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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럼에도 시로메구리 메구리는 보아주고 있다. (pp.

4-33)

1교시 수업이 시작되고, 나는 뭉친 어깨를 푸는 척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시야 한쪽에서 사가미의 모습을 포착하고 스치듯 힐끗 엿본다. 사가미는 몸을 구부린 채였고, 고


개 숙인 듯 내리뜬 시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침에 있었던 복도에서의 작은 충돌. 그 충돌이 사가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것을 확인
해 두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체육제 운영위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충돌뿐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일상생활까
지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 사가미의 현실 세계가 침식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이벤트만 끝나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면 그만이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명백


하게 뒤끝이 남은 것이다.
그 사실은 서서히 효과를 미치고 있는 듯 보였다. 늘 귀찮게 떠들던 “나 불쌍해” 어필은 자취를
감춘 채, 누가 보아도 의기소침한 상태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엾다는 생각도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사가미 미나미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심히 짜증스러운 짓을 당하기야 했지만, 기

껏해야 그게 전부다.
본디부터 관계성이 희박한 사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도 나와 그녀 사이

의 접점 같은 것은 아마 없을 터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찰해 보자면 지극히 단적인,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지극히 단
순한 감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속물, 이라는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가장 인간다운 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순진함이나 무구함을 귀여운 동물적인 존재의 특징 중 하나로 가정한다면, 사가미가


지닌 교활함이라는 속성은 인간의 특징 그 자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속이고 회유하고, 협잡하
고 잡아떼고, 허세를 부린다. 인간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렇기는 하나 사가미가 무리를 짓는 방식,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은 짐승들의 그것에 가깝기 때

문에, 어떻게 본다면 고도로 발달된 동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침팬지나 보노보 같은 유인원과 유사하지 않을까. 서열 및 계급이 존재하고, 그에 구
속되면서도 때로는 꾀를 부릴 줄 알며, 위협할 때에는 큰 소리로 끽끽 짖어대는 동물들.
공동체 안에서 항상 서열에 구속된 채, 혹은 늘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사가미 미나
미라는 인간이다.

한편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무리를 짓는 자들도 존재한다.


미우라 유미코가 그러할 것이다.
그녀가 무리를 짓는 방식은 비유하자면 호랑이와 같다.
무리를 형성하더라도 그것은 영역을 유지하면서 새끼를 보호하고 길러 나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
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인자한 어머니상이나 성모 같은 인상을 받기 쉽겠지만, 물론 그 이외의 동

물들에게는 그녀가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있는 발톱이든 엄니든 공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엄청 무섭다고요…….
따라서 그녀들은 둘 다 마찬가지로 무리를 짓고는 있지만,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 무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양쪽 모두 옳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정의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무엇이 올바른지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굳이 말하자면 고독은 악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녀들 모두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감상을 느끼게 할 만큼 2학년 F반 교실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사바나의 부시(bush) 같다고나 할까. 부시란 건 전 대통령 말고, 숲 얘기다. 참


고로 숲(*森, 모리)이란 건 작사가하고 한판 붙었던 그 가수1 말고, 나무가 모여 있는 그거 얘기다.

나무가 모여 있다고 하니 왠지 평화로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 평화롭기는커녕 침울할 지경이다.2


고도로 발달된 이 문명 사회에 느닷없이 출현한 정신적인 야생 세계에서는 초식남조차 침묵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야생 그 자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방불케 하는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

사파리 파크도 이것보다는 훨씬 평화로워 보일 정도로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이젠 아예 어디


서 희미하게 피 냄새까지 풍겨 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침의 그 사건 탓에 교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 원인 제공자인 미우라와 사가미. 둘 다 언짢은 모습인 것은 다를 바 없지만, 그 역학 관계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호랑이는 숲 속의 왕, 그리고 원숭이는 숲 속의 주민. 일개 민초와 영예로운 왕의 위치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다.
평소 같았다면 수업 중이라도 다소 속닥대는 소리쯤은 들릴 법도 하지만 지금은 고요한 정적만

1
작사가 카와우치 코우한(川内康範)과 분쟁이 있었던 중견가수 모리 신이치(森進一)를 말함.

2
木が集まるといっても元気玉的なことではなく、むしろみんな元気がない(나무가 모인다 하니 왠
지 원기옥 같은 느낌이지만, 오히려 다들 활기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무(木, 키)와 기
(気, 키)가 같은 발음이고, 기를 모아 시전하는 기술인 ‘드래곤볼’의 원기옥(元気玉)의 원기(元気,

겐키)에는 활기차다는 등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말장난.


감돌 뿐, 그저 가끔씩 미우라가 손톱으로 책상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다. 헛기침
을 하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거북한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누구 하나 미우라에게도,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인 사가미에게도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괜
히 엮이기 싫어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분이 삭을 때까지 그냥 가만히 두고자

하는 친절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특히 하야마나 유이가하마, 에비나 양을 비롯한 미우라의 친구들 같은 경우는 이럴 때의 접근법
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라 딱히 별 말을 걸지도 않는다.
하긴, 화났을 때 “혹시 화났어?” 하고 물으면 괜히 더 부글부글 끓기만 할 뿐이다. 설령 그 말이
친절과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위험한 곳을 가까이 하지 않는 법이며, 현명한 자일수록 남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기

마련이다. 남과 접촉하는 것은 곧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다. 고로 외톨이는 현자인 바, 연중


무휴 현자 모드.
그래도 역시 쉬는 시간이 되자 아침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였기 때문인지, 그나마 평상시
의 소란스러움을 되찾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의식적으로 평소처럼 지내면서 자기들은 평

상시와 아무 것도 다르지 않음을 어필하고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신을 향하여 저런


식으로 재차 확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기만은 관계의 윤활유로써는 중요한 행위다. 단지 나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탓


에 그저 답답하고,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다.

친함의 정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정말로 친한 상대에게는 일부러 배

려해 가면서 행동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친하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배려하게 된다. 배려해 주느라 말도 안 걸고, 얼씬도 하지 않는다.
외톨이는 겨우 절반만 상냥한 게 아니라 완전히 상냥함 그 자체인 셈이다.3

마치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교실은 평상시의 활기를 되찾아

간다. 미우라도 이미 평소처럼 돌아온 상태로, 어딘가 권태로운 분위기를 흘리면서도 에비나 양과
유이가하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교실 전체를 별 생각 없이 둘러보았다.
한편 사가미로 말하자면, 말없이 교실을 떠나간다. 오늘은 쉬는 시간이 되어도 함께 험담, 욕설,

푸념, 불만으로 신나게 떠들던 친구들과 행동을 같이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허영심이 강한 사가미로서는 아침에 있었던 그 사건, 하루카와 윳코에게 무시당하고, 심지어 그
모습을 만인 앞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이 나름대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인간은 때때로 스스로 고독을 갈망하곤 한다. 평소에는 고독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주제에 본인

3
ぼっちの半分は優しさでできてるどころか全部優しさまである. 진통제 버퍼린(バファリン)의 캐

치프레이즈 ‘버퍼린의 절반은 상냥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의 패러디.


편할 때만 “혼자 있고 싶다”니 너무 뻔뻔한 처사 아닙니까…….
하지만, 정말로 고독을 갈망하고 있다면 나름대로의 양식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누군가
에게 동정을 구하려 한다거나, 관심을 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본인의 가치를 깎아내리
는 행위일 뿐이다. 누군가의 인정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정의하지 못하는 약자라고 자신을

선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달리 말이 없는 사가미에게 친구들이 가볍게 말을 걸려고 한다.
그러나, 사가미는 그저 힘없는 미소로 답한다.
“나, 잠시만 좀…….”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사가미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난다.
이제까지와는 분명히 다른 행동 패턴이다.

남을 멀리하고, 일부러 거리를 둔다.


그것은 지금까지 누군가의 인정과 배려 없이는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할 것 같던 사가미와는
전혀 다르다.
그 변화를 나는 의아하게 여기며 시선으로 쫓는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그리 간단히 변하는 게 아니다.


이건 나의 지론이다. 고작해야 무슨 계기 하나 가지고 간단히 자기가 변한다면, 애초에 그 녀석

은 자기 같은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아, 그리고 자의식이 존재하는 자는 어딘가에서 변화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자기동일성을 유

지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원인은 단 하나.


내동댕이쳐지고 상처받고 완전히 박살이 나고,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다음에는 그런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

그런 행동이 마치 성장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습관화된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법이다.
객관적인 평가란 결국 행동에 대한 평가이다.
따라서, 그것이 본능적인 위험 회피를 위해 이루어진 행동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행동은 객관적

인 변화의 징조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테레사 수녀가 그랬던가.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된다. 성격
은 언젠가 운명이 된다, 그렇다나 뭐라나.
과연 마더 테레사. 훌륭한데. 마더는 위대하다. 마더 목장 4 도 대단하지. 아이스크림도 완전 맛있

4
マザー牧場. 치바현에 위치한 목장 테마파크.
고.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된다. 말, 행동, 습관. 그런 것들이 주위로부터 각 개인의 성
격과 인격으로 평가된다.
과연, 사가미의 행동의 변화는 무언가의 징조가 될 수 있을까.

× × ×

오늘은 운영위원회 전체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 진행 상황 확인과 함께 향후의 과제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하지만, 이것도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리 원만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나
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꺼림칙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다못해 내 머리털까지 꺼림칙한 예감
에 반응하여 까딱까딱 움직이는 듯 느껴질 정도다.

방과 후, 회의실로 향한다. 직원실과 도서관에 가까운 탓인지, 이 시간에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 이 복도를 걷고 있는 학생들은 벽 한 장 너머로 체육제 관련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줄


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애초에 체육제 운영위원회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조직 내부에서도 특히 그 존재가 은폐되어 있는 나의 특수성이 유

독 부각된다. 반갑소, 닌자=히키가야라오. 5 하긴, 숨어 있다기보다는 다들 나한테 관심이 없을 뿐


이지만 말입니다. 하치만, 알고 있어. 초평화 외톨이6는 다들 친하다는 거(혼자뿐이니까).
그러나, 개중에는 기척을 지우고 있어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다.

마침 직원실에서 나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히라츠카 선생님이 그러하다. 선생님은 나를

알아차리고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다. 나도 가볍게 고개 숙여 답한다.


서로 대화가 전해질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히키가야, 회의하러 가나?”
“네, 뭐 그렇죠.”

내가 회의실 문 쪽으로 시선을 힐끔 돌리며 대답하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흐음 하고 무언가 생


각하는 듯 뜸을 들였다.
“……미안하다, 오늘은 내가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할 것 같군.”

5
ドーモ、ニンジャ=ヒキガヤーです。소설 ‘닌자 슬레이어(NINJA SLAYER)’의 인살어(忍殺語).

6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초평화 버스터즈(超平和バスターズ) 패러디인 듯.
“그러신가요…….”
그렇게 된다면, 이번 회의는 현장반에 대한 억지력이 하나 줄어들게 되는데……. 점점 더 꺼림칙
한 예감이 깊어지면서, 내 하치만 레이더는 이미 안테나 세 개 7가 된 상태다. 그러고 보니 안테나
세 개란 것도 이제는 듣기 힘든 단어로군. 요즘 스마트폰 전파 표시 막대는 다섯 개 정도 뜨니까.

그렇다고 그 숫자만큼 더 잘 터지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던데, 그거 대체 뭐야?


“요 근래 2학년들은 연달아 행사가 잡혀 있지? 내 쪽도 일이 많아서 말이다. 수학여행 쪽도 마무
리를 지어야 하고, 그 다음에도 큰 행사가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서……, 정말 왜 이렇게 나한테만
일이 넘어오는 건지…….”
후우 하고 피로에 찌든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평상시의 대화 패턴을 생각해 볼 때 이거 설마
또 “젊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다 떠맡게 되더라” 이 얘기 꺼내려고 그러는 건가.

허나, 그렇게는 안 된다. 그걸 들을 때마다 살짝 불쌍해진다고! 게다가 덤으로 그런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선생님이 종종 귀여워 보이는 탓에 그런 사태는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
그런고로, 선수를 치기로 하였다.
“뭐, 선생님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이젠 더 이상 젊지 않으니까요, 하는 말은 속으로 꾹 삼켜 둔다. 이제 맞는 건 싫다고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그게 빈정거리는 소리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걱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다 하는군. 새겨 듣도록 하마.”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어 답한다.

……하긴, 이 분은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는 느낌도 드니까. 아주 걱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지금 건 비꼬는 말입니다 하고 일부러 정정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정면에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해 와도 난감할 따름이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
한다. 그러자 그 끝에 회의실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저는 이제 회의 가 볼게요.”

“아아, 잘 다녀와라.”
묘하게 낯간지러워지는 말과 함께 전송을 받으며, 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엇갈리려던 참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렸다.
“너도, 무리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뒤돌아보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유유히 떠나가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


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가볍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뭐, 너무 걱정 끼치면 안 되겠지, 나이도 나이고.

7
バリ3. 빠릿빠릿한 모습(バリバリ)과 3의 합성어. 예전의 휴대전화는 안테나 세 개가 최대 상태.
× × ×

회의실은 이제까지 해온 것보다 더욱 소란스럽게 웅성이고 있었다.

오늘은 고문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없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뇌부 측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그저 현장반 무리들이 끝도 없이 계속 떠들
고 있을 뿐이다.
이게 만약 회의 전의 광경이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서로 만나서 잡담 한두 마디
쯤 나누는 거야 평범한 일이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평범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이미 회의는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의욕이 없더라도 일단은 고등학생들이 모
인 자리다. 최소한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중이긴 하다. 하지만 마치 파도치듯 자그마한 소
리로 소근소근 주고받는 잡담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하루카와 윳코였다. 여전히 둘 다 조연스러운 스타일이라 누가 누군지

도 잘 모르겠다. 게다가 두 사람 말고도 잡몹 같은 것들이 몇 명 더 모여 앉아 있는 탓에 조연스


러운 분위기가 더 강조되고 있다. 완전 몹몰이 수준.

앞쪽에서 ㄷ자 형태로 앉아 있는 수뇌부와는 대조적으로, 어수선하지만 확고하게 무리 지어 모


여 있는 현장반. 두 그룹은 꼭 이종족(異種族) 간에 서로 견제하는 듯한 구도를 취하고 있었다.

“저기……, 현재 진행 상황 보고를 각 반에서……”

소란 속에서 사가미가 말문을 연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 우선은, 제작물부터 봐야겠네. 그럼, 입장문 쪽은 어때?”

보다 못한 메구리 선배가 끼어들었다.

사실 할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상황이라면, 아까 사가미가 지시했던 것처럼 하더라


도 상관이 없다. 의욕이 있는 인간들은 알아서 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동기 부여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상황하에서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좁혀 지시하고 지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반응
하지 않는다.

메구리 선배는 현장반 쪽을 향하여 질문했지만, 정작 그 질문에 일어서서 대답한 것은 유이가하


마였다.
“아, 네. 입장문은 거의 다 만들어 가는 중이고, 남은 건 페인트칠이랑 데코레이션…… 같아요.”
“응, 알았어. 고마워.”
생긋 웃으며 대답하기는 하였으나, 메구리 선배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그렇게 되는 것도 무리

는 아니다.
제작물 관련 업무는 거의 대부분이 현장반에 할당되어 있었고, 책임자 또한 정해져 있었을 터이
다. 따라서 원래 여기서 손을 들어 보고해야 하는 것은 그 담당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수뇌부가 일을 거들기 시작하면서, 그들 사이에서는 제멋대로 권한 이양이 벌어지
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각자 부활동 중에 본의 아니게 일을 떠맡은 것도 사실이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악순환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동기 부여는 물론이고 책임감까지 동시에 잃어버


리고 있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냥 떠넘겨 버리자,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상태였다.
현장반 안에서 “괜한 일을 시키고 있다” “남의 일을 대신 해 주고 있다”, 그런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어쨌든 이쪽은 협력을 간청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것도 부활동 때문에 바쁜 사람들에게 굳이 시

간을 할애해 달라고 부탁 중인 구도가 된 상황이다.


어느 쪽이 우위에 서 있는지는 명백하다. 무언가 보수라도 지불된다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
지만, 그런 보증도 없다. 무슨 체육계 부활동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껏 관례적으로 운동
부에서 일을 돕도록 차출되어 왔을 뿐이다.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 이상, 동기 부여를 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위기가 정체되어 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회의는 계속 진행된다.

“다음은 메인 이벤트입니다만…… 어떻게 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메구리 선배가 유키노시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일단 수뇌부 쪽에서 맡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이외의 잡무가 늘어난 탓에

좀처럼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남자부 종목에 대해서는 동선 확인까지는 끝난 상황입니다. 현안 중인 대장 선출에 관해서는 홍
팀 쪽의 후보 선출 및 하야마 군과의 확인 절차를 거칠 예정입니다.”

아무런 막힘도 없이 유키노시타가 답한다. 뭐, 장대 눕히기라면야 별 대단한 준비도 필요치 않다.

룰도 단순하므로, 말 그대로 대장만 선발하면 그걸로 끝이다.


문제는 다른 하나, 즉 치바전 쪽이다.
“여자부 종목에 대해서는……”
유키노시타가 입을 열자마자 웅성대는 소리가 한층 더 크게 번졌다. 그 중심으로 눈을 돌리자

여자들 몇 명이 무슨 비밀 대화라도 하듯이 서로 속닥거리며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그것을 인지하고 유키노시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적받은 여자는 자세히 보니 하루카였다.

“저기……, 그, 기마전? 에 대해서 말인데요, 조금…….”


하루카는 유키노시타 쪽으로는 시선을 향하지 않은 채, 무리들 내에서의 반응을 힐끔힐끔 살피
며 천천히 이야기한다. 무슨 답 맞추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이어질 말을 계속 기다렸다.
문득 옆에 앉아 있던 유이가하마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이거 우연인데, 나도 마침 딱 그런 심경
이었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투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말끝을 흐리는 것은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은 좋지 못한 말이


다. 대개 나한테 말을 거는 인간들이 늘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안다. 뭐야 이거, 나 아무
래도 엄청난 에스퍼 아냐? 조만간 아버지가 누드모델을 시킬지도 모르겠다.8
다음에 이어질 말은 무엇일까. 대충 예상은 되지만, 유키노시타는 짐짓 이어지는 말을 재촉한다.
“조금……, 그래서요?”
평소에도 시선 하나는 날카로운 유키노시타지만, 그 청량한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마치 서릿발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눈빛에 제압당한 하루카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등 뒤에 있는 수


많은 아군의 존재를 떠올린 것인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게, 기마전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해서. ……그 왜, 대회를 앞둔 부활동도 있으니까, 다칠 가
능성이 높은 건 별로 내키지 않아서, 하는 말인데…….”

거기에서 말을 끊고, 하루카는 마른침을 삼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짧은 텀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우리

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주저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의외로 가장 먼저 그 경직에서 풀려난 것은 사가미였다. 의자를 덜컹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다.

“어, 어째서 갑자기, 그런……!”


입을 뻐끔거리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이미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하루카와
윳코에게 시선을 맞추고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우린 부활동도 중요하니깐.”


하루카도, 윳코도,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대의명분이 있다. 사가미와의 일시적인 화
해극을 벌이는 중에 암암리에 부활동을 우선시해도 된다는 언질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녀들
본인들이 말했던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그 말에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사가미, 나아가서는 우리

수뇌부가 그것을 간과해버린 탓에, 그녀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주고 말았다. 원래라면 그 순간
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서라도 반박을 가해야만 했다. 한 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빌미로
더 많은 양보를 강요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딱 잘라 거절해야 할 것이다. 자칭・세계의 경찰도 자주 하는 말이다. 테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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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에스퍼 마미(エスパー魔美)’의 주인공 사쿠라 마미(佐倉魔美)의 패러디. 화가인 아버지를

위해 누드 모델을 한다는 설정으로 유명.


굴하지 않겠다고. 실제로 그 대응은 잘못되지 않았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 드는 행위를 용인하는 듯한 자세는 결코 취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수뇌부 쪽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확인하고자 조용히 메구리 선배 쪽으로 눈짓을 보냈더니,
그것을 알아차린 메구리 선배는 미소와 함께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사가미에게 시선

을 돌린다.
아무래도 메구리 선배는 사가미에게 결정을 일임하고자 하는 눈치였다.
정작 사가미 본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결정된 사항이고……”
사가미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꼬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흘끗 쳐다본 다음
하루카와 윳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로 아이컨택을 주고받고는 다시 사가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치만, 아무리 결정된 사항이라도, 그게 잘못됐다면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고 보는데.”
“역시 잘 생각해 봤더니,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도 들고.”
둘이서 마치 처음부터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언변을 토했다.

아니, 실제로 미리 준비해 왔을 것이다.


저 자리 배치만 보아도 그러하다. 자신들과 의견이 가까운 자들로 주변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앉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압력을 가할 때에는 수적 우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회의 전부터, 혹은 회의 중에도 은근슬쩍 별 것 아닌 일에 불만을 토로하고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 정도면 반발심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사가미에 대한, 그리고 수뇌부에 대한 불만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딜 가나 수동적
으로 일하고 있는 자들은 불만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험담이란 것은 곱셈과 같다. 기하급수 9처럼 증폭되어 간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고 봐

도 될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불만은 작을지라도, 그것이 한데 모이면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인식


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심지어는 본인들이 무슨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정의의 사자나 혁
명의 투사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까지 가져다 준다. 자기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지각하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부분을 정당화시켜 준다. 모두가 같은 의견이

라면 자신의 의견 또한 정당하다고 맹신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명확한 거절 의사를 표시하는 수법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불만을 가진 자들
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자기 말고도 불만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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倍々ゲーム. FX 마진거래나 룰렛 따위에서 승리할 때까지 판돈을 배로 늘려 나가는 전법을 가리

키는 듯.
으로 알려짐으로써 그자들 역시 동조하게 된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뇌부 쪽이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 자리에서 철저하게 하루카
일당의 의견을 완전히 깨부술 필요가 있었다. 동물의 세계처럼 어느 쪽이 강한지를 확실하게 보
여줘야만 하였다.

아마 이 경우 유키노시타라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다소 폭론을 퍼부을 수는 있겠지만 그 자


리에서 바로 논파해 냈겠지. 유이가하마였다면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는 아니~ 그게 아니라 같은
소릴 하면서 교섭의 실마리를 찾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
하였을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사가미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와서 그런 소릴 하면……”

사가미는 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초조한 탓인지 안색도 좋지 못하다. 마치 쓰러지듯이 의자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이걸로 형세는 결정되고 말았다.
수뇌부의 책임권자인 사가미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수면 위로 파문이 퍼지듯 웅성거리는 소리

또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기마전은 좀 위험하지.”

누군가 한 마디 툭 던졌다. 하루카도 윳코도 아닌, 현장반 누군가가 말했을 것이다. 또 다른 목


소리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이제 대회도 코앞이고…….”

“애초에 의상 같은 걸 준비할 시간이 어딨어.”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너

나 할 것 없이 제멋대로 툭툭 던지고, 거기에 편승하여 또 떠들어대는 탓에 도저히 수습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런 불만과 의혹의 도가니로 변해버린 회의실에 짝짝 손뼉 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자~ 주목!”
시선을 돌리자 메구리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여러분의 불만 사항은 잘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이쪽에서 반드시 마련해 드릴게요.”


그렇게 선언한 다음, 서둘러 이 화제를 중단시켰다.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이럴 때의 대응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
은 바로 해산시켜서 불길이 더 옮겨붙기 전에 불씨를 제거하는 게 좋다.
최대한 더 빨리 중단시켰어야 했지만, 정작 메구리 선배 본인은 사가미를 시험하고자 잠자코 있

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뭐, 우리도 사가미에게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이상 뭐라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겠지…….
“우선은 다른 작업 쪽을 확인해 보자구요.”
메구리 선배는 더 이상 이 화제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게끔 선언한다.
하지만, 현장반 무리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수근수근 무언가를 서로 속삭인다. 아무래도 저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게 둘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의혹 어린 음습한 시선들이 메구리 선배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하루카와 윳코 일당이 떠드는 말 따윈 약아빠진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뻔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우려가 기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안전 확보는 분명 우리 수뇌부 쪽이 고려해야 할 문제다. 더군다나 각 부활동에서 대회를 앞두
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민감한 문제임은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체육 수업 같은 것도 못하는 거 아닌가…….

걷다 보면 부딪치고, 뛰다 보면 넘어지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게 된다. 그저 살아가


는 것만으로도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정신론이나 원칙론을 따져 본들 아무 의미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상
대편을 물러서게 할 무언가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면 해산조차 해 주지 않을 것 같다.

현장반 인간들이 시선으로 압력을 가한다. 불만으로 가득한, 그리고 조소와 모멸이 뒤섞인 시선
이 우리들에게 박혀 온다.

이제까지 지시를 받기만 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제시
하지 못하는 수뇌부는 무능하게만 보일 것이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는 시시콜콜 간섭하는

주제에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다니, 형편없는 상사가 따로 없다.

허나, 이쪽을 너무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런 도전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진심으로 응전해 줄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승부사가 이쪽에 있
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녀석은 말도 안 되게 우수하기까지 하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지금껏 아무 말 없이 팔짱만 끼고 있었으나, 그 팔짱을 풀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유키노시타 양, 말씀하세요.”
메구리 선배에게 이름을 불리자, 유키노시타가 소리 없이 의자를 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아가 마커를 손에 쥐었다.

“대응책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현재, 몇 가지 유효한 방안이 있습니다.”


무언가 시작되려는 듯한 분위기에 회의실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 시선들을 등 뒤로 받으며 유키
노시타는 거침없이 판서를 시작하였다.
“우선, 첫 번째로 구호반의 설치, 그 다음은 지역 소방서와의 제휴, 규칙의 준수, 처벌 강화, 감시
강화. 물론 그에 따른 인적 비용은 다소 소요되겠습니다만……”

말을 이어가면서 유키노시타는 판서를 계속 해 나간다. 너무나 담담한 모습이었기 때문인지, 전


부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쓰고 나더니 몸을 돌려 이쪽을 돌아보았다.
“구호반은 양호 선생님과 상담한 다음 자체적으로 설치하기로 하고, 지역 소방서에 대한 연락은
학교 측에서 정식으로 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메구리 선배에게 시선을 보내자 선배도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거기에 대해선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학생회에서 학교 측에 요청해 두기로 할게.”


신속하게 승낙을 받은 후, 유키노시타는 다른 무리들에게 의문을 품을 여지조차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간다.
“규칙에 대해서는 명문화된 규율로 사전에 통지하는 한편, 교사 측에 협조를 구하여 감독해 드리
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위험 행위는 억제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논리 정연한 설명은 실로 유키노시타다웠다.

현장반 인간들도 각 사항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듯 검토해 간다. 작은 목소리로 술렁대며 상의


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었다.
“어떡하지?”
“글쎄, 그렇다면……”

“그래도……”
“그치.”

“하지만 뭐…”
그것은 의견의 교환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확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뉘앙스를 판독하고, 본인 또

한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언어 외적인 대화가 반복되었고, 곧이어 그 흐름은 가장 먼저 말을 꺼냈던 하루카와 윳코 쪽으


로 집약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눈짓을 교환하더니 이번에는 윳코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닌데……”

유키노시타에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인지 시선은 발밑 언저리를 이리저리 떠돌 뿐, 가끔씩 상황을


엿보듯 유키노시타 쪽을 힐끔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유키노시타는 마주쳐 오는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그 차갑고도 맑은 눈동자로 윳코를 주시하
고 있었다. 그 시선에 윳코의 목소리는 점점 꼬리를 내려 간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기가 한 발언

은 철회하지 않은 채, 그저 아으으 하는 작은 신음 소리만 이어갈 따름이었다.


이미 이론을 내세워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상황이 아니게 된 모양이다. 한 번 엉키기 시
작한 실은 아무리 풀어 보아도 금방 또 뒤엉키게 되는 것과 비슷하였다.
원래부터 수뇌부 쪽이 무리해서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을 뿐.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난 것만으로
도 쉽게 와해될 주장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실제로는 몇 초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경직된 분위기는
그렇게 생각되기에 충분하였다.
딱히 시계를 보고 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루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시간이……”
그 한 마디가 계기가 되어 다른 멤버들도 시계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이, 일단은 대책도 세웠으니깐, 오늘은 그만…….”

유이가하마가 일어서 있는 유키노시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래. 이쪽에서는 보다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가도록 하지요.”
“그럼, 일단 해산하기로 해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작업이 있는 분들께서는 남아 주세요.”
메구리 선배가 유키노시타의 말을 이어받아 그렇게 말했다. 온화한 목소리 덕분에 팽팽하던 긴
장감이 일거에 풀리고, 이어서 이완된 분위기가 돌기 시작한다.
남아서 작업할 무리들 사이에서도 다소 머뭇거리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하루카와 윳코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에 뒤따라 또 여러 사람이 회의실을 나간다. “부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


겠다”는 언질이 있는 이상, 딱히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은 이들은 그 광경을 눈으로 좇는다. 수뇌부 측도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안도의 한숨이 아니다. 오히려, 체념의 한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시간 초과로 회의 및 작업 시간이 종료되고 나서야, 우리는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한 게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였다.


결국, 오늘도 수뇌부 측은 풀 가동으로 업무를 떠맡아야 할 처지가 된 모양이다.

남은 시간과 남은 인원, 덤으로 안전 대책 문제까지 새롭게 불거져 나왔음을 감안해 볼 때, 무슨

수를 써도 기일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줄어든 덕분에, 열어놓은 창문에서는 선선한 가을 바람이 잘도 들어온다.
통풍이 잘 되는 직장이란 그냥 사람이 적다는 뜻이잖냐,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지독한 근로 환경을 나도 모르게 돌이켜 보고 말았다.


2. 은밀하게, 카와사키 사키는 질문한다. (pp.34-67)

입장문 및 패널을 비롯한 제작물들을 만드는 한편, 장대나 로프 같은 자재들을 모아 끝난 것부

터 체크 리스트에 기입해 나간다.


시시하지만 끝이 보이는 작업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지금처럼 사
람이 적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이다.
체크 리스트 최하단에는, 손글씨로 “치바전 안전 관리에 대하여”라는 항목이 추가돼 있었다.
그 문자열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회의실에 있는 수뇌부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자, 이제 어떡하나…….”
메구리 선배가 우웅~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말한다. 그 말에 뭔가 같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
던 것인지, 팔짱을 낀 채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이가하마가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치만, 유키농이 설명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렇지. 솔직히, 그걸로도 납득을 안 해 주면 진짜 답이 없겠더만.”


나도 유이가하마의 말에 동조한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렇게나 조리 있는 방안을 내놓은 유

키노시타의 능력은 역시 감탄할 만 하지만, 그럼에도 현장반 무리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다면 이건 더 이상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란 뜻이 된다.


발단이 된 것은 감정적인 갈등. 사가미에, 그리고 수뇌부에 대한 반감.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유치해 빠진 이유 같지만, 인간의 본질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감정의 문

제는 다루기도 힘들고 손쓰기도 힘들다. 때로는 감정의 대립이 비극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호

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감정은 사람까지도 죽일 수 있다.


문득,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사가미가 중얼거렸다.
“나만 그만두면 되는 걸까…….”
그것은 조금 뜻밖인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사가미의 목소리와는 달리 어딘가 진지한 듯 들리기

까지 하였다. 그 이유는, 그 말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사가미 자신을 향해 던지는 듯


한 말투였기 때문이리라.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아 보였다.
갑작스레 꺼낸 그 한 마디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조용해진 회의실 안에 유이가하마가 조심스레 팔짱을 바꾸어 끼는 소리가 들린다.
“……글쎄.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

예전에 그와 비슷한 말을 유이가하마가 아닌 유키노시타가 꺼낸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사가미를 시험하고자 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유이가하마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어딘가 사가미를 걱정하는 듯한 인상이 느껴졌다.
그것은 사가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문득 체념 섞인 쓴웃음을 짓는다. 이미 사가미
본인이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지금은 이렇게 꼬여버렸지만, 다음에도 기회는 또 있으니깐. 언젠가 사람들도 알아주게 될 지도


모르고 말야…….”
“응…….”
유이가하마의 말에 힘없이 끄덕이고, 사가미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건 분명 유이가하마의 위
로 같은 말에 한 점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테지만.
사가미는 이미 포기한 것이다. 위원장을 맡는 것도, 하루카와 윳코 일당과 화해하는 것도.

본인이 그걸 바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사가미는 남의 위에 설 만한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제 건에서도 충분히 확인된 바
있다.
이번에 우리가 받은 의뢰는 체육제를 성공시키는 것, 그리고 사가미를 어떻게든 하여 2학년 F반

의 분위기를 정상화시키는 것.
아마도 이 정도로 상심한 사가미라면 앞으로 한동안은 얌전히 조용하게 지내게 될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과거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폄하하기


시작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사가미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사가미를 침묵시킬 수 있다.

그 다음은 사가미가 사임한 후 전력을 다해 체육제 운영을 커버해 가면서, 어떻게든 대회를 성
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의뢰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최선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타당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번 일에서의 타협점은 이 정도가 한계 아닐까.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의자 소리가 덜컹 울린다.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유키노시타가 의자의 위치를 바로잡았던 모양이다. 유키노시타는 그때까
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곧은 자세로 사가미를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니?”

“……어?”
고개를 든 사가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다음’도 ‘언젠가’도 이젠 없을지도 몰라.”
유키노시타의 말은 마치 차갑고 날카로운 가시 같았지만, 목소리 자체에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미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만약 도발적인 음성으로 말했더라면, 무슨 대답이든 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들 때, 괴로울 때 전해져 오는 상냥한 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자기 자신
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인지를 똑똑히 보여주게 되니까, 연민받을 정도로 왜소한 존재임이 입증되
니까, 누군가의 상냥한 배려에 구원받고 있을 뿐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마니까.
차라리 가혹하게 대한다면 상대방의 몰이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 테니, 그나마 마음만은 편
할 것이다.
사가미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바로 그만두겠다고 대답하지 못한 그 시점에서, 사가미가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사태가 여기까지 치달은 이상 이미 위원장 사가미의 존재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 노동력으로서의 사가미가 한 명 줄어들 뿐이다. 이미 리더십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수준의
상황이 아니다. 위원장으로서의 사가미는 확실히 불필요하다.
하지만, 그만두는 걸로 사태가 해결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게 먹힐 수 있는 단계는

벌써 오래 전에 지나간 상태다.
지금 여기서 사가미가 그만둔다고 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심정적으로는 다소 개선이 될지도 모른다. 저쪽의 요구가 훨씬 심플하게 “사가미가 마음


에 안 든다”는 것뿐이라면 그걸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쪽에서 묘한 구실을 내세우는 바람에 사태 수습은 더욱 난해해지고 있었다.

안전 관리와 부활동.
별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긴 하지만 그녀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증오심을, 그 감정론을 어떻
게든 조리 있게 설명하려고 한 결과 그런 기묘한 이론이 성립되고 말았을 것이다.

감정에서 비롯된 이론은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 이번 같은 경우는 사가미 및 수뇌부가 마음

에 들지 않는다는 결론이 먼저 나온 다음, 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론이 성립되어버린 상


태다.
그 논리는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논파한다 하더라도, 상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는 이
상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이상한 이론으로 무장해 버린 탓에,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렇게 될 경우 남은 것은 승자 없는 진흙탕 싸움뿐이다.
“난……”
사가미는 고개를 숙인 채 있는 힘을 다하듯 목소리를 짜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시 꺼져
들었고, 이어지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모두 묵묵히 사가미가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유키노시타는 다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유이가하마는 진지한 눈빛으로 사가미
를 바라본다. 나는 턱을 괸 채 “손톱 꽤 자랐네” 같은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면서 귀를 쫑긋 세
우고 있었다.
단 한 명. 오직 한 사람만이 뜻밖의 행동을 취했다.
메구리 선배는 으흠 하고 조금 어색한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가미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


“에?”
사가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리액션을 취하는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이기는 하
지만, 뭐, 그럴 수밖에. 이제까지 사가미가 저지른 행동들을 본다면 빈말로라도 잘 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메구리 선배도 두 사람의 솔직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모양인지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덧붙여 말
한다.
“아, 그게, 있지…… 으, 음~, 사실 일 처리가 아주 훌륭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나도 딱
히 일을 잘 하는 편은 아니라 그런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눈에 다 보이는걸.”

조금 의외…는 아닌가. 확실히 메구리 선배는 실무 능력은 고만고만하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그렇


다고 통솔력이 눈에 띄게 좋은가 하면 그런 이미지도 별로 없다.

그 점은 메구리 선배 본인도 조금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움을


감추듯 뺨을 긁적였다.

“아니~……, 내 전대 선배들은 진짜 대단한 분들이 많았거든. 그, ……하루 선배처럼.”

마지막에 짧게 덧붙인 이름에 유키노시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 뛰어난 실무 능력은 물론, 겉과 속을 모두
꿰뚫어 보며 인심을 장악하는 통솔력은 실로 두려울 정도다.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인물

넘버 원이다.

“난 툭하면 맹하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진짜 그렇더라구……. 아하하, 학생회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야.”
그 말에 학생회 임원들은 희미하게 눈물을 글썽거린다. 개중에는 엉엉 울며 감동하고 있는 녀석
도 있었다. 너네들 대체 얼마나 심취해 있는 건데?

하지만 그 사실이 보여주듯이 메구리 선배는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간신히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뒤집어 보면 사가미에게는
그런 매력이 없는 셈이 되겠지만, 뭐, 지금은 그런 얘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니까, 사가미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열심히 해 왔으니까, 좀 더 해 보는 게 어
때?”

메구리 선배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이 사람의 사랑스러운 인품


과 잘 어울려서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무도 적극적으로 사가미를 만류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직 메구리 선배만이 사가미의 변화를
성실하게 평가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일을 맡기려 하고 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학생회 임원
들에게 존경을 받고, 지금도 이렇게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사가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마도 문화제, 체육제를 통틀어 처음으로 그녀가 제대로 평

가받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메구리 선배가 마치 다짐을 받듯이 “어때?” 하고 웃으며 말하자, 사가미는 작게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유이가하마도, 학생회 임원들도 작게 탄성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유키노시타도
딱히 미소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역시 조금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습이 그리 아름다운 광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가미는 그 선택으로 인해 지금보다도 더욱 괴롭고 힘든 처지에 놓일 것이다. 입어도 되지 않


았을 상처를 그 몸에 새기게 될 것이다.
상냥한 배려는 독이다. 그녀를 돕기 위한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든
다.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이건 일

부러 비난의 표적으로 나서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게 해서 만약 잘 풀린다 할지라도 과거의 원


한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서로 치고받고 싸워 봤자 우정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악감정 위에 좋은


감정을 덧칠할 수는 있어도, 결코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베일이 벗겨지면,

증오와 혐오가 고개를 내민다.

따라서, 사가미의 결의에도 분발에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각오한 채 앞에 나서려 하는 거라면.
거기에는 의의가 있다.

몰이해를 향한 반란, 다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는 저항.

영광스러운 고립의 길을 걷는 자를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냥한 배려에 의해 꾸며진


끔찍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광경을, 그 결단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건데?”
따라서 나는 내 안에서의 판단을 보류하고, 현재의 사안부터 먼저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당연하지만 내게 사가미의 결의에 훼방을 놓을 권리는 없다. 충고할 의무조차 없다. 사가미 역시
내 조언 따위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사가미는 이미 결정했다. 위원장의 교체는 없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방침을 정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철저하게 마련해야만 한다.
그런 문제 제기에 대해 곧바로 반응한 것은 유키노시타였다.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 상대편 쪽에서 굽히고 들어오게 만들 수밖에 없겠지.”
여전히 멋지구나, 이 녀석은. 사가미가 내린 답을 존중할 방침인 모양이다. 서로 대립 중이고, 그
양보 또한 바라기 어렵게 된 이상, 남은 길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쳐부수는 것밖에 없다.
그 방침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유키노시타의 말에 사가미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찡그린다. 지금 와서는 언행도 제법 신중해진

듯 보였다. 그 다음 말을 메구리 선배가 이어 말했다.


“어떻게 하면 굽히고 들어오게 만들 수 있겠어?”
그게 문제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나도 유키노시타도 아직 제대로 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잠시 숙고를 거듭하고 있자 유이가하마가 머뭇머뭇 손을 들었기에, 어디 한 번 말해 보라고 고개
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서, 설득, ……같은 건 어때?”

유이가하마가 자신 없는 듯 말한다. 그야 뭐, 기본이라면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현


재 상황에서는 별로 유효한 수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벌써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이렇게 된 거거든…….”
지금까지도 입이 아플 정도로 설득해 왔고, 작업 스케줄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게다가 그 작업

스케줄까지도 현장반을 위해 조정해 왔다.


양보와 타협을 진행한 결과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그 과정을 직접 보아 온 메구리 선배도

내 말에 찬성하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게다가 모두에게 동기 부여를 할 필요도 있으니까……. 괜한 말을 했다가 의욕만 더 떨

어뜨리는 경우가 제일 곤란할지도 몰라.”

메구리 선배가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하마도 납득한 것인지 우웅~ 하고 또 복잡한 표정을 하며
팔짱을 낀다. 하지만, 나는 왠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동기 부여라는 말이 심히 마음에 걸린다. 대체 어디에 동기 같은 게 있었다는 것일까.

사가미를 편들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하루카와 윳코 일당의 편을 들 마음도 없다.

양쪽 모두 바르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따라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냥 현장반 전부 때려 치우게 하는 건 어때요? 그러고 나서 새로 모으든지 하죠.”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반은 진심이란 뜻이다.
한 번 꼬여버리고 나면 무슨 수를 쓰든 아무 소용도 없다. 이쪽에서 그만둘 생각이 없는 이상,

상대 쪽이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지극히 간단한 이론이다. 게다가, 어중간하게 화근을 남길 바에


야 차라리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음~. 시간상으로 볼 때 기일에 맞추기 힘들 것 같아.”
메구리 선배의 이마에 꼬깃꼬깃 주름이 생기고, 미간에 골이 잡힌다. 남은 날짜로 보면 어느 정
도 여유는 있어 보이지만 주말에는 작업이 불가능하고, 메구리 선배의 말대로 처음부터 다시 인

원을 모을 만한 시간도 없어 보인다.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래도, 현재 이 인원 구성으로 진행해 봤자 어차피 기일에는 맞출 수 없다.
문득 유키노시타가 입을 연다.
“……새로운 전력을 투입할 필요는 있겠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일에 투입하는 건 어려울 테
니까, 몇 가지 항목으로 좁힌 다음 어디까지나 업무 지원이라는 형태로 한정시키지 않으면 현실

성이 희박하겠지.”
“차라리 우리 쪽을 보강하자 이건가.”
그 말에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턱에 손을 얹는다.
“그래. 이제까지 현장 쪽을 지원하느라 발생한 우리 쪽 업무 지연을 만회하기 위한 방안으로 봐
야 하겠지.”
그렇다면 새로운 전력은 어떻게든 조달해 온다 치더라도, 기존의 전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계속해서 곰곰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손가락을 척 세운다.
“둘 다 지금 있는 사람들하고 협력하는 방안은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젠 협력해 주지 않을 거야…….”

사가미가 미안한 듯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최대의 약점을 잡히고 있는 상황이니까.”

유키노시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본인 말마따나 난감한 모습 10 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약점… 이라.

확실히 그렇다. 전력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현장반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조건이 된다. 이


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우리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체육제의 성패는 그들 손에 쥐여진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강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기들이 돕지 않으면 체육제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돕지 않아도 괜찮겠느냐고


협박해 오고 있다. 하물며 그렇게 나오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녀들은 자기들과 가까운 무
리들의 의사를 한데 모으는 것으로 현장반 전체에 그런 분위기를 가득 채웠다.
절대 강자의 입장을, 수적 우위를 무기로 휘두르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나의 적이다.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녀들은 협력하지 않는다. 그런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게 뭐 하는 짓이냐고. 나도 툭하면 부려 먹히는 쪽인데, 왜 여러분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하
고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그러시는 거냐고요. 니들 지금 나 무시하냐? 중간관리직 좀 무시하지
말라고.

10
弱った様子. 弱る는 약해진다는 뜻과 난처해진다는 뜻을 가짐.
정당하지 못한 것은 질색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질색이다. 거기에 이유를 붙여 가며 어떻
게든 납득해 보려는 내 모습 역시 질색이다.
저쪽이 이치에 맞지 않게 나온다면, 이쪽은 더 이치에 맞지 않게 나갈 것이다. 불의가 판치기 시
작하면 정의가 설 자리는 없는 법이다.

그녀들은 체육제 자체를 인질로 잡고 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체육제 준비를 진행하지 않
을 거라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자각적인 행위인지는 차치해 두더라도, 결과
만 놓고 보면 그런 상황이 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취해야 할 수단은 오직 하나.
“우리도 같은 수법을 써먹어 볼까…….”
“무슨 뜻이야?”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요약하자면 이건 우리하고 현장반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거든. 저쪽은 파업이라고나 할까, 일종
의 사보타주로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셈이지, 체육제 개최를 인질로 잡고 말이야.
“……포타주.”

왠지 유이가하마는 그 부분만 따라 말하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이지만, 이 녀석은 아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모양이네……. 옥수수도 감자도 상관없고,

덤으로 사우다지11하고도 아무 상관 없다고. 비슷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뜻이거든.


유이가하마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한편, 유키노시타는 미간을 찡그리고 차가운 시선을 내 쪽으

로 던져 왔다. 뭔데, 번거로워서 싫냐?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그 물음에 나는 마침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른바 상호확증파괴란 거지.”

그 한 마디로 유키노시타는 대략 무슨 이야기인지 간파한 것 같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

더니, 긴 한숨을 내쉰다.


“정말 질렸어……. 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구나. 정말 정정당당하게 꼼수를 부린다고 해야
하나, 통쾌할 정도로 성격이 꼬였다고 해야 하나…….”
“그거 뭐 칭찬이냐?”

별 생각 없이 물은 말에 유키노시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두세 차례 눈을 깜빡인다.


“어머, 그렇게 안 들렸니?”
“안 들리거든…….”
그렇게 대답하자 유키노시타는 금세 표정을 바꾸어 이번에는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한다.
“그래. 칭찬한 건 아니야.”

11
Saudade. 향수 등의 여러 정서들을 포괄하는 포르투갈어.
역시나. 난 또 여전히 남을 칭찬하는 센스가 형편없구나 싶었다고. 습관이란 무섭구만. 하지만
이 아이, 남을 칭찬하는 척 꾸미고 허를 찌르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스킬만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
하는군요. 그 성장을 조금은 다른 쪽으로도 돌렸으면 좋겠는데……. 절대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마
음속으로 험담을 퍼부으며 갚아 주고 있는데, 유키노시타는 피식 하고 무척 작은 소리로, 자칫하

면 놓쳤을 뻔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은걸.”
유키노시타는 생긋 하고 승부욕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수세에 몰려 있는 것보다 공세로
돌아서는 쪽이 유키노시타의 성격에 더 잘 어울린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사전 준비와 교섭이 필요하겠는걸…….”
중얼중얼 혼잣말을 입에 담으며, 유키노시타는 다시 입가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그 미소에 넋을 놓을 뻔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역시 이 녀석은 무섭다니까…….


즐거운 표정으로 계획을 짜는 것도 무섭지만, 고작 단어 하나로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간파해
내는 것도 무섭기 그지없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나와 유
키노시타가 주고받는 말에 조금 당혹스러워 하는 모양새였다.

“히키가야, 설명 좀 부탁해도 돼?”


메구리 선배의 물음에 나는 선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도 녀석들의 체육제를 인질로 잡는 거예요.”


“뭐어?”

사가미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분위기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이 자식,

짜증나네……. 그 말투가 짜증난다고, 말투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구리 선배에게는 귓속말로 가르쳐 주고 사가미에게는 “너한테는 안 가
르쳐 주지롱~” 하는 초딩 같은 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거 당해 보면 무지 열받는데다가

꽤 진지하게 상처받거든……. 들려주기 싫은 말이면 일부러 내 앞에서 비밀 얘기 같은 거 하지 말

라고. 초등학생들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니까.


나도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다. 이미 어엿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므로 고등학생답게 치사하게 에두
른 표현으로 설명하기로 했다. 사가미 상대로 순순히 다 털어놓는 것도 마음에 안 드니까.
“녀석들이 간절히 기다렸을 체육제고 뭐고 다 빼앗고 망쳐 놓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면 어디

한 번 덤벼 보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죠.”


하지만 우회적인 표현이 조금 지나쳤는지 별로 잘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라, 사가미는 물론이고
메구리 선배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덤으로 유이가하마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구리 선배와 사가미는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하고 서로 확인하듯이 얼굴을 마주본다.
메구리 선배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고, 사가미는 자존심에 걸리는 모양인지 나에게 물어

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런 마당에 혼자만 불쑥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이가 있었다.
“……그,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야?”
유이가하마는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아니, 그렇게 잡아당기는 거 묘하게 부끄러우니까 하
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창피한 마음에 슬쩍 몸을 움직여 그 손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온 다
음 설명을 시작한다.

“녀석들이 사가미가 빠지기를 암암리에 요구한다면 우리도 녀석들에게 빠져 달라고 요구하는 거


지. 그것들이 숫자를 믿고 덤빈다면, 우리는 더 큼지막한 뒷배경을 준비하면 되는 거야.”
절대 강자의 입장을 무기로 휘둘러 온다면, 이쪽에서도 같은 검을 휘둘러 준다. 수적 우위를 앞
세워 온다면, 같은 칼로 상대해 준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당한 만큼 갚아준다. 간단한 이야기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 유이가하마가 손뼉을 탁 쳤다.


“과, 과연……. 알았어! 아마 대충은…….”
말이 뒤로 갈수록 유이가하마의 목소리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하긴 어느 정도는 구체적으로 들어 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

고 있던 유키노시타에게 말을 걸어 실제 실행에 옮길 작전을 확인한다.


담담하게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회의에서의 기본 방침을 설명한 다음, 그러기 위한 대책을 모

두와 상의하였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소도구 같은 것도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다.

모든 설명을 마치자 메구리 선배가 호와~ 하고 감탄한 듯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나를 말끄러

미 바라봐 온다.
“……어라, 왜 그러세요.”
하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 물었더니, 메구리 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으응, 아무 것도 아냐. ……히키가야는, 역시 악질이구나.”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회의를 미리 준비하는 한편 그 외의 세부 조정들 역시 결정해 나가야 한다. 위원회 내에서


의 분열은 그렇다 치고, 수뇌부 쪽의 실무 관련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지 않으면 체육제 자체가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다음 날은 현안 사항인 메인 이벤트 부분을 처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중요한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치바전 의상에 대해서이다. 의상의 비용 절감 방안 및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얼마 전 자이모쿠자와의 메일을 통해 대략적인 얼개는 그려 두었다.
방과 후, 미팅에 들어가기 전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타겟이 돌아가버린다. 외톨이의 저녁은 이르기 때문이다. 마치 시마카제처럼 날쌔


다12 할 수 있다.
내가 말을 걸려고 그 녀석 근처로 다가가 보니, 마침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훌쩍 가방을 메고
있던 참이었다.
나른한 발걸음을 한 발 내딛자 푸른 빛이 도는 긴 흑발이 찰랑인다. 그 머리를 묶고 있는 것은
의외로 손수 만든 헤어 슈슈.

카와사키 사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어딘가 권태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언짢은 듯 가


늘게 뜬 그 눈은 이미 출입문을 향하고 있다.
나는 카와사키 쪽으로 소리 없이 조용히 접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뭐라고 말을 걸어야 좋
을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글쎄, “야~!” 같은 그런 느낌? 시원하게 재수없네……. “여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고. “저기”나 “그게”나 “있잖아” 같은 게 무난하려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뭔가 이


름도 기억 못해서 그렇게 묻는다는 느낌이 들진 않을까. 그렇다고 “카와사키”하고 이름으로 부르

는 것도 위험 부담이 상당히 크다. 왜냐면 저 녀석 이름이 진짜 카와사키가 맞는지 틀린지 자신

이 없으니까. 게다가 사키(崎)라는 글자는 사키라고 읽는 경우하고 자키라고 읽는 경우가 있잖아?


그거 은근히 헷갈리거든. 하나로 통일 좀 해 달라고.
그런 식으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으음… 하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바람에 카와사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꺄악!”
카와사키는 나를 보자마자 무척 놀란 듯 짧게 비명을 지르고는 황급히 몇 발짝 뒷걸음을 쳤다.
마치 닌자라도 본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래져 있다. 닌자!? 웬 닌자!?13 하고 말할 기세다. 아니, 너
무 심하게 놀라는 거 아니냐…….

자기가 취한 리액션이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카와사키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

12
速きこと島風の如し. 소스는 ‘함대 컬렉션’의 시마카제(島風)의 자기소개 대사. 해당 대사는 손

자병법의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疾きこと風の如く)’에서 따온 듯.

13
ニンジャ !? ニンジャナンデ!? ‘닌자 슬레이어’에서 일반인이 닌자를 보았을 때의 반응.
“아, 아니.”
그렇게 노려보면 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기보다 얘 그냥 무섭다고요……. 뭐, 아까
의 리액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성은 착한 아이겠지만요, 그럼요. 마음을 다잡고 나는 대화의 실
마리를 찾는다.

“벌써 가?”
그 물음에 카와사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는 작은 소리로 대
답한다.
“……그, 그럴 건데.”
“그래?”
“……으, 응.”

그렇게 대답하더니 카와사키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내 쪽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화를 중단하고 자리를 뜰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
물러 있었다.
이런, 이거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나.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고요!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대화를 잘 이끌어 주었는지 실감이 된다……, 아주 뼈저리게 말이


다. 서로 아무 말도 못 하다 보니 왠지 어색해지는데, 뭐냐고, 이 분위기.

아무리 그래도 계속 침묵만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그래? 벌써 가는구나, 그렇구나……” 하


고 내가 봐도 찌질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데, 카와사키가 먼저 분위기를 맞춰 주려는

듯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인데?”
“아~ 그래, 맞아. 너, 지금 시간 있어?”
카와사키가 무슨 일인지 물어 준 덕분에 나도 어느 정도 말을 꺼내기 쉬워져서, 간신히 본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물음에 카와사키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또 고개를 홱 돌린다. 그리고는 겨우 들


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있긴… 한데.”
그런가, 다행이다. 이 녀석도 아르바이트니 학원이니 집안일이니 여러 가지 일로 꽤 바빠 보이던

탓에 뭐라고 대답할는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걸로 부탁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리
가벼운 분위기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평소 때보다 좀 더 성의를 담아 부탁을 전
하고자,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옷 좀 만들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고 긴 침묵이 드리웠다.


카와사키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만 몇 번 깜빡일 따름이다. 몇 초 가량이 지나고 난 다음에
야 겨우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이해한 것 같다.
“……에? 내, 내가? 네, 네 옷을? 그, 그게 무슨……”
왠지 혼란스러운 듯 당황한 모습으로 요란스레 손을 내젓는다.
말이 조금 짧았나. 양해부터 먼저 구한 다음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일단 나도 보충하는

말을 덧붙이기로 한다.
“아니, 내 거 말고. 체육제 경기에 쓰려고. 전부 다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좀 지도해 줬으면 싶은데.”
“──아아, 체육제. 무슨 말인가 했네…….”
카와사키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은 왠지 안도하는 분위기처럼 보
였다.

“그러고 보니, 너 위원회인가 뭔가 그랬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른한 듯한 평상시의 분위기로 돌아와서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카와사키가 말한다. 근데, 체육제 운영위원회 같은 건 표면상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 활동
인 탓에 관계자 말고는 대개 잘 모를 텐데.

“알고 있었어?”
내가 묻자 카와사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대답한다.

“타이시한테 들었어.”
아무래도 저번에 코마치하고 이야기하던 중에 나왔던 말이 거기까지 퍼져 나간 것 같다. 여동생

의 정보 확산 능력이 두렵다. 그리고 남매끼리 그런 말을 주고받는 카와사키 남매도 두렵다. 너네

는 왜 그런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거냐고.


“과연 브라콘답네…….”
내가 전율하며 말하자, 이제껏 딴 데를 보던 카와사키가 느닷없이 정면으로 쳐다봐 온다.

“너 맞는다.”

“죄, 죄송합니다.”
엄청나게 험악한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사과
해버리고 말았다.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진지해지기 때문에 무섭다. 특히 그 브라콘 끼가 무섭다.
카와사키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깨로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위원회라……. 전에도 그런 거 하더니, 그런 귀찮은 짓을 잘도 하는구나.”


“원래 그런 부활동이거든.”
“흐응─……”
내 한숨 섞인 대답과 카와사키의 무관심한 맞장구가 겹치면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카와사키
는 침묵을 주체하기 힘든 모양인지 딱히 별 문제도 없어 보이는 머릿결만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시선은 자신의 손 쪽을 향한 채, 여느 때와 같은 나른한 목소리로 문득 입을 열었다.


“……이유는 그게 다야?”
“뭐? 또 뭐가 있겠어.”
내가 별 생각 없이 즉답하자 카와사키는 조용히 눈을 내리뜬다.
“그래…….”
본인이 물은 것 치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묘하

게 마음에 걸려서, 이번에는 내가 질문한다.


“그게 왜?”
“아니, 그냥. 나한테는 잘 이해가 안 돼서.”
그야 당연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카와사
키의 마음가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한다 그래도 난감할 따름이다.

아무도 답을 알 수 없는데 그걸 다 이해한다는 양 관심을 보이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이쪽


은 이해도 답도 바라지 않는데 말이다.
카와사키의 묘한 물음에 이야기가 옆길로 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억지로 화제를 되돌
린다.

“아, 그래서 옷 얘기 말인데.”


“알았어, 뭐. 알바도 없어서 한가하니까.”

이번에는 카와사키가 즉답했다.


“그래, 덕분에 살았어. ……그럼, 한 시간쯤 뒤에 회의실에 찾아와 줘.”

그 말에 카와사키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오늘이야?”
“아, 응. 시간 있다며?”
“그렇긴 해도……. 하아, 그래. 알았어.”

그 이상 따지기를 포기하고 카와사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분위기로 말했다. 하긴, 느

닷없이 오늘 당장 나와 달라는 것도 조금 지나친 부탁이었나. 하지만, 이쪽도 시간이 그리 여유로


운 상황은 아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무리해서라도 협력을 받아야 하겠다.
“미안. 조만간 보답은 해 줄게.”
“……별로 그럴 필요 없어.”

나로서는 드물게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지만, 카와사키는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 × ×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오겠다는 카와사키와 헤어져, 나는 미팅이 있을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주요 멤버들은 대충 모여 있었다.
위원장 사가미, 메구리 선배, 유키노시타에 유이가하마, 그리고 학생회 임원들이다.
이번 미팅의 주요 의제는 ‘장대 눕히기’에서의 대장 선출이다.
여기에 대해 백팀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미 하야마로 점찍은 상태다. 교섭 절차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하야마 하야토라는 인간이다. 의지해 오는


이를 내칠 리 없다. 이것은 예전에 어쩔 수 없이 유도 대회를 열었을 때, 또 문화제 때, 그리고
이번에 사가미를 위원장으로 앉힐 때에도 모두 협력해 주었다는 사실로 검증이 끝난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홍팀의 대장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경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임 어드바이저, 에비나 히나의 등장이다.

“하로하로~”
정체불명의 인사와 함께 에비나 양이 유유히 회의실에 들어왔다.
“히나, 얏하로~!
인사로 화답하는 유이가하마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에비나 양은 그대로 가까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메구리 선배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일부러 오게 해서 미안해.”

“아뇨아뇨,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장대 눕히기’ 대장을 결정한다고 그랬지?”


에비나 양은 메구리 선배에게 상냥한 미소로 대답한 다음 유키노시타 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

고, 곧바로 본론이 이어졌다.

“그래. 백팀 후보로는 하야마면 문제 없겠니? 만약 그렇다면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요청하게 될


건데.”
유키노시타의 확인에 에비나 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응, 괜찮은데? 뭐, 하야마가 맡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하, 하야마가 안 맡아 주는 거야?”


사가미가 뜻밖이라는 듯 말하자 에비나 양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음~…… 글쎄, 맡아 줄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부탁해 봐야 아는 일이니까.”
“하야마라면 맡겠지.”

내 말에 에비나 양은 안경을 번쩍 빛내며 치켜 올린다. 입가 쪽에 주르륵 흘러나온 군침까지 덤


으로 반짝대고 있었다.
“어머, 뭔가 신뢰감이……”
“그런 거 아니거든…….”
나는 기막힘 반 황당 반을 합쳐 거절 100퍼센트로 대답했다. 그렇다, 절대 그런 류의 감정이 아

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하야마 하야토는 모든 일을 무사 평온하게 처리하기를 바라는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존’이라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체득한 것이고.
말하자면 무사안일주의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일은 떠맡아 주게 된다.
허나, 뭐 구태여 그런 말을 에비나 양에게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왠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무섭기도 하고.

나는 예전에 하야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야기를 가로막기로 했다.


“본인이 거들어 줄 일 없냐고 직접 말했을 정도니까, 뭐, 맡아 주겠지.”
그 말에 유키노시타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언질은 잡아 놨구나.”
잠깐, 그 말투. 말투가 안 좋아……. 왠지 내가 하야마를 속여먹고 있다는 식으로 들리지 않냐?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정정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논의를 진행시켰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유이가하마, 오늘이라도 바로 연락해 줄 수 있겠니?”


“OK~”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이가하마는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메일을 보내기 시작한다. 일단 이쪽의 핫
라인이 있는 이상 하야마가 백팀의 대장이 되는 것은 거의 확정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문제는 다른 한 명 쪽이다.

유키노시타가 팔짱을 고쳐 끼고 책상 위로 시선을 내린다. 거기에는 학생회 임원들이 만들어 준


홍팀과 백팀으로 분류된 학생들의 리스트가 올라와 있었다.

“다음은 홍팀 후보구나…….”

리스트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키노시타 옆에서, 나는 적당히 대충 넘겨 보


며 입을 열었다.
“뭐, 짝이 맞아야 하니까 하야마하고 균형이 맞는 인물이 좋겠지.”

전교의 남학생들이 모두 참가하는 메인 이벤트이다. 그 대장을 맡게 될 인물로는 인망과 인지도

를 겸비한 녀석이 좋을 것이다. 하야마는 그 점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인재다. 단지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으려 한다면 일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고심을 거듭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 저요! 하고 힘차게 손을 드는 녀석이 있었다. 에비나
양이다. 흥흥 거칠게 내뿜는 콧김으로 안경을 흐리며 멋대로 떠들기 시작한다.

“히키타니로 하면 밸런스 완전 잘 맞을 거야! 공수 밸런스가 말야!”


하하하, 꺼져.
나는 마음속으로 마른 웃음을 흘린다. 일단 지금은 에비나 양은 내버려 두기로 하자.
“하야마 같은 녀석이 또 있을까?”
학교 안 사정에 대해서는 딱히 잘 모른다고나 할까, 애초에 관심이 없는 탓에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인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유이가하마가 웅~ 하고 생각을 짜낸다.


“하야마 같이 눈에 확 띄는 사람이라면, ……토벳치?”
“그건 눈에 확 띈다기보다 눈에 거슬린다고 하는 게 맞지 않겠니?”
유키노시타가 즉각 반론했다.
진짜 너무하네, 너…….
토베는 인간 막장 급으로 답이 없는 놈이긴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안 그래?

내 희생양이 되어 주기도 했고(강제).


하지만 토베 같은 경우는 하야마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겠지. 게다가 리스트를 보니 이 녀
석 백팀이기도 하고. 뭐야, 쓸모 없는 놈이구만.
다른 홍팀, 홍팀이라면…….
리스트를 쭉 훑어 보니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자이모쿠자 요시테루……, 눈에 띈다는 의
미로만 보자면 이놈만큼 나쁜 의미로 눈에 띄는 놈도 좀처럼 찾기 힘들다. 굳이 자이모쿠자에 비

교할 대상을 찾는다면 아마 슈퍼스타맨14 정도가 있겠지.


하지만 자이모쿠자도 하야마와 비교하자면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특히 상식 같은 거. 따라서
자이모쿠자도 탈락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기억 속에서도 탈락시키고 싶을 지경이다.
딱히 이렇다 할 인재를 찾지 못해 묵묵히 리스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계속 리스트를

보고 있던 사가미가 입을 열었다.
“선배, 3학년은 어때요?”

그 물음에 메구리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꽤 얌전한 학년이라서 말야……. 하야마 같은 타입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걸.”

하야마가 얼마나 걸출한지를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닌 이야기이다. 외모도 머리도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 하고 인망 또한 갖추고 있으니 설마 저런 인간이 이 학교에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십 년에 한 번 꼴로 나온다는 명품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마다 쉬지도 않고 튀어나오는 보졸레
어쩌고15와는 달리, 아마도 하야마는 정말 뛰어난 인재라고 칭할 만한 존재일 것이다.

하야마의 삶의 태도야 어쨌든, 그 능력에 대해서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3학년에도 그런 존재가 없다면 이번에는 1학년 쪽에 생각이 미치지만, 1학년 같은 경우는 역시


학교 전체적으로 볼 때 지명도가 충분치 못하다. 이쪽도 제외시켜야 한다.
이렇게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져드는 상황 속에 고심하던 차에, 유이가하마가 무언가 떠오른 모
양새로 손뼉을 짝 쳤다.

“아, 하야토는 부장이니깐, 홍팀 쪽두 부장으로 골라서 부장 대결로 만들면 더 흥미진진하지 않


을까?”

14
만화 ‘떴다! 럭키맨(とっても!ラッキーマン)’의 등장인물.

15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툭하면 십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좋은 와인이라고 홍보해 온

탓에 나오게 된 말.
“부장 대결이라…….”
흐음. 컨셉을 갖추고 경기를 하게 된다면 다소 무리한 선발도 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직책
개념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과연 유이가하마. 폼으로 걸레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을 재미있게 기획하는 능력이

라고나 할까,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능력 면에서는 제법 뛰어나 보인다.


유키노시타도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프린트를 집어 든다.
“그게 좋겠구나. 홍팀에서 운동부 부장이라고 하면……”
“육상부, 탁구부, 테니스부……”
메구리 선배가 호오호오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고란에 적혀 있는 정보를 확인해 간다.
“그 중에 하야마랑 균형이 맞는 사람……”

사가미도 중얼거리며 리스트를 훑어 본다. 마찬가지로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간다. 그러던 중에 유이가하마가 목소리를 높인다.
“아, 사이도 홍팀이네.”
“토, 토츠카라고!?”

갑자기 호명된 예상 밖의 이름에 무심코 동요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반응은 개의치 않은 채 에비나 양이 찬성하는 어조로 말한다.

“오~ 과연. 토츠카라면 문화제에서 하야토 파트너도 맡았으니까, 커플링으로는 나쁘지 않을지도?”
커플링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방금 전력을 다해 반대하고 싶어질 뻔 했거든.

“아니, 토츠카는 무리지…….”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제기해 온다.
“어째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토츠카가 수많은 남자들에게 노려진다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큭, 어떤 놈이 이따위로 편을 짠 거야? 마법의 분류 모자?16 토츠카가 위험에 처하면 어쩔 거냐고.

넌 그리핀도~~르 하고 소리나 지르고 있으면 되거든?


그러나, 솔직히 그런 소리를 입 밖에 꺼낸다면 징그럽다는 소릴 듣는 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오
히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럴싸한 이유를 날조해 냈다.

“새, 생각해 봐, 그 뭐냐. 토츠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약체 취급 받는 테니스


부인데.”
만약 토츠카가 이 ‘장대 눕히기’에서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부활동에서 빠지게 된다면, 내가
책임 지고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테니스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잠깐만? 그거 나쁘지

16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기숙사를 분류하는 마법의 모자. Sorting Hat.
않은데. 나하고 토츠카가 함께 테니스를 친다면 피프틴 러브17가 아니라 폴인 러브가 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아니, 없거든. 없다고?
그렇게 내가 끙끙 앓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메구리 선배가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얼
굴을 들여다본다.

“히키가야, 그거 현장반 애들이 말하는 거랑 똑같은데?”


“윽, ……그, 그렇네요.”
그런가, 이것이 감정에 치우친다는 것인가. 늘 냉정한 나조차도 토츠카 이야기만 나오면 그 하루
카인지 윳코인지 하는 것들과 같은 수준의 사고로 떨어지고 만다. 토츠카, 무서운 아이.
하지만 감정론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논리적이기 힘들거든, 왜냐면 뭐, 삼 분의 일도 전해지지
않으니까. 바람의 검심 엔딩 18 에서도 그랬고. 근데 그렇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세 배의 애정을

쏟으면 전해질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어맛, 초 논리적! 나 완전 천재!


……바보냐. 살짝 반성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기가 막힌다는 모양새로 입을 연다.
“그것도 그렇지만 걱정이 너무 지나치다구. 사이도 남자란 말야.”
“게다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기에 대해서도 규칙을 엄격하게 만들고 안전 대책을 마련하

고자 하는 거니까.”
유키노시타의 말도 지극히 옳긴 하지만, 그건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경우 룰을

어기는 인간들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 걱정된다……. 그런 불안감이 점점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히, 히키가야~? 정말 참~”


메구리 선배가 볼을 부풀리고 야단쳐 온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메구리 선배의 메구
링 효과(주된 효능은 치유 및 재충전, 누님 속성의 부여 등)로 점점 마음이 진정되던 참에 에비나

양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게다가 대장은 팀원 모두가 지키려고 할 거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지켜? 내가 토츠카를? 내가 토츠카의 기사? 과연. 좋다. 그거 좋네. 그걸로 가자. 좋아요! 19 를
눌러 줄 테다.
“뭐, 그것도 그런가…….”

마지못한 척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시타가 서류 뭉치를 가지런히 톡톡 정리하며 결론을 내렸다.

17
fifteen love. 테니스에서 서비스 쪽이 1점, 리시브 쪽이 득점이 없는 경우를 말함.

18
6기 엔딩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1/3の純情な感情)’ 이야기. “부서질 정도로 사랑해도 1/3도 전

해지지 않아(壊れるほど愛しても1/3も伝わらない)”로 시작함.

19
イイネ! 페이스북의 그것.
“그럼, 토츠카에게 부탁하기로 하자.”
“찬성~!”
유이가하마가 명랑한 분위기로 말한다. 다른 이들도 이의는 없는 듯 박수 치는 소리가 훈훈하게
짝짝 울렸다.

그 소리에 섞여,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약속했던 대로 카와사키가 찾아와 준 모양이다.
다음은 ‘치바전’의 의상에 대해 카와사키의 조언을 받으며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오늘의 현
안이었던 메인 이벤트에 대해서도 이것으로 대략적인 가닥이 잡히게 된다.
이걸로 준비는 갖춰졌다.
자, 저항의 시간이다.
3. 그리고, 마지막 회의가 춤추기 시작한다. (pp.68-101)

며칠이 지나고, 다시 체육제 운영위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아마 이것이 체육제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열리는 대규모 회의가 될 것이다. 궤도를 수정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메인 이벤트는 여기서 최종적인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
아도 더는 실현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만약 여기서 또 수뇌부 쪽이 굽히고 들어가게 된다면, 현장반 인간들은 그 누구도 이쪽
의 지시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가 고비, 혹은 분수령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들 수뇌부가 회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자, 가장 먼저 히라츠카 선생님이 등장한다.
“상황은 어떠냐?”
“글쎄요…….”

“응? 무척 애매한 대답이로군.”


내 대답에 히라츠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것만은 나로서도 확실히 대답하기

힘들다.
“하아, 제가 나설 자리가 딱히 없으니 뭐라 말하기 힘들죠.”

그 말 그대로, 오늘 회의에서 내가 나설 자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일이

라고도 할 수 있다. 뭐야, 그 꿈의 직장.


요령부득인 내 대답만으로도 히라츠카 선생님은 뭔가 감을 잡은 모양이다. 회의실을 쭉 둘러보
고는 시선을 나 아닌 다른 이들 쪽으로 돌린다.

“그런가. 그럼,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에게 물어보면 되겠나?”

“아뇨, 쟤들도 마찬가지일걸요.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지 않을까요.”


“흐음. 무슨 뜻이지?”
그렇다, 나도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거의 개입할 일이 없다. 이미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
다. 이제부터 진두에 서게 될 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 아니, 원래는 처음부터 그 녀석이 서야

했을 자리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프린트를 체크하고 있는 그 녀석에게 눈길을 돌린다.


“이번 일은 위원장님께 맡기려고요.”
“호오…….”
히라츠카 선생님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오늘의 주인공, 사가미 미나미를 찬찬히 살펴
본다.

아마 이번 회의는 사가미가 위원장으로서의 자질을 똑바로 보이지 못한다면 무슨 수를 써도 제


대로 풀릴 수 없을 것이다. 현장반을 굴복시키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도, 아니, 정확하게는 유키노
시타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가미를 향한 반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가미가
그만두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대전제로 하여 우리들도 움직이고 있는 이상, 여기서는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사가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사가미 본인이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사가미의 평가는 뒤집히지 않는다. 주변에게도, 사가

미 본인에게도.
솔직히 말하자면 불리한 도박이다. 배당금 하나는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 오만하고 세심하지 못
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주제에 큰 무대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아무리 보아도
위원장 자리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봉사부가 받은 의뢰를 둘 다 달성시키려면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조금
이라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준비는 충분히 해 왔다고 생각한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20이라 하였던가. ……불안하구만.


“이번엔 또 어떤 계획을 세운 거냐……, 뭐, 어디 구경해 보기로 할까.”
즐거운 듯 웃으며, 히라츠카 선생님은 본인의 지정석인, 테이블에서 떨어져 있는 파이프 의자에
걸터앉는다. 이제 곧 회의가 시작된다.

나도 내 자리에 가서 앉는다.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은 수뇌부 멤버들이다.

옆에는 유이가하마, 그리고 ㄷ자 모양의 테이블 중앙 쪽에 앉아 있는 유키노시타가 보인다. 정중


앙에는 사가미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메구리 선배. 그 다음으로는 학생회 임원들이 대기하고 있

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나는 유키노시타 쪽으로 얼굴을 향한다.

“슬슬 시작인가.”
“그렇네.”
그때까지 자료를 확인하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문득 고개를 들고 시계를 확인한다. 나도 뒤따라

시계를 쳐다보며 말한다.

“뭐, 중간중간에 네가 말을 꺼내게 될 거라 생각은 하지만, 냉정함은 잃지 말라고.”


“그래.”
유키노시타는 짧게 대답해 왔다. 하지만, 그런 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유
키노시타가 냉정함을 상실한다는 건 도저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문화제 때에도, 요전의 체육

제 회의 때에도 그랬다. 오늘도 평소처럼 잘 해 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구태여


말을 계속 이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우위에 서서 진행하는 거야.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거든. 긴장
하거나 동요하는 모습 같은 걸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겠지.”

20
細工は流々、あとは仕上げを御覧じろ(세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니 끝날 때까지

지켜봐 달라).
시시콜콜한 것까지 하나하나 챙기고 있는 나에게 유키노시타가 언짢은 분위기로 시선을 던진다.
“나를 뭘로 보는 거니?”
“하긴.”
너무나 유키노시타다운 그 대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뭐, 물론 유키노시타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바로 옆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위원장님 들으시라고


하는 말이다. 오늘 회의에서 사가미의 강경한 자세를 어필하는 것은 반(反) 사가미 분위기로 흘러
가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때문에 이런 웃기지도 않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충고
하는 중이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대화 자체를 거부당할 게 뻔하거든…….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내 말 같은 건 듣지 않는다. 지금까지 있었던 회의 및 미팅 중에도 고집스럽게 계속 나

를 무시해 왔던 녀석이다. 오히려 지금 여기까지 와서 느닷없이 말을 듣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소름 끼칠 일이다.
현재 우려가 되는 부분은 이 사가미 정도인가. 나머지 준비는 착실하게 갖춰져 있다.
학생회 임원들의 책상 위에는 천 장이 넘는 프린트가 쌓여 있다. 오늘 회의를 위한 사전 준비

중 하나이다. 그들은 아무 불만도 없이 그 많은 프린트를 인쇄하고 여기까지 옮겨다 주었다. 문화


제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

그리고, 카와사키가 급하게 만들어 준 의상 디자인 러프.


카와사키는 저번 미팅에서 에비나 양에게 이것저것 다양한 조언을 받아 가면서, 자이모쿠자가

제출해 놨던 원안을 바탕으로 금세 그것을 구체화시켜 주었다.

뜻밖의 재능이라고나 할까, 카와사키는 이런 쪽에 센스가 있는 것 같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 타


이시 말고도 아직 어린 남동생하고 여동생이 있는 모양이라, 의외로 그런 걸 하면서 동생들과 놀
아 주는 사이에 체득한 스킬일지도 모른다. 그림 그려 달라고 조르는 여동생에게 귀찮다는 듯 사

각사각 그림을 그려 주는 카와사키를 상상했더니 살짝 훈훈해진다.

나는 한 자리에 모인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다음 조용히 시작할 때를 기다린다. 현장반


무리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지난 번 회의가 어중간하게 끝난 것이 사람들을 끌어 모은
모양인지, 오늘 모임은 제법 구색이 갖춰져 있다.
아직 몇 명은 오지 않은 듯 보였지만, 메구리 선배가 시간을 확인하고 사가미에게 고개를 끄덕

여 보인다.
“……그럼, 정각이 되었으므로 전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사가미의 다소 잠긴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린다. 최후의 회의가 막을 올린다.

× × ×
회의는 먼저 진행 상황 확인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번 회의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
지 않은 시점이다. 이렇다 할 특별한 보고 없이 담담하게 진행되어 간다.
딱히 들을 내용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장반의 반응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

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잡담은 기본이고, 한술 더 떠 책상 위에 엎드려서 휴대전화를 만지작
대거나 잠을 자는 등, 태만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그들이 수뇌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이젠
전혀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일부러 보여주려고 저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바로 이 태도가 그들이 가진 반항의 의사를 체현한 것이며, 또한 이러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실

질적인 연대감을 높이고 있다.


실로 치졸하고 음험한 저항 활동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상당하다. 하루카와 윳코를 중심으로 하
는 일파가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던 것을 계기로 지금의 반 수뇌부 분위기가 강해지게 되었다. 사
람들은 기세를 잡은 쪽, 수가 많은 쪽을 따르는 법이다.

문화제 실행위원회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사가미와 하루카, 윳코의 입장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수뇌부와 현장반이라는 가시적인 파벌 다툼이 존재하고 있는 탓에 가상적인


공통의 적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도 다르다.

이미 적은 자리를 틀고 있고, 이제는 서로 싸우는 것이 목적으로 변질된 상태다.

따라서, 이번에는 또 다른 방책을 취해야만 한다.


분위기는 저번 회의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지금까지의 열세를 계속 끌고 온 형국이 되어 있다.
의사 진행을 하고 있는 사가미의 목소리도 과연 어디까지 전해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어차피

안 들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는지, 사가미는 담담하게 회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고 다음 의제로 넘어가려던 그 순간 짧게 뜸을 들인다.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긴장을 가


라앉힌다.
“그럼, 저번 회의 의제로 올라왔던 메인 이벤트 건에 대해서입니다.”
거기에 이야기가 미치자, 현장반 무리들도 소란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듣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

늘 회의의 쟁점이 될 것임은 알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최대의 공격 포인트가 될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메구리 선배가 사가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유이가하마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책상 위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이 조마조마 불안해 보인다.

그런 온기 어린 시선을 받으며 사가미는 말문을 연다.


“현안 사항이었던 ‘치바전’의 안전대책,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설명한 대로 규칙의 엄격화,
지역 소방서와의 제휴, 구호반의 설치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대응하겠습니다.”
사가미가 말하고 있는 동안, 유키노시타는 눈을 감은 채 등을 곧게 편 자세로 묵묵히 경청하고
있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팔짱을 끼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미심쩍은 모양새로 예리한 시선을 사
가미 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차갑게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사가미는 여전히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또, 의상의 비용 절감 방안을 검토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배포된 자료를 확인해 주시
기 바랍니다. 해당 디자인 및 재료를 사용한다면 경기를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제
작 또한 간소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가미는 프린트 중 한 장을 가리킨다. ‘치바전’의 의상 제안서다.
카와사키가 만들어 준 디자인 러프는 안전 측면을 고려한 소재를 사용하고, 의상을 여러 부분으

로 분리시켜 마치 라인 공정처럼 하나로 완성시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거라면 고만고만한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각 부분마다 전담 노동력을 배치하면
효율적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생산에서 실용에 이르기까지 기능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이런 설계 사상은 제법 마음에 든다.

나는 옷 디자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꽤 훌륭한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


지만 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당연히 주의사항에 “※현재 제작 중인 디자인입니다” 한 마디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


다. 이것만 있으면 스펙이 대폭 변경되어도 용납될 수 있다. 앞으로는 아예 그냥 모든 말에 “※개

인의 감상입니다” 21 하고 덧붙여 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거 아무 말이나 막 던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긴 하지만.
사가미가 말을 끝내자 하루카와 윳코가 얼굴을 마주본다. 서로 확인하듯 작게 끄덕이더니 손을
들었다.

“그거, 저번 거하고 별로 안 바뀐 거 같은데요…….”

“결국, 확실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게 말할 것은 이미 예상한 바이다. 그렇다기보다, 지금까지는 그 발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
입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루카와 윳코의 뒤를 이어 현장반 무리들이 너나없이 불만을 쏟아내게 되는 것 또한

예측 범위 내의 일이다.
“좀 있으면 대회라니까~”
“아니, 위원장 쪽은 저번이랑 똑같은 말이나 하고, 너무한 거 아냐?”
“그러게. 일 좀 하지 그래?”
그러나, 이 들으란 듯 떠드는 불평불만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21
※個人の感想です. 뭔가 잘못될 때를 대비해 상품 소개나 리뷰 등에 흔히 붙이는 면피성 멘트.
사가미는 역시 불안해진 것인지, 메구리 선배와 유키노시타 쪽을 힐끔 확인한다. 아무리 사전에
설명을 들었더라도 막상 눈 앞에서 수많은 인간들에게 불만을 들으면 기가 죽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메구리 선배도 유키노시타도, 사가미를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것을 믿고, 사가미는 가만히 기다렸다.

입을 닫은 채, 시선을 고정한 채, 자세를 풀지 않은 채. 단지 책상 위로 프린트를 쥔 손만이 어


렴풋이 떨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떠들 불만도 슬슬 다 떨어졌는지 현장반 인간들은 조금씩 조용해진다. 그리고, 대
답 한 마디 하지 않는 사가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소란을 피우는 중에도 주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
히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서로 수 읽기에 들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잠시 기다리자, 회의실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타이밍을 노려 사가미가 입을 열었다.
“이쪽에서 제안할 수 있는 최선책은 이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불만이 있으시다면, 사고를 우려하
신다면……”

미리 계획했던 대로 사가미는 한 차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고한다.

“체육제 참가 자체를 자기 책임으로 참가하게 하겠습니다.”


사가미가 한 말의 의미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한 것인지, 대부분의 현장반 인간들은 무슨 헛소

리를 하고 있냐는 듯 “뭐어?”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편, 구석에 앉아 있던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계획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안 나와도 된다, 이건가?”
히라츠카 선생님이 확인 차 질문해 온다.

사가미는 선생님이 무언가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거기서 유키노시타가 즉각 지원에 나섰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치바전’만이 아니라 어떤 경기든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
다. 게다가 참가 인원이 적은 편이 위험도는 줄어들게 되니 타당한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만.”
“흠, 그건 그렇다만…….”

가만히 생각에 잠긴 히라츠카 선생님을 일단 제쳐 두고, 사가미는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킨다. 아


직 이 제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참자는 당일의 참여, 응원 및 관람까지 포함하여, 어떤 참가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즉각 효과가 나타났다. 심플한 주장이었던 덕분인지 사가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금세
이해한 현장반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다.

“뭐야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말도 안 돼…….”
어수선한 회의실에서 저마다 불만이 터져 나온다.
여기에 대해서는 딱히 정당한 이유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날조해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허나,
그걸 사가미에게 맡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영역이다.
“우리 학교 체육제는 교내에서만 참가하는 행사라서 말이지……. 보호자도 다른 학교 친구도 못

들어온다고. 즉, 원칙적으로 외부인의 참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거야.”


내가 봐도 정말 막나가는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냉정한 상황이었다면 곧바로 “아니, 그건
좀 아니지”22 하고 반박이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인 현장반에서는 그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수뇌부 이외에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히라츠카 선생님 정도일 것이다. 아직까지 아까
그 희망 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마에 살짝 손을 얹고 잠깐 타임이라도 걸듯이

손을 들었다.
“아니, 잠깐만. 참가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하려는 거지? 설마 집에서 그냥 놀게
내버려 둘 수도 없을 테고”
“수학여행 같은 거하고 똑같이 다루면 되지 않을까요. 그거 안 가는 애들은 등교시켜서 자습 같

은 거 하고 그러는 거 같던데.”
나는 거듭하여 대충 적당한 소리를 떠든다. 견강부회도 유분수지. 수학여행과 체육제는 아무 상

관도 없다. 다만 학교 제도상으로는 그런 게 존재한다. 그런 대응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


까지는 아니다. 검토할 여지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아니, 안 되나? 이런 경우 누가 판단하는 거지? 학년주임, 체육교사…… 아니,

교감? 교장인가……. 하지만, 범주만 놓고 보면 체육인데……”


서열주의 사회의 수직적 구조 앞에 고뇌 중인 히라츠카 선생님은 그냥 내버려 두고, 우리는 회
의를 진행시킨다. 사가미가 회의실 전체를 둘러본 다음 수뇌부 쪽의 결론을 고한다.

“여러분 모두에게 백 퍼센트의 안전을 약속할 수 없는 이상, 그렇게 판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배려한 결과, 도출된 결론이다.


기획 회의 때에도 이런 식의 배려에 따라 몇몇 기획이 사라졌다. 전례를 고려해 본다면 이 배려
를 명분으로 삼아 어느 정도 의견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
하는 자들이 적다는 것도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다.

수뇌부도 현장반도 그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인 학교의 의사에는 거역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
을 역이용하여 배려라는 이름 아래 제약을 가한다.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이쪽이 생각하는 대로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어? 이거 반대하면 체육제 못 나간단 소리야?”
“아니, 희망하면 괜찮은 거 아냐?”

22
いやその理屈はおかしい. 도라에몽이 태클 거는 짤방으로 유명한 말이기도 함.
“그래도, 여기서 기마전 반대하면 전부 못 나간다는 소리잖아.”
현장반 무리들은 아직 무언가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근데,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냐?”
“들을 필요 없어.”

“맞아, 참가를 못하게 만든다니 그냥 자기들 멋대로 떠드는 거잖아.”


점점 분노하는 분위기가 되어 가는 현장반. 상대를 흔들어 놓기 위한 잽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
로 훌륭하게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자, 그럼 파이널 블로우로 들어가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회 임원들 앞에 쌓여 있는 대량의 종이 뭉치를 손에 들었다. 그것을
앞쪽에 있는 유키노시타에게 넘긴다.

그러자, 그 중 한 장을 손에 든 유키노시타가 그 종이를 사가미 앞으로 밀어다 놓는다.


조용히 종이를 받아 들고, 사가미가 작게 심호흡을 한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한에서의 안전 확보 제안은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최선책은
제시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반대하시겠다면, 여러분만이 아니라 전교생을 상대로 의견을 묻

고자 합니다.”
사가미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천 장이 넘어가는 종이 뭉치를 가리킨다.

“여기, 그러기 위한 용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교생 분량으로.”


히라츠카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종이 뭉치 안에서 한 장을 뽑아 직접 훑어본다.

내용을 읽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입을 떡 벌렸다.

“체육제의 참가, 불참……. 이런 거를 학생들에게 묻는 체육제는 정말 전대미문이로군…….”


쓴웃음을 섞어 그렇게 말하고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사가미에게 말을 건다.
“이거, 다른 학생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전부, 하겠습니다…….”

“뭐?”
그 대답이 상당히 뜻밖이었는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멀뚱멀뚱 눈을 깜빡인다. 거기서 유키노시타
가 보충 설명에 들어간다.
“사정을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요. 일부 부활동으로부터 위험성을 지적받

고, 이쪽이 어떤 대응책을 제시하였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납득해 주지 않았으므로 전교생의 의견


을 묻고자 한다고, 그렇게 설명할 예정입니다.”
아니, 보충 설명으로 가장하고는 있지만, 그 실상은 현장반 무리들을 향한 견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공개 비난에 가깝다.
일부 부활동이라고 애매하게 말하더라도, 추측이나 색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악의는

없더라도 호기심 또는 정의감으로, 그 반대한 인간들을 찾아내려는 인간은 나오게 되어 있다.


체육제는, 문화제나 수학여행 같은 데 비하면 그렇게까지 학생들 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만한 행
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청춘에 굶주린 인간들에게는 고등학교 생활을 장식하는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이다. 그
것을 부당하게 박탈당하게 된다면, 무언가 행동을 취할 인간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1학년에게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있는 체육제이고, 3학년에게는 학교 생활에서의 마


지막 체육제다. 2학년 중에도 그런 식의 기념비적인 특별한 행사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심히 엉성하고 낙관적인 관측이기는 하지만, 절반 이상은 체육제가 있기를 바랄 터이다. 이 결과
여하에 따라 체육제 자체가 없어져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차하면 운동부 일파가 비난받
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 사실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수뇌부에 대해 쉽사리 반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진의를 물을 필요는 없다. 그럴 준비가 이미 되어 있고, 실현 또한 가능하다는 모습을 보
여주기만 하면 된다.
가능성이 낮더라도, 정말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심어 주면 된다.

다수파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놈들에게 가르쳐 주마. 네놈들이 믿는 가치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있는지 없는지도 분명치 않은 더 많은 다수파 앞에 겁먹는 공포를.

물론 반대의 목소리가 일어났다.


“그, 그런 거 안 해도, 기마전만 안 하면 되잖아.”

“딱히 체육제가 전부 다 싫은 것도 아닌데…….”

허나, 하루카도 윳코도 그 주위도, 목소리 톤은 상당히 낮다. 공개 비난을 당할 거란 공포 때문


인지 조금씩 주춤거리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걸로 체크 메이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몰아붙이면 완전히 침묵시킬 수 있을 터.

“기마전에 대해서도 설명할 생각입니다. 위원회에서 한 번 승인되었지만,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

졌다고요.”
“이미 결재된 사항이 뒤집혔다는 그런 불상사가 외부에 드러난다면 위원회의 책임 문제로도 이
어질 수 있겠구나……, 하아…….”
사가미의 설명에 이어, 유키노시타가 심각한 분위기로 말했다. 사실 이 녀석도 어디까지가 연기

인 건지 잘 모르겠다. 이 방법도 딱히 떳떳한 수단은 아니므로 유키노시타가 별로 좋아할 만한


계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망설이는 모습은 가히 효과적이었다. 교내
에서도 손꼽는 재원의, 이제까지 실질적인 위원장으로서 업무를 맡아 온 그녀의 난처한 표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해 준다.

회의실 안의 술렁임은 한층 더 커졌다.


이쪽도 위험을 감수하고 결행하는 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고, 그에 상응하는 각오가 되어 있다
는 것을 밝혔다.
녀석들이 체육제 개최를, 그 참가를 인질로 잡겠다면 이쪽도 그렇게 해 주겠다.
네놈들이 바라는 체육제라는 환상 그 자체를 인질로 잡아 주마.
서로가 서로 바라는 체육제를 파괴하는 핵 미사일 버튼에 동시에 손을 얹는다.

그것이 우리의 상호확증파괴 전략이다.


하루카와 윳코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뭐야 그게…… 말도 안 돼…….”
“그건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위원장이라고 딱히 말하는 걸 다 들어줘야 될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증오와 비판의 목소리는 사가미에게 집중된다. 당연한 결과다. 지금까지 줄곧 진두에 선 채 표적

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공격 대상으로 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사가미는 그것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
팔자 좋게 여유 부릴 수 있는 정상의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앞으로 나서서,
그만큼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입고,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뒤집어쓴다.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한 칼이라도 더 많이 내리치고, 한 칼이라도 더


많이 베어낸다. 본래 위에 선 자는 그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 역할은 괴롭다. 그저 단순히 위원장이라는 지위나 신분에 대한 비난이라면 차라리 견


딜 만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인격과 도매금으로 취급된다. 직위와 인격은 본디 별개의 것이기

는 하나,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그것은 곧, 이것이 점점 나아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가미에 대한 인신공격이 될 수 있다
는 뜻이다.

“제대로 일도 안 하는 주제에, 뭐냐고, 이럴 때만 위원장이니 뭐니 멋대로 떠들겠다 이거야?”

“진짜 대박이다……. 지각 같은 거나 하던 주제에…….”


위원장이라는 지위에서 사가미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으로 그대로 화제가 전이된다. 물론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사가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루카와 윳코 두 명이다. 이전부터 친분이 있어
온 만큼, 다른 무리들보다 더 정확하게 사가미의 결점을 물고 늘어진다.

“어이, 그만들 해라.”


“마, 맞아. 좀 진정해 봐, 응?
히라츠카 선생님과 유이가하마가 말려 보지만, 이미 두 사람은 히스테릭 상태에 빠져 있다. 머리
에 피가 쏠리는 모양인지, 그 제지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성량
이 높아져 간다.

“사가밍, 문화제 때도 그렇게 대충 때웠으면서, 혹시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그, 그건……”
과거의 일을 들추어 내자, 사가미가 초조해하기 시작한다. 그 문화제는 사가미 본인에게 있어서
도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약점을 보이기 시작하면 공격은 더욱 거세진다. 하루카도 윳코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연
이어 떠들어 댄다.

“거기 있는 걔 엄청 흉보던 주제에 자기 편할 때만 같은 편이라 이거야?”


“그래 놓고 우리 쪽은 하나도 편 안 들어줬지? 그렇게 질색하던 걔한테는 협조해 줬으면서.”
비교적 얌전해 보이던 하루카와 윳코였지만, 격정에 사로잡혔을 때의 기세는 귀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 박력에 주변에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 그러지 말구, 좀 진정해 보라니깐. 힛키는 그런 게 아니구…”
이쪽에까지 날아든 불똥을 유이가하마가 진화해 주고 있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

황인데 남에게만 마냥 맡기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하루카와 윳코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아니, 확실히 사가미는 완전 좀 그렇긴 하지만, 이번……”
“……시끄러워.”

말을 꺼내던 도중에, 낮은 목소리에 가로막힌다.


그 목소리가 들려 온 쪽을 쳐다보자, 사가미 미나미가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지금 거, 이 녀석

이 한 말인가? 확인 차 한 발 걸음을 내딛자, 사가미가 고개를 들어, 이번에야말로 나를 향해 똑


똑히 말했다.

“넌 입 다물어. 시끄럽다고, 맨날 이게 뭐 하자는 짓인데?”

나를 향한 명백한 적의가 담겨 있는 그 말. 실로 문화제 이래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이런 식으


로 사가미에게 감정이 실린 말을 듣는 것은. 나도 확 한 마디 해 줄까 생각하던 참에, 내 시야 앞
에 끼어드는 인간이 있었다.

유키노시타는 어깨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가미를 노려보았다.

“사가미, 지금 네 발언은……”
“시끄러!”
허나, 사가미는 전혀 듣지 않은 채, 이번에는 유키노시타에게도 같은 말을 하면서 아까 전의 하
루카와 윳코가 그랬던 것처럼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전부 다 니들 맘대로 정하고, 내 말 따윈 아무도 안 들어 주고, 뭐든 다 안다는 얼


굴로 진짜 나한테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숨을 들이마시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낸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건 과연 나와 유키노시타를 향한 말이었을까. 그 통곡 같은 음성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하루카

일당 쪽을 향한 공격이기도 하였다.
“이번엔 정말 꾹 참고 열심히 하려고 하잖아! 왜 다들 안 알아주는 건데? 사과도 하고, 반성도
했는데……”
고개를 떨군 사가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만
은 제대로 보였다. 점점 흐려져 가는 목소리는 도중에 잠시 끊기고 만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아
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사가미만이 마치 참회하는 것처럼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깐 다음엔 정말 열심히 할게, 그러니깐……”


사가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뒤이어 들린 것은 말이 아닌, 오열이었다.
“사가미.”
메구리 선배가 사가미의 등을 쓰다듬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하지만, 사가미는 전혀 진
정될 기미 없이 흐느끼기만 할 뿐이다.
“시로메구리. 어디 진정될 만한 데로 데려가 주겠나?”

히라츠카 선생님의 말에 메구리 선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사가미의 손을 잡아 천천히 일


으키고는, 그대로 회의실에서 데리고 나간다.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들은 그 광경을 말없이 눈으로 좇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들 할 말을 잃은 듯 침묵이 드리운다. 그것은 아까 전까지 독설을 퍼붓

고 있던 하루카와 윳코도 마찬가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게 술렁이는 소리는 거듭 이어지고 있


었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고요한 분위기였다.

이런 전개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도 않다.

사가미가 떠들던 말은 단순한 감정론이다. 정신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게끔 구축하였을 터인 내 이론과는 괴리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오산이다.


상호확증파괴도 뭣도 아니었다.
제발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그렇게 흐느끼며 절규한 것이다. 그게 다였다.

졌다.

아니, 실제로 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나 같잖고, 어리석고, 저속하고, 하찮은, 그리고 그렇기에 가장 단순한 사실을 나는 왜 깨
닫지 못했단 말인가.
이것은 처음부터 감정론에서 비롯된 문제다. 그렇다면, 그것을 뒤엎는 것 또한 감정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노에는 분노를, 공격에는 공격을. 히스테리에는 히스테리로 되갚는다.
그런 진흙탕 싸움은 먼저 냉정해지게 되는 쪽의 패배다. 사가미는 이미 퇴장해 버렸고, 반면에
하루카와 윳코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만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또한 빨랐다. 모두가 쳐다
보는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낀 듯,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도 힘든 침묵 속에서, 히라츠카 선생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다.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은 교사인 히라츠카 선생님 정도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회의실 전체를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물으마. 위원장 쪽의 제안에 반대하는 자 있나?”
이 상황에서 반대하고 나서는 놈은 악인일 것이다. 많은 이들 앞에서 비참하게 울부짖던 인간을
향해 그 이상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 놈은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결과에 히라츠카 선생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번에야말로 결정된 것 같군.”
“그러면, 향후의 방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가미 대신 유키노시타가 이후의 진행을 맡아 회의가 재개된다. 아직 동요가 남아
있는 회의실 안에서, 유키노시타의 차분한 음성이 퍼져 나간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깊은 한숨을 토했다.

× × ×

지난번의 회의를 거쳐 간신히 운영위원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사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단지 유야무야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작업

에 나오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물론 모두가 다 의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


긴 해도 일이 늦어져 버린 만큼은 만회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결국 수뇌부 사람들도 총동원되어
현장 작업에 끌려나가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치바전’의 의상 제작에는 카와사키와 에비나 양, 그리고 유키노시타가 중심이 되어, 재봉틀 같은

걸 능숙하게 다를 줄 아는 여자들 몇 명이 일하고 있다. 유능한 사람들이 주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자이모쿠자와 학생회 임원들이 골판지나 발포 스티로폼 같은 걸 쓱쓱 잘라 갑주를 제작
하고 있다. 학생회 임원들은 역시 학생회 같은 걸 맡고 있는 만큼 박애정신이 충만한 모양인지,

자이모쿠자를 일일이 다 상대해 주고 있다.


한편, 사가미 미나미 같은 경우는 주로 현장반과는 무관한 사무 관련 업무를 메구리 선배와 함
께 처리하고 있다. 역시 그만큼의 추태를 보여 놓고 현장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평소처럼,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 자리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여
기저기 돌아가며 부려먹히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그 뭐냐. 프리랜서다, 노마드다. 그

렇게 말하면 꽤 멋있게 들릴지도 모른다.


오늘은 새로 설치될 구호반 관련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필요할 것 같은 의약품 리스트 작성
에, 추가될 텐트 설치 장소 검토, 긴급시의 연락처 정리…… 아, 잠깐, 구호반 이거 누가 담당하는
건데? 이미 수뇌부 쪽은 거의 다 담당이 배정되었을 거고…….
이럴 수가, 쓸데없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이건 바로 그 패턴 아니던가. 그렇다, 일을 하는 만큼 줄줄이 일이 늘어나는 작업량 보존의 법칙.

일을 해치웠더니 거기서 새 일이 튀어나오는 악마의 시스템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구호반 서류


를 정리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일이 그대로 나한테 떠넘겨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누구 맡아 줄 사람 없나 생각해 보지만, 당일은 학생회 임원들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이 현장 지시에 파견되어 버리기 때문에 사람이 부족해진다.
현장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책임자로서 수뇌부 사람이 필요해진다. 사가미와 메
구리 선배는 운영 텐트에 상시 대기 중일 거고……. 그렇게 되면 이제…….

젠장, 왜 이런 걸 깨달아 버린 것인지. 나의 우수함이 나를 궁지로 몰아간다…….


혼자 절망에 빠져 의욕을 상실한 채 멍청히 있는데, 느닷없이 회의실 문이 열린다.
“얏하로~!”
그 목소리로 누가 왔는지는 바로 깨달았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없었군. 타박타박 걸어

오는 유이가하마를 반쯤 감은 눈으로 쳐다본다.


“……너, 어디 갔었냐.”

“에?”
내 물음에 유이가하마는 눈을 깜빡거린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뺨을 붉힌다.

“우리 반 갔다 왔는데……. 혹시 나 없는 거 알구 막 찾고 그랬어? 왠지 살짝 의외긴 하지만, ……

그런 거 의외로 좋을지두.”
“멍청아, 일도 안 하고 뭐 하고 있었냐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뭐라는 거야, 이 녀석……. 깊이 생각하면 쑥스러워지니까 그런 애매한 소리 하지 말아 줄래?

“아, 그런 뜻…… 이 아니라 실례야! 일 제대로 했거든!”

뭔가 미스터리한 착각을 한 걸 부끄러워하나 싶더니, 금방 또 분노를 터뜨린다. 변함없이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분주하고 활기찬 녀석이다.
엄청 서운하다는 듯 볼을 부풀리고 뾰로통해져 있길래, 무슨 일을 했는지 들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했는데?”

말을 건네자 유이가하마는 금세 또 표정을 바꾸어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 요전에 우리 역할 정하고 그랬잖아? 그거 다시 보니깐 방송 맡은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더라
구. 그래서, 이거 이상하네~ 싶어서.”
“아니, 별로 이상할 거 없잖냐. 음악 트는 거하고 안내 방송이나 하는 거니까 방송에는 딱히 더
들어갈 필요 없어.”

그 말에 유이가하마가 멈칫 굳어진다.
“……어, 그랬어?”
“그래.”
“그렇구나…….”
이번에는 눈에 다 보일 정도로 어깨가 축 처진다.
“왜 그래?”

이게 또 뭐 저질렀나 싶어서 불안한 마음에 그렇게 묻자, 유이가하마는 얼버무리듯 아하하 웃으


며 당고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실은 그게, 캐스터나 해설 같은 거 꼭 있어야 할 줄 알았거든.”
“어차피 고등학교 체육제잖아, 그런 게 왜 필요해.”
“그, 그래?”
“그럼.”

딱 잘라 말했지만, 유이가하마는 뭔가 하기 힘든 말이라도 있는지 계속 머뭇거린다. 말을 꺼내기


를 기다리고 있자, 오물오물 입을 움직여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치만, 벌써 부탁해서 데려와 버렸어.”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으렴.”

“에~!?”
“에는 무슨 에야. 쓸데없는 일 늘릴 필요 없잖냐.”

“조, 조금 있어 봐!”
그렇게 말하더니 유이가하마는 블레이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는 전화

를 건다.

“아, 여보세요? 나야 나……”


그렇게 말하며 원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는 유이가하마. 쟤는 대체 누구한테 전화하
는 걸까.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생각 외로 일찍 전화를 마치고 바로 돌아왔다.

“유키농이 괜찮대! 그럼 괜찮지!?”

……이거 무슨 어린애가 강아지 주워 왔을 때 하는 대화 같은데. 하지만 유키노시타가 괜찮다고


그랬다면야 뭐, 그 녀석도 뭔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겠지. 어쩌면 그냥 유이가하마한테 약할
뿐인 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유키노시타가 찬성한 시점에서 내가 반대해 본들 별 의미는 없을
게 뻔하므로, 그만 타협하기로 했다.

“뭐, 다른 사람들도 괜찮다고 그러면 할 말 없지만…….”


“물어보고 올게!”
말이 끝나자마자 유이가하마는 후다닥 메구리 선배와 사가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간다. 허나, 지
금 이 상태에서는 아마 다들 OK가 나올 것이다. 이제는 다들 하나같이 쟤한테 물러 터지게 된 상
황이니까…….

내 예상대로, 메구리 선배 쪽을 쳐다보자 유이가하마가 손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


다. 역시 허락받은 것 같다.
그러더니 그대로 유이가하마는 문 쪽으로 향하더니, 그 도와준다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 녀석은 언짢은 분위기로 금색 롤빵 머리를 삐용삐용 잡아당기며, 회의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고 있다.
“……근데, 왜 하필 미우라야.”

미우라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유이가하마에게 묻는다. 그러자 유이가하마 또한 목


소리를 낮춰 말한다.
“그야, 유미코 그런 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는 거 잘하구, 유미코가 하면 토벳치나 그런
애들도 도와줄 수 있잖아.”
하긴, 그건 말이 되는군. 게다가 미우라 그룹이 방송을 맡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분위기를 북
돋는 데 기여할 것이다. 유이가하마는 유이가하마대로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조금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그거랑, 나랑 히나가 위원회 얘기 같은 거 하고 있을 때, 유미코는 이야기에 못 끼어서 살짝
삐치구 그러거든.”
뭐야 그 미우라, 귀여워. 상상했더니 여러 모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다.

허나, 지금 눈 앞에 있는 미우라는 별로 귀엽지 않다. 오히려 겁난다.


미우라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양 이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뭐야, 혹시 뭐 보수라도

요구하려고 그러나? 하지만 이 일은 기본적으로 자원봉사다. 조촐한 사례는 고사하고23, 마음 말고


는 사례할 것이 없다.

“……저기, 미안하지만 잘 부탁할게.”

일단, 나 치고는 드물게 제대로 감사의 뜻을 담아 말했다. 예의에 까다로운 유키노시타의 교육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미우라는 별로 만족하지 못한 모양인지 쌀쌀한 대답이 돌아왔다.

“됐어. 유이 말 듣고 왔을 뿐이지, 도와줄 거라고 결정하지도 않았고.”

“에!? 아까랑 말이 다르…”


깜짝 놀란 유이가하마에게서 미우라가 새침하게 얼굴을 돌린다. 여왕님은 변덕이 심하거든,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미우라는 딱히 외면할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시선 끝에는 사가미가 있었다.


사가미도 미우라의 모습을 깨닫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급우가 왔으니 말 정도는 걸어 보려는 것
일까. 그런 경험을 겪어 놓고도, 아직 그런 식의 표면적인 교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미우라.”
사가미가 거는 말에, 미우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23
心ばかりのお礼. 감사의 선물을 건넬 때 쓰는 말로, 직역하면 ‘마음뿐인 사례’가 된다.
“미우라가 도와주러 온 거구나…….”
미우라에 대해서는 어딘가 복잡한 마음도 있을 테니, 사가미는 조금 당혹스러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미우라의 대답은 냉랭하다.
“그러니까~ 딱히 도와줄 거라고 결정한 적 없거든?”

“그, 그렇구나…….”
사가미는 미우라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 기죽은 듯 약간 몸을 움츠린다. 그 태도가 미우라를 또
짜증스럽게 만들었는지, 미우라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팔짱을 꼈다.
언젠가 교실에서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 다음이 그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사가미는 아직도 어색한 미소 그대로이긴 했지만, 뜻밖의 말을 입에 올린다.

“일손도 마침 부족하던 참이고, 미우라가 도와준다면 더 분위기가 살아날 거 같아. 부탁할 수 있


을까? ……요?”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다.
다소 비굴하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동안의 사가미와 미우라의 관계로 보면 있을 수 없는 모습

이다. 미우라도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지, 팔짱을 풀고 얼굴을 돌린 채 본인의 상징인 롤빵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만지작거린다. 아마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흐응~ 글쎄.”
그리고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들은 유이가하마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통역해 준다.

“도와줄 거래.”

“뭐래! 나아~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했거든!”


서로 와글와글 떠드는 두 사람을 사가미가 미소 섞인 눈길로 바라본다.
아무래도 사가미와 미우라 사이에는 아직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관계의 개선이 보이는 것 같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딪치는 것을 통해 거리감과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끝날 수 있는 거리감, 사가미는 하루카와 윳코와의 충돌로 그것을 배운 듯하다.


그것은 자기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취한 행동의 결과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가미가 변화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우라와의 사이에서 거리감을 잡는 방법을 배운 사가미가, 앞으로 하루카와 윳코 사이에서 어

떻게 거리감을 잡아 가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전부 다 토해내고 드러냈음에도, 그때의 추태를 부끄럽게 여기는 듯 입가에 아주 조금이나
마 비굴한 웃음을 남기고 있는 지금의 사가미라면, 의외로 훌륭하게 그 거리를 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따라서, 그들의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pp.102-143)

교정에 들어서자, 바람이 불어 모래먼지가 일어난다.

나는 빨간색 머리띠와 구호반 완장을 차고 운영 텐트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주위를 흘겨 보자 전부 소란스럽고 어딘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체육복 차림
에 빨간색 또는 흰색 머리띠를 손에 든 사람도 있고, 혹은 이마에 두른 사람도 있고, 개중에는 목
에 걸고 있는 사람도 있다.
처음부터 의욕이 차고 넘치는 이들도 있고, “이거 영 시시하네~” 같은 소릴 하는 놈도 있다. 그
런 소리 하는 분 치곤 아주 완벽하게 머리띠를 두르고 계시는 건 어째서인지요, 토베 군.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선선한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가벼운 운동을 하기에는 딱 좋다. 이


렇게 운영 텐트에 오는 것만으로도 산책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체육제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라 할 수 있다.
나도 운영위원회 일만 아니었더라면 이 기분 좋은 날씨 속에 야외에서 단잠을 즐기며 때때로 체

육복 차림의 여자들과, 여자들이 전력으로 달리는 모습, 혹은 체육복 차림의 토츠카를 바라보며
유유히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

오늘은 운영위원회로서 일하는 동시에, 구호반으로서 이 텐트에 처박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력으로 질주하는 토츠카나 크라우칭 스타트를 하는 토츠카, 장애물 경주에서 그물에

걸려 흐트러진 매무새로 몸부림치는 토츠카도 볼 수가 없다.

역시 일하면 지는 것이구나.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연설에서 언급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된 말

이지만, 이 말은 자주 오용되어 강제 참가를 위한 협박 문구가 되곤 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가는

것조차 시간 낭비인 것들도 썩어 나도록 많은데 말이다.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면 참가하지 않는 세력에 참가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고, 무슨 일
이든 경험할 가치가 있다면 경험하지 않는 경험 또한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모두가
경험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어 귀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또 시작이네.”
그 목소리에 돌아봤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텐트까지 와 있던 유이가하마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만 입 밖으로 나와버린 모양이다.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는 만큼 더 악질이구나.”
유키노시타도 함께 온 것인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유키노시타의 체

육복 차림을 처음 보았다. 이 녀석은 체육복이 딱히 안 어울리는구만. 하도 안 어울려서 평상시와


의 갭도 동시에 커지다 보니 왠지 이건 이것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야 어쨌든, 나에게도 내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아니, 잠깐. 난 아무 잘못 없어, 사회가 잘못된 거야. 아니, 그 뭐냐, 난 일종의 필요악이지.”
나쁜 녀석이 있어야 착한 녀석도 존재할 수 있다. 나라는 청춘의 패배자가 있는 덕분에 청춘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비교하는 것을 심히 좋아하는 존재니

까. 누군가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법이다.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고 캇체 씨도 수수께끼를 냈다 이거야!24 갓챠!
허나, 유키노시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자칭・필요악의 대부분은 그냥 악이야.”
“그러게, 필요하다고 그래도 좀 미묘해.”
한술 더 떠 유이가하마의 말은 문맥적으로 악 그 자체가 아니라 왠지 날 보고 하는 말처럼 들리

는데. 뭐냐고, 이 악・즉・참. 살짝 우울해진다고요…….


“저기요, 거기 숙녀 분들, 꼭 제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씀들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사소한 항의를 했더니 텐트 안쪽에서 발랄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메구리 선배다. 안에서 먼저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메구리 선배는 체육제 당일을 맞이하여 기분이 들뜬 듯, 가벼운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다들, 팀워크는 완벽하네!”


아마 우리 세 사람 다 “대체 어디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메구리 선배

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좋아! 열심히 하자~! 아자아자 파이팅! 오~!


“오, 오~……”
이분은 왜 이렇게 의욕이 넘치는 거람…… 하고 조금 난감한 기색을 하면서도 우리도 그 분위기

에 동참한다. 이런 콜 앤 리스폰스에도 만족한 모양인지 메구리 선배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있다.
그리고는 안고 있던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의 어깨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유이가하마는 약간
의 놀라움과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고, 유키노시타는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듯 몸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메구리 선배는 눈을 감으며, 이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느
긋한 어조로 말했다.
“다들, 정말 고마워. 너희들에게 상담한 덕분에 무척 즐거워질 것 같아.”
들떠 있던 목소리도 지금은 차분해져 있다.
원래 이 의뢰는 메구리 선배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마지막 체육제, 아마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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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갓챠맨 크라우즈(ガッチャマン クラウズ)’의 베르크 캇체(ベルク・カッツェ) 이야기.
회장으로서 관여하게 될 마지막 큰 행사. 그 분위기를 북돋고 성공시키는 것.
벌써 감개무량한 모습이지만, 그 팔에 안겨 있는 유키노시타는 메구리 선배의 팔을 부드럽게 걷
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요. 아직이에요, 메구리 선배.”

“어?”
메구리 선배는 뜻밖이라는 듯 되묻는다.
“하긴, 받은 의뢰는 아직 절반밖에 안 끝났으니까.”
확실히 아직 의뢰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의뢰에는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붙어 있었을 것이다.
유이가하마가 아리송한 표정인 메구리 선배의 팔을 꼬옥 붙잡는다.
“맞아요! 이왕 하는 거니깐 꼭 이기자구요!”

이기고 싶다, 메구리 선배는 메일에 그렇게 쓰고 있었다.


이것만은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어쨌든 승부는 그때그때의 운에 달린 것. 끝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래도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시도해 볼 수 있다.
메구리 선배는 우리의 얼굴을 차례차례 바라본다. 그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

짝 빛나는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응, 열심히 하자!”

눈가를 훔치듯 한 차례 어루만지더니, 그리고는, 역시 온화한 표정으로 웃었다.

× × ×

뭐 그런 식으로, 반드시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해 있었긴 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개회식을 이래저래 끝내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으니 곧바로 경기가 시작된다. 드디어 체육제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출장하는 종목은 뭔가 달리는 것뿐이었고, 그 한 종목 말고는 안 나갔기 때문에 남은 시간
은 구호반 텐트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기로 생각했는데, 어쩐지 홍팀 쪽이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으로 보고 있었지만, 오후에 접어들자 점점 홍팀이 현저
하게 열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패배가 패배를 부르는 것인지, 패전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자 다들 사기도 떨어진 것 같다.
일부러 대충 해 놓고 “진지하게 안 했거든~. 아니~ 나 진짜 하나도 진지하게 안 했다니까~” 같은

분위기를 내는 놈이라든가, 아예 개그를 노리고 뛰는 놈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개그를 노리는 인간들도 평소부터 그런 개그 캐릭터를 맡고 있는 녀석이라면, 분위기가 조금 썰
렁해지더라도 그나마 이해는 할 수 있으니 차라리 나은 편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비교적 정상이라고나 할까, 오히려 얌전하던 부류의 녀석이 분위기 맞춘답시고
친하게 지내던 무리들 사이에서 분위기 따라 몸개그를 시도했다가는 대형사고가 된다. 객석 한구
석에서 “야, 그건 좀 아니지~” 같은 소릴 하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차마 버틸 수가 없는 심정

이 된다. 아무리 구호반이라도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건 조금 어렵군요…….


전교 규모의 행사에서는 자기 분수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가장 안전한 것은 물론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오히려, 모두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고 두드러지는 것이 진정한 개성이
라 할 수 있다.
기발함=개성이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존재가, 백팀의 중심, 하야마 하야토다.


하야마는 특별히 눈에 띄려 드는 일 없이 단지 릴레이나 장애물 경주 등을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을 뿐인데도, 역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나가는 종목마다 1등을 차지해 온다.

이 활약 앞에 여자들이 환호하지 않을 수 없다.


백군 최대의 득점원, 하야마는 경기 중간마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

다. 그 모습이 별로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은 토베 일행도 그 안에 들어가서 즐겁게 떠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광경을 흐뭇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외부인이나 혹은 하야마의 동료들,

즉 백팀 사람들뿐이다.
홍팀 남자들로부터는 원한 어린 시선이 날아들고 있었다. 특히 자이모쿠자가 심각하다. 나 정도
는 가뿐히 뛰어넘을 수준의 썩은 눈이다.

포인트 게터 하야마의 활약과 패전 분위기에 쭉쭉 떨어지는 홍팀의 사기가 맞물려, 경기는 시종

일관 백팀의 우세로 진행되어 간다.


슬슬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 교사 창문에 설치된 스코어보드를 보니 점수차가 큰 폭으로 벌어져
있었다.
백팀 150점 대 홍팀 100점.

이건 이미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떨어진 득점판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자, 옆에서 마찬가지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했
더니 유이가하마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뭐,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게 큰소리 쳐놓고 이래서야 체면이 서질 않는군…… 그런 생각
을 하는데, 우리 이상으로 진지한 눈빛으로 스코어보드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유키노시

타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한 마디 툭 던진다.


“……남은 경기는 어떤 게 있니?”
그 목소리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졌기에, 나도 모르게 얌전히 대답하고 말았다.
“어, 아아. 다음은 메인 이벤트 ‘치바전’하고 ‘장대 눕히기’겠네.”
“그래…….”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와 유이가하마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상황을 살피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늘 보던 그거로군…….
요란하게 타오르는 새빨간 불꽃보다도, 조용히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 쪽이 온도가 높은 법이다.
지금의 유키노시타가 딱 그렇다.
유키노시타는 포기하기는커녕 이 판국에 이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궁극의 승부사가 지
금 여기 강림한다.

× × ×

짧은 휴식을 취한 다음 우리는 마지막 메인 이벤트의 준비에 들어갔다. 기마대장을 맡을 사람들

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다른 학생들을 정렬시킨다.


나는 구호반이기는 하지만, 역시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종목인 이상 도우러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종목을 발안한 자이모쿠자도 왠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우러 와 주었다.

팔에는 자기가 직접 만든 듯한 “제작총지휘”라는 완장이 붙어있다. 책임감의 표시인 건지, 아니


면 내가 오늘 상대해 주지 못하는 바람에 하도 한가한 나머지 심심풀이로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
겠지만, 뭐, 아마 후자겠지. 따라서 완장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열 정리 및 유도를 자이모쿠자와 학생회 임원들, 그리고 일부 현장반 사람들과 하고 있는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봤더니 에비나 양을 선두로 하여 기마대장을 맡은 인물들이 막 도착한 참이었다. 유키노시
타가 머리띠의 상태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걸어온다.
“정렬은 끝났어?”

“아아.”
간결하게 대답하고 즐겁게 감상하시라는 양 손으로 가리킨다. 나머지는 입장을 기다리는 것뿐이
다. 이쪽은 문제없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그걸 확인해 두기로 하였다.
“……근데, 그 복장은 뭐냐?”
“……내가 묻고 싶을 정도야.”

유키노시타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유키노시타가 입고 있는 것은 화려하고 주렁주렁


장식이 달려 있으면서도 약간 아슬아슬한 갑주 드레스이다. 소재 관계상 약간 싼티는 나지만, 토
시가 분리되어 살결이 드러나 보이고, 뒷면도 어깻죽지 근처까지 트여 있어 보기에 아름답다. 흉
갑과 토시 때문에 다소 중후한 느낌은 있지만, 스커트가 사뿐하게 나부끼고 있는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운 이미지를 준다.
이 갑주 드레스 자체는 급조한 것 치고는 꽤 잘 만들어지긴 했는데, 뭔가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다.
이상하네……, 내가 봤던 디자인 러프는 분명히 약간 일본식이었을 텐데, 어느 틈에 이렇게 된 거
지……. 이거 제작하는 동안 제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손길이 엄청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만…….
유키노시타도 어쩌다 이런 차림이 되고 만 건지 모르겠다는 분위기로 토시나 빌밑, 옷깃 따위에
신경을 쏟고 있다.
이거,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에 유이가하마의 모습을 찾는다.

가하마, 가하마……, 아, 저기 있네.


유이가하마는 톡톡 흉갑을 건들고, 토시를 건들고, 그리고 스커트 자락을 꾹꾹 당기며 확인하고
있다. 그러더니 얼굴을 빨갛게 화악 붉혔다.
“우와~, 이거 완전 부끄러…….”

하긴, 전교생 앞에서 코스프레를 하는 셈이니 뭐…….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
고 있는 것은 에비나 양이다. 옆에는 똑같이 옷을 갈아입은 카와사키도 있다. 아, 카와사키도 이

거 입는구나. 근데, 카와사키 엄청 불쾌해 보이는데…….


실은 입기 싫었던 거겠지 하는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알아차린 카와사키가 엄청

나게 새빨간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왜?”
목소리에도 분노가 배어나는 것이 겁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 본들 카
와사키의 기분이 나아질 리도 없고……. 일단 적당한 말로 때우기로 한다.

“아, 그, 뭐냐, 잘 어울리네, 그거.”

“……지금 시비 걸어?”
카와사키는 아까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목소리로 대답해 온다. 칭찬인데……. 아니, 알았다고, 미
안하대도, 이제 안 볼 거니까 제발 그만 좀 노려보십쇼…….
무섭도록 노려봐 오는 탓에 슬쩍 시선을 돌린다. 그 앞에는 에비나 양이 있었다. 에비나 양 본인

도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이쪽은 당당해 보인다.


“……진짜 이걸로 할 거야?”
반신반의라고나 할까, 유이가하마는 아직도 의아한 분위기로 자신의 의상을 통통 두들긴다. 그랬
더니 허리끈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걸 깨달은 카와사키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유이가하마
뒤로 돌아가서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에비나 양은 유이가하마의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야 전투니까. 대장은 갑옷 제대로 입어야지.”
“아니, 그래두~”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몸을 배배 꼰다.
“가만히 있어.”
카와사키가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하자, 유이가하마는 아으 하고 입을 다문다.

“하지만, 막상 이 의상으로 경기를 하려고 하니, 역시 조금은…….”


유키노시타가 조금 어두운 얼굴을 한다.
하지만 에비나 양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괜찮아~ 뭐 어때! 프로듀스드 바이 나, 메이드 바이 사키사키 스페셜 의상이라고!”
“사키사키 거리지 마.”
당신들, 사이 참 좋으시네요……. 문화제 이래로 에비나 양과 카와사키의 거리감은 의외로 가까워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카와사키가 각자의 의상을 다 체크한 다음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유키노시타가 몸을 빙글 돌려 본다. 편한 움직임을 중시해서 점검하는
걸 보니, 얘는 정말 이기고 올 생각으로 꽉 차 있나 보네……. 한편 유이가하마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신기하다는 양 호아~ 하고 감탄하며 자기의 옷차림을 확인하고 있었다.


움직임을 다 체크한 유키노시타가 흐음 하고 한숨을 흘린다.

“그건 그렇다 쳐도……, 왜 서양식인 거니…….”


“그건 그래…… 이거 원래 사무라이였잖아?”

유키노시타의 말에 유이가하마도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게, 대체 누가 이런 서양

식 의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나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발안자인 자이모쿠자와, 카와사


키에게 뭔가 이것저것 요구한 것 같은 에비나 양을 쳐다본다.
그랬더니 자이모쿠자와 에비나 양이 안경을 척 하고 치켜올렸다. 렌즈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난

다.

“그야 물론, 본관의 취향이지.”


“그야 물론, 내 취향이지.”
아~ 그러셔……. 취향이라면야 어쩔 수 없지…….
사실, 작업 현장이라는 건 대개 이런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작업 방식 중에는 누군가의 의사에

기반하여 일정한 통제하에 결과물을 구현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의 취향을
반영시킨 결과 생각지도 못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비관적으로 볼 것까진 없지만, 그걸 입어야 하는 쪽은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영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것인지 같은 의상을 입은 메구리 선배가 둘에게 다가왔다. 그 생글생글한

미소를 보니 아무래도 메구리 선배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자자, 다들 신나는 분위긴데 뭐 어때! 역전을 노려 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메구리 선배는 두 사람을 대기열 쪽으로 이끈다. 마침 이제 곧 입장할 시간이다.
에비나 양과 사키도 본인들의 진영인 백팀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메구리 선배 일행 세 명 쪽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스치듯 엇갈리는 그 모습.


“이 경기에서 이기면 30점이구나……
“응, 그리구, 그 다음 남자 경기도 이기면 역전할 수 있어…….”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몸을 돌려 나를 힐끔 쳐다본다. 두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한다. 메인 이벤트의 배점은 30점이다. 두 경기 모두 이긴다면 홍팀은 역전승을 거두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 한들 다음 경기에서도 꼭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백팀이 압
도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승률은 낮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편의 대장은 하야마다. 본인의 스펙은 물론이고 그 카리스마성 덕분에 백팀의 사기

도 충만해 있다. 한편 홍팀은 이미 의욕부터 바닥이고…….


이 상태로 이기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유키노시타라면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럼에도, 유키노


시타는 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약속은, 지킬 테니까.”

유키노시타는 덧붙여 말한 뒤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유이가하마도 오~ 하고 손을 힘차게 높이


들어올리며 생글 웃어 보였다.
“일방적인 선언은 약속이 아니거든…….”

이미 들리지 않을 것임 알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교정에 홍팀과 백팀 각 진영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마대장은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우리 홍팀의 기마대장은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그리고 메구리 선배다. 그에 대항하는 백팀의
기마대장은 미우라, 사키, 에비나 양.

솔직히 말하자면 ‘치바전’ 대장까지 선출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거의 수뇌부와 관계자를


대충 세우고 끝내 버렸다.
뭐, 메구리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미우라 그룹도 유키노시타도 교내에서의 지명도는 충분히 높
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카와사키도 딱히 지명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외모만 놓고
보면 그녀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본인은 하기 싫었던 것 같지만, 그것도 에비나 양이 능글맞게 설득한 모양이다.

기마대장들이 대오를 갖추자 기마대의 준비가 모두 갖춰졌다.


거기서, 교내방송이 삑~ 하고 하울링을 일으킨다.
『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까지는 미우라와 에비나 양이 중심이 되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법 화려한 실황 해설이 이
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경기 ‘치바전’은 여자들 전원이 참가하는 경기이다. 따라서, 여기서

방송하게 될 사람도 새로 교체되어 들어왔었다.


미우라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건지, 방송석에는 늘 보던 바보 삼총사가 앉아 마이크를 쥐고 있다.
『자, 체육제도 마침내 막바지, 지금까지는 백팀이 우세. 우리들의 하야마 하야토의 활약을 통해
대량의 득점을 획득해 가며 시합을 유리하게 진행해 왔습니다.』

묘하게 백팀 편향 방송이네……. 야, 우리들이 뭐냐고……. 과연 동정 기회주의자 오오오카다. 중립


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허나, 아직 승부의 향방은 모르는 것…….』


한편 야마토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홍팀의 기대를 북돋는다.

양 진영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되려는 찰나, 유독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떠벌대기 시작한다.

『드디어 이번 대회의 메인 이벤트, 여자 대항 치바 시민 기마전, 줄여서 치바전입니다아~!』


토베의 정체불명의 방송 멘트에 장내가 술렁인다. 하긴 갑자기 ‘치바전’이라고 그래도 그게 대체
뭐 하는 거냐는 느낌이 들긴 하겠지.

『자, 양 진영의 기마대장이 모두 등장했습니다. 이 치바전은 기마대장을 쓰러뜨린 수로 승패가

결정됩니다.』
오오오카의 간단한 규칙 설명이 이어진다. 기마대장은 각각 3기. 이들을 지키면서 상대의 기마를
무너뜨리거나 머리띠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양 진영이 서로 노려보며 대치하자 긴장감이 고조된다.

시작 신호를 맡은 사람은 히라츠카 선생님이다. 손에 소라피리를 들고 있다. 그걸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아, 저분, 이런 거 좋아하시나 보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힘차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뿌오오오오오~ 하는 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자 양팀이 일제히 달려 나간다.
『치바전, 드디어 승부의 막이 화려하게 올랐습니다!』

오오오카의 실황 중계를 들으면서 군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간다.


백팀은 단기 결전으로 끝내려 하는 것인지 기마대장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각각 짝을 맞추어 상
대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간다.
가장 먼저 맞붙어 온 것은 카와사키였다.
카와사키는 주변에 전개되어 있는 아군의 움직임조차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돌진해 간
다. 그 앞에 있는 것은 메구리 선배다.

확실히 홍팀의 기마대장 중에서는 가장 노리기 쉬운 상대일지도 모른다. 그 온화한 이미지로만


보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무너져버릴 것 같다. 허나,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지! 틀렸다!25
메구리 선배는 카와사키를 발견하고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였지만, 곧 차분한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부탁해!”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아군의 기마대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것이 카와사키의 진로를 방해


하는 동시에 메구리 선배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
메구리 선배의 인덕이 만들어 낸 결과다. 굳은 수비에 막혀 카와사키는 공격해 들어가지 못한다.
“……칫.”

카와사키는 혀를 차더니, 자세를 재정비하려는 것인지 일단 물러난다.


일단 메구리 선배 쪽은 어떻게든 잘 넘어갔나……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중앙 쪽에서는 괴성과 비명이 들려온다.


“으흐흐흐, 유~이~”

괴성의 주인은 에비나 양이다. 꽤 다부져 보이는 여자들로 짜여진 기마를 타고 모래먼지를 일으

키며 돌진해 온다.
“우와와, 뭔가 오고 있어~!”
비명의 주인은 유이가하마다. 실로 즐거워 보이는 에비나 양의 표적이 되고 만 모양이다. 집요하

게 추적해 오는 탓에 거의 울기 직전인 상태가 되어 이리저리 도망쳐 다닌다.

유이가하마의 기마는 기마들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며 이쪽저쪽 피해 다니기만 꾸준히 거듭한다.


그때마다 에비나 양이 모는 기마가 돌격해 왔다.
두 기마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혼란을 일으킨다.
이쪽은 이쪽대로 교착 상태인 것 같군……. 뭐, 유이가하마가 촐랑촐랑 도망쳐 다니는 동안은 안

심이겠지.
기마대장이 솔선하여 개별 격파로 움직이는 전개는 겉보기에도 알기 쉽고 화려하였고, 관중들은
그 광경 앞에 소리 높여 응원하고 있다.
『각 대장끼리의 격렬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오오, 또다시 벌어지는 대장끼리의 전투!』
오오오카의 실황 중계와 함께 높아지는 함성 소리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관중들의

25
違うな! 間違っているぞ! ‘코드 기아스’ 시리즈의 를르슈 람페르지의 대사.
이목은 남은 기마대장들로 옮겨 간다.
유달리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유키노시타의 기마다.
앞길을 가로막는 다른 기마들을 중간중간 거쳐 가며, 정확하게 상대의 머리띠를 노려 민첩하게
빼앗아 간다.

그 길 끝에는 미우라가 기다리고 있다.


미우라는 유키노시타를 시야에 넣으면서도, 덤벼드는 적들을 분쇄하며 하나씩 하나씩 거침없이
차례로 쓰러뜨려 간다.
그리고, 드디어 두 기마가 대치한다.
시선이 부딪치고, 씨익 웃는 미우라와 차가운 표정의 유키노시타.
전투 방식도 대조적인 두 사람의 대결에 이목이 쏠린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타이밍에 돌격해 나갔다. 미우라의 기마는 거칠


게 대지를 울리며. 반면 유키노시타는 소리 없이 조용히 내리는 눈과 같이.
그리고, 격돌한다.
서로 교착한 순간에 미우라의 몸이 약간 위로 떠올랐다.

멀리서 보기에는 단지 스쳐 지나갔다고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움직임을 본


기억이 있다. 거의 닿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내던지는 유키노시타의 주특기다.

“허, 허공 던지기26……. 뭐야 쟤, 마스터 아시아? 새벽에 죽는 거냐?27”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미우라의 기마가 밸런스를 잃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미우라가 쓰러

지자 그 기세에 압도당한 것인지 백팀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걸로 승패는 결정된 듯하다.


소라피리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진다.
『그야말로 훌륭한 솜씨! 홍팀의 승리입니다!』

실황 중계가 홍팀의 승리에 찬사를 보낸다. 관중들로부터 양팀 모두에 뜨거운 박수 갈채가 쏟아

졌다.
쟤네들, 진짜로 이겨버린 거냐…….
놀람 반, 납득 반으로 나도 손뼉을 친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유키노시타 일행이 돌아왔다. 유키노시타는 이제서야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

는지 어깻숨을 쉬고 있고, 유이가하마는 집요하게 스토킹을 당한 탓에 정신적인 피로가 쌓였는지


걸음걸이에 힘이 없다.

26
空気投げ.

27
暁に死すの? 기동무투전 G건담 45화 제목이 ‘さらば師匠!マスター・アジア、暁に死す(사부여,

안녕히! 마스터 아시아, 새벽에 지다)’.


“수고 많았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자, 그 손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하이 파이브를 해 온다.
“뒷일은 네게 맡길게.”
“힛키, 뒷일 잘 부탁해.”

“난들 어쩌라고…….”
두 사람이 운영 텐트로 향하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바라보았다.

× × ×

‘장대 눕히기’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일단 구호반 텐트로 돌아왔다. 뭐,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하는 법이다.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사이 실황 중계석이 다시 교체된 것인지 미우라의 멘트가 들려온다.

『이어지는 종목은 남자부 장대 눕히기입니다~』


그럼, 나도 입장문 쪽으로 가야 하겠지.

이제부터 시작할 ‘장대 눕히기’는 지극히 단순한 규칙으로 진행되는 경기다. 양팀의 진지에 장대
가 세워져 있고, 상대방의 장대를 쓰러뜨리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에비나 양의 발상 치고는 예상 외로 평범한 센스에 살짝 맥 빠질 정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

는데, 스피커에서 작고 낮은 목소리로 기분 나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28. 나, 남자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장대를 눕힌다니, 으, 음란해…….』
그 직후, 찰싹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에비나 양이 미우라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모양이다. 그 바람에 마이크에 하울링이 나서 삑~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역시 에비나 양은 정상이 아니야…….


아무래도 좋은 방송을 대충 흘려들으며 입장문 쪽 대기열에 줄을 서기로 한다. 서기로 하는데,
앞쪽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는 탓에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더럽게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간다.

“오오, 하치만 아니더냐.”


가는 도중에 자이모쿠자와 마주쳤다.
“이거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건데?”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와 있었다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에 자이모쿠자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28
ぐ腐腐腐.
“글쎄, 앞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아니겠나.”
“흐응~”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일단, 하도 사람이 많아 짜증스럽던 탓에 얼른 앞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나아간 끝에 도착한 인파의 중심부는 공터처럼 훤히 트여 있었다.

그 자리에 어떤 이 하나가 홀로 떨어져 서 있다.


누군가 싶어서 자세히 쳐다봤더니, 가쿠란을 입은 토츠카였다.
가쿠란은 왜 입고 있는 건데……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토츠카도 나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치만!”
활짝 웃으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 큰 사이즈의 가쿠란이 팔랑팔랑 나부

꼈다.
“토츠카, 그 차림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확인해 둬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
히고 말았다. 뭐야 이거, 진짜 이 조합 생각한 녀석 천재 아냐? 남자인 토츠카에게 가쿠란을 입히

다니, 세상에 이런 콜달(콜럼버스의 달걀의 약자)이 어딨냐고……. 이젠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과를 역전시키고, 원환의 법칙29에 인도되는 듯한 느낌이다.

일단 물어는 보았지만, 토츠카 본인도 왜 가쿠란을 입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왜, 왠지…… 갑자기 대장 맡기는 바람에……. 그러더니 이거 입으라고 그래서……. 아, 안 이상해?”

토츠카는 불안한 모양새로 남아도는 소매를 손끝으로 쥐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살짝 몸

을 움츠렸다. 급하게 준비한 탓인지 가쿠란은 무척 헐렁해서 슬림한 체형의 토츠카에게는 지나치
게 커 보였다. 허나, 그게 매력이다.30
“잘 어울려. 하나도 안 이상해.”

그렇다, 이건 이상한 게 아니라, 이상적인 사랑이다…….31

“허어, 살다 살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다 보게 되는군…….”


옆에 있던 자이모쿠자가 전율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토츠카가 사랑스러운 나머지 잘
들리지 않았다.

× × ×

29
円環の理. ‘마법소녀 마도카☆마키가’에 등장하는 개념.

30
だが、それがいい. 인터넷 유행어. 원 소재는 만화 ‘꽃의 케이지(花の慶次)’

31
そう、変じやなく、これは恋だ……. 이상함(変)과 사랑(恋)의 한자가 비슷하기 때문인 듯.
홍팀과 백팀은 각각 정렬을 마치고 입장한다. 드디어 ‘장대 눕히기’가 시작된다.
『먼저 양팀의 대장 소개가 있겠습니다. 백팀은 축구부 부장 하야마 하야토 군. 홍팀은 테니스부

부장 토츠카 사이카 군입니다.』


에비나 양의 소개 멘트가 흘러나오고, 관중의 이목이 각 대장에게로 쏠린다. 토츠카는 갑작스럽
게 호명된 탓인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반면 하야마로 말할 것 같으면 가볍게 손을 들
어 환성에 답해 줄 정도로 여유가 넘쳐 보인다.
그 여유는 주변에도 전파되는 것인지, 하야마 일행을 주축으로 삼은 백팀은 사기 또한 충천해
보인다. 하야마를 중심으로 진이라도 친 것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이 그야말로 청춘답다는 느

낌이다.
한편 홍팀 남자들은 어떤가 하면, 뚜렷하게 의욕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우중충한 분위기까지 함
께 어우러져 심히 나약해 보인다.
의욕이 있는 건 아까부터 옆에서 계속 뭔가 중얼중얼거리며 망상을 쏟아내는 중인 자이모쿠자

정도일 것이다. 아무래도 중2병은 이런 식의 싸움이나 전쟁 같은 걸 좋아하는 모양인지라, 어린


(魚鱗)이네 학익이네 육도삼략이네 하는 별 도움도 안 될 쓸데없는 지식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래서야 이기기는 글렀겠지……. 시작하기 전부터 결과가 뻔히 보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


고 만다.

그러나, 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손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수중

에 있는 카드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다소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자이모쿠자, 나한테 비책이 있어.”
그 말에 자이모쿠자는 솔깃한 듯 반응하였다.

“비책……? 장군에게는 참모가 따르는 법. 흐흠, 말해 봐라.”

그래그래, 먹혀 들었나. 이 녀석,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비책 같은 말도 좋아하는 모양이로군. 부


하 취급당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오늘만은 뭐 용서해 주기로 하자. 이제 곧 호되게 당하게
될 테니까.
속닥속닥 귓속말을 했더니 자이모쿠자가 흠칫 놀란다.

“……엥? 그거 내가 해야 돼?”
단숨에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버렸지만, 여기서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도 곤란하다.
“너 말고는 없잖냐. 지금 네 포지션은 삼국지로 치면 관우야. 토츠카가 유방32. 그렇다면, 이럴 때
격문을 띄울 수 있는 것도 군단을 이끌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어.”
모두가 좋아하는 삼국지 이야기를 들고 나오자 자이모쿠자도 끄으응 신음한다. 그리고, 무릎을

32
劉邦. 유비(劉備)의 오기일 수도.
탁 쳤다.
“오냐, 알았다. 본관에게 맡겨만 다오.”
아무래도 자이모쿠자의 중2병 스위치를 켜는 데 훌륭하게 성공한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자이모
쿠자에게 두려울 것은 없다. 사기안 계 중2병 환자는 때때로 묘하게 강한 멘탈을 발휘하는 경우

가 있다. 애초에, 본인의 망상을 남에게 떠벌린다거나 한여름에 트렌치 코트를 입고 다니는 그런
행위는, 때때로 상식조차 박살낼 정도의 강렬한 자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짓이다.
자이모쿠자는 홍팀의 대열 앞으로 나서더니.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친다.
“들어라, 제군들, 우리 군의 총대장 행차시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자이모쿠자를 멍하니 쳐다보던 토츠카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본
인 이야기임을 깨닫고는 당황한 모양새로 앞으로 나갔다.

“아, 저기, 홍팀 대장 토츠카 사이카입니다. ……여, 여러분, 열심히 해 보자구요.”


토츠카는 자기에게도 기합을 넣듯이, 가슴 앞으로 작은 주먹을 꼬옥 쥔다. 조금 자신 없는 듯 보
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지키고 싶다, 이 미소.33
그 인사에 이어, 자이모쿠자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우리들의 적은 하야마 하야토, 단 한 명! 졸병들은 디딤돌에 불과할 뿐이다! 잘 들어라, 지금이


야말로 우리들의 비원을 성취할 때이다! 저 지긋지긋한 망할 꽃미남이 우승까지 다 털어가도 괜

찮단 말이냐! 본관은 싫다! 너무도 싫다! 이제 더 이상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건 싫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길을 양보하기 싫다! 말을 걸어올 때 억지 웃음을 짓기 싫다! 근처를 지나갈 때 갑자기 입

을 다물고 그러는 게 싫단 말이다! 너희는 어떠냐!”

왠지 중간부터 자이모쿠자의 목소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자기의 연기에 너무 몰입해버리고 만


것인지 애달프기 그지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쌍함과 수수께끼의 박력에 압도당하는 홍팀 남자들. 백팀도 무슨 일인

가 하고 멀리서 쳐다보고 있다. 엄청나게 이목을 끌고 있었다.

“오, 오오……”
그리고, 띄엄띄엄 들려오는 찬동의 목소리.
“그렇다면 어찌 할 것이냐!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 눈떠야 할 때이다! 일어나라, 현민
들이여!”

“오~!”
쓸데없이 열이 오른 자이모쿠자의 연설에 홍팀 남자들은 조금 의욕이 생긴 것 같다. 특히 토츠
카의 인사가 최고였다. 그래, 이건 이미 모두가 토츠카를 위해서라도 진심을 다해야만 한다는 마
음이 된 것이다.
그렇게 홍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이모쿠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33
守りたい、この笑顔. 인터넷 유행어. 확산 계기는 ‘침략! 오징어 소녀’로 알려진 듯.
“흐음. 이 정도면 어떠냐.”
“아아, 괜찮아 보이네. 찌질스러운 게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이 다음도 잘 부탁하마.”
“찌, 찌질?”
자이모쿠자는 살짝 충격받고 있었다. 아니, 그야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당연히 찌질해 보이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싫든 좋든 박력이 있는 것이고, 모두가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의


욕이 떨어질 때에는 일단 관심부터 끌지 않으면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기 마련이니까.
그 점에 있어서 자이모쿠자는 훌륭히 잘 해 주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고 나면 “어쩌다가 그런 말
이 나와버린 걸까……” 하고 돌이켜 보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이불을 뻥뻥 찰 게 틀림없다.
그 자리의 분위기에 편승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새길 가능성
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자이모쿠자의 숭고한 희생과 토츠카의 미소 덕분에 준비는 갖추어졌다.


나는 시선을 목표인 백팀의 장대 쪽으로 향한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백팀 대장인 하야마 하야
토. 멀리서 본 모습이긴 하지만, 하야마 또한 나를 알아차린 것 같다. 멀리서 싱긋 웃는 표정으로
대답해 오는 듯 보였다. 좋다,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비굴하고 비겁하고 음험하게. 승부다.

× × ×

신호탄이 울리자, 양 진영에서 남자들이 뛰어나간다. 솟아오르는 환호, 그리고 남자들의 우렁찬
포효.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간다.
그 중에서도 실황 중계를 하고 있는 에비나 양의 고조된 분위기는 실로 대단했다.

『자, 시작되었습니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의 남자다운 장대 눕히기! 공과 수! 뒤섞이는 양팀!

우선은 백팀의 선제공격~!』


정신 나간 소리를 떠들고 있는 데 비해, 중계 내용만 놓고 보면 멀쩡한 양 들리는 게 난감하다.
역시 백팀 쪽이 사기가 높은 것은 물론, 하야마가 대장이기 때문인지 조직력이 상당히 높다. 전
력을 집중시켜 일점 돌파를 노려온다.

당연히, 팀워크고 뭐고 있을 리가 없는 홍팀 남자들은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공격은 장대 근처까


지 육박해 오고 말았다.
홍팀의 장대 아래는 토츠카를 비롯한 몇 사람이 지키고 있다. 거기로 백팀 남자들이 밀어닥친다.
“우, 우왓.”
격렬한 공방전에 토츠카가 자기도 모르게 공격을 피하느라 반사적으로 쪼그려 앉고 말았다(귀엽

다). 토츠카가 돌파당하면 장대를 지킬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던 차에, 근처에 있던 홍
팀 남자들이 구원에 나섰다.
그 중 한 명이 토츠카와 대치하고 있던 백팀 남자를 어떻게든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수
비대 역시 상당한 타격을 받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토츠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근처로 달려간다.
“미, 미안해.”

“아뇨! 이쯤이야 대장을 위해서라면!”


그 말을 들은 토츠카가 수줍음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으윽.”
그 미소를 직시해 버리고 말았는지, 홍팀 수비대가 묘하게 여한이 없는 얼굴을 한 채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홍팀 남자들은 멍청한 놈들뿐이로군…….”


전장 끝에서 자초지종을 다 보고 있었는데, 일단 장대는 토츠카와 다른 수비대에게 맡겨 놓으면
충분할 것 같다. 나는 무심한 듯 별 의욕 없이, 하지만 착실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딱 가운데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 적진 한복판에서 엄청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끄흐아아아아!”
뭔가 했더니 자이모쿠자가 너덜너덜해져서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빌빌 걸으며, 장렬한 최후

를 맞고 있었다. 그 희한한 광경에 다들 멀찍이 에워싸 쳐다보고는 있지만 누구 하나 손대는 사


람이 없다.

“큭, 크어억! 비, 비록 요시테루는 죽을지언정 승리는 죽지 않노라!34 본관의 인생에 한 점 후회도

없다35………… 무, 무념, 크흑.”


하도 요란하게 죽어가서 그런지 적도 아군도 질려버린 나머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자욱이 일어나는 모래먼지. 그 속에서 산발이 된 머리로 크흑이니 커헉이니 떠들면서도 여전히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자이모쿠자.

언제 봐도 상대하기 싫어지는 녀석이로군…… 하지만, 녀석이 눈길을 끌어주고 있는 덕분에 나도


내 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멀리서는 아직도 자이모쿠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고 있다. 홍팀의 진지에도 공격이 거듭 이어
지고 있다. 그렇다는 건 즉, 적도 아군도 내 행동에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주목받지 않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오랜 외톨이 생활로 단련한 능력, 스텔스 힛키!

34
정치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죽음 앞에서 남긴 말 ‘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이타가

키는 죽을지언정 자유는 죽지 않는다)’가 소스.

35
‘북두의 권’의 라오우의 명대사 ‘내 생애에 한 점의 후회도 없다(わが生涯に一片の悔い無し)’.
나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붕대를 꺼내서 빙글빙글 머리에 감았다. 이걸로 얼핏 봐서는 마치 백
팀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다른 백팀 녀석들 사이에 뒤섞여 적진을 돌파, 라기보다는 통과해 지나간다.
아직도 자이모쿠자가 괴성을 지르고 있기 때문에, 주위의 반응은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대로

저 녀석이 시선을 붙들고 있어 준다면…….


백팀의 장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다음은 흐느적흐느적 가까이 가서 쓰러뜨리
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일단, 수비중인 인원이 어느 정도 있는지 확인해 둘까. 그런 생각에 고개를 들었던 그 순간, 갑
자기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여어, 올 줄 알고 있었어.”

“하야마…….”
하야마 하야토는 상쾌하게 웃는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비굴한 웃음으로 답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은 이미 하야마 일당에게 둘러싸인 상황이다.
자기의 머리띠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면서, 하야마가 질문해 온다.

“그 붕대, 어디 머리라도 다쳤어?”


“내가 원래 머리에 문제가 좀 있는 놈이라 말이야…….”

애들 장난을 야단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말투에, 아무리 나라도 약간 민망해진다. 스르르 붕대를


푼다. 이어서 하야마는 자이모쿠자 쪽으로 시선을 힐끔 향한다. 자이모쿠자는 아직도 크흑이니 커

헉이니 유니버──스36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자이모쿠자였나? 걔를 미끼로 하는 것까지는 좋은 작전이었어. ……하지만,”


거기서 하야마는 미소를 지웠다.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내가 널 마크하지 않을 리 없잖아.”

“……너무 띄워줄 거 없어. 그런 대단한 역할은 아니라서.”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주위로부터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백팀


남자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온다.
어디 허술한 포인트는 없나 싶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고 있자, 그걸 알아차린 하야마가 최후
통첩처럼 말한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개인 플레이에는 팀 플레이로 대항해 줘야지.”


“그건 다수의 폭력이라고 하는 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는걸. 물량 작전이야.”
하야마는 싱긋 하고 상쾌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상태에서 웃는 표정을 짓는 것도 그냥 좋은 성
격만 가지고는 힘든 일이다. 이 녀석도 꽤 비뚤어진 구석이 있는가 보다. 하지만 지금은 하야마를

36
‘∀건담’의 하리 오드(ハリー・オード)가 쓰는 감탄사.
분석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듯 하야
마가 물어봐 온다.
“항복이야?”
하긴,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아니……. 자이모쿠자!”
들어올린 그 손을 장대를 향하여 힘차게 내리꽂았다.
“오오!”
그 부름에 주변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방황하던 자이모쿠자가 벌떡 일어나 장대 쪽으로 돌진해
간다.
“그쪽이 물량으로 나온다면, 이쪽은 중량으로 승부해 주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백팀 진영을 향해 나는 썩은 미소를 날리며 말했


다. 그러자, 깜짝 놀란 하야토가 재빨리 지시를 내린다.
“미끼의 미끼!? 큰일이야! 다들, 부탁할게!”
하야마의 지시에 토베, 야마토, 오오오카가 민첩하게 반응하여 접근을 저지하러 달려나갔다.

“여긴 못 지나가지!”
“어디 갈 수 있으면 가 보라고!”

“해치워 드리지요!”
세 명이서 단단히 스크럼을 짜고 자이모쿠자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자이모쿠자는 멈추지도

겁먹지도 않은 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길을 비켜라아아아아아! 으랏샤!”


멈추지 않고 달림으로써 그 가속까지 중량에 더하고 있었다. 위력은 충분하다. 세 사람을 돌파한
자이모쿠자는 그대로 장대까지 일직선으로 돌격했다.

장대가 천천히 흔들렸다. 관중들은 한 차례 술렁이더니, 이어서 숨을 죽인다. 장대가 반동으로

다시 천천히 흔들린다. 모두가 오로지 눈만 크게 뜨고 장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우뚱 하고.
장대가 쓰러진 그 순간, 환성이 폭발한다. 그 대환호 속에서, 자이모쿠자는 누구보다도 더 크게
승리의 포효를 외치고 있었다.

× × ×

가을도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는지, 부실에 들어오는 바람도 쌀쌀한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따뜻한 MAX 커피가 맛있다.
책상 위에는 티컵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이렇게 부실에서 보내는 방과 후의 일상도 무척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든다. 얼마 전의 체육제로
부터 며칠이 지나고, 봉사부는 정상영업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요컨대, 나와 유키노시타는 책을
읽고, 유이가하마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체육제의 여운은 조금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유키노시타가 책을 툭 덮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는데 지다니…….”
“아~……, 반칙패는 좀 의외였지 뭐야.”
두 사람은 티컵에 손을 뻗으며 그런 이야기를 한다. 나로서는 살짝 귀가 따가운 이야기이다.
“어떤 분이 머리띠로 어설픈 잔꾀만 부리지 않았으면 이겼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가 내 쪽으로 시선을 힐끔 보내온다. 아무래도 얼마 전의 체육제 결과


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유키노시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딱히 무리도 아닌
일이다.
“그, 그만그만, 힛키 때문에만 그런 것도 아닌데 뭐.”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유이가하마가 편을 들어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유키농하고 위험하


다37는 말은 묘하게 닮았는데 말입니다. 그거 혹시 거기서 따온 이름 아니냐?

그 위험하신 분으로 말하자면, 후우 하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아련한 눈을 하였다.


“일단 그렇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말대로, 체육제는 결과적으로 우리 홍팀의 패배로 끝났다. 게다가, 그 이유라는 게 최

종 경기 ‘장대 눕히기’에서의 반칙 행위 때문이었다.


폐회식에서의 결과 발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엉성하게 이루어졌다.
결과 발표를 담당한 것은 운영위원회 회장인 사가미이다.

“’장대 눕히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만, 홍팀과 백팀 쌍방의 반칙 행위, 위험 행위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노 게임으로 처리된 바 양팀 모두 무득점이 되겠습니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후 빠


른 시일 내에 여러분께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단편적인 한 마디로 상황은 종료되고, 백팀의 잠정 우승이라는 형태로 끝나게 되었다.
문제가 된 ‘장대 눕히기’ 같은 다수의 사람들이 뒤섞여 진행하는 경기에서는, 개개인의 플레이

내용까지 하나하나 체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쓰러져 놓고도 슬쩍 다시 일어나거나, 폭력적인 행위까지 이른다거나, 혹은 머리띠를 몰래 바꿔
치기하였을 녀석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바로 반발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반칙행위가 있었고, 누가 그런 짓을 했
는지 추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37
剣呑(켄농).
그러나, 이 반칙 행위의 존재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그 경기 내내 누
가 어떤 행위를 취하고 있었는지 전부 다 알지 못한다면 쉽게 단언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유령이나 UMA 38 같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에 가깝다. 본디 입증 책임은 반칙을 감독하는 쪽인 위원회에 있겠지만, 그 위원회가 밝히지 않

는 이상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덕분에 내 반칙도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긴, 나 말고 반칙한 사람이 없다는 증거도
없고.
“뭐, 위원장님이 그렇게 판단했으면 됐지 뭘.”
그러자 유키노시타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반성이 부족한가 보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


도 내가 반칙을 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사가미의 그 발표가 나를 지목한 말이
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거기까지 완벽하게 들켜버린 상황이다 보니, 감히 시치미를 뗄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래, 미안하다…….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다고…….”


약간 될 대로 되라는 느낌으로 사과하자, 유이가하마가 가볍게 설교라도 하는 것처럼 “떽!” 하고

손가락을 세운다.
“아니, 제대로 보고 있다구?”

“그래, 네가 붕대를 꺼냈을 때에는 뭘 하려는 걸까 싶었어.”

유키노시타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쉰다. 그런가, 거기서부터 목격하고 있었다면 이 녀석, 내가


반칙한 것도 다 알겠군…….
“아, 유키농두 봤었구나.”

문제의 그 장면은 유이가하마에게도 다 들키고 있었는지,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 쪽으로 얼굴

을 빙글 돌리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유키노시타는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린다.
“……우연히 말이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관심 없다는 듯 책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 만다.

“니들은 대체 뭘 쳐다보고 있는 건데…….”


아니, 뭐, 그런 단체경기라면 아는 사이인 쪽이 눈에 띄기 쉽다는 건 알고 있다. 실제로 ‘치바전’
때에도 나 엄청 열심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독설을 퍼부으려던 내 목소리도 조금씩 톤
이 낮아져 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질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유이가하마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38
Unknown Mysterious Animal, 미지의 생물.
“그, 그래도 뭐! 메구리 선배두 좋아해 주셨으니깐!”
유일한 위안은 그거다.
홍팀이 지기는 했지만, 메구리 선배에게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던 것 같다. 가능하면 이기게 해
주고 싶었지만, 뭐, 모든 일이 그렇게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유이가하마의 말에 유키노시타도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그래. 게다가, 사가미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그런 발표를 한 거겠지.”
“글쎄.”
나는 사람의 성장이나 변화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란 것은 결국 변하지 않
는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다만, 겉으로 꾸미거나, 가장하거나, 혹은 거리감을 잡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서로 증오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문제를 덮어 두거나,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체육제에서 지는 건 의외로 분한 일이구나. 처음 알았어.”
체육제 일을 떠올리자, 아무래도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듯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말한다.

“응, 내년엔 이기자!”


“……그래, 내년에는 꼭 그러자.”

의욕이 넘치는 유이가하마에게 유키노시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년에도 같은 팀이라는 보장은 없잖냐.”

“금방 또 그런 소리나 하구.”

유이가하마가 볼을 뿌우 부풀리자, 그와는 대조적이게 청량한 분위기로 유키노시타가 웃었다.


“그래, 히키가야는 적인 쪽이 더 즐거울 것 같아.”
“왠지 갑자기 의욕 생기기 시작했어!?”

그렇게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축제라는 특수한 상황이 지나

간 다음이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일상 속의 풍경이 무척 반갑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느 틈엔가 이런 일상이 익숙해지고 만 것처럼. 분명 이런 일상을 잃어버린 상황 또한 익숙해
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혹은, 무언가를 얻고, 그리고 무언가를 잃어가는, 그 자체가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들을 모두 삼켜버리고자, MAX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직 두 사람이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깐 커피 좀 사 올게.”
그 한 마디를 전한 다음, 딱히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부실을 나갔다.
가을 바람이 특별동 안으로 불어든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에서는 운동부의 구령 소리가 들려왔

다. 체육제도 끝났으므로, 그들 또한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하루카와 윳코도, 이 체육제, 그리고 사가미와의 사이에 대한 일을 유야무야 넘긴 채 일상의 고
리 안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제 조만간 모두가 체육제의 과정도 결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게 되고 모든 것은 풍화되어
갈 것이다.
인기척이 끊어진 교사 안을 천천히 걸어간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로 돌아들어 가려고 하는데, 하마터면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누구야, 위험하게스리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거기에 있던 것은 사가미 미나미였다.
사가미는 무언가 종이 뭉치를 떠안고 있고, 그 중 한 장에는 체육제라는 글자가 들쭉날쭉 보였
다. 아무래도 아직 운영위원회의 사후 처리가 남아있는 것 같다.
“……….”
“……….”

서로 눈을 피한 채 입을 다문다. 허나, 불현듯 사가미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거기, 좀 비켜 줄래?”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딱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와 사가미
의 관계성은 평행선 그대로이다.

나는 말없이 길을 양보했다.
그 뒤에는 단지, 떠나가는 발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래도 뭐, 글쎄. 대단한 진보 아닌가.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나와 사가미는 타인이라


는 관계성을 원만하게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도 마찬가지로 걷기 시작한다.

이렇게 축제 뒤의 축제가 끝나고,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 축제39가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러나, 울든 웃든 하루하루는 계속 흘러가고, 고교 생활은 끝을 향
해 나아간다.

따라서, 그들의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39
後の祭り. 이미 지나가 버린 일, 사후 약방문이라는 뜻. 직역하면 ‘뒤의 축제’.
후기 (pp.144-147)

안녕하세요, 일입니다. 아, 실수, 와타리 와타루입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어찌 이럴 수가!


그럼, 이 TV 애니메이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Blu-ray & DVD 초회한정판 특전
소설도, 이 6.75권으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6.25권이 나온 것이 6월이니 초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함께 해 주신 셈이 되겠습니다. 내 여름방학은 어디로 증발한 거야?
이 몇 개월 동안, 일련의 특전 소설과 원작 7.5권, 나아가서는 9월 발매인 게임 시나리오 감수에
11월 발매인 8권까지, 항상 뭔가 마감할 게 존재하는 ‘월간 와타리 와타루(月刊渡航)’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뭐야, 그 여행 잡지 같은 이름.


거기에 더하여 사축(社畜)이기도 한지라, 이번에도 상당히 괴로웠습니다.
뭐, 지금 상태나 일도 상당히 괴롭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옛날은 편하고 좋았었느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서, 예전의 학생이었던 시절도 역시 충분히 괴로웠구나 하고 요즘 느끼고 있습

니다. 어른이 되면 뭔가 바뀔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며, 그 시절 맛보고 있었던 온갖 고생이나, 고


난, 막연한 불안감, 그런 것들이 형태를 바꾸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여전합니다.

유감이로군, 학생 제군! 그대들의 괴로운 생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야! 후하하하!


하지만, 힘들어도 괴로워도 하루하루는 계속 흘러가는 것이고, 거듭 쌓여가며 과거가 되어 갑니

다.

학생 생활, 그리고 사회인 생활을 거치며, 저도 지금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이라거나, 일 같은 그런 것들.
혹은 인생의 기로에서의 선택 그 자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실패는 인간관계

에서의 실패였을지도 모릅니다.

실패는 잊을 수도 익숙해질 수도 만회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완전히 지워서 없었던 일


로 하는 것만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어쩌면, 실패야말로 우리의 살아있는 증거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도 그녀도 그 실패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런고로, 이상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6.25권, 6.50권, 6.75권을 보내드렸습니다.


이하, 감사 말씀.
퐁칸⑧ 하느님. TO・TSU・KA! TO・TSU・KA! 이번에도 최고로 멋진 자켓 일러스트 감사합니다.
원작도 동시 간행이라는 터무니없는 스케줄 속에서 함께 싸워주신 것,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음에
도 함께 열심히 해 보자구요!

담당 편집자 호시노 님. 매번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이 스케줄 세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소설, 그리고 미디어 믹스로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
음 번에도 와타리 와타루와 지옥에서 뵙기를.
요시무라 감독님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스탭 여러분. 매 권 감사 말씀과 중복되는 것 송구스럽습
니다만,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련하여 대단히 많은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애니메
이션으로 세상에 나온 것도 여러분 덕분입니다. 매주 TV 앞에서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패키지 발매는 계속됩니다만, 계속하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구치 타쿠야 씨를 비롯한 캐스팅 여러분. 드라마 CD부터 햇수로 2년, 이렇게 쓰니 정말 대단
히 오래 사귀어 주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차, 착각하지 마시죠! 사. 사귄다고는 했지만 그, 그
런 뜻은 아니거든요! (허접한 츤데레). 딱 2권을 다 썼을 즈음 오디션에 참여해 주셨던 그 시절의
일이 그립게 느껴집니다. 생각해 보면, 그 오디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제 안에 있었던 캐릭터
들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다양한 요소들이 단단히 다져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게 됩니

다. 원작의 대사나 깊은 생각 없이 쓴 문장들에서 캐릭터들의 마음을 이끌어 내어 형태로 빚어


표현해 주신 것,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귀어 주셨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제작 위원회를 비롯한 내청춘에 관여하고 계신 모든 분들. TV 애니메이션의 기획 제작부터 미디

어 믹스 전반, 광고, 판촉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필시 애니메이션에는 어울


리지 않았을 이 작품이 소설 이외의 형식이 되어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여러분

께서 힘써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중에서도 트위터 공식 계정의 재미난


트윗들은 저 역시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 자유분방한 느낌은 어떤 의미로 보면 가장 이 작품다운

분위기가 잘 배어나오고 있었던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BD & DVD 제작 담당자 분께는

특전 소설로 대단히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여러 방면에 걸친 조정과 배려 덕분에, 저도 어떻게


든 집필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 원작 소설부터 시작하여,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나 코미컬라이즈, 게임에 이

르기까지 내청춘이 다양한 전개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오로지 여러분의 성원 덕분입니다. 많은

독자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온, 그리고 함께 만들어 온 컨텐츠라고 감히 주제 넘게 생각해 봅니


다. 아직 원작은 한참 계속되겠습니다만, 이렇게 또 떠들썩한 축제 같은 나날을 여러분들과 보낼
수 있다면 대단히 기쁘겠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함께 어울려 주시며 이 작품을 놓치지 않고 즐겨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을 전해 드리며, 이번에는 이 정도에서 붓을 놓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은 8권에서 만나 뵙지요!

9월 모일 치바현 모처 심야, 지친 몸으로 지복의 한 잔, MAX 커피를 마시며


와타리 와타루
* 기본적으로 원문의 호칭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치만>히나: 에비나 상(海老名さん)
유키노>하치만: 히키가야 군(比企谷くん)
유키노>유이: 유이가하마 상(由比ヶ浜さん)

유키노>사가미: 사가미 상(相模さん)


유키노>하야토: 하야마 군(葉山くん)
유키노>토츠카: 토츠카 군(戸塚くん)
유이>토츠카: 사이 짱(さいちゃん)
유이>하야토: 하야토 군
코마치>유이: 유이 상(結衣さん)

메구리>하루노: 하루 상(はるさん)
메구리>하야토: 하야마 군
메구리>하치만: 히키가야 군
메구리>유키노: 유키노시타 상

메구리>유이: 유이가하마 상
메구리>사가미: 사가미 상

에비나>하치만: 히키타니 군(ヒキタニくん)


에비나>토츠카: 토츠카 군

사가미>미우라: 미우라 상(三浦さん)

하야마>자이모쿠자: 자이모쿠자 군(材木座く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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