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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엄마가 뿔이 나서 집을 나간다면?
엄마가 뿔났습니다. 남편이고 아이들이고 누구도 집안일을 돕지 않
습니다. 돕기는커녕 엄마를 노예처럼 부려 먹습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청소해 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남편과 아이들이 너무
야속해서 엄마는 뿔이 났고 그래서 집을 나갔습니다.
이제 집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선 밥은 누가 할까요?
먹고 나면 설거지는 또 누가 할까요? 식탁은 누가 치울 것이며 음식
물이 묻은 옷은 누가 빨래를 할까요? 아마도 집 안은 점점 돼지우리
가 되어 가고 가족들은 점점 돼지 같은 몰골로 변해 갈 겁니다.
돼지 같은 남편과 돼지 같은 아이들에 관한 책
남편 피곳 씨와 두 아들인 사이먼과 패트릭은 아주 중요한 직장과
아주 중요한 학교에 다니느라 집에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십 년은 참고 견디던 피곳 부인이 어느 날 편지
Ⓒ 앤서니 브라운
우리 가족 이야기 31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갔습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 요리는 열 번에 한 번쯤 제가 합니다. 다만 설거지는 좀 합니다.
열 번에 아홉 번쯤 제가 합니다. 심부름도 잘합니다. 그리고 운전기
‘너희들은 돼지야.’ 사 노릇은 아주 열심히 합니다.
제가 돼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집을 나가지 않는 건 비록 청소
그 편지를 받아 든 순간 피곳 씨와 아이들은 돼지로 변했습니다. 나 빨래는 하지 않지만 아내가 해주는 요리, 빨래, 청소가 사랑임을
나흘째 밤이 되자 이제 집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과 알고 감사하며 조금이나마 변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
피곳 씨는 음식 찌꺼기라도 찾으려고 집 안을 헤맵니다. 바로 그때 합니다. 그런데 문득 아내에게 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
피곳 부인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피곳 씨와 아이들은 피곳 부인 앞 까요? 설마 아내가 내일 가출하는 건 아니겠지요?
에 무릎을 꿇고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피곳 부인은 집에 머물
기로 했습니다. 피곳 씨와 아이들은 다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첫 장면의 비밀
피곳 씨가 설거지하고 다림질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침대를 정리했 이 책의 첫 장면은 정말 많은 것을 보여 줍니다. 피곳 씨와 두 아들
습니다. 또한 피곳 씨와 아이들은 엄마가 요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이 잘 차려입고 멋진 집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습
요리는 정말 재미있고 엄마도 행복했습니다. 니다. 그들은 멋진 집에 살고 멋진 정원이 있으며 멋진 차고 안에는
멋진 차도 있으며 집 안에는 피곳 씨의 아내가 있다고 말이지요.
나는 돼지인가? 사람인가? 첫 장면의 그림과 서술은 피곳 씨와 아이들이 아내이자 엄마인 피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을 본 독자라면 한번쯤 스스로 물어 보게 곳 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이들은 자
되는 질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돼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들의 멋진 삶을 누가 가능하게 만드는지 전혀 모릅니다. 피곳 씨와
우선 외모가 완전 돼지입니다. 신체검사를 하면 그때마다 결과 보 아이들은 피곳 부인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집안의 소유
고서에 고도비만이라고 인쇄되어 나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부끄 물로 여기며 잘난 체하는 돼지들로 보입니다.
럽지만, 음식을 볼 때마다 제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집안일에 관해서도 저는 돼지입니다. 청소도 빨래도 하지 않습니 마지막 장면의 반전
32 우리 가족 이야기 33
성격이 급한 독자들은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놓치기 쉽습니다. 보 한 말이 생각납니다.
통 전통적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행복했다는 것으로 끝이 나니까요.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엄마도 행복했습니다.’를 읽는 순간 성급한 독자들은 책장을 덮어 버
립니다. 안타깝게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책장을 한 장 더 넘기면 엄마가 차를 수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엄
마는 차를 수리했습니다.’가 이 책의 진정한 엔딩입니다. 남편과 아이
들이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자 엄마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습니다.
엄마는 이제 자동차 수리까지 생각할 만큼 여유가 생긴 겁니다.
설마 이 마지막 장면을 남녀의 역할 전환이나 역전으로 이해하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가정생활이 무슨 상거래나 물물교환은 아니
니까요.
코믹하지만 너무나 슬픈 표지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저는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왔다고 생
각합니다. 왕국에서 민주 국가로 변했고 가부장제에서 민주 가정으
로 바뀌었습니다. 아빠들이 달라졌고 엄마들도 달라졌습니다. 하지
만 그 모든 이상적인 변화는 지속적인 배움과 노력이 필요하나 봅니
다. 오늘날에도 『돼지책』 이라는 그림책 표지에 엄마가 아빠와 아이
들을 모두 등에 업은 그림이 실려 있으니까요. 표지에 나온 피곳 부
인이 마치 제 엄마 같고 할머니 같아서 왠지 마음이 아파집니다. 다
소 냉소적이지만 통쾌한 그림책 『돼지책』 을 보고 나니 참으로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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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은 살아 있다
『눈사람 아저씨』 레이먼드 브리그스 지음 | 마루벌
눈사람이 살아났다!
한 소년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밖에는 눈이 내립니다. 얼른 옷을 챙
겨 입은 소년은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눈송이를 뭉치고 굴려서 눈사
람을 만듭니다. 눈사람은 입도 코도 없는 그저 커다란 눈덩이일 뿐입
니다. 소년은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목도리와 모자를 얻어서 눈사람
을 장식합니다. 오렌지로 코를 만들고 석탄 조각으로 눈과 단추를 만
들어 줍니다. 이제 눈사람은 제법 사람을 닮았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소년은 자꾸만 창밖의 눈사람을 내다봅니다. 잠자
리에 들었다가도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밤 열두 시가 넘었습
니다. 잠에서 깬 소년은 창밖에서 환한 빛이 들어오는 걸 봅니다. 소
년이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눈사람이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합니다. 눈사람은 소년과 악수를 하고 소년은 눈사람을 집으로 초대
합니다.
이제 소년과 눈사람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 레이먼드 브리그스
내 친구 이야기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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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눈사람을 만든 까닭은? 미 생명을 얻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말이지요. 눈사람은 소년의 사랑
누구에게나 눈사람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눈이 내리면 마 을 받아서 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누군가의 사
음이 들뜨고 눈을 뭉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우 랑과 관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물건이
리는 어떤 소망으로 눈을 뭉친 걸까요? 있듯이 말입니다.
소년은 혼자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소년에게는 친구도 없었던 걸 살다 보면 증명할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하
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소년은 누군가를 그리워한 것 같습 게 됩니다. 꿈과 환상과 상상이 그러한 예입니다. 소년이 눈사람과 함
니다. 그는 ‘누군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말입 께 겪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지만 소년의 기억 속
니다. 에는 분명히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그 경험은 소년에게 무엇과도
어떤 사람은 소년이 외로움 때문에 눈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할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겁니다.
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이 친구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친구
는 사랑이 만듭니다. 소년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년은 눈사람은 왜 사라졌을까?
눈을 경이로워할 줄도 알고 그 눈에 사랑을 불어넣을 줄도 알았습니 누군가에게는 이런 질문이 참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날이 풀려
다. 소년은 이미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서 눈이 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픈 결말
을 가진 그림책을 갖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렇
눈사람이 어떻게 살아났을까? 게 멋지고 재미있는 눈사람을 만난 사람이라면 집 안에 커다란 냉장
어린이들은 이 책을 보고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지를 궁금해 고를 만들어서라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지 않을까요?
합니다. 더구나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스노우맨>을 보고 하지만 따뜻한 햇볕을 받아 눈은 녹고 눈사람은 형체도 없이 사라
난 어린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신 목도리를 손에 들고 서서 녹아 졌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지은이가 결코 슬픈 결말로 어린이의
버린 눈사람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모습 때문에 더욱 궁금해 하고 안 마음에 상처를 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책을 본 어떤 사람
타까워합니다. 어른들은 믿지 않는데 말입니다. 도 이별의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눈사람이 정말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은 만들어질 때 이 오히려 이 책을 본 사람들은 아쉬움과 슬픔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글이 없는 그림책
이 책에는 글이 없습니다. 또 그림은 만화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작은 코끼리, 큰 코끼리
별이 빛나는 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의 ‘별이 빛나는
밤’이자 소녀의 ‘별이 빛나는 밤’이 됩니다. 이제 그 별에서 온 소년과
함께 주인공 소녀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저는
두 사람의 모험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문득 할아버지가 감탄하던 숲 속의 별이 바로 소녀 자신이고 소년
이며 우리 모두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소녀가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 별에서 온 것처럼 자유롭고 즐거운 모습이라고 생각한 건
왜일까요? 사람은 원래 별처럼 아름답고 자유롭고 즐겁게 태어난 게
아닐까요? 우리는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에서 태어나서 사는 자유롭
고 즐거운 사람들이니까요. 우리의 삶이 아름답지도 자유롭지도 즐
겁지도 않다면 우리는 아마도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닐 겁니다. 오늘
밤도 별들이 아름답게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