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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모노가타리[흑]

니시오 이신
Illustration/VOFAN

번역: M_A_

제금화 츠바사 패밀리

/001

하네카와 츠바사와 마음껏 놀았던 골든위크 때를 새삼스레 떠올린다. 이제 와선 씁쓸하고, 찝찝한 추억이기에,
어딘가 달콤쌉싸름한 추억이라고 해도, 만약 가능하다면 잊어버리고 싶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해도 없던 일로
해두고 싶은, 황금색으로 빛난 9 일 동안의 일을 떠올린다.
하네카와 츠바사. 19 살. 성별 여자. 고등학교 3 학년. 클래스의 반장. 우등생. 앞머리를 가지런히 3 갈래로
땋은 상태. 안경 착용. 성실, 착실함. 선량. 머리가 아주 좋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아무리 알기 쉬운 기호적인 정보, 캐릭터 설정을 나열한다고 해도, 저 예외적인 그녀를 표현할 수 있다니,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녀한테는, 그녀를 실제로 마주 보거나 실제로 상대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실제로,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그녀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 때는 신들의 언어가 필요하겠지.
혹은 악마의 언어일지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진짜로, 정말로 죄송스럽기 짝이 없지만, 만약 골든위크 때의 일을 지금부터 상세하고,
아주 세세하게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애기한다고 해도, 저 악몽과 같은 9 일 동안의 진실은, 혹은 저 악몽과 같은
9 일간의 진실에 한없이 가까운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애초에 단념하고 있다.
그 일을 전달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나는 귀차니즘의 현신이며, 체념의 화신이다.
애초에 나는, 절대로 남한테 내 생각을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ㅡ 단적으로.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나의 은인에 대해,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내 친구에 관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릴 뿐이다.
아마, 의미도 없이.
확실히ㅡ 아무 것도 아닌.
누구한테도, 나한테조차, 의미없는, 아무 것도 아닌.
텅 빈 상태란 건 이런 것이다.
그야말로 나중에 만나게 될 센죠가하라 히타기나, 칸바루 스루가 입장에서 본다면ㅡ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희생하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한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짓밟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강함을 가진 그녀들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지금부터 시도하려는 회고주의나 복고주의는, 극히
경박한 노스탤지어라서,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들고, 비웃을 가치도 없는, 생산성이 결여된 퇴보적인 행위로
비춰지는 게 틀림없다.
인간은 모름지기 낙관적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어서, 긍정적인 태도는 아니더라도 활동적으로, 적극적이 아니어도
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강하면서 약한 그녀들의 가치관이다.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살다 더러워져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탐욕스러워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그런 가치관은ㅡ 다르다.
나와 다르다.
약하고, 물러서, 그녀들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라라기 코요미와는 다르다.
기가 약하고, 소심한 녀석이라서, 좌우뿐만 아니라 일단 뒤쪽까지 살피지 않으면 횡단보도도 건너지 않는 그런
인간과는ㅡ 그녀들은 다르다.
그리고.
그런 나와, 하네카와 츠바사는 동류이다.
뒤죽박죽이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우수해서, 어떤 의미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존재의 면모를 지닌 그녀와 자신을 겹쳐서 생각한다는 건,
너무나도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저 골든위크를 겪고 내가 얻은, 교훈에 끝없이 가까운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유일한 것이겠지. 그걸 교훈이라고 하는 건, 너무나도 사기꾼 같은 말투이지만, 그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ㅡ 단념하자.
나와 그녀의 공통점.
아라라기 코요미와 하네카와 츠바사의 공통항목.
마음 속의, 같은 부분.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ㅡ 저 골든위크 이후로 시간이 흘러, 2 학기가 시작하려고 하는 요즘, 지금이라면,
새삼스레, 크나큰 아픔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통감한다.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한테 말을 걸어준 이유를.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와 만나준 이유를.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를 구해준 이유를.
그래도 그건 과연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이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이기에, 즉 이제 와서는 어찌할
수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챙길 것도 챙기지 못한 채 되돌이킬 수 없고, 바로잡을 수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만난 직후 바로 알아차릴 수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골든위크의 단계에서 그 주변사정을 눈치챘다고 한다면,
혹시라도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약하고 무른 우리들은.
다른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이건, 역시,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중얼거리는 혼잣말로, 평범한 의자에 앉아 써내려가는
보편적인 형태를 따르는 반성문이다.
졸업 직전에 쇠못으로 문자를 책상에 새기는, 후회의 글이다.
반성은 하고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ㅡ 같이, 듣기좋은 미사여구는 굳이 하지 않는다.
반성은 하고 있고, 후회도 하고 있다.
없던 일로 해두고 싶고, 되돌이킬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
나는 저 골든위크 때의 일이, 너무 후회되고 분하기에 어쩔 수 없다. 어째서 좀더 야무지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왜, 어째서. 불사신의 몸이 아니라면 죽고 싶을 정도로 분해서,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울 것 같아서,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이다.
그건 틀림없는, 악몽이다.
하네카와 츠바사.
이형의 날개를 가진 소녀.
시기적인 정황을 설명해두자면, 그건 고등학교 2 학년에서 3 학년으로 진급할 때, 지내는 2 주 동안의 봄방학,
내가 지옥을 경험했던 대략 1 개월 후의 일이 된다ㅡ 현대 일본에서, 얼토당토않는, 설마 흡혈귀한테
습격당한다는 실로 로맨틱한 경험을 한 어리석은 나는, 그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어떻게든 일상생활로
복귀했다. 나를 시대착오적인 불량아라고 착각한 하네카와 츠카사의 책략으로 인해 억지로 떠맡겨진 부반장이란
직책을 어떻게 짊어져야 할까, 라고 아직 그걸 고민하던 한중간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에는 이미 그런 걸
떨쳐버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ㅡ 어쨌든, 그 당시.
그녀는 고양이한테 홀렸다.
고양이.
식육목 고양이과의 포유류.
그러니까 나는 골든 위크 이후ㅡ 고양이를 거북하게 여긴다.
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그렇다ㅡ 하네카와 츠바사가 무서운 것처럼.
서론이 약간 길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ㅡ 방과 후에 남는 시간은 의외로 많으니까.
그럼, 내가 어제 본 꿈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002

후일담 겸, 이번 여담.
다음날, 평소처럼 나는 두 명의 여동생, 카렌과 츠키히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일어나게 된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공휴일이든 관계없기에, 그 날이 골든위크의 첫날, 4 월 29 일이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그런 장치로 짜여진 기계인 것처럼, 나를 아침 일찍 깨운다. 맨날 밤늦게까지 놀고 밤새는 너희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쉽지 않지 않을 테지,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부지런함, 그건 오빠의 생활싸이클을 걱정해주는
마음씀씀이 따윈 없고, 아마, 그녀들은 내 수면을 방해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힘을 뽐낼 작정이겠지.
시위행위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가정 내에 행해지는 세력싸움이다.
그런데, 그 여동생들이 깨우는 방법이 왜 이런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뭐, 그건
굳이 언급할만한 것이 아니란 점이 크나큰 이유이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계단에서 밀려 굴러 떨어지거나, 카멜클러치(camel crutch) 및 근육드라이버를
당하지만, 저건 뭐, 실은 TV 예서 볼 수 있는 연출이라고 말해둔다. 이미지를 깨뜨려서 죄송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 저런 짓을 하는 귀여운 여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camel crutch- 상대 두팔을 자신 무릎위로 올려놓고 그대로 목을 잡아당겨 등, 목을 꺾는 기술, 바케 8
화 참조, 근육드라이버- 자신 양다리를 상대 양팔에 대고 상대 양다리를 손으로 잡아서 찍는 기술, 바케 15 화
참조)
뭐, 다른 가정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에서 카렌과 츠키히는,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나라구”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네는 정도로ㅡ
“뭘 또 자려고 하는 거야. 죽어버려”
내 베갯머리에 쇠지레가 내리쳐진다.
확 일어나서 그것을 피하는 나.
아니, 다 피하지 못하고 머리털이 한 다발 젖혀졌다.
그리고 그 머리털 째로, 쇠지레의 끝은 내 베개를 꿰뚫었다.
베개 깃털이 살랑살랑 휘날렸다.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그 광경에, 나는 죽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가슴 속 심장의 32 비트 고동을
느끼는 한, 아무래도 생명을 건진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귀신과 같은 형상으로, 중학교 2 학년인 내 여동생, 아라라기 츠키히가 목욕복 차림으로, 베개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침대까지 관통해버린 쇠지레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쇠지레와 비슷한 물건.
이 아니고, 말 그대로 쇠지레이다.
세게 제일의 쇠지레이다.
“츠, 츠키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빠를 죽일 생각이야!?”
“또 잠이나 퍼 자는 오빠는 죽여도 된다구. 모처럼 나와 카렌이 깨워줬는데 또 자버리다니 배짱이 두둑하네.
죽어버리면 돼, 죽어버리면 된다구, 죽어버리면 되잖아”
“너, 책 첫머리부터 캐릭터 설정이 엉망진창이 되있다구!?”
이전 작품들과 어떻게 연결되냐고, 그거!
“나는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에 비해 캐릭터가 확립되지 않은 모양이니까, 시험 삼아 얀데레 흉내를 내봤어”
“얀데레는 무슨, 이러면, 미친 년이잖아!”
“그래도 오빠, 이걸 피했다는 건, 자는 척하고 있었다는 애기네”
“아니, 푹 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인간은 자고 있어도, 의외로 위기에는 대응할 수 있는 모양이다.
진화도 정점에 도달했다고 애기하지만, 이것 참,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생물이다.
“캐릭터 확립을 신경쓰다니, 정말, 아직도 중학교 2 학년이군, 너는”
“실제로 중학교 2 학년인 걸”
“그런가”
뭐, 나도 남한테 뭐라 할 수 있을 만큼 보람찬 중학교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아니, 경험자이기에, 더욱더
타일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 아침 일찍 깨우러 오는 여동생만으로 충분해, 너의 캐릭터는”
“완벽한 들러리캐릭터네, 그거”
그런 건 싫어, 라고 말한다.
뭐, 그런 브라콘 캐릭터 설정은, 누구라도 싫겠지.
“나도 카렌처럼 화려한 캐릭터를 원한다구-. 저건 이미, 여동생으로서 최종진화형태잖아” (주:デㅡハㅡ -
화려한, 하데를 거꾸로 읽음)
“아니, 저건 최종진화형태라기보다, [저렇게 되어버리면 이미 갈 때까지 가 버린] 캐릭터라고. 알겠어?
너한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 제대로 된 캐릭터가 되도록 힘내봐”
“제대로 된 여동생 캐릭터를 목표로”
“그래”
여동생 캐릭터를 목표로 한다는 시점에 이미 정상인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이 장소에 아무도
없다.
“구체적으로는 [빨강머리 앤]에 등장하는 마리라를 목표로 하는 거야” (주: 마리라- 빨강머리 앤을 맡은
아주머니, 매슈 아저씨의 여동생, 배경무대가 그린게이블즈)
“마리라!?”
“그려”
나는 매슈 아저씨의 말투로 응한다.
잠이 덜 깬 상태이다.
“정말-, 마리라는 진짜로 이상적인 여동생이지- 나는 저런 여동생을 원했어. 그야말로 츤데레 중 츤데레야.
[나는 남자애를 원했어! 여자애가 오다니 전혀 도움이 되질 않잖아!] 같은 거? 그래도 마지막은 앤한테 홀딱
빠졌으니까”
“아, 진정한 의미로 츤데레네”
“아니, 요즘 의미로도 츤데레야. 데레 상태가 된 후 앤한테 내뱉는 대사도, 엄청나게 불타오른다고”
“오빠, 빨강머리 앤을 그런 시선으로 읽고 있었어?”
“응. 빨강머리 앤을 읽을 때, 내 안에서 마리라의 CV 는, 변함없이 쿠기미야 리에였다고”
(주: 쿠기미야 리에-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 맡는 역할이 죄다 츤데레/로리/소년, 대표적인 츤데레 캐릭터:
작안의 샤나, 제로의 사역마 루이즈, 하야테처럼 산젠인 나기, 토라도라! 아이사카 타이가)
“개인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마”
마리라는 몇 살인데, 라고 츠키히는 말한다.
바보 녀석, 아무 것도 모르는군.
여동생은 50 세를 넘어서부터 진짜인데.
“그리 생각하면, 매슈는 인생의 승리자였네. 평생 여동생과 둘이서 지내고, 거기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3 갈래
댕기머리를 한 딸을 길렀으니까. 저 녀석은 신지군을 뛰어넘는, 찌질한 히키코모리 남자들의 희망이야”
“매슈를 찌질한 히키코모리 남자라고 부르지 마......”
“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가는 장면에선, 읽고 울 정도로 꽤 감동받았다고. 아아, 이런 거야, '
쓸데없는 거 사오고 있네', 라고” (주: 매슈가 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생하면서 고른 퍼프소매 원피스를
보고 마리라가 내뱉은 대사)
나는 생생하게, 저 명작을 회상한다.
“그러니까 츠키히, 너도 노력해줘. 그러면 나는 너와 장래에 그린게이블즈에서 함께 살며, 노후를 같이
보내줄게”
“오빠, 그거, 프로포즈나 다름없어”
“훗. 프로포즈가 아니야. 포로네즈야” (주:프랑스어(polonaise)-4 분의 3 박자의 템포가 느린 폴란드
고유의 가곡·무용곡, 궁중무도회에서 많이 추었음)
“구혼댄스!?”
아아, 정말, 이제부터 어떤 얼굴을 하고 빨강머리 앤을 읽어야 하나, 라고 츠키히는 머리를 감싼다.
곤란한 여동생이군, 라고 어깨를 움츠리고, 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부터 여동생한테 저속한 행동을 하려는 게 아니고, 단순히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것 뿐이다.
“영차. 그래서, 카렌은 뭐하고 있어?”
“응?”
말을 걸어보면, 츠키히는, 내 두 번째 잠을 방해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무사히 끝마쳤다고 만족했는지, 내
침대 위에 칠칠맞게, 뒹굴대기 시작했다.
마리라와는 완전 딴판으로, 쇠지레를 뽑는 건 단념한 모양이다.
오늘 밤 나, 어떻게 하지.
게임처럼, 방에서 나간 후 다시 돌아오면 고쳐져있나.
하지만 츠키히가 그녀의 목욕복이 풀어헤쳐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좌우로 뒹구는 그 모습은, 마치 애벌레
같다.
여동생벌레라고 이름붙여두자.
“오빠. 여동생한테 음란한 별명을 붙이지 마”
“부연설명을 읽지 마. 그보다 질문에 대답해. 너가 항상, 일심동체로 따라다니고, 나보다 키가 큰 캐릭터를
확립한 화려한 청바지 차림 여자는 뭐하고 있냐고 묻고 있어. 저 포니테일, 같이 있지 않았어?”
“카렌은 조깅하러 갔어-”
“조깅? 조깅란 건, 저 달리는 걸 말하는 건가? 드물군. 별로 그런 걸 하는 녀석이 아닌데, 저 녀석”
“오늘은 특별해. 카렌은 골든위크 개시 축하 기념이라고 말했어”
“뭔 기념이냐고”
“성화 봉송하는 주자의 이미지라고 생각해”
“그런가. 오늘도 저 녀석은 바보짓하는군”
“골든위크(ゴ―ルデンウィ―ク)와 올림픽(五倫(ごりん))이, 카렌 안에서 뒤섞였다고 생각해” (주:
골든위크의 [고]과 올림픽의 [고]가 뒤섞임, 언어유희)
“그런가. 앞의 1 글자밖에 똑같지 않은 단어가 뒤섞이다니, 정말 평상시 그대로의 바보군”
훈훈하다.
과연, 그래서 츠키히는, 두 번째에는 나를 혼자서 깨우러 온 건가.
이른 아침(지금으로부터 1 시간 전)에 단잠을 자는 나를 깨우러 왔을 때에는 2 인 1 조였지만, 그 후, 그녀들을
보내고 나서 다시금 잠을 청한 나의 위장을 간파하고, 또다시 깨우려고(뭐냐, 그건) 혼자서 다시금 온
츠키히이다.
그리고 쇠지레인가.
이 녀석은 혼자서 행동하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카렌과 츠키히 중, 흉폭한 건 격투기를 생업으로 하는 카렌 쪽이지만, 보다 위험한 건, 브레이크란 걸 모르는
츠키히 쪽이다.
“아-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골든위크인가. 좋은 일은 하나도 없네-”
“첫날부터 갑자기 비관적이네, 오빠”
4 월 29 일, 토요일.
신록의 날. (주:緑の日. 자연친화를 추구하는 공휴일)
“아직 골든 위크는 시작한 지 9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나 같은 달인은, 9 시간만 지나도 대강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어”
“오빠는 공휴일이나 경축일, 일요일은 싫어하니까-. 평일을 아주 좋아하는 평일인간이니까-”
“평일인간이라니”
맥빠지는 단어네.
아무런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뭐, 확실히 나는 맥빠지는 녀석이지만.
“별로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서툴러”
“똑같은 거야”
“똑같지 않아”
싫은 거랑 서투른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같은 거라고 하면 같지만.
반성은 하고 있지만 후회는 하고 있지 않다는 말에 대해, 반성과 후회는 같은 거라고 핀잔을 들은 기분이지만,
하지만 뭐, 반론의 여지는 없다.
“그래도 골든위크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여동생은 여전히
깨우러오는데다 화를 내고, 키는 평소와 다름없이 크지도 않으니”
“뭐- 그렇네-. 학교를 안 갈 뿐이네”
“사람은 전쟁을 그만둘 수 없고, 배신과 거짓말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응? 어째서 애기가 그쪽으로 부풀려지는 거야?”
“오늘도 반드시 세계의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누군가가 죽겠지? 그걸 내버려둔 채 뭐가 경축일이야! 상복을
입으라고!”
“오빠, 누구한테 무얼 화내고 있어?”
휴일은 (한 적이 없으니까) 한가해서 서투르다는 이유로 몹시 격분하는 오빠를 보면서, 여동생은 정말 질려하고
있다.
그 기분은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모처럼 흥미가 생겼기에, 나는 계속했다. 나는 여동생한테 배려를 해주는 타입의 오빠가 아니었다.
“내 기분은 언제나 장례식 상태야. 연하장 같은 건 보낸 적이 없어”
“그건 보낼 친구가 없어서잖아?”
“아는 척하지 말라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야!”
“적어도, 매년 받는 연하장의 갯수는 알고 있어”
“그랬지”
“정확히 말하자면, 오지 않는 연하장의 갯수는 알고 있어”
“그랬지”
고등학생이 되어서, 드디어 아무한테도 연하장이 오지 않는 나이다. 반 전원 모두한테 연하장을 돌리는
녀석조차 보내지 않는다. 즉 특별히 기분이 어떻다는 게 아니고, 늘 매년 장례식 상태였다.
“그런가-. 내가 경축일을 싫어하는 건, 친구가 없어서 놀 수가 없어서였나-. 이건 새로운 발견이군”
“굳이 눈치채지 않아도 될 일을 깨달았네, 오빠”
츠키히가 친오빠를, 매우 불쌍하다는 눈으로 슬픈 듯이 쳐다본다. 참고로 츠키히(와 카렌) 은, 연하장을 백의
배수 단위로 보내야 할 정도로 친구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아라라기가의 가계와 우체통을 압박하고 있다.
실로 극단적인 남매이다.
쉽사리 3 점의 중심을 잡을 수 없다고 할까.
“뭐, 그렇다고 해도, 경축일이 평일과 별반 차이도 없고, 나아진 것도 없는 나날들이란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아무리 꿈을 꾸어도 현실은 변함없어. 내 개인적인 사정은 제쳐두더라도, 나아지는 건 없어. 평소와 똑같은
매일을 지내는 게, 뭐가 골든위크야. 무슨 금색이냐고. 호밀밭의 파수꾼한테 붙잡힌다고ㅡ 아니, 그건 홀딩
(holding)이지만.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여동생은 여전히 깨우러오는데다 화를 내고, 키는 평소와
다름없이 크지도 않고, 사람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고, 배신과 거짓말은 끊임없이 밴복되고, 너의 팬티는 평소
때와 변함없이 흰색이고” (주: 호밀밭의 파수꾼- ライ麦畑でつかまえて, 호밀밭의 금색을 비유)
“내 팬티를 언급하지 말아줘”
츠키히의 딴지는, 겉보기에는 마치 묘령의 귀부인다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알몸이 훤히 보이는 목욕복의 옷자락 부근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중학교 2 학년의 사춘기 한중간이었다.
반나체라기보다, 거의 웃통을 벗은 상태.
정말이지, 대담한 옷매무시이다.
카렌도 그렇지만, 여성에 대한 환상을 무수히 산산조각내는 여동생이다.
“그레고르·잠자는 즐거웠겠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되었다고? 뭐가 ‘변신’이냐고. 똑같이 여동생을
데리고 있는데 부러울 뿐이야. 저기, 여동생벌레” (주: 그레고르·잠자- 독일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
신’에 나오는 인물, 평범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르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 가족한테 소외받는다는 애기)
“여동생한테 음란한 별명을 정착시키려고 하지 마”
“응-”
뭐.
그리 말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 벌레는커녕, 흡혈귀로 변신해버린 경험과 비교해보면, 나도 잠자씨를 단순하게
부러워할 수 없지만.
그런가.
저 봄방학으로부터, 벌써 1 개월인가.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군ㅡ 라고, 그런 최종회 같은 대사를 생각할 장면도 아니지만, 문득 되돌이켜보면,
의외라고 생각하게 된다.
봄방학 때 겪었던 저 경험은, 나한테 몹시 인상적이었고, 너무도 강렬해서, 저 2 주 동안 있었던 일이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라고도 생각했다.
인생이 피크가 있다면, 저 봄방학.
그러니까 의외이다.
그 봄방학이 끝나고 나서도, 아직 인생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 상황이.
오랫동안, 영원히.
계속해서 이어진다.
흔히 인생은 게임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건 리셋 버튼이 없기 때문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엔딩이 없기에 인생은
게임과 다르지 않을까.
최근에는 온라인게임이나 휴대용기기 넷플 등등, 이른바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도 존재하지만, 그건 뭐랄까,
오히려 게임 쪽이 인생처럼 된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주:すれちがい通信- psp 의 kai, nds 의
와이파이기능)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 한,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ㅡ 인생은 계속된다.
엔딩 테마도 스탭롤도 없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낙제생이어도.
친구가 없어져도.
흡혈귀가 되어도.
인간으로 돌아와도.
인생은 계속된다.
계속은 힘이고.
또한 계속은 무력함이다.
“흔히 골든위크라고 말하잖아-. 그런 영화업계의 상술에 순순히 넘어가는 건, 부끄럽지 않냐고, 나는 진심으로
충고하고 싶어”
“충고하고 싶은 거구나”
“막고 싶어”
“막고 싶은 거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잖아. 정지라고 말하면, 인쇄소도 택배도 멈춰버리니까, 수작업(巻き)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잖아”
“어째서 오빠는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발언하고 있는 거야?”
“골든위크 탓에 4 월에 나올 예정이었던 책이 7 월에 나오게 되었다고!”
“구체적인 예시네”
참고로, 출판업계뿐만 아니라, 골든위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쉬지 않는 직종의 사람들도 적지 않기에, 모
공공방송에는 골든위크라는 거창한데다, 호화현란한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대형 연휴라고 바꿔 부르는
모양이다.
아니.
어쨌든 쉬지 않지만.
“상술로 말할 거 같으면,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이데이도 그렇잖아-. 화이트데이 같은 건 왜 있는지 모르겠어.
예수·그리스도나, 성 발렌티누스 같은 유래가, 제대로 있냐고”
“없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화이트데이가 아니라 화이트라이(Lie)겠지!”
“응?”
고개를 갸웃한다.
무심코 기세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뭐, 반복해서 말하지만 골든위크라는 건,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되어있어. 황금연휴라니.
토요일의 위치로 인해 그 기간이 변하는데, 어째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정된 물질 중 하나에 비유되고 있냐고”
“으-응. 그렇게 구체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뭐, 확실히 황금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과장되어있을지도”
“자, 그럼, 자네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왜곡왕(歪曲王)이 되지 말아줘” (주:부기팝 오버드라이브에서 나오는 왜곡왕, 황금에 관한 애기를
많이 함)
멋진 대사를 내뱉으려는 건 그만둬, 하고 여동생한테 타일러졌다.
깊이 반성.
“ 황금연휴라니, 휴일이 연속해서 있는 게 그렇게 기쁠까. 확실히 예전에는 연휴란 게 1 년 동안 드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해피먼데이 제도가 있으니까” (주: 일본 공휴일이 일요일에 겹치는 걸 막기 위해 월요일로
옮긴 제도, 성인, 바다, 경로, 체육의 날이 있다)
참고로, 그것도 출판업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unhappy 먼데이지만. 토요일조차 없어져버리라고 생각하는
업계이다.
“내가 휴일을 싫어하는 경향을 제쳐두더라도, 역시 이름을 잘못 붙인 거라고 생각하는데”
“으-음. 이름을 잘못 붙였다기보다, 이미지 전략이겠지. 즐겁다고 하는 연출이라고 할까. 낙인효과는 아니지만,
사람은 나이스한 네이밍을 추구하고 있어? 그거 알아? 오빠. 그린란드는, 극한의 툰드라 지대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와주길 원하니까, 신록이 가득한 이미지를 갖게 하려고, 그린란드라고 이름붙였다고 해” (
낙인효과(labeling effect)-사회제도나 규범을 근거로 특정인을 일탈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결국
범죄인이 되고 만다는 낙인이론. 이름을 붙인 대로 행해진다는 이론)
“오빠를 얕보지 말라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뿐만이 아니야, 그린란드의 수도는 Godhope 라고 이름붙여진
모양이야, 신의 희망이지”
“나도 알고 있어. 지금은 누크(Nuuk)라고 부르잖아”
오빠와 여동생 둘다, 얼핏 보기엔 사이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벌하고 치열한 잡학대결이 싱글벙글한
분위기 속에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 승부는,
“참고로 그린란드는 덴마크령이라고”
라는 츠키히의 한 마디가 결정타가 되어, 내 패배로 끝나버렸다.
정말로.
덴마크령인가.
역시 누가 뭐라 해도 머리가 좋군, 이 녀석.
잡학도 아닌 보통 지식으로 대항했다가는, 이길 도리가 없다.
“으-응. 신록의 날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린란드의 애기가 되어버렸네”
“오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4 월 29 일은, 요새 쇼와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어. 신록의 날은, 5 월
4 일” (주: 쇼와의 날- 원래 4 월 29 일은 구천황 탄생일, 신록의 날- 5 월 4 일, 골든위크에 낌)
“헤에. 국민의 경축일이 아니고?”
“응”
“시대는 변하고 있네-. 지금이 서기 몇 년인지, 전혀 알지 못해. 과연 아날로그 방송은 아직도 하고 있을까.
그래도, 뭐, 네가 말한 대로, 골든위크일 경우는, 확실히 이름을 잘못 붙였다기보다 이름을 잘 붙였다고
말해야겠네. 나라의 이름을 예로 든다면, 일본 역시, [태양이 뜨는 곳]이라고 고작 극동의 섬나라를 듣기 좋게
부르고 있고. 어디서나, 이미지 전략에 기를 쓰고 매달리고 있네. 다만, 이름을 잘 붙이나 잘못 붙이나, 빛좋은
개살구인 건 틀림없겠지. 역시 나는 평범하게 모 공공방송처럼 대형 연휴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 물론,
이 9 일 동안, 츠키히의 팬티가 눈앞이 아찔해질만한 황금색이 된다면 애기는 별개이지만” (주:양두구육-겉만
그럴싸해서 속은 변변찮음)
“그런 악취미스런 팬티는 입지 않아”
“흰색이냐”
“흰색이야”
말하고 자신의 목욕복 발밑을 크게 벌려, 애초에 보이는 그것을 한층 더 당당하게 내보이는 츠키히.
변태의 소행이다.
뭐, 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목욕탕에서 갓 나온 채, 집안을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동생의 속옷을
새삼스레 다시 봐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기분상, 색상 견본표를 보고 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오빠로서 그렇게 맥빠지는 대응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면서 큰 목소리로 칭찬했다.
“휘유ㅡ! 여동생팬티 최고-!”
“이야-! 고마워-!”
츠키히도 합세했다.
뭐지, 이 남매.
나는 과연 상당한 질량의 의문을 느꼈지만, 츠키히는 전혀 망설임없이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역시 팬티는 흰색이어야 제 맛이지. 흰색이 아니면 팬티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아아. 그 텐션.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아무래도 이제부터, 장장 2 페이지에 걸친, 네 녀석의 팬티토크가
시작되는 모양이군”
“그래. 그런 애기가 싫은 사람은 건너뛰고 읽도록 해”
여태까지 한 대화도 대략 제대로 된 애기가 아니었기에,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고 느끼지만, 츠키히가 그런
주석을 달았다.
“팬티뿐만 아니라, 브래지어 같은, 속옷은 기본적으로 흰색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오빠”
“오오, 진짜로 열변을 토하는 거냐”
어쩔 수 없군, 상대해줄까.
각오는 되어있다고.
대화하느라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해서, 바지를 입었을 뿐, 나는 아직 상반신 나체인 상태였지만, 손가락을
앞뒤로 깍지 끼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어깨를 좌우로 비튼 채 근육을 쫙 늘려, 그 자리에 책상다리로 털썩
앉았다.
자, 탁 터놓고 애기해보자.
“하지만 츠키히, 열변을 토하던 도중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찬성할 수 없어”
“음, 뭐야, 오빠는 내 적인가”
“적(敵)이라고 하면 적(敵)이야. 다만, 이상적(素敵)이란 이름이라고!” (주:敵, 素敵을 이용한 언어유희,
素敵는 원래 굉장함, 대단함의 뜻을 지닌 형용사)
상대가 여동생이기에, 그다지 멋지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는 대사를 잘도 내뱉을 수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관대하게 봐주시길 원한다.
혹은 보지 않으시길 원한다.
“즉 원래 적이었다는 거네”
“착각하지 마. 나는 굳이 흰 속옷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대환영이지. 아라라기 코요미는
팬티에 관해 언제나 문호를 넓게 개방하고 있어. 다만, 그래도 색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색인 이상, 다채로워야 하는 법이고, 다채롭기에 색깔-. 흰색에 한하지 않고, 누구나 다, 똑같이 같은 색의
속옷을 착용하는 건, 요즘 세상에, 너무 살벌하지 않아?”
“살벌하지 않냐고 말해도”
“다채로움이야말로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고ㅡ 아니,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라고 말해도”
나도 다른 색깔을 굳이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라고 츠키히는 말한다.
아무래도 그녀도, 즉흥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그녀만의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뭐, 그 취미가 일본 옷
취향으로 너무 편중되어있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세련되게 멋을 부리는 드레서-, 여자중학생의
패션리더이기에, 속옷에 구애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갖가지 색이 무수하게 존재하는 와중에, 흰색은 그 정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해. 색에 위계질서가 있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 최상층은 흰색이야. 랭킹(ranking)이란 단어는 이제부터 화이트닝(whitening)이란
단어와 바꾸고 싶을 정도야. 이번 주 화이트닝 톱텐(Top ten)이야” (주:ヒエラルキー(Hierarchie)-
피라미드형 계층조직, whitening-희게됨, 표백)
"흠......뭐, 완전색이란 의미로서, 흰색에 필적할만한 건 검은색밖에 없지만, 뭐, 모든 것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검은색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건, 이해할만하군“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미대생끼리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속옷 색깔에 관한 애기이다.
팬티의 애기라고-.
“그래도-, 츠키히, 널리 알려진 통설에 대해, 슬슬 모두 다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이야?”
“검은 색 속옷은, 별로 에로하지 않아”
“정말 그래!”
하이터치.
여동생과 속옷 취향이 의기투합했다.
“이예-!”
“꺄호-!”
풍취 있는 문화적인 대화였다.
마음이 내키면 문화유산으로 등록해줘도 된다.
“이름을 잘못 붙이거나, 잘 붙인다는 애기를 했지만, 그런 의미로 볼 때, 색깔에 대한 이미지란 것도 여러
가지 있네”
“여러 가지 있어”
“그만둬, 따라하지 마”
그러고 보니 츠키히는 아까 전, 갖가지 색, 이라고 능숙하게 회피했다. 교활한 계집애.
“한색(寒色) 계통과 난색(暖色) 계통. 철제 전극을 희게 칠하면 가볍게 보인다던가, 그런 거”
“아니야, 오빠. 흰색은 진지하고 순수하며 청초한 이미지로 비춰져”
츠키히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갈 뻔한 애기를, 궤도수정했다. 상당히 눈치가 빠르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테마는
굳이 그 애기로 돌아오지 않아도 될 만큼 쓸데없는 화제였다.
“자, 보라구, 오빠”
그리 말한 츠키히는 띠를 살며시 풀고 목욕복을 벗었다. 팬티뿐만 아니라, 브래지어까지 밖으로 드러난다.
목욕복을 옆에 접어놓고 이쪽을 향한 츠키히는 팬티, 브래지어는커녕, 신고 있는 하이삭스까지 흰색으로
통일되어있다. 토탈 코디네이트(total coordinate)란 건가.
그리고 무릎으로 선 채 포즈를 취하는 아라라기 츠키히.
“어때? 진지하고 순수하며 청초한 이미지로 비춰지지?”
“아니, 가볍고 불순하며 불결해보여......”
너, 섣불리 그런 포즈 취하면, 그대로 피규어가 되버린다고.
그 포즈가 쁘띠 넨드로이드로 되어버리겠어. (주:넨드로이드 뿌띠-미니피규어)
배후에 쇠지레가 꽂혀있는 베개가 좋은 옵션이기에, 음란함이 넘치는 그라비아 사진처럼 되고 있다.
“그건 오빠가 나라는 인간한테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봐봐, 이렇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개성을 없애서 익명성을 연출하면!”
츠키히는 오른손의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고, 자기 얼굴의 위쪽 부분을 숨겼다.
그 상태로 포즈.
“............”
음란함이 더욱더 증가했다고 말해ㅜ자.
역시 바보인가, 이 녀석.
학교 성적은 매우 좋을 터인데.
올 5 에 끝없이 가까울 터인데. (주: 점수 5 가 젤 고득점)
결국 학교 성적은 지능의 1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는 건가. 그래도 이런 녀석의 성적이 좋다는 건, 반
친구들한테서 공부할 의욕을 뿌리째 뺏어가겠지.
“그래도, 오빠가 입고 있는 그 죄수복 같은 줄무늬 트렁크스 역시, 그런 식으로 보면 삐뚤어진 인간이니까
줄무늬를 입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누가 삐뚤어졌다는 거야”
그보다, 여동생 뇌의 증상을 걱정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현재, 팬티 1 장만 달랑 걸친 속옷
차림이었다.
하반신 쪽은 옷을 걸치고 있다고 말했지만 바지를 입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그야말로 서술 트릭의 견본이라고 말해두자.
미스테리의 산 견본.
아라라기 코요미이다.
“오빠도 보여줄 거라면, 흰 속옷을 입어야 오해받지 않는다고?”
“흰색이든 줄무늬이든, 속옷을 남한테 보여주는 단계에서 이미 오해받는다고”
슬픈 오해라기보다, 올바른 이해지만.
“그보다, 속옷을 남한테 보여줄 기회가 있냐고?”
“어-? 그렇지 않아. 의외로 남자 속옷을 볼 기회는 많다고?”
“뭐시라?”
그 순간, 살기로 가득찬 나.
중학교 2 학년 여동생의 인생에, 그런 기회가 많다고 한다면, 고등학교 3 학년인 오빠로서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외설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뭘 상상하는 거야, 오빠”
츠키히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살 달랬다.
말을 달래는 기수 역할이다.
“저기, 로우라이즈(Lowrise)와는 다를 테지만, 남자는 종종 골반바지(腰穿きズボン)를 입잖아. 그러면,
웅크리고 앉을 때 셔츠의 옷자락이 위로 젖혀져서, 보이게 된다고”
(주:로우라이즈(Lowrise)-바지 길이를 허리에 맞춘 디자인이 아닌, 그 길이를 골반에 맞춘 바지. 반대로
허리에 맞춘 것은 하이 라이즈(high rise))
“아아”
“그리고, 체육 시간에 짧은 반바지 옷자락 사이로 보인다던지”
“뭐야, 그런 건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였다.
다행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어서.
하마터면 츠키히의 남자친구들을 모두 죽여버릴 참이었다고.
“여자의 스커트가 짧은 걸 문제삼았던 사람들은 옛날부터 많았지만-, 여자들 입장으로 보면 오히려, 남자가
입는 옷매무시의 느슨함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정강이털 같은 건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그건 오히려 보는 쪽의 모티베이션을 문제삼아야 되지 않을까?”
뭐, 남자와 여자는, 부끄러워하는 부분이나 욕정하는 대상이 서로 다르니까.
그런 의미로, 솔직하게 애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만큼, 남자 쪽이 더 빈틈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줄무늬 트렁크스 1 장 걸친 채 마을 안을 활보할 수 있냐고 질문받았을 경우,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
“거기에, 진지한 애기로 바꿔 말한다면, 남자의 경우, 여자가 그 사람한테 욕정한다고 해서, 힘에 밀려 무슨
짓을 당한다는 건 생각하기 힘드니까. 여자가 부끄러워하는 건, 어떤 의미로, 몸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생존본능일지도 몰라”
“진지한 애기는 이제 됐어. 속옷 애기를 계속하자”
“............”
나, 왠지 멀지 않은 장래에, 네 녀석과 같은 캐릭터를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농구가 장기인 동인녀
캐릭터. 지금은 그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ㅡ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라면 다행이지만.
“생존본능이네-. 그래도 뭐-, 그런 시점으로 보자면, 보통 남자애보다 훨씬 강한 카렌 역시, 그런 면에서
무방비하니까”
“아아, 그렇군”
“카렌, 남자 앞에서 체조복으로 종종 갈아입는 걸”
“저 녀석의 반 전화번호를 가르쳐줘. 남자들을 전부 학살해버릴 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카렌이 갈아입으려고 하면, 남자애들이 눈을 돌리고 도망가니까“
또다시 나를 달래는 츠키히.
쓰다듬으면서.
무심코,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다.
“그래? 학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오히려 학살했다간 큰일나니까......자기 누나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카렌, 여자로서의
매력이 낮은 편이라서-”
“뭐, 그야 그렇지”
무도가니까.
여동생이란 점을 제쳐두더라도 여성적인 면을 느낄 수 없고, 또한 본인도, 여성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파이어 시스터즈의 활동을 보는 한, 그녀는 남자 중의 남자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된다.
“무방비한 면도, 그런 의미로 보자면, 오히려 필요할지도. 남자 중의 남자를 목표로 하는 저 청바지 여자가
짧은 스커트를 입거나, 로우라이즈(Lowrise)를 입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아, 그래도 카렌, 귀여운 면도 있어. 남자친구 앞에 나갈 때에는, 속옷의 선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다고
애기해서, 청바지 밑은 노팬티인 채로 나가는 걸”
“왠 치녀냐고!”
이 집의 여자애들은 죄다 변태들 밖에 없어!
치녀들의 말썽이다.
“아무리 기모노를 좋아하는 나라도, 일상생활할 때 속옷은 항상 입으니까. 카렌의 발상에는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야” (주:원래 기모노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음)
“”속옷을 벗는 녀석한테 경의 따윈 필요없어. 뭐, 승부속옷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제쳐두고,
평상시 저 녀석이 입는 속옷, 꽤 컬러풀하니까. 풀컬러겠지. 그 방면은 어때, 너와 의견이 엇갈리는 거야?“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네. 오히려 카렌은 흰색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도,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생각은 일치하기에, 카렌은 [흰색은 진지해보이는 것 같아서 싫어]라고 말해”
“흐응”
진지함이 싫은 건가.
뭐, 삐뚤어지고 싶은 연령대이다.
정의의 아군을 자칭하고 있어도, 그런 점은 평범한 중학교 3 학년인가.
하지만.
“이런이런, 역시 너희들은 아직 애들이군. 그런 흔한 가치관에 사로잡혀있다니. 왜 그리도 발상이 빈곤한지.
흰색이 진지하다니, 검은색이 에로하다는 발상만큼이나 편협한 편견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뭐야, 흰색이 진지하지 않다는 거야? 죽여버릴 거야”
“어째서 오빠한테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어떤 색깔의 속옷을 입는다고 해도, 결국은
진지한 건 인간성의ㅡㅡㅡ”
말을 한 시점에.
나는, 문득, 떠올렸다.
아니ㅡ 생각이 미쳤다고 말해야 할까.
요 1 개월 간, 늘 끊임없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 어떤 문제에 대해ㅡ 안절부절하면서 계속 고민해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모처럼이니까, 이 기회에, 이른바 지극히 당연한 문제가 된 지금 현재, 츠키히한테 상담해볼까 하고ㅡ 그렇게
생각했다.
“응? 왜 그래? 오빠. 인간성의, 뭐?”
“아, 아니ㅡ 진지함이란 건, 그 사람의 인간성이 드러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즉,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한 녀석이 그걸 몸에 익히고 있다면, 속옷이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하게
보인다는 거지”
“흠. 지금 나처럼!”
“틀려”
오히려 정반대라고 애기했을 터이다.
180 도 다르다.
내가 말하는 건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굉장한 여동생이다.
무엇보다, 그런 여동생이기에, 오히려 이 경우는 상담할 상대로서 적합하다ㅡ 무슨 애기를 하더라도, 어차피
내일이 되면 완전히 잊어버릴 테니까.
“근데, 츠키히. 팬티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어? 벌써 끝내는 거야?”
“장장 2 페이지는 벌써 지나갔어”
그러기는커녕, 너무 떠들었다.
츠키히의 (주석)에 따라 페이지를 건너뛰면, 아직 팬티에 관해 말하고 있어서, 간담이 서늘해진 사람도 적지
않겠지.
뭐, 상관없지.
누구라도 팬티에 대한 애기는 좋아할 테지?
“하지만 애초에, 한창 때의 여자애가 ‘팬티, 팬티’하고 연호해서는 안돼”
“어? 오빠,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쪽 편으로 돌아서는 거야?”
츠키히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갑자기 배신이라니 너무하다.
막 걸친 사다리를 치우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 배신은, 화제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기에, 간과해주길 바랬다.
“팬티에 관해서 애기하기보다, 사랑에 관해서 애기하자고, 츠키히”
“사랑?”
눈썹을 찌푸리는 츠키히. 명백히 싫은 표정이다.
“싫어- 팬티의 애기를 계속 하고 싶어-”
벌렁하고, 뒤쪽으로 쓰러져, 침대 위에서 떼쓰는 것처럼, 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발을 바둥거리는 츠키히.
다다미 위의 수영연습이 아닌 침대 위의 수영연습이다.
......나는 제쳐두고, 소녀인 츠키히가 너무 오해받아도 불쌍하기에, 오빠가 직접 한 가지 (주석)을 달자면,
그녀가 지금까지 전개해온 팬티토크는 본심이 아니고, 순수하게 픽션으로서 속옷의 애기를 한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다시금 강조해두고서.
“시끄러워. 상관없으니까 사랑 애기를 하자고. 그리고 날뛰지 말고 옷을 입어”
“그건 오빠도”
“그렇군”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우스룰에 의하면 별거 아닌 규칙 내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좁은 방 안에서, 반라의 오빠와 속옷 차림의
여동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구도는, 별로 세간에 떳떳하게 내보일만한 일은 아니다.
커텐을 열어둔 채이고.
나와 츠키히는, 제각기 옷을 입기 위해 일어섰다ㅡ 츠키히는 목욕복을 다시 입고, 나는 실내복으로 다시
갈아입는다.
웃을 다 입고, 나체 차림으로 마주 보는 건 사라졌지만, 사실, 본심을 털어놓고 애기하는 건 지금부터이다.
할복토크이다.
나는 아까 전과 똑같은 위치에 앉았다.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츠키히도 침대에서 내려와, 마주 본 채 책상다리를 한다.
......전혀 관계없지만 골격의 문제인지, 책상다리를 제대로 하는 여자애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츠키히는 훌륭하게 해내지만, 이건 신체가 유연하기 때문인가. 카렌처럼 단련하고 있지 않으니까, 이
녀석, 살이 반 정도 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걸.
“마카로니처럼 부드러운 걸, 네 녀석”
“오빠, 그걸 말한다면 마쉬멜로 같다고 해야 되지 않아?”
어째서 훨씬 지명도가 높은 과자를 훨씬 지명도가 낮은 과자와 헷갈리는 거야, 라고 하는 츠키히.
백점만점의 딴지이다.
뭐, 애초에 살의 부드러움과 관절의 유연함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아마, 남녀차는 행동거지의 차이겠지.
“그래서, 어떤 사랑 애기를 하는 거야, 오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 애기가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르는 무언가의 애기야”
“으응? 사랑일지도 모르는 무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오빠는. 죽어버리지 않으려나”
“빈틈을 노려서 내 죽음을 바라지 마. 뭐, 중학생 주제에 남자친구가 있고, 아마도 친구들 사이에서 수많은
연애상담을 받은 백전연마의 너한테만 물어볼 수 있는 거지만”
“카렌한테는 묻지 않는 거야? 카렌도, 중학생 주제에 남자친구가 있고, 친구들 한테 수많은 연애상담을 받고
있어. 백전연마된 상태라고”
“저 바보한테 상담할 건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스스로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망설임없는 어조이다.
“어차피 수많은 상담을 받았다고 해도, 리얼 백전연마의 청바지 여자는 그걸 너한테 떠넘겼을 뿐이겠지?”
“아니, 그렇지 않아. 카렌이 난폭한 일만 해치우는 전투원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야. 연애상담도 제대로
해주고 있어. 다만 전부 실패할 뿐이야”
“최악이잖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그게 불가능하니까 아직 애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너가 연애상담을 해줄 때의 성공률을 어느 정도야?”
“물론 백퍼센트야”
그건 그녀한테 자부할만한 성과인지, 츠키히는 가슴을 펴고 크게 우쭐해했다. 여동생이 으스대는 걸 두고 보는
건 상당히 기분이 나쁘지만, 뭐, 확실히 자랑할 만한 경력이다.
백퍼센트라니.
아니 뭐, 그건 역시, 과장해서 한 말이겠지만.
“아니, 과장이 아니야. 진짜라니까. 상담을 받기만 하면 어떤 상대라도 나는 반드시 사랑을 성취시킬 수 있
어”
“............”
그건 무섭군.
오히려 상담하는데 주저할 만큼 위협이 느껴졌다ㅡ 아니, 애초에, 여동생한테 상담을 한다고 하는 상황이, 이미
크나큰 실수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것도ㅡ 연애상담.
뭐.
애초에 그.것.이 사랑인지, 아직 잘 모르니까ㅡ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해 수용액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말해볼까.
“실은 요새, 반에 신경쓰이는(気になる) 애가 있어”
“모모타로 같은 애?” (주:일본 옛이야기 등장인물.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가 개·원숭이·꿩을 거느리고
도깨비섬로 가서 도깨비를 정벌하고 보물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
“나무(木になる)가 되는 게 아니라고!” (주:키니나루(きにな·る)- 気になる, 木になる 동음이의어,
언어유희)
아마도 남매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을 고레벨,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극히 저레벨인 대화였다.
다만, 츠키히는 의도적으로 개그를 한 게 아니라, 반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어? 어? 무슨 말이야?”
하고 곤혹스러움을 보였다.
여동생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나는 히죽 웃고,
“즉, 반이 바뀌어서 같은 반이 된 여자애한테, 혹시라도 나는 호의를 품고 있을지도 몰라”
라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히죽 웃을 필요가 어디에 있었지.
“어머, 세상에!”
츠키히가 과장되게 호들갑을 떤다. 이런 지나친 연출과잉이 이 녀석의 인망을 두텁게 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되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그보다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냐고.
“그야 놀라겠지(驚く)......놀랄 뿐만 아니라 까무러친다고(轟く)! [친구를 만들면 인간 강도가 내려가니까]
라고 쓰라린 일을 공언한 오빠한테,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다니”
(주:驚く(오도로쿠), 轟く(토도로쿠)- 언어유희, 轟く의 원뜻:울려퍼지다, 알려지다)
덜덜 떨면서, 입가를 누르는 츠키히.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건 개가 말을 할 정도로 충격이야”
“............”
아니, 개가 두 발로 섰다고 할 정도라면 몰라도.
말하다니, 이미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잖아.
이 녀석은 친오빠를, 어느 레벨로 고독벽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해온 걸까.
뭐, 굳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아까 전의 발언 중에 전제처럼 [쓰라린] 일이라고 들은 것에 대해, 슬며시 상처받은 나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팥밥을 짓지 않으면. 저기, 팥밥은, 밥에다 고추를 섞어서 짓는 거였지?”
“너는 가정과 수업에서 뭘 배운 거냐”
그건 그렇고, 매우 맛있는 요리가 지어질 것 같지만.
“거기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신경쓰일 뿐인데다, 또한 [혹시라도], [품고 있을지도 몰라]일 뿐,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야”
“어머?”
“그러니까 너한테 하고 싶지도 않은 상담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떤 이성이 있다고 해, 그리고 자신이 그 녀석을
좋아하는지 어떤지, 그걸 어떻게 구별하지?”
“......저기, 미안, 오빠”
츠키히가 갑자기 신체의 떨림을 멈추고, 나한테 사과했다. 무엇을 사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여동생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좋다.
“뭐였지. 다시 한번 말해줄래?”
“뭐야, 흘려들은 거야? 정신차리라고, 파이어 시스터즈의 참모담당씨. 제발 좀 봐달라고, 건망증도 작작 좀
해두라고. 알겠어?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 이성을 이성으로 좋아하는지 어떤지, 그걸 어떻게 구별해? 즉
상대한테 품는 감정은, 어느 시점까지가 보통이고, 어느 시점까지가 호의가 되는 거야?”
츠키히는.
입다물고 팔짱을 꼈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이상 알기 쉬운 설명은 없다고 생각하는데ㅡ 이걸로 안된다면 액체 상태의 이유식을
시험해볼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미안, 오빠”
다시금 츠키히가 사과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몇 번씩이나 반복되지만, 여동생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좋다.
애기가 서로 통하지 않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상쾌하다ㅡ 하지만 사과하는
쪽인 츠키히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뭐, 츠키히나 카렌 둘다 [오빠한테 사과하는 건 기분이
좋아]라고 이상한 말을 꺼내면, 즉시 병원에 연행해야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연애상담을 받아온 나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런 레벨의 상담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라고, 사죄내용을 말했다.
어라?
그래?
그렇다면 나, 상담해서 손해봤잖아.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뭐야, 저렇게 으스대놓고, 츠키히, 네 녀석의 힘은 고작 그 정도인 거야?”
일어선 다음, 몸짓을 섞어 츠키히를 깔보는 나 (미국의 홈드라마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동생을 깔보는 건, 여동생한테 사과받는 다음으로 기분이 좋은 행위였다.
내 기대를 배신한 걸, 용서해줄 마음이 든다.
“뭐, 괜찮겠지. 확실히, 중학생 상대로 약간 레벨이 높은 상담을 해버린 내가 잘못한 걸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레벨이 낮은 상담을 받은 적이 없어”
아라라기 츠키히는 죽은 생선과 같은 눈ㅡ 이 아니고 죽은 생선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을 받기만 해도, 살아있는데 죽고 싶어지게 되는, 그런 시선이었다.
시선이라기보다, 광선 같다.
“응. 딴지는 기본적으로 오빠가 하는 것이고, 내가 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뭐, 이번만큼은 내가 말하도록
할까. [이 기분이 사랑인지 어떤지 알 수 없어]라고”
츠키히는 나를 따라하는 것처럼 일어서서,
“소녀는 자네라네!”
옛 시대의 만담가처럼 내 가슴팍을 손등으로 후려친다.
여동생한테 딴지를 걸리는 것도, 여동생한테 자네라고 불리는 것도, 여동생한테 손등으로 맞는 것도, 뭐,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지만, 왠지 내 성벽이 과도하게 변태처럼 되어가는 착각을 느꼈기에, 지금 느꼈던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은 앞으로도, 가능하면 무시하도록 하자.
모두를 최대한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일부러 변태인 척을 한다는, 아라라기 코요미의 기본적인 캐릭터 설정을
잊지 않ㄷ록, 신경쓰지 않으면.
“소녀라니......중학교 여자애 쪽이 훨씬 소녀에 가깝잖아”
“중학생 여자애한테 소녀는 없어!”
딱 잘라 말했다.
수많은 상담을 시체처럼 밟고 넘어온 그녀의 순수한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깊게 파고들면 여성불신에 빠져들 것
같기에, 적당히 사양하기로 했다.
“정좌!”
츠키히는 고함을 질렀다.
나한테.
뭘 잘난 척 하는 거야, 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신체는 그 박력에 밀려 제멋대로 정좌해버렸다. 이 무슨
노예근성인지.
하지만 뭐지, 이 녀석.
왜 화를 내는 거냐고.
뭐가 그녀를 화나게 한 거지. 뭐가 그녀를 격노하게 만든 거지.
츠키히는 꿇어앉는 나를 앞에 둔 채, 자신은 앉으려고 하지도 않고, 팔짱을 낀 다음, 휙하고 아래턱을 들어올려,
나를 내려다본다.
“오빠. 일단 먼저 묻겠는데, 그거,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진심이라니까. 나는 지금까지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입을 조심해서 놀리도록 해”
명령을 받았다.
여동생한테.
“경어를 사용해, 그리고 멍하니 있지 마”
“네, 넵, 알겠습니다”
따르는 나.
여동생 앞에 정좌한 채 깔봐지는데다 명령을 받고, 경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건 이거대로 이하 생략.
무시무시.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설명하도록 해, 이 오빠 녀석”
오빠 녀석이라니.
새로운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말이군.
시스터 프린세스에서 13 번째 여동생으로 등록해도 된다.
“저기, 그, 별로 구체적인 애기는 할 수 없지만......”
상세한 것까지 애기해버리면, (나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니까.
여동생한테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싶지 않다.
“......어쨌든, 다양한 경위가 있어서 말이지. 뭐, 일단, 대상을 임시로 H 씨라고 해둘게”
“H 씨”
왠지 구체적이네, 라고 하는 츠키히.
뭐, 보통의 이니셜이다.
구체적인 건 당연.
“이번 달 초에 같은 반이 되고 나서, 나는 어느새 그 H 씨만 생각하고 있어. 머리 속만이 아니야. 수업 중이나,
문득 칠판에서 시선을 떼어놓으면, H 씨의 자리를 보고 있어. 학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등하교길 중에도, 왠지
모르게 H 씨를 찾고 있어. 서점 같은 곳에 책을 사러 가도, 좁은 마을이니까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버리고. 그래서, 그 서점에서 산 책을 읽고 있어도, [아, 이 문장은 H 씨가 좋아할 거 같네]라고
생각해버려. 야한 책을 사려고 해도, [아아, 이런 책을 샀다간 H 씨한테 미움받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살며시
책꽂이에 돌려놓게 돼”
“오빠,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지 마. 오빠의 개인정보를 알고 싶지 않아”
그보다, 야한 책을 사는데 주저하는 오빠의 애기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라고 츠키히는 말했다.
이런, 가명을 H 씨로 해버리니까, 무심코 술술 애기하게 된다.
참고로 H 는 변태의 머리글자다.
“그보다 오빠”
“왜”
“그건 이상하겠지”
딱 잘라 말했다. 단정했다.
진지한 얼굴이 아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니, 역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느껴졌지만, 어떨는지,
그런 식으로 단정 지으면, 왠지 반항하고 싶어진다.
꽤 심술꾸러기인 나.
“모르겠다고? 그 정도는, 싫어하는 녀석 상대로도 생각하는 거겠지. 거기다 이처럼 애매한 기분은 내버려두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잖아”
“으-음. 그렇긴 하지만 그런 게 아니고......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츠키히는 팔짱을 낀 채,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를 기울인다.
“말하고 싶은 건 여러 가지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뭐야, 너한테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거야?”
즉, 지네(ムカデ)가 걷는 방법을 묻는 것과 비슷한 걸까. 한자로 지네(百足)라고 쓴 걸 보고 알 수 있듯이,
백 개의 다리를 가진 저 생물이, 어떤 순서로 다리를 움직이는지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없었다는 고사가 있다.
(주:百足,ムカデ-지네의 이름)
그런데, 그 때까지 평범하게 걸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은 순간, 그 때까지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그 뒤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해버렸기에, 츠키히는 이제부터 연애에 관심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와 고민을
공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
뭐, 그건 그거대로, 꽤 괜찮다는 느낌도 드는군.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레벨이 높은 애기가 아니라니까, 오빠”
저레벨의 애기야, 라고 하는 츠키히.
“그리고 지네는 다리가 백 개 있는 게 아니니까“ (주:지네다리-최소 30~최대 340 개)
“뭐, 뭐라고!? 뭐시라, 지네한테 다리가 백 개 있는 게 아니라고!?”
그 정도는 들을 필요도 없이 알기에, 시시한 잡학을 가지고 과장되게 놀란 척하는 재밌는 리액션을 취해보았지만,
츠키히의 눈보라(ブリザ―ド)와 같은 시선을 받고, 나는 맥없이 다시 앉았다.
뭐지, 이 썰렁함(フリ―ザ―).
“그러고 보니, 만약 프리더(フリ―ザ)와 베지터가 퓨전했다면, 엘리트 전사의 프리터님이 되었을까?”
“프리더와 베지터는 몸 형태가 완전히 다르니까 퓨전할 수 없어”
(주:블리자드(ブリザ―ド), 냉장고, freezer(フリ―ザ―), 드래곤볼 프리더(フリ―ザ)를 이용한 말장난)
단념하지 않고 과감하게 뚫으려고 했지만, 여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 너무 냉정한데다, 그녀는 드래곤볼을 이미
읽은 상태였다.
“지네 애기가 아니라, 단순히, 유치원 아이한테 곱셈의 개념을 가르쳐준다는 그런 기분이야”
“곱셈이라고? 그런 바보 같은, 그렇게까지 간단한 일이라고 말하는 거야?”
“응. 지금 츠키히의 모습은, 곱셈을 할 수 없는 오빠를 앞에 둔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동생의 구도라고
생각해주세요”
“............”
처절한 구도이군.
여동생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잖아.
불쌍하게도.
“아, 그래도 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야. 봐봐, 저기, 전지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였지. 기관차 토마스가
아니고......” (주: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 어린이 애니메이션, 크리스토퍼 오드리 작품)
“토머스·에디슨”
“아아, 그래그래”
“어째서 에디슨보다 토마스 쪽이 먼저 튀어나오는 거야, 오빠”
“아, 미안. 저 사람과 꽤 사이좋게 지냈으니까, 무심코 이름으로 부른다고”
“기관차와 헷갈린 주제에”
“토마스는 말이지”
억지로 흘려버리는 나.
개그에 관해서는 완고하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한테 [1+1 은 어째서 2 가 되는 걸까]라든지, 사물의 근본을 묻는 질문을 자주 했던
모양이야. 곱셈은커녕 덧셈이라고. 배운 것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납득할 때까지 계속 질문한 모양이야”
“아니, 그렇게 말하면, 마치 오빠와 에디슨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런 건 없으니
까”
츠키히는 고개를 흔들었다. 붕붕하고.
“[1+1 은 어째서 2 가 되는 걸까]라고 깜찍한 질문을 선생님한테 하는 아이는 이 세상 어느 시대에나 늘 있지만,
토마스·에디슨이라는 발명왕은, 딱 1 명뿐이야”
“어-?”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말을.
흥이 식어버린다고.
장래 에디슨이 될지도 모르는, 깜찍한 아이들의 싹을 솎아내지 말라고.
“그래도 어차피 에디슨 역시 어릴 적에 [나는 발명왕이 될 거야!]하고 말하며 놀았을 거라고?”
“에디슨 시대에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그는 타임머신을 발명했겠지”
결국, 간단한 것일수록 설명하기 힘든 법이야, 라고 츠키히는 애기를 되돌렸다.
“뭐, 오빠도 오빠 나름대로 진지할 테니까, 너무 바보 취급하거나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없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다면,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미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
“싫다면 애초에 그런 의문을 깊이 파고들지 않겠지”
“아니, 별로 깊이 파고든 건 아니지만”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괴롭다고 해야 하나.
안개처럼 뿌옇게 되어서, 어찌해도 개운치 않다ㅡ 라는 것이다.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직시하는 걸 계속 등한시해온 나이니까, 자신의 감정을 전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도.
그런 자신은 잘못되었다고ㅡ 지금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ㅡ 제대로 마주 바라보고 싶다.
자신의 마음속이나, 감정, 그런 부류의 여러 가지와 제대로 마주보고 싶다.
“왜일까. 일단 나,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
“없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아”
나는 아까 전 츠키히가 그랬던 것처럼, 정좌를 한 채였지만, 가슴을 펴고 뽐냈다.
“나는 여태까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
............
............
뭐지.
말하고 보니, 왠지 허무한 기분이 되었다.
쫙 편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아니, 그건 워래 열려있던 나락의 구멍이었을지도 모른다. (주: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에 나오는 악역 캐릭터 나라쿠의 저주, 풍혈이 생기게 됨)
어?
나는 그런 캐릭터 설정이었나?
그거, 위험하잖아?
쫙 폈던 상반신이 맥없이 늘어져, 나는 새우등이 되었다. 뭐, 등을 쫙 펴거나 구부정하게 있는 것 둘 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정좌에 걸맞는 등골의 상태는 아니다.
“수학여행날 밤, 베개싸움을 끝내고 취침시각을 넘긴 후에 펼쳐지는 잠자리 대화 비슷한 연애토크 대회에서,
[아니, 나, 지금 좋아하는 애, 없어]라고 말한 녀석이 있다면, 그건 나야”
“오빠한테 친구가 없는 이유는 그 점에 있는 것 같아”
쓸데없는 참견이다.
지금은 우정의 애기는 제쳐두고, 연애감정의 애기이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친구도 만들 수 없는 녀석이라니, 얼마나 신세대길래.
“뭐, 변명을 굳이 하자면”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
“싫어!”
“브라더(brother) 명령이다!”
“음......브라더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지”
시스터가 납득했다.
아무래도 변명을 들어줄 모양이다.
“즉, 그 수학여행날 밤이 좋은 예이지만, 아무래도 학교라는 공간에는 [누군가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이상한 압력이 느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음”
츠키히가 약간 반응을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게, 예상 외로 정론이었기에,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연애압력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너한테 연애상담을 하러오는 여자애들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나는 아주 사이좋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그런 폭력적인 분위기를 싫어했어”
“약간 비뚤어진 관점이란 느낌도 들지만, 학교라고 하는 그룹이 연애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건, 오빠가 말한
대로일지도 몰라. 남자와 여자를 한꺼번에 한 곳에 모아두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츠키히는 일단 납득해보이고.
아니, 납득한 척을 하고.
“그건 모두가 연애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되지만, 오빠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숨막힐 정도로 답답했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는, 오빠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아”
“되지 않네”
“변명이네”
“변명이군”
“사과해”
“죄송합니다”
사과했다.
사죄를 강요당했다.
태어나서 여태껏 단 한번도 사람한테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이 내가!
“거짓말 하지 마”
“아, 넵. 죄송합니다. 평상시 늘 거듭해서 츠키히씨한테 폐만 끼치고 있습니다”
“애기를 되돌릴게”
“부디 그러세요”
애기를 되돌렸다.
아라라기 코요미는 오래 전부터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다, 고 하는 부분까지.
하지만 나와 츠키히의 대화에는, 애기를 되돌리기 위해 도중에 거치는 과정이 지극히 많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네. 막상 들으니, 오빠가 여자애를 집에 데려온 건, 옛날부터 한 번도 없었네ㅡ 뭐, 남자애를 데리고 온
적도 없었지만”
“뭐, 그렇지. 아니, 그러니까 나,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 같
아”
“그래도 그런 건,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를 보면,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지 않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건 판타지잖아. 드래곤의 존재를 믿으라고 애기하는 것과 다름없어.
연애인의 스타일리쉬한 러브스토리를 보고, [오오, 근사해. 나도 이렇게 되자] 라고 생각할까?”
“으음-, 그야 그렇지만”
에디슨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말이지, 라고 츠키히는 신음한다. 드래곤의 예시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기에, 나는 다른 예시를 든다.
“해리·포터를 읽었다고 해서, 자신도 메라조마(メラゾㅡマ)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주:메라조마(メ
ラゾㅡマ)-드래곤퀘스트 6 의 화염마법, 1 인당 180 데미지)
“그 대사로 판단하는 한, 오빠는 해리·포터를 읽은 적이 없어”
설둑하는데 실패했다.
유감, 파이어 시스터즈한테 화염계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아니, 씨리즈물은, 일단 타이밍을 놓치면 쉽사리 스타트를 끊기가 힘들어지니까.
“혹은, 반대의 경우가 있을지도 몰라”
“우냐?”
“즉,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에서 아주 스타일리쉬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드라마틱한 연애를, 지겹게
보잖아. 그러니까, 그만한 레벨이 아니면 연애가 아니라고, 나는 자연스레, 그렇게 인식할지도 몰라.
화려함이나 겉보기에 너무 치중한 탓에, 사소한 일상생활 속에 숨어있는 작은 사랑을, 나는 놓쳐버린 걸지도 몰라.
말하고 보니 나는 정보가 과도한 현대사회의 희생자네”
“말하는 거나 말하고 싶은 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말투는 왠지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서 괜히 화가
나네”
뭐가 희생자냐고, 이 위선자 녀석.
츠키히는 그렇게 말하고 한쪽 발을 들어올려, 정좌하는 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머리 위에 올려놓고
싶었겠지만, 다리가 거기까지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내 어깨를 질근질근 짓밟는 츠키히.
보통 때라면 차버릴 테지만, 뭐,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범하게 넘어가주도록 하자.
대범하게 넘어가야 할 부분을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뻔뻔하게 변명하는 건 안돼, 오빠. 그런 정보가 과다한 사회 속에서, 모두 평범하게 연애하고 있으니까”
“음-. 정론공격인가”
“즉, 이 의제를 결론짓기 위해서, 오빠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걸로, 괜찮겠지?”
“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오히려 사랑의 전수자라고 해도 좋아. 나오에 카네츠구
(直江兼続)라고 불리는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겠지?”
(주: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때, 나오에 가문 계승, 우에스기가를 모심. 3 살
연상 부인인 오센과 사이가 좋으며 측실을 한명도 두지 않음, 일편단심 사랑의 대명사)
“오빠가 언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라고 불렸는데”
불린 적이 었었다.
단 한 번도.
“그래도 사랑이 없는 오빠”
츠키히는 말한다.
참고로 다리는 내 어깨에 놓여진 채 그대로이다. 양말이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있다는 시츄에이션은, 왠지,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뺨을 비비고 싶어진다.
“사랑이 없는(あいなき) 오빠는, 글쎄”
“어이, 여동생. 나를 쥐노래미(アイナメ)처럼 부르지 마”
(주:쥐노래미(아이나메, アイナメ, greenling)- 쏨뱅이목 쥐노래미과 바닷물고기, 돌삼치라고도 불림,
사랑이 없는(아이나키), 쥐노래미(아이나메)의 발음장난)
“사랑이 없는(あいなき) 오빠는, 글쎄”
내 항의는 말없이 각하되고, 츠키히는 떠보는 것처럼 계속한다.
십수년씩이나 같은 지붕 밑에서 지내왔지만, 이 녀석이 딴지를 거는 것과 걸지 않을 때의 판단기준을 알 수 없다.
“여자가 싫다는 건 아니지”
“응? 무슨 의미야?”
“여자를 싫어하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란 의미”
“아아, 그렇지 않아. 인간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를 자처한 적은 몇 번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여자만큼은 예외라고 강조했어”
“인류의 과반수가 예외잖아”
“진짜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대목은 농담이다. 그런 걸 강조한 적은 없고, 애초에 인간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를 자처한
적도 없다.
여동생과의 대화라는 건, 어찌해도 진지함, 진실함이 결여되어 좋지 않다. 진지하게 임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ㅡ
불량스런 양아치를 흉내낸 적도 없다.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를 서투르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ㅡ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단언할 만큼의 자신도 없다).
“응. 뭐, 그렇네-. 왜냐하면 오빠는 스스로 아무도 데러오지 않는 주제에, 나와 카렌이 집에 데려온 친구들과
옛날에는 자주 놀아줬으니까-”
“그랬나”
“응. 오빠, 내 친구들한테서 인기많았어(もてもて)”
“뭐라고? 내가 티모테(ティモテ)였다고?” (주: 티모테(Timotei)- 샴푸, 일본광고 및 한국광고로 방송,
럭키스타 6 화에서 코나타가 광고 흉내를 내면서 패러디함, 인기많았어(모테모테)와 발음장난)
점프의 CM 에 나왔잖아.
일확천금이다.
“오빠의 인기있던 시절은 저 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네”
“그런 시기가 있었다니......뭐, 괜찮아”
듣고 보니, 그 때는, 츠키히가 다이묘 행렬처럼 데려온 친구들과, 인생게임 등등을 하면서 놀았던, 그런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다. 데려온 친구들의 수가 츠키히를 포함해 홀수가 될 때에, 내가 사람수를 맞추기 위해
끼어들게 되었다. (주: 다이묘- 일본 시대의 영주)
그래도, 그건 오래 전 이야기.
그립지도 않다.
“어쨌든, 여자가 싫다는 건 아니야. 좋고 싫음을 말하지 않는 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었어”
그런 내가.
쿨하고, 냉정하고, 굳이 말하자면 돗토리 사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진 내가 현재 흔들리고 있다는 거니까,
생각해보면 이건 대사건이다. 천지가 뒤집힐지도 모른다. (주:돗토리 사구(鳥取砂丘)-일본의 사막지대)
“그래서 나한테 연애상담인 거야?”
“응. 그렇습니다. 그보다, 실컷 애기해놓고 좀 그렇지만, 별로 뚜렷한 해답을 원하는 건 아니야. 너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들어보자고 생각했어. 네 남자친구, 저기, 로우소쿠자와군이었지?”
“응. 잘도 기억하고 있네”
“이름만 말이지”
만난 적은 없으니.
이름만 기억한다기보다, 이름 이외는 전부 모른다.
“너는 언제, 어떤 단계에, 그 녀석을 [좋아한다]고 판단했어? 그걸 가르쳐주길 원하는 게, 본심이야”
“그런 건, 뭐ㅡㅡㅡ”
츠키히는 말을 머뭇거린 채,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잠깐 입다물었다.
말이 막혔다기보다, 단순히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스럽네, 이 녀석.
뽀뽀해버릴까.
“ㅡㅡㅡ왠지 모르게야”
“왠지 모르게”
“그래. 애매하고. 적당하게”
“그런 걸로 괜찮아?”
“그런 걸로 괜찮아. 그런 법이야”
마지막에 한 말은 왠지 대충 지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또한 수줍음을 숨기려는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명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포기한 건가.
오빠를 포기한 건가.
그렇다고 하면 그건 슬픈 사실이다.
나는 깨끗이 단념하지 못하고, 저항을 했다.
“자, 어떤 단계에 그렇게 됐는지는 일단 접어두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 일단 듣도록 할까. 그
로우소쿠자와군을, 너는 어째서 좋아하게 되었어?”
“그것도 왠지 모르게야”
이번에는 즉답이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대충 지어낸 것으로, 대답하기 귀찮다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애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ㅡ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태까지 깊은 애기 (?)를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 건 너무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정말로 왠지 모르게인걸.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되어 왠지 모르게 되었는걸”
츠키히는 토라진 것처럼 말했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되어 왠지 모르게 되었는걸.
“좋아하는 걸까- 라고 생각해, 좋아하는구나- 라고 느껴서,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 그런 느낌”
“뉘앙스에도 정도란 게 있겠지”
대체 뭐냐고, 그 3 단용법.
그런 느낌이라고 들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유라고 해도 말이지. 그야 여러 가지 이유를 대는 건 가능하다고? 멋있다던가, 상냥하다던가,
키가 크다던가, 부자라던가, 그런 이유를 갖다붙이는 건, 여러 모로 가능하지만”
“............”
그녀 취향의 타입 중에 [부자]가 섞여있다는 사실이, 츠키히의 인간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그게 아니고,
오히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래도, 그런 거 전부 거짓말인 걸”
라는 말 쪽이겠지.
“자신의 기분을 이성이 이해하게끔, 구실을 댄다고 해야 하나. 이유를 갖다 붙인다기보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거야. 좋아한다는 결론이 있고, 그 결론을 향해 사닥다리를 걸쳐가는 거지”
“사닥다리”
“사닥다리가 아니고 로켓일까. 응. 로켓을 만든다는 느낌”
츠키히는 짝하고 손뼉을 쳤다ㅡ 아무래도 그녀 마음 속에, 납득이 잘 되는 훌륭한 예시였던 모양이다. 멋대로
납득하다니 간사한 녀석이다.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라고 생각해ㅡ 이런 말을 알고 있어? 오빠”
“무슨 말인데”
“두꺼비를 사랑하는 자는, 달에서 두꺼비를 볼 수 있데”
“......그런 말은 모르지만”
그래도 의미는 즉각 알 수 있다.
사랑에 관해서, 그렇게 알기 쉬운 속담도 없을 테지.
좋아하게 되면, 이유 같은 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ㅡ 라고 하는 츠키히의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달에 이르기 위한 로켓 만들기인가.
확실히, [어째서 좋아하는 거야], [어디가 좋은 거야]라고 하는 건, 핵심을 놓친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어느 단계부터 [좋아]하게 되냐고, 어긋난 감각이겠지.
그런 엄밀한 것이 아닌.
오히려 애매모호함(ファジィ).
“......그런가, 과연. 그럴싸한 논리를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는 거구나”
“뭐,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건, 너무 지나치게 말한 거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개인을 사랑하는 건,
상반되는 면이 있으니까”
“있는 거냐”
“응. 박애라는 건, 결국,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거니까. 공평과 평등은, 사랑(愛)이긴
해도 연애적인 사랑(恋)은 아니야.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1 명을 선택하는 건, 말하자면 차별인걸.
박애주의와 차별주의가 양립할 리가 없잖아”
오빠는 박애주의자일지도 몰라, 라고 하는 츠키히.
음.
그건ㅡ 왠지, 칭찬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좋은 말을 듣는 것 같아도, 어떨는지ㅡ 왠지 모르게, 봄방학 때를 떠올리게 된다.
봄방학의.
내 박애주의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싫어도 누가 괴롭히는 것처럼 떠올리게 된다.
“전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聖人)이란 게 되겠지만ㅡ 성인(聖人)이 연애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겠지?”
“상상하기 어렵네”
그래서야 속세에 너무 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흠.
뭐, 차별주의라는 건 너무 지나치게 말했다고 쳐도, 즉 연애는, 어디까지나 속물적이며, 그래야만 하겠지.
박애와는 다르다.
마치.
“전 인류를 상대로 연애적인 사랑(恋)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최강이겠지만”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에 사랑을 애태운다ㅡ 인가. 그야 어렵겠지. 어렵다기보다 무모하겠지”
“오히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절조없는 바람둥이 같아”
“흠”
그래도 뭐, 그런 극단적인 애기를 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개념이나 정의는 일단 놔두도록 하자.
너무 애기를 전개해도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내 반의 H 씨에 관한 일이다.
“뭐, 네가 말한 대로, 나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외로운 녀석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내가, 그런 나, 아라라기 코요미군이 지금 그야말로, 방년 18 세가 되어 마침내, 사랑에 빠졌을지도 몰라”
“아니!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말고, 후딱 정해버리면 되는 거야!”
츠키히는 상반신을 구부리고, 내 양어깨에 탁하고, 굳세게 격려해주는 것처럼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실로 위세좋게 웃는 얼굴로 단언한다.
“빠졌을 거야!”
“빠졌다는 건가......”
“오빠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정!”
“결정한 거야!”
“그래! 예정은 미정이 아니야!”
휙, 나한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마를 나한테 부딪치는 츠키히. 숨결조차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감이었다.
“오빠는 H 씨를 아주 좋아해! 내가 정했어!”
“너가 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너무도 당찬 박력에 밀려.
나는 그렇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보다.
“............”
그렇네. 응.
츠키히가 말한 대로이다.
아니, 말한 대로일지 여부는, 전혀 알 수 없지만ㅡ 들은 대로 해보자.
좋아할지도 모른다, = 좋아해도 괜찮잖아.
좋아하는 건가, 하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거네, 라고 느끼고.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다.
늘,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느낌이겠지.
“그렇군. 좋아, 개운해졌다고, 츠키히. 끈질긴 아이라고 불렸던 나를 개운하게 만들다니 대단하군. 나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너를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아니, 뭘.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수줍어하는 츠키히.
손바닥을 얼굴 앞에서 휘휘 젓고, 싱글벙글하면서.
그런 사랑스러운 리액션을 보게 된다면, 좀더 부끄럽게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 오빠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수줍어하는 여동생은 사랑스러워!
모에모에!
“너는 최고의 여동생이라고, 츠키히!”
“오빠도 참-. 그렇지 않아-”
“나는 예전부터, 너는 언젠가 해낼 녀석이라고 생각해왔어. 그 언젠가가 설마 오늘이었을 줄이야. 50 년도
채우지 않고 마리라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하여간, 네 녀석의 진화 속도는 나를 놀라게 한다니까. 너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서, 이제부터는 카렌이라고 해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야”
“아하하하-”
“과연 나의 여동생다워”
“어라? 자화자찬 모드로 바뀌었어?”
츠키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들켰는가, 영리한 녀석이다.
이 기세로 [오빠가 칭찬받으면 기뻐하는 여동생]으로 츠키히를 조교하려고 계획했는데, 쉽사리 되지 않는
법이로군.
또한, 슬며시 카렌을 낮추면서 츠키히를 띄워줬지만, 그것에 대해 그녀가 완전히 무시해버린 건, 문제점으로써
확실히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은 제쳐두고.
“여기선 감사해두도록 하지. 정말 고마워, 츠키히”
“당연하게 받아들일게”
이런 초보적인 질문을 받은 건, 정말 처음이었는걸―, 라고 츠키히는 가슴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뭐,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오빠.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개가 짖는 것처럼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 당연한 건가”
“응. 보통이야”
“반에 신경쓰이는 여자애가 있는 건 보통”
“보통!”
“수업 도중, 칠판보다 그 아이 쪽을 자꾸 쳐다보는 것도 보통”
“등하교 중에 그 아이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것도, 우연히 만나지 않으려나 생각해버리는 것도, 책을 살 때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해버리는 것도!”
“보통!”
“그 아이의 가슴을 주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
대회가 멈췄다.
“응?”
“응?”
서로 속내를 탐색하는 것처럼 시선을 교환한다.
“어? 어라? 츠키히.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에에엑? 제, 제 쪽인가요?”
“너도 정좌하는 쪽이 좋지 않아?”
“아, 넵, 알겠습니다”
곤혹한 채, 정좌하는 츠키히.
정좌한 오빠와 정좌한 여동생이 마주 본다.
여긴 뭐지, 다도실인가.
잊혀지기 쉬운 설정이지만, 츠키히, 다도부.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그 H 씨의 가슴부분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만지고 싶고, 주무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잖아. 지금 그런 애기를 하고 있어”
“......어라? 내 머리가 나쁜 걸까, 왠지 오빠가 말하고 있는 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해가 되질 않아. 그
대사를 들은 감상이 [듣고 있지 않아]와 [묻지 않았어]로 2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아”
“하아? 너는 어쩔 수 없는 녀석이로구나. 이런이런, 멍청한 여동생을 둔 오빠는 고생하는군”
내 평가가 다시금 뒤집혔다.
이렇게 태도를 싹 바꾸는 건, 내가 한 거지만 너무 노골적이기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반에서 나밖에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애가
거유여서, 정말, 주무를 수밖에 없다고!”
“잠깐만 오빠, 만진다거나 주무른다거나, 노골적인 말을 사용하는 건 그만둬주시겠습니까?”
“응? 그런가?”
관대한 나는 여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 터치할 수밖에 없잖아!”
“노골적이지 않고, 사랑스러워졌지만”
왠지 말이지, 하고 츠키히는 우울하게 말한다.
나를 보는 눈이, 오빠를 보는 눈이 아니고 변태를 보는 눈이 되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착각일까.
아니, 뭐 착각이겠지.
지금 트릭 아트(trick art) 같은 게 유행하고 있으니. (주:트릭아트(trick art)-2 차원 평면회화작품을
3 차원 입체감각으로 체험가능한 미술작품. 2010.6.30.~8.20 까지 일산킨텍스에서 트릭아트 특별전 진행중)
“즉, 요컨대 나는 깨달으면, H 씨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이건 사랑인 거지”
“아니”
츠키히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단적이면서, 이쪽의 올바름을 주장하고 싶은 의욕을 싹 없애버릴 정도로 딱딱한 어조였다.
칫.
이 완고한 녀석.
그래도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런 츠키히한테 과감하게 도전한다.
“하지만 어때,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이 기분은 사랑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오빠가 그런 걸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그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버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네......”
츠키히는, 마치 고대인이 봉한 파괴마인을 일깨워버린 고고학자와 같은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책임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네가 아주 좋아하는 로우소쿠자와군도,계속 네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리 생각할 테지만, 그래도 그건 집합론으로 따질 때 ‘참’일 뿐, 로우소쿠자와군은 나를 포함한 세계 모든
여자들의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이군.
그보다, 그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너는 어떠냐고.
“그러니까 오빠. 남자애가 여자애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런 감정이니까, 너무 신경쓸
필요 없어”
“............”
왠지 다른 방향의 상담이 시작되어버린 모양이다.
연애상담에서 성교육 시간으로.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별개의 의미로 보통이니까”
“그런 거냐”
“그건 당연한 거야”
“당연한 일”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야”
“욕구!”
욕구인가......
그건 좋지 않군.
“아니, 오히려 욕구는 있지만”
“고전만담의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 말아줘. 무슨 말장난이냐고”
“이걸로 장면이 바뀌어도 될 정도로 산뜻한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뭐야, 아직도 애기는 계속되는 거야”
“응. 그래서야 끝나지 않아”
츠키히는 말한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끝나버렸어.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오빠의 인간성은 이제 끝이라고. 아-, 반장난으로 했어도, 나, 나머지 반은 꽤 진지하게 상담에 응해줬는데
말이지-. 설마 친오빠한테 흘러넘치는 성욕에 대한 상담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성욕이라니 실례라고. 내가 모처럼 진지한 상담을 하는데”
하물며 반장난으로 했다니.
장난치지 말라고 애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잖아. 반 여자애의 가슴이 신경쓰여, 수업 중에도 칠판보다 그 여자애의 가슴을 보고, 등하교
중에도 그 애의 가슴만 찾고 있고, 서점에 가도 그 애의 가슴만 상상한다니. 그것이 성욕이 아니고 뭐겠어”
“잠깐 기다려. 단어가 여러 가지 바뀌어 있어”
대담한 쇄신이 행해지고 있다.
무슨 리뉴얼이냐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그게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라고 생각하고, 그 녀석은 오빠가 아니라 변태라고
생각하지만, 츠키히,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업신여겨선 안돼. 분명 지금 넌, 착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
“아아. 착각하지 말아줘. 백보 양보해도, H 씨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은 이 순수한 기분이 성욕이라고 해도.
퓨어한 성욕이라고 해두자고. 이번 사건이 그런 측면을 적지 않게 띠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나도 뭐, 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여동생의 체면을 세워줄게. 그래도 어때, 츠키히”
나는 일단 말을 끊고.
그리고 힘을 담아, 준비해둔 대사를 말한다.
“성욕 없이 사랑은 생겨날 수 없잖아?”
“닥쳐. 아, 죄송해요. 나 정도 되는 인물이 딴지의 선택을 잘못해버렸네. 죽어버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명언처럼 애기하지 마, 라고 츠키히는 혀를 찼다.
품위없는 녀석이다.
다도부에 속해있다는 설정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죽지 않을 거야. 유감스럽게도 네 오빠는 불사신이야”
“오빠가 불사신이라면 나 역시 불사신이야”
하여간, 하고 말하고.
하여간, 정말, 하고 말하고.
츠키히는 스륵하고, 정좌를 한 채로, 요령있게 무릎을 접어서,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왜 그래”
“시험해보려고 생각해서”
“시험? 네 녀석, 이 오빠를 시험해본다는 거냐”
“응. 그 정도의 오빠를 시험해본다는 거야”
무릎 관절끼리 맞닿기 바로 전에 츠키히는 이동을 멈추고, 거기서 그녀는 쓰윽하고 가슴을 나한테 내밀었다.
“자, 만져봐”
만졌다.
말없이. 무표정으로.
즉결즉단, 즉시 터치했다.
“꺄악-!”
광속에 필적하는 나의 스피드에 놀랐는지, 비명을 올리며 뒤쪽으로 넘어질 뻔한 츠키히였지만, 그 기세인 채로
넘어지면 그녀는 등 뒤에 설치되어 있는 침대의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칠 것 같았기에, 나는 양손에 꽈악 힘을
담아, 어떻게든 츠키히의 상반신을 지탱했다.
아니.
즉 츠키히의 가슴을 손가락이 파묻힐 정도로, 꽉 움켜줬다는 말이지만.
터치가 아닌 캐치이다.
“아팟-!”
은혜도 모른다고 하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하마터면, 침대에 후두부를 세게 부딪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말하자면 생명의 은인인 나한테, 츠키히는
상반신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 쪽으로, 마치 진짜처럼 일으켜세워서, 그대로 나한테 박치기(head-but)를
먹였다.
머리와 머리가 충돌한다.
시야 안에서 불꽃이 튄다.
그래도 나는 츠키히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뒤로 튕겨나갈 뻔했지만, 그녀의 가슴을 생명줄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아팟! 놔, 놓으라고! 놓지 못할까(離さんか)!”
“놓치 못할까(離さんか)? 아아, 죽은 애완견의 재를 뿌려 벛꽃을 피게 했다는 저 노인의 애기인가”
(*주: 離さんか(하나상카),花咲爺(하나사카지지)-발음장난, 꽃피우는 영감애기)
“말꼬리 물고 늘어지는 말장난을 할 여유가 있다면 빨리 손을 떼어놓으라고!”
“그건 상식에서 손을 떼라고 하는 의미야?”
“이미 상식으로부터 손을 뗀 상태잖아, 너는! 좀더 평범한 의미라고!”
여동생한테 ‘너’라고 굳이 불리지 않아도.
나는 뒤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 신체를 일으키고 나서, 그녀의 움푹 튀어나온 부분에 걸려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어떤 오빠냐고, 어떤 오빠냐고, 어떤 오빠냐고. 음침한 오빠냐고? 아- 진짜, 말하는 것도 뒤죽박죽이고”
투덜투덜 화내는 츠키히.
실로 프리티하다.
“정말 지금,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네. 들은 순간, 뇌를 경유하지 않은 반사신경으로 주무르러 왔지‘
“이 무슨 실례를. 오빠는 여동생의 가슴 같은 건 주무르지 않아”
“지금 마음껏 주물렀잖아!”
“아니, 달라. 오히려 반대야. 발상의 역전이야. 네 가슴이, 내 손바닥을 주무르러 온 거야”
“뭐야, 그 기분나쁜 문장!?”
“친오빠의 손을 가슴으로 주무르러오다니, 너는 엄청난 변태여동생이로군”
“역전이고 나발이고, 그 발상은 있을 수 없다고......”
가슴으로 손바닥을 주무른다니.
츠키히는 관자놀이를 억눌렀다.
눈치채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떤 탓인지, 나와 츠키히 둘다, 정좌가 풀려있었다.
무심코 균형이 무너졌다.
“아- 정말! 오빠, 여동생의 가슴을 너무 자주 만져!”
“뭐야. 왜 화내는 거야. 너가 스스로 [만져봐?]라고 말했잖아. 따지고 보면 너가 나한테 유혹한 거지”
“유혹”
“그런데 [유혹(誘惑)]과 [어감(語感)]은, 한자로 막상 써보면 아주 비슷하네”
“착안점은 좋지만, 그런 걸로 내 애기는 빗나가지 않아! 울면서 꾹 참을 거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야,
이번 사건은 확실히 카렌한테 말해둘 테니까!”
“그만둬. 내가 원형도 남지 않게 된다고”
샌드백이 되어버리고 만다.
츠키히를 괴롭히면 카렌은 화낸다.
“그 결과, 카렌 손가락마디에 생채기가 나도 좋다는 거야!”
“뭘 당당하게 꼴사나운 대사를......”
말하고 찌릿하고 츠키히는 나를 째려본다.
살인자의 눈이다.
“오빠 같은 건, 원형도 남지 않는 게 좋아. 내일 아침은, 또 쇠지레로 깨우러 갈 테니까”
“소용없는 짓이야. 공교롭게도, 나한테 흉기는 통하지 않아”
츠키히의 협박을, 코웃음치는 나.
“나는 비실재청소년이야.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
“멋있어!?”
뭐.
자신의 행동을 전혀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지만, 지금은 오해하는 걸 겁내야겠지.
오해라기보다, 두려운 건 카렌이지만.
“자, 애기를 돌리지 않고, 문제점을 다시 짚어보자고? 너가 스스로 [만져봐?]라고, 나를 유혹했지만”
“일단 닮지도 않은 내 목소리 흉내내는 게 제일 열받아!”
아라라기 츠키히, 히스테리 모드였다.
이 무슨 히스테리 소설이냐.
............
안되는가, 이래도 아직 수습이 안되나.
개인적으로는 슬슬 다음 코너로 가고 싶지만, 장면은 그리 쉽사리 바뀌지 않나.
“나는 좀더 이구치 유카씨 같은 목소리야!” (주:이구치 유카(井口 裕香)-애니메이션 ‘바케모노가타리’
아라라기 츠키히의 실제 성우)
“개인 이름을 실제로 언급하지 마”
“그리고 나는 오빠를 유혹한 적 없어-!”
“했어. 이런 식으로 가슴을 내밀고. [me 를 만져봐-?]라고”
“나를 머리가 텅빈 차가운 캐릭터 설정으로 하지 마! 진짜 그런 캐릭터 설정은 원하지 않는다고! 그만둬, 이
책부터 읽기 시작한 사람도 있단 말이야!”
“뭐라고.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내 호감도가 걱정이로군”
이쪽은 지금까지 5 권 분량 동안 쌓아놓은 게 있다고 생각했기에, 안전지대에서 그녀를 놀릴 작정이었으니까. 내
멋진 모습을 충분히 알고 계시다는 걸 전제로 한 행패이다.
“지금은 M78 성운에도 독자가 있으니까, 오빠, 행동거지에는 진짜 주의하도록 해” (주:M78 성운-울트라맨들의
고향)
“그건 진짜 그렇네......”
우주문제가 되어버린다.
지구의 평화는 이제 내 양 어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는 뭐야. 그럼 [만져봐?]라고 들으면, 누구의 가슴이라도 만지는 거야?”
“어이어이, 나를 그렇게 절조없는 녀석으로 생각했냐고. 쇼크네”
거참,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런 도발적인 대사를 듣거나 다른 짓을 당하더라도, 내가 만지는 건, H 씨와 네 가슴뿐이야”
“나도 H 씨와 똑같이 특별범주에 들어가는 거야!?”
“아아, 아니, 카렌도야”
“카렌까지 손을 댄다는 거야? 에에? 잠깐 기다려, 우리들, 그런 사람을 오빠로 불러도 괜찮은 거야?”
“아니아니, 오빠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해가 더딘 츠키히한테, 나는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H 씨는 제쳐두더라도, 너희들의 경우는 오빠이기 때문이야”
“”무, 무슨 말이야......?“
“오빠로써 여동생의 가슴 같은 건, 가슴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거야. 반대로 말하면, 여동생의 가슴을 아무리
만져도, 오빠한테 그 행위는, 가슴을 만지는 게 아니야. 세지 않는 거지. 즉 아무리 만져도 괜찮다는 거야”
“그 3 단논법은,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기보다, 사람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불투명할 정도로, 있을 수 없는 발상이야......”
역전시키기 전에 비약하고 있어, 하고 츠키히는 맥없이 고개를 떨군다.
이해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슬프군.
혹시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토록 서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통신이 이만큼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과 사람 간에는 아무 것도 통하지 않고, 서로 신뢰할 수도 없는
건가.
하지만, 부연설명을 통한 내 사회풍자에도 꺾이지 않고, 츠키히는 굳세고 당차게, 축 늘어뜨린 얼굴을 확
일으켰다. 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항의를 계속할 작정인 모양이다.
끈질기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설령 만져서는 안될 불가침의 존재가 네 가슴이라고 하더라도, 소유자인 네 자신이 허가를 했으니까, 나를
탓할 이유는 되지 않아”
츠키히가 뭔가 불평하기 전에, 이번에는 내 쪽에서 선수를 쳤다. 결국, 아까 전의 야단법석은, 범인이 제 발
저리다고 원인제공자가 츠키히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애초에 발단이 그것이니까.
“아니야!”
하지만, 츠키히는 강경했다.
“달라, 다르다고! 이번에는 츤데레였어!”
“츤데레?”
아니, 어디가?
마리라를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나는 츤데레에는 나름대로 정통해있지만, 아까 전 츠키히의 말에, 그런 요소는
전혀 없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니까 그거야말로 발상의 역전이야. 나는 규제의 테두리에 구애받지 않아!”
“규제의 테두리는 지키도록 해”
이미 단속하고 있다고.
위험하다니까.
최근 여러 모로 엄하니까, 룰은 지켜가면서 야한 짓을 하자고.
“즉 역츤데레야!”
“역츤데레? 무슨 말이지?“
“즉, 평상시가 데레 모드이기에, 아주 친밀하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놓거나 얼굴을 접근시키는 스킨쉽도
태연하게 하지만, 그걸 보고 [어라? 이 녀석,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거 아냐?]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막상
고백해보면, 갑자기 츤 모드로 변모해서 [아, 아니, 그럴 작정이 아니었어요. 진짜 그만둬주세요. 뭘 착각하고
있는 건가요, 멋대로 우쭐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차갑게 쏘아붙이는 거지”
“............”
아니아니, 그건 츤데레나 역츤데레라기보다.
의외로 자주 보이는 보통 여자애잖아?
“즉 역츤데레인 나는, 장난으로 [만져봐?] 같은 대사를 말하지만, 실제로 만지려고 하면 [뭘 진짜로 하려는
거야, 바보 같아!]라고 거절하는 속성인 거야”
“최악이잖아”
무섭다고, 역츤데레.
어떻게 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보다, 애초에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 향후 어떤 전개가 될 거라 생각했기에 너는 내 앞에 가슴을
내민 거냐고”
“뭐, 장난 좀 치거나 살짝 시험해볼 생각으로 말이지, 그러니까 시험해본다고 말했잖아? 파이어 시스터즈
참모담당인 내 계획에 의하면, 내가 가슴을 내밀 때, 오빠는 흥미없는 것처럼 [아니, 그런 빈약한 가슴에는
흥미없어]라고 말해서,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할 테지만, 거기서 내가 [여동생의 가슴이니까
그렇겠지?]라고 딴지를 넣는다는 훌륭한 주고받기를 개시할 장면이었다고”
“아아, 그럴 작정이었냐”
“그런데 왜 훌륭한 리턴에이스를 쳐오는 거야” (주:리턴에이스-테니스에서 상대가 서브한 걸 바로 받아쳐서
점수가 나는 경우)
하여간, 하고 츠키히는 뺨을 부풀린다.
아무래도 남매의 거리감이, 약간 어긋난 모양이다.
“그래도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전개보다, 내가 여동생인 네 가슴을 터치하는 쪽이, 전개로써는 훨씬
재미있다고”
“으-음. 뭐, 그렇겠네. 자, 용서해줄게”
용서해줬다.
주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능력이나, 리더로서의 인망도 그 때문이겠지만, 걱정이 될 정도로 도량이 넓다.
“그래서, 어땠어?”
“응?”
“그러니까, 어땠냐고?”
“아아. 과연, 여동생의 가슴을 터치한 감상을 묻는 거로군”
뭐, 물어보고 싶겠지.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키워온 소유물이,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는지, 신경쓰이는 게 자연스런 발상이다.
여기서 나는 적당히 둘러대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약간 궁리하고, 그 후 솔직하게, 단적으로, 감상을 애기했다.
“76 점의 B 평가!”
“미묘!”
장래가 기대된다.
그래도 이 경우 채점자인 나는 여동생의 가슴밖에 터치한 적이 없기에, 채점기준에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라니?”
“아니, [만져봐?]라고 했으니까 만진 건데”
“그러니까 내 목소리 흉내내는 거 불쾌하다고 했잖아!”
“그 [시험]으로, 어떤 결론이 나오는 거냐고?”
“글쎄”
츠키히는 내 질문을 받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질문할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반응이었다.
이 녀석, 사실 내가 가슴을 주물러주길 바란 건가?
아니, 주무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가슴이 손바닥을 주물렀지만.
어떤 마사지냐고.
“오빠, 욕구불만인 게 아니야?”
“뭐시라!”
최악의 결론이 나왔다.
“봐봐, 그러고 보면 아까,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라고
말했잖아”
“3 번씩이나 말한 적 없어”
연호를 할까보냐.
그건 단순히 실언이다.
무심코 본심을 애기했을 뿐이다.
“그게 역효과인 거야. 완전히 역효과. 성욕을 사랑과 착각해버린 오빠는, 그렇게 욕구불만의 인플레 스파이럴을
일으킨 거야” (주:인플레- 경제용어, 돈이 과도하게 많은 상태, 화폐가치가 천정부지로 하락)
“인플레 스파이럴......”
그건 뭐지.
디플레 스파이럴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지만. (주:디플레 스파이럴-공급이 과도하게 많은 상태, 물가하락,
소득감소, 실업자증가)
“세상에......인플레 스파이럴이라니......그런 007 같은 현상이 내 뇌에 일어나고 있다고 너는 말하는
거냐......”
“응. 그러니까 여동생의 가슴도 분별없이 터치해버리는 거야”
“터치해버리는 건가......터치패널 같은 그 가슴에”
“터치패널은 평면이잖아!”
구타당했다.
만약 상대가 카렌이었다면 나는 벽까지 날라갔을 테지만, 츠키히의 가냘픈 팔로 행하는 공격이기에, 모기 물린
것처럼 간지럽다.
그렇기에, 나는 버텼다.
“핫. 즉 터치패널로, 사랑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거군”
“별로야!”
“그리고 예금을 찾는 거지”
“능숙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여동생이지만, 그런 점은 내 여동생답게, 판정은 공평했다.
“큰 문제네”
라고, 말하는 츠키히.
“이러는 게 내 가슴이니까 다행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 오빠, 이 이상 욕구불만이 쌓이면, 마침내 진짜로 H
씨의 가슴에도 손을 댈 거야”
“흠, 글자 그대로 손을 대게 된다는 건가......그보다 네 가슴이니까 다행인 거로군”
“다행이겠지?”
“나쁘진 않았어”
무슨 대화인지.
“하지만, 애초에 그 이론에 의하면, H 씨가 나한테 [만져봐?]하고 가슴을 내밀게 되는 설정이 되지만......”
H 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과감하게 터치하러 가는 오빠니까. 머리를 짜내겠지. [술래잡기
하자고-, 몸 아무 데나 터치하면 술래야-]라고 말하고”
“얄팍한 잔꾀로군......”
“색깔잡기(色鬼)를 하면서. H 씨의 브래지어색을 지정하는 거지” (주:色鬼- 술래잡기와 달리, 참가자는
술래가 지정하는 색을 찾음. 그 색부분은 안전지대가 되어 술래는 그 색부분에 접하지 않은 사람을 쫓음. 색에
접하기 전에 잡히면 술래교대, 그러지 못한 경우는 다른 색을 다시 지정)
“얄팍하기는커녕, 그 잔꾀야말로 평면 수준이잖아?” (주:얄팍하다(浅い), 평면(平面)-두께의 차이를 이용한
말장난)
아니.
여러 모로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내가 짜낼만한 잔꾀이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곱씹으면서 수긍했다.
그런가, 욕구불만인가.
신랄한 말에 심하게 상처받았지만 (울음), 듣고 보니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 말대로인 느낌도 든다.
훌륭하게 간파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명탐정한테 진상을 들킨 범인은, 이런 기분인 걸까ㅡ 과연, 모두 잘난 듯이 떳떳했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다니.
그런가, 이 기분은 욕구불만이었는가.
“오호라-. 그런 거였나”
“응. 위험했네, 오빠. 하마터면,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고작 가슴이 매력적이란 이유로 반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할 뻔했어”
“그런가. 이건 진정한 의미로 [착각하지 말아줘]인 거네”
“이 경우, H 씨 입장에서 보면, 그것, 절실한 바램이겠지”
“음“
확실히.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사랑과 착각한 나머지, 자칫 잘못해서 고백이라도 한 날에는, 되돌이킬 수 없다.
재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H.씨.의. 성.격.을. 고.려.한.다.면.ㅡ 그런 재난도, 달게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나는 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군. 위험할 뻔했는데 도움을 받았네, 츠키히. 나 정도 되는 사람이, 하마터면 마도로 떨어질 뻔했어”
“마도라니”
“카카카카캇. 확실히 착각도 유분수였지ㅡ 이 제 6 천마왕이신 아라라기 코요미가 하찮은 계집애한테 사랑을
하다니, 당치도 않지!”
“떨어질 필요도 없이, 이미 마도를 걷는 대마도사인 느낌이 들어......”
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뭐야, 라고 묻는 츠키히.
아수라맨이야, 라고 나는 대답했다. (주:아수라맨(アシュラマン)-근육맨에서 나오는 초인, 3 개의 얼굴, 6
개의 팔을 가짐)
“자, 결론이 나왔으니, 다음은 대응책을 세워야겠군. 욕구불만은 내버러두면 큰일이 벌어지니까. H 씨를 내
마수로부터 지켜내지 않으면”
“그러네”
“터치의 차이로 진상을 눈치챈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네”
생각나는 걸 무작정 애기했지만, 무시당했다.
아무리 여동생이 말상대라고 해서 아무 거나 애기해도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오빠가 H 씨한테 손댄 결과, 경찰관한테 잡혀서, [우와~앙! 가슴은 이제 지긋지긋해!] 같은 결말이 되는 건
꼭 막아야 돼”
“경찰관한테 잡히면,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의 결말로 끝나진 않겠지”
“나 역시, 우리 집에서 범죄자가 나오는 건 싫어. 파이어 시스터즈의 이름에 먹칠하는 거야. 지금까지 쌓아올린
신용이 물거품이 되어버려”
“흠. ‘진짜로 두려운 건 유능한 적이 아닌 무능한 아군이다‘ 라니 자주 듣는 애기지”
“무능한 아군이 아니라, 유해한 아군이지만 말이지”
“그렇게 볼 수도 있네”
하지만, 애초에 나는 파이어 시스터즈의 아군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한테는, 전대물에 나오는 6 명째의 멤버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파이어브라더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촌스러워!), 그런 은색 전사가 된 기억은 전혀 없다.
“어쩔 수 없네. 임시 치료법으로,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지 너나 카렌의 가슴을 주물러 해소하도록 할까”
“그런 치료법은 절대 실행하면 안돼!”
“뭐야. 너희들 파이어 시스터즈는 정의의 전사잖아. 그렇다면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라고”
“오빠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라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제멋대로 심심풀이 대용으로 가슴을 주무르게 놔둘 것 같아?, 라고 츠키히는 말했다.
“자, 어떻게 하면 되는데. 죄없는 시민인 H 씨가 터치당하느냐, 너희들 자매가 터치당하느냐, 둘 중 하나라
고”
“그 둘 중 하나라면......, 크으윽! 알았어, 우리들을 터치해도 좋아!”
자기희생정신에 투철한 파이어 시스터즈였다.
기분나빠.
“우리들의 가슴을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까, H 씨한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좋아, 약속할게. 아니, H 씨뿐만이 아니야. 너희들이 희생하는 한, 설령 장래에, 배낭을 등에 짊어진
트윈테일에 미아가 된 로리소녀를 본다고 해도, 나는 그 녀석한테 뒤에서 안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여기서
맹세하지”
“어째서 그렇게 구체적이야”
“왜일까”
신기하다.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의지를 느낀다.
“뭐, 그래도 약속이란 건 최대한 구체적인 게 좋으니까. 그 편이 더 지키기 쉬울 테지”
“그러네. 자, 그 맹세는,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다는 거네”
“그 말대로야”
왜일까.
아무런 확증도 없는 미래에 대한 약속인데,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보다, 그런 선택지는 없으니까”
“응”
당연하다.
여동생의 가슴을 만진다니, 대체 무슨 벌게임이냐고.
“애초에 욕구불만의 해소법은, 여동생의 가슴을 이용하지 않아도, 수없이 많겠지. 여동생의 가슴은 최후의
수단이야”
“마지막까지 취해선 안될 수단이란 느낌도 들지만”
자,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많은 해소법 중에서, 과연 어떤 걸 선택할지가 관건이군.
“스포츠에 열중하거나, 실내에 있어도 열중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진다거나, 뭐, 일반적으로 그런 느낌이겠지”
“스포츠네. 카렌과 함께 조깅이라도 할 걸 그랬나”
“2 인 3 각으로”
“그래, 2 인 3 각으로ㅡ 아니, 뭐냐고!”
아마 질질 끌려가겠지.
결혼식의 웨딩벨 같은 꼴을 당하겠지.
“아니, 카렌 성격으로 볼 때, 오빠를 질질 끌지 않도록 초스피드로 달릴 거야”
“내가 뜰 정도로 말이지”
닌자가 하는 수행이잖아.
뭐, 저 녀석은 장래, 신부보다 닌자가 될 것 같으니까.
하여간, 오랜만에 뒤늦게 딴지를 넣어버렸군.
“스포츠는 안돼. 더 이상 카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작은 오빠네......”
츠키히가 한심하다는 듯이 코멘트를 날렸다.
그건 품성에 대한 걸까, 아니면 신장차에 대한 걸까.
아니, 아마도 양쪽 다일 테지.
“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취미인가”
“그러네. 오빠, 최근에 나오는 게임 잘 안 하지?”
“아-. 최근에 나오는 게임 말이야-. 최근이란 말보다 최신게임이라고 해야겠지. 통신기능이나 네트워크 대전
등등, 그런 것들이 추가되어, 1 인 플레이만 하다간 제작자가 의도한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어”
“아-. 휴대용기기끼리 무선으로 통신하는 거?”
“그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뭐, 이런 시골마을이니까, 다른 사람과 통신하다 끊길 일은 없겠지만.
백화점 게임 코너에 집합.
얼토당토않은 히어로쇼이다.
“처음부터 재미가 제한된다고 생각하면, 역시 흥미가 사라지네”
“일단 우리집도 인터넷 회선이 연결되어있으니까, 1 층에서 놀면 되잖아”
“아니, 달라. 애초에 나는 게임을 혼자서 하고 싶어”
대전격투 같은 건 정말 싫어, 라고 말하고 빼놓는 나.
내 마음은 난입금지이다.
“게임을 혼자서만 즐기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사랑이 가능할 리가 없겠지ㅡ”
츠키히가 감개깊은 듯이 옛날 화제를 다시 꺼내면서, “자, 어쩔 수 없나” 하고 말한다.
“여동생의 가슴을 주물러”
“벌써 최후의 수단이야!?”
“실수야. 잘못 말했어”
“지금 우리들은 온갖 다양한 일들을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자, 어쩔 수 없나”
츠키히가 다시금, 고쳐 말한다.
“야한 책을 사면 되겠네”
“............”
결론은 그거냐.
“그러니까, 오빠는 제멋대로 착각해서, H 씨의 눈을 의식한 나머지 요 1 개월 동안, 구입을 주저해왔잖아?
혹시라도 오빠 성격을 보건대, 몸과 마음을 정리한다고 해서 여태까지 모아온 비장의 보물도, 끈으로 묶어 버린
게 아니야?”
이 여동생, 상당히 감이 좋군.
아니면 내 행동은, 그렇게 예측하기 쉬운 걸까.
“그게 욕구불만을 더하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야한 책을 새로 구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
“흠-”
처음 들었을 때는 질려버렸지만, 막상 듣고 보니 임시치료법이 아닌, 근본적인 치료법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치료될 수 있다.
그렇군.
야한 책이 있다면 사랑 같은 건 필요없잖아.
만사해결이다.
아니, 나와 츠키히는 지금, 세계의 해답에 다다른 게 아닐까?
과연 세계의 해답이지만, 한 발짝 잘못 내딛으면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사상이다.
“오호라......독서를 통해 옛 현인을 벗으로 한다는 거군(読書尚友)”
“응. 그리고 독서삼도야. 페이지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자세히 읽지 않으면 안돼” (주:독서삼도(読書三到)-
독서의 3 가지방법,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음)
“이것 참,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과연, 연애상담 해결율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아라라기 츠키히야.
평생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드디어 이 장면의 끝이 보이는군”
“그러네. 애니메이션이라면 3 화 분량이 될 정도로 애기했지만, 이걸로 간신히 장면이 바뀌겠어. 그렇게
정했으니 좋은 일은 서두르는 법이야, 오빠. 마침 서점도 열 시간이니까, 지금부터 사러 가는 게 어때? 여차하면
나도 함께 가줄게”
“아니, 과연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어. 이미 충분하게 도움이 되었어.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다고”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만의 싸움이야‘ , 라고 폼잡으면서 애기했지만, 나는 바로 그 때 어떤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안돼, 무리일지도”
“어? 왜? 내 나이스아이디어에 뭔가 결함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네 아이디어에 결함은 없지만, 앞서서 필요한 게 없어”
“앞서야 하는 거? 자살하는 아이?”
“그건 부모에 앞서서 죽는 불효이고”
으-음.
이, 개그가 없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시스템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어쩔 수 없군.
“돈이야”
“돈?”
“지금 나는 돈이 없는 상태야”
치아노제라고 말해두자. (주:치아노제(Zyanose)-청색증, 혈액의 산소결핍 때문에 피부가 검푸르게 변함)
어쨌든 지갑 안에는 377 엔밖에 없다ㅡ 지갑 안에 들어있는 돈을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장래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 경우, 파악하지 못하는 쪽이 더 어려울 정도로 적은 금액이다.
“그동안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네. 저번의 생일, 할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셨잖아”
“게임 사느라 다 써버렸어”
“게임 샀네, 뭘”
정확한 지적이었다.
뭐, 불평을 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하는 게 내 신조이다.
“어떤 걸 샀어?”
“아이돌 마스터와 헷갈리는 바람에 아이스 클라이머를 샀어-”
(주:아이돌 마스터-일본 남코에서 개발한 아케이드 게임, 엑박 360 용, 프로듀서가 되어 아이돌 후보생들을
키우는 리듬육성게임, 아이스클라이머-패미컴으로 발매된 닌텐도사 게임, 나무망치든 에스키모캐릭터로 최상층을
향해 가는 게임)
“그런 걸 헷갈리다니......정말, 귀찮게 하는 오빠네. 하여간, 멍청한 오빠를 가진 여동생은 고생한다니까”
아까 전 말했던 대사를 되돌려주는 츠키히.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하지만 게임을 사서 내 지갑의 잔액이 377 엔이 된 건 내 자업자득이니까, 오히려 이 상황에 잘난 척을 할 수
있게 해준 오빠한테, 츠키히는 감사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네, 나와 츠키히의 비장의 책을 1 권 제공할게”
“............”
여동생한테 야한 책을 받고 싶지 않다고.
쓰다 남은 걸 물려받는 건지, 바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취미가 맞지 않는다면 말도 안되고, 취미가 맞는다면 최악이다.
“......그래도, 일단 들어볼까. 그래, 어떤 내용이야?”
“뭐,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소년끼리”
“좋아, 거기까지야”
도중에 잘랐다.
여성향 애기를 도중에 잘랐다.
“마지막까지 듣지 않아도 괜찮아?”
“처음부터 듣기 싫었어”
“오빠, 제대로 듣지 않고 사람의 취미를 부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사람의 취미를 부정하는 건 좋지 않지만, 사람의 악취미를 부정하는 건 괜찮아”
“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부우- 부우- 하고, 야유하는 츠키히.
입을 뾰족하게 내민 채.
아무래도 내 철학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오빠처럼 선입관에 틀어박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는다고? 오빠의 취미는 제대로 빠짐없이 체크해서,
골라주는 거야”
“체크하지 마! 그리고 고르지 마!”
어쩐지 감이 너무 좋더라니!
집안을 샅샅이 뒤진 거잖아!
“오빠의 취미는, 솔직히 말해서, 위험해”
“시끄러워!”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들을 필요도 없이, 내 취미, 기호는 지극히 정상이야!
제길, 또다시 숨길 곳을 찾아야......
“그리고 ‘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네 입장이라면 어때? 내가 그쪽 방면의 책을 읽는
걸 보면, 여동생으로서 간과할 수 있겠냐?”
“동인남 오빠, 불타오르네!”
척,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츠키히.
글렀군.
너무 빠져든 나머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츠키히는 “정말, 고생시킨다니까, 애먹인다니까. 파이어 시스터즈한테도 큰 타격이야” 라고
불평하면서 일어선 후, 타박타박 내 방을 나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걸 보면, 아마 금방 돌아올 예정이겠지.
설마 갑자기 화난 것은 아닐 테지.
네 사복이 열받게 해! 라고, 그런 이유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몹시 살벌한 남매관계이지만,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츠키히는 바로 돌아왔다. 자세히 보면 그 손에는, 깨끗하게 접힌 천엔 지폐가 3 장, 들려있다.
그리고 츠키히는 그걸 나한테 내민다.
“자. 이거, 빌려줄게”
“에, 에엣!? 저 같은 녀석한테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까!?”
한순간에 비굴해지는 나.
내 자신이지만 너무나도 꼴사납다.
“응, 아니, 빌려줄 뿐이니까? 터치패널로 예금을 인출한 게 아니니까 말이지? 제대로 갚도록 해”
“무, 물론! 이자를 듬뿍 쳐서 갚을게! 법정이자의 범위 내로 말이지!”
“그런 건 확실하네......”
“나는 빚은 반드시 갚는 남자야”
“빚이 현금인 경우는 그 대사, 꼴사나워......”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여동생 앞에 정좌한 채 돈을 빌리고 있는 오빠라는 구도로, 왠지, 이 이상 꼴사나운
구도도 없다.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츠키히도 흥이 났는지,
“이자는 필요없지만 말이야”
하고.
그런 말을 했다.
“그 대신, 감사의 기분이란 걸, 보도록 할까?”
“감사의 기분?”
“츠키히, 고마워, 정말 좋아해, 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달라고 하는 거야”
츠키히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신발을 벗기 시작한다.
벗는 방식이 괜시리 야하다.
그리고 쿵푸영화처럼 한쪽 발로 서서, 들어올린 쪽의 발등을, 척하고 내 코끝에 내민다.
그리고 매섭게 말한다.
“핥아”
핥았다.
“전혀 망설이지 않아!”
그대로 쿵푸영화처럼 코끝을 채이고 말았다.
아니, 이건 진자로 아프다. 코피가 나오기는커녕 코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레벨의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건 이쪽이 할 대사야!”
“아니-, 이쪽이 할 대사겠지! 이 대사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양보하라고-!”
기분나빠, 기분나빠, 기분나빠, 라고 츠키히는 내가 빨아드린 발등을 슥삭슥삭, 불쾌한 기억과 함께 씻어내는
것처럼 닦아낸다.
“뭐야, 상처받네, 사람의 혀를 더러운 것처럼 취급하다니. 네가 [핥아봐?]라고 애원했으니까, 나는
마지못해서 핥은 건데”
“‘마지못해서’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적극성이었어! 그리고 더 이상 흉내라고 볼 수도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애원을 했다니,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야!” (주:중상비방(誹謗中傷)=중상모략)
“그 돈을 내놔, 안 그러면 발을 또 핥아버리겠어”
“이젠 협박까지 하네!”
츠키히는 3 장의 지폐를 확 뿌렸다.
떡을 받으러 모여드는 아이처럼, 나는 그것들이 공중에 떠있는 동안, 캣치했다.
착착착, 하고.
은행원처럼 그걸 체크하는 나.
“좋아좋아, 3 천엔, 확실히 받았어”
“얼마 없는 용돈을 긁어모아 빌려줬는데, 왜 내가 채무자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나는 신용할 수 없을 테니까, 이번 달 내 용돈에서 3 천엔을 빼내어 너한테 주도록, 파파와 마마한테 말해둘
게”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이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여동생이 신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래”
“소극적으로 검토할게”
그리 말하고, 나는 시계를 확인한다.
10 시 전.
좋아, 자전거 타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다.
나는 양복옷장을 열고, 다시금 갈아입기로 했다ㅡ 실내복에서 외출복으로. 왠지 아까부터 패션쇼를 하는 것
같다.
“오빠”
일단 청바지를 입었을 때, 문득, 한가하게 내 책상 위를 만지작대던 츠키히가, 이쪽에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지.
나한테 돈을 건넸으니, 후딱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기왕이면 이 세상에서도.
“언제 몸을 단련한 거야?”
“앙?”
“식스팩”(セミ腹)
츠키히는 그리 말하고, 내 배 부근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알몸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복근이 단련되어있지 않았는데”
“아아”
내 복근은 현재, 6 갈래로 나누어져있다. 그러고 보면, 이 상태로 여동생 앞에 벗는 것은 처음이었나.
이.렇.게. 된. 건. 봄방학 때였으니까ㅡ 설마, 나는 카렌이나 츠키히 앞에 1 개월 넘게, 알몸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건가.
실수했다.
여동생한테 알몸을 보인 적이 없다니 부끄러워!
......아니아니.
어떤 변태냐고.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떤 변태냐고] 계열의 1 인 딴지가 많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거야말로 변태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실은 지금, 복근 만들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어”
“헤에. 열중하고 있네”
“그래. 빌리즈 부트캠프를, 복근프로그램만 하고 있어” (주:빌리즈 부트캠프-한때 일본에서 유행한 50 대
흑인아저씨의 다이어트 DVD, 군인체조+권투)
“어째서 그렇게 편중된 육체개조를......”
물론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기에, 나는 적당하게 둘러대어, 얼버무리기로 했다.
“배가 뒤틀릴 정도로 재밌는 개그를 생각했기에, 너희들한테 그걸 보여줄 때까지 사전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 말하고 웃어버릴 정도로 재밌다니......”
“그래. 너희들도 죽고 싶지 않으면, 복근을 단련해놓는 게 좋아”
“빌리즈 부트캠프나, 코어리듬을 보면 돼?” (주:코어리듬- 일본의 다이어트 프로그램, 여자들이 나와서
스트레치, 춤을 선보임)
“아니, 이번에 추천하는 건 모테렛치야” (주:모테렛치-인기남녀가 되기 위한 스트레치, 아이돌이 나와서 다리
스트레치 선보임)
“모테렛치!?”
패션리더인 네 녀석한테는 잘 어울리겠지, 하고 그런 변명으로 속이니, “응, 알았어‘ 하고 츠키히는 수긍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지만 (이 설정은 아직도 유효할까), 오빠의 행동을 샅샅이 캐내는 녀석은 아니니까.
이번에는 상담하니까 응했을 뿐이다.
“자, 오늘은 고마웠어”
외출용의 긴 소매 셔츠를 입고 나서, 나는 간신히, 츠키히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러면 되는 애기이기도 하다.
“아니-, 천만에”
“다녀올게”
“다녀와”
얼핏 보면 츠키히는 내 침대에서 다시금 뒹굴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그 상태로 자버릴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
또 자는 걸 실컷 방해해놓고, 잘하는 짓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뭐, 이것저것 도움받았으니까, 잠자리 정도는
제공해주도록 할까. 쇠지레 처리는 알아서 하게끔.
나는 마지막으로, 츠키히한테 물었다.
“츠키히“
“왜”
“뭐, 이번에는 착각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언젠가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가능하지 않아? 인간이라면”
“그런가”
잘 자, 하고.
츠키히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내 방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웃는다.
킥, 하고 웃는다.
인간이네.
봄방학 이후ㅡ 고작 그것뿐인, 당연할 터인 범주에, 일일이 반응하게 되었군.
복근이나.
정말로 배가 뒤틀릴 정도의 애기ㅡ 이다.
“인간강도(强度)라던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애기로군”
강하다는 것.
강함.
그런 개념도 또한, 봄방학에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ㅡ 다름아닌 H 씨의 의해.
H 씨. H 씨. H 씨.
"카ㅡ“
하고.
얕게 웃다가, 아수라맨 뺨칠 정도의 큰 웃음으로 막 바뀌려고 할 시점에,
“다녀왔어-”
하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카렌이 조깅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의외로 빨랐군. 가족 내에서 대포알로 불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저 녀석은 일단 외출하면 종종 돌아오지 않는 녀석이지만.
최장기록에 의하면, 카렌이 초등학교 6 학년 때, 이 근처를 잠깐 산책한다고 말하고, 3 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건이 있다ㅡ 참고로 그 때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었다.
바다를 산책하지 말라고.
경찰까지 동원했잖아.
“어서 와-”
집에 있어도 방해만 되는 여동생이지만, 그 때의 대소동을 떠올리면, 이렇게 빨리 집에 돌아오는 걸 반겨야할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군, 잠깐이라도 얼굴을 봐둘까.
무슨 변덕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심경의 변화를 겪은 나는 ‘어서 와‘ 라고 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흠뻑 젖은 청바지 여자, 아라라기 카렌이, 쳔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다.
......?
흠뻑 젖어?
“어? 뭐야, 밖에 비오고 있어? 나, 지금부터 나갈 참이었는데”
창밖을 그리 신경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빗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고, 그 이전에, 햇빛이 여느 때처럼
비춘다고 생각했는데.
맑은 날에 비?
“아, 오빠. 다시 잤다가 또 일어난 거야”
카렌은 신발을 벗고, 그것을 일단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현관 매트를 밟고 들어온다. 현관 매트를 축축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에스타크와 쌍벽을 이룬다고 일컬어지는 오빠의 잠을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츠키히 한 명한테 맡기는 건
불안했지만, 뭐야, 잘 해낸 모양이잖아” (주:에스타크(エスタㅡク)-드래곤퀘스트 5 의 숨겨진 보스.강함)
“아니, 뭐, 잘 해냈다고 해야 하나......”
뭐, 깨운다는 목적 자체는 이뤄내도, 츠키히는 츠키히 나름대로, 그걸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는 느낌이
들지만.
속옷 차림으로 포즈를 취하거나 가슴으로 손을 주무르고 다리를 핥게 한데다, 3 천엔을 뜯겼으니까.
내 소중한 여동생을, 누가 그런 꼴로 만든 거냐.
용서할 수 없군.
“응응, 츠키히도 드디어 독립할 시기가 됐네. 언니는 조금 외로울 뿐이야. 그래도 뭐, 칭찬해줘야겠지”
“츠키히라면 지금, 자신이 맡은 역할을 끝내고, 내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당분간 내버려둬. 칭찬할 거라면
나중에 해도 되겠지. 그보다 카렌, 우산 챙겨가지 않았어?”
“우냐?”
카렌이 의아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뜬다.
“오빠, 왜 그래? 오빠가 우리들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드문데.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부끄럽다고 해서, 큰 여동생,
작은 여동생이라고 불렀잖아”
“아아, 이제 그렇게 부르는 건 귀찮으니까 그만두기로 했어”
어차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설정이다.
나 혼자 참으면 되는 일이다.
“흐-응. 시간 순서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된 느낌도 들지만, 뭐 상관없지”
별로 복잡한 걸 생각할 수 없는, 유감스런 상태인 카렌의 뇌는, 대개의 일을 [뭐 상관없지]로 넘겨버리기에,
별명에 관한 것은 그리 캐묻지 않고,
“아니, 비 안 오는데-”
라고 말했다.
“골든위크의 첫날에 어울리게, 햇볕이 쨍쨍해”
“응? 자, 넌 왜 그렇게 흠뻑 젖었어? 진창에 빠진 거야?”
“나는 오르는 일은 있어도 빠지는 일은 없어”
자랑스런 얼굴로 말하는 카렌씨.
쓸데없는 곳에 얽매이는데다 짜증나는 여동생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말을 들어도 빠지지 않아”
“그건 지옥과 같은 캐릭터 설정이군.......”
“돼지도 칭찬하면 나무에 오른다는 건 나를 위한 속담이야!” (주:속담이 섞임-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
너를 위한 속담이 그거여도 괜찮겠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 M 성향이 강해서 할 말이 없다.
“너가 빠지던지 올라가던지 내 알 바 아니니가, 어째서 흠뻑 젖었는지 가르쳐줘. 설마 세일러 마스한테 화성을
대신해서 벌받은 거냐” (주: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에 등장, 히노 레이가 변신하는 불꽃, 정열의 전사, 대사
‘화성을 대신하여 징계하겠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오빠. 그녀는 내 동료야”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건 너야”
“아니, 이거, 땀이라고”
봐봐.
하고 카렌은 나한테 안겨왔다.
흠뻑 물을 흡수한 스폰지에 전신이 휩싸이는 감촉.
즉.
“기분나빠! 불쾌지수, 장난 아니라고! 우악, 땀냄새!”
땀이라고오오!?
이게 전부!?
“이것 참, 오빠. 한창 때의 여자애를 냄새난다니 너무하네”
“놔줘-! 꺄악-! 진짜로 불쾌해, 아니, 너무 불쾌해!”
혼신의 힘을 다해 나는 날뛰었지만, 소용없다.
츠키히와 달리, 체육 계열의 파워계 여동생, 카렌이다.
힘으로 떼어놓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자-”
뺨을 비벼오는 카렌. 그녀의 땀이 윤활유가 되어, 묘하게 매끄러운 뺨비비기가 되었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행위는 뺨비비기가 아니라 오히려 땀의 염분을 얼굴에 문지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때 벗기는 마사지냐고.
“그, 그만둬 카렌! 키 차이를 고려하라고! 지금 너는 내 얼굴을 가슴에 끼워넣고 있어!”
“어? 진짜? 어머, 싫다-, 부-끄-러-워-!”
지적하니까, 바로 나한테서 떨어져,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는 카렌.
내 생명은 구해졌지만, 네 녀석의 부끄러워하는 기준을 모르겠어.
저렇게 열렬한 포옹을 해놓고, 뭘 부끄러워하는지.
“그게 전부 땀이었다고......? 진짜냐......아니, 그래도, 확실히 땀이네, 이건......”
흠뻑 젖은 정도는 아니지만, 카렌한테 안겼기에 내 쪽도 만만찮게 젖어버렸다. 그 수분을 손으로 집어서 혀로
맛보면, 진짜로 틀림없이 땀이다.
“여동생의 땀을 핥지 마. 역겨워, 오빠”
“시냇가에 출몰하는 요괴와 같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여동생 쪽이 훨씬 역겨워”
뭐였지, 저 요괴.
물귀신 처녀였나.
그렇다고 한다면 딱 들어맞는 이름이지만.
“조깅하는데 그렇게 땀을 흘린 거야? 너 설마 이 근처에서 고질라랑 싸우다가 온 건 아니겠지” (주: 일본의
대표적인 괴수영화 ‘고질라)
“아니, 나 조깅을 별로 한 적이 없으니까, 얼마나 해야 될지 몰라서. 페이스 배분을 잘못 한 모양이야”
“헤에”
조깅인데 전력질주해버렸다는 건가.
역시나.
하지만, 확실히 몸에 달라붙은 수분량이, 카렌의 체중을 훨씬 뛰어넘을 거 같은데......
“의외로 길었군. 42.195km"
“너, 풀마라톤을 뛰고 온 거야?”
“그래도 봐봐, 오늘은 골든위크 개시 기념으로 하는 조깅이고, 이미지는 성화 주자였으니까”
“성화 주자는 42.195km 를 뛰지 않는다고!”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과 헷갈리고 있다!
“어-? 그래도,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니까, 그 정도는 뛰지 않아?”
“훨씬 많은 사람수로 구간을 나눠서 달리고, 네 방식대로 생각하면, 42.195km 는 너무 짧아!”
나라와 나라의 거리감이 너무 좁다.
무슨 마을 내 운동회냐고.
“참, 오빠. 42.195km 는 길었어"
“그야 길기도 하시겠지. 적어도 네가 그렇게 땀투성이가 되어버릴 정도니까 말이지”
“응. 실감했어. 그건 더할 나위없이 실감했어. 아무리 42.195km 라고 해도, 고작 100m 의 천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두려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이 여동생의 머리나쁜 게 무섭다고!
무서워서 떨릴 정도야!
“그래그래, 지쳤다는 거네. 왜 이렇게 비실비실댔는지 드디어 이유를 알겠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알겠어’ 라고 말했다.
매우 걱정이다.
“그래서 오빠. 골테이프는 어딨어. 준비해뒀겠지?”
“하지 않았어. 설마 내가 가볍게 또 자고 있는 사이에 자신의 여동생이 가볍게 풀마라톤을 뛰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어”
“어라? 이상하네. 츠키히한테 부탁했을 텐데”
“츠키히도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했겠지.
사이좋은 자매이지만, 그런 점에서, 츠키히는 쿨한 면이 있다.
서로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잇다.
“어쩔 수 없네-. 츠키히도 야무지지 못하다니까. 역시 아직도 내가 있어야 하나-”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네 머리를 고치기 전에는, 츠키히도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을
테지만”
“하지만 골테이프를 끊지 않는 한, 내 러닝은 끝나지 않아”
카렌은 다시 한 번 “어쩔 수 없네” 하고 말한 뒤, 나를 향해서,
“오빠. 머리 위에 고리를 만들어줘”
라고 말했다.
“고리? 천사처럼 말이야?”
“아니, 달라. 팔로, 이런 식으로”
“아아”
카렌이 선보인 실제 예시를 보고, 나는 들은 대로 실행했다. 팔과 어깨의 라인으로, 숫자 제로(0)를 만드는
형태이다. 무슨 속셈으로 이런 걸 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ㅡ
“얍!”
카렌이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그리고 높이뛰기의 베리롤오버(Belly roll Over)로 내가 만든 팔고리를 빠져나갔다. (주:베리롤오버
(Belly roll Over)-높이뛰기에서 앞으로 엎드려 넘는 방식)
돌고래처럼.
혹은, 불고리 넘기의 사자처럼.
내 머리 부분을 스치면서.
바늘구멍을 꿰뚫는 것처럼ㅡ 마치 말벌과 같은 기동력으로, 빠져나갔다.
“야압!”
그리고 훌륭하게, 착지했다.
“오빠를 뚫었어! 이게 내 골이야!”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허세를 부리면서 고함을 질렸지만, 나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다.
내심 묘사하자면, 전신에 닭살이 돋은 이미지이다.
“아-, 지쳤어. 그보다 목말라. 물, 무울-!”
“기다려! 아직 애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나는 ‘그보다 흠뻑 젖은 채 복도를 걷지 마‘, 라고 말하면서, 수분을 보급하기 위해 거실로 향하는 카렌의
뒤를 쫓았다.
쫓아가보면, 그녀는 주방의 싱크대에 포니테일 머리를 내민 채, 수도꼭지에서 벌컥벌컥하고, 직접 물을 마시고
있다.
남자답다......
이 녀석, 이미 남자 중의 남자가 아닐까?
여동생인 주제에.
“꿀꺽, 꿀꺽, 꿀꺽, 꿀꺽, 푸하앗!”
5 리터 정도는 마시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카렌은 물을 잔뜩 마신 다음, 간신히 수도꼮지에서 입을
뗐다.
“자, 그럼-. 오빠한테 땀냄새난다고 듣고, 소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상처받았으니까, 샤워라도 할까”
그리 말하고 카렌은 청바지를 벗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즉 내 눈앞에서.
......그 행동거지의 어디에 상처받은 소녀의 마음이 있다는 거지......남매이니까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옷 벗는 건 탈의실에 가서 해야 하잖아.
“............”
그래도, 있잖아-.
이 녀석한테도 츠키히처럼, 남자친구가 있지-.
미즈도리군이었나.
잘 모르지만.
즉 소녀의 마음은 제쳐두더라도, 이 녀석은 이 녀석 나름대로, 사랑을 알 터이다.
“저기, 카렌”
나는 말한다.
원래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면, 매우 럭키한 일이다.
“왜 그래, 오빠”
“조금 가르쳐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뭐야, 마침내 오빠도 공수도를 배우고 싶어진 거야”
“아니, 가르쳐달라는 건 필살기 같은 게 아니야”
일단 말투를 진지하게 한 채, 나는 질문의 내용을 꺼냈다.
“너 말이야,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상대를 좋아한다는 걸, 어떤 식으로 판단해?”
“응?”
뭐야, 연애상담이야, 하고.
카렌은 상반신 알몸이 되어, 벗은 청바지와 셔츠, 스포츠 브래지어를 타올처럼 어깨에 휙 메면서,
“얼굴을 보고 이 녀석의 아이를 낳고 싶어- 라고 생각하면, 그게 좋아하는 거잖아?”
라고 대답했다.
......매우 남자다운 대답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참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꽃피우는 영감 애기:착한 할아버지가 개를 키우며 보살피다가 개 덕분에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자


이웃할아버지가 와서 개를 빌려갔는데 밭을 파보니 오물이 나옴. 열받은 이웃할아버지가 개를 죽이자, 개를 고이
묻어주고 나무를 심음. 그 나무를 베어 절구를 만들었는데 그걸로 떡을 찧으니 황금이 나옴. 이웃할아버지가
절구를 빌려다가 떡을 찧으니 오물이 또 나오길래 불태워버림. 할수없이 착한할아버지가 그 재를 가지고 죽어가는
벚꽃에 뿌리니 벚꽃이 활짝 핌, 그 때 원님이 지나가다 그걸 보고 착한할아버지한테 상금을 줌. 이웃할아버지도
상금이 탐나서 재를 뿌렸는데 재가 원님 눈에 들어가 체포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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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들과 노느라 무심코 80 페이지 전후, 전체 지면의 4 분의 1 가까이 되는 시간을 소모해버렸기에,


이제부터는 빠르게 진행한다. 애니메이션부터 보기 시작한 아라라기 비기너(beginner) 분들은 이미
탈락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읽고 있는 사람은 꾹 참고 따라와주길 바란다. 포기하지 말고, 힘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츠키히한테 자금 3 천엔을 뜯어내고ㅡ 사실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지 않으면 자금줄이
막힐지도 모른다), 카렌한테 적절한 충고를 받은 다음 (나중에 활용할 기회가 없어보이는 적절함이다), 나는
마을에 한 군데밖에 없는 대형서점을 향해, 평소 마음에 들어하는 마운틴바이크로 달렸다.
(주:카시하가시(貸し剝がし)-금융기관이 융자를 감액, 중지해서 융자금액을 회수하는 것, 여기선 용돈이 막힘)
물론, 야한 책을 사기 위해서이다.
골든위크라고 해서, 꼴사납게 마음을 들뜨게 하지 않고,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외출하는 자신의 금욕성
(stoic)에 일종의 감동조차 느껴, 어깨까지 듬뿍 자기도취에 빠진 채, 나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고 있었지만ㅡ
길 한가운데.
H 씨를 발견했다.
원래.
하네카와 츠바사를 발견했다.
HANEKAWA 씨
“............”
특별히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지만 나는 척수반사적으로 급브레이크를 걸고, 자전거 본체를 약간 비스듬이
기울여, 지면에 타이어를 스치면서 (2 륜 드리프트?) 정지했다.
“우오......오오오오오”
깜짝 놀란다. 얼마나 기막힌 타이밍인가.
그야말로 하네카와에 대해, 여동생과 격한 의논을 나눈 직후에, 하네카와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 아니고
욕구불만이란 진실이 판명된 직후에, 왠일인지 산책 도중으로 보이는 그녀를 발견하다니, 이건 너무나 기막힌
우연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또다시, 도서관이라도 가는 걸까ㅡ 아니, 골든위크니까 도서관은 닫고 있으려나.
그렇다고 한다면, 혹시라도 참고서를 사기 위해, 서점으로 향하는 도중이라는 가능성도 있다ㅡ 그런 타이밍에
만났다간 최악이다.
계획은 중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의가, 그리고 나한테 용돈을 빌려준 츠키히의 마음씀씀이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목숨보다 소중한
여동생의 배려를 헛수고로 만들다니, 댐건설의 공사를 중지하는 것보다 큰일이잖아.
“......음. 아니, 괜찮겠지”
자세히 보면.
하네카와의 진행방향은, 서점과 완전히 반대이다. 이쪽에 눈치챈 기색도 없고, 페이스를 늦추지 않은 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중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목적은, 서점이 아닌 모양이다.
흠.
그렇다면 어디로 향하는 걸까?
“............”
여기서 일단, 하네카와ㅡ 하네카와 츠바사에 대해 설명.
하네카와 츠바사.
내가 있는 반의 반장이다.
반장 중의 반장ㅡ 우등생의 화신과 같은 여자.
3 갈래 댕기머리에 안경이라는 그 겉모습도, 그 내면을 아주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오늘도, 골든위크인데
불구하고 제복을 입고 있는 건, 규칙을 준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아주 좋고, 늘 학년 톱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ㅡ 그것도 극히 태연하게. 시험 때마다 유유히 톱을
차지하는 그녀의 이름은, 학년 중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성격도 좋고, 공명정대한데다 인망도 있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완벽초인과 같이 두렵기
짝이 없는 여자고등학생이다.
완벽이란 개념은, 하네카와의 생일을 초능력으로 예지한 고대의 점술사가 그녀를 모델로 생각한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 같은 낙제생과는, 본래 다른 차원의 주민처럼 다르다기에, 인연이 먼 그녀이지만ㅡ 요전번의 봄방학,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녀한테 목숨을 구해졌다.
생명을 구해졌다.
그 상냥함에, 몸도 마음도 수그러들었다고 해도 좋다 ㅡ 그러니까, 나는 그 이후, 하네카와와 친구가 되었다.
......나를 불량아라고 착각하는 모양인 그녀 (하네카와 안에서는, 아무래도 낙제생과 불량아가 같은 뜻인
모양이다. 낙제한다는 건 게으름피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한 단계 건너뛴 이론이다) 는, 나를 갱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그 탓에 나는 요전번, 부반장에 임명되었지만, 그건 일단 애교라고 해두고.
봄방학 이후로 1 개월 동안, 하네카와는 나같이 평범한 일반인과 아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그걸.
사랑과 착각해버릴 정도로.
“훗. 하지만 뭐, 그건 무시해야겠군”
뭐,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이 별로 없기에, 다른 사람과의 거리감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서투른
인간이지만, 그래도 휴일에 친구와 만나면, 보통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게 친구라는 것이다.
그렇게 부담을 느끼진 않는다ㅡ 하지만, 오늘, 이 날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다. 나한테는 지금, 중요한 사명이
있다. 여동생들의 배려를 등에 업은 채 (카렌은 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점으로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만 한다.
빙글빙글하고.
그러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네카와를 지키게 된다ㅡ 츠키히와 애기할 때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가슴에 대한 건
제쳐두고, 별로 그런 짓을 할 작정도 없었지만, 만약 내가 착각한 나머지 자칫 잘못해서, 내가 고백이라도
해버린다면, 하네카와는 분명 곤란해할 테니까.
아니, 곤란해하기보다, 분명 나한테 설교를 해서, 그 착각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고백해서 설교당한다니, 풀이 죽는군.
그건 그거대로 즐거워보이지만.
[안된다고!]라고 듣고.
그런 예상을 제쳐두더라도, 하네카와한테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은 가득하지만, 지금은 꾹 참고, 금욕적으로
떠나는 게 남자이겠지.
안녕, 하네카와.
골든위크가 끝나고, 교실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그 때쯤이면 나는, 인간으로서 한층 더 성숙해져있겠지ㅡ 성장한 나한테 실수로 반하지 말라고.
새롭게 페달을 밟으려고 했을 때.
다시금, 내 다리는 멈췄다.
다리뿐만 아니라ㅡ 움직임이 멈췄다.
“......어?”
하네카와가, 문득, 길모퉁이를 꺾어, 방향을 바꿨다ㅡ 그 방향전환으로 인해 지금까지 옆쪽 밖에 보이지 않았던
하네카와를, 나는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면에서.
그리고ㅡ 나는, 하네카와의 왼쪽 얼굴면을 덮고 있는, 두터운 붕대의 존재를 눈치챘다.
할 말을 잃었다.
그건, 할 말을 잃게 만드는ㅡ 보기에도 아파보이는, 치료흔적이었다.
얼굴의 왼쪽 반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약간 스쳤다거나, 벽에 부딪쳤다거나, 그런 상처를 치료한 것이, 확실히 아니다ㅡ 테이프로 고정된 흰 붕대는,
하네카와 얼굴의 왼쪽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
아파보인다기보다,
진짜 아프다.
보고 있기만 해도 아파보이는ㅡ
지끈지끈하고, 아픔이 바로 전달되는 것 같은ㅡ
아니.
그게 보통 상처라면, 나는 지금 바로 하네카와한테 달려가서, 말을 걸어야만 한다.
걱정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그런 상처가 생겼는지, 물어봐야 한다.
넘어져서 굴렀거나, 전봇대에 부딪쳤는지,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겠지.
하지만ㅡ 내 몸은 완전히 굳어지고 있다.
왜냐하면ㅡ 아니,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봄방학 때 경험했던, 나의 싸움으로 얼룩진 추억이 그런 거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걸까?
대부분의 인간은 오른손잡이이고, 그 인간이 오른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딱 저런 식으로, 얼굴의 왼쪽만
상처입히게 된다, 라고ㅡ
“............”
그 붕대를 벗기면, 완전히 평소대로인 하네카와의 모습ㅡ 3 갈래 댕기머리도, 안경도, 제복도 평소대로인
하네카와의 모습은 반대로 처절해서.
반대로 처절해서.
실은 강렬해서.
하네카와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 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들키고 말았다.
그야 그렇겠지ㅡ 옆쪽이라면 몰라도, 정면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이쪽도 하네카와를 눈치채고 있으니까,
하네카와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것이, 이른바 골든위크에 있었던 내 최초의 실패라고 생각한다ㅡ 실수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말 걸지 않고
떠날 작정이었다면, 봐도 모른 척할 작정이었다면, 곧바로 사라져야 했다.
나같은 녀석은.
없어져야 했다.
그러지 않고, 멍하니 굳어져 있으니까ㅡ 나는 하네카와한테 확실히 의식되어버렸다.
“아”
하네카와는 말한다.
나를 가리키고.
“얏호-. 아라라기군”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허물없이 내가 있는 곳까지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온다.
“이예- 잘 지내고 있어?”
그 태도도 역시ㅡ 평소대로의 하네카와이기에.
왼쪽 얼굴의 붕대가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얏호-. 이예-. 잘 지내고 있어......”
그렇기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평상시와 전혀 달랐다. 목소리가 흥분되어있고, 짧게 말하다가 자칫 혀를
깨물었는지도 모른다.
“응, 아”
하고.
하네카와는, 거기서 실패했다ㅡ 는 얼굴을 했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데다, 국어책 읽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의 어색한 반응을 보고 깨달았겠지ㅡ 현재
자신의 모습에.
물론, 입술 가장자리에 붙은 밥알도 아니고, 자신의 얼굴에 있는 붕대에 하네카와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겠지.
그러니까.
내 반응이 어색한 게 뭐가 원인인지 하네카와가 모를 리가 없다ㅡ 내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하네카와도 이 때,
실수를 저질렀다.
하네카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ㅡ 나한테 눈치챘을 때, 절대로 말을 걸지 말아야 했다.
그런 법이다.
하네카와는 완벽하지만ㅡ 실패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혹시나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네카와는 그녀 나름대로 그 쓰라린 상처에 대해 잊어버리려고ㅡ 그런 식으로 애쓴 결과, 진짜로 완벽하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떠오르게 만든 건ㅡ 나다.
내 반응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응ㅡ 저기”
그런 식으로 하네카와가 말을 머뭇거리는 모습도 드물다. 어찌된 걸까, 이렇게 수습하기 힘든 상황을 과연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ㅡ 라기보다, 그건 단순히 곤혹해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나는 알 수 있다.
하네카와가 어째서 지금 곤혹해하는지 알 수 있다ㅡ 그건, 상처입은 자신이 남의 눈에 띄었기에 당혹스러워하는
게 아니고, 그녀는 지금 나를 곤혹하게 만든 것에 대해 곤란해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수습해서 내 기분을 편안하게 해줄지 생각하고 있다.
이 상황에도 그녀는.
나를 배려해주고 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고 있다.
그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되서ㅡ 나는 한층 더 견딜 수 없었다.
“저기, 아라라기군”
“에잇”
뭔가 해명을 하려고 한 건지, 아니면 계속되는 침묵을 깨려고 일단 말을 꺼낸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 이름을
부른 하네카와의 대사를 가로막는 것처럼ㅡ 나는 움직였다.
움직였다고 해도, 솔직히 깊이 생각해서 행동한 게 아니다ㅡ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도 없었다.
잔꾀조차 없다.
다만, 거기에 있던 건, 하네카와의 애처로운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개인적인 욕구였다.
얼굴의 붕대를 보고 싶지 않았고.
나를 위해서 곤란해하는 하네카와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실제로 존재한다면 야구계를 석권한다고 기대받는 언더슬로우의 명투수를 이미지하면서, 오른손을
감아올려ㅡ 하네카와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를 걷어올린다는 기행을 벌였다.
속된 말로 아이스케키이다.
“히악!?”
그런 내 기행에 당황한 하네카와는 내 뺨에 뺨따귀를 날렸다ㅡ 여자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동작이다. 훌륭하고
신속한 판단,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녀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스커트를 젖혔다고 해도, 손을 뻗으면 서로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즉 뺨따귀가 닿을만한), 가까운 거리이다.
만약 나를 때리지 않았다면, 즉 그 충격으로 내가 한쪽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각도상 스커트 안쪽은 거의
보이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하네카와의 뺨따귀는 힘조절을 하지 않고, 정말로 가차없이 셌기에,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ㅡ 는
정도가 아니라 냅다 쓰러져 땅을 기고 자갈을 핥는 자세가 되어, 그 결과, 바로 아래의 각도에서, ‘젖혀올려진’,
내가 젖혀올린 스커트의 안쪽을 빠짐없이 뵐(拝めて) 수 있는 위치가 되어버렸다.
되어버렸다기보다, 되었다고 말해야 하나.
글자 그대로, 뵌다(拝む).
그건 손을 모으고 싶어질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아니, 진짜로 손을 모으고 절했다(拝んだ). (주:拝む(오가무)-뵈다, 절하다의 2 가지 뜻, 언어유희)
반사적으로,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실제로 이게 신사였다면, 나는 백번 참배를 매일 하겠지ㅡ 아니, 이 광경을 직접 본 것만으로 이미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영험하군.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츠키히와 나눈 대화의 일부를 여기서 취소하기로 했다.
하네카와가 착용하고 있던 그 속옷의 색깔은 모든 것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검은색이었다ㅡ 옷의 소재에 관해
무지한 나는, 어떻게 그리 진한 검정을 연출하고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다크블랙(dark black).
선명한 검은색.
상상을 불허한다고 해도 좋다ㅡ 세간의 인식을 뒤집을만한 에로틱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발언을 취소한다면, 츠키히도 또한 취소해야만 한다ㅡ 내가 실컷 말했는데도 저 녀석은 가슴에
와닿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지만,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한 이미지가 흰색이라니, 너무 획일적인 견해라고.
츠키히도 이 영상을 보면, 분명 납득하겠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몸에 걸친 인간이 동일하다면ㅡ 마찬가지이다.
그 다크블랙은, 하네카와의 신체에 밀착한 검은색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해서ㅡ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에로와 진지함과 순수함과 청초함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인간조차 존재한다는 것을, 나와 츠키히는 마음 속에 명심해야 한다.
남매 둘다 깊이 반성해야 한다.
원래 저 때, 속옷 애기에서 H 씨의 화제로 넘어간 건, 봄방학 때 몇 번이고 실컷 볼 기회가 있었던 하네카와가
착용한 속옷들 중 색깔이 화사한 게 많았던 것이 원인이지만ㅡ 그렇다고 해도 검은색까지 그 취미 범주에 들어있을
줄이야, 하네카와 츠바사.
이것 참ㅡ 참말로 두렵기 짝이 없는 여자이다.
“......아니, 두려운 건 아라라기군이라고 굳게 생각합니다”
터보엔진에 달린 주마등처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계속 넘어진 상태로 전혀 일어설 기색이 없는 나한테,
하네카와는 이미 침착해졌는지 지극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아이스케키라니......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라라기군”
이것 참.
하고, 혼났다.
정면에서 직접 혼나면, 깜짝 놀라서 할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으면 아무 생각도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아이스케키나 하고.
요새는 초등학생도 안한다고.
“저기, 하네카와”
“알고 있어”
자, 여기, 하고 하네카와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붙잡아! 이건 그런 의미인 모양이다.
쓰러졌다고 해도 그리 큰 데미지를 받은 게 아니니까 손을 빌리지 않아도 일어설 수 있지만, 하네카와가 모처럼
내민 손을 헛되이 할 수도 없고.
나는 악수를 하는 것처럼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선다.
“............”
왜일까.
이렇게 손을 붙잡고 있을 때, 약간 설레이는 기분도ㅡ 단순한 욕구불만의 산물일까.
알 수 없다.
“상냥하네, 아라라기군”
하네카와는 말한다.
웃는 얼굴로.
붕대로 절반이 가려진 웃는 얼굴로.
“상냥해서 좋은 사람이야”
“......”
뭐라고 말해야 될까.
그 웃는 얼굴은ㅡ 무섭다.
솔직히 무섭다.
이 상황에서도 나한테 웃을 수 있는 하네카와는ㅡ 역시, 나 같은 낙제생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다르다고 말해도, 그건 위화감이 아니다.
오히려 외경에 가깝다.
즉 두렵다.
그러고 보면 오시노 녀석은 좀더 노골적으로ㅡ 하네카와를 [기분나쁘다]고 칭했었나.
“나는 아라라기군의 그런 면을 정말 좋아해”
그런 말을 주저없이 한다.
그건 평소대로의 하네카와이지만ㅡ 왜일까.
하네카와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물론 기쁘지만, 왠지 상처받은 기분이 되는 건.
부드러운 날붙이에 베인 것 같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왜일까.
그리고 하네카와는,
“걸을까, 조금”
하고.
그녀는 나를 권유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곤혹스러웠지만, 주저하지 않았다ㅡ 나는 옆에 세워둔 자전거 받침대를 세운 다음, 핸들을 잡고 자전거를
밀면서 하네카와를 쫓는다.
그리고 하네카와 옆에 나란히 선다.
남녀 둘이서 걸을 때는 남성이 차도 쪽을 걷는 게 매너라고 들었지만, 이 경우 그렇게 하면 내가 하네카와의
왼쪽으로 돌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오른쪽에 섰다.
물론, 자동차가 보도(步道)로 넘어온다면, 몸을 날려 하네카와를 감싸겠지만ㅡ 분명 하네카와는 지금, 왼쪽에
서는 걸 바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붕대 쪽에 서는 걸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네카와”
나란히 서자, 나는 일단 무난한 화제부터 애기했다.
“어디로 가는 중이야?”
“응? 아아”
하네카와는 그 질문에 대해,
“딱히”
라고 대답했다.
“휴일은 산책하는 날. 심심해서 걷는 것뿐이야”
“......그래도, 목적지는 있겠지?”
“없어. 특별히 어디로 갈 예정은 아니었어”
“............”
“어디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 하네카와는,
“아라라기군은ㅡ 확실히 여동생이 있었지?”
하고 질문을 되돌렸다.
당돌하게 화제를 바꿨다ㅡ 는 느낌은 아니다.
“봄방학 때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지만”
“아아......”
말했었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그런 걸ㅡ 하고 감탄할만한 건 아닌가.
하네카와의 뛰어난 기억력은 슈퍼컴퓨터 수준이라고 해도 좋다. 여태까지 나눈 대화 전부를 기억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뭐, 그녀를 상대하는 나도 지금까지 본 하네카와의 속옷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라라기군, 뭔가 이상한 생각 하는 거지?”
“아니, 전혀”
부정하고 나서,
“그래, 여동생이 있어”
나는 대답한다. 궁리, 궁리. 어째서 저 애기를 하네카와가 꺼냈는지, 최대한 생각하면서.
“필요없는 여동생이, 2 명”
“필요없다니”
놀리는 것처럼 킥킥 웃는 하네카와한테, “아니, 진짜라니까” 라고, 나는 꽤 흥분한 상태로 주장했다.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여겨지다니 의외이다.
나는 츤데레도 역츤데레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대레(反デレ)이다.
“저렇게 폐만 끼치는 여동생은 이 세상에 둘도 없어ㅡ 아니, 뭐, 실제로 둘밖에 없어. 저 녀석들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비뚤어졌는지......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는지. 그걸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 저 녀석들이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올바른 인생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
“그런 말하지 마. 그래도, 이래저래 투덜대지만,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네”
츠카사가 싱글벙글 웃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
“팬티를 서로 보여주거나 할 거 같아”
“............”
이 녀석은 내 무언가를 알고 있다!?
아니, 서로 보여준 적은 없지만......마치 오늘 아침 있었던 나와 츠키히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애기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자전거를 타고 무엇을 하러 어디로 갈 작정인지 파악했을지도 모른다......두렵기 짝이
없는 애기이다.
마음을 읽는 요괴인가. (주: 사토리요괴-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요괴, 원숭이처럼 생김)
닉네임, 사티인가.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
나는 남자 중의 남자라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한다.
기풍으로 보면, 하라 테츠오 선생 계열. (주:하라 테츠오(原哲夫)-만화 ‘북두의 꿘’, ‘창천의 권’ 작가)
“싸우기만 할 뿐이야. 최근 5 년 동안, 대화한 적도 없어. 말을 걸어와도, 무시”
“거짓말만 하네”
“아니, 진짜야. 몸짓으로만 애기하고 있어”
“사이좋잖아”
“아니, 최근 10 년간, 만난 적도 없어. 서로 메모로만 대화할 정도야. 우리들은 서로를 펜팔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러니까 사이좋잖아”
확실히.
겉보기엔 사이좋은 남매이다.
“아니, 하지만 오늘도야, 오늘도, 오늘 아침도 아래쪽 여동생과 싸움을 하고 온 참이야. 가슴으로 손을
주물러대서, 힘들었어”
“가슴으로 손을 주물러......?”
“아아! 진짜, 손을 엄청나게 주물렀다니까!”
나는 강한 분노를 드러냈지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네카와의 동의는 얻지 못했다.
그보다.
눈을 뒤집은 채 놀라고 있다.
희다......
놀리던 상태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저기, 하고 나는 화제를 바꾼다.
“뭐, 일단 가족이니까.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야. 하지만 여러 모로 폐를 끼치는 건 사실이야ㅡ 그렇다고 해도,
내 쪽도 약간 폐를 끼칠 때도 있으니까”
“서로 비슷하다는 거? 좋잖아, 그거. 가족 같아서”
“가족?”
“응, 패밀리”
하네카와가 걷는 페이스는 미리 계산된 것처럼 일정했다. 나는 자전거를 밀면서 거기에 맞춘다.
“내가 독자라는 건, 말했어?”
“아니ㅡ 애기한 적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지금 듣고보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하네카와는 형제자매가 있을 법한 이미지가 아니니가.
“그러니까, 아라라기군ㅡ 나한테 가족이란 건 없어”
그런 대사를ㅡ 하네카와는 태연하게 계속했다.
그런 대사를 너무 태연하게 말했기에, 하마터면 나는 흘려넘길 뻔했다.
맞장구치면서 흘려들을 뻔했다.
없다고? 뭐가?
“어이어이, 하네카와ㅡ 형제는 없어도 가족이 없다는 건 너무 지나치잖아. 아버지나 어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가ㅡ”
“없어”
이번에는 평범하지 않고.
하네카와는 단호하게 딱 잘라ㅡ 말했다.
완고하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도 안 계셔. 나는”
“............?”
부끄럽지만.
이 시점에선 하네카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예상도 할 수 없었다ㅡ 머리를 약간만
굴려도 알 수 있을 법한데, 그러나.
그건, 내가 생각하는 하네카와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에.
그게 암시하는 내용도.
그런 말투도.
“가족은 소중히 하는 법이야, 아라라기군”
“하네카와......너”
“아니, 착각하지 말아줘”
하네카와는 츤데레풍의 대사를 말했지만, 이 경우엔 물론 원래 의미이다.
“별로 천애고독이란 게 아니야. 그러네, 미안, 너무 지나치게 말했어. 너무 지나치게 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나한테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계셔. 한 지붕 밑에서 살고 계셔. 3 명이서 같이 살고 있어”
“아아......그런 거야? 그래도ㅡ”
“다만, 가족이 아닐 뿐”
그 뿐.
그렇게 말한 하네카와의 발걸음은ㅡ 전혀 바뀌지 않는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아니야”
“......친부모가 아니라니”
“즉 의부모란 거야”
하네카와는 아주 가볍게 애기했다.
그건 굳이 그렇게 말했다기보다 그렇게 발음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자, 그럼”
하네카와는 발을 늦추지 않는다.
‘어디부터 애기할까ㅡ 우선, 옛날 옛적 17 년 전, 사랑스러운 여자애가 한 명 있었습니다, 라는 느낌일까“
“여자애?”
“나와 똑같은 17 살 여자애라고 생각해주세요”
“아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수긍하니, 하네카와는 그대로 애기를 계속한다.
“어느 날, 그 여자애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하네카와는 터무니없는 일을 말했다.
“아ㅡ 아이를 가져?”
“응. 임신했다는 거. 참고로 상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사랑이 가득한 여자애였던 모양으로ㅡ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나야”
“자......”
나는 당황해서 하네카와 앞에 자전거채로 돌아가서, 그녀를 멈추게 한다.
“잠깐 기다려. 애기의 전개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 힘들어ㅡ 어? 너라고?”
“나”
“......”
하네카와한테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실로 보통 때의ㅡ 평소대로의 하네카와다.
“사생아가 되겠지. 그러니까. 응”
“기다려ㅡ 애기가 이상하잖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다니, 이상하잖아. 아까 전 아버지와 어머니 3 명이
지낸다고, 너, 말했잖아?”
“아-, 미안해. 그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 생물학상으로 피가 이어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애기”
엄밀하게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추궁해도 소용없으니까ㅡ 라고, 하네카와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 앞에 선
나를 살짝 피한 다음, 앞으로 간다.
목적지도 없는데.
앞을 향해 걷는다.
“참고로 지금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곧바로 자살해버리셨으니까”
“자살?”
“자살. 로프로 목을 매다셨어. 뭐, 자살 방법치고는 흔하니까ㅡ 장소가 아기 침대의 바로 위였다는 게, 조금
특이하지만”
모델 같았어, 라고.
하네카와는 말한다.
그것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옛날에 보았던 드라마의 줄거리라도 애기하는 것처럼.
자신의 반평생을 애기한다.
본래 기억에도 남지 않을 터인 옛 기억을.
“다만, 자살하기 직전에 그녀는 결혼했어. 어쨌든 그녀는 천애고독의 몸으로 아이를 키우는데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모양이어서ㅡ 돈을 목적으로 말이지”
“돈......”
“애정없는 결혼도 경우에 따라선 꾸짖을 수 없지만, 이 경우는 어떨까. 상대 남성 입장에서 보면 비극이겠지.
비극은커녕 성가시려나. 왜냐하면, 누구 애인지도 모르는데, 떠맡게 되었으니. 아아, 그 사람이 내 첫
아버지이지만”
“첫?”
“그 사람도, 지금 아버지와 달라”
“............”
다른 아버지ㅡ 인가.
하지만 다르다고 하는 건, 어디까지가ㅡ 다른 걸까.
“어머니의 자살 원인이 뭐였는지, 솔직히 알 수 없어. 원래 정신적으로 섬세하고 연약한 사람이긴 했지만ㅡ
돈을 목적으로 한 결혼생활을 지내는 건 힘들었겠지, 그녀는 너무 연애에 환상을 품고 있던 것 같아”
그래도 피해자는 첫 아버지 쪽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ㅡ 하고, 하네카와는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그 쿨한 말투가.
그녀답지 않은 냉정한 말투가.
일일이 내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첫 아버지라는 사람,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너무 성실한데다 일에 중독된 사람의 표본으로ㅡ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람이었대. 그래서, 또다시 결혼. 이번에는 아이를 키운다는 목적이 되려나ㅡ 그렇다면
베이비시터라도 고용하면 될 텐데”
뭐, 교육상 모친이 없는 건 아이한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겠지, 성실하니까ㅡ 하고, 하네카와는 [첫
아버지]의 행동을 두둔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결국 일을 너무 열심히 하시다가 과로로 돌아가셨어. 남은 모친이란 사람이 두 번째
어머니가 되어 지금의 어머니로, 지금 아버지는 그 사람의 재혼상대”
이상.
하고, 하네카와는 웃는 얼굴로 끝맺었다.
그 직후에 “라는 건 거짓말이야.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스프와 상냥한 아버지와 덜렁대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 라고 말하면, 그쪽 애기를 믿어버릴 정도로 종잡을 수 없었다.
아니, 실제로.
믿기 힘들 정도로 거짓말 같은ㅡ 황당무계한 애기이다.
영문을 알 수 없다고 해도 좋다.
복잡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서, 그림으로 그리면 실제로 알기 쉬운 가계도이다.
그래도.
그게 사실이라면 하네카와가 지금 함께 산다고 하는ㅡ 함께 지낸다고 말하는, 가족이 아닌 부친과 모친은.
“그래, 지금 같이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피가 전혀 이어져있지 않아. 말하자면 생면부지의 남이야.
아하하, 피가 이어져있지 않았는데 생판 남이라니ㅡ 흡혈귀가 들으면 비웃을만한 애기네”
“......웃지 않아”
내가 말하는 거니까ㅡ 틀림없어.
물론, 저 폐허에서 오늘도 쭈그려 앉아있을 작은 여자애도 절대로 웃지 않겠지.
무엇보다 나는 봄방학 이후, 저 유녀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지만.
“뭐야, 그거. 무슨 애기?”
“‘고아 해치‘라는 거야. 아니, 물론 호적상으론 확실히 부친과 모친이야. 아버지, 어머니이지만. 그래도 저
사람들은 부모다운 일을 전혀 해주지 않아” (주:고아 해치(みなしごハッチ)-벌 ‘해치’의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 원제‘곤충이야기 고아 해치’, 1970 년에 방송)
나.는. 이.렇.게.
딸.답.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내친 김에 덧붙인 것처럼 들린 말은, 내가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방적인 푸념에 가까운 말을 하네카와가 애기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떤가.
그거야말로 잘못 들은 게 아니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내가 하네카와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거지.
하네카와라면ㅡ 곤란해하거나 고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츠바사 하네카와는.
상처받지 않는다고?
그녀라면 반성이나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싫어하거나 서툴러하는 게 없다고?
하네카와는 당연히 행복할 거라고ㅡ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나.
그렇게 제멋대로 말이지.
“피가 이어져있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ㅡ 나도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 여러 가정을 전전한
끝에 도달한 집이니까 힘내서 사이좋게 지낼까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네, 진짜로”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시해.
그리 말하고, 하네카와는 당돌하게 뒤돌아서, 이번에는 그녀가 내 앞으로 끼어들어, 길을 막으며,
“미안, 아라라기군”
하고 말했다.
“지금, 나, 심술궂은 말, 했지”
“에ㅡ 아니, 그렇지 않아”
애기를 들었을 뿐인데 어째서 내가 하네카와한테 사과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당황해한다.
그러면 하네카와는,
“왜냐면, 이거, 화풀이인걸”
라고 말했다.
“갑자기 이런 애기 들으면, 반응하기 곤란하지? 그래서 어쨌냐는 느낌이고, 애시당초 아라라기군과는
상관없으니ㅡ 그래도, 왠지, 조금 동정하게 되어, 억지로 동정해버리는 자신한테 죄악감을 느껴버리지? 나쁜
짓을 해버린 듯한, 그런......안 좋은 기분이 들지? 친구의 사생활을 엿본 것 같아서, 무거운 기분이 들지?”
쉬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하네카와한테 후회하는 기색이 가득해서.
갑자기 몹시 연약한 표정이 되어ㅡ 자칫 잘못 대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것 같기에ㅡ 나한테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얼굴의 붕대가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걸까.
“그러니까 애기했어”
하네카와는 말했다.
“의도했던 대로. 나, 아라라기군으로 우울함을 달랬어”
“............”
“아라라기군을 기분나쁘게 해서, 우울함을 달래고 개운해지려고 했어ㅡ 푸념조차 아닌데 말이지, 이런거“
정말로 미안한 것처럼 그리 말하는 하네카와의 모습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욕구불만 해소야, 이런 거”
“욕구ㅡ 불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점에ㅡ 나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애시당초 두려워하던 추측이 맞았다는 걸ㅡ 그리고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네카와의 얼굴을 덮은 붕대.
그 이유.
만약 그게 내.가. 짐.작.했.던. 이.유.가. 아.니.라.면.ㅡ 하네카와가 갑자기 나한테 자기 가족에 대한
애기를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지 않는 한, 우울함을 달랜다니.
나를 가지고 우울함을 달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ㅡ 그런 걸, 용케 알고 있네. 그런 건 본인한테는 잘 가르쳐주지 않잖아? 스무살 되는 생일까지 비밀로
해두거나ㅡ”
“개방적인 부모라서 말이야.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들어왔어. 저 사람들ㅡ 내가 정말 눈엣가시인가 봐”
“......하네카와”
결심하고ㅡ 나는 묻는다.
흐지부지할 수 없다.
확실히 답을 내지 않고, 그걸 확인하지 않는 것이, 분명 이 장소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ㅡ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하네카와의 이야기에 너무 깊이 관여했다.
그녀의 마음에.
그녀의ㅡ 가정에.
나는 흙투성이발로 내딛었다.
“그. 얼.굴.ㅡ 누.구.한.테. 맞.았.어?
확증은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얼굴에 상처를 입는 이유는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ㅡ 다른 사람한테
맞는다니,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지?”
하네카와는 말했다.
내 질문을 거절하지 않고, 그저 신기하게 여기는 걸 그대로 입에 담는 어린애 같은 말투였다.
“어째서 아라라기군이 그런 걸?”
“......그건”
말을 머뭇거린다.
아마 그건 하네카와가 준 기회였는지도 모른다ㅡ 아니, 기회라는 단어처럼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물러선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경고문을ㅡ 최후통보를 제시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위협사격과 같이.
하지만ㅡ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내가 네 친구라서 그래”
“......친구”
“친구라면 애기를 들어주는 법이잖아. 이런 경우. 자세한 건 모르지만”
어쨌든 하네카와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니까.
거리감을ㅡ 종잡을 수 없다.
마치 3D 영상처럼 어디에 있는지ㅡ 헷갈린다.
“응-, 그런가, 그러네. 그럴지도”
하네카와는 내 말을 듣고 수긍했다. 나한테 더 이상 묻지 않고 수긍했다.
“그러네. 여기서 애기를 그만두면 정말로 아라라기군으로 울적함을 달랜 것이 되어버리니까ㅡ 아이스케키로는
수지가 맞지 않겠지”
“............”
아니, 완전히 맞는다고.
오히려 거스름돈으로 내 트렁크스를 보여주고 싶어.
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약속해줄래?”
“응, 그야 당연하지”
“아무한테도야. 진짜로, 아무한테도. 여동생들한테도ㅡ 가족한테도, 비밀”
다짐하는 말투는 반장난으로 생각되지만ㅡ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짐을 받으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말투였다.
그 기세에 눌리면서도ㅡ 나는 수긍했다.
“약속......할게”
“오늘 아침, 아버지한테 맞았어”
하네카와의 대답은 내 약속과 거의 동시였다.
어이없게, 웃는 얼굴로.
빙긋 웃으면서.
그녀는ㅡ 어느 가정에서나 자주 일어나는 당연한 일처럼 말했다.
“그건”
내 목소리는ㅡ떨고 있다.
분노로. 공포로
“그.러.면. 안.되.잖.아.ㅡ!”
물론.
이야기의 전개로 볼 때, 그 사실 자체가 굳이 놀랄 필요도 없고 당연한 결론이겠지ㅡ 틀렸다고 해도 때린 상대가
부친에서 모친으로 바뀌거나, 팔이 아니라 물건으로 얻어맞은 정도이고, 별 차이가 없다.
“부모다운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ㅡ 설마 부모답지 않은 짓을 당할 줄은 몰랐어. 놀라버렸어
요”
“놀라버렸다니......”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차가운 가족이ㅡ 아니었냐고”
“가족이 아니야. 차갑지만”
하네카와는 말한다.
그야말로 차가운 어조로.
“너무 차가워진 걸까ㅡ 얼어버린 걸까. 아니면 내가 이제 와서 새삼스레 가깝게 지내려고 한 걸까. 모처럼
밸런스가 잡혔는데. 그렇다면 내가 나쁘단 거네”
“나쁠 리가ㅡ 없잖아. 너는 나쁘지 않아ㅡ”
왜냐하면.
너는 언제나ㅡ 올바르니까.
“대체, 왜 아버지는 널 때리신 거야”
“별 일 아냐. 무심코, 아버지가 집에 들고 온 일에 참견했더니, 맞았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입다물고
지켜보셨습니다. 그 뿐이야”
“그 뿐ㅡ 이라니“
그야ㅡ 별 일 아니겠지.
확실히 그 뿐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뿐.
하지만.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어째서 아버지는 딸을ㅡ 때린 거지?”
“그게, 왜냐하면, 생각해봐, 아라라기군. 아라라기군이 40 살 정도이고ㅡ 본 적도 없는 17 살 어린애한테서 다
안다는 듯한 말을 들었다고 하면? 조금 화가 나더라도, 울컥 화가 치밀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ㅡㅡㅡ”
본. 적.도. 없.는. 17 살. 어.린.애?
뭐냐고, 그ㅡ 자학적인 말투는.
하네카와가 맞았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그쪽이 더 두려웠다.
아니, 이건ㅡ 두려운 게 아니다.
몸을 떨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마음이 술렁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ㅡ 기.분.이. 나.쁘.다.
오시노의 말을 빌리면ㅡ 이 아니다.
지금 나는 자신 안에 있는 감정으로ㅡ 내 말로, 내가 실감하면서.
하네카와 츠바사가 기분나쁘다.
가족이라 부르지 않고 진짜 부모가 아닌 가짜 부모라고 말하고, 차갑다고 애기하면서ㅡ 지금 하네카와 츠바사는
그래도 양친을 두.둔.하.려.고. 한.다.
나로부터인가, 아니면 세간의 이목으로부터인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모가 아닌 부모를.
딸을 때리는 부모를ㅡ 두둔하려고 한다.
그런 하네카와가.
나는 친구로서ㅡ 솔직히 기분나빴다.
뭐지, 이 녀석.
뭐냐고, 대체.
“폭력이 어쩔 수 없다니ㅡ 무슨 말 하는 거야. 너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그건 네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일ㅡ”
“괜찮잖아ㅡ 한 번 정도는”
하네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나는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방금 전에 아라라기군을 때렸으니까. 그런다고 아라라기군은 나를 꾸짖을 거야?”
“아니ㅡ 저건”
저건 내가 나쁘다.
대의명분이라고 칭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반 친구의 스커트를 젖히는 남자는 맞아도 싸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싱글벙글, 아무 생각 없이 얼굴에 웃음을 띄우는 하네카와ㅡ 허세부린다거나 동정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마음 속으로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나니까ㅡ 맞아도 어쩔 수 없어”
“............”
말이 막힌다ㅡ 정도가 아니다.
말이 막힐 정도로 할 말이 없다.
지금의 하네카와한테는ㅡ 할 말이 없다.
내 침묵을, 과연 하네카와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을까,
“약속했지? 아라라기군”
하고, 다시금 다짐하는 것처럼 묻는다.
한 발짝, 나와의 거리를 좁혀서.
타이르는 것처럼 말한다.
“약속했지, 아라라기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고ㅡ 약속했었지”
아무한테도.
여동생한테도, 가족한테도.
혹은ㅡ 학교에도, 경찰한테도.
아니.
다르다. 그뿐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하.네.카.와. 자.신.한.테, 두 번 다시 이 화제를 꺼내지 말라고ㅡ 약속했다고.
하네카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을 남김없이 애기함으로써, 하네카와는 오히려 내 행동을 묶어두려는 것이다.
하네카와는 나한테 약속을 받아내어, 약점을 잡으려고 한다ㅡ 양친을 위해서.
자신을 때린 부친을.
그걸 보고 있던 모친을.
생판 남을ㅡ 지키기 위해서.
“하, 하지만ㅡ 그런 약속은”
어떻게든 쥐어짜낸 내 목소리는, 아마도 조금씩 떨렸다고 생각한다.
“약속은ㅡ 지킬 리가”
“......부탁이야, 아라라기군”
하네카와는 말했다.
불분명한 대답을 하는 나한테.
약속을 태연하게 깨려고 하는 나와 같이 불성실한 인간한테, 끝까지 성실하게 임하려는 하네카와 츠바사는ㅡ
머리를 숙인다.
깊게.
허리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숙히, 어둠 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그 땋은 머리를 숙였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네카와......하지만, 나는”
그래도 저항을 보이는 나한테, 하네카와는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기계적으로 똑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입다물고 있어준다면, 나,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에!? 진짜!? 하네카와가 뭐든지 해주는 거야!? 만세!”
나는 달려들었다.
“아....., 아라라기군”
양손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그 자리에서 점프해 쾌재를 부르는 나한테, 하네카와는 놀라움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아까 전에 내딛었던 한 걸음을 뒤로 뺐다. 아니, 2 걸음, 3 걸음. 그 정도.
마음의 거리는 훨씬 더 멀어졌겠지.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그런 건 신경쓰이지 않았다.
하네카와가 뭐든지 해준다고?
하네카와 츠바사가?
내가 입다물기만 하면!?
“우와, 어떻하지. 뭘 시킬까, 뭘 시킬까. 뭘 시키는 게 가장 좋을까. 아니, 잠깐 기다려, 서두르지 마, 나.
들뜨지 마, 이럴 때일수록 쿨해져야 해. 엄숙한 분위기로 가자-. 이 전대미문의 찬스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거
야”
“어, 어라? 그런 리액션이야? 여기는 그런 장면인 거야? 아라라기군이 내 진지함에 감동받아, 마지못해
침묵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아닌 거야?”
“진지함!? 뭐야, 그딴 거 몰라!”
고양이한테나 먹이라고!
나는 너무나 들뜬 나머지 의미도 없이 그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빙글빙글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완전히 수상한 사람이지만, 타인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다. 또, 하네카와의 경멸에 찬 시선도 무시한다.
“뭐든지 가능한가-.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망설여지네-. 제길,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원망스럽네. 이럴
때 단번에 결단할 수 있어야, 남자 중의 남자인데”
“아니, 최악의 남자라고 생각해......”
하네카와가 질색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것 같다.
“저기, 아라라기군. 아까까지 우리들이 한 진지하고 중요한 애기의 내용, 기억해?”
“기억하지 않아”
“기억하지 않네”
“아라라기는 누구지”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네......”
이건 예정 외의 전개야, 하고 하네카와는 머리를 감싸안고, 신음하듯이 말한다. 내가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그렇게까지 쇼크를 받은 건 기쁘지만, 어디의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나에 대한 건 상관없다.
유일하게 기억하면 되는 것은, 아까 전 하네카와의 대사 뿐이다.
“그래, [하네카와 선생님이 아라라기군의 부탁, 뭐든지 들어줄게☆]라는 하네카와의 대사를......”
“그렇게 말한 적 없어!”
하네카와가 화냈다.
화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누구야, 하네카와 선생님은”
“응? 아아, 미안미안. 하네카와한테 여교사 플레이를 시켰을 경우의 패턴을 검토 중이어서, 무심코 입에 담고
말았네”
“대체 무엇을 검토하는 거야!?”
“그래서, 하네카와는 뭐라고 말했지?”
“우......”
끝없는 고뇌를 맛보면서, 하지만 한 번 입에 담은 말을 지키려고 하는 그녀의 성실함은 내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냐! 그 다음이야!”
이 일이라니 뭐냐고!
그런 말은 처음 들었어!
신선한 뉘앙스군, 어이!
“입다물고 있어준다면, 나,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우주에서 날라온 전자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어! 후반부만 다시 한 번 반복해줘!”
“............”
하네카와의 눈이 백안시(白眼視)하는 눈이라기보다 흰자위(白目)라고 말해도 좋은 레벨이 되었다.
으음.
되도록이면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면서 말해주길 바랬지만, 더 이상 배부른 소리는 할 수 없다.
마음 속으로는 경멸하면서 절대복종을 맹세하는 것도, 이건 이거대로 괜찮다.
......느낌 탓인가, 지금 나를 경멸하고 있는 시선은 하네카와 뿐만이 아니라고 보는데......특히
애니메이션을 보고 접한 분들이 그런 시선을 남기며 책을 팍 덮는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도 들지만.
뭐, 상관없다.
남한테 어떻게 여겨지든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마도 훌륭하신 옛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겠지.
땡큐, 옛 사람.
“뭐든지 할 테니까”
하네카와의 반복.
엄청난 국어책 읽기였다.
“............”
과연 국어책 읽기 버전은 다르군.
“좀더 팍, 감정을 담아서 부탁드립니다”
기묘하게도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쪽이 허리를 굽히면서 부탁하고 있다.
“지금 한 국어책 읽기 버전에 나의 아라라기군에 대한 모든 감정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주세요”
“아니, 그럴 리 없다니까. 하네카와, 자신을 믿는 거야. 너라면 좀더 혼을 담아서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할· 테·니·까”
이번에는 국어책 읽기 버전이 아니고 분노라는 이름의 혼이 담긴 거친 말투였다.
뭐든지 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위해서는 혀도 내밀지 않을 것 같다.
“큭......지지 않는다고”
그 정도 박력 가지고 나는 굴하지 않는다.
이걸로 확실히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나 온스테이지(on stage)이다. (주: 무대에서 상연 중)
아라라기 코요미의 독무대이다.
“뭐든지 한다고......하지만 정말로, 과연 뭘 시켜야 좋냐고!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헤매게 되는군! 아니,
오히려 이건 소논문이야! 나한테는 지금 구성력이 필요해!”
좀더 공부해뒀으면 좋았을걸!
모처럼 진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 지각만 한 거지!
너무 과도한 행복은 사람을 패닉에 빠지게 한다고 하지만, 나는 바로 지금, 그런 상황이었다. 침착한 뒤에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대실패를 범하게 된다.
“잠깐!? 그러고 보니 하네카와가 들어준다고 한 소원의 갯수는 한정되어있지 않네! 내가 말하는 걸 무한히
들어준다는 의미잖아!?”
“한 번이에요!”
즉시 하네카와가 정정했다.
“뭐든지 [한 번만]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큭......해명하게 만들었군”
역시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군.
뭐, 상관없다.
나는 나메크성의 신룡보다 지구의 용신 쪽을 좋아한다. 죽은 동료들을 한 번에 되살리는 게 가능해서 편리하니까.
(주:드래곤볼-소원을 비는 구슬, 7 개 모으면 용이 나와 소원 3 개를 빌 수 있음, 나메크성 신룡은 1 명씩밖에
못 살려내고, 나메크어로 빌어야함)
“정말, 이젠 두통이 나려고 해......”
하네카와는 그리 말하고, 진짜로 머리를 감싸안는다.
“아빠한테 맞은 뺨보다 머리가 더 아파”
“두통인가”
“응. 아라라기군과 연관된 봄방학 이후, 나, 계속 두통이 나”
“흠”
그건 매우 걱정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버려두고.
“일단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하자, 하네카와”
“아니, 이제 이곳도 인간미가 거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인간미가 아니야. 인적이야“
이쪽이야, 하고 이끄는 나.
“하아-......네에. 알겠습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
하네카와는 깊게 한숨을 쉬고, 내 뒤를 따라왔다.
흥. 그렇게 삐진 척해서 내 죄악감을 부추기려는 작전을 취해도 소용없다.
지금, 하네카와의 모든 것이 내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좋다ㅡ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칠 만큼, 미숙하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힘든 고비, 중대한 국면이기에, 내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지.
나는 자전거를 안전해보이는 장소에 세우고 (나름대로 비싼 마운틴바이크이기에, 도난에는 주의해야 한다),
하네카와를 가까운 수풀로 데려갔다.
“........................”
하네카와를 가까운 수풀로 데려갔다.
하네카와를 가까운 수풀로 데려갔다.
하네카와를 가까운 수풀로 데려갔다.
......뭐지, 묘하게 이 범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의 뉘앙스는......떨린다고!
아니!
쌍방이 합의했으니까 범죄가 아닐 터!
오히려 이 상황은 하네카와가 나한테 자신을 가까운 수풀로 데리고 가도록 시켰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이게 BL 에서 말하던 ‘수(受け)’이면서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역할인가!?
(주:사소이우케(誘い受け)-보이즈러브 소설에 ‘공(攻め)’, ‘수(受け)’가 있는데, 사소이우케는 적극적으로
남자 역(공)을 유혹하는 여자 역할(수))
혹은 츤데레‘수(受け)’!
......아니 뭐, 하네카와한테는 츤데레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지만, 왠지 지금은 츤츤거리니까 희한하게도
그렇게 여겨진다.
기간한정 츤데레.
“자, 그래서 뭐지? 아라라기군”
하네카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그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
뒤에 있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댄 채, 왠지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의 소꿉놀이에 어울려주는 친척 누나와 같은
태도였다.
‘자~ 자~’, 와 같은.
“뭐야. 하네카와. 상당히 여유있어보이는데”
“여유있어”
하네카와는 도발하는 것처럼 말한다.
여유작작하게. (주:말이나 행동이 너그럽고 침착함, 여유만만)
“왜냐하면 이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는 걸. 어차피, 아라라기군, 어떤 요구를 나한테 한다고 해도
내가 정정당당하게 그 요구에 응하면, 마지막에는 겁내서 아무 짓도 안 할 거잖아?”
“뭐, 뭐시라!?”
겁낸다고!?
내가 대체 언제 겁냈다고 말하는 거지!
“봄방학. 체육창고”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침묵했을 때의 사도란 이런 기분이었나. (주: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사도, 오퍼레이터의
대사 ‘사도, 완전히 침묵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굉장히 사랑스러운 에바가 내 앞에 있지만. (주: 에바(エヴァ)-에반게리온의 약자)
요시자키 미네 디자인인가. (주:요시자키 미네(吉崎 観音)-만화가, ‘케로로중사’의 작가, 특유의 귀여운
그림체와 에바 사도 씨리즈 피규어가 유명함)
“이것 참-, 기억나네-, 봄방학 때 아라라기군의 겁쟁이짓거리(chicken). 설령 닭(chicken)이란 생물을
몰랐다고 해도, 저 때 아라라기군을 보면 그게 어떤 생물인지 바로 알겠지”
드물게 비아냥거리는 하네카와씨.
기억나네-, 라고 말하면서 저 때 있었던 일은 회상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겁쟁이(chicken) 아라라기군. 나는 무얼 하면 되는 걸까? 어차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시키는 대로 해줄게. 어떤 거? 벗어? 왜?”
“......”
음.
아무래도 하네카와 안에서 내 남자다움은 몹시 낮게 평가되고 있는 모양이다.
남성으로서 이만한 굴욕도 없다ㅡ 아니, 하지만 하네카와는 오해하고 있다.
확실히 봄방학 때 나는 겁쟁이(chicken)였다.
그건 인정하자.
하지만 언제까지나 겁쟁이(chicken)가 겁쟁이인 채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병아리가 언젠가는 닭
(chicken)이 되는 것처럼 나도ㅡ 어라, 이래선 겁쟁이(chicken)인 채이다.
아니, 다르다고.
겁쟁이(chicken)는 겁쟁이여도, 나는 나고야닭(名古屋コㅡチン)이다!
(주:나고야코친(名古屋コㅡチン,cochin)-중국 원산의 육용종 닭, 일반닭보다 3.5 배 비싸고 생육기간이 3 배,
나고야닭요리가 특히 유명함)
오히려 봄방학 때의 실태를 만회한다는 기분으로, 나는 이 상황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훗.
이런 나한테 복수의 기회를 제공하다니, 신도 꽤 자비로우시군.
............
진짜로 [이런 나한테]라니.
신님, 너무 무른 거 아냐?
“흠......”
나는 턱에 손을 괴고, 그 후에 곰곰이 생각한다. 지긋이 하네카와의 다리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시선으로 훑는다.
“우......”
그런 내 시선에 약간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하네카와였지만 그녀는 다부지게 양손을 뒷짐지고 등줄기를
꼿꼿히 세워, 오히려 내가 하네카와의 온몸을 보기 쉽도록 해보였다.
흠.
그건 배짱인가.
아니면 진짜 마음 속으로 나를 겁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걸까.
......후자이겠군.
흥, 그렇다면 그 방심을 이용할 뿐이다ㅡ 어차피 이런 씨리즈, 6 권까지 애니메이션화될 걱정은 없으니까, 내
멋대로 해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터이다.
TV 에서 이런 장면을 내보내는 건 위험하지만, 글자로 표현하는 이상, 내 호감도에 영향은 없을 터!
소설은 규제받지 않는다!
“뭐야, 아라라기군. 상당히 거드름피우고 있네ㅡ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내 몸을 핥는 것처럼 보는 게 아라라기군이 하고 싶은 거야? 시간(視姦)이란 녀석?”
“............”
응.
아니ㅡ 그런가.
그건 하네카와 입장에서 볼 때 나를 도발하기 위해, 혹은 반대로 기세를 꺾기 위해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ㅡ
역으로 나한테는 중요한 힌트가 되었다.
그야말로 실마리이다.
그렇다.
하네카와의 [뭐든지 할 테니까]라는 말에 이끌려 나는 무심코 하네카와한테 무엇을 시켜야 할지, 그 점만
생각했지만ㅡ 이 경우, 반대로 접근할 수도 있다.
하네카와한테 무엇을 시키는 게 아니라ㅡ 하네카와한테 무슨 짓을 할.까. 고민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굳이 문맥에 따라 말하자면, 하네카와한테 [참아내도록] 하는 거겠지ㅡ 흠.
아주 바람직하다.
그리고 하네카와의 말 중에 포함된 힌트는 그뿐만이 아니다ㅡ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녀답지도 않다.
하네카와는 나한테 자진해서 자신의 공격법을 가르쳐준 거나 다름없다. 아니면 저건가. 역시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역할(誘い受け)인 건가ㅡ 그렇다면 사양할 필요는 없다.
내 안에 남아있는 일말의 양심이 지금 사라졌다ㅡ 아니, 잠깐 기다려, 그건 큰일이잖아?
양심이라니.
양심이 사라지다니.
“하네카와”
“왜”
“온몸을 핥는 것처럼 보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야”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네카와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거, 아라라기군이 평소에 나한테 하는 짓이니까”
”들켰네!“
수업 중에 하네카와 (의 가슴)한테 시선을 보낸 것이 들켰다, 자살하라고!
“노파심으로 말하지만, 칠판은 제대로 보는 게 좋아. 모처럼 선생님이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시니까”
“크윽......”
상냥하게 타이르는 것 같이......
이럴 바엔 비난받는 게 훨씬 낫다고......마음이 꺾일 것 같다!
힘내라, 나!
마음을 굳게 먹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강해라!
이걸 뛰어넘으면 나한테는 극락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아마도!
“그리고 참고로 나도 한 가지 가르쳐주겠지만, 여자애는 의외로 시선에 민감하니까 볼 때는 주의하도록 해”
“제길......, 그런 식으로 말해서 내 마음을 꺾고 부수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꺾이려고 하는 무릎을 어떻게든 다시 세우고, 몸을 벌떡 일으킨다.
“하네카와, 온몸을 핥는 것처럼 보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야”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나는 지긋이 하네카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ㅡ 나는 네 붕대 밑의 맞은 상처를 핥고 싶은 거야”

/004

자, 그럼
지금까지도 가끔씩 암시하듯이 화제에 나오곤 했지만, 알기 쉬운 형태로 봄방학 때의 일을 애기해두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장본인인 나는 저 2 주 동안 있었던 일을 별로 애기하고 싶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화제를 피할 수
없다는 판결이다.
봄방학.
나는 흡혈귀한테 습격당했다.
자기부상열차가 실용화되고 수학여행으로 해외로 가는 게 당연해진 이 시대에, 부끄러워서 밖에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꼴사나운 실태이지만, 어쨌든, 나는 흡혈귀한테 습격당했다.
흡혈귀ㅡ 괴이의 왕.
피도 얼게 하는. 피도 끓게 만드는.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의 흡혈귀.
셀 수 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문구를 가진 괴이살해자.
눈이 아찔해질 정도로 눈부시고, 눈이 찌부러질 정도로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 금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흡혈귀한테 목덜미를 덥썩 깨물려 온몸의 피를 들이마셔지고ㅡ 그리고 나는 흡혈귀가 되.었.다.
불사신으로. 무적으로. 최강의ㅡ 흡혈귀.
흡혈귀 전문의 사냥꾼인 뱀파이어·헌터나 흡혈귀이면서 흡혈귀를 사냥하는 동족살해의 흡혈귀, 그리스트교의
특수부대한테 구해지는 일도 없이ㅡ 그래서 내 봄방학은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한 싸움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결말부터 애기하면 지나가던 꾀죄죄한 아저씨나, 클래스 반장의 협력을 얻어서, 최종적으로 나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럭키-.
언럭키-.
다소의 후유증도 남아있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로 돌아오는 것이ㅡ 가능했다.
잘됐네, 잘됐어.
해피엔드.
뭐, 이 세상과 인생에 그렇게 알기 쉬운 결말은 없고 하물며 엔딩이란 것도 없다. 그래도 끝이 있다고 한다면,
저 아름다운 귀신한테 물린 시점에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고 해도 되지만.
그래서, 일단 접어두고.
여기서 왜 이 애기의 삽입이 필요했는지 말하면, 그건 [다소의 후유증]이란 녀석이다ㅡ 흡혈귀의 후유증.
그 후유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회복능력, 치료능력이 된다ㅡ 뭐, 흡혈귀의 불사신능력은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친숙한 대로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굴러서 무릎이 벗겨졌다거나 종이로 손가락을 베였다거나, 여동생, 카렌과 맞붙어 싸우다가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물론 그 장소 제각각의 컨디션, 즉 흡.혈.귀.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눈 깜짝할 새에 낫는다.
나아버린다.
고쳐버린다.
글자 그대로 인간과 동떨어진 회복력ㅡ 그리고 이 회복력은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한테 적용할 수 있다.
타인의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다.
피나 타액 종류의 체액을 상대의 상처에 바르면ㅡ 바른 걸로, 그 상처의 치료가 가능하다. 즉 오로나인,
멘소레담 계열과 약간 비슷하다고 보시면 된다. (주:오로나인-오오츠카제약의 연고, 후시딘 및 마데카솔류,
멘소레담-소염진통제, 파스와 비슷한 효과)
침.을. 발.라.두.면.
핥.아.두.면. 낫.는.다.ㅡ 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고로
“고마워”
하고ㅡ 일이 끝난 후, 나는 하네카와한테 감사인사를 받았다.
아니, 계획이 단번에 들통났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호감도를 희생해서,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게 목적인 것처럼 가장해
하네카와의 붕대 밑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들통나버렸다.
치료를 제안해도 분명 하네카와는 거절할 테니까, 상대의 말꼬리를 잡는다는 작전이지만 너무 뻔했던 모양이다.
부끄럽다.
자살해버려.
하지만 하네카와도 그녀 나름대로 이 계획을 간파했는데도 군말 없이 나한테 몸을 맡긴 건, 상처를 치료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내 체면을 세워준다는 측면이 강하다.
음.
왠지 결말이 뻔한 승부 같아서 슬프다.
“일단, 붕대 다시 붙여둘게”
나는 멋쩍은 걸 숨기려는 것처럼 말한다.
아니, 실제로 멋쩍은 걸 숨기고 있다.
“갑자기 상처가 낫는 건 이상하니까. 상.처.입.은. 척. 하지 않으면ㅡ”
“부모가 수상하게 생각한다고?”
하네카와는 내 대사를 가로챘다.
“생각하지 않아”
하고 말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도 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걸. 아마 저 사람들은ㅡ
내 얼굴도 기억하지 않아”
......일단 다시금 보충설명을 하자면, 실제로 하네카와의 얼굴을 핥을 배짱이 없는 겁쟁이, 내가 취한 행동은
가방에 붙어있던 안전핀으로 손가락끝을 찌른 후, 거기에서 나온 피를 하네카와의 환부에 칠한다는 지극히 건전한
행동이다.
나고야닭(名古屋コㅡチン)이 되어 날개짓하는 날은 아직도 멀다.
뭐, 그래도 봄방학 때라면 몰라도, 현재 흡혈귀와 비슷한 내 체액으로는 완치시킬 순 없었지만ㅡ 최종적인
경과를 보면, 흉터가 남지 않게끔 처치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런 치료를 하지 않았으면ㅡ
노골적으로 흉터가 남을 정도로 심한 상처였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이렇게 됐냐고 할 정도로.
얼얼해질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부친은 딸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ㅡ 하네카와가 말한 바에 의하면 마치 충동적으로 한 대 때린
뉘앙스였지만 그런 식으로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끈질기게ㅡ 집요하게 몇 번씩이나 때린 것처럼.
그런 모습이었다.
하네카와가 말했던 [맞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ㅡ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견]했길래
부친이 딸을 이렇게까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성인 남자가 여자애를 이렇게까지 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집까지 바래다줄까?”
라고 한 내 제안은,
“아니, 됐어”
라는 말로 단번에ㅡ 가차없이 거절당했다.
그건 정말 타인을 거부하는 태도였다ㅡ 당연하다.
하네카와는 딱히 나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니까.
우연히, 길 가던 중에 만났을 뿐이다.
그저 우연의 산물이다.
아니, 설령 도움을 청했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ㅡ 사람은.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지는 것뿐이니까ㅡ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후 우리들은 잠시 동안 평소대로의 바보같은 애기를 하면서 함께 걷고 적당한 때, 왠지 모르게
살며시 헤어졌다. 도중에 자동차에 치인 흰색 고양이를 묻어줬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이래저래.
결국 나도 그 후의 예정을 대부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ㅡ 댐건설은 중지다. 도저히 서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고 난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 오빠, 웬일이야. 빨리 왔네”
돌아오니, 카렌이 물구나무서기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참이다ㅡ 아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여동생.
무슨 트레이닝이 그러냐고.
“............”
하지만 딴지를 넣을 의욕도 없어서 나는 그녀를 그냥 지나치고,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한다.
“뭐야, 무시하지 말라고, 오빠. 사랑스런 여동생한테 ‘다녀왔어’ 한 마디해도 되잖아. 쇼핑은 잘 했어?”
“쇼핑? 아니ㅡ 쇼핑은”
그러니까, 하지 않았다.
욕구불만의 해소도 못한 채, 답답한 기분은 더해졌을 뿐이다.
상념은 더욱더 쌓일 뿐이고ㅡ

/005

다음날.
즉 4 월 30 일.
아니, 감각적으로는 아직 4 월 29 일 한밤중일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나는 여동생이 깨워주지 않으면 다음날
아침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ㅡ양친, 그리고 경축일 때문에 밤을 샜던 카렌이나 츠키히가 간신히 잠들 무렵,
나는 몰래 집을 나섰다. 마운틴바이크에 올라타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살그머니 조용조용하게 페달을
밟는다. 한동안 라이트도 켜지 않는 조심성은 내가 봐도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도 들지만.
밤놀이.
하러 가는 게 아니다.
나한테 그런 바지런한 기질은 없다ㅡ 성적면에선 지극히 낙제생이지만, 나는 이래뵈도 꽤 성실한
남자고등학생이다.
불량아 취급은 말도 안된다.
그럼 잠기운을 억누르고 어디로 향하는지 말하자면 마을에서 벗어난 페허, 일찍이 학원이었던 폐빌딩이다.
담력시험에도 사용되지 않을 법한 붕괴 직전의, 폐허에 가까운 건축물이다ㅡ 그래서, 한밤중에 그런 장소로 가는
건, 절대로 남한테 좋은 인상을 주지 않겠지만.
비행(非行)이라고 애기하도 반론할 수 없다.
하지만 이유는 있다.
그런 장소에 향하는 이유도ㅡ 시간이 밤중인 이유도.
확고하게 있다.
폐빌딩을 둘러싼 울타리 앞에 자전거룰 세우고, 주변에 인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필요없을 테지만 일단 만약을
위해서라고 할까, 단순히 습관처럼 뒷바퀴에 체인잠금장치를 걸어둔다. 그리고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로 부지 안에
들어간 후, 빌딩 안으로 들어간다.
담력시험에도 사용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밤중에 침입해보니, 자주 왔던 타인의 폐허라고 해도
나름대로 등줄기가 오싹해진다ㅡ 하물며 이 폐허 안에는 진짜 귀신이 산다고 하니까ㅡ 더욱더 그렇다.
귀신.
요괴.
괴이ㅡ 괴이의 왕.
흡혈귀.
야행성 나이트워커.
“뭐, 그래도 이제 와선 옛날 애기인가ㅡ”
옛날 옛적에.
이다.
이곳에 있는 건 흡혈귀가 아니고ㅡ 흡혈귀의 자취.
흡혈귀와 비슷한 유녀이니까.
외관상 보이는 것보다 더 황폐한 건물 안, 기와자갈이나 폐기물 등을 피하면서 계단을, 최상층인 4 층까지
곧바로 올라간다.
그리고 4 층에 있는 3 개의 방ㅡ 3 개 방 모두, 한때는 교실로 사용되었다ㅡ 의 문손잡이를 가까운 순서대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열어본다.
오늘은 운이 나쁜 모양이다.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둘다 빗나갔다.
3 번째 문도 정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ㅡ 흡혈귀와 비슷한 유녀는 있었지만, 또 한 명, 있어야 할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라......오시노 녀석. 이런 밤중에 어디로 가버린 거지?”
외출인가?
변함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이군ㅡ 하물며 이렇게 늦은 시간이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낡은 책상을 침대삼아 자고 있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내 방문을 예상했기에, 수면을 방해받지 않도록 일부러
4 층 교실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날짜를 예고해두지 않았지만 저 녀석은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보는
남자이니까 말이지ㅡ 슬슬 내가 언제 온다는 건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런 의미로는 나도 폐를 끼치는 손님이다. 이런 밤중에 방문하다니 확실히 비상식적이다. 언제나 “
아라라기군, 늦었네” 라고, 맞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잘못이다.
상식을 벗어난 흡혈귀를 상대하는 이상, 행동이 비상식적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겠지만ㅡ 다만.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문을 닫으면서, 캄캄한 교실 안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원흡혈귀 유녀를 보면서ㅡ
나는 꿀꺽 군침을 삼킨다.
나는 노골적으로 긴장했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이 녀석과 단둘이 있는 건ㅡ 봄방학 이후 처음이다.
지금까지, 여기서 이렇게 만날 때는 언제나 오시노가 있었다ㅡ 단둘이라고 해도, 유녀는 절대로 인간이 아니고
나도 또한 절대로 인간이 아니지만.
어중간한 괴이이며ㅡ 어중간한 인간.
그리고 나와 유녀, 우리들이 그렇게 된 책임은ㅡ 대부분 나한테 있다.
긴장된다.
마음도 굳게 먹는다.
죄악감도ㅡ 되살아난다.
모에가 싹튼다. (萌える)
“............”
아니, 싹튼다고(萌える) 해도 그건 ‘되살아난다’의 유의어로서 사용한 것이고, 절대로 얇은 옷을 입은 금발
유녀의 사랑스러움에 마음이 끌렸다는 게 아니다.
8 살 전후의 천진난만하게 앉은 모습이든.
숱이 많지만, 한올한올이 얇은 비단처럼 섬세한 금색 머리카락이든.
사랑스러운 원피스이든ㅡ 이 폐허를 전혀 걷지 않은 듯한, 투명한 피부색의 살이 얇은 맨발이든.
그녀는 사랑스럽지 않다.
거기에 대해서 말을 거듭할 필요는 없다......전혀, 절대로, 논할 필요가 없다.
이쪽을 강하게 째려보는, 원한으로 가득 찬, 찌르듯한 시선을 묘사하는 것만으로ㅡ 충분하다.
“......그렇게 째려보지 마. 예쁜 얼굴이 망가진다고”
농담조로 말하면서 나는 그녀한테 다가간다ㅡ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자, 싱긋 웃어보라고. 너한테는 웃는 얼굴이 제일 어울려‘
대답하지 않는다.
평범한 시체도 아닌데ㅡ 아니, 평범한 시체와 비슷한 건가.
그래도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해서 말을 건 게 아니다. 봄방학이 끝난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런 타이밍에 당돌하게 말한다는 극적인 전개를 노릴 정도로, 나도 기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말없이 지내면ㅡ 마음이 꺾일 것 같았기에 하다못해 나만이라도 시끄럽게 떠들 뿐이다.
오늘은 오시노가 없는만큼, 더욱더 그렇다.
뭐ㅡ 그래도, 이 녀석한테 웃는 얼굴이 제일 어울린다는 건 그저 내 본심이지만.
나는 교실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은 그녀, 그대로 두면 곰팡이와 동화될 것 같은 그녀 앞에 풀썩 앉아서
웃옷을 벗는다.
......아니, 이것도 얇은 옷의 금발 유녀를 앞에 두고 천천히 옷을 벗는 거지만, 지금부터 루팡 3 세 흉내에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다. (주: 애니메이션 ‘루팡 3 세’, 가즈히코 가토 원작, 루팡 3 세는 금발미인 후지코
앞에서 맨날 옷을 벗고 덮친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출판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상대는 엄밀하게 유녀가 아니라 괴이이고, 5 백살이니까 문제없다는 변명을 누구나 믿어주는 건 아니다.
4 월 막바지이기에 아직 피부가 차가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폐허 안에서 반나체가 된 건ㅡ 이 유녀한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식사?
근데 어째서 벗는 거지?
여성나체 스시가 아닌 남성나체 스시라도 먹일 작정인가? (주:여성나체회(女体盛り)-일본고유 음식문화,
여자알몸 위에 생선회 올려놓고 먹음, 성적 페티쉬)
그런 의문도 들려오지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그보다 3 번째 의문을 품으신 분은 좀더 다른 부분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흡혈귀의 식사라고 하면ㅡ 흡혈이다.
“......자, 잘 먹겠습니다 정도는 말하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의바른 식사가 아니니까”
그녀의 작은 체구에 팔을 돌려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나는 그녀의 입을 내 목덜미로 이끈다ㅡ 서로 얼싸안는
형태로, 이건 몇 번씩이나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자세이다.
식사. 흡혈.
싫어도, 그녀 입장에서 보면 이건 식사라고 볼 수도 없는, 훨씬 절실한 영양제 주사일지도 모른다ㅡ 애당초 현
시점에 그녀는 흡혈능력의 주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괴이의 권위자, 오시노 메메의 손에 걸려 체질적으로 개조당했기에, 내 혈액 이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체가
되었다ㅡ 다시 말해서, 정기적으로 내 피를 빨지 않으면, 그로 인해 허무하게 죽거나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존재이다.
지금 그녀는 영혼적인 면으로 볼 때 아라라기군의 노예에 가까워ㅡ 라고 오시노는 말했다.
아니, 하지만 그런 그녀한테 피를 계속해서 주는 내 쪽이 그녀의 노예라고 생각한다.
신하.
나.의. 신.하.
그녀는 위압적인 자세로 거만하게, 나를 그렇게 불렀다ㅡ 그렇게 불렸을 때를 떠올리면, 현재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녀가 피를 들이마실 때마다.
겨우 남은 흡혈귀의 모습인 덧니가 꽂히는 목덜미가 아니라ㅡ 가슴이
심장이 아파온다.
욱신욱신(ずきずきに)하고. 욱신욱신하고.
가지각색으로(好き好きに). (주:즈키즈키(ずきずき)와 스키즈키(好き好き)의 발음장난)
하지만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ㅡ 그 아픔에 나는 안심해버린다.
그녀가 내 체액을 섭취하고 있는 한ㅡ 적어도 그녀는 살려고 하는 거니까.
한때는 자살조차 꾀했던 흡혈귀가.
원래 죽은 거나 다름없는 흡혈귀가.
나.를. 위.해. 이렇게 살려고 하는 거니까ㅡ
“......어라?”
라고 말한 시점에.
오늘은 웬일로 그녀가 내 목덜미를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ㅡ 서로 포옹하며 그녀는 나한테 체중을
완전히 맡긴 상태로, 가냘픈 팔에다 나무막대기 같은 다리까지 내 신체에 감고 상반신을 서로 밀착시켜 코알라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데 물지 않는다.
“............?”
의도를 읽어낼 수 없다.
아니, 설마 그녀는 이제 와서 내 피를 마시는 걸 거부하는 걸까ㅡ 사는 걸 그만두려는 걸까, 하고 나는 한순간
전율해 자연히 그녀를 안는 팔에 힘이 들어가서 하마터면 그녀의 등골을 부러뜨릴 뻔했지만ㅡ 그게 아니었다.
달랐다.
자세히 보면ㅡ 흡혈귀 유녀의 시선을 쫓으면.
그녀는 내 목덜미는 보지 않고.
그 대신, 내가 그녀를 안을 때 옆에 놔둔 짐 쪽을 보고 있다.
달콤한 냄새가 감도는 짐이다.
“저기......”
그건 대략 풍족한 생활과 거리가 먼 방랑자, 지금도 이 폐빌딩에서 살고 있는 자유인, 오시노 메메를 위해
가져온 선물 겸 위문품이다.
미스터도너츠 상자이다.
가게 앞에서 10 개 천엔에 팔던 녀석이다.
골든초코렛, 프렌치쿨러, 엔젤프렌치, 스트로베리 프렌치, 허니츄로, 코코넛쿨러, 폰데링, D-pop,
더블쵸코렛, 코코넛쵸코렛. (주:http://www.misterdonut.jp/m_menu/donut/)
달콤한 냄새도 난다.
하네카와 만나고 돌아오던 길, 원래 여동생들한테 선물해주려고 산 것이다.
하지만 카렌과 츠키히는 둘다 입을 모아, “다이어트 중” 이라고 헛소리를 하면서, 오빠의 호의를 무시했다.
‘성장기 여자애가 다이어트를 하는 게 아니야, 좀더 통통해도 된다고‘ 같은 느낌으로, 그 후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만한 레벨의 격한 말다툼이 되어버렸지만, 애시당초 미스터도너츠 상자 자체가, 츠키히한테
받은 돈으로 산 것이니까, 그 말싸움에서 내 쪽이 불리했다.
최종적으로는 사과했다.
불합리한 남매감각이다.
하지만 10 개라는 양은 혼자 먹기에 너무 많고, 또 도너츠란 건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떨어지기에, 하는 수
없이 매일매일 식사도 제대로 못해 궁핍하게 지내는 오시노한테 가져온 것이다.
간신히 이 폐빌딩에서 비와 이슬을 피하고 있다, 고 하기보다 비와 이슬을 먹고 살아야 하는 저 녀석한테 가끔씩
단 것을 먹게 해주고자 하는 인정은 나한테도 있다는 것이다.
............
봄방학 때의 사건으로 저 남자한테 많은 금액, 구체적으로는 5 백만엔을 갚아야 하는 내가, 어째서 고작
천엔짜리 도너츠세트 가지고 위세등등한 건지 나도 수수께끼이지만.
5 백만이란 건.
어른이 목을 맬 정도로 큰 금액이겠지, 그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고, 검토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장이라도 팔까?
불사신 체질을 이용해서 몇 번이고 내장을 생산하면.
“무서워”
그래서.
그건 제쳐두고ㅡ 그런 경위로 이곳에 있는 향기로운 도너츠 상자를, 흡혈귀 유녀는 나한테 안긴 채, 하지만
나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일심불란하게 바라보고 있다.
뜨거운 시선.
즉 갈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니......그래도 설마”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없다.
영락했다고 해도, 찌꺼기라고 해도.
이미 그 존재로서 필수적인 요소를 거의 다 빼앗겨ㅡ 모습이나 형태도 남지 않고 이름조차 박탈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긍지높은 흡혈귀이다.
하물며 보통 흡혈귀가 아니다.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의 흡혈귀, 귀족의 혈통.
이른바 흡혈귀의 대명사이다.
그런 그녀가?
말도 안돼, 주식인 혈액을 눈앞에 내밀었는데, 그걸 냅두고 도너츠 쪽에 관심을 갖다니 그럴 리가 없......
질질.
그런 소리가 났다.
보면 유녀는 침을 흘리고 있다.
“꿈을 부수지 마!”
노성과 함께 유녀를 던지는 나.
던져진 유녀는 뒤쪽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웅크렸다.
큰일났다, 무심코 난폭하게 딴지를 걸었다. 풀어헤친 어깨의 피부부분에 직접 침이 묻은 불쾌감도 한몫해서.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미수로 끝났지만 피부가 아닌 하네카와의 얼굴에 타액을 바르려고 한 나도 절대로
칭찬받을만한 짓을 한 게 아니니까.
“괘, 괜찮아?”
어지간히 세게 부딪쳤는지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는 유녀한테 손을 내밀었지만, 난폭하게 뿌리친다.
화내는 것처럼.
금발 머리카락이 다소 거꾸로 서 있다.
......흠, 왠지 동물 같네.
사람을 잘 따르지 않고, 쉽사리 만지지 못하게 하는 고양이 같다.
하지만 화나게 만든 건 안 좋다ㅡ 슬슬 급유(給油)가 아닌 흡혈을 해두지 않으면 이 녀석의 신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최근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는 바람에 이 폐빌딩에 올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 쓸데없는
고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원인이지만 그건 츠키히 덕분에 해소되었고, 쓸데없이 낭비한 기간을 메꾸기 위해
되도록 오늘 밤에는 마시게 해두고 싶지만.
여동생들 눈을 피해 밤중에 집을 나서는 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ㅡ 또, 낮에 오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야행성인 흡혈귀한테 낮은 기본적으로 잠자는 시간이다.
자고 있는 걸 억지로 깨워져서 기분이 좋은 생물은 없다ㅡ 그렇게 되면 피를 마시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흡혈의 시간대라면 역시 밤중이 제일이다.
......정말로 동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군.
혹은 아기라던지.
아이한테 젖먹이는 엄마란 이런 기분일지도.
자, 그럼 어떻게 할까ㅡ 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한다.
오시노가 있다면 자문을 구했겠지만 부재이고. 다른 교실에서 자고 있다고 해도 깨울 만한 일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문료라고 해서 돈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다. 더 이상 지불해야 할 돈을 늘릴 수 없다.
그보다.
이 흡혈귀는 내가 평생 짊어지기로 결정했다.
이 정도의 곤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떡하겠냐고.
“이런 경우,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괜찮으려나......아니, 그건 복종의 증표가 되는 거지......”
으-음.
아, 그래.
얼마 안 하지만 애시당초 미스터도너츠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미스터도너츠로 해결하면 되잖아.
그래, 성가신 일은 전부 음식으로 해결한다.
맛의 달인 같다. (주:맛의 달인(美味しんぼ)-가리야 데쓰 원작, 하나사키 아키라 그림의 인기음식만화)
‘하하하, 이렇게 음식으로 나타내면 화를 낼 수가 없군‘, 같이.
나는 비닐봉투에서 미스터도너츠 상자를 꺼내서 자신의 무릎에 놓고, 흡혈귀 유녀한테 보이도록 천천히 연다.
그리고 1 개, 가장 구석에 있던 골든초코렛을 집은 다음, 팔을 뻗어 내밀었다.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벌써 빼앗겼다.
‘너, 사실은 흡혈귀의 스킬을 전부 잃어버린 게 아니지‘ 라고 할 만큼 초스피드로 빼앗겼다.
그리고 유녀는 제대로 맛보지도 않고 덥썩 깨문다.
그것도 또한 초스피드로 유녀는 골든초코렛을 3 번만에 먹어치웠다. 이젠 자기 손가락까지 먹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라고.
얼마나 게걸스레 먹는 거냐고.
반복하지만, 너, 내 피를 그렇게 맛있게 먹은 적 없잖아ㅡ 좀 쇼크라고, 그거.
“ㅡㅡ읏, 어이쿠!”
다 먹고 난 후, 이번에 흡혈귀 유녀는 내 무릎 위에 놓여있던 나머지 9 개의 도너츠를 곧바로 노렸다.
간신히 상자째 회피하는 나.
농담이 아니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도너츠를 주다가 하마터면 복근이 썰려나갈 뻔했다, 그 정도로
날카롭게 호의 궤도를 그리는 유녀의 움직임이었다.
“앉아!”
한층 더 추격을 해오려는 유녀한테, 나는 엉겁결에 외쳤다.
외쳤지만 ‘앉아’라니.
개도 아닌데.
그래도 흡혈귀 유녀는 시킨 대로 충실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ㅡ 그것도 평상시의 웅크려앉기가 아니라, 허리를
띄운 채 쭈그리고 앉는 바람직한 앉기 자세이다.
그리고 또렷하게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나는 대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입다물고 있어도 상황은 진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단 시험삼아 남은 9 개의 도너츠 중, 내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는 프렌치쿨러를 꺼내어 살그머니 흡혈귀
유녀의 앞에 내민다.
아까 골든초코렛을 보건대 손에 든 채로 주면 내 손까지 먹힐 것 같아서, 앉아있는 그녀의 눈앞에 놓았다.
물론 폐허의 바닥은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기에 (애당초 흡혈귀 유녀는 맨발이지만, 나나 오시노는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닌다), 일단 같이 들어있는 종이냅킨을 펼쳐서 그 위에 도너츠를 놓는 형태이다.
금방 달려들 거라 생각했지만 흡혈귀 유녀는 침을 가득 흘리면서 앉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귀신과 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지만.
아까 전까지 쏘아보던 눈빛이 상냥하게 여겨질 정도로 강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다ㅡ 만약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겠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뭐, 종족에 따라, 흡혈귀는 실제로 시선만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안(邪眼)인지, 마안(魔眼)인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봄방학 때는 째려보기만 했는데 콘크리트를 부쉈지ㅡ 나, 지금 절체절명의 핀치인 건가?
“......손”
왠지 모르게.
손을 내밀어본다.
그러면 흡혈귀 유녀는 주저없이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마치 영화 E.T.의 한 장면 같지만
최소한의 화풀이인지, 홈런주자의 하이터치처럼 기세좋은 손내밀기였다.
“자, 저기......먹어”
백인일수에는 머릿글자라는 것이 있다. (주:백인일수(百人一首)-역사상 인물 100 명의 단가를 한수씩 집선한
가집, 일본의 전통시 암기놀이, 머릿글자로 시를 외움)
예를 들어 ‘무스메후사호세(むすめふさほせ)’ 라고 하는 거다. (주: 백인일수의 머릿글자들만 모은 것)
읽어준 패의 머릿글자를 듣는 순간 움직이는 청력의 날카로움이 승부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양이다ㅡ
나는 유감스럽게도 백인일수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않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흡혈귀 유녀는
백인일수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먹어, 라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움직였다ㅡ 아니, 움직이는 것이이 완료했다.
야생짐승처럼 그녀는 프렌치쿨러에 이를 꽂고 있다.
아니, 야생짐승이라고 말할까.
완전히 기르는 개의 모습이지만.
금발에 8 살로 추정되는 아이가 네발로 기며 바닥을 핥는 것처럼, 종이냅킨째 프렌치쿨러를 볼이 터지도록
우겨넣는 모습은 왠지 다양한 의미로 위험했다.
그래도 종이냅킨째라니......역시 손에 들고 주지 않은 게 정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종이냅킨은 소화할 수 없는지, 요령있게 입 안에서 골라내어 그 부분만 [퉷]하고 그녀는
뱉어냈다.
그다지 식사예절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애시당초 네 발로 기어 도너츠를 먹는 시점에 식사예절이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뭐ㅡ 봄방학 때도 그다지 식사예절이 좋은 녀석이 아니었지만. 그 때 그녀의 말을 떠올리면, 애당초 흡혈귀와
인간은 식사할 때의 매너 자체가 다른 모양이다.
사람의 식사모습을 힐끗 보는 건 매너위반이라고 그 때 들었었나ㅡ 그래도 지금 이 녀석이 나를 강하게 쏘아보는
건 내가 매너위반을 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남은 도너츠 9 개를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래도, 이건 원래 오시노한테 주려고 한 거니까ㅡ”
애당초 아무리 맛있게 도너츠를 먹었다고 해도 그건 흡혈귀 유녀한테 영양이 되지 않는다. 흡혈귀 유녀한테
영양은ㅡ 유일한 완전영양식은ㅡ 내 혈액뿐이니까.
“ㅡ 그래도 뭐, 앞으로 3 개 정도면 괜찮겠지”
원래 10 개가 들어있었다.
오시노와 이 녀석이 같이 나눈다고 생각하면 1 인당 5 개씩 먹는다는 계산이다ㅡ 생각해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오시노 혼자서 도너츠 10 개는 힘들 테고.
“자, 어떤 게 좋아? 3 개 골라봐”
나는 유녀한테 상자 내용물이 보이도록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되니까”
그러면 유녀는 왼손의 손가락을 움직여서ㅡ 끝에서부터 순서대로 1 개씩 전부 가리켰다.
끝에서부터 가장자리까지 1 개씩.
“............”
전부라니.
욕심이 강하군.
양보할 셈은 없는지, 흡혈귀 유녀는 무뚝뚝한 얼굴인 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끝에서부터 가장자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1 개씩 가리켰다.
6 개 세트의 D-pop 를 일부러 1 개씩 가리킬 정도로 집념이 느껴지는 몸짓이다.
“으-음”
그런가, 이 녀석, 단 걸 좋아했나......아니, 그렇다고 해도 전부 먹는 건 좀 아니겠지. 이렇게 단 것이 그
작은 신체의 어디로 흡수되는 거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흡혈귀 유녀는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ㅡ 압력을 느낀다. 콘크리트를 부수는 압력을.
아니, 진짜로 찌부러질 것 같다.
뭐ㅡ 내가 지금 찌부러질 것 같은 건 죄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흡혈귀 유녀가 이런 생활을 억지로 해야
하는 건 역시 내 책임이니까. 기품있고 긍지높았던 아름다운 흡혈귀가, 지금은 기어서 도너츠나 먹고 있는 현실은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봄방학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녀.
저 때는 자주 웃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언짢은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을 뿐.
그녀가 한 것, 그녀가 해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인정을ㅡ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정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알았어. 전부 너한테 줄게”
나는 말한다.
시원스럽게, 기분좋게, 도너츠를 상자째 마루에 놓고.
마치 공물처럼.
“자, 3 번 돌고 왕, 하고 짖어봐”
아.
실수했다, 이야기 흐름상 엉겁결에 한 가지 재주를 요구해버렸다ㅡ 라고 생각해서 명령을 철회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팽이와 같이 훌륭한 트리플 악셀을 선보였다. (주:트리플악셀-피겨스케이트용어, 한번의
점프로 3 바퀴반을 도는 기술)
팽이라기보다 스톱모션 같네.
하지만 마지막에 [왕]하고 말하지 않고 흥, 하고 옆을 바라보는 점이 원귀족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ㅡ
아니, 그 자존심, 등장하는 게 너무 늦어.
흠.
말하지 않는 건, 역시 여전한가.
무심코 소리를 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리 잘 되진 않겠지.
뭐, 이런 개그신에서 말하는 건, 이쪽도 질색이다.
그렇게 막장전개는 있을 수 없다.
나는 도너츠 상자를 슬쩍 밀면서, [먹어]라고 말했다. 그러면 흡혈귀 유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네발로
기어가 이번에는 8 개의 도너츠를 상자째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먹기 시작했다.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식욕이라고 해야 하나, 이젠 바닥까지 먹어버릴 기세이다.
이래선 개가 아니라, 결식아동이다.
“장난아니로군. 이 고리 모양 음식, 정말 굉장하도다-. 그야말로 단맛으로 채워진 반지의 보석상자로군”
“너, 지금 말했어!?”
잠깐 한눈팔다가, 나는 놀라서 되돌아보았지만, 흡혈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에 한없이 가까운
표정으로 바닥ㅡ 이 아니라, 도너츠를 우걱우걱 게걸스레 먹고 있을 뿐이다.
뭐야, 환청인가......
우와-, 두근거렸다.
막장이 되나, 하고 생각했다.
하여간 정말, 그런 서프라이즈는 너무하다고.
“흠......뭐, 이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았다는 건 수확......이지만”
환청이 들려올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냈다는 건, 앞으로 나와 이 녀석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만.
그래도.
하지만, 그래도ㅡ 말해주지 않는다.
이쪽이 환청을 들을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ㅡ 완고히 입을 열지 않는다.
일시적이라고 해도 한때 주종관계였는데.
“하-아. 8 살짜리 애라서 미성숙한 목과 혀로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는 것도 아닐 텐데ㅡ”
아니,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더듬거려도 좋으니까, 말해주길 바란다.
현시연의 ‘수-’처럼.
현시연의 ‘수-’처럼.
현시연의 ‘수-’처럼.
(주:현시연-현대시각문화연구회, 오타쿠 동아리 회원들을 소재로 한 만화, 키오 시모쿠 작품,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됨//‘수-’-수잔나 홉킨스, 카나코가 미국에 살 때의 친구, ‘수-’라는 애칭으로 불림,
외견은 금발미소녀지만 엄청난 내공의 오타쿠로 일본애니메이션 명대사를 외우고 다님)
“뭘 하고 있는 거야, 마다라기군”(주:현시연 멤버 중 ‘마다라메‘군이 있음, 엄청난 오타쿠)
하고.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와, 나는 움찔하며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일어났다.
뒤돌아보면 그곳에는 오시노가 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기색도 없이.
“네 녀석은 네 녀석대로 놀라게 하는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한다.
한때는 나도 이곳을 임시 보금자리로 삼았을 정도이다, 나름대로 익숙해져있지만 그래도 폐허는 폐허다ㅡ 이런
상황에 갑자기 뒤에 서 있다면, 그야 나라도 놀라겠지.
“......갑자기 등장하지 말라고. 아무리 이름이 오시노(忍野)라고 해도, 몰래 다가오지 마(忍び寄る)”
“흥. 마다라기군이야말로 아무리 봉방학 때 원한이 남아있다고 해도, 흡혈귀짱을 그런 식으로 학대하면
안되잖아”
“학대하지 않았어”
“유녀를 개 취급하는 건 충분히 학대의 요건을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 마다라기군”
이것 참, 하고 오시노는 일부러 어깨를 움추린다.
“내 생각에 그 미스터도너츠는 나한테 선물해주려고 가져온 모양인데ㅡ 으-음, 다 먹어버렸네”
“............”
히죽이죽 웃으면서 변함없이 다 꿰뚫어본 것처럼 말한다.
그보다 마다라기군이라고 말하지 마.
왠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다.
미래에 쓸 이야기꺼리를 미리 써버리는 짓이다.
어쨌든ㅡ 오시노 메메.
30 살 먹은 아저씨.
의 등장이다.
1 년 내내 알로하옷을 입고 보기에도 경박해보이는 불량중년. 괴이의 전문가, 요괴변화의 권위자, 괴물, 귀신의
기술전문가(technocrat)ㅡ 그 직함에 걸맞게, 실로 수상쩍은 인물이다.
애니메이션에선 아주 멋있게 비춰졌다고 하는 수수께끼 정보도 들어왔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한테는 여하튼 수상쩍은 아저씨이다.
기기괴괴한 아저씨라고 말해도 좋다.
“아라라기군,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하니까ㅡ 또 기회가 생긴다면 부디 내 몫도
남겨두도록 해. 나는 올드패션을 가장 좋아해서. 워낙 고풍스런 남자이니까 말이지” (주: 미스터도너츠 메뉴 중
올드패션, 상당히 푸석푸석함)
“고풍스런 남자인 척 하지 마, 역겨워”
클래식해서 시대에 뒤처진 걸 자처하는 어른만큼 성가신 존재도 없다ㅡ 뭐, 확실히 올드패션은 맛있지만 말이지.
힐끗 보면 흡혈귀 유녀는 올드패션과 폰데링을 뒤섞어서 먹어치운 후 [어? 무슨 일이죠? 미스터도너츠? 그게
뭐죠?]와 같은 표정으로 교실의 구석, 원위치로 돌아가 무릎을 안고 웅크리는 기본 자세였다.
그야 봄방학 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에ㅡ 오시노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세해도, 입가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비교하는 대상이 너무 극단적이라서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오시노를 대할 때보다ㅡ 그나마 나한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아서, 나는 안심했다.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알았어. 자, 다음 기회가 생긴다면 올드패션이 채워진 걸 사올게ㅡ 미스터도너츠 포인트도 조금만 더 있으면
다 채워지니까. 그래서, 오시노. 이런 밤중에 어디에 다녀온 거야?”
분위기로 볼 때 다른 교실에서 자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응- 일이야, 일”
오시노는 거드름피우지도 않고, 평소대로 시치미떼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본래 떠돌이인 내가 이 마을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그리고 애당초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는 괴이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서니까 말이지ㅡ 무엇보다 아라라기군이 한 일을 뒷처리하는 게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뒷처리라니”
나는 곁눈질로 웅크려앉 아있는 흡혈귀 유녀를 엿본다.
흡횰귀 유녀는 이미 우리들의 대화에는 무관심인 모양이다.
“이 녀석을 돌봐주는 거?”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야ㅡ 진짜 귀찮다니까, 흡혈귀란 녀석은. 어쨌든 흡혈귀의 왕이고. 주위에 자극과
영향을 계속 주고 있어. 이 일대를 원만하게 정리하는 것까지 하는 게 아라라기군한테 부탁받은 내 일이야”
“여러 가지 병행해서 일을 진행시킨다는 거지. 마치 부기팝 같네. 장사가 번성하니 잘됐잖아” (주:라이트노벨
부기팝 씨리즈가 나올 때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등 각종 미디어로 함께 나옴)
다만, 내 5 백만엔은 제쳐두더라도 다른 괴이이야기를 수집하는 건 돈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애석하게도 부기팝만큼 솜씨가 좋은 게 아니라서 말이지ㅡ 내 머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똑같이 생각할
수 없어”
(주:부기팝-미디어웍스 전격게임 3 대상에서 4 회 대상을 받은 카도노 코우헤이 작품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 검은 옷, 모자를 쓴 암살자로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 늙어서 추하게 되기 직전
죽인다고 함)
그런데, 하고 오시노는 말한다.
“애기를 되돌리지만ㅡ 아라라기군. 흡혈귀짱을 너무 괴롭히지 마. 그런 행동은 화근을 남긴다고”
“그러니까 괴롭힌 적 없다니까”
뭐, 조금 지나치게 놀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대부분 이 녀석이 멋대로 한 짓이다. 말려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어울려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보다, 봄방학 이후 계속 생각해왔던 건데, 이 녀석 왠지 정신연령까지 어려진 거 아냐?”
겉모습은 8 살짜리 어린애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모습은 묘령의 귀부인이다ㅡ 아무리 흡혈귀는 겉모습을 따.라.
간.다.고 해도, 근본적인 그녀가 5 백살이란 점은 다르지 않을 텐데.
일단, 8 살짜리 애라도 개처럼 먹지는 않는다.
“아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라라기군ㅡ 흡혈귀만 그런 게 아니야. 괴이란 건 말하자면 인간의 신앙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말이지”
“인간의 신앙?”
“그래. 인간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에 있는 것ㅡ 그것이 괴이야. 유령의 정체를 막상 보고 나서 마른
억새라고 말하지만, 정체를 직접 보기 전까지 마른 억새는 진짜 유령이었다는 거야”
“응-? 잘 모르겠어. 뭐,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테지만, 그게 어째서 지금 이 녀석한테 연결되는
거야?” (주:鰯の頭も信心から-하찮은 것도 믿음의 대상이 되면 존귀하게 느껴짐, 무조건 믿음)
“흡혈귀가 어째서 최강의 괴이인지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흡혈귀를 최강의 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괴이는 주위의 인식대로 나타나ㅡ 주위의 기대대로 행동해”
그런 존재야, 라고 하는 오시노.
말하면서 흡혈귀 유녀한테 눈길을 준다.
설령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벌레 하나도 죽일 수 없는 듯한, 아무런 압력도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상냥한 시선이었다.
“자, 거기서 이 흡혈귀짱이다ㅡ 지금 이 흡혈귀를 인식하고 있는 건, 아라라기군, 자네뿐이지”
“............”
“엄밀히 말하면 나나 반장짱도 그렇지만, 그래도 흡혈귀짱이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은 건 아라라기군이야.
무엇보다, 지금의 아라라기군은 흡혈귀짱한테 유일무이한 영양원이니까 말이지. 그 영향은 수퍼다이렉트해
(super-direct)"
“자ㅡ 지금 이 녀석은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이런 모습이라고 말하는 거야?”
아니.
미스터도너츠를 좋아하는 건 내 영향이어도 좋지만, 개처럼 먹는 건 역시......그런 행동을 흡혈귀한테
기대한다고 하면, 나는 상당히 정신적으로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진짜로 진지하게 카운슬링이
필요하다. 아직 밤중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예약을 잡아놔야.
“확실히 나는 네 녀석이나 하네카와만큼 철들지 않아서 이 녀석을 어딘가 8 살짜리 애로 보는 구석이 있지만ㅡ
그래도 이 모습이 내 기대대로 되었다는 건 좀 아니잖아”
“아이가 꼭 부모의 기대대로 자란다고 할 수 없겠지? 그래도 기대의 영향은 받고 있어ㅡ 대체로 그런 느낌이
야”
“부모의ㅡ 기대”
가정.
의, 영향.
“별로 올바른 인간이 되라고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너무 놀리면 영향이 아닌 악영향을 주게 돼. 안
그래도”
오시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계속하지 않았다.
나를 배려해서 계속하지 않았다ㅡ 는 것도 아니다. 오시노는 그런 배려를 할 남자가 아니다. 단순히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하지 않은 게 틀림없겠지ㅡ 실제로 내가 봐도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안 그래도 저 긍지높은 흡혈귀를 이렇게 귀여운 아이로 만들어놓고ㅡ 거기다 악영향까지 줘서 어쩌려고.
그런 거다.
하지만 오시노의 말에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ㅡ 반드시 기대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이 흡혈귀는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내 기대에 응해준다.
즉 그건ㅡ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흡혈귀는 나를ㅡ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흡혈귀를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아라라기군. 도너츠를 먹인 걸 보니, 이번 흡혈당번은 끝난 거야?”
“흡혈당번이라니”
급식당번처럼 말하지 마.
“아직이야. 희한하네, 네 녀석이 틀리다니. 도너츠가 먼저, 흡혈은 그 다음이야. 이 녀석, 내 피보다
도너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지금 그 사실에 좌절하던 참이라고”
“흐응. 뭐, 아라라기군의 혈액은 별로 달지 않으니까 말이지. 흡혈귀짱의 기분도 모르는 건 아니야”
응응하고, 혼자서 수긍하는 오시노.
뭘 납득하는 거냐고.
“그건 냅두고 아라라기군. 아까 전에 살짝 화제에 올랐지만, 반장짱은 잘 지내?”
“어?”
뭐야, 갑자기 당돌하게.
마치 낮에 내가 하네카와와 만난 것을 간파한 것 같은 말투, 이것도 그의 장기인 꿰뚫어보기인가ㅡ 라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바꿔 말해서 오시노는 평소부터 묘하게 하네카와를 신경쓰는 기색이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나한테 하네카와의 안부를 물어온다.
아니, 하네카와를 걱정한다기보다ㅡ 하네카와의 동.향.을 신경쓴다고 표현하는 쪽이 정확한가.
과연 그렇구나, 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봄방학 때의 일로, 오시노는 하네카와를 꽤 경계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지ㅡ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오시노 입장에서 하네카와와 같은 녀석은 성가신 존재이겠지.
“저 여자애는 누구한테도 성가셔”
하고, 오시노는 말하지도 않은 내 감상을 가볍게 정정했다.
그런 점이 남을 꿰뚫어본다고 말하는 거다.
“물론 아라라기군한테도야ㅡ 흡혈귀짱이 찾아온 건 이 마을의 괴이사정을 상당히 일그러뜨렸지만, 그 말에 따라
애기하면 반장짱이 사는 건 이 마을의 인간사정을 제각기 일그러뜨리고 있어”
“그건 너무 과장된 해석이겠지”
“과장해서 애기하는 게 딱 좋아. 호들갑스럽게, 대담하게 말이지. 사실이야, 저 여자애의 경우”
그래서, 어때.
오시노는 그렇게 물어왔다.
“어떠냐니ㅡ 별일 없어. 잘 지내”
“진짜로?”
끈질기네.
아니, 이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는 건 내 무성의한 반응 (그보다 그 대답을 회피하는 것) 을, 오시노는
미심쩍게 여기는 거겠지.
뭐, 진짜냐고 물으면 진짜가 아니고.
진짜로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그건 하네카와의 가정사정이니까 이런 곳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른쪽 얼굴의 붕대에 관해서도ㅡ 그 속사정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설령 상대가 오시노라도.
“흠, 그렇군. 말할 수 없는 건가”
하지만 오시노는 과연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대답을 거절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다]
는 내 사정을 파악한 모양이다.
“그렇다면ㅡ 말할 수 없는 일이 그녀의 몸에 일어난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려나? 그건 걱정되네”
“ㅡ 네 녀석이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야”
그리고 물론.
내가 걱정할만한 일도ㅡ 아니다.
“하네카와의 문제야. 쓸데없이 참견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저 녀석이 혼자서 구해질 뿐ㅡ 그
방법밖에 없어”
“흐응. 자, 추궁은 안할게”
이런 전개니까, 분명 좀더 추궁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ㅡ 의외로 오시노는 깨끗이 물러섰다.
“아라라기군이 반장짱과 어떤 식으로 노닥거려도, 확실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네”
“아니, 별로 노닥댄 것이 아니라”
“스커트를 젖히던지 뭘하던지, 참견할 수 없지”
“네 녀석 뭘 아는 거야!?”
“그렇다면 접근을 달리해보지”
내 해명을 듣지도 않고ㅡ 오시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 이.외.의. 나.머.지.를 가르쳐줘. 반장짱에 대한 걸 전부 애기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
“............”
뭐ㅡ 그렇게 접근해오면 확실히 침묵을 유지할 수 없나.
하네카와의 가정사정이나 아버지한테 맞은 사실은 덮어둘 수밖에 없지만ㅡ 그 주변사정까지 숨겨야 한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오늘ㅡ 날짜로는 벌써 어제ㅡ 우연히 길에서 만나 잠깐 애기했다, 정도는 애기해도 문제없겠지.
어쨌든, 오시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적어도 깨끗하게는.
그리 생각한 나는 능숙하게ㅡ 능숙한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ㅡ 입막음당한 부분을 제외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애기한다.
숨겨야 할 일들을 숨기면서.
아침, 여동생한테 깨워졌을 때부터.
하네카와와 만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ㅡ 차에 치인 고양이를 묻어준 것까지.
애기했다.
“아라라기군”
그러면ㅡ 오시노는.
오시노 메메는.
알로하옷의 가슴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1 개피, 불을 붙이지 않고 물면서ㅡ 오시노 메메는,
“설마 그건ㅡ 은색에 꼬리없는 고양이는 아니겠지? ㅡ”
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주셨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자, 본제이다.

/006

그 .사.건.을, 끔찍한 애기가 되어버리지만, 나는 굳이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ㅡ 하네카와와 같이 다니면, 차에 치여서 도로에서 찌부러진 고양이를 고이 묻어주는 건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봄방학, 나를 도와준 것처럼.
하네카와는ㅡ 그 고양이를 묻어줬을 뿐이다.
당연하게.
“아라라기군, 도와줄래?”
그리 말하고.
또다시 얼굴에 붙여진 붕대를 잊어버린 것처럼, 평소대로 행동하고 평상시의 웃는 얼굴로.
애당초 눈부시게 빛났을 흰 털이, 몇 번씩이나 치여서 피와 얼룩으로 뒤섞이는 바람에 무슨 색인지 알 수 없게
된 고양이의 사체를 얼싸안았다.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그녀는 안았다.
고양이애호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고양이라는 동물을 좋아하는 인간은 많겠지만ㅡ 나도 싫어하는 건 아니다ㅡ
하지만, 설령 찌부러지지 않았어도 그 사체까지 안을 수 있는 녀석이 얼마나 될까.
그리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은ㅡ 또, 두근거린다.
뭔가 말하고 싶어서.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해고양이”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ㅡ 사실 흡혈귀 유녀한테 피를 주고 오시노한테 도너츠를 건네면 내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
잠을 잘 예정이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오시노의 일을 돕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처지가 되었다’, 고 피해자 행세를 해서는 안되겠지ㅡ 5 백만엔을 갚아야 할 몸이기에, 부탁받은 일은
대개 들어줘야 하는 법이고, 게다가 하네카와와 관련된 사건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도울 뿐만 아니라.
주축을 맡고 싶을 정도이다.
“식욕목 고양이과의 포유류”
오시노는ㅡ 그렇게 말했다.
고양이.
“방해고양이는 지금 내가 이 마을에서 수집하고 있는 괴이 이야기 중 하나야ㅡ 실은 아까까지 나갔다 온 건 그.
녀.석.을 쫓기 위해서였어. 이런 건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ㅡ 그렇다고 한다면 꽤 싫은 우연이지만. 옛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거기에 어떤 악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로군”
“아니ㅡ 잠깐 기다려, 오시노”
오시노의 말에 나는 약간 혼란해하면서ㅡ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반사적으로 무심코 반론한다.
“내 설명방식이 나빴어? 나와 하네카와가 묻어준 고양이는 괴이가 아니야. 실제로 살아 있어ㅡ 살아있던
고양이야. 현실의, 비현실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고양이야. 차에 치였던 모양으로ㅡ 확실히 너가 말한 대로
꼬리없는 고양이였고 생각해보면 은색이 섞인 흰색이였지만ㅡ 괴이나 요괴, 그런 게 아니라ㅡ 진짜로 있는”
“그래. 그런 게 아니겠지”
그렇겠지ㅡ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통이라면.
하고, 오시노는 말한다.
절대 감정적으로 내 반론을 부정하지 않는다ㅡ 평소처럼 경박한 태도의 오시노이다. 언제나 밸런스를 취하며 늘
중립에 서 있는 게 바로 오시노 메메다, 라고 하는 오시노의 오시노다운 태도.
평소의 오시노이지만ㅡ 그러나.
그래도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무는 그 입 가장자리가ㅡ 아주 약간 진지한 기색을 띠는 느낌이 들었다.
진실을 띠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감각은 느낌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ㅡ 하네카와 탓이다.
“그래도 아라라기군ㅡ 반.장.은. 보.통.이. 아.니.겠.지. 그 점에 관해서는 자네와 실컷 격론을 펼쳐왔으니까
더 이상 말다툼하고 싶지 않지만ㅡ 저 여자애는 진짜로 위험하다고”
“......뭐, 네 녀석이 하네카와를 경계하는 건 알고 있지만”
“경계가 아니야. 흡혈귀짱이”
오시노는 솜씨좋게 물고 있는 담배 끝으로 교실 구석에 앉아있는 유녀를 가리켰다.
“저런 식으로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반죽음 상태로 된 것은, 그야 아라라기군의 책임이지만ㅡ 그래도
근본적인 원인은 반장짱이 참견해서 그래”
“그야ㅡ 그렇지만”
봄방학.
나는 확실히 하네카와한테 구해졌다ㅡ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나를, 하네카와는 홀로 구해줬다. 그 부분은
아무리 고마워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ㅡ 그래도.
논리정연하게 따진다면, 만약 하네카와가 없었다면ㅡ 봄방학의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럴 의지나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ㅡ 자의는 없었고,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ㅡ 하네카와 츠바사의
매치 펌프도는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주:자의-제멋대로 함//매치 펌프-부당한 이익추구방법,
한쪽으로 사건원인을 만들면서 다른쪽으로 해결해서 돈버는 방법, match+pump)
“그래, 매치 펌프. 그 말대로. 버터플라이 효과의 체현처럼 섬뜩한 여자애야ㅡ 카오스에도 정도가 있다고,
실로 솜씨 좋은 연출가지. 무시무시한 프로듀서야. 차에 치인 고양이를 묻어줬다는 사소하고 흔한 애기,
말하자면 훈훈한 일상 에피소드조차, 그녀의 손에 걸리면 천지를 흔드는 대사건이 되어버리니”
특히 고양이는 더 위험하다고ㅡ 하고 오시노는 말했다.
“저 반장짱한테ㅡ 방.해.고.양.이.는. 딱. 맞.아.떨.어.져.”
“............”
오시노가 지금 쫓고 있다는 괴이, 방해고양이에 관해서ㅡ 나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주된 이유이지만, 마음 어딘가에 듣고 싶지 않았다는 기분도 있었겠지.
그렇다.
나 역시ㅡ 그렇다.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언제부터?
고양이를 묻을 때부터? 아니.
왼쪽 얼굴의 붕대를 봤을 때부터? 아니.
아마도ㅡ 하.네.카.와.와. 처.음. 만.난. 그. 때.부.터.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시노”
하고, 부질없는 반론을 생략하고ㅡ 말했다.
반론할 여지는 없다.
“자, 나는ㅡ 어떻게 해야 되지. 만약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ㅡ”
“아니, 십중팔구,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까 이대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채 내버려두면 돼ㅡ 라는, 오시노.
“그저 조심하는 것뿐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하지ㅡ 십중팔구, 아니, 만에 하나야. 유비무환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아라라기군” (주:유비무환-리스크를 생각해두면 미리
대처해둬야하는 법이다)
마지막에 오시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내 자세를 놀리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어떨는지, 방금 한 대사는
그저 안심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시노 본인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ㅡ 십중팔구나 만에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확률로 따지면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다만ㅡ 10 분의 1 이든 만분의 일이든.
그 확률을 태연하게 뽑아내는 것이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여자이다, 그 점에 관해선 이미 나와 오시노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해도 좋다.
저. 녀.석.은. 저. 녀.석.만.큼.은.
진.짜.로. 위.험.하.다.
“그리고, 두.통.이란 것도 신경쓰이네ㅡ 나로서는. 의미없는 복선이라면 좋겠지만. 자, 아라라기군, 지금은
서둘러 두 패로 나누도록 할까. 나는 너희들이 묻은 흰 고양이를 파내러 갈게. 즉 무덤파기지”
“무ㅡ 무덤파기라니”
“뭐, 벌받을 만한 행위이지만ㅡ 다만, 그만큼은 해두고 싶어. 그래서 묻힌 고양이가 평범한 고양이라면
안심이니. 그 시점에 잘 됐네, 잘됐어, 해피엔드. 나한테 벌이 내려지는 대신 아무 문제도 없지. 달게 받도록
하지. 원래 나는 일본북 같은 남자니까 말이지” (주:일본북(和太鼓)-일본 전통북, 축제 때 악기로 쓰이고,
신한테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함)
“네 녀석이 일본북인지 어떤지 알 바 아니지만ㅡ 의미도 알 바 아니지만 말이야. 즉, 나는 네 녀석한테
고양이를 묻은 장소를 가르쳐주면 되지? 그곳까지 네 녀석을 데려가면 되지?”
“그야 물론 가르쳐줘야 하지만, 아라라기군의 길안내는 필요하지 않아. 대충 어딘지 구두로 가르쳐주면, 나는
그 고양이짱의 무덤을 찾아갈 수 있어”
“흐응-”
멋으로 방랑생활한 게 아니란 건가.
토지감 같은 건 애시당초 필요없군ㅡ 과연, 현지인도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이런 폐허를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
“물론 그걸 가르쳐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ㅡ 내 행동범위 밖이니까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데, 정말로 그 장소를
대충 가르쳐줘도, 괜찮아?”
“응”
하고, 오시노는 수긍한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나한테 불평하거나 비아냥대지도 않는다ㅡ 그것이 반대로 현재 상황이 긴박하다는 걸 단적으로
알기 쉽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ㅡ 긴박한 상황이라니.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ㅡ 그래도 벌써 긴박한 상황이라는 건가.
전쟁 때와 같은 상황인가.
“그 대신, 아라라기군한테는 따로 중요한 역할을 맡길게”
“어?”
“말했겠지? 그러니까 두 패로 나뉜다는 거야ㅡ 아라라기군은 직접 반장짱한테 접근하도록 해”
“지ㅡ 직접?”
“이.제.부.터. 반.장.짱.의. 집.을. 방.문.하.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만나고, 얼굴과 눈을 보며
애기해서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해줘”
당연한 것처럼 지껄여대는 오시노한테ㅡ 나는 기가 막혔다.
어? 집을 방문해?
“어이ㅡ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오시노.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밤중이야. 그것도 한밤중이지. 한밤중이니까 하라는 거지ㅡ 어떤 의미로 한밤중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축시를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일반적으로 괴이가 가장 활성화하는 시간대이니까. 즉, 음성인지, 양성인지 가장 판단하기
쉬워” (주:축시-2 시~2 시반)
“그야 봄방학 때 실제로 체험했으니 알고 있지만ㅡ”
그래도 상식과 비상식이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런 밤중에 반의 이성친구 집을 방문한다는 행위는 명백히
비상식이란 말 쪽에 포함된다.
“비상사태니까 행동은 비상식적이어도 돼. 오히려 그래야만 해. 최악의 경우, 아라라기군이 반장짱한테
경멸당하는 걸로 끝날 뿐이야”
“진짜로 최악이잖아”
뭐.
낮의 일로 이미 경멸당했을 수도 있고, 좀더 파고들면 봄방학 시점부터 경멸당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확실히
듣고 보니 그걸 새삼스럽다고 느끼는 게 신기했다.
원래 꺼려지다니.
너무도 슬픈 사실이다.
“그리고 역할을 반대로 할 수도 없네ㅡ 묻은 고양이가 보통 고양이인지 아닌지 나는 판별할 수 없으니까ㅡ”
“그래, 그리고ㅡ 반.장.짱.한.테.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하.는. 건. 아라라기군 쪽이 더
잘하겠지”
친구이니까 말이지.
내친 김에 덧붙인 그 말에는 약간 냉소적이랄까 비꼬는 말투가 섞여있었지만ㅡ 설령 그게 비꼰 거라고 해도
의욕을 북돋아주는 신기한 말이었다.
그렇다.
괴이는 제쳐두고ㅡ 하네카와의 일이라면
오시노보다 내 쪽이 스페셜리스트다.
“아. 하지만 오시노. 나, 하네카와의 집을 모른다고”
“어? 어라? 그건 이상하네. 아라라기군와 반장짱은 같은 반이잖아? 반 주소록 같은 거 없어?”
“언제적 애기를 하는 거냐고. 지금은 개인정보의 관리가 철저하니까 말이지ㅡ 친구들도 아는 건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뿐이고, 어디 살고 있는지 역조차 모른다는 건 흔한 애기라고”
“싫은 시대네-. 아날로그파인 알로하 아저씨는 따라갈 수 없어”
아날로그파인 알로하 아저씨는 정말로 싫은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핸드폰이나 PHS 도 갖고 다니지 않는
기계치한테는 확실히 싫은 시대이겠지. (주:PHS-일본이 개발한 시티폰, NTT 에서 잠시 사용, 단거리기지국에서
발신전화만 가능, 지금은 안씀)
“하지만, 뭐, 그리 말해도 어때. 봄방학 때부터 포함해 1 개월 동안, 아라라기군과 반장짱은 나름대로 친하게
지냈으니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겠지. 평소 하던 대화나 약속장소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미루어볼 때,
반장짱이 사는 장소의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지 않아?”
“사람을 스토커처럼 애기하지 마......”
뭐.
그야 파악하고 있지만.
당연하잖아 (태연하게).
그 정도도 못한다면 아라라기 코요미의 불명예라고.
나와 오시노의 그런 대화를, 금발 흡혈귀 유녀는 실로 흥미없는 것처럼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흘려듣고 있다ㅡ
그런 느낌으로.
나는 마운틴바이크로 밤거리를 달렸다.
일단 라이트를 켜고 있지만 이건 지금 나한테는 필요없다. 폐빌딩을 나올 때 잊지 않고 흡혈귀 유녀한테 피를
주었기에 (생각 탓인지, 도너츠를 먹을 때 훨씬 맛있게 먹는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 쇼크다), 내 신체는 현재
웬만큼 높은 흡혈귀성을 띠고 있다. 캄캄한 밤이든 암흑이든, 멀리 떨어진 곳까지 볼 수 있다.
뭐, 자전거 라이트는 통행인한테 [자전거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사인이기에, 멀리 볼 수 있다고 해서
켜두지 않으면 위험하지만.
“이런, 참. 왠지 엄청난 일이 되어버렸네ㅡ 그보다 이런 시간에 집을 방문하라니, 어떻게 하네카와와 만나지”
빠를수록 좋다고 해도ㅡ 밤에 만나는게 좋다고 해도.
상당히 무모하다.
보통 가정이라도 그럴 텐데, 안 그래도 하네카와의 가정은 불화와 엇갈림을 겪고 있다ㅡ 낮에 들은 애기로
미루어볼 때, 밤중에 방문해온 반 친구를 환영해줄만한 환경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뭐, 그쪽 사정은 오시노한테는 덮어뒀으니ㅡ 그리고 저 녀석이 그걸 안다고 해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으니까”
어차피 역할을 교환할 수도 없다. 판별할 수 있을지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밤중에 여자애 집을 방문한다는
임무는 산전수전 겪은 오시노라도 무리겠지.
그렇지 않아도 수상쩍은 아저씨인데 폐빌딩에서 사는 것도 도가 터서, 봄방학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지저분한
모습이니.
꽤 수상한 사람이다.
혹은 유랑하는지도(るろうに) 모른다.
비천어검류의 후계자일지도 모른다.
(주-바람의 검심(루로우니켄신(るろうに剣心))-와츠키 노부히로의 작품, 일본막부말기~메이지유신을 그린
검객만화.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비천어검류의 검법을 쓴다, 언어유희)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내 경우는 설령 경찰에 통보된다고 해도 애들 장난으로 끝난다. 미성년의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자.
“그리고 하네카와가 나 보고 겁쟁이라고 했으니까ㅡ 애당초 무덤파기처럼 거친 짓은 할 수 없다고”
결국 적재적소라는 게 되겠군.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나는 자전거를 세웠다.
신호등 밑에 있는 주거표시판을 보는 한, 이 근처가 내가 추측한 하네카와가 사는 지역이다ㅡ 하네카와 집
근처다.
뭐, 방문할 때의 예의범절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해서ㅡ 그건 나중 문제이다.
우선 나는 하네카와의 집을 찾아야만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뭐가 우선이냐고.
엄청난 여정이잖아, 그거.
아무리 시골마을이라고 해도, 주택가인 건 틀림없다ㅡ ‘한 채 한 채 샅샅히 뒤지며 문패를 보면 되겠지’,
하고 자전거로 달릴 때는 그 여정을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 이건 엄청난 중노동이다.
비밀번호 4 자리의 자물쇠를 끈기있게 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도중에 포기한다.
아니, 비밀번호가 있는 자물쇠라면 언젠가 맞춘다는 보장이 있지만, 이 경우 내가 처음에 한 추측이 틀렸을
가능성은 크다ㅡ 하네카와의 집이 이 지역에 있다니, 내가 멋대로 예상했을 뿐이다.
하네카와의 일이다.
쉽사리 이 근처인지 알 수 없도록 행동했을 가능성도 있다ㅡ 아니, 그렇다고 하면 얼마나 경계되는 거냐고, 나.
진짜로 스토커 취급받는 거잖아.
“이것 참, 꼬리없는 고양이네ㅡ 있든 없든 고양이 꼬리라고 말하지만 말이지”
말하면서, 나는 마운틴바이크에 다시 오른다. 좀더 신중을 기한다면, 천천히 느긋하게 페이스를 낮춰서 문패를
체크해야겠지만, 지금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흡혈귀의 시력이 강한 것은 동체시력에도 적용된다ㅡ 시야각도 느낌 탓인지, 넓어져 있다. 과연 그렇게까지
무모한 짓은 하지 않지만, 있는 힘껏 페달을 밟는다고 해도 양옆에 걸려있는 주택의 문패를 한 개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지역을 남김없이 집집마다 구석구석, 일단 한 바퀴 돌아보자고 다시 기합을 넣고 나는 지면을 박찼다.
단 혼자서 롤러작전.
그렇다. 마음이 꺾인다고 해도, 알 바 아니다.
봄방학 때 하네카와가 나한테 해준 것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 따윈 복합골절되든 분쇄골절되든,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ㅡ 라고.
그렇게.
그런 결의도 결국은 허무한 것이었다.
내 결의 같은 건 항상 허공 속의 외침이다.
언제나 때늦은 후회이다.
내가 정말로 하네카와의 몸을 걱정했다면, 그녀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면ㅡ 나는 낮에 거절당하거나
입막음당해도, 설사 경멸당한다고 해도 그 시점에 억지로라도 하네카와의 집에 쳐들어갔어야 했다.
나는 글자 그대로.
때를 놓쳐버렸다.
“ㅡ 아”
일단 정면에 있는 도로를 달리고, 모퉁이를 돈 직후의 일이다.
시간대도 시간대이다, 지금까지 누구와도 엇갈리지 않고 자전거를 몰아온 내 정면에 갑자기.
불시에.
기습적으로.
문득.
부당하게ㅡ 나타났다.
실로 불합리하게ㅡ 나타났다.
아니, 그.건.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을 뿐ㅡ 그.건. 애당초 그곳에 있었을 뿐이니까, 그런 식으로 마치
자진해서 내 앞에 출연했다거나 굳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런 표현을 쓰는 건 올바르지 않다.
그건 너무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한 기회주의는 있을 수 없고.
필연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단순히 서로의 코스를 가던 도중 만났을 뿐이다ㅡ 나는 그.것.한.테. 너무나도 하찮기에 의식할 필요도 없는
왜소한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마치ㅡ 괴이한테 인간이 그런 것처럼.
가로등의 불빛조차 불확실한 밤중.
마운틴바이크의 핸들에 붙어있는 LED 라이트가 비추던 곳에 있는 건ㅡ 무얼 감추랴.
알고 계신 바와 같이, 반장 중의 반장.
하네카와 츠바사였다.
“ㅡ어라......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 하네카와를 보고, 그녀라고 판단하고, 단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
부모가 봐도 모를 터이다.
그런 수식문은 이 경우, 너무나도 아이러니로 가득 차서ㅡ
“......하네카와......야?”
희다.
희다.
희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ㅡ 순백으로.
웨딩드레스처럼 희다.
골든위크 때 할 만한 비유는 아니지만, 눈도 무색케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이다.
까마귀의 젖은 날개처럼 깨끗한 검은 색이었던 하네카와의 머리카락이 투명한 흰색으로ㅡ 안 그래도 색감이
옅었던 하네카와의 피부가 병적으로 희게.
변했다.
브래지어에 셔츠 하나 달랑, 신발뿐만 아니라 양말도 신고 있지 않아서 목욕탕에서 그대로 뛰쳐나온 것 같은
모습에 압도되었지만ㅡ 그 속옷 색깔만 유일하게 대조적으로 검다.
두드러지게.
지극히ㅡ 검다.
다만, 개인적으로 그 검은 속옷을 본 기억이 있다.
틀림없이 그건 낮에 하네카와가 입고 있던 속옷의 색이었다ㅡ 잊을 리가 없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다크블랙.
그게 꼭 확실한 증거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눈앞에 있는 존재가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허리의 형태가ㅡ 아니, 그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


어찌되어도 상관있다고 해도 지금은 보류해두자.
문제는.
속옷 차림으로 있는 거나 단순히 염색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레 머리색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보다ㅡ
좀더 두드러진 문제는.
“ㅡ냐옹”
그녀의 머리 부분에ㅡ 불쑥 고양이귀가 생긴 것이었다.
방해ㅡ 고양이.
“냐옹ㅡ”
그녀는ㅡ 운다.
데굴데굴하고ㅡ 목을 울린다.
“하ㅡ 하네카와”
“아아ㅡ 뭐냥, 너. 주인님의 친구이냥?”
하네카와는ㅡ 아니.
방해고양이는 말했다.
그런 말투도 성질도, 아니, 표정조차도ㅡ 하네카와와 전혀 다르다.
그녀와 관련된 점을 찾을 수 없다.
눈앞의 하네카와는 하네카와일 뿐, 하네카와가 전혀 아니었다.
하네카와는 그렇게 응석부리며 애교떠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 애교떠는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지금이라도 물고
늘어지려는 흉악한 표정을 띄우지 않는다.
대체 뭐지ㅡ 이건.
이 현상은.
하네카와이면서ㅡ 하네카와와 전혀 다르다.
대조될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래, 즉 대조가 아니고 정반대이다.
완전히 반대여서ㅡ 그렇기에 동일하다.
“냐하하ㅡ 그러고 보니 본 적이 있다냥. 날 묻어줄 때에 함께 있던 녀석이냥ㅡ 흥. 자, 딱 좋다냥”
내 혼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방해고양이는 엷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번쩍하고, 그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난 잘 모르겠지만, 친구 사이라는 건 서로 돕는 법이다냥? 그러니, 이. 녀.석.들. 뒷처리는 맡겨둔다냥”
말하고.
탁.ㅡ 하고, 그녀는 내 발밑에 무언가를 던져버렸다. 아니, 던져버린 물체는 2 개였기에 효과음은 탁, 탁ㅡ
하고 2 개였나?
하지만 하나로 합쳐진 한 덩어리였다.
한낱 한 뭉치였다.
놀랄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 내 정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ㅡ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정도 가지고는 놀라지 않는다.
그렇다.
인간을 두 명ㅡ 발밑에 던져진 정도 가지고는.
“............!”
아니, 역시 놀랐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랐다.
자전거 째로 넘어질 뻔했다.
그보다ㅡ 방해고양이는 대체 이 2 명을 어디서 데려온 거지?
처음부터 들고 있었나?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ㅡ 그렇다면 하네카와의 고양이귀 속옷 차림이라는 강렬한
임팩트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나는 방해고양이가 들고 있던 두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가?
아니면.
그 두 사람이 지금도 그런 상태로 마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으니까ㅡ 죽은 시체 같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모른
체 한 건가?
“저기. 뭐였지냥ㅡ 아, 맞다냥. 그 녀석들은 주인님의 [양친]인 것 같다냥. 잘 모르겠지만”
방해고양이는 말한다.
히죽이죽, 사악하게 웃으면서.
즐거워보이지만ㅡ 즐거워보일 뿐이다.
그 외에는 없다.
“뭐, 그러니까 말하자면 필.요.없.는. 녀.석.들.이다냥. 죽일 가치도 없다냥-. 괴롭힐 가치도 없다냥-.
아무런 가치도 없다냥-. 그러니까 친구인 네 녀석이 적당히 처리해달라냥ㅡ 뭣하면 네 녀석이 죽여도 된다냥.
주인님을 꾸짖거나 혼냈다냥”
그리고 방해 고양이는 빙글 돌아서 나한테 등을 돌린다.
고양이귀가 생겼으니까 고양이 꼬리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너무 빠진 걸지도
모르지만ㅡ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엉덩이는 매끈매끈하고 평탄했다.
그야 그렇다.
방해고양이는ㅡ 꼬리 없는 고양이니까.
“어ㅡ 어이, 기다려! 하네카와”
나는 그리 말하고, 마운틴바이크를 박차듯이 내리면서ㅡ 그녀를 부른다. 손을 뻗어서. 그리고 왔던 길을
자연스레 돌아가려는 그녀를 곧바로 쫓으려고 했다ㅡ 하지만 그건 어찌해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네카와는.
그녀는.
방해 고양이는ㅡ 문득 돌아보고.
“기다려, 라고”
아주 얄미운 듯이ㅡ 살의를 띠고 중얼거린다.
내 경솔한 말에.
갑자기 매몰차게 대답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서ㅡ 동공이 빨갛게 물든다.
이빨을 드러낸다.
“그렇게 뭐든지 주인님한테 기대지 말라고, 머저리가!”
네 녀석이 맨날 그러니까, 주인님이 이렇게 됐다냥!
말하기가 무섭게ㅡ 방해고양이는 나한테 덤벼들었다.
아니, 덤벼들었다는 행동묘사는 너무 거짓말 같아서 고양이처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ㅡ 허세도 적당히
부려야 한다. ‘이.미. 덥친 상태였다‘, 가 내가 인식했던 올바른 표현이다.
다만 이건 전율해야 할 사실이다.
올바른 표현을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전율해야 할 사실ㅡ 왜냐하면 나는 앞에서 말한 대로 흡혈귀 유녀한테 피를
준 직후이고, 즉 이 육체, 그 중에서도 시력은 상당히 강화되어서ㅡ 그런 나조차 인지할 수 없는 속도를
방해고양이는 낸 것이니까.
지금 내 시력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본래 없어야 할 터이다.
그리고 전율해야 할 것은 그 스피드만이 아니다.
파워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처럼ㅡ 그녀는 내 왼팔에 달라붙어, 그 상태로 이빨과 악력만 가지고 옷의 소매 째로
어깨에서 팔을, 잘 익은 열매라도 따는 것처럼 팍 잡아 뜯었으니까.
“앗......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볼품없고 꼴사납게 밤의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마치 변태한테 습격당하는 여자애처럼 비명을 질러댄 나를 꾸짖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ㅡ 봄방학 때도 진짜 여러 가지 험한 꼴을 당했지만, 힘에 밀려 팔이 잡아뜯겨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봄방학 때와 달리 불사신 정도가 약하다. 지금 나한테는 잃어버린 팔을 한순간에 회복할만한 치유력이
없다ㅡ 대량의 피가 어깻죽지에서 분수처럼 넘쳐흐른다.
인간의 신체에 이렇게 많은 혈액이 채워져 있었나, 하고 놀랄만한 혈액량이었다.
“아......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떠들지 말라냥. 이 정도 가지고”
꾸짖을 사람은 없어도.
하지만 꾸짖을 고양이는 있기에ㅡ 그 자리에서 가로등 쪽으로 넙죽 엎드려 웅크리고 만 내 머리를, 그녀는
잡아뜯어낸 내 왼팔을 입에 문 채, 맨발로 짓밟았다.
움직일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다.
머리를 밟혀도 그걸 뿌리칠 수 없다.
마치 밟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ㅡ 신기한 착각도 들었다.
아니, 오히려 밟히는 걸로 왼쪽 어깨의 아픔이 누그러지는ㅡ 바보 같아!
하네카와한테 밟혀져서 아픔이 누그러진다니, 어떤 변태냐고!
게다가 이건 누그러진다기보다 둔해진다고 말하는 쪽이ㅡ
“이.깟. 아.픔.ㅡ 주인님이 계속 참아온 고통에 비하면 모기에 물린 것밖에 되지 않는다냥”
“......주인님이란 건”
하네카와를 말하는 거냐, 하고 나는 당연한 것을 물으려다ㅡ 묻지 못했다.
말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지만ㅡ 어차피 당연한 사실이니 물을 필요도 없겠지.
너무도 명백하다.
너무도 순백하다.
너무도 결백하다.
알고 있고ㅡ 너무 잘 안다.
“아아, 맞다, 인간”
방해고양이는 그러니까ㅡ 물을 필요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제 주인님한테는 내가 있다냥. 그러니까 네 녀석은 필요없다냥. 양친도 친구도 전부 필요없다냥. 주.인.님.
자.신.조.차.ㅡ 필.요.없.다.냥.”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내 팔을ㅡ 그저 쓰레기처럼 뱉어버린다. 그 팔은 내 얼굴 앞에 뚝 떨어졌다.
“피ㅡ 필요없다니”
“내가 주인님을 자유롭게 해줄거다냥ㅡ 누구보다 자유롭게. 알고 있겠지? 그건 너희들이 할 수 없었던 거다냥.
너희들은 주인님을 얽매기만 하고 부자유스럽게 만들었지 않냥ㅡ”
우선.
지구와 필적할 만한 스케일의 스트레스에서 해방시키는 것부터 시작한다냥ㅡ 라고.
그렇게 말하고 방해고양이는ㅡ 뛰었다.
날았다고 말하는 쪽이 더 올바른가.
확실히 도약이라기보다 비상(飛翔)이었다.
무릎을 별로 굽히지도 않고 한순간 체중을 아래쪽으로 실은 다음, 살짝 뛰어서ㅡ 전봇대를 넘고 전선을 넘어,
그리고 정면에 있던 민가 지붕을 넘어서ㅡ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건 점프력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행위가 아니다ㅡ 새삼스럽지만 명백히 괴이의 소행이었다.
마치 날개가 돋은 것처럼.
호랑이에 날개가 아닌ㅡ 고양이한테 날개다.
“......하네카와”
하네카와 츠바사.
이형의 날개를ㅡ 가진 소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된 걸까ㅡ 전혀 짐작이 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오시노의 걱정이 훌륭하게
적중했다는 것이다.
표적의 한가운데를ㅡ 뚫었다.
전부 명중이다.(주:皆中-궁도용어, 쏜 화살 전부 과녁에 명중한 상태)
그리고ㅡ 그리고.
나는 또다시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너무ㅡ 늦었다.
“아......크, 읏”
나는 신체를 느릿느릿 일으키고ㅡ 방해고양이가 떨어뜨린 왼팔을 남은 오른팔로 주운 다음, 자신의 팔이 의외로
묵직한 것에 놀라며, 절단면이 깔끔하지 않고 조잡하지만 어쨌든 상처자국끼리 맞춰서 재생을 시도해본다.
자동재생을 바랄 수 없는 이상, 이 폐.품.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ㅡ 봄방학 때에 해본 적이 없는 타입의
치료법이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나오는 흡혈귀에 대한 잔지식을 총동원하면 이걸로 살이나 신경이 서로
붙을 터이다.
“............”
안개처럼 뿌연 내 시계에는 하네카와의 모습이나 방해고양이의 모습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ㅡ 다만 옆으로
쓰러져있는 마운틴바이크와 마찬가지로 쓰러져있는 두 명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
양친ㅡ 부친과 모친.
하네카와의 양친.
하네카와 츠바사의 부친과 하네카와 츠바사의 모친.
피가 연결되지 않은ㅡ 마음이 연결되지 않은 가족.
패밀리-.
그래도 어째서일까.
낮에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두 사람이 죽은 것처럼 축 쳐져서 쓰러져있는 것을 보면ㅡ 딱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분노가 솟구치지도 않고.
꼴좋다고 가슴이 후련해지지도 않는다.
요만큼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꾸짖거나, 화내고 싶지 않다.
그저 평범하게ㅡ 불쌍하다고 생각할 뿐.
동정하고 싶을 뿐이다.
신기하게도, 하네카와한테는 가해자일 뿐인 그들이ㅡ 왠지 내 눈에는 터무니없는 피해자로 비춰질 뿐이었다.

/007

여기서부터 내 기억은 잠시 건너뛴다.


즉 팔을 잡아 뜯어진 격통과 대량출혈로 인한 빈혈로 의식을 잃어버렸지만ㅡ 이건 뭐 [의외로 아라라기군은
근성이 있잖아!], [꽤 멋있네, 자네]라고 생각되는 에피소드이지만, 그래도 나는 실신하기 직전까지 온갖
취해야 할 행동을 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기억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의식을 잃을 때, 잃기 직전의 기억도 포함해 죄다 소거되는 것이 뇌의 구조인 모양이지만, 이 때의 나는
딱 그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는 애기는 애매한 추측과 주워들은 애기, 어슴푸레한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린다.
어쨌든.
방해고양이가 떠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마구 어질러진 상황의 뒤처리였다.
뒤처리ㅡ 라고 말하기엔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현장의 처리이다.
핸드폰을 사용해 구급차를 부르고ㅡ 다만 여기에는 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눈앞에 쓰러져있던 하네카와의
양친, 그 부친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을 사용했다.
너무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구급센터에 내 핸드폰 번호가 남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건다고 해도 완전히 감춘다고 볼 수 없고, 애당초 심상치 않은 일이다.
목소리는 녹음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ㅡ 기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뇌에 공급되어야 할
혈액은 죄다 길바닥에 흘러버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런 점은 흡혈귀.
원래라면ㅡ 뭐가 어떻게 원래인지 내버려두고ㅡ 주택가의 도로에 혈액이 뿌려졌다는 시츄에이션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과 덱브러쉬(deck brush)가 필요하지만, 존재가 물리학을 초월하고 있는 괴이의 현상이다.
뿌려진 내 피는 구급센터에 현재 주소를 다 전할 때에는 (나는 단념하지 않고, 음색을 변조해서 통화한 느낌이
든다. 우주인 같은 목소리로. 괜히 수상쩍다),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역시 머리에 피가 돌지 않는 나는 그 현상에 대해,
“........................”
하고, 멍하게 결과만 바라볼 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된다.
의문.
아니, 원래 혈액의 증발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ㅡ 봄방학 때 질리도록 본 광경이다.
오히려.
그 혈액이 증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사.실.에. 대.해.ㅡ 나는 이 사실에 의문을 품어도
좋으련만.
전화통화를 끝낼 때까지 긴 시간 동안, 길가가 물바다가 아닌 피바다로 되어있는 현상은ㅡ 그 괴.기.현.상.은
명백히 이질적이었는데.
“........................”
다만, 그런 일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여유도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부른 구급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
병원으로 운송할 때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일도 많은 구급차이지만 현장에 도착하는 속도는 역시 감탄할만하다.
그런 고로 서둘러 도망치지 않으면.
내 신체는 (특히 현재), 의사한테 진찰받을 만한 구조로 되어있지 않다ㅡ 진찰받는다고 하면 오히려 수의사
쪽이겠지.
잡아 뜯어진 팔을 무리하게 붙이는 수술이라니, 그런 건, 휴일에 출근하는 카미야 선생한테 진찰받을 수밖에
없다. (주:카미야 히로시(神谷浩史)-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 절망선생 이토시키 노조무의 성우임,
교통사고이후 2 달만에 엄청난 속도로 회복)
휘청휘청대는 발걸음으로 어떻게든 마운틴바이크를 세워 다시 올라탄 다음, 나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때의 내 심경은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지만 이 상황에 독백을 넣는다면,
“우왕! 괴이는 이제 질렸어!”
라고 해서, 자전거로 달리는 내 등이 검은 원형으로 둘러싸이겠지만ㅡ 유감스럽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
애니메이션에서 끝낼 때 작은 원으로 그 캐릭터만 남기는 것을 지칭)
아직 CM 조차 하지 않았다.
끔찍하게도 쉬지 않고......계속되는 중이다.
또, 길에서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방해고양이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던 옷자락ㅡ 무릎 부위나
왼팔 소매ㅡ 가 찢어진 것을 보면, 아무래도 주행 도중 나는 몇 번인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모양이다.
그.렇.게. 긁.힌. 상.처.들.은. 실.신.했.다.가. 깨.었.을. 때, 완.전.히. 나.아.버.렸.기.에.ㅡ
나중에 오시노한테 지적받을 때까지 알 수 없었지만.
뭐, 굴러도 그걸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몽롱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머리 속에 안개가 낀 상태로, 내가 마운틴바이크의 핸들을 향한 곳은ㅡ 여동생들이 자는 자기 집이
아니고 학원이었던 폐빌딩 쪽이다.
다음날 아침, 여동생한테 깨워지는 것을.
이 시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포기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ㅡ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여기서 간신히 내 의식은 현재로 연결된다.
접속된다.
즉, 폐빌딩에 도착한 시점에 나는 완전히 기절해버렸다는 것이다ㅡ 뭐, [참 잘했어요]라고 할 수 없지만, [
열심히 했습니다] 도장 정도는 받아도 될 만큼, 열심히 한 거겠지.
“......아”
낮선 천장이 아니고, 본 적이 있는 천장이었다.
늘 깨워지기만 하고 스스로 일어난 적이 별로 없는 나이기에, 자연스럽게 눈뜨는 것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봄방학 이후 처음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래도 지금은ㅡ 그 익숙하지 않은 감각보다, 일어나서 신체를 비튼 순간 왼쪽 어깨에 느껴지는 격통 쪽이
심해서 그런 위화감에 차분히 몸을 맡길 수 없었다.
“으......이곳은”
하고,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입에 담을 필요도 없다.
이곳은 폐빌딩 4 층.
어젯밤, 흡혈귀 유녀한테 도너츠를 먹인 교실이다ㅡ
“근데, 우읏”
조용히 놀라는 나.
사실은 좀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싶다는 (몸을 뒤로 젖히고 물구나무 서는 정도로 하고 싶다) 기분이었지만,
왼쪽 어깨에 죄어드는 아픔 탓에 그건 불가능하다.
옆으로 누운 나의 바로 옆에 그 흡혈귀 유녀가 있었다.
머리의 바로 옆에.
두 팔로 무릎을 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각도로 말하자면 그녀의 하반신 쪽, 원피스의 내용물이 정면에서 보이는 각도이다ㅡ 참고로 애니메이션판 설정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 유녀의 원피스 내용물은ㅡ 아니, 그건 내버려두고.
문제는 오히려 흡혈귀 유녀가 나한테 향하고 있는 그 시선이다.
평소 때의 원한 섞인, 증오로 가득 찬 시선이 아니다ㅡ 물론 미스터도너츠를 볼 때처럼 애타게 조르는 시선도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업신여기는ㅡ 시선이었다.
시선으로 죽이기는커녕, 시선으로 자살하게 만들 법한 눈초리였다.
의식을 좀처럼 되찾지 못하는 나를 걱정해서, 바로 옆에 붙어 돌봐줬다는 느낌은 절대로 아니다ㅡ 그녀가 나를
간호할 이유는 전혀 없다.
실제로 그녀의 시선은 마치 이렇게 애기하는 것 같았다.
[볼품없다]
[꼴사나워]
[고작 고양이 가지고 이게 뭔 꼬락서니인가]
[그래도 그대는 흡혈귀의 권속인가ㅡ]
......바보 같다.
뭐가 [이렇게 애기하는 것 같았다]냐.
이 녀석이 나한테ㅡ 뭔가 말할까보냐.
말해줄 것 같냐고.
뭘 제멋대로, 말이 없어도 통한다는 기분이 되는 거냐고. 자세히 보면 평상시 그대로 무뚝뚝한 얼굴이잖아.
단순히 평상시보다 거리가 가까우니까, 그리고 각도가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형태이니까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흡혈귀는 흡혈귀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서로 어디까지나 끝없이 평행한 직선이다.
나와 이 녀석은ㅡ 봄방학 때 결정적으로 결렬해버렸으니까.
이제 와서 나를ㅡ 권속 취급할 리가 없다.
해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눈을 뜨지 않는 나의 피를 멋대로 마셔도 될지, 고민하던 중이겠지ㅡ 지금 이 녀석한테 나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충전지 같은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살려고 하는 것만으로ㅡ 나는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을 뜬 건가, 아라라기군”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적당한 타이밍에ㅡ 교실문이 열려 알로하옷의 아저씨, 오시노 메메가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잠꾸러기네ㅡ 기다리다 지쳤다고. 벌써 태양도 져버렸다고”
“어?”
태양이 진다고?
어? 설마, 벌써 그런 시간인 거야?
나는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푹 잤다는 건가? 당황해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면 거기에 표시되어있는 시각은 확실히
[4 월 30 일 PM 5:20]이었다.
에에엣?
나, 12 시간 이상 잔 건가?
“잤다기보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말해야겠지ㅡ 차라리 의식불명의 중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그대로 죽는 게
아닐까, 걱정했어”
하핫-, 하고 오시노는 가볍게 웃어넘긴다.
말과 정반대로, 정말로 그저 늦잠 잔 것을 놀리는 웃음이었다.
평소와 같은 오시노의 태도이지만, 지금은ㅡ
“오ㅡ 오시노! 하네카와가!”
“아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벌써 들었다니까ㅡ 반장짱이 고양이로 되.어.버렸지?”
걱정이 맞아떨어졌네.
하고, 오시노는 수긍하고 나서, 흡혈귀 유녀 쪽을 향해,
“흡혈귀짱, 이제 됐어”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흡혈귀 유녀는 느릿느릿 오래된 바위처럼 일어나서, 그대로 몸을 질질 끌면서 휘청대는 발걸음으로
교실에서 나가버렸다.
문을 닫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
내 머리에는 물음표가 떠올라있다.
“무슨 일이야? 오시노. 대체 왜 저 녀석이 이런 시간에 깨어있는 거야. 저 녀석이 깨어있으니까 난 틀림없이
아직 새벽 시간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라라기군의 상처가 너무나 심해서 말이지ㅡ 흡혈귀짱한테 조금 협력해달라고 했어”
봐봐, 하고 오시노는 내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보면, 그 부위에는 붕대가 빙글빙글 감겨있다ㅡ 왠지 저주하는 주문처럼 이상한 붓글씨가 쓰여진 이상야릇한
붕대였지만, 뭐 붕대이다.
“자네들은 너무 지나치게 연결되어있다고 할 정도로 이어져있으니까ㅡ 링크되어있다고 말해도 좋아. 오히려 한
쌍(pairing)이려나. 회복력에도 연동하고 있어. 따라서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스킬은 강도를 더하는
거지ㅡ 그러니까 흡혈귀짱을 옆에 있도록 해서 자네의 회복력을 끌어올렸어”
“하아......”
그런 건가.
그렇다면 저 녀석은 나를 위해 무리한 철야 (?)를 강행했다는 것이 된다ㅡ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낀 것은,
그 탓일지도 모른다.
돌봐주고 있었다ㅡ 는 것은 아니라도.
충전되고 있던 것은 내 쪽이었나.
피를 마셔도 될지 고민하던 것이 틀림없다고, 내멋대로 착각해버렸다.
“나중에 고맙다고 해. 흡혈귀짱이 없었다면 그 팔, 아마도 괴사했을 거야”
“괴사라니......네크로시스인가(necrosis)”
뭐, 애당초 저 녀석이 없었다면 방해고양이한테 잡아 뜯긴 시점에 끝이었을 테지만.
“하지만, 확실히 의외였어. 봄방학 때의 치유력은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저 녀석한테 피를 준 직후였으니까ㅡ
회복력이 좀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믿음이란 건 무섭네. 팔 1 개 정도, 접착하면 곧바로 수복될 거라
생각했는데”
“뭐야. 처음부터 팔 1 개 희생할 작정으로 방해고양이한테 덤벼든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ㅡ”
도전하기는커녕.
싸울 작정도 없었다ㅡ 눈치채면, 눈치챌 틈도 없이 잡아 뜯겼을 뿐이다.
“ㅡ 음. 하지만 이 팔이 좀더 빨리 나았으면 방해고양이를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뭐, 역시
그렇게까지 불사신 능력을 기대하는 쪽이 잘못된 거지만”
“아니ㅡ 잘못된 건 이 경우, 방해고양이에 대한 인식 쪽이야, 아라라기군”
그렇게 애기하면 오시노는 말했다.
“지금 아라라기군의 불사력이라면 부상을 꽤 견딜 테지. 아라라기군이 말한 대로 피를 준 직후이니까. 치명상
이외라면, 순식간에 회복할 정도야ㅡ 하지만 이 경우, 상대가 나빴어”
상대라고 해야 하나, 상성이려나.
상성이 나빴다.
상반신을 약간 일으킨 상태로 아직 바닥에 드러누운 자세인 나한테, 오시노는 다가와서 왼쪽 어깨의 붕대 (와
같은 것) 을 풀며 계속한다.
“방해고양이는ㅡ 안돼”
“아, 안된다니”
“방해고양이한테 방해받았다(障られた)ㅡ 닿아서(障られた) 생긴 부상은 보통 데미지가 아니니까 말이지.
고양이를 건들지 않으면 재앙도 없다. 아라라기군, 에너지드레인이란 걸 알고 있으려나?”
(주:사와라레타(障られた, 障られた)-동음이의어//고양이를 건들지 않으면 재앙도 없다(触らぬ猫に祟りな
し), 원문-신을 건드리지 않으면 화를 입지 않는다(触らぬ神に祟りなし),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뜻)
“에너지드레인......?”
들어본 적이 있다.
아니, 그것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배운 지식이니까 자세하게 알진 못하지만ㅡ
“어, 하지만 에너지드레인은 오히려 흡혈귀의 특성이잖아? 흡혈활동은 원래 인간의 생명력을 쥐어짜는 행위라고
봄방학 때 들은 것 같은데ㅡ”
“그 말대로야. 그래도 그게 흡혈귀의 전매특허인 건 아니지ㅡ 영적 장애(靈障)라고도 말하려나. 딱히 권속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흡혈귀의 것과 다소 의미가 다르지만. 말하자면, 그건 방해고양이의 오리지널·스킬이란
거지”
“흐응ㅡ 즉 나는 왼팔을 잡아 뜯기는 것과 동시에 불.사.력.까.지. 빼앗겼다는 건가ㅡ”
그러니까 상처의 회복이 늦었나.
흘러넘친 피의 증발도 늦었는가.
상성의 나쁨.
능력끼리ㅡ 서로 먹고 먹히고, 엇갈렸다.
납득되었다.
왼팔만이 아니다ㅡ 하네카와의 양친도 그렇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움직이지도 않고 쇠약해진 두 사람이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전혀 없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애당초 무슨 짓을 당했길래 저렇게 약해진 건지, 나는 알지 못한 채로 구급차를
불렀지만ㅡ 에너지 드레인을 당했다고 하면 저 상태도 이해가 된다.
약해져서.
약해져 있는 상태는ㅡ 에너지 드레인의 결과였다.
“흡혈귀의 에너지 드레인과 달리 직접 피를 빨 필요가 없는 대신 간접적인 것이 되지만 말이지ㅡ 뭐,
아라라기군이 몸소 체험한 대로, 원리 자체는 원시적인데다 직접적이고 나름대로 위협이 돼. 이빨만 주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ㅡ 만져지면 그걸로 아웃이니까.
“그래서ㅡ 방해고양이인가”
무시무시하군.
나는 오시노가 붕대를 다 푼 환부를 본다ㅡ 일단 겉보기로는 상처도 남지 않고 나은 모양이다.
흡혈귀 유녀가 계속 옆에 있어준 것뿐만 아니라, 묘한 붕대의 힘도 물론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
이건 빚을 갚기 위해 일을 도왔는데, 빚이 한층 더 많아진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살짝 뇌리를 스쳤지만, 뭐, 그 생각은 머리에서 떨쳐내고, 어쨌든.
“하지만 방해고양이란 괴이, 나는 그 방면의 지식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흡혈귀의 불사력을 압도할 정도의
에너지 드레인은 확실히 위협이로군. 뜯겨나간 것이 왼팔이었으니 다행이지만 만약 그것이 머리였다면, 나는
잇지도 못하고 죽었겠네”
“......아아, 아니야, 이건 내가 말을 잘못 했네, 아라라기군”
내가 약간 안심하며 중얼거린 혼잣말에 오시노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상성이 나빴다는 건, 아라라기군과 상성이 나빴다는 의미야ㅡ 능력적으로 방해고양이가 흡혈귀한테 필적한다는
의미가 아니야”
“어?”
“하지만 흡혈귀는 괴이의 왕이라고ㅡ 왕님, 킹(king)이지. 똑같은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해도 랭크는 달라.
거기에는 절대적인 격차가 있어. 방해고양이의 에너지 드레인과 흡혈귀의 흡혈행위는 절대로 맞버틸 수 없어.
위협이 되는 건 인간한테만 그렇고ㅡ 흡혈귀한테는 그저 피래미야”
“피래미ㅡ”
저게ㅡ 피라미냐고.
저.런. 게.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전문가인 오시노가 그리 말하니까, 뭐, 확실히ㅡ 그렇겠지만.
“아라라기군은 흡혈귀짱한테 피를 줬던 직후여서, 그야 웬만큼 흡혈귀화하고 있지만, 싸울 때 그 정도는 별 거
아냐. 어디까지나 인간. 괴이 그 자체한테 이길 수 없어”
“괴이ㅡ 그 자체”
“만약 아라라기군이 봄방학 때의 불사성을 갖고 있다면ㅡ 유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은 영락한 상태이지만
흡혈귀짱이라면 방해고양이는 상대도 되지 않아. 팔을 잡아 뜯거나 모가지를 비틀어도 한순간에 재생하고, 애당초
강도가 세서 잡아뜯길 리가 없어”
“............”
아니.
그래도 저건 방해고양이인 동시에ㅡ 하네카와 츠바사일 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봄방학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ㅡ 하네카와도 홀린 것이 아니고ㅡ 존재 자체가 괴이로 되.어.버.
렸.다.는 건가.
괴이화.
괴물화.
“육체변이를 동반하는 괴이란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지. 그 점은 이제부터 조사해볼 수밖에 없어ㅡ
어쨌든, 한 발 늦었다는 건 확실해”
오시노는 말한다.
“아라라기군한테 들은 고양이짱의 무덤을 가볍게 파보았는데ㅡ 아.무. 것.도. 묻.혀.있.지. 않.았.어.
장소를 착각한 게 아니라면 거의 최악의 사태야”
“......그런가”
최악인가.
굳이 오시노가 팠다고 하는 그 장소를 확인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ㅡ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
이미 늦었다는 증거 자체를.
벌써 나는 보고 말았으니까.
넋을 잃고ㅡ 말았으니까.
눈앞에서 놓쳐버렸으니까.
“흠. 그래도 상처의 경과 자체는 순조로운 모양이네ㅡ 아직 안.쪽.은 다 붙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 상태라면
내일쯤에 다 낫겠지”
오시노는 말하고 나서, 툭하고, 내 왼쪽 어깻죽지를 두드려본다ㅡ 가볍게 친 것뿐인데, 그래도 체내에
침투해오는 아픔 (상당한 아픔) 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순조롭다]는 모양이다.
~한 모양, ~한 모양으로.
한 개도 확신을 갖지 않지만.
“흡혈귀짜ㅡ 은 벌써 자고 있으니까 다음번에 고맘다고 해둬. 뭐, 그녀도 아라라기군이 죽으면 곤란하니까
하룻밤 정도 곁에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해야겠지. 영양원인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건, 저 녀석이 적어도 살려고 하는 거니까”
“으-응. 그런 의미가 아닌데 말이지-”
둔감한 녀석, 하고 중얼거리는 오시노.
그건 또 뭐냐.
이유도 없이 욕먹은 기분이 든다고.
“뭐, 상관없어. 자-, 아라라기군, 가족들이 걱정하기 전에 돌아가도록 해”
“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는 모양인데. 진동 기능이었나, 그거?“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다ㅡ 아까는 날짜만 신경쓰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부재중 전화, 메일이 엄청나게 와있다.
착신: 146 건.
메일: 209 건.
무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엇!
우와아......왠지 확인해보기도 전에 예상했지만, 전부 카렌과 츠키히한테 온 거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마지막에는 전부 원컷콜과 빈 메일이잖아! (주:원컷콜(ワン切り)-한번 울리고 끊는 전화, 광고전화나
전화사기인 경우가 많음)
“이건 괴롭히는 수준이잖아”
이것 참.
어쩐지 일어나는 게 힘들더라니.
자고 있던 한중간, 이런 식으로 계속 떨리면 안심하고 잘 수도 없겠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어떻게든
나를 깨우려고 하다니, 거참 눈물나게 갸륵한 여동생들이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반장짱과 달리 걱정해주는 가족이 있으니까ㅡ 자네는 슬슬 돌아가야 해, 아라라기군”
“아, 아니ㅡ 이건 걱정하는 게 아니고ㅡ ”
“응?
어라, [반장짱과 달리]?
무슨 의미지.
만신창이 몸으로 이 폐빌딩에 도착해서 몽롱해진 상태로 피해보고를 할 때에도, 오시노한테 하네카와의
가정환경을 애기할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ㅡ 그저 말이 그렇다는 건가, 아니면 넘겨짚는 건가?
평소처럼 꿰뚫어보는 건가?
하네카와의 양친이 피해자란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 대사는 아무 것도 몰라도 할 수 있는 건가?ㅡ 아니, 어떻지?
왠지 뉘앙스적으로ㅡ 아니.
그보다ㅡ 우선.
“그만둬, 오시노ㅡ 이 정도 상처는 아무 것도 아냐. 하네카와가 저렇게 되었는데 터벅터벅 돌아갈 순 없겠지.
빨리 붙잡아서 방해고양이를 제거하지 않으면ㅡ”
“봄방학”
숨을 들이마시고, 말하기 시작한 나를ㅡ 오시노는 가로막는다.
말로 차단한다.
“봄방학, 반장짱이 아라라기군한테 그랬던 것처럼ㅡ 이번에는 아라라기군이 반장짱을 도와준다는 건가? 그치,
아라라기군”
“......그래”
묘하게 확인하는 것처럼, 확신으로 가득 차서, 불쾌감이 가득 느껴지는, 악의가 가득한 말투에 나는 수긍하기
어려웠지만ㅡ 최종적으로는 수긍했다.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그 말이 맞기 때문이다.
왠지 그렇게 표현하면 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도 들지만ㅡ 확실히 그 말대로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친구가 곤란할 때 돕는 건 당연하겠지”
나는 말했다.
방해고양이와 했던, 대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대화를 떠올리면서.
“흠. 그건 자네가 한 말이 아닌데, 아라라기군ㅡ 그거야말로 반장짱이 한 말이야. 뭐였지?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없다면 나는 친구라고 부르지 않아ㅡ 였나. 마치 삼국지 시대의 가치관이네, 반장짱은. 우리들은 비록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날한시에 죽을 것을 맹세한다ㅡ 였나?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뛰어난 무장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
“......여자를 무장에 비유하지 말라고”
“그래도 말이지, 아라라기군. 그건 무리야”
딱 잘라, 확실하게.
오시노 메메는 최후통첩과 같이 말했다.
“반장짱처럼 하는 건, 자네한테 불가능해ㅡ 나도 그렇고, 누구라도 그렇겠지. 반장짱처럼 하는 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해”
지금 자네는 그걸 깨달아야만 해.
툭ㅡ 하고, 다시 한 번 내 어깻죽지를 만지고, 오시노는 계속했다.
“친구가 곤란하니까 돕는 게 당연하다,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라라기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선택받은 자의 영역이라고. 자네 같이 평범한 사람이나 나 같이 평범하고 변변치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반장짱한테 반해서, 반장짱한테 보답하고 싶어서 반장짱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 기분은, 내고 싶다는
기분은 알아. 그래도ㅡ 그건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해서는ㅡ 안된다고”
“금지된 장난이야”
오시노는 말한다.
“저 여자애는 말이지, 괴이보다 괴이야. 괴물보다 괴물이지. 섣불리 흉내를 내려다간 따끔한 맛을 볼걸”
“흉내라니ㅡ 오시노,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야. 뭐, 그런 정신론은 제쳐두고”
어깨에 둔 손을 오시노는 내 머리 위로 옮겼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실제로,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지금부터는 프로가 할 일이야. 초보가, 하물며 미성년자가 나갈 차례는
아니야”
“............”
“아라라기군, 자네는 혹시라도 뭔가 책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 ‘반장짱이 고양이를 묻으려고 하는 걸
막았다면’, 하고, ‘좀더 애기를 들어줬다면’, 하고 그런 걸 생각할지도 몰라. 응. 나는 그런 걸로 책임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뭐, 후회되는 점이나 반성해볼 점이 전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ㅡ 이번
사태의 책임이 자네한테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네가 사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은 아니야”
“에......”
“나는 중립에 선 밸런서(balancer)로서, 책임 소재란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인간사회, 좀더 말하자면
세계가 전부 그런 식으로 되어있지 않아. 내 주장이 꼭 올바르다고 생각해선 안돼. 책임져야 할 녀석이 책임을
저버린다고 해도 세상사는 의외로 해결되는 법이야. 뭐, 이건 일반론이지만”
꼭 자네가 애써야 되는 건 아냐.
그럴 의무는ㅡ 없어.
오시노는 담담하게 말한다.
“봄방학, 자네가 흡혈귀가 되었을 때도 자네는 꽤 노력했지만ㅡ 예상 외로, 저 때, 굳이 애쓰지 않고 이
폐허에 몰래 숨어있기만 해도, 일이 문안하게 해결되었을지도 몰라”
“그”
나는ㅡ 오시노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리ㅡ 없겠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ㅡ 저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그리고 이번 사건도 그래”
“해야 할 일?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ㅡ 불가능해”
“............”
“이번에 자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라라기군”
오시노는 굳게 강조하며ㅡ 말했다.
“나는 보이는 바와 같이 무책임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이니까,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겠지만ㅡ 아라라기군한테
심한 상처를 입히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아직 예방 단계였다고 해도 아라라기군한테 돕게 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해. 밸런서(balancer) 실격이야. 나는 이론(theory)를 무시하고 방침(policy)에 위배되는
짓을 해버렸어. 자네가 이번에 받은 피해는 상당한 비율로 내 잘못이야. 네 부모님께 죄송스러울 따름이지”
아라라기군은 지금까지 충분히 역할을 다해줬어.
위로해주는 것도 아닌 것처럼, 그리고 별다른 진지함도 없이.
오히려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내 무력감을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하지만 오시노는 엄하게 단언했다.
“아라라기 코요미군. 이제부터는ㅡ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자네는 반장짱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하고 싶어도 불가능해. 기분만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실력의 문제야. 굳이 말한다면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자네의 가장 중요한 임무야”

/008

실로 인정머리없고, 가차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오시노의 거절에 별다른 반론도, 하물며 이렇다 할 반론도 할


수 있을 리 없고, 나는 그 후 터벅터벅 폐빌딩을 뒤로 했다.
그야 그렇다.
지옥과 같은 2 주였다고 해도, 고작 2 주 동안 흡혈귀가 되었던 나한테ㅡ 이 경우, 지금도 간신히 그 후유증을
육체에 남기고 있을 뿐인 나한테 가능한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찍소리도 못한다는 게 바로 이거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프로페셔널도 아니니까ㅡ 이제부터는 그 사람, 오시노 메메의 영역이다.
고.작.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은ㅡ 아무 것도 없다.
......아니, 그것도 변명이다.
해명이다.
허세부릴 뿐이다.
꼴사납게 허세부릴 뿐이다.
사실은 좀더 단순하다ㅡ 결국 중요한 것은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그녀 자신이 나 같은 녀석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시노가 아니다.
오시노한테 거절당한 게 아니고ㅡ 나는 하네카와한테 거절당했다.
저 때, 하네카와는 확실히ㅡ 내 도움을 거절했다.
상관하지 말아줘, 라고.
아는 척하지 말아줘, 라고.
단호하고 굳게ㅡ 거절했다.
교섭의 여지나 타협의 기색도 없다.
그러니까 오시노가 말한 대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ㅡ 오시노를 방해하지 않는 것뿐이다.
능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리적으로도.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러서있어, 이다.
그렇다고 해도ㅡ 머리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납득했을 텐데, 어찌해도 가슴 속에 뭉게뭉게 가시 돋친
응어리가 남아있어, 폐빌딩을 나온 후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고분고분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ㅡ 여동생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줄 집에 순순히 돌아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는커녕, 나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핸들을 향했다.
즉ㅡ 아까 전 내가 방해고양이와 만났던 장소로 나는 향했다.
뭐하러?
무엇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곳으로 향하면 또 방해고양이ㅡ 하네카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재회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ㅡ 다만 중도에 끝나버린 역할을 적어도 끝까지 해내려고
생각했다.
즉 하네카와의 집을 찾는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어째선지 그러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아직 혼란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네카와가 괴이한테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나 그녀의 고양이귀, 속옷 차림을 봤다거나, 그런 여러 가지 사실이
나한테서 냉정함을 뺏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하네카와가 야밤에 사라지고 하네카와의 양친이 병원으로 옮겨진 지금, 아무도 없을 하네카와의 집
문단속을 걱정하다니, 나는 그렇게 세심한 남자가 아니니까.
현지에 바로 도착하고 나서 주택가를 종횡무진하며 아무 생각 없이 찾아보니, 하네카와의 집은 너무나 쉽사리
발견되었다.
하네카와라는 문패.
문패 밑에는 양친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두 개, 그 옆에 약간 떨어져ㅡ 약간 떨어져서 [츠바사]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으니까,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극히 낮겠지.
극히 평범한 단독주택 1 채.
로 보인다.
적어도 이 2 층 건물의 집 안에서 가정폭력(DV)가 행해진다거나 방치 행위(neglect)가 행해진다고 전혀 그런
식으로ㅡ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츠바사]의 표기가 어린 소녀라는 것을 나타내듯이 히라가나인 점이ㅡ 약간 일그러짐을 스며들게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 문패는 바꾸지 않을 걸까ㅡ 라고.
딸의 성장에 맞춰서 다시 만들지 않는 걸까ㅡ 던가.
떼는 것도 귀찮았던 걸까ㅡ 하고.
생각해버린다.
필요없는 것을 생각해버린다.
열받는 것을 생각해버린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대문을 열고 이끌리는 것처럼 현관으로 향했다ㅡ 하지만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제대로 자물쇠가 걸려있다.
“............?”
하지만 의문이다.
하네카와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저 방해고양이ㅡ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별로 영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성이라곤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짐승이 더 영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영리함이 전혀 없다고 말해도 좋다.
그 방해고양이가 자물쇠라고 하는 인간 독자의 문화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지만ㅡ 아니, 현관으로
드나든다고 볼 수도 없나.
오히려 고양이라면 창문으로 드나드는 게 당연.
나는 현관에서 떨어져 집 주위를 돌면서 열려있는 창문을 찾는다. 하지만 모든 창문이 제대로 닫혀 있다ㅡ
덧문도 닫혀있을 정도이다.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ㅡ 나는 2 층 창문의 존재를 눈치챈다.
그렇다, 저 점프력이다.
달까지 닿을 정도로 강력한 저 점프력.
꼭 1 층으로 드나든다고 볼 수 없다. 그걸 깨닫고 다시 한 번 집을 돌아보면 이번에는 추측이 맞아떨어져, 나는
열려있는 창문을 발견했다.
흠.
흠흠.
여기까지 오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다행히 지금 나는 신체능력이 다소 향상되어있다ㅡ 고양이처럼 도약한 것만으로 2 층까지 뛰는 것은 무리여도
벽을 기어올라가는 것은 가능하다.
일단 결심하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ㅡ 일단 주위 사람들 눈을 살피면서 나는 클라이밍을 개시했다.
그리고 도착해ㅡ
“............?”
ㅡ 그리고 고개를 가웃했다.
열려있던 창문에 손을 대서 밤바람에 휘날리는 커텐을 휙 옆으로 치운 다음, 안을 엿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분명 이 열려있던 창문은 하네카와 방의 창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ㅡ 방해고양이가 하네카와 양친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뛰쳐나오는 곳이 소거법적으로 이 창문밖에 없는 이상,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 타당하겠지. 아니, 그
생각을 추측이라고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그곳은 뭐라고 해야 하나, 서재와 같은 방이었다.
하네카와 부친의 방인 걸까?
잘 모르겠다.
애당초 하네카와의 부친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나는 들은 적이 없고.
뭐, 여하튼 그곳은 아무리 봐도 사무실 분위기가 나고, 적어도 이건 여자고등학생의 방이 아니겠지.
“흠”
나는 벽에 스파이더맨처럼 들러붙은 채, 스스로 능숙하게 신발을 벗고 하네카와네 집 안으로 침입했다.
완전히 불법침입이지만 뭐, 벽에 들러붙은 시점에 충분히 수상쩍은 인물이기에, 이미 올라탄 배ㅡ 가 아니라
이미 밀항 수준이다.
다만.
올라탄 배가 노예선일 가능성을ㅡ 나는 고려했어야 했는데.
바꿔 말하면ㅡ 이야기 흐름상 이렇다 할 뚜렷한 목적도 없이, 불법침입이란 형법상의 죄를 저지른 나한테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천벌이 내려졌다.
이보다 덜할 수 없는, 천벌이.
나는.
아라라기 코요미는 하네카와네 집 안을ㅡ 사람이 없는 하네카와네 집 안을, 한쪽 손에 신발을 든 채 빙글 한
바퀴 돌고ㅡ 두 바퀴 돌고, 세 바퀴 돌고, 네 바퀴 돌고ㅡ
“ㅡㅡㅡ읏!”
달려나갔다.
현관으로 나오면 될 텐데 그런 발상조차 떠오르지 않은 나는 기어들어간 서재와 같은 방의 창문에서, 마치
그렇게 행동을 거슬러 가면 시간이 되감겨 전부 없었던 일이 된다고 맹신하는 것처럼 열려있던 창문에서
다이브했다.
당연히 낙하한다.
모처럼 붙였던 왼쪽 팔이 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낙법도 없이 아스팔트를 향해 똑바로 낙하했다ㅡ
추락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그런 아픔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나는 거의 공황상태로 부랴부랴 집 앞에 세워져있던 마운틴바이크가 있는 곳까지 네발로 뛰어가, 체인이 닳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 장소를 떠났다.
하네카와의 집에서 떠났다.
그것이 불쾌해서.
나쁜 물건이라도 있는 것처럼ㅡ 아니.
순수하게 나는 기분이 나빠서ㅡ 토할 뻔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길을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고, 얼마나 멀리
돌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문득 눈치채면 나는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ㅡ 딱히 돌아오려고 한 것이 아닌데.
어쨌든.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본능적으로ㅡ 집으로 돌아왔다.
“아. 오빠. 어서ㅡ”
현관을 열면 도대체 무슨 타이밍이었는지, 츠키히가 그곳에 서서ㅡ 속옷 위에 얇은 T 셔츠 1 벌 걸친 러프한
모습으로 추측컨대 아마 목욕탕에서 갓 나오거나 했겠지ㅡ 나한테 눈치챈 모양이지만 그녀가 [돌아와]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복도로 들어가 츠키히의 신체를 강하게 껴안았다.
강하고, 강하게, 꽉.
“우오옷! 뜻하지 않게 열렬한 포옹! 뭐냐고, 이 변태 오빠는!”
“............읏”
친오빠의 기행에 츠키히는 경악하고, 명백히 기분나빠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츠키히라서 한 행동이 아니다.
카렌이든, 누구이던 간에ㅡ 어쨌든 나는 처음에 만났던 누군가를 껴안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겠지.
아니, 껴안는다, 가 아니다.
매달리지 않고선ㅡ 견딜 수 없었다.
달라붙지 않고선ㅡ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정신이 붕괴한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했던가.
사실 츠키히한테는 덜덜 떨면서 어찌할 수 없는 내 신체의 떨림이 충분히 전해졌겠지.
겁먹고 있다.
겁쟁이라고 불려지던지, 뭐라고 불려지던지 상관없다.
공포에 대해 겁먹는 게 뭐가 나쁘냐고.
떨고 굳어지는 게ㅡ 뭐가 나쁘지.
그럴 정도로ㅡ 저 집의 임팩트는 강렬했다.
단독주택이다.
크기로 말한다면 내가 사는 이 집보다 클지도 모른다.
방의 수는 6 개였다.
그런데ㅡ 저 집에는.
하.네.카.와. 집.에.는. 하.네.카.와. 츠.바.사.의. 방.이. 없.었.다.ㅡ
“우.우.우.우.우.우.우.우.”
무서워. 무섭다고. 무섭다니까.
봄방학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ㅡ 저 지옥과 같은 추억이 극히 목가적인 풍경으로 덧씌워질 정도로, 저
봄방학은 별 일 없었던 2 주 동안이었다고 착각해버릴 정도로ㅡ 무섭다.
방이 없다.
그리고ㅡ 흔.적.이 없다.
어릴 적에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고 해도 15 년 가까이 하네카와는 저 집에서 생활해왔을 터이다ㅡ 그럴 텐데 집
안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나는 그곳에 하네카와의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집에는 제각기 독자적인 향기가 있다.
오래 살면 살수록ㅡ하지만 그 향기 중 하네카와의 것은 전혀 섞여있지 않았다ㅡ 정말로 집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하네카와 츠바사는 저 집에서 단절되어 있다.
아니.
물론ㅡ 거실 벽에 걸린 제복이나 서재와 같은 방에 늘어놓은 교과서·참고서류, 욕실의 옷 선반에 걸린 속옷류,
복도에 접혀진 모포, 계단의 콘센트에 꽂혀있는 핸드폰 충전기, 현관 옆에 놓여있던 학교가방 등을 고려하면ㅡ
하네카와가 저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하지만ㅡ 저래서야 마치 호텔 생활이다.
얹혀사는 것도 아니다.
너무 안일했다ㅡ 그래도 나는 낙관시했다.
부친한테 맞은 얼굴을 봐도 어딘가ㅡ 하네카와는 괜찮다, 하네카와는 하네카와니까 괜찮다, 하네카와는 괜찮은
게 틀림없다, 하네카와는 괜찮지 않을 리가 없다, 하고 그런 식으로 믿어버렸다.
방해고양이한테 홀려고 나서도 여전히.
괜찮다, 라니ㅡ 바보 같다.
“우우우우우우우”
이제 안되겠지.
하네카와는 이제 안되겠지.
저건.
어찌할 수도 없겠지ㅡ 수정불가능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미쳐있다.
반광란으로 전광란이다.
오시노한테 맡겨두면 확실히 하네카와는 멀지않아 보호되고 방해고양이는 저 알로하 녀석한테 어이없게
퇴치되어버릴 테지만ㅡ 적어도 이 이야기에는 하네카와가 오랜 세월 동안 담을 쌓은 양친과 화해하고 다년간의
불화가 해소되어 행복해진다는 결말은 없다.
끝나지도 않는다.
이 이상, 끝나지도 않는다.
저 집은.
저 가족은.
저 가정은.
이미 파탄날 정도로ㅡ 끝나버렸다.
“우우우우우우우ㅡ 우와아아아아!”
“......정말, 어쩔 수 없네, 오빠는. 착하지, 착하지, 무서웠지”
신체의 떨림은 계속 박차를 가하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도 높아져가는 나한테 츠키히는, 4 살 연하인 내
여동생은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미소짓고 내 머리를 착하지, 착하지 하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살짝 입술을 내밀며,
“자, 좋아”
하고 말했다.
“기분나빠!”
여동생을 밀쳐냈다.
당황해서.
“꺄악! 여동생이 헌신적으로 대하는데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오빠!”
“교육적 지도야! 너희 자매는 얼마나 즉흥적으로 사는 거냐고!”
“어쩔 수 없잖아, 오빠의 여동생이고!”
“큭!”
그 말을 들으면 반박하기 힘들군.
나만큼 즉흥적으로 살고 있는 녀석도 없으니.
다만, 나는 좀더 머리를 써서 살아간다는 느낌도 들지만ㅡ 척수반사만으로 살아가기는커녕, 척수조차 없어보이는
단세포생물 뺨치는 삶의 방식은 맹세코 하지 않는다.
그럴 테지만.
어찌됐건, 여동생의 기분나쁜 헌신으로 인해 일단 내 신체의 떨림은 멈췄다.
가져야 할 것은 가족ㅡ 라고 말하는 걸까.
가족.
가족, 인가.
그 말에서 필연적으로 병원에 옮겨져 아마도 지금쯤 입원해있을 하네카와의 부친, 그리고 모친을 연상해버리고ㅡ
나는 왠지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그들을 걱정해야 할 이유는, 정말로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없지만ㅡ 그래도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저 집에 15 년 가까이 산다는 건.
그들한테도 절대로 행복한 가정환경이 아니었을 테지 m
"그건 그렇고 걱정했어“
츠키히는 말한다.
사실은 2 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었겠지, 품에 안고 있던 목욕복을 이 자리에서 걸치면서.
“오빠, 계속 돌아오지 않으니까 말이지”
“앙?”
새삼스레 열려있던 현관문을 닫는 나.
신발도 벗는다.
“아니, 뭐, 무단외박은 나빴지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아니잖아, 이제 와서 뭘”
“그야 뭐, 봄방학 때 있었던 자아찾기 여행에 비하면 말이지”
“............”
봄방학 때의 일은 아라라기네 집 안에서 그런 걸로 되어있었지.
정정할 여지도 없다.
여동생들은 지금도 가끔 나를 [자아찾기군]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혹시나 귀신이라도 만난 게 아닐까 하고 츠키히와 둘이서 걱정했어”
“......귀신?”
딱 알아맞힌 그 말투에 한순간 흠칫했지만ㅡ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하고 당황해하는 자신을 추스르는
나.
“귀신이라니......뭐냐고, 그거. 네 녀석들은 중학생이 되어도 그런 걸 믿는 거야?”
“응-”
놀리는 것처럼 말해보았지만ㅡ 츠키히의 반응은 꽤 미묘했다. 작은 턱에 손가락을 대고 사색하는 얼굴을 한다.
“귀신이라기보다 괴물 고양이이지만”
“괴물ㅡ 고양이?”
나는ㅡ 츠키히의 말을 반복한다.
바보처럼 그저 반복한다.
괴물 고양이?
“응”
츠키히는 말한다.
농담을 말하는 얼굴이 아니다ㅡ 오히려 진지한.
올곧은.
정의 그 자체야, 라고 그녀가 큰소리치던 파이어시스터즈 참모담당의 얼굴이다.
“아직 소문 단계이니까 뭐라 말할 수 없지만ㅡ 사.람. 모.습.을. 한. 괴물. 고.양.이.가 마을 이곳저곳에서
사람을 덮치고 있데”
“............”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고양이.
그렇게 적당한데다 정확하고, 게다가 적격인 표현이 달리 있을까.
너무나도 애매하고.
너무나도 정확하다.
“사람을ㅡ 덮친다니. 무슨 말이야”
“응. 그러니까 자세히는 모르겠는데ㅡ 그 괴물고양이한테 만.져.지.면, 지친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쇠약해져서ㅡ 어쨌든 기절해버린대”
지친다거나 쇠약해진다는 둥, 너무나 종잡을 수 없는 설명이었지만ㅡ 미리 해답을 알고 있는 내가 볼 때에는
명백한 사실이다.
에너지 드레인.
“그건ㅡ 언제부터 퍼진 애기야?”
“어?”
“아니, 그러니까ㅡ 그 괴물고양이한테 사람이 처음 덮쳐졌다는 건 언제 있었던 애기야?”
“글쎄. 그리 자세한 애기는 듣지 못했는데ㅡ 아직 조사 중이지만 내가 있던 곳에 소문이 들려온 건 오늘
낮이었어. 그러니까 오빠가 걱정이 되어 그 때부터 귀신처럼 전화를 걸었는걸”
“............”
엄청나게 감이 좋네, 이 여동생.
뭐, 동시에 한 발 늦은 대응이었지만ㅡ 그 시점에 나는 이미 괴물고양이한테 덮쳐져서 한창 졸도 중이었으니까.
하지만ㅡ 그런가.
그랬었나.
어젯밤 나한테 하네카와의 양친을 건네주고ㅡ 방해고양이는 마을 사람들을 덮치고 있었나.
나나 하네카와의 양친 이외에도ㅡ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그걸로 납득했다.
어쩐지 오시노가 적극적인 것이 묘하다고 생각했다ㅡ 피해자가 하네카와 뿐이라면 밸런서(balancer),
중립주의인 저 녀석이 저렇게 능동적으로 일에 착수하지 않을 터이다.
피.해.자.가. 그. 외.에.도. 속.출.하.기.에.
아니.
고.양.이.한.테. 홀.린. 하.네.카.와. 자.신.이. 가.해.자.가. 되.었.기.에.ㅡ 저 전문가는 착수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어째서 방해고양이가ㅡ 사.람.을. 덮.치.지?
야행성 괴이가 낮에 활동하고 있는 시점에 이미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ㅡ 방해고양이는 그렇게
활동적으로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타입의 괴이가 아니라고, 오시노가 말하지 않았나?
......아니.
방해고양이 자신한테, 덮친다는 자각이 있다고 할 수도 없나ㅡ 괴이는 대개 인간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인간을 영양원, 피가 채워진 탱크로 여기는 흡혈귀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하고, 괴이 대부분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인간한테 괴이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있거나 말거나 똑같다ㅡ 그런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한 것처럼 팔을 잡아 뜯긴다거나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자각의 에너지 드레인
뿐이라면ㅡ [덮치고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 쪽에서 본 독선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
고양이귀 속옷 차림의 여자애를 보고 길을 가던 분별없는 사람이나 불량배가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지.
피해자는 그녀를 덮치려다 반대로 습격당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깜찍한 캐릭터를 방치하지 않겠지ㅡ 아니, 그건 일단 제쳐두고.
그보다.
진짜로 큰일이 되었잖아.
“오빠가 피해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 사태, 정의감의 화신, 파이어시스터즈로서 내버러둘 수 없어!
카렌도 지금 괴물고양이를 사냥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야”
“......아니”
뭐라 말해야 좋을까.
정의의 아군. 파이어시스터즈의 임무 중에는 요괴퇴치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
무슨 영계탐정이냐고. (주: 만화‘유유백서’에 나오는 영계탐정)
뭐, 보통 때라면 파이어시스터즈의 활동은 적당히 타이르는 정도로 내버려두지만ㅡ 이번에는 조금 위험하군.
여자 중학생의 담력시험과는 격이 다르다.
에너지 드레인에 당하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방해고양이한테 명백한 적대행동을 취하면ㅡ 나처럼 팔을
잡아 뜯겨질 수도 있다.
나처럼 불사성을 갖고 있지 않은 츠키히나 카렌은 그걸로 즉사이다.
카렌도 나름대로 한 가닥하는 솜씨이지만, 공수도로 고양이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고생하지 않는다ㅡ 어떤 냥코
선생이냐고. (주:냥코선생-소년만화‘이나캅페대장’의 주인공 ‘후다이 자에몬‘의 유도스승, 2 족보행하는
기묘한 얼룩고양이, 주인공한테 필살기’Cat 공중 3 회전‘을 가르쳐줌)
냥코 선생은 유도였나?
하지만 말린다고 해도 그만둘 여동생이 아니니까, 이 녀석들ㅡ 막으면 막을수록, 오히려 의욕을 내며 돌격하는
타입이다.
무모할 정도로 불타오른다.
파이어시스터즈.
“응? 오빠, 왜 그래? [아니]라니 뭐가?”
“......아니, 그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의아하게 내 얼굴을 엿보는 츠키히한테, 나는 마음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면서 마지못해 애기하기 시작했다.
“밤거리를 자전거로 돌아오는데도 이렇게 무서웠는데 그렇게 무서운 괴물고양이 괴담을 들으니, 완벽하게
우울해져서 겁쟁이인 나는 혼자서 잘 수 없어. 그러니까 오늘부터 한동안 카렌과 츠키히가 옆에서 같이 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정의를 위해서 꼭 출진해야 한다면 그야 포기할 수밖에 없네. 너희들만 믿고
있었는데”
“뭐? 우리들만 믿고 있었다고?”
걸려들었다.
바보같은 여동생이 걸려들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겁쟁이인 오빠가 불쌍하니까 카렌은 내가 설득시켜 wnwfrp! 괴물고양이 퇴치는
경찰아저씨한테 맡길게!”
“......고마워”
오빠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태에 대해, 전혀 내성이 없는 막내였다.
뭐.
그 말대로.
내가 하네카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시노의 방해를 하지 않는 것과 여동생들과 함께 자는 것
정도일지도 모른다.
/009

그래도 걱정이 남아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방해고양이의 에너지 드레인은 아무래도 치사성 스킬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특이한 능력이란 점은 분명하다ㅡ 또, 인간의 팔을
깨물기만 했는데 간단히 잡아 뜯어내는 엄청난 파워도 있다.
스피드나 점프력도 인간의 지혜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즉ㅡ 사태의 해결이 늦어지면,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오고, 사망자가 나온다.
누군가가 죽음으로.
하네카와가 죽는다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여동생들의 폭주는 내 몸을 바친 희생으로 인해 어떻게든 막았지만 나는 [경찰아저씨]나 혹은 [마을의 유지]의
행동까지 막을 수 없었다ㅡ 그런 권력이 일개 고교생한테 있겠냐고. 괴물고양이 퇴치, 괴물고양이 사냥, 그
정도는 아니라도 고양이를 구경하러 가는 녀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리스크는 늘어난다.
쇠약, 졸도가 그나마 낫다는 건 아니지만.
사망은ㅡ 위험하겠지.
왜냐하면 괴이라고 하는 상식을 초월한 현상을 빼놓으면ㅡ
하네카와 츠바사가 살인범이란 것이 된다.
보통ㅡ 살인범.
......절대로 사절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냐고.
무슨 농담이냐고.
참모라는 포지션에 있기에 보통 사람보다 소문에 민감한 성격이라고 해도, 고작 하루 날뛴 것 가지고 츠키히한테
그 존재가 알려진 방해고양이ㅡ 대체로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아니, 아마 아무 생각도 없겠지.
속옷 차림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그렇지만ㅡ 하네카와의 차후 일상생활을 요만큼도 고려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차후.
차후?
하지만 그건 어떤 일의 이후?
뭘 해야, 어떤 일의 이후가 되지?
닥치는 대로 에너지 드레인하기에, 방해고양이의 목적을ㅡ 알 수 없다.
방해고양이가 어떤 괴이인지, 오시노한테 좀더 자세하게 들었으면 그 부분도 확실해지겠지만ㅡ 아니, 내가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나.
그런 걸로 오시노를 걱정시켜선 안된다.
저 녀석을 방해하면 안된다.
괜찮아, 저렇게 무책임하고 미덥지 않은 경박한 아저씨이지만ㅡ 그래도 프로페셔널은 프로페셔널이다.
곧바로 해결해주겠지.
하네카와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기 전에ㅡ 곧바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다면 모든 게 끝난 후에 물어봐도 된다.
오시노한테ㅡ 아니면 하네카와한테
물어봐도 된다.
하지만, 어떠려나?
나한테 그걸 알 권리가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그걸 알고 싶다고 생각할까?
하네카와 집에 불법침입하고 저 집의 내부사정을 알게 되어ㅡ 저렇게 어지른 내가.
하네카와의 내면, 마음 속에 내딛어ㅡ 사생활에 흙투성이발로 비집고 들어가ㅡ 그래도 계속 하네카와의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떠려나.
이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것이 있잖아?
이 예시가 지금 상황에 들어맞는지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 동경하던 위인이나 존경하는 역사상 인물을 너무나
좋아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갖가지 전기를 파고들어보면 그 위인의 추문이나 불상사를 알게 되어, 그 때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건 누구한테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ㅡ 거기서 제멋대로 실망하는 건 좀 그렇잖아?
멋대로 좋아해서, 멋대로 싫어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동경하고, 멋대로 환멸하는 정도라면.
애초부터ㅡ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저 때.
역시 나는ㅡ 하네카와한테 깊게 관여하지 말았어야 했나.
붕대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ㅡ 그래도 말이지.
그건 즉, 보고 싶은 면만 본다는 거잖아.
좋아하고, 기대하고, 동경하고 싶을 뿐.
자신은 봄방학 때 저만큼 구해졌으면서ㅡ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고민할 따름이다.
결국 사고는 계속 겉돌기만 할 뿐이고 확실해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봄방학부터 헤아려 1 개월 이상, 나는
하네카와 츠바사와 같은 시간을 지내왔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데 사랑이라니, 어이없다.
웃긴다고.
비웃음당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츠키히와 나눈 저 대화가 괜스레 부끄러웠다.
완전히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지금도ㅡ 나는 하네카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말이지.
아이처럼, 인형처럼 여동생들과 같이 자면서 나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역시 지친 탓일까, 낮 동안 계속
잤는데도 그날 밤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런 식으로 4 월 30 일은 끝나고 5 월 1 일이 다가온다ㅡ 골든위크라고 해도 사립고등학교는 노동절(May Day,
5 월 1 일)에 쉬지 않는다.
5 월 1 일과 5 월 2 일은 평일이다.
월요일, 화요일.
등교해야 한다.
같이 자서 평소 때보다 쉽게 깨울 수 있었던 모양으로, 나는 카렌과 츠키히한테 곧바로 깨워져ㅡ 등교용의
마마체리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주:마마체리-장바구니 달린 아줌마용 자전거)
수업시작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도착해도 당연히 하네카와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결석이다.
우등생인 하네카와 츠바사의 무지각무결석조퇴, 정근상의 기록은 이 날, 어이없게 끊기고 말았다.
안 그래도 하네카와와 같이 주목도가 높은 학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양친이 의식불명으로 입원하고 있는 이상,
연락이 올 리도 없다) 결석한다는 건, 나 같은 낙제생이 문득 학교를 게으름피우는 것과 격이 달라서 담임선생이
걱정스럽게 누군가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냐고 HR 시간에 호소했다.
하지만 물론 그 호소는 교실을 갑자기 웅성거리게 했을 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히 나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ㅡ 이 시점에 반 친구 중에도 호기심이 강해서 눈치가 빠른 녀석이나 귀가 밝은
녀석이라면 괴물고양이의 소문을 들었을 테지만, 그것과 하네카와를 직접 연결 지어 생각한다는 건 무리이겠지.
저 괴물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그걸 하네카와라고 판단하는 것은ㅡ 기껏해야 나 정도이다.
아니, 나도 이제 무리일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ㅡ 내가 잘못 봤거나 뭔가 착각해버린 것이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이니까.
모두가 웅성거리는 교실 한쪽 구석에 ‘센죠가하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묘하게 시시한 듯이
담임선생의 호소를 듣고 있는 게 왠지 인상적이었다.
시시하다기보다 그건 뭐라 표현해야 할까ㅡ [역시나, 내 생각대로야. 저 애는 그런 애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동류를 꿰뚫어보는 듯한 무표정이었지만ㅡ 뭐, 그런 느낌으로.
5 월 1 일은, 그리고 5 월 2 일도 하네카와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2 일의 방과 후가 다가올 무렵 괴물고양이의 소문은 학교 안에 퍼져서ㅡ 목격담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ㅡ
방해고양이의 활약을 엿볼 수 있었다.
고작 3 일만에.
별다른 사건이 없는 평화스런 시골마을에 괴물고양이 소동은 유감스럽게도 봄방학의 흡혈귀 소동처럼 여자애들
사이에만 퍼진 소문이 아니라서ㅡ이대로는 과장이 아니고, 진짜 괴물고양이 사냥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파이어시스터즈도 언제까지나 내가 막아둘 수는 없다ㅡ 저 두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마을 안의 중학생들이
움직인다는 것과 같으니까 가능한 한 붙잡아두고 싶지만, 저 녀석들을 억누르는 것도 한도가 있다. 아니, 뭐,
설사 억누른다고 해도 여동생한테 계속 응석부린다고 하는 굴욕적인 환경에 내 정신 쪽이 견딜 수 없다는 문제도
생기지만.
어쨌거나.
다음날 5 월 3 일부터 다시금 시작되는 연휴를 앞두고 나는 다시 한 번 오시노가 사는 폐빌딩을 방문하기로
했다ㅡ 아니, 굳이 미련이 남아서 무언가를 도우려고 한다거나 혹은 뭔가 질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상황을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용건이다ㅡ 저번처럼 흡혈귀 유녀한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저번에 간 것이 4 월 29 일이기에 사실은 좀더 사이를 두어도 괜찮지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3 일 연휴는 휴일인
관계로 여동생들을 더욱더 엄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사정이 있어 미리 영양을 보급해두려는 생각이다. 요전에 나를
[충전]시키느라 저 녀석도 배가 고플 거란 초보적인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저녁이란 어중간한 시간대를 고른 것도 오히려 오시노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ㅡ 오시노가 방해고양이
찾기에 나섰을 시간대를 노린 것이다.
축시는 아니지만. (주:축시-2 시~2 시반)
악마를 만나는 때(황혼)ㅡ 라고 말하니까 말이지. (주:황혼(逢魔が時)-악마를 만나는 때로 불림)
하지만 골든위크 동안 나는 철저하게 감이 나빴다.
감이 나쁘고.
때가 안 좋았다.
폐빌딩 4 층, 흡혈귀 유녀를 찾아서 저번과 똑같은 교실을 먼저 들어가보면ㅡ 그곳에 흡혈귀 유녀는 없었고.
그리고 오시노 메메가 있었다.
그것도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너덜너덜하게 헤진 걸레와 같은 모습으로ㅡ 그곳에 있었다.
“어ㅡ 오시노!”
“응? 여어, 아라라기군ㅡ 기다리고 있었어”
오시노는 당황해서 달려간 나를 평소대로 아주 느긋하게 맞이했다. 위를 향한 채 쓰러진 건 단순히 유연체조의
과정으로 신체를 쭉 뻗기 위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머리를 천천히 긁으면서 몹시 귀찮은 듯이 몸을 일으킨다.
확실히 자세히 보면 너덜너덜하게 된 것은 알로하옷을 비롯해서 몸에 걸친 의류뿐이고, 신체 쪽은 아무렇지 않다.
찰과상이 몇 군데 눈에 띌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레짐작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시노 메메는.
명백히ㅡ 축 늘어져 초췌해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약해진 오시노를 보는 것은 봄방학 때 만난 이후, 처음이다.
“슬슬 올 거라고 생각했어ㅡ 그 전까지는 회복해두고 싶었는데. 영험있는 붕대는 요전번 아라라기군한테
사용했으니까 말이지ㅡ”
“오시노......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일단 오시노 옆까지 다가가서 착란한 상태로 질문한다.
“무슨 일이 있었다니? 아무 일도 없었어ㅡ 그저, 졌을 뿐이야”
오시노는 평소와 다름없이 유유한 태도로 내 질문에 대답한다.
허세나 강한 척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실을 애기할 뿐이다.
“져ㅡ 졌다니. 누구한테”
“당연하잖아. 방해고양이한테, 지ㅡ”
4 월 30 일 밤부터 헤아려 일수로 3 일.
그 동안 20 번 정도 싸워서ㅡ 20 번 정도 졌어.
히죽 웃고, 오시노는 말한다.
아니.
진짜로 히죽 웃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허세도 부리지 못한다.
오히려 약해보인다.
“그건ㅡ 다 진 거잖아”
“전부 졌어ㅡ 면목없네, 핫핫-”
오시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걸음걸이가 몹시 불안하다.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여간, 여고생의 속옷 차림은 아저씨한테 자극이 너무 심하네. 그쪽이 자꾸 신경쓰여서 싸움이 되질 않잖아”
“............”
그 대사는 틀림없이 본심을 숨기려는 오시노 특유의 농담이란 건 잘 알고 있지만ㅡ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여고생의 속옷에 넋이 나가, 싸울 수 없었다는 말 쪽이 훨씬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
왜냐하면ㅡ 오시노가 진다는 건.
봄방학 때,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한 흡혈귀조차 공기처럼 다뤘던 오시노가 20 번씩이나 연속해서 지다니ㅡ
질나쁜 농담이다.
악몽이다.
상대가 아는 사이인 하네카와니까 손대중해버렸다는 걸까ㅡ 아니면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방심했다고?
............
어느 쪽도 오시노답지 않다.
이 녀석은 그렇게 무른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시노는 상대가 아는 사이일 경우, 더 가차없이 상대하는 타입으로 생각된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본다면 말이지.
“정말. 아까 20 번째 싸울 때는 꽤 과격하게 빨.렸.다.고. 긁힌 상처가 치명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성가신
특성이야ㅡ 이렇게 기진맥진해서 시들어버린 중년 아저씨한테 정력을 쥐어짜내지 말라고”
“그ㅡ 그렇게까지 성가신 괴이냐고. 방해고양이는”
나는 전율을 느끼고 두려워하면서ㅡ 쭈뼛쭈뼛, 오시노한테 확인한다.
“전문가인 네 녀석조차 압도당할 정도의ㅡ”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오시노는 즉각 대답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전번에도 잠깐 말했지만 말이야, 아라라기군을 덮친 흡혈귀한테는 상대도 안돼ㅡ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저급 괴이야”
“어......?”
저급?
저급......이라고?
한순간, 그건 오시노가 내가 품었던 불안을 없애주기 위해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ㅡ 남을 안심시켜주는 말을
할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저급 괴이?
뭐라고?
“어이어이ㅡ 흡혈귀에 비해 격차가 있다고 말했지만 방해고양이가 저급 괴이라니, 네 녀석은 요전번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것까지 가르쳐주면, 자, 자신도 돕는다고 아라라기군이 말할지도
모르니까, 거기까지 설명하지 않았을 뿐ㅡ 전문가인 내 가치관으로 말한다면 아침식사 전에 처리할 수 있는
괴이야. 아니, 전문가가 나갈 필요도 없이 초보자도 지혜를 짜내어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괴이야”
“어ㅡ 그래도”
애기가 다르다.
요전번에 말하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자, 하고 말하려는 나를 오시노는 “물론” 하고 제지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봐주거나 하지 않았어. 진심으로 상대했지ㅡ 나중에 없던 것으로 친다고 해도 반장짱한테는
봄방학 때의 일로 빚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졌지, 하고 말하는 오시노.
분하다는 모습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분위기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분할 테고ㅡ 실패했다고 생각하겠지.
짧은 교제이고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ㅡ 그래도 그 정도는 전해진다.
오시노 메메는.
자신의 일에ㅡ 긍지를 갖고 있다.
“방해고양이는 피라미야”
다시금.
확인하는 것처럼 오시노는 말했다.
“애당초 방해고양이는 마네키네코와 정반대의 개념으로 나온 괴이여서ㅡ 굳이 말한다면 언어유희에서 생겨난
놀이와 같은 민간전승이야. 복을 부르는 마네키네코에 비해 방해를 부르는 방해고양이ㅡ 길바닥에서 죽은 척을
하고, 그걸 동정해서 가까이 온 인간한테 들러붙지. 인격이 바뀌는 계열의 괴물. 신체를 빼앗는 타입의 괴이.
그리고 가난뱅이신처럼 신체의 소유주를, 본체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려. 그런ㅡ 뭐, 말하자면 흔히 있는
전형적인 괴물이야” (주:마네키네코(招き猫)-복을 부르는 고양이 장식물, 한쪽 앞발 들고 사람을 부르는
시늉을 함)
“............”
사람의 양심이나 동정심을 이용하는 괴이.
그런 건 확실히 괴이 이야기로서 흔히 있는 애기이다ㅡ 거기에.
나.도. 경.험.한. 적.이.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리 신기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ㅡ 하지만 반장짱이야”
미리 알고 있었지만, 하고 오시노는 말했다.
“홀린 사람이 반장짱이란 점이, 이 경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예상 밖이었어. 본래 피래미에 지나지 않던
방해고양이를 거의 최강에 가깝게ㅡ 자칫 잘못하면 흡혈귀한테도 필적할만한 괴이로 격.상.시.켰.어”
“............”
“육체를 공유한다기보다 지식을 공유한다는 점이 안 좋아. 내가 사용하는 옛스런 괴이대책, 수법, 방법이
훌륭하게 전부 되받아쳐버려. 전문가만 아는 전문지식을 그녀는 갖고 있어. 저 아이는ㅡ 뭐든지 알고 있어”
“............”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사람을 습격하는 괴이라니,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다고”
아예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오시노는 말한다.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네, 반장짱은. 사람을 습격할 때 솜씨가 좋은 것도ㅡ 괴이가 할
만한 짓이 아니야”
“잠깐 기다려. 사람을 습격할 때 솜씨가 좋다고? 오시노, 그래선 마치 하네카와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덥치는 것
같잖아”
“뭐ㅡ 그러네. 방해고양이는 그런 괴이가 아닐 텐데ㅡ 하지만, 아라라기군. 내가 이렇게까지 고전한다는 건
그리 나쁜 전개가 아닐지도 몰라”
“어?”
“아니, 반대로 말하면 이 전개는 방해고양이 안에 반장짱이 남아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거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적어도, 방해고양이 안에 반장짱이 없고, 육체나 지식이 완전히 빼앗겼다면 이런 전개가 되지 않아.
아마 방해고양이 안에는 반장짱의 의식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어ㅡ 그렇기 때문에 힘겨워. 그리고 그건 지금으로선
최악의 정보인 동시에 안심할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해”
“어째서. 어디가 안심이 된다고 말하는 거야”
하네카와를 적으로 돌린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그 위협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ㅡ 어디가 안심이 된다고 하는 거지?
“아니, 그래도 완전히 빼앗겼다면 이제 끝이니까 말이지, 죽일 수밖에 없어”
시원스레.
오시노는 말했다.
죽일 수밖에 없다ㅡ 그리 말했다.
“반장짱의 의식이 남아있는 동안에 그 의식을 구조하지 않으면ㅡ 괴물고양이를 퇴치하지 않으면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아라라기군의 소중한 친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돼”

/010

오시노가 말하길 방해고양이란 지극히 흔한 괴이 이야기의 한 예ㅡ 라기보다 범례를 여기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길바닥에 흰 고양이가 죽어있다.
굶주리다 지쳐서 죽었는지 아니면 통행인한테 채였는지, 어쨌든, 옆으로 누운 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잡아뜯겨진 꼬리를 보면 그 전까지 애완고양이로서 소중하게 키워졌다고 하는, 그런 행복한 경력을 갖고 있지
않겠지.
그런 고양이를 불쌍하게 여겨ㅡ 길을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이 그 고양이를 손에 들고.
만져.
장소를 바꿔 묻고, 공양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합장해주었다ㅡ 는.
그 밤부터 선량한 그 남자의 기행이 시작된다.
사람이 변한 것처럼 거칠어져서.
폭력적이 되어.
술을 퍼마시고 사람을 때리는 대소동ㅡ 가까이 있는 사람은 친구, 가족을 불문하고 옆에 있기만 해도 축
늘어지는 상태이다.
저 고양이의 저주야, 하고 주위 사람들은 떤다.
실제로 고양이와 같은 행동거지도 보였다던가.
이래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단념한 주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기도사(祈禱師)를 불러 들러붙은 고양이를
쫓아내려고 하지만ㅡ
이제부터 결말.
방해고양이의 진면목.
괴이 이야기의 지극히 흔한 진실.
선.량.한. 그.한.테.는. 원.래. 고.양.이. 같.은. 건. 들.러.붙.지. 않.았.다.고. 한.다.ㅡ
“부조리한 결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깜짝 놀랄 만한 결말이라고 해야 하나, 이건 다소 교훈적인 괴이
이야기니까. 뭐, 동화에 자주 있는 설교성 가르침. 선량하기만 한 인간은 존재할 리가 없고 상냥함이란 결국
겉모습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 뒤쪽이 있어ㅡ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고 흰색이 있다면 검은색이 있어.
고양이는 그저 계기에 지나지 않지. 은혜 모르는 고양이란 애기뿐만 아니라ㅡ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에피소드야”
인간의 내면.
오시노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래도 어째서 고양이지, 하고 물은 나한테 그는 당연한 걸 설명하는 것처럼,
“그야 고양이(猫)는 내.숭.떠.는.(かぶる) 법이니까 말이지” (주:내숭떨다-猫をかぶる)
하고 말했다.
“반장짱도 내.숭.을. 떨.었.다.는 거겠지ㅡ 선량하고 공평하기만 한 인간은 없다는 거야. 오히려 계속 그렇게
해왔기에ㅡ 스트레스가 쌓인 거야”
새카맣게 말이지.
오시노는 말한다.
검정.
반장ㅡ 하네카와 츠바사의 암흑면.
“그래도 보통 때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가면이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반장짱은 방해고양이와 거의 일체화하고
있어. 고양이 쪽이 본체가 된다면 일체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동화(同化)이려나. 정말 강적이야. 이것도
강적이 아니라 무적이겠네”
더욱더 말을 뒤집어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오시노의 말투였지만, 그건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줄
뿐이었다. 이 녀석은 중대한 일일수록 가볍게 말한다.
경박하고ㅡ 가볍게.
“어쨌든 서둘러 매듭을 짓지 않으면 위험해. 안 그러면 최종적으로 반장짱한테는 애당초 고양이가 들러붙지
않았다ㅡ 같은 결말이 될 수도 있다고. 반장짱과 고양이가 완전히 융합되기 전에 손쓰지 않으면ㅡ”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았다.
최악의 경우, 오시노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래도ㅡ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니, 그러하면서.
전혀 없었다.
내가 하네카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그녀가 내면에 품고 있던 어두운 부분을 알면서도ㅡ 그 심원한 나락을 엿보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결국 그 후 오시노는 곧바로 나가버려ㅡ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농담일 뿐이고, 사실은 고양이와
싸우던 사이 잠깐 휴식하고 장비를 보충하러 폐빌딩에 들렀을 뿐인 모양이다ㅡ 나는 오늘 어째서인지 2 층에서
앉아있던 흡혈귀 유녀한테 피를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흡혈귀 유녀의 눈은.
역시 나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고 있다.
가볍게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ㅡ 분명 내가 나 자신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다음날ㅡ 5 월 3 일, 헌법기념일.
일본 헌법이 여행갔다던가 공시되었다던가 왠지 그런 날인 느낌이 들지만 잘 모른다. 어쨌거나 휴일.
결국, 유래가 어찌됐건 말이 어떻든 간에 이벤트데이는 서투르다.
아이답게 들뜨지 않는다면 어른스럽게 지내는 게 최고이다.
하지만 이 날, 5 월 3 일, 나는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여동생들의 눈을 피해 몰래 외출하기로 했다.
파이어시스터즈가 괴물고양이 퇴치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일단 보류해도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다.
왜냐하면 어제 오시노가 애기한 바에 의하면ㅡ 그리고 츠키히가 파이어시스터즈의 정보망을 구사해서 입수한
소문에 따르면, 확실히 방해고양이는 대량의 피해자를 에너지 드레인이란 형태로 내고 있지만 실은 그 피해가
경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식을 잃는 레벨로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뜨리지만ㅡ 그래도 입원이 필요하게 되는 증상이 아니란 점.
드래곤볼 최종회 부근의 베지터식으로 말한다면 [마음껏 달린 후 지친 상태 같은 것]이겠지.
특별히 피해가 컸던 것은 하네카와의 양친과 팔이 잡아 뜯겨진다고 하는 물리적 공격을 받은 나 정도로ㅡ 즉.
지.치.게. 만.든.다.ㅡ 정도이다.
흡혈귀와는 그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ㅡ 아니, 그 부분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컨트롤되고 있다. 그 의도가
반영되어, 에너지 드레인은 굳이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행해지고 있다.
상시발동형의 특성이면서ㅡ 혹은 그렇기에 손대중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사람을 덮치고 있다는 오시노의 추측이 맞다면ㅡ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손을
쓰고 있다.
하.네.카.와.의. 의.식.이. 남.아.있.다.ㅡ
그건 그러한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피해가 심했던 3 사람은, 왜 피해가 컸는지 신경쓰이게 되지만.
하네카와의 양친은 왠지 모르게 안다고 해도.
나는......
너무 깊게 고찰하면 기죽게 만드는 사실을 이끌어낼 것 같기에 사고를 굳이 정지하고 싶다.
뭐, 그런 고로ㅡ 적어도 밤이 아니고 낮이라면 파이어시스터즈가 어떻게 활동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안될 거라고
나는 판단했다. 죽을 걱정은 없다. 차라리 방해고양이가, 너무 건강해서 탈인 저 두 사람을 에너지 드레인해주길
바랄 정도이다ㅡ 이렇게 말하는 건 물론 농담이다.
어쨌거나.
내가 향한 곳은ㅡ 학교이다.
사립 나오에츠 고등학교.
내가 다니는 학교이다ㅡ 따로 용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아무런 용무도 없다.
보통 통상수업이 있을 때도 빼먹는 학교에 일부러 경축일에 온 것이니까, 내가 한 일이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와버린 건 어쩔 수 없다.
뭐, 그렇다고 해도 시간적으로는 꽤 대담한 지각이지만.
부활동에 힘쓰는 학생들을 위해 교문은 열려있고 학교건물도 문이 잠겨있지 않다.
그래서 하네카와의 집에 비하면 침입이 용이했다ㅡ 아니, 이렇게 말하면 마치 불법침입이 취미인 남자 같아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달리 갈만한 곳도 없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 교실로 향한다.
역시 교실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다ㅡ 고 생각했는데 뒤쪽 문이 열려 있었다.
어이어이, 부주의하군.
그리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교실 문단속은 부반장인 내 역할이었다.
평소 반장인 하네카와한테 맡기니까 무심코 잊어버린 거겠지ㅡ 이것, 참.
나는 하네카와가 없으면 문단속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건가.
풀이 죽는군.
......아니, 애당초 나는 그런 걸로 풀죽을 인간이 아니었을 터이다.
집에서도 걸핏하면 자물쇠를 열어놓고 나가버리는 녀석이었다ㅡ 물론 이 마을의 치안이 좋은 걸 알기에 그랬던
거지만.
어쨌든 그런 일에는 느슨해서 대충대충 넘기는 녀석이었다.
그럴 텐데ㅡ 적어도 오늘의 나는 문단속을 하지 않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말이지.
결국 지금의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하.네.카.와.로.부.터. 시.작.되.었.군.ㅡ 봄방학 이전에 하네카와와 만날
때까지 자신이 어떤 행동원리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면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이다.
다시 만들어진 느낌이 든다.
그저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만들어졌다ㅡ 하지만 그건 잘 생각해보면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군ㅡ
어째서 나는 그걸 기뻐하면서 받아들인 거지.
수수께끼이다.
“............”
당연한 거지만 교실 안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들어가서 교탁의 뒤쪽을 지나 자리에 앉는다ㅡ 자신의 자리가 아니고 하네카와의 자리에 앉는다.
평소 하네카와가 앉고 있는 자리.
수업 중, 왠지 모르게 찾게 되는 자리.
뭐ㅡ 이런 식으로 하네카와의 시점에서 칠판을 본다고 해도 하네카와의 기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아, 하고 나는 탄식하면서 털썩 주저앉는 것처럼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책상 위에 푹 엎드린다.
텐션이 전혀 오르지 않는다.
별로 기분전환하러 학교에 발을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있으면 우울함은 늘어가기만 한다.
골든위크 시작부터 헤아려 4 일 이상 공석이 되어있는 책상이다ㅡ 하네카와의 온기가 남아있을 리도 없고.
하지만 뭐, 나는 단지 텐션만 내려간 무기력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이러고 있으면 마치 아무도 없는 교실에
숨어들어 하네카와가 평소 사용하는 책상에 뺨을 비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군.
실은 거유인 하네카와씨의 슴가님(胸)께서 언제나 이 책상에 눌린다고 생각하면, 이 구도는 좋아하는 여자애의
리코더를 핥는 초등학생에 가깝다.
다른 사람한테 들킨다면 내 인생이 여러 가지로 끝나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당연한 거지만 낙서나 조각이
전혀 없는 번쩍번쩍한 신품 상태인 하네카와의 책상을 반장난으로 혀를 뻗어 가볍게 핥아보면ㅡ
“............읏”
ㅡ 들켜버렸다.
완전히 보여지고 있다.
약간 떨어진 위치에 내가 사용하던 자리에 앉아ㅡ 이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다.
눈동자이며.
그건 고양이눈이었다.
“......네 녀석은 한도란 걸 모르는 변태다냥”
거기서 왠지 모르게 떨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것은 누구일까ㅡ 대체 어느 새,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검은
속옷 차림의ㅡ 백발의 고양이.
아니.
방해고양이였다.
“무섭다냥......괴이보다 무섭다냥. 네 녀석은 지금 여자애의 책상을 낼름낼름 핥고 흥분하고 있다냥......”
“아......아니, 달라!”
다르지 않다.
정답이었다.
괴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그, 그런 것보다 네 녀석, 어디로 어떻게 이 교실에 들어온 거야ㅡ”
“그런 것보다라니냥. 인간, 네 녀석이 주인님의 책상을 핥고 있던 것보다 중요한 사건이 이 세상에 있는거냥?”
“뭔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 나는 네 녀석이 뭘 말하던, 재판에서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그런
것보다도다! 그런 것보다 네 녀석, 어디로 어떻게 이 교실에 들어온 거야!”
필사적으로 지껄여대는 나.
앞으로의 인생이 걸려있기에 정말로 필사적이다.
“냐하하하. 바보냥, 네 녀석은. 들키지 않게 몰래 살금살금 다가가는 건 고양이의 전매특허다냥ㅡ 네 녀석의
변태짓거리를 제대로 구경했다냥”
“............”
뭐.
괴이한테 ‘어째서’ 나 ‘어떻게’ 라고 그런 식으로 이것저것을 확인해도 어쩔 수 없고 허무할 뿐인가......
나는 의자에서 일어설ㅡ 기운도 없다.
갑자기 조우.
방해고양이와 갑자기 조우.
하지만ㅡ 왠지 이렇게 장면으로 돌입하는 방식이 너무나 갑작스럽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전환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
싸울 분위기가 아니다.
그리고ㅡ 애당초 나 혼자 이 고양이를 당해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응전하기는커녕 저항해도 소용없다.
나는 고작 냉정한 척을 하는 게 다이다. 오시노라면 몰라도ㅡ 아니, 오시노라도 상대하기 벅찰 정도이다.
적어도 이곳에 방해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어젯밤 나와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도 오시노는 바람직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자, 대체 하룻밤 사이에.
오시노는 몇 번 진 걸까ㅡ
“응? 뭐냥. 적의가 없어보이는 낯짝이다냥ㅡ 인간”
“어차피 나는 네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ㅡ 고양이. 그리고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건ㅡ 아니잖아?”
“자, 어떨까냥”
방해고양이는 웃는다.
하네카와의 얼굴로.
하네카와답지 않게ㅡ 웃는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ㅡ 하네카와 자신이다.
하네카와 츠바사의 암흑면.
“내 에너지 드레인은 스킬이 아니고 캐릭터 설정이니까냥ㅡ만지기만 해도 사람한테 해가 된다는 설정.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다냥. 손대중은 할 수 있어도 조절할 수 없다냥. 죽일 생각은 없어도 무심코
죽여버린다는 일도 있을 수 있다냥”
“......그래도 만나자마자 물고 늘어지거나 할퀴지 않으니 다행이지. 그런 짓을 당하면 견딜 수 없으니까”
왼쪽 어깨를 감싸는 시늉을 해보이며, 나는 말했다.
이건 허세일 뿐이다.
허세도 적당히 부려야 한다.
약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ㅡ 강한 척하고 있다.
“흥. 흡혈귀냥”
고양이는 말한다.
“뭐, 네 녀석의 변명에 덧붙이자면, 냐는 본래 맞서 싸우지도 못하는 훌륭한 괴이다냥ㅡ 하지만 주인님 덕분에,
주인님의 전술과 전략 덕택에 프로페셔널의 전문가도 압도할만한 존재력을 얻을 수 있었다냥. 고마운 일이다냥”
“............”
“냐는 은혜를 갚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타입의 괴이이지만ㅡ 이번만큼은 은혜갚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마운 애기다냥”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타입의 괴이ㅡ 인가.
유쾌한 표현이지만 확실히 그렇군.
“고양이란 건 의외로 의리깊은 생물이라고 나도 들은 적이 있어. 나베시마(鍋島)의 고양이던가ㅡ 주인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요괴까지 되었잖아. 개는 사람을 잘 따르고 고양이는 집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저건 이상하다
고”
“이상하냥(怪しい). 요괴(妖怪)가 말이냥”
냐하하하하, 하고 웃는 방해고양이.
으-음.
내 하네카와는 그렇게 시시한 말장난으로 웃거나 하지 않아.
시시한 개그를 말하면 설교당할지도 모른다.
하네카와의 뒷면이네.
뒷면ㅡ 암흑면.
“뭐, 서로 에너지 드레인을 특성으로 가졌다고 해도ㅡ 방해고양이와 흡혈귀는 전혀 다를 테지만”
나는 말한다. 이건 오시노의 말을 인용한 거지만.
“흡혈귀의 에너지 드레인은 식사이고ㅡ 방해고양이의 에너지 드레인은 저주”
“흠. 뭐, 그렇다냥”
“다만 이해가 안되는 건 네 녀석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덮친다는 점이야. 타입으로 애기한다면 방해고양이는
애당초 사람을 덮치는 괴이가 아니겠지?”
“............”
고양이는ㅡ 입다물었다.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니, 애당초 대답하기 싫은 건 대답하지 않고 말하기 싫은 건 말하지 않으니 대화가 제대로 성립되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ㅡ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말은 통하지만 의미가 통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뭐, 남들과 잡담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ㅡ 나는 그것만큼은 꼭 듣고 싶었다ㅡ 모처럼
우연이라도 이런 교실에서 고양이와 만났으니까.
......기다려.
이거, 우연인 건가?
하네카와의 집 옆에서 만난 것이랑 이 교실에서 만난 것은 완전히 의미가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ㅡ
“어이, 고양이. 네 녀석ㅡ”
“냐답지 않은 짓을 한다냥, 냐는”
그러면 방해고양이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너무도 귀찮은 듯이 다리를 꼬고.
이런 경우에 생각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하네카와, 다리, 엄청 기네.
스커트를 엿보지 않아도 맨다리가 발밑까지 드러나있으니까 그 길이를 생생히 알 수 있다. 나보다 키가 작은
주제에 나보다 길잖아?
구석구석 핥고-.
아, 아니, 달라, 다르다고.
훑어보는 것처럼 보고-, 이다. (주: 구석구석 핥고(舐め回して), 훑어보고(舐める), 한자가 똑같다)
......변명이 되질 않잖아?
“말하자면 지금 냐는 방해고양이라는 캐릭터 설정을 무시하고 있다냥ㅡ 캐릭터붕괴냥. 아니, 설정대로 하면
설정대로이지만 그래도 특이하다는 건 틀림없다냥”
하지만 특이한 건 내가 아니라.
주인님이다냥ㅡ.
방해고양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ㅡ 확실히 오시노가 비슷한 말을 했었나.
“나답지 않다ㅡ 냥”
“......”
“뭘 그러냥. 단지 스트레스 해소였다냥”
“어?”
“사람을 습격한 이유. 닥치는 대로 무차별적으로 에너지 드레인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가르쳐준
거다냥ㅡ 단지 스트레스 해소. 핑퐁 대쉬라던가! 벽에 낙서한다거나! 그런 것과 마찬가지!”
말하자면.
마구잡이로 한.
스트레스 발산이다냥ㅡ.
방해고양이는ㅡ 뺨이 찢어질만큼 웃으면서 그렇게 애기했다.
뭐?
뭐.라.고?
“스트레스의......발산이라고? 그거......어? 잠깐......무슨 의미야?”
“뭐고 자시고 말 그대로의 의미다냥ㅡ 너, 저 집, 안을 들여다봤지?”
“저 집이라니ㅡ”
“주인님의 집이다냥. 알고 있잖냥? 그리고 알고 있겠지ㅡ 고양이는 코도 제법 민감하다냥. 갈아입으러
돌아와보니 집안이 네 냄새로 가득 찼다냥”
냐아, 스커트 변태다냥ㅡ 하고, 고양이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그런 걸 말한다.
갈아입으러 돌아왔다?
아아, 확실히 똑같은 검은색이어도 지금 방해고양이가 몸에 걸친 속옷은 4 월 29 일, 정확히는 30 일에 만났을
때에 착용하고 있던 속옷과 형태가 다르다.
얼마나 혼란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런 것에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부끄럽다.
그런가, 과연 2 일이나 3 일도 똑같은 속옷인 채 지냈다고 할 수는 없군ㅡ 아니, 고양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할 리는 없으니까 그건 방대하게 남아있는 여고생 하네카와의 의식일까.
하네카와답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고양이 안에는 아직 그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ㅡ 나는 안심했다.
옷차림에 신경쓴다는 건ㅡ 극히 평범한 여자애다운 감성이다.
뒤늦긴 했지만ㅡ 아직 때를 놓친 것은 아니다.
아직 하네카와는 돌려놓을 수 있다.
막대하게 남아있는 의식.
그녀의 무의식.
......아니,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어젯밤 동안 오시노와 싸운 끝에, 오시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ㅡ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지만ㅡ 지금 고양이의 분위기를 보는 한, 그렇지도 않다.
어째서일까
아니, 그런 거다.
그래.
29 일과 다른 것은 속옷 형태만이 아니다.
악마도 저리 가라할 폭력적인ㅡ 고양이라고 하기보다 호량이와 같았던 방해고양이의 분위기에서 적의가 사라져ㅡ
누그러진 느낌이 든다.
............
스트레스의ㅡ 발산?
“저런 집에서, 저런 가정에서, 15 년간 주인님은 지내왔다냥ㅡ 그게 얼마나 큰 압력이 되어 주인님을
짓눌렀는지, 몰아세웠는지 상상이 되냥? 그게 얼마나 압박이 되었는지 모를 리가 없겠지. 냐는 그걸 근처의
선량한 시민한테 못된 장난을 치는 걸로 발산하고 있다냥. 무관계한 타인한테 폐를 끼치면서 풀고 있다냥. 그것
뿐이다냥ㅡ 이건 방해냐 저주, 그런 걸 도외시하는 거다냥”
“......도외시라니ㅡ”
너답지ㅡ 않아?
괴이가 그런 걸 하나?
괴이는 항상 설정에 충실해서ㅡ 흡혈귀가 그랬던 것처럼, 설정을 무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텐데ㅡ
무리. 도리를 억누르기 위한ㅡ 무리.
“한 가지 가르쳐준다면 말이냥ㅡ 저 두 사람”
고양이는 말한다.
“냐는 빙의 계열의 괴이로 주인님의 신체를 빼앗고 있다냥ㅡ 즉 뇌수를 빼앗고 있다냥. 그러니까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냥”
고양이는 말한다.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그렇기에 성가시다고 오시노가 말했던 점이다.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주인님이 어떤 식으로 저 가정에서 15 년 동안 지내왔는지ㅡ 알고 있다냥”
“............”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만ㅡ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지식뿐이다냥. 그 [알고 있는 것]에 주인님이 일일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냥. 주인님한테 일기를 쓰는 습관은 없었던 모양이고ㅡ 가끔 봄방학 숙제로 다이어리를 쓰는 일은 있었지만
늘 도장으로 찍은 것처럼 [오늘은 재밌었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냥”
“즐거웠다ㅡ 라니”
뭐가 즐거웠다는 거지.
“아아. 냐도 그렇게 생각한다냥ㅡ 내 지능은 기본적으로 고양이 수준이다냥. 그런 캐릭터 설정이니까 말이지ㅡ
하지만 그런 냐도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냥. 그러니까ㅡ 주인님의 스트레스 발산에 협력해준다는 거다냥”
“하지만......그게 이유라면 꼭 무관계한 사람을 덮치지 않아도ㅡ”
“어차피 냐는 그런 방법밖에 모른다냥ㅡ”
나쁜 짓은 즐거우니까 말이다냥.
생판 모르는 타인이 곤란해하니까 즐겁다냥.
“구실이나 핑계가 아니다냥ㅡ 적어도 원한을 품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잖냥? 네 녀석의 팔을 물어 뜯은 거에
비하면”
“......그렇게 생각해”
“그치? 즉, 내가 하고 있는 건 효과적이라는 거다냥”
그런 거니까 안심해도 좋다냥, 하고 고양이는 말한다.
“앞으로 5 백명만 덮치면ㅡ 주인님의 스트레스 발산은 끝난다냥. 그러면 냐란 괴이는 역할을 다하고, 은혜 갚는
것을 끝내서 소멸한다냥ㅡ 뭐, 내 행동범위는 지능과 똑같아서 고양이와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5 백명이라고
해도 간단하지 않지만. 그래도 1 개월 정도면 끝난다냥”
“......1 개월”
“그렇다냥. 그러니까 쓸데없이 방해하지 말라고 저 알로하 아저씨한테 전해둬. 잘 모르겠지만 저 알로하 자식,
주인님을 돕고 싶겠지? 그렇다면 그건 냐한테 맡겨둬”
오시노는ㅡ 아마 그런 동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돕고 싶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저 녀석이 가진 독특한 프로의식을 빼놓더라도ㅡ 누군가가 누구한테 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저 녀석은 전혀
믿지 않으니까.
사람은.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질 뿐ㅡ 그게 저 녀석의 인간으로서의 철학이다.
......하지만 그런 걸 설명해도 이 고양이는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을 갖고 잇지 않겠지.
사람과 괴이는ㅡ 서로 이해할 수 없다.
“말하자면 냐는 주인님의 스트레스가 구체화되어 나타난 인격이란 괴이다냥. 즉 신종이다냥. 이른바 범례에
나오는 방해고양이와 전혀 다르다냥ㅡ 전문가의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냥. 쫓아내거나 몰아내는 거, 뿌리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냥. 저 녀석 탓에 효율이 떨어져서 답답하니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건
그만두라고 가르쳐줘라냥”
“......하네카와를 네 녀석한테 맡기라니”
오시노의 성격에 대한 것은 입다문 채, 나는 묻는다.
“어째서 네 녀석이 그렇게까지 하는데. 네 녀석은 어차피 하네카와한테 들러붙은 악령일 뿐이잖아. 하네카와를
위해서 뭔가 자진해서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아까부터 몇 번씩이나 애기했잖냥? 냐답지 않게 은혜를 갚으려고ㅡ”
히죽이죽 웃으면서.
방해고양이는ㅡ 자리를 일어섰다.
아니, 의자 위에서 책상 위로 이동했다.
내 시선 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네발로 서서 기지개를 켜는 몸짓을 취한다.
“ㅡ 하지만 그렇게 말한 건 거짓말이다냥”
그리고.
기지개를 끝내고ㅡ 그리 덧붙였다.
“은혜를 모르는 고양이라는 내 설정까지는 쉽사리 무시할 수 없다냥. 괴이라는 건 그런 것이니까ㅡ 흡혈귀가
피를 빨지 않고 살 수 없는 것과 똑같다냥. 그러니까 이유는 은혜를 갚는 게 아니다냥ㅡ 애당초 나는 지식을 얻은
것 말고는, 주인님한테 은혜를 느낄 이유가 없다냥”
“......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길바닥에서 차에 치여 죽어있는 것을ㅡ 하네카와가 묻어줬잖아. 네 녀석은 그 동정심이나 상냥함을 이용한 게
아니었나ㅡ
“다르다냥, 그게ㅡ 확실히 현상으로는 그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냥. 주인님은 길바닥에 옆으로 누워있는
냐를 주워올려, 햇볕이 잘드는 장소까지 이동해 냐를 묻었다. 그 인식 자체는 틀림없다냥. 네 녀석이 옆에서
봤던 대로다냥ㅡ 참고로, 이 때, 네 녀석은 주인님 옆에서 구멍 파는 것을 돕기만 하고, 내 사체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방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냥”
뭐, 사체에 손대는 건 용기가 있으니까 그런 거다냥, 왠지 저주받을 것 같아서, 뭐, 실제로 저주받았지만ㅡ
하고 말하는 고양이.
“아아......뭐, 내가 겁쟁이란 건 인정할게. 그렇기에 그런 것을 태연하게 해치우는 하네카와는 굉장하다는
애기로ㅡ 그 결과, 저주받았으니 안타까운 애기지만. 하네카와의 상냥함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킨 거겠
지”
“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냥”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해도, 만약 내가 저 때 하네카와를 멈췄다면ㅡ 그 정도는 아니라도 겁먹지 않고
내 쪽이 고양이의 사체를 안았다면 이런 사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후회섞인 내 말을 듣고 나서,
방해고양이는 말했다.
“주.인.님.은.ㅡ 저. 때, 나.를.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냥”
“주인님은 나를 전혀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냥ㅡ 거기에는 상냥함이 요만큼도 없었다냥. 그 상냥함을 파고들어
이용하는 괴이인 냐는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냥”
냐, 하고.
어미를 덧붙이는 것처럼 말하는 방해고양이ㅡ 그것도 또한 설정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모에요소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확실히 불타오르지만.
그래도 그 요소로 인해 들춰진 하네카와의 내면은ㅡ 하네카와의 암흑면은.
너무도 검고.
너무도 거무칙칙하고.
너무도 검푸르고
너무도ㅡ 그로테스크하다.
“주인님은 길바닥에 죽어있는 나를 마치 정해져있는 일(routine work)을 하는 것처럼 공양했다냥ㅡ 완전히
무감정이다냥. 냐를 전혀 처량하게 여기지 않았다냥. 즉, 애당초 내가 파고들만한 틈새는 없었다냥ㅡ”
“아니, 그래도ㅡ 하네카와는”
“보.통. 여.자.애.처.럼. 되.고. 싶.다.는 게 주인님의 유일한 바램이다냥”
고양이는 말한다.
“차라리 소원이라고 말해야 하냐ㅡ 이 경우, 주인님이 생각하는 보통이란 건 윤리적인 거다냥. 올바르게 있고
싶다는 것이 주인님의 사상이다냥. 길가에 죽어있는 고양이를 보면 묻어준다ㅡ 뭐, 이건 확실히 올바른 것이다냥.
법칙이라고 말해도 좋다냥. 방정식이라고 해도 좋다냥. 그렇기에 주인님은 그 법칙과 방정식에 따랐다ㅡ
그뿐이다냥”
“............”
고양이의 말에 담긴 그 박력과 무게에ㅡ 나는 전혀 반론할 수 없다.
아니.
그뿐 아니라 반론의 여지가 없다.
엄격하게 규율이나 룰을 중시하는 하네카와 츠바사의 이질적인 면은 나도 계속 느꼈기 때문이다ㅡ 그 가치관은.
그 가치관은 확실히 말해 정상이 아니다.
고양이는 정해져있는 일(routine work), 법칙, 방정식이란 말을 사용하지만ㅡ 내가 굳이 말하자면 그건 계.
율.이다.
특수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길을 벗어난 녀석이라고 여겨지기 싫다는 사소한 고집에서 비롯된 계율의
준수ㅡ 이지만.
“......[보통]이라면 그런 계율은 준수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행위라는 걸 알고
있어도, 대개 사람들은 길에 쓰러져 죽어있는 고양이를 묻어주자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생각할지도 모르지만ㅡ
실행하지 않아. 전차에서 노인한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부끄러워서 할 수 없어”
할 수 있다고 해도 파이어시스터즈가 하고 있는 정의의 아군놀이까지다ㅡ 기껏해야 저런 놀이가 다이다.
그리고 저 여동생들도 고등학생이 될 쯤에는 그런 놀이에서 졸업하겠지.
저 녀석들도 언젠가.
보통 여자애가 된다.
하네카와는 절대로 될 수 없는ㅡ 보통 여자애이다.
“심정적이나 정신적으로도ㅡ 가능할 리 없어. 그런데 하네카와는 그걸 태연하게 해내고 있어”
“그렇다냥. 해내고 있다냥ㅡ 무감정하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기계처럼 윤리를 관철한다냥. ......
수많은 공양을 받아온 냐한테도 그건 아주 신기하다냥. 그.러.니.까.ㅡ 구.해.주.고. 싶.어.졌.다.냥”
말하자면 변덕이다냥.
고양이답지?
방해고양이는 마네키네코처럼 왼손을 들고ㅡ 그렇게 익살을 떤다. (주:마네키네코(招き猫)-복을 부르는 고양이
장식물, 한쪽 앞발 들고 사람을 부르는 시늉을 함)
“자, 제대로 전해달라냥ㅡ 저 알로하 녀석한테 고양이의 못된 장난 정도는 못본 척 해달라고 해줘. 동물학대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냥ㅡ 이쪽은 못본 척 해주고 있으니까”
“......무슨 의미냐고”
“알고 있겠지? 내가ㅡ 아니, 주인님이 진짜로 해를 끼칠 작정이었다면 저런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 죽였을
거다냥. 아는 사이이니까 봐주지 않고 싸울 수 있다는 거다냥ㅡ 네 녀석은......, 뭐,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말하고, 책상에서 뿅하고 뛰어내리는 고양이ㅡ 고작 50cm 정도의 높이인데 도중에 빙글 회전해보였다.
“뭐, 네 녀석이 정답이다냥. 주인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냥ㅡ 굳이 죽고 싶진
않겠지?”
발소리도 없이 나한테 등을 향하고 방해고양이는 문 쪽으로 걸어간다ㅡ 고양이는 발바닥에 부드러운 부분이
있으니까 발소리를 내지 않지만, 별로 하네카와의 발바닥은 그런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것도.
설정이란ㅡ 건가.
이론도 이치도 물리도 윤리도 초월한ㅡ 캐릭터 설정.
터무니없는 장화를 신은 고양이도 있는 법이다.
“안냥. 네 녀석은 왠지......힘내서 행복하게 살아라냥, 인간”
그렇게 말하고.
방해고양이는 교실에서 복도로 나가려ㅡ
“기다려!
는 것을.
나는 무심코 멈춰 세웠다.
앙, 하고 고양이는 고개만 되돌아본다ㅡ 글자 그대로 돌아보는 미인이다. (주: 돌아보는 미인(見返り美人)-
히시가와 모노로부의 친필화, 에도시대 그림으로 동경국립박물관 소장품)
아니,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의아해하는 표정이라서 어울리지 않지만
“하네카와의 스트레스 발산이 네 녀석의 목적이라고 한다면ㅡ 그런 건 무리야”
“아? 어째서냥?”
“왜냐하면ㅡ 그 스트레스의 원인은 하네카와의 양친한테 있겠지? 설령 스트레스가 전부 발산된다고 해도 그런 건
집에 돌아가면 다시 쌓일 뿐이야”
지금은 입원해 있지만ㅡ 저 두 사람도 언제까지나 입원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딸이 있을 자리가 없는 저 집으로ㅡ 그들은 돌아온다.
“5 백명이나 되는 무관계한 타인을 덮치거나 1 개월 동안 계속 스트레스 발산을 해도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이야”
“흐응. 아아, 그야 그렇다냥. 그렇다면”
아무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으로, 고양이는 내 지적을 받고ㅡ 봄방학.
저 흡혈귀가 나한테 자주 보인 것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ㅡ 처참한 미소를 띄웠다.
“두 번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이.걸.로. 혼내줄 뿐이다냥”
그리고ㅡ 오른손의 손톱을 나한테 과시한다.
사람이라도 죽일 것 같은.
사람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은 날카로운 5 개의 손톱을.
“이번에는 에너지 드레인만으로 끝내지 않는다냥. 가정 내 폭력에는 가정 내 폭력으로 응할 뿐이다냥ㅡ 그것이
주인님의 소망이라면”
“그런 거!”
그런 걸ㅡ 하네카와가 바랄까!
나는 의자를 차버릴 듯이 일어서서ㅡ 방해고양이한테 다가간다.
아니, 다가가려고 한다.
하지만ㅡ 그 어깨를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ㅡ 간신히 단념했다.
“......그래, 그게 정답이다냥. 만진 순간, 방해가 생긴다냥ㅡ 그러니까 방해고양이. 가까이 오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라냥. 손가락 하나 대지 마라냥. 연관되지 않는 게 정답이다냥ㅡ 나한테도 그렇고 아마
주인님한테도다냥”
“고양이ㅡ 네 녀석은”
“안냥. 네 녀석은 행복하게 지내라냥”
같은 말을 반복하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방해고양이는 떠났다ㅡ 이제 나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
교실에 한 명 남겨두고.
나는 태연하게 하네카와의 자리로 돌아와 일어설 때 쓰러져버린 의자를 세워 다시 한 번 자리에 앉는다.
고양이가 나타나기 전과 마찬가지로ㅡ 책상에 상반신 체중을 기댄다.
방해고양이를 만진 것도 아닌데.
푹ㅡ 지쳤다.
“아아......”
중얼거린다.
힘없이.
교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해ㅡ 아니, 설령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고 똑같은 것을
중얼거렸겠지.
중얼거리지 않고서 견딜 수 없었다.
넘칠 것 같은 이 생각은.
“안돼. 역시 나는ㅡ 하네카와를 좋아해”
말로 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형태로 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만질 수 없어”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
이렇게 책상에 뺨을 비비는 것이 고작이다.
봄방학 때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니다.
그녀한테 구해져서, 은혜를 입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랑스러워서, 하물며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다.
저 녀석이 좋다.
좋아하나-, 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네-, 라고 느껴서.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츠키히가 말한 대로야”
그리고.
나는 조용하게 계속 중얼거린다.
그야말로 감정이 없이ㅡ 생각한 대로.
“저 녀석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만ㅡ 그래도 이 기분은 사랑이 아니로군”
계속 중얼거리면서ㅡ 결의를.
한 가지 결의를 새롭게 한다.
그건 아마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것이었다.
정해져 있던 것을ㅡ 나는 이제 와서 눈치챘다.
나의 하네카와를 향한 마음은 점점 심해져서ㅡ
이미 사랑을 뛰어넘었다.
일생 동안 함께 있고 싶을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걸”

(주:나베시마 고양이 소동-예로부터 현재의 사가현부터 나가사키현에 걸친 지역 '히젠노쿠니'는 류우조우지라는


다이묘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번주가 잇달아 빨리 죽어버려, 후계자가 너무 어렸기에, 당시 류우조우지의
주군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류우조우지가의 가신인 나베시마가에게 히젠노쿠니를 통치하라고 했다. 그리고
후계자인 류우조우지 타카후키를 명목상의 번주로 삼았다. 부하에게 다이묘의 지위를 빼앗긴 류우조우지
타카후키는 에도에서 병사했다고도,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 세였다. 여기까지가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나베시마가가 사가번을 통치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난 후의 일이다. 류우조우지의 직계 자손은 류우조우지
마타이치로라는 맹인청년밖에 남지 않았다. 마타이치로는 바둑의 달인이었으며, 2 대 번주인 나베시마
미츠시게와는 자주 대국을 치뤘다고 한다. 그런데 번주는 대국 중에 무례를 범했다하여 마타이치로를 베어 죽였다.
그리고 부하인 코모리 한자에몬이라는 사무라이에게 명하여 마타이치로의 시체를 벽 속에 묻어버린 것이다. 그
무렵 류우조우지가에서는 마타이치로의 아내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귀여워하던 검은 고양이인
'코마'가 마타이치로의 잘린 머리를 물고 돌아온 것이었다. 모든 것을 안 아내는 단도로 자살. 동시에 '코마'
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며 류우조우지의 원한을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리하여 '코마'는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류우조우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나베시마가와 그 가신들을 멸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코마'는 마타이치로를
벽에 파묻은 코모리 한자에몬을 노리고, 코모리의 어머니를 물어죽인 뒤 둔갑하였다. 그러나 효자인 코모리는
금방 차이를 깨닫고 '코마'를 쫓아내었다. 다음에 번주인 나베시마 미츠시게를 직접 공격하려다 실패한 '코마'는
더욱 무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코마'는 미츠시게의 애인인 오토요로 둔갑, 건강을 해친 미츠시게를
간병하는 척하면서 오랜 세월 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코마'는 자신이 키운 많은 고양이 요괴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인 뒤, 여시중들을 남김 없이 모두 죽였다. 그리고 시체를 춤추게 하거나 하늘에 띄우는 등의 괴기현상을
일으키거나, 나베시마가의 통치를 싫어하는 가신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코마'의 계산
착오는 최초로 덮쳤던 효자인 코모리 한자에몬이 사가에 돌아왔었다는 것이다. 코모리는 바로 '코마'의 정체를
간파, 이 고양이 요괴를 퇴치하여 사가번에 평화를 되찾는다)

/011

그리고 그 날부터 내가 골든위크를 보낸 방법을 말하면 한 마디로 일관되게 무릎꿇고 절하는 자세였다. (土下
座)
학교 교실에서 방해고양이와 조우했던 5 월 3 일부터 대형 연휴 마지막 날인 5 월 7 일 일요일, 즉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마루를 기어다니며 지냈다.
무릎꿇고 절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수로 따지면 5 일.
시간 단위로 표현하자면 뭐,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연 100 시간 남짓일까.
그 사이에.
나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토요일의 학교도 내팽개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졸지도 않고 도중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고 그런 형태로 새겨진 석상인 것처럼 계속 무릎꿇고 절했다.
뭐뭐, 흔히 있는 에피소드이다.
굳이 무슨 일인지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라도 인생에서 한두 번쯤 경험할 테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보낸
연휴였다.
......골든위크가 끝나고, 어떻게 휴가를 보냈는지 작문으로 제출하라는 과제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아니, 초등학교도 아니니까 그런 게 나올 리가 없고ㅡ 설령 나온다고 해도, 나는 지금과 변함없이 완전히
똑같은 자세로 골든위크를 지냈을 테지만.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비장한 결의를 할 때부터 방해고양이와 나의 처절한 싸움을 기대하신 분께는 지극히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뭐,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분수란 것을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숙지하고 있다.
설령 사람을 덮친다고 하는 스트레스 발산행동의 결과, 당초 방헤고양이한테 있었던 흉악함이 다소 옅어진다고
해도ㅡ 그래도 [인간]인 내가 저 녀석한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오시노조차 이길 수 없었던 상대한테.
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져서 죽어버리면 끝이다.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고 싶다ㅡ 하지만 그건 하네카와를 위한 게 아니라면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죽지 않는다.
개죽음당하지 않는다.
굳이 말한다면ㅡ 고양이처럼 죽는다.
그런 고로 오시노와 방해고양이가, 사람을 덮치거나 구하면서 이 마을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단속적으로
음양사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나는 전신전령 풀파워를 내서 전속전진(pull a head)으로 무릎 꿇은 채
절하고 있었다.
참고로 무릎 꿇고 절하는 대상을 말하자면.
이것도 굳이 무슨 일인지 말할 필요도 없이 성장기를 거친 남자애라면 설령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이른바
통과의례로서 머리를 숙이게 되는 대상, 즉 8 살 유녀이다.
8 살 유녀.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한 흡혈귀.
키스숏·아세로라이온·하트언더블레이드의 영락한 찌꺼기.
금발 유녀의 원흡혈귀.
그러니까 이건 일찍이 학원이었던 폐빌딩, 그 4 층의 한 방에서 웅크리고 앉은 무뚝뚝한 얼굴의 흡혈귀 유녀와
그 앞에서 남자답게 무릎꿇은 채 절하고 있는 나라는 구도이다.
............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백 퍼센트, 애니메이션화될 수 없는 그림인 건 틀림없다.
이제 이 이상의 미디어믹스를 깨끗하게 포기한다는 구도로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ㅡ 아니, 그걸 따지자면,
첫머리에서 여동생과 팬티를 서로 보여줄 때부터, 전부 아웃이란 느낌이 들지만.
전편, 검은 화면으로 도배되겠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라라기군은”
실제로 오시노한테도 그런 말을 들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목숨을 실제로 거는 것과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ㅡ 나는 아라라기군이 봄방학
때 그런 걸 실컷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또한 저 녀석답게 비꼬는 말투나 불쾌한 말투도 없고,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는데다,
딱히 경박한 느낌도 아닌, 지극히 보통으로 느껴지는 대사였다.
그래도 이 5 일 동안 오시노가 나한테 건 말은 이 한 마디뿐이다ㅡ 오시노는 방해고양이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신체를 치유하러 이 폐빌딩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지만 (그 후, 휴식을 끝내고 준비를 해서 곧바로 나가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저 녀석도 나름대로 거의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내 의도를 헤아리고,
금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뒤를 지나갈 때도 아무 말 없었다.
원래 흡혈귀 유녀는 무언이었고.
나도ㅡ 무언이었다.
오시노한테도, 흡혈귀 유녀한테도.
무언으로 일관했다ㅡ 뭔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이건 간청의 의미를 담아서 무릎꿇고 절하는 것이 아니다ㅡ 그런 속셈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실제로 나는 사죄하는 뜻에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미안.
이제 와서 의지하려고 해서 미안.
성심성의껏, 사과하고 있다.
정말.
무슨 낯짝으로 나는 이렇게 뻔뻔한 짓을ㅡ 오시노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원한다면 이대로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안면을 깎아내고 싶을 정도이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어떤 것인지ㅡ 제대로 알고 있다.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자기만족인지ㅡ 알고 있다.

하지만 오시노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반면, 나의 그 행위를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밸런서인 그의 가치관 때문일 수도 있고 아주 약간은 내 기분이 통했을지도 모른다.
공감해준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역시 그건 아닌가.
단순히 내가 멋대로 구하려고 하는 것이기에ㅡ 막을 이유도, 막을 의리도 없을 뿐이다.
하지만 오시노.
이것만큼은 알아줘.
절대로 공감을 해주거나 동의를 해달라는 건 아니지만ㅡ 적어도 한 가지 오해하지 않길 바래.
이러고 있는 지금도, 나는 전혀 목숨을 걸고 있는 게 아니고ㅡ 죽어도 괜찮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아.
하네카와처럼ㅡ 하네카와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계율처럼 친구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니, 나는 그렇게
허무맹랑한 기분으로 생명을 걸 수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고 싶다고 하는, 그런 제멋대로인 욕망을 가슴에 품고 있을 뿐이다ㅡ 나는.
나는 욕구불만이다.
해야 한다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ㅡ 단지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딱 붙은 것처럼 정지되어 있던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5 월 7 일의 태양이 완전히 가라앉은 직후였다ㅡ
나와 마찬가지로 연 5 일 동안 절 받으면서 석화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던 흡혈귀 유녀가
느닷없이 갑자기 일어나서ㅡ 무릎꿇은 채 절하고 있는 내 머리 부분을 맨발로 밟았다.
뭐, 이것도 흔히 있는 애기.
기나긴 인생, 남녀불문하고 유녀한테 머리를 질근질근 밟히는 일은 누구라도 경험합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하신
분은 이제부터 경험하게 됩니다.
여동생한테 밟혀지고 고양이한테 밟혀지고 귀신한테 밟혀지고.
그렇게 다양한 일들이 있기에 인생.
흡혈귀 유녀는 내 머리부분에서 다리를 떼어놓는가 싶더니 그대로 방향을 바꿔 이번에는 토킥(toe kick)으로
내 안면을 쳐올리듯이 차버렸다. (주:토킥(toe kick)-축구용어, 발끝으로 공을 차는 기술)
그걸 견뎌내지 못하고, 나는 무릎꿇고 절하는 자세인 채로 뒤집어진다ㅡ 왠지 뒤집히는 거북이의 기분을
맛보았다.
등을 강하게 때린다.
5 일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내 자세가ㅡ
균형이 마침내 무너졌다.
유녀한테 걷어채인다.
꽤 위태롭지만 그래도 뭐, 이것도 견딜 수 없는 게 아니다. 우주개벽의 빅뱅에 비하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넘어가고 별 지장은 없겠지.
다만.
이제부터는ㅡ 좋지 않은 애기였다.
공전절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흔하지 않다.
나쁜 애기였다.
“............”
재차, 꺾이지 않고 무릎꿇고 절하는 것을 감행하기 위해 곧바로 일어났던 내가 본 것은, 똑바로 서서 입을
쩍하고 크게 벌려 혓바닥을 바로 앞에 내놓고ㅡ마치 옛날의 예능 마술사처럼 목구멍 안쪽에서 일본도를 질질
꺼내려고 하는 흡혈귀 유녀의 모습이었다.
긴ㅡ 일본도이다.
명백히 지금 흡혈귀 유녀의 신장보다 길다.
분류로 따지면 오오다치에 포함되겠지. (주: 오오다치(大太刀)- 일본식 대태도, 150cm 이상 넘는 장검,
도신과 칼자루가 얇고 날 밑이 없다)
나는 딱 한 번ㅡ 봄방학 때 딱 한 번 그 칼을 본 적이 있다.
하트언더블레이드.
칼날 밑에ㅡ 마음이 있다.
키스숏·아세로라이온·하트언더블레이드라는 통칭의 유래가 되고, 최강의 존재인 그녀가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휘두루는 [무기]ㅡ
요도 [코코로와타리].
별명 [요괴살해]ㅡ 칼집은 없다.
칼집은 필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괴이를 계속 베는 것이 숙명인 칼에 어째서 그런 칼집이 필요하겠지ㅡ
“!”
그 칼을.
그녀한테는 마패(鑑札札)와도 비슷한 자기의 증명이며 혹은 바꿀 수 없는 추억 그 자체이기도 한 요도를,
흡혈귀 유녀는 평범한 막대기처럼 내 가슴 언저리에 던졌다. (주:鑑札札-감찰패, 면허증, 등록증)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잘 못하는 공기놀이를 하는 것처럼 겨우 위태롭지 않게 안았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붙잡았다.
안심하고 얼굴을 들면ㅡ 흡혈귀 유녀는 벌써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무릎꿇고 웅크리고 앉은 채 무뚝뚝한 얼굴이다.
...........
나를 짓밟을 때나 차올린 때의 표정은 그러고 보니 못 봤군ㅡ 계속 바닥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요도를 뱉어낼 때의 그녀한테 표정이 있을 리도 없고ㅡ 뭐.
상상이 간다.
경멸이나 모멸이 가득한 표정이겠지.
어차피 말이지.
적어도ㅡ 봄방학 때처럼 처절하게 웃는 얼굴은 아니었을 터이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라도.
흡혈귀 유녀가 나한테 웃어줄 리가 없다ㅡ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그녀한테ㅡ 깊고 깊게 사과하는 것처럼ㅡ 무릎꿇고 절을 했다.
“처음 할 때부터 신경쓰였는데 말이지”
하고.
그 때 적당한 타이밍을 엿보던 것처럼ㅡ 꿰뚫어보는 듯한 타이밍으로.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운 목소리. 뒤돌아보면 당연히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오시노 메메였다.
“아라라기군, 무릎꿇고 절하는 법, 틀렸어”
“어?”
“그건 다도할 때 앉는 법이야. 예의를 갖춰서 부탁하는 방식이 왜 그러냐는 애기지ㅡ”
핫핫-, 하고 쾌활하게 웃는 오시노.
하지만 알로하옷은 다시금 긁혀져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ㅡ 지금까지 본 것 중 제일 심하다. 고양이 백
마리를 동시에 상대한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참담한 꼬락서니였다.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닐 텐데.
“아-. 다도부에 속한 중학생의 자세를 참고했으니까......잘못 기억했는지도 몰라”
“자네는 다도부의 중학생한테 무릎꿇고 절하게 시키는 거냐?. 위험한 성벽이네”
“별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뭐, 하고 나는 말한다.
“무릎꿇고 절하게끔 시키는 것보다 하는 쪽이 더 좋아ㅡ 상당히 충실했던 5 일이었어”
“흐응. 그리고 요괴 [코코로와타리] 획득인가. 굉장하군ㅡ 흡혈귀짱의 마음이 변한 것은 내가 봐도 예상
외였어”
뭐, 그래도 축하하다고 말해둘게, 라는 오시노.
축복하는 기색은 전혀 없지만.
전혀 요만큼도 없지만.
뭐, 그래도 겉치레로 하는 말도 아니겠지ㅡ 보건대 오시노도 상황이 다급해진 것은 확실하다.
프로로서, 이제 오시노는 내가 하는 것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ㅡ 방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절대로.
“반장짱의 양친 말이지”
오시노는 그게 별로 대단하지 않은 안건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실은 벌써 퇴원했어”
“! 그래?”
놀란다.
저렇게 쇠약해진 상태이다, 의식이 돌아오는 것도 상당히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ㅡ 아니, 그래도 그건
절대로 좋은 뉴스가 아니군.
즉ㅡ 하네카와의 방이 없는 저 집에는.
그들이 벌써 돌아갔다는 것이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ㅡ 만약 또다시 방해고양이가 갈아입으러 돌아왔을 때 마주치기라도 하면ㅡ
“그래서 나는 양친한테 잠깐 말을 걸었어”
“어?”
“퇴원 직전에 문병하러 갔지. 방해고양이와 싸우던 중에 시간을 내서 말이지ㅡ 뭔가 힌트가 되지 않으려나
생각해서. 뭐, 그런 건 없었지만”
“............”
내가 흡혈귀 유녀한테 무릎꿇고 절하는 동안 오시노는 그런 것도 하고 있었나ㅡ 아니, 듣고 보니, 방해고양이의
첫 [피해자]인 그들을 방문해 애기를 듣는 것은 오시노 입장에서 당연한 순서이고 당연한 수법이겠지.
내가 절대로 생각해낼 수 없는 발상이다.
하네카와의 양친한테 애기를 듣다니ㅡ 하네카와의 양친과 애기를 하다니.
있을 수 없다.
저 사람들의 애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ㅡ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몰.랐.어. 양친은 자신의 딸에 대해ㅡ 뭐, 요즘은 그런 걸까? 이해하기 힘든 나이대이고”
“......가정환경이 특수해. 저 녀석은”
“그렇겠지. 그.건. 알.고. 있.었.어.ㅡ 단 방해고양이와 싸우는데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입수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아아. 뭐, 의식이 막 돌아온 참이라 비몽사몽인 채 얼떨결에 말해버린 거겠지ㅡ 나를 의사라고 착각한
모양이고”
알로하옷에 꾀죄죄한 아저씨를 보고 의사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무리 꿈속을 헤매는 상태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건 오시노가 의도적으로 연기해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올바르겠지.
“어떤 에피소드를 들었는데”
“아버지가 반장짱의 얼굴을 때렸을 때의 애기”
천연덕스러운 표정인 채, 오시노는 그것이 진짜로 재미있는 애기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열받아서 성인 남자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완력으로 손대중하지 않고 있는 힘껏 때리고ㅡ 안경테에 베인
상처가 생길 정도로 힘을 담아서 때렸대. 반장짱은 벽까지 튕겨나간 모양이야. 뭐, 반장짱, 경량급이니까 말이
지”
“............”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애기가ㅡ 아니로군.
특히 때린 쪽의 시점으로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벽에 강하게 신체를 부딪치고 잠시 동안 그 아픔에 웅크리고 있던 반장짱이 그 후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라라기군?
“어떻게 했을 거라니ㅡ 그야”
“부친한테 불합리하게 맞아도 비명조차 내지 않고 그저 웅크리고 있던 반장짱이 다음에 취한 행동은 뭐라고
생각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고ㅡ 오시노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또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그녀의 일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을 싫을 정도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로ㅡ 이제.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안되요, 아버지]”
오시노는 말했다.
비슷하지도 않는데ㅡ 하네카와의 말투를 흉내내서.
“[여자애의 얼굴을 때리는 건ㅡ]. 반장짱은 빙긋 미소짓고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야”
“............읏”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이.
그게 부친한테 맞은 딸이 할 말이냐고!
그런 게!
“기분나쁘네ㅡ 섬뜩할 정도로 선량해. 아버지가 더욱더 이성을 잃고 반복해서 때린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야마타이국에 태어났다면 히미코의 후계자가 되었을 정도로 성인인 척ㅡ 확실히 말하면 나라도 때렸을 거야, 그런
애” (주:3 세기전반 일본의 야요이시대에 있었던 나라, '왜국대란(倭國大亂)' 이후 히미코(卑彌呼)가
즉위하여 통치, 20 개 소국연합으로 이루어짐)
무서워.
괴이보다 무서워.
기분나뻐.
오시노는 웃음을 지우고ㅡ 내뱉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결국 집에 가져온 일에 참견을 했다는 건 그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런 일이 없어도 아버지는ㅡ
어머니도 계속 반장짱을 때리고 싶지 않았을까”
“때리고 싶었다니ㅡ”
아버지가. 어머니가.
딸을.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들을 필요도 없이 요괴를 키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ㅡ
자신의 아이가 괴이와 바뀐다는 타입의 괴담은 흔히 있지만, 양친의 경우, 자신의 아이조차 아니었으니까ㅡ”
“......뭐야, 오시노”
오시노의 긴 대사에 나는 끼어든다.
“저 녀석들ㅡ 편이야?”
“편이 아니야, 중립이지. 굳이 말한다면 사물을 보는 시각이란 애기야 ㅡ 반장짱한테는 그녀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고, 양친한테는 양친만의 견해가 있어. 그리고 제 3 자는 어느 쪽이 올바른지 알 수 없고. 아니ㅡ 올바르다는
건, 처음부터 없어”
있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고 경우야, 하고 말하는 오시노.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흔한 말장난으로 표현한다면 아라라기군을 향해 양친(両親)을 내버릴 때에 반장짱은 양심(良心)을 버리고
있어. 재미있지도 않지만 말이야ㅡ 핫핫-, 아라라기군은 반장짱의 친구이니까 반장짱의 아군을 할 테지만 양친의
친구는 마찬가지로 양친의 아군이 되겠지. 올바른 건 처음부터 없어” (주:양친(両親), 양심(良心)-둘다 ‘
료우신’으로 발음, 동음이의어, 언어유희)
올바른 건 처음부터 없어.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오시노는 반복했다.
수긍할 필요도 없다.
그거야말로ㅡ 올바르다.
올바른 건 없다는 말은, 올바르다.
그래도ㅡ
“하지만, 하네카와는. 하네카와는ㅡ 올발라”
“그렇기에 무섭고 기분나쁘겠지”
오시노는 내가 쥐어짜낸 반론도 쉽사리 논파한다.
“생태계의 밸런스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이번에 반장짱 쪽에 서서 일하고 있지만ㅡ 진짜로 생태계의 밸런스를
생각한다면 반장짱은 이대로 방해고양이한테 먹혀서 사라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정도야”
“......그런 게”
반론할 수 없다.
그 말이 맞다고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ㅡ 부정할만한 근거는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감싸지 않는다.
그래도ㅡ 오시노.
나는 봄방학 때 하네카와의 그 특이한 성격 덕분에 구해졌어
구해졌다고.
“물론 반장짱의 양친은 칭찬받을만한 인간이 아니야ㅡ 애기하면서 그건 알았어. 저 사람들은 양친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지. 그건 명백했어. 그래도 아라라기군, 그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저렇게 올바른
인간과 한 지붕 밑에 산다니ㅡ 하물며 그게 자신의 딸이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 십수년 동안, 너무 올바른
인간이 계속 옆에 있었다고. 불쌍하게도 그들이 저런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반장짱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았으니까
그런 게 틀림없어”
나는 떠올린다.
하네카와 집에 걸려있던 저 문패.
양친의 이름에서ㅡ 약간 떨어져 히라가나로 [츠바사].
그래도.
적어도 처음은ㅡ 스타트지점에서는 저런 문패를 만들 정도로ㅡ 있었을 터이다.
설령 아주 약간이라고 해도 있었을 터이다.
가족의......뭔가 원형 비슷한 것이.
가정적인(at home) 홈드라마가, 영락하기 전의 무언가가.
잔해로 바뀌기 전에 무언가가 있었을 터이다.
지금의 내가 하네카와로부터 시작된 것처럼ㅡ 그들도 분명 하네카와로부터 시작되어 있다.
하네카와와 지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옆에서 항상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을 보게 되는 거지. 그건 바꿔 말하면ㅡ 자신의 추함, 자신의 미숙함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지옥이야. 악몽이지. 십수년 동안 잘도 때리지 않고 참아왔다고 칭찬해도 좋을 정도야”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네카와 탓이 아니잖아”
“반장짱의 탓이야.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 한 사람이지. 힘을 가진 인간은 그 힘이 주위에 끼치는 영향을
자각해야만 해ㅡ ‘개천에서 용난다‘는 예는 아니지만, 위대한 아이를 가진 부모가 인격적으로 망가졌다는 건
흔한 애기이니까. 그런 점에서 반장짱은 너무 자각이 없었네. 자신을 보통이라고 믿고 있어. 보통이라고
믿으려고 애썼어. 필요없는 노력을 했지. 그 결과가 이 상태야”
방해를.
만지는 물건에 방해를.
만지는 사람에게 방해를.
한창 피우는 것처럼ㅡ 초래했다.
“방해고양이라는 괴이조차 그 방향이 완전히 왜곡되어 있어ㅡ 이번 사건은 여러 모로 특이해. 여러 모로
특이해고 반장짱만이 특이하지. 흡혈귀짱이 지금 자네한테 약간이나마 협력해줄 마음이 든 것도, 적이
반장짱이니까 그런 거야. 이래저래 여러 모로 반장짱의 탓이야”
“......미안, 오시노. 네 녀석이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네 녀석한테 이런 것을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ㅡ 그 이상 하네카와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줘”
나는 말한다.
드디어 참을 수 없어서.
“죽이고 싶어져”
“그건 반장짱에 대한 동정이야?”
그거야말로 길바닥에 죽어있는 고양이한테 일반인이 품을 법한 감정인가ㅡ 하고, 오시노는 멈추지 않는다.
내가 겁준다고 해서 입다물 남자가 아니다.
잘도 떠드는ㅡ 남자이다.
“불우하게 태어나 불우하게 키워졌고, 불우하게 지나친 지능을 가져버린 반장짱한테ㅡ 아라라기군은 동정하는
거야?”
“......아니야. 완전히 틀렸어. 네 녀석답지 않네, 틀리는 것도 적당히 하라고, 오시노”
흡혈귀 유녀한테 빌린 요도의 칼끝을 어깨에 메고ㅡ 나는 기껏해야 폼잡으면서.
“동정을 할 것 같아? 불행한 여자애는 불타오를 뿐이겠지. 나는 단지ㅡ 욕구불만을 해소시키고 싶을 뿐이야”
하고.
울고 싶은 기분을 참으면서.
허세를 부리며ㅡ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속옷 차림의 고양이귀 여고생한테 욕정하고 있을 뿐이야”

/012

요도 [코코로와타리], 괴이살해ㅡ 그 통칭대로 그건 괴이를 살해하기 위한 날붙이이다.


괴이만을.
괴이만 죽이기 위한 흉기.
반대로 말하면 그건 사람을 죽일 수 없는 흉기라는 것이기도 하다ㅡ 아니, 인간뿐만이 아니다. 괴이살해는 괴이
이외의 온갖 생물, 괴이 이외의 온갖 기물을 벨 수 없다.
괴이를 앞에 두면 비길 데 없는 명도이지만 괴이를 앞에 두지 않으면 녹슨 칼과 마찬가지. 보는 방법에 따라서는
녹슨 칼보다 구리다고 말할 수 있다ㅡ 괴이 이외에는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빠져나가 통과해버리니까.
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흡혈귀 유녀가 소유하는 이 [코코로와타리]는 복제품이며 모조칼이다. 굳이 말한다면
흡혈귀틱하고 환상적인 초능력으로 만들어낸 망상의 산물로서의 모조칼이기에 그런 특성을 갖고 있고, [진짜]
괴이살해 쪽은 이시카와 고에몬의 참철검처럼 이 세상에 벨 수 없는 것은 곤약 정도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주:
루팡 3 세-이시카와 고에몬(石川五右衛門), 루팡 3 세와 같이 다니는 검객, 참철검을 씀)
그건 제쳐두고.
괴이만 죽이고 괴이만 베는 요도가 이번 케이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하자면ㅡ 말할 필요도 없다.
괴이살해를 사용하면 하네카와 츠바사로부터ㅡ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육체와 정신에서 방해고양이 부분만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만 베어ㅡ 베어버리고.
표리일체의 이중인격을.
일도양단할 수 있다.
하네카와 자신한테는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고 방해고양이만 퇴치하는 것이 가능하다ㅡ 자기 자랑 애기처럼
들어도 상관없지만 이건 전문가 오시노 메메한테도 불가능한 울트라 C 의 비밀기술이다. (주:울트라 C-체조용어,
최고난이도 C 보다 더욱 어려운 몸틀기, 선회)
저 오시노가 결국 골든위크 마지막 날까지 통산 100 전 100 패를 해온 방해고양이한테ㅡ 나만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가할 수 있다.
뭐, 빌린 물건이고 그걸 빌릴 때도 유녀한테 무릎꿇고 절해서 빌린 이상, 애당초 자랑거리도 되지 못하지만ㅡ
게다가.
전혀 자랑할 만한 기분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가능하다
절차를 건너뛰고.
복선이나 맥락을 전부 무시하고 다짜고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걸로 됐다.
“뭐, 그 요도는 흡혈귀 전용으로 개량되었으니까 나는 사용할 수 없고ㅡ 아라라기군이 할 수밖에 없네ㅡ 괜찮지
않아? 나이스 아이디어야”
하고, 전문가가 보증했다.
그 얼버무리는 말투로 추측하건대, 확실한 보증서 첨부ㅡ 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실제로 괴이살해가 흡혈귀 전용으로 개량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오시노는 전문가로서 능숙하게
사용할만한 물건이지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ㅡ
오시노는 해주지 않겠지.
이렇게 편.리.한 아이템은ㅡ 대상도 지불하지 않고 결과만 얻으려는 도구의 사용은 그한테 외도나 다름없으니까.
반칙에다 치트이고 룰위반에ㅡ 밸런스고 나발이고 없다.
“그러네. 그 말대로야. 자각이 있잖아. 자각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네”
히죽히죽 웃으며 오시노는 말했다.
“다만 아라라기군한테 전문가로서 해줄 말은 더 이상 없지만 친구로서. 아라라기군의 베스트프렌드로서
충고해두고 싶은 건 있으려나”
“충고? 뭔데?”
나는 기분나쁠 정도로 친한 척하며 거리낌없이 하는 말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일단 물었다.
그러면 오시노는 손가락을 3 개 세우고,
“충고라고 할까, 뭐, 나답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지만. 우선 첫 번째. 확실히 그 칼을 사용하면 반장짱과
방해고양이를 분리할 수 있어ㅡ 방해고양이를 저 세상으로 보낸다는 점에서 언뜻 베스트아이디어로 보이지.
하지만 베스트아이디어로 보이기에 반장짱 입장에서 보면 그걸 가장 경계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백전백패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전략과 전술 때문이야ㅡ 그리고 지식 때문이지. 계획을 전부 꿰뚫어보기에 약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그런 방해고양이니까 기껏해야 아라라기군이 생각해낸 방법이라면 미리 염두에 두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고, 첫 번째 손가락을 내렸다.
“......그럴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껏해야 아라라기군]이라고 들은 것에 대해 딴지를 넣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일단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오시노한테 말했다.
“가능성의 애기를 한다면 확실히 그래.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어ㅡ 아마 잘 될 거야. 절대로 그럴
거란 보장은 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계책이 있어“
“계책?”
“아니ㅡ 계책이 아니려나. 기대야”
말하고 보면 희망적 관측이다ㅡ 그러면 좋겠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뿐이다.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흐응. 그렇다면 그곳은 신용해볼까. 좋다고 해두지. 아라라기군이 그걸로 괜찮다면”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하지 마ㅡ 나머지 2 개의 충고는 뭐야?”
“아, 아니ㅡ 두 번째는 취소야. 이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이었네. 세 번째만 말해둘게”
오시노는 그리 말하고 나머지 2 개의 손가락을 한 번에 내린다.
뭐야, 막판에 와서 우유부단하게ㅡ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시노가 하려고 했던 두 번째 충고가 어떤 건지 대강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ㅡ 알고 있다.
응.
그건 알고 있어, 오시노.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주면ㅡ 좋겠어.
네 녀석은 나를 도울 생각이 별로 없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언제나 그랬지.
네 녀석은 나를 도우려고 하지 않지만.
“세 번째, 마지막 하나. 이게 가장 중요하고 게다가 실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라라기군. 그렇게
아라라기군이 임전태세로 돌입하는 건 괜찮고 막거나 하지 않지만ㅡ 그래도 현실적으로 이 마을의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반장짱을 자네는 어떻게 찾아낸다는 거지? 내가 골든위크 동안 계속 졌다고 해도
방해고양이와 백 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전문가로 괴이의 추적술, 괴이의 발견술을 익혔기 때문이야ㅡ
녀석의 영역의식과 영토를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그것도 3 번 중 1 번은 따돌려졌어.
상대가 반장이라서 어려운 걸 수도 있지만 초보인 아라라기군은 더더욱 그렇겠지. 그건 어떻게 할 작정인데?
어떻게 해서 대전 카드를 실현시킬 거야? 설마 이제 와서 추적과 발견에 대한 걸 나한테 맡길 작정은 아니겠지?“
“마치 맡길 거라면 나한테 맡겨달라고 하는 말투네, 오시노”
어깨를 움츠리고 나는 말한다.
“안심해. 그거라면, 단순한 기대나 희망적 관측이 아닌 제대로 된 계책이 있어. 네 녀석한테 부탁하지 않아.
뭐, 이제부터 따로 행동하자고. 네 녀석은 네 녀석대로 전문가로서 방해고양이를 찾도록 해ㅡ 나는 내 방식대로
할게”
“헤에. 아라라기군의ㅡ 방식인가”
“아아. 이것도 네 녀석한테는 불가능한 울트라 C 란 녀석이야”
“흐응”
그렇다면 꼭 보고 싶네.
마음대로 해ㅡ 수라장을 벌이든 애수드라마를 찍든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게 말하고 오시노는 내 계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지도 않았다. 참 대단한 베스트프렌드이다ㅡ 그리고.
그리고 그 대화로부터 30 분 후.
딱 30 분 후.
나는 오시노가 그랬던 것처럼 밖으로 방해고양이를 찾으러 가지 않고ㅡ 폐빌딩 2 층의 한 방, 아마도 건물
안에서 가장 좁은 교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
해야 할 것은 이미 끝냈다.
그러니까 기다릴 뿐이다.
다만 흡혈귀 유녀한테서 너무 멀어지면 요도가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존재력을 잃고 분자적으로 붕괴해버려서
폐빌딩 안에 계속 있을 뿐이고, 장소를 선택한 것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학교 교실이어도 상관없다ㅡ 아니,
뭐, 다른 사람 눈에 띄어도 곤란한가.
게다가 이 방은 의외로 좋은 선택이다.
아이가 돌이라도 던졌는지 유리가 깨져있고 창틀만 남아있는 이 방의 창문으로ㅡ
마치 밤하늘을 잘라낸 것처럼, 유명한 예술가가 완성한 한 폭의 그림처럼, 검은 밤하늘을 잘라낸 듯한 아름다운
달이 잘 보이니까ㅡ
“ㅡㅡㅡ!”
그런 명화의 바로 옆.
바로 옆의 콘크리트를 몸통박치기로 부딪쳐 탄환처럼 꿰뚫으면서ㅡ 방해고양이는 나타났다.
흩날리는 파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철골을 부러뜨리고ㅡ 굉음과 함께.
고양이는 어렵지 않게 내 정면에 네 발로 착지한다.
착지한 바닥조차 금이 가서 그대로 폐빌딩째로 붕괴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 공기를 통해
나한테까지 전해져 온다.
벽을 뚫고 나온 등장이라니, 이 21 세기에 란마 1/2 의 샴푸 같은 흉내를 낸다.
(주: 만화 란마 1/2, 다카하시 루미코 작품, 찬물쓰면 여자되는 사오토메 란마가 주인공//샴푸-중국의 여걸족,
물뿌리면 고양이가 됨, 란마에게 적극적으로 대쉬, 하지만 란마는 약혼자가 따로 있다)
그러고 보면 샴푸는ㅡ 물을 뿌리면 고양이가 되었나?
그렇다면 내숭떨다가 고양이가 된 하네카와와ㅡ 비슷하다.
흰 머리카락.
머리 부분에 생기는 짐승귀.
검은 속옷 차림ㅡ 맨발.
고양이눈의ㅡ 방해고양이.
존재만으로도 떨리게 한다.
그래도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는 나한테 방해고양이는 얼굴을 확 들고,
“아라라기군! 괜찮아!?”
라고.
초조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울 것 같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으로 그렇게 호소한다.
지금도 벽을 부순 것과 같은 자세로 나한테 덤벼들 기세였지만ㅡ 대충 오체만족으로 평범하게 서 있는 나를
고양이의 시력으로 확인하고
“......뭐야”
하고 말한다.
들어올렸던 얼굴을 떨구고ㅡ 천천히 일어서면서.
“속은 거네ㅡ 나”
“......아아”
그래, 하고 나는 말한다.
내가 한 짓은 간단했다.
술래잡기를 대륙의 말로 도우마오마오(藏猫猫)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ㅡ 공교롭게도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주:藏猫猫-중국어로 술래잡기, 한자로 고양이가 숨다, 도망친다는 뜻)
굳이 말한다면 깡통차기이다.
게다가 깡통은 나 자신이다.
나는 한 개의 메일을 보냈을 뿐ㅡ [흡.혈.귀.가. 날. 죽.이.려.고. 해, 도.와.줘]라는 내용의 전자메일을
하네카와의 휴대폰 메일주소로 보냈을 뿐이었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기에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는 극단적인 헬프 메일이다ㅡ 그리고
하네카와한테는 그걸로 충분했다.
다행히 나라는 남자한테는 걱정될 만한 요소가 얼마든지 있다.
걱정만 끼치는 나이다.
갖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하네카와는 멋대로 여러 가지 상상을 했겠지.
그리고ㅡ 달려오겠지.
언제라도 그랬다.
봄방학 때도.
그런 식으로 그녀는ㅡ 다 죽어가고 있는, 살해당하고 있는ㅡ 스스로 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말하자면 이 상황은 그 재현이다ㅡ 다만 메일 내용이 완전히 거짓말이란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엄청난 누명을 쓴 흡혈귀 유녀한테는 미안할 따름이지만, 뭐, 지금 현재 리얼리티를 살린다는 의미로 캐스팅할
수 있는 것은 그녀밖에 없다.
뭐, 구하고 구해지는 관계를 몹시 꺼려하는 오시노한테는ㅡ 안 그래도 기계치인 오시노는 사용할 수 없는
기책이다.
하.네.카.와.가.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ㅡ 내.가. 하.네.카.와.한.테. 도.움.을.
청.할. 뿐.이.다.
제 3 자한테 지적을 받을 만한 난점이 있다면, 방해고양이가 된 하네카와가 메일을 읽을지, 또, 애당초
핸드폰을 휴대하고 하고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점이지만ㅡ 나는 그런 걸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고.생.한.테. 핸.드.폰.은ㅡ 마.귀.이.겠.지.
속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돌아온다는 관념이 있다면ㅡ 콘센트에 꽂혀있던 충전기 역시 이용하겠지.
............
여유있는 사람은 가슴 사이에 껴서 가지고 다녔다고 상상하며 놀도록.
“핫ㅡ 그건 그렇고 꽤 빨리 왔잖아, 방해고양이. 고작 30 분만에 찾아오다니 감탄했다고.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네, 네 녀석”
“......최저야, 아라라기군”
방해고양이는 힐끗ㅡ 이쪽을 본다.
쏘아본다.
“거짓말이나 해서 사람을 걱정시키고ㅡ 그러면 못써”
“카카ㅡ”
나는 그 말에ㅡ 웃고 만다.
악역처럼.
아수라맨처럼. (주:아수라맨(アシュラマン)-근육맨에서 나오는 초인, 3 개의 얼굴, 6 개의 팔을 가짐)
무심코 웃게 된다.
“뭐야”
하고, 그걸 보고 그녀는 화를 낸다.
“사람이 화내고 있는데ㅡ 뭐가 이상하냐고”
“아니, 그래도”
나는 말한다. 고양이를. 방해고양이를.
“말투가 흐트러져있어ㅡ 하네카와”
하네카와 츠바사를 가리키며.
“............”
“왜 그래, 우등생. 어미에 냥- 냥- 붙이는 게 방해고양이의 캐릭터 설정이 아니었냐고......”
고양이는ㅡ 하네카와는.
내 지적에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ㅡ 이윽고 단념한 것처럼,
“뭐야”
하고 말했다.
아까 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태로.
“아니, [뭐냥]이려나ㅡ 뭐, 상관없어. 어? 어라? 언제부터 들켰어?”
묘하게 밝아서 켕기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떳떳한 태도이다.
그래, 평소의 하네카와이다.
하네카와다운ㅡ 하네카와.
그녀답지 않은 것도ㅡ 아니다.
아니.
하네카와가 하네카와가 아니었던 적은ㅡ 한 번도 없었다.
하네카와답지 않은 적도.
하네카와와 비슷한 적도, 비슷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의식을 방대하게 남기고 있다ㅡ 정도가 아니다.
이중인격이며ㅡ 이중인격 정도가 아니다.
겉도 속도, 검지도 희지도 않다.
뒷면은 뒤집어보면 겉으로.
암흑면인 동시에 전면적인 하네카와로.
반전시키든 암전시키든 어떻게 굴려도 그녀는 그녀로.
하네카와는ㅡ 하네카와였다.
언제 어디 있던지.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아무리 나쁜 행위라도.
아무리 나쁜 장난이라도.
전.부.ㅡ 그.녀. 자.신.이. 해.온. 것.이.었.다.
방해고양이의 괴이 이야기대로.
바뀐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ㅡ 애당초 하네카와한테는 고양이가 들러붙지 않았다는 것처럼ㅡ
유령의ㅡ 정체 발견, 카레오바나. (주: 카레오바나유령탐정사무소(枯尾花幽霊探偵事務所)-점프 SQ 2009 년
1 월호 나카무라 타카토시의 단편만화, 남주인공이 탐정, 여주인공이 조수로서 유령이 보이는 능력을 가짐)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알고 있었어. 나는 네 친구라고. 그러니까 잘못 볼 리가 없어. 그러니까ㅡ 모를 리가
없어”
나는 담담하게 감정이 없이 말했다.
거의 국어책읽기이다.
이런 말투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바보 같아서 대화를 할 수 없다.
얼마나 바보같은 대화(dialogue)냐고.
"괴이한테 들러붙었든지 괴이를 거둬들였든지ㅡ 너는 너 그대로야, 하네카와. 인격이 바뀐다고 성격이 바뀔까.
그게 너야. 너 자신이지. 친구한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이 오면 어떤 상황이건 어떤 전황이건, 서둘러서
달려오지ㅡ 고양이가 털뭉치를 굴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어! 그게 너인 거야“
“......이게”
이게 나.
지?
하고ㅡ 하네카와는 자신의 온몸을 내려다보려고 한다.
괴이로 변한 그 신체를.
괴물과 같은 그 모습을.
“그래. 왜냐하면 너, 지금, 거짓말을 한 나한테 화내지만 실은 안심하고 있겠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잖아?
내가 죽지 않아서, 내가 살해당하지 않아서ㅡ 안심하고 있지? 메일이 거짓말이어서 다행이잖아?”
“...........”
“엄청나게 상냥하고, 엄청나게 강해. 너무 상냥하고 너무 강해. 살아가는 게 힘들 정도로 너무 상냥하고 괴이에
혼을 팔아버릴 정도로 너무 강해. 타인을 압박할 정도로 올바르고. 그걸 부정하고 싶은 기분은 알아ㅡ 잘
모르지만, 알 수 있어. 그래도 하네카와......그래도 말이야, 하네카와......그래도 하네카와, 그게 너야!”
짊어져!
껴안아!
놓지 마!
전언철회다ㅡ 제길.
국어책 읽기도 되지 못한 채, 나는 고함치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감정을 담지 않고서 견딜 수 없다.
격정에 맡기지 않고서 견딜 수 없다.
하네카와한테ㅡ 고백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너는 그 성격 그대로 평생을 살아가는 거야. 바뀌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고, 다른 누군가가
되어주지도 않아! 그런 성격으로 태어나서 그런 성격으로 키워졌으니까 어쩔 수 없겠지! 이미 지난 일 가지고,
끝난 일 가지고ㅡ 지금도 이어진다고 해도 옛날은 옛날이야ㅡ 말하자면 그저 캐릭터 설정이야! 부정하고 싶어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아! 불평하지 말고, 힘내서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라라기군”
하네카와는ㅡ 내 절규를 듣고.
혼란한 것처럼.
곤란한 것처럼.
약간 머리를 기울여 무리하게 웃는 얼굴을 한다.
굳어버린 웃는 얼굴을.
애처롭게 만든다.
“무리한 걸 말하지 마ㅡ 나도 괴로워. 나 역시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어. 나 역시 인간이야”
“인간이 아니겠지”
나는 하네카와를 가로막고 말한다.
“너는 괴이에 그 몸을 맡겼어. 지금 너가 인간을 자칭하지 마”
“ㅡ 심한 말을 하네, 아라라기군”
그래도 웃는 얼굴로ㅡ 하네카와는 말한다.
나를 꾸짖는 것처럼.
“내가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는 주제에. 이런 나한테 그래도 힘내라니ㅡ 너무해. 너무 잔혹해.
아라라기군은 나한테 동정하지 않아?”
“하지 않아”
나는 오시노한테 했던 것과 똑같은 답을 하네카와한테 돌려준다.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낳아준 어머니는 자살했고 이곳저곳 여러 가정을 떠돌던 끝에, 피도 이어지지
않은 양친과 인연도 맺지 못하고 차가운 가정에서 자라, 그래도 굳이 보통으로 있으려 하고, 하필이면 그런 일이
달성되어ㅡ 마치 계엄령이 떨어진 인생을 어렵게 보내는 것 같아서, 정말 너, 재수가 없네! 운이 없어, 말하기
그렇지만 너무 불행해! 그래도ㅡ 괜찮잖아, 그 정도!”
별로 상관없잖아!
그래도 괜찮잖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ㅡ 그만두자고!
“오케이- 오케이-, 신경쓰지 마! 돈마인드야!(Don't mind) 불행하다고 괴로운 생각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자란 환경이 나쁘다고 해서 삐뚤어져야 되는 것도 아니야! 싫은 일이 있어도 건강해서 다행이잖아! 너는!
너란 녀석은 이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퇴원한 아버지, 어머니와 또다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생활을 보내야만 해! 평생 아버지나 어머니와 화해할 수 없어, 내가
보증할게! 만에 하나, 장래 행복하게 되어도 소용없다고, 아무리 행복해진다고 해도 옛날이 암울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아, 끝까지 따라간다고! 뭘 하든, 뭔 일이 일어나든 불행한 건 불행한 채
영원히 마음 속에 쌓이게 돼! 잊을 때쯤 떠올라, 평생 꿈에 보인다고! 우리들은 평생 악몽을 계속 꾸는 거야!
계속 봐야 하니까ㅡ 그건 이미 정해진 거니까 눈을 돌리지 마! 그 근처의 통행인한테 나쁜 장난을 하든, 속옷
차림으로 나체쇼(streaking)인 척하든, 그런 걸로 스트레스가 약간 발산되었다고 해도,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아!”
“......바뀌지 않아”
바뀌지 않아.
달라지지 않아.
변하지 않아.
가면을 써도, 내숭을 떨어도.
괴이로 되어도ㅡ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고.
너는 너 그대로야.
“나는 너한테 절대 동정하지 않아”
반복해서.
연속해서 내리치는 것처럼ㅡ 나는 말한다.
하네카와 츠바사를 규탄한다.
“나를 갱생시키는 게 아니었냐고ㅡ 너가 암울해서, 어쩌자는 거야!”
고양이를 이유로 하지 마.
괴이를 구실로 하지 마.
괴물을 계기로 하지 마.
불행을 발판삼아 성장하지 마.
그런 짓을 해도ㅡ 결국 스스로 자신을 할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괴이란 건ㅡ 사실 없.다.니까?
그거야말로.
거짓말이야.
“그래도 스트레스를 발산시키고 싶다면 내가 전부 받아줄게. 너의 가슴을 언제라도 만져주고, 속옷 차림을
구석구석 봐줄게. 그러니까 그걸로ㅡ 참도록 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
친구니까 말이지.
내 제안을 조용히 듣고 나서ㅡ 하네카와는.
하네카와 츠바사는.
“......정말, 아라라기군은 저질이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어.
하고 말한다.
“아라라기군은 스타가 될 수 있어도 히어로는 될 수 없네”
“스타도 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흡혈귀뿐이야”
그것조차ㅡ 되지 못했다.
“그러네”
되어주지 않는 거네ㅡ 내 히어로가.
되어주지 않는 거네.
“전부터 생각했지만 사실 아라라기군은 나를 싫어하는 거지”
“아아”
수긍한다.
“사실 나는 하네카와를 엄청 싫어하니까 말이지”
“그래. 나도 사실은 아라라기군을 엄청 싫어하니까”
하네카와는 그리 말하고.
“죽어버려”
그 시선을 나한테서 돌리고 경멸하는 것처럼ㅡ 꺼져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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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ㅡ 나한테, 죽어버려” (주:총 572 번 X“죽어버려”)
냐옹, 하고.
하네카와는 고양이처럼 말하고ㅡ 다시금 네발로 서는 자세를 취했다.
형태변화한 발톱이 20 개, 콘크리트 바닥에 파고든다. 요전에 교실에서도 비슷한 짓을 했지만, 그러고 보면
고양이 발톱은 넣고 빼는 것이 자유였나?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만ㅡ 고양이도 그건 마찬가지인가. (주:뛰어난 매는 발톱을 숨긴다(能ある
鷹は爪を隠す)-능력있는 사람일수록 겸손하다)
발톱 자체가ㅡ 능력인가.
“냐아. 아라라기군이 냐의 스트레스를 전부 받아준다니, 근사하다냥”
하네카와는 그 자세를 유지한 채, 말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자, 죽여도 되냥?”
“괜찮아, 바라던 바야”
나는 양팔을 벌려 하네카와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한다.
“나는 너한테 죽고 싶어”
“그래”
그렇다면 죽어.
그런 목소리가 간신히 인식된 직후ㅡ 혹은 직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소리도 없이 날라갔다.
정확히 말하면 내 상반신이 날라갔다.
대체 무슨 짓을 당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뭐, 아마도 손톱으로 할퀴어졌거나 그 이빨이 꽂혔거나, 아니면 단순한 몸통박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공격의 바리에이션은 대강 그 정도이다ㅡ 그리고 어떤 것이든 본래 인간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일격으로 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점이 괴이의 괴이인 이유.
심장이 멈출 정도로 강한 충격을 동반한 통한의 일격으로 내 몸통은 허리뼈 근처에서 베어져, 신칸센과 맞먹을
정도의 속도로 등 뒤의 벽에 등을 부딪쳤다. (주:신칸센-일본철도의 도시간 고속간선철도)
뭔가 저거 같네.
아돌·영식을 받은 우스이씨나 혹은 초사이어인을 상대로 했던 프리더님의 최후와 같이, 그런 느낌. (주:아돌·
영식-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사이토 하지메가 맹인검객 우스이를 필살기 아돌·영식으로 쓰러뜨림//프리더-
드래곤볼의 프리더)
무슨 샴푸가 이러냐고.
그래도 나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서 있는 자신의 하반신을 시계에 파악하면서ㅡ 내동댕이쳐진 교실의 벽에서
질질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쓰려졌다.
아-.
시점 낮아.
“아파......”
하고.
조금 늦게ㅡ 나하넽 통각이 작용한다.
쿵쿵하고, 불끈불끈하고, 내장이 튀어나오는 절단면을 보면서ㅡ 농담과 같은 아픔이 상처만이 아니고 전신을
휘감는다.
“아ㅡ 아파”
“아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하지만ㅡ 내가 고통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걸 방해하는 외침이, 좁은 교실 안에 퍼진다.
발정기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공명해서ㅡ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냐......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일격을 받았을 때의 고요함이 거짓말처럼.
마을 안에 울려퍼질 듯한 그 비명은 전 세계로 울려퍼질 듯한 그 비명은 물론ㅡ 말할 필요도 없이 하네카와의
것이다.
아니.
이것에 한해서는ㅡ 방해고양이의 것인가.
괴이의 단말마.
“아......아라라기군!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거야ㅡ 나하넽”
자세히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된 하네카와는 절규섞인 말투로 나한테 묻는다. 이제
와서 질문이라니, 이 와중에도 엄청난 지적 호기심이지만ㅡ
그러나 그런 것은 일목요연하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가리켰다.
계속 서 있는 자신의 하반신을.
“......! 읏”
말이 막히는 하네카와.
그야 말이 막히겠지ㅡ 그 하반신에는 마.치. 등.뼈.만. 그.곳.에. 남.아.있.는. 것.처.럼. 한. 자.루.의.
일.본.도.가. 튀.어.나.와.있.으.니.까.
뭐, 이 경우는 일본도로 하반신을 바닥에 꿰맨다는 표현 쪽이 실제로 가깝겠지만.
일본도.
말할 필요도 없이ㅡ 요도 [코코로와타리].
괴이살해이다.
“카ㅡ 칼을 미리”
“그래. 미리 삼켜뒀어ㅡ 마치 옛날의 예능 마술사처럼”
흡혈귀 유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엄밀하게는 흡혈귀 유녀와 하는 방식이 다르다ㅡ 흡혈귀 유녀는 흡혈귀의 물질창조능력을 응용해 자신을
칼집으로 하지만, 내 경우는 단순히 육체의 축처럼 입으로 칼을 찔러넣어 척추를 따라 위장을 통통과하고, 왼발을
통과해, 바닥까지 꿰뚫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꼬챙이에 꿰인 꼬치이다.
흡혈귀의 불사신 체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ㅡ 그것도 괴이살해로 죽는 것이기에 수복의 무한재생,
생지옥이다.
30 분 동안 하네카와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서서 기다린 것은 그 때문이다. 신체 중추에서 척추를 따라
중심을 통과하기에 나는 앉을 수가 없었다ㅡ 물론 상반신이 절단되어 간신히 편해졌다고 생각할 만큼 죽을 듯이
아픈 짓을 왜 했는지 말하자면, 그건 괴이살해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내 몸 안에 숨기기 위해.
그리고 하네카와가 경계하지 않고, 마음껏 공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예를 든다면 샌드백 안에 유리 파편을 잔뜩 집어넣은 것과 같은ㅡ 그런 것을 공격했으니까 하네카와로서는 견딜
수 없다.
전과 마찬가지로 팔이 노려지면 의미가 없는 작전이니까ㅡ 도발하는데 고생했다고.
가슴을 만진다거나 속옷 차림을 봐준다고 하면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변태끼 다분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괴로웠다.
“우, 크,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웃! 그, 그래도! 그래도ㅡ 그래도 아라라기군, 이 아픔은!”
“그래. 아.프.지. 않.아. 너. 자.신.은”
나는 말한다.
“내 신체에 묻어뒀던 그 칼은 괴이살해라서 말이지ㅡ 흡혈귀한테 빌린, 괴이만 베는 요도야. 너가 아니라ㅡ 네
신체에 묻혀있는 방해고양이만 베었어”
하네카와가 웅크리고 앉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오른쪽 손등이다ㅡ 그걸로 판단하는 한, 아무래도 내 상반신을
날려버린 것은 오른손으로 내보낸 고양이 펀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오른손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다.
그야 그렇다.
인간을 상처입힐 수 없다ㅡ 괴이살해가 베는 것은 괴이 뿐.
괴이살해가 죽이는 것은 괴이 뿐.
오시노가 고전했던 방해고양이의 특성ㅡ 스친 상처가 치명상이 될 수도 있는 에너지 드레인 정도가 아니다.
쇠약이라던가.
졸도라던가.
그렇게 어중간한 결과는 필요없다.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스.친. 상.처. 하.나.로. 괴.이.를. 죽.인.다ㅡ 요도 [코코로와타리]
“그, 그런”
내 설명을 듣고.
하네카와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된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칼이 있다니”
“아아. 몰.랐.지?”
말.한. 적.이. 없.으.니.까. 말.이.지.
괴이살해에 대한 것은 나도 흡혈귀 유녀한테 직접 들은 것이다. 전승이나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ㅡ 단지
나한테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봄방학.
그 폐빌딩 옥상에서ㅡ 완전체인 흡혈귀 유녀와 둘이서.
단둘이서 지낼 때에 들었던 이야기.
키스숏·아세로라이온·하트언더블레이드와 했던 저 애기는 지옥과 같은 체험 중 얼마 안되는ㅡ 내 보물과 같은
추억이다.
그러니까 괴이살해의 성질에 관해서는 아무한테도.
너한테도.
애기한 적 없어.
“전문가인 오시노도 저 녀석이 이렇게 굉장한 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방금 전까지 몰랐다고. 글자 그대로ㅡ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칼이라는 거지”
“오ㅡ 오시노씨도”
모른다니, 하고.
하네카와는ㅡ 신음한다.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하네카와한테 나는 계속한다.
자신만만하게.
“만약 이런 캐릭터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너는 절대로 이런 수법에 걸려들지 않았겠지ㅡ 자신의 신체
안에 칼을 집어넣어 함정을 판다는 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야. 도저히 작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잔꾀지”
그런데 하네카와는 걸려들었다.
어이없이, 싱겁게.
함정을 파자마자 바로 걸려들었다.
그녀는 몰랐으니까.
몰랐다ㅡ 그러니까.
“뭐, 그래도 이건 희망적인 관측이지만 말이야ㅡ 혹시라도 너는 그 칼의 존재를 나한테 들을 필요도 없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심했다고, 하네카와ㅡ 너도 뭐든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네”
“............”
“뭐든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네“
나는ㅡ 숨도 간간히 끊기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뭐든지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단념하지 말라고ㅡ ‘죽어버려‘ 같은 말. ’나 같은 건 죽어버
려’ 라고 말하지 말라고, 웃기지 마. 너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직 많이 있잖아! 그렇다면! 뭐든지 아는 게
아니야, 알고 있는 것만 안다고ㅡ! 평소처럼 그렇게 말해줘!”
쿨럭하고.
말의 마지막에는 대량의 피가 섞였다.
동체나 입에서도 출혈대서비스로, 길거리 곡예로 따지자면 칼로 하는 요술에서 물로 하는 요술로 이행한
형태이다.
아니, 하찮은 비유를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죽겠지.
이대로 비참하게 죽겠지.
요도에 스친 상처 하나로 방해고양이를 소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제로서 나는 동체를 관통한다는 (설마
상반신과 하반신을 절단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레벨의 공격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왼팔이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드레인을 동반하는 방해고양이의 공격에는 흡혈귀의 치료스킬이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 동체에서 밑부분이 재생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ㅡ 그저 끊임없이 피와 내장이 흘러넘칠 뿐이다.
요도가 꽂혀있는 하반신을 강제로 연결하면 혹시나 이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일단, 그 칼을 삼킬 때와 상반신을 날려버렸을 때 괴이살해는 내 신체를 적지 않게 상처입혔기에 그 데미지도
은근히 크다. 뭐, 저쪽은 죽어도 죽지 않고, 죽여도 죽지 않는 흡혈귀의 불사신성으로 재생이 이미 시작된
모양이지만ㅡ 어차피.
나는 죽는다.
하네카와한테 살해당해서 죽는다.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는다.
정말ㅡ 얼마나 행복한지.
“............”
물론 알고 있다.
자신이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ㅡ 명확히.
쓸데없다.
이.런. 것.은, 이.런. 것.은, 엄청나게 의미가 없다.
괴이살해를 사용하면 확실히 방해고양이는 퇴치할 수 있다ㅡ 그래도 그 뿐이다.
이야기는 완결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네카와가 안고 있는 스트레스가 극복되는 것도 아니고ㅡ 가정의 불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방해고양이라는 존재가 없어질 뿐.
즉 상황은 골든위크 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고양이가 5 백명을 덮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시도한 것과 별 차이 없다ㅡ 아니, 그쪽은 아직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해결방식으로 좋다면ㅡ 오시노는 아마 백번씩이나 지지 않겠지. 처음 싸웠을 때 결착을 냈을 테다. 말도
안되는 타협의 산물이다ㅡ 아까 오시노가 말했던 베스트프렌드로서의 두 번째 충고는 분명 그런 것이겠지.
괴이한테 전부 책임을 떠넘겨서 시추에이션을 전부 리셋하려고 하는 행위.
굳이 말한다면 그건 클리어하는 순서가 틀렸다고 해서 게임의 전원을 일단 끊고 세이브포인트부터 다시 시작하는
행위이다.
동물의 숲이라면 리셋씨한테 혼난다. (주:동물의 숲-NDS 용 게임, 와이파이대응//리셋씨-세이브안하면
나타나는 두더지)
비겁하고 임시방편이고.
진정한 의미로 일시적인 방편이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
나는 별로 너를 구하려고 생각한 게 아니야, 하네카와.
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다거나 양친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도 지금 와서는
뒤늦은 핑계야.
무의미하고 쓸모없어도ㅡ 너를 위해서 죽고 싶어.
그것뿐이야.
뭐, 그렇군. 저거야, 뭐였지.
아아......아니, 뭐, 그래도, 말하고 싶은 것은 전부 말했나.
응.
그래, 아까 말했던 대로이다.
힘내.
힘내.
해야 할 일들이 가득 있고, 싫은 일들이 가득 있어 앞으로도 계속 되지만ㅡ 힘내.
힘내서 행복해지도록 해.
나는 이대로 죽지만ㅡ 나는 나이고 괴이이고 괴물이고 흡혈귀라서 사람을 죽인 걸로 세지 않아도 되니까, 후딱
잊어버려.
다음은 혼자서ㅡ 잘 해봐.
“우......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내가 자기만족과 자기도취로 니힐을 가장해 눈을 감으려고 할 때ㅡ 깜짝 놀랄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주:니힐
(nihilism)-허무주의)
하네카와의 형상이 한층 더 변모했다.
한층 더 고양이처럼ㅡ 양팔, 양다리를 흰색 털이 감싼다.
발톱이나 이빨도 쑥쑥 자라서 특이하게 솟아난다.
그건 이미 고양이가 아니라 화이트타이거와 같았다.
“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순간 불꽃이 강하게 타오르는 것처럼ㅡ 방해고양이의 존재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하네카와를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피라미여도, 저급이여도.
죽기 직전이어도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어도.
썩어도 괴이.
죽기 직전의 고양이가 하네카와의 정신을 지금 갈기갈기 찢어놓아 능욕하고 있다.
칼에 베인 상처에 아파하고 날뛰면서 하네카와를 할퀴고 있다.
요도로 인해 하네카와와 방해고양이가 분리되어ㅡ 그 결과 불균형을 일으키고 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하네카와의 비명과 고양이의 비명이 교착한다.
서로 겹쳐져서ㅡ 싱크로한다.
그 비명에.
나는 마음놓고ㅡ 죽을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고양이”
다르겠지.
하네카와를 상처입혀서 어떡하냐고.
네. 녀.석.이. 어.째.서. 하.네.카.와.한.테. 들.러.붙.었.는.가ㅡ 네. 녀.석.이. 어.째.서. 하.네.카.
와.한.테. 받.아.들.여.졌.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고양이의 기억력으로는 기억할 수 없는 건가.
그건 절대로 고양이다운 변덕이 아니겠지.
고양이다운 것도 고양이답지 않은 것도 아니겠지.
네 녀석이 하네카와를 위해 이것저것 손을 써준 것은ㅡ 고양이의 손을 빌려줬던 것은 하네카와가 길바닥에
죽어있던 네 녀석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아.
룰에 따라. 윤리관에 따라.
완전히 무감정하게.
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그 말이 맞지만ㅡ 그것뿐만이 아니야.
나 때도 그랬다ㅡ 흡혈귀한테 덮쳐져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나한테도, 하네카와는 전혀 동정을 하지 않았다.
동정하거나, 연민하거나.
절대로 불쌍하다고ㅡ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등하게 봐주었다.
그렇겠지, 방해고양이.
길바닥에서 죽어있던지, 흡혈귀에 덮쳐지던지ㅡ
“우리들은 불.쌍.해.보이는 게 아니잖아!”
알고 있어.
변덕이 아니다.
은혜를 갚는 것만이 아니다.
네 녀석도 그런 하네카와를 좋아하게 되었구나ㅡ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네카와를 덮치는 것은 그만둬.
그만둬.
그만둬줘.
그만두세요.
내 바램을ㅡ 들어줘.
그래서야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은 것이 전혀 아니잖아ㅡ
“바보인가, 이 하인은. 난폭하게 전원을 끊어버리면 기계가 손상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고.
갑자기 그런ㅡ 환청이 들렸다.
너무 아픈 나머지.
죽을 때가 되어ㅡ 나는 그런 환청을 들었다.
리셋씨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녀가 질책하는 환청이ㅡ 들렸다.
“............!?”
아니, 실로.
정말로 환청이 들린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ㅡ 눈치챘을 때에는 언제부터 있었다고 표현하기보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게, 괴이 그 자체라고 봐도 좋은 존재의 불확실성으로 내 머리를 넘나드는
형태로 당돌하게 나타난 그녀가ㅡ 말할 리가 없으니까.
신출귀몰ㅡ 아니.
귀.출.귀.몰.의 그녀.
키스숏·아세로라이온·하트언더블레이드ㅡ 의 영락한 모습인 금발 금색 눈의 유녀가.
말하거나 할 리가 없으니까.
“검사도 미야모토 무사시 수준이 되면 노을 가지고 검으로 사용한다지만ㅡ 그대는 정말 그것과 반대로군. 짐이
자랑하는 명도를 거칠게 다루고. 무슨 괴이를 생선회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웃음거리로군”
(주: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에도시대 이도류를 사용하는 전설적인 사무리이,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결투를 했던 간류섬의 일화가 유명함, 무사시가 일부러 늦게 가서 도발한 후, 배 젓던 노로 코지로를
때려 죽임)
그녀는 그렇게 주절주절 수다스런 환청을 계속하다가, 뿌직, 하고 실로 어이없이 자신의 왼팔을 잡아뗐다.
프라모델 부품처럼.
물론 그녀의 팔은 프라모델 부품이 아니기에ㅡ 그 단면에서 새빨간 생피가 콸콸 흘러넘친다.
8 일 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그 광경에 눈을 빼앗겨 멍하니 있으면, 흡혈귀 유녀는 오른팔로 왼팔을 휘둘러
흘러넘치는 선혈을 샤워처럼 내 동체에 뿌렸다.
“............!”
이미 소개했던 대로 흡혈귀의 피에는 힐링 효과가 있다ㅡ 게다가 이 경우 순결한데다 순혈의 흡혈귀였던 과거를
가진 흡혈귀 유녀의 피이다.
그 효과는 극적으로ㅡ 내 동체의 단면에서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하반신이 쑥쑥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방 중앙에서 요도에 꽂혀있던 내 하반신이 증발하는 것처럼 소멸되어ㅡ 옷과 신발, 그리고 [
코코로와타리]의 긴 칼날만 그곳에 남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어째서 지금 현재 찌꺼기에 불과한 이 녀석이 이만한 치유를ㅡ 아아, 그런가.
막 생겨난 그 의문은 내 안에서 곧바로 해결된다. 말하자면 나는 이 골든위크 동안 이러쿵저러쿵해서 흡혈귀
유녀한테 피를 너.무. 많.이. 주.었.다ㅡ 구실을 만들어서 피를 마시게 한 것이 너무 지나쳤다. 아까 칼을 받고
나서도 결국 그 보답은 아니지만, 굳이 말한다면 이별 선물처럼 피를 가득 마시게 했고ㅡ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흡.혈.귀.성.이 다소 지나칠 정도로 돌아오고 있다.
봄방학 정도는 아니어도ㅡ 분명 그 때와 비교될 정도로.
방해고양이의 에너지 드레인 효과를 능가할 정도로.
나는 잘못 계산했다.
그녀한테 준 피의 양이 초보자가 눈대중으로 판단한 거라서ㅡ 기준치를 넘어 너무 지나쳤다.
“하여간, 저번에도 그랬지만 항상 눈앞에 닥친 일만 생각하는군, 이 하인은. 짐을 멋대로 살려놓고ㅡ 멋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바보 녀석, 하고 말하고.
불쾌감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며
처절한 웃음을ㅡ 띄우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모범을 보여줄 테니까 거기서 잘 봐두도록, 넋을 잃고 봐두라고. 알겠나, 괴.이.살.해란. 이.렇.게. 하.는.
거.다”
그것이 첫 번째 환청이었다.
애당초 나한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다고 망상하는 것뿐.
자기중심적인데다 자의식과잉에 포지티브한 희망적 관측이란 녀석이다.
그래도ㅡ 환청이라도 좋다.
환청이라서 최고다.
환각도 아니라면ㅡ 이건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와준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해서ㅡ 눈물이 난다.
“우ㅡ 냐앗!?”
흡혈귀 유녀는 말없이ㅡ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없이 느긋하게, 유녀이면서도 왕이 된 자의 풍격을 가지고
방해고양이한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던 도중, 바닥에 꽂혀있던 요도를 지나가는 김에 뽑아서, 이런 호들갑스런
물건은 사용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번에 삼켜 체내에 집어넣고, 방해고양이한테 다가가.
잘 먹겠습니다, 는 한 마디도 없이.
버릇없게 그 목을 덥썩 물었다.
식사이다.
칼에 베인 상처로 인한 아픔을 참는 게 고작인 방해고양이는 그것을 뿌리칠만한 여유가 없다. 에너지 드레인은
이빨이 닿는 시점에 발동되지만ㅡ 그것조차 효과는 없다.
흡혈귀한테 에너지 드레인이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정력을 아무리 빨아들인다고 해도, 그런 건 곧바로 빨아들여질 뿐이다.
서로 잡아먹는 관계이지만 스킬의 레벨이 너무 다르다.
지금 전신을 덮고 있던 희고 고운 털들이 서서히 사라져간다ㅡ 방해고양이라는 괴이가, 괴이만이, 빨려들어간다.
흡혈귀 유녀 안에 빨려들어간다.
하.네.카.와.의. 스.트.레.스.가ㅡ 흡.수.되.어.간.다.
“......괜찮겠지”
나는 중얼거린다.
육체는 완쾌되었지만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하지만 혼잣말이 아니다.
그건 하네카와한테 한 말이었다.
“괜찮겠지, 하네카와. 우리들, 모두 정상이 아니지만......굉장히 불행하고 하나도 보답받지 못하는데다 전혀
돌이킬 수 없지만......, 평생 이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걸로 괜찮겠지!”
이미 흡혈귀 유녀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교실 안에는 나와 하네카와 단둘.
고양이귀도 없어졌고, 머리카락도 검게 돌아와서.
원래대로 돌아온 하네카와는 흡혈귀 유녀한테 해방되어, 속옷 차림인 채 졸린 듯이 누우면서ㅡ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하고.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그런 말을 했다.
핫.
그야 그렇다.
너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올발라.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들은 이렇게 꿈처럼 행복하게, 악몽과 같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현실과 같은 꿈처럼
필사적으로.
문제를 뒤로 미루었던 것이었다.

/013

후일담이면서 이번 결말.
간신히 막을 내리는, 내려질 만큼 내려진ㅡ 이번 결말.
다음날, 평소와 같이 두 여동생, 카렌과 츠키히한테 두들겨 맞고 깨워져 나는 눈을 뜬다ㅡ 아니, 그 때는
골든위크 때처럼 말하자면 자고 있었다기보다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기에 깨워진 것이 아니라 소생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덧붙여 말하면 예상대로 5 월 3 일부터 5 월 7 일에 걸쳐 카렌과 츠키히의 파이어시스터즈는 괴물고양이 소동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 안을 우왕좌왕했다고 한다ㅡ 하지만 결국 골든위크 내에 그 단서(尻尾)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주:尻尾を摑·む-꼬리를 잡다, 단서를 잡다)
꼬리(尻尾)가 없는 고양이니까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
하여간, 사람이 무릎꿇고 절하고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오늘부터
수색활동을 재개하는 모양이다. 뭐, 마음대로 하라고. 이번만큼은 굳이 말리지 않는다. 끝나버린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 이야기되고 전해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나는 아침식사도 대충 하고 자전거에 올라 집을 나선다ㅡ 학교에 가니까 머신은 마운틴바이크가 아닌 마마체리
쪽이다.
하지만 학교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러니까 조금 일찍 출발했다.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하네카와와 함께 흰 고양이를 묻어줬던 곳, 굳이 말한다면 무덤이다ㅡ 오시노가 텅
비어있었다고 말했던 저 무덤.
장소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기에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애먹지 않고 그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ㅡ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들고 온 모종삽으로 그 자리를 파보면ㅡ 무덤을 뒤엎어보면 그곳에는 확실히.
고양이의 사체가 묻혀있었다.
빛이 바랜 은색 고양이의 사체가ㅡ 지면에 매장되어 있다.
텅 비어있지ㅡ 않았다.
부패한 냄새가 감도는 리얼한 사체였다.
“흠”
뭐, [하지만]이라고 말해봤지만, 알고 있던 것이었다ㅡ 이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예상대로이다.
자, 문제는 오시노가 이걸 알고 있었는지 여부이지만ㅡ 아니.
아마도 내가 전한 방식이 나빴던 거겠지. 오시노는 실수로 다른 장소를 파내고 사체가 없어졌다고 착각한
거겠지ㅡ 저 녀석도 만능은 아니니 착각 정도는 하겠지.
나는 그렇게 납득하고, 다시금 고양이의 사체에 흙을 덮어 묻어주고.
양손을 모아 합장한다.
명복을 빌었다.
“자, 그럼”
그리고 다음에 향한 곳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전에 학원이었던 폐빌딩이다ㅡ 무덤을 발견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려서 서두르지 않으면.
그렇다고 해도 이쪽은 긴요,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ㅡ 단순히 어젯밤은 내 신체의 상처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고 어떻게든 회복되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저 흡혈귀 유녀한테 고맙다고 하려고 생각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주자고 생각했다.
복종의 증거ㅡ 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그 정도는 허락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ㅡ 분명 고맙다고 말해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
그러한 내 기대는 크게 빗나갔다.
에필로그이기 때문에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뭐든지 가능할 거라는 전능감은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도착한 후, 4 층의 교실에서 그녀와 만나보니 흡혈귀 유녀는 어이없게도 오토바이를 탈 때 쓰는 고글이 달린
수수께끼의 헬멧을 쓰고 있다.
이래서야 쓰다듬어줄 수 없다.
“아아, 그거? 응, 흡혈귀짱이 졸라서 말이지. 뭐, 결국 고양이 사건은 그녀가 전부 해결해준 것이니까
포상으로 선물해주었어”
오시노는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무슨 짓을.
“기대가 빗나갔다고 할까......부질없는 희망이었군”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냐고.
이래서야 관계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될 뿐이잖아.
어쩔 수 없지만.
이러한 상태면, 저 때 들려왔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도, 사실은 환청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진짜로ㅡ 멋쩍은 걸 숨긴다거나 츤데레도 아니고. 그녀는 나를 도우려고 한 것도 아니었겠지.
봄방학 때 하네카와에 대한 원한이 아직 남아있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고, 나라고 하는 영양원을 보호한다는
명목도 한몫 했을 테고, 혹시나 미스터도너츠를 10 개 먹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지도ㅡ 뭐, 그거야말로.
고양이보다 변덕스러운, 그녀다운 변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괜찮다.
변덕도 실력 중 하나이다.
언젠가 저 환청을 현실로 듣고 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 아름다운 금발을 휘젓는 것을ㅡ 내 목표로
삼을게.
언젠가 네 녀석과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할게.
사람이나 괴이처럼 그런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
“뭐, 흡혈귀짱이 요도를 아라라기군한테 빌려줬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 일이지만 설마 자진해서 도우러
오다니ㅡ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질 뿐인데. 핫핫, 나는 이미 아라라기군과 반장짱의 일은 포기하고 있었는
데”
“............”
은근슬쩍 냉정한 말 하지 말라고, 이 녀석.
이것도 어디까지가 진심인지ㅡ 뭐, 이런 경우는 역시 전부 다 진심이겠지만.
뭐.
그 냉정함이 이 녀석의 맛이다.
“거기다 저런 계책으로 잘 되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ㅡ 찬물을 끼얹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반장짱 자체가 괴이화하고 있으니까 요도로 반장짱을 베어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는데”
“어!? 이제 와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이쪽은 전문가가 보증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서 임했는데!
너무 냉정하다고!
“반장짱이 진.짜.로 빙의되었다면ㅡ 위험했어”
“............”
그야 오시노가ㅡ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나.
고전했던 이유니까 말이지.
“그런데 오시노. 뒤처리는 전부 네 녀석한테 맡긴 이상, 말참견할 생각은 없지만......하네카와 말인데ㅡ
괜찮겠지?”
“응?”
오시노는 얼버무리는 것처럼 고개를 꺄우뚱한다.
이것이 학교에 가기 전에 확인해야 되는 마지막 용건이었다ㅡ 이것만큼은 확인해두고 싶었다.
“아아, 괜찮아. 그건 보증하지ㅡ 반장짱은 이 골든위크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 그 부분의ㅡ
블랙하네카와일 때의 기억은 완전히 잃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오시노는ㅡ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일부러 과장되게 입에 물었다.
“블랙하네카와? 그건 또 뭐야?”
“저. 상.태.의 반장짱을 말하는 거야. 저걸 방해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다르니까 말이지ㅡ 신종에는 신종의
이름이 필요해. 새로운 현대의 요괴, 블랙하네카와”
“네이밍센스 참 없네, 네 녀석”
하고 악담을 퍼부으면서, 나는 그것이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잘 붙인 것도, 이름을 잘못 붙인 것도 아니다.
훌륭하게ㅡ 이름이 실체를 나타낸다.
다크블랙.
그런 속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으니까 붙인 것이 아니고ㅡ 아니, 그런 점도 물론 있지만, 그 이전에.
저, 검고 검고 검고 검은ㅡ
암흑과 같은 존재의 그녀도 또한.
하네카와 츠바사란 점은 틀림없으니까.
“신종이네......뭐,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즉, 괴이와 관계없는 진짜 이중인격이라는 것이 되나ㅡ 저런
건”
“웅. 아니, 그런 게 아냐. 역시 저건 괴이야. 그렇게 설명해야만 해”
오시노는 매우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후,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의 반장짱을 집까지 바래다줬지만ㅡ 그 길에서 여러 가지 애기를 들었어”
“......몽롱하기는커녕 의식이 없었잖아”
“없었지만 말이지. 있다면 듣지도 못했어ㅡ 최면요법 같은 거니까”
그건 즉.
오시노의 본직이기도 한.
“괴이 이야기의 수집ㅡ 이란 거군”
“아아. 신종 괴이는 기계문명이 전성하는 지금 시대에 드물어ㅡ 그러니까 본인한테 제대로 애기를 듣고 싶었어.
뭐, 그것과 별개로 일한 만큼 대금을 청구해뒀지만 말이지. 10 만엔 정도”
그래도 뭐, 기억이 없다면 청구도 못하려나ㅡ 하고 오시노는 농담처럼 말한다.
하지만 10 만엔이라니, 나와 비교하면 너무 싸잖아......아니, 결국 오시노도 아까 말했던 대로 이번 사건의
해결에는 흡혈귀 유녀의 활약이 컸으니까 비율로 따지면 그 정도가 타당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마, 필요경비만 청구한 거겠지.
“그래서 뭘 들었어, 최면요법으로”
“뭐, 듣고 나서 이건 내 추측이지만ㅡ 처음에 고양이는, 단순히, 진짜로 성실했던 방해고양이였던 모양이야.
그래도 그 방해고양이 현상 자체는 곧바로 끝나버렸어”
“끝나버렸다고?”
“양친을 에너지 드레인했던 시점에ㅡ 우.연.히. 가.장. 가.까.이. 있.던. 인.간.을. 손.댄. 시.점.에
반장짱의 의식은 일단 돌아왔던 모양이야. 그 시점에ㅡ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졌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바램ㅡ”
욕구인가.
양친한테ㅡ 폭력적인 반항을 하는 것이, 그녀, 하네카와 츠바사의ㅡ
“그.래.도. 곧.바.로. 돌.아.왔.어. 아니ㅡ 반장짱 자신이 강하게 원해서, 떨어져나간 고양이를 스스로
데리고 돌아와, 다시금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맞으려나. 들러붙은 것을 받아들였지. 사실은 떼어놓고,
거절했을 터인 괴이를. 끝내지 않고 계속했어. 방해고양이는 반장짱한테 딱 들어맞는다고 말한 것은 나이지만,
그걸 바탕으로 말한다면 너무 딱 들어맞는 거겠지ㅡ 너무 딱 맞았기 때문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어. 즉, 고양이의
요상한 매력에 홀려서ㅡ 정이 들어서, 그 순간 신괴이, 블랙 하네카와가 탄생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 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쁜 짓 삼매경(惡業三昧)ㅡ 인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에너지 드레인.
밤마다 토오리마(通り魔)처럼. (주:토오리마(通り魔)-일본의 귀신, 바람처럼 사람 사이를 지나가며 사람을
죽이는 귀신)
변질자처럼 사람을 덮친다.
양친한테 한 에너지 드레인은 그야 물론 정당하다고 할만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동기였다ㅡ 그래도 그
다음에 한 짓은 그렇지 않다.
그럴싸한 것은 전혀 없다.
이유를 묻는다면.
당시 하네카와는 분명 이렇게 대답했겠지.
[닥치는 대로 해치웠을 뿐, 이유는 없어ㅡ]
[ㅡ 왜냐하면, 열받았는걸]
웃음거리이다.
괴이가 들러붙었을 때는 정당하고, 괴이를 받아들이고 난 후는 사악했다니ㅡ 그래도 그렇기에 인간이다.
하네카와는 인간이다.
“왠지ㅡ 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뒤집어쓴다는 애기 같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네카와의 책임이었지만ㅡ 저기,
오시노. 저대로 계속 사람을 덮쳤으면 방해고양이ㅡ 가 아니라, 하네카와ㅡ 도 아닌, 블랙하네카와란 녀석은
스트레스를 전부 해소해서 없어지려나”
(주: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진다(皿を舐めた猫が咎を負う)-생선을 먹은 고양이는 이미 도망가고 나중에
와서 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짊어진다, 악인이나 범죄자는 잡히지 않고 엉뚱한 사람만 잡힌다는 것)
내 의문은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어찌해도ㅡ 쓸데없는 짓을, 주제넘게 괜히 나서서 끼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내버려두면 될 것을 제멋대로,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ㅡ 쓸데없이 나서고.
하네카와의 방해를 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가, 그래도 남는다.
“그렇지 않아ㅡ 말했겠지. 저대로 계속되었다면 고양이한테 빠져서 사라졌을 뿐이야. 죽일 수밖에 없어.
날뛰어서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고생하지 않아. 나 같이 적당히 사는 인간 입장에서 본다면 쓸데없이 스트레스가
쌓일 법도 해ㅡ 스트레스란 건 적당히 모아둬야 하는 법이야. 반장짱의 블랙하네카와화는, 그 폭주는 오히려
양친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
“어......? 그래도ㅡ”
“인장응력(tensile stress)이라고 말하나. 버티지 못하면 막대기는 부러진다고 말하지만ㅡ 누구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ㅡ 아니, 뭐, 그런 걸 제쳐두더라도 괴이에
의지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는 건 너무 제멋대로지. 아라라기군이 한 것은 올발라” (주:인장응력
(tensile stress)-물체에 힘을 가했을 경우, 물체 내부에서 저항력이 가해지는 것)
무엇이, 누구 입장에서 올바른가 라는 건ㅡ 정말로 제멋대로이군.
확실히 나는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별로 하네카와가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검고 나빴을 뿐이다.
검다고 해서ㅡ
진지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순수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네카와한테 불리한 기억은 블랙하네카와가 전부 짊어줬다는 건가ㅡ 상당히 편리한 괴이로군”
“짊어졌다기보다 대신 해주는 거지. 연대보증인 같은 거야. 뭐, 반장짱 자신이 만들어낸 괴이이니까 말이지ㅡ
그녀한테 형편좋게 돌아가는 것도 당연해. 자작캐릭터이기에 기회주의 중에서도 이상주의야”
뭐, 나는 잊어버리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ㅡ 하고 오시노는 말했다.
“양친도 나름대로 강렬한 에너지 드레인의 결과, 딸한테 덮쳐졌다는 기억은 사라진 모양이지만ㅡ 그런 거,
언발에 오줌누기인 걸. 언발에 오줌을 싸도 얼 뿐ㅡ 더 이상 흐르지 않아” (주:臭いものには蓋をする-악취나는
것에 뚜껑을 덮다, 곤란한 일을 임시변통으로 숨김)
“흐르지 않아ㅡ 인가”
불화도, 일그러짐도.
가정 내 폭력도, 육아포기도.
무엇이든.
남아있는 채ㅡ 끝나지 않고, 계속 잔존해 있는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은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ㅡ 잊어버리는 쪽이 낫다.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라면ㅡ 마음을 잊는 쪽이 낫다.
이 골든위크에 있었던 일은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고ㅡ 고양이한테 물렸다고 생각하고, 악몽이라도 꾼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걸로 해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잖아.
기억하던지, 잊어버리던지
없던 일로 될 수 없고ㅡ 어차피 아무 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기회주의 중에서도 이상주의네. 즉 내가 생각한 괴이ㅡ 라는 느낌일까”
“그래그래. 바로 그거. 아라라기군 역시 초등학생 때는 나만의 오리지널 초인을 생각했잖아?”
세대가 다르다.
그래도 뭐, 자신만의 스탠드라면 생각했군. (주: 스탠드-죠죠의 기묘한 대모험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힘,
의지력로 발현,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7 부 진행중)
“형편좋게 자신을 구해러 오는 히어로ㅡ 그걸 밖에 요구할 수 없고, 자신 안에서 키웠다는 거네, 반장짱은”
“그렇게 말하면 역시 이중인격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그래도 실은 그렇게 들리도록 말하고 있어. 그렇게 해두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
말이지ㅡ 애당초, 괴이란 건 그런 존재야”
“그런 존재?”
“원래는 진실과 다르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면 암울해지니까 요괴 탓으로 해두자고ㅡ 이런 느낌의 책임
전가지. 반장짱이 가정 스트레스에 짓눌려서 기행을 벌였다ㅡ 이렇게 결론을 내는 것보다, 괴이나 방해고양이,
블랙하네카와나 이중인격, 그런 결론을 내서 그.런. 것.으.로. 해.두.는. 것.이 가장 문안하겠지”
“그런 것으로ㅡ 해둔다”
밸런서인 오시노답지도 않고, 그뿐만 아니라 이 녀석의 이론이 파탄날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그것이 이번
일에서 이 녀석이 나름대로 정한 타협점일지도 모른다. 프로로서 일을 완전히 마무리짓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
즉 타협점이라기보다ㅡ 끝맺음.
이번 사건의 결말.
부조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ㅡ
"흑백이 가려지지 않은 어중간한(gray) 결착이란 느낌이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장난으로 끝ㅡ 이다.
“어쩔 수 없어. 이도저도, 결국은 반장짱이 선택한 결말이야. 나나 아라라기군은 참견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아라라기군은 앞으로도 열심히 평상시대로 대해주면 돼”
“......그렇겠지”
그런 걸로 해둔다ㅡ 인가.
히어로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한 하네카와를 위해ㅡ 하네카와의 히어로가 될 수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인가.
그렇다.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오시노, 신종 요괴로 말하자면ㅡ 하네카와는 계속 가족이라는 이름의 요괴에 홀린 것이 아닐까”
문득.
나는 무심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ㅡ 그런 말을 했다.
말해보았다.
“고양이나 뭐, 귀신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ㅡ”
“가족이군. 그래도 반장짱한테 양친은 가족이 아니었겠지?”
“그러니까ㅡ 그렇기에”
나한테 카렌이나 츠키히가 당연한 것처럼 누구한테도 당연히 있을 터인 가족이란 존재가 저 녀석한테는 요괴변화
같은 것으로ㅡ 그러면 골든위크의 9 일 동안이 아니고, 15 년 동안이 아니고, 태어나서 여태까지 계속ㅡ 가족에
홀려서.
“하네카와한테 가족이란 건 계속 괴이였던 것이 아닐까”
“어떨지”
하지만 오시노는 부정적으로 고개룰 갸웃한다.
“하지만 가족이란 건 실제로 꽤 우울한 법이잖아? 반항기도 있고, 친부모라도 변변치 않은 사람도 있고ㅡ 저기,
아라라기군, 아라라기군은 일본지도를 그릴 수 있어?”
“응?”
아연해진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어른은.
내 애기를 듣고 있는 건가.
“그야 그릴 수 있지만, 무슨 애기야”
“아니, 일본인이라면 그야 대부분 일본지도를 그릴 수 있겠지ㅡ 그래도, 나는 그걸 일기예보 덕분이라고 생각해.
일기예보를 보면서 일본인은 일본의 형태를 기억하는 거지”
“하아ㅡ”
흠.
뭐, 듣고 보면.
일본지도를 그릴 때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TV 에서 본 일기도이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일기예보 쪽이 지도책보다 훨씬 눈에 들어오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일기예보를 보는 걸로 일본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ㅡ 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오시노는 말했다.
어중간한 지식으로 아는 척하지 말도록ㅡ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과연 그렇군.
“참고로 [가족]이란 개념을 실체로 한 괴이도 이미 존재해ㅡ 자네가 생각해낸 것은 이미 옛날 사람이 생각하고
있어, 아라라기군”
“그렇겠지. 미안하게 됐네, 어설픈 지식 갖고 아는 체해서”
나는 어깨를 움츠린다.
“그래도 뭐, 고양이가 되었다거나 어떻게 되었다고 해도ㅡ 하네카와는 하네카와인 채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역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돼”
“결혼해버리면 되잖아”
너무도 쉽게.
오시노는 그런 말을 했다.
말해주었다.
“응?”
“아니, 그러니까 아라라기군이 반장짱과 결혼하면 되잖아. 그러면 반장짱은 계속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가족을
가질 수 있으니까”
“아니......”
너무 가볍게 말한다고.
결혼이라니.
“질나쁜 농담이라고, 오시노”
“그런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 봄방학 때 반장짱한테 받았던 은혜를 갚아줄 수 있는 타당한 거래라고
생각하지만”
“하네카와의 기분이란 것이 있겠지”
“그야 있겠지”
천연덕스러운 오시노.
놀리는 것 같은 말투도 평소대로이다.
“기분이 있으니까, 홀린 거지”
“............”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되는 거야”
괴이로도 된다.
오시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라라기군의 기분이란 것도 있잖아?”
“내 기분?”
“나는 분명 아라라기군은 반장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웃는다.
히죽 웃는다.
그래ㅡ
이곳은 히죽 웃고, 멋있게 폼잡는 장면이다.
“나는 하네카와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런가”
“그래”
그런 것으로ㅡ 해두자.
그게 가장 행복하다.
핫핫, 하고 오시노도 웃었다. 가볍게 웃었다.
“응, 아라라기군이 괜찮다면 그걸로 좋겠지. 뭐, 물어보긴 했지만 아라라기군의 기본보다 반장짱의 기분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지ㅡ 방해고양이가 뭘 하든, 아라라기군이 뭘 하든,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지는 거니까”
“그리고 하네카와는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ㅡ 말이지”
밖에서 구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고.
“......나한테 도움을 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분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것만은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하네카와가 부탁했다면 나는 뭐든지 했을 텐데”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지극단적으로, 지극신랄하게 말하는 오시노.
“그보다 자신의 망상 쪽이 훨씬 의지할만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니면, 의외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응?”
“꼭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도움을 요청할 것일 수도 있겠지? 꼭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오시노 메메는.
예전과 같이 꿰뚫어보는 것처럼ㅡ 말했다.
“경솔하게 애기하지 않는 말은 누구라도 있는 법이야, 아라라기군”
“............”
“핫핫-.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다니, 역시 사람은 혼자서 제멋대로 구해지는 것뿐이지만. 하지만
불쌍하게도 흡혈귀짱한테 빨려져서, 그 신종의 괴이가 없어졌다는 것도 슬퍼. 어차피 역사가 짧은 신종, 돌연
변종. 구식의 왕을 이길 수는 없지. 오리지널에 자작의 괴이는 根付くまでは寒い. 기계와 다다미는 새로운 것이
좋지만, 괴이는 오래된 것이 좋아”
“괴이의 왕ㅡ 흡혈귀”
말하면서, 나는 그쪽에 눈을 준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흠. 하지만 언제까지나 흡혈귀짱이다, 흡혈귀 유녀다, 이러면 너무 정신없네. 다행히 이제부터는
미스터도너츠로 길들인다는 이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 같으니, 어디, 이 아이한테도 나름대로 뭔가 이름을
붙여주도록 할까ㅡ”
문득 눈치채면 꽤 오랫동안 이야기해버려서 수업개시시간이 가까이 다가왔기에, 나는 오시노의 그런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폐빌딩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지각해버린다.
지각하면 하네카와한테 혼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는다ㅡ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모든 일을 잊고 있는 하네카와와 제대로
애기를 할 수 있을지ㅡ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일심분란하게.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해 자전거 보관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교실로 향해 바쁘게 계단을 올라가면서도ㅡ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불안해하지 않는다.
평소대로 웃어주는 하네카와한테.
평소대로 똑같이 웃어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ㅡ 하네카와를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저 녀석을 좋아한다고.
평생 말할 일은 없으니까.
“......하네카와”
나는ㅡ 누구한테도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하네카와씨.
나는 언젠가 너 이외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겠지.
너 이외의 누군가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다.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을 너한테 배운 나한테는 너 이외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분명 오겠지.
그래도 나는 너가 잊어버린 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9 일 동안을ㅡ 나는 언제까지나 미련이 남은 것처럼 기억해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설령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린다고 해도, 어떤 장래를 맞이한다고 해도, 너한테 품은 이 기분은 절대로
바뀌지 않고 없었던 것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고로, 그런 식으로.
고등학교 3 학년 골든위크, 18 세의 5 월, 아라라기 코요미의 첫사랑이 아닌 무언가는 실연했다.
나는 계단을 오른다.

번역은 어떤 분이 하셨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자 분, 감사드립니다.

ㅣ 2 차 배포ㅣ해서(http://hsblogs.blog.me/)
-취급 시 주의사항-

* 본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라이트 노벨의 작가에게 있으며


한국어판 2 차 저작권은 해당 작품을 번역한 역자 분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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