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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여름 하면 산이랑 바다?

제 2 장 파란, 소용돌이친다.

제 3 장 지금은 지금뿐이니까 지금인 거야

제 4 장 거대한 불꽃을 쏴봐

비슷한 매일을 한편으로는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쿠라장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 아이와 만나기 전에는.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따위는 순식간에 색을 바꾼다.

내가 바꾸려고 하면 그만이다.

사쿠라장은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엉망진창이다.

그건 분명히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제 1 장

여름 하면 산이랑 바다?

1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리자 방 안이 약간 어두워졌다.
사쿠라장 101 호. 한복판에서 방주인인 칸다 소라타는 섬세한 분위기의 소녀,시이나 마시로와 마주 보고
있었다. 약간 올라간 눈. 윤기나는 부드러운 머릿결.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피부. 부정한 생각을 품고
만졌다가는 당장에라도 스러져버릴 듯한 허무한 분위기다.
“소라타.”
얇은 입술이 이름을 부르자,소라타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나,해본적 없어.”
마시로의 담담한 음색이 방의 침묵을 채워나간다. 낮에는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매미의 합창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말이 끊어지자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응.”
소라타는 이마의 땀방울을 티셔츠 소매로 닦았다.
오늘은 올해 최고기온을 기록한 매서운 더위로,해가 진 후에도 도무지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시로의 피부도 살짝 상기되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다정하게 해.”
“갑자기 끝까지 가는 건 무리일 테니,할 수 있는 데까지만.”
“안돼.”
“너 진짜”
“도중에서 멈추면 곤란해”
“그래도…….”
“소라타라면 괜찮아……. 끝까지 해.”
소라타를 가만히 바라보는 마시로의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없었고,그럴 생각으로 오늘은 여기 있는 거라고
언어 이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알았어.”
마시로는 금세 깨져버릴 듯한 얼음 장식 같은 인상을 한 주제에,한 번 뱉은 말은 절대 철회하지 않는
강직함이 있다. 아주 완고한 성격이다. 그래서 소라타가 양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만하고 싶을 때는 말해. 무리할 것 없으니까.”
“소라타가 해주는 거니까 괜찮아”
“그렇게까지 말하면 진짜 안 멈추겠지만. 그럼,얼른 보여줘”
감동 없는 눈동자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쳤다.
“소라타……. 막무가내구나.”
“안 그러면 할 수 없잖아.”
“하지만 갑작스러운건 싫어.”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아~,답답하네.”
“부끄러워.”
“적당히 좀 해! 너한테 부끄럽다 같은 감정이 어디 있어!”
“그렇게 보고 싶어?’
“됐으니까,낙제점 받은 답안지나 내놔! 내일 추가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해야 하잖아!”
아~아,소라타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고 만 걸까. 오늘부터 즐거운 여름방학이건만. 낙원이 코앞인데
누가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기분이다.
전부 시이나 마시로의 머리가 나쁜 것이 문제다. 귀찮은건 소라타에게 밀어버리고 미팅을 하러간 무책임
교사 센 고쿠 치히로가 문제다. 원인은 명백하고도 명쾌하다.
하지만 그걸 알아봐야 사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라타는 한숨을 쉬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여름방학 첫날 아침……이랄까 오후,소라타는 솥에서 푹푹 삶아지는 형벌을 받으며 뜨거운 전골을 먹는


고문 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이글이글 피부를 태웠고,그것도 모자라 팔,다리,배 할 것 없이 일곱 마리
고양이가 매달려 있어서 전신이 땀투성이,탈수 직전이었다.
“말라 죽을 뻔했어…….”
고양이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눅눅한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남쪽 하늘에서 작렬하는 태양을 부아가 치미는 눈길로 노려보았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이렇게까지 더우면 저주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서 삐질삐질 땀이 배어 나왔다.
부채로 있는 힘껏 부채질을 해봐야 미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을 뿐,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포기하고 티셔츠를 갈아입은 후 수분 보충을 위해 주방으로 가려고 할 때 밖에서 누군가 방문을 힘껏
열었다.
덕분에 소라타는 문과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고 말았다.
“무슨 짓이에요,미사키 선배! 내 처음을!”
찾아온 인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소라타가 외쳤다.
열린 문 그늘에는 사쿠라장 201 호 주민인 미술과 3 학년, 카미이구사 미사키가 뭔가를 꾸미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뒤에 길쭉한 것을 감추고 있다.
“짜잔~! 완성했어,후배님!”
미사키가 쫙 펼쳐 보인 것은 포스터 사이즈의 종이. 오늘 부터 8 월 말까지 쓰여 있는 달력이다.
“여름을 누구보다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기적의 결정체야!”
一 7 월 21 일「츠치노코#1 찾기!」
첫날부터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하고 싶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UFO 개발」,「회 잔치」,「고래 외줄낚시」,「사시나무를 사시나무 떨 듯하게 만들기」
에다「철인 삼종 경기 우승」등,불가능한 것부터 이해 불가능한 것까지,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스케줄로
빽빽하게 여름방학 계획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서는 안 된다. 미사키의 진정한 무서움은 꺼낸 말을 정말로 실행하고야 마는,
인지력을 뛰어 넘는 행동력에 있다. 이건 재빨리 손을 쓸 필요가 있다.

#1 츠치노코 일본에 서식한다고 알려진 미확인 생물. 60cm 정도 길이에 몸통은 납작하고 쥐 같은 꼬리가
달린 뱀.

“그리고 푸른 산이라든가 일곱 개의 바다를 돌아다니면 완벽해!”


“누군가의 이름#2 처럼 느껴지는 건 제 기분 탓인가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소라타는 미사키에게 예정표를 빼앗아 꾸깃꾸깃 뭉친 다음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무슨 짓이야~! 세 달 전부터 준비하고 매일 자면서 생각했는데!”
“전 방학 동안 집에 내려갈 거니까 못 해요.”
“말도 안 돼! 치히로가 후배님에게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했는데!”
“그 적당주의 교사가 또 적당히 아무 말이나 한 겁니까?”
“적당히 말한 것 아냐.”
미사키 뒤에는 어느 틈엔가 미팅용 옷차림을 한 치히로가 서 있었다. 잔뜩 힘준 풀 메이크업에 약간 짧은
스커트. 지나간 20 대를 붙들고 늘어지려 노력하는 자세에 소라타는 끝을 알 수 없는 애수를 느끼고
서글퍼졌다.
“예언을 해주지. 넌 집에 돌아갈 수 없어. 너 자신의 의지로 사쿠라장에 남을 거야.”
“네에.”
“그럼 후배님은 나랑 추억을 잔뜩 만들자. 계획도 다 짰고!”

#2 누군가의 이름 아오야마 나나미의 이름을 풀어서 말한 것.

미사키를 상대하려면 기계 몸이라도 손에 넣지 않는 한 체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매일 같이 있다간


과로사 확정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선배,집은요?”
“어떻게 할까나.”
“똑바로 대답해!”
“안 가~. 진도 남는다고 했고,이번 달에 각본도 완성될 것 같다고 했고. 완성되면 바로 만들고 싶어.
설정 같은 건 벌써 이래저래 잡고 있으니까.”
상식에서 벗어난 발언이 많이 보이지만 어릴 적 친구인 미타카 진이 각본을 담당하는 미사키의 자체제작
애니메이션 평가는 대단히 좋아서,일부 팬들은 신으로 숭상할 정도였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매일 녹초가 될 때까지 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역시
같은 인간이 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외계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소라타와는 다른 에너지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임이 틀림 없다.
“진 선배도 남는구나……. 흐~음.”
“보나 마나 고향에 만나기 싫은 여자라도 있는 거겠지.”
치히로는 사정을 모르겠지만,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아마 진은 전 여친인 미사키의 언니와
만나고 싶지 않아서 남는 것이리라. 분명히,이름은 후우카.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에도 올해 정초에도
진은 돌아가지 않았다. 소라타가 고향에 가 있는 동안 고양이를 부탁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은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부모님께 「빨리 손자 얼굴을 보고 싶다」 나「잘못 키웠다」 나「미련이 남아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같은 말을 들으러 내 발로 가야 하는 건데?”
“그렇군요…….”
사람은 서른을 넘기면 10 대 때는 상상도 못했던 고충이 생기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선생님은 무슨 볼일이세요?”
“볼일도 없는데 내가 말을 걸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 안 했으니까 묻는 거죠.”
이 사쿠라장의 관리인실에 사는 미술교사의 태도는 처음 부터 이런식 이었다. 발언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내뱉고,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한다. 일단은 문제아들만 모인 사쿠라장에서
학생들을 감독하고 갱생 시킨다는 사명이 있겠지만,그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 는 것을 소라타는 본
적이 없다. 뭐,그건 안 돼. 이건 안 돼. 이걸 저렇게 해. 저걸 이렇게 해,이런 식으로 잔소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너,마시로 추가시험 공부 좀 봐줘.”
“합격점을 받을 때까지 너도 여름방학은 보류니까 열심히 해 봐.”
“아자! 후배님! 집에는 다 갔네!”
“선생님,사정을 설명해주세요.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치히로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말고사에서 마시로가 낙제점을 받았어. 기말에서 낙제점을 받을 경우,추가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진급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건 아는데 제게도 계획이라는 게 있다니까요!”
“뭐? 보나 마나 제대로 된 계획도 아닐 것 아냐. 그딴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처량한 청춘시절이로군.
대체 어디가 푸르다는 건지. 암흑시절이라는 말이 훨씬 더 잘 어울려.”
“그래,맞아. 후배님의 여름은 내가독점할 거야!”
그럼 정말 암흑시절이 되어 버리잖아.
“대체 왜 제가 선생님께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데요! 대마왕이냐! 선배도 일일이 맞장구치지 좀
마세요!”
“뭐래,뭐래,후배님 바보! 대대손손 저주해 줄 테니까 두고 봐~!”
이렇게 말하면서 삐쭉 혀를 내민 미사키는 방에서 뛰쳐나 갔다. 정말 피곤해 돌겠다.
“별다른 볼일도 없는 널 위해 내가 친절하게 계획을 짜주겠다잖아. 순순히 감사의 눈물을 흘리도록.”
“이런 말도 안 되는 전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전 머리가 이상한 인간이잖아요!”
“넌 마시로의 주인이잖아. 마지막까지 제대로 보살펴주란 말이야. 지겨워졌다고 부모한테 미루는게
용납되는 나이는 초등학생까지다.”
“자기 사촌을 애완동물처럼 말하지 마세요! 전 내일까지 후쿠오카 집에 가야 해요.”
“뭐?”
“왜 그런 반응을 보이시죠?”
“엄마의 찌찌가 그립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집에 돌아 갈거면 마시로도 데려가.”
“그거야말로, 뭐라구요?”
“네가 없으면 대체 누가 마시로를 보니? 아주 웃기고 있어.”
“웃기고 있는 게 누군데! 제가 고향에 시이나를 데려간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해요! 뭡니까,그 궁극의
벌칙게임은!”
고향에 마시로를 데려간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가족들이 과연 어떤 눈으로 쳐다볼까.
“뭐 어때. 매일 밀회를 나누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라고 가족들에게 소개하면 되지. 외모는 괜찮으니까
너한테는 과분하다면서 네 부모님도 눈물을 흘리실 텐데.”
“세상에 울 일이 뭐 그리 많아요? 게다가「언제」「어디에서」「누가」「어떻게」밀회를 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너희 프라이버시에는 관심 없어.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하면 되잖아,
평소 하던 대로.”
“밀회를 전제로 이야기 진행시키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대답하고. 진짜 성가신 놈이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밀회가 싫으면 부모님께는 손자의 탄생을 기대하시라고 말해. 대부분의 부모들은 손자 얘기에
관대하니까.”
“밀회보다 더 나가면 어쩌자고!”
“너,이렇게 욕 나오게 더운데 자꾸 흥분 상태로 내 시야에 들어올래?”
“선생님이 제 혈압을올리니까그렇죠!”
“뭐,아무튼 마시로의 추가시험 보조는 부탁했다.”
“공부라면 미사키 선배나 진 선배가 더 잘하잖아요.”
사쿠라장에 있는 두 3 학년의 이름을 외쳐 봐도,치히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성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201 호의 주민인 카미이구사 미사키는 입학 때부터 학년 톱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괴짜다. 그 소꿉친구이자 103 호에 사는 외박의 제왕 미타카 진도 상위 성적을 늘 유지하고
있다. 둘 다 3 학년 1 학기 성적을 최종평가로 이미 스이메이 예술대학에 에스컬레이터 입학 권리를
획득했다. 미사키는 영상학부,진은 문예학부에 진학할 예정이다.
그에 비해 소라타의 성적은 중위권. 낙제점을 받은 적은 없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넌 상식적으로 말을 하려무나.”
“그 말 그대로 선생님께 반사하겠습니다.”
“카미이구사가 다른 사람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인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좀 더 학생을 믿어주세요! 인류를 포기하지 말고!”
“무리인 건 무리인 거지. 구제불능은 무슨 짓을 해도 구제 불능이야.”
“교육자가 할말입니까!”
“거짓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낫지 뭘. 사회의 매서움을 모르고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별것 아닌 벽에 부딪혀도 바로 의지가 꺾이고 말아. 자신의 역량을 아는 것도 중요해.”
“혹시 이 세상에 원한이라도 있어요? 결혼을 못 해서 그 런 겁니까?”
“칸다. 사람이 살의를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
스윽 가늘어진 치히로의 눈은 바늘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글쎄요. 그보다 미사키 선배가 안 되면 진 선배도 있잖아요! 오늘은 아직 기숙사에 있으니까!
부탁하고 올게요.”
“미타카랑 여자를 단둘이 방에 뒀다간 아이 만들기 공부 밖에 안돼. 그런 것도 모르니?”
“학생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진 선배라도…… 아니,가능성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하고,있어!”
“결론이 나와 있는 것을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니? 좀 더 머리 회전수를 늘리도록 해. 안 그러면 쓸 만한
인재가 되지 못할 테니까.”
“갑자기 냉혹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공부를 봐주시면 되겠네요!”
“뭐? 무슨 헛소리야? 난 오늘 밤에 미팅이라고 했잖아.”
“말 안 했어요! 보면 알 수 있지만.”
“아,그러니? 오늘은 깜찍한 악녀로 콘셉트를 잡아봤지.”
치히로가 자랑스럽게 한 눈을 찡긋했다.
깜찍한 악녀는 예전에 넘어서서 대마왕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소라타는 나오려던 말을 목에서 억눌렸다.
“자,이건 추가시험 일정표.”
게에…….”
치히로가 내민 종이를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전부 아홉 과목을 이틀에 나누어서 보는 것 같다. 그
날짜는 바로…….
“내일?!”
그리고 모레다.
“파이팅.”
“선생님,바보 아녜요? 왜 오늘에서야 말해주시는 건데요!”
“그야 당연하지. 신인상 발표다 뭐다,마시로가 공부나 하고 있을 상태도 아니었고,너도 세트로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신경 써준 거잖아. 고마워해.”
“……아~,이제 아무래도 좋아요. 그냥 피곤해.”
“불평은 마시로에게 하렴. 낙제점을 받은 건 내가 아니니까. 어머,벌써 시간이. 미팅 전에 미용실을
예약해놨거든. 그럼 뒷일을 부탁한다.”
치히로는 힐을 신더니 소라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들뜬 모습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소라타의 발치에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런 대화 끝에 소라타는 평소대로 귀찮은 일거리를 일방 적으로 떠맡게 됐다.
치히로가 나간 후,남겨진 소라타는 고양이들 밥을 주는 동시에 출출한 자기 배도 채운 다음,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내서 마시로의 방으로 갔다.
노크해도 어차피 반응은 없을 테니 문답 무용으로 문을 열었다. 그 순간,소라타의 시야가 하얗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옷과 속옷과 콘티로 바닥이 가득 차 있었다.
마시로는 그 중심에 있었다. 전신거울 앞에 서 있다. 뒷모습이다. 머리카락 틈새로 점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가 보였다. 탄탄하게 잡혀 있는 허리 라인이 무척 아름다웠다. 탄력 있는 엉덩이가 소라타를
맞이했다. 태어났을 당시의 모습이다.
이젤에 올려놓은 그림용 종이 위에서 연필을 끄적거리고 있던 마시로가 소리를 듣고 어깨너머로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라타는 힘차게 문을 닫았다.
바로 방 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너,뭐하고 있는 거야?!”
“나체 데생해.”
“나체가 데생한다를 잘못 말한 거겠지.”
“거울 보면서 하고 있어.”
“러프가 누드화냐! 갑자기 왜!”#3 “학교과제.”
“누드가?!”
“데생.”
“다른 제재를 골라! 자기 알몸을 제출하려고?!”

#3 러프~누드화냐! 러프와 나체는 발음이 같다.


“괜찮아.”
“뭐가?”
“잘 그려졌어.”
“지금 퀄리티를 걱정하는게 아니잖아! 부끄럽지도 않냐?!”
“작품이니까.”
“좋~아,그럼 나한테 보여줘.”
“왜 말이 없어?”
“소라타는 안돼.”
“왜?”
“부끄러우니까.”
“방금 전에는 작품이니까 안 부끄럽다면서?”
“소라타는 안돼.”
“어디 자세히 이유를 들어보실까……가 아니라 역시 말하지 마!”
어차피 이상한 대답을 할 게 뻔하다. 두통이 생기기 전에 이야기를 진행하는 편이 좋다.
“아무튼 다른 그림으로 해. 그걸 제출하겠다면 내가 전력으로 방해할 테니까.”
“……알았어.”
얌전한 목소리 였다.
“으,응……. 알았으면 옷 입어. 추가시험 건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잠깐만.”
문에 등을 기댔다. 소라타는 심호흡을 하고 심장 고동을 가라앉혔다.
5 분쯤 명상을 한 후 마시로에게 물었다.
“이제 슬슬 됐어?”
“응.”
이 대답에 안심한 소라타는 무방비하게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커다란 바스타올 한 장만 두른 소녀가 한
명 서 있었다.
“나 분명 옷을 입으라고 했지? 내 이성이 붕괴하면 어쩔 거야? 이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알고는
있어?”
“소라타가 준비해주지 않았으니까.”
“네,그렇군요. 전부 제 잘못이군요…….”
“노크도 안 하고.”
“해도 대답도 안 하잖아!”
“노크를 안 하면 곤란해.”
가슴 높이에서 수건을 꽉 쥔 마시로는 얼굴을 약간 주흥색으로 물들였다.
“알몸 그림을 제출하려고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은 없다만.”
자연스럽게 소라타의 눈은 이젤의 종이로 쏠렸다. 하지만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마시로가 등으로
가리듯이 서 있는 위치를 바꾼 탓에 거의 보지 못했다.
“곤란해.”
마시로가 화를 꾹 참으면서 볼을 부풀렸다.
“아,알았어! 다음부터는 노크할게! 아,아무튼 추가시험 말이야!”
소라타는 얼버무리듯이 선언해서 어색함을 떨쳐냈다. 그리고 옷을 적당히 골라서 마시로에게 입혔다. 이
일이 끝나자 기말 답안용지와 공부 도구 일체를 가져오게 시켜서,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이즈음 되자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소라타의 방에서 두 사람은 접이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니까답안지 꺼내 봐.”
“화 안 내?”
“내가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야?.”
“소라타 나름이지.”
“점수 나름을 잘못 말한 것이겠지!”
“그렇게도 말해.”
“그렇게밖에 말 안 해! 아니,됐으니까 꺼내.”
머뭇거리면서 꺼낸 답안 용지는 전부 아홉 장. 기말고사는 전부 아홉 과목이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낙제점을 받았다는 소리다.
그 시점에서 소라타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아홉 과목이나 가르쳐야 하는데,시험은 내일과 모레…
….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게다가 그 점수를 하나씩 확인함에 따라 소라타의 얼굴에서 차츰 핏기가 가셨다.
국어는 0 점…….
수학도 0 점…….
이하동문…….
멋진 0 점 행진. 9 회 완봉승. 오늘의 헤로인 데뷔는 결정됐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면,이건
야구의 스코어보드가 아니라 기말고사 답안이라는 점이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찍소리도 안 나온다. 뭐라 말해야 좋을까. 뇌가 완전히 직무를 포기했다.
“감동했어?”
“기가 찬 거다! 너,바보에도 재능이 있었구나.”
“너무해.”
“너무한 건 네 머리라고 생각한다만”
“화 안 내겠다고 약속했으면서.”
“화 안 냈어! 왠지 세상의 끝을 본 것 같은 기분에 잠겼을 뿐이야”
“나도 보고 싶어.”
“네가 바로 그 세상의 끝이라고!”
“아냐.”
“이제 그만. 자,거기까지. 아니,정말 괜찮아? 뇌가 부패 한 거 아냐? 왜 영어까지 0 점이냐고.
귀국자녀로서의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는 어디 팽개쳐둔 거냐.”
마시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몽골?”
“비행기에서 떨어뜨렸다?! 미안하지만 몽골에는 없어. 갑자기 들먹이면 몽골한테 민폐야! 똑바로
사과해.”
“몽골이 어딘데?”
^내가 어떻게 알아!”
“미안.”
마시로가 소라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난 몽골이 아냐.”
피곤하다. 너무 피곤하다. 이 시이나 마시로라는 아이에게 상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이상한 행동
하나하나에 태클 을 걸었다간,태클 과로사 할지도 모른다. 존재 그 자체가 바보다.
“너,대체 어떤 공부를 하면서 산 거냐?”
“그림 공부.”
“일반적인 수학이나 영어는?”
“한 적 없어.”
“우와~,이거 대책이 없네.”
마시로의 대답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오늘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잘 알고 있고,0 점 답안지가 뼈아플
만큼 증명해 주고 있다.
“일단 노트를 꺼내봐.”
마시로는 표지에 수학이라고 적힌 대학 노트를 들어 소라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끝을 소라타가
잡아도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시이나 씨?”
“화 안 낼 거야?”
“이 짓을 또 해야 하나?”
“소라타 나름이야.”
“노트 나름이겠지! 됐으니까 이리 내.”
손에 든 노트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좀큰 것같은데?”
보통은 B5 사이즈인데 마시로의 노트는 A4 사이즈다.
“쓰기 편하니까.”
“흐~음,뭐 상관은 없다만…….”
페이지를 한 장,또 한 장 넘김에 따라 소라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역시 안 좋아!”
노트에는 수업 내용 따위는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전부 만화용 콘티거나,캐릭터 디자인
러프거나,아무리 봐도 단순한 낙서로밖에 안 보이는 것들이었다.
“뭐야 이게! 연습장이야? 그렇지? 이런 건 초등학교랑 같이 졸업했어야지! 쓰기 펀하다는 건 그림
그리는데 편하다는 소리지? 이러니 0 점을 받죠! 동정의 여지가 없네! 그나저나 나도 대체 언제까지
잔소리를 해야 하는 거야!”
“약속 깼어.”
“알게 뭐야!”
“사람도 아냐.”
다른 과목 노트도 전부 마찬가지로,전부 낙서장으로 변해 있었다.
“너,좀 더 성실하게 수업을 들어봐. 공부할 의지를 보이라고. 안 그러면 나도 포기다. 그리고 사람도
아니라는 말은 좀지나치지 않나?”
소라타가 감정대로 말을 늘어놓아 봐야 마시로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무 감동도
없이 소라타를 보고 있었다.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이다. 신기한 동물은 마시로인데.
석연치 않은 기분에 짜증 내면서도,소라타는 더 이상 이야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좋아,그럼 더 이상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어떻게 할까나.”
“이상한 말투 배우지 마!”
안타깝게도 마시로와 있으면 소라타의 냉정함 따위는 2 초도 못 버티고 사라지고 만다.
“미사키에게 배웠어.”
“쓸데없는 지식은 안 배워도 돼! 제대로 된 공부를 해! 그리고 교과서 꺼내!”
“없어.”
“왜?! 내가 가져오라고 했잖아?”
“전부 학교에 있어.”
“추가시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 잘도 전부 두고 올 생각을 했구나. 공부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소라타가 있잖아.”
“난 만능 재주꾼이냐? 미래에서 온 고양이형 로봇 수준의 고성능이었구나,나는!”
“자의식 과잉이야. 말이 지나쳐.”
“말꼬리 잡지 마! 이제 됐어,아니,안 됐어! 네가 추시에서 합격점을 받지 못하면 내 여름방학이
없어진단 말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며칠이나 지나고 몇 번이나 도전해야 시험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추시돌파 보다 여름방학 끝나는게 더 빠를 것 같다.
“……이제 됐어. 파이팅,소라타. 지지 마라,소라타. 내가 나를 응원하고 있어! 좋아,그럼 수학부터
할까.”
“파이팅.”
“파이팅은 네가 해!”
“소라타는 오늘 화만 내.”
“네,그렇죠. 칼슘이 모자란 거야,분명. 그럼 처음 문제는…… 인수분해는 알아?”
“에도시대의 발명가로 화가이기도 했던 사람.”
“그건 히라가 겐나이. 인수분해랑 똑같은 음절이 하나도 없잖아! 말실수를 하려거든 좀 더 수준 높은
걸로 해!”
“알았어. 다음에는 제대로 할게.”
“그건 제대로 안 해도 돼! 아니,시이나.”
“왜?”
“반대로,아는 게 뭐냐? 함수는 알아? 방정식은?”
“그래도 구구단은 알지?”
“날 무시하는구나.”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내 마음도 헤아려줘.”
“영어로 요리라는 의미야.”
“그건 쿡크고! 더는 못 해! 추가시험 돌파는 말도 안 돼! 네 존재는 기적이야! 이 미라클 멍청아!”
“꼭 그렇지도 않아.”
“자랑스러워하지 마!”
“뭘~ 그렇게 떠들고 있어.”
고개를 들자 반쯤 열어 놓은 방문 틈새로 진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도와주세요!”
비통한 외침이 닿은 건지,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높은 위치에서
테이블 위의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순조롭게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어딜 어떻게 보면 그런 감상이 나오나요…….”
“아니~,만담 소재로는 제법 괜찮을 것 같은데? 연말에 천만 엔을 목표로 노력해봐#4. ”
완전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진의 태도에 진저리를 치면서 소라타가 정면으로 돌아앉으니,
벌써 공부를 때려치운 마시로가 크로키 북에 콘티를 짜고 있었다.
“조금 전에 약속했잖아!”
폭발한 소라타의 분노도 그림을 그리는 마시로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마시로는 손을 멈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있잖아,네 뇌 구조는 진짜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만.”

#4 연말~천만 엔 2001~2010 년까지 연말에 개최된 만담 콘테스트. 「M-1 그랑프리」. 우승 상금이 천만


엔이다.

“연재용 콘티,짜기로 했어.”


손을 움직이면서 마시로가 대답했다.
“편집자가 하래?”
“응. 다음 달 연재 회의에 올리는게 목표.”
“그럼 얼른 추시를 돌파해야겠네!”
연필의 움직임이 멈춘 순간을 노려 소라타는 크로키 북을 마시로에게서 빼앗았다. 진이 제법인데? 라고
놀렸다.
“시험 끝날 때까지 만화 금지입니다.”
“……알았어.”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의외로 마시로는 순순히 했다.
드디어 공부를 재개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후배님,노ㅡ올ㅡ자!”
미사키의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망가졌다. 미사키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본 후, 몸 전체를 기울이는 것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어라라,나만 따돌린 거야? 어떻게 된 거?! 어떻게 된 거냐고! 아까는 그렇게 저항한 주제에 즐겁게
놀고 있어?!”
“어쩌고저찌고 간에! 그냥 시이나의 공부를 봐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추시 대책.”
미사키가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건 됐으니까 놀자. 여름방학이잖아! 첫날이잖아! 여름방학이잖아! 첫날이잖아!”
“저도 그러고 싶거든요. 그런데 이 크리티컬 바보 때문에…….”
“꼭 그렇지도 않아.”
“똑같이 받아치지 마! 뭐야? 그게 마음에 들어?”
“꼭 그렇지도 않아.”
“마음에 들었네!”
“꼭 그렇지…….”
“이제 그만!”
무한 반복이 될 것 같아 소라타는 황급히 끼어들어 막았다.
“하아~,역시나~”
답안지 득점을 확인하던 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라타의 고충을 이해한 것 같다.
“이 상태로 평범하게 하는 건 무리겠지.”
“동의합니다. 스펙터클 멍청이거든요.”
“꼭 그렇지도 않아.”
“꼭 그래!”
“그럼 전부 외워버려.”
혼자서 냉큼 게임을 시작한 미사키가 화면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그것도 괜찮네.”
이어서 동의한 건 진이다.
“네?”
“음악과랑 미술과 추시는 본시험이랑 내용이 같아. 후배님은 그런 것도 몰랐어? 늦어~! 어~어~어~!”
“네? 그래요?”
보통과는 약간 난이도를 낮춘 다른 문제가 출제된다고 들은적이 있다.
“말하자면 진학 목적인 보통과와는 달리,예술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요구하는게 다르니까.”
“하지만 어떻게 미사키 선배가 그런 걸 알아요?”
미사키는 한 번도 추시를 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하우하우가 그랬거든.”
“차우차우의 친척입니까?!”
“좋~았어! 오늘에야말로 밉살맞은 라스트 보스를 밉살스럽게 밉상으로 만들어주마! 밉상이나 씻고
기다려라! 후하하하하하하!”
“무시하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걔 있잖아. 미사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음악 맡아주는 애.”
“전 면식이 없어요.”
“그랬나? 그러고 보니 소라타,더빙은 본 적 없지?”
“아니,뭐, 상관은 없는데요,그보다 추시…… 외우라고 해도 그건…….”
문답 무용으로 모범답안을 전부 암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정말 괜찮을 것인가. 애당초 전혀 이해가 안 된
것을 외우라는 것도 꽤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소라타가 고민하고 있는데 마시로가 너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외웠어.”
“뭐?”
“이 모범답안을 외우면 되는 거지?”
“그야 그런데.”
소라타와 진이 시선으로 의문을 던졌지만,물론 마시로가 눈치 빠르게 설명해 줄 리 만무했다.
“외웠다면 잠깐 테스트해볼까?”
진이 시키는 대로 소라타는 모범해답 용지를 치우고,대신 백지상태인 0 점 해답용지와 문제만을 테이블
위에 남겨 두었다.
“써봐.”
마시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그림을 그릴 때처럼 매끄럽게 펜을 놀렸다. 글자가 줄줄 적혀 나갔고,
답 하나가 적힐 때마다 소라타는 모범답안과 비교해 보았다.
처음 하나는 정답. 다음도,그다음도 정답. 마시로는 불과 5 분도 되기 전에 모든 수학 문제를 풀어
보였다.
“너,이거 어떻게 된 거야?”
“뭐가?”“차례대로 외웠어?”
“아니.”
“아니,하지만 방금 보고 바로 전부 적다니…… 이게 말이 되냐?”
수학은 풀이도 있다. 제법 많은 분량이다. 그것을 힐끔 본 것만으로 외워버릴 수 있는 걸까.
“이거 놀라운데.”
진도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소라타도할 수 있잖아.”
“무슨 수로! 난 그런 편리한 능력은 없어.”
“후배님의 특성은 고양이를 줍는 거니까~.”
미사키가 게임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한 거야?”
“한 번 보면 외울 수 있어.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소라타의 의문에도 마시로는 태연했다. 정말 마시로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뭐,결과만 나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 아냐? 이걸로 마시로의 추가시험 대책은 완벽하네.”
“……사기 치는것같지만요.”
“뭐,네가 공부에 푹 절은 여름방학을 즐기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사기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있잖아~있잖아~. 다 끝났으면 이거 하자!”
미사키가 눈앞에 들이민 것은 네 사람의 대전이 뜨거운 난투형의 배틀 액션 게임이다.
“자,마시로도 컨트롤러 꽉 쥐고 눌러!”
미사키가 건네주는 대로 마시로가 순순히 받아들었다. 왠지 언밸런스한 조합이다. 컨트롤러를 쥔 방법도
어색하다. 손에 올려놓기만 한 상태다.
“너 게임해 본 적 없어?”
“없어.”
“그럴 줄 알았다. 컨트롤러는 이렇게 쥐는 거야.”
소라타가 쥐는 법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검지는 위쪽 버튼에 올리고……. 응,그래그래.”
일단 모양새는 잡혔지만 그래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다음에는 스턱으로 커서를 움직여서 캐릭터를 선택하는 거야.”
일일이 자기 손과 화면 보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시로가 커서를 조작했다.
“난 고릴라! 고릴라의 힘을 믿어! 고릴라는 정의! 고릴라야말로 파워다!”
“일단 고릴라 신자는 놔두고,시이나는 어떤 게 좋아?”
“여우가 좋아.”“그럼 A 버튼으로 결정.”
A 버튼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마시로는 신중한 동작으로 눌렀다.
소라타는 아무 생각 없이 망국의 왕자를 선택. 진은 먼저 고슴도치를 선택한 상태 였다.
“그럼 꼴찌는 다음 주 정원 청소 당번!”
“잠깐! 다음 주는 원래 선배잖아요!”
“자,스타트! 그리고 느닷없이 콰광! 우주의 저편으로 날아가라~!”
미사키의 고릴라가 소라타의 왕자님을 메가톤 펀치로 날려버렸다. 크게 튕겨져나간 소라타의 캐릭터는
화면에서 사라졌고,화살표만이 끝에 표시되었다. 느닷없이 체력 제로의 클라이막스 모드다.
“이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이 자식!”
소라타는 2 단 점프와 이동계 필살기를 구사하여 왕자를 땅에 착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이 조정하는
고슴도치가 맹렬한 스피드로 굴러 와서 소라타의 왕자에게 몸받음을 시전했다. 그러자 소라타의 캐릭터는
다시 화면 밖으로 튕겨져나가고 말았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우오~,죽겠다 죽겠어! 는 농담이고,얌전히 죽을 줄 알고! 나만 노리다니 비겁해요!”
“이건 그런 게임이잖아. 내 미학은 표적이 된 녀석을 노린 다니까.”
소라타는 캐릭터를 조작해 육지 끝에 매달렸다.
“위험했어.”
하지만 한숨 돌린 것도 잠시,육지로 올라가기 위해 점프해 봤지만 멀리서 날아온 빔이 직격했다.
맞은편에 있는 건 마시로가 조정하는 여우 캐릭터다. 가여운 망국의 왕자님은 실력을 선보일 틈도 없이
죽고 싶을 만큼 초라하게 화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시작한 지 10 초도 채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노오오오오?!”
“나이스,마시롱!”
“진짜 완벽한 콤비네이션이야.”
“방금처럼 하면 돼?”
미사키와 마시로,진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잠깐! 함정이지? 이거 함정 맞지? 이런 식으로 내게 정원 청소를 시키고 싶어요?”
“어떡할래,후배님? 한번 더?”
“당연하지! 이런 다수의 폭력 따위,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소라타,게임 못해?”
“이런 말까지 듣다니.”
“시끄러워! 이제 용서 못 해! 초보자라고 봐주지 않겠어! 철저하게 해주지! 전원 명왕성 저편까지
날려버릴테니까 각오해! 대전쟁 개막이다!”
“후배님은 오버쟁이구나.”
“선배가 항상 하는 말이잖아요!”
“이번에도 후배님이 지면 하시모토 베이커리 궁극의 멜론 빵 쏘기야.”
붉은 기와 거리의 상점가에 있는 빵집의 간판 상품은 하루 20 개만 한정으로 만드는 희소상품이다.
텔레비전과 잡지에도 소개되는 바람에 요즘에는 멀리서 전철을 갈아타면서까지 사러 오는 팬도 많고,
아침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건 물론,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근처 주민인
소라타조차 손에 꼽을 정도밖에 먹어보지 못했다.
“이기면 되잖아? 그 정도는 여유죠…… 근데 왜 멋대로 시작한 거야!”
“자,두둥!”
조작이 늦는 바람에 고릴라의 메가 펀치를 먹은 소라타의 캐릭터는 시작 1 초 만에 별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날 각성시키고 만 것 같군요.”
“못하네.”
“시끄러워!”
이렇게 사쿠라장의 여름방학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진 게임 대회로 막을 올렸다.

“그럼,시험 잘 봐. 도중에 자면 안 돼.”


“졸려.”
“자면 끝장이야. 하지만 눈만 뜨고 있으면 네 승리라고.”
“노력은 할게.”
“난 우리 교실에서 시간 때우고 있을 테니까,끝나면 제대로 찾아와. 멋대로 돌아가다가 길 잃지 말고.”
“길 잃은 적 없어.”
“대체 어떤 입이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실까……. 그만 됐으니까 시험이나 보러 갔다 와.”
하룻밤이 지나고,소라타는 마시로의 시험 때문에 아침부터 학교에 와 있었다. 혼자 보내면 학교까지
제대로 찾아갈 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가기 직전까지 게임을 한 탓인지 거의 자지 못 해서,눈을 떼면 근처에서 숙면을 취할 우려도
있다.
“난 갈게.”
“응……. 있잖아, 소라타.”
“왜 이름으로 안불러줘?”
“야! 지금 그런 말을 할 때냐!”
그건 만화가 데뷔가 결정 나던 날의 일이었다. 눈앞의 소녀가「시이나」가 아닌「마시로」라고 부르란
소리를 느닷없이 꺼낸 것이다.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제는 계속「시이나」라고 불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그 문제는 해결됐다고 믿고 있었다.
“소라타?”
“그건 그…… 왠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할까,그런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잖아?”
본질에서 벗어난 빈말로 변명했다. 사실 다른 사람 눈이랑은 상관없이,소라타 자신이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특별한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마시로」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할까,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할까,아무튼 그런 묘한 의미가 자제 시키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쑥스 럽다는 이유도
있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
마시로의 마음은 직선적이었고,소라타의 거짓말을 의심 하지도 않았지만 탐색도 하지 않았다. 하는 말
그대로를 믿고,보고 생각한 그대로 대답했다.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자,소라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둘이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러.”
결국 변명한 소라타가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너,너,자, 잘도 그런 복잡한데다 쑥스러운 상황을 만드는구나.”
“…….”
모르겠다는 듯이 마시로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소라타가 좋아하는 동작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사고가 불 가능할 정도로 소라타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아,알았어. 그렇게 할게.”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최악의 약속을 하고 말았다.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마시로의 눈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상황이다. 일부러 마시로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럼,시험 잘 봐……마시로.”
찬찬히 바라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시로의 입술이 살짝 웃었다. 그 미소는 바로 평소의 무표정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마시로 자신도 미술과 교실로 모습을 감췄다.
마시로와 해어진 소라타는 허탈한 걸음걸이로 자기 교실로 향했다. 소라타의 교실은 미술과와 같은
층이지만 긴 복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리가 멀었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소라타는 한 걸음씩
확인하듯 복도를 걸어갔다.
여름의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에 섞여 동아리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들려왔다. 금속 배트가 볼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소라타는 자기 교실에 도착했다.
평소에 쓰던 자리에 짐을 두고 제일 먼저 창문을 전부 열었다.
그때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교무실에서 잘 아는 사람 그림자를 발견했다. 이번 달에 부인이
본가에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타카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아침까지 게임을 하고
있던 진이었다. 오늘 학 교에 볼일이 있으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타카츠 선생님 하면 사모님 일 이외에 떠오르는 건 진로 지도 책임자라는 것 정도였지만,진의
진로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렇게 약간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데,소라타의 시선을 알아차린 진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건
일순간뿐,진은 겸연쩍은 듯 바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뭐,이유라면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라고 생각한 소라타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꺼낸 책받침으로 얼굴을 부쳤다. 뒤이어 꺼낸 것은 낡은 책 한 권이었다. 프로그램 초보자용
교본이다. 사쿠라장 102 호 주민이자 게임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아카사카 류노스케에게 빌린
책이었다.
올 여름,집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소라타는 남아도는 시간을 프로그램 공부와 게임 기획서 작성에 쏟아
붓자고 결정했다. 완성한 기획서는 하드 메이커 주최의 기획 오디션「게임을 만들자」에 응모하는 것이
목표다.
여력이 있다면 디버그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보려고 계획 중이다.
책받침으로 부채질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교본 페이지를 넘겼다. 여전히 무슨 소리가 적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일단 읽어보았다. 몇 번 반복해서 읽으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니,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기분 탓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잘 모르겠다.
“으~음……”
왠지 감각적으로는 물리 공부를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었다.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한 번
이해하면 여러 가지로 응용이 가능하다. 반대로 모르는 것은 계속 애매모호하게 머릿속에 따라붙어 공식을
써서 문제를 풀어도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그런 느낌이다.
“이건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일단 1 장만 읽고 책을 덮었다. 간단한 계산 식을 컴퓨터에 실행시켜보기 위한 프로그램까지 공부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도 이 연장 선상에 어제도 신 나게 갖고 놀았던 게임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림이나 소리는 언제쯤 되어야 등장하는 걸까.
시계 대신이기도 한 휴대폰을 보자,두 시간 정도 지나있 었다. 제법 집중해서 읽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시로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시간이 남은 소라타는 류노스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프로그램 공부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었다.
ㅡ지금 뭐해?
바로 답장이 왔다. 류노스케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언제나 그렇다.
ㅡ현재 류노스케 님은「프로그래머는 매일 여덟 시간씩 자야 한다」라는 독자적인 이론에 근거해,이미
황홀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소라타 님께서 보내신 메시지지만,류노스케 님께
전할 수 없습니다. 죄송 하지만 이해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할 수만 있다면 류노스케 님께 바짝붙어
자고 싶은 메이드 양 드림.
오늘도 류노스케가 개발한 자동 응답 프로그램 AI 메이드는 컨디션이 좋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자고 있다면 질문할 도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한가해진다.
따분함도 해결할 겸,메이드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ㅡ메이드 양의 첫사랑은 언제야?
바로 답변이 돌아오며 휴대폰이 진동했다.
一 3 년 전 봄입니다. 그 얼굴을 처음 뵙는 순간 찌리릿 하고 느낌이 왔죠. 난 이분을 모시기 위해
태어났구나 라고. 하아~. 그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아, 류노스케 님……. 류노스케
님 일편단심인 메이드 양 드림.
아무래도 자신을 만들어준 류노스케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잘도 만들었군. 이 시스템을 이용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를 만들면 미친 듯이 팔리지 않을까.
다음에 류노스케에게 상담해 봐야겠다. 아마 관심 없다고 할 것 같지만.
一 고백 안 해?
一 전 류노스케 님을 모시는 몸입니다. 원래 종자 따위가 주인님께 사랑을 품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절 곁에 두시는 것만으로도 행복으로 알고,이 마음은 가슴 깊은 곳에 꽁꽁 넣어 두겠습니다. 사랑
중인 소녀 메이드 양 드림.
전자 메이드는 소라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나 때울
생각이었지만 점점 내용이 무거워지자 농담이라도 던져 분위기를 바꾸자 싶어 대담한 질문을 던졌다.
ㅡ 오늘 팬티는 무슨 색이야?
과연 어떤 답이 올까.
一 회색 사각팬티다. 칸다,남자인 내게 팬티 색을 물어보면 기분이 좋나?
ㅡ너한테 물어본 거 아냐!
ㅡ이거 참,한여름 날씨에 뇌가 융해된 건지.
一아냐. 메이드 양에게 물어본 거라니까!
一기업 비밀이다. 칸다,바보를 바보바보 하고 있으면 바보 같은 바보가 돼.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었다.
변명 메시지를 적었다. 송신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가 온 것이다.
화면에는 본가 번호가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건으로 연락한 것이리라. 얼른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네.”
「네,가 아냐,오빠!」
“뭐야,유우코구나.”
「뭐야,가 아니라니까!」
“내가 뭘 어떡하면 되겠니,동생아.”
「오늘 내려오는 거 아니었어?! 왜 연락이 없어?」
“네가 내 엄마냐.”
「동생이야~!」
“나도 알아. 아,그리고 못 가게 됐으니까 엄마랑 아버지 한테도 말해줘.”
「왜?! 안 돼! 반드시 내려와야 돼! 유우코의 여름방학 계획이 전부틀어진단 말이야!」
“아니,그게 좀 아주 설명하기 난감한사정이 있어. 미안해.”도저히 마시로를 보살펴 주느라 갈 수 없게
됐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여자구나.」
의외로 날카롭다. 여자의 감이라는 걸까.
“아냐.”
「목소리가 갈라졌어,오빠.」
“갈라지긴 뭐가.”
「난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아냐.”
「여자친구 생겼지? 그래서 이것저것…… 그,그,야,야 한 짓도 하고 싶으니까 안 오는 거잖아! 맞아!
틀림없어! 이 변태!」
“아냐! 대체 어떤 상상력…… 아니,망상력이 있으면 그렇게 되냐. 이 오빠는 네 장래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어느 틈에 그런 것을 배운 건지.”
「그럼 집에 내려오면 되잖아…….」
유우코가 조용하게 말하자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사실은,고양이를 주웠거든.”
「고양이?」
“응. 그래서 고양이를 봐줘야 돼.”
「데리고 오면 되지! 나도 고양이 쓰담쓰담하고 싶어.」
“미안. 일곱 마리나 돼.”
「거짓말쟁이.」
“거짓말아니야!”
「일곱 마리나 줍다니 이상해! 그건 저주받은 사람뿐이야! 평생에 걸쳐 주울 고양이를 어떻게 몇 개월
만에 주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진짜니까 믿어줘.”
「증거.」
“뭐?”
「고양이 사진 보내봐.」
“너,휴대폰 샀냐?”
「아냐……. 아빠가 결사반대하고 있어. 불안하다,위험하다,안전하지 못하다,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비행 청소년 되는 지름길이다 라면서…… 오빠가 뭐라고 말 좀 해줘. 휴대폰만 생기면 매일 오빠랑
메시지도 주고받을 텐데」
“넌 나랑 달리 사랑받는구나.”
「으휴~,말 돌리지 마! 증거!」
“그럼 나중에 엄마 휴대폰으로 보내 놓을게.”
『지금!」
“지금은 이걸로 전화하고 있잖아.” 「끊으면 되지.」
유우코는 소라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엄마 휴대폰으로 고양이
사진을 첨부한 멀티 메일을 보냈다.
일곱 마리 고양이가 우르르 모여 있는 호화로운 사진이다. 잠시 기다리자 다시 집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저주받았구나…….」
“처음에는 한 마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오빠답다고 하면 그렇긴 한데……」
이렇게 말하는 유코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다량의 불만이 담겨 있었다. 어지간히 소라타가 내려오지 않는
것이 납득 이 안 가는 모양이다.
“그보다 그쪽은 어때? 엄마는 잘 계셔 ?”
「응. 잘 계시지. 아빠도 그렇고.」
“아니, 난 아버지 근황은 안 물어봤고,알고 싶지도 않아.”
「나는 안 물어봐?」
“응? 좀 컸냐?”
「모,몰라. 오빠도 참,뭐, 뭘 그런걸 물어?」
“설 이후에 보질 못했으니까. 좀 컸지?”
「아,아무리 오빠라도,그,그런 건 안 돼. 그,그야~,조금은……. 근데 정말 조금밖에 안 커서…….」
“몇 센티?”
「어?! 그,그렇게 자세하게 물어보나?! 아,응……5,5…….」
“뭐?! 5 센티나? 성장률이 장난 아니네.”
「5 밀리지만……」
“뭐야,겨우 그거냐.”
「그렇게 실망할 건 없잖아……. 오,오빠 바보!」
“작은 게 신경 쓰여?”
「당연하지! 진짜! 별걸 다 묻고 난리야!」
왠지 묘하게 대화가 엇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니까 어느 정도 작아도 딱히…….”
여기서 갑자기 소라타는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내가 물어본 건 키…….”
「엄마아~,오빠가 자꾸 야한 얘기만 해~!」
“으아아아아악!! 잠깐,스톱,유우코! 기다려! 제발! 그런 거 엄마한테 말하면 가족회의가 열리잖아!”
하지만 비정하게도 휴대폰 수화기는 침묵했다. 멀리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나 했더니,접시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유우코 양?”
「오빠,아빠가 전해주래.」
“뭐,뭐라고……? 아버지도 있었냐? 회사는?”
「「딸은 못 줘! 넌 의절이다!」라고. 근데 의절이 뭐야? 오빠 혹시 울어?」
“……울고 싶어졌어. 아하하…….”「왜,왜 그래 오빠. 왠지 썩은 동태눈을 한 사람 같은 목소리야.」
그건 도대체 어떤 목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그런 말을 할 기운조차 소라타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아무튼 난 못 가. 여러 의미로 못 가게 됐으니까,넌 엄마랑 아버지랑 행복하게 살아라.”
「으,응……. 기운 내. 난 항상오빠 편이니까.」
“그럼,끊는다.”
「응,또 전화할게.」
통화를 끝내고 책상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물론 의절은 농담이겠지. 그래.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잘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다. 후쿠오카로 전근이 결정됐을때,소라타가 있든 말든 자신의
외로움에 영향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유우코라면 아주 끔찍하다.
“어라? 정말 끝난 게 아닌가?」
아니,생각하지 말자. 의절일 리가 없다. 시대착오적인 것도 정도가 있다. 정말이지 아버지다운…….
역시 진짜 끝이구나.
“하아~.”
힘이 빠져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일단 류노스케에게 답장이 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프로그램 질문을 할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에,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잠시 동안 소라타는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호흡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 동아리 활동 소리. 그에 섞여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 보폭은 좁지만 또렷했다.
발소리가 교실 앞에서 멈췄다.
“칸다?”
고개를 들자 열어 놓았던 교실 문 앞에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다.
같은 반의 아오야마 나나미 였다.
“뭐해?”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의문으로 흔들렸다.
“시이나 추가시험 동행.”
“무슨소리인지.”
그야 그렇겠지 생각하면서,소라타는 보충 설명 없이 반대로 질문을 했다. 마시로는 설명을 하면
길어지는데다,일반적인 감성의 소유자에게 말해봐야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너야말로 여기 웬일이야?”
“그냥 좀.”
나나미가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교실로 들어와 소라타한테서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똑바로 칠판을
보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출당했냐?”
하지만 나나미는 성적도 우수하고 생활 태도도 바른,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범생이다. 지각과 결석도 없고
선생님의 평판도 좋다. 그런 나나미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여름 방학에 학교에 있는 이유를
소라타는 도무지 짐작 할 수 없었다.
“곤란하게 됐어.”
여전히 칠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나미가 갑자기 예상 밖의 말을 했다. 하지만 보기에는 평소의 나나미와
똑같아서 곤란하기는커녕 옆얼굴에서는 강한 의지와 자신감까지 느껴졌다.
그 나나미가 곁눈으로 이유와 내용을 물어주길 원하는 듯 소라타에게 자기 마음을 내보였다. 눈치챈 이상
그냥 무시 할수 없는 게 소라타 성격이었다.
소라타는 나나미가 시키는 대로 물어보았다.
“음,나라도 상관없으면 얘기해봐.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은 한없이 낮을 것 같지만.”
“괜찮아. 기대도안하니까.”
“우와,잔인해.”
소라타를 자기 뜻대로 조정해서 만족한 건지,나나미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받아치려 했지만,
센스 있는 공격보다 나나미의 말에 말려드는 미래만이 머리에 떠올라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더욱 기분이 좋아진 나나미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둔 후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실은 말이지.”
그 순간 꼬르륵 소리가 났다.
“…….”
“…….”
나나미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소라타는 못 들은 척 했다.
“사실은,오늘 선생님께 불려 가서.”
꼬르륵.
“……커흠. 어라,이상하네. 목이 좀 안 좋나?”
“미래의 밥벌이 도구니까 소중히 다뤄.”
나나미는 성우 지망생으로 지금은 그 목표를 위해 아카데미도 다니고 있다.
“그,그래야지.”
직후 다시 뱃속의 벌레가 울었다.
“어이.”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아냐!”
꼬르륵.
“아~,진짜,뭐야!”
“내가 할 말이다! 기껏 모르는 척 해줬더니 왜 그리 끊임 없이 소리가 나는 건데!”
“내고 싶어서 내는 게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모르는 척 해주면 좀 좋니!”
“왜 적반하장인데!”
“됐어!”
나나미가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뭐라고 혼자 투덜거렸다. 자업자득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소라타 욕이었다.
소라타는 가방 안에서 마시로의 바움쿠헨을 꺼내 나나미에게 내밀었다.
“됐어. 지금은 그……다이어트 중이야.”
“뺄 정도로 찌지도 않았잖아.”
“본 적도 없으면서.”
나나미는 자신의 허리 부근을 두 손으로 누르면서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도 공복은 견디기 힘든지
원망스러운 듯 바움쿠헨을 쳐다보았다.
“됐으니까 먹어.”
“얼마야?”
“괜찮아.”
“칸다도 자취생이니까 그냥 받을 순 없어.”
이런 나나미의 겸허하고 고지식한 면을 조금이나마 사쿠라장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그럼 백 엔 플러스 세금.”
나나미는 가방에서 동전지갑을 꺼내 책상 위에서 엎었다. 속에서 나온 건 동전 세 개. 10 엔짜리가 두
개에,1 엔짜리가 하나. 합계 21 엔.
“개그야?”
“지금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번 달은 드디어 휴대폰도 끊어져서…….”
“진짜……?”
“그런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한 돈이 들어오니까 괜찮아.”
“하지만 오늘이랑 내일은 21 엔……. 제발 이 바움쿠헨을 먹어주세요. 마음이 아파서 내가 죽을 것 같다.
부탁이니까 먹어.”
소라타는 과장된 동작으로 가슴을 누르며 괴로운 척을 했다. 아니,실제로도 가슴이 살짝 아프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지만 아르바이트비가 나오면 갚을게. 잊어버리지 마.”
적당히 대답하면서 나나미에게 바움쿠헨을 내밀었다.
포장을 뜯은 나나미가 한 입 덥석 베어 무는가 싶더니 금세 사레가 들렸다.
“천천히 먹어!”
등을 탁탁 두드려주어도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소라타는 복도로 달려나가 계단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홍차를 한 팩 사왔다. 빨대를 꽂아 나나미에게 먹였다.
“푸핫…….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
“살인자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조심해. 「바움쿠헨 살인사건,나이테는 보고 있었다.」같은 건
사양이야.”
“나도 싫어.”
나나미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어제 점심때부터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뭐? 돈 없어도,일반 기숙사는 밥 나오잖아. 아침이랑 저녁은 기숙사비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돈이 없다니까 그러네.”
“21 엔이나 있잖아.”
얼음 같은 시선으로 나나미가 항의했다.
“방금 그 말에서는 악의가 느껴졌어.”
“그,그래서?”
“기숙사비도 좀 밀렸어.”
“조금이라니?”
“세 달 치 정도…….”
“그게 조금이냐? 체납의 척도를 모르겠네.”
“그래서 밥도 끊겼어.”
“오~,가스랑 수도 같구나.”
“오늘은 그 일로 호출받은 거야. 이번 달까지 체납하면 부모님께 면담을 요청하겠다는 최후 통보지.”
“네 부모님은 분명.”
“응. 내가 집에서 나온 걸 반대하고 있어. 주로 성우 건으로. 생활비는 스스로 벌겠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 집에도 기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우리 학교 입학을 허락 받았으니까,기숙사비 체납으로
연락이 가면 곤란해. 틀림없이 오사카로 끌려갈 거야.”
“그렇군.”
나나미가 “곤란하다.” 한마디로 정리한 것치고는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아카데미 하반기 레슨비는 지불했으니까,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면 그 후에는 괜찮을 거야.
아르바이트도 하나 더 찾았고.”
“근데 그 여름방학에도 기숙사비를 내야 하잖아.”
“응. 그래서 지금 어떡할까 고민 중이야.”
나나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등을 꼿꼿하게 세 우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나나미는 역시 그다지
곤란한 사람 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소라타가 반쯤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럼 사쿠라장에 오지그래?”
나나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사쿠리장?”
“오래됐지만 기숙사비는 싸. 식비도 별도니까 자기 나름대로 절약도 할 수 있어. 난 고양이 식비를
더해도 사쿠라장에 온 후의 생활비가 더 싸게 먹히거든. 여자는 빈방도 있으니까.”
“흐음~,그렇구나.”
나나미가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쿠라장은안 돼.”
“뭐,네 이미지와는 안 맞긴 하다만. 다른 학생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힘들고……. 왠지
선생님의 공격도 강해지는 것 같고……. 물론 안 되겠지.”
“그런 게 아니라.”
소라타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나나미의 어조가 불만스러워졌다. 하지만 소라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는 것은 이유를 물었다간 나나미가 더 불쾌해하리라는 것과,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더니 더욱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는 것 정도였다.
“그럼,뭐야?”
“남자가 있잖아.”
나나미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뜨고 소라타를 쳐다봤다.
“확실히 진 선배는 위험인물이긴 하지…….”
그 외박의 제왕에겐 현재 애인이 여섯 명이다. 전부 연상 누님들로,외박 일정이 요일별로 정해져 있는
최악의 인간 이다. 심할 때는 일주일 동안 전혀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아니,네가 있잖아.”
“아오야마…… 너,날 뭐로 보고.”
“남자,수컷,늑대.”
“수컷도 늑대도 아냐! 딱히 네가 사쿠라장에 있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전혀 의식 안 하니까!”
이 말에 나나미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건 나한테는 매력이 없다는 소리니?”
강한 의지의 결정체였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안한 듯 피한 시선이 바닥 위를 미끄러져 멀리 도망갔다.
그래도 나나미의 의식만은 소라타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아,아니,딱히,아오야마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럼,어떻게 생각하는데?”
온순한 목소리를 내는 나나미의 불안함과 기대가 소라타에게서 냉정함을 빼앗고,가슴 속에 동요만을
남겨두었다. 그 처리에 난처해진 소라타는 바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나나미의 다그침에 소라타는 갈라진 목소리로 단숨에 말했다.
“있어! 매력 있다니까! 아까는 그,그, 오기라고 할까,쑥스러움 같은 것이 있어서,사실은 아오야마가
사쿠라장에 있으면 아마 나는 매일 코피를 흘리면서,출혈 과다로 죽을…지도 몰라!”
소라타를 똑바로 관찰하고 있던 나나미는 도중부터 몸을 반으로 접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견뎠다.
“저기~,아오야마 씨? 혹시 절 속이셨습니까?”
몸을 일으킨 나나미는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하여튼 단순하기는.”
“너…….”
“조심하는 게 좋아. 여자는 약았거든.”
“특히…… 아오야마 넌 연기도 뛰어나니까.”
“고마워,그거 최고의 칭찬이야.”
이렇게 말한 나나미는 뭔가 눈치챈 듯 시선을 들었다. 소라타의 위,아니 뒤를 보고 있다.
소라타가 돌아보자 교실 입구에 마시로가 있었다. 마시로의 눈은 소라타를 똑바로 바라보고,나나미를
힐끔 힐끔 보더니 다시 소라타에게로 돌아갔다.
“시험,끝났어? 빨리 끝났네.”
소라타의 앞까지 온 마시로가 답안용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걸 소라타는 한 장씩 확인했다. 다섯 장. 오늘 분은 이게 전부다.
백 점 연발. 퍼펙트한 5 연승이다.
“칭찬해도 돼.”
“누가 칭찬을 한다는 거야! 이 사기꾼아!”
“쑥스러워할 건 없는데.”
“이건 쑥스러워하는 게 아냐! 전부 편리한 특수능력 덕분이잖아.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해.”
“미안.”
“마음을 담아서!”
“미안해?”
“왜 의문형인데!”
“저,저기,칸다?’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듯이,나나미가 말을 걸었다.
“아,미안. 바보 응수에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어.”
“그,그거 큰일이네.”
마시로가 소라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아아,나랑 같은 반인 아오야마 나나미야.”
소라타가 나나미를 소개하자, 마시로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미사키의 애니 목소리.”
“응.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전에 미사키가 말하는 걸 들었어.”
“그래도 네가 이름을 기억하다니 별일이네.”
“예쁜 이름이었으니까.”
마시로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나나미는 당연히 당황해서 기본적인 대답밖에 못했다.
“고,고마워.”
“이쪽은 아마 알겠지만,시이나 마시로. 나처럼 사쿠라장에 사는 애야.”
“응. 알아. 유명하니까.”
마시로는 그 단정한 용모와 천재 화가라는 칭호 덕분에 전학 당시부터 학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아마
스이고에서 마시로를 모르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자기 이름이 언급돼도 마시로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소라타의 옆에 서 있었다.
“소라타.”
그리고 평소처럼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이름으로 불러……?”
나나미가 조그맣게 뭐라고 말했지만,소라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말을 마시로가 하기 전에 소라타는 가방에서 바움쿠헨을 꺼내 건넸다.
“그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아껴 먹어.”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봉투를 쥐었다.
하지만 마시로는 먹으려 하지 않고 소라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시모토 베이커리의 궁극의 멜론빵이 먹고 싶어.”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지식만 배우는 거야…….”
“없어?”
“투정부리지 말고 그거나 먹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마시로는 봉지를 뜯고 바움쿠헨을 베어 물었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기분이다.
나나미도 약간 놀란 모습으로 마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시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눈을 감고,3
초도 지나지 않아 선 채로 잠들어 버렸다.
“자지 마!”
소라타가 머리를 살짝 때렸다. 눈을 뜬 마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움쿠헨 씹는 것을 재개했다.
하지만 10 초 정도 지나자 다시 상모를 돌리기 시작했다.
“자지 말라고!”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찔렀다. 일어나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바움쿠헨을 계속 양볼 미어지게
먹는다.
“시이나는 참,개성적인 사람이네.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나나미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자기 느낌을 말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냐.”
“그래?”
소라타와 나나미가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마시로는 세 번이나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적당히 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소라타는 마시로의 정수리를 수도로 내리쳤다.
“졸려.”
“장소와 상황을 생각해.”
“어제 소라타가 재워주지 않아서.”
“어?”
“뭐어?!”
소라타의 의문과 나나미의 놀라움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바로 나나미가 따지는 눈빛으로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절대 아냐.”
“소라타가 잘하지도 못 하면서 계속하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
“칸다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어째서인지 소라타가 혼났다.
홍당무가 된 나나미는 지금 틀림없이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까지 해서 몸이 힘들어.”
“카,칸다. 너, 너란 인간은!”
“아냐! 정말 아냐! 네가 상상하는 방향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게임이야! 어제랄까,오늘 아침까지 계속
게임을 해서 그래! 정말이야! 믿어줘!”
“정말이야? 시이나?”
중요한 타이밍에 마시로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 시이나! 안 그러면 내가 죽어!”
눈을 뜬 마시로는 자기 집을 빼앗긴 고양이처럼 불쾌한 눈빛으로 소라타를 흘껏 쳐다봤다.
“우리는 게임을 했어. 그렇지,시이나?”
“응.”
“아,아무리 그래도 밤새도록 한 방에 있었단 거잖아?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그게 이렇게 돼서 조만간
그렇고 그런 상황이 될지도 몰라!”
“그 점은 괜찮아. 진 선배랑 미사키 선배까지 넷이었으니까.”
오해를 풀려는 소라타를 흘끗 본 마시로는 서 있는 것이 힘들어졌는지 소라타의 등에 기대오면서 앉아
있던 의자의 절반을 점거했다. 그리고 기분 좋은 듯 새근거렸다.
마시로의 부드러운 피부와 온기가 맞닿은 부분을 통해 소라타의 몸으로 옮겨왔다.
마시로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다,나나미에게 할 변명에 집중하고 있던 탓에 소라타는 피할
타이밍을 완 전히 놓치고 말았다.
나나미 입장에서 보자면 마시로만이 아니라 소라타의 태도도 무척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아니,
나나미의 경직된 표정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왜,왜 그래,아오야마.”
무슨 소리를 들을지 대충 방향성은 알고 있다. 나머지는 그중에서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의 문제다.
“둘이 사귀어?”
나나미가 한 음절 한 음절을 똑똑히 발음하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소라타에게는 그 손이 약간 떨리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왜,왜 그렇게 되는 건데?”
“왠지 거리감이라고 할까,그런 게…… 지금도…….”
소라타는 황급히 마시로를 흔들어 깨우고,의자를 양보한 후 일어났다. 그래도 몸의 반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마시로의 체온은 소라타의 가슴 속을 요란하게 휘저어 놓았다.
“아니라면,대체 무슨관계야?”
“그냥 같은 기숙사에 사는 사이.”
소라타는 만약을 위해 쓸데없는 발언은 하지 말라는 눈빛을 마시로에게 보냈다. 마시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 콘택트는 멋지게 성공했다.
소라타가 안도하는 순간,진지한 표정으로 마시로가 나나미에게 말씀하셨다.
“소라타는 내 주인님이야.”
소라타는 이글거리는 더위 한복판에 있던 교실에서 순식간에 블리자드가 휘몰아치는 남극 대륙으로
날려갔다.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나미는 표정을 없애고,말없이 눈만 깜빡이더니 입술을 와들와들 떨었다.
“시이나! 넌 왜 꼭 중요 포인트에서 해선 안 될 말만 하는 거야!”
“주,주인이라니…….”
나나미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불끈 쥔 주먹은 어깨 보다 더 떨리고 있었다. 얼굴을 홱 치켜들고
소라타를 노려 보았다.
그 칼날 같은 시선에 찔려 나오려던 변명이 목구멍에 걸리고 말았다.
“카,칸다! 니 글카믄 안 돼!”
나나미는 벌떡 일어나 소라타에게 삿대질을 하며 선언했다.
“오~,사투리.”
“애인이라면 또 모를까…… 주,주인님이라니,머 하는 짓 이고?! 클난다,고등학생은 절대 글카믄 안
돼.”
격렬한 동요와 민망함으로 나나미는 새빨개져 있었다. 대체 주인님이라는 말에서 뭘 상상한 걸까. 일단
나나미의 머릿속에 등장한 소라타는 마시로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키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말해 두겠지만 아오야마,오해야! 커다란 오해라고!”
“변명 따위 집어치워!”
반쯤 울먹이는 눈으로,그래도 나나미는 소라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그러니까 정말 오해란 말이야!”
“입으로야 먼 말이든 몬하겠노. 미,미친 거 아이가? 주, 주인님이라니…… 주인님이라니…… 니 딱
제정신이가?”
“아~,진짜! 내가 어떡해야 믿어줄 건데?”
“내 좋은 생각 났다…….”
나나미의 눈동자 속에서 봐서는 안 될 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뭔데?”
맹렬하게 불길한 예감이 발치부터 솟아올랐다.
“진짜…….”
말을 하려다 말고 나나미는 눈을 감은 후 심호흡을 했다. 호흡이 진정되자,천천히 눈을 뜨고 똑바로
소라타를 쳐다 보면서 힘 있게 말했다.
“진짜 오해인지 아닌지 내가 사쿠라장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겠어!”
소라타는 표정이 굳었고,마시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잠들었다.
분명히 사쿠라장으로 옮기라고 제안한 것은 소라타다. 하지만 그건 기숙사비 체납이라는 문제 때문이지,
딱히 소라 타의 생활태도를 감시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섣불리 판단하면 안 돼,아오야마!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소라타와 마시로의 관계를 확인하면 난감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복잡한 소라타의 심중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나나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부탁해,칸다.”
이날 밤, 긴급 소집된 사쿠라장 회의에서 아오야마 나나미의 203 호 입주 보고가 치히로의 입을 통해
나왔다. 기숙사비 체납건 때문인지,학교 측은 무서우리만치 선선하게 승낙해 주었다고 한다.
이사는 모든 준비 기간을 고려해 8 월 1 일로 결정. 나나미가 안고 있는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이사
업자에게 의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쿠라장 학생들이 돕기로 한 것도,이 날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7 월 22 일.
사쿠라장 회의 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ㅡ 보통과 2 학년,아오야마 나나미의 203 호 입주 결정. 환영회는 이사 당일 밤에 개최 예정. 스스로
아수라장을 불러들인 소라타에게는 동정의 여지 없음. 마음껏 즐겨보자.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충고. 8
월 1 일까지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되니,주민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둘 것을 권하는 바이다. 서기·미타카 진.
ㅡ 미사키 선배,절대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추가· 칸다 소라타.
ㅡ 이 세상에는 말이지,쓸데없는 건 단 하나도 없어! 추가·카미이구사 미사키.

제 2 장

파란, 소용돌이친다.

“여기 하시모토 베이커리의 궁극의 멜론빵이 있어.”


이틀째 추가 시험이 끝나고 사쿠라장에 돌아오자마자 소라타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마시로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매일 식사 때 쓰는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빵집 종이 봉투를 옆에 앉은 마시로 눈앞에
내놓았다.
소라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시로를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요원으로서 아침부터 학교에 갔다. 그리고
마시로가 시험을 치는 동안 남는 시간을 이용해 상점가까지 뛰어가 줄을 서서 인기 멜론빵을 사온 것이다.
딱히 게임에서 진 페널티로 사온 것은 아니다. 모종의 사항을 마시로에게 약속받아내기 위한 미끼로 오랜
생각 끝에 준비한 비밀무기다.
마시로는 흥미진진한 듯 멜론빵이 든 봉투를 바라보는가 싶더니,소리도 없이 손을 뻗었다. 손이 닿기
직전에 소라타는 궁극의 멜론빵을 치워버렸다. 마시로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항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싶더니,눈은 다시 빵집 봉투에 사로잡혔다.
“안 줘?”
“빵한테 말 걸지 마.”
입가에 약간의 불만을 띄운 채 마시로가 겨우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그렇군. 미끼로 낚겠다는 작전인가.”
주방에 먼저 와 있던 진이 늦은 점심으로 냉우동을 먹으면서 히죽히죽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폴로셔츠에
회색 치노팬츠. 기숙사 안에서도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는 건 평소와 똑같다.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은 소라타로서는 불평 한마디쯤 하고 싶었지만 괜한 말을 해서 화제에서 벗어나는
것도 곤란하므로 진의 시선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 멜론빵을 받는 대신,나랑 약속 하나 해.”
“할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
“잘 들어,약 일주일 후에 아오야마가 여기로 이사 올 거야. 네 옆방으로. 이건 알지?”
응, 마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잘 생각해 봐. 아침에 깨우는 건 나,옷을 준비해 주는 것도 나,빨래랑 식사 준비도 나…….
게다가 팬티를 빠는 것도 개는 것도 골라주는 것도 나라고!”
“입는 건나.”
“쓸데없는 말 덧붙이지 않아도 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면 고지식한
아오야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소라타는 변태 딱지를 달게 될 것이고,쓰레기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문은 학교도 모자라
상점가까지 퍼져,조만간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소라타의
기분은 우울해졌다.
그런데도 마시로에게는 소라타의 100 분의 1 도 위기감이 없다.
“궁극의 멜론빵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그건 지금 너의 생각이고!”
“아냐.”
“호오,뭐가 아니라는 거지?”
“엄청먹고 싶어.”
“……선배,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예상을 상회하는 동문서답에 소라타는 허망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뭐야,난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한 거 아니었나?”
진이 우동을 후루룩거리며 파가 붙은 젓가락으로 소라타를 가리켰다.
“마음속으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죠. 죄송합니다. 몇 초 전의 제가 바보였어요.”
“그냥 발상의 전환으로 사귀는 사이라고 하면 어때?”
“물어본 제가 바보였어요…….”
“끝까지 들어봐.”
진이 우동 접시를 치우기 위해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개수대에 서서 능숙하게 설거지를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서,일주일간 산속에 틀어박혀 수행을 시킨들 오늘까지 할 수 없었던 빨래나 청소,
입을 옷 준비 같은 것을 마시로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잖아?”
“그야 그렇지만,거기에 거는 수밖에 없잖아요!”
“무리는 무리라고 깨끗하게 인정해. 현실적으로 간다면 내 안을 채용하는 수밖에 없어. 아침에 깨워주는
것도 방에 당당하게 출입하는 것도 옷을 입혀주거나 벗기는 것도,빨래를 하는 것도 커플로 설정하면
그다지 이상하지 않아. 아오야마도 그럼 할 수 없다고 납득할 거라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개수대에서 돌아온 진은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오오,그렇군요! 역시 선배,천잰데?……일 리가 없잖아!”
“오,장단 맞춰주다가 반전이라니 평소랑은 다르군.”
“선배는 애인이 입을 팬티를 골라준 적 있어요?”
“난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냐.”
“변태라고 하지 마!”
진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면,나나미가 아는 순간 완전 아웃이다.
“난 속옷에는 관심 없어. 중요한 건 그 속이니까.”
“그런 것까지 안 물어봤어요!”
소라타는 상담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후회하면서 다시 마시로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말이야.”
마시로는 어느 틈엔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낙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리고 있는 건 하시모토
베이커리의 종이 봉투. 식욕이 손가락까지 전염된 것 같다. 쓸데없이 리얼한데다 쓸데없이 잘그린다.
“제발 부탁한다,시이나. 아오야마는 원래 사쿠라장에 올 만한 애가 아니야. 지금이랑 똑같이 생활했다간
개학할 때 쯤이면 학교에 못 가게 될 거라고.”
“그거 큰일이네.”
“진짜 큰일인 것처럼 말해!”
“완전 큰일.”
“전혀 실감 안나거든!”
이제 정말 틀렸다. 자신과 똑같은 감각을 마시로에게 요구하는 건 글러 먹었다.
“이해가 안 되면 굳이 할 필요 없으니까,빨래랑 입을 옷 준비는 직접 해. 제발!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특훈이야,알았어?”
“…….”
“어이,알았냐고?”
“궁극을 먹으면 알 것 같아.”
“생략하려면 멜론빵을 남겨!”
원래 그럴 목적으로 준비한 것이니, 소라타는 궁극 멜론 빵을 마시로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마시로는
냉큼 봉투를 열어 속에서 멜론빵을 꺼내 조그만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알았어?”
“궁극,알았어.”
“……그래그래.”
전부 먹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생각에 소라타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음료를 가지러 갔다.
소라타와 마시로 몫의 우롱차를 컵에 따라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러자 소라타 자리 앞에 홀랑 벗겨진 멜론빵이 놓여 있었다. 쿠키 생지 부분만 깨끗하게 먹어치운 것이다.
“누가 음식을 이렇게 먹으래!”
“줄게.”
“못타이나이 오바케#5 가 확 잡아간다!”
이렇게 말하면서 소라타는 옷이 벗겨진 멜론빵을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궁극의 멜론빵은 그냥 단순한
빵이 되어 있었다. 뭐, 그래도 생지는 쫀득쫀득해서 충분히 맛있었지만…….
“소라타가 하고픈 말은 잘 알았어.”
“호오,어떤 부분을 알았는지 말해 보실까?”
“그러니까.”
“음.”
“나랑 소라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나나미를.”
“응.”
“없애버리면 돼.”
“대체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거야!”
진이 발을 구르며 폭소했다.
“내가 언제 살인계획 상담을 했다고!”
“방금 전에.”
“안 했어! 안 했다니까!”

#5 못타이나이 오바케 아깝다와 도깨비가 합쳐진 것으로. 음식 투정하는 어린이를 교육할 목적으로 만든
단어.

그러자 마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건 너야! 뭘 그렇게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
“아냐?”
“당연히 아니지! 타인을 배제하기 전에 너 자신을 어떻게 좀 해봐!”
“소라타,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야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없애려고? 하여튼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좀 더 다른 사람을 이해해 봐!”
마시로는 소라타의 기세에 끌려가지도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느긋한 동작으로 컵에 든 우롱차를
마셨다. 멜론빵을 다 먹은 지금은 소라타 따위 완전히 흥미 대상에서 제외해버린 모습이었다.
“사귀는 걸로 하라니까.”
진이 몇 번이나 말했더니,그게 명안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라타는 순간 기울어질 뻔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바로 잡았다.
“잘 들어,시이나.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특훈이야. 플랜 A 라고. 만약 그게 안 되면 선배의 플랜 B 도
재검토하지.”
이해를 한 건지 못한 건지,마시로는 그저 물끄러미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없애는 건 플랜 C 구나.”
“그건 기각!”
이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진이 눈짓하자 소라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정함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에,손님은 마침 좋은
쿠션이었다.
“네,누구세요.”
이렇게 물으면서 현관문을 드르륵 열자,불쾌한 표정을 지은 아오야마 나나미가 서 있었다.
“으악!”
“왜 그렇게 놀라?”
마침 나나미 대응책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지만,당연히 소라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동요하는
기색은 얼굴에 전부 드러나고 말았지만…….
“너야말로 웬일이야?”
“내 짐,안왔어?”
“뭐?”
“기숙사 옮기는 수속 때문에 낮부터 학교에 가 있었는데…….”
그래서 교복 차림일까.
“방으로 돌아갔더니 짐이 전부 사라져 버려서.”
“뭐? 누가소실 마술이라도 썼나?”
“넌 그런 장난을 하는구나.”
나나미가 모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농담이야. 미안.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는데,내 방어본능이 거부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어떤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사쿠라장에 정착한 외계인이다.
나나미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겠지.
“들어가도 돼?”
“그럼.”
나나미를 데리고 소라타는 바로 2 층으로 올라갔다. 망설임 없이 제일 안쪽의 203 호 앞까지 이동했다.
방문에는 나나밍의 방이라고 적힌 플레이트가 걸려 있었다. 이걸 보니 더 이상 자신의 예상을 부정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나미도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오야마,괜찮아?”
“응.”
나나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뭔가 묘하게 냉정해서,그건 그것대로 무섭다만.”
“방에서 짐이 없어진 단계에서 충분히 놀랐거든. 게다가 여기 오는 도중에 이래저래 생각해 봤는데,이것
외에는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마음의 준비가 된 것뿐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어떡하려고?”
물어보자 나나미의 눈이 소라타에게 열어달라는 듯 손잡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라타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203 호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창문. 바람이 불어 들어오며 하늘색 커튼을 펄럭이고 있었다.
방 구조는 소라타의 방과 똑같았지만 가구와 가전제품이 최소한에 그쳐서 그런지,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
침대와 옷 장,책상과 의자만이 있을 뿐이다.
유리 소품을 좋아하는지,동물 장식품이 책상 위에 몇 개 놓여 있었다. 잘 보니 전부 호랑이 모양이었다.
나나미는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하나씩 확인하고,확인이 끝나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라타를 향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라타는 실례하겠다는 식의 인사를 하고 침대로 갔다. 침대에는 모든 악의 근원인 미사키가 소라타가
키우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를 이끌고 호랑이 쿠션을 껴안은 채 행복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하얀 고양이 히카리가 고개를 들었다. 소라타와 나나미를 보고 냐옹 하고 운다. 침대에서
뛰어내려 나나미의 발에 몸을 비볐다. 나나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라타가 히카리를 주웠을 당시,우연히 나나미도 함께였다. 사쿠라장으로 유배 오기 전까지는 둘이서
종종 밥을 주곤했다.
그게 바로 나나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나나미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많이 자랐네.”
히카리가 또 기분 좋은 듯 울었다.
이 소리에 미사키의 귀가 움찔 반응하더니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고양이 여왕님은 괴성을 지르며 눈을
떴다.
“우냐~!”
그리고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놀란 고양이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히카리까지 합쳐 일곱
마리의 고양이는 나나미가 발산하고 있는 불온한 공기를 감지했는지,주인인 소라타를 두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가능하다면 소라타도 같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나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미사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옷 갈아입고 아르바이트 가야 하니까 나가 주시겠어요?”
의외로 나나미의 첫 음성은 침착했다.
“그치만 후배님.”
“카미이구사 선배도요.”
“에이~,어때. 같은 여자끼린데 친하게 지내자~.”
“사양하겠습니다. 비상식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죠. 멋대로 남의 짐을옮겨 놓고 어떻게 이렇게 태연해요?”
끝까지 담담하게 나나미가 칼날 같은 말을 쏟아냈다.
“좋아,아오야마. 더 말해줘.”
제일 큰 피해자는 틀림없이 나나미지만,이사 예정이 빨라진 것은 소라타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이 일로
플랜 A 를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다음 수를 생각해야만 한다.
“인생에는 적당한 서프라이즈적인 영양제가 필요해! 그게 없으면 몸이 말라버린다구! 노 서프라이즈,노
라이프야!”
“뭐든지 한도라는게 있어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그렇지,그렇지? 말도 안 되고 재미있지? 어제 나나밍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생각한 거야!
사이노마크 이삿짐 센터를 수배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인도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는 둥
어쩌고저찌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아서,이건 사람 하나 구하는 일이라고 전화로 설명하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렸어. 하지만 덕분에 나나밍이 이렇게 기뻐하니까, 대성공이야.”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미사키에게 죄책감이 있을 리 없었다.
이사 사실을 소라타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침부터 마시로를 따라가느라 사쿠라장을 비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기가 사쿠라장에 있었다면,마시로의 추가시험이 없었다면 하는 생각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뭐,
어느 쪽이든 미사키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런,바로 플랜 B 발동인가.”
돌아보자 입구에서 진이 얼굴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소라타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 표정으로
진은 이사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소라타는 확신했다.
진의 뒤로 마시로의 모습도 보였다.
“미타카 선배…… 그리고 시이나도…….”
나나미는 전원의 얼굴을 둘러보고,정면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보통과 2 학년 아오야마 나나미 입니다. 사실은 8 월 1 일부터 올 예정이었지만 오늘부터 살게 된 것
같네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하루라도 빨리 나나밍이랑 같이 살고 싶었단 말야~.”
미사키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뭐,잘 지내보자.”
진이 선뜻 대답했고,마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좋게 지내자.”
소라타는 마지막에 겨우 이 말만을 했다.
“그건 그렇고 플랜 B 는 뭐에요?”
귀가 밝은 나나미가 진에게 묻자,소라타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눈으로 애원했다.
“자세한 건소라타에게 들어.”
최악의 대답을 해줬다.
공연히 혼란을 야기하고 그걸 즐기는 것이다.
곁눈으로 나나미가 압박을 가해오는 것을 소라타는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며 무시했다.
“흐음,상관없지만…… 아무튼 얼른 아르바이트를 가봐야 하니까 나가 주실래요? 그리고 2 층은 남자
금지에요.”
나나미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온 이상 그건 확실히 지켜주시면 좋겠어요.”
나나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진이 양손을 들어 항복 포즈를 취했다. 이래서는 마시로를 보살펴
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두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쏠린 틈을 타서 옷장을 뒤지고 있던 미사키가 갑자기 환희의 팡파르를 울렸다.
하얀 천 조각을 높이 들어 보였다.
“이것 좀 봐,후배님! 나나밍은 이런 섹시한 걸 입는다구!”
미사키가 얼굴 앞에 들이민 것은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 팬티. 얇아서 반대쪽까지 다 보일 것
같다. 아니,의기양양해하는 미사키의 얼굴이 보인다.
“미사키 선배,용자군요.”
다른 사람의 옷장과 서랍을 태연하게 열 수 있는 신경에는 정말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어? 앗…… 그거,어디선가…….”
상황을 이해 못 한 나나미가 눈만 끔뻑였다.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일수록 보이지 않는 곳은 대담한 법이지.”
진이 냉정하게 분석했다.
“도,돌려주세요!”
상황을 파악한 나나미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미사키에게서 팬티를 빼앗았다. 옷장 안에
넣어두고 제일 먼저 소라타를 노려보았다.
“이,이건 고향 친구가 짓궂은 생일 선물로 준 거지,내가 고른 게 아니야. 그,그리고 아직 입은 적도
없고!”
“그럼 처음은 나한테 보여줘.”
진이 태연하게 놀렸다.
순간 나나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절대 안 입어요! 카,칸다 너도 알았지?”
“난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래,맞아. 소라타는 팬티 정도는 익숙하거든.”
“네?”
“선배,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어~차피 금세 들킬 텐데 뭐.”
진이 마시로를 힐끔 쳐다봤다. 그걸 못 보고 놓칠 나나미가 아니다. 그리고 소라타 역시 나나미의 작은
표정 변화를 눈치챘다. 순간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하지만 나나미보다 먼저 미사키가 움직였다.
“있잖아~ 있잖아~,여기도 있어!”
색은 같은 하얀색. 양쪽을 묶는 끈팬티다.
“아, 난 그게 더 좋아. 간단하게 벗길 수 있으니까.”
진이 일부러 감상을 늘어놓았다.
“선배,해외 RPG 였으면 총 맞아 죽었을 거예요.”
나나미가 안쓰러워서 못 견디겠다.
“멋대로 건들지 마세요! 그,그것도 친구가 준 거지,따,딱히 제가 고른 건 아니에요!”
야생동물이 먹이를 낚아채는 듯한 민첩함으로 나나미가 속옷을 빼앗았다.
“아,아까부터 자꾸 왜 이래요!”
“자아,자아. 미사키 선배랑 진 선배는 방에서 나가요. 이대로 있다간 아오야마의 정신이 붕괴되고 말
거예요.”
진이 이거 참 하고 중얼거리며 먼저 방을 나갔다. 마시로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칸다 너도!”
“어? 같은 취급이야?”
“짐승 주제에…….”
나나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잣말로 중얼거리지 마.”
그러자 나나미가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짐승!”
“또렷이 말하라는 뜻이 아냐!”
“아~,진짜~, 어쩌라고! 됐으니까 나 좀 혼자 있게 해줘!”
미사키도 다시 돌아온 진에게 끌려나갔다.
“너도 얼른 나가!”
“아오야마.”
“뭐?”
“후회 안 해?”
“해.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해도 소용없잖아. 처음부터 기숙사비를 체납한 건 나니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나나미답다고 하면 나나미다운 고지식함이다.
“그리고 기회일지도 모르고.”
약간 줄어든 목소리로 말한 나나미는 소라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으,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응,너한테 듣고 싶진 않지만,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
지겹다는 듯한 모습으로 나나미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시선만큼은 힘 있게 먼저 방을 나간 마시로를 쫓고
있었다.
“아오야마,미리 일러두고 싶은 게 있는데.”
“뭐?”
“미사키 선배도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정말 아오야마를 환영해주려고 그러는 거야. 그것만큼은
알아줘.”
“너도 환영해주는 거야?”
“물론이지.”
마시로의 비밀을 은폐할 준비를 한 후에 이사를 와줬으면 했지만, 보통 감성을 가진 친구의 입사는
대환영이다.
“계속 기다렸어.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고 해도 좋아.”
“날? 그,그거 무슨 뜻이야?”
“굳이 말안 해도 알잖아.”
“말안 하면 몰라. ……그런 건…….”
소라타를 올려다보는 나나미의 눈동자에는 기대의 빛이 어렸다.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덕분에 소라타도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다. 결심을 하고 자기 생각을 전했다.
“전부터 네가 괜찮다고 생각했어.”
“저,정말?”
“그래. 반드시,잔소리 요원으로서 사쿠라장에 영입하고 싶었거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나미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소라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당장 운석이라도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
나나미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
“됐으니까 당장나가!”
나나미가 던진 호랑이 쿠션을 정면으로 맞은 소라타는 황급히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마시로와 진,미사키도 남아 있었다.
“이거 참,첫날부터 미움을 샀군. 이제부터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니,환영회는 다른 날로 미룰까?”
“에~,나나밍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데~.”
“이게다 누구 때문인데요!”
“전부 후배님 때문이지!”
“나도 그 의견에 동의.”
“나도”
잽싸게 마시로까지 편승했다.
“시이나,너까지!”
“칸다! 방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 마!”
나나미의 지적이 날아오자,진과 미사키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시로는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 무자각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만.”
안타깝게도 소라타는 진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 했다.
“소라타,플랜 C 가 있어.”
“기각!”

아무튼,곤란하다.
나나미에게 마시로에 대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소라타는 이것만 생각했다. 욕실 청소를 하는 지금도,머리를
풀가동시키며 생각 중이다.
원래 이번 주는 마시로가 욕실 청소 당번이지만,시켰다간 뭔가 사고를 쳐서 결과적으로 소라타가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소라타가 전부 하고 있다.
세제 거품을 샤워기로 씻어냈다.
갑작스럽게 이사를 왔던 어제는,결국 나나미가 열 시를 한참 넘어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사쿠라장의 진정한 비정상적인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오늘,혹은 내일은 깨달을지도 모른다. 빨리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소라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플랜 B 밖에 없다.
마시로와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나나미에게는 눈을 감아달라고 하는,진의 추천 작전이다.
솔로경력 16 년인 소라타가 그런 거짓말을 해봐야 금방 들키진 않을까.
도대체 나나미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ㅡ나랑 마시로는 사귀기로 했으니까 방해하지 마.
어이어이,대체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一그게,실은 나랑 마시로가 사귀고 있어. 따뜻하게 지켜 봐주면 좋겠다.
마치 평소 신세진 선배한테 인사하는 것 같다.
ㅡ오늘 인사드리러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마시로 씨와의 교제를 허락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 기세군.
명백하게 무리가 있다. 애당초 사권다는 거짓말을 했다간 앞으로 매일 나나미를 속이기 위해 사귀는 척을
해야만 한다. 그것보단 차라리 지옥이 나을지도 모른다.
증거로 키스해 보라는 소리라도 하면 단번에 끝장이다. 욕조 거품을 전부 씻어낸 소라타는 샤워기를
잠갔다. 발치로 다가온 삼색고양이 코다마를 얼굴 높이로 안아 올렸다.
느닷없이 높은 장소로 올라간 코다마가 불만스러운 듯 낮 게 울었다.
“내가 어떡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아마 그 애는 답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보자 나나미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소라타를 쳐다봤다. 데님 큐롯팬츠에 위에는
하얀 블라우스,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같은 여자라도 미사키는 기숙사 안에서는 좀 더 러프한
차림을 하고 있으며, 마시로는 대부분 파자마 차림이다.
코다마를 내려주자,코다마는 욕실에서 후다닥 뛰어나갔다.
“칸다,너 뭐해?”
“뭐하는 것처럼 보이냐?”
“인생을 고민하면서 욕실 청소?”
“정답!”
“냉장고 당번표에 따르면 이번 주는 시이나가 당번이던데?”
“아~, 이건 말이지.”
“시이나는?”
말을 머뭇거리는 소라타를 추월해 나나미가 시원하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아마 잘걸.”
“그런건 안 좋아.”
나나미는 우향우를 하더니 한눈도 팔지 않고 2 층으로 올라갔다.
“앗,잠깐,아오야마!”
소라타도 황급히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나오는 방이 미사키의 201 호. 마시로의 202 호는 한가운데. 나나미가 노크했다.
“시이나?”
“아오야마,됐다니까.”
“규칙은 제대로 지켜야 해.”
그런 당연한 소리를 들으니 자신이 무척이나 몹쓸 인간처럼 느껴졌다.
“아니,정말 괜찮아!”
“흐음,시이나를 감싸는구나.”
“감싸는 거 아냐! 하지만 아무튼 이 방은 안 보는 게 좋아.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평범한 세상이
아니니까,내 충고를 들어.”
“이것 봐,감싸고 있네.”
“정말 아니라니까! 무엇보다 밖에서 이렇게 말 거는 정도로는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반사적으로 소라타는 문고리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 의미를 모르는 나나미가 아니지만,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었다.
“하지만 열쇠가…….”
나나미는 이렇게 말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열려 있다는 사실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남자도 있는데 문을 안 잠그다니,말도 안 돼…….”
문 안쪽에는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이세계로 끌려간 나나미는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마시로의 방은 언제나 그렇듯 옷과 속옷,책과 만화,그리고 콘티와 원고들이 사방팔방으로 어질러져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상태였다.
“이게다 뭐야.”
“나도 4 월에 똑같은 말을 했어…….”
나나미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 마시로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소라타를
돌아보며 의문을 던졌다.
“책상 밑에.”
수상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나나미가 책상 밑을 들여다 보았다.
“세상에……”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만,시이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야.”
“그래서 사쿠라장에 온 건가?”
소라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이나,일어나.”
나나미가 쪼그리고 앉아 마시로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마시로가 꿈지럭거리며 일어났다.
소라타는 일단 눈을 피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위아래 모두 파자미를 입고
있었다.
“시이나,안녕.”
잠에서 덜 깬 멍한 표정의 마시로가 나나미의 몸으로 손을 뻗어,갑자기 더듬더듬 만지기 시작했다.
“꺅,뭐,뭐야?!”
“소라타…… 부드러워졌네?”
“소라타는 저기!”
그러자 나나미가 가리킨 손가락 방향으로 걸어가 소라타 앞까지 왔다. 이번에는 소라타에게 손을 뻗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뭐하는 거야?”
“진짜. 이쪽이 소라타다.”
“눈으로 확인해!”
“졸려. 눈 뜨기 싫어.”
이 상태로 보아하니 잠든 것은 동틀 녘일지도 모르겠다.
“또 콘티라도 짰어?”
“데뷔 원고,입고 전 마지막 수정.”
짧은 말로 대답한 마시로는 다시 책상 밑의 둥지로 파고 들어갔다. 바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나미는 말 그대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상황 파악을 위한 시간을 줘.”
“일단 경험자로서의 충고를 해두겠는데,이해하려 할수록 더욱 수렁에 빠질 뿐이야.”
상식적인 사람일수록 마시로의 특수공격으로 인한 정신적인 데미지는 크다. 나나미의 경우,소라타보다
내성이 약한 것같다.
“……그야 그렇겠지. 응. 그만둘래. 그보다 시이나,일어나!”
과감한 도전자 나나미가 다시 마시로에게 덤벼들었다. 그만두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말한다고 들을
나나미도 아니다. 다시 책상 밑에서 마시로가 나왔다.
옷과 속옷들을 몸에 칭칭 감은 채로 바닥에 앉아 나나미를 올려다보았다.
“시이나,옷 갈아입어. 남자 앞인데 너무 무방비해. 그리고 이 방,너무 엉망이잖아. 정리해야지.
칸다도 멍하게 있지 말고 당장 나가! 2 층은 남자 금지야!”
나나미가 시원시원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소라타도 마시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아~,진짜. 이 봐,속옷까지 이렇게 난장판으로. 속옷은 남의 눈에 안 띄게 둬야지.”
“왜?”
“왜긴. 다른 사람이 보면 쑥스러운 물건이잖아.”
“입은 거 아니면 안 쑥스러워.”
이렇게 말하면서 마시로가 팬티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냥 천조각이니까.”
“그, 그래도!”
마시로의 가치관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나나미가 비명을 질렀다.
“남자애가 보기라도 하면 이것저것 이상한 상상을 해서, 분명,그게 저렇게 돼서,그러니까 나나미가
웅얼웅얼 말을 머뭇거렸다.
“나나미는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지!”
“왜?”
“왜긴,그러니까 그건…….”
나나미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대답이 궁해진 나나미는 갑자기 칼끝을 소라타에게로 돌렸다.
“넌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방금 그 분노는 부당한 것 같아.”
“소라타는 나랑 같은 의견이야.”
“날 끌어들이지 마!”
나나미가 매서운 눈초리로 힐문했다. 까딱 잘못 대답하면 무시무시한 욕설이 돌아올 것이다.
“난 아오야마에게 찬성이야. 정리하는 게 좋겠어. 속옷뿐만이 아니고 전부 다.”
“거짓말쟁이.”
마시로가 중얼거렸다.
“항상 내 팬티,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놀면서.”
“누가 갖고 놀았다고 그래!”
나나미가 기름이 떨어진 로봇 같은 동작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빙점 아래 세상으로 소라타를
끌어들였다.
“칸다,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설명해 볼래?”
한 걸음, 한 걸음 나나미가 다가오더니 소라타의 멱살을 잡았다.
“잠깐,잠깐. 이상하잖아? 방금 그건 시이나에 관한 이야기로 난…….”
“됐으니까 빨리 대답해!”
“아,네…….”
나나미의 공포에 떨면서 소라타는 약 한 시간에 걸쳐 올 4 월부터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소라타의 설명이 끝나자 나나미는 피곤한 듯 중얼거렸다.
“……갑자기는 못 믿겠지만.”
그리고 책상 밑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마시로를 기이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무 심한 취급이었지만 소라타에게 책망할 권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같은 반응을 해왔는지.
셀 수가 없다.
학교에서는 미스터리한 어린 천재화가로 유명한 반면,아무도 마시로의 본성을 모른다. 모두들 구름 위의
존재를 보듯이 멀리서 지켜볼 뿐,친해지려고 말을 거는 동급생은 한 명도 없었다. 사쿠라장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원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귀여운 외모에 재능까지 있으니 좋은 소문만 돈다. 미술 시간에 작품을 완성하면
그때마다 전시된 그림 앞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어,
“시이나는 좋겠다. 재능도 있고 연약해서.”
“지켜주고 싶은 느낌? 알 것 같아~.”
“남자들은 어찜 이렇게 멍청할까.”
“하지만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점은 나도 좋다고 생각해.”
“그러게. 내성적이라고 할까,고상하다고 할까, 저런 애가 잘 없지.”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시로는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해석해
준다. 창가 자리에서 멍하게 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허무한 아름다움 이 있다든가,깊이가 있다 같은
말을 들을 정도다. 아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바움쿠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텐데.
1 학기 동안 마시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들을 때마다,소라타는 본성이 드러나는 날을 생각하며 절망에
빠지곤 했다.
유소년기부터 영국에서 그림 영재교육을 받아온 마시로는 그 외의 다른 것을 접할 기회가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위태로울 정도로 일반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
아직도 사쿠라장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외우지 못하는가 하면,혼자서는 심부름 하나 마음 놓고 보내지
못한다. 편식은 심하고,싫어하는 것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싫어하는게 있으면 당연한 얼굴로 다른 사람
그릇에 덜어낸다. 취사나 세탁은 전혀 못 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는 옷 갈아입는 것은커녕,
팬티조차도 못 고르는 형편이다. 입는 것 담당. 신변의 잡다한 일은 누군가가 해준다. 그게 마시로의
상식이었다.
공부도 전혀 안 해서 1 학기 기말고사는 전 과목 0 점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을 소라타는 남김 없이 나나미에게 말 해 주었다.
“시이나는 말이지,미사키 선배랑 쌍벽을 이루는 사쿠라장의 괴짜야.”
게다가 화가로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를 목표로 해서 멋지게 데뷔까지 따냈다. 일본에는 그것을
위해 돌아온 것이다.
나나미는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어질러져 있는 원고들을 주워 모았다.
“정말그림 하나는 잘 그리네.”
“말해두겠는데,난 사실만 말했어.”
원고에서 나나미가 눈을 뗐다.
“이 참상을 보니 확실히 설득력이 있긴 하다.”
“그렇지?”
“덕분에 수수께끼도 하나 풀렸고.”
“수수께끼?”
“냉장고 당번표.”
“아아,그거…….”
누가 보나 이상한 명칭의 표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마시로 당번」은 시이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게 일이야.”
“거의 간호 수준이지. 시이나는 구제불능 판타지스타니까.”
“아무튼 사정은 알았어.”
소라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플랜 B 와 플랜 C 는 이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애당초 플랜
C 는 선택지에 넣어놓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납득은 안 돼.”
“뭐?”
“그렇잖아? 당당하게 칸다가 금남구역인 2 층까지 오는 것도 안 좋고,시이나는 조금씩이라도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런 건 남이 해준다고 쳐도,빨래나 방 청소를 남자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일손이 없어. 여자는 귀차니스트 교사랑 외계인뿐이잖아.”
“또한 사람 잊었어?”
“어이,설마.”
“「마시로 당번」은 오늘부터 내가 할게.”
“나쁜 소리 안 할 테니 그만둬! 너는 아르바이트랑 이카데미로 바쁘잖아?! 게다가 시이나 뒤치다꺼리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300 배쯤 아무 것도 못한다니까.”
책상 밑에 있는 마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획에 맞춰서 할 거니까 괜찮아.”
“무모하다고!”
“동성인 내가 해야 해.”
“냉정을 되찾아!”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아니면 뭐? 네가 꼭 시이나 보모역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아,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은 있다. 있지만 말로는 제대로 표현 못 할 것 같다. 소라타 자신도 가슴 속의 답답한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번을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존재는
막연하게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이유가 없으면 결정.”
“정말 부담스러울 텐데.”
“같은 말 계속하게 만들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나미에게는 망설임이 없었고,이제 와서 생각을 굽힐 마음도 없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소라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야. 당번 담당은 사쿠라장 회의의 결의가 필요해. 그런 룰이니까.”
“룰이 그렇다면 할수 없네.”
“그래,그렇지.”
소라타가 안도한 것도 잠시,나나미는 태연하게 선언했다.
“그럼 오늘 밤에 사쿠라장 회의를 소집할게. 아카데미 마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게 열 시니까. 좀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열한 시부터 하자.”
“……네. 알았습니다.”
이제 소라타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면 나가. 여긴 여자 방이니까.”
아무 대꾸도 못하고 방에서 나왔다. 나나미도 뒤따라 나와서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라며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나미를 배웅한 소라타 뒤에서 치히로가 말했다.
“너,진짜대책 없는바보구나.”
왠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서,뭐 잘났다고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이유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부담이라든가 무모하다 같은 말을 하면,아오야마같이 어른스러운 성격의 여자애는 당연히 발끈해서
부정하지. 좀 더 여자 다루는 법을 배우도록 해.”
말투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확실히 치히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다 들으셨어요?”
“멋대로 들렸어.”
아직 사쿠라장 회의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생각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나온 한숨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밤,나나미가 소집한 사쿠라장 회의에서「마시로 당번」담당자 변경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진이 나나미에게 한 표를 던졌고 미사키도 동의했다. 게다가 빨리 회의를
끝내고 싶어하는 치히로와 류노스케도 나나미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소라타는 간단하게「마시로 당번」
을 나나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동시에 그 외 다른 당번 로테이션도 나나미를 포함한 것으로 수정 되었다.

7 월 24 일.
시쿠라장 회의 의사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ㅡ「마시로 당번」담당자가 변경되었습니다. 칸다 소라타에서 아오야마 나나미로 변경하는 것이 다수결로
가결되었습니다. 의사록은 이런 식으로 쓰면 되나? 서기·아오야마 나나미.
ㅡ파이팅,나나밍! 내가 응원할게! 추가·카미이구사 미사키.

다음날부터「마시로 당번」은 신체제에 따라 나나미의 노성과 함께 막을 열었다.


규칙적인 생활이 상식적인 인격을 형성한다,라고 호언장담하는 나나미는 신조에 따라 일곱 시 정각에
마시로를 깨워서 재빠르게 빨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단히 익힐 마시로가 아니다. 몇 번이나 나나미가 순서를 설명하고,그것을 실연해 보여도 도무지
배울 의향이 없었다. 알았느냐고 물으면 알았다고 대답은 하면서,시켜보면 버튼은 적당히 누르고 색 있는
빨래든 속옷이든 신경 쓰지 않고 세탁기 안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도대체 왜~,세탁기 시용법을 익히질 않는 거야?”
“어려워.”
“컴퓨터도 쓰는데 못 외울 리가 없어.”
“만화 그리는데 필요하니까. 리타가 가르쳐줬어.”
상태를 보러 온 소라타는 나나미에게 리타란 영국 시절의 룸메이트라고 설명해주었다 .
“세탁기 사용법도 익혀.”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마시로는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부탁이니까 대답은 해.”
결국 이 날,나나미는 자신과 마시로의 빨래를 혼자서 했다.
그게 끝나자 둘은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소라타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방에서 아침을 먹고 있으니,욕실 쪽에서 나나미의 비명이 들려왔다.
소라타가 뛰어갔을 때는 욕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호스가 요동을 치고 있었고 나나미가 홀딱 젖어
있었다. 난처하게도 수도꼭지를 있는 대로 틀어놓은 장본인은 탈의실로 피난해 있었고,나나미만 민망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었으면 잠가!”
“나나미,감기 걸려.”
“네가 한 짓이잖아…….”
“…….”
“이야기 도중에 흥미 잃지 마…….”
나나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 되어 있었다. 나나미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전에 소라타는 바스타올을
나나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젖어서 그런지 블라우스가 피부에 착 달라붙어 몸매가 뚜렷하게 보이는
바람에 눈 둘 곳이 없었다.
자기 몸을 감싼 나나미가 다 봤지,라고 부끄러움과 분노가 서린 눈길로 째려보자,소라타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모르는 척했다.
그런 식으로 처음에는 불안해서 상태를 지켜보던 소라타 였지만,나나미와 마시로의 이런 행동이 이틀,
사흘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에 최근 몇 달간의 자신도 이런 느낌 이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나나미에게 맡겨놔도 별문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시로가 동급생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신선했고, 나나미에게 혼나면서 같이 청소와 빨래를 하는
모습은 다소 훈훈하기까지 했다.
“후배님,히죽거리는거 기분 나빠.”
“손자가 노는 걸 마루에서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아. 노숙 해지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미사키와 진에게는 이런 말도 들었지만…….
이 외에도 장 보러 가서 마시로가 미아가 되거나 나나미의 속옷을 당당하게 정원에 너는 등 매일 어디선가
나나미가 포효를 했지만,일주일쯤 지났을 무렵에는 소라타도 약간 서운하면서도 이건 이것대로 좋다며
신체제에 완전히 적응했다.
다만 소라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을 그만둬도 하루에 두세 번은 마시로가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
이틀 전에는 양팔 가득 빨래를 안은 마시로가 방에 와서 말했다.
“소라타,빨래 개 줘.”
그리고 나나미가 바로 쫓아왔다.
“시이나,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지!”
“소라타가 하고 싶대.”
“그런 소리 안 했어!”
“칸다, 시이나 응석 받아주지 마.”
“왜 내가 혼나야 하는데?”
소라타는 마시로의 손에서 떨어진 천조각을 친절하게 주워 주었다. 재수 없게도 그건 팬티였다.
무시무시하게 윽박을 지른 나나미가 소라타의 손에서 팬티를 빼앗아 갔다. 아무래도 나나미의 빨래가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뺨을 붉게 물들인 나나미는 소라타에게 바보 멍청이 변태 등 생각나는 욕설을 전부 퍼부으면서 황급히
방에서 도망쳤다. 그런가 싶더니 금세 돌아와 마시로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갔다.
어제는 밤 열 시 넘어서 소라타가 기획서 메모를 하는 와중에 씻고 나온 마시로가 왔다.
“소라타,머리 말려줘.”
하지만 때마침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나나미에게 들키고 말았다.
“남자에게 그런 거 부탁하는 거 아냐! 칸다 너도 여자애 말 다들어주지 마!”
“내가 언제!”
“그럼 나나미가 해줘.”
우주왕복선 모양을 한 드라이어를 나나미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알았어…….”
피곤한 표정을 한 나나미는 마시로와 세면장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오늘대로 오전 중에 마시로가 노트를 들고 방문했다.
“소라타,숙제해 줘.”
“직접 해!”
“모르겠어.”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나미가 뛰어왔다.
즉석에서 사정을 살핀 나나미는 포기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매일 시간을 내서 공부를 봐줄게.”
“다시 생각하는게 좋을 거야,아오야마. 시이나는 천재적인 바보야.”
“꼭 그렇지도 않아.”
“너는 조용히 해!”
“시이나,오늘부터 바로 스터디 하자. 칸다도 올래?”
“응? 그럼 가볼까?”
“뭐?!”
“네가 먼저 말해놓고 왜 놀라고 그래…….”
“농담이었는데.”
하긴 당연하다. 예전의 소라타 같았으면 극구 사양했을 것이다.
지금은 학교 성적을 올리고 싶은 이유도 있고,마시로의 추가시험 대책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나나미에게 일임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소라타,파이팅.”
“주로 파이팅 해야 하는 건 시이나야!”
마시로가 이런 식으로 종종 도움을 청해왔지만, 나나미가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살려 제대로 보모 역할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소라타가 나설 자리는 나날이 줄어갔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 스터디를 빼면,
소라타는 마시로와의 접점을 조금씩 잃어갔고 그와 반비례로 자유의 몸이 되어갔다.
덕분에 놀랄 만큼 시간 여유가 생겼고,올여름의 목표로 내건 프로그램 공부와 기획서 작성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은 류노스케 말대로 교본 연습문제에 매달려 계산기 같은 움직임을 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까지
성공했다. 실제로 컴퓨터 상에서 소스를 쓰고 컴파일해서 실행시 켜보자,조금이나마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ㅡ처음은 개나 소나 알아들어,포인터가 벽이지.
류노스케는 이런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계산기를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인지,벽이라는 말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기획서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적당히 메모해 두었던 아이디어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서류로 정리해 나갔다.
「게임을 만들자」 신청 개요에 서식은 자유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8 월 첫째 날인 이날도,소라타는 기획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빛이 들어왔다. 벌써 아침이다.
아침 햇살의 눈부심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소라타는 마지막 확인이라는 생각으로 작성한 기획서를
훑어보았다.
쓰고 싶은 내용은 전부 썼다고 생각한다. 내용에서도 느낌이 온다. 소라타는 작업 완료와 동시에 만세를
외치듯 두 팔을 쫙 뻗었다. 쭉 같은 자세로 있었기 때문인지 어깨와 목 부근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그대로 뒤로 쓰러져 한동안 침대에 기댄 채 멍하니 있었다.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았지만,흥분 때문인지 의식은 말똥말똥했다. 에너지가 떨어진 뇌는 텅 빈
느낌이었다.
작업이 끝나면 잘 생각이었으나, 이 상태로 보아 무리일 것 같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소라타는 채팅룸을 들여다보았다. 목적 인물은 접속 중이었다.
ㅡ아카사카,일어났어?
ㅡ앞으로 두 시간 반은 활동 예정이야.
ㅡ시간 괜찮으면 기획서 보고 감상 좀 말해줄래?
ㅡ알았어.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해 류노스케에게 메일을 보냈다.
一받았어. 잠깐 기다려.
ㅡ응.
그 짬을 이용해 소라타 역시 기획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일본 전국에 걸쳐 깔린 실제 노선도를 사용한 퍼즐 게임.
지정된 시각에 딱 맞춰 정해진 요금 내에서 전철을 환승하고,목표 역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다. 한 역을,
2,3 초로 통과하기 때문에, 조작 템포가 좋아야 한다. 퍼즐 감각으로 노선을 바꿔가며 낭비 없이 딱딱
맞춰 환승을 했을 때의 쾌감이 매력 포인트인 게임이었다.
기획서 작성법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써 본 기획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라는 점에서는 자신 있었다.
一다 읽었어.
ㅡ이런 식으로 하면 될까?
ㅡ아이디어 감상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크게 변동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흥미진진하다」
라고만 말 해두지. 서식은 솔직히 협력할 가치가 없는 물건이야. 이걸로「게임을 만들자」에 접수했을
경우,서류 심사에서 끝이야. 100% 확률로.
一넌 진짜 하기 어려운 말을 쉽게 하는 녀석이구나.
ㅡ좋은 말만 듣고 싶었으면 나한테 상담하지 말았어야지.
기획서를 코앞에서 부정당하자 바로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다고 됐다고 하는 것도 꼴사납고,이런 아픔을
피하기만 해서는 전진할 수가 없다. 그것을 소라타는 마시로의 만화 그리기에서 배웠다. 정답을 알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ㅡ안좋은 점이 뭐야?
이상한 땀을 흘리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ㅡ「콘셉트」,「타겟」,「베네핏」의 세 항목으로 나눠서 기획 내용을 간결하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선정해야 하지. 이해돼?
앞의 두 단어는 뉘앙스로 대충 알아들었다. 게임 잡지 같은 걸 보고 있으면, 때때로 눈에 띄는 단어다.
하지만 세 번째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ㅡ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선생님.
一우선「콘셉트」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갑자기 말투가 메이드 양으로 바뀌었다. 자동 메일 답변 프로그램 AI 를 채팅에도 적용한 모양이다.
ㅡ잘 부탁합니다.
ㅡ「콘셉트」란콘센트의 친척이 아닙니다(단호!).
ㅡ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압니다.
ㅡ가벼운 조크입니다. 그럼 마음을 다잡고.「콘셉트」란,이 경우「무엇이 재미있는 게임인지」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 주세요. 털북숭이 삼국지 장군이 무수히 많은 적을 혼자서 해치우는 게임을 예로
들면,콘셉트는「일기당천」이라는 네 글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혼자서 천 명의 적을 쓰러뜨리는
쾌감이 즐거움인 게임이라는 뜻입니다. 절대 털북숭이가 콘셉트가 아닙니다. 이하는 사고방식의 한 예가
되겠습니다만,플레이어가 조작한다는 게임 특유의 상호성 때문인지,동사를 콘셉트로 잡으면 유효한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과거,「숨기다」와「사냥하다」를 콘셉트로 대히트를 기록한 상품도 있습니다.
一그렇군. 공부가 되었습니다.
ㅡ다음으로「타겟」입니다만,이건 누구를 고객층으로 잡은 상품인지 연령이나 성별로 간단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중고생·남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단,판매층을 더욱 좁힌 경우에는「어떤
세대」나「라이트노벨 독자층」,「애니메이션 팬」등 구체적인 표현이 정확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서
써주시기 바랍니다.
ㅡ말하자면 누구에게 팔 건지도 생각해 두라는 것이군요.
ㅡ네. 마지막으로「베네핏」입니다만,요즘 기획회의에서는 이 점에 착안해서 상품을 개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직역하면「편리」라는 의미가 되겠지만,기획서의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가 얻는
이점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감동」을 얻을 수 있는지,「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동 물을 키우고
싶다」라는 욕구를 만족하게 해준다든지,「여자 친구를 키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해준다든지,혹은
「신진 대사 개선」이 되는지,등등 형식은 다양합니다만 유저가 자각적 혹은 잠재적으로 가진 욕구
중에서 어떤 부분을 만족하게 하고 어디를 자극하는지를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많은 유저가 바라는
상품이라는 것을 알면,나머지는 만들어서 팔기만 하면 됩니다. 바꿔 말하면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해하셨습니까? 혹시 이해가 안 되면 그건 소라타 님이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모른다고 대답하면 타는 쓰레기 수거일에 내다 버릴 테다! 이상,정말 알기 쉬운 메이드 양의
강좌였습니다.
마지막에 있던 쓰레기 이하 운운은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가끔 메이드 양은 어둠의 기운을 풍긴다…
…. 주인의 성격 때문일까.
ㅡ이해했어?
ㅡ덕분에 정말 쉽게 배웠습니다.
-「콘셉트」,「타겟」,「베네핏」의 파악은 어떤 오락을 어떤 유저층에게 팔아서 어떤 만족감을 줄
것인가를 파악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말하자면 기획 내용을 너 자신이 깊게 이해하지 못하면,바른
단어를 선정할 수 없지. 역으로 말하면 이 세 가지 항목을 파악하는 것은 자신의 기획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기도 해. 요즘 은「게임을 만들자」에 접수되는 기획서 레벨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고 들었어. 이런 사고가 가능해진 후에야 겨우 출발선에 섰다고 할 수 있지. 서류심사를
통과해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게 되면 어차피 필요해지는 거야.
역시 실제로 게임 관련 일을 의뢰받고 있는 만큼 류노스케의 발언에는 설득력과 무게가 있었다.
ㅡ약간 만만하게 봤는지도.
一너무 만만하게 봤지. 기념 삼아 한 번 넣어볼 생각이면 상관없지만 정말 도전할 생각이라면 고등학생
감각은 일찌 감치 버려. 기획서를 심사하는 건 억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어른들이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어린애 장난이 아니야.
一대체 얼마나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 만족하는 거냐,넌.
一그리고 하나 더.
一또 단점을 지적하려고!
ㅡ텍스트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삽입해야 해. 게임 기획 내용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움직이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같은 변명은 안 통해. 그런 말을 하려면 작성해서 지참해야지. 그게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그림으로 이미지를 보완할 것을 추천하는 바야.
ㅡ내 미술 성적 알아?
하필이면 소라타가 제일 못하는 과목이다.
ㅡ꼭 자기가 그릴 필요는 없어. 운 좋게도 사쿠라장에는 그림의 프로가 둘이나 있으니까.
一아,그 방법이 있었구나.
마시로와 미사키의 실력이라면 차고 넘친다. 협력 요청은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될지도 모르지만…….
ㅡ마지막으로 하나 더.
ㅡ어디까지 날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한 거냐? 어이. 너 사디스트지?
一기획서에 상세한 사양 레벨 설정이나 시스템 설명은 필요 없어. 제일 포인트인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면 돼. 이것저것 다 가능하다는 식의 기획서는 메인 아이디어에 자신감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짓이야. 심사원들이 바로 간파할걸. 당연히 부록 요소를 쓰는 것도 언어도단이야.
설정이나 시스템뿐 아니라,소라타의 기획서에는 부록 요소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오싹할 만큼 간담은 서늘해졌는데도 땀은 끊임없이 흘러 내려 키보드 위로 떨어졌다.
一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一현 단계부터 기획 입안,기획서 작성을 일상화하는게 좋지. 반드시 미래에 네 자산이 될 거야. 업계
실황을 말하라면,기획직은 90%가 잡다한 업무야. 소개 리스트 작성,소개 발주,소재 확인과 관리,
그래피커 절충,프로그래머용 사양 작성,회의 의사기록 담당,사양 절감,외주 관리,테스트 플레이,
디버그,디버그 관리,광고 소재의 선출과 기사 확인. 공략집 체크……. 그 외 기타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어. 아마 네가 꿈꾸는 크리에이터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업무겠지만,그런 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기획자는 많아.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걸 기획직이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
一확실히 뭔가 초라하네.
ㅡ기획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인재는 전체의 10% 정도야. 그림도 못 그리고 음악도 못 만들고
시나리오도 못 쓰고 프로그램도 못 짜니까 기획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기획자라는
이름을 팔려면 기획 프로여야 돼. 게임 아이디어 제안이나 기획서 작성은 프로그래머인 나도 할 수 있어.
실제로 현역 디렉터의 이력을 조사해 보면 전 그래피커나 전 프로그래머가 많아서 놀라울 정도지. 몇몇
대기업 게임회사의 경우 신입 기획직 채용은 아예 하지도 않아. 창조력 없는 잡용직은 필요 없으니까.
나는 이런 자세를 지지해. 그렇기에 더더욱 너는 확실한 기획력을 가진 진짜 기획자를 목표로 해줬으면
좋겠어.
一으,응. 열심히 할게.
ㅡ건투를 빈다. 미안하지만 모션 제어용 미들웨어,개발 코드「모 양」에게 사양 추가 의뢰가 왔어. 일을
정리하고 싶군. 나간다.
ㅡ미안, 조언 고마워.
ㅡ괜찮아. 유익한 시간이었어.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류노스케는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그나저나 아카사카는 정말 대단하구나…….”
일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의 사용법이나 사고 방법,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전부
차원이 다르다. 네이밍 센스는 미묘하지만…….
류노스케의 말을 바탕으로 야심작이었던 기획서를 다시 봤다. 류노스케……라고 할까,메이드 양이 설명해
준 항목에 관해서는 아예 없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생각이 얕거나 조사 부족이었다.
보면 볼수록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소라타는 잊기 전에 수정방침을 정하자는 생각에 프린트한
기획서를 빨간 펜으로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분해서 잠도 잘 수 없다.
유일한 위안은 류노스케가 게임 아이디어 자체는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흥미진진. 칭찬인 것 같다.
칭찬이든 아니든 아이디어는 소라타도 자신 있다. 스스로 믿는수밖에 없다.
한 차례 수정 방향성을 정하고,오늘은 이만 자자 싶어서 침대에 누웠다. 누구 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지,
고양이는 한 마리도 없었다.
오늘 스터디는 어떡할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바로 수마가 덮쳐와 의식은 꿈나라로 향했다.

얼마나 잤을까.
방에 들어오는 발소리가 소라타의 의식을 반쯤 꿈나라에서 현실로 끌고 왔다. 고양이 때문에 문은 열어둔
상태였다.
히카리인가,노조미,아니면 코다마일까. 아무래도 소리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고양이라도 별 상관은 없다. 스터디 시간이 되어 나나미가 깨우러 온 것이라면,일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미라면 그냥 밖에서 이름을 부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하자, 발소리가 침대로 올라왔다. 이 더위에도 고양이들은 다가오려는 것이다.
소라타는 고양이를 밀어낼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털의 감촉으로 어떤 고양이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에 닿는 느낌은 상상했던 감촉과는 완전 딴판이 었다.
고양이보다 부드럽고 크기가 제법 컸다. 슬쩍 밀어낸 것 만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만져져야
할 털의 감촉은 전혀 없었고,피부 감촉은 매끈매끈했다. 고양이 몸이 라기보다 천으로 만든 옷의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긴 소라타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마시로의 잠든 얼굴이 있었다.
뻗은 손은 마시로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다. 새우가 펄쩍 뛰어오르듯,소라타는 몸 전체를 써서 뒤로
물러났다.
자기도 모르게 땐 손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말았다. 전에 진이 말한 것처럼 가느다란 선으로는 상상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한 존재감이 있었다.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아버린 듯한 죄책감과 긴장감에 소라타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같이 자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소라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이,시이나.”
“……왜?”
반쯤 든 눈으로 마시로가 소라타를 쳐다봤다.
“왜는 무슨,너 여기서 뭐 해!”
“자.”
“네 방에서 자.”
“……아침에 나나미가 와.”
“그렇다고 내 방에 오면 어떡해!”
나나미의 방침에 따라 방학 중에도 마시로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야 했다. 오늘은 느긋하게 자고
싶어서 도망쳐 온 것이리라.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이렇게나 당당하게 침대로 파고들면 남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서 소라타로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콘티 짜느라…….”
다시 마시로가 눈을 감아 버렸다.
“자면내가 죽어!”
“……소라타.”
“왜,왜 불러.”
“둘이 있을 때는 마시로.”
“아,알아…….”
“그래……. 그럼 됐고.”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잠들려고 했다.
“으악~,잠깐,자지 마! 에~,아~,맞다! 다음에는 연재를 노린다고 했지? 그럼 본격적으로 만화가
느낌이 나겠네.”
“난 될 거야…….”
발언은 당찼지만,마시로는 당장에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피곤해 보여서 재워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그걸 허락하면 뒷일이 무섭다. 나나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가 없다.
“콘티는 잘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안돼……?”
“응.”
밤새도록 책상에 앉아 콘티 작업을 하는 마시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콘티가 잘 나올 때는 좋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때는 무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매일 지쳐 잠들 때까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하겠다고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게 마시로의 스타일이다.
“소라타,부탁이 있어.”
“응? 뭔데?”
올려다보는 마시로의 눈에 약간의 불안함이 스쳤다.
“잡지 나오면 같이 서점에 가고 싶어.”
“시이나……가 아니라 마시로의 데뷔작이 실린 거? 언제 나오는데?”
“12 일.”
“그래. 알았어.”
“당번 아닌데 괜찮아?”
“약속할게.”
쑥스러워진 소라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시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아무 말 없이 소라타는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자.”
“소라타.”
“왜?”
“……얘기해서 다행이다.”
손가락을 품과 동시에 마시로는 잠들었다. 그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나참,무슨의미야.”
소라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잠깐 동안 마시로의 자는 모습을 독점했다.
마시로 당번에서 벗어난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지만 눈앞에서 자는 마시로의 모습이 그리웠던 것이다.
잠시 동안 더 보고 싶었지만,유유자적하고 있을 순 없다. 시계는 이미 일곱 시를 지나 있었다. 슬슬
나나미가 마시로를 깨울 시간이다. 방에 없는 것을 알면 제일 먼저 여기로 올 것이다.
기다릴 생각으로 소라타는 방에서 나왔다.
현관 옆에 있는 계단에서 위층을 살폈다. 나나미가 내려 오기는커녕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라타는 경계하면서 주방을 쳐다보았다.
먼저 온 손님은 원탁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서 확인해보자 놀랍게도 나나미였다. 어제 나갈 때와 똑같은 복장. 분명히 아카데미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갔을 텐데. 그러고 보니 몇 시에 돌아왔는지 소라타는 모르고 있었다.
팔 밑에는 종이 다발. 대사 같은 것이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고, 군데군데 빨간 펜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무슨 대본인 모양이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대로 있다가는 감기 걸릴 것이다. 소라타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 홑이불을 들고 나와
주방에서 자는 나나미의 어깨에 걸쳐주려 했다.
그 순간, 나나미가 눈을 번쩍 떴다.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이불을 덮어주려던 자세의 소라타와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몇 센티만 나아가면 키스도 할 수 있을 거리다.
나나미는 두세 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소라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졸음 가득한 눈에 천천히 의식의
빛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나나미의 눈동자가 겁에 질렸다.
“카,칸다…….”
사투리 억양이었다.
“아냐,아오야마,이건!”
“내 몸이 목적이가!”
나나미가 있는 힘껏 콧잔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 충격으로 소라타는 몸을 일으켰고,비틀거리면서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참기 어려운 코의 독특한 통증.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그 이상으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려서 바닥에 빨간 비를 내렸다. 코를 잡은 손은 이미 새빨겠다.
그 사이에 나나미는 주방 구석으로 도망쳐 육식동물을 보고 겁먹은 토끼처럼 웅크렸다.
“니,니를 믿은 내가 바보였제.”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아오야마 씨.”
눈물과 코피로 비참해진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쌔, 쌤한테 다 이를끼다! 콩밥이나 양끗 무 봐라!”
“진정해! 상황을 좀 보라고!”
“상황 파악 진즉에 했다! 남의 방에 기들어온 주제에 짐 먼 소리……가아니라,어라?”
무언가를 알아챈 나나미가 천천히 일어났다.
“내 방이 아니네…….”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는 주방. 어깨에 걸쳐져 있는 홑이불. 그리고 소라타.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를 돌이 켜보듯 나나미가 천장을 쳐다봤다.
“생각났냐? 이해됐냐고?”
“혹시…….”
“그래,그 혹시다.”
“잠에서 덜 깬 얼굴,봤어?”
“할 말이 그거냐!”
나나미가 황급히 얼굴을 가리고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마 세면장으로 갔으리라. 복도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소라타는 한숨을 쉬면서 코에 휴지를 말아 넣었다. 아직도 바닥으로 피가 흘렀다. 쌍코피인 모양이다. 16
년 인생에 처음 하는 경험이다.
코피 처리가 끝나자 세수를 하고 앞머리를 정리한 후 옷 매무시를 가다듬은 나나미가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 하다는 자각은 있는지 양쪽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은 소라타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려 숨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가 떨렸다.
“미안.”
“아니,괜찮긴 한데. 그렇게 벽을 보고 말하면.”
“보면 웃기니까.”
“이게다 누구 때문인데!”
“미안하다니까.”
“됐어. 그보다 으음……그래.”
괜찮으냐고 물어보려던 소라타는 말을 삼켰다. 그걸 나나미에게 말하면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전에 치히로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 말을 제외하자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결과,테이블 위에서 화제를 찾았다.
“아아,이거? 21 일에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가 있거든. 그 때 공연할 것.”
“애니메이션?”
“아니,그냥 일반적인 것……. 연극이야.”
“흐음.”
“셰익스피어 정도는 알지?”
로미오와 줄리엣밖에 모르지만,소라타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 같은 것도 하는구나.”
“같은 것이라고 할까,기본적으로 연극 공부를 하고 있어.”
“뭐? 더빙을 하는게 아니라?”
“마이크 앞에서의 연기 연습은 전에 특별 강의로 한 번 정도 했나? 우리 아카데미는 연기 기초를
중시한다고 할까, 배우를 키운다는 방침이거든. 노래나 춤 레슨도 있어.”
“헤에~, 아카데미란 게 그런 거구나.”
“물론 실전을 중시하는 곳도 있겠지만.”
“그래서,연습 좀 했어?”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 받은 거야. 한 번 읽어보고 대사를 외워야겠다 생각 했는데.”
“도중에 잠들었다?”
“그랬나 봐.”
반성하고 있는 듯 나나미가 몸을 웅크렸다.
“그 발표회는 중요한 거야?”
“글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사무소에 소속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오디션은 2 월에
있고,보여주는 사람도 다르지만……. 그래도 매니저 같은 사람도 보러 오니까 아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말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진 소라타는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 팩을 꺼내보니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앗,어제 카미이구사 선배가부탁했는데……. 미안.”
냉장고에 붙은 당번표. 확실히 이번 주 장보기 담당은 나나미 였다.
“됐어. 나중에 나가는 김에 사올게. 넌 방에 가서 더 자.”
오늘도 아카데미에 갔다가 그 후에는 아르바이트도 가야 할 것이다. 체납되어 있는 일반 기숙사비를 내기
위해,나나미는 여름방학이 된 후로 아이스크림 가게 외에도 패밀리 레스토랑과 도넛 가게까지 동시에
뛰고 있다.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시간표다.
“아냐,괜찮아. 당번은 나니까. 얼른 갔다 올게.”
나나미는 식비가 들어 있는 사쿠라장 공동 지갑을 찬장에서 꺼내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며 나갔다.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어진 소라타는 나나미가 옆을 지나갈 때 팔을 잡아 세웠다.
“뭐 다른 것도 살 것 있어?”
“아오야마 넌 진짜 좀 자. 장은 내가 나중에 봐올게.”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했다.
“바로 돌이올 거야. 편의점은 길 나가면 금방이지?”
“남의 호의를 순순하게 받아들여. 왜 이런 걸로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러자 나나미가 소라타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소리야? 이건 일방적인 강요잖아.”
정면에서 나나미가 신경질을 냈다. 차갑기 짝이 없는 눈에서는 거리낌 없는 적의가 느껴졌다. 주변
공기도 순식간에 긴장감 넘치게 변했다.
냉랭함을 뿌리는 나나미와는 달리 소라타의 감정은 순식간에 가열되어 눈앞에서 새빨간 것이 보일 정도로
끓어올랐다.
“무슨 말이 그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압력에도 나나미는 굴하지 않고,차가운 위압감을 계속 뿌렸다.
1 밀리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난 괜찮아. 네 도움을 받을 이유는 없어. 전부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신경 꺼.”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자고 있던 애가 할 소리야?”
“덕분에 잘 잤으니까.”
폭언이 오가고 있다는 건 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해 버렸더니 자기를 지키기 위해 언어로
상대를 계속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달래는 기술도,받아주는 기술도 몰랐다.
“아~,그러셔? 그럼 마음대로 해!”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다. 말을 하자마자 후회하면서도 한 번 끓어오른 짜증의 온도는
간단하게 식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나나미는 몸을 홱 돌려 주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타이밍 나쁘게 돌아오던 진과 부딪쳤다.
“아오야마의 마음은 기쁘지만,루미 누나 집에서 3 차전까지 하고 왔더니 오늘은 더 이상 못 하겠어.
다음에 해줄래?”
들이받듯이 나나미가 진에게서 떨어졌다.
“미타카 선배는 정말 당당하게 통금이랑 외박허가를 무시하네요! 제대로 지키세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못 자는 체질이라. 아오야마가 같이 자주면 매일
돌아오겠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나미가 진을 꿰뚫었다. 그리고 실례 한다고 무뚝뚝하게 말한 후 현관으로 나가버렸다.

“이거 참,혼났네. 무서워라.”


소라타를 보고 진이 너스레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말려들게 해서.”
“그 정도는 괜찮아. 정면으로 상대랑 부딪치는 네 그런 점, 나는 흉내도 못 내고,싫어하진 않거든.”
“……다 봤어요?!”
입꼬리를 올리고 진이 일부러 웃어 보였다.
“나는 못하겠는데~. 고집부리는 상대에게「왜 이런 걸로 고집을 부리는 거야.」같은 소리는.”
그 점은 소라타도 반성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럼 뭐라고 말했어야 할까. 장보기 당번을
바꿔주는 것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진이나 미사키는 임기응변으로
해왔다. 그게 나나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지만 화해는 꼭 해.”
이런 말을 들어도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사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틀린 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진도 방으로 돌아가고,주방에는 소라타만 홀로 남았다.


한동안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눈꺼풀을 짓누르는 수마의 존재를 떠올렸다. 철야로 기획서 작업을 한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자고 싶다. 하지만 방 침대는 마시로가 점거하고 있다.
“근데 난 어디서 자야 하는 거야?”

8 월도 둘째 주가 되자 사쿠라장 안이 전보다 조용해졌다. 그건 소라타의 기분 탓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매일이 카니발인 미사키가 신작 애니메이션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방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전에 미사키가 말했던 예정과 얼추 비슷하게 진이 각본을 완성했다. 시간은 45 분 이상.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는 제일 길다.
“아무리 미사키라도 이 길이라면 졸업까지 걸릴 거야. 이걸로 면직이네.”
각본을 완성한 직후에 진은 자조적으로 약간 마음에 걸리는 말을 했다. 하지만 소라타에게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그 날로 바로 누나가 있는 곳으로 나가 버렸다.
뒤풀이 핑계로 마음껏 즐길 생각인 것 같다.
또 하나는 나나미가 마시로 당번에 익숙해져서 비명이나 호통,절규를 지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소라타와 살짝 말다툼한 이후 나나미의 방식은 보다 철저 해졌고,조금씩이긴 하지만 마시로도 빨래와
청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혼자 하라고 시키면 대참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전했지만…….
마시로치고는 콘티 작업과 병행 하면서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나나미는 그 외의 당번에서도 일절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해내서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소라타에 대한 태도도 예전 그대로,그날의 일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매일 아침 스터디에서도 태연한 태도를 보였고,다툰 것은 화제로 올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때때로 시선이 마주쳐도,
“칸다,모르는 부분 있어?”
“아니,그런 게 아니라.”
“공부할 생각 없으면 굳이 참가 안 해도 돼. 그 문제도 틀렸고.”
“어? 진짜? 아,정말이네.”
“정신 차려.”
이런 식으로 소라타를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나나미의 철저한 태도는 선전포고일 뿐이라는 것을 소라타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나나미를 상대로 소라타 진영에서 응전할 수단은 없었기 때문에,본의
아니게 나나미의 생각대로 흐지부지한 상태로 매일을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주의 중반인 10 일이 되자,삐걱대는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소라타는 밤이 되어 돌아온 진에게
상담을 하게 되었다.
진의 방문을 노크했다.
“열렸어.”
틈새로 얼굴을 들이 밀고 확인을 했다.
“시간 괜찮아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진은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런 음울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방에 들어가자 소라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 앉으면 의자를 돌려 돌아본 진과 딱 적당한 거리가 된다.

소라타는 진이 작업하던 손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아마 미사키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각본을 손보는 중일 것 이다.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진지함이
옆얼굴에서 묻어났다. 안 그래도 어른스러운 얼굴이 훨씬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5 분 정도 지나자 진은 천장을 향해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끝나자 소라타 쪽을 돌아보고 안경을 벗은 후 눈을 꼭 감았다.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웬일이야? 전성기가 오지 않아 고민스럽냐?”
“아니에요.”
“그거 도시 전설이야.”#6

#6 전성기~도시 전설 이성에게 인기 폭발인 시기가 평생 세 번은 온다는 도시 전설.

“그러니까 아니……,네?! 진짜요?!……믿었는데…….”


“네 경우 알아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시선으로 추가 설명을 요구했지만,진은 안경만 다시 썼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아오야마 때문에요.”
“고백 받았냐?”
“아니요! 절 놀리면 재미있습니까?”
“응.”
진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어떻게 이 사람은 때때로 이렇게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을수 있는지 신기했다.
“넌 아오야마가 걱정돼?”
“뭐…… 걱정이라고 할까. 짜증 난다고 할까……. 저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정확한 말을 찾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이대로는 좋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마시로는 어떻게 생각해?”
“왜 갑자기 시이나가 튀어나오는데요?”
“나는 왜 그런 질문이 되돌아오는지를 모르겠다만.”
난해한 질문에 소라타는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오야마를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떻게냐고 물어도 참 그렇지만……. 요령이 좋은 덕에 대부분의 일을 평균 이상으로 해낸다고 해서 모든
것을 혼자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쿠라장에서 같이 사니까 서로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랄까요.”
신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소라타는 어떻게든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내 인상과는 많이 다르네.”
“인상이라면,아오야마요? 어떻게 다르죠?”
“됐어,방금 그 말은 잊어버려. 모처럼 아오야마의 생각대로 되고 있으니까,너는 그냥 아오야마한테 속아
줘.”
이런 말을 들어도 역시 마음에 걸린다.
“그보다 너,또 정의의 편이 되려고 하진 않는 거지?”
“…안 해요. 이번엔 달라요.”
“그럼 다행이고. 착실하게 자기 갈 길을 가.”
“그건 하고 있어요. 선배도 언제 한 번 기획서 봐주세요.”
기획서 수정을 막 끝내고 상담하러 온 것이었다. 이제 화면 이미지 그림만 있으면 완성이다. 이건
마시로가 아니라 게임에 정통한 미사키에게 부탁하려고 생각 중이지만,그 당사자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하고 있어서 상담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기획서라. 기대하고 있을게.”
이때 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많은 애인 중 누군가일 것 이다. 하지만 진은 벨 소리가 멈출 때까지 받지
않았다.
“안 받아도 돼요?”
“네 이야기 아직 안끝났잖아.”
“……그 말,좀 멋있네요.”
“반하지 마라.”
이 말만 안 했으면 진짜 멋있었을 것이다.
“말해봐야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만 아오야마의 경우,목표를 찾아서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고 혼자서
오사카에서 올라왔잖아. 집에서 나온 후로 쭉 혼자였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스스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럼 내버려두라는 소리에요?”
“난 그렇게 할 거야. 네가 어떻게 할 지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생각하는 건 좋은 일이지,후배님.”
자리에서 일어난 진이 소라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거, 하지 마세요.”
진의 손을 뿌리치고 소라타도 일어났다. 그러자 바닥에 쌓아두었던 책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아,죄송합니다.”
황급히 정리하려고 뻗은 손이 입시 문제집을 잡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건 한순간뿐. 이건 수험생이 보는 책. 그게 진의 방에 있다는 데 대한 위화감이
위장 부근에 묵직하게 쌓여갔다.
잘 보니 다른 것들도 있었다. 참고서. 예상문제집. 오사카에 있는 예술대학의 기출 문제집까지
발견되었다.
그러자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진로지도 담당인 타카츠 선생님과 진이 교무실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건 마시로의 추가시험에 따라갔던 날이었다. 단편적인 정보를 모아가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없기를 바랐다.
그렇게 바라면서 고개를 든 소라타의 의혹의 시선을 진은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받아들였다. 그게 또
부정하고 싶은 미래로의 눈금을 한 단계 전진시켰다.
“선배,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손에 든 입시 문제집을 진에게 들이밀었다.
“그렇게 수선 피울 일은 아니잖아.”
“수선 피울 일이에요! 그러니까…… 대학은?”
“스이메이는 안 가.”
결정적인 사실이 충격이 되어 정수리를 내리쳤다.
“에스컬레이터를 차버리려고요?”
“이미 찼어.”
“네?!”
“아니,처음부터 원서도 안 냈어.”
“……무슨,소리에요?”
진은 문예학부. 미사키는 영상학부에 간다고 생각했다. 아니,미사키에게 그렇게 들은 것뿐이지,잘
생각해보면 진은 아무 말도 안 했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를 졸 업해도 두 사람은 스이메이에
남을 거라고 소라타가 멋대로 생각한 것뿐이다.
“난 오사카의 예술대학에 갈 거야. 그뿐이야.”
“잠깐만요! 미사키 선배는 어떡하고요!”
“미사키가 무슨 상관이야?”
“보나 마나 그 이유로 스이메이에는 안 가겠다는 거잖아요?”
“……그렇다 해도 네가 난리 칠 일은 아니야.”
한 톤 낮아진 목소리에서는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미사키한테는 말하지 마. 말할 때는 내가 할 거니까.”
“……왜.”
“네가 그런 피곤한 표정을 하니까.”
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이 진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소라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의 결의가 얼마나 굳은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포기한 시점에서 이미 물러날 곳은 없는 것이다. 스이메이에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저는 앞으로 어떤 얼굴로 미사키 선배와 놀고 이야기해야 하죠……?”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돼.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해. 간단하지?”
“불가능해요!”
“불가능해도 해.”
쌀쌀맞기 짝이 없는 진의 태도를 견디다 못한 소라타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질타하면서
방에서 뛰쳐 나왔다.
복도 벽을 두 번 때렸다.
그런 짓을 해봐야 떠오르는 건 천진난만한 미사키의 얼굴 뿐이다.
소라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연 소라타는 움직 일 수 없게 되었다.


하필이면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책상을 보고 수수께끼의 노래를 읊조리면서 무척 긴 연필을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대하면 된다. 평소에 그랬듯이. 하지만 평소에 어떤
식으로 대했더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미사키가 빙글 돌아앉았다.
“후배님! 이런 느낌 어때?”
미사키가 보여준 것은 A4 용지. 소라타가 보여준 기획서 프린트다. 작화 이미지의 그림을 부탁하려고
생각한 부분을 비워두었는데,그 부분에 미사키가 연필로 러프를 넣은 것이다. 레이아웃도 제대로 잡아서,
소라타가 상상했던 게임 화면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우와,멋지다.”
솔직하게 감탄했다.
“근데 어떻게?”
아직 아무 상담도 안 했는데.
“후배님의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삐비빗 하고 왔거든.”
“그럴 리가.”
“응. 난 3D 를 셀처럼 움직여보고 싶다는 생각에 방금 전 까지 방에서 프레임 줄이는 걸 실험해 봤어.
이게 완전 잘 돼서 3D 특유의 미끈한 느낌이 없어지고 빠릿하게 움직이는게 아니겠습니까! 하는 김에 HD
출력 렌더링을 해봤더니 깜짝 놀랐지 뭐야.”
“아,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시작된 건지.
“SD 보다 몇 배나 시간이 걸렸다니까! 렌더링 중에는 시간이 남아돌거든. 류노스케한테 렌더링 서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미사키의 말을 반도 이해 못 했지만 소라타는 그냥 묻지 말자고 생각했다. 되물어봐야 이야기가 복잡해질
뿐이다. 대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아카사카는 별명을 안 붙여요?”
“알았어. 오늘부터 아쿠타가와라고 부르자!”
“류노스케의 대표이긴 하지만 그건 하지 마요!#7
“그럼 드래곤!”#8
사람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멍청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류노스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드래곤…….
“아무튼! 렌더링 중에는 할 일이 없어서 후배님이랑 놀려고 왔지! 그랬더니 뭔가 놓여 있지 않겠습니까!
일러스트를 넣을 곳에「이건 사랑하는 미사키 선배한테 부탁하자. 부끄럽지만 이 마음을 고백해야 해!
러브! 러브!」라고 적혀 있어서 내가 그려 버렸어.”
“제가 적은 의견은「일러스트는 미사키 선배」뿐이에요! 이상하게 날조하지 마세요!”
소라타는 이 부분은 일단 지적하고 기획서를 들었다. 다시 내용을 확인한다. 좋다. 무척 좋다. 그림
덕분에 드디어 진짜 기획서다운 느낌이 들었다.

#7 아쿠타가와~대표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8 드래곤 류노스케 중 龍을 이용한 별명.

“그런 식으로 괜찮으면 나중에 데이터 만들어서 색까지 입혀서 갖다줄게.”


“부탁드릴게요.”
“근데 괜찮겠어? 내가 해도. 마시롱한테도 부탁했어? 거절 당한 거야? 불쌍한 후배님! 그럼 내가 위로해
줘야겠지만.”
“왜 시이나가 나오는 겁니까.”
“으음~,글쎄…….”
자기 발언에는 책임을 져줬으면 좋겠다.
“여자의 감?”
온몸이 옆으로 갸우뚱하는건 자신 없음을 나타내는 것일까. 영문을 모르겠다. 이럴 때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신상을 위한 길이다. 특히 상대가 미사키인 경우에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미사키로 말할 것 같으면 대화에 흥미를 잃고 침대 위에서 고양이랑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건 여전하다.
한동안 내버려 두자 미사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있잖아,후배님.”
요즘 점점 후덕해지는 하얀 고양이 히카리를 미사키가 안아 들었다. 커다란 가슴에 얼굴이 묻힌 히카리는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왜요?”
“응……. 있지.”
조금 전까지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은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이야기가 나오겠다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떻게 하면 진이 나를 봐줄까?”
괜한 소리를 했다간 동요하는게 전부 드러날 것 같다. 그래서 침묵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말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이 타이밍에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방금 전에 진에게서 스이메이를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참이다. 이건 즉, 미사키와 거리를 두겠다는 소리인데…….
“그,그…… 선배는 진 선배와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어떻게는…… 커플,이지.”
“구체적으로는?”
“쭈 하고 싶어…….”
“쥐?”
“아니,뽀뽀~.”
입을 비죽이며 미사키가 귀여운 표정으로 항의했다. 진 얘기가 되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소녀다워지는 걸까. 소라타는 그게 너무 신기했다. 평소에는 무서운 거라곤 없는 외계인이면서.
진에게 미움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자기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에 괴로워하고 있다.
“손잡고 걷고 싶어.…….”
안쓰러워서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다.
“꼭 안아줬으면 좋겠고…….”
콧속이 축축해졌다. 큰일이다. 더 이상 들으면 울 것 같다.
“하지만……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커플이 되는 거야? 나는 뭐가 모자란 걸까.
혹시 평생 이대로 지내야 하는 걸까……. 후배님,도와줘.”
침대 위에서 무릎을 감싸 안은 미사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진이 입을 막았기 때문에 외부 수험에 대한 건 말할 수 없었다. 누구 편이냐고 물으면 소라타는 단연
미사키 편이다. 진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민 하는 미사키를 내버려둘 만큼
독해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센스 있는 말은 해줄 수는 없었다.
“선배는 귀여우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미사키가 스스로 재기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고마워,후배님. 약간 기운이 나는 것 같아.”
이런 말을 듣자 반쯤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머지 반은 무력한 자신이 한심해서 울고 싶어졌다.
“기운 나게 아침까지 게임이라도 할까요?”
“오,나한테 도전하다니,후배님도 성장했군~”
전원을 켜고 컨트롤러를 잡았다.
“후배님.”
“응?”
“올 여름은 마음껏 놀자.”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야 나랑 진에게는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여름이니까.”
미사키의 시원한 한 마디가 소라타의 가슴을 푹 찔렸다.
오늘은 정말 위험하다. 눈물샘을 직격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소라타는 황급히 콧물을 들이켰다.
미사키가 재빨리 대전을 시작해도 도저히 대응할 수 없었다.
“어휴~,정말,후배님,무슨 짓이야!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생활도 앞으로 몇 개월만 지나면 변하고 만다. 내년 여름에는 미사키도 진도
이 사쿠라장에 없다. 이건 떼를 써도 싫다고 울부짖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고,두 사람이 떠난
사쿠라장을 상상하면 또 코가 찡 해졌다.
그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서,선배가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렇죠!”
“이상한 소리 안 했다 뭐!”
순진하게 웃는 미사키가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난 아직 여기 있으니까.”
“……처음 들었어요. 미사키 선배가 선배다운 말 하는 거.”
“그건 후배님의 마음이 어른이 됐다는 증거지! 드디어 나의 위대함을 알았나 보군.”
“무슨 소리야! 다음에는 안 져요.”
“그럼 진 쪽이 나나밍의 방에 침입해서 옷장속 팬티 꺼내 오기 벌칙.”
“내가 일방적으로 불리해!”
완전히 평소 분위기를 되찾은 소라타와 미사키는 알바에서 돌아온 나나미에게 고성방가 죄라며 혼날
때까지 게임을 계속하며 놀았다.
마지못해 방으로 돌아가는 미사키를 배웅하고 나나미에게 한참 잔소리를 들은 소라타는 먼저 자고 있던
고양이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침대 구석에 웅크려 누웠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남겨지자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반복재생 되었다.
나나미와 다툰 그날 아침의 일.
외부 수험을 본다고 선언한 진의 차가운 표정.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 있던 미사키.
그 진과 미사키도 내년에는 사라지고 만다. 예년의 졸업 식은 3 월 초순. 남은 7 개월. 아직 한참 남은
일이다. 하지만 그날은 하루씩 확실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까. 나나미와는 잘 지낼 수 있게 될까. 진이랑 미사키는 어떻게 될까.
마시로는 만화가로서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류노스케는 지금과 똑같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하자 어떤 질문에도 답은 보이지 않아서,시간만 헛되게 보내고 말았다.
소라타는 자는 것을 포기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을 기분도 아니라 심야의 사쿠라장 복도로 나갔다. 폭푹
찌는 더위와 고요함만이 존재한다. 낡은 판자 바닥은 휘파람새 복도 도 아니면서 뻑뻑 소리를 냈다.
주방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알아차린 소라타는 그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곳에 있던 건 치히로다. 혼자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본 소라타의 마음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풀렸다.
엽서를 보고 있던 치히로가 시선을 들었다.
“애들은 잘 시간이야.”
“어른도 잘 시간이에요.”
시계는 심야 두 시를 지났다.
“편지,에요?”
치히로는 아무 대답 없이 엽서를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돼요?”
“동창회 같은 거 가봐야 돼지고기 원재료처럼 변한 녀석들의 자랑이나 고생담만 들어줘야 하니까.”
“그냥 돼지라고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건가요?”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알 거다.”
십수 년 후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전에 언젠가 어른이
되긴 하는 걸까. 그런 의문조차 들었다.
“게다가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도 있고.”
치히로가 맥주를 털어 넣었다.
“옛날 애인이요?”
농담이었는데 순간 치히로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하지만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맥주를 죄다 털어
마셨다.
“근데 넌 무슨용건이야? 위로라도 바라는 거니?”
“……오늘은 터치 안할래요.”
“너 선생님을 상대로 무슨 야한 상상을 한 거야.”
“왠지 선생님의 존재는 위로가 되네요. 대충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차피 네 고민거리라고 해봐야,아오야마나 미타카,카미이구사에 관한 일이겠지?”
냉장고에서 새 맥주 캔을 꺼낸 치히로의 등은 귀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하는 말은 정중앙을 직격하고
있어서 소라타는 내심 놀랐다.
“넌 정말 손해 보는 성격이야. 다른 사람의 사정에는 완전히 동조하고 질질 끌려다니고,정서불안이 되고
밤에 잠도 못자다니. 바보 아닌가 몰라.”
자리로 돌아온 치히로가 캔을 땄다. 그리고 뿜어져 나온 거품이 아깝다며 바로 입에 대고 마셨다.
“선생님,제게 뭐 원한이라도 있어요? 절 괴롭히면 즐거우세요?”
“아니~.”
그건 그것대로 억울한 대답이었다. 이유도 없이 매도당하는 건가.
“아,맞다. 이거,마시로한테 줘.”
테이블에 놓여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누가 주는 건 무엇이든 넙죽 받는 건 소라타의 나쁜 버릇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가장자리가 둘러쳐진 봉투. 항공우편이다. 영어로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다. 처음본
국제우편물이 신기해서 소라타는 자연스럽게 뒤집어 보았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아델 에인즈워스라고 읽는 걸까.
“남자 이름이네.”
저도 모르게 진지한 눈으로 치히로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소년의 질투가 훤히 보인다.”
“누,누가요?”
대체 마시로와는 무슨 관계일까. 외모는……. 나이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쓰여 있을까. 그게 신경 쓰였다.
“어머,마침 잘왔네.”
무슨 소린가 싶었더니 마시로였다. 오늘도 연재용 콘티 작성에 애쓰고 있었던 걸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책상 앞이 아니더라도 집중력이 끊어지지 않는다. 약간 긴장된 분위기인 것은,콘티 작성이 잘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시로는 소라타와 치히로를 한 번 쳐다본 후,주방 찬장을 열고 뭔가를 부스럭부스럭 꺼냈다. 컵라면을
찾자 소중한 듯 양손으로 갖고 와서 소라타 앞에 내밀었다.
“해줘.”
소라타는 불평 없이 마시로에게 컵라면을 끓여주었다. 3 분을 기다리는 동안 치히로에게 받은 편지를
내밀었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마시로는 무감동한 듯 봉투를 찢어 안에 든 편지를 꺼냈다. 나쁜 짓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소라타도 곁눈으로 봤다. 하지만 당연히 영어 편지라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무표정한 마시로에게서도 아무 정보도 캐낼 수 없었다.
다 읽을 때까지의 침묵이 답답했다. 결국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소라타가 질문했다.
“그 사람,누구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특별한 사람.”
딱 한 마디로 소라타의 심장은 벌떡벌떡 뛰었다. 그건 곧 조이는 듯한 통증으로 변화하여 소라타의 중심을
지배해갔다.
다른 고민은 갑자기 밀려온 거대한 해일에 쓸려 해저로 가라앉았다. 나나미에 대한 것이나 진,미사키,그
모든 것 들이…….
머릿속이 마시로로 가득 찼다. 농담으로 자신을 지킬 여유조차 잃은 소라타는 구원의 손길을 찾듯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특별하다면, 어떤…….”
애원하는 심정이었다.
마시로가 편지를 보던 고개를 들었다. 소라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좋아하는 사람.”
머릿속에서 바짝바짝 마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이 쩌억 갈라지는 듯한 소리. 시야는 새하얘졌고,
자기가 어딜 보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특별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소중히 간직하던 것이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간다. 그건 소라타 자신이었을지도 모르지만,지금의
소라타로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위는 묵직하게 밟혔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음의 방향감각은 사라졌고,영문을 모르는 머리로「아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냐,나는
상처받지 않았어. 아냐,난 상관없어. 아냐,난 그런건 생각 안 해. 아냐,이건 아냐…….
하지만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조금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았다. 밝아지기는커녕 막다른 구석으로 점점
몰려가기 만했다.
“소라타?”
걱정스러운 듯한 마시로의 목소리에 소라타는 정신을 차렸다.
“나 슬슬 졸려서 잘게. 잘 자.”
재빨리 이 말만을 남기고 주방에서 나왔다.
서둘러 방으로 도망쳤다. 세게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소라타는 밀려오는 허탈감에 저항도 하지 않고
바로 미끄러져 떨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힘없이 뻗은 다리를 멍하게 쳐다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 3 장

지금은 지금뿐이니까
지금인 거야

아침 해가 떴다. 일기예보는 사흘 연속 쾌청. 오늘도 지긋 지긋할 정도로 더운 하루가 되겠지. 8 월도


하순에 접어든 20 일인데,아직도 가을의 기척은 멀기만 하다.
철야를 한 소라타는 완성한 기획서를 등록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웹상의 서식에 필요 사항을 기입하고,확인 차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이제「등록」버튼을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류노스케에게 조언을 들은 후로 기획서 내용은 급속도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미사키가 만들어준 이미지 데이터와 진에게 상담해서 정리한 키워드가 인상적이라,처음에 쓴 텍스트뿐인
기획서와는 레벨이 달랐다. 제법 진짜 기획서 같은 느낌이 난다.
조금 전 류노스케에게 재차 보여줬는데 전처럼 지적을 받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다. 소라타에게는 그런 성취감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충만해 있는 동안「게임을 만들자」에 등록할 결심을 굳혔다.
등록 폼 지시대로 항목을 메우자 5 분도 되지 않아 준비는 끝났다. 이제 클릭 한 번만 하면 수속은 끝이다.

마우스를 쥔 손은 땀으로 흥건해졌고,아랫배는 은근히 불안하다. 소라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긴장감과 흥분 속에 있었다.
이렇게나 솔직하게 몸이 반응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사쿠라장에 왔을 때도 이 정도로 겁먹지는 않았다.

딱 열까지만 세고 등록하자.
심호흡을 하고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9,8……7 을 떠올린 순간 책상 위로 노조미가 뛰어 올라왔다. 그 바람에 소라타의 손가락이 버튼을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면서「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글자가 떴다.
노조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책상 위에 앉았다.
“너 이 자식…….”
하필이면 노조미. 검은 고양이다. 뭔가 불길하다…….”
하지만 말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에 소라타는 브라우저를 닫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컴퓨터를 껐다. 서류 심사
결과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다.
한동안은 아무도 없다.
소라타는 의자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했다. 일단은 완수했다.
저도 모르게 뜻을 알 수 없는 큰소리를 질렀다.
놀란 고양이가 일제히 항의의 시선으로 소라타를 쳐다봤다.
지금은 그 정도로 흥분이 가라앉진 않았다. 책상 위에 배를 깔고 누운 노조미를 소라타가 안아 올렸다.
잠들려던 노조미는 귀찮아하는 분위기였지만 소라타로서는 자기가 느 끼는 행복을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착하지,착하지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노조미는 품 안에서 요동을 치더니 도망쳐 버렸다.
분위기 못 맞추는 고양이와 기쁨을 나누는 걸 포기한 소라타는 의자를 뒤로 젖혀 천장을 쳐다보았다. 낡은
나뭇결을 쳐다보는 사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기분은 고조되었지만 동시에 힘이 빠진다고 할까,
무기력감마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원고를 완성하고 며칠 간 마시로도 멍한상태로 지냈다. 이런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준비 없이 마시로를 떠올린 탓에, 텅 비어 있던 머릿 속이 순식간에 마시로 일색으로 물들었다.
마시로 앞으로 온 편지. 특별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거의 관심 없는 마시로가 다음 날에는 답장을 쓰더니 그걸 보내고 싶다며 나나미에게
상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같이 우체국에 가는 뒷모습은 어쩐지 기뻐 보였고,그와는 반대로 소라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좀 더 자세히 듣기 전에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매일 아침 스터디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용기를
쥐어 짜내보았지만, 물었다간 최악의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주일 이상 지난 지금도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상상의 아픔을 두려워하며 마음은 겁쟁이가 된다.
그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소라타는 기획서 작업에 몰두했다. 여유가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요 며칠은 정말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획서 작성이 일단락된 지금,소라타에게는 숨을 장소가 없다.
서서히 발치에서부터 마시로에 대한 것들이 소라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불안한 요소는 있다. 바로 진의 외부 수험이다. 미사키는 어떻게 될까. 게다가 나나미와
다투었던 일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그 나나미로 말할 것 같으면 매일 아르바이트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마시로를 봐주었으며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때,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소라타.”
놀라서 중심을 잃은 소라타는 젖히고 있던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아픔을 견디면서 눈을 떴다.
아래위가 뒤집어진 마시로가서 있었다.
황급히 일어났다.
동시에 중요한 약속이 생각났다. 오늘은 8 월 20 일. 마시로의 데뷔작이 실리는 잡지 발매일. 마시로가
같이 서점에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스터디 끝났으면 서점 갈까?”
놀랍게도 마시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에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나나미가 이상해.”
“이상하다니,뭐가?”
마시로는 대답 없이 복도 끝…… 현관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있는 걸까.
소라타가 방에서 얼굴만 내밀자,현관에는 사복 차림의 나나미가 있었다.
신발장에 기대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확실히 상태가 이상하다. 언제나 빠릿빠릿한 나나미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복도로 나간 소라타는 나나미에게 달려갔다. 마시로가 그 뒤를 따라왔다.
“아오야마?”
말을 걸자 나나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이 풀린 눈에 상기된 볼. 하지만 추운 듯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너…….”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목에 감겨드는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다. 평소 같은 활기를 도통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냐.”
이마에 손을 댔다. 손바닥을 통해 나나미의 체온이 끈적하게 전해졌다.
열이 있다. 그것도 상당히 높다…….
“괜찮다니까.”
소라타를 뿌리치는 손에 힘이 없었고,조금 움직이자 나나미는 괴로운 듯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나나미의 등을 쓸어주었다.
“칸다……. 성희롱이야…….”
“지금이 그런 소리나 할 때냐.”
“이제 됐어……. 아르바이트 가야해…….스터디는,미안……. 오늘,빨리…….”
생각이 연결되지 않는다. 열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증거다.
“스터디는 됐어. 그리고 이래서는 아르바이트도 무리야. 가지 마.”
“갑자기 빠지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일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피해야!”
소라타가 엄하게 잘라 말했다.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애당초 이대로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까지 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부축해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다.
“됐으니까 오늘은 쉬어. 너,내일 중요한 날이라면서?”
내일,8 월 21 일은 아카데미 중간발표회다.
“그……렇긴 한데……”
“아무튼 오늘은 방에서 자. 내일을 위해. 가게 번호 뭐야? 내가 연락해줄게.”
“아냐……. 내가할게…….”
나나미의 숨결이 뜨겁다. 이미 눈을 뜨고 있을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나미는 현관의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번호를 하나씩 누른다.
그렇다. 나나미는 지난달부터 휴대폰이 끊어진 것이었다.
번 돈은 일반 기숙사비를 갚는 데 쓰고 있기 때문에 아직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에 나나미는 없으면
없는대로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말했다. 소라타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아오야마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네,죄송합니다,몸이 안 좋아서 열이 좀……. 네,네.
부탁합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나나미가 기침을 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을 다 써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일어날 기력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라타는 아무말도 못 하게 하고 나나미를 업었다.
목에 와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것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그 중압감에 지지 않도록 소라타는 다리에
힘을 주고 계단을 올라가 나나미를 방까지 옮겼다.
침대에 재워 놓을 때까지 나나미는 아무 저항도 없었다.
“바로 약가져올게.”
방을 나가려는 소라타의 손목을 나나미가 움켜잡았다. 닿은 부분에서 바로 땀이 배어 나왔다. 나나미의
열은 소라타의 몸에 녹아들어 동요가 되어 전신을 좀먹어 갔다.
“왜 그래? 달리 필요한 거라도 있어?”
“내일은…… 갈게…….”
헛소리처럼 나나미가 중얼거렸다.
“갈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나나미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소라타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대로 손을 놓자,나나미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괴로운 호흡이 내일은 절망적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소라타는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왕진을 부탁하기 위해 기숙사에서 뛰어나갔다.
마치다 의원은 상점가 근처에 있는 개인병원으로,몸이 아플 때면 자주 어머니 손에 끌려갔다.
10 년 전부터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선생님이 환자들을 보는데,소라타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느닷없이 뛰어가도 싫은 표정 하나 보이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게다가 오전과 오후 진찰 사이에 사쿠라장까지 와주겠다 고했다.
한 시간 후에 찾아온 할아버지 선생님은 나나미의 진찰을 마치고 방에서 기다리던 소라타를 찾아갔다.
과로로 면역력이 저하된 데다 여름 감기. 자세히 말하지 도 않았는데 나나미가 무리했다는 것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아무리 젊어서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사나흘은 얌전히 쉬어야 한다고 했다.
내일 외출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무리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할아버지 선생님은 해열제와 비타민제를 처방해주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치히로는 일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없다. 진도 외박으로 어제부터 기숙사를 비운 상태다.
점심이 지나서야 방에서 나온 미사키에게는 제일 먼저 나나미의 상태를 전했다.
저녁이 되어 진이 돌아오자,소라타는 모두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소라타,진,미사키,그리고
마시로까지 네 사람이었다.
우선 진에게 나나미의 상황을 설명했다.
“언젠가 쓰러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이런 타이밍이라니.”
알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았 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도 없고,
소라타도 대충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일이지~.”
미사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 중간 발표회가 있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었다. 요 며칠간 긴장된 분위기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2 층에 있으면
연습하는 목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내일 가겠다고 잠꼬대까지 했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소의 레슨과 도 다르다. 내일은 1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날이다. 지금까지 연습의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 나나미는 그 날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다고 보낼 수는 없잖아.”
진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나도 아까 슬~쩍 보고 왔는데,나나밍이 엄청 괴로워 해서 내일은 절대 불가능이라곤 할 수 없지만,
못 갈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래도 간다고 하면 우리가 말려야지.”
“그렇죠.”
안타까웠지만 소라타는 진에게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 늦다. 나나미를
생각하면 이번 발표회는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진이 이야기는 끝났다며 일어났다.
그 직후,계속 조용히 있던 마시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라면 갈 거야.”
소라타와 미사키의 시선은 마시로를 향했고,방을 나가려 던 진이 발을 멈췄다.
“나라면 갈 거야.”
“하지만,시이나.”
“나나미가 가고 싶어 하면 가게 해줘.”
난감해진 소라타는 진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나미를 보내줘,부탁이야.”
부탁하는 어조였지만 그 눈은 안 된다면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탁할게.”
마시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는데 어떡할 거야~,소라타?”
“그야 저도 아오야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싶죠. 하지만…….”
손목을 잡던 나나미의 뜨거운 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목소리가,그 결심이,오늘까지의
나나미의 노력이 보상받기를 바랐다.
“소라타,부탁이야. 나나미는 열심히 했어……. 매일 늦게 까지.”
“그건 알지만?????? 옆에서 말려줘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제발.”
“상식이 방해한다면,답은 이미 나온 거 아냐?”
고민하는 소라타에게 이렇게 말한 건 진이다. 그 포기했다는 표정은 하나의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문제아의 소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쿠라장이다. 마시로가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은 흔들렸다. 보낼
것인가,말릴 것인가,무엇이 나나미를 위한 일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결정하는
건 소라타가 아니라 나나미니까.
“알았다. 아오야마가 가겠다고 하면 말릴 수는 없지.”
나나미는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소라타는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그럼 결정이네! 다 같이 나나미를 도와주자?!”
응,하고 미사키가 자기의 말에 대답했다.
“소라타,고마워.”
“아냐……. 내일,내가 따라갈게요. 아오야마가 저 상태라면 위험하니까.”
“그럼 이동 수단은 내가 확보해줄게?.”
“아,그렇군요. 택시가 좋을지도. 선배의 재력으로 부탁할게요.”
“우주선을 탄 마음으로 편안~하게 와!”
미사키가 빙긋이 웃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나나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소라타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머지는 치히로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무래도 반대하겠지.”
진이 안경을 고쳐 썼다.
“상식적인 어른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아마도…….”
“뭐,그쪽은 내가 어떻게든 할게.”
“부탁할게요.”
절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라타가 치히로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 모습으로 보아 그게 자기 역할이라는 것을 진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시로가 불쑥 물었다.
“시이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일이야.”
손이 가는 문제를 늘리면 더 큰 일이다.
“나도 뭔가 하고 싶어.”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럼 마시롱은 소라타랑 같이 가.”
“잠깐, 선배!”
“이동 수단은 미사키,치히로 대책은 나. 불만 없지?”
“응!”
미사키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뭐야,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희들,이런 곳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지?”
방에 나타난 건 학교에서 돌아온 치히로였다. 예정보다 빨리 온 건,나나미가 감기로 쓰러진 걸
휴대폰으로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난 스즈네 누나가 불러서 가볼게.”
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이어서 미사키도,
“레이아웃 끝내버려야지~.”
이렇게 말하며 뛰어나갔다.
이 소란을 틈타 마시로도 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 뒷모습 을 본 치히로가 불러 세웠다.
“마시로,이거,우편함에 와 있더라.”
치히로가 내민 건 커다란 봉투. 제법 부피가 있었다. 표면에는 순정만화 잡지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견본이지?”
치히로가 재촉하자 마시로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테이프를 뜯고 안에서 잡지 한 권을 꺼냈다.
마시로는 기뻐하지도,웃지도,감동하지도 않은 채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자기 만화를 잡지 중앙에서
발견하자 표지 그림만 확인하고 바로 덮었다.
그리고 견본을 소라타에게 내밀었다.
“벌써 다 본 거야?”
“내용은 아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이렇게 좀 더 기뻐한다든가…… 그런 건 없어?”
“엄청 기뻐.”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무튼 데뷔 축하해.”
“응,고마워.”
역시 기뻐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나미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라타는 건네받은 잡지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왼쪽 구석에 조그맣게 마시로의 단편 만화가
소개되어 있었다. 제목 밑에는「시이나 마시로」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게재 페이지를 찾는 손가락이 떨렸다. 대충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지를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정말 실려 있다. 그런 당연한 생각을 했다. 한 페이지씩 읽어나갔다. 전에 보긴 했지만 잡지가 된 것과는


다른 것이랄까,왠지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화가라는 게,될 수 있구나.”
제일 먼저 소라타의 마음에 생겨난 것은 소박한 놀라움이담긴 납득이었다.
견본을 마시로에게 돌려주었다. 마시로는 그것을 품에 안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치히로는 사냥감을 찾는 뱀 같은 눈으로 소라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너희는 혹시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귀차니스트 교사는 의외로 예리했다.
“생각 안 해요. 얼른 방에서 나가서 문이나 닫아주세요. 제게도 존중받아야 할 프라이빗과 프라이버시가
있습니다!”
“그런 것 없어.”
치히로는 이런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나가주었다.
열린 문은 직접 닫았다.
안도의 한숨.
하지만 진짜 시련은 지금부터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까지 나나미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다음 날 소라타의 기도도 허탈하게 나나미의 건강은 회복 되지 않았다.


부석부석한 눈두덩으로 1 층에 내려온 나나미는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옷을 갈아입고,
아카데미에 갈 때 드는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당연히 치히로가 말렸다.
“아오야마,방으로 돌아가.”
“왜요……?”
나나미의 목은 완전히 쉬어서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어제보다도 목소리 상태는 더 나쁘다.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유를 모를 만큼 열로 판단력이 저하되어 있으니까.”
가차 없는 치히로의 정론에도 나나미는 물러서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다. 한 번이라도
고개를 숙였다간 그걸로 끝이라는 것을 몸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몸이 어떤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으면 충분히 쉬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가야만돼. 매일 연습한 성과를 보여줘야만 하니까.
“됐으니까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
“싫습니다.”
“네 뜻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치히로가 나나미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 직전에 진이 뒤에서 치히로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야,미타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소라타,뒷일을 부탁해.”
대답 대신 소라타는 가방을 들고 나나미를 현관으로 유도했다.
“달갑진 않겠지만 데려다 줄게.”
나나미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한 번 끄덕일 뿐이 었다.
“너희,어제 칸다의 방에 모인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치히로가 공중에 뜬 발을 버둥거렸다.
“자,잠깐! 미타카?! 너,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왜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거야!”
“그야물론 거기 가슴이 있으니까요.”
“우연이라는 듯이 말하지 마!”
등 뒤의 치히로의 비명을 들으면서 소라타는 나나미를 데리고 사쿠라장을 나갔다.
그러자 길에 하얀 미니밴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반짝반짝 한 새 차다.
“후배님! 타!”
운전석에는 미사키.
“어? 선배,무슨 짓이에요?!”
분명히 이동 수단은 미사키에게 맡겼다.
하지만 택시를 준비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미사키가 핸들을 잡고 있는 걸까.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나나미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마시로가 어느새 잽싸게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문을 닫자 미사키가 차를 출발시켰다. 진에게서 벗어난 치히로가 뒤에서 쫓아왔지만,순식간에 거리는
벌어졌고 모퉁이를 돌자 그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됐다.
“저기…… 선배,면허는요?”
“땄어.”
“언제요?”
“으음~,순식간에.”
“제대로 설명을 하세요!”
이 차가 안전한지 불안감이 밀려왔다. 일단 주행은 안정 적이고 규정 속도도 지키면서 달렸다.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핸들을 쥐고 있는 건 누가 뭐래도 외계인
미사키다. 아무래도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음~,그러니까~,아,그때다. 후배님이 마시롱이랑 냉전 상태라 왠지 차인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슬픈 6 월.”
슬픈 6 월 같은 이상한 타이틀을 붙인 건 유감이었지만, 확실히 그 때는 여유라곤 없어서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못 했다.
미사키가 운전면허를 따러 다닌 것을 몰랐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럼…… 이 차는? 렌터카?”
“샀어.”
“얼마요?”
“현금으로 두둥하고 일시불로 3 백만 정도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런 수속은 전부 진한테 맡겼거든.”
“그렇군요. 그냥 됐습니다.”
일본 법률에 따르면 18 세가 되면 보통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미사키는 틀림없이 6 월에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 했다.
나나미는 몸이 힘든지,계속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체력 낭비를 막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몸이 좋아지도록 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라타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나나미를 방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차는 국도로 나가 더욱 부드럽게 나아갔다.
한 시간 정도 달린 차는 도내의 빌딩 숲에서 길을 잃었고, 미사키가 급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길 잃었어?”
“아니야아~. 이 근처란 말이야?!”
그 증거로 내비게이션이「목적지 근처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아오야마,도착한 것 같아.”
나나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 정도 잠을 잤는지,잠이 덜 깬 멍한 얼굴이다. 그래도 눈 안쪽에는 의지가 빛나고 있다. 자기가 할
일에 집중하고 있는 눈이다. 의지는 살아 있다.
“여기면 돼?”
“……응. 이제 혼자서도 괜찮아.”
문을 열고 나나미가 차에서 내렸다. 걸음걸이가 흔들거렸다. 암만 봐도 괜찮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도와줄 수 없다. 중간발표회에 임하는 건 나나미지 소라타가 아니다.
그래서 차 안에서 배웅했다.
잘하고 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가능하 다면 너무 분발하지 말았으면 했다. 얼른 몸을
생각해서 침대에 누워 쉬길 바랐다.
나나미는 보도를 10 미터 정도 가더니 어느 5 층 빌딩으로 들어갔다.
“레슨 스튜디오가 이런 곳에 있었구나아~.”
빌딩이 늘어서 있는 아주 흔한 풍경. 바로 근처에는 편의 점도 있었고,그 위에는 일반 주택 같았다.
“차,반대편 주차장에 넣어놓을게.”
미사키가 방향지시등을 넣고 다시 차를 몰았다.
익숙한 솜씨로 시간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달리지 않는 차 안은 한층 고요했다.
“얼마나 걸려?”
이렇게 말한 건 조수석에 앉아 있는 마시로다. 차에 탄후 로 처음 하는 말이다.
“보통 레슨은 세 시간 정도라고 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더 일찍 마칠지,더 오래 걸릴지…… 모르겠어.”
“그래.”
이렇게 차 안에서 세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들다. 침묵은 답답하다. 그렇다고 괜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울
상황도 아 니다.
“시이나,서점 갈래?”
“아니.”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거 구경하고 싶진 않아?”
“괜찮아.”
“……괜찮다니 뭐가?”
“앞으로 발매일은 몇 번이나 올 테니까.”
분명히 마시로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연재를 성취 하면 매월 발매일은 돌아온다. 그런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시로다.
실패했을 때를 위한 방어선은 치지 않는다. 늘 유언실행.
마시로가 정말 대단한 것은 이런 점이다.
“그렇구나.”
“그래.”
하지만 오늘 마시로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의 결정체 같은 존재인데,조수석에서
움츠리고 있다.
“있지,소라타.”
“왜?”
“나 때문이지?”
“응?”
“나나미,지친 걸까.”
“아냐.”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소라타는 단언했다.
익숙지 않은 사쿠라장에 와서 마시로 당번을 하며 아르바이트와 아카데미에 묻혀 사는 나날을 선택한건
나나미다. 분명히 나나미는 마시로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고,여러 상황이 겹쳐서 재수 없게 이
타이밍에 몸살이 난 것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사과해야 해.”
“하지만. 보나마나 화낼 거야.”
마시로의 죄책감이 진짜라 해도,그걸 나나미는 자신에 대한 동정심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오해로 누군가가 상처 입는 건 보고 싶지도 않고,허무할 뿐이다.
이걸 끝으로 모두들 입을 다물게 되었다.
차 안에서 두 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으니,아카데미 빌딩 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서른 명 정도
될까. 마지막으로 나나미가 나왔다.
눈치챈 소라타는 바로 차에서 내려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 바로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나나미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일방적으로 동년배 여자아이에게 무슨 말인가를 듣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혼나고 있다는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나나미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본 소라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말았다.
“아오야마,그만 가자.”
나나미와 이야기하고 있던 소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소라 타를 쳐다봤다. 나나미의 표정도 더욱 흐려졌다.
“뭐예요? 나나미 남자친구?”
특징적인 달콤한 목소리. 긴 속눈썹. 인형처럼 조막만 한 얼굴.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신비롭고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소라타한테 내보이는 감정은 창처럼 뾰족해서 귀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오야마를 데리러 오긴 했지만 남자친구는 아닌데요.”
“팔자 좋네.”
나나미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안하지만 할 말이 있으면 다음에 해주지 않을래요? 아오야마는 오늘 몸이 많이 안 좋으니까.”
“그건 알지만 다음이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미안……. 정말,미안해,모모코…….”
“뭐야,잘못한 건 나나미인데 왜……. 됐어!”
두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모모코라 불린 아이는 뛰어가 버렸다.
“칸다도 미안…….”
“됐으니까가자.”
나나미를 부축해서 차로 돌아왔다.
뒷좌석에 나나미를 앉히고 소라타도 올라탔다.
“그럼 돌아가자~!”
미사키가 쾌활하게 행동했지만 달리는 차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시트에 몸을 깊게 묻은 나나미의 상태는 명백하게 악화되 어 있었다. 해열제 효과가 떨어져서 열이 오르는
건지도 모른다.
긴장의 실이 끊어져,나나미가 컨디션 나쁜 것을 숨기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친 호흡이 귓가에서 술렁거렸다. 때때로 기침을 하며 몸을 숙였다.
열로 힘든 몸. 목은 아프다. 코는 막혀서 괴롭다. 하지만 나나미의 표정을 어둡게 하는 것이 그런 증상의
악화 때문 이 아니라는 건 소라타도 알고 있다. 중간발표회가 원치 않는 결과로 끝난 것이다…….
해줄말이 없었다.
미사키는 운전에 집중했고,마시로는 앞만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라타는 얼른 사쿠라장에 도착하기를
바라면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긴 침묵을 깬 건 나나미였다.
쭉 뻗은 국도를 가는 도중에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의 사투리로 말했다.
“……미안.”
“사쿠라장에 도착할 때까지 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무슨 생각을 한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내 땜시 고생만 시키서…… 미안.”
그래도 나나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표준어를 잊어버리고 갈라진 목소리를 낼 때마다,왠지 가슴이
아파져 왔다. 평소 같으면 훨씬 맑고 중심이 있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할 것이다. 그런 중요한 부분이
전부 떨어져 나간 지금의 나나미는 자신감도 잃고 다른 사람처럼 약해 보였다.
“됐어,지금은 됐어.”
“되긴 머가 됐다카노……. 내 땜에 다들 고생만 하고…….”
“됐다니까.”
“칸다 니도 글캤잖아……. 무리라고,무모하다고……고집부리지 말라고…….”
감정에 복받친 나나미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소라타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내 혼자 머 잘났다고 다 끌어안고…… 다 망치삤다. 고생해서 데꼬 나와줬는데……. 내는 암 것도
못했다…….”
“아오야마…….”
“몸은 못 움직이제,목소리는 안 나오제……. 선생님한테는 컨디션 관리 하나 못하냐고 혼나고…… 변명할
말도 엄꼬…… 아카데미 애들한테도,모모코한테도 피해만주고…… 내,진짜등신 같다, 문디…….”
후회가 나나미를 짓눌렸다. 실력을 전부 선보이지 못한 아쉬움. 평소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났다는 허무함.
오늘이라는 날은 오늘밖에 없는데,그게 끝나버렸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들 전부를 모아도 맞설
수 없을 정도로 거대 화해버린 한심함이 나나미를 짓눌러 버리려 했다.
“오늘을 위해 준비했는데……. 그걸 말짱 황으로 만들아 삐고,이런 기 먼 소용이고……. 이러려고 그리
열심히 한 게 아닌데……. 그런 게 아인데,진짜…… 좀 더,제대로 할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 진짜,바보 같다……. 머 이런 등신이 다 있노…….”
오로지 자책밖에 할 수 없는 나나미를 보는 건 괴로웠다. 옆에서 듣고는 있었지만,말이,감정이,몸에
생채기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나나미는 스스로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이다. 달리 용서받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런 건 너무 슬프다. 의미가 없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아오야마. 내 말은 무시해도.”
“머가 개안타는 건데! 하지 마라…그런 말 하지 마라. 차라리 바보 아이냐고 비웃어라……. 안 그러면 내
…… 비참해서 죽고 싶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생각하지도 말고. 네가 바보면 세상에 바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냐.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지!”
“……칸다.”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고,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한 나나미의 모습을 안다.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선생님들에게 신뢰 받고 있고 생활비와 아카데미 수업료를 아르바이트로 충당 하고……. 이 정도로
자립해서 생활하는 동급생을 소라타는 본 적이 없다. 똑부러지는 모범생. 그게 바로 아오야마 나나미다.
하지만 소라타는 그건 착각인지도 모른다고 이제야 생각 했다.
나나미는 뭐든 요령 있게 해내니까 대부분의 것들은 평균 이상으로 해내고 만다. 그게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다. 그래도 제대로 해내는 것은 그렇게 하고자 늘 마음을 다잡고 계속 노력해온 결과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대충대충 하지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것은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듣지 않도록,나나미는 강한 자신을
연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전에 진이 말했다. 나나미에 대한 인상이 소라타와는 다르다고. 그건 분명히 이런 점을 뜻 하는
것이었으리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사카에서 상경한 나나미는 오늘까지 약 1 년 반 동안,언제나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오직 홀로 허세를 부리며 그것을 철저하게 감추면서……. 무리를 무리라고 인정해버리는 순간,
더 이상 노력할 수 없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약한 모습을 허용하면,몇 번이나
약해지고 말 것 같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기를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못난이가 눈을 뜨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런 무모함이 언제까지고 계속될리 없었고,그렇게 오늘 변명이 통하지 않는 형태로 나나미는
패배하고 말았다.
“아오야마는 노력했어. 그건 우리가 제일 잘 알아.”
“와…… 와 그런 소릴 하노. 그리 말하면 내는…… 더 이상……. 그런 말…… 계속…… 듣고 싶었는데…
….”
나나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아직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나나미의 목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오열하면서도,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나미는 눈가를 훔쳤고 코를 훌쩍 거렸다.
엉망진창이 된 우는 얼굴을 보지 않도록 소라타는 쭉 앞 만 쳐다봤다. 차가 달린다. 미사키도 마시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는 나나미가 소라타의 손등에 뜨거운 손을 겹쳐 놓았다. 놀란 건 한순간뿐이었다. 어떡해야
좋을지는 신기하게도 몸이 알고 있었다. 소라타는 손을 뒤집어 나나미의 손을 감싸듯이 꽉 잡았다.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 주는 마음으로. 넌 열심히 했다는 말을 대신해서…….
어린아이 처럼 끅끅거리며 나나미가 조심스럽게 소라타의 손을 잡았다. 반대편 손으로는 계속 눈물을
닦으면서…….
그리고 사쿠라장에 돌아올 때까지 나나미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그치려 하는 걸,소라타는 그저 귀로만
듣고 있었다.

3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가 사쿠라장에 도착했을 때,나나미는 소라타의 어깨에 몸을 맡기고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도록 안아서 기숙사로 데려가 2 층 방에 뉘 었다.
옷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던 치히로에게 싹싹 빌어 갈아입혔다.
그 후 소라타,진,미사키,마시로 네 사람은 주방에서 두 시간 정도 치히로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설교라고 해봐야 거의 푸념 같은 것으로,사쿠라장의 담당교사가 얼마나 귀찮은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내용이었다. 중간부터는 요즘에 미팅 건수가 줄었다,동급생들이 차례로 결혼한다 등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버럭 하고 싶어지는 내용으로 바뀌었지만,일단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사쿠라장에 남아 있던 진이 혼자 소라타 일행의 몫까지 설교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무 연관도 없는 이야기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치히로에게 해방되자마자 바로 회사 원인 루미 누나가 기다리는 맨션으로 나가버렸다.
나나미는 밤이 되어도 눈을 뜨지 못했고,한 시간 간격으로 소라타가 방을 찾아가도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마시로는 그 옆에 앉아 뭐라고 말해도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마시로 나름대로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시이나,그만쉬어. 열두 시도 넘었어.”
“괜찮아. 여기 있을게.”
“그러다 네가 아프면 아오야마가 책임감을 느끼잖아.”
“난 괜찮아.”
“……알았어. 그럼 아오야마를 부탁할게. 일어나면 가르쳐줘.”

다음 날 아침,소라타는 히카리의 엉덩이 체온을 얼굴로 느끼며 깨어났다.


“최악의 아침이군.”
몸을 일으키자마자 방을 나가 세면장으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밥 달라고 요구하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주방으로 갔다.
안쪽 부엌에는 진이 서서 가스에 올려놓은 1 인용의 질그릇 냄비를 보고 있었다. 옷은 어제 입고 있던 것
그대로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들어온 모양이다.
소라타의 기척을 느낀 진이 가볍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소라타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는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그거 뭐예요?”
진이 냄비 뚜껑을 들었다.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더니 먹음직스러운 가다랑어 국물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내용물은 심플한 죽이 었다.
“뭐든 먹여야하지 않겠어?”
이렇게 말하며 진이 2 층으로 눈을 돌리더니 가스 불을 껐다. 나무 쟁반에 냄비와 숟가락,그리고 매실
장아찌를 담은 종지를 올리더니 소라타에게 내밀었다.
“먹여주고 와. 난 잘 거니까.”
진은 하품하면서 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잡을 틈도 없었다.
달리 부탁할 상대도 없다. 안타깝게도 주방에는 소라타와 고양이들뿐이다.
쟁반을 들고 소라타는 신중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나미의 방 앞에 오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마시로가 닫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그 틈새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라지로……내 인자 우짜노.”
나나미의 목소리다.
누구랑 이야기하는 걸까. 나나미는 휴대폰이 끊겼다. 그렇다면 전화일 가능성은 없다. 토라지로가 대체
누구야?
“「내가 알끼 머꼬. 니가 뿌린 씨 정도는 니 손으로 처리해라.」”
상대방도 칸사이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목소리도 나나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아이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감기 때문에 코맹맹이
소리가 된 탓에 햇갈릴 수가 없었다.
“글케도 어제 일은 역시 쪽팔린달까…….”
“「문디 자슥. 기숙사비 밀린 게 백만 배 더 쪽팔린다. 인자 와서 먼 소리 하고 앉았노.」”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궁금해진 소라타는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칸다한테 펑펑 울어서 추한 꼴 보이꼬. 그다음에는 우째 된 건지 기억도 안나고. 내 혹시 자는
모습도 보인 거 아이가? 아~,진짜,미치고 팔짝 뛰겠다…….”
“「누가 그래 무방비하게 자는 모습 보이라 카드나? 내를 잡아잡수랑 머가 다르노?」”
침대에 나나미가 앉아 있었다. 파자마 차림이다. 대화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발치에 엎드리듯 마시로가
자고 있을 뿐이었다.
“머,머라카네!”
“「속 터지는 소리 하지 말고 고마 확 덮치삐.」”
나나미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건 호랑이 모양 쿠션이다.
“그게 토라지로냐…….”
평소 습관대로 태클을 걸고 말았다.
“어? 누,누고?!”
“아~,저기,아오야마,일어났어?”
“나 칸다인데,들어가도 될까?”
“으,응……. 그래.”
소라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나나미는 호랑이 쿠션에 얼굴을 반쯤 묻은 상태로 소라타를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방금 그거,들었어?”
“설마 쿠션에 말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나미는 완전히 쿠션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귀와 목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눈만 돌려 소라타를 보면서 약속을 강요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라지로도 노려보고 있고. 다만 이 상태로 보아 처음 해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들고 온 쟁반을 내밀었다.
“먹을 수 있겠어?”
보아하니 어제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은 것 같다.
“응. 실은……배가 고파서.”
어제,그제 이틀간 거의 먹지 않았다. 당연히 배가 고플 것이다.
“네가 만든 거야?”
“아니,진 선배가.”
“미타카 선배는?”
“이거 만들어서 나한테 떠넘기고 자러 갔어.”
소라타가 죽 쟁반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나나미는 쓴웃음만 짓고 받아들지 않았다.
“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나나미의 시선 끝을 따라가자 마시로의 두 손에 꼭 잡힌 나나미의 오른손이 보였다.
“밤새 잡아줬나 봐.”
쑥스러운지 나나미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스레 기뻤던 건지도 모른다.
“시이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지만,네가 걱정되고 책임감도 느끼는 것 같더라.”
“그럴 필요는 없는데.”
“게다가 널 가장 잘 알고 있던 것도 시이나였어.”
“무슨 소리야?”
“시이나가 말하지 않았다면 난 널 말렸을 거야.”
“아카데미 가는 거?”
“그래. 열이 그렇게 나니 당연하지. 하지만 시이나는 자기라면 반드시 갈 테니 꼭 데려다 주고 싶다고.
나랑 진 선배, 미사키 선배한테 머리 숙여 부탁했어.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쭉 봐왔으니까…….”
“그랬……구나.”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네 뜻을 존중해주자고 결정한 거야.”
“그럼 고마워해야겠네. 발표회는 완전히 망쳤지만,가길 잘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냥 쉬었다면 아마 계속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렇구나.”
“응……. 대단하네,시이나는. 열 받을 만큼 강해.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노력도 많이 하고…….”
나나미가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자기 노력이 마시로의 영역에는 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늦게까지 만화를 그리고……. 내가 이제 그만 자라 고 해도 들리지도 않나봐…….”
“내가 말해도 그랬어. 집중하면 무시당해.”
“몇 번이나 고치고,또 고쳐 그리는 걸 반복하더라고. 잘 안 되는 건 뒤에서 봐도 알 정도인데,그래도
시이나는 도중에 포기하지는 않더라.”
“그렇지.”
“아침에 내가 깨우러 갈 때까지 그리고 있을 때도 있다니까. 끝장을 보는 게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이야.
그런 부분은 놀랐어. 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노력 같은 거 안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바로 천재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시이나를 알게 되기 전까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재능을 따라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을 모르는 소라타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나미는 답을 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 그 답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초조한가봐……. 그렇게 간단히 시이나처럼 될 수는 없는데.”
나나미가 남은 한 손으로 마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시로가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손에서
힘을 뺐다. 나나미는 몇 시간 만에 해방된 오른손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뭔가
씌었던 것이 빠져나간 듯 후련해 보였다.
“이렇게 걱정하는 널 보니 왠지 내가 책임감이 느껴지네.”
나나미의 중얼거림에 소라타는 왠지 안심이 됐다. 어제까지의 나나미는 어딘가 사쿠라장의 주민 같지가
않았지만 지금의 나나미는 같이 사는 사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내민 쟁반을 나나미가 받아들었다.
그리고 잘 먹겠다고 한 후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입을 벌린 나나미가 곁눈질로 소라타를 쳐다봤다.
“너무 빤히 보지 마.”
“미,미안.”
소라타는 황급히 시선을 방으로 돌렸다.
“방도.”
할 수 없이 소라타는 발치에 엎드려 있는 마시로를 보았다.
“시이나의 자는 모습도 안돼.”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역시 약할 때도 나나미는 나나미다. 이게 좋다. 주도권을 쥐고 상대를
끌어가는 정도 가 딱 좋다.
“나가라는 소리야?”
“그런 말까지는 안 했지만,조금 떨어져 주면 고맙겠어.”
“은근 상처주네…….”
침대에서 떨어져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야…… 씻지도,않았고…….”
“응? 뭐라고 했어?”
“죽,맛있다고.”
“다행이다. 진 선배가 요리 잘하거든. 식욕이 나는거 보니 이제 괜찮나 보네. 많이 먹어.”
나나미가 눈을 치뜨고 소라타를 노려봤다.
“많이 먹으면 살찌잖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나미는 묵묵히 죽을 떠먹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죽 냄비는 순식간에 깨끗하게 비었다. 나나미가 식후 약을 먹는 동안 소라타는 쟁반을 책상 위에 옮겨
놓았다.
그때 나나미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미안.”
“갑자기 왜?”
“어제 나 때문에 귀찮았잖아……. 카미이구사 선배가 차 까지 운전하게 만들고,미타카 선배는 선생님
말리고……. 그,이래저래 걱정해줬는데 나는 전부 혼자 할 수 있다고 고집이나 부리다가…… 결국,이
꼴이 났으니……
“미사키 선배와 진 선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오야마에게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행동하거나
말한 건 아냐. 어제도 마찬가지고.”
“……그거,용서하지 않겠단 소리?”
자신감을 잃은 눈으로 나나미가 힘겹게 물었다.
“아냐.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처음부터 그런 건 신경 쓴 적이 없다고 할까…….”
“잘 모르겠어.”
“그런 생각이 들어. 그야 모든 것을 혼자서 척척 해결할 수 있다면 멋있기도 하고,그런 게 어른이 되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잘하는 것이랑 못하는 것,한가하거나 바쁜 건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런 걸
인정하고 사쿠라장 전체가 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
나나미는 소라타를 똑바로 쳐다볼 뿐,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있으니까 힘들 때는 기댈 수 있는 거지. 그게 안 되면,난 왠지 섭섭해.”
“…….”
“그런 게 좋다고 생각해.”
“칸다.”
“왜?”
“말하고 부끄럽지 않아? 들은 나는 창피해서 숨고 싶은데.”
“그런 감상은 가슴 속에 묻어둬!”
소라타는 새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의미 없이 창밖을 보며 어떻게든 평상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런
소라타의 등에 대고 나나미가 기습을 날렸다.
“고마워.”
놀라서 돌아보자 온순하게 고개를 살짝 숙인 나나미가 있 었다. 보기 드문 모습에 넋을 잃었다.
“고맙다고. 두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으, 응.”
“왜?”
“아오야마 너,항상 이런 느낌이었나?”
“진짜…… 그런 소리나 하는 너는 마음에 안 들어.”
입술을 비죽이며 농담조로 나나미가 토라진 척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솔직하다고 할까,소녀다운 모습이
전면에 나오자 소라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니,응…… 괜찮아!”
동요를 진정시키려고 큰 소리를 낸 탓에 마시로가 깨어 났다.
감긴 눈을 20 퍼센트쯤 뜨고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라,나나미?”
“잘 잤어? 시이나.”
“이제 괜찮아?”
“응……. 미열은 있지만 많이 나아졌어.”
“그렇구나,다행이다.”
“전부 시이나 덕분이야.”
그리고 영차 하는 기합을 넣은 나나미는 소라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칸다한테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
“응?”
나나미가 곁눈으로 마시로를 쳐다봤다. 그걸로 대충 무슨 용건인지 감이 왔다.
“「마시로 당번」말인데……. 미안,솔직히 계속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9 월부터는 2 학기도
시작되고,그렇게 되면 학교,아르바이트,아카데미…… 다른 당번도 생각하면 도무지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알았어. 내가 할게. 오늘 사쿠라장 회의에서 교대하자.”
“응…….”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하겠다고 선언한 순간,소라타는 하나의 불안 요소를 떠올렸다.
그 편지다. 아직 자기 안에서 후련하게 정리하지 못한 것 이다.
앞으로 마시로와의 접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해소하지 못한 찜찜한 감정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아,아니,하는 건 좋지만 문제가 좀…….”
“그건 걱정 마. 이미 해결했으니까.”
“어?”
나나미가 한쪽 눈을 찡긋해서 신호를 보냈지만,소라타는 그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소라타 옆에서 나나미는 마시로를 쳐다봤다.
“저기,시이나.”
“왜?”
“전에 영국에서 편지 보낸 사람 말인데.”
“아델.”
“응. 그 아델이라는 사람은 너랑 무슨 관계야?’
“잠깐!”
급히 막으려 했지만 이제 와서 이야기를 끊지는 못했다.
“그림 선생님이야.”
나나미가 질문을 계속했다.
“나이는?”
“열일곱.”
“뭐?”
소라타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나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마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댄다. 이제 해결됐지?”
“그,그걸 왜 나한테 말해?”
“글쎄. 왜 그랬을까. 이걸로 빚은 다 갚았다.”
“그러니까 빚 같은 건 딱히……가 아니라, 어떻게 알았어?”
나나미에게 물으면서 마시로를 곁눈으로 쳐다보자 이상한 표정으로 소라타를 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 스터디에서 얼굴을 마주치면 왠지 상태가 이상하다~ 라는 것 정도는 보통 눈치챌걸. 시기를
대충 맞춰 보면 뭐,이유는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탐정이냐”
“그런 반응을 보니 정답인가 보네.”
“아니,아냐! 그런 거 아냐!”
뭔가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말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소라타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딱히,뭐가 어떻다고 말한 거 아냐.”
완전히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다. 왠지 그건 그것대로 분했지만,나나미가 부활한 증거이기도 하니
지금은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이나,아무 것도 아냐.”
“난 아무 말도 안했어.”
“으,응. 그랬지. 그럼 됐고. 응,됐어.”
마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칸다가 편지가 신경 쓰였나 봐.”
“으앗~! 무슨 소릴 하는 거야,아오야마!”
“칸다도 편지 받고 싶어?”
“아냐!”
“뭐 어때,달라고 해.”
나나미의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알았어. 다음에 써줄게.”
“으, 응…….”
왠지 은근히 피곤하다. 마시로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은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순순히 기뻐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마시로는 그런 소라타의 마음은 짐작도 못 한 채, 졸린 고양이처럼 하품했다.
“시이나,난 이제 됐으니까 방에 가서 쉬어.”
그런 나나미를 마시로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왜 그래?.”
“마시로.”
“응?”
“나나미에게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늘 그렇지만 정말 갑작스럽네…….”
나나미가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마시로가 아무 연관도 없는 화제를 느닷없이 꺼냈으니까.
“그래도 응,알았어,마시로. 어차피 너도 처음부터 내 이름 막 불렀으니까.”
이게 마시로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마시로는 나나미의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자려고 했다.
그리고 또 당연한 듯이 나나미의 지적이 날아들었다.
“네 방에 가서 자!”

이 날,소라타가 소집한 사쿠라장 회의 자리에서「마시로 당번」 교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새


담당자는 칸다 소라타. 다른 당번들도 나나미의 상황을 고려해서 부담을 개선 한 신체제가 결정되었다.
一「마시로 당번」이 아오야마 나나미에서 칸다 소라타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당번은 당번표 참조. 왠지
내 부담이 늘어난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서기·칸다 소라타.
ㅡ현실도피만 하고 있으면 꿈에서 깨어날 수 없게 돼! 추가·결국 의사록까지 대응하는 메이드 양.
一칸다,당번,잘 부탁해. 이래저래 미안해. 하나 깜빡한 게 있어서 여기에 써놓을게. 마시로에게 이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추가·아오야마 나나미.

날이 갈수록 나나미의 컨디션은 회복했고,이틀 후인 24 일이 되자 오후부터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르바이트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진이 쓰러진 직후 에 같은 실수를 하는
성격은 아닐 거라고 해서, 나나미의 「괜찮다」를 소라타는 믿고 보내주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은 벌써 26 일. 여름방학도 이제 일주일 남았다. 멋진 추억 만들었느냐고
하면,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햇갈리는 상황이 었다.
기획 오디션에 등록한 것이 가장 큰 성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에는 임팩트가 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전에 타코야키를 먹으러 가자는 미사키의 말에 휘적휘적 차를 타고 나간 결과 여덟 시간에
걸쳐 오사카까지 끌려갔다 온 일이나,라면 먹으러 가자는 소리에 하네다에서 신치토세까지 날아가서
치히로에게 전화로
“칸다,너 지금 어디야? 뭐? 삿포로? 그럼 저녁 메뉴는 게구나. 사와.”
라는 말을 듣고 라면 한 그릇을 먹고 게 세 마리를 사서 당일에 돌아간 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테니 주의해야만 한다. 실질적으로 삿포로에 머문 시간은 한 시 간 정도였다. 정말 사치스러운
여행이 아닐 수 없다. 홋카이도 첫 상륙이 었는데.
어제는 짬뽕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나가사키에 끌려가리라 예상을 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대신
쓰러진 이후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인 나나미가 미사키의 산제물이 되었고,돌아와서 괜히 소라타에게 화를
냈다.
좀 더 평범한 추억을 갖고 싶다. 바다에 간다든가 산에 간다든가 여자친구와 알콩달콩이라든가……. 원래
그런 것이 건전한 여름 이벤트 아닌가.
뭐 사쿠라장의 경우 늘 합숙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항상 이벤트 준비 만반인 상태지만 그건
그것대로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전,소라타는 주방 테이블에 엎드렸다. 옆자리에서는 마시로가 크로키 북에 콘티를 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만화잡지 편집자가 이 사쿠라장에 온 사건이 있었다.
듣기로는 의논 겸 마시로와 작업장 모습을 보러 왔다고 했다.
마시로가 이름을 잘 꺼내기 때문에 아야노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모습도 목소리도,성조차도
처음이었다. 풀네임은 이이다 아야노. 부드러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유연한 여성이었다. 나이는 스물여섯
살. 이건 진이 당당하게 물어 봤다. 키는 165 센티미터,스리 사이즈는 88·59·85 라는 매우 바람직한
몸매의 소유자로,진은 어느 틈엔가 휴대폰 번호까지 따내서 놀랐다.
“진 선배의 머리는 어떻게 생겨먹은 거예요?”
“알몸으로 뒹구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되나?”
타고난 마하라자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모양이다. 언젠가 정말 칼 맞아 죽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마시로의 연재용 콘티 진행상황은 좋지 않았고,회의는 결론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난관은 역시 감정적인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본인의 성격이 불행인 건지,아무리 해도 마시로가 만든 이야기와 인물은 너무
담백하고 수수했다.
그래도 아야노와의 의논으로 돌파구를 찾은 모양이다. 소라타 옆에서 크로키 북에 연필로 끄적이고 있는
마시로는 어쩐지 생기가 넘쳐 보였다. 사각사각 선을 그리고 점점 페이지를 넘겨 갔다.
주방에서는 진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식탁에 늘어져 있던 미사키가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평범한 사쿠라장의 일상 풍경. 이 구시렁거리는 시간도 소라타는 싫지 않았다.
치히로는 아침부터 학교에 갔다가 미팅으로 직행 예정. 늦게 들어온다고 들었다.
나나미는 조금 전에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서 지금은 방에 있다.
“진 선배,오늘 저녁은 뭐예요?”
“남은 것 처리라 별거 없어.”
이런 아무 내용 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면 나나미가 주방으로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무심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억!”
평소에는 기숙사 안에서도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던 나나미가 오늘은 잠옷 차림에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전원의 시선과 의문과 놀라움이 집중된 가운데 나나미는 새삼 머리를 숙였다.
“조금 늦긴 했지만 여러모로 폐를 끼쳤어요.”
고개 숙인 나나미는 약간 쑥스러운 듯 눈길을 이리저리 돌렸다.
“칸다,너무보지마.”
“왜 나만 갖고 그래?!”
“아오야마,렌즈였구나.”
부엌에서 나온 진이 자연스럽게 나나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사전에 그걸 파악한 나나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슬쩍 피했다.
“나나밍은 진짜 성실하네~. 그래도 난 그런 안경을 쓴 나나밍도 완전 좋아~!”
이번에는 미사키가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건 차마 피하지 못하고 잡힌 나나미가 넘어지고 말았다.
“선배! 그,그만 하세요! 답답해요!”
“여자끼리인데 뭐 어때~.”
개의치 않고 나나미의 가슴에 미사키가 얼굴을 묻었다.
“아,안 돼요! 남자들 눈이 있잖아요!”
“그럼 방에서 계속할까? 아니면 세면실?”“그만 하세요!”
나나미는 어떻게든 미사키에게서 탈출하긴 했지만,이미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미사키는
팔팔했다. 과연 우주 에너지로 움직이는 외계인. 신체 구조 자체가 다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환영회 할까?”
진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모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듣고 보니 나나미의 환영회는 쭉 보류해둔 상태였다.
“아,그거 찬성?! 좋아,역시 진이야! 나이스 아이디어! 환영회로 정했으면 그거지! 나 쭉 준비해둔
것이 있어! 나나밍의 부활을 기다렸다고! 드디어 이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약속의 날이!”
늘 그렇듯 주변을 무시하고 들뜬 미사키가 2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천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1 층으로 돌아왔다.
다시 모습을 보인 미사키는 등에 산타클로스 주머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주방 테이블
위에 엎었다.
나온 건 색색의 수영복 더미. 서른 벌 정도 됐다.
“나나밍 환영 수영대회를 개최하는 거야!”
“선배,무슨 소리에요?”
“잘 생각해봐! 우리 여름방학인데 바다에도 수영장에도 못 갔잖아. 이런 말라비틀어진 여름방학은
여름방학이라 부를 수 없어! 안 그래? 맞아~! 맞아~!”
“아,네…… 그렇군요.”
나나미는 넋이 나간 상태로 굳어 버렸다. 진은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수영복을 헤집고 누구한텐 이게
어울리겠다며 마음대로 떠들었다. 물론 마시로는 반응이 없었다.
“수영대회는 괜찮지만 벌써 여섯 시에요. 수영장은 문 다 닫았을 거예요.”
부활한 나나미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학교에 있잖아.”
“어이! 설마 몰래 숨어 들어가겠다고??!”
“얼른얼른. 후배님도 나나밍도 얼른 준비해!”
“몰래 들어가는 건 죽어도 싫어요! 규칙 위반은 용납 못 해요!”
나나미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맞아요!”
소라타도 반대했다.
“저 넓은 바다가 날 부르고 있어! 후배님도 보고 싶잖아! 내 수영복 모습이라든가, 나나미의 수영복
모습을! 마시롱의 수영복 모습이라든가!”
그야 물론 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칸다,이상한 생각하지 마!”
나나미가 척 삿대질을 하며 소라타를 공격했다.
“싸울 상대가 틀렸잖아! 미사키 선배의 페이스에 넘어갈라.”
나나미가 퍼뜩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맞아요! 학교 수영장은 안 돼요.”
그러나 이번에는 진의 옹호가 들어왔다.
“괜찮아. 학교에 연락해서 허락 받을 테니까. 치히로를 통하면 그 정도 허가는 줄걸.”
“네? 정말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면 꽤 무리한 것도 들어줘.”
“하, 하지만,자,잠깐만요! 저,수영복 없어요.”
“좋아하는 걸로 골라. 이거 어때?”
미사키가 발랄하게 비키니를 나나미 몸에 대려고 했다.
“무, 무리에요! 이렇게 노출이 심한 건!”
“나나밍한테는 이게 더 어울릴지도!”
더 아슬아슬한 수영복을 미사키가 내밀었다.
“이,이거면 됐어요!”
적어도 스스로 고르고 싶었던 건지 결국 나나미는 비키니를 고름으로써 선선히 수영장에 가는 것을
승낙하고 말았다.
“에?,그렇게 수수한건 섹시함이 모자라잖아,나나밍! 이왕 가서 후배님에게 선보이는 거니까 좀 더
대담해져야지!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다고 후회해도 난 몰라~.”
“칸다랑 미타카 선배는 나가주세요! 그, 그럼 제대로 고를게요.”
완전히 미사키 월드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시롱도 골라,골라. 자아, 얼른 빨리!”
흥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무표정하게 마시로가 수영복을 집어 드는가 싶더니,
“소라타,골라줘.”
이렇게 당치 않은 소리를 했다.
“너,날 죽이려는 거냐!”
수영복을 고르라니,그런 민망한 짓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럼 30 분 후에 현관에서 집합.”
진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주방을 나갔다. 미사키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초리로 그 등을 쳐다봤다.
아마 미사키는 진이 골라주는 수영복을 입고 싶었으리라. 여러 가지 감정에서 도망치듯, 소라타는 진을
쫓아갔다.
방 앞에서 진을 불러 세웠다.
“선배.”
“응?”
“수영장 허가받을 수 있다는 거 거짓말이죠? 일반 학생이라면 교사 동반으로 가능성이 있겠지만 여긴
사쿠라장이잖아요.”
“잘 아네.”
“덕분에 저도 완전히 여기 주민이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오야마가 화낼 거예요. 걔는 고지식해서
이런 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할 수 없잖아.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갈 거 아냐. 어느 정도는 틀을 깨는 게 편해.”
“뭐,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선배가 책임지세요.”
“무슨 헛소리야? 우린 공범이잖아.”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부탁한다,동지.”
쓸데없는 소릴 했다고 후회하면서,소라타는 작년에 산 수영복을 어디에 넣어놨는지 떠올리려 했다.
진이 지정한 30 분을 한참 넘긴 약 한 시간 후,소라타,진,마시로,미사키,나나미 다섯 명은 교복
차림으로 현관에 집합했다. 늦은 이유는 여자에게는 여러 가지 준비 할 것이 있다,뭐 그런 맥락이다.
교복을 입은 이유는 나나미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이라고는 해도 학교에 갈 때는 교복 착용.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지만,학생수첩을 찾아보니 확실히 교칙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일곱 시 반을 넘어,해가 저문 히늘은 깜깜해져 있었다. 그래도 오후의 더위는 누그러들
기색도 없이 지금도 푹푹 찌는 더위였다. 미사키는 얼른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어서 오는 도중부터 계속
몸이 근질근질해 있었다.
닫힌 뒷문을 뛰어넘어 학교로 들어갔다.
“정말 허가받은 거예요?”
나나미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소라타가 연락해서 허락받았어.”
“아아,그렇고말고.”
진은 철저하게 소라타를 공범으로 만들 속셈인 듯했다.
“그럼 다행이지만.”
수영장은 체육관 옆에 있다. 거기까지 교사 뒤쪽을 통해 이동한다. 당연히 입구는 잠겨 있었기 때문에
소라타가 먼저 펜스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뛰어 들어온 미사키가 수영장 사이드를 뛰면서 교복을 벗어 던지더니,진홍색 비키니
모습이 되어 더 이상은 한계라는 듯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소라타도 마찬가지 였지만,다들 수영복을 옷
안에 입고 온 것이다.
“카미이구사 선배! 준비 운동 제대로 하고 들어가야죠!”
다이빙대 앞에 서서 나나미가 지당한 말을 했다.
그러자 미사키가 스윽 다가왔다.
“아오야마,거기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소라타의 충고가 끝나기 전에 미사키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나나미에게 물을 뿌렸다. 얼굴에 직격으로
맞은 나나미는 근처에 있는 비트판을 집어 들더니 부메랑처럼 미사키에게 던졌다. .
그걸 미사키가 칼날잡기로 막았다.
“약해,나나밍! 나한테 한 방 먹이려면 10 년은 일러~!”
“그 말,두고 보자구요.”
나나미가 교복 단추를 잡았다. 그때 소라타와 눈이 마주 쳤다. 그러자 아무 말 없이 탈의실로 숨었다.
“내 존재가 그렇게 용납이 안 되는 건가요,그런 건가요…….”
마시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라타와 눈이 마주치자
동작을 멈췄다. 잠시 생각한 후에 나나미를 따라서 탈의실로 숨었다.
진은 아직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수영장 사이드에 사쿠라장에서 가져온 휴대용 가스레 인지를 놓고 전골
준비를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쿠라장의 환영회는 전골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수영장 안에서 미사키가 자기를 노린다는 걸 안 소라타는 얼른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옷을 입은 채로
젖는 것은 사양이었다.
개의치 않고 미사키가 물을 뿌렸다. 소라타는 감아놓은 호스를 꺼내 수영장 사이드에서 응전했다.
“먹어라,외계인! 지구는 절대 넘겨줄 수 없어!”
“어림없다! 비트판 커터!”
미사키가 던진 비트판이 소라타의 이마에 직격하자 소라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러는 사이 나나미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파란색과 흰색이 반씩 섞인 비키니. 하의는 두 겹으로 핫 팬츠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이 특징이 었다.
나나미는 배꼽 부근을 손으로 가리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있었다.
“어,어……때?”
“…….”
“아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손바닥으로 소라타를 막고는 고개를 돌렸다.
“좋은데. 잘 어울려.”
“지,진짜가?”
“응.”
“그,그치만 카미이구사 선배처럼 대담한 것도 아이고……. 아이고,이것도 나름 최선을 다한 거긴 한데.
내 이런 거 처음 입어본다 아이가. 그래서 이상하면 우짜지 싶어서…….”
“아니, 정말 잘 어울려……. 근데 사투리 나온다.”
소라타도 꽤나 민망했지만 나나미가 너무 동요하니 이상하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 다행이다.”
나나미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좀 의외다.”
“칸다는 그런 말,하는 사람이구나.”
“어? 아니,그…… 이상한가? 보통 안 하나?”
조금 더 가까이서 이야기를 하려고 다가가자,나나미는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달아났다.
“……왜 도망쳐?”
“너,너무가까이서 보지마.”
거리는 5 미터 정도.
“나는 이 미묘한 거리를 두고 말하는 게 왠지 더 부끄러운데.”
“그,그럼 약속해!”
“뭘?”
나나미의 눈은 수영장 중앙에 둥실 떠 있는 미사키를 보고 있었다.
“비교하지 마. 절대 하지 마.”
“알았어.”
“그리고 너무 뚫어지라 보지 마.”
일단은 나나미의 옆으로 간 건 좋았지만, 할 말을 전부 해버린 후라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남고 말았다.
“뭐,뭐든 말해.”
“말하라고 해도…….”
가까이서 보는 수영복 차림의 나나미는 어쩐지 어색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있잖아……. 진짜로 잘어울려?”
“으, 응.”
그렇게 말한 순간 소라타의 왼손이 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뒤늦게 탈의실에서 나온 마시로였다.
가만히 소라타의 눈을 쳐다본다.
마시로의 수영복도 비키니로,하얀 바탕에 오렌지 체크무늬였다. 미사키나 나나미와 다른 점은 아래에
상의와 똑같은 무늬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영복 디자인보다 압도적으로 하얀 피부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스름 속에서도
마시로의 하얀 피부는 눈에 띄었다.
아무 감동 없는 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신기하게 소라타만 바라볼 뿐이었다.
“시이나,제대로 준비했어?”
“응.”
마시로가 소라타 앞에서 빙글 돌았다.
“이상한 곳 있어?”
“아,아니…… 없어.”
마시로의 기습 발언에 소라타는 움찔했다. 평소와 인상이 다르다. 수영복 탓만은 아니다. 만화 집필에
쏟는 집중력이
없어진 탓인지,지금 마시로는 수영장에 놀러 온 평범한 여고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즐겁게,표정도
밝다.
그 평범함이 소라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이상 보고 있으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얼굴을 돌린 소라타 앞으로 마시로가 돌아왔다.
“왜,왜?”
“…….”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말 있으면 해.”
“…….”
조금씩 마시로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야 이 바보야,너무 다가오지 마!”
소라타가 도망치듯 상체를 젖혔다. 마시로가 몸을 바짝 붙이는 바람에 불룩 나온 가슴이 피부에 닿았다.
뇌를 뒤흔드는 탄력을 느낀 소라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떻게든 참고 딸꾹질처럼 넘겼지만 일단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위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뭐,뭐야. 넌!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이번에는 불만스럽게 소라타의 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나나미는 칭찬했는데.”
“뭐?”
“……소라타 바보.”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런 마시로의 태도는 처음 보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날 바보 취급하다니,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어디 있어. 나 참,아무리
상식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네 머릿속 구조는 어떻게 생긴 거냐. 수영 복은 어울린다만…….”
고개를 든 마시로의 눈이 한 번 더 말해달라고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울립니다. 자,이걸로 됐습니까?”
부끄러워서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구조를 요청하듯 나나미를 봤지만,차가운 눈으로
소라타를 볼 뿐이 었다. 도저히 구세주가 되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소리를 수영장 사이드에서 하고 있던 소라타는 가장 주의해야 할 존재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그건 나나미도 그랬고, 마시로에게는 원래 경계심이 없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직후에 수영장에 처박힌 것은 진심으로 놀랐다.
“진짜~,기껏 수영장에 왔으니까 헤엄쳐야지! 이건 수영 장의 상식이야!”
“선배가 상식을 말하면 곤란하죠!”
제일 먼저 수면으로 얼굴을 내민 소라타가 미사키에게 불평했다. 셋이 함께 빠진 것이다.
“어이! 시이나?!”
나나미는 얼굴을 들었지만 마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다. 시이나 마시로가 헤엄칠
수 있을 리 없다. 소라타는 수중에서 마시로를 즉시 구조해냈다.
두 손으로 받쳐 마시로를 세웠다.
그 순간 소라타의 시선은 마시로의 가슴에 쏠리고 말았다. 예쁘게 부풀어 오른 몽우리가 수면에서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이나,수영복 벗겨졌어!”
마시로가 느릿한 동작으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약 2 초의 침묵. 고개를 들자 마시로는 입을 꾹 다물고 뭔가를 참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가
싶더니 두 손으로 소라타의 눈을 가렸다.
“보지 마.”
갑자기 시야가 막힌 소라타는 당연히 당황했다.
“바,바보야! 가리려면 네 가슴을 가려!”
“어휴~, 진짜,뭐하는 거야,칸다!”
뒤에서 나나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냐!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알았으니까 날뛰지 마! 마시로도 그대로 있어. 금방 수영 복고쳐줄게.”
“응.”
“칸다,손가락 틈으로 보면 눈 찔러버린다.”
“안 봐! 질끈 감고 있다고!”
“정말이지?”
“얼른 수영복이나 바로 입혀!”
“실은 벌써 다 입혔어.”
“그럼 손을 치워!”
그걸 신호로 마시로의 손이 떨어졌다.
소라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양팔로 가슴을 가린 마시로가 오리 주둥이로 협박해왔다.
“이건 사고야.”
“하여튼 남자들은 저질이라니까.”
나나미가 대신 비난을 해준다.
“그런 목적이었으면,미사키 선배를 보지!”
무심결에 이렇게 지껄이자 당사자인 미사키가 물속에서 덮쳐왔다. 수영복을 벗기려 한다.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소라타는 어떻게든 탈출했다.
“선배는 절 어쩌려는 거예요!”
“수영대회 하면 역시 홀라당이지! 노 홀라당! 노 라이프!”
“그런 거면 시이나한테 해주세요!”
마시로의 모습을 살펴보자 어쩐지 불쾌해 보였다. 말실수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봐,보고말고.”
“소라타는 미사키가 좋아.”
“오해를 부르는 발언은 하지 마.”
“나도 봐?”
“봐, 보고말고.”
오기가 생겨 마시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시로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너무 보지마.”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때 진이 전골이 다 됐다며 구원의 손을 내밀자,전원 수영장 밖으로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시로의 불만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전골 쪽은 열기가 있었다.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나중에 수영장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처음에는
비상식이라고 했던 나나미도 정신을 차려보니 채소를 먹고,불 조절을 하고 마시로에게 편식하지 말라는
둥 완전히 식사 자리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다섯 명이 둘러앉은 전골은 금세 텅 비었다. 이제 남은 건 마무리 죽뿐이다. 한소끔 끓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군가 펜스 밖에서 손전등 빛을 비췄다.
“너희,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아,큰일이다.”
제일 처음에 반응을 보인 건 진이었다. 모두의 눈이 손전등을 든 경비원에게로 향했다. 미사키는
순식간에 일어나 짐을 회수. 소라타도 도망치는 순서를 머릿속으로 확인했다. 경비원이 있는 건 수영장
입구 반대쪽이다. 이 경로라면 도망칠 수 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나나미만 의문을 가졌다.
“어라,근데 선배. 허락받았다고.”
“하핫. 학교에서 그런 걸 허락해줄 리 있나. 그렇게라도 말 안 했으면 네 수영복 차림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상큼하게 거짓말을 폭로한 진은 가스의 불을 끄고 도망치라고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선두를 달리던 미사키가 입구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르던 진이 자신의 수건을 미사키의 어깨에
걸쳐줬다.
“뛰어!”
소라타는 짐을 챙겨 들고 멍하게 서 있는 나나미에게 외친 후 마시로의 팔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죽은?”
“그런 거 들고 뛰면 데이잖아!”
“먹고 싶었는데.”
“아~,진짜,이게 뭐야! 미타카 선배는 그래도 조금은 정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앞서 가는 나나미가 욕을 퍼부었다.
수영장에서 나와 교사 뒤로 향했다. 경비원도 제법 반응이 빠르다. 벌써 뒤로 돌아와 있다. 문제는
마시로다. 뛰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거의 소라타가 끌고 가다시피 하고 있으니,당연하다.
“너,제발 네 힘으로 뛰어!”
“왜?”
“왜 그걸 모르겠는지 누가 나한테 좀 가르쳐 주라!”
이대로는 잡히고 만다. 뒤돌아보며 전체를 살펴보는 진에게 이런 사실을 눈빛으로 호소했다.
“창고 틈새로 숨어.”
진의 지시대로 사이에 끼이듯 콘크리트벽 사이에 전원이 몰려 들어갔다. 미사키,진,나나미,소라타,
마시로 순이 었다.
“앗,미사키,좀 더 안으로 가! 달라붙지 마!”
“안 돼~,가슴이랑 엉덩이가 닿는단 말이야.”
먼저 숨어 있던 진과 미사키가 승강이를 벌였다. 하지만 소라타는 그쪽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진과
미사키가 밀착하고 있듯이,소라타도 마시로와 나나미 사이에 낀 샌드 위치 상태였다.
럭키 해프닝 같은 기분도 들지만,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이런 건 지옥이다.
“카,칸다,너무 가까워. 붙지 마.”
“붙지 말라고 해도,밀지 마,시이나!” “들켜도 괜찮아?”
“그건 아는데,드,등에 닿잖아!”
수영복 너머로 행복한 풍만함이 느껴진다. 미끈미끈한 피부가 스친다.
“조용히 해,발소리가 다가온다.”
회중전등 빛이 발치로 다가왔다. 숨을 죽이고 경비원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묘한 긴장감이 주변
일면에 감돌았다. 발소리가 빠져나간다. 바로 경비원의 기척은 멀어져 갔다.
“갔어?”
“그런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나나미가 경직된 목소리를 냈다.
“카,칸다.”
“왜,왜 그래.”
“뭔가,배에 닿았는데…… 이,이건 혹시.”
“할 수 없잖아! 이런 상황에서 반응하지 말라는 게 말이 안 돼. 남자니까! 사춘기를 용서해 줘!”
“어이,조용히 해. 경비원이 돌아와.”
“하,하지만,그,그래도,이건, 이건…….”
나나미는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듯한 기세였다.
“나중에 때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그러니까 제발 침착해 주세요, 아오야마 씨.”
“지, 지지,진정하고 있어. 너,너도 제발 가라앉혀줘.”
“그건 힘들어. 나로서도 손 쓸 방법이 없어…… 아니, 나도 괴롭다고!”
“도와줄까?”
마시로가 뒤에서 속삭였다.
“도와주다니 뭘 어떡하려고!”
“소라타가 해주길 원하는 것.”
무심결에 이런저런 부정한 망상을 하고 말았다.
“해줬으면 하는거 없어?”
“부탁이니까,제발 더 이상,내 피를 자극하지 마!”
“칸다,조용!”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나미와 마시로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동이 가슴과 등으로 전해져 왔다. 자기
고동도 한 번,한 번 쓸데없이 크게 들려왔다.
1 분 정도의 침묵이 영원처럼 생각되었다. 경비원은 혼잣 말로 이상하군 하며,수영장 쪽으로 돌아갔다.
“좋아,드디어 갔나 보군. 지금 나가자.”
말없이 한 사람씩 벽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끔찍한 꼴을 당했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그게, 그건,칸다 네…… 그,그…….”
안쓰러울 정도로 나나미는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군.”
진의 말에 소라타와 나나미가 고개를 끄덕 였다. 미사키는 아직 충분히 놀지 못한 것 같았지만,진이 옷을
입으라고 하자 이번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으려고 해도,어디서?”
수영장 탈의실로 돌아가는건 위험하다. 그리고 여기는 교사 뒤다. 잠긴 창고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여자는 저쪽 창고 뒤. 나랑 소라타는 여기서 갈아입으면 돼.”
“바,밖인데?”
“어두워서 안보여.”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수영복 차림으로 기숙사에 가고 싶으면 굳이 말리진 않아.”
진이 짓궂게 말했다.
“윽.”
나나미가 낮게 신음하며 창고 뒤로 가려 했다. 그러더니 도중에 돌아서서 소라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못을 박았다.
“저,절대 훔쳐보지 마.”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발정한 수컷이겠지. 실제로 바로 조금 전까지,아,지금도냐?”
나나미가 새빨개진 얼굴로 끄덕였다.
“진 선배는 이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오야마가 아주 울 것 같잖아요.”
“울긴 누가!”
“울 것 같다고 했어.”
이런 주변 분위기를 무시하고 마시로가 소라타의 팔을 당겼다.
“소라타,팬티는?”
“역시 너,잊고 온 거냐?”
수영복을 입고 사쿠라장을 나왔으니,보나 마나 이리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가져오길 참 잘했다.
짐에서 꺼낸 수건과 팬티를 마시로에게 건넸다. 어째서인지 나나미가 째려보았다.
“자,자. 됐으니까 갈아입어. 또 경비 아저씨가 오면 성가시니까.”
진이 재촉하자 나나미가 마지못해 창고 뒤로 사라졌다,
“엿봤다간 기억상실이 될 때까지 매타작을 해줄 거야.”
“알았다고.”
여자아이들이 그늘에 숨은 틈에 소라타도 얼른 옷을 갈아 입었다.
제일 먼저 갈아입고 나온 건 미사키였다. 그다음으로 마시로가 나왔다. 하지만 머리는 축축해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가온 마시로의 머리에 수건을 올리고,탈탈 닦아 주었다. 이건 고양이를 목욕시킨 후랑 똑같다.
“너,진짜 어떻게 좀 해보라니까.”
“그,그래,마시로는 너무 무방비해.”
마지막으로 나온 나나미는 어째서인지 불만스럽게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자세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스커트 자락을 누른 채 안짱다리 느낌으로,일부러 힘들게 걷고 있었다.
“아오야마,그 이상한 자세는 뭐야?”
“뭐,뭐가. 평범하잖아?”
누가 들으나 당황한 목소리다.
그때 교사 벽을 타고 올라가듯 강풍이 불었다.
“꺅!”
나나미가 치마 앞과 뒤를 필사적으로 눌렀다.
“괜찮아?”
“다,당연하지.”
“아마 수영복 입고 오느라 아오야마도 팬티를 잊고 온 거 겠지.”
진이 재미있다는 듯 지적했다.
“아,아니에요! 그럴 리 없잖아요!”
“그랬으면 그냥 수영복을 입고 있었으면 됐을 텐데.”
“그럴까도 생각했지만 옷 아래에 젖은 수영복을 입으면 찜찜할 것 같아서…… 가 아니라. 잊은 거
아니라니까요!”
“나나밍,노팬티! 노 라이프야!”
“그렇다는데,아오야마.”
“신경 꺼!”
그때 회중전등 빛이 갑자기 비췄다. 교사를 한 바퀴 돈 경비원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앗,위험.”
“도망쳐~!”
이번에도 미사키가 제일 먼저 뛰어나갔고, 진이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무,무리! 절대 무리! 이런 상황에서 뛰었다간…….”
“도망치지 않으면 더 곤란해질걸!”
소라타는 나나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나나미는 치마를 신경 쓰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노팬티 상태로 설교 듣기는 싫잖아!”
“다,당연하지! 1 초라도 좋으니 빨리 팬티를 입고 싶다고! 그보다 자꾸 노팬티,노팬티 하지 마!”
겨우 뛰기 시작한 나나미. 소라타는 멍하게 서 있는 마시로의 손을 잡고 나나미의 뒤를 따랐다.
“아,안 돼! 칸다,앞! 죽어도,앞에서 뛰어!”
“어두워서 안 보인다니까!”
“기분문제야!”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나나미를 추월했다. 하지만 치마를 신경쓰느라 제대로 뛰지
못하는 나나미를 뿌리치고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이나,먼저 가.”
팔을 끌고 마시로를 앞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마시로는 옷자락을 신경 쓰는 동작을 보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라타,변태.”
“너까지 그런 말 하기냐!”
“돌아보지 마!”
“알았다,알았어.”
할수 없이 소라타,마시로,나나미의 순으로 뛰게 되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달렸다. 지금은 뒷문이 경비가 더 삼엄할 것 같다고 미사키의 후각이
포착한 것이리라. 그 예측은 보기 좋게 적중해서 정문 쪽에는 경비원이 한 명도 없었다.
미사키와 진이 열어 준 틈을 빠져나가 소라타, 마시로,나나미 세 사람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아무리 경비원들 이라도 학교 밖까지 쫓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도망쳐 둘 필요가 있다.
속도를 늦추자 미사키와 진에게는 금방 따라잡혔다.
“소라타,힘들어.”
“자기 다리로 달려!”
“그래,마시로는 좀 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할 필요가 있다고.”
“나나미도 팬티 까먹었어.”
“뭐!”
“아~,너희들,싸우지 좀 마!”
“왠지 재미있어졌군,소라타.”
진이 행복한 표정으로 놀렸다.
“전 하나도 재미없어요!”

학교와 사쿠라장 사이에 있는 아동공원까지 도망치자 소라타 일행은 완전히 달리던 것을 멈췄다.
“벌렁벌렁,두근두근 대모험이었어! 이래서 그만둘 수가 없다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손으로 치맛자락을 누른 나나미가 항의했다.
“난 오늘 일을 평생 못 잊을 거야. 나나밍의 노팬티 러시를 후세까지 전하는 게 내 사명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걸랑~.”
“당장 잊으세요! 칸다랑 미타카 선배도 히죽거리지 말고!”
소라타는 웃음을 참았고,진은 괜히 더 크게 웃었다.
“진짜 최악이야……. 이 일이 소문 나면 난,살 수가 없어…….”
“신경 쓰지 마,노팬티 러시 정도는.”
“이상한 이름 붙이지 마요!”
“소라타 말대로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사쿠라장에 있으면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닐걸.”
그걸 무시하고 성큼성큼 나나미가 앞으로 걸어갔다. 더 이상 이야기도 하기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오르막길 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칸다랑 미타카 선배는 앞장서요!”
“그래,그래.”
진이 크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 옆에서 소라타도 나란히 걸어갔다.
뒤에서는 미사키를 중심으로 나나미와 마시로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진을 따라 소라타도 별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멀리 있는 빛.
손을 뻗어도 절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때로는 아름다운 밤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진이 불쑥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든 갈 수 있어요.”
“대담하게 나오는군.”
“왠지 사쿠라장에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진이 소라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둘이~,무슨 이야기 해?”
소라타와 진 사이에 끼어든 미사키가 둘에게 매달리듯 팔을 꼈다.
“내일은 뭘 할까,그런 얘기.”
“아~,그렇다면 말이지~.”
사쿠라장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미사키가 세운 여름방학 파이널 세일 계획이 발표되었다. 세일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세계 일주 여행처럼,대부분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꿈 이야기였지만 같잖다든가 무리라든가 가능할 턱이
있냐 같은 분위기 깨는 소리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이 멤버로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들 느꼈기
때문이 리라.
미사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꿈을 꾸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꿈도,사쿠라장에 도착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칸다,무슨 편지가 와 있는데.”
우편함을 열어본 나나미가 소라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낯선 우편물. 바로「게임을 만들자」의 결과
발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후다닥 현관으로 들어갔다. 주방 불을 켰다.
봉투를 뜯었다.
세 개로 접힌 종이가 한 장. 낙선 통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응한 몸은 말 그대로 삐걱거렸다. 다소
실망한 마음이 간단하게 편지를 펼쳐 보게 만들었다.

ㅡ사랑을 가르쳐줘.

가로쓰기 편지지의 중앙에 딱 한문장이 적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통 파악이 되질 않았다. 아니,짚이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마시로가 편지를
쓰겠다고 전에 말했다. 이게 그것이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화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나미가 조금 늦게 소라타에게 왔다.
“칸다.”
“왜?”
“하나더 있어.”
봉투에는「게임을 만들자」를 주최한 하드 메이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얄팍한 종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봉투를 뜯었다.
ㅡ 칸다 소라타 님,점점 건승하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얼마 전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게임 기획
오디션「게임을 만들자」에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모 서류를 살펴본 결과,꼭 프레젠테이션
회장에서 더욱 자세한 기획 내용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다망한 와중에 죄송하지만,
하기의 일시에 지정 장소까지 와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젠테이션 일정은 8 월 31 일 화요일. 오후 한 시부터. 회사 지도와 가는 방법.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당일,그 자리 에서 준비할 수 있는 컴퓨터와 소프트 등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한 번 더,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틀림없다. 1 차 심사를 통과했다.
전혀 일지 않던 실감이 급작스레 전신에서 끓어 올랐다. 사고도,이성도 잃은 채 소라타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우렁 차게 외쳤다.
“만세~!”
가까이 있던 나나미가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미사키와 진이 흥미진진하게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오~,후배님,해냈구나!”
“선배 덕분이에요.”
미사키와 힘찬 악수를 나눴다.
“축하로 나나밍이 뽀뽀해준대!”
“아,안 해요!”
“볼인데?”
“위치의 문제가 아니에요!”
“차였구나,소라타.”
“그렇네요…….”
“왜,왜 그렇게 낙담하는 건데!”
“아니, 너무 강력하게 즉답을 하니,난 그렇게까지 네게 미움을 받고 있었나 해서…….”
“아냐. 딱히 미워하는 게 아니라,그건, 그…….”
“됐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사쿠라장으로 꼬드긴 바람에 온갖 고생과 민폐는 다 겪은 데다 노팬티
러시라는 인생의 오점까지 남기고 말았으니까.”
“진짜,그건 잊어버리라니까! 앗,그러고 보니 나,아직.”
나나미가 허둥지둥 주방에서 나갔다. 팬티를 찾아 방으로 간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마시로도 없다.
“시이나는?”
“글쎄? 방에 돌아간 거 아냐?”
“그런가…….”
갑자기 기쁨이 반감했다. 마음속 어디선가 마시로도 기뻐해 줄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시로가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적힌 것은 한 문장뿐이다.
ㅡ사랑을 가르쳐 줘.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지금의 소라타에겐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제 4 장

거대한 불꽃을 쏴봐

몸이 무겁다. 어젯밤 서류 심사 돌파 축하를 핑계로 미사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도중에


진이 구해준 덕분에 밤샘은 면했지만,소라타가 침대에 들어간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근처 초등학생이 라디오 체조에 나가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라타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감각이 돌아온 건 몸에 가해진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무겁다. 배가 압박당하고 있다. 가슴이
답답하다. 이건 틀림없이 프레젠테이션의 중압감이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27 일. 준비
기간은 고작 나흘밖에 없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맞춰서 준비할 수 있을까. 대체 프레젠테이 션에서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전부 미지의 세계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서류 심사는 통과했다. 아이디어에는
자신을 가져도 될 것이다. 심사원들은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주길 원한다고 했다. 그것도 처음 쓴
기획서로.
어쩌면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느닷 없이 기획이 채용되어 게임 제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메가 히트를 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괜한 압박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어째서인지 몸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가벼워지기는 커녕,감각은 더욱 생생해져 가기만 했다. 고양이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안개가 낀 듯
몽롱한 뇌에 한 줄기 햇살이 비추었다. 아아, 잠이 깼구나, 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자 무게 외에도
열기와 분명한 탄력을 피부가 인식했다.
배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 닿은 부분이 축축한 열기를 갖고 있다. 전부 물리적인 것이다. 어디의
누구였던가. 프레젠테이션 압박이라고 말한 건…….
소라타는 무게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천천히 눈을 떴다. 무감동한 눈이 소라타를 내려다보았다. 잠옷
차림으로 소라타의 배를 깔고 앉아 있다. 붓을 쥔 손을 소라타의 이마로 가져가고 있다. 잠시 후면 붓이
이마에 닿을 것이다.
“이건 꿈인가?”
“안녕.”
“꿈이라고 말해줘!”
“꿈이야.”
“꿈이면 깨어나!”
마시로에게 뺨을 맞았다. 메마른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1 분 후,화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너한테 얻어맞을 만한 짓을 했던가? 응? 무슨 잘못을 한건데?!”
“현실을 봐.”
“보고 있어. 일어났더니 202 호의 시이나 마시로가 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대체 너 뭘하고 있는 거야! 왜? 어째서? 그 붓은 뭔데?”
“낙서하려고.”
“대체 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것도 정도가 있다.
“소라타 탓이야. 내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들었으니까…….”
마시로는 가슴에 손을 대고 시선을 돌렸다. 눈초리를 살짝 내린 불안한 표정.
“어제부터 여기가 이상했어.”
원인은 수영장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라는 둥,보지 말라는 둥,마시로의 상태가 살짝 이상했다.
“어떻게 이상한데?”
“소라타를 생각하면.”
“뭐?! 나?!”
“응,소라타.”
“그,그래서? 날 생각하면?”
“굉장히 짜증스러워져.”
“면전에 대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붓을 들고 소라타의 얼굴에 낙서하러 아침부터 온 건가.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이유도
도무지 모르겠고 짜증의 발산 방법이 이상하다.
“평소보다 더 하는 짓이 의미 불명이잖아! 탕수육의 파인애플만큼이나 이해를 못 하겠어! 그보다 이제
그만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불만이 해소되지 않은 건지,썩 개운하지 않은 모습으로 마시로가 몸을 일으켰다. 괜스레 움직였다간
해프닝이 일어날 것 같아서 소라타는 마시로의 이동이 완료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일어난 마시로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앉아.”
“네에,네에.”
소라타는 양반다리를 했다.
“꿇어앉아.”
“이유를 들어볼까?”
마시로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왠지 표정이 평소보다 험악한듯한…… 아니,기분 탓인 듯한…… 아니,
험악한듯한…….
“모르겠어?”
불만스러운 어조다.
“배가 고프다든가?”
그러자 이번에는 알기 쉽게 마시로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아무래도 화가 난 모양이다.
마시로는 소라타의 책상 위에서 기획서를 가져와 그걸 소라타에게 내밀었다.
“이게 왜?”
“안 가르쳐줬어.”
정면에 앉은 마시로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전혀 몰랐어.”
“그랬……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히 마시로에게 기획서를 보여준 기억은 없다. 진행 상황이 어떤 느낌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상담도 하지 않았다.
일전에 기획 오디션에 참가할 생각이라고 선언한게 전부다. 아니,그걸 말했다고 해야 할지도 수수께끼다.
일방적으로 소라타가 말했을 뿐,마시로가 들었다는 보증은 없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마시로가 불쾌한 이유를 알 수 없어진 소라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시로가 기획서 그림을 가리켰다.
“미사키 그림.”
“그려달라고 부탁한 거야.”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그야 미사키 선배가 게임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시이나 너는 콘티 짜느라 바빠 보였으니까 괜히
이야기했다가는 귀찮겠다 싶어서 그런 거지.”
“소라타를 귀찮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그래?”
“응.”
아직도 마시로의 얼굴은 부어 있었다. 이건 이것대로 귀엽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싶었어?”
마시로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하면 나니까.”
“그래…… 그렇지.”
一그림은 나.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재능이 마시로에게는 있다. 그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마시로는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고 있다는 증거다.
一너는 뭐니?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소라타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대답 따윈 없다. 그렇게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마시로에게는 그것이 있다. 그리고 그 분명한 것을 소라타는 짓밟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림. 그런 것을 상담받지 못했기 때문에 화내고 있는 것이라고
소라타는 해석했다.
“소라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으면 들을게. 다 말해.”
자신에게 과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시로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단단히 결심한 소라타에게 마시로는 터무니 없는 말을 했다.
“나, 화난 거야?”
“나한테 묻지 마!”
“다음엔 뭐라고 말해야 해?”
“오늘은 한층 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역시 시이나 마시로다. 상식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다.
“가르쳐 줘.”
“……「미워」같은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제 그냥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다.
“소라타.”
“뭡니까?”
“미워.”
마시로가 입을 삐죽 내밀고 째려보았다.
이걸 어쩌나. 왔다. 제대로 왔다. 물론 무섭거나 그런 게 아니다. 전혀 무섭지 않다. 똑바로 바라보면
입이 헤벌쭉 벌어질 정도로 귀엽다.
“히죽거리지 마.”
“미안.”
필사적으로 진지한 표정을 되찾았다.
“날 봐.”
“무모한 소리 하지 마!”
보면 표정이 풀어지고 말 것이다.
마시로는 점점 불만스러워 보였다.
“다음엔 내가 그릴래.”
“으, 응.”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소라타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돌린 채 이에 응했다.
“용서해줄게.”
“그것참, 고마워.”
“사랑을 가르쳐줘.”
대화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한 발언에 소라타는 숨넘어가게 기침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을
고쳐먹었다.
“강이라든가 연못에 있는 담수어로,관상용 비단잉어는 그 무늬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며,비싼 것은
몇십만,몇백만을 하는 것도 있대.#9
마시로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크로키 북에 메모를 했다.
“메모 안 해도 돼! 물고기가 알고 싶은 거냐!”
“말한 건 소라타잖아.”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하지만…….
“나를 두근두근하게 만들어줘.”
“담담하게 그런 말 하지 마.”
“날 찌잉 하게 만들어줘.”
“그런 큰 임무,제겐 무리입니다.”
“파이팅.”
“너도 조금은 투지를 불태워 봐! 그보다 왜 갑자기 사랑 타령인데?”
“아야노가 말했어.”
“다음에 언제 오는데? 그때 나 좀 따져도 될까? 어떻게 매번 나는 아야노 씨가 해준 조언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지?”
“리얼한 사랑을 그리기에는 연애가 최고.”
“그렇습니까.”
“누구든 인생에서 한 번은 사랑 이야기를 그릴 수 있대.”
“그 편집자님,잘도 그런 쑥스러운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군.”

#9 사랑~있대 사랑과 잉어는 동음이의어다.

“얼굴을 붉혔어.”
“그건 아마 네가 너무 반응이 없어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겠지.”
편집자 역시 피해자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래서 따지는건 보류하기로 했다.
“이번 마감이 언제였지?”
“31 일에 신연재를 결정하는 회의가 있어.”
소라타의 프레젠테이션과 같은 날이다.
“지금부터 콘티 짤 거야?”
“3 화분은 해놨어.”
옆에 둔 종이 다발을 소라타 앞에 쿵 내려놓았다. 그걸 팔락팔락 넘겨보았다. 정말 다 되어 있다. 언제
봐도 빼어나게 멋진 그림이다.
내용은 쉐어하우스에 사는 예술계 대학생 여섯 명을 중심으로 한 좌충우돌 군상극.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연애와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우정도 다져나간다. 그런 느낌이다.
“있잖아.”
“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인데?”
“아야노가 그랬어. 사쿠라장을 제재로 삼아 보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설정은 꽤 손을 봤지만 등장 인물의 배경에 미사키와 진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몇 년 후의 미래. 사쿠라장의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이메이 예술대학으로 진학한다면 마시로가


그리는 만화 같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의 외부 수험을 몰랐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손에 넣을 수 없는 미래라는 생각이 들자 소라타는 약간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등장인물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욱신거리는 가슴 통증이 느껴졌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지
마시로가 얼굴을 내밀고 들여다보았다.
“재미없어?”
“아냐,재미있어.”
미련을 끊어내듯 소라타가 고개를 들었다.
만화 전체의 인상은 코믹해서 읽기 쉬웠고,템포도 빨라서 요즘 트렌드에 잘 맞다. 다만 게재되는 잡지를
생각하면 연애요소는 약간 모자란 것 같기도 하다. 현재는 청춘 드라마 냄새가 강하다.
그렇기에 아야노도 더더욱 연애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누구든 인생에서 한 번은 사랑
이야기를 그릴 수 있다 같은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그 결과,마시로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꺼내게
되었고.
“그러니까 사랑을 가르쳐줘.”
“힘들어! 난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해야 해!”
당일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다.
“괜찮아.”
“뭐가?”
“내가 도와줄게.”
“됐어! 사양하겠습니다!”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고양이들 때문에 열어둔 문틈으로 나나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경에 트레이닝복. 요즘 사쿠라장
안에서는 항상 이런 스타일이다.
“마시로,또 그런 얇은 옷차림으로 남자 방에 오다니. 그럼 못 써.”
나나미가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왜?”
“그야,그…… 남자는 에로틱한 생물이니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 나나미가 소라타를 쳐다봤다.
“나를 남자 대표로 삼지 마!”
“자,마시로는 옷 갈아입고 와야지.”
“안 돼. 아직 사랑을 못 배웠어.”
일순 나나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리고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아냐. 그런 거 아냐!”
“그,그런 거라면 어떤 거? 딱히,침대 위에서 남녀가 하는 것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저,좋지 않다고
생각한 것뿐……”
“난 그런 말까지 하지 않았어!”
“아,아무튼! 마시로는 좀 더 자신을 소중히 해. 무방비하게 남자 방에 들어오면 안 돼. 위험하다고.”
“아오야마 씨,제 앞에서 당당하게 그런 이야기는 삼가 주겠습니까?”
“그리고 칸다는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있잖아? 지금은 방해하지 말아야지.”
“난,방해 안했어.”
확인 시선을 나나미가 보내왔다.
“아니,뭐,딱히 방해……는 아니지만.”
“지만?”
“방해는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아직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이다.
“혹시…….”
“응?”
갑자기 겸연쩍어진 나나미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으면 말해.”
“괜찮아.”
“왜 마시로가 대답하는데!”
“괜찮으니까.”
“그~래,그~래,후배님과 노는 건 바로 나인걸?!”
문을 걷어차면서 미사키가 뛰어들어왔다.
“선배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마세요!”
“나, 푸딩은 원래 마시는 거라고 생각했어!”
“적어도 화제는 정리 좀 합시다! 이게 사람이야,돼지야! 그래그래,프레젠테이션은 아카사카라는 든든한
아군한테 상담할 테니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으니 다들 나가!”
여전히 투덜거리는 마시로,나나미,미사키 세 사람을 방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미사키 발에 차여 쓰러진 문을 고치고서야 소라타는 프라이버시를 되찾았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시작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아무튼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는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았다. 키보드 를 두드렸다.
一아카사카,지금 괜찮아?
一류노스케 님은 현재「좌우 어느 쪽으로든 열리는 냉장고 문을 양쪽 동시에 당기면 어떻게 되는가?」를
진지하게 고찰하느라 여력이 없습니다. 매우 죄송하지만 소라타 님의 메시지에는 응답할 수 없습니다.
답장을 보낸 건 메이드 양이었다.
ㅡ그 녀석도 그런 걸로 고민하는구나…….
一소라타 님도 참. 물론 조크에요,조크. 메이드 양 조크 입니다.
그건 아메리칸 조크 같은 걸까. 때때로 이 전자 메이드가 알쏭달쏭하게 느껴진다.
一그럼 메이드 양이라도 상관없어.
기획서 쓰는 법도 제대로 설명해 준 실적이 있으니 틀림없이 프레젠테이션 대책도 똑부러지게 가르쳐 줄
것이다.
ㅡ「그럼」,「이라도」 같은 아무나 상관없는 용건이 있으신 소라타 님에게는 어떤 벌을 내려서
없애버려야 할까요(ㅋㅋ).
一벌써 답 나왔잖아!
ㅡ어머,저도 참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무심결에 본심이.
아무래도 어느 틈엔가 메이드 양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모양이다.
ㅡ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ㅡ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면서 살아가는 법이지요.
ㅡ그런 것도 모르고,참으로 죄송합니다.
보복으로 바이러스를 보내면 난처하므로 냉큼 사과했다.
一소라타 님도 참,항상 류노스케 님과 늘 즐겁게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잖아요. 그럴 때의 류노스케 님의
웃는 얼굴을 보면 정말 어찌나 멋있는지……. 제 앞에서는 그런 표정은 절대 보여주지 않으시는데,우?!
열받아! 절대 류노스케 님은 넘기지 않을 거예요!
一저기,선전포고를 당한 직후라 무척 송구합니다만,상담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ㅡ무슨 일이야,칸다. 너무 예의 바르니 기분 나쁘군.
말투가 180 도 바뀌었다. 주인님이 강림하신 듯하다.
一최악의 타이밍에 배턴 터치하지 말아줄래? 허무해서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ㅡ용건은 뭔데?
一프레젠테이션 말이야,프레젠테이션!
ㅡ서류는 통과했나?
ㅡ덕분에.
ㅡ내 충고를 듣고 낙선했다면 바이러스 폭탄을 투하하려고 했어.
ㅡ참아주세요.
주인이나 메이드나 아주 똑같다.
ㅡ그나저나 프레젠테이션이라…….
ㅡ가능하면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선생님.
ㅡ내가 할말은 하나뿐이야.
ㅡ호오,뭐지?
一정장착용,이상.
一그게 다냐!
ㅡ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서투른 내게 뭘 기대했어?
ㅡ아니,그야 맞는 말이긴한데…….
ㅡ뭐든 경험이야. 사쿠라장 멤버들 상대로 연습이라도 해둬. 다행히도 개성 넘치는 멤버들이 모여 있잖아.

ㅡ견실한 조언,송구스럽습니다.
ㅡ그럼,난 이만.
류노스케의 아이콘이 자리 비움 모드로 변했다.
자,이렇게 되면 아까부터 등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돌아보자 문틈으로 여섯 개의 눈…… 아니,어느 틈엔가 여덟 개로 늘어났다. 진도 합류한 것 같다.
다가가자 문이 바깥쪽으로 열렸다.
“어떡할래,칸다?”
“도와줘?”
“아까는 건방진 소릴 해서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후배님,약해~. 지금부터 수행편 개막이다!”
“뭐,열심히 기어 올라오라고.”
이렇게 소라타는 결전 당일까지 며칠 동안,사쿠라장의 멤버를 연습 상대 삼아 프레젠테이션 대책을
연구해야 했다.

프레젠테이션 연습은 매일 저녁 식사 후에 하기로 결정되었다. 재미있어하던 치히로도 참가해준 덕분에


들어주는 청중은 전부 다섯 명이 되었다.
회장은 주방 테이블을 이동해서 만들었다. 마시로,미사키,진,나나미,치히로 순서대로 한 줄로 나란히
앉힌 후, 그 앞에 화이트보드를 끌어내어 와서 프린트한 기획서를 붙였다. 한 페이지씩 내용을 보충하듯
설명했다.
이게 막상 해보니 어려웠다. 시간 분배도 알 수 없었고 처음에는 주어진 15 분이란 시간 중 고작 5 분
만에 설명이 끝나버렸다. 뒤이어 한 두 번째 연습에서는 20 분이 넘어도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았다. 세
번째,네 번째 반복하면서 시간 감각만은 조금 익혔지만,프레젠테이션 정확도로 따지면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기획 내용은 잘 이해하고 있을 터인데 말은 더듬더듬 나왔고,말도 앞뒤가 맞지 않아 횡설수설이었다.「에
~」라든가 「아~」같은 감탄사만 몇 번이나 반복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시간 가까이 연습한 후,치히로가 말했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칸다,우리 상대로 하면서 너무 긴장했어.”
“뭐랄까~,평소의 후배님이 아니라 재미없어~.”
“높임말로 설명하니 전부 재미없게 느껴져.”
이렇게 나나미,미사키,진에게서도 지적이 들어왔다. 마시로는 소라타의 따분한 프레젠테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부터 졸고 있었다.
첫날 프레젠테이션 연습은 참패. 설마 이렇게나 참혹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소라타는 당황했다.
다음 날,밤 프레젠테이션 연습 전에 소라타는 아침부터 일어나서 커닝페이퍼를 준비했다. 치히로의
말대로 기승전결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요점을 조직해 나갔다. 필요에 따라 기획서 순서도 바꾸고,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할 지도 재고했다.
진의 지적도 실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말하면서 소라타도 느꼈던 것이다. 평소 어투가 아니면
머릿속 생각을 스트레이트로 표현할 수 없다. 분위기와 텐션이 잘 전달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렇다고
반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여러 번 반복해서 높임말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긴장감. 아는 얼굴을 앞에 두고 하니 가슴이 벌렁거려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나미 에게 조언을 구했다.
“긴장해도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습을 계속하면 돼.”
요컨대 긴장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건 어려우니 긴장해도 말할 수 있도록 내용을 몸으로 익히라는
이야기다.
이 말에는 바로 납득했다.
“그리고 전부 같은 느낌으로 말하면 단조로워서 질리니까,템포의 강약 조절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나미가 말했다. 실제로 마시로는 프레젠테이션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소라타가 조는 수업을
떠올려 보니 확실히 텐션이 균일한 과목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을 프레젠테이션 당일까지 어떻게든 구체화하고 싶다. 그게 최소한의 목표였다.
커닝페이퍼 내용을 중얼거리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돌아보자 파자마 차림의 마시로였다. 자기 방이나 다름없는 태도로 들어와 침대
위에서 작업 하고 있던 소라타의 등에 기대어 앉았다. 말없이 가져온 크 로키 북에 연필로 끄적거렸다.
경쾌한 템포로 선이 그려질 때마다 어딘가 시원한 소리가 났다. 새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의문을 품은 소라타의 시선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에~,저기요,시이나 씨.”
이름을 불러도 한동안 크로키 북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소라타는 자기 작업을 진행했다.
5 분 정도 경과하여 마시로가 대답했다.
“왜?”
“저기,뭐더라? 아,그래,맞다. 내 프라이버시는?”
멋대로 방에 들어와서 멋대로 자리에 앉는 것도 모자라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까지…… 이래서는
존재의의까지 의심스러워진다.
“없어.”
“그렇구나,없구나. 그럴 거라 생각했어.”
“있어.”
“그럼 하나 물어보겠는데,여긴 어디지? 넌 지금 뭘 하고 있고?”
“소라타 방. 캐릭터 디자인.”
“네 방이 있잖아. 항상 방에서 작업했잖아.”
“오늘부터 여기서 할래.”
“좋아,그 이유를 물어볼까.”
“그건…….”
마시로가 연필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왜? 라고 되묻지는 마.”
여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를 쳤다.
그러자 뭔가 말하려던 마시로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린 거냐!”
“아냐.”
“호오. 그럼 다시 한 번 이유를 물어볼까.”
예상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소라타는 살짝 기분이 들떠 마시로를 도발했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것을
유발하게 될 줄도 모른 채…….
“여기서 하면…….”
“여기서 하면?”
“사랑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뭐?”
사랑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나? 그게 소라타의 방에서 작업하는 이유라고……. 왜 그게
소라타의 방인가…….
어째서. 이유가 뭘까. 이건 어쩌면…….
아니,아니,지금은 그게 아냐. 할 일이 있다.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겨 어쩌라는 건가. 어렵게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프레젠테이션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있으면,안 돼?”
“아,아니…… 그건.”
“내가 있으면 안 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들어 소라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오야마가 보면 또 혼날 텐데.”
“그럼 여기 있을래.”
더욱 분명하게 마시로가 단언했다.
“뭐?”
“……소라타는 항상 나나미.”
“무슨 소리야?”
“몰라.”
마시로는 소라타에게 등을 돌린 채 캐릭터 디자인에 집중 했다. 선을 긋는 소리,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샤프함이 더해 졌다.
“방에 있는 건 상관없는데.”
작업을 하는 한,마시로는 무척 조용하기 때문에 커다란 인형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뿐이다 .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방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라타는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래도 마음이 있는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계속 무시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춘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마시로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일지 모르지만 때때로 고민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디자인이 잘되지 않기
때문인지,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라타의 의식을 돌리는 데는 충분한
파괴력이 있었다.
덕분에 정기적으로 마시로를 관찰하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마시로는 계속 침대 위에 있으면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기도 하고,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고 있기도 했다. 심할 때는 엎드려서 다리를 흔들거리기도 했다. 변함없는 건 항상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때로 소라타와 시선이 마주친다는 것이었다. 먼저 소라타가 보고,마시로가 시선을
눈치챌 때도 있었고 그 반대 패턴도 비슷한 빈도로 일어났다.
“왜 봐?”
“안 봐.”
“거짓말,봤으면서.”
“너야말로 봤잖아.”
“안 봤어.”
“거짓말하지 마.”
“안 봤어.”
“나도 안봤어.”
“…….”
“왜,왜 말이 없어?”
“남자답지 못해.”
“트집 잡지 마!”
이런 대화를 반복하는 와중에 해가 졌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나나미가 도넛 선물이 있다고 밖에서 말했다. 문은 열어놓은 상태였으므로
나나미의 시선은 곧 침대 위의 마시로에게로 향했다.
“몇 번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나나미,어서 와.”
“응…… 이 아니라! 정말, 왜 마시로 넌 그렇게 잠옷을 입고 남자 방에 오는 건데?”
“소라타가 입을 옷을 안 꺼내주니까.”
“그게 내 탓이냐!”
“칸다도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하여튼 변태라니까.”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그래!”
“정말 안 해?”
“응. 그 증거로 오전부터 있었는데 이 시간까지 아무 일도 없었잖아!”
“흐음~,계속 같이 있었구나.”
나나미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
“어, 어라? 나,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나도 멍청하게 있으면 안 되겠어.”
이 말은 너무 작아서 소라타는 잘 듣지 못했다.
“응?”
“아무튼! 마시로는 나랑 같이 2 층으로 올라가!”
나나미가 다짜고짜 마시로의 손을 끌었다.
“어,어이.”
“오늘도 프레젠테이션 연습할 거지? 너도 얼른 준비해!”
“으, 응.”
“안 봐줄 거야.”
“공사는 구분하자!”

다음 날도,또 그 다음 날도 마시로는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와 뭔가 용건을 말하지도 않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는 소라타의 등에 기대 자기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매일 밤,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나나미에게 혼나고 2 층으로 끌려 올라가는 패턴을 반복했다.
소라타는 그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밤에는 사쿠라장 멤버를 상대로 프레젠테이션 연습. 낮에는 전날
연습에서 한 실수를 참고하여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원고를 준비하고 혼자 연습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해는 뜨고 또 졌다.
이렇게 운명의 8 월 31 일. 소라타에게는 프레젠테이션 당일,마시로에게는 신연재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여름방학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결전 당일 아침에는 일어난 순간부터 몸 한가운데서 부유감이 느껴졌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이래 슬금슬금


다가오던 진짜 긴장감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소라타는 눈을 떴지만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밥 달라고 고양이가 몸을 비비적거리는 것도 무시했다.
똑바로 누운 채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려 보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처음부터
다시했다. 그걸 일곱 번 반복했다.
괜찮아.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 준비는 끝났다.
이렇게 기합을 넣어도 불안감에 하복부가 욱신거렸다.
열 시가 넘어서야 소라타는 겨우 방에서 나왔다.
주방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줬다. 일곱 마리 고양이는 천진난만하게 열심히 먹었다.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면서 소라타도 토스트를 베어 먹었다.
사쿠라장은 고요했고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은 연극학부 4 학년 학생인 아사미 누나 집에서 잤다. 나나미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이미 나가고 없다.
치히로는 학교에 갔을 것이다. 미사키가 조용한 건 자고 있다는 증거다.
마시로도 책상 밑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신 연재를 결정하는 회의에 낼 콘티를
수정하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을 소라타는 의식했다. 그리고 그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괜히 신경을
써주면 부담을 느낄 테니까.
소라타는 고양이를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느긋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커튼레일에 걸어둔 정장은 진에게 빌린 것이다. 레이싱퀸인 스즈네 누나에게 레스토랑에 초대받았을 때
선물 받은 것이라고 했다. 약간 사이즈가 크긴 했지만 불평할 입장은 아니다.
옷깃이 빳빳한 와이셔츠를 입었다. 단추를 제일 위부터 잠갔다.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졸라매자 제법
긴장감이 들었다. 몇 번을 봐도 시치고산#10 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이것 만큼은 어쩔 수 없다. 사흘 전에
시착했을 때는 시쿠라장 모두에게 큰 웃음을 안겨 주었다.
재킷은 입지 않고 들고 가기로 했다. 지금부터 전부 갖춰 입었다간 땀투성이가 될 것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몇 번이나 고쳐 쓴 커닝페이퍼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소라타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쪼그려 앉아 구두끈을 묶었다. 벌써 손이 떨린다. 다 묶은 후 뺨을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라타.”
계단을 내려온 마시로가 소라타를 불러 세웠다.
전에 소라타가 골라준 티셔츠와 캐미 원피스를 맞춰 입고있다. 자면서 헝클어진 머리도 스스로 정리한
건지 오늘은 얌전했다.

#10 시치고산(三五七) 어린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날. 남아는 3, 5 세. 여아는 3. 7 세에 나들이옷 을


입혀 참배한다.

마시로가 돌아본 소라타의 가슴에 무언가를 안겼다. 받으려다 마시로와 손가락이 닿았다.
꼭 쥔 손을 펴자,합격기원 부적이 있었다. 여기서 30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사의 것이다. 스이메이
예술대학을 노리는 수험생들이 종종 사러 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거,어떻게 된 거야?”
“어제갔다 왔어.”
“아오야마에게 부탁했어?”
“왜 나나미야?”
마시로가 약간 불만스럽게 소라타를 올려다보았다.
“어? 그야,너 설마,혼자?”
“찾아보고 사람들한테 물으면서 많이 걸었어.”
듣고 보니 어제 마시로가 방에 온 건 저녁이 된 이후였다. 자기 방에서 콘티 작업을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미안,나 아무것도 준비 못 했어. 오늘 연재 여부 결정날 텐데.”
“난 괜찮아.”
되묻기 전에 소라타의 오른손을 마시로가 양손으로 감쌌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뗐다.
“뭐가「응」이란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상관없나……. 아무튼 이거,고마워.”
소라타는 마시로를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신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갈게.”
“잘 다녀와.”
소라타는 마시로의 배웅을 받으며 잰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마시로에게 받은 부적을 꼭 움켜쥐었다.
마음을 담은 후 바지 뒷주머니에 잘 넣었다.
역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쯤 가자 신주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환승해서「게임을 만들자」를 주최하는
하드 메이커 자사 빌딩으로 갔다.
소라타는 환승한 전철의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에 앉지 않고 문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아랫배부터
허벅지 윗부분에 침전한 불쾌감 때문에 앉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철이 한 정거장 나아갈 때마다 그런 긴장감은 고동을 동반하며 성장했고,지금은 소라타의 중앙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무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 물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차내 방송이 다음 역명을 알렸다. 소라타가 내릴 역이다.
몸에 묶은 끈을 누가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라타의 신경이 팽팽해졌다.
아직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철은 시간을 지켜 역에 정차했다.
문이 열렸다. 소라타는 정장 차림의 인파에 섞여 비틀거리면서 홈에 내려섰다.
노란색 안내판을 보고 출구를 확인했다. 회사 이름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종당하듯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하나 올라갔다. 개찰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세 번째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30 층 이상은 될 법한 빌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리벽의
화려한 건물로 반짝거렸다. 못 찾으면 어떡할까 생각했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빌딩 중심부에
큼지막하게 회사 로고가 적혀 있었다. 소라타의 목적지다.
탁 트인 1 층은 전망이 좋아서 밖에서도 모습이 잘 보였다. 자동문 앞에 경비원이 두 사람. 하얀 타일.
그 안에 있는 접 수처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예쁜 누나 세 명이 서 있었다. 미소를 잃지 않고
방문자들에 대응하고 있었다.
폴로어 공간 중 앞쪽 반에는 멋들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지금도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이
앉아 상의하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앞에는 역의 개찰 구와 비슷한 게이트가 있었다. 카드를 대고
사람들이 통과했다. 그런 보안 시스템인가 보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이 소라타를 덮쳐왔다.
ㅡ큰일이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냐.
아군은 없다. 고립되어 있다. 붕 떠 있다. 그걸 자각하자 점점 더 불안해져 갔다. 뱃속 상태까지 안
좋아지는 형편이 었다.
자동문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소라타를 경비원이 수상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당황한 소라타는 정장
상의를 입었다. 그리고 도전 정신으로 빌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냉방이 되고 있는 시원한 공기가 소라타를 맞이했다. 하지만 땀이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흘러내렸다.
잘못온 것 같다는 정도의 혼란이 아니다. 당장 우향우하여 전력질주로 달아나고 싶다.
경비원에게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안심한 순간 이번에는 안내데스크의 여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내 누나가 생긋 웃는 바람에 눈 둘 곳을
몰라 접수처 앞에 섰다. 세 사람 중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가운데 있던 누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저기…… 나,아니,저…… 전「게임을 만들자」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왔습니다만.”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양쪽 옆에 있던 누나들이 살짝 웃었다. 어색한 모습으로 분발하고 있다는 건 누가
보나 알 수 있었다.
“그럼 성함을 여기 적어주시겠습니까?”
안내 누나가 엽서 사이즈의 종이와 같이 볼펜을 내밀었다.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성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수 백 번 써본 자기 이름조차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삐뚤빼뚤 했다. 회사명을 적는 곳은 공백.
약속 상대 이름도 공백으로 둘 수밖에 없었지만,이름만 적으니 안내 누나가 종이를 받았다.
“그럼 칸다 님,이걸 걸어주세요.”
목걸이형 입관증명을 내어주었다. 일단 이름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바로 담당자가 올 테니 저쪽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누나가 뒤에 있는 멋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옆에는 다른 누나가 솜씨 좋게 내선으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그게 담당자일까.
소라타는 설명을 들은 대로 입관증명을 목에 걸고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등을 곧게 세운채 얌전히
기다렸다.
후~우,크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은 웬만하면 보지 않으려 했다. 보면 자기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또 배가
아파질 것이다.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약간 멀리서 들렸다.
발소리가 다가온다.
시선을 들자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이 소라타를 보고 있었다.
“칸다 님이신가요?”
연령은 20 대 후반. 화장이 옅어서 맑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아,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말투까지 시원시원했다.
일어나서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개찰구 같은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건 아까 지나간 사람을 봤기 때문에 입관증명서를
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했다.
문을 열어주자,소라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숫자는 36 층까지 있다. 여사원이 그 중 25 층 버튼을 눌렀다.
소리도 진동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바로 도착 소리가 났다.
“내리세요.”
이번에도 소라타가 먼저 내렸다. 먼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융단 같은 감촉.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여사원이 개의치 않고 걸어간 덕에,소라타는 구두를 벗는 실수는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7 번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정장 차림의 손님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소라타와 같은
입관증명. 서류심사 합격자다.
중년 남성 사원이 그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러 데려나갔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부터
프레젠테이션이구나.
“여기서 기다리세요.”
회의실 한가운데의 의자에 앉았다. 앞에는 또 다른 프레젠테이션 도전자가 명상하고 있었다.
여사원은 회의실 입구에 서서 무슨 일이 있으면 대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소라타를 포함한 세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방은 고요했다.
그리고 몇 분 후,소라타 앞에 앉은 다른 프레젠테이션 도전자도 중년 사원에게 불려 나갔다.
먼저 간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이 방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지금은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해야 한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까지 준비한 것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큰일 났다. 감정에 몸이 반응한다. 배가 아프다. 속이 쓰리다. 도망치고 싶다.
“저,저기,죄송합니다.”
“네,왜 그러시죠?”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걸로 완화될 정도로 소라타의 긴장감은 가벼운 단계가 아니었다.
뭔가 평소보다 시야가 좁아진 기분이 들었다. 몸이 둥실 거렸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안내받은 화장실은 청소가 잘 되어 반짝반짝했다. 이런 적지에서 바지를 벗을 용기도 없는지라,소라타는
옷을 입은 채로 변기에 앉았다.
긴장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신이 없으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상상보다 열
배는 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었다.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소라타는 주머니 안의 부적을 꼭 움켜쥐었다.
한심한 결과로 끝낼 수는 없다.
일어났다. 자동으로 물이 내려갔다.
손을 씻고 입을 행궜다. 흐트러진 머리와 넥타이를 바로 잡고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사신 같은 새까만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와 있었다. 앞서 두 사람을 데려간
사원이다.
“칸다 님. 시간이 되었으니 준비가 되었으면 시작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제대로 말했어.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어.
회의실을 나왔다. 긴 복도를 똑바로 걸어갔다.
제일 안쪽에 임원 회의실이라고 적힌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 사원이 노크했다.
“칸다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안에서 돌아왔다.
돌아본 남성사원은
“그럼 잘부탁합니다.”
이 말만을 하고 문을 열었다.
소라타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야단스러운 이름의 방은 조금 전까지 있던 회의실 두 배 정도의 넓이. 대충 교실 두 개 분이었다.
길쭉했다.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 그 옆에 컨트롤용 노트북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곳에 서서
설명하라는 뜻일 것이다.
심사위원은 전부 다섯 명. 횡렬로 앉아 있다. 네 사람은 정장.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있다. 이
회사 대표 이사다. 게임쇼나 E3 엑스포 때마다 차세대 하드 전략,상품력을 어필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곤
했다.
나머지 사람은 모른다. 아니, 제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안다. 혼자 사복 차림이다. 그것도 티셔츠
한 장이라는 프리한 차림이었다. 초기「게임을 만들자」에서 액션 퍼즐 게임을 개발한 인물. 이름은
후지사와 카즈키. 스이메이 예술대학 출신으로 여전히 히트 상품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게임 크리에이터다.
“칸다 씨,시작하세요.”
이렇게 인사한 건 왼쪽 끝에 있던 남자다. 소라타 눈으로 보면 아버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연령이다.
그런 사람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받은 적이 없는 소라타의 반응은 둔 했다.
“네?”
“시작하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지금껏 살아온 세계와는 달랐다.
“아,아,네.”
앞으로 나갔다. 앞부분은 한 단 높게 만들어져 있어서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다섯 명의 심사원의 거동이 잘 보였다. 세 사람은 지루해 보였다. 다른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럼 기획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극도의 긴장 상태지만, 소라타의 첫 목소리는 괜찮았다. 말이 빨라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 듣기
싫지 않았다. 목소리도 잘 나온다.
나나미의 충고 덕분에 긴장해도 일단은 말문이 막히지는 않았다.
우선 기획 콘셉트를 정중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리고 게임 전체 규모를 해설하면서 타겟층을 분석했다.
적당히 목소리의 톤과 말하는 페이스는 조절하면서 진행했다.
베네핏 설명에서는 플레이하는 유저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도록 몸짓 손짓을 적절히 섞어가며 기획서
내용을 보충 했다.
처음 5 분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한 것치고는 잘했다.
그러자 여유가 생긴 소라타는 세세한 게임 내용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여태까지는 안 보려고 애쓰던
심사위원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았다.
연거푸 시선이 마주쳤다. 전원 어딘가 불쾌해 보였다. 팔 짱을 낀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반응이
나쁘다. 한 사 람은 계속 아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신감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고,소라타를 지지하고 있던 것은
허탈하게 붕괴하고 말았다.
새하얘졌다.
눈앞도,머릿속도.
다음으로 무엇을 하고,어떤 이야기를 할지가 전부 날아가 버렸다. 아무튼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넘겨야 해. 아니,원래 궤도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 봐야 이 썰렁한 반응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빨간 불빛이 깜빡였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그 후,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기획서 마지막 페이지를 전부 읽은 순간은 어느 정도 기억한다. 커닝페이퍼에 적어놓은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연습의 성과다. 머릿속은 엉망이어도 몸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의응답에서는 세 개의 질문이 왔다.
하나는 사장님. 두 개는 후지사와 카즈키가 했다.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럼 칸다 씨의 프레젠테이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소라타는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상태로는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됐다. 어차피 결과는 며칠 후에 편지로 올 것 이다. 아무튼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다. 이 회사에서 도망치고 싶다. 정장을 벗고 싶다. 넥타이를 풀고 싶다. 평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갈망했다.
“칸다 씨.”
이름을 부른 건 사장이었다.
“우선「게임을 만들자」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저야말로,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이 눈인사를 했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번 기획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군요.”
“…….”
지금,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네…… 그렇습니까.”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멋대로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실례했다고 말한 소라타는 임원 회의실을 나왔다. 여기까지 안내해 준 남자 사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 층까지 내려왔다. 또 역 개찰 같은 게이트를 지나갔다. 접수에 입관증명을
반납했다. 남자 사원의 90 도 인사를 받으며 빌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에게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설마 그 자리에서 결과를 통보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끝나면 끝난 대로 한고비 넘겼다고 스스로 칭찬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 했는데…….
게다가 뭐야,그 태도는. 어른이 존댓말을 쓸 때의 불쾌한 기분. 사장까지 소라타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게 업무인가. 사회인이라는 건가.
류노스케는 고등학생 감각을 버리라고 했다. 그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서류심사를 통과했다고 자만한 것도 있다. 좀 더 자신의 기획을,흥미를 갖고 들어줄 거라고 착각했다.
속상한 마음과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항할 기술도 도망칠 방법도 없는 소라타는
순식간에 그 파도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그 앞은 깜깜한 어둠밖에 없었다.

예대앞역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가 조금 넘은 후였다. 여름의 이 시간은 아직 밝다. 망령 같은


걸음걸이로 소라타는 홈에 내려서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붉은 기와 상점가 한복판을 비틀비틀 걸어갔다.
도중에 어물전 아저씨가
“여,꼬맹이 칸다잖아! 꼴이 그게 뭐냐!”
이렇게 말하며 폭소해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정육점 앞에서 아주머니에게,
“세상에, 소라타 아니니. 어머나,못 알아봤네. 아줌마가 20 년만 젊었으면~.”
이렇게 농담을 던져 와도 버럭할 여유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말을 걸었다. 그 전부를 소라타는 한 손을 드는 것만으로 대답했다. 대부분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10 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사쿠라장으로 돌아오기까지 30 분이 넘게 걸렸다.
말없이 문을 열고 현관문에 손을 댄 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 다녀왔다고 말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모두에게 결과를 보고할 의무가 있다. 매일 몇 시간씩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이런
안타까운 결말을 듣고 싶을까. 괜히 마음만 쓰게 만들 뿐이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소라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이 있는 뒤쪽으로 돌아갔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저물어가는 태양을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몸이 붉게 물들었다. 만신창이에 피투성이다.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얻어맞았다.
모든 것이 모자랐다. 닿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고 해도 오늘 보여준 모든 것이 지금 소라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게으름 부리지
않았다. 준비도 제대로 했다. 아이디어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안 됐다. 그게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전부다.
“……큭.”
이마를 짚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코안이 시큰거렸다. 안구가 뜨거웠다.
이런 한심한 눈물은 흘리기 싫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견뎠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건만 자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의 승산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든가,다음에는 해낼 수 있을 거야 같은 그런 위로의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라타.”
“…….”
마시로의 목소리다. 새삼 잘못 들을 리 없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소라타?”
“갔다 왔어…….”
난처해 보이는 마시로에게 이 말만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서 와.”
툇마루 위를 마시로가 다가왔다. 그 기척을 느끼고 소라타는 미리 방어선을 쳤다.
“연재는 어떻게 됐어?”
“하기로 했어. 11 월 발매호부터.”
“그렇구나. 축하해.”
“응. 고마워.”
역시 마시로다. 제대로 결과를 내보였다.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재능. 게다가 그 재능을 키우는 노력도 하고 있다.
과연 나와 마시로는 뭐가 다른 걸까. 그 정도쯤이야 얼마 든지 말할 수 있다. 마시로는 쭉 재능의
세계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입장으로 살아온 것이다. 몇 번이 나 상처받으면서도 몇
번이나 재기했다. 그런 모습은 전에 도 봤다.
지속하는 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힘. 아픔에 지지 않는 강인함. 모든 면에서 소라타는
마시로와 비교가 안 된다. 물론 실력으로도.
“그럼 그려야겠네.”
“응. 1 화 원고 하면서 다음 콘티도.”
“바빠지겠네.”
“…….응.”
소라타의 결과는 역시 마시로도 모를 것이다. 마시로가 소라타 옆에 앉으려 했다.
“여기 있지 말고 그려.”
“그치만…….”
“시이나.”
“응?”
“여긴 앞이 아냐.”
마시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게…….”
우향우를 하여 마시로가 떠나갔다. 어차피 닿을 수 없다면,까마득히 먼 곳까지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희망 따위 품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에 가주었으면.
어디까지고 마구 달려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남겨진 소라타는 마시로에게 받은 부적에 조용히 사죄했다. 지금은,지금만은 마시로 옆에 있는 것이
괴로웠다. 마시로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해도,마시로의 존재가 자신을 비난했다. 그 눈이 자신을
쳐다보면,더 오래전부터 노력해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어진다.
마시로를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아아,그렇구나. 바로 이거구나.
흐릿했던 것의 윤곽이 갑자기 뚜렷하게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진이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구나.
아픔의 깊이가,드디어 소라타도 이해가 됐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자신의
감정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멀다. 너무 멀다. 지금의 소라타에게 마시로는 별 같은 존재였다. 손을 뻗어서 닿을수 있을법한 거리가
아니다. 보이기는 하지만,닿기에는 터무니없이 엄청난 여정이 있다. 그 여로를 생각하면 의지가
꺾여버릴 것 같다.
이런 것이 보이면 확실히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싫어서 거리를 두려 한다.
진이 미사키와의 일로 고민하는 것도 당연하다. 진도 주체 못하는 감정을 자신이 시간이 지난다고
어떻게든 할 수 있을까.
답 같은 건 나올 리가 없다. 소라타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 소라타 옆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울어도 돼.”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나나미 였다. 소라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
“난 아오야마가 아니니까 안 울어.”
“뭐,뭐라는 거야. 사람이 기껏…….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는 울어서…….”
“미안,거짓말이야. 고마워.”
“그 말을 먼저 해야지,정말…….”
“어이,아오야마.”
“왜?”
“진심이 된다는 건,힘든 거구나.”
“응. 그렇지.”
“후회라든가,속상한 마음이라든가,그런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어.”
이번 패배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전부 내 탓. 대충 하지도 않았다. 전력으로 부딪쳤고,그리고
산산조각 깨졌다.
“하지만 난 목표를 갖고 사는 사람이 좋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좋고…….”
옆에 앉은 나나미의 옆얼굴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뭐,뭘 봐?”
“……아니,아오야마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서.”
“무, 무슨소리야…….”
고개를 숙인 나나미가 몸을 웅크렸다.
“아냐! 딱히 다른 의미가 아니라…… 나, 뭐라고 했지?”
“하아~,그런 건 고치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이건 그…… 왠지 아오야마 덕분에 좀 편해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난.”
“그래,그래. 알았습니다.”
“뭐야,그 사람 바보 취급하는 태도는.”
“아,눈치챘어?”
“쳇…… 남이 모처럼 고마워하고 있는데.”
자연히 소라타의 표정이 풀렸다. 마시로 앞에서는 이런 식으로 웃지 못했다.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나나미는 다른 기분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이 옆에 있는 기분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솔직히 기뻐할 마음도 안 드는데.”
나나미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위압적인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럼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정말 괜찮아?”
“아아,왠지 마음이 편해졌어.”
“뭐야,그게?”
프레젠테이션 실패를 생각하자 언짢아졌다. 오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고, 그것을 소라타는 이전의 마시로에게 배웠다. 결국 분한 마음을 씻는 방법은 노력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가까운 미래,내가 성장한다면 분명히 이 아픔도 딱지가 되어 떨어질 것이다.
그걸 알면 괴로운 마음속에 한줄기의 즐거움이 싹트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는 도전하려는 산의 높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을 경험함으로써,목표가 훨씬 더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모가 보인 건 아니지만,도전할 상대의 강대함을 슬쩍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의 거대함이,
강인함이,소라타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
“으아…… 왠지 즐거워졌어.”
“칸다,너 마조였구나.”
“그것도 평범하다는 말보다는 기쁘네.”
“우왓,완전 진성이야. 과연 사쿠라장 주민답다.”
“지금은 아오야마도 그 일원이야.”
“윽,그랬지…….”
하늘을 봤다. 다음에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소라타는 그렇게 결심했다.
나나미가 툇마루 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뭔가 있는 걸까.
“신경 쓰여서 안달인가 보네.”
“어?”
“마시로 말이야.”
이 말에 돌아보자 건물 안에서 마시로가 이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소라타에게 들켰다는 걸 깨닫자,
일단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쭈뼛쭈뼛 눈이 닿는 곳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나나미가 손짓했다.
“이제 괜찮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소라타는 응 하고 대답했다.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나미한테는
당할 수가 없다.
“근데 너,보고 있었던 거야?”
“뭐가?”
나나미가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그 모습으로 보아 소라타와 마시로의 대화는 전부 들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마시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라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안 됐어. 다음엔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응.”
마시로도 소리 내어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 한마디로 충분 했다. 마음은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마시로를
앞에 두고도 괴롭지 않았다.
“이제 됐어?”
나나미의 질문에 소라타도 마시로도 말없이 대답했다.
“그럼 나도.”
이렇게 머리말을 꺼내더니 나나미는 똑바로 마시로를 쳐다보고
“마시로에게는 안 져.”
이렇게 가벼운 느낌으로 선언했다.
약간 놀란 듯 마시로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바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는건 싫어.”
이렇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 의미를 소라타는 완전히 잘못 이해했다.
“응,나도.”
“……그런 뜻 아냐.”
“어?”
“아무것도 아냐!”
“왜 화를 내?”
“화내긴 누가!”
“화냈잖아!”
“너 진짜 죽는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소라타 바보!”
“시이나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오~,후배님,어서 와~!”
그때 핫피#11 를 입은 미사키가 뛰어나왔다. 양손에는 다 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불꽃이 들려
있었다.
“뭐야,소라타. 돌아왔냐?”
진도 방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미사키가 모두에게 불꽃을 나눠주며 돌아다녔다. 불붙은 촛불과 양동이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했다.
“여름 하면 불꽃이지! 불꽃놀이도 안 하고 여름을 논하지 말지어다! 여름은 끝날 수 없어! 그래서
지금부터 불꽃놀이 대회를 개최할 거지롱~!”
이렇게 말하면서 미사키가 하늘로 쏘아 올리는 불꽃에 차례로 점화해 나갔다. 통에서 불꽃이 하늘로
올라갔다.
진도 방에서 나와서 봉투를 뜯고 불을 붙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나나미도,
“뭐, 아무렴 어때.”
라는 말만 계속했다. 예상대로 불꽃놀이를 해본 적 없는 마시로에게도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있다.

#11 핫피 가게 점원들이나 축제 때 위에 걸쳐 입는 일본 전통 옷.

“불꽃은 사람을 향해서 쏘면 안 돼.”


“소라타는?”
“나도 사람이야!”
소라타도 참전해서 대량의 불꽃놀이에 불을 붙였다. 예쁜 불꽃이 흩어지며 어둠을 밝게 수놓았다.
사라지면 금세 새로운 불꽃을 쏘아 올렸다. 다들 웃는다. 즐거워 보인다. 그래서 소라타의 마음도
개운해졌다.
툇마루에서는 치히로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 경계하면서 고양이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럼 다음은 이거다!”
미사키가 핫피 안에서 꺼낸 것은 메론 사이즈의 커다란 공 모양. 골판지 같은 외장에 도화선이 나와있다.
본 적이 있다. 본격적인 불꽃이다.
전원 뻣뻣해진 틈을 타 미사키는 어느 틈엔가 정원에 설치되어 있던 커다란 통에 그 공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점화.
“기다려요,선배!”
한발 늦게 소라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직후,공이 통에서 튀어나와 저 높은 하늘로 솟구쳤다. 피유~웅 하는 정취 넘치는 소리가 나더니,그
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구름 한 점 없는 여름의 밤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피어났다.
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나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 미사키가 불꽃이다아~라고 소리를
질렀고 치히로가 맥주를 뿜었다. 마시로는 아무런 감동도 하지 않은 듯 그저 불빛만 받고 있었다.
바로 밑에서 보는 불꽃은 신선하고 짓눌릴 것 같은 박력이 있었다. 진동이,소리가,부딪쳐 온다.
온몸으로 불꽃을 느꼈다.
밤하늘을 비추는 커다란 꽃을 소라타는 마음에 단단히 새겨놓았다. 올여름의 추억으로서. 아마 진도,
미사키도,나나미도,마시로도,치히로도 소라타처럼 기억에 새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늘을 지배한 불꽃도,이윽고 밤에 녹아 사라져 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대신,시쿠라장에서 치히로의 절규가 울려퍼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다들,거기 한줄로 서!!”
8 월 31 일.
이날 시무라장 회의 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혔다.
ㅡ불꽃놀이를 했다. 예뻤다. 서기·시이나마시로.
ㅡ앞으로「대회」를 개최하는 경우에는 센고쿠 치히로의 허가를 필히 받을 것! 수영장에 숨어들어 갔던
것도 다 알고 있어! 추기·센고쿠 치히로.

〈2 권 마침>

서점에 이 책이 진열될 즈음에는 이제 그만 세도 되지 않 을까 싶은,무시무시한 서른두 번째 생일이라는


것이 돌아 올 예정입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차이나칼라
교복이라는 것을 입게 된 그 날로부터 무려 16 년이나 흘렀다는 소리라 이 말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는 서른을 넘은 제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았습니다만,지금은 제게도 10 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네요. 정말로요…….
당시의 제가 지금의 절 보고 실망하지 않기를 빌어봅니다.

이 얘기는 차치하고 완전히 늙어버린 뇌를 어떻게든 회춘 시키면서 쓰고 있는「사쿠라장의 애완그녀」2


권은 마음에 드셨는지요. 마음에 드셨다면 기쁘겠습니다. 안 드셨다면…… 그냥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제목이기도 한「사쿠라장」은 어감과 익숙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붙인 이름입니다만,별로 특이한 이름이


아닌 탓에 슬쩍 검색해봤더니 전국 여기저기에 실재하는 모양입니다. 딱히 특정 사쿠라장을 모티프로 한
것은 아닌데…….
어쩌면 여러분 생활권에도 사쿠라장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라고 하시면,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잠시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편지를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고맙습니다. 정말이지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소중히 읽고 힘을 얻어 다음에도 새하얀 원고와 열심히 싸워보려 합니다.

또한 디자이너 T 님,기획서 이미지 데이터까지 작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예쁜 일러스트를


그려주신 미조구치 케이지 님,담당편집자인 아라키 님께도 감사 인사 를 드립니다.
그럼 다음에는 여름 즈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카모시다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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