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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도망치세요, 아가씨
(19) 도망치세요, 아가씨
19 금 소설 속 엑스트라의 몸에 들어왔다.
-1-
여주고 남주고 전부 변태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 성관계밖에 없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주인공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미쳐서 성관계만 맺더라도 내게 영향을
끼칠 일은 없다는 것이다.
?
***
?“후원자?”
??“뭐, 뭔데.”
애니카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3 년 전에 되찾았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니카 공작, 그리고 후원.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알베르트 모니카였다. 그것은 즉, 오늘 방문할
손님은 변태기 충만한 남자 주인공이라는 뜻이었다.
?
어우. 내가 싫은 티를 내며 얼굴을 구기자 애니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활발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 아마도?”
쿠키? 나는 반색하며 애니카를 바라봤다. 그녀는 손님용 쿠키를 몇 개 빼돌렸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애니카가 주방으로 가는 사이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달콤한 쿠키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쯤에서 기다리면 되려나. 나는 수도원 건물과 정원을 잇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 날씨가 퍽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불편한 모자는 벗고 긴 금발을 쓸어내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이 거세게 흔들려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헉.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
저벅저벅.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정원을 가로질러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람이 완전히 멎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걸음 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알베르트를 수도원장에게 안내해 주다가 애니카와 엇갈리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했으나 손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모자에 욱여넣은 뒤 그를 수도원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
***
?“공작님을 봤다고?”
?“어땠어? 진짜 엄청 잘생기셨어?”
??“…….”
??“엥? 저를요?”
?“부르셨어요, 신부님?”
고아였던 나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 주신 분들이라 그런지 수녀님들과 신부님은 나와 대화할 때마다 편하게
말을 건넸다. 신부님이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스텔라입니다.”
가만히 있던 알베르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한테 안내를 부탁한다고? 무슨 속셈이지. 도저히
새까만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거부한다고 해서 공작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공작님.”
-2-
??“네?”
??“주신 렌다와 성녀의 석상 앞에서 이토록 부적절한 관계라니.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한다면 신을 배반한
반역자라고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
?“쉬잇, 착하지.”
?“흐, 읏.”
?“하윽!”
?“끄, 끝난 거 아니었어요?”
?“수녀님, 핥아 주세요.”
알베르트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이 상태에서 혀를 움직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직접 손가락을 내 혀에 비비기 시작했다.
?“공작님.”
??“공작님 완전 짜증 나는 거 알아요?”
나는 알베르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폭 덮으며 한탄했다. 갑자기 기도실에서 쾌락에
젖어 신음을 흘리던, 부끄러웠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젠장, 그런 잘생긴 얼굴 이런 데에 낭비하지
말라고요. 얼굴만 잘생기면 다냐.
***
알베르트가 돌아간 후 나는 비틀거리며 공용 욕실로 향했다. 혹시 사람이 있을까 살피며 조심히 목욕을
마쳤다. 몸에는 알베르트가 남긴 수많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있었다.
나를 찾아온 애니카가 다리가 많이 아프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입을 꾹 닫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아니라 허리가 아픈 거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잊자, 잊어. 앞으로 알베르트를 만날 일 없도록 조심하면
되니까.
?
낮에 알베르트에게 시달렸던 탓에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나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어라, 이상하다.
?“이제야 깬 거야?”
?“하으, 윽, 아읏…….”
?
입에서 미칠 듯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굵은 물건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질문하려고 했으나 신음에 묻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기 위해 두 손으로
꾹 입을 눌렀지만 이내 상대가 내 두 손을 입에서 뜯어내어 양쪽으로 내리눌렀다.
-3-
도대체 내 위에서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일단 알베르트의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그때, 남자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입술을 꾹 깨물어 신음을 참았다. 그러자 갑자기 입안에 남자의 물컹한
혀가 침입했다.
남자는 허릿짓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읏, 흣. 나는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성냥을 집었다.
?“…….”
?“…….”
정상적인 주제는 아니지만 일단 살로스라는 몽마는 내게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 대화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거야.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내 아래에 연결되어 있던 살로스의 물건을 빼내려고 했다.
?“아윽!”
너한테 안긴 게 아니라 너 때문에 쓰러진 거잖아……! 화를 내려고 했으나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며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살로스는 빙긋 웃으며 흐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 상태로 허릿짓을 시작했다. 망할.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가 싶었더니 이놈도 알베르트 과인가 보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수도원인데 어떻게 몽마가 찾아올 수 있는 거지. 악마나 몽마는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읏.”
??“뭐? 그게 어떤…….”
그럼에도 살로스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뻔뻔한 미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
주신 렌다이시여, 만약 정말로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부디 제 평화로웠던 일상을 돌려주십시오.
***
……설마 청소하기 싫어서 시간을 끌려고 냉수를 핑계로 도망간 건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더 성실한 성격이니까.
?“아.”
누가 잡아 주기라도 한 건가?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곳은 내 시야보다 훨씬 낮은 아래쪽이었다.
?“노아?”
-4-
?“고마워, 노아.”
?“그런데 지금 수업 시간 아니야?”
??“…….”
?“대화는 즐거우셨습니까?”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게다가 그가 향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그는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꽥꽥거리며 몸부림을 쳐 봤으나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언제 웃었냐는 듯 서늘했다. 심경 변화가 왜 이렇게 빨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거지. 그와 평화롭게 지낸 여주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질투하세요?”
?“그런 것 같습니다.”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닙니다.”
그럼 공작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합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차마 내뱉어지지는 못하고
삼켜졌다. 어느새 알베르트와 나는 내 방문 앞에 도착했다.
?“저 나가 봐야겠는데요.”
?“흣…….”
?
갑자기 아래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신음을 흘리자 알베르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설마 사과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 또 하려고 온 거야……?
?“무, 무슨…….”
??“마법으로 만든 기구입니다.”
알베르트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래에서 딱딱한 것이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읏, 흐, 아…….”
***
?“……님.”
??“…….”
??“수녀님!”
헉, 깜짝이야.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응.”
내가 단호하게 답하자 살로스는 오히려 히죽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그냥 죽을 수는 없어?”
?“빼 줄까?”
?“무, 슨.”
??“왜? 빼 달라며.”
?“빼 준다며!”
?“이, 이 미친놈.”
?“아, 흣.”
-5-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풀렸다. 잠시 멍하니 살로스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살로스가 느릿하게 내 눈을 핥았다. 힉.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눈가가 촉촉해졌어.”
마침내 살로스는 내 아래에서 기구를 뺀 후 바지 버클을 끌렀다. 와중에 몽마는 도대체 왜 옷을 입는 거지.
??“누구, 알베르트?”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수녀님, 빨리 정기 좀 나눠 줘.”
??“무거우니까 비켜.”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수녀님.”
??“…….”
??“여기는 내가 만든 공간이라고.”
??“…….”
??“지금까지 수녀님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은 건 수녀님의 반응이 재밌어서였어. 근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저것도 수녀님 아래에서 꺼내 줬는데?”
그러더니 살로스가 손가락을 휘둘러 얇은 밧줄을 만들어 냈다. 아,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
정말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살로스의 굵은 물건이 아래에 삽입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침내
내가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며 눈물 흘리자 그제야 살로스는 만족한 듯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나한테, 집중하세요.”
??“제가 왜요.”
?
괜히 반항심이 들었다. 내가 왜 이놈이 원하는 대로 전부 따라 줘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오히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알베르트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더 세게 허릿짓을 했다. 그 탓에 나는 힘없이 앞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더럽다고 당신을 욕하고 손가락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가 당신을 증오하면 당신은
나만의 것이 될 수 있을 텐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
***
정원에 쌓인 낙엽을 쓸고 있는데, 아직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멀리서 총총 걸어오는 노아가 보였다.
?“꽃?”
??“그렇지?”
그러자 노아의 표정이 점차 오묘해졌다. 아차. 너무 혼내는 것처럼 말해서 시무룩해진 건가.
?“왜 안 돼?”
??“응?”
?
??“…….”
꽃은 발이 없어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만…….
최대한 빨리 정원에서 도망치느라 그때는 몰랐다. 어린아이의 지독한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
그러자 무심한 표정을 하고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애니카가 빗자루를 땅에 고정하고 몸을 기대며 말했다.
?
오늘은 바로 성녀 세티아 탄생을 기념하는 바로 전날이기 때문에 외부인이 수도원에 출입할 수 없는
날이었다.
??“청소나 하라니까.”
애니카가 계속 옆에서 잔소리를 했으나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꽃놀이로 가득 차 있었다.?
-6-
?“스텔라. 잘 들어.”
??“응. 말해 봐.”
??“응.”
??“쓰러졌었지. 피곤해서.”
??“뭐라고?”
그러자 노아는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런 격렬한 반응이라니. 애니카와 너무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으휴, 진짜 좋은 거 가르친다.”
??“으응. 이따 봐, 누나.”
?***
?“흐읍…….”
?
창밖은 어두웠다. 나는 숨소리조차 아끼며 걸음을 내디뎠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내 무게를 받을
때마다 삐그덕, 하고 울었다.
삐그덕, 삐그덕. 낮에는 알지 못했는데 밤에 걸으며 들으니 계단은 바닥보다 더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진짜 분위기 왜 이래.
?“흐어악!”
?
잠깐만. 흰 천을 두른 것 같은?
?“누나 괜찮아?”
어흐흑. 진짜 놀랐다고…….
?
기특하기는 한데 손에 들고 다니면 되는 걸 굳이 그걸 몸에 두르고 다녀야겠니……. 나는 차마 이를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내적 눈물을 흘렸다.
?“거기 누구니!”
?“노아. 빨리 가자.”
?***
??
?“윽. 먼지.”
?
그러자 노아가 배시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체온은 따듯했다.
?“…….”
??“…….”
그리고 저 멀리에서 붉은색 불꽃이 날아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내자, 노아가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
??
꽤 신나는 밤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도 마을에서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는지 불빛이 번쩍였다. 나는
창문을 통해 한참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심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서로 방이 다르기 때문에 인사를 하며 헤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험악한 얼굴로 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헉. 수, 수녀님.”
윽.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결국 노아와 나는 수녀님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어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
??“아, 아니!”
?“아, 미안.”
신을 모시는 몸으로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수도원에서 쫓겨날 테니까. 그럼 나는
알베르트의 저택에 갇혀 쉴 새도 없이 그와 관계를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7-
?“공작님.”
??“말씀하십시오.”
?“일단 당신을 모니카 공작저로 데려갈 겁니다.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도록, 당신이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방에만 가둬 놓고 싶어요.”
??“……미친.”
??“모를 리가 있겠나요.”
나는 알베르트의 밑에서 거세게 흔들리며 딴생각을 했다. 이제는 입에서 나오는 신음도 참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는 더 기뻐 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고, 쫓겨나면 알베르트에게 납치라도
당할까 조마조마하고.
?
낮에는 알베르트, 그리고 밤에는 살로스. 나는 둘에게 매일 시달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박히다가
겨우 풀려나는 일상.
어차피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언젠가 모두에게 밝혀질 것이다. 손가락질받으며 쫓겨나고 알베르트에게
거둬지느니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스스로 나가는 편이 나았다.
?
나는 약 일주일 동안 계획을 세운 뒤 신부님에게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신부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이유를 물었다.
사실 그냥 알베르트 때문이었지만.
?“떠난다고?!”
??“응.”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
혹여 편지를 통해 알베르트가 나를 찾아오면 곤란했다. 하지만 내 말을 오해한 애니카가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노아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안녕, 노아.”
??
***
?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는 마을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숲의 나무들뿐.
?***
??“뭐?”
??“뭐긴 뭐야. 수녀님 완전히 공공물 될 뻔했다는 말이지.”
??“…….”
?“살로스.”
?“……좋다.”
??“뭐?”
??“하기 싫어.”
??“응?”
??“섹스, 하기 싫다고.”
??“…….”
??“이리 와, 수녀님.”
??“…….”
***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알베르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고, 공작님?”
-8-
?“아, 노아구나. 무슨 일이니?”
노아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부는 노아가 부쩍 스텔라를 잘 따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런. 신부는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신부는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스텔라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노아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기에.
?“…….”
노아는 신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그는 신부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었다.
***
?“……코르넬.”
“예, 가주님.”
?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코르넬은 알베르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이름. 스텔라.
“알겠습니다.”
?
찾는다면 손에 쥐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항상 상상만 하고 차마
실현하지는 못했던 더러운 갈망이었다.
?“…….”
마차의 창문은 특수한 유리로 만들어졌기에 밖에서 내부가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의
푸른 눈은 마차 안의 알베르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괜히 불쾌했다. 어린아이의 것일 뿐인 저 눈동자가, 묘하게 불쾌했다.
?“출발해.”
이내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아는 계속해서 알베르트가
탄 마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마을의 규모가 작아 시장도 잘 서지 않았다. 덕분에 생필품을 사려면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구매해야만 했다.
?“아가씨. 이걸 한 번에 혼자 들고 가려고?”
“네.”
그리고 그제야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자는 정말로 무거웠다. 들어 올리자마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저기, 아가씨.”
주변을 둘러봤으나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요?”
“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그, 짐이 무거워 보여서 도와드리려고…….”
나는 흔쾌히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불의 절반 정도를 그 남자에게 넘겼다. 이불을 건네받은 그 또한 이불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꽤 힘겨운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별말씀을요.”
이불의 무게 중 절반을 그에게 넘기니 확실히 상자가 가벼워졌다. 이제야 좀 들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됐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
“네.”
“그런가요.”
?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충 짧게 답했더니 남자가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음.
너무 성의 없었나.
“아, 알겠어요.”
“아저씨 아니에요!”
“아……. 전 보리스예요.”
?
따로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보리스라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스텔라. 스텔라예요.”
“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네요.”
?“……이름, 예뻐요.”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거참,
순수한 청년일세.
***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짜증 나게도 사실이었다. 알베르트나 살로스를 만나기 전이라면 보리스와 대화하며 설��을지도 모르겠다.
들어 보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나불나불 말하기 시작했다.
“굳이?”
그러자 살로스가 상처받았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는 흉내를 냈다. 심지어 흑흑, 하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어색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9-
***
??“…….”
그게 왜. 살로스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살로스가 한 마디로
간결하게 설명했다.
??“…….”
??“느, 느에?”
***
그래도 이 짓도 5 년 동안 하다 보니 익숙해지……
기는 개뿔. 하루하루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살로스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알베르트보다
더했다. 항상 그 짓의 끝은 기절이었다.
?“야.”
??“왜, 수녀님?”
?
??
?“그럼 내가 죽을까?”
??“…….”
?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결국 살로스에게서 벗어나려면 그가 나한테 질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잖아.
?“그래도 죽지 마, 수녀님.”
??“그건 싫어.”
?“어디 가?”
??“일하러.”
??
성수라도 뿌려 볼까? 멀쩡히 수도원에 들어오는 몽마에게 통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신성한 물이니까
기분은 좀 나쁠지도.
?“수고하셨어요.”
??
??“아, 그게…….”
그러자 신부님은 커다란 유리병에 성수를 가득 담아 내게 건넸다. 꽤 묵직한 정도의 양이었다. 신부님,
혹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신가요?
?“감사합니다.”
?“비켜.”
??“수녀님, 매정해.”
??“응.”
?
아, 아니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금 이렇게 잘 구슬려서 겉옷을 가져오게 한
다음 성수를 뿌리면……!
게다가 이름까지 부르니 살로스는 눈꼬리가 접어 예쁘게 웃었다. 이놈이 몽마만 아니었어도 이미 이
얼굴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소용없었지만.
-10-
***
살로스와의 관계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부드러움을 가장했을 뿐 거칠었다.
자기 딴에는 부드럽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살로스는 아무래도 자신의 물건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디 가, 수녀님?”
??“일하러 가지.”
어느새 단단한 나무 벽이 내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뒤에는 단단한 나무 벽이, 그리고 앞에는 살로스의
단단한 가슴팍이. 이거 상황이 좀…….
지금까지 못 한 걸 오늘 다 하겠다는 말이 진심인지, 살로스는 거칠게 내 입안을 탐했다. 평소에는
부드럽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정말로 거칠게 입안을 헤집었다.
?“하아, 흣…….”
?“응, 읏…….”
그의 물건이 들어왔을 때 엄청난 쾌락이 나를 덮쳤다면, 지금은 금방이라도 교성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래가 간지러웠다. 살로스가 이런 식으로 혀로 내 아래를 핥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래가 너무나도 간지러웠다. 살로스의 혀가 내벽을 긁기도 했고, 입구를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입술을
꾹 물고 참았으나 이내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수녀님 울어?”
?“……윽.”
?“이익, 윽.”
?“그럼 말해 봐, 넣어 달라고.”
?“살, 로스…….”
?“왜? 내 거 넣어 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은 그에게 멈추라고 말하라며 소리 지르고 있는데, 입이 쉽사리 열리지가
않았다.
?“넣어 줘?”
?“헉.”
-11-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래를 힐끔 바라보자, 살로스의 붉은색 물건이 보였다.
히익. 행위 중 아래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행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색정적이었다.
“…….”
살로스가 그대로 내 몸을 아래로 내렸다. 내 아래와 연결되어 있던 살로스의 물건이 뿌리까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악!”
게다가 그들이 억지로 나를 탐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불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들의 아래에서 헐떡이는 내가 미웠다.
심지어 오늘은 ‘넣어 줘’라는 살로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설마 훈련받은 개처럼 그에게
길들여진 걸까. 19 금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잠시만.
몽마가 잠을 잔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됐다. 악마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고, 살로스가 스스로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
정말로 그는 자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아으…….”
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 소중한 휴일을 살로스에게 바치고 또다시 서점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살로스, 이 망할 자식.”
어떻게든 살로스가 내게 질리게 만들리라고.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지경이었으니.
“아, 죄송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멍하니 걷다가 상대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것에 더 가까웠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나와 부딪힌 상대는 붉은색 머리칼의 남자였다. 남자는 깔끔한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 이
남자는 기사인 건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사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왜 그러세요?”
***
“설마, 또 자?”
일을 하느라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는데 침대까지 뺏겼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심지어 이놈은 계속 집에서 놀고먹기만 했는데.
그래서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성수를 꺼냈다. 제아무리 강력한 악마라고 해도 잠을 자다가
성수를 맞으면 불쾌하기는 할 것이다.
투둑.
내게서도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천천히 내 손을 내려다보니, 내 손등도 살로스의 등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12-
“…….”
아, 드디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집에 돌아와도 귀찮게 구는 몽마가 없고, 강제적인 성관계도 없다.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찾았습니다.”
“…….”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알베르트는 활짝 웃으며 제보자를 찾아갔다. 정확히는 제보자가 찾았을 스텔라를
찾아간 것이었지만.
스텔라를 봤다고 말하는 사기꾼들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목숨보다 귀하랴.
하지만 코르넬도 의문스럽기는 했다. 5 년 동안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녀였다. 이전에도 스텔라가 살던
마을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르넬은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여자는 스텔라가 아니었다. 알베르트를 모시며 종종 먼발치에서 스텔라의 얼굴을 봤었던 그였다.
적어도 그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이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고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에 빠져 있던 그는, 무언가 발견했다.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하늘 아래에 서 있던 한 여자. 낮에 그와 부딪혔던 여자였다.
여자는 달빛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환하게.
여자는 스텔라가 분명했다. 어째서 낮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당장 알베르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
그의 말은 마치 네가 본 것이 스텔라가 아니라면, 이전의 그 사기꾼들처럼 눈을 뽑아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코르넬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자신 있게 답했다.
“분명 스텔라였습니다.”
“…….”
여전히 알베르트는 코르넬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텔라를 찾았다는 제보를 처음 받았을 때, 알베르트는 값비싼 텔레포트를 이용해 그녀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이제는 일말의 기대도 남지 않은 건지, 그는 평범한 마차를 이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안을 때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스텔라가 필요하다니.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덜컹덜컹.
“……스텔라?”
***
살로스가 없으니 확실히 인생이 즐거웠다. 나는 아무런 간섭 없이 늦은 밤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었다.
“한 잔 더!”
“이 아가씨가 정말!”
그리고 이쯤에서 또 옛말을 떠올려 봐야겠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나는 정말로 쫓겨났다. 젠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술을 안 주냐고!
나는 잠시 술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망했다.
으으. 시간에 맞춰서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나는 걱정을 가득 안고 침대에 누웠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한 탓에, 그리고 술기운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13-
“……스텔라?”
?
나는 멍하니 알베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깨끗하고 생기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둡고 수척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세요.”
“…….”
잠시만. 기사라고?
문틈 사이로 붉은 머리의 기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알베르트와 그 기사를 번갈아 봤다. 아아,
그렇구나.
“지금까지 절 찾으셨어요?”
“공작님 약혼녀는요?”
약혼녀. 소설의 여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알베르트는 여주와 만나 약혼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싫어요.”
“코르넬.”
“예, 가주님.”
하지만 도저히 알베르트의 저 매서운 얼굴을 마주하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잘게 몸을 떨었다.
“두렵습니까?”
“…….”
마침내 알베르트가 천천히 내게서 입을 떼어냈다. 천사 같은 백발에, 황금안. 그리고 입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
코르넬은 ‘공작의 충실한 개’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였다. 황제도 아니고,
오직 알베르트에게만 충성하는 기사.
집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금방 코르넬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어떡해야 하지, 도대체 어떡해야 하지.
?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알베르트는 빠르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 맨 아래에 위치한 단추가 실에 걸려
풀리지 않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트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엥……?”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세게 창문을 당겨 봤지만 창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잠시만. 이거 왜 이래.
“…….”
[그러든가.]
아마 살로스가 여전히 내 앞에 있었으면 이미 얼굴에 주먹을 몇 번 날렸을 것이다. 젠장. 성수를 뿌리기
전에 몇 대 때릴 걸 그랬다.
“…….”
등 뒤에서 알베르트가 차분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장난은 즐거우셨습니까?”
“말씀하세요.”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예쁘게 웃는 얼굴이라도 그렇게 말없이 빤히 보고만 있으면
조금 무섭습니다만, 공작님.
“누우세요.”
“아윽!”
새된 비명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알베르트가 난데없이 나를
때렸다고? 갑자기?
-14-
“했습니까?”
“네, 네?”
“히, 익.”
“즐거우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즐겁지는 않았으나 쾌락에 젖어 헐떡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걸 말했다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 같았다.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아악, 읏, 하, 윽.”
다리와 팔 힘이 풀리는 바람에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는데, 그때마다 알베르트가 내 허리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뒤 다시 세게 박았다.
“스, 텔라. 윽.”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어깨에 잇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알베르트가 손으로 천천히 내 어깨를 쓸었다. 아,
따가워. 내가 몸을 잘게 떨자 알베르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보고, 싶었습니다.”
“5 년…… 동안 보고 싶었습니다.”
알베르트가 다시 느릿한 허릿짓을 시작했다. 이전처럼 쾌락이 밀려올 정도는 아니었으나, 정신을 헤집어
놓기에는 충분한 움직임이었다.
소설의 전개에 따르면 알베르트는 3 년 전쯤 수도원에서 여주를 만났어야 했다. 하지만 만약, 만약이지만
알베르트가 나를 그리워했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에 내 입에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음에 묻혀 목소리가 제대로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
그의 축축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내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여전히 찡그린 채로 아래에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살폈다.
“……아, 진짜.”
알베르트가 다시 입구에 물건의 끝을 맞추더니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여기 있잖아요.”
-15-
차라리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보였던 수척한 얼굴의 알베르트가 나았다. 지금은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능글거리는 말을 뱉는 것은 5 년 전과 똑같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트는 내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젠장, 도대체 소설 전개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알베르트의 품에 안긴 채로 마차 안에 타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일어나셨습니까?”
마차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 마차는 아마 모니카 공작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
알베르트가 나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가 지금까지 피땀 흘려 벌었던
돈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그럼 내려 주세요.”
“글쎄, 그건 좀 곤란한데요.”
“전부 들어 준다면서요.”
“…….”
“……하지 마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
내 허리를 주무르던 그의 손이 어느새 내 엉덩이 부근으로 내려왔다. 그는 천천히 내 엉덩이를 쓰다듬더니
이내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신음만 겨우 뱉는 사이, 어느새 내 치맛자락은 알베르트의 손에 붙잡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었다.
그때 철컥, 하며 벨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 소리를 외면했다.
아, 아니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환청이다, 환청.
“아윽!”
“그러니까 가만히…….”
덜컹!
“하, 으…….”
“내게, 집중하세요.”
그 짐승 같은 행위는 마차가 수 시간을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알베르트가 내 가슴을 깨무는 바람에,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어도 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안 됩니다.”
“왜요?”
?
“친구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남자입니까?”
“아뇨, 여자인데요.”
그러자 알베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가 술집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성한 수도원에
간다는데 도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16-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5 년 전에 수도원 중앙에서 당신과 섹스하고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왔겠죠.”
알베르트도 이전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마차는 외형부터 이전 마차와 차이가
있었다.
유리창을 장식한 반짝이는 보석들, 그리고 섬세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마차를 이런 비싼 것들로 꾸밀 수 있는 걸까.
수도원 정문을 지나쳐 정원을 따라 걷는데, 왜인지 자꾸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옆쪽을 바라보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스텔라?”
“아, 그게…….”
“갑자기 떠나더니, 갑자기 돌아오고! 이제 어디 갈 생각, 하지도 마!”
“……나도 보고 싶었어.”
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애니카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살
건들기 시작했다.
“헉.”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애니카는 알베르트의 얼굴을 봐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듯 말하곤 했었다. 공작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라고 했었는데, 그 한이 드디어 풀렸나 보다.
“어, 안녕하세요 공작님. 일단 전 애니카라고 해요. 공작님, 진짜 스텔라랑 결혼하실 거예요? 예전부터
보통 사이는 아닐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는데, 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결혼, 하실 거죠?
하실 거죠?”
“결혼, 말씀이신가요.”
그러고 보니 알베르트를 후견인이라고 둘러대려는 계획도 세웠는데 제대로 실행하지도 못했다. 젠장.
알베르트가 향하는 위치를 보니 마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애니카도 만났는데 어딘가 찝찝했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노아.”
?
“노아를 아직 못 만났어요. 노아를 만나고 갈래요.”
“노아?”
“……갔다 와도 돼요?”
***
그렇다면 이 사람은…….
“노아?”
눈이 마주치자 노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놈의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오묘한 미소를 마주하자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아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고지식한 인사나 뱉고 말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의 말투는 5 년 전과 같이 다정했다. 걱정이 담긴 듯한 말투는 변함없었으나 성인 남성이 된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서늘했다.
-17-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려는 거지. 나를 부쩍 잘 따랐으니 반가운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난 누나 되게 보고 싶었는데.”
“…….”
“누나는 아니었어?”
“스텔라.”
“아.”
?
내 눈을 덮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낸 것은 노아였다. 노아가 알베르트의 손을 떼어내자 알베르트가 불쾌한
듯 얼굴을 구겼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노아가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하자 알베르트는 오히려 혐오 가득한 얼굴로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니,
내려다봤다는 말은 둘의 키가 비슷하니 옳지 않은 말이겠다.
“갑시다, 스텔라.”
“아니, 잠깐만요.”
“……공작님.”
“그 손, 당장 놔.”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분명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걸 웃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딘가
불쾌한 듯이,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제 목에 팔을 두르십시오.”
건조한 아래에 두꺼운 물건이 들어오자 엄청난 고통이 나를 덮쳤다. 나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물건을 박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거칠게 관계를 맺어도 아래를 풀어 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도대체 어째서.
“하윽, 흑. 윽. 이, 나쁜 놈…….”
하지만 언뜻 들으면 기분이 좋아서 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상황은 미묘한 상황이었고,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애매한 소리였다.
“…….”
?
노아. 그 푸른 시선의 주인은 분명 노아였다.
애니카 그리고 노아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베르트의 이상한 연극에 맞춰
줄지언정, 그 추악한 내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듯, 노아는 석상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
내 시선이 오랜 시간 기도실의 나무문을 향하자, 알베르트도 그 방향을 힐끗 바라봤다. 그도 노아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알베르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릿짓에 속력을 가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정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
하지만 스텔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자신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며 알베르트를
거부했다.
알베르트는 힐끗 노아를 바라봤다.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아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그의 생각대로 어리석고 어린 짐승은 질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들의 정사를 지켜봤다. 그래, 제아무리
어른인 척해 봤자 막 성년을 지난 어린 짐승일 뿐이었다.
-18-
소년의 눈빛은 허술했다. 소년의 시선은 완전히 스텔라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베르트는 더욱 세게
물건을 쳐올렸다. 스텔라의 입에서 고통이 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정사를 지켜보던 노아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죽
웃었다. 그것도 이제 제 주제를 깨달았나 보군.
고아원 출신인 데다가 아무런 재능도 없어 성년이 지나고도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는 멍청한 것.
알베르트는 노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코르넬.]
[예, 가주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텔라가 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켜. 절대, 절대 나오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어……. 맛있었어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러다 나중에는 족쇄까지 채우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하다가 혹시
실현될까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식사를 담은 쟁반은 하녀에 의해 방 밖으로 이동했다. 아, 나도. 나도 나가고 싶은데. 하지만 코르넬이
바로 옆에서 매섭게 눈을 뜨고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서늘한 공기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져 천천히 눈을 뜨니, 또다시
코르넬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코르넬 스테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코르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버벅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말씀하십시오.”
“나가고 싶어요.”
코르넬의 얼굴이 조금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안 됩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평생 겪었던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흑.”
“왜, 왜 그러십니까?”
“…….”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던 공원, 따스한 분위기의 시장…….”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전혀 기대를 안 했는데, 코르넬은 생각보다 동정심이
풍부한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어깨를 들썩였다.
에이, 실패인가 보다. 아무래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는데.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드는데, 코르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코르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코르넬은 숙련된 기사였다. 그것도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들을 이끄는, 기사단의 단장 같은 존재.
코르넬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이 근처에는 매일 열리는 야시장이 있었는데,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잠시 이것 좀 들어 주실래요?”
골목에서는 역겨운 악취가 났으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섬뜩한 곳이었다.
그리고 묵직한 걸음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를
찾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골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아?”
분명히 그것은 노아였다. 벽에 기대어 어느 한 남자와 대화하던 노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보다,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머릿속은 노아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
***
“주, 주인님?”
그녀를 쫓던 남자들은 노아를 발견하고 넙죽 무릎을 꿇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암흑가에는 잔인한 지배자가 살았다.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남자의 이름은 반
미리엄. 그는 범죄자들의 주인이었다.
? 노아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스텔라를 세게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암흑가에 입성했던 소년은 어느새 지배자의 측근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 반 미리엄이라는 노인은 그를 찾아와 자신의 아래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19-
그러나 그는 교활했다. 그는 평생을 암흑가에 바쳤다. 반 미리엄은 이 세상에 범죄가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으며 그것을 위해 암흑가를 운영했다.
그리고 노아는 반 미리엄의 그런 능력을 원했다. 온갖 불법적인 일들과 범죄자들을 제 아래에 놓고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능력.
노아는 그녀를 간절히 바랐다.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꽃을 그 모습 그대로 꽃병에 담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였다.
이제야 목적을 이뤘다. 스텔라를 찾기 위해서는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자리가 필요했다. 반 미리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매일이 고통이었다. 도대체 왜, 어디로 도망친 거야. 왜 돌아오지 않는 거야. 설마 내 욕망을 눈치챘나?
내 추악한 욕망을 눈치채서, 내가 미워서 돌아오지 않는 건가.
처음에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배출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스텔라를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텔라.”
아무리 그녀를 닮은 사람들을 안아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의 아래에 제
물건을 잔뜩 쑤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사라졌을 때처럼 갑자기 돌아왔다. 그녀를 간절하게 찾던 공작과 함께.
정면으로 그에게 승부를 걸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날 노아는 사람이 없는 외진 골목에서 수하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알베르트의 눈을 피해 스텔라를 암흑가로 데려올지.
“노아?”
도망쳐야 한다는 듯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는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순간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간다면 다시 그녀가 노아의 수중에 들어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때, 노아는 또다른 계획을 떠올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품 안에서 정신을 잃게 만드는 향을 꺼냈다.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던 스텔라는 이내 정신을 잃고 그의 품 안에 들어왔다.
***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코르넬을 속여 도망쳤고, 이상한 남자들이 나를 쫓아왔다. 도망치던
중 노아를 발견해서 함께 도망쳤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망할, 이런 망할. 나 때문에 노아도 그 남자들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들을 유인해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노아는 괜찮을 걸까.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차가운 방안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
“……죽일 거예요?”
죽일 거면 차라리 정신을 잃었을 때 죽이지. 일부러 깨어나면 죽이려고 기다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악질
중의 악질이다.
***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며칠이 지났다. 남자가 내게 식사를 주는 횟수로 날짜를 계산해 볼까
고민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일까, 혹은 어딘가에서 만났던 사람일까. 도대체 그는 누구이길래 나를
죽이지 않고 이렇게 가둬 놓은 채로 괴롭게 만드는 걸까.
“만약, 만약 저를 죽일 거면.”
“…….”
“……나.”
“누나!”
-20-
자꾸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불안했다. 노아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들지.
내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을 본 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 이곳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인 것 같았다. 노아의 품속에서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잠든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멍하니 오두막의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노아가 걸어 들어왔다.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
“너는?”
“나도 괜찮아.”
“너…… 왜 그런 곳에 있었어?”
“그러는 누나야말로.”
“…….”
***
노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방에서 나왔다. 방 안에서 스텔라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그냥 그녀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공허하던 모든 게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러다가 스스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음을
선택해 버리면 어떡하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는 구해 내겠다는 생각이.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냈다.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조금이라도 더 스텔라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노아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나 입던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스스로 몸에
자잘한 상처들을 냈다. 그는 애써 초췌한 얼굴을 만들어 스텔라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
꿈을 꿨다. 나는 눈을 감았던 때와 같이 낡은 오두막 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던져서 깨트려도 노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달려오지 않았다.
이 꿈 안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살로스?”
“켁.”
꿈인데도 불구하고 살로스의 얼굴을 가격한 주먹이 욱신거렸다. 주먹으로 뺨을 가격당한 살로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살로스가 가련한 척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우, 꼴 보기 싫어. 어디서 자기가 불쌍한 척인지.
맞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살로스의 머리에 뿔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너 뿔은 어디 갔어?”
그가 내 정기를 야금야금 먹고 실체화했을 때도 뿔이 없기는 했었다. 하지만 꿈에서의 살로스는 항상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마치 인간처럼 매끈했다.
“나는 수녀님 소원도 들어줬는데 수녀님은 나한테 성수나 뿌리고! 나 완전 서운했다고. 지옥에
돌아가니까 힘도 약한 몽마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었는지 알아?!”
“그래서 결론은?”
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결론을 요구했다. 살로스의 긴 푸념을 다 듣기는 귀찮았다. 그냥 네가
요약해서 들려주면 되는 이야기잖아.
“그동안 공작이 수녀님 못 찾은 거…… 나 덕분이었는데…….”
“아야.”
“무슨 생각해?”
살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
“어, 어어. 그렇지. 그랬었지.”
그렇다면, 설마.
“설마 너 지금 내 생각 못 읽어?”
“…….”
“…….”
“야, 대답해.”
-21-
살로스가 우물우물 서운한 듯이 말했다. 결론은 내가 그에게 성수를 뿌렸던 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건가.
“두 놈이라니, 그게 무슨…….”
이 상태로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살로스도 그것을 아는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살로스.”
“응, 수녀님.”
“내 꿈에 찾아오지도 말고.”
“……어.”
“뭐라고?”
“…….”
“…….”
“아, 일어났구나.”
“컵, 예쁘지?”
그 말을 듣는데, 문득 알베르트가 떠올랐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신기한 눈으로 마차를 살피는
내게 능글거리는 말을 건넸었지.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나는 이미 그에게서 도망쳤다. 왜 이제 와서
그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잊어버리자.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흘렀더라. 잠들고 깨어나고. 이것만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
내가 어쩌다 이런 극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고마워.”
“……수렁.”
“응?”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분위기가 5 년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서.
“푹 쉬어.”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실제로 몸도 멀쩡했다. 다만 문제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인지 건강해
보이는 몸과 달리 막상 걸으려고 하면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방문이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
-22-
“…….”
물론 이것은 명백히 코르넬의 잘못이었다. 가주의 명령을 어기고 스텔라를 저택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녀는 도망쳤다.
“나가.”
“……죄송합니다.”
?
그녀를 찾는 데 자그마치 5 년이 걸렸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하루가 지나갔고 계절이 수십 번 변했다.
코르넬의 보고에 따르면 스텔라는 사람이 많은 야시장에서 도망쳤다. 집사는 야시장에 있던 사람들의
제보를 듣고 보고서를 작성해 그에게 올렸다.
그러던 중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으니. 바로 스텔라가 암흑가로 향하는 것을 봤다는 제보였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암흑가로 들어갔을 리가. 애써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음 제보를 읽어 보려고 했으나 자꾸만 그 문장이 신경쓰였다.
“…….”
“반 미리엄…… 말씀이십니까.”
“그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기사들이 유추하여 그렸던 수배지의 교활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애초에 공작이 범죄자와 만나는 것 자체가 제국과 황실을 반역하는 행동이기는 했다.
하지만 범죄자 따위와 연통할 정도로, 알베르트는 그토록 간절했다. 손에 쥐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그녀를 다시 찾는 것이.
***
“아.”
“아니,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아.”
“아.”
?
확실히 수프는 맛있었다. 수프의 맛을 음미하며 입을 우물거리자 노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착하다.”
?
단호하게 말을 꺼냈지만 말을 끝까지 마칠 수는 없었다. 노아가 손을 뻗어 내 입술을 매만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수프가 묻어 있길래.”
“아.”
“노아.”
“응?”
“누나.”
노아가 짧게 나를 불렀다.
“열려고 하지 마.”
그 대상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노아가 무엇을 말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힐끗 부엌에
있는 나무문을 향했다.
“안 열 거지, 응? 나랑 하는 약속이야.”
“고마워.”
?
노아는 더 이상 내게 수프를 먹을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23-
“……그게.”
“그게?”
?
귀찮게도, 다시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몸뚱이 하나만 먹여 살리면 되니 단순한 노동도
괜찮았다.
그런데 앞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드니, 노아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돼?”
“엥?”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기 있을 거야?”
노아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대답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
망설여서 뭐해.
“그러자, 우리 동생.”
“아, 그럼 우리 착한 동생.”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노아?”
“…….”
“왜 그래?”
그렇게 오늘도 노아와 함께 썩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하루였다.
“확 머리를 다 뽑아 버릴까…….”
그러나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살로스가 급하게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호하듯 가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수녀님 너무해.”
“싫으면 꺼져.”
“별로 안 궁금한데.”
하지만.
“……아.”
“열어 보자.”
“자, 여는 거야.”
“헉.”
?
그는 자꾸만 의자에 앉아 자곤 했다. 침대를 양보해 주겠다고 말해 보기도 했으나, 노아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에게 이불이라도 덮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
[열어 보자.]
순간 살로스가 속삭였던 말이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여는 거야.’
하지만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내 몸을 억누르던 강압적인
기운이 사라졌다.
방안은 박물관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오래되어 변색된 지도나 나침반, 혹은 특이한
모양의 시계들.
“와아…….”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깨끗하게 관리된
상태였다.
?
황족이나 착용할 법한 커다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봤을 때는 정말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목걸이를 전부 구경하고, 한 걸음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독수리. 그것은 알베르트의 가문인 모니카 공작가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저 독수리 문양은 모니카
공작가의 마차에도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독수리 문양 자체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모니카 공작가를 제외하고도 독수리를 가문의 문양으로
사용하는 귀족 가문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독수리 문양이 그 자체가 아니라, 저 익숙한 붉은 보석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24-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
“누나.”
“…….”
“…….”
“왜 내 말 안 들었어, 응?”
“아니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노아의 고개가 상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잘못 본 것이겠지.
“제발, 노아.”
다음으로 내가 한 것은 애원이었다.
“…….”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거잖아.”
“누나, 미안해.”
게다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정말로 너였다는 거구나.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아.”
“난 네 진심을 모르겠어.”
“…….”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차라리 네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면 이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하지만 희망은 완전히 부서졌다.
“…….”
“……노아.”
“네가 어떻게…….”
“…….”
“아니, 절대 안 보내 줘.”
어디인지 모를 곳이 미칠 듯이 쓰라렸다.
***
두 손목을 연결하는 쇠사슬은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사람의 목에 둘러도 한 바퀴는
족히 두를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다.
누나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아무리 쇠사슬이 길어도 누나는 도망치지 못할 거야. 그는 철쇄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부 그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여 사악하게 스텔라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시작은 반 미리엄처럼 사악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노아로서 그녀를 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멍청하고도 교활한
계획이었다.
?
그렇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동아줄을
부여잡고 싶은 법이니.
설령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실제로 스텔라의 심장은 노아를 향해 빠르게 뛰었었다. 하지만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 떨림은 완전히 멎고 말았다.
“누나.”
?
노아가 스텔라를 불렀으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답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해 보였다.
***
절그럭.
욱신거리는 손목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양쪽으로 철쇄를 당겼다. 여전히 철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밉다. 네가 참 미워.
사탕을 주며 나를 걱정하던 과거의 네가 그립고 꽃을 선물하며 예쁘지 않냐고 환하게 웃던 오래전 그날의
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과거의 모습은 이제 현재의 네 악행 뒤에 숨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제 과거는
그저 추억할 수밖에 없는 거짓이 되어 버렸다.
-25-
“누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
쿵, 쿵.
왜? 어째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싶은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를.
“왜 안 죽여?”
“누나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인정하기 싫었다. 순간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랑 따위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려고 해도 감정이 깃든 기억, 즉 추억이라고 불리는 질척거리는 감정이 자꾸만 내 눈
앞을 가린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내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는다.
그는 뻔뻔하게 내게 애원했다.
?
***
또다시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금이라도 그
소리를 막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어느새 시끄럽던 집은 고요해져 있었다. 그들은 항상 아침이 되면 싸움을
멈추고 각자의 유흥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노아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시야에 급하게 가방에
무언가를 욱여넣는 그의 어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그는 어눌하게 어미를 불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부여잡으며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그는 제 어미를 쫓아 달렸다.
엄마, 엄마. 작은 입으로 어미를 부르고 작은 손으로 낡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
“애니카, 여기 집이 있어!”
소녀와 그 친구는 고아였다. 둘은 몰래 고아원을 빠져 나와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데에 집이 있다고?”
스텔라의 뒤를 따르던 애니카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응, 저기.”
“진짜네.”
가 보자, 응? 스텔라는 애니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애니카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녀를 따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계세요?”
스텔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주인을 찾자 애니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스텔라는 무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두막 내부는 엉망이었다. 깨진 접시들, 그리고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러다가 그녀는 부엌에 있는 작은
방을 발견했다.
“욱!”
그녀는 구역질이 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얼굴을 구겼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주위에는 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왜? 왜 그래?”
“빨리!”
순하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애니카는 얼떨결에 으응, 하고 대답하며 오두막을 벗어나 나무
사이로 달렸다. 스텔라는 그녀가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스텔라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아악!”
-26-
그녀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가 여전히 호흡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는 살아 있었다. 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아이를 눕힌 후 물병에 담긴 물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노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날 밤에 봤던
금빛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뿐이었다.
***
눈을 뜨니 노아는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올려져 있던 축축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아빠, 아빠…….”
그는 어미를 부를 때처럼 애타게 아비를 불렀다. 눈물이 주륵 흘렀으나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아빠…….”
“아빠…….”
다시 한번 그가 애처롭게 아비를 부르자 여자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린아이에게 도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여자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로 물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절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년은 슬퍼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저 아비를 그리워하며 멀뚱히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노아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오래전 어미가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에게나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고아원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관리하는 수녀에게는 복종했으나 어눌한 노아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눌하게 말하는 노아를 깔보고 무시했으며 이따금 폭력도 행사했다.
그곳에서 노아는 세상을 배웠다. 1 년, 2 년.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교활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
그리고 그가 여덟 살이 됐을 때, 그는 마침내 별을 찾았다.
“이씨, 내 베개 찢어 놓은 거 너지!”
“아니, 나 아닌데.”
노아는 앞에서 시비를 거는 대신 뒤에서 복수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허술했던 건지,
한 멍청한 놈이 그의 악행을 알아챘다.
“그야 당연히……!”
그 말이 곧 정답이었다.
단 한 명, 노아를 제외하고는.
“어디 보자, 네가 어제는 누구를 괴롭혔더라. 샐리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앤디의 모래성을 밟았네.”
노아는 이왕이면 조용히 살려고 했다.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도 없고,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
“……이익!”
“…….”
바실은 어느새 이 상황이 두려운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노아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멍청하긴.”
“야, 야! 어디 가!”
바실은 무언가 고민하며 입술을 세게 깨물더니,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바실이 노아에게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그늘이 가득 드리운 음침한 곳에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보였고 머리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리고
있었다.
-27-
감히 저런 머저리 따위가 더러운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또한, 깔끔하던 그의
셔츠는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놈에게 맞고 있는 얼굴이 가장 아팠다. 바실은 곧 자신이 아무리 노아를 때려도 말릴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먹질에 박차를 가했다.
아직 그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은 노아인데도. 멍청한 놈. 노아는 목구멍 안에서 그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바실의 약점을 쥔 것이 노아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맞다가는 약점을 발설하기도 전에
얼굴 뼈가 부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봐, 신은 존재하지 않는걸.
노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열한 악당처럼 웃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지금만 버티면 저 멍청한
것을 골려 줄 수 있다는 생각 덕분에.
바실이 주먹질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봤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누군가는 노아와
바실의 바로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소녀는 바실의 등을 세게 밀었다. 그러자 바실은 마치 저가 피해자인 양 울상을 지으며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어, 그러니까…… 괜찮아?”
소녀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바실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자신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러자 소녀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노아는 소녀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바실이 저 소녀를 뭐라고 불렀더라.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않았었다. 노아는 홀로 골똘히 생각했다.
?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 아, 바실.”
스텔라의 입에서 멍청한 바실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노아는 입 안쪽의 살을
잘근 씹었다.
“이런 일 많았어?”
물론 전부 거짓일 뿐이었다. 바실도 노아에게 자주 시비를 걸기는 했으나 오히려 거듭해서 복수하며
소소하게 바실을 괴롭혔던 것은 노아였다.
“엥?”
그녀는 조그마한 소년의 등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뭉개지듯 얻어맞은 얼굴, 그리고 줄줄
흘러내리는 피.
아마 소년은 그녀가 어딘가로 가 버린 사이에 바실이 돌아와 그를 위협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녀가 그저 넘겨짚어 예상한 것일 뿐이었지만.
?
스텔라가 작은 손으로 노아의 어깨를 잡고 그를 수도원의 치료실로 이끌었다. 노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순순히 그녀를 따라갔다.
“노아.”
도망친 그의 어미가 지어 줬던 이름. 3 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름을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
그 후 노아는 모든 관심을 스텔라에게 쏟아부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생활하는지. 그것이
그의 모든 관심사였다.
“안녕, 누나.”
이제는 사람들이 왜 신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 바로 신이고 별인데, 어찌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두 번이나 노아를 구원했다. 자신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던 세상에서 스텔라는 노아의 유일한
빛이었으니. 그의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스텔라가 유일했다.
“애니카아. 나 심심해.”
“아, 그럴까?”
스텔라는 벽 뒤에 있던 노아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노아는 멀어져 가는
스텔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히 손안의 꽃을 쓰다듬었다.
바실은 언젠가부터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도, 건방지게 소리지르는
것도 그만두고.
“형아, 형아들.”
“노아?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울먹이며 친분이 있는 손위의 소년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억지로 눈물을 흘려 그들의 동정을 이끌어
냈다. 바실을 배척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28-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에 매달려 간절하게 애원했다. 순진한 그녀는 얼떨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도 우리 노아 쭉 보고 싶으니까.”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도대체 그놈의 추억이 뭐라고, 고작 8 년의 세월이
뭐라고. 스텔라는 더 넓은 세상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남았다.
***
다 누나를 위해서 심은 건데. 정작 본인은 정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수도원에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미의 정원. 그 정원이 노아가 스텔라를 제외하고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
그렇게 알베르트를 거부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가 나를 찾아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 정도로 이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을 꽤 좋아했던 것 같기도 했다. 비열하지만 퇴폐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환호했었다.
“허.”
“누나.”
“…….”
“……웃어 줘.”
“웃어, 달라고?”
“응. 웃어 줘.”
“좋아해.”
“이기적이네.”
“어쩔 수 없지.”
태어나기를 이렇게 추악하게 태어났으니까. 노아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태어나기를 행복하고 깨끗하게 태어났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
“…….”
“누나는 내 신이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이렇게 누나를 섬기고 사랑할 테니, 진심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
….”
“난 신이 아니야.”
분명하게 노아의 말을 부정했으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싫어.”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노아의 얼굴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내 손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
아무런 목표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욕망이라고 해 봤자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
“안녕, 수녀님.”
“……아.”
“오랜만이네.”
살로스가 내 눈앞에서 살포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운 밤이었다.
꿈인가 싶어 팔을 내려다봤으나 손목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꿈이야?”
“아니, 현실.”
“삼켜도 돼.”
“응? 뭐? 뭐라고?”
“삼켜도 된다고.”
“수녀님다운 말이네.”
“그러든가.”
살로스는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몽마다운 곱상한 얼굴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그거, 뭐야?”
노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은 마치 살로스를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아, 물론 인간이 아닌 건 맞지만.
-29-
“누구지?”
“공작이 보냈나?”
그에 살로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노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 파편을 툭,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로 범벅된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더욱 자잘하게 조각났다.
“다시 한번 묻지.”
“공작이 보냈나?”
“누나. 아는 사람이야?”
“…….”
“있잖아, 꼬마야.”
“뭐?”
하지만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는지, 살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노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버릴 거야?”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응. 갈 거야.”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감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 너한테는 눈물을 흘리는 게 그렇게 쉽구나. 감정이라는 게 너한테는
진심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또 거짓이었구나. 나는 도대체 너한테
뭐길래 너는 나를 대할 때마다 가면을 쓰고 거짓만을 말하는 걸까.
“살로스.”
“응, 수녀님.”
부디 나를 삼켜 줘.
“또 나를 두고 가지 마.”
“…….”
“이 끔찍한 어둠 속에 날 홀로 남겨 놓고 가지 마.”
?
너와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으나 끝내 너를 미워하며 마지막을 그린다.
***
“콜록.”
“창문부터 열까?”
살로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미약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낡아
여기저기가 부서진 을씨년스러운 집이었다.
?
“……여기가 어디야?”
***
“…….”
“저, 들어가겠습니다.”
스테판은 문고리를 돌리고 힘껏 문을 열었다. 암흑가의 주인을 위한 방답게 노아의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또 불태워 버릴까요?”
“스테판.”
“그 편지, 이리 가져와라.”
등을 보인 채로 허공만을 바라보던 노아가 드디어 몸을 틀어 스테판을 바라봤다. 그는 노아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스테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히 편지를 건넸다. 노아는 굵은 눈물을 대충 소매로 닦아 낸 후
나이프로 편지의 봉인을 제거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전부 이따위다. 거만하고 멍청한 족속들. 노아는 편지를 구길까 고민하다가 독수리가
새겨진 봉인을 뜯어 주머니에 넣었다.
“스테판.”
“예, 주인님.”
봉인에 새겨진 독수리를 보니 독수리가 새겨진 보석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던 그날의 스텔라가
떠올랐다. 노아가 봉인을 세게 쥐자 봉인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공작이 반 미리엄의 정체를 알아차려 그에게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노아는 입을 꾹 닫고
손가락으로 나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30-
“…….”
“예, 알겠습니다.”
스텔라가 암흑가로 들어갔다는 증언. 그놈의 증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의존해 스텔라를 찾아 헤맨
경험은 셀 수도 없이 해 봤다.
또다시 그 증언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이런 고생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알베르트는
턱을 괴고 앞을 응시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색의 망토를 둘러쓰고 수수한 흰색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
눈까지 전부 가리고 있는 가면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애초에 암흑가의 주인은 노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렇게 젊은 목소리라니.
알베르트는 응접실의 중앙에 위치한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의 대각선에는 반 미리엄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가면을 벗으라는 말에도 반 미리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허. 알베르트는 짜증이 섞인
비웃음을 내뱉었다.
마침 알베르트의 뒤에는 코르넬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악당처럼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코르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수행한 후 알베르트의 뒤로 돌아온 코르넬의 손에는 백색의 가면이 들려 있었다. 알베르트는 턱을
들어 올리며 반 미리엄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외모와 목소리도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어디, 한번 들어볼까. 무엇이 너를
그렇게 다급하게 만들었는지.”
알베르트는 지긋이 노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만한 것이,
마치 귀족의 표본 같았다. 노아는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그렇다면 이 눈먼 암흑가의 주인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려 웃으며
생각했다.
“스텔라를 찾아와라.”
“…….”
결국 노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공작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으나, 알베르트 또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가 보도록.”
코르넬은 그제야 강하게 잡고 있던 노아의 머리에서 손을 떼 냈다. 노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면을
주워 다시 얼굴에 씌웠다.
그는 응접실에서 나가기 전 가면으로 가려져 눈빛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알베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곳은 나만의, 그리고 누나만을 위한 공간이니까. 노아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장난이 섞인 말이었으나 코르넬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것을 본 알베르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
코르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베르트를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노아를 감시함으로써 배의 효율을 얻겠다는 소리였다. 코르넬은 알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무릎을 꿇은 뒤 조용히 노아의 뒤를 따랐다.
노아를 태운 어두운 색의 마차는 빠르게 달려 암흑가로 향했다. 코르넬은 자신이 스텔라를 놓쳤던 골목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31-
마물이면 급이 낮은 악마나 마찬가지일 텐데. 게다가 몽마는 악마의 일종이고. 그럼 살로스는 동족을
열심히 죽이고 있는 걸까.
나는 붕대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반대로 살로스는 내 손목을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
“무슨……!”
나는 곧 느껴질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고 꾹 눈을 감았다.
“흐…….”
고통은 없었으나 왜인지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로스는 반대쪽 손목에도 그 행위를 반복했다.
“상처가…….”
상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말끔하게 나았다. 커다란 흉터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상처는
이미 깨끗하게 나아 부드러운 피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뭐, 그래도 흉터가 남는 것보다는 낫겠다. 흉터가 남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볼 때마다 노아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아프지 마, 수녀님.”
“미안해.”
***
그리고 이곳에 온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갑자기 백색의 갑옷을 입은 무장 기사들이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황실에서 마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사들을 파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황실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성기사?”
확실히 마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기사들보다 성기사들이 더 쓸모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신전 밖으로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어째서.
“아.”
“…….”
순간 남자는 차가운 얼음이 녹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미소를 응시했다.
“왜 그래 수녀님?”
그때, 나는 내 행동에서 이상함을 찾아냈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되는 성기사를 두려워하고 몽마에게
의지하려고 하다니.
“마음에 안 들면 쟤네 쫓아 줄까?”
?
눈이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라면 몽마의 결계 너머를 볼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력을 가진 성기사일 테다.
만약 그런 자를 쫓으려다가 오히려 살로스가 공격받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떠올리려고 애썼더니 갑자기
너무 억울했다.
“……가지 마.”
“…….”
?
창문 틈 사이로 마물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듣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곧 떠나는 거다, 곧.
-32-
??
??
?“수녀님. 무슨 생각해?”
??
“……향?”
“…….”
살로스가 천천히 얼굴을 기울이자 살로스의 코끝과 내 코끝이 톡, 닿았다. 눈앞,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가까운 곳에서 살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먼 곳. 엄청 먼 곳에서.”
차마 이 세상은 사실 소설 속이고 나는 이 소설의 바깥에서 왔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살로스의
성격이라면 분명 ‘수녀님, 생각보다 창의적인 몽상가였네’ 따위의 말을 하며 놀릴 게 뻔했다.
?“글쎄.”
??
??
?“그거야 네가 더 알겠지.”
??
?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나?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살로스처럼 거울을 통해 내
표정을 살폈다.
??
?“수녀님, 피 나잖아.”
??
살로스는 이전처럼 혀를 내어 조심스럽게 상처를 핥았다. 따끔한 감각도 잠시일 뿐이었다. 깊게 베였던
손가락은 금방 아물었다.
하지만 살로스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핥다가 손바닥을 핥았고,
손바닥을 핥으며 점점 위로 올라왔다.
?“흐으…….”
??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로스는 나를 쳐다보며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 왜 자꾸 그런 표정 지어?”
?“수녀님이 짓고 있는 표정?”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크기의 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져 자국을 만들어 냈다.
?“……너 울어?”
??
?“미안해, 미안해.”
?“……이게 지금 무슨.”
?“내가 잘못했어…….”
?“수녀님 눈동자가…….”
??
?“…….”
?“……아.”
?“나는 왜 수녀님이 그렇게 슬퍼하는 건지 모르겠어. 수녀님 눈동자만 보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난 죽을 생각 없어.”
??
이 말에 대해 살로스가 무어라고 의견을 덧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로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끌어안았다.
?
살로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너야말로.”
-33-
??
?“미안해, 수녀님.”
??
한 개로 시작했던 손가락이 어느새 세 개나 아래에 들어와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손가락들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윽, 흐…….”
?“수녀님.”
?“……싫어.”
?“가지 마.”
?
하지만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잊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는 깊게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이제 너무 지쳐 버렸다.
살로스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살로스의 물건이 끝까지 들어오자 아랫배가 살짝 부풀었다. 살로스는 자신의 물건으로 가득 찬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
꿈속에서 나는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로스가 만들어 낸 공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곤 딱딱한 바닥뿐이었다. 그래도 걸음을 내디디 수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려나.
처음에는 조심히 걸었다. 혹여 앞에 장애물이 있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
??
?“……나아.”
??
?“거기 누구야?”
??
?“……노아.”
?“…….”
??
?“스텔라 누나아…….”
??
?
또다시 밝은 빛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열세 살의 그였다.
?“…….”
??
?
나는 조심히 손을 뻗어 노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해 줬지만 그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
?“이거 놔.”
??
?“그야…….”
??
?“보고 싶어.”
?“누나, 보고 싶어. 누나가 나한테 웃어 주던 것도, 누나가 마지막에 슬퍼하는 표정도. 전부 다.”
??
?
?“누나가 아니면 가치가 없어.”
??
??
??
?
?“별것 아니었어.”
쿵쿵.
-34-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밀색 머리칼의 성기사가 떠올랐다. 이전에도 결계 너머가 다 보인다는 듯이
뚫어져라 이곳을 쳐다보던 그 성기사.
?“……살로스.”
?“응, 수녀님.”
??
??
?
하지만 나와 살로스는 여전히 이 낡은 집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살로스가 눈을 뜨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
쿵쿵!
?“으음. 그러게.”
??
쿵쿵쿵!
??
하지만 저 미소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기적인 몽마보다 선한 성기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는 게.
??
??
그러자 테오필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가 숨어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
?“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아, 진짜.”
??
??
??
?
?“제국에는 신전이 곳곳에 깔려 있는데 감히 주신 렌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체화를 한 꼴이라니.
어리석구나.”
??
??
?“손 놔.”
??
그는 몽마이면서 너무 감정적이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그들을 현혹해야 할 몽마가 오히려 감정에
휘둘리다니.
?“오지 마.”
?“수녀님.”
?“틀린 말은 아니네요.”
??
?
다만 나와 살로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살, 로스.”
??
?“후.”
잠시 후 살로스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가 성수를 뿌렸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그 현상은 곧 살로스의 힘이 약해진 상태임을 나타냈다. 살로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테오필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죠, 수녀님.”
?“…….”
?“수녀님의 친구는 가 버린 모양인데요.”
??
그리고 테오필은 자신이 주신 렌다의 현신이라도 된 것처럼 친절하고 자애롭게 웃었다. 흰 갑옷과 장갑에
튄 붉은색 피와 잘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
?“손, 잡으세요.”
??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
??
?“이름이 무엇입니까?”
?“…….”
??
-35-
하지만 테오필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부정하지는 않았다.
?
다만 테오필의 것으로 보이는 백마 한 마리만이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저를 데려가면 당신만 손해일 텐데요. 성기사가 신전에 여자를 데려가다니, 평판이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
??
?
하지만 테오필은 언제나 나를 찾아냈다. 나무 뒤에 숨어도 찾았고 그렇게 높지 않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쳐도 금방 나를 찾아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도대체 나한테서 느껴지는 그 기운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서른다섯 번째로 탈출을 시도한 나를 찾아냈을 때, 테오필은 손으로 내 발목을 쥐고 이렇게 말했다.
??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도 잠시, 미칠 듯이 끔찍한
고통이 발목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이런 끔찍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눈앞의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짜증 날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 증오스러웠다.
?“쉿, 로즈. 이러다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잠에서 깨어나겠어요. 신전에 도착해서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된다면 전부 치료해 줄게요. 난 성력을 가진 성기사니까.”
??
테오필은 신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성력으로 내 발목을 치료하고 붕대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으로 발목을 쓸었다. 뼈가 부러진 자리는 말끔하게 나았지만 당시에 겪었던 고통은 아직도
생생했다.
밖에서 보기에 방문은 말끔했지만 내부는 감옥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문은 죄수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처럼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철문이었다.
?“…….”
??
?
처음에는 정말 그가 싫었다. 살로스의 모든 것이 너무 싫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의지할 곳이 살로스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이 몽마뿐이라니, 듣기에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살로스는 죽었을까요.”
??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성력을 쓰기는 했지만 몽마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으니까요. 성검으로 가슴
부근을 찔러야 죽을 겁니다.”
?“그런가요.”
??
테오필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그는 소리 내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사랑이라고요?”
??
?“내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알아요. 난 살로스를 사랑하지 않아요.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지.”
??
?
?“내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다면 쉽게 말하지 마세요.”
??
?“…….”
??
감옥같이 생긴 이 방에는 크지 않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테오필은 나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는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침대에 연결했다.
?“…….”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로즈,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왕국? 그게 아니라면
바다 한가운데에 동떨어진 섬?”
??
?“그렇습니까.”
??
?“거지 같았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
?“어제 당신을 이곳에 두고 돌아간 후 신전 도서관에서 사제들의 기록들을 찾아봤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사례를 찾기 위해서요.”
??
??
-36-
놀랍게도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루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가진 기운은 전 세계를 떠돌던 나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아르엘 왕국에서 느껴지는 기운인가? 아니,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대 제국의 사람들이 지닌 기운이었나?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
외모가 이상했느냐고? 아니, 그는 달콤해 보이는 오렌지 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
?“전부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이 쓴 기록들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경우인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
??
?“…….”
??
그때, 손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신음하며 손을 부르르 떨자, 테오필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
??
?“…….”
?“무지한 이들은 신께서 공평하시다고 믿고는 하죠. 아주 어리석지 않습니까. 세상의 밑바닥에서 태어난
이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
?“성력 또한 신의 축복입니다.”
??
??
***
?“로즈.”
??
갑자기 무게가 쏟아진 탓에 침대가 출렁였다. 침대의 출렁임이 멈췄을 때쯤 테오필이 멋대로 지어 줬던
이름이 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이불 안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테오필이 가져다주는 식사의 횟수를 통해 시간을 유추해 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테오필은 이 수작을
눈치챘는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 쓰러진 나를 보며, 테오필은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쓰러진 내 입에
억지로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테오필의 물건이 아래에 들어올 때였다. 이처럼 남성의 성기가 징그러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동화에 등장하는 성기사들은 항상 정의로웠다. 악마와 마물들을 멋지게 물리치고 성력으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
?
그때는 성기사의 그런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기사의 실체를 알게 되어 끔찍할
뿐이었다. 순결해야 할 성기사가 성을 탐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어색했다.
고난을 겪고 눈물을 흘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정말, 정말로 가끔씩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희망이 전혀,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알베르트나 살로스, 노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새하얀 베개에 얼굴을 묻자
베개가 천천히 눈물로 젖어 들었다.
?
?“울고 계십니까?”
??
?“도대체 언제…….”
?“…….”
??
?“도망치고 싶습니까?”
??
??
정말로 테오필은 아무런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목을 조르지도 않았고 입술을 물어뜯지도 않았다.
??
그리고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난 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를 바라봤다.
?
그런데 발목을 채우고 있어야 할 족쇄가 보이지 않았다.
?“헉……?”
??
그가 의도한 것이든 실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점이었다.
?
그리고 나는 달렸다. 숨이 차올라도 뒤를 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내가 다리를 뻗으며 뛸 때마다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울 소리의 주인이 테오필이 아닌가 싶어 겁을 먹었다. 하지만 방울 소리는
내 움직임에 따라 달라졌다.
설마 몸 어딘가에 방울이 달려 있는 걸까. 온몸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방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불길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37-
?그 손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로즈. 즐거우셨습니까?”
?“왜 화가 난 거예요?”
??
??
?테오필은 나를 들어 올려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도록 했다. 그는 복도를 따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허언이 심하시네요.”
??
??
?짜증 나게도 정답이었다. 테오필이 의도한 상황인 걸 짐작하고도 방을 빠져나온 것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으니.
?“…….”
??“이곳은 성기사 단장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오로지 저와 제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 는 공간.”
??
?즉, 도망쳐 봤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테오필이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도 꽤 애를 먹을 뻔했습니다.”
?“…….”
??
?역시 그곳에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딱딱한 구체가 들어 있기라도 한
건지, 아랫배가 살짝 볼록했다.
?
??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습니다. 당신이 도망칠 기회가 있어도 이곳에 남는 걸 선택하지 않을까, 라고.”
?“그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한테 상처를 입혔잖아요. 상처들을 성력으로 치료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그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러웠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눈을 막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
??
?“…….”
?“당신이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이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 당당하게 나에게 맞서던 그 태도가 무너지는
것이 좋아요.”
??
?
?그는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즐겁게.
?“왜 더 이상 울지 않으십니까?”
?“흐, 으윽.”
??
?나는 신이 끔찍한 괴물에게 징벌을 내리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테오필의 말대로 신은
내가 아니라, 저 끔찍한 괴물을 더 사랑하고 아꼈다.
?언젠가 눈앞에 있는 괴물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테오필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나?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갑자기 밀려오는 절망감 탓에, 나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테오필은 다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철문은 남아 있었다.
??
?이를 악물고 테오필을 노려보며 따지자 테오필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
?다시 한 글자씩 곱씹으며 <필릭 일대기>와 <엘도니아 여행기>를 읽어 본 결과, 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됐다.
?
?강력한 성력을 지닌 성기사인 에반의 일대기를 기록한 <에반 일대기>에서는 중독에 관련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아.”
??
?“아름답지 않습니까.”
??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 꽃은 순결해 보이는 백합이었다. 나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색한 선물이었다.
?수도원이나 신전에서 백합이 사용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
?그래,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 수도원과 신전에서는 성녀 세티아는 백합을 닮았다는 기록을 발견한
이래로 백합으로 그녀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
??
-38-
??
?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은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말았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당신은 절망을 겪고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잖습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완전한 절망이 아니에요.”
??
?코를 찌르는 진한 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꽃다발을 버리지도 않았다. 나는
꽃이 시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 침대 옆에 그 백합을 올려놓았다.
***
?
?어느 날 테오필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신이 난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
??
?고향에 대한 소식이라고?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
??“도대체 내가 왜요?”
??“네?”
??
?제발 살려 달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빌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비참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다시 돌아온 테오필은 나를 스텔라라고 부르며 트리센 마을과 수도원의 소식을 내게 들려줬다. 그는 이미
나와 친하던 이들의 정보까지 수집한 뒤였다.
?
??
??
??
?하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뤘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느라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
??
??“…….”
??
??“……네?”
??“모니카 공작의 기사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 건가 봤더니, 그 대상이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자 암흑가를 관리하던 범죄자였더군요.”
??
??“…….”
??“어떻습니까, 스텔라.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 정말 이 흉악한 범죄자 맞습니까?”
??
??“제가 어떻게 하면 애타게 울며 애원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아끼는 친구나 동생을 죽이기라도 해야,
그래야 애원하시겠습니까?”
??“……거짓말. 당신은 성기사잖아.”
??
??“거짓말 같습니까?”
??
??“그러지 말아요.”
??
?
??“역시 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전에 말했듯이 과하게 멍청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아서.”
??
?내 얼굴을 쓰다듬던 테오필의 손가락이 입에 들어와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올 때면
숨이 막히기도 했다.
***
?
??“안녕, 수녀님…….”
??
?가끔 테오필이 헤프게 보이기는 하지만 성기사 단장이기는 하구나. 한순간의 공격으로 살로스를 저렇게
만들다니.
??“잘 지냈어?”
??
??“그렇구나.”
??
?몽마가 우는 장면은 언제 보든 항상 어색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몽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넌 너무 감정적이야.”
??“…….”
??“내가 전에 말했잖아. 수녀님이 나한테 명령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그 성기사를 죽이라고 나한테
명령해. 그 새끼가 밉지도 않아?”
??
-39-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
?
내가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살로스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괴롭다고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응.”
??
?
최근 들어 살로스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졌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말이 많던 살로스가 상상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변화한 그에게 적응했다. 몽마가 감정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했던 말?”
??
??“……그때는 뭣도 모르고.”
??
그날은 왜인지 부쩍 꿈속에서 기분이 좋았다. 꿈속에서 살로스와 가볍게 장난도 쳤고, 소소한 대화도
매끄럽게 진행됐다.
?
나는 여전히 그때 테오필이 왜 그렇게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미친놈의 정서와 그 이유 따위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오필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 그 행동에 논리는 전혀 없었다.
***
애초에 암흑가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없었고, 암흑가를 유지하라는 반 미리엄의 유지를 이을 생각도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하지만 스텔라가 노아를 떠나던 그때, 그녀는 머리에 뿔이 달린 이상한 남자가 함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법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사용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서류는 읽어 봤자 거짓된 증언들뿐이었다. 누나를 봤다면서. 증언하는 놈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들뿐이다. 노아는 쓸모없는 서류를 던져 버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
온 제국을 뒤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경 지대와 같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공간도 있었으니.
평소였다면 스텔라가 그런 곳까지 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을 사용해
이동했다. 적어도 누구나 갈 수 있는 평범한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테다.
대체 누나는 어디로 간 걸까. 노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증언이라고 올라온
것들은 죄다 믿을 수 없는 내용들뿐이니,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 노아는 얼굴을 완전히 구기며 집무실에
침입한 상대를 노려봤다.
?
??“시, 신전. 신전입니다. 중앙 신전으로 가 보셔야 합니다.”
??
하도 급하게 들어오길래 무슨 중대한 소식을 가져온 줄 알았더니 시답잖은 소리뿐이군. 노아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스테판. 장난 상대를 잘못 골랐군. 안타깝게도 내게는 사람을 찾겠답시고 신에게 기도하는 취미는
없는지라.”
??
긴장한 스테판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그만큼 노아의 얼굴과 목소리는 피곤과 분노에 절어 있었다.
??“성기사단의 단장이 국경 지대에서 데려온 한 아가씨가 있는데, 몽마에게 시달리던 것을 성기사 단장이
구해 준 모양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는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그때, 스텔라가 도망치기 직전 대화하고 있던 남자의 외양이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머리에 어두운 빛깔의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말해 보도록.”
??
그제야 노아는 스테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 볼 마음이 생겼다. 스테판은 성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부 노아에게 전했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에 생겼다. 성기사 단장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에도 성기사들은 그를 막아설
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암흑가의 주인임을 밝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기사들은 노아의 고급스럽고 깔끔한 옷을
보고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성기사 단장에게 다녀오겠다던 성기사는 정말로 금방 돌아왔다. 그는 단장의 허락을 받았다며 노아를 신전
안쪽으로 안내했다.
?
바로 스텔라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도착한 곳은 신전 내부에 위치한 작은 응접실이었다.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
??
그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때때로 혼자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암흑가를 다스리는 더러운 범죄자가 감히 신성한 신전에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군.”
??
단장은 노아의 말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며 흰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응접실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웃음 한 점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중얼거렸다.
노아는 그대로 신전에서 쫓겨났다. 범죄자, 더러운 것.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40-
“부르셨습니까, 성하.”
“경.”
“예, 성하. 하문하십시오.”
“그렇습니까.”
“경, 제정신인가?”
교황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어지는 타박에도 테오필은 여전히 당당했다.
“무슨 말이지.”
?
“전 몽마에게 고통받는 아가씨가 있길래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경. 아주 기고만장하군.”
그리고 스텔라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한 성기사가 급하게 그를 찾았다. 어느 귀족이 찾아왔는데 그가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였다. 남자는 자신의 누나를 찾으러 신전에 왔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스텔라, 그녀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를 내어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 신전에 찾아왔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소식과 함께,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면 눈앞의 이 여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그는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려 간사한 괴물처럼 웃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텔라가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도록.
“지금 돌려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동생이라. 테오필은 자신이 말하고도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누나를 찾으러 왔다고? 웃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애절한 표정으로 누나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놈이 말한 만큼 간단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
너무 힘들었다.
현실에서는 최대한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여기는 꿈속이니까 조금은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
그래서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수녀님…….”
“……살로스.”
?
“울지 말라고도 안 할 거고 소리 지르지 말라고도 안 할 거야. 그런 위로는 쓸모가 없는 걸 아니까. 그냥,
너무 괴로워하지는 마. 수녀님이 더 힘들어지는 길이니까…….”
“…….”
“…….”
“…….”
“……안녕.”
그러자 문양은 금세 지워졌다. 하지만 문양이 지워지는 동시에 허공에서 예리한 단검이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다.
단검의 중앙에는 살로스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나는 유심히 그 보석을 관찰했다.
?
그리고 다시 단검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단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이때쯤 나는 문양과 단검의 관련성을 눈치챘다. 단검이 사라지자 손바닥에는 다시 문양이 나타났다. 다시
문양을 문지르자 단검이 나타났고 또 다시 손바닥을 문지르자 단검이 사라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는 당장 단검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러 담았다.
“……허.”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건 봐야 알 것 같군요.”
-41-
테오필이 움직일 때마다 뻑뻑한 아래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버티는 척하며
테오필의 팔에 깊게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성기사의 몸에 생긴 상처는 일부러 치료하지 않아도 금세 스스로 회복됐다. 테오필은 그런 자잘한
상처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언제까지 버텨야 기회가 오려나. 테오필의 심장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찌른다면 단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에게 막힐 것이 분명했다.
테오필은 홀로 허릿짓을 하다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고 깊은숨을 뱉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
그 비웃음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테오필의 웃음은 마치 그 스스로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테오필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단검을 높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바로 성력을 이용해 부상을 치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기회가 물거품이 됐다고
생각하며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
“상처가 낫지를 않, 윽…….”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테오필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입술을
물어뜯으며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
“…….”
“…….”
“…….”
그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운 걸까. 앞으로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 살인자라는 명칭이 무서운 건가?
?
?
나는 그저 기다렸다. 다른 성기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방에 들어와 나를 체포할 것을 말이다.
“끄으…….”
침묵 속에서 테오필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나는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을 테다.
덜컹.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테오필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성기사들이 들어온 것일 테지.
그들이 우악스럽게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
“……여기는 왜 왔어.”
“가. 다시 돌아가.”
애초에 중앙 신전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성기사들은 전부 기절시키고 온 건지 노아의 뒤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노아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테오필이 이제 그에게 자신을 살리라고 애원에 가까운 명령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태도가 저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니,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간사한가.
그러나 노아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테오필의 피로 얼룩져 있는 그 단검을.
-42-
“욱.”
?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노아가 다시 한번 테오필의 몸을 찌르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리 와, 누나.”
나는 끝까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오고 있어.”
?
“누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 살짝 입술을 깨물거나 울먹거리면 더 좋을 거야. 아플 정도로 깨물지는
말고.”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순간, 노아가 나를 밀쳐 침대에 쓰러트렸다. 그리고 그는 내 어깨를 짓누르며 내
위에 올라탔다.
“저놈이다, 침입자다!”
지금 이 상황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판단해 보자. 나는 노아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힘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노아는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
“아가씨를 보호해 주시던 테오필 단장님께서 그렇게 되시다니. 온 신전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네?”
“노아를 만나 보고 싶어요.”
“왜 그랬어?”
“뭐가?”
“왜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갔냐고.”
?
“쓸데없다니.”?
“대신 네가 사형당하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이미 주신 렌다에게 구원받을 수 없어. 렌다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거든.”
“…….”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기도실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는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는데, 왜인지 지금은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열려 있었다.
기도실 내부는 조용했다. 천장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이 렌다의 석상을 비추고 있었다.
“신이시여…….”
“……안녕, 누나.”
“어제, 했던 말.”
“아, 그거.”
“어제부터 자꾸 손을 쳐다보던데.”
“…….”
“핏자국.”
“핏자국?”
“아아.”
“죄책감이겠지.”
“왜?”
“…….”
“그때는 죽도록 싫었던 놈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놈 덕분에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
“…….”
“좋아해, 누나. 아니,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누나를 더 사랑해.”
-43-
“네가 말한 대로 하면 뭐가 남는데?”
“뭐가 남느냐고?”
“뭐?”
“누나가 성기사 단장인지 뭔지, 그놈을 죽였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 놈이 악마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겠지. 나는 그렇게 믿어.”
?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노아가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나를
잡아당기자 나는 힘없이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내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나는 노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밤에도 어둠을 뚫고 손 위에서 선명하게 나를 괴롭히던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신의 저주가 아니라 내 죄책감일 뿐이었구나.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렌다의 석상 앞에서 기도해도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말 한마디에 핏자국이 지워지다니.
“꼴도 보기 싫어…….”
?
나는 이렇게나 네가 싫은데. 너를 아끼던 마음과 사랑하던 마음은 이미 추억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인데.
“나는 알 것 같아.”
“뭘.”
?
“나한테서 필요한 게 있는 거잖아. 누나가 필요로 하는 게 정확히 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럼?”
“한번 사랑받으면 더 욕심이 날 테니까. 매일이 지날수록 하루만 더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할 게
분명해서.”
진부하지만 노아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무릎에 바닥이랑 이어지는 자석이라도 붙어 있나. 왜 이렇게
무릎을 자주 꿇어.
?
“누나, 제발.”
“아마 그렇겠지.”
“아아, 진짜…….”
?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
나는 이것을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암흑가를 이용해 신전을 몰아붙이고 탈출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노아는 이렇게 답했다.
“황실?”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
“…….”
“알베르트가 또 나를 찾고 있구나…….”
노아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창살 사이로 그의 두 다리가 삐져 나왔다.
?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이 나한테 감시를 붙여 놨을지도 모르거든. 아직 수상한 기색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있는데 네가 찾지 못한 거면 어쩌려고.”
노아가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이곳에 더 있으면 성기사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을 외면하고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
내 시선이 품속의 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성기사는 얼른 쓸데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나한테 질린 걸까.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던 주제에 상황이 이렇게 되니 떠나 버린 건가.
“…….”
나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
이번 방은 테오필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시설이 좋고 깔끔했다. 내가 지하 감옥에 있는 사이
누군가 방을 치워 준 모양인지, 이불이 각에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44-
?
“혹시, 그 찾아온 사람이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던가요?”
“…….”
순간 말을 잃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호자요?”
“하지만…….”
“네?”
“아가씨? 아가씨!”
***
다시 이불에서 꾸물꾸물 나왔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웠다. 왜인지 창문이 있으니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이곳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없었다. 주머니에는 작은
빵을 넣어 둔 상태였다.
?
이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알베르트와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도 도망친다면, 다시 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르엘 왕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아니, 넘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가 반복될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대로 아르엘 왕국으로 가 버리면.
그렇다면 노아는?
“너 아까 모니카 공작 봤냐?”
?
“후우…….”
게다가 노아를 생각할 때마다 과거의 그가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과거의 그 여리던
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죽도록 이곳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
망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밤에는 신전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설마 공작이라서 그냥 들여보내
준 건가?
하여간 신전에 사는 게 신을 모시는 사제라는 놈들인지 계급주의자들인지 모르겠다. 상대가 지위만 높으면
다 허용해 주는 거냐고.
?
나는 이전에 방문을 두드렸던 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으득, 이를 갈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텔라.”
“……아.”
“저는 아닌데요.”
“도대체 왜 당신은 얌전히 앉아 있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요. 가만히 내 옆에만 있으면, 당신이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텐데.”
?
어디서 거짓말이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맨날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게 누군데.
“하지만…….”
“그것마저도 당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성격을 좋아하든, 외모를 좋아하든, 결국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돈 많고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렸는데 왜 굳이 나한테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향이라는 게 뭐길래 알베르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베르트가 말하는 향도 그것과 비슷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여주를 사랑해야 할 알베르트가
나를 따라 신전까지 쫓아온 걸까.
“코르넬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해 줬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 미리엄, 아니,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동생이 당신을 찾아 준 덕분이죠.”
“네?”
알베르트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입 밖으로 헛웃음을 뱉고는 말했다.
?
“무엇이 말입니까?”
?
나는 결국 노아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뭐, 그래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결국은 나도
테오필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최우선인 일은 노아를 구하는 것이었으니.
-45-
“무슨 의미입니까?”
“스텔라, 그만.”
“스텔라. 당신의 살인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를 탓하는 자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이겠지요.”
?
아니, 아니야.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누군가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
“버리지, 못한 게 아니라…….”
“전 가고 싶지 않아요.”
“…….”
하지만 아무리 눈을 문질러 닦아도 손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이것이 진실이
아니며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제 손에는 지금 피가 잔뜩 묻어 있어요.”
“성기사 단장을 죽인 후부터 손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여요.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이게 환영일 뿐이고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걸.”
“스텔라.”
?
한동안 알베르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마침내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냈다. 허리를 짓누르는
강력한 힘이 사라지자 여러모로 한결 편해진 듯했다.
“아니, 안 돼요. 오히려 공작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핏자국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
“공작님. 제발 이제 그만해 주세요…….”
“…….”
“스텔라.”
“핏자국, 핏자국이라.”
“…….”
밤이 깊은 탓에, 피곤한 거라고? 하지만 이 핏자국이 보이는 시간대는 다양했다. 새벽에 보이기도 했으며
아침에 보이기도 했다.
“상관없습니다.”
“공작님께서 미친 여자를 거두셨다고 소문이 날 거예요.”
“공작님.”
“네, 스텔라.”
“지금 이대로 공작님을 따라가면, 전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공작님이 관계를 요구하시면 따르고,
평생 그곳에 갇혀서 제가 원하는 것은 버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
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알베르트는 해가 뜨면
공작저로 출발하자고 말하며 나를 방으로 보냈다.
또다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노아는 그대로 죽게
될 테고.
***
교황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알현실의 의자에 앉았다. 알현실 창문을 통해 희미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교황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전의 모든 이들이 테오필이 죽었다는 이유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교황만이 성기사 단장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슬프지 않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죽음이 기쁘기까지 했다.
-46-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이었다. 테오필은 마치 자신이 교황인 양 그를 협박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전을 움직였다.
최근의 일만 해도 그렇다.
테오필이 여자를 데려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교황은 주먹을 세게 쥐며
기함했다.
성기사, 그것도 그중 우두머리라는 성기사 단장이 신전에 여자를 데려오다니, 정말로 그가 제정신이긴 한
건가?
하지만 신전의 사람들이 뭐라고 수근거리든 교황은 테오필과 그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불쾌할 뿐이었다.
몽마니 뭐니, 그에게는 전부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테오필을 중심으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한 남자가 신전에 침입해 테오필을 살해한
것이었다.
때문에 신전이 완전히 뒤집혔다. 모두 하루라도 빨리 죄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아 떠들고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뵙게 해 주세요.”
“저 여자 말씀이십니까, 성하?”
?
교황이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수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곧이어 테오필이 데려왔다는 여자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여자가 들어오자 순간 어색한 향이 알현실 안에
맴돌았다.
“에린. 나가 보도록.”
“성하.”
“…….”
에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여자를 흘겨봤다. 그녀는 마치 여자를 더러운 것을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성하.”
아마 에린이 나가기 전 걱정한 것은 이것일 테다. 몽마에게 시달리던 자이니 분명 더러울 것이고, 위험할
것이라고.
?
여자는 어눌하게 말을 시작했다. 교황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교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여자의 외양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성기사 단장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 신전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교황은 골똘히 생각했다. 왜 신전은 지금까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나?
테오필은 지금까지 몽마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줬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테오필을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탓일 테다.
생각하던 중 교황은 무언가 이상함을 떠올렸다. 그리고, 신전의 사람들 중 처음으로 교황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단하게 테오필이 저지른 죄악을 그에게 설명했다. 덧붙여, 자신은 죄인을 죽인
것뿐이라는 말까지.
“그뿐만 아니라…….”
“또 뭐지?”
찾아오신 분이라. 교황은 곧 모니카 공작이 한 여자를 찾으러 신전을 방문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또한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었던 건가.
?
초기의 신전은 청렴하고 무구했다. 그러나 교황의 자리를 사이에 두고 거듭되는 권력 싸움 탓에 청렴하던
신전은 문란해지고 부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교황이 성기사 단장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살인을 의뢰해도 소문이
날 터.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자의 주장에 따르면 눈앞의 여자는 테오필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지하 감옥 열쇠다.”
“…….”
그러나 여자는 열쇠를 받고도 아무 말 없이 열쇠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나가지 않는 거지? 교황은
얼른 나가라는 의미로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 성하.”
“감사합니다.”
“어떤 차이 말씀이십니까.”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어떤 고난이 와도 결국은 밟고 일어설 수 있어. 죽으면 뭣도 아니게 되겠지만.”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해가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에린이 알현실로 돌아왔다.
“……차가 다 식었군.”
-47-
아직 아침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창문 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기는 했으나 정확히는
새벽이었다.
노아를 먼저 지하 감옥에서 꺼낼지 단검을 먼저 챙길지 고민하다가 단검을 먼저 챙기러 갔다. 적어도 검이
있으면 성기사를 만났을 때 배 정도는 찔러 줄 수 있겠지.
봉인실 안에는 기분 나쁜 물건들이 가득했다. 내게는 성력이 없는지라 정확히 그 기운을 감지할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기분이 더러운 것은 확실했다.
?
그중 봉인실의 중앙에 있는 것은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그 검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아, 노아.”
“……누나?”
“이리 와. 빨리.”
?
나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왼쪽으로 돌렸다가 창살이 열리지 않길래 다시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창살이 열렸다. 오른쪽이 정답이었나 보다.
그 소리에 다른 죄수들이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인지 이쪽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허어, 뭐야 저것들은.”
“도망치려나 본데.”
“성기사들! 이리 와 보라니까!”
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더니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노아가 내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냥 한 번만 믿는 셈치고…….”
금방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꼴이 영 못 미덥기는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신전의
창문을 열고 후문으로 향했다.
“…….”
?
노아는 대답하는 대신 내 손을 잡고 당당하게 후문을 통과했다. 물론 성기사들이 우리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아니, 이 자식 그놈 아니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옥에 끌려갈 때 성기사들에게 저 병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누나. 숨 참아.”
뚜껑이 열리자 병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를 마신 성기사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응.”
***
하지만 성기사 단장이 죽었기 때문인지, 성기사들이 국경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은 전부 틀어지는데.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아르엘 왕국으로 넘어가자니 기록이 남을 것이고, 그렇다고 불법으로 국경 지대를
넘자니 성기사들에게 붙잡힐 수 있다는 것이 걸렸다.
벌써 우리가 후문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성기사들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 교황님, 아무리 더
이상 도와주실 방법이 없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빠르잖습니까.
?
이미 교황에게 갈 때 죽음을 각오했었다. 평소에도 간간이 생각해 왔던 길이라 그런지 큰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게 나를 왜 꺼냈어.”
“…….”
“이 거지 같은 환영을 없애려고 널 꺼낸 거잖아.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어느새 성기사들이 둥글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위협적으로 성검과 창을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
노아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기력이 없는 탓이 큰 것 같았다.
“잠시만. 저게 무슨…….”
그때, 우리를 둘러싼 성기사들 중 한 명이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허공에서 어두운 보라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애초에 저걸 빛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부셔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이게.”
“아. 어라.”
?
“네, 네?”
옆에서는 성기사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성기사들과 우리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세워졌다. 성기사들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장벽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넘기기에는 어딘가 찝찝했다. 마치 검과 관련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의 여자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살로스가 연상돼서, 나는
조심히 그 손을 잡았다.
-48-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상이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내며 방의 중앙으로 끌려왔다.
“아……. 스텔라예요.”
“그쪽은?”
“……노아.”
?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손바닥을 문지르니 갑자기
튀어나왔으니까.
“아, 저 근데.”
“응? 말해 봐.”
?
그렇게 물으셔도 뭔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요. 나는 눈에 살짝 힘을 주며 말끝을 흐렸다.
싱글벙글 멍청하게 웃는 모습이 무해해 보이기는 했으나 사람을 외양으로만 판단했다가는 언젠가 뒤통수를
맞고 말 것이다.
“여긴 어디인가요?”
노아는 팍 인상을 쓰고 수프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수저를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따지기에는 심하게
굶주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탑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탑에서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마법도 개발한다고
들었다. 마법을 개발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
“다 죽었어. 23 년 전쯤. 애초에 별로 머릿수가 많지도 않았고.”
그리고 아리안은 내 당황한 표정을 보고 표정이 웃기다고 놀렸다. 그녀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다가 과거
회상에 빠져 혼잣말하듯 주절주절 말을 시작했다.
“고대 기록들을 읽다가 이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했거든. 그래서 그곳의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했어. 마법진을 그려서 힘을 전부 쏟아부었지.”
?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말하고 있군.”
“넌 조용히 해 봐.”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어? 이 이야기를?”
?
“그래, 뭐. 듣고 싶다는데 말 못 해 줄 것도 없지. 어차피 꽤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마력이 많이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실패할 확률도 높다. 아리안을
제외한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그리고 그것을 발동시키기 위해 힘을 전부 쏟아부었으나,
마법진에서는 빛만 뿜어져 나올 뿐 다른 세상의 사람은 마법진에서 소환되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무슨 저주받은 마탑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아무도 마탑에 찾아오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나
혼자 연구나 하면서 살고 있지.”
?
아리안이 선뜻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은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마법사들이 싸워서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
이 검에 마력이 많이 담겨 있다고? 나는 아리안과 단검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뭐, 망설이는 걸 보면 소중한 물건인가 보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봐. 심심하면 마탑
구경이라도 할래? 아래층은 내가 거의 안 다녀서 더럽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때가 낀 계단이 본래의 돌 색으로 변했고 먼지가 가득한 방이
깨끗해졌다.
“…….”
“…….”
금방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길래 노아가 이미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불편해서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노아가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잡았다.
?
“……또 날 두고 가려고 하는 거지?”
“아니, 그거 말고.”
그는 아까 내가 한 말을 쭉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
-49-
“제발, 누나. 내가 사랑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이렇게 흔들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누나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건지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하겠어.”
아, 진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노아는 끈질기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네 말 한마디가
내 죄책감을 없앴으며 네가 내 죄를 부정해 줬기에 이 환영이 사라졌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날 왜 감옥에서 꺼내 줬어?”
“그거야 당연히…….”
?
“그때 누나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
“…….”
빈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이 환영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노아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
내 손을 잡은 노아의 손을 대충 흔들어 털어냈다.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감긴 후에야 나도 옷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그녀는 마법으로 따듯한 수프와 빵을 만들어서 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가 먹지 않겠다며 괜한
고집을 부리고 버티길래 머리를 잡고 입에 빵을 욱여넣었다.
?
아리안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놈 말투 싹수없는 거 봐라. 얼굴을 구기고 노아를 노려봤더니 그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쓰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각사각. 깃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편하게 누웠다.
침대에서는 좋은 꽃향기가 났다.
***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과 암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둠과 암흑 속에 숨어 나를 공격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누군가가 무서웠다.
“텔…… 라.”
끈적한 액체와 바닥이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밀색 머리의 남자가 암흑 속에서
걸어 나왔다.
“끄, 으…….”
도망쳐야지. 저 끔찍한 테오필과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지.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손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악!”
?
눈을 감아도 테오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끔찍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흐으, 아악!”
“노, 아. 노아…….”
“스텔라!”
커다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아는 들어오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
왜 노아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 환영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를 통해 환영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버린 탓일까. 결국 환영을 없애는 건 노아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때때로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하고
사실 내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어느 한쪽에 생각이 고정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달빛이라도 정통으로 받고 있으면 눈이 부신지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어렸을 때의 노아와 지독히도 닮았다. 차라리 자라면서 얼굴이 달라졌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50-
아리안은 둥근 마법구로 스텔라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잠든 것을 보고는 그제야 마법구의 작동을
해제시켰다.
스텔라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밤을 새우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스텔라가
일정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사람의 소리를 들으니 꽤 기분이 좋았다.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옆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평범한
악몽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스텔라?”
아리안은 의문이 담긴 어조로 스텔라를 불렀다. 응답을 원해서 불렀다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부른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스텔라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을
뿐이었다.
“스텔라, 스텔라.”
몇 번이고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크게 소리를 질러도 그녀는 지독한 악몽에서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했다.
“아악!”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스텔라를 내려다보고만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빽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흐으, 아악!”
스텔라가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굳게 감았다. 그렇게 하고도 스텔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노, 아. 노아…….”
“스텔라.”
애타게 부르던 노아라는 남자를 찾아 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책장에서
마법구를 꺼내 조심히 책상에 올려놓았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길래 아리안은 마법구가 고장 났다고 생각하고 마법구를 몇 대 때렸다. 하지만 곧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그저 스텔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스텔라와 노아는 무슨 관계인 걸까. 끔찍한 악몽을 꾸고 고통스러워하던 스텔라가, 어떻게 노아를
보자마자 평온한 얼굴로 잠든 걸까. 큰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잠들지 않았던 건가. 아리안은 유심히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잠든 스텔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 스텔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리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휘두르자 스텔라의 주변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스텔라는 오묘한 색의 빛 안에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디 꿈속에서는 편안하기를. 아리안은 조금 더 스텔라를 쳐다보다가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 버리고
위층으로 돌아왔다. 뭐, 스텔라는 노아라는 녀석이 잘 챙겨 주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
계속 욕심이 났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그녀의 곁에만 머무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애원하며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다.
노아는 발소리의 주인이 스텔라임을 확신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스텔라가 가쁜 숨을 쉬며 들어왔다. 노아는 살짝 눈을 떠 그것이 스텔라라는 것을 확인했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침대에 눕혔다. 그때 방문 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올
사람은 마법사라는 그 이상한 여자밖에 없었다.
노아는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십,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말이 진실인지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노아는 스텔라가 그랬던 것처럼 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보기도 하고, 뺨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
마치 그녀가 유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히.
-51-
알베르트는 마차의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실제로 유약한 종류의 광물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알베르트의
힘을 정통으로 받고는 살짝 아래로 휘어졌다.
신전은 스텔라와 노아의 탈출 문제로 시끄러웠다. 사실 논란의 초점은 스텔라와 노아보다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둘을 데리고 사라진 마법사에 맞춰져 있었다.
사제들은 알베르트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서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붉어진 주먹을
펴고 코르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큼 마법사들은 강한 존재였다. 그들은 악마와 같이 마법을 사용하나 악마처럼 성수로 해칠 수도 없다.
***
“……안녕하세요.”
그나저나 오늘 아침에 노아의 침대에서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던지. 심지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아를
보고 두 배로 놀랐다.
“눈 밑이 어두우신데…….”
“약이요?”
“응.”
왜인지 할머니의 이름을 찍찍 부르는 것 같아서 마음 한쪽이 불편하기는 했다. 아무리 외양이 젊다고 해도
나이가 하도 많아서 그런가.
“거울부터 보고 그런 말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리안과 나, 둘 중에서 수면이 더 필요한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아리안을 고를 것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들어올 때부터 노아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왔다. 아리안은 조금 들뜬 말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하던 살로스가 떠올라서 나는 꾹 주먹을 쥐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녀가 탁자를 툭툭 두드리자 순식간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졌다.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속이 안
좋을 텐데,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식사는 가벼운 음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어제는 연구를 하느라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던 아리안도 풀 따위를 포크로 눌러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불만이 저렇게 많은 거지? 심지어 아리안은 성기사들 사이에서 우리를
구해내 이곳으로 데려와 주기까지 했는데.
막막하기만 하던 상황이 이제야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풀리고 있는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짓만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방금 무슨…….”
놀라울 따름이었다. 노아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노아도 얼굴을 마구 찌푸린 것과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아아, 네.”
***
아리안은 그 후로도 매일 내가 침대에 누우면 파란색의 액체를 내게 내밀었다. 어느새 며칠이 지났고,
그건 마치 일상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한 시간 정도?”
“…….”
“그런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완전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금방 테오필에게 따라잡혔다.
제발 좀 사라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는 공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차라리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어난다면 테오필은 사라질 테고 나는 바로 노아에게
달려가면 되니까.
***
당시 아리안은 스텔라를 침대에 눕히고도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마녀들의 약
덕분에 스텔라가 악몽을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자기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만들어 놓았던 마녀들의 약이 전부 떨어져 버렸다.
악몽의 내용이 과연 무엇일지는 잘 모르지만, 스텔라가 또다시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곧장 그녀를 깨워야
했다.
규칙적으로 스텔라를 주시하며 연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집중력을 흔드는 일이었다. 결국 아리안은 연구를
포기했다.
“스텔라!”
그래서 그녀는 이곳으로 노아를 불렀다. 물론 시간이 없었으므로 아리안은 마법으로 공중에 노아를
불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그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느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리안은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스텔라를 깨워.”
“……누나?”
“누나, 지금 대체 무슨…….”
또 그 같잖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노아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환영?”
아리안은 노아의 어깨를 세게 작으며 소리쳤다. 어깨를 쥔 손아귀 힘이 강력한 탓에 노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
“누나…….”
“…….”
“스텔라, 누나…….”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성기사 단장이라는 놈을 찌른 게 그렇게 죄스러워?
내가 간절하게 부르면 일어나 줄 거야? 누나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평생 옆에서 환영을 없애 줄게,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
지금도 비슷한 경우였다. 테오필이 아무리 내 목을 졸라도 이곳은 꿈속이기 때문에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
“누나?”
테오필이 갈라진 목소리로 저주가 섞인 말들을 내뱉는 와중에, 희미하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이, 멍청아!”
바로 뒤에는 테오필이 있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노아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누나.”
노아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불렀다.
“…….”
-53-
“스텔라?”
“…….”
“…….”
“…….”
노아는 작게 욕설을 지껄이다가 아리안이 준 쪽지를 가지고 창고로 향했다.
“네?”
“아.”
아리안은 정말 어렵게 질문을 꺼냈다. 질문하기에 어려운 내용일 뿐만 아니라, 대답하기에도 애매하고
어려운 내용이었다.
뿌득.
무엇보다 저 소파, 나무로 만들어진 거 아니었나. 바깥쪽이 천으로 덮여 있기는 하지만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찌그러졌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파가 걱정돼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나무도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
“…….”
방을 가득 채운 침묵을 깬 것은 아리안이었다.
“어……. 그랬었죠.”
하지만 짐작일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마법을 발동시킨 시점이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탓에, 홀로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말해도 괜찮아.”
“……아아.”
“어쩐지 향이.”
“왜 죄책감을 갖는 거야?”
“…….”
“네.”
“내일 해가 지면 바로 가는 거야.”
“네……?”
곧이어 노아가 탑의 방문을 걷어차는 탑을 울렸다. 아리안은 시끄럽게 울리는 파열음이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몇 분이 지나자 노아가 입술을 깨물며 옥탑방에 올라왔고, 아리안은 잘했다며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를 거칠게 빼앗았다. 물론 노아는 아리안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닿자마자
벌레가 앉은 것처럼 거칠게 뿌리쳤다.
아차. 나는 얼른 눈을 뜨며 컵을 건네받았다.
아리안은 내가 잔에 든 액체를 끝까지 다 마시는지 지켜보다가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곧 아리안은 드디어 결정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녀는 노아의 뒷덜미를 잡은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얇은 벽 너머로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직접 침대에 던져 주고 왔나 보다.
-54-
아리안이 흥분하며 꽥 소리를 질렀다. 노아는 그녀의 예민한 행동에 질린다는 듯이 혀를 쯧, 하고 찼다.
물론 아리안은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너 방금 혀 찼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아는 자연스럽게 아리안의 말을 무시했다. 아리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노아는 아리안을 노려보다가 주름진 옷을 가볍게 두드려 주름을 폈다. 감옥에서부터 입고 있던 흰색의
셔츠가 노아의 머리카락 색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색이라 그런지 특히 더 눈에 띄었다.
마법을 이용해 마을로 바로 가면 될 것을, 아리안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마법을 쓰면 괜한 이목을 끈다고 답했다.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소리,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의
단어를 속삭이는 소리.
“쯧. 저게 도대체 뭔지. 미사여구 앞에 아무 물건이나 가져다 붙이면 칭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여간 귀찮게 하네. 아리안은 툴툴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고 노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리안은 노아를 보며 혀를 차다가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노릇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각종 채소와 고기가 함께 꽂혀 있는 꼬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기고 홀린 듯이 꼬치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덕분에 길거리
한복판에 노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건물들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광장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한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꽃을 파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나는 멍하니 아이를 보다가 다시 꼬치 가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리안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가게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결국 아리안을 찾으러 가게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노릇한 냄새가 나는 가게 안에 들어가자
위층에서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생각보다 난감했다. 애초에 아리안의 손에 이끌려 나왔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건 노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노아와 꽃이라니! 어렸을 때의 그라면 몰라도 지금의 노아와 꽃은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미 정원을 만들 정도로 장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취향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여튼 우리는 그것을 시작으로 축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가게마다 달린 형형색색의 등불 때문에 눈이
부셨다.
마땅히 돈을 쓸 만한 가게가 보이지 않아 계속 걷기만 했더니 어느새 우리는 광장에 도착했다.
나를 힐끗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노아가 나와 광장의 사람들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고 싶어?”
물어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다만 저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함께 춤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했고, 그건 곧 노아를 데리고 춤을 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추는 춤은 정말로 즐거웠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 때마다 치마가 꽃처럼 피어나는 것도,
부드럽게 불어오는 시원한 밤의 바람도, 귀를 채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웃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당연한 상황이 왜인지 너무나도 반가워서, 그래서 그냥
웃어 버렸다.
-55-
***
아리안의 옆에는 돈뿐만 아니라 값비싼 패물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또다시 남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리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 옆에 놓인 돈을 손으로
쓸어 가져왔다.
남자는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아리안은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고는 다시 광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아무리 쳐다봐도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나도 눈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손뼉을
치고 춤을 췄다.
얇은 꽃잎들이 노아의 손안에서 마구 구겨져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진 부분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왜 표정이 복잡한가 했더니 장미가 찢어져서 그랬었나 보다. 내가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나 보다. 장미가
찢어져서 침울할 정도로 노아가 세심한 성격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장미 다시 사러 갈래?”
꽃을 팔던 아이는 여전히 거리를 누비며 꽃을 팔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아직도 활짝 핀
장미가 많았다.
“……아니.”
“스텔라! 이거 봐!”
아리안은 한 손에는 금화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꼬치를 들고 후다닥 1 층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준
꼬치는 다 식어 차가웠다.
“잘 놀다가 왔어?”
“근데 쟤는 또 왜 저래?”
확실히 노아는 그런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미가 날아가서 마음이 아픈 노아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했다. 장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찢어 버린다면 모를까.
아리안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물론 노아와 아리안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으며, 아리안은 침대가 아니라 그녀의 딱딱한 나무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56-
망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과연 오늘은 테오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저번보다
더 끔찍해졌을까? 이번에는 얼마나 고통받아야 노아가 나타나고 테오필이 사라질까.
역시나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기어 나와 내 발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저번과 똑같은 전개라서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지루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테오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똑같은 전개가 지겹다는 생각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예……?”
“내가 잠깐 내려간 사이에 잠들어 버리면 어떡해! 괜찮아? 또 악몽 꾼 거지? 지금 가서 쟤 데려올까?”
“저 악몽 안 꿨어요.”
빙 돌려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기쁨은 온전히 전달이 되었나 보다. 아리안은 호들갑을
떨었던 모습은 완전히 지워 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안은 아르엘 왕국의 남쪽에 있는 이 해변은 파도가 험해 사람은 물론 배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라고
말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를 데려온 건가……. 어쩐지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들이 날카롭게 깎여 있더라.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안을 쳐다보자 그녀는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바다에 도착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한곳에 모여 바다를 구경하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바위 사이에 희귀한 광물이 보인다며 갑자기 곡괭이로 바위를 캐기 시작했다. 근데 아리안이라면
괜한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마법으로 간단하게 광물만 꺼내면 되는 거 아닌가.
“어제는 악몽 안 꿨다며?”
“어떻게 알았어?”
“저 이상한 여자가 말해 주던데.”
새삼 노아와 아리안이 서로를 격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남달랐다. 꼬맹이, 그리고 이상한 여자.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야?”
내 머릿속에서 노아는 동화에나 나오는 피노키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속은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의 의심은 타당했다.
노아에게도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리안은 마법사니까
아리안한테 좀 부탁해 볼까.
노아가 내 질문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쉬워?”
“…….”
“…….”
에이, 설마.
“…….”
“행복?”
노아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니 굉장히 어색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내 행복을
빌어 주는 말이라니.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갑작스럽게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끝난다. 이런 형식은 노아가 나를 오두막에
가두고 손에 철쇄를 채웠을 때부터 계속 똑같았다. 그때부터, 쭉.
아리안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붉은빛의 돌과 푸른빛의 돌이라니.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푸른빛을 띠는 돌을 노아에게 건넸다.
돌은 막 건네받은 그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돌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건 네 거.”
“그리고 이건 내 거.”
그렇게 목걸이가 마음에 드나. 내가 구해온 목걸이는 아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한다. 저런 표정은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파도가 거칠었고, 노아와 진부하고 익숙하며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꽤 괜찮은 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노아 같은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은 걸까.
-57-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아르엘 왕국 남쪽 바다의 모습은 어땠는지. 암초와 난파선이 많았던 것부터,
아리안에게 예쁜 돌을 받은 것까지. 그리고 그중 하나를 노아에게 줬더니 그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리안이 주는 약을 먹지 않고 자 보겠다고 주장했다. 아리안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고 끝내 약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리안은 노아와 나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탑에 다시 돌아올 때마다 자세하게 일기를 썼다.
몽마의 힘이 깃든 단검…… 너무 기니 줄여서 몽마의 단검이라고 부르자. 몽마의 단검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노아의 오두막에서도 나는 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노아가 허락만 해 준다면 평생 그곳에서 노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편하게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널브러져 있지는 말자.
아리안도 나를 보더니 다행이라며 함께 기뻐해 줬다. 긴장감을 완전히 풀면 안 되기는 하지만 아리안을
의심하기에 그녀는 너무 친절했다.
하여튼 아리안이 먼 곳으로 떠나자 탑에는 노아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됐다. 우리는 아리안이 알려 준 14 층
창고에서 음식을 꺼내 식사를 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음식이 계속 나오나 했더니, 그 출처가 바로 여기였나 보다. 커다란 창고가
전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노아는 가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렇겠지.”
평소에는 잘 참았는데 계속 쌓이고 쌓이던 것들이 폭발하려고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지겨웠다. 도대체
노아는 왜 나를 필요로 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기에?
“좀…….”
그렇게 말하는 나도 며칠 전까지는 손에 환영이 보인다는 이유로 노아를 억지로 옆에 두려고 했었다. 그에
노아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 반응하기는 했었지만.
“누나가 내 세상이잖아.”
“…….”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축축해 보였다. 노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본다.
지금까지 쭉 악몽에 시달리다가 노아가 나타나면 환영이 사라지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그냥 노아를 보면
환영이 사라지는 줄 알고 있었는데.
-58-
“환영 때문이야?”
하지만 나를 괴롭히던 노아를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환영이 사라졌다. 붉게 물들었던 손바닥은 이제 새하얀
색을 되찾았다.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노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노아가 머무는 방은 커다란 창문이 있어
밤마다 달빛이 쏟아졌다.
커다란 창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정말 어두웠고, 달빛은 노아의 등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노아가 몇 살이더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오래전이었다는 사실만은 떠올릴 수
있었다.
정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장미꽃들이 왜인지 광적으로 느껴졌다. 그 의미를 모를 때에는 예쁘게만
느껴졌었는데.
“그렇구나.”
“본론이나 말해.”
“뭐? 그게 뭔 소리야?”
아니, 일어났다는 것까지는 좀 과장이고. 몸을 크게 뒤트는 바람에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네 세상이라며.”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노아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억울해서, 그리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었구나, 하고
화가 나서.
***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가슴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을 밖으로 뱉어냈다. 그동안의 그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은 것처럼 무감각했고 덤덤했다. 아리안을 만난 후로 조금 변하긴 했지만.
아리안이 자리를 비운 그날, 스텔라는 숨도 쉬지 않고 노아를 몰아붙였다.
왜인지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스텔라가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서 나오는
눈물인가?
그게 아니었다.
다행히 스텔라의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건 피했지만,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빠르게 뛰어서 노아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했다.
전부터 스텔라는 쭉 그에게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러니 구원 따위를 바라지 말라고 말해 왔었다. 그가
듣지 않았을 뿐.
스텔라,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노아의 신이기 때문에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선의로 쓰러져 죽어가던 어린아이를 구해 준
것뿐이었다.
얼마나 많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되뇌었던가. 어리석어서,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범위 안에서의 말일
뿐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찾으려고 하지 말걸. 차라리 그녀를 애타게 찾던 알베르트를 방해할걸. 만약 그랬다면
스텔라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해지지 않았을까.
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마주 보며 앉았다. 그녀에게 하려고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등으로 달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를 장미꽃과 겹쳐 보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스텔라는 입술을 살짝 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노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스텔라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59-
“할아범!”
“나간다, 나가!”
노인이 아리안의 발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으나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그 공격을 피했다.
“어딜 들어와!”
노인은 한참 아리안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지팡이를 내렸다. 물론 아리안은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멀쩡하게 노인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
“할아범?”
“뭐? 능력?”
하지만 벨라프는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눈을 지그시 감고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지금까지 고생 좀 했겠군그래.”
“했지. 엄청 많이.”
“않다만?”
“나처럼 되겠지.”
벨라프는 르비아를 자유롭게 만들어 줬다며 기뻐하면서도 마법을 잃었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머저리.”
마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만나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가 마법을 잃었다는 사실은 아리안에게도
절망적이었다.
“아리안?”
르비아가 벨라프보다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르비아를 다시 만났을 때, 아리안은 벨라프가 새로운 여자를
만난 것이라고 착각했다.
저렇게 밝은 사람이었나. 르비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때면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리안은
달라진 르비아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르비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리안이 벨라프보다 서럽게 울었을 정도이니, 그만큼 아리안의 르비아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건…….”
물론 힘겨울 것이다. 힘겹다뿐이겠는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고 불편할 테다.
“이건 내 속죄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기는, 말 그대로지.”
“어떻게 생긴 건데?”
그때 아리안이 딱, 하는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벨라프가
뒤지던 책장을 훑고 지나갔다.
“부럽지 할아범?”
“여기 있군.”
“고생깨나 하겠군.”
-60-
“뭐?! 빨리 안 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안녕 할아…… 아니 벨라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었어.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자고.”
“이 할아범이 끝까지…….”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재미있기는 했다. 르비아도 같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리안은 잠시 텅 비어 있는 벨라프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괜한 걱정하지 마라. 네놈하고 어울려 지냈던 탓인지 죽고 싶어도 장수하고 있으니까. 정말 저주가 옮은
모양이로군.”
***
걱정하는 대상이 아리안인 만큼, 무슨 큰일을 당했을 거라는 걱정만큼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돌아오지 않으니 큰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나 노아에게는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노아의 그 말이 그의 진심임을 깨달았다.
어떤 층에는 이상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어떤 층에는 사나운 마물이 갇혀 있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도서관은 8 층에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는 기쁨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도서관은 어려운 제목의 마법책들로만 가득했다. 심지어 어떤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언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아리안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일기장을
펼쳐 봐도 되는 걸까.
날짜는…… 고작 70 년 전의 일기였다.
70 년을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아리안이 살아온 긴 세월에 비하면 ‘고작’이 맞았다.
나는 수백 년 전의 일기를 기대했는데 70 년 전이라니.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녀석이었는데. 도대체 사랑이 뭐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왜.]
벨라프? 벨라프라면 일기장 속의 아리안이 가장 자주 놀리던 상대였다. 가장 친한 사람 같았는데 그
사람이 마법을 잃은 걸까.
르비아? 처음 보는 이름이 나왔다. 앞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확실히 처음 나오는
이름이었다.
나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부를 이름도 없으니 이참에 이름이나 붙여 줄까. 머리카락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니까 이름은…….]
그다음부터는 일기장이 찢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찢어진 건가 싶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찢은
흔적이 보였다.
유일하게 찢어지지 않은 페이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문장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때, 갑자기 책장들이 사람의 신음 같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61-
“무슨…….”
쿵, 쿵. 계속해서 책장이 쓰러지며 나를 쫓아왔다. 젠장, 아리안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한 게 아니라 저 책들이 갑자기 나를 죽이려고 쫓아왔다고 하면 믿어 줄까?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책장을 피해 도서관 밖으로 몸을 날렸다. 넘어지는 바람에 계단에 무릎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 계단에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데, 등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도서관에서 아리안의 일기장을 가져와 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가져다 놓기는 무서운데.
아리안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게다가 창고의 음식도 그대로였다. 내가 가져가는 음식을 제외하면 창고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도 벌써 사흘 정도가 흘렀다. 그런데 음식이 줄어들지 않았다니.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경 쓰지 말자고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나는 결국 빵이 담긴
그릇을 들고 노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어…….”
마탑은 인적이 드문, 아니, 주변에 사람이 아예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무리
뛰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손바닥에 담기지 못하고 넘쳐서 바닥에 흘렀다. 옆에서 물을 기르던 여인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아리안이 도박으로 떼돈을 벌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돈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목걸이에서 나왔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다음은? 왜 갑자기 목걸이에서 빛이 나오는 거지?
하지만 지금 그런 걸 판단할 정도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면 무작정 탑에서 뛰쳐나오지도 않았겠지.
설마 그새 정이 들기라도 한 건가?
……아,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 나는 머리를 털어내고 생각을 비웠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자.
-62-
“……음.”
“스텔라?”
한 번.
“스텔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스텔라는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잠깐 외출한 건가? 필요한 게 있어서
마을에 갔나?
이게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스텔라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녀석이 그녀가 외출하는 데 따라가지 않을 리가
없으니.
아리안은 삐딱하게 앉아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밤이 깊었음에도 여전히 스텔라와 노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뭐야.”
***
나는 곧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곧바로 빛을 따라 길을 나선 것을 후회했다. 밤길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험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널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강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좁은 폭이 나올 수도
있고, 그곳에는 강을 건널 만한 다리가 있을 수도 있다.
“…….”
***
사람의 움직임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다. 그들을 자세히 보려면 인상을 찌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들이 백색의 갑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색의 갑주. 테오필이 항상
착용하고 있던 갑주와 같은 색이었다.
마탑과 신전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말이야? 나는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지?
사실 마탑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는 마탑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최대한 한눈팔지 않고 빛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간간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탐스러워 보이는 열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허기가 찾아왔다. 이제는 붉은빛보다 나무에
매달린 과일에 더 신경이 쏠렸다.
그들은 어두운 숲속을 밝히기 위해 커다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빠르게 지나간 그것을
쫓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서 사람들이 전부 지나갈 때까지 수풀 뒤에서 나오지 못했다. 곧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지나갔나……? 나는 그제야 수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그것뿐만 아니라, 빛의 방향은 지금도 순간마다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살짝 위로 기울어졌다가 왼쪽으로
심하게 꺾이기도 하고, 아래로 쏠리기도 하고…….
-63-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을 따라잡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걸을수록 그들의 소리는 멀어졌다.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밟지 않도록 발아래를 주의하며 조금씩 속도를 가했다.
드디어 사람의 형체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나는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노아가 쫓기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용병들이 그렇게 우르르 쫓을
정도라면 비싼 보석을 훔치기라도 했으려나.
남자는 다시 한번 노아를 찌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번뜩이는 칼날은 노아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제대로 남자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남자는 욕설을 지껄이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고 했다.
나는 남자가 뒤돌아보기 전에 다시 한번 나무토막을 휘둘렀다. 이번 공격은 정확히 남자의 머리에 꽂혔다.
하지만 막상 나무를 휘두른 나는 테오필을 찔렀을 때보다 훨씬 무덤덤했다. 오히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보다 나무에 기대고 앉아 있는 노아가 훨씬 걱정스러웠다.
“노아.”
“…….”
나는 이 상황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뭇잎 같은 것들에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이번에는 정말 짐승인가?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우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기사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표정, 옷차림 하나하나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저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남색 제복, 그리고 가슴에 황금색 실로 바느질되어 있는 독수리 자수.
자세히 보니 기사들 사이사이에 용병들이 섞여 있었다. 이제야 왜 노아가 용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리안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 성기사들이 몇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의 행방을
물어봤자 ‘갑자기 사라졌다’ 혹은 ‘마법사의 장난이다’ 따위의 두루뭉술한 말밖에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코르넬.”
“…….”
음. 생각해 보니 그거 꽤 좋은 것 같은데.
모니카 공작의 충실한 사냥개라느니 뭐라느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건 소설의 표면적인 서술일 뿐이었다.
-64-
나는 코르넬에 대한 소설의 서술을 한순간 의심했다. 공작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학살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들.
저렇게 멍청하고 순진한 사람이 사람을 학살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서술이 전부 실제이기
때문에 알베르트의 기사로서 일하고 있는 거겠지만.
“단장님……?”
코르넬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기사가 재촉하듯 코르넬을 불렀다. 코르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
“……합니다.”
“단장님?”
“미안, 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코르넬보다 순진하다고 해서 공작의 사냥개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우리를 붙잡았다.
“윽.”
기사들에게 강하게 붙잡힌 팔이 아팠다. 의식이 없는 노아조차 무의식 속에서도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코르넬은 곧바로 노아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망설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예……?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사는 곧 신속하게 노아를 포박하고 짐마차에 물건을 던지듯 태웠다.
“콜록.”
노아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나왔다. 칼에 찔린 부상자를 거세게 포박하고 아무렇게나 짐마차에 던져 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코르넬은 나를 포박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나무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마차에 갇혔다.
덜컹. 문이 닫히고 밖에서 문을 굳게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무에 몸을
부딪쳐 보기도 했다.
기사들이 노아의 상처를 치료해 줬을까? 짐마차에라도 태운 걸 봐서는 죽이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다가 문득 아리안이 처음에 노아와 나를 마탑에 데려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몽마의 검 때문이었다.
***
마차의 문이 굳게 닫혔다고 해서 밖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기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애초에 마탑을 나올 때부터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기는 했지만,
노아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겠다, 정도의 간단한 설계는 존재했다.
이러다가는 끝없이 누군가를 탓하고만 있을 것 같아서 이 상황의 원인을 밝혀내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공작저까지 남은 거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가볍게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크 소리를 듣고 헛웃음을 뱉었다.
“안 됩니다.”
“어차피 노아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어요. 걘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요.
정신도 못 차리는 거 봤잖아요?”
망설이고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부디 내 추측이 옳았기를 빌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노아의 상처를
살필 시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간절하게 애원했다.
“잠깐만 보내 줘요. 이렇게 애원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65-
나는 마차에서 내려 곧장 짐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숲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어느새 모이기라도 했는지,
아까보다 병력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노아.”
고개를 들 기력조차 없어 보이기는 했으나 의식을 차린 상태이기는 했다. 상처가 보이는 것만큼 깊지는
않았는지 어느새 피가 멎어 있었다.
“포박을 푸는 건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왠지 그런 말을 할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아리안이 우리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대로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노아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마탑에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마차. 마차의 바퀴가 굴러갈 때 생기는 자국이었다. 적당히 두꺼우며 적당히 가느다란 바퀴의 자국.
이런 울창한 숲에서 굳이 걸리적거리게 마차를 사용하는 미친놈들이 있나.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순간 행동을 멈췄다.
스텔라가 자란 수도원은 트리센 마을에 있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녀를 국경 지대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스텔라도 그랬어야 했다. 그녀도 어렸을 때부터 자란 트리센 마을에서 평생 살다가 그곳에서 눈을
감았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스텔라는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신전까지 왔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왜 성기사
단장에게 그런 짓을 당했으며 왜 국경 지대에서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리안은 곧바로 트리센 마을로 방향을 바꿨다. 마침 마차의 바퀴 자국도 트리센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스텔라가 자란 마을. 그리고 아마도 꽤 최근까지도 그녀가 머물렀을 마을. 그러나 아마도 의도치 않게
떠나야 했을 그 마을.
***
또한 마차가 멈출 때마다 코르넬은 내게 먹으라며 수프를 건넸는데, 수프는 기사들이 식재료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끓이기만 한 건지 맛은 굉장히 형편없었다.
나는 코르넬이 음식을 가져다 줬으니 그렇다 쳐도 노아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함께
데려가라고 명령을 내렸던 코르넬마저도 노아를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코르넬이 준 수프를 대신 노아에게 먹였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서 그런지 노아는 그 역겨운
걸 잘도 받아먹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릴까 고민했으나 곧 포기했다. 이마에 올리는 조그마한 물수건 따위로
해결될 만한 열이 아니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66-
코르넬이 말하는 그 목을 날리는 상대는 아마 알베르트일 것이다. 공작의 사냥개니 뭐니 칭호는 성대해도
알베르트가 코르넬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쉬십시오.”
괜찮은 거 맞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의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고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돼도 이상하게 곧 알베르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곧
아리안이 와서 멋지게 우리를 구해 줄 거라는 기대에 차 있는 건가?
게다가 마차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기사들이 목적지에 도착해 하나둘 말에서 내리는 중인지, 주변이
점점 시끄러워졌다.
그때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코르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착했습니다.”
“…….”
다행히 빛은 바로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노아가 아래층에 있다는 뜻이었다. 끔찍한 비명 따위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문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후에 노아가 암흑가의 주인이란 걸 알았을 때에야 그가 보석을 암흑가에 두고 왔거나 암흑가의 은밀한
보석상 같은 곳에 팔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는 다시 보석을 진열장에 올려놨다. 하지만 팔을 거둬들이며 소매가 보석에 부딪힌 탓에, 보석이
진열장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아, 망했다.
감겨 있던 알베르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나를 향했다.
“스텔라, 당신…….”
“…….”
-67-
“…….”
“…….”
“…….”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같은 자세로 동상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알베르트에 대해 모르던 예전의 나였다면 이 화사한 미소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마에서 알베르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옷으로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코르넬.”
“쉬십시오.”
알베르트의 말대로 방안에는 하녀들이 몇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인사하며
나를 극진히 대우했다.
***
째깍, 째깍. 시계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며 조용한 방 안을 소리로 채웠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계와 문을 번갈아 봤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할까? 그러면 알베르트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렸다. 그것으로 보아, 문을 두드린 상대는 알베르트가
분명했다.
물론 나는 와인을 단 한 모금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와인에 이상한 약이라도 탔을지 모르는 일이다.
알베르트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
정말, 이제 이런 인질극은 지겨울 정도다. 그래, 항상 똑같은 패턴이 지겹다. 하지만 아무리 지겨워도
노아에 관련된 일인 이상 쉽사리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당신은 지금 그토록 아끼는 동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겁니까?”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는…… 데요.”
“놈이 당신에게 저지른 짓을 아는데도 여전히 그가 소중합니까? 믿음에 배신을 당해 놓고서는,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노아를 용서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노아가 죽기 직전까지만 죽도록 패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용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용서 타령이야.
“저를 멍청이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알겠지만, 믿었던 동생한테 발등을 찍히고도 바보처럼 허허 웃으며
넘어갈 생각은 아니에요.”
“…….”
“……제 옆에서.”
-68-
“전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으라고 강요한 건 노아가 아니라 저예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걸요.”
이렇게 멍청하고 충성심만 가득한, 아무것도 모르는 개처럼 행동할 거였으면 나한테 사소한 자비는 왜
베풀었는지.
“…….”
“……?”
이런. 알베르트가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할 테다.
그리고 하나 더.
“그렇습니까.”
“…….”
“놈과 잤습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아닌데요.”
“…….”
목덜미 주변을 쓰다듬던 알베르트의 손이 밀가루를 반죽하듯 내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알베르트의
눈은 이미 완전히 풀려 버린 후였다.
또 나는 이렇게 고통받다가 테오필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알베르트를 죽이기로 마음먹나? 그렇게
내가 상처를 입혀 놓으면 노아든 누구든 와서 나 대신 그들을 끝장낼까?
하지만 의자가 휘청거리는 걸 눈치챈 알베르트가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 의자가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했다.
“…….”
“못 본 사이에 대담해지셨군요.”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죽을 생각도 해 봤는데, 알베르트 혀를 깨문 대가로 죽는 것 정도야 뭐.
-69-
살아남기야 할 것이다. 알베르트가 나를 용서한다면. 알베르트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 웃기기는
했지만 하여튼.
“칭찬으로 들을게요.”
알베르트가 악마처럼 웃었다. 그래, 악마. 매혹적이나 동시에 추악하고 달콤하나 동시에 끔찍했다. 그런
미소였다.
“내 손가락 하나와 놈의 목숨을 뒤바꾸겠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물컹하고 축축한 혀가 입안에 들어왔다. 깨물어 버리려고 생각하다가도 알베르트가 협박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
아주 조금이지만 노아, 그놈에게 감사한 마음도, 불쾌한 마음도 들었다. 놈이 없었다면 스텔라가 지금
이곳에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감사한 마음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불쾌한 쪽이 훨씬 더 크기는 했다. 도대체 그놈이 뭐라고
스텔라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것도 놈이 저지른 짓에 대하여 전부 알고도. 정말 도대체 그놈이 뭐라고
놈의 이름을 들먹이면 스텔라가 모든 걸 내려놓지.
그들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수년 전 수도원 기도실에서의 협박이었다. 협박으로 시작된 관계는 협박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의 다리를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반투명한 잠옷 너머로 스텔라의 새하얀 피부가
선명하게 보였다.
알베르트는 상체를 숙여 스텔라와 몸을 겹쳤다. 서로의 배가 맞닿은 기분이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알베르트는 그저 그 온기가 좋았다.
알베르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아래를 비집고 들어갔다. 자신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물고 있는 것만
같다고, 알베르트는 생각했다.
“스텔라.”
“…….”
“대답해요, 스텔라.”
그는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맞추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굵은 물건이 꽉 막힌 입구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와인을 마구 들이켠 탓에 시야가 명확하지 않아서
스텔라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뭐, 대충 얼굴을 찡그리고 있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스텔라는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마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나.
***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희미해졌다. 아래에서는 알베르트의 물건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바닥은 딱딱했고 등은 차가웠다. 바닥에 러그라도 깔려 있었으면 좀 더 나았을 텐데…….
-70-
“이 저택 감옥.”
내가 뻔뻔하게 대답하자 하녀가 안 된다고 기겁을 하며 나를 끌어당겼다. 감옥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래 봤자 감옥 곳곳에 기사들이 깔려 있을 텐데.
이전에 모니카 저택에서 머무를 때 이곳의 위치를 외워 뒀었다. 나는 기억을 천천히 더듬으며 감옥을 찾아
헤맸다.
“아.”
“코르넬.”
“당신이 왜 여기까지…….”
“안 됩니다.”
“코르넬.”
“…….”
“코르넬.”
“…….”
“…….”
적당히 들여보내 준다면 노아와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코르넬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오기가 생겼다.
제발. 그놈의 제발. 코르넬은 제발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나서야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러나저러나 코르넬은 뛰어난 기사였다. 그만큼 그는 청각도 발달해 있을
것이다. 코르넬이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피어올랐으나 곧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안 됩니다.”
“네?”
“그럼 어디에…….”
나는 목걸이를 찾기 위해 얼른 품 안을 뒤졌다.
알베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목걸이 줄을 끊었고…… 그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분명 목걸이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던 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만약 하녀가 이미 방을 치웠으면 어떡하지? 그러게 방을 나오기 전에 바닥을 좀 쳐다볼걸. 바닥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지 좀 볼걸.
“저기…….”
나는 하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서랍을 쳐다봤다. 바닥과 그사이에 조그만 틈도 없는, 아주 무거워
보이는 서랍이었다.
“아. 고마워.”
이래서 아까는 빛이 보이지 않았던 거구나. 노아가 내가 머무르고 있는 층보다 더 아래에 있기 때문에.
밖에도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많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에 공작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알베르트와 내가 맺은 관계가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횡적인 관계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알베르트와 나의 관계를 아는 것도 코르넬을 포함하여 모니카 공작가의 기사 중 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감옥……
감옥인가. 아니, 감옥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역겨운 살냄새가 풍겼다.
그래, 고문실. 고문실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맞겠다. 그리고 고문실의 한가운데에는 노아가 묶여 있었다.
이럴 거면 치료는 왜 해 줬던 건가 싶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하마터면 이런 때에 구역질을 할
뻔했다.
71-
“이거, 아직 쓸 수 있는 거 맞지?”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번처럼 또다시 옷을 찢어 노아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리고
최대한 상처가 있는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아가 정말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완전히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를 찾은 이상, 그리고 그가 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금 당장 나가는 것이 이익이었다.
그게 아니면 기척을 느꼈음에도 노아가 빠져나왔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보지 않고 있거나. 기사들은
기척에 예민하니 이쪽이 더 현실성 있게 들렸다.
“숨, 참아.”
숲으로 가자, 노아. 숲으로 가서 숨으면 알베르트가 우리를 찾기 힘들어질 거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노아는 내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왔다. 벌어진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도.
후문으로 빠져나올 때 언뜻 알베르트의 얼굴을 봤던 것 같기도 했다. 제발 내가 정문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여기기를.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살면서 이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비가 왔었던 걸까. 땅은 물을 머금은 것처럼 질척거렸다. 발을 휘감는 징그러운 감각에도 우리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먹구름이 보였다.
나는 노아를 물건처럼 끌어당기며 발이 움직이는 대로 도망쳤다. 커다란 나무가 나오면 방향을 틀었고
바위가 나오면 바위 위로 넘어 도망쳤다.
그리고 마침내 숲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아래에 강물이 흐르는 높은 절벽에 다다랐다. 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스텔라.”
두꺼우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미성이 들려왔다.
지금은 오로지 알베르트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부 알베르트에게 달려
있었다.
알베르트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얼른 노아를 끌어당겨 노아를 내 뒤에 숨겼다.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스텔라. 오히려 저놈이 살아 있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도망칠 겁니다.”
“…….”
“…….”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알베르트의 저 사나운 표정을 보아하니, 노아는 분명 죽을 테고…… 나는 어떻게 될까. 죽을까. 아니면
노아가 죽는 광경을 지켜본 채 살아남을까.
너는 끝까지 네가 이기적이었던 순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네 과거의 행동이 나도 내 마음대로
이기적이게 너를 내 옆에 둘 이유가 될 테니까.
-72-
“노아.”
“여기까지 와서 노아를 저버릴 거였다면 애초에 노아를 데리고 저택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
역시나 향은 효과가 좋았다. 다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베르트는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뒤에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 봤자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알베르트는 끝까지 내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의 뒤로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이 모시는 이가 갑자기 가파른 절벽 끝에서
향에 취해 쓰러져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눈물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노아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마저도 또렷하게 보였다.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도 아직 강물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강물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위에 부딪히기 직전에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노아도 알베르트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
“스텔, 라…….”
“아리안…….”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아리안이 나를 찾으러 와 줄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마탑을 떠난
지 몇 주나 지났었으니까.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아, 아리안…….”
“……그래, 스텔라.”
“……그리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에 있는 건 너무 싫고, 끔찍하고…… 알베르트, 그러니까 공작이
있는 이곳이 너무 싫어서…….”
나는 소매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어느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 돼 버리긴
했지만.
아리안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돌아가자 스텔라.”
-73-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어쨌든 도서관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건 나였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
“……미안해요, 아리안.”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충분히 알겠으니까. 책들이 너한테 심술이 났었나 보지.”
책들이 심술이 났다는 특이한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 끄덕였다. 아리안은 원래 특이한
사람이니까.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눈빛으로 노아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도 충분히 네 존재가 스텔라의 인생에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
아리안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말리지 않았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괜찮겠지. 아리안 성격에
때리면 때렸지 팔다리를 잘라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리안이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가는 모습까지만 보고 위층으로 올라간지라 그 후에 노아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리안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처음 본 것이라 궁금증이 일기는 했으나 굳이
아리안의 허락 없이 열어 볼 정도는 아니었다.
“…….”
아리안은 몸이 뻐근한지 몇 번이고 허리를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이틀이나 잤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아리안이 자고 일어났을 때 나한테 줄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그렇지.”
“어디 보자.”
아리안은 바닥을 두드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커다란 원을 몇 개 그리더니 그
안에 이상한 문자도 몇 개 적어넣었다.
“그게 뭐예요?”
“마법진.”
“네, 뭐…….”
아리안은 마법을 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아리안이 사라진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방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창문은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며 그 아래에는 노아가
누워 있다.
쭉 아리안이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더니 벌써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창문을 통해
붉은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리안의 그 급한 일이라는 건 마법진을 그리는 일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리안이 어딘가로 사라진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돌아왔다.
-74-
“아. 금방 왔네요, 아리안.”
“먼지가 묻었어요.”
“아, 그거……. 마법진을 발동시킬 때 필요한 재료가 부족해서 좀 구하러 갔다 왔어. 험한 산에서만 나는
재료라.”
어느 날 모니카 공작가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에게 습격을 받았고, 공작은 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저, 근데 아리안.”
“응?”
“…….”
“싱겁기는.”
“……?”
그때 별안간 아리안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얼굴빛을 보니 피곤한 것 같았다. 이틀을 내리 자고도
피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요?”
정말로, 정말로 아리안의 말대로 향이 사라진 걸까. 그럼 이전처럼 고생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나는 다리를 모으고 그 안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아리안이나 노아가 깨어나면 물어볼 수밖에 없지.
책에는 몽마에 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인간을 유혹해 정기를 야금야금 빼먹는 악마라는
기본적인 정보부터, 몽마들의 자세한 습성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몽마의 검]
***
“……일어났어?”
“…….”
“어떻게 알았어?”
“그렇구나.”
“거기에 네 소중한 사람도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았어?”
“……그래.”
“노아.”
-75-
“너…….”
너 아직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마 이런 간질거리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탓에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곧 비가 올 것임을
보여주는 바람이었다.
몸이 약해져 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추운 곳에 더 있다가는 노아가 감기로 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들어가자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노아를 내려보내기 위해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먼저 내려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노아?”
“좋아해.”
“……싫어하지는 않아.”
잠에서 깨어난 아리안은 손봐야 할 곳이 있다며 마탑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나
아리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침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때부터 마탑을 돌아다니던 아리안은 점심이 되어서야 꼭대기 층으로 돌아왔다.
“으으, 스텔라. 배고프지 않아?”
아리안은 평소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계단을 오르내리며 손수 음식을 날랐다. 마탑에 돌아온 후
아리안은 어쩐지 전과 달라졌다.
포크로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찍을 때마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 밖의
다른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아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리안다운 미소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저런 자애롭고 포근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오늘따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자기 떠나는 건
어떻냐는 말부터, 지켜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아침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아리안이 그렇다면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래.”
***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니,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기보다는 애초에 챙길 게 별로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살로스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한 단검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단검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것도 가방에 챙겼다.
-76-
“아, 네.”
손을 잡자마자 한순간에 마을로 이동했던 지난번과 달리 아리안은 우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바닥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축제를 즐겼던 마을의 으슥한 뒷골목에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안은 능숙하게 우리를 데리고 사람이 많은 큰길로 데려갔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마차를
잡았다.
“짐은 뒤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많지 않은 짐을 마차에 싣는 사이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리안.”
“그래, 스텔라.”
“우리 또 만날 수 있겠죠?”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잠시만.”
하지만 곧 아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노아가 그녀에게 속삭인 내용을 전부 나불나불 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노아의 표정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 그래. 노아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왠지 실망스러웠다.
말을 유감스럽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아는 무감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게다가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다니. 그 무엇보다도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는
게 놀라웠다.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의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
마탑을 떠나기 전 노아와 나는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마탑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일단 우리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알베르트를 만났던 그 나라를 다시 방문할 생각도, 여행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대신 아르엘
왕국의 옆에 위치한 마르주 왕국을 목적지로 택했다.
“방 두 개 주세요.”
나는 은화 두 개를 여관 주인 앞에 내밀며 말했다.
“아니, 방 한 개만 주세요.”
달리는 마차 안에서 가방을 흔들어 봤었지만 딱딱한 물체들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나는 여관의 방에 들어와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가방을 열어 볼 수 있었다.
***
사람들의 발음이나 억양이 제국과 다르기는 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더 빨리 익숙해졌다.
마르주 왕국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마르주 왕국의 길거리를 거닐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어느 마법사에 의해 모니카 공작가가 풍비박산이 됐었다는 소식이었다.
-77-
모니카 공작가의 기사 몰살 사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도 결국 이곳은 마르주 왕국이었다.
제국에서 일어난 일을 마르주 왕국에서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죽었을까. 후계자가
없었을 텐데 그럼 모니카 공작가는 이대로 멸문하는 건가.
***
돈을 아껴야 한다며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는 내내 옆에서 귀찮게 군 노아 때문에 결국 여관 방은 하나만
잡게 됐다.
밤이 되면 나는 침대에 눕고 노아는 소파에 눕는다. 그러나 도중에 불편해 잠에서 깨어나면 노아는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노아.”
“…….”
“노아.”
“…….”
“……야.”
“…….”
“…….”
“노아.”
“…….”
“노아!”
“너 안 자고 있었지.”
“너 안 자고 있었지.”
“응.”
마르주 왕국에 도착한 뒤 몇 번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번 마을은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며 방문한 네 번째
마을이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우리의 계획은 여행이었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짧게 여러 곳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유명한 거리가 하나 있었다. 베이커 거리. 빵을 맛있게 굽기로 유명한
여행지였다. 베이커 거리가 얼마나 유명하냐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센 마을에서도 베이커 거리의
명성을 들어 봤을 정도였다.
이어지는 잔소리에도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더 자.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아를 뒤로하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베이커 거리는 여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주절주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공을 주워들었다. 아이는 시선을 공에 집중시킨
채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소설 속에서 알베르트가 특히나 더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천사의
그것을 닮은 백색이었기 때문에.
“저기, 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신경 하나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그런지, 아이는 나를
돌아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78-
“미셸. 미셸이에요.”
“……누나는요?”
“스텔라야.”
미셸은 입안에 내 이름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발음해 봤다. 마르주 왕국 특유의 높낮이가 적은 억양으로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속닥속닥 비밀을 말하듯 제 친구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셸은 나를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미셸.”
***
주저앉아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미셸이 공을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던 카른이 돌아온 제 친구를 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미셸! 저기서 도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네가 올 때까지 놀지도 못하고 한참을
기다렸잖아.”
“갑자기 저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래. 그리고 애초에 공을 이상한 데에 찬 건 너잖아.”
아는 사람이냐고? 미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카른과 말다툼을
하는 사이 이미 그녀는 너무 멀리 가 버려 점만큼 작아져 있었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른이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미셸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
어느새 다음 마을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전에 베이커 거리에서 만났던 미셸이라는 아이가 자꾸 떠오르기는
했지만 미셸에 대한 생각을 꾹 누르고 마차에 올라탔다.
“어떻게 하실는지요?”
그리고 나는 이다음 마차비까지 합한 가격을 마부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부는 활짝 웃으며 밝은 얼굴로
답했다.
우리는 사토르 마을에 도착해 소개받은 여관을 찾아갔다. 마부의 이름을 대니 여관 주인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줬다.
그뿐인가. 여관 주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제국의 것임을 눈치채고 기꺼이 마르주 왕국의 옷을 한
벌씩 기부해 줬다.
남성의 바지도 제국의 것보다 기장이 조금 짧았다. 제국의 바지가 발목을 전부 덮는 것이 특징이었다면
마르주 왕국의 바지는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았다.
“이제 갈까.”
어느새 해가 지고 축제가 시작될 시간이 됐다. 벌써부터 마을에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켜지고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아는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가 어색한지 광장으로 향하던 도중에 이따금 멈춰 서서 맨땅에 발을 굴렀다.
나는 노아의 손을 잡아끌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음식 냄새를 풍기는
가게들과 사람들이 늘어났다.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데.”
“잠시만, 나는…….”
노아가 뭐라고 따지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얼른 노아를
데리고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청객이 달갑지 않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은 방긋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고는 함께 빙글빙글 춤을 췄다.
그녀는 노아와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노아의 시선은 쭉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음에도 노아 쪽에 쓰이는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딱딱한 얼굴로 삐거덕거리며 흥겨운 춤을 추는 모습이 웃겼으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몸이 왜 그렇게 딱딱한 통나무 같냐며 놀렸을 순간이었다.
-79-
“안녕, 노아.”
“좋아 보이더라.”
“…….”
“좋아해.”
“나도.”
“……뭐?”
“…….”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공간만큼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네가 매일 하는 말이잖아.”
“그건…….”
“……글쎄.”
“아니.”
나는 분수대를 응시하다가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주친 노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바다처럼, 깊고
깊은 심해처럼 공허한 눈동자가 조명을 받고 빛났다.
갑자기 대화를 하다 말고 노아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다가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노아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노아가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뻗어 그 남자를 가리키며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은 건 아니잖아.”
“그래.”
축제는 며칠씩이나 계속됐지만 우리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사토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노아가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며 방을 하나 더 잡은 뒤 종일 방에 박혀 있던 탓이었다.
***
“노아.”
쿵쿵. 나는 가볍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
“……너 뭐해?”
“조금 더워서.”
“출발해 주세요.”
그제야 노아가 짐칸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마차는 이미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마차를 멈춰 달라고 하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었다.
“…….”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뭐야.”
“어쨌든 내가 직접 온 거잖아.”
“확실히 대답해.”
노아는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반복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그가 원하는
확신을 선물했다.
시야에 노아의 얼굴이 가득 찼다. 마차 짐칸에서 이게 무슨. 싸구려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구식의
장면이었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完 /
-외전 1-
외전 1
아리안이 처음으로 세상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거스르고,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간 아주
오래전이었다.
아리안이 태어나고 그녀의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났다. 가르트, 네바에, 티타, 에슨.
아리안이 보기에 하나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동생들이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기는 건 첫째인 아리안과 둘째인 가르트의 몫이었다.
“에슨……?”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하더니, 혼자 집에 돌아간 건가? 아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집 쪽을 향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
“에, 에슨…….”
헉, 헉. 산꼭대기에 올라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숨이 찼다. 그럼에도 아리안은 뜀박질을 멈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리안은 눈을 감고 뛰었다. 발로 풀을 짓밟은 소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곤충이 우는 소리. 그리고…
… 어린아이가 훌쩍이는 소리.
“아, 안 돼. 에슨!”
설령 에슨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아리안이 그에게 닿는다고 해도 늑대를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에슨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을 뿐이지, 아리안도 손에 무기 하나 없는 열다섯 아이였다.
“흐, 흐으…….”
뭐지? 도대체 뭐지? 아리안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빛이
느껴졌고…… 그 앞에는 늑대가 머리가 터진 채로 죽어 있었다.
“흐으……. 흐, 흐윽…….”
에슨이 울지 않는다고 하여 늑대들이 그들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리안은 에슨을
달랬다.
에슨은 훌쩍이다가 잠들었다. 늑대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득한 순간에 잠이 들다니.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그때 아리안은 자신의 것을 제외한 다른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지만 동시에 무겁고, 빠르지만 동시에
묵직한.
맙소사. 희망이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이들을 물어뜯어 죽이기 위해 수많은 늑대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미세한 소리였으나 오감이 곤두선 아리안은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늑대들이 가득 숲에서 감히 방심하고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마을의 울타리는 굳게 닫혀 있었으나 단순히 늑대들의 침입을 막는 용도의 것이었기 때문에 아리안이 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안! 에슨!”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들의 부모가 울먹이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아리안은 제 부모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부모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이 티가 나는 진한
흙냄새.
아리안은 어떻게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늑대를 만났고 에슨은 늑대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그런데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늑대가 죽어 있었다고.
아리안이 어렸을 당시는 주신 렌다를 믿는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성력을 가진 이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능력을 사용하게 되다니.
“아리안, 진정하렴. 너는 에슨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네가 조심하기만 한다면 누군가를 해칠
일도 없을 거야. 너는 착한 아이니까…….”
그날 아리안은 동생들이 모두 잠든 어두운 방에서 훌쩍이며 부모와 약속을 했다. 절대 그 능력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기로.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되, 그 능력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지켜 주기로.
***
열다섯의 아리안이 얻은 능력은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통나무를 번쩍번쩍
들기도 했고 원하는 곳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물다섯 살 생일이 지날 때부터 점점 그 생각을 지워 갔다. 축복받은 능력? 아니,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저주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리안의 아버지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 후로는 나이순으로 가르트, 네바에,
티타가 떠났다. 모두 빵을 꼭꼭 씹어먹듯 오랜 시간 생을 즐기다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법을 사랑했다. 네바에의 생일이 되면 하늘에 불꽃을 터뜨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마법을 사랑했고, 태풍이 불어 나무가 밭에 쓰러지면 이를 해결하고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를 띄워 주는
마법을 사랑했다.
마법은 사랑했지만 마법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영원한 시간의 저주는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외전 2-
세지 않았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십 년 정도가 흘렀다. 아리안은 그동안 집에만 처박혀 마법뿐만
아니라 약초도 연구했다. 약초를 이리저리 섞어 만든 약물은 사람의 몸에 효과가 좋았다.
아리안은 아이들과 마주치면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했다. 아주 오래전, 숲에서 뛰놀던 티타와
에슨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리안을 만났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제 부모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다. 숲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신기하게 생긴 풀을 캐고 있더라.
아리안을 본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아리안이 아이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편하게 대하던 탓이었다.
그들은 우물가에 모여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고, 밭을
갈다가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아무도 아리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아리안은 위아래로 아이들을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온몸에 흥건하게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리안의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가장 큰 아이는 자신도 어린 주제에
더 어린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리안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 치료할 때는 그녀가 약초를
연구하다가 만든 약을 사용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한 일들이었다. 아리안은 한동안 전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에비타의 얼굴만 쳐다봤다.
아리안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처음으로 마녀사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가 바깥에 관심이 없던
십 년 동안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전염병은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걸 가지고 사람을 마녀로 몰아가다니. 아리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다시 시간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아리안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추운 겨울이 몇 번이나
지나가고 또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녀가 어린 마녀들을 불러왔다. 자신들이 이 마을을 지배하려는 거야, 저들은 우리를 전부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야!
특히 카를은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이 도망치는 걸 보고는 마녀의 자식들은 똑같이 마녀라며, 마녀들을
놓치지 말고 전부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푸핫.”
카를이 더럽다며 기겁을 하자 에비타는 카를을 마구 때리며 꺽꺽 웃었다. 웃으면서 옆 사람을 때리는
에비타의 버릇을 아주 잘 알고 있던 안젤라는 이미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
본인들이 덤덤하게 말하는데 상황을 진중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아리안은 그냥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아리안.”
아리안은 멍하니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을 지켜보다가 빙긋 웃었다.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로
새로운 가족을 얻은 기분이었다.
***
소란스러운 마을과 달리 하늘은 잔잔했다. 바람은 불고 구름은 여유롭게 푸르른 하늘을 쓸고 지나간다.
하늘을 가득히 메우는 태양은 적당히 눈부셨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 어두컴컴한 한밤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오르는 분노만큼
뜨거운 횃불을 들었다. 병을 퍼뜨린 괘씸한 마녀를 불태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외전 3-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염병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던 두려움을 지워 버렸으며 근본 없는 용기를 불러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들이, 아리안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전부 불타고 있다. 에비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마력석을 찾기 위해 품 안을 뒤졌다. 어서 아리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마력석을 주면서 급할 때 이것을 깨뜨리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신호가
올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아, 아리안…….”
그녀를 발견한 카를이 울먹이며 아리안을 불렀다. 그에게는 평상시의 활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공포에
질려 기가 죽은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아리안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떠올린 기억들은 전부
에슨이 살아 있던 적의 일이었다.
“……아.”
“왜…….”
기억이란 아주 약한 것이라서, 기억을 보관하던 매개체가 사라지면 그 기억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 쉽다.
“…….”
“…….”
가장 서러운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액자에 그려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겨우 유지하던 희미한 기억마저 이제 지워져 버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리안을 보고 잠시 주춤했던 이들이 아리안이 눈물을 흘리자 다시 용기를 얻었다.
“……아.”
아리안은 귀가 찢어질 듯이 울부짖는 에비타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야
어깨의 고통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순간순간이 비현실적이었다. 자신만 제외하고 전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절대 그녀의 시간이 빠르게 흐를 리는 없을 텐데도.
무엇보다 공포에 질려 흐느끼고 있는 아이들이 가장 안쓰러웠다. 마녀로 몰리던 마을에서 도망쳐 이곳까지
온 아이들에게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아리안은 온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눈길로 마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죽이러 온 악랄한 마녀인가 보지.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됐어요. 이 능력을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고,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그 약속 지키지 못했네요.
“아리안…….”
“……에비타.”
아리안은 침묵했다. 에비타는 불안한 강아지처럼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집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그녀가 자신들을 버릴까 봐 불안한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아리안…….”
아리안은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마을에 정착했다. 새롭게 도착한 마을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여기는 평화롭네.”
제 딴에는 아리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안은 청력이 좋았다.
아리안은 에비타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그들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다.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이 성장할 동안
아리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그들은 아리안의 가족과도 같았다. 그녀의 가족도 늙지 않던 자신들의
딸을, 언니를, 누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었다. 그녀의 시간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도.
하지만 단순히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저주로 인해 얻게 된 힘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달랐다.
자신이 그들을 도왔던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웠다. 심지어
자신은 전염병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그녀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다. 마법을 연구하느라, 죽기 위해서, 이처럼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은 또 그들을 마녀로 몰아 공격할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만든 추억이 또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니까.”
“언니. 그런 말은 좀…….”
“왜, 사실이잖아.”
에비타가 안젤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아, 그건.”
“…….”
“왜 죄책감을 갖는 거예요?”
에비타의 말이 머리를 쿵 울리는 듯했다. 그야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을 죽였다.
그야말로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었다.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야.”
“그럼 저희는 마녀가 맞나 보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뭘 하든 뭐라고 하든 사람들은 우리를 마녀로
생각할 텐데.”
아리안은 자신만을 마녀라고 칭했다. 그리고 에비타는 자신과 에비타, 카를까지 전부 포함해 마녀라고
칭했다. 뭐, 애초에 마녀는 사람들의 공포가 형상화된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기는 했으나.
갑자기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리안은 놀라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투명한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리안은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젖은 손등을 응시했다.
에비타는 으이구, 따위의 소리를 내며 아리안을 끌어안았고 안젤라는 말없이 아리안을 끌어안았다.
카를은 셋의 눈치를 보다가 에잇, 하며 팔을 넓게 벌려 셋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만약 아리안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칭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죄인의 죄를 감싸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흔쾌히 죄인을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자처했을 것이다.
결국 아리안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리안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음에 제각각으로 기뻐했다.
에비타는 방긋 웃었고 안젤라는 희미하게 웃었으며 카를은 바보처럼 웃었다.
“아리안, 당신은 이곳에서 저희와 행복했나요?” 아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즐기는 것보다 다 함께 에비타와 카를이 잘못 만든 빵을 먹어치우는 게 더 즐거웠다고. 네가
나를 걱정해 만든 약물을 받았을 때는 금은보화를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노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제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람으로 치유가 가능함을 알게 됐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유롭게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안젤라가
말한 것처럼,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 날, 아리안은 마을에서 인기가 많다는 한 청년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다. 청년은 아리안이
약초를 캐는 숲까지 찾아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
“아.”
오, 렐라.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상점가를 거니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사랑해요, 렐라.
“네? 나이요?”
“그래.”
맙소사! 아리안은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다. 스물한 살이라고?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거의 방금 전에 갓
태어난 수준이었다.
-외전 5-
“안 돼.”
“나이 차이요?”
“아리안.”
이런 일이나,
“우연히? 이곳은 숲으로 연결된 길이라 늑대가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데. 그런
길을 우연히 걷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애초에 아리안은 약초를 캘 때 항상 늑대를 쫓는 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늑대가 갑자기
그들을 덮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해가 지나가고. 하루는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홀로 묵묵히 약초를 캐며 알마스를 떠올렸다. 알마스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리안이 답을 하지 않아도 계속 말을 걸었었다.
그래, 그렇겠지. 어차피 계속 받아 주지 않으면 결국은 포기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 다 그렇지
뭐. 변덕스러운 게 사람이지, 변덕스러워야 사람이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
마침내 아리안은 약초를 캐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곧바로 마을로 내려왔다. 둔감한 마을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아리안은 보고도 살갑게
반겨 줬다.
“왜, 무슨 일인데?”
“……알마스?”
아리안은 조용히 알마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새삼 아리안은 자신이 알마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안……?”
“알마스.”
“여기는…… 어떻게.”
평범한 감기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감기라고 해도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치명적인
병으로 취급되기는 했지만.
이후 기력을 조금 회복한 알마스가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는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멍청한 놈.”
그녀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전 네바에와 함께 봤던 연극보다도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특별하지도 않은 게 사랑이지, 어떻게…….
“잠시 먼 곳에 갔다 올 거야.”
“먼 곳이라는 게……?”
알마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리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껏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
“그러게.”
“곧 눈이 오려나 봐요.”
아리안은 웬만하면 알마스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알마스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아리안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를 괴물, 혹은 마녀라고 생각할까 봐.
그리고 다행히 알마스는 병을 앓았을 당시 아리안이 마법을 사용해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리안은 알마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돌아섰다. 알마스는 시야에서 아리안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먼 곳에? 짐 하나 안 챙기고?”
먼 곳이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아리안은 의문스러운 표정의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걸었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한참 걷다 보니 들으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정복왕 아이벡. 하나 그 별칭은 풍족하게 생활하는 귀족들이 만들어 붙인 거짓이었다. 실상은 세금으로
왕국민들을 박해하는 폭군일 뿐이었으니.
이 정도면 됐나. 아리안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나는 잘 살고 있어.”
-외전 6-
천천히 그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눈보다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늘 들리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리안은 차라리 그가 눈 위에 오래 누워 있어서 몸이 차가워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가 살던 마을을 포함한 근방의 마을들은 왕이 제시한 세금에 불만이 많았다. 개중에 글을 아는 영리한
이들은 영주들에게 불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영주들에게 도착한 편지의 내용은 순화되어 왕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하지만 순화를 해 봤자 결론은 왕의
뜻에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뿐.
……아니,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비밀을 밝혔을지라도 바보같이 착한 알마스는 자신 때문에
아리안이 곤경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을 테니까.
도대체 사람은 왜 변하지를 않는지. 하여간 이기적인 족속들. 남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지.
아리안은 알마스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슬픔의 무게는 모두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알마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미안, 정말 미안해. 너희들을 떠나보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슬퍼.
아리안은 곧장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궁이 얼마나
호화롭던지.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본 아리안의
눈동자가 점점 더 차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왕궁의 경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공간을 찢고 이동할 수 있는 이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아리안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아이벡을 찾아냈다.
렌다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신에게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고, 신께서
그 힘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존재했다.
성력은 마법처럼 여러 분야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물건을 옮긴다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등 간단한 일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숨이 끊어져도 심장의 울림이 멎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항상 멀쩡하게 의식을 차렸다. 숨이
끊어지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들마저 완벽하게 아문 채로.
그녀의 인생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 아끼는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을 잃고 혼자가 되어
마법을 연구하다가 다시 그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과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비슷한 것을 넘어 거의 동일했다.
아리안은 과거에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의 시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시간의 저주라고
불렀었다.
“……나쁘지 않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알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리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알마스를 닮은 인형을 쳐다봤다.
***
노크 소리가 탑 전체에 울려? 이럴 수가 있나? 아리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불쾌함과
노크 소리를 이 넓은 탑 전체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는 데에 기묘함을 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맞으시죠? 저는 헬렌이라고 하고요, 마법사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괜찮으시면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엄청나게 마법을 잘 다루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소녀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분명 탑을 쌓은 이후로는 사람들과 교류한 적이 없는데 내 소문을 어떻게 들었다는 거지. 아리안은 눈앞의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혼자 연습도 했어요! 가벼운 물건을 옮기는 거랑, 그리고 또…… 아! 방금처럼 소리를 넓게
울리게 할 수도 있어요!”
아리안은 헬렌의 그 쓸데없는 마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성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처럼,
자신과 같이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나타난 모양이라고.
“그래서?”
“그래, 그렇구나.”
“아악! 잠시만요!”
-외전 7-
헬렌의 마법은 아리안에 비하면 정말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런 헬렌이 제아무리 문을 열려고 끙끙거려
봤자 아리안이 진심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쉽게 문을 닫을 수 있었겠지만 아리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사람치고는 뻔뻔한 행동과 말투였다. 아리안은 모질게 대답했다.
“하나도 안 불쌍해.”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한 아리안을 보며, 헬렌은 바보같이 헤헤, 하고 헤프게 웃었다. 그 웃음은 아리안
그녀가 오래전 반했던 미소와 닮아 있었다.
헬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리안이 구석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빗자루가 지능을 가진 생명체처럼 스스로 지저분한 곳을 찾아다니며 청소했다.
“어…… 음…….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스스로 청소하는 빗자루를 보고 자신의 쓸모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헬렌은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아.”
***
헬렌은 마탑에 들어온 후 보통 아리안의 연구를 돕거나 옆에서 연구를 지켜보며 연구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헬렌이 열여덟 살이 됐을 때는 스스로 그녀 자신만의 마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헬렌을 받아들인 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녀의 탑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대부분은 헬렌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다수는 아리안을 찾아와 제발 받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집에서 쫓겨났다는 핑계를 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핑계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헬렌을 돌아보면 그녀는 언제나 억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너희 집이냐? 내가 너희 보모야? 내가 왜 연구할 시간도 모자란데 너희를 키우고 있어야 해?”
아리안이 헬렌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듯이 그녀에게 돌진하자 헬렌은 그 상황마저 즐거운지 얼굴에는
미소를 띄운 채 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리안은 평생을 마법과 함께했고, 그녀에게 내려진 시간의 저주는
증오스러웠으나 그녀에게 주어진 마법은 사랑했다.
그래서 아리안은 그들을 더욱 사랑할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떠나갈 날을
걱정했다. 물론 영원의 시간을 사는 아리안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과 달리 오랜 시간 알마스를 그리워했던 이유는 그와의 마지막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결말이 비극인 연극은 특히나 관객들에게 여운을 더 오래 남기는 법이었다.
“…….”
완전히 포기하니 차라리 마음이 더 편했다. 아리안은 인형을 폐기한 후 이전보다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처음으로 아리안을 찾아왔던 헬렌이 떠나고, 함께하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끝내러
떠나도 계속해서 새로운 마법사들이 마탑을 찾아왔다. 계속되는 연구로 마탑의 불은 꺼질 날이 없었다.
“나갑니다, 나가.”
하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마법으로 장난을 쳤나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한참
아래에 위치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안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상냥한 르비아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마법사들에게는 광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었다. 이는 곧 마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아, 그렇군. 저놈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 아니라 사랑인 거였어. 아리안은 온화하게 웃으며 편지를 쓰는
벨라프를 향해 눈을 흘겼다.
-외전 8-
“그걸 보고 있었어?”
“……그래.”
벨라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당신이 그녀에 대해 무얼 알아 그렇게 말하냐고 길길이
날뛸 녀석이 웬일이람.
“르비아요.”
“누구긴요. 그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아리안이죠.”
“카일.”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메릴의 목소리를 듣고 카일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메릴이 계략을 꾸미는 참모처럼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 위에는 카일이 평소에 예뻐하던 흰색의 토끼가 올려져 있었다. 이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결국 카일은 땅이 꺼질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벨라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카일은 아리안과 메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날아오는 물건에 얻어맞으며 도망쳐 나왔다.
“실연의 슬픔이 큰가 보지, 뭐. 하기야 애초에 저 더러운 성격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어.”
***
아리안의 물음에 책상에 엎드려서 자던 카일이 부스스 침을 흘리며 일어났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에서 안 나왔어요.”
“여, 열게요.”
“하나, 둘, 셋 하면 열어.”
“으……, 네.”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아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카일은 문고리와 연결된 마력의 흐름을 뒤틀어 문을
열었다. 끼이,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낡은 나무문이 열렸다.
“……없는데요?”
“뭐?”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메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죽어? 벨라프가 죽어? 아리안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며 경악을 했다.
“……아리안.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감지가 안 돼요. 벨라프 정도의 마력이면 이렇게
감지가 안 될 리가 없는데……. 진짜 어디 가서 죽은 건 아닐지…….”
“……아리안.”
“아리안, 나…….”
“마법이, 마법이…….”
“…….”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한참을 말없이 벨라프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아리안이 마침내 힘겹게 짧은
문장을 뱉었다.
아리안은 지금껏 르비아에게서 미세하게 풍기던 향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다른 세계? 우리가 사는 곳 말고도 새로운 세상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아리안은 알마스에 대한 기억을 부정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를 잊고 벨라프를 쏘아붙였다.
“멍청한 새끼.”
“…….”
-외전 9-
“…….”
차라리 찾지 말걸 그랬나. 아니, 그랬더라면 죽은 줄로만 알았겠지. 아마 그쪽이 더 슬펐을 테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이별이 항상 더 슬픈 법이니.
카일은 그녀의 명령 같은 지시에도 큰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벨라프는 마법을 잃었기
때문에 마탑까지 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벨라프?”
“걸어 올라왔다고?”
“메릴?”
질문에 묘하게 가시가 돋아 있었다. 과연 저 질문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가? 카일이 보기에는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메릴, 그만해.”
“…….”
그는 떠나기 직전 마법사들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무뚝뚝한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리안.”
***
“다른 세계라니. 벨라프가 마탑에서 내쫓기는 걸 보지 않았더라면 허황된 이야기라고 믿었을 거예요.”
“내쫓기다니.”
“아리안한테 내쫓긴 거 맞지 않아요?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놈인데 스스로 마탑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리는 없고.”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자신은 벨라프가 마법보다 사랑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메릴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
“뭐?”
메릴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긋 웃었다. 그녀가 마탑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으로 보는 메릴의 미소였다.
***
메릴의 연구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그녀의 연구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아리안은 카일을 데리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망할 마법사 놈들이 마탑주 말도 안 듣는다고,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카일은 그냥 희생양일 뿐이었다.
물론 아리안이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팔에 이마를 얻어맞은 후에는 자연히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벌건 얼굴을 하고는 아리안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야.”
“말씀하세요.”
“넌 왜 메릴이랑 같이 연구 안 했냐.”
“그냥…… 뭔가 찜찜해서요.”
“찜찜해? 뭐가.”
아리안은 카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벨라프를 쫓아낸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이 착한 놈이라도 자신의 멱살을 잡을 게 분명했다.
주제를 돌려야 할 것 같은데. 카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몸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 도박판이었다.
아리안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먼지 낀 금화 다섯 닢을 꺼냈다. 메릴이 꼴 보기 싫어 마탑에서 뛰쳐나올 때
마탑 여기저기를 탈탈 털어 찾았던 것이었다.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아리안을 쭉 주시하던 카일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리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비틀거리며 도박판으로 걸어가면서도 얼마나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을 하던지. 카일은 멍하니 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길 수밖에 없다니.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이제 슬슬 들어가야죠.”
“제발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머릿속에서 검토를 거치고 뱉으란
말이에요.”
“충분히 검토했어.”
“…….”
“…….”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메릴이 그 연구를 끝낼 때까지? 아니면 메릴이 늙어서 그 연구를 중단해야 할
때까지.”
“머리 울린다. 시끄러워.”
“…….”
“……?”
-외전 10-
“……벨라프.”
“벨라프가 왜요.”
“……쫓.”
“……아냈어. 내가…….”
카일은 아리안의 입에서 나온 문장들을 더듬더듬 이어 붙였다. 그녀가 한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어
본 그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아무리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왔다고 해도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때 인생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애가 마법을 더 이상 못 쓰게 돼서 축 처져 있었는데,
불쌍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카일이 갑자기 꿱 소리를 지르자 아리안은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얌전하던 애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런대.
아무리 상대의 잘못된 행동을 거론하며 잘잘못을 따져도 상대가 듣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법이었다.
카일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를 보며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마법은 벨라프를 찾을 때만은 항상 말썽이었다.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던 그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응.”
아리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마탑의 다락방으로 이동했다. 아래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카일도 도착한 듯했다.
아리안은 메릴이 다른 세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자신의 방을 다락방으로 옮겼다. 메릴과 그 동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몸에 두르고 있던 낡은 망토를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서
잠들지도 못 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카일 이 망할 놈.”
그놈의 벨라프, 벨라프. 카일 그놈은 성질도 더러운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꾸 벨라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럴 거면 벨라프가 떠날 때 붙잡았어야지.
“안 되겠다, 카일.”
하하. 카일은 아리안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멍청하게 웃었다. 그러나 카일이 얼른 가서 자라며 손을
흔들어도 아리안은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딱 한 사람 있나. 메릴. 아리안이 반대했어도 메릴은 연구를 진행했으니까. 카일은 궁싯거리며
몸에 망토를 둘렀다.
“일주일간은 마탑으로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쉴 생각도, 잠잘 생각도 하지 말고.”
“…….”
그녀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아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카일의 뒷목을 쥐고 그를 잡아끌었다.
그 후로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 일주일도 가뿐히 지나갔다. 그들이 마탑을 떠나온 지 거의 이
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들은 드디어 벨라프가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오두막을 찾아냈다.
“도대체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 지금 나가요.”
문 너머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본 사이에 벨라프가 성격을 고쳤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벨라프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아리안과 여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르비아요.”
아리안은 성큼성큼 다가가 르비아를 살폈다. 눈앞의 여자가 르비아가 맞는지. 과연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이 집에 벨라프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카일이 벨라프를 향해 돌진하자 그는 옆으로 피하며 카일의 포옹을 피했다. 그럼에도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프를 쫓았고, 결국 그를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벨라프! 나 카일이야.”
아리안은 작은 오두막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창문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왔고 침대에서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아리안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웃긴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르비아는 그냥 그녀를
따라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앉아 분위기만 살피던 카일이 아리안의 팔을 툭툭 치며 속삭였다.
“아.”
“아…… 니. 그래도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충분할 수도 있지.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외전 11-
“카일. 입을 좀 다물 수는 없니?”
카일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 아리안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쥐어박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일이길래.”
아리안이 눈을 굴려 르비아를 쳐다봤다. 메릴이 르비아를 보고서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글쎄, 르비아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리안은 얼른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연구에 진전이 없어서 답답하다면서 책상을 때려 부쉈던 일, 카일이 노트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카일이
작성했던 연구 일지들을 전부 불태워 버린 일…… 또 뭐가 있더라. 아리안이 손가락을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굴하지 않고 그 큰 몸을 구겨 르비아의 뒤쪽에 숨었다. 카일도 뒤늦게 아리안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 뒤로 숨었다.
아리안은 또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는 벨라프의 처절한 시도는
르비아의 거절에 가로막혔다.
“누가 너 보러 왔대?”
아리안이 보기에 르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막무가내로 연구를 진행하는 메릴에게
시달리던 차에 만난 것이 르비아였고, 이전에 벨라프를 통해 들었던 그녀의 과거사는 그녀에 대한 동정과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동생, 동생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오래전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외동이었으며 가족과는 연을
끊은 지 오래라고 했으니까.
메릴의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수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녀는 지난 몇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보다 좀
더 간사해 보인다고나 할까.
“…….”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저것에게도 아기는 귀엽게 보이나 보지. 아리안은 메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해
그렇게 결론지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아.”
알마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리안은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고
의식을 잃었다.
***
“……카일.”
“……메릴.”
“카일.”
“일어나 봐.”
“카일, 카일…….”
“…….”
“메릴.”
“…….”
“메릴.”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 또 나는 혼자 살아남았구나.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도, 이제는 몇 번이고
반복된 그 상황이 익숙해져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
-외전 12-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는 서로에게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폭발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붉은색의 빛이.
그것은 마치 아기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두운 붉은색의 빛. 이는 메릴이
사용하는 마법의 색이었다.
맙소사, 메릴. 어떻게 죽어서도 그리 추악할 수가. 아리안은 손을 가볍게 휘둘러 아기의 목을 조르던
힘을 쫓아내고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메릴의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마력들이 우는 아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리안은 벌레를 쫓듯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쫓았다.
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 아리안이 아기에게 달려드는 마력을 쫓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추악한
밑바닥을 보기 위해 마탑에 그들을 들여보냈었나. 아리안은 그나마 카일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음에
안도했다.
마력의 출처는 그들이 집필한 책들이 쌓여 있는 더미였다. 그들의 살아생전에 비하면 미약한 양이기는
했으나, 분명히 마력이 느껴졌다. 책들에 그들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아리안은 마력이 느껴지는 책들을 전부 모아 도서관에 차곡차곡 꽂았다. 그리고 마력이 도서관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방에 마법을 걸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다. 카일을 포함하여, 전부. 마탑에 남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리안과
아기, 이 둘이 전부였다.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전부 떠나보내야 했기에, 그녀에게는 감히 남에게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
***
어두운 새벽, 아리안이 도착한 곳은 마탑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에 위치한 고아원이었다. 시간이 늦은
탓에 건물은 사람 소리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아기와 바구니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텔라, 아리안이 유일하게 아기에게 준 것을 함께
담아.
그러다가 벨라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벨라프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한 깔끔한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꽤
비참했다.
아리안은 즉시 겉옷을 걸치고 마탑을 나섰다. 참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개인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날이 따스했다.
“장난친 거 아니었어.”
벨라프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판단한 후에야 아리안은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탑에 돌아온 후부터
더 이상 마탑에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받아 주고 정이 들어 봤자 언젠가 떠나갈
이들이었다. 찾아온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일이 반복되니 방문객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마탑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졌다. 한때는 사람들에게 마법사들이 악마들의 수하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다. 악마라고 부르기에 마법의 힘은 너무나도
유용했다. 왕국에 마법 왕국이라는 명예를 쥐여 줬던 마탑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
사실 여태껏 마탑의 도서관은 이름뿐인 장소였다. 도서관의 책은 점점 불어났으나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도서관을 어떻게 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연구를 통해 집필된 책은 후대를 위하여 도서관에 남겨졌다. 물론 마법사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구에 미쳐
있던 까닭에 선대가 남겨 준 책을 읽어 볼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녀가 몽마에 대한 책을 펼친 것은, 마탑에 남은 사람이 그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못 해 넘칠 지경이었다.
책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몽마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에 대한 진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별것 없는 내용들. 내용에 대한 흥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악마나 몽마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그것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들인지라,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간만에 영양가 있는 책을 발견했나 싶었더니,
이번에도 꽝이었다. 아리안은 거칠게 책을 덮었다.
그 후로 아리안은 간간이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죽은 마법사들의 마력이 담긴 책들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덜컹덜컹 움직였기에 도서관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줄어들었고, 대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다락방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이게 무슨.”
“…….”
-외전 13-
외전 2
“애니카. 너 출장이다.”
“……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뤄진 사랑이라니. 당시의 애니카는 그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연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친구를 만나고 싶어 공작저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이곳에 없다는 말만 돌아오기에 공작이 제
친구를 너무 사랑해 둘러댄 거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녀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잠시 마을을 떠난 것뿐이다.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 상단주님.”
“어서 가서 짐 싸지 않고 뭐 해?”
***
맙소사, 이제는 바다만 봐도 스텔라를 떠올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상사병이 아닐까.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웃었다.
웩. 애니카는 갑판에 걸터앉아 구역질을 했다. 맥클라우드 왕국의 항구가 멀지 않았으나 오랜 항해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종이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여자가 보여 준 애니카를 위해 준비된 집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기에, 애니카는 마을의 도시의 외곽에 있는 집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맥클라우드는 먼 나라였다. 비교적 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언어가 비슷한 아르엘 왕국과는 달리
맥클라우드의 언어는 제국과 정반대였다. 맥클라우드에 오기 전 이웃들과 말이 안 통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 걱정했던 시간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맥클라우드의 상단에 불려가 상단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고 상단주가 전하라고
지시를 내린 제국 상단 측의 의견을 전하고 제국과 맥클라우드 간의 무역로에 대한 회의를 하고 무역 상품
가격에 대해 협상을 한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일정이었다.
난관을 마주한 것은 집 문 앞에서였다. 열쇠가 가방에 들어 있는데 품에 가득한 사과들 때문에 열쇠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구니를 챙길걸.
긴 금발을 가진 이웃은 말없이 바닥의 사과를 함께 줍기 시작했다. 애니카는 묵묵히 사과를 주우며
맥클라우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루마스요, 루마스.”
“스텔라!”
“……애니카?”
금발에 붉은 눈. 그리고 익숙한 그 목소리. 그녀는 스텔라였다. 스텔라도 곧 그녀를 알아보고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으나 애니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서 누군가
스텔라를 따라 나왔다. 그 또한 익숙한 얼굴이라, 애니카는 바보같이 멍청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뭐야 노아 네가 여기 왜 있어!”
“……애니카?”
“칭찬으로 들을게.”
노아가 말 그대로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애니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와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예민이 극에 달했던 그때와는 달리 그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근데 너희 왜 같이 살고 있어?”
“아, 이건.”
“너희 혹시 결혼했니?”
“그럴 리가 없잖아.”
-외전 14-
“망상이라니.”
돌아오기만을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들을 맥클라우드에 와서야 만나게 되다니. 상단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니카는 상단주를 떠올리며 제국이 있는 방향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애니카는 그들과 헤어져 침대에 누운 후에도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이 꿈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볼을 꼬집어보았다. 다행히도 세게 비틀어 꼬집힌 볼은 아팠다.
***
처음에는 모니카 공작을 피해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스텔라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또 그럴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발음에도 마부는 허허 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애니카도 마부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눠 봤는데 오늘은 어떨까.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애니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스텔라?”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상단이 위치한 도시까지 그녀를 태우고 갈 마차가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가방에 사과를 쑤셔 넣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다행히 집에서 나왔을 때 아직 마차는 출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는 스텔라도 보였다.
대충 의미 정도는 전달이 되었기를 바라며 애니카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빠르게 달려
상단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옆에 앉아 있는 통역사에게도 위로의 눈빛을 던졌다.
애니카가 처리한 서류를 맥클라우드어로 번역하는 것은 아슈르의 일이었으니.
“…….”
“…….”
애니카가 조심스럽게 아슈르를 부르자 그녀가 뭐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소중한 휴식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빛은 어쩐지 매서워 보였다.
“왜 그러시나요?”
“……아.”
“아. 그런가요.”
“건국제요?”
애니카가 얼른 반색하며 물었다. 애니카의 과하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아슈르는
끝까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
“불꽃놀이?”
***
건국제 당일.
“누나, 같이 가.”
애니카는 꼬치를 입에 욱여넣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노아가 스텔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챙기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뭘까, 저 둘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둘의 관계는 너무도 오묘하게 변해
버렸다.
“내가 같이 가 줄까?”
애니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문이 뭐 별것이겠는가. 손짓 발짓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것을. 스텔라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애니카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괜찮다고 우기니
따라오지는 않았다.
“금방 올게!”
해맑게 외치며 가게로 들어갔으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섯 가지 사이즈로 물통들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애니카가 손짓 발짓에 최선을 다해 물을 사왔을 때 노아와 스텔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외전 15-
“……스텔라? 노아?”
애니카는 툴툴거리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어차피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일 것이고, 그중에는 스텔라와 노아도 있을 것이다.
“노아!”
“애니카 누나.”
“어디 있었어. 같이 불꽃놀이 못 보는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스텔라는? 스텔라는 어디 있어?”
“뭐라고?”
“잠깐만. 그럼 나도 같이 가.”
“…….”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불꽃놀이를 함께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렇게 걱정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집에서 침대에 누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데 모여 다 같이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애니카는 사람이 드문 언덕으로 향한 후 물통을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은 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며칠간 일하는 시간마저 즐겁게 느껴질 정도로 기대하던 날이었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아으…….”
“흐으…….”
분명 노아는 불꽃놀이가 시작하기도 전에 스텔라를 간호해야 한다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애니카는 노아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듣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갑자기 와서 스텔라가 아프다고
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게 감히 나를 속여? 애니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
“애니카!”
“애니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꿈인가 싶어 무시했으나, 그 누군가는 집요하게도 애니카가 일어날 때까지 문을
두드려 댔다. 애니카는 잠결에도 어렵지 않게 그 누군가가 스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니카! 애니카!”
“애니카!”
“애니카.”
“…….”
“애니카.”
“…….”
“애니카?”
“아, 응. 왜 그래?”
스텔라가 몇 번을 물어보든 애니카는 괜찮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아팠던 적이 없었으니.
스텔라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는 듯 위아래로 매섭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다행이네.”
애니카는 뒤늦게 자신들이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잡아당겨
활짝 열며 말했다.
“으응.”
“나 갈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동생은 은근히 걸리적거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과 스텔라 사이를
방해하려는 듯했다.
“…….”
-외전 16-
외전 3
“전하.”
“…….”
“……전하.”
“아. 코르넬.”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한때 누구보다 빛났었다. 젊은 나이에 공작위에 올라 얼마나
많은 눈길을 받았던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칭송했었다. 특히 수려한 얼굴은 사람들의 호감을
끌기에 최고의 무기였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여자마저도 그의 얼굴을 볼 때는 종종 멍청한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
첫 만남은 여느 인연들이 그렇듯이 우연이었다. 후원하던 수도원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기던 오묘하면서 기분 좋은 향을 따라가 봤더니 계단에 앉아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우연, 그놈의 우연. 모든 후회는 이름만 들어도 짜증나는 그 우연에서 시작됐다. 평생을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서 살아왔던 탓에, 모든 게 만만하게 느껴졌던 탓에. 우연과 인연, 감정에 운명까지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 죄였다. 향을 맡았던 즉시 그곳에서 도망칠걸.
알베르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연한 금발, 그리고 붉은 눈……. 또 무슨
특징이 있더라. 어떻게 생겼더라. 그렇게 사랑했었으면서,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의 삶도 망쳐 버렸으면서
이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알베르트는 낮게 웃었다.
아니,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자신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눈앞의 마법사에게 죽을 테니까.
“……뭐, 유언이라도 들어 줄까. 오늘이 지나면 어차피 잊어버릴 테지만. 들어 주기라도 한 테니.”
“후회…… 후회해.”
“후회?”
“그래, 후회…….”
“뭘 후회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게 끝이야?”
“…….”
알베르트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후회를 한다면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한 후회가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위한 후회일 테다.
“…….”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표정하던 마법사의 얼굴에 경멸이 담겼다. 알베르트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렇게 경멸할 만한 말을 했나. 그저, 유언을 들어 주겠다길래 마음에 담아 뒀던 말을 한
것뿐인데.
“그래……. 네바에랑 보러 갔었던 연극도 이랬었지. 악당 놈들은 절대로 후회도 속죄도 사과도 안
하는구나. 딱 연극에 나왔던 악당 수준이야. 그때는 멍청하고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배울 게 많았다니까.”
마법사의 손에는 어두운 색상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의 중앙에는 보라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신이 저책 홀에 전시해 뒀던 장식용 검처럼 보였으나 마법사는 실제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것이 검이 장식용이 아님을 증명했다.
“…….”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단검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갈랐다.
검이 가르고 지나간 부분에서 시작해 따듯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 따스한
액체가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핏자국만 남기고 날아갔던 코르넬의 머리통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눈을 번쩍 뜬 채 벽에 박혀 알베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아무리 봐도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의 기사들이 전부 도망갔을 때 그만이 끝까지 공작의 옆에 남았다. 몰락한 공작의 옆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외전 4
스테인 자작은 코르넬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알베르트가 자작에게 그렇게 하라 지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코르넬은 반항 않고 묵묵히 검술을 배웠다.
코르넬 그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공작과 자작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를 보아 공작이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스테인 자작. 그와는 수년간 함께했으나 이제는 헤어져야만 했다. 검술을 가르칠 때만큼은 엄격했으나
그래도 꽤 친절했던 자신의 스승.
“…….”
자작은 자신이 아니라 모니카 공작에게 친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코르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를 따라나섰다.
“…….”
“…….”
“아, 경. 왔는가.”
“…….”
“…….”
“……예, 전하.”
코르넬은 자신의 처지를 보며 낮게 웃었다. 자신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를 두려워하는
기사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
코르넬은 알베르트를 돌아보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알베르트의 금색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사나웠다.
기사는 심장에 검이 꽂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물론 진실이 어떠하든
코르넬 그에게도 알베르트에게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
그럴 때마다 코르넬은 스스로를 세뇌했다. 충성스러운 기사가 돼라. 전하께 충성을 바쳐. 그렇지 않으면
주인께서는 자신을 버리시리라. 괴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 이상하기도 하지. 사람들은 원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하고 스스로의 본질을 억지로 바꾸는
것을 충성을 바치는 것을 사냥개 같다고 부르나. 코르넬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외전 18-
“여자…… 말입니까?”
공작은 자신의 측근들을 제국 전역으로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전국을 뒤져도 알베르트가 말한 여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1 년이 지나고 2 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공작은 미쳐 갔다. 코르넬이 평소의
그는 미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리고 5 년이 지났을 때쯤, 드디어 코르넬은 여자를 찾아냈다. 옅은 금발에 붉은 장미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공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는 간간이 코르넬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여자는 안타깝게도 괴물에 눈에 띄어 버린 모양이었다. 가엾기도 하지.
공작은 이후 여자를 저택으로 데려왔다. 며칠간 그들을 지켜보며 코르넬은 그들의 관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은 수도에서 열리는 건국 기념제에 참석하러 저택을 나섰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며 몇 번이고 일렀다. 여자를 계속 감시하라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코르넬은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여자를
맡기고 수도로 올라갔다.
그런데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도중, 여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을이 그립다고,
매일 가던 거리들이 그립다며.
수년간 스스로를 세뇌해 공작 못지않은 괴물이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거리가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쳤다.
건국 기념제가 끝나고 저택에 돌아온 공작은 죽일 듯이 코르넬을 노려봤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죽으면
손해인 것은 공작 본인이었다. 말을 잘 듣는 개 한 마리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여자는 여럿의 손을 거쳐 갔다. 첫 번째는 공작이었고 그다음은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성기사단장이었다. 참 다양하기도 했다.
코르넬은 돕겠다는 명목으로 신전의 지하 감옥을 살폈다. 철창을 이리저리 살폈으나 안에서 따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죄수는 몸을 움직일 힘도 거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고 했으니 여자가 문을 열어 줬을 테다. 하지만 평범한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문을
딸 수가 있었을까. 성기사단장을 살해한 죄수, 그리고 성기사단장을 거슬린 돌 보듯 하던 교황.
“죄수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나지 뭡니까. 처음에는 마물인 줄 알았더니,
마법을 쓰더군요. 마탑은 수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전하, 제발.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번에는 분명 위험할 겁니다.
마법은 사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공작위의 권력으로 통제 가능했던 암흑가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코르넬.”
코르넬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들을 이끌고 마탑을 찾으러 출발했다. 언제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적이 있었나. 전부 개처럼 공작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
그러다가 숲에서 암흑가의 주인이었던 자를 발견했다.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던 그는 기사들을 발견하더니
인상을 찌푸리고는 도망쳤다.
***
보십시오, 전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법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듯싶더니 며칠 후 돌아와 공작가를 몰락시켰다. 사용인들은 도망치도록 내버려
뒀고 도망치지 않고 공작을 지키려고 하는 기사들은 전부 죽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대부분 공작을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 기사의 덕목이라던 충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은 공작을 버렸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원래 괴물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괴물에게 호의적이었던 세상이 이상한 거였다.
“…….”
“전하.”
“…….”
“…….”
“전하.”
“…….”
“……전하.”
“아. 코르넬.”
공작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법사가,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공작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코르넬도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코르넬을 곧 자신의 의식도 끊어질 것을 알았기에 최선을 다해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공포가 뭉쳐 만들어진 충성이 이렇게 끝이 났다. 코르넬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눈을 감았다.
-외전 19-
외전 5
“누나.”
“으응.”
“내 말 듣고 있어?”
“응, 으응.”
“…….”
“다시 한 번 말해 줘.”
“그렇구나.”
“……졸려.”
스텔라는 고개를 기울여 노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아는 그녀가 좀 더 편하게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살짝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하게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
“자?”
“얘가 또 왜 이래.”
“…….”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노아가 부담스러웠는지 스텔라는 평소와 달리 버벅거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시간이
배로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텔라는 남자가 설명을 끝내고 갈 때까지도 방긋방긋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남자가 가자마자 그녀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서 앞서갔다. 노아는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혹시 자신이 귀찮게 굴어서
화라도 난 것일까.
“……미안.”
“……남들한테 막 웃어 주지 마. 착각하잖아.”
“내가 언제 막 웃어 줬다고.”
“꼬맹이.”
“뭐라고?”
“빨리 안 오고 뭐 해?”
“……나도 알아.”
“알면서 왜 그래.”
“왜겠어, 당연히…….”
“미리엄 님!”
노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스텔라는 익숙한 언어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리엄 님! 여기 계셨습니까!”
“…….”
“미리엄 님!”
“…….”
“…….”
“…….”
주먹이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애써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자 스테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노아, 아는 사람이야?”
“…….”
“……미리엄 님. 이런 먼 곳까지 오셔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암흑가는 잊으셨습니까?”
“그야 그때는 주인님께서 암흑가에 계셨고,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태도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셔서 함께 암흑가 재건에 힘써 주신다면 그때와 같은 진중하고 과묵한 태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스테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가 줄곧 보고 싶어했던 공연의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테판이 애타게 노아에게 매달릴수록 스텔라의 인내시도 점점 바닥이 났다.
“……노아.”
“응, 누나.”
“응.”
“어디에. 암흑가에?”
“응.”
“저라고 다 버리고 도망친 미리엄 님이 어디가 예쁘다고 이러고 있겠습니까. 모니카 공작 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간부들은 다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저뿐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얼마 전에 모니카 공작가가
몰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잖습니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회는 무슨 기회. 노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스스로도
놀랐다. 스텔라가 했던 행동과 비슷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고 뻔뻔하다느니 뭐라느니 해도 결국을 자신도
닮아 가고 있었던 건지.
“……맞다.”
“정말 미치셨군요. 그때 미리엄 님께서 어떤 미친 짓까지 하셨는지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아직도
저분 옆에 뻔뻔하게 달라붙어 계시다니.”
“다녀왔어?”
“농담이지?”
“글쎄.”
-외전 20-
“도서관 좀.”
***
야심한 밤이었다. 노아는 스텔라가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은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를 놓았다가 괜히 심술이 나 다시 끌어안았다.
항상 스텔라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잤고, 노아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노아는
여느 때처럼 스텔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아. 이거 개 같다고 했었지. 그리고 뒤늦게 스텔라의 말이 떠올라 노아는 얼른 그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칭찬입니까?”
“칭찬이었군요.”
“그분은요? 외출하셨나요?”
“……그래.”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그러지 마시고 들어나 보시지요. 제가 마부로 위장하고 마차를 빠르게 몰고 가겠습니다.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를 피하면서 그분을 끌어안으시면 극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요?!”
“미친 거냐.”
“미쳤냐니, 너무하십니다.”
“예, 예. 그래야지요.”
“그런가?”
그때 옆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고, 노아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뺑…… 뭐?”
“아니.”
스텔라는 조심스럽게 노아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애로운 얼굴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
“……응.”
“……뭘.”
아. 노아는 그제야 스텔라의 그 표정이, 수도원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수녀들의 그것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
“……스테판이 계속 찾아와.”
“아, 그때 그 남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아는 스텔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스텔라였다.
“암흑가로 돌아가고 싶어?”
“아니.”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노아는 스텔라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스텔라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
“…….”
“……스테판.”
“……스테판.”
“어떻게 해야 좀 그만 찾아오겠나.”
“그 역할을 네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에이, 그럴 리가요!”
스테판은 미리 준비해 둔 증명서를 품에서 꺼냈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문서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될 것을 어떻게 알고 증명서를 준비해 온 걸까.
-외전 21-
외전 6
“으응…….”
“불편해서 잠 다 깼지?”
마침내 슬며시 눈을 뜬 노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뻐근한 몸을 풀었지만, 그녀의 발치에서 몸을 치우지는 않았다.
“안 불편해.”
스텔라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앚아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 순간, 노아가 번쩍 눈을 떴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고 어느새 노아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스텔라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어린 게 까불어.”
***
“누나?”
노아는 배신감에 물든 목소리로 스텔라를 부르며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들은 노아에게 놀이에 대해
설명해 주는 듯하더니, 냅다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노아는 초반에는 날래게 아이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공격이 계속 쏟아지자 곧 해탈한 듯 몸에 힘을 빼고 아이들에게 맞아 줬다. 그나저나 대체 저게 무슨
놀이람.
“……누나.”
“잘 됐네. 좋은 경험이었겠어.”
” 지금 나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
“그때는 좀 잘 피해 봐!”
“…….”
“……아.”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노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노아가 조그맣게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어’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필립.”
필립? 스텔라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머릿속에 넣고 굴리며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아, 필립.”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서 수녀에게 필립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적응을 못하길래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대답만 돌아왔었지.
지나서 생각해 보니 꽤 이상한 일이었다. 적응을 못했다니. 분명 애니카와 그녀는 필립과 꽤 재밌게
놀았던 것 같은데…….
“가자, 노아.”
노아는 앞서가는 스텔라의 뒷모습을 보며 희맑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미움을 사
수도원에서 쫓겨났던 소년은 스텔라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
“우리가 안 가 본 데가 있나?”
“어디에?”
***
“…….”
“누나? 왜 그래?”
“……방금.”
아리안 아니었나. 스텔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노인이 사라졌음에도 노인과 마주쳤던 그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