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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메릴 호

한가을 글

차례

제1부 언덕 위의 집

1. 미래에서 걸려온 전화

2. 불청객

3. 이상한 저택

4. 엠엠엘단의 정체

5. 발코니의 여섯 사람

6. 짧은 탐험

제2부 밀항

7. 뜻하지 않은 승선

8. 끝없는 바다

9. 밀항의 끝

10. 폭풍 속에서

제3부 장악당한 선단

11. 기항지의 파티

12. 탈출 계획
13. 항로를 바꾸다

14. 검은 깃발

15. 다시 장악당한 선단

제4부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16. 삼각돛 섬의 횃불

17. 세 편으로 나뉜 전투

18. 어둠 속에 떠오른 그림자

19. 목숨을 건 탈출

20. 악마의 바다와 데스 선장의 항해술

제5부 선원의 거울

21. 제국에서 하룻밤

22. 수수께끼 원반

23. 다시 걸려온 전화
“네가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가지.”
제1부 언덕 위의 집

1. 미래에서 걸려온 전화

전화벨이 울렸다.

"메릴 호 선장님 댁이십니까?"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닌데요."

전화를 끊고 나는 풀이 죽은 채로 따분한 일차함수를 풀었다.

숙제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수학 숙제가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달 전만 같아도 학원


에 가 있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아빠의 인쇄소가 멈춘 뒤부터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보습학원도 다니


지 않게 되었다.

혼자만 학원을 다니지 않은 뒤부터 녀석들과도 멀어진 듯하다. 내 용


돈 지갑이 텅 비게 된 것도 그 즈음 같다.

나는 공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다시 전화벨이 어두운 거실 안으로 울려 퍼졌다. 거실 벽에 걸린 전화


기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메릴 호 선장님 댁이십니까?"


조금 전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질문이었다.

"아닌데요. 여긴 가정집인데요."

나는 조금 짜증난 투로 대답했다.

"3677-3577 맞지 않습니까?"

"번호는 맞는데요."

"그럼 메릴 호 선장님 댁이 확실하군요."

"하지만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여긴 바다가 가까운 항구도 아니고 우리 집안은 대대로 선원과는 눈곱


만큼도 관계가 없다.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범선을 아주 좋아한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럴 리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수화기 너머로 삑삑 무슨 단말기를 눌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ㄱ시 북구 수림동 415-6호. 주모이 씨 댁 아닙니까?"

"주모이는 제 이름인데요?"

"그럼 메릴 호 선장님 댁이 확실하군요, 모이 선장님."

나는 난처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전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당연하지요. 전 당신의 기준으론 미래의 한 세계에서 전화를 하고 있
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기준으로 현재에서 전화를받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겠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8년 전 백양나무숲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8년 전이라면 내가 여섯 살 때이다.

엄마와 함께 집 뒤 백양나무 숲에서 버섯을 따고 있던 날이 생각났다.


이른 봄이었고, 우리는 이파리도 채 피우지 못한백양나무들 아래서 버
섯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소년과 소년의 엄


마처럼 보이는 챙이 둥근 모자를 쓴 여자가 무언가에쫓기며 우리 쪽으
로 도망쳐오고 있었다.

불쌍해 보이는 여자는 낡고 네모난 옷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


리나라 사람 같지도 않았고 이 시대 사람들 같지도않았다.

혼비백산 달려오는 두 사람은 생명이 오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표정


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여자에게 도움이 필요하세요? 하고영어로 물었
다.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온 저 쪽에서 커다란 먼지 구름이 일더니 말을 탄


흑기사단이 숲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모두 가린 검은 투구에 절렁거리는 갑옷과 무시무시한 창과


검,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너무무서워 손에
쥐고 있던 모형 범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여자와 소년은 자신들을 뒤쫓아 온 자들을 발견하고 우리를 남겨둔 채
다시 도망쳤다.

소름이 돋는 쇳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남기며 흑기사단이 우리 옆을 지


나쳤다.

나와 엄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들이 지나친 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숲속에서는 평화로운 새소리가 들렸고, 이제 갓돋기 시작한 풀꽃
들은 고요하게 떨릴 뿐이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내 범선은 말발굽
에 뭉개져 있었다.

엄마와 나는 너무 놀랐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 뻔해엄마는 신고를 하
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제가 여섯 살 때 숲에서 겪은 일과 이 전화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


죠?"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이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죠. 그리고 앞


으로도 백양나무 숲 주변에선 불가사의한 일들이 자주벌어질 겁니다.
그곳은 여러 풍선의 주둥이가 한데 꼬여 있는 듯한 '늪'이 위치한 자리
니까요."

"늪이요?"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늪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시


공간' 늪이죠."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선장님! 우린 십만 톤에 달하는 두랄루민 합금 운반을 선장님에게 의
뢰할까 합니다. 바하나 항구를 기항지로 하고 목적지는나이브항입니
다. 이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판단했거
든요. 이 일을 처리해주는 대가로YI-482 세계의 보석과 펜던트, 장식
품들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 원석 5000캐럿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우
리 세계에서는돌멩이에 불과하지만요. 승낙해주시겠습니까?"

목소리가 물었다.

"……."

나는 머뭇거렸다.

YI-482 세계의 다이아몬드 5000캐럿이 어느 정도 값어치가 나가는 것


인지, 왜 저 사람의 세계에선 그것이 돌멩이에불과한지 나로선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미지의 사내가 어린 내게 왜 이런 이상한 부탁을 하는 거지?

하지만 다이아몬드 5000캐럿이면 아빠의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제기랄 '그들'이 와요! 돼지 같은 녀석들! 기회가 오면 다시 전화 드리


겠습니다!"

목소리는'그들'에 힘주어 말하며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한참동안이나 멍한 자세로 서 있었다.

미래의 한 세계에서 걸려온 전화라니,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도 못한 어떤 배, 메- 뭐라고 하는 배의선장이라니…….
2. 불청객

밤중에 화장실에 다녀왔다. 안방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빠가 누


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공장만은 안 됩니다. 그건 저의 모든 것입니다."

아빠는 수화기 저편 누군가에게 애원했다. 아빠는 더 이상 인쇄소를


운영할 수 없는 파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제발……."

아빠는 거의 절망적으로 사정하고 있었다.

나는 거실로 걸음을 옮겨 벽에 걸린 다른 전화기를 살짝 들어 귀에 갖


다 댔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알겠어?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라


고."

유리를 씹는 듯한 목소리가 협박했다.

"인쇄기를 한 번만이라도 돌리게 해주시면, 그 동안 드리지 못했던 대


금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그러니까, 한 달 안엔 인쇄 청탁이 들어오게 할 겁니다. 그러니까 한


달만……."

"안 돼."

"그럼 보름만 미뤄주세요."

아빠가 비참하게 하소연했다.


"일주일 뒤야. 일주일 뒤, 오후 여섯 시. 명심하라고. 공장으로 가겠
어."

전화가 툭 끊겼다.

아빠 방에서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음 날 아빠는 공장에 가서 할 일이 거의 없을 텐데도 평소처럼 아침


일곱 시가 되자 어김없이 출근했다. 가족들에게근심을 끼쳐주고 싶지
않아, 인쇄소가 돈을 빌린 사람들에게 넘어가게 생겼는데도, 아빠만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니.

엄마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엄마는 삼년 전, 집 앞 길가의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날 홀연히 집을


떠났으니까.

나중에야 알았지만 엄마가 가지고 떠난 것은 바퀴가 달린 작은 여행용


가방이 전부였다. 그 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어디에서도 소식을 들
을 수가 없었다.

아빠의 사업은 엄마가 떠난 뒤부터 점점 어려워졌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아빠의 회사를 떠났고, 매출이 주는 대신 빚만 늘


어나기 시작했다. 아빠가 엄마 때문에 일을 거의놓다시피 했기 때문이
다.

학교에서 돌아왔다.

승호는 거실에서 신나게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헤드셋을 낀 유


나 누나는 핫팬츠차림으로 침대 끝에 두 다리를 걸치고누워 건방지게
패션 잡지나 넘기고 있었다.

모두 현재 아빠가 처한 고통과는 전혀 무관인 듯했다.


"휴― 인터넷이 곧 끊기고, 엠피쓰리마저 충전하지 못할 상황이 올지
도 모르는데 모두 태평하네."

나는 중얼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너, 넌 누, 누구지?"

나는 가방을 채 내려놓기도 전에 뒤로 자빠질 뻔했다.

기가 막힌 모습을 한 여자 애가 새파란 빛이 감도는 렌즈를 들고 내 방


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 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린 숱 많은 진갈색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동


자, 강한 햇빛에 그을린 피부.

이마에는 수십 가지 색깔 실로 꼬아 만든 띠를 두르고, 서인도제도나


중남미의 어느 토착민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데도 목에는 짐승 꼬리털로 만든 흰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


다. 거기에다 어깨에는 열대 나무줄기로 짠 가방을메고, 두 발에는 풀
줄기로 엮은 샌들이라니!

여자 애는 대답도 않고 벽을 만져보기도 하고 장롱을 열어보며 아무데


나 렌즈를 들이댔다. 침대 밑을 기웃거리더니 그리 끙끙기어들어갔다.

한참 만에 여자 애가 다시 기어 나왔다.

여자 애의 얼굴에는 침대 밑에 쌓인 먼지가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넌 누구이고 남의 방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다시 물었다.

"내 이름은 마르치니 에르고스페네. 귀찮으면 마치라고 불러도 돼. 하


지만 내 이름을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
요는 없어."

여자 애가 얼굴에 묻은 먼지를 아무렇게나 뜯어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한 애 때문에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아니었


다. 언제나 나는 쓸데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난 지금 길을 찾는 중이야. 널 방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곧 사


라져줄 테니까. 네 할 일이나 하시지. 일테면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볼
때, 영 바보 같아 보이는 보충수업을 하러 간다든가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여자 애는 계속해서 여기저기 방구석을 조사했다.


내 비밀 서랍까지 열어볼 것 같았다.

벗어놓은 빨래 관리도 소홀한데 말이다.

"보충수업? 난 이젠 학원 따윈 안다녀. 도대체 어떻게 남의 집에 들어


온 거야? 누나와 동생이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들은 날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난 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나간 적이 없으니까."

"뭐라고? 넌 얼마동안 내 방에 있었지?"

"약 여섯 시간?"

"그렇다면 누나와 동생이 집에 돌아오기 전부터네?"

"네가 학교에 가고 난 뒤 얼마 안 돼서부터라고 할 수 있지. 널 위해서


빨리 가줘야 할 텐데. 영 길을 못 찾겠단말이야."

"무슨 길? 길이 왜 내 방 안에 있어?"
"휴 못 찾겠다. 좀 쉬었다 찾아야겠어."

여자 애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여자 애의 목에 둘린


털목도리가 꿈틀댔다. 목도리인줄 알았는데 그게풀리면서 숱이 많은
여자 애의 머리카락 속에서 뭔가 기어 나왔다.

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작고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여자 애


의 어깨에 올라탔다.

"네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던 저 녀석은 또 뭐야? 아뿔싸 안경까지 썼


잖아?"

나는 알이 커다랗고 다리가 넓적한 흰색 뿔테 안경에 두 손가락을 가


져갔다. 그러자 안경을 쓴 설치류 과의 짐승이 날카로운이빨로 내 손
가락을 깨물어버렸다.

"제길!"

내 손가락에 피가 났다.

"치노야. 인사방식이 서툴지. 특히 자신의 안경을 건드리면 사나워져."

여자 애가 말했다. 짐승은 끄르르-르, 사나운 소리를 내질렀다.

"가만있어. 길만 찾으면 곧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여자 애는 애완동물을 쓰다듬었다.

나는 여자 애가 말하는 길이 뭔지 짐작 조차할 수 없었다.

왜 이상한 가출 소녀가 내 방으로 들어온 거야? 며칠 새 왜 이렇게 이


상한 일들만 생기는 것이지?
3. 이상한 저택

마치는 아빠가 돌아올 시간까지 허둥댔지만 자신이 말한 길을 찾지 못


했다.

"오늘은 틀렸어. 곧 아빠가 돌아오실 시간이야."

동생과 누나가 잠깐 밖에 나간 틈을 타 마치를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


갔다. 지하실에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친구들을 데리고와 놀곤 했던
방이 꾸며져 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 엄마와 내가 지하실을 꾸미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엄마에게 지하실도 내 방처럼 꾸며달라고 떼를썼다. 일주일 동안
엄마와 나는 지하실에 노란 벽지를 바르고, 고물상에서 가져온 가구들
과 소파들을 들여놓았다. 마지막 날엄마와 나는 벽을 따라 늘어선 기
다란 선반을 수많은 모형 범선들로 장식했다. 브리건틴, 스쿠너, 슬루
프, 갤리선, 쉽,브리그, 스노, 커터, 전장 범선에서 핑크 형 범선까
지……. 나는 그 시절 범선들을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엄마가 떠난 뒤, 나는 지하실에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자꾸


엄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누나와 동생은 마치가 우리 집에 머무는 걸 허락할 것이다. 하지만 힘


든 처지에 놓인 아빠에게는 낯선 손님이 와 있다는사실 하나만으로도
짐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마치를 지하실에 있게 할 생각이었다.

"네가 무슨 사정 때문에 집을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무작정 집을 나가고 싶을 때가많았지만, 너처럼 진짜
집을 뛰쳐나온 적은 한 번도 없어. 네 엄마와 아빠가 무척 걱정하실 거
야. 살다보면 힘든 일도많겠지. 하지만 땡전 한 푼 없이 집을 나온 건
잘못이다."
나는 내가 인생을 모두 산 어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에게 충고했
다. 마치는 나를 쳐다보며 휴― 한숨만 쉴 뿐이었다.

"하기야 네가 어떻게 나를 이해하겠어."

마치는 모든 걸 체념한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을 예림이나 소정이 따위로 부르지 않고 마르치니 에르고스페네


라 부르는 이상하게 생긴 가출 소녀가 우리 집에 나타난날부터, 집에
돌봐주어야 할 강아지가 생긴 것처럼 자꾸 신경이 쓰인다. 걔는 동남
아 여자와 우리나라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혼혈아인지도 모른다. 우리
반에도 그런 애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에메랄드빛 눈을 하고 태
어날 수 있지?

네시 반. 학교가 파하자 친구들은 모두 학원으로 향했다. 나는 천변을


따라 혼자서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중이었다.

저 멀리 경마장에서 말발굽 소리와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주말 베팅을위해 경마장
에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곤 한다.

나는 집으로 갈까, 하릴없이 천변이나 거닐까 망설였다. 내일은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니깐 내 앞에 시간이란 모래알처럼널려 있었다.
돌멩이를 차 개울로 빠뜨리며 거닐었다. 오래 전 엄마가 초등학교 입
학 선물로 사준 중국제 손목시계를들여다보았다.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다시 큰길 쪽으로 올라왔다. 아빠의 공장으로 향하는 마
을버스를 타기위해서였다.

나는 마을버스에서 내려 아빠의 공장으로 갔다. 공장 옆 지류 창고에


는 종이를 부리다만 노란 지게차가 두 달 전부터 멈춰있다. 현관 앞에
는 낯선 흰색 자가용이 주차돼 있었다. 마하바흐였다. 현관을 지나 이
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텅 빈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층 인쇄실 쪽이었다.


"어느 나라 여섯 시지?"

"……."

목소리가 물었고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계단을 내려와 인쇄실로 통하는


철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죽점퍼에 노랑머리를 닭 볏처럼 꼿꼿이 세운 사내가 아빠의 턱을 잡


고 있었다. 아빠 턱을 잡은 사내 또한 키가 작았지만,똥똥한 아빠보다
는 작지 않았다.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빠가 불그스레한 한쪽 귓볼에
나와 세트로 맞춘 남자용 은귀고리를하고 있는 모습도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 또한 왠지 웃겼다.

노랑 닭 볏 머리 사내 옆에는 키가 큰 다른 사내가 다소곳이 서 있었


다. 검은 양복 위에 코트를 걸친 빨강 닭 볏 머리사내였다. 포도주색
가죽 장갑을 낀 그의 한쪽 손에는 네모난 검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두 사내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낯설고 괴상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얼


굴과 손은 온통 분홍빛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노랑 닭 볏 머리가 부하처럼 보이는 빨강 닭 볏 머리에게 물었다. 빨강


닭 볏 머리는 대답을 못하겠다는 듯 공손히 머리를조아릴 뿐이었다.

"준비한 서류 좀 꺼내봐."

노랑 닭 볏 머리가 빨강 닭 볏 머리에게 명령했다. 빨강 닭 볏 머리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럼 네 마지막 부탁대로 정확히 21일 뒤 금요일 여섯 시야. 네 몸에


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도 된다고승낙했으니까, 날짜를 대폭 늦
춰준 거야. 여기 각서를 써."
노랑 닭 볏 머리가 아빠에게 서류를 디밀었다. 아빠는 서류를 받아들
었다. 아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

나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주시했다. 저들은 악독한 사채업자들이고 사


채업자들은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신장 같은 것을떼어간다고 했다. 돈
을 갚지 못한 아빠는 저들에게 장기를 저당 잡히려는 걸까?

아빠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나서 그것을 도로 건넸다. 아빠는 서류의


내용이 너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해도 피땀 어린 공장을 이런 식으로 넘겨줄


순 없소."

"그러니깐 약속을 지키라는 것 아냐. 약속을 못 지키면 그땐 공장을 밀


어버려도 되지? 이런 구닥다리 인쇄기 따윈 우리에게쓸모가 없으니
까. 우리 주인님께선 이 공장을 밀어버리고, 너처럼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얼간이들에게도 돈을 무작정대출해주는 '마음대로쓰시고
마음대로갚으세요-론', 곧 MML 27호 지점을 이곳에 마련코자 하시거
든. 이곳은 경마장이가까워 무작정 돈을 빌리려는 녀석들이 많아 우리
사업에 유리하지."

"공장을 미는 건 안 돼!"

아빠가 저항했다. 노랑 닭 볏 머리 사내가 아빠의 뺨을 세게 쳤다. 아


빠는 저항하지 못했다.

"자!"

사내가 아빠에게 펜을 쥐어주었다.

"21일 뒤, 정확히 이 시각까지도 네가 우리에게 빌린 돈을 마련하지 못


할 경우, 네가 우리에게 바쳐야 할 항목이 그안에 들어 있어. 하지만
우리가 네게 말했듯이 생명엔 전혀 지장이 없을 거야."

"아프지도 않지."

빨강 닭 볏 머리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아빠는 한쪽 손으로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마지못해 서명을했다. 노랑 닭 볏 머
리 사내가 계약서의 복사본을 떼어 아빠에게 건넸다.

"자! 그럼 21일 뒤, 금요일 저녁 여섯 시에 다시 오겠어. 그땐 마하바흐


가 아닌 불도저나 굴삭기를 타고 올지도모르니까 돈을 미리 준비해놓
고 있어."

빨강 닭 볏 머리 사내가 서류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둘은 출입


구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얼른 계단으로 올라가 몸을숨겼다.

두 사내는 바람처럼 홀을 가로질러 현관을 나섰다. 흰색 마하바흐에


시동이 걸리고 차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갔다.

계단을 내려와 인쇄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빠는 커다랗고 육중한


인쇄기들 너머, 벽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아빠는 녀석들이 건
네준 서류를 한손에 쥔 채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타박타박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 한


대가 내 옆을 지나쳤다. 트럭 안에는 폐차된자동차들과 짓이겨진 고
철, 냉장고나 전자제품 등에서 떼어낸 플라스틱들이 가득 실려 있었
다.

승호는 거실에서 숙제를 하다 잠이 들어 있었다.

지하실에 내려 가보았다. 마치는 집 뒤편 잔디밭 바로 위쪽으로 뚫린


창으로 다가가 내가 어렸을 때 이 방에서 갖고 놀던,접고 뽑을 수 있는
원통형 외알 망원경으로 연신 밖을 기웃거렸다.

"뭐하는 거냐?"
"저 언덕 위의 으스스한 빈집 말이야. 저 집이 좀 수상해. 내가 이곳에
죽 머문 뒤부터 우연히 저곳을 지켜보게되었는데, 날마다 고철과 플라
스틱, 그리고 웬 자루를 실어 나른단 말씀이야."

"저긴 누군가의 별장이었어. 하지만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했지. 현재


는 고물상으로 쓰고 있는지 고물만 그득 쌓여 있어."

"고물상?"

"쓰다버린 것들을 산더미처럼 모아서 되파는 곳 말이야."

"하지만 난 한 번도 저 고물들이 다시 나가는 것을 못 보았어. 트럭들


은 집 뒤편으로 돌아가 마당 밑으로 뚫린 통로로내려가는 것 같았어."

"그래? 저 집엔 그렇게 많은 플라스틱과 고철을 쌓아놓을 지하실이 없


을 텐데."

그때 또 하나의 트럭이 힘겹게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트럭의 짐칸


은 두꺼운 캔버스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반짝이는 저건 뭐지?"

내가 천 사이로 삐죽 나온 검은 물체를 보고 물었다. 검은 물체는 저물


어가는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가 외알 망원경을 트럭 꽁무니 쪽으로 향했다.

"바퀴가 네 개 달린 이동식 대포야. 자 봐!"

마치가 내게 망원경을 건넸다.

"저건 18세기 초에 제작된 캐논 대포잖아? 주로 범선 현측에 장착했던


거야. 고물상에서 왜 구닥다리 무기를 취급하는거지?"
"어젯밤엔 온갖 떠돌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가득 실은 트럭 세 대가
저 집으로 올라갔어. 하지만 여태 나오지 않고 있지.그리고 이걸 봐."

마치가 휴지처럼 구깃구깃해진 종잇조각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종


잇조각은 빛이 바래고 바닷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노련한 사무장과 항해사, 갑판장, 선목(*나무배의 수리와 건조를 맡는


목수),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반 선원 대 모집.

항해 내내 신선한 과일과 술, 오락거리 제공. 계약 즉시 경악할 만한


선금 지급.

단, 돛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고 선원 규약을 엄수할 수 있는 자에


한함.

나는 이상한 모집 광고를 쥔 채 물었다.

"돛배란 수백 톤급 요트를 말하는 걸까?"

"글쎄. 아무튼 저 집에서 날아온 거야. 어젯밤 너희 집 뒤편에 떨어져


있는 이 전단지를 주웠어. 트럭을 타고 와, 저집으로 줄지어 들어간 사
내들 가운데 한 명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것 같아."

벌써 언덕 위의 집 너머에는 배가 볼록해진 달이 걸려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다시 언덕길을 올라갔다. 트럭에


는 지금까지 것들과는 다른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트럭 뒤로 날렵한 흰색 왜건이 뒤따랐다. 뒷자리에는 알이 작은 은테


안경을 낀 인물이 타고 있었다. 그가 차 안의 등을켜더니 양옆으로 펼
친 종이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망원경을 쳐들고 길게 뽑아 배율을 높였다.


"복잡하고 이상한 설계도면이야. 'A6G9 양방향 반중력 전자기 풀 생
성시스템 상세설명도'라는 긴 이름이 쓰여 있어.괄호 안엔 '허리케인
의 눈'이라고 돼 있는데?"

"뭐?"

마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긴 눈썹에 쌍꺼풀이 진 커다란 에메랄드빛


눈이었다.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어?"

"'허리케인의 눈'이란 바로 양자 웜홀을 만들어 내거나, 자연적으로 만


들어진 원자 크기보다 작은 양자 거품을 넓힐 수있는 기계들 가운데
하나야. 웜홀은 상상도 못할 중력 작용으로 여는 것도 힘들지만 순식
간에 닫혀버리지. 그 때문에인공적으로 웜홀을 열어놓을 수 있는 기계
의 발명은 불가능했지. 하지만 과학이 아주 발달한 몇몇 세계에서는
그게가능해졌어. 반중력 상태를 만들어 일단 여는 데 성공한 입구를,
아주 짧은 시간동안 열어놓을 수 있는 기계들이발명되었거든. 허리케
인의 눈만 있다면 난 내가 속한 우주로 돌아갈 수 있어!"

이번엔 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마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속한 우주라니? 너 가출 소녀 아니었냐?"

"사절단과 함께 BB-206 세계로 우주 간 이동 중 네 방에 홀로 떨어진


거야. 이래 뵈도 난 알모타 제국을 이어받을공주라고."

"너 공주 병 걸린 거 아냐? 하하하."

나는 배를 움켜잡고 오랜 만에 웃었다. 아주 오랜 만에.

"비웃지 마! 난 진짜 공주라고! 내가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네가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게 아니라면, 한번 노력해볼게. 하지
만 자신을 외계에서 온 공주라고 믿는 여자 애는처음이야. 하하."

"정확히 난 외계인이 아니거든."

"외계인이 아니라고?"

"난 평행우주 번호 JJ-109 세계에서 왔어."

"평행우주라니?"

"이웃한 우주를 말해. 자신의 우주와 거의 비슷한 우주도 있고, 하나의


사건이나 원자, 시간의 흐름 들 때문에 많이달라져버린 우주도 있지."

"아예 6500만 광년 떨어진 독수리 성운 너머 태양이 다섯인 어느 별에


서 왔다고 하지. 하하하. 근데 외계인치고는우리말을 너무 잘 하시네,
하하하하."

나는 또 웃었다.

"맘껏 비웃지. 난 너희 세계의 말을 거의 모두 습득했어. 그런데 언제


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지?"

"삼년 전 벚꽃이 떨어질 무렵 봄이었어. 우리는 엄마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떠난 그 어떤 이유도 알아낼 수 없었어.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갈 만한 곳을 모두 수소문했지만 엄마는 그 어디에도 없었어. 마치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린것처럼."

엄마 얘기를 하고 나니까 다시 우울해졌다.

"그럼 정말 엄마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잖아?"

"뭐?"
"네 엄마가 사라질 당시, 혹시 네 엄마처럼 홀연히 집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 년에 두 번, 우리 세계로 이주해오는 우브 세계 사람들이 있었지."

"우브라니?"

"네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말하는 거야. 정확히는 UV-609 세계이


지."

"UV-609?"

"너희 UV-609 세계에선 벚꽃이 질 무렵과 낙엽이 떨어질 무렵에, 우리


세계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있었지. 이 세계의사람들의 마음이 까닭
없이 나른하고 쓸쓸해지는 때라고 했어. 일 년에 딱 두 번만 운행하는
페렐월드(*평행우주)횡단특급을 타고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영원히
떠나는 여행길에 올랐지. 하지만 평행우주 간 여행은 모두 불법이야.
여행이발각되면 그것을 알선한 인간들과 승객들은 지옥보다 끔직한
기억을 주입받고 마지막 우주 번호인 ZZ-909 세계에버려진다고 했어.
네 엄마의 흔적을 우브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면 네 엄만 분명 그 횡단
특급을 탔는지도 몰라."

"말도 안 돼! 엄마가 영원히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네가 말한


그런 세계 따윈 없어! 넌 머리가 완전히 돌아 집을나온 얘가 분명해!
당장 이 방에서 꺼져버려!"

나는 울어버릴 것처럼 마치에게 대들었고, 걔를 맘껏 모욕했다.

하지만 마치는 강했다. 나의 말 따위에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표정


이었다.

"난 갈 곳이 없어."
마치가 힘없이 대답했다. 치노가 마치의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를 내밀
고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손가락을 깨물어 밉살
스런 녀석도 왠지 불쌍해보였다. 우리는 말이 없이 한참동안 서 있었
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면 며칠 동안만 여기 더 머무르는 걸


허락해줄 테야?"

마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어떻게?"

"네 엄마가 사라질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조사해보는 것이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경찰서의 실종 전담 부서는 우리 같은 애들에


게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하지만 휴대전화로 실종된사람들 신상명세
서를 보내주긴 하대."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드러난 모든 자료를 분석


하는 건 가능할 거야."

나는 마치와 함께 지하실을 나와 거실로 올라갔다.

컴퓨터를 켜고 마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는 실종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 관리 사이트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일반인들도
실종자들의 구체적인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사이트는 없었다.

마치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우리 집 컴퓨터와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이


상하게 생긴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구아바 나무 열매처럼 생긴 목걸이였다.

"그게 뭐야?"
"공주 용 마스터키 같은 거야. 알모타 제국의 공주만이 휴대할 수 있
지. 네 방으로 떨어지며 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바람에몇 개의 기능이
고장 났어.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기초적인 기능은 해낼 수 있을거야."

마치는 구아바 나무 열매처럼 생긴 '공주용 마스터키' 끝을 유에스비


잭에 어렵게 연결했다. 모니터에 내가 모르는 언어로창이 하나 떴다.

마치는 검색 조건과 범위를 설정했다.

엄마가 사라진 날짜에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여러 사람들에 대한 정보


가 아주 빠르게 검색돼 하나의 파일에 담겨졌다. 마치가다른 키를 입
력하자 그 날짜에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한글로 번역돼 나열되
었다.

"나라와 인종은 다르지만 사라진 백 이십 명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


군."

"그게 뭔데?"

"첫째 사라진 사람들 가운데서 너희 세계에서 다시 발견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야. 둘째, 이들이 최종적으로목격된 장소와 시각
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야. 마지막으로, 이들 모두 특별한 이유가 없
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야.그리고 결정적으로, 어흠, 난 이 사람을
알고 있다는 거야."

마치가 거들먹거리며 모니터 속 한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말쑥한 정


장 차림을 하고 있는 뉴욕 출신 회계사 남자를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우리 알모타 제국이 속한 JJ-109 세계의 한 강에서 관광객


을 태워주는 곤돌라 사공으로 일하고 있지.지금도 아마 그럴 거야. 난
각료들과 함께 가끔 그 강으로 여행을 떠났어. 내가 만났을 때 이 남자
는 턱수염을 기르고차양 모자를 쓰고 있었지. 우리 세계의 공용어로
나와 몇 마디 나누었지. 그런데 그의 말 속에 우리 세계에선 전혀발견
되지 않는 억양이 들어 있었어. 난 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지. 하지만 신고하진 않았어.그는 현재 자신의 소박한
삶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행복한 표정이었거든."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식구들이 깰까봐, 나는 얼른 거실 전화를 받았다.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네 아빠를 바꿔."

노랑 닭 볏 머리 사내의 목소리였다.

"안 돼요. 지금 주무시거든요."

"난 늘 이 시각이면 네 아빠와 통화를 해왔다니깐. 내 전화가 왔다고


하면 반가워할 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자는 아


빠를 깨웠다. 아빠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나는 거실로돌아왔다. 통화
내용을 엿듣고 싶어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잠시 뒤 아빠가 안방 문을 열고 말했다.

"친구가 와 있었구나. 미안하지만 수화기 좀 올려주겠니?"

초췌한 모습의 아빠가 내게 부탁했다. 나는 거실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네 아빠에게 무슨 일 있어?"

마치가 물었다. 나는 푼수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애에게 그간에 아빠


에게 벌어진 일을 죄다 말해버렸다. 전화를 건 녀석들이마음대로쓰시
고마음대로갚으세요-론, 곧 MML단 녀석들이라는 사실까지.

"엠엠엘단? 피부 색깔이 분홍빛인 자들 아니었어?"


"맞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들은 CP-707 세계 사람들이야. 정확히 그들이 노리는 건 뭔지 모르


지만 너희 세계에 와서 돈을 쉽게 빌려주고,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
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간다고 했어."

"그들이 원하는 것?"

"아마 인간의 마음과 관계된 거라 했는데 확실히는 나도 몰라. 한 세계


에서 다른 세계로의 마음의 이동은 물체의 이동처럼우주의 균형을 깨
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페렐월드-캅(*평행우주경찰)들도 눈감아주고
있대."

"아빠가 그들에게 서명한 계약서를 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


을 텐데."

그때 안방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노랑 닭 볏 머리 사내는 오늘 아빠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서도, 절


대 날짜를 잊지 말라고 또 협박 전화를 한 것이다.
4. 엠엠엘단의 정체

토요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나는 아빠 방에서 찾아낸 계약서를 들


여다보았다.

아빠가 다 다음 주 금요일 여섯 시까지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아빠가


그들에게 저당 잡힐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음 번호 7TWENTY7 신체 내 적출? 이게 무슨 뜻이지?"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 '세븐투엔티세븐'을 네 아빠 몸속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야.


그들이 그것을 가져가 그들의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는뜻이지."

어느 새 마치가 뒤에 와 있었다.

"세븐투엔티세븐?"

"마음 번호 세븐투엔티세븐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의 고통을 잊지 못


하고 그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는 마음'이야. 그 마음을버리지 못한 사
람에겐 영원히 고통스러운 마음일 뿐이지. 그들이 네 아빠에게서 가져
갈 것은 바로 그거였어. 아마 네 아빠가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믿는
너희 엄마에 대한 '미워하고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일 거야."

"말도 안 돼. 아빠의 그런 마음이 어디 있지?"

"마음은 발바닥에 있을 수도 있고 손톱 밑에도 있을 수도 있어. 마음이


언제나 뇌 속에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마음은심장에만 있는 것도 아
니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배꼽 밑에 있다고 믿고 있지. 하지만 마음
은 인간의 몸속 어딘가에 있는건 분명해."

"그럼 아빠가 그들의 돈을 못 갚을 경우, 그들이 아빠의 신체 일부를


가져가겠다는 뜻이야?"
"그렇진 않을 거야. 아마 네 아빠의 뇌 속에서 네 엄마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기억을 꺼내가겠지. 엠엠엘단에게 마음은원자가 결합한 모습
이거나 그것들의 이온화 과정에 불과하거든. 그들은 어떤 마음의 세기
를 일렉트론볼트(*1일렉트론볼트는분자나 원자 하나에 대한 에너지
의 크기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단위)로 나타내지. 하지만 그들이 그
마음 에너지를 어디에쓰는지는 아무도 몰라."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아빠에게서 네 엄마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건 네


아빠를 위해선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잖아?"

마치는 갈수록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걔가 말한 대로 전


혀 다른 세계가 우리 세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
마저 현재로선 받아들기 힘 드는데 말이다.

솔직히 마치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다.

저 귀찮고 얼토당토한 말만 늘어놓는 신경질적인 여자 애를 빨리 우리


집에서 쫓아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아저씨와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


지. 아빠는 그런 엄마를 미워하지만 잊지 못하고 괴로워해. 하지만 나
는 엄마가 우릴 버리고 떠났다고 믿고 싶진 않아!"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야. 네 마음속에서 엄마를 지독히 증오하


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네가 엄마의 기억이 남아있는 지하실에 내려
오길 싫어하는 것을 보고 알았어."

마치의 말이 맞았다. 나는 마음속에서 우리를 버리고 떠난 엄마를 끝


도 없이 원망했으니까.
"오늘은 삭구와 닻, 밧줄, 범포, 원재(*범선의 돛대나 활대에 사용되는
튼튼한 나무 장대) 등을 가득 실은 트럭 세대가 저 언덕 위의 집으로
들어갔어. 그리곤 갑자기 조용해."

마치가 얼른 말을 돌렸다.

"여긴 바다와 먼 육지인데 왜 배가 필요하지? 배를 띄우려면 근처에


바다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니깐 이상하다는 거지. 어두워지면 함께 가보지 않을래?"

마치가 나를 부추겼다.

"난 아빠에게 한번 가봐야겠어. 아무래도 걱정되거든. 배가 고프면 거


실에 올라가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먹으면 돼.동생과 누나는 나가
고 없어. 이따 다시 내려올게."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서랍에서 내 저금통장을 꺼냈다. 자전거를 타고


아빠의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으로 가는 길에는대학교가 하나 있다.
대학교 교정을 가로질러 가면 가깝기 때문에 교정을 지나갈 생각이었
다.

내가 교정을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며칠 전 아빠 공장에서 보았던 마


하바흐가 삼 층짜리 건물 모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남자 화장실 앞에 멈춰 있는 마하바흐 쪽으로 다가갔


다. 어두운 화장실 안쪽에서 노랑 닭 볏 머리 사내의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어 비명이 들려오다 멎었다. 나는 얼른 화장실 유리문으로 다가
갔다. 경첩 아래 틈으로 안을들여다보았다.

대학생 형이 고꾸라진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대학생 형 옆에는 그 형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양복과 점퍼, 서류 가


방, 검정 구두들이 널려 있었다. 그 형의 머리위로는 커다랗고 힘이 센
문어 모양을 띤 흉측한 생물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

생물들이 기절한 형의 머릿속과 등뼈 속에, 빨판이 달린 여러 개의 긴


다리를 집어넣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게 생물들이 다리 끝으로 뭔가를 뽑아내었다.

그러자 생물들의 몸은 온갖 빛으로 차올랐다. 화장실 안이 섬광으로


가득했다. 생물들의 몸이 빛을 뿜는 것을 멈췄다.생물들의 기다란 다
리 끝에 특이하게 생긴 시험관이 들려 있었다. 시험관에는 분홍색 골
수가 차 있었고 그 속에서는 뇌 조각같은 게 둥둥 떠다녔다.

생물들이 대학생 형의 몸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흩어진 옷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웃옷에 이어 바지가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더니 옷의 목덜미 부근에서


사람의 머리 같은 게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빨강 닭 볏머리 사내와 노
랑 닭 볏 머리 사내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빨강 닭 볏 머리 사내는 채 1그램도 되지 않을


뇌 조각과 골수가 담긴 시험관을 쥔 채 검은 가방을열었다. 가방의 한
쪽에는 골수와 뇌 조각이 담긴 수많은 시험관이 찔려 있었다.

빨강 닭 볏 머리는 새 시험관을 수많은 시험관이 늘어선 맞은편, 진공


퓨즈의 홈처럼 생긴 곳에 끼웠다. 전류가 흘렀고,에너지의 세기를 나
타내는 막대형 계기판이 작동했다.

"2TWENTY2 마음, 9.3일렉트론볼트입니다."

빨강 닭 볏 머리 사내가 노랑 닭 볏 머리 사내에게 보고했다.

"이 녀석이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겨우 10일렉트론볼트에도


못 미치는군. 하지만 다른 녀석에게서 뽑은 질투하는마음과 혼합하면
쓸 만하겠어."
노랑 닭 볏 머리 사내가 말했다.

"지옥 같은 마음 중 하나인 '7TWENTY7'을 만들 수 있겠네요."

빨강 닭 볏 머리 사내는 방금 전의 시험관을 뽑아서, 수백 개 시험관이


꽂힌 맞은편의 빈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가방을 탁닫았다.

고꾸라져 있던 형이 깨어났다.

"이젠 정말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쓰러져 있던 형이 물었다.

"그래. 하지만 주위에 급한 돈이 필요한 친구들이 있으면 언제든 우릴


소개시켜 주라고."

대학생 형은 무슨 일을 당한지도 모르고 일어났다. 화장실 유리문에


노랑 닭 볏 머리와 빨강 닭 볏 머리의 그림자가비쳤다.

나는 화장실 앞을 달아나 자전거로 달려갔다. 둘은 마하바흐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대학생 형이 화장실을 나와 내 옆을 지나쳤다. 그 형의 얼굴


에는 누군가 꿈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한 모습만이남아 있었다.

아빠는 이층 사무실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줄담배만 피우


고 있었다.

"아빠. 무슨 일 있는 거죠?"

"아니다."

"제가 모아 둔 돈이 좀 있어요. 두 달 전까지는 아빠가 주신 용돈 절반


은 계속 저금해왔거든요. 자요! 그리고 이것도."
통장과 왼쪽 귓불에서 떼어낸 은귀고리를 아빠에게 건넸다. 아빠는 통
장을 열어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표정이었다.

"기특한 녀석…….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걸로는……."

아빠는 은귀고리를 나의 귓불에 다시 끼워주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요. 하지만 절대 그 사람들에게 넘어가선 안 돼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갚아버려요. 그들이 아빠에게 원하는 건아빠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 있어요. 그들은 CP-707 세계에서 온,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괴물인간들이에요. 우리 집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여자
애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

"뭐?"

"조금 전 내가 그들의 본래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그 여


자 애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요."

"그들이 누구이건 방법이 없잖아? 나도 최선을 다 해보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금리가 가장높은 사채업자들까지
찾아다니며 사정해봤지만, 허사였어."

똥똥한 몸으로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거나 헐떡거리


며 사채업자들을 찾아 이 계단 저 계단 오르내렸을 아빠의모습이 그려
졌다.

"그만큼 나의 신용이 땅에 떨어졌거든. 그냥 시간이 가는 것을 지켜보


며, 차라리 약속한 날이 빨리 다가와버렸으면 하는마음뿐이야."

아빠는 집행일이 다가오는 사형수처럼 초조해 했다.

"그들이 가져가려고 하는 건 바로 아빠의 마음이에요. 엄마를 잊지 못


하고 때론 증오하고 때론 사랑하는 바로 그마음이라고요. 그들과 타협
하면 엄마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나 추억도 함께 빼앗기게 되는 거라고
요."

"뭐?"

아빠는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쳐다보았다.

"그, 그러긴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들은 독사보다 냉혹해요. 약속한 시간에 어


김없이 나타나 아빠의 마음을 빼앗아 갈 거예요.그들에게 마음을 빼앗
긴 사람은 유령 같았어요."

아빠는 절망적이 되어 석양에 반짝이는 나무 이파리들을 쳐다볼 뿐이


었고, 나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왔다 갔다 할뿐이었다.
5. 발코니의 여섯 사람

밤하늘에는 열사흘 달이 떠 있었고 아빠와 누나, 동생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나는 점퍼 속에 플래시를 집어넣고 지하실로내려갔다. 마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마치는 새잎이 달빛에 반짝이는 백양나무 숲을 가로질러 언덕 위


의 집으로 다가갔다.

"오늘 어떤 대학생 형이 엠엠엘단 녀석들에게 당하는 걸 보았어. 그 형


은 그들에게 당한 후 왠지 삶의 의욕 같은 걸잃어버린 듯했어. 이젠 그
의 마음속에서 2TWENTY2, 곧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영영 사라
져버렸기 때문일 거야."

"난 하나의 마음을 빼앗긴다는 게, 별것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아빠가 엠엠엘단 녀석들에게 당해도 그 형처럼 되겠지?"

"그럴 거야. 네 아빤 지금보다 더 무기력해질 거야."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울타리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언덕 위의 집 정원


에 풀어놓은 송아지만한 복서(*경비견, 호신견의 일종)세 마리가 앞발
을 쳐들고 우리를 때려눕힐 것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치노가 마치의 머리카락 속에서 빠져나와 녀석들을 향해 사납게 끄르


르르르 댔다. 녀석들은 눈치만 살피더니 귀퉁이로사라졌다.

"잘 했어. 치노!"

나는 치노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이번에 치노는 내 손


가락을 물어뜯지 않았다.

우리는 한창 피어난 자목련과 벚꽃 냄새로 어지러운 저택의 정원으로


숨어들었다. 달빛이 삼 층짜리 건물의 발코니를 비추고있었고, 발코니
에 나와 있는 여섯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알이 작고 둥근 은테 안경
을 낀 흰색 피부 남자는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었고, 보타이에 콧수
염을 기른 양복 차림의 두 번째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세 번째 남자는 왠지 사팔뜨기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오른쪽 관자놀


이 위쪽에서 코 쪽으로 가로지르는 깊은 칼자국이 나있었다. 숀 코네
리를 닮은 듯한 좀 큼지막한 얼굴은 잿빛 털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 스
카프를 목에 두른 이 남자는 키가그들 중 가장 컸고 얼굴이 새빨갰고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 옆에 달라붙은 키가 작달만하고, 피부가 커피 색깔처럼 까무잡잡하


고 어깨가 딱 벌어진 남자는 눈이 작고 가늘고 어딘가꼼꼼해보였다.
그는 청계천이나 남대문 군인 상점에서 구한 것 같은 해군 제복에 항
해사용 모자와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그옆에 서 있는 나머지 두 명의
남자는 특별한 개성이 없어보였다.

"안경 낀 남자는 바로 설계도를 들고 있던 사람이고, 잿빛 털이 얼굴을


뒤덮은 남자는 종종 모습을 드러냈어. 하지만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
는 저 남자는 새로운 인물이야. 내가 너네 집 지하실에서 죽 지켜보았
지만 한 번도 저 사람을 본적이 없거든."

마치가 속삭였다.

"안경 낀 하얀 피부의 저 젊은 남자는 왠지 낯이 익어. 텔레비전 연애


프로에도 자주 나오는 조현우라고 하는 사람이야.일반인치곤 젊은 나
이에 너무 빨리 자수성가했고 외모가 깔끔하고 매너가 좋기 때문에 여
자들에게 꽤 인기가 많아. 욘사마만큼 말이야. 거의 연예인이다 시피
하거든.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아시아의 천재랬어. 지금
은 어느 벤처 그룹대표라고 했는데, 정확힌 그가 무슨 사업을 해서 그
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지는 모두에게 미스터리야."

"조용히 해봐. 저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마치가 내 말을 끊었다.

"내일 이 시각에 출항한다고 했죠? 의약품과 의료 장비들은 배 안에


완벽히 구비돼 있나요?"

파이프 담배 남자가 은테 안경을 낀 조 씨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최소한의 설비 밖에 갖추지 못했습니다. 약품과 외과 장비


들은 18세기 초의 것들뿐이죠. 선박과 선원들의 복장,그리고 조그만
소품 하나하나 모두 18세기 초기의 것들이죠. 만약에 페렐월드-캅들
에게 발각돼 우브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이드러날 경우, 제 사업은 끝
이기 때문이죠. 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샅샅이 뒤져보니까요. 하나
라도 의심되는 게 발견되면안 됩니다. 그들은 평행우주연합의 위임장
으로 평행우주 간 비밀 무역을 하는 자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으니까
요."

"이거 난감하군요. 18세기 초의 약품과 장비라……."

"알모타 제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통과해야 할 JJ-109 세계의 바다


가 18세기 초의 대서양과 카리브해와 겹쳐 있기때문이죠. 그래서 18
세기 서인도 제도의 문명이 자주 끼어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운이 좋
다면 그런 구세기 약품이나장비들을 쓸 일이 없겠죠."

"운이 좋다니? 18세기 초는 해적의 전성기였어. 그들의 검은 깃발이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뒤덮었는데 그들을 따돌릴 수있을지 의문이군."

사팔뜨기에다 털북숭이 남자가 불만을 드러냈다.

"배의 양쪽 현측에 각각 12대의 이동식 대포들이 장착돼 있습니다. 돛


대의 장루(*돛대의 높은 곳에 꾸며 놓은 작은발판. 주로 전망대로 쓰
임)와 이물과 고물(*배의 앞과 뒤) 갑판에 숨겨진 6대의 선회포까지 합
치면 5급 군함들과도맞먹을 화력이죠."
"물론 그런 무기들 또한 18세기 초의 것들이겠죠? 하지만 이번에 운반
할 물건들은 양이 많아 쉽게 발각될 텐데?"

사팔뜨기에다 털북숭이 남자가 의문을 던졌다.

"전혀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소령님. 배 안의 쥐새끼들도 찾지 못할


곳에 숨겨두었으니까요. 자, 수십 톤의 알모타제국의 보물과 멋진 출
항을 위해 건배!"

조 씨가 다섯 명의 남자에게 포도주를 따랐다. 여섯 사람은 쨍! 잔을


부딪고 하늘에 뜬 열사흘 달을 바라보며 축배를들었다. 여섯 사람은
곧 안으로 사라졌다.

"파이프 담배 남자는 아무래도 외과의사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마치에게 속삭였다.

"이 저택의 주인인 조 씨가 고용한 선의(*선원들의 건강과 치료를 위


해 배에 함께 타는 의사)일 거야. 그리고 얼굴이털로 뒤덮인 남자는 장
교 출신이고 그 옆에 있던 키가 작고 어깨가 넓고 꼼꼼해 보이는 남자
는 항해사 같다는 느낌이 들어.나의 추리가 옳다면 난 나의 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가 내 생각을 확인해
봐야겠어."

마치는 겁도 없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만 돌


아가고 싶었다. 나는 이 으스스한 저택이나 마치의계획과는 별 상관도
없으니까.

"네 생각이란 뭐지? 난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내가 마치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조 씨라는 남자가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게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넌 어쩌면 특종을 잡게 될지도모르잖아? 싸구려 연예
계와 언론들에 저 은테 안경을 낀 남자에 대한 정보를 흘려주는 대가
로 돈을 받아내면, 위기에 처한네 아빠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물론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알모타 제국으로 돌아가는 데
있지만. 관심없으면 돌아가도 좋아."

어느 새 마치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저택을 반 바퀴 돌아 저택 뒤편으


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는 정말 조 씨가 엄청난재산을 모은 비밀을
알아낸 걸까? 마치의 말대로 저 남자에 대한 중요한 비밀이 이 집 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나는조 씨에 대한 모든 것을 궁금해 하는 연
예가에 정보를 팔아서라도 아빠를 돕고 싶었다.

그가 쓰는 코털 가위 하나만 훔쳐 와도 엄청난 벌이가 될 것이다. 아니


그가 잠옷 차림으로 침실을 나와 하품을 하는모습을 잡은 사진 한 장
도, 곧 거리로 내몰릴 우리 가족에게는 막강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누나의 디카를 슬쩍챙겨 나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나는 벌써 마치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집 뒤에는 고철과 플라스틱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고철을 압착시키는 데쓰는 유압식
압착기가 공중을 찌를 것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트럭 째로 무게를 재
는 바닥 저울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건어느 고물상에나 있다.

삼 층의 한 방을 제외하고 불이 모두 꺼진 저택의 뒤편에 지붕이 낮은


가건물이 있었다. 가건물 지붕 위로는 어마어마하게큰 은행나무가 가
지를 뻗고 있었다. 가건물의 지하로 통하는 비탈진 통로가 보였다. 마
치는 그리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내가 가건물 입구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발견하고 주의를 주었다. 마


치는 우뚝 멈춰 섰다.

"이곳에 들어온 게 발각되면 우린 끝장이야. 저들은 썩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거든."
내가 마치에게 다시 주의를 주었다.

"그럼 이걸 쓰면 되겠네."

마치는 자기 옆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우


산을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입구를 향해 활짝 펼쳤다.

"찍힌다 해도 우리란 건 모를 거야."

마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통로의 끝을 향해 내려갔다. 입구 앞에


는 대형 트럭들이 세워져 있었다. 감시카메라에 잡힐위치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얼른 마치의 우산 뒤로 숨어 함께 우산대를 붙잡았다. 나와 마
치는 우산으로 발목까지 가리고 잔뜩허리를 굽힌 채 가건물의 입구까
지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여기 철문이 있어."

감시카메라의 시야가 벗어났을 때, 마치가 철문을 가리켰다. 우리 앞


에 는 건물 지붕까지 닿는 어마어마한 철문이 버티고있었다.
6. 짧은 탐험

나와 마치는 철문을 힘껏 오른쪽으로 당겼다.

쇠바퀴가 달린 문이 기분 나쁘게 끽끽댔다. 우리는 겨우 몸이 들어갈


공간만큼 틈을 만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높은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 외에는


빛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플래시를 켰다.

우리 앞에 어마어마한 공간이 펼쳐졌다. 실내 농구장만큼 커다란 직사


각형 홀에는 갓 건조된 범선 세 대가 한 줄로 늘어서있었고, 배에서는
아직도 갓 칠한 타르 냄새가 배어났다.

"브리건틴이야! 주로 연안 무역이나 먼 항해에 쓰였지. 왜 이런 배가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무게가 약 180톤 정도되는 범선들에 플래시를 비추었다.

나는 두 개짜리 돛대가 달린 실제 브리건틴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


기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 줄로 늘어선범선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범선들은 레일 위에 놓여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온 입구와는 반대 방향


을 향하고 있었다.

"분명 다른 게 있을 거야. 나의 추리가 맞다면."

마치가 말했다. 나는 실내 여기저기를 비추며 마치를 뒤따랐다. 높은


난간과 복도들, 무엇에 쓰는지 짐작할 수 없는 기괴한벽들이 내부를
둘러싸고 있었다.

두꺼운 벽으로부터 튀어나온 은빛 기둥들 끝에는 가장자리가 오목 볼


록한 강철 판들이 연결돼 있었다.
마지막 범선에 다다르자 범선의 기움돛대(*배의 앞부분에서 길게 튀
어나온 돛대) 앞에 또 하나의 엄청난 물체가 누워있었다.

은빛 합금으로 된 원통형 물체였고 물체 주변은 온갖 케이블과 전원


장치들로 뒤덮여 있었다.

기계는 앞쪽으로 갈수록 원둘레가 좁아졌다. 거대한 삼단 로켓이 누워


있는 형태였다.

끝에는 빨강과 초록, 파랑 세 개의 기다란 침으로 이루어진 창 같은 것


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끝은 단단한 바위라도뚫어버릴 듯 깜깜한
벽을 향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작아,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플랑크


길이의 양자 웜홀을 인공적으로 넓힐 수 있는 기계가분명해. LS-827
세계에서 발명된 것 중 하나를 탑재하고 너희 세계로 도망치던 밀수업
자들이 이 근처에서 조난당했지.너희 세계로는 4년 전 겨울이었어. 하
지만 모두 죽었을 거야."

"4년 전 겨울?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며 우리 집 뒤 백양


나무 숲에서 빛이 일었다 사라졌는데? 그해 겨울을숲에서 보냈던 한
부랑자는 누군가가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고 있는 걸 봤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어. 약간 정신이 나간사람이라 아무도 믿지 않았지."

"아마 이 저택의 주인이 LS-827 세계에서 도망친 밀수업자들을 묻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이 고장 난 '허리케인
의 눈'을 수리하기 위해 여러 해를 바쳤겠지. 이야호!"

마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 위에서 손바닥을 두 번 짝짝! 치고 엉덩이를 두 번 왼쪽으


로 치켜 올려 대고 나서, 훌라춤을 추는 것처럼궁둥이를 마구 흔들며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왼쪽 어깨 위에서 손바닥을 짝짝! 두
번 치고 같은 순서로엉덩이를 흔들었다.
"무슨 춤이 그렇게 천박해!"

"우리 제국의 민속춤이야. 내가 원하는 걸 발견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뭐?"

"저들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대로 평행우주 간 여행을 계획하


고 있었어."

"하지만 뭣 때문에 이렇게 큰 배들이 필요한 거지?"

"아마 이 세계의 무언가를 다른 세계의 물건과 바꾸러 가기 위해서일


거야. 이 세대의 범선이 바로 무역선이라면."

"이 세계의 무엇을 가지고 가려는 것이지?"

그때였다. 우리가 들어왔던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플


래시를 껐다.

우리는 미처 달아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범선의 고물 아래, 커다란


키 뒤로 몸을 숨겼다. 입구 쪽에서 뚜벅뚜벅 버클이달린 구두 발소리
가 들렸다. 플래시를 켠 큰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림자는 입구와 가까운 쪽 범선에 플래시를 비추었다.

나는 키와 선체의 틈 사이로 그림자를 엿보았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


구에 잿빛 구레나룻과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사팔뜨기같은 눈을 한,
발코니의 세 번째 남자였다.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그는 버클이 달린 18세기 선원 구두로 갈아


신고 있었다. 그는 저 앞의 첫 번째 범선까지 가서배를 점검해보고 뱃
머리를 돌아 우리들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얼어붙어버릴 것 같았다.


마치는 샌들을 벗더니 두 손에 쥐고 다리를 까치발처럼 들고 출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나도 방법이 없었다. 나도 운동화를 벗어 들고 까치발로 냅다 뛰었다.

"휴― 저 남자에게 붙잡혔으면 몸이 들린 채 따귀를 얻어맞았을 거야."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우리는 저택 앞 숲 속에서 헐떡거렸다.


제2부 밀항

7. 뜻하지 않은 승선

아빠는 이제 담배로도 초조함을 달랠 수 없어 손가락으로 연신 소파의


팔걸이를 긁어 파거나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소파에서 떨어져 나온 스펀지가 옥수수 빵조각처럼 바닥에 나뒹굴었


다.

소파의 팔걸이 부분은 깊게 파여 앙상한 스프링을 드러냈고 이젠 뜯어


낼 스펀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엠엠엘단 녀석들과의 약속이 보름 정도 남아 있어요."

내가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더 남아 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


니까. 이 공장을 비롯해 내가 쌓아온 많은 것들을잃게 되겠지. 하지만
모든 걸 잃는 건 아니지. 난 너희들만 있으면 돼. 희망이 부질없다 해
도, 인간의 목숨이 붙어 있는한 언제든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단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마저 멈춰선 안 돼."

나는 아빠가 나를 가르쳐들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빤 엄마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마저 잃게 되는데도 괜찮으


세요?"

"어차피 우리들 곁을 떠난 사람이잖니. 차라리 네 엄마를 전혀 알지 못


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솔직한 어른들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아빠가 여전히 엄마를 끔
찍이 생각하고 있으며 언제든 다시 돌아오길 고대하고있다고 말해주
기를 바랐던 것 같다.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기분


이어떤 것인지 알게 되겠지.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던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의 참담한 기분 말이야.
차라리 엠엠엘단 녀석들이 네 엄마에대한 기억을 지워줄 수 있다면 좋
겠어. 슬픔과 절망만 안겨주는 사람에 대한 기억 따위가 뭐가 중요하
겠니?"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아빠의 진심이 아닐 것이다. 아빠 또한 엄마를 결


코 잊지 않으려 할 게 분명하다. 나는 어젯밤아빠가 엄마 사진을 앨범
속에서 하나씩 빼내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는 모습을 엿보았으니까.

아빠의 공장이 엠엠엘단 녀석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아빠가 다시 희망


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아빠는 엄마에 대한희망을 버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빠가 엄마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리는 건, 우리가 엄마에 대한 희망


을 놓아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희망은 다른 희망을돌보게 만드니
까.

하지만 엠엠엘단 녀석들과의 약속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빠에게 희망을 다시 안겨줄 수 있지? 나는 차라리시간이 이대로 멎
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하실로 내려가자 마치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 봐


야 거의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망원경 내가 가져가도 되지?"

마치가 나의 외알 망원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맘대로 해."

"이 성냥과 다목적 칼도 쓸 만하겠는걸. 불과 칼이란 반드시 필요할 때


가 생기는 법이니깐."

마치는 케이크 촛불 용 성냥과 스위스제 아미나이프를 가방에 챙기며


또 가지고 갈 만한 것이 없나 둘러보았다.

"하지만 갈 데라도 있어?"

"몰래 범선을 탈거야. 그들은 분명 JJ-109 세계로 간다고 했으니까. 바


다를 거쳐 알모타 제국으로 간다고 했어."

"하지만 그들은 해적이 날뛰는 18세기 초의 바다를 지난다고 했어. 18


세기 초의 한 부분이 JJ-109 세계에 끼어있다고 했잖아. 언덕 위의 일
당에게 들키지 않게 갈 수 있을지라도 해적들을 피해갈 수는 없을 거
야. 신사들(*해적들은자신들을 신사들이라 불렀다)은 배 안을 샅샅이
뒤져 약탈해가지. 만약 네가 그들에게 들키거나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난 알모타 제국의 공주니까 살려줄 거야."

"네가 공주라는 사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그들은 널 인질


로 붙잡아 둘 거야. 그들이 원하는 걸 얻을때까진. 하지만 그것도 네가
알모타 제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증명했을 때의 얘기지."

"설사 내가 공주란 사실을 증명하지 못해도 예쁘니깐 봐주지 않을까?"

"순진하긴. 18세기 해적 규약에 따르면 해적들은 절대 여자를 배에 태


우지 않게 돼 있어. 누구든지 여자를 몰래 태운자는 사형에 처해졌지.
여자는 동료 해적들 간의 신뢰와 우정을 깨뜨리기 때문이지. 그리고
해적 선장은 아내와 자식들이있는 선원들 또한 해적 일원으로 뽑지 않
았어. 그들은 늘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울수가 없었지."
"하지만 여자 해적들도 있었다고 했어."

"그들도 처음엔 모두 남자 차림을 하고 해적단에 들어갔던 거야. 앤 보


니와 메리 리드, 앨와일다 같은 여자 해적들은 동료선원들을 감쪽같이
속였지."

"잘났군."

"여기 있어!"

나는 마치에게 말하고 내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나는 내 옷장을 뒤져,


몸에 꼭 끼는 재킷과 스카프, 흰색 셔츠, 두터운흰색 양말, 헐렁한 청
바지를 가방에 쑤셔 담았다. 그리고 학교에 다녀와서 입을 벌린 채 한
숨 때우는 중인 유나 누나방으로 가 옷장을 열고 보닛 모자를 슬쩍했
다. 보닛 모자에서 베일을 뜯어내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 현관을 나오
며 버클이달린 내 구두를 가방에 또 쑤셔 담았다.

지하실로 내려간 나는 가방을 마치 앞에 던졌다.

"이걸로 갈아입어라."

"대충 선실 심부름꾼이나 꼬마 해적 같은 모습은 연출할 수 있겠네."

마치는 가방을 열어보고 중얼거렸다.

나는 마치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지하실 입구에서 기다렸다.


잠시 뒤, 긴 머리를 보닛 모자 속에 밀어 넣은 마치가올라왔다. 어딘지
약간 어색하지만 영락없는 애송이 선원 같은 모습이었다.

"잘 가!"

나는 언덕 위의 집으로 향하는 마치에게 말했다. 벌써 보름달이 떠올


라 있었다.

"잘 살아!"
마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며 어두운 숲속을 혼자 기어 올라갔
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뜬금없이 나타났던 여자 애는숲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가 숲속에서 다람쥐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좀 힘들겠어.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졌어. 이번엔 엄청나게 큰 고양이


까지 등장했어. 좀만 도와줄 수 있겠어?"

"쳇. 며칠 전 우리가 쑤셔놔서 저들이 눈치 챘나 봐. 좋아 뭐. 그 정도


야."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네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잖아?"

"이상한 구멍을 열 수 있는 기계가 성공할지 난 확신할 수 없어. 제대


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영원히 이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 뭐."

"확실하지 않는 것에 모험을 걸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난 네가 창고


까지 숨어들어갈 수 있게만 도와줄 생각이야."

"의심 많고 소심하고 싱겁고 재미없는 녀석."

마치는 이렇게 내뱉고 먼저 움직였다. 숲을 통과하여 언덕 위의 저택


앞에 다다랐을 때, 풀어놓은 복서 세 마리가 우리쪽으로 달려와 잡아
먹을 것처럼 날뛰며 짖었다. 그 뒤에는 두 눈에 쌍라이트를 켠 점박이
짐승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표범이야!"

"뭐? 고양이가 아냐?"

조 씨가 애완용으로 기르는 표범이었다. 그로그라는 이름의 표범으로


조 씨와 함께 텔레비전에까지 나왔었다. 이번에도 치노가마치의 머리
카락 속에서 나타나 버릇없이 까부는 짐승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집
뒤를 돌아 가건물의 지하로 통하는 입구에다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
다.

"이번엔 저택을 돌아 지하로 다가가는 건 글렀어."

낮잠을 한숨 푹 자둔 사내들이 벌써 마당에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었


다. 60명 정도 되었다.

그들은 방방곡곡에서 흘러온 떠돌이들 같았다.

노련한 뱃사람 몇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할 일 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항구에서 떠돌던 사내들. 또는 볼품없는 고기잡이배에서그물을 몇 번
건져 올려봤을 뿐인 풋내기 선원들. 아니면 인생이 죽도 밥도 아니어
서 미래라고는 전혀 없이 무작정날파리들처럼 몰려든 사내들뿐이었
다.

그들 가운데는 상당히 험악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들도 몇 끼어 있었


다. 하지만 단순히 조 씨가 지급했을 '경악할 만한선금'에 현혹된 자들
이 대부분일 테지. 그들은 자신들이 닻을 올리고 떠날 항구가 바로 근
처에 있다는 사실도, 목적지도,어떤 일을 하게 될지조차도 제대로 모
르는 것 같았다.

조 씨와 잿빛 털이 얼굴을 뒤덮은 키 큰 남자, 선의가 현관에 나타났


다. 발코니에서 보았던 여섯 명 가운데 두 명도그들을 따라 나왔다. 모
두가 18세기 초 선원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정원에서 얼쩡거리던
사내들은 나타난 간부 선원들을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여덟 시 정각에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모


두 이 시각까지 이 여행이 과연 어떤 것이며 무슨의미가 있는지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이 저택에서 함께 합숙을 하며 18세
기 식 선원 생활을 공부하면서도여러분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몰랐을
테니까요. 하지만 전 여러분에게 이번 항해만 무사히 마치게 해주면
미리 드렸던 경악할만한 선금 외에, 무역에서 얻은 값진 재물의 절반
을 정한 몫에 따라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부와 영
광이돌아갈 것이며……."

이 여행을 주최한 선주 조 씨가 사내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우리는 저택의 왼쪽으로 돌아 가건물의 입구와 이어


진 통로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저 아래 가건물의 입구앞엔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버티고 있었다.

"어떡하지? 벌써 여덟 시 15분 전이야."

마치가 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입구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겠어. 저길 봐!"

나는 지하에 파묻힌 거대한 건물 지붕 위로 늘어진 은행나무 가지들을


가리켰다.

"저 가지가 지붕 위의 환풍구를 향하고 있어. 나무를 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범선의 주돛대가 환풍구 쪽으로 솟아있었던 게 기억나."

"하지만 밧줄 같은 게 필요하겠는데?"

마치는 이렇게 말하며 밧줄을 찾았다. 밧줄이 근처에 있을 리 없었다.


우리는 뼈대만 남은 고철과 플라스틱 틀들이산더미처럼 쌓인 곳을 지
나 은행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고물들 틈에서 두꺼운 알루미늄 전선을
발견했다. 나는 둘둘 말린알루미늄 전선을 목과 어깨에 걸쳐 두르고
은행나무로 올라갔다.

마치는 나를 뒤따랐다. 치노가 우리를 앞서 가 튼튼한 가지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지붕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기어가고 있었고, 저 아래서는 조
씨의 확신에 찬 연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간신히지붕마루에 도
착했다. 환풍구 바깥에 여러 겹으로 꼰 전선을 친친 감았다.

다행히 선풍기 날개가 없는 T자형 환풍구였다. 나는 마치를 환풍구 안


으로 밀어 넣었다. 치노는 마치의 어깨 위에 풀쩍뛰어올랐고 마치는
전선을 붙들고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내가 마치에게 집게손가락에 가
운뎃손가락을 포개 행운을 빌고 있을그때였다. 내 등 뒤 나뭇가지 사
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달빛 속에서 은빛 털을 반짝이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짐승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로그였다. 표범이 캬아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가로누운


나뭇가지를 타고 나를 향해 성큼성큼 뛰었다. 나는 거의본능적으로 환
풍구 속으로 다리와 몸을 디밀고 전선을 붙잡은 채 매달렸다. 하지만
잘 훈련된 사나운 짐승이 잽싸게 풀쩍뛰어 구멍에 다다라 상체를 기울
이고 나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나는 피하려다 전선을 놓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손이 뜨거워 전선을 놓고 말았다. 내 몸은 어느 새
주돛대의 활대에 걸쳐졌다.

"아!"

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갑판 위에서 화물칸의 입구로 달려가고 있던


마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 봐! 빨리 거기서 내려와! 곧 저들이 들어온단 말이야!"

벌써 입구 밖에서 사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몸을 곧추세


우고 기어가 돛대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돛대를 다리사이에 끼운 채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손바닥이 다시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마치에게 허겁지겁 달려갔다. 하지만이미 사내들이 입구로 들이닥쳤
다. 마치는 무작정 나를 붙들고 화물칸 계단으로 달려내려 갔다.

"이 계단에 숨어 있다 나가라고. 저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말이


야."

나와 마치는 저 아래 어디선가 돼지와 염소, 닭과 오리, 거위, 소 따위


의 가축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계단 중간에웅크리고 있었다.

잠시 뒤 사내들이 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화물칸으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나와 마치는 재빨
리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배의 맨 아래층에 식량 저장고가 있었고, 상자와 통들로 가득 쌓인 칸


막이 너머에는 가축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또 하나의화물칸에는 반듯
하게 쌓아놓은 향신료 상자와 원형 뿔처럼 생긴 설탕 덩어리, 담배 상
자 등이 수십 톤 씩 쌓여 있었다.

우리는 버터와 오트밀, 양초, 식초, 비스킷, 건빵, 말의 머리, 그리고 맥


주와 럼주, 포도주, 고급 클라레 병 등을담아둔 상자와 술통들 뒤로 몸
을 숨겼다. 입구와 우리 사이에 말린 고기들이 걸려 있어서 커튼처럼
우리를 가려주었다.방구석의 네모난 상자에는 사과와 파인애플, 포도,
레몬과 같은 탐스런 과일들이 쌓여 있었다.

잠시 뒤 18세기 선원 복에 부츠를 신은 남자가 뚜벅뚜벅 내려왔다. 머


리가 레슬링 선수처럼 반들거렸다.스킨헤드(*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
린 머리 모양)였다.

사무장처럼 보이는 어딘지 탐욕스럽게 생긴 스킨헤드 씨는 식량 저장


고의 품목들과 항해 중에 싱싱하게 잡아먹을 가축들을꼼꼼히 점검하
고 다시 올라갔다.

"이때야!"
마치가 빨리 나가라고 내 엉덩이를 떠밀었다. 하지만 거대한 철갑 캡
슐 같은 것에 범선이 단단히 둘러쌓이는 듯한 소리가착, 착, 착 들려오
더니 어마어마한 굉음이 뒤따랐다. 위이이이잉― 허리케인 같은 광풍
이 배 주위에 몰아치는 소리가들렸다. 선체가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
다.

"저녁 여덟 시야. 양자-웜홀을 넓히고 있어!"

마치가 외쳤다.

"안 돼!"

내가 달려 나가려던 찰나였다. 배가 앞으로 순식간에 빨려나가더니 좁


은 회오리 터널을 만난 것처럼 기우뚱했다.

곧 범선은 더 넓은 터널 가장자리를 따라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다 터


널에서 내뱉어지더니 은하계의 바깥 테두리를 따라 한바퀴 휘돌아오
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범선은 철갑 캡슐과 함께 원래 자리에서 1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옆 벽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말로는도저히 표현할 수 없
는 순간이동을 겪은 탓에 나와 마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8. 끝없는 바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뱃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주위에는 맥주와


럼주 등을 담아놓은 술통들이 나뒹굴었다.

마치는 돼지와 소, 닭 들을 가두어 둔 가축 울타리 아래 엎어져 있었


다.

치노가 발로 마치의 볼을 연신 긁어댔지만 마치는 정신을 못 차렸다.

"이 봐! 일어나!"

내가 흔들어 깨우자 마치가 눈을 떴다.

"성공한 거야?"

"몰라."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배의 바닥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마치를 혼자 두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왼쪽으로


칼로 자른 것 같은 붉은 빛이 쏟아졌다. 햇빛이었다.

나는 아무도 들키지 않게 갑판까지 다가갔다. 상갑판 쪽에서 18세기


무역선의 선원 옷으로 갈아입은 몇몇 선원들이 앞돛대에매달려 바람
의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다. 돛을 고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살짝 목을 빼고 뱃전 너머를 살폈다. 태양은 하


늘을 이등분한 지점에서 약간 비낀 곳에 걸려 있었고주위에는 끝도 없
는 쪽빛 바다만이 펼쳐져 있었다. 파도는 잔잔했고 바람은 적당했다.

우리는 '메릴 호'라 이름 지어진 제2 브리건틴에 타고 있었다. 메릴 호


의 두 돛대에 걸린 범포들은 바람을 가득안고 살짝기운 자세로 바다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고물 쪽에서 따라오는 범선이 보였다. 제3 브
리건틴 킨 세일 호였다.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쪽의 제1 브리건틴 어드벤처 호 역시 범포에 바


람을 가득 안은 채 달리고 있었다.

"어디야?"

마치가 뒤로 다가와 물었다.

"바다야."

"성공한 것 같은데. 하지만 웜홀 생성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못


한 것 같아. 저들 또한 놀랬을 거야. 너무 심하게흔들렸거든. 갑자기
배가 고파."

나와 마치는 먹을 것을 살피러 다시 저장고로 내려갔다.

안쪽 벽에 기대어 쌓여진 통들 가운데 하나의 뚜껑을 뜯어내자 비스킷


이 나왔다. 우리는 비스킷을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마치는 치노에게도
비스킷을 건넸다. 치노는 마치의 어깨 위에 앉아 도토리를 먹는 다람
쥐처럼 바쁘게 비스킷을 삼켰다.

한참 먹고 나자 배가 불러왔지만 목이 말랐다. 비스킷 통들 옆에 물통


처럼 보이는 작고 둥근 통들이 있었다. 나는 통들 중하나에서 마개를
뽑고 통을 기울여 벌컥벌컥 마셨다.

"으아 퉤!"

나는 마신 것을 모조리 내뱉었다.

"왜 그래?"

"물맛이 이상해. 진한 냄새에다 이상한 맛이 나."


마치가 살짝 맛을 보았다.

"이건 물이 아니라 향신료를 넣은 럼주야."

마치가 물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굴려왔다. 우리는 마개를 뽑고 통을


기울여 꿀꺽꿀꺽 물을 나눠 마셨다. 그러자 벌써부터졸음이 쏟아져왔
다. 이곳으로 숨기 위해 신경을 너무 쓰고, 사나운 짐승에게 쫓기고,
알 수 없는 시공간을 순식간에가로지른 탓에 피로가 쌓인 우리는 선체
의 안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쌓인 피로와 파도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왔다 올라가는 배의 규칙적인


움직임 때문인지, 나와 마치는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우리가 잠에서 깼을 때 배 안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고, 배가 점점 크게


놀아댔다.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높이가낮과는 아주 차이
가 있었다. 배 밖 어디선가 삭구에 부딪혀 갈라지는 바람 소리가 일고,
거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툭툭때려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배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배의 바닥이 올라갈 때는 그런 대로 참


을 만했지만 파도의 골을 따라 주욱- 내려갈 때의어지러움은 특히 참
을 수가 없었다.

"배를 좋아할 뿐 배를 타는 데는 젬병이잖아?"

속도 모르고 마치가 나를 놀려댔다. 나는 비위가 약한 편이다. 지하방


에서 잘 때조차도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꾸고는 했다.

나는 낮에 먹은 비스킷을 바닥에 죄다 토하고 말았다. 그러나 멀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았다. 나는바이킹도 타지 못한다.

아직 엄마가 우리 곁에 있었던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린이날 온


가족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ㅅ랜드로 놀러갔다.우리는 바이킹을 탔
다. 내 주위의 인간들은 즐거워서 쓰러질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르는데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죽음의 비명을내지르고 있었다. 남의 고통과는 무
관하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주위의 얄미운 인간들을 보며 나는 처음
으로 고독을 느껴야했다. 그땐 이 세상 누구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노랗게 뜬 얼굴로 어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신에게 간곡하게 빌


었던 것 같다. 1초가 1년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는 바이킹 위에서 '혼절'하고 말았고, 정신이 깨었을 때는 화장실 앞


벤치 위에서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나는 지금 그 악몽의 순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


가고 싶은 맘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그게 가능이나할까?

"이대로 계속 되면 난 죽고 말 거야. 모두 네 탓이야."

나는 사실 마치를 탓할 기운도 없었다.

"이 누나가 한 수 가르쳐줄게."

이렇게 까불며 마치는 나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를 놀리는 마


치를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마치가 나를 이순간에서 구원해준다
면 백 번이라도 누나라고 불러줄 의향이 있었다.

"네가 배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파도의 움직임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파도의 움직임을 거부하거나 의식할수록멀미를 하게 돼. 자
가만히 파도의 움직임에 몸을 내맡겨봐. 너 자신이 그냥 배가 된 느낌
으로 말이야."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의 말대로 배가 올라갈 때는


떨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떨어질 때는떨어지고 있다는 생각
을 잊기로 했다. 그냥 몸을 배의 움직임에 내맡기자 멀미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치는그때까지도 나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
었다. 수십 번 반복되는 배의 움직임에 생각을 편안하게 맡기자 멀미
가 거짓말처럼달아나버렸다.
"벌써 날이 어두워졌어."

마치가 계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의 맨 아래층까지 짙은 어둠이 내


려와 있었다. 가만히 있던 가축들이 소동을 피워댔다.계단에서 붉은
빛이 춤을 추며 나타났고, 검은 그림자들이 내려왔다.

우리는 얼른 상자들 뒤로 몸을 숨겼다. 저장고에 나타난 이는 스킨헤


드 사무장과 그의 조수였다. 깡마르고 눈빛이 날카로운조수의 손에는
캔버스 천으로 만든 커다란 자루와 양동이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가축들에게 다가갔다.

"돼지 한 마리, 닭 일곱 마리."

사무장이 가죽 표지로 된 수첩에 기록하고 허리에 찬 선원용 걸리(*배


에서 쓰던 큼직한 칼)를 빼들었다. 그리고 돼지 한마리에 다가가 목 급
소에 깊숙이 칼을 박았다. 신선한 가축을 먹기 위해서였다. 꽥, 비명
한 번 제대로 못 지르고 급습을당한 돼지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조
수가 잽싸게 다가가 양동이를 받치고 피를 받았다. 그런 다음 다섯 마
리 닭들의 목을차례로 비틀어 캔버스 자루에 담았다.

손에 돼지 피가 흥건한 스킨헤드 사무장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


벅 다가왔다. 나와 마치는 상자들 뒤에 더욱 낮게웅크리고 숨을 죽였
다.

"이 비스킷 통이 왜 열려 있지? 자네가 열었나?"

사무장이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돼지 피를 닦으며 조수에게 물었다.


나는 비스킷 통을 연 뒤 뚜껑을 닫지 않은 것을후회했다.

"범선이 구멍을 통과할 때 충격으로 열린 게 아닐까요?"

"이 물통도 열려 있군. 다른 통들은 모두 괜찮은데 말이야. 항해 중에


음식이 부족하면 안 되니까 꼼꼼히 관리하도록 해.계획 없이 축냈다간
먹을 게 돼지 사료 밖에 남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어."
사무장은 조수에게 이르고 먼저 나갔다. 조수는 축 늘어진 돼지 한 마
리와 닭들이 담긴 자루를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다시 내
려와 선원들이 저녁으로 먹을 맥주 한 통과 물 한 통을 메고 사라졌다.

우리는 낮에 건드렸던 비스킷 통을 다시 열었다. 천장에 걸린 말린 소


고기 생각이 나, 나는 흔적이 남지 않게 고기 몇조각을 베어왔다. 하지
만 너무 딱딱해 먹을 수가 없었다. 마치가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마치는 바닥에 나뒹구는 가축용사료 그릇 하나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
리고 말린 고기조각을 담가두었다.

포도주에 불리어 부드러워진 소고기를 몇 조각 씩 나누어 먹자 포만감


같은 게 밀려왔다. 물통을 열어 물을 마시고 뚜껑과마개를 닫았다. 후
식으로 사과를 하나씩 베먹자 적당히 배가 불렀다. 낮에 잔 탓인지 잠
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는태평히 다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 망원경 좀 가지고 갈게."

나는 저장고가 답답해서 망원경을 들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상갑판은 조용했다. 선원들은 모두 숙소에 묵는 듯했다. 바닷물에 젖


은 갑판이 미끄러웠다. 신발을 벗고 갑판의 가로 들보를밟으며 선수루
쪽 난간으로 다가갔다.

고물 등이 켜진 제1 브리건틴 어드벤처 호는 메릴 호의 우현(*배의 뒤


쪽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뱃전)에서 약간 앞쪽으로벗어나 밤바다를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불이 켜진 어드벤처 호의 고물 창은 열려 있었
다. 털북숭이 숀 코네리처럼 생긴어드벤처 호의 선장과 일급 항해사의
모습이 비쳤다. 둘은 기다란 원목 탁자 위에 해도를 펼쳐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그들
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 항로를 결정하기 위한 걸까.


내가 망원경을 들고 그들 쪽을 살피자 어드벤처 호의 선장은 마치 뭔
가 낌새를 채기라도 한 것처럼 고물 창 너머로 이쪽을바라보았다. 나
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시 해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아까보
다 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열려진 창문으로 여전히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들은 좋지 않은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순전한 호기심이 발동해 망원경을 들고 뱃머리 쪽으로 걸었다.


두 개의 삼각돛을 매단 기움돛대를 기어올랐다.기움돛대에는 앞돛대
와 이어진 밧줄과 발판용 밧줄들이 군데군데 감겨 있어 미끄러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몸은 선체에서벗어나 배의 맨 앞쪽에 치우쳐져 있
었기 때문에 배의 용골이 파도의 마루를 피해 내려갔다 올라갈 때는
약간 어지러웠다.떨어진다면 바로 밑은 검푸른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
다. 나는 수영을 잘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바다로 떨어져 배 양 옆에
서갈라지는 급류에 휩싸인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배의 뒤쪽에서 이는
회오리 물살 속으로 잠기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기움돛대 끝까지 가 있었다. 기움돛대에 두 삼각돛


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내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했다.돛대에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웅크렸다. 열린 창으로 새어 나오는 말소
리에 귀를 기울이며 망원경을 어드벤처호의 선장실 안으로 향했다. 발
코니에서 보았던 작고 어깨가 떡 벌어지고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눈이
단추 구멍만한 남자 또한18세기 항해사 복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선주는 약삭빠르고 머리가 좋은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순진한


녀석이야. 거친 사업엔 어울리지 않아. 알모타 제국사람들이 순순히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쉽게 교환해줄 거라고 믿고 있거든. 함장
시절 내가 자네와 좋은 일을 많이했던 것처럼, 난 그와 함께 몇 차례
일을 했지. 모두 성공이었어. 하지만 이번엔 달라. 평행우주연합의 단
속도 심한 탓도있지만, 알모타 제국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
하지만 결정적인 선주의 실수는 알모타 제국의 정권이 얼마 전에바뀐
사실을 모르고 있어. 나태하고 게으르고 절제할 줄 모르는 왕이 직접
무분별한 평행우주 간 무역에 뛰어들었다가,재수없이 악랄한 숲속의
도적들에게 인질로 붙잡혔지. 자연스럽게 왕의 아내가 왕좌를 이어받
았지. 도적들은 여왕에게 인질로잡은 왕과 알모타 제국의 보물을 맞바
꾸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어. 하지만 여왕이 보낸 화답은 어땠는지
아나, 왈왈이항해사?"

"글쎄입죠. 제게 가장 부족한 게 바로 상상력이거든요."

'왈왈이'란 별명의 항해사가 놋쇠 디바이더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겐 늑대 밥이 되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야. 벼랑 밑에 버려도 괜


찮아.'"

"히히히. 왕의 아내는 왕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던 거군요. 소령


님."

일급 항해사가 교활하게 웃었다. 그가 어드벤처 호의 선장을 소령님이


라고 부르는 것으로 봤을 때, 어드벤처 호 선장은 해군함선의 지휘관
이었을까?

"맞았어, 왈왈이. 그녀는 아주 꼼꼼하고 확실할 뿐만 아니라 평행우주


연합의 규율에도 충실한 편이지. 그리고 배짱도두둑하지. 그녀의 뱃살
만큼이나 말이야."

"그렇다면 뱃살의 여왕은 우리가 가지고 간 물건을 순순히 바꿔주지


는 않겠군요?"

"우리 브리건틴 선단이 싣고 가는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지만, 그


녀가 우리 물건이 맘에 들었다 해도, 우리에게 아주불리한 조건을 내
걸 거야. 우리가 돌아올 '구멍'을 한 번 열어주는 데 어마어마한 수수료
를 내게 하거나 열 수 있는'거품'의 위치를 절대 공짜로 가르쳐주지 않
을 수도 있지."
"이 항해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우린 바늘구멍보다 작은
자연 웜홀의 위치에 대한 정보마저 없으니깝쇼."

"그래서 난 지금 알모타 제국과의 거래에 찬성할 수 없다는 거야."

"네?"

"난 알모타 제국이 아닌 론바르바도와 거래를 하고 싶어. 알모타 제국


은 제국 앞에 넓게 퍼진 바다 안개 때문, 여기선직항로를 설정할 수 없
지. 더욱이 알모타 제국 앞바다엔 해도에 표기되지 않은 작고 기다란
섬들로 이루어진 해협과 암초,배를 집어 삼킬 수 있는 회오리 급류 들
이 널려 있어. 아주 노련한 항해사나 선장도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그것도 다행히 이 바다를 거쳐 목숨을 건졌을 때의 얘기지.
선원들이 가장 많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곳이 바로 여기거든.알모타
제국의 해안에서 54킬로미터 떨어진 악마의 바다야."

"악마의 바다라니요?"

"선원과 배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의 바다지. 그래서 지어진


별명이야."

"바다 괴물이 나온다는 말인가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악마의 바다에서 살아 나온 이가 없기 때문에 그


바다에 대해선 아무도 정확히 말해줄 수 없지. 난불확실한 일에 모험
을 걸고 싶지 않아. 원래 항해 계획은 알모타 제국의 남쪽 해안선과 같
은 위도를 따라 일직선으로나아가다, 이 뱀머리 섬 앞에서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꺾어 경도와 평행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
렇게 멀리돌아갈 필요조차 없어. 우리의 항해 거리는 더욱 짧아질 테
니까."

"어째서요?"

항해사가 물었다.
"바로 이 뱀머리 섬을 지나쳐 곧장 가면 이 섬이 보이지? 알모타 제국
과 비교하면 새발에 피지만 바로 론바르바도섬이야."

나는 망원경의 배율 최대로 높였다. 선장이 가리키는 해도 위의 섬을


확대시켰다. 섬의 남쪽 양쪽 가장자리에 안쪽으로 굽은반원 모양의 만
두 개가 보였다. 섬의 북쪽 양쪽에는 투우소의 뿔처럼 휘어진 두 개의
곶이 튀어나와 있었다. 성난투우소의 머리를 닮은 섬이었다.

"론바르바도요?"

"그래. 론바르바도 섬 앞바다엔 알모타 제국의 모든 보물을 준대도 바


꾸지 않을 보물이 묻혀 있지."

"알모타 제국의 모든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이라니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요?"

왈왈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선장을 쳐다보았다.

"'잭 캐치의 사물함'이라고 들어보았나?"

"잭 캐치라면 교수 집행인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해적들이 바다 밑에


숨겨놓은 보물을 일컫는'데이비 존의 사물함'이란 말은들어봤지만 잭
캐치의 사물함은 처음인데요. '잭 캐치와 함께 춤을 추다'는 교수형을
당하다는 뜻입지요."

"잭 캐치의 사물함은 그토록 운명적인 함을 의미하는 거야. 그래서 '성


난 오긴의 함'이라고도 불리지."

"'오긴'이라면 해적들이 바다를 일컬었던 이름인데요."

"맞아. 성난 바다가 이 함을 삼켰으니까."

"대체 그 사물함 속에는 어떤 보물이 들어 있는 겁니까요?"


"자네가 꿈도 꾸지 못할 보물이겠지. 나도 그것이 뭔지 무지무지 궁금
하거든. 바로 여기 '잭 캐치의 사물함'의 위치가있지."

어드벤처 호 선장이 18세기 범선 선장처럼 위장하기 위해 눌러쓴 삼


각모자를 이마 위쪽으로 젖혔다. 그리고 오른손을 오른쪽눈으로 가져
가 눈을 벌렸다. 곧 왼손이 오른쪽 눈구멍 속으로 사라진 듯 빨려 들어
갔다.

잠시 후 그가 왼손을 빼냈다. 그의 오른쪽 눈알이 있던 자리엔 검은 구


멍만이 뎅그렇게 남아 있었고, 선장의 왼손에는유리눈알이 들려 있었
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선장을 주시했다. 이빨이 모두 빠진 노파의 쭈글쭈글한입술처럼 텅 빈
한쪽 눈을 가진 선장은 왼손으로 유리눈알을 잡고 눈알 뒤쪽의 한가운
데를 손톱으로 집어 뭔가를 빼냈다.고무마개였다. 그것을 빼내자 유리
눈알 속에서 시거처럼 돌돌말린 누런 종이가 나왔다.

선장이 종이를 펼쳤다. 너덜너덜해진 지도였다!

선장은 지도를 조심스럽게 펼쳐 탁자 위에 놓았다. 수 세기 전의 지도


같았다. 해안에는 수심을 나타내는 숫자들과 닻과범선으로 나타낸 정
박지들이 표시돼 있고, 왼쪽 위쪽 모서리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보물이 묻힌 지점을 가리키는 ×표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보물의 위치는 없는데요?"

왈왈이가 탐욕스럽게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장이 지도를 뒤집었


다.

잭 캐치의 사물함
폰체 만, 그라나딜로 곶, 남남동, 1.5마일

위도 17.40. 경도 78.50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유리눈알 선장이 지도의 뒷면을 왈왈이에게 보여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입지요?"

"나도 해석을 못했어. 하지만 항해사로서 뭔가 잡히는 게 없나?"

"폰체 만이라면 콧구멍처럼 움푹 들어간 이 왼쪽 만 같은데. 하지만 그


라나딜로 곶의 표기는 없네요. 만의 입구 왼쪽에클로렌스 요새라고 표
시된 이 지점을 그라나딜로 곶으로 설정하고 여기서 남남동 방향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이라면 이위치입죠.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잖아요.
바다 한 가운데 보물이 묻혀 있다고요? 혹시 이 주위의 섬들 가운데
하나가아닐깝쇼?"

왈왈이가 자신이 찾아낸 한 점 주위에 다섯 개 정도 널려 있는 작은 섬


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곶의 어느 지점을 설정해서 1.5마일인가에 따라 이 섬들 중 하


나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지."

"그렇습죠. 나침의 시작점의 위치가 좀 애매하군요. 나침의 시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탐사할 지점 또한 아주달라지죠. 찾아야 할 지
점이 너무 넓어질 것 같은데요? 정확한 경도 값만 안다면 경도와 위
도, 나침의 세 선이 만나는지점을 설정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초기
해양 크로노미터에 의해 제작된 지도들이란 경도 값이 모두 엉터리로
계산돼있었습죠."

"답은 아랫줄에 있어.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이게 무엇을 뜻하


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글쎄요.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에서 났나요?"

"조 씨와 함께 KE-858 세계로 무역을 떠났을 때, 조 씨 몰래 가져간 우


리 세계의 주석 한 덩이와 맞바꾼 거지.내가 물건을 교환한 친구는 알
모타 제국에서 도박이 성행하는 KE-858 세계로 이주한 친구였지. 그
의 알모타 제국 선조는과학 기술이 아주 발달한 아칸 제국과의 무역에
서 얻은 금속재, 수수께끼 보물과 기념품, 설탕덩이, 담배상자 등을 배
안에잔뜩 싣고 론바르바도 섬의 폰체 만 앞의 바다를 지나던 중이었
지. 그 배의 이름은 엘 드라곤 호였지. 하지만 보름달이 뜬밤에 엘 드
라곤 호는 론바르바도의 사략선(*정부로부터 적국의 상선을 나포하도
록 위임장이나 적국 선박 나포면허장을 받은무장한 배)들에 습격을
당한 것이지. 함포 사격으로 엘 드라곤 호가 두 동강나기 전 그의 선조
는 겨우 목숨을 건져 보트를타고 탈출할 수 있었지. 사략선들 또한 자
신이 노리던 배가 바다 속에 묻혀버렸고, 밤이라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없었어. 그들은 그 배에 실린 것들을 단념했지만, 그 선조는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 선조는보물들이 가라앉
은 장소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언젠가 적당한 때를 봐서 그곳
에 다시 가기로 했던 것이지. 하지만론바르바도의 사략선들이 그 바다
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없었지. 그는 바다에
대한 향수와 오랜바다 여행에서 얻은 열병으로 쓸쓸히 돌아가고 말았
지. 후손들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수 세기 전의 이 지도가 나온
것이지."

"잭 캐치의 사물함이란 바로 보물선 엘 드라곤 호를 가리키는 것일깝


쇼?"

"선원들이 모두 보물을 실은 무역선에 묻혀 있을 테니깐, 배는 바로 죽


은 자들의 무덤이 되는 것이지. 하지만 잭 캐치의사물함이란 그런 의
미가 아냐. 잭 캐치의 사물함이라고 일컫는 함이 따로 있어. 보통 사물
함처럼 위장하기 위해 선장실에눈에 잘 띄게 놔두었지."

"그 함 안에는 보석 중의 보석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하군요. 그게 뭘까


요?"
"아칸 제국이 알모타 제국 왕실에 보냈던 의문의 선물이지. 나도 무척
기대 돼. 그리고 보너스도 푸짐해."

"보너스요?"

"운이 좋게도 우리가 탐사할 일대는 바로 해적들의 소굴이었던 포트


로열과 가까운 바다야. 1960년대 보물 사냥꾼들은 그항구에서 불과
몇 킬로 밖에 떨어지지 않는 라임케이라는 무인도에서 옛 스페인 금화
와 은화, 은괴가 가득 담긴 궤짝을발견했지."

"저도 소문을 들었습죠."

"이번에 우리가 탐사할 지역은 1530년부터 해마다 세비야를 향해 출


발했던 스페인 대해의 세 보물 선단 가운데 한 선단이폭풍을 만나 가
라앉은 지점이지. 바로 아바나와 카르타헤나를 오가던 갈레온 보물선
단이야."

"에콰도르의 금과 콜롬비아의 에메랄드, 베네수엘라의 진주를 아바나


에 집결시켜 본국으로 실어 날랐던 그 선단 말인가요?"

"맞아. 스페인 본국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대해에서 세 방향으로 흩어


졌던 보물선단은 멕시코나 페루, 그리고 에콰도르,콜롬비아, 베네수엘
라 등 여러 식민지에서 보물을 싣고 와 쿠바의 아바나에 집결했지. 그
런 다음 다시 그 엄청난 보물들을싣고 본국으로 돌아갔지. 1549년, 카
르타헤나에 모인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기적적인 보물
들을 갈레온보물선단이 실었지. 기함 산토도밍고 호의 총사령관 디에
고 데 아빌레스가 지휘하는 보물연합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갈레온선
단은 여느 때처럼 카르타헤나에서 북북서 방향, 곧 아바나까지의 직항
로를 따라 항해하던 중이었어. 하지만 항해 도중20미터 짜리 파도를
앞세운 허리케인을 만난 것이지. 선단은 자메이카 방향으로 피신했어.
하지만 호위함 가운데 세 척과보물선 두 척은 조난을 당하고 말았지.
암초에 걸려 좌초되었을 거야. 하필이면 엘 드라곤 호가 가라앉은 지
점이 바로 그갈레온 선단 가운데 하나인 이슬라 데 피노스 호가 가라
앉은 지점과 일치해. 현재 우브 세계의 탐사권은 자메이카 정부가갖고
있기 때문에 보물 사냥꾼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지. 하지만 JJ-109
세계와 겹쳐지는 과거 세계의 것은 먼저발견하는 게 임자이지."

"이슬라 데 피노스 호라면 500만 파운드 이상의 보물을 싣고 가다가


침몰했다는, 소문의 난파선 말인가요?"

"맞아. 우리가 탐사할 주위엔 불규칙적으로 뻗어 있는 암초가 많아 보


물을 싣고 가던 중, 사나운 폭풍을 만나 가라앉은보물선들이 널려 있
지. 그곳은 중국남해와 지중해와 더불어 세계 3대 선박들의 무덤 가운
데 하나야. 바로 그런 바다의한가운데 이슬라 데 피노스 호와 론바르
바도의 사략선들에 습격을 받은 JJ-109 세계의 엘 드라곤 호가 함께
가라앉아있는 거야. 이런 걸 뭐에다 비유하는지 아나?"

"꿩과 알로 비유합죠. 꿩은 엘 드라곤 호이고 알은 신세계의 보물을 가


득 싣고 가다 난파당한 이슬라 데 피노스 호입죠."

"하지만 난 이 세상의 모든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 중의 보물, 잭


캐치의 사물함 안에서 잠자는 보물을 보고 싶어.그 신비의 보물을 손
에 넣기 위해, 평행우주 보물 사냥꾼들이 모두 안달이 났더군."

"대체 그게 뭔지 무척 기대가 되는데입쇼?"

"그걸 손에 넣는 것이 이 여행의 최대 목표이지. 우린 다른 평행우주


보물 사냥꾼들을 따돌리고 맨 먼저 그것을 손에 넣는거지. 우린 알모
타 제국의 남쪽 해안선과 같은 위도 상에 접근하면 감쪽같이 항로를
남쪽으로 돌려 이슬라 데 피노스 호와엘 드라곤 호가 잠든 곳으로 가
는 거야."

선장은 지도를 다시 접어 유리눈알 속에 감췄다. 그리고 유리눈알을


다시 텅 빈 오른쪽 눈구멍에 끼워넣었다.

"하지만 선주 녀석이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요?"


"어차피 이번 여행이 끝나는 대로 그 녀석과 거래를 끊을 작정이야. 적
당한 기회를 봐서 녀석과 녀석이 고용한 친구들,그리고 녀석 편에 가
담한 선원들을 무인도에 고립시키거나, 물고기 밥이 되게 해줄 생각이
야. 우리 몫이 적어지면 안되잖아?"

"당연하죠. 그런데 확실히 우리 편인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을 말하는


겁니까요?"

"메릴 호의 사무장과 칼을 좀 쓸 줄 아는 그의 조수는 처음부터 나와


뜻을 같이 했어."

"스킨헤드 씨랑 제비를 말씀하시는군요."

"맞아. 그리고 앞으로 구워삶을 좀 거친 친구들이 바로 우리 편이지."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요."

"자네에게 제격인 임무지. 이번 일만 성공하면, 페렐월드 짭새 녀석들


을 매수할 수도 있어. 그들이 눈감아주면 우린 별 탈없이 우브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조 씨가 수리에 성공한 '허리케인의 눈' 또한 결국 우
리 손에 들어올 거야. 그것만있으면 우린 언제든 다른 세계와의 불법
무역을 주도할 수 있어. 우리 세계에선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들이 다
른 원소들의세계에선 어마어마하게 귀중하니깐."

"하지만 선주 녀석은 물건들을 죄다 어디에다 숨겼을깝쇼? 그 물건들


을 론바르바도 사람들에게 건네면, 자기 나라의앞바다에서 보물을 맘
껏 뒤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을 텐데요."

"나도 그것으로 론바르바도 앞의 바다를 탐사할 수 있는 권리를 따낼


생각이었어. 하지만 선주는 숨긴 위치를 전혀 말하지않고 있어. 그가
가장 믿는 킨 세일 호의 선장과 항해사는 알고 있을 거야. 그들이 숨겨
온 우리 세계의 물건이 뭔지모르지만 JJ-109 세계에 속하는 론바르바
도엔 아주 값이 나가는 걸 거야. 그 물건들을 위장 화물들과 뒤섞어놓
은 것같지는 않아. 배를 만드는 과정에 숨긴 것 같아. 하지만 항해 중
간 중간 내가 샅샅이 뒤져봤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나머지 두 배
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을 땐, 녀석들을 돛대에다 묶어놓거나 대포 위
에 묶어놓고 좀 아프게 대해줘도괜찮겠지?"

"그것 또한 제가 맡겠습니다요."

왈왈이란 별명의 항해사가 대답했다. 그때 메릴 호의 선미 쪽에서 인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뒷갑판(*주갑판보다 높은, 배의 뒤쪽 갑판)에는 키잡이조차보


이지 않았다. 타륜을 고정시켜놓고 들어간 듯했다.바람의 방향이 오랫
동안 바뀌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키잡이가 불시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나는 기움돛대를 타고


내려와 캡스턴(*닻을 감아 올리는 장치)을 돌아 막저장고의 입구로 향
하려던 찰나였다. 선미 쪽 뱃전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
렸다.

나는 얼른 현측 대포 아래로 몸을 숨겼다. 조심스레 난간 밖으로 고개


를 빼고 배의 뒤쪽을 살폈다. 킨 세일 호가 살짝기운 자세로 바람을 받
으며 멋지게 따라오고 있었다. 메릴 호의 선장실에 흘러나온 불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뒷갑판바로 앞, 난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셔츠 바람으로 나온 선주 조 씨였다. 그는 달빛에 물든 바다를 바라보


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얼굴은 지금 한껏
부풀어 있는 돛들처럼 기대와 야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지옥 같은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까. 그는 이 항해가 목숨을 건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있다는 사실을 전
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물 쪽에서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장실 앞의 작은 방에서 키


잡이가 나타났다. 나는 다시 얼른 바닥에 엎드린 뒤,저장고의 입구로
기어가 계단을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마치가 자고 있는 곳을 향해 더듬어갔다.

"아악!"

상자와 통들 사이를 지나다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마치가 깨


었고 불안한 잠을 자던 가축들이 뒤척였다.

"왜 그래?"

마치가 다가왔다.

"오른쪽 발이 빠졌어. 움직이지 않아."

발목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파왔다. 마치는 양초를 넣어둔 상자를 뒤


져 우리 집에서 가지고 온 성냥으로 불을 켰다. 마치가내 발목 가까이
촛불을 들이댔다. 움푹 꺼져 부러진 판자 속에 발이 빠져 있었고 부러
진 판자 틈에 발목이 걸려 있었다.

"바닥이 꺼진 곳으로 발목이 빠졌군. 높은 곳에 쌓아둔 술통이 떨어지


면서 바닥이 꺼진 곳을 네가 밟았기 때문이야. 이판자를 들어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아."

마치가 내 발목을 죄고 있는 판자 하나를 들어냈다. 아픔이 몰려왔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이 조각만 빼내면 되겠어."

마치가 나의 발목에 박힌 작은 나무 조각을 빼냈다. 그리고 암연이 쌓


인 칸으로 가서 암연 조각 하나를 떼어왔다. 마치는물통의 물을 끼얹
어 내 상처를 씻었다. 그리고 상처 위에 암연을 갖다 대고 칼로 긁어
상처에 뿌렸다. 상처가 몹시쓰려왔다.

"우리 제국에선 이 암연이 약제로 쓰이지."


마치는 자신의 가방에서 주름이 잡힌 붉은 색 머리 장식용 천을 꺼내
내 발목을 묶었다.

"오늘 네게 빚진 게 많군. 멀미도 잠재워주고 말이야."

"쪼잔한 녀석. 그냥 고맙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그런데 이건


뭐지?"

마치가 뜯어낸 판자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판자 밑에서 반짝이는 물체


가 드러났다.

"쇠 같은데?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넣어둔 바닥짐일까?"

"그럴 리 없어. 그런 것은 일반 바닥짐으로 대신할 수 있으니까. 쓸데


없이 무거운 것을 싣지는 않는다고."

나는 부러진 나머지 판자를 들어내 보았다.

"이런! 금괴처럼 납작하게 압착시킨 고철 덩어리야. 자동차나 폐냉장


고 등에서 뜯어낸 것들 같아."

나는 옆의 판자를 하나 더 뜯어냈다. 판자와 배 밑바닥 사이에서 납작


하게 압착시킨 고철 덩이가 계속 나타났다.

"이리 촛불을 줘봐!"

나는 마치에게서 촛불을 건네받고 판자 사이에 고개를 집어넣었다. 촛


불을 판자 사이로 들여와 배의 밑바닥을 비추었다.

"맙소사. 가축들이 있는 저 밑바닥까지 고철과 플라스틱들이 숨겨져


있어. 배 무게의 삼분의 일은 될 것 같아.흘수선(*배가 가라앉아 수면
과 닿는 위치)아래가 깊고, 바닥이 보통 배들보다 높은 게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저것들을감추기 위해서였어."
"이제 알았어. 저들은 이 고철과 플라스틱을 알모타 제국과 교환하기
위해 가는 거야. 우리 제국에서 고철과 플라스틱은엄청나게 귀중한 자
원들이거든. 너희 세계의 다이아몬드나 금, 보석들처럼 말이야. 하지
만 알모타 제국에서 다이아몬드나, 금따위는 너희 세계의 석영이나 규
석 정도에 불과하지. 여기저기 깔려 있으니까. 심지어 알모타 제국 해
변의 십분의 일은사금으로 뒤덮여 있을 정도야. 그래서 우리에겐 특별
한 의미가 없지. 저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우브 세계에서 별 하잘것없
는물건을 다른 세계와 교환하기 위해서 이 여행을 준비한 거야."

"나도 조금 전에 눈치 챘어. 조 씨가 짧은 순간에 얻은 어마어마한 부


가 이런 여행과 관계가 있었어."

"맞아. 그는 우브 세계의 하잘것없는 자원들을 모아 다른 세계의 귀중


한 것들과 맞바꾸는 비밀 무역을 함으로써 부를 쌓은거야. 이번 말고
도 여러 번 이런 여행을 해왔을 거야. 범선으로는 처음이겠지만. 하지
만 이런 무역은 불법이야. 오래지속되면 원자 구조가 조금씩 다른 우
주들 간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지. 이 세계의 모래 한 알이 저 세계
로 움직일경우마저도 자칫하면 심각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어. 그렇
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평행우주연합의 페렐월드-캅들이 철저하게단
속을 시작했지. 하지만 평행우주 간 비밀 무역은 사라지지 않고 있어.
우주의 균형이나 질서 따윈 상관없이, 자기세계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
를 거머쥐려는 탐욕스런 인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알모타 제국에선 이번에 조 씨가 계획한 비밀 무역을 받아줄까?"

"원칙대로라면 받아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절대 아니라고는 장담 못


해. 고철은 제국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있고, 플라스틱은 가볍
고 실용적이고 세련된 물건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제국의 어떤 자원
은 우브 세계와 비교하여 턱없이부족하지."

"네가 알모타 제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알면 저들이 무척 반길 거야. 일


등실에 태울 텐데, 우린 괜히 이 어둡고 껌껌한곳에서 고생만 하고 있
었잖아? 그리고 문제가 생겼어. 어드벤처 호의 선장은 브리건틴 선단
을 장악하려 하고 있어. 깐깐한여왕이 통치하고 있고, 접근하기 힘들
다는 이유 때문에 알모타 제국과의 무역을 일치감치 단념하고, 론바르
바도란 곳으로항로를 바꾸려 하고 있어."

"알모타 제국과의 무역이 불가능할 걸 알고 론바르바도 섬으로 배를


돌리려 하고 있다고?"

"그래. 그렇다면 너도 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네가 알모타 제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밝혀. 그러면 이들은 널무사히 제국에 데려
다주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 대가로 네가 무역을 알선시켜준다면 대
부분 반길 거야. 조 씨와 어드벤처호의 선장 사이에 벌어질 싸움은 나
중에 걱정해도 되잖아? 너와는 상관없는 거니깐."

"웃기기 마. 선주 측 사람들이 내가 알모타 제국의 공주란 사실을 알


면, 이 배에 태워준 대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할거야. 우리 제국엔 오
히려 손해지. 공짜로 배를 탈 수 있다면 공짜 배를 타는 거야. 좀 불편
하더라도. 그것이 남는장사지. 또한 JJ-109 세계에서 우브 세계로의
이동은 페렐월드-캅들에게 발각될 확률이 높지. JJ-109 세계의 불법
여행알선업자를 만나 평행우주 간 여행이 가능해진다 해도, 수수료가
엄청날 거야. 이번 무역에서 남는 게 별로 없지. 조씨는 영악하고 철저
하게 장사꾼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비되
는 알모타 제국의 '허리케인의 눈'을공짜로 쓰려들 거야. 그러므로 내
가 공주라는 사실을 알리는 건 우리 제국엔 별 도움이 되지 않지. 이걸
바로 상업적인마인드라고 하는 거야. 사업을 하는 아빠에게선 대체 뭘
배운 거니?"

"글쎄…… 돈을 함부로 빌리면 안 된다는 것?"

"둘째, 살인을 계획하고 있는 어드벤처 호의 선장 일당이 이 배와 나머


지 배를 장악했을 경우야. 그들에겐 내가 공주라는사실이 하나도 도움
이 되지 않아. 그들은 어차피 알모타 제국까지 가지도 않을 거니깐. 그
들은 론바르바도 앞바다에서 원하는것만 얻고, 론바르바도나 다른 불
법 여행 알선업자를 섭외해 우브 세계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어드벤
처 호의 선장이범선들을 장악해서 론바르바도 섬으로 간다 해도 방법
은 있어. 적당한 기회가 오면 범선 한 척을 빼돌려 밤을 틈 타달아나면
돼. 이제 우리가 여기에 꼼짝없이 숨어서 일이 되어가는 꼴만 구경하
고 있어야 하는 까닭을 알겠어?"

나는 알모타 제국의 공주인 마르치니 에르고스페네가 대단히 현명하


고 존경스럽게 보였다. 그런 공주와 함께 있는 것이한편으로는 자랑스
럽게 느껴졌다. 나는 마치를 호위하는 호위대장이라도 된 듯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네. 선주 측은 알모타 제국에 무리한 요구를 할 테고, 선단을 장악하


려는 악당들에겐 목숨 또한 보장받기 어렵기때문입니다. 공주님."

난 정중히 공주 마마를 응대하는 호위대장처럼 행동했다.

"하하하."

마치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내 제국에 돌아가면 서로 예를 갖추어 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시오,모이 대장."

"그러겠사옵나이다."

나는 장단을 맞추고나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아빠가 걱정되


었기 때문이다. 또 하루가 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아빠가 걱정되기 때문이야. 곧 엠엠엘단 녀석들이 공장을 밀어버리


고 아빠에게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빼앗아갈 거야."

"잘만하면 넌 아빠가 위험에 처해 있을 금요일 여섯 시 이전에 되돌아


갈 수 있을 거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거품'을이용하면 돼. 그런 것들
은 이런 바다 한가운데도 존재하지.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란 아주
힘이 들어. 너무너무 작아보이지 않지. 그러나 웜홀 확대경으로 보면
찾을 수 있지. '거품' 가운데 하나를 넓혀 너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날 믿어."

얘는 내 방에서 그런 걸 찾아 어떻게 해보려 했던 것이군. 아무튼 나는


마치의 말에 희망이 되살아났다.

"이건 알모타 제국의 공주로서 네게 약속하겠어. 그리고 또 잘만 하면


넌 횡단특급을 타고 JJ-109 세계로 날아온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
라. 네 엄마가 알모타 제국에 살고 있을지, 아니면 JJ-109 세계의 다른
나라에 살고있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하지만 이주한 우브 세계의 인
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알모타 제국이거나 알모타제국과
가까운 토르투아나 섬이기 때문에, 네게도 이 여행의 목적이 뚜렷해졌
을 거야. 엄마를 만나고 위기에 처한 아빠에게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만약 네가 이 여행의 끝까지 나와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면 나 또한 네가 원하는 그 두가지를 모두 약속할 수 있어. 물론 네게
무작정 의지하는 건 아냐. 내가 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 수 없을 경우
에 네가날 지켜줄 수 있냐는 거지."

갑자기 계산적으로 변한 마치가 매우 낯설어 보였지만 나는 흔쾌히 고


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아빠나 엄마 모두 똑같이 소중한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인지, 위기에 처한 아빠
에게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여행인지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점점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얼떨결에 배에 올라버린 목적또한 더욱 분
명해졌다.

나는 엄마를 만난 뒤, 엄마를 데리고 우리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다.

물론 마치의 세계에서 하찮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값진 것들도 좀 달라


고 해서.
그것은 인쇄 공장을 지키려는 아빠를 위해 필요할 것이므로.
9. 밀항의 끝

우리는 몇 날 며칠 동안 어둡고 침침하고 냄새나는 저장고 바닥에서


숨어 지냈다. 가축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오랫동안 목욕을하지 못한 우
리의 몸에서는 냄새까지 났다. 세 대의 범선이 첫 번째 기항지를 잠깐
들러 다시 떠난 뒤부터는, 우리가 몰래먹을 수 있는 음식들의 종류가
좀 늘어나기는 했다. 하지만 걱정거리 또한 늘어났다.

배에 쥐가 생긴 것이다. 배 바닥과 천장, 들보에서는 끊임없이 갈색쥐


들이 지나다녔다. 천장으로 기어다니는 쥐들이 한밤중에우리의 몸 위
로 떨어지기도 했고, 바닥을 기다 몸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해먹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매달았다간 진작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쥐들이 징그럽다기보다는 그들이 끊임없이 내는 소리에 신경


이 더 쓰였고, 무슨 병이나 옮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쥐들또한 우리처
럼 몰래 저장고의 음식들을 조금씩 축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건빵과 비스킷에는 바구미가 득시글대기 시작했다. 우리


는 달리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구미들을 털어내고먹을 수밖에 없
었다. 항해의 초기에는 그나마 조금씩 몰래 먹을 수 있었던 사과나 파
인애플 같은 과일도 이제는 거의 바닥이나고 없었다. 몰래 손을 대면
흔적이 날 정도로 적은 양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족한 비타민 때문인지 마치와 나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고, 생기


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아직초롱초롱했다. 우
리는 오직 각자의 희망에 의지하여 지루한 항해를 버텨내고 있었으니
까.

갑자기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지하가 몹시 후텁지근해졌다.

"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어. 아주 조금씩 고향의 냄새가 느껴져."


마치가 비스킷을 씹더니 배 안으로 흘러들어온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
했다.

"이 지긋지긋한 바구미 비스킷과도 곧 작별이겠군."

바구미들이 이리저리 구멍을 내놓은 비스킷을 삼키며 내가 말했다.

나와 마치는 그날 치의 질 나쁜 음식을 먹고 저장고의 상자들 뒤에 숨


어서 다시 낮잠을 청했다. 곧 깊은 잠에 빠지고말았다.

"웬 생쥐 두 마리가 우리 먹을 것을 축내고 있었군."

굵고 낮은 목소리가 우리를 깨웠다.

놀라 눈을 뜨자 번뜩이는 스킨헤드 머리를 한 메릴 호 사무장과 그의


조수 제비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끌고 올라 와."

사무장이 조수에게 명령했다.

닭의 목을 비틀었던 조수의 억센 손이 가축을 대하듯 잔인하게 나와


마치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조수는 우리를 짐승처럼 끌고갑판으로 올
라갔다. 살갗을 태울 것 같은 뜨거운 정오의 태양이 갑판 위를 내리쬐
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범선들은 모두난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과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정선(*배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멈
춘 상태)해있었다.

15kg급 이동식 대포를 놓아둔 현창(*대포를 쏘기 위해 배 옆에 덧문을


달아 놓은 창. 평소에는 덧문을 닫아둔다) 옆에메릴 호 사무장이 두 다
리를 벌린 채 팔짱을 끼고 버티고 있었고, 그의 오른쪽 손에는 아홉 가
닥 채찍이 들려 있었다.

"대포에 묶어."
사무장이 조수에게 명령했다. 조수는 나를 먼저 대포로 끌고 갔다. 사
무장은 해적들이 동료 선원들을 채벌할 때 쓰는방법으로 우리를 혼내
려는 모양이었다. 해적들 사이에서 '사수의 딸에게 키스하기'라고 부
르는 잔인한 채찍질 말이다!

"잘못했어요! 장난으로 지하실에 들어 가보았다가 우연히 범선을 타


게 되었어요. 일부러 음식을 축낼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사무장을 향해 애원했다. 사무장은 삶은 달걀처럼 무표정했다.


내가 저항했지만 조수는 우악스런 손으로 나의 셔츠를찢어버리고 나
를 대포 위로 밀어뜨렸다. 한손으로 나를 짓누르고 밧줄을 쥔 다른 손
으로 나의 몸을 대포에 친친 감았다.

소동을 보고 갑판에서 일을 하던 선원들이 몰려들었다.

부츠를 신은 사무장이 뚜벅뚜벅 다가와 채찍을 치켜들었다. 휘리리릭!


첫 번째 일격이 나의 등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거의느낌이 없었고 시
간이 지나자 미치도록 쓰라렸다. 두 번째 일격이 나의 등에 떨어졌다.
두 번째 일격까지 잘 참아냈다.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일격이 떨어지
자, 나의 마음은 모두에게 느껴지던 수치심에서 점점 사무장에 대한
분노로바뀌어갔다. 하지만 레슬링 선수처럼 근육으로 단단히 뭉친 그
에 비하면 나는 힘없는 어린 애였고, 묶여 있는 포로에불과했다.

대포는 벌써 나의 침과 땀, 그리고 눈물로 뒤범벅이었다.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고, 아빠가 이 비참한 모습을 보지않았기에 다행이라고 위로
했다.

어김없이 재빠르게 다섯 번째 채찍이 나의 등에 떨어지고, 드디어 마


치가 두 눈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 마치는 가엾은 나에대한 연민과 곧
자신에게 가해질 매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실신 직전이었다. 치노 녀석
도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는지 마치와 함께있지 않았다.

사무장이 다시 채찍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그만 두세요!"

구원의 목소리가 나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햇빛을 받아 삶은 달걀처


럼 머리가 반짝이는 스킨헤드 사무장 너머에 조 씨가 서있었다.

"밀항을 했소. 이미 우리의 정체를 알아버렸단 말이오. 거기다 쥐새끼


처럼 우리가 먹을 양식을 축내고 있었소. 이렇게대해준 것도 요런 녀
석들에겐 고마울 뿐이죠. 바다에 던져버려도 아깝지 않소이다."

사무장이 내 뒤에서 나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


다.

"난 저 애를 알아요."

조 씨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우리 집 아래 사는 애예요. 숲에서 자기 엄마하고 함께 있는 걸 자주


보았죠. 늘 모형 범선 하나쯤은 들고 있었죠."

조 씨가 말했다. 조 씨가 나와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니!

"친구와 함께 우연히 우리 집 지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겁니다. 범선을


좋아했기 때문에 실제 범선이 있는 걸 알고들어가보고 싶었겠죠. 그러
다 갑자기 여기까지 오게 된 걸 거예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조 씨가 내게 물었다.

"맞아요! 우린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범선이 있는 지하실에 놀러갔다


가 갑자기 벌어진 일이에요. 아저씨들 모두가 무섭게생겼고, 갑자기
닥친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지금까지 저장고에 숨어만 지냈던 거예
요!"
마치가 영리하고 재빠르게 변명했다. 그러자 조 씨가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우리가 이 여행의 목적이나 비밀에 대해서 전혀모르고 있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가만히 지내면 집에 무사히 돌아가게 해줄 거야.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면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지내면 돼."

조 씨가 파이프 담뱃대에 담배를 채워 넣으며 말했다.

"묶여 있는 녀석은 갑판을 청소하게 하고, 저 녀석은 선실 심부름꾼이


나 가축들을 돌보게 하면 제격이겠군."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뒤늦게 나타난 킨 세일


호의 선장이었다. 데스(Death) 선장이라는 별명이붙은 그는 발코니의
여섯 인물 가운데 하나였는데, 배들이 정선해 있을 때 보트를 타고 메
릴 호로 건너온 모양이었다. 그는두 눈이 깊고, 얇은 일자 입술을 지닌
이로서 나이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데스 선장 옆에는 발코니에서 보았던 회색 코트를 갖춰 입은 선의가


서 있었다. 선의가 채찍을 맞아 살이 터진 내게응급처치를 해주자 선
원들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다.

선의와 데스 선장이 보트를 타고 메릴 호의 선미 쪽에 정선해 있는 킨


세일 호로 건너가자 범선들이 닻을 올렸다. 나는상갑판 아래 선원실로
옮겨졌다. 곧 세 대의 범선이 뜨거운 바다를 미끄러져갔다.
10. 폭풍 속에서

다행히 내 등의 상처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 조수 선


원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다음 날부터 갑판 위 청소를맡게 되었다. 마
치는 선원들의 심부름을 도맡거나 날이 맑은 날에는 오리와 염소들을
화물칸에서 몰고 올라와 갑판 위에서돌아다니게 했다.

선원들이 충분치 않아 장루를 맡은 선원은 따로 없었다. 그 때문, 내게


주돛대의 장루에 올라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나는이따금씩 원통형 외
알 망원경을 허리에 꽂은 채 벌이줄을 타고 장루로 올라가곤 했다.

그 높은 곳에서도 나의 배 멀미는 어느 새 사라져버렸다. 나의 머리 위


에서 뱅뱅 맴을 돌며 따라오는 갈매기들 너머로 먼수평선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워 내려오는 걸 새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선단은 유카탄 반도의 위도와 비슷한 항로를 유지하며 해가 지는 방향


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기후가습해졌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맑았던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삭구들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장송곡처럼 들려왔다. 바람의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바람이 왼쪽 뱃전에서 불어오자 선원들은 가로돛의 위치를 바꿔 바람


을 안게끔 고정시켰다. 하지만 바람이 더욱 거세지자범선이 오른쪽으
로 심하게 기울었다. 갑판의 삭구와 물통들이 오른쪽 뱃전으로 미끄러
졌다. 돛을 줄여야 했다. 선원들은돛줄을 잡아당겨 꼭대기의 돛 하나
를 줄였다. 하지만 파도의 너울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체가
자꾸 오른쪽으로쏠렸다.

"남서풍이군. 바람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며 갑판장이 말했다. 서쪽 바다로 기울던


태양은 어느 새 사라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하늘을 뒤덮은 먹구
름이 다가왔다.
곧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캄캄해지고 바람이 더욱 세
차게 날뛰었다. 빗줄기와 함께 높은 파도가 갑판으로들이치기 시작했
다. 메릴 호의 선장이 심하게 요동치는 범선의 갑판으로 가까스로 걸
어나왔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살폈다.

"저게 뭐지?"

메릴 호 선장이 남서 방향의 수평선을 가리켰다. 수평선이 갑자기 뭔


가에 들린 것처럼 아까보다 반뼘이나 높아져 있었다.

"제가 올라가 볼게요!"

나는 망원경을 허리춤에 끼우고 벌이줄을 타고 장루로 올라갔다. 돛에


강한 옆바람을 받은 돛대와 삭구들이 웅- 웅- 소리를내며 떨었다. 내
주위에선 강한 남서풍이 만들어내는 파도들이 비바람 속에서 하얀 이
를 벌리고 뛰어다녔다.

파도에라도 닿을 것처럼 수면을 향해 심하게 기운 돛대의 장루 난간을


한손으로 붙든 채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바람이불어오는 쪽을 살폈다.
검은 바다를 휩쓸고 있는 강한 비바람과, 수평선 끝까지 펼쳐진 파장
이 짧은 파도들 저 너머에서높이가 30미터쯤 되는 파도 하나가 다가
오고 있었다. 약간 시간차를 두고 그 뒤에서 비슷한 높이를 지닌 또 하
나의 파도가뒤따라왔다.

"허리케인이에요!"

갑판을 내려다보며 내가 모두에게 외쳤다. 약 40미터 앞에서 나아가


던 어드벤처 호가 급히 진로를 바꾸고 있었다.

"돛을 모두 줄이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뱃머리를 틀어라! 그리


고 갑판의 화물들은 모두 배의 맨 아래층으로 옮기고갑판 뚜껑을 닫
아!"
메릴 호 선장이 갑판의 선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키잡이가 왼쪽으로
빠르게 타륜을 돌렸고, 선원들은 서둘러 마룻줄을잡아당겨 돛을 줄였
다. 그런 다음 두 돛대에 연결된 벌이줄을 타고 일제히 기어올랐다. 나
머지 선원들은 배의 균형을무너뜨릴 갑판 위의 대포들과 통들, 그 밖
의 물건들을 재빨리 맨 아래 칸으로 옮겼다.

나는 주돛대로 올라온 선원과 함께 비바람 속에서 활대에 허리를 걸치


고 가로돛을 급히 말아 올렸다. 다시 로열마스트(*여러 구역으로 나뉜
돛대의 맨 윗부분)까지 이어진 두 번째 벌이줄을 타고 올라가 중간돛
(*주돛 위쪽에 다는사각형돛)을 접고, 돛을 끝까지 접어 밧줄로 고정
시켰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주돛대와 앞돛대에 사이에
한선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두 돛대 사이에 매단 사각 세로돛을 접
고 있었다. 옆에서 불어오는 엄청난 풍압이 그를 날려버릴것 같았다.

우리보다 빨리 빈 돛대 상태로 만든 저 뒤의 킨 세일 호도 거대한 파도


가 다가오는 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나는 몸을 찢어버릴
것 같은 강한 비바람을 뚫고 갑판으로 가까스로 내려왔다. 허연 이를
드러내고 날뛰던 물보라가 뱃전을향해 넘나들었다. 어드벤처 호에서
굉음이 들렸다. 어드벤처 호의 돛들이 갈갈이 찢겨나가고 주돛대가 부
러졌다. 어드벤처호의 선원들은 벌이줄을 타고 올라가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배들을 천국까지 던져버릴 것 같은 비바람과 함께 상상도


못할 첫 번째 파도가 선단을 향해 덮쳐왔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아 보였다.

"오 하느님!"

메릴 호 선장이 가슴에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우리를


지옥으로 안내할 어마어마한 파도의 물마루를쳐다보았다.
맨 앞의 어드벤처 호가 45도 각도로 들리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파도
의 꼭대기에 다다르자 어드벤처 호는 곧 뒤로뒤집어질 것처럼 기울었
다. 드디어 하늘 끝까지라도 닿을 것 같은 파도의 물마루가 어드벤처
호의 갑판을 기어올랐다. 몇명의 선원들과 함께 갑판의 모든 것들을
물속으로 쓸어버렸다. 어드벤처 호는 파도의 꼭대기 어딘가로 가라앉
아버렸다. 곧이어메릴 호를 향하여 악마의 파도가 덮쳐왔다.

"그래! 덤벼라!"

키잡이는 천국에까지 날려버릴 파도를 향해 소리치며 파도를 수직으


로 가르기 위해 타륜을 단단히 붙들었다. 미처 아래층으로피하지 못한
나와 선장은 각각 돛대와 뱃전의 난간을 붙든 채 우리가 갈 곳이 지옥
이 아니길 빌었다.

메릴 호의 뱃머리가 들리며 45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


은 배의 이음새들이 뒤틀리며 끽끽 소리를 내질렀다.배를 뒤로 잡아당
겨 뒤집어 놓을 것 같은 돛대들은 곧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고, 운명을
단숨에 바꾸어놓을 파도의 꼭대기가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눈을 찔끔 감고 운명에 내 자신을 내맡겼다.

곧이어 범선은 차가운 물속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메릴 호는 기움돛대를 물 밖으로 내밀고 빠르게파도를 미끄러져 내
려가고 있었다.

"자!"

비바람 속에서 선장이 선원용 손도끼를 내게 던졌다.

"주돛대를 잘라!"

나와 선장은 두 번째 파도가 우리를 덮쳐오기 전에 주돛대의 아래 기


둥을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기둥을 각각 두 번씩내리치자 곧 두 번째
파도가 우리 앞에 다가와 있었다. 갑판이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도끼질을 멈추고 납작하게엎드려 밧줄을 붙들었다. 하지만 선장은 도
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선장님!"

나는 선장을 향해 외쳤다. 선장은 뒤늦게야 위기를 알아채고 갑판을


미끄러지기 직전에 도끼질을 멈추고 주돛대를 붙들었다.

내 뒤 어디선가 키잡이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방에서 날


뛰는 바람 속에 지워져버렸다. 배가 점점 기울어지자우리가 자르다 만
돛대가 드디어 부러졌다. 하지만 곧 파도가 갑판을 덮쳐버렸다.

갑판이 파도 속으로 잠기고 통제 불가능한 배는 다시 물 밖으로 선체


를 내밀었다. 나는 재빨리 선장이 있던 쪽을바라보았다. 메릴 호 선장
은 주돛대와 함께 절벽 같은 파도의 저 아래로 휩쓸려가고 보이지 않
았다.

나는 선장을 삼켜버리고 저 앞으로 사라지는 파도를 향해 미친 듯 그


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키잡이는 '올 테면 와봐라!'는 식으로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세


번째 파도를 맞이하기 위해 타륜을 붙들었다.

세 번째 파도가 서서히 배를 들어 올리자 나는 뒷갑판과 중앙 갑판 사


이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쥐고 있던손도끼로 갑판을 찍어
버텼다. 만약 뒷갑판과 중앙 갑판 사이에 갇힌다면 계속 들어차는 바
닷물 때문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내 손은 점점 도끼의 손잡이
에서 빠져나가 계단까지 밀려갔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계단을 기어
키잡이가 있는뒷갑판으로 올라갔다.

"네가 할 일은 이제 없다! 방으로 들어가!"

키잡이가 내게 명령했다. 하지만 아래층로 통하는 계단은 갑판 뚜껑으


로 막히고 선실의 문들은 안에서 굳게 닫혀 있었다.미처 방으로 들어
갈 새도 없었다. 나는 줄을 잡고 미끄러지지 않게 버티며 왼쪽 현측으
로 기어갔다. 그리고 이동식 대포의현창에 달린 문고리를 단단히 붙들
었다. 다시 범선이 끽끽대고 세 번째 파도가 머리 위로 덮쳐왔다.

갑판에는 나와 키잡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범선이 잠겼다가 다시


어마어마한 파도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키잡이는이를 악물고 타
륜을 붙든 채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했다. 갑판으로 몰아치는 강한 비
바람이 삭구들 사이에서 휘리리릭― 거리다삭구들을 툭툭 끊어버렸
다. 당겨져 있던 돛줄이 풀리며 엉켜버리고, 감아놓은 돛들마저 찢겨
나갔다.

나는 포문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키잡이 쪽을 바라보았다. 강풍에 날린


물체 하나가 휙 소리를 지르며 뒷갑판으로 빠르게날아왔다. 그것이
툭! 소리를 남기고 나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내가 다시 키잡이를 바라보았을 때는 키잡이의 머리가 날아가고 없었


고, 몸의 나머지는 여전히 타륜 앞을 떠나지 않고있었다. 머리가 없는
키잡이의 두 손이 타륜의 손잡이를 붙들고 바르르르 떨었다.

타륜을 붙들고 있는 그의 모습 너머, 키잡이의 머리를 날려버린 앞돛


대의 중간 활대가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시체와 함께 시체가 붙들고 있는 타륜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잡이의 의지가 아직도 몸의 나머지 부분에 남아 있는듯했지만, 시체
의 힘이 빠져나가며 메릴 호가 오른쪽으로 뱃머리를 틀기 시작했다.
파도를 왼쪽 뱃전에 맞는다면 범선은나뭇잎처럼 뒤집혀지고 말 것이
다. 나는 겁도 없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타륜을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목이 없는 시체 뒤에서타륜을 붙들었다. 죽기 전 키잡이가 너무 강하
게 타륜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던 바람에 그의 손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
았다.

나는 그와 사이좋게 키를 조종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을 하나하나 뭉개


고 비틀어 그를 타륜에서 겨우 떼어냈다.
재빨리 왼쪽으로 타륜을 꺾었다.

폭풍우에 찢겨나가고 남은 돛은 두 돛대 사이의 아래쪽 사각 세로돛과


기움돛대의 삼각돛 뿐이었다. 그나마 온전치 못한 보조돛들에 바람을
태우며 메릴 호가 머리를 왼쪽으로 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면에서
무시무시한 파도가 덮쳐왔다. 범선이가파른 파도를 기어올랐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키가 움직이지 않게 두 손으로 타륜을 쥐고 파도를 헤
쳤다.

갑판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뿐이었다. 머리가 달아난 키잡이조


차 자신의 머리를 찾아 영원히 배에서 떠나버렸던 것이다.
제3부 장악당한 선단

11. 기항지의 파티

"모이! 괜찮아?"

마치가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


고 타륜의 한쪽 가장자리로 상체가 삐딱하게 꺾인 채 축늘어져 있었
다. 휘날리는 나의 긴 앞 머리카락 사이로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조 씨와 사무장, 제비, 그리고 선원들이 주위에


서 있었다. 치노를 안은 마치는 이들 옆에 서서나를 걱정스럽게 내려
다보고 있었다.

"폭풍은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들에게 물었다. 폭풍의 흔적이 아주 가시진


않았지만 파도가 잔잔해져 있었고 바람도 그다지 거세지않았다. 왼쪽
뱃전으로 동이 터오고 수평선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메릴 호와 어드벤처 호는 길게 뻗은 섬의 해안에 쓸려가 있었다. 하지


만 킨 세일 호는 난파를 당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밤사이 폭풍의 중심이 급히 내륙 쪽으로 꺾어진 것 같아. 우리가 무사


한 건 모두 네 덕분인 것 같군."

조 씨가 내게 말했다.

"배의 맨 아래층으로 모든 짐을 옮겨 밸러스트(*배가 뒤집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뱃바닥에 쌓는 짐)를 확보하기 위해 애쓴우리의 노력도 컸
지만, 너도 잘해주었다, 모이."

갑판장도 나를 칭찬했다.
"쥐새끼처럼 음식이나 축내던 녀석에게서 요런 초인적인 용기가 어디
서 나왔을까? 이 항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기때문이나? 하하하."

사무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 속에서는 왠지 나뿐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거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선 돛대를 다시 세우고 파손된 곳을 수리하고 식수를 보충하기 위


해선 저 섬의 만으로 배를 대는 게 좋겠군요."

목수가 간부 선원들에게 제의했다.

모두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선원들이 두 범선에서 보트들을 내려


바다에 띄웠다. 그리고 밧줄걸이를 던져 범선에 밧줄을걸었다.

보트들에 나뉘어 탄 선원들이 노를 저어 어드벤처 호와 메릴 호를 섬


으로 이끌고 갔다. 우리 앞에 부메랑처럼 굽은 만을품은 섬이 나타났
다. 해안은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고 파란 바닷물과 새하얀 모래톱으
로 둘러싸여 있었다.

만의 끝에 걸린 채 선체가 심하게 기울어져 좌초된 범선 한 척이 발견


되었다. 앞돛대가 사라져버린 킨 세일 호였다.무시무시한 폭풍 속에서
도 단 한 척의 범선도 난파되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선원들은 돛대에 연결한 도르래 장치를 이용해 범선들을 모래톱 만의


물가에 눕힌 뒤 수리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선원들은목수의 지시에 따
라 나무를 자르거나 화물칸에 놓아둔 비상 돛대를 옮겨 세우거나, 구
멍 난 선체의 판자를 갈고 판자의갈라진 틈을 끌과 나무망치를 이용해
뱃밥으로 막는 일을 했다.

냄새가 고약한 역청이나 송진을 바르거나 바닥에 괸 물을 퍼내거나,


여벌의 돛을 수선하는 일을 담당하는 선원들도 보였다.세 범선의 주방
장들은 남아 있던 음식들과 해변에 널린 어패류를 이용해 선원들에게
제공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와 마치는 섬의 안쪽으로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기 위해 떠난 일행들
틈에 끼었다. 조 씨와 메릴 호 갑판장과 항해사,스킨헤드 사무장과 제
비, 어드벤처 호의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이 항해사, 킨 세일 호의 데스
선장과 선의, 그리고 범선에남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승무원들로 이
루어진 이들이었다.

우리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의 숲 어귀에 다다르자 놀란 수백


마리 앵무새들이 푸드드득, 공중으로 치솟아 섬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
꼭대기 쪽으로 날아갔다.

25미터 정도 키가 자란 육두구 나무와 이파리가 넓은 열대나무들이


빽빽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하지만 물의 흔적은 찾을 수없었다.

세 팀으로 나뉜 일행은 가장 중요한 식수가 발견될 경우 연기를 피우


거나 소리를 질러 신호를 하기로 했다. 별 기술이 없는일반 선원 몇은
식수통을 메고 계곡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키 큰 활엽수들이 무성한 계곡의 왼쪽으로 나아가기로 한 일행들은 멧


돼지나 토끼, 야생 꿩 등을 사냥하기 위한 소총과수풀을 헤치기 위한
손도끼나 군도, 그리고 탄약 몇 상자를 갖고 떠났다.

나와 마치, 그리고 대포만 쏠 줄 알뿐 18세기 식 머스켓 소총은 잘 다


룰 줄 모르는'감초 씨'라는 별명을 지닌 메릴호의 사수는 열매나 과일
을 찾아, 계곡의 오른쪽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우리에겐 미지의 적이 우리를 덮칠 때를 대비해 겨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나 쓸 수 있을 플린트락이라 불리는 벨기에 제화승총 한 자루씩
과 선원용 단검, 그리고 캔버스 천으로 만든 자루가 전부였다.

"어쩌다 이 항해에 뛰어들게 되었죠?"

나는 수풀 사이를 걸어가며 해군 함포병 출신인 감초 씨에게 물었다.


"내게 미래란 전혀 없었으니까. 절망과 불운으로 떡칠해진 과거와 별
반 다를 게 없는, 개떡 같은 시간들이 자신 앞에반죽처럼 펼쳐진 인생
이 어떤 것인지 아니?"

"글쎄요. 엿 같은 인생이겠죠."

나도 일부러 좀 거칠게 대답했다. 나도 이젠 당당한 뱃사람이라고 자


부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원래 선원들은 좀 거칠게말하는 법이니까.

"맞았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개똥같은 인생들이 있


지. 내겐 언제나 불행이 어울리는 것 같았지. 오래입은 내복처럼 말이
야. 급료가 낮고 고달픈 선원 생활을 그만 두고 여전히 개똥같은 나날
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지. 조씨가 붙인 전단지를 우연히 항구에
서 주웠지. 그건 바람에 날아와 내 낡은 구두에 개떡처럼 달라붙었지.
난 운명을 바꿀 단하나 뿐인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지. 그 운명의 종이
쪼가리 하나가 나와 맞닥뜨리기 전에 지나가던 길 잃은 개의 오줌에젖
어버렸거나, 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바다로 떨어졌다면, 난 여전
히 개떡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이미 과거에 쥐어
본 적도 없는 계약금을 이미 받았고, 이 항해에 성공할 경우에 모든 선
원들에게 돌아갈 상당한 몫을배당받게 되지. 이미 인생을 뒤집은 데
반은 성공한 거야."

"이 항해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우린 선주인 조 씨가 이와 비슷한 환상적인 여행들에서도 백 퍼센트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물론 그의 여행에대해선 비밀을 지켜
야 한다는 조항에 서명했기 때문에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지만."

감초 씨는 누가 엿들을세라 곧 침묵을 지켰고, 우리는 열대나무들이


빽빽한 밀림 사이를 헤치며 말없이 나아갔다.양치식물들로 뒤덮인 평
지가 나타났다. 평지 사이로 흐르는 아주 좁고 얕은 개울이 보였다. 개
울을 따라 올라가자 이끼들로뒤덮인 바위가 나타났고, 바위 아래 모래
와 자갈이 깔린 얕은 샘이 있었다. 우리는 샘을 찾은 기쁨으로 들떴다.
연기를피워 다른 일행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치노가 마치에게서 내려와 맨 먼저 샘물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타앙―!

등성이 너머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가 섬을 뒤흔들었다. 머스켓 소


총이 발사된 소리에 숲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소총을 지니고 떠
났던 일행이 사냥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연이어 두 발의 총성이 이
어졌고 날카로운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들려왔다. 치노는 물을 먹다 말
고 마치의 머리카락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은데요?"

마치가 총소리가 들려왔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감초 씨도 의아해하며 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총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섬은 태초처럼 고요해졌다.우리는 마른 가지들
과 땅에 떨어진 오래된 낙엽들을 모아 불을 지폈다. 연기를 한참이나
지펴 올렸지만, 물통을 갖고 떠난선원들이나 사냥을 위해 떠난 일행은
우리 위치로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이 다른 샘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우리에겐백랍으로 만든 휴대용 물통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샘의 위치를
표시해 두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섬의 해안과 가까운 곳에서 야자수 숲을 발견했다. 열매를 닥


치는 대로 자루에 채워 일행과 헤어졌던 장소에 다다랐을때는 날이 이
미 어두워져 있었다.

숲 사이로 보이는 해안 저 멀리 모닥불이 흔들렸다. 범선 수리를 마친


선원들이 임시로 쳐놓은 천막 곁에서 모닥불을 피우며기항지 파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숲을 헤치고 일행과 헤어졌던 장소에 다다랐을 때, 땅바닥에
포개진 채 쓰러져 있는 두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는그쪽으로 달려갔
다. 밧줄로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버려진 메릴 호의 항해사와 킨 세일
호의 데스 선장이었다.

소총 탄알이 뒷머리에 박힌 항해사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왼쪽 옆구리와 심장 부위의 갈빗대에 탄알이 박힌 데스선장은 아직 살
아 있었다. 탄알이 갈빗대를 완전히 부러뜨렸거나, 살짝 갈빗대 사이
를 관통해 심장에 이르렀다면 그는 이미저 세상 몸이 되어 있었을 것
이다. 그는 지독하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감초 씨가 데스 선장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노, 놈들이 이랬어."

"놈들이라뇨?"

"어드벤처 호 선장 일당 말이네. 선의와 메릴 호 사무장과 사무장의 조


수 제비도 그들 편에 가담하고 있어. 알모타 제국과교환할 화물이 있
는 곳을 불라고 했는데 불지 않자 이렇게 만들었어. 그들이 조 씨를 데
려갔지. 화물을 숨긴 위치를알아내기 위해서야. 그들은 항로를 변경해
문제의 화물들을 론바르바도 제국에게 넘기고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를 얻으려 하는것 같네."

"론바르바도 앞의 바다를 탐색할 수 있는 허가권이에요. 론바르바도


앞의 바다 어딘가에 알모타 제국의 모든 보물들과도바꾸지 않을 수수
께끼 보물이 묻혀 있다고 했거든요. 유리눈알과 왈왈이가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내가 그날 밤 들은 이야기를 말해버렸다.

"유리눈알과 왈왈이?"
"어드벤처 호의 선장과 항해사 말이에요."

"그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군. 으윽."

데스 선장은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말을 시키면 안 돼요. 빨리 탄알을 뽑아야 해요."

마치가 감초 씨에게 일렀다. 하지만 선의는 이미 저들 편이 돼버렸고,


우리에겐 외과용 수술 도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소독약과 거즈, 핀셋만 있다면 좋을 텐데. 살을 쨀 도구는 있으니까."

감초 씨가 선원용 단검을 칼집에서 꺼내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것 없네. 어서 뽑아주게. 죽는 것보다 낫지. 윽."

데스 선장이 이를 악물었다. 감초 씨는 샘에서 떠온, 백랍 물통 속의


물을 선장에게 먹이고 나머지는 나뭇가지를 태워끓였다. 거즈로 쓸 캔
버스 자루의 천을 잘라 포갠 다음, 그 위에 끓인 물을 부었다. 선장의
피 묻은 재킷과 셔츠를젖히고 물 불린 천으로 상처를 덮어 축축이 적
신 다음 불로 칼날을 소독했다.

감초 씨는 나와 마치에게 선장의 등 뒤에서 나뭇가지를 입에 물려 붙


들게 하고 허술한 수술에 들어갔다. 갈빗대를 부러뜨리고박힌 탄알은
그리 어렵지 않게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에 박힌 탄알이 문제
였다.

두 번째 칼날이 살을 찢자 선장은 비 오듯 땀을 흘렸다. 그러나 신음


소리 하나 내뱉지 않고 버텼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신음 소리를 내지
르는 건 오히려 감초 씨 쪽이었다.

한참 뒤 피가 흥건한 감초 씨의 왼쪽 손바닥에는 검은 구슬 같은 두 번
째 탄알이 올려 있었다. 길게 찢은 천으로 어깨아래와 옆구리를 감싸
응급처치를 끝내자, 선장과 감초 씨 모두 기운이 빠져버린 듯했다.

"그 수수께끼 보물이란 뭐지, 모이?"

감초 씨가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내게 물었다.

"아칸의 보물이래요."

"아칸?"

마치가 둥그렇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뭐가 잡히는 게 있어?"

"아칸 제국은 우리 JJ-109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한 제국이었어.


하지만 수 세기 전에 미스터리로 가득찬 보물들과함께 땅 속 깊이 묻
혀버렸지. 아칸의 보물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마치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칸의 보물을 실은 알모타 제국의 보물선이 론바르바도 앞


을 지나다 사략선들에 습격을 당했다고 했어. 대포 세례를받은 보물선
이 두 동강 나며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고 했어. 그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어드벤처 호의 선장이 갖고있어."

"뭐? 그럼 그들 편에 가담할 걸 그랬나?"

감초 씨가 말했다.

"틀렸네. 그들은 선원들을 꼬드겨 자신들 편에 가담시켜 일을 성공시


킨 다음, 모두를 무인도에 유배시키거나 바다 귀신이되게 할 생각이
야. 우리를 이 꼴로 만든 걸 보면 모르겠나?"

데스 선장이 감초 씨를 나무랐다.
"맞아요. 그와 비슷한 말을 왈왈이 항해사와 유리눈알 선장이 했던 것
같아요. 자신들 몫이 작아지면 안 된다고했거든요."

내가 대답했다.

"이거 난감하군. 난 이번 항해가 운명을 바꿔놓을 유일한 기회라고 믿


고 있었는데. 역시 난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녀석이야, 이런 개떡."

감초 씨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버릇처럼 인생을 비관했


다.

"방법은 두 가지 뿐이네. 하나는 그들에게 협력하는 척해서 보물을 함


께 찾은 다음, 우리가 먼저 치는 방법이고. 다른하나는 모두가 야영지
에서 자고 있을 때 범선을 빼돌려 원래 우리의 목적지인 알모타 제국
으로 곧장 가는 방법이지."

"우리라고 해 봐야, 저와 선장님 그리고 이 아이들 둘. 그리고 조 씨. 이


렇게 다섯뿐이잖습니까?"

"킨 세일 호의 요리사, 바비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면, 그는


분명 우리와 함께할걸세. 그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배를 탄 사람이니
까."

"좋습니다. 그 베트남 요리사도 포함시키죠. 하지만 모두가 잠든 사이,


설사 범선을 빼돌리는 데 성공해도 여섯 명이 범선세 척을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선장님은 몸도 성하지 않죠."

"일반 선원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할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일단 동정을 살펴야겠죠. 하지만 모두 어드벤처 호의 선장 일당에게


포섭이 돼버렸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한가지뿐입니다. 그들을 따
라 가다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요."
"그럴 경우 난 따라갈 수 없어. 그들은 이미 내가 죽은 걸로 알고 있으
니까."

데스 선장이 대답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돌아가서 분위


기를 살핀 후 돌아오겠습니다."

감초 씨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낯선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한 킨 세일 호의 항해사를 모래톱에


파묻어 무덤을 만들어주고, 데스 선장을 숲의 어귀와가까운 곳에서 찾
아낸 작은 바위 동굴 속에 숨겼다.

우리는 선장에게 물통 하나와 야자나무 열매 세 개, 그리고 탄알이 장


전된 플린트락 한 자루를 쥐어주고 동굴을 떠났다.권총의 의미는 선장
도 잘 알고 있었다.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경우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더 나은 상황이 종종 벌어지기때문이다.
12. 탈출 계획

우리 셋은 기항지에서 자축 파티가 한창인 선원들 사이로 갔다.

선원들은 들떠 있었다. 폭풍을 무사히 넘겼고, 배의 수리를 마쳤기 때


문이다. 또한 오랜만에 육지에서 맘껏 마시고 배불리먹은 탓이었다.
선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계곡의 위쪽으로 갔던 일행도 이미 식수를 보충해놓고 선원들과 어울


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드벤처 호의 선장 일당과 조 씨는보이지 않았
다. 휘어진 곶의 저 끝에 선미 등을 단 범선 세 척이 어두운 밤바다에
닻을 내리고 떠 있었다.

"이봐 너희들도 여기 와서 한 잔 하지! 항로 변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말이야."

메릴 호의 갑판 선원 하나가 나와 마치를 불렀다. 우리는 손을 흔들어


싫다, 하고 야자나무 열매가 든 자루를 둘러메고장작불이 타고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린 엄청난 보물선을 끌어올릴 거야! 자 건배!"

나는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 내용을 듣고 이미 왈왈이가 선원


들을 모두 꾀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키가 나보다 한 뼘 정도 밖에 크지 않은 바비는 걸어놓은 스튜 냄비 옆


에 앉아 장작불을 넣고 있었다. 바비가 우리 셋과치노에게 뚜껑을 닫
아놓은 냄비에서 양념 찜처럼 생긴 요리를 접시에 담아주었다.

포도주에 담가 놓은 닭살에 감자, 양파, 소스, 올리브유 등을 넣고 익


힌 '꼬꼬뱅'이라는 남프랑스 식 요리였다.'취하'라고 하는 중국식 새우
요리도 있었는데, 술에 절여 놓은 새우를 익힌 것이었다.
홍합 대신에 이 섬의 바닷가에서 잡은 커다란 소라를 잘라 버터로 구
운 요리는 바비의 요리 가운데 최고였다. 거기에 들어간멸치젓갈처럼
생긴 엔초비가 느끼한 맛을 없애주었다.

"이 엔초비는 토르투가나 포트로열 같은 해적 소굴의 선술집에서 유


행했던 18세기 식 샐머건디(*여러 음식을 접시 하나에섞어 담은 샐러
드 요리의 하나)요리법에도 자주 등장하지."

바비가 엔초비를 손가락으로 집어 맛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바비의


요리를 칭찬하자 바비는 오늘 준비한 음식들은 예고편에불과하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어부의 스튜'라는 프로방스
요리라고 했다. 하지만 항해 중엔 재료를구할 수 없기 때문에 바비의
'어부의 스튜'를 맛볼 기회는 없었다.

바비가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피터 메일이라는 작가가 쓴 《프로


방스에서의 1년》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책에서처럼 여유 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


았지. 이번 항해가 무사히 끝나면 오랜 선실 요리사생활을 마치고 프
랑스 레스토랑을 운영할 생각이야. 오너 셰프(*주인이 조리사를 겸함)
가 꿈이거든. 내가 이 항해에 뛰어든이유이지. 내 형편으로는 죽을 때
까지 돈을 모아도 그런 레스토랑을 마련할 수는 없을 테니깐."

바비가 쇠꼬챙이로 장작불을 뒤적이며 자신의 꿈을 얘기했다.

"네 꿈은 멋져.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

감초 씨가 나머지 선원들이 눈치 채지 않게 바비를 데리고 야자나무


하나가 바다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는 바닷가로 갔다.둘은 우리가
데스 선장을 남기고 떠나온 동굴과 어둠속에 불만 켜진 선단 쪽을 번
갈아 바라보며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다.바비의 얼굴이 어두운 낯빛으
로 변했다.

둘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지금 술판을 벌이고 있는 선원들 사이엔 유리눈알 선장이 부리
는 일급 잠수부들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어드벤처 호의 어딘가에는 유리눈알 선장이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마련해 놓은 잠수 장비와 난파선 인양에쓰는 장비들이 숨겨
져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이 항해사의 과거에 관한 거였다.

둘은 각각 해군 소령과 항해사로 복무할 때 중국 어선과 동남아 배들


과 관계한 밀무역에 가담했다가 해군당국에 들켜 영창신세를 면치 못
했다.

불명예스럽게 해군 복무를 마친 후에 둘은 그간 밀무역에서 번 돈으로


난파선 인양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조 씨와 손을잡기 전에 사실
은 조난선 인양업자들이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은 '전문
보물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우리나라 서남해안 일대에서 보물선을 인양하는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당국에 신고하거나 해양박물관에넘기지 않고
빼돌린 유물도 상당했다.

유리눈알과 왈왈이에 대해 알고 있는 바비가 들려준 얘기는 위와 같았


다.

"잠수 장비들이 페렐월드-캅들에게 발각될 경우엔 당신들이 우브 세


계에서 온 사람들이란 걸 알고 모두 즉결처분할 거예요.평행우주연합
에서 위임장을 받은 그들은 어떤 장소에서도 처벌을 내릴 수 있거든
요. 그들에겐 자비나 용서가 통하지 않아요."

마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선단엔 다이너마이트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들로 가득


차 있군요. 유리눈알 선장과 한편이 되는 것 또한 위험해보여요."
바비가 자기 심정을 얘기했다.

"이제 선원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여섯 명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모두가 잠든 사이에 메릴호나 킨 세일 호 가운
데 하나를 빼돌려 이 섬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내가 감초 씨와 바비, 그리고 마치에게 제안했다.

"그 방법이 제일 나을 것 같군. 좋아 그럼 모두가 잠든 사이에 산호초


가 가까운, 저 만의 가장자리에 매어 있는 보트들가운데 하나를 이용
해 두 범선 가운데 하나에 오르는 거야."

"메릴 호가 좋겠어요. 여기선 두 범선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고 해안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어, 들키지않고 출항하기엔 가장
나을 것 같군요."

바비가 제안했다.

"좋아. 메릴 호로 하지. 데스 선장은 내가 미리 해안에 옮겨놓겠어. 난


지금 데스 선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갈 거야.모두는 잠든 척 하다,
저 곶 끝의 두 개의 뾰족 바위가 있는 사이에서 나의 신호가 나타나면
그곳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와야 해. 알았지?"

감초 씨는 이렇게 이르고 곶 쪽을 한번 바라본 뒤 숲으로 뛰었다. 나는


우리가 이 섬에서 달아날 수 있도록 바람이 세게불어주기만 바랐다.

"배를 띄우기엔 바람이 안성맞춤이군. 리워드(*바람이 부는 쪽으로 나


아감)가 가능하겠어."

바비가 손바닥을 세워 앞으로 내밀고 바람의 방향을 살폈다. 다행히


섬을 넘어온 바람은 만을 휘돌아 먼 바다 쪽으로불어가고 있었다.

첨벙!
범선들이 정박한 바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메릴 호에서 보트 한 척이 바닷가의 야영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


가 들고 있는 보트 뱃머리의 등불 너머 서 있는사람들이 비쳤다. 유리
눈알 선장과 왈왈이 항해사, 스킨헤드 사무장, 선의 일행이었다.

그들 틈에 오른쪽 이마와 흰 셔츠가 피범벅이된 조 씨가 의식을 잃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세련되고 스마트한 모습만텔레비전에서 보아왔
기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낯설고 초라했다. 거꾸로 쥐고
내리친 소총 개머리에 당한 것같았다.

"유리눈알 일당이 조 씨를 협박해 우브 세계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이


감춰진 위치를 알아낸 것 같군."

바비가 다가오는 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위장 화물들과 가축들이 실린 화물칸의 밑바닥에 숨겨진 고철덩이와


플라스틱을 보고 일당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고물상처럼보이던 언
덕 위의 집에서 배 밑창에 숨겨온 게 바로 그 고물들을 압착시킨 물건
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JJ-109 세계에선 다르다. 이 세계에서 그것들은 우브 세계의


금덩이보다 더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니까. 일당들또한 이 사실을 곧
깨달았을 것이다.

보트에서 내린 일당은 배를 수리하고 남은 목재들 더미에 조 씨를 내


버려두고 선원들이 쳐 놓은 천막 하나로 들어갔다.

네 번째 천막에서 나와 마치는 곤하게 떨어진 선원들 틈에 끼여 누워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부서지는 소리와 선원들이가끔씩 뒤척이거
나 얕게 코를 고는 소리 외에 야영지는 고요했다. 다행히 선원들은 감
초 씨가 사라진 사실조차 모르고있었다.
범선의 일등실이 쾌적할 텐데도 굳이 유리눈알 일당이 육지의 야영지
에서 잠을 청하는 이유가 뭘까? 오랫동안 배 위에서망망대해의 외로
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육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이유야 어
쨌든 유리눈알 선장 일당이 섬에서 묵기로결정한 것은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다. 나는 신이 우리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천막 밖 바닷가에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툴고 초조한 갈매기


의 울음 소리였다. 경험 많은 선원들 가운데 누군가자지 않고 이 소리
를 들었더라면, 인간이 내는 소리란 사실이 금방 들통 나고 말았을 것
이다.

"감초 씨야."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던 마치가 속삭였다. 나와 마치는 다닥


다닥 붙어 누워 있는 선원들을 밟지 않게 온통 신경을집중하며 천막을
빠져나왔다.

바비도 이미 짐을 꾸리고 세 번째 천막 밖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는 허


리를 잔뜩 구부리고 목재들 옆에 방치된 조 씨에게다가갔다. 우리가
조 씨를 깨워 백랍 물통의 물을 들이키게 했다.

다시 의식을 찾았지만 조 씨는 축 늘어진 짐승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


의 머리 상처는 보기보다 심각했다. 하얀 머리뼈가드러날 정도였다.
일당에게 일격을 당한 머리가죽이 10센티 정도나 찢어져 있었다. 선
의 또한 조 씨를 방치한 것을 보면선의는 유리눈알 선장 일당에게 완
벽하게 맘을 돌린 것 같았다.

머리를 꿰맬 수 있는 외과 수술용 도구는 분명 선의가 킨 세일 호에 두


고 왔을 것이다. 나는 내 스카프를 바닷물에 헹군다음 일단 그것으로
조 씨의 머리를 감싸 묶어주었다.
"고, 고마워. 우브 세계에선 나처럼 이 우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과학
자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우브 세계 인간의 마음하나 꿰뚫어보지 못하
고 당했어. 흐흐."

"인간의 마음은 물리학이나 수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요리하


기가 가장 까다로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마음이죠."

요리사 바비가 대답했다.

"이 세계의 원자들 가운데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가장


충실히 따르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분명 인간의 뇌 속어딘가에 존재
하는 원자들일 거야."

"그래서 저들이 당신 머리를 확실하게 만들어 놓았군요."

바비가 조 씨에게 대답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조 씨가 바비에게 물었다.

"데스 선장은 아직 살아 있어요. 감초 씨가 해안으로 옮겼을 겁니다.


우리는 메릴 호의 닻을 끊고 오늘 밤 떠나려고해요."

바비가 조 씨에게 대답했다.

"우리 세계에서 애써 숨겨 온 물건의 삼분의 이를 버려 아깝지만 그것


밖엔 방법이 없겠군. 하지만 바람이 좀 약해진 것같은데?"

"자정을 지나 바람의 방향이 좀 이랬다 저랬다 해서 저도 좀 걱정이에


요. 뜬금없는 여자의 마음처럼 말이죠. 잘못하면 배가수프 위의 건더
기 같겠어요."

"이 섬 때문일 거야. 일단 섬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바람을 안는 것은


문제가 안 될 거야."
조 씨가 대답했다.

"썰물이 시작되었어요. 서둘러야겠는걸요."

바비가 조 씨를 가까스로 일으켰다. 키가 작은 바비가 조 씨를 엎자 이


불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곶 끝에 불빛이 흔들렸다. 우리는 감초 씨를 향해 달렸다. 바비가 할딱


대며 조 씨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불쌍한 폼으로달리자, 나는 뒤에서
조 씨의 양 다리를 들고 뛰었다.

갯바위 끝에 두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감초 씨와 데스 선장이었


다. 감초 씨와 바비는 해류에 밀려가 줄이 팽팽해진보트의 닻줄을 잡
아당겼다. 그리고 선장과 조 씨를 먼저 보트에 태웠다.

바다 경험이 많은 바비와 감초 씨가 보트의 맨 앞과 맨 뒤를 맡고, 나


와 마치는 중간에서 노를 하나씩 맡았다. 우리는어둠 속에 떠 있는 범
선들을 향해 소리 없이 나아갔다. 킨 세일 호의 이물에 다가가자 섬에
서 빠져나가는 썰물 때문에와류가 생겼다. 우리는 와류에 휩쓸리지 않
도록 주의하며 킨 세일 호를 지나 메릴 호로 다가갔다.

쿵! 메릴 호의 옆구리에 보트가 부딪었다. 감초 씨가 통로 바로 옆의


도르래에 걸린 밧줄을 잡아 보트가 떠밀려가지 않게붙들었다. 바비가
모선에 닻줄을 걸었고 나는 감초 씨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통로에 발
을 디뎠다. 나는 줄사다리를 찾기위해 뒷갑판 쪽으로 움직이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뒷갑판에 술에 취해 뻗어 있는 선원 하나가 보였고, 사무장실로 통하


는 계단에서 불빛이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사무장실은뒷갑판 아래 깊
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불빛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다. 하지만 그냥 켜놓은 것일 수있었다.

나는 일행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혹시 다른 선원은 없


는지 살피기 위해 곯아떨어진 선원 옆을 지나사무장실로 통하는 계단
을 내려갔다.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확실했다. 칼잡이 제비


의 목소리였다. 나무문의 판자 틈으로 안을들여다보았다. 소총 한 자
루 씩을 테이블 옆에 세워놓은 제비와 다른 선원이 백개먼을 두고 있
었다. 섬에서 자지 않고 배에남아 배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었다.

나는 돼지 목에 걸리를 꽂아 넣던 제비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리가 후


들후들 거렸다. 얼른 계단을 올라와 메릴 호의 양 옆에정박해 있는 나
머지 범선들을 살폈다. 소총을 지팡이처럼 쥔 채 어드벤처 호의 수로
에 서서 등을 돌리고 배 너머로 소변을보는 키 큰 선원의 그림자가 보
였다.

킨 세일 호에서도 선원들 몇이 갑판에 남아 가벼운 술판을 벌이며 잡


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 또한 권총과 소총으로무장하고 있었다.

내가 통로로 되돌아갔을 때는 이미 감초 씨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틀렸어요. 바다에 남은 선원들이 범선들을 모두 지키고 있어요."

내가 감초 씨에게 속삭였다.

"몇 놈쯤은 해치울 수 있지 않겠어?"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어요."

"소동이라도 벌어진 걸 눈치 채면, 양쪽 배에 남아 있는 선원들이 이


배로 뛰어들 겁니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저와감초 씨 뿐이고, 우
린 겨우 부싯돌 권총 세 자루가 전부예요. 습기를 잔뜩 먹어서 그것마
저 터질지 의문이군요."

바비가 말렸다.
"그래. 순순히 단념하는 게 낫겠어. 조 씨와 데스 선장님이 몸이 성하
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말이야. 난 역시 되는 게없다고."

감초 씨도 단념했고, 우리는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급히 노를 저어


곶 끝으로 되돌아왔다.

보트를 다시 묶고 조 씨와 데스 선장을 동굴로 옮겼다.

"다들 데스 선장님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더군요."

바비가 말했다.

"그리고 조 씨는 달아난 것으로 하지. 나머지는 저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어."

감초 씨가 대답했다.

"때가 되면 기회가 오겠죠. 계란 프라이를 뒤집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


담할 수 없었다. 조 씨와 데스 선장 또한 그랬을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을 때가 있다.

조 씨와 데스 선장은 우리를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둘에게 샘물의 위치를가르켜주고 둘을 남겨둔
채 그들을 떠났다.

우리가 야영지로 돌아갔을 때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팔짱을 끼고 등을


돌린 채 칠흑 같은 밤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스킨헤드 사무장이었
다.

"모두 어딜 갔다 오는 거지?"

사무장이 날카롭게 물었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바비가 얼버무렸다.

"조 씨가 보이지 않던데? 그도 함께 산책을 간 건 아니겠지?"

"우린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어디론가 도망쳤군. 하지만 죽긴 마찬가지지. 이런 무인도에선 좀 서


서히 죽어갈 뿐. 내일 아침 일찍 출항하니깐 자두는게 좋을걸. 그리고
이 시각부터 개인행동이나 무단이탈은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
두면 도움이 될 거야."

사무장이 명령조로 말했다.


13. 항로를 바꾸다

아침이 되자 섬에서 마련한 물과 보급품을 싣고 보트들이 세 범선으로


이동했다. 나와 마치, 바비와 감초 씨는 데스 선장과조 씨를 남겨두고
떠난 섬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감초 씨와 나, 마치는 메릴 호에 올랐고 바비는 처음처럼 킨 세일 호에


올랐다.

어느 새 메릴 호 선장 자리를 가로챈 스킨헤드 사무장이 배를 통제하


기 시작했다. 그의 출항 명령에 따라 세 선원이캡스턴에 매달려 닻걸
이까지 닻을 감아 올렸다.

기움돛대의 삼각돛들이 섬에서 바다를 향해 불어가는 바람을 태우자


선체가 왼쪽으로 돌았다. 뱃머리는 난바다 쪽으로 향해있었다.

갑판의 선원들이 활대에 올라가 줄을 풀자 돛들이 내려와 퍼덕거리며


요동쳤다. 오른쪽 뒤에서 비스듬히 불어오는 바람을맞도록 도르래 줄
을 당기고 활대의 각도를 고정시키고 아딧줄을 걸었다. 두 돛대에 매
달린 가로돛들이 불룩 솟았다.

범선이 바람을 안고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세 범선의 주돛대 꼭대기에는 기다란 붉은 상선기가 매달려 있었다.


론바르바도 앞바다의 보물선을 끌어올리는 게 목적인유리눈알 선장
일당이 선단을 어느 새 상선들처럼 위장해놓고 있었다.

여기서 알모타 제국의 항구로 가기 위해서는 범선들은 정 북쪽으로 항


해하다 제국의 남쪽 해안선과 같은 위도에 다다르면,항로를 바꿔 위도
와 평행한 항로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폭풍 때문에 항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알모타 제국항구까지의 직항로를 설정할 수 없는
이유는 제국의 앞바다에 도사린 위험과 짙은 바다 안개에 휩싸인 제국
까지의 거리를정확히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선단은 남남서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다. 북북서 방향의
알모타 제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상선 깃발을 단 핑크 선 한 척이 선단을 지나쳐갔다.

조 씨와 데스 선장을 버려두고 왔던 무인도에서 약 6해리 정도 남남서


방향으로 내려가자 저 멀리 짙은 안개에 휩싸인바다가 나타났다.

바람이 그치자 선단은 안개 한가운데 멈춰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조류


때문에 배가 천천히 앞으로 떠밀려갔다. 나는 장루에있던 선원과 교대
하기 위해 벌이줄을 타고 올라갔다. 돛대의 높은 곳에 오른 나는 망원
경으로 바다를 살폈다.

안개에 싸인 군도의 한가운데 제법 큰 섬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


다. 검의 끝처럼 날카롭게 솟은 거대한 백색의바위산이었다. 바위산에
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둥글고 밋밋하고 낮은 화산 봉우리
가 솟아 있었다.

"섬이 나타났어요!"

내가 갑판을 향해 외쳤다.

섬의 남쪽에 움푹 들어간 만이 보였다. 성난 투우소의 콧구멍처럼 움


푹 들어간 두 개의 만 가운데 하나였다. 그 만이투우소의 오른쪽 '콧구
멍'이라면 폰체 만이 틀림없었다.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섬은 유리눈알 선장이 숨겨놓은 해도 속의 섬


이 분명했다.

"론바르바도야!"

어드벤처 호에서 누군가 외쳤다.


브리건틴 선단이 안개에 휩싸인 바다에 갇혀 있을 때, 안개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를 띤 범선 한 척이 유령선처럼 고요히다가왔다.

"저게 뭐지?"

스킨헤드 사무장이 제비에게 물었다.

"범선 같은데요?"

조수가 대답했다.

"바람이 없는데 범선이 움직일 리가 있나?"

짙은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기다란 한 척의 범선이 분명했다. 하


지만 그 배는 전형적인 18세기 형 범선이 아니었다.앞돛대에는 가로
돛을 달고 주돛대와 뒷돛대에는 세로돛을 달고 있었다. 앞돛대와 주돛
대 사이에는 세 개의 삼각 세로돛이펼쳐져 있었다. 바컨틴 형식이었
다.

선체 옆구리는 검정과 흰색 줄무늬가 번갈아 칠해져 있었다. 현대의


이탈리아 해군 소속의 항해 훈련선 팔리누로 호와 무척닮아 있었다.

하지만 배의 고물 쪽에서 커다란 고양이과의 짐승이 그르릉대는 듯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이물에서 누군가 깃발을 흔들었다.배를 멈추라는
신호였다.

"안개 너머에서 우리 배들을 정선시키라는 신호가 왔어요!"

장루에서 망원경으로 다가오는 전함을 살피고 있던 내가 소리쳤다. 어


드벤처 호에서 유리눈알 선장이 망원경으로 다가오는전함을 살폈다.
전함의 주돛대 꼭대기에는 전함의 신분을 나타내는 페넌트가 걸려 있
었다.

"론바르바도 제독의 배 같은데. 닻을 내려라!"


유리눈알 선장이 어드벤처 호에서 브리건틴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닻을 내리자 조류에 천천히 흘러가던 범선이 닻줄을 팽팽히 당긴 채


멈췄다.

전함이 우리 선단 옆으로 와 멈췄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전함의 활대에는 흰 바지에


검정 재킷을 입은 승무원들이 빨래줄의 제비처럼 한 줄로죽 늘어서 있
었다. 현측의 10문 정도되는 포문은 모조리 우리 쪽을 향해 열려 있었
다.

함대의 갑판에 납처럼 무겁고 무표정한 간부 선원들이 나타났다. 갑판


에서 브리건틴 선단의 최고 책임자의 보트를 보내라는신호가 왔다. 어
드벤처 호에서 보트가 내려졌다. 어드벤처 호의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
이 항해사, 그리고 노를 젓기 위한선원 둘이 보트에 올라탔다.

선의는 킨 세일 호의 난간에 나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안개 속에


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이 항해사를 태운 보트가 짙은 안개를 헤치고 함


선에 가 닿았다. 두 사람은 전함의 갑판에 올랐다.전함 선장실에서 화
려한 해군제복을 입은 이가 나타났다. 본국에서 식민지에 파견된 해군
제독 같은 인상을 주었다.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이 항해사는 그를 따라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


실로 들어간 셋은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나는높은 장루에서
기다리기가 지루해 다시 갑판으로 내려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마치가 감초 씨에게 물었다.

"흥정을 하는 걸 거야. 이곳은 임자가 있는 바다니까."


감초 씨가 대답했다.

한참 뒤 전함의 선장실 문이 열리고 유리눈알과 왈왈이가 걸어 나왔


다. 둘의 표정은 매우 흡족해보였다. 두 사람은 보트를타고 어드벤처
호로 건너왔다. 유리눈알은 곧바로 어드벤처 호의 선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선원들은 어드벤처 호에 실린보트들을 모조리 띄웠다. 그리
고 맨 아래 층화물칸에서 끄집어낸 물건들을 갑판으로 옮겼다. 옮긴
물건들을 도르래를 이용해보트에 실었다.

"우리 세계의 고물상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야."

감초 씨가 속삭였다.

"금속과 플라스틱을 정제하여 압착시킨 것들이에요. 저걸 뇌물로 바


치고 론바르바도 앞의 바다를 탐색하려는 걸 거예요.알모타 제국처럼
론바르바도는 철강과 플라스틱이 절대적으로 희귀한 자원이니까요."

마치가 대답했다.

"유리눈알 선장 일당이 우리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 전부를 줘버리지


않는 건 왜죠? 메릴 호와 킨 세일 호에도 숨겨져있잖아요."

내가 감초 씨에게 낮게 속삭였다.

"탐사 기간이 끝났을 때 나머지를 주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을 거야. 지


금 것은 일종의 계약금 같은 거지. 유리눈알 일당이메릴 호와 킨 세일
호에 남아 있는 것들까지 모두 줘버리기 전에 배를 탈취하여 이곳을
도망쳐야 해. 우리의 목적지는알모타 제국이고, 녀석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뒤 물귀신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전 아빠를 구해야 하고, 엄마를 찾아야 하고, 애


물귀신이 되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요."

"저의 목적도 분명해요."


마치도 맞장구를 쳤다.

"얘는 알모타 제국을 이어받을 공주니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이


유가 더욱 분명하죠."

나는 마치와 나 사이의 비밀을 감초 씨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하지


만 감초 씨는 우리 편이니까 이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않겠는가.

"뭐? 정말이니?"

감초 씨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치를 훑어보았다. 선원복을 입은 마치


가 공주라는 사실보다 여자였다는 사실에 더 놀란 것같았다.

"브리건틴 선단 사람들이 저를 핑계로 알모타 제국에 무리한 요구를


할까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렇겠군."

"그리고 이 세계의 바다엔 18세기 해적들이 자주 나타나죠. 제가 공주


라는 소문이 퍼지면 그들은 절 인질로 잡아 몸값을요구할 수도 있어
요."

"하지만 18세기 대서양이나 카리브해 문명이 단 한 번도 항해 중에 끼


어들지 않았잖아?"

"운이 좋아서죠."

마치가 대답했다.

"내게도 운이 따를 때가 있군. 내일부터는 탐사가 시작될 거야. 우리가


탈출하기엔 선원들이 범선에 남아 있지 않는 밤이좋겠지만, 도무지 그
럴 기회가 오진 않을 것 같군."

감초 씨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드벤처 호에 실린 금속덩이와 플라스틱 전부를 전함에 옮겨 싣자 전
함은 뱃머리를 돌려 목적을 달성한 사자처럼 론바르바도의항구로 돌
아갔다.

어드벤처 호에 탄 유리눈알 선장은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납처럼 짙게 내리 깔린 안개는 흩어지지 않았다. 마냥 기다려


도 바람이 불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배를 원하는 방향으로움직이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닻을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썰물이 섬들 사이를 빠져 먼 바다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복잡하게 얽혀 있
어 자칫하면 여기저기 널린 암초에 좌초될 수 있었다.

유리눈알 선장은 어느 새 유리눈알 속에서 꺼낸 해도를 펼쳐놓고 선장


실에 탁자에 턱을 괸 채 심각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왈왈이가 망원경
을 눈에 대고 밖을 내다보며 좌표로 삼을 만한 이정표를 눈이 빠지게
찾았지만 안개 때문에 애먹고 있었다.

세 범선이 두 섬 사이의 해협을 빠져나가자 안개가 어느 정도 걷혔다.


론바르바도 섬의 남쪽, 두 개의 움푹 들어간 만양쪽이 서서히 시야에
잡혔다. 론바르바도로부터 4해리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검의 끝처럼 우뚝 솟은 론바르바도 섬의 꼭대기와 그 옆 둥근 화산 봉


우리가 안개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론바르바도의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항구에는 20세기 초 형태의 수많은 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 항구


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포르투갈 또는 지중해의 여느항구를 떠올리
게 했다. 항구에서부터 비스듬히 올라간 언덕에는 감청색 지붕에 하얀
색 페인트로 벽이 칠해진 집들이 닥지닥지붙어 있었다.

유리눈알 선장은 아직까지 해도와 선실 밖을 번갈아보며 정박할 위치


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류에 25미터 쯤 더 밀려갔을 때 유리눈알 선장이 닻을 내리라고 명
령했다. 조류에 떠밀려가던 세 대의 범선이 멈춰섰다. 바위와 열대림
으로 뒤덮인 섬에서 약 200미터 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밤이 찾아왔다.

갑판 위에서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친 선원들은 모두 선원 숙소로 돌아


가 피곤한 몸을 해먹 위에 뉘였다.

밤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세 대의 범선은 이지러진 달을 등진 채


낯선 바다 위에 평화롭게 떠 있었다.

이번에는 간부 선원과 일반 선원들 모두가 배 안에서 묵게 되었다. 바


람은 전혀 불어주지 않았고, 우리가 메릴 호나 킨세일 호를 탈취해 달
아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14. 검은 깃발

동이 트자마자 갑판에서 기상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에 넓게 퍼져 있던 짙은 안개는 어느 새 말끔히 걷혀 있었다. 론바


르바도 섬 너머, 저 멀리 왼편에 또 하나의 섬의해안이 모습을 드러냈
다. 새로 모습을 드러낸 섬에 비하면 론바르바도는 새발에 피였다.

나는 멀리 새로 나타난 해안의 항구로 망원경을 들이댔다. 움푹 들어


간 만과 만 앞에 가로누운 기다란 곶. 그 너머에밋밋하게 펼쳐진 봉우
리들. 어린 시절 내가 지하실에서 즐겨 읽던 범선의 역사에 관한 어느
책 속의 삽화와 똑 닮아있었다. 저 산들이 블루마운틴이고 그 아래 기
슭이 킹스턴이라면, 저 곳은 1692년 엄청난 지진이 도시를 덮치고 난
뒤의포트 로열이 틀림없었다. 신세계의 소돔이라 불리며, 해적들의 은
신처가 돼주었던 버커니어 시절보다 작아졌지만, 복구된 만의입구 안
쪽으로는 18세기 초 형태의 수많은 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과거가
실제처럼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니! 나는헛깨비를 보는 것 같았다.

보물선 탐사 지시가 떨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어드벤처 호에 몰래 숨


겨온 잠수 장비들을 작은 보트 대신 롱보트에 싣기시작했다. 숨겨오는
데 힘이 들었기 때문인지, 보물선을 인양하는 데 쓰는 도구들은 그지
없이 작고 간단한 것들 뿐이었다.몇 벌의 잠수복과 산소통, 수중 플래
시, 난파선을 한꺼번에 올릴 수 있는 대형 크레인 대신 난파선의 잔해
들만 끌어올릴 수있는 작은 도르래 형 기중기와 망 따위들이었다.

네 팀으로 나뉜 보트에는 잠수부들과 그들이 발견한 것을 소형 기중기


를 이용해 끌어올릴 선원과, 끌어올린 잔해를 처리할나머지 선원들이
탔다. 유리눈알은 어드벤처 호의 갑판에서 론바르바도 섬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보물선이 가라앉은 위치를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
안 망원경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 마침내 목표 지점을 발견한 것 같았
다.
그는 론바르바도의 폰체 만 입구 왼편에서 바다를 향해 길게 튀어나
온, 그라나딜로 곶 끝으로부터 2.5km 떨어진 지점을가리켰다. 그는 능
수능란하게 보트들의 위치를 지시했다. 보트들이 네 지점으로 이동했
다. 론바르바도의 해안선과 수직방향으로 보트들이 한 줄로 늘어섰다.
보트들을 조금씩 앞으로 전진시키면서 암초로 가득한 해역을 바둑판
모양으로 뒤져나갈계획인가 보았다.

나와 마치는 론바르바도의 해안선과 가장 먼 쪽 보트에 올라타 있었


다. 우리는 끌어올린 보물선의 잔해에서 모래와 개펄을걷어내고 쓸 만
한 물건을 골라내는 작업을 맡은 선원들 틈에 끼었다.

유리눈알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보물선은 당연히 엘 드라곤 호였다.


그 배는 보름달이 뜬 날 밤 아칸의 보물을 싣고 가다,론바르바도의 앞
바다에서 사략선들의 대포 세례를 받고 침몰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가지 앞으로 조금씩 이동하며 바다 밑을 이 잡듯 뒤


지고 있었다. 하지만 잠수부들이 건져 올린 것은뭉쳐진 조개껍데기들
과 배에서 버려진 쓰레기들 뿐이었다. 한 시간 뒤에는 난파당한 선박
의 잔해처럼 보이는 판자를 발견하고모두는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 끌
어올려진 것들은 썩은 소형 대포 몇 개, 난파당한 선박의 닻과 보잘것
없는 삭구장치들뿐이었다. 두 시간 뒤에는 론바르바도 해안선과 가장
가까운 보트에서 궤짝처럼 보이는 물건을 끌어올렸다. 그것을 보고유
리눈알 선장과 왈왈이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지만 궤짝 안에 든 것은
진흙과 모래뿐이었다.

하지만 궤짝이 나온 뒤부터 유리눈알 선장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과 선원들의 식사시간마저 잊어버린 지오래였다. 그는 축구
장에서 뛰는 답답한 선수들을 지켜보는 감독처럼, 어드벤처 호의 난간
에 팔짱을 끼고 서서 초조하게작업을 지켜보았다.

그의 바람대로 궤짝이 계속 끌어올려지긴 했지만 그 안에 든 것은 그


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들뿐이었다. 마침내유리눈알 선장
은 그의 충실한 항해사와 함께 보트를 타고 탐사가 진행되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 지점이 확실한 것 같은데, 보물이랍시고 끌어올린 건 암초에 좌초


된 코딱지만 어느 짐배의 쓰레기뿐이군입쇼."

왈왈이가 유리눈알 선장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위도는 확실해. 하지만 해도에 나타난 경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경도의 정확성이 떨어져."

"1760년 대 존 해리슨이 해양 크로노미터를 발명한 이후에나 겨우 경


도를 측정할 수 있었습죠. 그 이전엔 위도나 간신히측정할 수 있는 장
난감이 있었을 뿐입죠. 그래서 소령님이 입수한 지도 또한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요. 경도 측정기가발명되기 전의 지도이니까요. 경
도 측정기 발명 이전의 지도 제작자들이 만든 지도는 쓰레기나 마찬가
지입죠. 경도를 조금만잘못 측정해도 수 십 해리 이상 차이가 났습죠.
이곳에 기록된 경도 78.50는 그래서 의미가 없는 것입죠."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맨 마지막에 표기된 이 의미가 뭔지 모


르겠어."

"지도를 그린 녀석의 자필 서명 같은 건 아닐깝쇼?"

"그렇지 않아. 자신만이 아는 암호 같은 것이었을 거야. 보물선의 정확


한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놓을 바보는 아니었을테니까."

작업 중인 보트들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주위의섬들을 둘러보았
다.

작업 중인 잠수부들과 선원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정오를 지나자 날씨


가 몹시 후텁지근해지고, 론바르바도의 해안선마저 보이지않을 정도
로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낮게 깔리더니 서쪽 바다에서
쿵쾅 소리가 들렸다. 마른번개가 치고있었다. 보트의 선원들은 천둥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곳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지."

유리눈알 선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가 더욱 어두컴


컴해지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철수해야 할 것 같은데요?"

왈왈이가 두 손으로 비를 가리며 유리눈알 선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항해사의 의견은 곧 무시되고 말았다. 나머지 보트들보다10미터 정도
앞서 나가던 보트에서 뭔가 기다랗고 묵직한 물건을 끌어올렸기 때문
이다.

"뭐지?"

유리눈알 선장은 수면 위로 드러난 물체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


중기로 끌어올린 물건 주위에 선원들이 매달려 진흙을걷어내고 있었
다. 나와 마치도 긴장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기다란 궤짝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모서리가 터진 궤짝의 판자를 부


수고 한 선원이 진흙 속에서 납작하고 둥근 물체를꺼냈다. 표면의 진
흙을 닦아내자 은빛이 반짝였다.

"청동 거울이야! 테두리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선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테두리를 계속 훔쳤다. 곧이어 잠수부


하나가 물밖으로 나와 숨을 헐떡댔다. 유리눈알 선장과왈왈이가 서둘
러 노를 저어 다가왔다.

"엘 드라곤 호였어? 이슬라 데 피노스 호였어?"

왈왈이가 물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고 있는 잠수부에게 물었다.


"이 궤짝은 배의 화물창에서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 그 배의 밑바닥을
뚫고 또 하나의 돛대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갈레온 선 이슬라 데 피노스 호 위에 엘 드라곤 호가 가라앉은 거야!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요, 소령님!"

속담을 잘못 사용할 정도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왈왈이가 유리눈알 선


장을 쳐다보았다. 굵은 빗물이 얼굴이 까무잡잡한항해사의 들창코의
콧잔등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눈알 선장은 잠수부가
발견한 궤짝 속의 물건을 이리저리뜯어보며 냉정하게 감식했다.

"넘겨짚지 마. 이건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하급품의 월장석이지. 이 밑


에 가라앉은 게 우리가 찾는 배라고 단정지을 만한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 계속 수색해."

유리눈알은 얼음을 끼얹듯 말하며 모두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왈왈이


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무역풍이 작은 섬들을 사납게 휩쓸었다. 약 한 시


간을 더 뒤진 끝에 잠수부들은 작은 사물함을끌어올렸다. 사물함을 깨
부수자 진흙투성이 자루 하나가 나왔다. 자루를 터뜨리자 둥근 쇠붙이
가 쏟아졌다. 한쪽은 방패꼴문장이, 다른 쪽은 헤라클레스 기둥이 그
려진 투박한 은화였다. 8레알(*8경화나 페소라고도 불리던 스페인 옛
은화)이었다. 은화를 보고 모두는 흥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눈알 선장은 차갑게 쐐기를 박으며 선원들의 흥


분을 가라앉혔다.

"이 밑에 가라앉아 있는 건 보물선이 아니야. 이건 작은 고깃배나 짐배


의 선장실 사물함 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어느불쌍한 선장 녀석이 모
아놓은 급료 같은 거라고."

그의 말처럼, 그 자루 하나 이외에는 소득이 전혀 없었다. 잠수부들은


멈추지 않고 바다 밑을 탐색했다. 빗속의 탐색이 앞방향으로 계속되었
지만 달리 나아진 것은 없었다. 바람과 파도가 점점 거세졌다. 암초들
이 높은 파도 사이로 간간히 머리를드러냈다. 보트들은 낙엽처럼 흔들
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크고 작은 섬들을 세찬 비바람이 쓸고 다녔다.
이파리가 커다란섬의 열대나무들이 비바람에 쓸리며 쏴아아아, 소리
를 내질렀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삼각돛을 나란히 붙여 놓은 것 같은
바위섬이 다가와 있었다. 그 삼각돛 섬으로 다가갈수록 모래와 산호로
뒤덮인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의 깊이는 얕아졌다.궂은 날씨와 비바
람만 아니라면 바닥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침몰선이 가라앉아 있기에
는 수심이 너무 얕은 산호초 밭이었다.나는 엘 드라곤 호나 이슬라 데
피노스 호는 이보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
다.

유리눈알이 침몰 지점을 잘못 짚은 것이다. 해도가 암시하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잠수부들과, 보트에서인양 작업을
하던 선원들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탐욕에 가득 찬 유리눈알을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비바람 속에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는해도가 암시하는
이정표나 기준점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때였다. 범
선을 지키고 있던 선원이 앞갑판으로뛰어오르며 외쳤다.

"배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선원들은 비바람 속에 정박해 있는 브리건틴 선단 너머를 응시했다.


날렵하게 생긴 배들이 뒤편에서 부는 강한 바람을 안고브리건틴 선단
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론바르바도의 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왈왈이가 손으로 눈가리개를 하고 말했다. 하지만 배들의 정체를 짐작


할 수 없었다. 나는 망원경을 꺼내 다가오는 범선들쪽을 바라보았다.
청새치처럼 날렵하고 빠른 선체. 두 돛대 스쿠너(*두 개 이상 돛대를
가진 세로돛 범선. 빠르고날렵하고 배 밑창이 얕아 약탈하려는 연안의
안쪽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해협이나 만의 안쪽으로 깊이 숨는
데도이점이 있어 17세기 말부터는 해적들이 가장 선호하던 배)였다!

군도를 향해 몰아치는 바람을 업은 스쿠너 세 척이 시속 12노트(*약


시속 22km) 속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검은 바탕에 흰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매달린 주돛대 꼭대기로


망원경을 옮겼다. 상선 선장 복장을 한 남자가 창을 든해골과 정답게
악수를 하고 있는 깃발이었다. 둘의 머리 위에는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고 해골의 창끝에는 뚝뚝 피 흘리는심장이 나타나 있었다. 그 깃발
은 나포 왕 바르톨로뮤 로버츠의 깃발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로
버츠의 깃발엔모래시계나 피 흘리는 심장이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의 눈앞에 죽음처럼 내걸린 깃발은 악마의 화신인 검은 수염 에드


워드 티치의 것도 아니었다. 낭만적이고 사교성이뛰어났던 토마스 튜
의 깃발도 아니었다. 튜의 깃발은 검은 바탕에 넓은 단도를 든 힘센 팔
뚝이 그려져 있었다. 튜의 활동무대는 주로 인도양이었고 1695년쯤에
포탄을 맞고 복부가 찢어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 후에 체포돼 처형
된 것으로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18세기 초에 나타날 리는 없다.

물론 우리 앞에 나타난 깃발은 한몫 크게 잡고 언제 떠날지 잘 알고 있


었기에 드물게 살아남은 해적 키다린 밴(*헨리에이버리)의 것도 아니
었다. 헨리 에이버리는 아일랜드로 마지막 항해를 한 뒤 자취를 감췄
다. 그 뒤 깨끗이 손을 턴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적들 가운데 가장 성
공을 거둔 해적으로 남은 그가 다시 스쿠너로 무장하고 서인도 제도에
나타날리는 없다. 그는 적어도 46문으로 무장한 사략선 팬시 호를 몰
던 대 해적이었다.

흐릿한 빗속에서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깃발은 잭 랙컴이나 크리스토


퍼 무디, 에마뉘엘 윈이나 리처드 윌리, 또는 토마스코클린의 깃발마
저 아니었다. 그 깃발은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서 달아나 해적이 되
었다는 스티드 보넷의 깃발은 더더욱아니었다.
곧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깃발은 내가 줄줄이 외고 있던 그 어떤
해적의 깃발에도 속하지 않았다. 마커스 레디커 같은뛰어난 해양사가
조차도 밝혀내지 못한 깃발이었다. 하지만 '해안의 형제들'이 내건 염
라대왕의 깃발임에는 틀림없었다. 검은깃발 속의 모래시계는 우리에
게 결코 시간이 없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해적 깃발이에요!"

나는 거의 실신할 것처럼 외쳤다.

"이곳으로 과거가 침입해 들어와 있기 때문이야!"

마치가 대답했다.

"전원 전투 준비!"

유리눈알이 비바람 속에서 외쳤다. 보트에 탄 선원들이 전속력으로 세


브리건틴을 향해 노를 저었다. 해적들이 선단을 덮치기직전이었다. 공
포에 질린 선원들 틈에 낀 나와 마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노를 저었
다. 우리는 가까스로 비바람을 뚫고모선에 다다랐다. 동시에 폭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맨 앞의 스쿠너의 이물에서 발사한 첫 번째 경고
포탄이 삼각돛 섬과가까이 정박해 있던 어드벤처 호의 기움돛대를 날
려버렸다.

우리는 미친 듯 각자의 배를 향해 기어올랐다. 나는 감초 씨와 함께 대


포가 젖지 않았기를 빌며 메릴 호의 고물을 향해뛰었다.

어드벤처 호에 올라탄 유리눈알 선장은 선원들에게 닻을 끊고 서둘러


돛을 펼치게 했다. 어드벤처 호를 출항시켜 시간을벌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스쿠너의 두 번째 포문에서 발사된 사슬탄(*적의 배가 도망가
지 못하게 적의 돛대나 삭구를파괴하여 조종 불능상태에 빠뜨리는 데
쓰는 탄환. 두 개의 반구형 탄환이 쇠사슬로 연결돼 있다)이 날아와 돛
을 갈갈찢어버렸다.
해적들이 검은 깃발을 올리고 경고 포를 발사할 때, 과거의 무역선 선
원들은 대부분 순순히 항복하고 말았다. 해적들에 비해무장도 형편없
고 싸울 숫자도 부족하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훈련 또한 돼 있
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눈알선장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코앞에 묻어둔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단념할 수는 없을 테니깐. 유리눈
알 선장은 해군장교출신답게 맹렬히 싸우기로 결심한 듯 어드벤처 호
의 뱃전에서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렸다. 그의 옆에는 머스켓 열 자루
가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그가 21세기 식 잠수 장비를 챙겨오면서 톰
슨 기관총 한 자루 숨겨오지 않는 게 의아했다. 어쩌면그것을 가지러
갈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점화약이 젖지 않게 격철 부위를 손수건으로 감쌌다. 왈왈이는


유리눈알 선장 옆에 낮게 웅크리고 앉아, 날아오는탄알을 피하며 열심
히 장전을 돕고 있었다.

브리건틴 선단을 향해 곧장 돌진하던 스쿠너 세 대가 오른쪽로 급히


뱃머리를 틀었다. 맨 바깥쪽에 떠 있는 킨 세일 호를지나쳐 우리 선단
과 평행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우리의 왼편에서 다가오는 스쿠너들을
보고 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배수량이 100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폭이 좁은 세 대의 스쿠너 갑판 위에는 각각 80명 정도 되는 해적들이
올라와있었기 때문이다. 240여 명으로 이루어진 해적선단이었다. 하
지만 우리는 겨우 60여 명밖에 안 되는 싸움에 경험이 없는일반선원
들에 불과했다.

나와 감초 씨는 필사적으로 고물 갑판과 뒷갑판 사이에 놓인 대포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오는 맨 앞의 스쿠너 이물에 서서우리를 향해 기
다란 머스켓 소총을 겨누고 있는 사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반사
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핑-소리를 내지르며 경고탄이 날아
왔다. 뒤에서 비명이 터졌다. 내 뒤를 따라 달려오던 선원이 목울대에
총알을 맞고 그대로고꾸라졌다.

뒤따라오던 마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선원을 붙들었지만 곧 목이


꺾였다. 브리건틴 선단이 순순히 항복을 않고 반항할의사를 내비치자
해적들은 깃발을 바꾸어 달았다. 붉은 바탕에 줄무늬가 들어간 깃발이
었다!

"저건 무슨 의미지?"

감초 씨가 내게 물었다.

"이제 저들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으며, 오직 우리 앞엔 잔혹


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예요!"

"제기랄! 난 역시 억세게 재수가 없는 놈이란 말이야. 싸우다 죽으나


저들에게 생포돼 처참하게 죽으나 다를 게 없겠군."

"하지만 저 범선들엔 여덟 대의 소형 포가 장착돼 있을 뿐이에요. 함포


화력 면에선 우리가 훨씬 유리해요."

"하지만 저들이 갑판을 기어오를 땐 문제가 달라진다고!"

마치가 치노와 함께 뒷갑판으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이 비 때문에 화약이 터질지 의문이야! 재수에 옴이 붙었어!"

감초 씨는 15kg급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이동식 캐논 대포로 해적들


의 사기를 꺾어놓기 위해 포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메릴 호의 현측으
로 뒤늦게 달려온 사수들에게 고함을 쳤다.

"현측 포문을 모조리 열고 발사 준비를 마치시오!"

킨 세일 호와 어드벤처 호 한가운데 끼어 있던 메릴 호의 사수들이 일


제히 방수포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해적 선단의 맨앞의 스쿠너가 우리
배를 지나쳐 삼각돛 섬에서 가장 가깝게 정박해 있는 어드벤처 호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혼란 속에서맨 앞 스쿠너의 선수루(*주갑판 이
물 쪽의 단을 높인 부분)에 올라 서 있는 키 큰 사내를 발견했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챙이 둥근 커다란 검정색 모자, 그리고 빨강 망토를 두
르고 있었다. 복부에 두른 빨간 띠에는 총신이 긴 편에 속하는 단한 자
루의 권총을 꽂고 있었다. 장전을 하기 어렵고 불발이 잦기 때문에 대
여섯 개의 권총을 꽂고 다니던 여느 해적선장들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그 흔해빠진 커틀래스(*해적들이 주로 차던 휜 칼) 또한 차고 있지 않
았다. 그의 무장은의외로 소박했다. 단 한 자루 씩의 머스켓 소총과 권
총, 그리고 탄약,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매단 의문의 작은 자루(*그자
루 속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유황 폭탄이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로만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걸친 의상에 있어서도, 금실로 장식된 벨벳 코트와 꼭 달라붙은


반바지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해적 선장들의이미지와는 너무 동떨
어져 있었다. 그는 윗몸에는 기다란 흰색 천을 두르고 허리 아래로는
발목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기다란검정색 선용용 치마를 입고 있었
다. 버클 구두나 양말조차 신지 않은 발에는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
가락에 끈을 끼우게 돼있는 샌달을 신고 있었다. 어깨에 숄처럼 두른
흰색 천의 한 가닥은 살짝 풀어져 치마의 끝자락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쥔 기다란 머스켓 소총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손은


망토 자락을 거머쥔 채 허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사내가 우리 앞을 지나치자 그의 귓불 밑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는


고리가 큰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것보다훨씬 커서 귓불 밑
에에 달랑거렸고, 나처럼 은귀고리가 아닌 금귀고리였다. 그는 나처럼
한쪽에만 귀고리를 한 것이 아니라양쪽에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머스
켓 소총을 잡은 손의 팔목에는 금색 팔찌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입술 위쪽에만 콧수염을 살짝 기른 스물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사내


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그가 탄 맨 앞의 해적선로버 호(*Rover. 유
랑자 호)가 어드벤처 호 쪽으로 유유히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 배는 두 번째 스쿠너 배철러스 딜라이트 호(*Batchelor's


Delight. 독신자의 즐거움 호)와나란히 서게 되었다. 독신자의 즐거움
호의 갑판 가득 타 있는 해적들을 보고 나는 다시 놀랐다. 내가 책이나
영화에서 본해적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은 아주 실용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과장되거나 잰 체 하는차림은
드물었다. 그들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매거나, 타르 칠을 한 반바지나
질긴 범포 재킷을 걸치거나, 웃통을 벗고있었다. 갑판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대부분 맨발이었다. 드물게 팔찌나 귀고리를 하고 있는 사내들
도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갈고리나 휜 칼, 단도, 권총, 가까운 적들에
게 산탄을 흩뿌리는 나팔총, 수류탄, 선원용 바늘, 삼각 표창, 전투용
손도끼 등 근접전과 치열한 육박전에 대비한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
다.

독신자의 즐거움 호는 선원용 단도와 엑스 자로 둘러 맨 어깨 끈에 단


두 개의 권총을 찔러넣은 조타수가 지휘하고 있었다.그는 타륜 뒤에
서 있었다. 우리 왼편, 메릴 호의 고물 쪽에서는 킨 세일 호가 또 하나
의 해적선 배철러스 어드벤처호(*Batchelor's Adventure. 독신자의 모
험 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해적들은 갑판 위에서 맹렬하게 야유의 함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


은 우리 배와 자신들의 배를 맞닿게 한 뒤, 갑판으로뛰어들기 위해 갈
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나머지 사수들은 머스켓 소총과 4kg급 대포로
무장하고 조타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있었다.

"웬 동양 녀석들이야!"

"바다의 감시자 깃발 아래, 포악하고 야비한 군주의 상선은 항복하라!"

"마지막으로 신사들의 배로 선장을 실은 보트를 보낼 기회를 주겠다!"

브리건틴 선단을 향해 해적선의 장루에 올라 있는 해적들이 나팔을 불


고 꽥, 꽥 소리를 내지르며 위협했다.

내가 순순히 항복을 하는 게 천 번은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 펑-! 브리건틴 어드벤처 호에서 포문이열려버렸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5kg 이동식 대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로버 호의 주돛대가
붕괴되며 닻줄이끊어지고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드벤처 호
의 사수가 유리눈알의 명령에 따라 해적들이 포탄처럼 퍼붓는 위협과
야유에 응사를 해버린 것이다. 어드벤처 호의 현측 대포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물에 물감을 풀듯 낮게 깔리며 로버 호를에워싸고 있었다.

해적들은 잠시 동요했다. 그러다 일제히 꿈에도 상상 못할 지옥 같은


욕설을 우리를 향해 퍼붓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마지막 자비마저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죽음, 고문, 그리고 그들 식의 악몽 같은
체벌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독신자의 즐거움 호의 해적들 가운데 그라나도 유탄에 불을 붙이고 있


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나와 마치를 향
해 히죽댔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리고 커다란 삼각모를 눌러쓴 주근
깨투성이의 어린 해적 녀석이었다. 겨우내 나이쯤 돼보이는 녀석이 심
지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유탄을 우리를 향해 던지려 하고 있었다.

"현측에 키스하라!"

독신자의 즐거움 호의 조타수가 갈고리를 돌리고 있는 해적들에게 명


령했다. 동시에 어린 해적 녀석이 유탄을 던졌다. 유탄이메릴 호의 갑
판에서 터지며 독한 연기와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와 바람 때
문에 효과가 치명적이진 못했지만 메릴 호선원들은 켁켁대며 갈팡질
팡했다.

"브로드사이드(*한쪽 뱃전의 대포를 전부 발사하는 것)를 해야겠어!"

감초 씨마저 켁켁대며 대포의 사수들에게 고함을 쳤다. 낮게 깔린 유


탄의 연기 속에서 세 명이 한 팀으로 이루어진 메릴호의 사수들이 현
측 대포에 폭약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갑판의 대포들에 달라붙어 한
사람은 비에 젖지 않게 방수포를 받치고다른 사람은 포신에 화약 막대
기를 밀어 넣고 화약을 꾹꾹 다지는 모습들은 처참했다.
나와 마치는 일등 사수 감초 씨와 한 조가 되었다. 우리의 포는 다행히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고물 갑판 아래에 위치해있었다. 나는 재빨리
포도주 술통처럼 생긴 화약통의 뚜껑을 땄다. 검은 가루 화약을 퍼 담
아 포신에 밀어넣자 마치가막대기로 꾹꾹 다졌다. 나는 포신에 굴려
넣을 둥근 대포알을 들고 끙끙 포의 주둥이로 움직였다. 주둥이에 재
빨리 포탄을떨어뜨렸다. 마치가 한 번 더 포탄을 막대기로 꾹 밀어넣
고 빼자 감초 씨는 이동식 바퀴를 한참 뒤로 뺐다.

우리 옆에서는 해적들이 던진 쇠갈고리가 물귀신의 손처럼 뱃전에 툭


툭 걸쳐지기 시작했다. 쇠갈고리들을 보자 나는 까무러칠것 같았다.
치노는 뱃전을 타고 달려가 쇠갈고리의 밧줄을 끊기 위해 이로 갉아댔
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가라앉혀줄게!"

감초 씨는 이를 악다물고 대포를 더 뒤쪽으로 뺐다. 고각을 더욱 낮추


기 위해 대포 뒤쪽에 나무 쐐기까지 박았다.

"고각이 너무 낮아요! 포탄이 물에 떨어지겠어요!"

내가 감초 씨에게 소리쳤지만 감초 씨는 생각한 게 있는지 나의 주의


를 무시했다.

"브로드사이드!"

감초 씨가 대포를 고정시키고 메릴 호 사수들에게 명령했다. 사수 조


수를 맡은 선원들이 점화 막대기로 일제히 불을 댕겼다.마치도 불이
붙은 막대기를 대포의 뒤쪽에 위치한 격발 장치에 갔다댔다. 마치는
나와 함께 재빨리 웅크리며 귀를틀어막았다.

―펑!

―펑!
화약이 터지며 배의 갑판이 뒤흔들리고 포가의 바퀴가 돌며 대포가 뒤
로 쑥 밀려났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메릴 호의 현측대포들 가운데 발
사된 대포는 단 두 대 뿐이었다. 나머지 대포들은 꽁지에서 픽- 픽- 연
기만 자욱하게 피어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독신자의 즐거움 호 갑판에서 의기양


양해 있던 해적들의 함성 소리가 갑자기 쥐죽은 듯해졌기때문이다. 나
는 마치와 함께 뱃전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적의 스쿠너를 살폈
다.

아주 멀리 빗나간 포탄 하나가 독신자의 즐거움 호 저 뒤편 바다에 풍


덩! 떨어지며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독신자의 즐거움
호는 우리 쪽으로 기우뚱거렸다. 해군 순양함의 일등 사수 출신 감초
씨가 쏜 대포알이 독신자의 즐거움호의 배 밑창을 뚫어버린 것이다.
적의 전함의 밑창 한가운데로 보낸 뇌격기의 어뢰처럼.

스쿠너 독신자의 즐거움 호가 천천히 가라앉으며 메릴 호 쪽으로 기울


고 있었다. 해적들이 갑판에서 미끄러지며 바다로풍덩풍덩 떨어지는
것까진 좋았지만 스쿠너의 기다란 주돛대 또한 우리의 갑판을 향해 기
울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발생했다. 삭구와 밧줄, 벌이줄 등에 대
롱대롱 매달려 있던 해적들이 돛대가 우리의 갑판에 보기 좋게 걸쳐지
자 돛대를 타고기어오를 준비를 했다. 그제야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
작했다. 적의 배와 거리를 둔 채 우리의 화력이 앞섰을 때 비가그쳤더
라면!

"완전히 가라앉혀 버려야겠어!"

감초 씨는 대포에 매인 도르래 줄을 뒤로 잡아당겨 대포를 다시 포문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두 번째 장전을 나와 마치에게명령했다. 마치
는 막대기로 대포 구멍에 화약을 박아넣고 나는 포탄을 밀어넣고 물러
섰다. 하지만 권총과 단도를 뽑아든 다섯명이 돛대의 중간을 기어 올
라오고 나머지는 보트를 젓거나 헤엄을 쳐서 메릴 호의 옆구리를 향해
다가왔다.
감초 씨는 조금 앞으로 대포를 이동시키고 두 번째 대포를 발사시켰
다. 우리를 향해 약 45도 각도로 기울고 있는 스쿠너의중앙 갑판이 날
아갔다. 메릴 호의 다른 사수들이 쏜 포탄이 다가오는 보트들 앞에 떨
어져 10미터짜리 물기둥을 만들며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약
서른 명으로 이루어진 해적 사수들이 가라앉는 스쿠너 독신자의 즐거
움 호의 옆구리로기어 올라 빨래줄 위의 제비들처럼 한 줄로 늘어섰
다.

적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고물 갑판 바로 밑을 향해 기다란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렸다. 바로 우리 셋이 한 팀이 돼조작하는 이동
식 대포가 위치한 곳이었다.

"수십 개 총구멍이 우릴 향하고 있어요!"

공포에 질린 나는 서둘러 포신에 화약을 채워 넣고 털뭉치로 틀어막았


다. 마치는 순식간에 장전 막대기를 대포의 구멍에밀어넣어 화약을 다
졌고, 나는 두 손으로 15kg이나 나가는 구형 포탄을 들고 왔다.

"이번엔 그게 아냐! 캐니스터 탄 하나, 포도탄 한 알!"

감초 씨가 대인용 산탄을 두 개씩이나 주문했다. 나는 열두 개의 쇠구


슬이 금속제 깡통에 든 캐니스터 탄 한 발과 아홉개의 포도알처럼 탄
알이 캔버스 자루에 한 데 뭉친 포도탄 한 발을 급히 대포의 구멍에 밀
어넣었다. 감초 씨는 가라앉는스쿠너로 탄알들을 흩뿌려 제비처럼 늘
어선 사수들을 날려버릴 모양이었다.

감초 씨가 점화 장치에 막 불을 붙이고 있을 때였다. 콩을 볶는 듯 요


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고물 갑판 판자들이 쪼개지며공중으로 치솟
았다. 고물 갑판이 벗겨짐과 동시에 우리의 대포가 터졌다. 스쿠너의
사수들 가운데 삼분의 일이 앞으로꼬꾸라지거나 배의 뒤편으로 떨어
졌다. 나와 마치가 신속하게 두 번째 장전을 마치고 있을 때, 해적들이
보트로 다가와 던진쇠갈고리들이 다시 척, 척 뱃전에 와 박혔다. 치노
가 달려가 밧줄 하나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치도 단도를 빼들고
달려가 걸린 쇠갈고리의 밧줄을 자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배 위로
기어오르는 녀석들을 막는 것이 더 급한지도 몰랐다.치노는 다시 걸린
이물 쪽의 쇠갈고리로 달려가 이빨로 밧줄을 끊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때 새 한 마리가 로버 호 쪽에서날아와 치노의 등 뒤에 올라탔다.

"싸가지 없는 녀석!"

조그만 삼각모에 한쪽 눈을 덮은 검은 색 눈가리개, 잘려나간 한쪽 다


리에는 나사못을 댄 애꾸눈 앵무새가 치노에게 욕설을퍼부으며 이마
를 쪼아댔다. 치노는 해적 앵무새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앞다리를
휘두르며 치열하게 맞섰다.

치노가 자르는 데 실패한 밧줄을 타고 나팔총으로 무장한 포르투갈 녀


석이 올라왔다. 마치는 상갑판의 사수 옆에 떨어져 있던머스켓 소총을
집어들고 달려가 밧줄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녀석을 향해 발사했다.
녀석이 바다로 풍덩 떨어지자 보트에 타고있던 다른 녀석이 '불덩어
리'라 불리는 수류탄에 불을 붙여 배 안으로 던졌다. 갑판 위에 구르며
심지가 타들어갔다.수류탄이 폭파하기 직전이었다.

"으아아!"

마치는 그것을 집어 해적들의 보트를 향해 던져버렸다. 보트 한가운데


떨어진 불덩어리가 폭파하기 전 놈들은 바다표범처럼잽싸게 물로 뛰
어들었다. 불덩어리가 보트 위에서 폭파하자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
었다. 곧 두 번째 보트의 녀석들이갈고리를 던지며 배 위로 기어올랐
다. 메릴 호 선원들은 대포를 쏘는 것을 단념하고 머스켓을 집어 들고
뱃전으로 다가가기어 올라오는 해적들을 향해 한 발 씩 갈기고 탄알을
쟀다.

감초 씨는 다가오는 세 번째 보트들을 파괴하기 위해 다시 장전을 명


령했다. 나와 마치는 신속하게 장전을 끝냈고 감초 씨는보기 좋게 세
번째 보트를 날려버렸다. 흥분한 스쿠너의 사수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
해 한꺼번에 머스켓을 발사했다. 머리위에서 고물 갑판이 홀라당 까지
며 고물 갑판의 난간에 붙어 있던 선회포도 함께 날아가버렸다. 이제
우리의 머리는 스쿠너의사수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었다. 나와 감초 씨
가 서둘러 장전을 끝냈지만 독신자의 즐거움 호 사수들의 세 번째 집
단 사격으로우리가 찰떡처럼 믿고 있던 네 바퀴짜리 이동식 대포를 뒷
갑판에서 주저앉혀버렸다.

나와 감초 씨는 대포를 단념하고 뒤로 물러섰다. 스쿠너 사수들은 가


라앉는 배 위에서 다른 소총들을 한꺼번에 쳐들었다.그들은 연거푸 수
차례 쏘아댄 뒤에 메릴 호의 중앙 상갑판 대포들마저 주저앉혀 버렸
다. 15kg급 주포의 화력은 이것으로끝이었다.

"선회포가 남아 있어요!"

마치가 브리건틴 주돛대의 장루에 숨겨진 선회포를 가리켰다.

"이물 쪽에도 한 대 남아 있군. 너희들은 장루를 맡아!"

감초 씨는 우리에게 명령하고 갑판을 기듯 낮게 웅크려 닻걸이 바로


옆,이물의 선회포를 향해 뛰었다. 마치와 나는 주돛대를엄폐물 삼아
날아오는 탄알을 가까스로 피하며 벌이줄을 타고 장루로 기어올랐다.
비와 바람이 그친 섬들 주위는 처참했다.총들과 대포에서 피어오른 자
욱한 연기와 매캐한 화약 냄새, 배의 갑판 배수구를 타고 흘러내려가
는 피와, 세상과 막 이별중인 비명들로 지옥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
었다.

킨 세일 호의 기움돛대 위를 기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선의가 보


였다. 그의 뒤에서는 단도를 거꾸로 쥔 해적이 뒤쫓고있었다. 해적이
선의 허벅지를 향해 단도를 내리꽂았다. 하지만 선의는 용케 피해 기
움돛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해적이손을 찍어 내리자 선의는 두
손을 놓고 바다 속으로 퐁당 떨어졌다. 선의는 화약 연기가 바다 안개
처럼 깔린 수면을 헤엄쳐삼각돛 섬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킨 세일 호는 독신자의 모험 호의 날쌘 선원들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
었고, 어드벤처 호와 로버 호는 T자형으로 늘어서우리처럼 치열한 전
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비와 바람이 그쳤으므로 현측 포문에서 불발 없이 브로드사이드를 해


대는 12대의 15kg급 대포들 덕분에, 삼각돛 섬을바람막이 삼아 정박
한 어드벤처 호는 요새처럼 단단했다. 어드벤처 호는 세 대의 브리건
틴 중 최고의 방어력을 유지하고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유리눈알과
왈왈이의 완벽한 호흡이었다. 단 한쪽 눈으로만 거리를 가늠할 수 있
는 데도 불구하고유리눈알은 이 모든 싸움에서 최고의 저격수였다. 현
측에서 불을 뿜는 대형포의 화력도 막강했지만 그는 강선(*탄알을회
전시켜 정확하게 날려 보내기 위해 총신 안쪽에 나선형으로 파놓은 여
러 쌍의 홈)도 없는 구식 부싯돌 소총으로 보트로바짝 다가서는 모든
적들을 정확하게 쓰러뜨렸다. 그는 보트로 다가오는 적들 가운데서도
노를 젓거나 머스켓을 든 녀석들부터쓰러뜨리며 아주 효율적으로 어
드벤처 호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가 오른쪽에 세워진 총들을 쏘고 왼쪽에 세워놓으면 왈왈이는 재빨


리 왼쪽으로 이동해 점화약을 갈아넣어 장전을 마쳐놓았다.그러면 유
리눈알은 다시 왼쪽에 장전된 총을 쏘고 오른쪽 옆에 세워놓았다. 왈
왈이는 그의 양 옆을 바삐 왔다갔다 하며,등을 기댄 배의 난간을 방어
막 삼아 유리눈알이 쉴 새 없이 발사한 총을 장전시켜 세워놓는 일만
되풀이했다. 둘은 주인과충직한 발발이처럼 호흡의 완벽함을 자랑했
다.

그러나 유리눈알의 운명도 다하는 것 같았다. 로버 호의 선수루에서


어깨에 소총을 매고 전투를 지휘를 하던 사내가 천천히머스켓 소총을
어깨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탄약을 가득 털어넣고 장전을 끝낸
뒤 유리눈알을 향해 천천히 소총을들어올렸다. 바로 챙이 넓은 검은
모자에, 빨간 망토를 두른 사내였다.

장루의 0.5kg급 선회포에 장전을 마친 나는, 저격 직전의 장면을 목격


하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저승사자가다가온 사실도 모르
는 저 냉혈한 유리눈알이 타향에서 죽음을 맞게 내버려두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을 막아야 할지 선택할 수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로버 호
의 사내를 향해 선회포를 발사한다면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소총을 쏠
것이 뻔했다. 내가 쏜선회포는 분명 정확하지 못해 로버 호의 사내가
유리눈알 대신 나를 향해 총구를 들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그의 탄알
을용케 피한다 해도 문제였다. 내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데 대한 보
복으로, 그가 우리 선단을 점령했을 때 나부터 지옥으로보내주지 않을
까 걱정이 앞섰다.

"붉은 망토를 향해 쏴버려!"

마치가 나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나는 아래로 굽은 선회포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오른쪽으로 회전시켰다.유리눈알을 곧 저승으로
보내려는 붉은 망토를 향해 불을 붙였다.

두개골이 갈라질 것 같은 폭발음과 함께 선회포가 뒤로 휙 뒤집어졌


고, 나와 마치는 그 반동으로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나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쏜 선회포의 포탄이 정확하게 날아가 붉은 망토
가 밟고 있는 이물을 날려버렸기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가 쏜 탄환이
유리눈알을 맞추지 못하고 비껴간 것 같았다. 유리눈알은 방금 자신의
목 옆으로저승사자가 지나간 사실도 모른 채 사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
다.

하지만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뒤로 나자빠진 붉은 망토는 곧 일어


나 나와 마치가 서 있는 장루를 쳐다보았다. 심장이얼어붙는 것 같았
다. 하지만 그는 소총에 탄알을 재려다 그만 두고 부하 선원들을 둘러
보았다.

우리는 그 틈을 타 좁은 장루 바닥에 엎드렸다. 붉은 망토는 어드벤처


호의 포문을 꺾을 수 없는 자신들의 공격이 시원치않자 비장의 카드를
꺼낸 것 같았다. 그가 뭔가를 명령하자 배에 남아 있던 해적들 대부분
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머지해적들은 캡스턴을 감아 닻을 올리고 돛
을 죄다 펼쳤다. 스쿠너가 바람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배에
남아 있던부하들마저 바다로 뛰어들게 했다. 그는 움직이는 배 위에서
포도주 통처럼 생긴 탄약통의 뚜껑을 연 다음 검은 가루 탄약을이물과
갑판 군데군데 뿌렸다. 그리고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 뒤 배 위에 뿌려
진 탄약들 위로 던졌다. 탄약이 일제히타올랐다. 그리고 뒷갑판으로
뛰어가 타륜을 붙들고 불기둥이 치솟는 스쿠너를 어드벤처 호의 한가
운데로 몰았다.

"화공선이다!"

어드벤처 호에서 누군가 외쳤다. 어드벤처 호의 현측에서는 다가오는


불덩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수면과 맞닿은 화공선의 뱃머리아래쪽을
향해 한꺼번에 포탄이 발사되었다. 돛들까지 활활 타오르는 화공선의
뱃머리가 열렸다. 하지만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멈추지 않고 조금씩 가
라앉으며 어드벤처 호의 옆구리로 돌진했다. 어드벤처 호 선원들이 일
제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붉은망토는 화공선이 어드벤처 호를 들이받
기 직전까지 타륜을 붙들고 있었다. 화공선이 어드벤처 호를 쿵 들이
받으며 무너졌다.붉은 망토는 불타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 불이
붙은 어드벤처 호의 화약고가 폭발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질렀다.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섬 주위가 온통 붉게 물들고 장루에 올라선


우리 옆으로 시뻘건 파편이 휘리리릭 날아왔다. 전투를치르던 두 편은
불꽃놀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잠시 싸움을 멈추고 폭발 광경을 지켜
보았다. 하지만 폭발이 잦아들자 해적들이사방에서 메릴 호 갑판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갑판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현장으로 변하기 직
전이었다.

어드벤처 호에서 탈출한 유리눈알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은 소총을 머


리 위로 들고 삼각돛 섬 해안으로 기어올랐다. 그들은서둘러 해안에
공격 거점을 확보하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커틀래스와 단도를
번뜩이며 쫓아오는 무법자들에게 사격을퍼부었다. 하지만 숫자에서
해적들이 앞섰기 때문에, 해적들은 소총과 권총을 다시 장전할 틈도
주지 않고 번뜩이는 단도를치켜들고 달려들었다.
흰 모래가 펼쳐진 삼각돛 해안에서 다섯 명의 선원이 끔찍하게 살해되
었다. 대항하던 선원 몇은 곧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수상한 자루를 하
나 멘 왈왈이와 유리눈알은 약 열 명 정도 되는 선원들과 함께 삼각돛
섬의 뒤편으로 달아났다. 혼비백산달아나는 맨 뒤의 둘과 나머지 선원
들을 좇아 번뜩이는 단도를 거꾸로 쥔 맨발의 신사들이 해안에 펼쳐진
흰 모래톱을 밟으며떼거지로 달려갔다. 그들은 지옥 같은 욕을 퍼붓고
악을 써대며 삼각돛 섬의 해안 저 끝으로 멀어져 갔다.

하지만 메릴 호의 선원들은 독신자의 즐거움 호의 신사들을 본격적으


로 맞아들일 찰나였다.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선원들은소총과 권총으
로 무장하고 양쪽 뱃전과 이물과 고물에 지켜 선 채 거머리처럼 올라
오는 놈들을 떨어뜨렸다. 양손에 든 권총두 자루로만 방어하고 있던
고물의 선원 둘을 무자비하게 처치하고 해적들이 갑판으로 기어올랐
다. 감초 씨는 이물 난간에붙박힌 선회포의 머리를 배의 안쪽으로 돌
리더니 고물 갑판으로 막 떼를 지어 올라온 놈들을 향해 뇌관을 터트
려버렸다.

대포알이 맨 앞 해적의 복부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희생자는 허리가


푹 꺾이며 뒤에 엉거주춤 선 녀석들과 함께 고물너머로 우두둑 떨어졌
다. 하지만 뱃머리를 맡은 선원들을 쓰러뜨린 적들이 뱃머리로 기어오
르자 감초 씨는 선회포를 단념하고총 띠에 찔러 넣은 두 자루 권총을
양손에 빼들고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감초 씨는 아래를 향해 양손의 권총을 모두 쏘고 바삐 점화약을 털고


있었다. 나는 감초 씨를 덮치기 위해 다시 기어오르는뱃머리 쪽 놈들
을 향해 선회포를 회전시켜 야구공만한 0.5kg짜리 대포알을 한방 날
려 보냈다. 기움돛대 아래,컷워터(*물결을 헤치는 부분) 위쪽이 뭉개
지며 녀석들이 보기 좋게 바다로 나가떨어졌다. 시간을 번 감초 씨는
장전을서둘러 마친 뒤, 갑판 위에 떨어진 선원용 군도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뒷갑판 난간으로 악착같이 기어오른 해적들을 당해내지 못한


선원들은 소총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벌이줄을 타고잽싸게 달
려올라오는 설치류가 보였다.
"치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치노가 우리들을 향해 도망쳐 왔다.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한 우리 편 선원들 셋도 벌이줄을 타고올라오고 있었다.
한 명은 아래서 쏜 해적의 권총에 맞고 갑판으로 곤두박질쳤다.

나와 마치는 두 선원 바로 아래에서 장루를 향해 기어오르는 해적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말았다. 두건을 쓴
녀석이 도망쳐 올라오는 두 선원의 뒤꿈치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뒤늦게 올라오는 선원은 아킬레스건이끊어진 채 벌이줄 중간에 멈추
고 말았다. 발목이 덜렁거리는 선원을 놈이 베려했다. 마치가 재빨리
선회포 포탄을 하나 집어밑으로 내던졌다. 뻑, 수박을 쪼개는 듯한 소
리가 들렸다. 선회포 알에 두개골이 쩍 벌어진 녀석이 팔을 놓으며 주
춤거리다뒤로 넘어졌다. 벌이줄 중간에서 떨어진 녀석은 등이 꺾인 자
세로 뱃전에 걸쳐졌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올라오던 녀석이 발목이 끊어진 채 죽을 힘을 다


해 기어오르는 선원을 따라잡아 등 한가운데 단도를꽂았다. 앞서 올라
오던 선원이 무사히 장루 난간을 붙잡는 데 성공하자, 마치는 장루와
연결된 벌이줄 끝을 선원용 걸리로잽싸게 끊어버렸다. 벌이줄을 타고
올라오던 해적들이 등에 칼이 꽂힌 선원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 나
와 마치는 간신히목숨을 건진 선원을 붙들어 난간 안쪽으로 끌어올렸
다. 별 기술이 없어 주방 보조와 갑판 청소를 맡고 있던 30대 초반의김
씨였다.

하지만 독신자의 즐거움 호 해적들이 뱃전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난


간을 넘어오고 있었고, 저항을 하는 선원은 많지않았다. 세 줄 무늬 곤
색 아디다스 체육복과 조깅화로 차림을 바꾼 제비, 유리눈알의 부하인
잠수부 다섯과 여섯 명의 일반선원, 그리고 감초 씨뿐이었다. 탐사 중
습격을 당했기 때문에 잠수부들은 잠수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난간을 넘어오는 해적들이 갑판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이었다. 왠지 이


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드드드드득! 소리가 상갑판에서화물창으로 뚫
린 계단 입구에서 들려왔다. 삶은 달걀처럼 반짝이는 머리의 주인공이
톰슨 기관총을 들고 계단 입구에나타났다. 20세기 초 뉴욕 밤거리에
서 한창 싸우던 중 해적들이 날뛰는 18세기 초의 세계로 순간 이동을
겪게 된 어느갱단원? 아니 스킨헤드 사무장이었다. 그는 바다의 무법
자들에게 톰슨 기관총을 쏘아대며 부츠를 신은 발로 뚜벅뚜벅다가갔
다. 해적들은 난생 처음 보는 자동화기 앞에서 처참하게 꼬꾸라졌다.
그러나 아직 보트에 남아 있던 해적들이 용감하게뱃전을 기어올랐다.
탄창을 갈아끼운 사무장은 미친 사람처럼 히죽대며 해적들을 향해 난
사하며 다가갔다. 해적들은 배 안에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배 너머로
떨어졌다. 주갑판 한쪽으로 기어오른 일행들 가운데 하나가 사무장을
향해 무언가를 휙던졌다.

스킨헤드 사무장의 이마에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는 뒤로 주


춤주춤댔지만 방아쇠울 속의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기관총의 반동 때
문에 거구의 몸이 체조선수처럼 뒤로 휘어졌다. 총신이 위쪽으로 꺾어
지며 공중으로 빗발친 탄알들이 활대와접힌 돛과 밧줄 들을 파괴했다.
나와 마치와 김씨는 얼른 장루의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활대를 지탱
하는 삭구 하나가풀리며 사무장 위를 덮쳤다. 기관총이 멈췄다.

곧이어 지주(*주갑판 주위에 설치한 난간을 받치는 수직 나무) 사이로


두건을 두른 이가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단도를 집어던진 조타
수와 삼각모를 삐딱하게 쓴 해적 소년, 그리고 여덟 명의 해적이었다.
그들은 갑판 위로 마름쇠를집어던지고 권총을 쏘아대며 갑판에 남아
있던 선원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비와 감초 씨, 선원들과 잠
수부들 또한만만치 않았다. 제비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다섯 자루의 해
군용 단검을 차례로 던지며 뱃전을 넘어온 해적 다섯을 쓰러뜨렸다.

산소통을 멘 잠수부 하나가 단검을 쥐고 조타수와 엉켰고 감초 씨는


웃통을 벗어젖힌 녀석과 맞붙었다. 감초 씨와 웃통을벗어젖힌 녀석은
서로 엉켜 계단 밑까지 굴러가 엎치락뒤치락했다. 마침내 감초 씨는
놈의 배 위에 올라타서 왼손으로는 놈의목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이
미 발사해버린 플린트락을 거꾸로 쥔 채 적의 머리를 부수려 하고 있
었다.

검을 모두 던져버린 제비는 잠수부 둘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삼각돛


섬 쪽으로 도망쳤다. 다른 잠수부는 갑판에 떨어진톰슨 기관총을 집어
들고 고물 방향에서 달려드는 해적들을 향해 난사했다. 무적의 해적들
조차 문명 앞에선 맥을 추지 못하고쓰러진다. 하지만 돛을 꿰매는 데
쓰는 선원용 바늘을 쥔 해적이 잠수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해적은
형제들의 복수를하듯 잠수부의 튀어나온 후두부 바로 아래 목뼈에 바
늘을 찔러 넣었다. 급소를 당한 잠수부는 머리와 사지를 떨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붙을 상대가 없어 심심한지 어린 해적 녀석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


리 배로 그라나도 유탄을 던진 녀석이었다. 녀석은히죽대더니 남아 있
는 벌이줄을 타고 다람쥐처럼 오르기 시작했다. 김 씨와 마치는 선회
포 탄알을 애송이 해적을 향해던졌다. 포탄 하나가 삼각모 끝을 스쳤
다. 삼각모가 녀석의 머리에서 핑그르르 돌며 벗어나 바다로 떨어졌
다. 녀석의금발머리가 드러났다. 녀석은 햇빛에 그을린 얼굴 때문에
더욱 하얗게 보이는 이를 씩 내보이며 단도를 거꾸로 쥐더니 잽싸게기
어올랐다.

"너희들이 진짜 사내라면 한 명이라도 붙어보시지?"

녀석이 지껄였다. 하지만 겁먹은 우리는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녀석


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올라오지 마!"

마치가 거꾸로 쥔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녀석을 위협했다.

"그래도 네가 그 중에서 제일 사내 값을 하는군! 어디 한번 그럴싸하게


덤벼보시지."
이렇게 지껄인 뒤 녀석은 동료 해적들 틈에서 배운 상상도 못할 욕설
을 퍼부어 우리 기를 한풀 꺾어놓았다. 마치도 욕설을퍼부으며 녀석을
향해 거꾸로 쥔 소총을 던졌다. 하지만 녀석은 허리를 뒤로 젖혀 멋지
게 피했다. 마치는 걸리를 빼들고장루와 연결된 벌이줄 끝을 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어느새 장루 난간에 한 마리 오랑우탄처럼 맨발을 걸쳐


놓았다. 그리고 장루 가장자리에서 로열 마스트와 연결된다른 벌이줄
을 잡았다. 마치가 녀석을 향해 걸리를 던졌다. 녀석은 이번에도 머리
를 살짝 낮춰 걸리를 피했다. 이젠버틸만한 무기가 떨어지자 우리 셋
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신발도 내던진 채 돛대의 꼭대기와 연결된 벌
이줄 사이를 헤집고난간을 넘었다. 우리는 돛의 삭구 장치들을 붙들며
위태롭게 매달린 활대를 밟고 활대 끝으로 도망쳤다. 우리 셋은 횃대
끝에 몰린 닭들처럼 두려움에 떨며 고양이처럼 나불대는 녀석의 눈치
만 살피고 있었다.

"누가 신사 프랑수아 플라스와 함께 해안의 형제들 식으로 한판 겨뤄


볼까?"

어린 악당이 아슬아슬 활대 위에 서 있는 우리 셋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때 새 한 마리가 장루로 날아와 녀석의 어깨에앉았다.

"싸가지 없는 녀석! 싸가지 없는 녀석!"

애꾸눈 해적 앵무새마저 우리를 비웃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네가 좋겠군. 얼굴이 흰 생원 같은 녀석."

녀석이 맨 앞의 나를 가리키며 오른쪽 아랫다리와 바지 사이에 숨겨놓


은 다른 단도를 건넸다.

"싸가지 없는 녀석!"
앵무새마저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마치나 김 씨가 그 칼을 잡아주
길 바랐지만 나는 얼떨결에 녀석이 내민 단도를 집어들고 말았다. 마
치가 나를 뒤에서 떠밀었다. 내가 해적용 단도를 들고 이 높은 꼭대기
에서 18세기 초(저 녀석에게는지금이 현재겠지만)의 또래 녀석과 목
숨을 건 싸움을 붙어야 할 상황이 올 줄이야. 아빠가 이런 꼴을 보면
뭐라 하실까.

녀석은 너무 자신만만해 있었다. 단도를 건네받은 나는 두 다리에 영


힘이 없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장루까지 다가가난간을 넘었다.

"차, 착한 녀석 같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길로 빠지게 되었냐?"

나는 단도를 쥐고 장루의 왼쪽으로 돌며 녀석에게 겨우 말을 건넸다.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는 해적 녀석이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지하방


에서 읽곤 했던 해적에 관한 어느 동화책이 생각났다.동화책의 주인공
도 엄마 잔소리가 싫어 집을 뛰쳐나와 해적단에 들어갔는데. 그와 비
슷한 녀석이 실제 내 앞에 나타나다니!

"프랑수아! 어딜 개처럼 싸다니다 이제 기어들어 오는거야! 빨리 밥이


나 처먹고 네 방으로 기어들어가!"

갑자기 뒤에서 마치가 엄마처럼 프랑수아 녀석에게 잔소리를 했다.

"저게!"

흥분한 애송이 해적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를 득득 갈며


분개했다.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힘을 얻은 나는녀석과 보조를 맞추
며 계속 왼쪽으로 돌았다. 내 주위로 한줄기 희망이 터지듯 구름 사이
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수아! 팬티가 두엄자루가 됐구나! 넌 손이 없니? 네 손으론 빨아
입을 순 없니!"

"이 녀석아! 넌 손이 없니 발이 없니? 네 손으로 빨아 입을 순 없니!"

활대 위에서 마치와 김 씨가 탁탁 손뼉을 치고 입을 맞춰 소리친 뒤,


동동 발을 굴리며 응원했다.

"싸가지 없는 녀석!"

해적 앵무새가 주인의 어깨 위에서 상황도 판단 못하고 지껄였다.

"우이 씨!"

프랑수아 녀석이 앵무새의 목을 잡아 공중으로 홱- 집어던져 버렸다.


앵무새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모양이었다. 해적 앵무새
는 자신의 주인을 원망하는 것처럼 계속 '싸가지 없는 녀석'을 외치며
장루를 뱅뱅 맴돌았다.

난간 밖에서 마치와 김 씨는 더욱 세게 발을 구르며 나를 응원함과 동


시에 애송이 악당에게는 엄마처럼 잔소리를 퍼부었다.녀석의 얼굴은
홍당무가 돼 있었다. 나는 칼을 쥔 채 잽을 날리듯 살짝살짝 위협하며
한걸음, 한걸음 왼쪽으로 돌며몰아붙였다. 하지만 녀석이 선회포 앞을
지나칠 때 거꾸로 쥔 단도를 나를 향해 비스듬히 내리찍었다. 나는 오
른쪽 난간으로급히 미끄러졌다. 내 의지는 아니었는데 적의 칼을 피하
는 꼴이 되고 말았다. 파도가 나를 살렸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크게
옆질한 범선의 돛대가 한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나는 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단도를 녀석의 턱을 향해 겨누


며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녀석은 다시 단도를 다른손으로 바로 잡음
과 동시에 짧고 간단하게 옆으로 그었다. 적의 칼끝에 내 뱃가죽을 살
짝 긁히고 말았다. 땀이 밴 흰 셔츠위로 피가 번졌고 나를 응원하던 마
치와 김 씨는 탄식을 내질렀다. 나는 아픔도 잊은 채 왼쪽으로 도는 걸
멈추지 않고이제는 한 번쯤 공격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
다. 뒷걸음치며 돌던 녀석이 다시 선회포 앞을 지나쳤다.

마치와 김 씨는 더욱 강도 높은 엄마 잔소리를 적에게 퍼부으며 응원


석의 관중들처럼 뛰었다. 그제야 뱃가죽이 쓰려오기시작하며 식은땀
이 내 등골을 타고 내렸다. 내가 약해진 사실을 간파한 녀석이 세 번째
공격을 위해 다른 손에 버릇처럼단도를 바꿔들었다. 나는 뒤늦게 녀석
의 공격 패턴을 알아챘다. 녀석의 이번 공격만 피하면 내게 기회가 돌
아올 것이다.나는 일부러 칼끝을 조금 내려뜨리며 공격을 유도했다.
예상대로 녀석이 날카롭게 왼쪽 바깥쪽으로 잽싸게 칼을 저었고, 나는
허리를 쭉 빼며 피했다. 녀석이 칼을 오른손으로 바꿔들 찰나, 나는 머
릿속에 그려둔 대로 왼쪽 옆구리를 공격하는 척하다얼른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찔렀다. 하지만 녀석은 나의 수를 간파해버렸다. 녀석은
상체를 살짝 오른쪽으로 비틀며 그리날카롭지 못한 나의 공격을 피했
다. 그리고 자신에게 바짝 다가온 먹잇감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날카로운 칼끝을 내밀기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펑! 펑! 펑! 연달은 폭
발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어드벤처 호의 무기고에서 폭파하지 않고
남아있던 화약에 불이 붙은 것이다. 어마어마한 폭음에 놀란 녀석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뒤를 돌아볼 찰나, 중심을 다시잡은 나는 녀
석에게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녀석은 나를 안은 채 뒤로 넘어졌다. 난간이 부러지며 녀석과 내가 엉


킨 채 쓰러졌다. 나와 녀석의 몸 절반 정도만이좁디좁은 장루 바닥에
걸쳐져 있었다. 배가 멈춰 있는 상태에서 옆질을 해댔기 때문에 돛대
가 다시 심하게 우리 쪽으로기울었다. 한데 엉겨 붙은 녀석과 내가 돛
대가 기우는 쪽으로 조금씩 미끄러졌다. 나와 녀석이 장루에서 함께
떨어져 곧죽음을 맞이할 상황이었다. 녀석은 왼손으로 난간 세로대를
붙들고 나는 왼쪽 다리를 벌려 난간 아래 부분에 걸쳤다. 배가심하게
휘청댔기 때문에 마치와 김 씨도 우리 쪽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나는 칼을 쥔 녀석의 오른쪽 팔목을 비틀어 칼을 빼앗았다. 밑에 깔린


녀석이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버렸다.나는 녀석의 얼굴
에 침을 퉤 뱉고 부러진 난간을 간신히 붙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메릴 호의 갑판으로 뛰어든 데 성공


한 해적들이 손도끼로 닫힌 문들을 부수고 약탈할 만한물건들을 찾아
이리저리 날뛰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몇 안 되는 선원들은 완전히
굴복한 채 뒷돛대 옆에 무릎을 꿇고있었다. 계단 입구에 바닥에 대자
로 뻗은 해적과 피와 땀이 범벅인 채 주저앉은 감초 씨도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표정으로 불길에 휩싸인 어드벤처 호를 바라보고 있
었다.
15. 다시 장악당한 선단

어드벤처 호는 로버 호와 함께 잿더미로 변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두 배의 시커먼 돛대들만이 X자 모양으로 엇갈려있었다.

살아남은 포로들을 실은 보트가 킨 세일 호에서 메릴 호로 다가왔다.


킨 세일 호의 생존자는 다섯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틈에 기적처럼 바비가 끼어 있는 걸 알아채고 나는 당장 신께 감


사를 드렸다. 해적들은 킨 세일 호의 포로들을 메릴호의 포로들이 있
는 갑판으로 끌고 왔다.

간간히 삼각돛 섬에서 해적들과 유리눈알 일당이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주위는 바람과 파도와 우리를 둘러싼섬들의 해안에
서 지저귀는 새들의 존재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해적들은 난간이나 통 위에 걸터앉아 피 묻은 무기를


청소하거나 약탈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갑판의 해적들 사이로 누군가 철퍼덕, 철퍼덕 샌들을 끌며 다가왔다.


화공선으로 어드벤처 호를 침몰시킨 붉은 망토였다.

그는 머스켓 소총을 어깨에 걸친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저무


는 태양을 등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구릿빛 얼굴이었다.

그는 소총을 어깨에서 내리더니 총구를 나의 귓가로 가져왔다.

'나의 길지 않은 생도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나는 알모타 제국이나 제국과 가까운 어느 나라에 있을 엄마가 그리웠


고, 엠엠엘단 녀석들이 정한 날짜가 다가오면서 고통을겪고 있을 아빠
가 그리웠다. 나는 두 분에게 작별인사를 보냈다. 이렇게 세상을 일찍
작별할 줄 알았으면 동생 승호도조금씩만 때리고 좀 더 잘해줄걸. Y마
트 안경점에 새로 들어온 선글라스를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는데…….
지금쯤 영식이녀석이 벌써 사갔는지도 모르겠네. 죽음 앞에서 선글라
스가 떠오르는 이유는 뭐람.

아직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총구가 나의 귓불에 닿았다. 붉은 망토


는 내가 선회포로 자신을 저승으로 보내려 했다는사실을 기억하고 있
는 듯했다.

총구는 나의 은귀고리를 압박했다. 마침내 격철이 튕겨졌다. 나의 영


혼은 이미 지옥의 가시밭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런, 점화약을 채워놓는 걸 깜빡 했군."

붉은 망토는 다시 소총을 가져가 어깨에 걸치고 물었다.

"이 배의 선장은 어디 있지?"

해적 선단의 선장인 붉은 망토가 하필 영어도 잘 못하는 내게 물었다.


불어 억양이 섞인 말투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죽었어요."

스킨헤드 사무장이 메릴 호를 지휘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해적들은 '스웨트'라 불리는 고문(*Sweat.앞갑판과 뒷갑판 사이 돛대
주위에 초들을 꽃아놓고 스물네 명 정도 되는 이들이 칼, 주머니칼, 컴
퍼스, 포크 따위의날카로운 물건들을 손에 쥐고 둘러싼다. 죄인이 원
안에 들어간다. 바이올린으로 흥겨운 댄스곡이 연주되면 죄인은 원 안
에서십 여분 동안 뛰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둘러싼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도구로 죄인의 몸 뒷부분을 찌른다)이나 용골 따라끌어당기기(*
벌 받는 이의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밧줄로 묶은 뒤 배 밖 물속으로
던져 밧줄을 끌어당겨 따개비들이달라붙은 배 밑 용골을 지나게 하는
고문. 살갗이 배 밑에 달라붙은 날카로운 따개비에 찢겨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물밖으로 나왔을 때는 익사 직전이 된다) 같은 고문을 할
기회가 사라져 실망인 표정이었다.
어떤 해적들은 선장을 기움돛대에 묶어놓고, 눈에는 불타는 성냥을 집
어넣고 입에는 권총을 물리고 배 안의 귀중품이 있는곳을 불게 했다.
하지만 이런 고문도 해적 랑그도크의 몽바스나 장 롤로네의 잔인하고
역겹고 독창적인 고문에 비하면 오히려신사적인 편이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녀석들은 어떤 취향을 갖고 있을까. 나는 상상조


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붉은 망토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떤 대답이 우리에게 유리


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죽음에서 우리 모두를 구할수 있을까?

우리는 우브 세계에서 온 비밀 무역 선단의 선원들이고 고철덩이와 플


라스틱을 싣고 알모타 제국으로 가던 중 기항지에서휴식을 취하는 중
이었다고 말할까. 아니면 철과 플라스틱 일부를 론바르바도에 넘겨주
고 바다 밑 보물선을 탐색 중이었다고솔직하게 말할까?

"이들은 우리가 우브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너희 세


계의 사람들이 비행접시를 마주치거나 크롭사인(*옥수수 밭 따위에
나타나는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기호) 현상을 만난 때랑 비슷한 상황
이기 때문이지. 또한 이들은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한꺼번에 존재할 수
도 있다는 사실조차 이해 못해. 그리고 이들에겐 철이나 플라스틱 따
위는 별 쓸모가없어. 그러므로 이들에게 우리의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18세기 식 대답을 생각해 내. 내 말 참조하라고."

마치가 내 옆에서 빠르게 속삭였다.

"넌 가만있어!"

조타수가 들고 있던 권총 개머리로 마치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치의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보복이 두려워 우
리들 가운데 아무도 마치를 돌보지 못했다.

마치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고 나는 나의 대답이 생각보다 중요하


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의 대답 하나에 우리의 목숨이달려 있다.

하지만 마치의 조언처럼 우리는 평범한 상선의 선단일 뿐이라고 대답


한다면, 이들은 십중팔구 우리를 죽이고 배에 불을지르거나 밑창에 구
멍을 뚫어 가라앉힌 다음 약탈한 물건들만 챙겨 떠날 것이다.

아주 운이 좋을 경우, 우리는 지옥 같은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처럼 동인도 회사와 식민지의 혼란을빌고, 식민지 총
독과 영국 왕과 고관 나리들과, 야만적인 노예무역을 서슴지 않는 로
열 아프리카 회사에 저주를 퍼부으며,열렬히 해적단에 가입을 희망하
는 경우이다. 그들이 받아줄 경우 우리는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과
거의 시공간에 갇혀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보물을 찾고 있었어요. 당신들 세계와 시공간이 겹쳐진 이 근처엔, 신


세계의 보물을 싣고 가던 스페인 보물선단 가운데 한척과 JJ-109 세계
의 무역선이 함께 가라앉아 있죠. 바로 스페인의 갈레온 보물선단 가
운데 하나인 이슬라 데 피노스호와 알모타 제국의 엘 드라곤 호이죠.
이슬라 데 피노스 호는 카르타헤나에 쌓아둔 에콰도르의 금과 콜롬비
아의 에메랄드,베네수엘라의 진주 등 500만 파운드 이상이나 되는 값
진 보물들을 싣고 가다 난파당했어요. 바로 우리의 발아래에 16세기
스페인 보물선과 알모타 제국의 보물선이 함께 매장돼 있는 거죠. 그
리고 우린 당신들처럼 과거의 범선 시대 사람들이아니라, 당신들 기준
에서 약 300년 뒤의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물론 당신들에겐 지금
이 '현재'겠지만요. 당신들이이해하지 힘들겠지만, 모두 사실이에요.
그리고 특히 엘 드라곤 호에는 이 세상의 보물들과는 견줄 수도 없는,
아칸의신비한 보물이 실려 있다고 했어요. 바로'잭 캐치의 사물함'이
죠. 하지만 두 보물선의 정확한 위치는 유리눈알 선장만이알고 있어
요. 그가 보물선이 가라앉은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갖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어렵고 복잡한 사실을 영어로 말하진 못
했다.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한 해적 선장이 난처해하자놀랍게도 바비
가 재빨리 불어로 통역을 했다.

불란서 요리가 전공이기 때문에 불어를 조금 할 줄 알 거라고는 짐작


하고 있었지만, 불어를 그렇게 잘 할 줄이야.

바비는 내가 말한 이 어려운 사실들을 아주 쉽고 정확하게 이해시키고


있는지 해적들은 위-, 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바비는 요리에 비유
하며 이해하기 힘든 블록 우주(*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우주)론 따위를 쉽게 설명하고있는 것 같았다. 21세기 초 산 포도주와
18세기 초 산 포도주가 한 술통에 섞일 수도 있다는 따위로 말이다.

붉은 망토와 프랑스 버커니어 후손 해적 몇은 바비의 통역을 완벽히


알아듣고 흥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최선의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유리눈알 선장이


보물선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하면, 이들은유리눈알에게서 보물지도
를 빼앗고 보물선의 위치를 알아낸 다음, 보물 인양 작업을 마칠 때까
진 우리를 쉽사리 해치지 못할것이다. 보물을 인양할 수 있는 현대 장
비들을 다룰 줄 아는 건, 현재로선 우리들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흥분에 싸인 녀석들을 더욱 불지르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당신들에게 습격을 당하기 훨씬 전에 은화 한 자루를 건


져 올렸어요. 그리고 ,"

내가 말하고 바비가 통역하자 놈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뭐지?"

붉은 망토가 나를 재촉했다.
"멕시코나 베네수엘라나, 페루 광산에서 주조된 대형 스페인 금화 세
자루를 건지는 데 성공했죠. 이슬라 데 피노스 호에서나온 것 같았어
요. 막 보물밭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당신들의 습격을 받았어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과거 스페인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쥐어짜내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부풀려놓고말았다.

거짓말은 내 적성이 아니었지만 코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 솔직할 필요


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바비가 통역했다.

실제 보물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내가 금화 얘기를


꺼내자 녀석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바비는 내가말한 것에다 좀
더 부풀려 말한 것 같았다. 양 손을 펼쳐 보이는 것으로 봐서 금화가
약 열 자루 정도는 나왔다고 말한것 같았다.

나는 놈들을 보물로 더욱 확실하게 구슬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해적의 하느님은 돈이고 해적의 구세주는 오로지 무기일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읽은, 18세기 어느 해양 소설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 소설은 조지 로버츠라는 상선 선장이겪은 모험담을 다룬
이야기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녀석들이 우리보다 더 보물에 환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무법자들의 대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건졌다는 스페인 금화는 어디 있지?"

붉은 망토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심장이 그대로 멎어버리는 것 같았


다. 이들에게 전혀 증거를 들이댈 수 없다. 지금까지건진 하찮은 것들
마저 유리눈알과 왈왈이가 챙겨가 버렸다.
"보물을 인양 중이다 당신들 습격으로 어쩔 수 없이 어드벤처 호로 피
해갔던 보트가 어드벤처 호와 함께 불타버렸어요. 그보트 안에 보물선
에서 건져 올린 금화 자루들이 들어 있었거든요."

악당 두목은 검게 그을린 돛대만 남은 어드벤처 호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그렇다면 금화를 건졌다는 장소는 어디지?"

우리 모두는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습격을 받았을 때 겨우 은


화 한 자루를 건져 올린 보트가 떠 있었던 위치를기억하고 있는 사람
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날씨가 험악해서 주위를 분간
하기조차 어려웠었다.

하지만 우리가 스페인 보물을 끌어올리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당장 증


명하지 못할 경우 우린 모두 떼죽음을 당할 것이분명했다.

"제,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구세주처럼 마치가 입을 열었다. 마치는 삼각돛 섬의 흰 모래톱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60미터 떨어진 지점을 손가락으로가리켰다. 메릴
호와 거의 직각인 방향이었다.

붉은 망토는 우리 뒤편 바다를 바라보았다.

"코찔찔이(*해양 모험담을 너무 많이 읽은 이를 일컫는 해적 속어) 같


은 네 놈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너와네 동료들은 모두
돛대에 묶인 채 권총 사격과 병 던지기 연습용 표적이 될 거야."

무법자의 두목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페드로. 너희들은 이들의 악독한 선장을 처형하려고 떠난 형제들을


따라가라. 유리눈알이란 녀석이 갖고 있는 지도가 쓸만한지 봐야겠
어."

해적 선장은 머리에 감청색 두건을 맨 페드로라는 젊은 해적과 일당


몇에게 명령했다.

페드로, 나와 맞붙은 프랑수아 녀석과 그의 해적 앵무새, 그리고 열 명


의 해적은 보트를 저어 삼각돛 섬으로 멀어져갔다.

유리눈알 일당을 족치려 두 번째 원정대가 떠나자 배 안에 남은 해적


들과 우리는 다시 보트에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는우리가 겨우 은화
한 자루를 건져 올렸을 뿐인 장소로 노를 저어갔다.
제4부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16. 삼각돛 섬의 횃불

우리는 습격을 받기 전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유리눈알의 부하였지만 이젠 포로가 된 잠수부 한 명과 수영 솜씨가


아주 뛰어난 해적 셋이 한 조가 되었다. 도망치지못하게 허리에 밧줄
을 묶은 잠수부는 산소통을 메고 들어갔고, 나머지 세 명의 해적은 발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산소통을 안고겁도 없이 차디찬 물속으로 잠수했
다.

다시 난파선을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해적들은 전문 보물선 인양업자인 유리눈알처럼 조직적이지도 못했


고 성급했다. 그들은 바다 밑을 되는대로 쑤시거나 헤집고다녔다.

먼젓번 장소를 몇 번이나 뒤졌지만 난파선을 발견하지 못하자 놈들은


우리를 못미더워하는 눈치였다. 일이 진행돼도 소득이전혀 없으면 당
장 우리를 물고기 밥이 되게 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한 시간을 뒤진 끝에 난파선 하나를 발견하고 무법자들은 흥분했다.

소형 기중기의 밧줄에 매단 망을 바다 속으로 내려 보냈다. 아래서 밧


줄을 당겨 신호를 보내면 기중기를 작동시켜감아올렸다. 하지만 올라
온 망 속 내용물은 하찮은 것들뿐이었다. 습격당하기 전 우리가 은화
한 자루를 발견했던 바로 그난파선에서 올라오는 것들이었다. 이 위치
에 가라앉아 있는 배는 보물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화물을
싣고 가까운근해를 왕래하던 작은 슬루프(*외돛대 범선)에 불과했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고 섬들 너머에서 구름이 몰려왔다. 새파랗던


바다 색깔이 잿빛으로 변하며 곧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한날씨로 바뀌
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점처럼 떠 있는 섬들과 기다란 섬
들로 이루어진 해협 때문에 무역풍이 여러방향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원래 서인도제도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날뛰던 바람은 구름


이 몰려오자 아무때나 방향을 바꾸는 비바람으로 변했다.비바람에 섬
들이 이리저리 씻기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내가 탄 보트는 슬루프가 가라앉은 위치에서 겨우 20미터 정도 나아


간 곳에 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간 친구들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이지?"

"있지도 않는 보물선을 찾느라 시간만 까려고 그렇지. 이 녀석들은 시


간을 벌려고 쌩을 깐 거고. 플린트락으로 머릿속에총알을 박아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고 배로 돌아가 장화(*온갖 형태의 약탈물을 뜻하는 해
적 속어)나 챙겨 떠나는 게낫겠어."

조타수가 붉은 망토에게 제안했다.

"그게 더 쏠쏠하겠어."

보트에서 작업을 지켜보던 해적들 대부분이 조타수의 의견에 찬성했


다. 무법자의 두목도 가늘게 눈을 뜨고 험악해지는 날씨를살피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푸하!"

물속으로 들어갔던 해적들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다. 나머지 두 해적도


곧 뒤따라 올라왔다.

"뭘 발견했나?"

"아무 것도 없어."

두목이 묻자 맨 먼저 물 밖으로 나온 해적이 대답했다.


"역시 그렇겠지? 요 코찔찔이들이 조금이라도 오래 목숨을 붙여놓고
싶어서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 분명해졌군."

두목이 중얼거리자 보트에 타 있던 놈들이 어깨와 허리에 두른 총띠에


서 미리 탄알을 재둔 권총을 빼들었다. 기중기를조작하기 위해 대기하
고 있거나 끌어올린 잔해들 사이에서 얼굴이 진흙투성이인 채로 앉아
있던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떨기 시작했다.

"물속에 있는 잠수부 녀석은 물 위로 올라오면 입 안에 한 방 먹여주


고, 이놈들부터 처리해야겠어."

조타수가 말했다. 해적 선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조타수의 의견에 동


의하는 듯했다. 놈들이 우리를 보트의 뱃전으로 끌고갔다.

"당신들이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날 밤 유리눈알이 갖고


있던 해도의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폰체 만, 그라나딜로 곶, 남남동, 1.5마일. 위도 17.40. 경도 78.50! 유


리눈알 선장이 갖고 있던 보물지도에 표기된 숫자예요! 이슬라 데 피
노스 호와 엘드라 곤 호가 함께 가라앉아 있는 자리랬어요!"

내가 정확한 위치를 말하자 해적 두목은 머뭇거렸다. 그는 의견을 구


하는 듯 조타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조타수는 고개를저었다.

"난 한번 녀석의 말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형제들 생각은


어때?"

두목이 부하 해적들을 둘러보며 의견을 물었다.

"백스태프(*마주한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다 시력을 상실하곤 했던 뱃


사람들의 애환을 돕기 위해 태양을 등지고 고도를 측정할수 있게 개발
된 기구)라면 발루가 잘 다루지. 나소(*18세기 초 뉴프로비던스의 북
쪽 항구에 번창한 해적 소굴)의 아가씨궁둥이를 다루듯 말이야. 키키
킥."

앞 이빨 하나가 빠지고 늘 입술을 헤 벌리고 있는 녀석이 긴 금발머리


를 뒤로 묶은 젊은 항해사를 가리키며 킥킥댔다.

"네 앞이빨이나 잘 다루시지, 메이시. 나 같으면 영국 해군 녀석들이


쏘아대는 소총 탄알이 날아올 땐 입을 한 번쯤은다물고 있었을 거야.
다음번에도 다물고 있지 않으면 네 이빨이 더 이상 너를 살려주지는
못할걸. 부러진 이빨 사이를헤집고 탄알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테니
깐."

발루가 대꾸했다.

"세미 발루, 한번 해 보겠나?"

"난 이미 저 어린 녀석이 말한 숫자를 머릿속에 넣어두었어."

두목이 묻자 발루라는 자는 메릴 호에서 약탈한 백스태프를 들고 저물


어가는 태양을 등진 채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천천히 나사로 위치
를 조절했다.

"위도의 위치는 나무랄 데 없군."

이번에 발루는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틀어 나침반을 꺼내고 폰체 만


쪽을 살폈다.

"여기로부터 북북서 약 1.5마일 지점에 그라나딜로 곶이 위치하고 있


으니 저 녀석이 말한 건 거의 사실이군요. 하지만위도와 나침의 방향
을 연결하는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닌, 저 앞이죠. 유리눈알
선장 녀석도 위치를 잘못 파악한것 같군요. 저의 느낌으로는 이곳에서
8분의 1마일 정도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저 녀석이 말한 경
도 값을적용할 수만 있다면 더욱 정확해지긴 하겠죠. 그런데 저 녀석
이 말한 경도의 숫자는 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경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구는 당신들 세계에선 약 40년 뒤에 발명
하게 돼요. 해양 크로노미터라고 하죠. 그렇다할지라도 그걸로 재는
경도 값은 그리 정확하지 못해요. 그래서 엘 드라곤 호의 선장은 자신
만이 아는 암호로 경도 값을적어두었죠."

"그게 뭐였지?"

발루가 내게 물었다.

"A Greedy Old Captain's Silhouette(*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이게 마지막 힌트예요."

"A Greedy Old Captain's Silhouette?"

나는 생각나는 영어 단어를 쥐어짜 대답했고, 두목은 허접한 내 발음


을 알아듣고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바를 전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저 녀석 머리가 대단한데. 우리와 수수께끼 풀이 놀이를 하며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잖아?"

조타수가 두목에게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 녀석이 이 지점의 위도와 경도의


위치, 그라나딜로 곶에서의 거리를 정확하게 불어댈때는 말이야. 쟤가
뛰어난 항해사가 아닌 이상 어떻게 즉흥적으로 이곳의 위치를 지어내
겠나?"

"한번 더 뒤져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겠어."

"그렇게 하자고 대장."

부하 해적들의 의견이 내가 의도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보트는


발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약 200미터 쯤 전진했다.
다시 탐사작업이 시작되었다. 물의 깊이는 훨씬 얕아져 있었고, 우리
는 낮은 절벽과 바위, 수풀 들로 이루어진 섬들에둘러싸여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날씨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바다 밑으로 들어간 잠수


부와 해적들이 또다시 빈손으로 나오자 놈들은 짜증을부리기 시작했
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조금만 앞으로 나가서 뒤져보고 소득이 없으면


이 코찔찔이부터 해치우고 배로 돌아가지."

놈들은 동료 셋을 잠수부와 함께 물속으로 내보냈다. 우리는 마지막


낚싯밥을 던진 낚시꾼처럼 물속에 드리워진 밧줄을바라보며 최후의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밧줄을 잡아당기는 신호는 전해오지 않았다.

"왜들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역시 없다니깐."

"코찔질이들을 물고기 밥으로 보내고 빨리 돌아가 한 잔 부어야 직성


이 풀리겠어."

성질이 사납고 급한 녀석들이 우리를 보트의 뱃전으로 끌고 갔다. 머


리를 뱃전 너머로 박게 하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맨 가의 보트에서 잠수부와 연결된 밧줄을 잡고 있던 선원 하나가 밧


줄을 놓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남쪽으로 약 70미
터 정도 떨어진 '수풀의 섬'을 향해 헤엄쳤다.

보트의 고물에 서 있던 붉은 망토가 태연히 어깨에서 소총을 내리더니


도망자를 향해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헤엄을 쳐도망치던 선원은 허
무하게 팔을 몇 번 젓다 멈춰버린 채 고개를 물속에 박고 둥둥 떠 있었
다.

"부러워 마. 너희들도 저렇게 해줄 테니깐."


놈들은 우리의 뒷머리를 잡아끌며 뱃전 너머로 고개를 더 내밀게 했
다. 마치의 모자가 물로 떨어졌다. 내가 슬쩍한 누나의보닛 모자를 고
쳐 만들어준 임시방편용 선원모였다. 모자 속에 감춰둔 마치의 긴 머
리카락이 풀리며 목덜미가 드러났다.그리고 볼록하게 처진 셔츠 속의
앞가슴도.

"어라! 여자애였잖아. 여러 면에서 좀 이상하다 했거든. 여자라면 우리


형제들이 일을 하는 데 집중할 수 없지. 넌특별히 빨리 보내줘야겠다,
쓸데없이 귀여운 궁둥이를 가진 아가씨."

놈이 마치의 엉덩이를 발로 톡톡 차더니 물속으로 머리를 푹 처박았


다. 알모타 제국의 공주를 저런 식으로 다루다니! 나는마치를 지켜주
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포로 신세라니.

"개자식!"

마치가 몸부림치며 해적에게 저항했다. 동시에 치노가 마치의 뒤통수


를 감아쥔 해적의 손을 물어뜯었다. 녀석의 혼란을 틈타노를 잡고 있
던 감초 씨가 녀석의 뒤통수를 쳐 바다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소동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일은 놈들의 화를 더욱 돋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놈들은 우리를 당장 해치우기 위해 뒤통수를 틀어쥐고 뱃전 너머 물속


으로 우리의 머리를 깊게 처박았다. 도저히 숨을 쉴수가 없었다.

"탄알을 재는 것도 귀찮은데 이대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난 화약 냄새가 그리운걸. 물고기들도 피냄새를 그리워할 거야."

놈들이 격철을 뒤로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머리 뒤에서도


찰칵!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떠 물속을 바라보
고 고개를 돌려 물속의 마치를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서로 숨을 참고
있던 마치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입에서 기포가 솟구치며 마치가 다급
하게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잘 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나는 마치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물속 저 아래서 검은 그림


자가 빠르게 올라왔다. 저승사자구나! 검은 그림자가물 밖으로 손을
내밀며 외치는 소리가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왔다.

"진주 목걸이야!"

검은 팔에는 진주 목걸이가 감겨 있었다. 해적들이 손을 놓자 우리는


참았던 숨을 헐떡거리며, 물속에서 올라온 인물을바라보았다.

그는 저승사자가 아니라 물속에서 올라온 천사였다. 잠수복을 입은 잠


수부였던 것이다. 그의 뒤에서 함께 들어갔던 해적이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녀석의 손에는 진흙이 묻은 자루가 들려 있었다.

"방패꼴 문장과 스페인 국왕의 두상이 새겨진 대형 금화 자루야! 8에


스쿠도 동전이라고!"

불룩한 자루를 보고 놈들이 우리의 등 뒤에서 일제히 권총을 거두었


다.

"더블룬(*금화 8에스쿠도의 다른 이름)이군!"

"그거 두 줌만 있으면 뒤집어쓰지."

"우리 형제들이 바다 생활에서 은퇴할 수 있는 퇴직금과 맞먹는다고."

"저 코찔찔이 녀석 말이 사실이었어! 암초에 배 아랫부분이 부딪혀 난


파됐더군. 자루가 터진 것처럼 배 밑바닥에서 흘러나온주화와 보물들
이 약 30미터 폭을 두고 길게 띠를 이루며 흩어져 있었어. 눈깔이 뒤집
힐 것 같은 대부분의 보물들은 아직도배 안에 있더군. 하지만 조난선
은 이곳에서 난바다 방향으로 60미터나 떨어진 암초 계곡 사이에 끼
어 있었지."

건져 올린 자루를 쥐고 여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해적이 말했다.

"해도의 수치대로라면 나의 계산은 더할 나위 없었어. 차이가 나는 건


두 가지 정도의 변수 때문이지. 조류와 측정된 위도값이 실제와 약간
달랐기 때문이야."

발루가 자신을 변호했다.

"하지만 정확한 위도 값의 위치를 안다 해도 그 아래 침몰선이 그대로


가라앉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어. 오긴(*바다를뜻하는 해적 속어)은 암
탉이 아니잖아. 수 세기 동안 계속된 조류 때문에 침몰선의 위치가 바
뀌어 있을 거야.벨러미(*18세기 초 해적)가 습격한 인양업자의 말에
따르면, 오래된 침몰선은 선체 밖으로 보물들이 흘러나와, 넓은 폭을
두고 수 십 킬로미터에 걸쳐 자갈처럼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다더군."

조타수가 대답했다. 나는 유리눈알 일당보다 난파선의 위치를 정확하


게 찾아내는 해적들의 실력에 감탄했다. 하기야 놈들은무법자 악당이
기 전에 뛰어난 뱃사람들이니까.

"다른 배는 찾지 못했나?"

두목이 물었다.

"없었어.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발견한 배조차 수백 년 동안 거센


조류에 휩쓸려서 위치가 조금씩 바뀌었을 거야.하지만 암초 계곡 틈바
구니에 끼게 돼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은 것 같아. 며칠 전 벨러미가
습격한 난파선 인양업자녀석들이 찾고 있던, 그 보물선 같았어. 찰스
턴에서 영국 식 커터(*외돛대 범선의 하나)를 타고 온 영국 놈들은 이
근처에서 현측에 노들이 달려 있고, 결정적으로 바퀴가 두 개 달린 스
페인 식 포가를 장착한 배를 찾고 있었다더군."
수 세기 전에도 보물선 인양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
졌다.

"그런데 말이야. 멍청하고 쓸데없이 현란한 장식이 들어간 저 밑 범선


의 포가는 작은 바퀴가 네 개 달린 영국이나 네덜란드식 포가가 아니
었어."

물속으로 들어갔던 해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두 바퀴 대포를 장착한 16세기 스페인 갈레온 선이 분명하군!"

"이슬라 데 피노스 호야!"

무법자들은 모두 흥분에 휩싸였다. 그들은 이슬라 데 피노스 호가 가


라앉은 지점으로 보트들을 이동시켰다. 하지만 저녁이성큼 다가오고,
가는 비와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대 작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날씨가 험악하군. 보물선이 암초 계곡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지점부터


보물들이 흘러가 있는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두고날이 밝는 대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

붉은 망토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창자와 뼈가 녹도록 마실 수 있고, 평생 써대고도 남을 보물을 바로


밑에 두고 잠이 오겠어? 당장 시작하자고!"

모두가 반대했다.

"좋아. 그럼 일단 몸을 데울 럼주와 흥분을 가라앉힐 포도주, 포로와


우리의 허기를 달랠 위안의 빵. 그리고 저 구름속의 이지러진 달은 믿
지 못하니, 불을 환하게 밝힐 횃불과 양초를 가져와야겠군."

붉은 망토의 말이 떨어지자 메릴 호와 가장 가까운 곳에 떠 있는 보트


하나가 메릴 호를 향해 출발했다. 잠시 후 녀석들은우리 배에서 약탈
한 술통과 음식, 양초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우리는 장밋빛 꿈으로 잔뜩 달아오른 해안의 형제들 틈에 섞여 빵과


포도주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조촐한 만찬 중간에어두워진 삼각돛
섬 꼭대기에서 총소리가 한참 들려오더니 연달은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삼각돛 섬의 꼭대기에서 횃불을


들고 있었다. 횃불 아래서 작은 유리 같은 게반짝였다. 누군가 망원경
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듯했다.

횃불을 발견한 붉은 망토가 삼각돛 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제들이 놈들을 모두 저승으로 보내줬어."

조타수가 말했다. 하지만 삼각돛 섬 꼭대기에서 누군가 횃불로 단어를


그리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KILL YOU!"

조타수가 신호를 해독하고 천천히 발음했다.

"놈들의 공격 신호야. 우리 형제들이 놈들을 해치우는 데 실패했군."

붉은 망토가 포도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운명을 바꿀 엄청난 보물을 두고 저승으로 떠나기도 힘들겠지."

붉은 망토는 자신의 머스켓 소총을 점검하고, 그것을 높이 들어 어느


새 구름 사이로 나타난 이지러진 달을 겨냥하며말했다.

"페드로는 죽었다. 하지만 놈들은 살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보물


선을 발견했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삼각돛 섬 방향에 보트들을 흩어 띄우게 했다. 그


리고 유리눈알 일당이 보물밭에 접근하지 못하게 각보트에 네 명씩 태
워 경계를 맡겼다. 경계조들은 보트 안의 불을 끈 뒤 머스켓을 쥐고 보
트에 기대앉아 삼각돛 섬 쪽을살피며 사이좋게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
다.

삼각돛 섬 꼭대기의 횃불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살아남은 유리눈알


일당은 들개들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해안의형제들은 음식
과 술을 먹느라 우리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유리눈알이 오늘밤 공격해올까요?"

나는 바닷바람에 축축해진 빵을 뜯으며 낮게 감초 씨에게 속삭였다.


녀석들이 들어도 우리말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지만주의했다.

"하이에나 같은 녀석이니까 일생일대의 먹이를 두고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야.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낮이겠지. 하지만오늘밤이 더 좋겠
지."

"그럼 우린 어떡해야죠?"

마치가 감초 씨에게 물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야. 어느 편을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군. 이럴 땐 바비가 그립군."

"바비는 지금 다른 보트에 타고 있어요."

"그는 늘 현명한 생각을 해왔지.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는


데."

"제게 방법이 있어요."

마치는 주위에 떨어진 작은 판자 조각에 우리 집에서 가지고 온 다용


도 칼로 짤막한 글자를 새겼다. 판자 조각을 치노의입에 물렸다. 마치
가 눈짓을 하자 치노는 쥐도 새도 모르게 보트의 뱃전을 따라 쪼르르
달려갔다. 보트들이 거의 맞닿아있었기 때문에 쉽게 바비에게 도달한
치노는 잠시 후 돌아왔다.

치노의 입에는 조금 전의 판자 조각이 물려 있었다. 마치가 그것을 얼


른 빼서 뒤쪽을 살폈다. 마치는 뜻밖이란 듯 커다랗게눈을 뜨고 있었
다.

"왜 그래?"

"이것 봐요!"

마치가 판자 조각을 감초 씨에게 건넸다.

"일생일대의 요리를 두고 떠날 수는 없지요. 두 손님을 몰아내고 우리


자신을 위한 요리를 들고 싶습니다."

바비의 메시지는 이랬다.

"이게 무슨 뜻이죠?"

"우리도 싸우자는 뜻이야."

"미쳤어요! 바비답지 않아요!"

"당연하지. 엄청난 보물을 발아래 묻어두고 바비도 어쩔 순 없었을 테


니까. 어쩌면 이게 가장 이성적인 생각인지 몰라."

감초 씨도 우리의 바로 발밑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보물선 앞에서


이성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턱없이 숫자도 부족하고 무기조차 없어요."

확실한 우리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제 감초 씨, 나, 마치, 김


씨 그리고 바비 다섯뿐이다. 지금 상황으로선 다른선원들의 생각이 어
떤지는 물을 수조차 없다. 계획이 들통날 수 있고, 그들은 언제 맘이
바뀔지 모르는 이들이니까.

"유리눈알은 반드시 공격해올 거야.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


야."

감초 씨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맣게 속삭였


다.
17. 세 편으로 나뉜 전투

해적들은 촛불들 사이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다섯 번째 올라온 망 안


에 든 상자를 깨부수자 에콰도르의 금으로 만든 대형주화보다 값진,
콜롬비아의 에메랄드 원석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놈들은 진흙도 걷어내지 않은 에메랄드 원석을 두 손에 움켜쥐고 기쁨


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해적 소굴에 가서 창자와 뼈가녹도록 마셔댈
술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줄 알면서도 덤비는 노름판,
그리고 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즐거움들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
리라.

지금껏 올라온 보석과 에스쿠도 금화, 그리고 8레알 만으로도 녀석들


에겐 충분할 정도였다. 녀석들이 직급에 따라 고루나누어가져도 해적
생활 최대의 배당 몫이 될 테니깐.

"이번엔 나도 모건(*헨리 모건. 최대의 성공을 거둔 버커니어 해적 선


장)처럼 땅을 살까봐. 이젠 나도 저축을 좀해야겠어."

"장화를 나누어가질 때마다 넌 하룻밤 새 거지가 되었지. 많은 돈을 어


딜 가서 그렇게 다 써버렸어?"

놈들은 즐거워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트 하나 가득 수 세기 전의 진


귀한 보물들이 들어차자 놈들은 보물을 메릴 호로옮겼다. 예닐곱 정도
는 메릴 호에 남아 보물을 지키고 나머지는 보트로 되돌아왔다.

잠수용 플래시와 산소통을 지니고 내려간 해적의 밧줄에서 다시 툭툭


신호가 왔다. 기중기가 급히 묵직한 망을 끌어올렸고 망가득 이끼 낀
상자들이 올라왔다. 놈들은 탐욕스럽게 눈을 번뜩이며 궤짝을 도끼로
부쉈다. 이번에는 원석이 아닌 손질이끝난 보석들과 장신구, 펜던트들
이 쏟아졌다. 식민지 총독이 스페인 왕궁으로 보내는 보물들 같았다.
놈들은 브로치를 가슴에달거나, 여러 겹으로 된 목걸이를 목에 걸어보
며 아가씨처럼 아양을 떨거나 공작부인처럼 우아한 척 해대며 배꼽을
잡고즐거워했다. 우리는 녀석들을 부러워하며 촛불 아래 빛나는 보석
들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찬물을 끼얹듯, 삼각돛 섬 방향으로 약 3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서 보트 한 척이 고요히 다가오고 있었다. 삼각돛섬 어디선가 바다쥐
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유리눈알은 배가 아파 도저히 참
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바다쥐들은긴장한 채 일제히 무기를 들고
보트 바닥에 엎드렸다. 감초 씨와 바비 또한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둘은 놈들처럼 얼른보트 바닥에 웅크리며 머뭇거리고 있는 나와 마치,
그리고 김 씨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우리 셋도 납작하게 엎드렸
다.

보트는 어둠을 타고 고요하게 미끄러져왔다. 노를 젓지도 않았고, 보


트에 탄 사람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보트를 엄폐물 삼아 보트 뒤에서 헤엄쳐서 다가오고 있어!"

경계를 맡고 있던 해적 하나가 외쳤다.

"보트를 박살 내버려!"

두목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계조들은 언덕 뒤에 매복해 있던 웰링턴 장


군의 저격병들처럼 한꺼번에 보트들에서 일어나 다가오는보트를 향
해 머스켓 소총을 갈겼다. 다가오던 보트의 선미가 날아가고 키가 떨
어져 나갔다. 하지만 보트는 멈추지 않고다가왔다.

경계조들이 쏘고 몸을 낮추자 우리 쪽에 있던 해적 사수들이 일어나


다시 갈겼다. 밤이었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보트를 맞추기쉽지 않았지
만 두 번째 일제 사격에 보트 앞머리가 쪼개지며 목재와 판자들이 날
아갔다. 하지만 보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다가왔다.

"싸가지 없는 녀석! 싸가지 없는 녀석!"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욕을 내뱉었다. 장전을 끝낸 앞의 해적들이 다시
세 번째 사격을 퍼붓기 전이었다. 보트 안에서 버클구두를 신은 작은
발이 나타나 이리저리 내젓는 것이 보였다.

"멈춰! 응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

붉은 망토는 사격을 멈추게 하고 다가오는 배를 살폈다. 노 젓는 소리


도 없이 보트가 다가왔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 작은배는 조류에 떠
밀려오고 있었다.

촛불을 비추자 보트 안에는 두 팔이 뒤로 감긴 채 바닥에 묶인 프랑수


아가 타고 있었다. 재킷은 어디로 달아나고 단추가풀린 셔츠만 걸친
녀석의 윗옷과 몸뚱이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녀석이 재갈이 물린 채로 무슨 말을 하느라 욱, 욱 댔다. 녀석 옆에는


흰 헝겊으로 친친 감은 아르마냑 한 병이 뒹굴고있었다. 헝겊 위로 기
다랗게 접은 종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두목이 재빨리 재갈을 벗겨내
고 포박을 풀어주자 프랑수아녀석이 브랜디 병을 건넸다.

"노, 놈의 전갈이에요!"

녀석은 아직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두목을 올려다보며 입


을 뗐다. 붉은 망토는 병의 헝겊을 풀고 기다랗게 접은메시지를 펼쳐
읽었다. 그러고 나서 짙은 어둠 속에 묻힌 주위 섬들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쓰여 있지, 대장?"

조타수가 묻자 붉은 망토는 메시지를 조타수에게 건네고 불안스레 소


총의 격철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분명 떨고 있었다.

"우리가 찾던 보물선을 드디어 찾아주어 고맙다. 삭아빠진 닻줄이나


녹 슬은 대포, 싸구려 술 따위를 약탈하는 바다쥐 같은네 놈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을 엄청난 재화 앞에서 맘껏 즐거워하라. 하지만 동이
트기도 전에 바로 그곳을 너와 네형제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줄 테다.
태양의 영광은 바다쥐 같은 네 놈들에겐 어울리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내일의 태양은 결코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절망하거나 즐거워
하거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갈 것이므로 기왕이면 즐거워하라. 소령
Lee."

조타수가 메시지를 읽고 촛불로 태워버렸다. 유리눈알은 과거의 해군


함장 시절의 직함을 서명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놈들은 몇 명 쯤 남아 있었지, 프랑수아?"

"간부 선원 네 명과 잠수부 두 명, 그리고 바닷개(*경험이 풍부한 뱃사


람) 놈들 일곱과 자루걸레 같은 놈 셋 쯤됐어요."

"간부급 선원은 어떤 놈들이었지?"

"눈이 사팔뜨기 같은 털북숭이 녀석과 그를 삽살개처럼 따르는 항해


사, 선의처럼 보이는 콧수염, 단도를 표창처럼 다루는 물찬 제비같은
녀석이었죠. 콧수염 녀석의 저격 솜씨도 만만찮았지만 선창구멍이 하
나만 온전한 녀석은, 미안하지만, 대장과맞장 떠도 나무랄 데 없는 솜
씨였어요. 놈들은 삼각돛 섬의 꼭대기 바위틈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하
고 올라가는 우리들을하나씩 떨어뜨렸죠. 대부분 한쪽 선창구멍만 있
는 녀석의 총질에 밧줄 춤(*밧줄 춤을 추다는 교수형 당하다는 뜻)도
못추고 가버렸죠. 놈들은 형제들의 무기를 전부 건져 다시 올라갔어
요."

"뱃바닥 물 같은 소리 그만 해, 프랑수아. 젠장 맞을 니 눈깔!"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해적 선목이 애송이에게 욕을 퍼붓고 대장을


위로했다.

"떨 것 없어, 알프레드 코클린. 넌 늘 네 형 토미보다 나았어. 우리가 먼


저 놈들을 치면 돼. 세 번째 원정대는 내가맡을게. 대장은 여기서 편안
하게 달콤한 장사를 끝내면 돼."
하지만 나는 중요한 사실을 눈치 챘다.

"당신이 바로 토머스 코클린의 동생이에요?"

나는 뜬금없이 대장에게 물었다.

"네가 읽은 해적의 역사책에선 나에 대한 평가는 어땠지?"

대장이 내게 물었다. 이들의 대장이 바로 해적 토머스 코클린의 동생


이라니.

"당신에 대한 평가는 단 한 줄도 나타나지 않아. 토머스 코클린만 나타


나지. 토머스 코클린에게 해적 동생이 있었는지조차몰랐어."

나는 습격해올 유리눈알 탓에 겁에 질려 있는 놈의 신경을 괜히 건드


려놓고 말았다.

"흥. 그래? 난 그 따위엔 관심 없어. 내겐 현재의 영광만이 중요하니


까."

그는 머스켓의 총신 내부를 꼬챙이로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


기를 점검했다.

"엔디 아저씨. 그럼 최고의 바닷개들과 천막기둥(*육지에서 활동하는


해적) 경험 있는 형제들만 데리고 삼각돛 섬으로가줘요. 여긴 되도록
빨리 정리하죠. 이따 느긋하게 독신자의 모험 호에서 놈이 보낸 브랜
디를 뱃밥삼아 즐겨보죠."

"놈의 명복을 빌며 말이야. 돌아올 때는 놈의 머리를 가져오지."

엔디라는 자는 싸움에 이골이 난 잔인하고 대범한 자들만 뽑아 보트


다섯 대에 나누어 태웠다. 그리고 어둠을 방패삼아 소리없이 노를 저
어 삼각돛 섬 쪽으로 멀어져갔다. 하지만 이슬라 데 피노스 호가 가라
앉은 바다 위에는 여전히 절반 정도의악당들이 남아 있었다.
금으로 만든 머리띠와 팔찌, 스페인 문장이 새겨진 원판과 줄이 모두
금으로 된 체인, 금으로 된 훈장, 은으로 된담뱃갑, 금으로 된 동전함,
크기가 다양한 금화들과 사금이 든 가방…….

끌어올린 궤짝과 보석 상자들이 보트가 가라앉을 정도로 차오르자 두


목은 메릴 호로 두 번째 운반 지시를 내렸다. 해적들은가장 가까운 데
정박해 있는 메릴 호로 노를 저어가 상자들을 옮겨놓고 곧 되돌아왔
다.

비바람은 잦아들어 있었다. 이 세계의 밤하늘엔 스무 하루 달이 떠 있


었다. 짙고 두꺼운 구름들은 군도 쪽으로 달려갔다.만조가 된 바다는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했다. 삼각돛 섬으로 간 일행들은 쥐도 새도 모
르게 절벽을 기어오르는지 조용했고,난파한 보물 함대 가운데 하나를
우리의 발밑에 둔 고요의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우리의 것이 아닌 게 답답하고 아쉬울 뿐이었다.

난파한 갤리언선으로 내려간 이들이 화물창을 뜯어내는가 보았다. 세


번째 보물을 망에 매달고 신호를 보내왔다. 기중기의모터가 돌고 도르
래가 한참이나 끽끽댔다. 우리는 기중기에 힘을 보태기 위해 두 손으
로 밧줄을 끌어올려야 했다. 이번에는관처럼 긴 궤짝이 올라왔다. 조
타수가 그것을 도끼로 쪼개자 모래가 쏟아지다 금괴가 미끄러져 나왔
다. 놈들은 달빛에 빛나는금괴를 양 손에 쥐어보다 품에 꼭 안고 춤을
추었다. 금괴에 이어, 대형 금화가 넣어진 궤짝이 올라왔다. 그 다음엔
먼젓번에 끌어올려진 것보다 훨씬 큰,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궤짝이
떠올랐다. 그 궤짝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야 할 만큼무거웠다. 단도
로 뚜껑을 따내자 풍뎅이 같은 빛깔을 내는 녹보석과 사탕 알 만한 자
색 보석, 흑진주목걸이, 엄지손톱만한블루 다이아몬드와 새끼손톱 크
기로 잘라낸 무색 다이아몬드, 토파즈…… 에메랄드로 뒤덮인 십자가.
건진 것들 가운데서도최고의 것들이었다. 보석들은 달빛을 받으며 숨
을 쉬는 것처럼 아름답게 빛났고, 주위의 악당들의 얼굴마저 오색 천
사의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녀석들 사이엔 위그노 해적(*프랑스 개
신교파 해적.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식민지 연안을공격했다)의 후예
가 많았을 텐데도, 스페인 보물이 나오자 가톨릭교도 흉내를 냈다. 그
들은 감탄을 잃고 넋이 나간 채달빛과 보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성호를
긋고, 에메랄드 십자가를 품은 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바다 밑에서 다시 보물 상자를 끌어올리라는 신호가 왔다. 기포가 뽀


글뽀글 올라오는 수면을 향해 모두 고개를 돌렸다.해적들은 더욱 기대
에 찬 표정으로 낚싯줄처럼 드리워진 밧줄 끝을 바라보았다. 릴을 감
는 낚시꾼이 이번엔 어떤 대어가올라올까, 기대하는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뽀글뽀글, 물방울과 함께 무언가 수면으로 붕 떠올랐다. 놈들의 얼굴


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올라온 것은 천국의보석이 아니라 이
미 지옥의 손길이 다녀간 동료의 시체였기 때문이다. 물질을 위해 내
려갔던 해적은 오른쪽 경동맥이 잘린 채등을 보이고 둥둥 떠 있었다.
수도 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혈관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수면을 붉게
물들였다.

"어떻게 된 거지?"

핏기가 사라진 조타수가 입을 열었다.

"밑으로 내려간 형제들끼리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서로 가로채기 위


해 싸운 것일까?"

"우리 형제들은 결코 그럴 리 없어."

악당들은 이렇게 말을 주고받았지만 그들의 불안은 역력했다. 잠시 후


또 다른 물방울들이 5미터 정도 떨어진 보트 옆에서떠올랐다. 놈들은
이성을 잃고 다닥다닥 붙은 보트들을 징검다리 삼아 그쪽으로 달려갔
다. 시체 하나가 먼젓번과 비슷한모습으로 떠올랐다. 한 해적이 노로
시체를 끌어당겼다. 몸을 뒤집고 촛불을 가져갔다. 촛불 밑에 공포에
질린 창백한얼굴이 드러났다.

"갑판장 코너야."
누군가 말했다. 감초 씨는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보트에서 그들의 행
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뭔가를 생각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다섯은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저 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감초 씨는 이미 판단을 끝낸 것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뒤로 물러나라


고 눈짓을 했다. 그가 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가온 듯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하고 맨 뒤의 보트로 물러났다. 촛불이 미치지 못하


는 우리 뒤편에는 짙은 어둠이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숨을 죽인 채 감
초 씨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세 번째 시체가 또 다른 보트의 뱃머리 쪽에서 떠올랐다. 시체의 발목


에는 밧줄이 감겨져 있었다. 난파선을 향해 내려갔던세 번째 해적이었
다. 놈들은 재빨리 다른 밧줄을 잡아당겼다. 잠수부의 허리를 묶어놓
았던 밧줄이었다. 하지만 그 밧줄은올라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잠수부 녀석이야!"

이들 가운데 성질이 급한 다섯 명이 한꺼번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때다 싶어, 우리 넷은 감초 씨의 눈치를 살폈다. 감초씨는 고개를 저었
다.

잠수부의 반란이 아니면 뭘까? 나는 그제야 진실을 알아챘다. 해적들


의 산소통은 하나도 올라오지 않았고, 잠수부의산소통에는 아직 산소
가 남아 있다. 그 짧은 시간차를 두고 한 사람이 세 사람을 연달아 죽
이고 산소통 세 개를 가로챌 수있을까?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이들 가운데 머리가 가장 명석한 두목이 뭔가


를 알아챈 듯했다.

"습격이다!"
갑자기 붉은 망토가 한손에 든 소총을 하늘로 쏘며 외쳤다. 총소리가
밤의 고요를 갈라놓았다. 바로 그때 감초 씨가엄지손가락으로 바다 속
으로 뛰어내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놈들이 무기를 들고 보트를 뛰어
다니며 부산을 떨어대는 바로 그순간 우리는 어둠 속으로 자맥질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떠 있는 작은 산호초 섬을 향해 죽어라 헤엄쳤다. 어
둠이 우리를가려주었고, 놈들은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들은 바다 밑을 향해 맹렬히 총질을 해대고 나서 물속으로 첨벙첨벙뛰
어들었다.

우리는 아직 놈들의 사정권을 충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망토의 형제들에게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전투에서도겪어보지 못했을
이상하고 힘든 형태의 전투가 막 펼쳐지고 있었다.

"감초 씨는 어떻게 알아차렸죠?"

마치가 감초 씨에게 물었다. 수영을 못하는 치노는 마치의 머리 위에


불안하게 앉아 있었다.

"단 하나의 산소통도 떠오르지 않은 걸 보고 눈치 챘지. 유리눈알은 바


다 밑으로 약 네다섯 쯤 보냈을 거야. 하지만산소통이 충분하지 않았
어. 그래서 잠수부 둘과 물질에 능한 선원 두셋을 산소마스크로 나누
어 마쉬게 하여 보물밭까지접근시켰겠지. 그들은 보물을 인양하고 있
던 잠수부와 한 편이 돼 잠수 중인 해적들을 처치하고 산소통을 빼앗
았겠지."

"대여섯 마리 상어와 나무판자에 탄 수십 마리 개들의 싸움 같군요."

김 씨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여섯 밖에 안 되는 잠수부들은 물속


을 맘대로 젓고 다니며 해적들의 보트를 갈고리로잡아당겨 뒤집거나
보트 바닥에 구멍을 내 가라앉혔다. 혼란 속에서 촛불들마저 하나둘씩
꺼져버리자 싸움은 잠수부들에게 더욱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아직 보
트에 남아 있는 해적들은 수면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대거나 단도를
던지거나 커틀래스를 거꾸로쥐고 미친 듯 찍어댔다. 그렇게 하여 잠수
부 하나를 떠오르게 하는 데는 성공이었다.

복수를 하듯 잠수부들은 수면에서 헤엄치는 녀석들의 발목을 잡아당


겨 물귀신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러자 허리에 밧줄을감고 단도를
거꾸로 움켜쥔 수십 명의 해적들이 개떼처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보
트 위의 형제들은 내려간 형제들의 허리에묶은 밧줄을 쥐고 있었다.
잠수부들을 잡아 올리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간 형제들이 숨이 막혀 밧
줄을 잡아채면 그들은 황급히밧줄을 잡아당겨 물밖으로 나와 숨을 쉬
게 했다.

마침내 단도를 거머쥐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간 용감무쌍한 해적들


이 나머지 잠수부들의 목을 베어 건져 올리는 데 성공했다.그들이 수
면으로 피가 뚝뚝 듣는 적의 머리를 동료들에게 들어보이자 무법자들
은 다시 기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난데없는포격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던 킨 세일 호에서 포탄 하나가 어두운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와 보트들과 헤엄을 쳐 도망치는 우리들사이에 떨어졌
다.

"유리눈알 일당이 킨 세일 호를 접수했군. 삼각돛 섬이 조용한 게 이상


했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어."

감초 씨가 말을 맺자마자 킨 세일 호에서 두 번째 포탄이 날아와, 기세


가 등등해진 해적들 한가운데 떨어졌다. 보트 하나가쪼개지며 수면으
로부터 튀어 올랐다. 애써 건져 올린 보물들을 실은 보트마저 위험한
상황이었다. 보물을 가득 실은 보트에올라탄 두 해적은 보트가 포탄에
맞는 걸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하지만 날아온 세 번째
포탄이 보물을 실은보트 바로 앞에 떨어졌다.

우리는 다섯 명이 엉덩이를 겨우 붙이고 앉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산호


초 섬 꼭대기에 올라앉아 일이 돌아가는 모습을지켜보았다. 킨 세일
호의 상갑판 현측에서 시작된 포격이 붉은 망토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킨 세일 호의 갑판에서 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갑판에 나타난 그림
자는 그들뿐이었는데, 포격을 담당하기 위해 삼각돛섬에서 킨 세일 호
까지 헤엄쳐 간 것 같았다. 셋은 대포 주위에 달라붙어 있고 나머지 한
선원은 킨 세일 호의 선수에웅크리고 있었다.

선수에 웅크린 선원은 메릴 호의 선미에 진을 친 두 해적과 겨우 30미


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총질을 해대고 있었다.

촛불을 모두 꺼버린 보트들 한가운데서 드디어 긴 머스켓을 든 그림자


가 일어섰다. 붉은 망토였다. 네 번째 포격을 위해 킨세일 호의 사수가
머리를 수그렸고, 조수가 점화 장치에 불을 붙일 찰나 머스켓이 작열
했다. 사수의 목이 꺾이며 대포가불을 뿜었다. 포신을 떠난 포탄이 수
면 위로 빨랫줄처럼 날아와 맨 가의 보트 네 대를 줄줄이 쪼개놓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15kg급 대포의 화력에 위기를 느낀 해적들은 포격으로부터 보물밭을


지키기 위해 소총을 들고 메릴 호의 상갑판을 향해난사했다. 하지만
오히려 소총을 쏘아대는 해적들이 하나 둘씩 보트 너머로 쓰러졌다.
전혀 짐작도 못할 방향에서, 희미한달빛에 드러난 해적들의 그림자와
불 뿜는 총구를 표적삼아 유리눈알의 저격이 시작된 것이다. 붉은 망
토는 잔뜩 긴장하고저격 방향을 둘러보았다. 하나는 분명 삼각돛 섬의
해안에서 불을 뿜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저격 방향을 읽을 수조차없
었다. 가까운 다른 섬으로 옮겨간 유리눈알은 동굴이나 바위 뒤에서
저격을 하며, 총구 끝의 불꽃을 가릴 수 있는 놀라운방법을 고안해낸
것 같았다.

해적들은 어둠 속의 치명적인 저격의 표적이 된 상태에서도 보물밭을


떠나지 못했다. 원모양으로 띄운 보트들을 방어벽 삼아이슬라 데 피노
스 호가 가라앉은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린 여기서 왼쪽으로 헤엄쳐간다. 킨 세일 호의 선미를 돌아 메릴 호


로 접근하는 거지."
"메릴 호엔 해적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요?"

"대포 세례를 받는 동료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거야."

우리는 킨 세일 호의 대포를 조작하는 나머지 두 선원들의 포격과 두


방향에서 해오는 유리눈알 일당의 효과적인 저격을 틈타, 산호초 섬을
떠났다. 킨 세일 호까지 약 200미터를 헤엄쳐갔다. 킨 세일 호의 고물
에 다다르자 난바다 쪽으로 약40미터 떨어진 곳에 떠 있는 날렵한 검
은 배의 그림자가 보였다. 스쿠너 독신자의 모험 호였다. 우리는 독신
자의 모험호와 킨 세일 호 사이를 지나 난바다 쪽으로 30미터쯤 곧장
나아갔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 정 반대편이었는데, 자칫하면메릴 호
선미에서 킨 세일 호의 뱃머리를 향해 총질을 해대는 해적들에게 들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직각 방향에는 메릴 호와 킨 세일 호가 한 줄로 떠 있었고, 그


너머의 바다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화약들이작열했다.

만조였기 때문에 우리는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메릴 호의 측면으로 다


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붙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메릴 호의 선미로 헤
엄쳤다. 고물 갑판 끝에서 총을 쏘아대던 두 해적 중 한 녀석이 우리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있었다.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녀석은 총을 쏘
다 꼬꾸라져 바다로 퐁당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난간에 걸쳐 있었다.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키의 양쪽에 손으로 붙들 만한 가로 보조재들


이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는 보조재를 손끝으로 붙들고뜬 채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떻게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저 위 상갑판에서
악당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갑판의보물을 지키던 그들은 반대편 뱃
전에 서서 유리눈알 일당이 저격해오는 쪽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거
나 그곳을 향해 의미없는 총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미 포격은 멈춰 있었다. 붉은 망토의 탄알에 포격을 담당한 선원들


이 모두 꼬꾸라졌거나, 메릴 호 선미에서 쏘아대던 두해적의 총질에
나가떨어진 것 같았다.
포격이 멈춘 것은 우리에게 불리했다. 옆에서 터지는 포격의 굉음이
메릴 호 갑판에 있는 악당들의 신경을 한동안분산시켜놓았기 때문이
다. 우리는 킨 세일 호나 해적들의 스쿠너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마련
해오지 못한 걸 후회했다. 하지만소총이나 플린트락을 가지러 돌아가
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고, 그것들을 물에 젖지 않게 가져오기는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몸이 가장 가벼운 마치가 치노와 함께 배에 기어오르기로 했다. 우리


는 마치의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물속에서 이미 신발을잃어버린 마치
는 키를 선체에 연결하는 가로 보조재들을 맨발로 밟고 올라갔다. 마
치는 키 양편에 뚫린 두 개의 포문 가운데하나로 기어들어가는 데 성
공했다.

"놈들의 동정을 살피고 올게요. 그리고 무기고에 접근할 수 있다면 무


기를 가져올게요."

"무기는 중앙부 상갑판 바로 아래 칸에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을지


도 몰라."

감초 씨가 말했다.

"치노가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마치는 곧 배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마치의 보고에 따라 다음 행동


을 결정하기로 하고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배에달라붙어 있었
다.

10분 쯤 지난 뒤 포문이 열리며 마치가 고개를 내밀었다.

"상갑판에서 배를 지키고 있는 녀석은 모두 넷이에요."

"고물 갑판에 죽어 있는 녀석까지 합해 예닐곱 정도는 된 것 같았는


데? 냄비에 들어갈 멸치 숫자를 세듯 세보았다고. 한두명 정도는 어딘
가에 처박혀 있을 거야."
바비가 의문을 던졌다.

"쓸 만한 무기는 이것 밖에 구할 수 없었어요. 하나는 치노가 무기고에


서 물어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선장실에서구했어요. 놈들이 무
기를 죄다 쓸어갔어요."

마치는 단 두 자루의 플린트락과 한 두어 번 쏘고 바닥날 점화약을 건


넸다.

"나머지는 각자 들어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걸 구하면 돼. 상갑판으로


나가는 출구 두 곳과 뱃머리 쪽에서 놈들에게 한꺼번에달려들어야 해.
놈들이 배 안에서 날뛰게 놔두면 우린 끝이야. 나와 바비는 놈들과 가
장 가까운 중앙부 상갑판 계단을 통해나가겠어. 나머지는 선미 쪽 상
갑판 출구와 뱃머리를 맡아."

"제가 뱃머리를 맡을게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네가 플린트락을 하나 가져가. 난 솜씨가 형편없으니 놈들을 위


협할 때나 이걸 쓸 거야."

나머지는 모두 포문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는 점화약을 모조리 털어넣


어 탄알을 잰 플린트락을 왼손에 거꾸로 쥔 채 수면밖으로 높이 쳐들
고 뱃머리 쪽으로 헤엄쳤다. 플린트락을 입에 물고 물결을 헤치는 이
물의 컷워터를 양손으로 붙잡고 두다리로 조이며 기어올랐다. 뱃머리
양쪽에 각각 두개씩 뚫린 선창 구멍 가운데 하나를 손으로 붙잡고 몸
을 옆으로 돌렸다.컷워터를 지지하기 위해 튀어나온 가로 목재에 발을
걸쳤다. 오른손에 플린트락을 옮겨쥐고 기움돛대의 아랫부분을 왼손
으로붙들고 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의 왼쪽 저 멀리에서는 두 편이 쏘아대는 총질 때문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바다 위에 퍼지고, 작열하는 불꽃들은 한강의불꽃놀이처럼 아
름답게 밤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양편에서 저격해오는 유리눈알 일당
을 소탕하기 위해 일부 해적들은 삼각돛섬으로 떼를 지어 헤엄쳐가고,
다른 일부는 삼각돛 섬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수풀의 섬'을 향해 보
트를 저어가고있었다. 붉은 망토와 나머지 해적들은 여전히 보트의 닻
을 단단히 내린 채 자신들의 바로 발밑에 잠긴 보물밭을 찰떡같이지켜
내고 있었다.

내 머리 위, 뱃머리에서 초기 발라드풍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후렴구


는 휘파람으로 멋지게 처리하고 있었다. 나와 불과1.5미터밖에 안 떨
어진 뱃머리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휘파람이 멈추고 끙, 소리가 들
렸고 나의 왼쪽 어깨를 스치며바다로 무언가 퐁 떨어졌다. 그리고 누
구에게나 낯익은 냄새가 공기 중에 나돌았다. 다시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상선들은 우리를 태우고 출항했네. 즐거운 미풍을 타고, 레고른을 향


해서 나흘이 지나 우리가 원했던 것은 오직순풍뿐……."

나는 머리를 약간 내밀고 앞을 내다보았다.

상선 출신으로 보이는 한 해적이 갑판 쪽으로 몸을 돌리고 '위안의 의


자'(*뱃머리에 튀어나온 목재구조물 위에 얹어놓은구멍이 뚫린 상자.
그 상자 위에 앉아 구멍을 통해 바다로 큰것을 떨어뜨려 보냈다)에 앉
아 개인적인 일을 보며 전투가벌어지는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상갑
판의 넷을 제외하고,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나머지 해적이었다.

녀석 너머 상갑판에는 눈이 뒤집어질 것 같은 보물 상자들이 뚜껑이


열린 채로 쌓여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보석들을 보자달아났던 용기
가 솟구쳤다. 이제 메릴 호는 떠다니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내 귀
에선 아빠의 인쇄소가 다시 힘차게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
다. 기대와 희망이 내 몸을 소용돌이쳤다. 녀석이 커틀래스를 거꾸로
짚고 일을 보고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기어 다가갔다. 놈의
옆으로 다가가 플린트락을 옆구리에 들이대고 낮게 위협했다.

"계속 노래만 처 불러! 그렇지 않으면 밑도 못 닦고 가게 될 거야!"


나는 최대한 해적 식 단어를 골라 겁을 주려 했지만, 영어 실력이 딸려
썩 잘 되지는 않았다. 영어로 욕을 하는 법부터배웠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럼 찝찝하지."

"무기를 놓고 배에서 떨어져."

"아, 시절은 힘들고 급료는 낮구나. 그녀(배)를 떠나렴, 조니야, 그녀를


떠나렴. 나 이제 짐을 꾸려 아래로내려간다네. 이제 우리가 그녀를 떠
나야할 시간……."

녀석은 음흉스럽게 다른 노래를 부르며 나를 급습하기 위해 기회를 살


폈다. 하지만 내가 틈을 주지 않자 커틀래스를 놓고배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녀석은 옛 뱃사람의 노래를 끝까지 부르며 내 눈치만 살핀
채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녀석이 뭔가를 발견하고 내 등 뒤 갑
판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에게 총을 겨눈 채 고개를 돌리고 어깨
너머 상갑판을살폈다. 선미 쪽 상갑판 출구에 마치와 김 씨가 나타났
고, 중앙부 상갑판 출구에는 감초 씨와 바비가 머리를 내밀고있었다.

마치는 커틀래스로, 김 씨는 선원용 도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감초 씨


는 왼손에는 플린트락을 다른 손에는 거꾸로 쥔 병으로무장하고 있었
고, 바비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요리사용 식칼을 들고 있었다.

바지도 챙겨 입지 못한 녀석이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자신의 형제들에


게 소리쳤다. 내가 방심한 탓에 급습하려던 계획이틀어지고 말았다.
나는 총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재빨리 녀석의 플린트락을 허리춤에서
뽑고 오른쪽 어깨로 놈을 밀어 배밖으로 떨어뜨렸다. 녀석은 바지도
못 추스른 채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등을 보이고 뱃전에 매달려 있던 놈들이 부리나케 무기를 챙김과 동시


에 우리들은 세 방향에서 악을 쓰며 무적의 악당들을향해 뛰어갔다.
나는 양손에 쥔 플린트락을 연속 쏴 나팔 총을 든 가운데 놈 하나를 쓰
러뜨렸고, 감초 씨는 플린트락이빗나가자 병을 던져 맨 오른쪽 놈의
머리를 맞추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놈 가운데 한 녀석이 쏜 총에 김
씨가 그자리에서 배를 움켜쥐고 꼬꾸라졌다.

감초 씨는 얼른 김 씨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김 씨를 쓰러뜨린


녀석이 감초 씨의 팔뚝을 붙잡고 커틀래스로 목을베려하자 치노가 뛰
어올라 놈의 얼굴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놈이 커틀래스를 쥔 쪽 팔
뚝으로 얼굴을 감싸자, 감초 씨는여전히 자신의 팔뚝을 잡고 놓지 않
는 놈의 팔을 세게 비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적의 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놈은소총의 총신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마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바비는 뒷돛대 아래에 주저앉았다. 커틀


래스를 쥔 마지막 녀석이 바비의 목을 내리치려 하고있었다.

"뒤를 봐!"

나와 감초 씨는 갑판에 나뒹굴던 통을 세우고 소리쳤다. 놈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우리는 재빨리 통을 굴려 놈의 다리를쓰러뜨렸다. 녀석이
뒤로 홀라당 넘어지자 물러났던 마치와 바비는 무지무지한 욕과 악을
쓰며 한꺼번에 달려왔다. 번뜩이는무기보다 욕과 악에 기가 질려버린
녀석은 잽싸게 내빼 뱃전 너머로 몸을 날렸다. 녀석은 바다로 풍덩 뛰
어들어 아까뱃머리에서 개인적인 용무를 보던 놈을 따라 동료들 쪽으
로 달아났다.

"롱보트를 띄우고 화약통 두 개를 실어!"

감초 씨는 우리에게 명령하고 뱃머리로 뛰어가 메릴 호의 닻줄을 잘랐


다. 메릴 호가 서서히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넌 롱보트를 타고 가 독신자의 모험 호와 킨 세일 호를 가라앉혀. 그


렇지 않으면 놈들이 스쿠너나 브리건틴을 이용해추격해 올 거야. 이미
건져 올린 보물도 상당하거든. 조금 전 산호초 섬을 기억하지?"

"네."
"우리는 메릴 호를 그 산호초 섬 너머, 수풀로 우거진 섬의 뒤쪽 만에
숨길 거야. 여기서는 만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그곳에서 돛을 수리하
고 날이 밝는 대로 이 바다를 뜰 거야. 하지만 현재로선 여기서 멀리
달아날 순 없어. 전투 때문에돛이 성한 게 별로 없거든. 할 수 있겠지?"

"같이 가요."

나는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

"누군가 해야 해."

"알았어요!"

나는 화약 두 통과 도화선, 성냥을 싣고 오늘밤 운명을 마칠 두 척의


범선을 향해 미 군함을 침몰시킨 오카 특공기(*2차대전 말엽 태평양
해전에 나타났던 일본의 유인 미사일. 돌이킬 수 없는 폭탄에 탄 거나
다름없었다)처럼 두려움 없이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롱보트의 세로돛을 펼쳤다. 돛이 퍼덕거리며 롱보트가 벌써부터


물을 차고 나아가려했다. 롱보트의 고물 쪽에 앉아왼손으로 돛의 활대
를 쥐고 앞뒤로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가늠했
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단단히 키조종 막대를 붙들었다.
18. 어둠 속에 떠오른 그림자

수면을 훑고 섬들로 몰려가는 밤바람을 옆으로 안으며 나의 보트는 킨


세일 호를 향해 접근했다. 산탄으로 갈기갈기 찢긴돛들과 떨어져 나간
동삭, 비스듬히 걸쳐 있는 활대와 축 처진 도르래 장치, 맥없이 풀려버
린 삭구 들이 처참하게 매달린킨 세일 호는 앙상한 유령선처럼 떠 있
었다.

나는 통로 아래쪽에다 보트를 대고 닻줄을 킨 세일 호 난간 너머로 던


졌다. 닻줄을 타고 통로로 기어 올라가 짐을 끌어올릴때 쓰는 도르래
줄을 풀어 보트 바닥까지 떨쳤다. 다시 보트로 내려가 화약통에 묶인
줄에 갈고리를 걸고 갑판으로 올라와도르래 줄을 잡아당겼다. 나 혼자
끌어올리기에 화약통은 너무 무거웠다.

메릴 호는 조금 전 정박해 있던 위치에서 100미터 정도 달아나고 있었


다. 나는 간신히 끌어올린 화약통을 무기고로 통하는계단으로 데굴데
굴 굴려갔다.

바다 저 멀리서 해적들은 다시 촛불을 밝힌 채 잠수부들에게서 빼앗은


잠수복과 수중 플래시 등을 이용해 열심히 작업중이었다. 삼각돛 섬
쪽의 저격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해적 선목이 끄는 세 번째 원정대와
아까 떼거지로 헤엄쳐 간일행이 그들을 모두 잔인하게 소탕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삼각돛 섬에서 오른쪽으로 100미터 떨어진 수풀의 섬
해안에서반짝이는 두 총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날아
오는 탄알은 보물밭에서 작업 중인 붉은 망토의 부하들을 시체로만들
어 물 불은 핫도그처럼 수면에 띄워주거나 작업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
고 있었다. 나는 두 총구의 주인이 유리눈알 선장과엽총 사냥이 취미
인 선의의 것일 거라 확신했다. 세 팀으로 찢어져 포위 공격을 하던 유
리눈알 일당도, 이제는 수풀의섬으로 건너가 진을 친 일행만 남은 것
같았다.
나는 무기고의 바닥까지 어렵게 옮겨간 화약통의 뚜껑을 열었다. 돌돌
말린 도화선 끝을 화약 한가운데 묻고 뚜껑을 닫았다.도화선을 풀며
보트까지 내려가 출발 준비를 마친 다음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지지직! 심지가 타올라가자 나는 잽싸게 킨 세일 호의 옆구리를 밀어


보트를 멀어지게 했다. 검은 그림자처럼 떠 있는스쿠너를 향해 도망치
고 있을 때 내 뒤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렸다. 몸을 날려버릴 것 같
은 폭발의 여파로 돛이 후닥닥손에서 벗어나고 불꽃이 내 주위로 떨어
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킨 세일 호의 한가운데가 두 동강 난 채 V자를
그리며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다시 활대를 쥐고, 가라앉는
킨 세일 호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빨갛게 떠 있는스쿠너를 향해
다가갔다.

스쿠너의 갑판 위에서 두 번째 화약통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다.

보물밭에서 출발한 보트 두 대 중 하나는 이미 시야에서 모습을 감춰


버린 메릴 호를 쫓아가고, 다른 하나는 이쪽으로 빠르게다가오고 있었
다.

조금만 늦었다간 우리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


다. 나는 화약통을 스쿠너의 밑바닥까지 옮기는 걸 단념하고주돛대로
굴려갔다. 돛대 바로 밑에 화약통을 세워두고 도화선을 풀며 보트로
잽싸게 기어 내려왔다.

도화선 끝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바람은 다가오는 놈들의 보트 쪽으


로 불어댔다. 나는 보트 안의 노로 수면을 필사적으로저었다. 난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보트가 스쿠너의 옆구리에 달라붙
으며 나아가지 않았다. 노를 보트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스쿠너의 측면
을 두 손바닥으로 잡고 죽어라 옆으로 밀었다. 불타고 있는 킨 세일 호
의 불빛 때문에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소총을 쏘아댔다. 보트 뱃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죄다 덮을 것 같은 커다란 삼각모를 주워 쓴 시건방진
프랑수아 녀석도 보였다. 녀석은 자신의 키만 한 장총을 내 쪽으로 겨
눈 채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쳐대는 한 마리의고라니처럼 떨
고 있는 나를 향해 발사했다.

탄알들은 대부분 물속에 떨어지거나 롱보트의 세로돛에 구멍을 내고


빗나갔다. 하지만 저승사자를 실은 탄알 하나가 나의 바로왼쪽, 스쿠
너의 측면에 맞고 내 귓불에 끼운 은귀고리를 팅- 때리고 핑- 물속으로
떨어졌다. 유탄에 목을 맞아 갈 뻔했던나는 다시 보트를 스쿠너에서
죽어라 떠밀었다. 하지만 섬들 쪽으로 몰아쳐가는 바람과 파도 때문에
스쿠너의 옆구리에찰싹찰싹 달라붙는다. 내 몫의 엄청난 보물을 메릴
호에 실어놓은 채 폭발이 초읽기에 들어간 놈들의 배와 함께 가라앉고
싶지는 않았다. 탄알이 거센 바닷바람 때문에 변화구처럼 휘어지며 날
아왔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스쿠너의 고물까지 보트를밀어내는 데 성
공했다.

간신히 스쿠너의 옆구리를 벗어나자 스쿠너가 놈들의 보트를 시야에


서 가려주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곧돛을 리칭(*바
람을 직각방향으로 안으며 항해함)이 가능한 위치에 두고 섬들로 불
어가는 바람을 안을 수 있었다.

군도를 왼편에 두고 스쿠너의 선미로부터 무조건 곧바르게 수면을 미


끄러져갔다. 곧 뒤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놀란 나는상체를 숙이고 뒤
를 돌아보았다. 스쿠너의 갑판에서 무겁고 짙은 연기가 바람을 따라
배 밖으로 쏠리고, 붕괴된 주돛대는폭격을 맞은 공장 굴뚝처럼 넘어지
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연쇄 폭발은 없었다. 나는 눈썹이 휘날리
게 곧바로 나의 작은배를 몰아간 다음, 뱃머리를 난바다 쪽으로 돌려
야 할 지점에서 보트를 멈춘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다시 뒤를돌
아보았다.

보트를 타고 온 놈들이 자신들의 배로 기어올라 서둘러 불을 끄고 있


었다. 화가 난 프랑수아 녀석이 스쿠너의 난간으로달려와 '불덩어
리'라 불리는 둥근 수류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홈을 향해 공을 던지
는 외야수처럼 나의 보트를 향해던졌다. 나는 노를 들고 그것을 쳐 날
려버릴까 하다 무조건 바다로 다이빙했다. 하지만 '불덩어리'는 보트
선미에 맞고바다로 퐁 떨어지며 심지가 꺼져버렸다. 나는 물속에서 프
랑수아 녀석에게 가운뎃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려보였지만 18세기초
의 녀석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보트로 올라와 노를 이용해 보트의 방향을 바꾼 다음 활대를 붙


들었다. 바람이 거의 왼쪽 앞 방향에서 불어왔기 때문에난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활대를 놓고 난바다 쪽으로 노를 저었다.
스쿠너와 충분히 떨어져 있어,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고 메릴 호를 따라
갈 수 있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리칭이 가능해지자 다시 활대를 잡고
기우뚱 바람을안은 채 조종 막대를 붙들었다. 연기만 피어오르는 스쿠
너를 오른편에 두고 론바르바도와 삼각돛 섬 사이로 나아갔다.

뱃머리를 오른쪽으로 튼 뒤 뒤쪽에서 불어오는 순풍을 안고 메릴 호가


사라진 쪽으로 보트를 진행시켰다. 조류가 바뀌어바닷물이 천천히 군
도에서 빠져나갔고, 조금에 가까워진 달은 창공을 가로질러 서편 바다
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삼각돛 섬을오른편에 두고 얕은 바다를 지났
다. 메릴 호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 해적들의 보트를 만날까 두려웠
다. 하지만 나는 삼각돛섬을 지나치고,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던 수풀
의 섬 남동쪽 해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나의 오른쪽, 보
물밭에선아직도 간간히 한두 발 씩 쏘아대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만 한밤중에 비하면 심심해서 쏘아보는 정도에 불과했다.그곳에선 케
이크에서 타는 촛불들처럼 평온하게 횃불을 밝혀놓고 무법자들의 보
물찾기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긴 그림자를 남기며 흔들리는 도깨비불들처럼, 수십 개 횃불들


이 수풀의 섬 여기저기에서 춤을 추며 해안으로내려왔다. 해적들이 유
리눈알 일당을 찾아 섬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나는 살짝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수풀의 섬 뒤편해안으로 달아나기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그때 오른쪽으로 급히 빠져나가는 조류가 보트를 오른쪽으로 끌고 갔
다. 보트는하필이면 놈들의 보물밭으로 머리를 틀고 한참이나 떠밀려
갔다. 겨우 3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수풀의 섬 곶이 나타났고,낯익은 우
리말 상소리를 내뱉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소리가 그렇게 반
가운 적도 없었다. 우리 일행인 줄 알고기다리다 곧 나의 실수를 알아
챘다. 보물밭을 단념하고 도망치는 유리눈알 잔당이 내뱉는 욕지거리
였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반대편으로 뱃머리를 틀기 위해 죽어라 한쪽
노를 저었다.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썰물에 휩쓸린 보트는 난바


다 쪽으로 머리를 틀더니 다시 난바다 쪽으로 흘러갔다.수풀의 섬 곶
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 처지에서 돛은 오히려 방해가되었다. 활대를 놓아버리고
수풀의 섬에서 다가오는 유리눈알 잔당과 해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난바다 쪽으로 노를 저었다.내 앞에 왼쪽은 낮은 바위 절벽으로 덮이
고 오른쪽은 열대 나무로 뒤덮인 작은 바위섬이 다가왔다. 바위섬과
10미터 정도떨어진 오른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섬이 새끼 섬처럼 떠
있었고, 그 섬의 꼭대기에는 단 한 그루의 야자수만이 자라고있었다.
보트는 낙엽처럼 한 바퀴 돌다 조류가 약한 곳에 이르렀다. 메릴 호가
사라진 쪽으로 뱃머리를 틀려 할 때, 곶에소총을 든 세 그림자가 나타
났고, 그들 너머 저 뒤편에서는 해적들의 횃불이 나타났다. 메릴 호를
따라 나아가다간 유리눈알잔당이나 수풀의 섬에서 유리눈알 잔당을
찾는 해적들에게 들킬 수 있었다. 난바다 쪽으로 나아갔다간 보물밭의
해적들에게들킬 수 있었다. 곧 동이 터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을 따라 보트가 제 자리에서 빙빙 맴을 돌았다. 이러지도 저


러지도 못하고, 나는 곶 끝을 돌아보다 다시 앞을바라보았다. 그때 난
바다 쪽에서 구름이 밀려오다 번개가 바다를 때렸다. 아크등처럼 밝은
빛이 바다로 퍼지며 광활한 곳에점처럼 떠 있는 나를 두 편의 적들에
게 죄다 드러나게 만들었다. 바다 위에서 쿵쾅! 천둥이 쳤다. 또다시
번개가 바로앞, 작은 바위섬 너머 어딘가에 떨어졌다. 나무가 쪼개지
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며 뇌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이콩
알만 해져 뇌우가 몰아치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번개가 떨어지자
어둠속에 숨어 있던 이상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곧사라졌고 뒤이어 천
둥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번개에 드러난 그림자의 실루엣을 똑똑히 기억했다. 실루
엣은 인간의 옆모습을 하고 있었다. 삼각모를 얹은이마에 매부리코,
이빨이 모두 빠져 두 입술이 푹 꺼지고 주걱턱이 길게 튀어나온 사람
의 옆모습. 두 번째 번개가 떨어지자실루엣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바
로 유리눈알 선장이 그렇게 찾고 있었던 경도의 위치.'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이었다!

난파선의 판자에 올라 표류하는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같은 몰골을 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보물밭으로부터 일직선
으로 그어온 선을 내 머릿속에 그려두고, 바로 앞 탐욕스런 늙은 선장
의 옆얼굴로부터 일직선으로 그어온선을 머릿속에 그렸다. 놀랍게도
각각 위도와 경도를 나타내는 두 선이 직각으로 만나고 있었다. 나는
우연의 일치에 놀라,마지막 확인을 하려는 듯 그라나딜로 곶 쪽을 바
라보았다. 나로부터 북북서 방향에 그라나딜로 곶 끝의 등대 불빛이
흔들리고있었다.

나의 롱보트가 떠 있는 현재 위치가 유리눈알이 눈이 빠져라 찾던 바


로 그 지점이었다. 야후! 나는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지르려다 입을 틀
어막았다. 수풀을 헤치고 횃불들이 해안으로 내려왔고, 곶에 모습을
드러낸 유리눈알 잔당의 세 그림자는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곶
끝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곶 끝 그림자 하나는 소총 두
자루를 들고 있었고,그 옆의 땅딸막하고 옆으로 퍼진 다른 그림자 하
나는 어깨에 의문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소총 한 자루를 든 마지막그
림자는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곧 세 그림자는 메릴 호가 사라진 왼쪽 해안으로 내뺐다. 나 또한 횃불


을 들고 나타난 해적들에 들켰다간 바다 귀신 신세가될 게 뻔했다. 나
는 고양이를 만난 중병아리가 날개를 치며 달아나듯 양쪽 노를 저으
며'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섬'으로 도망쳤다. 보트를 해안의 바
위 틈에 숨기고 섬의 나무들 사이로 올라가 동정을 살폈다. 곶에 나타
난 해적들은저항력을 잃어버린 유리눈알 잔당을 찾아 족치는 걸 단념
하고 개떼들처럼 헤엄을 쳐서 보물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은 점점 밝아졌고, 번개와 천둥은 멎어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
자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산호초 섬들이 곳곳에서 머리를드러냈다. 후
두두, 나무의 넓은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를 들으며 비를
피한 채 나는 조금 전 내가 떠 있었던지점을 응시했다. 지금 내가 있는
섬과 수풀의 섬 사이를 빠져나온 썰물은 그 지점에서 커다랗게 천천히
맴을 돌다가 난바다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오른편에서 겨우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해적들은 보물을 실


은 보트 한 척을 스쿠너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해적들의 작업은 지
지부진해져 있었다. 그들이 건져 올린 물건들은 초저녁에 건져 올린
것에 비하면 부피만 많이 나갈 뿐값은 나가 보이지 않았다. 스쿠너로
건너가는 보트 안에는 도자기나 향료 병, 보석을 박은 마스크, 금제 칼
자루, 식민지의기념품들 따위가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은 채 얼마쯤 졸았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동이 터오고 썰물이 빠른 속도로 난바다로


빠져나가 해수면이 꽤 낮아 있었다. 물에 떠 있던나의 보트도 해안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내가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을 만났던 지
점의 물 색깔도 점점 파랗고 맑게바뀌었다. 비가 멎고 구름들이 빠르
게 군도 너머로 물러나고 있었다. 내가 떠 있었던 지점에 뱃길을 가늠
하기 위해 바다속에 박아놓은 것 같은 두꺼운 막대 끝이 나타났다.

'저게 뭐지?'

나는 부러진 막대 끝을 응시하며 시간이 더 흐르기를 기다렸다. 해수


면이 가장 낮아지는 조금이 내일이었기 때문에 해수면은평소보다 훨
씬 낮아질 것이 분명했다. 동쪽 수평선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동이 트
기 직전이었다. 튀어나왔던 막대가 약30센티미터 정도나 수면 밖으로
드러났다. 물이 빠질 때로 빠져나가 급류가 생기지 않았고 물의 깊이
가 그리 깊어 보이진않았다. 나는 웃옷과 신발을 벗고 물가로 나갔다.
부러진 막대를 향해 헤엄쳤다.
물속에 비스듬히 박힌 두꺼운 막대가 심상치 않았다. 막대를 붙든 채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눈을 떴다. 저 밑으로경사진 막대는 아래로
갈수록 점점 두꺼워졌다. 막대 아래 부분에 밧줄들이 엉켜 있었고, 바
로 밑에 악어의 아래턱처럼튀어나온 구조물이 보였다. 범선의 충각 같
았다.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막대는 기움돛대 같았다. 조금 더 내려
가 눈을커다랗게 뜨고 밑을 응시했다. 깊지 않은 바다 밑에 움푹 꺼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낯선 형태의
범선이 용골이 동강난 채 가라앉아 있었다. 그 배는 스페인의 갈레온
선과 아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앞뒤갑판의 높이를 줄이고 폭을 좁힌
날렵한 유선형이었고 배의 안전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장식이나 돌출
부 따위는 없었다.

바로 엘 드라곤 호였다!

나는 기쁨에 겨워 당장이라도 내려가 안을 뒤지고 싶었지만 숨이 막혀


왔다. 기움돛대를 놓고 수면으로 헤엄쳤다. 푸하아!참았던 숨을 내뱉
고 숨을 들이키자 바로 나의 앞,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섬'과
수풀의 섬 사이로 보트 한 척이다가오고 있었다. 보트 안에는 약 여섯
명 정도 되는 험악한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보트 선수에 등을 돌리고
탄 녀석의팔뚝에 새겨진 졸리 로저(*교차시킨 대퇴골과 해골로 나타
낸 해적의 상징)를 보고 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 나는 다시수면 아래
로 몸을 숨겼다. 메릴 호를 찾아 떠났던 해적들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
고 수면에서 겨우 1미터 정도 아래에 멈춘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잔인
한 무법자들의 보트는 한 마리 백상아리처럼 기움돛대를 스칠 듯 지나
쳐 보물밭 쪽으로멀어져갔다. 놈들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숨을 참다
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기움돛대를 붙든 채 어떻게 하면 저 아래의 물건들을 끌어올릴까


고민에 빠졌다. 감초 씨나 마치, 바비에게 찾아가 이사실을 알린 뒤,
기회를 봐서 이리 다시 올까? 하지만 도둑맞은 메릴 호의 보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해적들과,유리눈알 잔당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
았다.
'헨리 에이버리와 모건 식으로 하는 거야. 엘 드라곤 호를 과감히 단념
해야 해. 자제할 줄 모르고 약탈을 멈추지 않았던해적 선장들은 대부
분 교수형을 당했거든.'

저 아래 묻힌 모든 보물을 단념하고 잭 캐치의 사물함만을 챙겨 이곳


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보통 사물함처럼 위장하기위해 선장실
의 일반 사물함들과 함께 놔두었다는 유리눈알 선장의 말이 기억났다.
선장실은 보통 고물 갑판 바로 아래, 배의맨 뒤에 있다. 내가 기움돛대
를 붙들고 있는 맞은편, 선미에 선장실이 있다. 배가 V자를 그리며 가
라앉았기 때문에수면에서 그리 깊지는 않은 곳이다.

나는 선미를 향해 헤엄쳤다. 작은 물고기 떼가 둥지처럼 패인 바다 밑


공간에서 이리저리 평화롭게 지나다녔다. 고물 끝에선창이 나타나고
이끼가 덮인 창을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넘어진 집기들과 상자
들 틈에 찢겨진 선원복이 나풀거렸고 몇개의 해골들이 구석에 가라앉
아 있었다. 해골의 텅 빈 눈 속으로 작은 물고기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드나들었다. 물밖으로 나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열린 선장
실 창 하나로 몸을 디밀고 들어갔다. 수면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선창으로 새어 들어와 빗살무늬로 퍼져나가며 수백 년 동안 가라앉아
있던 무역선의 내부를 비추었다. 갑판으로 통하는 출입구쪽에 테이블
이 뒤집어져 있었고, 테이블 밑에는 항해 측정도구들과 무기들이 널려
있었다. 테이블 옆에 열린 원목 서랍장이보였다. 서랍장 너머에 크고
작은 함 네 개가 벽에 달라붙은 채 가라앉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가장 큰 직사각형 사물함을 열었다. 손으로 안


을 휘젓자 함 안에 든 것들이 부스러지며 개펄처럼변해버렸다. 서류뭉
치와 해도들을 넣어두었던 함 같았다. 첫 번째 함의 절반만한 검정 색
함을 열어보려 애썼지만 열리지않았다. 두 번째 함을 단념하고 그 옆
세 번째 함을 열어보았다. 어깨에 늘어뜨리는 장식 줄과 알이 큰 반지,
낯선문장이 새겨진 훈장 등이 나왔다. 내겐 별 가치가 없어 보였다. 함
들 가운데 가장 작은 네 번째 함에 손을 가져가려했지만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숨을 들이켰다.
이미 해가 솟아 있었다. 해적들은 난바다 쪽으로 약간 옮겨간 곳에서
작업하고 있었고, 스쿠너의 갑판에서는 벌써부터 돛대를갈아끼우고
있었다. 메릴 호가 사라졌던 수풀의 섬 해안 쪽에서 바람을 따라 낮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재빨리 숨을 들이마시고 수면 아
래로 헤엄쳤다.

널린 무기들 가운데 단검을 집어 들고 네 번째 함을 부수었다. 목재가


갈라지며 접혀진 망원경과 나침반, 사분의, 해시계,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는 데 쓰이던 아스트롤라베 등이 나왔다. 고대 항법에 대한 예
의를 표하기 위한 장식용 골동품들을넣어두던 상자이지 잭 캐치의 사
물함 같지는 않았다. 선장실엔 함이라곤 단 네 개 뿐이었기 때문에, 열
지 못한 두 번째함이 잭 캐치의 사물함임에 틀림없다. 나는 측면에 달
린 두 개의 손잡이를 들고 위로 헤엄쳐보았다. 꽤 무거운 함을 들고헤
엄쳐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함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헤엄쳤
다.

보트를 정박시켜둔 해안으로 헤엄쳐가 닻을 올리고 엘 드라곤 호의 선


미 쪽으로 보트를 저어갔다. 닻과 닻줄을 거머쥐고 다시침몰한 배 안
으로 들어갔다. 닻을 함의 한쪽 손잡이에 걸고 밧줄을 구겨 다른 쪽 손
잡이에 끼우고 매듭을 만든 뒤, 물밖으로 나왔다. 보트에 올라가 끙끙,
닻줄을 잡아당겼다. 한참 밧줄이 당겨지다 걸렸다. 창턱에 걸린 것 같
았다. 닻줄을보트에 팽팽하게 매고 다시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창턱에 걸린 함을 밀어 올렸다. 무거운 함이 간신히 배 밖으로빠져나
갔다.

다시 보트로 올라가 닻줄을 잡아당기고 있을 때였다. 수풀의 섬에서


웅성이던 사람들의 머리끝이 비쳤다. 그들은 메릴 호가사라진 해안 쪽
에서 조심스레 다가왔다. 굶주리고 겁에 질린 들개들 같은 몰골을 한
세 사람이었다. 유리로 된 눈알이 빠져어디론가 달아나버린 유리눈알
선장과 왈왈이, 그리고 체육복 차림의 제비였다.

나는 끌어올리던 닻줄을 놓아버리고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섬' 바로 옆에 떠 있는 조그만 섬 뒤편으로 허겁지겁보트를 저었다. 섬
의 뒤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닻줄이 팽팽해지며 보트가 더 이상 나가
지 않았다. 셋은 벌써 곶 끝으로다가왔다. 유리눈알은 해적들 쪽으로
망원경을 들이대고 동정을 살폈다. 그가 내 쪽으로 망원경을 들이대는
날에는끝장이었다. 아직 채 숨기지 못한 보트의 절반이 드러나는 위치
였기 때문이다. 저들에게 들키는 날에는 잭 캐치의 사물함은더 이상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재빨리 보트에서 내려 물가에 발을 디뎠다. 수심은 깊지 않았다. 필사


적으로 닻줄을 끌어당겼다. 물속의 함이 질질끌려왔다. 이때 유리눈알
선장은 망원경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스쿠너 쪽으로 옮기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계 방향으로돌려 수평선을 훑었다. 메릴 호의 행방을
좇고 있는 듯했다. 다시 망원경을 시계 방향으로 훑고 있었다. 내가 그
의 시야에잡히기 직전이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보트를 밀었고, 단
하나의 야자수만이 꼭대기에 자라고 있는 작은 섬 뒤편으로 겨우보트
와 나를 숨겼다.

몸을 숨긴 채, 함에 연결된 닻줄을 끌어당기며 잔당의 동정을 살폈다.


유리눈알은 시계 방향으로 죽 훑던 망원경을 갑자기멈추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뭔가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
맨 눈으로 자신의 앞쪽을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망원경을 갖다 댔
다. 그의 입가에 면도날처럼 희미하고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또
한'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을 발견한 것일까? 유리눈알은 망원
경을 수면으로 옮겨갔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엘 드라곤호의 기움돛대
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냉정을 잃지 않고 두 부하에게 뭔가를 명령
했다. 왈왈이와 제비가 왼쪽 바위해안으로 사라지더니 아르헨티나 국
기처럼 파란 줄무늬 돛을 단 롱보트를 끌고 왔다. 셋은 보트에 올라 조
금 전 내가 한차례 탐사를 마친 엘 드라곤 호를 향해 노를 저어갔다.

엘 드라곤 호의 위치에선 내가 숨긴 보트가 드러나게 돼 있다. 나는 보


트를 더 끌어당겨 옮긴 뒤, 닻줄을 잡아당겼다.드디어 잭 캐치의 사물
함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세 명의 들개는 부러진 기움돛대에
보트를 정박시켜둔 채, 저 멀리해적들의 눈치를 살폈다. 제비가 보트
에 숨겨둔 단 한 벌의 잠수복과 산소통을 착용했고, 환상의 콤비인 유
리눈알과 왈왈이는해적들이 습격해올지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 자루의 머스켓에 서둘러 탄알을 쟀다. 그들에겐 단 세 자루의소총
만으로도 이젠 8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은 해적들을 막아내는 데는 충
분할 것 같았다.

둘은 밧줄에 매단 망과 함께 제비를 물 밑으로 보냈다. 그리고 해적들


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돛을 모두 줄인 뒤 보트의바닥에 납작하게 엎드
렸다. 나는 그들의 등 뒤에서 겨우 3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함을 뭍으로끌어올렸다. 함은 내가 들기엔 너무 무
거웠다. 함을 숨길 곳을 찾았다. 바다 위에 공처럼 떠 있는 이 조그만
바위섬에해적들의 스쿠너 쪽으로 뚫린 구멍이 있었다.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눈구멍처럼 생긴 작은 동굴이었다. 닻줄을 쥐고동굴로
들어가 함을 끌어올렸다. 함을 동굴 안에 옮기고 함을 다시 열어보려
했지만 꼭꼭 잠겨 있었다. 열쇠 없이는 열 수없는 함이었다.

함을 동굴의 안쪽에 숨기고 밖을 내다보았다. 내 앞의 일당은 뭔가를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석연찮은지 계속 투덜댔다.JJ-109 세계에 속한
알모타 제국과 아칸 제국 간의 무역은 자원 무역일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밑에 가라앉아 있는 보물은 알모타 제국의
입장에서만 보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세계의 입장에서는 별 쓸모
가 없는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알모타 제국이 기념품으로 받은 것들
가운데서 잭 캐치의 사물함만을 빼고는.

제비가 끌어올린 것은 아칸의 기념품들과 고철로 된 각종 무기들과 사


금 대신 철가루가 든 자루들뿐이었다. 커다란 파충류들의해골과, 뒤통
수가 타원형의 공처럼 튀어나간, 우리와 전혀 다른 커다란 인류의 해
골도 나왔다. 아칸 제국의 살아있는파충류들과 알 수 없는 종족도 선
적 목록에 포함된 것 같았다.

유리눈알 잔당은 그것들을 모두 물속에 던져버리고 침몰선의 여러 선


실에 잠자고 있던 함이나 상자들만 끌어올렸다. 그들은상자나 함을 소
총 개머리로 부셔 열 때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일깝쇼, 소령님? 도둑고양이 같은 어떤 놈이 선수를 친


것일깝쇼?"

왈왈이가 유리눈알에게 물었다.

"그럴 리 없어. 살아있는 것들 가운데 잭 캐치의 사물함에 대해 아는


건 이 세상에 우리 밖에 없어. 그건 수 세기 동안진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우리 손에 들어올 거야."

하지만 유리눈알은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그는 남아 있는 한쪽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로 된 눈알이어디론가 달아나 텅 비
어버린 그의 한쪽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저게 뭘깝쇼?"

왈왈이가 자신들 쪽으로 둥둥 떠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물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탐욕스런 늙은 선장의 옆얼굴 섬' 해안


에 벗어놓은 재킷이었다. 다시 밀물이 차오자 해수면이높아져 재킷이
떠다니게 된 것이다. 유리눈알은 나의 재킷을 소총 끝으로 건져 올려
살폈고 왈왈이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마늘냄새에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십대들에게서 나는 겨드랑이 냄


새. 왠지 살짝꿍 낯이 익은데요? 저기 저 구두의 주인이지않을깝쇼?"

왈왈이가 내가 해안에 벗어놓은 버클 구두 한 짝을 가리켰다.

"코흘리개 뱃놈이 요 근처에 들른 것 같은데?"

유리눈알은 망원경을 한쪽 눈에 가져가 주위를 한 바퀴 슥 둘러보았


다. 그리고 다시 작업을 지시했다.
19. 목숨을 건 탈출

나는 눈구멍 섬의 작은 바위 동굴 속에서 꼼짝도 못한 채 거의 한나절


을 기다렸다. 다시 저녁이 다가왔고 해적들은 바다밑바닥에 흩어진 보
물의 띠를 따라 저 멀리까지 옮겨가 있었다. 하지만 물이 깊어 잠수가
어렵고 소득 또한 거의 없는 것같았다.

무법자들은 바다 밑에 너무 넓게 흩어진 보물을 단념하고 스쿠너로 돌


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의 셋은 자리를 뜨지 않고눈을 부라리며
바다 밑에서 뭔가 떠올라주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게 마지막 함입니다, 제길."

제비가 보트 뱃전에 한손을 걸치며 직사각형 함을 밀어 올렸다. 유리


눈알은 소총 개머리로 함의 자물쇠를 내리쳤다. 함 안에든 것은 서인
도 제도의 흰 모래와 잘라낸 여자의 머리카락, 머리장식용 관과 드레
스, 비단으로 지은 신발 한 짝이전부였다. 어느 여인의 유품 같았다.

유리눈알은 절망과 분노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눈을 감고 놀라운


집중력과 자제력을 발휘하며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듯했다. 하
기야 멀고 먼 낯선 세계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는
해적들의 스쿠너 쪽으로 망원경을 들었다.바다의 무법자들은 자질구
레한 보물들을 화물창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래도 저 바다쥐들은 진주 쪼가리 몇 개라도 물고 여길 뜨는군요. 놈


들이 가고나면 설거지라도 할 겸, 저길 뒤져보는것도 괜찮지 않을깝
쇼?"

부러운 듯 해적들 쪽을 바라보며 왈왈이가 중얼거렸다.

"흠-"

자존심이 상한 유리눈알은 마다하지 못하고 신음만 내뱉었다.


서쪽 수평선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셋은 슬슬 이슬라 데 피노스 호
가 가라앉아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나도 여길 떠서나를 기다리는 동
료들에게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숨겨둔 함을 서둘러 동굴 가장자
리로 옮겼다. 함을 등에 업고 보트를향해 기다시피 걸어갔다. 무릎이
반으로 접힐 것 같았다. 보트에 함을 싣고 눈구멍 섬에 매어놓은 닻줄
을 풀었다.

바람은 여전히 남동쪽으로 불고 있었다. 활대와 조종 막대를 잡은 채


바람을 안았다. 보트가 눈구멍 섬을 벗어났다.유리눈알 잔당은 내 오
른쪽 뒤편에서, 포획물을 한바탕 먹어치우고 쉬는 사자의 눈치를 살피
는 하이에나들처럼, 해적들의눈치를 살피며 이슬라 데 피노스가 가라
앉은 지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바람이 한바탕 난바다 쪽에서 세
게 불어왔다.나의 보트의 돛이 퍼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귀가 밝은
왈왈이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왈왈이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왈왈
이가 주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황혼을 등진 유리눈알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한쪽 눈이 지옥의 아가리처럼 꿈틀거렸다. 나는태어나서 저토록 공포
에 질리게 하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보트에서 일
어나 소총을 들어올렸다. 그는나의 보트 바닥에 놓인 그가 그렇게 찾
아 헤매던 사물함을 드디어 발견한 것 같았다. 최고의 명사수라도 100
미터거리에서는 명중률이 30퍼센트에 지나지 않던 머스켓 소총을 거
의 100퍼센트에 가깝게 명중시키는 인간 사냥꾼의 총구앞에서, 나는
등을 돌린 채 달아나는 짐승처럼 공포에 떨며 활대를 붙들었다. 나의
보트는 보기 좋게 바람을 안고 달아나기시작했다. 하지만 곧 머스켓이
폭발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른쪽 어깻죽지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붙잡은 키
를 놓고 말았다.

나는 고통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표적을 맞추는 데 성공한 인간 사


냥꾼은 서두르지 않고 왈왈이가 건넨 두 번째 부싯돌소총을 들어올렸
다. 머리가 핑 돌고 사물이 흐릿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모든 게 끝장이
야. 나는 앞으로 상체를 굽히고 휙돌아가 버린 활대를 겨우 붙잡았다.
뱃전 너머의 물이 빙빙 돌았다. 나의 보트는 지그재그, 지옥의 문 근처
에서 달아나려발버둥 쳤다. 두 번째 탄알이 날아와 오른쪽 견갑골에
박혔다. 어깨가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왼손으로 활대를 붙들고덜
덜 떨리는 오른팔을 간신히 키의 조종 막대 위로 가져갔다. 오른쪽 어
깻죽지 밑에 조종막대를 끼우다 나는 뒤쪽으로쓰러져버렸다. 등을 대
고 납작하게 누워버린 나는 겨우 발등으로 활대를 감았다. 보트는 물
찬 제비처럼 달아나고 있었다. 세번째 폭발음과 함께 내 머리 뒤쪽 선
미 판자가 벗겨지며 튀어 올랐다. 나무 파편이 나이프로 긁듯 돛을 찢
고 저 너머로떨어졌다.

하지만 나의 작은 배는 천천히 냉혈한 인간 사냥꾼의 사정권을 벗어나


고 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는살짝 머리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잔당들의 보트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
었다. 하지만 잭 캐치의 사물함을발견한 놈들이 나를 가만둘 리가 없
었다.

나는 수풀의 섬 해안을 오른쪽 가까이 두고 한참을 나아갔다. 해안을


지나치며 만을 찾았다. 견갑골과 어깻죽지에서 흘러내린피가 보트 바
닥으로 빨갛게 번져가고 있었다. 바다 위의 검은 하늘 위에서 셀 수도
없는 별들이 반짝거렸다. 다가온 죽음만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앞에 열대 나무 수풀에 가린 깊고 은밀한 만이 하나 나타났다. 입구


는 넓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다.나는 고요한 안식
처처럼 자리 잡은 만을 향해 보트를 진행시켰다. 만의 저 안쪽에 검은
그림자처럼 범선이 한 척 떠있었다. 보트 한 척이 다가왔고 누군가 물
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를 보트에 옮겼다.

"나의 사물함……."
나는 정신을 잃으며 사물함 쪽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뜨자 오른쪽 어깻죽지와 견갑골에 깊은 통증과 쓰라림이 느껴졌


다. 나는 해먹 위에 누워 있었다. 어깨엔 붕대가 친친감겨 있었고, 선
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배는 규칙적으로 푹 꺼졌다 올라왔다하며 놀아
대고 있었다. 누군가 똑똑 문을두드렸다. 컴컴한 선실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마치가 다가와 백랍병 속의 물을 흘려주었다.

"바비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듯 네 살을 찢고, 포크로 사이좋게


박힌 탄알 두 개를 끄집어냈지. 그리고 난 마법처럼빠르게 상처를 치
유시키는 아마멜라라는 우리 제국의 가루약을 네 상처에 뿌렸지."

마치는 목걸이 끝에 달린 뿔피리처럼 생긴 조그만 병을 만져 보였다.

"얼마동안 시간이 흐른 거지?"

"하룻밤 정도 지났어. 지금 메릴 호는 원래 항로로 진입하기 직전이야.


곧 우리가 묵었던 기항지 섬을 지나쳐 알모타제국으로 갈 거야."

나는 마치에게 일으켜달라고 했다. 두 다리에 힘이 없어 곧이라도 주


저앉을 것 같았다. 마치의 부축을 받으며 갑판으로나갔다. 달과 별이
떠 있었고 밤은 고요했다. 보조돛으로 갈아 끼운 메릴 호는 삼각돛과
두 돛대 사이 사각 세로돛까지모두 펼친 채 밤바다를 미끄러져가고 있
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오른편 저 멀리 우리가 들른 섬이 나타났다. 그러나


메릴 호는 섬에서 멀어지며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데스 선장과 조 씨를 생각하며 멍하니 그 섬을 바
라보았다. 헛것을 보았을까? 섬의곶 끝에 서 있는 누군가 옷자락을 마
구 흔들었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조난자들 같았
다.

뒷갑판에서 타륜을 붙들고 있는 감초 씨에게 곶 끝을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릴 호를 섬으로 돌렸다. 며칠이지나지 않았는데도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것 같았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몰골이 말이 아
닌 두 사람이 곶에 서 있었기때문이다. 데스 선장과 조 씨였다. 두 사
람에게 바비가 보트를 저어갔다. 잠시 뒤 세 사람은 갑판으로 올라왔
다.

"살아 있었군요?"

섬에 버려진 자들에게 우리가 건넨 첫마디는 이랬다. 반가움보다는 놀


람이 앞섰기 때문이다.

"바다 자라를 잡아먹으며 버텼어요. 물은 당신들이 가르켜준 샘에서


구했고."

조 씨가 대답했다.

"아모르 파티!(*운명을 사랑한다는 뜻) 운명에 감사할 일이군요. 우리


또한 당신들처럼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죠. 그 긴이야기는 우리의 항해
가 모두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축배를 들며 하죠. 데스 선장, 이제 당
신에게 메릴 호를 맡겨도될까요?"

우리들의 임시 선장이었던 감초 씨가 물었고 데스 선장은 고개를 끄덕


였다.
20. 악마의 바다와 데스 선장의 항해술

메릴 호는 돛을 리프(*바람을 받는 돛 면적을 줄이는 것) 상태에 두고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을 살짝 안은 채 사방이수평선에 가로막
힌 광활한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데스 선장은 해적들이 메릴 호에서 포어스태프와 백스태프조차 가져


가버렸기 때문에 선장실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추가 매달린원시적
인 형태의 사분의로 위도를 쟀다. 아직 알모타 제국의 최남단 해안과
같은 위도 선상에 이르지 못한 듯했다. 그위치에 다다르면 정동으로
항로를 바꿔 항해한 다음, 다시 정북으로 나아가 제국의 항구에 배를
접안시킬 계획이었다.

여기서 직항로를 설정할 수는 없다. 직항로를 설정하면 반드시 알모타


제국 앞에 도사린 악마의 바다를 지나야 하기때문이다.

메릴 호는 항로를 틀지 않은 채 계속 나아갔다.

북서 방향에서 기다란 외륜선 한 척이 다가오다 오른편으로 지나갔다.


어느 새 우리의 배는 18세기 초의 악몽 같은 바다를빠져나온 듯했다.

바비의 요리를 갑판에서 마치고 막 졸음이 쏟아질 무렵이었다.

"두 시 방향에서 범선 한 척이 나타나 접근하고 있어요!"

나와 교대를 하기 위해 장루에 올라가 있던 마치가 외쳤다. 데스 선장


은 서둘러 망원경을 빼들고 마치가 가리키는 방향을당겼다. 두 세로돛
과 삼각돛에 직각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득 안고 범선 한 척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 돛대스쿠너였다!

"특이하고 독창적인 졸리 로저를 매달았군. 모래시계와 악수하는 해


골이 주요 콘셉트야."
데스 선장이 말했다.

"독신자의 모험 호예요!"

내가 대답했다.

"이 상태로 항해하다간 정확히 두 시 방향에서 목덜미가 잡혀. 놈들이


우리의 우현에 이르게 되지. 놈들을 비껴가려면우리도 리칭을 해야겠
어! 우현! 접힌 돛의 괄범삭을 모두 풀고 돛을 내려 오른쪽에 위치!"

데스 선장은 타륜을 붙든 감초 씨와 나머지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와 마치는 양쪽 벌이줄을 타고 다람쥐처


럼 기어올라 괄범삭을 풀었다. 데스 선장은 뒷갑판으로뛰어올라 직접
타륜을 붙들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맡은 돛을 내리고 돛귀를 활
짝 잡아당겨 걸었다.

나는 주돛대의 중간돛을 펼친 뒤 활대에 발을 딛고 서서 다가오는 스


쿠너를 바라보았다. 데스 선장은 사정없이 타륜을 돌려뱃머리를 더 오
른쪽으로 꺾어놓았다.

데스 선장의 의도대로라면 뱃전과 뱃전 사이에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고 평행선을 그으며, 다가오는 스쿠너를 지나칠수 있을 것 같았
다. 목적지를 빗나가고 있었지만 리칭이 가능해지자 브리건틴 메릴 호
의 속도가 무섭게 빨라졌다.

메릴 호와 평행선을 그으며 지나칠 줄 알았는데, 다가오던 스쿠너가


우리의 의도를 알아채고 우리가 진행하는 쪽으로 뱃머리를틀었다. 스
쿠너의 돛들이 순풍을 안고 빠르게 접근했다. 이대로 갔다간 스쿠너가
왼쪽 측면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놈들은 선수루에 떼거지로 올라서서 벌써부터 무기를 번뜩이며 자신


들의 보물을 갖고 토낀 우리에게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다가오던 적의
배가 경고 포탄을 쏘아 올렸다. 포탄이 왼쪽 뱃전 너머에 떨어지며 물
기둥을 쳐 올렸다. 하지만 데스 선장은우리에게 포격을 명령하지 않았
다.

"적들과 착탄 거리 내에 있다! 모두 몸을 숨기고 명령을 기다려라!"

이렇게 명령하고 데스 선장은 곧장 메릴 호를 전진시켰다. 스쿠너가


좌현에서 다가오며 오른쪽 상갑판 포문들을 열고 한꺼번에대포를 발
사했다. 하지만 스쿠너 앞에서 빠르게 지나치는 우리의 배를 빗나갔
다.

스쿠너가 메릴 호 옆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메릴 호가 직진하는 속도


때문에 스쿠너는 이물 뒤를 쿵 스치고 지나갔다.놈들이 우리를 따라잡
기 위해 서둘러 배를 돌렸다. 하지만 달려오던 가속도 때문에 커다란
원을 그려야 했다.

스쿠너는 우리 뒤에서 길게 한 바퀴 돈 끝에 우리처럼 리칭 상태로 돛


을 옮겨 달고 추격해왔다.

스쿠너와 브리건틴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진행 방향이 같고 리칭 상태


라면 세로돛 스쿠너가 가로돛 브리건틴을 따라잡게 된다.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데스 선장은 그것을 대비해 후미의 대포를 감초 씨와
나와 마치에게 맡겼다.

뜬금없이 세 시 방향에서 파란 줄무늬 세로돛을 단 조그만 배 한 척이


물수제비처럼 미끄러져오고 있었다. 유리눈알 잔당의롱보트였다. 그
들은 잭 캐치의 사물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우주의 끝까지
좇을 집념에 불타고 있었다.

놀라운 의지를 지닌 유리눈알 잔당과, 자신들의 보물을 가로챈 우리를


처치하지 못해 안달인 해적들. 데스 선장은 이 둘을따돌릴 수 있을까.
목적지까지 다 왔다고 느꼈는데 또다시 어려움이라니. 더구나 메릴 호
는 끔찍한 해역으로 다가가고있었다. 해적선만 만나지 않았다면 악마
의 바다를 비켜갈 수 있었을 텐데.
"곧 악마의 바다예요!"

마치가 데스 선장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데스 선장은 항로를 바꾸지


않았다. 조용하던 우리 앞의 수평선에 50미터 높이의너울 같은 게 떠
올랐다. 그리고 폭풍이 밀려올 듯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정체불
명의 물체가 꿈틀 꿈틀대며 점점 수면위로 몸을 드러냈다.

"저게 뭐지?!"

우리를 쫓던 롱보트에서 제비가 소리쳤다.

"서펜트 아녀?"

왈왈이가 손 가리개를 하고 대답했다. 정말 우리 앞에 나타난 괴물은


온 몸을 뒤덮은 징그러운 진녹색 비늘과 가시 돋친지느러미, 날카로운
이빨과 새빨간 혀를 지닌 끔찍한 바다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화와 전설 속의 선원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백 미터 남짓


한 바다 괴물 서펜트가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서펜트가 브리건틴과 롱보트와 해적선 사이에서 심하게 몸을 뒤틀어


댔다. 주위에는 높은 파랑이 너울댔다. 괴물이 일으키는파랑이 배들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공동의 적 앞에서 해적선과 롱보트의 사수들이
마구 소총을 쏘아대고, 스쿠너가 일제히브로드사이드를 했다. 포탄을
맞은 바다용의 몸뚱이에서 피가 튀었다.

스쿠너의 4kg급 대포의 화력은 바다용의 성을 돋울 뿐 치명적이지 못


했다. 스물 다섯 명의 용감한 해적들이 커틀래스를거꾸로 쥐고 바다용
의 몸으로 기어올랐다. 지느러미를 붙들고 등에 올라타 칼을 찔러 넣
고 마구 목을 베었다. 난폭한바다용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괴물의
몸에 올라탔던 용감무쌍한 공격조의 몸이 수십 미터나 튕겨 나가 바다
속으로곤두박질쳤다.
상체와 두 앞발을 모두 쳐들고, 아가리를 쫙 벌린 성난 괴물이 우리 배
를 두 동강내려 했다. 현측에서 조 씨와 바비가서둘러 포탄을 쟀다. 나
와 감초 씨, 마치도 한 조가 돼 이동식 대포의 고각을 최대한 올리고
몸부림치는 놈의 상체를 향해불을 붙였다.

15kg짜리 구형 포탄 두 알이 괴물의 위쪽 몸뚱이를 향해 날아갔다. 포


탄을 맞은 서펜트의 상체가 뒤쪽으로 튕겨지더니서서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서둘러 포탄을 재고 괴수의 동정을 살폈다.

몸을 꿈틀대며 거대한 괴수가 수면 아래로 꼬리를 감추었다. 사방에서


일던 파랑은 잔잔해졌다. 해적들은 갑판에서 무기를치켜세우며 만세
를 불렀다. 무적 악당들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히죽이며 우리 배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현측의 8문의 포가가 다시 앞으로 이동하며 스쿠너의 포문에 포신이


나타났다. 삼각모를 쓴 건방진 프랑수아 녀석이 포가들뒤에서 커틀래
스를 내리치며 사수들에게 외쳤다.

"파야―!"

포탄이 일제히 날아와 메릴 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부러진 난간은


뼈다귀처럼 덜덜거리고 배는 통제 불능상태에 빠졌다.우리가 응사하
려하고 놈들이 다시 브로드사이드를 하기 직전이었다. 우리의 배가 이
미 지나친, 선미 저 뒤쪽에서 조용하던바다가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섬처럼 솟아오른 또 다른 정체불명의 괴물이 하늘로 수 백 개의 무색


알을 쏘아 올렸다. 무색 알들이 우리를 향해돌진했다. 슈-슈-슉-, 슈-
슈-슉-, 조그만 미사일처럼 다가오던 알들이 공기의 저항에 뒤틀리며
괴상한 모습을 띠기시작했다.

"저건 뭐야? 새떼들인가?!"

해적들이 외쳤다. 날아오던 알들이 새떼로 모습을 바꾸며 배들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왔다.
"모두 엎드려!"

데스 선장이 명령했다. 새떼는 스쿠너 갑판으로 돌진해 해적들의 몸을


들이박거나 우리 배의 갑판을 스칠 듯 지나쳤다.

돛대와 삭구에 머리를 처박고 떨어진 새들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니고 있었다. 갑판에 떨어진 익용을 닮을 새들이카아악! 카아악! 소
리를 내지르며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우리는 사납게 덤벼드는 새들을 소총 개머리로 찍어 죽이느라 갑판을


뛰어다녔다. 죽은 새들이 해면체처럼 변하며 녹아내렸다.이상했다.

육탄 공격에 실패한 나머지 새들은 하늘로 빙빙 돌며 갑판을 향해 똥


을 찍찍 갈겼다. 떨어지는 새똥에 얼굴을 맞은 해적들의얼굴에서 치치
치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격을 받은 해적들은 구멍이 뚫려버린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피해요! 염산 똥이에요!"

마치가 우리에게 외쳤다.

스쿠너의 해적들과 유리눈알 일당은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며 살인적인


똥을 찍찍 갈겨대는 새들을 향해 플린트락과 소총을발사했다. 새들은
바다나 갑판으로 떨어져 사납고 징그럽게 몸을 뒤틀다 녹아내렸다. 나
머지 새들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더니,다시 무색 알처럼 변하며 모체
괴물의 구멍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섬처럼 떠 있는 괴물이 공격을 늦춘 틈을


타, 스쿠너의 현측 포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포탄을 맞은 괴물의 몸
뚱이에서 끈적끈적한 해면체 덩어리들이 튀었다. 괴물은 타격을 입고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메릴 호의 선원들과 해적들, 유리눈


알 잔당은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언제 또 다른
괴수가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틈을 타 데스 선장은 지옥 같은 바다를 빠져나가기 위해 뱃머리를


롱보트와 스쿠너 사이로 돌렸다. 두 편의 적들을빠르게 헤쳐나간 뒤
뱃머리를 왼쪽으로 틀었다. 롱보트와 스쿠너가 추격해왔다.

10km 정도의 아슬아슬한 추격이 이어졌다.

나와 마치, 감초 씨는 후미의 대포로 옮겨갔다. 저들이 바짝 따라잡을


경우 포격을 할 생각이었다.

난간 너머로 우리를 따라오는 스쿠너와 롱보트를 바라보았다. 추격해


오는 배들 뒤에서 회오리바람이 나타났다. 바다 밑에서정체불명의 거
대한 그림자가 회오리바람을 끌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구름의 그
림자는 아니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물속의 거대 그림자는 배들 사이
로 지그재그 회오리바람을 끌며 우리의 배 밑을 지나 저 앞으로 멀어
져갔다. 무언지 감조차잡을 수 없었다.

회오리바람은 저 앞, 섬들로 이루어진 해협 한가운데 멈춰 있었다.

"저 해협만 통과하면 악마의 바다는 끝이에요!"

마치가 타륜을 붙든 데스 선장에게 앞을 가리켰다. 하지만 회오리바람


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해협 사이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솟아올랐다. 그
것은 해협을 가로막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지?"

데스 선장은 뱃머리를 급히 돌려 배를 정선시킨 채 저 앞을 바라보았


다. 스쿠너와 롱보트는 나타난 미지의 적을 알아채지못하고 계속 추격
해왔다.

"조금 전에 새들을 쏘아 보냈던 괴물이 물속을 가로질러 다시 우리 앞


에 나타난 것 같아요!"
내가 데스 선장에게 외쳤다. 해협을 가로막고 떠 있는 무색투명에 가
까운 미지의 괴물의 몸속에서 오색찬란한 빛 무늬가빠르게 지나다니
기 시작했다.

괴물이 몸을 살짝 움츠리더니 몸에 뚫린 수백 개 구멍으로 하늘 높이


뭔가를 퐁퐁 쏘아 올렸다. 하늘에는 수백 개 낙하산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크기가 파라솔만한 수백 마리 해파리 떼였다!

해파리 떼는 물속을 떠다닐 때처럼 머리 부분을 둥글게 펼치고 다리를


곧게 뻗친 채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내려왔다. 우리는뒷갑판 밑으로
몸을 숨겼다. 해파리 떼는 배의 돛대들에 감기거나 해적들의 얼굴 위
로 떨어지며 몸을 덮쳤다. 해파리에휘감긴 채 독이 쏘인 해적들은 사
지를 벌벌 떨다 목숨을 잃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해파리 떼의 공격
을 피한 스쿠너의해적들은 서둘러 갑판 밑으로 몸을 숨겼다.

유리눈알 잔당은 보트를 덮어버릴 것처럼 내려오는 거대 해파리를 피


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낙하산처럼 하늘에서 떨어진해파리 떼가 모
두 수면에 다다르자, 데스 선장은 뛰쳐나가 타륜을 붙들고 미지의 괴
물이 버티고 선 해협 사이로 뱃머리를돌렸다.

"안 돼요!"

내가 데스 선장을 말렸다.

"난 저 놈의 정체를 알아냈어."

"네?"

"마치! 악마의 바다에서 선원들이 어떤 괴물들에게 당했는지 소문을


들었지?"

"네.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어요!"

"하지만 괴물은 하나야!"


"네?"

우리는 놀라 데스 선장을 쳐다보았다.

"저건 단지 거대한 유기체 조합일 뿐이야. 하나 하나의 산호들이 모여


거대한 산호초 섬을 만들 듯 말이야. 하지만통합적인 의식이 있어. 한
데 모이면 선원들의 생각과 공포를 읽을 수 있는 극미 강장동물의 일
종이니까. 선원들은 온갖 바다공포를 마음속에 키워왔지. 하지만 패턴
이 있어. 서펜트, 크라켄, 사이렌, 유령선 따위 말이야. 저건 자신 앞에
나타난선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패턴으로 몸을 바꿀 수 있는, 떠도는
유기체 섬과 같은 거지. 패턴을 유도하고 가장 두려워하는집단 공포를
읽어내는 지능이 뛰어난 단위 유기체들의 집합이야. 어린 시절 난 해
양 모험을 다룬 많은 책들을 읽으며 바다를동경했지. 그런 책들 가운
데 선원 출신이었던 존 밸서프라는 시인이 쓴 책이 생각나. 그 17세기
시인은 수많은 낱낱의산호들이 모여 산호초 섬을 이룬 것 같은 떠도는
유기체 괴물 섬에 대해 묘사했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괴물이 존재하
는세계가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어."

"언뜻 젤리처럼 보였던 건 강장동물에 속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점점 저 녀석의 정체가 드러났던 이유가 뭐죠?"

내가 물었다.

"바다의 무법자들이 용감하게 싸워준 덕분이지. 해적들의 공격에 통


합 의식의 힘이 약해졌어. 놈이 다가오고 있군!"

우리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 집단 유기체가 사나운 바다용, 앙상한


유령선이나 해골섬, 회오리바람, 메가톤급 허리케인따위로 몸을 바꾸
며 선원들의 공포를 유도하고 있었다. 해적들이 동요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데스 선장은 플린트락을 공중으로 쏘며 해적들에게 경고했다. 유리눈


알과 왈왈이, 제비는 보트의 뱃전을 잡고 물에 뜬 채꼼짝 않고 있었다.
붉은망토도 더 이상 아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데스 선장을 지켜보았
다.

"출항!"

데스 선장은 타륜을 붙들고 우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괴물을 향해


메릴 호를 미끄러져가게 했다. 이끼와 바다풀,따개비들이 군데군데 붙
은 유기체 괴물이 수면 밖으로 해파리의 다리처럼 생긴 다리들을 내밀
고 꿈틀댔다.

"주돛대를 빙 둘러 싸고 서로 손을 잡아! 그리고 저 녀석이 즐겨 띠는


모습인 거대 해파리만을 생각해!"

데스 선장이 우리에게 명령했다. 조 씨와 바비, 감초 씨, 나와 마치, 치


노까지, 우리는 주돛대를 둘러싼 채 손을 잡고둥글게 서서 거대한 해
파리를 떠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의 몸이 붕 떠 있는 듯했다.
육지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얼굴에 와 닿았고 기구에 타 있는 기분
이었다.

"모두 눈을 떠도 좋아!"

우리는 눈을 떴다.

주위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지 않고 구름과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메릴 호는 어마어마한 해파리의 머리 꼭대기에 얹혀 있었고, 거대 해


파리는 낙하산처럼 몸을 활짝 펼치고 다리를 길게 아래로늘어뜨린 채
둥둥 떠 바람을 안고 날고 있었다.

갑자기 펑! 대포 소리가 들렸다.

이어 마구 머스켓을 쏘아대는 소리, 탄성과 야유, 지옥보다 끔찍한 욕


지거리를 내뱉는 소음이 저 아래서 들려왔다.
저 아래 스쿠너의 갑판 위 해적들이 우리를 닭 좇던 개처럼 쳐다보며
분통을 떠트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파란 줄무늬돛을 단 롱보트가 쥐
도 새도 모르게 독신자의 모험 호 뒤편으로 내빼고 있었다.
제5부 선원의 거울

21. 제국에서 하룻밤

메릴 호를 태운 거대 해파리는 하늘을 가로질러 황금색 노을이 비낀


알모타 제국을 향해 다가갔다. 열대 나무 숲과 반짝이는금모래 들로
뒤덮인 해안이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해안 너머엔 고원 지대의 황토 빛 땅들과 높은 계단들이 나타났다. 고


원에는 공중에 뜬 사원들처럼 황토 빛 건물들과 크고작은 탑들이 닥지
닥지 붙어 있었다.

고온 다습한 유카탄 반도의 열대성 기후와 비슷한 기후가 우리의 얼굴


을 감쌌다. 거대 해파리는 천천히 바다로 내려가 항구앞에 내렸다.

항구에는 알모타 제국의 전함들이 늘어서 있었다.

전함의 갑판과 항구에서는 한쪽 어깨가 드러난 셔츠에 치마처럼 생긴


전통 의상을 걸친 갈색 피부의 해군들이 사열한 채우리를 가로막고 있
었다. 마치가 메릴 호의 뱃머리로 올라가 그들에게 수신호를 했다. 그
러자 해군 병사들은 일제히 팔을가슴팍으로 들어 올리고 경례를 올렸
다.

메릴 호는 드디어 닻을 내렸다.

잠시 후 항구는 극빈을 초대하는 환영장처럼 변했다. 관악기와 타악


기, 전통 악기들로 이루어진 해군 군악대가 경건한 음악을연주하며 환
송했다. 이어 군악대가 커다란 참외처럼 생긴 나무 악기와 작은 북을
두드리며 흥겨운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자군악대 사이로 딱딱이를 들
거나 맨손인 여자들이 나타나 궁둥이를 양 방향으로 마구 흔들며 오른
쪽 왼쪽으로 돌면서 다가왔다.마치가 추었던 춤과 똑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두 팔과 궁둥이를 흔들어대며 격렬한 민속춤을 추는 갈
색 피부의 여자들에 넋이 나가 있을 때, 빨간 깃털이달린 모자를 쓴 제
독이 나타나 마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가 발을 살포시 들자 그는
마치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양쪽 발등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마치가 가방에서 호리병처럼 생긴 병을 꺼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붓더
니 그의 정수리에뿌렸다. 다른 세계에서 퍼 담아온 흙 같았다.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르치니 에르고스페네 공주


님. 그런데 공주님과 어울리지 않게 질이 좀 떨어져보이는 이들은 누
구일까요?"

단추 구멍 같은 눈을 한 제독이 우리를 경계하며 마치에게 물었다.

"저를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에요. 왕궁으로 모


시고 갈 거예요. 이들은 우브 세계의 귀중한 물건들을가져오셨죠."

"안됩니다, 공주님. 평행우주 간 비밀 무역꾼들이라면 당장 여기서 떠


나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의 에르난도 사령관이이번에 평행우주연합
의 의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우리 제국은 특별히 연합의 규칙에 충실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하는 불청객처럼 몹시 난처한 입장에 처하고 말


았다.

"제가 직접 여왕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조 씨가 나섰다.

"여왕 폐하는 당신 같은 비밀 무역업자 따위를 상대할 시간이 없어."

제독이 딱 잘라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주선해보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마치는 노새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우리는 알모타 제국의 경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항구의 초소에서 날


이 어두워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다. 마침내 경비대장에게전갈이 왔
다. 우리를 왕궁으로 들여보내도 좋다는 전갈이었다.

노새를 타고 수많은 계단을 오른 끝에 고원의 왕궁에 다다랐다. 깨끗


한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은 마치가 성문 밖에서 우리를기다리고 있었
다.

왕궁은 붉은 흙벽돌로 지은 것처럼 수수했고, 여느 왕궁들처럼 높거나


주눅이 들게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마치를 따라 열대 나무들과 새들의 천국인 정원을 지나, 바닥


에 기하하적이고 신비한 무늬가 깔린 넓은 홀로들어섰다.

홀에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테이블이 안쪽을 향해 놓여 있었


다. 휑뎅그렁한 홀 안은 밀가루 색깔 식탁보가 덮인테이블과 딱딱한
나무 의자들뿐이었다. 잠시 후 오른쪽 통로에서 씩씩 숨을 가쁘게 쉬
며 끙끙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에는 죽부인을 세워놓은 것처럼 기다란 왕관을 쓰고, 둥그런 얼굴


에다 볼 살은 축 처지고, 목에는 수십 겹은 될 것같은 장신구과 목걸이
를 치렁치렁 매단 여왕이 나타났다. 그녀는 한쪽 어깨가 모두 드러난
감청색 민소매 쫄쫄이 티셔츠를입고 있었는데, 티셔츠 아래로는 뱃살
이 사방으로 흘러내린 채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 옆에는 네 명의 남자
하인이 달라붙어흘러내린 뱃살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뱃살 여왕
의 빨강과 노랑, 녹색 무늬가 뒤섞인 치마의 한쪽은 허리 부근까지째
져 있었다. 그녀의 현란한 치마는 우리 집 거실의 커튼만큼이나 컸지
만, 째진 치마 틈으로 코끼리 다리처럼 두껍고 뽀얀다리가 굴러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테이블 끝에 앉고, 하인들은 여전히 옆에 달라붙어 무릎을 꿇
은 채 뱃살을 받쳤다. 그녀가 우리에게 앉으라고말했고, 하인들이 만
찬을 날랐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여왕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기다란핀셋과 엽궐련, 재떨이를 쟁반에 든 시녀
가 나타났다. 시녀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기다란 핀셋 끝으
로 집었다.

시녀는 여왕의 옆에 서서 여왕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뺐다 하며 여왕


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담배를 피울 수 있게거들었다.

"손님들 가운데, 후―, 누가 나와 장기를 한판 두지 않을래요? 후―"

담배 연기를 우리들 쪽으로 후우― 불며 여왕이 제안했다. 여왕은 말


을 하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서로의 눈치만 살
폈다.

"장기를 둬서 당신들이 이기면 당신들의 물건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요."

여왕이 말하자 하인들이 식탁보를 걷었다. 테이블에 커다란 장기판이


새겨져 있었다. 시녀가 말을 가져왔다. 그리고 말을여왕의 앞과 여왕
의 반대편, 테이블 끝에 놓았다. 하지만 말은 단 두 개 씩 뿐이었다.

"누가 둘까요?"

여왕이 물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여왕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조 씨뿐


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천제적인 물리학자니까.

마치가 장기 두는 법을 설명했다. 조 씨는 너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하지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말은 앞으로단 한 칸 씩 밖에
움직일 수 없고, 장기판은 여왕의 반대편에서 여왕 앞까지 단 두 줄 뿐
이었다. 나는 이게 실제로두려고 만든 장기가 아니라 일종의 넌센스란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재빨리 그 긴 테이블 위에 그려진 장기판의 칸의 수를 세고 경우
의 수를 따졌다. 세로 칸의 수는 홀수이고 총 칸의수는 짝수였다.

"제가 두겠어요."

내가 대답하고 여왕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여왕과 나 사이는 몇


백 광년이나 떨어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누가 먼저 둘까?"

"여왕이 먼저 두세요."

여왕이 물었고 내가 대답했다. 여왕은 왼쪽 말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나 또한 왼쪽 말을 앞으로 한 칸 이동시켰다. 그러자여왕은 말을 바라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다. 핀셋 담배를 두 대 정도 피울 시간이 흘
렀다.

"내가 졌군."

여왕이 입을 뗐다. 다른 사람들은 말을 단 한 번 밖에 움직이지 않고


내가 이긴 것에 놀랐다.

"넌 왜 내게 먼저 두게 했니?"

뱃살의 여왕이 물었다.

"이 장기는 먼저 두는 쪽이 무조건 지게 돼 있으니까요."

"흐흐. 어차피 장기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이지. 복잡한 장기를


두며 시간 낭비할 필요 따윈 없지. 내일 정오에떠나게 해주마."

이렇게 말하며 여왕은 고통스럽게 일어나 뱃살을 받치는 네 명의 하인


과 함께 사라졌다.
일행은 왕궁의 숙소로 가고 나는 마치와 함께 텅 빈 홀에 남아 있었다.
나는 마치에게 엄마를 만나게 주선해줄 수 있는지물었다.

"내일 너희 세계로 떠나야 한다면 오늘밤 밖에 시간이 없을 텐데."

"돌아가는 날짜를 미룰 수는 없을까?"

"그럴 순 없을 거야. 모레부터는 연합의 정기 총회가 우리 제국에서 열


리거든. 평행우주 간 비밀 무역과 인구 이동에 대한금지와 처벌을 더
욱 강화하자는 게 주요 안건이야. 너희 세계의 인터폴 같은 기구를 마
련해 범죄자의 탈출과 이동, 거주를사전에 막는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
어. 하지만 네 엄마가 사는 곳을 알아봐줄 순 있어."

마치는 안쪽으로 뚫린 아치형 복도를 지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복도


멀리서 마치가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듯한 소리가들려왔다. 통화를
끝내고 하인 하나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치
가 다시 걸어 나왔다. 마치는 나를복도 끝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 중간
에 올챙이배처럼 볼록한 작은 홀이 나오고, 다시 복도가 이어졌다. 복
도 끝에 식민지풍 현관이 나타났다. 현관 앞에는 말 두 필의 목을 번갈
아 쓰다듬고 있는 하인이 서 있었고, 바다 저 아래까지 내리막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하인과 나는 말을 타고 언덕을 내려갔다. 우리는 두 필의 말과 함께 작


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화물선에 올랐다. 화물선이바다를 가로질러 어
느 섬에 닿았다.

우리는 섬의 쓸쓸한 부두에 내렸다. 나는 다시 말에 오른 뒤, 하인이


탄 말을 따라 달렸다. 언덕을 지나고 능선을 몇 개넘고, 세 개의 계단
식 마을을 지났다. 능선을 따라 지어진 네 번째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
른 뒤 고개를 넘자 저 멀리바다가 나타났다. 하룻밤을 꼬박 달려온 것
같았다.
하인이 턱으로 저 아래를 가리켰다. 오목한 만에 자리한 작은 해안 마
을이 보였다. 캐나다 북부의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같았다. 하인은 마
을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절벽 해안을 가리켰다. 높은 파도가 들
이치는 절벽과 가까운 평지에 조그맣고쓸쓸한 돌집이 한 채 서 있었
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나는 쓸쓸한 풀들이
자라는 언덕을 단숨에내려가 절벽 위의 집으로 말을 달렸다. 나는 울
타리도 없는 집 앞에서 말을 멈췄다. 말을 세워 두고 천천히 그 집의현
관을 향해 다가갔다.

구름이 잔뜩 낀 새벽이었다. 하지만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나는 쓸쓸


한 나무문에 달린 둥근 고리를 잡고 문을 톡톡,두드렸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난로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
었고, 나무로 된 부엌 식탁위에 놓인 오래된 책 한 권이 바람에 펄럭였
다.

바다 쪽으로 난 작은 마루의 창은 열려 있었고 커튼이 나풀댔다. 하지


만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아궁이 맞은편에 나 있는좁은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끝의 작은 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누군가바다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등을 보이
고 앉아 느리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나는 쓸쓸한 그림자를 향해 다가
갔다.

"저, 실례합니다."

나는 통로 끝에서 조용하게 말했다. 파마가 거의 풀려버린 머리를 뒤


로 묶은 그림자가 뒤돌아보았다. 여자는 처음에 나를보고 놀랐다. 그
러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자는 눈시울을 글
썽이더니 등받이가 없는 둥근 나무의자에 앉은 그대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달려가 무릎을 꿇고 여자의 품에 안긴 채 흐느꼈다.

우린 오래도록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뺨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다에서 희미하게 솟아오른 태양의 붉
은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그리고 있던 방 안의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완성시


키지 못한 캔버스 속에는 아이를 업고 이쪽을 바라보며미소 짓는 노
인, 석양빛에 붉게 물든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 맨발로 분수
가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고해자, 그물을 손질하는 노부
부, 털모자를 쓴 채 타륜을 쥐고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소년, 벌
이줄을 타고 올라가삭구를 손보는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난 돛…… 엄
마가 그리고 있던 그림들은 손으로 만지면 부스러져버릴 것 같은, 늦
가을의힘없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소박하고 꾸밈없는 삶의 단편들이
었다.

나는 엄마에게 왜 우리를 황망히 떠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엄마가 아빠나 우리 형제자매


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니라고 믿고싶었다. 엄마에겐
엄마만의 삶이 있었고, 그것은 남에게 이해시키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옛날처럼 아빠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엄마 자신을 지켜내는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날 당시 엄마는 까닭 없는 우울증
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무언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또는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서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을찾아 헤맸던 것 같다.

엄마는 이곳에서 바라던 것을 찾았을까?

현실이 어렵다고 모든 사람이 다 엄마처럼 다른 세계로 도피할 순 없


다. 어쩌면 엄마의 선택도 절망스런 도피라고 볼 수는없는지도 모른
다. 엄마가 그 당시 홀로 느끼고 있던 마음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엄마는 이렇게 내 앞에 살아 있
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아빠는 말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구겨진 다리를 일으켜세우고 조금씩 전진해
야 한다고.

이제 가야할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돌아올 거죠?"

나는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내겐 더 시간이 필요해."

"그래요. 엄마는 늘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일행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기 힘들지도몰라요. 마치에게
부탁하면 좀 늦어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걔는 생각보다 의리가 있으니
까요."

"마치?"

엄마가 의아해하자 나는 그간의 일을 아주 짧게 설명했다. 우리 메릴


호에는 여러 사람의 목숨과 바꾸어 얻은 보물이 잔뜩실려 있고, 또 알
모타 제국과의 무역에 성공했다는 것까지. 하지만 어느새 나와 함께
온 하인이 문밖에 와 있었다. 나는엄마가 초등학교 선물로 사준 중국
제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아침 여섯 시였다. 엄마가 간단한 아침을
제안했지만 나는마다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요!"

나는 현관 앞의 엄마에게 외치고 말에 올랐다. 엄마는 내가 언덕 위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곳에 홀로 서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나
는 뒤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넘어갔다.
22. 수수께끼 원반

메릴 호의 밑바닥을 뜯어내고 꺼낸 고철과 플라스틱을 부두에 쌓고 있


었다. 알모타 제국 사람들은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눈이 휘둥그레
졌다. 대신 그들은 알모타 제국의 다이아몬드 원석이 담긴 함 다섯과
향신료, 예를 갖추기 위한 기념품,고원에서 채취한 암연, 그리고 해안
에서 채취한 수백 자루의 사금을 실어주었다. 이들에게 다이아몬드 원
석과 사금은 우리세계의 규석만큼 흔한 자원이었다.

정오가 되자 진귀한 보물을 잔뜩 실은 메릴 호는 제국의 해군 승무원


들이 탄 수천 톤 급 바크선의 호위를 받으며 서쪽바다로 출항했다. 때
에 따라 엔진을 가동시킬 수 있는 바크선에는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마치도 타고 있었다.

수풀로 우거진 해안을 오른쪽에 두고 두 배는 반나절을 달렸다.

서쪽 바다 끝에 우브 세계로 통하는 자연 웜홀이 몇 있다고 했다. 하지


만 그것들은 원자 크기보다 작아, 바크선에 실린알모타 제국의 '허리
케인의 눈'이 인공적으로 구멍을 열어두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통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닫혀버리기 때문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수풀로 우거진 해안이 끝나고 있었다. 바크선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고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메릴 호는 바크선의 선미에서약 50미터 정
도 뒤처져 있었다. 바크선이 살짝 뱃머리를 왼쪽으로 틀고 멈췄다. 바
크선의 선수에서 기다란 막대 같은 게튀어나왔다. 끝에는 현미경의 대
물렌즈 같은 렌즈들이 달려 있었고 렌즈들이 이리저리 회전했다. 물질
의 최소 단위까지 측정이가능한 고배율 망원경이었다. 확대시킬 양자
거품을 찾아낸 뒤, 망원경이 들어가고 바크선의 선수가 거대한 메뚜기
의 입처럼양쪽으로 열렸다. 허리케인의 눈이 서서히 머리를 드러냈다.
그때였다. 우리 뒤에서 낯선 소음이 들렸다. 세워놓은 럭비공을 닮은
비행체가 수평선 끝에서 나타나 커브를 그리며 빠르게접근하고 있었
다. 나는 망원경으로 비행체를 살폈다. 비행체의 몸체에는 수많은 겹
눈이 달린 것처럼 크고 작은 반구들이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서둘러요!"

바크선에서 마치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비행체가 메릴 호를 추격해


오고 있었다. 데스 선장은 타륜을 막대로 고정시켜 놓고뒷갑판에서 뛰
어내렸다. 그는 나머지 선원들과 함께 재빠르게 움직여, 묶여 있던 나
머지 돛을 풀고 동삭을 팽팽히잡아당겼다. 돛이 퍼덕대며 범선이 바크
선의 선수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뒤에서 경고음이 들려왔다.

"배를 멈춰라! 우리는 평행우주연합 경찰이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배를 멈춰라!"

우리가 계속 전진하자 다가온 비행체의 겹눈들이 사방에서 열렸다. 크


고 작은 검정색 반점 무늬가 있는 녹색 피부의 인간들이쏟아져 내려왔
다. 몸에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그들의 정수리 양쪽에는 나비의 감
각기관 같은 게 튀어나와 있었고 등에는불나방의 날개 같은 작은 날개
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양손에는 서구 경찰의 진압봉처럼 생긴 'ㅏ'자
형의 무기를 들고있었다.

우리가 멈추지 않자 그들은 고물 갑판으로 내려앉아 선수를 향해 성큼


성큼 뛰어왔다. 우리는 서둘러 소총과 플린트락으로무장했다. 하지만
뒤늦게 소총을 든 맨 뒤의 조 씨에게 한 녀석이 표범처럼 달려들었다.

조 씨는 놈을 향해 발사했다. 놈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옆으로


뛰어 피한 뒤, 다리로 갑판을 박차고 뛰어오르더니진압봉의 작은 축을
한손으로 잡고 돌리다 조 씨의 턱을 올려쳤다. 안경이 벗겨지고 입안
의 피를 뿌리며 조 씨가 뒤로서서히 넘어졌다. 곧장 놈은 쓰러진 조 씨
의 머리에 진압봉 끝을 갖다 대고, 말아 쥔 축 끝에 달린 스위치를 눌
렀다.
"즉결처분. 마음 번호 7TWENTY7 주입. 최종 우주 번호 ZZ-909 세계
로 이송!"

조 씨의 머리에 실낱같은 신경편이 주사되었다. 엠엠엘단 녀석들은 사


람에게서 빼앗은 '마음'을 평행우주연합의 짭새들에게팔아왔던 것이
다!

조 씨가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도망쳐오자 거미의 꽁무니처럼 생긴


비행체의 맨 아랫부분에서 화살 같은 게 쏘아져내려왔다. 화살 끝에는
와이어가 달려 있었다. 도망쳐오던 조 씨의 등에 화살이 박히더니 그
를 낚아챘다. 그가 공포에 질린눈을 커다랗게 뜨고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몸이 붕 떠올라 비행체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머지 놈들이 고물 갑판으로 차례로 내려앉으며 진압봉을 거머쥔 채


우리를 향해 뛰었다. 우리는 양손에 쥔 플린트락과머스켓으로 마구 쏘
아댔다. 두 놈은 탄알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나머지 세 녀석은 표범
처럼 갑판을 이리저리 뛰며 피한뒤 우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짭새들이
덮치기 직전, 메릴 호는 바크선에 바짝 다가갔고 바크선의 선수루에
있던 두 열 짜리기관포가 우리를 향해 돌더니 불을 뿜었다. 마치였다.
우리를 향해 공중 높이 뛰어오르던 평행우주연합 짭새 녀석들이날카
로운 비명을 지르며 갑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모선이
우리의 머리 위로 곧장 다가왔다. 동시에 바크선의허리케인의 눈이 가
동되며 바다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열렸어요! 곧 닫혀요! 서둘러요!"

마치가 외쳤다. 데스 선장은 뒷갑판으로 달려가 고정시킨 타륜을 붙들


고 범선을 허리케인의 눈 한가운데로 몰았다. 메릴 호가급류를 따라
안쪽으로 점점 빨려 들었다. 하지만 달아나는 메릴 호를 통째로 견인
하기 위해 연합의 모선이 낮게 내려와와이어가 달린 수십 개 화살을
꽁무니에서 발사했다. 허리케인의 눈의 중심에 이르자 웜홀이 빠른 속
도로 좁혀지고 있었다.뒷갑판에 박힌 화살들 때문에 우리의 배는 전진
하지 못하고 두 세계 사이에 걸쳐졌다. 바크선이 반-중력 추진기를 가
동시키며모든 에너지를 쏟아넣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압력이 배를
조여왔고 배가 폭파하듯 쪼개졌다. 배 안의 화물들과 함께 파편이사방
으로 튀었다.

나의 잭 캐치의 사물함마저 저 세계의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웜홀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였다. 마치가 바크선의 돛대를 박고열린 사물함
에서 튕겨나온 물건들 가운데 뭔가를 주워들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
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걸 가져 가!"

마치가 저 너머에서 스트라이크 존처럼 좁아지는 구멍을 향해 그것을


휙 집어던졌다. 곧이어 구멍이 닫혀버렸다. 우리는 크고작은 파편들과
함께 은하계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
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 뒤 어딘가로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백양나무 숲에 떨어져 있었다. 주위에는 배의 파편들이 몇 개쯤


흩어져 있었고, 이상하게도 일행은 눈에 띄지 않았다.나는 값진 보물
들이, 부서져버린 배의 화물칸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내가떠난 날로부터 정확히 보름 뒤, 여
섯 시 35분 전이었다. 아빠가 엠엠엘단 녀석들과 한 약속 시간이 코 앞
에 다가와있었다. 아빠의 공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였다. 발 옆에 자색 사탕 같은 게 반짝거렸고 그 옆에는전기모기
향 훈증기만 한 게 떨어져 있었다. 배가 부서지며 튕겨 나온 자색 보석
한 알과 마치가 던진 원반 같았다.

자색 보석을 줍고 원반을 살폈다. 크고 작은 원반 두 개가 투포환처럼


포개져 있고 끝에 은사슬이 달려 있었다. 잭 캐치의사물함에 들어 있
던 물건 같았다.

원반 앞면에 고대 범선과 나침반, 컴퍼스, 사분의 등 항해도구의 이미


지와 'MARINERS MIRROR'라고 돋을새김된문자가 보였다. 선원의
거울? 양쪽 원반의 테두리를 따라 규칙적인 눈금이 15개 씩 새겨져 있
었다. 두 개를 맞잡고 시계반대 방향으로 한 눈금 정도만 비틀어보았
다. 갑자기 내 몸이 숲에 떨어진 배의 파편들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올
랐다. 내가쥔 원반의 앞면과 뒷면이 서로 돌며 원래 위치를 향해 다가
갔다. 그러자 붕 들렸던 내 몸이 배의 파편들과 함께 다시 숲을향해 곤
두박질치는 것 이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숲에 떨어졌던 상
태로 되돌려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여전히흘러가 이제 5시 2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반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다섯 눈금 정도 틀어보았다. 내 몸이 붕 떠


은하계를 거꾸로 한 바퀴 도는 착각을 일으키다양자-웜홀에 배가 반
쯤 걸려 있던 5분 전으로 돌아가, 악몽 같은 상황 속에 다시 놓여 있었
다. 하지만 나의 또 다른몸은 저 아래 숲에서 원반을 쥐고 있었다. 뒤
늦게 깨달았지만 실제 나의 몸은 숲에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실
감났다.

그것을 시계 방향으로 한 눈금만 틀어보았다. 내 실제 몸은 여기 있지


만, 나의 또 다른 몸은 내 몸을 훌쩍 벗어나 달리며숲을 빠져나가고 있
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맞닿은 두 원반이 원 위치를 찾아가자
나의 실제 몸이 달아났던 몸을불러들였다. 원반을 뒤집어보았다.

뒤쪽 원판의 가장자리에 시계 속의 원형 톱니바퀴 같은 납작한 다이얼


과 다이얼의 테두리를 따라 눈금판이 붙어 있었다.눈금판에는 또 15
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각 눈금들은 다섯 개의 점으로만 그 값을
나타내고 있었다. 점자처럼 점의위치를 조금씩 바꿔가며 열다섯 개의
숫자값을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현재 다이얼은 '눈금1'에 위치해 있었
다. 그상태에서 포개진 원반을 시계 방향으로 세 눈금 정도 비틀었다
놓아보았다. 내 몸은 이미 숲 사이를 빠져나가 아빠의공장으로 가는
마을버스 속에 있었다. 3분 후의 상황 같았다. 이 원반이 뭔지 감이 잡
힐 것 같았다. 이건 일종의 시간가속기 같은 거였다.

원판 뒤의 다이얼을 아무리 다르게 위치시켜 놓고, 시계 반대 방향으


로 원반을 돌려도 과거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실제일어났던 15분 전
까지의 과거만 겪게 해주었다. 하지만 다이얼을 눈금1에 놓고 시계 방
향으로 비틀면 최대한 15분 후의미래까지 겪게 해주는 것 같았다. 하
지만 원반을 모두 시험해볼 시간이 없었다. 다이얼을 원래 위치 '눈금
1'에 놓고뛰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약 15분 뒤의 미래까지만 겪는 게 가능한 선원의 거울을 손에 쥐고 나


는 아빠의 공장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죽어라 뛰었다.

벌써 5시 37분이었다. 막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잡아타고 아빠의 공장


으로 향했다. 당연히 아빠는 나를 바라보고 화들짝놀랬다. 아빠는 그
동안 손톱으로 소파만 긁고 있었는지, 소파는 솜이 모두 떨어져 나가
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이제 돌아오는 거야!"

"갚을 돈을 마련했나요?"

"겨우 한 군데서 빌렸어. 하지만 턱도 없어. 잠시 후면 이 고통도 끝이


지. 난 네 엄마에 대한 마음을 놈들에게 팔기로결정했다. 그런데도 놈
들은 공장을 밀어버리겠다고 하는구나. 이자는 갚지 못했다며."

굴삭기가 캐터필러를 굴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진압군의 탱크 소리처


럼 들려왔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중장비들을 이끌고온 마흐바흐
가 현관에 멈췄다.

"엄마는 꼭 돌아온다고 했어요! 엄만 남자 친구 때문에 우릴 떠난 게


아니었어요. 놈들 꾐에 넘어가면 안 돼요! 절따라와요!"

"뭐? 엄마가 돌아온다고!"

모든 것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아빠 손을 잡고 무작정 놈들에게 달


려내려 갔다.
"공장을 밀지 마! 내가 갚을 방법을 마련했어. 한 시간만 기다려줘!
자!"

나는 당돌하게 노랑 닭 볏 머리에게 자색 보석을 건네며 말했다.

"꽤 쌉쌀한 골동 보석인데? 이거라면 그 정도는 서비스해줄 수 있지."

노랑 닭 볏 머리는 이리저리 보석을 뜯어봤고 아빠는 고개를 갸웃댔


다.

"하지만 빨리 와야 해. 중장비 모는 친구들이 파업 중이라서 어렵게 모


셔왔거든. 하지만 이걸로는 한 시간까진 안 돼.정확히 40분 뒤에 밀겠
어."

치사한 녀석이 20분을 댕겼다.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도로로 달렸다.


차들이 쌩쌩 지나치는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고,지나가는 차를 잡
기 위해 조난자처럼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세워주지 않았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저 앞에 빨간 스포츠카하나가 지그재그 다가오고 있었
다. 술주정뱅이가 모는 것 같은 푸조였다.

"술주정뱅이들은 보통 인심이 후한 편이지. 기분 좋게 취했을 경우에


만 그렇지만. 위험하지만 저걸 세워야겠다."

아빠가 푸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차라리 말리고 싶었다.

"오케이!"

단추가 네 개나 풀린 흰 셔츠를 걸친 알코올 중독자가 우리 앞에 차를


끽 세웠다. 우린 무조건 탔다. 푸조는 불안스레천변을 달렸다.

"난 오늘 밤 가진 걸 모두 걸기 위해 병원에서 뛰쳐나왔답니다. 죽기


전 실컷 즐기기 위한 마지막 베팅이죠. 인생은한방이지 않겠습니까?"

주정뱅이는 왼손으로 마시던 꼬냑 병을 개천으로 던져버리고 말했다.


"나의 목적지는 고대하던 코리언더비가 열리는 저기인데, 당신들의
목적지는 어디이죠?"

주정뱅이가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다가오는 경마장을 가리키며 말했


다.

"우리 목적지도 당신과 같아요!"

내가 대답했고 주정뱅이는 '여- 후!' 외쳤다. 하지만 아빤 달랐다.

"맙소사!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도박을 하다니! 보름동안 가출해 못된


친구들과 어울린 게 분명해. 인생을 성실하게살아야지. 요행을 바라다
니. 기껏 가는 데가 경마장이었냐? 난 공장을 잃어도 좋아. 난 네가 바
르게 자라는 게 더중요해. 내려주시오!"

아빠가 주정뱅이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소리쳤다.

"요행이 아니에요! 난 이걸 얻기 위해 아빠가 상상도 못할 고생을 했어


요. 목숨을 건 노력을 기울였다고요!"

나는 선원의 거울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 직감을 믿지. 마지막 베팅은 여섯 시


에요. 경마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건전하게즐기면 돼요."

주정뱅이가 대답했다.

"닥치시오! 당신은 이미 건전하게 즐기지 못한 것 같은데?"

"아빠! 딱 한번만 저를 믿어 봐요!"

나는 애원하듯 아빠를 쳐다보았다.

"좋아! 어차피 주어버릴 돈이니까.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약속할


수 있지?"
나는 그러기로 아빠와 약속했다.

5시 51분. 접수마감 9분 전. 주정뱅이는 사람들을 헤집고 창구로 가서


마권을 한 묶음 집어왔다. 그리고 마권을 대신기입해주고 수수료를 챙
기는 사람들을 떼거지로 데리고 왔다. 베팅 한도액 때문이었다. 주정
뱅이는 그들에게 2번 마'아미고'와 9번 마 '무패강자'에다 사인펜으로
칠하게 하고 자기가 가지고 온 판돈을 몽땅 걸었다.

미성년자는 마권을 구입할 수 없다. 주정뱅이는 친절하게도 마권을 대


신 기입해주는 사람들을 아빠에게 알선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아빠에게 잠깐 기다리게 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선원의 거울을


비틀기 위해서였다. 원반 뒤편의 다이얼을 '눈금1'에둔 채 10분 후의
시간만큼만 원반을 시계 방향으로 비틀었다 놓았다. 화장실 안이 휘황
찬란한 불빛에 쌓였다. 내 몸이 붕떠서 화장실 창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가 은하계 끝까지 멀어져 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쌍승식으로 7번 마 '씨코리아'와 12번 마 '뇌천'에다 색을 칠하게 하는


내가 보이고, 말들이 달리고 아우성이 들리고,카메라 뒤편에서 응원하
는 나와 아빠가 보였다. 하지만 '씨코리아'는 도주마가 되고 '뇌천'은
꼴찌로 들어왔다. 절망하는나와 아빠의 모습이 스쳐가고 나는 은하계
의 전환점을 돌아 몸이 빠져나갔던 화장실 창의 바로 옆 창으로 들어
오는 것같았다. 그리고 서로 돌던 두 원판이 제자리에 멈췄다. 나는 당
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15분 후까지의 미래를 보여주는 시간 가속기


가 아냐. 우승마조차 알 수 없어. 그렇다면 난가장 맞추기 어렵지만 배
당률이 높은 쌍승식(*순서대로 1등과 2등을 맞추는 베팅 방식)을 포기
할 수밖에 없어.'

접수 마감 시간이 이젠 6분밖에 남지 않았다. 빨리 말을 결정해야 했


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톱니바퀴처럼 생긴 세 번
째 다이얼의 기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을까.
얼른 눈금2에 다이얼을 맞추고 시계 방향으로 10분만 비틀었다. 또다
시 내 몸이 떠오르며 창을 통과해 나가더니 갑자기 두개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두 개로 쪼개진 몸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며 서로 다른
미래를 겪고 돌아왔다. 하나는 5번마와 8번 마를 선택한 나의 미래였
고, 다른 하나는 6번 마와 10번 마를 선택한 나의 미래였다. 하지만 두
조합모두에서 절망하는 나와 아빠를 보았다.

이번엔 눈금3에 다이얼을 맞추고 시계 방향으로 원반을 10분 정도 틀


었다. 내 몸은 세 개로 쪼개져 서로 다른 우주를겪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조합에서도 절망하는 나와 아빠가 보일 뿐이었다. 이제 다이얼의
기능이 감이 잡힐 것 같았다.하지만 마감 시간이 채 4분도 남지 않았
다. 과감하게 눈금15에 다이얼을 놓고 시계 방향으로 원반을 비틀었
다. 나의 몸은창을 빠져나가 15개의 나로 갈라졌다. 분수의 물방울처
럼 내가 흩어지며 깜깜한 15개의 각각의 은하의 가장자리 따라질주했
다. 조금 전에 실패한 3개의 선택이 모두 보였고, 아직 선택하지 않은
미래들이 나타났다.

15개 미래에는 12개의 절망하는 나와 아빠, 겨우 본전만 건지는 나와


아빠, 겨우 배당률이 두 배 정도에 그쳐버린 나와아빠, 마지막으로 환
호성을 지르는 나와 아빠가 스쳐지나갔다. 각 우주들의 전환점을 돌아
오면서 나는 15개 우주 사이를가로지르며 나의 15개 미래를 모두 보
고 있는 착각에 빠졌다. 원반이 멎기 직전, 15개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우주를경험한 '나'들이 하나의 창을 통과해 화장실에 서 있던 원래의
내 몸속으로 착착 들어왔다.

선원의 거울은 바로 나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질 15개의 서로 다른 우


주를 보여주는 기계였다. 좀 어려운 말로 양자적으로쪼개질 주관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기계 말이다. 나는 15개 우주 중 1등과 2등 마를 알
아맞히는 우주를 기억하고 아빠가기다리는 창구로 가기 위해 화장실
을 뛰쳐나왔 다. 그때 복도 왼쪽에서 웨이터가 아래 칸에 왼발을 걸치
고 오른발로 밀며달려오는, 음식이 가득 담긴 룸서비스용 웨건이 나의
옆구리를 부딪었다. 사골탕이 든 음식 뚝배기들이 공중으로 튀었다.나
는 쓰러졌고 선원의 거울은 나의 손에서 벗어나 구르다 질주하는 웨건
의 앞바퀴에 끼었다.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음식과식기들로 엉망진
창이 된 복도를 웨건이 미끄러져 가다 멈췄다. 작은 두 눈이 넙치처럼
한가운데로 몰린 웨이터가 성난 눈으로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따져
야 했고 선원의 거울이 무사한지 알아봐야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
는 일어나 창구로 튀었다.

나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4번 마 '지구소녀'와 폐기처분 직전


의 13번 마 '전광석화'를 쌍승식으로 조합하게하고, '지구소녀'를 단승
식에도 걸게 했다.

"4번 마는 장거리 경험이 전혀 없고 주폭도 엉망이야."

아빠는 <가속도>라는 예상지를 보며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


다. 곧 배당률이 전광판에 떴다.'지구소녀'의 배당률은 무려 세 자리나
되었다.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지구소녀'에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와 나, 그리고 주정뱅이 씨는 자리가 없어, 경마장 본부석 레스토


랑의 베란다에서 촬영 중인 경마 방송 카메라 기자뒤에 서 있었다. 열
네 필의 말들이 출발했고 나와 아빠는 거의 꼴찌로 달리는 두 말을 목
이 터져라 응원했다. 드디어이변이 나타났다. 반환점을 돌던 중 우승
예상마들이 서로 내측 펜스에 밀어붙이며 다투다 엉켜 넘어졌고, 관중
석에서 탄식이새어나왔다. 그리고 내가 조금 전에 선원의 거울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겁에 질려 도주하는 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도예
상하지 않았던 '지구소녀'와 '전광석화'는 3등 마와 무려 43마신이나
차이를 두고 차례로 들어왔다. 순전한 우연의결과였다.

처음에 아빠와 나는 어리벙벙하고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러다 환호성


을 지르며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좋아할 시간이 없었다.불도저와 굴삭
기 소리가 아빠 공장에서 들려오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수
증을 쥐고 환급 창구로 내달렸다.
23. 다시 걸려온 전화

선원의 거울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다시는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돼버렸다.

여러분은 바비와 감초 씨, 데스 선장의 행방에 대해서도 궁금해 할 것


이다. 그들은 그들이 만족할 만한 꿈을 이루었다고전해주고 싶다. 오
래고 오랜 가난과 고된 선원 생활 끝에 그들은 드디어 원하던 삶을 찾
았다. 그들은 그날 내가내동댕이쳐진 장소에서 한참이나 먼 숲에 떨어
졌다. 화물칸의 보물함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과 함께 떨어졌는데, 주
로 이슬라데 피노스 호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알모타 제국의 선물은
겨우 한 상자 밖에 건지지 못했다.

우리는 며칠 뒤 바비의 고향 친구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한 베트남 식


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해적들 식으로 값진 전리품을나누었다. 나는 어
리고 신참내기 선원이라는 이유로 배당 몫의 1배를 가져야 한다고 동
료들을 설득했다. 데스 선장은 배당몫의 2배, 그리고 감초 씨와 바비
는 1.5배를 가졌다. 그들은 바다가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때도 있
겠지만, 선원이아닌 다른 삶을 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약 없이 헤어
졌다.

내 몫의 보물은 우리집 지하실에 숨겨놓았다. 나는 아직 그것을 안전


하게 처리할 방법을 모른다. 아빠의 인쇄소에는 다시직원들이 돌아오
고 아빠는 한 출판사에서 인쇄 청탁을 받았다. 많은 부수는 아니었지
만 인쇄기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아빠는 피우지도 않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제법 사장인 체 했다. 아빠의 배가 더 나와 보이는 건
이제 우리가 그지긋지긋한 빚 독촉으로부터 달아나 허리를 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저녁이었다. 나는 공부가 즐거워서라기보다는, 친


한 친구들과 멀어지는 게 싫어 다시 다니기 시작한학원을 가려는 중이
었다. 전화가 울렸다. 나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전화를 받았다.
"메릴 호 선장님 댁이십니까?"

전화기의 목소리가 물었다.

"어느 세계이죠?"

"당신이 미래의 한 시기에 결정해야 할 중요한 선택과 연관된 YI-482


세계이죠. 우린 당신의 뱃사람으로서 훌륭한자질을 깨닫고 수소문하
였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두랄루민 십만 톤을 우리 세계의 바
하나에서 GR-753 세계의나이브 항까지의 안전한 운반을 당신에게 의
뢰합니다. 그 어떤 선원도 겪지 못한 매력적인 바다 세계가 당신을 기
다리고있지요. 우리가 당신에게 드릴 배는 새로 건조된 메릴 호 선단
이고, 조건은 저번에 말씀드린 것보다 훨씬 낫게해드리겠습니다. 언덕
위의 집 지하에 있는 기계를 이용해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와도 좋습
니다."

"사양하겠어요. 난 현재로선 친구들과 다시 학원에 다닐 수 있다는 데


만족하니깐요."

"당신은 당신의 보물을 너무 믿는 것 같군요. 우린 겨우 15분이 아닌,


1년 정도의 기간까지 가장 정확한 확률로 분석할수 있는 휴대용 양자
컴퓨터를 드릴 수 있지요. 사업이나 경제에 대한 감각이란 미래를 예
측할 줄 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아니니까요. 하지만 당신 세계의 사
람들은 1초 후에 던져질 주사위 눈금 하나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죠.
곧 1초 후의미래도 예측하지 못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맞아요. 우린 겨우 몇 분 후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고 우산을 챙겨가


지 않아 쫄딱 비를 맞거나 교통 카드가 든 지갑을챙겨오지 못해 통학
버버스를 놓치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제겐 15분 후의 미래를
겪을 수 있는 기계가 있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당신은 다시 우리가 제안한 여행을 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배를 다시 탄 세계에서당신은 메릴 호 선장
이지요."

"그 선택이란 뭐죠?"

"당신의 어머니나, 당신의 여자 친구 때문일 수 있지요."

이렇게 말하며 미지의 사내는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전화를 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여자 친구?"

나는 의아해 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현관을 나서자 벌써 날이 어


두워져 있었다. 불현듯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그토록많은 선원들의 길
잡이가 돼주었던 북극성이 내 머리 위에 커다란 보석처럼 박혀 있었
다. 내가 미래에 평행우주 간 여행을다시 해야 하는 시점이란 정확히
무얼 뜻하지? 엄마를 내가 직접 모시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일
까? 엄마는 무사히돌아올 수 있을까? 혹시 마치 때문은 아닐까?

마치는 잘 있을까?

나는 연합의 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우리를 무사히 보내주려 했던 마


치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며, Y마트에서 산선글라스를
꺼냈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무겁고 습한 저녁 공기를 헤치며 보습
학원으로 향했다.
|한가을

소설과 동화가 각각 공모전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2006년 한국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 낸 책에는 판타지《잠꾸니 루미1.2.3》(2009
한국문학번역원 해외 진출지원도서)《보물선 메릴 호》(2010 한국문
학번역원 번역지정도서 선정)《못말리는 헬리콥터 엄마, 여섯 아이
들, 그리고 스카프》등이 있고, 다른 필명으로 낸 소설들도 몇 권 있
다. 직장인으로근무하는 틈틈이 다양한 소재에 바탕을 둔 실험적인 소
설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한가을의 다른 책

-못 말리는 헬리콥터, 엄마, 여섯 아이들, 그리고 스카프

-잠꾸니 루미 1, 2, 3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in the Galaxy)

보물선 메릴 호
종이책 첫판 1쇄 펴낸날 2008년 9월 16일

지은이 한가을

편집 윤이누
디자인 주미영

펴낸곳 엔블록

출판등록 2007년 11월 22일 제300-2007-162호

주소 (110-550)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01-28 계명빌딩 512호

전화 02-2253-5385

팩시밀리 02-2237-2077

이메일 nblock@paran.com

Copyrightⓒ 엔블록, 2008

ISBN 89-960477-4-2-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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