로나마 2010년에 「장애인연금법」이 제정되었고, 2011년


과 2014년에는 각각 「장애아동복지지원법」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
원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12년 8월부터 시작된 장애등
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에서의 농성은 현재까지 무려 1,000일
가까이 지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을
해보니 2001년에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그 소원이 14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이루어지지를 않았더라고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우리나라의 KBS, MBC, SBS 3개 지상파 방송사는 각각


「심야토론」, 「100분토론」, 「시사토론」 1) 과 같은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을
다 하나씩 운영해 오지 않습니까. 이런 토론 프로그램들은 우리 사회에서 매
우 영향력이 큰 대표적인 공론장(public sphere)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여
기서는 ‘함께’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선별해서 매주 한 차례씩 토론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그런 프
로그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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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문제를 가지고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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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프로그램들이 다룬 2천개가량의 이슈들 중 장애문제는


단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다.

3개 방송사에 1년이 52주이니 지난 14년간 대략 2천개가량의 이슈가 다루어


진 것인데, 그 수많은 이슈들 중 장애문제는 단 한 번 낄 자리가 없었던 것입
니다. 장애인들이 잠잠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시기도 아니고, 그들의 울분
과 요구와 목소리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터져 나왔으며 굵직
한 이슈도 셀 수 없이 많았던 지난 14년 동안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류적 공
론장에서 장애문제란 ‘함께’ 해결해야할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따로’ 처리
되면 그만인 ‘너희(타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사실 소위 시민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주요 학술행사나


토론행사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공론장에서도 장애는 함께
공유하고 논의해야 할 무엇으로서 좀처럼 초대를 받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
의 장애인들은 무수히 많은 말들을 해왔지만, 어떤 면에서 그러한 말들은 좀
처럼 사회화되지 않았고 담론화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굳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같은 학자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과 담론이라고 하는 것이 권력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힘 있는 자들의 말은 또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고 담론의 체계 내에서 증폭되고 재해석 되며 의미를 획득해
갑니다. 그러나 권력을 박탈당해온(disempowered) 존재인 장애인들의 말은,
그 치열한 목소리들의 대부분은, 이 사회를 향해 내뱉어진 뒤 날 것의 말 그
대로 소멸되어 갔던 것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장애학에 대한 영어 표기는 ‘Disability Studies’입니다. 우리


말로 직역을 하자면 ‘장애 연구’로도 옮길 수 있겠지요. ‘Culture Studies’가
‘문화 연구’로 옮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 ‘장애’에 대해 ‘연구’를 하는 학문은 장애학 말고도 많이 존재를
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학․특수교육학 등을
들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학문들과 장애학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살펴보면 장애학이란 어떤 학문인지도 대략 파악을 해볼 수가 있
을 것 같습니다.

2009년에 출간된 졸저 『장애학 함께 읽기』에서 저는 장애를 다뤄 왔던 기존


의 학문들과 비교하여 장애학이 지닌 차이점을 ①사회 문제로서의 장애에 대
한 연구 ②학제적 연구 ③차별 철폐와 권리 확보를 향한 실천지향성 ④해방
적 0 연구 접근법의 4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이
어떤 정답은 아니고, 추가적으로 다른 중요한 특징과 차이점도 이야기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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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장애학이 어떤 학문인가를 파악하는데 있어 ‘사회적(social)’, ‘학제


적(interdisciplinary)’, ‘실천지향적(praxis-oriented)’, ‘해방적(emancipatory)’이
라는 키워드는 여전히 나름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미나 프
로그램의 진행을 위해 쓰인 그 책에서는 이 내용이 조금 건조하고 딱딱하게
서술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여기서 이 4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장애학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키워드1: 사회적

2000년대 후반부터 장애학 서적이 조금씩 번역되어 출간이 이루어지고 있


고, 또 외국에서 장애학을 공부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생겨나면서 관련 논문
들이 학술지에 기고도 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에서 한글로 접할 수 있는 장
애학 관련 텍스트는 양적으로 매우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나
마 외국의 장애학 저널이나 단행본을 뒤적이게 되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어로 쓰인 장애학 문헌들을 보다보면 참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
데, 그게 바로 ‘social’입니다.

장애학 관련 텍스트에서 이처럼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


은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들이 장애를 이와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
음을 함의합니다. ‘사회적’의 반대말이 뭐지요? ‘개별적(individual)’ 혹은 ‘개
인적(personal)’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즉,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
학․특수교육학 등의 학문이 장애를 연구해 왔지만, 그러한 학문들은 장애를
개별적․개인적인 문제로서 다루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학이 성립하
던 시기 장애학의 개척자들은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들이 ‘개별적 장애모델(i
ndividual model of disability)’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을 하면서 ‘사회적 장애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을 주창하게 됩니다.

장애학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사회적 장애모델을 정립한 영국의 장애학자


들을 비롯한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장애인을 표기할 때 ‘disabled people(혹
은 the disabled)’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영어권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던 장애인에 대한 공식 용어
는 ‘disabled people’입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는 장애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소위 ‘피플 퍼스트(people first)’라는 지향에 입각해서 사람을 앞쪽에 내세운
‘people with disabilities’가 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와
뉘앙스를 지닌 ‘disabled/disability’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physicall
y[mentally] challenged people’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최근에는 ‘differently a
bled
0
people’과 같은 완곡어법도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자는 ‘신체적[정
신적]으로 도전을 겪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이고, 후자는 ‘다른 능력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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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지요.
 

▲ 개인이 적응을 해야 하는가, ‘할 수 없게 만드는(disabling)’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그런데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disabled people’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은
이 용어가 무언가를 드러내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게 된(disable
d)’이라는 수동태의 표현은 이미 그 맞은편에 ‘할 수 없게 만드는(disabling)’
작용을 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장애인들
은 그들 자체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할 수 없게 만들어진 존
재라는 것이고, 이처럼 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
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disabled people’을 완전히 풀어서 표현하자면
‘people disabled by society’가 되는 것이지요.1)

결국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disabled peop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disabling society’를 염두에 둔 것이고, 장애학에서 연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이처럼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원인이 장애인의 몸(손상)이 아닌 사회에
있다고 보니까요. 영국의 오픈 유니버시티(Open University)에서 1975년에
최초로 개설되었던 장애학 과정은 1994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두 번에 걸쳐
프로그램이 갱신되는데, ‘disabling society’는 바로 그 최종 프로그램의 타이
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애학도 오로지 사회만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도 다룹니다.


그렇지만 이때의 장애인은 개별화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이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파악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장
애인이지요. 요컨대 장애학은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내는
‘사회’를 다루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을 다룹니다. 그러니 ‘사회적’이
라는 단어가 장애학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키워드2: 학제적

다른 나라들에서도 장애학이라는 학문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신생 학문에


속하기 때문에, 장애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외국의 대학이나 장애학을 연
구하는 기관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장애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 소개를 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개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장
애학은 학제적인 연구 분야라는 것입니다.

‘학제적’이라는
0
단어가 낯선 분들도 계실 텐데요, 그 의미는 ‘국제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제적으로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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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누군가가 국가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그러한
경계들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는 것을 뜻하지요. 장애학이 학제적
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장애학이 기존에 존재하는 여러 분과학문들의 경계
에 얽매이지 않고 장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역사학․철
학․인류학․사회학․정치학․정치경제학․사회정책학과 같은 여러 인문사회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연과학의 경계들까지도 넘나들면서 말이지요.
 

▲ 장애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분과 학문의 유기적 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장애학의 학제적 특성이 강조되는 이유가 장애학은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여러분, 이 세상에는 굉
장히 많은 학문들이 존재하는데요, 그러한 학문들은 다 왜 존재를 합니까?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고 성찰하고 해결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장애인도 인간이지요. 그럼
장애인이 맞닥뜨리는 장애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그런 학문들이 당연히 필
요한 것 아닐까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문제는 의료․재활의 문제나 복지의 문제로만 다


루어져 왔습니다. 장애문제를 해결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면 다 보건복지부로
가라고 떠밀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를 찾아가니까 장애문제를 가지고 왜 여기로 오냐, 보건복지부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장애문제는 ‘철학적’ 문
제이기도 하고,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고,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고, ‘경제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러
한 모든 학문들이 장애문제를 제대로 연구하고 해결하는 데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억압을 하고
회피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즉, 장애학이 학제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장애문제가 총체적 성격을 지니


며, 인간이 지닌 다양한 보편적 문제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루되어 있음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란 인간 일반의 문제에
부차적으로 덧붙여져 다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적대와
차이, 공동체라는 문제에 있어 회피될 수 없는 무엇이며, 그것들을 온전히 해
명하기 위한 하나의 키워드 내지 매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난 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기존의 장애 관련 학문에서는 장애인의 삶이 배


제되거나
0 왜곡되어 왔으며, 주류 공론장 및 담론에서도 장애인의 목소리가
철저히 배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의 답답함과 서운함을 가라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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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고 조금 냉정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원인을 단선적으로
장애인 공동체 외부와 상대방에게서만 찾을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애인들의 날 것의 말과 몸짓을 ‘현장’에서 ‘직접’ 소통할 수 없는 무수히 많


은 이 사회의 ‘상대방’들과 공간성 및 시간성의 제약을 뛰어 넘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물이 필요한 건 아닐까, ‘아’라고 했는데 ‘어’라고 듣지
않도록 일정한 리듬 및 코드에 맞춰 소통을 가능케 하는 공동성 자체를 증대
시킬 기제가 마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도 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저 자신도 에바다 투쟁을 통해 장애인운동과 접속하기 전까지는 장애인
을 타자화시켜 바라보았고, 그들을 위해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특수교
육과에 진학했던 무지한 비장애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결국 장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지는 연재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가 되겠지만, 장애학은 기본적으
로 장애에 대한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운동을 실천
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이자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무엇이며
사회과학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인
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요. 또 운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
대’를 해소하고 ‘차이’를 화해시키는 것을 통해 더 나은 ‘공동체(commune)’를
구성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인간, 사회, 적대와 차이, 공동체라는 문제에 있어 장애가 회피될 수 없


는 무엇이라고, 아니 그것들을 온전히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키워드 내지 매
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인위적
으로 형성된 장애라는 범주는, 그러한 범주를 다룰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음
으로써 장애를 억압하는 또 하나의 기제로 기능했던 의학과 재활학, 특수교
육과 사회복지라는 협소한 틀 내에서는 결코 정당하고 올바르게 다루어질 수
가 없다는 것이지요.
 

▲ (사진 왼쪽: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가 미래의 국가 형태


를 생각했을 때 그는 ‘비국가’, 요컨대 자신의 소멸을 산출하
는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에 대해 말했다는 것을 상기합시다.
똑같은 것을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탐구한 것은 ‘비철학’, 그 이론적 헤게모니 기능이 철학의 새
로운 존재 형태들에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소멸할 ‘비철학’입
니다.”(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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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오른쪽: 고병권) “나는 ‘철학’을 묻는 질문을 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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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 그것을 ‘철학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곤 한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
한 행함이다.”(고병권, 『살아가겠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
의 철학을 본다」 중에서)
 
형식화된 텍스트로서의 철학은 거의 생산하지 않았지만 철학이라는 장( 場 )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철학의 무대인 세계를 변화시켰던, 그리하여 또
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칼 맑스(Karl Marx)를 염두에 두면
서,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비(非)철학
으로서의 철학’ 내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조금 상이
한 맥락이기는 하지만 형식화된 철학 텍스트의 생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
는 ‘비철학자로서의 철학자’ 고병권은 “나는 ‘철학’을 묻는 질문을 접할 때마
다 그것을 ‘철학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곤 한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
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장애학 역시 장애학이라는 장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으로서 텍스


트의 생산이 요구되지만, 앞서 얘기되었던 맥락에 비추어보자면 우리에게 더
욱 중요한 것은 ‘장애학 하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 텍스트로서의 장
애학은 그러한 장애학 하기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 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학 하기는 필연적으로 공동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


에서 다시 ‘장애학 함께 하기’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함께 장애학을 읽고
성찰하는 것, 그러한 성찰을 말과 글을 통해 나누는 것, ‘장애인 되기’를 감행
하는 것(즉 장애/비장애라는 분할을 가로지르고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 맺기
와 이를 통한 스스로의 변태(變態)를 시도하는 것), 자신의 절실한 삶의 요구
를 걸고 아스팔트 위에 서는 것, 그리고 그 곁에 함께 서는 것, 그리하여 장애
라는 ‘현상’을 구조화시키는 세계의 배치를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장애학의
탄생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

결국 이번 연재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게 될 장애학은 그러한 총체적인 것으


로서의 장애학 함께 하기를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며, 그런 만큼 이 글을 통
해 지금 이 순간 장애학을 만나게 되는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와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다음번에는 장애학이란 도대체 어떤 학문
인지, 그 기본적인 성격과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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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이 실천지향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사실 크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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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습니다. 이는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학은 기본적으로 학문공동체 내부의 아카데믹한 관심
에 의해 성립된 학문이 아닙니다. 여성학이 차별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
아내고 이 사회가 어떤 식으로 여성을 억압해왔는지를 담론화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처럼, 장애학 역시 차별받는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과정에
서, 장애인운동의 이론적 무기를 벼리고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1960년대 말부터 대중적 장애인운동이 활성화된 이후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장애학이 하나의 실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러한
장애인운동과 장애학의 직접적인 관계를 잘 드러내 줍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사회적 장애모델의 성립을 주도했던 빅터 핀켈스타인(Victor Finkelstein), 마
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 콜린 반스(Colin Barnes) 등의 학자들은 모두 장
애인이면서 장애인운동의 선봉에 있던 활동가들이기도 했습니다.
 
장애학의 궁극적 지향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
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장애인차별철폐, 장애해방▲ 실천지향적 성격이 부
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즉 장애인운동의 지재한 장애학은 앙꼬 없는
향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장애학찐빵
(함께) 하기’를 이야기하면서 참조했던 고병권의 말을 차용하자면 ‘장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인 것이지요. 따라서 장애학에 만약 실천지향적 성격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엔진 없는 자동차이고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애학은 장애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애학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키워드 4 : 해방적
 
장애학도 당연히 하나의 학문이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연구 방법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학 연구의 방법 내지 연
구의 기본적 태도로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emanci
patory research approach)입니다. 그런데 연구면 그냥 연구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해야 해방적으로 연구를 한다는 것일까요? 얼른 잘 감
이 오지를 않지요? 사실 해방적 연구 접근법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은 매우 다
양하기도 하고 또 논쟁적인 지점들도 존재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핵심적
인 지점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하나의 ‘과학(scie
nce)’이 연구를 수행할 때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것이0 바로 ‘객관성’이고, 조금 달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중립성’이
지요. 어떤 연구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상실했다고 하면, 그건 연구로서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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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 없다고 비난을 받게 되곤 하지요.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누
군가의 편을 들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즉 ‘불편부당(不偏
不黨)’해야 한다고 보통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장애학이 이야기하는 해방적 연구 접근법에서는 이러한 연구자의 객
관성과 중립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편파성’과 ‘당파성’을 대놓
고 주장을 합니다. 즉 해방적 장애 연구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입장에 서 있고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일까요? 바로 억압받는 자와 장애인의 편에서 이 세상
과 사회를 바라보고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하나의 일화를 좀 소개할까 하는데요, 영국의 장애인운동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1세대 인물 중에 폴 헌트(Paul Hunt)라는 분이 있습니
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 운동이 활발하게 벌
어지고 있는데요, 원래 헌트는 레너드 체셔 재단(Leonard Cheshire Foundati
on)1)이 운영하는 잉글랜드 남부의 한 시설에서 생활하던 시설생활인이었습
니다. 레너드 체셔 재단은 우리나라로 치면 꽃동네 정도 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사회복지재단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냥 착한 장애인은 아니고 성깔이 좀 있는 까칠한 장애인이
었던 모양입니다. 시설 내에서 다양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또 열악한 생활
환경도 영 마음에 들지 않자, 동료 생활인들을 조직해서는 시설 경영진에 맞
서 소요를 일으키고 일련의 논쟁과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투
쟁의 성과로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회복지 연구소 중 하나인 태비스톡
연구소(Tavistock Institute)를 초청해서 실태조사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헌트
의 입장에서는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와서 조사를 하게 되면 시설 체제의 문
제점이 낱낱이 드러나리라 기대를 했겠지요.
 
그렇게 시설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고 당시 책임연구원 격으로 조사에
참여했던 에릭 밀러(Eric Miller)와 제럴딘 그윈(Geraldine Gwynne)은 얼마 후
연구보고서를 내놓게 되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헌트는 시쳇말로 완전히 ‘꼭
지가 돌고’ 맙니다. 보고서의 내용 중 기대했던 시설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은 하나도 없고, 그저 조금 완고한 시설 경영진과 불만 많은 생활인들 사
이에서 갈등이 벌어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서술이 되어 있었기 때
문이지요.
 
시설 내에서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낀 헌트는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 것을 제
안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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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의 글을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Guardian)』에 기고한
후 시설을 나왔고, 결국 영국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모태가 된다고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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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에저항하는신체장애인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
gregation, UPIAS)의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후 헌트는 1981년에 그 연구보고서의 내용과 연구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
는 「기생적 인간들과의 거래를 청산하기(“Settling accounts with parasite pe
ople”)」라는 글을 한 편 쓰게 되는데요, 여기서 재밌고도 중요한 것은 헌트가
그 연구자들이 시설 체제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고 지
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연구자들은 스스로를 시설 경영진과 생활인들 사이
에서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했다고 자부했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이 일화가 드러내주는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누구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객
은 없다 관성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
서 보통 객관적․중립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억압하는
자들의 객관성․중립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편
파성․당파성이 객관성․중립성으로 포장이 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미
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
의 진보적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고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 함의를 새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권력자와
억압자의 입장을 자꾸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이라고 우긴다면, 장애학은
편파적이고 당파적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연구를 수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둘째, 학문을 한다는 것도 하나의 활동인데요, 모든 활동에는 그것을 실행하
는 주체(subject)가 있습니다. 학문이라는 활동에서의 주체, 즉 학문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지요? 일반적으로 학자(學者)라고 부를 수 있겠고, 흔히들 전문
가라고 이야기하지요. 한쪽에 주체가 있으면 그 맞은편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렇지요, 객체 내지 대상(object)이 있겠지요. 그래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
는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에서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주체’가 되고 장애인은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학․특수교육학 등의 장
애 연구에서는 장애인이 대상화(objectification)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대상화된다’라는 말을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
지는 않지요. 그들의 주체성과 목소리를 앗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
구하고 기존의 장애 연구에서는 연구자 내지 전문가와 장애인 사이에 주체/
대상이라는 위계 및 권력 관계가 분명히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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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장애학도 하나의 학문이고 장애학을 하는 학자들이 존재하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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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장애학자들과 장애인 대중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의 두 번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장애학 하기란
곧 장애학 ‘함께’ 하기라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는데요, 여기에 일정한 힌트가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대중 예능프로그램의 한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서바이
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들이 함께 하나의 팀을 이루어 공동으로
선곡을 하고 편곡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한
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장애학이 수행하는 장애 연구에서는 연구자들과
장애인들 사이의 관계가 콜라보레이터(collaborator), 즉 공동작업자 내지 공
동연구자(co-researcher)로서 설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장애학의 장애 연구에 있어 장애학자와 장애인 대중의 관계는 장애
인차별철폐와 장애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함
께 소통하고 논의하고 연구하고 실천을 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애학자는 장애인 대중의 일
부로서 존재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요. 요컨대 장애학에서의 장애 연구는 그 연구의 결과물이 장애해방에 도
움이 되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그 연구의 과정 역시 장애인 대중에게 억압적
이지 않고 해방적인 것으로 존재를 해야만 한다고,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없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이들 가운데 일부는 노동 가능자로,


나머지는(!?) 노약자로 분류될 것이다. 노동 가능자는 머리가 깎이고 팔에 등
록 번호가 새겨진 뒤 강제 노역에 동원될 운명이며, 그들 중 다수는 온갖 학
대와 탈진으로 숨지거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될 것이다. 노약자로 분류된 사
람들은 그 유명한(?) 가스실로 보내져 결국 학살된다. 그리 먼 과거가 아닌 2
0세기 초반의 일이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불과 5년의 기간에만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갔고, 이들 가운데 150만 명가량이 독가스, 총살, 기아 등으로 숨졌다. 이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에 따라 독일에
서 학살된 유대인의 수는 5백만 명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
며, 집계되지 않았지만 질병환자, 정신병자, 장애인, 경제적 빈곤자 등과 같이
독일 인종 내에서도 비정상인(!?)으로 판정되어 가스실로 보내진 사람들의 숫
자가 또한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위의 내용은 우생학을 다룬 한 외국 연구서의 옮긴이 서문에서 가져온 것입
니다.1)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eugenics)’이라는 단어
를 접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이기도 할 것입니
다.0 독일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무자비하고 끔찍한 학살, 그리고 이를 뒷받침
했던 우생학. 그리하여 우리는 우생학을 나치즘에 경도된 일부 학자들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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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 낸 ‘사이비’ 과학이라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우생학적 폭력을 현
재의 우리 삶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 오늘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중


하나.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갔으며,
노동력이 없는 어린아이, 노약자, 장애인은 가스실로 보내졌
다.
 
물론 그러한 비난은 일면 정당하며,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역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과 거리 두기
의 이면에는 과학이란 객관적이고 좋은 것이며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어떤 통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로 인해 현재 유
전학과 생명과학이라는 ‘진정한’ 과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개입들
에 내포된 바로 그 정치적이고 우생주의적인 성격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리 예고해드렸던 대로 ‘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는 이번 주부터 「우생주의


의 역사와 생명권력 시대의 장애 」 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재를 이어 갑니다.
이번 연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일부 변경이 있
을 수도 있겠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구성과 순서를 따를 것입니다.
 
○ 20세기 전반기 우생학의 역사
 - 우생학의 등장: 영국
 - 우생학의 대중화: 미국
 - 우생학의 극한적 실천: 독일
 - 복지국가의 우생학: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 우생학이라는 타이틀의 소멸과 내용의 보존
 - 개혁 우생학와 인류유전학
 -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 현대의 네거티브 우생학
 
○ 생명권력 개념을 통해 본 우생학과 현대의 우생주의적 실

 - 살게 만드는 권력이 어째서 사람을 죽게 만드는가
 - 예외상태에 놓인 생명, 장애인
 - 신자유주의적 통치성과 우생주의
 -0저항의 두 가지 차원: 주체화와 저항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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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첫 번째 부분에서는 영국의 장애학자인 톰 셰익스피어(Tom Shakespear
e)가 앤 커(Anne Kerr)와 함께 저술한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
로젝트까지(Genetic Politics: From Eugenics to Genome)』(2002)2)를 기본 텍
스트로 해서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생학은 영국에서 그 기본적인 내용이 확립된 후 미국에서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됩니다.
나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극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지만, 스칸디나
비아의 복지국가들 또한 우생학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요. 우생학적
폭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단종법(sterilization law)은 1907년 미국의
인디애나주에서 처음 실시된 이래 1920년대 말에는 캐나다, 스위스, 덴마크,
1930년대에는 독일,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 1940년대에는 일본
에서 제정되어 길게는 1970년대 중반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우생학이 결코 독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


었으며, 당시에는 매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최첨단의 ‘과학’이자 현대
유전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음을 확인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생학이라는 타이틀이 소멸되는 과정에서도 그 기본적


인 관점과 내용이 어떻게 현대의 인류유전학(human genetics)과 의료유전학
(medical genetics) 내로 이전되었는지를 고찰한 후,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지
는 대표적인 유전학적 중재의 사례로서 산전 검사(prenatal testing) 및 선별
적 낙태(selective abortion)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부분에
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생명
권력(biopower) 개념을 통해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과 현대 유전학의 우생
주의적 실천을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코의 생명권력에 대한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우생학적 폭력이 어떤 특수한


반인륜적 정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가권력의 속성
그 자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는 것임을 이해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생
명정치적 주권권력이 창출해내는 예외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는 장애를
지닌 태아에 대한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로의 전환기는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게 있어 상당


한 혼란과 위기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경제에서 영국이 자치했
던 독점적인 지위는 1870년대부터 독일 제국을 비롯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
들이 성장함에 따라 위협을 받았고, 산업혁명 이후 물질적 번영과 성장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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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적 진보를 낙관했던 분위기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0년 이상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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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되었던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에 옥스퍼드 사전에 처음으로 ‘실업(unemployment)’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만큼 경제적 침체에 따른 대규모 실업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
고, 이에 따른 도시 빈민과 범죄의 증가 또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보어전쟁(Boer War)1)을 위해 모집된 하층계급 출신 신병들의
열악한 신체적 조건과 영국의 잇따른 패배는 국민체위(國民體位, national ph
ysique)의 저하와 인종적 퇴보에 관한 우려를 확산시켰으며, 중산층에서의 출
산율 감소 또한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에 의한 자연선택(natur


al selection)’의 이론을 정식화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
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 1859년에 출간
된 이후, 영국에서는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진
화론적 관점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이론들, 즉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
ism)가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은 물론 『생물학의 원리
(Principles of Biology)』라는 책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철
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윈 자신 또한 『종의 기원』 5판(1869)에서부터는 이러한 적자생존이


라는 용어를 자연선택이라는 용어와 병기해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생존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의 『인구
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차용해 온 것이기도 합니
다.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세계의 모든 생물이 높은 기하급수적 비율로


증식하는 결과 일어나는 ‘생존경쟁’을 다루려 한다. 이는 맬서스의 원리를 모
든 동식물계에 적용한 것이다.”라고 직접 언급을 하였으며, 말년에 쓴 자서전
에서도 “연구를 시작한 지 15개월 후인 1838년 10월 우연히 접한 맬서스의
『인구론』으로부터 계속된 장기간의 동물과 식물의 습성에 관한 연구를 통해
모든 곳에서 생존경쟁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서 자신의 자연
선택설이 성립하게 된 과정을 술회한 바 있습니다.2)

그러니까 흔히 다윈은 경쟁에 의한 선택(도태)의 논리를 자연의 세계에만 적


용시켰다고 이야기되며 이를 인간 사회에 확대시킨 사회적 다윈주의의 시조
로서 스펜서를 들지만, 이러한 평가에는 역설적인 측면도 존재를 하는 것이
지요. 경쟁과 도태의 논리는 당시 사회의 시대정신이었고, 다윈이 이러한 사
회의 논리를 자연의 세계에 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0공정하게 말하자면, 맬서스의 『인구론』(1789),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스펜서의 『생물학의 원리』(1864)에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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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종의 에피스테메(Episteme)―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
적 체계―가 작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스미스의 『국부론』(1776), 맬서스의 『인구론』(1789), 다


윈의 『종의 기원』(1859), 스펜서의 『생물학의 원리』(1864)
에는 당대를 지배하던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에피스테메)’가
작동을 하고 있었다. 즉, 다윈주의 자체가 사회적인 것이다.
 
사실 그 유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
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 역시 이러한 저작들과 공
통의 에피스테메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는 경
제주체들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질서를 부여한다는 인식과 생존경쟁
을 벌이는 동식물의 세계(혹은 인간 사회)에 ‘자연선택(혹은 적자생존)’이 질
서를 부여한다는 인식은 일정한 동형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이로 인해 로버트 영(Robert M. Young) 같은 이는 “다윈주의 자체가 사회적


이다(Darwinism is social).”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윈은 특히 1871년에 출
간한 『인간의 유래, 그리고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
elation to Sex)』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문명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선택의 작용도 여기서 어느 정도 언급을 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주제는 W. R. 그레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 이전
에는 월리스와 골턴에 의해서 훌륭하게 논의되어 왔다. (…) 미개인들 사이에
서는 몸이나 마음이 허약한 자는 곧 제거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일반
적으로 강인한 건강 상태를 보인다. 우리 문명화된 인간들은 반대로 약자가
제거되는 과정을 저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저능한
사람, 불구자, 병자를 위해 보호시설을 세운다. 우리는 구빈법을 제정한다. 그
리고 우리의 의사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전
력을 다한다. (…) 그리하여 사회의 허약한 구성원들이 그들과 같은 종류의 자
손을 증식시키게 된다. 가축을 기르는 일에 종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것이 인간종에게 대단히 해악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3)

다윈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에게 존재하는 협동능력․이타심․도덕이라는 독특


한 본능은 인간이 생존경쟁을 겪으면서 진화한 결과로 갖게 된 것입니다. 다
윈은 이 점에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를 강조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독
특한 능력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워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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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복지 정책 덕분에 사회적 약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국제적인 비난
때문에 약한 종족을 제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즉 진화의 결과로
더 이상의 자연적인 진화(자연선택)가 어려워진 상태에 이르게 된 셈입니다.
4) 그리고 이로부터 우생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선택을 넘어선 인
위선택(artificial selection)의 필요성 내지 당위성이 도출될 수 있지 여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위의 인용문 앞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다


윈의 사촌으로, 그가 바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우생
학을 정립한 인물입니다. 골턴은 1874년의 저서 『 영국의 과학적 지식인들:
그들의 천성과 양육(English men of Science: Their Nature and Nurture)』에
서 자신의 유전 이론에 근거하여 오늘날 일반화되어 있는 천성 대 양육이라
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확립하였으며, 1883년에 『인간의 능력과 그 발달에
관한 탐구(Inquiries into Human Faculty and Its Development)』에서 처음 우
생학(eugenics)이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5)

그리스어에서 ‘eu’는 ‘well(좋은)’을 뜻하고 ‘gene’는 ‘genesis(발생)’을 뜻하므


로, eugenics는 어원상으로는 ‘좋은 태생(well-born)’에 관한 학문을 의미합니
다. 그리고 골턴에 의하면 우생학은 “정신과 육체의 양면에 있어 차세대 인류
의 질을 높이거나 낮추는 작용 요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를 사회의 통제 아
래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학”으로, 혹은 “인종의 질적 개량에 영향을 주
는 모든 요인, 그리고 인종의 질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데 관련되는 모든 분야
를 취급하는 학문”으로 정의됩니다.6)

이러한 우생학은 크게 보자면 포지티브 우생학(positive eugenics)과 네거티


브 우생학(negative eugenics)으로 구분이 되는데요, 전자가 우수한 형질을
지닌 사람들의 재생산을 촉진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열등한 형질을 지닌 사
람들의 재생산을 막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우생학이라는 과학이 일정
한 신념에 기반을 둔다고 했을 때, 인간은 선천적으로 우등한 자 내지 적자
(適者, the fit)와 열등한 자 내지 부적자(不適者, the unfit)가 있으며, 그처럼
우등한 인간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위선택이 필요하다는 믿음 내지 이데올
로기를 ‘우생주의(eugenicism)’라고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생학의 창시자 골턴은 1907년에 열렬한 사회적 다윈주의자였던 수학자 칼


피어슨(Karl Pearson)과 함께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 골턴국가
우생학연구소(Galton Laboratory for National Eugenics)를 설립하여 우생학
의 연구와 전파에 매진하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영국 우생학 운동의 지적 산
실 0 역할을 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개인 기부금으로 운영되었
으나 종전 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로 발전하였지요. 인간의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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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계학적 방법에 근거해 연구하는 생물통계학(biostatistics)을 발전시켰던
골턴과 피어슨은 현대 통계학의 기본 도구가 되는 상관계수(correlation coeff
icient)와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그 유명한 종형 곡선(bell curve)을 개발한 장
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생학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이끌어 냈으며, 특


히 당시에는 신생 분야였던 유전학 자체가 우생학과의 뒤얽힘 속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유전학(genetics)이라는 용어는 1905년이 되어서야 윌리
엄 베이트슨(William Bateso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다수의 유전학자들
이 우생학적 관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전학의 핵심
적인 이론 및 기술 중 몇몇은 직접적으로 우생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요.

의사들도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 실패를 거듭하자 이를 설명하려는 노


력의 일환으로 유전주의적인 우생학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저명한 의학 전문
저널인 『랜싯(The Lancet)』과 왕립내외과의사협회(Royal College of Surgeon
s and Physicians)는 우생학적 단종수술을 지지하는 성명을 채택하기도 하였
습니다.

1907년에는 골턴국가우생학연구소와 더불어 최초의 우생학 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우생학교육협회(British Eugenics Education Society) 또한 창
립되었고(1926년에 영국우생학회(British Eugenics Society)로 개칭됨), 이듬
해 골턴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협회의 회원은 그 수가 가장 많
았을 때에도 700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회원들과 지지자들 중에는 당대의
저명한 의사, 과학자, 사상가들을 비롯한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의 발


상지이자 종주국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페이비언 사회
주의의의 지도자였던 웨브 부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 다수가 좌우를 막론하
고 이러한 우생학 사상을 수용하였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윈스턴 처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조지 버나드
쇼, 웨브 부부)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와 아서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


rlain) 같은 보수당의 정치가들도 이 협회의 회원이었는데, 그들은 둘 다 영국
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들이지요. 그리고 1912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국제우
생학회의(International
0 Eugenic Congress)의 부의장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
중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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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ham Bell)도 있었습니다.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농인의 교
육을 위해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농인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농인들
간의 결혼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우생학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우생학의 지지자들이 우파 성향의 인물들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로 레닌 및 트로츠키와도 교류했던 열렬한 사회주의자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지도자인 시
드니 웨브(Sidney Webb)와 비어트리스 웨브(Beatrice Potter Webb) 부부, 19
2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페이비언협회의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산아제한운동의
선구자인 마리 스톱스(Marie Stopes)와 같은 여성 또한 우생학의 지지자였으
며, 실제로 우생학은 맑스주의자, 페이비언주의자,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시드니 웨브는 “일관성 있는 어떠한 우생학자도 ‘자유방임주의’적인 개인주


의자일 수는 없다. 그가 절망하여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즉
그는 개입하고, 개입하고, 또 개입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1) 이처럼
우생학 자체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보어전쟁이 끝나고 난 후인 1903년에 영국에


서는 체위저하에관한부처합동위원회(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Phys
ical Deterioration)가 구성되었고, 도시 빈민들과 학교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실태조사가 진행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1908년에는 왕립정신박약
자돌봄및통제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Care and Control of the Fee
bleminded)의 보고서가 출간되었고, 이 보고서의 내용은 다시 1913년 「정신
적결함법(Mental Deficiency Act)」의 제정으로 이어졌지요.

「정신적결함법」의 제정에는 인간 지능의 유전에 대한 골턴의 연구, 당시 막


도입되기 시작한 IQ 검사, 영국우생학교육협회의 캠페인이 커다란 영향을 미
쳤는데, 이 법의 주요 내용은 일반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능력이 없고 다른 아
동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신적 장애아동들을 정신적결함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격리기숙학교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1929년
에 전국교사노조 집행부가 “지금이야말로 정신적 결함자들 사이에서의 재생
산이라는 총체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라는 진
술을 담은 결의안을 승인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2) 이러한 조치는 별다른 반
대 없이 실행되었고 영국에서 장애인들의 시설 수용을 크게 촉진시켰습니다.

한편
0 영국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자발적 단종 수술의 합법화를 위한 활동
이 전개되었으며, 1934년에 정부가 내놓은 「단종수술에 대한 담당부처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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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보고서(Report of the Departmental Committee on Sterilization) 」 (일명
브록 보고서(Brock Report))의 내용에 따라 1937에 「자발적 단종법안(Volunt
ary Sterilization Bill)」이 의회에 제출됩니다. 이러한 단종수술의 합법화에 대
해서는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동의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모닝
포스트(Morning Post) 』 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78.7%가
단종수술에 찬성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는 단종수술의 합법화가 오히려 중산계급의 출산율을


더 감소시키고, 임신에 대한 걱정 없이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성행위로 인해
성병의 확산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노동당, 노
동조합, 가톨릭 교회 등은 우생학적 단종수술에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논
쟁적 분위기로 인해 의회의 최종 표결에서 「자발적 단종법안」은 부결되었고
결국 법제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요.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영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생


학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우생학 사상은 당시의 중산계
급과 사회지도층 전반에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습니다. 비록
단종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네거티브 우생학의 실천은 상대적으로 미약했지
만, 의사․생물학자․유전학자․심리학자 등의 참여 아래 영국에서 하나의 과학
으로 정립된 우생학은 이후 미국에서 강력한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점차 전 세계로 확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미국은 우생학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리고 영국에서 사회적 다윈주의가 확산되고 우생학이 발전하는데 선구
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골턴과 피어슨이었다면, 미국에서는 찰스 대븐포트
(Charles B. Davenport)와 해리 로플린(Harry H. Laughlin)이 그와 같은 역할
을 수행하게 됩니다.

하버드대학교 진화생물학 교수였던 대븐포트는 1898년에 뉴욕의 콜드스프


링하버연구소(Cold Spring Harbor Laboratory)의 책임자로 부임을 하게 되는
데, 이 연구소는 현재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
휘하고 있습니다. 1953년에 그 유명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제임
스 왓슨(James D. Watson)도 당시 이 연구소 소속이었지요. 대븐포트는 이
연구소를 근거지로 하여 골턴과 피어슨에게서 전수받은 우생학 사상을 소개
했습니다.

그는 또한 1910년에 로플린과 함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내에 우생학기록


보관소(Eugenics Record Office)를 설립하고 다양한 형질과 질병의 유전에 대
한 0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여 우생학의 과학적 기반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요 우생학 단체들에서 활동하며 미국의 여러 주에서 네거티브 우생학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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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생학기록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로플린은 1913년에 “기업이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려하듯 인간도 그렇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생학이란 인간의 재
생산에 대기업의 방법을 적용한 것”이라는 말을 했던 바가 있는데요,1) 그의
발언에서 시사되듯 미국에서는 독과점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우생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미국에서는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 철강왕 앤드루 카네


기, 석유왕 존 록펠러, 씨리얼왕 존 캘로그와 같은 독점 대자
본가들의 자금 지원과 주도 아래 우생학과 우생학적 국가 정
책이 발전하였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해리먼, 카네
기, 록펠러, 캘로그)
 
우생학기록보관소 자체가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 Harriman)의
미망인인 메리 해리먼(Mary Harriman)의 직접적인 지원 아래 설립되었으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카네기연구소(Carnegie Institut
e), 석유왕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
on)이 차례로 우생학기록보관소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씨리얼을 판매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 존 캘로그(John H. Kellogg)는 1911년


에 인종개량재단(Race Betterment Foundation)이라는 좀 더 노골적인 이름
의 재단을 설립해 우생학의 발전을 도모했지요. 미국에서 재벌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학재벌 듀폰(DuPont) 가문이나 금융재벌 J. P. 모건(John Pi
erpont Morgan) 가문 역시 우생학 단체들의 주요 자금원이었습니다.

미국 우생학의 발전과 확산은 이들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


니다. 즉, 이러한 거대 자본들은 자신들의 기구를 통해 직접 우생학 연구를
촉진하거나, 혹은 우생학을 위해 설립된 다른 단체들을 지원하면서 우생학의
발전과 우생학적 국가 정책을 주도하게 됩니다.2)

미국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유전학회(American Genetics Associatio


n, AGA)와 같은 유전학자들의 전문직 협회, 의사나 생물학자를 포함한 다른
많은 분야의 과학자들 또한 우생학과 결합되었습니다. 특히 심리학은 우생학
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컨대 프랑스에게 처음 개발된 지능 검사의 선구인 비네-시몽검사법(Binet-


Simon Test)은 심리학자들이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때
0
인 1910년에 미국에 도입되었으며,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자이자 우생학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신봉자인 루이스 터먼(Lewis Terman)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현재 우리가 사
용하는 IQ 검사의 원형인 스탠퍼드-비네검사법(Stanford-Binet Test)이 1916
년에 탄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IQ 검사의 확립은 정신적 능력에 대한 유전
주의적 관점을 정당화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과학자들의 지원 아래 우생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사회적 인정


을 받게 되면서 당시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 중 90% 이상이 우생학을 다루
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했던 『시민생물학(A Civic Biology)』
에서는 정신박약, 알코올중독, 성적 일탈, 범죄 경향은 유전이 되기 때문에 이
러한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적 격리와 불임조치가 필요하다고 기술하
고 있었지요.3)

그리고 1914년에는 44개의 대학에 우생학 과정이 존재했지만, 하버드대학


교․예일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와 같은 주요 대학의 총장들이 우생학의 열렬
한 지지자가 되면서 1928년이 되면 그 숫자는 무려 376개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국에서도 다양한 우생학 단체들이 만들


어졌으며, 그러한 단체들은 1923년에 하나로 뭉쳐 미국우생학회(American E
ugenics Society)를 설립하고 전국 28개 주에 지부를 둔 거대한 조직으로 발
전을 하게 됩니다.

우생학을 지지했던 정치인들 중 다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


velt) 대통령이나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의 할아버지 프레스콧
부시(Prescott Bush)와 같은 보수주의자였지만, 영국의 우생학 운동에서처럼
급진주의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저명한 여성주의 산아제한 운동가인 마거릿 생어(Margaret San


ger)도 영국의 스톱스와 마찬가지로 우생학의 지지자였습니다. 헬렌 켈러(He
len Keller)조차 “행복의 가능성, 지능, 그리고 역량 등이 우리의 삶에 존엄성
을 주지만 이것들이 없는 기형적이며 마비된 생각 없는 생물(…) 이러한 예외
적 존재에 대한 관용은 정상적인 삶이 가진 존엄성을 줄이는 일이다. 정신적
결함자(…)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쓰면서 우생학을 옹
호한 바가 있습니다.4)

미국우생학회는 우생학에 대한 이러한 지지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기독교


교리와 우생학적 주장을 결합시킨 『우생학 교리문답집(A Eugenics Catechis
m)』(1926)을 출간하고, 우량아선발대회(Better Babies competitions)나 건강
0
가족경진대회(Fitter Families contest)와 같은 대중적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였습니다. 우량아선발대회는 우리나라에서도 1971년부터 1984년까지 한 기
업과 방송사의 주최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관심 속에 진행된 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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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우생학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사회적 다윈주의가 확산되고 우생학이 발전하
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골턴과 피어슨이었다면, 미국에서는
찰스 대븐포트(Charles B. Davenport)와 해리 로플린(Harry H. Laughlin)이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하버드대학교 진화생물학 교수였던 대븐포트는 1898년에 뉴욕의 콜드


스프링하버연구소(Cold Spring Harbor Laboratory)의 책임자로 부임을 하
게 되는데, 이 연구소는 현재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953년에 그 유명한 DNA의 이중나선 구조
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도 당시 이 연구소 소속이었지
요. 대븐포트는 이 연구소를 근거지로 하여 골턴과 피어슨에게서 전수받
은 우생학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또한 1910년에 로플린과 함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내에 우생학


기록보관소(Eugenics Record Office)를 설립하고 다양한 형질과 질병의
유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여 우생학의 과학적 기반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요 우생학 단체들에서 활동하며 미국의 여러 주에서 네
거티브 우생학이 확산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생학기록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로플린은 1913년에 “기업이 더 좋


은 상품을 생산하려하듯 인간도 그렇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생학이란 인
간의 재생산에 대기업의 방법을 적용한 것”이라는 말을 했던 바가 있는
데요,1) 그의 발언에서 시사되듯 미국에서는 독과점으로 거대한 부를 축
적한 자본가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우생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
다.
 

▲ 미국에서는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 철강왕 앤드루 카네


기, 석유왕 존 록펠러, 씨리얼왕 존 캘로그와 같은 독점 대자
본가들의 자금 지원과 주도 아래 우생학과 우생학적 국가 정
0
책이 발전하였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해리먼, 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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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록펠러, 캘로그)
 
우생학기록보관소 자체가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 Harriman)
의 미망인인 메리 해리먼(Mary Harriman)의 직접적인 지원 아래 설립되었
으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카네기연구소(Carnegie I
nstitute), 석유왕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이 차례로 우생학기록보관소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습
니다.

씨리얼을 판매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 존 캘로그(John H. Kellogg)는 1911


년에 인종개량재단(Race Betterment Foundation)이라는 좀 더 노골적인
이름의 재단을 설립해 우생학의 발전을 도모했지요. 미국에서 재벌이라
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학재벌 듀폰(DuPont) 가문이나 금융재벌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가문 역시 우생학 단체들의 주요 자금원이었
습니다.

미국 우생학의 발전과 확산은 이들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즉, 이러한 거대 자본들은 자신들의 기구를 통해 직접 우생학
연구를 촉진하거나, 혹은 우생학을 위해 설립된 다른 단체들을 지원하면
서 우생학의 발전과 우생학적 국가 정책을 주도하게 됩니다.2)

미국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유전학회(American Genetics Associa


tion, AGA)와 같은 유전학자들의 전문직 협회, 의사나 생물학자를 포함한
다른 많은 분야의 과학자들 또한 우생학과 결합되었습니다. 특히 심리학
은 우생학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습
니다.

예컨대 프랑스에게 처음 개발된 지능 검사의 선구인 비네-시몽검사법(Bi


net-Simon Test)은 심리학자들이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
었던 때인 1910년에 미국에 도입되었으며,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이자 우생학 신봉자인 루이스 터먼(Lewis Terman)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IQ 검사의 원형인 스탠퍼드-비네검사법(Stanford-
Binet Test)이 1916년에 탄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IQ 검사의 확립은 정
신적 능력에 대한 유전주의적 관점을 정당화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
별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과학자들의 지원 아래 우생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면서 당시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 중 90% 이상이 우생
학을 다루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했던 『시민생물학(A
0
Civic Biology)』에서는 정신박약, 알코올중독, 성적 일탈, 범죄 경향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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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적 격리와 불임
조치가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었지요.3)

그리고 1914년에는 44개의 대학에 우생학 과정이 존재했지만, 하버드대


학교․예일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와 같은 주요 대학의 총장들이 우생학
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면서 1928년이 되면 그 숫자는 무려 376개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국에서도 다양한 우생학 단체들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단체들은 1923년에 하나로 뭉쳐 미국우생학회(Am
erican Eugenics Society)를 설립하고 전국 28개 주에 지부를 둔 거대한 조
직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우생학을 지지했던 정치인들 중 다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


osevelt) 대통령이나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의 할아버지 프레
스콧 부시(Prescott Bush)와 같은 보수주의자였지만, 영국의 우생학 운동
에서처럼 급진주의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저명한 여성주의 산아제한 운동가인 마거릿 생어(Marga

ret Sanger)도 영국의 스톱스와 마찬가지로 우생학의 지지자였습니다. 헬


렌 켈러(Helen Keller)조차 “행복의 가능성, 지능, 그리고 역량 등이 우리
의 삶에 존엄성을 주지만 이것들이 없는 기형적이며 마비된 생각 없는
생물(…) 이러한 예외적 존재에 대한 관용은 정상적인 삶이 가진 존엄성
을 줄이는 일이다. 정신적 결함자(…)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
하다.”라고 쓰면서 우생학을 옹호한 바가 있습니다.4)

미국우생학회는 우생학에 대한 이러한 지지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기


독교 교리와 우생학적 주장을 결합시킨 『우생학 교리문답집(A Eugenics
Catechism)』(1926)을 출간하고, 우량아선발대회(Better Babies competitio
ns)나 건강가족경진대회(Fitter Families contest)와 같은 대중적 행사를 개
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량아선발대회는 우리나라에서도 1971년부터 1
984년까지 한 기업과 방송사의 주최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관심 속에
진행된 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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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의 지원 속에 우생학기록보관소와 life
미국우생학회의 활동이 광
범위한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미국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
한 형태의 우생학 법률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법률들로는 우선 우생
학적 원칙과 인종차별에 근거한 이민제한법을 들 수 있습니다.
 
1921년에 제정된 「존슨법(Johnson Act)」은 1910년의 인구조사를 기준
으로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을 출생 국가별로 구분하여 각
국적별 인구의 3%까지만 이민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 존슨법 」 은
인구조사 기준이 1910년이었기 때문에 이미 1880년대부터 유입된 남동
유럽인들에게는 강력한 제한을 가할 수가 없었지요.1) 이러한 이유로 19
24년에 기준이 더욱 강화된 「존슨-리드법(Johnson-Reed Act)」이 새롭
게 제정됩니다. 이 법은 1890년의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각 국적별 인구
의 2%까지만 이민을 허용했고, 이로 인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계와 남
동유럽 국가 국민들의 이민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약 30개주에서 우생학적인 혼인법(marriage law)이 새롭
게 제정되거나 종래의 법이 우생학적으로 개정되었습니다. 예컨대 1905
년에 제정된 인디애나주의 혼인법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자, 유전적 질
병이 있는 자, 습관성 알코올중독자의 혼인 금지를 구체적으로 명문화하
였으며, 다른 주의 혼인법들도 발달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의 결혼을 무
효화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부적자에 대한 혼인을 제한하는 조항들을 지
니고 있었습니다.2)
 
그러나 미국의 우생학 법률 중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무엇보다도 단종
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단종법은 주마다 차이는 있었지
만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을 비롯한 장애인, 유전성 질환자, 성범죄자
와 성매매여성, 강력범죄자, 알코올중독자, 부랑자들, 심지어 어떤 주는
흑인과 아메리카 선주민들까지도 그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1935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단종법을 통과시킨 28


개 주(빗금)와 통과 예정인 7개 주(검은 색)를 보여주는 지도
 
미국에서는 이미 1890년대 말 캔자스주립정신박약아시설(Kansas State I
nstitution for Feeble-Minded Children)과 인디애나주립소년원(Indiana State
Reformatory)에서 단종수술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최초의
공식적인 단종법은 1907년 인디애나주에서 통과되었습니다. 1935년이
되면 28개 주에서 이러한 단종법이 제정되고 7개 주에서는 입법 발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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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통과를 기다리는 상황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미연방대법원이 단
종법의 합헌성을 인정한 1927년의 벅 대 벨(Buck vs. Bell) 사건 판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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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수술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캐리 벅(Carrie Buck)은 버지니아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 태생으로, 지
적장애를 지니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가 린치버그(Lynchburg)에 있는 시
설에 수용됨에 따라 양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17세 때 임신을 하게 됩니
다. 그녀는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양부모는 출산
한 아이를 빼앗고 그녀를 어머니가 있는 시설로 보냈습니다. 당시 존 벨
(John Bell)이 원장으로 있던 시설 측은 1924년에 제정된 버지니아주의
단종법에 의거하여 벅에게 단종수술을 시행했고, 이를 둘러싼 논란은 법
정으로 옮겨갔습니다.
 
미연방대법원은 버지니아주의 법률이 다수의 안전과 복지를 추구하는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고 “퇴보한 후손들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기다
리거나 그들이 저능함 때문에 굶어죽도록 놓아두는 대신에, 명백하게 부
적자인 이들이 그 종을 잇지 않도록 사회가 막는 것이 전 세계를 위해 유
익한 일이다. 강제접종을 유지하려는 원칙은 나팔관을 잘라내는 데에도
적용 가능하다. 저능아는 3대로 족하다.”며 시설 측의 손을 들어주게 됩
니다.
 
더군다나 이 판결문을 작성한 이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
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을 뿐만 아
니라, 무려 173건의 소수의견을 내며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 이름을 날
린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Jr.) 대법관이었습니다.3)
 
이처럼 단종수술이 국가의 공인된 정책으로 확립되고 그 정당성을 획득
하면서, 미국에서는 1974년 단종법이 모두 폐지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만
6만 5천명 이상이 강제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종수술을 당하
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단종수술 정책은 전 세계적인 단종법
의 제정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1930년대 나치의 우생학 운동과도 긴밀히 연결되었습니다. 대븐
포트는 하버드대학교의 300주년 기념일에 독일의 우생학자들을 초청하
였으며, 로플린은 유전적 순수성을 보존하는 활동을 한다는 공로로 1936
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28년 설립된 인간개량재단(Human Betterment Foundation)의 이사장 폴
포페노(Paul Popenoe)는 베를린대학교 교수였던 프리츠 렌츠(Fritz Lenz)
와 함께 양국의 우생학 성과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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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닙니다. 록펠러재단은 1920년대부터 독일의 주요 연구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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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여 독일의 우생학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히틀러 자신 또한 1920년대 중반에 쓴 자서전 『 나의 투쟁(Mein Kamp
f)』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주의 정책들을 찬양하고 단종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바 있는데요, 그의 유대인 강제 수용과 집단학살 정책은 미국이
아메리카 선주민을 다룬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바가 크다고 알려져 있
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독일의 우생학과 유대인 집단학살의 기원이
라고 주장을 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입니다.4) 그럼 다음 글에서는 독일
에서 인종위생학(racial hygiene)이라는 이름아래 우생학 정책이 어떤 식
으로 발전하고 실행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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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적 다윈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인기를 끌었


으며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명한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
t Haeckel)은 1899년에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우주의 수수께끼(The R
iddle of the Universe)』에서 “어떤 생명이 전혀 쓸모가 없게 된 경우까지
도 모든 상황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
라고 주장하면서,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야만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원단의 선임을 권고하였지요.

1905년에 알프레트 플뢰츠(Alfred Ploetz)의 주도하에 설립된 독일인종위


생학회(German Society for Race Hygiene) 또한 모든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예컨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낙태의 결정을 개별 여성들에게 맡겨놓는 것에 반대했으며, 같은 사회민
주당 소속으로 베를린대학교 사회위생학 교수였던 알프레트 그로트잔(A
lfred Grotjahn)은 부적자의 단종수술을 옹호하였습니다. 그렇긴 해도 제1
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할 때까지 인종위생학자들의 활동은 주로
포지티브 우생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패전의 경험은 독일 내에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였습니


다. 전쟁으로 인한 산업의 파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이후
부과된 엄청난 배상금, 뒤이어 찾아온 전 세계적인 대공황은 독일 전역
에 걸쳐 사회적 불안정과 고통을 야기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독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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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중산계급은 우경화되거나 극단적 민족주의에 빠져들었고, 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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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인 인구가 가져오는 경제적 부담에 관한 주장은 점점 더 영향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20년에 법률가인 칼 빈딩(Karl Binding)


과 정신과 의사인 알프레트 호헤(Alfred Hoche)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
의 말살에 대한 허용(The Permission to Destroy Life Unworthy of Life)』이
라는 제목의 책을 썼던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장애인들을 ‘인간 밸러스
트(human ballast)’1)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가져오는 경제적 부담을 강조
하고, ‘자비로운 살해(mercy killing)’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빈딩과 호헤의 입장은 출간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이지 않은 다소 극


단적인 주장에 속했지만,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의견이 수용되
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1933년 나치 정권의 등장 역시 패전에 뒤
이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분위기를 배경으로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장애인들이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


음을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물 중 하나. 선천성 질환
이나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소요되는 일일 5.5마르
크의 비용이면 건강한 일가족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유전성 장애를 지닌 사람 한 명이 60세


까지 생존하는데 50,000마르크가 필요하
며, 이러한 비용이 독일 노동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포스터.
 
나치 체제에서 이루어진 초기의 조치들 중 하나는 장애인과 환자들을
위한 시설로부터 자원을 회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생학에 대한 정당화
는 흔히 자원을 절약해야할 필요성에 의존했고, 장애인을 돌보는 것은
돈 낭비로 간주되었지요. 이로 인해 어떤 정신장애인 시설에서는 의사
한 명당 무려 500명에 이르는 장애인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 비율이 1:160 정도였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이처럼 장애인에게 들어가는 비용의 부담과 그 무익함을 강조하


기 위하여, 나치의 집권 후 학교에서 사용되었던 한 수학 교과서에는 아
래와 같은 문제들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문제 94)
독일제국의
0 한 지역에 4,400명의 정신질환자가 국립병원에 수용되어 있
고, 4,500명이 국가의 원조를 받고 있으며, 1,600명은 지방병원에, 2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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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간질 환자를 위한 시설에, 그리고 1,500명은 복지시설에 있다. 그리
고 국가는 이러한 시설과 환자들에게 최소한 매년 천만 마르크를 지불
하고 있다.

Ⅰ. 국가가 1년에 환자 1인당 부담하고 있는 평균 비용은 얼마인가?

Ⅱ. Ⅰ번 문제로부터 계산된 결과를 사용하여, 다음의 각 경우에 국가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얼마인지 구하여라.
 A. 868명의 환자가 10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면?
 B. 260명의 환자가 20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면?
 C. 112명의 환자가 25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면? 
 
문제 95)
정신병원 하나를 짓는데 6백만 마르크가 든다. 정신병원을 짓는데 들어
간 비용으로 한 채 당 1만 5천 마르크가 소요되는 주택은 몇 채나 지을
수 있는가?2)

또한 안과 의사인 헬무트 웅거(Helmut Unger)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내용


을 담은 『사명과 신념(Sendung and Gewissen)』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를 각색하여 제작한 영화 「나는 고발한다(I Accuse)」는 전국적으로
상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
e)3)에서 수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쓸모없는 식충이(useless eater)’, ‘살 가치


가 없는 생명’, ‘인간 밸러스트’와 같이 장애인을 격하하는 표현은 나치
의 선전뿐만 아니라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용
어가 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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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정권을 잡은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3년 7월 14일 「유전


적 결함을 지닌 자손의 예방을 위한 법률(Law for the Prevention of Gene
tically Defective Progeny)」 을 시행에 옮겼습니다. 그 법률은 “유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갖게 될 어떤 아이가 상당히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
적0 결함을 지닐 가능성이 매우 높음이 과학적인 의료적 경험에 의해 입
증된 경우라면, 그와 같은 모든 사람은 외과적 수술에 의해 자식을 갖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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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지요. 이 법에 의해 독일에서
는 1939년 9월 1일까지 약 375,000명에게 단종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아래의 목록은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기준들이고 괄호 안의 수치는 1934


년에 이러한 기준들 아래서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비율인데, 그 다수는
‘선천성 정신박약’으로 표기되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종수술 중 24.1%는 본인이 아닌 법적 후견인에 의해서만 동의가 이루
어졌고 38.6%는 강제로 수술이 이루어졌는데, 나치 체제하에서 단종수
술을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5%에 달했다고 합니다.
 
1. 선천성 정신박약 (52.9%)
2. 정신분열증 (25.4%)
3. 순환정신병(조울증) (3.2%)
4. 유전성 간질 (14%)
5. 유전성 무도병(헌팅턴병)1) (0.2%)
6. 유전성 맹 (0.6%)
7. 유전성 농 (1%)
8. 중증의 유전성 신체적 기형 (0.3%)
9. 자신의 재량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중증의 알코올중독 (2.4%)2) 

또한 1935년 9월 공표된 「뉘른베르크법령(Nuremberg Laws)」3)의 일부


인 「혼인보건법(Marriage Health Law)」은 배우자들 중 어느 한 쪽이라
도 유전성 질환, 정신착란, 혹은 결핵이나 성병과 같은 전염성 질환을 앓
고 있는 경우에는 아예 결혼을 금지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이미 단
종수술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
을 원천적으로 막는 우생학적 조치들을 실시했던 나치 독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안락사라는 이름 아래 장애인에 대한 집단학살로까지 나아
갔습니다.

장애성인에 대한 안락사 프로그램은 1939년 9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를 담당했던 비밀 조직이 베를린 시내의 동물원로(Tiergartenstrasse) 4번
가에 위치해 있던 유대인에게서 몰수한 한 저택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
기에 T-4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공식적인 법률
이나 정부 차원의 명령이 아니라 히틀러의 개인적인 명령에서 비롯되었
고, 그의 주치의였던 칼 브란트(Karl Brandt)가 총통비서실장 필립 불러(P
hilipp Bouhler)와 더불어 총 책임을 맡았습니다.

T-4 프로그램의 주요 대상은 정신박약, 정신분열증, 우울증, 왜소증, 마


비, 간질과 같은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생산성의 정도가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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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안락사 조치는 그 시점이 제2차 세계대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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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발과 맞물려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고
갈의 막는다는 경제적 동기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지요. T-4 조직에 고
용되어 있던 한 통계전문가는 나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70,273회의 ‘살
균’이 독일제국의 예산 855,439,980마르크를 절감해 주었으며, 독일 전
체에서 12,492,440kg의 고기와 소시지의 낭비를 막아주었다는 통계를 산
출하기도 했습니다.

▲ T-4 프로그램에 의해 장애인들을 안락사센터로 수송했던


게크라트의 버스.
 
일단 안락사를 시킬 대상이 선정되면 게크라트(GeKraT)―Gemeinnützige
Krankentransport GmbH의 약자로 ‘환자수송 자선회사’라는 의미임―라고
불렸던 수송 조직이 회색의 버스와 밴을 이용해 사람들을 그라페네크(Gr
afeneck),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베른부르크(Bernburg), 하다마르(Ha
damar), 하트하임(Hartheim), 존넨슈타인(Sonnenstein)에 위치한 6개의 안
락사센터로 날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를 마시고 죽어갔습니다. T-4 프로그램에서 장애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이러한 가스실은 이후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자
행된 홀로코스트에서도 똑같이 사용이 되었지요.

피해자 가족과 안락사센터가 위치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1941년 8월


그 프로그램이 종료되기까지 최소한 7만 명의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살
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T-4 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이후에
도 임의적인 형태의 안락사는 독일 전역과 점령지에서 광범위하게 자행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T-4 프로그램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장애아
동들에 대한 안락사는 ‘특수아동병동’으로 위장된 전국 28곳의 살인센터
에서 치사주사, 약물 과다 투여, 아사 등의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시행되
었으며, 이러한 장애아동의 안락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속
되었습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제출된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의 연


구에 따르면 나치 체제하에서 살해된 장애인의 수는 27만 5천 명으로 추
산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
면 정신장애 한 가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1939년에 독일에는 30만 명의
정신장애인이 있었지만 1946년에 그 수는 단 4만 명에 불과했으니까요.

▲1933년의 단종법 시행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나


치의
0 홍보포스터(1936년 제작). 맨 위쪽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고, 한 쌍의 독일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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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유사한 단종법을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왼쪽) 고
려 중인(아래쪽과 오른쪽) 나라들의 국기에 둘러싸
여 있다.
 
이렇듯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장애인에 대한 살해와 단종수술이 이루어
졌지만 종전 후 이러한 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범재판
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학살과 단종수술은 은폐되거나 단지 유대인 학살
에 대한 시작으로서만 설명되었으며, 누구도 이를 이유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단종수술을 받은 이들이나 살해된 장애인의 상속인에
게는 어떠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집단학살 정책이 초래한 막대한 폐해가 장애인들이 맞이


했던 마찬가지의 비극적 운명을 가려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
의 주체였던 연합국의 주요 국가들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우생학적 차별
과 범죄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조금 달리 평
가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부터 범죄자들이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고 처벌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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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다윈주의는 20세기 초의 세계적 조류였고 미국의 각 주에서 단


종법이 확산되고 있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도 단종
법이 널리 채택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앞선 글에서 언
급되었듯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1997년 8월 스웨덴의 일간지 『다옌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는 스


웨덴에서 1950년대까지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반강제적인 불임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도해 충격을 주었고, 이는 영국의 언론에서도 큰
뉴스로 다루어지면서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적이 있었습
니다. 과학사회학과 사회정책을 연구해 온 영국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힐러리 로즈(Hilary Rose)는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이러한 오래
된 이야기가 어째서 현재의 뉴스가 되었는지에 대해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나라들, 특히 강력한 복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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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발전되어왔던 나라들은 부인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여러 가지로 불
편함을 느끼게 할 수 밖에 없는 우생학의 역사는 망각되었다. 대신 우생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학적 실천은 단지 나치의 소행으로만 치부되었다. 나치의 악마들을 악마
로 묘사하는 것은 충분히 온당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
거를 부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전학자, 사회정책 분
석가, 사회개혁가, 맑스주의 혁명가를 불문하고 20세기 전반기의 지식인
들 사이에서 우생학에 대한 열광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좌파
와 자유민주주의자 양쪽 다 잊고 싶어 했다.1)

많은 사람들이 인간주의의 얼굴을 한 최상의 복지국가들에 비인간적인


단종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
펴본 대로 영국, 미국, 독일에서도 좌우파를 막론하고 우생학에 대한 지
지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의 연재 글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근
대적 복지의 탄생과 뒤얽혀 있던 생명권력의 속성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북유럽 국가들에서 이루어진 우생학적 폭력은 어
찌 보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생학은 1912년에 헬싱키에서 열린 제6차 북유럽장애인복지컨퍼런스


(Nordic Conference on the Welfare of the Handicapped)의 의제로 오른 후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확산이 되기 시작하며, 국제우생학
회의와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전반
적으로 볼 때 지리적으로 가까운 독일보다도 미국이 우생학에 대한 관
심과 지지를 야기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요.
 
1909년에 설립된 스웨덴인종위생학회(Swedish Society for Racial Hygiene)
를 이끈 의사 헤르만 룬드보리(Herman Lundborg)는 콜드스프링하버연구
소의 대븐포트와 공동의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덴마크의 우생학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시설 재벌 켈러 가문의 크리스티앙 켈러(Christian
Keller)는 자신 직원들로 하여금 미국의 시설들을 견학하도록 했으며, 매
사추세츠정신박약자학교(Massachusetts School for the Feeble Minded)의
교장이었던 월터 퍼날드(Walter Fernald)의 우생학 강의를 직접 번역해서
출간하기도 했지요. 그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에서 단종법
을 중심으로 한 우생학 정책이 어떤 식으로 도입되고 시행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덴마크

덴마크의 우생학 정책에 있어 두드러진 인물로는 사회민주당의 핵심 정


치가였으며 덴마크 복지제도의 설계자라고 불리는 칼 크리스티앙 스테
잉케(Karl Kristian Steincke), 그리고 앞서 언급된 시설 재벌 크리스티앙 켈
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스테잉케와 같은 사회개혁가들에게 있어 우생학은 합리적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의 핵심적인 일부분이었습니다. 즉, 사회적 약자로
범주화되는 일부 집단이 아닌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
국가가 ‘모두가 함께 기여하고 모두가 함께 누린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
된다고 할 때, 기여하지는 못하면서 누리는 자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합
리적’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 덴마크 복지제도의 설계자 칼 크


리스티앙 스테잉케는 덴마크 우생
학 정책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스테잉케는 1920년에 출간된 『미래의 사회구제(Social Relief of the Futu
re)』 에서 부적합하고 무력한 이들을 국가가 그냥 버리는 것은 냉담한
태도인 반면, 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재생산되도록 놔두는 것도 어리
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생학이 바로 이러한 딜
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즉, 우생학적 조치들이
그들의 수가 증가하지 않는 것을 보장한다면, 사회가 그들을 인도적이고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켈러는 발달장애인들의 성적인 격리를 목표로 발달장애남성만이


거주할 섬과 발달장애여성만이 거주할 섬을 각각 별로로 사들이기까지
했던 인물인데요, 그는 스테잉케의 책이 출간된 1920년에 시설 운영자
들을 대표해서 정부에 단종수술을 논의하기 위한 전문가 위원회의 설립
을 요청하였습니다.

덴마크에 사회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1924년에 스테잉케는 법무부 장관


이 되었고, 그는 켈러 등 여섯 명의 시설 대표자들이 포함된 ‘거세와 단
종수술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또 다
른 인물로는 ‘유전자(gen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저명한 멘델주의 식
물학자 빌헬름 요한센(Wilhelm Johannsen)과 투철한 유전론자 정신과 의
사였던 아우구스트 빔머(August Wimmer)가 있었습니다.

‘거세와 단종수술을 위한 위원회’는 1926년에 『퇴행적 소인을 지닌 이


들에 대한 사회적 대책(Social Measures Toward Degeneratively Predispose
d Individuals)』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는데요, 이 보고서는 단종수술이
유전질환의 발생률을 감소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인종개량이라는 목적
을 달성할 수는 없지만,2) 아이를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없고 태어날 아이
또한 유전적으로 해를 입을 수 있는 일정한 집단에 대해서는 단종수술
이0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단종수술은 시설 수용자를 대
상으로 하는 것이 논란을 피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역사회로 재통합시키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면서 시설에 가해지는 재정적․공간적 압박도 완화할 수 있다고 제안하
였습니다. 정책안의 후반부에는 반복적인 성범죄자의 거세에 대한 내용
도 담겨 있었는데, 이는 성범죄의 증가를 우려하면서 거세를 해결책으로
요구했던 전국여성단체협의회(Women's National Council)의 청원서 내용
을 반영한 것이었지요.

이 보고서의 내용에 기반을 두고 덴마크에서는 단종법안이 마련되었으


며, 1929년 농민당(Agrarian Party) 정부하에서 단종법의 재가가 이루어졌
습니다. 사회민주당 정부가 마련한 단종법안이 농민당 정부하에서 재가
되었다는 것은 우생학이라는 이슈에 대해 존재했던 초당파적인 합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덴마크는 정신적 손상 및 정신
질환을 지닌 이들이 결혼을 하려면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명시
한 1923년의 혼인법과 더불어 우생학 정책의 골격을 갖추게 됩니다.

1929년 선거에서 다시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이후 스테잉케가 사회부장


관으로 재직하던 1934년에는 새로운 「정신적 장애법(Mental Handicap A
ct)」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법은 발달장애인들 중 일정한 집단에 대한
강제 감금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고, 단종수술을 미성년자와 시설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였으며, 수술을 받게 될 사람의 동의 절
차를 삭제했습니다. 이에 따라 1929년의 단종법하에서보다 이 법 아래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단종수술이 이루어졌지요.

아래의 표에서 확인되듯 1950년까지 단종수술을 받은 이들 중 70% 정도


가 ‘학습적 장애’로 표기되고 있는 발달장애를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이
들 중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가량이나 많았습니다. 또한 성범죄에
대한 규정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폭력적인 성범죄뿐만 아니라
노출증 같은 성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동성애자들에게
까지도 단종수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덴마크에서의 단종수술, 1929~1950년]3)
학습적 장 학습적 장
학습적 학습적
애를 지니 애를 지니
시기 장애여 장애남 총계
지 않은 여 지 않은 남
성 성
성 성
1924~19
84 19 4 1 108
34년
1935~19
825 375 150 30 1,380
39년
0
1940~19
1,000 500 story by
510style - in solitude
110 life 2,120
45년
1946~19
869 469 902 96 2,332
50년
5,940
총계 2,778 1,359 1,566 237

노르웨이의 우생학 운동에 있어 가장 열성적이었던 인물 중 한 명은 노


르웨이상담우생학위원회(Consultative Eugenics Committee of Norway)의
지도자인 욘 알프레드 뫼엔(Jon Alfred Mjöen)이었습니다. 그는 1912년 런
던에서 개최된 제1차 국제우생학회의에 참석하고, 찰스 다윈의 아들인
레너드 다윈(Leonard Darwin)이 의장을 맡은 국제상설우생학위원회(Perm
anent International Committee for Eugenics)에도 참여를 하면서 노르웨이
에 우생학 사상을 전파하였지요. 그리고 ‘인종적 퇴보’라는 위험을 피하
기 위한 예방책으로서 발달장애인들의 출산을 막을 수 있는 강제 격리
와 자발적 단종수술을 제시한 정책안을 1931년에 법무부에 제출하였습
니다.

1932년에는 일군의 형법 개정론자들에 의해 성범죄자들에 대한 선택적


거세 조치를 포함한 단종법안이 발표되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농민
당(Farmers’s Party)의 에를링 뵈른센(Erling Björnsen)이 제출한 안을 기초
로 하여 노르웨이에서도 1934년에 단종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어
떤 사람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또는 유전병을 물려줄 가능성이 있
는 경우에 단종수술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노르웨이에서도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사람들


의 대다수는 발달장애인이었으며, 80~90%는 여성이었습니다. 덴마크
의 ‘거세와 단종수술을 위한 위원회’ 보고서가 인정했듯이 단종수술과
인종개량이라는 목적의 무관함이 이미 드러난 상황에서, 북유럽 4개국
의 단종법은 단종수술의 사유로서 공통적으로 “아이를 기를[돌볼] 수
없는 경우”라는 조항을 두고 있었습니다. 즉, 여성보다는 남성의 단종수
술 시술이 훨씬 더 간단하고 용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압도적으
로 많은 수의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것은, 출산과 양육의 책임이 기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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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여성에게 할당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입니다.

한편 1940년부터 종전 때까지 나치에 의한 점령이 이루어지면서, 노르


웨이에서는 우생학 프로그램이 한층 더 확대되고 단종수술도 증가하게
됩니다. 나치의 점령 이전에 평균적인 단종수술 시행 건수는 일 년에 10
0건을 약간 밑돌았지만, 나치의 실질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2년 반의 기
간 동안 평균적인 단종수술 시행 건수는 연간 약 280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러한 변화를 모두 나치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노르웨이의 유전학계 주류는 오슬로대학교에 새롭게
만들어진 생물학적유전연구소(Institute for Biological Heredity)를 중심으로
우생학 정책을 정당화하는 연구를 수행하였고, 단종법안을 제출했던 뵈
르센은 노르웨이 나치당에 자발적으로 가입을 했으니까요. 즉, 우생학을
지지했던 이들은 애초부터 더욱 강력한 단종법을 원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나치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던 것이지요.

○ 핀란드

핀란드에서 우생학은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소수 집단에 의해 촉진된 측


면이 존재합니다. 스웨덴계는 20세기로의 전환기에 핀란드 인구의 약 1/
8 정도만을 차지했지만 핀란드의 엘리트층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인종
위생학은 스웨덴계 인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캠페인의 성격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제3차 국제우생학회의에 핀란드 대표로 참석했던 하리 페더리(Harry Fed


erley) 교수는 스웨덴어 사용자들의 공중위생 단체인 삼푼데트(Samfunde
t)를 이끌면서 핀란드 내에서 우생학 사상을 촉진했습니다. 그 단체는 핀
란드 선주민인 핀족1)이 순혈 북유럽인종인 스웨덴인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네 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은 건강한 스웨덴어 사용자 어
머니들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지요.

핀란드에서는 1934년에 단종법이 제정된 후 1935년에 시행에 들어갔습


니다. 그 법은 “백치, 치우2), 정신이상자”가 그러한 이상을 유전시킬 수
있다고 간주되거나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강제적 단종수술을 허용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열등한 아이를 출산할 우려가 있는 경
우에는 자발적 단종수술을 허용하였습니다. 또한 “그 강도나 지향의 측
면에서 비정상적인 성적 충동을 보여주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미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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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쳐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도 단종수술을 허용하였습니다.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단, 단종수술은 국립보건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에 서면을 통한
신청과 재가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에 그 내용이 훨씬 더 강화된 새로운 단종법이 제정되었


고, 그 이후로는 우생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의료
적 이유에 근거한 단종수술까지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담당 외과 의사나 고문 의사가 자체적으로 수술 여부를 결정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이는 단종수술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1958년에는 우생학적 동기에 의한 단종수술만 413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단종수술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스웨덴어 사용자보다 핀란드어 사용


자들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리고 대개 재정이 열악한 지방정
부 당국들이 단종수술에 의지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의 공적 자금으로
발달장애인들을 부양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결국 핀
란드에서도 인종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논리가 우생학에 의한 희생자들
을 양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스웨덴

스웨덴은 1922년부터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State Institute for Racial Biol


ogy)라는 우생학 연구기관을 전 세계 최초로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운영했고, 단종법안이 처음 의회에 제출된 것도 1922년으로 북유럽 국가
들 중 가장 빨랐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률이 제정된 것은 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1934년에 제출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1935년이었습니다.

▲ ‘인민의 가정’이라는 개념을 공식화했던 스웨덴 사민당의


당수 페르 알빈 한손. 이러한 좌표 아래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를 선도했던 스웨덴은 우생학 정책의 실행에 있어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1935년의 단종법은 정신질환, 정신지체, 그 밖의 정신적 결함을 지닌 이
들에 대해 법적으로 의사능력이 없거나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또는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를 자식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높은 경우 동의도
없는 단종수술을 허용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국립보건위원회의 승인
을 받아야 했지만, 정신지체의 경우에는 두 명의 의사가 공동으로 결정
을0 하면 그러한 승인마저도 필요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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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스웨덴의 단종법은 처음부터 매우 강력했지만, 1941년에는 더욱
강화된 단종법이 새롭게 제정되었습니다. 1941년의 단종법은 ‘유전학적
이유’를 정신지체나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심각한 신체적 질병이나 유전
성 결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이유’라는 명분으로 정신지체와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인 생활
양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였으며, 의료적 이유를 근거로 한 여성들
의 자발적 단종수술도 허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정신지체 소녀들
이 특수학교나 거주시설을 떠나기 전에 단종수술을 받았으며, 때때로 단
종수술은 퇴소를 위한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스웨덴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단종법이 제정되었지만,


이처럼 강력한 법률하에서 가장 많은 단종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1935
년과 1941년의 양쪽 법률하에서 1935~1975년 사이에 이루어진 단종수
술은 총 6만 3천 건에 이릅니다. 나치 독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인구 당
가장 많은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지요. ‘인민의 가
정(folkhem, people’s home)’이라는 구호3) 아래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정
책을 선도했던 스웨덴은 우생학 정책의 실행에 있어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주류 우생학이 누렸던 대중적 인기와 지위는 1930년대를 정점으로 조금


씩 약해지다가 전후에는 나치가 자행했던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
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자 우생학은 일정한 원칙들은 보존
함과 동시에 내부의 극단적 입장들이나 비과학적인 요소들을 스스로 비
판하면서 소위 ‘개혁 우생학(reform eugenics)’으로 변모해 나가게 됩니
다.
 
개혁 우생학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것으로서 새로운 추동력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유전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환경도 함께 강조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우생학의 열성적 지지
자 중 한 명이었던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는 다른 22명의 영국 및
미국 과학자들과 함께 1939년에 작성한 「유전학자들의 선언(Geneticist
s' Manifesto)」 에서 그들의 목표가 유전적 개량에 의한 것이든 환경의
개선에 의한 것이든 가능한 한 최선의 아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공
표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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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50년대를 거치면서 개혁 우생학은 다시 인간의 질병 문제에 초점
을 맞춘 인류유전학 내지 의료유전학으로 점차 그 간판을 바꿔 달기 시
작합니다. 1925년에 영국에서 칼 피어슨에 의해 창간된 격월간 저널
『우생학 연보(Annals of Eugenics)』는 1954년에 그 제호를 『인류유전
학 연보(Annals of Human Genetics)』로 변경했습니다. 1922년에 설립되
었던 스웨덴의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도 1958년에 웁살라대학교의 부설
기관이 되면서 그 이름을 의료유전학연구소(Institute for Medical Genetic
s)로 바꾸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48년에 미국인류유전학회(American Society of Human Gen
etics)가 창립되었는데요. 창립 후 회장직을 맡았던 여섯 명 중 다섯 명은
또한 미국우생학회의 이사이기도 했지요.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
던 록펠러재단은 변함없이 인류유전학계의 거대한 자금줄이 되어주었
을 뿐만 아니라, 1901년에 설립된 록펠러의학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
of Medical Research)―지금의 록펠러대학교―를 통하여 의료유전학을 비
롯한 생명과학 연구에 힘을 쏟았습니다.
 
1940년대에 인류유전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지만, 점차 다양한
분야의 광범위한 과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물리학
자와 화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이들의 참여 속에 분자유전학(m
olecular genetics)이 발전하면서 막연한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유전
자의 전모가 점차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1944년에 록펠러의학연구소의 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T. Avery)와 그
의 동료들은 보통 DNA라고 불리는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이 유전자라는 추상적 개념의 배후에 있는 물리적 실체일 것이라고 제
안했습니다. 이 시기에 DNA 조각을 전기적으로 나누어서 유전자의 패턴
을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인 전기영동법(電氣泳動法, electrophoresis)도 라
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에 프
랜시스 크릭(Francis H. C. Crick)과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이 그 유
명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마침내 DNA의 분자적 구조
와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유전자의 물리적 전모가
밝혀지면서 유전자 결정론이 점차 새로운 힘을 얻게 되지요.
 

▲노벨상까지 받은 저명한 인류유전학자들인 허먼 멀러, 라이


너스 폴링, 프랜시스 크릭, 제임스 왓슨. 그러나 그들은 모두
우생학적 사고와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명한 우생주의자들이
0
기도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멀러, 폴링, 크릭, 왓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슨).
 
주목할 만한 것은 인류유전학의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이러한 인
물 중 다수가 우생주의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전학
자들의 선언」을 주도했던 미국의 멀러는 X선에 의한 인공적 돌연변이
의 발생을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확립한 공로로 1946년에 노
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말년에 생식세포선택재단(F
oundation for Germinal Choice)의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고, 이 재단에서
엄정하게 가려진 우수한 기증자의 정자를 활용하여 인공수정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멀러가 사망한 후 실제로 그러
한 기관이 설립되었지요.
 
미국의 백만장자 사업가이자 우생주의자였던 로버트 그레이엄(Robert K.
Graham)은 멀러의 구상을 따라 1980년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Escond
ido)에 생식세포선택을위한보관소(Repository for Germinal Choice)라는 이
름의 정자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애초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만
정자를 기증받고자 하였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아주 높은 IQ를
지닌 사람이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정자 또한 선별하여 받았다고 합
니다.
 
이 기관은 언론에 의해서 흔히 ‘노벨상정자은행(Nobel prize sperm ban
k)’이라고 불렸는데요, 노벨상 수상자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자 기증
자로는 열렬한 우생학 지지자였으며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로로 1956
년에 노벨물리학상을 탄 윌리엄 쇼클리(William B. Shockley)가 있습니다.
쇼클리는 IQ가 100 이하인 사람들에게 단종수술 비용을 의무적으로 지
급하자는 제안을 미국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 하
는 등 우생주의적 신념에 따른 돌출적 발언과 행동으로 많은 논쟁의 중
심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지요. 이곳의 정자를 이용한 인공수정을 통해 1
982년 4월 19일 첫 번째 아기의 출산이 이루어졌으며, 같은 방식으로 총
218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관은 그레이엄이 사
망하고 나서 2년이 지난 후인 1999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전기영동법을 개발한 폴링은 원자와 원자의 화학적 결합에 대한 특성을
밝혀내 1954년에 노벨화학상을, 핵실험 반대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62
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미국의 물리화학자입니다. 그는 DNA의 구
조를 밝히는 연구에서는 크릭과 왓슨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고, 겸상적
혈구빈혈증(sickle-cell anemia)1)의 원인이 이상 혈색소인 헤모글로빈 S
가 혈액 중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1949년에 처음으로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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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분자병의 개념이 성립되는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지요. 그렇지만
폴링은 1968년에 결혼기 남녀에게 겸상적혈구빈혈증 및 다른 유해 유전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자에 대한 의무검사를 실시할 것을, 그리고 보인자(保因者, carrier)2)임이
확인될 경우 그들에게 문신을 새길 것을 요구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바가 있습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여 1962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크
릭과 왓슨 또한 상당히 적극적으로 우생주의적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크릭은 1961년에 대규모 우생학 프로그램의 마련을 요구했으며, 멀러의
생식세포선택재단 구상에 대해서도 열렬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또한 유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아이의 출산을 제한하는 계획을 허용해야 한
다는 생각을 피력했고, 예비 부모들이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증을
발급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금은 황당한 발언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왓슨 역시 임신한 태아가 동성애자인 것으로 판명될 경우 여성들이 그
러한 태아를 낙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한다고 주장을 하는가 하면,
1997년에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히틀러가 지지했던 것이라면 모두 반대하는 어리석은 함정에 빠
져서는 안 된다. 히틀러가 정신병을 사회에 대한 재앙으로 여겼던 것은
결코 부도덕한 일이 아니다… 히틀러가 지배자 민족(Master Ra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오늘날보다 좀 더 유능한 존재
로 만드는 데 유전학이 사용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서는 안 된다.3)

이처럼 대부분 노벨상까지 받은 저명한 인류유전학 연구자들에게서 우


생주의적 언행이 빈번히 나타나는 것을 필연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과도
하고 부당한 일이 되겠지만, 그 상관관계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부정하기
는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인류유전학은 그 동기적인 측
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우생학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쇄신
된 형태로 물려받았으니까요. 위에서 언급한 이들뿐만 아니라 1960년대
내내 의료유전학계의 주요 인사들도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작업이 ‘우생
학’의 한 형태라고 이야기했지요.
 
1970년대에 접어들자 인류유전학은 가장 각광받는 과학의 분야 중 하나
가 되었으며, 1973년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과 허버트 보이어(Her
bert Boyer)에 의해 이루어진 재조합DNA(recombinant DNA)4)기술의 개발
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 이후 인류유전학을 다시 한 번 크게 도약
시키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유전자 조작, 즉 유
전자공학(genetic engineering)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유전자 검사 및 치료

0 이러한 재조합DNA 기술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그리고 1990년에 시작되어 2003년에 완결된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에 의해 30억 염기쌍으로 이루어진 인간 게놈5)의 95%
이상이 분석되고 3만 개가 넘는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지도가 작성되면
서, 이제 인간의 생명과 질병을 다루는 인류유전학과 의료유전학은 이전
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적인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1975년에 출
간된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사회생물학(Soci
obiology)』과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
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를 통해 대중화된 사회생물학은 그 주창자
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유전자 결정론적 시각을 사회담론의 수준에서
확산시키는데 상당 부분 활용되었습니다.
 
미국우생학회가 1972년에 사회생물학회(Society for the Study of Social Bi
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영국우생학회 또한 1989년에 골턴연구회(Galton
Society)라는 이름의 소규모 학회로 전환된 것에서 드러나듯, 1970년대
이후 가장 극단적인 이들을 제외하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생학이
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우생학과 유전
학은 진화론적 어법을 사용하자면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거듭해
왔으며, 그 기본적인 관점과 이데올로기를 점차 인류유전학과 의료유전
학 내로 이전시켜 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유전학은 국가의 억압적 통
제와 인구정책이 아니라, 유전상담(genetic counselling)을 통한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우생주의적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역량
을 획득하게 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경쟁 문화의 전면화와 생명공학
산업의 발흥이라는 사회적 조건은 이러한 역량을 더욱 강화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6~1948년에 초대 유네스코(UNESCO) 의장을 지낸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Julian S. Huxley)는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또 한 명의 저
명인사입니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생주의적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린 풍자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쓴 올더스 헉슬리
(Aldous L. Huxley)가 그의 친동생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지요.

줄리언 헉슬리는 영국우생학회가 1937년에 제작한 선전 영화 「인간의


유전(Heredity in man)」에서 해설을 맡았던 바가 있습니다. 15분 분량의
영화는 전반부에서 스포츠․음악․예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
0휘한 사람들의 가계를 소개하며 그 재능이 유전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후반부에서는 열등한 형질이 유전되는 예로서 지적장애인 부모에게서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태어난 여섯 명의 형제가 모두 시설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비추며 이들
의 일그러진 얼굴과 텅 빈 시선을 클로즈업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
막 장면은 헉슬리가 “장애인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은 사회의 당연한 의
무지만, 그들이 태어나지 않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보다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1)

이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우생주의자들은 장애를 지


닌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혼인법을
통해 결혼을 제한하고 단종수술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할 수 없었기에 좀
더 적극적인 네거티브 우생학자들은 안락사까지도 지지했고, 실제로 그
러한 안락사가 암암리에 혹은 공식적으로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유전학은 단종수술이나 안락사가 아니더라도 원하기만 한


다면 장애인의 탄생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기술
들을 발전시켜 냅니다. 그러한 기술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산전
검사(prenatal testing)와 선별적 낙태(selective abortion)라고 할 수 있지요.
즉, 초음파검사, 산모혈청검사, 양수검사(amniotic fluid test)2), 융모막융
모생검(chorionic villus sampling, CVS)3) 등을 통해 태아의 장애 유무를 미
리 확인하고 장애가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선별적으로 낙태를 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산전 검사는 어떤 유전학적 이상의 위험성이 존재하는지를 일차적으로


가려내기 위해 광범위한 산모를 대상으로 실시되는 선별검사(screening)
와 선별검사에서 태아에게 일정 확률 이상의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판
단될 경우 그러한 이상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 실시되는 진단검
사(diagnostic testing)로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양수검사 외에는 별다
른 산전 검사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1960년대에는 양수검사가 선별검
사인 동시에 진단검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초음파검사
와 산모혈청검사와 같은 비침습적 검사가 선별검사의 성격을 갖는다면,
양수검사나 융모막융모생검과 같은 침습적 유전자검사는 진단검사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요.4)
 

▲유전자검사를 제공하는 전 세계의 실험실(적색)과 유전자검


사 이루어질 수 있는 장애(녹색)의 증가를 보여주는 도표. 200
1년만 해도 819가지에 머물렀던 장애의 목록은 급격한 증가가
이루어져, 2015년 8월 1일을 기준으로 무려 4,412가지 달한다
(출처: www.genetests.org).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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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산전 검사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거치면서 질병과 연관된 유전
자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고 관련 기술이 정교화 됨에 따라 점점 더 확장
되고 있습니다. 유전자검사를 제공하는 전 세계의 실험실과 클리닉에 대
한 정보 등을 안내하는 진테스트(GeneTests)의 웹사이트(www.genetests.
org)에서는 2015년 8월 1일 현재 유전자검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4,412가
지 장애(disorder)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 중 대다수는 태어날
아이에게 유전적 장애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재생산 관
련 검사이지요. 또한 유산의 위험이 없는 비침습적 검사인 초음파검사와
산모혈청검사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산전 선별검사가 이제는 거의 모든
산모를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범위한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선별검사는 사회적으로 보자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공중위생 경제학에서는 이것이 비
용 대 편익이라는 견지에서 정당화됩니다. 즉 산전 선별검사 프로그램은
관련 인구에 대한 검사를 실시하는 데 드는 총비용이 검사를 안 했더라
면 태어났을 장애를 지닌 아기에 대한 의료비 및 복지비용보다 적다는
것이 논증될 수 있을 때 도입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유형의 비용-편익
분석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단종수술과 안락사에 대한 근거
로 활용되었던 과거의 네거티브 우생학과 뚜렷한 공명이 존재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산전 검사를 정당화해주는 논거는 임신과 관련하여


소위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informed choice)’을 할 수 있는 예비 부
모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산전 검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유전상담(ge
netic counselling)은 이러한 부모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객관적인 정보
를 제공하면서 ‘비지시적(non-directive)’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됩니다.
그러나 과연 산전 검사는 예비 부모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며,
예비 부모들은 비지시적인 상담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일
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크게 보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태아의 장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산전 검사가 현재는 고민을 하


거나 선택을 할 여지도 없이 하나의 ‘관례화된(routinized)’ 절차로서 제공
이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검사 자체가 특정한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
니다. 즉, 임신을 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초음파검사와 같은 선
별검사는 이미 양수검사와 같은 진단검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진단검사는 선별적 낙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낙태
가 불법화되어 있어 정확한 실태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0
선별검사를 받은 산모들이 이후 진단검사와 낙태를 선택하는 비율은 이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러한 연계적 경향성을 잘 보여줍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취합된 관련 데이터를 보면, 미국(1984~1993년)의


경우 다운증후군에 대한 산전 선별검사에서 양성 결과가 나온 산모들
중 79%가 양수검사 제안을 받아들였고, 양수검사에서 다운증후군을 지
닌 태아를 임신한 것으로 진단된 여성의 85%는 다시 낙태를 선택하였습
니다. 그리고 영국(1991~1993년)의 경우에는 같은 상황에서 75%가 양수
검사 제안을 받아들였고, 92%가 낙태를 선택하였지요.5) 그러니까 사람
들은 기차역에서 가서 자유롭게 행선지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 입구에서 모두에게 나눠주는 부산행 기차표를 받아들고 나서 부산으
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의 여부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유전상담을 행하는 주체들과 여기서 제공되는 정보들이 결코 중립


적이거나 비지시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산전 검사와 선
별적 낙태의 과정에서 상담을 행하는 주체는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
의 관점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장애를 의료적 중재
를 통해 해결되어야만 할 문제로 여기도록 훈련을 받아왔으며, 어떤 이
상이 치료될 수 없다면 사전에 예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들에게 있어 비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편 많은 장애인들에게 있어 장애란 엄연한 삶의 일부일 뿐 의료적인


비극이 아니지만, 장애에 대한 산전 검사와 낙태의 여부를 선택하는 과
정에서 그들의 경험은 하나의 정보로서 제공되지 않습니다. 즉, 유전상
담을 행하는 주체들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지시적이고자 해서가 아
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관점과 지식 자체가 이미 한쪽 방향으로 편향
되어 있기 때문에 비지시적인 상담이 이루어지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지
요.

셋째, 예비 부모들이 산전 검사의 결과에 따라 장애아의 낙태를 선택하


도록 하는 강력한 사회문화적․경제적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
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인 문화가 만연
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장애를 지닌 태아의 출산 여부
를 결정해야 하는 예비 부모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사회적 지원의 미비 속에서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추가적인
의료비․양육비․교육비의 부담을 개인적으로 짊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실태조사에서 나타나듯 경제적 활동까지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
도 비일비재해 이중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은 장애아의 출산을 가로막는 무시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
용을 하지요.
0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명예교수이자 책임있는유전학을위한회의(Coun
cil for Responsible Genetics, CRG)의 일원인 루스 허버드(Ruth Hubbard)는
이러한 측면을 날카롭게 성찰하며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
다.

"물론 어떤 여성은 그녀가 지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임신을 중절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하지만, 그녀는 또한 임신을 중절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충족된 삶을 살
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한다. 출산 전의 중재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따라
행해진다면 그것은 재생산 선택권을 확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권을
제한한다."6)

앞서 살펴보았듯 과거의 우생학도 때때로 본인의 동의를 거치는 소위


‘자발적 단종수술’이라는 형태로 제시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강압이 존재 했습니다. 또한 현재 어떤 장애인이 시설로의 입소를 결정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인 압력 때문이지 시설에서의 삶이 좋아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즉, 어떤 선택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반대편을 선택을 가로막는 사회적 압력이 충분히 제거가
되어야 하지만, 자발적 단종수술이나 시설 입소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산
전 검사 및 선별적 낙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
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평가는 산전 검사를 받는 사람들이 어떠한


선택권도 부정당하게 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누
군가에게 직접적인 강요를 당하거나 속아 넘어가서 선별적 낙태를 택하
게 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요인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맥락적으
로 생성해내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가
하나의 우생주의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각주1) 염운옥,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 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
학』, 11~12쪽.
 
0
각주2) 가는 주사 바늘을 이용해 자궁 내에서 양수를 채취한 후, 양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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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되어 있는 태아로부터 탈락한 조직세포의 DNA와 양수의 화학 성분
을 분석하여 태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산전 검사법이다. 일정한 양
의 양수가 태아를 둘러싼 후인 임신 15주 이후부터 20주 사이에 실시된
다.
 
각주3) 태아와 양수를 둘러싸고 있는 융모막은 수정란에서 유래되기 때
문에 태아와 거의 유사한 염색체 구성을 나타낸다. 융모막융모생검은 이
러한 융모막의 융모를 채취하여 세포유전학적 분석, DNA 분석 및 효소
분석을 하는 산전 검사법의 하나로 통상적으로는 임신 10~12주 사이에
실시된다. 양수검사보다 조기에 시행될 수 있는 반면, 태아가 유산될 위
험성은 조금 더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각주4) 침습적(invasive) 검사란 신체 조직에 손상을 유발하며 그로인해
잠재적으로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는 외과적 형태의 검사를 말한다. 양
수검사와 융모막융모생검와 같은 침습적 검사는 산모와 태아에게 직간
접적인 영향을 주어 유산의 위험성을 일정 정도 높이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생명권력(biopower)에 대한 통찰은 기본적으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76년에 출
간된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La volonté de sav
oir)』의 마지막 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행해진 19
75~76년의 강의 『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Il faut défendre la sociét
é”)』의 마지막 11번째 강의에서 생명권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개요를
제시한 바 있지요.

푸코는 근대 이전의 군주가 지닌 고전적 주권에도 자신의 인민에 대한


어떤 종류의 생사여탈권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죽음
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되는 칼의 권리였으며 “죽게 만들고 살게 내
버려 두는” 권력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전환 이후 국
가가 인민에 대해 행사하는 생사여탈권은 오히려 삶의 편에서 불균형하
게 행사되는 권리로,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으로 성격
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푸코는 이를 바로 생명권력이라고 지칭합
니다.1) 따라서 생명권력이란 기본적으로는 생명[生]을 지키는[衛] 권
력, 즉 ‘위생권력’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0  
▲미셸 푸코, 그리고 그가 story by style - in solitude
‘생명권력’이라는 life
개념의 개요를 제
시한 『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 (오른쪽 아래)와 『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오른쪽 위).
 
푸코가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국가권력의 성격
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에 따라 생산하는 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되는 것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前)자본주
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생산자인 농민들이 생산수단인 토지에 직접 결합
되어 식량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알아서 먹고사는 자급자족 성격의 사
회였습니다. 그러니 군주의 입장에서는 그냥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
고, 죽게 만드는 칼의 권리를 통하여 능동적 권력이 행사되지요.

한편 자본주의로의 전환기를 기점으로 생산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


리되어 무산자가 되었지만, 이들 중에서 고용이라는 매개과정을 거쳐 자
본가가 지닌 생산수단에 간접적으로 결합되지 않는 대중, 즉 상대적 과
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이 광범위하게 발생합니다. 따라서 근대적 권력
은 이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고, 살게 만들 때 능동적 권력의 행
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복지의 탄생이
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에 국가권력은 인민들이 자


본주의적 노동 규율을 내재화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개별적
인 신체’에 대한 규율과 훈육에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
터 근대적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감옥․병원․
구빈원․학교․군대․공장 등의 장치를 통해 이러한 과정이 어느 정도 진척
되고 그 메커니즘이 확립되자, 18세기 후반기부터는 이와 더불어 ‘인구
(즉 전체 노동력)’의 육성과 관리에 주된 관심을 두는 생명권력이 등장하
게 됩니다. 그러니까 개체의 수준에서 행사되는 규율권력과 인구의 수준
에서 행사되는 생명권력이 교차적․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하며 인간의 생
명이 생산에 활용되고 그러한 활용에 순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생명권력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


떤 개개인이나 죽음의 위기에 처해 보호가 필요한 구체적인 사람들의
생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의 “종(種 )으로서의 인간(human specie
s)” 내지는 인구 전체의 생명이 그 대상이 됩니다. 이에 따라 생명권력은
인구의 출산율․사망률․평균수명․발병률 등의 ‘정상적(normal)’ 분포를 유
지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둡니다. 의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이 근대 권력의
핵심부와 접속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0 그리고 인구의 건강과 생명활동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


러한 명분과 목적 아래, 때때로 전체 인구 중 열등하거나 해악적이라고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간주되는 특정 집단을 정리해버리는 잔혹함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생명권력은 그 자체로 ‘생물학적 전체주의’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으며, “마치 유기체적 신체에 내포된 부분이지만 그 신체의 생명을 위
협하는 암세포를 제거하듯이”2) 전체를 위해 살게 할 자와 그럴 가치가
없는 자를 규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처럼 전체 인구의 생명활동을 약화시키는 이들이란 어떤 종


류의 인간들일까요? 푸코의 설명을 따르자면 그들은 큰 틀에서 볼 때 자
본주의 체제 내에서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자본주의적 규율에 순
응하지 못한다고 판단된 인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각종 유전병을 비롯
한 질병이나 정신․정서․신체상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일차적인 대상이 됩니다. 더불어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다양한 비행자들과 자활(自活)하지 못하는 인간들 또한 언제든지 그러한
집단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체를 살리기 위해 소극적인 방
식으로 죽도록 방치되거나 적극적인 방식으로 제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맬서스가 1798년에 쓴 『 인구론 』 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


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잉여 인간들은 죽어야 한다고,
그렇게 남아도는 인간은 “죽게 내버려두는 게 사회 전체의 증대를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생명권력의 한 측면을 직접
적으로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 운
동이나 나치하에서 인종위생학에 기반을 두고 장애인에 대한 학살이 자
행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근대적 생명권력이 가장 능동적으로 작동한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푸코가 제시


한 생명권력 개념을 새로운 방향에서 확장하고 심화시켜 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그는 푸코와 달리 생명권력이란 근대 이후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구 정치 구조 속에 항상 이미 함축이
되어 있었다고 주장 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의 관점에서는 ‘살 가치
가 없는 생명’을 결정하는 생명권력이란 모든 주권 권력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고, 단지 근대 이후에 그러한 생명권력의 발현이 좀 더 일상화
내지 전면화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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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감벤의 생명권력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그가
쓴 가장 유명한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1)와 ‘예
외상태(state of exception)’2)라고 할 수 있는데요, 호모 사케르란 일단 예
외상태에 놓여 있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이란 무엇이며, 예외상태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호모 사케르’와 ‘예외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푸코의 생명권


력 이론을 확장하고 심화시켜 낸 조르조 아감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삶/생명(life)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로 구분되어 있
었는데요, 그 하나는 조에(zoē)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bios)입니다. 조에
란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
킵니다. 즉 동물적·생물학적 삶/생명이 바로 조에입니다. 반면 비오스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킵니다. 즉 정치
적·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생명이 바로 비오스이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조에로서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은 오이코스(oikos),


즉 가정이었고 비오스로서의 삶이 실현되는 공간은 폴리스(police)였으
며 이 둘은 철저하게 분리·구분되었습니다. 아감벤은 주권 권력에 의해
비오스의 영역에서 ‘추방’되고 ‘배제’되어 조에로서만 존재하는 생명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했던 ‘한갓 생명(bloßes Leben)’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이야기한 ‘단순한 생명(sheer life)’ 개념을
참조하여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아감벤은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의 대표적인 형상을 고대 로마법에 나오


는 호모 사케르에서 찾는데요, 로마법에서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
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자로서 기술됩니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법에서도 배제되어 있고,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
서 세속의 법에서도 배제되어 있는 존재, 즉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 존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호모 사케르가 주권 권력에 의해 법[즉 권
리]으로부터 추방되고 배제된 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만 존재하는 영역
이 바로 ‘예외상태’입니다.

이러한 예외상태는 좀 단순화시켜 얘기하자면 일종의 치외법권지대(extr


a-territory)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치외법권지
대로서의 예외상태는 단순히 법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
0 제된 채 법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외상태는 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법의 외부에 있지만, 그 자체가 법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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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된다는 의미에서는 여전히 법의 내부에 있으며 법과의 관계를 잃지
않습니다.

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외상태란 법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극한·문턱,


좀 더 정확히는 그러한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비식별역(z
one of indistinction)에 해당합니다. 결국 호모 사케르 역시 배제의 형식을
통해(서만) 법에 포함되는 존재, 그러한 비식별역에서 주권자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예외상태’에 놓인 자로서의 ‘호모 사케르’라는 형상을 우리는 바


로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의 대상이 되는 장애를 지닌 태아에게서 발
견할 수 있습니다. 장애를 지닌 태아가 우리 사회에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간주되고 임의적인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
며, 낙태와 관련된 법에서 장애가 말 그대로 예외적 조건으로 취급된다
는 점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나라는 낙태가 실제로는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여


전히 법에 의해서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자보건법」은 제14조 ①항에서 합법적으로 낙태(인공임신중절수술)
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명시하고 있는데, 그 중 1호가 바
로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조항은 태
아의 장애 여부를 직접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명시적으로 장
애를 지닌 생명의 가치를 절하하면서 장애아의 출산을 합법적으로 방지
하는 말 그대로의 ‘우생학적’인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영국의 「 낙태법(Abortion Act)」 은 임신 24주 후에는 임신중절을


금지하지만, 아이가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을 지니고 태어날
상당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만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외조
항은 표면적으로 태아가 출산 과정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
박하거나 또는 신생아기 사망(neonatal death)―살아서 태어난 아기가 4주
이내에 사망하는 것―에 이를 수 있는 경우를 포괄하기 위해 마련된 것
입니다.

그러나 그 법이 ‘심각한 장애를 지닌(severely handicapped)’에 대한 구체


적인 정의와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장애와 그렇지
않은 장애의 경계를 어디에서 그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즉 누가 실
제로 태아에 대해 ‘주권자’로 행세하는가의 문제는 최종심급에서 결국
의료권력의 재량에 맡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 자
0
체로 생명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 구개열(口蓋裂)을 이유로 태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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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지요.3)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낙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부모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사실 산전 검사에 의한 장애태아의 선별적 낙태는 성별 선택(sex selectio
n)에 의한 낙태와 마찬가지로 불법이라고 주장될 수 있습니다.4) 그러나
그러한 낙태가 불법/합법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종의 비식별역으로 들
어올 수 있는 것은 「모자보건법」제14조 ①항 5호에서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낙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의료권력이 손
상을 지닌 태아의 임신은 그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로 인해 모체의 건
강을 심각하게 해칠 것이라는 자의적 판단을 내릴 권한을 부여받아 행
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

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가 제공하고 있는 국가건강정보포털(health.mw.g


o.kr)에서는 ‘산전 기형아 검사’ 항목의 개요 부분에서 “임신부나 그 가족
은 임신 기간 내내 태아가 건강할까하는 불안감으로 많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만일 유전적 질환이나 선천적 기형을 갖고 있는 신생아가 태어
나면 부모와 다른 가족은 물론 본인도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부담으로
고통 받기 때문입니다.… 특히 염색체 이상이 있는 경우는 평생 장애를
갖게 되고, 대부분 다발성 기형을 동반하므로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
다.”라고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작성 및 감수자
로 ‘보건복지부/대한의학회/대한산부인과학회’라고 명시가 되어 있지
요.

국가권력과 결합된 의료권력의 이러한 공식적인 입장 속에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고통”과 “심각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지시적인 방향성이 또한 함축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처법(즉 선별적 낙태)은 법의 내부와 외부
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비식별역에서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실행되고
있겠지요.

푸코는 1976년에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을 제시한 후 1978~79년의 콜


레주 드 프랑스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Naissance de la biopolitique)』에
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성격과 그러한 통치가 초래하는 주체 형성
0
의 양태에 대해 선구적인 분석을 수행한바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노자타협과 사회통합을 기조로 하는 복지국가적 통치가 위기에 빠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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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처리즘(Thatcherism)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시작으로 1980년대에 신자유주가 전면화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
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흔히 자유방임에 기초한 고전적 자유
주의로의 회귀나 그것의 현대적 응용으로서 이해가 되어왔습니다. 그러
나 푸코는 『 생명정치의 탄생 』 에서 현대 신자유주의 근원이 되는 두
종류의 신자유주의를 다루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신자유
주의의 성격을 분석해 냅니다.

푸코가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신자유주의는 전후 1948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시기의 독일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입니다. 질서자유주의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라이부르크 학파의 발터 오이켄(Walter Euc
ken)과 프란츠 뵘(Franz Böhm)을 들 수 있으며, 빌헬름 뢰프케(Wilhelm R
öpke)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 또한 이들에게 지
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장이란 기본적으로 ‘교
환’의 장소이지만, 오이켄을 비롯한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이란 ‘경
쟁’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쟁이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즉 자연적 소여)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산되어
야만 하는 것으로서 파악된다는 점입니다.1)

하이에크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란 ‘모든 개인의 활동을 상호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원리’로서의 경쟁을 창출해내는 것이기에 결코 자유
방임을 원리로 삼지 않습니다.2) 그리고 뢰프케는 좀 더 명확히 “시장의
자유에는 능동적이고 극도로 용의주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
니다.3) 즉, 신자유주의란 시장과 사회 전반에 인위적인 경쟁을 구축하
기 위하여 법과 제도를 통해 개입하는 ‘적극적 자유주의’이자 ‘개입적 자
유주의’이며, “사회 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는 관
점하에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을 해체한 후 시장질서와 경쟁의 원리를
일상의 수준으로까지 확산시킴으로써 사회를 통치하려는 통치 기법인
것입니다.

푸코가 다룬 또 하나의 신자유주의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걸친 이른


바 제2세대 시카고학파, 특히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문제를 다뤘던
시어도어 슐츠(Theodore W. Shultz)와 게리 베커(Gary Becker)의 이론입니
다. 인적자본 이론에서 노동이란 생산을 위해 기업에 일정 시간만 판매
되는 노동력 상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자가 지닌 적성․능력으로서
의 ‘능력자본’입니다. 그리고 임금이란 이러한 능력자본에 할당된 소득
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각자의 능력자본을 소유하고 그러한 자본을 투
자해서 임금이라는 형태의 소득을 창출하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의[에
0
대한] 기업가’인 일종의 1인 기업으로 간주됩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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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능력자본으로서의 인적자본은 선천적 요소와 후천적 요소로 구성
이 되는데요, 전자는 다시 유전적인 것과 단순히 선천적인 것으로 구분
이 될 수 있으며, 후자는 부모의 교육적 투자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투자’란 단순히 아이의 교육에 돈을 지출
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의 투자를 넘어, 부모가 자녀와 함
께 시간을 보내고 애정을 쏟는 것 같은 비경제적 행위까지를 포괄합니
다.5)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사회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과 더불
어 개인까지도 각각 투자․생산․비용을 관리하는 하나의 기업으로서 파
악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회 전체를 ‘경쟁’과 ‘기업’이라는 키워드에 따라 재편해 온 현


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체제는 종신고용 관행의 철폐, 능력별 급여의 도
입, 노동시장의 유연화, 사회복지의 축소에 따른 사회보장의 개인화 등
과 같은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무한경쟁의 환경을 조성해 왔습니다.
또한 그러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체들은 마치 시장에서 기업이
도산되며 퇴출당하듯 가차 없이 사회 바깥으로 내쳐지게, 즉 “죽게 내버
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 메커니즘은 단지 근대적 규율권력
에 의해 통제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 즉 시장의 원리와 욕망을
내면화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투자를 행하고 자기의 위험을
관리하는 ‘자기-경영적 주체’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자기계발서의 적극적인 탐독,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한 시간 쪼개기 형태


의 자기 투자, 외모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성형수술 및 피트니스(fitn
ess)―즉 인위적인 적합화―의 대중화, 조기교육과 사교육 투자의 지속적
인 증대는 개인과 가족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경영적 주체
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느 시점부터인가
「무한도전」과「슈퍼스타K」로 대표되는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가
지배적인 대중문화의 형식으로 등장하고 ‘루저’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된
것은, 실제로 승자독식의 서바이벌 게임과 다를 바 없는 우리 사회의 모
습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6)

자,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 환경과 우생주의는 과연 어떤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살펴본 인적자본의 요소에서 직
접적으로 나타나듯, 유전적․선천적인 결함을 지닌 장애인은 출발선에서
부터 능력자본의 취약함을 지닌 존재로서 간주됩니다. 그리고 후천적인
교육 투자가 이루어진다 해도 능력자본이 회복되고 무한경쟁의 환경에
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낮은 존재로 이 사회에 남겨질 수밖에 없
습니다. 특히 지식기반 사회라고 불리며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성이 증대

0
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을 포함한 발달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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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은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우수하고 결함이
없는 아이를 갖고 싶은 우생주의적 욕망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
에서 점차 확대되어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생주의
적 욕망이 현대를 살아가는 자기-경영적 주체들에게 내면화된 것으로
존재할 때,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굳이 강압적 정책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판매되는 유전학적 서비스와 생명공학 상품을 통해 그러한 우
생주의적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됩니다.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미국의 인공수정 전문의 제프리 스타인버그. 그는 자신이 운
영하는 임산연구소(The Fertility Institutes)의 홈페이지에 ‘눈 색
깔, 머리 색깔, 암에 걸릴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산전 검사 및 선별적 낙태와 같은 네거티브 우생학적 서비스뿐만이 아
닙니다. 체외수정(in vitro fertilization, IVF)과 착상전 유전자진단(pre-impla
ntation genetic diagnosis, PGD)7) 기술은 ‘맞춤아기(designer baby)’8)의 탄
생을 이미 가능하게 했고, 이는 현재와 같은 치료적 목적이나 성별의 선
택을 넘어선 포지티브 우생학적 서비스로 상품화될 가능성을 충분히 지
니고 있습니다. 1978년에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즈 브라운(Louise Bro
wn)을 탄생시켰던 저명한 발생학자 로버트 에드워즈(Robert G. Edwards)
교수는 유럽인간생식및발생학회(European Society of Human Reproductio
n and Embryology)의 1999년도 연례총회에서 “머지않아 유전병이라는 무
거운 짐을 짊어진 아이를 낳는 것은 부모의 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질을 고려해야만 하는 세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선언을 하기
도 했지요.9)

그리고 루이즈 브라운의 출생을 성공시킨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미국의


인공수정 전문의 제프리 스타인버그(Jeffrey Steinberg) 박사는 2008년 12
월 자신이 운영하는 임산연구소(The Fertility Institutes)의 홈페이지에 ‘눈
색깔, 머리 색깔, 암에 걸릴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
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논란을 불러일
으키기도 했습니다.10)만일 이와 같은 형태의 포지티브 우생학적 서비스
가 시장에서 판매된다면, 그리고 현재와 같은 무한경쟁 및 배제의 질서
0
가 유지․강화된다면, 일정한 자금력을 지닌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기꺼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이 ‘투자’를 감행하고자 할 것입니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
bermas)가 착상전 유전자진단 기술의 우생학적 위험성을 강하게 지적하
며 철학적 비판을 수행했던 것은11) 결코 노철학자의 과민 반응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티븐 루크스(Stephen Lukes)의 아래와 같은 통찰은


현대의 유전학적 서비스를 정당화하는 소위 ‘자율적 선택’이라는 수사가
지닌 어떤 근본적인 난점과 허구성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
생학적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실천 또한 매우 근본적인 수
준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성찰토록 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
다.

"A는 B가 원치 않는 것을 하게 만듦으로써 B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A는 또한 B가 원하는 것 그 자체를 형성해 내고, 거기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게 만듦으로써 B에 대해 권력을 행
사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나 타자들이 가져주길 원하는 바로 그러한
욕망을 그들이 실제로 갖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최고의 권력의 행
사가 아니겠는가?"12)

우생주의적 실천이 과거에는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면,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우생주의적 욕망을 내면화
한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러한 실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개인주의적
우생학(individual eugenics)’이나 ‘자발적 우생학(voluntary eugenics)’ 같은
개념1)이라고 할 수 있지요. 트로이 더스터(Troy Duster)가 ‘뒷문으로 이
루어지는 우생학(back door eugenics)’2)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철학자
필립 키처(Philip Kitcher)가 사용하는 ‘소비자 우생학(consumer eugenic
s)’과 ‘자유방임 우생학(Laissez-faire eugenics)’이라는 용어3)도 뉘앙스와
시각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맥락 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리고 그러한 우생주의적 욕망의 내면화 과정에는 무엇보다도 무한
경쟁의 체제에서 밀려난 주체들을 ‘사회적 배제’의 영역으로 밀어내 “죽
게 내버려”지도록 만드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0
▲ ▲ 장애대중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빈곤계층에서 끊임없이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발생하고 있는 자살, 스페인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
스텔을 참조하자면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제도적
으로 금지”당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타살이다. (사진 앞
열의 오른쪽이 마누엘 카스텔)

스페인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은 사회적


배제를 “특정한 개인들과 그룹들이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 제도와 가치
에 의해 고안된 사회 표준 내의 자율적인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위치로
의 접근을 제도적으로 금지당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4) 장애대중
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빈곤계층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자살―즉
죽음의 자발적 선택―을 우리가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제도적으로 금지”당함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우생주의에 대한 저항
은 서로 연동되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체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권력과 우생주의적 욕망에


의 예속화(assujettissement)에서 벗어난 주체화(subjectivation)의 가능성
을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예속화’가 기존 체제의 통치 원리에 따
라 자기 관리를 실행하는 순응적․복종적 주체의 형성이라면, ‘주체화’란
그러한 통치 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이탈적․저항적 주체의 형성, 즉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체제의 질서와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장치를 통하여 이에 예속된


주체를 생산해내지만, 우리가 직관적․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러한 과정이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시설 체제는 그러한 시설의 규율과 권력에 순응하는
주체들을 생산해 낼 수 있기에 유지되지만, 그로부터 이탈을 하고자 하
는 탈시설의 욕망을 지닌 주체들의 생성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습니
다. 즉 예속화에는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언제나 일정한
여백 내지 공백이 존재를 하는 것이지요.

푸코는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에서 “권력이 있는 곳, 거기에는 저항


이 있다”고, 저항은 권력관계의 “축소[배제]할 수 없는” “또 다른 항”으
로서 그러한 권력관계 속에 기입되어 있다고 말합니다.5) 그렇다면 권력
에의 예속화란 단 한 번의 절차로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리고 그러한 반복과 갱신의 과정에서 주체의 내재적 ‘반성’에 의해,
보다 일반적으로는 우발성을 띤 외재적 ‘사건’―타자와의 만남을 포함한
0
―의 틈입과 이러한 반성의 결합에 의해 일정한 균열의 가능성이 발생하
story by style - in solitude life
고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예속화가 단 한 번의 절차로서 완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화가 또한


어떤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상응합니다. 그러니까 어
떤 개인이 한 번 저항적․이탈적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영원히 저
항적․이탈적 주체로 존재할 것임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처럼, 역으로 어
떤 개인이 한 번 순응적․복종적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영원히 순
응적․복종적 주체로 남을 것임을 보장하지도 않는 것이지요. 즉, 예속화
와 주체화는 서로 길항(拮抗)의 힘을 주고받는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으
로서 존재를 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하나의 경향성이 우세해질 때 그것은 ‘양의 되먹임(positive fe


edback)'을 발생시키면서 상대적인 안정화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대편의 운동을 완전히 분쇄하고 정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과는 다른 주체로 변태할 수 있는 계기를 자기 자신의 수준에서, 또한 자
기 자신과 타인들 간의 만남의 과정에서 촉발해내기 위한 실천이 끊임
없이 모색되고 개발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 사회구조적 측면에서는 저항권의 발동을 통해 사회적 배제의 메커


니즘을 약화시키고 해체하는 것입니다. 아감벤의 생명권력 이론에서 주
권자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의를 따라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
는 자”로서 규정되는데요, 그러한 주권자는 법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위치하는 역설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권자는 법질서의 효
력을 정지시키는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법의 외부에 위치하지만, 동
시에 그러한 권력을 법에 의해 정당화하면서 법의 내부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자의 위치는 법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그러한
배제의 형식을 통해 법에 포획되어 있는 호모 사케르7)의 위치에 정확히
상응을 합니다.

예컨대 계엄과 같은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주권 권력은 헌법의 효


력과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킨다는 의미에서 법의 외부에 있지만, 그것
은 많은 경우에 법률에 의해서만 선포될 수 있다고 규정되며 소위 ‘특별
법’의 형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에 대응하는 인민들의 저항권 역시
기존의 헌법을 취소하고 새롭게 제정할 수 있는 제헌권력으로까지 소급
된다는 의미에서 헌법의 외부에 있지만 이 또한 헌법에 의해 정당화되
며, 그러한 의미에서 법의 외부와 내부를 가로지르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칭성은 예외상태하에서 벌거벗은 생명으로 격하된


0(혹은 그러한 격하의 가능성에 항상적으로 노출된) 호모 사케르가 정치
적 생명/삶으로서의 존재론적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저항권의 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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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생주의적 욕망을 강화
하는 신자유주의적 배제사회에서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적인 삶의 권리’입니다. 그것은 기본소득(basic income)8)을 통해서 이루
어질 수도 있고, 공공시민노동 체제9)의 구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
적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적인 삶의 권리는 인민에게 주어진
최종심급에서의 권리인 저항권이 유의미하게 활성화될 때만이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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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지 못해 미안
사회·정치

몸 크고 얼굴 크고 마음도 큰 지구인 남자를 기다리는 외계인 남자.. 게이이며 모솔인 생명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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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토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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