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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장의 애완그녀 2권
사쿠라장의 애완그녀 2권
제 2 장 파란, 소용돌이친다.
제 4 장 거대한 불꽃을 쏴봐
사쿠라장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내가 바꾸려고 하면 그만이다.
사쿠라장은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엉망진창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제 1 장
여름 하면 산이랑 바다?
1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리자 방 안이 약간 어두워졌다.
사쿠라장 101 호. 한복판에서 방주인인 칸다 소라타는 섬세한 분위기의 소녀,시이나 마시로와 마주 보고
있었다. 약간 올라간 눈. 윤기나는 부드러운 머릿결.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피부. 부정한 생각을 품고
만졌다가는 당장에라도 스러져버릴 듯한 허무한 분위기다.
“소라타.”
얇은 입술이 이름을 부르자,소라타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나,해본적 없어.”
마시로의 담담한 음색이 방의 침묵을 채워나간다. 낮에는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매미의 합창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말이 끊어지자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응.”
소라타는 이마의 땀방울을 티셔츠 소매로 닦았다.
오늘은 올해 최고기온을 기록한 매서운 더위로,해가 진 후에도 도무지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시로의 피부도 살짝 상기되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다정하게 해.”
“갑자기 끝까지 가는 건 무리일 테니,할 수 있는 데까지만.”
“안돼.”
“너 진짜”
“도중에서 멈추면 곤란해”
“그래도…….”
“소라타라면 괜찮아……. 끝까지 해.”
소라타를 가만히 바라보는 마시로의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없었고,그럴 생각으로 오늘은 여기 있는 거라고
언어 이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알았어.”
마시로는 금세 깨져버릴 듯한 얼음 장식 같은 인상을 한 주제에,한 번 뱉은 말은 절대 철회하지 않는
강직함이 있다. 아주 완고한 성격이다. 그래서 소라타가 양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만하고 싶을 때는 말해. 무리할 것 없으니까.”
“소라타가 해주는 거니까 괜찮아”
“그렇게까지 말하면 진짜 안 멈추겠지만. 그럼,얼른 보여줘”
감동 없는 눈동자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쳤다.
“소라타……. 막무가내구나.”
“안 그러면 할 수 없잖아.”
“하지만 갑작스러운건 싫어.”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아~,답답하네.”
“부끄러워.”
“적당히 좀 해! 너한테 부끄럽다 같은 감정이 어디 있어!”
“그렇게 보고 싶어?’
“됐으니까,낙제점 받은 답안지나 내놔! 내일 추가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해야 하잖아!”
아~아,소라타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고 만 걸까. 오늘부터 즐거운 여름방학이건만. 낙원이 코앞인데
누가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기분이다.
전부 시이나 마시로의 머리가 나쁜 것이 문제다. 귀찮은건 소라타에게 밀어버리고 미팅을 하러간 무책임
교사 센 고쿠 치히로가 문제다. 원인은 명백하고도 명쾌하다.
하지만 그걸 알아봐야 사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라타는 한숨을 쉬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1 츠치노코 일본에 서식한다고 알려진 미확인 생물. 60cm 정도 길이에 몸통은 납작하고 쥐 같은 꼬리가
달린 뱀.
제 2 장
파란, 소용돌이친다.
#5 못타이나이 오바케 아깝다와 도깨비가 합쳐진 것으로. 음식 투정하는 어린이를 교육할 목적으로 만든
단어.
아무튼,곤란하다.
나나미에게 마시로에 대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소라타는 이것만 생각했다. 욕실 청소를 하는 지금도,머리를
풀가동시키며 생각 중이다.
원래 이번 주는 마시로가 욕실 청소 당번이지만,시켰다간 뭔가 사고를 쳐서 결과적으로 소라타가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소라타가 전부 하고 있다.
세제 거품을 샤워기로 씻어냈다.
갑작스럽게 이사를 왔던 어제는,결국 나나미가 열 시를 한참 넘어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사쿠라장의 진정한 비정상적인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오늘,혹은 내일은 깨달을지도 모른다. 빨리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소라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플랜 B 밖에 없다.
마시로와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나나미에게는 눈을 감아달라고 하는,진의 추천 작전이다.
솔로경력 16 년인 소라타가 그런 거짓말을 해봐야 금방 들키진 않을까.
도대체 나나미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ㅡ나랑 마시로는 사귀기로 했으니까 방해하지 마.
어이어이,대체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一그게,실은 나랑 마시로가 사귀고 있어. 따뜻하게 지켜 봐주면 좋겠다.
마치 평소 신세진 선배한테 인사하는 것 같다.
ㅡ오늘 인사드리러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마시로 씨와의 교제를 허락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 기세군.
명백하게 무리가 있다. 애당초 사권다는 거짓말을 했다간 앞으로 매일 나나미를 속이기 위해 사귀는 척을
해야만 한다. 그것보단 차라리 지옥이 나을지도 모른다.
증거로 키스해 보라는 소리라도 하면 단번에 끝장이다. 욕조 거품을 전부 씻어낸 소라타는 샤워기를
잠갔다. 발치로 다가온 삼색고양이 코다마를 얼굴 높이로 안아 올렸다.
느닷없이 높은 장소로 올라간 코다마가 불만스러운 듯 낮 게 울었다.
“내가 어떡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아마 그 애는 답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보자 나나미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소라타를 쳐다봤다. 데님 큐롯팬츠에 위에는
하얀 블라우스,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같은 여자라도 미사키는 기숙사 안에서는 좀 더 러프한
차림을 하고 있으며, 마시로는 대부분 파자마 차림이다.
코다마를 내려주자,코다마는 욕실에서 후다닥 뛰어나갔다.
“칸다,너 뭐해?”
“뭐하는 것처럼 보이냐?”
“인생을 고민하면서 욕실 청소?”
“정답!”
“냉장고 당번표에 따르면 이번 주는 시이나가 당번이던데?”
“아~, 이건 말이지.”
“시이나는?”
말을 머뭇거리는 소라타를 추월해 나나미가 시원하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아마 잘걸.”
“그런건 안 좋아.”
나나미는 우향우를 하더니 한눈도 팔지 않고 2 층으로 올라갔다.
“앗,잠깐,아오야마!”
소라타도 황급히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나오는 방이 미사키의 201 호. 마시로의 202 호는 한가운데. 나나미가 노크했다.
“시이나?”
“아오야마,됐다니까.”
“규칙은 제대로 지켜야 해.”
그런 당연한 소리를 들으니 자신이 무척이나 몹쓸 인간처럼 느껴졌다.
“아니,정말 괜찮아!”
“흐음,시이나를 감싸는구나.”
“감싸는 거 아냐! 하지만 아무튼 이 방은 안 보는 게 좋아.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평범한 세상이
아니니까,내 충고를 들어.”
“이것 봐,감싸고 있네.”
“정말 아니라니까! 무엇보다 밖에서 이렇게 말 거는 정도로는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반사적으로 소라타는 문고리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 의미를 모르는 나나미가 아니지만,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었다.
“하지만 열쇠가…….”
나나미는 이렇게 말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열려 있다는 사실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남자도 있는데 문을 안 잠그다니,말도 안 돼…….”
문 안쪽에는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이세계로 끌려간 나나미는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마시로의 방은 언제나 그렇듯 옷과 속옷,책과 만화,그리고 콘티와 원고들이 사방팔방으로 어질러져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상태였다.
“이게다 뭐야.”
“나도 4 월에 똑같은 말을 했어…….”
나나미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 마시로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소라타를
돌아보며 의문을 던졌다.
“책상 밑에.”
수상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나나미가 책상 밑을 들여다 보았다.
“세상에……”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만,시이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야.”
“그래서 사쿠라장에 온 건가?”
소라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이나,일어나.”
나나미가 쪼그리고 앉아 마시로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마시로가 꿈지럭거리며 일어났다.
소라타는 일단 눈을 피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위아래 모두 파자미를 입고
있었다.
“시이나,안녕.”
잠에서 덜 깬 멍한 표정의 마시로가 나나미의 몸으로 손을 뻗어,갑자기 더듬더듬 만지기 시작했다.
“꺅,뭐,뭐야?!”
“소라타…… 부드러워졌네?”
“소라타는 저기!”
그러자 나나미가 가리킨 손가락 방향으로 걸어가 소라타 앞까지 왔다. 이번에는 소라타에게 손을 뻗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뭐하는 거야?”
“진짜. 이쪽이 소라타다.”
“눈으로 확인해!”
“졸려. 눈 뜨기 싫어.”
이 상태로 보아하니 잠든 것은 동틀 녘일지도 모르겠다.
“또 콘티라도 짰어?”
“데뷔 원고,입고 전 마지막 수정.”
짧은 말로 대답한 마시로는 다시 책상 밑의 둥지로 파고 들어갔다. 바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나미는 말 그대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상황 파악을 위한 시간을 줘.”
“일단 경험자로서의 충고를 해두겠는데,이해하려 할수록 더욱 수렁에 빠질 뿐이야.”
상식적인 사람일수록 마시로의 특수공격으로 인한 정신적인 데미지는 크다. 나나미의 경우,소라타보다
내성이 약한 것같다.
“……그야 그렇겠지. 응. 그만둘래. 그보다 시이나,일어나!”
과감한 도전자 나나미가 다시 마시로에게 덤벼들었다. 그만두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말한다고 들을
나나미도 아니다. 다시 책상 밑에서 마시로가 나왔다.
옷과 속옷들을 몸에 칭칭 감은 채로 바닥에 앉아 나나미를 올려다보았다.
“시이나,옷 갈아입어. 남자 앞인데 너무 무방비해. 그리고 이 방,너무 엉망이잖아. 정리해야지.
칸다도 멍하게 있지 말고 당장 나가! 2 층은 남자 금지야!”
나나미가 시원시원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소라타도 마시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아~,진짜. 이 봐,속옷까지 이렇게 난장판으로. 속옷은 남의 눈에 안 띄게 둬야지.”
“왜?”
“왜긴. 다른 사람이 보면 쑥스러운 물건이잖아.”
“입은 거 아니면 안 쑥스러워.”
이렇게 말하면서 마시로가 팬티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냥 천조각이니까.”
“그, 그래도!”
마시로의 가치관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나나미가 비명을 질렀다.
“남자애가 보기라도 하면 이것저것 이상한 상상을 해서, 분명,그게 저렇게 돼서,그러니까 나나미가
웅얼웅얼 말을 머뭇거렸다.
“나나미는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지!”
“왜?”
“왜긴,그러니까 그건…….”
나나미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대답이 궁해진 나나미는 갑자기 칼끝을 소라타에게로 돌렸다.
“넌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방금 그 분노는 부당한 것 같아.”
“소라타는 나랑 같은 의견이야.”
“날 끌어들이지 마!”
나나미가 매서운 눈초리로 힐문했다. 까딱 잘못 대답하면 무시무시한 욕설이 돌아올 것이다.
“난 아오야마에게 찬성이야. 정리하는 게 좋겠어. 속옷뿐만이 아니고 전부 다.”
“거짓말쟁이.”
마시로가 중얼거렸다.
“항상 내 팬티,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놀면서.”
“누가 갖고 놀았다고 그래!”
나나미가 기름이 떨어진 로봇 같은 동작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빙점 아래 세상으로 소라타를
끌어들였다.
“칸다,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설명해 볼래?”
한 걸음, 한 걸음 나나미가 다가오더니 소라타의 멱살을 잡았다.
“잠깐,잠깐. 이상하잖아? 방금 그건 시이나에 관한 이야기로 난…….”
“됐으니까 빨리 대답해!”
“아,네…….”
나나미의 공포에 떨면서 소라타는 약 한 시간에 걸쳐 올 4 월부터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소라타의 설명이 끝나자 나나미는 피곤한 듯 중얼거렸다.
“……갑자기는 못 믿겠지만.”
그리고 책상 밑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마시로를 기이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무 심한 취급이었지만 소라타에게 책망할 권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같은 반응을 해왔는지.
셀 수가 없다.
학교에서는 미스터리한 어린 천재화가로 유명한 반면,아무도 마시로의 본성을 모른다. 모두들 구름 위의
존재를 보듯이 멀리서 지켜볼 뿐,친해지려고 말을 거는 동급생은 한 명도 없었다. 사쿠라장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원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귀여운 외모에 재능까지 있으니 좋은 소문만 돈다. 미술 시간에 작품을 완성하면
그때마다 전시된 그림 앞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어,
“시이나는 좋겠다. 재능도 있고 연약해서.”
“지켜주고 싶은 느낌? 알 것 같아~.”
“남자들은 어찜 이렇게 멍청할까.”
“하지만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점은 나도 좋다고 생각해.”
“그러게. 내성적이라고 할까,고상하다고 할까, 저런 애가 잘 없지.”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시로는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해석해
준다. 창가 자리에서 멍하게 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허무한 아름다움 이 있다든가,깊이가 있다 같은
말을 들을 정도다. 아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바움쿠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텐데.
1 학기 동안 마시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들을 때마다,소라타는 본성이 드러나는 날을 생각하며 절망에
빠지곤 했다.
유소년기부터 영국에서 그림 영재교육을 받아온 마시로는 그 외의 다른 것을 접할 기회가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위태로울 정도로 일반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
아직도 사쿠라장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외우지 못하는가 하면,혼자서는 심부름 하나 마음 놓고 보내지
못한다. 편식은 심하고,싫어하는 것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싫어하는게 있으면 당연한 얼굴로 다른 사람
그릇에 덜어낸다. 취사나 세탁은 전혀 못 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는 옷 갈아입는 것은커녕,
팬티조차도 못 고르는 형편이다. 입는 것 담당. 신변의 잡다한 일은 누군가가 해준다. 그게 마시로의
상식이었다.
공부도 전혀 안 해서 1 학기 기말고사는 전 과목 0 점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을 소라타는 남김 없이 나나미에게 말 해 주었다.
“시이나는 말이지,미사키 선배랑 쌍벽을 이루는 사쿠라장의 괴짜야.”
게다가 화가로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를 목표로 해서 멋지게 데뷔까지 따냈다. 일본에는 그것을
위해 돌아온 것이다.
나나미는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어질러져 있는 원고들을 주워 모았다.
“정말그림 하나는 잘 그리네.”
“말해두겠는데,난 사실만 말했어.”
원고에서 나나미가 눈을 뗐다.
“이 참상을 보니 확실히 설득력이 있긴 하다.”
“그렇지?”
“덕분에 수수께끼도 하나 풀렸고.”
“수수께끼?”
“냉장고 당번표.”
“아아,그거…….”
누가 보나 이상한 명칭의 표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마시로 당번」은 시이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게 일이야.”
“거의 간호 수준이지. 시이나는 구제불능 판타지스타니까.”
“아무튼 사정은 알았어.”
소라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플랜 B 와 플랜 C 는 이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애당초 플랜
C 는 선택지에 넣어놓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납득은 안 돼.”
“뭐?”
“그렇잖아? 당당하게 칸다가 금남구역인 2 층까지 오는 것도 안 좋고,시이나는 조금씩이라도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런 건 남이 해준다고 쳐도,빨래나 방 청소를 남자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일손이 없어. 여자는 귀차니스트 교사랑 외계인뿐이잖아.”
“또한 사람 잊었어?”
“어이,설마.”
“「마시로 당번」은 오늘부터 내가 할게.”
“나쁜 소리 안 할 테니 그만둬! 너는 아르바이트랑 이카데미로 바쁘잖아?! 게다가 시이나 뒤치다꺼리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300 배쯤 아무 것도 못한다니까.”
책상 밑에 있는 마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획에 맞춰서 할 거니까 괜찮아.”
“무모하다고!”
“동성인 내가 해야 해.”
“냉정을 되찾아!”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아니면 뭐? 네가 꼭 시이나 보모역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아,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은 있다. 있지만 말로는 제대로 표현 못 할 것 같다. 소라타 자신도 가슴 속의 답답한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번을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존재는
막연하게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이유가 없으면 결정.”
“정말 부담스러울 텐데.”
“같은 말 계속하게 만들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나미에게는 망설임이 없었고,이제 와서 생각을 굽힐 마음도 없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소라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야. 당번 담당은 사쿠라장 회의의 결의가 필요해. 그런 룰이니까.”
“룰이 그렇다면 할수 없네.”
“그래,그렇지.”
소라타가 안도한 것도 잠시,나나미는 태연하게 선언했다.
“그럼 오늘 밤에 사쿠라장 회의를 소집할게. 아카데미 마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게 열 시니까. 좀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열한 시부터 하자.”
“……네. 알았습니다.”
이제 소라타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면 나가. 여긴 여자 방이니까.”
아무 대꾸도 못하고 방에서 나왔다. 나나미도 뒤따라 나와서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라며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나미를 배웅한 소라타 뒤에서 치히로가 말했다.
“너,진짜대책 없는바보구나.”
왠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서,뭐 잘났다고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이유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부담이라든가 무모하다 같은 말을 하면,아오야마같이 어른스러운 성격의 여자애는 당연히 발끈해서
부정하지. 좀 더 여자 다루는 법을 배우도록 해.”
말투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확실히 치히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다 들으셨어요?”
“멋대로 들렸어.”
아직 사쿠라장 회의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생각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나온 한숨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밤,나나미가 소집한 사쿠라장 회의에서「마시로 당번」담당자 변경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진이 나나미에게 한 표를 던졌고 미사키도 동의했다. 게다가 빨리 회의를
끝내고 싶어하는 치히로와 류노스케도 나나미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소라타는 간단하게「마시로 당번」
을 나나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동시에 그 외 다른 당번 로테이션도 나나미를 포함한 것으로 수정 되었다.
7 월 24 일.
시쿠라장 회의 의사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ㅡ「마시로 당번」담당자가 변경되었습니다. 칸다 소라타에서 아오야마 나나미로 변경하는 것이 다수결로
가결되었습니다. 의사록은 이런 식으로 쓰면 되나? 서기·아오야마 나나미.
ㅡ파이팅,나나밍! 내가 응원할게! 추가·카미이구사 미사키.
얼마나 잤을까.
방에 들어오는 발소리가 소라타의 의식을 반쯤 꿈나라에서 현실로 끌고 왔다. 고양이 때문에 문은 열어둔
상태였다.
히카리인가,노조미,아니면 코다마일까. 아무래도 소리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고양이라도 별 상관은 없다. 스터디 시간이 되어 나나미가 깨우러 온 것이라면,일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미라면 그냥 밖에서 이름을 부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하자, 발소리가 침대로 올라왔다. 이 더위에도 고양이들은 다가오려는 것이다.
소라타는 고양이를 밀어낼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털의 감촉으로 어떤 고양이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에 닿는 느낌은 상상했던 감촉과는 완전 딴판이 었다.
고양이보다 부드럽고 크기가 제법 컸다. 슬쩍 밀어낸 것 만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만져져야
할 털의 감촉은 전혀 없었고,피부 감촉은 매끈매끈했다. 고양이 몸이 라기보다 천으로 만든 옷의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긴 소라타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마시로의 잠든 얼굴이 있었다.
뻗은 손은 마시로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다. 새우가 펄쩍 뛰어오르듯,소라타는 몸 전체를 써서 뒤로
물러났다.
자기도 모르게 땐 손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말았다. 전에 진이 말한 것처럼 가느다란 선으로는 상상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한 존재감이 있었다.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아버린 듯한 죄책감과 긴장감에 소라타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같이 자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소라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이,시이나.”
“……왜?”
반쯤 든 눈으로 마시로가 소라타를 쳐다봤다.
“왜는 무슨,너 여기서 뭐 해!”
“자.”
“네 방에서 자.”
“……아침에 나나미가 와.”
“그렇다고 내 방에 오면 어떡해!”
나나미의 방침에 따라 방학 중에도 마시로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야 했다. 오늘은 느긋하게 자고
싶어서 도망쳐 온 것이리라.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이렇게나 당당하게 침대로 파고들면 남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서 소라타로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콘티 짜느라…….”
다시 마시로가 눈을 감아 버렸다.
“자면내가 죽어!”
“……소라타.”
“왜,왜 불러.”
“둘이 있을 때는 마시로.”
“아,알아…….”
“그래……. 그럼 됐고.”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잠들려고 했다.
“으악~,잠깐,자지 마! 에~,아~,맞다! 다음에는 연재를 노린다고 했지? 그럼 본격적으로 만화가
느낌이 나겠네.”
“난 될 거야…….”
발언은 당찼지만,마시로는 당장에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피곤해 보여서 재워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그걸 허락하면 뒷일이 무섭다. 나나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가 없다.
“콘티는 잘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안돼……?”
“응.”
밤새도록 책상에 앉아 콘티 작업을 하는 마시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콘티가 잘 나올 때는 좋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때는 무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매일 지쳐 잠들 때까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하겠다고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게 마시로의 스타일이다.
“소라타,부탁이 있어.”
“응? 뭔데?”
올려다보는 마시로의 눈에 약간의 불안함이 스쳤다.
“잡지 나오면 같이 서점에 가고 싶어.”
“시이나……가 아니라 마시로의 데뷔작이 실린 거? 언제 나오는데?”
“12 일.”
“그래. 알았어.”
“당번 아닌데 괜찮아?”
“약속할게.”
쑥스러워진 소라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시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아무 말 없이 소라타는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자.”
“소라타.”
“왜?”
“……얘기해서 다행이다.”
손가락을 품과 동시에 마시로는 잠들었다. 그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나참,무슨의미야.”
소라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잠깐 동안 마시로의 자는 모습을 독점했다.
마시로 당번에서 벗어난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지만 눈앞에서 자는 마시로의 모습이 그리웠던 것이다.
잠시 동안 더 보고 싶었지만,유유자적하고 있을 순 없다. 시계는 이미 일곱 시를 지나 있었다. 슬슬
나나미가 마시로를 깨울 시간이다. 방에 없는 것을 알면 제일 먼저 여기로 올 것이다.
기다릴 생각으로 소라타는 방에서 나왔다.
현관 옆에 있는 계단에서 위층을 살폈다. 나나미가 내려 오기는커녕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라타는 경계하면서 주방을 쳐다보았다.
먼저 온 손님은 원탁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서 확인해보자 놀랍게도 나나미였다. 어제 나갈 때와 똑같은 복장. 분명히 아카데미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갔을 텐데. 그러고 보니 몇 시에 돌아왔는지 소라타는 모르고 있었다.
팔 밑에는 종이 다발. 대사 같은 것이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고, 군데군데 빨간 펜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무슨 대본인 모양이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대로 있다가는 감기 걸릴 것이다. 소라타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 홑이불을 들고 나와
주방에서 자는 나나미의 어깨에 걸쳐주려 했다.
그 순간, 나나미가 눈을 번쩍 떴다.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이불을 덮어주려던 자세의 소라타와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몇 센티만 나아가면 키스도 할 수 있을 거리다.
나나미는 두세 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소라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졸음 가득한 눈에 천천히 의식의
빛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나나미의 눈동자가 겁에 질렸다.
“카,칸다…….”
사투리 억양이었다.
“아냐,아오야마,이건!”
“내 몸이 목적이가!”
나나미가 있는 힘껏 콧잔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 충격으로 소라타는 몸을 일으켰고,비틀거리면서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참기 어려운 코의 독특한 통증.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그 이상으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려서 바닥에 빨간 비를 내렸다. 코를 잡은 손은 이미 새빨겠다.
그 사이에 나나미는 주방 구석으로 도망쳐 육식동물을 보고 겁먹은 토끼처럼 웅크렸다.
“니,니를 믿은 내가 바보였제.”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아오야마 씨.”
눈물과 코피로 비참해진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쌔, 쌤한테 다 이를끼다! 콩밥이나 양끗 무 봐라!”
“진정해! 상황을 좀 보라고!”
“상황 파악 진즉에 했다! 남의 방에 기들어온 주제에 짐 먼 소리……가아니라,어라?”
무언가를 알아챈 나나미가 천천히 일어났다.
“내 방이 아니네…….”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는 주방. 어깨에 걸쳐져 있는 홑이불. 그리고 소라타.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를 돌이 켜보듯 나나미가 천장을 쳐다봤다.
“생각났냐? 이해됐냐고?”
“혹시…….”
“그래,그 혹시다.”
“잠에서 덜 깬 얼굴,봤어?”
“할 말이 그거냐!”
나나미가 황급히 얼굴을 가리고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마 세면장으로 갔으리라. 복도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소라타는 한숨을 쉬면서 코에 휴지를 말아 넣었다. 아직도 바닥으로 피가 흘렀다. 쌍코피인 모양이다. 16
년 인생에 처음 하는 경험이다.
코피 처리가 끝나자 세수를 하고 앞머리를 정리한 후 옷 매무시를 가다듬은 나나미가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 하다는 자각은 있는지 양쪽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은 소라타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려 숨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가 떨렸다.
“미안.”
“아니,괜찮긴 한데. 그렇게 벽을 보고 말하면.”
“보면 웃기니까.”
“이게다 누구 때문인데!”
“미안하다니까.”
“됐어. 그보다 으음……그래.”
괜찮으냐고 물어보려던 소라타는 말을 삼켰다. 그걸 나나미에게 말하면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전에 치히로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 말을 제외하자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결과,테이블 위에서 화제를 찾았다.
“아아,이거? 21 일에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가 있거든. 그 때 공연할 것.”
“애니메이션?”
“아니,그냥 일반적인 것……. 연극이야.”
“흐음.”
“셰익스피어 정도는 알지?”
로미오와 줄리엣밖에 모르지만,소라타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 같은 것도 하는구나.”
“같은 것이라고 할까,기본적으로 연극 공부를 하고 있어.”
“뭐? 더빙을 하는게 아니라?”
“마이크 앞에서의 연기 연습은 전에 특별 강의로 한 번 정도 했나? 우리 아카데미는 연기 기초를
중시한다고 할까, 배우를 키운다는 방침이거든. 노래나 춤 레슨도 있어.”
“헤에~, 아카데미란 게 그런 거구나.”
“물론 실전을 중시하는 곳도 있겠지만.”
“그래서,연습 좀 했어?”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 받은 거야. 한 번 읽어보고 대사를 외워야겠다 생각 했는데.”
“도중에 잠들었다?”
“그랬나 봐.”
반성하고 있는 듯 나나미가 몸을 웅크렸다.
“그 발표회는 중요한 거야?”
“글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사무소에 소속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오디션은 2 월에
있고,보여주는 사람도 다르지만……. 그래도 매니저 같은 사람도 보러 오니까 아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말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진 소라타는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 팩을 꺼내보니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앗,어제 카미이구사 선배가부탁했는데……. 미안.”
냉장고에 붙은 당번표. 확실히 이번 주 장보기 담당은 나나미 였다.
“됐어. 나중에 나가는 김에 사올게. 넌 방에 가서 더 자.”
오늘도 아카데미에 갔다가 그 후에는 아르바이트도 가야 할 것이다. 체납되어 있는 일반 기숙사비를 내기
위해,나나미는 여름방학이 된 후로 아이스크림 가게 외에도 패밀리 레스토랑과 도넛 가게까지 동시에
뛰고 있다.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시간표다.
“아냐,괜찮아. 당번은 나니까. 얼른 갔다 올게.”
나나미는 식비가 들어 있는 사쿠라장 공동 지갑을 찬장에서 꺼내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며 나갔다.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어진 소라타는 나나미가 옆을 지나갈 때 팔을 잡아 세웠다.
“뭐 다른 것도 살 것 있어?”
“아오야마 넌 진짜 좀 자. 장은 내가 나중에 봐올게.”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했다.
“바로 돌이올 거야. 편의점은 길 나가면 금방이지?”
“남의 호의를 순순하게 받아들여. 왜 이런 걸로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러자 나나미가 소라타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소리야? 이건 일방적인 강요잖아.”
정면에서 나나미가 신경질을 냈다. 차갑기 짝이 없는 눈에서는 거리낌 없는 적의가 느껴졌다. 주변
공기도 순식간에 긴장감 넘치게 변했다.
냉랭함을 뿌리는 나나미와는 달리 소라타의 감정은 순식간에 가열되어 눈앞에서 새빨간 것이 보일 정도로
끓어올랐다.
“무슨 말이 그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압력에도 나나미는 굴하지 않고,차가운 위압감을 계속 뿌렸다.
1 밀리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난 괜찮아. 네 도움을 받을 이유는 없어. 전부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신경 꺼.”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자고 있던 애가 할 소리야?”
“덕분에 잘 잤으니까.”
폭언이 오가고 있다는 건 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해 버렸더니 자기를 지키기 위해 언어로
상대를 계속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달래는 기술도,받아주는 기술도 몰랐다.
“아~,그러셔? 그럼 마음대로 해!”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다. 말을 하자마자 후회하면서도 한 번 끓어오른 짜증의 온도는
간단하게 식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나나미는 몸을 홱 돌려 주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타이밍 나쁘게 돌아오던 진과 부딪쳤다.
“아오야마의 마음은 기쁘지만,루미 누나 집에서 3 차전까지 하고 왔더니 오늘은 더 이상 못 하겠어.
다음에 해줄래?”
들이받듯이 나나미가 진에게서 떨어졌다.
“미타카 선배는 정말 당당하게 통금이랑 외박허가를 무시하네요! 제대로 지키세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못 자는 체질이라. 아오야마가 같이 자주면 매일
돌아오겠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나미가 진을 꿰뚫었다. 그리고 실례 한다고 무뚝뚝하게 말한 후 현관으로 나가버렸다.
제 3 장
지금은 지금뿐이니까
지금인 거야
딱 열까지만 세고 등록하자.
심호흡을 하고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9,8……7 을 떠올린 순간 책상 위로 노조미가 뛰어 올라왔다. 그 바람에 소라타의 손가락이 버튼을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면서「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글자가 떴다.
노조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책상 위에 앉았다.
“너 이 자식…….”
하필이면 노조미. 검은 고양이다. 뭔가 불길하다…….”
하지만 말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에 소라타는 브라우저를 닫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컴퓨터를 껐다. 서류 심사
결과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다.
한동안은 아무도 없다.
소라타는 의자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했다. 일단은 완수했다.
저도 모르게 뜻을 알 수 없는 큰소리를 질렀다.
놀란 고양이가 일제히 항의의 시선으로 소라타를 쳐다봤다.
지금은 그 정도로 흥분이 가라앉진 않았다. 책상 위에 배를 깔고 누운 노조미를 소라타가 안아 올렸다.
잠들려던 노조미는 귀찮아하는 분위기였지만 소라타로서는 자기가 느 끼는 행복을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착하지,착하지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노조미는 품 안에서 요동을 치더니 도망쳐 버렸다.
분위기 못 맞추는 고양이와 기쁨을 나누는 걸 포기한 소라타는 의자를 뒤로 젖혀 천장을 쳐다보았다. 낡은
나뭇결을 쳐다보는 사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기분은 고조되었지만 동시에 힘이 빠진다고 할까,
무기력감마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원고를 완성하고 며칠 간 마시로도 멍한상태로 지냈다. 이런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준비 없이 마시로를 떠올린 탓에, 텅 비어 있던 머릿 속이 순식간에 마시로 일색으로 물들었다.
마시로 앞으로 온 편지. 특별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거의 관심 없는 마시로가 다음 날에는 답장을 쓰더니 그걸 보내고 싶다며 나나미에게
상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같이 우체국에 가는 뒷모습은 어쩐지 기뻐 보였고,그와는 반대로 소라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좀 더 자세히 듣기 전에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매일 아침 스터디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용기를
쥐어 짜내보았지만, 물었다간 최악의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주일 이상 지난 지금도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상상의 아픔을 두려워하며 마음은 겁쟁이가 된다.
그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소라타는 기획서 작업에 몰두했다. 여유가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요 며칠은 정말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획서 작성이 일단락된 지금,소라타에게는 숨을 장소가 없다.
서서히 발치에서부터 마시로에 대한 것들이 소라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불안한 요소는 있다. 바로 진의 외부 수험이다. 미사키는 어떻게 될까. 게다가 나나미와
다투었던 일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그 나나미로 말할 것 같으면 매일 아르바이트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마시로를 봐주었으며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때,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소라타.”
놀라서 중심을 잃은 소라타는 젖히고 있던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아픔을 견디면서 눈을 떴다.
아래위가 뒤집어진 마시로가서 있었다.
황급히 일어났다.
동시에 중요한 약속이 생각났다. 오늘은 8 월 20 일. 마시로의 데뷔작이 실리는 잡지 발매일. 마시로가
같이 서점에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스터디 끝났으면 서점 갈까?”
놀랍게도 마시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에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나나미가 이상해.”
“이상하다니,뭐가?”
마시로는 대답 없이 복도 끝…… 현관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있는 걸까.
소라타가 방에서 얼굴만 내밀자,현관에는 사복 차림의 나나미가 있었다.
신발장에 기대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확실히 상태가 이상하다. 언제나 빠릿빠릿한 나나미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복도로 나간 소라타는 나나미에게 달려갔다. 마시로가 그 뒤를 따라왔다.
“아오야마?”
말을 걸자 나나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이 풀린 눈에 상기된 볼. 하지만 추운 듯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너…….”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목에 감겨드는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다. 평소 같은 활기를 도통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냐.”
이마에 손을 댔다. 손바닥을 통해 나나미의 체온이 끈적하게 전해졌다.
열이 있다. 그것도 상당히 높다…….
“괜찮다니까.”
소라타를 뿌리치는 손에 힘이 없었고,조금 움직이자 나나미는 괴로운 듯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나나미의 등을 쓸어주었다.
“칸다……. 성희롱이야…….”
“지금이 그런 소리나 할 때냐.”
“이제 됐어……. 아르바이트 가야해…….스터디는,미안……. 오늘,빨리…….”
생각이 연결되지 않는다. 열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증거다.
“스터디는 됐어. 그리고 이래서는 아르바이트도 무리야. 가지 마.”
“갑자기 빠지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일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피해야!”
소라타가 엄하게 잘라 말했다.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애당초 이대로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까지 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부축해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다.
“됐으니까 오늘은 쉬어. 너,내일 중요한 날이라면서?”
내일,8 월 21 일은 아카데미 중간발표회다.
“그……렇긴 한데……”
“아무튼 오늘은 방에서 자. 내일을 위해. 가게 번호 뭐야? 내가 연락해줄게.”
“아냐……. 내가할게…….”
나나미의 숨결이 뜨겁다. 이미 눈을 뜨고 있을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나미는 현관의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번호를 하나씩 누른다.
그렇다. 나나미는 지난달부터 휴대폰이 끊어진 것이었다.
번 돈은 일반 기숙사비를 갚는 데 쓰고 있기 때문에 아직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에 나나미는 없으면
없는대로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말했다. 소라타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아오야마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네,죄송합니다,몸이 안 좋아서 열이 좀……. 네,네.
부탁합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나나미가 기침을 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을 다 써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일어날 기력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라타는 아무말도 못 하게 하고 나나미를 업었다.
목에 와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것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그 중압감에 지지 않도록 소라타는 다리에
힘을 주고 계단을 올라가 나나미를 방까지 옮겼다.
침대에 재워 놓을 때까지 나나미는 아무 저항도 없었다.
“바로 약가져올게.”
방을 나가려는 소라타의 손목을 나나미가 움켜잡았다. 닿은 부분에서 바로 땀이 배어 나왔다. 나나미의
열은 소라타의 몸에 녹아들어 동요가 되어 전신을 좀먹어 갔다.
“왜 그래? 달리 필요한 거라도 있어?”
“내일은…… 갈게…….”
헛소리처럼 나나미가 중얼거렸다.
“갈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나나미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소라타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대로 손을 놓자,나나미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괴로운 호흡이 내일은 절망적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소라타는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왕진을 부탁하기 위해 기숙사에서 뛰어나갔다.
마치다 의원은 상점가 근처에 있는 개인병원으로,몸이 아플 때면 자주 어머니 손에 끌려갔다.
10 년 전부터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선생님이 환자들을 보는데,소라타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느닷없이 뛰어가도 싫은 표정 하나 보이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게다가 오전과 오후 진찰 사이에 사쿠라장까지 와주겠다 고했다.
한 시간 후에 찾아온 할아버지 선생님은 나나미의 진찰을 마치고 방에서 기다리던 소라타를 찾아갔다.
과로로 면역력이 저하된 데다 여름 감기. 자세히 말하지 도 않았는데 나나미가 무리했다는 것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아무리 젊어서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사나흘은 얌전히 쉬어야 한다고 했다.
내일 외출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무리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할아버지 선생님은 해열제와 비타민제를 처방해주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치히로는 일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없다. 진도 외박으로 어제부터 기숙사를 비운 상태다.
점심이 지나서야 방에서 나온 미사키에게는 제일 먼저 나나미의 상태를 전했다.
저녁이 되어 진이 돌아오자,소라타는 모두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소라타,진,미사키,그리고
마시로까지 네 사람이었다.
우선 진에게 나나미의 상황을 설명했다.
“언젠가 쓰러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이런 타이밍이라니.”
알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았 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도 없고,
소라타도 대충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일이지~.”
미사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가 있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었다. 요 며칠간 긴장된 분위기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2 층에 있으면
연습하는 목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내일 가겠다고 잠꼬대까지 했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소의 레슨과 도 다르다. 내일은 1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날이다. 지금까지 연습의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 나나미는 그 날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다고 보낼 수는 없잖아.”
진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나도 아까 슬~쩍 보고 왔는데,나나밍이 엄청 괴로워 해서 내일은 절대 불가능이라곤 할 수 없지만,
못 갈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래도 간다고 하면 우리가 말려야지.”
“그렇죠.”
안타까웠지만 소라타는 진에게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 늦다. 나나미를
생각하면 이번 발표회는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진이 이야기는 끝났다며 일어났다.
그 직후,계속 조용히 있던 마시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라면 갈 거야.”
소라타와 미사키의 시선은 마시로를 향했고,방을 나가려 던 진이 발을 멈췄다.
“나라면 갈 거야.”
“하지만,시이나.”
“나나미가 가고 싶어 하면 가게 해줘.”
난감해진 소라타는 진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나미를 보내줘,부탁이야.”
부탁하는 어조였지만 그 눈은 안 된다면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탁할게.”
마시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는데 어떡할 거야~,소라타?”
“그야 저도 아오야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싶죠. 하지만…….”
손목을 잡던 나나미의 뜨거운 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목소리가,그 결심이,오늘까지의
나나미의 노력이 보상받기를 바랐다.
“소라타,부탁이야. 나나미는 열심히 했어……. 매일 늦게 까지.”
“그건 알지만?????? 옆에서 말려줘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제발.”
“상식이 방해한다면,답은 이미 나온 거 아냐?”
고민하는 소라타에게 이렇게 말한 건 진이다. 그 포기했다는 표정은 하나의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문제아의 소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쿠라장이다. 마시로가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은 흔들렸다. 보낼
것인가,말릴 것인가,무엇이 나나미를 위한 일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결정하는
건 소라타가 아니라 나나미니까.
“알았다. 아오야마가 가겠다고 하면 말릴 수는 없지.”
나나미는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소라타는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그럼 결정이네! 다 같이 나나미를 도와주자?!”
응,하고 미사키가 자기의 말에 대답했다.
“소라타,고마워.”
“아냐……. 내일,내가 따라갈게요. 아오야마가 저 상태라면 위험하니까.”
“그럼 이동 수단은 내가 확보해줄게?.”
“아,그렇군요. 택시가 좋을지도. 선배의 재력으로 부탁할게요.”
“우주선을 탄 마음으로 편안~하게 와!”
미사키가 빙긋이 웃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나나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소라타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머지는 치히로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무래도 반대하겠지.”
진이 안경을 고쳐 썼다.
“상식적인 어른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아마도…….”
“뭐,그쪽은 내가 어떻게든 할게.”
“부탁할게요.”
절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라타가 치히로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 모습으로 보아 그게 자기 역할이라는 것을 진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시로가 불쑥 물었다.
“시이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일이야.”
손이 가는 문제를 늘리면 더 큰 일이다.
“나도 뭔가 하고 싶어.”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럼 마시롱은 소라타랑 같이 가.”
“잠깐, 선배!”
“이동 수단은 미사키,치히로 대책은 나. 불만 없지?”
“응!”
미사키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뭐야,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희들,이런 곳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지?”
방에 나타난 건 학교에서 돌아온 치히로였다. 예정보다 빨리 온 건,나나미가 감기로 쓰러진 걸
휴대폰으로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난 스즈네 누나가 불러서 가볼게.”
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이어서 미사키도,
“레이아웃 끝내버려야지~.”
이렇게 말하며 뛰어나갔다.
이 소란을 틈타 마시로도 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 뒷모습 을 본 치히로가 불러 세웠다.
“마시로,이거,우편함에 와 있더라.”
치히로가 내민 건 커다란 봉투. 제법 부피가 있었다. 표면에는 순정만화 잡지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견본이지?”
치히로가 재촉하자 마시로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테이프를 뜯고 안에서 잡지 한 권을 꺼냈다.
마시로는 기뻐하지도,웃지도,감동하지도 않은 채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자기 만화를 잡지 중앙에서
발견하자 표지 그림만 확인하고 바로 덮었다.
그리고 견본을 소라타에게 내밀었다.
“벌써 다 본 거야?”
“내용은 아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이렇게 좀 더 기뻐한다든가…… 그런 건 없어?”
“엄청 기뻐.”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무튼 데뷔 축하해.”
“응,고마워.”
역시 기뻐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나미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라타는 건네받은 잡지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왼쪽 구석에 조그맣게 마시로의 단편 만화가
소개되어 있었다. 제목 밑에는「시이나 마시로」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게재 페이지를 찾는 손가락이 떨렸다. 대충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지를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3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가 사쿠라장에 도착했을 때,나나미는 소라타의 어깨에 몸을 맡기고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도록 안아서 기숙사로 데려가 2 층 방에 뉘 었다.
옷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던 치히로에게 싹싹 빌어 갈아입혔다.
그 후 소라타,진,미사키,마시로 네 사람은 주방에서 두 시간 정도 치히로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설교라고 해봐야 거의 푸념 같은 것으로,사쿠라장의 담당교사가 얼마나 귀찮은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내용이었다. 중간부터는 요즘에 미팅 건수가 줄었다,동급생들이 차례로 결혼한다 등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버럭 하고 싶어지는 내용으로 바뀌었지만,일단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사쿠라장에 남아 있던 진이 혼자 소라타 일행의 몫까지 설교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무 연관도 없는 이야기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치히로에게 해방되자마자 바로 회사 원인 루미 누나가 기다리는 맨션으로 나가버렸다.
나나미는 밤이 되어도 눈을 뜨지 못했고,한 시간 간격으로 소라타가 방을 찾아가도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마시로는 그 옆에 앉아 뭐라고 말해도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마시로 나름대로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시이나,그만쉬어. 열두 시도 넘었어.”
“괜찮아. 여기 있을게.”
“그러다 네가 아프면 아오야마가 책임감을 느끼잖아.”
“난 괜찮아.”
“……알았어. 그럼 아오야마를 부탁할게. 일어나면 가르쳐줘.”
학교와 사쿠라장 사이에 있는 아동공원까지 도망치자 소라타 일행은 완전히 달리던 것을 멈췄다.
“벌렁벌렁,두근두근 대모험이었어! 이래서 그만둘 수가 없다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손으로 치맛자락을 누른 나나미가 항의했다.
“난 오늘 일을 평생 못 잊을 거야. 나나밍의 노팬티 러시를 후세까지 전하는 게 내 사명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걸랑~.”
“당장 잊으세요! 칸다랑 미타카 선배도 히죽거리지 말고!”
소라타는 웃음을 참았고,진은 괜히 더 크게 웃었다.
“진짜 최악이야……. 이 일이 소문 나면 난,살 수가 없어…….”
“신경 쓰지 마,노팬티 러시 정도는.”
“이상한 이름 붙이지 마요!”
“소라타 말대로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사쿠라장에 있으면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닐걸.”
그걸 무시하고 성큼성큼 나나미가 앞으로 걸어갔다. 더 이상 이야기도 하기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오르막길 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칸다랑 미타카 선배는 앞장서요!”
“그래,그래.”
진이 크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 옆에서 소라타도 나란히 걸어갔다.
뒤에서는 미사키를 중심으로 나나미와 마시로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진을 따라 소라타도 별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멀리 있는 빛.
손을 뻗어도 절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때로는 아름다운 밤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진이 불쑥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든 갈 수 있어요.”
“대담하게 나오는군.”
“왠지 사쿠라장에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진이 소라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둘이~,무슨 이야기 해?”
소라타와 진 사이에 끼어든 미사키가 둘에게 매달리듯 팔을 꼈다.
“내일은 뭘 할까,그런 얘기.”
“아~,그렇다면 말이지~.”
사쿠라장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미사키가 세운 여름방학 파이널 세일 계획이 발표되었다. 세일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세계 일주 여행처럼,대부분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꿈 이야기였지만 같잖다든가 무리라든가 가능할 턱이
있냐 같은 분위기 깨는 소리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이 멤버로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들 느꼈기
때문이 리라.
미사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꿈을 꾸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꿈도,사쿠라장에 도착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칸다,무슨 편지가 와 있는데.”
우편함을 열어본 나나미가 소라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낯선 우편물. 바로「게임을 만들자」의 결과
발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후다닥 현관으로 들어갔다. 주방 불을 켰다.
봉투를 뜯었다.
세 개로 접힌 종이가 한 장. 낙선 통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응한 몸은 말 그대로 삐걱거렸다. 다소
실망한 마음이 간단하게 편지를 펼쳐 보게 만들었다.
ㅡ사랑을 가르쳐줘.
제 4 장
거대한 불꽃을 쏴봐
“얼굴을 붉혔어.”
“그건 아마 네가 너무 반응이 없어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겠지.”
편집자 역시 피해자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래서 따지는건 보류하기로 했다.
“이번 마감이 언제였지?”
“31 일에 신연재를 결정하는 회의가 있어.”
소라타의 프레젠테이션과 같은 날이다.
“지금부터 콘티 짤 거야?”
“3 화분은 해놨어.”
옆에 둔 종이 다발을 소라타 앞에 쿵 내려놓았다. 그걸 팔락팔락 넘겨보았다. 정말 다 되어 있다. 언제
봐도 빼어나게 멋진 그림이다.
내용은 쉐어하우스에 사는 예술계 대학생 여섯 명을 중심으로 한 좌충우돌 군상극.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연애와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우정도 다져나간다. 그런 느낌이다.
“있잖아.”
“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인데?”
“아야노가 그랬어. 사쿠라장을 제재로 삼아 보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설정은 꽤 손을 봤지만 등장 인물의 배경에 미사키와 진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ㅡ견실한 조언,송구스럽습니다.
ㅡ그럼,난 이만.
류노스케의 아이콘이 자리 비움 모드로 변했다.
자,이렇게 되면 아까부터 등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돌아보자 문틈으로 여섯 개의 눈…… 아니,어느 틈엔가 여덟 개로 늘어났다. 진도 합류한 것 같다.
다가가자 문이 바깥쪽으로 열렸다.
“어떡할래,칸다?”
“도와줘?”
“아까는 건방진 소릴 해서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후배님,약해~. 지금부터 수행편 개막이다!”
“뭐,열심히 기어 올라오라고.”
이렇게 소라타는 결전 당일까지 며칠 동안,사쿠라장의 멤버를 연습 상대 삼아 프레젠테이션 대책을
연구해야 했다.
마시로가 돌아본 소라타의 가슴에 무언가를 안겼다. 받으려다 마시로와 손가락이 닿았다.
꼭 쥔 손을 펴자,합격기원 부적이 있었다. 여기서 30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사의 것이다. 스이메이
예술대학을 노리는 수험생들이 종종 사러 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거,어떻게 된 거야?”
“어제갔다 왔어.”
“아오야마에게 부탁했어?”
“왜 나나미야?”
마시로가 약간 불만스럽게 소라타를 올려다보았다.
“어? 그야,너 설마,혼자?”
“찾아보고 사람들한테 물으면서 많이 걸었어.”
듣고 보니 어제 마시로가 방에 온 건 저녁이 된 이후였다. 자기 방에서 콘티 작업을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미안,나 아무것도 준비 못 했어. 오늘 연재 여부 결정날 텐데.”
“난 괜찮아.”
되묻기 전에 소라타의 오른손을 마시로가 양손으로 감쌌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뗐다.
“뭐가「응」이란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상관없나……. 아무튼 이거,고마워.”
소라타는 마시로를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신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갈게.”
“잘 다녀와.”
소라타는 마시로의 배웅을 받으며 잰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마시로에게 받은 부적을 꼭 움켜쥐었다.
마음을 담은 후 바지 뒷주머니에 잘 넣었다.
역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쯤 가자 신주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환승해서「게임을 만들자」를 주최하는
하드 메이커 자사 빌딩으로 갔다.
소라타는 환승한 전철의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에 앉지 않고 문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아랫배부터
허벅지 윗부분에 침전한 불쾌감 때문에 앉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철이 한 정거장 나아갈 때마다 그런 긴장감은 고동을 동반하며 성장했고,지금은 소라타의 중앙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무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 물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차내 방송이 다음 역명을 알렸다. 소라타가 내릴 역이다.
몸에 묶은 끈을 누가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라타의 신경이 팽팽해졌다.
아직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철은 시간을 지켜 역에 정차했다.
문이 열렸다. 소라타는 정장 차림의 인파에 섞여 비틀거리면서 홈에 내려섰다.
노란색 안내판을 보고 출구를 확인했다. 회사 이름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종당하듯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하나 올라갔다. 개찰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세 번째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30 층 이상은 될 법한 빌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리벽의
화려한 건물로 반짝거렸다. 못 찾으면 어떡할까 생각했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빌딩 중심부에
큼지막하게 회사 로고가 적혀 있었다. 소라타의 목적지다.
탁 트인 1 층은 전망이 좋아서 밖에서도 모습이 잘 보였다. 자동문 앞에 경비원이 두 사람. 하얀 타일.
그 안에 있는 접 수처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예쁜 누나 세 명이 서 있었다. 미소를 잃지 않고
방문자들에 대응하고 있었다.
폴로어 공간 중 앞쪽 반에는 멋들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지금도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이
앉아 상의하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앞에는 역의 개찰 구와 비슷한 게이트가 있었다. 카드를 대고
사람들이 통과했다. 그런 보안 시스템인가 보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이 소라타를 덮쳐왔다.
ㅡ큰일이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냐.
아군은 없다. 고립되어 있다. 붕 떠 있다. 그걸 자각하자 점점 더 불안해져 갔다. 뱃속 상태까지 안
좋아지는 형편이 었다.
자동문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소라타를 경비원이 수상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당황한 소라타는 정장
상의를 입었다. 그리고 도전 정신으로 빌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냉방이 되고 있는 시원한 공기가 소라타를 맞이했다. 하지만 땀이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흘러내렸다.
잘못온 것 같다는 정도의 혼란이 아니다. 당장 우향우하여 전력질주로 달아나고 싶다.
경비원에게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안심한 순간 이번에는 안내데스크의 여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내 누나가 생긋 웃는 바람에 눈 둘 곳을
몰라 접수처 앞에 섰다. 세 사람 중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가운데 있던 누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저기…… 나,아니,저…… 전「게임을 만들자」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왔습니다만.”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양쪽 옆에 있던 누나들이 살짝 웃었다. 어색한 모습으로 분발하고 있다는 건 누가
보나 알 수 있었다.
“그럼 성함을 여기 적어주시겠습니까?”
안내 누나가 엽서 사이즈의 종이와 같이 볼펜을 내밀었다.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성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수 백 번 써본 자기 이름조차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삐뚤빼뚤 했다. 회사명을 적는 곳은 공백.
약속 상대 이름도 공백으로 둘 수밖에 없었지만,이름만 적으니 안내 누나가 종이를 받았다.
“그럼 칸다 님,이걸 걸어주세요.”
목걸이형 입관증명을 내어주었다. 일단 이름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바로 담당자가 올 테니 저쪽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누나가 뒤에 있는 멋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옆에는 다른 누나가 솜씨 좋게 내선으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그게 담당자일까.
소라타는 설명을 들은 대로 입관증명을 목에 걸고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등을 곧게 세운채 얌전히
기다렸다.
후~우,크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은 웬만하면 보지 않으려 했다. 보면 자기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또 배가
아파질 것이다.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약간 멀리서 들렸다.
발소리가 다가온다.
시선을 들자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이 소라타를 보고 있었다.
“칸다 님이신가요?”
연령은 20 대 후반. 화장이 옅어서 맑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아,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말투까지 시원시원했다.
일어나서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개찰구 같은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건 아까 지나간 사람을 봤기 때문에 입관증명서를
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했다.
문을 열어주자,소라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숫자는 36 층까지 있다. 여사원이 그 중 25 층 버튼을 눌렀다.
소리도 진동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바로 도착 소리가 났다.
“내리세요.”
이번에도 소라타가 먼저 내렸다. 먼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융단 같은 감촉.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여사원이 개의치 않고 걸어간 덕에,소라타는 구두를 벗는 실수는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7 번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정장 차림의 손님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소라타와 같은
입관증명. 서류심사 합격자다.
중년 남성 사원이 그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러 데려나갔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부터
프레젠테이션이구나.
“여기서 기다리세요.”
회의실 한가운데의 의자에 앉았다. 앞에는 또 다른 프레젠테이션 도전자가 명상하고 있었다.
여사원은 회의실 입구에 서서 무슨 일이 있으면 대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소라타를 포함한 세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방은 고요했다.
그리고 몇 분 후,소라타 앞에 앉은 다른 프레젠테이션 도전자도 중년 사원에게 불려 나갔다.
먼저 간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이 방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지금은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해야 한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까지 준비한 것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큰일 났다. 감정에 몸이 반응한다. 배가 아프다. 속이 쓰리다. 도망치고 싶다.
“저,저기,죄송합니다.”
“네,왜 그러시죠?”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걸로 완화될 정도로 소라타의 긴장감은 가벼운 단계가 아니었다.
뭔가 평소보다 시야가 좁아진 기분이 들었다. 몸이 둥실 거렸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안내받은 화장실은 청소가 잘 되어 반짝반짝했다. 이런 적지에서 바지를 벗을 용기도 없는지라,소라타는
옷을 입은 채로 변기에 앉았다.
긴장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신이 없으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상상보다 열
배는 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었다.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소라타는 주머니 안의 부적을 꼭 움켜쥐었다.
한심한 결과로 끝낼 수는 없다.
일어났다. 자동으로 물이 내려갔다.
손을 씻고 입을 행궜다. 흐트러진 머리와 넥타이를 바로 잡고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사신 같은 새까만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와 있었다. 앞서 두 사람을 데려간
사원이다.
“칸다 님. 시간이 되었으니 준비가 되었으면 시작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제대로 말했어.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어.
회의실을 나왔다. 긴 복도를 똑바로 걸어갔다.
제일 안쪽에 임원 회의실이라고 적힌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 사원이 노크했다.
“칸다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안에서 돌아왔다.
돌아본 남성사원은
“그럼 잘부탁합니다.”
이 말만을 하고 문을 열었다.
소라타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야단스러운 이름의 방은 조금 전까지 있던 회의실 두 배 정도의 넓이. 대충 교실 두 개 분이었다.
길쭉했다.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 그 옆에 컨트롤용 노트북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곳에 서서
설명하라는 뜻일 것이다.
심사위원은 전부 다섯 명. 횡렬로 앉아 있다. 네 사람은 정장.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있다. 이
회사 대표 이사다. 게임쇼나 E3 엑스포 때마다 차세대 하드 전략,상품력을 어필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곤
했다.
나머지 사람은 모른다. 아니, 제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안다. 혼자 사복 차림이다. 그것도 티셔츠
한 장이라는 프리한 차림이었다. 초기「게임을 만들자」에서 액션 퍼즐 게임을 개발한 인물. 이름은
후지사와 카즈키. 스이메이 예술대학 출신으로 여전히 히트 상품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게임 크리에이터다.
“칸다 씨,시작하세요.”
이렇게 인사한 건 왼쪽 끝에 있던 남자다. 소라타 눈으로 보면 아버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연령이다.
그런 사람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받은 적이 없는 소라타의 반응은 둔 했다.
“네?”
“시작하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지금껏 살아온 세계와는 달랐다.
“아,아,네.”
앞으로 나갔다. 앞부분은 한 단 높게 만들어져 있어서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다섯 명의 심사원의 거동이 잘 보였다. 세 사람은 지루해 보였다. 다른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럼 기획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극도의 긴장 상태지만, 소라타의 첫 목소리는 괜찮았다. 말이 빨라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 듣기
싫지 않았다. 목소리도 잘 나온다.
나나미의 충고 덕분에 긴장해도 일단은 말문이 막히지는 않았다.
우선 기획 콘셉트를 정중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리고 게임 전체 규모를 해설하면서 타겟층을 분석했다.
적당히 목소리의 톤과 말하는 페이스는 조절하면서 진행했다.
베네핏 설명에서는 플레이하는 유저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도록 몸짓 손짓을 적절히 섞어가며 기획서
내용을 보충 했다.
처음 5 분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한 것치고는 잘했다.
그러자 여유가 생긴 소라타는 세세한 게임 내용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여태까지는 안 보려고 애쓰던
심사위원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았다.
연거푸 시선이 마주쳤다. 전원 어딘가 불쾌해 보였다. 팔 짱을 낀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반응이
나쁘다. 한 사 람은 계속 아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신감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고,소라타를 지지하고 있던 것은
허탈하게 붕괴하고 말았다.
새하얘졌다.
눈앞도,머릿속도.
다음으로 무엇을 하고,어떤 이야기를 할지가 전부 날아가 버렸다. 아무튼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넘겨야 해. 아니,원래 궤도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 봐야 이 썰렁한 반응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빨간 불빛이 깜빡였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그 후,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기획서 마지막 페이지를 전부 읽은 순간은 어느 정도 기억한다. 커닝페이퍼에 적어놓은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연습의 성과다. 머릿속은 엉망이어도 몸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의응답에서는 세 개의 질문이 왔다.
하나는 사장님. 두 개는 후지사와 카즈키가 했다.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럼 칸다 씨의 프레젠테이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소라타는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상태로는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됐다. 어차피 결과는 며칠 후에 편지로 올 것 이다. 아무튼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다. 이 회사에서 도망치고 싶다. 정장을 벗고 싶다. 넥타이를 풀고 싶다. 평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갈망했다.
“칸다 씨.”
이름을 부른 건 사장이었다.
“우선「게임을 만들자」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저야말로,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이 눈인사를 했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번 기획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군요.”
“…….”
지금,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네…… 그렇습니까.”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멋대로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실례했다고 말한 소라타는 임원 회의실을 나왔다. 여기까지 안내해 준 남자 사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 층까지 내려왔다. 또 역 개찰 같은 게이트를 지나갔다. 접수에 입관증명을
반납했다. 남자 사원의 90 도 인사를 받으며 빌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에게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설마 그 자리에서 결과를 통보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끝나면 끝난 대로 한고비 넘겼다고 스스로 칭찬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 했는데…….
게다가 뭐야,그 태도는. 어른이 존댓말을 쓸 때의 불쾌한 기분. 사장까지 소라타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게 업무인가. 사회인이라는 건가.
류노스케는 고등학생 감각을 버리라고 했다. 그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서류심사를 통과했다고 자만한 것도 있다. 좀 더 자신의 기획을,흥미를 갖고 들어줄 거라고 착각했다.
속상한 마음과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항할 기술도 도망칠 방법도 없는 소라타는
순식간에 그 파도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그 앞은 깜깜한 어둠밖에 없었다.
#11 핫피 가게 점원들이나 축제 때 위에 걸쳐 입는 일본 전통 옷.
〈2 권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