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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년, 내가 이 학교에 온 후 한 학기 조금 더 지난 방학 보낼 때까지 마음 속에 맴돈 생각은 “내가

뭘 위해서 수능을 봤지”라는 의문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잔뜩 건드리면서 정작 가장 논쟁거리여야


하는 학내 민주주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새내기인 내가 보기에도 소통도, 실천도
너무나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타에서의 말싸움만은 꽤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학우들간의 관계도 묘연하고 다들 막막한 미래에 대해서 고민만 한가득인
듯했다. 물론 그래도 성공회대에서의 삶을 즐겁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학교 전체의 미래가 걸린
일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학부/학과제 원칙을 폐지했다. 내 생각에 이런 정책을 만든 이유는 4 차


산업혁명이니 융합학문이니 하는 국제사회의 트렌드에 적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개혁”이 우리가 학부제 개편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4 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미래학부나 유학생을 받아들이기 위한 국제학부를 신설하려고해도,
“학부”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 개념을 재도입할 것인가? 그외에도 취업에
용이해지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를 해놓은 듯 하지만 학생회에서 제시한 요구안대로 개편안은
인문융합자율학부를 외면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바꿀 정도로.

그러나 만일 학과/학부제가 사라진다고 한다면, 이렇게 임의로 목적을 두고 밀어줄 학과를 나누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다. 학과/학부제가 사라지면 분명 가장 중요한 것은 커리큘럼의 다양성이다.
그런데 맥락도 없고 학교의 정체성과도 상관없는 커리큘럼을 그저 취업을 보장해준다는
홍보차원에서 내놓는다면 기존 학생들에게도 문제가 될 뿐더러 장래의 학생들에게도 실속있는
커리큘럼도 아니다.

우리 학교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 더더욱이 질적인 소양을 쌓은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우리 학교는 현재 사회과학이 상징적으로 큰
틀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과학에서 다 다루지 못하는 실용성의 측면에서는 소프트웨어학과나
미디어컨텐츠학부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인문융합학부에는 주요 어문학과 3 개와 신학과 정도밖에
없다. 그 흔한 철학과나 국어국문학과, 혹은 역사학과조차도 없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학문보다는
교양을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이 시장의 시녀가 되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인간성과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혜를 습득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다.

물론 간학문적인 학풍이 우리 학교의 특징인만큼, 융합학문을 위한 학과나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학교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배운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결핍마저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껍데기를 씌우려고 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회학과
빅데이터가 관계가 있거나 미디어컨텐츠가 코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학과 4 차 산업혁명과는 무엇을 엮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문학과들은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대학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앞서 대학은 자신의 사명에 투철할 필요가 있다. 지식인으로서 따지면 학생들도 물론이다.

게다가 인문학은 우리 학교의 주요 학문인 사회학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분명


사회과학에서 다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인문학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실증주의로만을 알 수 없는 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윤리적 가치라고 믿는다. 우리 학교는 대한민국 학생 운동에서 민주화의
거점이었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듣는다. 그런데 위기에 빠진 대학 인문학을, 안 그래도 옆동네
민주화의 주인공들마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 상황을 그저 내버려둘 것이란 말인가? 더이상
우린 인서울 끝자락 대학이니까, 우린 별볼일 없으니까 같은 자조적인 소리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시대의 인물이 언제나 명문이었던가? 공자는 무당의 자식이었다. 예수는 구유에서 태어났으며
소크라테스는 산파에게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도 맨 처음에는 작은 시골 어딘가에 선교를 위해
세워진 이름없는 학교였다.
우리도 한때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고 투박하지만 그 정신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리학교에도 존재한다. 외면하고 있었다면 되찾으면 된다. 우리라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다른 여러 지방대들의 케이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생존이라는 명목을 위해
폐쇄되었다. 지금 성공회대의 모습도 다르지 않은 실정이다. 지금 우리는 인서울에서 지방대로
추락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달린 것이다.

우리 학교에도 분명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존재할 것이다. 실제로 나도 사회과학보다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딱히 갈만한 학과가 없어 영어영문학과라도 선택했을 뿐이다. 성공회대가
처음부터 실용적으로 설계되었다라고 말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났다. 그동안 성공회대는
지식인 양성을 위한 길을 걸었으며 사회를 개혁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길러냈다. 이제 와서 입을 싹
닦기에는 너무나도 어렵다. 나도 취업을 하고 싶다. 나도 돈 벌고 싶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재 개편안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회대가 인문융합자율학부를 버리는
카드로 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타 학과에 없는 예산을 쏟아붓는 것은 분명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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