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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 도망치세요, 아가씨 - 오징어먹물잉크 [dd]

#판타지물 #서양풍 #연하남 #영혼체인지/빙의 #역하렘 #소유욕/독점욕/질투 #집착남 #존댓말남 #철벽녀


#피폐물 #고수위

※ 본 작품은 강압적인 관계를 포함하여 호불호가 나뉘거나 키워드 및 관련 내용으로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19 금 소설 속 엑스트라의 몸에 들어왔다.

어차피 주인공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인생, 수도원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원에서 남주를 만나서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와 함께 공작저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요, 제 목표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기인데요…….

하지만 그런 내 바람과는 달리 원작의 전개는 계속 바뀌어만 갔고, 그래서 나는 결국 내 조용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위해 전부 버리고 도망치기로 했다.

-1-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소설 속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열다섯 살 때쯤이었다.


열다섯 살의 어느 날, 수도원의 도서관을 뒤적이다가 붉은색 표지를 가진 책을 찾았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책이었기에 의문을 품고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나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이곳은 전생에 내가 읽었던 19 금 소설의 세상이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수도원은 남주가 후원하고


있는 마을 변방의 작은 수도원이자 고아원이었고.

소설의 내용을 전부 떠올리고 나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생의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남사스러운 소설을 읽은 거지?

소설의 전개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섹…… 아니, 성관계였다.

여주고 남주고 전부 변태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 성관계밖에 없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곧 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수도원은 원작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름 한 줄 적히지 않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나는 주인공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미쳐서 성관계만 맺더라도 내게 영향을
끼칠 일은 없다는 것이다.
?

휴, 다행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전생을 깨닫고 나서도 3 년 동안 소설에 대한 내용을 잊고 살 수


있었다.

***

그리고 3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수도원에 머무르는 고아로서 밥만 축내던 나는


열일곱 살에 성인식을 치른 후 수녀가 되었다.

뭐, 그래 봤자 아직 어린 수녀인지라 하는 일은 기도와 청소밖에 없었다.

?“스텔라, 기도실 청소 끝냈어?”

??“아니. 아직 뒤쪽을 못 쓸었어.”

그러자 애니카는 빗자루를 들고 와 함께 기도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를 향해 고마움을 담아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자 그녀는 질색을 하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애니카는 나와 같은 고아원 출신 수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서 그런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가족같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아, 그거 들었어? 오늘 수도원에 후원자가 온다고 하던데.”

?“후원자?”

내가 묻자 애니카는 지겨운 설명을 시작했다.

?“응. 모니카 공작님 있잖아. 5 년 전부터 우리 수도원에 후원해 주고 계신 분. 근데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뭐, 뭔데.”

??“그분 미모가 아주 그냥…….”

애니카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3 년 전에 되찾았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니카 공작, 그리고 후원.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알베르트 모니카였다. 그것은 즉, 오늘 방문할
손님은 변태기 충만한 남자 주인공이라는 뜻이었다.

?
어우. 내가 싫은 티를 내며 얼굴을 구기자 애니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활발하게 질문을 던졌다.

?“너 이제 오늘치 일 다 끝났지?”

??“어……. 아마도?”

??“내가 주방에 몰래 숨겨 둔 쿠키 있거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가지고 갈 테니까.”

쿠키? 나는 반색하며 애니카를 바라봤다. 그녀는 손님용 쿠키를 몇 개 빼돌렸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애니카가 주방으로 가는 사이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달콤한 쿠키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쯤에서 기다리면 되려나. 나는 수도원 건물과 정원을 잇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 날씨가 퍽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불편한 모자는 벗고 긴 금발을 쓸어내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이 거세게 흔들려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헉.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
저벅저벅.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정원을 가로질러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람이 완전히 멎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걸음 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백발의 미청년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실례지만 신부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제야 그 남자가 알베르트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여주와 이런저런 짓들을 하는 변태…….

알베르트를 수도원장에게 안내해 주다가 애니카와 엇갈리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했으나 손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모자에 욱여넣은 뒤 그를 수도원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신부실 앞에 서서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신부님, 모니카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어요.”


?

그러자 알베르트는 놀랐다는 듯 말을 걸었다.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 그…….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한마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장이 문을 열고 알베르트를 맞았다. 나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애니카가 말하기를 알베르트가 5 년 동안 수도원에 후원을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5 년 동안


후원을 하면서 신부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고?

나는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뭐, 기억력이 안 좋을 수도 있지.

등 뒤로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으나 알베르트는 이미 신부실로 들어간 후였다.

아, 애니카가 기다리겠다. 나는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
***

?“공작님을 봤다고?”

알베르트를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애니카는 입에 쿠키를 잔뜩 넣고 부럽다며 발을 굴렀다.

?“어땠어? 진짜 엄청 잘생기셨어?”

나는 쿠키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쿠키는 막상 먹어 보니 텁텁한 맛만 날 뿐,


그다지 달콤하지 않았다. 나는 물로 입을 헹궈 냈다.

?“아, 나도 봐 보고 싶다. 성격도 엄청 친절하시다던데.”

??“…….”

그래, 친절한 사람이기는 했다. 겉과 속이 다른 것만 빼면 말이지.


멍하니 애니카가 쿠키를 먹는 것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나이가 지긋한 수녀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스텔라. 신부님께서 널 찾으시더구나.”

??“엥? 저를요?”

??“글쎄. 자세한 건 신부님께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애니카에게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신부실로 향했다.

?“부르셨어요, 신부님?”

??“아, 스텔라. 왔구나.”

고아였던 나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 주신 분들이라 그런지 수녀님들과 신부님은 나와 대화할 때마다 편하게
말을 건넸다. 신부님이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부여잡으며 테이블로 향하는데, 테이블 건너편에 알베르트가 보였다. 헉.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의심 가득한 눈빛을 하며 의자에 앉자 당사자 대신 신부님이 알베르트를 내게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수도원에 후원을 해 주고 계신 모니카 공작님이란다.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스텔라입니다.”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인사했다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베르트를 힐끗


쳐다보자 그의 반짝이는 황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눈꼬리를 휘며 나른하게 웃었다.

갑자기 어딘가 싸한 미소를 마주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다름이 아니고, 네가 공작님께 수도원을 안내해 드리면 어떨까 싶어 불렀단다.”

예에? 나는 금방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왜, 왜 하필 저예요? 안내는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할 텐데요?”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스텔라 수녀님께서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가만히 있던 알베르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한테 안내를 부탁한다고? 무슨 속셈이지. 도저히
새까만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거부한다고 해서 공작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은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알베르트와 나를 신부실에서 내보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알베르트를 앞서갔다. 그가 구두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기도실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빌며 기도실 문을 열었다. 기도실 안에는 석재로 만들어진


성녀와 주신 렌다의 석상이 서 있었고, 그 앞으로 나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아침이 되면 이곳에서 모두 기도를…… 아윽!”

기도실에 대해 설명하다가 알베르트에게 붙잡힌 것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나를 벽에 몰아붙여서 몸이


세게 부딪혀서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알베르트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는 내 양팔을 세게 붙잡고 내 혀를


그의 혀로 옭아맸다.

한참 동안 계속된 행위에 숨이 차서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다시 내 턱을 붙잡고 그를 바라보게 했다. 맑게


빛나던 그의 황금안은 이제 욕망에 가득 차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내 양팔은 알베르트의 넥타이에 얽혀 뒤로 묶였다. 미, 미친. 이게 뭐야. 그는
나를 안아 들어 던지다시피 기도실의 중앙에 내려놓았다.

그가 창문의 커튼을 치고 문을 빗장으로 막는 것이 보였다. 이제 기도실을 밝히는 것은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빛뿐이었다.

빗장으로 문을 막은 알베르트가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으나 얼마 가지 못해 팔이 묶인 탓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고, 공작님.”

그는 답하지 않고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내 입술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에 젖어 있었다.

-2-

?“다, 다가오시면 소리지를 거예요.”

알베르트는 내 말을 무시하듯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허리를 낚아챈 후 그대로 나를 바닥에


눕혔다.
?“소리 지르고 싶으시면 지르셔도 괜찮습니다.”

??“네?”

??“주신 렌다와 성녀의 석상 앞에서 이토록 부적절한 관계라니.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한다면 신을 배반한
반역자라고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알베르트가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놈, 제대로 미친놈이다. 설마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여주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자겠어, 하고


생각했는데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짜증 나게도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기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면, 그와


나의 평판은 나락까지 떨어질 것이다.

알베르트는 누워 있는 내게 손을 뻗어 빠르게 옷을 벗겼다. 여러 겹의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자는 어느새 벗겨져 금발이 여기저기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소심하게 반항했으나 곧 그가 내 다리를 잡고 당기는 바람에 다시 그와 가까워지고


말았다.
알베르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

미친. 그의 물건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래가 미칠 듯이 아팠다. 설마 찢어진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내 몸을 덮쳤다.

아니, 애초에 저 커다란 게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게 불가능했다고. 제일 짜증 나는 건 이런 상황인데도


간질간질한 쾌락 때문에 기분이 좋다는 점이었다. 꾹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쉬잇, 착하지.”

알베르트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다가 갑자기 상체를


숙여 내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핥기 시작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놀라 몸을 떨자 알베르트가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수녀님, 그거 알아요? 수녀님 훌쩍거릴 때마다 아래가 조여요. 완전 기분 좋아.”

공작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불량한 남자들이 할 법한 말이나 뱉으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다.


내가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 사이로 그를 노려보자 그가 미소 지으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여전히 물건을 빼지 않은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알베르트가 붉은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짜증


나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알베르트의 얼굴은 잘 세공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니, 남주
버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알베르트는 그의 물건으로 가득 찬 내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저와 함께 공작저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가신다면, 수녀님을 위해 아름다운 보석을 세공하고


화려하게 정원을 꾸미겠습니다.”

?“흐, 읏.”

“그 누구보다 사랑해 드릴 자신도 물론 있습니다.”

필요 없다고 말하고 대화로 해결해 볼 생각으로 조금 엉덩이를 뒤로 뺐으나 그가 세게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오히려 그의 물건이 더 깊게 박혔다.
?“윽.”

나를 내려다보던 알베르트가 갑자기 능글맞게 웃더니 내 허벅지를 당겨 나를 그의 다리 위에 앉혔다.


물건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움직이자 그의 물건이 뿌리까지 내 안에 들어왔다. 내벽 깊은 곳까지
그의 물건이 들어왔다.

?“하윽!”

신음을 참기 위해 알베르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더니 그는 짓궂게 웃으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수녀님. 어, 때요? 성녀와 주신이, 윽, 보는 앞에서 섹스하, 는 기분이?”

그가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알베르트의 어깨너머로 성녀와 주신의


석상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수녀가 된 건 신앙 때문이 아니라 생계를 위함이었다고 해도, 이건 미친 짓이었다. 신성한


기도실에서 수도원 후원자와 섹스라니.

알베르트에 대한 분노를 가득 담아 그의 어깨를 깨물자 그는 오히려 즐거워하며 내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의 손에 이끌려 거의 정신을 잃을 때까지 시달렸다. 나는 몸에 힘이 빠져 거의 종이 인형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는 나를 놔 주지 않았다. 공작님, 혹시 에너자이저세요?

여러 번의 사정 후에야 그는 내 안에서 물건을 뺐다. 입구 사이로 그의 정액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제야 끝이구나.

나는 양팔이 묶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른 알베르트가 내 팔을 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알베르트가 내 한쪽 허벅지를 그의 어깨 위에 걸치더니 내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끄, 끝난 거 아니었어요?”

??“빼내야죠, 내 정액. 설마 안에 담고 있으려고 했어요?”

내가 입술을 꾹 깨물자 그가 그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신벌이, 흣, 두렵지도 않으, 세요?”

??“이미 지옥에 갈 정도로 죄를 많이 지어서 상관없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길래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봤다.


알베르트는 즐거운 표정으로 내 안에 들어 있는 정액을 긁어냈다. 그의 손가락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쾌락에 찬 신음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는 제 손을 흠뻑 적신 정액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손을 내
입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입안에 텁텁하고 비린 맛이 느껴지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알베르트의 손이 내 입안에


들어온 후였다.

?“수녀님, 핥아 주세요.”

알베르트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이 상태에서 혀를 움직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직접 손가락을 내 혀에 비비기 시작했다.

그의 정액이 내 입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는 금방 손을 뺐다.

하도 피곤해서 당장 방으로 뛰어가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고, 팔은 여전히 묶여 있었다.

알베르트는 내 팔을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내더니 그의 옷차림을 정돈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그는 미소 지으며 내 옷을 입혀 줬고, 천천히 나를 안아 들었다.
미친 거 아니야? 이 상태로 수도원을 돌아다니겠다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헉. 복도를 걷다가 마주친 수녀님이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저기,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태연하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텔라 수녀님께서 수도원 안내를 해 주시다가 다리를 접질리셨는데, 수녀님의 방이 어딘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어떡해요. 괜찮니, 스텔라? 여기서부턴 제가 부축할게요.”

??“아닙니다. 수녀님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요. 위치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결국 내 방의 위치가 알베르트에게 공개되고 말았다. 그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뭘 봐,


이 자식아. 내가 그를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내 방 침대에 나를 눕힌 그가 천천히 다가오길래 나는 설마 그가 여기서도 하려는 건가, 하고 불안에


떨었다. 내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수녀님.”


다행히 또 하려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나저나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그를 불렀다.

?“공작님.”

??“네, 스텔라 수녀님.”

??“공작님 완전 짜증 나는 거 알아요?”

그러자 알베르트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백합처럼


순수해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알베르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폭 덮으며 한탄했다. 갑자기 기도실에서 쾌락에
젖어 신음을 흘리던, 부끄러웠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젠장, 그런 잘생긴 얼굴 이런 데에 낭비하지
말라고요. 얼굴만 잘생기면 다냐.

***

알베르트가 돌아간 후 나는 비틀거리며 공용 욕실로 향했다. 혹시 사람이 있을까 살피며 조심히 목욕을
마쳤다. 몸에는 알베르트가 남긴 수많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있었다.

진짜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성직자와 관계를 맺을 수가 있지.


?“아윽…….”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이만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눕자 또다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찾아온 애니카가 다리가 많이 아프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입을 꾹 닫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아니라 허리가 아픈 거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래도 수도원 사람들은 전부 각방을 써서 다행이었다. 룸메이트라도 있었으면 지금 이 상황이 더욱


힘들었겠지.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자 어둠이 밀려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낮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오, 씨. 자꾸 알베르트의 밑에서 신음을 냈던 게 떠올라서 이불을 몇 번 발로 찼다. 그때는 대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거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잊자, 잊어. 앞으로 알베르트를 만날 일 없도록 조심하면
되니까.

?
낮에 알베르트에게 시달렸던 탓에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나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어라, 이상하다.

나는 분명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는데 왜인지 자꾸 아랫배가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어서 그런가. 자세를 바꾸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 순간,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깬 거야?”

동시에 꿀을 바른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 함께 들려왔다.

나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주변은 온통 암흑처럼 어두웠고, 누군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으, 윽, 아읏…….”

?
입에서 미칠 듯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굵은 물건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흐으, 아으……. 누, 누구세, 하으, 윽…….”

질문하려고 했으나 신음에 묻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기 위해 두 손으로
꾹 입을 눌렀지만 이내 상대가 내 두 손을 입에서 뜯어내어 양쪽으로 내리눌렀다.

다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상대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3-

알베르트와 했을 때는 쾌락도 꽤나 존재했지만 고통 또한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쾌락뿐이었다.

도대체 내 위에서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일단 알베르트의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그때, 남자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리 굴리지 마. 전부 티 나니까.”

주변이 전부 컴컴한데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붙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남자의 무지막지한 힘에 눌린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느낀 남자가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만 빨라졌을 뿐이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입술을 꾹 깨물어 신음을 참았다. 그러자 갑자기 입안에 남자의 물컹한
혀가 침입했다.

헉. 남자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야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가 숨이 차 헐떡이자 그제야 제 입을 떼


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수도원에서 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는지 확인해야겠다. 이쯤에 성냥이 있을 텐데…….

남자는 허릿짓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읏, 흣. 나는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성냥을 집었다.

하지만 남자에 비해 작은 이 몸뚱이가 자꾸 흔들리는 탓에 성냥에 불을 붙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그때, 남자가 내 작게 웃으며 야살스럽게 말했다.

?“수녀님, 성냥은 왜 들고 있는 거야? 내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더니 그는 내 손에서 성냥을 뺏은 후 스스로 성냥에 불을 붙였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어두운 은발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어두운


색의 뿔이 두 개 달려 있었다.

?“…….”

이건 꿈이다. 그래, 꿈이야.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려 있을 리가 없지. 다시 잠들자.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내 얼굴 보고 싶어 했잖아. 왜 안 봐?”

??“내 꿈에서 나가.”

내가 꿈속의 악마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성냥으로 옆에 놓인


촛대에 붙을 붙이며 말했다.

?“꿈인 거 어떻게 알았어? 보통 사람들은 못 알아차리던데.”


??“…….”

??“근데, 눈 떠 봐. 섹스는 계속해야 할 거 아냐.”

꿈은 보통 경험을 기준으로 두고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저런 요사스러운 말을 하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왜 저런 게 내 꿈에 나오는 거야.

?“눈 안 뜨면 내일 꿈속에도 찾아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바로 눈을 떴다. 그걸 보고는 남자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네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내가 짜게 식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살로스, 몽마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얘가 방금 몽마라고 자기소개한 거 맞지?

?“신과 성녀 앞에서 신나게 섹스를 하고 있더라. 재밌었어?”


?

정상적인 주제는 아니지만 일단 살로스라는 몽마는 내게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 대화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거야.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내 아래에 연결되어 있던 살로스의 물건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세게 물건을 내 아래에 박아 넣는 탓에 나는 앞으로 쓰러지며 그의 목에 매달리고 말았다.

?“아윽!”

??“어라, 수녀님 방금 나한테 안긴 거야?”

너한테 안긴 게 아니라 너 때문에 쓰러진 거잖아……! 화를 내려고 했으나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며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살로스는 빙긋 웃으며 흐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 상태로 허릿짓을 시작했다. 망할.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가 싶었더니 이놈도 알베르트 과인가 보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었다.

하긴, 몽마라는 존재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바라는 게 애초에 무리였을지도.

내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살로스의 목을 더욱 세게 끌어안자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쥐고


쳐올렸다. 허리를 감싼 옷 위로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쾌락에 가득 차 헐떡이며 살로스의 목을 안고 있는데 막상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오히려 야살스럽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신 앞에서 당당하게 섹스를 한 성직자는 수녀님이 처음이야. 신기하지?”

아니, 전혀 신기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당당하게 하지 않았다. 내가 손톱을 세워 살로스의 등을 긁으며


분노를 표하자 무엇이 웃긴지 그는 또다시 터트리며 말했다.

?“수녀님, 고양이 같다.”

그러더니 그는 축 늘어져 있던 내 팔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댄 후 가볍게 입 맞췄다. 분명 가벼운 입맞춤일


뿐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마저도 농밀하게 느껴졌다.

?“손끝이 분홍색이네. 진짜 고양이인가?”

그는 내 손끝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멋대로 꿈속에 들어와 놓고 이제는 동물 취급이라니.

그러면서도 그는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허릿짓을 하는 내내 신음 한 번 내지 않더니,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에야 조용히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아, 하응……! 응, 윽!”

몸이 거세게 뒤흔들리더니 따듯한 액체가 몸 안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의 존재를 알아채기도 전에


살로스는 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그의 물건은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수도원인데 어떻게 몽마가 찾아올 수 있는 거지. 악마나 몽마는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힘이 약한 하급 몽마들한테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대뜸 살로스가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뱉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내 눈가를 문지르며 이마에 입 맞췄다.

?“이 꿈은 내가 만든 공간인데 내가 수녀님 생각 하나 못 읽겠어?”

헉. 그럼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 들린다는 말인가. 괜히 소름이 돋았다.

?“더 하고 싶은데…… 곧 아침이 찾아와서 못하겠네. 아쉽다.”


??“…….”

??“그런 앙칼진 표정 짓지 마. 내일 또 찾아올 테니까.”

??“아니, 찾아오지 마.”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살로스가 눈꼬리를 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아래에 들어와 있던 그의 물건이


천천히 움직였다.

?“……읏.”

??“아까 좋아서 헐떡대던 사람이 누구더라.”

나는 입술을 깨물며 꾹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그는 장난이었다는 듯 내 볼을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수녀님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세 가지 있기는 해.”

??“뭐? 그게 어떤…….”

??“수녀님에 대한 내 흥미가 떨어지거나, 수녀님이 내게 반하거나, 수녀님이 죽거나.”

마지막 방법은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일단 첫 번째 방법이 가장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나는 두 번째 방법이 가장 쉬울 거라고 생각해.”

??“내가 너한테 반하면 어떻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 나랑 섹스하는 거지.”

??“달라지는 게 없잖아, 인마.”

그럼에도 살로스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뻔뻔한 미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일 밤에 보자. 수녀님.”

살로스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이 끈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존재를 알렸다.

?“…….”

?
주신 렌다이시여, 만약 정말로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부디 제 평화로웠던 일상을 돌려주십시오.

크흡. 나는 얼굴을 양손에 박고 나오지 않는 눈물을 쥐어짰다. 이미 관계를 두 번이나 맺은 수녀의 기도


따위를 신께서 들어 주실 리가 없다.

***

꿈속에서도 그 짓을 해서 그런지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피폐했다. 내가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건가,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애니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되겠어. 너 잠 깨라고 내가 냉수라도 한 잔 가져올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설마 청소하기 싫어서 시간을 끌려고 냉수를 핑계로 도망간 건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더 성실한 성격이니까.

그나저나 피곤해서 그런지 바닥을 밟고 있는 발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으으, 정신 차리자.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며 다짐했으나 다리는 결국 스텝이 꼬여 서로 얽히고 말았다.

?“아.”

넘어진다. 나는 곧 이어질 고통을 기다리며 다치면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넘어지던 몸은 어느 순간 멈췄다.

누가 잡아 주기라도 한 건가?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곳은 내 시야보다 훨씬 낮은 아래쪽이었다.

?“노아?”

흑발에 푸른 눈. 노아는 수도원 안에 위치한 고아원에 사는, 아직 열세 살밖에 먹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 뒤에 서서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작은 손으로 힘겹게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사실 받치고


있다기보다는 밀고 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함께 넘어질 것 같아서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똑바로 선 후 노아를 바라봤다.


아직 키가 작아 한참 고개를 숙여야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시간만 나면 나를 찾아오는 것이 꽤 귀여워 간식을 몇


개 쥐여 주기도 했다.

노아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애니카 누나가 그랬어. 스텔라 누나가 피곤해 보인다고.”

그렇게 말하며 불쑥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손을 바라보자 그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그나저나 애니카는 냉수 한 잔 가지러 간다면서 내가 피곤한 걸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는 모양이다.


돌아오면 잔소리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손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노아가 내게 준 것은 바로 노란색 종이로 포장된 사탕이었다.

-4-

?“레몬 사탕이야. 신 걸 먹으면 잠이 깨니까…….”


??“아…….”

??“이왕이면 자러 가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하지만 청소를 하고 있으니까 자러 갈 수는 없었다. 확실히 나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잠들지 않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나를 신경 써서 레몬 사탕을 가져다주다니. 게다가 기특한 말만 늘어놓는 것이 고마워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노아.”

그러자 노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노아는 평소에 사람들에게 무뚝뚝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데, 나는


그것이 그들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아이인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 수업 시간 아니야?”

??“…….”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아, 이 녀석 몰래 빠져나온 거구나.

내가 그를 혼내려는 듯 빗자루를 들고 쫓아가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망갔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노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어우, 셔. 입안에 퍼지는 신맛에 몸을 작게 떨었다.

?“대화는 즐거우셨습니까?”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알베르트가 서 있었다.

수도원에 서 있는 백발의 미청년이라. 언뜻 보면 천사님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표정은


사람도 씹어먹을 것처럼 서늘했다.

저 망할 인간.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한 게 바로 어제인데 또 찾아왔다. 게다가 저 불만스러운 표정은


대체 뭐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한참 아까부터 서 있었습니다.”


??“오셨으면 신부님을 찾아가지 왜 여기 계세요?”

??“수도원장을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

불길한 예감이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알베르트가 한 걸음 다가오자 나는 두 걸음 도망갔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잔뜩 구기더니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아니, 진짜 저한테 왜 그러세요!”

알베르트가 나를 안아 들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들고 있던 빗자루는 이미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가 향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그는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꽥꽥거리며 몸부림을 쳐 봤으나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설마 알베르트가 미리 손써 놓기라도 한 건가? 내 예상이 맞았는지 알베르트가 나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어린아이와 헤실헤실 웃으며 즐거우셨습니까?”

??“네?”

?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언제 웃었냐는 듯 서늘했다. 심경 변화가 왜 이렇게 빨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거지. 그와 평화롭게 지낸 여주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고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수녀님의 미소가 그렇게 싼 것인지 몰랐습니다. 겨우 사탕 하나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설마 내 미소가 보고 싶다는 말인가. 어제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아무도 모르게 수녀님을 납치해서 모니카 공작저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헉.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인간이라면 분명 진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농담입니다. 물론 수녀님을 손에 넣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는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베르트를 바라봤다.


?“그래도 그 아이에게 너무 웃어 주지는 말아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불쾌한 눈동자를
가졌으니까.”

그는 자꾸 노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설마 만에 하나…….

?“……혹시 질투하세요?”

알베르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노아를 스무 살은 먹은 성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이상 열세 살밖에 먹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게다가 알베르트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요?”

??“저는 수녀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서운하군요.”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닙니다.”
그럼 공작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합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차마 내뱉어지지는 못하고
삼켜졌다. 어느새 알베르트와 나는 내 방문 앞에 도착했다.

?“저는 청소하고 있었는데 왜 제 방에 데려오셨나요.”

??“선물해 드리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설마 그 선물이라는 게 위로금인가? 지금 나를 창부 취급하는 거야? 나는 인상을 쓰며 알베르트를


노려봤다. 위로금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돌아가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곧 내가 지금까지 알베르트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위로금을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문을 잠갔다. 나는 그때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위로금을 주는데 문을


잠그지.

?“저 나가 봐야겠는데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알베르트는 나를 나무 책상 위에 앉히더니 갑자기 치마 속에 손을 넣었다.

?“흣…….”

?
갑자기 아래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신음을 흘리자 알베르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설마 사과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 또 하려고 온 거야……?

아래에서는 계속 야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신음을 참으며 그의 손을 빼기 위해 끙끙거리자,


알베르트는 무언가 발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갑자기 물컹한 것이 들어온 탓에 놀라 살짝 그의


혀를 깨물었음에도 그는 아픈 기색 없이 입안을 탐했다.

한참 동안 혀로 내 입안을 휘젓던 알베르트는 마침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떼 냈다. 그의 입안에서 오독,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알베르트가 내 입안에 있던 사탕을 가져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거 노아가 준 건데. 설마


일부러 가져간 건 아니겠지.

알베르트의 손가락은 여전히 내 아래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는데,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더니 그는 품 안에서 꺼낸 것을 내 아래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딱딱한 것이 깊숙이 들어오자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무, 무슨…….”

??“마법으로 만든 기구입니다.”
알베르트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래에서 딱딱한 것이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읏, 흐, 아…….”

그 기구를 아래에서 꺼내기 위해 입구 주변을 더듬었지만 없었다. 뭐가 없었느냐고?

?“주, 줄이, 하으, 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기구와 연결된 줄이 없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마법으로 만든 기구라고.”

??“그, 게 무슨, 흣.”

??“제가 아니면 꺼낼 수 없습니다.”

이, 이 미친놈아! 있는 힘껏 외치려고 했지만 신음이 섞여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내 목을 쓰다듬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내일 봐요, 수녀님.”

그는 살로스처럼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갔다.

***

?“……님.”

??“…….”

??“수녀님!”

헉, 깜짝이야.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살로스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내 눈앞에 있는 걸 보면 또 꿈속이라는 이야기인데.

?“잠들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 같던데. 나 만나기 싫었어, 수녀님?”

??“응.”
내가 단호하게 답하자 살로스는 오히려 히죽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살로스는 몽마였다. 그것은 즉, 꿈이라는 연결체가 없으면 내게 찾아올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잠들지 않으려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지금 살로스가 내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잠든 모양이다.

?“난 수녀님 봐서 반가워 죽겠는데.”

??“그럼 그냥 죽을 수는 없어?”

??“수녀님, 농담도 참. 아, 복상사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히익.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러자 살로스는 재밌다는 듯 낄낄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배에 재미있는 게 들어 있네?”

살로스가 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거라니. 잊을 만하면 자꾸 진동하며 아래를 자극하는 바람에 종일 죽을 뻔했는데, 재미있는


거라니.

살로스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빼 줄까?”

그는 알베르트가 넣은 기구를 빼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홀린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살로스가 내 허리를 잡아당겨 나를 그의 아래에 위치시켰다.

?“무, 슨.”

??“왜? 빼 달라며.”

아니, 그건 맞지만 굳이 이런 자세로?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살로스를 노려보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잠옷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빼 준다잖아. 알베르트가 내 아래에 들어 있는 기구를 빼 줄 리는 절대 없었다. 지금 빼지


않으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래, 참자. 조금만 참자.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자 감각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로스는 손가락으로 입구를 벌리더니
그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빼 준다며!”

??“수녀님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지금 빼고 있잖아.”

하지만 그의 표정은 장난을 치는 소년의 것과 같았다. 처음부터 빼 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살로스는 내 허리를 세게 잡고 놔 주지 않았다.

?“이, 이 미친놈.”

빼 준다면서, 그는 오히려 기구를 깊숙이 밀어 넣고 있었다.

?“아, 흣.”

-5-

기구가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오며 배를 찔렀다. 현실이었다면 분명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꿈이라서


그런지 쾌락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악마를 믿는 게 아니었어. 심지어 그냥 악마도 아니고, 몽마는 성욕의 악마잖아. 내가 그런 놈을


믿다니. 멍청했다.
내가 살로스의 팔을 잡고 부들부들 떨자 그는 웃으며 내 손등에 입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이 어찌나 야릇하던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풀렸다. 잠시 멍하니 살로스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살로스가 느릿하게 내 눈을 핥았다. 힉.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눈가가 촉촉해졌어.”

??“윽, 손가락이나 빼고, 흐, 말해.”

??“울어 봐. 눈 촉촉한 거 보고 싶어.”?

가관이었다. 내 눈이 촉촉해지는 걸 보고 싶다는 이유로 울어 보라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아니면 아래로 내 거 먹으면서 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마침내 살로스는 내 아래에서 기구를 뺀 후 바지 버클을 끌렀다. 와중에 몽마는 도대체 왜 옷을 입는 거지.

?“이걸 넣은 인간한테는 감사해야겠네. 이거 덕분에 이미 수녀님 아래가 축축하니까.”

??“누구, 알베르트?”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감사는 개뿔. 천하의 쌍놈이라고 불러도 모자란 놈에게 감사라니.

갑자기 살로스가 내 위로 그대로 엎어지더니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수녀님, 빨리 정기 좀 나눠 줘.”

??“무거우니까 비켜.”

??“정기가 모여야 현실에서도 수녀님을 만날 수 있단 말이야.”

살로스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아니, 그나저나 잠시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응. 수녀님한테서 충분히 정기를 얻으면 실체화할 수 있어.”


진짜로, 정말로 완전 싫었다. 현실에서 만나는 건 지긋지긋한 알베르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미친 몽마까지 만나야 한다고? 싫다. 안 된다, 절대.

나는 있는 힘껏 살로스를 밀친 후 후다닥 방문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등 뒤에서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녀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굳어 방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몸이 굳은 게 아니라, 진짜로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

??“여기는 내가 만든 공간이라고.”

갑자기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돌려 살로스에게 다가갔다. 살로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을 벌렸고, 나는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수녀님이 반항해도 전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야. 내가 만든 공간이니까.”

??“…….”
??“지금까지 수녀님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은 건 수녀님의 반응이 재밌어서였어. 근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저것도 수녀님 아래에서 꺼내 줬는데?”

그럼 살로스가 원한다면 나를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살로스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떡할까. 말 안 듣는 우리 수녀님.”

살로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왔다.

?“요즘 밧줄로 묶고 섹스하는 게 재밌어 보이던데.”

그러더니 살로스가 손가락을 휘둘러 얇은 밧줄을 만들어 냈다. 아,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던가.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살로스는 내 손을 뒤로 묶은 후 미친 듯이 쳐올렸다. 울어 보라고, 눈 촉촉한 게 보고 싶다고 말한 게
진심일 줄 내가 알았겠는가.

정말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살로스의 굵은 물건이 아래에 삽입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침내
내가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며 눈물 흘리자 그제야 살로스는 만족한 듯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꿈속에서 관계를 가졌음에도 피곤했다. 그리고 낮에는 다시 알베르트가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기구는 어떻게 빼셨습니까? 다른 자와 관계라도 가졌습니까?”

??“그럴 리, 가 없잖아요, 흣.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공작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어라고 더 따지려고 했지만 알베르트가 거칠게 입을 맞추는 바람에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진짜 피곤해 죽겠다. 이러다가 진짜로 관계를 가지다가 죽은 수녀로 역사에 남는 건 아닐까. 나는


알베르트의 위에서 아무렇게나 흔들리며 상념에 빠졌다.

?“나한테, 집중하세요.”

??“제가 왜요.”

?
괜히 반항심이 들었다. 내가 왜 이놈이 원하는 대로 전부 따라 줘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오히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알베르트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더 세게 허릿짓을 했다. 그 탓에 나는 힘없이 앞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트의 품에 안기며 몸을 바들바들 떨자 그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오, 진짜. 이


미친놈이.

?“수녀님이, 당신이 수도원에서 쫓겨났으면 좋겠어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키며 알베르트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

?“모두가 더럽다고 당신을 욕하고 손가락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가 당신을 증오하면 당신은
나만의 것이 될 수 있을 텐데.”

순간 섬뜩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알베르트의 눈빛이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뱀의 것처럼 공허하고,


날카로워서.

알베르트가 집착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소설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여주 한정이었다고.


대체 나한테 왜 이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그는 다시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발버둥 쳤지만, 전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알베르트가 말을 흘리며 내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갑자기 들어온 혀에 놀라 나도 모르게 그의 혀를


깨물고 말았다.

?“…….”

그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떼 냈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 갖고 싶어요. 나만 보게 하고 싶고, 나만 보고 싶어.”

알베르트의 그 말에는 진득한 소유욕이 묻어 있었다.

잠시만. 소설 속에서 알베르트가 원래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나. 소설은 그냥 여주랑


남주가 변태 짓이나 하는 가벼운 내용이었단 말이야.
이 정도면 피폐 소설이었다고 해도 믿겠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이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알베르트의 입안에서 흘러내리는 끈적거리는 피뿐이었다.

***

정원에 쌓인 낙엽을 쓸고 있는데, 아직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멀리서 총총 걸어오는 노아가 보였다.

?“아, 노아. 안녕. 좋은 아침이야.”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노아는 머뭇거리다가 등 뒤에 숨겼던 것을 내게 건넸다.

?“꽃?”

??“누나처럼 예뻐서 꺾어왔어.”

노아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으윽, 내 심장. 귀여워 죽겠다. 나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겨우 바르게 섰다. 노란색 꽃잎. 줄기가
아무렇게나 자란 것을 보니 길에 핀 들꽃 같았다.

내게도 이 예쁜 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렇게 꺾어서 가져다준 것은 기특했다. 하지만 수도원은


어린아이들에게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었다.

수녀님들이 아이들을 교육했던 것처럼 나도 노아에게 충고를 하나 해 주기로 결심했다.

?“꽃 정말 예쁘다, 노아.”

??“그렇지?”

??“응. 그런데 예쁘다고 해서 다 이렇게 꺾어 버리면 안 돼. 보는 우리는 즐겁지만 꽃은 아플 테니까.”

그러자 노아의 표정이 점차 오묘해졌다. 아차. 너무 혼내는 것처럼 말해서 시무룩해진 건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서운하기보다는 의문스러운 것에 가까웠다.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왜 안 돼?”

??“응?”
?

왜 안 되느냐는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이럴 때 꽃에 사과하며 훈훈하게 끝내지


않았었나.

그러나 노아는 예외였다.

?“나는 꽃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 꽃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나는 꽃이 아니니까.”

??“…….”

??“내가 원하면 꽃을 꺾어서 가질 거야.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꽃병에 넣어서 보관할래.”

꽃은 발이 없어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만…….

그나저나 열세 살 어린아이가 말하기에는 꽤나 섬뜩한 대답이었다. 꽃에 사과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다가 오히려 그의 대답 때문에 말문만 막혔다. 이를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좀 무책임하기는 하지만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하는 게 최고지.

?“아, 맞다. 나 부엌 청소해야 하는데. 그럼 안녕, 노아. 다음에 보자.”


나는 노아의 대답을 들지도 않고 손에 빗자루를 든 채로 잽싸게 정원을 빠져 나왔다. 역시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건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다.

최대한 빨리 정원에서 도망치느라 그때는 몰랐다. 어린아이의 지독한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

?“누나. 스텔라 누나.”

작은 형체가 내 치마에 달려와 폭 안겼다. 검은 머리통이 부드러운 치마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무심한 표정을 하고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애니카가 빗자루를 땅에 고정하고 몸을 기대며 말했다.

?“또 노아네. 하여간 너는 참 스텔라를 좋아하는 것 같아.”

??“너 설마 또 수업 시간에 몰래 나온 건 아니지?”

??“아니야. 나 숙제까지 다 하고 왔어.”

??“그래그래, 알겠어. 잘했네.”

?
오늘은 바로 성녀 세티아 탄생을 기념하는 바로 전날이기 때문에 외부인이 수도원에 출입할 수 없는
날이었다.

어흑. 내가 진짜 이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아마도 오늘이 매일 찾아오는 알베르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일 것이다.

내일 기념일에 수도원을 찾는 손님들을 맞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빡세게 청소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뭐, 이


정도쯤이야.

노아는 어느새 자신의 키만 한 빗자루를 들고 와 함께 바닥을 쓸고 있었다. 애니카와 나는 그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밤에 마을에서는 불꽃놀이 한다던데, 수도원에서는 그런 거 안 하려나.”

??“수도원에서 불꽃놀이는 무슨. 빨리 청소나 해.”

??“건물 꼭대기에서 보면 보이겠지?”

??“청소나 하라니까.”

애니카가 계속 옆에서 잔소리를 했으나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꽃놀이로 가득 차 있었다.?

-6-

?“밤에 같이 보러 갈 거지, 응?”

??“내일 하루 종일 바쁠 게 뻔한데 미리 자 둬야지.”

말은 저렇게 해도 애니카는 사실 정이 많고 유한 성격이기 때문에 계속 조르면 같이 가 줄 게 뻔했다.


나는 애니카의 팔을 매달려 그녀를 설득했다.

?“스텔라. 잘 들어.”

??“응. 말해 봐.”

??“작년에도 네가 불꽃놀이 보자고 해서 탄생 기념일 전날에 잠 안 자고 불꽃놀이 봤었지?”

??“응.”

??“그리고 기념일 당일에 내가 어떻게 됐었지?”

??“쓰러졌었지. 피곤해서.”

??“그걸 알면서 나한테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하냐!”


?

억. 나는 애니카가 휘두른 팔에 튕겨 나가 저 멀리로 널브러졌다. 이럴 수가. 애니카는 작년에 피곤함에


절어 쓰러졌던 기억이 머리에 콕 박힌 탓인지 내 생각 외로 단호했다.

?“정 보러 가고 싶으면 노아랑 보러 가든지. 나는 또 쓰러지기 싫으니까.”

??“그냥 자기 체력이 바닥인 거면서…….”

??“뭐라고?”

??“허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매섭게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애니카를 피해 노아에게 다가갔다.

?“어때, 노아.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갈래?”

그러자 노아는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런 격렬한 반응이라니. 애니카와 너무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들키면 혼나고 자러 가라는 말이나 들을 게 뻔하니까 조심히, 몰래 나와야 해. 오늘 밤 열한 시에


수도원 건물 꼭대기에서. 알겠지?”

??“으휴, 진짜 좋은 거 가르친다.”

??“칭찬 고마워 애니카.”

애니카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하자 애니카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으이구!’ 따위의 소리를 내며 내


등짝을 마구 때렸다. 아니, 갑자기 왜 때리는 거야.

?“그럼 이따 보자. 밤 열한 시야, 밤 열한 시.”

??“으응. 이따 봐, 누나.”

노아와 나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불꽃놀이에 대한 기대 때문에


기분이 마구 솟구쳤다.

?***

?“흐읍…….”

?
창밖은 어두웠다. 나는 숨소리조차 아끼며 걸음을 내디뎠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내 무게를 받을
때마다 삐그덕, 하고 울었다.

수도원이 낡으니 이런 단점이 있구나. 몰래 돌아다니기에 최악의 환경이었다.

차라리 노아처럼 무게라도 덜 나가면 조금은 수월했으려나.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홀로 킥킥


웃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다른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했다. 밤에 보는 계단은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갑자기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삐그덕, 삐그덕. 낮에는 알지 못했는데 밤에 걸으며 들으니 계단은 바닥보다 더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진짜 분위기 왜 이래.

진짜 유령이라도 튀어나오면 어쩌지. 악마도 있고 마법도 있는 이 세상에 유령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흐어악!”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실제로 흰 천을 두른 것 같은 유령의 형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놀라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벽에 찰싹 붙었다.

잠깐만. 흰 천을 두른 것 같은?

?“누나 괜찮아?”

누군가 안에서 나풀대는 천을 살짝 젖히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천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노아였다.

?“도대체 왜 그러고 다니는 거야…….”

어흐흑. 진짜 놀랐다고…….

?“혹시 누나 추우면 주려고…….”

?
기특하기는 한데 손에 들고 다니면 되는 걸 굳이 그걸 몸에 두르고 다녀야겠니……. 나는 차마 이를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내적 눈물을 흘렸다.

?“거기 누구니!”

그때였다. 내 비명을 들은 건지, 아래층에서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빨리 가자.”

우리는 까치발을 하고 후다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

??

꼭대기 층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평범한 집들의 다락방처럼 생긴 곳이었다.


?

이미 마을에서의 불꽃놀이는 시작한 상태였다. 불꽃놀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윽. 먼지.”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먼지가 가득했다. 우리는 작은 창문을 열어 먼지를 대강 털어내고 방을


환기했다.

?“직접 가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지. 밤에는 외출이 금지되니까. 이렇게 보는 걸로 만족해야지, 뭐.”

밤이라 창문을 타고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내가 살짝 몸을 떨자 노아는 자신의 어깨를 덮고 있던 흰 천,


아니 담요를 내 어깨에 덮어 두었다.

이 녀석 젠틀한 것 좀 보게. 다 자라면 인기 좀 있을 것 같다. 나는 담요를 활짝 벌리며 노아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
그러자 노아가 배시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체온은 따듯했다.

?“…….”

??“…….”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 우리 둘 다 불꽃놀이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붉은색 불꽃이 날아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내자, 노아가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누나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불꽃놀이를 보러 와서 좋다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라고 대답했다.

?“나는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좋아.”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낄낄 웃었다. 과연 저 말이 언제까지 가려나. 한 2 년만 지나도


친구들이랑 노느라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 그래. 누나도 노아가 제일 좋아.”

??

그러니 나중에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가끔 말이라도 걸어 주렴. 나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 같은


심정이었다.

이제 슬슬 마을의 불꽃놀이도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화려하게 물들었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우리도 이제 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노아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노아는 잠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색색거리며 규칙적으로 호흡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든 것처럼이 아니라 진짜 잠든 것 같은데.


?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과연 내가 잠든 노아를 업고 들키지 않은 채로 그의 방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솔직히 0 에 가까웠다. 살짝만 밟아도 삐거덕거리는 바닥이 나와 노아를 합칠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나는 그냥 노아를 바닥에 눕히고 나도 벌렁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어차피 잠들면 살로스를 만날 게 분명해서 눈을 감지도 않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의 찬 공기를 이겨 내기 위해 노아에게 딱 달라붙었다. 노아의 등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혹시 잠든 게 아니라


아파서 쓰러진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열도 없고, 호흡도 정상적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그의 옆에 누웠다.


?

꽤 신나는 밤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도 마을에서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는지 불빛이 번쩍였다. 나는
창문을 통해 한참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일이 되면 다시 수도원은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을 것이다. 특히 내일은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몰려들 거고.

아마 그중에는 알베르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를 떠올리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아직도 그날 그때 정원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거기에 있지만 않았어도 알베르트를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 봤자 무엇하겠는가. 이미 엎지른 물인 것을.

에휴. 나는 깊은 한숨을 뱉고는 눈을 감았다.

잠들지 않았음에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달이 사라지고 밝은 해가 산 위로 서서히 떠 오르고


있었다.
?

?“노아. 일어나. 아침, 아니 새벽이야. 내려가야지.”

노아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깨우자 그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우리는 조심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서로 방이 다르기 때문에 인사를 하며 헤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험악한 얼굴로 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헉. 수, 수녀님.”

어제 내 비명을 듣고 쫓아왔던 수녀님이었다.

?“스텔라. 그리고 노아. 도대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방에 있지 않고 무슨 일이니?”

??“아, 일찍 일어나서 청소라도 해 놓으려고 나왔어요.”

??“그런데 왜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거지?”


?

윽.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결국 노아와 나는 수녀님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어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그 벌로 우리는 종일 주방에 처박혀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쿠키를 굽는 일만 주야장천 했다. 다행인 건


주방에만 있었던 덕분에 알베르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수녀님이 감시하고 있지 않을 때는 몰래 쿠키도 몇 개 집어먹었으니까.

게다가 가장 좋았던 것은, 어제 노아와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쿠키를 굽다가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다.

***

?“스텔라.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휴식실에서 벽에 기대어 있던 애니카가 내게 물었다.


무슨 일. 무슨 일이라. 무슨 일은 참 많았다. 낮에는 알베르트에게 시달리고 밤에는 살로스에게 시달리고.
다만 그걸 소리 내 말할 수가 없을 뿐.

?“아니, 아니야. 별일 없어.”

??“좀 자고 올래? 내가 대신 일 하고 있을게.”

??“아, 아니!”

나도 모르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애니카가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아, 미안.”

하지만 잠들면 다시 살로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꿈속에서 다시 그와 관계를 가지면 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스텔라. 공작님께서 찾으신단다.”

아아, 또다. 또 알베르트는 수도원을 안내해 달라는 이유로 나를 불렀다.


피곤한 얼굴을 겨우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애니카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공작님이랑 네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없거든? 내가 물론 신앙심은 바닥이지만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연애를 넘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지만.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신을 모시는 몸으로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수도원에서 쫓겨날 테니까. 그럼 나는
알베르트의 저택에 갇혀 쉴 새도 없이 그와 관계를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어우, 최악이다. 지금도 힘든데 그렇게 된다면 정말 힘들어서 눈도 못 뜰지도.

-7-

나는 터덜터덜 걸어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다리를 꼬고 고급스럽게 앉아 있는


알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문 잠그고 와요. 섹스할 거니까.”

응접실에서 문 잠그고 섹스하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그 대상이 나만 아니었어도


손뼉을 쳐 줬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나인지라 차마 웃을 수 없다는 것.

?“공작님.”

??“말씀하십시오.”

??“만약 제가 수도원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알베르트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너무나도 빠르게 답했다.

?“일단 당신을 모니카 공작저로 데려갈 겁니다.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도록, 당신이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방에만 가둬 놓고 싶어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든 당신과 섹스할 수 있도록 아래를 기구로 채워 넣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흥분해서 제게


애원하는 걸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미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거 여주랑 하던 거잖아. 왜 나한테 하려고 해. 그런 거 좋아하는


여주랑 하라고.
?“그거 범죄인 거 아세요?”

??“모를 리가 있겠나요.”

알베르트가 악마처럼 미소 지으며 내 옷에 달린 단추를 풀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고민했다. 아무리


알베르트가 공작이라지만 이 새끼의 실체를 하나하나 세상에 밝히면 사회에서 매장되지 않을까, 라고.

관계를 맺을 때는 미칠 듯한 쾌락이 내 몸을 덮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관계가 끝나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 짓도 지겹다, 이제는. 진심으로.

나는 알베르트의 밑에서 거세게 흔들리며 딴생각을 했다. 이제는 입에서 나오는 신음도 참지 않았다.

처음에 알베르트가 내가 신음을 참는 모습을 좋아하길래, 그런 걸 좋아하는 취향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신음도 마구 흘려 보았으나, 그는 여전했다.

오히려 지금 그는 더 기뻐 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고, 쫓겨나면 알베르트에게 납치라도
당할까 조마조마하고.
?

낮에는 알베르트, 그리고 밤에는 살로스. 나는 둘에게 매일 시달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박히다가
겨우 풀려나는 일상.

그런 생활이 하루, 이틀…… 벌써 한 달이나 반복됐다. 미치겠다, 진짜로.

살로스는 꿈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알베르트가 가장 큰 문제였다.

알베르트는 매일 수도원을 찾아왔다. 정말로 매일. 그리고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그 짓을 매일 했다.


무슨 네가 에너자이저냐.

이런 생활이 한 달 동안 반복됐다.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

나는 매일 기도실에서 알베르트가 복상사하기를 기도했지만 신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다.


차라리 내가 체력이 달려서 죽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수도원을 떠나자고, 도망치자고.

어차피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언젠가 모두에게 밝혀질 것이다. 손가락질받으며 쫓겨나고 알베르트에게
거둬지느니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스스로 나가는 편이 나았다.

?
나는 약 일주일 동안 계획을 세운 뒤 신부님에게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신부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이유를 물었다.

?“더 많은 걸 경험해 보고 싶어서요.”

사실 그냥 알베르트 때문이었지만.

신부님은 내 안녕을 빌며 눈물 흘려 주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나는 떠나야만 했다.

?“떠난다고?!”

??“응.”

??“이, 이 나쁜 계집애! 평생 나랑 같이 산다며!”

애니카는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 나는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데리러 오겠다는 말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편지, 꼭 보내. 아흑. 내가 간간이 만나러 갈 테니까. 흑.”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
혹여 편지를 통해 알베르트가 나를 찾아오면 곤란했다. 하지만 내 말을 오해한 애니카가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 진짜 어떡하지. 알베르트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손가락으로 약속 도장까지 찍은 후에야 애니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떠나기에는 최고로 좋은 시간 아니겠는가.

나는 수도원 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노아. 노아에게만은 꼭 마지막 인사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고아원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노아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는 하지 못했지만 나는 노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안녕, 노아.”
??

그리고 나는 알베르트가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수도원을 떠났다. 수녀복을 벗고,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채로.

남주야, 너는 여주랑 행복하게 살거라.

***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교통이 활성화되어 있는 도시를 향해 열심히 걸었다.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으니.

하지만 도시는 생각보다 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오는 마차를 타고 갈걸.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알베르트가 언제 나를 찾으러 올지 모르는데 한가하게 마을에서 마차를 기다리겠다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 금방이라도 내게 손을 흔들 것만 같은 밤이 되어 있었다.


헉, 언제 밤이 된 거야.

?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는 마을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숲의 나무들뿐.

뭐, 어쩔 수 없나.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적당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가방에 넣어 놓았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금방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아으, 잠들면 살로스를 만나게 될 텐데.

하지만 내 의지와 다르게 내 눈은 결국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

?“우리 수녀님, 겁도 없어라. 숲에서 잠들 생각이나 하고.”

또다시 살로스가 싱긋 웃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절망스럽다. 나는 으으, 하고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살로스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와, 진짜 너무하네! 오늘 종일 수녀님 지켜 준 게 누구인 줄 알아? 나거든?! 수녀님한테 접근하는


놈들 전부 마법으로 혼내 줬단 말이야!”

??“뭐?”
??“뭐긴 뭐야. 수녀님 완전히 공공물 될 뻔했다는 말이지.”

그리고 살로스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와 대비되게, 나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어떻게 말을 저렇게


저급하게 할 수가 있지.

?“여러 사람이랑 같이 쓰고 싶지는 않거든.”

??“…….”

??“그나저나, 야외에서 섹스라. 새롭네.”

진짜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가 있을까. 진심으로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 하면 내일 피곤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도망침으로써 알베르트와의 관계를


끊어 낸 것처럼, 살로스와의 관계도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살로스.”

나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평소였다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을 그가, 왜인지 조용했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다.”

??“뭐?”

??“수녀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니까 좋아.”

잠시만. 내가 방금 그를 이름으로 불렀었나? 나는 뒤늦게 내 실수를 알아차리고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피곤해도 저 몽마 놈 이름을 부를 생각을 하다니.

?“왜 불렀어? 이렇게 예쁘게 내 이름을 불러 주니까, 수녀님이 부탁하는 건 다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하기 싫어.”

??“응?”

??“섹스, 하기 싫다고.”

진심이었다. 하긴,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섹스하기 싫다는 말이 진심이 아닐 때도 있었나. 항상


진심이었지.

그러자 살로스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건 들어주기 싫은데. 나 야외에서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

??“이리 와, 수녀님.”

또다시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살로스에게 걸어갔다. 그는 다가오는


나를 기꺼이 끌어안았다.

?“하지만 기분이 좋으니까.”

??“…….”

??“상을 줄게. 수녀님이 지금 가장 원하는 걸 들어 줄 거야.”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해 놓고 살로스는 내게 소원을 묻지 않았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살로스는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알베르트도, 살로스도 길거리에서 스쳐 가듯 본 평범한 남자들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만날 일조차 없는 존재들과 얽혀 버렸다. 알베르트와 마주쳤기 때문에 그와
섹스했고, 그와 섹스한 탓에 살로스를 만났다.

섹스.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였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나에게 왜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치는


거냐고. 그들은 내 속마음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체념했다. 그래도 알베르트에게서 벗어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내 위에서 열심히


허릿짓을 하는 살로스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스텔라 수녀님께서 떠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곳을 떠나 더 많은 걸 배워 보고 싶다더군요. 참 기특하지 않습니까.”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알베르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떠났다. 스텔라가 떠났다.

그의 아래에서 엉엉 울며 애원하던 작은 새가, 주인을 피해 새장을 탈출했다. 적어도 알베르트는 이


상황을 그렇게 생각했다.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그 붉은 눈을 마주할 때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혀로 그 눈을 핥으면 움찔대던 그
하얀 몸은 얼마나 사랑스럽던가.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스텔라. 그녀는 알베르트를 난폭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마치 중독된 것처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났다.

그녀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으나 신부는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계속 무어라고 떠드는 신부는 더 이상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신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 버렸다.

?“고, 공작님?”

신부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으나 알베르트가 다시 돌아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신 문틈 사이로 건장한


공작보다 훨씬 작은 어린아이가 들어왔다.

-8-
?“아, 노아구나. 무슨 일이니?”

“스텔라 누나…… 아니, 스텔라 수녀님이 떠나셨어요?”

노아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부는 노아가 부쩍 스텔라를 잘 따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런. 신부는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그래. 하지만 스텔라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란다. 스텔라도 너를 그리워할 테니까.”

“하지만 돌아오지 않으면요?”

신부는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스텔라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노아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기에.

?“…….”

노아가 서러운 듯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누가 봐도 친한 누나가 떠나 슬퍼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노아는 신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그는 신부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쯤, 노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의 푸른 눈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차가워 보였다.

내가 원한다면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가지리라. 꽃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꽃을 단단한 꽃병에 가둬


버리리라.

아이는 끔찍한 계획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열세 살. 그의 나이가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

알베르트는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여유롭고 고고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던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초조했다. 스텔라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도, 어느 곳으로 향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코르넬.”

“예, 가주님.”
?

알베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마차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코르넬 스테인. 그는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였다.

?“찾아와. 최대한 빨리.”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코르넬은 알베르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이름. 스텔라.

?“상처 하나 내지 말고, 온전한 상태로.”

“알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베르트는 천천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곧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스텔라. 하늘의 별 같은 여자였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이상하게 손에 전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갖지 못했던 것은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원한다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손에


넣었고, 절대 놓지 않았다.

?
찾는다면 손에 쥐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항상 상상만 하고 차마
실현하지는 못했던 더러운 갈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현할 것이다. 그 붉은 눈이 그만을 바라보게 할 것이고, 작은 입이 그만을 부르게


만들 것이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저도 모르게 손톱이 살을 파고든 후에야 그는 손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는 대충 상처를 짓누르며 턱을 괴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수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스텔라가 서 있던


붉은 장미의 정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정원.

그런데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가 아닌 다른 이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이 불쾌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그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가 타고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흑발과 푸른 눈을 가진


어린아이. 이름이 노아였던가.

마차의 창문은 특수한 유리로 만들어졌기에 밖에서 내부가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의
푸른 눈은 마차 안의 알베르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괜히 불쾌했다. 어린아이의 것일 뿐인 저 눈동자가, 묘하게 불쾌했다.

알베르트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출발해.”

이내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아는 계속해서 알베르트가
탄 마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걷고,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에 위치한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수도원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나는 이곳에 정착했다.

상쾌한 공기에 친절한 마을 사람들까지. 게다가 있을 건 다 있는 꽤 괜찮은 마을이었다.

요즘 대부분 주민이 도시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있어 싼값에 집도 구할 수 있었다.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렇게 이루게 되다니.
?

딱히 챙겨온 짐도 없었기에 새로 사야 할 것들이 가득했다.

마을의 규모가 작아 시장도 잘 서지 않았다. 덕분에 생필품을 사려면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구매해야만 했다.

?“아가씨. 이걸 한 번에 혼자 들고 가려고?”

“네.”

“아유, 이게 보기와 다르게 되게 무거워.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나눠서 들고 가.”

“에이, 귀찮게 뭘 또 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이 가득 든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자는 정말로 무거웠다. 들어 올리자마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그런 내 모습을 본 상인 할머니가 비실 웃음을 흘리며 내일 또 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말이 내 자존심을 긁었다. 사람이 검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나는 내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박스를 내려놓지 않았다.

물론 상점에서 나온 후 열 걸음 정도 걷자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들고 있던 게


이불이라 다행이었다. 접시였으면 전부 깨질 뻔했으니.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 이런 식으로 가면 집에는 밤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 끌고 가야 하려나.

그때, 앳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기, 아가씨.”

주변을 둘러봤으나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가 나를 보며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저요?”

“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그, 짐이 무거워 보여서 도와드리려고…….”

아. 산속 마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친절하구나. 초면인데 이렇게까지 도와주려고 하다니.

나는 흔쾌히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불의 절반 정도를 그 남자에게 넘겼다. 이불을 건네받은 그 또한 이불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꽤 힘겨운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고마워요. 어떻게 들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별말씀을요.”

이불의 무게 중 절반을 그에게 넘기니 확실히 상자가 가벼워졌다. 이제야 좀 들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됐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

“네.”

“도시에서 이런 시골로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그런지 신기하네요.”

“그런가요.”

?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충 짧게 답했더니 남자가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음.
너무 성의 없었나.

?“그거, 이쪽으로 가져와 주시면 돼요. 제집은 저기, 산 아래거든요.”

“아, 알겠어요.”

도움을 받는 주제에 너무 당당한가. 나는 괜히 머쓱해져 얼굴을 긁적이려다가 곧 남는 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집 앞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꽤 힘들었는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옆에 조심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짐 들어다 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

“아저씨 아니에요!”

“당연히 농담이죠. 이름을 모르니까.”

“아……. 전 보리스예요.”

“아. 예, 뭐. 보리스. 고마워요.”

?
따로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보리스라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나저나 이름 한번 참 평범하네. 보리스라니. 길 가다 보리밭을 발견하면 떠오를 것 같은 이름이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스텔라. 스텔라예요.”

“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네요.”

슬슬 이 영양가 없는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상자를 같이 옮겨 준 건 고마운데, 대체 왜 아직까지


안 가고 버티고 있냐 이거다.

?“……이름, 예뻐요.”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거참,
순수한 청년일세.

나는 집 밖에 잔뜩 놓인 상자들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넓은 편은 아닌지라 짐이 몇 개


들어오자 금방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냐. 나는 기지개를 쭉 켠 후 하나하나 상자에서 물건들을 꺼내 정리했다.

***

?“난 참 피곤한 것 같아. 수녀님이 너무 인기가 많아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까 보리스라는 꼬마 있잖아. 수녀님만 보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지더라.”

꼬마. 꼬마라니. 좀 앳된 얼굴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꼬마라고 부를 정도의 나이는 아닌 것 같던데.


하지만 나는 곧 살로스가 몽마라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녀님은 걔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좀 불안해서 말이야.”

짜증 나게도 사실이었다. 알베르트나 살로스를 만나기 전이라면 보리스와 대화하며 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알베르트나 살로스와 같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수준의 얼굴들을 보며 눈이


저 하늘까지 솟은 후였다. 보리스를 보며 마음이 간질거리는 설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괜히 짜증이 나서 살로스를 발로 찼더니 살로스가 악,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짓궂게 웃었다. 되려
살로스를 가격한 내 발이 아팠다. 하여간 꿈이 너무 생생해서 문제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좋은 걸 하나 생각해 봤거든.”

들어 보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나불나불 말하기 시작했다.

?“그 꼬마를 떼 낼 좋은 방법 말이야.”

“굳이?”

“굳이? 굳이라니? 설마 수녀님 그 꼬마한테 반했어?”

??“그건 아니지만 굳이 떼 내야 할 필요가 있나. 너보다는 나은 놈일 텐데.”

그러자 살로스가 상처받았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는 흉내를 냈다. 심지어 흑흑, 하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어색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곧 새침하게 눈을 뜨고 협박하듯 말했다.


?“맨날 꿈에서 섹스만 하고 싶어?”

이미 그러고 있잖아……. 내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살로스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9-

?“내 말대로 안 해 주면 피곤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해 줄 거야.”

과연 이런 유치한 놈이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몽마가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답을 소리 내 말하지 않았지만 살로스는 이미 내 답을 알겠다는 듯 사악하게 히죽 웃고 있었다. 어디,


도대체 그 방법이 뭔지 한번 들어나 보자.

***

?“미쳤구나. 나를 이 마을에서 미친 사람으로 만들 셈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그 정도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길길이 날뛰며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 미친 몽마 같으니라고. 그딴 것도 계획이라고
세웠냐.

?“한번 해 보고 말해. 완전 확실하다니까!”

??“그래, 확실하겠지. 내가 미친 사람이 될 확률이!”

나는 다시 한번 세게 은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살로스가 만든 공간이라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완전히


뽑히지는 않았다. 그냥 고통만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일단 해 보자니까.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응?”

??“어떻게 하든 나만 손해인 일이잖아.”

??“내가 알려 준 대로만 잘하면 하루 정도는 섹스 안 하고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그게 보상이냐? 겨우 그딴 게 보상이냐고!”

또다시 난리를 치려는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내가 저걸 제대로 실행하든 말든 살로스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아닌가. 대충 보리스와


아무 대화나 하고 오고는 살로스가 말한 대로 하고 왔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생각을 읽은 살로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뭐, 왜 뭐. 갑자기 왜 비웃는 건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

??“신 앞에서 당당하게 섹스를 한 성직자는 수녀님이 처음이라고 말이야.”

그게 왜. 살로스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살로스가 한 마디로
간결하게 설명했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항상 내가 수녀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야. 투명 마법을 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하나.”

??“…….”

??“뭐, 하여튼. 내가 말한 대로 꼭 하고 와야 해. 지켜보고 있는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나는 여기저기에 묻고 물어 보리스를 찾아갔다. 나무문을 두어 번 쿵쿵 두드리자 상기된 얼굴의


보리스가 집 안에서 튀어나왔다.
?“스텔라?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왜인지 분위기가 비장해졌다. 보리스도 나를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그러지 마. 나는


긴장돼서 심각해진 것뿐이라고.

나는 살로스가 지어 준 대사를 그대로 입에 올렸다.

?“저 사실, 이상한 것들이 눈에 보여요.”

??“느, 느에?”

??“예를 들어 당신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라든가. 신기하네요. 보통 이렇게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경우는 드문데.”

??“하, 할머니라니 그게 무슨…….”

??“당신 집에도 가득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딸꾹. 보리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는 덜덜 몸을 떨다가 결국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여간 순수한


청년일세.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보리스는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나지 않아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괜히 순수한 청년에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꿈에서 만난 살로스는 잘됐다며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아. 이미 살로스 때문에 평화롭게 살기는 그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살로스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괴상한 방법으로 쫓아냈다. 도대체 왜


이래, 이 미친놈이!

***

오랜 시간이 지나 약 5 년이 흘렀다. 다행히 나에 대한 흥미가 이제는 식어 버렸는지 알베르트는 나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애니카에게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녀님. 내가 편지 보내지 말라고 했지.”

??“왜? 애니카 보고 싶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놈이 수녀님 위치 알아내면 어쩌려고?”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여자하고 잘 지내고 있을걸.”


?

살로스가 전부 편지를 찢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정기를 쪽쪽 빨아먹은 결과 약 2 년 전쯤 실체화에 성공했다. 알베르트에게서 도망쳤더니 이제는


살로스라니.

낮에도 밤에도 살로스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쉬지도 않고 그 짓을 하려고 했으니까.

다행히 나는 일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낮에는 집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대신 밤에 두 배로 시달려야


하지만.

그래도 이 짓도 5 년 동안 하다 보니 익숙해지……

기는 개뿔. 하루하루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살로스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알베르트보다
더했다. 항상 그 짓의 끝은 기절이었다.

?“야.”

??“왜, 수녀님?”
?

이제 수녀도 아닌데 항상 그는 나를 수녀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 세 가지가 뭐였지.”

??“내가 수녀님한테 질리거나, 수녀님이 나한테 반하거나, 수녀님이 죽거나.”

??

아무래도 내가 죽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죽을까?”

아무 생각 없이 툭 뱉은 말인데 살로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거침없이 내


입안을 탐했다. 나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로스는 그것마저 핥아 낸 후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럼 지옥에서 영원히 나랑 섹스해야 할 테니까.”

??“…….”
?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결국 살로스에게서 벗어나려면 그가 나한테 질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그가 나한테 질릴까 생각하던 도중, 살로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죽지 마, 수녀님.”

??“그럼 네가 내 인생에서 좀 꺼져 봐.”

??“그건 싫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살로스를 힘껏 밀친 후 어깨에 겉옷을 걸쳤다.

?“어디 가?”

??“일하러.”

??

나는 짧게 대답하고 문을 쾅 닫았다. 집 밖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하늘에 떠 있는 눈 부신 태양이 괜히


얄미웠다. 나는 땅바닥에 있는 돌을 발로 툭툭 차며 일터로 향했다.
내가 선택한 일거리는 서점 알바였다. 월급이 적기는 하지만 뭐 어떠한가. 나 혼자 먹고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물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먹어봤자 내 체력은 정기가 되어 전부 살로스에게 돌아갔다. 이 무슨 깨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경우가 다 있나.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살로스가 나를 싫어하게 되려나. 나는 책들을 정리하며 곰곰이 고민했다.

성수라도 뿌려 볼까? 멀쩡히 수도원에 들어오는 몽마에게 통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신성한 물이니까
기분은 좀 나쁠지도.

생각할수록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좋아. 꾸준히 살로스에게 성수를 뿌리자. 마침 내가 머무르고 있는


마을의 중앙에는 작은 수도원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몇 병 받아야겠다.

?“수고하셨어요.”

??

해가 산 뒤로 조금씩 숨기 시작하자 나는 겨우 일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었다. 아, 맞다. 성수 받아


가야지.

나는 조심히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지긋한 신부님이 나를 맞아 주었다.


?“성수 좀 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악마라도 만나신 겁니까?”

??“아, 그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대충 말을 흐리며 둘러댔다.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그러자 신부님은 커다란 유리병에 성수를 가득 담아 내게 건넸다. 꽤 묵직한 정도의 양이었다. 신부님,
혹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주신 렌다의 축복이 함께하길.”

신부님은 내게 행운의 말을 건넸다.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 최대한 겉옷 주머니에 성수를 욱여넣었다. 크기가 큰 유리병이었지만 다행히 그


모습 정도는 옷으로 감출 수 있었다.
문을 열자 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살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도대체 네가 왜 내 침대에 누워
있으세요.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비켜.”

??“수녀님, 매정해.”

살로스가 툴툴거리며 내게 안겨 옴에 따라 내 심장도 미칠 듯이 뛰었다.

언제 성수를 뿌려야 하지. 만약 뿌리면 화를 내면서 평소보다 더 세게 안으면 어떡하지?

내가 망설이는 사이 살로스가 내 겉옷을 벗기고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나는 살로스의 아래에 누워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겉옷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젠장. 성수가 겉옷에 들어 있는데.

?“수녀님은 언제쯤 날 받아 줄래?”

받아 달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지. 설마 너한테 유혹당해서 평생 너랑 관계나 가지면서 살라는 소리니?

?“내가 널 받아 주기를 원해?”

??“응.”
?

살로스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 몽마 같으니라고. 받아 주기를 원하면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지는


말았어야지.

아, 아니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금 이렇게 잘 구슬려서 겉옷을 가져오게 한
다음 성수를 뿌리면……!

?“그래, 살로스. 그럼 일단 테이블 위에 있는 겉옷 좀 가져와 봐.”

게다가 이름까지 부르니 살로스는 눈꼬리가 접어 예쁘게 웃었다. 이놈이 몽마만 아니었어도 이미 이
얼굴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근데 그건 싫어. 저 옷 마음에 안 들어.”

꽤 강한 몽마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설마 주머니에 들어 있는 성수의 기운까지 느낀 거야? 나는


겨우 경악을 감추며 살로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

물론 소용없었지만.

-10-

그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내 옷을 찢듯이 벗겼다.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로스가 내 가슴에 가볍게 입 맞추며 능글맞게 웃었다. 어느새 그는 나신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헤집었다. 야이씨, 사람 말 좀 들어라!

***

다음날, 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옆에서 누워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살로스를 노려봤다.

살로스와의 관계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부드러움을 가장했을 뿐 거칠었다.

자기 딴에는 부드럽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살로스는 아무래도 자신의 물건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살로스가 부드럽게 허릿짓을 해도 나는 죽을 맛이었다. 아래가 절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을 아는가?


바로 그걸 나는 매일 경험하고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옷을 챙겨 입었다.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살로스가 예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디 가, 수녀님?”

??“일하러 가지.”

그러자 살로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야, 왜 저래. 설마…….

?“내가 최근에 밖에 나갔다가 마을 여자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가 입은 것이라곤 아래를 겨우 가리는 가죽 바지뿐이었다.

아니, 상체 다 드러내고 다가오지 말라고. 나는 울상을 지었다.

?“수녀님이 일하는 서점은 매주 월요일, 화요일 휴무라던데?”


?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절망했다.

사실 내가 일하고 있는 서점은 매주 월요일, 화요일 휴무였다. 다만 이 사실을 살로스에게 밝히면


피곤해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매주 그를 속이고 밖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다가 온 것이었다.

?“오늘은 월요일인데 일을 하러 간다라. 지금까지 날 속인 거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살로스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후 조용히 속삭였다.

?“뭐, 괜찮아. 지금까지 못 한 거, 오늘 다 하면 되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미친.

어느새 단단한 나무 벽이 내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뒤에는 단단한 나무 벽이, 그리고 앞에는 살로스의
단단한 가슴팍이. 이거 상황이 좀…….
지금까지 못 한 걸 오늘 다 하겠다는 말이 진심인지, 살로스는 거칠게 내 입안을 탐했다. 평소에는
부드럽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정말로 거칠게 입안을 헤집었다.

꽤 오랜 시간 그 행위가 이어지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좀 비켜 봐, 이러다가 진짜로 질식사하겠다고!


나는 열심히 살로스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하아, 흣…….”

마침내 살로스가 입을 떼 냈다.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봤다. 얄밉게도, 그는 숨찬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살로스가 능글맞게 웃더니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나를 잡아당겼다. 침대로 가려는 생각이겠지. 웃기지 마.


내가 갈 것 같냐.

내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버티자 살로스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잠시 후, 그는


크게 웃음을 터드렸다. 뭐야, 왜 웃어.

?“알겠어. 여기서 하자는 거지?”

그러더니 나를 들어 올려 딱딱한 나무 책상 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아,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살로스의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는 빠르게 내 등 뒤에 있는 지퍼를 내렸다. 옷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가슴이 드러나고 말았다.

?“나, 수녀님이 거짓말해서 기분이 좀 안 좋거든. 오늘은 좀 아플지도 몰라.”

??“평소에도 아팠는, 아윽!”

살로스가 이로 세게 내 가슴을 깨물었다.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하자 내 가슴 위에는 붉은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내가 입고 있던 원피스는 정강이 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지 않은 길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살로스의 손이 내


아래에 파고들자 어느새 원피스는 내 허리까지 올라오게 됐다.

?“응, 읏…….”

아래에 손가락이 들어갔을 뿐인데 입에서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원래 내 몸이 이렇게까지 민감했었나,


생각하며 살로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아, 이놈 짓이구나.
그때, 갑자기 살로스가 혀를 내어 내 아래를 핥기 시작했다.

?“히익, 더럽게 그런, 데를 왜, 아윽, 흐읏.”

그의 물건이 들어왔을 때 엄청난 쾌락이 나를 덮쳤다면, 지금은 금방이라도 교성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래가 간지러웠다. 살로스가 이런 식으로 혀로 내 아래를 핥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그의 머리를 밀어내자 그는 오히려 내 양손을 짓누르며 책상 위에 고정했다. 아아, 진짜 망했다.


살로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아래가 너무나도 간지러웠다. 살로스의 혀가 내벽을 긁기도 했고, 입구를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입술을
꾹 물고 참았으나 이내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그러자 살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수녀님 울어?”

나는 억울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건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하루도 안 쉬고 맨날


그 짓만 하니까.

하지만 나는 곧 내 행동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전 수도원에서, 그는 내 눈가가 촉촉해졌을 때


오히려 울어 보라고 한 놈이었다.

살로스의 얼굴이 천천히 기쁨으로 물들었다. 아, 안 돼.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이전에 내가 무어라고 했던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었지.

살로스가 내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입구 근처에서만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몸을 비틀 때마다 살로스가 더욱 세게 내 허리를 잡았다. 그는 내 손을 놓아 줬지만 내가 살로스를 밀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윽.”

결국 눈에서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물론 그


손마저도 곧 살로스에 의해 떨어져 나가고 말았지만.

눈을 감고 있었기에 살로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뺨에서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져 천천히 눈을 떴다. 살로스가 내 뺨에 짧게 입 맞춘 후 미소 지었다.


?“역시 수녀님은 우는 게 제일 예뻐.”

역시 몽마도 악마는 악마였다. 네가 괴롭혀서 울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버럭 따지고 싶었으나


입에서는 울음이 섞인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익, 윽.”

??“내가 괴롭혀서 그런 거지?”

끄덕끄덕. 마음속으로 살로스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해 봐, 넣어 달라고.”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겨우 눈을 뜨며 살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자신이 우위에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그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맞지만, 어딘가 불쾌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것 같냐.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살로스를 노려봤다. 살로스와 나 사이의 대치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꽤 시간이 흐르고, 살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고집만 세고.”

나는 드디어 살로스가 포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게 고집이 세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살로스가 더했다.

그는 더욱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손을 빠르게 휘젓고, 농밀하게 혀를 섞었다. 그는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넣어 달라는, 그 말이 뭐길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이 흐를 때마다 살로스는 내 눈을 핥았다. 내 눈은 그의


타액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쥐어짜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 안에는 넣어 달라는 의미보다는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살, 로스…….”

숨은 의미를 눈치챘는지 살로스가 맑게 웃었다. 그 순간 잠시 진심으로 그가 몽마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 거 넣어 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은 그에게 멈추라고 말하라며 소리 지르고 있는데, 입이 쉽사리 열리지가
않았다.

지금 내 몸은 살로스의 괴롭힘 탓에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의 살로스라면 멈추라고 말한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내 입에서 넣어 달라는 한 마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멈추라고 한다면 정말로 멈춰 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망설이자 결국 살로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넣어 줘?”

젠장, 젠장!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놈에게 넣어 달라고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짓을


원했다는 것 자체가 짜증 나고, 부끄러웠다.

스스로를 욕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갑자기 살로스가 내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물건을 넣는다는 것에 동의한 것은 나였으나,


갑자기 허벅지가 벌려지자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원래 애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넣어 주려고 했는데. 고맙지?”

살로스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진득한 액이 내 얼굴에 붙어 주욱 늘어졌다.

그리고 나는 곧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갑자기 살로스가 그의 물건을 내 아래에 세게


박아 버렸으니.

?“헉.”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래가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살로스가 한참 내 아래를 괴롭혔기에


액이 엄청나게 흘러나왔었는데, 어째서.

하지만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살로스와의 행위는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허릿짓을 하던 평소와 달리, 그는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11-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래를 힐끔 바라보자, 살로스의 붉은색 물건이 보였다.
히익. 행위 중 아래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행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색정적이었다.

그의 거친 행위 탓에 나는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신음만 뱉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살로스가 허릿짓을 멈추고 흐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살로스가 내 허벅지를 잡고 나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몸이 들리는


바람에 잠시 버둥거렸으나 살로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은 어느새 살로스의 가슴팍과 닿은 채로 꼿꼿이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나를 들어올린


거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살로스가 그대로 내 몸을 아래로 내렸다. 내 아래와 연결되어 있던 살로스의 물건이 뿌리까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악!”

그의 물건이 내 배를 가득 채운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깊게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프다는 감각만큼은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로스가 내 허벅지를 잡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 때문에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질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나도 모르게 살로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에.

아윽. 이건 좀 심했다. 진짜로 아래가 갈라질 것 같다고.

살로스는 항상 행위 중 나를 몰아붙이기는 했으나 나처럼 쾌락에 헐떡이며 이성을 잃은 적은 없었다. 매번


능글맞은 얼굴로 나를 놀릴 뿐이었지.

아프다고, 그만해 달라고 말하면 살로스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간신히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두드렸는데.

“아으, 사, 살로, 읏, 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몽롱한 표정으로 쾌락에 젖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그에게 깃들어 있던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는 악마였다. 그것도 성욕을 담당하는, 몽마. 그러니 그런 그가 이성을 잃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째서?
무언가 크게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로스도, 나도. 그리고 나는 그 변화가 결코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알베르트나 살로스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싫었던 이유는 내가 수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신앙심이 깊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고아원에서 자랐기에 자연스럽게 수녀가 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성관계를 싫어했던 이유. 내 평화롭던 일상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는 알베르트와도, 몽마인 살로스와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억지로 나를 탐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불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들의 아래에서 헐떡이는 내가 미웠다.

성관계는 싫어했으나 쾌락은 즐겼다라. 이 얼마나 모순인가.

심지어 오늘은 ‘넣어 줘’라는 살로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설마 훈련받은 개처럼 그에게
길들여진 걸까. 19 금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처럼?

안 돼, 내 평화로운 일상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제발. 신이시여. 이제 감히 쾌락을 즐기지도 않을


테니 제발 내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으면.

나는 이를 악물며 살로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허릿짓 하던 그가 마침내 몸을 잘게


떨었다. 그의 물건과 이어진 부분에서 서로 뒤섞인 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손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나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설마 이 상태에서 더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살로스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들었다. 벗어나지


못하게 나를 꽉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아니, 잠시만.

몽마가 잠을 잔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로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잠들었던


그였다.

하지만 말이 안 됐다. 악마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고, 살로스가 스스로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혹시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살로스의 눈앞에 손을 휘저었으나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숨만 쉬고 있었다.

“…….”
정말로 그는 자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성수를 뿌려서 그를 골려 주려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겉옷에 들어 있는 성수를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살로스가 나를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분한 얼굴로 한참 살로스를 노려보다가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 망할 몽마 때문에 다시 피곤한 것이었다.

나는 마구 욕설을 내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반드시 이놈에게 성수를 뿌리겠다고 결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일이 서점 휴무일이었다는 것.

다음 날. 살로스는 나보다 일찍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며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내가


깨어나자마자 빙긋 웃으며 커다란 물건을 꺼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 자던 사람한테 저 커다란 물건을 넣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나아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나아지긴 개뿔. 그는 오늘도 미친 듯이 내 안에 물건을 박았다. 도대체 살로스에게 서점 휴무일을


알려 준 마을 여자가 누구야. 찾아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

“아으…….”

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 소중한 휴일을 살로스에게 바치고 또다시 서점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허리가 이렇게 아픈데 제대로 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정도 일을 쉴까


생각도 해 봤으나, 어차피 쉬어 봤자 살로스에게 시달릴 게 분명했기에 꾸역꾸역 집을 나섰다.

“살로스, 이 망할 자식.”

주머니에 들어 있던 성수가 손끝에 닿았다. 나는 성수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세게 쥐며 결심했다.

어떻게든 살로스가 내게 질리게 만들리라고.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지경이었으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멍하니 걷다가 상대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것에 더 가까웠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나와 부딪힌 상대는 붉은색 머리칼의 남자였다. 남자는 깔끔한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 이
남자는 기사인 건가?

왜 기사가 이런 시골까지 들어왔대. 아, 제국의 마물들을 잡기 위해 황제가 기사들을 풀었다는데 그것


때문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사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왜 그러세요?”

하지만 기사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 예……. 뭐. 꼭 찾으시길 바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기사를 지나쳐 걸어갔다. 기사가 잠시 내 뒷모습을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참으로 매서운 얼굴의 기사였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

나는 내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살로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깨를 톡톡 건드려 봤으나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설마, 또 자?”

네 입으로 몽마는 안 잔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또 자고 있다고?

일을 하느라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는데 침대까지 뺏겼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심지어 이놈은 계속 집에서 놀고먹기만 했는데.

게다가 살로스는 요즘 내 식사를 뺏어 먹기 시작했다. 몽마는 사람의 정기만 먹고 산다면서, 하여간


악마는 전부 거짓말쟁이.

도대체 왜 음식을 먹는 거냐고 묻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그냥, 이라고 답했다.


하여튼 얄미워 죽겠다. 내 일상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이.

그래서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성수를 꺼냈다. 제아무리 강력한 악마라고 해도 잠을 자다가
성수를 맞으면 불쾌하기는 할 것이다.

자, 얼른 성수나 맞고 나한테 질려라. 나는 병 입구를 기울여 살로스의 등 위에 성수를 흘렸다.

그러나 성수가 살로스의 등에 닿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릴 만큼 강력한 빛이 퍼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빛이 조금 희미해지고 나서야 나는 살로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등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빛 사이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수가 닿아 흐른


부분이 갈라져 있었다. 벽이 갈라진 것처럼, 끔찍하게.

살로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곧 다시 쓰러졌다. 그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힘없이 손을


뻗었다. 마치 그 손을 잡아 달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성수 덕분에 살로스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투둑.

내게서도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천천히 내 손을 내려다보니, 내 손등도 살로스의 등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헉. 설마 물귀신 작전이라도 쓰려는 건가. 다급하게 살로스를 쳐다봤으나 당황한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지, 라고 생각한 순간 갈라진 부분이 낡은 껍질이라도 된 것처럼 툭,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딱딱하고 투명한 막 같은 것이었다.

그에 반해 살로스는 어떠한가. 등이 갈라진 부분에서 끊임없이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수도원에도 멀쩡히 들어오던 놈이라 성수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살로스가 내게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내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지더니 목소리를 쥐어짜며


중얼거렸다.

“왜, 도대체 왜…….”


성수를 뿌린 이유를 묻는 듯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로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12-

살로스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의 몸이 갈라질수록 내 몸에서 이상한 투명한 막이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나왔다.

나는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투명한 막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또 살로스가 내게 무언가 이상한 수를 써 놓은 걸까.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살로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사라졌다.

“…….”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어.

볼을 꼬집었다가 아파서 얼른 손을 떼어냈다. 꿈이 아니었다. 5 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살로스가, 드디어


사라졌다. 그것도 고작 성수 몇 방울로!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살로스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5 년
동안의 괴롭힘이 겨우 성수 따위로 사라진 것이었다.

아, 드디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집에 돌아와도 귀찮게 구는 몽마가 없고, 강제적인 성관계도 없다.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5 년간 몹쓸 몸정이라도 들었는지 잠시 허전함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허전함보다는 해방감이 훨씬


더 컸다.

어둠 속의 달빛은 유난히 밝았다. 어두운 은빛 달이 잠시 살로스를 연상시켰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5 년 전에는 알베르트에게서 벗어났고,


오늘은 살로스에게서 벗어났다.

왜 살로스가 성수 따위에 무력하게 패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미소


지으며 달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약 5 년 만에 처음으로 말이다. 나는 미소를 얼굴에 걸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아아, 이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살로스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찾았습니다.”

코르넬이 저의 가주를 향해 무릎 꿇으며 말했다. 그가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낮추자 붉은 머리카락이


그를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

낮임에도 불구하고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독한 술 냄새. 코르넬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알베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해 몸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휘청거렸다. 알베르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5 년. 자그마치 5 년이었다. 작은 새가 새장을 벗어나 떠나간 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스텔라, 그녀는 마치 마약 같았다. 가까이할수록 기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숨이 막혔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다가갔는데, 그녀 때문에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이리도 미쳐서
살고 있었다. 5 년 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알베르트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옅은 주황빛의 액체가 잔 안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코르넬은 알베르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찾기 위해


암흑가에 스텔라에 대한 정보를 풀었었다. 그녀를 찾는 자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하며.

처음에는 돈에 눈이 멀어 무작정 그녀를 봤다며 거짓을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알베르트는 활짝 웃으며 제보자를 찾아갔다. 정확히는 제보자가 찾았을 스텔라를
찾아간 것이었지만.

그리고 제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알베르트는 코르넬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코르넬. 사람 얼굴 하나 구분하지 못한 저 두 눈을 뽑고 거짓을 말한 저 혀를 베어 버려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으나 그때 알베르트의 얼굴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코르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제보자의 눈을 뽑고 혀를 베었다.

스텔라를 봤다고 말하는 사기꾼들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목숨보다 귀하랴.
하지만 코르넬도 의문스럽기는 했다. 5 년 동안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녀였다. 이전에도 스텔라가 살던
마을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스텔라를 찾은 것은 바로 전날이었다. 그날, 코르넬은 같은 마을을 다섯 번 정도 뒤졌기에 굉장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는 터덜터덜 마을을 걷던 중 한 여자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르넬은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감. 수년 동안 기사로서 살며 쌓았던 감이 그에게 속삭였다. 이 여자는 어딘가 수상하다고.

하지만 여자는 스텔라가 아니었다. 알베르트를 모시며 종종 먼발치에서 스텔라의 얼굴을 봤었던 그였다.
적어도 그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이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자가 스텔라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고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에 빠져 있던 그는, 무언가 발견했다.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하늘 아래에 서 있던 한 여자. 낮에 그와 부딪혔던 여자였다.

여자는 달빛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환하게.

하지만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코르넬은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쳐다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바로 그가 5 년 동안 찾아 헤매던 스텔라였다. 코르넬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5 년 전 먼발치에서 봤던 스텔라의 얼굴만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다.

여자는 스텔라가 분명했다. 어째서 낮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당장 알베르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잠시 전령새를 보낼까 고민했으나 새보다는 직접 가는 것이 빠르리라고 판단했다. 코르넬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말에 올라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최대한 빨리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했건만,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정하기만 했다.

?
그의 말은 마치 네가 본 것이 스텔라가 아니라면, 이전의 그 사기꾼들처럼 눈을 뽑아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코르넬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자신 있게 답했다.

“분명 스텔라였습니다.”

“…….”

여전히 알베르트는 코르넬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 보도록 하지.”

기대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말투였다.

스텔라를 찾았다는 제보를 처음 받았을 때, 알베르트는 값비싼 텔레포트를 이용해 그녀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이제는 일말의 기대도 남지 않은 건지, 그는 평범한 마차를 이용했다.

수년간 알베르트에게 충성을 약속해 왔던 코르넬이었다. 그런 그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코르넬은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주인은 망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스텔라, 그녀가 필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안을 때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스텔라가 필요하다니.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덜컹덜컹.

마차는 포장되지 않은 거친 길을 천천히 달렸다. 알베르트는 불편할 것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코르넬은 말을 타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스텔라는 모니카 공작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스텔라가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하루가 지난 깊은 밤이었다.

코르넬은 스텔라가 사는 작은 오두막으로 알베르트를 안내했다. 알베르트는 코르넬이 나무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여전히 심드렁했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나온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베르트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

셀 수 없이 그녀를 안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치 하늘의


별이 그에게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살로스가 없으니 확실히 인생이 즐거웠다. 나는 아무런 간섭 없이 늦은 밤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었다.

“한 잔 더!”

“아가씨, 제발 그만 좀 마셔! 가게 술의 절반을 아가씨가 마셨어!”

하지만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마셔 보는 술이었다. 어렸을 때는 나이가 어려서 마시지 못했고,


수녀일 때는 성직자라는 이유로 마시지 못했고 최근까지는 살로스 때문에 마시지 못했었다.

아아, 술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료였나. 나는 몽롱한 기분을 즐기며 또다시 잔을 기울였다. 가게 술의


절반을 내가 마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내 옆에는 술잔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가씨. 걱정돼서 그래. 술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마시면 몸이 망가진다니까?”

“아, 거. 하루쯤은 괜찮잖습니까!”

“이 아가씨가 정말!”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이마를 턱 짚었다. 나는 그녀를 마주 보며 큭큭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쫓아내기라도 하겠어?

그리고 이쯤에서 또 옛말을 떠올려 봐야겠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나는 정말로 쫓겨났다. 젠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술을 안 주냐고!
나는 잠시 술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망했다.

으으. 시간에 맞춰서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나는 걱정을 가득 안고 침대에 누웠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한 탓에, 그리고 술기운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의식이 흐려질랑 말랑.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떤 미친놈이 예의 없이 문을 두드린담. 나는 툴툴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술기운은 전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13-

내 앞에는 놀란 표정의 알베르트가 서 있었다.

“……스텔라?”

?
나는 멍하니 알베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깨끗하고 생기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둡고 수척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당신은 여주랑 행복하게 변태 짓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네가 여기에


있는데?

알베르트도 나와 같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만 있다가는 또 5 년 전의 관계가 되풀이될 수도 있었다.


단호하게 이 관계를 잘라 내는 거다, 단호하게.

“돌아가세요.”

“…….”

그러나 당연하게도 알베르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5 년 만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길래


나를 다시 찾아왔나. 나는 이제야 겨우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는데.

문전박대라도 당해야 돌아가려나.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알베르트는 꽤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문고리를 잡고 세게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때, 알베르트가 빠르게 틈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나무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가격했다. 뒤에서 어느 기사가 다급하게 알베르트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잠시만. 기사라고?

문틈 사이로 붉은 머리의 기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알베르트와 그 기사를 번갈아 봤다. 아아,
그렇구나.

코르넬 스테인. 붉은 머리칼을 가진 매서운 기사. 오직 알베르트에게만 충성하는 공작의 충실한 개.


이전에 부딪혔던 그 남자가 바로 코르넬, 그였던 것이다.

멍청하게도 나는 그가 코르넬일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시골에 기사가 올 리가 없는데,


참으로 멍청했다.

“지금까지 절 찾으셨어요?”

내 질문을 들은 알베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5 년 전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원래 이렇게


차분한 사람이었나. 나를 보면 항상 능글맞은 미소부터 짓던 사람이었는데.

“공작님 약혼녀는요?”
약혼녀. 소설의 여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알베르트는 여주와 만나 약혼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없습니다. 스텔라, 내게 필요한 건 당신뿐이에요.”

“그게 무슨…….”

“같이 가자는 말 따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해요. 선택권은 주지 않겠습니다.”

항상 능글맞고 장난스럽던 알베르트의 눈빛은 이제 지독하게 차가웠다.

하. 나는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뱉었다. 5 년 전과는 달라 보이기는 개뿔. 이전보다 조금 더 차분해졌을


뿐, 강압적인 것은 똑같았다.

“싫어요.”

이래 봬도 내가, 어? 몽마까지 퇴치한 사람이라고. 나는 패기 넘치게 거부의 대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알베르트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아니, 굳었다기보다는 분노한 것처럼 딱딱해졌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겠다.

“선택권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사람도 아닌가요? 제 인권은요?”


아. 노예도 있는 세상에서 인권이라는 말은 조금 많이 생소하려나. 아니나 다를까, 알베르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여튼 안 갑니다, 안 가요. 제가 공작님을 따라가서 무슨 득을 본다고.”

알베르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심히 나를 쳐다봤다.

“거부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문틈 사이에 손을 넣어 세게 당겼다. 무거운 나무문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그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열렸다.

“코르넬.”

“예, 가주님.”

“내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대기해라.”

코르넬이 딱딱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알베르트는 코르넬이 마차 옆에 서서 대기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불길했다. 나는 5 년 전 그의 행실을 떠올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론 알베르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 바람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됐지만.

“이 집에 얼마나 많은 남자를 들였습니까?”

남자는커녕 여자도 초대한 적이 없는 집이었다. 유일하게 함께 살던 생명체는 살로스뿐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알베르트의 저 매서운 얼굴을 마주하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잘게 몸을 떨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알베르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두렵습니까?”

“…….”

“오히려 저를 두려워하는 게 나을 것도 같습니다.”

알베르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왼쪽 뺨을 한 손에 쥐더니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두려우면, 적어도 나를 농락하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입은 알베르트에게 삼켜졌다. 그는 내 어깨를 세게 쥐고 거칠게 혀를 움직였다.
혀와 혀가 서로 농밀하게 얽혔다.

허억. 숨이 막혔다. 두려움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제대로 호흡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와 입을 맞댄 상태로는 숨을 쉴 수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의 가슴팍을


아무리 두드려도 그는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나를 옭아맸다.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국 나는 발버둥 치다가 세게 그의 혀를 깨물고 말았다. 혀를 통해 비릿한 피의 향이 느껴졌다.

마침내 알베르트가 천천히 내게서 입을 떼어냈다. 천사 같은 백발에, 황금안. 그리고 입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

고통이 상당할 터인데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는 빙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숨을 조이던 그 섬뜩한 얼굴이, 갑자기 예쁘게,


아름답게 웃었다.

그는 나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나를 침대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푹신한 이불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으나


불쾌했다.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도 명확해서.

알베르트가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단정한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크라바트는 무참히 구겨진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기쁩니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당신을 탐하는 게 나라서.”

혹시 공작님은 조울증에 걸리셨나요? 어떻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으면서 이제


와서 웃으면서 기쁘다고 말할 수가 있지?

나는 탈출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공작이다. 물론 힘만 보면


기사가 되고도 남았을 것 같지만.

그는 전문적인 기사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내가 빠르게 달려 인파 속으로 도망친다면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마차를 지키고 있는 코르넬이었다.

코르넬은 ‘공작의 충실한 개’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였다. 황제도 아니고,
오직 알베르트에게만 충성하는 기사.

집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금방 코르넬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어떡해야 하지, 도대체 어떡해야 하지.

?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알베르트는 빠르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 맨 아래에 위치한 단추가 실에 걸려
풀리지 않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트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코르넬이 서 있는 곳은 출입문이 있는 곳이었다. 뒤쪽의 큰 창문을 이용해서 빠져나간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좋아. 하는 거다. 나는 내 아래에 깔려 있던 이불을 힘껏 알베르트에게 집어 던진 후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엥……?”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세게 창문을 당겨 봤지만 창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잠시만. 이거 왜 이래.

“…….”

창문에 걸쇠가 걸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걸쇠를 바라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수녀님. 창문에 잠금장치가 없어. 설치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놔둬. 귀찮게 뭘 설치하고 자시고야.]

나는 당시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느라 바빴기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살로스가 내게 무어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그럼 걸쇠라도 걸어 놓는다?]

[그러든가.]

이런 망할. 그때 살로스의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애초에 그놈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마 살로스가 여전히 내 앞에 있었으면 이미 얼굴에 주먹을 몇 번 날렸을 것이다. 젠장. 성수를 뿌리기
전에 몇 대 때릴 걸 그랬다.

“…….”

등 뒤에서 알베르트가 차분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장난은 즐거우셨습니까?”

“어, 그러니까, 공작님.”

“말씀하세요.”

“미안합니다. 바닥에 머리라도 박을까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알베르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부디 그의 웃는 표정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기를


빌었다.

알베르트는 다시 한번 생글 웃었다. 그의 예쁜 미소는 아무래도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미소에 대한 거짓 여부가 아니었다.

“아니요, 바닥에 머리를 박으실 필요는 없고. 제 걸 당신 아래에 박으면 될 것 같네요.”

히익. 나는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고 나오는 수위 높은 말을 듣고 경악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내 구겨진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바로 앞에 왔을


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예쁘게 웃는 얼굴이라도 그렇게 말없이 빤히 보고만 있으면
조금 무섭습니다만, 공작님.
“누우세요.”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침대 위에 누웠다. 어흐흑, 말 잘 들었으니까 제발 그가 이 행위를 빨리


끝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내가 순한 양처럼 굴자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아, 저 능글맞은 표정 진짜 얄밉다. 진짜, 진심으로.

내 위에서 엎어져 나를 끌어안고 있던 알베르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 어깨와 허리를 잡고 내


몸을 뒤집었다.

세상이 갑자기 뒤집힌 탓에 혼란스러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나는


알베르트의 무릎 위에 엎드린 상태였다. 마치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맞는 아이처럼.

나는 당황하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부림을 멈춘 것은 내 엉덩이를 세게 내리친 알베르트의


손길이었다.

“아윽!”
새된 비명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알베르트가 난데없이 나를
때렸다고? 갑자기?

-14-

“공작님, 대체 무슨, 아, 읏.”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또다시 엉덩이로 손이 날아왔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보통 SM 물에서나 볼 수 있었던 행위를, 알베르트가 내게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손이 다시 날아와 엉덩이를 가격했다. 이런 미친.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이불에 얼굴을 푹 묻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잠옷은 굉장히 얇은 재질이었다. 알베르트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 냈으니 엉덩이는 분명


붉어졌을 테다.

이러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엄청 아프기까지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겨우 입을 열어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미친. 공작님, 제발 그만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을 들은 알베르트가 마침내 행동을 멈췄다.

“그럼 이제 이런 장난치지 않을 겁니까?”

장난이 아니라 필사적인 탈출 시도였는데요.

하지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계속하여 내 엉덩이를 갈길 것만


같았으니.

나는 알베르트가 팔에 힘을 빼길래 이제 나를 놓아주려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놓아주기는커녕, 잠옷을 들어 올려 속옷 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이 입구 주변을 빠르게 문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구 주변만 배회하던 그의 손가락 한 개가


아래로 들어왔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내 아래에 손가락을 넣은 알베르트가 잠시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천천히 아래를 헤집었다.

“했습니까?”

“네, 네?”

“다른 남자와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나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래, 하기는 했다. 근데 그게 사람이 아니라
몽마였을 뿐이지.

그러나 알베르트는 내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손가락 여러 개를 한 번에 집어넣었다.

“히, 익.”

“즐거우셨습니까?”

아, 아니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즐겁지는 않았으나 쾌락에 젖어 헐떡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걸 말했다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라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는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내가 다른 이와


관계를 맺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일단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시는 게, 아윽!”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네가 나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변명을 왜 해! 그냥 이야기를 들어 보라고 했을


뿐인데 알베르트가 거칠게 내 몸을 뒤집었다.

“잠시, 잠시만요. 아, 진짜 공작님!”

그가 바지 버클을 끄르자 그 사이로 그의 커다란 물건이 튀어나왔다.

……5 년 동안 더 커진 것 같은데 제발 내 착각이길 빌었다. 그보다 설마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았으면서 그


흉기를 내 안에 넣으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앞으로 내 좌우명은 ‘설마가 사람 잡는다’로 정하겠다. 알베르트는 내 아래를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은


채로 그 흉기 같은 물건을 그대로 박았다. 나는 아프다고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뱉었다.

“아악, 읏, 하, 윽.”

어쩌다가 소설 속에 들어와서 별 체험을 다 해 보는구나. 속박, SM, 그리고 후배위까지. 전부 알베르트


때문에 체험하게 된 것들이었다.

자세 때문에 그의 물건이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배를 가득 채우던 고통은 금세 쾌락으로


변화했다.

다리와 팔 힘이 풀리는 바람에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는데, 그때마다 알베르트가 내 허리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뒤 다시 세게 박았다.
“스, 텔라. 윽.”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꺼운 물건이 액과 뒤섞여 찔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깊게 들어왔다.

내 등에 무언가 축축한 것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방금 뭐였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등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알베르트가 내 어깨를 세게 깨문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축축했던 무언가가 그의 입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어깨에 잇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알베르트가 손으로 천천히 내 어깨를 쓸었다. 아,
따가워. 내가 몸을 잘게 떨자 알베르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알베르트가 웃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 조금 많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난 5 년 동안 살로스와 관계를 맺으며 몸이 민감해진 것이었다.

아, 젠장. 알베르트가 물건을 세게 박을 때마다 입에서는 미친 듯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엎드려서 손으로


입을 막아 보기도 했으나 알베르트가 내 등에 가슴을 가까이 붙인 채로 내 입을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알베르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 부근에서


느껴졌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5 년…… 동안 보고 싶었습니다.”

알베르트가 다시 느릿한 허릿짓을 시작했다. 이전처럼 쾌락이 밀려올 정도는 아니었으나, 정신을 헤집어
놓기에는 충분한 움직임이었다.

그나저나 5 년 동안 보고 싶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그러고 보니 아까 그가 무어라고 말했던가. 그는 약혼자가 필요 없다고 말했었다.

설마 여주를 만나지 않은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말도 안 돼. 소설의


전개가 바뀌었다고?

소설의 전개에 따르면 알베르트는 3 년 전쯤 수도원에서 여주를 만났어야 했다. 하지만 만약, 만약이지만
알베르트가 나를 그리워했다면.

그리워한다니. 내가 생각해 놓고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알베르트. 그가 누구인가. 그는 소설


최고의 난봉꾼이었다.

매일 에스코트하는 여자가 바뀌던 그가 겨우 한 여자에게 정착하게 된 것은 전부 여주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그리워할 리가 없는데.

그런데 왜 알베르트의 목소리가 저렇게 애절한 거지. 애초에 당신네랑 나랑 무슨 사이였다고?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았나?

일단 대화를 해 봐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강제적이지만 그와 살을


맞댔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정보를 제외하면 나는 알베르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알베르트는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 그를 불렀으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읏, 공, 작님, 흐.”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에 내 입에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음에 묻혀 목소리가 제대로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다.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행동일 뿐이었건만, 내 손에


덥석 잡힌 것은.
?

“…….”

그의 축축한 물건이었다.

히익.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져 본 건 처음이었다. 물론 고의성이 담긴 행동이 아니라 실수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그런데 내 손에 그의 물건이 닿은 후부터 알베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베르트를 올려다봤다. 그 또한 꽤나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당황한 표정을 지워 버리고 눈꼬리를 휘며 예쁘게 웃었다. 아, 젠장. 몹쓸 남자


주인공 버프. 이런 상황에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니.

“제 것을 그렇게나 원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아니, 아니요. 안 원하는데요.”

하지만 알베르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멋대로 내 손을 잡고 그의 물건에 가져다 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덕에 그의 물건은 내 아래에서 빠져나갔다. 대신 내


손에는 힘줄이 솟아 있는 알베르트의 두꺼운 물건이 자리 잡았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촉 탓에 내 얼굴은 와그작 구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와 대비되게, 알베르트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져 주십시오, 부드럽게.”

어우, 싫은데요. 손을 힘껏 빼려고 했으나 내 손은 알베르트에게 세게 붙잡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알베르트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물건에 솟아 있는 힘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내 손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며 낮게 신음했다. 그럴 거면 그냥 네 손으로 하지, 뭐하러


내 손으로 하십니까…….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내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여전히 찡그린 채로 아래에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살폈다.

하여간 이놈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하다가 갑자기 빼고는 혼자 자위하는 놈이 어딨어. 이런 놈이 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남자는 얼굴과 커다란 물건만 있으면 되는 건가.
그나저나 얼굴이 예뻐서 그런지 혼자서 헉헉대며 자위하고 있는 모습이 퍽 색정적이었다. 제발 그 얼굴을
좋은 곳에 쓰라고, 나한테 이런 짓이나 하지 말고.

내 손으로 자신의 물건을 쓰다듬던 알베르트가 갑자기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위아래로 질척거리는 야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 아래에서 물건을 뺐다고 해서 끝났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나 보다. 그는 수차례 더 손을


움직이더니 이내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물건에서 흘러나온 걸쭉한 액체가 내 손에 범벅됐다.

“……아, 진짜.”

나는 손에 묻은 액을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알베르트가 내 손을 맞잡더니 이내 액이 잔뜩 묻은


손으로 내 뺨을 쥐었다.

윽. 질척거리는 액이 내 뺨에 엉겨 붙었다. 냄새도, 감촉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알베르트가 다시 입구에 물건의 끝을 맞추더니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알베르트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여자들이 싫어하지 않던가요?”

명백한 빈정거림이었다. 묻는다기보다는, 그저 시비를 걸기 위한 질문.

하지만 알베르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애초에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여기 있잖아요.”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그래도 관계 중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놈을 싫어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하지만 나는 곧 신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알베르트가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물건을 쳐올렸으니까.

-15-

“그런가요? 제 눈에는 당신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공작님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좀 노력해 보세요.”

차라리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보였던 수척한 얼굴의 알베르트가 나았다. 지금은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능글거리는 말을 뱉는 것은 5 년 전과 똑같았다.

이런 관계가 싫어서 도망친 건데, 왜 다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잠시만, 하윽! 잠시만요. 일단 대화 좀, 읏.”

제가 원하는 건 육체의 대화가 아닌데요, 공작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트는 내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젠장, 도대체 소설 전개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 중 가장 분했던 것은, 내가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알베르트는 멀쩡해 보였다는


것이다. 역시 남주 버프를 받은 사람이라고 놀라워해야 하는 걸까.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알베르트의 품에 안긴 채로 마차 안에 타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일어나셨습니까?”

왜 그쪽이 마치 자고 일어난 애인을 살피는 남자 같은 말투를 쓰고 있죠. 괜히 기분이 불쾌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마차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 마차는 아마 모니카 공작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마차의 도착지를 알고 있음에도 나는 확인차 물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모니카 공작저로 가고 있습니다.”

잠시만. 그럼 내가 지금까지 모았던 돈, 그리고 내가 힘들게 마련했던 마이 스윗 홈은?

“제집은요? 그리고 또, 제가 모았던 돈은요?”

?
알베르트가 나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가 지금까지 피땀 흘려 벌었던
돈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공작저에 도착하면 원하는 건 전부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려 주세요.”

“글쎄, 그건 좀 곤란한데요.”

“전부 들어 준다면서요.”

알베르트는 대답 대신 내 손등에 입을 가져가 짧게 입 맞췄다. 애초에 이건 납치잖아, 이 미친 공작


같으니라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정말, 진심으로 알베르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기절시킨 뒤 마차를 돌릴까 고민했다.


높으신 귀족 나리께 고소당해 목이 잘릴까 봐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나저나 대체 언제까지 나를 끌어안고 있으려는 거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엉덩이 근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알베르트의 물건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알베르트는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아, 나


이거 뭔지 알아. 개미지옥이잖아.
정말로 개미지옥 같았다. 내가 버둥거릴수록 알베르트의 품 안으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움직이면서 알베르트의 물건이 내 엉덩이에 몇 번 스치자 그것이 점점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

그의 물건이 벌떡 선 것이 느껴지자 나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알베르트가


질척한 손길로 내 허리를 쓸어내렸다.

“……하지 마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알베르트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되레 질문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알베르트와의 관계 탓에 여전히 허리가 쓰라렸다.


그것은 즉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런데 어째서 알베르트의 물건은 아직도 힘이 넘친다는 듯이 꼿꼿이 서 있는 걸까. 나는 그의 아래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
내 허리를 주무르던 그의 손이 어느새 내 엉덩이 부근으로 내려왔다. 그는 천천히 내 엉덩이를 쓰다듬더니
이내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아래에 파고들었다.

“흐…… 으. 하지, 말라니까요.”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알베르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웃음 소리를 냈다.

내가 그의 손길에 반응할수록 그는 더욱 농밀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벽을 더듬는 손가락의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알베르트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탓에 알베르트의 물건이 바로 등 뒤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신음만 겨우 뱉는 사이, 어느새 내 치맛자락은 알베르트의 손에 붙잡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었다.

그때 철컥, 하며 벨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 소리를 외면했다.
아, 아니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환청이다, 환청.

하지만 물건의 끝부분이 입구에 닿자 더 이상 그 소리를 부정할 수 없었다. 내 허벅지를 잡고 나를


들어올린 알베르트가 천천히 내 몸을 아래로 내렸다.
?

도대체 뭐야, 이 상황은.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다. 물론 내 발버둥 탓에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말았다. 그의 물건이 절반 정도 내 아래에 박혔다.

“아윽!”

“그러니까 가만히…….”

덜컹!

알베르트가 무어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커다란 돌이라도 밟은 건지 마차는 잠시


휘청거리다니 다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 으…….”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전의 충격 때문에 알베르트의 물건이 끝까지 내 안에 박힌


것이었다.
알베르트도 내 허리를 쥔 채로 힘겹게 호흡하고 있었다. 아윽. 아래가 찢어진 건 아닌지 걱정된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알베르트는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했다.

그의 물건이 조금 빠져나갔다가 다시 깊게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뱃속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알베르트가 내 가슴을 손에 쥐고 가볍게 주물렀다. 나는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쾌락에 시달리며


눈을 꾹 감았다. 자꾸만 흔들리는 시야 때문에 어지러웠다.

행위가 반복되자 건조하던 아래에서 액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액은 다리를 타고 흘러 내 치맛자락과


알베르트의 바지를 적셨다.

숨을 몰아쉬며 물건을 쳐올리던 그가 갑자기 내 뺨을 쥐고 당겼다. 그가 내게 입 맞추려는 것 같았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리자 그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알베르트는 손으로 내 입을 억지로


벌리며 혀를 집어넣었다.

자세가 불편했던 것인지, 알베르트는 내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도록 했다. 그의 혀와 얽힐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손으로 내 귀를 막자 그 소리가 더욱 생생해졌다.
?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5 년 전에는 관계를 맺을 때 이렇게 흥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몸이 이렇게 변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로스 때문이었다. 그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자, 알베르트가 세게 허리를


들썩이며 속삭였다.

“내게, 집중하세요.”

나는 힘이 풀려 그대로 알베르트의 가슴팍에 기댔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더니 내 허리를 쥐고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짐승 같은 행위는 마차가 수 시간을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알베르트가 내 가슴을 깨무는 바람에,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어도 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일주일. 끌려오다시피 공작저에 와서 나가지도 못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알베르트의 저택이자 모니카 공작저는 내가 5 년 전 머무르던 수도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강제로든 자의로든, 오랜만에 이곳에 왔으니 애니카를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안 됩니다.”

알베르트는 단호한 표정으로 안 된다고 답했다.

“왜요?”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물건인 줄 아나. 왜 못 나가게 하는 건데?

그러자 알베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내 옆을 팔로 가로막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다고, 당신이 나만 보도록 만들고 싶다고.”

“……설마 그게 진심일 줄은 몰랐죠.”


이 소설이 집착물이었던가.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여주랑 변태 짓이나 하고 있어야 할 놈이 왜 나하고
이러고 있냐고.

공작저에 온 후 몇 번이나 알베르트에게 정말, 정말로 약혼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없다고 답했다. 공작저의 사용인들 또한 이렇게 답했다.

공작님은 약혼은커녕 5 년 동안 저택에 여자를 들이신 적도 없다고.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절망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내가 여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아닐까.

지금까지는 소설의 전개가 바뀔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소설 속


스텔라와 다르게 행동했다면 전개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신이 나만 보게 하고 싶다느니, 5 년간 당신만 찾았다느니.

이런 말을 보통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하지는 않잖아. 나는 결국 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받아들이는 거고, 수도원에 가고 싶은 건 별도의 문제였다. 애니카 보고


싶단 말이야, 애니카.

?
“친구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남자입니까?”

“아뇨, 여자인데요.”

“그렇다면 시녀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없을 때만 말동무로 쓰시면 괜찮을 것 같군요.”

잠시만, 뭔 개소리야. 갑자기 시녀라니. 나는 애니카를 친구로서 보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녀로 만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수도원에 가게 해 달라는 뜻이라고요.”

그러자 알베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가 술집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성한 수도원에
간다는데 도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16-

“정말 친구만 만나고 오실 겁니까?”

나는 애니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5 년간 연락 한 통 없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하지만 그다음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혹시 도망칠 수도 있으니.”

물론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동행이라니. 말도 안 됐다.

“더 많은 걸 배워 보고 싶다고 하면서 수도원을 떠났는데 공작님이랑 같이 수도원을 찾아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내가 흥분하며 말하자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답했다.

“돈 많고 잘생긴 공작과 눈이 맞아서 수도원을 떠났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문제예요! 제발 제 평판을 좀 생각해 주시라고요.”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5 년 전에 수도원 중앙에서 당신과 섹스하고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왔겠죠.”

아, 글렀다. 말이 통하지가 않는다.

결국 나는 알베르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 내게 그와의 관계를


묻는다면 어쩌다가 후견인으로 이어진 인연일 뿐이라고 둘러대기로 계획도 세웠다.
***

덜컹거리는 소음 없이 마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심하게 덜컹거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전의 마차와는


다르게 말이다.

알베르트도 이전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마차는 외형부터 이전 마차와 차이가
있었다.

유리창을 장식한 반짝이는 보석들, 그리고 섬세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마차를 이런 비싼 것들로 꾸밀 수 있는 걸까.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마차를 구경하자 알베르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제 옆에만 있겠다고 약속하시면 전부 당신의 것이 될 텐데, 어떻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구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진짜 나를 물건이나 새장 속 새 정도로 보나


보다.

나는 알베르트가 또 저번처럼 마차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히 그를 살폈다.


다행히 마차가 수도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백색의 석조로 지어진 수도원이 보였다. 자그마치 5 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알베르트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내게 손을 뻗었다. 아마 잡고 내리라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손을 피해 옆쪽으로 내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알베르트가 내 뺨을 쥐고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다.

“아, 알겠어요. 손 잡고 내릴게요!”

내가 그의 가슴팍을 밀며 다급하게 외치자 그제서야 알베르트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수도원 정문을 지나쳐 정원을 따라 걷는데, 왜인지 자꾸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옆쪽을 바라보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당신을 이 정원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

그 말을 듣고 나는 알베르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우리는 정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원에서 알베르트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날 정원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 표정과 대비되게 알베르트는 마치 그 기억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스텔라?”

애니카였다. 5 년 만에 보는 애니카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뺨을 채우고 있던 주근깨들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고, 얼굴형은 가름해졌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내게 빠르게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동안 왜 편지 안 보냈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아, 그게…….”
“갑자기 떠나더니, 갑자기 돌아오고! 이제 어디 갈 생각, 하지도 마!”

무어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애니카가 빠르게 나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나는 조그맣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알베르트도 내 편의를 봐 준 것인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애니카의 훌쩍임이 멈출 때까지 계속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동안 훌쩍이며 눈물로 내 어깨를


적시던 애니카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5 년 만에 돌아왔는데 공작님과 함께라니.”

생각해 보니 그녀는 5 년 전에도 틈만 나면 알베르트와 나를 엮으려고 했었다. 저 표정만 봐도 애니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감동적인 만남이 5 분도 지속되지 않다니. 역시 애니카 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애니카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살
건들기 시작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말해 봐. 대체 뭐야? 공작님이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거, 개소리도 정도껏이지. 무어라고 따지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내 오른손이 누군가에게 세게


잡혔다.

알베르트였다. 그는 예쁘게 웃으며 내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애니카에게


인사했다.

“헉.”

애니카는 그 상태로 굳어 멍하니 알베르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애니카는 알베르트의 얼굴을 봐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듯 말하곤 했었다. 공작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라고 했었는데, 그 한이 드디어 풀렸나 보다.

한참 알베르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애니카가 드디어 입을 열고 폭포처럼 말을 뱉기 시작했다.


?

“어, 안녕하세요 공작님. 일단 전 애니카라고 해요. 공작님, 진짜 스텔라랑 결혼하실 거예요? 예전부터
보통 사이는 아닐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는데, 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결혼, 하실 거죠?
하실 거죠?”

저기, 애니카? 너 오늘 알베르트랑 처음 얼굴 마주한 거 아니었니? 애니카는 마치 알베르트가 십년지기


친구인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애니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 오른손과 연결된 그의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결혼, 말씀이신가요.”

그러더니 그대로 내 손을 그의 입술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하면 좋겠지만 꼭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스텔라는 제 것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애니카가 어머, 어머, 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애니카는 아마 알베르트의 말이 농담을 빙자한 사랑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은 내 감금 라이프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저택에만 갇혀 있다가 겨우 나온 거란


말이야.

물론 영원히 얌전하게 그의 옆에 머물러 줄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다.


그가 선물한 보석들을 챙겨서 말이다.

……다만 공작저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그 기회가 언제가 될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니카는 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몇


번이고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외치며 거부했으나 결국 알베르트의 손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알베르트를 후견인이라고 둘러대려는 계획도 세웠는데 제대로 실행하지도 못했다. 젠장.

알베르트가 향하는 위치를 보니 마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애니카도 만났는데 어딘가 찝찝했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노아.”

불현듯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5 년 전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났었다.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자고 있던 어린 소년.

?
“노아를 아직 못 만났어요. 노아를 만나고 갈래요.”

“노아?”

알베르트가 그 이름을 발음하고 되뇌더니 이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항상 싱긋 웃고 있거나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는데,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갔다 와도 돼요?”

내가 조심히 묻자 알베르트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친구만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베르트가 날카롭게 말했으나 나는 그의 입에서 긍정의 답변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마치 정말로 그의 소유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치를 보고,


그의 허락을 기다린다.
내가 알베르트의 노예인 것도 아닌데 왜 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지?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수도원을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서 알베르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노아를 찾기 위해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다른 익숙한 얼굴들도 꽤나 발견했다. 그들은 내게 반갑게


인사했으나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건 노아였다.

나는 대충 그들에게 인사한 뒤 다시 뛰었다.

보통 노아가 어디에 자주 있었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정답을 알 수는 없었다. 보통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어쩌면 노아는 더 이상 수도원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까 수도원을 떠났을지도.

그렇게나 나를 잘 따랐었는데. 이제 만날 수 없는 걸까. 괜히 서운해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

순간 알베르트가 벌써 쫓아온 건가, 했으나 밀려오는 시원한 향취에서 그가 아님을 확신했다.


알베르트에게서는 조금 더 귀족적인 향이 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노아?”

흑발에 맑은 벽안. 나를 끌어안은 것은 노아였다.

나보다 한참 작던 소년은 이제 고개를 들어야만 시선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깜짝이야. 얘 왜


이렇게 잘 자랐어.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훤칠하게 자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가 노아라는 것을 몰랐다면 진짜로 설��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마주치자 노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놈의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오묘한 미소를 마주하자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아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고지식한 인사나 뱉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의 말투는 5 년 전과 같이 다정했다. 걱정이 담긴 듯한 말투는 변함없었으나 성인 남성이 된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서늘했다.

-17-

설마 5 년 전에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나서 화난 건가. 조심히 노아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는 그저 예쁘게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려는 거지. 나를 부쩍 잘 따랐으니 반가운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노아, 반가운 건 알겠는데 일단 좀 놓고 대화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노아의 팔을 떼어냈다. 그러자 노아는 순순히 내게서 멀어졌다.

그런데 이걸 순순히 멀어졌다고 볼 수 있나.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도 내 소매 끝을 잡고 있었다.

“난 누나 되게 보고 싶었는데.”

“…….”
“누나는 아니었어?”

아, 아니. 당연히 보고 싶었는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노아가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공작을 사랑해? 그래서 함께 돌아온 거야?”

도대체 어떻게 착각을 하면 내가 알베르트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부정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알베르트의 귀족적인 향이 밀려왔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더니, 시야가 어두워졌다. 알베르트가 내 눈을 덮은 채로


속삭였다.

“스텔라.”

“아.”

“지금 내게서 도망친 겁니까? 내 말을 무시하고?”

알베르트가 내 눈을 가린 탓에 내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 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
내 눈을 덮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낸 것은 노아였다. 노아가 알베르트의 손을 떼어내자 알베르트가 불쾌한
듯 얼굴을 구겼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노아가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하자 알베르트는 오히려 혐오 가득한 얼굴로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니,
내려다봤다는 말은 둘의 키가 비슷하니 옳지 않은 말이겠다.

알베르트는 귀족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에 맞서 순박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노아를 노려보던 알베르트는 마침내 혀를 차며 매서운 눈빛을 거뒀다. 그는 내 허리를 팔로


감싸며 나를 잡아당겼다.

“갑시다, 스텔라.”

“아니, 잠깐만요.”

그때, 노아가 손을 뻗어 다시 한번 내 소매 끝을 잡았다. 나를 잡아끌던 알베르트가 걸음을 멈추고


노아가 쥐고 있는 내 소매를 응시했다.

“어이가 없군.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고아 따위가.”

“……공작님.”
“그 손, 당장 놔.”

명령. 그것은 명령이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붙들고 있던 소매에서 손을 떼어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공작님. 부디 수도원에서 편안히 쉬다 가시길.”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분명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걸 웃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딘가
불쾌한 듯이,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어느 정도 노아와 거리가 벌어지자, 알베르트가 으득, 이를 갈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도대체 저 새끼는 누구입니까?”

저 새끼라니. 고상한 공작님께서 쓰실 법한 단어는 아니었다.

“노아라고, 저를 잘 따르던 동생이에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만나지 마십시오.”


“도대체 공작님께서 무슨 권리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시는 거예요?”

애니카도, 노아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고작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나지 말라고?

그에게 나를 통제할 권리가 있나?

아니, 없었다. 그럴 권리 따위, 그에게 없다.

“제가 공작님한테서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서, 공작님의 소유물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수도원 내부를 향해 걸었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크게 소리질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는 없었다. 작게 반항해 봤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걸어 알베르트가 향한 곳은, 5 년 전 우리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기도실이었다.

먼지 한 톨 없는 기도실. 그 앞에는 성녀와 주신 렌다의 모습을 조각한 섬세한 석상들이 서 있었다.


갑자기 여기는 왜……. 불길한 기분이 마음속에서 밀려왔다.

알베르트는 기도실의 긴 나무의자에 나를 내려놓았다. 기도실의 문을 굳게 닫은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위로 몸을 가까이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목에 팔을 두르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단호해서 나도 모르게 순순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았다. 그는 내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른 것을 확인하고는 내 허벅지를 활짝 벌렸다.

“아, 아니. 잠시만요.”

심지어 문도 제대로 닫혀 있지 않은 상태인데 말이다. 내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으나 알베르트는 내 부름을


무시하고 억지로 내 아래에 그의 물건을 박았다.

건조한 아래에 두꺼운 물건이 들어오자 엄청난 고통이 나를 덮쳤다. 나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물건을 박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거칠게 관계를 맺어도 아래를 풀어 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도대체 어째서.

알베르트조차도 움직이는 것이 힘겨운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물건을 밀어 넣었다.

왜 자신의 목에 팔을 감으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망할 놈의 목을 졸라서 죽여 버려야겠다.


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깨로 문질러 닦았다.

분해서 그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줬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알베르트를 끌어안은 것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하윽, 흑. 윽. 이, 나쁜 놈…….”

알베르트는 나쁜 놈이라는 말이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을수록 그는 허릿짓에 속도를 올렸다. 나는 종이처럼 흔들리며 알베르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입에서는 계속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쾌락에 의한 신음이 아닌, 고통에 의한 신음이.

하지만 언뜻 들으면 기분이 좋아서 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상황은 미묘한 상황이었고,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애매한 소리였다.

지금의 알베르트는 아마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까.

[제가 공작님한테서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서, 공작님의 소유물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에이, 설마. 설마 저 몇 마디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다고? 소설의 주인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속이 좁으면 쓰나.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알베르트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저 말 때문에 화가 난 게


맞는 것 같았다.

으휴, 그래. 내가 사지 멀쩡하게 공작저를 탈출하려면 이 정도에서 물러나 줘야겠다. 대충 그를 달래고


회유시키려는 생각으로 고개를 든 순간, 내 시야에는 알베르트가 아닌 다른 이가 눈에 들어왔다.

“…….”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노아. 그 푸른 시선의 주인은 분명 노아였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베르트의 허릿짓 탓에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으나, 내 의지는 아니었다.

노아의 시선은 완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발, 제발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네가 몰랐으면 좋겠어.

애니카 그리고 노아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베르트의 이상한 연극에 맞춰
줄지언정, 그 추악한 내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제발 나를 못 봤다고 말해 줘. 제발, 그냥 가던 길을 따라서 나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계속 걸어. 나를


외면하고 이곳에서 벗어나.

나는 간절히 빌었다. 노아가 나를 지나치기를.

하지만 내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듯, 노아는 석상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
내 시선이 오랜 시간 기도실의 나무문을 향하자, 알베르트도 그 방향을 힐끗 바라봤다. 그도 노아를
발견한 것 같았다.

“흐, 공작님……. 이제 제발 그만…….”

나는 알베르트의 목을 끌어안고 애원했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노아가 보는 앞에서, 그리고 신성한


기도실에서 이런 추악한 짓을 저지르는 걸 멈춰 달라고.

하지만 알베르트는 오히려 교활하게 웃으며 그의 물건을 깊게 내 안에 박았다. 그 탓에 몸이 찌르르,


울렸다.

나는 계속 노아를 응시했다. 그가 어서 가기만을 기다리며.

그러다가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노아의 푸른색 눈이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노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경멸, 혹은


혐오였을지도 모른다.

눈을 꾹 감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애원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몸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

알베르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릿짓에 속력을 가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정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

불쾌하다. 수년 전에도 스텔라를 담고 있던 저 푸른 눈동자가. 넓고 광대하나 동시에 공허하여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노아. 그 어린 것은 5 년 전에도 그런 눈빛으로 알베르트를 바라봤다. 마치 그가 자신의 경쟁자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것의 시선은 항상 스텔라를 따라갔다. 알베르트가 스텔라를 안는 그 순간까지도.

너는 어째서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스텔라는 나의 것인데, 너 같은 것은 결코


넘볼 수 없는 대상인데.

그것의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표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의 표정은 마치 소동물을 앞에 둔


맹수와도 같았다.
가장 위험한 부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짓말쟁이.

그래서 알베르트는 스텔라에게 노아를 멀리하라고 일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소 중요한 설명을


생략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스텔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자신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며 알베르트를
거부했다.

알베르트는 힐끗 노아를 바라봤다.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아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 따위는 스텔라에게 있어 자신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꽉 쥐고 잠시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트는 저 건방진 것에게 스텔라가


누구의 것인지 보여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도실에서 스텔라를 탐했다. 일부러 누군가 보란 듯이 문도 잠그지


않은 채로.

그의 생각대로 어리석고 어린 짐승은 질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들의 정사를 지켜봤다. 그래, 제아무리
어른인 척해 봤자 막 성년을 지난 어린 짐승일 뿐이었다.

-18-
소년의 눈빛은 허술했다. 소년의 시선은 완전히 스텔라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베르트는 더욱 세게
물건을 쳐올렸다. 스텔라의 입에서 고통이 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정사를 지켜보던 노아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죽
웃었다. 그것도 이제 제 주제를 깨달았나 보군.

고아원 출신인 데다가 아무런 재능도 없어 성년이 지나고도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는 멍청한 것.
알베르트는 노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스텔라의 아래에 제 물건을 박으며 승자만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게도,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상상도 못 한 채.

***

수도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트는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 기념제에 참석하느라 수도로


떠났다.

그가 나를 수도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찌나 힘들었는지. 다행히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그를


말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차라리 수도에 따라가는 것이 나았을지도. 알베르트는 공작저를 떠나기 전, 손가락으로 방 하나를
가리키며 코르넬에게 명령했다.

[코르넬.]

[예, 가주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텔라가 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켜. 절대, 절대 나오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커다란 방에 덩그러니 갇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코르넬이 방문 앞에서 나를 감시했다.


그러나 내가 몇 번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이후로는…….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코르넬은 방 안에서, 정확히는 침대 바로 옆에서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강력하게


거부했으나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 맛있었어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러다 나중에는 족쇄까지 채우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하다가 혹시
실현될까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식사를 담은 쟁반은 하녀에 의해 방 밖으로 이동했다. 아, 나도. 나도 나가고 싶은데. 하지만 코르넬이
바로 옆에서 매섭게 눈을 뜨고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고급스러운 침대가 내 무게를 견디며 출렁였다.

“…….”

아. 눈 마주쳤다. 나를 빤히 지켜보던 코르넬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탈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서늘한 공기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져 천천히 눈을 뜨니, 또다시
코르넬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감시가 자신의 일인 주제에, 자신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코르넬은 냉철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았다.

아, 그렇다면 동정심 유발 작전은 어떨까. 물론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코르넬에게 통할 리는 없지만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

“저기…….”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코르넬을 올려다봤다.

“코르넬 스테인입니다.”

“아, 네. 코르넬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소설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알베르트와 여주뿐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코르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버벅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 그러니까, 코르넬.”

“예, 말씀하십시오.”

막상 그의 이름을 부르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고 말았다. 나는 잠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어요.”
코르넬의 얼굴이 조금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안 됩니다.”

저 말을 들으니 왠지 그와 알베르트가 겹쳐 보였다. 알베르트도 매일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평생 겪었던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흑.”

나는 겨우 눈물을 한 방울 흘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순진한 기사는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갔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사실……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너무 외로웠어요……. 모처럼 고향 같은 곳에 돌아왔는데 공작저에만


갇혀 있어야 하고…….”

“…….”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던 공원, 따스한 분위기의 시장…….”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전혀 기대를 안 했는데, 코르넬은 생각보다 동정심이
풍부한 것 같았다.

마치 눈앞에 공원과 시장이 보이는 것처럼 손을 뻗자 코르넬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싶었는데……. 역시 안 되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끈기를 갖고 코르넬이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렸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에이, 실패인가 보다. 아무래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는데.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드는데, 코르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헉, 진짜? 나는 코르넬의 눈을 피해 다급하게 코와 눈을 문질렀다. 됐다. 이 정도면 운 것처럼 눈이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정말요?”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코르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코르넬은 잠시 뻣뻣하게 서 있더니 이내 방에서 나가 버렸다. 뭐야. 설마 내가 웃어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아니면 이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거나?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코르넬은 바로 다음 날 나를 저택에서 내보내 줬다.

다만, 문제는 그가 나와 동행했다는 점이었다.

코르넬은 숙련된 기사였다. 그것도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들을 이끄는, 기사단의 단장 같은 존재.

그런데 그런 그를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공원 길을 따라 걸으며 코르넬을 어떻게 따돌릴까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이렇게 넓은 곳에서는
도망쳐 봤자 내가 손해다. 금방 따라잡힐 테니.

그렇다면 시장으로 가자. 시장은 사람도 많고 길도 복잡하니 그를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장으로 가 볼까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팔 텐데.”

코르넬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이 근처에는 매일 열리는 야시장이 있었는데,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나는 사탕을 사거나 양꼬치를 먹는 등의 행동으로 코르넬을 방심시켰다. 코르넬도 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잠시 이것 좀 들어 주실래요?”

이제 슬슬 계획을 실행해야겠다. 나는 그의 품에 과자들을 잔뜩 안겨 준 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어, 공작님? 왜 벌써 돌아오셨어요?”

순진한 코르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알베르트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코르넬이 다른 곳을 쳐다보는 틈을 타 얼른 인파 속으로 숨었다. 코르넬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이런 멍청한 코르넬. 나는 이 허술한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기뻐 방향도 살피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드니, 나는 어두운 골목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엥.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폈다.

골목에서는 역겨운 악취가 났으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섬뜩한 곳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들어왔지. 조금 긴장됐지만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뭐야, 저 쪼그만 건.”

“웬 여자 같은데. 주인님께서 데려오신 여자인가?”

“아니, 주인님 침실에서 저런 건 본 적도 없어.”

저 말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제발 착각이기를 빌었다.


“한번 데려가 보면 알겠지.”

그리고 묵직한 걸음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를
찾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골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뛰기 시작하자 나를 쫓아오던 사람들도 나를 따라 뛰었다.

제발 누가 좀 도와줬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돌아 어느 골목에 들어선


순간.

“노아?”

분명히 그것은 노아였다. 벽에 기대어 어느 한 남자와 대화하던 노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보다,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머릿속은 노아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노아의 손목을 잡고 따라오라는 듯 당겼다. 하지만 노아는 몇 걸음 나를 따라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왜 안 따라오는 거야. 여기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다시 한번 그를 잡아당기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이상한 향 같은 것이 풍겼다. 진동하는 달콤한 향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썼지만, 나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알베르트 말대로 그냥 저택에만 있을 걸 그랬다. 괜히 나 때문에 노아까지 위험한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노……아.”

나는 쥐어짜듯 노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

노아는 제 품 안에 쓰러진 여자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품에 몸이 쏙 들어올 정도로 체구가 작은 여자는


색색거리며 얌전하게 잠들어 있었다.

“주, 주인님?”
그녀를 쫓던 남자들은 노아를 발견하고 넙죽 무릎을 꿇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암흑가에는 잔인한 지배자가 살았다.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남자의 이름은 반
미리엄. 그는 범죄자들의 주인이었다.

? 노아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스텔라를 세게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 미리엄. 그는 전대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교활하고 추악한 노인.

스텔라가 떠난 지 4 년이 지났을 때, 노아는 성년의 날을 맞았다. 그는 성년이 되자마자 암흑가를


찾아갔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석 달. 그는 무서운 속도로 암흑가를 손에 넣었다.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권력을 쟁취했다.

처음에는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암흑가에 입성했던 소년은 어느새 지배자의 측근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 반 미리엄이라는 노인은 그를 찾아와 자신의 아래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19-

반 미리엄은 속을 알 수 없는 교활한 노인이었다. 노아는 항상 암흑가의 주인은 우아하고 거만한 귀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반 미리엄은 노아가 생각했던 것만큼 우아하지 않았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추악하고 못난
노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활했다. 그는 평생을 암흑가에 바쳤다. 반 미리엄은 이 세상에 범죄가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으며 그것을 위해 암흑가를 운영했다.

그리고 노아는 반 미리엄의 그런 능력을 원했다. 온갖 불법적인 일들과 범죄자들을 제 아래에 놓고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능력.

스텔라가 사라진 것이 벌써 4 년 전이었다. 어렸던 소년은 이제 성숙해졌다. 여전히 소년의 티가 나기는


했으나, 그는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아는 그녀를 간절히 바랐다.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꽃을 그 모습 그대로 꽃병에 담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였다.

노아가 반 미리엄의 측근이 된 지 세 달이 흘렀을 때였다. 반 미리엄은 이상한 병에 걸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피를 토했다.

그리고 또다시 한 달이 흐르자 반 미리엄은 병 때문에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몸이 됐다.

노아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반 미리엄을 내려다봤다. 그는 기운 없이 웃으며 노아의 손을 잡았다.


손을 뿌리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노아는 애써 참았다. 반 미리엄은 노아에게 암흑가를 유지해
달라고 부탁이자 명령을 했다.

노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노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목적을 이뤘다. 스텔라를 찾기 위해서는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자리가 필요했다. 반 미리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속을 알 수 없던 이상한 사람이었다. 노아는 그의 무덤을 응시하다가 뒤돌아 걸었다. 노아라는


이름을 암흑가의 주인으로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반 미리엄. 그 이름은 이제 노아의 것이 되었다.

이제 스텔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암흑가의 힘을 이용하면, 금방 스텔라를 내 앞에 데려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의 예상을 틀렸다. 몇 달이 지나도 스텔라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그 공작이 이미 스텔라를 찾은 것은 아니겠지.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찾기 위해 암흑가에 정보를 흘렸다.

그것으로 보아, 스텔라가 알베르트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매일이 고통이었다. 도대체 왜, 어디로 도망친 거야. 왜 돌아오지 않는 거야. 설마 내 욕망을 눈치챘나?
내 추악한 욕망을 눈치채서, 내가 미워서 돌아오지 않는 건가.
처음에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배출됐다.

암흑가에는 몸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별을 따지지 않고


안았다. 그들의 아래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물건을 쳐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스텔라를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너희들이 그녀와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 어째서, 감히.

그럴 때마다 그의 측근이 겨우 노아를 말렸다. 제아무리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스텔라.”

그 이름이 이제는 어색할 정도였다. 약 5 년 동안 그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그녀를 닮은 사람들을 안아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의 아래에 제
물건을 잔뜩 쑤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사라졌을 때처럼 갑자기 돌아왔다. 그녀를 간절하게 찾던 공작과 함께.

왜 그녀를 처음 찾은 것은 내가 아니라 저자일까. 왜 나는 저 사람보다 빨리 스텔라를 찾지 못했나.

노아는 충동적으로 스텔라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당황한 듯 버벅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항상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가 스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입이 예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아름답게 그를 바라본다.

이 황홀한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본다는 것이 불쾌했다. 저 눈동자가 나만 향했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 알베르트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처럼.

알베르트는 항상 노아를 하찮은 벌레를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 5 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문을 열어 놓고 기도실에서 스텔라와 관계를 멎었다. 스텔라는 그의 아래에서


신음을 흘렸다.

노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피가 손톱에 스며들었다.


알베르트 모니카. 그는 귀족들 중에서도 상당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자였다. 암흑가를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 않을 테였다.

정면으로 그에게 승부를 걸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스텔라를 납치하여, 영원히 암흑가에 가둬 놓는 것. 그의 측근인 스테판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노아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미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오히려 범죄자들의 주인이라는 자리에 걸맞다고 봐야 할까.

하지만 그날,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날 노아는 사람이 없는 외진 골목에서 수하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알베르트의 눈을 피해 스텔라를 암흑가로 데려올지.

“노아?”

하지만 그녀는 직접 노아가 있는 암흑가로 찾아왔다. 그녀는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그가 위험에 빠졌다고 착각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듯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는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순간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간다면 다시 그녀가 노아의 수중에 들어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때, 노아는 또다른 계획을 떠올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품 안에서 정신을 잃게 만드는 향을 꺼냈다.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던 스텔라는 이내 정신을 잃고 그의 품 안에 들어왔다.

따듯하다. 얼음 같이 차가운 노아의 몸과 달리 그녀의 몸은 따듯했다. 그 온기가 좋아서,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내 그는 스텔라를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품 안에 얌전하게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노아는 가볍게 스텔라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달콤한 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은 무거운 쇠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팔은


자유로웠으나 눈을 가리고 있는 쇠에 자물쇠가 있어 풀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코르넬을 속여 도망쳤고, 이상한 남자들이 나를 쫓아왔다. 도망치던
중 노아를 발견해서 함께 도망쳤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망할, 이런 망할. 나 때문에 노아도 그 남자들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들을 유인해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노아는 괜찮을 걸까.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차가운 방안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끌려온 거고? 노예로 팔아넘기려는 걸까,

일단 몸을 일으키려고 끙끙대는데, 갑자기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저 무거운 소리로 보아, 이곳은 감옥 비슷한 곳인 것 같았다.

차라리 눈을 가린 쇠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앞이 보이지 않으니 공포가 배가 되어 돌아왔다.

“…….”

상대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억누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노아……. 그러니까, 저랑 같이 있던 남자애는 어디있어요? 그 애도 무사한 거죠?”

제발 그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아직 그 다정하던 아이와 풀어야 할 오해가 많았다.

그러자 상대가 작게 조소를 흘리는 것이 들렸다. 잠깐, 조소라니. 내 말을 비웃는 거야? 그럼 설마


노아는 이미 해코지를 당한 거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몸이 또다시 거세게 떨렸다. 노아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물론 몸은 다 컸지만, 아직


여리고 어린 아이인데 그런 그가 죽었을 수도 있다니.

제발 저자가 노아는 죽지 않았다고 말해 줬으면. 간절히 빌었으나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일 거예요?”

죽일 거면 차라리 정신을 잃었을 때 죽이지. 일부러 깨어나면 죽이려고 기다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악질
중의 악질이다.

하지만 상대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뺨을 쓸었다. 마치, 죽일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는 것처럼.

“그게 아니면, 노예로 팔아넘길 거예요?”

나는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상대는 내 손을 들어올려 그 위에 부드러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상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감옥 같은 방에서 나가 버렸다.

***

남자는 다음날에도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수프를 들고 와 내 입에 떠먹여 줬다.


무언가 이상한 걸 섞은 건 아닐까 걱정하며 먹었지만 다행히 평범한 수프였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노아는 죽었느냐고 물어도,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해도 남자는 침묵했다.

그래서 그냥 이 현실을 수긍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곳에 끌려온 이상 나도 사지 멀쩡하게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며칠이 지났다. 남자가 내게 식사를 주는 횟수로 날짜를 계산해 볼까
고민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남자가 여섯 번째로 찾아왔던 날,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누구예요?”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일까, 혹은 어딘가에서 만났던 사람일까. 도대체 그는 누구이길래 나를
죽이지 않고 이렇게 가둬 놓은 채로 괴롭게 만드는 걸까.

“만약, 만약 저를 죽일 거면.”

“…….”

“차라리 지금 죽여 주세요. 부탁할게요.”

나는 삶에 대한 애착이 꽤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갇힌 이후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할 때, 분노해야 하는 것은 내 앞의 이 남자가 아니라 나 아닌가.

나는 덜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그냥 지금은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를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피곤해 죽겠으니까 제발 깨우지 좀 마. 나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

“누나!”

하지만 목소리는 꽤나 다급하게 들렸다. 맑은 미성. 점점 또렷해지는 목소리는 분명 노아의 것이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쇠가 풀리고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뚜렷해졌다.

-20-

내 눈앞에는 죽었다고 믿었던 노아가 조금 초췌하지만 무사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정은 도망친 후에 설명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가 나를 안아 드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이 상황이 각본이 있는 연극처럼 느껴졌다.

자꾸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불안했다. 노아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들지.
내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을 본 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곤할 거야. 눈 좀 붙여.”

이런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잠을 자서도 안 됐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눈꺼풀은 서서히 내 눈을 덮었다.

무의식적으로 노아의 가슴팍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가 나를 힐끗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피곤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노아에게 의지한 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수수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 이곳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인 것 같았다. 노아의 품속에서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잠든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멍하니 오두막의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노아가 걸어 들어왔다.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

“누나,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너는?”

목이 쉬었는지 입에서는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노아가 내게 따듯한 차를 한 잔 건넸다.


나는 차를 받아들고 따듯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나도 괜찮아.”

“너…… 왜 그런 곳에 있었어?”

내가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묻자 노아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러는 누나야말로.”

그렇게 말하는 노아는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보였다.


그는 깨어나 보니 이상한 곳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사지가 멀쩡히 풀려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주러 들어오는 사람을 공격해 탈출했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

그 후 노아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목까지 이불을 덮어 준 후에야 방에서 나갔다.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따듯한 수프가 올려져 있었다.

수프. 나는 그것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자꾸 잊고 싶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렀다.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며칠 동안의


힘들었던 기억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피곤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눈을 감았다.

***

죽여 달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노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방에서 나왔다. 방 안에서 스텔라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그냥 그녀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공허하던 모든 게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죽여 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만약 이러다가 스스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음을
선택해 버리면 어떡하지.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녀가 죽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노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스텔라, 그녀를 구해 낼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는 구해 내겠다는 생각이.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냈다.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조금이라도 더 스텔라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노아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나 입던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스스로 몸에
자잘한 상처들을 냈다. 그는 애써 초췌한 얼굴을 만들어 스텔라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
꿈을 꿨다. 나는 눈을 감았던 때와 같이 낡은 오두막 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살로스와 꿈에서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오묘하고 몽롱한 기분.

아니나 다를까,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던져서 깨트려도 노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달려오지 않았다.
이 꿈 안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침대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몇 번 휘청거렸지만


계속해서 걸었다.

방을 벗어나서 작은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문을 힘껏 밀었다. 밖에는 키 큰


나무와 풀들이 가득 자라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유일하게 키가 작은 나무 그루터기가 보였다. 그 위에는 어느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왜인지 익숙한 뒤통수였다.

“……살로스?”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자색 눈동자가 데굴 굴러 나를 향했다.


“안녕, 수녀님.”

그는 살로스였다.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더니 그가 만든 공간이었던 것이다.

살로스는 내게 인사하며 순박하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만약 살로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점점 다가오는 나를 보는 살로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의 바로 앞에 섰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살로스의 멱살을 잡았다.

“켁.”

살로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나는 그의 얼굴은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살로스의 얼굴을 가격한 주먹이 욱신거렸다. 주먹으로 뺨을 가격당한 살로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뒤늦게 고통에 차 신음하며 뺨을 감쌌다. 나는 그의 멱살을 툭, 놓으며 말했다.


“미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너무 짜증 나서 때려 버렸네.”

“원래 그 반대 아니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게 아니고……?”

살로스가 가련한 척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우, 꼴 보기 싫어. 어디서 자기가 불쌍한 척인지.

이제 목적도 이뤘겠다, 나는 다시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애초에 살로스를 만나기 위해 오두막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말은 건 것도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것을 바라 왔으니 그것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맞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살로스의 머리에 뿔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뒤돌아 그를 보자 툴툴거리던 살로스가 다시 불쌍한 척을 하며 훌쩍거렸다. 그가 그러든 말은,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주욱 잡아당기며 물었다.

“너 뿔은 어디 갔어?”
그가 내 정기를 야금야금 먹고 실체화했을 때도 뿔이 없기는 했었다. 하지만 꿈에서의 살로스는 항상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마치 인간처럼 매끈했다.

그러자 살로스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외쳤다.

“이게 다 수녀님 때문이잖아!”

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그를 내려다보자 그는 길고 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수녀님 소원도 들어줬는데 수녀님은 나한테 성수나 뿌리고! 나 완전 서운했다고. 지옥에
돌아가니까 힘도 약한 몽마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었는지 알아?!”

그러고도 살로스는 약 5 분 동안 내게 설명을 빙자한 푸념 쏟아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절반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그래서 결론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거의 안 들었다.

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결론을 요구했다. 살로스의 긴 푸념을 다 듣기는 귀찮았다. 그냥 네가
요약해서 들려주면 되는 이야기잖아.
“그동안 공작이 수녀님 못 찾은 거…… 나 덕분이었는데…….”

살로스가 입을 내밀고 웅얼웅얼 말했다.

마치 개미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으며 똑바로


말하라고 협박하자 그제야 살로스는 또박또박 말했다.

“알…….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5 년 동안 사람 한 명 못 찾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이제 나에 대한 알베르트의 흥미가 식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다시 만났을 때, 5 년 동안 나를 찾아 헤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를 찾지 못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루터기 위에 앉아 있는 살로스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그는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살로스의 정수리를 세게 때렸다.


“뭘 웃어, 짜증 나게.”

“아야.”

몇 주 전의 기억을 더듬자 살로스의 몸이 갈라지던 것처럼 내 몸에서 투명한 막이 떨어져 나왔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예상한 것이 맞다면 살로스가 무언가 손을 썼기 때문에 알베르트가 나를 찾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알베르트가 나를 찾은 것은, 내가 살로스에게 성수를 뿌렸기 때문이고.

“무슨 생각해?”

살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뭘 물어.”

이곳은 살로스가 만든 공간이니까.

그런데 이 말을 하자마자 살로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리듯 중얼거렸다.

?
“어, 어어. 그렇지. 그랬었지.”

어딘가 수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능글맞음의 대명사라고 불릴 법한 살로스가 당황을 할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끝까지 내 시선을 피하며 먼 곳에 서 있는 나무를 쳐다봤다. 아까 내가 멱살 잡을 때 꼼짝도 못 하던


것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설마 너 지금 내 생각 못 읽어?”

“…….”

살로스가 입을 꾹 다물고 이리저리 내 시선을 피했다.

뿔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내가 그의 멱살을 잡을 때마다 반항하지 못하던 것도 그렇고. 꿈 속에서는


항상 그의 힘이 우위였는데. 물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살로스의 태도를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생각 못 읽는 거 맞네. 그렇지?”

“…….”

“야, 대답해.”

그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버릴 것처럼 세게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쥐자 그는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21-

“이게 다 수녀님 소원 들어 주느라 이렇게 된 거잖아……. 어떤 두 놈이 수녀님을 엄청 집요하게


찾아다녔단 말이야. 그거 막으려다가 힘도 다 썼는데, 수녀님은 나한테 성수나 뿌리고.”

살로스가 우물우물 서운한 듯이 말했다. 결론은 내가 그에게 성수를 뿌렸던 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5 년 전 쯤 그가 소원을 들어 주겠다며 나불대던 것이 기억난다. 그나저나 두 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를 찾던 것은 알베르트 한 명뿐이었는데.

“두 놈이라니, 그게 무슨…….”

“힘 좀 잃었다고 하급 몽마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나 슬퍼 죽겠어, 수녀님.”


?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얼굴로 살로스가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수녀님이랑 몇 번만 자면 금방 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결론은 그거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로스를 밀쳤다.

분명 힘을 잃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세게 밀어도 그는 여전히 내 허리를 팔로 옭아매고 있었다.


하여간 거머리 같은 놈. 힘을 소진하고 성수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돌아오다니.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나를 강제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읽을 수도,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 상태로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살로스도 그것을 아는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응? 수녀님, 제발.”

이제 살로스는 간절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힘을 잃어 하찮아진 살로스의 뺨을 감싸며 둥글게


웃었다.
키가 큰 나무 너머로 해가 뜨기 시작한다. 나는 살로스의 뺨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살로스.”

“응, 수녀님.”

“내가 너랑 잘 일은 없어. 그러니까 나 말고, 섹스 좋아하는 사람 찾아서 그 사람이랑 신나게 해.”

이전에는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르겠다.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서 덤덤해진 걸지도 모른다.

살로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나는 허리에서 그의 팔을 떼어낸 후 먼지 털 듯 허리를 탈탈 털었다.

“내 꿈에 찾아오지도 말고.”

“……어.”

“뭐라고?”

“싫어. 난 수녀님 안 떠나. 아니, 못 떠나.”

힘도 잃은 주제에 괜한 억지를 부리네. 내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살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녀님은 나한테서 못 벗어날걸.”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수녀님이 머무르고 있는 저 오두막, 저게 수녀님한테는 수렁이라는 걸 모르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데, 그 말만큼은 귀에 박히듯이 들렸다. 노아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오두막이 내게 수렁이라.

“수녀님이 저 음습한 집에 더 오래 있을수록 내 힘만 더 강해질 거야. 부디 기대해.”

“…….”

“조만간 수녀님을 삼켜 버릴 테니까.”

음습한 건 저 집이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요. 살로스는 당당한 말투와 달리 몸을 잘게 떨며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산 위로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눈앞에 서 있던 살로스는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아가 보였다.

“…….”
“아, 일어났구나.”

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쭉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자꾸만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아는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웃더니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잔을 건네받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컵에 그려진 화려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이었다. 이 잔, 꽤 비쌀 것 같은데.

이렇게 비싼 컵을 살 만큼 노아에게 돈이 많았었나?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를 힐끔 쳐다봤다.

뭐,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많았던 아이니까 성인이 되어 돈을 버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사치품을 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내가 빤히 컵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노아가 작게 웃었다.

“컵, 예쁘지?”

그 말을 듣는데, 문득 알베르트가 떠올랐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신기한 눈으로 마차를 살피는
내게 능글거리는 말을 건넸었지.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나는 이미 그에게서 도망쳤다. 왜 이제 와서
그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잊어버리자.

지금쯤이면 알베르트도 코르넬로부터 내가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나는 오두막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을 바라봤다.

아직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노아는 내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며, 오두막에서 나가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오두막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울창한 숲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이라면, 알베르트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흘렀더라. 잠들고 깨어나고. 이것만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전에는 살로스의 힘 덕분에 알베르트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에게서 나를 숨길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건, 이 오두막처럼 숲속에 집을
짓고 사는 것뿐이었다.

?
내가 어쩌다 이런 극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더니 노아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노아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쓸었다.

5 년 전, 작고 부드럽던 소년의 손은 이제 크고 단단했다. 분명 노아가 나보다 더 동생인데, 똑같이 힘든


일을 겪었으니 내가 노아를 더 챙겨 줘야 하는데.

그런데 그 손길을 받는 것이 너무 안심이 돼서 나는 그냥 눈을 꾹 감고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노아는


한참 동안 내 뺨과 머리를 어루만졌다.

“……고마워.”

나는 입술을 조금 벌리고 말했다.


“그 수렁에서 구해 줘서.”

내 말을 들은 노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설마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걸까. 괜히


미안해져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수렁.”

“응?”

“맞아, 수렁. 수렁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지.”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한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노아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우고 노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상체를 살짝 숙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노아의 붉은


입술이 내 손등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분위기가 5 년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서.

우리는 그냥 친한 누나와 동생이 아니었던가. 그런 관계 사이에, 이런 행동이 정상적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푹 쉬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아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넓은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노아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검은색 셔츠.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실제로 몸도 멀쩡했다. 다만 문제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인지 건강해
보이는 몸과 달리 막상 걸으려고 하면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내 팔을 빤히 쳐다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빵을 베어 물었다. 고작 며칠 정도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을 뿐인데 몸이 허약해졌다. 이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른 다시 건강해져서 새로운 집을 찾아서 떠나자.


순간, 노아가 괜찮다고 말해 주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아도 슬슬 어여쁜 애인을 만들 나이니까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건 민폐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쿡쿡, 웃었다. 방금 뭔가 손자를 걱정하는 할머니 같은 생각이었어.

나는 빵 한 덩어리를 입에 욱여넣은 후 조심히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노아는 쉬라고 했지만,


침대에만 있는 건 너무 답답했다.

발이 차가운 나무 바닥에 닿았다. 두 발로 서자 다리가 잠시 휘청거렸다.

하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방문이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꿈에서의 경험을 제외한다면 이 방에서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화장실도 전부 방 안에 있었으니. 꿈에서


봤던 것처럼 이 방에서 나가면 작은 부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방도 하나 있었다. 작은 오두막치고는 꽤 효율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노아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오두막을 구경했다.


노아는 내가 방에서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부엌에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 놓고 갔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근사한 음식들이 아니었다.

부엌 구석에 위치한 방. 나는 천천히 그 방을 향해 다가갔다.

꿈속에서도 저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었다. 꿈속에서도 열리지 않았던 방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아.”

하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 구멍을 얇은 막대로 마구 쑤셔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게 뭐야, 김빠지게. 나는 막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자꾸만 열리지 않는 문이 떠올랐다.


노아가 돌아오면 저 방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

나는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졸린 건지. 아무래도


따듯한 빵을 먹은 게 그 원인인 것 같다.

-22-

“경이 이렇게 무능력한 줄은 몰랐군.”

“…….”

“스테인 경. 경도 입이 있으니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언뜻 들으면 실수를 저지른 기사를 다그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코르넬은 알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당장이라도 코르넬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코르넬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베르트와 함께했다. 그 수 년 동안 알베르트는 매일 친근한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스테인 경. 딱딱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물론 이것은 명백히 코르넬의 잘못이었다. 가주의 명령을 어기고 스텔라를 저택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녀는 도망쳤다.

하지만 코르넬은 차마 사과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알베르트가


그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기에.

고요한 침묵을 깬 것은 알베르트였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가.”

“……죄송합니다.”

코르넬이 딱딱하게 경례했으나 알베르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코르넬이 집무실에서 나갈 때까지


이마만 짚고 있었다.

탁. 백색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닫히고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수도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건국 기념제. 그것이 무엇이라고 스텔라를 두고 수도로


갔을까.

?
그녀를 찾는 데 자그마치 5 년이 걸렸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하루가 지나갔고 계절이 수십 번 변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서 살았는지는 코르넬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어떻게 감히.

알베르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흰 장갑이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작은 통증 따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막막했다. 도대체 어떻게 스텔라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녀는 내게 관심 하나 없으니, 스스로 돌아올 리가 없다.

알베르트는 혼자 그 말을 되뇌다가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그녀에게 빠져서. 어쩌다가,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작은 새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스텔라의 목에 얼굴을 묻으면 언제나 달콤한 향이 났다. 그 향을 맡고 있지 않을 때는 항상 그 향이


떠올라 알베르트를 괴롭혔다.

어서 향을 맡으라고, 스텔라를 차지하라고.


하지만 새는 다시 그의 곁을 떠났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쳤다.

천사 같은 외형을 가진 공작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언제나 세상을 그를 위주로 돌아갔는데,


이상하게도 스텔라를 만난 후부터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여러 감정이 섞인 한숨이 알베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감기는 눈을 겨우 뜨며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코르넬의 보고에 따르면 스텔라는 사람이 많은 야시장에서 도망쳤다. 집사는 야시장에 있던 사람들의
제보를 듣고 보고서를 작성해 그에게 올렸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제보는 전부 엉망이었고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으니. 바로 스텔라가 암흑가로 향하는 것을 봤다는 제보였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암흑가로 들어갔을 리가. 애써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음 제보를 읽어 보려고 했으나 자꾸만 그 문장이 신경쓰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알베르트는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코르넬을 불렀다.


“코르넬 스테인.”

코르넬은 그의 부름에 답하지도,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알베르트는 코르넬이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인기척이 문 앞에서 느껴졌다.

“스텔라가 암흑가로 향했다는 제보가 있군.”

“…….”

“암흑가의 반 미리엄에게 연락을 넣어라.”

“반 미리엄…… 말씀이십니까.”

“그래.”

코르넬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자신의 주인이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음흉한 자를 찾아가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빠른 시일 내로 찾아가겠다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알베르트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구겨졌다. 알베르트는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코르넬에게 짜증스럽게


답했다.
“내가 그깟 늙은이를 직접 찾아가야 한다?”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기사들이 유추하여 그렸던 수배지의 교활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코르넬은 그제서야 알베르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자신이 한 말을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찾아오라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직접 범죄자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공작의 격을 떨어트리는 짓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아니, 애초에 공작이 범죄자와 만나는 것 자체가 제국과 황실을 반역하는 행동이기는 했다.

하지만 범죄자 따위와 연통할 정도로, 알베르트는 그토록 간절했다. 손에 쥐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그녀를 다시 찾는 것이.

***

“아.”
“아니,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아.”

이런 망할.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손을 저어도 노아의 얼굴은 단호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내 앞에 위치한 수저를 바라봤다.

작고 귀여운 수저에는 따스한 수프가 담겨 있었다. 고소하고 담백할 것 같은 훌륭한 수프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손은 이렇게 멀쩡한데 왜 먹여 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

그걸 알리기 위해 노아의 눈앞에 손을 대고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노아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수저를 내 입에 더욱 가까이할 뿐이었다.

“아.”

아무리 그를 설득해도 이 수저가 거둬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입을


벌렸다.

?
확실히 수프는 맛있었다. 수프의 맛을 음미하며 입을 우물거리자 노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뭔데, 저 미소는. 혹시 노아가 있는지도 몰랐던 내 엄마였던 걸까.

나는 소설 속 세상에서 고아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런 내게 엄마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노아는 남자잖아. 엄마라니.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도 노아의 행동만 보면 마치 그가 내 엄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착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노아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노아. 네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내 동생인…….”

?
단호하게 말을 꺼냈지만 말을 끝까지 마칠 수는 없었다. 노아가 손을 뻗어 내 입술을 매만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왜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손에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곧 노아의 손이 내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수프가 묻어 있길래.”

거짓말. 언뜻 보였던 그의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노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을까.

아니, 아니야.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처음 노아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다섯 살일 때였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노아를 봐 왔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감정을 가질 수가 있지.

나는 최대한 이 추악한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렀다. 이건 그냥 그 수렁에서 나를 구해 줬다는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일 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아.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자 노아도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노아라는 방패를 이용해 며칠 전의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그의 친절함을 이용해 열심히


기억을 지웠다.

아니, 사실 기억하기 싫은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억이 머릿속에서 잊힐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노아의 부드러운 미소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그 미소를 동생의 다정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그 부드러운


미소를 볼 때마다 자꾸만 추악한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

또다시 노아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눈앞에는 수프를 담은 수저가 보였다.

나는 들어 있는 것도 없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따듯한 수프가 들어와 입안을 채웠다.

노아가 나를 구해 줬다는 것에 대한 감정은 감사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이상의 감정을 느껴


버렸을까.

나도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전에 열어 보려고 시도했다가 끝내 열지 못했던 방문이 생각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드디어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노아.”

“응?”

“부엌에 있는 문 있잖아. 그 안에는 뭐가 있어?”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고로 쓰는 방이라든가, 먼지가 가득한


더러운 방이라든가.

하지만 노아는 잠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다물었다. 붉은 입술은 굳게 닫힌 후 다시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이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긴 침묵이 흘렀다. 설마 내가 던진 이 질문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을까.

“누나.”
노아가 짧게 나를 불렀다.

“열려고 하지 마.”

그 대상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노아가 무엇을 말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힐끗 부엌에
있는 나무문을 향했다.

“안 열 거지, 응? 나랑 하는 약속이야.”

어쩐지 그는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새끼손가락을 그의 것에


감았다. 두 손가락이 서로 얽힌 부분이 왜인지 어색했다.

“고마워.”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감사를 받은 기분이란 오묘했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저


웃었다.

?
노아는 더 이상 내게 수프를 먹을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미 내 배는 그가 준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더 먹으면 오히려 음식들이


역류할지도.

“누나는 몸이 다 나으면 어떻게 할 거야?”

-23-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설마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건가.

“……그게.”

“그게?”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곧 나가야지. 공작 놈, 아니. 공작님한테서 받았던 보석은


잃어버렸으니까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도망칠 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알베르트가 선물했던 보석들도 몇 개 가지고 나왔었는데, 되팔면 비싼


것들이라 남자가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노아는 내 옆에 보석 같은 귀중품은 놓여 있지 않았다고 답했다.

?
귀찮게도, 다시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몸뚱이 하나만 먹여 살리면 되니 단순한 노동도
괜찮았다.

그래도 역시 수도원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청소와 기도만 하면 밥이 나오는 생활이라니. 알베르트만


없었어도 나는 아직 수도원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드니, 노아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돼?”

“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지 마. 나랑 같이 살자. 나 누나랑 같이 살고 싶어. 여기에서 살면 안 돼?”

노아가 말꼬리를 늘이며 내 손을 맞잡았다. 마치 어렸을 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오래전 내게 꽃을


선물하며 방긋 웃던 귀여운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의외다. 노아가 한 말의 의도가 저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네가 나가라고 재촉하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너는 수도원에서 살던 거 아니었어?”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 거야?”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노아와 함께 있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망설이는 거지.

순간 부엌에 위치한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문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집요하게 문을 응시했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길래 굳게 문을 봉하고


그 안의 내용물마저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걸까.
“누나?”

노아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대답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
망설여서 뭐해.

“그러자, 우리 동생.”

내가 말했으면서도 동생이라는 단어가 신기해 몇 번 되뇌었다. 동생이라고 부르니 마치 5 년 전의 귀엽던


그가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정말 그냥 동생이야? 그게 다야?”

그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가볍게 답했다.

“아, 그럼 우리 착한 동생.”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노아?”

“…….”

“왜 그래?”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 중에 불쾌한 말이 섞여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슬슬


이 분위기가 불편해졌기에 나는 노아의 소매를 약하게 잡았다.

그러자 노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동생 정도는 돼야지. 서운하네.”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아, 역시 장난이었구나. 그제야 나도 편하게 웃으며 노아를 향해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 하고 불렀다.

그렇게 오늘도 노아와 함께 썩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하루였다.

꿈에서 살로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

“안녕, 수녀님. 오랜만이네.”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 살로스가 은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내게 인사했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왜인지 며칠 전보다 기세등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확 머리를 다 뽑아 버릴까…….”

그러나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살로스가 급하게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호하듯 가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수녀님 너무해.”

“싫으면 꺼져.”

“수녀님,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나름 진지하게 말했는데 농담으로 치부 당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수녀님은 궁금하지 않아? 저 방에 뭐가 있는지.”


살로스의 손가락은 부엌에 딸린 방을 향하고 있었다.

“과연 그 꼬맹이가 저 방에 뭘 숨겨 놨을까? 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까.”

“별로 안 궁금한데.”

내가 단호하게 답하자 살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부추기지 않았다.


대신, 내 목덜미를 잡더니 혀를 내어 내 목을 핥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컹한 것이 목에 닿자 나는 반사적으로 살로스를 밀쳤다. 그는 힘을 잃었으니 쉽게 밀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치아로 내 목을 약하게 깨물었다.

“열어 보자.”

그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이전부터 궁금해 했잖아. 열어 보고 싶잖아.”

그는 마치 뱀처럼 선악과를 삼키라고 나를 유혹했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몽롱해졌다.


그러니까, 살로스가 내 목덜미를 물었을 때부터.

살로스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듯 기대어 비밀이 가득한 방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노아가 열지 말라고 했는데. 약속까지 했는데.

분명 머리는 이러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몸이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나무문 앞에 서


있었다.

“자, 여는 거야.”

살로스는 내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의 손안에 내 손을 쥔 채로 내가 문고리를 잡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헉.”
?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까지 나를 부추기던 살로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노아가 보였다.

“침대 가서 편하게 자라니까 또…….”

그는 자꾸만 의자에 앉아 자곤 했다. 침대를 양보해 주겠다고 말해 보기도 했으나, 노아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에게 이불이라도 덮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

노아의 주머니에서 흘러내린 것은 갖가지 열쇠들이 모여 있는 열쇠 꾸러미였다.

[열어 보자.]
순간 살로스가 속삭였던 말이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여는 거야.’

속삭임은 점점 커져 이제는 울림이 되었다. 목소리는 내게 명령하고 있었다. 굳게 닫힌 저 문을 열라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노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열쇠를


손에 쥐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방을 향해 걸을 때마다 초조해졌다. 금방이라도 노아가 잠에서 깨어나 나를 향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 마침내 문 앞에 당도했다.

떨리는 손이 열쇠를 잡는다. 그중 가장 밝고 화려하게 생긴 열쇠. 나는 그 열쇠를 선택해 문의 열쇠


구멍에 꽂았다.

그 열쇠가 바로 정답이었는지 문은 바로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들어가지 않기로 노아와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내 몸을 억누르던 강압적인
기운이 사라졌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의지가 돌아오면 이 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침대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방안에 들어오니 호기심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방안은 박물관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오래되어 변색된 지도나 나침반, 혹은 특이한
모양의 시계들.

왜 노아가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은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으로 건들지만 않으면 구경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조심히 유물들에게 다가갔다.

“와아…….”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깨끗하게 관리된
상태였다.

?
황족이나 착용할 법한 커다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봤을 때는 정말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목걸이를 전부 구경하고, 한 걸음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다음은 비싸 보이는 진열대에 올려져 있는 붉은 보석이었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거기서 뭐해?”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노아가 있었다. 그는 문에 기댄 채로


팔을 뻗어 출구를 가로막았다.

마치 누군가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처럼.

“아, 미안해. 내가 들어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횡설수설 변명했다. 노아는 빙긋 웃으며 내 변명을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본 붉은 보석, 그


아래에 무슨 문양이 그려져 있던 것 같은데.

나는 눈동자를 굴려 힐끗 보석을 바라봤다. 보석의 밑부분에는 얇은 황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작게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독수리. 그것은 알베르트의 가문인 모니카 공작가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저 독수리 문양은 모니카
공작가의 마차에도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씹었다.

독수리 문양 자체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모니카 공작가를 제외하고도 독수리를 가문의 문양으로
사용하는 귀족 가문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독수리 문양이 그 자체가 아니라, 저 익숙한 붉은 보석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저 보석은 내가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칠 때 비상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챙긴 것이었다. 전부 챙기면


의심받을까 봐 알베르트가 선물한 보석 중 가장 비싸 보이는 보석만 챙긴 거였는데.

그러나 노아가 말하기를, 그가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 주변에 보석 같은 귀중품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가 가져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 보석이 이곳에 있는 걸까.

-24-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가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항상 화사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겨울처럼 차갑게 나를


응시한다.

마침내 그가 내 바로 앞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굳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누나.”

“…….”

“내가 열지 말라고 했잖아.”

“…….”
“왜 내 말 안 들었어, 응?”

그 내용은 전혀 따스하지 않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금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나는


겨우 입을 열어 쥐어짜듯 질문을 던졌다.

“아니지……?”

내가 첫 번째로 한 것은 부정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틀렸기를 바라며, 부정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노아의 고개가 상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잘못 본 것이겠지.

“제발, 노아.”

다음으로 내가 한 것은 애원이었다.

“제발. 그렇다고 대답하지 마. 네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거잖아.”

애원하고 동시에 외면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그가 고개를 젓고 부정하기를 바랐다.

그가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그 친근한 사이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내가 그를


증오할지도 모르니까.

“누나, 미안해.”

갑자기 노아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였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 용서해 줘…….”

미안하다고? 도대체 뭐가?

그는 무엇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내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이것도 네 가면이고


연극일까.

게다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정말로 너였다는 거구나.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아.”

나는 짧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뺨을 감쌌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한순간이지만 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든 이 사람이.

“난 네 진심을 모르겠어.”

그렇게 뻔뻔하게 가면을 쓰고 나를 속였구나.

“네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 거짓말 같아.”

“…….”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차라리 네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면 이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해 줘. 거짓말이었다고, 이건 다 꿈이라고.

“아니.”
하지만 희망은 완전히 부서졌다.

눈물이 맺혀 있던 슬픔 가득한 눈동자는 이미 날카롭게 변한 지 오래였다. 아, 역시 저 눈물마저도


거짓이었구나.

노아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완벽하게 착한 동생을 연기한 것이었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도 연기였고.

“상관없어. 애초에 그딴 관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

“누나와 동생이라. 이게 얼마나 우스운 호칭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노아.”

“친누나도 아니면서 항상 내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런데 왜 네 목소리는 떨리고 있는 걸까. 내가 몸을 떨고 있듯이 노아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눈물이 흘러나온 탓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네가 나한테.

구해 줘서 고맙다며 웃는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을 속였다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을까.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 도대체 왜. 왜 그런 짓을 저질러서 감히 되돌릴 수도 없는 이런 비참한


기억을 내게 선물했나.

너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을 겪었는지 이해할 수나 있을까. 매일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너를


걱정하며 버텼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사람이 바로 너인 줄은 모르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게 바로 너였다고?

이 상황이 꿈이기를 바랐다. 눈을 뜨면 평소의 친절한 노아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꿈이기를 바랄 때는 언제나 현실이었다. 친절한 네가 현실이 아니라, 나를 속인 거짓말쟁이가


바로 진실이며 현실이고 네 본질이었다.
“내가 누나를 보내 줄 것 같아?”

“…….”

“아니, 절대 안 보내 줘.”

노아가 쓰게 웃으며 내 턱을 쥐었다.

어디인지 모를 곳이 미칠 듯이 쓰라렸다.

잘 모르겠다. 노아에게 잡힌 턱이 아픈 건지, 혹은 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고 슬퍼서 마음이 쓰라린


건지.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던가.

그건 바로 나를 겨우 지탱하고 있던 지지대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

그 후 노아는 스텔라의 얇은 두 손목에 무거운 철쇄를 채웠다.


발목이 아닌, 두 손목에.

두 손목을 연결하는 쇠사슬은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사람의 목에 둘러도 한 바퀴는
족히 두를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다.

그렇다면 그가 의미도 없는 철쇄를 채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저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나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아무리 쇠사슬이 길어도 누나는 도망치지 못할 거야. 그는 철쇄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텔라도 그 숨겨진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저 가만히 순응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변했다. 희망도, 꿈도 담겨 있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가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저 길거리에 흔히 굴러다니는 붉은색 돌 같았다.

눈에 담겨 있던 생기도 사라졌고 빛도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텔라는 테이블 앞에 앉아 앞에 놓인 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서 응시했다.
이전에 스텔라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보고 있던 컵이었다. 그때는 반짝거리는 예쁜 눈으로 보고 있었잖아.
왜 이제 그 예쁜 눈을 보여 주지를 않아?

노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원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스텔라의 눈이 빛을 잃게 만든 것도,


그녀를 비참하게 만든 것도.

전부 그였다.

반 미리엄처럼 교활하게 행동하겠다고 했던가.

그래, 그는 교활하게 행동하기는 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여 사악하게 스텔라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시작은 반 미리엄처럼 사악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노아로서 그녀를 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멍청하고도 교활한
계획이었다.

?
그렇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동아줄을
부여잡고 싶은 법이니.

설령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실제로 스텔라의 심장은 노아를 향해 빠르게 뛰었었다. 하지만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 떨림은 완전히 멎고 말았다.

화사한 미소도, 떨리는 심장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이제 아무것도 그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넋이 나간 여인만이 그의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쁠 줄 알았다. 어떤 방법을 쓰든 스텔라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텅 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뤘는데.

“누나.”
?

노아가 스텔라를 불렀으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답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해 보였다.

그에 노아는 무릎 위에 올려진 스텔라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는 작고 하얀 손에 짧지만 깊게 입


맞췄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이 순간 절그럭거리는 쇠사슬을 바라보며 빛났다.

***

목이 따가워서 천천히 눈을 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았기에 목은 어서 물을 달라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작게 신음하며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자 듣기 싫은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절그럭.

몸을 움직임에 따라 내 손목을 묶은 철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함께 움직였다. 무겁고, 걸리적거렸다.


풀어 버리고 싶지만 풀리지 않았다.
맑은 창문을 통과해 석양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칠흑 같은 어두운 머리통이 보인다.

노아는 의자에 앉은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잠결에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철쇄 안쪽에는 백색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 철쇄를 풀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쳤더니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생겼다.

아마 잠든 사이에 그가 치료해 놓은 것일 테다. 철쇄 사이로 약의 씁쓸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양쪽으로 철쇄를 당겼다. 여전히 철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손목을 연결하는 쇠사슬의 길이는 꽤나 길었는데, 사람의 목을 조르기에도 충분할 정도였다.

나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쇠사슬을 빤히 쳐다봤다.

최근 5 년 동안 항상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어쩌다 나한테 이런 상황이 벌어졌지, 어쩌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사실 아직도 나는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그저 순수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짓을.

다시 내 시선이 쇠사슬을 향했다.

쇠사슬의 길이는 사람의 목도 조를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이번에는 내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밉다. 네가 참 미워.

착한 얼굴을 하며 나를 향해 웃었으면서 속으로는 나를 기만하고 농락하던 네가, 너무나도 밉다. 너는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알까.

아니, 모르겠지. 애초에 내 마음을 알았으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까.

사탕을 주며 나를 걱정하던 과거의 네가 그립고 꽃을 선물하며 예쁘지 않냐고 환하게 웃던 오래전 그날의
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과거의 모습은 이제 현재의 네 악행 뒤에 숨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제 과거는
그저 추억할 수밖에 없는 거짓이 되어 버렸다.

-25-

나는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쇠사슬이 내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따라온다.

그때 방을 연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당시에 계속해서 내게 속삭이던 살로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의 속삭임은 정말로 내게 선악과였던 것이다. 궁금증을 유발하여 결국 선악과를 베어 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이토록 비참하고 씁쓸하지 않은가.

나는 목도리를 두르듯 노아의 목을 따라 쇠사슬을 감았다. 내가 이 상태로 손목을 당긴다면, 그는


쇠사슬에 목이 졸려 삶의 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손이 덜덜 떨렸다.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뭐해, 당기지 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일어났는지, 노아는 어느새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 작은 손목에 철쇄를 채운 순간부터 계속 나를 죽이고 싶어 했잖아. 기회가 왔는데, 왜 죽이지


않아?”

나도 모르게 두 손목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알고 있었구나. 너를 향한 내 증오가 얼마나 큰지.

그는 내 손을 잡고 쇠사슬을 양쪽으로 당겼다. 쇠사슬이 팽팽해지며 노아의 목을 조르자,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누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

하지만 그는 가쁘게 숨을 쉬며 집요하게 나를 불렀다.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더 세게 당겨, 그리고 죽이는 거야.”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위기를 향해 달려가는 연극 속 상황에서나 들릴 것 같은 고요한 경보음이었다. 내 손목을 잡은 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지금 힘을 보탠다면 그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머리는 분명 내게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왜? 어째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싶은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를.

노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도 힘이 풀렸는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선택의 나의 몫이었다. 쇠사슬을 졸라 그를 죽일지, 혹은…….


“…….”

손목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노아는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려 나를 응시했다.

“왜 안 죽여?”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 쓰라린 감정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봐, 나를 죽이지 못하잖아.”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 미워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눈을 가려 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누나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좋아하잖아.”

인정하기 싫었다. 순간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랑 따위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려고 해도 감정이 깃든 기억, 즉 추억이라고 불리는 질척거리는 감정이 자꾸만 내 눈
앞을 가린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내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는다.

내가 사랑하며 아끼던 것은 오래전 만든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푸른 눈동자의 화사한 어린아이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귀여운 어린아이인데. 나를 비참하게 만든 저 추악한 남자가 아니라.

하지만 자꾸 오래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겹쳐 보인다. 도저히, 내가 아끼던 그 아이를 죽일 수가 없었다.

노아가 힘없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뺨을 쥐며 속삭였다.

“그럼, 이왕이면 나를 좋아해 줘.”

그는 뻔뻔하게 내게 애원했다.
?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래. 이게 바로 애증이라는 감정이구나.

애증이란, 살로스가 내게 선사한 그 선악과보다도 훨씬 달콤하며 비참한 감정이었다.

***

때는 13 년 전.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들이 처음 만난 그 순간을 알 수 있었다.

노아는 13 년 전, 즉 그가 다섯 살일 때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 들어왔다.

아직 어리며 짧고 별것 없는 그의 지난 인생은 어떠하던가. 깊은 숲속에 위치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매일


부모의 싸움을 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의 아비는 도박에 빠져 살았으며 그의 어미는 술에 빠져 살았다.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악화되어 있었다.

“당신이 매일 술만 마시니까 애 꼴이 이따위잖아!”


“뭐? 네가 밖에 돈을 버리고 오는 건 생각도 안 해?”

또다시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금이라도 그
소리를 막아 보기 위해서.

그의 부모가 싸우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석에 앉아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금빛 별이 그날따라 유난히 밝았다.

새벽이 될 때까지도 싸우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노아는 귀를 꾹 막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면 이


소리도 멎을 것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어느새 시끄럽던 집은 고요해져 있었다. 그들은 항상 아침이 되면 싸움을
멈추고 각자의 유흥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노아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시야에 급하게 가방에
무언가를 욱여넣는 그의 어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그는 어눌하게 어미를 불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부여잡으며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하나뿐인 제 아들을 오두막에 버려둔 채로.

그는 제 어미를 쫓아 달렸다.

엄마, 엄마. 작은 입으로 어미를 부르고 작은 손으로 낡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어미는 낡은 옷 몇 벌과 소량의 돈을 가방에 욱여넣은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노아는 바닥을 굴러


엉망이 된 모습으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것이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엄마…….”

그는 어렸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어미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해가 나무 위에 걸릴 때까지 어미가 도망친 방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해가 천천히 산 뒤로
모습을 숨길 때쯤, 그제야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그를 챙겨 주던 것은 그의 어미뿐이었다. 앞으로 무능한 아비와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가 그밖에 없는 것을. 노아는 제 아비를 찾기 위해 오두막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가 부엌에 있는 작은 방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비의


모습이었다.

노아는 그가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깨우면 맞을 것이 분명하니 깨우지 않았다. 그냥


그가 일어날 때까지 구석에 앉아 기다렸다.

보살핌 없이 작은 오두막에서 거의 죽어 가던 노아를 발견한 것은 하늘의 별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금발을


가진 한 소녀였다.

“애니카, 여기 집이 있어!”
소녀와 그 친구는 고아였다. 둘은 몰래 고아원을 빠져 나와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데에 집이 있다고?”

스텔라의 뒤를 따르던 애니카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응, 저기.”

“진짜네.”

가 보자, 응? 스텔라는 애니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애니카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녀를 따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이 집에 보물이 있을지도 몰라.”

“스텔라, 넌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어.”

“하지만 필립이 그랬어. 숲속에는 원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똑똑. 스텔라는 싱글 웃으며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없는 집인가 봐.”

“당연하지. 보물은 원래 주인이 없어야 하니까!”

그녀는 오두막이 버려졌으리라고 확신하며 문을 세게 밀었다. 열 살 소녀가 미는 힘에도 문은 쉽게 열렸다.

“계세요?”

“방금은 원래 보물에는 주인이 없는 법이라며.”

스텔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주인을 찾자 애니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스텔라는 무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두막 내부는 엉망이었다. 깨진 접시들, 그리고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러다가 그녀는 부엌에 있는 작은
방을 발견했다.

“저기에 보물이 있을 거야.”

“어휴, 그놈의 보물.”

애니카는 툴툴거리면서도 스텔라를 따라갔다. 스텔라는 보물을 기대하며 조심히 문을 열었고, 보물 대신


고약한 썩은 내가 그녀를 반겼다.
?

“욱!”

그녀는 구역질이 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얼굴을 구겼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주위에는 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친구를 막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 들어오지 말고, 수도원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왜? 왜 그래?”

“빨리!”

순하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애니카는 얼떨결에 으응, 하고 대답하며 오두막을 벗어나 나무
사이로 달렸다. 스텔라는 그녀가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녀는 작은 손으로 코를 막고 시신으로 다가갔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끔찍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꽤나 태연했다.
스텔라는 시신의 앞에 무릎 꿇고 시신을 위해 기도했다. 주신 렌다이시여, 부디 이 자를 영원한 안식으로
이끄소서.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스텔라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아악!”

구석에 한 어린아이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스텔라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잠재우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설마 이것도 시신인가. 스텔라는 다시 한번 기도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26-

그녀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가 여전히 호흡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는 살아 있었다. 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아이를 눕힌 후 물병에 담긴 물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의식이 없는 아이는 잠시 힘겨워했으나 이내 갈증에 미친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스텔라는 아이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노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날 밤에 봤던
금빛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몸에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는 떠났고 아빠는 날 두고 오랫동안 잠만 자고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다.

노아는 이 상황을 그저 꿈으로 치부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
눈을 뜨니 노아는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올려져 있던 축축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아빠, 아빠는 어디 있지.

그의 세상은 매우 좁았다. 그의 세상은 오두막과 숲뿐이었으며 아는 사람은 그의 부모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미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남은 것은 아비뿐이었다.

그런데 하나 남은 가족이 사라졌다. 비록 항상 그를 때리며 욕설을 퍼붓는 아비였으나 좁은 세상에 살던


노아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다.

“아빠, 아빠…….”

그는 어미를 부를 때처럼 애타게 아비를 불렀다. 눈물이 주륵 흘렀으나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침대 아래로 발을 뻗는 순간, 그는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요란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수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아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뚱이 탓에 무력감을 느꼈다.
?

“어머, 도대체 무슨 일이니.”

파열음을 듣고 달려온 한 여자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였다.


노아는 그녀의 도움을 받고 겨우 일어나면서도 아비를 애타게 불렀다.

“아빠…….”

어리석은 소년은 우는 방법을 몰랐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슬픔인지도 몰랐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눈물인지도 몰랐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년인가.

소년은 소매로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오두막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것을 떠올렸다.

별. 별을 봤던 것 같다.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던 금빛 별을 가까이에서 봤던 것 같은데.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어미의 뒷모습과 쓰러져 있던 아비의 뒷모습뿐.

“아빠…….”
다시 한번 그가 애처롭게 아비를 부르자 여자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린아이에게 도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네 아버지께서 너를 이곳에 맡기고 가셨단다.”

여자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로 물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절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년은 슬퍼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저 아비를 그리워하며 멀뚱히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노아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오래전 어미가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에게나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별은 뭐였을까. 노아는 의문을 품은 채 고아원에 살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를 비슷한 또래들이 지내고 있는 방에 집어넣었다. 순한 아이들이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순한 아이들이라고? 노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절대 순수하게 착할 수 없다. 설사 착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은 더 높은 상대에 대한 복종일 뿐일
것이다.

고아원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관리하는 수녀에게는 복종했으나 어눌한 노아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눌하게 말하는 노아를 깔보고 무시했으며 이따금 폭력도 행사했다.

겨우 다섯 살밖에 먹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말이다.

그곳에서 노아는 세상을 배웠다. 1 년, 2 년.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교활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여덟 살. 세상을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이 되자 왜 자신의 어미가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왜 자신의 아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별이었다. 분명 금빛 별이 그를 구했다.


그런데 그 별은 그를 구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별을 닮은 천사였나, 혹은 변장하고 나타난 악마였을까.

?
그리고 그가 여덟 살이 됐을 때, 그는 마침내 별을 찾았다.

“이씨, 내 베개 찢어 놓은 거 너지!”

“아니, 나 아닌데.”

노아는 앞에서 시비를 거는 대신 뒤에서 복수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허술했던 건지,
한 멍청한 놈이 그의 악행을 알아챘다.

바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이었다.

그는 노아를 고아원 건물 뒤로 부른 후 찢어진 베개를 그의 앞에 흔들며 추궁했다. 하지만 노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부정했다.

“너 맞잖아! 너 자꾸 거짓말하면 죽는다?”

꽤 살벌한 협박이 들려왔는데도 노아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죽여 버린다는 말은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이 허세를 부리는 말일 뿐이었다.
“왜 나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놈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노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작게 웃었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은 미소였다.

“네가 항상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복수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이 곧 정답이었다.

놈은 힘으로 다른 아이들을 지배했다. 모든 또래 아이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복종했다.

단 한 명, 노아를 제외하고는.

“어디 보자, 네가 어제는 누구를 괴롭혔더라. 샐리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앤디의 모래성을 밟았네.”

바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악행들에 대해 창피함을 느낀 건 아닐 테고, 그저 분노한 것이겠지.

“네 무거운 머리를 매일 지탱하다 보니 베개가 혼자 찢어졌을 수도 있고, 앤디나 샐리나가 찢었을 수도


있지.”
베개가 혼자 찢어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앤디나 샐리나는 그의 베개를 찢을 만큼
용감하지도 않았다.

노아는 이왕이면 조용히 살려고 했다.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도 없고,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

하지만 바실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노아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뺏어 가서 찢어 버린다든가, 하는 유치하고 한심한 시비.

“어떻게 할까. 수녀님께 가서 말씀드릴까? 네 베개가 찢어졌는데, 그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이익!”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도 같이 말씀드리면 되겠다. 그렇지?”

노아는 눈꼬리를 휘며 예쁘게 웃었다. 미형의 외모를 가진 소년이 싱긋 웃는 것을 보면 모두 그를 따라


웃을 테다. 하지만 바실에게는 그저 악마의 미소로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바실?”


노아는 마치 선택하라는 듯 물었다.

“둘 중에 골라 봐. 지금 당장 수녀님께 가서 네가 아이들에게 한 짓을 말씀드릴까?”

“…….”

“아니면 빌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 봐.”

떠나는 어미를 그리워하며 울던 소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꿈속에서 어미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아비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여리던 소년은 변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상황이 그를 변화시켰다.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적인 상황이 항상 그의 발밑에 있었으니,


변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바실은 어느새 이 상황이 두려운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노아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바실은 폭력적이었으나 열정적이었다. 또래 아이들 중 가장 열심히 주신 렌다를 섬기고 기도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이렇게 게으르고 무자비하게 사는 주제에 신에게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다니.

하지만 수년 전에는 노아도 그러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별을 향해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소원 또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속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디 한번 네 신에게 빌어 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해 달라고. 아마 그 신은 네 멍청한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고 있을 테니까.

“멍청하긴.”

노아는 한숨을 뱉는 짧은 말을 남긴 채로 뒤돌았다. 그러자 바실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야, 야! 어디 가!”

“네 멍청한 짓들을 말씀드리러.”

머저리의 멍청한 꼴을 보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끝까지 노아의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자존감만 높은 멍청이. 노아는 바실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노아는 이제 저 멍청한 것과는 엮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건물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수녀에게 가 바실의 죄들을 일러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바실은 무언가 고민하며 입술을 세게 깨물더니,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바실이 노아에게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그늘이 가득 드리운 음침한 곳에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나이에 비해 크고 무거운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하고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보였고 머리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리고
있었다.

-27-

이게 도대체 무슨. 노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는 순간, 바실이 그의 위에 올라탄 후 다시 한번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에 맞은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노아는 조용히 신음하며 바실을 노려봤다. 놈은 겨우 떨림을


참으면서도 꼴좋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것이 감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계속해서 날아오는 주먹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상황은 역전됐다. 바실은 자신이 궁지에 몰린 만큼 주먹을 휘둘렀다.

노아는 무기력하게 그 공격을 맞고만 있었다. 이제는 신음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쓰라렸다.

“수녀님께 말씀드린다고? 웃기지 마!”

놈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노아를 비웃었다.

나한테 무기력하게 맞고 있는 주제에.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감히 저런 머저리 따위가 더러운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또한, 깔끔하던 그의
셔츠는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놈에게 맞고 있는 얼굴이 가장 아팠다. 바실은 곧 자신이 아무리 노아를 때려도 말릴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먹질에 박차를 가했다.
아직 그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은 노아인데도. 멍청한 놈. 노아는 목구멍 안에서 그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바실의 약점을 쥔 것이 노아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맞다가는 약점을 발설하기도 전에
얼굴 뼈가 부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바실을 밀쳐 내기 위해 팔을 휘둘러 보기도 했으나 쓸모없는 짓이었다.

봐, 신은 존재하지 않는걸.

신은 당신께서 손수 빚은 아이가 고통받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 그게 아니면 당신을 섬기는 정도에


따라 당신의 아이들을 편폐하시기라도 하는 걸까.

주신 렌다이시여, 당신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겁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신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원의 대상이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신과 별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비추는 것이 그가 아니라 다른


이였을 뿐이었다.
하기야, 신과 별이 어둡고 음침한 동굴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는 하겠는가.

노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열한 악당처럼 웃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지금만 버티면 저 멍청한
것을 골려 줄 수 있다는 생각 덕분에.

“야, 거기 뭐하는 거야?”

그때였다. 얇고 통통 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실이 주먹질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봤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누군가는 노아와
바실의 바로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연한 금발을 가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와……. 진짜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 어린놈이 수도원에서 미쳤다고 주먹질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그녀 또한 그리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노아는 터진 입술을 꾹 깨물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얀마, 안 비켜?”

그녀는 상당히 거칠게 발로 바실을 툭툭 찼다.

“스, 스텔라 누나.”

“분명 나는 너희 나이 때 수녀님한테 인성 교육 같은 것도 받았던 것 같은데. 넌 안 받았어? 그래서 애들


패고 다니냐?”

그 말을 들은 바실은 후다닥 노아의 위에서 내려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얘가 먼저 시비 걸었단 말이야.”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노아는 소매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응, 그래그래. 판단은 수녀님이 하시겠지. 넌 미리 가서 고해성사나 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소녀는 바실의 등을 세게 밀었다. 그러자 바실은 마치 저가 피해자인 양 울상을 지으며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어, 그러니까…… 괜찮아?”

소녀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바실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자신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소녀의 손을 무시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위로의 말


따위나 들을 시간에 차라리 낮잠이나 자러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자 소녀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노아는 소녀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소녀는 노아의 등을 바라보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쟤 걔구나, 3 년 전에 오두막에 있던 애.”

상대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노아에게는 그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3 년 전, 오두막.


오로지 노아 그 자신과 그를 구원했던 별만이 알고 있는 그날의 이야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너머의 소녀를 바라봤다. 그날 봤던 것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그때 그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외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3 년 전 그를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와 그를 일으켰던 두
손, 괜찮냐고 묻던 그 작은 입.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그녀의 모든 것이 이제 전부 특별하게 보였다.

바실이 저 소녀를 뭐라고 불렀더라.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않았었다. 노아는 홀로 골똘히 생각했다.

[스, 스텔라 누나!]

그래, 스텔라. 스텔라였다.

노아는 묵묵히 닫혀 있던 입을 벌려 웃었다. 그 미소 덕분에 그는 여느 순수한 소년들과 같이 어리숙하고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머리카락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스텔라를 향해 다가갔다.

“도와 줘서 고마워, 스텔라 누나.”

스텔라는 손바닥 뒤집듯 바뀐 노아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 아, 바실.”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스텔라의 입에서 멍청한 바실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노아는 입 안쪽의 살을
잘근 씹었다.

“이런 일 많았어?”

이런 일. 굳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아는 망설이는 척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부 거짓일 뿐이었다. 바실도 노아에게 자주 시비를 걸기는 했으나 오히려 거듭해서 복수하며
소소하게 바실을 괴롭혔던 것은 노아였다.

“바실, 그 자식이 진짜…….”

스텔라는 바실에게 달려가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소매를 걷어붙였다.


?

안 돼, 가지 마. 그 멍청한 놈한테 가지 마. 노아가 쭉 손을 뻗었지만 스텔라는 이미 성큼 걸음을 옮긴


후였다.

또다시 별을 놓칠 수는 없었다. 노아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힘껏 바닥을 밀며 스텔라의 등을


끌어안았다.

“엥?”

무언가가 저를 세게 끌어안자 스텔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그녀보다 훨씬 작은 소년이


간절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뭐, 뭐야. 왜 그래.”

“가지 마, 누나. 나 두고 가지 마.”

그녀는 조그마한 소년의 등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뭉개지듯 얻어맞은 얼굴, 그리고 줄줄
흘러내리는 피.

아마 소년은 그녀가 어딘가로 가 버린 사이에 바실이 돌아와 그를 위협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녀가 그저 넘겨짚어 예상한 것일 뿐이었지만.
?

“그……. 알겠어. 일단 얼굴부터 치료하러 가자.”

스텔라가 작은 손으로 노아의 어깨를 잡고 그를 수도원의 치료실로 이끌었다. 노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순순히 그녀를 따라갔다.

수년간 그가 의심하던 진리는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신은 그를 구원하지 않았으나 별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를 구원했다.

인간의 욕심은 참으로 광활하다. 그동안 그의 소원이 별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는 별을


시야에 넣고 손으로 쥐는 것을 원했다.

노아는 얼굴에 남아 있던 어리숙한 웃음을 삼키고는 어깨에 올려진 스텔라의 손을 붙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온기가, 3 년 전 그의 아비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온기가.

“아,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였지?”

“노아.”
도망친 그의 어미가 지어 줬던 이름. 3 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름을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노아, 그렇구나. 예쁜 이름이네.”

그 순간에는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까무러치게 기뻤다.

***

그 후 노아는 모든 관심을 스텔라에게 쏟아부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생활하는지. 그것이
그의 모든 관심사였다.

“안녕, 누나.”

“아, 노아구나. 안녕.”

그녀를 눈에 담는 것은 기쁘다 못해 황홀했다. 햇살을 받고 밝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별 같아서,


그래서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왜 신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 바로 신이고 별인데, 어찌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두 번이나 노아를 구원했다. 자신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던 세상에서 스텔라는 노아의 유일한
빛이었으니. 그의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스텔라가 유일했다.

물론, 그것이 스텔라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애니카아. 나 심심해.”

“나 책 읽고 있잖아. 가서 필립하고 놀아.”

“아, 그럴까?”

스텔라는 벽 뒤에 있던 노아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노아는 멀어져 가는
스텔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히 손안의 꽃을 쓰다듬었다.

조그마한 노란색 꽃잎. 스텔라를 닮아 조심히 꺾어 온 것이었다.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꽃잎이


구겨지지 않도록, 손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가져왔는데.

손안에 들어 있던 꽃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노아는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꽃을 쥐는 작은 손에는 의도치 않게 힘이 들어갔다. 결국 노란 꽃은 그의 손안에서 힘없이


으스러지고 말았다.
뭉개진 꽃을 빤히 바라보던 노아는 이내 꽃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채 걸었다.

바실은 언젠가부터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도, 건방지게 소리지르는
것도 그만두고.

“형아, 형아들.”

“노아?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울먹이며 친분이 있는 손위의 소년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억지로 눈물을 흘려 그들의 동정을 이끌어
냈다. 바실을 배척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노아는 벽 뒤에 숨어 그들이 필립을 구석에 몰아넣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28-

내년이면 스텔라는 성년이 될 것이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수녀가 되어 수도원에


머무를지, 혹은 수도원을 떠날지.
“가지 마, 응? 안 가면 안 돼?”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에 매달려 간절하게 애원했다. 순진한 그녀는 얼떨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도 우리 노아 쭉 보고 싶으니까.”

노아와 스텔라가 만난 지 8 년이 됐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도대체 그놈의 추억이 뭐라고, 고작 8 년의 세월이
뭐라고. 스텔라는 더 넓은 세상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남았다.

***

삭막하던 수도원의 정원이 어느 순간부터 화사하게 변한 일이 있었다. 칙칙한 색의 나무만이 존재하던


정원이, 화려한 붉은 장미로 가득 찬 것이었다.

물론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이뤄 낸 일은 아니었다. 오직 신만을 섬기는 것이 삶의 목표인 이들이 그것


외에 무엇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장미를 심은 것은 노아였다. 그는 땅을 얕게 파 씨앗을 심고 정성으로 가꿨다. 한 송이로 시작됐던
장미의 정원은 수년 후 정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아졌다.

수수함을 추구하는 수도원 건물과 화려한 장미 정원이라니. 참으로 괴상한 조합이었다.

노아는 길에 피어 있는 자유로운 들꽃보다는 일정한 곳에 갇혀 있는 장미가 더 좋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도 결국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원 속의 장미가 참 좋았다. 그리고 정원의 장미를 볼 때는
스텔라의 보석 같은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장미를 봄으로써 스텔라를 보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이걸 다 노아 네가 심은 거라고? 진짜?”

다 누나를 위해서 심은 건데. 정작 본인은 정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나, 옆에 앉아도 돼?”

별이 그의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장미는 바람을 맞아 날아가지 않지만 들꽃은 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라갔다. 분명 스텔라를 닮아 예쁜


꽃이었으나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들판에 자란 노란 꽃을 망설이지 않고 꺾었다. 그리고 그는 들꽃을 스텔라에게 선물했다.
도망치려던 들꽃은 그녀의 손에 붙잡혔다. 그 광경을 보는 심정은 꽤나 미묘했다.

노아는 스텔라를 닮은 들꽃은 사랑했으나 그것들이 도망치는 것까지 용서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참 변덕이 심한 아이였다. 꽃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마구 분노하여 들꽃을 꺾다가도 자신이


스텔라를 닮은 꽃을 꺾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몸을 잘게 떨고는 했다. 차마 스텔라를 닮은 들꽃을
아무렇게나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들꽃은 스텔라에게 선물했다. 수수하기도 하며 화려한 모습이, 서로
퍽 잘 어울렸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꽃은 장미였다. 장미는 들꽃처럼 도망치지 않고 항상 그의


곁에 머물러 줬으니.

수도원에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미의 정원. 그 정원이 노아가 스텔라를 제외하고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

추억이란 참 비겁하다.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은데 추억이 내 판단을 방해한다. 네가 미운데 결코 너를


미워할 수가 없다.

황홀한 비극. 추억이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

이제는 십수 년 전 죽어 가던 너를 구했던 것을 후회한다. 내가 증오해야 하는 대상은 너일까,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추악한 나 자신일까.

그렇게 알베르트를 거부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가 나를 찾아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 정도로 이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을 꽤 좋아했던 것 같기도 했다. 비열하지만 퇴폐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환호했었다.

“허.”

이제 와서 떠올리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노아, 악당 같은 너를 보니 알겠다. 악당은 매력적이지


않다. 그저 추악할 뿐.

“누나.”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목에는 여전히 붉은 사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 이름 불러 줘.”

“…….”

“어렸을 때처럼 내 이름 불러 줘, 응?”

나는 그저 침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노아의 행동은 전부 꾸며낸 가짜 같았다. 그는 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웃어 줘.”

“웃어, 달라고?”

“응. 웃어 줘.”

“날 이 꼴로 만든 게 너인데 너한테 웃어 주라고? 도대체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답을 원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당겨 그의 뺨에 가져대 댔다. 따듯한


온기가 손을 통해 느껴졌다.

“좋아해.”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좋아한다면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좋아해서 그랬어. 누나를 바라볼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기를 원해서.”

“이기적이네.”

“어쩔 수 없지.”

태어나기를 이렇게 추악하게 태어났으니까. 노아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태어나기를 행복하고 깨끗하게 태어났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

“누나가 어렸을 때 읽어 준, 성녀 세티아께서 저술하신 성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

“…….”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진심을 다해 주신 렌다를 섬기고 사랑한다면 끝내 주신의 보살핌 아래 구원받으리라.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그에게 읽어 준 성서의 내용이었다.

“누나는 내 신이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이렇게 누나를 섬기고 사랑할 테니, 진심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
….”

“난 신이 아니야.”
분명하게 노아의 말을 부정했으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날 구원해 줘, 사랑해 줘.”

나는 신이 아니다. 감히 누군가를 구원할 만큼 위대한 존재도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가 내게 사랑해 달라고 빌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무어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내보내 줘. 그럼 기꺼이 널 사랑해 줄 테니.”

물론 거짓말일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이미 그를


미워하는 동시에 아끼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싫어.”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노아의 얼굴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내 손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누나가 웃는 모습이 좋아. 그치만 놔 주면 도망갈 거잖아. 다시는 날 보러 안 올 거잖아. 날


미워할 거잖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말은 너무 모순적이야.”

“나도 알아.”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적어도 나를 이런 곳에 처박아 두지는 말았어야지.”

노아는 내 말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기 위해 세게 손을 잡아당기자 예상과 달리


그는 쉽게 내 손을 놓아 줬다.

나는 축 처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노아를 뒤로한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런 목표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욕망이라고 해 봤자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

“안녕, 수녀님.”

“……아.”

“오랜만이네.”

살로스가 내 눈앞에서 살포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운 밤이었다.
꿈인가 싶어 팔을 내려다봤으나 손목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아니, 사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살로스가 만든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생생해서 어떤


감각이든 현실처럼 느껴지니까.

“꿈이야?”

너 때문에 비밀 속에 감춰져 있던 문을 열었다고 화낼 기력도 없었다. 간신히 고개만을 돌려 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현실.”

힘을 잃었다고 주장하던 이전과는 달리 살로스의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힘을 되찾은 건가. 나는 빤히 그의 뿔들을 응시했다.

“내가 말했지. 부디 기대하라고.”

잠이 덜 깨 정신이 몽롱했다. 다른 것들은 제대로 인지할 수도 없었으나 살로스의 목소리만큼은 귀에


똑똑히 박혔다.

“조만간 수녀님을 삼켜 버릴 거라고 했잖아.”

“삼켜도 돼.”
“응? 뭐? 뭐라고?”

“삼켜도 된다고.”

무슨 반응을 기대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로스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네가 날 삼켜서 여기서 내보내 줄 수 있으면 기꺼이 허락해 줄게.”

“허락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근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당장 꺼져. 내가 생각해도 감정 하나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살로스는 멍하니 내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수녀님다운 말이네.”

그런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시작한 순간부터 쭉 서 있던 그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낮시간 내내 노아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였다.
“하나만 분명하게 말할게.”

“그러든가.”

“그냥 체념해. 다 체념하고, 나를 선택해.”

애초에 이 상황에 내게 선택권이 있기는 했나. 선택이라는 말을 듣자 헛웃음이 흘러나올 듯 입가가


간지러웠다.

“너를 선택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글쎄. 장담은 못 하겠는데.”

살로스는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몽마다운 곱상한 얼굴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근데 적어도 여기보다는 낫겠지. 믿던 동생에게 이런 짓을 당하는 것보다는 말이야.”

“뻔뻔하네. 이런 상황을 조성한 건 너면서.”

“뭐, 칭찬으로 들을게.”

한 대 쥐어박을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로스를 노려보던 중, 열린 문 너머에서 낮게 깔린 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그의 손에는 투명한 유리컵이 들려 있었다. 자던 중 갈증이 일어 깬 모양이었다.

“그거, 뭐야?”

노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은 마치 살로스를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아, 물론 인간이 아닌 건 맞지만.

-29-

노아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표정을 하고선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표정, 왜인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아. 나는 이내 언제 노아의 그 표정을 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전에 알베르트와 함께 수도원에 방문했을 때. 기도실에서 그와 관계를 맺다가 문틈 사이로 노아를
발견했을 때 그의 표정이 딱 저랬다.

부엌에 있던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손에 있던 유리컵은 어느새 산산이 조각나 위협적인 흉기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살로스의 목에 날카로운 파편을 겨누며 물었다.

“누구지?”

“아,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공작이 보냈나?”

그에 살로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노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 파편을 툭,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로 범벅된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더욱 자잘하게 조각났다.

그는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전에 알베르트가 노아를 대할 때 했던 행동이었다. 귀족 특유의


거만한 습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그가 하고 있다니.

5 년이라는 긴 세월이 너를 변화시킨 건지, 그게 아니면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노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빠르게 살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살로스는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머리카락을 내어 줬다.

“다시 한번 묻지.”

“아야, 이것부터 놓고 말하자. 응? 아프단 말이야.”

“공작이 보냈나?”

그는 살로스의 머리에 달린 어두운 색의 뿔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녀님, 얘 너무 무서워졌어. 어렸을 때는 좀 덜 사나웠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노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살로스의 머리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누나. 아는 사람이야?”

“……글쎄. 애초에 사람이 아닌데.”

이에 노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살로스를 가리켰다가 톡톡 머리를


두드렸다.
그제야 노아는 살로스의 뿔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에는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 옳은 악마의 뿔이
달려 있었다. 노아의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

“있잖아, 꼬마야.”

꼬마라니. 외형만으로는 노아와 살로스는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내가 수녀님을 데리고 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주라.”

“뭐?”

“다시 말해 줄까? 수녀님이 날 선택했다고. 네가 아니라, 나를.”

살로스의 표정은 어린아이에게 장난을 치는 못된 어른처럼 보였다. 과연 노아가 저 말에 넘어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는지, 살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노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버릴 거야?”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라고 하는 게 맞겠다.

“버리고 갈 거야? 엄마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응. 갈 거야.”

“가지 마, 누나. 가지 마…….”

이 울음 또한 거짓말일까. 이제는 무엇이 그의 진심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약한 척 울먹이다가 또다시 본심을 드러내고 나를 향해 비리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워서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또 나한테 거짓말을 하네.”

감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 너한테는 눈물을 흘리는 게 그렇게 쉽구나. 감정이라는 게 너한테는
진심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또 거짓이었구나. 나는 도대체 너한테
뭐길래 너는 나를 대할 때마다 가면을 쓰고 거짓만을 말하는 걸까.

“나는 너를 구원해 줄 만큼 강하지도 않고 희생적인 사람도 아니야.”

“아니, 누나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어.”

두 손목을 압박하는 철쇄는 지나치게 걸리적거렸다. 서로 얽혀서 끊어지지 않는 각 사슬의 관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핏 보면 나를 올려다보는 노아의 눈동자는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손에 머무르던 온기가 점차 사라졌다.

“구원자를 원하는 거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 봐. 적어도 나보다는 희생적이고 널 위해서 살아 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지.”

“안 돼. 누나가 아니면 안 돼.”

노아가 무어라고 더 말했으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살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살로스.”
“응, 수녀님.”

“너를 선택할 테니까, 그러니까.”

부디 나를 삼켜 줘.

살로스가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의미인가. 나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또 나를 두고 가지 마.”

“…….”

“이 끔찍한 어둠 속에 날 홀로 남겨 놓고 가지 마.”

또다시 노아가 나를 향해 애원했으나 내가 그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살로스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간절하게 애원하던 노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이


콧등이 시큰했다.

?
너와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으나 끝내 너를 미워하며 마지막을 그린다.

곧 시야가 흐려지며 시야에서 노아의 얼굴이 사라졌다.

***

여기가 어디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먼지 때문에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들자 손목을 연결하는 철쇄가 거친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창문부터 열까?”

살로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미약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낡아
여기저기가 부서진 을씨년스러운 집이었다.

?
“……여기가 어디야?”

“그냥 제국 안에서 인적이 제일 드문 곳으로 왔어. 어디 보자, 집 밖에 마물들이 우글우글하네.”

마물이라고?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살로스가 생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창밖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어두운


색의 끈적이는 점액으로 뒤덮인 징그러운 생명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려고 보니까 국경 지대밖에 없더라.”

국경 지대. 드넓은 사막과 제국이 이어지는 곳.

동시에, 수많은 마물들의 서식지라고 불리는 곳.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낡은 집들이 몇 채 더 있었다. 아마 마물들이 소환되기 전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집일 것이다.

대책 하나 없는 멍청한 몽마 같으니라고. 나는 얼굴은 잔뜩 일그러트리며 살로스를 노려봤다.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구석에 가 대충 주저앉았다.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 건 머리가 너무 복잡한


탓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오히려 머리가 멍하니 텅 빈 탓이었다.

과연 내가 살로스의 손을 잡기 직전 노아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허공을 응시했다.

햇빛을 받고 은색으로 빛나는 먼지가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내 손은 먼지에 닿지 못하고 살로스에게 잡혔다.

“피곤해 보여, 수녀님.”

“너한테서 그런 정상적인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한숨이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잘게 몸을 들썩일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라 일렁였다.


“그냥 눈 좀 붙여.”

어쩐지 짜증이 난다. 살로스가 한 저 말이, 노아가 이전에 나를 구해 주는 척 연기를 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살로스가 손으로 내 눈 위를 덮었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손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사용한 건지,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꿈속으로


찾아갔다.

***

“모니카 공작가에서 또다시 서신이 왔습니다.”

“…….”

“저, 들어가겠습니다.”
스테판은 문고리를 돌리고 힘껏 문을 열었다. 암흑가의 주인을 위한 방답게 노아의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아는 스테판에게 등을 보인 채로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스테판은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모니카 공작가에서 온 서신입니다.”

“…….”

“또 불태워 버릴까요?”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러라는 것인가 보다. 스테판이 몸을 돌려 화로에 편지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낮게 깔린 노아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스테판.”

스테판의 손을 벗어나려던 편지는 겨우 재가 되는 것만은 피했다.

“그 편지, 이리 가져와라.”
등을 보인 채로 허공만을 바라보던 노아가 드디어 몸을 틀어 스테판을 바라봤다. 그는 노아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스테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히 편지를 건넸다. 노아는 굵은 눈물을 대충 소매로 닦아 낸 후
나이프로 편지의 봉인을 제거했다.

편지에는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찾아오라는 내용뿐이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전부 이따위다. 거만하고 멍청한 족속들. 노아는 편지를 구길까 고민하다가 독수리가
새겨진 봉인을 뜯어 주머니에 넣었다.

“스테판.”

“예, 주인님.”

“마차를 준비시켜라. 모니카 공작저로 갈 것이니.”

봉인에 새겨진 독수리를 보니 독수리가 새겨진 보석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던 그날의 스텔라가
떠올랐다. 노아가 봉인을 세게 쥐자 봉인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공작이 반 미리엄의 정체를 알아차려 그에게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노아는 입을 꾹 닫고
손가락으로 나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공작의 목적이 무엇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보나 마나 반 미리엄, 즉 암흑가의 주인이 가진 힘을


빌려 스텔라를 찾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이래 봬도 공작은 암흑가의 주인보다도 스텔라를 먼저 찾은 자였다. 그런 자를 이용해서 그녀를 찾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노아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마차에 올랐다.

-30-

“서신을 몇 통이나 보냈는데 이제서야 답하다니.”

알베르트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놈은 더럽게 비싼 몸이신가 보군.”

“…….”

아마 이 자리에 알베르트와 함께 있는 것이 코르넬이 아니라 집사였다면 제발 체통을 지켜 달라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알베르트는 집사가 잔소리를 하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느 날 아침, 코르넬이 가지고 온 것은 암흑가의 주인이 모니카 공작저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늙은이가 오면 응접실로 안내해.”

“예, 알겠습니다.”

반 미리엄. 교활한 여우 같은 늙은이라고 들었다. 그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진짜로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알베르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농도가 높은 위스키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헤집는


듯했다.

스텔라가 암흑가로 들어갔다는 증언. 그놈의 증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의존해 스텔라를 찾아 헤맨
경험은 셀 수도 없이 해 봤다.

또다시 그 증언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이런 고생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알베르트는
턱을 괴고 앞을 응시했다.

추악하고 오염된 인생 살며 얻은 유일한 유희라서 그런 걸까. 그는 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미소


지었다.
덜컹덜컹. 꽤 작은 소리였음에도 알베르트의 귀에는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 더러운 범죄자의 얼굴이나 보러 가 볼까.”

과연 범죄자들의 주인이라는 그 늙은이가 얼마나 교활한지 말이야. 알베르트는 1 층에 위치한 응접실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계단에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세상이 비틀렸다. 아마 위스키를 마구 입에 들이부은 탓이리라.


알베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응접실 앞에 서 있는 코르넬을 쳐다봤다.

코르넬이 지키고 있는 저 응접실 안에는 대단하신 범죄자가 앉아 있을 것이다. 알베르트가 응접실 앞에


서자 코르넬이 대신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색의 망토를 둘러쓰고 수수한 흰색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알베르트는 남자가 먼저 그에게 인사를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제국의 공작이 한낱 범죄자에게 먼저


인사할 수는 없으니.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전하. 반 미리엄입니다.”


“노인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젊군.”

“…….”

“실내인데 그 가면은 좀 벗지그래.”

눈까지 전부 가리고 있는 가면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애초에 암흑가의 주인은 노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렇게 젊은 목소리라니.

알베르트는 응접실의 중앙에 위치한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의 대각선에는 반 미리엄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가면을 벗으라는 말에도 반 미리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허. 알베르트는 짜증이 섞인
비웃음을 내뱉었다.

알베르트는 손을 뻗어 가면의 끝부분을 쥐었다. 그가 손을 당긴다면 반 미리엄의 가면은 바로 어딘가로


날아가고 이 범죄자의 얼굴은 전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은 곧 반 미리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노인의 손 치고는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감히 자신의 옷을 구긴 그 손을 노려봤다.

“무례하군. 감히 범죄자 따위가.”


“제가 아무리 무례하다고 한들 첫 만남에 상대의 가면을 벗기려고 하신 전하보다 무례하겠습니까.”

나지막한 미성은 왜인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과연 가면 속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지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저 가면을 벗기고 놈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 알베르트의 뒤에는 코르넬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악당처럼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코르넬에게
명령했다.

“코르넬. 이 무례한 범죄자의 가면을 벗겨라.”

과연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기사 답다고 해야 할까. 코르넬은 즉시 소파를 뛰어넘어 반 미리엄에게


달려들었다. 반 미리엄이 재빨리 알베르트의 손을 놓고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명령을 수행한 후 알베르트의 뒤로 돌아온 코르넬의 손에는 백색의 가면이 들려 있었다. 알베르트는 턱을
들어 올리며 반 미리엄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네놈이었구나.”


“…….”

“마법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외모와 목소리도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어디, 한번 들어볼까. 무엇이 너를
그렇게 다급하게 만들었는지.”

거만한 말을 뱉는 백발을 가진 공작은 천사 같다기보다는 뱀의 탈을 쓴 악마 같았다. 푸른 눈동자의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공작을 노려봤다.

곧 노아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것 또한 거짓이며 가면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시고도 제가 공작 전하의 물음에 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 목이 잘리고 싶나?”

“제국의 모든 범죄자들로부터 살아남으실 자신 있으십니까?”

알베르트는 지긋이 노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만한 것이,
마치 귀족의 표본 같았다. 노아는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맹이가 배짱 하나는 좋구나.”

“…….”

“예전부터 그 배짱이 마음에 안 들었어.”


알베르트는 당장이라도 손짓 한 번으로 거만한 범죄자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아가 죽어
버린다면 스텔라의 행방을 쫓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터.

“스텔라가 암흑가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증언이 있었다.”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증언자의 혀를 잘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

“아무래도 그 대상이 네가 될지도 모르겠군.”

코르넬. 알베르트가 코르넬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코르넬은 노아의 머리를 잡고 눌러 그를 무릎 꿇렸다.

그에 노아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비틀었으나 수 년 동안 훈련받은 기사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무릎 꿇은 노아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베르트가 표정을 완전히 굳힌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해. 스텔라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네 혀를 잘라 버릴 테니.”

“제 도움이 필요해서 절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없으시면 누나의 행방을 영영 모르실 텐데


말입니다.”

그는 ‘누나’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며 말했다. 그녀와의 친근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시인 걸까. 꼴에


도발이라도 해 보려고?

그래 봤자 아직 소년의 티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겨우 저 정도로 암흑가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꼬맹아, 하나만 묻자.”

알베르트는 한 손으로 노아의 뺨을 세게 쥐었다. 노아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머리카락을


뽑아 버릴 듯 잡아당기는 손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게 행동하는 건 과연 네가 순진해서일까, 아니면.”

“…….”

“스텔라가 새처럼 멀리 도망가 버린 탓에 불안해서일까.”


당연히 후자가 정답이었다. 애초에 알베르트 또한 그것을 예상하고 질문한 것이었으니.

“반응을 보아하니 후자인 것 같군.”

만약 그가 스텔라를 데리고 있었다면 알베르트의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제 발로 알베르트를


찾아왔다는 것은 곧 노아 또한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스텔라가 노아를 떠났다면 그는 스텔라를 찾는 데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눈먼 암흑가의 주인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려 웃으며
생각했다.

“반 미리엄. 아니, 노아.”

자신의 진짜 이름이 들려오자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베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스텔라를 찾아와라.”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그 한마디 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힘들게 누나를 찾아 전하께 데려오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 것 같습니까?”


“암흑가가 지도에서 사라져도 좋다면 그렇게 해도 좋고.”

“황실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암흑가인데, 무슨 자신감이십니까?”

노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알베르트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미소가


자신감을 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

결국 노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공작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으나, 알베르트 또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가 보도록.”

코르넬은 그제야 강하게 잡고 있던 노아의 머리에서 손을 떼 냈다. 노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면을
주워 다시 얼굴에 씌웠다.

그는 응접실에서 나가기 전 가면으로 가려져 눈빛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알베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수도원의 정원에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
그곳은 나만의, 그리고 누나만을 위한 공간이니까. 노아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공작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공작저를 떠나는 모습은 코르넬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괜히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자가 아니었다.

“코르넬.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 못생겨질 텐데 표정 좀 펴는 게 어때.”

장난이 섞인 말이었으나 코르넬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것을 본 알베르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저 범죄자를 믿으십니까?”

알베르트는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놈이 스텔라를 찾는다고 해도 내 앞에 스텔라를 데려올 리가 없지. 차라리 암흑가를 버릴


놈이야.”

“그럼 도대체 왜…….”

“마침 잘 말했군. 코르넬, 저놈을 감시해.”

?
코르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베르트를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혹시라도 저놈이 나보다 먼저 스텔라를 찾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노아를 감시함으로써 배의 효율을 얻겠다는 소리였다. 코르넬은 알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무릎을 꿇은 뒤 조용히 노아의 뒤를 따랐다.

노아를 태운 어두운 색의 마차는 빠르게 달려 암흑가로 향했다. 코르넬은 자신이 스텔라를 놓쳤던 골목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또다시 그의 주인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코르넬은 허리에 꽂았던 검을 세게 쥐었다.

-31-

국경 지대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 깨진 창문을 통해 모래가 들어오기도 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징그러운 마물들을 봐야 했다.

살로스가 결계를 쳐 놓은 덕에 마물들이 집까지 들어오지 못했지만 말이다.

기세 좋게 나를 삼켜 버리겠다고 선전포고하듯 말했던 살로스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그는 거의


집 안에 있는 일 없이 매일 밖에 나가 마물들을 죽였다.
?

나는 창문을 통해 가만히 서서 손가락만으로 마물들을 죽이는 살로스를 보며 생각했다.

마물이면 급이 낮은 악마나 마찬가지일 텐데. 게다가 몽마는 악마의 일종이고. 그럼 살로스는 동족을
열심히 죽이고 있는 걸까.

도대체 살로스의 머릿속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살로스는 매일 해가 진 이후 어두운 밤이 됐을 때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항상 간단한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내게 내민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분명 배가 고프기는 한데 음식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수녀님. 왜 맨날 힘없이 누워만 있어?”

살로스가 축 처진 내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마물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것만 빼면 여기 꽤 경치가 좋아. 구경 갈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경치는 무슨. 마물들에게 공격이라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철쇄 탓에 깊게 파였던 손목의 상처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것 같았다. 손목을 꾹 눌렀더니 붕대가 피로


물드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었다.

나는 붕대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반대로 살로스는 내 손목을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거 뭐야, 수녀님? 다쳤어?”

내가 무어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상처 위로 그의 손이 닿아 쓰라렸다.

붕대를 풀자 불규칙적으로 찢어진 손목의 모습이 보였다. 고통이 잘 느껴지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더니


상처가 생각보다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

살로스가 잠시 입술을 꽉 깨물며 내 손목을 내려다봤다. 이내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과 함께 입을


살짝 벌리고 내 손목을 입에 물었다.

“무슨……!”
나는 곧 느껴질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고 꾹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고통은커녕,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살로스의 물컹한 혀뿐이었다. 그가 입안에서 혀로 내 손목을


핥는 것이 느껴졌다.

“흐…….”

고통은 없었으나 왜인지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로스는 반대쪽 손목에도 그 행위를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그에게 따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손목에 일어난 현상을 보게 되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상처가…….”

상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말끔하게 나았다. 커다란 흉터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상처는
이미 깨끗하게 나아 부드러운 피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살로스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살로스가 눈가를 접어 웃더니 혀를 내어 입가에


묻어 있던 피를 핥았다.
“흉 남으면 수녀님 속상할 것 같아서.”

“아무리 속상해도 지금보다 더 힘들 것 같지는 않는데.”

뭐, 그래도 흉터가 남는 것보다는 낫겠다. 흉터가 남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볼 때마다 노아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나는 감사의 의미로 살로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는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눈을 감고 있던 살로스가 어느 순간 눈을 뜨고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프지 마, 수녀님.”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지.”

“미안해.”

살로스가 내 무릎에 기댄 채 짧게 사과했다. 이놈이 저지른 수많은 미친 짓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한마디였다.

문득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보니 쥐어뜯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손에 그의 머리카락을


가득 쥐고 세게 당겼다.
“아, 아악.”

살로스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매달렸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손에 힘을 풀었다.

이놈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대머리로 만들어도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답답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노아가 막아 놓은 이 답답한 숨통을 살로스로 풀어내려는 심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좋을까. 자꾸만 노아가 떠올라서 가슴이 더더욱 답답해지기만 하는데.

이 이상 무언가를 생각하기가 싫어 나는 눈을 감고 먼지가 가득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출렁이며 회색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 집, 언제 한번 청소라도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 기관지가 먼지에 막혀 호흡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이곳에 온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갑자기 백색의 갑옷을 입은 무장 기사들이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황실에서 마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사들을 파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황실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백색 갑옷과 그 위에 새겨진 금빛 문양들. 보통 기사들이라기보다는…….

“으. 저게 뭐야. 성기사들이잖아.”

그래. 성기사에 가까웠다.

아니, 잠시만. 진짜 성기사들이라고?

“성기사?”

“어우, 저 하얀 갑옷 좀 봐. 보기만 해도 짜증나네.”

살로스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며 툴툴거렸다. 나는 그의 머리에 여전히 뿔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살로스의 힘이 약해졌을 때 그의 뿔은 모습을 감춘다. 뿔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힘이 약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인데.
그렇다는 것은, 성기사는 몽마에게 꽤나 해로운 존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살로스가 그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말이다.

“괜히 여기로 왔네. 성기사들이 올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을 텐데.”

대략 열 명 정도의 성기사들이 마물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태양에 의해 쫓겨나는 어둠처럼 마물들이


사그라들었다.

확실히 마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기사들보다 성기사들이 더 쓸모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신전 밖으로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어째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처음 보는 성기사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그때였다. 성기사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 것은.

밝은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미친 듯이 그것들을 도륙하던 남자가 문득


이쪽을 바라봤다.

“…….”
순간 남자는 차가운 얼음이 녹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미소를 응시했다.

이상하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집은 살로스가 쳐 놓은 결계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분명 이전에 살로스가 내게 말하기를, 마물과


인간은 결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저 남자, 성기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싱긋 웃기까지 했다.

아무리 성기사라고 해도 살로스 정도 되는 고위 몽마가 쳐 놓은 결계 너머를 자연스럽게 볼 수가 있나.

나까지 마물로 생각해서 죽이려고 들까 봐 괜히 소름이 끼쳐서 나는 얼른 창문이 없는 쪽으로 도망치듯


이동했다.

살로스는 여전히 창문 앞에 붙어 성기사들을 욕하는 내용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창문 앞에 있으면 성기사들한테 보이지 않아?”

“수녀님, 걱정도 참. 쟤네는 결계 안에 뭐가 있는지 못 봐.”


그럼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만약을 대비해 살로스를 끌고 밖에서 우리를
보지 못하도록 안쪽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수녀님?”

“어떤 남자랑 눈이 마주쳤어.”

그때, 나는 내 행동에서 이상함을 찾아냈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되는 성기사를 두려워하고 몽마에게
의지하려고 하다니.

하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을 때 본 남자의 눈동자는 선한 성기사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싸늘하던 눈동자가.

또다시 그 눈동자가 머릿속에 떠오르길래 얼른 고개를 붕붕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살로스는 고민하는


듯이 턱을 쥐고는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쟤네 쫓아 줄까?”

그 말을 듣고 나는 다급하게 살로스의 소매를 잡았다.

?
눈이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라면 몽마의 결계 너머를 볼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력을 가진 성기사일 테다.
만약 그런 자를 쫓으려다가 오히려 살로스가 공격받는다면.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신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몽마 따위에게 의지하고 있다.

의지의 대상. 그것은 처음에는 노아였고 이제는 살로스였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떠올리려고 애썼더니 갑자기
너무 억울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알베르트라는 미친놈을


만나서 상황이 전부 이렇게 됐다.

제국의 공작인 알베르트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만약 살로스의 힘이 없었다면 5 년은커녕 1 년도


안 돼서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살로스가 필요했다. 아직 알베르트로부터 나를 숨겨 줄 수 있을 만한 힘이 필요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의지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지 마.”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간절했다.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그러자 살로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예쁘게 빙긋 웃으며 내 옆에 풀썩 앉았다.

“그래, 뭐. 수녀님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 안 가야지.”

“…….”

“근데 여기 마음에 안 든다. 그치? 성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좀 시끄럽네.”

금방 다른 곳을 찾아볼게. 살로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성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위험해 보이는 남자. 그런 사람을 근처에 두고 편히 생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
창문 틈 사이로 마물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듣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곧 떠나는 거다, 곧.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며칠 후 커다란 재앙이 나를 반겼다.

-32-

며칠이 지나자 국경 지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가끔 나가 마물들을 죽이며 놀던


살로스는 성기사들이 도착한 후로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취미 생활을 뺏긴 기분이야.”

??

살로스가 창문을 통해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대해 그딴 게 취미 생활이냐고 반박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취향에 간섭하는


것은 괜한 짓이었다.

성기사들이 국경 지대에 온 지 얼마나 지났더라.


?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성기사들은 훨씬 오래 국경 지대에 머물렀다. 이 정도면 일반 기사단이 왔다고


해도 마물들을 다 처리했을 시간인데.

살로스는 매일 아침 성기사들을 노려보다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으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바닥이나 낡은 침대 위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잡아먹겠다는 말과 달리 살로스는 얌전했다. 이전에 상처를 핥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짓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그가 어째서 아직도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못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저기에 성기사들이 깔렸거든. 어딜 가도 저놈들뿐이야. 완전 짜증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신전에 틀어박혀 웬만하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 바로 저것들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살로스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못하는 이유가 성기사들이 제국 여기저기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기사란 성녀의 탄생일 정도로 큰 행사가 있지 않은 이상
신전 안에서 나오지 않고 수련을 하는 직업이었다.

국경 지대에 서식하는 마물의 수가 급증하기라도 했나? 아니, 아마 그건 아닐 테다.

마물에 관한 일은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마물의 수가 급증했다면 전국에


그 소식이 퍼졌을 테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수녀님. 무슨 생각해?”

??

갑자기 살로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뒤로 조금 물러나려고 했으나 이미 등을 벽에 맞대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손으로 살로스의 가슴을 밀어 그를 뒤로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으나 동시에 내 손을 잡고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꼈다.


?

?“수녀님한테는 신기한 향이 나.”

“……향?”

?“응. 수천 년 동안 살면서도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향이.”

손목 안쪽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진다. 살로스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어. 도대체 수녀님은 뭐야?”

“…….”

?“애초에 수녀님을 발견한 것도 이 이상한 향 때문이거든. 향이란 건 절대 유일무이할 수가 없는 건데.”

살로스가 천천히 얼굴을 기울이자 살로스의 코끝과 내 코끝이 톡, 닿았다. 눈앞,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가까운 곳에서 살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녀님은 어디에서 온 거야?”

?“……먼 곳. 엄청 먼 곳에서.”
차마 이 세상은 사실 소설 속이고 나는 이 소설의 바깥에서 왔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살로스의
성격이라면 분명 ‘수녀님, 생각보다 창의적인 몽상가였네’ 따위의 말을 하며 놀릴 게 뻔했다.

?“대답이 재미가 없어.”

?“무슨 대답을 원했길래.”

?“글쎄.”

??

대답이 끝나자 손목에 닿아 있던 살로스의 입술이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왔다. 조금 전에 비해 거칠어진


숨결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삼켜 버리겠다더니, 그게 지금이야?”

?“미안. 그 꼬마 때문에 속상할까 봐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

?“뭐, 네가 언제부터 내 기분을 신경 썼다고.”

??

눈앞에 있는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괴로운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한 그런 복잡한 얼굴.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거야 네가 더 알겠지.”

??

살로스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미간을 꾹꾹 눌러 보기도 했다. 살짝 구겨진


눈가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벽에 붙어 있는 깨진 거울 조각에 얼굴을 비췄다. 미끈한 그의 얼굴이 거울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수녀님 표정이랑 비슷한 것 같아.”

?“내 표정이랑, 비슷하다고.”

“지금 슬픈 건가? 내가 슬프다고?”

?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나?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살로스처럼 거울을 통해 내
표정을 살폈다.

입꼬리는 살짝 내려가 있었다. 낯빛이 조금 창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다른 것이 없었다.

?“슬픈 표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야. 수녀님은 슬플 때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알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수녀님이 아끼는 그 꼬맹이랑 헤어질 때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

아. 살로스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깨진 거울을 느릿하게 손으로 쓸었다. 내가 노아를 버리고 살로스를 따라갈 때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손가락의 연한 살점은 결국 거울의 뾰족한 파편을 이겨 내지 못하고 팍, 하고 터지고 말았다. 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녀님, 피 나잖아.”

??

그것을 발견한 살로스가 다급하게 내 손을 거울에서 떼 냈다. 피는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몽글몽글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살로스는 이전처럼 혀를 내어 조심스럽게 상처를 핥았다. 따끔한 감각도 잠시일 뿐이었다. 깊게 베였던
손가락은 금방 아물었다.

하지만 살로스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핥다가 손바닥을 핥았고,
손바닥을 핥으며 점점 위로 올라왔다.

목에서 일시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살로스는 내 목을 살짝 깨물어 그 위에 자국을 만들었다. 몽마인


주제에, 사람의 것을 닮은 잇자국을 만들었다.

?“흐으…….”

??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로스는 나를 쳐다보며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살로스는 나를 따라 몸을 낮추며 계속 목에 입을 맞췄다. 나는 나른하게 움직이는 살로스의 얼굴,


그러니까 두 뺨을 양손으로 쥐었다.

?“너 왜 자꾸 그런 표정 지어?”

?“수녀님이 짓고 있는 표정?”

고개를 끄덕이자 살로스가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나도 왜인지는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

?“수녀님이 나 미워하니까 슬픈가 봐.”

?“네가 지금까지 한 행동에 그 이유가 있다는 건 생각을 안 하는구나.”


?“미안해.”

내가 수년간 겪은 일들이 겨우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해결될 만큼 가벼운 일이었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살로스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아 들었다.

다시 손을 짚을 수 있는 바닥이 생겼을 때 나는 침대 위였다. 살로스는 내 셔츠를 잠그고 있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그때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크기의 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져 자국을 만들어 냈다.

?“……너 울어?”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몽마가 눈물을 흘린다니. 수도원의 도서관에 잔뜩 보관된 두꺼운 책들에서도,


전설이나 기록에서도 읽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미안해, 미안해.”

?“……이게 지금 무슨.”
?“내가 잘못했어…….”

지금까지 수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도대체 왜?

?“좋아해 달라고 안 할게. 미워하지만 말아 줘…….”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수녀님 눈동자가…….”

??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리던 살로스가 돌연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어두운 자색 눈동자가


물기가 차올랐다.

?“전에는 예쁘게 빛났는데, 이제 빛나지가 않아. 수녀님이 멀리 가 버릴 것 같아서그래. 그래서 걱정이


돼서…….”

?“…….”

?“지금 수녀님 눈이 너무 슬퍼 보여. 지금까지 이렇게 슬퍼한 적 없잖아. 그 동생이라는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걔가 그렇게 소중해?”

?“……아.”
?“나는 왜 수녀님이 그렇게 슬퍼하는 건지 모르겠어. 수녀님 눈동자만 보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잡을 수 없는 곳이라고? 내가 죽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당사자는 그럴 생각도 없는데 오히려


네가 망상을 펼치는 중이라고.

?“……난 죽을 생각 없어.”

??

이 말에 대해 살로스가 무어라고 의견을 덧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로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끌어안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고 버텨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침대 위에 내가 쓰러지고, 그 위에


살로스가 쓰러지듯 엎어졌다.

살로스의 무게를 버텨야 하니 숨이 찰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살로스의 몸은 나와 닿아 있지 않았다. 나를 배려하는 건지, 그는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살로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손이 뻘쭘해 그냥 살로스의 등 위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하니 그를 안고 있는 것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살로스가 울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살로스의 눈물


때문에 어깨가 축축해졌으니.

?“좋아해, 수녀님. 좋아해…….”

?“…….”

?“가지 마. 떠나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수녀님이 아끼는 그 꼬맹이한테도 가지 말고 내 옆에…….”

??

순간 창문 너머로 봤던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성기사가 떠올랐다.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잘게


떨었다.

얼른 그 사람이 가 버렸으면 좋겠다. 혹은 살로스와 내가 먼저 이곳을 떠나거나.

?
?“……너야말로.”

살로스의 등 위에 얹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33-

살로스 또한 이를 느꼈는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 탓에 얼굴에 얼룩이 졌음에도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또렷했다.

하지만 놀란 얼굴도 잠시, 그는 다급하지만 느긋하게 내게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서로 얽히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입안이 미칠 듯이 간지러웠다. 혀가 서로 맞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왜인지 아쉬움이 들었다.

?“맞아, 이 향이었어. 이 향이 미쳐 버릴 것처럼 그리웠어.”

??

향, 향이라.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다던 그 향을 말하는 걸까.


?

?“미안해, 수녀님.”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짐승처럼 얽혔다. 꽤 오랜 시간 물건을 품지 않았던 아래는 퍽 뻑뻑했다.


살로스의 손가락이 거칠게 아래에 침범했다.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와 살로스의 손가락과 마찰하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이 작은 집에 울려 퍼졌다.

위에서는 혀가 서로 얽히고 있었고 아래에서는 손가락과 애액이 서로 얽히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살로스가 손가락을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숨이 차올랐다. 이러다가 숨이 넘어가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드디어 살로스가 입을 떼 냈다.

한 개로 시작했던 손가락이 어느새 세 개나 아래에 들어와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손가락들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윽, 흐…….”

그는 손에 묻어난 애액을 보며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바지를 고정하던 버클이 풀리자 꼿꼿이 선 그의


물건이 드러났다.
살로스는 곧바로 아래에 그의 물건을 맞추고는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했다. 물건의 둥근 끝부분이 아래에
조금씩 침투했다.

내벽을 통해 물건의 핏줄 하나하나까지 상세하게 느껴졌다.

?“수녀님.”

살로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갈라진 목소리가 듣기 싫을 만도 하건만,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수녀님, 하아, 대답해 줘.”

?“……싫어.”

싫다고 대답했지만 살로스의 옷자락을 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살로스도 이를 깨닫고 희미하게 웃었다.


하여간 눈치만 빠른 놈.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살로스의 옷자락을 쥔 손을 올려다봤다.


?

내가 어쩌다가 이런 몽마에게 의지하게 됐을까. 언제부터 감정이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는 알 수


없었다. 그 계기가 노아…… 노아라는 것만 자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살로스가 내 가슴에 얼굴을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때문에 잠시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그


틈을 타 숨을 몰아쉬었다.

?“수녀님이 전에 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었잖아.”

나는 차마 대답할 힘이 없어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거, 한 번 더 말해 줘. 가지 말라고, 수녀님 옆에 있으라고 해 줘. 뭐든 해 줄 수 있어. 수녀님이


명령하는 건 전부 할게.”

?“가지 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살로스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고, 그것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
하지만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잊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는 깊게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이제 너무 지쳐 버렸다.

살로스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살로스의 물건이 끝까지 들어오자 아랫배가 살짝 부풀었다. 살로스는 자신의 물건으로 가득 찬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성기사들에 대해 불평을 잔뜩 털어놓던 그였지만 관계를 갖는 동안은 그들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햇살로 채워져 있던 창문에는 어느새 어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능력을 거의 잃었을 때의 그는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수면을 취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지 않았고


먹지 않았으며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살로스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 나를 지켜봤다. 나는 살로스의 집요한 시선을 외면하며 애써 눈을 감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깊은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

꿈속에서 나는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로스가 만들어 낸 공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곤 딱딱한 바닥뿐이었다. 그래도 걸음을 내디디 수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려나.

처음에는 조심히 걸었다. 혹여 앞에 장애물이 있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곧 이 넓은 공간에 장애물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조금 더 과감하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으니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계속 걷는 것이 지겨워져 결국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히 주먹으로 바닥을 콩콩 두드렸다.
당연하지만 바닥은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아.”

??

잠시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암흑뿐이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아.”

??

아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만 상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거기 누구야?”

??

그래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

바닥의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빛은 점점 형태를 갖추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노아.”

앳된 얼굴과 내려다 봐야 할 정도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지금의 노아는 아니었다.

몸 여기저기에 있는 크고 작은 생채기들. 저 상처들이 가리키고 있는 노아의 나이는 분명했다.

다섯 살. 처음 노아를 발견했을 때 그의 모습이 딱 저랬다.

?“…….”

??

겁을 단단히 먹은 어린 소년은 나를 보고는 몸을 움츠렸다. 그는 눈만을 깜빡이며 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처음 그를 봤을 때가 떠올라 뭉클해진 탓이었다.

내가 노아에게 한 걸음 다가가자 노아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또다시 꾸물꾸물 움직이며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스텔라 누나아…….”

??

이번에는 언제 적의 노아지? 아직 키가 작은 것을 보니 성장기가 오기 전인 여덟 살 정도인 것 같았다.

이번에도 바실에게 맞고 있던 여덟 살의 그가 떠올라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덟 살의 노아가 손을


잡아 달라는 듯 힘껏 작은 손을 뻗었다.

?“가지 마, 누나. 나 두고 가지 마…….”

어렸을 적의 모습으로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
또다시 밝은 빛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열세 살의 그였다.

?“누나, 스텔라 누나? 어디 갔어?”

?“…….”

?“어디 간 거야? 설마 날 버리고 가 버린 거야……?”

??

나를 애타게 찾던 열세 살의 노아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우울해 보였다.

꿈속이 아니라, 진짜 노아도 내가 말도 없이 떠났을 때 저렇게 행동했을까. 파도처럼 밀려오는 미안함에


나는 더 그에게 다가갔다.

계속 그에게 다가갔더니 어느새 손을 뻗으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이곳은 꿈속일 뿐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는 열여덟 살의 이기적인 노아가 아닌, 열세 살의


노아였다.

?
나는 조심히 손을 뻗어 노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해 줬지만 그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손을 떼어 내려는 순간, 억센 힘에 의해 움직임이 봉쇄됐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했잖아.”

??

젠장. 두 팔로 나를 옭아맨 것은 열여덟 살, 즉 지금의 노아였다.

?“이거 놔.”

??

꿈인 걸 알지만 그의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떼어 내려고 했던 손은 이미 노아에게 잡힌 지 오래였다.

?“이렇게 버리고 갈 거면 예전에 왜 날 구해 준 건데.”

?“그야…….”
??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인 줄 몰랐으니까.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노아는 뒷말을


예상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고 싶어.”

?“제발 네 감정만 중요하게 여기지 마. 너처럼 나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네가 마음대로 밀어붙여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누나, 보고 싶어. 누나가 나한테 웃어 주던 것도, 누나가 마지막에 슬퍼하는 표정도. 전부 다.”

??

노아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밀어내도 밀리지 않았고 그를 거부하는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누나를 간절하게 찾고 있어.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지 마. 날 찾지 말고 네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

이 넓은 세상에 너와 어울리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네 이기적인 본심을 알고도, 너를 구원해


주겠다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거야.

?
?“누나가 아니면 가치가 없어.”

?“가치, 가치라니. 사람은 가치로 판단하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 누나가 보고 싶어.”

??

끝까지 노아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다시 빛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나를 품에 넣고


놓아 주지 않았다.

?“……금방 찾으러 갈게.”

??

노아가 완전히 빛이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녀님, 괜찮아? 식은땀 엄청 흘리더라.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길래 꿈에 들어가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어.”

??

식은땀? 소매로 뺨을 문지르니 소매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허어. 나는 그것을 보고 깊게 숨을


뱉었다.

?
?“별것 아니었어.”

살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지만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노아의 꿈을


꿨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쿵쿵.

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누군가 정갈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34-

살로스와 나는 말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성기사들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살로스의 결계는 강력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결계를 뚫고 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문을 두드린 것이 우연일 수가 없었다. 마물이 가득한 국경 지대 주변에 위치한 빈집에 어느 누가 문을


두드리겠는가.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밀색 머리칼의 성기사가 떠올랐다. 이전에도 결계 너머가 다 보인다는 듯이
뚫어져라 이곳을 쳐다보던 그 성기사.

?“……살로스.”

?“응, 수녀님.”

?“너 지금 마법 사용할 수 있어?”

?“사용할 수 있기는 한데.”

?“그럼 빨리 도망치게 마법 좀 써 봐, 빨리.”

??

살로스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마 신체가 접촉한 상태여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그 손을 잡았다.

?“일단 성기사들 없는 곳으로 이동할게.”

??

살로스는 눈을 살포시 감으며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
하지만 나와 살로스는 여전히 이 낡은 집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살로스가 눈을 뜨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왜 마법이 안 써지지?”

?“뭐……?”

??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 않나? 지금 꽤 심각한 상황 아니야?

쿵쿵!

이번에는 재촉하는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럼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

?“으음. 그러게.”

??
쿵쿵쿵!

이제 문 너머의 상대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문을 부숴 버리려는 듯이 거세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단 저 옷장 속에 들어가. 빨리!”

??

나는 살로스를 낡은 옷장 속에 구겨 넣은 후 재빨리 문을 닫았다.

성기사라면 악마를 죽이는 것이 목적일 테니 살로스의 존재만 들키지 않으면 될 것이다. 나는 숨을


가다듬은 후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성기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중앙 신전에서 파견 나온 테오필이라고 합니다.”

?“저한테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

아.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테오필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기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친절하게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저 미소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기적인 몽마보다 선한 성기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는 게.

?“마물이 바글바글한 국경 지대에는 무슨 일로 거주하고 계십니까? 위험하시니 함께 신전으로 가는 건


어떠신지요.”

?“개인 사정이에요. 친절은 정말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

보통 성기사들은 다 함께 행동한다. 그런데 어째서 테오필의 주변에는 그 동료 성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지.

?“함께 가시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판단됩니다.”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다고. 그리고 제 일은 제가 판단해요.”

??

그러자 테오필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가 숨어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

?“함께 가시는 편이 저것이 죽지 않는 길일 텐데요.”

?“네?”

??

테오필의 손가락은 정확히 옷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우연이라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이게


우연일 수가 없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 너. 나오는 게 좋을 텐데.”

??

발뺌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이곳에 몽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이었다.

?“아, 진짜.”

??

결국 삐거덕거리며 옷장이 열렸다. 그 안에서 살로스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나왔다.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수녀님이 말한 거 진짜였구나. 결계 너머를 보는 놈이 있다는 거.”

?“수녀라. 신을 모시는 몸이셨습니까?”

??

신을 모시기는 했었지. 때려치운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수녀님. 쟤 마음에 안 드는데 죽일까? 죽여도 돼?”

?“죽이겠다니. 재밌는 말을 하는군. 내가 쳐 놓은 결계에 막혀 악마들의 추악한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

살로스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게 저 성기사 때문이었단 말이야? 그럼 저 성기사가 친 결계가 살로스가 친


결계보다 강력하다는 뜻인가.

내가 크게 놀란 데 비해 살로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덤덤한 얼굴이었다.

?
?“제국에는 신전이 곳곳에 깔려 있는데 감히 주신 렌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체화를 한 꼴이라니.
어리석구나.”

?“수녀님. 나한테 한 번만 입 맞춰 줘.”

??

그러고 보니 살로스가 가진 힘의 원천이 사람의 정기였던가. 나는 테오필을 힐끗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빠르게 살로스에게로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뛰던 중 테오필이 내 허리를 잡고 달랑 들어 올리는 바람에 나는 살로스에게 가지 못한 채 붙잡히고


말았다.

?“아니, 잠시만요. 이게 무슨.”

?“몽마가 인간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

테오필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실제로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운이라니.”


??

흰 장갑을 낀 테오필의 손이 내 뺨을 천천히 쥐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흰 장갑에는 마물의 피가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손 놔.”

?“살면서 몽마의 명령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

나는 뺨에 닿아 있는 테오필의 손을 뿌리친 뒤 고개를 돌려 살로스를 바라봤다. 살로스는 불쾌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온통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몽마이면서 너무 감정적이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그들을 현혹해야 할 몽마가 오히려 감정에
휘둘리다니.

살로스는 끝내 테오필과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테오필을 바라보니,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오지 마.”
?“수녀님.”

?“오지 말라고. 내가 명령하는 건 전부 따른다며.”

?“자신이 오겠다는데 어째서 말리십니까.”

?“살로스가 가까이 오면 당신이 죽일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

하지만 테오필보다는 내가 살로스에게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만약 살로스가


가까이 온 순간 내가 먼저 그에게 뛰어들어 정기를 준다면.

조금은 결과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나는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테오필을 살폈다. 몸 전체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 탓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그리고 테오필의 손은 나와 닿아 있지 않은 상태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뛰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나를 보고는 살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팔을 크게 벌렸다.

?
다만 나와 살로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성기사들은 마물들을 죽일 때 일반 기사들만큼의 실력, 혹은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였었다. 성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기사가 된 것이 아니라 기사로서의 실력 또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테오필은 나와 살로스가 서로 닿기도 전에 내 앞으로 와 살로스의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이전에 내가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악력이었다.

굉장히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살로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로스의 얼굴은 거친 나무 벽에 처박혔다. 몽마인 살로스에게서도 인간과 같이 붉은 피가 튀었다.

나는 말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살로스가 테오필에게 붙잡힌


그 순간부터, 쭉.

?“살, 로스.”

??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그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 살로스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

?“후.”

몇 번이나 살로스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을까. 테오필은 무거운 숨을 뱉으며 살로스의 피가 묻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마치 장갑이 오염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몽마라니. 보통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살로스는 손가락을 몇 번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살로스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가 성수를 뿌렸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그 현상은 곧 살로스의 힘이 약해진 상태임을 나타냈다. 살로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테오필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죠, 수녀님.”

?“…….”
?“수녀님의 친구는 가 버린 모양인데요.”

??

그리고 테오필은 자신이 주신 렌다의 현신이라도 된 것처럼 친절하고 자애롭게 웃었다. 흰 갑옷과 장갑에
튄 붉은색 피와 잘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자, 아가씨. 이제 신전으로 가실 이유는 충분한 것 같네요.”

?“…….”

?“손, 잡으세요.”

?“저를 신전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요.”

??

테오필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곧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재미있어 보인다니.

?“저 몽마 놈이 그런 것처럼 저도 이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흥미로운 물건은 가지고 가는


버릇이 있어서요.”

?“전 물건이 아닌데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테오필은 붉은 피로 물든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당장 그 손을 마주 잡으라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기를 망설였다. 아니, 망설였다기보다는 잡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지.

?“제 손을 잡지 않으실 겁니까?”

??

이 순간만큼은 소설 속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민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왜 나는 알베르트처럼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지. 왜 나는 살로스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는 걸까.

지금 이 순간, 저 손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오랜 시간 그의 손을 쳐다보기만 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더니, 테오필이 먼저 내 손을 잡았다.


벌레가 손에 닿은 것처럼 거부감이 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는 입을 다물고 답하지 않았다.

?“뭐, 이름 정도는 상관없겠죠. 제가 새로 지어 드려도 되는 일이니.”

?“…….”

?“로즈. 눈동자가 장미처럼 붉으니 이 이름이 좋겠습니다.”

??

그리고 테오필은 나를 향해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묻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눈동자 색이 장미를 닮아서 로즈라니. 최악의 작명 센스였다.

-35-
하지만 테오필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부정하지는 않았다.

테오필의 표정을 보니 내가 로즈라는 이름에 만족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젠장. 완전 최악이잖아.

그나저나 살로스는 어떻게 된 걸까.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내 시선이 살로스가 쓰러졌던 자리로 향했다. 테오필은 내 시선의 방향을 알아차렸는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신전이라니. 그곳으로 가면 알베르트나 노아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커질 텐데.


아니, 그냥 애초에 테오필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걷지 않고 버티면 테오필은 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걸었다. 집 밖, 즉 국경 지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테오필과 함께 있던 다른 성기사들도 없었고 국경 지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징그러운 마물들도 없었다.

?
다만 테오필의 것으로 보이는 백마 한 마리만이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테오필은 나를 던지듯이 백마에 태웠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지니 어지러웠다.

?“저를 데려가면 당신만 손해일 텐데요. 성기사가 신전에 여자를 데려가다니, 평판이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

테오필을 협박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당신은 몽마에게 시달리던 불쌍한 아가씨가 될 테고, 전 그런 아가씨를 구한 용감한


성기사라고 불릴 테니까요.”

??

테오필은 내 뒤에 앉아 한쪽 팔로는 내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말을 몰았다. 짜증나게도 성기사의


팔은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국경 지대에서 출발한 이후 나는 계속 탈출을 시도했다. 테오필이 잠든 사이 도망치고 목욕을 하러 간


사이 도망쳤으며 먹을 것을 구하러 갔을 때 도망쳤다.

?
하지만 테오필은 언제나 나를 찾아냈다. 나무 뒤에 숨어도 찾았고 그렇게 높지 않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쳐도 금방 나를 찾아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도대체 나한테서 느껴지는 그 기운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서른다섯 번째로 탈출을 시도한 나를 찾아냈을 때, 테오필은 손으로 내 발목을 쥐고 이렇게 말했다.

?“조금 아프겠지만 참으십시오. 신전에 도착하면 치료해 드릴 테니.”

??

그리고 그는, 내 발목을 부러뜨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도 잠시, 미칠 듯이 끔찍한
고통이 발목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고통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차마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그때 나를 내려다보던 테오필의 표정은 어떻던가. 그의 눈동자는 마치 짐승을 바라보는 것처럼 덤덤했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의 발목을 부러뜨려 놓고 저런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수가 있지?

이런 끔찍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눈앞의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짜증 날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 증오스러웠다.

?“쉿, 로즈. 이러다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잠에서 깨어나겠어요. 신전에 도착해서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된다면 전부 치료해 줄게요. 난 성력을 가진 성기사니까.”

??

아니, 너 같은 게 성기사일 리가 없다. 분명 성기사는 정의롭고 친절하다고 배웠으니까. 중앙 신전에서


신을 모시는 자가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

테오필은 퉁퉁 부어오른 내 두 발목을 붕대로 세게 감았다. 발목은 작은 접촉에서 통증을 호소했다.


그때마다 비명이 튀어나왔다.

발목이 부러진 순간부터 나는 무력해졌다. 움직이지도, 도망치지도 못했다. 테오필은 그런 나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국경 지대에서 출발한 지 2 주 하고도 나흘이 지났을 때 우리는 중앙 신전에 도착했다.

테오필은 신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성력으로 내 발목을 치료하고 붕대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대신 그는 내 어깨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로즈. 잠시만 조용히 있어요.”

나는 천천히 손으로 발목을 쓸었다. 뼈가 부러진 자리는 말끔하게 나았지만 당시에 겪었던 고통은 아직도
생생했다.

테오필과 나를 보고 몇몇 성기사들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테오필은 그들에게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말하며 나를 어떤 방으로 데려갔다.


?

밖에서 보기에 방문은 말끔했지만 내부는 감옥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문은 죄수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처럼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철문이었다.

나를 그곳에 가두다시피 한 테오필은 잠시 뒤에 돌아왔다.

?“순진하고 멍청한 것들. 형편없는 연극을 잘도 믿더군요.”

?“…….”

?“로즈. 당신은 몽마에게 시달리던 가련한 아가씨고 나는 그런 당신을 보호해 주는 성기사예요.”

??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신전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신전이 잠잠한


것으로 보아 모두 테오필의 말을 믿는 모양이었다.

테오필이 다시 내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자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한때 살로스에게 시달리기는 했었다. 다만 몽마에게 시달리던 가련한 아가씨라니. 그렇게 가련하게


불리기는 싫었다.

?
처음에는 정말 그가 싫었다. 살로스의 모든 것이 너무 싫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의지할 곳이 살로스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이 몽마뿐이라니, 듣기에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살로스는 죽었을까요.”

?“살로스가 그 몽마의 이름입니까?”

??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필은 잠시 흐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성력을 쓰기는 했지만 몽마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으니까요. 성검으로 가슴
부근을 찔러야 죽을 겁니다.”

?“그런가요.”

?“설마, 몽마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
테오필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그는 소리 내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몽마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소문은 들었는데,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사랑이라고요?”

?“예. 사랑 말입니다, 사랑.”

?“난 살로스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요, 당신은 그 몽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자가 더 잘 아는 법이죠.”

??

이런. 명색이 성기사라는 놈이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알아요. 난 살로스를 사랑하지 않아요.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것도 그것대로 웃기군요. 의지할 상대가 없어 몽마에게 의지하는 생이라니.”

??

테오필의 말투는 마치 나를 비꼬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
?“내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다면 쉽게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상황이야 뻔하죠. 기댈 곳이 몽마밖에 없다면 얼마나 엉망으로 인생을 살았겠어요.”

??

아니, 아니다. 조금 게으르게 살기는 했어도 결코 엉망으로 산 적은 없었다.

어느 날 만난 공작에 의해 평화롭던 인생이 바뀌고, 갑자기 찾아온 몽마 때문에 휴식도 제대 로 취하지


못하며 아끼던 동생이 나를 배신하고 농락했는데.

당신이 이런 인생을 살아 봤을 리가 없잖아. 전부 꿰뚫어 본다는 듯이 행동하는 눈앞의 남자 때문에


불쾌했다.

?“나를 언제까지 이곳에 둘 거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흥미가 생긴 물건은 가지고 가는 버릇이 있다고.”

?“…….”

?“아마 제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아닐까요.”

??
감옥같이 생긴 이 방에는 크지 않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테오필은 나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는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침대에 연결했다.

발목이 부러졌을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도망칠 수가 없었다.

?“로즈.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눈을 피하지 마세요. 당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뿐이에요.”

?“…….”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로즈,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왕국? 그게 아니라면
바다 한가운데에 동떨어진 섬?”

?“뭐, 그 비슷한 곳이에요.”

??

나는 진실을 말하기보다 대충 얼버무리는 것을 택했다.

?“그렇습니까.”
??

테오필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이 방에 내버려 둔 채로 나가 버렸다.

문이라도 두드리며 누군가 도와 달라고 외쳐 보고 싶었지만 발목을 붙잡고 있는 족쇄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차라리 잠들면 꿈속에서 살로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만난 것은 암흑뿐이었다. 암흑 속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살로스를 만날 수는 없었다.


감옥처럼 생긴 방 안에서 다시 눈을 뜨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곳은 정말로 감옥 같았다. 죄인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

나는 죄인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죄인처럼 발목에 족쇄를 차고.

하아.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뱉었다.


시간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인지 방에는 작은 창문마저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때,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테오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로즈. 잠자리는 어땠습니까?”

?“거지 같았어요.”

내 대답을 들은 테오필이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다행이군요.”

??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웃긴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테오필은


둔탁한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려 내 관심을 끌었다.

바닥에는 테오필이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책 두 권이 떨어져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테오필은 주절주절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 당신을 이곳에 두고 돌아간 후 신전 도서관에서 사제들의 기록들을 찾아봤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사례를 찾기 위해서요.”

??

테오필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을 조심히 펼쳤다.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던 그는 마침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책을 들이밀었다.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테오필이 강경하게 책을 들이미는 바람에 결국 억지로 받고 말았다.

?“신어로 적힌 책이 아니니 당신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

책의 제목은 <에반 일대기>였는데, 테오필이 펼친 페이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36-

[오늘은 카라빈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기 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놀랍게도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루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가진 기운은 전 세계를 떠돌던 나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아르엘 왕국에서 느껴지는 기운인가? 아니,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대 제국의 사람들이 지닌 기운이었나?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처음 느껴 보는 기운이었다. 본래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가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사이 테오필은 다른 책의 페이지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이번 책의 제목은 <엘도니아 여행기>였다.

[나는 어느 날 주점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
외모가 이상했느냐고? 아니, 그는 달콤해 보이는 오렌지 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다른 세상의 기운이 느껴졌다.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맡아 본 적 없는 희한한 향이 난다고 해야 맞겠다.

드넓은 바다와 같은 광활한 향, 그리고 꽃밭의 근본이 되는 달콤한 향. 그런 매력적인 향들이 한데 섞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을 오스틴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술을 마신 후 관계를 가졌는데, 정말로 신기한 건


여기부터였다.

오스틴과 관계를 맺고 입을 맞출 때마다 그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연결된 부분을 타고


매혹적인 향이 흘러왔다.

그 향에 중독될 것만 같아서, 나는 다음날 바로 그 마을을 떠났다.]

?
?“전부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이 쓴 기록들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경우인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

아마 그런 것 같았다. 특히 <에반 일대기>의 내용을 보자마자 나는 확신했다.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가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처럼 말이다.]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 이 구절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전 <엘도니아 여행기>의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

테오필은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 책의 한 구절을 따라 읽었다.

?“오스틴과 관계를 맺고 입을 맞출 때마다 그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

그리고 테오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설마. 아닐 거다, 아닐 거야.

?“흥미롭지 않습니까? 입을 맞추고 관계를 맺을 때마다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해진다니.”

?“…….”

??

테오필은 내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그저 얼른 그에게 잡힌 손을 닦아 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때, 손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신음하며 손을 부르르 떨자, 테오필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피가 그의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피는 내 손등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

테오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가 말끔한 손을 내 손 위에 올리자


손등에 있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입을 맞추고 관계를 갖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건 성기사가 할 만한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러다가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성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테오필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짜증의 절반이라도 그가 느껴 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성력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신의 축복이니까요.”

?“…….”

?“무지한 이들은 신께서 공평하시다고 믿고는 하죠. 아주 어리석지 않습니까. 세상의 밑바닥에서 태어난
이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

?“렌다께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몇몇 인간들에게만 축복을 선물하셨습니다. 귀족들은 신께서 내리신


축복을 이용해 거짓 고귀함을 만들죠.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고귀함을 잃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오필이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으며 그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기 때문에.

?“성력 또한 신의 축복입니다.”

??

그는 세상의 어두운 부분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밝게 미소 지었다.

?“그 어떤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렌다께서는 이 축복을 다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전 신의 축복을


받았으며 렌다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이니까요.”

?“유감이네요. 신께서 당신의 발목을 하나하나 부러뜨리시는 걸 보지 못하게 돼서.”

?“그것참 안타깝군요, 로즈.”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오필은 한 손으로 내 뺨을 쥐었다. 곧 입술을 통해 물컹거리는 더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

***

?“로즈.”

??

갑자기 무게가 쏟아진 탓에 침대가 출렁였다. 침대의 출렁임이 멈췄을 때쯤 테오필이 멋대로 지어 줬던
이름이 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이불 안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로즈라는 이름에 즉각 반응하는 걸 보니 이 거지 같은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전에 온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테오필이 가져다주는 식사의 횟수를 통해 시간을 유추해 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테오필은 이 수작을
눈치챘는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짧은 시간 동안 식사를 두 번이나 가져다주기도 했으나 어떤 날은 굶어 죽기 직전까지 식사를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 쓰러진 나를 보며, 테오필은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쓰러진 내 입에
억지로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퍽퍽한 빵이 목에 걸려 컥컥대자 테오필은 잘 좀 삼켜 보라며 내 목을 졸랐다. 이후에 그는 목에 멍이


생긴 것을 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성력으로 치료했다.

그뿐이겠는가. 그는 다른 세계의 그 신비한 기운이 궁금하다며 거칠게 입을 맞추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때마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테오필의 물건이 아래에 들어올 때였다. 이처럼 남성의 성기가 징그러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고아원에 있을 때 수도원의 목사님이나 수녀님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성기사의 멋진


모험을 기록한 동화를 읽어 주곤 했었다.

동화에 등장하는 성기사들은 항상 정의로웠다. 악마와 마물들을 멋지게 물리치고 성력으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

?
그때는 성기사의 그런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기사의 실체를 알게 되어 끔찍할
뿐이었다. 순결해야 할 성기사가 성을 탐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어색했다.

테오필은 흥미가 떨어지면 나를 보내 주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발목을 채운 족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방과 바깥을 분리하고 있는 무거운 철문 또한


그랬다.

고난을 겪고 눈물을 흘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정말, 정말로 가끔씩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흰옷의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테오필이


본다면 눈물까지도 조롱하며 재밋거리로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희망이 전혀,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알베르트나 살로스, 노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새하얀 베개에 얼굴을 묻자
베개가 천천히 눈물로 젖어 들었다.

?
?“울고 계십니까?”

??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테오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는 것도 최근에 생긴 버릇이었다.

?“도대체 언제…….”

?“제가 없을 때만 우는 것 같아 최대한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

?“섭섭하군요. 이렇게 예쁜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다니.”

??

테오필은 내게 깊게 입 맞춘 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놓아 줬다. 나는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도망치고 싶습니까?”

??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긍정의 답을 하면 어떤 폭력이 되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

?“사실대로 마음에 담긴 답을 말해 보십시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

여전히 그를 믿을 수 없었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테오필은 아무런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목을 조르지도 않았고 입술을 물어뜯지도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나에 대한 테오필의 흥미가 식어 버린 모양이라고. 이제야 나에게 질린


것이라고.

?“로즈. 당신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

하지만 테오필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난 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를 바라봤다.

?
그런데 발목을 채우고 있어야 할 족쇄가 보이지 않았다.

?“헉……?”

??

너무 당황해서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발목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철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과연 이건 테오필이 의도한 상황일까, 아니면 그의 실수일까.

그가 의도한 것이든 실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점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아랫배에 무언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탈출이었으니까. 다른 건 전부 탈출한 다음에 생각하자.

?
그리고 나는 달렸다. 숨이 차올라도 뒤를 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왜인지 신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제 한 명쯤은 보일 법도 한데…….

이상함을 느낀 것은 내가 다리를 뻗으며 뛸 때마다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울 소리의 주인이 테오필이 아닌가 싶어 겁을 먹었다. 하지만 방울 소리는
내 움직임에 따라 달라졌다.

설마 몸 어딘가에 방울이 달려 있는 걸까. 온몸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방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불길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37-

??“로즈. 당신을 위해 재미있는 놀이를 준비해 봤는데, 당신은 어떠셨습니까? 저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

?그 손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그의 표정은 굉장히 오묘했는데,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말대로


즐거워 보였으나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내가 뒤로 도망친 만큼 테오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순순히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로즈. 즐거우셨습니까?”

?“왜 화가 난 거예요?”

??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입을 조금이라도 잘못 놀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그는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 로즈. 설마 제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나는 화가 나지 않았어요. 그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에요.”

??
?테오필은 나를 들어 올려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도록 했다. 그는 복도를 따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이제 당신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만 봐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허언이 심하시네요.”

?“허언이라니요. 당신의 생각을 제가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

?테오필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소매로


이마를 문질렀다.

?“왜 이곳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이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

?짜증 나게도 정답이었다. 테오필이 의도한 상황인 걸 짐작하고도 방을 빠져나온 것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으니.

?“애초에 당신을 아무런 곳에나 둘 리가 없잖습니까, 로즈. 그렇지 않나요?”

?“…….”
??“이곳은 성기사 단장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오로지 저와 제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 는 공간.”

??

?즉, 도망쳐 봤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테오필이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분했다. 당연히 밖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 때문에.

?“그래도 꽤 애를 먹을 뻔했습니다.”

?“…….”

?“고양이가 몸에 방울을 매달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은 테오필이 걸을 때마다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뒤져 봐도 방울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역시 그곳에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딱딱한 구체가 들어 있기라도 한
건지, 아랫배가 살짝 볼록했다.
?

?도망치던 내내 나를 불안하게 만든 그 방울은, 내 아랫배에 들어 있었다.

?“당신이라면 한 번쯤은 이상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내가 간절하게 뛸 때마다 아랫배에 들어 있는 방울이 내 위치를 알려 줬다. 테오필은 그 방울 소리를


듣고 금방 나를 금방 찾아온 것일 테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습니다. 당신이 도망칠 기회가 있어도 이곳에 남는 걸 선택하지 않을까, 라고.”

?“당신이 지금까지 내게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갇힌 시간 동안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왔다. 테오필은 계속 언젠가 놓아 주겠다며 희망을 갖게 하고


곧 그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그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한테 상처를 입혔잖아요. 상처들을 성력으로 치료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그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러웠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눈을 막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물은 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

?테오필은 아무 말도 없이 내가 우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모르겠다.


묵묵히 나를 지켜보던 그는,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신전 기둥에 등을 기대게 했다.

?“로즈. 이렇게 제게 약한 모습만 보여 주면 어떡합니까.”

?“…….”

?“당신이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이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 당당하게 나에게 맞서던 그 태도가 무너지는
것이 좋아요.”

??

?그 말을 듣고 눈물을 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얼굴을 들어 테오필을


바라봤다.

?
?그는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즐겁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나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새하얀 기둥이


뒤를 막고 있었다.

?“왜 더 이상 울지 않으십니까?”

?“흐, 으윽.”

??

?나는 억지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참았다. 결국 테오필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그는 그것을 재미로 삼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사람의 불행을 먹고 행복을 얻는 끔찍한


괴물.

?나는 신이 끔찍한 괴물에게 징벌을 내리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테오필의 말대로 신은
내가 아니라, 저 끔찍한 괴물을 더 사랑하고 아꼈다.

?언젠가 눈앞에 있는 괴물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테오필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나?

?둘 다 아니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갑자기 밀려오는 절망감 탓에, 나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테오필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다시 감옥을 닮은 그 방으로 데려갔다.

?테오필은 다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철문은 남아 있었다.

?“로즈. 나는 당신이 더욱 무기력해졌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전부 이뤄질 일은 없을걸요.”

??
?이를 악물고 테오필을 노려보며 따지자 테오필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앞으로 두고 보면 정답은 스스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다시 철문이 닫혔다. 탈출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

?테오필은 이전에 나에게 줬던 <에반 일대기>와 <엘도니아 여행기>를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아마


읽으라는 의미로 두고 간 듯했다.

?온통 벽으로 가로막힌 방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질릴 때까지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시 한 글자씩 곱씹으며 <필릭 일대기>와 <엘도니아 여행기>를 읽어 본 결과, 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됐다.
?

?먼저 엘도니아는 사제이기는 했으나 성력이 강력하지 않아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하지만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엘도니아도 오스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엘도니아는 다음날 바로 마을을 떠난 이유가 오스틴에게 중독될까 봐, 하고 말했다.

?중독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한 문장을 계속해서 읽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강력한 성력을 지닌 성기사인 에반의 일대기를 기록한 <에반 일대기>에서는 중독에 관련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일반인에 가까운 엘도니아는 느낄 수 있고, 성력을 가진 성기사인 에반은 느낄 수 없는 무언가라.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책들로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오필에게 책을 더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다.
?

?결국 나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책을 덮은 후 베개를 끌어안고 누웠다.

?“아.”

??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뱉자 잔뜩 갈라져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에 잡힌 머리카락은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했다.

?나는 손을 쫙 펴고 눈앞에 가까이 가져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조금 더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콜록. 가끔 스스로 들어도 고통스럽게 들리는 기침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곳에 갇힌 후 얻은 버릇 중 하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

?달칵. 문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버릇을 얻었다고는 하나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나는 테오필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도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테오필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필을 쳐다봤다.

?테오필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아 정원이나 길가에서 꺾은 꽃으로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테오필은 내


시선이 꽃다발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다.

?그는 기꺼이 꽃다발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 꽃은 순결해 보이는 백합이었다. 나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색한 선물이었다.

?수도원이나 신전에서 백합이 사용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오늘은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었습니다.”

??

?그래,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 수도원과 신전에서는 성녀 세티아는 백합을 닮았다는 기록을 발견한
이래로 백합으로 그녀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백합으로 만들어진 꽃다발 따위가 아니었다.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요?”

??

?오늘이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라는 것은 즉, 내가 이곳에 갇힌 지 적어도 세 달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나한테 그걸 알려 주는 이유가 뭐예요?”


?“위대한 성녀 세티아의 탄생일은 누구나 기념함이 마땅하기 때문이죠.”

?“거짓말. 다른 목적이 있잖아요.”

??

?정답이었나 보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테오필은 곧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나는 당신이 참 좋아요. 과하게 멍청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으니까. 적당하다는 건 항상 좋은


일입니다.”

?“무슨 의도였는지나 말해요.”

?“그저 작은 절망감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요즘 당신은 무언가를 잊은 것 같아서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갇혀 있기만 해도 시간은 당신을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사실을.”

-38-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기는 했다. 나는 아무것도 이룰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렇다고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변화하지 못하는 건 제가 당신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니.”

??
?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은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말았다.

??“절망을 배우세요, 로즈. 비록 작은 절망으로 시작하더라도 언젠가 그건 당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 거대해질 테니.”

??“절망은 이미 질릴 만큼 경험해 봤어요.”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당신은 절망을 겪고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잖습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완전한 절망이 아니에요.”

??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려 구겨진 꽃다발을 쳐다봤다. 꽃다발 안에서 함께 뭉개졌던 백합은 비록 꽃잎


여기저기가 찢어지기는 했으나 아름다운 향을 잃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진한 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꽃다발을 버리지도 않았다. 나는
꽃이 시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 침대 옆에 그 백합을 올려놓았다.

***

?
?어느 날 테오필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신이 난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즈. 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해 봤자 그의 주관적인 평가일 뿐일 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고향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기도 할 텐데 듣지 않으시겠다니. 유감이군요, 로즈.”

??

?고향에 대한 소식이라고?

??“아니, 이제는 로즈가 아니라 스텔라라고 불러야 할까요.”

??“…….”

??“트리센 마을을 조사하며 함께 알게 됐습니다. 당신이 머무르던 마을이잖습니까, 트리센 마을은.”

?로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불쾌했으나 내 진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것보다 배는 더 불쾌했다.


?

??“트리센 마을에는 당신이 모니카 공작과 연인이 되어 떠났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문을 지니고 국경 지대에는 무슨 일로 계셨습니까? 그것도 몽마와 함께.”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제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

?나는 테오필이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국경 지대로 가게 됐는지


알아내면 그것을 이용해 또 나를 짓누르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테오필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마치 당연히 내가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도대체 내가 왜요?”

??“네?”

??“지금도 당신만 보면 발목을 부러뜨려 주고 싶어요. 그 짜증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뺨을 갈기고 싶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고요. 내가 몇 달이 지나도록 당신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데 그런 걸
기대해요?”

??

?나는 마음속에 담겨 있던 말을 전부 내뱉은 후 후회했다.

?테오필은 결코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 그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테오필의 발목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것도, 뺨을 갈기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도 전부 다.

?그가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때때로 진실이라도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테오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이렇게 하면 전부 테오필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테오필이 돌아왔을 때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빌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비참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이틀 동안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손을 움직일 힘이 없었고 목이 따가웠다.

?그제야 테오필은 자비롭게 웃으며 내게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 물을 마셨다.

?나는 드디어 확신했다. 테오필은 자신이 내게 질리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포기한 척, 무너진 척 연기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테오필이 원하는 ‘무너짐’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몰랐다. 나는 일단 이 방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미뤘다.

?다시 돌아온 테오필은 나를 스텔라라고 부르며 트리센 마을과 수도원의 소식을 내게 들려줬다. 그는 이미
나와 친하던 이들의 정보까지 수집한 뒤였다.
?

??“애니카라.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습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최근에 큰 상단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다더군요. 상단주의 최측근까지 올라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니카는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사이에 수도원을 나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단주의 최측근이 되어 늠름하게 서 있는 애니카의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뤘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느라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갑자기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

?그 후로도 나는 대충 테오필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필은 내 이런


행동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계속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필이 마지막 이름을 불렀다.

??“노아. 당신이 가장 아끼던 동생의 이름이라던데, 사실입니까?”

??“…….”

??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살짝 벌렸다.

??“사실이죠. 아끼던 동생이었으니까.”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라면 순수하고 티 한 점 없는 아이였겠군요.”

??“…….”

??“아마 이 부분이 소식 중 가장 흥미로운 내용이겠군요.”


??

?테오필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는지, 감은 눈을 쉽게 뜨지 않았다.

??“그렇게 순수하고 깨끗하던 아이가 암흑가의 주인이 됐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네?”

??“모니카 공작의 기사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 건가 봤더니, 그 대상이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자 암흑가를 관리하던 범죄자였더군요.”

??

?암흑가의 주인.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반 미리엄었지, 결코 노아의 이름이


아니었다.

??“뻔뻔하게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전대의 이름을 빌려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스텔라.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 정말 이 흉악한 범죄자 맞습니까?”

??

?그가 암흑가의 주인일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를 알지 못한 사이에 그가 좋지 않은 쪽으로 삐뚤어졌다는 건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그렇게 지나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노아가, 암흑가의 주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테오필이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전에 확신했듯이, 그는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내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저는 당신이 제게 애원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제가 어떻게 하면 애타게 울며 애원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아끼는 친구나 동생을 죽이기라도 해야,
그래야 애원하시겠습니까?”
??“……거짓말. 당신은 성기사잖아.”

??

?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자신의 인생을 찾아 애니카는 행복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또한 지금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노아조차도 결국은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감히 그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

??“거짓말 같습니까?”

??

?아니. 테오필이라면 애니카와 노아를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스텔라.”

??“그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애원할 테니까, 당신이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아도 그냥 내가 애원할


테니까 제발 그러지 마요.”

??

?테오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역시 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전에 말했듯이 과하게 멍청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아서.”

??

?테오필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그에게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애니카와 노아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더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됐다.

?나는 전부 순응하고 포기한 듯 순한 양처럼 테오필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내 얼굴을 쓰다듬던 테오필의 손가락이 입에 들어와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올 때면
숨이 막히기도 했다.

?왈칵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테오필에게서 벗어나거나, 혹은 내가 먼저 그를 죽이기 전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
?

?오랜만에 꿈속에서 살로스를 만났다. 약 세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안녕, 수녀님…….”

?그는 힘없이 인사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살아 있었네.”

??

?노아의 오두막에 있을 때 봤던 살로스의 모습처럼, 지금 그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지 않았다.

?가끔 테오필이 헤프게 보이기는 하지만 성기사 단장이기는 하구나. 한순간의 공격으로 살로스를 저렇게
만들다니.

??“너한테 이렇게 인사하려니까 뭔가 웃기기는 한데.”


??“…….”

??“잘 지냈어?”

??

?살로스와 안부 인사 따위를 나누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니, 절대.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

??“그렇구나.”

??“수녀님은 그렇게 힘들었을 텐데, 나는…….”

??

?도움 한 번 못 주고……. 결국 살로스의 뺨을 따고 흐른 눈물이 검은 바닥 위에 떨어졌다.

?몽마가 우는 장면은 언제 보든 항상 어색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몽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살로스는 참 희한한 존재였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몽마라니. 평생 살며


들어 본 적도 없었다.
?

??“넌 너무 감정적이야.”

??“내가 너무 감정적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 수녀님하고 관련된 일인데.”

??“…….”

??“내가 전에 말했잖아. 수녀님이 나한테 명령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그 성기사를 죽이라고 나한테
명령해. 그 새끼가 밉지도 않아?”

??“내가 너한테 명령하면 죽일 수는 있고?”

??

?그건……. 살로스는 무언가를 외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살로스 그 자신도 테오필을 죽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테오필은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만큼 그는 가장 확실하게 신의 축복을 받았고,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력에 특히 더 취약한 살로스가 테오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그를 방심시킨


후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테오필을 방심시킨다고 해도 그를 죽일 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39-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살로스는 자신이 내 상황을 대신 겪고 있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괴로워했다. 역시 그는


몽마인 것에 비하면 너무 감정적이다.

??“내가 뭐라도 할게. 내가 그놈을 이길 수 없더라도 일단 어떻게든, 무엇이든 일단 해 볼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무능력한 상태에서는 괜히 나서 봤자


손해를 볼 뿐이야.”

??“아니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가 실체화를 해서 문을 부술게. 수녀님이 도망칠 수 있도록.”

??“멍청한 소리 하지 마. 테오필을 죽이지 않으면 뭘 하든 전부 원래대로 돌아갈 게 분명하니까.”

??

테오필은 살로스의 강력한 결계를 뚫고 살로스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모든 기운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 내 기운, 혹은 살로스의 기운을 따라 따라올 것이다.

?
내가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그냥 기다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작은 기회라도 오겠지.”

하지만 살로스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괴롭다고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일단 너는 살아 있기만 해. 네가 죽도록 밉기는 해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너밖에


없어.”

??“……응.”

??

살로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내 어깨에 비볐다. 옷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짜증을 내려고 했으나 곧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깨닫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건지 살로스는 매일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꿈속에서의 시간을 테오필을


욕하는 데에 쓰곤 했다.

항상 대화를 이끄는 것은 나였고 들어 주는 것은 살로스였다.

?
최근 들어 살로스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졌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말이 많던 살로스가 상상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처음 그의 변화를 마주했을 때는 조금 어색했다.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살로스에게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변화한 그에게 적응했다. 몽마가 감정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오두막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네.”

??“내가, 했던 말?”

??“나를 삼켜 버리겠다면서 떵떵거리던 그때 말이야.”

??

삼키기는 무슨.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입에서 노인의 것을 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수천 년을 살아왔다고 했으면서 철이 덜 들 수가 있나.”


??

그를 탓하는 종류의 말이기는 했으나 절반 정도는 농담이었다. 살로스도 농담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내


타박에도 그다지 속상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요즘도 매일 날 지켜보고 있어?”

살로스가 고개를 저어 부정을 표했다.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꾹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뭐. 주제에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존중은 해 줄게.”

??“뭐? 주제에? 수녀님 완전 너무한 거 알아?”

??

그날은 왜인지 부쩍 꿈속에서 기분이 좋았다. 꿈속에서 살로스와 가볍게 장난도 쳤고, 소소한 대화도
매끄럽게 진행됐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가 문제였다.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온 테오필은 나를 밀쳐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
나는 여전히 그때 테오필이 왜 그렇게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미친놈의 정서와 그 이유 따위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오필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 그 행동에 논리는 전혀 없었다.

그냥 이후에 내가 본 그의 행동이 테오필에 대한 나의 살의를 더 키워 줬을 뿐이었다.

***

노아는 그의 앞으로 새로 들어온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두껍게 쌓인 서류 중 절반의 절반 정도는 스테판이 올린 서류였다. 그것들은 전부 스텔라의 행방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스텔라를 찾더라도 알베르트에게 보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스텔라를 공작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암흑가를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

애초에 암흑가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없었고, 암흑가를 유지하라는 반 미리엄의 유지를 이을 생각도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다만 이번에는 흔적이 너무 없었다. 이전에 스텔라를 찾지 못했던 것은 당시 그가 암흑가를 얻기


전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는 암흑가를 손에 넣은 후였다. 몇 달 정도만 허비하면 금방 스텔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텔라가 노아를 떠나던 그때, 그녀는 머리에 뿔이 달린 이상한 남자가 함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법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사용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무언가 때문에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는커녕 언제 어떻게 어느 길을 따라


이동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서류는 읽어 봤자 거짓된 증언들뿐이었다. 누나를 봤다면서. 증언하는 놈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들뿐이다. 노아는 쓸모없는 서류를 던져 버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
온 제국을 뒤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경 지대와 같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공간도 있었으니.

평소였다면 스텔라가 그런 곳까지 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을 사용해
이동했다. 적어도 누구나 갈 수 있는 평범한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테다.

대체 누나는 어디로 간 걸까. 노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증언이라고 올라온
것들은 죄다 믿을 수 없는 내용들뿐이니,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 노아는 얼굴을 완전히 구기며 집무실에
침입한 상대를 노려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스테판이었다. 그는 급하게 뛰어온 건지 꽤나 힘들어 보였다.

다른 이였으면 이미 성을 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침입자가 스테판이라는 것을 확인한 노아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체했다.

노아가 보고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
??“시, 신전. 신전입니다. 중앙 신전으로 가 보셔야 합니다.”

??

중앙 신전? 갑자기 중앙 신전이라니?

하도 급하게 들어오길래 무슨 중대한 소식을 가져온 줄 알았더니 시답잖은 소리뿐이군. 노아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스테판. 장난 상대를 잘못 골랐군. 안타깝게도 내게는 사람을 찾겠답시고 신에게 기도하는 취미는
없는지라.”

??“그게 아닙니다. 중앙 신전의 성기사들 중 친분이 있는 자가 있는데, 스텔라 님의 초상화를 보여 줬을


때 거의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또 들을 가치도 없는 거짓 증언을 가져와 나를 귀찮게 하는 거라면, 이번에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

긴장한 스테판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그만큼 노아의 얼굴과 목소리는 피곤과 분노에 절어 있었다.

??“성기사단의 단장이 국경 지대에서 데려온 한 아가씨가 있는데, 몽마에게 시달리던 것을 성기사 단장이
구해 준 모양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는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그때, 스텔라가 도망치기 직전 대화하고 있던 남자의 외양이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머리에 어두운 빛깔의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다.

국경 지대, 그리고 몽마.

그가 뒤져 보지 못한 장소들 중 대표적인 곳을 한 곳 대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국경 지대라고 답할 것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기도 했고, 위험하니 스텔라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도록.”

??

그제야 노아는 스테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 볼 마음이 생겼다. 스테판은 성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부 노아에게 전했다.

노아는 곧장 말을 몰고 중앙 신전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황실에서 운영하는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니


도착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에 생겼다. 성기사 단장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에도 성기사들은 그를 막아설
뿐이었다.

젠장. 너무 급하게 오느라 이런 일을 생각 못 했다. 스테판을 함께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쯧. 노아가 혀를 찰 때마다 성기사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스스로 암흑가의 주인임을 밝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기사들은 노아의 고급스럽고 깔끔한 옷을
보고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황제와 교황이 독립적 권력 주체라고는 해도 완전히 서로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


성기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성력을 대가로 귀족들에게 불법적으로 재산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단장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

성기사 단장에게 다녀오겠다던 성기사는 정말로 금방 돌아왔다. 그는 단장의 허락을 받았다며 노아를 신전
안쪽으로 안내했다.

?
바로 스텔라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도착한 곳은 신전 내부에 위치한 작은 응접실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제복의 화려한 장식을 보니 아마 그가


단장인 것 같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단장이라는 자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성직자가 사람을 대할 때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는 건


오늘 처음 알게 됐다.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을 찾으시려거든 황성으로 가시지, 왜 신전으로 오셨습니까?”

??“신전에 머무르고 있을 누나를 찾기 위함입니다.”

??

노아를 바라보던 상대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는 꽤 놀랐다는 듯한 얼굴로 노아를 쳐다봤다.

??“허. 아아. 그렇군.”

??
그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때때로 혼자 웃었다.

??“감히 이곳에 올 생각을 하다니. 이런 뻔뻔한 것을 다 봤나.”

??“그게 무슨 말이지?”

??“암흑가를 다스리는 더러운 범죄자가 감히 신성한 신전에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군.”

??

허? 노아는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뱉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자세하고 알고 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지? 건방지게 사람의 뒷조사라도 했나?”

??“누나를 찾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친히 찾아오시다니. 이것 참 세기의 애절한 짝사랑이로군.”

단장은 노아의 말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며 흰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응접실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웃음 한 점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중얼거렸다.

??“당장 나가라. 너 같은 더러운 것은 신전에 출입할 수 없으니.”


??

노아는 그대로 신전에서 쫓겨났다. 범죄자, 더러운 것.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노아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도록 할까. 준비를 철저하게 한 후에 다시 오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닐 테니까.?

노아는 백색의 신전을 잠시 응시하다가 신전을 등지고 말에 올라탔다.

-40-

“부르셨습니까, 성하.”

테오필은 빙긋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어 눈앞의 교황에게 예의를 표했다.

“경.”
“예, 성하. 하문하십시오.”

“경이 국경 지대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온 이야기가 신전에 자자하더군.”

“그렇습니까.”

“경, 제정신인가?”

교황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어지는 타박에도 테오필은 여전히 당당했다.

“나는 경이 갑자기 성기사들을 마물 토벌에 보내라고 했을 때도 믿고 보냈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신전에 여자를 데려오다니?”

“아니요, 성하. 그게 아니잖습니까.”

“무슨 말이지.”

“저를 믿으신 것이 아니라 저를 두려워하신 것이었지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교황은 눈을 매섭게 뜬 채 테오필을 노려보고 있었고, 테오필은 그저 웃으며 이에


맞설 뿐이었다.

?
“전 몽마에게 고통받는 아가씨가 있길래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 여자를 신전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또 몽마에게 시달리실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교황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든 테오필, 그는 순순히 타인의 말을 인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신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테오필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교황에게 등을 보였다.

“경. 아주 기고만장하군.”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성하의 강력한 권력을 이룩하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저인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오필은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늙더니 말이 많아졌군. 테오필은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스텔라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한 성기사가 급하게 그를 찾았다. 어느 귀족이 찾아왔는데 그가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귀족, 귀족이라. 오늘 나를 찾아올 귀족이 있던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찾아온 것은 흑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남자였다. 흑발에 푸른 눈동자? 왜인지 익숙한


외양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였다. 남자는 자신의 누나를 찾으러 신전에 왔다고 말했다.

눈앞의 남자가 찾고 있다는 그 누나는 스텔라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소리였다. 범죄자가 뻔뻔하게도 제 발로 신전에 들어오다니.


?

“당장 나가라. 너 같은 더러운 것은 신전에 출입할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있으면 스텔라, 그녀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를 내어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다.

말 많은 교황부터 멋모르고 신전에 찾아온 어린 범죄자까지. 그날따라 그를 귀찮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시답잖은 것들이 그를 귀찮게 만드는 것이 불쾌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마구 치밀어 올랐다.

그는 노아를 쫓아낸 후 곧장 스텔라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가자 문과 벽이 서로


부딪혔다. 그 소리에 놀란 스텔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테오필은 스텔라를 넘어뜨리고 그녀를 탐했다. 거친 말을 쏟아붓고 목덜미를 물어뜯어 상처입혔다.

“스텔라, 오늘은 제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마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 신전에 찾아왔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소식과 함께,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면 눈앞의 이 여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 당신이 그렇게도 아끼는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예상대로 스텔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테오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앳된 티를 버리지 못한 어린 청년이더군요,”

그리고 그는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려 간사한 괴물처럼 웃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텔라가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도록.

“누나를 찾으러 왔다는 모습이 얼마나 순수하던지.”

후후. 테오필의 입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이 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스텔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지금 돌려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동생이라. 테오필은 자신이 말하고도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누나를 찾으러 왔다고? 웃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애절한 표정으로 누나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놈이 말한 만큼 간단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 사이의 감정이 그렇게 복잡하게 짜여 있는 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황을 만났을 때, 그리고 노아를 만났을 때에 이어 테오필의 기분이 더욱 아래로 가라앉았다. 쯧. 그가


혀를 차자 스텔라가 움찔 몸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아, 그래. 이 여자한테 풀면 되겠다.

테오필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얀 목은 한 손으로도 충분히 압박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가늘었다.

스텔라가 발버둥 치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속삭였다. 스텔라, 발버둥 치는 게 벌레 같아요. 계속된


압박에 스텔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벌써 죽이기에는 아직 마음에 드는 모습을 충분히 보지


못했으니까.
끝내 스텔라는 숨통을 조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테오필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그의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녀가 결국 서러운 것을 전부 뱉어 내듯 울었다.


테오필은 그것이 좋았다. 그의 영향으로 그녀가 변화하는 것이 좋았다.

그는 서럽게 우는 스텔라를 내버려 두고 방에서 나왔다. 오늘은 즐겁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

너무 힘들었다.

원래 테오필에게서 벗어나거나 그를 죽이기 전에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울어 버렸다.

현실에서는 최대한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여기는 꿈속이니까 조금은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

하지만 현실에서 눈물을 다 흘려 버린 탓인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더 답답했다.


이 꽉 막힌 마음을 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앞에 보이는 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꿈속임에도 등을 타고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살로스의 얼굴이 보였다.

“수녀님…….”

“……살로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도와줄 수가 없어서 미안해…….”

답답함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나 살로스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울지 말라고도 안 할 거고 소리 지르지 말라고도 안 할 거야. 그런 위로는 쓸모가 없는 걸 아니까. 그냥,
너무 괴로워하지는 마. 수녀님이 더 힘들어지는 길이니까…….”

살로스는 그렇게 한 문장씩 조심히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었는지 모르겠어.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이랑은


상황이 달랐을 텐데…….”

“…….”

“미안해.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게.”

살로스가 하는 말은 왜인지 작별 인사같이 느껴졌다. 마치 서로 악감정을 가졌던 이들이 떠나갈 때 감정을


정리하는 말처럼.

“안녕. 나 일단 가 볼게. 잘 있어, 수녀님.”

“…….”

“아니, 아니지. 이번에는 좀 다르게 불러 보려고 했는데.”

“…….”

“안녕, 잘 있어. 스텔라.”


?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녕.”

살로스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암흑이 찾아왔다. 이는 곧 살로스가 내 꿈속에서 떠났음을


의미했다.

아직 아침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왜 벌써 가 버린 거지.

나는 한참 암흑 속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역시나 창문이 없어 나를 비추는 것은


희미한 촛불 빛뿐이었다.

나는 초에 불을 더 붙여 방 안을 밝혔다. 내부가 밝아지자 서서히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땀이 흐른 몸은 씻지 못해 찝찝했다. 물수건으로라도 몸을 닦아 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손바닥의


검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잠시만. 검은 문양이라고?

손바닥에는 십자 모양의 검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 모양이라기보다는 손잡이가


달린 검의 모양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문질러 닦으면 지워질까 싶어 옷 소매로 문양을 세게 문질렀다.

그러자 문양은 금세 지워졌다. 하지만 문양이 지워지는 동시에 허공에서 예리한 단검이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다.

발이 조금만 옆에 있었다면 단검을 맞아 잘릴 뻔했다. 나는 발이 잘리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 검은 또 뭐지.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오다니.

단검의 중앙에는 살로스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나는 유심히 그 보석을 관찰했다.
?

참 이상한 일이었다. 손바닥 위의 문양이 사라지고 대신 단검이 나오다니. 그 검은 문양과 이 단검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다시 문양이 있던 자리를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이렇게 갑자기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질 수가 있나?

그리고 다시 단검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단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이때쯤 나는 문양과 단검의 관련성을 눈치챘다. 단검이 사라지자 손바닥에는 다시 문양이 나타났다. 다시
문양을 문지르자 단검이 나타났고 또 다시 손바닥을 문지르자 단검이 사라졌다.

아마 이 문양이 위치한 부분을 문지르면 단검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듯했다.

순간 테오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이 단검으로 공격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쭉 테오필을 죽이고 싶었다. 그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부터, 계속.


?

하지막 막상 기회가 오니 두려웠다. 과연 내가 테오필을 죽이고도 들키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까? 만약


성기사들로부터 도망쳐도 과연 죄책감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아니야. 뭘 고민하는 거야. 이건 신께서 주신 기회인데.

그래. 죽이는 거다. 테오필이 들어오면 그를 죽이는 거다.

왜인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죄를 저지른 이를 죽이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손이 떨리는 걸까.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테오필이 저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시간이 꽤 지난 뒤, 문틈 사이로 테오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걷는다고 하기에는 조금 빨랐다 뛰고


있다고 하기에는 느렸다.

걸음 소리가 완전히 가까워졌을 때, 나는 손바닥에 그려진 문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

테오필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미친 듯이 웃었다. 예상을 벗어난 그의 행동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텔라.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몽마마저도 당신에게 미치게 만들었습니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몽마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스텔라. 그 몽마가 제 꿈에 찾아왔습니다, 그 멍청한 몽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다짜고짜 제게


덤벼들지 뭡니까.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

“어떻게 하면 저도 당신에게 미칠 수 있습니까? 그 다른 세계의 기운을 계속 들이키면 가능할 것


같습니까?”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는 당장 단검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러 담았다.

“혹시 모르죠. 살로스처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관계를 가지면 미칠 수 있을지도.”

“……허.”

테오필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는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악당처럼 비소를 뱉었다. 테오필이 셔츠 단추를 풀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스텔라, 당신. 오늘따라 이상합니다.”

순간 테오필이 내 생각을 꿰뚫어 본 줄 알았다. 나는 거세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싫어요?”

“글쎄요. 그건 봐야 알 것 같군요.”

-41-

철컥, 하고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바지 사이로 드러난 테오필의 물건이


위아래로 껄떡거렸다.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릴 뻔한 것을 겨우 정신력으로 참아 냈다. 대신 나는 눈을 반쯤 감아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길을 택했다.

“당신이 무엇이길래, 공작에 몽마에 암흑가의 주인까지 당신에게 빠져 있는지.”

아. 팔에 테오필의 손이 닿았다. 그는 한 손으로 내 팔을 짓누르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바로 앞에


테오필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까운 거리인지라 눈을 반쯤 감아도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테오필과 시선을 맞췄다. 테오필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배려라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아 거칠었다.
곧이어 아래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래를 풀어 주지도 않은 채로 자신의 물건을 삽입한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테오필이 움직일 때마다 뻑뻑한 아래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버티는 척하며
테오필의 팔에 깊게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성기사의 몸에 생긴 상처는 일부러 치료하지 않아도 금세 스스로 회복됐다. 테오필은 그런 자잘한
상처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언제까지 버텨야 기회가 오려나. 테오필의 심장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찌른다면 단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에게 막힐 것이 분명했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를 두 팔로 안은 채 뒤에서 심장을 찌르는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아직 틈이 보이지 않았다.

테오필은 홀로 허릿짓을 하다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고 깊은숨을 뱉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보다는 조소에 가깝기는 했지만.

?
그 비웃음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테오필의 웃음은 마치 그 스스로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툭. 무언가 묵직한 것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테오필이 자신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것이었다. 벌레가


몸 위를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이 역겨운 머리를 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이 바로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였다.

테오필을 끌어안는 것처럼 두 손을 그의 등 위에 올렸다. 그리고 한 손만을 이용해 조심히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자 찌르기 쉽게 오른손 안에 딱 단검이 들어왔다.

후.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어서는 안 된다. 이제 완전히 마음을 정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고, 내가


해야 하는 일도 이것밖에 없다.

?
나는 테오필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단검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바로 테오필을 찔렀어야 했다. 잠시의 망설임은 곧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서 가게 만들었다.

검이 테오필의 심장을 향해 비스듬하게 곤두박질치는 순간, 테오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단검은


테오필의 심장이 아닌 다른 곳을 찌르고 말았다.

‘그’ 테오필이 비명을 질렀다. 상처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단검에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굴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바로 성력을 이용해 부상을 치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기회가 물거품이 됐다고
생각하며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대체, 쿨럭. 지금 뭘로, 찌른, 거야.”

그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왈칵 피를 토했다. 옆구리를 감싼 테오필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는 했으나 옆구리는 여전히 끔찍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
“상처가 낫지를 않, 윽…….”

그 순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떨어뜨렸던 검을 다시 손안에 쥐었다. 쇠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차가웠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테오필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입술을
물어뜯으며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감히…… 이딴 재밌지도 않은…… 장난을…….”

젠장. 실로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칭찬해야 하려나. 그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과정에서 몇 번 휘청거리기도 했다.

검을 쥔 손은 성큼성큼 다가온 테오필에게 금방 잡히고 말았다. 그는 내 손에서 단검을 빼앗은 후 멀리


던져 버렸다.

날아간 단검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저런 무기는, 어디서, 구했지……?”

“…….”

그는 쥐어짜듯 말을 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 몽마, 하아. 놈이 주고 간 건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자 테오필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한 바퀴를 구른 테오필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쯧. 테오필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을 오롯이 한 몸에 받게 되자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이렇게


표독한 표정의 테오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는 이 머리통을 어떻게 해야 하지…….”

테오필이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

“목을 졸라서 다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해야 하나.”

“…….”

“그래, 그거야. 그거 좋군.”

뭐? 이어질 테오필의 행동에 대비하기도 전에 그의 억센 손이 내 목을 감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내 목을 쥔 테오필의 손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곧장 검은 문양이 그려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자 내 손과 이어져 있던 테오필의 손목 안에서


단검이 나타났다. 내 것이 아닌 살가죽을 꿰뚫는 소리가 들렸고, 바로 테오필의 신음이 이어졌다.

테오필은 손목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이번에도 그의 성력이 통하지 않는 상처였다.


?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테오필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특히 손목에서 지혈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만약 그를 죽이게 된다면 마지막 인사로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었다.

“나를…… 죽, 이면…… 당신은 살인자가 되는 거야…….”

“…….”

“성기사를…… 신의 저주, 를 받고 싶어……?”

그 말이 내 머리를 세게 때린 것만 같았다. 살인자, 그리고 신의 저주. 만약 내가 테오필을 죽이면 신은


나에게 저주를 내릴까?

신은 공평하지 않아 저 속이 뒤틀린 괴물에게는 성력이라는 축복을 선물했고 나에게는 비극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을 선물했다. 내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죽였다는 걸 알면 나에게 저주를 내릴까?

“…….”

검이 테오필의 살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살을 찢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었다.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를


자르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나는 단검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아까 잠시 테오필의 손목을 잡고 있었던 탓에 손은 테오필의 피로


흥건했다.

뒤늦게 테오필이 한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만약 그를 죽이면 신의 저주를 받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죄책감 때문에 평생 괴롭게 살 것이다.

정신이 멍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겠다. 눈앞을 물들인 붉은 피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단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꽤나 용감하게 테오필을 찔렀던 당시의 격한 감정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내가, 사람을 찔렀다. 테오필은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지금 그를 찌른다면 그를 완전히 죽일 수


있을 것이고 지금 그를 구한다면 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테오필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서운 건가?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를 처음 찔렀을 때는 오히려


후련했으니까.

그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운 걸까. 앞으로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 살인자라는 명칭이 무서운 건가?
?

아마 이게 맞는 것 같았다. 살인자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를 죽였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싶지도 않았다.

테오필이 저지른 죄악들에 비하면 내가 한 짓은 비교적 가벼운 죄 아닌가? 그렇게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대로 두면 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될 것이었다.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테오필 때문에 겪은 고통들, 그리고 앞으로 겪을


고통이 너무 억울할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도망칠까.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탓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피로 물든 단검은 이제 제 쓸모를 다했다는 듯, 손바닥을 아무리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문을 열고 도망치려는 시도도 해 봤으나 애초에 안쪽에는 문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테오필도 항상 나갈 때는 성력을 이용해 문을 열었었다.

?
나는 그저 기다렸다. 다른 성기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방에 들어와 나를 체포할 것을 말이다.

코를 찌르던 피비린내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나는 피로 얼룩진 손을 이불에 문질러 닦았다. 피가


딱딱하게 굳어 잘 닦이지 않았다.

“끄으…….”

침묵 속에서 테오필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나는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을 테다.

방 안에는 시간을 알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덜컹.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테오필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성기사들이 들어온 것일 테지.

그들이 우악스럽게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

그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백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아니라,


노아였다.

노아? 노아라니. 도대체 노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노아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나를 지켜봤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기는 왜 왔어.”

“……누나를 찾으려고 왔지. 누나가, 너무 보고 싶으니까.”

“가. 다시 돌아가.”

하지만 노아는 발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 가라고. 가란 말이야!”


?

내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애초에 중앙 신전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성기사들은 전부 기절시키고 온 건지 노아의 뒤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저렇게 하면 침입했다는 사실을 금방 들킬 텐데. 나도, 노아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돌아가. 이러다가 너도 잡힌다고.”

네 이기심이 밉기는 하다. 하지만 네가 겨우 나를 찾으러 왔다가, 나를 이유로 체포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노아는 등을 돌려 돌아가는 대신 걸음을 크게 벌려 내게 다가왔다.

쓰러져 있던 테오필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아를 바라봤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짜내 힘겹게


말했다.
?

“살…… 려……. 나를…… 살려…….”

노아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테오필이 이제 그에게 자신을 살리라고 애원에 가까운 명령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태도가 저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니,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간사한가.

그러나 노아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테오필의 피로 얼룩져 있는 그 단검을.

도대체 저 검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노아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힘껏 테오필의 머리를 찔렀다.

-42-

“욱.”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가 테오필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자 헛구역질이


일었다.

?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노아가 다시 한번 테오필의 몸을 찌르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도 노아는 계속 테오필을 찔렀다. 머리부터 심장, 배, 다리까지. 안 찌른 곳이 없을 정도였다.

몸 안에 머무르고 있던 피가 다시 몸 밖으로 튀었다. 테오필은 숨이 끊어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다.

노아의 얼굴이 피로 얼룩졌다. 그의 손도 눈이 아플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이리 와, 누나.”

노아가 나를 향해 피가 묻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섬뜩한 손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

“저번처럼…… 그런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이리 와.”

나는 끝까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결국 노아는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모를 한숨을 내뱉으며 먼저 내게 다가왔다.

그는 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내 손을 닦았다. 손을 닦고, 피가 튄 내 얼굴을 닦았다.

옷의 얼룩은 제거할 수 없어 그냥 뒀다. 노아가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성기사들이 오고 있어.”

침묵 속에서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철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누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 살짝 입술을 깨물거나 울먹거리면 더 좋을 거야. 아플 정도로 깨물지는
말고.”

항상 너는 애매한 말만 해 왔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도 네 진짜 마음이 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지금의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순간, 노아가 나를 밀쳐 침대에 쓰러트렸다. 그리고 그는 내 어깨를 짓누르며 내
위에 올라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잠시만, 테오필 기사 단장님?!”

“저놈이다, 침입자다!”

테오필의 시체를 발견한 성기사들이 횡설수설하다가 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상황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판단해 보자. 나는 노아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힘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노아는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몸은 테오필의 피로 물든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성기사들은 과연 누구를 테오필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하겠는가?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저놈이 단장님을 죽였다. 체포해!”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테오필의 숨을 끊은 범인은 노아였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노아가 한 모든 것, 그러니까 테오필을 찌른 것과 내 몸에 묻은 피를 닦아 준 것. 이 모든 것이


노아를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

“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단장님을 죽이고 아가씨께 이런 짓을 저지르려고 하다니…….”

“…….”

“주신 렌다께서 저자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감히 이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다니. 주신 렌다께서 저런


자를 구원해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게, 그게 아니야. 노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테오필을 죽인 건 내가 됐을 거라고.


?

그렇게 외치려는 순간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게 미소 지으며 쉿, 하고 뻐끔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렇게 노아는 성기사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에 반해 나는 한 성기사에 의해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목욕을 하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손이 자꾸만 붉은 피의 색으로 보였다.?

눈을 세게 문질러 닦자 피의 모습을 보여 주던 환영이 사라졌다.

감옥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던 지난 방과 달리 이번 방은 정말 손님을 위해 준비한 방처럼 깔끔했다.

“아가씨를 보호해 주시던 테오필 단장님께서 그렇게 되시다니. 온 신전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보호?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해 줬다는 말이지?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를 불러 주십시오.”


“……를.”

“네?”

“노아를 만나 보고 싶어요.”

“노아……. 아, 그 죄인의 이름입니까.”?

성기사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나를 지하 감옥으로 데려갔다.

“잠시 대화를 해 보고 싶은데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이 수상한 요청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기꺼이 자리를 비켜 줬다. 다른 죄수들은 노아와는 멀리


떨어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즉, 이 주변에는 우리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는 어쩌자고 왔어. 죄인이랑 대화를 하면 누나도 의심받을 텐데.”

“왜 그랬어?”

“뭐가?”

“왜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갔냐고.”
?

성기사 단장을 죽이다니. 사형까지 갈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야 누나가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난 네가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네가 얻는 게 뭐야? 왜 쓸데없는 짓을


해?”

“쓸데없다니.”?

노아는 살짝 웃으며 창살에 등을 기댔다. 이 때문에 노아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등을 보인 채로


말을 이었다.

“일단 누나가 사형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 쓸모가 증명된 셈이고.”

“대신 네가 사형당하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그는 꽤 달라져 있었다. 애원만 하며 어린아이처럼 굴던 그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

“나는 이미 주신 렌다에게 구원받을 수 없어. 렌다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거든.”

갑자기 성서는 왜 언급하는 거지. 노아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이제 누나도 렌다에게 구원받을 수 없어. 사람을 죽였잖아. 뭐, 결국 숨을 끊은 건 나기는


하지만.”

“구원 같은 거 받고 싶지도 않아.”

“나도. 나도 렌다의 구원은 필요 없어.”

그리고 노아는 등을 돌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 푸른 눈동자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깊었다.

“내가 원하는 건 누나의 구원이니까.”

“…….”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어. 죽기 전에 누나가 나를 구원해 준다면 죽더라도 억울하지는


않겠네.”
?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었다.

구원? 그딴 거 바라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노아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손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진짜가 아니다. 피곤해서, 힘들어서 보이는 환영일 뿐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눈을 문질러 닦고 손을 닦아도 핏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노아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그 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결국 나는 도망치듯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빠르게 달려가는 나를 발견한 성기사가 무슨 일이냐며 외쳐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

중앙에는 거대한 기도실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는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는데, 왜인지 지금은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멈춰섰다. 열린 문 사이로 주신 렌다의 석상이 보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문을 열고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신앙심? 그런 거 조금도 없었다. 수녀가 됐던 건 삶을 연명할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기도실 내부는 조용했다. 천장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이 렌다의 석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석상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내 두 손을 바라봤다. 핏자국은 아직도 내 두 손에 남아 있었다.

정말 나는 이대로 살인자가 되는 건가?

[렌다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거든.]


?

노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렌다의 석상 앞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따스한 햇볕이 내 머리 위로도 환하게 쏟아졌다.

“신이시여…….”

나는 쥐어짜듯 신을 불렀다.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신을 불렀다. 신에게 응답을 요청함으로써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지금 내 모습이 우스웠다. 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지도 않으면서 죄를 부정하기 위해 신을 애타게 부르는


모습이 한심했다.

손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음날, 나는 렌다의 석상을 찾아가는 대신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노아를 찾아갔다. 그는 식사를


하지 못했는지 어제보다 더 지쳐 보였다.

“……안녕, 누나.”

당당하게 서 있던 어제와는 달리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어제, 했던 말.”

“어떤 걸 말하는 걸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다는 말.”

“아, 그거.”

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철창을 향해 기어왔다. 그리고 그는 내 앞에 쓰러지듯 무릎 꿇었다.

“난 이미 암흑가에서 사람을 죽였어. 신에게는 구원받지 못해.”

“진짜였구나. 네가 암흑가의 주인이었다는 게.”


“애초에 그 자리가 사람을 죽여서 오른 자리니까.”

“그게 자랑처럼 당당하게 말할 일은 아닐 텐데.”

“뭐 어때. 이제 누나도 나랑 비슷한 처지인데.”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제는 손에 묻은 피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영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정도로


선명해졌다.

핏자국이 진짜라면 신의 저주일 것이고 환영이라면 내가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두려워 미쳐 버린 것일 테다.

어느 쪽이든 좋지는 않았다.

“어제부터 자꾸 손을 쳐다보던데.”

“…….”

“왜, 손에 뭐라도 있어?”

그래. 무언가 있기는 있다. 저주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

테오필 같은 놈을 죽였다는 이유로 죄책감이 들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핏자국.”

“핏자국?”

“핏자국이 있어. 분명 네가 어제 닦아 줬는데. 분명 깨끗하게 씻었는데…… 계속 남아 있어.”

“아아.”

노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저주일까 아니면 내 죄책감일까.”

“죄책감이겠지.”

“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핏자국이 내 죄책감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답한 이유가 궁금했다.


?

“신은 자애롭지만 모든 생물에게 관심을 갖는 건 아니야. 동굴 안에 숨은 음침한 이들에게 하나하나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거든.”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래전 나를 두들겨 패댄 바실에게 감사해.”

바실? 바실이 누구였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노아를 넘어뜨리고 때리던


녀석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때는 죽도록 싫었던 놈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놈 덕분에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

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바실, 그놈 때문에 노아를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

“그때 나는 누나를 내 신으로 정했어. 다른 존재의 구원은 필요 없어. 누나만, 누나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돼. 그냥 한 번만 사랑을 속삭여 줘. 멍청한 인간들이 신이 자기들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처럼 나도
어리석게 전부 믿을 테니까.”

“…….”
“좋아해, 누나. 아니,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누나를 더 사랑해.”

네가 사랑이라고 칭하는 그 감정은 형태가 참 독특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43-

“네가 말한 대로 하면 뭐가 남는데?”

“뭐가 남느냐고?”

“이 죄책감이 사라지기라도 해? 도대체 내가 그렇게 해서 내가 뭘 얻는데?”

얻는 것도 없는데 뭐하러 내가 싫은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대가 없이 너를 사랑하라니. 그냥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믿음을 얻겠지. 나는 항상 누나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

“뭐?”

“누나가 성기사 단장인지 뭔지, 그놈을 죽였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 놈이 악마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겠지. 나는 그렇게 믿어.”

?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노아가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나를
잡아당기자 나는 힘없이 노아에게 다가갔다.

“원래 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거잖아. 천하의 죄인을 죽인 이유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내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나는 노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밤에도 어둠을 뚫고 손 위에서 선명하게 나를 괴롭히던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너는 내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설마, 설마 그 말 한마디로 나를 괴롭히던 환영이


사라졌다고?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신의 저주가 아니라 내 죄책감일 뿐이었구나.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네 말 한마디가 나를 구원한 건가.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증오하는 네가 나를 구원한다니. 신도 해 주지 않은 일을,
어떻게 감히 네가?

그래서 노아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노아는 순순히 손을 놓을 뿐,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렌다의 석상 앞에서 기도해도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말 한마디에 핏자국이 지워지다니.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이불 속에 숨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싫어. 근데 네가 나를 구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 돼.

“꼴도 보기 싫어…….”

네 푸른 눈동자도 싫고 어두운 흑색의 머리카락도 싫다. 네가 나를 보며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증오스럽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네 손은 혐오스럽다.

?
나는 이렇게나 네가 싫은데. 너를 아끼던 마음과 사랑하던 마음은 이미 추억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런데 나는 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해 주던 네 목소리가 한 번 더 듣고 싶은 걸까. 왜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굳게 잡고 있던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걸까.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 노아를 찾아갔다. 신전은 그에게 음식과 물을 조금도 주지 않는


듯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를 위해 품에 물통을 숨겨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노아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다급하게 물을 삼켰다.

“나는 알 것 같아.”

“뭘.”

“어제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쳤으면서 누나가 다시 나를 찾아온 이유.”

나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나한테서 필요한 게 있는 거잖아. 누나가 필요로 하는 게 정확히 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누나. 내가 계속 말하고 있잖아. 부디 날 한 번만 사랑해 줘. 그럼 난 누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테니까. 신발을 핥으라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거고 누나 대신 죽으라고 해도 기쁘게 죽을게.”

이미 나 대신 죽으려는 작정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아를 쳐다봤다.

노아는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을 휘저으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한 번만 사랑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

“……그럼?”

“한번 사랑받으면 더 욕심이 날 테니까. 매일이 지날수록 하루만 더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할 게
분명해서.”

진부하지만 노아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무릎에 바닥이랑 이어지는 자석이라도 붙어 있나. 왜 이렇게
무릎을 자주 꿇어.

?
“누나, 제발.”

“짜증 나니까 자꾸 무릎 꿇지 마. 네가 반성하는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제발…….”

그리고 노아는 작게 웃었다. 자신이 애원한 바에 대해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누나도 전에 부정하지 않았잖아. 누나는 나를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한다고. 나만 보면 어렸을 때의 그


불쌍한 꼬마가 생각나는 거지?”

정확한 답이었다. 이전에 꿨던 꿈에서도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노아에게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를


위로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만약, 순간의 욕심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누나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계속


좋아하는 감정만 남아 있었을까?”

“아마 그렇겠지.”

“아아, 진짜…….”
?

멍청했구나, 노아. 노아는 스스로 자조하며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너는 지금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테오필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당당할까. 아마 노아의 경우는 전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했잖아. 너랑 맞는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지금 사랑해 달라고 빌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

그러다가 문득 노아가 왜 홀로 이곳까지 왔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데려왔었다면,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암흑가에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것을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암흑가를 이용해 신전을 몰아붙이고 탈출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노아는 이렇게 답했다.

“황실이나 신전은 피해 입는 걸 싫어하니까 암흑가를 쉽게 못 건드는 것뿐이지, 싸워서 이기지 못할


정도로 범죄자들의 힘이 절대적인 건 아니야. 오히려 그것들이 신전에 쳐들어와 봤자 개죽음만 당할걸.”
“네가 그런 이유로 싸워 보지도 않고 죽음을 택하는 거야? 암흑가의 주인인 주제에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고 범죄자들의 안위를 생각해?”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 개미들 목숨이 나한테 뭐가 중요하다고.”

그가 범죄자들을 개미라고 부르는 꼴이 웃겼다. 자기 자신도 범죄자인 주제에 도대체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건지.

노아는 명확한 답을 말해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질문했다.

“그것들이 전부 여기로 몰려오면 누가 제일 먼저 이상함을 느낄 것 같아?”

“황실?”

“아니. 황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하나 있는데, 한번 맞춰 봐. 누나도 아는 사람이니까.”

설마…….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한 인물을 언급했다. 노아가 한 말에 따라 유추해 보면, 알베르트는 여전히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개미들의 헛된 개죽음부터 모니카 공작이 다시 누나를 데려가는 것까지. 신전과 싸워 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

“그 뱀처럼 재수 없는 새끼가 누나 옆에 붙어 있을 때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아?”

“알베르트가 또 나를 찾고 있구나…….”

물론 그가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알베르트와 헤어졌던 이유는 그가 내게 질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쳤기 때문이니까.

“뭐, 그래도 지금 당장 누나의 위치를 아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썩 나쁘지는 않네.”

노아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창살 사이로 그의 두 다리가 삐져 나왔다.

?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이 나한테 감시를 붙여 놨을지도 모르거든. 아직 수상한 기색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있는데 네가 찾지 못한 거면 어쩌려고.”

“글쎄. 만약 내가 못 찾은 감시자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물론 가능성은 적지만 말이야.”

그 후로는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가지 마, 누나. 더 있어. 응?”

노아가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이곳에 더 있으면 성기사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을 외면하고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지하 감옥에서 나가던 중 지나가던 어느 성기사와 마주쳤는데, 그는 품 안에 상자 같은 각진 것을 들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

내 시선이 품속의 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성기사는 얼른 쓸데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당시 놈이 가지고 있던 단검입니다.”

“……아.”

“자세히 조사해 보니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봉인실에 넣어 두라는 명령을 받고 가던


길입니다.”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단검이라고? 그러고 보니 살로스는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알 수 없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나한테 질린 걸까.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던 주제에 상황이 이렇게 되니 떠나 버린 건가.

그래도 지금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였는데. 하지만 살로스가 나를 떠난 것에 상처받기에는 머리가


복잡했다. 하나하나 전부 신경 쓴다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도 지하 감옥에서 놈을 만나고 오신 모양입니다.”


“아, 네.”

그의 말투를 보아하니, 그는 내가 지하 감옥에 자주 들락거려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단장님께서 저런 놈 때문에 돌아가셨으니, 아가씨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렇게 아가씨께 잘해


드렸는데…….”

“…….”

“신전의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습니다. 놈의 사형 문제를 두고 신전이 시끄럽습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상심이 크겠다고? 테오필이 나에게 잘해 줬다고? 성심껏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아,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네.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려고요.”

?
이번 방은 테오필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시설이 좋고 깔끔했다. 내가 지하 감옥에 있는 사이
누군가 방을 치워 준 모양인지, 이불이 각에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조금 전 만난 성기사는 신전이 노아의 사형 문제를 두고 시끄럽다고 말했다. 노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노아가 밉기는 해도 죽는 걸 원한 적은 없는데.

끙.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굴렀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행동을 멈추고 문을 쳐다봤다.

“저, 아가씨. 아가씨를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44-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 설마 애니카는 아닐 테고, 노아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렇다면 설마


…….

?
“혹시, 그 찾아온 사람이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던가요?”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 전하셨습니다.”

“…….”

순간 말을 잃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아는 그렇게 말했다. 알베르트가 자신에게 감시자를 붙여 놨을 수도 있다고.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아니, 애초에 이곳에 계속 남아 있던 내가 잘못이었다.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저,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공작님께선 제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계셨나요?”

“금발과 붉은 눈을 가진 아가씨를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아. 이 정도면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다. 분명 알베르트는 노아에게 감시자를 붙여 놨던 거다. 그게


아니라면 노아가 나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찾아올 리가 없잖아.
?

“만나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도…… 만나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아가씨의 보호자라고 주장하셨는데…….”

“보호자요?”

문 너머의 사람이 뻔뻔스럽게 네, 라고 대답했다.

“전 보호자 없이는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가서 전해 주세요.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테오필, 아니 성기사 단장이 한 말 때문인가요?”

“네?”

“몽마에게 시달리고 있던 사람이니, 누군가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했었나요?”

오히려 내가 알베르트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처지인데, 알베르트를 내 보호자라고 생각하다니. 애초에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성인에게 보호자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냐고.
?

“아가씨? 아가씨!”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얇은 이불이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

다시 이불에서 꾸물꾸물 나왔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웠다. 왜인지 창문이 있으니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저녁이니 신전 내의 경비가 그렇게 삼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신전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전부 건물


밖에 있을 테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이곳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없었다. 주머니에는 작은
빵을 넣어 둔 상태였다.

?
이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알베르트와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도 도망친다면, 다시 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면 말이다.

신전과 멀지 않은 곳에는 서쪽 왕국인 아르엘과 연결되는 국경 지대가 있었다. 서쪽 국경 지대는 다른


국경 지대들과는 다르게 마물이 소환되지 않아 안전한 곳이었다.

잠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마음을 굳혔다. 어설프게 도망친다면


알베르트는 반드시 나를 찾아낼 것이다.

나는 아르엘 왕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아니, 넘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가 반복될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대로 아르엘 왕국으로 가 버리면.

그렇다면 노아는?

그 생각을 한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이대로 아르엘 왕국으로 가 버린다면 노아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처형대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간 그에게, 죽음까지 강요해야만 하나?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정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아. 발에 못이 박힌 듯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복도에서 어느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아까 모니카 공작 봤냐?”

“당연히 봤지. 아주 얼굴이 장난 아니던데.”

헉. 야간 순찰을 도는 성기사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벽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저벅, 저벅. 두꺼운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복도 끝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히 벽 뒤에서 나왔다.

?
“후우…….”

나는 노아를 살려야만 했다. 그를 살리지 않으면 또다시 짜증 나는 죄책감으로 인해 두 손이 피범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게다가 노아를 생각할 때마다 과거의 그가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과거의 그 여리던
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죽도록 이곳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일단 생각을 해 보자. 어떻게 하면 노아를 그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꺼낼 수 있을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지하 감옥을 향해 걸었다. 한 자리에 오뚝이처럼 서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며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몸의 힘을 빼고 걷기는 했으나 넓은 복도에 걸음 소리가 울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걸음 소리를 줄이기 위해 조금 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걸음 소리와 다른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빨리 걸어도,


조금 느리게 걸어도 따라오는 걸음 소리는 일정했다.

?
망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성기사에게 발각된 것이 분명했다. 왜 이 시간에 방이 아니라 이런 곳에 있었냐고 추궁하면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상대는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성기사는 밤에 방에서 나온 나를 매섭게


추궁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진 것은 성기사의 위협적인 추궁이 아니라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성기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는 팔을 뻗어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밤에는 신전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설마 공작이라서 그냥 들여보내
준 건가?

하여간 신전에 사는 게 신을 모시는 사제라는 놈들인지 계급주의자들인지 모르겠다. 상대가 지위만 높으면
다 허용해 주는 거냐고.

?
나는 이전에 방문을 두드렸던 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으득, 이를 갈았다.

곧 꿀을 바른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텔라.”

“……아.”

“도망쳐서 이런 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허리를 감싼 팔은 단단했다. 오래전부터 그의 고유한 향이었던 그 시원한 향은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아닌데요.”

“도대체 왜 당신은 얌전히 앉아 있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요. 가만히 내 옆에만 있으면, 당신이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텐데.”

?
어디서 거짓말이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맨날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게 누군데.

“공작님이 저한테 뭘 해 주시든 그게 제가 원하는 건 아닐 거예요. 공작님이 저한테 해 주실 수 있는 건


없어요.”

“제가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제발 저 좀 그냥 평화롭게 찌그러져 살게 해 주세요.”

“하지만…….”

알베르트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당신이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 옆에서는 공기마저도 이렇게나 달콤한데.”

“결국 저의 무언가가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 향인지 뭔지를 좋아하시는 것뿐이죠.”

“그것마저도 당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성격을 좋아하든, 외모를 좋아하든, 결국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돈 많고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렸는데 왜 굳이 나한테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향이라는 게 뭐길래 알베르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니, 잠시만. 향이라고?

문득 이전에 테오필이 내게 던져 주고 갔던 책들이 떠올랐다. 엘도니아 여행기에 나온 내용이었나.


하여간 그 책에서 엘도니아는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서 희한한 향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오스틴과의 만남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그 향에 중독될 것만 같아서 끝내 허겁지겁 그 마을을


떠났다고, 그렇게 기록했다.

알베르트가 말하는 향도 그것과 비슷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여주를 사랑해야 할 알베르트가
나를 따라 신전까지 쫓아온 걸까.

“도대체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코르넬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해 줬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 미리엄, 아니,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동생이 당신을 찾아 준 덕분이죠.”

결국 노아에게 감시자를 붙여 그를 쫓아왔다는 이야기였다.


?

“놈에게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네. 당신을 찾게 해 줬으니.”

“노아는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알베르트가 ‘그래서 뭐?’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비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인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알베르트라면 노아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작님. 노아를 구해 주세요.”

“네?”

알베르트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입 밖으로 헛웃음을 뱉고는 말했다.
?

“스텔라. 갑자기 내게 그런 말을 해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작님에게는 공작이라는 지위가 있잖아요.”

“더군다나, 놈은 고귀한 성기사 단장을 죽인 범죄자가 아닙니까. 저는 당신의 말대로 이 제국의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그런 범죄자를 옹호할 수는 없죠.”

맞는 말이었다. 노아는 나 대신 죄를 뒤집어썼으니 표면적으로 성기사 단장인 테오필을 죽인 범죄자였다.


공작이 범죄자를 옹호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성기사 단장을 죽인 건 나예요.”

?
나는 결국 노아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뭐, 그래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결국은 나도
테오필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최우선인 일은 노아를 구하는 것이었으니.

“이런. 내가 없는 동안 살인까지 저지르셨습니까.”

“하지만 이유가 있었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알베르트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마치 내 사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45-

“놈이 성기사 단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더라도, 그는 살인자이자 범죄자입니다. 그런 것을 살려 둬서야


되겠습니까. 제국의 앞날을 방해할 범법자인데.”

“그렇게 따지면 공작님은요?”

“무슨 의미입니까?”

“스테인 경을 시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신가요?”

소설에서 내가 읽은 것만 세어도 다섯 번이 넘었다. 여주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처리한 것은


코르넬이었다. 물론 그의 뒤에는 항상 알베르트가 있었고.

“죽음으로 갚아야 할 만큼 흉악한 죄를 저지른 자들뿐이었습니다.”

“정말요? 죄가 없는 사람은 없었나요?”

“스텔라, 그만.”

알베르트는 듣기 싫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스텔라. 당신의 살인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를 탓하는 자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이겠지요.”

내가 저지른 죄.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알베르트와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 위치시켰다.

눈앞에 보이는 손은 붉었다. 그냥 붉은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이 붉은 피로 완전히 덮여 있는 탓에 붉은


것이었다.

?
아니, 아니야.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누군가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

피는 점점 손에 고여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베르트를 바라봤지만 그는 이 피가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당신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모두에게 버려졌을 때 내가 기꺼이


당신을 거둘 테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하면 테오필이랑 뭐가 달라.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던 테오필이랑 뭐가 달라.

“공작님, 공작님. 제발, 제발…… 노아를 구해 주세요.”

“놈이 죽는다고 해서 당신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아니, 아니에요. 난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신은 더 이상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 테니까요.”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꼴이 한심했다. 내가 언제부터 구원 따위를 원했다고. 그것도


그렇게 미워하던, 노아의 구원이라니.
알베르트는 그 예쁜 얼굴을 가차 없이 구기며 몰인정하게 답했다.

“그게 굳이 놈이 될 필요는 없잖습니까.”

“안 돼요. 꼭 노아여야만 해요. 노아가 아니면 안 돼요.”

알베르트는 오히려 나를 죄책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노아와 대화를 할 때는 보이지 않던 피가 알베르트와


대화를 하자마자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알베르트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여전히 단단했다.

“놔요, 놔 주세요. 지금 노아한테 가야 해요.”

“놈에게 가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알베르트가 나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바닥을 기어서 가는 한이 있어도 나는 가야만 했다. 오직 나를 위해서, 노아의 한마디에 기대


내가 살인자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오로지 내 편의를 위하여.
?

“도대체 왜 그놈이 아니면 안 되는 겁니까? 당신이 나에게서 도망친 사이 놈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다 알고 왔습니다. 왜 아직도 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버리지, 못한 게 아니라…….”

내 죄를 부정해 주는 사람이 노아밖에 없어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입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나는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갈 겁니다.”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스텔라. 사랑하는 나의 스텔라.”

“…….”

“이 이상 고집부리지 말아요. 내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문질러 닦아도 손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이것이 진실이
아니며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알베르트에게 손에 있는 이 핏자국에 대해 밝혀야 하나. 만약 그가 알게 된다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트가 나에게 거부감을 갖는다면,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천천히 심호흡한 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제 손에는 지금 피가 잔뜩 묻어 있어요.”

그러자 내 손을 살핀 알베르트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예?’ 하고 되물었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말을 마구 쏟아 냈던 것 같다.

“성기사 단장을 죽인 후부터 손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여요.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이게 환영일 뿐이고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걸.”

“스텔라.”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건 노아만이 없애 줄 수 있어요. 노아의 말 한마디면 사라질


환영인데,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 미쳐 버리라는 말씀이세요?”

?
한동안 알베르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마침내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냈다. 허리를 짓누르는
강력한 힘이 사라지자 여러모로 한결 편해진 듯했다.

그는 내 몸을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그 핏자국이라는 환영을 없애 줄 수는 없는 겁니까?”

“아니, 안 돼요. 오히려 공작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핏자국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노아의 말이 꿈이라면 알베르트의 말은 현실이었다. 노아의 말이 달콤한 거짓이라면 알베르트의 말은


씁쓸한 진실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달콤한 거짓을 속삭여 줄 거짓말쟁이가 필요했다. 내 죄를 함께 부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 또 도망칠 겁니까? 내가 그 환영을 없애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알베르트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그의 표정은 화가 난 듯 매서웠다.

?
“공작님. 제발 이제 그만해 주세요…….”

“…….”

“저는 공작님께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제발 이제 제가 원하는 대로 평화롭게 살게 해 주세요, 제발.


저를 찾지도 말아 주세요. 저를 쫓지도 말아 주세요.”

알베르트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제가 5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러고 있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제 향이 좋은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향을 가진 사람은 저 말고도 또 있을 거예요. 아,


신전 도서관에 기록이 있을 거예요. 날이 밝으면 제가 찾아올게요. 그러니까…….”

“스텔라.”

내가 횡설수설하자 알베르트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쓰러지다시피 몸을


늘어뜨렸다. 다만 알베르트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쓰러지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제 향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 향이 당신의 향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예요.”

아니야. 당신은 다른 세계의 향에 중독된 것뿐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믿을 리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

알베르트는 내 손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말한 핏자국이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 같았다.

“핏자국, 핏자국이라.”

“…….”

“밤이 깊어 피곤한 탓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모양입니다.”

밤이 깊은 탓에, 피곤한 거라고? 하지만 이 핏자국이 보이는 시간대는 다양했다. 새벽에 보이기도 했으며
아침에 보이기도 했다.

알베르트는 내가 보는 이 환영을 피곤한 탓에 착각한 것뿐이라고 치부했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혹은 억지로 이 환영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갑시다. 동이 트면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갈 테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정신이 나가 버릴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공작님께서 미친 여자를 거두셨다고 소문이 날 거예요.”

“그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알베르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냐고.

그게 아니면 일부러 이해하지 못하는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님.”

“네, 스텔라.”

“지금 이대로 공작님을 따라가면, 전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공작님이 관계를 요구하시면 따르고,
평생 그곳에 갇혀서 제가 원하는 것은 버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원하는 것은 내가 전부 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포기하라는 것만 제외하고 전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습니다.”

결국 알베르트는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내 의견을 묵살한 채,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한다.

?
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알베르트는 해가 뜨면
공작저로 출발하자고 말하며 나를 방으로 보냈다.

새로이 받은 방에서는 창문을 통해 신전 입구 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커튼 뒤에 숨어 알베르트의 마차가


마을로 향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분명 낮에 알베르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었다. 해가 지면 외부인은 전부


신전에서 내보낸다는 것이 신전의 원칙이었다.

아마 신전 측은 알베르트가 나를 데려갈 수 있도록 그를 신전에서 내보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신전의 사람들은 나를 몽마에게 시달리다 미쳐 버린 불쌍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전은 나를 알베르트에게 넘길 것이다.

또다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노아는 그대로 죽게
될 테고.

나는 밤새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며 침대 위를 굴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뜨면


알베르트가 신전으로 올 것이다.
?

***

교황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알현실의 의자에 앉았다. 알현실 창문을 통해 희미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날 밤 성기사 단장 테오필을 죽인 죄인의 사형 집행일이 정해졌다. 정확히 사흘 후에 죄인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교황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전의 모든 이들이 테오필이 죽었다는 이유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교황만이 성기사 단장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슬프지 않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죽음이 기쁘기까지 했다.

수년 전, 교황이 그 자리를 얻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테오필이었다.

-46-

테오필은 아무런 힘도 없던 교황을 차세대 교황으로 추대했고,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이었다. 테오필은 마치 자신이 교황인 양 그를 협박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전을 움직였다.

최근의 일만 해도 그렇다.

이번 해에는 이상하게도 제국 여기저기에서 마물이 소환됐다. 황실이 홀로 부담하기 힘든 정도가 되자,


테오필은 마물 토벌을 위해 성기사들을 제국 여기저기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자신을 보며 매섭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고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경 지대로 갔던 성기사들이 마물 토벌을 마치고 신전으로 돌아왔으나 테오필은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테오필이 그들을 먼저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러, 테오필이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한 여자를 데리고.


?

테오필이 여자를 데려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교황은 주먹을 세게 쥐며
기함했다.

성기사, 그것도 그중 우두머리라는 성기사 단장이 신전에 여자를 데려오다니, 정말로 그가 제정신이긴 한
건가?

몽마에게 시달리던 여자라는 말도 있었고 테오필이 그 여자를 몽마로부터 지켜 주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신전의 사람들이 뭐라고 수근거리든 교황은 테오필과 그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불쾌할 뿐이었다.
몽마니 뭐니, 그에게는 전부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테오필을 중심으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한 남자가 신전에 침입해 테오필을 살해한
것이었다.

때문에 신전이 완전히 뒤집혔다. 모두 하루라도 빨리 죄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아 떠들고 있었다.

일반인이 성기사를 죽일 수 있다니 놀랍기는 했다. 또한 그 죄인은 몽마의 힘이 담긴 단검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

하지만 교황, 그는 오히려 그 죄인에게 포상이라도 내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성가신 테오필을 대신


죽여 주다니!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았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자애로운 교황이었다. 감히 성기사 단장을 죽인 죄인에게


포상을 내릴 수는 없었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교황은 향긋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뵙게 해 주세요.”

“아가씨,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교황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알현실의 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밖의 소란이 내부까지 들려왔다. 알현실을 지키는 성기사가 아가씨라고


부를 사람은 신전 내에 단 한 명밖에 없을 텐데. 교황은 찻잔을 내려놓고 문을 빤히 응시했다.

“에린. 저 여자를 들여보내.”

“저 여자 말씀이십니까, 성하?”

?
교황이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수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성하께서 그분을 알현실로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린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곧이어 테오필이 데려왔다는 여자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여자가 들어오자 순간 어색한 향이 알현실 안에
맴돌았다.

“에린. 나가 보도록.”

“성하.”

“내가 나가 보라고 하지 않는가.”

“…….”

에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여자를 흘겨봤다. 그녀는 마치 여자를 더러운 것을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성하.”

여자는 에린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입 모양을 보니 ‘성하’라는 말을 따라한 것 같았다.

덜컹. 알현실의 문이 닫히고 알현실에는 교황과 여자만 남게 되었다.

아마 에린이 나가기 전 걱정한 것은 이것일 테다. 몽마에게 시달리던 자이니 분명 더러울 것이고, 위험할
것이라고.

교황의 생각 또한 그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여자를 알현실에 들여보낸 것은 그 두꺼운


낯짝이나 봐 보자는 생각이었다.

교황이 앉아 있는 자리는 계단 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황은 여자를 내려다봤고 여자는 그를


올려다봤다.

“저, 그러니까 성하.”

?
여자는 어눌하게 말을 시작했다. 교황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사흘 후가 성기사 단장을 살해한 죄인의 사형 집행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곳까지 왔는지.”

여자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성기사 단장을 죽인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접니다.”

교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여자의 외양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성기사 단장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성기사 단장을 살해한 무기는 몽마의 힘이 담긴 검이었습니다. 그 남자와 저 중에 몽마와 관련이 더 큰


사람을 고르라면 당연히 저일 것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 신전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교황은 골똘히 생각했다. 왜 신전은 지금까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나?

테오필은 지금까지 몽마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줬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테오필을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탓일 테다.

생각하던 중 교황은 무언가 이상함을 떠올렸다. 그리고, 신전의 사람들 중 처음으로 교황이 그녀에게
물었다.

“테오필 경이 정말로 그대를 보호해 줬나?”

여자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교황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단하게 테오필이 저지른 죄악을 그에게 설명했다. 덧붙여, 자신은 죄인을 죽인
것뿐이라는 말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를 사면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곳에는 왜 온 거지?”


“저를 사형시키는 대신 남자를 풀어 주실 것을 간청 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허? 교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두 눈으로 교황을 똑바로 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를 사형시키고 대신 남자를 풀어 주십시오.”

“왜지?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저는 이미 살인을 저질러 신께 구원받지도 못하는 신세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 남자가 유일하게 저를


구원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인데, 함께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감히 주신 렌다를 두고 사람을 낙원으로 삼다니. 어리석은 짓을 했군.”

“그렇다면 사람을 구원이자 낙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교황은 턱을 살짝 들어 여자를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잠시 교황을 쳐다보다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성하. 이미 낙원에 있는 자들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하께서도 그러시지요.”

“감히 교황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목숨이 아깝지 않기 때문에 제가 성기사 단장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밝힌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여자의 눈동자는 파도처럼 일렁이지 않고 덤덤했다.

흠. 교황은 앓는 소리를 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자를 직접 만나 보기 전까지는 몽마와 붙어먹다가


미쳐 버린 더러운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의 판단이 조금 섣부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아직 못다 한 말이 있는지 여자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또 뭐지?”

“혹여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저를 찾아오신 분께 평생 쫓기며 살 것이 분명합니다.”

찾아오신 분이라. 교황은 곧 모니카 공작이 한 여자를 찾으러 신전을 방문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또한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었던 건가.
?

초기의 신전은 청렴하고 무구했다. 그러나 교황의 자리를 사이에 두고 거듭되는 권력 싸움 탓에 청렴하던
신전은 문란해지고 부패했다.

모든 생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 그건 다 고지식한 옛 사제들의 말일 뿐이었다. 신전에 있는 지하


감옥과 처형대만 봐도 신전이 바뀌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교황 또한 그랬다. 이미 그는 교황으로서 기틀을 다지고 권력을 얻었다. 다만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이기지


못하던 것은, 성기사 단장 테오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교황이 성기사 단장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살인을 의뢰해도 소문이
날 터.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자의 주장에 따르면 눈앞의 여자는 테오필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결국 교황은 그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교황은 본디 신전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종류별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랍에서 지하 감옥의 열쇠를 찾아, 그 안에 성력을 불어넣어 똑같은 것을 하나 복사했다.

그리고 빛이 감도는 열쇠를 여자에게 발치에 던졌다.

“지하 감옥 열쇠다.”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지.”

“열쇠를 누군가에게 들키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도울 수 없으니 알아서 죄인을 데리고


도망치도록.”

“…….”

“죄인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바로 성기사들이 쫓기 시작할 테니.”

그러나 여자는 열쇠를 받고도 아무 말 없이 열쇠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나가지 않는 거지? 교황은
얼른 나가라는 의미로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 성하.”

그러자 여자는 발표하듯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

“혹시 몽마의 단검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쯧. 내보내고 멋지게 마무리하려고 했건만. 교황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기도실 옆방에 보관되어 있다. 잠시 봉인을 풀어 둘 테니 재주껏 가져가 보도록.”

“감사합니다.”

그제야 여자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제 정말로 그녀는 나가 보려는 듯 알현실 문의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그녀를 다시 멈춰 세웠다. 여자는 문을 열다 말고 다시 교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는 꽤 커다란 차이가 있지.”

“어떤 차이 말씀이십니까.”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어떤 고난이 와도 결국은 밟고 일어설 수 있어. 죽으면 뭣도 아니게 되겠지만.”

“……제가 과연 이 상황을 밟고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여자는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교황은 여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해가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에린이 알현실로 돌아왔다.

여자와의 긴 대화로 인해 이미 차는 식어 버린 후였다. 교황은 찻잔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차가 다 식었군.”

이를 들은 에린이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그에 답했다.

“새로운 차를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47-
아직 아침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창문 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기는 했으나 정확히는
새벽이었다.

알베르트는 분명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성기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도


아침부터이니,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노아를 먼저 지하 감옥에서 꺼낼지 단검을 먼저 챙길지 고민하다가 단검을 먼저 챙기러 갔다. 적어도 검이
있으면 성기사를 만났을 때 배 정도는 찔러 줄 수 있겠지.

기도실 옆에는 방이 하나 있었다. 방의 용도를 알리는 표지판은 신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읽을 수는


없었으나 아마 봉인실 그 비슷한 이름일 것이다.

정말 교황이 봉인을 풀어 준 건지, 평소에는 열리지 않던 문이 살짝만 밀어도 쉽게 열렸다.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조심히 봉인실 안으로 들어갔다.

봉인실 안에는 기분 나쁜 물건들이 가득했다. 내게는 성력이 없는지라 정확히 그 기운을 감지할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기분이 더러운 것은 확실했다.

?
그중 봉인실의 중앙에 있는 것은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그 검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다시 교황이 이 방을 봉인하기 전에 봉인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지하 감옥을 향해 최대한


빨리 달렸다.

탁탁, 하고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지하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노아의 모습이 보였다.

“노아, 노아.”

나는 속삭이며 바닥에서 작은 돌을 주워 그에게 던졌다. 돌은 노아의 머리에 맞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노아가 사과를 먹고 깨어난 공주님처럼 가련하게 눈을 떴다. 몸이 아프기라도 한 건지, 푸른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조금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나?”

“이리 와. 빨리.”
?

나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왼쪽으로 돌렸다가 창살이 열리지 않길래 다시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창살이 열렸다. 오른쪽이 정답이었나 보다.

노아는 금세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가 나올 수 있도록


창살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낡은 지하 감옥을 너무 과대평가한 탓일까. 기름칠을 하지 않은 창살은 마치 사람이 울부짖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다른 죄수들이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인지 이쪽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허어, 뭐야 저것들은.”

“도망치려나 본데.”

“거기 성기사들 없어?! 저것들이 도망치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꽥꽥 지르고는 우리의 탈출을 훼방 놓은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자기들끼리 낄낄


웃었다.
?

“성기사들! 이리 와 보라니까!”

“저것들이 지금 탈출을, 커헉!”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목을 부여잡고 켁켁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그들의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덕분에 그들은 더 이상 성기사 타령을 하며 울부짖을 수 없게 됐다. 나는 노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죄수들이 컥컥거린 것이 이상해 단검을 내려다봤으나 단검에 박힌 자색 보석이 더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탈출하느냐가 문제였다. 신전 주변은 전부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더니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노아가 내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성기사들이 없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몇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

그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노아는 키만 나무처럼 크고 조금 건장해 보일 뿐, 코르넬이나 알베르트처럼 힘이 센 것 같지는


않았다. 얘가 성기사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제발…… 그냥 한 번만 믿는 셈치고…….”

금방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꼴이 영 못 미덥기는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신전의
창문을 열고 후문으로 향했다.

확실히 후문으로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기 때문에 보초를 서는 성기사들의 수도 적었다.

“이제 어떻게 해?”

“…….”

?
노아는 대답하는 대신 내 손을 잡고 당당하게 후문을 통과했다. 물론 성기사들이 우리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아니, 이 자식 그놈 아니야?!”

“뭐야. 어떻게 나온 거야!”

옆에 나도 있는데 성기사들은 노아만 보이나 보다.

성기사 몇 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는 게 믿는 것 없이 떵떵거리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노아는 품에서


이상한 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옥에 끌려갈 때 성기사들에게 저 병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누나. 숨 참아.”

노아가 뚜껑을 열기 직전에 한 말을 듣고 나는 얼른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노아 또한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

뚜껑이 열리자 병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를 마신 성기사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너 설마 전에도 이걸로 성기사들 기절시키고 신전 내부까지 들어온 거야?”

“응.”

나는 또 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력 천재가 돼서 돌아온 줄 알았잖아.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해가 하늘에 떠오른 후였다. 드디어 아침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날이 밝은


것이었다.

내가 방에 없는 것을 알면 알베르트는 분명 나를 쫓아올 것이다. 그전에 국경을 넘거나 해야 한다.

평소라면 기사들이 국경의 바로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일은 드물었다. 국경에서 꽤 떨어진 곳에는


게이트가 있는데, 기사들은 그곳을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성기사 단장이 죽었기 때문인지, 성기사들이 국경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은 전부 틀어지는데.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아르엘 왕국으로 넘어가자니 기록이 남을 것이고, 그렇다고 불법으로 국경 지대를
넘자니 성기사들에게 붙잡힐 수 있다는 것이 걸렸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교황한테 뭐 좀 더 부탁하고 올걸. 예를 들어 노아 대신 이미 내가 사형당했다고


알베르트한테 거짓말을 해 준다든가.

음. 그래도 그건 교황의 능력 밖 일이려나.

벌써 우리가 후문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성기사들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 교황님, 아무리 더
이상 도와주실 방법이 없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빠르잖습니까.

하아. 나는 가만히 서서 한숨을 뱉었다.

?
이미 교황에게 갈 때 죽음을 각오했었다. 평소에도 간간이 생각해 왔던 길이라 그런지 큰 망설임도 없었다.

도망쳐 봤자 알베르트가 쫓을 것이고 손에 보이는 환영 때문에 결국 미쳐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만약 내가 죽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면 노아를 데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환영을 없애 줄 수 있는 것은 노아뿐이니까.

그런데 결국 이렇게 잡히게 되는구나. 노아의 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아는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러게 나를 왜 꺼냈어.”

허. 이게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힘들여서 감옥에서 탈출시켰더니 왜 꺼냈냐고?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네가 좋아서 널 지하 감옥에서 꺼낸 줄 알아?”

“…….”
“이 거지 같은 환영을 없애려고 널 꺼낸 거잖아.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도대체 어느 부분이 기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아는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미친놈. 나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부 짜증 나 죽겠다. 나는 대체 무슨 죄로 지금 여기에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거지.

어느새 성기사들이 둥글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위협적으로 성검과 창을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누나. 우리 다음 생에도 만날 수 있을까?”

얘는 또 왜 이래. 새드 엔딩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뱉으니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짜증 나니까 오글거리게 그딴 말 하지 마.”

?
노아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기력이 없는 탓이 큰 것 같았다.

“잠시만. 저게 무슨…….”

그때, 우리를 둘러싼 성기사들 중 한 명이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허공에서 어두운 보라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애초에 저걸 빛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부셔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이게.”

그 안에서는 키가 큰 사람이 걸어 나왔다. 긴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 사이로 삐져나온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머리카락은 가진 사람이었다.

성기사들이 소리 지르며 누구냐고 물어도 그 사람은 뻔뻔하게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할 뿐이었다. 계속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 어라.”
?

상대의 시선이 내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향했다. 상대는 눈을 크게 뜨며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와. 아가씨. 그거 어디에서 얻은 거야?”

“네, 네?”

“수백 년을 살아도 못 구했던 건데. 그거 나 주면 안 돼?”

키가 커서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목소리가 가늘었다.

“응? 한 번만. 한 번쯤은 연구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넌 누구지? 놈들과 아는 사이냐?!”

옆에서는 성기사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만 아저씨들. 시끄러워요. 지금 대화하고 있잖아.”


?

순식간에 성기사들과 우리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세워졌다. 성기사들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장벽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뭘 해 주면 그거 줄래? 돈? 힘? 그게 아니면, 저 아저씨들한테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데로


데려가 줄까?”

하지만 이걸 그대로 넘기기에는 어딘가 찝찝했다. 마치 검과 관련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주는 게 안 되면 그냥 잠시만 빌려주기만 해도 돼. 연구만 하고 돌려줄게. 그 연구가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

“아니면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거야.”

나는 노아를 힐끔 쳐다봤다. 그의 의견을 한번 들어 보려는 생각이었으나, 그는 내 선택을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의 여자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살로스가 연상돼서, 나는
조심히 그 손을 잡았다.

-48-

여자의 손을 잡자마자 시야가 뒤집히더니 몸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아와 나는 물건이 가득 쌓인 더미 위에 처박혀 있었다. 마법을 사용한 저 여자만이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 있었다.

“우리 집이야. 더럽기는 한데, 뭐 앉을 공간 정도는 있으니까.”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상이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내며 방의 중앙으로 끌려왔다.

“음. 통성명부터 할까. 나는 아리안이야. 아가씨는?”

“아……. 스텔라예요.”

“그쪽은?”

“……노아.”
?

이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싹수없게 반말을 찍찍하네. 내가 노아의 어깨를 툭 치자 노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저 사람도 나한테 반말했잖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가씨. 아니, 이름으로 불러야지. 스텔라. 그 검은 어떻게 구했어? 길 가다 주운 건 아닐


테고.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니니까. 나도 기록에서만 읽어 봤고.”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손바닥을 문지르니 갑자기
튀어나왔으니까.

“아, 저 근데.”

“응? 말해 봐.”

“저는 이게 뭔지도 아직 잘 모르겠는지라.”

?
그렇게 물으셔도 뭔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요. 나는 눈에 살짝 힘을 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지금 당장 아리안이라는 여자를 믿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이 검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목적뿐인가?

싱글벙글 멍청하게 웃는 모습이 무해해 보이기는 했으나 사람을 외양으로만 판단했다가는 언젠가 뒤통수를
맞고 말 것이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이 검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어.

일단 아리안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온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우리 집 말하는 거야?”

노아는 이제 거의 힘이 없는지 책상에 엎드렸다.


?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간간이 내 몫의 식사를 몰래 가져다주기는 했으나 자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힘이 날 리가 없었다.

노아를 빤히 바라보던 아리안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자 둥근 접시에 담긴 수프가 나왔다.

“빈속인 것 같길래. 빈속에 기름진 걸 먹으면 속이 뒤집힐 테니까.”

아마 오래 굶주린 노아를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노아는 팍 인상을 쓰고 수프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수저를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따지기에는 심하게
굶주린 모양이었다.

“어……. 일단 우리 집은 아르엘 왕국에 있는 마탑인데.”

그 말을 듣고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마탑, 여기가 마탑이라고.


?

마탑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마법에 특화된 아르엘 왕국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모여 연구를


진행하는 탑.

나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곧 우리가 땅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곳은 마탑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탑에서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마법도 개발한다고
들었다. 마법을 개발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탑의 마법사였을 줄이야 알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다른 사람? 다른 마법사들 말하는 거야?”

으음. 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
“다 죽었어. 23 년 전쯤. 애초에 별로 머릿수가 많지도 않았고.”

그리고 아리안은 내 당황한 표정을 보고 표정이 웃기다고 놀렸다. 그녀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다가 과거
회상에 빠져 혼잣말하듯 주절주절 말을 시작했다.

“되게 실력이 뛰어난 애들이 많았어.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면서 연구도 많이 했고 마법 개발도 많이


했었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수십 년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아리안의 나이는 몇인 걸까.

“고대 기록들을 읽다가 이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했거든. 그래서 그곳의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했어. 마법진을 그려서 힘을 전부 쏟아부었지.”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실패했어. 그렇게 말하고 아리안은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위로라도 해 줘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으나 지금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했다고?

?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말하고 있군.”

옆에서 노아가 틱틱거렸다. 얘 요즘 도대체 왜 이래. 사춘기인가?

“넌 조용히 해 봐.”

나는 손으로 노아의 입을 틀어막은 뒤 계속 아리안의 말을 들었다. 아리안은 노아의 뚱한 표정을 보고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어? 이 이야기를?”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다는 건 아는데, 저한테 너무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나한테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아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래, 뭐. 듣고 싶다는데 말 못 해 줄 것도 없지. 어차피 꽤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아리안의 말에 따르면 23 년 전 마법사들이 떼로 죽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마력이 많이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실패할 확률도 높다. 아리안을
제외한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그리고 그것을 발동시키기 위해 힘을 전부 쏟아부었으나,
마법진에서는 빛만 뿜어져 나올 뿐 다른 세상의 사람은 마법진에서 소환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마법사들 사이의 불화는 점점 몸집을 불렸고, 그나마 힘이 남아 있던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증오했다.

저주를 걸고 싸운 탓에 힘이 빠진 마법사들은 하나둘 죽기 시작했고, 남아 있던 마법사들도 결국 저주를


받아 전부 죽었다.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마법진에 힘을 쏟아붓지 않았던 아리안뿐이었다.

여기까지가 아리안의 이야기였다.

“그 일 이후로 무슨 저주받은 마탑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아무도 마탑에 찾아오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나
혼자 연구나 하면서 살고 있지.”

?
아리안이 선뜻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은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마법사들이 싸워서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했다는 그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23 년 전쯤 마법사들이


죽었다는 것은 곧 그때쯤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렸다는 말일 테다.

23 년 전. 그해는 내가 태어났던 해였다. 정확히는 갓난아이인 채로 고아원에 버려졌던 해.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알베르트가 항상 운운하는 그 지긋지긋한 향인지


뭔지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전 생을 그리워한 적은 없지만, 잘만 하면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그럼 이쪽에서도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나요?”

“에헤이,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마. 나한테 궁금하다고 말해도 난 못 해 주니까. 괜히 그 바보들처럼


개죽음하기는 싫거든. 아, 근데 그 검에는 마력이 꽤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한 번만 빌려줘 봐. 혹시
알아? 연구하다가 그 마법진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모르지.”

?
이 검에 마력이 많이 담겨 있다고? 나는 아리안과 단검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만약 아리안이 검을 연구하다가 마법진을 열게 되면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몽마의 힘이 담겨 있다는


말도 그렇고, 이 검을 얻은 후로 살로스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이 검이 왠지 살로스와 큰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뭐, 망설이는 걸 보면 소중한 물건인가 보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봐. 심심하면 마탑
구경이라도 할래? 아래층은 내가 거의 안 다녀서 더럽기는 하지만.”

여기도 충분히 더러운데 아래층은 더 더럽다고?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공기 대신 먼지를


마시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자 아리안은 직접 마법으로 아래층을 청소해 주겠다며 노아와 나를 아래층으로 이끌었다.

정말로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때가 낀 계단이 본래의 돌 색으로 변했고 먼지가 가득한 방이
깨끗해졌다.

“자, 됐지? 그럼 난 연구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잘 생각해 보고 올라와.”


?

아리안은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래층에는 노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

“…….”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까 하도 구박을 해서 그런지 어쩐지 조금


어색했다.

방구석에 텅 빈 옷장이 있길래 나는 그곳에 가서 기대고 앉았다. 노아도 나를 따라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옷소매로 단검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단검 중앙의 자색 보석이


반짝 빛났다.

아리안은 이 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 검이 살로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안에게


묻는다면 아리안이 알아내 줄 수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밤새 나를 괴롭혔던 환영은 노아와 함께 있었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이렇게 쉽게 사라지다니. 왠지 억울했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피곤했다. 힐끗 노아를 보니 그 또한 피곤한지 눈을 살짝 감고 있었다.

나도 뒤통수를 옷장에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몸을 뒤덮는 햇살이 꽤 따듯했다.

그때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슬쩍 눈을 떠 보니 노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있었다.

노아를 노려보며 어깨를 털어낼까 고민하다가 그냥 혀를 쯧, 차고 그대로 뒀다. 옆에 벽도 있는데 왜


하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건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나도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또 소란스럽게 그를 구박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금방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길래 노아가 이미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불편해서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노아가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잡았다.

?
“……또 날 두고 가려고 하는 거지?”

“어깨가 불편한 걸 어쩌라고.”

“아니, 그거 말고.”

그게 아니라면 뭘 말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싫어?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을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

그는 아까 내가 한 말을 쭉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저번에는 두고 가지 말라고 어린애처럼 떼쓰며 울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꽤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누나가 나한테서 뭔가 필요로 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조금 안심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

“도대체 나를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게 뭐야? 이제 그게 필요가 없어졌어? 그래서 가려고 하는 거야?”


“다른 곳으로 가면 이 짜증 나는 환영이 사라지기라도 하겠지. 설령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고.”

그제야 노아는 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는 내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올려 뚫어지게 응시했다.

-49-

“아직 환영이 남아 있다는 소리야?”

그는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따지듯 나를 몰아붙였다.

“제발, 누나. 내가 사랑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이렇게 흔들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누나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건지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하겠어.”

“시끄러워, 말 걸지 마. 조용히 좀 해. 지금은 안 보이니까.”

“지금은 안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 진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노아는 끈질기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네 말 한마디가
내 죄책감을 없앴으며 네가 내 죄를 부정해 줬기에 이 환영이 사라졌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는 뜻이야?”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나. 나 몇 개만 물어봐도 돼?”

“내가 허락 안 해 줘도 물어볼 거잖아.”

“날 왜 감옥에서 꺼내 줬어?”

“그거야 당연히…….”

“그때 분명 누나는 환영을 없애려고 날 꺼냈다고 말했어.”

성기사들에게 쫓기며 흘리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니.

?
“그때 누나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

“…….”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빈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이 환영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노아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만약 노아를 옆에 두지 않아도 환영을 없앨 방법이 있다면 그를 옆에 둘 필요가 없었다. 소설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환영을 없앨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사죄할 테니 가지 마. 응?”

그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빌고 있는데도 무정하게 가


버릴 거냐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그냥 다시 잠이나 자.”

?
내 손을 잡은 노아의 손을 대충 흔들어 털어냈다.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감긴 후에야 나도 옷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아리안은 우리에게 꽤 극진한 대우를 해 줬다. 겨우 몽마의 힘이 깃든 검이 그녀의 목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마법으로 따듯한 수프와 빵을 만들어서 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가 먹지 않겠다며 괜한
고집을 부리고 버티길래 머리를 잡고 입에 빵을 욱여넣었다.

사춘기가 늦게 왔나. 성인식도 치른 놈이 대체 왜 이래.

아리안은 우리가 식사를 하는 중에도 계속 책상 앞에 앉아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만 있었다. 눈 밑이


어두운 걸 보니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저렇게 살다가는 몸이 망가져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을 텐데.


?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자기 입으로 수십, 수백 년을 살았다고


말했는데 뭐. 그 정도 살아왔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잘 관리하겠지.

낮에도 햇빛을 받으며 몇 시간 낮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우리의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했다.

“피곤한 것 같은데 자러 갈래?”

처음 보는 사람이니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적어도 노아나 알베르트, 테오필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음. 침대가 있는 방이 몇 없는데.”

?
아리안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너는 저 아래층에서 자고, 아가씨는 내 침대에서 잘래? 나는 앞으로도 며칠 동안 안 잘 예정이라서.”

“누나가 왜 당신 침대에서 자?”

이놈 말투 싹수없는 거 봐라. 얼굴을 구기고 노아를 노려봤더니 그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쓰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아리안이 안내해 준 침대에 올라가 주섬주섬 이불 안에 들어가 누웠다. 솜으로 가득 채운 이불은


폭신하고 따듯했다.

아리안은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나를 배려해 심지가 가장 작은 초에 불을 붙였다. 초의 불빛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사각사각. 깃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편하게 누웠다.
침대에서는 좋은 꽃향기가 났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살로스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은 지는 꽤 됐다. 그 날짜를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그 단검을 얻은 날이자


테오필이 죽은 날부터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살로스가 없는 꿈속에서의 내 의식은 두루뭉술했다. 내 신체의 형체도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눈앞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어둠과 암흑이 무섭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과 암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둠과 암흑 속에 숨어 나를 공격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누군가가 무서웠다.

그러다가 곧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어차피 여긴 꿈속인데.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현실의 내가


다칠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뭘 무서워하는 거야.
?

“텔…… 라.”

그때 암흑 속에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끈적한 액체와 바닥이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밀색 머리의 남자가 암흑 속에서
걸어 나왔다.

의식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실제로도 떨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테오필은 노아와 내가 만든 칼자국을 그대로 몸에 지닌 채로 나타났다. 머리가 터지고, 몸의 내용물이


전부 쏟아진 그때의 그 모습으로.

“끄, 으…….”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동물의 고통에 찬 신음을 닮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

그는 하나 남은 눈동자로 끔찍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일었다.

도망쳐야지. 저 끔찍한 테오필과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지.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손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사이 테오필이 비틀거리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체가 썩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코를 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은 공포에 잠식됐다.

어느새 발치에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테오필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피인가?

아니, 그 피는 내 손에서 흐르고 있었다.

“아악!”
?

나는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손을 내려다보니 알베르트와 함께 있을 때처럼 손에 붉은 환영이 보였다. 아, 싫다. 또 환영이 보인다.


노아를 데려왔으니 이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아도 테오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끔찍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흐으, 아악!”

제발 좀 사라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먼저 나를 못살게 굴면


당신이면서.

“노, 아. 노아…….”

노아를 불러야 한다. 노아를 불러서, 내 옆에 둬야지만 이 짜증 나는 환영을 잠시나마 없앨 수 있었다.


?

하지만 노아는 아래층에 있었다. 아래층으로 가려면 눈을 떠야 했으나, 눈을 뜨면 손에 묻은 피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어떻게.

“스텔라!”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빽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혼란스럽던 머리가 말끔해졌고, 나를 부르던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눈가가 축축한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린 모양이었다.

“왜 우는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엄청 놀랐어.”

아리안이 놀란 얼굴로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

나를 부르는 테오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나 손에 핏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이


노아가 필요한 때였다. 지금, 당장.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낡은 나무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벌컥. 나는 곧장 노아가 머무르는 방의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아는 들어오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아직 환영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다가가야만 환영이 없어질까.

베개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아. 드디어 핏자국이 사라졌다.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
왜 노아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 환영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를 통해 환영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버린 탓일까. 결국 환영을 없애는 건 노아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환영을 처음으로 없애 준 게 노아, 그였기 때문에 내 사고가 맹목적으로 그를 믿고 있기는 했다.

이건 뭐. 사람을 죽인 죄인들끼리 서로를 두둔해 주며 범죄를 부정해 주는 꼴이었다.

구원이라. 이전의 나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노아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었고. 이것은 구원의 탈을 쓴 회피였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때때로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하고
사실 내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어느 한쪽에 생각이 고정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달빛이라도 정통으로 받고 있으면 눈이 부신지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이 미운 얼굴을 어떻게 하면 좋나. 나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을 엄지로 세게 문질렀다. 그런데도 그는


깊게 잠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어렸을 때의 노아와 지독히도 닮았다. 차라리 자라면서 얼굴이 달라졌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나는 쭈그려 앉아 노아의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더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해지니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졸음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암흑이


몰려왔다.

-50-

아리안은 둥근 마법구로 스텔라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잠든 것을 보고는 그제야 마법구의 작동을
해제시켰다.

스텔라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밤을 새우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스텔라가
일정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사람의 소리를 들으니 꽤 기분이 좋았다.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옆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스텔라였다. 아름다운 꿈을 꾸듯 평온하게 자던 그녀는 갑자기 몸을 비틀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아리안은 잠시 스텔라를 쳐다볼 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흔히들 꾸는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평범한
악몽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스텔라?”

아리안은 의문이 담긴 어조로 스텔라를 불렀다. 응답을 원해서 불렀다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부른 것에 가까웠다.

스텔라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호흡 또한 불규칙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그녀는


위태로워 보였다.

아리안은 곧장 그녀에게 뛰어갔다. 의식도 없이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걱정됨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스텔라.”

그녀는 스텔라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을
뿐이었다.

“스텔라, 스텔라.”

몇 번이고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크게 소리를 질러도 그녀는 지독한 악몽에서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했다.

“아악!”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스텔라를 내려다보고만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빽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다행이다. 아리안은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스텔라의 시선은 이상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흐으, 아악!”
스텔라가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굳게 감았다. 그렇게 하고도 스텔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노, 아. 노아…….”

노아? 그게 누구였더라. 아리안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곧 그게 스텔라와 함께 있던 남자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텔라는 눈을 뜨고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반복했다.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스텔라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스텔라를 깨워야


했다.

아리안은 스텔라의 손을 잡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악몽 속에 파묻힌 스텔라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스텔라.”

어둡기만 하던 스텔라의 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악몽에서 막 깨어나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왜 우는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엄청 놀랐어.”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
그리고 표정에는 어떠한 대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주먹을 세게 쥐더니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리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애타게 부르던 노아라는 남자를 찾아 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책장에서
마법구를 꺼내 조심히 책상에 올려놓았다.

마법구 위에 손을 얹고 집중하자 곧 마법구 중앙에 스텔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베개 위에 흘러내린


노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길래 아리안은 마법구가 고장 났다고 생각하고 마법구를 몇 대 때렸다. 하지만 곧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그저 스텔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텔라는 한참 동안 노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곧 얼굴이 평온해지는 걸


보니 잠든 듯했다.

도대체 스텔라와 노아는 무슨 관계인 걸까. 끔찍한 악몽을 꾸고 고통스러워하던 스텔라가, 어떻게 노아를
보자마자 평온한 얼굴로 잠든 걸까. 큰 의문이었다.

하여튼 그건 그렇다 쳐도, 결론은 스텔라를 저대로 불편하게 자게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

아리안은 마법구의 작동을 해제시킨 후 다시 책상에 대충 처박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니


깨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스텔라를 다시 푹신한 침대에 눕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봤을 때, 노아는 이미 스텔라를 자신의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후였다.

벌써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기에는 아직 늦은 밤이었다. 그렇다고 스텔라의 기척을 듣고 깼다고 하자니


그녀가 과하게 조용히 움직이던 게 생각났다.

그렇다면 애초에 잠들지 않았던 건가. 아리안은 유심히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잠든 스텔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 스텔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 아리안은 벽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쁜 놈은 아닌 건가?

생각해 보면 스텔라가 종종 노아에게 잔소리를 할 뿐이었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함께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지 않았던가.

아리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휘두르자 스텔라의 주변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스텔라는 오묘한 색의 빛 안에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디 꿈속에서는 편안하기를. 아리안은 조금 더 스텔라를 쳐다보다가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 버리고
위층으로 돌아왔다. 뭐, 스텔라는 노아라는 녀석이 잘 챙겨 주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

노아는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낮에 잠을 조금 잔 탓인지 혹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밝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낮에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스텔라가 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그 말에 감정이 담겼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떠나고 다시 그녀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를 포기했다.

처음 그는 스텔라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애증이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스텔라는 그를


보며 과거의 불쌍했던 노아를 떠올리고는 했었다.

노아 또한 그것을 알고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졸랐다. 그녀의 안에 두 가지 감정이 존재한다면, 차라리


증오를 지워 버리라고. 그렇게 애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증오가 아닌 사랑이 희미해졌다. 끝내 그녀는 노아를 미워하며 그를 떠났다.

그래도 노아는 계속 희망 속에서 스텔라를 찾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밝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대하며 그녀를 찾고 또 찾았다.

물론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희망과 꿈은 그저 상상 속의 무가치한 기대였다.

스텔라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노아를 사랑해 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일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와 줬으니까. 스텔라가 주는 사소한 물 한 잔, 빵 한 조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건조한 어조를 들을 때면 다시 기분이 바닥에 처박혔다.

계속 욕심이 났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그녀의 곁에만 머무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애원하며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다.

참, 어리석기도 했다. 자꾸 흔들리는 모습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아둔하고 멍청했다.

노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빨리 잠이 들기 위해 노력했다. 깨어 있으면 자꾸 머리가 복잡해져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계단을 타고 다급하게 노아가 있는 층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한
여자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노아는 발소리의 주인이 스텔라임을 확신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스텔라가 가쁜 숨을 쉬며 들어왔다. 노아는 살짝 눈을 떠 그것이 스텔라라는 것을 확인했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온 스텔라는 천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스텔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노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거지?

그러나 그는 곧 그 손길에 애정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애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의 노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스텔라는 노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이번에는 뺨을 세게 문질렀다. 문질렀다기보다는 꼬집는 것에


가까워 노아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스텔라는 꼬집는 것에 가깝게 그의 뺨을 문지르다가 노아가 누워 있는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노아는


그녀의 숨결을 바로 옆에서 들으며 곁눈질로 몰래 그녀를 쳐다봤다.
곧 완전히 잠들었는지 스텔라의 몸이 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침대에 눕혔다. 그때 방문 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올
사람은 마법사라는 그 이상한 여자밖에 없었다.

노아는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십,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말이 진실인지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그는 아리안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린 채 스텔라만을 응시했다. 그녀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손등에


입술을 붙여 보기도 했다. 깨어 있을 때 이런 짓을 하면 더욱 미움을 살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노아는 시선이 못 박힌 듯 스텔라를 뚫어져라 쳐다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노아는 스텔라가 그랬던 것처럼 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보기도 하고, 뺨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
마치 그녀가 유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히.

그는 완전히 스텔라의 행동을 따라 했다. 침대는 몇 없었지만 그가 잘 만한 방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노아는 굳이 침대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구부정해진 목이 더럽게 아팠다. 노아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다.

어떻게 해도 불편한 것은 똑같길래 결국 그는 바닥에 눕는 것을 택했다. 아리안이 이미 청소를 해 줬기


때문에 바닥의 상태는 양호했다.
눈을 반쯤 감자 창문 사이로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그는 별을 향해 잠깐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괜한 짓 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51-

알베르트는 마차의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실제로 유약한 종류의 광물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알베르트의
힘을 정통으로 받고는 살짝 아래로 휘어졌다.

알베르트는 아침이 된 후에야 신전에 도착했다. 그는 성기사들을 통해 스텔라가 노아를 구해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전은 알베르트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니, 사실 그에게 호의적이었다기보다는 스텔라에게 적대적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제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내내 몽마에게 시달리던 스텔라를 성기사 단장이 구한 것이라고 했으니까.

몽마와 관련이 있는 자를 신전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알베르트 또한 모두가 그녀를 배척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심한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스텔라를 찾은 즉시 공작저로 데려갔을 것을, 방심하여 다음 날로


미뤘다.

도대체 신전 놈들은 일을 어떻게 하길래! 알베르트는 분노해 창문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그가


주먹으로 마차의 창문을 깨려고 하는 것을 옆에 있던 코르넬이 겨우 막았다.

젠장. 알베르트는 낮게 욕을 읊조렸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스텔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

가장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스텔라가 노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점이었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아끼는


동생이라 이건가.

신전은 스텔라와 노아의 탈출 문제로 시끄러웠다. 사실 논란의 초점은 스텔라와 노아보다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둘을 데리고 사라진 마법사에 맞춰져 있었다.

“마법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래. 그때 놈들을 쫓아갔던 성기사들 중에 발트가 있었는데, 걔가 말한 거야.”

사제들은 알베르트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서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붉어진 주먹을
펴고 코르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 어떠한 말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올린 것이었다.


“……마법사.”

감히 자신을 두고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쳤을지 궁금했다. 도망치면 내가 찾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 알베르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코르넬은 오히려 무언가 불편한 듯 두 손을 등 뒤에 모은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 그래도 얼마 없던 마법사들이 수십 년 전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전부


죽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마법사가 스텔라와 노아를 데려갔다니. 살아남은 마법사가 여전히 있단 말인가.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탑에 대한 정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법에 특화된 아르엘 왕국 안에 세워져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은둔하며 아르엘 왕국을 뒤에서 지원해 주던 마탑은 이미 몰락했다. 마법사들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르엘 왕국은 그들이 남겨 놓은 마법으로 문명을 일구고 있었다.

그만큼 마법사들은 강한 존재였다. 그들은 악마와 같이 마법을 사용하나 악마처럼 성수로 해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가 스텔라를 데려갔다.


이번에 스텔라를 찾는다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코르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

“안녕, 아가씨.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나는 잠시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젯밤에 아리안이 나를


도와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에 노아의 침대에서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던지. 심지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아를
보고 두 배로 놀랐다.

노아를 발로 툭툭 차며 농담으로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고 말했더니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얼굴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꾹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근데, 뭐. 자기가 말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내가 물어봐야 할 필요가 있나. 나는 그의 몸을 넘어 아리안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리안은 아침부터 방긋방긋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리안의 눈 밑이 얼굴색에 비해 어두웠다. 어제도 눈 밑만 어두워 보이기는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눈 밑이 어두우신데…….”

말을 끝마치지 않고 흐렸음에도 아리안은 내 말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아, 이거? 괜찮아. 나중에 며칠 몰아서 자면 괜찮아지겠지, 뭐.”

그러다가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이거 말이야. 요즘은 거의 없어진 마녀들의 약인데, 아가씨 줄게. 자기 전에 물에 타서 마시고


자면 수면에 좋을 거야.”

“약이요?”

“응.”

수면에 좋은 약이라니, 그런 걸 왜 나한테 준단 말인가?

“저 말고 아리안…… 아니, 마법사님…… 그러니까…….”

“그냥 아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아리안이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왜인지 할머니의 이름을 찍찍 부르는 것 같아서 마음 한쪽이 불편하기는 했다. 아무리 외양이 젊다고 해도
나이가 하도 많아서 그런가.

“내가? 왜? 나는 이런 거 없어도 잘 자는데.”

“거울부터 보고 그런 말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리안과 나, 둘 중에서 수면이 더 필요한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아리안을 고를 것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에잇, 그러지 말고 받아. 밤새 만들었단 말이야.”

아, 뭐야. 희귀한 보물 같은 게 아니라 직접 만들 수 있는 거였어? 그걸 깨달은 후에야 나는 선뜻


아리안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받기만 하고 감사 인사로 끝내려니 왜인지 부족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리안. 수면 부족은 큰 병으로 이어질지도 몰라요.”

“어, 정말? 지금 일주일은 안 잔 것 같은데. 오늘은 조금이라도 자야겠네. 잠 조금 안 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참 부러웠다. 마법사들은 잠이나 건강에 대한 인식도 다른가 보다.


일반인에 비해 더 체력이 뛰어나거나 건강이 좋은 건가?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래층에서 노아가 올라왔다. 내가 올라올 때부터 깨어 있었으면서 뭐하다가 이제야


오는 건지.

들어올 때부터 노아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왔다. 아리안은 조금 들뜬 말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저 꼬맹이는 왜 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지.”

꼬맹이……. 나는 아리안이 노아를 꼬맹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수백 년을


살았다고는 해도 노아한테 꼬맹이라니. 왠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호칭인데.

그러다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하던 살로스가 떠올라서 나는 꾹 주먹을 쥐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야, 꼬맹아. 인상 쓰지 말고 와서 아침이나 먹어.”


아리안은 또다시 노아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아리안을 바라보는 노아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딱
오두막에서 살로스를 보던 그 눈빛이었다. 이러다가 살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리안에게도 깨진 유리컵
같은 걸 휘두르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탁자를 툭툭 두드리자 순식간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졌다.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속이 안
좋을 텐데,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식사는 가벼운 음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본 빵은 금방 구운 것처럼 따듯했다. 나는 그 후로도 빵을 톡톡 건드려


보다가 입에 넣었다.

어제는 연구를 하느라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던 아리안도 풀 따위를 포크로 눌러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한 채 눈앞에 놓인 샐러드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노아가


보였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불만이 저렇게 많은 거지? 심지어 아리안은 성기사들 사이에서 우리를
구해내 이곳으로 데려와 주기까지 했는데.

막막하기만 하던 상황이 이제야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풀리고 있는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짓만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아리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 대신 노아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도대체 방금 무슨…….”
놀라울 따름이었다. 노아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노아도 얼굴을 마구 찌푸린 것과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으나,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아리안이 험악한 노아의 얼굴을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노아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는


것을 반복했으나 곧 하, 하고 짜증이 담긴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기보다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나는 다시 빵으로 시선을 돌리고 달콤한 잼을 발라 입에 넣었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 골고루 퍼졌다.

아리안과 노아의 기 싸움이 분위기를 망칠 뻔했던 것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아침이었다.

***

다시 밤이 되고 노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리안은 또 밤새 연구를 할 생각인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리안이 잊지 말라는


듯 자신이 줬던 약을 가리켰다.

“수면에 좋다니까. 조금만 마시고 자 봐.”

그리고 그녀는 손수 둥근 유리컵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과하면 중독되는 성분이 들어 있거든.”

“아아, 네.”

아리안이 물에 소량의 약을 타 내밀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컵을 받아들었다. 물의 색은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이었다.

나는 컵 안에 든 액체를 한입에 마셔 버렸다. 향은 이상했지만 어린이들이 먹는 약처럼 과일 맛이 나는


덕에 꽤 쉽게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안이 나에게 이걸 준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저한테 왜 준 거예요? 아무리 봐도 저보다는 아리안한테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젯밤에……. 아니, 아니야. 그냥 푹 자라고.”


아리안이 빨리 자라는 듯이 손으로 베개를 탕탕 치자 나도 모르게 베개 위로 쓰러졌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아리안이 천천히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

아리안이 준 약의 효능은 꽤, 아니 엄청나게 뛰어났다. 오랜만에 푹, 깊게 잠을 자고 일어난 덕분에 몸이


개운했다.

아리안은 그 후로도 매일 내가 침대에 누우면 파란색의 액체를 내게 내밀었다. 어느새 며칠이 지났고,
그건 마치 일상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매번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도 아리안은 어물쩍


농담으로 대화를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약도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엑. 이게 벌써 떨어졌네. 잠시만 기다려 봐. 금방 만드니까 먹고 자.”

“저…… 금방이 어느 정도인가요?”

“한 시간 정도?”

한 시간? 벌써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데 잠을 자지 않고 한 시간을 버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루쯤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미 충분히 잘 자고 있기도 하고.”

“…….”

아리안은 한동안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며칠 동안 간간이 그녀를 관찰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고민할 때 저렇게 화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했다.

“그런가…….”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 소리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자다가 몸이 불편하면 말하고.”

아리안은 빛을 뿜어내는 마법구를 끈 뒤 불빛이 약한 촛불에 의존해 책을 펼쳤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잊고 있던 지난번의 악몽이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제야 나는 며칠 전에 꿨던 악몽을 기억해 냈다.


-52-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번에 꿨던 악몽의 내용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 악몽과 얼굴을 마주하니 잊고 있던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끔찍한 몰골의


테오필부터,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붉은 피까지 전부.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이제 와서 떠올려 보니 처음부터 며칠 전의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악몽에서 막 깨어나고


노아를 찾아갔을 때는 악몽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잊고 있었던 거지?

노아를 찾아간 이후에 깔끔하게 이 일을 잊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 끔찍한 악몽을 잊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쉽게 잊을 만한 기억이 아닌데.

며칠 전의 그때와 똑같았다. 테오필은 몸 여기저기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내게 다가왔다.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완전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금방 테오필에게 따라잡혔다.

“신께…… 서 널…… 저주…… 거야…….”

테오필은 저주의 단어들을 뱉으며 나를 향해 기어왔다. 그의 모습은 저번보다 더 끔찍해졌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끄으으. 그의 입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테오필의 손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테오필은 손가락마저도 온전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손가락을 네 개까지 세다가 포기했다.

“너, 때문에…… 내가…….”

제발 좀 사라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는 공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손이 또다시 흥건해짐을 느꼈다. 나는 굳이 그게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피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붉은 피.

손에 흐르는 피의 환영을 없앤 것은 결국 노아의 말 한마디가 아닌 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을


바꾸면 이 환상을 없앨 수 있어야 하는데, 왜 사라지지를 않지.

차라리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어난다면 테오필은 사라질 테고 나는 바로 노아에게
달려가면 되니까.

나는 아리안이 내 옆에 있다면 나를 좀 깨워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

당시 아리안은 스텔라를 침대에 눕히고도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마녀들의 약
덕분에 스텔라가 악몽을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자기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만들어 놓았던 마녀들의 약이 전부 떨어져 버렸다.

악몽의 내용이 과연 무엇일지는 잘 모르지만, 스텔라가 또다시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곧장 그녀를 깨워야
했다.

규칙적으로 스텔라를 주시하며 연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집중력을 흔드는 일이었다. 결국 아리안은 연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스텔라가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스텔라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당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스텔라에게 달려갔다.

“스텔라!”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었다. 있는 힘껏 그녀를 부르는 아리안과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스텔라.


그녀는 깨어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환각 같은 것을 보며 두려워했다.

아리안은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덜커덩!

그래서 그녀는 이곳으로 노아를 불렀다. 물론 시간이 없었으므로 아리안은 마법으로 공중에 노아를
불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그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느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리안은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노아는 그 손을 쳐내며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한테 겁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지?”

“스텔라를 깨워.”

그 말을 들은 노아의 시선이 스텔라에게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여린 뺨을 타고 식은땀이 가득


흘러내렸다.

“……누나?”

그녀는 오지 마, 싫어 따위의 말을 뱉으며 몸부림쳤다. 아리안은 다시 스텔라의 손을 잡고 의식이 없는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스텔라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나, 누나…….”

아리안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던 노아 또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스텔라를 흔들어


깨우려고 시도했다. 아리안은 노아, 그라면 스텔라를 깨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텔라가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적대적으로 굴기는 했으나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을 보면 오래 알고 지낸


듯 친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텔라는 지난번에도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노아에게 달려갔다.

노아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스텔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내색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그를


아끼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나, 지금 대체 무슨…….”

또 그 같잖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노아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환영?”

물론 아리안의 그 순간의 말조차 놓치지 않았다. 같잖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노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귀를 닫고 스텔라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윽, 아니, 아니야…… 흐…….”

스텔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흐느꼈다.

아리안은 노아의 어깨를 세게 작으며 소리쳤다. 어깨를 쥔 손아귀 힘이 강력한 탓에 노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뭘 쳐다보고만 있어? 빨리 깨우라니까?!”

“…….”

저 여자는 내가 누나를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어떻게? 누나는 이미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부른다고 해서 일어날까?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나…….”

“…….”

“스텔라, 누나…….”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성기사 단장이라는 놈을 찌른 게 그렇게 죄스러워?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누나는 나의 신이나 마찬가지니, 부디 죄책감을 갖지 말아 달라고. 누나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지게 될 테니까.

내가 간절하게 부르면 일어나 줄 거야? 누나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평생 옆에서 환영을 없애 줄게,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테오필에 의해 신전에 갇혀 있을 때도 괴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도망칠 수


있을지, 혹은 영원히 그곳에 처박혀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비슷한 경우였다. 테오필이 아무리 내 목을 졸라도 이곳은 꿈속이기 때문에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

숨통이 조여온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거지?


숨을 들이마시면 시체 썩은 내가 풍겼고 눈을 뜨면 썩어 문드러진 얼굴이 보였다. 뺨 위로는 테오필의
얼굴에서 흐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테오필은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죽으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려면 멀었나? 아리안은 아직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 그게 아니면


그녀가 나를 깨우고 있는데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눈을 감았다.

“누나?”

테오필이 갈라진 목소리로 저주가 섞인 말들을 내뱉는 와중에, 희미하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뜨고 그쪽을 바라보자 어렸을 때의 노아가 나를 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목을


조르던 테오필도 고개를 들어 노아를 바라봤다.

“넌…….”

테오필이 내 목을 조른 채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숨을 끊은 사람을 알아보는 걸까.


결국 그는 내 목에서 손을 떼어 내고 비틀거리며 노아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쓰라린 목을 부여잡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아는 여전히 나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저 바보가 도망치지 않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테오필이 나한테 그랬듯이 노아의 목을 조르고 저주를 퍼부을까? 저 어린아이한테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할까? 많아 봤자 다섯 살로밖에 안 보이는 어린 노아한테?

분명 여기는 꿈속이고, 저건 그냥 내 꿈이 만든 가짜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느새 테오필을 앞질러 노아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검은 손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지만 어떻게든 밟고 뿌리치며 뛰었다. 어린아이가 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 멍청아!”

바로 뒤에는 테오필이 있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노아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테오필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어떡하지. 무작정 뛰기는 했는데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내 목을 조르려나. 꿈에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더욱 세게 노아를 끌어안았다. 이 어린 몸뚱이가 고통스러워하며 발버둥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목을 졸리는 것이 나았다.

아리안, 제발 옆에 있으면 나 좀 깨워 줘요.

“누나.”

노아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굵고…… 음.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좀 더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다시 고개를 들자 열여덟의 노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내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사죄하면서 살라고 했잖아.”

“아니, 그렇기는 한데…….”


“저 끔찍한 것도, 손에 보이는 환영도 내가 어떻게든 없애 줄게.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면 안 돼, 응?”

그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우리를 쫓아오던 테오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테오필이 사라지자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밝아졌고 내 발목을 끌어당기던 검은 손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이 끔찍했던 꿈에서 깨어났다.

-53-

“스텔라?”

내가 깨어난 걸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아리안이었다. 그녀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게 내가 잠깐만 기다렸다가 자라고 했잖아,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바보 같다니. 말이 거칠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그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는 무안해하며


웃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이상한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은 아리안 덕분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리안이 내 손을 세게 쥐었다.

그나저나 노아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그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

“…….”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스텔라. 다시 잠들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얼른 약을 만들어 올 테니까.”

아리안이 긴 팔다리를 소란스럽게 움직이며 책을 여러 권 꺼냈다. 그녀는 가만히 놀고만 있는 노아가


아니꼽다며 창고에서 재료를 가져오게 했다.

“……그냥 당신이 마법으로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게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니? 스텔라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도 못 해?”

“…….”
노아는 작게 욕설을 지껄이다가 아리안이 준 쪽지를 가지고 창고로 향했다.

“꼬마야, 창고는 2 층에 있어. 여기가 24 층이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야.”

뭐? 노아가 짜증스럽게 물었으나 아리안은 그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옥탑방 문을 굳게 닫고 잠가 버렸다.

일들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게 아니면 그냥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리안은 방을 누비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꺼냈다 꽂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녀가 찾는 책이 쉽사리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렇게나 책장에 처박혀 있는 책들을 보면 못 찾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 여��다. 책은 찾았고, 이제 꼬맹이만 돌아오면 되겠네.”

아리안은 책을 찾느라 지쳤다는 듯이 소파에 몸을 맡기고 쓰러졌다. 그녀의 다리가 소파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 나왔다. 소파가 작은 건지 아리안의 키가 너무 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리안은 거의 눕다시피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텔라.”

“네?”

그러던 아리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그, 있잖아. 그거.”

그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아리안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입을 우물거렸다.

“악몽…… 있잖아. 그걸 악몽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강요하는 건 아닌데 그냥 대강 무슨 일인지만 알려 주면 안 될까? 혹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고…….”

아리안은 정말 어렵게 질문을 꺼냈다. 질문하기에 어려운 내용일 뿐만 아니라, 대답하기에도 애매하고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걸 말해도 괜찮을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교황에게도 이미 말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한결 쉽게 입을


열었다.
***

뿌득.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리안이 쥐고 있던 소파의 팔걸이가 마침내 찌그러졌다.

무엇보다 저 소파, 나무로 만들어진 거 아니었나. 바깥쪽이 천으로 덮여 있기는 하지만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찌그러졌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내 시선이 계속 부서진 팔걸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괜찮아. 고칠 수 있으니까.”

소파가 걱정돼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나무도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보다, 그런 놈이 자기 입으로 직접 자기가 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신이 널 저주할 거라고 말했단


말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긴 놈이네. 지옥에 떨어져도 모자랄 놈이.”

“…….”

“근데 그놈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거 저 꼬맹이도 알고 있는 거야?”

이번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 꼬맹이도 은근 맹목적인 바보구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놈을 찔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찔러 죽이다니.”

“…….”

“뭐, 하여튼. 아가씨는 그 죄책감 때문에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이고…….”

듣다 보니 아리안이 나를 지칭하는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텔라, 너, 아가씨


등등 다양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작은 촛불 하나뿐인지라 아리안의 표정까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방을 가득 채운 침묵을 깬 것은 아리안이었다.

“근데 나한테 덜 말한 거 있지 않아?”


덜 말한 게 있다고? 아리안의 말은 굉장히 모호했다.

“처음 만났을 때 23 년 전 일을 되게 궁금해 했었잖아.”

“어……. 그랬었죠.”

“뭔가 너랑 관련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 아니야?”

하지만 짐작일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마법을 발동시킨 시점이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탓에, 홀로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말해도 괜찮아.”

나는 저 사람이 왜 자꾸 나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 단검이 그렇게 갖고 싶은 건가.

게다가 이건 잘못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아리안은 이미 다른 세상과 이


세상이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를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기는 조금, 조금 어색하고 민망했다. 읽던 19 금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리안의 눈빛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신뢰로 가득 차 있던 탓에, 나는 입을 열고


말았다. 19 금 소설이라는 이야기는 빼고 말이다.

……그나저나 부담스러우니 이렇게 너무 신뢰로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아리안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완전히 나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지 향이.”

순간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녀를 쳐다봤으나 아리안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죄책감을 갖는 거야?”

그리고 아리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노아가 종종 내게 묻던 말과 비슷했다. 왜 죄책감을 갖느냐고.

물론 그사이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노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나를 두둔해 주기 위해 그


질문을 하곤 했다.
“결국 마지막에 숨을 끊은 건 저 꼬맹이였다며. 아니, 설령 네가 죽였다고 해도 그런 놈을 죽인 게
그렇게 죄스러워?”

“…….”

“뭘 착각하고 있구나. 죄를 지은 건 아가씨가 아니라 그놈인데.”

하지만 아무리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말을 들어도 꿈에는 테오필이 나왔으며 그를 만나고 나면 손에


환영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이미 죄책감은 머릿속에 박혀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 스텔라, 축제에 나가자.”

“네.”

“내일 해가 지면 바로 가는 거야.”

“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가 뒤늦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것도 보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야.”


“아니, 그…….”

“꼬맹이한테도 말하고 올게.”

아리안은 허공으로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말하고 왔어. 지금 9 층에서 올라오고 있더라. 안 그런 척하면서 자기도 데리고 올라가라는 듯이


쳐다봤는데 그냥 왔어.”

곧이어 노아가 탑의 방문을 걷어차는 탑을 울렸다. 아리안은 시끄럽게 울리는 파열음이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참 재밌는 애야. 너를 너무 좋아하는 것만 빼면.”

그 재밌는 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노아도 소파 팔걸이 꼴이 날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몇 분이 지나자 노아가 입술을 깨물며 옥탑방에 올라왔고, 아리안은 잘했다며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를 거칠게 빼앗았다. 물론 노아는 아리안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닿자마자
벌레가 앉은 것처럼 거칠게 뿌리쳤다.

아리안은 노아의 거친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잠들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스텔라.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노아는 흐느적거리며 내 옆쪽에 와서 앉았다. 안 힘든 척하고 있지만 올라오느라 지쳐서 서 있을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은 노아의 정수리가 보일 정도였다.

노아는 최대한 숨을 삼키며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두지, 뭐.

나는 잠시 노아의 둥근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두웠다. 새까만 밤하늘에 은색 실로 수를 놓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색


속에서 별들이 눈에 띄게 반짝였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노아도 어느새 내 무릎에 기댄 채로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절반 정도 감았을 때, 아리안이 한 손에는 하얀


컵을 들고 나타나 잔소리를 퍼부었다.

“잠시만 기다리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몰래 눈을 감고 있네.”

아차. 나는 얼른 눈을 뜨며 컵을 건네받았다.
아리안은 내가 잔에 든 액체를 끝까지 다 마시는지 지켜보다가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얜 뭐야.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

아리안이 다소 과격하게 노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가 그 상태로 몸을 굳힌 채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보기에는 마법으로 그를 방으로 보낼지 혹은 뒷덜미를 잡고 방까지 끌고 갈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곧 아리안은 드디어 결정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녀는 노아의 뒷덜미를 잡은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얇은 벽 너머로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직접 침대에 던져 주고 왔나 보다.

생각해 보면 노아도 나와 같은 시간에 침대에 올라갔으니 지금쯤이면 분명 한참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인데.


이곳에 있던 걸 보니 중간에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봤던 노아를 떠올렸다가 곧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왜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마치 노아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도움을 받는 건


현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리안은 나 대신 침대를 정리해 주고는 누우라고 손짓했다. 나는 얼른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리안이 준 약 때문인지, 혹은 시간이 늦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다만 완전히


잠들기 전에 아리안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꿈 한번 꾸지 않은 편안한 시간이었다.

-54-

다음날 해가 지자마자 아리안은 바쁘게 움직였다.

“축제는 열두 시까지야. 빨리 안 가면 상인들이 전부 들어갈 거라고.”

“열두 시까지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세 시간이면 부족한 거지!”

아리안이 흥분하며 꽥 소리를 질렀다. 노아는 그녀의 예민한 행동에 질린다는 듯이 혀를 쯧, 하고 찼다.
물론 아리안은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너 방금 혀 찼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아는 자연스럽게 아리안의 말을 무시했다. 아리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어우, 나이도 어린 게 진짜…….”

그렇지만 둘 다 제 나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리안도, 그들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이


싸우는 것처럼 유치하게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노아는 아리안을 노려보다가 주름진 옷을 가볍게 두드려 주름을 폈다. 감옥에서부터 입고 있던 흰색의
셔츠가 노아의 머리카락 색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색이라 그런지 특히 더 눈에 띄었다.

참고로 저 셔츠는 며칠 전 아리안이 마법으로 세탁해 준 것이었다. 물론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리안 덕분에 청결한 상태의 옷을 계속해서 입을 수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안이 말하는 축제가 열리는 마을은 아리안의 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마을로 바로 가면 될 것을, 아리안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마법을 쓰면 괜한 이목을 끈다고 답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 아리안은 이상한 데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는 하는 것 같다.

마을에 도착하자 아리안이 신나서 나를 끌고 앞장섰고, 노아는 질질 끌려가는 내 옷소매를 슬그머니 잡고


따라왔다.

아리안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본 마을은 여러 가지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소리,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의
단어를 속삭이는 소리.

“제니. 네 버터처럼 부드러운 눈동자에 파묻히고 싶어.”

“오, 피터. 동방의 비단같이 매끈한 네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니?”

연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했다. 계속 듣고 있자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귀를 막으며 듣기를 포기했다.

그 탓에 노아가 잡고 있던 옷소매가 툭, 노아와 떨어졌다. 노아는 다시 내 소매를 잡으려고 했으나 내가


그 손으로 귀를 막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원래 이쪽 세상 연인들은 저런 게 일상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도 곧 지워지고 말았다.


아리안이 얼굴을 구긴 채 연인들을 바라보며 헛구역질하는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쯧. 저게 도대체 뭔지. 미사여구 앞에 아무 물건이나 가져다 붙이면 칭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리안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나를 잡아끌었다. 걸어가다가 오른손이


허전해서 뒤를 돌아봤더니, 노아가 몇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꼬맹아, 빨리 와. 애도 아니고 무슨 걸음이 그렇게 느려.”

하여간 귀찮게 하네. 아리안은 툴툴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고 노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평소와 같은 아리안의 시비에도 노아는 울컥하여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다시 슬그머니 내 소매 끝을


잡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노아를 보며 혀를 차다가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노릇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각종 채소와 고기가 함께 꽂혀 있는 꼬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기고 홀린 듯이 꼬치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덕분에 길거리
한복판에 노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길의 중앙에 서 있기에는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 같아 한쪽으로 비켰다. 골목과 가깝고


나무상자들이 쌓여 있어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나는 상자 위의 먼지를 살짝 털어낸 후 그 위에 앉았다. 노아는 상자 위에 앉는 대신 그냥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건물들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광장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한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꽃을 파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꽃들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에게 꽃을 팔고 있었다. 장미, 튤립, 백합……


종류가 꽤 다양했다.

나는 멍하니 아이를 보다가 다시 꼬치 가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리안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가게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결국 아리안을 찾으러 가게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노릇한 냄새가 나는 가게 안에 들어가자
위층에서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치를 사 온다고 하지 않았나? 꼬치를 파는 곳은 1 층인데.

의문을 갖고 2 층에 올라가 본 결과,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아 카드를 섞고 있는 아리안을 볼 수 있었다.


건너편에는 아저씨들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돈이 쌓여 있었다.

“아, 미안 스텔라. 한 판만 하려고 했는데 못 일어서겠어.”

그렇게 신나게 카드를 섞으면서 미안하다고 해 봤자 하나도 안 와닿는데요…….

그보다 카드 게임이라니. 아리안이 질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패가 나와도 마법으로


감쪽같이 바꿔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아리안은 이 아저씨들과 게임을 해야 하니 나가서 놀고 오라며 우리 손에 돈을 가득 안겨 줬다. 이 돈도


마법으로 만든 가짜가 아닐까 싶어 눈앞에 대고 흔들어 봤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들의 안녕을 빌어 준 뒤 노아를 챙겨 꼬치


가게 겸 도박장을 빠져나왔다.

상황이 생각보다 난감했다. 애초에 아리안의 손에 이끌려 나왔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건 노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꼬치 가게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 중 먼저 움직인 것은 노아였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 건가?

그러나 노아는 곧 멈춰 섰다. 그는 아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꽃을 파는 아이에게서 꽃을 한 송이


구매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붉은 장미였다.

노아와 꽃이라니! 어렸을 때의 그라면 몰라도 지금의 노아와 꽃은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미 정원을 만들 정도로 장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취향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여튼 우리는 그것을 시작으로 축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가게마다 달린 형형색색의 등불 때문에 눈이
부셨다.
마땅히 돈을 쓸 만한 가게가 보이지 않아 계속 걷기만 했더니 어느새 우리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서는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로 손뼉을 치며, 발을 통통 튀기기도 하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수도원에 있을 때도 마을의 축제 때마다 마을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수도원까지 들리고는


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애니카와 함께 통통 뛰며 춤을 췄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니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장 뛰어 들어가 함께 섞여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를 힐끗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노아가 나와 광장의 사람들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고 싶어?”

물어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다만 저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함께 춤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했고, 그건 곧 노아를 데리고 춤을 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꽤 진중하게 고민했다. 춤을 추지 않고 지루하게 구경만 하는 것과 노아를 데리고 춤을 추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을지.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노아가 먼저 내 손을 잡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광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나는 중앙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통을 발을 튀기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리고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뻣뻣하게 다리를 움직이더니 어색하게 내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몸이 뻣뻣한지, 통나무에 팔다리가 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꽤 새로웠다.
노아가 못 하는 것도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튀길 때마다 경쾌한 리듬이 되어 광장을 울렸다.


그에 비해 노아와 나는 신전에서 도망쳤을 때 신고 있던 신발 그대로였다.

이제 보니 내가 입고 있던 옷도 눈에 띄는 흰색이었다. 신전에서 준 옷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의 옷들


사이에서 특히 눈에 띄었다. 어쩐지 걸어 다닐 때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더라.

오랜만에 추는 춤은 정말로 즐거웠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 때마다 치마가 꽃처럼 피어나는 것도,
부드럽게 불어오는 시원한 밤의 바람도, 귀를 채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웃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당연한 상황이 왜인지 너무나도 반가워서, 그래서 그냥
웃어 버렸다.

소리 내서 크게, 더 크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도 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지금 얼마나


즐거운지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원하는 대로 팔을 뻗으며 몸을 움직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음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음악의 흥겨움이 가장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힘껏 웃으며 눈을 떴다.

-55-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노아의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상대의 손을 놓고 홀로 춤을 추는 차례였다. 나는 노아의 손을 놓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발로 바닥을 두드리듯이 춤췄다.

오늘처럼 기분이 좋은 날에는 노아에게도 웃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계속 바닥만 쳐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노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춤추는 것도 잊고 바보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 보였다.

평소였다면 얘가 갑자기 왜 이러냐며 혀를 찼겠지만 오늘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의 바보 같은


얼굴마저도 지금은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며 힘차게 웃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단순히 즐거워서


나온 웃음이었다.
나는 멍하게 서 있는 노아의 팔에 팔짱을 한 바퀴 돌았다. 그 후로는 계속 춤이 삐그덕거렸다. 노아가
춤을 제대로 추지 않고 멍하게 서 있기만 한 탓이었다.

***

아리안은 매섭게 판을 살피다 말고 뻥 뚫린 테라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광장을 바라봤다.

높게 세워진 건물들 때문에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는 없었다. 아리안은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그때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아리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이, 당신 차례인데 빨리 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아, 아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아리안의 옆에는 돈뿐만 아니라 값비싼 패물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또다시 남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리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 옆에 놓인 돈을 손으로
쓸어 가져왔다.
남자는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아리안은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고는 다시 광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지만 스텔라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춤을 추던 곡이 끝나고 새로운 곡이 시작됐다. 아까 아리안을 기다릴 때 들었던 노래와 비슷한 빠른


박자의 경쾌한 춤곡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니 노래가 바뀔 때마다 한 칸씩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 규칙인 것 같았다.


옆에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한 칸 이동하기 위해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손을 잡으려던 것도 잊고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옆을 돌아보니 노아가 멍한 얼굴로 내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인상을 쓴 채 그를 쳐다보자


그는 놀란 듯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마을의 친숙한 분위기에 휩쓸려 노아의 그 이기적인 성격까지 잠시 잊어버렸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리가


없는데.

나는 노아가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으니까, 그리고 쭉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내게 손을 뻗었던 남자는 무슨 일이냐고 묻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며 고개를
까딱였다.

노아를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규칙을 지키지도 않고 둘이서만 춤을 추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민폐였다.

그때, 내 손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일단 남자의 손을 잡고 한 칸 옆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아르엘 왕국 특유의 어조로 반갑다고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급하게 노아를 돌아봤다. 노아는 다른 여자와 춤을 추면서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아는 시선을 돌렸다. 딱딱하게 춤을 추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붉은색의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나도 눈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손뼉을
치고 춤을 췄다.

음악은 계속 끝나고 다시 시작됐다. 여러 사람을 거쳐 다시 노아를 만났음에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여기서 입을 연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지? 네가 내 손을 놔 준 게 의외였다? 아니면 왜 내 손을 놔
줬냐고 물어보나?

무슨 말을 하든 좋은 선택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날 때쯤


노아를 데리고 광장에서 빠져나왔다.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춤을 췄던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아리안을 기다리던 그 장소로 돌아갔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밤의 거리는 아직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노아를 뒤에 두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노아도 내 속도에 맞춰 걸어오고 있는 건지 뒤에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인파 사이에 묻혀 있어도 노아의 걸음 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 소리가 멈췄다. 나는 걸음 소리가 멈추고도 몇 걸음 더 걸어가다가 노아를 따라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노아는 발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왜인지 복잡해 보였다.

다시 걸음을 옮길 생각이 없어 보이길래 나는 노아의 손을 잡고 끌고 갈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으려던 그의 왼손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아까 노아가 샀던 장미가
들어 있었다.
“…….”

얇은 꽃잎들이 노아의 손안에서 마구 구겨져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진 부분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노아의 시선은 손안의 장미를 향하고 있었다.

왜 표정이 복잡한가 했더니 장미가 찢어져서 그랬었나 보다. 내가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나 보다. 장미가
찢어져서 침울할 정도로 노아가 세심한 성격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 노아의 손 위에 올려져 있던 장미가 하늘로 날아갔다. 아직 높게 날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가 빨리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노아는 가만히 서서 장미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바람이 멎자 장미는 천천히 가게에 걸려 있는 등불 위에 앉았다. 장미는 노아의 손안에서 거칠게


찢어졌음에도 등불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아는 잠시 장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장미 다시 사러 갈래?”
꽃을 팔던 아이는 여전히 거리를 누비며 꽃을 팔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아직도 활짝 핀
장미가 많았다.

“……아니.”

계속 장미를 소중하게 손안에 쥐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모순적인 대답이었다. 아니면 그새 장미에 질려


버린 걸까.

이런 걸 보고 변덕스럽다고 하는구나. 나는 아직도 노아의 생각이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어려웠다.

“스텔라! 이거 봐!”

거리에 아리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 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나를 한 번씩 힐끗거리고 지나갔다. 윽, 이게 뭐야.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내 이름을


광고할 셈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흥분해서 나를 부르나 했더니, 도박장 겸 꼬치 가게에서 딴 돈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아리안의 옆에 쌓여 있던 돈은 금화 두세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열 배가 넘는 양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아리안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도박이 아리안의 주요 돈벌이는
아닐까.

아리안은 한 손에는 금화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꼬치를 들고 후다닥 1 층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준
꼬치는 다 식어 차가웠다.

“잘 놀다가 왔어?”

신나게 통통 뛰며 춤을 추던 순간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안도 금화를 자랑하며 자신도 잘 놀다가 왔다고 말했다.

“근데 쟤는 또 왜 저래?”

아리안이 말하는 ‘쟤’는 노아였다. 노아는 아까의 복잡한 표정 그대로였다.

“글쎄요. 샀던 장미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이후로 계속 저러고 있더라고요.”

“진짜? 쟤가? 꼬맹아, 너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구나.”

확실히 노아는 그런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미가 날아가서 마음이 아픈 노아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했다. 장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찢어 버린다면 모를까.
아리안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근데 쟤랑 장미라니 진짜 안 어울린다.”

나는 아리안과 동감이라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 보면 아리안은 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특히 노아에 관해서는 이보다 더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광장에서 재밌었어?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던데.”

“거리가 저렇게 먼데 그게 들린다고요?”

“당연하지. 내 이름도 걸 수 있어.”

“제가 아리안 이름 가져서 뭐하게요.”

그건 그렇긴 하지. 아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자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제 그만 가자. 내일도 갈 데가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왜인지 광장에서 함께 춤을 춘 갈색 머리의


남자와 겹쳐 보여 나는 선뜻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리안이 내민 손을 잡은 후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듯이 노아가 내 손을
잡을 차례였다.

노아는 멀뚱히 내 손을 쳐다봤다. 그리고 느릿하게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노아의 둔하고 느린 행동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리안이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하는 것이 보였다.

노아가 내 손을 잡자마자 우리는 아리안의 탑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도 한참이 걸릴 그 긴 거리를 굳이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새삼 아리안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물론 노아와 아리안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으며, 아리안은 침대가 아니라 그녀의 딱딱한 나무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노아는 끝까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계속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잠시 노아가 열고 나간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장미가 날아갔을 때? 아니, 그보다 이전부터 저런 표정이었다.


그럼 나랑 춤을 출 때부터인가.
흠. 나는 침대 위에 앉아 노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노아의 감정
변화를 읽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특히 지금의 노아는 더더욱 그랬다.

그나저나 아리안이 약을 가져다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축제에서 여기저기 쏘다녔던 탓에 피곤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아리안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감기는 눈 사이로 놀라 달려오는 아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56-

망했다.

잠들고 나서 주변이 온통 어둠이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니 잠들기 전에 차를 마시지 않았다.

오늘 마을에 다녀온 것도 테오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잊을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아리안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를 마시지 않고 자다니. 이러다가 또 꿈속에서 테오필을 보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과연 오늘은 테오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저번보다
더 끔찍해졌을까? 이번에는 얼마나 고통받아야 노아가 나타나고 테오필이 사라질까.

마침내 어둠 속에서 끈적한 무언가 붙었다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온몸에 피를 둘러쓴 테오필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몰골이었다. 아마 테오필의 저 모습은 평생 봐도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역시나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기어 나와 내 발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저번과 똑같은 전개라서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놀라는 것과 두려운 것은 별개였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검은 손들은 두렵지 않지만 테오필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은 두려웠다.

지루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테오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똑같은 전개가 지겹다는 생각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테오필과의 거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저주를 퍼부을까. 이번에 그는 어떻게 나에게


고통을 줄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 떠들썩했다. 야시장에서 본 것과 같이, 사람들은 노래를


연주하고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검은 손들을 걷어차고
달렸다. 왜인지 조금 전과 달리 검은 손들은 쉽게 나가떨어졌다.

내 뒤에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그냥 빛을 바라보며 힘껏 달리고 또 달렸다.


테오필이 나를 따라잡을 수 없도록.

조금 여유가 생겨 뒤를 돌아봤을 때, 테오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빙긋 웃었다. 노아와 춤을 추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유도 모른 채 웃음이


나왔다.

일어나면 아리안에게 이야기해 줘야겠다. 이제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악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럼 친절한 아리안은 좋은 일이라며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해 줄 것이다. 나는 밝은 빛 아래에서


아리안의 반응을 기대하며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일어나자마자 들은 말은 바보라는 소리였다.

“예……?”
“내가 잠깐 내려간 사이에 잠들어 버리면 어떡해! 괜찮아? 또 악몽 꾼 거지? 지금 가서 쟤 데려올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리안이 더 호들갑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고 있는 노아를


끌고 올 기세였다.

“아니, 아니요. 아리안. 일단 진정하고…….”

아리안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허둥지둥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그녀는 소란스럽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저 악몽 안 꿨어요.”

꿈속에서도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깨어나면 아리안에게 내가 꿈속에서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는지 말해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막상 꿈속에서 겪은 일을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테오필과 검은 손들을 피해 빛을 향해 달려가니 악몽이 사라졌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내가


생각해도 입으로 뱉기에는 오글거리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조금 돌려서 말했다. 축제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빙 돌려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기쁨은 온전히 전달이 되었나 보다. 아리안은 호들갑을
떨었던 모습은 완전히 지워 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봐. 역시 내 말대로 놀러 가기를 잘했지?”

나는 한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훨씬 가벼운 듯했다.

축제에서의 기억을 계속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테오필이 나오는 악몽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리안은 나를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 곳으로 데려갔다. 물론 노아도 포함해서.

축제에 갈 때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던 노아도 이제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얘가 하루 사이에 철이


들었나.

그나저나 날이 더운 여름이니 바다를 즐기는 사람이 아주 적어도 한두 명쯤 있을 법도 한데 해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리안은 아르엘 왕국의 남쪽에 있는 이 해변은 파도가 험해 사람은 물론 배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라고
말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를 데려온 건가……. 어쩐지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들이 날카롭게 깎여 있더라.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안을 쳐다보자 그녀는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분명 잠깐 내 시선을 피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무 생각도 없이 데려왔던 건 아니겠지.

바다에 도착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한곳에 모여 바다를 구경하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바위 사이에 희귀한 광물이 보인다며 갑자기 곡괭이로 바위를 캐기 시작했다. 근데 아리안이라면
괜한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마법으로 간단하게 광물만 꺼내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흥분해서 바위를 캐는 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파도가 험하다고는 하나 바다 자체는 정말로 예뻤다. 이런 걸 보고 에메랄드빛 바다라고 하는 거구나.

노아는 해변에 있던 난파선들을 구경하다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광물을 채굴하는 데 성공한


아리안은 곧장 난파선으로 향했다. 안에서 무언가 발견했는지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는 악몽 안 꿨다며?”

“어떻게 알았어?”
“저 이상한 여자가 말해 주던데.”

새삼 노아와 아리안이 서로를 격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남달랐다. 꼬맹이, 그리고 이상한 여자.

“그럼 이제 손에 환영도 안 보이겠네.”

나는 곧 노아의 목소리가 어딘가 서운한 것처럼 들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계속 환영을 보기를 바라는 거야?”

노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은 곧 긍정을 뜻했다.

“……아니.”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노아는 내 질문을 부정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야?”

내 머릿속에서 노아는 동화에나 나오는 피노키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속은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의 의심은 타당했다.
노아에게도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리안은 마법사니까
아리안한테 좀 부탁해 볼까.

노아가 내 질문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없어도 되겠네.”

노아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쥐어짜듯 말을 뱉었다.

나는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게 싫다는


건가.

“그래서 아쉬워?”

“…….”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면 정말 용서 못 할 호래자식이었다. 나는 그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만약 그렇다고 답하면 몇 대 때려 줄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인연을 끊는 건 덤으로. 내가 끊고 싶다고 해서 끊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끊고


싶다고 마음대로 끊을 수 있으면 이미 끊었겠지.
“미안 누나.”

“…….”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에이, 설마.

“정말 아닌데, 진짜로 아닌데……. 누나가 환영 같은 건 더 이상 안 보면서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기는


하는데.”

“…….”

“이제 내가 누나한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아니라고 대답을 못 하겠어…….”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노아가 한 말이 순간 내 머리를 세게 때리는 것만 같았다.

“행복?”

노아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니 굉장히 어색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내 행복을
빌어 주는 말이라니.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장미만큼 노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니,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행복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다음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갑작스럽게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끝난다. 이런 형식은 노아가 나를 오두막에
가두고 손에 철쇄를 채웠을 때부터 계속 똑같았다. 그때부터, 쭉.

침묵이 깨진 것은 난파선을 뒤지던 아리안이 돌아왔을 때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우리 둘을 보며


아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희. 싸웠어?”

아리안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나침반, 돌돌 말린


파피루스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띄던 것은 붉은빛을 띠는 돌과 푸른빛을 띠는 돌이었다. 둘 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였는데, 끝에는 작을 고리와 줄이 연결되어 목걸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화려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거 마음에 들면 가져도 돼.”

아리안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붉은빛의 돌과 푸른빛의 돌이라니.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푸른빛을 띠는 돌을 노아에게 건넸다.

돌은 막 건네받은 그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돌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건 네 거.”

나는 노아가 들고 있는 푸른빛의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 거.”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들고 있는 붉은빛의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복잡한 이유는 없었다. 붉은빛의 돌은 내 눈동자와 같은 색이길래 내가 가진 것이었고 푸른빛의 돌은


노아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길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돌에 달린 줄을 목에 걸어 봤으나 돌치고는 가벼웠다.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벗어 손 위에 올렸다. 난파선에서 나온 목걸이이니 시체가


사용하던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안은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그건 상자에서 찾은 거야. 깨끗해.”

그렇다면야. 나는 목걸이가 깨끗하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다시 목에 줄을 걸었다.

목걸이를 차고 다시 노아를 쳐다보니, 그는 목에 걸라는 목걸이는 걸지도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그렇게 목걸이가 마음에 드나. 내가 구해온 목걸이는 아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한다. 저런 표정은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파도가 거칠었고, 노아와 진부하고 익숙하며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꽤 괜찮은 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노아 같은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은 걸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노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거칠지만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57-

나는 바다에서 돌아온 후 아리안에게 노트를 한 권 받아 자세하게 일기를 썼다.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아르엘 왕국 남쪽 바다의 모습은 어땠는지. 암초와 난파선이 많았던 것부터,
아리안에게 예쁜 돌을 받은 것까지. 그리고 그중 하나를 노아에게 줬더니 그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리안이 주는 약을 먹지 않고 자 보겠다고 주장했다. 아리안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고 끝내 약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테오필이 또 꿈속에 나와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또다시 테오필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빛을 향해 달려가니 나를 쫓아오던 것들이 사라졌다.


심지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쉽게 도망쳤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리안은 노아와 나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탑에 다시 돌아올 때마다 자세하게 일기를 썼다.

그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테오필의 힘은 약해졌다. 아홉 번째로 일기를 쓴 날에는 아예 테오필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흐응. 나는 일기장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웃었다. 뒤늦게 내가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확실히 거울을 보니 신전에 있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다. 스스로가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였다.

아리안을 만난 것에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처음 봤을 때 그녀를 의심했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아리안의 탑에서 머무른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계속 이렇게 신세만 져도 되는 건지…….


이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하자 그녀는 오래 머물러도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몽마의 힘이 깃든 단검…… 너무 기니 줄여서 몽마의 단검이라고 부르자. 몽마의 단검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단순한 호의뿐인 것 같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냥 그것뿐인 호의.

침대까지 양보해 줄 정도의 호의라니. 정말 순수한 의도의 호의도 존재할 수 있구나.

신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아리안은 내가 몽마의 단검을 아무


데나 둬도 절대로 손대는 법이 없었다.

방심시키다가 갑자기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의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이 너무나도 편안한


분위기에 이미 녹아드는 걸 넘어 편안함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가능하다면 평생 이곳에서 아리안과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전의 일을 떠올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노아의 오두막에서도 나는 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노아가 허락만 해 준다면 평생 그곳에서 노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편하게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널브러져 있지는 말자.

열다섯 번째 일기를 쓰던 날,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테오필이 나를 쫓아오기는커녕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몸이 개운했다.

아리안도 나를 보더니 다행이라며 함께 기뻐해 줬다. 긴장감을 완전히 풀면 안 되기는 하지만 아리안을
의심하기에 그녀는 너무 친절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리안은 먼 곳에 볼일이 있다며 탑을 떠났다. 돌아오는 날을 말해 주지 않은 채로.

집이나 마찬가지인 탑을 맡기고 떠나는 것을 보면 아리안에게 별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리안은 그냥 친절한 바보였다, 바보.

그게 아니면 친절한 아리안을 마음 한편에서 계속 의심하고 있는 내가 바보이거나.

하여튼 아리안이 먼 곳으로 떠나자 탑에는 노아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됐다. 우리는 아리안이 알려 준 14 층
창고에서 음식을 꺼내 식사를 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음식이 계속 나오나 했더니, 그 출처가 바로 여기였나 보다. 커다란 창고가
전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안은 떠나기 전 모든 방에 들어가도 좋으나 17 층에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다.


그걸 굳이 당부씩이나. 그냥 아리안이 문을 잠그고 가면 우리는 당연히 못 들어갈 텐데.
뭐, 하여튼. 하루, 이틀. 그렇게 계속 지루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아리안이 있을 때는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리안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으니까.

탑에 막 왔을 때는 왜인지 노아와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는데 이제 전부 익숙해졌다.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지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노아는 가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아니, 사실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노아는 평소와 같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기 애매한, 짜증 나는 질문을.

“누나는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그렇겠지.”

또 저 질문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나는 대충 대답했다. 애초에 그를 필요로 했던 건 그가 빌어먹을


환영을 없애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환영을 없앨 필요가 없고 환영을 보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노아를 데리고 다녀야 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이쯤 되면 노아도 내 말을 대충 던지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질문을 멈추곤 했다. 물론 저 농담에는


진담도 조금 섞여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노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필요가 없어지면, 나를 두고 떠날 거야?”

질문이 한층 무거워진 건 같아서 이번에는 대답하기를 잠깐 망설였다.

노아의 질문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그의 표정이 한순간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잠시 말을 잃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 질문은 여전히 너무 진부했다. 그는 종종 나에게 자신을 두고 떠날 것이냐고 묻기를 반복했다.

평소에는 잘 참았는데 계속 쌓이고 쌓이던 것들이 폭발하려고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지겨웠다. 도대체
노아는 왜 나를 필요로 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기에?
“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노아의 보모도 아니고, 왜 그가 징징거리는 것까지 다 들어 주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 좀 해. 더 이상 나한테 징징거리지 마.”

나를 향하던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벌써 열여덟 살이라고. 이제 네 어리광 들어 주는 것도 지겨워.”

지금까지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삼켰던 말들을 전부 토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구원, 구원. 그놈의 구원. 나는 신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말하는 나도 며칠 전까지는 손에 환영이 보인다는 이유로 노아를 억지로 옆에 두려고 했었다. 그에
노아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 반응하기는 했었지만.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지금 이곳에 아리안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이 난리를 피웠다가는 아리안 얼굴
보기가 창피할 뻔했다.

공간에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아였다.

“누나가 내 세상이잖아.”

한껏 노아를 밀어붙이고 숨이 차서 바닥을 보고 숨을 몰아쉬다가 노아가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다시 그를


쳐다봤다.

“십수 년 전에 오두막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죽어가던 나를 구한 것도 누나고,


바실한테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나를 구한 것도 누나야.”

“…….”

“그런데 내가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모든 게 누나인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축축해 보였다. 노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본다.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을 처음 본다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또 그 짜증 나는 연기인지


진심인지 구별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의 얼굴을 잘 살펴봐도 잘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노아가 쓰는 방에 함께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축축한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리안이 세탁해 준 향기 좋은 이불 안에 들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당겼다.

이건 네가 잘못한 거잖아. 자꾸 짜증 나는 질문을 하니까, 자꾸 구원 따위를 강요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거잖아. 내가 항상 너에게 하던 모진 말인데 오늘은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항상 내뱉던 모진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늦은 밤이었던 탓에 잠들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이 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악몽을 꿨다. 물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다시 붉은 환영이 보였다.

이제 환영이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꼴이 상당히 거슬렸다.

마치 나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죄가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테오필인데. 어쨌든


당연한 말이지만 환영은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다만 환영을 없애려면 노아에게 가야 하고, 나는 방금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노아에게 징징거린다며,


지겹다며 막말을 하고 갔었다.
끄응. 나는 한참 노아의 방문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히, 아주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깨지 않게 조심히 들어갔다가 환영이 없어지면 바로 나와야지.

설마 아직도 깨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달빛을 받으며 아주 잘 자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노아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노아에게 왔으니 환영만 없애고 가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환영을 없앨 수 있는지 정확한 기준을 모르겠다.

지금까지 쭉 악몽에 시달리다가 노아가 나타나면 환영이 사라지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그냥 노아를 보면
환영이 사라지는 줄 알고 있었는데.

노아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홀로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깜짝이야. 나는 입만 뻐끔 벌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눈을 뜬 노아의 눈동자가 곧바로 나를


향해서 더 놀랐다.

역시 막말을 하고 도망쳐서 그런지 얼굴 보기가 어색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자 잠이 다 깨지 않아 피곤한 동태처럼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58-

“환영 때문이야?”

짧은 한마디였음에도 그 안에 무슨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를 괴롭히던 노아를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환영이 사라졌다. 붉게 물들었던 손바닥은 이제 새하얀
색을 되찾았다.

이제 괴롭고 미쳐 버릴 만큼 환영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활에 지장이 가며 거슬린다는 것은


분명했다.

꿈속의 테오필에게서는 이제 스스로 도망칠 수 있는데 손에 묻은 핏자국이라는 환영은 스스로 없앨 수


없다니.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노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노아가 머무는 방은 커다란 창문이 있어
밤마다 달빛이 쏟아졌다.

노아가 몸을 꼿꼿이 세우자 방안으로 쏟아지던 달빛이 그의 등 뒤를 비췄다. 그의 표정은,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노아는 의미 없는 질문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허투루 쓸데없는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구석에서 작은 의자를 꺼내 방 한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노아와 얼마나 떨어진 거리지? 세 번 정도 다리를 크게 벌려 걸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이 늦은 밤에 촛불 하나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애초에 이 방에는 초가 없기는 했다. 아리안이


노아에게도 어두운 밤에 쓰라고 초를 몇 개 줬지만 그는 받지 않고 거절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이 방에서 대화할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이 방에 초를 가져다 둘 걸


그랬다. 방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미약한 달빛밖에 없었다.

커다란 창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정말 어두웠고, 달빛은 노아의 등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조금씩 얼굴을 움직일 때만 간간이 흰자위가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도 어두워서 나는 그가 입을 벌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누나랑 장미꽃을 겹쳐 보고 있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장미꽃이라고? 사람도 아닌, 고작 꽃을 나랑 겹쳐 보고
있었다고?

장미꽃, 장미꽃이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수도원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꽃이 떠올랐다.

그 꽃 역시 장미꽃이었다. 피처럼 붉은 탐스러운 색의 장미꽃.

그때의 노아가 몇 살이더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오래전이었다는 사실만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너는 나를 아이의 시점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 그 이상으로 보고 있었던 걸까.

정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장미꽃들이 왜인지 광적으로 느껴졌다. 그 의미를 모를 때에는 예쁘게만
느껴졌었는데.

“그렇구나.”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자 노아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뭐야, 왜 웃는 건데. 이게 뭐가 웃긴 거야?


“내 딴에는 생각을 많이 해 본다고 해 봤어. 아직 충분한 것 같지는 않지만.”

노아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답답해져서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본론이나 말해.”

다시 말하지만, 어두운 환경 탓에 나에게는 노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안 그럴게. 욕심 안 낼게.”

“뭐? 그게 뭔 소리야?”

“쓸데없는 간섭, 안 할게. 누나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누나가 원치 않으면 따라가지도 상관하지도 않을게.


누나가 원한다면 이곳을 떠날 거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났다는 것까지는 좀 과장이고. 몸을 크게 뒤트는 바람에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일단 진정하자.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앉았다.


“네 거짓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

“여기를 떠나서, 암흑가로 돌아가면 될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네 세상이라며.”

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쪽으로 고개만 고정했다. 마치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내가 지금 떠나라고 하면 정말 떠나는 건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를 지치게 만들어 놓고는 이렇게 쉽게?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노아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억울해서, 그리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었구나, 하고
화가 나서.

“……아리안이 올 때까지는 이곳에서 기다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위층으로 돌아갔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설마 노아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손을 저어 그 목소리를 없애 버리고 문을 세게 닫았다.

***

노아는 지금까지 스텔라가 장미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보고 장미꽃을 연상했던 이유는 붉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가 루비와 같은 보석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에서 붉은색을 가진 가장 아름다운 물체는 장미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의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었다. 그녀가 한 곳에 박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장미꽃을 연상한 것이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장미꽃. 한 곳에 박혀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장미꽃.


그것이 노아가 바라는 스텔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가슴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을 밖으로 뱉어냈다. 그동안의 그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은 것처럼 무감각했고 덤덤했다. 아리안을 만난 후로 조금 변하긴 했지만.
아리안이 자리를 비운 그날, 스텔라는 숨도 쉬지 않고 노아를 몰아붙였다.

징징거리지 마.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그리고 나도 네 신이 아니야. 네 어리광을 들어 주는 건 지겨워.


구원, 구원. 그놈의 구원.

왜인지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스텔라가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서 나오는
눈물인가?

그게 아니었다.

다행히 스텔라의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건 피했지만,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빠르게 뛰어서 노아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했다.

전부터 스텔라는 쭉 그에게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러니 구원 따위를 바라지 말라고 말해 왔었다. 그가
듣지 않았을 뿐.

평소였다면 이번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축제에서 밝게 웃으며 춤추던


스텔라를 봐 버린 후였다.

맞아. 누나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광장에서 스텔라를 바라보며 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제야 스텔라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노아는 지금까지 쭉 그녀를 그만의 신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자신은 망가지더라도 스텔라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힘든 일이 닥치면 망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신전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완전히 너덜너덜 망가진 상태였다.

스텔라,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노아의 신이기 때문에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선의로 쓰러져 죽어가던 어린아이를 구해 준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지는 수십 년이었고 깨달음은 한순간이었다.

늦게도 알았다. 십수 년간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생각만 하고 살았던 건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망쳐 버린 건지.

얼마나 많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되뇌었던가. 어리석어서,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범위 안에서의 말일
뿐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찾으려고 하지 말걸. 차라리 그녀를 애타게 찾던 알베르트를 방해할걸. 만약 그랬다면
스텔라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해지지 않았을까.

사실 그녀는 장미꽃이 아니라 들꽃이었다. 오래전 그들이 수도원에서 지낼 때, 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노란색 꽃. 바람이 불면 하늘을 날던 그 들꽃.

아니, 노아가 아는 스텔라라면 아예 자신을 꽃에 비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들어왔다. 그녀가 늦은 밤에 노아를 찾아올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환영. 왜 환영을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자신뿐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전에서부터 그녀는 환영을 없애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스텔라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노아가 눈을 뜨자 그녀는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마주 보며 앉았다. 그녀에게 하려고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등으로 달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를 장미꽃과 겹쳐 보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스텔라는 입술을 살짝 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노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이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똑같아서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힐끗 스텔라의 얼굴을


훔쳐보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노아는 다시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나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누나가 원치 않으면 따라가지도 상관하지도 않을게. 누나가 원한다면 이곳을


떠날 거고. 여기를 떠나서, 암흑가로 돌아가면 될까?

끝내 그녀는 노아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스텔라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을 그런 말. 그는 더 이상


억지스러운 기대를 하지 않았다.

스텔라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사실 암흑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알베르트가 이미 암흑가를 없애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설사 암흑가가 멀쩡하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갔다가 범죄자들한테 돌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노아는 작게 실소했다. 아마 스테판이 가장 커다란
돌을 던질 것이다.

결국 또 스텔라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59-

“어이, 할아범. 집에 없어?”

아리안은 작은 오두막의 문을 쿵쿵, 하고 두드렸다. 문은 아리안의 키보다도 훨씬 작아, 그 높이가


그녀의 어깨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문을 왜 이렇게 작게 만들어서는…….”

그녀는 문을 노려보며 혀를 차다가 다시 문을 세게 두드렸다.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문을 부숴 버릴 것처럼 계속 두드렸다.

“할아범!”

“나간다, 나가!”

집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쿵쿵 바닥을 밟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백발을 짧게 자른 노인이 서 있었다. 아리안은 그를 내려다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라, 할아범. 못 본 사이에 더 늙은 것 같은데.”

“네놈이 이상하게 늙지 않는 것뿐이겠지!”

“오랜만에 보는데 왜 보자마자 성질이야.”

노인이 아리안의 발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으나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그 공격을 피했다.

“좀 들어갈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어딜 들어와!”

“르비아! 벨라프가 또 깽판을……!”

아리안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멈췄다.

그 틈을 타 노인은 지팡이로 신나게 아리안을 두들겨 팼다.

“아, 아! 나이를 먹더니 성격만 더 괴팍해져서는!”


“그러게 누가 남의 부인 이름을 찍찍 부르래?!”

르비아. 그것은 수년 전에 죽은 노인의 아내가 가지고 있던 이름이었다.

노인은 한참 아리안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지팡이를 내렸다. 물론 아리안은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멀쩡하게 노인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아리안이 노인을 향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자 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리안을 째려봤다.

“할아범.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

“할아범?”

“할아범은 무슨 할아범이야, 나보다 나이도 많은 게!”

“아, 그래그래 알겠어. 벨라프. 이제 됐지?”

이제 됐냐는 물음에도 노인, 아니 벨라프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닫고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리안을


노려봤다.

“어떻게 부르든 불쾌한 건 마찬가지로군.”


“알겠어 할아범.”

아리안이 옆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벨라프는 느릿느릿 걸어 흔들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서 눈을 감고 바닥을 한 번 발로 찼다.

흔들의자가 앞뒤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들여보내 놓고 혼자 감상에 빠져 있는 건 대체 뭐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걸 보고 놀라기는 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내가 그렇지 뭐.”

“부러워. 르비아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뭐? 능력?”

아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어 터뜨린 실소에 더 가까웠다.

“할아범. 이건 능력이 아니라 저주야. 이것보다 더 끔찍한 저주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 중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미 수명이 다해 죽고 없었다. 그나마 오래


살아남고 있는 것은 벨라프뿐이었다.
벨라프는 아리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슬슬 죽을 때가 됐는데 왜 죽지를 않는 건지…….”

아리안은 괜히 고약한 말을 뱉었다.

“나한테 저주가 옮기라도 했나 보지. 맨날 나한테 성질만 내더니 쌤통이다.”

하지만 벨라프는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눈을 지그시 감고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할아범, 아니 벨라프. 자지만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시끄러워.”

“르비아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신기한 향이 났잖아.”

르비아의 이름이 나오자 벨라프는 눈을 번쩍 뜨며 아리안을 쳐다봤다.

“이제야 이야기를 좀 들어 줄 생각이 생겼나 보네. 근데 유감이지만 르비아를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야.”

“최근에 내가 르비아하고 비슷한 사람을 만났거든.”

“르비아하고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고?”

“으음. 최근에 처음 만난 건 아닌가? 하여튼.”

이제 벨라프는 아리안이 서 있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상태였다.

“르비아보다 향이 훨씬 강하기는 한데, 하여튼 향이 난다는 건 똑같아.”

“지금까지 고생 좀 했겠군그래.”

“했지. 엄청 많이.”

아리안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콧등을 찌푸렸다. 집에 들어온 후로 쭉 서 있던 그녀는


마침내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 앉을 만한 곳이 자신의 침대라는 것을 깨달은 벨라프는 화를 내며 작은 나무 의자를 그녀에게 던졌다.

“나이도 많이 먹었으면서 힘도 좋네.”


의자가 너무 낮잖아. 아리안은 좁은 의자 위에 겨우 커다란 몸을 구겨 앉으며 불평했다.

“네가 르비아의 향을 없앨 때 썼던 그 이상한 마법 있잖아. 그거 좀 알려 줘.”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다만…….”

“않다만?”

“시전자의 몸에 무리가 갈 텐데.”

“고작 마법 좀 쓴다고 내가 죽기라도 하겠어?”

“죽지는 않겠지. 대신…….”

벨라프에게서 말이 없었다. 웃음으로 가득 차 있던 아리안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고, 허공에서


아리안과 벨라프의 시선이 부딪혔다.

“나처럼 되겠지.”

본래 벨라프는 아리안과 같은 마법사였다. 강하고, 영리하며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마법사.

벨라프가 마법을 잃은 것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르비아를 만난 이후였다.


마법사들은 사람을 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감각이 더 민감한 건지,
마법사들만의 고유한 능력인 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르비아에게서는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는 향이 났다. 그녀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향 때문에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처음 마탑의 마법사들이 다른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르비아가 그들의 눈에 띈


탓이었다. 마법사들은 끝까지 르비아를 추궁해 결국 그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아냈다.

그들이 사는 곳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법사들은 세계를 서로 연결하는


마법에 대해 미친 듯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세상이라는 말은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에게 퍽 신기한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벨라프는 다른 마법사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고 르비아를 위한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향을 없애기 위해.

그 과정을 전부 옆에서 지켜봤던 아리안은 이렇게 생각했다.

꼴값 떨고 있네. 사랑이 뭐라고.

벨라프는 마침내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을 발견했고, 곧바로 향을 없앴다. 그리고 태어나기를 마법사로


태어나 평생 마법이 존재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그날 르비아를 구한 대가로 마법을 잃었다.

벨라프는 르비아를 자유롭게 만들어 줬다며 기뻐하면서도 마법을 잃었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머저리.”

마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만나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가 마법을 잃었다는 사실은 아리안에게도
절망적이었다.

그때 아리안은 위로 대신 모진 말을 뱉었고, 벨라프는 다음날 마탑을 떠났다.

아리안이 벨라프와 르비아를 다시 만난 것은 수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은 깊은 숲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아리안?”

르비아가 벨라프보다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르비아를 다시 만났을 때, 아리안은 벨라프가 새로운 여자를
만난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만큼 오랜만에 만난 르비아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저렇게 밝은 사람이었나. 르비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때면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리안은
달라진 르비아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르비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리안이 벨라프보다 서럽게 울었을 정도이니, 그만큼 아리안의 르비아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스텔라의 그 향만 없앨 수 있다면 스텔라도 르비아처럼 밝아질 거고, 눈꼬리를 접으면서 웃을 수 있을


거고, 그리고 또…… 하여튼 더 행복해질 수 있겠지.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마법을 사용하면서 산 건 고작 이십 년이었어. 그런데도 한순간에 마법이 사라지니 아직까지도


어색하다고. 그런데 너는 어떻지?”

“그건…….”

“난 네가 정확히 몇 년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백, 혹은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어.”

“음. 맞아. 그건 나도 모르겠어. 500 살부터는 세지도 않았거든.”

“그런데 그런 네가 마법 없이 살 수 있겠나? 수백, 수천 년을 함께한 마법을?”

물론 힘겨울 것이다. 힘겹다뿐이겠는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고 불편할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스텔라의 향을 없애 주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건 내 속죄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기는, 말 그대로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그러는 넌 시간이 지날수록 무뚝뚝해지는 것 같아.”

둘은 의미 없는 말싸움을 나눴다. 벨라프도 말을 험하게 하기는 했지만 산속에서의 적적한 생활 중에


말동무가 찾아와 꽤 기쁜 듯이 보였다.

벨라프는 오래전 연구했던 마법에 대해 적어 놓은 종이를 찾아 집을 뒤졌다. 그의 작은 오두막은 아리안의


어지러운 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긴 건데?”

“아마 붉은색 책 사이에 끼워져 있을 거다. 이쪽 어디에 뒀던 것 같은데…….”

그때 아리안이 딱, 하는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벨라프가
뒤지던 책장을 훑고 지나갔다.

파묻혀 있던 수많은 책 중 붉은색 표지를 가진 책이 빠져 나와 아리안의 손 위에 떨어졌다. 벨라프가 찾던


바로 그 책이었다.

벨라프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리안의 손 위에 떨어진 책을 응시했다.


“……마법이 편하긴 편하군.”

“부럽지 할아범?”

“어차피 너도 곧 잃을 마법. 지금 신나게 즐기는 게 좋을 거다.”

“아직 안 잃었으면 됐지 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벨라프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인상을 쓴 채로 한 장 한 장 책을 넘겼다. 책의 내용이 전부


벨라프의 글씨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쓴 책이 분명했다.

“여기 있군.”

그는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꺼내 아리안에게 건넸다. 가장자리가 누런 것을 보니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도대체 몇 년 전이지. 벨라프가 스무 살일 때였으니, 60 년도 더 지난 때였나. 아리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종이를 받았다.

“허?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그럼 그런 복잡한 마법을 사용하는 데 마법을 사용할 네 몸뚱이와 주문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생각보다 필요한 재료가 많았다. 뭐, 정령의 눈물? 이건 지금까지 살면서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건데.

아리안이 종이에 적힌 재료를 읽어 내리며 툴툴거리자 벨라프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깨나 하겠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벨라프는 아리안을 집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재료 목록을 읽어 보는 사이에 집에서


내쫓겼다.

-60-

“늙더니 성질만 괴팍해져서는.”

“뭐?! 빨리 안 가?!”

“예, 예. 이제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갈 겁니다.”

아리안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두막에서 몇 걸음 멀어졌다. 그녀는 벨라프에게서 받은 종이를 다시


한번 보고는 대충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나는 이렇게 해야 안 잃어버리는 거뿐이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어차피 이미 나한테 준 거잖아.”

아리안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능글맞게 웃었다. 그에 비해 벨라프는 답답해 죽을 맛이라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아리안은 소리 내 깔깔 웃었다.

“안녕 할아…… 아니 벨라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었어.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자고.”

“그래. 그때쯤이면 네놈이 이미 마법을 잃은 후겠군.”

“이 할아범이 끝까지…….”

아리안은 벨라프를 노려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재미있기는 했다. 르비아도 같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리안은 잠시 텅 비어 있는 벨라프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이제 진짜로 갈 거야. 건강하게 지내.”

“괜한 걱정하지 마라. 네놈하고 어울려 지냈던 탓인지 죽고 싶어도 장수하고 있으니까. 정말 저주가 옮은
모양이로군.”

아리안은 벨라프에게서 받은 종이에 적힌 첫 번째 재료를 생각하며 머릿속에 이동할 위치를 떠올렸다.


머릿속이 정리됐을 때,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아리안은 모습을 감췄다. 벨라프는 아리안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

아리안이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그녀가 걱정됐다.

걱정하는 대상이 아리안인 만큼, 무슨 큰일을 당했을 거라는 걱정만큼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돌아오지 않으니 큰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고 훌쩍 떠나 버리다니. 말이라도 제대로 해 줬다면 걱정이 덜 됐을까.


……그리고 아리안이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조언을 들어 보려고 했는데.

달빛이 노아의 등을 환하게 비추던 그날. 그날 노아는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탑을 떠나 암흑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나 노아에게는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노아의 그 말이 그의 진심임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게 바로 내가 아리안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이유였다. 나도 내 생각을 잘 모르겠어서.

그날 이후 우리는 마주치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아리안의 방에서, 노아는 그의 방에서,


이렇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생활했다.

식사 시간도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음식 창고에 음식을 가지러 갈 때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사실 지금 나는 매우 지루하다.

아리안이 있을 때는 온 탑이 떠들썩해서 심심할 새가 없었고 그녀가 없을 때에는 노아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서 심심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에는 금빛 물감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과 키가 작은 소녀의 그림이었다.

저게 저런 그림이었구나. 지금까지는 천장을 쳐다볼 일이 없어서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천장을 구경하는 일마저 질려 버리자 나는 다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뭔가 할 만한 게 없을까.

그러다가 시야에 아리안이 연구할 때 사용하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심심함을 달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 책들은 아리안이 연구를 하며 온갖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 놓은 책들이었다. 내가 함부로 만지고


펼쳐 볼 수는 없었다.

그때 아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탑 어딘가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말했었다.

문제는 그 도서관이 몇 층에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여간 이놈의 짧은 기억력이란.

그래서 나는 직접 한 층, 한 층 탑을 뒤지며 도서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은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낮이었지만 탑 내부는 창문이 거의 없어 어두웠다. 나는 길을 밝힐 수 있을


만한 램프를 들고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탑은 총 24 층이었다. 그중 2 층은 아리안이 약을 만들 때 쓰는 재료가, 그리고 14 층은 음식들이 쌓여
있는 창고였다. 23 층은 노아의 방이 있는 층이었다.

한 층, 한 층 탑을 내려가면서 느낀 건데, 탑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

어떤 층에는 이상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어떤 층에는 사나운 마물이 갇혀 있기도 했다.

문을 열자마자 괴이하게 생긴 마물이 나를 향해 달려들길래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마물은 철창에 갇혀 있어서 나에게는 다가오지조차 못하는데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도서관은 8 층에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는 기쁨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도서관은 어려운 제목의 마법책들로만 가득했다. 심지어 어떤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언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나는 마탑의 도서관에서 뭘 기대한 거니.

그래도 나는 빼곡한 책장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아리안은 작은 도서관이라고 말했지만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책 중 유일하게 내 눈에 들어온 책은 남색 표지를 가진 책이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 사이에서


홀로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남색 표지. 어쩐지 아리안이 생각나는 책이라 홀린 듯이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의 은은한 빛은 내
손이 닿자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제목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표지의 아랫부분에 정갈한


글씨로 아리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아, 이건 책이 아니라 아리안의 일기장인 건 아닐까? 슬쩍 첫 장을 펼쳐 봤을 때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건 아리안의 일기장인 것 같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아리안의 일기장이라니. 이거 완전 역사책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나는 일기장을 한


손에 들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아리안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일기장을
펼쳐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양심의 가책도 잠시.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남이 읽기를 원치 않았으면 은밀한 곳에 숨겨 놓지 않았을까? 도서관에 꽂아 뒀다는 건 남이 읽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고…….

결국 나는 과한 자기 합리화와 함께 뻔뻔하게 일기장의 첫 장을 넘겼다.


과연 사람을 놀리는 것과 마법 연구를 좋아하는 아리안답게 첫 일기는 함께 마법 연구를 하다가 실패한
친구를 놀렸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고작 70 년 전의 일기였다.

70 년을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아리안이 살아온 긴 세월에 비하면 ‘고작’이 맞았다.
나는 수백 년 전의 일기를 기대했는데 70 년 전이라니.

그래도 나는 그녀의 일기를 계속 읽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서 쓰는 것이 마치 소설 속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었다.

다섯 번째 장, 여섯 번째 장. 계속 한 장씩 넘기며 일기를 읽었다. 내용은 대부분 일상 속의 소소한


것들뿐이기는 했지만 세세한 내용은 매일 달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끊겼다. 더 이상 일기가 없길래 실망스럽게 마구 일기장을 넘겼다.

그리고 열다섯 번째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새로운 일기를 발견했다. 마지막 일기로부터 8 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일기의 내용은 이러했다.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녀석이었는데. 도대체 사랑이 뭐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왜.]
벨라프? 벨라프라면 일기장 속의 아리안이 가장 자주 놀리던 상대였다. 가장 친한 사람 같았는데 그
사람이 마법을 잃은 걸까.

나는 다시 일기장을 넘겼다. 또 한동안 텅 빈 종이만이 일기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일기는 마지막 일기로부터 5 년이 흘렀을 때였다.

[르비아는 생각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거다. 그 이상한 향만


없었어도 르비아는 예전부터 행복했겠지.]

르비아? 처음 보는 이름이 나왔다. 앞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확실히 처음 나오는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그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일기장을 한 장 더 넘겼다. 중요한 인물의 이름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전 일기와 다음 일기 사이의 간격은 무려 30 년이었다. 도대체 아리안은 일기를 쓰는 거야 마는 거야?


이쯤 되면 가끔 생각날 때만 일기를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르비아를 보고 다른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던 녀석들이 결국 연구를 시작했다. 다른 세상과의 연결이라니.


위험한 연구가 될 텐데, 빨리 그만둬 버렸으면 좋겠다.]
시기를 보니 아마 이때는 다른 세상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진을 발동시키다가 아리안을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다는 그때인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이 미친놈들이 결국 웬 어린아이를 데려왔다. 결국 그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저 머저리들은 어린 생명에게 죄스럽지도 않은 건가?]

어린아이? 마법사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왔다고? 아리안이 그 일에 대해 말해 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또, 또 나만 살아남았다. 마법진이 폭발하고 저주가 흘러나와 모두가 죽었는데 또 나만 유일하게 살아


있다. 이 영원한 저주는 언제쯤 끝나는 걸까. 도대체 언제…….]

[아니, 나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놈들이 데려왔던 어린아이도 살아남았다. 놈들이 저주에 걸려 서로


싸우던 순간에도 아이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부를 이름도 없으니 이참에 이름이나 붙여 줄까. 머리카락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니까 이름은…….]

그다음부터는 일기장이 찢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찢어진 건가 싶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찢은
흔적이 보였다.
유일하게 찢어지지 않은 페이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희가 너무 밉고 원망스럽고, 짜증 나. 그런데도 미워할 수가 없어. 보고 싶어.]

보고 싶다라. 죽은 마법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까. 나는 다시 한번 그 문장을 눈으로 훑어보며 읽었다.

문장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때, 갑자기 책장들이 사람의 신음 같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61-

“무슨…….”

괴상한 마법진부터 괴이한 마물까지. 하도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 그런지 나는 덜컥 겁부터


먹었다.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들이 붉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핏빛 책들이 사람 같은 끔찍한


신음을 질렀다.

다리가 굳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책장이 내가 앉아 있던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쓰러지는 책장을 피했다. 책장은 다른 책장과 함께 먼지를 피우며 쓰러졌다.

지금 이 상황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겠다. 일단 이 미친 곳에서


도망쳐야겠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쿵. 계속해서 책장이 쓰러지며 나를 쫓아왔다. 젠장, 아리안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한 게 아니라 저 책들이 갑자기 나를 죽이려고 쫓아왔다고 하면 믿어 줄까?

아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안은 이 미친 곳에 사는 장본인이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책장을 피해 도서관 밖으로 몸을 날렸다. 넘어지는 바람에 계단에 무릎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 계단에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데, 등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책장이 전부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책들은 여전히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책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제일 중요했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오자 책이 내 목숨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꼭대기까지 올라와서


문을 잠근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책장들도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쓰러질까 봐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나저나 도서관에서 아리안의 일기장을 가져와 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가져다 놓기는 무서운데.
아리안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르겠다.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괜히 일기장을 다시 가져다 놓으려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보다는…….

커다란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쯤 나와 볼 법도 한데 노아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방에만


박혀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창고의 음식도 그대로였다. 내가 가져가는 음식을 제외하면 창고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설마 식사를 거르고 있는 건가?

지난번에 노아가 떠나겠다는 말을 한 후 우리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도 일부러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도 벌써 사흘 정도가 흘렀다. 그런데 음식이 줄어들지 않았다니.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경 쓰지 말자고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나는 결국 빵이 담긴
그릇을 들고 노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자고 있는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쳐들어갔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간 바람이 부드럽게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그곳에는 노아가 없었다. 커튼만 바람을 받고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잠깐 어딘가 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의자 위에 앉아 빵을 들고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노아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노아의 침대 위에 누워 천천히 빵을


씹어먹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노아는 방에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노아를 찾아 탑을 뒤지기


시작했다.

괴상한 마법진이 그려진 방도, 괴이한 마물이 갇혀 있는 방도, 나를 죽일 듯이 쫓아오던 책장이 있는


도서관도 다시 가 봤다.
각 방의 문을 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리안은 지금 탑에 없었다. 그리고 탑을 다
뒤져 봤지만 노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 탑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갑자기 마물이 탈출해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면 어떡하지? 마법진이 발동돼서 나를 끌어당기면 어떡하지?


책들이 이곳까지 쫓아오면 어떡하지?

노아는 어디에서 마음 편하게 쉬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맛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면 곧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달려 탑의 1 층까지 내려갔다. 무작정 문을 열고 탑에서 빠져나왔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멍청하게 그냥 뛰었다.

마탑은 인적이 드문, 아니, 주변에 사람이 아예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무리
뛰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다 보면 이전에 아리안과 노아와 함께 갔던 마을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속


뛰었다.

내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높이 떠 있던 해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지쳐서 뛰지도 못하고


천천히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걷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늘의 암흑과 빛이 오묘하게 섞였을 때쯤 나는 멀리에서 빛을 발견했다. 마을에서 축제 기간에 밝히는
빛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바스라질 듯 힘들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갈증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마을에 가면 우물이 있을 것이다. 일단 갈증부터 해결하고 노아를 찾을 생각을 하자.

시끌벅적한 마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우물이 보였다. 그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얼른 우물로 달려가 두레박으로 물을 떴다. 빨리 입을 대고 마시려는데, 옆에서 물을 기르던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쓰는 두레박에 내 입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두레박에 담긴 물을 다시 손에


담아 마셨다.

그중 절반 정도는 손바닥에 담기지 못하고 넘쳐서 바닥에 흘렀다. 옆에서 물을 기르던 여인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봤다.

와중에 나는 그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봤다. 한참을 뛰어서 냄새도 날 테고 땀도 났을


것이다. 그리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꼴이라니…….

그만 상상해 보도록 하자.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우고 두레박을 내려놓았다.


나는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앉아서 생각을 정리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마침 지난번에 아리안을 기다리며 잠시 엉덩이를 붙였던 나무 상자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위에


주저앉았다.

며칠 만에 다시 왔음에도 이 거리는 변한 것이 없었다. 저번과 똑같이 꼬치 가게 위층에서는 도박판이


열리고 있었고 길에서는 작은 소녀가 돌아다니며 꽃을 팔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많은 사람 중에 노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설마 한 명도


없으려나.

물론 이 마을에도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 상인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공짜로 정보를 줄 만큼 호구 같은 정보 상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아리안이 도박으로 떼돈을 벌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돈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노아 그 멍청이는 어디로 간 거냐고.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푹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내 무력함이 너무 원망스러워졌다. 차라리 나도 아리안처럼 힘이 있었더라면 노아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제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달이 떠올랐다. 마을은 어둠으로 가득 찼으나 곧 마을 사람들이 밝힌 불빛을


받고 밝아졌다.

해가 지자 어둠을 뚫고 붉은빛이 뻗어 나갔다. 나는 그 빛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붉은빛?

그 빛의 시작은 내가 목에 걸고 있는 붉은색 목걸이였다.

처음에는 이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이라니.

목걸이에서 나왔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다음은? 왜 갑자기 목걸이에서 빛이 나오는 거지?

어느새 나는 멍하니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빛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빛이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도 그들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빛은 사람과 건물을 뚫고 이어졌다. 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넋이 빠진 것처럼 걷다가 사람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빛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들판 위로 빛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빛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빛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 빛은 내가


마탑에서부터 걸어온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걸이의 돌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빛이 향하는 각도가 조금 변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빛은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먼 곳을 가리키며.

나는 유심히 빛을 응시했다. 빛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멀리 내다봤다.

그때 나아가던 붉은 빛에 얼핏 푸른색의 빛이 섞여서 보였다.

빛의 끝부분에서 얼핏 보인 푸른색의 빛, 그리고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와 어떠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붉은 빛.

설마. 나는 이전에 아리안과 바다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리안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며


난파선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보여 줬었다.
나는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 돌이 달린 목걸이들을 골랐었다. 그중 붉은색은 내가 갖고 푸른색은 노아에게
줬었지.

정말 그런 걸까. 정말 이 빛의 끝에 노아가 있는 걸까.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마침 주운 목걸이에 그런 놀라운 기능이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런


우연이 있겠느냐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판단할 정도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면 무작정 탑에서 뛰쳐나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다시 내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서, 그리고 붉은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너를 찾으러 가는 걸까. 이제는 악몽도 자주 꾸지 않고, 환영도 더 이상


나한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설마 그새 정이 들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새는 아니지. 정은 아주 오래전, 십수 년 전부터 들었을 테니까.

게다가 그 녀석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데 고작 며칠 동안 함께 지낸 것 가지고 모든 걸 용서하고 정이


들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나는 환영을 핑계로라도 너를 보러 가고 싶은 건 아닐까.

……아,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 나는 머리를 털어내고 생각을 비웠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의 이유는 노아를 만나고 그 후에 생각해 보는 거야.

-62-

“……음.”

콜록. 아리안은 텅 빈 탑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기침을 했다.

젠장.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더니 감기라도 걸린 건가. 그녀는 따끔거리는 목을 따듯한 손으로 천천히


주물렀다.

“스텔라?”

한 번.

“스텔라? 나 왔는데 어딨어?”


두 번.

두 번이나 스텔라를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다. 보통 두 번 정도 부르면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잠들었나?

그러나 옥탑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를 덮고 있는 이불도 걷어 봤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은빛의


먼지뿐이었다.

혼자 있기 심심해서 꼬맹이랑 같이 있는 건가?

똑똑. 아리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스텔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스텔라는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잠깐 외출한 건가? 필요한 게 있어서
마을에 갔나?

대신 아리안은 노아에게 스텔라의 행방을 물을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꼬맹아, 스텔라가 방에 없던데 어디 갔는지 혹시 아는…….”


하지만 스텔라뿐만 아니라 노아도 방에 없었다.

이게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스텔라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녀석이 그녀가 외출하는 데 따라가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정말로 마을에라도 간 모양이지.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스텔라가


돌아오기 전까지 책이라도 한 장 더 보고 있어야지.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아리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텔라가 마을에서 재미있는


동물이라도 발견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 들판을 떠도는 개들마저 집으로 돌아갈 때쯤.

아리안은 삐딱하게 앉아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밤이 깊었음에도 여전히 스텔라와 노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뭐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들 여행이라도 간 거야?

***
나는 곧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곧바로 빛을 따라 길을 나선 것을 후회했다. 밤길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험했다.

심지어 이곳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들판이었다. 언제 갑자기 들짐승을 만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걷다 보면 언젠가 강이나 호수가 한 번쯤은 나오겠지. 나는 그 생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계속


걸었다.

실제로 내 생각처럼 쭉 걷다 보니 넓은 강이 하나 나오기는 했다. 나는 강을 발견하자마자 지친 것도 잊고


얼른 달려가 물을 마셨다.

나뭇잎이 떠 있는 강의 물을 마시다가 문득 내 행동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종일 숲에 처박혀 사는


사냥꾼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자 물을 마시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들과 숲에 둘러싸여 있는 강이라 그런지 물은 맑았다. 사람들이 발을 담그거나 빨래를 하는 탓에 뿌옇게


변한 여느 마을의 강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다 좋았다. 강을 발견한 것도 좋았고 마침 발견한 강이 맑은 것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갈증이


해소된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목걸이에서 나온 빛이 강의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젠장.”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껏 강을 찾았더니 이번에는 그 강을 건너야 한다니.

생각해 보니 빛이 가리키는 길은 직선거리였다. 책 밖 세상의 내비게이션처럼 가장 가깝고 편리한 길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아리안. 갑자기 손가락만 살짝 튕기면 한 번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아리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나는 머릿속에 아리안의 얼굴을 그리며 푹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널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강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좁은 폭이 나올 수도
있고, 그곳에는 강을 건널 만한 다리가 있을 수도 있다.

달은 하늘 높이 떴다. 정처 없이 걸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는 일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대로 걷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지면 어떡하지?


이러다가 노아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어떡하지? 아니, 애초에 이 목걸이가 가리키고 있는 게 노아가
아니면 어떡하지?

나는 너무나도 무모하게 그를 찾아 나섰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완전히 노아를 걱정했기 때문인가? 아니, 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다.

마탑의 모든 것이 나를 저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붉은빛을 띠는 책들은 나를 죽이려는 듯이 쫓아왔고


용도를 모르겠는 마법진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물건을 던졌다.

“…….”

누군가 내 귀에 겁쟁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

커다란 숲이 보였다. 강의 건너편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숲의 끝자락이 나를 반겼다. 숲


너머에는 또다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그 끝에는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다. 그들을 자세히 보려면 인상을 찌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들이 백색의 갑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색의 갑주. 테오필이 항상
착용하고 있던 갑주와 같은 색이었다.

이는 곧 그들이 테오필과 같은 성기사들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신전. 저곳은 신전의 근처에 위치한 국경 지대였다.

마탑과 신전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말이야? 나는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지?

사실 마탑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는 마탑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래전부터 아리안이나 다른 마법사들이 마탑에 무슨 조처를 해 놓은 것 같았다. 하긴.


수가 많지도 않은 마법사들인데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치는 않았었겠지.

하여튼 노아의 행방을 찾더라도 국경 지대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높은 다리


위에서 빛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살폈다.

……놀랍게도 빛은 눈앞에 보이는 숲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목걸이에서 나온 빛이 푸른색 돌을 가리키고 있다면, 이 커다란 숲의 어딘가에 노아가 있다.

나는 다리의 난간을 잡고 천천히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숲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입을 벌리는 것만 같았다. 숲이 왜인지 불쾌한 기운을 뿜어냈다.

노아가 근처에 있다는 건 당연히 다행인 일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국경 지대에서 처음으로 테오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처럼 온몸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리며 생각을 털어냈다. 테오필은 이미 죽었어. 테오필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긴장한 몸을 풀기 위해 다리를 몇 번 두드리고 숲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한눈팔지 않고 빛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간간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탐스러워 보이는 열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식사를 한 때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구나. 노아를 찾는 데만 집중하느라 배고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허기가 찾아왔다. 이제는 붉은빛보다 나무에
매달린 과일에 더 신경이 쏠렸다.

얼핏 보기에는 사과처럼 생긴 과일이었다. 정말로 사과인지, 혹은 독이 있는 다른 열매인지는 과일이


손에 들어온 후에 판단할 생각이었다.

팔을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과일을 향해 팔을 최대한으로 뻗었다.


마침내 손가락 끝이 과일의 표면을 건드렸다. 아, 됐다. 조금만 더…….

그리고 그 순간,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며 검은 물체가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헉, 깜짝이야. 나는 과일을 따는 것도 잊고 얼른 나무와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동물, 동물인가? 하긴 이렇게 커다란 숲에 동물이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긴 숲의 끝자락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노아를 찾기도 전에 짐승에게 물려 죽게 되는 건가?

하지만 곧이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그쪽을 쳐다봤다.

“저쪽, 저쪽으로 갔다!”

그들은 어두운 숲속을 밝히기 위해 커다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빠르게 지나간 그것을
쫓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서 사람들이 전부 지나갈 때까지 수풀 뒤에서 나오지 못했다. 곧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지나갔나……? 나는 그제야 수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숲에 노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었던 건가?

뒷모습을 보니 오래전 마을에서 가끔 봤던 용병들의 뒷모습과 비슷했다. 용병들이 이런 숲에는 무슨


일이지. 짐승이라도 잡으러 왔나.

뭐, 용병들이 숲에서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용병들에 대한 관심을 지워 버리고 다시 노아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목걸이를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용병들을 피하기 위해 숨었다가 다시 본 빛의 방향은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똑바로 앞을


가리키던 빛이 갑자기 방향을 바뀌었다. 이제 빛은 앞이 아니라 옆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빛의 방향은 지금도 순간마다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살짝 위로 기울어졌다가 왼쪽으로
심하게 꺾이기도 하고, 아래로 쏠리기도 하고…….

불안한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나. 방금 전에 사람들이 분명 이쪽으로 지나갔었지. 나는 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바라봤다.

젠장. 빌어먹게도 빛은 그들이 향한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나는 제발 용병들에게 쫓기던 그 들짐승 같은 물체가 노아가 아니었기만을
빌었다.

짜증 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고 바닥에 찍힌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갔다.

-63-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을 따라잡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걸을수록 그들의 소리는 멀어졌다.

이러다가는 놓칠 것 같은데. 차라리 뛰어야 하나? 저쪽이 하도 시끄러워서 나한테는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밟지 않도록 발아래를 주의하며 조금씩 속도를 가했다.

정신없이 뛰다가 보니 마구 방향을 바꾸는 빛이 어느 순간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박힌 불안감이 빠르게 몸집을 키웠다.

나는 발에 나뭇가지가 밟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방망이를 닮은


두꺼운 나무가 들려 있었다.

무거운 나무를 들고 달리기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헉, 헉. 숨이 차오를수록 목걸이에서 나온 빛도 점점 선명해졌다. 푸른 빛도 이제는 완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드디어 사람의 형체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나는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노아가 쫓기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용병들이 그렇게 우르르 쫓을
정도라면 비싼 보석을 훔치기라도 했으려나.

용병들이란 욕심이 많은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정말 값비싼 보석을 훔치기라도 했다면 잡혔을 때


노아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망할 새끼! 정말 끈질기기도 하군, 바퀴벌레처럼 말이야.”

드디어 용병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엉망이 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용병 중 두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노아의 머리카락을 세게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피. 분명 남자의 손에 묻어 있는 것은 피였다. 똑같은 색의 피가 노아의 머리에도 묻어 있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노아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오는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라는 것을 알아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칼에는 노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노아를 찌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번뜩이는 칼날은 노아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 안 돼. 긴 시간이 흐른 듯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이 북을 울리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나는 쭉 손에 쥐고 있던 두꺼운 나무토막을 내려다봤다. 이걸로, 저 남자를 세게 치면, 남자는 쓰러질까?

테오필을 찌르고도 한동안 악몽과 환영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잖아. 극복한 척해 놓고 이제 와서 다시


사람을 해치겠다고? 또 누군가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무토막을 꽉 쥔 손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떨어서는 안 됐다. 저 남자가 노아를 죽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기를 몇 번 반복하자 떨림은 금방 멎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두 번째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 이런 걸까. 나무토막을 세게 잡았더니 거친 나무껍질에


손바닥이 긁혀 따가웠다. 나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토막을 세게 휘둘렀다.

첫 번째 공격은 제대로 남자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남자는 욕설을 지껄이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고 했다.
나는 남자가 뒤돌아보기 전에 다시 한번 나무토막을 휘둘렀다. 이번 공격은 정확히 남자의 머리에 꽂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앞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쓰러지자 노아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남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속을 게워 내거나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나무를 휘두른 나는 테오필을 찔렀을 때보다 훨씬 무덤덤했다. 오히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보다 나무에 기대고 앉아 있는 노아가 훨씬 걱정스러웠다.

“노아.”

나는 노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 손등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노아의 머리에서


떨어진 피인지, 혹은 쓰러진 남자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톱만큼 작았던 핏자국이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손등을 전부 채울 정도로 넓어졌다. 나는 바로 눈치챘다.


아, 또 환영이구나.
핏자국에 뒤덮인 손으로 노아의 손을 세게 잡자 노아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뒤덮고
있던 핏자국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이곳까지 노아를 찾아오며 내가 굳이 그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를 욕하기도 많이 욕했다.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바보라고.

하지만 이 미운 얼굴을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왜 너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평소 내가 바라던 대로라면 당장 너에게 떠나라고 윽박을 질러야 맞는데.

내가 노아를 찾으려던 이유는 결국 이거였던 걸까? 이제 환영 따위는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그를 찾으러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

“…….”

나는 이 상황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피를 흘리다가 의식을 잃은 듯했다. 지혈은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칼로 끔찍하게 벤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통 지혈을 이렇게 하던데……. 나는 입고 있던 치마에서 그나마 깨끗한 부분을 찢어 상처를 세게 묶었다.


노아가 무의식 속에서 신음을 흘렸다.
“…….”

그러게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나와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나는 갑자기 치솟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노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물론 의식이 없어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노아를 마탑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노아를 부축하고 마탑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최대한 찢어진 배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를 부축했다.

마탑으로 돌아가면 왜 용병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추궁한 후에 몇 대, 아니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뭇잎 같은 것들에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이번에는 정말 짐승인가?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한 곳에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우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표정, 옷차림 하나하나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저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남색 제복, 그리고 가슴에 황금색 실로 바느질되어 있는 독수리 자수.

그들은 알베르트의 기사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기사들 사이사이에 용병들이 섞여 있었다. 이제야 왜 노아가 용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노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네가 아무 말 없이 마탑을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온 거지. 도망쳤던 당시 마차나 배 같은 기록이 남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아리안의 마법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행방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아리안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 성기사들이 몇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의 행방을
물어봤자 ‘갑자기 사라졌다’ 혹은 ‘마법사의 장난이다’ 따위의 두루뭉술한 말밖에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시는 몸이니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정보를 모으기가 쉬웠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빨리 나를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젠장. 저 두껍고 치밀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방법이 전혀 없으려나?


그때 낯선 얼굴들 사이로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붉은 머리칼의 기사, 모니카 공작의 충직한
사냥개.

“코르넬.”

대화를 해 본 횟수도, 이름을 불러 본 횟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꽤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코르넬은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또 공작님의 명령을 충직하게 수행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해 줄 필요까진 없잖아.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와 대화를 시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공작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해야


대화를 받아 주려나.

음. 생각해 보니 그거 꽤 좋은 것 같은데.

“우리를 보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주인을 죽일 거예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나는 역시나다. 알베르트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자 코르넬은 곧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빠르게 그 말에 대꾸했다.

“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역겨운 혀를 내 입안에 넣었을 때 콱 씹어 버리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텐데.”

실행하기만 했었다면 진작 지옥 같던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왜 진작


실행하지 않았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테오필을 찔렀을 때처럼 알베르트의 혀도 씹어서 죽여 버릴걸. 왜 그때는 알베르트를 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먹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좀 더 모든 걸 일찍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입술을 꾹 깨문 채 입을 다물고만 있던 코르넬이 입을 열었다.

“알고 보면 그분께서도 불쌍한 분이십니다.”

불쌍? 누가? 설마 내가 아는 알베르트가? 지금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아요.”

알베르트 따위 혼자 불행하고 불쌍하게 죽어가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당신의 주인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서도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모니카 공작의 충실한 사냥개라느니 뭐라느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건 소설의 표면적인 서술일 뿐이었다.

내 말을 듣고 코르넬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사냥개는 무슨. 바보 같고 순진한


코르넬.

-64-

코르넬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알베르트의 명령에


따라 나를 공작저로 데려갈지, 혹은…… 나를 그냥 놓아줄지.

나는 코르넬에 대한 소설의 서술을 한순간 의심했다. 공작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학살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들.

저렇게 멍청하고 순진한 사람이 사람을 학살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서술이 전부 실제이기
때문에 알베르트의 기사로서 일하고 있는 거겠지만.
“단장님……?”

코르넬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기사가 재촉하듯 코르넬을 불렀다. 코르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

“단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합니다.”

“단장님?”

“미안, 합니다…….”

그 말은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마차에 모셔라. 공작저로 돌아간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코르넬보다 순진하다고 해서 공작의 사냥개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우리를 붙잡았다.
“윽.”

기사들에게 강하게 붙잡힌 팔이 아팠다. 의식이 없는 노아조차 무의식 속에서도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단장님. 이 녀석은 어떻게 합니까?”

코르넬은 곧바로 노아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망설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아를 죽이기를 망설인다기보다는,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보고


있기 때문에 노아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참 이상한 일이다. 코르넬이 왜 내 눈치를 본단 말인가. 나를 알베르트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주제에.

나는 입술을 악물고 코르넬을 노려봤다. 노아를 쫓던 용병이 그를 죽이려고 하던 것도 겨우 막았다.


나무토막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내려치기까지 하면서.

내가 어떻게 저 녀석을 구했는데, 감히 노아를 죽이겠다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절대 코르넬 그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그에게 해가 되는 것도 없었다. 내 증오는


이렇게나 무력한 것이었다.
코르넬과 내 시선이 중간에서 부딪혔다. 왠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코르넬의 눈매가 순해진 것 같다고,
나는 이 상황에서 잠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함께 공작저로 데려가라.”

“예……? 아, 알겠습니다.”

기사는 당연히 코르넬이 노아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사는 곧 신속하게 노아를 포박하고 짐마차에 물건을 던지듯 태웠다.

“콜록.”

노아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나왔다. 칼에 찔린 부상자를 거세게 포박하고 아무렇게나 짐마차에 던져 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코르넬은 잠시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코르넬은 나를 포박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나무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마차에 갇혔다.
덜컹. 문이 닫히고 밖에서 문을 굳게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무에 몸을
부딪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차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차의 문을 열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단단한 문과 대비되게 의자는


고급스러운 소파처럼 폭신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했다.

기사들이 노아의 상처를 치료해 줬을까? 짐마차에라도 태운 걸 봐서는 죽이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리안은? 아리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마탑을 떠난 사이에 마탑에 돌아왔을까?

그러다가 문득 아리안이 처음에 노아와 나를 마탑에 데려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몽마의 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지금 마탑에 있다. 그것도 눈에 아주 잘 띄는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올려져 있지.

아리안은 마탑에 돌아왔을 때 바로 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연구하고 싶어했던 그 검을.


만약 아리안이 순수한 의도로 노아와 나를 거둔 것이었다면 그녀는 우리를 찾으려고 들 것이고, 몽마의
검이 그녀의 목적이었다면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리안의 성격상 그녀가 우리를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안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글쎄다. 내가 아리안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원래 어떤 사람이라느니


뭐라느니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려나.

그냥 나는 또 희망을 가질 뿐이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두 뺨을 손으로 때렸다.

괜히 이런 생각을 해서 무력해지면 안 된다. 도움만 받으면 뭐 어때.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게 없으면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물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한다고 해서 울적했던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무력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아리안을 기다렸다. 모니카 공작저로 다다르기 전에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
마차의 문이 굳게 닫혔다고 해서 밖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기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하지만 밖의 상황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문이 있기는 했으나 아주 작았다. 심지어 높은 곳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맑고 푸른 하늘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애초에 마탑을 나올 때부터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기는 했지만,
노아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겠다, 정도의 간단한 설계는 존재했다.

그런데 코르넬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알베르트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마탑은 그 위치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마탑에만 있었다면 코르넬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건 노아의 탓이 되려나.

이러다가는 끝없이 누군가를 탓하고만 있을 것 같아서 이 상황의 원인을 밝혀내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한참 거친 길 위를 달려가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곧 마차는 완전히 정차했다.

작게 소근거리는 수준이었던 대화 소리는 어느새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마 말을 타고 달리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다고 했지?”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공작저까지 남은 거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기 위해 최대한 가까이 벽에 귀를 붙였다.

그때 누군가 내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어서 가볍게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크 소리를 듣고 헛웃음을 뱉었다.

어차피 문을 열 수 있는 건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람인데 노크는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곧 문이 열렸고 나는 노크를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코르넬이었다.


그의 손에는 묽은 수프가 들려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상황에 수프를 먹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짐마차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말도 안 듣는 그 미운 녀석이 더 중요했다.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아를 만나게 해 줘요.”

“안 됩니다.”

코르넬은 단호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대답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부분이 멀쩡한지만 보겠다는 거잖아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또 거짓을 말하고 도망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또라니?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코르넬을 속여 도망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거였나. 그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그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노아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어요. 걘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요.
정신도 못 차리는 거 봤잖아요?”

수프 위로 피어오르던 증기가 점차 희미해졌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코르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코르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랬다. 어느 기사가 그에게 노아의 처분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부디 내 추측이 옳았기를 빌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노아의 상처를
살필 시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간절하게 애원했다.
“잠깐만 보내 줘요. 이렇게 애원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까지 코르넬이 보인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는 분명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불쌍하지도 않아요? 내 말을 들은 코르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저 눈빛을 보니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던 게 맞긴 맞나 보다. 그렇다면 노아를 짐마차에 함께 태운 것도 나를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이겠지.

생각해 보면 비겁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쭉 봐 왔으면서


알베르트를 저지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동정이라니.

그저 동정만 하는 것은 쉽다. 동정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결국 코르넬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마도 노아가 타고 있을 짐마차가 보였다.

바보 같고 순진한 코르넬. 나는 숲에서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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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차에서 내려 곧장 짐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숲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어느새 모이기라도 했는지,
아까보다 병력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코르넬은 빠른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아마 그는 계속 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나는 더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내 목적은 노아의 상태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참 웃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코르넬의 동정이라니. 알베르트의 명령으로 그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일까. 아마 손발을 전부 사용해도 다 셀 수 없을 것이다.

짐마차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들도 용병들도 전부 마차에서 내린 후 한데 모여 불을 피우고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노아.”

나는 노아를 부르며 짐마차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문에 달린 천 같은 것을 젖히자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노아였다.

고개를 들 기력조차 없어 보이기는 했으나 의식을 차린 상태이기는 했다. 상처가 보이는 것만큼 깊지는
않았는지 어느새 피가 멎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상태로 있으면 상처가 덧날지도……. 나는 고개를 돌려 코르넬을 바라봤다. 그는 내


시선을 맞받아치듯 즉각적으로 말했다.

“포박을 푸는 건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왠지 그런 말을 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코르넬의 말은 사실이었다. 왠지 속내가 꿰뚫린 느낌이라 기분이 영 좋지는 않았다.

“사람을 순식간에 기절시키는 이상한 향 따위를 가지고 다니는 놈입니다. 그 향에 당한 저희 측 기사들도


한둘이 아닌지라.”

그러고 보니 숲에서 내가 뒤늦게 노아를 쫓는 용병들의 뒤를 쫓아갔을 때도 이미 두 명이 쓰러진 후였지.

하여튼 코르넬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론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를 설득해 보려고 아무리 여러 말을


지껄여도 그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코르넬의 저 딱딱한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코르넬의 비겁하고 값싼 동정도 이제 슬슬 끝을 보이는 듯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코르넬을 따라 순순히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의 문은 철컹, 하고 다시 굳게 닫혔다. 코르넬은 나를 이곳에 가둔 채 어딘가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코르넬과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께 전해 드려라. 스텔라를 찾았다는 전보다.”

아직 알베르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었구나.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에서 긴 휴식을 취하려는 건 아니었는지, 곧 출발하라는 코르넬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마차가 출발하고 곧이어 길 위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정확히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아리안이 우리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대로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할 것이다.

정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구나. 그곳에서 겨우 도망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는데 결국에는 다시


그곳으로.

나는 아직도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노아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마탑에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제 발로 떠났을 뿐인데 그냥 떠나게 두면 될 것을, 나는 왜


어리석게도 노아를 따라왔을까.
하지만 노아를 찾아 길을 나서기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내 선택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도 노아를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차가 거친 흙길 위를 달리자 크고 작은 충격들이


전해졌다.

***

“이런 젠장. 여기에도 없잖아.”

아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나무를 걷어찼다. 희미하지만 나무에는 분명 스텔라의 향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주 잠깐이라도 스텔라가 이곳에 머물렀었다는 의미였다.

아리안은 스텔라가 머무른 흔적 따위를 쫓고 있다기보다는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 가리키는 방향을


하염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스텔라가 떠난 지 꽤 오래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향은 점점 희미해졌다.

급하게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면 적어도 편지 한 장 정도는 남겨 놓지 그랬어. 그래야 내가 너를 찾으러


갈 수 있었을 텐데. 아리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치아가 닿는 부분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피를
흘려보낼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가벼운 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무거운 물체에 눌린 듯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생긴 지 며칠이 지나 스텔라의 향만큼이나 희미해져 버린 웬 자국이었다. 아리안은 미간을


좁히고 가까이에서 자국을 관찰했다.

……마차. 마차의 바퀴가 굴러갈 때 생기는 자국이었다. 적당히 두꺼우며 적당히 가느다란 바퀴의 자국.

이런 울창한 숲에서 굳이 걸리적거리게 마차를 사용하는 미친놈들이 있나.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순간 행동을 멈췄다.

스텔라는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라고 말했었다.

물론 당시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미 한때 그녀와 함께했던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겠다며 머저리
같은 짓을 한 전적이 있는데, 무엇을 믿지 못하겠는가.

스텔라가 자란 수도원은 트리센 마을에 있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녀를 국경 지대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보통 제국민들은 거주지를 잘 옮기지 않는다. 처음으로 나고 자란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는 게


제국민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스텔라도 그랬어야 했다. 그녀도 어렸을 때부터 자란 트리센 마을에서 평생 살다가 그곳에서 눈을
감았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스텔라는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신전까지 왔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왜 성기사
단장에게 그런 짓을 당했으며 왜 국경 지대에서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걸까.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르비아는 어땠더라……. 스텔라와 르비아, 둘 다 그 망할 향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니 비슷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아리안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르비아도 그렇게 괴롭게 살았는데, 과연 스텔라라고 달랐을까? 과연 그녀가 만난 미친놈이 성기사


단장이라는 그놈뿐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리안은 곧바로 트리센 마을로 방향을 바꿨다. 마침 마차의 바퀴 자국도 트리센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스텔라가 자란 마을. 그리고 아마도 꽤 최근까지도 그녀가 머물렀을 마을. 그러나 아마도 의도치 않게
떠나야 했을 그 마을.

“젠장, 스텔라. 너 때문에 내가 지금 개새끼같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까, 다시 만나게 되면 이 마법을 포기해서라도 그 향을 없애 줄 테니까…….


아리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다시 만나게 되면…….

아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트리센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

***

마차는 몇 번이고 멈추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마차가 멈출 때마다 코르넬은 마차의 문을 열고 잠시 동안 나를 내보내 줬다. 나는 그때마다 노아의


상태를 살피러 짐마차로 달려갔다.

또한 마차가 멈출 때마다 코르넬은 내게 먹으라며 수프를 건넸는데, 수프는 기사들이 식재료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끓이기만 한 건지 맛은 굉장히 형편없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된 여정 속에서 도저히 허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독을 넣은 것처럼


역겨운 향의 수프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날 나는 배를 부여잡고 속을 다 비웠다. 정말 수프에 독이라도 넣은 건가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수프에 들어간 식재료들이 상하거나 더러운 상태였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맛이


문제였던 것 같다.
코르넬은 속을 비우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강물에 깨끗하게 씻은 사과를 새로이 내게
건넸다. 나는 사과 한 알로 겨우 배를 채웠다.

나는 코르넬이 음식을 가져다 줬으니 그렇다 쳐도 노아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함께
데려가라고 명령을 내렸던 코르넬마저도 노아를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코르넬이 준 수프를 대신 노아에게 먹였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서 그런지 노아는 그 역겨운
걸 잘도 받아먹었다.

숲에서 출발한 지 이틀 정도가 지나자 노아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피는 멎었으나 그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릴까 고민했으나 곧 포기했다. 이마에 올리는 조그마한 물수건 따위로
해결될 만한 열이 아니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이러다 정말로 죽는 거 아니야?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계속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마차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코르넬에게 잡혀 마차로 질질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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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은 마차의 문을 열고 얼른 들어가라는 듯이 내게 눈짓했다. 내가 짐마차를 힐끗거리며 망설이자


코르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사들을 시켜 상처를 치료하고 약이라도 먹일 테니 제발 고집 좀 그만 부리십시오. 제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코르넬이 말하는 그 목을 날리는 상대는 아마 알베르트일 것이다. 공작의 사냥개니 뭐니 칭호는 성대해도
알베르트가 코르넬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순순히 마차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쉬십시오.”

쿵.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나는 좁은 마차 안에서 겨우 스트레칭을 한 후에 의자에 풀썩


눕듯이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나는 코르넬의 저 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코르넬은 이 마차에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달리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일같이 노아의 부상이 악화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잠들었고, 그 걱정 때문에 금방 깨어났다.

게다가 아무리 의자가 넓고 푹신하다고는 해도 결국 마차는 마차였다. 침대 위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좁고 불편했다. 마차 안에서는 몇 시간을 자든 한번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뻐근했다.
차라리 나도 짐마차에 태워 달라고 코르넬에게 부탁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적어도 짐마차는 먼지가 많기는
해도 내가 타고 있는 마차보다는 훨씬 넓었으니까.

코르넬이 정말로 기사들을 시켜 노아를 치료해 준 모양인지, 그 다음번에 마차에서 내려 노아에게


데려갔을 때 그의 상태는 훨씬 호전돼 있었다.

다만 기사들이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인지 아무리 깨워도 노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은 거 맞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의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고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코르넬이 위험하다느니 뭐라느니, 그런 소리를 할 때는 와닿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기사들이


노아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됐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돼도 이상하게 곧 알베르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곧
아리안이 와서 멋지게 우리를 구해 줄 거라는 기대에 차 있는 건가?

물론 기대를 하고 있기는 했다. 지금은 나도 노아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그냥……


새삼 내가 아리안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몸을 구겨 의자 위에 누웠다. 팔다리를 다 펴기에는 마차가 좁아서 다리를 접어야만 완전히 누울 수


있었다.
그 후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침이 밝으면 노아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달이 뜨고 다시 달이 졌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드디어 마차가 부드러운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쭉 거친 길 위를 달렸었는데.

나는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를 쓰며 열리지도 않는 작은 창에 얼굴을 구겨 넣었다. 익숙한


길거리, 익숙한 숲. 그리고 익숙한 마을.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지만 절대로 돌아오고 싶지 않기도 했던 곳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까지 태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에 아리안이 와 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니까, 당연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안은 아직 우리를 찾지 못했다. 찾지 않은 건지 찾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덥지도 않은데 갑자기 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아마 알베르트를 만나야 한다는 예정된 미래 때문에


긴장해서 흐르는 식은땀일 것이다.

제발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빌었으나 곧 모니카 공작가 집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코르넬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마차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기사들이 목적지에 도착해 하나둘 말에서 내리는 중인지, 주변이
점점 시끄러워졌다.
그때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코르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착했습니다.”

코르넬이 도착했다는 말을 하는 건 출발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결국 그의 말은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개미가 되어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리안과 같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문을 여는 코르넬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이 할 일도 없나? 알베르트는 왜 허구한 날 나를 기다리고만 있는 거야? 코르넬에게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물론 나도 안다. 이 비난이 섞인 질문을 받아야 하는 건 정확히 말하자면 알베르트라는 걸. 이건 그저


화풀이일 뿐이라는 걸.
집사 대신 코르넬이 나를 안내했다.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늪지대 위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소설 내용처럼 여주랑 만나서 잘 살지, 왜 계속 나를 찾는 거야. 이제야 겨우 조금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됐는데 왜 또 나를 찾은 거냐고.

코르넬은 한참을 걸어가다 복도의 중앙쯤에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문을 두드렸다.


마차의 문을 두드릴 때보다는 조금 더 힘 있는 노크였다.

“공작 전하. 코르넬 스테인입니다.”

대답이 없었으나 코르넬은 그것이 허락의 표시라도 되는 것처럼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내게


자신을 따라서 들어오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기사들의 귀환으로 인해 떠들썩한 바깥과는 달리 방 안은 고요했다. 나는 찬찬히 고개를 돌리며


알베르트를 찾았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고 있었다.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코르넬은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갔다. 결국 나만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게 됐다.


설마 내가 알베르트가 잠든 사이 또 도망칠까 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건가. 나를 동정한다고
생각했는데 또 왜 이렇게 박하게 구는 건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방안 구조물들을 구경했다. 알베르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가만히 서 있기도 뭐했다.

나는 그때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노아를 찾을 때와 같이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노아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졌을 때 목걸이에서 다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 돌에서 빛이


나오는 조건은 다른 돌과의 거리인 것 같았다.

다행히 빛은 바로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노아가 아래층에 있다는 뜻이었다. 끔찍한 비명 따위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문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조금 안심하고 다시 방 안을 둘러봤다. 방에는 여러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노아의 오두막에 있던


그 방과 비슷했다.

쭉 진열장들을 둘러보다가 나는 어딘가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이전에 내가 도망칠 때 훔쳤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보석이었다. 보석의 윗부분에는 작게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히 비슷한 것을 넘어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특히 체인


부분의 이 흠집. 오래전 내가 보석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생긴 흠집이었다.
당시 노아는 나에게 보석의 존재를 들킨 후부터는 내 눈치를 보지 않고 보석을 들고 다녔다. 그는 손안의
보석을 깨뜨려 버리고 싶다는 것처럼 세게 쥐고 며칠 동안 오두막을 들락거렸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보석이 사라졌다. 노아는 더 이상 보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그


보석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후에 노아가 암흑가의 주인이란 걸 알았을 때에야 그가 보석을 암흑가에 두고 왔거나 암흑가의 은밀한
보석상 같은 곳에 팔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모니카 공작가를 의미하는 독수리가 새겨진 보석을 아무 보석상에나 팔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훔친 것으로 오해받았을 것이다. 내가 훔친 보석이긴 하니까 결과적으로 훔친 건 맞으려나.

그런데 이 보석이 왜 알베르트에게 돌아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알베르트가 암흑가에 쳐들어가서 다시 받아왔는지 돈을 주고 샀는지는 나랑 상관이 없다.

나는 다시 보석을 진열장에 올려놨다. 하지만 팔을 거둬들이며 소매가 보석에 부딪힌 탓에, 보석이
진열장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덜그럭, 하는 소음과 함께 보석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얼른 알베르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아, 망했다.
감겨 있던 알베르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나를 향했다.

알베르트가 나를 발견하고는 점점 눈의 크기를 키웠다.

“스텔라, 당신…….”

그는 나를 다시 만난 게 감격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는데, 나는 도저히 그의 머릿속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저런 반가운 표정을 짓는 거지. 알베르트는 억지로 끌려온 나를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연인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미친놈의 정서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5 년 동안 나를 찾아다녔을 때만큼 황폐한 몰골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신전에서 알베르트가 허무하게 나를 놓친 뒤로는 불과 몇 개월밖에 흐르지


않았으니까.

알베르트는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 걸음걸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시체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알베르트의 모습이 마치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여서.

“새장에 가둬 놓으려고 해도 자꾸만 빠져나가 버리고…….”


나는 당신의 소유물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은 이제 더 해 봤자 진부하기만 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이다. 말로 해서 들을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들었겠지.

“다리를 부러뜨려야 도망가지 않을까…….”

“…….”

일단 알베르트가 나를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분명해졌다. 세상의


어느 연인이 상대에게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하겠는가.

“다리가 부러지면 기어서라도 도망가겠죠.”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 무려 공작 앞에서 건방지게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었다.

-67-

“애들같이 의미 없는 말싸움이나 하자고 저를 끌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그럼, 제가 무슨 의도로 당신을 데려온 것 같습니까?”

그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베르트가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의 눈동자는 탐욕에 찌들어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알베르트는 두 걸음 더


다가왔다.

알베르트가 가진 그 특유의 향이 물씬 풍겼다. 바다를 닮은 시원한 향. 그 순간 그를 제외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기사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는 멀게
느껴졌다.

“…….”

바다를 닮은 향이 갑작스럽게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나는 숨을 들이켜는 것마저도 잊어버렸다. 알베르트의


향은 매혹적인 동시에 너무나도 위험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서 바로 알베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어느새 내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

“…….”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같은 자세로 동상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알베르트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알베르트에 대해 모르던 예전의 나였다면 이 화사한 미소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해사한 미소를 보며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는 사이 알베르트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마에서 알베르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옷으로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장난이 너무 짓궂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에 비해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인데.

“하여튼, 스텔라.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긴 거리를 달려오느라 피로할 테니 몸이라도 녹이십시오.


하녀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니. 알베르트의 말은 마치 내 집이 이곳 모니카 공작저라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알베르트가 천장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종을 울렸고, 즉시 코르넬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공작저에 돌아온 코르넬은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묻는 말에 곧잘


대답을 했었는데, 이제는 노아의 상태를 묻는 말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코르넬.”

나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가만히 코르넬을 불렀다. 역시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쉬십시오.”

그게 코르넬의 입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나를 어느 방 앞까지 데려다준 후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덩그러니 문 앞에 서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알베르트의 말대로 방안에는 하녀들이 몇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인사하며
나를 극진히 대우했다.

이전에 모니카 공작저에 머물렀을 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하녀들이 나를 귀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히 다뤘었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알베르트의 손님이라고 해서 그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귀한 귀족 집 아가씨 같은


게 아닌데.
시설이나 대접이 호화스러워서 부담스럽기보다는, 그냥 이곳 자체가 싫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호화스러운 저택보다 수도원의 작은 방이 나는 훨씬 좋았다.

이제 애니카는 수도원을 떠났으니까 이 마을에 없겠지.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알베르트가 내보내 줄 리도 없지만.

나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창밖을 내다봤다. 해는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푸른색과 붉은색,


그 중간의 애매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 색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푸른색 빛이 서로 섞인 것과 비슷해서,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 풍경을 지켜봤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팔을 감싸 안았다.

***

밤이 되자 착실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녀들은 뿔뿔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침내 나는 넓은 방 안에


완전히 혼자 남게 됐다.

째깍, 째깍. 시계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며 조용한 방 안을 소리로 채웠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계와 문을 번갈아 봤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할까? 그러면 알베르트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아니, 자는 척 침대에 누워 있어 봤자 알베르트를 더 자극할 뿐이다. 알베르트라면 아마 자고 있던


상대를 그대로 범하면 범했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 알베르트를 기다렸다. 알베르트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희망을 심어 주며.

그러나 내 희망을 깡그리 밟아 무시하듯 밤이 깊어 달이 높이 떠오르자 누군가 정갈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렸다. 그것으로 보아, 문을 두드린 상대는 알베르트가
분명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공작저는 어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상대는 알베르트였다. 그의 손에는 투명한 유리잔과 와인 병이 들려 있었다.

귀하신 공작님께서 하인을 시키시지 않고 손수 잔과 와인을 들고 오시다니요. 나는 속삭이듯 나지막이


빈정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알베르트에게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빈정거림에도 굴하지 않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잔에 붉은 액체가 빠르게 채워졌다. 알베르트는 싱긋 웃으며 먼저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물론 나는 와인을 단 한 모금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와인에 이상한 약이라도 탔을지 모르는 일이다.
알베르트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에 비해 알베르트는 새로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는 뻘쭘해서라도 상대한테 좀 마셔


보라고 권하지 않나. 정말 남의 눈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구나.

어느새 알베르트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새 취한 모양이었다. 혼자서만 무식하게 연거푸 잔을


기울일 때부터 알아봤다.

“취하신 것 같은데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신지.”

그래. 차라리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때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설득시켜 보자.

“새장에 가둬 놓아도, 다리를 잘라도 도망치려고 한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소중한 동생의 목숨을 인질로 잡을까.”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알베르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는 노아의 목숨을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테오필의 경우와 비슷했다. 테오필, 그 쓰레기 같은 것도
나를 협박하는 데 노아를 사용했지. 나는 결국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에게 굴복했었고.

도대체가 왜 다들 나를 협박하는 데 노아를 못 써먹어서 안달들인지. 오랜만에 테오필이 떠오른 탓에


불쾌해졌다. 나는 얼른 머리를 털어내서 테오필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정말, 이제 이런 인질극은 지겨울 정도다. 그래, 항상 똑같은 패턴이 지겹다. 하지만 아무리 지겨워도
노아에 관련된 일인 이상 쉽사리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최대한 알베르트가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을 하는 것뿐이었다.

“……노아를 가지고 협박하시는 이상 이건 제가 질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았다. 손의 온기가 정확히 가운데에 머무른다. 나는 말을 끝내고 두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알베르트에게서 말이 없길래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당신이 이 협박에 넘어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당신은 지금 그토록 아끼는 동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겁니까?”

알베르트는 아마 내가 암흑가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는…… 데요.”

노아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건 알베르트인데 당황한 것도 알베르트였다. 술에 취해 살짝 꼬인 발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평소의 또렷한 발음으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놈이 당신에게 저지른 짓을 아는데도 여전히 그가 소중합니까? 믿음에 배신을 당해 놓고서는,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용서한 적이 없는데요.”

내 말에 알베르트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알베르트가 참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아를 용서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노아가 죽기 직전까지만 죽도록 패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용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용서 타령이야.
“저를 멍청이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알겠지만, 믿었던 동생한테 발등을 찍히고도 바보처럼 허허 웃으며
넘어갈 생각은 아니에요.”

“……아니, 아니. 잠시. 그럼 도대체 왜…….”

“그리고 용서니 뭐니 그런 말이 공작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웃기네요. 마치 자기는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

“전 노아를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평생 저에 대한 죗값을 치르며 살아가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나는 강조하듯 덧붙였다.

“……제 옆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벼랑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던 알베르트의 얼굴이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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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미소가 제 고유의 표정인 듯 여유롭게 웃고만 있던 알베르트의 표정이 저렇게나 일그러지다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저놈 표정 좀 보라며 마음속으로 깔깔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놈이 강요하덥니까? 혹은 협박하덥니까,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무르라고?”

나는 찬찬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으라고 강요한 건 노아가 아니라 저예요.”

쩌적. 그때 두꺼운 와인 병이 알베르트의 손안에서 갈라졌다. 알베르트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박혀


있었으나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와인 병 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기사만큼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악력만으로 저 두꺼운 병을 깨다니.

알베르트가 병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날카로운 조각이 그의 손바닥을 길게 그었는지, 일자로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잠시 상처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이블을 손으로 쓸며 내게 다가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우리는 어느새 가까워졌다.

그는 상체를 숙여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이 말을 건넸다.


“당신이 코르넬에게 그랬다는데.”

밑도 끝도 없이 저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그 안에 숨은 뜻을 알아듣는단 말인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화법이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걸요.”

“내가 당신에게 입 맞추면, 내 혀를 깨물어서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그러니 주의하라고 코르넬이 충고해


주지 뭡니까.”

정말 스쳐 지나가듯 짧게 한 말인데 그걸 또 기억해 놓고 알베르트한테 가서 전부 밀고하다니. 나는


코르넬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멍청하고 충성심만 가득한, 아무것도 모르는 개처럼 행동할 거였으면 나한테 사소한 자비는 왜
베풀었는지.

알베르트는 먹이를 탐색하는 뱀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생은 나에게 너무나도 거슬립니다.”

“…….”

“나는 분명 코르넬에게 놈을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놈의 숨을 끊고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요즘 말을 듣지를 않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알베르트의 표정은 서늘했다. 천사 같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마치 뱀 같았다.
그를 보고 있자니 나는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코르넬이 베푼 자비를 보고 사소하다고 칭했던가. 알베르트의 말을 들어 보니 코르넬은 사실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노아를 살려 준 거였다니. 게다가 그는 기사들을 시켜 노아를 치료해


주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코르넬이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준 것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거기에 고마움을 못 느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거면 차라리 나를 도망치게 도와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그곳에서 죽었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베르트는 계속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알베르트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나에게는 이렇게도 박한 당신이, 왜 놈에게는 그렇게 너그러워지는 건지…….”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헛소리를 들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이런. 알베르트가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할 테다.

자기한테는 박하고, 노아한테는 너그럽다라.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베르트는 언제쯤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저는 노아를 용서한 적이 없다고. 제 욕심에 의해서 옆에 두는 것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제가 노아에게만 너그러운가요?”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공작님께서 아셔야 하는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공작님이 저지르신 짓들은 노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베르트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습니까.”

“…….”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놈을 곁에 두겠다라…….”


톡, 톡. 침묵 속에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나도, 그놈도 똑같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놈만 옆에 두는 이유가.”

그러던 중 순간 테이블을 두드리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쓸었다.

알베르트의 손이 뺨을 지나 목덜미를 타고 쇄골까지 내려왔다. 손길이 퍽 농밀했으나, 동시에 거칠었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알베르트는 미간을 좁히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말 진지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막상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놈과 잤습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알베르트의 그 갑작스러우며 이상한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칭하는 ‘놈’은 분명


노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고민해서 생각해낸 게 고작 그거야? 꼭


생각을 해도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을 한다.
나는 그냥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하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알베르트는 이를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놈을 변호할 리가 없지.”

“아닌데요.”

그제야 얼른 부정의 답변을 내놓았으나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알베르트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매섭게 타올랐다.

“차라리 그때…… 그래, 차리리 어렸을 때 그 두 눈을 파 버렸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뭐라는 거야? 설마 두 눈을 파 버렸어야 한다는 게,


열세 살 때의 노아를 말하는 거야?

“그게 무슨…… 어린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으시네요. 그리고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다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러게 왜


혼자 물 마시듯 와인을 입에 털어 넣어서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베르트를 노려봤다.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감정 변화 따위의 특별한 이유가 있어 얼굴이 붉어졌다기보다는, 술에


과하게 취한 탓인 듯했다.

그는 아기가 옹알이하듯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미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한 번만 쓰고 버리려는 게 전부였는데.”

“…….”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지려고 해도, 당신의 얼굴만 보면 하려던 말을 전부 잊어버리고…….”

한 번만 쓰고 버리려고 했다라. 그것도 참 그거대로 쓰레기 같은 말이었다. 정말 나를 물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정말 그의 말대로 한 번만 쓰고 버렸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목덜미 주변을 쓰다듬던 알베르트의 손이 밀가루를 반죽하듯 내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알베르트의
눈은 이미 완전히 풀려 버린 후였다.

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신전에 있을 때, 그러니까 테오필 때와 다른 게 뭐지?

또 나는 이렇게 고통받다가 테오필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알베르트를 죽이기로 마음먹나? 그렇게
내가 상처를 입혀 놓으면 노아든 누구든 와서 나 대신 그들을 끝장낼까?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테오필 대신 알베르트가 꿈에 나와서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테오필의 흔적에서 벗어났는데 또 그 끔찍한 악몽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라고?
아니, 싫다.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알베르트가 점점 나를 뒤로 밀어붙였다. 이러다가는 의자와 함께, 그리고 알베르트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의자가 휘청거리는 걸 눈치챈 알베르트가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 의자가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했다.

의자와 함께 넘어지지 않았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의자가 고정된 덕분에 뒤로 도망갈 수도 없게


됐으니.

알베르트는 내 귀에 대고 꼬인 발음으로 속삭였다. 이제 그의 몸에서는 시원한 향과 달콤한 향이 동시에


풍겼다.

“수도원에서도 당신은 수치스럽다며 엉엉 울곤 했었죠.”

“…….”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수치스럽습니까?”

알베르트가 그렇게 물었다. 수치스럽냐고.


수치스럽냐고? 나는 몇 번이나 입안에서 그 문장을 굴려 봤다. 글쎄. 이전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당신인데 왜 그 대가는 전부


내가 받아야 하는 건지.

“수치스러워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공작님 아니에요?”

알베르트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잘살고 있던 저한테 접근하셔서 제가 이 꼴이 났는데, 그 행위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공작님이죠.”

“못 본 사이에 대담해지셨군요.”

“당연하죠. 공작님의 혀를 깨물어 버릴 용기도 생겼는걸요.”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죽을 생각도 해 봤는데, 알베르트 혀를 깨문 대가로 죽는 것 정도야 뭐.

……물론 아직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살 수 있다면 살고 싶다.


알베르트에게 해를 끼치고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기는 있을까.

-69-
살아남기야 할 것이다. 알베르트가 나를 용서한다면. 알베르트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 웃기기는
했지만 하여튼.

하지만 알베르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예를 들면 코르넬이라든가. 충성에 미친


사냥개 같은 놈들. 같잖은 동정에 잠시 흔들려도 개는 결국 개다.

“어때요, 공작님. 이런 말을 듣고도 몸이 달아오르시나요? 성관계 한 번과 혀를 바꾸시겠어요?”

“……확실히, 당신은 변했습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알베르트는 어느새 맑은 눈동자로 나를 훑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술이 깬 모양이었다.

하기야 혀를 씹어 버리겠다느니 뭐라느니, 살해 협박 그 비슷한 것을 듣고도 술에 취해 정신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알베르트는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내 입안에 넣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봤다.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 라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안을 쓸어내릴 때, 문득 궁금증이 하나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알베르트의


손가락을 물어서 잘리게 만든다면.
만약 나 때문에 알베르트의 손가락이 잘린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바로 나를 죽일까. 그게 아니면 잠시
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고 그 후에 공개적으로 나를 죽일까.

그것도 아니면, 알베르트가 내 치아들을 전부 뽑아 버릴까. 다시는 그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도록.

나는 여전히 알베르트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그를 거슬러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내 어느 정도의 행동까지 용서해 줄지,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처벌의 강도는 어떠할지.

결국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베르트의 손가락을 세게 씹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뭐, 바로 죽이지는


않겠지. 며칠 후에 나를 죽인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아리안이 와 줄 테고.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좋지 않은데. 만약 아리안이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옅게 웃었다.

그리고 턱에 세게 힘을 주고 입안에 들어온 알베르트의 손가락을 씹으려던 순간이었다. 잠시 방 안에


찝찝한 정적이 흘렀다.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알베르트의 표정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알베르트가 악마처럼 웃었다. 그래, 악마. 매혹적이나 동시에 추악하고 달콤하나 동시에 끔찍했다. 그런
미소였다.
“내 손가락 하나와 놈의 목숨을 뒤바꾸겠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는 이미 내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주변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알베르트는 내 눈앞의 한 명뿐인데,


마치 여럿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굳게 다물었던 입도 천천히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노아는 내 앞길을 막는 방해물 같았다.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든 노아가 걸려 있는 이상 나는 멈춰야


했으니.

“그놈이 도대체 당신에게 뭐라고…….”

그러게. 알베르트의 말이 맞았다. 도대체 노아가 나에게 뭐라고. 도대체 수년 전 작은 오두막에서


죽어가던 어린애가 나한테 갖는 의미가 뭐라고 나는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그때 알베르트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아마 술에 취해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았다. 혀를 씹어


버리겠다는 말을 듣고 눈빛이 말끔해진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하필 넘어져도 이쪽으로 넘어질 건 뭐지. 나는 알베르트의 몸에 밀려 함께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알베르트가 내 등을 받친 덕분에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알베르트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는 기분이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물컹하고 축축한 혀가 입안에 들어왔다. 깨물어 버리려고 생각하다가도 알베르트가 협박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취해서 넘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자신의 아래에 깔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노려보는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알베르트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암흑가에서 봤던 범죄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약에 취해


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시 그는 그들을 약에 중독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심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약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만약 약에 취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알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텔라를


끌어안았다. 스텔라가 자신의 품 안에서 발버둥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미약한 움직임도 노아를 들먹이자 금방 멎어 들었다. 굳어 버린 스텔라의 몸에서 그의 몸을 타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스텔라의 몸은 따스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노아, 그놈에게 감사한 마음도, 불쾌한 마음도 들었다. 놈이 없었다면 스텔라가 지금
이곳에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감사한 마음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불쾌한 쪽이 훨씬 더 크기는 했다. 도대체 그놈이 뭐라고
스텔라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것도 놈이 저지른 짓에 대하여 전부 알고도. 정말 도대체 그놈이 뭐라고
놈의 이름을 들먹이면 스텔라가 모든 걸 내려놓지.

스텔라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피하다가 힘이 빠진 건지, 포기한 건지 곧 얌전해졌다.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스텔라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협박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입도 못 맞출 뻔했습니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아니, 잠깐. 씁쓸하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관계의 시작이 그러했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나요.”

그들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수년 전 수도원 기도실에서의 협박이었다. 협박으로 시작된 관계는 협박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알베르트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그의 말대로 씁쓸한 것뿐이었다.


스텔라가 듣는다면 기함할 소리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진심이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의 다리를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반투명한 잠옷 너머로 스텔라의 새하얀 피부가
선명하게 보였다.
알베르트는 상체를 숙여 스텔라와 몸을 겹쳤다. 서로의 배가 맞닿은 기분이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알베르트는 그저 그 온기가 좋았다.

알베르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아래를 비집고 들어갔다. 자신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물고 있는 것만
같다고, 알베르트는 생각했다.

“스텔라.”

“…….”

“대답해요, 스텔라.”

스텔라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꾹 감은 채로 입술을 세게 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터져 피가 나올 것 같은데도.

후우. 알베르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맞추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굵은 물건이 꽉 막힌 입구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와인을 마구 들이켠 탓에 시야가 명확하지 않아서
스텔라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뭐, 대충 얼굴을 찡그리고 있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스텔라와 그의 몸이 부딪힐 때마다 그녀의 몸이 앞뒤로 움직였다. 간간이 신음이 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알베르트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언가 텅 빈 것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스텔라는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마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나.

최대한 조심히 데려오라고 코르넬에게 말해 뒀던 것 같은데. 알베르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웃으며


스텔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

눈을 떴을 때 알베르트는 없었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막 깨어난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들 잠들었을 깊은 밤에 알베르트가 나를 찾아왔고, 그는 가져온 와인을 마셨고…… 아, 그래. 또 짐승


같은 행위가 이어졌었지.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희미해졌다. 아래에서는 알베르트의 물건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바닥은 딱딱했고 등은 차가웠다. 바닥에 러그라도 깔려 있었으면 좀 더 나았을 텐데…….

허리를 움직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알베르트가 문득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표정이 마치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구겨졌다.

목걸이에서는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알베르트의 눈에는 빛이 보이지 않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내 목걸이를 매만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조금의 값어치도 없을 것 같은 이 목걸이는 무슨…….”

그거야 난파선에서 주운 목걸이니까 당연하지. 오래전 알베르트가 내게 선물했던 값비싼 보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여튼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알베르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 후로 정신을 잃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함이 쌓인 탓에 잠이 든 건지, 혹은 알베르트의 지나친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지쳐
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꿈 한번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느낄 정도로 눈이 뻐근할 때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어느새 들어온 하녀가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래가 욱신거리길래 이불을 살짝 들어 보니 아래에는 여전히


알베르트의 것이 분명한 액이 남아 있었다.

뺨에 주근깨가 있는, 어쩐지 어렸을 때의 애니카를 닮은 하녀였다.

“알, 아니, 공작님은?”

“볼일이 있으셔서 외출하셨다고 들었어요.”

마침 알베르트도 저택에 없었다.

그래. 노아. 노아를 보러 가자.

-70-

“저, 그, 그, 차림으로 어디를 가시려고요……?”

“이 저택 감옥.”
내가 뻔뻔하게 대답하자 하녀가 안 된다고 기겁을 하며 나를 끌어당겼다. 감옥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래 봤자 감옥 곳곳에 기사들이 깔려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던 건지, 하녀는 잠옷 차림이던 나를 목욕시키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녀는 내 옷을 갈아입힌 후에야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냥 위험성의 문제가 아니라 잠옷 차림이었던 게 문제였던 걸까.

이전에 모니카 저택에서 머무를 때 이곳의 위치를 외워 뒀었다. 나는 기억을 천천히 더듬으며 감옥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감옥 입구에는, 코르넬이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아.”

“코르넬.”

“당신이 왜 여기까지…….”

“제가 감옥에 올 이유가 뭐가 있겠나요.”

“또 당신의 동생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그럼 내가 노아의 일이 아니면 무슨 일로 어둡고 음침한 감옥까지 찾아왔겠나.

“당신이 또 놈을 찾는 모습을 보면 전하께서 분노하실 겁니다.”

“상관없어요. 이미 외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거니까요.”

“……입이 가벼운 하녀들을 벌해야겠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많은 하녀 중에 누가 나한테 그 소식을 전해 줬는지 어떻게 찾겠다고.

“돌아가십시오.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코르넬. 기사들이 빽빽하게 지키고 있는 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안 됩니다.”

“코르넬.”

“…….”

“코르넬.”

“…….”

“저한테 말 걸지 마십시오. 이 모습이 전하의 눈에 보이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으나 코르넬은 단호했다. 그는 심지어 대답조차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버티고 서자 그는 나를 무시하는 대신 애원하기로 마음먹는지, 애원하는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애원하는 주체가 바뀌어 있었다.

“제발…… 저한테 말을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전하께서 보시면 또 저를


갈구실 겁니다.”

“당신이 공작님에게 어떻게 갈굼을 당하든 뭘 당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저런 너무하다는 표정을 짓는 건지.

“어쨌든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적당히 들여보내 준다면 노아와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코르넬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오기가 생겼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 나는 이를 악물고 문틈 사이로 돌진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억지로 길을 뚫으려다가 실패하고 기사에게 붙잡혔다. 나는 코르넬과 다른 한 기사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방으로 끌려왔다.

나를 방에 데려다 놓은 코르넬은 문을 닫고 나가려다 말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지친 얼굴로


애원했다.

“제발 얌전히 계십시오, 제발.”

제발. 그놈의 제발. 코르넬은 제발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나서야 방문을 닫았다.

알베르트가 명령하면 발등에도 입을 맞출 개새끼. 나는 문이 닫히는 순간에 조용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코르넬이 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러나저러나 코르넬은 뛰어난 기사였다. 그만큼 그는 청각도 발달해 있을
것이다. 코르넬이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피어올랐으나 곧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알베르트는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를 몰아붙이며 노아가 그렇게도 보고 싶냐고


나를 다그쳤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내가 노아를 찾고 있다는 걸 코르넬이 알베르트에게 알렸구나. 하기야 개새끼 근성이 변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에도 나는 코르넬을 만나기 위해 꿋꿋하게 감옥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정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듯한 얼굴이었다.

“노아를 만나게 해 줘요.”

“안 됩니다.”

“그럼 왜 안 되는 건지 이유나 들어 보죠.”

코르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나인데 왜 오히려


코르넬이 한숨을 쉬는 건지.

“……놈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네?”

“이곳으로 오셔 봤자 놈은 이곳에 없다는 말입니다. 감옥 앞에서 놈을 만나겠다고 아무리 고집을 부리셔도


놈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거기까지 말하다가 코르넬이 이 질문에 답해 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감옥에 없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감옥이 아닌 저택 내부의 어딘가? 그것도 아니면, 저택 밖에 있나?

나는 목걸이를 찾기 위해 얼른 품 안을 뒤졌다.

하지만 목걸이는 몸 어디에도 없었다. 한순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목걸이를 어디에 뒀더라. 목욕할 때에도 뺀 적이 없었는데, 설마 줄이 끊어져 어딘가에 버려졌나?

나는 눈을 감고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알베르트가 찾아올 때까지도 목걸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조금의 값어치도 없을 것 같은 이 목걸이는 무슨…….]

알베르트가 흘리듯 했던 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알베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목걸이 줄을 끊었고…… 그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분명 목걸이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던 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만약 하녀가 이미 방을 치웠으면 어떡하지? 그러게 방을 나오기 전에 바닥을 좀 쳐다볼걸. 바닥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지 좀 볼걸.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발견할 수 있는 건 작은 먼지뿐이었다.

다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이미 버린 게 분명했다.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한테


목걸이의 행방을 물어봐야 하지.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방 한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방을 치우고 있던 하녀를 발견했다.

저 하녀라면 목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 아가씨.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연한 갈색 머리칼의 하녀는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아리안도 종종 나를 ‘이 멍청한 아가씨야’ 혹은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라고 부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호칭과는 별개로 아가씨라고 불리는 것은
어색했다.

나는 잠시 눈앞의 하녀를 살폈다. 노아보다도 어린 듯한 작은 소녀였다.


“……혹시 바닥에서 빨간색 목걸이를 봤나 해서.”

“아, 그 빨간색 목걸이요?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저 서랍에 넣어 놨어요.”

나는 하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서랍을 쳐다봤다. 바닥과 그사이에 조그만 틈도 없는, 아주 무거워
보이는 서랍이었다.

“아. 고마워.”

“네.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또 불러 주세요.”

첫 번째 서랍을 여니 바로 목걸이가 보였다. 빛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래서 아까는 빛이 보이지 않았던 거구나. 노아가 내가 머무르고 있는 층보다 더 아래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곧장 빛을 따라 뛰었다. 빛은 저택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꽤 소란스럽게 달려 나갔지만 나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밖에도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많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에 공작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알베르트와 내가 맺은 관계가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횡적인 관계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알베르트와 나의 관계를 아는 것도 코르넬을 포함하여 모니카 공작가의 기사 중 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빛을 따라 도착한 곳은 마구간 앞이었다. 마구간 앞에는 그곳을 지키는 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장소였다.

나는 마구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기사가 다른 곳으로 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중간에 다른


기사와 교대하는 시간이 분명 있을 텐데…….

하늘이 주홍색으로 물들었을 때쯤 커다란 종소리가 저택 내에 울려 퍼졌다. 기사는 크게 하품을 하며


느릿한 걸음을 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교대할 기사를 만나러 가는 것일 테다. 기회는 이때뿐이었다. 지금 저 안을 뒤지지 못한다면 새로운


기사가 와서 이 앞을 지킬 것이다.

나는 조심히 주변을 살피고 마구간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보기에는 마구간이었으나 안은


달랐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감옥……
감옥인가. 아니, 감옥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역겨운 살냄새가 풍겼다.

그래, 고문실. 고문실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맞겠다. 그리고 고문실의 한가운데에는 노아가 묶여 있었다.
이럴 거면 치료는 왜 해 줬던 건가 싶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하마터면 이런 때에 구역질을 할
뻔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곧 눈을 뜨기는 했으나 무슨 약이라도 쓴 건지 노아의 눈은


몽롱했다.

“노아, 일어나. 지금 가야 해.”

노아의 팔과 다리를 묶은 밧줄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칼로 끊었다. 이곳에서 꽤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너, 저번에 성기사들한테 썼던 그 향 아직도 있어?”

진작 기사들에게 뺏겼을 것 같기는 했으나 혹시 모르니 물어봤다.

그러자 노아가 품 안 깊숙한 곳을 뒤적이더니 작은 크기의 향을 하나 꺼냈다. 기사들이 저곳까지 뒤지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71-

“이거, 아직 쓸 수 있는 거 맞지?”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번처럼 또다시 옷을 찢어 노아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리고
최대한 상처가 있는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살이 덜렁거리는 광경이라니. 다시 그쪽을 봤다가는 먹은 건 없지만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굳이 아프냐고 묻지는 않았다. 살이 덜렁거리는데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처음 봤을 때 약에 취한 듯 눈동자가 몽롱해 보였으니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우리는 당장 도망쳐야 했다. 알베르트가 저택에 돌아오기 전에.

노아가 정말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완전히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를 찾은 이상, 그리고 그가 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금 당장 나가는 것이 이익이었다.

“가자. ……조금 힘들겠지만.”

노아는 끔찍하게도 벌어진 상처 위를 손으로 감싸고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조용히 계단을 딛고 지하에서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노아가


비틀거린 탓에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구간 앞을 지키는 기사는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게 아니면 기척을 느꼈음에도 노아가 빠져나왔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보지 않고 있거나. 기사들은
기척에 예민하니 이쪽이 더 현실성 있게 들렸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노아가 품 안에서 향을 꺼냈다.

“숨, 참아.”

노아가 힘겹게 한 마디를 뱉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노아는 자신까지 입과 코를 틀어막은 후 무색의 향을 마구간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향해 흘려보냈다.

기사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콜록거렸다. 이전에 내가 그 향을 맡고 쓰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시간이었다. 아마 기사라도 일반인보다는 조금 더 오래
버티는 것 같았다.

뒤늦게 노아가 고문실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가 뒤를 돌아봤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기사의 무릎이 앞으로 꺾였다. 눈빛은 이미 몽롱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기사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마구간의 입구에 달려 있던 종을 울렸다. 저 종이 저런


용도로 달려 있던 거였나.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두드리는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우리를 잡으러


달려오고 있을 테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게 기사들의 가장 피곤한 점이었다. 한 명이 도움을 요청하면 나머지가 전부 몰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개미 떼 같은가.

“가자, 노아. 힘들겠지만 최대한 속도를 내 봐.”

정문으로 나가다가는 도망치다가 되려 알베르트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후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후원이 하도 넓어서 마구간에서 후문까지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됐다. 이쯤이면 내가 노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까지 밝혀졌을지도 모르겠다.

후문과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숲이 하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모니카 저택은 트리센 마을 근처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이곳 지리에 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숲으로 가자, 노아. 숲으로 가서 숨으면 알베르트가 우리를 찾기 힘들어질 거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노아는 내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왔다. 벌어진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도.
후문으로 빠져나올 때 언뜻 알베르트의 얼굴을 봤던 것 같기도 했다. 제발 내가 정문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여기기를.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살면서 이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비가 왔었던 걸까. 땅은 물을 머금은 것처럼 질척거렸다. 발을 휘감는 징그러운 감각에도 우리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먹구름이 보였다.

나는 노아를 물건처럼 끌어당기며 발이 움직이는 대로 도망쳤다. 커다란 나무가 나오면 방향을 틀었고
바위가 나오면 바위 위로 넘어 도망쳤다.

그리고 마침내 숲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아래에 강물이 흐르는 높은 절벽에 다다랐다. 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이런 소설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필 이런 상황에 높은 절벽이라니.

말을 탄 알베르트와 그의 기사들은 금방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가 도망친 숲은 그리 넓지 않았고, 게다가


그들은 말을 탔다. 이렇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발 그가
우리를 찾지 못하기를 바랐었다.

나무 하나 없는 절벽 위로는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뜨는 것마저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스텔라.”
두꺼우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미성이 들려왔다.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에도 도망가겠다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그 말에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노아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로지 알베르트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부 알베르트에게 달려
있었다.

“놈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정말 포기한 줄 알았는데. 순한 양처럼 복종하고 순응한 줄 알았는데…….”

알베르트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얼른 노아를 끌어당겨 노아를 내 뒤에 숨겼다.

테오필이 했을 법한 말을 알베르트가 하니 끔찍하면서도 기분이 오묘했다. 물론 오묘하기보다는 끔찍한


기분이 더 컸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이 세찬 바람을 만나 이리저리 꺾였다.

“놈을 이용하면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스텔라. 오히려 저놈이 살아 있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도망칠 겁니다.”

“…….”

“놈을 죽일 겁니다. 당신이 놈을 데리고 도망치며 희희낙락거리는 모습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겠고.”

희희낙락은 도대체 어느 부분이 희희낙락이란 말인가.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친 기억밖에


없는데.

갑자기 마음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정말 빗방울인지 알 수도


없었다.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쥐어짜듯 억지로 말을 뱉었다.

“이…… 멍청아. 네가 말도 않고 마탑에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내뱉는 비난에도 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미안.”

지금 이런 사과가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데. 나는 노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베르트의 표정은 항상 오묘했다. 예를 들면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덤덤해 보이는, 뭐 그런 표정들.


물론 표정을 보지 않아도 화가 나면 그의 온몸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금 매우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베르트의 저 사나운 표정을 보아하니, 노아는 분명 죽을 테고…… 나는 어떻게 될까. 죽을까. 아니면
노아가 죽는 광경을 지켜본 채 살아남을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전에 노아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종종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당시에는 그게 징그럽게 느껴졌다. 내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감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하지만 지금 이게 노아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설마


마탑에서 도망쳤던 게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렇게 증오했으면서도 이제는 그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답을 듣고 싶어 하다니! 나도 그와


함께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을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론은 아니, 였다. 나를 사랑하든 말든 곧 그의 모든 것이 멎어 버릴 것이다. 초의 심지에 붙은


촛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나를 쭉 응시하던 알베르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면, 저택에서 당신의 옆을 지키던 하녀들을 죽이는 건 어떨까요.”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아를 죽이겠다며 으르렁거리다가 갑자기 하녀들의


목숨을 들먹이는 이유는 뭐지?

“어떻습니까, 스텔라. 당신 때문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죽어야 하는 이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요.”

아아, 알겠다. 그는 나를 성녀쯤으로 생각하고 있나 보다.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뭐


그런 사람 정도로. 이전에 내가 테오필을 찔렀다는 말은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누나, 그러지 마.”

내가 스스로를 희생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서 노아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노아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할 때마다 왜인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너는 끝까지 네가 이기적이었던 순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네 과거의 행동이 나도 내 마음대로
이기적이게 너를 내 옆에 둘 이유가 될 테니까.

일단 알베르트가 생각하는 대로 맞춰 주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노아의


손을 떼어냈다.

-72-

몸에 성한 데가 없던 노아는 부축하는 손이 사라지자마자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았다기보다는 쓰러졌다는 말이 더 맞겠다.

노아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다. 의문, 당황, 절망, 뭐 그런 것들.

나는 노아와 시선을 맞추는 대신 알베르트를 쳐다봤다. 노아도 체념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가 체념하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새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새로운 모습에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행동이 알베르트에게


보이지 않게 조심히 발로 쓰러진 노아를 건드리며 속삭였다.
노아가 축 처진 얼굴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봤다. 이제는 굳이 그게 무슨 표정이냐고 묻지 않아도, 그냥
대충 보기만 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베르트에게 가려는 거구나. 그래서 나를 버리려는 거구나. 그럴 거면 애초에 나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아마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마음속으로 던지고 있을 질문에 반문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그를 버릴 거였으면,


애초에 내가 이 고생을 하며 그를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노아에게는 향이 있고, 알베르트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그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알베르트가 갑자기 쓰러지면 기사들이 당황해서 그사이에 도망칠 틈이 생길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향, 공작이 가까이 다가오면 향을 꺼내.”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아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가 지켜보고 있는 탓에 표정 관리를 했는지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방금
전보다는 밝았다.

“……당신은 너무나도 친절합니다.”

그때 알베르트가 잘 들리지 않는 크기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노아의 손을 떼어내는 모습을 보고 그를 저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함께 온 기사들에게 가만히 자리를 지킬 것을 명하고 홀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너무 친절해서, 그래서 저런 것 따위에게도 사랑을 줄 만큼.”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결국 노아를 경시하는 말이었다.

나는 알베르트가 다가올수록 절벽의 끝에 다가섰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할 만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알베르트가 더 가까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내가 저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질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알베르트는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 손을 잡으십시오. 이곳은 너무 위험하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

“……공작님이야말로 어쩜 그렇게 친절하실 수가 있는지.”

나는 알베르트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했다. 알베르트는 가만히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부드러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무 친절해서 제가 몇 번이고 도망치고 몇 번이고 거짓말을 했는데도 또 저를 믿으셨잖아요. 그만큼


저를 믿어 주셨는데 어떻게 친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나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노아.”

내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노아가 품에서 향을 꺼내 들었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으나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 알베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알베르트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칠 새도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위험한 절벽의 끝이었다. 쉽게 몸을 움직이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을 것이다.

노아가 알베르트를 향해 향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나와 노아는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노아가 다시 향의 마개를 덮었을 때, 나는 몽롱한 얼굴의 알베르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닿아


있던 그의 손을 무정하게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여기까지 와서 노아를 저버릴 거였다면 애초에 노아를 데리고 저택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

“공작님이 말한 그 향에 코가 비뚤어져서 제대로 된 판단도 안 되나 봐요.”

당신이 말한 대로 머릿속까지 향에 중독돼 버렸나 보지. 거짓말에도 쉽게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해져


버렸나 보지.

역시나 향은 효과가 좋았다. 다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베르트는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뒤에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 봤자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알베르트는 끝까지 내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의 뒤로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이 모시는 이가 갑자기 가파른 절벽 끝에서
향에 취해 쓰러져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노아는 알베르트가 눈을 감는 순간 바닥에 쓰러졌다. 지혈했던 상처가 벌어졌는지 옷 위로 붉은 핏자국이


스며들었다.

나도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알베르트를 절벽에서 밀어 버린 후에 어떻게 해야 그의 기사들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알베르트를 유인하기 위해 절벽 끝에 서 있던 게 문제였다. 알베르트는 하필 내 쪽으로 쓰러졌고, 나는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함께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아 몸을 가누기 힘든 탓도
있었다.

함께 넘어가던 알베르트는 그를 구하기 위해 뒤에서 달려온 그의 기사들이 잡아 줬다지만, 나는? 나를


잡아 줄 사람은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절벽의 끝에서 뒤로 넘어가고 있는데 잡아 줄 사람이
없다니. 그건 곧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중 가장 또렷한 것은 노아의 얼굴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나온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노아의 거짓 눈물에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보며 울 때는 거의 항상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눈물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노아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마저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나마 코르넬이 나를 붙잡기 위해 절벽 너머로 손을 뻗었으나 그도 나를 잡지 못했다. 누나. 나를


부르는 노아의 목소리가 그의 입을 떠나자마자 나는 뒤로 넘어갔다.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도 아직 강물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강물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알베르트를 다시 만난 이후로 한순간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새가 아니니 다시 날아서 저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곧 느껴질 통증을 기다렸다.

하지만 바위에 부딪히기 직전에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노아도 알베르트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

“스텔, 라…….”

“아리안…….”

아리안. 나를 붙잡은 것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은 다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마법사니까, 굳이 발로 뛰어온 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다급하게 온 건 맞는 것 같았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아리안이 나를 찾으러 와 줄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마탑을 떠난
지 몇 주나 지났었으니까.

아리안은 숨을 몇 번이고 몰아쉬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니 할 말을 정하고 있는 듯했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결국 아리안이 한참의 고뇌 끝에 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녀는 내 허리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움켜쥐었다.
바보 같은 아가씨. 평소에도 아리안에게 종종 들었던 그 상냥하면서도 모진 말이 지금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아. 순간 마음을 조이고 있던 긴장이 끈이 툭 풀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니 잠깐. 왜 우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아리안은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그 다정한 손길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크게 놀란 탓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다.

“아, 아리안…….”

“……그래, 스텔라.”

“저 아리안이랑, 노, 아랑 다시 축제도 가고 싶고…….”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지난번에 갔던 바다도 또 가고 싶고…….”


“그래. 파도가 위험하긴 하지만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다줄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더듬더듬 말했지만 아리안은 참을성 있게


내 말을 전부 들어 줬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에 있는 건 너무 싫고, 끔찍하고…… 알베르트, 그러니까 공작이
있는 이곳이 너무 싫어서…….”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자. 네가 오기 싫으면 다시는 오지 않아도 돼.”

나는 소매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어느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 돼 버리긴
했지만.

아리안은 나를 데리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기사들에게 양팔이 잡혀 있던 노아가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알베르트의 기사들도 아리안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세상에 남은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본 마법사는 아리안이 유일했을 것이다.

그중 코르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리안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돌아가자 스텔라.”

아리안은 짐을 챙기듯 다른 한 손으로 노아를 들어 올린 후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돌아가서 들을 테니까.”

-73-

마탑에 돌아온 후 나는 먼저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아리안에게 알렸다. 엉망이 된 도서관을 본 아리안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어쨌든 도서관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건 나였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책장들이 저한테 쓰러졌어요.”

“…….”

“……미안해요, 아리안.”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충분히 알겠으니까. 책들이 너한테 심술이 났었나 보지.”
책들이 심술이 났다는 특이한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 끄덕였다. 아리안은 원래 특이한
사람이니까.

아리안은 나를 향해 활짝 웃어 주며 도서관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며 문에 마법을 걸었다.


나는 그 후로 도서관의 문이 다시 열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한데 모여 노아가 아무도 모르게 마탑을 떠났던 이유를 물었다.

노아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대강 이러했다.

자신이 떠나는 게 내가 더 행복할 것 같아서 떠났다고, 말을 하지 않고 나온 이유는 미리 알리면 내가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아마 평생 내 옆에 남아 사죄하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코르넬과 만난 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코르넬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 코르넬이 바로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자신을 잡도록 명령했다고.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결론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라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뭐 얼마나 나를 배려했다고 감히 내
행복에 대해 논하는지.

성인식을 치렀으면 무엇하나, 한때 암흑가의 주인이었으면 무엇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노아는 어딘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어리숙했다.
아리안은 그 말을 듣고 거의 뒤집어질 뻔했다. 겨우 그딴 이유로 그런 짓을 벌여서 일을 이렇게 키워?
아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노아의 멱살을 잡았으나 노아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물러난 것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이 노아를 잡고 있던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네 존재가 스텔라의 인생에 방해가 될 때는 아주 죽여 버릴 줄 알아.”

그리고 그다음으로 노아는 나와 그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리안에게 말했다. 이후에 그 일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노아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눈빛으로 노아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도 충분히 네 존재가 스텔라의 인생에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

으르렁대는 아리안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아리안을 쳐다봤다.


알베르트를 볼 때처럼 차가운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리안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말리지 않았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괜찮겠지. 아리안 성격에
때리면 때렸지 팔다리를 잘라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리안이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가는 모습까지만 보고 위층으로 올라간지라 그 후에 노아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은 노아를 찾으러 나서기 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며칠간 관리할 사람이 없었던


탓에 먼지가 조금 쌓인 것뿐이었다.

노아를 데리고 숲을 미친 듯이 달린 탓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 위에


앉으려다가 부슬비에 젖은 옷을 보고 슬그머니 나무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아, 그리고 방에 쌓인 먼지를 제외하고도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아리안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처음 본 것이라 궁금증이 일기는 했으나 굳이
아리안의 허락 없이 열어 볼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리안의 몸에 피가 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노아의


팔다리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는 소파 위에 늘어졌다.

“스텔라, 나 잠깐만 자고 일어날게.”

굳이 잠을 잔다는 사실을 보고할 필요가 있나. 물론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아리안이 잠을 자겠다는 말은 꽤


새로웠다. 적어도 나는 그녀가 잠을 자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원래 한 달 정도는 잠을 안 자도 멀쩡한데…… 이번에는 부쩍 피곤하네…….”

“…….”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저렇게 젊은 겉모습을 하고서 저런 말을 해 봤자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내 생각이 떨떠름하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리안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고 일어났을 때 너한테 줄 게 있어. 금방 일어날게. 이따 보자.”

아리안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았다.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금방 일어나겠다는 아리안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이틀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고 거칠게 깨워 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마침내 아리안은 쭉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참고로


아리안이 일어난 시간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낮이었다.

아리안은 몸이 뻐근한지 몇 번이고 허리를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이틀이나 잤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아리안이 자고 일어났을 때 나한테 줄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리안. 저한테 줄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렇지.”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루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멀뚱멀뚱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더니 나에게도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아리안은 나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이었다. 또 이상한 마물이나


마법진이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것들은 없었다.

“어디 보자.”

아리안은 바닥을 두드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커다란 원을 몇 개 그리더니 그
안에 이상한 문자도 몇 개 적어넣었다.

“그게 뭐예요?”

“마법진.”

아리안은 짧게 대답한 후 다시 마법진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 나를 왜 데리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아리안이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중간에 일이 막히는지 무언가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며 끙끙거리기도 했다. 그 위에 이상하게 생긴


재료들을 올려놓기도 했는데, 복잡해 보여서 그냥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미안 스텔라. 괜히 따라오라고 했네.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예의상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다리가 너무 저려서 차마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따라오라고 한 건지라도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때였다. 아리안은 마침내 쾌재를 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됐어! 드디어 됐어!”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됐다는 말이냐고. 아리안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내 의문에 답해 줬다.

“좋은 거야. 아주 좋은 거. 너한테도, 나한테도…… 는 아닌가. 하여튼 너한테 좋은 거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명쾌한 답은 아니었다. 좋은 거, 그것도 아주 좋은 거라고? 아리안이 하고 있는 말은
전부 두리뭉실했다.

“스텔라, 마법진 위로 올라가. 그럼 내가 바로…….”

아리안이 신나서 떠벌리다가 한순간 말을 멈췄다.

“아니, 아니야……. 스텔라. 정말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네, 뭐…….”

“미안, 정말 미안해. 위층에 올라가서 침대에서 쉬고 있어. 금방 올게.”

드디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나에게는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느라 다리가 잘


펴지지도 않았다.

아리안은 마법을 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아리안이 사라진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노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후로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리안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쭉 자는 것은 아니었으나, 깨어 있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고문실에서 얻은 상처가 꽤 큰 것 같았다. 외상은 아리안이 전부 치료해 줬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모니카 저택의 고문실에서 삼켜야 했던 온갖 약으로 인한 내부손상이 꽤 심하다고 했다. 아리안은 자신의
마법이나 약으로도 쉽게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아는 이틀간 최소한의 생활만 하며 내리 잠을 자는 중이었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노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창문은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며 그 아래에는 노아가
누워 있다.

쭉 아리안이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더니 벌써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창문을 통해
붉은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손을 뻗어 노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심장은 콩콩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노아를 내려다보다가 창문을 닫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밤의 찬 공기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아리안의 그 급한 일이라는 건 마법진을 그리는 일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리안이 어딘가로 사라진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돌아왔다.

-74-
“아. 금방 왔네요, 아리안.”

“응.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거든.”

“근데 아리안, 얼굴에 뭐가 묻었는데…….”

내가 그녀의 뺨을 가리키자 아리안이 놀라 몸을 퍼드득 떨었다. 마치 들키지 않아야 할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먼지가 묻었어요.”

나는 소매로 그녀의 뺨을 닦아 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먼지만 묻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도, 두르고 있던 망토도 절반 정도 찢어져 있었다.

맨손으로 암벽 등반을 하고 온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옷이 찢어질 수가 있나?

“아…… 먼지. 난 또 뭐라고.”

“그나저나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망토랑 옷이 되게 심하게 찢어져 있는데…….”

“아, 그거……. 마법진을 발동시킬 때 필요한 재료가 부족해서 좀 구하러 갔다 왔어. 험한 산에서만 나는
재료라.”
어느 날 모니카 공작가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에게 습격을 받았고, 공작은 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리 와, 스텔라. 이 위로 올라가.”

다급하게 말을 돌린 아리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마법진 위였다. 아직 발동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법진은 푸른빛으로 옅게 빛나고 있었다.

아리안이 마탑에 없는 동안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마법진 위로 올라가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아리안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다독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스텔라. 지금은 내가 옆에 있잖아.”

“……이게 무슨 마법진인지 말해 주면 안 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해 주기 곤란할 정도로 꼭꼭 숨겨야 하는 일인가. 나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뭐, 다 끝난 다음에 말해 주려고 했는데 궁금하다면야 말해 줘야지.”

순간 아리안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아리안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향. 네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진이야.”

이 말을 듣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향, 그놈의 향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노아도


그중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베르트부터 시작해 살로스까지.

그런데 그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있다니. 차마 이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기쁨을 넘어,


그보다 훨씬 장대한 어떤 감정이었다.

“나도 이런 마법이 있었다는 게 최근에야 생각이 났어. 네 동생이 가출만 안 했어도 훨씬 빨리 없앨 수


있었을 텐데…….”

가출이라는 말에 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아리안이 노아를 얼마나 어리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 거기에 서. 그렇게. 준비가 되면 말해. 바로 마법진을 발동시킬 테니까.”

“저, 근데 아리안.”

“응?”

“…….”

갑자기 오래전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가 떼로 죽었다는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때처럼 마법진이 폭발하는 건 아니죠?’라고 물어볼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어도 사실 아리안이 그 일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아리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마법진의 끝부분에 손을 올려놓았다. 흐릿하던 푸른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빛은 순간적으로 반짝이고 다시 사그라들었다.

“됐어, 스텔라. 이제 내려와도 돼.”

“……?”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내가 생각하던 마법진은 이런 게 아니었다. 뭔가 좀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그런 걸 기대했다고 하면 아리안이 비웃겠지? 나는 기대했던 바를 마음속에 꾹꾹 숨겼다.

그때 별안간 아리안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얼굴빛을 보니 피곤한 것 같았다. 이틀을 내리 자고도
피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안녕, 스텔라. 나는 좀 더 자러 가야겠어.”

“또요?”

“지금까지 못 잔 잠을 몰아서 자야 하거든.”

침대에서 자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아리안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긴 팔다리를 소파 안에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아리안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내 팔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애초에 나는 그 향이라는 걸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아리안이나 알베르트가 내게서 향이 난다고 말하길래


그렇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아리안의 말대로 향이 사라진 걸까. 그럼 이전처럼 고생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나는 다리를 모으고 그 안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아리안이나 노아가 깨어나면 물어볼 수밖에 없지.

나는 그 후로 한동안 멀뚱멀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아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리안은 방금 막 잠들었다.

위험한 물건이나 마물이 들어 있는 방은 아리안이 전부 마법으로 막아 뒀기 때문에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혼자 남겨지면 괜히 불안한 게 인간의 심리였다.

그래, 책. 책이라도 읽자. 도서관은 갈 수 없으니 나는 대충 책상 위에 놓인 책을 펼쳤다. 아리안은 내게


원하는 책을 마음껏 봐도 좋다고 허락해 줬었다.

책의 제목은 아주 간단했다. 몽마. 수식어니 뭐니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몽마, 그냥 그게 제목의


전부였다.

몽마의 검에 관심이 많은 아리안이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몽마의 검에 관심을 보였었다.

이 책 외에는 전부 제목이 어려워 보였다. 제목이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경우도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몽마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에는 몽마에 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인간을 유혹해 정기를 야금야금 빼먹는 악마라는
기본적인 정보부터, 몽마들의 자세한 습성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의자에 기대 몸을 까딱이며 이상한 자세로 책을 읽던 중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이 바닥에


떨어지며 페이지가 아무렇게나 넘어갔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다시 내가 읽던 쪽을 펼치려고 마구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눈에 익은 단어가 보였다.

[몽마의 검]

나는 읽던 페이지를 찾는 것도 잊고 홀린 듯이 그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이 악마, 그중에서도 몽마는 특히나 더 이기적인 족속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이 이기적인 족속, 몽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우가 있다.

몽마의 검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몽마가 자신 스스로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찾았을 때.

스스로를 희생한 몽마의 힘은 전부 검에 깃들고 몽마의 자아는 완전히 사라진다.]

길지 않은 설명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짧았다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 의도한 듯이 그 순간에 적절하게 테오필을 찌를 검을 만들어 준 게 살로스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검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스스로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

그렇구나, 그랬구나. 나는 천천히 책상 위에 놓인 단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지 않길래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몰랐을 뿐, 그는


계속 내 옆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가 없는 검을 끌어안고 엉엉 울 정도는 아니었다. 고마운 마음만큼 살로스를 원망하는


마음도 컸으니까.

나는 한동안 그냥 그렇게 검을 쳐다보기만 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했다.

***

아리안은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일어났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맑게 웃고는 나를 보며 하는 말이,

“제대로 잠을 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지금껏 살면서 처음 느껴 봐.”

이틀 동안 잔 적도 있는데 이 정도 잔 걸로 뭘. 나는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리안의


성격은 항상 한없이 가볍기만 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노아는 그로부터 사흘 후에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 안에 독이 남아 있는지 간간이
마른기침을 하기는 했으나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일어났어?”

“…….”

거북이처럼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던 노아가 느릿하게 팔을 벌렸다. 말을 하지 않으니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아 달라는 걸까.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히 그를 끌어안았다.

아마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노아도 내가 그랬듯이 양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목에 얼굴을 박고 비비는 느낌이 퍽 간지러웠다.

노아는 지금까지 내 향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과연 그는 향이 사리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을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고, 향에 대해 빙 돌려서 물었으나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답하지 않자 나도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노아는 계속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어디를 갔다 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마탑의 지붕을 떠올렸다.
이전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했었다. 아리안은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몰래 조심히
갔다 오면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는 지붕 위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위로 올라갔다. 내가 먼저 올라간 뒤 몸이 좋지 않은 노아가


올라오는 것을 도와줬다.

높이가 하도 높아 처음에는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까마득한 풍경을 내려다보느니 그냥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확실히 눈을 감고 있으니 뒤틀리듯 울렁이던 속도 평화를 되찾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쓸데없는


잡담을 할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공작이 암흑가를 없애 버린 건 알아?”

“어떻게 알았어?”

노아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공작 집무실에서 네가 가져간 보석을 봤어.”

“그렇구나.”
“거기에 네 소중한 사람도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았어?”

내 질문에 노아는 빠르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은 누나밖에 없어.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래.”

그때 갑자기 그에게 묻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 절벽에서 노아의 숨이 곧 촛불처럼 꺼져버릴


것이라고 믿어 굳이 묻지 않았던 그 질문.

“노아.”

나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속이 울렁거릴까 봐 뜨지 않았던 눈도 지금은 뜰 수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노아가 바로 나를 쳐다봤다. 나를 응시하던 그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뒤덮은 색과 닮아


있었다.

-75-

“너…….”
너 아직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마 이런 간질거리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혹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답하면? 나는 그 말에 대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햇빛을 등진 노아의 의아한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탓에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곧 비가 올 것임을
보여주는 바람이었다.

바깥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추운 건지 노아의 마른 팔목이 잘게 떨렸다. 나는 그의 팔목을 빤히 쳐다봤다.

신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꽤 건장하던 몸이었다. 지금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때보다는 야윈 상태였다.

몸이 약해져 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추운 곳에 더 있다가는 노아가 감기로 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들어가자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노아는 순순히 내가 끄는 대로 따라왔다.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내부로부터 따듯한 열기가 올라왔다.

일단 노아를 내려보내기 위해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먼저 내려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잡아 주겠다는 건지. 몸 안의 독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 창백한 노아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으나 노아는 내가 먼저 내려가지 않으면 계속 이곳에 있겠다는 듯이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나였다. 나는 네모난 문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나는 아래로 향하는


사다리에 발을 올리면서도 계속 노아를 주시했다.

아리안은 지금 자고 있으니 노아가 발을 헛디뎌 떨어져 버리면 그를 구해 줄 사람도 없었다. 노아가 너무


태평할 뿐이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 칸, 한 칸, 발을 움직이며 문 위로는 얼굴만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돌연 노아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 끝을 손에 움켜쥐었다.

“……노아?”

노아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고생의 흔적으로 생기 없이


메마르고 거칠거칠한 입술이 퍽 간지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으나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노아는 닿지 않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밝게 웃었다. 앞니까지 보이며,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노아가 열세 살일 때까지만 볼 수 있던 밝은 웃음이었다. 그 후 5 년 동안은


만나지 못했었으니까.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는 간단하게 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대답은.

“……싫어하지는 않아.”

모호한 말이었으나 그는 용케 내 말뜻을 알아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뺨을 비볐다. 어쩐지


커다란 개가 생각나는 행위였다.

우리는 그대로 지붕에서 내려왔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아의 말에 대충 호응해 준 후 그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냈다. 이곳에서는 아리안이 숙면을 취하고


있으니 조용히 해야 했다.

아리안은 여전히 소파 위에 퍼질러져 괴상한 자세를 취한 채 자고 있었다. 혹시 아리안이 깨어났을 때


침대로 기어 올라갈 것을 생각해 나는 침대 대신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배려가 무색하게도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소파가 텅 빈 것을


보니 아리안은 이미 깨어난 것 같았다.

아리안이 어디로 간 건지 알아보기 위해 방에서 나오니 아래층에서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어난 아리안은 손봐야 할 곳이 있다며 마탑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나
아리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리안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마법 문외한인 내가 쉽게 도울 수 있을 만한 일들은 아닌


듯했다.

아침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때부터 마탑을 돌아다니던 아리안은 점심이 되어서야 꼭대기 층으로 돌아왔다.
“으으, 스텔라. 배고프지 않아?”

아리안은 배를 움켜쥐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평소와 다른 아리안의 모습을 지켜봤다.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테이블 위에 음식이 나타나는데 굳이 아래층까지 걸어가야 하나?

아리안은 평소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계단을 오르내리며 손수 음식을 날랐다. 마탑에 돌아온 후
아리안은 어쩐지 전과 달라졌다.

또한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기름이 가득한 고기 요리들을 먹어 치웠다. 아, 며칠까지는


아니어도 잠을 오래 잤으니 꽤 오랜 시간을 굶은 건 사실인가.

평소의 아리안은 사람이 고작 저것만 먹고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소식했었고, 또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했었다. 물론 아리안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의 기준과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뭐, 그래도 배부르게 잘 먹는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겠지. 나는 안일하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걱정을


지워 버렸다.

포크로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찍을 때마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 밖의
다른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왜인지 이 엄중한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애꿎은 샐러드만 집요하게


괴롭혔다.
“스텔라, 있잖아.”

아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제 향도 없어졌으니까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아. 나는 포크로 열심히 샐러드를 찍어누르던 행동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말을 잃었으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 그래야죠. 계속 아리안에게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스텔라. 네 표정을 보아하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절대 떠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그냥…… 마탑은 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거든. 내가 항상 지켜 줄 수는 없잖아.”

“그건 이미 직접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어요.”

책장이 내 쪽으로 쓰러지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입에 넣은 샐러드를 씹다 말고 으으,


하고 몸을 떨었다.

“네가 원하면 너랑 저놈 둘 다 넉넉하게 살 집 정도는 쉽게 구해 줄 수 있어. 어때?”

“아, 아니요. 집은 괜찮아요.”


그렇게 하기에는 아리안한테 너무 신세만 지는 것 같고 해서…….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눌러 뭉개며
웅얼웅얼 말했다.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너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뿐이니까.”

“아리안이 저한테 무슨 빚을 졌나요?”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있기는 있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

“정확히 말해 줄 수 없다면 그냥 없는 일로 쳐도 되잖아요. ……그리고 굳이 떠나야 하나요? 아리안이


도서관에 마법도 걸어 줬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 아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두운 흑색 눈동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리안답지 않은 미소였다.

아리안다운 미소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저런 자애롭고 포근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그 미소를 보고 나도 모르게 내가 뱉었던 말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냥.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스텔라 네가 어리광부리는 건 처음 보네. 아, 그렇다고 네 어리광이 밉다는 건 아니야.”


“아리안이야말로 오늘따라 평소랑 다른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평소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오늘따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자기 떠나는 건
어떻냐는 말부터, 지켜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아침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나는 포크를 꾹 쥐다가 결국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이라면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내가 떠나야만 하는 일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까. 보이는 것보다는…….

“……아리안이 그렇다면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리안은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구니 안에 든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고는 오독, 하고 씹었다.

곧 아리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꼭대기 층에는 노아와 나만 남게 됐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꾹


짓누르며 마탑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갈 때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마탑에서 십수 년을 산 것도 아닌데, 벌써 아리안과 헤어져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 그나저나 노아의 의견은? 그에게도 떠날 것인지 혹은 이곳에 남을 것인지 의견을 물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를 따라오겠다고 할 것 같기는 하다만. 아리안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고.

“노아. 너는 어떻게 할래? 나랑 같이 떠나고 싶어? 아니면 여기에 남을래?”

“누나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래.”

내가 예상했던 답변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물어볼 필요 없었던 질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짧게 대답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음식이 더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

아리안이 떠나는 게 어떻냐는 말을 꺼내고 나흘 정도가 흘렀다.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니,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기보다는 애초에 챙길 게 별로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살로스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한 단검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단검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것도 가방에 챙겼다.

-76-

오늘이 드디어 마탑을 떠나는 날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천천히 어두운색의 돌로 만들어진 거칠거칠한


벽을 쓸었다.

한껏 감성적으로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스텔라, 준비는 다 됐어?”

“아, 네.”

“그럼 일단 마을로 가자. 마탑으로 마차를 부를 수는 없으니까……. 마을에서 마차를 불러 줄게.”

손을 잡자마자 한순간에 마을로 이동했던 지난번과 달리 아리안은 우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바닥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마법진을 보고 주춤거리자 아리안이 안심하라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토닥거리며 나를 마법진 위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푸른색의 작은 돌멩이를 꺼내더니 표면을 두세 번 두드린 다음 마법진 위에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멩이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작은 돌멩이에서 나온 빛은 곧 커다란 마법진으로 이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축제를 즐겼던 마을의 으슥한 뒷골목에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안은 능숙하게 우리를 데리고 사람이 많은 큰길로 데려갔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마차를
잡았다.

마부는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개중 무거운 짐들을 짐칸에 싣기 시작했다.

“미안해, 스텔라. 여기서 더 배웅은 못 해주겠네. 다시 돌아오려면 꽤 고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돌아오려면 꽤 고될 것 같다니.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원하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리안은 억지로 나와 노아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돈을 쥐여 주며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짐은 뒤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많지 않은 짐을 마차에 싣는 사이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리안.”

“그래, 스텔라.”

“우리 또 만날 수 있겠죠?”

아리안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먼저 찾아와 줘요.”

나는 가만히 서서 그때를 떠올렸다.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위협받고 있을 때, 갑자기 허공에서 아리안이


나타나 우리를 마탑으로 데려왔던 그때를.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리안에게 하려던 말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왜인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트에 적어 놓기라도 할걸.


“그리고 이거…….”

나는 가방을 뒤져 새까만 단검을 꺼내 중앙에 박힌 보라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보석의 색이 살로스의


눈동자 색과 같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나는 찬찬히 단검을 쓰다듬다가 그걸 아리안에게 건넸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몽마의 검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조를 때는 언제고, 아리안은 단박에 단검을 거절했다.

“앞으로 쓸데가 많을 거야. 나한테 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그리고 쓸데가 많아 봤자 무슨 상관이에요. 쓸 줄도


몰라서 구석에 처박아 놓을 바에는 아리안이 연구해 주는 게 훨씬 낫지.”

아리안은 몇 번이고 거절했고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앞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큼큼. 마부가 계속 옥신각신 다투며 시간을 끄는 우리에게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줬다.

아리안은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단검을 받아들었다.

“이제 나한테는 쓸모가 없단 말이야.”

아리안이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잠깐 노아와 대화를 하느라 듣지 못했다. 다시 말해 주기를 부탁했으나


그녀는 양쪽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노아와 아리안은 간단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 정말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내가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그때 노아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나는 마차에 올라타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노아가 아리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아리안이 노아보다 아주 조금 키가 컸기 때문에 노아는 살짝


고개를 들고 아리안에게 다가섰다.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으나 노아가 작게 비밀을 속삭이듯 말한 탓에 그 내용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아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노아가 그녀에게 속삭인 내용을 전부 나불나불 불었다.

“이걸 나만 듣게 되다니, 너무 아까워. 스텔라, 방금 얘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고맙대, 얘가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고!”

제 딴에는 하기 힘든 말을 조심스럽게 했을 텐데 아리안이 그걸 큰소리로 다 말해 버렸다. 노아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노아의 표정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 그래. 노아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왠지 실망스러웠다.

“……보통 이렇게 놀리면 쑥스러워한다거나 뭐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나.”

“기대하는 반응이 아니라 유감이네요.”

말을 유감스럽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아는 무감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방금 아리안과 노아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가 벌어졌다. 아니, 이걸 대화다운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신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리안이 일방적으로 노아를 놀리던 모습만 봐


왔던지라.

게다가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다니. 그 무엇보다도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는
게 놀라웠다.

노아는 먼저 마차에 올라탄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한결 수월하게 마차에 올랐다.


“진짜 안녕, 스텔라.”

투명하고 깨끗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리안이 하얀 치아가 보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노아. 안녕.”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의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리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뚫어져라 그 자리를 쳐다봤다.

덜컹덜컹.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마차 안을 채웠다.

***

마차는 달리고 달려 아리안의 마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다가 유명한 항구 도시 카라하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다 내음이 풍겼다. 과연 항구 도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마탑을 떠나기 전 노아와 나는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마탑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일단 우리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알베르트를 만났던 그 나라를 다시 방문할 생각도, 여행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대신 아르엘
왕국의 옆에 위치한 마르주 왕국을 목적지로 택했다.

마르주 왕국으로 가는 배편은 내일 아침이었다.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전까지 기다릴 장소가


필요했다.

“방 두 개 주세요.”

나는 은화 두 개를 여관 주인 앞에 내밀며 말했다.

여관 주인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은화를 한번 쳐다보고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노아를


한번 쳐다봤다.

그러자 노아가 은화 두 개 중 하나를 가져오며 덧붙였다.

“아니, 방 한 개만 주세요.”

나는 다시 그의 손에서 은화를 빼앗아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두 개 주세요.”

“누나.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 없잖아.”

결국 나는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노아의 뒤통수를 갈겼고, 노아는 내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뒤에야 입을


다물었다.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 없다는 그의 말은 옳았으나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뭐가 더 있기는 있으니까. 나는 출발하기 전 아리안에게서 받았던 가방을 내려다봤다.

아리안이 자신이 쥐여 준 돈이 부족하면 팔아서 쓰라고 말하며 준 가방이었다. 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열어 보라고 했었지.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달리는 마차 안에서 가방을 흔들어 봤었지만 딱딱한 물체들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나는 여관의 방에 들어와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가방을 열어 볼 수 있었다.

가방 안에 든 것들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 안에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영롱한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보석 하나를 들어


올려 눈앞에 들이댔다.

아리안에게 보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아리안은 보석보다는 금화를 더 좋아했으니까.


그나저나 아리안이 준 보석들은 하나같이 모니카 저택에서 봤던 보석들과 세공 방식이 비슷했다. 보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쉽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강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보석을 빛에 비춰 보는 등 혼자 장난을 치다가 금방 질리고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내일 아침 일찍 보석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보석들은 마르주 왕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팔아 버릴


것이다.

***

사흘에 걸쳐 배를 타고 도착한 마르주 왕국에서는 카라하에서처럼 짙은 바다 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발음이나 억양이 제국과 다르기는 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더 빨리 익숙해졌다.

마르주 왕국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마르주 왕국의 길거리를 거닐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어느 마법사에 의해 모니카 공작가가 풍비박산이 됐었다는 소식이었다.

범인이 아리안이라는 것을 유추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임에 동시에 알베르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77-
모니카 공작가의 기사 몰살 사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도 결국 이곳은 마르주 왕국이었다.
제국에서 일어난 일을 마르주 왕국에서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묻고 물어 겨우 들은 소식 중에는 공작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공작의 호위기사인 코르넬 스테인 또한 실종됐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리안이 과연 순순히 알베르트가 도망치도록 뒀을까.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사람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아리안이?

진실은 아리안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리안에게 묻고 싶어도 그녀에게는 편지조차 보낼 수 없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다고 해도 마탑의 주소를 아는 배달원은 없을 테니까.

오늘따라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죽었을까. 후계자가
없었을 텐데 그럼 모니카 공작가는 이대로 멸문하는 건가.

하지만 방에 들어오자마자 알베르트에 관한 생각들은 전부 사라지고 아리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에


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아리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그 밖의 쓸데없는 생각들은 전부 던져 버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
돈을 아껴야 한다며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는 내내 옆에서 귀찮게 군 노아 때문에 결국 여관 방은 하나만
잡게 됐다.

각자 방을 쓸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밤이 되면 나는 침대에 눕고 노아는 소파에 눕는다. 그러나 도중에 불편해 잠에서 깨어나면 노아는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노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직접 노아의 팔을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노아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

“…….”

“노아.”

“…….”

“……야.”

“…….”

진짜 잠든 거 맞아? 잠든 사람이 이렇게 힘이 세다고?


잠든 거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끙끙거리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노아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매끈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고 가는 속눈썹은 아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참 예쁘게 생겼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도원의 사람들은 모두 친근하게 말을 거는 예쁘장한 그를 좋아했었다.

애니카와 함께 청소를 하다가 고아원을 지나치며 대강 봤을 때 또래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하여튼.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나지막이 노아를 부르며 아프지 않게 그의 뺨을


두드렸다.

“노아, 일어나. 나 답답하단 말이야.”

“…….”

“노아.”

“…….”

“노아!”

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노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노아의 얼굴은 잠에서 막 깨어나 비몽사몽 한 얼굴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치 진작에 일어나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혹시 깨어 있는 건 아닌가 했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눈을 뜬 노아가 배시시 웃으며 여전히 허리에 팔을 두른 채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목덜미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노아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 뺨을 두드렸다. 노아의 미소를 보고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는 자신이 예쁘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너 안 자고 있었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오기가 나서 두 손으로 단단하게 그의 뺨을 잡아 고정하고 다시


물었다.

“너 안 자고 있었지.”

“응.”

심지어 그는 당당했다. 좋게 말해 당당하고 나쁘게 말해 뻔뻔한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자라고 말하며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럴수록 노아는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창문 밖을 보니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노아가 나를 끌어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창문 밖이 조금 더 밝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뒤척거렸다.

마르주 왕국에 도착한 뒤 몇 번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번 마을은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며 방문한 네 번째
마을이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우리의 계획은 여행이었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짧게 여러 곳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유명한 거리가 하나 있었다. 베이커 거리. 빵을 맛있게 굽기로 유명한
여행지였다. 베이커 거리가 얼마나 유명하냐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센 마을에서도 베이커 거리의
명성을 들어 봤을 정도였다.

나는 노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허리에 둘러진 노아의 팔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정말로 깊게 잠이 들었는지 힘을 쓰지 않고도 그의 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노아가 일어나기 전에 빵을 사 와서 아침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간단하게 겉옷만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잠들어 있던 노아가 내 손목을 잡았다.
깜짝이야.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어났으면 기척을 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붙잡지 말고. 이러다가 어느 날은 정말 놀라서 기절할 것


같으니까.”

이어지는 잔소리에도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그런 노아를 보니 왜인지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봤던 강아지들이 떠올랐다. 하는 짓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개였다.

“더 자.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나는 손을 털어 노아의 두 손을 뜯어냈다. 노아가 손에 힘을 주고 있는 탓에 쉽게 떼어지지는 않았지만


비몽사몽 한 사람의 손을 떼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아를 뒤로하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베이커 거리는 여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침 일찍 왔음에도 베이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과연 유명한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단 사람이 제일 적은 가게에 들어가서 줄을 섰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담백한 빵 냄새가 살포시 몸을


감쌌다.
“여기, 주문하신 빵 나왔습니다.”

주문한 빵이 나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여관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바다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태양이 위로 떠올랐으니 한 시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나는 얼른 개별 포장된 빵들을 품에 안고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쯤이면 노아도 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악! 카른! 공을 어디에다가 차는 거야!”

그때 등 뒤에서 한 어린아이가 꽥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짚을 엮어서 만든 거칠거칠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 내 발치로 왔다. 굴러온 공은 통, 하고 내 다리에


부딪혔다. 나는 품에 빵을 가득 안은 채 그 공을 내려다봤다.

“카른! 또 헛발질을 해서 공을 이상한 데다가 차 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공이 굴러온 동선을 따라 한 남자아이가 총총 달려왔다. 뒤쪽에 아이 또래의 소년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공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카른이 공을 잘 못 차서 자주 저렇게 헛발질을 하고는 해요.”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주절주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공을 주워들었다. 아이는 시선을 공에 집중시킨
채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처음에는 아이가 내게 그렇듯 나도 아이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품 안에 있는


빵들을 무사히 여관까지 옮기는 일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이의 빛나는 은발이었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세상에서는 명도가 낮은 색상의 머리카락이 가장 흔했다. 그와 반대로


명도가 높은 백발이나 은발이 가장 희귀한 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소설 속에서 알베르트가 특히나 더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천사의
그것을 닮은 백색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은색 머리카락을 보게 되다니. 완전히 새하얀 백발과는 달리 은발은 햇빛을 받고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서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멍하니 바보처럼 아이를 쳐다봤다. 어쩐지


아이의 은색 머리카락이 익숙했다.
마침내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순간 팔에 힘이 빠질 뻔한 것을 겨우 지탱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산 빵을 전부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마주친 아이의 보라색 눈동자와 은발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어쩐지 단검에 박혀 있던 자색 보석과 비슷했다. 나는 홀린 듯 멍하니 아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쩌면 내가 그냥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검이 생성되는 것과 동시에 몽마의 자아는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나. 애초에 이


아이는 인간이었다. 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같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니 조급해졌다. 나는 얼른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려는


아이를 불러세웠다.

“저기, 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신경 하나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그런지, 아이는 나를
돌아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뿐 겁을 먹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발에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닮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아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관찰했다.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아이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78-

어쩌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은 천천히 아이의 정수리를 향했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는지. 놀라는 얼굴,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았다.

아이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 미안. 내가 허락도 받지 않고…….”


“아니요, 괜찮아요.”

아이가 눈동자만 굴려 힐끗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내 머리카락 부드럽죠? 우리 부모님도 내 머리 쓰다듬는 걸 제일 좋아해요. 우리 가족 중에 은발을 가진


건 나뿐이거든요.”

아이는 한 손으로는 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구불구불 꼬며 쫑알쫑알 수다스럽게


말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미셸. 미셸이에요.”

미셸. 상당히 중성적인 이름이었다.

“……누나는요?”

자꾸만 나를 힐끗거리며 내 반응을 살피기만 하던 미셸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내 이름을 묻는


듯했다.

“스텔라야.”
미셸은 입안에 내 이름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발음해 봤다. 마르주 왕국 특유의 높낮이가 적은 억양으로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그래요. 그럼 안녕, 스텔라 누나. 나는 이제 친구들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게 가면 나한테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하거든요. 특히 카른이 잔소리가 제일 심해요. 공도 제일 못 차는 게.”

속닥속닥 비밀을 말하듯 제 친구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셸은 나를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스텔라 누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녕, 미셸.”

멀어지는 미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주저앉아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미셸이 공을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던 카른이 돌아온 제 친구를 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미셸! 저기서 도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네가 올 때까지 놀지도 못하고 한참을
기다렸잖아.”
“갑자기 저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래. 그리고 애초에 공을 이상한 데에 찬 건 너잖아.”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너랑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냐고? 미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카른과 말다툼을
하는 사이 이미 그녀는 너무 멀리 가 버려 점만큼 작아져 있었다.

아니. 일평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른이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미셸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어쩐지 고개를 쉽게 돌릴 수가 없었다. 미셸은 여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여자가 서


있던 그곳을 응시했다.

***

어느 날 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더 이상 환영이 보이지 않느냐고.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어느 순간부터 환영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안 보여. ……최근까지는 그랬어.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도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환영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새 다음 마을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전에 베이커 거리에서 만났던 미셸이라는 아이가 자꾸 떠오르기는
했지만 미셸에 대한 생각을 꾹 누르고 마차에 올라탔다.

“내일 사토르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대.”

“축제? 축제가 열린다는 말 들어 본 적 없는데.”

“축제가 열리는 걸 모르고 계셨습니까?”

앞에서 얌전히 마차만 몰던 마부가 갑자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토르 마을의 축제는 화려하기로는 마르주 왕국에서 가장 유명합니다. 축제 때에 딱 맞춰 사토르 마을을


방문하신다니, 방이 남은 여관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부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자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방문객이 많은 축제 때는 여관을 찾는


손님들도 많은 게 당연했다.
어떡하지? 행선지를 바꿔야 하나? 아니면 길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하나?

“이다음에도 저희 마차를 이용하신다면 여관을 알아봐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토르 마을에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여관이 하나 있는지라.”

그제야 나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마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하실는지요?”

“저는 사토르 마을에서 사흘간 머무르다가 델로네 마을로 이동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나는 이다음 마차비까지 합한 가격을 마부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부는 활짝 웃으며 밝은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사흘 후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여관방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 불리한 제안도 아니었고. 따로 마차를


잡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우리는 사토르 마을에 도착해 소개받은 여관을 찾아갔다. 마부의 이름을 대니 여관 주인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줬다.
그뿐인가. 여관 주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제국의 것임을 눈치채고 기꺼이 마르주 왕국의 옷을 한
벌씩 기부해 줬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제국의 옷과는 달리 마르주 왕국의 옷은 무릎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특징이었다. 활동하기에는 마르주 왕국의 것이 훨씬 편했다.

남성의 바지도 제국의 것보다 기장이 조금 짧았다. 제국의 바지가 발목을 전부 덮는 것이 특징이었다면
마르주 왕국의 바지는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았다.

“이제 갈까.”

어느새 해가 지고 축제가 시작될 시간이 됐다. 벌써부터 마을에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켜지고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아는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가 어색한지 광장으로 향하던 도중에 이따금 멈춰 서서 맨땅에 발을 굴렀다.

나는 노아의 손을 잡아끌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음식 냄새를 풍기는
가게들과 사람들이 늘어났다.

“노아, 잠깐. 저거.”

나는 지나가다 어느 가게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노아는 내 소매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멈춰 서면


노아도 자연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손가락 끝은 닭을 통째로 굽고 표면에 양념을 발라 파는 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노아는 내 뜻을


알아채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이지만 맛은 최고였다. 벤치에 앉아 축제를 구경하며 음식을 먹고 있으려니 아리안이


떠올랐다.

아마 아리안이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그녀는 또 도박을 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을 것이다.


나는 음식을 입에 넣고 혼자 쿡쿡, 하고 웃었다.

둘이 먹으니 닭 한 마리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고된 마차 여행을 끝내고 처음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특히 더 맛있었다.

“손이나 씻으러 가자.”

사람들은 종종 분수대에서 손을 헹구고는 했다. 우리는 냅킨으로 먼저 대강 손을 닦아낸 후 분수대에 손을


집어넣었다.

먼저 손을 헹궈낸 노아가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뭐가 있나? 고개를 쭉 뻗고


기웃거렸으나 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광장이야.”

“그건 나도 알아. 근데 광장이 왜?”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데.”

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뛰었다.

정말이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는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젊은 남녀가 빙글빙글 돌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쩐지 멀리서부터 흥겨운 음악이 들리더라니.

“들어가자. 들어가자, 노아.”

“잠시만, 나는…….”

노아가 뭐라고 따지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얼른 노아를
데리고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청객이 달갑지 않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은 방긋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고는 함께 빙글빙글 춤을 췄다.

음악의 한 파트가 끝나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야만 할 때가 왔다. 나는 노아의 손을 놓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또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기꺼이 내 손을 놓아 줬다. 뜻밖의 일이라 조금 당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가 다음 남자의 손을 잡은 것과 동시에 한 여자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노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노아와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노아의 시선은 쭉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음에도 노아 쪽에 쓰이는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딱딱한 얼굴로 삐거덕거리며 흥겨운 춤을 추는 모습이 웃겼으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몸이 왜 그렇게 딱딱한 통나무 같냐며 놀렸을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는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발을 헛디뎌 다리끼리 꼬일 뻔한 것을 겨우


피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차이는 있으면 좋은 것과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눈을 감고 춤을 췄음에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쪽이 더 긴장감이 넘쳐서 좋았다.
여행하는 내내 노아는 꽤 훌륭하게 동료 역할을 해냈다. 확실히 곁에 있으면 좋았다. 적어도 함께 있으면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기본적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깔린 것이었다. 그럼,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은?

-79-

노아가 없으면……. 나는 마탑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노아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나를


떠났었다.

없으면, 없으면. 어떨까. 나는 노아가 없어도 되는 걸까?

아니, 안 된다.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미 나는


네가 곁에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으니.

그럼 이게 사랑인가? 겨우 이런 별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좀 더 방대할 줄 알았다. 노아가 하도 사랑, 사랑. 혀에 사랑이라는 말을 새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굴길래 사랑이 그만큼 위대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자각했으나 온몸이 울릴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빠를 뿐,


나는 꽤 평온했다. 그래도 평소보다 감정이 고조된 건 맞았다.
오래전, 오두막에서 노아를 향해 심장이 뛰었었던 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가 나를 구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심장을 울렸었다.

그 이후로 그를 보며 심장이 콩콩 빠르게 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낼까? 그리고 따스한 양 뺨을 쥐고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 확신한


것에 대해 주절주절 말해 버릴까?

안타깝지만 그런 짓을 벌일 만큼 충동적이지는 못했다. 갑자기 행렬을 무너뜨리고 빠져나가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음악에 맞춰 빙빙 돌다가 노아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볍게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한 피리 소리를 따라갔다. 노래 한 곡이 끝났을 때쯤 나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노아를 만났다.

“안녕, 노아.”

나는 살갑게 웃고 발을 구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을
노아의 등에 얹었다.

내가 먼저 춤의 종류를 바꿨고 노아는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정해진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추는


춤이라기보다는 넓은 공간을 무대로 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추는 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광장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광장에서 벗어난 데는 춤의 특성이 그러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가 추고 있던 춤은 축제에서 추는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 거리가 먼 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어 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춤을 어디서 배웠더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 년 전에 억지로


알베르트에게 배운 춤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불쾌해서 더 이상 춤을 출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불쾌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너무


많이 춰서 질려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벗어나자 우리의 춤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드니 분수대


앞이었다. 똑같은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좋아 보이더라.”

“좋았지. 사람들 틈에 섞이는 건 재밌으니까.”

“나도 좋았어. 누나의 그 표정이.”

“…….”
“좋아해.”

그리고 노아가 짧게 덧붙였다. 사랑한다고.

너는 항상 같은 말만 한다고 지적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항상 같은 말이라도 듣기에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뭐?”

노아는 꽤 놀란 듯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랑할지도 모르지. 미운 정이든 뭐든 결국은 애정이니까.”

“…….”

“이러면 좀 말이 애매한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사랑이 맞는 것 같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는 있으면 좋은 거고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없으면
안 되는 거래.”

나는 광장에서 춤을 추며 생각했던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래?”

“근데 지금의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거든.”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공간만큼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분수대에 고여 있는 물의 표면을 쓸면서 만지던 노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매일 하는 말이잖아.”

“그건…….”

노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내가 마탑을 떠났을 때를 기억해?”

“당연하지. 네가 저지른 최고로 멍청한 짓인데.”

나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당시에는 힘들고 막막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니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과연 시간의 힘이란.
“그럼 누나는 내가 그 멍청한 짓까지 저지르면서 떠났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낮게 가라앉은 노아의 목소리에 내 웃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누나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아니까 떠난 거였어.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얼마나 나를 누르고 또


눌렀는지 알아?”

“아니.”

“그래, 모르겠지. 알았으면 나를 찾으러 따라오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분수대를 응시하다가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주친 노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바다처럼, 깊고
깊은 심해처럼 공허한 눈동자가 조명을 받고 빛났다.

그 눈동자가 오래전 그의 것을 닮아 있었다. 오두막에서, 내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을 때와 비슷했다.

“근데 누나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누나를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눈동자를 파


버려도 된다는 뜻이고 누나랑 어깨가 닿은 놈은 어깨를 아작내 버려도 된다는 뜻이야.”

“……어떻게 하면 내가 한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어?”


“그래도 돼?”

“그러지 마. 그러면 이 감정이 사랑인 것 같다고 했던 말 취소할 거니까.”

“언제는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야?”

“죄를 무작정 감싸 주는 건 사랑이 아니야.”

갑자기 대화를 하다 말고 노아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다가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노아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노아가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뻗어 그 남자를 가리키며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방금 누나를 쳐다봤어.”

“……하지 마. 그리고 나를 쳐다본 게 아니라 분수대를 본 거잖아.”

……응. 노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툭 대답을 뱉었다.

나는 물기에 젖은 노아의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잡고 들어 올렸다. 아직 손등에 묻은 물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문질러 닦았다.

그 위에 입술을 비볐다. 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완전히 접었다. 어느새 그의 매끈한


손등이 붉어져 있었다.

“……반칙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해 준 적 없으면서.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게 전부였잖아.”

“그래서 싫은 건 아니잖아.”

노아가 나머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목조목한 작은 얼굴은 한 손에도 다 들어갔다.

“……가자. 돌아가자, 누나. 이 기분으로는 축제를 더 즐기지도 못해.”

“그래.”

축제는 며칠씩이나 계속됐지만 우리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사토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노아가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며 방을 하나 더 잡은 뒤 종일 방에 박혀 있던 탓이었다.

돈을 아껴야 하니 방은 하나만 잡자고 할 때는 언제고.

***

“노아.”
쿵쿵. 나는 가볍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제 다음 마을로 가야 하거든? 마차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빨리 안


나오면 나 혼자 출발할 거니까.”

그제야 안에서 짐을 챙기는 듯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아가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다음 목적지는 델로네 마을이야. 이번에는 더 열심히 조사했어. 다행히 축제 같은 건 안 열리더라고.


여관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다행이네.”

“……너 뭐해?”

마차에 올라타는가 싶더니 그는 가방만 마차에 태우고 자신은 벽이 없어 뻥 뚫린 짐칸에 대충 앉았다.

“조금 더워서.”

“곧 겨울이야. 벌써 입김이 나오는데 더운 게 말이 돼?”

“옷이 두꺼워서 괜찮아.”

하나부터 열까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였다. 노아는 겨우 바람만 막아 주는 얇은 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오라고 설득을 해도 노아는 짐칸에 앉아 고집스럽게 버텼다. 추울 것이 분명한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우직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네가 앞에 타지 않겠다면야……. 나는 천천히 다가가 노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도망치기 전에


얼른 마부를 불러 말했다.

“출발해 주세요.”

그제야 노아가 짐칸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마차는 이미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마차를 멈춰 달라고 하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매섭게 물었음에도 노아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짐칸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그는 쭉 반대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그냥 내 얼굴 보기 싫어서 그래?”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제일 최근에 내가 노아한테 한 행동이 뭐가 있었지.


설마 분수대 앞에 앉아 노아의 손등 위에 입술을 비볐던 게 문제인가? 갑작스럽게 깨달은 감정에 사로잡혀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는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게 기분 나빴나?

처음은 걱정이었다. 내 행동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나, 하고. 하지만 그 이후 느껴진 것은 분노였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답답함이 확 치솟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노아의 얼굴을 잡고 돌려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기 봐. 고개 돌리지 마.”

“…….”

“뭐가 문제야? 저번에 내가 허락 없이 손등에 입술을 비벼서 그래? 그런 거면 사과할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뭐야.”

노아가 꾹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얼른 말하라니까. 나는 노아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싫다고 도망쳤었으면서 어쩌자고 다시 걸어들어와.”

“어쨌든 내가 직접 온 거잖아.”

“나는 분명 놓아 줬는데 누나가 다시 들어온 거야.”


“그래.”

“확실히 대답해.”

“그래, 맞아. 맞다고. 이제 됐어?”

응. 그의 짧은 대답이 꽤나 진중하게 울려 퍼졌다.

노아는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반복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그가 원하는
확신을 선물했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그는 꽤 침착해 보였다.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이쯤이면 됐겠지. 나는 이제 슬슬 잡고 있던 노아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다만, 되려


노아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긴 덕분에 나는 오히려 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시야에 노아의 얼굴이 가득 찼다. 마차 짐칸에서 이게 무슨. 싸구려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구식의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분위기에 취해 바보같이 눈을 감았다. 이마부터 시작해


점점 내려오며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덜컹덜컹, 마차가 힘차게 달리는 바퀴 소리가 조용한 들판 위로 울려 퍼졌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完 /

-외전 1-

외전 1

아리안이 처음으로 세상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거스르고,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간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모였다. 아리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리안이 태어나고 그녀의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났다. 가르트, 네바에, 티타, 에슨.
아리안이 보기에 하나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동생들이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기는 건 첫째인 아리안과 둘째인 가르트의 몫이었다.

그리고 첫째인 아리안이 열다섯, 막내인 에슨이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부모는 일을 나갔고, 아리안은 심심하다며 칭얼거리는 에슨을 데리고 숲으로 갔다.

아리안은 에슨을 주변에서 뛰어놀도록 둔 뒤 두꺼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었다.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리안은 깜빡 잠이 들었다. 전날 침대에 누워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책을 읽은


탓일 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에슨을 찾았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했으나 에슨이 보이지 않았다.

“에슨……?”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하더니, 혼자 집에 돌아간 건가? 아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집 쪽을 향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흙바닥에 찍혀 있는 작은 발자국이 아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

에슨의 것처럼 보이는 발자국은 숲 깊은 곳을 향해 있었다. 말도 안 돼, 맙소사. 아리안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에, 에슨…….”

발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장 숲의 깊은 곳을 뛰어갔다.


“에슨! 에슨! 어디 있어!”

헉, 헉. 산꼭대기에 올라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숨이 찼다. 그럼에도 아리안은 뜀박질을 멈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밤의 숲은 위험했다. 아리안이 잠들었던 곳은 숲의 끝자락이기 때문에 짐승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이야기가 달라진다.

숲에는 사나운 늑대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단다. 이것이 바로 마을의 어른들이 항상 아리안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아리안도 늑대를 본 적이 있었다. 신기한 풀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숲으로 조금 들어와 버린 후였다.

숲의 깊은 곳을 바라보다가 사람이 엎드린 듯한 형체를 보았다. 어렸던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늑대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마을을 향해 도망쳤다.

일평생 살면서 그 순간보다 절박했던 때는 단연코 없었다. 아리안은 숨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


숲에서 빠져나왔다.

마을에 도착해 울타리 안에서 숲을 바라보니 숲 끝자락까지 그녀를 쫓아온, 노란 눈을 가진 늑대가 빤히


아리안을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아리안이 목이 쉴 때까지 에슨을 부르며 달렸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보다 특히 더 정이 많았다. 만약 이


일로 에슨이 죽는다면……. 아리안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끝까지 하지 못한 말은 이것이었다. 에슨이 죽는다면 나도 따라 죽어 버려야지.

아리안은 눈을 감고 뛰었다. 발로 풀을 짓밟은 소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곤충이 우는 소리. 그리고…
… 어린아이가 훌쩍이는 소리.

에슨. 에슨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번쩍 눈을 뜨고 울음소리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한발 늦었다. 아리안이 에슨을 발견했을 때 이미 탐욕스러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늑대가


에슨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늑대가 에슨을 보며 그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아, 안 돼. 에슨!”

설령 에슨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아리안이 그에게 닿는다고 해도 늑대를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에슨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을 뿐이지, 아리안도 손에 무기 하나 없는 열다섯 아이였다.

아리안은 에슨을 향해 팔을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자신도 늑대에게 잡아먹힐


테였다. 굳이 동생의 마지막을 두 눈을 뜨고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감은 눈 너머로 밝은 빛이 느껴졌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자신에게 달려들었어야 할 늑대가


잠잠했다.

“흐, 흐으…….”

죽지 않은 에슨이 울먹였다. 아리안은 에슨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슬그머니 눈을 뜰 수


있었다.
에슨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에슨을 잡아먹으려던 늑대는 어디에 있지?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리안은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했다.

망치로 때려 터뜨린 듯이 늑대의 대가리는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아리안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빛이
느껴졌고…… 그 앞에는 늑대가 머리가 터진 채로 죽어 있었다.

아리안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설마 내가…….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에슨을 등에 업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미 하늘에는


달이 떴고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흐으……. 흐, 흐윽…….”

“에슨, 쉿. 울지 마. 네가 울면 늑대들이 더 몰려들 거야. 그것들은 전부 우리를 쫓아올 거고.”

에슨이 울지 않는다고 하여 늑대들이 그들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리안은 에슨을
달랬다.

에슨은 훌쩍이다가 잠들었다. 늑대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득한 순간에 잠이 들다니.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그때 아리안은 자신의 것을 제외한 다른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지만 동시에 무겁고, 빠르지만 동시에
묵직한.

맙소사. 희망이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이들을 물어뜯어 죽이기 위해 수많은 늑대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안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제발 죽어, 쫓아오지 말고 그냥 죽으란 말이야!

미세한 소리였으나 오감이 곤두선 아리안은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늑대들이 가득 숲에서 감히 방심하고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숲의 끝이 보였고 언덕 아래로 마을이 보였다. 아리안은 아무렇게나 팽개쳤던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의 울타리는 굳게 닫혀 있었으나 단순히 늑대들의 침입을 막는 용도의 것이었기 때문에 아리안이 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안! 에슨!”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들의 부모가 울먹이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아리안은 제 부모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부모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이 티가 나는 진한
흙냄새.

“도대체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니! 얼마나 걱정했는데!”

“에슨이 심심해하길래 숲에 잠깐 데려갔다가 그만…….”

“맙소사, 아리안. 너희 둘은 괜찮은 거니? 늑대를 만나지는 않았고?”

아리안은 어떻게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늑대를 만났고 에슨은 늑대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그런데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늑대가 죽어 있었다고.

설마 제가 한 짓은 아니겠죠……? 아리안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리안이 다시 그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능력을 다시


사용해 보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리안이 어렸을 당시는 주신 렌다를 믿는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성력을 가진 이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능력을 사용하게 되다니.

심지어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손만 뻗었는데 늑대의 대가리를 터뜨릴 수 있는 능력이라니. 에슨과


아리안의 생명을 구한 능력이긴 하나 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리안의 부모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안을 안아 줬다. 만약 그 섬뜩한 능력이 네 것이라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듯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리안은 제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훌쩍였다. 바쁜 농사일 때문에 자식들에게 소홀하기는 해도 어쨌든


그들은 제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리안, 진정하렴. 너는 에슨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네가 조심하기만 한다면 누군가를 해칠
일도 없을 거야. 너는 착한 아이니까…….”

그날 아리안은 동생들이 모두 잠든 어두운 방에서 훌쩍이며 부모와 약속을 했다. 절대 그 능력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기로.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되, 그 능력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지켜 주기로.

***

열다섯의 아리안이 얻은 능력은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통나무를 번쩍번쩍
들기도 했고 원하는 곳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아리안은 이 신기한 능력을 두고 마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리안은 자신이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은 그녀


자신밖에 없었으니.

그리고 그녀는 스물다섯 살 생일이 지날 때부터 점점 그 생각을 지워 갔다. 축복받은 능력? 아니,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저주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리안의 시간은 항상 능력을 얻은 지 10 년이 지난 스물다섯 살의 그해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리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때 막내인 에슨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오히려 에슨보다 어려 보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리안의 아버지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 후로는 나이순으로 가르트, 네바에,
티타가 떠났다. 모두 빵을 꼭꼭 씹어먹듯 오랜 시간 생을 즐기다가 눈을 감았다.

티타가 눈을 감던 그때까지도 아리안은 스물다섯의 외양에 머물러 있었다.

눈물이 아리안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가족이 떠날 때마다 한 번도 울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매번


그들의 손을 붙잡고 자신을 두고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마지막으로 에슨이 떠날 때 아리안은 자신이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 저주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법을 사랑했다. 네바에의 생일이 되면 하늘에 불꽃을 터뜨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마법을 사랑했고, 태풍이 불어 나무가 밭에 쓰러지면 이를 해결하고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를 띄워 주는
마법을 사랑했다.

마법은 사랑했지만 마법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영원한 시간의 저주는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외전 2-

그녀는 가족과 함께했던 집 안에 숨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죽은 듯이 조용하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마법을 연구하며 살았다.

배를 곯으면 죽을까 싶어 몇 주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으면 죽을까 싶어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몸에 힘이 조금 없을 뿐,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세지 않았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십 년 정도가 흘렀다. 아리안은 그동안 집에만 처박혀 마법뿐만
아니라 약초도 연구했다. 약초를 이리저리 섞어 만든 약물은 사람의 몸에 효과가 좋았다.

아리안은 아주 가끔 약초를 캐러 밖으로 나갔다. 마법을 이용해 이동했기에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가끔 숲에서 놀던 아이들과 마주쳤다.

아리안은 아이들과 마주치면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했다. 아주 오래전, 숲에서 뛰놀던 티타와
에슨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리안을 만났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제 부모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다. 숲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신기하게 생긴 풀을 캐고 있더라.

아리안을 본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아리안이 아이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편하게 대하던 탓이었다.

그럴수록 아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아리안은 겨우 십 년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은


것뿐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십 년은 길었다. 이제 친절하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우물가에 모여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고, 밭을
갈다가 아리안의 이야기를 했다.

가족들이 다 늙어 죽는 동안 조금도 늙지 않더라. 이상한 능력을 사용해서 커다란 통나무를 옮기더라.


그러다가 들키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끝을 흐리며 웃더라.

마녀, 저 집에 사는 여자는 마녀가 분명하다. 홀로 늙지 않고 이상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저것은


마녀다.

어느 순간부터 아리안과 그녀의 가족들이 살던 집은 마녀의 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아무도 아리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당시 왕국에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애꿎은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리안은 집안에서만 숨어 사느라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아리안의 마을에는 아직 전영볌이 돌지 않아 마녀사냥도 일어난 적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 다른


마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더라,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눈이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달도 뜨지 않은 아주


어두운 밤, 아리안은 그날도 잠을 자지 않고 약초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콩콩 문을 두드렸다. 어른이 두드렸다고 하기에는 가벼웠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이 더 어울리는 조그마한 소리였다.

이전에 숲에서 만난 애들인가? 아리안은 아이들이 실수로 솥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얼른 솥의 뚜껑을 닫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건 마을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아이들이 서서 덜덜 떨며


아리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아리안은 위아래로 아이들을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온몸에 흥건하게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단 들어오렴.”

아이들은 아리안의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가장 큰 아이는 자신도 어린 주제에
더 어린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리안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 치료할 때는 그녀가 약초를
연구하다가 만든 약을 사용했다.

이는 아리안이 상처를 잘 입지 않는 자신의 몸에 겨우 상처를 내고 실험해 본 약이었다. 역시나 약은


아이들에게도 잘 들었다.

상처는 아침이 되기도 전에 금방 아물었다. 아리안은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계속 지켜봤다. 아이들은 그


시선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던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게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가장 큰 아이가 제일 먼저 일어나 그녀에게 들여보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문을 두드린 것은 총 세 명이었는데,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하나였다. 셋은 형제인지 모두 비슷한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아이가 더듬더듬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 저는 에비타고…… 얘는 안젤라, 그리고 얘는 카를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너는 에비타. 너는 안젤라. 그리고 너는 카를.”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다른 분들은 아무도 저희를 들여보내 주시지 않았거든요…….”

“그나저나 어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이 마을에는 무슨 일로.”

에비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왔다는 것, 그곳에서 전염병이 유행했다는 것, 그들의
어미는 마녀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것, 아비는 제 아내를 구하려다가 함께 처형당했다는 것.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한 일들이었다. 아리안은 한동안 전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에비타의 얼굴만 쳐다봤다.

아리안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처음으로 마녀사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가 바깥에 관심이 없던
십 년 동안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전염병은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걸 가지고 사람을 마녀로 몰아가다니. 아리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믿고 싶지 않은 것뿐이지,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전날 아이들이 온몸에 피를 두르고 있던 것이


그 증거가 됐다.

아리안은 기꺼이 아이들을 거둬 키웠다. 갈 곳을 잃은 아이들도 내심 아리안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 다시 시간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아리안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추운 겨울이 몇 번이나
지나가고 또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리안이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니 아이들도 집 안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아리안은 심심해하는 카를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에게 약초에 대해 알려 줬다.

종종 아이들은 아리안을 대신하여 약초를 캐러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마녀의 집에서 나온 아이들을 보고


자기들끼리 이렇게 속삭였다.

마녀가 어린 마녀들을 불러왔다. 자신들이 이 마을을 지배하려는 거야, 저들은 우리를 전부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야!

물론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아리안이나 에비타, 안젤라, 카를이 마을의 술렁임을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안다고 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에 관심 따위를 할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약초였다.

안젤라는 약초를 구별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에비타는 후각이 좋아 약초가 피어 있는 곳을 곧잘


찾아내고는 했다. 그리고 카를은 그것들을 잘 조합해 훌륭한 포션들을 만들었다.

물론 수십 년간 약초와 포션을 연구한 아리안에게는 못 미치는 실력이었으나 모두 의원을 해도 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시간이 꽤 흐른 만큼 그들은 십 년 전 벌어졌던 참사에 대해서도 무덤덤해졌다. 그들은 종종 비가 오는


날에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특히 카를은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이 도망치는 걸 보고는 마녀의 자식들은 똑같이 마녀라며, 마녀들을
놓치지 말고 전부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 사람들은 저를 보면서도 마녀라고 부르더라고요. 저는 여자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죠.”

“푸핫.”

안젤라가 잘못 만든 딱딱한 빵을 질겅질겅 씹어먹던 에비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는 결국 입에 들어


있는 빵을 뿜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악! 누나! 지금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아니, 갑자기 그때 그 바보 같던 일이 생각나서.”

카를이 더럽다며 기겁을 하자 에비타는 카를을 마구 때리며 꺽꺽 웃었다. 웃으면서 옆 사람을 때리는
에비타의 버릇을 아주 잘 알고 있던 안젤라는 이미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

“푸핫, 하하. 진짜 바보들 아니야? 완전 웃기지 않아요, 아리안?”

본인들이 덤덤하게 말하는데 상황을 진중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아리안은 그냥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아리안.”

그때 안젤라가 아리안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안젤라가 아리안보다 훨씬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귀에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안은 멍하니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을 지켜보다가 빙긋 웃었다.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로
새로운 가족을 얻은 기분이었다.

***

왕국에 지독한 전염병이 또다시 유행했다.

전염병이 지나는 자리는 하나같이 고요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어 흙으로 돌아가거나 불에 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매번 운 좋게 전염병을 피해가던 아리안의 마을도 이번만큼은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강 주변에서 뛰어놀다가 목이 말라 강물을 떠먹은 아이였다.

아이는 며칠 후 제 어미와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다가 픽 쓰러졌다.

아이는 제 어미에게 병을 옮겼고 그녀는 남편에게 병을 옮겼다. 그는 제 일터 동료에게 병을 옮겼다.


그렇게 하나둘 마을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조시도 병에 걸렸다고! 이게 가능해?! 이런 병은 태어나서 평생 본 적도 없어!”

“우리 가족은 나 빼고 전부 침상에 누워 있어. 간호를 해 주고 싶어도 나까지 병에 걸릴까 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마녀! 마녀의 짓이야. 마녀가 한 짓이 아니고서야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소란스러운 마을과 달리 하늘은 잔잔했다. 바람은 불고 구름은 여유롭게 푸르른 하늘을 쓸고 지나간다.
하늘을 가득히 메우는 태양은 적당히 눈부셨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 어두컴컴한 한밤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오르는 분노만큼
뜨거운 횃불을 들었다. 병을 퍼뜨린 괘씸한 마녀를 불태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불에 타도 죽지 않는 저주를 받은 데다가, 당시 아리안은 약초를 캐느라 집에 없었다.


집을 지키고 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에비타, 안젤라, 카를.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저 약초를
좋아하는 아이들.

-외전 3-

아이들을 거둬들인 지 1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아리안은 에비타에게 푸른색의 단단한 돌을 하나 쥐여 줬다.

그녀의 마력을 담은 마력석이었다. 아리안이 약초를 캐러 나갔거나 집에 없을 때 급한 일이 생기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는 용도였다.

물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력석이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마녀라며


두려워했고, 그 덕분에 그들의 집은 언제나 평화로웠으니.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염병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던 두려움을 지워 버렸으며 근본 없는 용기를 불러냈다.

사람들은 아리안의 집에 쳐들어가 카를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으며 에비타와 안젤라에게


발길질을 했다. 횃불에서 떨어진 불씨로 인해 집이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에비타는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반항하며 불타오르는 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안 돼. 집이 불타면, 안 되는데……. 에비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처음 아리안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저 낡은 집에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물건들, 그리고 여섯 명의 단란한 가족이 그려진 작은 액자. 아리안은 종종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
액자를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들이, 아리안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전부 불타고 있다. 에비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마력석을 찾기 위해 품 안을 뒤졌다. 어서 아리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마력석을 주면서 급할 때 이것을 깨뜨리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신호가
올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동안 혹시라도 잘못 깨뜨릴까 봐 조심히 지니고 다녔던 것을 드디어 세게 쥐어 깨뜨렸다. 마력석을 세게


쥐자 퍼석, 하고 낙엽이 짓밟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리안이 도착하는 데는 눈을 깜빡일 만큼 짧은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에비타가 마력석을 깨뜨리고 그


가루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아리안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아, 아리안…….”

그녀를 발견한 카를이 울먹이며 아리안을 불렀다. 그에게는 평상시의 활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공포에
질려 기가 죽은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아리안은 아이들을 보기 전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최근 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대부분은 아는 얼굴들이었다.


저 사람은 톰이었나. 이십 년쯤 전에 늑대한테 물려 죽을 뻔한 걸 내가 몰래 도와 줬었지. 저 사람은
에드나인 것 같은데. 십오 년 전쯤 딸이 아플 때 약을 줬었고. ……딸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갔나.

아리안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떠올린 기억들은 전부
에슨이 살아 있던 적의 일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로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침착하던


아리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아리안이 짧게 탄식을 뱉었다.

한참 전부터 무섭게 집을 집어삼키던 불은 어느새 사그라들어 마지막 불씨마저도 가라앉았다. 불을 끌


것도 없이 이미 집은 전부 타 재가 되어 버린 후였다.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제집에 불을 지른 것이 마을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왜…….”

나는 당신들을 도운 일 외에는 아무 짓도 한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지만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기억이란 아주 약한 것이라서, 기억을 보관하던 매개체가 사라지면 그 기억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 쉽다.

“…….”

아리안은 전부 타서 회색 재가 되어 버린 집을 멍하니 응시했다. 가족들과의 추억이 담겨 있던 것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완전히 사라져서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아리안은 꾹 주먹을 쥐었다.

“…….”

가장 서러운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액자에 그려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겨우 유지하던 희미한 기억마저 이제 지워져 버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리안을 보고 잠시 주춤했던 이들이 아리안이 눈물을 흘리자 다시 용기를 얻었다.

“마녀, 허공에서 마녀가 나타났다!”

“저년이 우리 마을에 병을 퍼뜨렸어!”

“죽이자, 마녀를 죽여!”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귀가 웅웅거렸다. 마녀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때 누군가 달려와서 날카로운 낫을 휘둘렀다. 아리안은 불타 없어진 집에 정신이 팔려 공격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낫이 여린 살을 가르고 아리안의 어깨에 박혔다. 그 광경을 보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에비타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리안은 귀가 찢어질 듯이 울부짖는 에비타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야
어깨의 고통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순간순간이 비현실적이었다. 자신만 제외하고 전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절대 그녀의 시간이 빠르게 흐를 리는 없을 텐데도.

자신의 목을 향해 낫이 날아오는 시간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최근 십 년 동안 이렇게 그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공포에 질려 흐느끼고 있는 아이들이 가장 안쓰러웠다. 마녀로 몰리던 마을에서 도망쳐 이곳까지
온 아이들에게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아리안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날아오던 낫이 아리안의 목에 닿으려던 순간, 땅에


번개가 내리쳤다.

콰릉. 번개는 천둥과 거센 비를 이끌고 찾아왔다. 번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타죽고 시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내리쳤다.

아리안은 온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눈길로 마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죽이러 온 악랄한 마녀인가 보지.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됐어요. 이 능력을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고,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그 약속 지키지 못했네요.

그래 봤자 당신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도 내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내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겠지만…….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에비타가


힘없이 다가와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리안…….”

“……에비타.”

“……미안해요. 집이 타 버리기 전에 아리안을 불렀어야 했는데…….”

아리안은 침묵했다. 에비타는 불안한 강아지처럼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집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그녀가 자신들을 버릴까 봐 불안한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마침내 아리안이 입을 열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다른 마을로. 이 마을에는 이제 못 있겠다.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아리안…….”

불에 다 타 버려서 챙길 것이 없었다. 아리안은 에비타, 안젤라, 카를의 손을 잡고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그녀가 평생을 살아왔던 마을에는 이제 산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주변 마을들에는 마녀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마녀가 그 마을에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병에 걸리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녀에게 직접


살해당했다고. 이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리안은 씁쓸하게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

아리안은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마을에 정착했다. 새롭게 도착한 마을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여기는 평화롭네.”

“평화롭기는 저번 마을도 평화로웠어. 사람들의 본심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드러나는 거야.”

카를이 멍하니 한 말에 에비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제 딴에는 아리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안은 청력이 좋았다.
아리안은 에비타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그들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다.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이 성장할 동안
아리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그들은 아리안의 가족과도 같았다. 그녀의 가족도 늙지 않던 자신들의
딸을, 언니를, 누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었다. 그녀의 시간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도.

하지만 단순히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저주로 인해 얻게 된 힘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달랐다.
자신이 그들을 도왔던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웠다. 심지어
자신은 전염병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그래도 그녀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수십 명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다. 마법을 연구하느라, 죽기 위해서, 이처럼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묵묵한 얼굴로 아리안을 살피던 안젤라가 조그마한 병에 담긴 약물을 아리안에게


내밀이었다.

“제가 만들었어요. 악몽을 꿀 때 마셔요.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리안은 안젤라의 선물을 받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편하게 잠들어서는 안 됐다. 자신이 편해진다는 것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적어도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안은 가만히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수십 년이 흐르면 이 마을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아리안에 대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은 또 그들을 마녀로 몰아 공격할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만든 추억이 또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아리안은 아이들을 한데 불러서 말을 꺼냈다. 만난 지 십수 년이 흘러서 이제


그들은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나는 떠나려고 해.”


-외전 4-

꽤 진지하게 말을 꺼냈으나 정작 그 말을 들은 에비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한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떠난다고요? 이 마을 사람들도 아리안한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였어요? 뭐, 아리안이


떠나겠다는데 저희가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이번에는 어느 마을로 갈 거예요?”

“아, 그러니까.”

혼자 떠나려고 하는데. 아리안이 말끝을 흐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을 마시던 카를의 입에서 폭포처럼 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평소라면 더럽다며 구박을 했어야 할


에비타가 조용했다. 그녀는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건 안젤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잘 이해가 안 돼서.”

“말 그대로야. 너희는 여기에 있어. 나는 떠날 테니까.”

“왜요? 이유라도 말해 줘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안젤라였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리안이 떠나려는 이유를 물었다.

“이번 일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나야, 나. 나 때문이라고. 내가 이상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 일어난 일이잖아. 너희는 괜히 나랑 있다가 어느 순간 마녀로 몰려서 죽을지도 몰라.”

“맙소사, 아리안. 그런 진부한 핑계는 뭐예요.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연극에서도 그런 대사는 안 쓸


거예요.”

“언니. 그런 말은 좀…….”

“왜, 사실이잖아.”

에비타가 안젤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아리안은 에비타가 화가 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만약 그녀가 화를 낸다면 저런 표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잠 제대로 못 잤던 거 다 알아요.”

“아, 그건.”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

“왜 죄책감을 갖는 거예요?”

에비타의 말이 머리를 쿵 울리는 듯했다. 그야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을 죽였다.
그야말로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었다.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야.”

“그럼 그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에요. 아리안의 집을 태운 게 누군데요? 아리안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저희를 죽였을 거예요. 저도, 안젤라도, 카를도.”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돼.”

“그 사람들이 저지른 죄도 정당화될 수 없어요. 아무 죄 없는 아리안한테 낫을 휘둘렀잖아요!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상처가 심하게 덧나서 죽었겠죠.”

아리안은 십수 년 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에비타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봤다. 마을 사람들과


연관된 문제가 유독 그들에게 민감한 사항인 탓이었을까.

“……나는 정말로 악랄한 마녀일지도. 망설임 없이 수십의 사람들을 죽였어.”

“그럼 저희는 마녀가 맞나 보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뭘 하든 뭐라고 하든 사람들은 우리를 마녀로
생각할 텐데.”

아리안은 자신만을 마녀라고 칭했다. 그리고 에비타는 자신과 에비타, 카를까지 전부 포함해 마녀라고
칭했다. 뭐, 애초에 마녀는 사람들의 공포가 형상화된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기는 했으나.

갑자기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리안은 놀라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투명한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리안은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젖은 손등을 응시했다.

그녀는 가족들과의 추억이 불탔을 때도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다. 에슨이 죽고 난 뒤 홀로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 펑펑 운 이후로 이렇게 운 것은 수십 년 만이었다.

에비타는 으이구, 따위의 소리를 내며 아리안을 끌어안았고 안젤라는 말없이 아리안을 끌어안았다.
카를은 셋의 눈치를 보다가 에잇, 하며 팔을 넓게 벌려 셋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에게 안겨 위로를 받는 기분이란. 아리안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아리안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칭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죄인의 죄를 감싸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흔쾌히 죄인을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자처했을 것이다.

결국 아리안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리안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음에 제각각으로 기뻐했다.
에비타는 방긋 웃었고 안젤라는 희미하게 웃었으며 카를은 바보처럼 웃었다.

그렇게 또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들은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숲속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집을


짓고 살았다.

카를은 나이가 들고 뒤늦게 술에 빠진 탓에 자신의 누나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는 에비타가,


그 후로는 안젤라가 차례대로 눈을 감았었다.

안젤라가 죽기 전 어느 햇살 좋은 날에, 아리안과 안젤라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리안의 시간은


여전히 스물다섯에 머물러 있었고, 안젤라의 시간은 그때에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아리안이 안젤라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믿지 못할 테였다. 겉모습만으로는


아리안이 안젤라의 손녀로 보일 정도였다.

안젤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아리안, 당신은 이곳에서 저희와 행복했나요?” 아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즐기는 것보다 다 함께 에비타와 카를이 잘못 만든 빵을 먹어치우는 게 더 즐거웠다고. 네가
나를 걱정해 만든 약물을 받았을 때는 금은보화를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노라고.

함께 산 세월이 오십 년을 훌쩍 넘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안젤라는 아리안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얽매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요, 아리안.”

안젤라는 그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비타를 따라갔다.

더 이상 세상에는 아리안을 얽맬 것이 없었다. 가족들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은 이미 오래전 불에 타


사라졌고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을 나타내는 물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직접 자신들의 물건을 정리한 탓이었다.

그들은 결혼조차 하지 않고 죽었다. 아리안이 자신들을 그리워할 매개체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고 그저 그렇게 살다 보니 연인을 만들고 사랑을 할 시간도 없었다.

때문에 아리안은 비교적 홀가분하게 그들이 살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에비타와 안젤라,


카를이 원하던 바였다. 그들은 아리안이 가끔 저들의 무덤을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생각했기에.

물론 홀가분하다고 하여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카를이 죽었을 때도, 에비타, 안젤라가 죽었을 때도


아리안은 매번 묘지 앞에서 울부짖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시간의 저주를 원망하며.

하지만 그녀는 이제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람으로 치유가 가능함을 알게 됐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안녕, 안젤라.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잘 있어. 안녕, 에비타. 안녕, 카를.”

아리안은 묘비에 대고 하나하나 인사를 한 후에야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이후 아리안은 새로운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을 경계하다가도 마을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는 등 친절하게 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유롭게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안젤라가
말한 것처럼,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서.

하지만 소중한 것을 찾겠다는 욕심과 강박 때문이었을까.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리안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녀에게 중대한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리안은 집에 틀어박혀 마법을 연구했다. 이제 그녀는 원한다면 홀로 왕국도 갈라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왕이면 평화로운 세상이 좋았다. 아리안은 조용히,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이번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고 둔했다. 수년에 한 번씩 아리안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나가도


'저번에 저 집에 살던 여자의 딸인가?'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평생 그녀는 가슴이 설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마을은 사람들이 둔하니까, 한번 해 볼까?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고는 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들마저도 아리안보다는 훨씬 어렸다. 그녀는 에슨보다도 늦게 태어난 이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리안은 마을에서 인기가 많다는 한 청년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다. 청년은 아리안이
약초를 캐는 숲까지 찾아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실 텐데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죄송하지만 좋아해요. 저번에 우물가에서 첫눈에


반했어요.”

“……?”

이 대사,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리안은 약초를 뜯다 말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

때는 네바에가 살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마을에서 연극을 한다며 아리안에게 함께 갈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고, 아리안은 귀찮은 척하다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당시 연극의 한 대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리안은 그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 렐라.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상점가를 거니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사랑해요, 렐라.

아리안은 간만에 그 대사를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시 연극의 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리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백할 때 사용하는 대사보다는


나이 차이였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니?”

“네? 나이요?”

“그래.”

“아, 스물한 살입니다.”

맙소사! 아리안은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다. 스물한 살이라고?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거의 방금 전에 갓
태어난 수준이었다.

-외전 5-

“안 돼.”

아리안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청년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감자 바람을 타고 아릿한 약초 냄새가 풍겨왔다. 아리안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이 차이요?”

청년은 아리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사고로는 아리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 그러니까…… 아가씨는…….”

“아리안.”

“아, 네. 아리안. 하지만 아리안도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걸요. 많아 봐야 다섯 살 차이


정도일 텐데.”

다섯 살은 무슨. 내가 너보다 가뿐히 이백 년은 더 살았을 텐데. 아리안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안 돼. 게다가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럼 제가 누구인지 알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말이 그렇게 돼?”

그 후 청년은 아리안이 언제 어디에 있든 매일 그녀를 찾아와 눈도장을 찍었다. 때문에 아리안은 알고


싶지 않아도 청년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푸른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이름은 알마스. 예의가 바르며 친절하고 상냥하며…… 사실 이런 것들은


아리안에게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귀찮다고 생각한 것은 알마스의 성실함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안. 좋은 아침이죠?”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만.”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런 일이나,

“아, 아리안! 여기서 약초를 캐고 있었군요. 아리안을 만나다니, 마침 오늘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길


잘했네요.”

혹은 이런 일. 알마스는 ‘우연히’를 특히 강조해서 말했다.

“우연히? 이곳은 숲으로 연결된 길이라 늑대가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데. 그런
길을 우연히 걷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아리안은 약초를 캐고 있었던 거예요? 빨리 마을로 돌아가요!”

“약초를 다 캐기 전까지는 돌아가기가 곤란한데.”

알마스는 아리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일을 돕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미숙하게 약초를 캐면서도


불안한지 숲 쪽을 계속 힐끗거렸다.
“무서우면 먼저 가도 될 텐데.”

“아니, 아니에요. 무서운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갑자기 늑대가 튀어나올까 봐…….”

“결론은 늑대가 무섭다는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다음날 알마스는 늑대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괭이를 챙겨왔다. 끝이 뭉툭하고 녹슨 낡은 괭이였다.

저딴 걸로 늑대를 잡겠다고 설치다니……. 아리안은 한심한 표정으로 알마스와 괭이를 쳐다봤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리안은 약초를 캘 때 항상 늑대를 쫓는 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늑대가 갑자기
그들을 덮칠 일도 없었다.

알마스는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 늑대를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아리안의 일을 도왔다. 그것은


약초를 캐는 일일 때도 있었고 약초를 씻어서 말리는 일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해가 지나가고. 하루는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홀로 묵묵히 약초를 캐며 알마스를 떠올렸다. 알마스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리안이 답을 하지 않아도 계속 말을 걸었었다.

그래, 그렇겠지. 어차피 계속 받아 주지 않으면 결국은 포기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 다 그렇지
뭐. 변덕스러운 게 사람이지, 변덕스러워야 사람이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
마침내 아리안은 약초를 캐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곧바로 마을로 내려왔다. 둔감한 마을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아리안은 보고도 살갑게
반겨 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숲 근처에 사는 아가씨 아니야? 어머니는 또 안 모시고 나왔나?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없군 그래.”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계세요. 그나저나 저 여쭤볼 게 있는데…….”

어머니는 어디 있냐는 말을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술술 나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서 굳이 이상함을 찾으려고 들지 않았다.

“왜, 무슨 일인데?”

“알마스. 알마스의 집이 어딘지 궁금해서요.”

“아아. 알마스? 알마스라면 저기, 저기 있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지. 근데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통 집에서 나오지를 않더라고.”

아리안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미처 하지 못하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보는 눈이 많아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보기에 알마스의 집은 굉장히 작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알마스의 어머니가 그를 가지자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고, 알마스가
태어난 후 어머니조차 그를 내버려두고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작은 집의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방 안의 열기가 후끈했다. 아리안은 이런 기운을 이미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병자의 기운이었다.

“……알마스?”

아리안은 조용히 알마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새삼 아리안은 자신이 알마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 안에서 사람의 형체가 꿈틀거리더니 곧 알마스의 찡그린 얼굴이 이불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리안……?”

“알마스.”

“여기는…… 어떻게.”

콜록. 알마스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리안은 곧장 알마스의 팔을 들어 맥을 쟀다. 알마스가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며 발버둥쳤지만 그의 힘은


아리안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범한 감기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감기라고 해도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치명적인
병으로 취급되기는 했지만.

아리안은 알마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마법과 약초를 사용했다. 수십, 수백 년간 마법과 약초를


연구해 온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끼지 않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참으로


지극정성이었다.

이후 기력을 조금 회복한 알마스가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는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리안이 걱정해 주니까 너무 좋아요…….”

평소 아리안은 알마스가 헤프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웃고 다녔다. 특별히 기분이 좋은 일이 없어도


그저 매일 웃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헤픈 웃음들과 달리 이 미소는 왜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지.

“……멍청한 놈.”

결국 아리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있을 때는 십 년도 짧게만


느껴졌으나, 알마스와 함께했던 한 해는 결코 짧지 않았다고.

그녀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전 네바에와 함께 봤던 연극보다도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특별하지도 않은 게 사랑이지, 어떻게…….

아니지, 진부하니까 사랑이지. 뻔한 전개를 알면서도 바보같이 매달리니까 그게 사랑이지.

아리안은 결국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설레는 사랑을 하고 말았다.


***

“잠시 먼 곳에 갔다 올 거야.”

“먼 곳이라는 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짧으면 이틀, 길면 나흘 정도 걸리겠지.”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알마스는 아리안이 사랑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나 없는 동안 다른 사람한테 한눈팔면 안 돼.”

“아리안이야말로 나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면 안 돼요.”

알마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리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껏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

“그러게.”

“곧 눈이 오려나 봐요.”

아리안은 곧 눈이 올 것만 같은 추운 날에 옛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너희들이 원했던 것처럼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 너희들도 더 이상 내 걱정 말고 편히 쉬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

아리안은 웬만하면 알마스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알마스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아리안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를 괴물, 혹은 마녀라고 생각할까 봐.

그리고 다행히 알마스는 병을 앓았을 당시 아리안이 마법을 사용해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리안은 알마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돌아섰다. 알마스는 시야에서 아리안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알마스와 헤어진 후 아리안은 길을 따라 걸어 시내로 내려왔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보던 한


남자가 아리안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아리안 아냐. 평소에는 알마스랑 맨날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가? 알마스가 서운해하겠네.”

“먼 곳에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오려고요.”

“먼 곳에? 짐 하나 안 챙기고?”

“네. 먼 곳이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거든요.”

먼 곳이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아리안은 의문스러운 표정의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걸었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한참 걷다 보니 들으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매우 불경스럽게도, 그들은 저들이 사는 곳을 통치하는 왕을 욕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 최근에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정복왕 아이벡. 하나 그 별칭은 풍족하게 생활하는 귀족들이 만들어 붙인 거짓이었다. 실상은 세금으로
왕국민들을 박해하는 폭군일 뿐이었으니.

나라가 평화로우면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모른다고들 하지. 안타깝게도 마을 사람들은 왕의 이름을


모르기는커녕 하루하루 왕을 욕하느라 바빴다.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증거였다.

이 정도면 됐나. 아리안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오랜만에 옛 가족을 찾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아리안은 기나긴 고민 끝에 겨우 말 한마디를 짜냈다.

“나는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잘 살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리안은 그들 이전의 가족을 만나러 떠났다.

아리안은 느긋하게 옛 가족들을 만나고 사흘 후에 돌아와서, 난장이 된 마을을 보며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서는 안 됐었다는 사실을.

-외전 6-

그날은 알마스의 말처럼 눈이 내렸다. 날은 추울 대로 추워져서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나왔다.

마을에 살아 있는 생명은 없었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좋아하던 아이들도, 눈이 오면 허리가


아프다던 노인도, 마을을 떠나기 직전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도.

아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눈을 뜨고 곧장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그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곳에는 알마스가 잠든 듯이 누워 있었다. 호수처럼 맑고
푸른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천천히 그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눈보다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늘 들리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리안은 차라리 그가 눈 위에 오래 누워 있어서 몸이 차가워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 있자 시체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에 질려 얼굴을 떼어낼 법도 한데,


아리안은 아주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살던 마을을 포함한 근방의 마을들은 왕이 제시한 세금에 불만이 많았다. 개중에 글을 아는 영리한
이들은 영주들에게 불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영주들에게 도착한 편지의 내용은 순화되어 왕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하지만 순화를 해 봤자 결론은 왕의
뜻에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뿐.

왕은 기사들에게 감히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반란 종자들을 쓸어 버리라고 명령했고, 그 본보기가 된


것이었다. 알마스와 그녀가 살던 마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에비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력석이라도 쥐여줄걸, 나를 부를 수 있게. 그랬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마도 달랐겠지.

……아니,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비밀을 밝혔을지라도 바보같이 착한 알마스는 자신 때문에
아리안이 곤경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을 테니까.

도대체 사람은 왜 변하지를 않는지. 하여간 이기적인 족속들. 남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지.

아리안은 알마스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슬픔의 무게는 모두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알마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미안, 정말 미안해. 너희들을 떠나보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슬퍼.

적어도 너희하고는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잖아. 떠날 때 알마스가 내게 보여 줬던 미소가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더 오래 볼 걸 그랬어.

너희처럼 좋은 가족을 다시 한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거였을까. 그 끝이 좋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아리안은 수백 년 동안 키워 온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한 동기가 있다면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아리안은 곧장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궁이 얼마나
호화롭던지.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본 아리안의
눈동자가 점점 더 차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왕궁의 경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공간을 찢고 이동할 수 있는 이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아리안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아이벡을 찾아냈다.

이 자가 귀족들 사이에서 정복왕이라고 불리는 아이벡이로구나. 다채롭게 몸을 장식한 아이벡을


내려다보는 아리안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온기가 없었다.

아리안은 하루에 걸쳐 아이벡을 끔찍하게 죽이고 땅을 갈라 왕궁과 썩어 문드러진 귀족들을 지하에


가라앉혔다. 죽어서도 땅 아래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녀가 땅속 깊숙한 곳에 묻어버린 왕국은 차후의 사람들에게 고대 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대 제국과 함께 파묻힌 귀족들과 달리 살아남아 도망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주신 렌다였다.

렌다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신에게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고, 신께서
그 힘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존재했다.

인지하는 것이 곧 힘이었다. 믿음과 깨달음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냈다.


곧 세상 여기저기에서 사람을 치유하는 힘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아리안의 능력과는 종류가 다르기는
했으나 특별한 능력이라는 것은 똑같았다.

그들의 능력은 사용할 때 백색의 빚을 뿜는 것이 특징이었다. 사람들은 그 힘에서 나오는 빛이 신이 내려


주신 것이라며, 신성하다 하여 성력이라고 불렀다.

성력은 마법처럼 여러 분야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물건을 옮긴다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등 간단한 일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사람 중 일부는 성력을 얻어 특별해졌다. 성력을 얻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도 고대 제국에서 귀족이


아니었던 이상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전보다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짧은 순간일 뿐이겠지만 모두가 행복한 그 순간에 불행한 것은 아리안뿐이었다.

알마스, 알마스……. 아리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잠들고 싶었다. 이왕이면 영원히 잠들어서,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절망했다.

숨이 끊어져도 심장의 울림이 멎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항상 멀쩡하게 의식을 차렸다. 숨이
끊어지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들마저 완벽하게 아문 채로.

이제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황무지에 높은 탑을 쌓고


그 안에서 마법을 연구했다.

그녀의 인생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 아끼는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을 잃고 혼자가 되어
마법을 연구하다가 다시 그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지독하게 권태로운 인생이었다. 권태롭고 지루하다고 하여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는,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는 인생.

아리안은 그 지루한 인생을 조금이라도 즐겨 보기 위해 때때로 마법진을 그려 악마를 소환하기도 했다.


그녀는 소환된 악마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과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비슷한 것을 넘어 거의 동일했다.

아리안은 과거에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의 시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시간의 저주라고
불렀었다.

영원의 시간은 저주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저주였구나. 내 힘은 악마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아리안은 이 사실을 알고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악마의 힘에서 비롯됐으면 뭐 어때. 나는 이미 수백


년간 이 힘을 써 왔고, 이제는 내 힘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느 순간부터 아리안은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계속


쌓이다 보니 책장 여러 개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나쁘지 않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알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리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알마스를 닮은 인형을 쳐다봤다.

알마스를 닮은 인형은 아리안이 말을 걸어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이기만 할 뿐이었다.


제발, 알마스. 이제 제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내가 너를 그리워하며 인형에 대고 말을 거는 식의
추접스러운 짓까지 저지르지 않게 해 줘. 아리안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그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탑의 꼭대기 층에서 연구를 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탑 전체가


울렸다.

노크 소리가 탑 전체에 울려? 이럴 수가 있나? 아리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불쾌함과
노크 소리를 이 넓은 탑 전체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는 데에 기묘함을 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탑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가 아리안의 가슴 정도에 오는, 정말 작은 소녀였다.


아리안의 키가 지나치게 큰 탓도 있었지만 소녀의 키가 지나치게 작은 탓도 있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맞으시죠? 저는 헬렌이라고 하고요, 마법사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괜찮으시면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엄청나게 마법을 잘 다루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소녀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분명 탑을 쌓은 이후로는 사람들과 교류한 적이 없는데 내 소문을 어떻게 들었다는 거지. 아리안은 눈앞의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렇지만 혼자 연습도 했어요! 가벼운 물건을 옮기는 거랑, 그리고 또…… 아! 방금처럼 소리를 넓게
울리게 할 수도 있어요!”

헬렌이 발랄하게 문을 두드리자 탑 여기저기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안은 헬렌의 그 쓸데없는 마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성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처럼,
자신과 같이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나타난 모양이라고.

“마탑에는 위대한 마법사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게 마법사님 맞죠?”

마탑, 마탑이라니? 설마 그게 내가 지은 탑의 이름인가? 마법사의 탑이라서 마탑인 건 아니겠지? 맙소사.


게다가 위대한 마법사라니. 본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그런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란 말이야. 아리안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말하는 위대……한 마법사라는 게 내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칭하는 것은 정말이지 못할 일이었다. 아리안은 당장 고개를 숙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데 혼자 하려니까 영 실력이 안 늘더라고요. 그래서 스승님으로 모실 분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래, 그렇구나.”

“부모님은 이게 악마의 힘이라면서 저를 은근히 피하셨거든요. 이 힘을 마법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여기까지 오면서 알았어요.”

“알겠어. 이야기를 다 들어 준 것 같은데 이만 문 좀 닫아도 될까?”

“아악! 잠시만요!”

헬렌이 닫히는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온몸으로 문을 미는 동시에 마법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전 7-

헬렌의 마법은 아리안에 비하면 정말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런 헬렌이 제아무리 문을 열려고 끙끙거려
봤자 아리안이 진심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쉽게 문을 닫을 수 있었겠지만 아리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안 돼요, 마법사님. 제 이야기 한번만 들어 보세요. 저 마법 배우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집에서


쫓겨나서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에요. 이런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자신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사람치고는 뻔뻔한 행동과 말투였다. 아리안은 모질게 대답했다.

“하나도 안 불쌍해.”

“대충 보니까 혼자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같이 살면서, 아니, 마법 배우면서 말동무라도 해


드릴게요.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네? 네?”

아리안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행동을 멈춘 틈을 타 헬렌은 얼른 문을 열고 탑 안으로 들어왔다.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한 아리안을 보며, 헬렌은 바보같이 헤헤, 하고 헤프게 웃었다. 그 웃음은 아리안
그녀가 오래전 반했던 미소와 닮아 있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고 몸이 딱딱하게 굳는 듯했다. 그 헤프고 바보 같은 웃음을 본 이상, 더 이상 감히


그녀를 내쫓으려고 할 수가 없었다.

아리안은 그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나는 또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려고 하는구나.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실수를 반복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잖아. 미숙하고 제 행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니 사람이지. 몇 년을 살았든 나도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아리안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호하며 결국 소녀를 탑에 들였다.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청소도 잘하고요, 빨래도 잘하고요……. 또…… 뭐가 있지.


하여튼 몸으로 하는 건 전부 자신 있어요!”

헬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리안이 구석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빗자루가 지능을 가진 생명체처럼 스스로 지저분한 곳을 찾아다니며 청소했다.
“어…… 음…….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스스로 청소하는 빗자루를 보고 자신의 쓸모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헬렌은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리안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너 여기 마법 배우고 싶어서 왔다며 그게 아니라 청소하러 온 거였어?”

“아.”

헬렌은 뒤늦게 아리안의 말뜻을 이해하고 방긋 웃었다.

***

헬렌은 마탑에 들어온 후 보통 아리안의 연구를 돕거나 옆에서 연구를 지켜보며 연구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헬렌이 열여덟 살이 됐을 때는 스스로 그녀 자신만의 마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헬렌을 받아들인 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녀의 탑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대부분은 헬렌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다수는 아리안을 찾아와 제발 받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집에서 쫓겨났다는 핑계를 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핑계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헬렌을 돌아보면 그녀는 언제나 억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쟤한테 그 수법을 알려 줬을 리가 있겠어요? 저도 처음 보는 애란 말이에요.”

“뭐? 수법? 방금 수법이라고 했어?”

“에고, 이런. 말실수를 했네. 하지만 집에서 쫓겨났던 건 사실이에요.”

“여기가 너희 집이냐? 내가 너희 보모야? 내가 왜 연구할 시간도 모자란데 너희를 키우고 있어야 해?”

“어쩔 수 없잖아요. 처음 저를 받아들인 게 죄죠. 그리고 시간이라면 아리안한테는 충분하잖아요.”

“그래, 그랬어. 네놈이 이 사태의 원흉이었구나.”

아리안이 헬렌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듯이 그녀에게 돌진하자 헬렌은 그 상황마저 즐거운지 얼굴에는
미소를 띄운 채 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하지만 머릿수가 많다고 하여 좋으면 좋았지 결코 그녀에게 나쁜 것은 없었다. 특히 연구 부문에서 그랬다.

홀로 연구를 진행할 때는 책장 몇 개만을 겨우 채우던 책들은 여럿이 함께하자 모이고 모여 도서관이


되었다. 책장이 모자라게 되자 아리안은 아래층에 따로 책들을 보관하는 용도의 방을 마련했다.

“책을 한데 모아 놓으니까 보기에 나쁘지는 않네.”

“그렇죠? 역시 저를 받아들인 게 좋은 선택이었죠?”

책이 많아져서 좋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헬렌은 아리안의 말을 그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헬렌의 성격이었다. 털털하고 넉살스럽고, 능글맞고.

그게 딱히 나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진다면 모를까. 한 번도


기분이 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아리안의 성격이 그녀를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리안은 평생을 마법과 함께했고, 그녀에게 내려진 시간의 저주는
증오스러웠으나 그녀에게 주어진 마법은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리안은


생각했다.

그래서 아리안은 그들을 더욱 사랑할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떠나갈 날을
걱정했다. 물론 영원의 시간을 사는 아리안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아리안처럼 영원을 사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유한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보통


사람들보다 노화가 느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를 스스로 알았다. 그래서 죽기 몇 년 전에 안온한 곳에서 노후를


보내겠다며 마탑을 떠나고는 했다.

정든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않아도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달리 오랜 시간 알마스를 그리워했던 이유는 그와의 마지막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결말이 비극인 연극은 특히나 관객들에게 여운을 더 오래 남기는 법이었다.

알마스가 아이벡의 폭정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다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죽은 것이었다면


그녀도 이렇게까지 알마스를 그리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

사실 아리안이 만들었던 알마스를 닮은 인형은 헬렌이 마탑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됐었다.

지나다니던 헬렌이 인형을 보고 자주 놀란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기억 속의 알마스를 이만


놓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완전히 포기하니 차라리 마음이 더 편했다. 아리안은 인형을 폐기한 후 이전보다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처음으로 아리안을 찾아왔던 헬렌이 떠나고, 함께하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끝내러
떠나도 계속해서 새로운 마법사들이 마탑을 찾아왔다. 계속되는 연구로 마탑의 불은 꺼질 날이 없었다.

어느 날은 한 소년이 마탑의 문을 두드렸다. 아리안은 연구 중에 귀찮게,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직접 문을


열어 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언제인지 모를 순간부터 굳어진 관습이었다.

“나갑니다, 나가.”

쿵쿵 문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손님에 아리안은 신경질을 내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마법으로 장난을 쳤나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한참
아래에 위치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의 키가 얼마나 작았느냐 하면, 헬렌을 처음 봤을 때보다도 키가 훨씬 작았다.

키가 작은 소년은 자신을 벨라프라고 소개했다. 벨라프는 지금껏 마탑을 찾아온 이들 중 최연소였다.

비록 가장 어린 나이기는 했으나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아리안에게는 못 미치는


실력이기는 했으나 벨라프는 그녀가 본 마법사들의 실력 중 단연 최고였다.
“내가 이런 말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너는 내가 없었다면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뭐가 어찌
됐든 내가 있으니까 최고의 마법사가 되는 건 힘들겠지만. 너는 내 연구도 제일 많이 도와줬으니까, 만약
내가 죽으면 이 마탑은 무조건 너한테 줄게.”

“당신은 안 죽으니까 상관없잖아. 그리고 떠들 시간 있으면 가서 약초나 더 들여다 봐.”

“어린놈이 칭찬을 해 줘도 말을 이따위로……. 하여간 싹수 노란 것.”

다만 완벽한 그의 단점을 하나 꼽으라면, 성격이 더럽다는 것이었다. 벨라프의 성격 결함은 자신이 잘난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아리안은 벨라프가 항상 자신에게만 신경질적이라며 징징거렸지만 마탑의 모든 마법사는 그 말에 반대했다.


그리고 벨라프는 아리안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신경질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예외는 있었으니.

벨라프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 아리안은 싫다는 벨라프를 끌고 마을 축제로 향했다. 벨라프는 그곳에서


르비아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최고로 연극 같은 일이 벌어졌다.

벨라프는 마탑 마법사 중 가장 신경질적인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항상 1 위를 차지하고는 했다. 벨라프가


마탑에 온 지 십 년이 지났으나 그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다소곳하게 앉아 르비아에게 보낼 편지를 쓰며 웃고 있었다. 벨라프가 웃는 모습을 본


마법사들은 자신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스스로 자신의 뺨을 갈기기도 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리안은 경악했다.

“맙소사! 저놈이 연애를 하면 내 연구는 누가 도와줘!”

“다른 놈한테 맡기면 되잖아. 메릴이라든가, 카일이라든가. 둘 다 느긋해 보이던데.”

“야! 우리도 약초 채집하느라 바쁘거든?”

미쳤다. 저놈이 미친 게 틀림없다. 마법에서만큼은 항상 성실했고 진지했던 놈이 다른 마법사들한테


자신의 일을 넘기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심지어 벨라프가 편지를 쓰다 말고 신나서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을 듣고 아리안은 정말 기절할 뻔했다.


르비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깊게 빠졌구나.

아리안은 부디 세상 물정 모르는 그가 연극에나 나오는 ‘이런 감정을 느낀 건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대사를 뱉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벽 뒤에 숨어 벨라프가 고백하는 장면을 훔쳐봤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하지만 아리안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상냥한 르비아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누가 연극을 허구라고 칭하던가. 잘 생각해 보면 아리안이 연극에서 본 장면들은 대부분 현실에서도


일어나고는 했다.

저 성질 더러운 못난 놈을 데려가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리안은 아닌 척하며 벨라프를 많이 아꼈다.


그랬기에 르비아에 대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는 광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었다. 이는 곧 마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아, 그렇군. 저놈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 아니라 사랑인 거였어. 아리안은 온화하게 웃으며 편지를 쓰는
벨라프를 향해 눈을 흘겼다.

-외전 8-

“그나저나 네 구식 고백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옆에서 듣는 내가 다 짜증이


나더라니까. 걔가 네 뺨을 갈기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걸 보고 있었어?”

“그래, 내가 제일 아끼는 제자가 고백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 레비아, 아니


르비아였나? 소심한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

벨라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당신이 그녀에 대해 무얼 알아 그렇게 말하냐고 길길이
날뛸 녀석이 웬일이람.

“그래, 뭐. 어쨌든. 잘해 봐.”

잘해 보라는 말에 벨라프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리안은 푹 숙인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좋은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르비아를 만나러 외출했던 벨라프가 돌아왔다.

“벨라프? 너 나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 헉.”

벨라프는 울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의 우는 얼굴을 본 카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침대에 누워


태평하게 책을 읽던 아리안도 그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메릴마저도 하던 일을 멈추고 벨라프를 쳐다봤다. 카일은 ‘쟤 눈에서 흐르는 거 빗물 맞지? 밖에 비가


오나?’ 따위의 헛소리를 하며 창문을 열어 보기도 했다.

벨라프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거칠게 눈을 문질러 닦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아리안이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맙소사, 메릴. 제발 내가 잘못 본 거라고 해 줘.”

“그렇지 않아도 제가 방금 카일 허벅지 꼬집어 봤는데 아프다고 꽥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지금 보고 있는


게 꿈은 아닌 모양이에요.”

“설마 헤어졌나. 그, 있잖아. 누구였지. 레비아?”

“르비아요.”

“아, 그래. 맞아. 르비아. 그렇게 좋아 죽더니 헤어진 건가?”

“글쎄요. 카일. 네가 한번 가서 물어보고 와.”


메릴이 카일을 벨라프가 있는 쪽으로 밀자 카일이 기겁했다. 카일은 손까지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메릴, 아리안. 당신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건 알지만 이건 좀 아니에요. 저럴 때는 그냥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요.”

“공감 능력이 부족하긴 누가 부족하다는 거야.”

“누구긴요. 그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아리안이죠.”

“카일.”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메릴의 목소리를 듣고 카일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메릴이 계략을 꾸미는 참모처럼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 위에는 카일이 평소에 예뻐하던 흰색의 토끼가 올려져 있었다. 이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결국 카일은 땅이 꺼질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벨라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카일은 아리안과 메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날아오는 물건에 얻어맞으며 도망쳐 나왔다.

“아으. 봐요, 제가 가만히 놔두자고 했잖아요!”

“역시 헤어졌나 봐요.”

메릴과 담담하게 말하자 카일이 그 모습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아리안이나 메릴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여간 저 인간들은 왜 저렇게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건지.

그 후로 벨라프는 종일 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카일은


배도 고프지 않냐고 타박을 줬고, 굳이 식사를 할 필요가 없어 채소로 식사를 때우는 아리안조차 그에게
질려 끌끌 혀를 찼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벨라프가.”

“실연의 슬픔이 큰가 보지, 뭐. 하기야 애초에 저 더러운 성격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어.”

“메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날카로운 말을 하는 게 문제야.”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나한테 잔소리야.”

“하여간 너나 아리안이나 공간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

“뭐 새삼. 쟤가 울어도 해야 할 연구가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연구나 하자고.”

***

“벨라프. 벨라프 어딨어? 그놈한테 맡겨야 하는 거 있는데.”

아리안의 물음에 책상에 엎드려서 자던 카일이 부스스 침을 흘리며 일어났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에서 안 나왔어요.”

“아직도? 얘 식사는 하고 있는 거야?”

“나온 적이 없는데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요. 근데 혹시 모르죠. 새벽에 은밀하게 빵 훔쳐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을지.”

“지금 장난할 때야?”

“……저도 진지하게 말했는데.”

사람이 식사는 꼬박꼬박 해야 하는데……. 결국 그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을 열었을 때 쏟아질


벨라프의 분노에 대해 절반씩 책임을 지기로 합의한 후 문을 열었다. 물론 자신들의 신체적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마법을 이용해서.

“여, 열게요.”

“하나, 둘, 셋 하면 열어.”

“으……, 네.”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아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카일은 문고리와 연결된 마력의 흐름을 뒤틀어 문을
열었다. 끼이,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낡은 나무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없는데요?”

“뭐?”

“안에 벨라프가 없어요.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까 창문으로 나간 걸까요? 공간 이동 마법도 쓸 수


있는 놈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이 망할 놈. 설마 그 나이 먹고 가출이라도 했나. 아리안은 빈방을 들여다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카일. 너는 빨리 벨라프 찾아봐.”

“이럴 때만 나를 찾지……. 네,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대체 언제부터 방에 없었던 거야?”

“실연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죽은 건 아닐까요.”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메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죽어? 벨라프가 죽어? 아리안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며 경악을 했다.

“맙소사, 메릴!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죽으면 그놈한테 마탑을 물려주려고 했단 말이야!”

“어차피 벨라프가 살아 있든 죽었든 아리안보다 벨라프가 먼저 죽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하여간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카일은 질린다는 얼굴로 메릴을 흘기다가 곧 벨라프를 찾기 위해 눈을


감고 창문을 열었다. 그는 푸른 하늘에 마력을 넓게 펼쳤다.

아리안은 그가 좋은 결과를 내놓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난 후 카일이 눈을 뜨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리안.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감지가 안 돼요. 벨라프 정도의 마력이면 이렇게
감지가 안 될 리가 없는데……. 진짜 어디 가서 죽은 건 아닐지…….”

“죽었을 리가 없잖아. 일단 너희는 마탑으로 돌아가서 다른 마법사들이랑 기다려. 그놈은 내가 찾아볼


테니까.”

그렇게 아리안이 벨라프를 찾은 곳은 마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황무지였다. 아리안이 그를 찾는 데 세


시간은 족히 걸렸으니 카일이 찾지 못할 만도 했다.

“……아리안.”

“뭐야, 너. 답지 않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아리안, 나…….”

아리안은 흐린 눈을 비비고 똑바로 벨라프를 쳐다봤다. 곧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가 소년일 적부터 청년을 거쳐 성인이 될 때까지. 아리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벨라프가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울고 있었다.

빗방울이 뺨에 엉겨 붙어 무엇이 눈물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서러워 보여 아리안은 벨라프가 울고 있다고 판단했다.

“마법이, 마법이…….”

벨라프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내뱉으며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떤 마법을 쓰려고 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손 중앙으로 모이던 푸른 빛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마법을 쓸 수가 없어……. 마력이 모이지를 않아…….”

“…….”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한참을 말없이 벨라프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아리안이 마침내 힘겹게 짧은
문장을 뱉었다.

그제야 아리안은 벨라프가 최근 몇 달간 끼니까지 거르며 몰두하던 연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르비아는 사실 이곳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서는 특이한


향이 풍긴다, 그리고 그 향 때문에 그녀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

아리안은 지금껏 르비아에게서 미세하게 풍기던 향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다른 세계? 우리가 사는 곳 말고도 새로운 세상이 있단 말이야?

벨라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마법을


사용하고 나니 더 이상 마력이 모이지를 않는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누군가 망치로 그녀의 심장을 쿵 친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괘종시계가 열두 시가 알리며 뎅뎅


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벨라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소리를 내어 우는 것도 아닌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서러워 보이던지. 아리안은 한때 그가 사람을 사랑하느라


더 이상 마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르비아를 사랑한 만큼 마법을 사랑하고 있었다.

네 선택에 후회하느냐고 묻자 벨라프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절망스러울 뿐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아리안의 눈에는 모든 게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몸과 영혼을 갉아먹기만 하는


사랑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언젠가 끝나 버릴 감정이 뭐가 그렇게 황홀하다고…….

아리안은 그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잘못된 것이었는지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밟고 서 있는 이 마탑조차도 그녀가 알마스를 잃고 홀로 틀어박혀 살기
위해 만들었던 곳이었으니.

그러나 다음 순간 아리안은 알마스에 대한 기억을 부정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를 잊고 벨라프를 쏘아붙였다.

“멍청한 새끼.”

“…….”

등신, 머저리, 천치. 그 어떤 말을 해도 꽉 막힌 듯한 가슴이 뚫리지는 않았다. 왜 마법을 잃은 것은


벨라프인데 자신이 더 억울하고 답답한 건지.

-외전 9-

“……진짜. 꼴값 떨고 있네. 사랑이 뭐라고. 너 같은 걸 애초에 마탑을 들인 내가 미친놈이지.”

“…….”

“마탑에서 나가. 마법도 못 쓰는 새끼를 마탑에 들여보내 줄 수는 없지.”

아리안은 이후에야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때 제일 힘들었던 건 벨라프였을


텐데.

수백 년을 살아왔으면서 왜 아직도 충동적인 감정 하나 이기지 못해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부터 좀 변해 볼걸.

“……짐. 짐만 가지고 갈게.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아리안은 더 듣지 않고 마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카일이 화색을 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아리안. 벨라프는 찾았어요?”

아리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카일은 다행이라며 화색을 표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다행인가. 글쎄, 다행일까. 나한테는 마법이 곧 인생이었는데. 아마
벨라프도 그랬겠지.

차라리 찾지 말걸 그랬나. 아니, 그랬더라면 죽은 줄로만 알았겠지. 아마 그쪽이 더 슬펐을 테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이별이 항상 더 슬픈 법이니.

마법을 잃었는데도 그런 짓을 벌인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처음 마탑에 찾아왔을 때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마법에 투자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사랑, 하여간 그놈의
사랑…….

“그나저나 벨라프는 어디 있어요? 같이 안 왔어요?”

“카일. 마탑의 문을 열어 놔.”

카일은 그녀의 명령 같은 지시에도 큰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벨라프는 마법을 잃었기
때문에 마탑까지 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벨라프?”

돌아온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카일이었다. 그는 벨라프가 돌아오자마자 충동적으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아, 미안. 기분 나빴나.”

그러다가도 얼른 몸을 떼어 내고 물었으나 벨라프는 괜찮다는 듯이 카일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야, 너 비에 젖은 것 좀 봐. 잠깐만. 너 설마 마법 안 쓰고 1 층부터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온 거야?


엄청 힘들었겠다.”

“걸어 올라왔다고?”

그때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릴?”

“왜? 마법을 쓰면 되잖아.”

질문에 묘하게 가시가 돋아 있었다. 과연 저 질문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가? 카일이 보기에는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메릴과 눈싸움을 하듯 시선을 맞추던 벨라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어. 그러니 이곳을 떠날 거야.”

순간 공간에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그 침묵을 깬 쪽은 메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데?”

“메릴, 그만해.”

“그만하라니, 뭘? 나는 그냥 궁금한 걸 묻고 있는 것뿐이야.”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는 아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리안. 당신이 대신 설명해 줘. 단, 메릴에게만.”

“…….”

벨라프는 간단하게 짐을 쌌다. 챙길 것은 편한 옷가지 몇 벌뿐이었고 그가 연구를 진행하며 수집한


자료들은 전부 마탑에 남겨 뒀다.

그는 떠나기 직전 마법사들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무뚝뚝한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안녕, 카일. 그리고 메릴.”

벨라프의 시선이 마법사들의 얼굴 위에 하나하나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아리안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아리안.”

***

“다른 세계라니. 벨라프가 마탑에서 내쫓기는 걸 보지 않았더라면 허황된 이야기라고 믿었을 거예요.”

“내쫓기다니.”

“아리안한테 내쫓긴 거 맞지 않아요?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놈인데 스스로 마탑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리는 없고.”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자신은 벨라프가 마법보다 사랑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메릴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신기하기는 하네요. 벨라프도 넘어갔을 정도면 그 향이 대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

“아리안,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메릴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 제 2 의 벨라프라고 불릴 정도로 표정이 없던 그녀가 어쩐지 신나


보였다.

“이쪽 세상이랑 벨라프가 말하는 다른 세상이랑 연결해 보는 거.”

“뭐?”

“솔직히 아리안도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잖아요. 왜,


저희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미친 듯이 연구만 해서 새로운 마법 만들어내는 거.”

메릴의 말에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벨라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에게서는 향이 난다고.

그 향을 없애기 위해 벨라프가 마법을 잃어야만 했다. 그걸 알면서도 이쪽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해


보자고?
“웃기지 마. 그렇게 하고 싶으면 혼자 하든가.”

“설마 혼자 하겠어요? 하자고 하면 자기도 하겠다고 손 번쩍 들 마법사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메릴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긋 웃었다. 그녀가 마탑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으로 보는 메릴의 미소였다.

***

메릴의 연구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그녀의 연구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세상. 연구와 마법에 미쳐 있는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들리겠는가.

연구에 참여하지 않는 마법사는 아리안과 카일뿐이었다. 메릴도 자신의 제안이 두세 번 정도 거절당하자


더 이상 함께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리안은 카일을 데리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망할 마법사 놈들이 마탑주 말도 안 듣는다고,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카일은 그냥 희생양일 뿐이었다.

술집에서 연거푸 술을 들이키던 아리안이 탁자 위에 엎어져 몸을 바르작거렸다. 긴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으나, 이미 술에 찌들어 이성을 잃은 카일에게는 웃을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아리안이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팔에 이마를 얻어맞은 후에는 자연히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벌건 얼굴을 하고는 아리안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에 비해 아리안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주제에 겉보기에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야.”

아리안이 껄렁하게 카일을 불렀다. 비위를 맞춰 주지 않으면 마치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라도 걸 듯한


투였기에 카일은 얼른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말씀하세요.”

“넌 왜 메릴이랑 같이 연구 안 했냐.”

“그냥…… 뭔가 찜찜해서요.”

“찜찜해? 뭐가.”

“좀 그렇잖아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찜찜하고, 그 세계랑 이쪽 세계를 연결한다는 건 더 찜찜하고.


……게다가 벨라프가 그것 때문에 마탑에서 떠났는데.”

아리안은 카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벨라프를 쫓아낸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이 착한 놈이라도 자신의 멱살을 잡을 게 분명했다.

주제를 돌려야 할 것 같은데. 카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몸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 도박판이었다.
아리안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먼지 낀 금화 다섯 닢을 꺼냈다. 메릴이 꼴 보기 싫어 마탑에서 뛰쳐나올 때
마탑 여기저기를 탈탈 털어 찾았던 것이었다.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아리안을 쭉 주시하던 카일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리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악! 미쳤어요?! 그건 우리 생활비라고요!”

“카일. 걱정 마. 내가 이길 수밖에 없으니까.”

비틀거리며 도박판으로 걸어가면서도 얼마나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을 하던지. 카일은 멍하니 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길 수밖에 없다니.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잠시 후 아리안은 정말 품에 가득 돈을 안고 카일이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일은 물을


마시다 말고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을 주르륵 뱉어 냈다.

“봐.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잖냐.”

“어떻게…… 어떻게 한 거예요? 아리안이 저 도박광들을 이겼을 리가 없는데.”

“마법의 힘을 좀 빌렸지. 투시 마법.”

“결국 사기 쳤다는 거네요.”

“사기가 아니라 재능이지.”

말은 참 번지르르하게도 하시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쯧쯧 혀를 차다가도 아리안이 용돈 좀 주겠다며


돈을 허공에 뿌리자 재빨리 바닥을 기며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아리안은 낄낄 하고 소리 내어 웃은 후 다시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벌써 시간이 늦었는데……. 카일이


손가락으로 조심히 아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죠.”

“가긴 뭘 가. 잠도 여기서 자고 갈 건데. 너도 여기서 자고 가라.”

“제발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머릿속에서 검토를 거치고 뱉으란
말이에요.”

“충분히 검토했어.”

“충분히 검토하긴 뭘 해요!”

“…….”

“아리안? 지금 자는 척하는 거죠?”

“…….”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니까. 아무리 말을 걸어도 침묵으로 응하니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 리가. 결국


카일은 살살 달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 아리안이 키는 크지만 정신 연령은 조금 어릴 수 있으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메릴이 그 연구를 끝낼 때까지? 아니면 메릴이 늙어서 그 연구를 중단해야 할
때까지.”
“머리 울린다. 시끄러워.”

“쫓아낼 수도 없잖아요. 쫓아낸다고 해서 순순히 나갈 애들도 아니지만.”

“…….”

“……?”

그는 자신이 ‘쫓아낼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아리안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나?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안을 쳐다봤다. 아리안이 주정을 부리며 네가 맨날 짓는 그 표정 짜증난다고


지적을 했으나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너 그러다가 눈 그 상태로 고정되는 수가 있어.”

“숨기는 거나 빨리 말해 봐요. 뭐 있죠. 뭐 있는 거죠?”

평소에는 바보 같은 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 아리안은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외전 10-

“……벨라프.”

“벨라프가 왜요.”

“……쫓.”

“쫓…… 뭐요. 말을 끝까지 해야 알아듣죠.”

“……아냈어. 내가…….”

카일은 아리안의 입에서 나온 문장들을 더듬더듬 이어 붙였다. 그녀가 한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어
본 그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 귀는 멀쩡한데.”

손바닥으로 귀를 통통 두드리면 머릿속이 통통 울린다. 분명 그의 귀는 멀쩡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아리안이 벨라프 쫓아냈어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아니,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믿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목소리에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얘한테 추궁당하고 있는 거지. 아리안은 이 상황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질문에 답했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카일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얼핏 보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안이


미처 카일에게 우느냐고 묻기도 전에 카일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길고 긴 문장들을 입 밖으로 뱉어 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아무리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왔다고 해도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때 인생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애가 마법을 더 이상 못 쓰게 돼서 축 처져 있었는데,
불쌍하지도 않았어요?”

“……너 벨라프한테 잔소리 옮은 것 같아.”

“옮기는 뭐가 옮아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메릴이 아리안한테 무정한 성격을 옮긴 것 같은데.”

“그건 좀 기분 나쁜데. 말도 안 듣는 그것하고 내가 뭐가 비슷하다고.”

지금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카일이 갑자기 꿱 소리를 지르자 아리안은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얌전하던 애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런대.

“지금 당장 벨라프를 찾으러 가요. 저도 같이 갈 테니까. 아리안한테 시간은 많다 못해 넘쳐나잖아요.


애초에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건 아리안이었고.”

“……내가 뭐 하러 걔를 찾으러 가?”

“그야 벨라프를 쫓아낸 게 아리안이니까요!”

이 자식 시끄럽다고 했는데도 또 소리 지르네. 아리안은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카일이 옆에서


뭐라고 앙알거렸으나 아리안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의 잘못된 행동을 거론하며 잘잘못을 따져도 상대가 듣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법이었다.
카일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를 보며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리안은 모든 마법사들에게 칭찬이 박했다. 그러나 벨라프에게는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짙은


마력을 가진 이는 마법사가 된 이래로 처음 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듯 벨라프는 아리안이 가장 아끼는 마법사이자 동료였다. 물론 이는 벨라프가 딱 마법을 잃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카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들은, 마탑에 사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서로라는 존재는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오랜 시간 정을 쌓고 쌓아 만든 가족이 아니라 이익과 손해로 이루어진 집단일 뿐이었나.

카일은 몸을 낮추고 바닥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마력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훑고 지나갔다.


카일에게는 마력이 지나가는 길이 밝은 노란빛으로 보였다.

이는 아리안이 카일에게 너는 그나마 그 마법이 가장 봐 줄 만하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했던 마법이었다.


실제도 물건이나 사람을 찾을 때 꽤나 유용하게 쓰이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의 마법은 벨라프를 찾을 때만은 항상 말썽이었다.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던 그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또 벨라프의 기운은 하나도 안 느껴져요. 아리안도 알다시피 둘 중 하나죠. 죽었거나 너무 멀리 갔거나.


벨라프가 죽었을 리는 없고…… 어디로 갔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리안. 잘 생각해 봐요. 정말로, 그냥 단순히 벨라프가 천재라서 좋았어요?”

“응.”

아리안의 단호한 대답에 카일이 혀를 내둘렀다. 저런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벨라프 그가 다른 마법사들처럼 쭉정이 같은 마력을 가졌었다면 그녀는 그를


칭찬하지 않았을 테고, 그를 아끼지 않았을 테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들어가자.”

“그렇게 가자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아리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마탑의 다락방으로 이동했다. 아래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카일도 도착한 듯했다.

아리안은 메릴이 다른 세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자신의 방을 다락방으로 옮겼다. 메릴과 그 동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몸에 두르고 있던 낡은 망토를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서
잠들지도 못 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카일 이 망할 놈.”

그놈의 벨라프, 벨라프. 카일 그놈은 성질도 더러운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꾸 벨라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럴 거면 벨라프가 떠날 때 붙잡았어야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의식이 또렷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술집에서 탁자에 코


박고 잠들어 버릴걸.

아리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이 쾅 하고 굉음을 내며 벽에


부딪히자 카일이 부은 눈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안 되겠다, 카일.”

“……예? 한참 자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벨라프, 찾으러 가야겠어. 당장.”

“뭐라고요……? 농담하지 마요. 이 오밤중에 어딜 가겠다고.”

하하. 카일은 아리안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멍청하게 웃었다. 그러나 카일이 얼른 가서 자라며 손을
흔들어도 아리안은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리안……. 농담이죠……? 지금은 새벽이에요. 당장 벨라프를 찾으러 가겠다니. 벨라프를 찾으러


가자고 그렇게 사정을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이 새벽에 갑자기 깨워서 하는 말이 그거예요?”

“가자. 옷 갈아입어. 그대로 가도 좋고.”

그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굳이 그가 아니라도 아리안의 고집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 있나. 메릴. 아리안이 반대했어도 메릴은 연구를 진행했으니까. 카일은 궁싯거리며
몸에 망토를 둘렀다.
“일주일간은 마탑으로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쉴 생각도, 잠잘 생각도 하지 말고.”

“…….”

“아무 말도 안 하네? 불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힘없는 저한테 무슨 거부권이 있겠나요.”

그녀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아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카일의 뒷목을 쥐고 그를 잡아끌었다.

그 후로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 일주일도 가뿐히 지나갔다. 그들이 마탑을 떠나온 지 거의 이
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들은 드디어 벨라프가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오두막을 찾아냈다.

“여기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갈까.”

“아리안. 벨라프 성격 더러운 거 잘 알잖아요. 함부로 문 부수지 말고 노크, 제발 노크.”

“도대체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리안은 큼큼거리며 목을 푼 뒤 주먹을 쥐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뒤쪽에서 노크를 할 거면 목은 뭐 하러


푼 거냐는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지금 나가요.”

문 너머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본 사이에 벨라프가 성격을 고쳤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벨라프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아리안과 여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오두막에서 나온 이는 벨라프가 아니었다. 하지만 벨라프의 흔적은 이곳에서 끊겨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간 건지.

“아, 설마 얘가 걘가? 르, 뭐더라. 걔?”

“르비아요.”

카일이 얼른 아리안의 귀에 속삭였다. 아, 그래. 르비아. 르비아였지.

아리안은 성큼성큼 다가가 르비아를 살폈다. 눈앞의 여자가 르비아가 맞는지. 과연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이 집에 벨라프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그러자 르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안을 올려다봤다. 아리안이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던 탓에,


르비아는 한참이나 고개를 올려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맑았다.

“근데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전에는 좀 더 칙칙했고…….”

그때 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냄비가 날아와 아리안의 옆구리를 스치고 벽에 처박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얼굴을 마구 구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벨라프가 보였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칙칙? 미쳤어? 죽고 싶어?”

“이제 마법도 못 쓰는 게 죽이기는 누굴 죽여? 야, 카일. 네가 그렇게 찾던 벨라프다. 성질 더러운 거


보니 벨라프 맞나 보네. 마탑 떠날 때는 그렇게 아련하게 인사하더니.”

카일이 벨라프를 향해 돌진하자 그는 옆으로 피하며 카일의 포옹을 피했다. 그럼에도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프를 쫓았고, 결국 그를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벨라프! 나 카일이야.”

“알아, 아니까 떨어지기나 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불쌍한 벨라프! 못된 아리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저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네.”

아리안은 작은 오두막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창문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왔고 침대에서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벨라프.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대접해야지.”

“쫓아낼 때는 언제고 손님은 무슨.”

“아가씨. 아가씨는 저런 성격 더러운 놈하고 어떻게 같이 사는 거야?”

아리안이 르비아를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씨는 저놈한테 코 꿰인 거야. 성격 더럽고 가진 것 없고……. 아, 유일하게 가진 건 마법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고!”

아리안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웃긴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르비아는 그냥 그녀를
따라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앉아 분위기만 살피던 카일이 아리안의 팔을 툭툭 치며 속삭였다.

“아리안, 제발……. 눈치 바닥인 거 티 좀 내지 마요. 벨라프가 왜 마법을 못 쓰게 됐는지 생각하라고요.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

아리안은 어색함을 이기지 못 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아…… 니. 그래도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충분할 수도 있지.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외전 11-

르비아는 그저 맑게 웃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그녀를 보며 저 미소에 벨라프가 홀랑 넘어가 마법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은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 마법사님.”


“마법사님이라니. 너무 거창하게 들리잖아. 그냥 간단하게 아리안이라고 부르면 되지.”

“칙칙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름을 부르라는 건지…….”

“카일. 입을 좀 다물 수는 없니?”

카일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 아리안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쥐어박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애가 점점 메릴을 닮아 가는 것 같아.”

내내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들을 노려보고만 있던 벨라프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메릴? 갑자기 메릴이 왜. 당신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메릴은 꽤 좋아했잖아. 성격은 별로지만 일은


열심히 해서 좋다며.”

“너무 열정적이라 문제지.”

“무슨 일이길래.”

아리안이 눈을 굴려 르비아를 쳐다봤다. 메릴이 르비아를 보고서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글쎄, 르비아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리안은 얼른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겠어? 너는 성격도 별로고 일도 열심히 안 했잖아.”

“……괜히 내 성격에 트집을 잡는 걸 보니 할 이야기가 떨어졌나 본데. 그럼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지


그래.”

“할 이야기가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아직 르비아한테 말해 주지 못한 네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연구에 진전이 없어서 답답하다면서 책상을 때려 부쉈던 일, 카일이 노트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카일이
작성했던 연구 일지들을 전부 불태워 버린 일…… 또 뭐가 있더라. 아리안이 손가락을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벨라프가 말없이 팔을 뻗어 옆에 놓여 있던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세게 쥐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의자를 집어 들어 불청객들을 마구 두들겨 팰 기세였다. 카일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그냥 돌아가자며
아리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굴하지 않고 그 큰 몸을 구겨 르비아의 뒤쪽에 숨었다. 카일도 뒤늦게 아리안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 뒤로 숨었다.

“아가씨. 저놈 표정 보여? 저 험악한 놈 데리고 살려면 고생이 많겠어.”

르비아가 그 말을 듣고 벨라프를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세상 그 누구보다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그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아리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이제 주소도 알았겠다, 매일 찾아와야겠네. 마침 요즘 할 일도 없어서.”

“르비아. 우리 이사를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글쎄, 벨라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뿐만 아니라 난 이곳이 꽤 마음에 드는걸.”

아리안은 또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는 벨라프의 처절한 시도는
르비아의 거절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 후 매일 찾아오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아리안은 매일같이 그들의 오두막을


방문했다. 카일은 제 할 일을 하다가도 아리안이 부르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안녕, 르비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대체 어떻게 하면 하루를 오랜만이라고 하는지.”

“누가 너 보러 왔대?”

아리안이 보기에 르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막무가내로 연구를 진행하는 메릴에게
시달리던 차에 만난 것이 르비아였고, 이전에 벨라프를 통해 들었던 그녀의 과거사는 그녀에 대한 동정과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리안에게 시간이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에서 깨어나고, 카일을 끌고 오두막을


방문한다. 그리고 항상 해가 지면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카일을 끌고 나가기 위해 방을 나서던 중 메릴을 마주친 것도 그런 날들 중 하루일 뿐이었다. 아리안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메릴의 얼굴에 팍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본 메릴은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너무 어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갓난아기였다.

동생, 동생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오래전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외동이었으며 가족과는 연을
끊은 지 오래라고 했으니까.

“마을에서 데려왔어? 뭐, 마법사야? 이렇게 어린애가 마법사일 수가 있나.”

메릴의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수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대화하네요.”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자고 말 건 거 아니야. 내 허락 없이 마탑에 새로운 마법사를 들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아리안이 저한테 단단히 화가 났던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설마 며칠도 아니고 수년 간


모른 척을 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나요.”

“…….”

“벨라프랑은 오래전에 화해한 것 같던데……. 어땠나요? 그 여자랑은 아직도 잘 지내던가요?”

그녀는 지난 몇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보다 좀
더 간사해 보인다고나 할까.

아리안의 시선이 쭉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메릴이 그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아기의 동그란 머리 위로 솜털 같은 옅은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다. 아기가 힘겹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짙은 빨간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리안. 아기의 이름을 대신 지어 줄래요? 제가 작명에는 영 재주가 없는지라.”

저 뱀 같은 것이 나한테 왜 저런 부탁을 하지. 아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릴을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래 카일과 어울려 다니느라 그의 버릇이 옮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그래도 설마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뿐인데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나. 아리안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메릴을 보고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스텔라. 진짜 마탑에서 키울 거면 스텔라로 지어.”

“스텔라……. 그래요. 고마워요, 아리안. 아기도 기뻐할 거예요.”

스텔라. 특별히 좋은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 이름은 그저 아리안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한 여자의 이름일 뿐이었다.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저것에게도 아기는 귀엽게 보이나 보지. 아리안은 메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해
그렇게 결론지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비극은 항상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시간에 벌어지는 법이었다.

아리안은 메릴의 연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메릴이 아기를 데려온 것은 결코 순수한 의도로 행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다른 세계와
연결된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날이 그날이었음을.

단순한 사고였을까, 혹은 신이 그들에게 내린 벌이었을까.

메릴이 만든 마법진은 폭발했다. 물리적인 폭발이라기보다는, 마법진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의 폭발이었다.

당시 아리안은 침대에 누워 희미한 빛에 의존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돌연 온몸에 퍼져 있던 마력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끓어오른 마력은 폭발하듯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울컥 하고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느껴 본 적이 없던 끔찍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아.”

알마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리안은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고
의식을 잃었다.

***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다락방 창문이 열려 그 사이로 찬 밤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항상 연구로 분주하던 마탑이 이토록 조용한 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닥과 그녀의 옷에 묻은 피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의식을 잃은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을 만큼 끔찍했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핏자국이 허상인 것처럼.

“……카일.”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메릴.”

그리그 그토록 미워하는 이의 이름도 불러 봤다.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통증은 없었으나 이상하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다락방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카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오다가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

“카일.”

카일에게서는 마을사람들을 죽이고 고대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실컷 맡았던 시체 썩는 내가 나지 않았다.

“일어나 봐.”

그러니 죽은 것이 아닐 텐데. 그냥 의식을 잃은 것일 뿐일 텐데.

“카일, 카일…….”

아리안은 그저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의 몸을 등에 업고 다른 마법사들이 있을 곳으로 갔다.


지금 카일이 쓰러져 있는데 치료하지 않고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

다른 곳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법진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 책상 앞에 엎어진 여자……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잠든 듯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메릴.

아리안은 빠르게 메릴에게 다가갔다.

“메릴. 일어나 봐.”

메릴에 대한 감정 따위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었다.

“메릴.”

“…….”
“메릴.”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메릴이 눈을 뜨는 일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일도 없었다.

사실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카일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아, 또 나는 혼자 살아남았구나.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도, 이제는 몇 번이고
반복된 그 상황이 익숙해져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그저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중에는 메릴의 필체로


추정되는 글씨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쪽지인 듯했다.

[대상은 어린 아기로. 괜히 어른 몸에 넣었다가 날뛰면 귀찮아지잖아.]

[이왕이면 부모가 없는 애가 좋겠어. 부모가 애를 찾겠다고 귀찮게 할 수도 있잖아.]

[마법진 가동은 내일 밤. 올 때 애 데려오는 거 잊지 마.]

“…….”

아리안은 더 이상 종이를 넘기지 잃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든 듯 죽어 버린 메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시지만 죽었다는 이유로 너한테 동정을 품은 내가 머저리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수백, 혹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어리석게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외전 12-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는 서로에게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폭발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아리안은 그들을 보고 자신이 신경을 안 쓰는 동안 마탑이 개판이 됐다며 그저 조용히 혀를 찰 뿐이었다.

그때 방 어딘가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안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폭발을 일으킨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메릴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누워


있었다.

“…….”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붉은색의 빛이.
그것은 마치 아기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두운 붉은색의 빛. 이는 메릴이
사용하는 마법의 색이었다.

맙소사, 메릴. 어떻게 죽어서도 그리 추악할 수가. 아리안은 손을 가볍게 휘둘러 아기의 목을 조르던
힘을 쫓아내고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메릴의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마력들이 우는 아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리안은 벌레를 쫓듯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쫓았다.

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 아리안이 아기에게 달려드는 마력을 쫓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추악한
밑바닥을 보기 위해 마탑에 그들을 들여보냈었나. 아리안은 그나마 카일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음에
안도했다.

마력의 출처는 그들이 집필한 책들이 쌓여 있는 더미였다. 그들의 살아생전에 비하면 미약한 양이기는
했으나, 분명히 마력이 느껴졌다. 책들에 그들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아리안은 마력이 느껴지는 책들을 전부 모아 도서관에 차곡차곡 꽂았다. 그리고 마력이 도서관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방에 마법을 걸었다.

메릴이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는 것은 전부 아리안의 일이었다. 뒷수습이 전부 끝난 후에야 아리안은


허기를 느끼고 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마탑에 사람이 붐볐던 동안에는 느껴 본 적이 없던 허기에, 아리안은 괜히 카일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몇


주쯤 굶어도 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아리안의 식사를 챙기려고 했었다. 카일이 지금의 그녀를
봤다면 당장 잔소리를 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세상에 없었으니.

그때 다시 조그마한 아기 울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뒤처리에 몰두하느라 아기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우는 아기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다. 카일을 포함하여, 전부. 마탑에 남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리안과
아기, 이 둘이 전부였다.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전부 떠나보내야 했기에, 그녀에게는 감히 남에게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과연 제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들어하는 이가 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아기를 잘 돌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아기를 어딘가에 완전히 맡겨 버린다면 모를까…….

“…….”

아리안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

어두운 새벽, 아리안이 도착한 곳은 마탑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에 위치한 고아원이었다. 시간이 늦은
탓에 건물은 사람 소리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아기와 바구니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텔라, 아리안이 유일하게 아기에게 준 것을 함께
담아.

미안, 미안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네게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지 못 해서 미안해. 아리안은 한참


동안이나 아기를 내려다보다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또 수년이 지났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아리안은 마탑에 틀어박혀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벨라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벨라프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한 깔끔한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꽤
비참했다.

르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전염병이라고 했다.

아리안은 즉시 겉옷을 걸치고 마탑을 나섰다. 참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개인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날이 따스했다.

오랜만에 본 벨라프는 흐른 시간에 비해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벨라프는 빠른 노화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오래전 그가 르비아를 위해 사용했던 마법의 부작용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무정하구나. 이런 큰일이 있어야만 나한테 연락할 생각을 하고.”

“지금이 장난이나 주고받을 상황이야?”

“장난친 거 아니었어.”

아리안은 꽤 오래 그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벨라프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이따금 마당에 나가 르비아의 이름이 적힌 묘비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벨라프가 카일의 부재를 알아차린 것은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카일은 어디 있냐는 그의 말에


아리안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그에게 전했다.

벨라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묻고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말한다고 해도 달라진 것 무엇 있었겠는가. 오히려 르비아가 살아 있을 때 그 사실을 알렸더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벨라프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판단한 후에야 아리안은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탑에 돌아온 후부터
더 이상 마탑에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받아 주고 정이 들어 봤자 언젠가 떠나갈
이들이었다. 찾아온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일이 반복되니 방문객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마탑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졌다. 한때는 사람들에게 마법사들이 악마들의 수하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다. 악마라고 부르기에 마법의 힘은 너무나도
유용했다. 왕국에 마법 왕국이라는 명예를 쥐여 줬던 마탑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

사실 여태껏 마탑의 도서관은 이름뿐인 장소였다. 도서관의 책은 점점 불어났으나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도서관을 어떻게 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연구를 통해 집필된 책은 후대를 위하여 도서관에 남겨졌다. 물론 마법사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구에 미쳐
있던 까닭에 선대가 남겨 준 책을 읽어 볼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녀가 몽마에 대한 책을 펼친 것은, 마탑에 남은 사람이 그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못 해 넘칠 지경이었다.
책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몽마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에 대한 진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별것 없는 내용들. 내용에 대한 흥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아리안이 돌연 손을 멈췄다.

몽마의 검. 그곳에는 몽마의 검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글씨가 매우 작아 읽기 힘들기는 했으나,


아리안은 오랜 시간을 할애해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책을 읽었다.

아리안은 검에 대한 장을 읽자마자 생각했다. 아, 이거라면 벨라프가 잃었던 마법을 다시 되돌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검이 생성되는 조건을 읽자마자 포기했다. 몽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만


몽마의 검이 생성된다.

그녀 또한 악마나 몽마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그것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들인지라,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간만에 영양가 있는 책을 발견했나 싶었더니,
이번에도 꽝이었다. 아리안은 거칠게 책을 덮었다.

“이걸 알아낸 놈도 대단하네. 그 이기적인 것들이 남을 위해 희생한 사례가 없었을 텐데. 이 책 대체


누가 쓴 거야?”

책의 표지에 적힌 저자를 확인했지만 이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아왔던 헬렌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첫 방문자였기에
특별하다고 인식했던 그녀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그 후로 아리안은 간간이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죽은 마법사들의 마력이 담긴 책들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덜컹덜컹 움직였기에 도서관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줄어들었고, 대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다락방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그날도 매일 똑같은 날들 중 하나였다. 아니, 책을 읽던 그녀의 눈앞에 갑자기 마법진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테다.

“……이게 무슨.”

마탑에 아직 남아 있는 마법사가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수십 년이 흐르도록 마탑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법진은 누가 그린 것인지.

“…….”

다만 그녀가 마법진을 향해 발을 뻗은 것은 마법진 너머로 어렴풋이 몽마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 마법진 속으로 들어가면 몽마의 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찾기는 했다. 다만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들려 있기는 했지만.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는 아직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금발에 붉은색 눈. 어딘가 익숙했다. 그리고 후에


여자는 자신을 스텔라라고 소개했다.

스텔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리안은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직접 지어 주었던 이름인데.

스텔라가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때 못한 속죄를 하라는 의미인가. 벨라프, 네가 마법을


포기할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래, 속죄. 이것은 속죄를 하라는 의미이다. 메릴을 대신하여, 아무 죄 없는 이를 이 꼴로 만든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외전 13-

외전 2

“애니카. 너 출장이다.”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애니카가 급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말도 안 돼,


출장이라니.

“맥클라우드 왕국에 있는 상단이랑 이번에 계약을 맺었거든. 네가 우리 상단 대표로 좀 가 줘야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애니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5 년 전, 그녀의 친구가 사라졌다.

물론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0 년 전에도 그녀의 친구는 이유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은 채 사라졌었고,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는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돌아왔을 당시에 모니카 공작과 함께 있기에 그와
결혼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뤄진 사랑이라니. 당시의 애니카는 그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연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 년 전 모니카 공작가는 몰락했다. 상단에 들어가 승승장구를 하던 그녀에게 이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던 일도 전부 내팽개치고 공작저로 달려갔으나, 어디서도 친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경비병들이


출동해 무너진 공작저를 수색하고 있기에 가서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는 없었냐고 물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고 싶어 공작저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이곳에 없다는 말만 돌아오기에 공작이 제
친구를 너무 사랑해 둘러댄 거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애초에 공작저에 있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친구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자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잠시 마을을 떠난 것뿐이다.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친구가 사라진 시기에 맞춰 함께 사라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노아. 제 친구를 잘 따르던 어린아이.

10 년 전 친구가 사라졌을 때 아이는 이상해졌다. 그녀가 스텔라와 친했던 탓이었을까, 애니카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만을 지키기는 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친구는 사라졌고 아끼던 아이는
변했다. 자신만을 제외하고 세상이 갑자기 변한 것 같다고,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돌아오자 아이는 매우 기뻐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둘 다 사라졌고. 불법적인
단체에 의뢰를 해서라도 그들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매번 찾을 수 없었다는 대답만 들려올 뿐이었다.

애니카가 상단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제국에 남아 있으려고 한 이유는 그들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출장이라니. 그렇게 되면 그들이 돌아왔는지, 돌아왔다면 언제 또 떠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상단주님.”

“어서 가서 짐 싸지 않고 뭐 해?”

“그, 트리센 마을 말인데요. 혹시 제가 맥클라우드에 가 있는 동안 트리엘 마을에 노아나 스텔라라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한테 연락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상단주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는 듯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카는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빠져나왔다.

***

챙길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맥클라우드 왕국에서 사용할 돈과 입을 옷가지 조금. 그게 전부였다.


애니카는 가벼운 짐 가방을 들고 상단에서 운행하는 배에 올라탔다.

푸름을 넘어 시퍼렇기까지 한 바다를 보니 노아의 두 뺨을 쥐고 눈동자가 바다 같다며 신기해하던 제


친구가 떠올랐다.

맙소사, 이제는 바다만 봐도 스텔라를 떠올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상사병이 아닐까.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웃었다.

맥클라우드 왕국은 제국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배로 한 달은 족히 걸렸다. 그 한 달 동안


애니카는 배는 사람이 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 으……. 배는 사람이 탈 만한 게 아니야…….”

웩. 애니카는 갑판에 걸터앉아 구역질을 했다. 맥클라우드 왕국의 항구가 멀지 않았으나 오랜 항해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종이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여자가 그녀를 맞았다. 맥클라우드의 상단에서 보내 준


사람인 듯했다. 애니카는 여자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녀가 맥클라우드에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집을
고르러 갔다.

여자가 보여 준 애니카를 위해 준비된 집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기에, 애니카는 마을의 도시의 외곽에 있는 집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 펼쳐졌다. 집은 아홉, 아니 열 채


정도일까. 대충 세어 봤기에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정도인 것 같았다.

애니카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보여 준 집을 골랐다. 여자는 다음날 아침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애니카는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마을에 외지인이 왔는데도 나와 구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맥클라우드는 먼 나라였다. 비교적 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언어가 비슷한 아르엘 왕국과는 달리
맥클라우드의 언어는 제국과 정반대였다. 맥클라우드에 오기 전 이웃들과 말이 안 통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 걱정했던 시간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맥클라우드의 상단에 불려가 상단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고 상단주가 전하라고
지시를 내린 제국 상단 측의 의견을 전하고 제국과 맥클라우드 간의 무역로에 대한 회의를 하고 무역 상품
가격에 대해 협상을 한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일정이었다.

그녀는 달이 하늘 높이 뜬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애니카는 다음날 아침으로 먹기 위해 산


사과를 양손 가득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난관을 마주한 것은 집 문 앞에서였다. 열쇠가 가방에 들어 있는데 품에 가득한 사과들 때문에 열쇠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구니를 챙길걸.

뒤늦게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니카는 최대한 사과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고자 했다. 사과 중 일부를 입으로 무는 등 별짓을 다 해 봤으나 결국 사과들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중 하나는 빠르게 굴러가 옆집의 문을 쿵 하고 두드렸다. 애니카는 부디 이웃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통역사도 없는 곳에서 어눌한 발음으로 이웃과 인사해야 한다니. 일에 찌든 지금의
상태로는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기도가 무색하게도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던


이웃이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애니카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 금발을 가진 이웃은 말없이 바닥의 사과를 함께 줍기 시작했다. 애니카는 묵묵히 사과를 주우며
맥클라우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애니카는 암흑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어, 그러니까…… 맥클라우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이 뭐였더라…….”

“루마스요, 루마스.”

“아, 맞다. 그랬었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마스.”

애니카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루마스’를 외치고 한참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웃이 제국 사람이었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런 먼 나라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가 없는데,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눈앞의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마침 마법으로 만든 등불이 거리를 밝혔다. 애니카는 이웃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스텔라!”

“……애니카?”

역시나 이웃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그리고 익숙한 그 목소리. 그녀는 스텔라였다. 스텔라도 곧 그녀를 알아보고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너 왜 지금까지 안 돌아왔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미안, 미안해, 애니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으나 애니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서 누군가
스텔라를 따라 나왔다. 그 또한 익숙한 얼굴이라, 애니카는 바보같이 멍청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뭐야 노아 네가 여기 왜 있어!”

그러면서도 애니카는 얼른 달려가 남자의 흑색 머리카락을 문질러 헝클어뜨렸다. 남자의 짧은 짜증이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텔라가 사라진 후부터 그가 꽤 자주 보여 왔던 반응이었으니까.

“……애니카?”

“애니카가 뭐냐, 애니카가! 누나라고 불러야지!”

“아, 그렇지. 애니카 누나.”

애니카가 꿱 소리를 지르자 헷갈렸다는 듯이 말을 정정하기는 했으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건


헷갈렸을 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애가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능구렁이가 됐지.”

“칭찬으로 들을게.”

노아가 말 그대로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애니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와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예민이 극에 달했던 그때와는 달리 그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근데 너희 왜 같이 살고 있어?”

“아, 이건.”

“너희 혹시 결혼했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역시 그렇게 보여?”

스텔라는 부정을, 노아는 긍정을 표했다. 함께 살면서 서로 다른 대답이라니. 애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봤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모니카 공작과 스텔라가 함께 수도원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비슷한
질문을 던졌었다. 그때는 정말 공작과 제 친구가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품고 있었기에.

물론 그런 소설 같은 일을 상상하며 꺅꺅거리기는 무리였다. 이제 그녀는 너무 성장해 버렸다. 애니카는


노아의 말보다는 스텔라의 말을 믿기로 했다.

-외전 14-

“하긴 노아 너는 옛날부터 스텔라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런 망상을 할 법도 하지.”

“망상이라니.”

노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조금 험악해 보였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수 년 간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살면서 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애니카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한 번 친구를 세게 끌어안았다. 스텔라는 답답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애니카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돌아오기만을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들을 맥클라우드에 와서야 만나게 되다니. 상단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니카는 상단주를 떠올리며 제국이 있는 방향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노아와 스텔라가 혼자 꾸벅거리고 있는 그녀를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뭐 어떤가.

애니카는 그들과 헤어져 침대에 누운 후에도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이 꿈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볼을 꼬집어보았다. 다행히도 세게 비틀어 꼬집힌 볼은 아팠다.

***

맥클라우드 왕국에 온 첫날부터 통역사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여자가 애니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날과 금일 그녀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제는 되게 피곤해 보이셨는데. 어제는 오래 배를 타고 오시느라


힘들어서 그러셨던 걸까요?”

“글쎄요. 어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죠.”

그리고 기분이 좋은 건 맞지만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일이 이렇게 힘든데 피곤하지 않을 리가.

애니카는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켰다. 통역사의 귀에 들어가는 말은 전부 맥클라우드 왕국


상단주에게 전해질 것이다. 통역사의 앞에서는 그저 후후 기분 좋은 척 웃었다.

그래, 오랜 친구를 만나 기분이 좋은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스텔라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를 않았다. 스텔라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더라. 헤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니, 애초에 스텔라가 가리는 음식이 있던가. 웬만하면 다 잘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노아가 떠올랐다. 스텔라와 노아. 노아가 어렸을 때부터


스텔라를 따랐다고는 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봐도 결혼을 한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모니카 공작을 피해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스텔라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또 그럴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노아는 그냥 순수하게


스텔라를 좋아하는 것뿐이었고, 스텔라가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꼬맹이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적어도 건국제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스텔라를 만난 다음 날, 일을 마친 후 통역사가 함께 가 주겠다고 한 것까지 마다하고 애니카는 홀로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 언어로 겨우 사과를 사들고 스텔라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사과를 먹으면 좋다는
잔소리를 몇 마디 한 후에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기요, 저기. 저기에 내려 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루마스 루마스.”

어색한 발음에도 마부는 허허 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애니카도 마부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눠 봤는데 오늘은 어떨까.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애니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스텔라?”

하지만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며 스텔라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으나, 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 다


잠든 듯했다.

뭐,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되지. 애니카는 바구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상단이 위치한 도시까지 그녀를 태우고 갈 마차가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가방에 사과를 쑤셔 넣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다행히 집에서 나왔을 때 아직 마차는 출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는 스텔라도 보였다.

시간이 없어 사과의 효능을 설명할 새도 없이 스텔라의 손에 사과 한 알을 쥐여 주고 급하게 뛰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얼마나 좋은지는 저녁에 설명하도록 하자. 애니카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스텔라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충 의미 정도는 전달이 되었기를 바라며 애니카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빠르게 달려
상단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슈르 씨. 좋은 아침이에요. 사과 한 알 드시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애니카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애니카는 통역사에게 사과 한 알을 건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제국 상단에서 그녀에게 보낸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옆에 앉아 있는 통역사에게도 위로의 눈빛을 던졌다.
애니카가 처리한 서류를 맥클라우드어로 번역하는 것은 아슈르의 일이었으니.

애니카가 서류를 넘기면 아슈르는 그저 말없이 제국어를 맥클라우드어로 번역했다. 점점 말이 없어지다


보니 애니카는 왠지 이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심지어 주어진 일을 전부 끝내고 휴식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슈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

“…….”

“……저, 아슈르 씨.”

애니카가 조심스럽게 아슈르를 부르자 그녀가 뭐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소중한 휴식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빛은 어쩐지 매서워 보였다.

“왜 그러시나요?”

“아, 다름이 아니고. 제가 온 지 며칠 안 된지라 이곳 지리도 잘 모르잖아요. 혹시 가 볼만한 곳 추천해


주실 수 없나 해서요.”

“……아.”

“근데 피곤하실 텐데 제가 괜히 방해한 건…….”

“괜찮아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방해가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애니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멀리 가지 않는 이상 이 주변은 전부 도시예요. 빽빽한 건물들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닌 이상 특별히


가 볼만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런가요.”

“그래도 다음 주부터 일주일 간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네요. 건국제


때문이었나.”

“건국제요?”

애니카가 얼른 반색하며 물었다. 애니카의 과하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아슈르는
끝까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놀이라니. 불꽃놀이는 그녀의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 매년 마을 축제가 열릴 때면 스텔라는 항상 마을에 내려가
불꽃놀이를 구경하자며 그녀의 치마를 잡아끌곤 했었으니까.

“고마워요, 아슈르 씨. 제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보답으로 드릴 건 사과밖에 없는지라, 일이라도 좀


도와 드릴까요?”

아슈르는 그저 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맥클라우드어도 모르면서 돕긴 뭘 도와요. 애니카는 그 의미를 대강 알아채고 그냥 아슈르를 따라 하하


웃었다.
***

애니카는 전날과 같이 손에 사과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든 채 문은 두드렸다.

“스텔라?”

소리 내어 스텔라의 이름을 부르자 안쪽에서 사람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키가


그녀와 비슷한 것을 보니 스텔라인 듯했다.

또 일찍 잠에 들려던 건지 집 안이 어두웠다. 밤인 데다가 불까지 켜지 않아서 스텔라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건 그녀가 말할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입모양뿐이었다.

마차에서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연습했으면 무엇하나. 막상 말을 할 때가 되니 걱정이 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헤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이제 친구가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반면에 그녀의 반응은 수 년 전과 같았다. 애니카가 무슨 말을 하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처럼.


그래, 그냥 말하면 되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해서 무엇하겠나.

“스텔라. 불꽃놀이 아직도 좋아해? 그, 예전에는 네가 막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고 조르고 그랬었잖아.


……비록 내가 그때는 같이 안 가 주긴 했었지만…….”

“불꽃놀이?”

“다음 주에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한다길래.”

“당연히 아직 좋아하지. 잠시만, 노아한테도 물어보고 올게.”

스텔라는 잠시 후 돌아와 ‘노아도 가겠대’라는 답을 가져왔다. 아아, 다행이다. 둘 다 10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구나. 애니카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빙긋 웃었다.

***

건국제 당일.

“애니카! 저기! 저기 가 보자!”

“누나, 같이 가.”

같은 집에 사는데도 노아와는 달리 유난히 피곤해 보이던 스텔라는 광장에 나오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오히려 항상 쌩쌩하던 노아가 그녀를 따라다니느라 진땀을 뺄
지경이었다.

오히려 집에서 더 쌩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쉼터가 되어야 할 공간에서 더 힘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집에서 노아가 스텔라한테 노동이라도 시키는 건가.’

애니카는 꼬치를 입에 욱여넣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노아가 스텔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챙기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뭘까, 저 둘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둘의 관계는 너무도 오묘하게 변해
버렸다.

“아, 잠시만. 오래 걸었더니 목마른 것 같아. 나 물 좀 사 올게.”

“내가 같이 가 줄까?”

애니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문이 뭐 별것이겠는가. 손짓 발짓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것을. 스텔라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애니카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괜찮다고 우기니
따라오지는 않았다.

“금방 올게!”

해맑게 외치며 가게로 들어갔으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섯 가지 사이즈로 물통들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애니카가 손짓 발짓에 최선을 다해 물을 사왔을 때 노아와 스텔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외전 15-

“……스텔라? 노아?”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으나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 오겠다고 했는데 성격 한번 급하네.”

애니카는 툴툴거리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어차피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일 것이고, 그중에는 스텔라와 노아도 있을 것이다.

애니카는 맥클라우드에서는 통하지 않을 제국어로 지나가겠다는 말을 연발하며 광장으로 향했다. 해는


완전히 진 지 오래였지만 불꽃놀이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채였다.

“스텔라! 노아! 어디 있어?!”

광장에 도착한 후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스텔라와 노아의 이름을 외쳤지만 주변 사람들만이 그녀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지나갈 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러다가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덜컥 걱정이 됐다.

“진짜 어디 간 거야, 스텔라……. 자기도 불꽃놀이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 스텔라! 노아!”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애니카는 금방 그가 노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아!”

“애니카 누나.”
“어디 있었어. 같이 불꽃놀이 못 보는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스텔라는? 스텔라는 어디 있어?”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지, 노아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왠지 그의 어렸을 적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스텔라 누나는, 아파서 먼저 들어갔어.”

“뭐라고?”

스텔라가, 아프다고? 애니카는 놀라 노아가 한 말을 또박또박 따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그러자 노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잠깐만.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 스텔라 누나가 자기 때문에 걱정 끼치는 거 싫다고 누나는 불꽃놀이 마저 보고 들어오래.”

“스텔라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불꽃놀이를 계속 봐.”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야, 잠깐! 노아!”

노아는 뒤돌아 집으로 가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인파에 밀려 손은


미끄러지고 말았다. 몇 번이고 애타게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노아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애니카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불꽃놀이를 함께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렇게 걱정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집에서 침대에 누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데 모여 다 같이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애니카는 사람이 드문 언덕으로 향한 후 물통을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은 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며칠간 일하는 시간마저 즐겁게 느껴질 정도로 기대하던 날이었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언덕 위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보니 사람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건국제를 잘 즐겼다는


듯 후련한 표정이었는데, 그녀만 아니었다. 그녀만 서운했고 그녀만 아쉬웠다.

“아으…….”

“흐으…….”

서러워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팍 묻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조금 늦게 들려온 소리는


그녀가 낸 것이 아니었다. 애니카는 멍청하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분명 노아는 불꽃놀이가 시작하기도 전에 스텔라를 간호해야 한다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누구인지. 눈을 아무리 비비고 다시 봐도 저 검은 머리칼도 저 얼굴도


노아의 것이 맞았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를 끌어안고 상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스텔라를 간호하러 가겠다면서. 지금 아픈 스텔라를 두고 저러고 있는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으려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여자는 스텔라였다. 다시 말해 노아와 스텔라,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진득하게 혀를 섞고


있었다.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정말 저 두 사람이 스텔라와 노아인 것인가, 자신이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다.

하지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스텔라와 노아가 맞았고 환각도 아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헤어져 있던 몇 년 동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입만


벌리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스텔라가 제 입을 떼어 내며 물었다.

“애니카는 먼저 집에 들어갔다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프면 약이라도 사 가서 같이 있어 줘야 할


텐데…….”

게다가 자신은 여기 멀쩡하게 서 있는데 먼저 집에 들어갔다니. 그리고 스텔라는 아파서 먼저 들어갔다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아니, 그냥 피곤하다고 하더라. 며칠간 계속 피곤해 보였잖아. 피로가 쌓였나 봐.”

애니카는 노아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듣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갑자기 와서 스텔라가 아프다고
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게 감히 나를 속여? 애니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노아를 바닥에 팽개치고 마구 짓밟으며 화를 풀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그들을 지켜봤다. 아니, 지켜보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친구랑 아는 동생이랑 언덕에서 입술 비비는 걸
봐서 무엇 하나. 애니카는 마차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겨우 침대까지 끌고 가 누웠다. 잠드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아 이 망할 놈 하고 중얼거리다 보니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

“애니카!”

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니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꿈인가 싶어 무시했으나, 그 누군가는 집요하게도 애니카가 일어날 때까지 문을
두드려 댔다. 애니카는 잠결에도 어렵지 않게 그 누군가가 스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벽의 미약한 햇빛이 눈가를 간질였다. 애니카는 눈을 비비다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날


건국제가 끝나고 아주 푹 잔 모양인지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애니카! 애니카!”

아침 일찍부터 스텔라의 목소리와 함께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애니카는


미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비틀 문으로 걸어갔다. 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지.
“스텔라……? 이 이른 시간부터 왜…….”

“애니카!”

문을 열자마자 스텔라가 들이닥쳐 애니카의 뺨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어디 상처라도


있는지 살펴보고 열이 있나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고,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스텔라는 그녀를 놓아줬다.

“어제 아프다고 미리 들어갔잖아. 혹시 혼자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을까 봐 와 봤어.”

“아……. 맞다, 노아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노아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냥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다며. 왜 그랬어?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뭐? 데려다주겠다고 해? 그놈이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야?”

목이 터져라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가 버릴 때는 언제고 저런 휘황찬란한 거짓말을. 애니카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스텔라는 그런 놈이 뭐가 좋아서 어제 그렇게
쪽쪽대고 있었을까. 역시 얼굴인가. 스텔라는 예전부터 얼굴에 약했으니.

“애니카.”

“…….”

“애니카.”

“…….”

“애니카?”

“아, 응.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부르는 것도 못 들어.”

차마 너희가 전날 입을 부닥치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할 수는 없었기에, 애니카는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노아 말 들어 보니까 많이 아팠던 거 같은데. 지금은 괜찮은 거 맞아?”

스텔라가 몇 번을 물어보든 애니카는 괜찮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아팠던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지. 한숨 푹 자니까 다 나았어.”

스텔라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는 듯 위아래로 매섭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다행이네.”

애니카는 뒤늦게 자신들이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잡아당겨
활짝 열며 말했다.

“들어와서 차나 마시고 갈래?”

“잠이나 깨고 말해.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애니카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친구의 얼굴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난 가 볼 테니까 조금 더 자. 너무 늦게까지 자지는 말고. 아픈 건 잘 쉬어야 나아.”

“으응.”

“식사도 잘 챙기고. 바쁘고 귀찮다고 대충 사과로 데우지 마. 잘 안 먹으면 아픈 것도 안 아나.”

도대체 지난 5 년 사이에 제 친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잔소리쟁이가 돼 버린 걸까. 그나저나


아침도 사과로 때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 갈게.”

애니카는 비몽사몽한 눈을 한 채로 스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애니카는 스텔라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동생은 은근히 걸리적거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과 스텔라 사이를
방해하려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노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스텔라에게 전부 말해 버릴까? 아니, 그래도 5 년 전에


같이 사라졌었으니 같이 산 세월이 결코 적지 않을 테다. 스텔라가 노아의 그 성격을 모를 리가 없는데.

“…….”

애니카는 고개를 마구 저어 털어 버린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다시 헤어지지 않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쭉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노아가 옆에 붙어서 깝죽거리든 말든, 자신이 더 달라붙으면 되는 것 아닌가. 못 보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이거면 충분하지. 물론 노아 그놈이 옆에서 깝죽거리는 게 거슬리기는 하지만. 애니카는 눈을
감고 살포시 웃었다.

-외전 16-

외전 3

“전하.”

“…….”

“……전하.”

“아. 코르넬.”

알베르트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해 이런 것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이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그자가 저희를 쫓고 있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사실 성력이 담긴 마력석도 거의 떨어져


가는지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법사가 맹렬히 그들을 추격할 때 겨우 그들의 모습을 숨겨 주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마력석이었다.
그런데 마력석이 떨어져 간다니. 그 말은 그들에게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베르트는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숨을 뱉었다. 날이 추웠다. 입 밖으로 뱉은 숨은 뿌옇게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한때 누구보다 빛났었다. 젊은 나이에 공작위에 올라 얼마나
많은 눈길을 받았던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칭송했었다. 특히 수려한 얼굴은 사람들의 호감을
끌기에 최고의 무기였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여자마저도 그의 얼굴을 볼 때는 종종 멍청한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

……그래, 그 여자. 스텔라.

첫 만남은 여느 인연들이 그렇듯이 우연이었다. 후원하던 수도원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기던 오묘하면서 기분 좋은 향을 따라가 봤더니 계단에 앉아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우연, 그놈의 우연. 모든 후회는 이름만 들어도 짜증나는 그 우연에서 시작됐다. 평생을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서 살아왔던 탓에, 모든 게 만만하게 느껴졌던 탓에. 우연과 인연, 감정에 운명까지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 죄였다. 향을 맡았던 즉시 그곳에서 도망칠걸.

……그래, 당신은 진짜 독이었구나. 그녀의 앞에서 가끔 당신은 독 같다며, 중독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그녀를 쫓고 쫓고, 수 년 간 쫓다 보니 그녀가 옆에 없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지경까지 왔다. 마법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코르넬이 말했었지.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수십 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미움받은 젊은 공작. 그 칭호가 붙자마자 그를 칭송하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마법사에게 미움받은 그를 감히 도울 용기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지.

알베르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연한 금발, 그리고 붉은 눈……. 또 무슨
특징이 있더라. 어떻게 생겼더라. 그렇게 사랑했었으면서,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의 삶도 망쳐 버렸으면서
이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알베르트는 낮게 웃었다.

뜨겁던 사랑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식어 갔다. 아마 마법사가 공작저를 습격한 순간, 그쯤부터였을


테다. 자신이 왜 그런 사랑을 했었나, 스스로의 마음에 의심이 갈 정도로.

그가 기억하기에 그녀에게서는 항상 특이한 향이 났었다. 그는 그 향을 참 좋아했었다. 맡으면 또 맡고


싶었고…… 하여튼 그러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기분은…… 약에 찌들어 있을 때와 기분이
비슷했다. 이제는 무슨 향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코르넬이 옆에서 계속 그를 끌어당겼다. 가야 합니다 공작 전하, 가야 합니다 전하. 그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다만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도 꽤 지쳐 보였다. 하기야, 며칠 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힘을 주고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일어나서 무엇하나. 도망친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나. 이미 가문은


몰락하여 사라지고 자신은쫓기는 신세가 되었는데, 계속 이렇게 살아 무얼 하지? 애초에 무얼 할 수 있긴
한가? 그 마법사가 계속 자신을 쫓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코르넬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전하, 제발……. 더 이상 남아 있는 마력석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코르넬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바닥에 흩부려진
핏자국…… 그리고

거 봐, 코르넬. 도망쳐 봐야 소용이 없었다니까. 알베르트는 작게 웃으며 이미 사라져 없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죽을 때가 다 됐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

마법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알베르트는 앉아 있는 데다가 마법사는 키가 꽤 컸기 때문에 마법사와 눈을


맞추려면 한참 고개를 들어야 했다. 알베르트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마법사의 무릎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내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 혹시 미친 건 아니니? 남의 인생에 간섭할 때는 그렇게


즐거워하더니.”

자신이 남의 인생에 간섭할 때 즐거워했던가. 사람을 죽이며 즐거워했던가, 사람을 고문하며


즐거워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영영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자신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눈앞의 마법사에게 죽을 테니까.

“……뭐, 유언이라도 들어 줄까. 오늘이 지나면 어차피 잊어버릴 테지만. 들어 주기라도 한 테니.”

“후회…… 후회해.”

“후회?”

“그래, 후회…….”

“뭘 후회하는데?”

무엇 하러 굳이 그런 것까지 묻나. 어차피 기억해 줄 것도 아니면서. 오늘이 지나면 잊을 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제법 착실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힘이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법사가 잘 들은 것이 맞나. 기껏 말한 것을 바로


잊어버렸으면 큰일인데. 알베르트는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아리안과 눈을 맞췄다. 조금 고개가 아프기기는
했으나 대화하기에는 훨씬 수월했다.

“그게 끝이야?”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지?”

“다른 사람한테 한 행동이 후회스럽지는 않아? 너 사람 많이 죽였잖아. 너 도망치고 나서 저택 뒤지면서


기록으로 남은 것들 세어 본 것뿐인데도 못해도 수백 명은 되겠던데.

알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없어 느릿하게 행동한 것뿐이었으나 언뜻 보면 죄책감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이는 긍정의 표시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것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답변.
“……그럼 사람 죽인 건 후회 안 해? 아무 죄 없는 사람도 많던데. 그리고, 스텔라한테는? 네가 가장 많이
괴롭힌 게 스텔라인데 왜 스텔라한테는 안 미안할까.”

“…….”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정말, 조금도 안 미안해? 스텔라한테 한 짓 정말 조금도 후회 안 해?”

알베르트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후회를 한다면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한 후회가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위한 후회일 테다.

“…….”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표정하던 마법사의 얼굴에 경멸이 담겼다. 알베르트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렇게 경멸할 만한 말을 했나. 그저, 유언을 들어 주겠다길래 마음에 담아 뒀던 말을 한
것뿐인데.

“그래……. 네바에랑 보러 갔었던 연극도 이랬었지. 악당 놈들은 절대로 후회도 속죄도 사과도 안
하는구나. 딱 연극에 나왔던 악당 수준이야. 그때는 멍청하고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배울 게 많았다니까.”

네바에? 연극, 악당? 마법사는 자신만 알아들을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장검을 예상했으나 검은 생각보다 짧았다.

마법사의 손에는 어두운 색상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의 중앙에는 보라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신이 저책 홀에 전시해 뒀던 장식용 검처럼 보였으나 마법사는 실제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것이 검이 장식용이 아님을 증명했다.

“…….”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단검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갈랐다.

검이 가르고 지나간 부분에서 시작해 따듯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 따스한
액체가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는 굳이 알베르트의 끝을 지켜보지 않았다. 마법사는 알베르트가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시선을 거두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알베르트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핏자국만 남기고 날아갔던 코르넬의 머리통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눈을 번쩍 뜬 채 벽에 박혀 알베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아무리 봐도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의 기사들이 전부 도망갔을 때 그만이 끝까지 공작의 옆에 남았다. 몰락한 공작의 옆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공작의 사냥개라고 불리더니 정말 마음까지 사냥개가 되어 버린 모양이야. 충성밖에 모르는 머저리


같으니라고. 알베르트는 그를 머저리라 욕했다. 자신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모든 것을 잃은 공작이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던 것은 기사 하나뿐이었다.


알베르트는 은은하게 웃으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코르넬, 너는 내가 거둔 최고의 기사였으니.


-외전 17-

외전 4

코르넬 스테인. 본디 그에게는 성이 없었다.

뒷골목에서 우연히 알베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코르넬일 뿐이었다.

그래, 우연. 그것은 전부 우연이었다. 그가 알베르트를 만난 것도, 알베르트가 그를 데려가 검을 몇 번


휘둘러 보게 했던 것도. 그리고 그를 스테인 가에 입적시킨 것까지도.

그는 알베르트를 따라가 처음으로 음식을 배불리 먹어 봤다. 코르넬은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집어넣으면서도 알베르트를 힐끗거렸다. 그는 턱을 괴고 자신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과 나이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어른인 양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 개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오묘했다.

그가 눈앞의 소년이 어린 나이에 공작위를 물려받은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알베르트는 스테인 가에 코르넬을 맡긴 채 한동안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코르넬은 스테인


자작이 알베르트의 이름을 알려 주기 전까지는 그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스테인 자작은 코르넬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알베르트가 자작에게 그렇게 하라 지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코르넬은 반항 않고 묵묵히 검술을 배웠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했다. 때로 검을 휘두르다가 손바닥이 찢어지기도 했다. 그런


생활이 매일 반복됐다.

스테인 자작은 엄격한 스승이었으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이 코르넬 스테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아들처럼 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검술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면 그는 꽤 다정한 사람이었다.

자작은 가끔 술을 마시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3 년 전에 저택에 불이 나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고.


코르넬은 자작이 불우한 과거를 자신에게 말해 준다고 해서 굳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자작은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는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사의 덕목은


충성이라느니, 언젠가 공작님이 너를 찾으러 올 테니 그에게 충성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느니.
그에게는 귀찮은 잔소리일 뿐이었다.

알베르트가 다시 코르넬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5 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알베르트는 이미 소년의 티를


벗은 완연한 성인이었고, 코르넬은 여전히 앳된 티가 나는 청년이었다.

알베르트는 그에게 자신이 데려온 기사들과 싸워 볼 것을 요구했고, 코르넬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알베르트가 데려온 기사들을 몇 쓰러뜨렸다.

“자작. 꽤 괜찮게 키웠군.”

“아무렴요. 어떤 분이 명령하신 건데 잘 따라야지요.”

코르넬 그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공작과 자작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를 보아 공작이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스테인 자작. 그와는 수년간 함께했으나 이제는 헤어져야만 했다. 검술을 가르칠 때만큼은 엄격했으나
그래도 꽤 친절했던 자신의 스승.

“가지, 스테인 경.”

“…….”

코르넬을 알베르트를 따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스테인 자작이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알베르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자작은 자신이 아니라 모니카 공작에게 친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코르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를 따라나섰다.

알베르트는 항상 그를 스테인 경이라고 불렀다. 코르넬은 알베르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된 후 종종


스테인이라는 성을 떼고 자신의 옛 이름만을 되뇌어 봤다. 코르넬, 참 짧기도 하지.

생각해 보면 그가 가진 것은 모두 알베르트가 준 것들이었다. 식사도, 입고 있는 옷도,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성마저도. 묘한 일이었다.

하루는 알베르트가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개인적으로 지시할 일이 있나 싶어 찾아가 문을 여니, 사람이


죽어 있었다.

“…….”

어쩐지 문을 열기 전부터 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나더라. 코르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수년간 매일


검술을 배웠을 뿐이지, 사람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뒷골목에서 살 때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본 적은 많았지만,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아, 경. 왔는가.”

죽은 이들의 한가운데에는 알베르트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죽은 이들은 모니카 공작의 전속 기사임을


나타내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알베르트의 손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 중 딱 한 명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마저도 곧 죽을 듯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기는 했지만.

“…….”

“이들이 내 충성스러운 기사임을 연기하면서 내 정보를 빼돌리고 있더군.”

“…….”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당연히 죽여야 함이 옳겠지. 아, 물론 이제 살아 있는 남은 이는 한


명밖에 없기는 하지만.”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를 했던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그 동료들이 공작의 정보를 빼돌리고 있었다니.

공작은 천천히 코르넬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검을 쥐여 줬다. 그는 눈꼬리를 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미소는 전부 저랬다. 5 년 전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던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도대체 지난 5 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스테인 경. 내 충성스러운 기사.”

“……예, 전하.”

“내 기사들 중 경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러니 경에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지. 감히


주인을 배반하려고 한 저자를 직접 처단하라.”

손이 덜덜 떨려왔다. 코르넬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사람을 죽이라고, 그것도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를.

코르넬은 자신의 처지를 보며 낮게 웃었다. 자신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를 두려워하는
기사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코, 코르…… 넬…….”

죽어 가는 기사는 억울함을 토로하려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듯. 아,


그래. 어쩌면 공작 전하께서 착각을 하셨을 수도 있다. 그 누구보다 그에게 강한 충성을 바치던 이들이다.
그러니 분명 오해일…….

“…….”

코르넬은 알베르트를 돌아보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알베르트의 금색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사나웠다.

그는 강요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저 기사를 죽여라. 코르넬은 홀린 듯이 쓰러져 있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코르, 넬! 나는, 나……는!”

기사는 심장에 검이 꽂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물론 진실이 어떠하든
코르넬 그에게도 알베르트에게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코르넬은 알베르트에게 검을 돌려줬다. 알베르트는 검을 받아 들고는 기사의 숨이 확실히 끊어졌는지


확인했다. 코르넬은 뒤늦게 검의 손잡이 부분에 새겨져 있는 독수리 문양을 발견했다.

그가 뒷골목에 있을 적, 종종 독수리가 동물들의 사체를 뜯어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본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게 느껴졌었던지.

알베르트와 참 잘 어울리는 동물이라고, 코르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하군. 이제 가 봐도 좋아. 방은 하인들을 불러서 치우도록 해야겠군.”

“편히 쉬십시오, 전하.”

사람을 무더기로 죽여 놓고 편히 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코르넬은 집무실에서 벗어나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항상 우연에 감사했었다.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우연의 덕이었으니.

다만 이번만큼은 그 우연이라는 게 너무나도 끔찍했다. 자신은 왜 동료를 죽여야 했나.


여긴 괴물의 집이다. 모니카 공작은 괴물이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사람이 저런 짓을 저지를 수가 없다.

그날부터 알베르트는 코르넬을 스테인 경이 아닌, 코르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종종 알베르트는 코르넬을 집무실로 불러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죽이도록 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 점점 무뎌졌다. 사람을 죽이면서 코르넬은 알베르트가 자신을 시험하려고 한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코르넬은 스스로를 세뇌했다. 충성스러운 기사가 돼라. 전하께 충성을 바쳐. 그렇지 않으면
주인께서는 자신을 버리시리라. 괴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살다 보니 정신없이 몇 년이 흘렀다. 아니, 정신없이라는 말보다는 챙길 정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니 어느새 자신은 공작의 가장 가까운 기사가 되어
있었으며, 세간에서는 공작의 사냥개라고 불렸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사람들은 원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하고 스스로의 본질을 억지로 바꾸는
것을 충성을 바치는 것을 사냥개 같다고 부르나. 코르넬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공작의 성격도 점점 익숙해졌다. 공작이 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보다 오히려 그 미친 공작이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 놀랄 것 같았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모를까,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의 주인은 언젠가부터 이상해졌다.

-외전 18-

어느 날 공작은 후원하던 수도원에 다녀왔다. 그는 저택에 돌아와서도 계속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택에서 출발했을 때와 달리 그의 몸에서는 오묘한 향이 풍겼다.

그 후로 공작은 매일같이 수도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다른 일정이 있다는 건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코르넬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공작은 그에게 웬 여자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자…… 말입니까?”

그 여자는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공작이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뺨이라도 갈겼을까.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공작이 죽이려고 하는 걸까.

“그래. 내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사랑, 사랑이라니. 코르넬은 귀를 의심했다. 공작이 살인이라고 말한 것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고. 그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감정의 교류가 있었기에 저 괴물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말은 왜 이렇게 오싹하게 느껴지는 거지.
“뭐 하나, 당장 찾으러 가지 않고.”

공작은 자신의 측근들을 제국 전역으로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전국을 뒤져도 알베르트가 말한 여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1 년이 지나고 2 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공작은 미쳐 갔다. 코르넬이 평소의
그는 미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로.

공작은 괴물이었으나 기사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러다가 술이 몸을 망칠 텐데.

평소에는 한 번도 코르넬에게는 검을 휘두른 적이 없었으나 미쳐 버린 알베르트는 달랐다. 코르넬은


알베르트가 휘두른 검을 맞아 복부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5 년이 지났을 때쯤, 드디어 코르넬은 여자를 찾아냈다. 옅은 금발에 붉은 장미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공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는 간간이 코르넬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여자는 안타깝게도 괴물에 눈에 띄어 버린 모양이었다. 가엾기도 하지.

공작은 이후 여자를 저택으로 데려왔다. 며칠간 그들을 지켜보며 코르넬은 그들의 관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 분명 공작이 말하기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보통 저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던가. 코르넬은 그저 공작이 미쳐 있었기에 그의 사랑도 미쳐 버렸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은 수도에서 열리는 건국 기념제에 참석하러 저택을 나섰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며 몇 번이고 일렀다. 여자를 계속 감시하라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코르넬은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여자를
맡기고 수도로 올라갔다.

그런데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도중, 여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을이 그립다고,
매일 가던 거리들이 그립다며.

……그래. 안쓰러운 이였다. 원래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살다가 공작 때문에 5 년 동안 도망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코르넬은 멍청하게도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수년간 스스로를 세뇌해 공작 못지않은 괴물이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거리가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쳤다.

건국 기념제가 끝나고 저택에 돌아온 공작은 죽일 듯이 코르넬을 노려봤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죽으면
손해인 것은 공작 본인이었다. 말을 잘 듣는 개 한 마리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여자를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같은 생활이 반복됐다. 또 공작이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전국을


뒤졌다.

여자는 여럿의 손을 거쳐 갔다. 첫 번째는 공작이었고 그다음은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성기사단장이었다. 참 다양하기도 했다.

성기사단장까지는 괜찮았다. 그까지는 공작의 권력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신전의 성기사들은 마법사를 봤다고 했다. 마법사가 여자와 죄수를 데려갔다고.

코르넬은 돕겠다는 명목으로 신전의 지하 감옥을 살폈다. 철창을 이리저리 살폈으나 안에서 따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죄수는 몸을 움직일 힘도 거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고 했으니 여자가 문을 열어 줬을 테다. 하지만 평범한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문을
딸 수가 있었을까. 성기사단장을 살해한 죄수, 그리고 성기사단장을 거슬린 돌 보듯 하던 교황.

코르넬은 교황과 성기사단장이 어떤 관계인지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부러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과 교황 사이의 정치 사움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죄수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나지 뭡니까. 처음에는 마물인 줄 알았더니,
마법을 쓰더군요. 마탑은 수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무엇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자를 데려간 것이 마법사라는 사실이었다. 성기사들은 마법사가 손을


튕기자 자신들의 앞에 커다랗고 투명한 장벽이 생겼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두드리고 성력을 써 봐도 깰
수가 없었다며.

“전하, 제발.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번에는 분명 위험할 겁니다.
마법은 사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공작위의 권력으로 통제 가능했던 암흑가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차라리 여자를 포기하시라고. 세상에는 더 좋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이건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 일이라고, 세상에는 권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고, 당신이 걱정돼
하는 말이니, 제발 좀 들으라고!

하지만 뚫리지 않는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공작은 섬뜩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코르넬.”

언제부터 개가 의견을 낼 수 있었지.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과거의 공작이었다면 절대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테다. 그는 이성적이었고 교활했으니까. 그랬던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여자에게 미쳐서 판단력까지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코르넬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들을 이끌고 마탑을 찾으러 출발했다. 언제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적이 있었나. 전부 개처럼 공작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

코르넬은 마탑으로 가기 위해 숲을 통과하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 한번 파란만장하구나.

그러다가 숲에서 암흑가의 주인이었던 자를 발견했다.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던 그는 기사들을 발견하더니
인상을 찌푸리고는 도망쳤다.

그를 잡으러 가던 도중 여자를 찾았다. 왜인지 일이 술술 풀렸다. 곧 안 좋은 일이 닥치기라도 할 것처럼.

아마 눈앞의 여자도 질긴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다. 하지만 그건 코르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공작의 명령을 받고 그녀를 찾으러 다니는 제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불쌍하지도
않으냐는 말에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생각 덕분이었다. 과거였다면 또 넘어가
놓아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여자를 공작의 앞에 데려갔다.

***
보십시오, 전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코르넬은 스텔라를 끌어안고 공작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마법사를 보며 생각했다. 마법사는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 가주가 미친 괴물이기는 했지만 제법 잘 굴러가던 공작가가 몰락할지도 모르겠다.
코르넬은 공작의 뒤에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듯싶더니 며칠 후 돌아와 공작가를 몰락시켰다. 사용인들은 도망치도록 내버려
뒀고 도망치지 않고 공작을 지키려고 하는 기사들은 전부 죽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대부분 공작을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 기사의 덕목이라던 충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은 공작을 버렸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원래 괴물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괴물에게 호의적이었던 세상이 이상한 거였다.

……나도, 도망칠까. 주인을 버리고, 도망칠까.

“…….”

그는 멍청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공작의 충실한 사냥개인 척 세뇌했더니 정말 그의


사냥개가 되어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전하.”

“…….”

“전하, 가셔야 합니다.”

“…….”

“성력을 사용하면 한동안은 마법사가 저희 위치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코르넬은 다리를 다친 공작을 부축해 말에 태웠다.

이틀을 자지 않고 달려 꽤 먼 곳까지 도망쳤다. 공작의 부상이 심해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마력석에 담겨 있던 성력도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마법사가 공작을 노리고 있으니 분명 공작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 뒀을 터였다.

“전하.”

“…….”

“……전하.”

“아. 코르넬.”

공작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법사가,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공작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코르넬도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석에 담겨 있던 성력이 다했는지 마력석을 밝히던 불이 꺼졌다. 코르넬은 그 순간


등 뒤에 없던 인기척이 나타났음을 느꼈다.

그 후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고……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코르넬을 곧 자신의 의식도 끊어질 것을 알았기에 최선을 다해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공포가 뭉쳐 만들어진 충성이 이렇게 끝이 났다. 코르넬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 모니카, 당신은 내가 만난 최악의 주인이었다.

-외전 19-

외전 5

“누나.”

“으응.”

“내 말 듣고 있어?”

“응, 으응.”

“내가 뭐라고 했는데?”

“…….”

“봐, 말 못하잖아. 내 말 안 들었지?”

스텔라는 눈을 감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 뻔뻔한 모습 좀 보라지. 다만 그녀의 뻔뻔한 모습, 그러니까


단점까지도 사랑하는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 줘.”

“마부가 마을에 10 분 뒤에 도착한대.”

“그렇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졸려.”

스텔라는 고개를 기울여 노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아는 그녀가 좀 더 편하게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살짝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하게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

“자?”

혹시라도 잠들었다가 꺨까 봐 소근소근 말하는 제 꼴이 우스웠다. 스테판이 지금 제 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스테판은 암흑가와 함께 죽어서 보지 못하려나.

노아는 스텔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

마을에 도착한 후 스텔라는 손짓 발짓을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길을 물었다. 그나저나 길을 묻는 것뿐인데


저렇게 활찍 웃을 필요가 있나. 노아는 스텔라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뒤에서 스텔라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얘가 또 왜 이래.”

“…….”

“야, 나 길 물어보고 있잖아.”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노아가 부담스러웠는지 스텔라는 평소와 달리 버벅거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시간이
배로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텔라는 남자가 설명을 끝내고 갈 때까지도 방긋방긋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남자가 가자마자 그녀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서 앞서갔다. 노아는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혹시 자신이 귀찮게 굴어서
화라도 난 것일까.

“……미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자신만 이렇게 조급한지. 그렇게까지 예쁘게


웃을 필요가 있었나? 그냥 잔잔한 미소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은데.

“……남들한테 막 웃어 주지 마. 착각하잖아.”

“내가 언제 막 웃어 줬다고.”

“방금도, 아까도, 어제도.”

“꼬맹이.”

“뭐라고?”

“아.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 원래 그냥 어린애라고만 하려고 했어. 아리안하고 같이


지낸 시간이 꽤 길어서 무의식적으로 입에 붙었나 봐.”

이러니저러니해도 하여튼 결국 자신을 어리게 봤고 얕봤다는 말 아닌가. 노아는 홀로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다섯 살, 다섯 살이면 그리 많이 차이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사랑한다고 해 줄 때는 언제고 또 동생


취급이라니. 이 정도면 그냥 동생으로서 사랑한다는 말을 아니었을까.

“빨리 안 오고 뭐 해?”

누나는 나를 동생으로서 사랑한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이제는 스텔라가 자신을 향해 뻗는 손도


동생을 챙기는 누나의 손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은 작고 동글동글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따듯했다. 따듯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주 어렸을 적 잡았던 어미의 손은 차가웠고,
아비는 한 번도 손을 잡아 준 적이 없었으니.

노아는 스텔라의 손을 세게 잡아다 놓기를 반복하며 손장난을 했다. 그게 거슬렸는지 걷다 말고 스텔라가


그를 돌아봤다.

“요즘 부쩍 애처럼 구네.”

“……나도 알아.”

“알면서 왜 그래.”

알면서 왜 그러느냐니.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왜겠어, 당연히…….”

“미리엄 님!”

노아는 자신의 말을 끊고 들려온 익숙한 호칭에 얼굴을 구겼다. 반 미리엄.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던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과거 암흑가에서 자신을 보좌하던 스테판임이
분명했다. 공작이 암흑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였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아 있었나.

노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스텔라는 익숙한 언어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리엄 님! 여기 계셨습니까!”

“…….”

“미리엄 님!”

“…….”

“미리엄 님? 미리암 님!”

“…….”

“이 망할 사람아, 암흑가가 망했는데 당신은 여기서 평화롭게 여행이나 즐기고 계셨습니까!”

“…….”

주먹이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애써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자 스테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미리엄 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을 듣고도 미리엄 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없는데.”

스테판은 부러 모자란 척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노아는 최대한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저 간악한 게 저런 멍청한 말투를 쓸 리가 없다고.

“노아, 아는 사람이야?”

“아니, 이거 대화를 듣자하니 제국어를 쓰고 계시는군요. 제국 분들이십니까?”

스테판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노아의 옆에 섰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연기를 해 대는 꼴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낯선 이국에서 제국 분들을 만나뵙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라. 잠시만요. 이거이거, 미리엄 님 아니신가요?!”

“…….”
“……미리엄 님. 이런 먼 곳까지 오셔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암흑가는 잊으셨습니까?”

“……스테판. 그 역겨운 말투 한 번만 더 쓰면 목을 꺾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노아가 자신이 그가 찾는 사람임을 인정하자마자 스테판은 어서 암흑가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조잘거리며


노아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암흑가에서 봐 왔던 딱딱하고 조용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태도가 많이 달라졌구나. 부산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야 그때는 주인님께서 암흑가에 계셨고,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태도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셔서 함께 암흑가 재건에 힘써 주신다면 그때와 같은 진중하고 과묵한 태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미 전부 무너진 곳에 돌아가서 뭐 해. 돌아갈 생각 없으니 혼자 돌아가서 실컷 암흑가 재건하도록.”

노아는 스테판을 떼어 내기 위해 한참을 용을 쓰다가 스텔라를 쳐다봤다. 아마 그녀도 둘의 대화를 통해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암흑가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다. 그래도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이 난장이 언제 끝나나 생각하며 시계와 노아, 그리고 스테판을 차례대로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테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가 줄곧 보고 싶어했던 공연의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테판이 애타게 노아에게 매달릴수록 스텔라의 인내시도 점점 바닥이 났다.

그녀는 시계와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노아.”

“응, 누나.”

“급하니까, 안 보내 줄 것 같으면 그냥 지금 당장 목 꺾어 버려.”

“응.”

곧바로 노아의 매서운 시선이 스테판을 향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기에,


스테판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선 빠르게 도망쳤다. 내일도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스테판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노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안 돌아갈 거야.”

“어디에. 암흑가에?”

“응.”

“나도 알아. 너는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너 나 때문에 암흑가 버리고 나한테 온 거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자신이 옆에서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무나한테 방긋방긋 웃어 준단 말인가.


자신은 멀쩡히 굴러가던 암흑가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상대에게만 매달리고 있는데……. 노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텔라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안다면 또 꼬맹이라고 부를 것이 분명했다.

“공연 시작 얼마 안 남았어. 빨리 가자.”

제 처지 때문에 왠지 억울했으나 노아는 입을 꾹 다물고 스텔라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

스테판은 정말 다음날에도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텔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온 것 정도일까.

분수대에 걸터앉아 스텔라를 기다리고 있던 노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네가 왜 또 여기


왔냐고 따지는 듯이.

그럼에도 스테판은 슬그머니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는 손으로 분수대에 고여 있는 물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홀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뭐 하자는 거지? 왜 또 왔나?”

“몰라서 물으십니까. 당연히 설득해서 암흑가로 끌고 가려고 왔지요.”

그놈의 암흑가.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지겨울 지경이었다.

“저라고 다 버리고 도망친 미리엄 님이 어디가 예쁘다고 이러고 있겠습니까. 모니카 공작 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간부들은 다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저뿐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얼마 전에 모니카 공작가가
몰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잖습니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회는 무슨 기회. 노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스스로도
놀랐다. 스텔라가 했던 행동과 비슷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고 뻔뻔하다느니 뭐라느니 해도 결국을 자신도
닮아 가고 있었던 건지.

“아, 그나저나 방금까지 계속 같이 계셨던 분 말인데요, 예전에 그분 아니십니까?”

“……맞다.”

스테판의 말을 들어 보면 마치 그가 계속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들렸다. 경비대에 자신들을


쫓아다니는 이가 있다고 하면 좀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정말 미치셨군요. 그때 미리엄 님께서 어떤 미친 짓까지 하셨는지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아직도
저분 옆에 뻔뻔하게 달라붙어 계시다니.”

“스테판. 정말 목이 꺾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입 다물어라.”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꼽아 보라면 저는 납치극을 고르겠습니다.”

목을 꺾어 버리겠다는 섬뜩한 협박에도 스테판은 꿋꿋했다.

“맞는 말을 한 것뿐인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때 멀리서 스텔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노아는 잠시 굳어 있다가 얼른 가라며 스테판의 등을 밀었다.


암흑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스테판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스텔라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스텔라는 자신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빨리, 빨리. 누나가 오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거냐. 들키기 전에 빨리 가거라.”

“아니, 굳이 저랑 있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


스테판은 말 한 마디를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노아에게 등을 떠밀려 쫓겨났다. 노아는 스텔라가 오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방긋 띄웠다.

“다녀왔어?”

노아가 스텔라의 손을 잡아끌어 얼굴을 비비자 스텔라가 눈을 오묘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어째 요즘 점점 개를 닮아 가는 것 같은데. 얼굴 비비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해?”

“농담이지?”

“글쎄.”

스텔라가 짓궂게 웃었다.

-외전 20-

“그나저나 어디 다녀왔어? 어디 가기에 굳이 혼자 다녀온다고 했어?”

“도서관 좀.”

그러고 보니 스텔라의 손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대충 제목을 살펴보니 몽마에 관한


책이었다.

몽마에 관한 책은 왜……. 노아가 책을 보며 미간을 좁히자 스텔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더 늦기 전에 여관이나 가자.”

책의 내용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야심한 밤이었다. 노아는 스텔라가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은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를 놓았다가 괜히 심술이 나 다시 끌어안았다.

항상 스텔라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잤고, 노아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노아는
여느 때처럼 스텔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아. 이거 개 같다고 했었지. 그리고 뒤늦게 스텔라의 말이 떠올라 노아는 얼른 그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가까이 붙어 있자니 머리칼에서 스텔라의 향이 났다. 언젠가부터 향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지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향이 좋았다.

다시 잠이나 자자.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 스텔라는 자리에 없었다. 또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간 거겠지. 나도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스텔라가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또다시
얼굴을 비비려다가 스텔라가 했던 말이 떠올라 베개를 밀어냈다.

그때 유리창에 무언가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스테판이 난간에 매달려 창문을 열어 달라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긴 분명 3


층이 아니던가. 노아는 얼굴을 팍 구기며 창문을 열어 줬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칭찬입니까?”

“그럴 리가. 도둑놈 새끼 근성을 못 버렸다는 뜻이지.”

“칭찬이었군요.”

스테판이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분은요? 외출하셨나요?”

“……그래.”

“어째 같이 계시는 시간보다 떨어져 계신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얄밉게 할 수가 있지. 매섭게 노려봐도 스테판은 하하 하고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같이 다니시기에 저는 드디어 연인이 되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누나 동생 사이였던 거군요.”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네? 섭섭하게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 심심한데 미리엄 님께서 그분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다시 하나하나 읊어 볼까요? 그리고 함께 도덕적으로 성찰이라도 해 볼까요?”

“평소에 네가 가진 도덕성이 얼마나 됐다고 도덕을 들먹이지?”

“제 도덕성이요? 미리엄 님께서 가지신 매력의 두 배 정도는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얄미운 사람이었나. 암흑가에 있을 때는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던 것이 어쩌다가 제 앞에서


이렇게 깝죽거리게 됐는지.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됐다. 네까짓 게 도움은 무슨. 애초에 도움 같은 거 필요 없다.”

“그러지 마시고 들어나 보시지요. 제가 마부로 위장하고 마차를 빠르게 몰고 가겠습니다.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를 피하면서 그분을 끌어안으시면 극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요?!”

스테판은 흥분해서 소리까지 지르며 말했다. 반면에 노아는 도저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미친 것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자기 입에서 얼마나 미친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건가? 노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테판을 쳐다봤다.

“미친 거냐.”
“미쳤냐니, 너무하십니다.”

“그런 구식적인 방법을 대체 누가…… 그 미친 마법사가 자주 이야기하던 연극에서도 안 나올 것 같은


방법을……. 아니,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스테판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목숨 아니니 상관없다, 뭐 이런 건가.

“저 근데, 미리엄 님. 누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분 아닙니까?”

스테판의 말을 듣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정말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방향을 보니 스텔라가


분명했다. 노아는 창문을 열고 스테판을 밀었다.

“어서 가라, 어서.”

“예, 예. 그래야지요.”

스테판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텔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람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스테판, 이 망할 것 때문에 자신이 무슨 고생인가. 노아는 스텔라에게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세게 쥐며


애써 웃어 보였다.

“위층하고 헷갈린 거 아니야?”

“그런가?”

다행히 스텔라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아침 식사를 위해 사 온 빵을 먹은 뒤에는 곧바로


관광지로 향했다.

이번에 가는 곳도 스텔라가 가고 싶다며 찾아온 곳이었다. 여름에도 눈으로 덮여 있는 산이라나 뭐라나.


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 건지,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은 제외하고 계속 돌아다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항상 스텔라는 노아의 손을 잡고 다녔다. 그 모습이 정말 동생을 챙기는 누나 같아서 왠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야, 저 마차! 왜 인도로 들어오는 거야?!”

그때 옆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고, 노아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향해 웬 마차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부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는


스테판이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노아의 머릿속에 아침에 스테판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그 짧은 사이에 마차는 어떻게 구한 거야. 문제는 마차의 속력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빨랐다는 것이었다. 스테판 저것은 정녕 생각이 없는 걸까.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으로 마차를 몰아
놓고, 도대체 어떻게 스텔라를 끌어안고 피하라는 말인가!

노아는 일단 스텔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스테판이 의도한 상황이었다기보다는,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나온 행동이었다.

부하 하나 잘못 둬서 죽을지도 모른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마차에 부딪힐 거라고 생각하고 누나라도


살리자 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오히려 그를 잡아끈 것은 스텔라였다.
스텔라는 노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둘은 거리 위를 거하게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순간에도 노아는 스텔라를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스텔라는 아으, 하고 신음을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는 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몸을 벌떡 일으켜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악! 뺑소니범이 도망가잖아!”

“뺑…… 뭐?”

“그런 게 있어. 아니, 지금 이럴 게 아니고 저놈 잡아야지!”

스테판은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얼른 마차를 몰아 도망쳤다. 스텔라는 마차를 쫓아가다가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멀어지는 스테판의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욕설을 지껄였다.

스텔라는 그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 동안 식식거렸다.

그리고 해가 지고 거리에 어둠이 깔려, 여관에 돌아왔을 때 그를 침대에 앉혀 놓고 묻기를.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아니.”

스텔라는 조심스럽게 노아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애로운 얼굴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왠지 익숙한 표정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노아.”

“……응.”

“예전부터 내가 말해서 알고 있잖아.”

“……뭘.”

아. 노아는 그제야 스텔라의 그 표정이, 수도원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수녀들의 그것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누가 봐도 훈육의 현장이었다. 젠장. 노아는 조용히 욕을 뱉었다.

“내가 너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거.”

“…….”

“말해 봐. 뭐 숨기는 거 있지? 아까 마차도 그렇고.”

“……스테판이 계속 찾아와.”

“아, 그때 그 남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아는 스텔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스텔라였다.
“암흑가로 돌아가고 싶어?”

“아니.”

“하긴. 이제 가고 싶다고 해도 안 보내 줄 건데.”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텔라를 쳐다봤다. 평소의 스텔라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빙긋 웃으며,

“뭘 놀래, 네가 예전에 맨날 나한테 하던 말인데.”

하고 말했다. 노아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점점 유해지고 있는데, 그녀는 점점


과거의 자신을 닮아 가고 있었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노아는 스텔라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스텔라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

“…….”

“……스테판.”

“……예, 미리엄 님. 미리 말씀드리는데, 절대 미리엄 님을 죽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발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정말 그것


하나뿐이었다.

“……스테판.”

“예, 미리엄 님.”

“어떻게 해야 좀 그만 찾아오겠나.”

“암흑가를 이끌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역할을 네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에이, 그럴 리가요!”

스테판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사이에 노아는 그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었다.

“아니다, 그 역할에 어울리는 것은 너밖에 없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미리엄 님이 이렇게 앞에 계신데!”

“스테판. 부디 네가 암흑가를 책임져 줬으면 좋겠다.”

이 무슨 웃음도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암흑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이에게 제발 암흑가를


가져 달라 빌빌 기고 있다니.
스테판은 마침내 샐쭉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확실히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위급 간부들은 의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너를 제외한 고위급 간부들은 다 죽었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하여튼. 뭐, 증명서에 도장이라도 찍어


주랴?”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스테판은 미리 준비해 둔 증명서를 품에서 꺼냈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문서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될 것을 어떻게 알고 증명서를 준비해 온 걸까.

노아는 도장을 꾹 찍고 창문을 통해 스테판이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멀어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외전 21-

외전 6

요즘 이상하게 노아가 부쩍 개처럼 행동했다.

……어감이 좀 이상하기 하지만 정말이었다. 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암흑가로 돌려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노아.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으응…….”

“어리광 부리지 말고 빨리. 네가 앤 줄 알아?”

“그냥 여기서 자는 게 좋은 거야…….”

구부정하게 자는 게 좋기는 뭐가 좋다고. 스텔라는 노아를 노려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야 허리가 슬 아파 오기 시작했는지, 노아가 몸을


뒤척였다. 스텔라는 그것 보라는 듯이 헹, 하고 웃었다.

“불편해서 잠 다 깼지?”

마침내 슬며시 눈을 뜬 노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뻐근한 몸을 풀었지만, 그녀의 발치에서 몸을 치우지는 않았다.

“불편할 텐데 뭐 하러 그러고 있어.”

“안 불편해.”

“너 아까도 그렇게 말했어.”

“왜, 누나는 나 이러고 있는 거 싫어?”


노아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렸지만 스텔라는 대수롭지 않게 책장을 넘겼다. 말만 저렇게 하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노아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스텔라는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누나 예전부터 내 얼굴 좋아했잖아. 오랜만에 나 봤을 때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던 게 아직도 기억


나는데.”

“……가서 잠이나 자.”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스텔라가 노아의 얼굴을 밀자 그는 힘없이 밀려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오래전, 5 년 만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자신이 아주 잘 알던


동생이라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기도 했으니.

수도원에 있을 때 애니카가 항상 그녀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너는 얼굴에 너무 약하다고.

젠장. 스텔라는 책을 덮고 이마를 짚었다. 짜증나게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아를 쳐다봤다. 잠 다 깼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아주 잘만 자고 있었다.

스텔라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앚아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어느 집 자식인지 참 잘생기기는 했다. 스텔라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을 살살 간질였다.

그 순간, 노아가 번쩍 눈을 떴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고 어느새 노아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스텔라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어린 게 까불어.”

무슨 말을 해도 노아는 기분 좋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촛불을 후, 하고 불자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스텔라는 옷에 손을 집어넣는 노아의 손을 때리며 눈을


감았다.

***

아침이 밝자 맑은 공기라고 쐴까 싶어 나간 광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스텔라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노점에서 산 음료를 마시며 멍하니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진한 갈색 머리칼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개구지게 웃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나누나, 우리 쳐다보는 거, 재미있어 보여서 그런 거죠? 우리랑 같이 놀래요?”

재미있어 보였다기보다는 그냥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아무데나 쳐다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열두 살, 아니 열세 살 정도이려나. 스텔라는 아이의 외형으로 나이를 유추했다. 대략 그녀가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의 노아 나이 정도인 것 같았다.

다만 당시 또래에 비해 얌전하고-겉보기에는-순했던 노아와는 달리, 아이들은 매우 거칠게 놀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가 몸통으로 상대를 박는 게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같이 놀자고 제안한 아이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겠다. 스텔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노아의 등을 떠밀었다.

“으응, 누나는 좀 힘이 들어서 안 될 것 같고, 이 형이 대신 놀아 줄 거야.”

“누나?”

노아는 배신감에 물든 목소리로 스텔라를 부르며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들은 노아에게 놀이에 대해
설명해 주는 듯하더니, 냅다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노아는 초반에는 날래게 아이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공격이 계속 쏟아지자 곧 해탈한 듯 몸에 힘을 빼고 아이들에게 맞아 줬다. 그나저나 대체 저게 무슨
놀이람.

노아는 하도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터덜터덜 돌아왔다. 스텔라는 책을 읽다 말고


그를 반겨 줬다.

“……누나.”

“아, 왔어? 노는 건 어땠어, 재미있었어?”

“어렸을 때도 저렇게 거칠게 논 적이 없는데 지금에서야 해 보다니.”

“잘 됐네. 좋은 경험이었겠어.”

” 지금 나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

스텔라는 부정하면서도 힘겨운 숨은 뱉으며 분수대에 걸터앉는 노아를 보며 낄낄 배를 잡고 웃었다.


노아가 어린아이들에게 맞아 저렇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노아와 함께 놀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아를 불렀다. 힘이 다 빠져 주저앉아 있는 노아와는


달리 아직 아이들은 쌩쌩했다.

“안녕, 형! 다음에 또 놀자!”

“그때는 좀 잘 피해 봐!”

노아는 아이들을 마주보며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스텔라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어?”

“재미있었냐니. 내 표정 못 본 거야? 그냥 힘들었어. ……어렸을 때도 저렇게 놀아 본 적은 없었는데.”

“응? 그건 너 친구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

“……아.”

스텔라는 자신을 보는 노아의 눈동자에 원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얼른 말을 돌렸다.


“아, 아니야. 괜…… 괜찮아, 괜찮을 거야 노아. 그래도 너는 어른들이나 누나 형한테 예쁜 많이
받았잖아.”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노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노아가 조그맣게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어’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전부 그런 게 아니면, 뭐 널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어?”

“……필립.”

필립? 스텔라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머릿속에 넣고 굴리며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아, 필립.”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서 수녀에게 필립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적응을 못하길래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대답만 돌아왔었지.

지나서 생각해 보니 꽤 이상한 일이었다. 적응을 못했다니. 분명 애니카와 그녀는 필립과 꽤 재밌게
놀았던 것 같은데…….

스텔라는 깊게 생각하려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다 지난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자, 노아.”

노아는 앞서가는 스텔라의 뒷모습을 보며 희맑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미움을 사
수도원에서 쫓겨났던 소년은 스텔라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

“누나. 언제까지 이 마을에 있을 거야? 벌써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가 안 가 본 데가 있나?”

“몇 군데 남아 있기는 하지. 볼 만한 건 없는 곳들이지만.”

“슬슬 여행은 끝내고 정착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디에?”

노아가 지도를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스텔라는 지도를 쭉 훑어보다가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위에는 작게 맥클라우드 왕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맥클라우드. 맥클라우드 왕국.”

“맥클라우드 왕국? 엄청 먼데. 굳이 거기로 가려고?”

“그냥. 거기가 마음에 들어.”

이상하게도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꼭 맥클라우드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맥클라우드로 가는 배를 많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이 안 좋으면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배편은 내일 내가 찾아 볼게.”

다행히 며칠 후 노아는 맥클라우드로 가는 표를 두 장 들고 돌아왔다. 스텔라는 표를 보며 좋아하다가


얼른 짐을 싸기 시작했다.

***

“배에 타면 아침부터 먹자.”

“맞다, 오늘은 빵 안 사 왔네.”

“배 타러 가야 하는데 빵 사 올 시간이 어디 있어.”

스텔라가 핀잔을 주자 노아가 맑게 웃었다. 요즘 그는 뭐든 웃음으로 넘기려고 해서 문제였다.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순간, 한 노인이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을 떄 이미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

“누나? 왜 그래?”

“……방금.”

아리안 아니었나. 스텔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노인이 사라졌음에도 노인과 마주쳤던 그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냈다. 방금 지나간 이는 노인이었다. 애초에 아리안은 늙지


않는데, 아리안일 리가 없지.

“가자, 노아. 배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손을 내밀자 노아가 얼른 손을 맞잡았다.

스텔라는 노아의 손을 잡고 항구를 향해 뛰었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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