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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네코모노가타리 (흑)
6네코모노가타리 (흑)
니시오 이신
Illustration/VOFAN
번역: M_A_
/001
하네카와 츠바사와 마음껏 놀았던 골든위크 때를 새삼스레 떠올린다. 이제 와선 씁쓸하고, 찝찝한 추억이기에,
어딘가 달콤쌉싸름한 추억이라고 해도, 만약 가능하다면 잊어버리고 싶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해도 없던 일로
해두고 싶은, 황금색으로 빛난 9 일 동안의 일을 떠올린다.
하네카와 츠바사. 19 살. 성별 여자. 고등학교 3 학년. 클래스의 반장. 우등생. 앞머리를 가지런히 3 갈래로
땋은 상태. 안경 착용. 성실, 착실함. 선량. 머리가 아주 좋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아무리 알기 쉬운 기호적인 정보, 캐릭터 설정을 나열한다고 해도, 저 예외적인 그녀를 표현할 수 있다니,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녀한테는, 그녀를 실제로 마주 보거나 실제로 상대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실제로,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그녀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 때는 신들의 언어가 필요하겠지.
혹은 악마의 언어일지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진짜로, 정말로 죄송스럽기 짝이 없지만, 만약 골든위크 때의 일을 지금부터 상세하고,
아주 세세하게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애기한다고 해도, 저 악몽과 같은 9 일 동안의 진실은, 혹은 저 악몽과 같은
9 일간의 진실에 한없이 가까운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애초에 단념하고 있다.
그 일을 전달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나는 귀차니즘의 현신이며, 체념의 화신이다.
애초에 나는, 절대로 남한테 내 생각을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ㅡ 단적으로.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나의 은인에 대해, 하네카와 츠바사라고 하는 내 친구에 관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릴 뿐이다.
아마, 의미도 없이.
확실히ㅡ 아무 것도 아닌.
누구한테도, 나한테조차, 의미없는, 아무 것도 아닌.
텅 빈 상태란 건 이런 것이다.
그야말로 나중에 만나게 될 센죠가하라 히타기나, 칸바루 스루가 입장에서 본다면ㅡ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희생하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한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짓밟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강함을 가진 그녀들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지금부터 시도하려는 회고주의나 복고주의는, 극히
경박한 노스탤지어라서,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들고, 비웃을 가치도 없는, 생산성이 결여된 퇴보적인 행위로
비춰지는 게 틀림없다.
인간은 모름지기 낙관적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어서, 긍정적인 태도는 아니더라도 활동적으로, 적극적이 아니어도
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강하면서 약한 그녀들의 가치관이다.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살다 더러워져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탐욕스러워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그런 가치관은ㅡ 다르다.
나와 다르다.
약하고, 물러서, 그녀들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라라기 코요미와는 다르다.
기가 약하고, 소심한 녀석이라서, 좌우뿐만 아니라 일단 뒤쪽까지 살피지 않으면 횡단보도도 건너지 않는 그런
인간과는ㅡ 그녀들은 다르다.
그리고.
그런 나와, 하네카와 츠바사는 동류이다.
뒤죽박죽이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우수해서, 어떤 의미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존재의 면모를 지닌 그녀와 자신을 겹쳐서 생각한다는 건,
너무나도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저 골든위크를 겪고 내가 얻은, 교훈에 끝없이 가까운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유일한 것이겠지. 그걸 교훈이라고 하는 건, 너무나도 사기꾼 같은 말투이지만, 그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ㅡ 단념하자.
나와 그녀의 공통점.
아라라기 코요미와 하네카와 츠바사의 공통항목.
마음 속의, 같은 부분.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ㅡ 저 골든위크 이후로 시간이 흘러, 2 학기가 시작하려고 하는 요즘, 지금이라면,
새삼스레, 크나큰 아픔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통감한다.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한테 말을 걸어준 이유를.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와 만나준 이유를.
하네카와 츠바사가 나를 구해준 이유를.
그래도 그건 과연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이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이기에, 즉 이제 와서는 어찌할
수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챙길 것도 챙기지 못한 채 되돌이킬 수 없고, 바로잡을 수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만난 직후 바로 알아차릴 수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골든위크의 단계에서 그 주변사정을 눈치챘다고 한다면,
혹시라도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약하고 무른 우리들은.
다른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이건, 역시,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중얼거리는 혼잣말로, 평범한 의자에 앉아 써내려가는
보편적인 형태를 따르는 반성문이다.
졸업 직전에 쇠못으로 문자를 책상에 새기는, 후회의 글이다.
반성은 하고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ㅡ 같이, 듣기좋은 미사여구는 굳이 하지 않는다.
반성은 하고 있고, 후회도 하고 있다.
없던 일로 해두고 싶고, 되돌이킬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
나는 저 골든위크 때의 일이, 너무 후회되고 분하기에 어쩔 수 없다. 어째서 좀더 야무지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왜, 어째서. 불사신의 몸이 아니라면 죽고 싶을 정도로 분해서,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울 것 같아서,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이다.
그건 틀림없는, 악몽이다.
하네카와 츠바사.
이형의 날개를 가진 소녀.
시기적인 정황을 설명해두자면, 그건 고등학교 2 학년에서 3 학년으로 진급할 때, 지내는 2 주 동안의 봄방학,
내가 지옥을 경험했던 대략 1 개월 후의 일이 된다ㅡ 현대 일본에서, 얼토당토않는, 설마 흡혈귀한테
습격당한다는 실로 로맨틱한 경험을 한 어리석은 나는, 그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어떻게든 일상생활로
복귀했다. 나를 시대착오적인 불량아라고 착각한 하네카와 츠카사의 책략으로 인해 억지로 떠맡겨진 부반장이란
직책을 어떻게 짊어져야 할까, 라고 아직 그걸 고민하던 한중간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에는 이미 그런 걸
떨쳐버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ㅡ 어쨌든, 그 당시.
그녀는 고양이한테 홀렸다.
고양이.
식육목 고양이과의 포유류.
그러니까 나는 골든 위크 이후ㅡ 고양이를 거북하게 여긴다.
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그렇다ㅡ 하네카와 츠바사가 무서운 것처럼.
서론이 약간 길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ㅡ 방과 후에 남는 시간은 의외로 많으니까.
그럼, 내가 어제 본 꿈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002
후일담 겸, 이번 여담.
다음날, 평소처럼 나는 두 명의 여동생, 카렌과 츠키히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일어나게 된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공휴일이든 관계없기에, 그 날이 골든위크의 첫날, 4 월 29 일이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그런 장치로 짜여진 기계인 것처럼, 나를 아침 일찍 깨운다. 맨날 밤늦게까지 놀고 밤새는 너희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쉽지 않지 않을 테지,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부지런함, 그건 오빠의 생활싸이클을 걱정해주는
마음씀씀이 따윈 없고, 아마, 그녀들은 내 수면을 방해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힘을 뽐낼 작정이겠지.
시위행위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가정 내에 행해지는 세력싸움이다.
그런데, 그 여동생들이 깨우는 방법이 왜 이런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뭐, 그건
굳이 언급할만한 것이 아니란 점이 크나큰 이유이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계단에서 밀려 굴러 떨어지거나, 카멜클러치(camel crutch) 및 근육드라이버를
당하지만, 저건 뭐, 실은 TV 예서 볼 수 있는 연출이라고 말해둔다. 이미지를 깨뜨려서 죄송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 저런 짓을 하는 귀여운 여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camel crutch- 상대 두팔을 자신 무릎위로 올려놓고 그대로 목을 잡아당겨 등, 목을 꺾는 기술, 바케 8
화 참조, 근육드라이버- 자신 양다리를 상대 양팔에 대고 상대 양다리를 손으로 잡아서 찍는 기술, 바케 15 화
참조)
뭐, 다른 가정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에서 카렌과 츠키히는,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나라구”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네는 정도로ㅡ
“뭘 또 자려고 하는 거야. 죽어버려”
내 베갯머리에 쇠지레가 내리쳐진다.
확 일어나서 그것을 피하는 나.
아니, 다 피하지 못하고 머리털이 한 다발 젖혀졌다.
그리고 그 머리털 째로, 쇠지레의 끝은 내 베개를 꿰뚫었다.
베개 깃털이 살랑살랑 휘날렸다.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그 광경에, 나는 죽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가슴 속 심장의 32 비트 고동을
느끼는 한, 아무래도 생명을 건진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귀신과 같은 형상으로, 중학교 2 학년인 내 여동생, 아라라기 츠키히가 목욕복 차림으로, 베개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침대까지 관통해버린 쇠지레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쇠지레와 비슷한 물건.
이 아니고, 말 그대로 쇠지레이다.
세게 제일의 쇠지레이다.
“츠, 츠키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빠를 죽일 생각이야!?”
“또 잠이나 퍼 자는 오빠는 죽여도 된다구. 모처럼 나와 카렌이 깨워줬는데 또 자버리다니 배짱이 두둑하네.
죽어버리면 돼, 죽어버리면 된다구, 죽어버리면 되잖아”
“너, 책 첫머리부터 캐릭터 설정이 엉망진창이 되있다구!?”
이전 작품들과 어떻게 연결되냐고, 그거!
“나는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에 비해 캐릭터가 확립되지 않은 모양이니까, 시험 삼아 얀데레 흉내를 내봤어”
“얀데레는 무슨, 이러면, 미친 년이잖아!”
“그래도 오빠, 이걸 피했다는 건, 자는 척하고 있었다는 애기네”
“아니, 푹 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인간은 자고 있어도, 의외로 위기에는 대응할 수 있는 모양이다.
진화도 정점에 도달했다고 애기하지만, 이것 참,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생물이다.
“캐릭터 확립을 신경쓰다니, 정말, 아직도 중학교 2 학년이군, 너는”
“실제로 중학교 2 학년인 걸”
“그런가”
뭐, 나도 남한테 뭐라 할 수 있을 만큼 보람찬 중학교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아니, 경험자이기에, 더욱더
타일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 아침 일찍 깨우러 오는 여동생만으로 충분해, 너의 캐릭터는”
“완벽한 들러리캐릭터네, 그거”
그런 건 싫어, 라고 말한다.
뭐, 그런 브라콘 캐릭터 설정은, 누구라도 싫겠지.
“나도 카렌처럼 화려한 캐릭터를 원한다구-. 저건 이미, 여동생으로서 최종진화형태잖아” (주:デㅡハㅡ -
화려한, 하데를 거꾸로 읽음)
“아니, 저건 최종진화형태라기보다, [저렇게 되어버리면 이미 갈 때까지 가 버린] 캐릭터라고. 알겠어?
너한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 제대로 된 캐릭터가 되도록 힘내봐”
“제대로 된 여동생 캐릭터를 목표로”
“그래”
여동생 캐릭터를 목표로 한다는 시점에 이미 정상인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이 장소에 아무도
없다.
“구체적으로는 [빨강머리 앤]에 등장하는 마리라를 목표로 하는 거야” (주: 마리라- 빨강머리 앤을 맡은
아주머니, 매슈 아저씨의 여동생, 배경무대가 그린게이블즈)
“마리라!?”
“그려”
나는 매슈 아저씨의 말투로 응한다.
잠이 덜 깬 상태이다.
“정말-, 마리라는 진짜로 이상적인 여동생이지- 나는 저런 여동생을 원했어. 그야말로 츤데레 중 츤데레야.
[나는 남자애를 원했어! 여자애가 오다니 전혀 도움이 되질 않잖아!] 같은 거? 그래도 마지막은 앤한테 홀딱
빠졌으니까”
“아, 진정한 의미로 츤데레네”
“아니, 요즘 의미로도 츤데레야. 데레 상태가 된 후 앤한테 내뱉는 대사도, 엄청나게 불타오른다고”
“오빠, 빨강머리 앤을 그런 시선으로 읽고 있었어?”
“응. 빨강머리 앤을 읽을 때, 내 안에서 마리라의 CV 는, 변함없이 쿠기미야 리에였다고”
(주: 쿠기미야 리에-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 맡는 역할이 죄다 츤데레/로리/소년, 대표적인 츤데레 캐릭터:
작안의 샤나, 제로의 사역마 루이즈, 하야테처럼 산젠인 나기, 토라도라! 아이사카 타이가)
“개인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마”
마리라는 몇 살인데, 라고 츠키히는 말한다.
바보 녀석, 아무 것도 모르는군.
여동생은 50 세를 넘어서부터 진짜인데.
“그리 생각하면, 매슈는 인생의 승리자였네. 평생 여동생과 둘이서 지내고, 거기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3 갈래
댕기머리를 한 딸을 길렀으니까. 저 녀석은 신지군을 뛰어넘는, 찌질한 히키코모리 남자들의 희망이야”
“매슈를 찌질한 히키코모리 남자라고 부르지 마......”
“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가는 장면에선, 읽고 울 정도로 꽤 감동받았다고. 아아, 이런 거야, '
쓸데없는 거 사오고 있네', 라고” (주: 매슈가 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생하면서 고른 퍼프소매 원피스를
보고 마리라가 내뱉은 대사)
나는 생생하게, 저 명작을 회상한다.
“그러니까 츠키히, 너도 노력해줘. 그러면 나는 너와 장래에 그린게이블즈에서 함께 살며, 노후를 같이
보내줄게”
“오빠, 그거, 프로포즈나 다름없어”
“훗. 프로포즈가 아니야. 포로네즈야” (주:프랑스어(polonaise)-4 분의 3 박자의 템포가 느린 폴란드
고유의 가곡·무용곡, 궁중무도회에서 많이 추었음)
“구혼댄스!?”
아아, 정말, 이제부터 어떤 얼굴을 하고 빨강머리 앤을 읽어야 하나, 라고 츠키히는 머리를 감싼다.
곤란한 여동생이군, 라고 어깨를 움츠리고, 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부터 여동생한테 저속한 행동을 하려는 게 아니고, 단순히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것 뿐이다.
“영차. 그래서, 카렌은 뭐하고 있어?”
“응?”
말을 걸어보면, 츠키히는, 내 두 번째 잠을 방해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무사히 끝마쳤다고 만족했는지, 내
침대 위에 칠칠맞게, 뒹굴대기 시작했다.
마리라와는 완전 딴판으로, 쇠지레를 뽑는 건 단념한 모양이다.
오늘 밤 나, 어떻게 하지.
게임처럼, 방에서 나간 후 다시 돌아오면 고쳐져있나.
하지만 츠키히가 그녀의 목욕복이 풀어헤쳐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좌우로 뒹구는 그 모습은, 마치 애벌레
같다.
여동생벌레라고 이름붙여두자.
“오빠. 여동생한테 음란한 별명을 붙이지 마”
“부연설명을 읽지 마. 그보다 질문에 대답해. 너가 항상, 일심동체로 따라다니고, 나보다 키가 큰 캐릭터를
확립한 화려한 청바지 차림 여자는 뭐하고 있냐고 묻고 있어. 저 포니테일, 같이 있지 않았어?”
“카렌은 조깅하러 갔어-”
“조깅? 조깅란 건, 저 달리는 걸 말하는 건가? 드물군. 별로 그런 걸 하는 녀석이 아닌데, 저 녀석”
“오늘은 특별해. 카렌은 골든위크 개시 축하 기념이라고 말했어”
“뭔 기념이냐고”
“성화 봉송하는 주자의 이미지라고 생각해”
“그런가. 오늘도 저 녀석은 바보짓하는군”
“골든위크(ゴ―ルデンウィ―ク)와 올림픽(五倫(ごりん))이, 카렌 안에서 뒤섞였다고 생각해” (주:
골든위크의 [고]과 올림픽의 [고]가 뒤섞임, 언어유희)
“그런가. 앞의 1 글자밖에 똑같지 않은 단어가 뒤섞이다니, 정말 평상시 그대로의 바보군”
훈훈하다.
과연, 그래서 츠키히는, 두 번째에는 나를 혼자서 깨우러 온 건가.
이른 아침(지금으로부터 1 시간 전)에 단잠을 자는 나를 깨우러 왔을 때에는 2 인 1 조였지만, 그 후, 그녀들을
보내고 나서 다시금 잠을 청한 나의 위장을 간파하고, 또다시 깨우려고(뭐냐, 그건) 혼자서 다시금 온
츠키히이다.
그리고 쇠지레인가.
이 녀석은 혼자서 행동하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카렌과 츠키히 중, 흉폭한 건 격투기를 생업으로 하는 카렌 쪽이지만, 보다 위험한 건, 브레이크란 걸 모르는
츠키히 쪽이다.
“아-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골든위크인가. 좋은 일은 하나도 없네-”
“첫날부터 갑자기 비관적이네, 오빠”
4 월 29 일, 토요일.
신록의 날. (주:緑の日. 자연친화를 추구하는 공휴일)
“아직 골든 위크는 시작한 지 9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나 같은 달인은, 9 시간만 지나도 대강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어”
“오빠는 공휴일이나 경축일, 일요일은 싫어하니까-. 평일을 아주 좋아하는 평일인간이니까-”
“평일인간이라니”
맥빠지는 단어네.
아무런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뭐, 확실히 나는 맥빠지는 녀석이지만.
“별로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서툴러”
“똑같은 거야”
“똑같지 않아”
싫은 거랑 서투른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같은 거라고 하면 같지만.
반성은 하고 있지만 후회는 하고 있지 않다는 말에 대해, 반성과 후회는 같은 거라고 핀잔을 들은 기분이지만,
하지만 뭐, 반론의 여지는 없다.
“그래도 골든위크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여동생은 여전히
깨우러오는데다 화를 내고, 키는 평소와 다름없이 크지도 않으니”
“뭐- 그렇네-. 학교를 안 갈 뿐이네”
“사람은 전쟁을 그만둘 수 없고, 배신과 거짓말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응? 어째서 애기가 그쪽으로 부풀려지는 거야?”
“오늘도 반드시 세계의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누군가가 죽겠지? 그걸 내버려둔 채 뭐가 경축일이야! 상복을
입으라고!”
“오빠, 누구한테 무얼 화내고 있어?”
휴일은 (한 적이 없으니까) 한가해서 서투르다는 이유로 몹시 격분하는 오빠를 보면서, 여동생은 정말 질려하고
있다.
그 기분은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모처럼 흥미가 생겼기에, 나는 계속했다. 나는 여동생한테 배려를 해주는 타입의 오빠가 아니었다.
“내 기분은 언제나 장례식 상태야. 연하장 같은 건 보낸 적이 없어”
“그건 보낼 친구가 없어서잖아?”
“아는 척하지 말라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야!”
“적어도, 매년 받는 연하장의 갯수는 알고 있어”
“그랬지”
“정확히 말하자면, 오지 않는 연하장의 갯수는 알고 있어”
“그랬지”
고등학생이 되어서, 드디어 아무한테도 연하장이 오지 않는 나이다. 반 전원 모두한테 연하장을 돌리는
녀석조차 보내지 않는다. 즉 특별히 기분이 어떻다는 게 아니고, 늘 매년 장례식 상태였다.
“그런가-. 내가 경축일을 싫어하는 건, 친구가 없어서 놀 수가 없어서였나-. 이건 새로운 발견이군”
“굳이 눈치채지 않아도 될 일을 깨달았네, 오빠”
츠키히가 친오빠를, 매우 불쌍하다는 눈으로 슬픈 듯이 쳐다본다. 참고로 츠키히(와 카렌) 은, 연하장을 백의
배수 단위로 보내야 할 정도로 친구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아라라기가의 가계와 우체통을 압박하고 있다.
실로 극단적인 남매이다.
쉽사리 3 점의 중심을 잡을 수 없다고 할까.
“뭐, 그렇다고 해도, 경축일이 평일과 별반 차이도 없고, 나아진 것도 없는 나날들이란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아무리 꿈을 꾸어도 현실은 변함없어. 내 개인적인 사정은 제쳐두더라도, 나아지는 건 없어. 평소와 똑같은
매일을 지내는 게, 뭐가 골든위크야. 무슨 금색이냐고. 호밀밭의 파수꾼한테 붙잡힌다고ㅡ 아니, 그건 홀딩
(holding)이지만.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여동생은 여전히 깨우러오는데다 화를 내고, 키는 평소와
다름없이 크지도 않고, 사람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고, 배신과 거짓말은 끊임없이 밴복되고, 너의 팬티는 평소
때와 변함없이 흰색이고” (주: 호밀밭의 파수꾼- ライ麦畑でつかまえて, 호밀밭의 금색을 비유)
“내 팬티를 언급하지 말아줘”
츠키히의 딴지는, 겉보기에는 마치 묘령의 귀부인다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알몸이 훤히 보이는 목욕복의 옷자락 부근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중학교 2 학년의 사춘기 한중간이었다.
반나체라기보다, 거의 웃통을 벗은 상태.
정말이지, 대담한 옷매무시이다.
카렌도 그렇지만, 여성에 대한 환상을 무수히 산산조각내는 여동생이다.
“그레고르·잠자는 즐거웠겠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되었다고? 뭐가 ‘변신’이냐고. 똑같이 여동생을
데리고 있는데 부러울 뿐이야. 저기, 여동생벌레” (주: 그레고르·잠자- 독일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
신’에 나오는 인물, 평범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르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 가족한테 소외받는다는 애기)
“여동생한테 음란한 별명을 정착시키려고 하지 마”
“응-”
뭐.
그리 말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 벌레는커녕, 흡혈귀로 변신해버린 경험과 비교해보면, 나도 잠자씨를 단순하게
부러워할 수 없지만.
그런가.
저 봄방학으로부터, 벌써 1 개월인가.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군ㅡ 라고, 그런 최종회 같은 대사를 생각할 장면도 아니지만, 문득 되돌이켜보면,
의외라고 생각하게 된다.
봄방학 때 겪었던 저 경험은, 나한테 몹시 인상적이었고, 너무도 강렬해서, 저 2 주 동안 있었던 일이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라고도 생각했다.
인생이 피크가 있다면, 저 봄방학.
그러니까 의외이다.
그 봄방학이 끝나고 나서도, 아직 인생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 상황이.
오랫동안, 영원히.
계속해서 이어진다.
흔히 인생은 게임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건 리셋 버튼이 없기 때문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엔딩이 없기에 인생은
게임과 다르지 않을까.
최근에는 온라인게임이나 휴대용기기 넷플 등등, 이른바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도 존재하지만, 그건 뭐랄까,
오히려 게임 쪽이 인생처럼 된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주:すれちがい通信- psp 의 kai, nds 의
와이파이기능)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 한,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ㅡ 인생은 계속된다.
엔딩 테마도 스탭롤도 없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낙제생이어도.
친구가 없어져도.
흡혈귀가 되어도.
인간으로 돌아와도.
인생은 계속된다.
계속은 힘이고.
또한 계속은 무력함이다.
“흔히 골든위크라고 말하잖아-. 그런 영화업계의 상술에 순순히 넘어가는 건, 부끄럽지 않냐고, 나는 진심으로
충고하고 싶어”
“충고하고 싶은 거구나”
“막고 싶어”
“막고 싶은 거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잖아. 정지라고 말하면, 인쇄소도 택배도 멈춰버리니까, 수작업(巻き)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잖아”
“어째서 오빠는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발언하고 있는 거야?”
“골든위크 탓에 4 월에 나올 예정이었던 책이 7 월에 나오게 되었다고!”
“구체적인 예시네”
참고로, 출판업계뿐만 아니라, 골든위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쉬지 않는 직종의 사람들도 적지 않기에, 모
공공방송에는 골든위크라는 거창한데다, 호화현란한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대형 연휴라고 바꿔 부르는
모양이다.
아니.
어쨌든 쉬지 않지만.
“상술로 말할 거 같으면,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이데이도 그렇잖아-. 화이트데이 같은 건 왜 있는지 모르겠어.
예수·그리스도나, 성 발렌티누스 같은 유래가, 제대로 있냐고”
“없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화이트데이가 아니라 화이트라이(Lie)겠지!”
“응?”
고개를 갸웃한다.
무심코 기세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뭐, 반복해서 말하지만 골든위크라는 건,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되어있어. 황금연휴라니.
토요일의 위치로 인해 그 기간이 변하는데, 어째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정된 물질 중 하나에 비유되고 있냐고”
“으-응. 그렇게 구체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뭐, 확실히 황금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과장되어있을지도”
“자, 그럼, 자네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왜곡왕(歪曲王)이 되지 말아줘” (주:부기팝 오버드라이브에서 나오는 왜곡왕, 황금에 관한 애기를
많이 함)
멋진 대사를 내뱉으려는 건 그만둬, 하고 여동생한테 타일러졌다.
깊이 반성.
“ 황금연휴라니, 휴일이 연속해서 있는 게 그렇게 기쁠까. 확실히 예전에는 연휴란 게 1 년 동안 드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해피먼데이 제도가 있으니까” (주: 일본 공휴일이 일요일에 겹치는 걸 막기 위해 월요일로
옮긴 제도, 성인, 바다, 경로, 체육의 날이 있다)
참고로, 그것도 출판업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unhappy 먼데이지만. 토요일조차 없어져버리라고 생각하는
업계이다.
“내가 휴일을 싫어하는 경향을 제쳐두더라도, 역시 이름을 잘못 붙인 거라고 생각하는데”
“으-음. 이름을 잘못 붙였다기보다, 이미지 전략이겠지. 즐겁다고 하는 연출이라고 할까. 낙인효과는 아니지만,
사람은 나이스한 네이밍을 추구하고 있어? 그거 알아? 오빠. 그린란드는, 극한의 툰드라 지대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와주길 원하니까, 신록이 가득한 이미지를 갖게 하려고, 그린란드라고 이름붙였다고 해” (
낙인효과(labeling effect)-사회제도나 규범을 근거로 특정인을 일탈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결국
범죄인이 되고 만다는 낙인이론. 이름을 붙인 대로 행해진다는 이론)
“오빠를 얕보지 말라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뿐만이 아니야, 그린란드의 수도는 Godhope 라고 이름붙여진
모양이야, 신의 희망이지”
“나도 알고 있어. 지금은 누크(Nuuk)라고 부르잖아”
오빠와 여동생 둘다, 얼핏 보기엔 사이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벌하고 치열한 잡학대결이 싱글벙글한
분위기 속에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 승부는,
“참고로 그린란드는 덴마크령이라고”
라는 츠키히의 한 마디가 결정타가 되어, 내 패배로 끝나버렸다.
정말로.
덴마크령인가.
역시 누가 뭐라 해도 머리가 좋군, 이 녀석.
잡학도 아닌 보통 지식으로 대항했다가는, 이길 도리가 없다.
“으-응. 신록의 날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린란드의 애기가 되어버렸네”
“오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4 월 29 일은, 요새 쇼와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어. 신록의 날은, 5 월
4 일” (주: 쇼와의 날- 원래 4 월 29 일은 구천황 탄생일, 신록의 날- 5 월 4 일, 골든위크에 낌)
“헤에. 국민의 경축일이 아니고?”
“응”
“시대는 변하고 있네-. 지금이 서기 몇 년인지, 전혀 알지 못해. 과연 아날로그 방송은 아직도 하고 있을까.
그래도, 뭐, 네가 말한 대로, 골든위크일 경우는, 확실히 이름을 잘못 붙였다기보다 이름을 잘 붙였다고
말해야겠네. 나라의 이름을 예로 든다면, 일본 역시, [태양이 뜨는 곳]이라고 고작 극동의 섬나라를 듣기 좋게
부르고 있고. 어디서나, 이미지 전략에 기를 쓰고 매달리고 있네. 다만, 이름을 잘 붙이나 잘못 붙이나, 빛좋은
개살구인 건 틀림없겠지. 역시 나는 평범하게 모 공공방송처럼 대형 연휴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 물론,
이 9 일 동안, 츠키히의 팬티가 눈앞이 아찔해질만한 황금색이 된다면 애기는 별개이지만” (주:양두구육-겉만
그럴싸해서 속은 변변찮음)
“그런 악취미스런 팬티는 입지 않아”
“흰색이냐”
“흰색이야”
말하고 자신의 목욕복 발밑을 크게 벌려, 애초에 보이는 그것을 한층 더 당당하게 내보이는 츠키히.
변태의 소행이다.
뭐, 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목욕탕에서 갓 나온 채, 집안을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동생의 속옷을
새삼스레 다시 봐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기분상, 색상 견본표를 보고 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오빠로서 그렇게 맥빠지는 대응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면서 큰 목소리로 칭찬했다.
“휘유ㅡ! 여동생팬티 최고-!”
“이야-! 고마워-!”
츠키히도 합세했다.
뭐지, 이 남매.
나는 과연 상당한 질량의 의문을 느꼈지만, 츠키히는 전혀 망설임없이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역시 팬티는 흰색이어야 제 맛이지. 흰색이 아니면 팬티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아아. 그 텐션.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아무래도 이제부터, 장장 2 페이지에 걸친, 네 녀석의 팬티토크가
시작되는 모양이군”
“그래. 그런 애기가 싫은 사람은 건너뛰고 읽도록 해”
여태까지 한 대화도 대략 제대로 된 애기가 아니었기에,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고 느끼지만, 츠키히가 그런
주석을 달았다.
“팬티뿐만 아니라, 브래지어 같은, 속옷은 기본적으로 흰색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오빠”
“오오, 진짜로 열변을 토하는 거냐”
어쩔 수 없군, 상대해줄까.
각오는 되어있다고.
대화하느라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해서, 바지를 입었을 뿐, 나는 아직 상반신 나체인 상태였지만, 손가락을
앞뒤로 깍지 끼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어깨를 좌우로 비튼 채 근육을 쫙 늘려, 그 자리에 책상다리로 털썩
앉았다.
자, 탁 터놓고 애기해보자.
“하지만 츠키히, 열변을 토하던 도중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찬성할 수 없어”
“음, 뭐야, 오빠는 내 적인가”
“적(敵)이라고 하면 적(敵)이야. 다만, 이상적(素敵)이란 이름이라고!” (주:敵, 素敵을 이용한 언어유희,
素敵는 원래 굉장함, 대단함의 뜻을 지닌 형용사)
상대가 여동생이기에, 그다지 멋지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는 대사를 잘도 내뱉을 수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관대하게 봐주시길 원한다.
혹은 보지 않으시길 원한다.
“즉 원래 적이었다는 거네”
“착각하지 마. 나는 굳이 흰 속옷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대환영이지. 아라라기 코요미는
팬티에 관해 언제나 문호를 넓게 개방하고 있어. 다만, 그래도 색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색인 이상, 다채로워야 하는 법이고, 다채롭기에 색깔-. 흰색에 한하지 않고, 누구나 다, 똑같이 같은 색의
속옷을 착용하는 건, 요즘 세상에, 너무 살벌하지 않아?”
“살벌하지 않냐고 말해도”
“다채로움이야말로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고ㅡ 아니,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라고 말해도”
나도 다른 색깔을 굳이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라고 츠키히는 말한다.
아무래도 그녀도, 즉흥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그녀만의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뭐, 그 취미가 일본 옷
취향으로 너무 편중되어있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세련되게 멋을 부리는 드레서-, 여자중학생의
패션리더이기에, 속옷에 구애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갖가지 색이 무수하게 존재하는 와중에, 흰색은 그 정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해. 색에 위계질서가 있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 최상층은 흰색이야. 랭킹(ranking)이란 단어는 이제부터 화이트닝(whitening)이란
단어와 바꾸고 싶을 정도야. 이번 주 화이트닝 톱텐(Top ten)이야” (주:ヒエラルキー(Hierarchie)-
피라미드형 계층조직, whitening-희게됨, 표백)
"흠......뭐, 완전색이란 의미로서, 흰색에 필적할만한 건 검은색밖에 없지만, 뭐, 모든 것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검은색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건, 이해할만하군“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미대생끼리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속옷 색깔에 관한 애기이다.
팬티의 애기라고-.
“그래도-, 츠키히, 널리 알려진 통설에 대해, 슬슬 모두 다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이야?”
“검은 색 속옷은, 별로 에로하지 않아”
“정말 그래!”
하이터치.
여동생과 속옷 취향이 의기투합했다.
“이예-!”
“꺄호-!”
풍취 있는 문화적인 대화였다.
마음이 내키면 문화유산으로 등록해줘도 된다.
“이름을 잘못 붙이거나, 잘 붙인다는 애기를 했지만, 그런 의미로 볼 때, 색깔에 대한 이미지란 것도 여러
가지 있네”
“여러 가지 있어”
“그만둬, 따라하지 마”
그러고 보니 츠키히는 아까 전, 갖가지 색, 이라고 능숙하게 회피했다. 교활한 계집애.
“한색(寒色) 계통과 난색(暖色) 계통. 철제 전극을 희게 칠하면 가볍게 보인다던가, 그런 거”
“아니야, 오빠. 흰색은 진지하고 순수하며 청초한 이미지로 비춰져”
츠키히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갈 뻔한 애기를, 궤도수정했다. 상당히 눈치가 빠르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테마는
굳이 그 애기로 돌아오지 않아도 될 만큼 쓸데없는 화제였다.
“자, 보라구, 오빠”
그리 말한 츠키히는 띠를 살며시 풀고 목욕복을 벗었다. 팬티뿐만 아니라, 브래지어까지 밖으로 드러난다.
목욕복을 옆에 접어놓고 이쪽을 향한 츠키히는 팬티, 브래지어는커녕, 신고 있는 하이삭스까지 흰색으로
통일되어있다. 토탈 코디네이트(total coordinate)란 건가.
그리고 무릎으로 선 채 포즈를 취하는 아라라기 츠키히.
“어때? 진지하고 순수하며 청초한 이미지로 비춰지지?”
“아니, 가볍고 불순하며 불결해보여......”
너, 섣불리 그런 포즈 취하면, 그대로 피규어가 되버린다고.
그 포즈가 쁘띠 넨드로이드로 되어버리겠어. (주:넨드로이드 뿌띠-미니피규어)
배후에 쇠지레가 꽂혀있는 베개가 좋은 옵션이기에, 음란함이 넘치는 그라비아 사진처럼 되고 있다.
“그건 오빠가 나라는 인간한테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봐봐, 이렇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개성을 없애서 익명성을 연출하면!”
츠키히는 오른손의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고, 자기 얼굴의 위쪽 부분을 숨겼다.
그 상태로 포즈.
“............”
음란함이 더욱더 증가했다고 말해ㅜ자.
역시 바보인가, 이 녀석.
학교 성적은 매우 좋을 터인데.
올 5 에 끝없이 가까울 터인데. (주: 점수 5 가 젤 고득점)
결국 학교 성적은 지능의 1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는 건가. 그래도 이런 녀석의 성적이 좋다는 건, 반
친구들한테서 공부할 의욕을 뿌리째 뺏어가겠지.
“그래도, 오빠가 입고 있는 그 죄수복 같은 줄무늬 트렁크스 역시, 그런 식으로 보면 삐뚤어진 인간이니까
줄무늬를 입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누가 삐뚤어졌다는 거야”
그보다, 여동생 뇌의 증상을 걱정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현재, 팬티 1 장만 달랑 걸친 속옷
차림이었다.
하반신 쪽은 옷을 걸치고 있다고 말했지만 바지를 입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그야말로 서술 트릭의 견본이라고 말해두자.
미스테리의 산 견본.
아라라기 코요미이다.
“오빠도 보여줄 거라면, 흰 속옷을 입어야 오해받지 않는다고?”
“흰색이든 줄무늬이든, 속옷을 남한테 보여주는 단계에서 이미 오해받는다고”
슬픈 오해라기보다, 올바른 이해지만.
“그보다, 속옷을 남한테 보여줄 기회가 있냐고?”
“어-? 그렇지 않아. 의외로 남자 속옷을 볼 기회는 많다고?”
“뭐시라?”
그 순간, 살기로 가득찬 나.
중학교 2 학년 여동생의 인생에, 그런 기회가 많다고 한다면, 고등학교 3 학년인 오빠로서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외설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뭘 상상하는 거야, 오빠”
츠키히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살 달랬다.
말을 달래는 기수 역할이다.
“저기, 로우라이즈(Lowrise)와는 다를 테지만, 남자는 종종 골반바지(腰穿きズボン)를 입잖아. 그러면,
웅크리고 앉을 때 셔츠의 옷자락이 위로 젖혀져서, 보이게 된다고”
(주:로우라이즈(Lowrise)-바지 길이를 허리에 맞춘 디자인이 아닌, 그 길이를 골반에 맞춘 바지. 반대로
허리에 맞춘 것은 하이 라이즈(high rise))
“아아”
“그리고, 체육 시간에 짧은 반바지 옷자락 사이로 보인다던지”
“뭐야, 그런 건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였다.
다행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어서.
하마터면 츠키히의 남자친구들을 모두 죽여버릴 참이었다고.
“여자의 스커트가 짧은 걸 문제삼았던 사람들은 옛날부터 많았지만-, 여자들 입장으로 보면 오히려, 남자가
입는 옷매무시의 느슨함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정강이털 같은 건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그건 오히려 보는 쪽의 모티베이션을 문제삼아야 되지 않을까?”
뭐, 남자와 여자는, 부끄러워하는 부분이나 욕정하는 대상이 서로 다르니까.
그런 의미로, 솔직하게 애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만큼, 남자 쪽이 더 빈틈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줄무늬 트렁크스 1 장 걸친 채 마을 안을 활보할 수 있냐고 질문받았을 경우,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
“거기에, 진지한 애기로 바꿔 말한다면, 남자의 경우, 여자가 그 사람한테 욕정한다고 해서, 힘에 밀려 무슨
짓을 당한다는 건 생각하기 힘드니까. 여자가 부끄러워하는 건, 어떤 의미로, 몸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생존본능일지도 몰라”
“진지한 애기는 이제 됐어. 속옷 애기를 계속하자”
“............”
나, 왠지 멀지 않은 장래에, 네 녀석과 같은 캐릭터를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농구가 장기인 동인녀
캐릭터. 지금은 그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ㅡ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라면 다행이지만.
“생존본능이네-. 그래도 뭐-, 그런 시점으로 보자면, 보통 남자애보다 훨씬 강한 카렌 역시, 그런 면에서
무방비하니까”
“아아, 그렇군”
“카렌, 남자 앞에서 체조복으로 종종 갈아입는 걸”
“저 녀석의 반 전화번호를 가르쳐줘. 남자들을 전부 학살해버릴 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카렌이 갈아입으려고 하면, 남자애들이 눈을 돌리고 도망가니까“
또다시 나를 달래는 츠키히.
쓰다듬으면서.
무심코,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다.
“그래? 학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오히려 학살했다간 큰일나니까......자기 누나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카렌, 여자로서의
매력이 낮은 편이라서-”
“뭐, 그야 그렇지”
무도가니까.
여동생이란 점을 제쳐두더라도 여성적인 면을 느낄 수 없고, 또한 본인도, 여성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파이어 시스터즈의 활동을 보는 한, 그녀는 남자 중의 남자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된다.
“무방비한 면도, 그런 의미로 보자면, 오히려 필요할지도. 남자 중의 남자를 목표로 하는 저 청바지 여자가
짧은 스커트를 입거나, 로우라이즈(Lowrise)를 입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아, 그래도 카렌, 귀여운 면도 있어. 남자친구 앞에 나갈 때에는, 속옷의 선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다고
애기해서, 청바지 밑은 노팬티인 채로 나가는 걸”
“왠 치녀냐고!”
이 집의 여자애들은 죄다 변태들 밖에 없어!
치녀들의 말썽이다.
“아무리 기모노를 좋아하는 나라도, 일상생활할 때 속옷은 항상 입으니까. 카렌의 발상에는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야” (주:원래 기모노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음)
“”속옷을 벗는 녀석한테 경의 따윈 필요없어. 뭐, 승부속옷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제쳐두고,
평상시 저 녀석이 입는 속옷, 꽤 컬러풀하니까. 풀컬러겠지. 그 방면은 어때, 너와 의견이 엇갈리는 거야?“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네. 오히려 카렌은 흰색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도,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생각은 일치하기에, 카렌은 [흰색은 진지해보이는 것 같아서 싫어]라고 말해”
“흐응”
진지함이 싫은 건가.
뭐, 삐뚤어지고 싶은 연령대이다.
정의의 아군을 자칭하고 있어도, 그런 점은 평범한 중학교 3 학년인가.
하지만.
“이런이런, 역시 너희들은 아직 애들이군. 그런 흔한 가치관에 사로잡혀있다니. 왜 그리도 발상이 빈곤한지.
흰색이 진지하다니, 검은색이 에로하다는 발상만큼이나 편협한 편견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뭐야, 흰색이 진지하지 않다는 거야? 죽여버릴 거야”
“어째서 오빠한테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어떤 색깔의 속옷을 입는다고 해도, 결국은
진지한 건 인간성의ㅡㅡㅡ”
말을 한 시점에.
나는, 문득, 떠올렸다.
아니ㅡ 생각이 미쳤다고 말해야 할까.
요 1 개월 간, 늘 끊임없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 어떤 문제에 대해ㅡ 안절부절하면서 계속 고민해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모처럼이니까, 이 기회에, 이른바 지극히 당연한 문제가 된 지금 현재, 츠키히한테 상담해볼까 하고ㅡ 그렇게
생각했다.
“응? 왜 그래? 오빠. 인간성의, 뭐?”
“아, 아니ㅡ 진지함이란 건, 그 사람의 인간성이 드러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즉,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한 녀석이 그걸 몸에 익히고 있다면, 속옷이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진지하고 순수하고 청초하게
보인다는 거지”
“흠. 지금 나처럼!”
“틀려”
오히려 정반대라고 애기했을 터이다.
180 도 다르다.
내가 말하는 건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굉장한 여동생이다.
무엇보다, 그런 여동생이기에, 오히려 이 경우는 상담할 상대로서 적합하다ㅡ 무슨 애기를 하더라도, 어차피
내일이 되면 완전히 잊어버릴 테니까.
“근데, 츠키히. 팬티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어? 벌써 끝내는 거야?”
“장장 2 페이지는 벌써 지나갔어”
그러기는커녕, 너무 떠들었다.
츠키히의 (주석)에 따라 페이지를 건너뛰면, 아직 팬티에 관해 말하고 있어서, 간담이 서늘해진 사람도 적지
않겠지.
뭐, 상관없지.
누구라도 팬티에 대한 애기는 좋아할 테지?
“하지만 애초에, 한창 때의 여자애가 ‘팬티, 팬티’하고 연호해서는 안돼”
“어? 오빠,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쪽 편으로 돌아서는 거야?”
츠키히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갑자기 배신이라니 너무하다.
막 걸친 사다리를 치우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 배신은, 화제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기에, 간과해주길 바랬다.
“팬티에 관해서 애기하기보다, 사랑에 관해서 애기하자고, 츠키히”
“사랑?”
눈썹을 찌푸리는 츠키히. 명백히 싫은 표정이다.
“싫어- 팬티의 애기를 계속 하고 싶어-”
벌렁하고, 뒤쪽으로 쓰러져, 침대 위에서 떼쓰는 것처럼, 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발을 바둥거리는 츠키히.
다다미 위의 수영연습이 아닌 침대 위의 수영연습이다.
......나는 제쳐두고, 소녀인 츠키히가 너무 오해받아도 불쌍하기에, 오빠가 직접 한 가지 (주석)을 달자면,
그녀가 지금까지 전개해온 팬티토크는 본심이 아니고, 순수하게 픽션으로서 속옷의 애기를 한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다시금 강조해두고서.
“시끄러워. 상관없으니까 사랑 애기를 하자고. 그리고 날뛰지 말고 옷을 입어”
“그건 오빠도”
“그렇군”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우스룰에 의하면 별거 아닌 규칙 내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좁은 방 안에서, 반라의 오빠와 속옷 차림의
여동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구도는, 별로 세간에 떳떳하게 내보일만한 일은 아니다.
커텐을 열어둔 채이고.
나와 츠키히는, 제각기 옷을 입기 위해 일어섰다ㅡ 츠키히는 목욕복을 다시 입고, 나는 실내복으로 다시
갈아입는다.
웃을 다 입고, 나체 차림으로 마주 보는 건 사라졌지만, 사실, 본심을 털어놓고 애기하는 건 지금부터이다.
할복토크이다.
나는 아까 전과 똑같은 위치에 앉았다.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츠키히도 침대에서 내려와, 마주 본 채 책상다리를 한다.
......전혀 관계없지만 골격의 문제인지, 책상다리를 제대로 하는 여자애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츠키히는 훌륭하게 해내지만, 이건 신체가 유연하기 때문인가. 카렌처럼 단련하고 있지 않으니까, 이
녀석, 살이 반 정도 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걸.
“마카로니처럼 부드러운 걸, 네 녀석”
“오빠, 그걸 말한다면 마쉬멜로 같다고 해야 되지 않아?”
어째서 훨씬 지명도가 높은 과자를 훨씬 지명도가 낮은 과자와 헷갈리는 거야, 라고 하는 츠키히.
백점만점의 딴지이다.
뭐, 애초에 살의 부드러움과 관절의 유연함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아마, 남녀차는 행동거지의 차이겠지.
“그래서, 어떤 사랑 애기를 하는 거야, 오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 애기가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르는 무언가의 애기야”
“으응? 사랑일지도 모르는 무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오빠는. 죽어버리지 않으려나”
“빈틈을 노려서 내 죽음을 바라지 마. 뭐, 중학생 주제에 남자친구가 있고, 아마도 친구들 사이에서 수많은
연애상담을 받은 백전연마의 너한테만 물어볼 수 있는 거지만”
“카렌한테는 묻지 않는 거야? 카렌도, 중학생 주제에 남자친구가 있고, 친구들 한테 수많은 연애상담을 받고
있어. 백전연마된 상태라고”
“저 바보한테 상담할 건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스스로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망설임없는 어조이다.
“어차피 수많은 상담을 받았다고 해도, 리얼 백전연마의 청바지 여자는 그걸 너한테 떠넘겼을 뿐이겠지?”
“아니, 그렇지 않아. 카렌이 난폭한 일만 해치우는 전투원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야. 연애상담도 제대로
해주고 있어. 다만 전부 실패할 뿐이야”
“최악이잖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그게 불가능하니까 아직 애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너가 연애상담을 해줄 때의 성공률을 어느 정도야?”
“물론 백퍼센트야”
그건 그녀한테 자부할만한 성과인지, 츠키히는 가슴을 펴고 크게 우쭐해했다. 여동생이 으스대는 걸 두고 보는
건 상당히 기분이 나쁘지만, 뭐, 확실히 자랑할 만한 경력이다.
백퍼센트라니.
아니 뭐, 그건 역시, 과장해서 한 말이겠지만.
“아니, 과장이 아니야. 진짜라니까. 상담을 받기만 하면 어떤 상대라도 나는 반드시 사랑을 성취시킬 수 있
어”
“............”
그건 무섭군.
오히려 상담하는데 주저할 만큼 위협이 느껴졌다ㅡ 아니, 애초에, 여동생한테 상담을 한다고 하는 상황이, 이미
크나큰 실수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것도ㅡ 연애상담.
뭐.
애초에 그.것.이 사랑인지, 아직 잘 모르니까ㅡ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해 수용액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말해볼까.
“실은 요새, 반에 신경쓰이는(気になる) 애가 있어”
“모모타로 같은 애?” (주:일본 옛이야기 등장인물.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가 개·원숭이·꿩을 거느리고
도깨비섬로 가서 도깨비를 정벌하고 보물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
“나무(木になる)가 되는 게 아니라고!” (주:키니나루(きにな·る)- 気になる, 木になる 동음이의어,
언어유희)
아마도 남매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을 고레벨,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극히 저레벨인 대화였다.
다만, 츠키히는 의도적으로 개그를 한 게 아니라, 반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어? 어? 무슨 말이야?”
하고 곤혹스러움을 보였다.
여동생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나는 히죽 웃고,
“즉, 반이 바뀌어서 같은 반이 된 여자애한테, 혹시라도 나는 호의를 품고 있을지도 몰라”
라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히죽 웃을 필요가 어디에 있었지.
“어머, 세상에!”
츠키히가 과장되게 호들갑을 떤다. 이런 지나친 연출과잉이 이 녀석의 인망을 두텁게 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되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그보다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냐고.
“그야 놀라겠지(驚く)......놀랄 뿐만 아니라 까무러친다고(轟く)! [친구를 만들면 인간 강도가 내려가니까]
라고 쓰라린 일을 공언한 오빠한테,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다니”
(주:驚く(오도로쿠), 轟く(토도로쿠)- 언어유희, 轟く의 원뜻:울려퍼지다, 알려지다)
덜덜 떨면서, 입가를 누르는 츠키히.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건 개가 말을 할 정도로 충격이야”
“............”
아니, 개가 두 발로 섰다고 할 정도라면 몰라도.
말하다니, 이미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잖아.
이 녀석은 친오빠를, 어느 레벨로 고독벽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해온 걸까.
뭐, 굳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아까 전의 발언 중에 전제처럼 [쓰라린] 일이라고 들은 것에 대해, 슬며시 상처받은 나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팥밥을 짓지 않으면. 저기, 팥밥은, 밥에다 고추를 섞어서 짓는 거였지?”
“너는 가정과 수업에서 뭘 배운 거냐”
그건 그렇고, 매우 맛있는 요리가 지어질 것 같지만.
“거기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신경쓰일 뿐인데다, 또한 [혹시라도], [품고 있을지도 몰라]일 뿐,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야”
“어머?”
“그러니까 너한테 하고 싶지도 않은 상담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떤 이성이 있다고 해, 그리고 자신이 그 녀석을
좋아하는지 어떤지, 그걸 어떻게 구별하지?”
“......저기, 미안, 오빠”
츠키히가 갑자기 신체의 떨림을 멈추고, 나한테 사과했다. 무엇을 사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여동생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좋다.
“뭐였지. 다시 한번 말해줄래?”
“뭐야, 흘려들은 거야? 정신차리라고, 파이어 시스터즈의 참모담당씨. 제발 좀 봐달라고, 건망증도 작작 좀
해두라고. 알겠어?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 이성을 이성으로 좋아하는지 어떤지, 그걸 어떻게 구별해? 즉
상대한테 품는 감정은, 어느 시점까지가 보통이고, 어느 시점까지가 호의가 되는 거야?”
츠키히는.
입다물고 팔짱을 꼈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이상 알기 쉬운 설명은 없다고 생각하는데ㅡ 이걸로 안된다면 액체 상태의 이유식을
시험해볼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미안, 오빠”
다시금 츠키히가 사과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몇 번씩이나 반복되지만, 여동생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좋다.
애기가 서로 통하지 않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상쾌하다ㅡ 하지만 사과하는
쪽인 츠키히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뭐, 츠키히나 카렌 둘다 [오빠한테 사과하는 건 기분이
좋아]라고 이상한 말을 꺼내면, 즉시 병원에 연행해야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연애상담을 받아온 나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런 레벨의 상담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라고, 사죄내용을 말했다.
어라?
그래?
그렇다면 나, 상담해서 손해봤잖아.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뭐야, 저렇게 으스대놓고, 츠키히, 네 녀석의 힘은 고작 그 정도인 거야?”
일어선 다음, 몸짓을 섞어 츠키히를 깔보는 나 (미국의 홈드라마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동생을 깔보는 건, 여동생한테 사과받는 다음으로 기분이 좋은 행위였다.
내 기대를 배신한 걸, 용서해줄 마음이 든다.
“뭐, 괜찮겠지. 확실히, 중학생 상대로 약간 레벨이 높은 상담을 해버린 내가 잘못한 걸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레벨이 낮은 상담을 받은 적이 없어”
아라라기 츠키히는 죽은 생선과 같은 눈ㅡ 이 아니고 죽은 생선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을 받기만 해도, 살아있는데 죽고 싶어지게 되는, 그런 시선이었다.
시선이라기보다, 광선 같다.
“응. 딴지는 기본적으로 오빠가 하는 것이고, 내가 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뭐, 이번만큼은 내가 말하도록
할까. [이 기분이 사랑인지 어떤지 알 수 없어]라고”
츠키히는 나를 따라하는 것처럼 일어서서,
“소녀는 자네라네!”
옛 시대의 만담가처럼 내 가슴팍을 손등으로 후려친다.
여동생한테 딴지를 걸리는 것도, 여동생한테 자네라고 불리는 것도, 여동생한테 손등으로 맞는 것도, 뭐,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지만, 왠지 내 성벽이 과도하게 변태처럼 되어가는 착각을 느꼈기에, 지금 느꼈던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은 앞으로도, 가능하면 무시하도록 하자.
모두를 최대한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일부러 변태인 척을 한다는, 아라라기 코요미의 기본적인 캐릭터 설정을
잊지 않ㄷ록, 신경쓰지 않으면.
“소녀라니......중학교 여자애 쪽이 훨씬 소녀에 가깝잖아”
“중학생 여자애한테 소녀는 없어!”
딱 잘라 말했다.
수많은 상담을 시체처럼 밟고 넘어온 그녀의 순수한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깊게 파고들면 여성불신에 빠져들 것
같기에, 적당히 사양하기로 했다.
“정좌!”
츠키히는 고함을 질렀다.
나한테.
뭘 잘난 척 하는 거야, 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신체는 그 박력에 밀려 제멋대로 정좌해버렸다. 이 무슨
노예근성인지.
하지만 뭐지, 이 녀석.
왜 화를 내는 거냐고.
뭐가 그녀를 화나게 한 거지. 뭐가 그녀를 격노하게 만든 거지.
츠키히는 꿇어앉는 나를 앞에 둔 채, 자신은 앉으려고 하지도 않고, 팔짱을 낀 다음, 휙하고 아래턱을 들어올려,
나를 내려다본다.
“오빠. 일단 먼저 묻겠는데, 그거,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진심이라니까. 나는 지금까지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입을 조심해서 놀리도록 해”
명령을 받았다.
여동생한테.
“경어를 사용해, 그리고 멍하니 있지 마”
“네, 넵, 알겠습니다”
따르는 나.
여동생 앞에 정좌한 채 깔봐지는데다 명령을 받고, 경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건 이거대로 이하 생략.
무시무시.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설명하도록 해, 이 오빠 녀석”
오빠 녀석이라니.
새로운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말이군.
시스터 프린세스에서 13 번째 여동생으로 등록해도 된다.
“저기, 그, 별로 구체적인 애기는 할 수 없지만......”
상세한 것까지 애기해버리면, (나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니까.
여동생한테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싶지 않다.
“......어쨌든, 다양한 경위가 있어서 말이지. 뭐, 일단, 대상을 임시로 H 씨라고 해둘게”
“H 씨”
왠지 구체적이네, 라고 하는 츠키히.
뭐, 보통의 이니셜이다.
구체적인 건 당연.
“이번 달 초에 같은 반이 되고 나서, 나는 어느새 그 H 씨만 생각하고 있어. 머리 속만이 아니야. 수업 중이나,
문득 칠판에서 시선을 떼어놓으면, H 씨의 자리를 보고 있어. 학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등하교길 중에도, 왠지
모르게 H 씨를 찾고 있어. 서점 같은 곳에 책을 사러 가도, 좁은 마을이니까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버리고. 그래서, 그 서점에서 산 책을 읽고 있어도, [아, 이 문장은 H 씨가 좋아할 거 같네]라고
생각해버려. 야한 책을 사려고 해도, [아아, 이런 책을 샀다간 H 씨한테 미움받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살며시
책꽂이에 돌려놓게 돼”
“오빠,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지 마. 오빠의 개인정보를 알고 싶지 않아”
그보다, 야한 책을 사는데 주저하는 오빠의 애기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라고 츠키히는 말했다.
이런, 가명을 H 씨로 해버리니까, 무심코 술술 애기하게 된다.
참고로 H 는 변태의 머리글자다.
“그보다 오빠”
“왜”
“그건 이상하겠지”
딱 잘라 말했다. 단정했다.
진지한 얼굴이 아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니, 역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느껴졌지만, 어떨는지,
그런 식으로 단정 지으면, 왠지 반항하고 싶어진다.
꽤 심술꾸러기인 나.
“모르겠다고? 그 정도는, 싫어하는 녀석 상대로도 생각하는 거겠지. 거기다 이처럼 애매한 기분은 내버려두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잖아”
“으-음. 그렇긴 하지만 그런 게 아니고......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츠키히는 팔짱을 낀 채,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를 기울인다.
“말하고 싶은 건 여러 가지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뭐야, 너한테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거야?”
즉, 지네(ムカデ)가 걷는 방법을 묻는 것과 비슷한 걸까. 한자로 지네(百足)라고 쓴 걸 보고 알 수 있듯이,
백 개의 다리를 가진 저 생물이, 어떤 순서로 다리를 움직이는지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없었다는 고사가 있다.
(주:百足,ムカデ-지네의 이름)
그런데, 그 때까지 평범하게 걸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은 순간, 그 때까지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그 뒤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해버렸기에, 츠키히는 이제부터 연애에 관심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와 고민을
공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
뭐, 그건 그거대로, 꽤 괜찮다는 느낌도 드는군.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레벨이 높은 애기가 아니라니까, 오빠”
저레벨의 애기야, 라고 하는 츠키히.
“그리고 지네는 다리가 백 개 있는 게 아니니까“ (주:지네다리-최소 30~최대 340 개)
“뭐, 뭐라고!? 뭐시라, 지네한테 다리가 백 개 있는 게 아니라고!?”
그 정도는 들을 필요도 없이 알기에, 시시한 잡학을 가지고 과장되게 놀란 척하는 재밌는 리액션을 취해보았지만,
츠키히의 눈보라(ブリザ―ド)와 같은 시선을 받고, 나는 맥없이 다시 앉았다.
뭐지, 이 썰렁함(フリ―ザ―).
“그러고 보니, 만약 프리더(フリ―ザ)와 베지터가 퓨전했다면, 엘리트 전사의 프리터님이 되었을까?”
“프리더와 베지터는 몸 형태가 완전히 다르니까 퓨전할 수 없어”
(주:블리자드(ブリザ―ド), 냉장고, freezer(フリ―ザ―), 드래곤볼 프리더(フリ―ザ)를 이용한 말장난)
단념하지 않고 과감하게 뚫으려고 했지만, 여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 너무 냉정한데다, 그녀는 드래곤볼을 이미
읽은 상태였다.
“지네 애기가 아니라, 단순히, 유치원 아이한테 곱셈의 개념을 가르쳐준다는 그런 기분이야”
“곱셈이라고? 그런 바보 같은, 그렇게까지 간단한 일이라고 말하는 거야?”
“응. 지금 츠키히의 모습은, 곱셈을 할 수 없는 오빠를 앞에 둔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동생의 구도라고
생각해주세요”
“............”
처절한 구도이군.
여동생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잖아.
불쌍하게도.
“아, 그래도 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야. 봐봐, 저기, 전지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였지. 기관차 토마스가
아니고......” (주: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 어린이 애니메이션, 크리스토퍼 오드리 작품)
“토머스·에디슨”
“아아, 그래그래”
“어째서 에디슨보다 토마스 쪽이 먼저 튀어나오는 거야, 오빠”
“아, 미안. 저 사람과 꽤 사이좋게 지냈으니까, 무심코 이름으로 부른다고”
“기관차와 헷갈린 주제에”
“토마스는 말이지”
억지로 흘려버리는 나.
개그에 관해서는 완고하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한테 [1+1 은 어째서 2 가 되는 걸까]라든지, 사물의 근본을 묻는 질문을 자주 했던
모양이야. 곱셈은커녕 덧셈이라고. 배운 것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납득할 때까지 계속 질문한 모양이야”
“아니, 그렇게 말하면, 마치 오빠와 에디슨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런 건 없으니
까”
츠키히는 고개를 흔들었다. 붕붕하고.
“[1+1 은 어째서 2 가 되는 걸까]라고 깜찍한 질문을 선생님한테 하는 아이는 이 세상 어느 시대에나 늘 있지만,
토마스·에디슨이라는 발명왕은, 딱 1 명뿐이야”
“어-?”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말을.
흥이 식어버린다고.
장래 에디슨이 될지도 모르는, 깜찍한 아이들의 싹을 솎아내지 말라고.
“그래도 어차피 에디슨 역시 어릴 적에 [나는 발명왕이 될 거야!]하고 말하며 놀았을 거라고?”
“에디슨 시대에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그는 타임머신을 발명했겠지”
결국, 간단한 것일수록 설명하기 힘든 법이야, 라고 츠키히는 애기를 되돌렸다.
“뭐, 오빠도 오빠 나름대로 진지할 테니까, 너무 바보 취급하거나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없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다면,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미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
“싫다면 애초에 그런 의문을 깊이 파고들지 않겠지”
“아니, 별로 깊이 파고든 건 아니지만”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괴롭다고 해야 하나.
안개처럼 뿌옇게 되어서, 어찌해도 개운치 않다ㅡ 라는 것이다.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직시하는 걸 계속 등한시해온 나이니까, 자신의 감정을 전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도.
그런 자신은 잘못되었다고ㅡ 지금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ㅡ 제대로 마주 바라보고 싶다.
자신의 마음속이나, 감정, 그런 부류의 여러 가지와 제대로 마주보고 싶다.
“왜일까. 일단 나,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
“없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아”
나는 아까 전 츠키히가 그랬던 것처럼, 정좌를 한 채였지만, 가슴을 펴고 뽐냈다.
“나는 여태까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
............
............
뭐지.
말하고 보니, 왠지 허무한 기분이 되었다.
쫙 편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아니, 그건 워래 열려있던 나락의 구멍이었을지도 모른다. (주: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에 나오는 악역 캐릭터 나라쿠의 저주, 풍혈이 생기게 됨)
어?
나는 그런 캐릭터 설정이었나?
그거, 위험하잖아?
쫙 폈던 상반신이 맥없이 늘어져, 나는 새우등이 되었다. 뭐, 등을 쫙 펴거나 구부정하게 있는 것 둘 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정좌에 걸맞는 등골의 상태는 아니다.
“수학여행날 밤, 베개싸움을 끝내고 취침시각을 넘긴 후에 펼쳐지는 잠자리 대화 비슷한 연애토크 대회에서,
[아니, 나, 지금 좋아하는 애, 없어]라고 말한 녀석이 있다면, 그건 나야”
“오빠한테 친구가 없는 이유는 그 점에 있는 것 같아”
쓸데없는 참견이다.
지금은 우정의 애기는 제쳐두고, 연애감정의 애기이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친구도 만들 수 없는 녀석이라니, 얼마나 신세대길래.
“뭐, 변명을 굳이 하자면”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
“싫어!”
“브라더(brother) 명령이다!”
“음......브라더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지”
시스터가 납득했다.
아무래도 변명을 들어줄 모양이다.
“즉, 그 수학여행날 밤이 좋은 예이지만, 아무래도 학교라는 공간에는 [누군가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이상한 압력이 느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음”
츠키히가 약간 반응을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게, 예상 외로 정론이었기에,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연애압력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너한테 연애상담을 하러오는 여자애들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나는 아주 사이좋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그런 폭력적인 분위기를 싫어했어”
“약간 비뚤어진 관점이란 느낌도 들지만, 학교라고 하는 그룹이 연애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건, 오빠가 말한
대로일지도 몰라. 남자와 여자를 한꺼번에 한 곳에 모아두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츠키히는 일단 납득해보이고.
아니, 납득한 척을 하고.
“그건 모두가 연애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되지만, 오빠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숨막힐 정도로 답답했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는, 오빠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아”
“되지 않네”
“변명이네”
“변명이군”
“사과해”
“죄송합니다”
사과했다.
사죄를 강요당했다.
태어나서 여태껏 단 한번도 사람한테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이 내가!
“거짓말 하지 마”
“아, 넵. 죄송합니다. 평상시 늘 거듭해서 츠키히씨한테 폐만 끼치고 있습니다”
“애기를 되돌릴게”
“부디 그러세요”
애기를 되돌렸다.
아라라기 코요미는 오래 전부터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다, 고 하는 부분까지.
하지만 나와 츠키히의 대화에는, 애기를 되돌리기 위해 도중에 거치는 과정이 지극히 많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네. 막상 들으니, 오빠가 여자애를 집에 데려온 건, 옛날부터 한 번도 없었네ㅡ 뭐, 남자애를 데리고 온
적도 없었지만”
“뭐, 그렇지. 아니, 그러니까 나,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 같
아”
“그래도 그런 건,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를 보면,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지 않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건 판타지잖아. 드래곤의 존재를 믿으라고 애기하는 것과 다름없어.
연애인의 스타일리쉬한 러브스토리를 보고, [오오, 근사해. 나도 이렇게 되자] 라고 생각할까?”
“으음-, 그야 그렇지만”
에디슨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말이지, 라고 츠키히는 신음한다. 드래곤의 예시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기에, 나는 다른 예시를 든다.
“해리·포터를 읽었다고 해서, 자신도 메라조마(メラゾㅡマ)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주:메라조마(メ
ラゾㅡマ)-드래곤퀘스트 6 의 화염마법, 1 인당 180 데미지)
“그 대사로 판단하는 한, 오빠는 해리·포터를 읽은 적이 없어”
설둑하는데 실패했다.
유감, 파이어 시스터즈한테 화염계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아니, 씨리즈물은, 일단 타이밍을 놓치면 쉽사리 스타트를 끊기가 힘들어지니까.
“혹은, 반대의 경우가 있을지도 몰라”
“우냐?”
“즉,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에서 아주 스타일리쉬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드라마틱한 연애를, 지겹게
보잖아. 그러니까, 그만한 레벨이 아니면 연애가 아니라고, 나는 자연스레, 그렇게 인식할지도 몰라.
화려함이나 겉보기에 너무 치중한 탓에, 사소한 일상생활 속에 숨어있는 작은 사랑을, 나는 놓쳐버린 걸지도 몰라.
말하고 보니 나는 정보가 과도한 현대사회의 희생자네”
“말하는 거나 말하고 싶은 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말투는 왠지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서 괜히 화가
나네”
뭐가 희생자냐고, 이 위선자 녀석.
츠키히는 그렇게 말하고 한쪽 발을 들어올려, 정좌하는 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머리 위에 올려놓고
싶었겠지만, 다리가 거기까지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내 어깨를 질근질근 짓밟는 츠키히.
보통 때라면 차버릴 테지만, 뭐,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범하게 넘어가주도록 하자.
대범하게 넘어가야 할 부분을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뻔뻔하게 변명하는 건 안돼, 오빠. 그런 정보가 과다한 사회 속에서, 모두 평범하게 연애하고 있으니까”
“음-. 정론공격인가”
“즉, 이 의제를 결론짓기 위해서, 오빠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걸로, 괜찮겠지?”
“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오히려 사랑의 전수자라고 해도 좋아. 나오에 카네츠구
(直江兼続)라고 불리는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겠지?”
(주: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때, 나오에 가문 계승, 우에스기가를 모심. 3 살
연상 부인인 오센과 사이가 좋으며 측실을 한명도 두지 않음, 일편단심 사랑의 대명사)
“오빠가 언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라고 불렸는데”
불린 적이 었었다.
단 한 번도.
“그래도 사랑이 없는 오빠”
츠키히는 말한다.
참고로 다리는 내 어깨에 놓여진 채 그대로이다. 양말이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있다는 시츄에이션은, 왠지,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뺨을 비비고 싶어진다.
“사랑이 없는(あいなき) 오빠는, 글쎄”
“어이, 여동생. 나를 쥐노래미(アイナメ)처럼 부르지 마”
(주:쥐노래미(아이나메, アイナメ, greenling)- 쏨뱅이목 쥐노래미과 바닷물고기, 돌삼치라고도 불림,
사랑이 없는(아이나키), 쥐노래미(아이나메)의 발음장난)
“사랑이 없는(あいなき) 오빠는, 글쎄”
내 항의는 말없이 각하되고, 츠키히는 떠보는 것처럼 계속한다.
십수년씩이나 같은 지붕 밑에서 지내왔지만, 이 녀석이 딴지를 거는 것과 걸지 않을 때의 판단기준을 알 수 없다.
“여자가 싫다는 건 아니지”
“응? 무슨 의미야?”
“여자를 싫어하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란 의미”
“아아, 그렇지 않아. 인간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를 자처한 적은 몇 번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여자만큼은 예외라고 강조했어”
“인류의 과반수가 예외잖아”
“진짜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대목은 농담이다. 그런 걸 강조한 적은 없고, 애초에 인간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를 자처한
적도 없다.
여동생과의 대화라는 건, 어찌해도 진지함, 진실함이 결여되어 좋지 않다. 진지하게 임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ㅡ
불량스런 양아치를 흉내낸 적도 없다.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를 서투르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ㅡ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단언할 만큼의 자신도 없다).
“응. 뭐, 그렇네-. 왜냐하면 오빠는 스스로 아무도 데러오지 않는 주제에, 나와 카렌이 집에 데려온 친구들과
옛날에는 자주 놀아줬으니까-”
“그랬나”
“응. 오빠, 내 친구들한테서 인기많았어(もてもて)”
“뭐라고? 내가 티모테(ティモテ)였다고?” (주: 티모테(Timotei)- 샴푸, 일본광고 및 한국광고로 방송,
럭키스타 6 화에서 코나타가 광고 흉내를 내면서 패러디함, 인기많았어(모테모테)와 발음장난)
점프의 CM 에 나왔잖아.
일확천금이다.
“오빠의 인기있던 시절은 저 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네”
“그런 시기가 있었다니......뭐, 괜찮아”
듣고 보니, 그 때는, 츠키히가 다이묘 행렬처럼 데려온 친구들과, 인생게임 등등을 하면서 놀았던, 그런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다. 데려온 친구들의 수가 츠키히를 포함해 홀수가 될 때에, 내가 사람수를 맞추기 위해
끼어들게 되었다. (주: 다이묘- 일본 시대의 영주)
그래도, 그건 오래 전 이야기.
그립지도 않다.
“어쨌든, 여자가 싫다는 건 아니야. 좋고 싫음을 말하지 않는 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었어”
그런 내가.
쿨하고, 냉정하고, 굳이 말하자면 돗토리 사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진 내가 현재 흔들리고 있다는 거니까,
생각해보면 이건 대사건이다. 천지가 뒤집힐지도 모른다. (주:돗토리 사구(鳥取砂丘)-일본의 사막지대)
“그래서 나한테 연애상담인 거야?”
“응. 그렇습니다. 그보다, 실컷 애기해놓고 좀 그렇지만, 별로 뚜렷한 해답을 원하는 건 아니야. 너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들어보자고 생각했어. 네 남자친구, 저기, 로우소쿠자와군이었지?”
“응. 잘도 기억하고 있네”
“이름만 말이지”
만난 적은 없으니.
이름만 기억한다기보다, 이름 이외는 전부 모른다.
“너는 언제, 어떤 단계에, 그 녀석을 [좋아한다]고 판단했어? 그걸 가르쳐주길 원하는 게, 본심이야”
“그런 건, 뭐ㅡㅡㅡ”
츠키히는 말을 머뭇거린 채,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잠깐 입다물었다.
말이 막혔다기보다, 단순히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스럽네, 이 녀석.
뽀뽀해버릴까.
“ㅡㅡㅡ왠지 모르게야”
“왠지 모르게”
“그래. 애매하고. 적당하게”
“그런 걸로 괜찮아?”
“그런 걸로 괜찮아. 그런 법이야”
마지막에 한 말은 왠지 대충 지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또한 수줍음을 숨기려는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명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포기한 건가.
오빠를 포기한 건가.
그렇다고 하면 그건 슬픈 사실이다.
나는 깨끗이 단념하지 못하고, 저항을 했다.
“자, 어떤 단계에 그렇게 됐는지는 일단 접어두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 일단 듣도록 할까. 그
로우소쿠자와군을, 너는 어째서 좋아하게 되었어?”
“그것도 왠지 모르게야”
이번에는 즉답이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대충 지어낸 것으로, 대답하기 귀찮다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애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ㅡ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태까지 깊은 애기 (?)를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 건 너무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정말로 왠지 모르게인걸.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되어 왠지 모르게 되었는걸”
츠키히는 토라진 것처럼 말했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되어 왠지 모르게 되었는걸.
“좋아하는 걸까- 라고 생각해, 좋아하는구나- 라고 느껴서,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 그런 느낌”
“뉘앙스에도 정도란 게 있겠지”
대체 뭐냐고, 그 3 단용법.
그런 느낌이라고 들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유라고 해도 말이지. 그야 여러 가지 이유를 대는 건 가능하다고? 멋있다던가, 상냥하다던가,
키가 크다던가, 부자라던가, 그런 이유를 갖다붙이는 건, 여러 모로 가능하지만”
“............”
그녀 취향의 타입 중에 [부자]가 섞여있다는 사실이, 츠키히의 인간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그게 아니고,
오히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래도, 그런 거 전부 거짓말인 걸”
라는 말 쪽이겠지.
“자신의 기분을 이성이 이해하게끔, 구실을 댄다고 해야 하나. 이유를 갖다 붙인다기보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거야. 좋아한다는 결론이 있고, 그 결론을 향해 사닥다리를 걸쳐가는 거지”
“사닥다리”
“사닥다리가 아니고 로켓일까. 응. 로켓을 만든다는 느낌”
츠키히는 짝하고 손뼉을 쳤다ㅡ 아무래도 그녀 마음 속에, 납득이 잘 되는 훌륭한 예시였던 모양이다. 멋대로
납득하다니 간사한 녀석이다.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라고 생각해ㅡ 이런 말을 알고 있어? 오빠”
“무슨 말인데”
“두꺼비를 사랑하는 자는, 달에서 두꺼비를 볼 수 있데”
“......그런 말은 모르지만”
그래도 의미는 즉각 알 수 있다.
사랑에 관해서, 그렇게 알기 쉬운 속담도 없을 테지.
좋아하게 되면, 이유 같은 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ㅡ 라고 하는 츠키히의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달에 이르기 위한 로켓 만들기인가.
확실히, [어째서 좋아하는 거야], [어디가 좋은 거야]라고 하는 건, 핵심을 놓친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어느 단계부터 [좋아]하게 되냐고, 어긋난 감각이겠지.
그런 엄밀한 것이 아닌.
오히려 애매모호함(ファジィ).
“......그런가, 과연. 그럴싸한 논리를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는 거구나”
“뭐,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건, 너무 지나치게 말한 거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개인을 사랑하는 건,
상반되는 면이 있으니까”
“있는 거냐”
“응. 박애라는 건, 결국,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거니까. 공평과 평등은, 사랑(愛)이긴
해도 연애적인 사랑(恋)은 아니야.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1 명을 선택하는 건, 말하자면 차별인걸.
박애주의와 차별주의가 양립할 리가 없잖아”
오빠는 박애주의자일지도 몰라, 라고 하는 츠키히.
음.
그건ㅡ 왠지, 칭찬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좋은 말을 듣는 것 같아도, 어떨는지ㅡ 왠지 모르게, 봄방학 때를 떠올리게 된다.
봄방학의.
내 박애주의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싫어도 누가 괴롭히는 것처럼 떠올리게 된다.
“전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聖人)이란 게 되겠지만ㅡ 성인(聖人)이 연애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겠지?”
“상상하기 어렵네”
그래서야 속세에 너무 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흠.
뭐, 차별주의라는 건 너무 지나치게 말했다고 쳐도, 즉 연애는, 어디까지나 속물적이며, 그래야만 하겠지.
박애와는 다르다.
마치.
“전 인류를 상대로 연애적인 사랑(恋)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최강이겠지만”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에 사랑을 애태운다ㅡ 인가. 그야 어렵겠지. 어렵다기보다 무모하겠지”
“오히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절조없는 바람둥이 같아”
“흠”
그래도 뭐, 그런 극단적인 애기를 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개념이나 정의는 일단 놔두도록 하자.
너무 애기를 전개해도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내 반의 H 씨에 관한 일이다.
“뭐, 네가 말한 대로, 나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외로운 녀석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내가, 그런 나, 아라라기 코요미군이 지금 그야말로, 방년 18 세가 되어 마침내, 사랑에 빠졌을지도 몰라”
“아니!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말고, 후딱 정해버리면 되는 거야!”
츠키히는 상반신을 구부리고, 내 양어깨에 탁하고, 굳세게 격려해주는 것처럼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실로 위세좋게 웃는 얼굴로 단언한다.
“빠졌을 거야!”
“빠졌다는 건가......”
“오빠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정!”
“결정한 거야!”
“그래! 예정은 미정이 아니야!”
휙, 나한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마를 나한테 부딪치는 츠키히. 숨결조차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감이었다.
“오빠는 H 씨를 아주 좋아해! 내가 정했어!”
“너가 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너무도 당찬 박력에 밀려.
나는 그렇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보다.
“............”
그렇네. 응.
츠키히가 말한 대로이다.
아니, 말한 대로일지 여부는, 전혀 알 수 없지만ㅡ 들은 대로 해보자.
좋아할지도 모른다, = 좋아해도 괜찮잖아.
좋아하는 건가, 하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거네, 라고 느끼고.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다.
늘,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느낌이겠지.
“그렇군. 좋아, 개운해졌다고, 츠키히. 끈질긴 아이라고 불렸던 나를 개운하게 만들다니 대단하군. 나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너를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아니, 뭘.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수줍어하는 츠키히.
손바닥을 얼굴 앞에서 휘휘 젓고, 싱글벙글하면서.
그런 사랑스러운 리액션을 보게 된다면, 좀더 부끄럽게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 오빠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수줍어하는 여동생은 사랑스러워!
모에모에!
“너는 최고의 여동생이라고, 츠키히!”
“오빠도 참-. 그렇지 않아-”
“나는 예전부터, 너는 언젠가 해낼 녀석이라고 생각해왔어. 그 언젠가가 설마 오늘이었을 줄이야. 50 년도
채우지 않고 마리라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하여간, 네 녀석의 진화 속도는 나를 놀라게 한다니까. 너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서, 이제부터는 카렌이라고 해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야”
“아하하하-”
“과연 나의 여동생다워”
“어라? 자화자찬 모드로 바뀌었어?”
츠키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들켰는가, 영리한 녀석이다.
이 기세로 [오빠가 칭찬받으면 기뻐하는 여동생]으로 츠키히를 조교하려고 계획했는데, 쉽사리 되지 않는
법이로군.
또한, 슬며시 카렌을 낮추면서 츠키히를 띄워줬지만, 그것에 대해 그녀가 완전히 무시해버린 건, 문제점으로써
확실히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은 제쳐두고.
“여기선 감사해두도록 하지. 정말 고마워, 츠키히”
“당연하게 받아들일게”
이런 초보적인 질문을 받은 건, 정말 처음이었는걸―, 라고 츠키히는 가슴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뭐,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오빠.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개가 짖는 것처럼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 당연한 건가”
“응. 보통이야”
“반에 신경쓰이는 여자애가 있는 건 보통”
“보통!”
“수업 도중, 칠판보다 그 아이 쪽을 자꾸 쳐다보는 것도 보통”
“등하교 중에 그 아이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것도, 우연히 만나지 않으려나 생각해버리는 것도, 책을 살 때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해버리는 것도!”
“보통!”
“그 아이의 가슴을 주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
대회가 멈췄다.
“응?”
“응?”
서로 속내를 탐색하는 것처럼 시선을 교환한다.
“어? 어라? 츠키히.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에에엑? 제, 제 쪽인가요?”
“너도 정좌하는 쪽이 좋지 않아?”
“아, 넵, 알겠습니다”
곤혹한 채, 정좌하는 츠키히.
정좌한 오빠와 정좌한 여동생이 마주 본다.
여긴 뭐지, 다도실인가.
잊혀지기 쉬운 설정이지만, 츠키히, 다도부.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그 H 씨의 가슴부분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만지고 싶고, 주무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잖아. 지금 그런 애기를 하고 있어”
“......어라? 내 머리가 나쁜 걸까, 왠지 오빠가 말하고 있는 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해가 되질 않아. 그
대사를 들은 감상이 [듣고 있지 않아]와 [묻지 않았어]로 2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아”
“하아? 너는 어쩔 수 없는 녀석이로구나. 이런이런, 멍청한 여동생을 둔 오빠는 고생하는군”
내 평가가 다시금 뒤집혔다.
이렇게 태도를 싹 바꾸는 건, 내가 한 거지만 너무 노골적이기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반에서 나밖에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애가
거유여서, 정말, 주무를 수밖에 없다고!”
“잠깐만 오빠, 만진다거나 주무른다거나, 노골적인 말을 사용하는 건 그만둬주시겠습니까?”
“응? 그런가?”
관대한 나는 여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 터치할 수밖에 없잖아!”
“노골적이지 않고, 사랑스러워졌지만”
왠지 말이지, 하고 츠키히는 우울하게 말한다.
나를 보는 눈이, 오빠를 보는 눈이 아니고 변태를 보는 눈이 되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착각일까.
아니, 뭐 착각이겠지.
지금 트릭 아트(trick art) 같은 게 유행하고 있으니. (주:트릭아트(trick art)-2 차원 평면회화작품을
3 차원 입체감각으로 체험가능한 미술작품. 2010.6.30.~8.20 까지 일산킨텍스에서 트릭아트 특별전 진행중)
“즉, 요컨대 나는 깨달으면, H 씨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이건 사랑인 거지”
“아니”
츠키히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단적이면서, 이쪽의 올바름을 주장하고 싶은 의욕을 싹 없애버릴 정도로 딱딱한 어조였다.
칫.
이 완고한 녀석.
그래도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런 츠키히한테 과감하게 도전한다.
“하지만 어때,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이 기분은 사랑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오빠가 그런 걸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그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버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네......”
츠키히는, 마치 고대인이 봉한 파괴마인을 일깨워버린 고고학자와 같은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책임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네가 아주 좋아하는 로우소쿠자와군도,계속 네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리 생각할 테지만, 그래도 그건 집합론으로 따질 때 ‘참’일 뿐, 로우소쿠자와군은 나를 포함한 세계 모든
여자들의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이군.
그보다, 그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너는 어떠냐고.
“그러니까 오빠. 남자애가 여자애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런 감정이니까, 너무 신경쓸
필요 없어”
“............”
왠지 다른 방향의 상담이 시작되어버린 모양이다.
연애상담에서 성교육 시간으로.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별개의 의미로 보통이니까”
“그런 거냐”
“그건 당연한 거야”
“당연한 일”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야”
“욕구!”
욕구인가......
그건 좋지 않군.
“아니, 오히려 욕구는 있지만”
“고전만담의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 말아줘. 무슨 말장난이냐고”
“이걸로 장면이 바뀌어도 될 정도로 산뜻한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뭐야, 아직도 애기는 계속되는 거야”
“응. 그래서야 끝나지 않아”
츠키히는 말한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끝나버렸어.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오빠의 인간성은 이제 끝이라고. 아-, 반장난으로 했어도, 나, 나머지 반은 꽤 진지하게 상담에 응해줬는데
말이지-. 설마 친오빠한테 흘러넘치는 성욕에 대한 상담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성욕이라니 실례라고. 내가 모처럼 진지한 상담을 하는데”
하물며 반장난으로 했다니.
장난치지 말라고 애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잖아. 반 여자애의 가슴이 신경쓰여, 수업 중에도 칠판보다 그 여자애의 가슴을 보고, 등하교
중에도 그 애의 가슴만 찾고 있고, 서점에 가도 그 애의 가슴만 상상한다니. 그것이 성욕이 아니고 뭐겠어”
“잠깐 기다려. 단어가 여러 가지 바뀌어 있어”
대담한 쇄신이 행해지고 있다.
무슨 리뉴얼이냐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그게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라고 생각하고, 그 녀석은 오빠가 아니라 변태라고
생각하지만, 츠키히,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업신여겨선 안돼. 분명 지금 넌, 착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
“아아. 착각하지 말아줘. 백보 양보해도, H 씨의 가슴에 터치하고 싶은 이 순수한 기분이 성욕이라고 해도.
퓨어한 성욕이라고 해두자고. 이번 사건이 그런 측면을 적지 않게 띠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나도 뭐, 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여동생의 체면을 세워줄게. 그래도 어때, 츠키히”
나는 일단 말을 끊고.
그리고 힘을 담아, 준비해둔 대사를 말한다.
“성욕 없이 사랑은 생겨날 수 없잖아?”
“닥쳐. 아, 죄송해요. 나 정도 되는 인물이 딴지의 선택을 잘못해버렸네. 죽어버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명언처럼 애기하지 마, 라고 츠키히는 혀를 찼다.
품위없는 녀석이다.
다도부에 속해있다는 설정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죽지 않을 거야. 유감스럽게도 네 오빠는 불사신이야”
“오빠가 불사신이라면 나 역시 불사신이야”
하여간, 하고 말하고.
하여간, 정말, 하고 말하고.
츠키히는 스륵하고, 정좌를 한 채로, 요령있게 무릎을 접어서,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왜 그래”
“시험해보려고 생각해서”
“시험? 네 녀석, 이 오빠를 시험해본다는 거냐”
“응. 그 정도의 오빠를 시험해본다는 거야”
무릎 관절끼리 맞닿기 바로 전에 츠키히는 이동을 멈추고, 거기서 그녀는 쓰윽하고 가슴을 나한테 내밀었다.
“자, 만져봐”
만졌다.
말없이. 무표정으로.
즉결즉단, 즉시 터치했다.
“꺄악-!”
광속에 필적하는 나의 스피드에 놀랐는지, 비명을 올리며 뒤쪽으로 넘어질 뻔한 츠키히였지만, 그 기세인 채로
넘어지면 그녀는 등 뒤에 설치되어 있는 침대의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칠 것 같았기에, 나는 양손에 꽈악 힘을
담아, 어떻게든 츠키히의 상반신을 지탱했다.
아니.
즉 츠키히의 가슴을 손가락이 파묻힐 정도로, 꽉 움켜줬다는 말이지만.
터치가 아닌 캐치이다.
“아팟-!”
은혜도 모른다고 하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하마터면, 침대에 후두부를 세게 부딪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말하자면 생명의 은인인 나한테, 츠키히는
상반신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 쪽으로, 마치 진짜처럼 일으켜세워서, 그대로 나한테 박치기(head-but)를
먹였다.
머리와 머리가 충돌한다.
시야 안에서 불꽃이 튄다.
그래도 나는 츠키히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뒤로 튕겨나갈 뻔했지만, 그녀의 가슴을 생명줄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아팟! 놔, 놓으라고! 놓지 못할까(離さんか)!”
“놓치 못할까(離さんか)? 아아, 죽은 애완견의 재를 뿌려 벛꽃을 피게 했다는 저 노인의 애기인가”
(*주: 離さんか(하나상카),花咲爺(하나사카지지)-발음장난, 꽃피우는 영감애기)
“말꼬리 물고 늘어지는 말장난을 할 여유가 있다면 빨리 손을 떼어놓으라고!”
“그건 상식에서 손을 떼라고 하는 의미야?”
“이미 상식으로부터 손을 뗀 상태잖아, 너는! 좀더 평범한 의미라고!”
여동생한테 ‘너’라고 굳이 불리지 않아도.
나는 뒤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 신체를 일으키고 나서, 그녀의 움푹 튀어나온 부분에 걸려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어떤 오빠냐고, 어떤 오빠냐고, 어떤 오빠냐고. 음침한 오빠냐고? 아- 진짜, 말하는 것도 뒤죽박죽이고”
투덜투덜 화내는 츠키히.
실로 프리티하다.
“정말 지금,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네. 들은 순간, 뇌를 경유하지 않은 반사신경으로 주무르러 왔지‘
“이 무슨 실례를. 오빠는 여동생의 가슴 같은 건 주무르지 않아”
“지금 마음껏 주물렀잖아!”
“아니, 달라. 오히려 반대야. 발상의 역전이야. 네 가슴이, 내 손바닥을 주무르러 온 거야”
“뭐야, 그 기분나쁜 문장!?”
“친오빠의 손을 가슴으로 주무르러오다니, 너는 엄청난 변태여동생이로군”
“역전이고 나발이고, 그 발상은 있을 수 없다고......”
가슴으로 손바닥을 주무른다니.
츠키히는 관자놀이를 억눌렀다.
눈치채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떤 탓인지, 나와 츠키히 둘다, 정좌가 풀려있었다.
무심코 균형이 무너졌다.
“아- 정말! 오빠, 여동생의 가슴을 너무 자주 만져!”
“뭐야. 왜 화내는 거야. 너가 스스로 [만져봐?]라고 말했잖아. 따지고 보면 너가 나한테 유혹한 거지”
“유혹”
“그런데 [유혹(誘惑)]과 [어감(語感)]은, 한자로 막상 써보면 아주 비슷하네”
“착안점은 좋지만, 그런 걸로 내 애기는 빗나가지 않아! 울면서 꾹 참을 거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야,
이번 사건은 확실히 카렌한테 말해둘 테니까!”
“그만둬. 내가 원형도 남지 않게 된다고”
샌드백이 되어버리고 만다.
츠키히를 괴롭히면 카렌은 화낸다.
“그 결과, 카렌 손가락마디에 생채기가 나도 좋다는 거야!”
“뭘 당당하게 꼴사나운 대사를......”
말하고 찌릿하고 츠키히는 나를 째려본다.
살인자의 눈이다.
“오빠 같은 건, 원형도 남지 않는 게 좋아. 내일 아침은, 또 쇠지레로 깨우러 갈 테니까”
“소용없는 짓이야. 공교롭게도, 나한테 흉기는 통하지 않아”
츠키히의 협박을, 코웃음치는 나.
“나는 비실재청소년이야.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
“멋있어!?”
뭐.
자신의 행동을 전혀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지만, 지금은 오해하는 걸 겁내야겠지.
오해라기보다, 두려운 건 카렌이지만.
“자, 애기를 돌리지 않고, 문제점을 다시 짚어보자고? 너가 스스로 [만져봐?]라고, 나를 유혹했지만”
“일단 닮지도 않은 내 목소리 흉내내는 게 제일 열받아!”
아라라기 츠키히, 히스테리 모드였다.
이 무슨 히스테리 소설이냐.
............
안되는가, 이래도 아직 수습이 안되나.
개인적으로는 슬슬 다음 코너로 가고 싶지만, 장면은 그리 쉽사리 바뀌지 않나.
“나는 좀더 이구치 유카씨 같은 목소리야!” (주:이구치 유카(井口 裕香)-애니메이션 ‘바케모노가타리’
아라라기 츠키히의 실제 성우)
“개인 이름을 실제로 언급하지 마”
“그리고 나는 오빠를 유혹한 적 없어-!”
“했어. 이런 식으로 가슴을 내밀고. [me 를 만져봐-?]라고”
“나를 머리가 텅빈 차가운 캐릭터 설정으로 하지 마! 진짜 그런 캐릭터 설정은 원하지 않는다고! 그만둬, 이
책부터 읽기 시작한 사람도 있단 말이야!”
“뭐라고.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내 호감도가 걱정이로군”
이쪽은 지금까지 5 권 분량 동안 쌓아놓은 게 있다고 생각했기에, 안전지대에서 그녀를 놀릴 작정이었으니까. 내
멋진 모습을 충분히 알고 계시다는 걸 전제로 한 행패이다.
“지금은 M78 성운에도 독자가 있으니까, 오빠, 행동거지에는 진짜 주의하도록 해” (주:M78 성운-울트라맨들의
고향)
“그건 진짜 그렇네......”
우주문제가 되어버린다.
지구의 평화는 이제 내 양 어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는 뭐야. 그럼 [만져봐?]라고 들으면, 누구의 가슴이라도 만지는 거야?”
“어이어이, 나를 그렇게 절조없는 녀석으로 생각했냐고. 쇼크네”
거참,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런 도발적인 대사를 듣거나 다른 짓을 당하더라도, 내가 만지는 건, H 씨와 네 가슴뿐이야”
“나도 H 씨와 똑같이 특별범주에 들어가는 거야!?”
“아아, 아니, 카렌도야”
“카렌까지 손을 댄다는 거야? 에에? 잠깐 기다려, 우리들, 그런 사람을 오빠로 불러도 괜찮은 거야?”
“아니아니, 오빠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해가 더딘 츠키히한테, 나는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H 씨는 제쳐두더라도, 너희들의 경우는 오빠이기 때문이야”
“”무, 무슨 말이야......?“
“오빠로써 여동생의 가슴 같은 건, 가슴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거야. 반대로 말하면, 여동생의 가슴을 아무리
만져도, 오빠한테 그 행위는, 가슴을 만지는 게 아니야. 세지 않는 거지. 즉 아무리 만져도 괜찮다는 거야”
“그 3 단논법은,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기보다, 사람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불투명할 정도로, 있을 수 없는 발상이야......”
역전시키기 전에 비약하고 있어, 하고 츠키히는 맥없이 고개를 떨군다.
이해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슬프군.
혹시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토록 서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통신이 이만큼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과 사람 간에는 아무 것도 통하지 않고, 서로 신뢰할 수도 없는
건가.
하지만, 부연설명을 통한 내 사회풍자에도 꺾이지 않고, 츠키히는 굳세고 당차게, 축 늘어뜨린 얼굴을 확
일으켰다. 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항의를 계속할 작정인 모양이다.
끈질기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설령 만져서는 안될 불가침의 존재가 네 가슴이라고 하더라도, 소유자인 네 자신이 허가를 했으니까, 나를
탓할 이유는 되지 않아”
츠키히가 뭔가 불평하기 전에, 이번에는 내 쪽에서 선수를 쳤다. 결국, 아까 전의 야단법석은, 범인이 제 발
저리다고 원인제공자가 츠키히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애초에 발단이 그것이니까.
“아니야!”
하지만, 츠키히는 강경했다.
“달라, 다르다고! 이번에는 츤데레였어!”
“츤데레?”
아니, 어디가?
마리라를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나는 츤데레에는 나름대로 정통해있지만, 아까 전 츠키히의 말에, 그런 요소는
전혀 없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니까 그거야말로 발상의 역전이야. 나는 규제의 테두리에 구애받지 않아!”
“규제의 테두리는 지키도록 해”
이미 단속하고 있다고.
위험하다니까.
최근 여러 모로 엄하니까, 룰은 지켜가면서 야한 짓을 하자고.
“즉 역츤데레야!”
“역츤데레? 무슨 말이지?“
“즉, 평상시가 데레 모드이기에, 아주 친밀하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놓거나 얼굴을 접근시키는 스킨쉽도
태연하게 하지만, 그걸 보고 [어라? 이 녀석,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거 아냐?]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막상
고백해보면, 갑자기 츤 모드로 변모해서 [아, 아니, 그럴 작정이 아니었어요. 진짜 그만둬주세요. 뭘 착각하고
있는 건가요, 멋대로 우쭐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차갑게 쏘아붙이는 거지”
“............”
아니아니, 그건 츤데레나 역츤데레라기보다.
의외로 자주 보이는 보통 여자애잖아?
“즉 역츤데레인 나는, 장난으로 [만져봐?] 같은 대사를 말하지만, 실제로 만지려고 하면 [뭘 진짜로 하려는
거야, 바보 같아!]라고 거절하는 속성인 거야”
“최악이잖아”
무섭다고, 역츤데레.
어떻게 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보다, 애초에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 향후 어떤 전개가 될 거라 생각했기에 너는 내 앞에 가슴을
내민 거냐고”
“뭐, 장난 좀 치거나 살짝 시험해볼 생각으로 말이지, 그러니까 시험해본다고 말했잖아? 파이어 시스터즈
참모담당인 내 계획에 의하면, 내가 가슴을 내밀 때, 오빠는 흥미없는 것처럼 [아니, 그런 빈약한 가슴에는
흥미없어]라고 말해서,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할 테지만, 거기서 내가 [여동생의 가슴이니까
그렇겠지?]라고 딴지를 넣는다는 훌륭한 주고받기를 개시할 장면이었다고”
“아아, 그럴 작정이었냐”
“그런데 왜 훌륭한 리턴에이스를 쳐오는 거야” (주:리턴에이스-테니스에서 상대가 서브한 걸 바로 받아쳐서
점수가 나는 경우)
하여간, 하고 츠키히는 뺨을 부풀린다.
아무래도 남매의 거리감이, 약간 어긋난 모양이다.
“그래도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전개보다, 내가 여동생인 네 가슴을 터치하는 쪽이, 전개로써는 훨씬
재미있다고”
“으-음. 뭐, 그렇겠네. 자, 용서해줄게”
용서해줬다.
주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능력이나, 리더로서의 인망도 그 때문이겠지만, 걱정이 될 정도로 도량이 넓다.
“그래서, 어땠어?”
“응?”
“그러니까, 어땠냐고?”
“아아. 과연, 여동생의 가슴을 터치한 감상을 묻는 거로군”
뭐, 물어보고 싶겠지.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키워온 소유물이,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는지, 신경쓰이는 게 자연스런 발상이다.
여기서 나는 적당히 둘러대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약간 궁리하고, 그 후 솔직하게, 단적으로, 감상을 애기했다.
“76 점의 B 평가!”
“미묘!”
장래가 기대된다.
그래도 이 경우 채점자인 나는 여동생의 가슴밖에 터치한 적이 없기에, 채점기준에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라니?”
“아니, [만져봐?]라고 했으니까 만진 건데”
“그러니까 내 목소리 흉내내는 거 불쾌하다고 했잖아!”
“그 [시험]으로, 어떤 결론이 나오는 거냐고?”
“글쎄”
츠키히는 내 질문을 받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질문할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반응이었다.
이 녀석, 사실 내가 가슴을 주물러주길 바란 건가?
아니, 주무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가슴이 손바닥을 주물렀지만.
어떤 마사지냐고.
“오빠, 욕구불만인 게 아니야?”
“뭐시라!”
최악의 결론이 나왔다.
“봐봐, 그러고 보면 아까,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야한 책을 살 수 없어, 라고
말했잖아”
“3 번씩이나 말한 적 없어”
연호를 할까보냐.
그건 단순히 실언이다.
무심코 본심을 애기했을 뿐이다.
“그게 역효과인 거야. 완전히 역효과. 성욕을 사랑과 착각해버린 오빠는, 그렇게 욕구불만의 인플레 스파이럴을
일으킨 거야” (주:인플레- 경제용어, 돈이 과도하게 많은 상태, 화폐가치가 천정부지로 하락)
“인플레 스파이럴......”
그건 뭐지.
디플레 스파이럴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지만. (주:디플레 스파이럴-공급이 과도하게 많은 상태, 물가하락,
소득감소, 실업자증가)
“세상에......인플레 스파이럴이라니......그런 007 같은 현상이 내 뇌에 일어나고 있다고 너는 말하는
거냐......”
“응. 그러니까 여동생의 가슴도 분별없이 터치해버리는 거야”
“터치해버리는 건가......터치패널 같은 그 가슴에”
“터치패널은 평면이잖아!”
구타당했다.
만약 상대가 카렌이었다면 나는 벽까지 날라갔을 테지만, 츠키히의 가냘픈 팔로 행하는 공격이기에, 모기 물린
것처럼 간지럽다.
그렇기에, 나는 버텼다.
“핫. 즉 터치패널로, 사랑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거군”
“별로야!”
“그리고 예금을 찾는 거지”
“능숙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여동생이지만, 그런 점은 내 여동생답게, 판정은 공평했다.
“큰 문제네”
라고, 말하는 츠키히.
“이러는 게 내 가슴이니까 다행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 오빠, 이 이상 욕구불만이 쌓이면, 마침내 진짜로 H
씨의 가슴에도 손을 댈 거야”
“흠, 글자 그대로 손을 대게 된다는 건가......그보다 네 가슴이니까 다행인 거로군”
“다행이겠지?”
“나쁘진 않았어”
무슨 대화인지.
“하지만, 애초에 그 이론에 의하면, H 씨가 나한테 [만져봐?]하고 가슴을 내밀게 되는 설정이 되지만......”
H 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과감하게 터치하러 가는 오빠니까. 머리를 짜내겠지. [술래잡기
하자고-, 몸 아무 데나 터치하면 술래야-]라고 말하고”
“얄팍한 잔꾀로군......”
“색깔잡기(色鬼)를 하면서. H 씨의 브래지어색을 지정하는 거지” (주:色鬼- 술래잡기와 달리, 참가자는
술래가 지정하는 색을 찾음. 그 색부분은 안전지대가 되어 술래는 그 색부분에 접하지 않은 사람을 쫓음. 색에
접하기 전에 잡히면 술래교대, 그러지 못한 경우는 다른 색을 다시 지정)
“얄팍하기는커녕, 그 잔꾀야말로 평면 수준이잖아?” (주:얄팍하다(浅い), 평면(平面)-두께의 차이를 이용한
말장난)
아니.
여러 모로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내가 짜낼만한 잔꾀이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곱씹으면서 수긍했다.
그런가, 욕구불만인가.
신랄한 말에 심하게 상처받았지만 (울음), 듣고 보니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 말대로인 느낌도 든다.
훌륭하게 간파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명탐정한테 진상을 들킨 범인은, 이런 기분인 걸까ㅡ 과연, 모두 잘난 듯이 떳떳했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다니.
그런가, 이 기분은 욕구불만이었는가.
“오호라-. 그런 거였나”
“응. 위험했네, 오빠. 하마터면,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고작 가슴이 매력적이란 이유로 반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할 뻔했어”
“그런가. 이건 진정한 의미로 [착각하지 말아줘]인 거네”
“이 경우, H 씨 입장에서 보면, 그것, 절실한 바램이겠지”
“음“
확실히.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사랑과 착각한 나머지, 자칫 잘못해서 고백이라도 한 날에는, 되돌이킬 수 없다.
재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H.씨.의. 성.격.을. 고.려.한.다.면.ㅡ 그런 재난도, 달게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나는 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군. 위험할 뻔했는데 도움을 받았네, 츠키히. 나 정도 되는 사람이, 하마터면 마도로 떨어질 뻔했어”
“마도라니”
“카카카카캇. 확실히 착각도 유분수였지ㅡ 이 제 6 천마왕이신 아라라기 코요미가 하찮은 계집애한테 사랑을
하다니, 당치도 않지!”
“떨어질 필요도 없이, 이미 마도를 걷는 대마도사인 느낌이 들어......”
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뭐야, 라고 묻는 츠키히.
아수라맨이야, 라고 나는 대답했다. (주:아수라맨(アシュラマン)-근육맨에서 나오는 초인, 3 개의 얼굴, 6
개의 팔을 가짐)
“자, 결론이 나왔으니, 다음은 대응책을 세워야겠군. 욕구불만은 내버러두면 큰일이 벌어지니까. H 씨를 내
마수로부터 지켜내지 않으면”
“그러네”
“터치의 차이로 진상을 눈치챈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네”
생각나는 걸 무작정 애기했지만, 무시당했다.
아무리 여동생이 말상대라고 해서 아무 거나 애기해도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오빠가 H 씨한테 손댄 결과, 경찰관한테 잡혀서, [우와~앙! 가슴은 이제 지긋지긋해!] 같은 결말이 되는 건
꼭 막아야 돼”
“경찰관한테 잡히면,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의 결말로 끝나진 않겠지”
“나 역시, 우리 집에서 범죄자가 나오는 건 싫어. 파이어 시스터즈의 이름에 먹칠하는 거야. 지금까지 쌓아올린
신용이 물거품이 되어버려”
“흠. ‘진짜로 두려운 건 유능한 적이 아닌 무능한 아군이다‘ 라니 자주 듣는 애기지”
“무능한 아군이 아니라, 유해한 아군이지만 말이지”
“그렇게 볼 수도 있네”
하지만, 애초에 나는 파이어 시스터즈의 아군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한테는, 전대물에 나오는 6 명째의 멤버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파이어브라더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촌스러워!), 그런 은색 전사가 된 기억은 전혀 없다.
“어쩔 수 없네. 임시 치료법으로,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지 너나 카렌의 가슴을 주물러 해소하도록 할까”
“그런 치료법은 절대 실행하면 안돼!”
“뭐야. 너희들 파이어 시스터즈는 정의의 전사잖아. 그렇다면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라고”
“오빠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라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제멋대로 심심풀이 대용으로 가슴을 주무르게 놔둘 것 같아?, 라고 츠키히는 말했다.
“자, 어떻게 하면 되는데. 죄없는 시민인 H 씨가 터치당하느냐, 너희들 자매가 터치당하느냐, 둘 중 하나라
고”
“그 둘 중 하나라면......, 크으윽! 알았어, 우리들을 터치해도 좋아!”
자기희생정신에 투철한 파이어 시스터즈였다.
기분나빠.
“우리들의 가슴을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까, H 씨한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좋아, 약속할게. 아니, H 씨뿐만이 아니야. 너희들이 희생하는 한, 설령 장래에, 배낭을 등에 짊어진
트윈테일에 미아가 된 로리소녀를 본다고 해도, 나는 그 녀석한테 뒤에서 안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여기서
맹세하지”
“어째서 그렇게 구체적이야”
“왜일까”
신기하다.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의지를 느낀다.
“뭐, 그래도 약속이란 건 최대한 구체적인 게 좋으니까. 그 편이 더 지키기 쉬울 테지”
“그러네. 자, 그 맹세는,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다는 거네”
“그 말대로야”
왜일까.
아무런 확증도 없는 미래에 대한 약속인데,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보다, 그런 선택지는 없으니까”
“응”
당연하다.
여동생의 가슴을 만진다니, 대체 무슨 벌게임이냐고.
“애초에 욕구불만의 해소법은, 여동생의 가슴을 이용하지 않아도, 수없이 많겠지. 여동생의 가슴은 최후의
수단이야”
“마지막까지 취해선 안될 수단이란 느낌도 들지만”
자,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많은 해소법 중에서, 과연 어떤 걸 선택할지가 관건이군.
“스포츠에 열중하거나, 실내에 있어도 열중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진다거나, 뭐, 일반적으로 그런 느낌이겠지”
“스포츠네. 카렌과 함께 조깅이라도 할 걸 그랬나”
“2 인 3 각으로”
“그래, 2 인 3 각으로ㅡ 아니, 뭐냐고!”
아마 질질 끌려가겠지.
결혼식의 웨딩벨 같은 꼴을 당하겠지.
“아니, 카렌 성격으로 볼 때, 오빠를 질질 끌지 않도록 초스피드로 달릴 거야”
“내가 뜰 정도로 말이지”
닌자가 하는 수행이잖아.
뭐, 저 녀석은 장래, 신부보다 닌자가 될 것 같으니까.
하여간, 오랜만에 뒤늦게 딴지를 넣어버렸군.
“스포츠는 안돼. 더 이상 카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작은 오빠네......”
츠키히가 한심하다는 듯이 코멘트를 날렸다.
그건 품성에 대한 걸까, 아니면 신장차에 대한 걸까.
아니, 아마도 양쪽 다일 테지.
“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취미인가”
“그러네. 오빠, 최근에 나오는 게임 잘 안 하지?”
“아-. 최근에 나오는 게임 말이야-. 최근이란 말보다 최신게임이라고 해야겠지. 통신기능이나 네트워크 대전
등등, 그런 것들이 추가되어, 1 인 플레이만 하다간 제작자가 의도한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어”
“아-. 휴대용기기끼리 무선으로 통신하는 거?”
“그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뭐, 이런 시골마을이니까, 다른 사람과 통신하다 끊길 일은 없겠지만.
백화점 게임 코너에 집합.
얼토당토않은 히어로쇼이다.
“처음부터 재미가 제한된다고 생각하면, 역시 흥미가 사라지네”
“일단 우리집도 인터넷 회선이 연결되어있으니까, 1 층에서 놀면 되잖아”
“아니, 달라. 애초에 나는 게임을 혼자서 하고 싶어”
대전격투 같은 건 정말 싫어, 라고 말하고 빼놓는 나.
내 마음은 난입금지이다.
“게임을 혼자서만 즐기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사랑이 가능할 리가 없겠지ㅡ”
츠키히가 감개깊은 듯이 옛날 화제를 다시 꺼내면서, “자, 어쩔 수 없나” 하고 말한다.
“여동생의 가슴을 주물러”
“벌써 최후의 수단이야!?”
“실수야. 잘못 말했어”
“지금 우리들은 온갖 다양한 일들을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자, 어쩔 수 없나”
츠키히가 다시금, 고쳐 말한다.
“야한 책을 사면 되겠네”
“............”
결론은 그거냐.
“그러니까, 오빠는 제멋대로 착각해서, H 씨의 눈을 의식한 나머지 요 1 개월 동안, 구입을 주저해왔잖아?
혹시라도 오빠 성격을 보건대, 몸과 마음을 정리한다고 해서 여태까지 모아온 비장의 보물도, 끈으로 묶어 버린
게 아니야?”
이 여동생, 상당히 감이 좋군.
아니면 내 행동은, 그렇게 예측하기 쉬운 걸까.
“그게 욕구불만을 더하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야한 책을 새로 구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
“흠-”
처음 들었을 때는 질려버렸지만, 막상 듣고 보니 임시치료법이 아닌, 근본적인 치료법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치료될 수 있다.
그렇군.
야한 책이 있다면 사랑 같은 건 필요없잖아.
만사해결이다.
아니, 나와 츠키히는 지금, 세계의 해답에 다다른 게 아닐까?
과연 세계의 해답이지만, 한 발짝 잘못 내딛으면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사상이다.
“오호라......독서를 통해 옛 현인을 벗으로 한다는 거군(読書尚友)”
“응. 그리고 독서삼도야. 페이지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자세히 읽지 않으면 안돼” (주:독서삼도(読書三到)-
독서의 3 가지방법,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음)
“이것 참,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과연, 연애상담 해결율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아라라기 츠키히야.
평생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드디어 이 장면의 끝이 보이는군”
“그러네. 애니메이션이라면 3 화 분량이 될 정도로 애기했지만, 이걸로 간신히 장면이 바뀌겠어. 그렇게
정했으니 좋은 일은 서두르는 법이야, 오빠. 마침 서점도 열 시간이니까, 지금부터 사러 가는 게 어때? 여차하면
나도 함께 가줄게”
“아니, 과연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어. 이미 충분하게 도움이 되었어.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다고”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만의 싸움이야‘ , 라고 폼잡으면서 애기했지만, 나는 바로 그 때 어떤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안돼, 무리일지도”
“어? 왜? 내 나이스아이디어에 뭔가 결함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네 아이디어에 결함은 없지만, 앞서서 필요한 게 없어”
“앞서야 하는 거? 자살하는 아이?”
“그건 부모에 앞서서 죽는 불효이고”
으-음.
이, 개그가 없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시스템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어쩔 수 없군.
“돈이야”
“돈?”
“지금 나는 돈이 없는 상태야”
치아노제라고 말해두자. (주:치아노제(Zyanose)-청색증, 혈액의 산소결핍 때문에 피부가 검푸르게 변함)
어쨌든 지갑 안에는 377 엔밖에 없다ㅡ 지갑 안에 들어있는 돈을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장래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 경우, 파악하지 못하는 쪽이 더 어려울 정도로 적은 금액이다.
“그동안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네. 저번의 생일, 할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셨잖아”
“게임 사느라 다 써버렸어”
“게임 샀네, 뭘”
정확한 지적이었다.
뭐, 불평을 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하는 게 내 신조이다.
“어떤 걸 샀어?”
“아이돌 마스터와 헷갈리는 바람에 아이스 클라이머를 샀어-”
(주:아이돌 마스터-일본 남코에서 개발한 아케이드 게임, 엑박 360 용, 프로듀서가 되어 아이돌 후보생들을
키우는 리듬육성게임, 아이스클라이머-패미컴으로 발매된 닌텐도사 게임, 나무망치든 에스키모캐릭터로 최상층을
향해 가는 게임)
“그런 걸 헷갈리다니......정말, 귀찮게 하는 오빠네. 하여간, 멍청한 오빠를 가진 여동생은 고생한다니까”
아까 전 말했던 대사를 되돌려주는 츠키히.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하지만 게임을 사서 내 지갑의 잔액이 377 엔이 된 건 내 자업자득이니까, 오히려 이 상황에 잘난 척을 할 수
있게 해준 오빠한테, 츠키히는 감사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네, 나와 츠키히의 비장의 책을 1 권 제공할게”
“............”
여동생한테 야한 책을 받고 싶지 않다고.
쓰다 남은 걸 물려받는 건지, 바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취미가 맞지 않는다면 말도 안되고, 취미가 맞는다면 최악이다.
“......그래도, 일단 들어볼까. 그래, 어떤 내용이야?”
“뭐,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소년끼리”
“좋아, 거기까지야”
도중에 잘랐다.
여성향 애기를 도중에 잘랐다.
“마지막까지 듣지 않아도 괜찮아?”
“처음부터 듣기 싫었어”
“오빠, 제대로 듣지 않고 사람의 취미를 부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사람의 취미를 부정하는 건 좋지 않지만, 사람의 악취미를 부정하는 건 괜찮아”
“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부우- 부우- 하고, 야유하는 츠키히.
입을 뾰족하게 내민 채.
아무래도 내 철학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오빠처럼 선입관에 틀어박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는다고? 오빠의 취미는 제대로 빠짐없이 체크해서,
골라주는 거야”
“체크하지 마! 그리고 고르지 마!”
어쩐지 감이 너무 좋더라니!
집안을 샅샅이 뒤진 거잖아!
“오빠의 취미는, 솔직히 말해서, 위험해”
“시끄러워!”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들을 필요도 없이, 내 취미, 기호는 지극히 정상이야!
제길, 또다시 숨길 곳을 찾아야......
“그리고 ‘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네 입장이라면 어때? 내가 그쪽 방면의 책을 읽는
걸 보면, 여동생으로서 간과할 수 있겠냐?”
“동인남 오빠, 불타오르네!”
척,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츠키히.
글렀군.
너무 빠져든 나머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츠키히는 “정말, 고생시킨다니까, 애먹인다니까. 파이어 시스터즈한테도 큰 타격이야” 라고
불평하면서 일어선 후, 타박타박 내 방을 나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걸 보면, 아마 금방 돌아올 예정이겠지.
설마 갑자기 화난 것은 아닐 테지.
네 사복이 열받게 해! 라고, 그런 이유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몹시 살벌한 남매관계이지만,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츠키히는 바로 돌아왔다. 자세히 보면 그 손에는, 깨끗하게 접힌 천엔 지폐가 3 장, 들려있다.
그리고 츠키히는 그걸 나한테 내민다.
“자. 이거, 빌려줄게”
“에, 에엣!? 저 같은 녀석한테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까!?”
한순간에 비굴해지는 나.
내 자신이지만 너무나도 꼴사납다.
“응, 아니, 빌려줄 뿐이니까? 터치패널로 예금을 인출한 게 아니니까 말이지? 제대로 갚도록 해”
“무, 물론! 이자를 듬뿍 쳐서 갚을게! 법정이자의 범위 내로 말이지!”
“그런 건 확실하네......”
“나는 빚은 반드시 갚는 남자야”
“빚이 현금인 경우는 그 대사, 꼴사나워......”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여동생 앞에 정좌한 채 돈을 빌리고 있는 오빠라는 구도로, 왠지, 이 이상 꼴사나운
구도도 없다.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츠키히도 흥이 났는지,
“이자는 필요없지만 말이야”
하고.
그런 말을 했다.
“그 대신, 감사의 기분이란 걸, 보도록 할까?”
“감사의 기분?”
“츠키히, 고마워, 정말 좋아해, 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달라고 하는 거야”
츠키히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신발을 벗기 시작한다.
벗는 방식이 괜시리 야하다.
그리고 쿵푸영화처럼 한쪽 발로 서서, 들어올린 쪽의 발등을, 척하고 내 코끝에 내민다.
그리고 매섭게 말한다.
“핥아”
핥았다.
“전혀 망설이지 않아!”
그대로 쿵푸영화처럼 코끝을 채이고 말았다.
아니, 이건 진자로 아프다. 코피가 나오기는커녕 코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레벨의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건 이쪽이 할 대사야!”
“아니-, 이쪽이 할 대사겠지! 이 대사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양보하라고-!”
기분나빠, 기분나빠, 기분나빠, 라고 츠키히는 내가 빨아드린 발등을 슥삭슥삭, 불쾌한 기억과 함께 씻어내는
것처럼 닦아낸다.
“뭐야, 상처받네, 사람의 혀를 더러운 것처럼 취급하다니. 네가 [핥아봐?]라고 애원했으니까, 나는
마지못해서 핥은 건데”
“‘마지못해서’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적극성이었어! 그리고 더 이상 흉내라고 볼 수도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애원을 했다니,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야!” (주:중상비방(誹謗中傷)=중상모략)
“그 돈을 내놔, 안 그러면 발을 또 핥아버리겠어”
“이젠 협박까지 하네!”
츠키히는 3 장의 지폐를 확 뿌렸다.
떡을 받으러 모여드는 아이처럼, 나는 그것들이 공중에 떠있는 동안, 캣치했다.
착착착, 하고.
은행원처럼 그걸 체크하는 나.
“좋아좋아, 3 천엔, 확실히 받았어”
“얼마 없는 용돈을 긁어모아 빌려줬는데, 왜 내가 채무자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나는 신용할 수 없을 테니까, 이번 달 내 용돈에서 3 천엔을 빼내어 너한테 주도록, 파파와 마마한테 말해둘
게”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이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여동생이 신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래”
“소극적으로 검토할게”
그리 말하고, 나는 시계를 확인한다.
10 시 전.
좋아, 자전거 타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다.
나는 양복옷장을 열고, 다시금 갈아입기로 했다ㅡ 실내복에서 외출복으로. 왠지 아까부터 패션쇼를 하는 것
같다.
“오빠”
일단 청바지를 입었을 때, 문득, 한가하게 내 책상 위를 만지작대던 츠키히가, 이쪽에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지.
나한테 돈을 건넸으니, 후딱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기왕이면 이 세상에서도.
“언제 몸을 단련한 거야?”
“앙?”
“식스팩”(セミ腹)
츠키히는 그리 말하고, 내 배 부근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알몸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복근이 단련되어있지 않았는데”
“아아”
내 복근은 현재, 6 갈래로 나누어져있다. 그러고 보면, 이 상태로 여동생 앞에 벗는 것은 처음이었나.
이.렇.게. 된. 건. 봄방학 때였으니까ㅡ 설마, 나는 카렌이나 츠키히 앞에 1 개월 넘게, 알몸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건가.
실수했다.
여동생한테 알몸을 보인 적이 없다니 부끄러워!
......아니아니.
어떤 변태냐고.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떤 변태냐고] 계열의 1 인 딴지가 많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거야말로 변태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실은 지금, 복근 만들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어”
“헤에. 열중하고 있네”
“그래. 빌리즈 부트캠프를, 복근프로그램만 하고 있어” (주:빌리즈 부트캠프-한때 일본에서 유행한 50 대
흑인아저씨의 다이어트 DVD, 군인체조+권투)
“어째서 그렇게 편중된 육체개조를......”
물론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기에, 나는 적당하게 둘러대어, 얼버무리기로 했다.
“배가 뒤틀릴 정도로 재밌는 개그를 생각했기에, 너희들한테 그걸 보여줄 때까지 사전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 말하고 웃어버릴 정도로 재밌다니......”
“그래. 너희들도 죽고 싶지 않으면, 복근을 단련해놓는 게 좋아”
“빌리즈 부트캠프나, 코어리듬을 보면 돼?” (주:코어리듬- 일본의 다이어트 프로그램, 여자들이 나와서
스트레치, 춤을 선보임)
“아니, 이번에 추천하는 건 모테렛치야” (주:모테렛치-인기남녀가 되기 위한 스트레치, 아이돌이 나와서 다리
스트레치 선보임)
“모테렛치!?”
패션리더인 네 녀석한테는 잘 어울리겠지, 하고 그런 변명으로 속이니, “응, 알았어‘ 하고 츠키히는 수긍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지만 (이 설정은 아직도 유효할까), 오빠의 행동을 샅샅이 캐내는 녀석은 아니니까.
이번에는 상담하니까 응했을 뿐이다.
“자, 오늘은 고마웠어”
외출용의 긴 소매 셔츠를 입고 나서, 나는 간신히, 츠키히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러면 되는 애기이기도 하다.
“아니-, 천만에”
“다녀올게”
“다녀와”
얼핏 보면 츠키히는 내 침대에서 다시금 뒹굴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그 상태로 자버릴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
또 자는 걸 실컷 방해해놓고, 잘하는 짓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뭐, 이것저것 도움받았으니까, 잠자리 정도는
제공해주도록 할까. 쇠지레 처리는 알아서 하게끔.
나는 마지막으로, 츠키히한테 물었다.
“츠키히“
“왜”
“뭐, 이번에는 착각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언젠가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가능하지 않아? 인간이라면”
“그런가”
잘 자, 하고.
츠키히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내 방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웃는다.
킥, 하고 웃는다.
인간이네.
봄방학 이후ㅡ 고작 그것뿐인, 당연할 터인 범주에, 일일이 반응하게 되었군.
복근이나.
정말로 배가 뒤틀릴 정도의 애기ㅡ 이다.
“인간강도(强度)라던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애기로군”
강하다는 것.
강함.
그런 개념도 또한, 봄방학에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ㅡ 다름아닌 H 씨의 의해.
H 씨. H 씨. H 씨.
"카ㅡ“
하고.
얕게 웃다가, 아수라맨 뺨칠 정도의 큰 웃음으로 막 바뀌려고 할 시점에,
“다녀왔어-”
하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카렌이 조깅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의외로 빨랐군. 가족 내에서 대포알로 불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저 녀석은 일단 외출하면 종종 돌아오지 않는 녀석이지만.
최장기록에 의하면, 카렌이 초등학교 6 학년 때, 이 근처를 잠깐 산책한다고 말하고, 3 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건이 있다ㅡ 참고로 그 때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었다.
바다를 산책하지 말라고.
경찰까지 동원했잖아.
“어서 와-”
집에 있어도 방해만 되는 여동생이지만, 그 때의 대소동을 떠올리면, 이렇게 빨리 집에 돌아오는 걸 반겨야할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군, 잠깐이라도 얼굴을 봐둘까.
무슨 변덕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심경의 변화를 겪은 나는 ‘어서 와‘ 라고 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흠뻑 젖은 청바지 여자, 아라라기 카렌이, 쳔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다.
......?
흠뻑 젖어?
“어? 뭐야, 밖에 비오고 있어? 나, 지금부터 나갈 참이었는데”
창밖을 그리 신경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빗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고, 그 이전에, 햇빛이 여느 때처럼
비춘다고 생각했는데.
맑은 날에 비?
“아, 오빠. 다시 잤다가 또 일어난 거야”
카렌은 신발을 벗고, 그것을 일단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현관 매트를 밟고 들어온다. 현관 매트를 축축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에스타크와 쌍벽을 이룬다고 일컬어지는 오빠의 잠을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츠키히 한 명한테 맡기는 건
불안했지만, 뭐야, 잘 해낸 모양이잖아” (주:에스타크(エスタㅡク)-드래곤퀘스트 5 의 숨겨진 보스.강함)
“아니, 뭐, 잘 해냈다고 해야 하나......”
뭐, 깨운다는 목적 자체는 이뤄내도, 츠키히는 츠키히 나름대로, 그걸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는 느낌이
들지만.
속옷 차림으로 포즈를 취하거나 가슴으로 손을 주무르고 다리를 핥게 한데다, 3 천엔을 뜯겼으니까.
내 소중한 여동생을, 누가 그런 꼴로 만든 거냐.
용서할 수 없군.
“응응, 츠키히도 드디어 독립할 시기가 됐네. 언니는 조금 외로울 뿐이야. 그래도 뭐, 칭찬해줘야겠지”
“츠키히라면 지금, 자신이 맡은 역할을 끝내고, 내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당분간 내버려둬. 칭찬할 거라면
나중에 해도 되겠지. 그보다 카렌, 우산 챙겨가지 않았어?”
“우냐?”
카렌이 의아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뜬다.
“오빠, 왜 그래? 오빠가 우리들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드문데.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부끄럽다고 해서, 큰 여동생,
작은 여동생이라고 불렀잖아”
“아아, 이제 그렇게 부르는 건 귀찮으니까 그만두기로 했어”
어차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설정이다.
나 혼자 참으면 되는 일이다.
“흐-응. 시간 순서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된 느낌도 들지만, 뭐 상관없지”
별로 복잡한 걸 생각할 수 없는, 유감스런 상태인 카렌의 뇌는, 대개의 일을 [뭐 상관없지]로 넘겨버리기에,
별명에 관한 것은 그리 캐묻지 않고,
“아니, 비 안 오는데-”
라고 말했다.
“골든위크의 첫날에 어울리게, 햇볕이 쨍쨍해”
“응? 자, 넌 왜 그렇게 흠뻑 젖었어? 진창에 빠진 거야?”
“나는 오르는 일은 있어도 빠지는 일은 없어”
자랑스런 얼굴로 말하는 카렌씨.
쓸데없는 곳에 얽매이는데다 짜증나는 여동생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말을 들어도 빠지지 않아”
“그건 지옥과 같은 캐릭터 설정이군.......”
“돼지도 칭찬하면 나무에 오른다는 건 나를 위한 속담이야!” (주:속담이 섞임-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
너를 위한 속담이 그거여도 괜찮겠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 M 성향이 강해서 할 말이 없다.
“너가 빠지던지 올라가던지 내 알 바 아니니가, 어째서 흠뻑 젖었는지 가르쳐줘. 설마 세일러 마스한테 화성을
대신해서 벌받은 거냐” (주: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에 등장, 히노 레이가 변신하는 불꽃, 정열의 전사, 대사
‘화성을 대신하여 징계하겠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오빠. 그녀는 내 동료야”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건 너야”
“아니, 이거, 땀이라고”
봐봐.
하고 카렌은 나한테 안겨왔다.
흠뻑 물을 흡수한 스폰지에 전신이 휩싸이는 감촉.
즉.
“기분나빠! 불쾌지수, 장난 아니라고! 우악, 땀냄새!”
땀이라고오오!?
이게 전부!?
“이것 참, 오빠. 한창 때의 여자애를 냄새난다니 너무하네”
“놔줘-! 꺄악-! 진짜로 불쾌해, 아니, 너무 불쾌해!”
혼신의 힘을 다해 나는 날뛰었지만, 소용없다.
츠키히와 달리, 체육 계열의 파워계 여동생, 카렌이다.
힘으로 떼어놓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자-”
뺨을 비벼오는 카렌. 그녀의 땀이 윤활유가 되어, 묘하게 매끄러운 뺨비비기가 되었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행위는 뺨비비기가 아니라 오히려 땀의 염분을 얼굴에 문지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때 벗기는 마사지냐고.
“그, 그만둬 카렌! 키 차이를 고려하라고! 지금 너는 내 얼굴을 가슴에 끼워넣고 있어!”
“어? 진짜? 어머, 싫다-, 부-끄-러-워-!”
지적하니까, 바로 나한테서 떨어져,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는 카렌.
내 생명은 구해졌지만, 네 녀석의 부끄러워하는 기준을 모르겠어.
저렇게 열렬한 포옹을 해놓고, 뭘 부끄러워하는지.
“그게 전부 땀이었다고......? 진짜냐......아니, 그래도, 확실히 땀이네, 이건......”
흠뻑 젖은 정도는 아니지만, 카렌한테 안겼기에 내 쪽도 만만찮게 젖어버렸다. 그 수분을 손으로 집어서 혀로
맛보면, 진짜로 틀림없이 땀이다.
“여동생의 땀을 핥지 마. 역겨워, 오빠”
“시냇가에 출몰하는 요괴와 같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여동생 쪽이 훨씬 역겨워”
뭐였지, 저 요괴.
물귀신 처녀였나.
그렇다고 한다면 딱 들어맞는 이름이지만.
“조깅하는데 그렇게 땀을 흘린 거야? 너 설마 이 근처에서 고질라랑 싸우다가 온 건 아니겠지” (주: 일본의
대표적인 괴수영화 ‘고질라)
“아니, 나 조깅을 별로 한 적이 없으니까, 얼마나 해야 될지 몰라서. 페이스 배분을 잘못 한 모양이야”
“헤에”
조깅인데 전력질주해버렸다는 건가.
역시나.
하지만, 확실히 몸에 달라붙은 수분량이, 카렌의 체중을 훨씬 뛰어넘을 거 같은데......
“의외로 길었군. 42.195km"
“너, 풀마라톤을 뛰고 온 거야?”
“그래도 봐봐, 오늘은 골든위크 개시 기념으로 하는 조깅이고, 이미지는 성화 주자였으니까”
“성화 주자는 42.195km 를 뛰지 않는다고!”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과 헷갈리고 있다!
“어-? 그래도,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니까, 그 정도는 뛰지 않아?”
“훨씬 많은 사람수로 구간을 나눠서 달리고, 네 방식대로 생각하면, 42.195km 는 너무 짧아!”
나라와 나라의 거리감이 너무 좁다.
무슨 마을 내 운동회냐고.
“참, 오빠. 42.195km 는 길었어"
“그야 길기도 하시겠지. 적어도 네가 그렇게 땀투성이가 되어버릴 정도니까 말이지”
“응. 실감했어. 그건 더할 나위없이 실감했어. 아무리 42.195km 라고 해도, 고작 100m 의 천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두려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이 여동생의 머리나쁜 게 무섭다고!
무서워서 떨릴 정도야!
“그래그래, 지쳤다는 거네. 왜 이렇게 비실비실댔는지 드디어 이유를 알겠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알겠어’ 라고 말했다.
매우 걱정이다.
“그래서 오빠. 골테이프는 어딨어. 준비해뒀겠지?”
“하지 않았어. 설마 내가 가볍게 또 자고 있는 사이에 자신의 여동생이 가볍게 풀마라톤을 뛰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어”
“어라? 이상하네. 츠키히한테 부탁했을 텐데”
“츠키히도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했겠지.
사이좋은 자매이지만, 그런 점에서, 츠키히는 쿨한 면이 있다.
서로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잇다.
“어쩔 수 없네-. 츠키히도 야무지지 못하다니까. 역시 아직도 내가 있어야 하나-”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네 머리를 고치기 전에는, 츠키히도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을
테지만”
“하지만 골테이프를 끊지 않는 한, 내 러닝은 끝나지 않아”
카렌은 다시 한 번 “어쩔 수 없네” 하고 말한 뒤, 나를 향해서,
“오빠. 머리 위에 고리를 만들어줘”
라고 말했다.
“고리? 천사처럼 말이야?”
“아니, 달라. 팔로, 이런 식으로”
“아아”
카렌이 선보인 실제 예시를 보고, 나는 들은 대로 실행했다. 팔과 어깨의 라인으로, 숫자 제로(0)를 만드는
형태이다. 무슨 속셈으로 이런 걸 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ㅡ
“얍!”
카렌이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그리고 높이뛰기의 베리롤오버(Belly roll Over)로 내가 만든 팔고리를 빠져나갔다. (주:베리롤오버
(Belly roll Over)-높이뛰기에서 앞으로 엎드려 넘는 방식)
돌고래처럼.
혹은, 불고리 넘기의 사자처럼.
내 머리 부분을 스치면서.
바늘구멍을 꿰뚫는 것처럼ㅡ 마치 말벌과 같은 기동력으로, 빠져나갔다.
“야압!”
그리고 훌륭하게, 착지했다.
“오빠를 뚫었어! 이게 내 골이야!”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허세를 부리면서 고함을 질렸지만, 나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다.
내심 묘사하자면, 전신에 닭살이 돋은 이미지이다.
“아-, 지쳤어. 그보다 목말라. 물, 무울-!”
“기다려! 아직 애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나는 ‘그보다 흠뻑 젖은 채 복도를 걷지 마‘, 라고 말하면서, 수분을 보급하기 위해 거실로 향하는 카렌의
뒤를 쫓았다.
쫓아가보면, 그녀는 주방의 싱크대에 포니테일 머리를 내민 채, 수도꼭지에서 벌컥벌컥하고, 직접 물을 마시고
있다.
남자답다......
이 녀석, 이미 남자 중의 남자가 아닐까?
여동생인 주제에.
“꿀꺽, 꿀꺽, 꿀꺽, 꿀꺽, 푸하앗!”
5 리터 정도는 마시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카렌은 물을 잔뜩 마신 다음, 간신히 수도꼮지에서 입을
뗐다.
“자, 그럼-. 오빠한테 땀냄새난다고 듣고, 소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상처받았으니까, 샤워라도 할까”
그리 말하고 카렌은 청바지를 벗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즉 내 눈앞에서.
......그 행동거지의 어디에 상처받은 소녀의 마음이 있다는 거지......남매이니까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옷 벗는 건 탈의실에 가서 해야 하잖아.
“............”
그래도, 있잖아-.
이 녀석한테도 츠키히처럼, 남자친구가 있지-.
미즈도리군이었나.
잘 모르지만.
즉 소녀의 마음은 제쳐두더라도, 이 녀석은 이 녀석 나름대로, 사랑을 알 터이다.
“저기, 카렌”
나는 말한다.
원래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면, 매우 럭키한 일이다.
“왜 그래, 오빠”
“조금 가르쳐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뭐야, 마침내 오빠도 공수도를 배우고 싶어진 거야”
“아니, 가르쳐달라는 건 필살기 같은 게 아니야”
일단 말투를 진지하게 한 채, 나는 질문의 내용을 꺼냈다.
“너 말이야,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상대를 좋아한다는 걸, 어떤 식으로 판단해?”
“응?”
뭐야, 연애상담이야, 하고.
카렌은 상반신 알몸이 되어, 벗은 청바지와 셔츠, 스포츠 브래지어를 타올처럼 어깨에 휙 메면서,
“얼굴을 보고 이 녀석의 아이를 낳고 싶어- 라고 생각하면, 그게 좋아하는 거잖아?”
라고 대답했다.
......매우 남자다운 대답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참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003
/004
자, 그럼
지금까지도 가끔씩 암시하듯이 화제에 나오곤 했지만, 알기 쉬운 형태로 봄방학 때의 일을 애기해두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장본인인 나는 저 2 주 동안 있었던 일을 별로 애기하고 싶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화제를 피할 수
없다는 판결이다.
봄방학.
나는 흡혈귀한테 습격당했다.
자기부상열차가 실용화되고 수학여행으로 해외로 가는 게 당연해진 이 시대에, 부끄러워서 밖에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꼴사나운 실태이지만, 어쨌든, 나는 흡혈귀한테 습격당했다.
흡혈귀ㅡ 괴이의 왕.
피도 얼게 하는. 피도 끓게 만드는.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의 흡혈귀.
셀 수 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문구를 가진 괴이살해자.
눈이 아찔해질 정도로 눈부시고, 눈이 찌부러질 정도로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 금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흡혈귀한테 목덜미를 덥썩 깨물려 온몸의 피를 들이마셔지고ㅡ 그리고 나는 흡혈귀가 되.었.다.
불사신으로. 무적으로. 최강의ㅡ 흡혈귀.
흡혈귀 전문의 사냥꾼인 뱀파이어·헌터나 흡혈귀이면서 흡혈귀를 사냥하는 동족살해의 흡혈귀, 그리스트교의
특수부대한테 구해지는 일도 없이ㅡ 그래서 내 봄방학은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한 싸움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결말부터 애기하면 지나가던 꾀죄죄한 아저씨나, 클래스 반장의 협력을 얻어서, 최종적으로 나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럭키-.
언럭키-.
다소의 후유증도 남아있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로 돌아오는 것이ㅡ 가능했다.
잘됐네, 잘됐어.
해피엔드.
뭐, 이 세상과 인생에 그렇게 알기 쉬운 결말은 없고 하물며 엔딩이란 것도 없다. 그래도 끝이 있다고 한다면,
저 아름다운 귀신한테 물린 시점에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고 해도 되지만.
그래서, 일단 접어두고.
여기서 왜 이 애기의 삽입이 필요했는지 말하면, 그건 [다소의 후유증]이란 녀석이다ㅡ 흡혈귀의 후유증.
그 후유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회복능력, 치료능력이 된다ㅡ 뭐, 흡혈귀의 불사신능력은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친숙한 대로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굴러서 무릎이 벗겨졌다거나 종이로 손가락을 베였다거나, 여동생, 카렌과 맞붙어 싸우다가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물론 그 장소 제각각의 컨디션, 즉 흡.혈.귀.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눈 깜짝할 새에 낫는다.
나아버린다.
고쳐버린다.
글자 그대로 인간과 동떨어진 회복력ㅡ 그리고 이 회복력은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한테 적용할 수 있다.
타인의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다.
피나 타액 종류의 체액을 상대의 상처에 바르면ㅡ 바른 걸로, 그 상처의 치료가 가능하다. 즉 오로나인,
멘소레담 계열과 약간 비슷하다고 보시면 된다. (주:오로나인-오오츠카제약의 연고, 후시딘 및 마데카솔류,
멘소레담-소염진통제, 파스와 비슷한 효과)
침.을. 발.라.두.면.
핥.아.두.면. 낫.는.다.ㅡ 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고로
“고마워”
하고ㅡ 일이 끝난 후, 나는 하네카와한테 감사인사를 받았다.
아니, 계획이 단번에 들통났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호감도를 희생해서,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게 목적인 것처럼 가장해
하네카와의 붕대 밑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들통나버렸다.
치료를 제안해도 분명 하네카와는 거절할 테니까, 상대의 말꼬리를 잡는다는 작전이지만 너무 뻔했던 모양이다.
부끄럽다.
자살해버려.
하지만 하네카와도 그녀 나름대로 이 계획을 간파했는데도 군말 없이 나한테 몸을 맡긴 건, 상처를 치료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내 체면을 세워준다는 측면이 강하다.
음.
왠지 결말이 뻔한 승부 같아서 슬프다.
“일단, 붕대 다시 붙여둘게”
나는 멋쩍은 걸 숨기려는 것처럼 말한다.
아니, 실제로 멋쩍은 걸 숨기고 있다.
“갑자기 상처가 낫는 건 이상하니까. 상.처.입.은. 척. 하지 않으면ㅡ”
“부모가 수상하게 생각한다고?”
하네카와는 내 대사를 가로챘다.
“생각하지 않아”
하고 말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도 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걸. 아마 저 사람들은ㅡ
내 얼굴도 기억하지 않아”
......일단 다시금 보충설명을 하자면, 실제로 하네카와의 얼굴을 핥을 배짱이 없는 겁쟁이, 내가 취한 행동은
가방에 붙어있던 안전핀으로 손가락끝을 찌른 후, 거기에서 나온 피를 하네카와의 환부에 칠한다는 지극히 건전한
행동이다.
나고야닭(名古屋コㅡチン)이 되어 날개짓하는 날은 아직도 멀다.
뭐, 그래도 봄방학 때라면 몰라도, 현재 흡혈귀와 비슷한 내 체액으로는 완치시킬 순 없었지만ㅡ 최종적인
경과를 보면, 흉터가 남지 않게끔 처치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런 치료를 하지 않았으면ㅡ
노골적으로 흉터가 남을 정도로 심한 상처였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이렇게 됐냐고 할 정도로.
얼얼해질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부친은 딸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ㅡ 하네카와가 말한 바에 의하면 마치 충동적으로 한 대 때린
뉘앙스였지만 그런 식으로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끈질기게ㅡ 집요하게 몇 번씩이나 때린 것처럼.
그런 모습이었다.
하네카와가 말했던 [맞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ㅡ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견]했길래
부친이 딸을 이렇게까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성인 남자가 여자애를 이렇게까지 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집까지 바래다줄까?”
라고 한 내 제안은,
“아니, 됐어”
라는 말로 단번에ㅡ 가차없이 거절당했다.
그건 정말 타인을 거부하는 태도였다ㅡ 당연하다.
하네카와는 딱히 나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니까.
우연히, 길 가던 중에 만났을 뿐이다.
그저 우연의 산물이다.
아니, 설령 도움을 청했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ㅡ 사람은.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지는 것뿐이니까ㅡ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후 우리들은 잠시 동안 평소대로의 바보같은 애기를 하면서 함께 걷고 적당한 때, 왠지 모르게
살며시 헤어졌다. 도중에 자동차에 치인 흰색 고양이를 묻어줬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이래저래.
결국 나도 그 후의 예정을 대부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ㅡ 댐건설은 중지다. 도저히 서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고 난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 오빠, 웬일이야. 빨리 왔네”
돌아오니, 카렌이 물구나무서기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참이다ㅡ 아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여동생.
무슨 트레이닝이 그러냐고.
“............”
하지만 딴지를 넣을 의욕도 없어서 나는 그녀를 그냥 지나치고,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한다.
“뭐야, 무시하지 말라고, 오빠. 사랑스런 여동생한테 ‘다녀왔어’ 한 마디해도 되잖아. 쇼핑은 잘 했어?”
“쇼핑? 아니ㅡ 쇼핑은”
그러니까, 하지 않았다.
욕구불만의 해소도 못한 채, 답답한 기분은 더해졌을 뿐이다.
상념은 더욱더 쌓일 뿐이고ㅡ
/005
다음날.
즉 4 월 30 일.
아니, 감각적으로는 아직 4 월 29 일 한밤중일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나는 여동생이 깨워주지 않으면 다음날
아침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ㅡ양친, 그리고 경축일 때문에 밤을 샜던 카렌이나 츠키히가 간신히 잠들 무렵,
나는 몰래 집을 나섰다. 마운틴바이크에 올라타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살그머니 조용조용하게 페달을
밟는다. 한동안 라이트도 켜지 않는 조심성은 내가 봐도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도 들지만.
밤놀이.
하러 가는 게 아니다.
나한테 그런 바지런한 기질은 없다ㅡ 성적면에선 지극히 낙제생이지만, 나는 이래뵈도 꽤 성실한
남자고등학생이다.
불량아 취급은 말도 안된다.
그럼 잠기운을 억누르고 어디로 향하는지 말하자면 마을에서 벗어난 페허, 일찍이 학원이었던 폐빌딩이다.
담력시험에도 사용되지 않을 법한 붕괴 직전의, 폐허에 가까운 건축물이다ㅡ 그래서, 한밤중에 그런 장소로 가는
건, 절대로 남한테 좋은 인상을 주지 않겠지만.
비행(非行)이라고 애기하도 반론할 수 없다.
하지만 이유는 있다.
그런 장소에 향하는 이유도ㅡ 시간이 밤중인 이유도.
확고하게 있다.
폐빌딩을 둘러싼 울타리 앞에 자전거룰 세우고, 주변에 인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필요없을 테지만 일단 만약을
위해서라고 할까, 단순히 습관처럼 뒷바퀴에 체인잠금장치를 걸어둔다. 그리고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로 부지 안에
들어간 후, 빌딩 안으로 들어간다.
담력시험에도 사용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밤중에 침입해보니, 자주 왔던 타인의 폐허라고 해도
나름대로 등줄기가 오싹해진다ㅡ 하물며 이 폐허 안에는 진짜 귀신이 산다고 하니까ㅡ 더욱더 그렇다.
귀신.
요괴.
괴이ㅡ 괴이의 왕.
흡혈귀.
야행성 나이트워커.
“뭐, 그래도 이제 와선 옛날 애기인가ㅡ”
옛날 옛적에.
이다.
이곳에 있는 건 흡혈귀가 아니고ㅡ 흡혈귀의 자취.
흡혈귀와 비슷한 유녀이니까.
외관상 보이는 것보다 더 황폐한 건물 안, 기와자갈이나 폐기물 등을 피하면서 계단을, 최상층인 4 층까지
곧바로 올라간다.
그리고 4 층에 있는 3 개의 방ㅡ 3 개 방 모두, 한때는 교실로 사용되었다ㅡ 의 문손잡이를 가까운 순서대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열어본다.
오늘은 운이 나쁜 모양이다.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둘다 빗나갔다.
3 번째 문도 정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ㅡ 흡혈귀와 비슷한 유녀는 있었지만, 또 한 명, 있어야 할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라......오시노 녀석. 이런 밤중에 어디로 가버린 거지?”
외출인가?
변함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이군ㅡ 하물며 이렇게 늦은 시간이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낡은 책상을 침대삼아 자고 있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내 방문을 예상했기에, 수면을 방해받지 않도록 일부러
4 층 교실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날짜를 예고해두지 않았지만 저 녀석은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보는
남자이니까 말이지ㅡ 슬슬 내가 언제 온다는 건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런 의미로는 나도 폐를 끼치는 손님이다. 이런 밤중에 방문하다니 확실히 비상식적이다. 언제나 “
아라라기군, 늦었네” 라고, 맞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잘못이다.
상식을 벗어난 흡혈귀를 상대하는 이상, 행동이 비상식적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겠지만ㅡ 다만.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문을 닫으면서, 캄캄한 교실 안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원흡혈귀 유녀를 보면서ㅡ
나는 꿀꺽 군침을 삼킨다.
나는 노골적으로 긴장했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이 녀석과 단둘이 있는 건ㅡ 봄방학 이후 처음이다.
지금까지, 여기서 이렇게 만날 때는 언제나 오시노가 있었다ㅡ 단둘이라고 해도, 유녀는 절대로 인간이 아니고
나도 또한 절대로 인간이 아니지만.
어중간한 괴이이며ㅡ 어중간한 인간.
그리고 나와 유녀, 우리들이 그렇게 된 책임은ㅡ 대부분 나한테 있다.
긴장된다.
마음도 굳게 먹는다.
죄악감도ㅡ 되살아난다.
모에가 싹튼다. (萌える)
“............”
아니, 싹튼다고(萌える) 해도 그건 ‘되살아난다’의 유의어로서 사용한 것이고, 절대로 얇은 옷을 입은 금발
유녀의 사랑스러움에 마음이 끌렸다는 게 아니다.
8 살 전후의 천진난만하게 앉은 모습이든.
숱이 많지만, 한올한올이 얇은 비단처럼 섬세한 금색 머리카락이든.
사랑스러운 원피스이든ㅡ 이 폐허를 전혀 걷지 않은 듯한, 투명한 피부색의 살이 얇은 맨발이든.
그녀는 사랑스럽지 않다.
거기에 대해서 말을 거듭할 필요는 없다......전혀, 절대로, 논할 필요가 없다.
이쪽을 강하게 째려보는, 원한으로 가득 찬, 찌르듯한 시선을 묘사하는 것만으로ㅡ 충분하다.
“......그렇게 째려보지 마. 예쁜 얼굴이 망가진다고”
농담조로 말하면서 나는 그녀한테 다가간다ㅡ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자, 싱긋 웃어보라고. 너한테는 웃는 얼굴이 제일 어울려‘
대답하지 않는다.
평범한 시체도 아닌데ㅡ 아니, 평범한 시체와 비슷한 건가.
그래도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해서 말을 건 게 아니다. 봄방학이 끝난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런 타이밍에 당돌하게 말한다는 극적인 전개를 노릴 정도로, 나도 기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말없이 지내면ㅡ 마음이 꺾일 것 같았기에 하다못해 나만이라도 시끄럽게 떠들 뿐이다.
오늘은 오시노가 없는만큼, 더욱더 그렇다.
뭐ㅡ 그래도, 이 녀석한테 웃는 얼굴이 제일 어울린다는 건 그저 내 본심이지만.
나는 교실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은 그녀, 그대로 두면 곰팡이와 동화될 것 같은 그녀 앞에 풀썩 앉아서
웃옷을 벗는다.
......아니, 이것도 얇은 옷의 금발 유녀를 앞에 두고 천천히 옷을 벗는 거지만, 지금부터 루팡 3 세 흉내에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다. (주: 애니메이션 ‘루팡 3 세’, 가즈히코 가토 원작, 루팡 3 세는 금발미인 후지코
앞에서 맨날 옷을 벗고 덮친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출판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상대는 엄밀하게 유녀가 아니라 괴이이고, 5 백살이니까 문제없다는 변명을 누구나 믿어주는 건 아니다.
4 월 막바지이기에 아직 피부가 차가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폐허 안에서 반나체가 된 건ㅡ 이 유녀한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식사?
근데 어째서 벗는 거지?
여성나체 스시가 아닌 남성나체 스시라도 먹일 작정인가? (주:여성나체회(女体盛り)-일본고유 음식문화,
여자알몸 위에 생선회 올려놓고 먹음, 성적 페티쉬)
그런 의문도 들려오지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그보다 3 번째 의문을 품으신 분은 좀더 다른 부분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흡혈귀의 식사라고 하면ㅡ 흡혈이다.
“......자, 잘 먹겠습니다 정도는 말하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의바른 식사가 아니니까”
그녀의 작은 체구에 팔을 돌려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나는 그녀의 입을 내 목덜미로 이끈다ㅡ 서로 얼싸안는
형태로, 이건 몇 번씩이나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자세이다.
식사. 흡혈.
싫어도, 그녀 입장에서 보면 이건 식사라고 볼 수도 없는, 훨씬 절실한 영양제 주사일지도 모른다ㅡ 애당초 현
시점에 그녀는 흡혈능력의 주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괴이의 권위자, 오시노 메메의 손에 걸려 체질적으로 개조당했기에, 내 혈액 이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체가
되었다ㅡ 다시 말해서, 정기적으로 내 피를 빨지 않으면, 그로 인해 허무하게 죽거나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존재이다.
지금 그녀는 영혼적인 면으로 볼 때 아라라기군의 노예에 가까워ㅡ 라고 오시노는 말했다.
아니, 하지만 그런 그녀한테 피를 계속해서 주는 내 쪽이 그녀의 노예라고 생각한다.
신하.
나.의. 신.하.
그녀는 위압적인 자세로 거만하게, 나를 그렇게 불렀다ㅡ 그렇게 불렸을 때를 떠올리면, 현재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녀가 피를 들이마실 때마다.
겨우 남은 흡혈귀의 모습인 덧니가 꽂히는 목덜미가 아니라ㅡ 가슴이
심장이 아파온다.
욱신욱신(ずきずきに)하고. 욱신욱신하고.
가지각색으로(好き好きに). (주:즈키즈키(ずきずき)와 스키즈키(好き好き)의 발음장난)
하지만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ㅡ 그 아픔에 나는 안심해버린다.
그녀가 내 체액을 섭취하고 있는 한ㅡ 적어도 그녀는 살려고 하는 거니까.
한때는 자살조차 꾀했던 흡혈귀가.
원래 죽은 거나 다름없는 흡혈귀가.
나.를. 위.해. 이렇게 살려고 하는 거니까ㅡ
“......어라?”
라고 말한 시점에.
오늘은 웬일로 그녀가 내 목덜미를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ㅡ 서로 포옹하며 그녀는 나한테 체중을
완전히 맡긴 상태로, 가냘픈 팔에다 나무막대기 같은 다리까지 내 신체에 감고 상반신을 서로 밀착시켜 코알라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데 물지 않는다.
“............?”
의도를 읽어낼 수 없다.
아니, 설마 그녀는 이제 와서 내 피를 마시는 걸 거부하는 걸까ㅡ 사는 걸 그만두려는 걸까, 하고 나는 한순간
전율해 자연히 그녀를 안는 팔에 힘이 들어가서 하마터면 그녀의 등골을 부러뜨릴 뻔했지만ㅡ 그게 아니었다.
달랐다.
자세히 보면ㅡ 흡혈귀 유녀의 시선을 쫓으면.
그녀는 내 목덜미는 보지 않고.
그 대신, 내가 그녀를 안을 때 옆에 놔둔 짐 쪽을 보고 있다.
달콤한 냄새가 감도는 짐이다.
“저기......”
그건 대략 풍족한 생활과 거리가 먼 방랑자, 지금도 이 폐빌딩에서 살고 있는 자유인, 오시노 메메를 위해
가져온 선물 겸 위문품이다.
미스터도너츠 상자이다.
가게 앞에서 10 개 천엔에 팔던 녀석이다.
골든초코렛, 프렌치쿨러, 엔젤프렌치, 스트로베리 프렌치, 허니츄로, 코코넛쿨러, 폰데링, D-pop,
더블쵸코렛, 코코넛쵸코렛. (주:http://www.misterdonut.jp/m_menu/donut/)
달콤한 냄새도 난다.
하네카와 만나고 돌아오던 길, 원래 여동생들한테 선물해주려고 산 것이다.
하지만 카렌과 츠키히는 둘다 입을 모아, “다이어트 중” 이라고 헛소리를 하면서, 오빠의 호의를 무시했다.
‘성장기 여자애가 다이어트를 하는 게 아니야, 좀더 통통해도 된다고‘ 같은 느낌으로, 그 후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만한 레벨의 격한 말다툼이 되어버렸지만, 애시당초 미스터도너츠 상자 자체가, 츠키히한테
받은 돈으로 산 것이니까, 그 말싸움에서 내 쪽이 불리했다.
최종적으로는 사과했다.
불합리한 남매감각이다.
하지만 10 개라는 양은 혼자 먹기에 너무 많고, 또 도너츠란 건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떨어지기에, 하는 수
없이 매일매일 식사도 제대로 못해 궁핍하게 지내는 오시노한테 가져온 것이다.
간신히 이 폐빌딩에서 비와 이슬을 피하고 있다, 고 하기보다 비와 이슬을 먹고 살아야 하는 저 녀석한테 가끔씩
단 것을 먹게 해주고자 하는 인정은 나한테도 있다는 것이다.
............
봄방학 때의 사건으로 저 남자한테 많은 금액, 구체적으로는 5 백만엔을 갚아야 하는 내가, 어째서 고작
천엔짜리 도너츠세트 가지고 위세등등한 건지 나도 수수께끼이지만.
5 백만이란 건.
어른이 목을 맬 정도로 큰 금액이겠지, 그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고, 검토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장이라도 팔까?
불사신 체질을 이용해서 몇 번이고 내장을 생산하면.
“무서워”
그래서.
그건 제쳐두고ㅡ 그런 경위로 이곳에 있는 향기로운 도너츠 상자를, 흡혈귀 유녀는 나한테 안긴 채, 하지만
나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일심불란하게 바라보고 있다.
뜨거운 시선.
즉 갈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니......그래도 설마”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없다.
영락했다고 해도, 찌꺼기라고 해도.
이미 그 존재로서 필수적인 요소를 거의 다 빼앗겨ㅡ 모습이나 형태도 남지 않고 이름조차 박탈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긍지높은 흡혈귀이다.
하물며 보통 흡혈귀가 아니다.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의 흡혈귀, 귀족의 혈통.
이른바 흡혈귀의 대명사이다.
그런 그녀가?
말도 안돼, 주식인 혈액을 눈앞에 내밀었는데, 그걸 냅두고 도너츠 쪽에 관심을 갖다니 그럴 리가 없......
질질.
그런 소리가 났다.
보면 유녀는 침을 흘리고 있다.
“꿈을 부수지 마!”
노성과 함께 유녀를 던지는 나.
던져진 유녀는 뒤쪽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웅크렸다.
큰일났다, 무심코 난폭하게 딴지를 걸었다. 풀어헤친 어깨의 피부부분에 직접 침이 묻은 불쾌감도 한몫해서.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미수로 끝났지만 피부가 아닌 하네카와의 얼굴에 타액을 바르려고 한 나도 절대로
칭찬받을만한 짓을 한 게 아니니까.
“괘, 괜찮아?”
어지간히 세게 부딪쳤는지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는 유녀한테 손을 내밀었지만, 난폭하게 뿌리친다.
화내는 것처럼.
금발 머리카락이 다소 거꾸로 서 있다.
......흠, 왠지 동물 같네.
사람을 잘 따르지 않고, 쉽사리 만지지 못하게 하는 고양이 같다.
하지만 화나게 만든 건 안 좋다ㅡ 슬슬 급유(給油)가 아닌 흡혈을 해두지 않으면 이 녀석의 신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최근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는 바람에 이 폐빌딩에 올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 쓸데없는
고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원인이지만 그건 츠키히 덕분에 해소되었고, 쓸데없이 낭비한 기간을 메꾸기 위해
되도록 오늘 밤에는 마시게 해두고 싶지만.
여동생들 눈을 피해 밤중에 집을 나서는 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ㅡ 또, 낮에 오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야행성인 흡혈귀한테 낮은 기본적으로 잠자는 시간이다.
자고 있는 걸 억지로 깨워져서 기분이 좋은 생물은 없다ㅡ 그렇게 되면 피를 마시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흡혈의 시간대라면 역시 밤중이 제일이다.
......정말로 동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군.
혹은 아기라던지.
아이한테 젖먹이는 엄마란 이런 기분일지도.
자, 그럼 어떻게 할까ㅡ 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한다.
오시노가 있다면 자문을 구했겠지만 부재이고. 다른 교실에서 자고 있다고 해도 깨울 만한 일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문료라고 해서 돈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다. 더 이상 지불해야 할 돈을 늘릴 수 없다.
그보다.
이 흡혈귀는 내가 평생 짊어지기로 결정했다.
이 정도의 곤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떡하겠냐고.
“이런 경우,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괜찮으려나......아니, 그건 복종의 증표가 되는 거지......”
으-음.
아, 그래.
얼마 안 하지만 애시당초 미스터도너츠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미스터도너츠로 해결하면 되잖아.
그래, 성가신 일은 전부 음식으로 해결한다.
맛의 달인 같다. (주:맛의 달인(美味しんぼ)-가리야 데쓰 원작, 하나사키 아키라 그림의 인기음식만화)
‘하하하, 이렇게 음식으로 나타내면 화를 낼 수가 없군‘, 같이.
나는 비닐봉투에서 미스터도너츠 상자를 꺼내서 자신의 무릎에 놓고, 흡혈귀 유녀한테 보이도록 천천히 연다.
그리고 1 개, 가장 구석에 있던 골든초코렛을 집은 다음, 팔을 뻗어 내밀었다.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벌써 빼앗겼다.
‘너, 사실은 흡혈귀의 스킬을 전부 잃어버린 게 아니지‘ 라고 할 만큼 초스피드로 빼앗겼다.
그리고 유녀는 제대로 맛보지도 않고 덥썩 깨문다.
그것도 또한 초스피드로 유녀는 골든초코렛을 3 번만에 먹어치웠다. 이젠 자기 손가락까지 먹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라고.
얼마나 게걸스레 먹는 거냐고.
반복하지만, 너, 내 피를 그렇게 맛있게 먹은 적 없잖아ㅡ 좀 쇼크라고, 그거.
“ㅡㅡ읏, 어이쿠!”
다 먹고 난 후, 이번에 흡혈귀 유녀는 내 무릎 위에 놓여있던 나머지 9 개의 도너츠를 곧바로 노렸다.
간신히 상자째 회피하는 나.
농담이 아니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도너츠를 주다가 하마터면 복근이 썰려나갈 뻔했다, 그 정도로
날카롭게 호의 궤도를 그리는 유녀의 움직임이었다.
“앉아!”
한층 더 추격을 해오려는 유녀한테, 나는 엉겁결에 외쳤다.
외쳤지만 ‘앉아’라니.
개도 아닌데.
그래도 흡혈귀 유녀는 시킨 대로 충실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ㅡ 그것도 평상시의 웅크려앉기가 아니라, 허리를
띄운 채 쭈그리고 앉는 바람직한 앉기 자세이다.
그리고 또렷하게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나는 대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입다물고 있어도 상황은 진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단 시험삼아 남은 9 개의 도너츠 중, 내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는 프렌치쿨러를 꺼내어 살그머니 흡혈귀
유녀의 앞에 내민다.
아까 골든초코렛을 보건대 손에 든 채로 주면 내 손까지 먹힐 것 같아서, 앉아있는 그녀의 눈앞에 놓았다.
물론 폐허의 바닥은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기에 (애당초 흡혈귀 유녀는 맨발이지만, 나나 오시노는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닌다), 일단 같이 들어있는 종이냅킨을 펼쳐서 그 위에 도너츠를 놓는 형태이다.
금방 달려들 거라 생각했지만 흡혈귀 유녀는 침을 가득 흘리면서 앉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귀신과 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지만.
아까 전까지 쏘아보던 눈빛이 상냥하게 여겨질 정도로 강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다ㅡ 만약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겠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뭐, 종족에 따라, 흡혈귀는 실제로 시선만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안(邪眼)인지, 마안(魔眼)인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봄방학 때는 째려보기만 했는데 콘크리트를 부쉈지ㅡ 나, 지금 절체절명의 핀치인 건가?
“......손”
왠지 모르게.
손을 내밀어본다.
그러면 흡혈귀 유녀는 주저없이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마치 영화 E.T.의 한 장면 같지만
최소한의 화풀이인지, 홈런주자의 하이터치처럼 기세좋은 손내밀기였다.
“자, 저기......먹어”
백인일수에는 머릿글자라는 것이 있다. (주:백인일수(百人一首)-역사상 인물 100 명의 단가를 한수씩 집선한
가집, 일본의 전통시 암기놀이, 머릿글자로 시를 외움)
예를 들어 ‘무스메후사호세(むすめふさほせ)’ 라고 하는 거다. (주: 백인일수의 머릿글자들만 모은 것)
읽어준 패의 머릿글자를 듣는 순간 움직이는 청력의 날카로움이 승부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양이다ㅡ
나는 유감스럽게도 백인일수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않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흡혈귀 유녀는
백인일수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먹어, 라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움직였다ㅡ 아니, 움직이는 것이이 완료했다.
야생짐승처럼 그녀는 프렌치쿨러에 이를 꽂고 있다.
아니, 야생짐승이라고 말할까.
완전히 기르는 개의 모습이지만.
금발에 8 살로 추정되는 아이가 네발로 기며 바닥을 핥는 것처럼, 종이냅킨째 프렌치쿨러를 볼이 터지도록
우겨넣는 모습은 왠지 다양한 의미로 위험했다.
그래도 종이냅킨째라니......역시 손에 들고 주지 않은 게 정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종이냅킨은 소화할 수 없는지, 요령있게 입 안에서 골라내어 그 부분만 [퉷]하고 그녀는
뱉어냈다.
그다지 식사예절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애시당초 네 발로 기어 도너츠를 먹는 시점에 식사예절이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뭐ㅡ 봄방학 때도 그다지 식사예절이 좋은 녀석이 아니었지만. 그 때 그녀의 말을 떠올리면, 애당초 흡혈귀와
인간은 식사할 때의 매너 자체가 다른 모양이다.
사람의 식사모습을 힐끗 보는 건 매너위반이라고 그 때 들었었나ㅡ 그래도 지금 이 녀석이 나를 강하게 쏘아보는
건 내가 매너위반을 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남은 도너츠 9 개를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래도, 이건 원래 오시노한테 주려고 한 거니까ㅡ”
애당초 아무리 맛있게 도너츠를 먹었다고 해도 그건 흡혈귀 유녀한테 영양이 되지 않는다. 흡혈귀 유녀한테
영양은ㅡ 유일한 완전영양식은ㅡ 내 혈액뿐이니까.
“ㅡ 그래도 뭐, 앞으로 3 개 정도면 괜찮겠지”
원래 10 개가 들어있었다.
오시노와 이 녀석이 같이 나눈다고 생각하면 1 인당 5 개씩 먹는다는 계산이다ㅡ 생각해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오시노 혼자서 도너츠 10 개는 힘들 테고.
“자, 어떤 게 좋아? 3 개 골라봐”
나는 유녀한테 상자 내용물이 보이도록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되니까”
그러면 유녀는 왼손의 손가락을 움직여서ㅡ 끝에서부터 순서대로 1 개씩 전부 가리켰다.
끝에서부터 가장자리까지 1 개씩.
“............”
전부라니.
욕심이 강하군.
양보할 셈은 없는지, 흡혈귀 유녀는 무뚝뚝한 얼굴인 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끝에서부터 가장자리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1 개씩 가리켰다.
6 개 세트의 D-pop 를 일부러 1 개씩 가리킬 정도로 집념이 느껴지는 몸짓이다.
“으-음”
그런가, 이 녀석, 단 걸 좋아했나......아니, 그렇다고 해도 전부 먹는 건 좀 아니겠지. 이렇게 단 것이 그
작은 신체의 어디로 흡수되는 거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흡혈귀 유녀는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ㅡ 압력을 느낀다. 콘크리트를 부수는 압력을.
아니, 진짜로 찌부러질 것 같다.
뭐ㅡ 내가 지금 찌부러질 것 같은 건 죄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흡혈귀 유녀가 이런 생활을 억지로 해야
하는 건 역시 내 책임이니까. 기품있고 긍지높았던 아름다운 흡혈귀가, 지금은 기어서 도너츠나 먹고 있는 현실은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봄방학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녀.
저 때는 자주 웃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언짢은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을 뿐.
그녀가 한 것, 그녀가 해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인정을ㅡ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정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알았어. 전부 너한테 줄게”
나는 말한다.
시원스럽게, 기분좋게, 도너츠를 상자째 마루에 놓고.
마치 공물처럼.
“자, 3 번 돌고 왕, 하고 짖어봐”
아.
실수했다, 이야기 흐름상 엉겁결에 한 가지 재주를 요구해버렸다ㅡ 라고 생각해서 명령을 철회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팽이와 같이 훌륭한 트리플 악셀을 선보였다. (주:트리플악셀-피겨스케이트용어, 한번의
점프로 3 바퀴반을 도는 기술)
팽이라기보다 스톱모션 같네.
하지만 마지막에 [왕]하고 말하지 않고 흥, 하고 옆을 바라보는 점이 원귀족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ㅡ
아니, 그 자존심, 등장하는 게 너무 늦어.
흠.
말하지 않는 건, 역시 여전한가.
무심코 소리를 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리 잘 되진 않겠지.
뭐, 이런 개그신에서 말하는 건, 이쪽도 질색이다.
그렇게 막장전개는 있을 수 없다.
나는 도너츠 상자를 슬쩍 밀면서, [먹어]라고 말했다. 그러면 흡혈귀 유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네발로
기어가 이번에는 8 개의 도너츠를 상자째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먹기 시작했다.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식욕이라고 해야 하나, 이젠 바닥까지 먹어버릴 기세이다.
이래선 개가 아니라, 결식아동이다.
“장난아니로군. 이 고리 모양 음식, 정말 굉장하도다-. 그야말로 단맛으로 채워진 반지의 보석상자로군”
“너, 지금 말했어!?”
잠깐 한눈팔다가, 나는 놀라서 되돌아보았지만, 흡혈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에 한없이 가까운
표정으로 바닥ㅡ 이 아니라, 도너츠를 우걱우걱 게걸스레 먹고 있을 뿐이다.
뭐야, 환청인가......
우와-, 두근거렸다.
막장이 되나, 하고 생각했다.
하여간 정말, 그런 서프라이즈는 너무하다고.
“흠......뭐, 이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았다는 건 수확......이지만”
환청이 들려올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냈다는 건, 앞으로 나와 이 녀석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만.
그래도.
하지만, 그래도ㅡ 말해주지 않는다.
이쪽이 환청을 들을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ㅡ 완고히 입을 열지 않는다.
일시적이라고 해도 한때 주종관계였는데.
“하-아. 8 살짜리 애라서 미성숙한 목과 혀로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는 것도 아닐 텐데ㅡ”
아니,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더듬거려도 좋으니까, 말해주길 바란다.
현시연의 ‘수-’처럼.
현시연의 ‘수-’처럼.
현시연의 ‘수-’처럼.
(주:현시연-현대시각문화연구회, 오타쿠 동아리 회원들을 소재로 한 만화, 키오 시모쿠 작품,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됨//‘수-’-수잔나 홉킨스, 카나코가 미국에 살 때의 친구, ‘수-’라는 애칭으로 불림,
외견은 금발미소녀지만 엄청난 내공의 오타쿠로 일본애니메이션 명대사를 외우고 다님)
“뭘 하고 있는 거야, 마다라기군”(주:현시연 멤버 중 ‘마다라메‘군이 있음, 엄청난 오타쿠)
하고.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와, 나는 움찔하며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일어났다.
뒤돌아보면 그곳에는 오시노가 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기색도 없이.
“네 녀석은 네 녀석대로 놀라게 하는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한다.
한때는 나도 이곳을 임시 보금자리로 삼았을 정도이다, 나름대로 익숙해져있지만 그래도 폐허는 폐허다ㅡ 이런
상황에 갑자기 뒤에 서 있다면, 그야 나라도 놀라겠지.
“......갑자기 등장하지 말라고. 아무리 이름이 오시노(忍野)라고 해도, 몰래 다가오지 마(忍び寄る)”
“흥. 마다라기군이야말로 아무리 봉방학 때 원한이 남아있다고 해도, 흡혈귀짱을 그런 식으로 학대하면
안되잖아”
“학대하지 않았어”
“유녀를 개 취급하는 건 충분히 학대의 요건을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 마다라기군”
이것 참, 하고 오시노는 일부러 어깨를 움추린다.
“내 생각에 그 미스터도너츠는 나한테 선물해주려고 가져온 모양인데ㅡ 으-음, 다 먹어버렸네”
“............”
히죽이죽 웃으면서 변함없이 다 꿰뚫어본 것처럼 말한다.
그보다 마다라기군이라고 말하지 마.
왠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다.
미래에 쓸 이야기꺼리를 미리 써버리는 짓이다.
어쨌든ㅡ 오시노 메메.
30 살 먹은 아저씨.
의 등장이다.
1 년 내내 알로하옷을 입고 보기에도 경박해보이는 불량중년. 괴이의 전문가, 요괴변화의 권위자, 괴물, 귀신의
기술전문가(technocrat)ㅡ 그 직함에 걸맞게, 실로 수상쩍은 인물이다.
애니메이션에선 아주 멋있게 비춰졌다고 하는 수수께끼 정보도 들어왔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한테는 여하튼 수상쩍은 아저씨이다.
기기괴괴한 아저씨라고 말해도 좋다.
“아라라기군,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하니까ㅡ 또 기회가 생긴다면 부디 내 몫도
남겨두도록 해. 나는 올드패션을 가장 좋아해서. 워낙 고풍스런 남자이니까 말이지” (주: 미스터도너츠 메뉴 중
올드패션, 상당히 푸석푸석함)
“고풍스런 남자인 척 하지 마, 역겨워”
클래식해서 시대에 뒤처진 걸 자처하는 어른만큼 성가신 존재도 없다ㅡ 뭐, 확실히 올드패션은 맛있지만 말이지.
힐끗 보면 흡혈귀 유녀는 올드패션과 폰데링을 뒤섞어서 먹어치운 후 [어? 무슨 일이죠? 미스터도너츠? 그게
뭐죠?]와 같은 표정으로 교실의 구석, 원위치로 돌아가 무릎을 안고 웅크리는 기본 자세였다.
그야 봄방학 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에ㅡ 오시노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세해도, 입가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비교하는 대상이 너무 극단적이라서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오시노를 대할 때보다ㅡ 그나마 나한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아서, 나는 안심했다.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알았어. 자, 다음 기회가 생긴다면 올드패션이 채워진 걸 사올게ㅡ 미스터도너츠 포인트도 조금만 더 있으면
다 채워지니까. 그래서, 오시노. 이런 밤중에 어디에 다녀온 거야?”
분위기로 볼 때 다른 교실에서 자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응- 일이야, 일”
오시노는 거드름피우지도 않고, 평소대로 시치미떼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본래 떠돌이인 내가 이 마을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그리고 애당초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는 괴이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서니까 말이지ㅡ 무엇보다 아라라기군이 한 일을 뒷처리하는 게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뒷처리라니”
나는 곁눈질로 웅크려앉 아있는 흡혈귀 유녀를 엿본다.
흡횰귀 유녀는 이미 우리들의 대화에는 무관심인 모양이다.
“이 녀석을 돌봐주는 거?”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야ㅡ 진짜 귀찮다니까, 흡혈귀란 녀석은. 어쨌든 흡혈귀의 왕이고. 주위에 자극과
영향을 계속 주고 있어. 이 일대를 원만하게 정리하는 것까지 하는 게 아라라기군한테 부탁받은 내 일이야”
“여러 가지 병행해서 일을 진행시킨다는 거지. 마치 부기팝 같네. 장사가 번성하니 잘됐잖아” (주:라이트노벨
부기팝 씨리즈가 나올 때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등 각종 미디어로 함께 나옴)
다만, 내 5 백만엔은 제쳐두더라도 다른 괴이이야기를 수집하는 건 돈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애석하게도 부기팝만큼 솜씨가 좋은 게 아니라서 말이지ㅡ 내 머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똑같이 생각할
수 없어”
(주:부기팝-미디어웍스 전격게임 3 대상에서 4 회 대상을 받은 카도노 코우헤이 작품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 검은 옷, 모자를 쓴 암살자로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 늙어서 추하게 되기 직전
죽인다고 함)
그런데, 하고 오시노는 말한다.
“애기를 되돌리지만ㅡ 아라라기군. 흡혈귀짱을 너무 괴롭히지 마. 그런 행동은 화근을 남긴다고”
“그러니까 괴롭힌 적 없다니까”
뭐, 조금 지나치게 놀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대부분 이 녀석이 멋대로 한 짓이다. 말려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어울려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보다, 봄방학 이후 계속 생각해왔던 건데, 이 녀석 왠지 정신연령까지 어려진 거 아냐?”
겉모습은 8 살짜리 어린애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모습은 묘령의 귀부인이다ㅡ 아무리 흡혈귀는 겉모습을 따.라.
간.다.고 해도, 근본적인 그녀가 5 백살이란 점은 다르지 않을 텐데.
일단, 8 살짜리 애라도 개처럼 먹지는 않는다.
“아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라라기군ㅡ 흡혈귀만 그런 게 아니야. 괴이란 건 말하자면 인간의 신앙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말이지”
“인간의 신앙?”
“그래. 인간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에 있는 것ㅡ 그것이 괴이야. 유령의 정체를 막상 보고 나서 마른
억새라고 말하지만, 정체를 직접 보기 전까지 마른 억새는 진짜 유령이었다는 거야”
“응-? 잘 모르겠어. 뭐,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테지만, 그게 어째서 지금 이 녀석한테 연결되는
거야?” (주:鰯の頭も信心から-하찮은 것도 믿음의 대상이 되면 존귀하게 느껴짐, 무조건 믿음)
“흡혈귀가 어째서 최강의 괴이인지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흡혈귀를 최강의 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괴이는 주위의 인식대로 나타나ㅡ 주위의 기대대로 행동해”
그런 존재야, 라고 하는 오시노.
말하면서 흡혈귀 유녀한테 눈길을 준다.
설령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벌레 하나도 죽일 수 없는 듯한, 아무런 압력도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상냥한 시선이었다.
“자, 거기서 이 흡혈귀짱이다ㅡ 지금 이 흡혈귀를 인식하고 있는 건, 아라라기군, 자네뿐이지”
“............”
“엄밀히 말하면 나나 반장짱도 그렇지만, 그래도 흡혈귀짱이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은 건 아라라기군이야.
무엇보다, 지금의 아라라기군은 흡혈귀짱한테 유일무이한 영양원이니까 말이지. 그 영향은 수퍼다이렉트해
(super-direct)"
“자ㅡ 지금 이 녀석은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이런 모습이라고 말하는 거야?”
아니.
미스터도너츠를 좋아하는 건 내 영향이어도 좋지만, 개처럼 먹는 건 역시......그런 행동을 흡혈귀한테
기대한다고 하면, 나는 상당히 정신적으로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진짜로 진지하게 카운슬링이
필요하다. 아직 밤중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예약을 잡아놔야.
“확실히 나는 네 녀석이나 하네카와만큼 철들지 않아서 이 녀석을 어딘가 8 살짜리 애로 보는 구석이 있지만ㅡ
그래도 이 모습이 내 기대대로 되었다는 건 좀 아니잖아”
“아이가 꼭 부모의 기대대로 자란다고 할 수 없겠지? 그래도 기대의 영향은 받고 있어ㅡ 대체로 그런 느낌이
야”
“부모의ㅡ 기대”
가정.
의, 영향.
“별로 올바른 인간이 되라고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너무 놀리면 영향이 아닌 악영향을 주게 돼. 안
그래도”
오시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계속하지 않았다.
나를 배려해서 계속하지 않았다ㅡ 는 것도 아니다. 오시노는 그런 배려를 할 남자가 아니다. 단순히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하지 않은 게 틀림없겠지ㅡ 실제로 내가 봐도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안 그래도 저 긍지높은 흡혈귀를 이렇게 귀여운 아이로 만들어놓고ㅡ 거기다 악영향까지 줘서 어쩌려고.
그런 거다.
하지만 오시노의 말에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ㅡ 반드시 기대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이 흡혈귀는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내 기대에 응해준다.
즉 그건ㅡ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흡혈귀는 나를ㅡ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흡혈귀를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아라라기군. 도너츠를 먹인 걸 보니, 이번 흡혈당번은 끝난 거야?”
“흡혈당번이라니”
급식당번처럼 말하지 마.
“아직이야. 희한하네, 네 녀석이 틀리다니. 도너츠가 먼저, 흡혈은 그 다음이야. 이 녀석, 내 피보다
도너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지금 그 사실에 좌절하던 참이라고”
“흐응. 뭐, 아라라기군의 혈액은 별로 달지 않으니까 말이지. 흡혈귀짱의 기분도 모르는 건 아니야”
응응하고, 혼자서 수긍하는 오시노.
뭘 납득하는 거냐고.
“그건 냅두고 아라라기군. 아까 전에 살짝 화제에 올랐지만, 반장짱은 잘 지내?”
“어?”
뭐야, 갑자기 당돌하게.
마치 낮에 내가 하네카와와 만난 것을 간파한 것 같은 말투, 이것도 그의 장기인 꿰뚫어보기인가ㅡ 라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바꿔 말해서 오시노는 평소부터 묘하게 하네카와를 신경쓰는 기색이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나한테 하네카와의 안부를 물어온다.
아니, 하네카와를 걱정한다기보다ㅡ 하네카와의 동.향.을 신경쓴다고 표현하는 쪽이 정확한가.
과연 그렇구나, 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봄방학 때의 일로, 오시노는 하네카와를 꽤 경계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지ㅡ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오시노 입장에서 하네카와와 같은 녀석은 성가신 존재이겠지.
“저 여자애는 누구한테도 성가셔”
하고, 오시노는 말하지도 않은 내 감상을 가볍게 정정했다.
그런 점이 남을 꿰뚫어본다고 말하는 거다.
“물론 아라라기군한테도야ㅡ 흡혈귀짱이 찾아온 건 이 마을의 괴이사정을 상당히 일그러뜨렸지만, 그 말에 따라
애기하면 반장짱이 사는 건 이 마을의 인간사정을 제각기 일그러뜨리고 있어”
“그건 너무 과장된 해석이겠지”
“과장해서 애기하는 게 딱 좋아. 호들갑스럽게, 대담하게 말이지. 사실이야, 저 여자애의 경우”
그래서, 어때.
오시노는 그렇게 물어왔다.
“어떠냐니ㅡ 별일 없어. 잘 지내”
“진짜로?”
끈질기네.
아니, 이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는 건 내 무성의한 반응 (그보다 그 대답을 회피하는 것) 을, 오시노는
미심쩍게 여기는 거겠지.
뭐, 진짜냐고 물으면 진짜가 아니고.
진짜로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그건 하네카와의 가정사정이니까 이런 곳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른쪽 얼굴의 붕대에 관해서도ㅡ 그 속사정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설령 상대가 오시노라도.
“흠, 그렇군. 말할 수 없는 건가”
하지만 오시노는 과연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대답을 거절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다]
는 내 사정을 파악한 모양이다.
“그렇다면ㅡ 말할 수 없는 일이 그녀의 몸에 일어난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려나? 그건 걱정되네”
“ㅡ 네 녀석이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야”
그리고 물론.
내가 걱정할만한 일도ㅡ 아니다.
“하네카와의 문제야. 쓸데없이 참견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저 녀석이 혼자서 구해질 뿐ㅡ 그
방법밖에 없어”
“흐응. 자, 추궁은 안할게”
이런 전개니까, 분명 좀더 추궁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ㅡ 의외로 오시노는 깨끗이 물러섰다.
“아라라기군이 반장짱과 어떤 식으로 노닥거려도, 확실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네”
“아니, 별로 노닥댄 것이 아니라”
“스커트를 젖히던지 뭘하던지, 참견할 수 없지”
“네 녀석 뭘 아는 거야!?”
“그렇다면 접근을 달리해보지”
내 해명을 듣지도 않고ㅡ 오시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 이.외.의. 나.머.지.를 가르쳐줘. 반장짱에 대한 걸 전부 애기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
“............”
뭐ㅡ 그렇게 접근해오면 확실히 침묵을 유지할 수 없나.
하네카와의 가정사정이나 아버지한테 맞은 사실은 덮어둘 수밖에 없지만ㅡ 그 주변사정까지 숨겨야 한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오늘ㅡ 날짜로는 벌써 어제ㅡ 우연히 길에서 만나 잠깐 애기했다, 정도는 애기해도 문제없겠지.
어쨌든, 오시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적어도 깨끗하게는.
그리 생각한 나는 능숙하게ㅡ 능숙한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ㅡ 입막음당한 부분을 제외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애기한다.
숨겨야 할 일들을 숨기면서.
아침, 여동생한테 깨워졌을 때부터.
하네카와와 만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ㅡ 차에 치인 고양이를 묻어준 것까지.
애기했다.
“아라라기군”
그러면ㅡ 오시노는.
오시노 메메는.
알로하옷의 가슴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1 개피, 불을 붙이지 않고 물면서ㅡ 오시노 메메는,
“설마 그건ㅡ 은색에 꼬리없는 고양이는 아니겠지? ㅡ”
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주셨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자, 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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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걱정이 남아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방해고양이의 에너지 드레인은 아무래도 치사성 스킬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특이한 능력이란 점은 분명하다ㅡ 또, 인간의 팔을
깨물기만 했는데 간단히 잡아 뜯어내는 엄청난 파워도 있다.
스피드나 점프력도 인간의 지혜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즉ㅡ 사태의 해결이 늦어지면,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오고, 사망자가 나온다.
누군가가 죽음으로.
하네카와가 죽는다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여동생들의 폭주는 내 몸을 바친 희생으로 인해 어떻게든 막았지만 나는 [경찰아저씨]나 혹은 [마을의 유지]의
행동까지 막을 수 없었다ㅡ 그런 권력이 일개 고교생한테 있겠냐고. 괴물고양이 퇴치, 괴물고양이 사냥, 그
정도는 아니라도 고양이를 구경하러 가는 녀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리스크는 늘어난다.
쇠약, 졸도가 그나마 낫다는 건 아니지만.
사망은ㅡ 위험하겠지.
왜냐하면 괴이라고 하는 상식을 초월한 현상을 빼놓으면ㅡ
하네카와 츠바사가 살인범이란 것이 된다.
보통ㅡ 살인범.
......절대로 사절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냐고.
무슨 농담이냐고.
참모라는 포지션에 있기에 보통 사람보다 소문에 민감한 성격이라고 해도, 고작 하루 날뛴 것 가지고 츠키히한테
그 존재가 알려진 방해고양이ㅡ 대체로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아니, 아마 아무 생각도 없겠지.
속옷 차림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그렇지만ㅡ 하네카와의 차후 일상생활을 요만큼도 고려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차후.
차후?
하지만 그건 어떤 일의 이후?
뭘 해야, 어떤 일의 이후가 되지?
닥치는 대로 에너지 드레인하기에, 방해고양이의 목적을ㅡ 알 수 없다.
방해고양이가 어떤 괴이인지, 오시노한테 좀더 자세하게 들었으면 그 부분도 확실해지겠지만ㅡ 아니, 내가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나.
그런 걸로 오시노를 걱정시켜선 안된다.
저 녀석을 방해하면 안된다.
괜찮아, 저렇게 무책임하고 미덥지 않은 경박한 아저씨이지만ㅡ 그래도 프로페셔널은 프로페셔널이다.
곧바로 해결해주겠지.
하네카와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기 전에ㅡ 곧바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다면 모든 게 끝난 후에 물어봐도 된다.
오시노한테ㅡ 아니면 하네카와한테
물어봐도 된다.
하지만, 어떠려나?
나한테 그걸 알 권리가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그걸 알고 싶다고 생각할까?
하네카와 집에 불법침입하고 저 집의 내부사정을 알게 되어ㅡ 저렇게 어지른 내가.
하네카와의 내면, 마음 속에 내딛어ㅡ 사생활에 흙투성이발로 비집고 들어가ㅡ 그래도 계속 하네카와의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떠려나.
이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것이 있잖아?
이 예시가 지금 상황에 들어맞는지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 동경하던 위인이나 존경하는 역사상 인물을 너무나
좋아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갖가지 전기를 파고들어보면 그 위인의 추문이나 불상사를 알게 되어, 그 때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건 누구한테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ㅡ 거기서 제멋대로 실망하는 건 좀 그렇잖아?
멋대로 좋아해서, 멋대로 싫어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동경하고, 멋대로 환멸하는 정도라면.
애초부터ㅡ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저 때.
역시 나는ㅡ 하네카와한테 깊게 관여하지 말았어야 했나.
붕대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ㅡ 그래도 말이지.
그건 즉, 보고 싶은 면만 본다는 거잖아.
좋아하고, 기대하고, 동경하고 싶을 뿐.
자신은 봄방학 때 저만큼 구해졌으면서ㅡ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고민할 따름이다.
결국 사고는 계속 겉돌기만 할 뿐이고 확실해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봄방학부터 헤아려 1 개월 이상, 나는
하네카와 츠바사와 같은 시간을 지내왔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데 사랑이라니, 어이없다.
웃긴다고.
비웃음당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츠키히와 나눈 저 대화가 괜스레 부끄러웠다.
완전히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지금도ㅡ 나는 하네카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말이지.
아이처럼, 인형처럼 여동생들과 같이 자면서 나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역시 지친 탓일까, 낮 동안 계속
잤는데도 그날 밤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런 식으로 4 월 30 일은 끝나고 5 월 1 일이 다가온다ㅡ 골든위크라고 해도 사립고등학교는 노동절(May Day,
5 월 1 일)에 쉬지 않는다.
5 월 1 일과 5 월 2 일은 평일이다.
월요일, 화요일.
등교해야 한다.
같이 자서 평소 때보다 쉽게 깨울 수 있었던 모양으로, 나는 카렌과 츠키히한테 곧바로 깨워져ㅡ 등교용의
마마체리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주:마마체리-장바구니 달린 아줌마용 자전거)
수업시작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도착해도 당연히 하네카와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결석이다.
우등생인 하네카와 츠바사의 무지각무결석조퇴, 정근상의 기록은 이 날, 어이없게 끊기고 말았다.
안 그래도 하네카와와 같이 주목도가 높은 학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양친이 의식불명으로 입원하고 있는 이상,
연락이 올 리도 없다) 결석한다는 건, 나 같은 낙제생이 문득 학교를 게으름피우는 것과 격이 달라서 담임선생이
걱정스럽게 누군가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냐고 HR 시간에 호소했다.
하지만 물론 그 호소는 교실을 갑자기 웅성거리게 했을 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히 나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ㅡ 이 시점에 반 친구 중에도 호기심이 강해서 눈치가 빠른 녀석이나 귀가 밝은
녀석이라면 괴물고양이의 소문을 들었을 테지만, 그것과 하네카와를 직접 연결 지어 생각한다는 건 무리이겠지.
저 괴물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그걸 하네카와라고 판단하는 것은ㅡ 기껏해야 나 정도이다.
아니, 나도 이제 무리일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ㅡ 내가 잘못 봤거나 뭔가 착각해버린 것이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이니까.
모두가 웅성거리는 교실 한쪽 구석에 ‘센죠가하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묘하게 시시한 듯이
담임선생의 호소를 듣고 있는 게 왠지 인상적이었다.
시시하다기보다 그건 뭐라 표현해야 할까ㅡ [역시나, 내 생각대로야. 저 애는 그런 애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동류를 꿰뚫어보는 듯한 무표정이었지만ㅡ 뭐, 그런 느낌으로.
5 월 1 일은, 그리고 5 월 2 일도 하네카와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2 일의 방과 후가 다가올 무렵 괴물고양이의 소문은 학교 안에 퍼져서ㅡ 목격담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ㅡ
방해고양이의 활약을 엿볼 수 있었다.
고작 3 일만에.
별다른 사건이 없는 평화스런 시골마을에 괴물고양이 소동은 유감스럽게도 봄방학의 흡혈귀 소동처럼 여자애들
사이에만 퍼진 소문이 아니라서ㅡ이대로는 과장이 아니고, 진짜 괴물고양이 사냥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파이어시스터즈도 언제까지나 내가 막아둘 수는 없다ㅡ 저 두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마을 안의 중학생들이
움직인다는 것과 같으니까 가능한 한 붙잡아두고 싶지만, 저 녀석들을 억누르는 것도 한도가 있다. 아니, 뭐,
설사 억누른다고 해도 여동생한테 계속 응석부린다고 하는 굴욕적인 환경에 내 정신 쪽이 견딜 수 없다는 문제도
생기지만.
어쨌거나.
다음날 5 월 3 일부터 다시금 시작되는 연휴를 앞두고 나는 다시 한 번 오시노가 사는 폐빌딩을 방문하기로
했다ㅡ 아니, 굳이 미련이 남아서 무언가를 도우려고 한다거나 혹은 뭔가 질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상황을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용건이다ㅡ 저번처럼 흡혈귀 유녀한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저번에 간 것이 4 월 29 일이기에 사실은 좀더 사이를 두어도 괜찮지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3 일 연휴는 휴일인
관계로 여동생들을 더욱더 엄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사정이 있어 미리 영양을 보급해두려는 생각이다. 요전에 나를
[충전]시키느라 저 녀석도 배가 고플 거란 초보적인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저녁이란 어중간한 시간대를 고른 것도 오히려 오시노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ㅡ 오시노가 방해고양이
찾기에 나섰을 시간대를 노린 것이다.
축시는 아니지만. (주:축시-2 시~2 시반)
악마를 만나는 때(황혼)ㅡ 라고 말하니까 말이지. (주:황혼(逢魔が時)-악마를 만나는 때로 불림)
하지만 골든위크 동안 나는 철저하게 감이 나빴다.
감이 나쁘고.
때가 안 좋았다.
폐빌딩 4 층, 흡혈귀 유녀를 찾아서 저번과 똑같은 교실을 먼저 들어가보면ㅡ 그곳에 흡혈귀 유녀는 없었고.
그리고 오시노 메메가 있었다.
그것도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너덜너덜하게 헤진 걸레와 같은 모습으로ㅡ 그곳에 있었다.
“어ㅡ 오시노!”
“응? 여어, 아라라기군ㅡ 기다리고 있었어”
오시노는 당황해서 달려간 나를 평소대로 아주 느긋하게 맞이했다. 위를 향한 채 쓰러진 건 단순히 유연체조의
과정으로 신체를 쭉 뻗기 위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머리를 천천히 긁으면서 몹시 귀찮은 듯이 몸을 일으킨다.
확실히 자세히 보면 너덜너덜하게 된 것은 알로하옷을 비롯해서 몸에 걸친 의류뿐이고, 신체 쪽은 아무렇지 않다.
찰과상이 몇 군데 눈에 띌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레짐작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시노 메메는.
명백히ㅡ 축 늘어져 초췌해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약해진 오시노를 보는 것은 봄방학 때 만난 이후, 처음이다.
“슬슬 올 거라고 생각했어ㅡ 그 전까지는 회복해두고 싶었는데. 영험있는 붕대는 요전번 아라라기군한테
사용했으니까 말이지ㅡ”
“오시노......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일단 오시노 옆까지 다가가서 착란한 상태로 질문한다.
“무슨 일이 있었다니? 아무 일도 없었어ㅡ 그저, 졌을 뿐이야”
오시노는 평소와 다름없이 유유한 태도로 내 질문에 대답한다.
허세나 강한 척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실을 애기할 뿐이다.
“져ㅡ 졌다니. 누구한테”
“당연하잖아. 방해고양이한테, 지ㅡ”
4 월 30 일 밤부터 헤아려 일수로 3 일.
그 동안 20 번 정도 싸워서ㅡ 20 번 정도 졌어.
히죽 웃고, 오시노는 말한다.
아니.
진짜로 히죽 웃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허세도 부리지 못한다.
오히려 약해보인다.
“그건ㅡ 다 진 거잖아”
“전부 졌어ㅡ 면목없네, 핫핫-”
오시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걸음걸이가 몹시 불안하다.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여간, 여고생의 속옷 차림은 아저씨한테 자극이 너무 심하네. 그쪽이 자꾸 신경쓰여서 싸움이 되질 않잖아”
“............”
그 대사는 틀림없이 본심을 숨기려는 오시노 특유의 농담이란 건 잘 알고 있지만ㅡ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여고생의 속옷에 넋이 나가, 싸울 수 없었다는 말 쪽이 훨씬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
왜냐하면ㅡ 오시노가 진다는 건.
봄방학 때,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한 흡혈귀조차 공기처럼 다뤘던 오시노가 20 번씩이나 연속해서 지다니ㅡ
질나쁜 농담이다.
악몽이다.
상대가 아는 사이인 하네카와니까 손대중해버렸다는 걸까ㅡ 아니면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방심했다고?
............
어느 쪽도 오시노답지 않다.
이 녀석은 그렇게 무른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시노는 상대가 아는 사이일 경우, 더 가차없이 상대하는 타입으로 생각된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본다면 말이지.
“정말. 아까 20 번째 싸울 때는 꽤 과격하게 빨.렸.다.고. 긁힌 상처가 치명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성가신
특성이야ㅡ 이렇게 기진맥진해서 시들어버린 중년 아저씨한테 정력을 쥐어짜내지 말라고”
“그ㅡ 그렇게까지 성가신 괴이냐고. 방해고양이는”
나는 전율을 느끼고 두려워하면서ㅡ 쭈뼛쭈뼛, 오시노한테 확인한다.
“전문가인 네 녀석조차 압도당할 정도의ㅡ”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오시노는 즉각 대답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전번에도 잠깐 말했지만 말이야, 아라라기군을 덮친 흡혈귀한테는 상대도 안돼ㅡ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저급 괴이야”
“어......?”
저급?
저급......이라고?
한순간, 그건 오시노가 내가 품었던 불안을 없애주기 위해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ㅡ 남을 안심시켜주는 말을
할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저급 괴이?
뭐라고?
“어이어이ㅡ 흡혈귀에 비해 격차가 있다고 말했지만 방해고양이가 저급 괴이라니, 네 녀석은 요전번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것까지 가르쳐주면, 자, 자신도 돕는다고 아라라기군이 말할지도
모르니까, 거기까지 설명하지 않았을 뿐ㅡ 전문가인 내 가치관으로 말한다면 아침식사 전에 처리할 수 있는
괴이야. 아니, 전문가가 나갈 필요도 없이 초보자도 지혜를 짜내어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괴이야”
“어ㅡ 그래도”
애기가 다르다.
요전번에 말하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자, 하고 말하려는 나를 오시노는 “물론” 하고 제지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봐주거나 하지 않았어. 진심으로 상대했지ㅡ 나중에 없던 것으로 친다고 해도 반장짱한테는
봄방학 때의 일로 빚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졌지, 하고 말하는 오시노.
분하다는 모습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분위기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분할 테고ㅡ 실패했다고 생각하겠지.
짧은 교제이고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ㅡ 그래도 그 정도는 전해진다.
오시노 메메는.
자신의 일에ㅡ 긍지를 갖고 있다.
“방해고양이는 피라미야”
다시금.
확인하는 것처럼 오시노는 말했다.
“애당초 방해고양이는 마네키네코와 정반대의 개념으로 나온 괴이여서ㅡ 굳이 말한다면 언어유희에서 생겨난
놀이와 같은 민간전승이야. 복을 부르는 마네키네코에 비해 방해를 부르는 방해고양이ㅡ 길바닥에서 죽은 척을
하고, 그걸 동정해서 가까이 온 인간한테 들러붙지. 인격이 바뀌는 계열의 괴물. 신체를 빼앗는 타입의 괴이.
그리고 가난뱅이신처럼 신체의 소유주를, 본체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려. 그런ㅡ 뭐, 말하자면 흔히 있는
전형적인 괴물이야” (주:마네키네코(招き猫)-복을 부르는 고양이 장식물, 한쪽 앞발 들고 사람을 부르는
시늉을 함)
“............”
사람의 양심이나 동정심을 이용하는 괴이.
그런 건 확실히 괴이 이야기로서 흔히 있는 애기이다ㅡ 거기에.
나.도. 경.험.한. 적.이.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리 신기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ㅡ 하지만 반장짱이야”
미리 알고 있었지만, 하고 오시노는 말했다.
“홀린 사람이 반장짱이란 점이, 이 경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예상 밖이었어. 본래 피래미에 지나지 않던
방해고양이를 거의 최강에 가깝게ㅡ 자칫 잘못하면 흡혈귀한테도 필적할만한 괴이로 격.상.시.켰.어”
“............”
“육체를 공유한다기보다 지식을 공유한다는 점이 안 좋아. 내가 사용하는 옛스런 괴이대책, 수법, 방법이
훌륭하게 전부 되받아쳐버려. 전문가만 아는 전문지식을 그녀는 갖고 있어. 저 아이는ㅡ 뭐든지 알고 있어”
“............”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사람을 습격하는 괴이라니,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다고”
아예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오시노는 말한다.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네, 반장짱은. 사람을 습격할 때 솜씨가 좋은 것도ㅡ 괴이가 할
만한 짓이 아니야”
“잠깐 기다려. 사람을 습격할 때 솜씨가 좋다고? 오시노, 그래선 마치 하네카와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덥치는 것
같잖아”
“뭐ㅡ 그러네. 방해고양이는 그런 괴이가 아닐 텐데ㅡ 하지만, 아라라기군. 내가 이렇게까지 고전한다는 건
그리 나쁜 전개가 아닐지도 몰라”
“어?”
“아니, 반대로 말하면 이 전개는 방해고양이 안에 반장짱이 남아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거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적어도, 방해고양이 안에 반장짱이 없고, 육체나 지식이 완전히 빼앗겼다면 이런 전개가 되지 않아.
아마 방해고양이 안에는 반장짱의 의식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어ㅡ 그렇기 때문에 힘겨워. 그리고 그건 지금으로선
최악의 정보인 동시에 안심할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해”
“어째서. 어디가 안심이 된다고 말하는 거야”
하네카와를 적으로 돌린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그 위협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ㅡ 어디가 안심이 된다고 하는 거지?
“아니, 그래도 완전히 빼앗겼다면 이제 끝이니까 말이지, 죽일 수밖에 없어”
시원스레.
오시노는 말했다.
죽일 수밖에 없다ㅡ 그리 말했다.
“반장짱의 의식이 남아있는 동안에 그 의식을 구조하지 않으면ㅡ 괴물고양이를 퇴치하지 않으면 하네카와
츠바사라는 아라라기군의 소중한 친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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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날부터 내가 골든위크를 보낸 방법을 말하면 한 마디로 일관되게 무릎꿇고 절하는 자세였다. (土下
座)
학교 교실에서 방해고양이와 조우했던 5 월 3 일부터 대형 연휴 마지막 날인 5 월 7 일 일요일, 즉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마루를 기어다니며 지냈다.
무릎꿇고 절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수로 따지면 5 일.
시간 단위로 표현하자면 뭐,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연 100 시간 남짓일까.
그 사이에.
나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토요일의 학교도 내팽개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졸지도 않고 도중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고 그런 형태로 새겨진 석상인 것처럼 계속 무릎꿇고 절했다.
뭐뭐, 흔히 있는 에피소드이다.
굳이 무슨 일인지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라도 인생에서 한두 번쯤 경험할 테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보낸
연휴였다.
......골든위크가 끝나고, 어떻게 휴가를 보냈는지 작문으로 제출하라는 과제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아니, 초등학교도 아니니까 그런 게 나올 리가 없고ㅡ 설령 나온다고 해도, 나는 지금과 변함없이 완전히
똑같은 자세로 골든위크를 지냈을 테지만.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비장한 결의를 할 때부터 방해고양이와 나의 처절한 싸움을 기대하신 분께는 지극히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뭐,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분수란 것을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숙지하고 있다.
설령 사람을 덮친다고 하는 스트레스 발산행동의 결과, 당초 방헤고양이한테 있었던 흉악함이 다소 옅어진다고
해도ㅡ 그래도 [인간]인 내가 저 녀석한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오시노조차 이길 수 없었던 상대한테.
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져서 죽어버리면 끝이다.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고 싶다ㅡ 하지만 그건 하네카와를 위한 게 아니라면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죽지 않는다.
개죽음당하지 않는다.
굳이 말한다면ㅡ 고양이처럼 죽는다.
그런 고로 오시노와 방해고양이가, 사람을 덮치거나 구하면서 이 마을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단속적으로
음양사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나는 전신전령 풀파워를 내서 전속전진(pull a head)으로 무릎 꿇은 채
절하고 있었다.
참고로 무릎 꿇고 절하는 대상을 말하자면.
이것도 굳이 무슨 일인지 말할 필요도 없이 성장기를 거친 남자애라면 설령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이른바
통과의례로서 머리를 숙이게 되는 대상, 즉 8 살 유녀이다.
8 살 유녀.
철혈이고 열혈이며 냉혈한 흡혈귀.
키스숏·아세로라이온·하트언더블레이드의 영락한 찌꺼기.
금발 유녀의 원흡혈귀.
그러니까 이건 일찍이 학원이었던 폐빌딩, 그 4 층의 한 방에서 웅크리고 앉은 무뚝뚝한 얼굴의 흡혈귀 유녀와
그 앞에서 남자답게 무릎꿇은 채 절하고 있는 나라는 구도이다.
............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백 퍼센트, 애니메이션화될 수 없는 그림인 건 틀림없다.
이제 이 이상의 미디어믹스를 깨끗하게 포기한다는 구도로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ㅡ 아니, 그걸 따지자면,
첫머리에서 여동생과 팬티를 서로 보여줄 때부터, 전부 아웃이란 느낌이 들지만.
전편, 검은 화면으로 도배되겠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라라기군은”
실제로 오시노한테도 그런 말을 들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목숨을 실제로 거는 것과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ㅡ 나는 아라라기군이 봄방학
때 그런 걸 실컷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또한 저 녀석답게 비꼬는 말투나 불쾌한 말투도 없고,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는데다,
딱히 경박한 느낌도 아닌, 지극히 보통으로 느껴지는 대사였다.
그래도 이 5 일 동안 오시노가 나한테 건 말은 이 한 마디뿐이다ㅡ 오시노는 방해고양이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신체를 치유하러 이 폐빌딩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지만 (그 후, 휴식을 끝내고 준비를 해서 곧바로 나가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저 녀석도 나름대로 거의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내 의도를 헤아리고,
금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뒤를 지나갈 때도 아무 말 없었다.
원래 흡혈귀 유녀는 무언이었고.
나도ㅡ 무언이었다.
오시노한테도, 흡혈귀 유녀한테도.
무언으로 일관했다ㅡ 뭔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이건 간청의 의미를 담아서 무릎꿇고 절하는 것이 아니다ㅡ 그런 속셈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실제로 나는 사죄하는 뜻에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미안.
이제 와서 의지하려고 해서 미안.
성심성의껏, 사과하고 있다.
정말.
무슨 낯짝으로 나는 이렇게 뻔뻔한 짓을ㅡ 오시노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원한다면 이대로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안면을 깎아내고 싶을 정도이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어떤 것인지ㅡ 제대로 알고 있다.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자기만족인지ㅡ 알고 있다.
/012
/013
후일담이면서 이번 결말.
간신히 막을 내리는, 내려질 만큼 내려진ㅡ 이번 결말.
다음날, 평소와 같이 두 여동생, 카렌과 츠키히한테 두들겨 맞고 깨워져 나는 눈을 뜬다ㅡ 아니, 그 때는
골든위크 때처럼 말하자면 자고 있었다기보다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기에 깨워진 것이 아니라 소생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덧붙여 말하면 예상대로 5 월 3 일부터 5 월 7 일에 걸쳐 카렌과 츠키히의 파이어시스터즈는 괴물고양이 소동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 안을 우왕좌왕했다고 한다ㅡ 하지만 결국 골든위크 내에 그 단서(尻尾)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주:尻尾を摑·む-꼬리를 잡다, 단서를 잡다)
꼬리(尻尾)가 없는 고양이니까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
하여간, 사람이 무릎꿇고 절하고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오늘부터
수색활동을 재개하는 모양이다. 뭐, 마음대로 하라고. 이번만큼은 굳이 말리지 않는다. 끝나버린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 이야기되고 전해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나는 아침식사도 대충 하고 자전거에 올라 집을 나선다ㅡ 학교에 가니까 머신은 마운틴바이크가 아닌 마마체리
쪽이다.
하지만 학교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러니까 조금 일찍 출발했다.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하네카와와 함께 흰 고양이를 묻어줬던 곳, 굳이 말한다면 무덤이다ㅡ 오시노가 텅
비어있었다고 말했던 저 무덤.
장소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기에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애먹지 않고 그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ㅡ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들고 온 모종삽으로 그 자리를 파보면ㅡ 무덤을 뒤엎어보면 그곳에는 확실히.
고양이의 사체가 묻혀있었다.
빛이 바랜 은색 고양이의 사체가ㅡ 지면에 매장되어 있다.
텅 비어있지ㅡ 않았다.
부패한 냄새가 감도는 리얼한 사체였다.
“흠”
뭐, [하지만]이라고 말해봤지만, 알고 있던 것이었다ㅡ 이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예상대로이다.
자, 문제는 오시노가 이걸 알고 있었는지 여부이지만ㅡ 아니.
아마도 내가 전한 방식이 나빴던 거겠지. 오시노는 실수로 다른 장소를 파내고 사체가 없어졌다고 착각한
거겠지ㅡ 저 녀석도 만능은 아니니 착각 정도는 하겠지.
나는 그렇게 납득하고, 다시금 고양이의 사체에 흙을 덮어 묻어주고.
양손을 모아 합장한다.
명복을 빌었다.
“자, 그럼”
그리고 다음에 향한 곳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전에 학원이었던 폐빌딩이다ㅡ 무덤을 발견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려서 서두르지 않으면.
그렇다고 해도 이쪽은 긴요,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ㅡ 단순히 어젯밤은 내 신체의 상처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고 어떻게든 회복되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저 흡혈귀 유녀한테 고맙다고 하려고 생각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주자고 생각했다.
복종의 증거ㅡ 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그 정도는 허락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ㅡ 분명 고맙다고 말해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
그러한 내 기대는 크게 빗나갔다.
에필로그이기 때문에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뭐든지 가능할 거라는 전능감은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도착한 후, 4 층의 교실에서 그녀와 만나보니 흡혈귀 유녀는 어이없게도 오토바이를 탈 때 쓰는 고글이 달린
수수께끼의 헬멧을 쓰고 있다.
이래서야 쓰다듬어줄 수 없다.
“아아, 그거? 응, 흡혈귀짱이 졸라서 말이지. 뭐, 결국 고양이 사건은 그녀가 전부 해결해준 것이니까
포상으로 선물해주었어”
오시노는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무슨 짓을.
“기대가 빗나갔다고 할까......부질없는 희망이었군”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냐고.
이래서야 관계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될 뿐이잖아.
어쩔 수 없지만.
이러한 상태면, 저 때 들려왔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도, 사실은 환청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진짜로ㅡ 멋쩍은 걸 숨긴다거나 츤데레도 아니고. 그녀는 나를 도우려고 한 것도 아니었겠지.
봄방학 때 하네카와에 대한 원한이 아직 남아있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고, 나라고 하는 영양원을 보호한다는
명목도 한몫 했을 테고, 혹시나 미스터도너츠를 10 개 먹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지도ㅡ 뭐, 그거야말로.
고양이보다 변덕스러운, 그녀다운 변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괜찮다.
변덕도 실력 중 하나이다.
언젠가 저 환청을 현실로 듣고 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 아름다운 금발을 휘젓는 것을ㅡ 내 목표로
삼을게.
언젠가 네 녀석과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할게.
사람이나 괴이처럼 그런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
“뭐, 흡혈귀짱이 요도를 아라라기군한테 빌려줬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 일이지만 설마 자진해서 도우러
오다니ㅡ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질 뿐인데. 핫핫, 나는 이미 아라라기군과 반장짱의 일은 포기하고 있었는
데”
“............”
은근슬쩍 냉정한 말 하지 말라고, 이 녀석.
이것도 어디까지가 진심인지ㅡ 뭐, 이런 경우는 역시 전부 다 진심이겠지만.
뭐.
그 냉정함이 이 녀석의 맛이다.
“거기다 저런 계책으로 잘 되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ㅡ 찬물을 끼얹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반장짱 자체가 괴이화하고 있으니까 요도로 반장짱을 베어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는데”
“어!? 이제 와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이쪽은 전문가가 보증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서 임했는데!
너무 냉정하다고!
“반장짱이 진.짜.로 빙의되었다면ㅡ 위험했어”
“............”
그야 오시노가ㅡ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나.
고전했던 이유니까 말이지.
“그런데 오시노. 뒤처리는 전부 네 녀석한테 맡긴 이상, 말참견할 생각은 없지만......하네카와 말인데ㅡ
괜찮겠지?”
“응?”
오시노는 얼버무리는 것처럼 고개를 꺄우뚱한다.
이것이 학교에 가기 전에 확인해야 되는 마지막 용건이었다ㅡ 이것만큼은 확인해두고 싶었다.
“아아, 괜찮아. 그건 보증하지ㅡ 반장짱은 이 골든위크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 그 부분의ㅡ
블랙하네카와일 때의 기억은 완전히 잃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오시노는ㅡ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일부러 과장되게 입에 물었다.
“블랙하네카와? 그건 또 뭐야?”
“저. 상.태.의 반장짱을 말하는 거야. 저걸 방해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다르니까 말이지ㅡ 신종에는 신종의
이름이 필요해. 새로운 현대의 요괴, 블랙하네카와”
“네이밍센스 참 없네, 네 녀석”
하고 악담을 퍼부으면서, 나는 그것이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잘 붙인 것도, 이름을 잘못 붙인 것도 아니다.
훌륭하게ㅡ 이름이 실체를 나타낸다.
다크블랙.
그런 속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으니까 붙인 것이 아니고ㅡ 아니, 그런 점도 물론 있지만, 그 이전에.
저, 검고 검고 검고 검은ㅡ
암흑과 같은 존재의 그녀도 또한.
하네카와 츠바사란 점은 틀림없으니까.
“신종이네......뭐,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즉, 괴이와 관계없는 진짜 이중인격이라는 것이 되나ㅡ 저런
건”
“웅. 아니, 그런 게 아냐. 역시 저건 괴이야. 그렇게 설명해야만 해”
오시노는 매우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후,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의 반장짱을 집까지 바래다줬지만ㅡ 그 길에서 여러 가지 애기를 들었어”
“......몽롱하기는커녕 의식이 없었잖아”
“없었지만 말이지. 있다면 듣지도 못했어ㅡ 최면요법 같은 거니까”
그건 즉.
오시노의 본직이기도 한.
“괴이 이야기의 수집ㅡ 이란 거군”
“아아. 신종 괴이는 기계문명이 전성하는 지금 시대에 드물어ㅡ 그러니까 본인한테 제대로 애기를 듣고 싶었어.
뭐, 그것과 별개로 일한 만큼 대금을 청구해뒀지만 말이지. 10 만엔 정도”
그래도 뭐, 기억이 없다면 청구도 못하려나ㅡ 하고 오시노는 농담처럼 말한다.
하지만 10 만엔이라니, 나와 비교하면 너무 싸잖아......아니, 결국 오시노도 아까 말했던 대로 이번 사건의
해결에는 흡혈귀 유녀의 활약이 컸으니까 비율로 따지면 그 정도가 타당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마, 필요경비만 청구한 거겠지.
“그래서 뭘 들었어, 최면요법으로”
“뭐, 듣고 나서 이건 내 추측이지만ㅡ 처음에 고양이는, 단순히, 진짜로 성실했던 방해고양이였던 모양이야.
그래도 그 방해고양이 현상 자체는 곧바로 끝나버렸어”
“끝나버렸다고?”
“양친을 에너지 드레인했던 시점에ㅡ 우.연.히. 가.장. 가.까.이. 있.던. 인.간.을. 손.댄. 시.점.에
반장짱의 의식은 일단 돌아왔던 모양이야. 그 시점에ㅡ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졌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바램ㅡ”
욕구인가.
양친한테ㅡ 폭력적인 반항을 하는 것이, 그녀, 하네카와 츠바사의ㅡ
“그.래.도. 곧.바.로. 돌.아.왔.어. 아니ㅡ 반장짱 자신이 강하게 원해서, 떨어져나간 고양이를 스스로
데리고 돌아와, 다시금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맞으려나. 들러붙은 것을 받아들였지. 사실은 떼어놓고,
거절했을 터인 괴이를. 끝내지 않고 계속했어. 방해고양이는 반장짱한테 딱 들어맞는다고 말한 것은 나이지만,
그걸 바탕으로 말한다면 너무 딱 들어맞는 거겠지ㅡ 너무 딱 맞았기 때문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어. 즉, 고양이의
요상한 매력에 홀려서ㅡ 정이 들어서, 그 순간 신괴이, 블랙 하네카와가 탄생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 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쁜 짓 삼매경(惡業三昧)ㅡ 인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에너지 드레인.
밤마다 토오리마(通り魔)처럼. (주:토오리마(通り魔)-일본의 귀신, 바람처럼 사람 사이를 지나가며 사람을
죽이는 귀신)
변질자처럼 사람을 덮친다.
양친한테 한 에너지 드레인은 그야 물론 정당하다고 할만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동기였다ㅡ 그래도 그
다음에 한 짓은 그렇지 않다.
그럴싸한 것은 전혀 없다.
이유를 묻는다면.
당시 하네카와는 분명 이렇게 대답했겠지.
[닥치는 대로 해치웠을 뿐, 이유는 없어ㅡ]
[ㅡ 왜냐하면, 열받았는걸]
웃음거리이다.
괴이가 들러붙었을 때는 정당하고, 괴이를 받아들이고 난 후는 사악했다니ㅡ 그래도 그렇기에 인간이다.
하네카와는 인간이다.
“왠지ㅡ 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뒤집어쓴다는 애기 같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네카와의 책임이었지만ㅡ 저기,
오시노. 저대로 계속 사람을 덮쳤으면 방해고양이ㅡ 가 아니라, 하네카와ㅡ 도 아닌, 블랙하네카와란 녀석은
스트레스를 전부 해소해서 없어지려나”
(주: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진다(皿を舐めた猫が咎を負う)-생선을 먹은 고양이는 이미 도망가고 나중에
와서 접시를 핥은 고양이가 죄를 짊어진다, 악인이나 범죄자는 잡히지 않고 엉뚱한 사람만 잡힌다는 것)
내 의문은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어찌해도ㅡ 쓸데없는 짓을, 주제넘게 괜히 나서서 끼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내버려두면 될 것을 제멋대로,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ㅡ 쓸데없이 나서고.
하네카와의 방해를 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가, 그래도 남는다.
“그렇지 않아ㅡ 말했겠지. 저대로 계속되었다면 고양이한테 빠져서 사라졌을 뿐이야. 죽일 수밖에 없어.
날뛰어서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고생하지 않아. 나 같이 적당히 사는 인간 입장에서 본다면 쓸데없이 스트레스가
쌓일 법도 해ㅡ 스트레스란 건 적당히 모아둬야 하는 법이야. 반장짱의 블랙하네카와화는, 그 폭주는 오히려
양친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
“어......? 그래도ㅡ”
“인장응력(tensile stress)이라고 말하나. 버티지 못하면 막대기는 부러진다고 말하지만ㅡ 누구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ㅡ 아니, 뭐, 그런 걸 제쳐두더라도 괴이에
의지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는 건 너무 제멋대로지. 아라라기군이 한 것은 올발라” (주:인장응력
(tensile stress)-물체에 힘을 가했을 경우, 물체 내부에서 저항력이 가해지는 것)
무엇이, 누구 입장에서 올바른가 라는 건ㅡ 정말로 제멋대로이군.
확실히 나는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별로 하네카와가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검고 나빴을 뿐이다.
검다고 해서ㅡ
진지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순수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네카와한테 불리한 기억은 블랙하네카와가 전부 짊어줬다는 건가ㅡ 상당히 편리한 괴이로군”
“짊어졌다기보다 대신 해주는 거지. 연대보증인 같은 거야. 뭐, 반장짱 자신이 만들어낸 괴이이니까 말이지ㅡ
그녀한테 형편좋게 돌아가는 것도 당연해. 자작캐릭터이기에 기회주의 중에서도 이상주의야”
뭐, 나는 잊어버리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ㅡ 하고 오시노는 말했다.
“양친도 나름대로 강렬한 에너지 드레인의 결과, 딸한테 덮쳐졌다는 기억은 사라진 모양이지만ㅡ 그런 거,
언발에 오줌누기인 걸. 언발에 오줌을 싸도 얼 뿐ㅡ 더 이상 흐르지 않아” (주:臭いものには蓋をする-악취나는
것에 뚜껑을 덮다, 곤란한 일을 임시변통으로 숨김)
“흐르지 않아ㅡ 인가”
불화도, 일그러짐도.
가정 내 폭력도, 육아포기도.
무엇이든.
남아있는 채ㅡ 끝나지 않고, 계속 잔존해 있는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은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ㅡ 잊어버리는 쪽이 낫다.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라면ㅡ 마음을 잊는 쪽이 낫다.
이 골든위크에 있었던 일은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고ㅡ 고양이한테 물렸다고 생각하고, 악몽이라도 꾼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걸로 해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잖아.
기억하던지, 잊어버리던지
없던 일로 될 수 없고ㅡ 어차피 아무 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기회주의 중에서도 이상주의네. 즉 내가 생각한 괴이ㅡ 라는 느낌일까”
“그래그래. 바로 그거. 아라라기군 역시 초등학생 때는 나만의 오리지널 초인을 생각했잖아?”
세대가 다르다.
그래도 뭐, 자신만의 스탠드라면 생각했군. (주: 스탠드-죠죠의 기묘한 대모험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힘,
의지력로 발현,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7 부 진행중)
“형편좋게 자신을 구해러 오는 히어로ㅡ 그걸 밖에 요구할 수 없고, 자신 안에서 키웠다는 거네, 반장짱은”
“그렇게 말하면 역시 이중인격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그래도 실은 그렇게 들리도록 말하고 있어. 그렇게 해두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
말이지ㅡ 애당초, 괴이란 건 그런 존재야”
“그런 존재?”
“원래는 진실과 다르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면 암울해지니까 요괴 탓으로 해두자고ㅡ 이런 느낌의 책임
전가지. 반장짱이 가정 스트레스에 짓눌려서 기행을 벌였다ㅡ 이렇게 결론을 내는 것보다, 괴이나 방해고양이,
블랙하네카와나 이중인격, 그런 결론을 내서 그.런. 것.으.로. 해.두.는. 것.이 가장 문안하겠지”
“그런 것으로ㅡ 해둔다”
밸런서인 오시노답지도 않고, 그뿐만 아니라 이 녀석의 이론이 파탄날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그것이 이번
일에서 이 녀석이 나름대로 정한 타협점일지도 모른다. 프로로서 일을 완전히 마무리짓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
즉 타협점이라기보다ㅡ 끝맺음.
이번 사건의 결말.
부조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ㅡ
"흑백이 가려지지 않은 어중간한(gray) 결착이란 느낌이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장난으로 끝ㅡ 이다.
“어쩔 수 없어. 이도저도, 결국은 반장짱이 선택한 결말이야. 나나 아라라기군은 참견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아라라기군은 앞으로도 열심히 평상시대로 대해주면 돼”
“......그렇겠지”
그런 걸로 해둔다ㅡ 인가.
히어로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한 하네카와를 위해ㅡ 하네카와의 히어로가 될 수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인가.
그렇다.
나는 하네카와를 위해서 죽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오시노, 신종 요괴로 말하자면ㅡ 하네카와는 계속 가족이라는 이름의 요괴에 홀린 것이 아닐까”
문득.
나는 무심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ㅡ 그런 말을 했다.
말해보았다.
“고양이나 뭐, 귀신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ㅡ”
“가족이군. 그래도 반장짱한테 양친은 가족이 아니었겠지?”
“그러니까ㅡ 그렇기에”
나한테 카렌이나 츠키히가 당연한 것처럼 누구한테도 당연히 있을 터인 가족이란 존재가 저 녀석한테는 요괴변화
같은 것으로ㅡ 그러면 골든위크의 9 일 동안이 아니고, 15 년 동안이 아니고, 태어나서 여태까지 계속ㅡ 가족에
홀려서.
“하네카와한테 가족이란 건 계속 괴이였던 것이 아닐까”
“어떨지”
하지만 오시노는 부정적으로 고개룰 갸웃한다.
“하지만 가족이란 건 실제로 꽤 우울한 법이잖아? 반항기도 있고, 친부모라도 변변치 않은 사람도 있고ㅡ 저기,
아라라기군, 아라라기군은 일본지도를 그릴 수 있어?”
“응?”
아연해진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어른은.
내 애기를 듣고 있는 건가.
“그야 그릴 수 있지만, 무슨 애기야”
“아니, 일본인이라면 그야 대부분 일본지도를 그릴 수 있겠지ㅡ 그래도, 나는 그걸 일기예보 덕분이라고 생각해.
일기예보를 보면서 일본인은 일본의 형태를 기억하는 거지”
“하아ㅡ”
흠.
뭐, 듣고 보면.
일본지도를 그릴 때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TV 에서 본 일기도이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일기예보 쪽이 지도책보다 훨씬 눈에 들어오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일기예보를 보는 걸로 일본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ㅡ 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오시노는 말했다.
어중간한 지식으로 아는 척하지 말도록ㅡ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과연 그렇군.
“참고로 [가족]이란 개념을 실체로 한 괴이도 이미 존재해ㅡ 자네가 생각해낸 것은 이미 옛날 사람이 생각하고
있어, 아라라기군”
“그렇겠지. 미안하게 됐네, 어설픈 지식 갖고 아는 체해서”
나는 어깨를 움츠린다.
“그래도 뭐, 고양이가 되었다거나 어떻게 되었다고 해도ㅡ 하네카와는 하네카와인 채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역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돼”
“결혼해버리면 되잖아”
너무도 쉽게.
오시노는 그런 말을 했다.
말해주었다.
“응?”
“아니, 그러니까 아라라기군이 반장짱과 결혼하면 되잖아. 그러면 반장짱은 계속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가족을
가질 수 있으니까”
“아니......”
너무 가볍게 말한다고.
결혼이라니.
“질나쁜 농담이라고, 오시노”
“그런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 봄방학 때 반장짱한테 받았던 은혜를 갚아줄 수 있는 타당한 거래라고
생각하지만”
“하네카와의 기분이란 것이 있겠지”
“그야 있겠지”
천연덕스러운 오시노.
놀리는 것 같은 말투도 평소대로이다.
“기분이 있으니까, 홀린 거지”
“............”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되는 거야”
괴이로도 된다.
오시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라라기군의 기분이란 것도 있잖아?”
“내 기분?”
“나는 분명 아라라기군은 반장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웃는다.
히죽 웃는다.
그래ㅡ
이곳은 히죽 웃고, 멋있게 폼잡는 장면이다.
“나는 하네카와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런가”
“그래”
그런 것으로ㅡ 해두자.
그게 가장 행복하다.
핫핫, 하고 오시노도 웃었다. 가볍게 웃었다.
“응, 아라라기군이 괜찮다면 그걸로 좋겠지. 뭐, 물어보긴 했지만 아라라기군의 기본보다 반장짱의 기분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지ㅡ 방해고양이가 뭘 하든, 아라라기군이 뭘 하든, 사람은 혼자서 멋대로 구해지는 거니까”
“그리고 하네카와는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ㅡ 말이지”
밖에서 구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고.
“......나한테 도움을 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분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것만은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하네카와가 부탁했다면 나는 뭐든지 했을 텐데”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지극단적으로, 지극신랄하게 말하는 오시노.
“그보다 자신의 망상 쪽이 훨씬 의지할만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니면, 의외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응?”
“꼭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도움을 요청할 것일 수도 있겠지? 꼭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오시노 메메는.
예전과 같이 꿰뚫어보는 것처럼ㅡ 말했다.
“경솔하게 애기하지 않는 말은 누구라도 있는 법이야, 아라라기군”
“............”
“핫핫-.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다니, 역시 사람은 혼자서 제멋대로 구해지는 것뿐이지만. 하지만
불쌍하게도 흡혈귀짱한테 빨려져서, 그 신종의 괴이가 없어졌다는 것도 슬퍼. 어차피 역사가 짧은 신종, 돌연
변종. 구식의 왕을 이길 수는 없지. 오리지널에 자작의 괴이는 根付くまでは寒い. 기계와 다다미는 새로운 것이
좋지만, 괴이는 오래된 것이 좋아”
“괴이의 왕ㅡ 흡혈귀”
말하면서, 나는 그쪽에 눈을 준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흠. 하지만 언제까지나 흡혈귀짱이다, 흡혈귀 유녀다, 이러면 너무 정신없네. 다행히 이제부터는
미스터도너츠로 길들인다는 이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 같으니, 어디, 이 아이한테도 나름대로 뭔가 이름을
붙여주도록 할까ㅡ”
문득 눈치채면 꽤 오랫동안 이야기해버려서 수업개시시간이 가까이 다가왔기에, 나는 오시노의 그런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폐빌딩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지각해버린다.
지각하면 하네카와한테 혼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는다ㅡ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모든 일을 잊고 있는 하네카와와 제대로
애기를 할 수 있을지ㅡ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일심분란하게.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해 자전거 보관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교실로 향해 바쁘게 계단을 올라가면서도ㅡ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불안해하지 않는다.
평소대로 웃어주는 하네카와한테.
평소대로 똑같이 웃어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ㅡ 하네카와를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저 녀석을 좋아한다고.
평생 말할 일은 없으니까.
“......하네카와”
나는ㅡ 누구한테도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하네카와씨.
나는 언젠가 너 이외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겠지.
너 이외의 누군가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다.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을 너한테 배운 나한테는 너 이외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분명 오겠지.
그래도 나는 너가 잊어버린 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9 일 동안을ㅡ 나는 언제까지나 미련이 남은 것처럼 기억해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설령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린다고 해도, 어떤 장래를 맞이한다고 해도, 너한테 품은 이 기분은 절대로
바뀌지 않고 없었던 것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고로, 그런 식으로.
고등학교 3 학년 골든위크, 18 세의 5 월, 아라라기 코요미의 첫사랑이 아닌 무언가는 실연했다.
나는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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