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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은, 그 시작을 깨달은 순간 이미 지나가 있었다. (pp.

10-39)

2월에 들어서고 얼마 가량 지난 어느 날.
겨울의 추위는 아직도 매섭고, 건조한 북풍이 불어칠 때마다 교실 창
유리가 삐걱삐걱 울린다.
종례가 끝나자 기온이 한층 더 낮아지려는 기미가 느껴진다. 복도 쪽
에 가까이 위치한 내 자리는 난방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미묘하게 열
린 문틈 사이로는 황소바람이 밀려든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할짝 핥고
스쳐가자 소름이 오싹 돋는다.
하지만 창가로 눈을 돌리자 여전히 높이 떠 있는 태양이 시야에 들
어온다. 낮 시간이 서서히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달력상으로는 이제 입춘. 해마다 그렇지만 이렇게 추운데 뭔 얼어 죽
을 봄이냐고, 머리로만 Spring has come1이면 다냐? 같은 생각이 저절
로 든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라는 말도 있다.
방과 후의 교실도 조금씩 봄다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앞으로 한 달 가량 지나면 달력으로는 경칩.
교실은 난방이 잘 돼서 그런지 달력보다 다소 이르게, 월동하던 벌레
나 뱀, 개구리가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활기
를 띠고 있다.
그중에서도 창가 쪽 자리는 창틀 바로 아래에 난방 기구가 있는 덕
분에 한결 더 따뜻해 보인다. 그 주변에 자리를 틀고 있는 무리들도
무척이나 기운이 넘친다. 역시나 오늘도 어김없이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1
スプリングハズカム. 하타 모토히로(秦基博)의 노래.
“아~ 왠지 막 달달한 게 땡기네~”
토베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오오오카와 야마토가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동감이라도 하는 양 무릎을 탁 친다. 그러더니 토베 쪽으
로 손가락을 척 가리켜 보인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셋이서 서로 힐끔힐끔 시선을 교차시킨다.
“그 있잖아? …………초콜릿 같은 거 먹고 싶지 않어?”
토베가 쓸데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셋 다 의미심장한 표정으
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여자들 쪽으로 힐끔힐끔 시선을 보낸다. ……으
음. 한순간 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아직은 한겨울이었
던 모양이로군요!
하지만 그런 썰렁한 꽁트 따위보다 훨씬 싸늘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미우라의 반응이었다.
“……뭐?”
혀를 살짝 차더니 정색한 시선으로 토베 일당을 째려보자, 바보 3인
조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유이가하마도 에비나 양도 쓴웃음만
지을 따름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얼마 안 남았나……?”
하야마가 중재하듯이 그렇게 말하자 오오오카와 야마토가 고개를 끄
덕거린다.
“하야토야 당연 괜찮겠지만~ 우린 진심 위험하거든.”
“그렇지.”
오오오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야마토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
여 보인다. 실제로도 말끝마다 심각한 분위기가 살살 묻어난다. 근데
저 동정 기회주의자 녀석, 은근 삐딱한 게 상남자 같아서 멋있다 야
……. 그런 생각을 하는데, 토베가 실실 웃으며 하야마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아니~ 그래도 하야토는 기본적으로 그런 거 안 받아 주잖아.”
“진짜!? 아깝지도 않아?!”
오오오카의 절규에 하야마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가, 괜한 트러블
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취하는 거겠지.
그러나 하야마에게 마음이 있는 여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행동을 가
만히 납득해 주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필두에 있는 미우라 같은 경
우는 토베 일당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면서도 관심 없는 척 시큰둥한
표정으로 딴 데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미우라를 보며 유이가하마가 “아” 하고 말문을 연다.
“그래두, 잘 모르는 사람한테 받는 건 왠지 좀 무서울 거야.”
자기도 이해한다는 양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에비
나 양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가로막듯이 손을 척 내민다.
“잠깐만. 안 받아 주는 쪽이면…… ‘공’이겠네?2 그럼 히키타니가 받아
주는 ‘수’란 얘기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우라에게 머리를 찰싹 얻어맞는다. 저 인
간은 진지한 표정으로 뭔 개소린지……. 그러더니 미우라가 휴대용 티
슈를 쓱 들이민다.
“에비나, 코피.”
“아, 땡큐, 고마워.”
후히히 하는 수상쩍은 웃음을 거두고 팽 하고 코를 푸는 에비나 양
을 보면서, 미우라가 훗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난방기 바로
옆자리인 것도 한 가지 이유겠지만,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있어서인지

2
受け(우케)에는 ‘받다(受ける, 우케루)’의 뜻 외에 BL용어 ‘수’의 의미가 있음.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는 다들 따스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니, 그와 그녀들만이 아니라 이 교실 전체에 그런 온기가 가득하였
다. 토베를 비롯한 바보 3인조만이 아니라 교실 여기저기서 누구 할
것 없이 들떠 있는 분위기다.
시간상으로 보면 이제 곧 발렌타인 데이다.
요컨대 엄마와 여동생에게 초콜릿을 받는 날이다.
과연 발렌타인 데이는 사랑으로 가득한 축복된 날인가? 거기에는 다
소 이론의 여지가 있다. 본디 그 성립만 생각해 봐도 처음부터 피로
흥건히 젖은 날이다. 비단 그 성인만 그런 게 아니라, 마피아들 간의
전쟁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3 애초에 치바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발렌타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바비 발렌타인4이지, 초콜렛 따
위는 안중에도 없을 거다.
하지만 나 따위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본들 세간의 인식이 하루아
침에 뒤바뀔 턱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제 와서 제과업계의 상술이라는
음모론을 내세우다가는 무지몽매한 인간이라는 낙인만 찍힐지도 모른
다.
발렌타인 데이는 이미 이 나라의 독자적인 문화로 정착했다. 크리스
마스 같은 날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할로윈 같은 경우도 조만간 훨씬
더 일본식으로 변모한 행사로 정착할 수도 있다. 따져 보면 여름 축제
나 봉오도리5, 춘분과 추분에 성묘 가는 것과 크게 다를 바도 없다.
결국 주어진 선택지는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일 뿐, 정통이 아니네
사도네 뭐네 하고 부정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든 발렌타

3
발렌타인 데이 학살 사건(Valentine day's massacre, 1929).

4
Robert John "Bobby" Valentine. 전 치바 마린즈 감독.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

5
盆踊り. 오봉(お盆, 보통 양력 8월 15일)에 열리는 조상을 추모하는 행사, 또는 그 춤.
인 데이든 부정할 거라면 “내가 싫다잖아!” 하고 소리 높여 외칠 수밖
에 없다.
내 경우에는 해마다 코마치가 약아 빠진 초콜릿을 선물해 주기 때문
에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코마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오라버니
입장에서는 목이 빠지게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올해는 과연 원가 얼마짜리 초콜릿으로 답례를 강요해 올까…… 여동
생을 위해 지갑을 탈탈 털리게 될 기쁨에 벌써부터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왠지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떡해! 이러다간 절대 다 못 끝낼 거야!”
“괜찮아. 아직 충분하다구! 힘내! 포기하지 마!”
문득 그쪽을 쳐다봤더니 다른 한쪽에서는 여학생 카스트 2, 3단계 언
저리에 있는 여자들이 머플러나 스웨터 같은 걸 바쁘게 뜨고 있는 중
이다. 마치 라노벨 작가와 편집자 같은 대화다. 아니, 당연히 늦는 게
정상 아니냐? 발렌타인 데이가 코앞인데 이제 겨우 10퍼센트 정도밖
에 못 했구만. 기일에 맞추려고 애쓸 바에야 차라리 마감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건설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런 비극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있던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
나 보다.
미우라가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으며 불쑥 한 마디 한다.
“……뭐, 수제 같은 건 살짝 부담스럽잖아? 안 받는 것도 이해는 가.”
무심하게 툭 던지는 그 말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부담스럽구나…… 그러게……”
유이가하마는 살짝 삐져나온 카디건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엷은 복숭앗빛을 띤 갈색 머리를 꼬물꼬물 매만진다. 그리
고는 살짝 난처한 듯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그 미소를 보자 언젠가 있었던 일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다.
벌써 한참 오래 전 어느 계절에 있었던 그 일.
──’수제’라.
그 녀석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 보려 그랬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흘끗 돌리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도 유이가하마도 서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글쎄, 중요한 건 모양보다는 마음이겠지.”
어딘가 쓴웃음처럼도 들리는 하야마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그러췌! 아니, 나도 개인적으로 말이야? 살짝 그런 바람이 있달까
뭐랄까?”
토베가 즉석에서 무릎을 탁 치며 찬성한다. 허나 그 대각선 방향에
있는 에비나 양은 팔짱을 끼더니 시선을 옆으로 착 돌린다.
“그래도 수제 초콜릿은 어설프게 만들면 눈에 빤히 다 보이고 원가
도 별로 안 되니까,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살짝 어려울 거야. 차라리
그냥 사는 게 안정적이지 않을까?”
“그거도 괜찮네!”
에비나 양의 말에 토베가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한다.
……아니, 최소한 뭐라 한 마디라도 하고 넘어가야 되는 거 아니냐?
“……흐응~ 수제 초콜릿이라.”
무관심한 투로 툭 던지는 미우라의 목소리. 그 뒤로도 그와 그녀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고 떠들기를 거듭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던 단절은 찾아볼
수 없다.
하야마는 그에게 요구되는 하야마 하야토다운 모습을 성실하게 보여
주었고, 미우라도 미우라대로 조금씩 서서히 그 거리를 줄여 나가려
하고 있었다. 글쎄, 토베와 에비나 양은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둘 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두 사람다운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 주는 중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이가하마 유이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잔뜩 들떠 있는 교실 가운데 서서히 다가오는 봄처럼 시나브로 따스
해져 가는 그 공간이 외부인의 눈에는 다소 눈부신 듯 느껴졌기에, 나
는 그 광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볼 따름이었다.

× × ×

특별관으로 향하는 복도는 차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피부가 바짝 당기는 기분이다.
교실 창유리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지만, 복도 쪽 창문은 한 점 흐림
없이 깨끗한 덕분에 교정의 모습이 똑바로 잘 보였다. 거기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라고는 이파리를 떨군 앙상한 나무들과 휑하니 화단을 채
우고 있는 흙더미들뿐. 추운 북쪽 지방과는 또 다른, 어딘가 삭막해
보이는 짙은 갈색으로 가득한 겨울 풍경이다.
치바의 겨울은 눈이 적게 내린다. 눈에 익숙지 않은 칸토 지방 가운
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설량이 적은 지역일 것이다. 저번 달에는
도쿄에 눈이 내린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그때도 치바에 눈 따위는 찾
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겨울다운 게 없다 보니 공연히 더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
까 전까지 머물러 있던 교실과의 온도차가 격하게 피부에 와 닿은 탓
에 목에 두른 머플러를 위로 추켜올린다.
그 교실의, 그 공간이 따스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단순히 난방기 근처
라는 물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틈새가 제대로 메워져 있었
기 때문이다.
분명 하야마가, 그리고 모두가 바라는 것처럼, 그들은 드라마틱한 결
말 없는 평온하고 따스한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마치 세계가,
인생이 마지막에 이르는 그 순간처럼. 행복과 평화는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그와 그녀들도 몇 번씩 겨울을 나면서 경험적으로 봄은 찾아
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따스하지만은 않은 섬약한 이별의 순간이 기다리는 봄. 꽃 피는
자리에 비바람 많듯이 인생이란 이별의 연속이 아니겠는가.6
학급은 바뀌고, 모두 각자의 인간관계를 새롭게 구축해 간다. 내년
이맘때는 한창 수험 기간 중이기 때문에 학교에 올 일도 없어진다. 그
렇기에 누구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맞이하려는 바람을 안은 채
이 겨울을 촌각을 아끼며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런 모습에는 버젓한 온기가 담겨 있을진대, 어딘지 모르게 으
슬으슬한 한기를 느끼고 만다. 머플러 속에서 어우 추워 하고 작은 소
리로 중얼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또박또박 가벼운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돌아보려던 내 어깨를 무언가가 툭 친다. 그쪽을 보자 영
못마땅한 기색으로 뾰로통한 표정을 한 유이가하마가 있었다.
“왜 먼저 가구 그래……?”
“아니, 딱히 같이 가자 그런 적 없거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 찝찝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하마는 멍하니 입만 떡 벌리더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꼬물꼬물 만지작거린다.

6
당나라 시인 우무릉의 시 ‘권주(勸酒)’의 구절. 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화발다풍우, 인생족별리).
“……아, 기다려 줬는 줄 알았어. 힛키가 교실에 잠깐 남아있길래……”
“그건 뭐, 그냥……”
그렇게 말하면서도 왜 스스로가 교실에 남아 있었는지 문득 생각에
잠기게 된다. 확실히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유이가하마의 요청에 따라
함께 부실에 간 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어쩌면 나도 모
르게 같이 가자고 얘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다른 구실이 제대로 머리에 떠올라 준다.
“그 뭐냐, 하야마하고 미우라 분위기 좀 본다고.”
“아~ 응. 이제 괜찮은 거 같애. 참 다행이야.”
유이가하마는 나직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살포시 끄덕인다. 그리고
는 인적 없는 복도 가운데 내 앞으로 몇 발짝 나오더니, 몸을 틀어 이
쪽을 향한다.
“있잖아, 참 좋지? 그런 거. 다들 생각하는 건 이것저것 많겠지만, 그
래두 지금을 소중히 한달까, 막 지금을 제일루 아낀달까……”
한마디 한마디 되새기듯 말하는 그 표정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하긴 그래. 지금이 제일일지도 모르지.”
“오~ 힛키 치고는 웬일루 긍정적이네……?”
“과거를 떠올리면 후회돼서 죽고 싶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우
울해지니까 소거법으로 따지면 지금이 곧 행복하다 할 수 있겠네.”
“역시 순 부정적이었어!”
유이가하마는 뺨을 볼록 부풀려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축
떨군 채 총총히 앞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투덜투덜 불만을
표시한다.
“맨날 그런 소리만 하구……. 분위기 좀 맞춰주면 안 돼?”
“분위기는 무슨……”
만약에 예를 들면.
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그런 분위기 말인가.
그래,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된다. 나도 때로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인간 군상들을 보고 익히다 보면, 얼마간이나마 그런 분위기 사이에
끼어 한 패라도 된 것처럼 그럭저럭 즐기고는 『분위기 좀 맞춰 봤어』
하는 한마디로 때워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마냥 기대하고,
호의에 기대고, 내맡기고, 기다리고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태도는 불성실하다. 어떤 해답과 결말이 기다
리고 있다 할지라도 허위도, 기만도, 시기와 의심도 없이 똑바로 다가
서고, 그런 다음에 후회하고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 분위기에도 맞춰 줄 겸, 지금 물어보기로 하자.
“그러고 보니……”
애써 입 밖으로 꺼낸, 살짝 쉰 소리가 섞인 그 말에 유이가하마가 뒤
돌아본다. 갸우뚱 기울인 고개와 시선이 이어질 말을 묻는다. 그 모습
을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조금 눈이 시렸던 탓에 얼굴을 약간 돌리고
만다.
“……너, 조만간 시간 되냐?”
“어? 으, 응. 어, 아마두…… 어지간하면 시간 다 될 텐데…”
살짝 놀란 듯 허둥지둥 손을 놀리며 황급히 폰을 꺼내보는 둥 바쁘
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내 그 움직임이 뚝 그친다.
유이가하마는 부실 문을 힐끔 본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어딘가 침울하게도 보이는 표정으로.
그 얼굴은 다소 뜻밖이기는 했지만, 구태여 그 이유를 묻는 것도 거
부감이 들었던 탓에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복도의 공기는
무척이나 차갑고 건조하여 무언가 목구멍 깊숙이 엉겨 붙은 듯한 위
화감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나은 다른 표현이라든가, 뭔가 더 스마트한 방법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새삼 이렇게 일부러 물어보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있게 판단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고, 나는 윗몸을 숙이고 내리뜬 눈
그대로 유이가하마의 얼굴을 힐끗 살핀다. 그제서야 시야에 들어오는
난처한 듯 미소 띤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숨이 탁 멎는다.
드리운 침묵을 애써 깨려는 것처럼 유이가하마가 빠른 어조로 말한
다.
“쪼끔 생각해 볼게, 나중에 또 얘기하자!”
“……아, 응.”
안도일까, 혹은 탈진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까.
무엇이든 간에 깊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탓에 살짝 쉰 소리가 섞
여버린 내 대답도 채 기다리지 않고, 유이가하마는 또박또박 몇 발짝
앞서 나가 부실 문을 열었다.

× × ×

힘껏 열어젖힌 문. 그 안으로 걸음을 내딛자 포근한 공기가 몸을 감


싸 안는다.
교실에 비하면 사람 수는 훨씬 적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여기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부실이 위치한 특별관 쪽이 햇볕이 더 잘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그 자리에는 언제나처럼 유키노시타 유키노
가 앉아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문고본 책에서 고개를 들고, 긴 머릿결을 조용히 쓸
어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안녕.”
“얏하로~ 유키농!”
“반갑다.”
유이가하마가 손을 척 들어 보이며 답하고, 나 역시 늘 하던 적당한
인사말을 입에 담으며 각자 제자리에 앉는다.
여기가 내 자리라고 누가 선언한 적도 없고, 누가 일부러 강요한 적
도 없고, 누가 의문을 제기한 적도 없는, 언제부턴가 그대로 굳어진
각자의 자리. 그 자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런 만큼 낯선 녀석이 끼어들면 위화감 또한 격하게 요동치기 마련
이다.
“선배님, 느려요~7”
“너는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건데……”
책상 위에 엎드린 채 다리를 파닥거리고 있는 이는 분명 우리 학교
학생회장을 맡고 계실 터인 잇시키 이로하 양이다. 일부러 볼에 바람
을 볼록 넣어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고개를 홱 돌리는 그 일
거수일투족이 하나같이 다 여우 같기 그지없다……. 아니, 애초에 나하
고 유이가하마보다 빨리 와 있는데, 혹시 너 빠르기는 뭐처럼 어쩌고
하는 걔 아니냐?8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봤는데, 너희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계
속 여기 있었어.”
유키노시타가 후우 하고 한숨을 지으며 말한다. 잇시키를 힐끗 쳐다

7
おっそーい. ‘함대 컬렉션’, 시마카제(島風). 사쿠라 아야네(佐倉綾音)의 성우장난.

8
速きこと何風の如しなの? 시마카제 입수 대사, 빠르기는 시마카제처럼(速きこと、島風の如し).
보는 그 시선이 유난히 싸늘하다. 그런 것 치고는 차도 똑바로 끓여
주고 하는 걸 보면 의외로 환대는 해 주고 계신 모양이다. 환대하는
방법에도 이것저것 종류가 많은 모양인데, 왠지 이것도 막 하나하나
컬렉션하고 싶어지지 말입니다?
정작 잇시키 본인은 유키노시타의 싸늘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도 모르쇠로 일관할 뿐. 몸을 내 쪽으로 돌리고는 입가에 손을 척 붙
이더니,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몰래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유키노시타 선배 있죠, 제가 막 들어오니깐 처음엔 얼굴에 웃음꽃이
아주 활짝 피더라구요? 근데 바로 실망하시더니…… 그 뒤로 쭉 저런
분위기예요.”
아, 그렇냐……. 하긴 잇시키가 찾아와서 뭐 좋은 일이 있었던 역사가
없으니 말이야, 하하하. 아니, 얘는 진짜 왜 자꾸 여기 쳐들어오는 건
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나직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잇시키?”
그쪽을 보자 유키노시타가 생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나 이 얼굴
뭔지 알아! 무서운 유키농이 짓는 그 미소야!
“네, 넵! 죄송해요, 저 진짜 용무가 있어서 왔거든요!”
잇시키는 마치 조건반사라도 되는 것처럼 유키노시타의 미소를 보자
마자 내 뒤로 쏙 숨더니 등을 꾹꾹 눌러댄다. 야, 하지마, 나도 저러면
살짝 겁나거든?
“자, 그만그만. 이로하, 그 용무라는 거 학생회 일이야?”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유이가하마가 이리 온
하고 부르듯 잇시키 쪽에 손짓을 보낸다. 그러자 잇시키도 “유이 선배,
너무 상냥하세요~” 하고 말하며 다시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원위치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시선으로 묻자, 잇시키
는 한층 더 천연스런 얼굴로 손을 살그머니 흔들어 보인다.
“아뇨, 그게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남더라구요~?”
“뭐?”
얘는 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 거람……. 님 때문에 뼈 빠지게
고생했던 게 바로 얼마 전 일입니다만……? 아니지, 그 일이 끝난 덕분
에 이제 오히려 시간이 남아돈다 이거냐? 아니면 뭐 혹독한 업무가
너무 오래 이어지다 보면 그 뒤에 찾아오는 휴식과의 격차가 너무 큰
나머지, 새하얗게 불타버려서 정신 못 차리게 된다는 번아웃 신드롬
같은 그런 건가? ……근데 새하얗게 불태운 건 네가 아니라 나 같거든
요? 예? 그렇게 아까 그 발언의 진의를 음침한 시선으로 뻔히 쳐다보
며 샅샅이 살피고 있는데, 잇시키는 검지손가락을 턱에 착 붙이더니
귀엽게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지금은 학교 행사도 없고요, 사소한 일들은 부회장 같은 분이 열심
히 잘 처리해 주고 있거든요. 연도말 보고서 같은 것도 저는 마지막에
도장만 콕 찍으면 되고요.”
호오, 학생회에서 하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외로 하는 일들
이라고는 다 그런 류의 것들일지도 모른다. 3학년은 한창 입시 시즌이
진행 중이고, 학교 측도 신입생 입시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
기다.
그렇게 되면 재학생들은 상당히 어중간한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하
기야 그리 따지면 시간이 남는다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요, 별로 안 바쁠 때는 학생회도 쉬어 주기로 했거든요.”
오오, 착한 경영자로구나……. 그렇게 보면 딱히 별 일도 없는데 이렇
게 부실에 늘 집합시키는 이 부활동은 악덕 부활동이 틀림없다!
그 말에 이 악덕 부활동의 악덕 경영자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
면서도 조용히 턱에 손을 얹고 묻는다.
“너, 부활동도 있잖니?”
고개를 갸웃하는 유키노시타의 말에 잇시키는 살짝 부끄러운 듯 뺨
을 붉히더니, 살그머니 귀엽게 고개를 돌린다.
“………………그게요, 축구부는 요즘 추워서요.”
귀엽고 자시고 그냥 지극히 입에 담기 부끄러울 만한 이유였다. 유키
노시타는 애써 두통을 가라앉히듯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고, 유이가하
마도 애써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 아하하……. 그럼, 용무는 뭐야?”
그 물음에 잇시키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휙
돌린다.
“근데요, 선배님,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지만요, 단 거 좋아하세요?”
“하야마라면 아무거나 기꺼이 잘 먹어 주겠지, 뭐.”
이미 잇시키의 행동 원리는 다 파악하고 있다. 미리 기선을 제압해
놓자 잇시키는 재미없다는 양 뺨을 볼록 부풀린다. 그 말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어 말한다.
“아, 그치만 하야토는 초콜릿 안 받는다 그랬어.”
“네~? 왜 안 받아요~?”
“……그, 글쎄?”
그렇게 되묻는 말에 유이가하마가 고개만 갸웃거리자, 유키노시타가
짧게 한숨을 짓는다.
“다툼이 생길 게 뻔하잖니.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 다음 날마다 교실
분위기가 무척 살벌해지곤 했었어……”
“……아~”
“……아~ 왠지 이해가 가.”
잇시키도 유이가하마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그럼, 나도 알지. 알다
마다!
다음날이 되면 교실은 분명 『두근두근☆여자들만의 결석 마녀 재판!
밀고자도 있다구!』 9 같은 빅 이벤트로 대성황을 이뤘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여자들끼리 모여서 나누는 이야깃거리는 대부분이 다
른 여자 욕하는 얘기거든(내 조사).
참으로 무섭구나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데 그 험난한 뒷세계, 아,
실수, 여자들의 세계에서 시련을 당하며 살아왔을 잇시키가 조용히 한
숨을 내쉰다.
“그럼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선배님 취향이라도 상관없어요. 선배
님, 단 거 좋아하세요?”
“꼭 질문을 그런 식으로 해야겠냐……?”
분명 아까와 똑같은 질문일 텐데 도저히 순순히 대답해 주고 싶지가
않다. 이건 뭐 대놓고 덤으로 물어본다는 말투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달가닥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난다. 그쪽을 보자 유이가하
마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었다.
“힛키는 단 거 좋아해!”
“그래, 맞아.”
어째 유키노시타 쪽도 한 수 아래인 상대를 쳐다보는 것처럼 훗 하
고 은근히 고압적인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두 사람의 태도에 살짝 기
가 눌린 듯한 잇시키가 말을 약간 흐린다.
“왜 두 분께서 대신 대답하시는진 모르겠지만요…… 그럼 마침 잘 됐
네요!”
“하아……. 아니, 뭘?”
“얼마나 달게 만들어야 될지 고민이었거든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

9
女だらけの欠席魔女裁判! 密告もあるよ! 과거 후지TV의 프로그램 ‘女だらけの水泳大会’ 시리즈
에서 따온 것. ‘ポロリもあるよ!(서비스 신 있음!)’이라는 패러디 소재를 남기고 소멸.
다르잖아요~?”
잇시키는 내 질문은 안중에도 없는 양 무시한 채 말을 계속 잇는다.
그 말에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갸웃한다.
“얼마나……? 잇시키, 네가 직접 만들 생각이니?”
“의외네……”
그 말에 잇시키가 발끈한 표정을 짓는다.
“뭐예요, 저 과자 진짜 잘 만들거든요?”
“좋겠다. 나두 잘 만들고 싶은데, 너무 못 만들어서 말야……”
잇시키가 빈약한 가슴을 활짝 펴는 데 반해, 그와는 대조적으로 유이
가하마는 어깨를 움츠린 채 새우등을 하고 있다. 허어, 잔뜩 내민 가
슴이 더 작아 보이는데 어째 원근감이 좀 많이 이상하네……. 원근법이
잘못됐나? BD에서는 작화 수정 부탁드릴게요!
아니 뭐, 유이가하마 같은 경우는 단순히 못 만드는 수준을 초월해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가슴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유이 선배. 요리는 정성이에요.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냥한 마
음씨와 배려의 마음이라구요. 상대방을 제대로 생각하면서 만드는 게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에요.”
잇시키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한 유이가하마를 달래듯 다정하게 어깨
를 톡톡 토닥여 주더니, 손가락을 척 세워 보인다. 그리고는 사근나긋
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격려를 보내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차피 받을 사람은 제과의 제 자도 모르는 남자잖아요? 그래서 수
제 초콜릿이 있는 거라구요.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생산한 다음에요,
마무리할 때 살짝 센스를 발휘해서 하나씩 커스텀하면 끝! 이거면 남
자들 낚는 건 껌이라구요.”
“배려의 방향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냐…….? 상냥한 마음씨
는 고사하고 완전히 지갑에만 집중하는 거 같은데.”
“논리만 놓고 보면 틀린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게 더 악질적이구나……”
“왠지 하나두 위로가 안 돼……”
연이어 쏟아지는 비판에 그 뻔뻔한 잇시키조차도 한 발 물러나고 만
다. 한순간 우웃 하고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그건 그렇다 치고요……
하고 말하기라도 하듯 억지로 화제를 전환시킨다.
“뭐, 지금 건 그냥 농담이랄까요, 선배님 말하는 거 한번 따라 해 본
거뿐이라구요……. 아무튼요, 의리 초콜릿 만드는 데 참고해 보려고 그
러거든요. 선배님은 어떤 단맛 좋아하세요?”
“단맛? ……그야 이거지.”
가방에서 꺼낸 물건은 물론 MAX 커피. 왜냐면 이것 또한 특별한 존
재이기 때문이랍니다.10
맥캔을 테이블 위에 탁 꺼내 놓자 세 사람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다.
아니,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쳐다보는데……? 단 거 하면 이거 아니냐?
치바 사람들 중에 이거 받고 싫어할 사람 없잖아? 하고 역설해 보고
싶었는데, 어째 다들 엄청 미묘한 표정이네…….
캔커피를 빤히 쳐다보던 유이가하마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럼 나두 왠지 만들 수 있을 거 같애.”
“야, 웃기지 마, 너 지금 맥캔 무시하냐? 그냥 커피에다가 설탕하고
연유만 때려 부으면 끝인 줄 알어?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하네
진짜.”
“진심으로 화났어!?”
당연하지. 단순히 커피에 연유만 탄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오
히려 연유에 커피를 탔다는 표현이 더 옳게 느껴질 수준이다. 성분 표

10
‘웨더스 오리지널(Werther's Original, ヴェルタースオリジナル)’ 캔디 CM의 문구 패러디.
시대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서는 그런 찰진 단맛이 나올 수가 없다.
감히 아마추어 따위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말씀.
잇시키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무언가 생각하듯이 입을 연다.
“근데요, 그렇게 하면 예산 초과겠네요.”
“몇 개나 만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개당 130엔 이하로 맞추기도
무척 어려워 보여……”
유키노시타가 기가 막힌 양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지만, 그럴 걱
정은 전혀 없다.
“괜찮아. 맥캔은 싸게 파는 데 잘 골라서 박스 단위로 사면 훨씬 저
렴하게 살 수 있거든.”
“힛키는 도대체 맥캔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꿀 빠는 인생하고는 거리가 멀다 보니 일종의 반작용 같은 거지. 항
상 인생의 매운 맛에 시달리는 신세거든.”
헹 하고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자 유키노시타가 어깨로 내려온 머
리칼을 쓸어 넘기며 당돌한 미소를 짓는다.
“인생의 매운맛이 아니라, 인생의 쓴맛이겠지”11
“뭐 어때, 맵든지 쓰든지. 결과만 따져 보면 어차피 고통받는 건 똑
같잖아. 아무튼 그런 만큼 앞으로는 단물만 쪽쪽 빨아먹으면서 살고
싶다 이거야.”
“아직 인생의 쓴맛을 덜 보았나 보구나……”12
후우 하고 유키노시타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

11
苦汁は吸うものではなく、嘗めるものよ(간수는 마시는 게 아니라, 핥는 거야). 원문에서 하치만
은 괴로움을 겪는다는 뜻의 관용어 ‘苦汁を嘗める’의 ‘핥다(嘗める)’를 ‘마시다(吸う)’로 실수.

12
あなたが嘗めていたのは苦汁ではなくて人生だったみたいね(네가 핥던 건 간수가 아니라 인생이
었나 보구나). 말장난. 일본어의 ‘핥다(嘗める)’에는 ‘얕보다’라는 의미가 있음.
렇네. 맵든 쓰든 앞으로도 인생의 고통은 피할 수 없을 터. 13 고로 인
생=고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바, 인생은 괴롭다!
그런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잇시키가 나를 보고 훗 하고 코웃음을
친다.
“에효.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요.”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너무하네, 너. 잇시키는 홍차를 단숨에 쏙 들이
켜고는 종이컵을 톡 내려놓고 다시금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의리 초콜릿 기준으로 생각해 주세요.”
“의리 초콜릿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되새겨 보지만 의리 초콜릿이란 물건을 받
은 적이 없다 보니 도무지 기준을 알 수가 없다. 뭐? 여동생? 여동생
한테 받은 건 당연히 진심 초콜릿 아니냐?
그런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난 모양인지 잇시키가 썩소를
샐쭉 지어 보인다.
“아~ 선배님, 혹시 초콜릿 받아 보신 적 없어요? 그래도요, 남자들끼
리는 초콜릿 받은 숫자로 시합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한 개도 못
받으면 남자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잖아요, 그쵸?”
“아니, 그런 거 딱히 필요 없거든……? 근데 언제부터 발렌타인 데이
가 그런 스포츠로 변신했는데?”
많이 받은 쪽이 승리한다는 승패 결정 방식 자체는 명쾌하기 그지없
는데, 룰 쪽은 엄청 허술하지 않나? 특히 그 의리 초콜릿인가 뭔가 하
는 오프사이드 트랩 같은 그거! 시뮬레이션으로 바로 레드 카드 먹여
버려야 되는 거 아니냐? 근데 오프사이드가 뭐더라? 축구 규칙 그런

13
俺ってば苦汁ぺろぺろしてるし、人生もぺろぺろしてる(나는 간수도 싹싹 핥고, 인생도 싹싹 핥
고 있었군). 以上のことから人生=苦汁と言えるので (고로 인생=간수라 정의할 수 있으므로).
거, 사실 잘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애써 변명해 봤지만, 잇시키에게는 단순한 허세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묘하게 따스한 시선과 함께 에효, 참 나 하고 안쓰러워하는 양 한숨을
흘린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나 유키노시타가 잇시키의 말을 가로막는다. 긴 머릿결을 살포시
쓸어 올리며 여유롭게 머금은 그 미소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어리둥
절해 있는 앳된 분위기의 잇시키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어……? 혹시 유키노시타 선배…”
잇시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유키노시타는 다 듣지도 않고 곧바
로 훗 하고 부드럽게 웃는다.
“히키가야한테는 경쟁할 친구 따윈 없는걸.”
“아, 그러게요.”
그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잇시키를 따라 나 역시 옳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서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고 있으니 무슨
닭장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러게, 일리 있다. 외톨이는 경쟁 원리에 구
속받지 않는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 속한 존재라 이거군. 너무 원시적
인 나머지 한 명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만.
진정한 평화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데, 옆에
서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뺨을 볼록 부풀린다.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애초에, 힛키한테는 벌써 줄 사람
다 있는걸. ……그치?”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시선을 이쪽으로 힐끔 보낸다.
나도 거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어……? 그거 혹시……”
잇시키의 시선이 나와 유이가하마 사이를 힐끔힐끔 오간다. 당혹스럽
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마주보자 나도 모르게 의기양양한 웃음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른다.
“훗, 그래. ……나한테는 코마치가 있거든!”
그러니 당연히 줄 사람이 다 있단 말이지! 앗싸! 여동생이 있어서 정
말 다행이라니까! 여동생만 있으면 돼!14
하지만 잇시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 코마치……? 그게 누군데요? 쌀 이름요?”
“쌀 아냐.”
뭐야, 잇시키 너네 집은 아키타 코마치 쌀 먹냐? 오히려 개인적으로
는 아예 우고 농협15 같은 데하고 콜라보레이션 쌀을 새로 만들어 보
고 싶을 정도다. 아니, 근데 치바 농협이 좀 나서 주면 안 돼?
“아, 코마치는 힛키 여동생이야.”
유이가하마가 설명해 줬지만 잇시키는 전혀 관심 없는 얼굴로 헤에~
호오~ 하는 소리만 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선배님, 여동생 있었죠?”
“그래.”
있지. 세계구급 여동생이. 국민 여동생을 초월한 세계 여동생이.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나를 잇시키가 수상쩍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본
다. 극한까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쏘아보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시스콤?”
“뭔 헛소리야? 아니거든?”

14
妹さえいればいい. 라이트 노벨 ‘여동생만 있으면 돼.’

15
JAうご. 니시마타 아오이(西又葵)의 일러스트 포장 쌀 ‘아키타 코마치(秋田小町)’로 유명.
그렇게 항변해 봤지만 주위의 반응은 차가울 따름이다.
“……어,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 같애.”
유이가하마가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시타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아니, 옹호 좀 해 주라, 응?
그 반응에 흐음흐음 하고 무언가 납득한 듯한 이로하스. 그러더니 검
지손가락을 세워 턱에 딱 붙이고는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
울여 보인다.
“선배님. 역시 연하 취향이신가 보네요?”
“아니, 딱히, 전혀.”
연하네 연상이네 따위를 떠나서, 나는 상대방이 누구든 관계없이 올
라운드로 버거운 타입이다.
그렇게 대충 때우고 넘어가려는데, 잇시키가 간신히 귀에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칫 하고 혀를 찬다.
“그럼……”
잇시키는 목 상태를 점검하듯이 음 하고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딱 한 번 나를 힐끗 올려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옆으로 피해버린다.
교복 옷깃을 꼬옥 쥔, 살며시 움직여 흐트러진 스커트를 바로잡는 그
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내쉬는 그 숨결에는
희미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입을 열어 천천히 한 마디씩 말을 이어 나간다.
“연하인 여자애는, ……혹시, 싫으신 거예요?”
…………싫어, 할 턱이 있나! 암! 오히려 좋은지 싫은지 묻는다면 무지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
유이가하마가 기가 막힌 듯 짧은 한숨을 흘리며 잇시키를 보며 말한
다.
“그거 결국 괜히 의미심장하게 얘기하니깐 그런 거잖아……”
“……하긴, 그렇지.”
음, 나도 그 의견에 찬성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쯤 되면 내성이 생기
기 마련이다. 그런 태도가 영 못마땅한 듯 잇시키는 살짝 삐친 눈빛으
로 이쪽을 쳐다본다.
그 태도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만다.
잇시키의 행동과 말투는 물론 잇시키 본인도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하
지만, 몇 가지 이유 탓에 지금의 나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을 뿐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진작에 홀랑 넘어가고도 남았을 게 틀림없다.
그 몇 가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난 여동생이기만 하면 연상이든 연하든 상관없이 좋아하거든.”
“그거 시스콤이나 연하 취향을 떠나서 완전 중증 아냐?!”
유이가하마의 구슬픈 목소리가 부실 안에 메아리치고, 잇시키도 완전
히 질려버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왜, 뭐 어때서? 연상의 코
마치라, 잠깐 상상만 좀 했을 뿐인데 왠지 막 설레는구만. 누구 편 들
어 줄 녀석 없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는데, 어째 유키노
시타가 난해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연하는 어떤 기준으로 연하로 판단해야 될까? 학년? 출생 연도? 아
니면 생년월일이 조금이라도 뒤에 있으면 연하에 속하는 걸까……? 정
의하기 애매하구나. 우선은 그것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 무언가 열심히 중얼거리는 유키노시타를 멈추기라도 하려는
건지, 유이가하마가 손뼉을 탁 친다.
“아, 그래두 힛키는 살짝 누나인 쪽이랑 궁합이 잘 맞을 거 같애, 그
치! ……아마 그럴 거야. 절대루.”
불끈 쥔 주먹에 묘하게 힘이 들어가 보인다. 근데요, 저 진짜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요?
“……딱히 별 상관 없잖아? 한 살 차이면 어차피 똑같지 뭘.”
주로 수입 같은 면에서 말이야! 중요한 건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느
냐 없느냐의 여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코마치는 날 키우는 데
최적화된 인간이라 할 수 있지! 녀석에게는 최고의 브리더가 될 자질
이 있다.
그 말에 잇시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네~? 정말요~? 혹시 하야마 선배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니, 하야마 머릿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치만요, 선배님, 저번엔 후배라는 입장에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그
러셨잖아요~?”
“아~. 뭐, 그랬지……”
그 말에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일단은 후배였지……. 잇시키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경의고 존대고 존중이고 존경이고, 선배에게 가져야 할 감정
자체가 완전히 결여돼 있다 보니 가끔씩 후배라는 사실조차 까먹을
정도다…….
아니 근데, 얘는 진짜 날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닌가? 내 이름 이니
셜에 H가 2개 들어간다고 H2라고 수소처럼 가벼운 존재도 아니거니
와, 야구 만화는 야구 만화인데 야구 요소는 은근 가볍게 들어간 그
만화하고도 아무 상관없거든?16 그건 야구 만화가 아니라 오히려 청춘
러브코미디에 더 가깝지 않을까. 워낙 불멸의 명작이다 보니 매년 여
름방학마다 전권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작품이다.
“아니, 애초에 넌 4월생이니까 나하고 실제로 1년 차이도 안 나다 보
니 딱히 연하라는 이미지가 안 느껴진다고.”
현재로서는 나하고 두세 살 정도는 차이가 나야 비로소 체감이 된다.

16
아다치 미츠루, ‘H2’.
딱 코마치나 하루노 정도면 나이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츠카 선생님 정도쯤 되면…… 응….
실제로 잇시키하고의 나이 차이는 겨우 8개월. 심지어 유키노시타와
잇시키 같은 경우는 고작 3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잇시키 본인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지, 아연
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
“뭔데……?”
“아, 아뇨…… 살짝 의외라서요.”
내가 말을 건네자 뭔가 얼버무리기라도 하듯이 앞머리를 쪼물쪼물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는 잇시키.
반면 그 반대편에 앉아 있던 유이가하마는 의자를 뒤로 드르륵 빼면
서 나하고 거리를 쫙 벌린다.
“생일은 왜 알고 있어?! 무섭게! 힛키, 소름 끼쳐……. 아니, 그거 진짜
루 소름 돋거든……?”
“……아는 게 참 많구나?”
그리고 유키노시타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히 미소만 지
어 보인다. 진정한 살인미소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는 그 표정에
서,17 당장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박력이 생생
히 느껴진다.
“아니, 저번에 잇시키가 뭔 쓸데없는 어필한답시고 자기 입으로 노리
고 얘기했잖아……”
“쓸데없다고요!? 쓰, 쓸데 있거든요~?! 애초에 노리고 얘기하지도 않

17
にっこり笑顔というよりはにっかり青江. にっこり笑顔(닛코리에가오, 생긋 웃는 얼굴)과 にっか
り青江(닛카리아오에)의 말장난. ‘닛카리 아오에’는 웃는 유령을 베었다는 전설이 있는 칼로, 웹게
임 ‘도검난무(刀剣乱舞)’의 캐릭터이기도.
았고요, 오히려 그러는 선배님이 노리고 얘기하는 티 팍팍 나거든요!”
잇시키가 벌떡 일어나더니 검지손가락을 척 세우고 삿대질을 해 온
다. 아니, 노리고 그런 적 없고요, 아무리 봐도 잇시키 네 쪽이 훨씬
더 노리고 얘기하는 티 팍팍 나거든요…….
“내가 기억력이 꽤 좋거든……. 아무튼 용건 끝났으면 학생회실이든
축구부든 냉큼 돌아가기나 하렴.”
그렇게 말하자 잇시키가 끄응 하고 불만스레 입술을 뾰족 내밀어 보
지만, 결국 마지못한 분위기로 부실을 떠나려 한다. 얘 또 시작이네.
예예, 속 보입니다, 속 보여요.
나도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그런 후배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
며 잇시키를 떠나보내려던 찰나, 봉사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
다.
2. 이리하여, 여자들의 싸움이 시작된다(남자도 있다구!).18 (pp.40-75)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나는 문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본다.


부실을 막 떠나려던 잇시키는 문하고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살
포시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앉는다. 하긴 막 나가려는 타이밍
에 부실에 들어오는 방문객하고 딱 마주치는 것도 어색한 노릇이리라.
이윽고 얇은 벽 너머로 시끌시끌한 대화 소리가 전해져 온다.
“나~ 딱히 여기에 의뢰까지 안 해도 되는데……”
“뭐 어때~. 어차피 나도 그런 거 잘 못한다구.”
귀에 익숙한 성깔 있는 말투, 그리고 잔잔하면서도 줏대 있는 목소리
가 귓가에 와 닿는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리드미컬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유키노시타가 노크 소리에 응답하자 조심스레 문이 드르륵 열리고,
그 사이로 에비나 양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헬로헬로~ 잠깐 실례 좀 해도 돼?”
“히나? 아, 일단 얼른 들어와!”
유이가하마가 손짓하자 에비나 양이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음, 빨리
들어올수록 바람이 적게 들어올 테니 얼른 들어와 주면 고맙겠다. 내
자리가 문하고 꽤 가깝거든…….
“실례할게요~”
양해의 말과 함께 에비나 양이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새침한 분위
기로 딴 데만 쳐다보던 미우라가 말없이 뒤따라 들어온다.

18
こうして、女だらけの戦いが始まる(男もいるよ)。9번 각주 참조.
“용건이 뭐니?”
유키노시타가 말을 건네자 미우라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양 입을 오
물거리더니 잇시키를 힐끗 쳐다본다.
“쟤는 왜 여깄대?”
“음~ 저도 똑같이 대답해 드리고 싶은 심정이랄까요~……?”
잇시키가 아핫 하고 웃는 얼굴로 받아치자, 미우라는 못마땅한 분위
기로 손가락으로 머리를 빙글빙글 꼬아 가며 잇시키를 노려본다.
으음, 분위기 참 미묘하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유이가하마가 거들어 주듯이 입을 연다.
“아, 그게~ 사람이 많아서 얘기하기 좀 힘든 거 같애.”
“딱히 그렇진 않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우라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맞은 그대로다. 이래
서는 대화가 좀처럼 원활하게 진행될 수가 없다.
“뭣하면 잇시키 돌려 보낼까?”
“어!? 왜요~?!”
아니, 왜긴 왜야, 너 딱히 부원도 아니잖아……. 무슨 당연한 일처럼
여기 붙어있는 게 훨씬 이상하거든?
거기서 에비나 양이 미우라의 어깨를 톡톡 토닥이며 수습에 나선다.
“자자, 유미코. 그런 건 다 얘기하기 나름이라구. 너무 구체적으로만
얘기 안 하면 괜찮다니까? 응?”
“그래…….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충분히 있을 테니까……. 나야 어
떻든 상관없지만.”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이쪽을 힐끔 향한다. 확인을 구하는 듯한 그 행
동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뭐, 얘기할 수 있는 내용만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나중에 개별적으로 따로 들으면 되는 거고.”
“응, 맞아. ……그리구 또, 이로하 의견두 참고가 될 수도 있잖아.”
잇시키는 무슨 짐짝처럼 취급당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만
스런 표정으로 뺨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지만, 유이가하마의 말에 마지
못한 분위기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반응에 유이가하마가 안도한 듯
미소를 짓는다. 왠지 양쪽 모두에게 괜한 신경을 쓰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진다.
“그럼, 무슨 이야기인지 다시 물어봐도 되겠니?”
유키노시타가 다시금 용건을 묻는다.
미우라는 잠시 잇시키를 빤히 쳐다봤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어디
상한 머릿결이라도 찾는 것처럼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연다.
“……그 뭐지? 수제 초콜릿, 그거 한번 만들어 볼까 싶어서. ……그게,
내년이 벌써 입시구. ……그러니까 그, 마지막으로…”
그 목소리에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우라의 뺨
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목소리 역시 천천히 작아져 간다.
하지만 그 말에는 다소 쓸쓸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어쩌면 그저 내
멋대로 그렇게 간주하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내년 이맘때가 되면 우리에게 등교해야 할 의무는 사라진다.
그야말로 입시전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시기. 사립대 같은 경우는
딱 시험 날짜하고 겹치는 시점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실질적으로 이번이 고교 생활의 마지막 발렌타인 데이
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겪게 될 발렌타인 데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거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되었을 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감
각으로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
이 되어서도 초콜릿 하나에 일희일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에는 눈이 내리는 게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다 보니 일기예보에 눈 표
시만 봐도 마음이 설레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똑같은 눈을 보아도 학
교 가기 귀찮다, 춥다, 축축하다 같은 성가신 점만 떠오르는 것과 비
슷할지도 모른다.
“……뭐, 그러니까, 한 번쯤은 재미로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
었거든.”
미우라는 주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애써 감추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을 빙글빙글 감는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머릿결에 맞추어 입 밖으로
꺼낸 그 말에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분명 인생 마지막 발렌타인 데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각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
은가 보다. 잇시키는 아직 1학년이라서 그런가 딱히 실감이 안 되는
모양새로 그래요~? 하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고,
유키노시타는 흐음 하고 턱에 손을 얹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유이가하마 같은 경우는 뺨을 볼록 부풀리고 있다. 그러더니 눈을 가
늘게 뜨고 미우라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유미코, 수제 같은 거 살짝 부담스럽댔잖아?”
“……그, 그건…”
유이가하마의 말에 미우라가 으윽 하고 말문이 막힌 듯 슬그머니 시
선을 피한다. 허나 놓치지 않겠다는 양 유이가하마의 시선도 미우라를
따라 움직이는 탓에 차마 도망칠 수가 없다. 불만스레 작게 볼멘소리
를 내는 유이가하마를 에비나 양이 나서서 달랜다.
“자자, 그럴 수도 있지 뭐. 수제 초콜릿도 나쁘지 않잖아?”
“어? 히나두 만들게?”
유이가하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며 에비나 양을 쳐다본
다.
“응. 뭐, 유미코랑 같이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나도 이
번 기회에 배워 두면 좋을 거 같고 말야.”
“헤에, 왠지 의외야……”
“그래? 그런 거 배워 두면 코미케나 그럴 때 간식 챙겨 주기 편하고
좋잖아, 안 그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중, 문득 위화감이 느껴지는 단어
가 귀에 들어온다.
“호오~……”
……챙겨 준다? 방금 챙겨 준다고 그랬나? 호오~? 하고 약간 신기하
게 생각하면서 에비나 양을 보고 있는데, 에비나 양이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본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묻는 듯 쳐다보는 렌즈 너머의 시선. 거기에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친구나 지인 사이가 아닌 이상, 간식 따위를 챙겨 줄 때 직접 만든
음식은 가급적 피하는 게 보통이다. 에비나 양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의리 초콜릿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은, 분명 나름대
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이거지…….
……토베, 제법이로구만. 조금은 진전이 있나 보다? 하긴 뭐 선물할
상대가 토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심지어 토베가 누군
지조차 가물가물한 수준이긴 하지만. 토베? 누구냐, 너?
그런 생각을 하며 어렴풋이나마 훈훈한 눈길로 에비나 양을 바라보
고 있는데, 순간 에비나 양의 미간이 꿈틀 움직인다. 그리고는 우후후
하는 썩은 아우라가 철철 묻어나는 웃음소리와 함께 안경이 반짝 빛
난다.
“역시 수제 초콜릿 만한 게 없다니깐! 히키타니도 하야토랑 우정 초
콜릿 교환하는 거 어때?!”
“아니, 죽어도 안 할거거든……?”
아~ 진짜 에비나 양은 언제 봐도 에비나 양답네, ……여러 가지 의미
로. 근데 그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 온 문화래? 뭐? 우정 초콜릿? 마루
코네 할아버지야?19
“근데 걔는 초콜릿 안 받는다며?”
“남자끼리라면 세이프라구!”
남자끼리라는 전제부터가 아웃 아니냐?
에비나 양이 떠드는 소릴 일일이 들어주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또
있을까……. 항상 중간에 끊어 주던 미우라도 지금은 심란한 표정으로
머리만 빙글빙글 꼬고 있고…….
우정 초콜릿인지 호모 초콜릿인지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에비
나 양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잇시키가 팔짱을 낀
채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글쎄요~. 안 받는다고 미리 못을 박아 놓은 이상 선물해 드리긴 어
려울 거 같아요.”
응,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랑 하야마는 둘 다 남자입니다만……?
잠깐,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 녀석, 남자가 주는 초콜릿이면 딱히 분
쟁으로 발전할 일도 없으니까 평범하게 상쾌한 미소와 함께 받아주지
않을까……. 근데 그거, 뭔가 훨씬 심각한 쪽으로 발전하게 되는 거 아
닌가?! 그딴 발전은 진심 사양이거든요?!20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요~……”

19
‘마루코는 아홉 살’, 사쿠라 토모조(さくら友蔵)와 우정 초콜릿(友チョコ, 토모초코)의 말장난.

20
その展開はハッテンどころか俺的には○点なんですけど(그런 전개는 8점은커녕 저한테는 0점짜
립니다만?) 말장난. 발전(発展, 핫텐)은 게이 은어로 성행위의 의미가 있고, 이 경우 보통 ‘ハッテ
ン’으로 표기. 8점(핫텐)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함.
“에휴……. 그러게 말야.”
잇시키와 미우라, 둘의 한숨이 한데 겹치더니 서로 동시에 고개를 척
든다. 부딪치는 시선 사이에 불똥이 파직파직 튀기는 것만 같다…….
어우, 무셔라…….

× × ×

1층 매점 자판기에서 MAX 커피 버튼을 뾱 누른다. 21 자판기에서 캔


을 꺼내고 일어서자 땅이 꺼지도록 한숨이 푹푹 나온다.
잇시키와 미우라의 침묵의 배틀이 살벌하게 계속되고 있는데, 아무래
도 남자인 나로서는 끼어들 구석이 없다. 오히려 양쪽에서 압력을 계
속 받다 보니 이러다간 무슨 미국 도시전설에 나오는 슬렌더맨처럼 22
호리호리하게 진화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왕 화장실 다녀오는 거, 일어선 김에 자판기까지 들러서 지친 몸에
커피 한 잔을 보급하고 부실로 향한다. 그렇게 홀짝홀짝 맥캔을 음미
하며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문 앞을 서성이는 인물에 눈에 들
어온다.
녀석이 안절부절못하고 두리번거릴 때마다 푸른 빛이 감도는 흑발
포니테일이 이리 살랑 저리 살랑 요리 찰랑 저리 찰랑 살랑찰랑 찰랑
살랑 살랑살랑 찰랑찰랑23 흔들려 댄다.
“……뭐 하냐, 너?”

21
ポチッとな. ‘얏타맨’, 보얏키(ボヤッキー).

22
Slender Man. 기이할 정도로 깡마른 게 특징.

23
あっちへぴょこぴょここっちへぴょこぴょこ合わせてぴょこぴょこみぴょこぴょこする. 발음 테
스트 ‘카에루 뾰코뾰코(蛙ピョコピョコ三ピョコピョコ、合わせてピョコピョコ六ピョコピョコ).’
하도 행동거지가 수상쩍은 나머지 무심결에 말을 걸자, 그 포니테일
이 화들짝 철렁인다. 그러더니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슨 산속에서 만난 살쾡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심을 드러내는 그
모양새에 한순간 나도 모르게 이리 온~ 하고 맥캔을 먹이 삼아 길들
여 보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야생동물에게 함부로 먹이
를 줘서는 안 될 일이다.
잠깐, 길들이고 뭐고 이전에 이름부터 붙여야지! 어~…… 그래, 카와
어쩌고 양이라고 명명해 볼까. 얘~ 카와 어쩌고 양~. 일단 마음속으
로만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 무슨 일로 왔는지 용건을 묻는다.
“무슨 일인데?”
내 물음에 카와 어쩌고 양은 휴우 하고 안도와도 같은 한숨을 흘리
더니, 부실 더 앞쪽,24 복도 한구석으로 나를 손짓해 부른다. 아, 맞다,
카와사키 사키 양이지. 알거든?
카와사키는 부실 쪽을 힐끔힐끔 엿보며 입을 연다.
“자,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아니, 안에 들어가서 하지 그래? 여기 춥잖아.”
보아하니 봉사부에 뭔가 용무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
차피 들을 얘기, 이왕이면 얼른 난방 잘 되는 부실 안에 들어가서 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카와사키는 무언가 생각하듯 뜸을 들이더니 황
급히 손사래를 친다.
“어……. 아냐, 여기서 해도 돼! 여기서 하면 된다니까! 그게, 그냥 유
키노시타한테 조금 물어볼 게 있어서……”
아니, 그럼 직접 얘기하지 그러냐…….

24
先(사키).
“유키노시타라면 안에 있어. 아무튼 빨리 들어가기나 해. 여긴 추우
니까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어디 다른 부실에서 환기한답시고 창문이라도 열어놨는지 복도 안은
싸늘한 공기로 가득하다. 발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는 물론이
고, 바람이 불어칠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유리창 소리마저 귓속
깊이 한기를 전달해 오는 기분이다.
“난, 딱히…… 상관없는데……”
카와사키는 고개를 홱 돌린다. 아니, 너는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하
나도 안 괜찮거든……? 요즘 같은 때 감기라도 걸려서 코마치에게 전
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고, 낫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치바인의 감기 치료법이라 하면, 우선 나리타케에 가서 찐득찐득, 고
명 25 듬뿍으로 마늘 팍팍 넣은 라면을 실컷 먹은 다음 따뜻~한 MAX
커피를 쭉 들이켠 후 푹 자는 게 최고다. 이렇게 하면 다음 날에는 확
실하게 병원에 실려갈 수 있다. 따라서 감기 예방을 위해서라도 집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게 최고랍니다!
어쨌든 수험생이 있는 건 카와사키네 집도 마찬가지다. 카와사키 동
생, 타이시에게 감기가 전염될 수도 있고, 만약 그게 다시 코마치한테
전염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 손을 피와 죄로 물들여야 하겠지…….
“잔말 말고, 얼른.”
타이시인가 뭔가 하는 코마치에게 꼬여 드는 해충을 향해 불타오르
는 적개심 탓에 그만 목소리에 날이 서고, 말투도 거칠어진다. 그러자
카와사키는 기분 탓인지 맥없이 고개를 푹 떨군다.
“그, 그렇게 얘기한다면야……”
말귀가 빨라서 다행이다. 코마치 주변에 감기 환자가 늘어날 수 있는

25
薬味. ‘약’이라는 의미도 있음.
위험 요소는 조금이라도 차단해 두고 싶거든.
“뭐,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부실 문을 열어 카와사키를 안으로 들어가도록 권한
다. 그러자 카와사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으, 응.”
카와사키는 그 겁나는 외모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여린 목소리
로 대답하더니, 다소곳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얘는 얼핏 보
면 양아치 같긴 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온순하고 착한 소녀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카와사키를 뒤따라 부실 안으로 들어간다.
“힛키~ 어서 와~…… 어라, 사키네?”
유이가하마가 몸을 돌려 이쪽을 보더니, 신기한 표정으로 윗몸을 살
짝 기울인다.
“아, 응……”
어색한 분위기로 대답하는 카와사키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유키노시타는 아리송한 눈빛을 보내고, 잇시키는 살짝 겁먹은 듯 몸
을 움츠린다. 아니아니, 이 카와 어쩌고 양, 생긴 건 무서울지 몰라도
딱히 무서운 언니는 아니라구?”
반면에 에비나 양은 명랑한 분위기로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 사키사키네~? 헬로헬로~”
“사키사키라고 부르지 마.”
언짢은 듯 대꾸하는 카와사키를 달래듯, 유이가하마가 의자에 앉으라
권하며 말을 건다.
“사키가 여기까지 다 찾아오구, 별일이네…… 아니, 처음이지?”
수학여행 이후로 조금 친해졌는지 유이가하마는 카와사키를 사키라
고 이름 그대로 부르나 보다. 남에게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시키지 못
했던 카와 어쩌고 사키 양이 마침내 사키라는 이름을 똑바로 기억시
킨 감동의 순간. 그 광경에 살짝 울컥해서 눈물이 똑똑 떨어질 것만
같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졌는지 일요일마다 프리큐어가 위기에 처
한 모습만 봐도 눈물샘이 철철 넘치는 남자, 그게 바로 접니다.
음음, 소녀들이 우애를 다지는 모습은 훌륭하지. 참으로 바람직하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차갑게 식은 몸이 조금씩 따스해짐을 느끼고 있
던 중, 유키노시타가 종이컵에 차를 따르며 묻는다.
“그래서, 용건이 뭐니?”
“고, 고마워……. 어, 그게……”
그렇게 입을 떼기는 했지만, 카와사키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쟤, 유키노시타에게 뭔가 볼일이 있었다고 그랬던 거 같
같은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카와사키가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따닥따닥 손톱으로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쪽을 쳐다보자 미우라가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카와사키 역시 미우라를 싸늘한 시선
으로 쏘아보았고, 거기에 미우라 또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수한다.
“저기요?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거든요?”
“뭐? 넌 차만 계속 홀짝거렸잖아?”
아까 한 말 취소. 카와사키 양, 역시 무서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꼬나보는 데 여념이 없는 미우라와 카와
사키. 이야, 두 분은 여전히 상성이 최악이시네요……. 둘이서 뚫어져라
서로 노려보고 있는 그 광경에 잇시키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던 그때, 그 교착 상황 사이로 에비나가 끼어든다.
“자자, 유미코, 너무 그러지 마. 사키사키도 할 얘기 있는 거 맞지?
나라도 괜찮다면 대신 들어 줄게~”
“의뢰는 우리가 받는 거 아니니……?”
“자, 한번 얘기해 봐.”
유키노시타가 한 마디 하는 건 못 들은 척 에비나 양이 말을 재촉한
다. 그러자 카와사키는 나와 유이가하마, 유키노시타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하아 하고 짧은 한숨을 쉬고는 그제서야 입을 연다.
“그게, 초콜릿 때문에 그러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우라가 풉 하고 웃는다.
“뭐야? 너도 누구한테 주기라도 하게? 너 좀 웃긴다?”
“뭐?”
“뭐?”
그새 또 서로 노려보기 시작하는 두 사람.
“……’너도’ 하고 멋대로 한통속 취급하지 말아 줄래? 난 너처럼 그런
쓸데없는 일엔 관심 없거든?”
“뭐?”
“뭐?”
……제발 그만! 좀 사이좋게 지내 줘!
미우라와 카와사키의 모습을 보며 유키노시타가 한숨을 흘리며 고개
를 젓는다. 표정을 보니 한심해…… 하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너도 쟤
네 못지 않게 한 성깔 하지 않냐……? 음, 그래도 뭐 요즘은 누구 상대
로든 가슴속을 쫙쫙 후벼놓던 비수 같은 26 유키농 어록은 좀 덜 나오
는 편이긴 하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미우라와 카와사키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잇
시키가 소근소근 말한다.
“역시 선배님 주변 분들은 별난 사람이 참 많네요……”

26
触るもの皆傷つけたギザギザハートの切れたナイフ(만지는 사람 모두 상처입히던 톱날 모양 하
트의 예리한 나이프). ‘체커즈(チェッカーズ)’의 노래 ‘ギザギザハートの子守唄’ 가사.
“뭐?”
“뭐?”
둘이 동시에 째려보는 시선에 잇시키가 잽싸게 내 뒤로 쏙 숨는다.
아니, 쟤는 왜 자꾸 저렇게 지뢰밭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냐고……. 어
디 살짝 모자란 고양이도 아니고……. 애초에 나도 쟤네 둘은 살짝 겁
나거든요?!
일단은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키기로 하자.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빨
리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그게 전부다.
“그래서, 초콜릿이 뭐?”
“여동생이 어린이집에서 발렌타인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자기도 만
들어 보고 싶다 그랬거든…… 그래서 말인데, 뭔가 아이들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거 없을까?”
“아이들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거, 말이지……”
유키노시타는 카와사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더니, 흐음 하고 고개
를 끄덕인다. 거기서 에비나 양이 헤에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사키사키. 너, 집안일은 다 잘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분명 카와사키는 부모님이 일로 바쁜 건 물론이고
형제자매도 많다 보니 집안일을 자주 맡고 그랬지. 장바구니에 대파가
삐져나오는 묘하게 살림꾼스러운 모습도 목격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당
연히 요리도 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쳐다봤더니, 카와사키
는 어색한 분위기로 얼굴을 피한다.
“……그게, 내가 만드는 건 조금 평범해서 말야. 어린애들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거든.”
“하나 묻겠는데, 카와사키 네가 잘 하는 요리는 뭔지 말해 줄 수 있
겠니?”
유키노시타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이윽고 카와사키가 더듬
더듬 작은 소리로 입을 연다.
“토, 토……”27
토? ……토끼 과자? 그 설탕 과자 얘긴가? 그런 거면 아이들도 충분히
좋아할 거 같은데. 나도 어린 시절엔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장식된 산
타클로스 모양 설탕 과자를 두고 코마치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었지……. 정작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실은 그거 엄청 맛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나도 코마치도 손도 안 대게 되었고, 결국 항상 아버
지가 처리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27
さと(사토). 설탕(砂糖, 사토우)와 음이 유사.
그러나 카와사키가 말하려는 건 설탕 과자가 아닌가 보다. 뒤에 이어
질 말이 과연 무엇인지 모두의 이목이 한 자리에 모인다.
쏟아지는 시선에 카와사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기어
드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토, 토란, 조림……”28
……평범하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평범한 메뉴에 금세 부실이 정적에 휩싸인
다. 솔직하기 그지없는 모두의 리액션에 카와사키가 살짝 울상을 짓는
다. 어지간히 부끄러운가 보다.
그 모습을 본 유이가하마가 헉 하고 고개를 들더니 카와사키를 격려
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뭐 어때! 난 요리 같은 거 한 개도 할 줄 모른다구, 그런 거 잘 하
는 게 얼마나 부러운데! 그치, 유키농!”
그 물음에 유키노시타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토란이 구르는 걸 보면 왠지 고양이 구르는 게 생각나서 귀엽
게 느껴져.”29
“그거 위로하는 말 맞아!?”
유이가하마가 경악하는 분위기로 뒤돌아본다. 옳으신 말씀. 위로가
될 요소 따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니, 고양이는 갑자기 왜 굴리는데……? 하긴 잠자는 고양이를 억지
로 데굴데굴 굴리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홱 째려보는 그 순간
적인 표정, 그거 무지 귀엽다 보니 살짝 공감은 되지만. 다만 장모종

28
里芋のにっころがし(사토이모노닛코로가시).

29
煮っころがしとねっころがしってちょっと似てて(조림이란 말은 고양이 굴린다는 말하고 비슷해
서). ‘조림(煮っころがし, 닛코로가시)’과 ‘고양이 굴림(ねっころがし, 넷코로가시)’의 말장난.
같은 경우는 함부로 굴리면 무슨 걸레처럼 먼지란 먼지는 다 묻으니
까 주의할 것!
뭐, 고양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카와사키
쪽이다. 카와사키는 유키노시타의 기묘한 위로 탓에 괜히 부끄러움만
증폭된 모양인지, 마치 갓 분양해 온 새끼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다, 쟤가 사람 위로하는 센스가 좀 떨어지거든…….
그 대신이라 할 것까진 아니지만, 나도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 입을
연다.
“뭐, 그래도 딱히 나쁘진 않잖아? 잘 만들면 좋지 뭘.”
“글쎄요, 뭐 그렇죠. 평범한 건 사실이지만요……”
내 말에 이어서 잇시키도 다소 난감한 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
야유나 조롱의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응, 왠지 사키사키다워서 좋은걸?”
에비나 양도 에비에비한 스마일로 엄지를 척 세워 보인다.
칭찬이 이어지자 카와사키는 그건 그것대로 멋쩍은 모양인지, 이번에
는 몸을 비비 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던 중 한순간 움
직임이 뚝 그친다. 시선을 쭉 따라가 보자 그 종착지에 미우라가 있었
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을 양 으르렁대던 미우라에게 무
슨 말을 들을지 걱정스럽나 보다.
하지만 미우라는 카와사키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관심 없는 척 고
개를 홱 돌린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너, 요리 잘 하나 보네?”
“어? 아, 응, 뭐……”
“흐응~……”
무심한 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고는 있지만, 그 목소
리에는 어딘가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긴 미우라 양은 척
봐도 요리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시니 말이지요……. 꽃다운
소녀 미우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재주가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카와사키의 요리 실력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메뉴 선정만 해 줘도
충분하지 않겠니?”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유키노시타가 턱에 손을 얹
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아, 나두! 나두 배울래! 어린애들도 만들 수 있는 거면 나두 충분히
가능할 거야!”
유이가하마가 손을 힘차게 척 들어 올리자 유키노시타가 슬픈 듯이
눈을 내리깐다.
“……글쎄, 정말 그럴까?“
“유키농,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아니, 최소한 불가능하다고는 얘기 안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충분
히 배려해 준 말 아니냐?”
“나 대체 얼마나 구제불능인 건데!?”
아직 자각이 덜 됐나 보구만……. 유이가하마 같은 경우 메뉴 선정이
나 조리 방식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필요도 없는 조미료 따위를 들
이 붓는 등 괜한 사족을 붙이는 게 문제라 본다. 예전에 유키노시타와
함께 만들었을 때 마지막에 만들어 냈던 물건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
으니까. 아니 뭐, 유키노시타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
니었지만…….
“잠깐만? 나~ 이제 내 얘기도 좀 했으면 좋겠거든?”
“맞아맞아. 우리도 끼워 줘!”
카와사키의 의뢰만 계속 듣기가 따분했는지 미우라와 에비나 양이
불만을 표시하자, 잇시키도 살그머니 손을 척 들어올린다.
“아, 그럼요, 저도 참고 좀 하게 해 주세요.”
세 사람을 보고 유키노시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나는 상관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힐끗 향한다.
“……글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어차피 실행하는
건 본인 몫이니까.”
“그래……. 알았어. 적절히 정리해 볼 테니까 시간을 조금 줄 수 있겠
니……?”
미우라와 에비나 양, 그리고 카와사키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며 유
키노시타가 말하자, 세 사람 다 예외 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 × ×

미우라와 에비나, 카와사키가 부실을 떠나고 잠시 후. 겨우 조용해진


부실에서 유키노시타가 조용히 한숨을 흘린다.
“왠지, 오늘은 좀 지치는구나……”
새로 끓인 홍차를 입으로 옮기며 우리도 휴우 하고 한숨을 돌린다.
오늘은 웬일로 손님이 많다. 하루에 세 명, 아니, 잇시키까지 포함하면
네 명이나 온 셈으로 봉사부 사상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별 것 없는 창고 같기만 했던 넓은 부실이 지금은 이렇게 사람의 온
기로 가득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의자는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
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새 티 세트가 놓인 긴 책상을 중심으로 살짝
비뚤비뚤한 원을 그리고 있다.
지금의 부실은 그 무렵에 비해 많은 것이 변했다.
약하게 작동 중인 난방 기구, 티 세트와 담요, 겹겹이 쌓인 문고본의
수. 의자의 숫자와 물건의 배치. 내리쬐는 햇볕의 세기와 벽에 걸린
코트.
봄의 끝 무렵, 차가운 색조를 띠고 있던 그 부실은 어느덧 따스한 색
채로 가득 차 있었다.
계절의 변화에 의해 그렇게 된 건지, 아니면 다른 요인에 의해 그렇
게 된 건지는 분명치 않다. 그저 졸음을 부르는 이 공기가 간지러웠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며칠 내로 강한 한파가 시작된다던데, 오늘만 해
도 바깥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는 중이다.
달각거리는 유리창 소리는 그녀들의 잡담 소리 사이에서도 확실하게
전달돼 온다. 그러던 중, 돌연 드르륵 하고 세차게 문 여는 소리가 귓
전을 때린다. 이어서 그보다 훨씬 큰 호통 소리가 부실을 쩌렁쩌렁 울
린다.
“잇시키!”
“히익!”
잇시키가 어깨를 움찔하며 화들짝 놀라더니, 쭈뼛쭈뼛 문 쪽으로 시
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미간을 찡그린 히라츠카 선생님이 화가 잔뜩
난 모양새로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선생님, 노크 좀……”
“아, 미안하다. 조금 서두르다 보니 말이야. ……잇시키.”
유키노시타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가벼운 미소로 답하고는 성큼성큼 부실 안으로 들
어온다.
그리고는 잇시키 옆자리에 서더니 팔짱을 끼고 잇시키를 내려다본다.
“일은 어떻게 됐지?”
“어~ 그게요……”
잇시키는 말문이 막힌 채 시선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이내 그 허둥
지둥 두리번대던 눈동자와 눈길이 마주친다.
“너, 시간이 남네 어쩌네 그러지 않았냐?”
“……전 시간 많이 남는다구요.”
내 물음에 잇시키는 뾰로통하게 얼굴을 홱 돌리더니 뭔가 토라진 것
처럼 그렇게 말한다. 그 말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요란하게 한숨을 내
쉰다.
“학생회 업무 자체는 확실히 잘 돌아가고 있다만, 너한테는 다른 업
무도 있지 않나? 분명 졸업식에 쓸 송별사를 생각해 오라 그랬을 텐
데?”
졸업식……. 벌써 시기가 그렇게 되었나 생각하는데, 졸업식은 아마 3
월 둘째 주 초 근처였을 터이다.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을 텐데…….
아무래도 잇시키 역시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다. 아하하~ 이거 참~ 어
떡한담~☆ 하고 깜찍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그래도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요, 뭐~……”
“만만히 보지 마라! 방심보다 위험한 건 없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엄한 말투로 일침을 가하자 잇시키가 어깨를 움
츠린다.
옳은 말이다. 한 달이 영원히 한 달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지 말라.30
일이든 방학이든, 무엇이건 간에 여유가 있다고 방심하는 순간, 그
여유는 이미 사라져 버린 거나 다름없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간다는 말도 있듯이 아직 괜찮다, 아직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스베이더! 31 따위 생각을 하다가 전혀 괜찮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30
일본 속담 ‘いつまでもあると思うな親と金(부모와 돈이 영원할 거라 생각지 말라)’의 변형.

31
まだ助かるまだ助かる助かる助かるタスマニアデビルよ! 말장난. 9권 p.165(원문 p.158)의 변형.
있잖아, 왜 마감은 맨날 금방 오는 거야?32
“애초에 2월은 한 달이라 하기도 민망하지. 가뜩이나 날짜도 적은데
입시 시즌까지 겹쳐 있다 보니 우리도 시간이 남아나질 않는다. 아무
튼 2월은 시간이 별로 없는 달이다 이 말이야.”
히라츠카 선생님이 거듭 강조하며 말한다.
“네! 당장 할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래서
여기에 상담하러 온 거거든요! 작년엔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려고 왔
던 거라구요!”
대답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잇시키, 훌륭하다. 그런데 말입니
다, 님 혹시 상담 내용이 의리 초콜릿 아니셨는지……?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노력해 보겠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 같은
말만큼 신용 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사축 입에서 나오는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믿어서는 안 된다……. 출
처는 우리 아버지. 그거 집으로 업무 때문에 전화가 올 때마다 수시로
쓰는 말인데, 전화 끊어지자마자 “그게 말이나 되냐? 멍청하기는” 하
는 말이 튀어나오고 그러더라고, 그 아저씨…….
물론 잇시키의 얄팍한 대답은 히라츠카 선생님 눈에 뻔히 다 보였는
지, 히라츠카 선생님은 골치가 아픈 양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떨떠름
한 표정을 짓는다.
“저기 말이야, 그래서는 곤란하단다. 내년엔 어엿하게 홀로서기를 해
야지. 언제까지고 계속 선배들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나?”
히라츠카 선생님의 말에 유키노시타가 컵을 손에 들고 고개를 끄덕
이며 동의한다.
“맞는 말이야.”

32
‘반딧불의 묘’의 명대사, 何で蛍すぐ死んでしまうん(왜 반딧불은 금방 죽어)?의 변형.
“웅~ 많이 힘들겠지만……. 뭐, 그래두 회장이니깐……”
유이가하마도 난감한 분위기로 잇시키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잇시키는 편 들어줄 사람을 찾아 살금살금 의자를 움직인다.
곧이어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내 소매를 꾹꾹 당기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매달려 오면 아무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코마치도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눈물 작전을 시도할 때가 많은데,
나 정도 클래스의 엘리트 오빠쯤 되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여동생 편
을 들어주게 되기 마련이고,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세계 한두 개쯤은
가뿐히 멸망시킬 수도 있다. 역시 오라버니세요!33
하는 수 없지. 뭔가 그럴싸한 말로 때워서 이 상황을 수습해 주기로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막 열려던 것을 유키노시타가 가로막
는다.
“히키가야, 어리광은 받아 주지 마렴.”
“아니, 그래도 얘도 일단은 상담하러 온 건 맞잖아……”
그 말에 잇시키가 몸을 불쑥 내민다.
“맞아요~ 다른 분들은 상담 다 받아 주셨잖아요~?”
“그치만, 이로하 건 유미코나 사키 거랑은 살짝 다른 거 같은데……“
우움~ 하고 유이가하마가 열심히 고민하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눈을 깜빡거린다.
“뭐냐, 다른 방문객들도 있었나?”
“네! 맞아요! 얼마나 많이 왔었는데요~ 그래서요, 저도 지원군으로
같이……”
“네가 나설 일은 아니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딱 잘라 말하자, 잇시키가 우웃 하고 입을 꾹 다

33
さすがのお兄様. ‘마법과고교의 열등생(魔法科高校の劣等生)’, さすおに(사스오니) 이야기인 듯.
문다.
생각이 얕구나, 잇시키. 히라츠카 선생님의 추궁을 피할 생각에 일견
정당해 보이는 말로 둘러대는 짓은 헛수고일 뿐이다. 왜냐면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히라츠카 선생님 쪽이 훨씬 정당하니까. 아무리 잇시키
가 가슴을 활짝 펴고 말한들 없는 정당성이 갑자기 생기진 않는다. 정
당성만 없는 게 아니라……34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가? 하긴 그 정도
면 됐지 뭐. 그런 면에서는 어쩌고시타 양이 독보적이니 말이지요!
아무튼 결국, 정론이란 누군가를 책망할 때 쓰는 거지, 책망을 듣는
사람이 쓰는 게 아니다. 고로 한 귀로 흘려 듣든지, 아니면 어물쩍 받
아넘기든지 하는 게 정답이다.
어디 한 번 시범을 보여 주기로 할까…….
“뭐, 그게 말이죠, 상담 내용이 여자들하고 관련된 거였거든요, 그럼
여자가 한 명이라도 많은 편이 도움이 되겠죠, 잘은 몰라도요. 그 뭐
냐, 좀 있으면 발렌타인이잖아요?”
발렌타인 데이. 그 마법의 단어를 꺼내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움직임
을 뚝 그친다. 그러더니 돌연 먼눈을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래, 발렌타인 데이라……. 옛날 생각이 저절로 나는군……”
훗 하고 자조적인 분위기로 한숨을 흘리더니, 히라츠카 선생님은 우
리들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발렌타인 데이, 라” 하고 작은 소리로 거듭 말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
도 보였던 농담 같은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선에, 어딘
가 서글픈 심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후

34
まっとうというよりはまっ平(정당하긴 고사하고 그냥 평평한). ‘まっとう(맛토우)’와 ‘まっ平(맛타
이라)’의 말장난.
지시를 변경한다.
“상담이 너무 많다면 송별사 쪽은 조금 기다려 주기로 하마. 가끔은
잇시키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겠지.”
“엥, 아뇨, 딱히 잇시키는 별 필요 없는데요……”
“너무하신 거 아녜요!?”
격분한 표정으로 홱 돌아보면서 항의하는 잇시키였지만, 아니, 솔직
히 네가 끼면 보통은 일거리만 더 늘어나잖냐……. 그런 생각을 하며
쌀쌀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거기서 유이가하마가 끼어든다.
“자자, 그러지 말구……. 괜찮지 않을까? 잇시키가 거들어 주면 우리
일두 훨씬 편해질 거구……”
“그럴까?”
“선배님, 진짜 저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툴툴거리는 잇시키는 내버려 두고 유키노시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유이가하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상관없는데……”
거기서 히라츠카 선생님이 박수를 짝 친다.
“그럼 결정됐군. 송별사 쪽은 잇시키가 알아서 열심히 하면 되는 일
이다. 게다가 다들 너희를 굳게 믿고 있잖나? 그건 지금까지 업무에
최선을 다해 온 너희들에 대한 평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냥 심부름 센터 취급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분명 상담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늘었다. 그 탓
에 업무량도 비례해서 늘어난 상황이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대가는
한 푼도 안 떨어진다는 점이다. 실로 무보수 잔업을 방불케 하는 가혹
한 근무조건이 아닐 수 없다. 뭐야 이거? 무슨 노예노동이야? 35 혹시

35
裁量労働制でみなし残業扱いなの(재량노동제에 잔업 포함이야)? ‘재량노동제(裁量労働制)’는 실
제 근로시간과 무관하게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 ‘みなし残業’는 임금에 일정량의 잔업 수당이 미리
포함돼 있는 임금 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덕 기업에서도 거뜬히 일할 수 있는 봉사력을
습득해 버린 거 아닐까?
원망 어린 시선으로 그렇게 말하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찡긋 하고 윙
크로 답한다.
“그래도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아주 조금
이라도 누군가의 등 뒤를 밀어 주는 건 정말로 가치 있는 행동이란다.
그런 부분을 잇시키가 물려받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야.”
“네, 열심히 배워 볼게요!”
힘찬 목소리로 밝게 대답하는 잇시키였지만, 그 웃는 얼굴에 앗싸~!
마감 연장~! 하고 희희낙락하는 게 뻔히 다 드러난다.
“……어째 너희의 단점까지도 흡수해 가고 있는 건 한번 생각해 볼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잘 해 보도록.”
그렇게 말한 후 히라츠카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쥐어박듯
이 잇시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 손을 가볍게 들고 흔들어 보이며
부실을 떠난다.
그 모습을 배웅하면서 우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난감하구나……”
유키노시타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자, 잇시키가 똑같이 팔짱을 끼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토한다.
“그러게요, 미우라 선배가 살짝 진지하게 나오는 건 조금 난감하다구
요.”
“나는 의뢰 숫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 건데……”
두 사람의 그런 대화를 아하하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불쑥 한 마디 던진다.
“그치만, 하야토 마음두 왠지 알 거 같애……”
하야마의 마음? 아니, 난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에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눈짓으로 묻자, 유이가하마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가면서 입
을 연다.
“아, 그게 있잖아…… 뭐랄까~…… 역시 사람들 앞에서두 공평하게 하
려고 하구, 안 보이는 데에서두 이것저것 신경 많이 써 주구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실로 그녀다운 배려심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잇시키도 고개를 끄
덕인다.
“아~ 왠지 유이가하마 선배답네요. 뭔가 상냥하고 그런 거요.”
“그래……? 아하하……. 나답다, 라……”
잇시키의 말에 유이가하마는 난처한 듯 웃더니, 조금 가라앉은 표정
을 지어 보인다.
칭찬을 듣고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하야마 하야
토와 마찬가지로 상냥함 때문에, 배려심 때문에 갑갑한 나머지 그러는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유이가하마는 하야마와도, 미우라와도, 잇시
키와도 친한 사이다 보니 셋 사이에 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리
라. 저번에 디스티니 랜드에 갔을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닐까.
고생 참 많네…… 하고 남의 일처럼 편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라고 마냥 그럴 수만은 없다.
주위의 인간관계에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그 심정은 나
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감할 수는 있다. 그런 결론을 내리
고 싶어지는 그 마음만큼은.
그건 아마 유키노시타도 마찬가지라 본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이가하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 표정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만약에 하야마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그런 갑갑함도 후련
하게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하야마 하야토가 되기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완벽하게 이행해 간다. 타협 없는 최대한의 타협을 시도한다. 전신전
령을 다해 관계를 연명시킨다.
그토록 진지하고도 불성실한 방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상냥한’ 이들을 위해 상냥하지 못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
리 많지 않다. 고작해야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게 전부다.
“……글쎄, 그럴싸한 구실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하야마가 납득할 만
한 명분이라든가.”
“예에?”
잇시키는 전혀 못 알아들은 양 윗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이쪽을 쳐
다본다. 잇시키 넌 행동만 놓고 보면 귀여운데, 왜 입만 열면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냐……?
“안 받을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해 받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
어 주면 얘기가 또 달라질 거 아니냐고.”
풀어서 다시 말해주자 잇시키는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입술만 실룩거릴 따름이다. 거기서 유키노시타가 컵을 달그락 내려놓
고는 조용히 시선을 내 쪽으로 향한다.
“요컨대 핑곗거리가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지? ……비교적 클로즈드한
환경에서 전달해 준다면 하야마도 공연한 다툼을 피할 수 있으니 납
득해 줄 테고.”
“그래, 클로즈드, 그거.”
딱히 클로즈드든 크로우즈든, 워스트든 QP든36 별 상관은 없지만, 아
무튼 요지는 하야마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공적인
이미지에 손상이 가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주면 된다 그 말이다.

36
타카하시 히로시(高橋ヒロシ)의 만화 ‘크로우즈’, ‘워스트’, ‘QP’.
그렇긴 한데 어째 잇시키도 유이가하마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양 고개
만 갸웃거릴 뿐이다. 심지어 유이가하마 같은 경우는 “클로제트……?”
하고 중얼거리고 있다. 뭐? 클로젯? 클로젯한 환경이 뭔데? 도라에몽
서식지냐?37
“예를 들면…… 발렌타인 선물이랍시고 주는 게 아니라 시식이라는
명목으로 준다면 하야마도 먹어 주겠지,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같이 만들면 되는 거구나.”
유이가하마가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그 표정에는
어딘가 안도와도 같은 분위기가 어른거렸다. 음, 무사히 전달된 거 같
아 다행이군요.
“뭐, 그런 셈이지. 잇시키도 미우라도 하야마하고 같이 만들면서 시
식해 달라 그러면 걔도 차마 거절하진 못할 거 아냐?”
단지 그렇게 되면 초콜릿을 먹인다기보다는 그냥 속여먹는다고 표현
하는 게 더 정확할 거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전체적인 방향은 제
시해 놨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생각은 과연 어떨까 싶어 반응을 살피
고 있는데, 가장 약삭빠른 녀석이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린다.
“그렇네요……. 대충 이해했어요! 방해물들이 못 보는 데로 몰래 데려
가 버리면 된다 그 얘기죠~?”
“맞긴 맞는데, 그 말투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그렇게 잇시키를 타이르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키득 웃는다.
“그래도, 어차피 요점은 그런 거잖니? 역시 남의 눈에 안 띄는 것과
비겁한 수법에 있어서는 천재적이구나.”
“너도 말투에 신경 좀 써라, 응?”

37
도라에몽은 벽장에서 잠을 잔다는 설정이 있음.
칭찬 교육법도 때로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는데, 유이
가하마가 무릎을 탁 치면서 벌떡 일어선다.
“그럼, 같이 만들면 되겠네! 우리두 같이 만들면 좋을 거 같애.”
“……그래. 그 자리에서 가르쳐 준다면 굳이 개별적으로 메뉴를 선정
해 주지 않아도 괜찮을 테고.”
“아, 그거 좋네요~! 의뢰하러 온 분들 모아서 이벤트 같은 거 열고요,
막 서로 배우고 그러는 거예요~. 그럼요, 유키노시타 선배께서 가르쳐
주시는 거 맞죠?”
잇시키가 유키노시타 옆으로 의자째 몸을 살금살금 가까이 붙인다.
그리고는 흐음 하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 중이던 유키노시타의 손을
꼬옥 잡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빼꼼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에헤
헤 웃으며 애교를 부린다.
“그, 그래…… 그건 상관없지만……”
스킨십과 신체 접촉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유키노시타의 모습은 이젠
익숙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귀여운 애교까지 곁들여 주면 간단하게 함
락 완료. 유이가하마의 케이스와 비교하면 자연산과 양식 정도의 차이
는 있지만, 유키노시타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유키노시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내 쪽을 힐끔 살핀다.
“업무 지원으로 받아들인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니?”
“아니, 나한테 물어본들……. 어차피 가르치는 건 너니까 그게 편하면
그걸로 된 거지, 뭐.”
게다가 유이가하마도 그쪽으로 마음이 쏠린 모양이라 여기서 거부권
을 행사해 본들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 그럼, 무언가 그런 자리를 만들 방법을 고안해 봐야겠구나……”
유키노시타가 턱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기는데, 옆에 앉아 있던 잇시
키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아, 부회장님? 기획서 제출 좀 하세요. 요리 교실 이벤트~! 뭐 그렇
게요. ……네에? 아니, 그러니깐요, 일단 불판38 쫙 깔고 공지 딱 붙이고
~ 그럼 되잖아요?”
전화 너머로 곤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잇시키는 혀를
차 가면서 목소리를 깔고 지시를 계속 내린다. 근데 쟤는 말투가 왜
저래……? 조만간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39 뭐 이런 말까지 튀어
나오는 거 아니냐?
“있잖아~ 유키농, 난 뭐 해~?”
유이가하마가 의자를 달각달각 움직여 유키노시타 옆으로 오더니 자
기는 뭘 하면 좋을까 하고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물음에 유키노시타
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인다.
“유이가하마는……”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로 유이가하마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어린아이
를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하고 같이 만들자.”
“신뢰도 빵점이야!? 우으……. 아, 그럼 힛키는…… 어떡할 거야?”
이쪽을 척 돌아보며 그렇게 물어보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정말로 내
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난 요리 같은 거 못 만들어.”
그렇게 답하자 유키노시타가 키득 웃는다.
“상관없어. 그냥 맛이나 보고 의견을 얘기해 주면 돼.”
언젠가 들은 적 있었던 것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분위기도,

38
ハコ. 공연장 따위를 의미하는 속어이기도.

39
チョッパヤでやらないとケツカッチンじゃないですか. 만화 ‘마법진 구루구루’, 니케의 대사에서
따 온 것. ‘ちょっぱや(서두르다)’, ‘ケツカッチン(제 시간에 늦음)’ 모두 원래는 업계 속어.
목소리의 톤도 다르다. 옆에 앉은 유이가하마도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린다.
“……맡겨만 둬, 그런 건 내 전문이거든.”
그때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머릿속으로 회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셋이서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기도 모
르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자그마한 웃음 소리가 신경 쓰이기라도 했는지, 아직 통화 중이던
잇시키가 우리 셋 쪽으로 시선을 힐끗 돌린다. 왜 그렇게 웃냐고 시선
으로 질문해 왔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런 건 차마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
느 정도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통해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직접
발견한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거니까.
잇시키는 내 제스처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얼마 안 가 부회장하고
하던 대화도 대강 정리가 다 됐는지 통화를 마무리한다.
“네, 네~, 네~에, 잘 부탁드려요~”
통화 상대방인 부회장은 여전히 뭐라 뭐라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지
만 잇시키는 싹 무시해 버린 채 가차없이 전화를 툭 끊는다. 그렇게
전화를 끝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한다.
“그런고로, 사소한 건 저희가 다 처리해 둘 테니까요, 이번 요리 교
실, 잘 부탁드려요.”
잇시키는 “그럼 실례~”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바로 우리 쪽
으로 경례를 척 하고는 부실을 떠나려 한다. 아마 곧 열리게 될 그 요
리 교실인가 뭔가를 준비하러 가는 거겠지.
예전과는 다르게 제법 믿음직스런 모습이다.
일하는 방식 자체는 약간 막 나간다는 감도 없지 않지만, 이것도 잇
시키 나름대로의 성장일 거라 생각한다. 아니, 성장이라 하기에는 상
당히 민망한 수준이긴 하지만, 뭐, 나름대로 요령이 좋아졌다 보면 되
겠지. 부회장이나 토베 굴리는 솜씨 같은 거…….
“그럼 잘 부탁해, 잇시키.”
“응! 이로하! 우리 열심히 하기야!”
문 앞에서 꾸벅 인사하는 잇시키를 향해 유키노시타는 가늘게 뜬 눈
으로 다정한 미소를 지었고, 유이가하마는 명랑하게 손을 들어 보인다.
나도 음 하고 고개를 끄덕여 잇시키를 배웅한다.
조용히 스르륵 부실 문을 닫는 잇시키를 보면서 문득 생각한다.
……그런가, 이번에는 잇시키가 잘 해 줄 것 같으니 난 딱히 아무 것
도 안 해도 되겠군. 수고를 덜 끼치게 된 건 좋지만, 어째 이건 이것
대로 은근히 아쉬운데.
3. 뜻하지 않게, 잇시키 이로하의 부재가 가져온 것은. (pp.76-105)

사소한 건 신경 쓸 거 없다,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사소한 데 더 신


경이 쓰여서 안절부절못하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그 폭풍처럼 밀려왔던 상담 요청과 잇시키의 제안이 있은
후 며칠, 부실에는 다소 조마조마한 기색이 감돌고 있다.
방과 후 부실에 와서 책을 읽고, 홍차를 마시고, 때때로 홍차에 곁들
여 나오는 다과를 집어먹고, 그러다 불현듯 문 쪽을 쳐다보고. 그러기
를 계속 반복 중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이 조마조마한 기분은 마치 어린애한테 ‘첫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허구한 날 일을 떠맡기기만 하던 잇시키이
다 보니, 과연 자기 혼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해 낼 수 있을지 전전긍
긍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음, 그래. 분명 그거다. 그 뭐냐, 부성애라는 거다.
그게 아니면 혹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사랑하게 돼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을 던지자 내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
하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의뢰나 상담 따위를 가지고 오면 곧바로 일의 홍수에 휩
쓸리는 게 정석이었는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다.
비유하자면 마감 기일이나 납입 기한은 확정돼 있는데 자세한 내용
은 알려주지도 않은 업무를 덜컥 떠맡은, 그런 고문 같은 상황이다.
게다가 그 업무를 떠맡기는 상대가 잇시키 이로하라는 점도 불안감
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나 이제 어떡해~!? 하고 마법소녀물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자, 맞은편에서도 한숨 흘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을 보자 유키노시타가 문고본에서 고개를 들고, 그대로 문 쪽으
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아무래도 내가 품고 있는 조바심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
이다. 아니면 혹시 너, 잇시키를 좋아하는 거 아니니? 이로×유키, 적
극 지지합니다!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피식 웃는다.
“둘 다 아까부터 너무 문만 쳐다보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로하라면 그렇게 걱정 안 해두 될 거 같은데……”
“딱히 잇시키 걱정한다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
“잇시키 이야기는 아무도 안 했잖니.”
나와 유키노시타가 거의 동시에 대답한다. 유키노시타는 고개까지 홱
돌린다.
물론 나도, 그리고 아마 유키노시타도 잇시키를 염려하고 있는 건 사
실이겠지만, 그런 마음을 유이가하마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 아무
래도 부끄러운 일이다 보니 무심결에 그런 모난 말이 튀어나오게 된
다.
그리고 그런 삐딱한 말조차도 유이가하마에게는 속내가 다 보였는지,
생글생글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진짜야~?”
“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 시선에 유키노시타는 이번엔 몸을 통째로 휙
돌린다. 유키노시타의 뺨과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이가하마가 행복한 분위기로 휴우 하
고 엷은 한숨을 흘린다.
거기서 만족해 주면 좋으련만, 유이가하마는 이어서 이쪽으로 시선을
힐끔 돌리더니 우웅 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웅~? ……그치만 힛키, 이로하한테는 맨날 상냥하면서.”
“그래. 태도가 너무 물러. 나도 그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야.”
유이가하마의 말을 듣자마자 유키노시타 또한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잠깐만? 표적을 나한테 돌리지 말아 줄래?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
그렇게 대답해 봤지만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는 오히려 더 수상한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할 따름이다. 아니, 얘네 왜 말이 없어…….?
아오, 진짜 아니래도 그러네! 아니, 왜 그런 변명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연다.
“그냥 잇시키가 홀랑 다 떠맡겨 버리고 그러면 어쩌나 불안해서 그
럴 뿐이야. 손쓸 도리가 없는 상태로 넘겨받는 것도 난감한 일이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직접 손을 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무심코 꺼낸 그 이야기가 의외로 핵심을 찌르
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무심코 꺼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분
명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내 나쁜 버릇이다.
맡길 수 없다는 말은 곧 믿을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 인간이 신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신뢰와도 비슷하지만 훨씬 가혹한 무언가,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놈이 누군가를 걱정하다니,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짓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카페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과연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만 입이 멈추고, 희미한 침묵이 드리운다.
그 공백을 얼버무리려 빠른 어조로 덧붙여 말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건 잇시키가 아니라 내 미래라고.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꼴이 되면 어쩌나 생각할 때마다 불안해 죽
겠거든.”
“그 발언 쪽이 훨씬 더 미래가 걱정스러워져……”
유키노시타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은 한숨을 토한다.
“뭐, 그것두 나름대로 힛키다운 대답이긴 해……”
유이가하마도 기가 막힌 듯 난감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글쎄, 따지고 보면 나도 유키노시타도 잇시키에게 딱히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믿고 맡긴다는 의미에서 보면 잇시키를 가장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
람은 아마 유이가하마일 것이다. 잇시키를 제대로 평가해 주고, 괜한
걱정이나 참견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나와 유키노시타
와 차별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기보다 유키노시타 같은 경우는 뭐……. 스킨십하고 애교 공격
에 끝내주게 약한 만만노시타 40 선배라는 사실이 잇시키한테 다 들통
난 상황이니까……. 이건 반드시 지적질을 해 줘야 될 문제다. 나는 나
무라듯이 유키노시타를 흘끗 쏘아본다.
“애초에 무른 걸로 따지자면 유키노시타 너도 심각하거든?”
“나? 나는 오히려 엄격하게 대하는 중이라 생각하는데……”
유키노시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
던 유이가하마에게는 이해가 되었는지 팔짱을 끼고 끙끙 앓는 소릴
내기 시작한다.
“웅~…… 그렇다기보단 오히려 상냥하단 느낌이야. 유키농은 누구 챙
겨주고 그러는 거 많이 좋아하잖아.”

40
チョロノ下(쵸로노시타). ちょろい(쉽다)+유키노시타.
역시41 가하마, 사스가하마 양. 잘 아는구만.
“그렇지. 유이가하마도 일일이 잘 챙겨주기도 하고.”
“어!? 따, 딱히 안 그렇거든! 귀찮게 한 적 없거든! 아마두! 그렇게까
진!”
유이가하마가 항의하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 하고 언성을
높여 보지만, 그것도 이내 그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의 미소에 가로막
히고 만다.
“어머, 혹시 자각 못하고 있었니?”
“자, 자각 못 하는 건 아닌데……”
생긋 지어 보이는 그 미소에 유이가하마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우물쭈물하더니, 풀 죽은 분위기로 도로 자리에 앉는다. 무릎 위에 다
소곳하게 손을 올린 얌전한 자세로.
응, 자각, 중요.42
그렇긴 하지만 유키노시타가 유이가하마와 잇시키를 챙겨주는 방법
은 미묘하게 각각 다르다.
유이가하마에 대해서는 이미 있는 그대로, 거의 수동적으로 다 받아
준다는 느낌이지만, 잇시키에 대해서는 어딘가 능동적으로 챙겨 주는
이미지가 있다. 약간 거리감을 둔달까, 일단 본인이 연장자라는 사실
을 의식하고 하는 듯한 발언이 눈에 띈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고양이와 강아지 같은 관계라면, 유키노
시타와 잇시키는 어미고양이와 새끼고양이 같은 관계라 봐도 되지 않
을까. 아니 뭐, 잇시키는 고양이보다는 은근히 사납기도 하고 억센 면
도 있는 족제비에 더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만.

41
さすが(사스가).

42
‘관희 챠이카’, 챠이카 트라반트의 말투인 듯.
……하긴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가 종종 챙겨 주곤 하니까, 서로 피
차일반인 셈인가.
꽃다운 소녀들이 우애를 나누는 모습, 훌륭하도다. 그럼그럼. 반면에
꽃다운 소녀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건 엄청 무섭지……. 미우
라하고 카와사키를 보고 있으면 하도 박력이 넘치는 나머지 쫄리다
못해 지려버릴 지경이다. 아예 기저귀라도 미리 차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43 자제 부탁요.
아무튼 봉사부와 잇시키 사이의 관계는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제 딴에 무언가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뭐, 그치만 이로하두 자기 챙겨 주는 거 제법 좋아할지두? 그런 점,
은근 귀여운 게 참 좋을 거 같애……”
책상에 철푸덕 엎드려서는, 끝에 가서는 뭔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
한다. 뭐, 유이가하마는 의외로 야무진 부분도 있고, 자기가 자발적으
로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이미지도 없다. 얼핏 보면 비슷한 스타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극과 극이라고 봐야겠지…….
그렇다 보니 그런 잇시키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잇시키는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 녀석이 둘씩이나 있는 것도 문제거니와, 유이가하마가 잇시키처
럼 변하는 것도 살짝 아니다 싶지만 뭐, 그건 그것대로 괜찮달까, 그
대로라도 괜찮달까, 그대로인 게 좋지 않을까 어떻달까, 뭐 그렇습죠,
예……. 하마터면 입 밖으로 횡설수설 늘어놓을 뻔한 그런 잡생각을 으

43
なんならチブル星人になっちゃう(아예 치불 성인이 될 거 같다). チビる(치비루, 지리다)와 チブ
ル(치부루)의 말장난. 치부루 성인(チブル星人)은 ‘울트라맨’ 시리즈의 등장 외계인.
흠으흠 커흐흠 헛기침을 하며 꾹 삼킨다(병맛).44
그 어색한 헛기침 소리에, 책상에 엎드려 있던 유이가하마가 살포시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사과머리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사르르 뒤로 넘어가고, 앞머리는
하늘하늘 앞으로 흘러내린다. 그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가, 그리고 흘러나오는 숨결을 타고 희미하게 떨리는 요염한
입술.
아래쪽에서 빼꼼히 올려다보는 그 시선에 포착되자, 미리 준비해 두
었던 말은 금세 꼬리를 감추고 만다.
“아니, 잇시키의 그런 점이 귀여운가는 좀 생각해 봐야지, 귀여운 게
딱히 그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도 무척 부끄러운 나머지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고, 읽지도 않은 문고본 페이지로 고개를 떨군다. 전혀 말 같
지도 않은 의미 불명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피식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쪽을
보니 어느새 몸을 일으킨 유이가하마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그러게.”
그 대답에 묘하게 마음이 안도가 되었고, 덕분에 거기서부터는 무난
하게 말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무튼 여긴 상냥한 언니들이 이것저것 잘 챙겨 주니까 마음에 드
는 거겠지. 요즘은 아예 나보다 일찍 와 있을 정도고.”
그 말에 유키노시타가 입가에 손을 얹더니 흐음 하고 떨떠름한 표정

44
こぱとーんと咳払いで飲み込む(ココナッツ味)(코퍼톤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삼킨다(코코넛 맛)).
말장난. 코퍼톤(コパトーン) 코코넛 향 태닝 워터 이야기인 듯.
을 짓는다.
“마음에 들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실에 올 때는 사전에 연
락해 줬으면 좋겠어. 홍차 재고도 점점 더 빨리 줄어들고, 다과도 여
유 있게 준비해 둬야 하니까. 무엇보다도 차분하게 책 읽을 시간이 줄
어들었거든.”
하아 하고 야단스레 한숨을 쉰다. 유키노시타가 푸념하듯 그렇게 말
하는데 비해, 그 입가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즐
거운 듯 보인다.
비유하자면 마치 심술궂은 할머니가 손주한테는 오냐오냐 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고양이한테 침대를 사 줬더니 침대가 아니라 포장용
종이 박스에 들어가서 자는 꼴을 보고 아이 참, 저 아이는 왜 저런담
하고 툴툴대는 그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뭔가 유키노시타와 잇시키 둘
이서 있을 때의 풍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다.
잇시키에게 무관심한 척 하긴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다
보니 차도 내 오고 이것저것 챙겨도 주는 유키노시타, 그 모습을 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계획대로!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유키노시타에게 마음을 허락해 가는 잇시키, 뭐 그런 시츄에이션. 뭐
야 그거, 설레여! 이로×유키, 적극 지지합니다.
한숨을 쉬면서 잇시키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유키노시타를
유이가하마가 멍하니 쳐다본다.
그리고는 한 마디 툭 던진다.
“나두 쪼끔 더 빨리 올까……?”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부러워하는 기색이 드러나 보인다. 그 말을 들
은 유키노시타가 야단이라도 치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 치켜 올린다.
“……일단은 어엿한 부활동이니까, 빨리 오는 게 당연하잖니?”
“아, 응, 그치만 유미코나 다른 애들이랑 얘기 좀 하다 보면 깜빡하
구 지각해 버리고 그러거든.”
유이가하마는 에헤헤 하고 사과머리를 꼬물꼬물 만지며 웃음으로 얼
버무려 보지만, 유키노시타의 표정에서는 웃음기라고는 영 찾아볼 수
가 없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는 조용히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천천히 떨군다.
아무래도 살짝 토라진 모양이다. 하기야 듣기에 따라서는 미우라가
더 우선이라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질투가 날 만도 하지요.
오늘도 평화로운 봉사부실.jpg.
뭐, 내가 봐도 바로 이해가 될 정도다. 유이가하마가 모를 턱이 없다.
유이가하마는 자세를 바로잡았고, 의자 위치도 함께 살짝 움직인다.
“그래두, 진짜 쪼끔만 더 빨리 올까 싶어. 이렇게 셋이서 느긋하게
보내는 거, 나, 많이 좋아하거든…… 아니, 너무 좋아해.”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 말은 유키노시타에게 더 쉽게 전
달되지 않았을까. 휴우 하고 짧은 한숨을 흘리고 유키노시타가 유이가
하마의 표정을 힐끗 살핀다. 글쎄, 그렇게 살펴본들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표정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조금 쑥스러운 듯 내리뜬 눈동자와 희미하게 물들인 그 뺨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홍차, 새로 끓일게.”
“아, 정말? 그럼 과자두 새로 꺼낼게!”
그렇게 말하더니 유이가하마도 부스럭부스럭 가방을 뒤적인다.
그래, 뭐, 어차피 그 과자는 본인이 거의 다 드시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좋아하신다던 게 실은 그 과자 아니신지……? 그런 식으로 속으
로 깐죽거리긴 했지만, 딱히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미소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히키가야.”
“그래, 부탁해.”
말을 걸어오기에 나도 찻종지를 조용히 내민다.
따스하게 피어나는 김, 그리고 홍차 향기. 거기에 쿠키의 달콤한 냄
새가 어우러진다.
“자, 힛키.”
“오, 땡큐.”
과자가 담긴 접시가 밀려오고, 그 가운데 하나를 쏙 집어 우물우물
먹는다. 그리고 따뜻한 홍차를 앗뜨뜨 하고 중얼거리며 홀짝홀짝 마시
자 휴우 하고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삼인삼색, 각자의 한숨 소리가 한데 겹치고, 자기도 모르게 서로 시
선을 나누게 된다.
뭐, 하지만.
흔히 이럴 때 손님이 찾아오곤 하는 법이다.
그 예상은 제대로 들어맞았는지, 정말로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
려온다. 들어오세요, 하고 답하는 유키노시타의 목소리에 맞추어 그
손님이 천천히 문을 연다.
“많이 기다리셨죠~!”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잇시키 이로하가 부실에 찾아왔다.

× × ×

유키노시타가 홍차 한 잔을 새로 준비하는 사이, 잇시키는 프린트 몇


장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럼요, 이것저것 결정해 왔으니깐요,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 부탁할게.”
유키노시타가 대답하면서 홍차가 든 종이컵을 내민다. 스틱 설탕 두
개와 함께. 거기에 잇시키는 답례를 표하며 태연한 분위기로 그걸 받
는다. ……아니, 유키노시타의 배려도 대단하지만, 저렇게까지 조교를
시킨 잇시키도 정말 장난이 아니다.
“우선 날짜와 장소 말인데요~……”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에 잇시키가 설명을 시작한다. 그
설명과 함께 건네받은 프린트를 읽어 나간다.
그러다 문득 그 날짜에 시선이 멈춘다.
“발렌타인 데이 당일에 하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하야마 하야토에게 초콜릿을 줄 것인가, 그런 이야기의 흐름
상으로 볼 때 당연히 당일에 하는 거 아닐까 하고 멋대로 단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 날짜는 그 며칠 전으로 설정돼 있다. 유키노시타
도 거기에 생각이 닿았는지 프린트에서 눈을 떼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날은 입학 시험날이기도 하니까, 감독 선생님 허가를 받기 어렵지
않겠니?”
“아, 그러게, 그날 학교 쉬니깐.”
납득했다는 양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리는 유이가하마에게 잇시키
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하지만요, 발렌타인 당일은 약속이 있는 분들
도 많이 있을 테니까요, 참가율을 고려해 보면 그 전으로 잡는 게 다
들 참여하기 편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과연, 맞는 말이네……”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다.
발렌타인 당일이 입학 시험날이라면 나도 그날은 하루 종일 코마치
의 합격을 기원하며 가지기도(加持祈禱) 45 는 물론 갑골점, 46 포춘 쿠
키, 47 심지어는 소신공양 48 이라도 불사할 자신이 있다. 아니, 소신공양
은 좀 심했나?
아무튼 코마치로 머릿속이 꽉 차기 시작하는 바람에, 이제 이벤트 따
위는 하든지 말든지 안중에도 없다.
입학 시험날이 발렌타인 데이란 말은 코마치가 초콜릿을 준비할 수
없단 뜻 아니냐고……. 아니지, 시험이 직전인데 밤을 새워 애정이 듬
뿍 담긴 수제 초콜릿이나 만들고 있다면 아무리 나라도 화를 내며 때
려 줄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살며시 안아 줘야지…….
아아, 코마치 초콜릿, 줄여서 코마초코가49 점점 멀어져 간다…….
내가 크흑 하고 신음하는 사이에도 잇시키는 진지한 분위기로 설명
을 계속 이어 간다.
“유키노시타 선배는 당일 일곱 시쯤 미리 와 주실 수 있나요~? 선배
님이랑 유이 선배는 조금 늦게 오셔도 되지만요.”
“나는 그래도 괜찮아.”
“우리두 유키농이랑 같이 가자. 응? 힛키.”
유이가하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메아리친다.
“아~ 맘대로 해, 가든지 말든지……”
코마치에게 초콜릿을 받을 수 없다면, 이제 뭐가 어찌 되든 아무래도
좋다……. 마치 온몸이 부슬부슬 부서져 내려 먼지가 되어 소멸하는 듯

45
부처의 힘을 빌리기 위해 올리는 기도. 加持祈祷(카지키토우),

46
太占(후토마니). 사슴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치는 것.

47
辻占(츠지우라). 점괘가 적힌 종이 쪽지. 전병에 넣어 팔기도 하는 듯.

48
盟神探湯(쿠카타치). 끓는 물에 손을 담가 죄를 판별하는 것.

49
‘코이초코(恋と選挙とチョコレート, 사랑과 선거와 초콜릿)’ 이야기인 듯.
한 기분이다. 흡사 핵이 부서져 버린 ARMS50 같다. 하긴 코마치는 나
의 핵이니까, 그럴 수밖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새하얗게 불타버려 있는데, 51 대각선 맞은편
에 앉아 있던 잇시키가 차가운 시선으로 정색하고 쳐다보는 게 느껴
진다.
“왠지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인 게 엄청 신경 쓰이는데요……”
잇시키의 말에 유이가하마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아하하 웃는다.
“뭐, 힛키가 이렇게 될 때는 대개 다 이유가 뻔하니깐 괜찮아.”
“그래, 대충 예상이 되는구나. 걱정 마렴, 내버려 둬도 돼.
“하아, 그런가요……”
유키노시타가 기가 막힌 듯 하는 말에, 잇시키는 아무래도 좋지만요
하는 뉘앙스로 그렇게 답한다.
다시금 잇시키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재료랑 조리 기구는 학생회에서 조달하기로 했으니까 문제 없어요.
앞치마 같은 건 각자 지참하기로 했지만요.”
턱에 손을 얹고 흐음흐음 듣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척 든다.
“일단, 나중에 조리 기구 목록 좀 볼 수 있을까? 빠진 게 없는지만
확인해 봤으면 해.”
“알았어요~”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지 심히 미묘한 대답을 하면서 잇시키
는 자기 프린트에 무언가 끄적끄적 메모를 한다. 그렇게 대충 다 쓰고
는 무슨 요술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유이가하마
를 힐끗 쳐다본다.

50
만화 ‘ARMS’.

51
‘내일의 죠’.
“연락망은 대충 그런 식으로요, 어~ 미우라 선배랑 에비나 선배한테
연락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실은 저 연락처 모르거든요.”
“응~ 오케이.”
유이가하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
리고 말았다.
으, 으응……. 뭔가 은근슬쩍 여자들의 세계의 편린을 보여 주는 건
자제해 주지 않으련……? 얼굴도 자주 보고 대화도 하고 그러면서 연
락은 따로 안 한다니 뭐야 그거, 무서워……. 그것도 그렇지만, 여자들
의 정말로 무서운 점은 딱히 친한 사이든 아니든 간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게 티끌만큼도 안 느껴진다는 점이 아닐까…….
……아니지, 잇시키하고 미우라는 딱히 친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게
정상인가? 과연 나~ 양, 비뚤어진 건 질색이지!52
“아, 그리고요…… 그 카와…… 카와……? 뭔가 무서운 그 선배한테도
누구 연락 좀 해 주실 분 계세요?”
“응, 사키한테두 내가 연락해 둘게.”
유이가하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
리고 말았다.
으, 으응……. 역시 잇시키 너도 이름 못 외웠니……? 과연 카와 어쩌
고 양. 그래도 본인 앞에서 그런 얘긴 절대 꺼내지 마렴, 이로하스! 얼
굴은 안 돼! 몸에다 하라고!
연락 관련 사항은 대략 이 정도려나요~ 하고 재차 프린트를 확인하
던 잇시키가 아, 맞다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인다.
“혹시 또 데려오실 분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인원 조정해 드릴 테니
깐요~”

52
曲がったことが大嫌い! 예능인 하라다 타이조(原田泰造)의 자기소개 멘트.
“아, 다른 애들도 불러두 돼?”
“네. 왠지 토베 선배도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려는 거 같고요.”
잇시키가 흥 하고 뭔가 경멸과 무시로 가득한 어조로 말한다. 너 진
짜 토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나하고 생각이 딱 맞는데?
“아~ 유미코나 하야토한테 들었나 보네……”
유이가하마가 난감한 듯 아하하 웃는다. 근데 토베도 오는 건가. 뭐,
여자들만 잔뜩 있는 행사에 토베가 와 준다면 하야마도 마음이 한결
편할 테니 데려오는 데 도움이 되겠지. 녀석도 의외로 세심한 남자다
보니, 어디서 소문을 주워듣고 지원군으로 참전해 주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토베, 짜증나지만 좋은 녀석이로군…….
한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중 문득 몇 가지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토베, 남자, 여자, 하야마, ……다른 애들도 불러도 된다?
그렇다는 건… 하고 지금까지 나온 퍼즐 조각을 신중하게 맞춰 나간
다. 그러자 이윽고 그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형상으로 맺어지기 시작
한다.
그 말은.
그 말인즉슨.
…………토츠카도 불러도 된다는 말 아닌가?
“좋아, 연락은 나한테 맡겨!”
해답이 나온 순간,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소리에 잇시키가 어깨
를 움찔하며 화들짝 놀라더니, 잠시 후 황당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이
쪽을 쳐다본다.
“왠지 갑자기 의욕이 확 생기셨는데요……?”
잇시키의 말에 유이가하마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아하하 웃는다.
“뭐, 힛키가 이렇게 될 때는 대개 다 이유가 뻔하니깐 괜찮아.”
“그래, 대충 예상이 되는구나. 걱정 마렴, 내버려 둬도 돼.
“하아, 그런가요……”
유키노시타가 기가 막힌 듯 하는 말에, 잇시키는 아무래도 좋지만요
하는 뉘앙스로 그렇게 답한다.
이야, 둘 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로구만. 그렇다기보다 이거 아예
그냥 포기해 버린 분위기 같은데…….
“유키노시타 선배, 메뉴에 대해 상담드릴 게 있는데요, 후보를 몇 개
정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안 그러면 발주가 안 되거든요~”
잇시키는 이미 날 상대할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는 모양인지, 그대
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가방 안에서 제과 교과서 같은 책자를 몇 권
척척 꺼내어 놓는다. 유키노시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가운데 한 권을 집어 들고 팔랑팔랑 넘겨 보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게 좋을까……. 가토 쇼콜라나 자허토르테,
트뤼플 초콜릿……. 무난하게 쿠키로 해도 상관없지만. 역시 초콜릿이
라는 느낌이 나야겠지. 초보자도 있으니 난이도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
구나……”
유키노시타는 음~ 하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페이지를 다시 한 장 넘
긴다. 뭐, 초콜릿 과자라고 묶어서 말하긴 해도 그 안에 또 종류가 많
이 있으니까.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함부로 참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나 잘 모르냐 하면 자허토르테를 자허르테르트라고 그러
면서 아는 척을 할 정도다.53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할 말 다
하는 사람도 있다. 유이가하마가 딱 그런 케이스다.
이번에도 유이가하마는 손을 척 들더니, 딱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몸

53
‘내 이야기!!(俺物語!!)’, 고우다 타케오(剛田猛男). 에구치 타쿠야(江口拓也)의 성우장난.
을 쑥 내밀며 적극적으로 발언한다.
“아, 그래! 초콜릿 퐁듀 같은 거! 초코파 같은 거 하면 재밌을 거 같
애!”
“초, 코파……? 그게 뭐니……?”
처음 듣는 단어였던 모양인지 유키노시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지금까지의 유이가하마의 발언들로 미루어 볼 때, 초
코파라는 건 초콜릿 파티 혹은 초콜릿 퐁듀를 즐기는 파티의 약칭이
겠지. 이 정도면 슬슬 가하마 어(語) 검정시험 2급, 혹은 YUEIC 고득
점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유키노시타는 아직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지만, 옆에 있
는 잇시키는 호오~ 하고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다 함께 재미있게 즐기는 것도 좋죠~. 그런 이벤트도 괜찮을지
도 모르겠네요.”
괜찮은 거냐……. 아니 근데, 타코야키 파티, 전골 파티, 카레 파티, 무
슨 말끝마다 되는 대로 파티파티 붙이는데, 너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매일매일 쥬시 포리 예이~54하고 즐기는 빠리 피플이라도 돼……?
“그래도요, 이번 행사는 요리 교실 이벤트니까요……”
다소 말을 흐리면서도 잇시키가 손가락으로 작게 가위표를 만들어
보인다. 그걸 보고 유이가하마도 하윽 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흐음 하고 고
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역시 정석적인 걸 가르치는 게 좋겠지……. 어느 정도 보
기에도 좋고, 만들기도 간단한 게……”
제과 교과서를 쓱 넘겨 보던 유키노시타가 어느 한 부분에서 눈길을

54
성우 타카하시 치아키(たかはし智秋)의 인사법. Juicy! Party! Yeah!
멈춘다. 아무래도 광고 페이지 같다. 신상품이네 뭐네 하는 글자가 떡
박혀 있다.
“전부 세트로 포함된 제품도 있구나……. 계량할 필요도 없고, 간단해
보이네.”
“아~ 이거라면 나두 만들 수 있을 거 같애”
유이가하마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 아니,
너, 지금, 무슨 망발을…….
“…………”
“입 다물지 마!”
내 침묵에 유이가하마의 구슬픈 절규가 덧씌워진다. 그 소리가 잦아
들자,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살며시 고개를 든다. 유키노시타가 조
용히 유이가하마의 어깨를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유이가하마, 내용물보다는 포장 쪽에 집중하는 것도 한 방법이잖니?”
“그런 배려도 하지 말아 줘!”
유이가하마가 으앙 하고 우는 소리를 낸다. 아니, 포장도 중요하거든?
그 뭐냐, 가슴에 파란 리본만 한 바퀴 감아도 액센트가 돼서 화제 독
점, 인기 폭발은 기본일걸?55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잇시키가 작게 한숨을 흘린다.
“하아, 세트로 파는 제품도 맛은 똑같을 거고, 외형도 한눈에 봐서는
비슷하겠지만요……. 일단 이번에는 이벤트 용으로 준비해야 되니까 세
트 제품은 사지 말기로 해요.”
“뭐, 세트는 비쌀 거니까.”
“네. 뭐, 일단 참가비는 걷을 생각이지만요. 저렴하게 진행하는 게 최
선이니까요.

55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헤스티아.
“……엥? 참가비도 걷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감정이 철철 묻어나고 말았다. 덤으로 얼굴에
도 대놓고 속내가 다 훤히 드러난 모양이다. 내 표정을 본 잇시키의
입에서 우와…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선배님, 엄청 질색하는 표정이시네요……. 뭐, 기껏해야 몇백 엔이지
만요. ……애초에 선배님들은 안 내셔도 돼요. 어차피 도와주고 계시잖
아요.”
“그럼 다행이지……”
“그래, 참가비가 있다면 생각보다 예산에 여유가 생길지도 모르겠구
나……. 우선 예산이 얼마 잡혀 있는지 가르쳐 주겠니? 그걸 바탕으로
후보를 몇 개 정하고 재료의 기준과 견적을 정리해 볼게.”
“네,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잇시키가 클리어 파일에서 프린트를 꺼낸다. 거기에는
이번 행사의 시산표(試算表) 같은 게 나와 있다. 유키노시타는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메뉴 후보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의뢰로 전달된 내용은 꽤나 까다로운 조건들뿐이다. 난항을
겪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의리 초콜릿으로 최적일 것. 마음이 가는 그 사람에게 전해 줘도 부
끄럽지 않을 것. 배워 두면 여러모로 편리할 것. 거기에 아이들도 즐
겁게 만들 수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악의 난제인 건, 아까부터 유키노시타가 무슨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바로 그거다.
“유이가하마도 만들 수 있는 거…… 유이가하마도 만들 수 있는 거……”
“너무해, 유키농!”
징징거리며 달라붙는 유이가하마를 살짝 성가신 듯 취급하면서도, 기
본적으로는 그대로 달라붙게 놔둔 채 유키노시타는 제과 교과서를 계
속 넘긴다.
그 가운데 그럴싸한 후보가 몇 개 눈에 띄었는지, 유키노시타는 거기
에 필요한 재료 및 분량을 메모해 간다. 유이가하마는 여전히 찰싹 달
라붙은 채 옆에서 그 모습을 엿본다.
그러던 유이가하마가 불현듯 즐겁게 웃는다.
바로 옆에서 킥킥거리고 웃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유키노시타가 언
짢은 분위기로 유이가하마를 힐끗 쳐다본다.
“……왜 그러니?”
“아, 아니야! ………………왠지, 그립구나 싶어서.”
유이가하마는 얼버무리듯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지만, 그 손을 살며시
내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유키노시타를 향한 그 시선
이 무척 눈부셔 보였다.
그녀가 무엇에 대해 그리움을 느꼈는지, 그 답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리고, 아마 유키노시타도.
“……그렇구나.”
유키노시타는 짧은 말로 그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마주 보는 눈동자
는 그 말보다 훨씬 오랜 시간 유이가하마를 꼭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유이가하마가 수줍은 듯 에헤헤 웃더니, 유키노시타와 한결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의자를 당긴다. 그러자 딱 내 정면에 두 사람
이 나란히 들어온다.
“……그치?”
그리고 확인하듯이 작은 소리로 그렇게 묻는다. 멀리서 나를 들여다
보듯 고개를 기울여 보이는 그 천진난만한 몸짓에 그만 웃음이 흘러
나온다.
“그러게.”
나 역시 짧은 말로 대답해 주고 시선을 쓱 돌린다.
그때부터 아직 채 일 년도 안 됐는데, 무척이나 그리운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부실이, 분명히 움직인 순
간이 있었다.
“이로하, 고마워.”
“어? 아, 네, 아뇨…… 처, 천만에요?”
유이가하마가 돌연 고마움을 표시하자, 잇시키가 당황스러운 분위기
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이 못내 우스웠는지 유이가하마가 킥킥
웃는다. 그러다 웃음을 거두고, 흡족한 듯 한숨을 흘린다.
“올해도 좀 있으면 끝이지만, 마지막으로 즐거운 추억이 생길 것 같
아서 참 다행이야……”
“올해는 이제 막 시작했지만 말이다.”
“정확하게는 2학년 아니겠니?”
나와 유키노시타가 각자 한 마디씩 하자, 유이가하마가 뺨을 살짝 부
풀린다.
잇시키는 잇시키대로 “우와~ 두 분 진짜 센스 없으시네요……” 하고
살짝 황당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대화를 보고 아무튼 이번 모임도
일단락이 되었다 생각했는지, 우리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흘리더니 그
럼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홍차,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 응. 그날 잘 부탁해~!”
“그럼, 나중에 봐. 견적은 미리 산출해 둘게.”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의 말에 잇시키는 가볍게 인사로 답한 후
부실을 떠난다.
그렇게 세 사람만 남자, 아까 전에 느꼈던 그리운 감정이 보다 더 생
생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운 감정을 느끼는 건 아마 여러 가지가 변해 버렸기 때
문이리라. 어딘가에서 동일성을 잃어버렸기에. 두 번 다시 같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리워하는 것이다.
분명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멈추기 마련이다.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는 유이가하마와, 그것을 눈부신 듯 바라보는
유키노시타. 두 사람은 그저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겨우 그것뿐인 광경임에도,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하였다.

× × ×

겨울철의 목욕은 아무래도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심히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긴 밤거리를 자전거로 쉬지 않고 쭉
달려온 탓인지, 나도 모르게 몸을 푹 담그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한
다.
현기증이 돌기 직전까지 목욕하던 걸 마친 후, 온기가 채 식기 전에
곧바로 코타츠에 발을 넣고 드러눕는다.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불현듯 눈 앞에 다시 어른거리는 듯한
감각에, 아무래도 발밑이 두둥실 뜨는 기분이 든다.
그 때문에 뒹굴뒹굴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무언가 보들보들한 털뭉
치가 발에 툭 채인다.
그러자 안에서 우리 집 애묘 카마쿠라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다.
심히 불쾌해 보이는 시선으로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할짝할짝 털 고
르기를 시작한다.
이윽고 무언가 감지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달칵 들린다.
아무래도 코마치가 돌아온 모양이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더
니 뒤이어 거실 문이 열린다.
“다녀왔습니다~”
“오~ 어서 와.”
코마치가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으려 하는데, 그 발밑을 카마쿠
라가 부비부비 몸을 비비며 어이, 좀 안아 주라! 하듯 애교를 부린다.
“안 돼~ 그럼 못 써. 교복에 털 묻잖아.”
몸을 살짝 피하는 코마치 대신 카마쿠라를 안아 든다. 야야, 내가 상
대해 줄 테니까 피곤한 코마치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러자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마쿠라가 내 품 안에서 아둥
바둥 날뛰기 시작한다. 이놈의 고양이는 왜 이리 눈치가 없냐…….
그보다 카마쿠라 씨, 아무리 저한테 안기기 싫어도 질색하는 게 좀
심한 거 아니신지? 왜 제 얼굴을 손으로 꾹 밀고 그러십니까…….
카마쿠라에게 얼굴에 꾹꾹이질을 당하며 코마치 쪽을 보자, 코마치는
한쪽 발로 균형을 잡으며 하이 삭스를 쑥 잡아당겨 벗기고 있던 참이
다.
아무리 난방이 된다고는 해도 바닥은 차가울 텐데. 여자애는 너무 몸
을 차갑게 두면 안 된단다? 하고 엄마의 시선으로 쳐다보자, 내 시선
을 깨달았는지 코마치가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아, 코마치, 목욕하고 올게.”
“그래? 아, 맞다. 아까 내가 들어갔다 나왔으니까, 물 새로 안 받아도
돼.”
“응. 그러니까 코마치, 목욕하고 올게.”
“아니, 그러니까 내가 들어갔다 나왔으니까 물 새로 안 받아도 된대
도?”
“응, 그러니까.”
코마치는 정색한 얼굴로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잠깐만? 왜 그러니? 따져 묻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코마치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니아니, 오빠가 들어갔던 물에 어떻게 또 들어가? 오빠 육수가 쫙
우러났을 거 아냐. 무리라구, 무리.”
“사람을 무슨 돈코츠처럼 얘기하지 말아 줄래?”
언젠가 카츠오도 와카메한테 이런 얘길 하는 날이 오진 않을까…….
이소노네 집 목욕물, 엄청 맛있을 거 같다.56
근데 이 녀석, 설마 지금까지 나 다음에 목욕하러 들어갈 때마다 계
속 물 새로 받은 거였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반대로 말하면 내가
코마치 다음에 들어갈 땐 항상 코마치 육수를 한껏 만끽했다는 뜻인
데……. 음, 소름 돋을 만도 하네.
그나저나 어렸을 적에는 귀여운 코마치카 57 라고 불리던 우리 코마치
도 이제는 벌써 한창 사춘기인가 보네…….
여동생의 성장에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데, 코마치의 눈에도 무언
가 반짝 하고 빛난다. 어머, 우리 코마치도 역시 나랑 동감인 걸까 생
각했는데, 이내 곧바로 흐아암 하고 맥 빠진 하품 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코마치, 목욕 좀 하고 올게.”
“그래, 푹 씻어. 목욕하다 잠들진 말고.”

56
‘사자에상’. 카츠오와 와카메 남매. 가다랑어(カツオ)와 미역(ワカメ)이란 이름으로 친 말장난.

57
コマーチカ. ‘러브라이브!’, 아야세 에리의 애칭, 에리치카(エリーチカ).
“응~”
돌아오는 대답에도 하품이 섞인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뭐, 입학 시험 당일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코마치보다 먼저 목욕하지 않을 것, 그
리고 기도하는 것 정도다. 그 밖에는 기껏해야 코마치 이불이나 구두
를 따뜻하게 데워 두는 것 정도려나. 어맛, 그러다 또 미움받는다구!
혹시 전국시대였다면 출세할지도 모르지만!58
이래서야 영 발렌타인 같지가 않구만…….
과자 만들기 행사에 대해서는 코마치에게 말하지 않는 게 나으리라.
괜히 신경만 쓰이게 하고 아쉬워하게만 할 뿐이다. 코마치도 수험 공
부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고. 시험이 끝나면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해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은 되도록이면 코마치에게 민폐도, 걱정도, 마음 고생도
끼치지 않게끔 해야겠지!
코마치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혼자만의 힘으로, 혼자만의 의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첫걸음이다. 홀로 서고, 홀로 걷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와 함
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코마치도 점점 오빠인 나한테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가는구나. 쓸쓸
하지만 쓸쓸해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조금은 쓸쓸해지는, 복잡한 기
분이다.
너무도 쓸쓸한 나머지 품 안에 안고 있던 카마쿠라 배에 얼굴을 폭
파묻는다.
하아~…… 언제까지 코마치한테 초콜릿을 받을 수 있을까~……. 받을

5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신발을 몸으로 데웠던 이야기.
수만 있다면 평생 코마치한테 초콜릿 받고 싶은 심정이다.
우정 초콜릿이고 호모 초콜릿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으니까, 코마치
초콜릿이 필요하다고.
……코마초코, 받고 싶어라.59

59
コマチョコ、しよ?
4. 그리하여, 남자들의 일희일우가 시작된다(여자도 있다구!). (pp.106-
140)

폭풍처럼 상담이 쏟아지던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봉사부의 활동이라고는 딱히 업무다운 업무 없이, 때때
로 확인을 구하러 오는 잇시키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는 게 전부
였다.
한편 잇시키 본인은 똑바로 일을 잘 진행해 가고 있는지, 방과 후 교
내에서 어디론가 촐랑촐랑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러 번 목격
됐다.
덤으로 부회장이 서류 뭉치를 대량으로 안고 고개를 푹 떨군 채 한
숨을 토하는 모습. 그리고 그러는 부회장을 격려해 주는 서기의 모습
은 더 자주 목격됐다. 놀지 말고 일해라, 부회장. 자고로 남자라면 늘
엄격 진지한 자세로 업무에 임해야 하는 법. 그게 바로 접니다.
어쨌든 이벤트 당일인 오늘도 학생회 멤버 제군들은 모두 바쁘게 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의 그 크리스마스 이벤트 때와는 무척 다르
다.
역 근처에 위치한 커뮤니티 센터는 젊은 목소리들이 가득 메아리치
고 있었다. 지정된 입장 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이지만, 어차피 오늘은
이벤트를 도우려 온 상황이다. 아니, 돕는 건 내가 아니라 유키노시타
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오늘은 오랜만에 커뮤니티 센터를 방문해 보기로 하였
습니다! 물론 크리스마스 이후로 처음 오는 건 맞지만, 그 짧은 사이
에 뭐가 딱히 바뀐 게 있을 리가 없다.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운 후, 세 사람 다 자기 집 안방이라도
드나드는 것처럼 센터 안으로 척척 들어간다.
거기에는 잇시키를 비롯한 학생회 멤버들이 이벤트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분위기로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현관 쪽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가 왔음을 깨달은 잇시키
가 쪼르르 다가온다. 뭔가 종이 뭉치 같은 걸 품에 안고 있다.
“아, 선배님~. 일찍 오셨네요~”
“오오.”
인사를 대신해 짧은 말로 가볍게 답하자, 뒤에 있던 유키노시타와 유
이가하마도 고개를 빼꼼 내민다.
“안녕, 잇시키.”
“얏하로~! 혹시 뭐 도와줄 거 있나 싶어서 와 봤어.”
유이가하마의 말에 잇시키가 음~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요~? 아, 그럼 이거 붙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입구 쪽에 붙이
기만 하면 오케이니까요, 배치나 그런 건 알아서 해 주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며 잇시키가 건네 온 것은 급조된 B2 사이즈 크기의 포
스터였다. 뭐, 포스터라고는 해도 매직 같은 걸로 형형색색 꾸며서 직
접 만든 물건이다. 공지 사항 외에 누가 그렸는지 모를 하트 마크와
초콜릿 마크, 이모티콘 등 낙서 같은 그림이 곁들여져 있다. 포스터라
기보다는 손글씨를 크게 때려 박은 판촉용 일러스트에 더 가까워 보
인다.
사실 디자인 쪽은 초라하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다.
문제는 적혀 있는 그 문장이다.
『미경험자 환영! 할당량 없음! 내 집 같은 분위기! 홀로서기를 위한
노하우 경험!』
이거 아무리 봐도 악덕 기업을 초월한 악덕 기업 RX 수준인데…… 60

60
ブラック企業RXなんだけど. ‘가면라이더 블랙 RX’.
특히 내 집 같은 분위기란 말은 내 가족 말고는 몽땅 가차없이 부려
먹겠다는 의미로밖에 안 보인다만.
“포스터 붙이는 정도는 맡겨 줘도 상관없지만, 괜찮겠니?”
유키노시타가 염려하는 분위기로 그렇게 말하자, 잇시키는 허공 쪽으
로 시선을 홱 들더니 검지손가락을 턱에 착 붙이고는 조금 생각하듯
이 뜸을 들인다.
“아~ ……아뇨, 지금은 꽤 복잡해서 들어가면 방해만 될 거 같거든요,
저도 포스터 붙일게요.”
기껏 떠올린 핑계가 그거냐. 얘 그냥 땡땡이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는데, 저 말고 두 분도 역시 같은 생각이신가 봅
니다.
“……아, 아하하. 이, 이유가 좀 미묘하다, 그치?”
“잇시키, 돌아가도 되겠니?”
유이가하마는 쓴웃음을 아끼지 않았고, 유키노시타는 최대 출력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 아녜요! 땡땡이 치려고 그러는 거 아니라구요. 애초에 이번 행사,
그렇게 일거리도 안 많고요……”
그럼 왜 또 그러는데…… 하고 시선으로 묻자, 잇시키는 휴우 하고 한
숨을 내쉰다.
“우리 학생회는 남녀 반반이잖아요~? 그리고요, 왠지 서기랑 부회장
이 요즘 꽤 친하더라구요? 게다가 또, 그게~ ……아, 어, 뭐, 이것저것
있거든요~☆”
잇시키는 말끝을 애매하게 흐리며 웃음으로 때우려는 양 꺄핫 웃는
다. 하던 말을 중간에 끊는 것만큼 사람 성질 긁는 짓도 없지만, 귀여
우니까 세이프!
“……?”
“아, 아~…… 그렇구나.”
유키노시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렸지만, 유이가하마는
지금 그 정보만으로도 대충 다 파악한 모양이다. 나도 왠지 모르게 어
떻게 된 사정인지 이해가 간다.
복잡한 건 업무 내용이 아니라 인간관계인 모양. 그런 직장은 어딜
가나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나도 그게 원인이 되어 알바 하던 거 접은
적도 있으니까. 이야~ 진짜 그건 아니더라고. 점장하고 여고생이 사귀
질 않나, 그 여고생이 새로 들어온 꽃미남 대학생하고 바람을 피우질
않나, 그 꽃미남을 점장이 괴롭히기 시작하질 않나. 그런 직장은 진짜
아니지. 전부 미쳤어…….
……뭐, 어딜 가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그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진짜 어딜 가도 있다.
워낙 흔하다 보니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최적해는 아직 알지 못한다.
확인하지 못한 문제, 그리고 나오지 않는 해답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데, 그러던 내 등이 꾹 떠밀린다.
“그렇게 되었으니 얼른 붙이러 가자구요! 되도록이면 천천히요!”
“시간 벌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구만. 딱히 불만은 없지만, 바깥은
추우니까 얼른 끝냈으면 좋겠는데.”
유리문 한 장 너머 밖으로 나가자, 온몸에 스며들어 오는 한기에 무
심코 몸이 오싹 떨린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하늘은 아직도 한낮의 밝은 빛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석양이 지기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걸 가르쳐 준다.
후우 하고 숨결을 내뱉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올랐고, 그것이 사라져
가는 방향을 좇아 눈길을 옮겼다.
× × ×

포스터를 쫙 펼치고 어떻게 붙여야 할지 각을 잡아 본다. 요 며칠간


에 비해 오늘은 바람이 다소 약하게 불었고, 덕분에 얇은 종잇장이 바
람에 떨어져 나갈 걱정도 덜하다.
그러고 있는 사이, 건너편 편의점에 셀로판 테이프를 사러 갔던 잇시
키가 비닐 봉투를 들고 돌아온다.
“확실히 춥긴 춥네요~. 자, 여기요.”
봉투에서 꺼낸 건 페트병에 든 홍차다. 이왕 간 김에 같이 사 온 모
양이다. 그 홍차를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에게 각각 내민다.
“고마워.”
“와~ 따뜻해~”
받아 든 홍차를 유키노시타는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유이가하마는 뺨
에 대어 따스한 온기로 몸을 녹인다.
“자요, 선배님도요.”
“오~”
건네 온 음료수는 맥캔이었다. ……요 녀석, 뭘 좀 아는구만.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시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은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맑은 날이 더 춥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복사냉각이라는
개념을 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현상이다. 아니면 훨씬
애매하고 막연하게, 겨울은 원래 추운 거라고만 인식하고 있다면 그런
게 애초에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터이다.
의외로 사람의 감각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인간의 감각이란 지각
과 기억, 착각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맑으나 흐리나 춥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탓에, 나
는 맥캔을 불끈 쥐고 손을 녹이며 작업을 개시한다.
우선은 커뮤니티 센터 입구의 유리문에 한 장 붙인다.
“자.”
“땡큐.”
유이가하마에게서 포스터를 넘겨받는다. 포스터 네 귀퉁이에 미리 셀
로판 테이프가 붙어 있었으므로, 내가 할 일은 종이를 벽에 딱 누르고
테이프가 붙은 부분을 톡톡 두드려 붙이기만 하면 끝이다.
잘 보이도록 조금 높은 곳에 붙여 볼까……. 이얍 하고 살짝 발돋움을
하여 척 붙인다.
“이 정도면 돼?”
확인을 부탁하려고 뒤돌아보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내가 작업하
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다.
“비뚤어졌어.”
“그래? 이 정도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붙인 포스터를 다시금 확인해 보지만 딱히 기울어진 것처럼 보
이지는 않는다. 뭐가 잘못된 건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유키노시
타가 후우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원래부터 비뚤어진 너한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구나.”
“오오, 이해가 확 되는데……. 아니, 너도 충분히 비뚤어진 거 같은데
말이다? 애초에 올바른 게 도대체 뭔데?”
힐끗 돌아보며 그렇게 묻자, 유키노시타는 어깨로 내려온 머리를 쓸
어 넘기며 내 쪽을 똑바로 쳐다본다.
“세상에 절대적인 올바름의 기준 같은 건 없어. 오직 누군가가 결정
한 올바름만이 존재할 뿐이야. 지금 여기서는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해당되겠구나. 잔말 말고 왼쪽을 약간 내리렴.”
“그 말투부터가 이미 비뚤어진 거 같거든……? 그래서, 이 정도면 되
냐?”
“뭐, 그 정도면 될 거야.”
유키노시타의 허락을 받았으므로 같은 요령으로 또 한 장, 이번에는
도로 쪽 게시판으로 이동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붙일 위치에 각을 잡
아 본다.
거기에 맞추어 유키노시타도 또박또박 뒤따라오고, 이번에는 유이가
하마도 쪼르르 달려와 유키노시타 옆에 선다. 거기에 어째서인지 잇시
키도 빠른 걸음으로 총총 걸어와 두 사람 옆에 나란히 선다.
“힛키, 쪼끔 더 위! 위!”
“너무 올라갔구나. 조금 아래로 내리렴.”
“어~ 그것보다는 아까 그 왼쪽으로 옮겼던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응, 너네 말이다, 명령은 한 사람만 해도 되거든?
위라든가 아래라든가 좌우좌우라든가 계속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포
스터를 붙이고 있자니, 뭔가 코나미 커맨드 61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초등학생 수준의 감상)? 근데 요즘 초등학생들이 코나미 커
맨드가 뭔지나 알까?
“이 정도면 되겠지 뭐. 한 장 더 붙일까?”
다 붙인 포스터를 톡톡 두드려 단단히 붙이면서 뒤돌아보자, 코코아
가 들어있는 캔을 양쪽 소매로 감싸 쥐고 있던 잇시키가 고개를 젓는
다.
“뭐~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을 거
고요, 혹시 모르니깐 일단 표지판 삼아 붙여 둔 거예요.”

61
코나미 게임에 주로 포함돼 있던 숨겨진 커맨드.
그런 거였나……. 뭐, 친구와 지인들끼리만 모여서 하는 조촐한 기획
이라면 딱히 공지도 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표지판
이라는 건 꽤 중요하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목적지 검색도 되는 편
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짜 여기 맞나? 혹시 잘못 찾아온
거면 쪽팔리니까 그냥 집에 가 버릴까……” 하고 불안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말이야! 표지판 완전 중요! 그거 때문에 알바 면접도 포
기하고 집에 온 적도 있거든!
그건 그렇고, 오늘 이벤트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까…….
이번 행사는 정말로 당일 행사 지원 정도밖에 관여하지 않았다 보니,
이벤트의 개요도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태다.
의뢰하러 왔던 미우라와 에비나 양, 그리고 카와사키는 일단 고정이
고, 그 외에 시식 담당으로 하야마도 데려올 테고…… 그런 생각을 하
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등장한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이가하마가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인다.
“아, 히나네 애들이다. 얏하로~!”
“헬로헬로~. 오늘은 잘 부탁할게~”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에 맞추어 에비나 양이 쪼르르 달려온다. 거기
에 맞춰서 나란히 달려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토베였다.
“쵸리스~!”62
그 인사는 또 뭐냐? 뭐? 츄러스야?63 아무래도 이것도 이벤트이다 보
니 평소보다 분위기가 들떠 있는 모양이다. 그대로 에비나 양과 유이
가하마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다.
토베는 오늘도 변함없이 짜증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 뒤를 따

62
ちょりーっす. 모델 키노시타 유키나(木下優樹菜)가 유행시킨 인사말.

63
ソーセージかこいつは(지가 무슨 소시지야?). 초리조(Chorizo, チョリソ) 소시지 이야기인 듯.
라 등장한 미우라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무척 조용한 분위기다.
미우라는 힐끔힐끔 옆에 있는 존재 쪽으로 시선을 돌려 가면서 가방
을 고쳐 매거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등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한
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부터 그 녀석에게 수제 초콜릿을 먹
여야 하니까.
무슨 말로 꼬셔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우라는 훌륭하게 하야마를 데
리고 오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일단 이걸로 첫 번째 관문은 돌파한 셈. 다음은 미우라가 수제 초콜
릿을 제대로 만들어 내기만 한다면 미우라의 의뢰는 문제 없이 해결
된다. 일단 이걸로 안심이라는 생각에 발 아래 계단에 내려놨던 맥캔
을 손에 들고 홀짝홀짝 마시는데, 타닥타닥 발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그리고, 순간 내 시야에 잇시키 이로하의 모습이 잡힌다.
“아, 하야마 선배! 오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로하는 곧바로 하야마 옆에 나란히 선다. 하야마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미우라가 대놓고 째려봤지만, 잇시키는 방실
방실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넘긴다. 아아, 미우라 앞에 또 새로운 관
문이 등장하고 말았다…….
“안녕, 이로하. ……아. 이런 데 내가 와도 괜찮을까? 과자는 만들어
본 적 없어서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미우라와 잇시키 사이에 낀 하야마가 곤란한 듯 난감한 듯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는다. 그러자 미우라가 어깨를 살짝 부딪친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되잖아? 어차피 하야토는 의견만 들려 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맞아요~. 시식 잘 부탁드릴게요!”
미우라와 잇시키가 수줍은 목소리와 애교 있는 목소리로 하야마를
자리에 붙들어 맨다. 하야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서글서글한 분위기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
“그래, 준비를 시작해야겠구나.”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확인하듯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자, 에비
나 양 일행도 두 사람을 따라 커뮤니티 센터 안으로 들어간다.
하야마도 미우라와 잇시키에게 양팔을 단단히 붙들린 채 그 뒤를 따
른다.
저 녀석도 참 고생이로구만, 하하하 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가벼
운 마음으로 쳐다보며 맥캔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불현듯 하야마
와 눈이 마주친다.
“안녕.”
하야마는 짧은 인사를 건네 오더니 미우라와 잇시키에게는 먼저 가
있으라고 눈짓을 한다. 거기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둘 다 홀 쪽
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온화한 미소로 배웅하고는 하야마가
내 쪽을 힐끗 본다.
“히키가야도 시식 담당이야?”
“뭐, 그렇지.”
“……그렇구나.”
내 짧은 대답에 하야마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러더니 뭔가 참다 못
한 것처럼 훗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뭐 하자는 건데……?”
무언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와, 어딘가 연민을 보내는 듯한 미소.
그 눈빛과 말투가 그 사람을 상대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
신경에 거슬린다. 그 바람에 그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대답해 버리고
만다.
그러자 하야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젓는다. 표정은 부드러웠고,
방금 전까지 보여 주던 어른스러운 분위기는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아, 아니야.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
“뭐?”
“단 거, 좋아하잖아?”
하야마는 마치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 수중에 있던 맥캔을 가리킨
다. 아니, 뭐, 맥캔 자주 마시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그랬어, 하고 작은 소리로 덧붙인 후 하야마는 시원한 걸음걸
이로 미우라와 잇시키가 기다리고 있는 홀 쪽으로 향한다.
큰일날 뻔 했다, 한순간 “어맛! 어떡해! 하야마가 내가 좋아하는 음료
수 기억해 줬어♡” 하고 넘어갈 뻔 했다고. 아니, 절대 안 넘어갈 거
지만.
……오히려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농담 하나
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게 될 테니까.
그건 아마도 하야마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렇기에 일부러 놀리
는 소리를 하며 어물쩍 넘어갔던 게 아닐까.
마시던 맥캔을 단숨에 들이켜고, 찌그러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그 스
틸 캔을 꽉 쥔다.
뭐, 아무튼 포스터 게시 작업은 끝났다.
센터 안의 상황은 못 봐서 모르겠지만,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쳐다보
고만 있어도 될 상황은 아니겠지. 뭔가 조금이라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일이 시작되겠습니다…….64

× × ×

64
‘울려라! 유포니엄(響け!ユーフォニアム)’, ‘そして、次の曲が始まるのです’ 이야기인 듯.
무언가 일을 하게 될 것임은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그게 육체노동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홀 중앙에 떡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종이 박스들. 안에는 아무래도 잇
시키네 학생회에서 조달한 깨진 초콜릿이나 설탕, 베이킹 파우더 따위
가 들어 있는 듯하다.
일단은 이것들을 2층 조리실까지 운반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업체에 부탁해서 여기까지 배달받은 건 좋은데, 이왕 배달해 주는 거
처음부터 2층에 가져다 줬으면 좋았을 것을……. 뭐, 직접 가서 사 오
라고 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오케, 그럼 착착 날라 보자고~”
토베가 으랏샤 하고 팔을 걷어붙이더니 흐압 하고 힘을 넣고 박스를
든다. 그 다음은 나, 그리고 부회장이다. 지금 이 멤버, 아무리 봐도
잇시키 이로하 셀렉션인데……. 다른 이름으로는 잇시키 이로하 피해자
모임이라고도 하지요. 물론 하야마 선배는 당연히 면제랍니다.
재료로 가득 찬 박스를 품에 안고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다.
“으아~ 이거 왠지 의외로 무겁지 않어~?”
의기양양하게 선두에 서서 나아가던 토베였지만, 계단 중간쯤 접어든
지점에서 뒤늦게 상자의 무게를 실감하였는지 이얍 하는 소리를 내며
상자를 고쳐 든다. 그러자 내 뒤에 따라오던 부회장이 미안한 분위기
로 입을 연다.
“미안, 남자가 적다 보니 덕분에 도움이 많이 돼.”
“아니, 딱히 상관없는데……”
“그럼그럼. 뭐, 난 이런 거 익숙하걸랑.”
토베가 기세 좋게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쪽으로 고개를 척 돌리더니,
씨익 웃어 보인다. 에에이, 짜증나게시리. 위험하니까 앞이나 보라고,
앞이나. 그리고 그놈의 머리도 좀 자르라고.
하지만 토베도 잇시키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일일이 휘둘려 주는 걸
보면 제법 호인이라 할 수 있겠지. 이 부회장 같은 경우도 심약해 보
이는 표정 탓인지, 잇시키가 고생을 많이 시키는 듯 보인다. 이건 뭐
보살 3인조로구만. 조만간 세계 4대 성인이 7대 성인으로 늘어날 거
같다.65
셋이서 영차 영차 박스를 옮긴 끝에 겨우 목적지인 조리실에 도착하
였다. 토베가 박스를 품에 안은 채 요령 좋게 팔꿈치로 미닫이문을 열
어젖힌다.
안에는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각 테이블마다 조리 기구를 세팅
하고 있다. 미우라와 에비나 양, 하야마도 학생회 임원의 지시에 따라
다른 테이블의 준비를 거들어 주고 있었다.
우선은 이 종이 박스를 어디다 두어야 할지 물어보고자 잇시키네 쪽
으로 향한다.
“고생 많았어~”
유이가하마의 격려의 말과 함께 박스를 털썩 내려놓는다. 그러자 박
스를 확인하려는 듯 유키노시타가 가까이 온다.
“수고했어. 잇시키, 재료는 소포장으로 나눠져 있니?”
“그럼요~. 이제 테이블에 척척 늘어놓기만 하면 일단 오케이예요.”
잇시키가 물음에 대답하면서 하나 둘 셋 하고 박스 숫자를 세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 준비된 거 같네요. 그럼, 박스 뜯어서 테이블마다 나눠주세요.”
잇시키의 지시를 받고 부회장이 박스를 안은 채 빠른 걸음으로 서기

65
三人揃って苦労人シリーズだな。吸血鬼倒す武器になれそう(셋이 모여 쿠로오니 시리즈로군. 흡
혈귀를 쓰러뜨릴 무기가 될 것 같다). ‘종말의 세라프’. 苦労人(쿠로우닌)과 黒鬼(쿠로오니, 흑귀)를
가지고 친 말장난.
가 있는 조리대 쪽으로 향한다.
나와 토베는 일단 그 자리에 걸터앉아 개봉 작업에 들어간다.
상자 뜯는 소리, 이것저것 의논하는 술렁이는 소리가 무언가 시작되
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준다. 지금 그것을 가장 여실히 느끼게
해 주는 존재는 토베가 아닐까. 수시로 뒷머리를 꾹꾹 당기는 것이 꽤
나 기분이 들뜬 모양새다.
“역시 이벤트는 완전 설렌다니까~. 그건 그렇고 이로하스, 너도 학생
회장 다 됐다~?”
“물론이죠, 전 학생회장이라고요. 그치만 아직 매니저 일도 맡고 있
거든요? 날씨 따뜻해지면 부활동도 제대로 갈 거라고요!”
아니, 부활동은 춥든 말든 제대로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잇시키의 씩씩한 대답을 듣자, 토베가 웃는 얼굴로 엄지를 척 세우며
윙크를 한다. 이야~ 개짜증.
아무튼 순조롭게 박스를 뜯고 오늘의 메인 식자재인 깨진 초콜릿 세
트들을 꺼낸다.
그걸 보고 토베가 곧바로 반응을 보이며 중얼거린다.
“우와, 이 초콜릿들 진짜 맛있겠다~. 막 집어먹고 싶네~”
“예?”
잇시키의 차가운 목소리와 시선을 한 몸에 받아도 토베는 끄떡도 하
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스읍 하고 살짝 숨을 들이마시더니, 무언가
각오라도 굳힌 것처럼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확인하더니, 이리 와
보라는 듯 작게 손짓을 보내 우리를 한 자리에 모은다.
“뭔데? 무슨 비밀 얘기 같은 거야?”
“지금은 그리 한가한 상황이 아닌데……”
유이가하마는 흥미진진한 분위기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유키노시타
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유이가하마 때문에 마지못한 모양
새로 끌려온다. 그렇게 한 자리에 둥글게 늘어서자 원 모양이 딱 잡힌
다. 설마 뭐 원이나 만들고 놀려고 이렇게 부른 건 아니겠지……. 66

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토베는 뒷머리를 쭉 잡아당기고는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으며 무척 쑥스러워하는 분위기로 입을 연다.
야, 하나도 안 귀엽거든?
“어~ 아니, 그 뭐랄까? 오늘 초콜릿 만들잖어? 그래서 말인데, 어떻
게 보면 오늘은 거꾸로 받는 쪽에서 그 뭐야, 어필? 그거 하는 것도
은근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말인데, ……뭐 좋은 거 없을까?”
뭐 좋은 거 없냐니, 무슨 과자 CF 찍냐……?67 어머니 안 오셨거든?
애초에 거꾸로고 뭐고 너, 평소에도 수시로 어필하는 거 전부 가드당
하거나 무시당하고 그러지 않냐? 갑자기 안 하던 짓 하고 그러면 역
효과만 난다는 거 몰라? 아니면 혹시 그 역발상이란 게 밀어서 안되
면 당겨 보는 게 아니라, 아예 확 밀어서 자빠뜨리겠다 이 소린가……?
어맛! 요즘 드문 완전 상남자! 홀딱 반해버렷!
그러나 하마터면 반할 뻔 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나 보다. 여자들
쪽은 하나같이 반응이 밋밋하다.
“……참 나, 요컨대 초콜릿을 받을 수 있게 어필하고 싶다 이거지?”
아무도 반응이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내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자 토베가 손가락을 척 향해 온다.
“그러췌! 뭐, 까놓고 말하면 대충 그런 느낌이랄까?”
그 말에 잇시키가 우웩 하고 표정을 찡그린다.

66
円陣だけにエンジンかけていきましょうとか言い出さないよね(엔진이니까 시동 걸고 가 보자고
같은 말장난은 치지 마라). 円陣(엔진, 원진)과 エンジン(엔진)의 말장난.

67
味ごのみのCMじゃないんだから. 과자 ‘아지노고미(味ごのみ)’의 CM ‘なんかない なんかない
お母さん(엄마, 뭐 없어?)’로 시작.
“누구를 노리시는진 모르겠지만요, 그거 무조건 역효과일 거라 봐요.
초콜릿 구걸하는 어필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쫙 돋는다고요. 그
냥 가만히 계세요.”
“으, 으응……”
가차없구나, 이로하스……. 아무리 토베라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는지,
누구 편 들어줄 사람 없나 하고 좌중을 한 바퀴 쭉 둘러본다.
그러자 그 기대에 유키노시타가 부응해 주려는 모양이다. 뺨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을 입 밖으
로 꺼낸다.
“하지만, 잇시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귀찮은 존재가 늘 시야
한구석에서 촐랑거리고 있는 것도 짜증스러운 일이니까……”
“…………”
일말의 희망까지 철저하게 박살을 내 놓자, 아무리 토베라도 결국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근데 왜 이로하스는 “그쵸~?” 하고 유키노시타
양한테 어깨를 비비면서 애교를 떨고 계시는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역시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불쌍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유이가하마가 우웅 하고 앓는 소릴 낸다.
“어, 웅~……. 그치만 말야, 막 전혀 안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러
면, 주려던 사람도 어떡하지 하구 살짝 망설여질지도 모르구…….”
“그지!?”
그 말에 단번에 기력을 도로 되찾은 토베가 손가락을 딱 튕긴다. 하
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잇시키가 엄격한 목소리로 일침을 가한다.
“아뇨아뇨. 유이 선배 말씀은 원래 줄 생각이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
애기니까요, 토베 선배 상황하고는 전혀 다르다구요.”
“그지~……”
절대 아니라는 양 손을 붕붕 가로저으며 강조해 말하자, 역시 토베도
다시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따져 본다면 가능성이 아예 전무한 것까진 아닐 수도
있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에비나 양이 이런 자리에
등장해서 수제 초콜릿을 만들려 한다는 그 시점에서 예전과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히 그냥 미우라를 따라왔을 뿐일지
도 모르는 일이니, 진짜 속내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애매모호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이벤트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본다.
“뭐, 열심히 만들다 보면 분위기 상 한 입 정도는 시식해 보라고 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부터 저쪽에다 좀
가져다 놔.”
그렇게 말하며 남은 박스를 토베에게 떠넘긴다. 토베는 처음에는 얼
떨떨한 표정으로 멍청히 있었지만, 이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의도
를 깨달은 듯 손뼉을 짝 친다.
“그지! 바로 그거지!”
토베는 후련해진 표정으로 나를 척 가리키더니, 박스를 어깨에 짊어
지고는 에비나 양 일행이 있는 조리대로 후다닥 걸음을 옮긴다. 참 나,
리액션 하나하나가 다 짜증나는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좋은 녀석이지
만.
근데 토베 저놈은 도대체 출신이 어딜까…….68 말이 와 저 꼬라지고?

× × ×

그 후로도 요리 이벤트 준비는 계속 진행되었고, 시간도 슬슬 정각에

68
원문에서의 토베의 말투는 속어 및 방언 같은 부분이 많음.
가까워져 간다.
잇시키와 유키노시타, 덤으로 유이가하마는 뭘 만들지 함께 의논하고
있다. 나도 딱히 참견할 부분은 없지만, 딱히 할 것도 없다 보니 그
자리에서 멍하니 대화하는 걸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의하는 목소리 너머로, 문 밖에서 다소 소란스럽게 시끌
시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뜻 시계를 바라보자 슬슬 다른 사람
들도 도착할 만한 시간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카와 어쩌고 양…… 치고는 목소리의 숫자가
꽤 많다. 아니면 내가 모르고 있을 뿐 다른 카와 어쩌고 양이 여러 명
존재하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못 외우는 것도 왠지 납득이
가는구만…….
자, 그럼 어떤 카와 어쩌고 양이 찾아왔을까, 카와시마(川島)? 카와구
치(川口)? 카와고에(川越)?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센다이(川内)? 69 센다
이(仙台)…… 어떤 카와 어쩌고 양이 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끔 만반
의 준비를 갖추고 조리실 문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리고 문이 드르륵 열린다.
거기에 등장한 건, 타마 어쩌고 씨였다.
“안녕, 이로하. 이야~ 참 나이스 타이밍이야. 역시 저번 이벤트는 평
판이 꽤 좋았거든. 앞으로도 함께 긴밀한 파트너십을 쌓아 가며 얼라
이언스 활동을 계속 하고 싶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이번 오퍼가 들어
왔지 뭐야.”
“그러게요~ 고생 많으셨어요~”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은 전혀 아랑곳없이 몽땅 한 귀로 흘려들은 채,
잇시키가 짧은 말로 받아넘긴다.

69
말장난. 동일한 한자로 카와우치로도 읽힘.
카이힌 종합고등학교 학생회장, 타마나와……. 초장부터 냅다 날리는
그 잽은 여전히 건재한 모양이로군……. 고속으로 에어 도자기를 빚어
대는 그 황금의 왼팔만 있다면 세계 제패도 꿈이 아닐 거 같다는 생
각이 든답니다.
거기에 타마나와만 아니라 그 동료들까지 출현한다. 아마 저쪽 학생
회 멤버들일 텐데, 크리스마스 합동 이벤트 때에도 봤던 인간들이 조
리실 안으로 속속 들어온다. 성질 박박 긁던 머리핀하고 속을 뒤집어
놓던 카디건 목도리,70 솔솔 기억이 나는구만.
“이런 기회는 비즈니스 찬스이기도 하지. 클라우드 펀딩으로 자금을
모아 전개해 나가는 스킴(scheme)도 괜찮을지도 몰라.”
“그거, 나도 어그리(agree)야.”
“인센티브를 환원해 가는 메소드를 구축할 수 있다면 얼리 어댑터들
에게 필이 딱 꽂힐 수도 있어.”
“미국에서는 프리 마켓에서 아이들이 레모네이드를 팔면서 경제 감
각을 키운다는데, 그거랑 니어리(nearly)려나?”
“그렇지, 그것도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야.”
저 인간들의 대화 문맥 속에서는 한낱 레모네이드조차도 뭔가 의식
수준 높아 보이는 단어처럼 들리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쟤네들이 얘기하면 스프라이트 71 나 밀크 커피 72 같은 것도 뭔가 의식
깨나 있어 보이는 단어로 변신하지 않을까?
“여전히 뭐라는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네……”
무심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유키노시타가 휴우 하고 짧은 한숨

70
プロデューサー巻き. 카디건 따위를 어깨에 두르고 양 소매를 가슴 앞에서 묶는 패션.

71
ライフガード(라이프가드). 청량음료.

72
がぶ飲みミルクコーヒー(가부노미 밀크 커피).
을 흘린다.
“너는 의식 수준이 낮은가 보구나. 동공도 풀려 있고, 입술도 보랏빛
이고, 말을 걸어도 반응이 밋밋하고……”
“그건 의식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의식을 상실한 거 아니냐?”
근데 그 정도면 사실상 그냥 시체 아닙니까……? 그건 그렇고 저 인
간들도 변한 게 없구만……. 뭐, 사람은 그리 간단히 변하지 않는 법이
다. 오히려 한두 번 실패한다고 바로 굴할 인간들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상황이 꼬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초지일관 자기의 스탠스를 관철
하고 있는 거라고 해석한다면 은근히 마음에 들기도 한다.
음음, 부디 타마나와와 친구들은 평생 그 모습 그대로 있어 주기 바
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무리 뒤쪽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
나온다.
“아, 히키가야네? 역시 올 줄 알았다니까~”
“오, 오오.”
변함없이 거리감 따위는 싹 무시한 가벼운 분위기로 말을 걸어오는
건 오리모토 카오리였다. 그대로 카이힌 종합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
더니 내 근처까지 총총 다가온다.
거기서 오리모토의 시선이 내 뒤쪽을 향한다.
“아, 반가워.”
“바, 반가워……”
오리모토가 고개만 움직여 간단히 인사하자, 약간 당황한 분위기로
유이가하마도 인사로 답한다. 유키노시타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가벼운 목례로 대답할 뿐이다.
이 묘하게 싸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그러고 보면 이 세 사람, 딱히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도 없이 그냥 서
로의 존재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그런 상황이로군. 딱히 친하게 지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제발 이상하게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것만
큼은 참아 줬으면 좋겠다.
이로하스~ 도와줘, 이로하스~ 하고 비교적 오리모토하고 대화도 통
하고, 표면상으로는 그럭저럭 무난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잇시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 보지만, 거기에 돌아오
는 것은 헛기침 소리뿐이다.
으음, 허험 하는 약간 낮은 점잖은 분위기의 헛기침. 잇시키 치고는
영 귀엽지가 않네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타마나와였다. 오리모
토가 말을 건네는 바람에 내 존재를 알아차린 건지, 타마나와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너희도 와 있었어……?”
“아~ 얘기 안 드렸던가요?”
잇시키는 윤기 있는 입술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붙이고 고개를 갸웃
한다. 저거 아주 대놓고 시치미 떼고 있구만…….
“으, 으음…… 글쎄. 메일 베이스 대화 로그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잇시키는 끙끙 앓는 타마나와는 내버려 둔 채 내 쪽을 쳐다보더니
장난스럽게 혀를 빼꼼 내민다. 뭐냐 그거? 귀엽게시리.
잇시키의 훌륭한 시치미 떼기 스킬에 더 이상 따지기를 포기한 건지,
타마나와는 어~ 음~ 어~ 음머~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조리실 끝,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떠나간다. 다른 카이힌 종합고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럼 나중에 봐~”
오리모토도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그 무리에
섞여서 떠난다.
그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던 잇시키에게 슬그
머니 말을 건다.
“야, 쟤네는 여기 왜 왔냐……?”
“합동이라는 명목으로 카이힌 쪽 예산도 끌어오면 최고잖아요! 저도
의리 초콜릿에 쓸 돈도 굳히고, 일석이조라고나 할까요~?”
“으, 으응……”
과연 잇시키 이로하…….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구나……. 얘 진짜
언젠가 정말로 칼빵 한 번 제대로 맞는 거 아닐까, 저대로 괜찮을까
걱정된 나머지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잇시키도 조금은 멋쩍었나
본지 뺨을 살짝 붉히고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다.
“게다가 참가비는 일단 받아 뒀으니까요, 예산 면에서 보면 이벤트
자체는 흑자예요. 뭐, 경비를 제외하면 제로섬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쌤쌤이지만요.”
“왠지 이젠 이로하까지 무슨 얘기 하는지 한 개두 못 알아듣겠어……”
유이가하마가 우웃 하고 머리를 싸맨다.
뭐, 의식 높은 양반들하고 비즈니스 용어는 겹치는 부분이 제법 있으
니까……. 참고로 말하자면 제로섬하고 플러스마이너스 제로하고 쌤쌤,
그거 다 똑같은 말이야!
하지만 잇시키도 학생회 예산을 끌어오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였
을 것이다. 아마 포스터 같은 걸 만든 것도 활동 실적에 올리기 위해
서겠지. 현물이 있으면 소득공제73 받을 때도 편리하니까! 요 녀석, 장
사 감각이 아주 몸에 배었구만. 합리적이고 저렴한 참가비! 불타는 상
혼! SHOW BY ROCK퓨루!74
다른 학교를 끌어들임으로써 예산은 대폭 증가. 참가비도 걷으니까

73
確定申告. 확정신고의 개념이 우리와는 다른 듯.

74
商売ロックぴゅる! 商売(쇼바이)와 게임/애니메이션 ‘SHOW BY ROCK!!’의 말장난. ‘퓨루’는 등
장 캐릭터 모아(モア)의 말버릇으로, 성우는 사쿠라 아야네. 성우장난.
이윤 상승. 마치 퀴즈 더비75 같은 방식으로 획득 예산이 늘어나고 있
다.
아니, 잇시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학생회의 사유화나 횡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거 같지만……. 학생회의 지갑 관
리 같은 건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그냥 눈 감고 넘어가기로 하자. 무
엇보다도 “딱히 내 돈도 아닌데 뭔 상관이람” 하는 사축 마인드가 내
안에 뿌리박혀 있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말만 듣고 있어도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지만 실제 이벤트는 이렇
게 잘 진행되고 있으니, 잇시키의 시도 자체는 아주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나만 머리가 지끈지끈한 건 아니었는지, 유키노시타도 관자놀이에 손
을 얹은 채 휴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사고방식의 옳고 그름은 차치해 둔다면…… 생각 외로 우수하구
나, 잇시키……”
“그럼그럼. 잇시키, 제법 야무지다구~? 살짝 기복은 있지만.”
“아~ 그거 왠지 알 거 같기두……”
그 포근한 목소리에 유이가하마가 쓴웃음을 흘린다. 그러게, 진짜 틀
린 말이 없다.
……포근한 목소리?
유키노시타와도 유이가하마와도 잇시키와도 다른, 어딘가 스르르 눈
이 감기는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휙 돌아본
다.
머리핀으로 고정된 앞머리, 반들반들한 이마. 땋아 내린 머리가 살랑
흔들리자 포근한 분위기가 주위를 두둥실 물들인다. 그리고 메구☆링

75
クイズダービー. 과거 TBS의 퀴즈 프로그램. さらに倍, 倍率ドン 등의 유행어를 남김.
하게 방실방실 웃는 그 미소.
“앗! 시로메구리 선배!”
“아, 안녕하세요……”
유이가하마의 놀란 목소리와 유키노시타의 당혹스러움 섞인 인사가
한데 겹친다. 둘 다 눈만 깜빡거리며 바라본다.
“응! 안녕~”
전임 학생회장인 시로메구리 메구리 선배는 아담한 가슴 앞으로 손
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로 대답해 온다.
“저기, 여긴 웬일이신지……”
갑작스러운 등장에 잠시 메구링 효과(주된 효능은 힐링과 릴렉세이
션, 누님 속성의 부여 등)에 취해 있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
렇게 물어본다. 그러자 메구리 선배는 손뼉을 퐁 치며 살짝 고개를 갸
웃하더니, 즐거운 분위기로 입을 열어 말한다.
“행사한다고 부르길래…… 한번 와 봤어!”
에헷 하고 웃음을 짓자 포근한 공기가 사르르 흘러나오며 메구메구
메구링☆메구리시 효과(주된 효능은 리저렉션과 디톡스, 누님 속성의
부여 및 때때로 보이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천진난만한 몸짓의 추가
효과를 얻는다. 상대는 사망76)가 시전된다.
그 폭신폭신한 말투 그대로 메구리 선배는 한 걸음 앞으로 스르르
나와 잇시키의 손을 꼬옥 잡는다.
“직접 초대받고 온 거야~. 나, 졸업식 답사 맡게 됐거든, 그래서 학
교에 왔다가 잇시키하고 만났는데 괜찮으면 한번 들러 달라 그러더라
구.”
호오, 잇시키 본인이 초청한 거였나. 메구리 선배한테는 꽤 약해 보

76
相手は死ぬ. ‘이터널 포스 블리자드(エターナルフォースブリザード)’.
이던데…… 그런 생각에 잇시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잇시키는 고개
를 홱 돌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종알거린다.
“……뭐, 어느 정도 사람이 많을수록 단가도 내려가니깐요.”
거의 입만 뻐끔거리는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그 말은 딱히 메구리 선
배 귀에는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본인은 잇시키에게 초대받
았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는지 잇시키의 손을 꼭 잡고 앞뒤로 붕붕 흔
들었고, 그때마다 잇시키가 곤혹스러운 분위기로 몸을 비비 꼰다.
“나, 추천 입학 결정돼서 시간 많거든~. 근데 친구들은 다들 시험 때
문에 바쁘고……. 그래서 시간 있는 멤버들만 데리고 이렇게 와 봤어.”
“하아, 그러셨나요……”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위화감을 깨닫는다. 멤버? 77 웬 멤버? 말이
이상한데……. 용의자라고 해야 될 부분에 모종의 압력이 걸리는 바람
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가? 무슨 뜻인가 싶어 메구리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자, 메구리 선배는 몸을 빙글 돌려 뒤쪽을 향한다.
“그치?”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슈슉 하고 학생 몇 명이 그 자리에 출
현한다. 뭐야 이거? 닌닌, NINJA?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어 보자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얼굴들이다. 그 뭐냐, 안경이라든가, 안경 같은
뭐 그런 분위기의 전임 안경 학생회 임원들 같다.
역시 후임 학생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많았을 것이다. 잇시키가 학
생회장이 된 경위도 경위고, 무엇보다도 메구리 선배에게 학생회라는
곳은 특별한 장소니까.
이윽고 메구리 선배는 잇시키에게서 손을 놓고, 이번에는 그 손을 살

77
メンバー(멤버). 일본에서는 ‘용의자’를 대신해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여기서는 ‘이나가키 고로
멤버’가 소스인 듯. 외부 압력 때문에 용의자 대신 멤버라는 말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음.
며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의 어깨에 얹는다. 그리고 조금 그리운
분위기로 우리의 얼굴을 바라본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은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또 학생회 일
에 얼굴도 비추고, 유키노시타랑 유이가하마랑, ……히키가야하고도 얘
기할 수 있는 건 정말 기뻐.”
“아…… 저두 그래요!”
유이가하마도 메구링 효과에 빠졌는지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대
답하였고, 유키노시타도 딱히 대답은 없었지만 약간 고개를 숙이고 귀
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봉사부 입장에서 알고 지내는 선배라고는 메구리
선배밖에 없다.
……이런, 졸업식에서 메구리 선배가 답사를 읽는 모습을 봤다가는 나,
진짜 울컥할 것 같다. 심지어 당장 지금도 눈물이 찔끔찔끔 고이고 있
을 정도다. 연하 상대로 격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저입니다만, 실은 연상의 누님에게도 평범하게 약하답니다.
이런 사람이 내 선배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포근한 기분을 누리고
있는데, 메구리 선배는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음 하고 고개를 끄
덕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마치 기합이라도 넣으려는 것처럼 메구리 선배가 주먹을
꼭 쥐어 보인다.
“좋았어,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 보자! 아자아자 파이팅!”
힘차게 주먹을 치켜들며 외치는 그 소리에 아무도 반응이 없다. 잇시
키 역시 방금 전의 그 대견한 태도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정색한 눈
초리로 메구리 선배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나 그런 냉랭한 시선 따윈 아랑곳없이, 메구리 선배는 마이 페이
스를 유지한 채 다시 한 번 주먹을 번쩍 치켜든다.
“아자아자 파이팅!”
“……파, 파이팅~”
저 멘트에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으면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계속
들어야 된다……. 무엇보다도 메구리 선배 뒤에 늘어서 있는 학생회 임
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압력이 장난이 아니다……. 분위기에 맞춰 냥
냥 펀치를 날리는 고양이 수준으로 슬그머니 손을 살짝 들어 보인다.
우리의 리액션을 보고 메구리 선배는 휴우~ 하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흘린다.
그리고는 벽시계 쪽으로 시선을 힐끔 돌린다. 나도 덩달아 시계를 쳐
다본다. 사람들도 점점 모이기 시작하고, 재료 및 조리 기구 준비도
끝났다. 카와사키 쪽도 다소 늦고는 있지만 곧 도착할 것이다.
이제 슬슬 시작될 시간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흐음 하고 메구리
선배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루 선배가 조금 늦네?”
“그러게요. 장소야 척 보면 바로 아실 텐데요~”
잇시키가 메구리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그러나 나는 고개
하나 까딱거리지 못할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심히
불안해지는 단어가 귀에 들어온 탓이다.
하루 선배. 딱히 온천 여관에 근무하는 종업원하고는 관련 없는 단어
다.78 메구리 선배가 그렇게 부르는 인물은 오직 한 명뿐이다.
시선을 옆으로 힐끗 돌리자 유키노시타도 조용히 눈살을 찌푸린다.
유이가하마도 대충 상황을 파악하였는지 문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윽고.
덜거덕 하는 아귀가 안 맞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움직이고, 가늘

78
만화, 드라마 ‘はるちゃん(하루 짱)’ 이야기인 듯. 온천 마을을 무대로 하는 내용이라고.
고 나긋나긋한 손가락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거기에 영차 하
고 힘이 들어가자 그제서야 문이 드르륵 열린다.
이어서 그녀가 신은 힐이 또각 하는 소리를 낸다. 천천히, 한발 한발
뚜렷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리들 앞에 선다.
“햣하로~! 미안~ 많이 늦었지?”
“그런고로, 오늘의 특별 강사 하루 선배님을 모시겠습니다~!”
“반가워요~ 하루 선배님이랍니다.”
잇시키가 깜찍 발랄하게 애교를 떠는 목소리로 말하자, 거기에 편승
하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답한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진홍
빛 코트를 사뿐히 나부끼며 가볍게 손을 척 들어 보인다.
“아~ 하루 선배. 오랜만이에요.”
“……메구리, 얼마 전에도 한 번 봤잖아~?”
쪼르르 다가온 메구리 선배의 이마를 콕 찌르며, 하루노가 어이없다
는 투로 말한다.
“하루 선배가 만드는 과자는 참 맛있으니까 많이 기대돼~”
“뭐, 일단 부탁받은 거니까 만들어 주겠지만 말이야~. 상냥한 선배는
후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법이거든~”
딱히 상냥하다기보다는 사냥한다는 79 말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게, 어
째 괜히 더 살벌하게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인사 겸 잡담을 몇 마디 나눈다.
그 틈에 잇시키에게 까딱까딱 손짓을 보내며 작은 소리로 슬쩍 말을
건넨다.
“야, 저 양반은 왜 불렀는데?”

79
優しいというより、ヤシャシーン! ‘優しい(야사시이)’와 ‘ヤシャシーン(야샤신)’의 말장난. 야샤
신!이란 ‘아르슬란 전기(アルスラーン戦記)’에 등장하는 ‘돌격!’을 의미하는 말인 듯.
“그야 딱 봐도 백전노장 같은 느낌이잖아요~?”
내 물음에 잇시키는 아리송한 분위기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마치 당
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한다. 그래, 그 판단 자체는 훌륭하게 들어맞긴
한다. 백전노장은 물론이고 백전백승, 아예 공포최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유키노시타는 가만히 팔꿈치를 어루만지며 맞은편에 있는 하루노에
게서 시선을 돌린다.
“뭐, 가르치는 건 몰라도 네 요리가 끝내주게 맛있는 건 사실이지.”
“…….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유키노시타에게는 뜻밖의 칭찬이었는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그렇게 답한다. 아니, 딱히 칭찬하려고 한 말
아니거든? 가르치는 게 쥐약이라고 까려고 그랬을 뿐이다.
“그래두, 나 유키농한테 배우는 거 엄청 기대돼!”
유이가하마가 와락 달려들자, 유키노시타도 다소 힐링이 되었는지 쑥
스러운 분위기로 헛기침을 한다. ……뭐, 유키노시타 외에도 강의해 줄
사람이 있다면 유이가하마에게 할애할 분량도 늘어날 테니까 딱히 나
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하루노를 불렀는지는 신경이 쓰이게 된다.
애초에 이벤트 참가 인원을 생각해 보면 딱히 배울 사람이 아주 많
은 것도 아니거니와, 잇시키 본인도 자기 입으로 실력에 자신이 있다
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그 외에도 과자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여
자들은 여럿 있을 것이다.
“딱히 저분까지는 안 불러도 되는 거 아냐? 유키노시타도 웬만한 사
람들보다는 훨씬 잘 한다고.”
은근슬쩍 잇시키에게 왜 굳이 하루노를 불렀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뭐, 사실 저도요, 유키노시타 선배는 요리 진짜 잘 하실 거라고 봐
요. 그래서 부탁도 드렸고요.”
하지만 잇시키는 거기서 말을 끊더니, 어색한 분위기로 시선을 피한
다.
“근데요, 그게…… 남자들한테 먹힐지 살짝 애매하지 않나 싶어서요.”
“탁월한 선택이네……”
실제로 유키노시타는 요리에는 능숙하지만 서비스 정신이 결여됐달
까, 서비스 신이 결여됐다고나 할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슴 쪽에
서비스 정신이 결여돼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유이가하마는 서비스
하나는 훌륭하지만, 기본기가 괴멸적이다 보니……. 어쨌든 견실하고
충실하게 정석적으로 과자를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 잇시키 말마따나
남자들에게 먹힐 만한, 다시 말해 소녀다운 면을 어필하기 위한 과자
를 만들기에는 확실히 약간 불안한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남녀 불문, 사람의 마음을
틀어쥔다. 아니, 쥐어서 으스러뜨린다. 내가 아는 한 그녀 이상으로 누
군가의 마음의 틈을 꿰뚫어 보는 데 능수능란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유키노시타를 능가하는 기본 스펙의 소유자다. 분명 과자를
만들 때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일 것이다. 너무 맛있는 나머지 인간은 물론이고 요정까지 길들여
버리는 거 아닐까예요?80
그런 식으로 농담이라도 한 마디 섞지 않으면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그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며, 동시에 유의미하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도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일 게 분명하다.

80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의 요정 이야기인 듯.
겨우 후배에게 부탁받았으니까 같은 단순한 이유만으로 왔을 리가 없
다.
언제나 그랬다.
그 사람은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다.
자기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드러내지 않는데.
5. 문득, 히라츠카 시즈카는 현재진행형과 과거형에 대해 논한다.
(pp.141-190)

이벤트는 딱히 별다른 문제 없이, 눈에 띄는 특별한 연출도 없이 천


천히 진행돼 간다.
이벤트 개시 예정 시각에 접어들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그럼, 시작해 볼까요?” 같은 분위기가 된다. 거기에
맞추어 잇시키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어서 각자 달각달각 조리에
들어간다.
나는 초콜릿을 만들지 않다 보니 딱히 할 일이 없다. 굳이 말한다면
서포트 및 서비스, 어시스트, 헬프가 주된 업무이기는 하지만, 간단히
말해 그냥 무직이다.
그런 나와는 대조적으로 유키노시타는 곧바로 업무를 척척 처리해
나간다.
눈앞의 조리대에서는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그리고 미우라 셋이
서 초콜릿과 조리 기구를 앞에 두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선은 초콜릿을 썰고 중탕해야겠구나. 무엇을 만드냐에 따라 정도
는 다를 수 있지만, 이 과정은 꼭 거칠 필요가 있어.”
“그게 다야?”
“……뭐, 기본적으로는 그래. 물론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겠지만.”
김빠진 분위기로 미우라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유키노시타는 식칼
로 리드미컬하게 깨진 초콜릿을 가늘게 똑똑 썰어 보인다. 그 물 흐르
듯 거침없는 손놀림에 유이가하마가 오~ 하고 감탄사를 흘린다. 아니,
아직 감탄하기에는 좀 이른 거 같은데…….
거기에 미우라도 보고 배운 대로 유키노시타를 따라한다. 식칼이 별
로 익숙지 않은지 벌벌 떠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통통 소리와 함께
초콜릿이 분쇄돼 간다. 참고로 유이가하마는 아직 식칼을 손에 쥐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초콜릿이 대략 다 썰리자 미우라가 고개를 든다. 어딘가 흡족해 보이
는 표정이다. 아뇨, 아직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는뎁쇼…….
하지만 미우라 입장에서는 제법 보람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흐응~……. 너무 쉬운 거 아냐?”
훗 하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나 어때? 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돌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일침을 가한다.
“방심하지 마, 유미코!”
“너무 만만하게 보는구나.”
유이가하마는 버럭 하는 분위기로, 유키노시타는 냉소를 지으며 그렇
게 말했다. 그럼에도 지금 하는 작업이 생각한 것보다 무척 쉽다는 이
미지에는 변화가 없는지, 미우라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 어디 힘든 거라도 있어?”
그 말에 유이가하마가 흐흥 하고 자신감 넘치게 가슴을 쫙 편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야! 중탕은 막 물속에 집어넣고 그러는 거 아니
라구? 뭔가 확~ 하구 막 확~ 하구 그래야 돼.”
아마 유이가하마가 말하는 건 녹인 초콜릿을 젓는 교반 과정이나 온
도를 조절하는 템퍼링이겠지만, 일단 초콜릿 말고 님부터 템퍼링 좀
해야 할듯?81 중탕 한번 당해 볼래?
반면 유키노시타 쪽은 유이가하마의 말에 약간 두통이라도 느끼는
모양새였으나, 이내 조용히 관자놀이에 손을 얹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

81
現在進行形でテンパりながら言ってるのに掛けてたりします? ‘템퍼링’과 ‘텐파루(テンパる, 허둥
거리다)’의 말장난.
로 입을 연다.
“한 번 녹은 초콜릿을 그대로 굳히면 지방분이 하얗게 일어나서 보
기에 안 좋고, 식감에도 영향이 생겨. 게다가 다음에 이어질 작업 과
정에서도 불필요한 수고가 들게 돼.”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의 발언 수준의 차이가 정말 극과 극이로군…….
거의 현금술사와 무료충82 수준의 격차가 아닐까.
아무튼 유이가하마와의 기세와 유키노시타의 이론. 아무래도 두 사람
의 협공에는 당할 수가 없었는지 미우라도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다.
“흐응~. ……그래서, 다음은?”
말투 자체는 평상시의 미우라였지만, 그 태도는 제법 갸륵하다. 적어
도 가르침을 구하는 태도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 미우라
의 모습에 유키노시타가 작게 미소를 짓는다.
“일단 중탕하고 템퍼링이겠지.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만드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겠지만……. 글쎄, 오늘은 사람도 많
으니 가토 쇼콜라 쪽으로 해 보는 건 어떠니?”
“가토 쇼콜라! 그거 빵집 아니라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은데……. 나는 비터 초콜릿을 쓰지만, 미우
라와 유이가하마는 취향대로 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유이가하마, 그리고
흐응~ 제법인데?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미우라.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키노시타는 쓴웃음을 짓는다.
뭐, 유이가하마 쪽은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유키노시타가 붙어 있
다면 대참사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옆에 있

82
詫び石ユーザー. ‘퍼즐 앤 드래곤’, 문제 발생 시 지급하는 마법석(詫び石)만 쓰는 무과금 유저.
는 다른 조리대로 눈길을 돌리자, 마이 페이스로 꾸준히 과자를 만들
어 가는 잇시키 이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략적으로 보건대 잇시키의 조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초콜릿 중탕은 끝났는지 볼 안에 든 초콜릿은 매끄러운 광택을
발하고 있고, 다른 볼에는 거품을 낸 머랭이 폭신폭신하게 담겨 있다.
그 훌륭한 솜씨만 보더라도 이런 걸 만드는 데 익숙하다는 사실을 충
분히 실감할 수 있다.
잇시키는 계속해서 볼에 양주 비슷한 걸 한 스푼 붓고는 한 차례 섞
는다. 그런 다음 스푼으로 조금 떠서는 입에 쏙 넣어 맛을 본다.
그렇게 잠시 스푼을 그대로 오물오물 입에 물고 있었지만, 이내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잇시키는 다
시 설탕과 생크림, 코코아 파우더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넣기 시작한
다.
“너 진짜로 요리 잘 하나 보네……”
딱히 의외랄 것까진 아니지만, 꽤나 잘 만들고 있는 모습에 놀란 나
머지 무심코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잇시키는 반쯤 감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선배님, 설마 제가 했던 말 의심했던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대단하다 싶었을 뿐이야. 제법 열심
히 하길래.”
하야마에게 초콜릿 하나를 먹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중
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 한결같은 마음이 제법 마음에 든다. ……뭐, 의
리 초콜릿에 들어갈 돈을 굳히기 위해서 같은 흑심도 은근슬쩍 보이
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복에 에이프런이라는 코스튬의 효과도 한몫하
였는지 그런 속셈조차도 전부 가슴이 훈훈해지는 노력으로 변환돼서
보이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당장 외쳐 보자. 알몸 에이프런보다
교복 에이프런이 훨씬 쩔어! 물론 제일 쩌는 건 민소매 숏팬츠에 에
이프런을 입은 코마치지만 말이지요.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잇시키는 눈을 깜빡거리며 얼
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나하고 거리
를 쭉 벌린다.
“뭐예요 지금 저 꼬시는 건가요 달콤한 초콜릿처럼 달콤한 말로 속
삭이시면 먹히지 않을까 생각하시다니 생각이 너무 달달하시네요 좀
더 잘 생각해 보시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 주세요 죄송해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장렬하게 차이고 말았다. 꼬
시는 것도 아니고, 다시 얘기도 안 할거거든……?
정말 언제 봐도 잇시키 이로하는 변함이 없다. 아니, 그 여우 같은
행동이나 굳건한 멘탈은 오히려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 대단하
구나 싶어 황당 반 감탄 반으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던 그 순간,
입가를 향해 스푼이 쑥 전진해 온다.
“에잇!”
잇시키의 목소리와 함께 스푼이 살짝 뺨을 스치고 입에 쏙 들어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나머지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데, 그 명
멸하는 시야 가운데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잇시키가 눈에 들어온다.
“선배님, 이런 달달한 건 싫어하세요?”
스푼을 요리조리 흔들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잇시키는 올려다보는 시
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장난치는 걸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의기양
양해 하는 입가의 미소와, 소녀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도발적이고 자신
감 넘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언밸런스했고, 그렇기에 반칙이란 생각
이 들 만큼 매력적으로 보였다.
“……싫지는 않지만.”
분명 당분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혀가 저릴
만큼 달콤하게 느껴진다. 근데 그 숟가락, 아까 쓰던 거 아니냐……?
그런 거 당하면 진짜로 심장에 안 좋으니까 제발 자제해 줬으면 좋겠
다…….
피로에는 단 게 좋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정신적 피로에는 역효과인
모양이다. 격하게 밀려드는 피로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토하자, 잇
시키도 마찬가지로 한숨을 흘린다.
“에휴. 딱히 맛이 어떤지 여쭤본 거 아니거든요?”
말투 자체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들렸지만, 힐끔 쳐다보는 그 눈동자
에는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가득하다.
나는 여전히 입 속에 남아 있는 달콤함을 곱씹으며, 잇시키가 말하려
는 바를 몇 번이고 씹어 본다.
“그래도, 대답은 똑같겠지……”
“……그래요?”
잇시키는 무언가 생각하듯이 품 안에 안고 있던 볼을 쳐다보면서 흐
음흐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고개를 척 든다.
“제법 참고가 됐어요. 그럼 잠깐 다녀올게요. 하야마 선배~!”
잇시키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후다닥 달려 나
간다.
그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면서, 뺨에 묻은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닦아
입에 넣어 본다. 초콜릿과 럼주의 향기가 코를 타고 전해진다.
“너무 달구만……”
혼잣말로 다시금 맛에 대한 감상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독백에 섞
여 달각달각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금속 부딪치는 소리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쓸고 지나가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소리 한번 살벌하네 싶어 뒤를 돌아보자, 유키노시타가
볼을 안은 채 내용물을 스푼으로 달각달각 휘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히키가야는 시식 담당이었구나.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길래 깜빡 잊고 있었어. 혹시 괜찮다면 이쪽 것도 감상
을 들려줄 수 있겠니?”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가 스푼을 한 바퀴 빙글 돌려 손잡이를 내
쪽으로 내민다. 내밀어 온 스푼에는 새까만 초콜릿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그거 카카오 90% 넘어가지 않냐? 딱 봐도 무진장 쓰겠구만……”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틀림없이 설탕도 생크림도 하나도 안
들어간, 기껏해야 무염 버터나 조금 들어가 있는 물건이라 확신한다.
번쩍번쩍한 검은 광택이 흐르는 게 생긴 것도 향기도 카카오 그 자체.
그러나 유키노시타는 차가운 시선을 이쪽으로 고정시킨 채 전혀 물
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한 발짝 더 다가오더니 말없이 스
푼을 내밀어 온다. 당연히 그딴 스푼을 곱게 받아 줄 턱이 없으므로
서로 눈싸움만 벌이고 있는데, 그 사이로 유이가하마가 끼어든다.
“아, 이거! 이건 어때!?”
그렇게 말하며 볼째 내밀어 온 것은 갈색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액체
였다. 이미 초콜릿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수준으로, 초콜릿 소스라고
부르기에도 점도가 영 부족한 게 그냥 네스퀵83이라 그래도 믿을 만한
수준의 액체 그 자체다.
코 앞에 척 들이민 그 볼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아마 힛키는 이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도지만……”
에헤헤~ 어때~? 하고 웃으며 내밀어 온 볼 안을 다시 살펴보자 묘
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숨막히는 달콤함 속에 은은히 감도는 커피 향
기. 하얀 빛을 띤 갈색 액체에 높은 당도가 느껴지는 거품까지……. 살
짝 MAX 커피 같은 느낌인데…….
그러나 제작자가 유이가하마다. 절대 겉보기 그대로의 맛이 나올 리
가 없지……. 이 아이, 미각 테러리스트니까. 근데 오늘 초콜릿 만드는
거 아니었냐?
한 쪽은 안 먹어 봐도 쓴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암흑물질. 한 쪽은
무슨 맛일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암흑물질. 달콤하고 쌉쌀하고 현
기증이 날 지경이랍니다…….84

83
ヴァンホーテンミルクココア(반호텐 밀크 코코아). 실제 상품명은 バンホーテンミルクココア.

84
甘くて苦くて目が回りそうです. ‘혈계전선’ ED, ‘シュガーソングとビターステップ(슈가 송과 비터
스텝)’ 가사.
양쪽에서 협공을 해 오는 탓에 뭐라고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자, 잠깐만 좀 기다려 주라, 응?”
한창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조리실 문이 드르르륵 하고 무서
운 기세로 활짝 열린다.
그리고 불쾌한 분위기의 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린다. 그 발소리의 주
인공은 그대로 이쪽으로 접근해 오더니 후우~ 하고 지옥의 밑바닥에
서 몰아치는 바람 같은 한숨을 토한다.
“쳇, 달콤한 공기가 진동을 하는군……”
마치 지독한 독기라도 감지한 것처럼 사나운 말투로 중얼거리는 이
는 물론 그분, 우리들의 귀염둥이 히라츠카 시즈카(독신, 서른 줄)야!
히라츠카 선생님은 죽도록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
만, 아무리 봐도 달콤한 공기 같은 건 안 느껴지는데…….
“저기, 히라츠카 선생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응? 아아, 잇시키에게 보고를 들었으니까. 상황을 한번 보러 왔다.”
당혹스러워하는 유키노시타의 물음에 히라츠카 선생님은 휴우 하고
지친 한숨 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답한다. 그러고는 유키노시타
와 유이가하마가 안고 있는 볼을 힐끗 보더니 큭큭 하고 낮은 웃음소
리를 흘린다.
“말해 두는 걸 깜빡했다만, 학교에서는 초콜릿 반입 금지다.”
“그런 교칙두 있었어요?”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묻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사악한 미
소를 히죽 지어 보인다.
“교칙은 없다. 없지만, 금지다. 학업에 관계 없는 물건은 금지다, 금
지. 내가 뭣 때문에 교무실 내 의리 초콜릿 철폐에 찬성했다고 생각하
나? 귀찮은 건 물론이거니와 학생들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
해서다. 마음과 감정은 장애물이 있어야 새록새록 피어나는 법, 다 생
각이 있어서 그런거다, 생각이.”
이분은 어쩜 저렇게 멋진 미소로 최악인 소릴 떠들 수 있는 거람!
그런 부분 완전 좋아! 그래도 정말로 의리 초콜릿부터 시작되는 러브
스토리도 충분히 가능하다고요! 초콜릿 받아주실 분하고 선생님 받아
주실 분, 둘 다 발 벗고 모집해 드리고 싶네요!
“어차피 당일은 입학 시험 때문에 학교는 쉬지만 말이야.”
히라츠카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훗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
며 “농담이란다” 하고 한 마디 덧붙인다.
그리고는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안고 있는 볼 쪽으로 각각 눈
길을 주더니, 즐거운 분위기로 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뭐, 열심히 해 보도록.”
그 말에 유이가하마는 어~ 그게요~ 하고 당혹스러운 듯 웃었고, 유
키노시타는 고개를 홱 돌린다. 두 사람의 태도에 히라츠카 선생님은
쓴웃음을 짓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 × ×

꼭 히라츠카 선생님 덕분에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고치 않은


방문객의 존재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어 간다. 달콤한 향
기와 함께 조리실 안은 온화한 분위기로 채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한 명. 그 온화한 분위기의 상징 같은 인물이 등장
한다.
그 아이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가지런히 자른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사이즈에 딱 맞는 어린이용 앞치마를 걸
치고 있었다. 언젠가 미녀로 자라날 거라 확신하게끔 하는 그 고운 이
목구비는 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카와사키 케이카. 카와 어쩌고 양의 여동생이다.
어린이집에서 케이카를 데려온 카와사키는 한 손에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카와사키가 여동생의 요리 준비를 척
척 마친 후, 휴우 하는 보람찬 한숨과 함께 기념으로 삼으려는 듯 사
진을 찰칵 찍는다.
앞치마도 본인이 직접 케이카의 사이즈에 맞추어 리폼한 것인지, 아
플리케 장식과 수놓은 이름이 무척 귀엽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난 뒤, 그제서야 자기는 준비가 덜 되었다는 사실
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다.
“저, 저기, 나도 저쪽에서 준비 좀 하고 올까 싶은데……”
내 쪽으로 까딱까딱 손짓을 보내더니, 조심스레 이쪽을 쳐다보며 그
렇게 말한다.
흐음. 굳이 자리를 떠 가면서 해야 될 준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
자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 법이다. 이럴 때 쓸데없이
깊게 물어보면 버럭 화를 낸다는 사실은 코마치를 통해 검증된 바 있
다. 게다가 여기는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고 조리 기구 같은 위험한
물건들도 많은 장소다. 이런 곳에 여동생 혼자 남겨두는 건 걱정스러
운 일이겠지.
“알았어, 내가 봐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그, 그럼……”
내 말에 카와사키는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뚜벅뚜벅 빠른 걸음으
로 조리실을 나선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후 케이카 쪽을 돌아본다.
케이카는 어린이집에 다녀오느라 피곤한 건지, 아니면 방금 전 카와
사키에게 사진을 줄줄이 계속 찍히느라 피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약
간 졸린 듯 눈꺼풀이 무거워 보인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곧바로
입을 열어 말한다.
“하아 오빠다!”
아무래도 저쪽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짤막한 팔을 한껏
뻗어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킨다.
“오~ 그래~. 하아 오빠란다~. 정확하게는 하치만이지만~. 사람한테
함부로 삿대질 하는 거 아니야. 훅 가는 수가 있어~”
엿차 하고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다. 덤으로 나도 손가락을 척
내밀어 케이카의 볼을 몰캉몰캉 콕콕 찔러 준다. 어맛, 부드러워라…….
고속으로 몰캉몰캉 볼을 콕콕 찌르고 있자 케이카는 오옷 오옷 하고
물개처럼 묘한 소리를 내며 당황해한다. ……음, 교육 완료로군. 이제
앞으로는 남에게 함부로 삿대질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족스럽긴 하지만 하도 부드러운 나머지 좀처럼 손가락이 떨어지지
를 않는다. 오우야, 완전 부드럽다 얘……. 코마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아니, 지금도 부드러우려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층 더 몰캉몰캉몰캉 볼을 콕콕 찔러대자 케이카는 한동안 귀찮아하
는 표정을 지었지만, 돌연 오옷 하고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을 바꾼다.
“에잇.”
거침없는 일격이 내 뺨에 뾱 꽂힌다.
“아야……. 아니, 그러니까 삿대질 하지 말래도 그러네. 눈 같은 데 찔
리면 위험하잖냐.”
벌이라도 주듯이 몰캉몰캉 어택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그러자 무
슨 놀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케이카는 꺄하하 웃으며 자기도 대항하
려는 양 내 뺨을 뾱 찔러 되갚아준다. 으, 으음…… 교육 실패인가.
이걸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케이카의 볼을 찌르고 있는데, 등 뒤
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든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엥, 아니, 그냥……”
뒤를 돌아보자 에이프런 차림을 한 카와사키가 눈에 들어온다. 볼과
깨진 초콜릿을 손에 들고 정색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차마 말하기 힘든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연다.
“있잖아, 돌봐주는 건 고마운데, 그런 건, 그……”
“아니, 잠깐만. 오해야.“
썩은 동태눈을 한 위험한 남자가 귀여운 어린 소녀의 볼을 찌르고
있는 상황……. 비주얼만 보면 완전히 범죄 그 자체였다. 지금 여기가
야외였다면 이미 사건이 터지고도 남았을 것이고, 심지어 동네 회람판
에 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어머니께 농담조로 “이거 너
아니니? 오호호호!” 하는 비웃음을 들으며 “으, 으응……” 하고 말문이
막히는 미래까지 눈앞에 훤히 보인다……. 거기에 더하여 카와사키의
“믿었는데……” 같은 시선이 묘하게 따가운 나머지 밀려오는 죄책감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건 그거거든, 그 뭐냐……”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들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보임과 동시에,
뒤이어 입에 올릴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는다. 그러고 있던 중 다리에
무언가 척 달라붙는 게 느껴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케이카가 내 허
리를 꼬옥 안고 있다.
“있잖아~ 하아 오빠랑 같이 놀아 주고 있었어.”
“응, 뭐, 그렇지……”
나는 내가 놀아 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내가 이 꼬마
숙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귀여움과 부드러운
뺨의 감촉에 농락당했다는 의미로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벌써부터 남자를 쥐락펴락하다니, 무서운 아이……!85
하지만 뭐,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언니인 카와사키 사키는 보다시피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인이라
평할 수 있다. 문제는 얼핏 보면 양아치 같다고나 할까, 무슨 일진처
럼 보인다는 점이겠지만. 그러나 여동생을 지켜보는 그 눈길만큼은 위
압감이나 공포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
케이카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카와사키도 경계심을 푼 것처럼 훗 하
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케이카도 마찬가지로 방글방글 웃으며 나에
게 꼭 달라붙은 채 귀엽게 고개를 살짝 갸웃해 보인다.
“사아 언니도 같이 할래?”
“아, 안 해. 케이, 그만 하고 이리로 와.”
카와사키가 내게서 케이카를 떼어 놓고 자기 품에 꼬옥 안는다. 아니,
그렇게까지 경계 안 해도 아무 짓도 안 하거든요? 아무튼 이걸로 사
건 발생→신고→체포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토한다.
그러나 안심하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카와사키는 다소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다. 케이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두리번두리번 조리실 안을 둘
러보고는 입을 연다.
“정말 이렇게 데려와도 괜찮아?”
카와사키가 불안하게 여기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이 자리에 있는 이
들은 대부분이 고등학생. 게다가 다른 학교 사람들까지 섞여 있다 보
니, 그 가운데 케이카가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밖
에 없다. 그렇지만 딱히 공적인 행사도 아닌 건 물론 명확한 규칙 따

85
‘유리가면’.
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각선 앞쪽에 위치한 조리대로 시선을 힐끗 돌린다. 거기에는 메구
리 선배와 즐겁게 잡담을 나누는 하루노의 모습이 있었다. 저 사람이
온 시점부터 이미 참가 자격이네 뭐네 운운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 된
지 오래다.
“뭐, 당연히 괜찮지 않겠어? 이 사람 저 사람 다 왔는데.”
“응……”
내 말에 카와사키도 납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뭐, 애초에
이 이벤트가 열리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카와사키의 상담이기도
하다. 참석하기에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건 미안한 일이지만,
최소한 그녀의 의뢰는 제대로 달성되었다 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한 건 딱히 없지만. 그 의뢰를 달성시켜 준 존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급하게 쪼르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
온다.
“오~ 사키. 안 늦게 잘 왔구나.”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건 유이가하마다. 유키노시타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케이카두 오랜만이야~”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쪼그려 앉아 케이카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 유이가하마도 유키노시타도 크리스마스 이벤트 때 케이카와 만난
적이 있어서 서로 안면이 있다.
유키노시타도 케이카 근처까지는 왔지만, 살짝 들어올린 손을 뻗었다
움츠리기만 거듭한다. 아무래도 쓰다듬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다. 서투르구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한 명 사람 대하는 게 서투른 이가 있
었다.
“저기…… 오늘은, 잘 부탁할게……”
카와사키는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쑥스러운 분위기로
그렇게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그러자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카와사키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케이카가 자세를 가
다듬더니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건지 말투는 어리숙했지만, 무뚝뚝한 언니와는 대
조적으로 붙임성이 느껴지는 그 인사에, 지켜보고 있던 내 얼굴이 느
슨하게 풀어짐을 느낀다. 비단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유이가하
마는 꺄아~ 하고 귀여움에 몸부림쳤고, 카와사키에 이르러서는 여동
생의 성장에 감격하였는지 눈시울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유키노시타 또한 훗 하고 자애로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스커
트 자락을 손으로 누르며 천천히 몸을 웅크리더니, 케이카와 눈높이를
맞추어 천천한 어조로 말을 건다.
“그래. 잘 부탁해. 그럼 어떤 과자를 만들어 볼까?”
그 물음에 케이카는 카와사키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카와사키도 거기
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케이, 어떤 과자 먹고 싶어?”
그 물음에 케이카는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다가 불현듯 입을 열어
말한다.
“장어.”
“오, 오오…… 그래……”
차마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장어구나~.
“미안, 얼마 전에 가족끼리 장어 먹었는데, 그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
나봐.”
카와사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흔히
엉뚱한 소릴 하고 그러곤 하니까, 딱히 깊은 생각 없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던 걸 냉큼 대답한 것뿐이겠지…….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들 헛
수고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째 유키노시타 양은 턱에 손을 얹고 진
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계시네요…….
“그렇다면 장어 파이가 좋을까? 파이 자체는 만들 수 있지만, 장어를
어떻게 손질하느냐에 대해서는 조금 조사할 필요가 있겠구나……”
“호오, 그런 파이도 만들 수 있어?”
“그래.”
자못 당연한 분위기로 유키노시타가 말한다. 얘는 정말 못 만드는 게
없구만. 근데 왜 본인의 특정 부위는 제대로 못 만드는 걸까요…….86
“괜찮다면 한번 시도해 보겠니?”
유키노시타의 물음에 카와사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괘, 괜찮아, 사양할게! 그냥, 얘도 쉽게 만들 만한 그런 거,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렇다면 트뤼플 초콜릿 정도가 좋을까……? 잠깐 재료 좀 더
챙겨 올게.”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는 조리실 앞에 있는 교탁 쪽으로 향한다.
추가 재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 돌보기라도 하고 있을까 싶어 케이
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랬더니 나의 아이 돌보기 업무는 이미 유
이가하마에게 강탈당한 상황이었다.
유이가하마는 자기 스커트가 보일락 말락 하는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쪼그려 앉은 자세로 케이카와 무언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

86
‘パイ(파이)’와 ‘おっぱい(옷파이, 가슴)’의 말장난.
다.
“장어 말이구나~ 나두 알아. 나두 그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어~”
“장어는 있잖아, 맛있어. 밥이 쏙쏙 들어가.”
“그치? 장어 맛있지~”
“맞아, 밥 맛있어.”
“어? 밥……?”
이야기가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지만 둘 다 즐거워 보인다. 단지 유
이가하마 같은 경우는 진짜로 해 볼 거 같아서 걱정스럽다.
그래도 유키노시타와 카와사키가 있는 이상 그런 폭주는 일어나지
않겠지. 시식 담당이라는 내 역할도 지금 당장은 등장할 차례가 없어
보인다.
일이 들어오기 전까지 어딘가에서 또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야겠다.

× × ×

카와사키와 케이카가 유키노시타의 지도 아래 초콜릿 만들기에 들어


감으로 인해 아이 돌보기 업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또 어
엿한 무직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무직 상태로 계속 있을 바에야 어
디 강가에서 돌이나 주워다 팔아 볼까 싶기도 하다. 아니, 그건 『무능
한 사람』87인가?
나와 마찬가지로 시식 담당이라는 명목으로 이 자리에 와 있는 하야
마는 여전히 미우라와 잇시키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다. 그 외에 어떻
게든 시식에 끼어 보려고 애쓰는 중인 토베는 에비나 양 근처에서 이
것저것 시끄럽게 떠들어 보지만, 그때마다 냉담한 반응만 돌아올 따름

87
無能の人. 강변에서 돌을 주워 파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내용의 영화인 듯.
이다.
하루노와 메구리 선배는 히라츠카 선생님과 잡담을 나누고 있다. 신
구 학생회 임원들은 각 조리대에 부족한 건 없는지 돌아다니며 체크
하는 중이고, 부회장과 서기 같은 경우는 때때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일해라, 부회장.
카이힌 종합고등학교 사람들은 타마나와를 중심으로 조리대에서 디
스커션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조리에는 손을 놓고 있는 걸 보
면, 또 그놈의 브레인 스토밍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정말로 나 혼자만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셈이다.
일단은 모두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곳에서 멍하니 구경이나 해
볼까 각을 잡고 있는데, 시야 한구석, 조리실 문이 스르륵 살짝 열린
다.
손잡이 부분에 손을 걸친 그 인물은 조리실 안의 분위기를 가만히
엿보고 있는 모양인지, 몇 센티 가량 벌어진 틈에는 더 이상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누굴까…… 다른 커뮤니티 센터 이용객들이 시끄럽다고 민원 같
은 거라도 넣었나…….
문이 움직인 걸 알아차린 사람은 나밖에 없는 모양이라, 하는 수 없
이 무슨 일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터벅터벅 문 앞까지 도착하기는 했지만, 바로 앞까지 와서 갑자기 망
설여진다.
왠지 묘령의 유부녀라든가 하면 살짝 무서울 것 같은데……. 초장부터
버럭 한 마디 들으면 무지 쫄릴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하나 사축이 누
군가의 분노를 받아주는 건 당연한 일. 아예 남이 호통치는 걸 들어주
는 자체가 업무라고 봐도 된다. 아니 뭐, 어차피 무급이지만. 봉사부는
연중 무급이라구! ……무휴였나?88
각오를 다지고 손잡이로 손을 뻗어 힘껏 연다.
문이 드르륵 열리자, 내가 잘 아는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
부활동을 막 끝내고 온 듯 다소 커 보이는 바람막이에 헐렁한 체육
복. 긴 소맷자락 탓에 손끝만 살짝 드러나 보이는 두 손은 불안한 분
위기로 가슴 앞에서 깍지를 끼고 있다. 본인 나름의 분위기 메이킹 스
킬인지, 살짝 몸을 웅크린 그 자세에 깔깔한 소재로 된 재킷조차 부드
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활짝 펴고 반짝반짝 빛낸다.
“하치만!”
“토, 토츠카……. 와 줬구나.”
“응, 부활동도 하고 오느라 조금 늦어버렸지만.”
문 앞에 있던 이는 나의 급우, 토츠카 사이카였다. 저번에 학교에서
만났을 때 오늘 있는 이벤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
말로 이렇게 찾아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야. 장소를 잘못 찾아온 줄 알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카이힌 종합고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과연, 조그맣게 열린 문틈으로는 그들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음음, 시야가 좁아진 상태에서는 아무래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게
있는 법이지.
예를 들면 지금 토츠카 뒤에서 얼쩡대는 놈의 존재 같은 거.
“하치만~!”
토츠카 뒤에 있던 건 나의…… 나의 뭘까…… 뭐, 체육 시간 같은 조라
고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체육 시간 같은 조, 자이모쿠자 요시테루다.

88
むきゅう. ‘무급(無給, 무큐)’과 ‘무휴(無休, 무큐)’를 이용한 말장난인 듯.
학교에서도 딱히 만났던 적도 없고 오늘 일에 대해서도 입도 뻥끗 안
했지만, 왠지 모르게 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왜냐면 자이모
쿠자니까.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자.
“그래서, 자이모쿠자 넌 왜? 무슨 일인데? 벌써 가게?”
그렇게 묻자 자이모쿠자는 짐짓 헛기침을 해 보인다.
“허험 허험. 아까 전 토츠카 도령과 같이 있는데 히라츠카 교사로부
터 심부름을 부탁받아서 말이다. 고로 아직 떠날 수는 없다네.”
“심부름? 아직 안 갔냐?”
“아니, 그러니까 마 안 간다카이.”
가슴 앞으로 손을 붕붕 흔들며 어디 말인지 알 수가 없는 정체불명
의 사투리로 대답한다. 그건 그렇다 쳐도 히라츠카 선생님의 심부름이
란 건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토츠카가 영차 하고 메
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게 있잖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신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토츠카는 가방 안을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오오, 도착했나. 물건은 무사히 가져 왔나?”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알아차린 듯 히라츠카 선생님이 다가온다. 때
마침 가방 안에서 찾던 물건을 발견한 토츠카가 휴우 하고 한숨을 쉬
었고, 방긋 웃으며 히라츠카 선생님께 무언가 전달한다.
“네. 여기요.”
그렇게 전달된 물건은 백화점 지하 같은 데에서 식재료를 살 때 주
는 보냉백 여러 개였다. 은빛으로 반질반질 빛나는 그것들을 받아 든
히라츠카 선생님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새삼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
한다.
“뭡니까, 그거?”
“음? 아아, 마침 잘 됐군. 저쪽에서 열어 보기로 할까.”
나의 물음에 히라츠카 선생님은 그 백을 들고 뚜벅뚜벅 원래 있던
조리실 창가 쪽으로 향한다. 거기서 근처에 있던 의자를 당겨 털썩 걸
터앉은 후, 기분이 썩 좋아 보이는 모양새로 콧노래를 부르며 보냉백
의 내용물을 바깥에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중에 다 같이 먹게 될 거 아니냐? 그래서 참고가 될 만한 간식거
리를 생각해 봤다만, 어째 부탁이 과하다 싶어서 따로 시키진 않았지.
그러다 마침 나오려던 차에 저 아이들을 만나서 심부름을 부탁해 본
거란다.”
“허어, 그랬나요.”
이 시기에는 슈퍼든 백화점이든 인터넷 쇼핑몰이든, 유명 업체의 초
콜릿을 쉽게 입수할 수 있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대충 그런 데에 주문
해 놓았던 초콜릿을 자이모쿠자와 토츠카에게 받아오도록 시켰던 모
양이다.
그러나 히라츠카 선생님이 주문했던 물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지,
업체 이름이 나와 있는 보냉백을 몇 개 개봉하여 내용물을 꺼내 나간
다.
차례차례 조리대에 진열돼 가는 주문 배달 고급 초콜릿들은 멀리서
봐도 확연히 눈에 띄는 듯, 여기저기서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하루노였다. 메구
리 선배를 데리고 또박또박 이쪽으로 오더니 흥미진진한 분위기로 하
나하나 체크해 간다.
“헤에~ 시즈카, 제법인데~? 고디바는 기본이라 쳐도, 피에르 에르메
에 장 폴 에방……. 그밖에도 제국 호텔에 뉴 오타니……. 아, 사다하루
아오키도 있네.”
“훗, 뭐 그렇지.”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게 나름 기뻤던 모양인지, 히라츠카 선
생님은 우쭐하게 가슴을 쭉 편다.
실제 나만 해도 그냥 다 초콜릿 아냐? 같은 생각 밖에 안 들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물건인 것 같다. 물론 고디바 정도는 아무리 나
라도 들어본 적 있는 물건이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유명한 제품들
이 많이 있는가 보다. 아까 하루노가 했던 말, 불어였나? 불어 맞나?
뭐라는지 알 수가 없네.
아까 뭐랬더라? 피, 피에……피에르 타키?89 장 피에르…… 폴나레프?90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명한 초콜릿 아닐까.
화려한 케이스를 열자 마치 쥬얼리 샵의 쇼윈도처럼 눈부시게 화려
한 초콜릿들이 나란히 담겨 있다. 그 광경에 메구리 선배가 탄성을 터
뜨린다.
“와~ 맛나겠다……”
“아~ 역시 메구리도 좀 아나 보네? 이거 진짜 맛있어~. 나도 추천해.”
“잠깐, 하루노 네가 왜 잘난 척이냐? 내가 고른 거라고?”
슴부심이라도 부리는 건지 가슴을 쭉 펴고 으스대는 하루노에게 히
라츠카 선생님이 언짢은 듯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나저나 역시 취미에 인생을 건 시즈카 양이로군……. 타고 다니는
차도 엄청 비싸 보이더만……. 좋아하는 것에는 돈과 열정을 왕창 쏟아
붓는 상남자의 패기, 쩔어 준다.
남자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식으로 한 가지에 올인하는 멋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존경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비단 나만 그런게 아니라 토
츠카 또한 히라츠카 선생님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선생님, 단 거 좋아하시나 봐요?”

89
ピエール瀧. 일본 연예인.

90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토츠카의 질문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우웃 하고 말문이 막힌다.
“……그, 그런 편이지. ……아, 안 어울리나?”
“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어, 어울린다고 봐요!”
어깨를 축 떨군 히라츠카 선생님를 토츠카가 다급히 격려한다. 그 모
습을 보던 하루노가 유쾌한 분위기로 키득키득 웃는다.
“시즈카 같은 경우엔 술안주로 먹는 거지. 좋겠다~ 나도 이런 맛있
는 초콜릿이랑 한 잔 하고 싶어.”
“내가 초콜릿을 안주로 즐기는 타입인 건 사실이다만…… 오늘은 안
된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흘끗 쏘아보자 하루노는 치~ 하고 불만스레 뺨을
볼록이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 모습이 조금 뜻밖이었다.
실제 유키노시타 하루노라는 인간은 고의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놀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지금 히라츠카 선생님
에게 보이는 반응은 꾸밈 없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역시 그녀의 강화 외골격 같은 외면을 유지하는 데 이용되는 한 가지
기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유키노시타 하루노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 유키노시타의 언
니, 하야마의 소꿉친구, 메구리 선배의 선배, 히라츠카 선생님의 옛 제
자, 고운 용모의 완벽 악마 초인, 그와 같은 표면적인 정보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여도, 본질적인 부분은 진흙으로 가득 찬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전혀 볼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하루노가 그녀 자신보다 연상인 누군가와 길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아연한 분위기로 하루노 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은 다시금 그 수면을 조용히 일그러뜨린다.
하루노는 짐짓 어깨를 축 떨궈 보이더니, 조리대에 엎드려 애교 섞인
눈길을 히라츠카 선생님 쪽으로 향한다.
“그거 아쉽네. 그럼 있잖아, 다음에 한번 따로 만나자~ 오랜만에 묵
혀둔 이야기 같은 것도 하고 말야, 응?”
아무렇지도 않은, 예의상 하는 멘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
그 말을 히라츠카 선생님은 진지한 시선으로 받는다.
초콜릿을 개봉하고 있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양손으로 깍지를 낀다.
그리고 천천히 하루노의 눈을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하루노. 만약 네게, ……정말로 묵혀 둔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라도
만나 주기로 하지.”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루노의 어깨가 꿈틀 움직인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히라츠카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유리알
처럼 투명하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 느껴졌다.
분명 일 초도 채 못 될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착하
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 탓에 나는 호흡하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하루노의 키득거리는, 입꼬리만으로 미소 짓는 웃
음소리였다.
“정말~? 그럼 조만간 약속 잡아야겠네~. 아, 히키가야도 올래? 언니
들이랑 같이 한 잔 어때?”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하루노는 일부러 내 쪽으로 몸을 기울
이며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나를 빼꼼이 들여다본다. 그것을 슬쩍 피하
고 거리를 벌린다.
“저 미성년자거든요? 술은 안 되니까 오렌지 주스로 부탁드리죠.91”
자이모쿠자가 푸훕 하고 뿜는다. 게다가 히라츠카 선생님 역시 아까
까지의 진지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어깨를 바들바들 떨고 있다.
이 두 사람에게 먹혔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안 먹혔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토츠카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메구리 선배는 아는지
모르는지 방실방실 미소만 지었고, 하루노 같은 경우는 팔자 눈썹으로
연달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안 마셔? 재미없게시리. 뭐, 미성년자니까 어쩔 수 없나? 그럼 메구
리, 같이 갈래?’
“하루 선배, 나도 미성년자라구~? 차라면 몰라도……”
“그래? 어~ 그럼 어떡하지~? 동창들한테 연락이라도 해 볼까~?”
하루노가 폰을 톡톡 만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히라츠카 선생님이
깊은 한숨을 토한다.
“뭐, 조만간 연락해 다오.”
그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마친 후, 히라츠카 선생님은 유명 쇼콜라티
에의 이름이 새겨진 케이스를 내 쪽으로 쓱 내민다.
“히키가야, 시로메구리. 적당히 덜어서 사람들에게 몇 개 가져다 주
도록.”
“네~. 어디~ 몇 개씩 나누면 좋을까~?”
메구리 선배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양한 초콜릿들을 근처에 있던
종이 접시에 담아 간다. 대충 하면 된다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말을 듣
고도 한동안 음~ 음~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메구리 선배였지
만, 마침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든다.

91
酒はダメなんで、オレンジジュースください. ‘유유백서’, 도구로(戸愚呂) 동생.
“그럼, 자. 히키가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종이 접시 몇 장을 척척 밀어 온다. 아무래도 메구리
선배 기준으로는 제법 마음에 들게 뽑힌 모양인 듯, 실제로도 형형색
색으로 균형 있게 각 쇼콜라티에들의 초콜릿이 나누어 담겨 있었다.
에헴~ 하고 살짝 자랑스레 가슴을 펴는 메구리 선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메구리시☆되고 말았다…….
“예씀다.”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접시를 들고 일어나려는데, 토츠카와 자이모쿠
자도 의자를 달그닥 움직인다.
“아, 나도 도와줄게.”
“이하 동문.”
“응, 그럼 우리 다 같이 가자!”
메구리 선배 역시 종이 접시를 들었고, 각자 나누어 줄 조리대 쪽으
로 또박또박 향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그렇게 자리가 넓게 분산
돼 있는 건 아니다. 크게 보면 세 군데 정도인 셈이다.
카이힌 종합고등학교와 학생회 쪽에는 메구리 선배가 가고, 카와사키
자매와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쪽에는 토츠카가 간다. 자이모쿠자는
토츠카의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 딸려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미우라와 잇시키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조리대
이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미우라는 잇시키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그 눈빛을 잇시키는 여유로운 미소로 받
아넘기고 있으며, 중간에 낀 하야마는 시종일관 상큼한 미소를 유지하
고 있는 중이다. 토베는 그런 하야마를 신경 써 주듯이 수시로 말을
걸고 있을 뿐, 지금은 에비나 양을 향한 어필 같은 건 접어 둔 모양이
다.
으음~……. 고생이 많이 보이는구만. 고생이고 뭐고, 저 상황 한복판
에 끼어드는 건 사양인데.
어떻게든 조리대 근처까지는 도착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간
식을 전달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하야마가 내 모습을 깨닫
는다.
“미안, 잠깐 실례 좀 할게.”
하야마는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한 후 미우라와 잇시키 사
이를 살며시 빠져나와 이쪽으로 다가온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아, 아~. 아니, 그 뭐냐, 히라츠카 선생님이 간식 가져다 주라길래.”
그렇게 말하며 종이 접시를 쓱 내밀자 하야마의 안색이 약간 흐려진
다.
“또 초콜릿이구나……”
“맛있을 거 같은데.”
“……그런가.”
하야마는 짧게 대답하고는 종이 접시를 건네받고 조리대 쪽으로 빠
르게 돌아간다.
이걸로 무사히 미션 완료. 볼일은 다 마쳤으므로 그대로 돌아가려는
데, 등 뒤에서 깡 하고 금속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지 않은 그 소리에 뒤돌아보자 하야마가 캔 커피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었다. 손에 든 커피 캔 두 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같이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어봐 온다.
하긴 계속 미우라와 잇시키 사이에 끼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하야마라고 해도 다소 지칠 만도 하겠지. 나를 핑계 삼아 조금
쉬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 역시 한가한 몸이다.
음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하야마는 미우라 일행이 있는
곳에서 한 칸 떨어진 조리대 의자에 걸터앉았고, 이어서 나에게도 의
자에 앉기를 권한다.
내가 자리에 앉자 눈앞에 캔 커피를 탁 놓는다. 종류는 MAX 커피가
아닌 블랙 커피다. 그 캔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하야마가 쓴웃음을
짓는다.
“단 게 더 나았어?”
“아니.”
아무리 나라도 지금은 단 음료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제 곧 초콜릿을 먹게 될 테니까. 건네받은 캔 커피의 뚜껑을 따고
단숨에 쭉 들이켠다.
하야마도 마찬가지로 한 모금 마시고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캔 내려놓는 소리나 불현듯 흘러
나오는 한숨 소리의 교환만이 대화를 대신하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오
고 갈 뿐이다.
손에 전해지는 무게로 볼 때 이제 곧 한 모금도 안 남겠구나 생각하
던 즈음, 불현듯 하야마가 “그렇다 쳐도” 하고 입을 열었다.
“좋은 아이디어네.”
“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영문을 몰라 정색한 얼굴로 되묻자, 하야
마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하야마 하야토다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렇게 하면 모두…… 모두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하야마는 천천히 조리실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따라
가자 다양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진지한 눈빛으로 저울을 노려보는 미우라와 휘파람을 불며 오븐을
조작하는 잇시키, 얼굴에 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는 유이가하마와 그
모습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유키노시타.
이윽고 하야마의 시선은 내게로 돌아왔다. 그 표정은 내가 아는 하야
마 하야토다운 쓸쓸함이 묻어나는 쓴웃음이다.
하야마가 말하는 모두.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누구를 보고 모두라 부르고 있는지. 어렴
풋이 알아차리면서, 나는 하야마에게서 시선을 피한 후 아리도록 쓴
캔 커피를 목구멍으로 삼킨다.
그의 독백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하야마는 갑자기 훗 웃
는다.
“덕분에 토베도 초콜릿 먹고 좋아하는 중이야.”
하야마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시선을 돌려 보자 아무래
도 토베는 에비나 양이 조리 중인 초콜릿을 맛보는 데 성공한 모양인
지, 뭔가 맛있네 달달하네 쩌네 떠들고 있었다. 오~ 고생 많았다, 야.
……하긴 에비나 양은 그 다음부터가 훨씬 문제인 타입일 거라 생각하
지만. 그런 부류의 인간은 마음을 여는 방식이 몇 단계나 있으니 말이
다. 그러다 꼭 닮은 정신 구조를 가진 누군가가 떠오른 탓에, 그만 쓴
웃음을 짓고 만다.
하지만 뭐, 지금은 일단 토베의 건투를 칭찬하기로 하자. 내 나름대
로의 방식으로 말이지만.
“초콜릿이고 토베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특히 토베.”
“하핫, 너무한걸.”
그렇게 웃으며 하야마 또한 씁쓸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다. 그리고
는 캔이 다 비었나 확인하듯이 가볍게 흔들어 보더니, 하야마는 캔을
버리러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그 모습이 미우라의 시
야에 들어왔는지, 미우라는 애교라도 부리는 양 깜찍한 목소리로 하야
마를 부른다.
“하야토~”
“지금 갈게.”
그렇게 대답한 후 하야마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보고는 그럼 이만, 하
고 짧게 고한 후 그대로 곧장 미우라 일행이 기다리는 조리대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면서, 이미 다 마신 캔 커피를 다시 한
번 입으로 옮긴다.

× × ×

과자 만들기도 절정에 접어든다.


작업 속도가 빠른 이들은 오븐에 반죽을 집어넣기도 하고, 냉장고로
차게 식히기도 하는 등 완성을 향한 최종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수다만 계속 떨고 있는 줄 알았던 하루노도 어느 틈엔가 작업을 거
의 다 마쳐 놓은 모양새다. 뿐만 아니라 지도를 맡고 있던 메구리 선
배나 전임 학생회 멤버들의 과자 만들기도 슬슬 대단원에 이르러 있
어서, 남은 일이라고는 틀에 넣어 토핑이나 데코레이션 따위를 하는
것 정도인 상황이다.
도대체 얼마나 멀티태스킹에 능숙한 걸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지만 그만큼 남들을 챙겨 주었기 때문일까, 역시 그것도 슬슬 질리
는 모양인지 지금은 심심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키노시타에게 훼방
을 놓고 있다.
“우리 유키노, 뭐 만들어~? 언니도 한 입 먹여 줘~”
하루노는 집요하게 말을 걸지만, 유키노시타는 완전히 무시한 채 지
금은 유이가하마와 미우라의 감독을 맡는 중이다.
유키노시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우라는 진지한 얼굴로 틀에 반죽을
붓고 있고, 유이가하마는 영차영차 하면서 다른 반죽을 틀로 찍어내고
있다.
그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하루노는 이번엔
토라진 말투로 다시금 유키노시타에게 말을 건다.
“아이 참, 유키노~ 응?”
“……하루노 누나. 유키노시타도 지금 많이 바쁘잖아.”
그 모습에 하야마가 쓴웃음을 지으며 하루노를 달래려는 듯 그 옆으
로 이동한다. 외야 쪽에서 저렇게 시끄럽게 굴고 있으면 미우라 역시
정신이 산만해질 테니까, 거기에 대한 배려도 포함된 건지도 모른다.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건 미우라와 유이가하마만이 아니다. 잇시키는
생크림을 짜면서 예쁘게 데코레이션을 넣는 데 여념이 없고, 카와사키
자매 쪽은 케이카가 얼굴에 초콜릿을 잔뜩 묻혀가면서도 트뤼플 초콜
릿 같은 걸 열심히 마무리하는 중이며, 카와사키 사키도 그 모습을 촬
영하느라 바쁘다. 아니, 넌 도대체 얼마나 기록을 더 남겨야 직성이
풀리길래 그러냐…….
다들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시식 담당인 내 업무도 슬슬 시
작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가급적 방해가 되지 않게끔 멍하니 바라보고
만 있다. 그러고 있던 중, 오리모토가 불쑥 찾아오더니 한가해 보이는
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 온다.
“히키가야. 혹시 초콜릿 틀 남는 거 없어?”
“어, 어~……. 잠깐 있어 봐.”
아무래도 카이힌 종합고 사람들 쪽도 작업이 대단원에 들어선 모양
이다. 무엇을 만들지 논의하면서 한참을 떠들던 것 치고는 그럭저럭
제대로 완성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도록 오리모토에게 양해를 구한 후 유키노시타 쪽
으로 향한다.
“미안한데, 혹시 남는 틀 없어?”
“저기에 몇 개 있으니 필요하다면 가져가도 괜찮아.”
“오~ 고마워~”
허나, 그렇게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대로 내 뒤를 쫄랑쫄랑 따라온 오리모토 카
오리였다.
유키노시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오리모토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
보며 침묵을 지킬 뿐이다. 지시를 내리던 목소리가 중단된 탓에 유이
가하마 역시 이상하다는 분위기로 고개를 든다.
소부고 사람들 사이에 낀 카이힌 종합고 교복의 모습은 다소 튀어
보인다. 오리모토 쪽으로 약간 주목이 모였지만, 본인은 딱히 신경 쓰
지 않는 모양새로 하나하나 틀을 체크해 간다.
그리고 돌연, 별 생각 없는 분위기로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러고 보니 나, 히키가야한테 이런 거 준 적 있었나?”
그 말투는 정말로 아무런 기억도 없는 듯한 느낌이어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기억에 없는 건가. 하기야 그렇겠지.
오리모토는 중학교 시절부터 남녀 불문하고 의리 초콜릿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씩 챙겨 주던 녀석이지만, 그 사이에 끼지 못했던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 무렵의 나는 그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을까, 그렇게 조금 그리운
마음에 젖어버리는 바람에 대답하는 게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그 말없이 이어지던 시간 사이에 몇 차례 헛기침 하는 소리, 그리고
달각달각 바쁘게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쪽 그쪽으로 시선
을 돌리자 유키노시타는 턱에 손을 얹고 나와 오리모토를 주시하고
있고, 유이가하마는 시선을 돌린 채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으며, 잇시
키는 헤에~ 하고 흥미진진한 분위기로 호오호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카와사키가 입을 떡 벌린 채 얼떨떨한 얼굴로 이쪽
두 사람을 보고 있고, 타마나와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더니 후우~ 후
우~ 하고 앞머리로 바람을 불어올리고 있다. 타마나와 씨, 살짝 짜증
나거든요……?
“아니, ……당연히 없지.”
먼 옛날의 기억은 딱히 가슴 쓰릴 것도 없었기에, 나 치고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오리모토 또한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깔깔 웃는다.
“그래? 올해는 줄게.”
“엥, 아니, 아, 그래……”
예상치 못한 말에 내 자연스럽던 태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당황으
로 가득 찬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내 자연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지만……. 뭐야 그
거, 나 완전 소름 돋지 않아?
“그럼, 다 만들면 먹으러 와, 알았지?”
싹싹한 분위기로 그렇게 말하며 오리모토는 틀을 가지고 원래 있던
자리로 총총 돌아간다.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도 혹시 그냥
예의상 한번 해 본 말일지도 모르고…… 그런 번뇌에 휩싸인 채 떠나
가는 오리모토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하긴 이것도 분명 오리모토 카오리 특유의 그게 쿨한 줄 착각하고
떠드는 언동일 뿐, 딱히 깊은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속내를
읽지도, 비뚤게 보지도, 곡해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
아들일 수 있었기에, 나는 훗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흘렸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만족감과 함께 시선을 다시 조리대 쪽으로 돌린
순간, 창가에 있던 하루노와 눈이 마주친다.
하루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와 오리모토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무척 재미있는 거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녀의 부드럽던 미소가 가학적인 표정으로 변한다. 희미하게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오르고, 가늘게 뜬 눈에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서
린다. 이어서 하루노는 옆에 있던 하야마에게 시선을 힐끗 돌린다.
“그러고 보니 하야토는 옛날에 유키노한테 받은 적 있었지?”
하야마를 보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다
들리도록 말하는 음성.
그 음성에는 지금껏 무시로 일관하던 유키노시타도 반응을 보이고
만다. 유키노시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루노 쪽을 말없이 노려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건 비단 유키노시타만이 아니었는지, 미우라
또한 딱딱하게 굳어버려 있었다. 잇시키는 흐아아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고 있다.
굳이 미우라와 잇시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에 쓴웃음이 흘러나왔고, 나는 머리를 북북 긁는다. 이상하
게도 어느샌가 손에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던 탓에, 머리를 빗어 내리
기가 무척 힘들다.
유키노시타는 하루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 대신 곤혹스러운
분위기로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 표정은 갑작스럽게 파헤쳐진 옛날 이야기에 몹시 당황한 듯, 입술
은 살짝 깨문 채였고 눈동자는 불안한 분위기로 한 자리에 가만히 머
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나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마치 가래라
도 낀 것처럼 목구멍 깊숙히 무언가가 턱 막혔고, 소화불량이라도 되
는 건지 위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꿈틀 준동하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
진다.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숙이고, 나 또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 끝에
있던 유이가하마는 불안한 시선으로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
다.
짧은 침묵. 그럼에도 체감 시간은 끔찍하게 길게 느껴졌고, 그 침묵
을 깨야 한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토한다. 그러나 적절한 말이 떠올
라 주지 않는다.
“그래, 초등학교 올라가기 전쯤에 받았던 적 있지. 하루노 누나하고
같이 말이야.”
그렇게 이 자리에서 가장 올바른 해답을 입에 올린 건 하야마였다.
하야마는 더없이 훌륭하고 상쾌한 미소로 시원스레 답하며 상황을
수습해 보인다. 그러자 하루노는 살짝 김빠진 표정이 되고 만다.
그 대답에 미우라는 후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잇시키는 휴우 하
고 안도의 한숨을 흘린다.
그러나 유키노시타 하루노의 표정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싸늘하게 변
했다. 재미없다는 양 하야마를 가볍게 일별하더니, 완전히 흥미를 잃
어버린 것처럼 창가를 떠난다. 그 모습을 하야마가 희미하게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배웅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유키노시타 옆에 하루노가 선다.
“그런데, 우리 유키노는 누구한테 줄 생각이야?”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명랑한 미소. 두 사람의 사정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모습은 마치 귀여운 자매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실제로 고개를 홱 돌리는 유키
노시타의 그 몸짓 역시, 보기에 따라서는 자꾸 장난을 걸어 오는 언니
에게 토라진 여동생처럼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딱히, 언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 언니한테는 안 주게?”
하루노가 키득키득 웃으며 농담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시
타는 발끈한 것처럼 살짝 노려본다.
“줄 리가 있겠어? 줘야 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언니도 그런 건 지금
까지 한 번도 준 적 없잖아?”
“음~ 하긴 그래.”
하루노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그리고는 훗
하고 쓴웃음 같은 한숨을 흘린다.
“뭐, 유키노가 한 번 안 준다 그랬으면 절대로 안 주겠지. 옛날부터
거짓말 같은 건 안 하는 아이였고.”
그것은 예전에 내가 유키노시타 유키노에게 가졌던 이미지와 흡사하
다. 그러나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그 무렵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
을 이해하고 있다.
“그치만, 진실을 얘기하지 않을 때는 있어.”
방금 전까지와는 명백하게 온도차가 느껴지는, 뼛속까지 오싹 스며드
는 듯한 그 시선으로 유키노시타를 꿰뚫어보며 하루노는 키득키득 웃
는다.
“아무한테도 안 줄 거란 얘긴 안 했지? 역시 누군가한테는 줄 건가
보네?”
하루노의 말에 유키노시타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본
다. 그 시선을 그대로 전부 받아내면서도, 하루노의 미소에는 변함이
없다.
“뭐, 유키노가 줄 사람이야 한정돼 있지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어디 실컷 떠들어 보든지”
유키노시타는 거기서 말을 끊고, 대신에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눈 앞에 있는 빈 그릇과 볼 쪽으로 손을 뻗어 일부러 달각달각 소리
를 내어 가며 정리 작업에 들어간다.
유키노시타 자매의 화기애애한 대화가 끝나자, 조리실 안은 다시금
떠들썩한 분위기로 돌아간다. 어수선한 그 분위기에 무언가 부드러움
까지 느껴진다.
후우 하고 한숨을 토하고 있는데, 돌연 깡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 쪽으로 눈을 돌리자, 바닥에 떨어진 볼이 빙글빙글 돌며 내
근처까지 굴러오고 있었다. 볼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웅웅 메아리치는
가운데 연약한 목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미, 미안해……”
귓전까지 주홍빛으로 확 물든 유키노시타가 고개 숙인 채 황급히 볼
을 주우러 온다.
이런 평범한 실수도 다 하고, 별일이로구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는 발밑 근처까지 굴러 온 볼을 줍고자 쪼그려 앉는다.
그 순간,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쪼그려 앉는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
치고 말았다. 서로 손을 뻗을까 말까 눈치라도 살피는 것처럼 어정쩡
한 자세로 얼어붙는다.
불과 몇 센티 거리를 사이에 둔 채, 하마터면 닿을 뻔 했던 손끝을
급하게 도로 물린다.
왜 그렇게 동요하는 건지. 그런 모습을 보이면 나도 동요하게 되잖냐.
“아냐……”
얼굴을 돌리며 미안, 하는 짧은 말을 덧붙이면서 유키노시타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다.
유키노시타가 허둥지둥 볼을 주우려 한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볼은 도로 줍기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다시
또 깡깡거리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 버린다.
그 굴러가는 소리가 계속 귓속에서 웅웅 메아리친다. 볼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서도 귓가에 엉겨붙은 소리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모른다.
그 소리는 발 아래로 굴러간 볼을 누군가가 가볍게 집어든 순간에서
야 겨우 사라졌다.
그쪽을 올려다보자 유이가하마가 볼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에헴 하고 가슴을 쭉 펴고 있었다.
“흐흥, 유키농두 아직 멀었구나? 난 볼 같은 조리 기구 다루는 건 완
벽하다구.”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에 한숨이 흘
러나온다. 계속 가슴속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고, 얄
미운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덕분에 겨우 일어설 수가 있다.
“……아니, 넌 그거 말고는 다 치명적이잖냐.”
“동감이야. ……고마워.”
유키노시타도 미소를 보이며 답례를 하고는 유이가하마에게서 볼을
받으려 손을 내민다. 거기에 유이가하마도 응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
인다. 그리고, 볼을 건네준 유이가하마는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아
무 것도 없는 손바닥을 보며 주먹을 꼬옥 쥔다.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멍하니 쳐다보고 만다. 그녀의 그런 표
정은 언젠가도 분명 본 적이 있었을 터이다.
언제적의 일이었을까,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가며 벽 근처 자리에 스
르르 주저앉는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흘리던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키득 웃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 × ×

조리실 안이 향긋한 냄새로 자욱히 채워지기 시작한다.


오븐 앞에는 여러 사람이 진을 치고 완전히 다 구워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미우라는 유독 진지한 분위기로 오븐
유리창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구워지면 드디어 시식 시간으로 넘어간다. 나도 무직
간판을 반납하고 마침내 일하게 된다.
그때를 대비하여 기운을 모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살짝 무리
안에서 빠져나와 휴식을 취하려는데, 등 뒤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려
온다.
뒤를 돌아보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서 있다. 손에는 아까 나눠주고 남
은 건지, 초콜릿이 담긴 종이 접시를 들고 있었다.
“좋은 이벤트가 되었군.”
그렇게 말을 건네며 히라츠카 선생님은 내 옆의 의자를 당겨 앉고는
종이 접시에 담긴 초콜릿을 스윽 밀어 권한다. 그 가운데 하나를 감사
히 받아 먹으며 나도 대답을 돌려준다.
“하아, 뭔가 알 수 없는 이벤트지만요.”
애초에 이걸 이벤트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냥 여
러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제멋대로 떠들고 있을 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히라츠카 선생님도 그런 건 알고 있는지, 즐거운 듯 킥킥 웃는다. 그
리고는 조리실에 있는 학생들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면 된 거지. 넌 원래부터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너와 관계된 사
람들도 다들 알 수 없는 녀석들이야.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뇨…….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뭐, 예전보다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셈인가.”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씨익 웃음을 지으며 히라츠카 선생님
도 초콜릿을 쥔다.
“사람의 인상은 날마다 계속 갱신되는 법이지. 같은 시간을 함께 살
아가고, 함께 성장을 거듭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딱히 성장한 기분은 안 드는데요. 맨날 똑같은 것만 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조금은 변했단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그렇게 말하더니, 꿀꺽 삼킨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닦는다. 그 몸짓은 섹시하기보다는 마치 어
린 소년 같아서, 나도 모르게 킥 하고 웃음이 나오고 만다.
확실히 그 말대로, 나도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가지고 있던 인상은 조
금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인상에도 다
소간의 변화는 있을 것이다.
단지 그 변화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글쎄요, 변했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뭔가 묘한 느낌인데요.”
“묘한 느낌?”
히라츠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게 쑥스러웠던 나머지 고개를 홱 돌리며 허둥지둥 말을 잇는다.
“아~ 뭔가 위화감 같은 게 있어서 말이죠.”
말로 내뱉고 보니 의외로 깔끔하게 납득이 된다.
줄곧 따라다니던 느낌이다.
우연한 순간에 인식하게 되는,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무언가. 누
군가와 접할 때마다 문득 안쪽에서 솟아나와 나에게 묻는다. 그게 올
바르냐고.
“위화감이 있다, 그 말인가. ……그 위화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딘가 그리워하는 어조로 히라츠카 선생님이 먼눈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나를 향하고 있다기보다는 누군가 다른 이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였는지, 시선은 이내 나에게로 되
돌아온다.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 성장할 징조인 것 같구나. 어른이 되면 그런
걸 쉽게 지나쳐 버리게 되지. 그러니 지금 그 위화감을 똑똑히 직시해
줬으면 좋겠다. 소중한 거란다.”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지 않나요?”
내가 산통을 깨어 놓는 소리를 툭 던지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흐흥
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눈으로 보지 마라, 마음으로 보는 거다.”
“생각하지 마라, 느껴라,92 뭐 그런 말인가요? 무슨 포스도 아니고……”
이분은 잘난 척 하는 얼굴로 뭔 소릴 하는 거람……. 그냥 소년 만화
같은 말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며 정색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아무리 히라츠카 선생님이라도 조금은 쑥스러
웠던 모양인지 으흠 하고 짐짓 헛기침을 한다.
“그 반대란다. 느끼지 마라, 생각해라.”
내 말을 고쳐 말하는 그 표정은 방금 전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
니라 진지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넘치고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는 천천하게, 조용히93.
“그 위화감을 계속 생각하렴.”
“계속, 말인가요?”
곱씹어 보듯 그 말을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러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준다.
“그래, 계속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겠

92
考えるな感じろ. ‘용쟁호투’, 이소룡의 명대사 “Don't think, Feel!”에서 유래.

93
静か(시즈카).
나? 걸음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걸어온 거리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 물론 걸음을 멈춰 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걸어온 거리
만큼 배신당한 기분도 들기 마련이다만……”
거기서 말을 끊고, 히라츠카 선생님은 조리실 안에 있는 사람들 쪽으
로 차례차례 시선을 보낸다.
“지금, 가까운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어 다행이구나.”
그렇게 말한 뒤 히라츠카 선생님이 읏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내 등을 툭 치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언제까지고 계속 지켜볼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려 돌아본 순간, 히라츠카 선생님은 뭉친 어깨를
푸는 것처럼 하암 하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탓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뚜둑뚜둑 목을 풀고 내 쪽으로 돌아선 때에는 이미 평상시의 히라츠
카 선생님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나는 슬슬 업무에 복귀해야겠군.”
“안 드시고 가게요?”
“그게 말이다, 조금 밀린 일이 있어서 말이지……. 3월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기도 하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말이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하하 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뺨을 긁적인다. 그
리고, “그럼 이만” 하고 손을 가볍게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걸
어 나간다. 힐이 또각또각 바닥을 울리고, 히라츠카 선생님은 당당하
게 조리실을 뒤로한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초콜릿을 입에 던져 넣는다.
대충 골라 집은 초콜릿은 선생님의 말과 함께 녹아내리고, 쌉쌀한 뒷
맛이 희미하게 남았다.
6. 아직도, 그가 구하는 진실된 것에는 손이 닿지 않고 진실된 것은
잘못을 거듭한다. (pp.191-224)

오븐과 키친 타이머가 연이어 소란스럽게 울린다. 그때마다 조리실


안은 환호와 탄식이 넘치고, 달콤한 향기와 고소한 냄새가 피어난다.
오븐 앞에서 굳어 있는 사람들 쪽을 바라보건대, 아무래도 미우라의
혼신의 역작도 무사히 완성된 모양이다.
미우라가 조심조심 오븐을 열고, 안에서 꺼낸 가토 쇼콜라를 살며시
유키노시타 앞에 내민다.
그 성과를 유키노시타가 확인해 본다. 한 차례, 두 차례 천천히 시간
을 들여 차근차근 보고 있는 사이, 옆에 있는 미우라는 조마조마한 분
위기로 안절부절못하고, 그 옆의 유이가하마도 가슴을 졸이며 지켜본
다.
이윽고 유키노시타는 휴우 하고 짧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예쁘게 완성된 것 같아.”
유키노시타의 말에 하아 하고 흘러나오는 한숨과 함께 미우라의 어
깨에서 긴장이 쭉 풀린다.
“유미코, 너무 대단해!”
유이가하마가 미우라를 덥석 껴안자 미우라도 얼굴이 살살 풀어진다.
“응, 고마워, 유이. ……유, 유키노시타도.”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시선만은 유키노시타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참으로 기묘한 답례법이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기묘하기 그
지없다.
“아직 맛을 보지 않았다 보니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합격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얘는 그냥 순순히 천만에요 하고 말하면 어디 덧나냐……. 하지만 유
키노시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번 이벤트의 목적은 단순히 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려는 게 아니다.
“유미코.”
유이가하마가 미우라의 어깨를 살포시 만지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거기에 떠밀려 미우라는 주방용 장갑을 벗는 것도 잊어버린 채 가토
쇼콜라를 조심스레 옮긴다. 그리고 하야마 앞까지 도착하더니 부끄러
운 듯 몸을 비비 꼰다.
“하, 하야토……. 이거, 시식 좀 해 줄 수…… 있어?”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분위기만 살피듯 시선을 힐끔 보내자,
하야마는 거기에 잔잔한 미소로 답한다.
“물론이지. 나라도 괜찮다면.”
“응……. 응.”
미우라는 무언가 할 말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새빨
갛게 물들인 얼굴로 고개만 몇 번 끄덕거릴 뿐이다.
마음속으로 수고 많았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내 옆에서 무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녀석이 있었다.
“끄으응……”
“너 어디 아프냐?”
시선을 힐끗 돌려 잇시키를 보자, 잇시키는 미우라를 원망스러운 시
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 손에는 예쁘게 포장이 된 건 물론 메시지
카드까지 완비된 수제 과자 선물 세트가 들려 있었다. 그 물건을 힘을
잔뜩 넣어 꽉 쥔다.
“제법이네요, 미우라 선배……”
“그러게, 그 가토 쇼콜라, 의외로 예쁘게 잘 만들었더라고.”
그 말에 잇시키는 “예에?” 하고 이상한 거라도 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 아저씨는 뭔 헛소리래? 같은 표정 짓는 건 자제해 주지
않으련……?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잇시키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아까 전에 한 말의 의도를 해설해 준다.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고요, 갭 얘기라구요, 갭. 평소에는 그렇게
성질 더러워 보이는 주제에 이럴 때만 귀엽게 나오고, 완전 비겁하잖
아요!”
“아~ 그거……”
과연 여우 짓의 대가. 하지만 미우라 같은 경우 그런 내숭 따위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지 않을까. 그건 그냥 본인 나름의 소녀다운 모
습일 뿐인 거 같은데. 그런 점은 잇시키도 이해하고 있는지 “애초에
그 분, 실제로는 성격도 안 나쁘고요!” 하고 중얼중얼거리고 있다. 그
러게, 너는 실제로도 성격 꽤 나쁜데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던 잇시키였지만, 한차례 넋두리를 늘어놓은 덕
분에 다소 기분이 풀렸는지 훗 하고 미소를 짓는다.
“뭐, 저 정도는 돼야 붙어 볼 만하니까 즐겁긴 하지만요~. 붙어 봤자
별 재미도 없는 사람도 많이 있거든요.”
에효, 참 나 하고 한탄이라도 하듯이 한숨을 흘리고는, “아, 맞다” 하
고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에이프런 주머니를 부스럭거려 무언가 꺼내
더니 나한테 휙 던져 준다.
“선배님, 이왕 만드는 거 덤으로 하나 만들어 봤으니까 드세요.”
건네받은 물건을 확인해 보니 작은 비닐 봉투에 쿠키가 들어 있다.
작은 리본이 묶여 있는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포장 같은 건 없는 게,
지금 잇시키가 손에 들고 있는 호화찬란한 수제 과자 세트와는 하늘
과 땅 수준의 격차가 느껴진다.
“뭔데? 이거 나 주는 거냐? 땡큐?”
하도 대충 건네주는 바람에 고맙다는 인사가 얌전히 나오지를 않는
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의리 초콜릿을 주네 마네 남자의 자존심이
어쩌네 그랬지. 뭐야, 잇시키도 괜찮은 애구만! 아까 성격 나쁘다고 속
으로 깠던 거 미안!
나의 감사의 말에 잇시키는 킥킥 웃더니 검지손가락을 척 세우고 살
포시 입술 앞으로 가져다 댄다.
“……다른 분들한테는 비밀이에요?”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쪽 눈을 찡긋 감더니, “소문 나면
귀찮으니까요~” 하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쪼르르 떠난다. 그대로 하
야마 쪽으로 가려는 모양이다.
반면에 나 같은 경우는 지금 잇시키의 그 몸짓과 표정에 기가 막힌
나머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이건 여우 같네 약았네 할 수
준이 아니다. 솔직히 이제는 무섭기까지 하다……. 아까 그거, 예전의
나였으면 한 방에 훅 갔다니까?
여우 같은 후배의 파괴력 앞에 전율하면서, 그녀의 분투를 감상하고
자 하야마 일행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잇시키는 꺄르륵☆ 하고 애교 풀 가동 상태로 빼꼼히 올려다보는 시
선으로 하야마에게 수제 과자 세트를 내민다.
“하야마 선배, 이것도 한번 드셔 봐 주세요~”
“하하, 다 먹을 수 있으려나?”
하야마는 미우라의 가토 쇼콜라를 먹으면서도 상쾌한 미소를 잃지
않고 성숙한 대응으로 잇시키를 맞이한다. 또다시 미우라와 잇시키 사
이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자 와삭와삭 우걱우걱 바둑판무늬 쿠키를 먹어 가면서, 토베가
하야마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보인다.
“하야토, 다 못 먹겠으면 불러 줘! 난 언제라도 준비 완료걸랑!”
“아뇨, 토베 선배 몫 같은 거 없거든요……?”
토베의 뜨거운 말을 잇시키의 차가운 목소리가 꽁꽁 얼린다. 그 매몰
찬 대우에 토베가 하야마에게 징징댄다.
“이로하스 너무한 거 아냐!? 그지, 하야토~?”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토베 넌 그쪽 거 먹는 데 집중하는 게 좋
을 거 같아.”
하야마가 토베에게 넌지시 귀띔하듯이 말한다. 그러자 토베는 다시
한 번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며 웃는다.
허어, 그런가. 자세히 보니 그 바둑판무늬 쿠키는 에비나 양이 만든
물건인 모양이다. 의외인데…… 하는 생각에 만든 당사자 쪽으로 눈길
을 돌려 본다.
“음~ 하야×토베라~? 살짝 모자란데~”
에비나 양은 불만스러운 양 바둑판무늬 쿠키를 집어먹으며 연달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저쪽은 저쪽대로 앞날이 막막하구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는 어떨까 싶어 미우라 일행과는 정
반대 방향, 카이힌 종합고등학교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저쪽도 거
의 다 완성 단계인 모양이다. 메구리 선배 및 소부고 신구 학생회 임
원들과 한 자리에 모여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 오리모토 카오리가 나의 존재를 깨닫고 손을 흔들
어 온다. 아~ 저 녀석, 이럴 때 손 흔들어 오는 거 중학교 때하고 똑
같네……. 하긴 뭐, 이제와서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그럴 것
도 아니니 별 상관은 없지만.
오리모토는 뭔가 조리대 위에서 부스럭부스럭 작업을 하더니, 이쪽으
로 후다닥 달려온다.
“히키가야~. 자, 이거.”
그렇게 말하며 내밀어 온 것은 종이 접시에 담긴 초콜릿 브라우니다.
아까 준다던 게 이건가 보다. 아~ 포장이나 그런 건 전부 생략이구만
요……. 아니, 이렇게 챙겨 주시는 것만으로도 심히 고마운 일이긴 하
지만 말입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 브라우니를 우물우물 먹
는다. 순간, 오리모토 뒤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온다.
“음, 이런 교류도 괜찮아 보이는데?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스무스
한 관계를 중시해 나가는 것도 앞으로는 무척 중요해질 거니까.”
대충 말투만 듣고 있어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다. 카이힌 종합고 학
생회장 타마나와 씨로군요.
오리모토는 타마나와를 깨닫고 타마나와 쪽에도 접시를 내민다.
“아~ 회장도 있었네? 자, 회장도 먹어.”
“고, 고마워. ……일단 이거, 내가 해 본 건데.”
타마나와는 감사의 말과 함께 본인도 무언가 내밀어 온다. 거기에 있
는 것은 깔끔하게 커팅된 시폰 케이크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만든
물건인 모양이다.
오리모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시폰 케이크를 빤히 쳐다본다.
“어? 왜?”
그 물음에 타마나와는 어험어험 헛기침을 하더니 또 그 도자기 빚는
제스처로 손짓 발짓 섞어가며 해설에 들어간다.
“해외에서는 발렌타인 데이에 남자가 선물을 주는 게 일반적이니까,
이번에는 그런 글로벌라이제이션도 의식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
이야. 우리가 일본에서의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자는 의미라 할
수 있겠지.”
“흐음~”
하지만 어째 오리모토에게서는 “그래, 그거야!94” 같은 리액션이 나오

94
それある! (소레 아루!) 애니메이션 2기 참조.
지 않는다. 그 밋밋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는지, 타마나와는 다시 말을
이으며 도자기 빚는 속도를 올린다.
“일본과 해외에서는 의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컬처 갭이 있거든. 예
를 들면 프랑스에서 스커트는 소중한 사람 앞에서 입는 옷이기도 하
다는데, 예를 들면 그런 거하고 비슷한 거야.”
호오……. 요컨대 토츠카가 스커트를 입지 않는 것도 요컨대 그런 거
하고 비슷한 거라 이 말씀이로군! 더 노력해야겠어! 그래, 그거야!
그렇게 내가 새롭게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오리모토가 그 시폰 케이
크를 쏙 집어든다.
“꽤 맛있네? 고마워.”
“아아, 응. 아니……. 마침 저기서 커피 브레이크가 진행 중인 모양이
니까, 그만 돌아갈까?”
“커피 브레이크는 또 뭐야? 웃기게시리.”
오리모토는 깔깔 웃으며 나에게 “이만 갈게” 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
어 보이며 원래 있던 카이힌 종합고 사람들 쪽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아직 안 가고 남아 있던 타마나와가 나를 힐끗 본다.
“그럼……. 다음에 볼 때는 페어로 가 보자고.”
수수께끼의 퇴장 대사를 남기며 타마나와는 당당하게 떠나간다.
“아니, 안 갈 거거든……?”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는 과연 그에게 전달되었을까. 아니, 아
마 안 됐겠지. 외래어가 없으면 안 들어줄 것 같다.
그렇다 쳐도 타마나와의 그 태도. 혹시 아까 그건 타마나와 나름대로
분발해서 시도한 어필이었을까. 오리모토에게는 전혀 전달이 안 된 거
같던데……. 뭐, 어차피 타마나와니까 되든 말든 상관없겠지!
타마나와는 알아서 하라 그러고, 나도 분발해야겠다. 토츠카에게 스
커트를 입힐 수 있도록.
어디, 토츠카토츠카스커토츠카……. 그렇게 의욕을 가득 채우고 토츠
카를 찾아보자, 그 모습이 금방 포착된다. 역시 토츠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터벅터벅 다가가 봤더니 토츠카는 자이모쿠자와 함께 케이카를 돌봐
주고 있는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그 옆에 있는 조리대에서는 카와사
키가 뒷정리를 척척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동안 잠시 아이 돌보기를
맡겨 놓은 듯하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어린아이와 놀아 주는 데 익숙하지 않은지 둘
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다. 자이모쿠자 같은 경우는 얼어버리다
못해 돌부처가 된 상태. 그 바람에 토츠카는 혼자서 아이 돌보기를 다
떠맡은 채 어~ 저기~ 하고 약간 곤혹스러운 분위기로 케이카에게 말
을 걸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케이카. 난 토츠카 사이카라고 해. 잘 부탁해.”
“어~. 사이카……. 사이카……. 사아 오빠? 사, 사아 오빠……?”
케이카는 언니와 비슷한 이름을 들은 탓인지 토츠카를 뭐라고 불러
야 되는지 혼란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음음, 혼란한 것도 이해가 간
다. 나도 토츠카가 하도 귀여운 나머지 정신을 못 차리겠거든(혼란).
뭐, 꼬마 숙녀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나도 그럭저럭 자신이 있다.
이럴 땐 토츠카 대신 내가 꼬마 숙녀의 상대를 해 드리기로 하자.
케이카의 등 뒤로 살포시 다가가 머리 위에 손을 톡 얹는다.
“아, 하치만.”
“하아 오빠다!”
토츠카는 안도한 분위기로 내 얼굴을 보았고, 케이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는 케이카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으며
토츠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이 오빠야. 사이 오빠라고 부르면 돼.”
“응. 사이 오빠!”
케이카는 혼란 상태에서 벗어났는지 토츠카를 똑바로 인식한다. 토츠
카 역시 케이카에게 이름을 불리는 게 즐거웠는지 아핫 웃었다.
그럼 어디, 또 한 명, 토츠카 뒤에 있는 돌부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이쪽은 자이모쿠자 요시테루야. 자이 오빠라고 불러도 돼.”
내가 자이모쿠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케이카가 응 하고 고
개를 끄덕이더니 자이모쿠자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킨다.
“자이모쿠자.”
“겨, 경칭 생략~!? 본관만 경칭 생략~!? 우리 업계에서는 포상입니다
만!?95”
아무리 자이모쿠자라고 해도 꼬마 숙녀에게 경칭 생략으로 이름을
불리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인가 보다. 경악으로 가득 찬 얼굴로
아연실색하고 있다. 아니, 좋아하는 건가? 하긴 뭔 상관이람, 어차피
자이모쿠자인데.
하지만 마음 착한 토츠카는 격려를 빼먹지 않는다.
“너, 너무 그러지 마. 그런 거 있잖아, 어린애들은 이상한 말은 금방
외우고 그러잖아?”
“으, 으음~…… 딱히 본관의 이름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만……”
자이모쿠자는 살짝 납득할 수 없다는 양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러저러하는 사이에 카와사키가 급하게 에이프런으로 손을 닦고 후
다닥 다시 돌아온다. 그러자 케이카도 사아 언니~ 하고 이름을 부르
며 카와사키에게 뛰어든다.
“미안, 돌봐 주느라 고생했어.”

95
我々の業界ではご褒美です. 인터넷 밈.
“아니야, 전혀 안 그런걸. 하치만도 와 줬고. 카와사키는 정리 다 끝
났어?”
“덕분에 잘 끝냈어.”
토츠카에게 감사의 말을 표한 뒤 카와사키는 내 쪽으로 시선을 빤히
향한다. 무언가 살짝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
린다.
“저기, 이제 그만 돌아갈게. ……저녁 차려야 되거든.”
“오, 그래.”
그 말을 듣고 시계를 확인해 보자 슬슬 딱 그런 시간이다. 그래서 카
와사키가 그렇게 급하게 정리를 하고 있었던 거겠지. 딱히 그대로 두
고 가도 상관없으련만, 의외로 야무진 소녀로군요, 카와사키 양. 생활
력이 높다.
“자, 케이. 집에 가자.”
“응. ……사아 언니.”
카와사키가 케이카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케이카는
카와사키의 스커트를 꾹꾹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로 대
답한다. 그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행동이란 걸 언니인 카와사키는 잘
아는 모양이다.
“……그래. 잠깐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하더니 가방 안을 뒤적여 초콜릿이 담긴 봉지를 꺼내 케이
카에게 넘겨준다. 케이카는 받은 초콜릿을 즐거운 표정으로 보더니,
그것을 내 눈앞에 내민다.
“자, 하아 오빠!”
“왠지 너한테 주고 싶다 그러더라고. ……받아 줘.”
“오오, 땡큐. 잘 만들었는데? 우리 케이, 제법이네?”
머리를 꾹꾹 쓰다듬어 주자 케이카는 내 허리에 찰싹 안겨 온다. 하
하하, 요 깜찍한 것~ 하고 한결 더 신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내, 내가 만든 것도 좀 섞여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카와사키가 코트를 입으며 얼굴을 홱 돌린 채 웅얼웅얼 말한다. 그
말에 그 트뤼플 초콜릿을 확인해 본다.
“그래? ……잘 구별이 안 가는데. 네 여동생도 대단하네.”
“그치, 대단하지! 그래도 있잖아, 사아 언니도 많이 열심히 했다구.”
에헴 하고 가슴을 쭉 펴면서 케이카는 빼꼼 고개를 들어 언니를 칭
찬한다. 그 말에 맹랑하다는 양 카와사키가 훗 웃는다.
“전해 줄 건 전해줬으니까, 케이, 그만 갈까?”
그렇게 말했지만 케이카는 나한테 착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를 않는
다. 그러는 케이카를 카와사키가 찌릿 쏘아본다. 그러자 케이카가 흠
칫 몸을 떠는 게 느껴진다. 아니, 그렇게까지 무섭게 쳐다볼 필요는
없잖냐…….
“좋아, 우리 케이, 가 볼까?”
그렇게 말하며 케이카를 그대로 매달고 걸음을 걷는다.
“응, 가자!”
케이카도 나를 뒤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뒤를 카와사키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뒤따른다.
“케이야, 바이바이~. 나중에 또 봐.”
“음, 이바이바.96”
토츠카와 자이모쿠자가 눈길로 배웅하는 걸 받으며 케이카가 바이~
하고 손을 흔든다. 그대로 조리실 바깥까지 나와 계단을 내려간다. 그
사이 카와사키는 케이카에게 코트를 입히고 머플러를 감아 주는 등
여동생 돌보기에 여념이 없다.

96
さらだばー(사라다바, 샐러드바). 말장난. さらばだ(사라바다, 안녕이다)를 틀리게 한 것.
이러저러하는 사이에 커뮤니티 센터 현관까지 도착하자, 바깥은 이미
깜깜하게 날이 저물어 있었다.
“역까지 데려다 줄까?”
“괜찮아, 늘 있는 일이니까. 너도 할 일 있잖아.”
카와사키는 가방과 장바구니를 고쳐 들더니 영차 하고 쪼그려 앉아
케이카를 안아 올린다. 그 순간 힐끗 보이는 카와사키의 스커트 안쪽
으로 시선이 쏠리는 걸 필사적으로 자제한다. 검은색 레이스였던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절대로 안 봤다.
“그, 그럼 이만.”
“하아 오빠, 바이바이!”
카와사키가 고개를 살짝 숙여 작별 인사를 전하자 품 안에 있던 케
이카도 뒤따라 인사한다.
“……조심해서 가라.”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둘에게 그런 말을 건네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한다.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는 겨울 밤하늘은 무척이나 맑았지만, 그만큼
얼어붙은 날씨 또한 뼈가 시리도록 춥게 느껴진다. 저 두 사람은 서로
꼭 붙어 있으니 그렇게까지 추울 것 같지는 않는다.
코트를 입지 않고 바깥에 나와버린 게 약간 후회된다.
바로 안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건만,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 발걸
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에 털썩 걸터앉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정말로 별 대단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다소 피곤하게 느껴
진다.
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충족감이 있었을 것이다.
미우라와 에비나 양, 카와사키 자매의 의뢰를 받고, 잇시키 일행과
함께 이벤트를 열고, 거기에 오리모토와 타마나와를 비롯한 카이힌 종
합고 학생들, 그리고 메구리 선배도 하루노도 들러 주고, 하야마와 토
베도 시식 담당으로 참가해 줬고, 토베도 자이모쿠자도 찾아와 주고,
히라츠카 선생님은 간식을 챙겨 주고.
충분하다 못해 과분할 정도다.
꽤 즐겁구나.
그렇게 입 안으로만 중얼거린다.
근질근질한 가려움이 목덜미를 기어다니고, 입꼬리는 올라간 채 굳어
져 있다. 추위 때문에 뺨이 경직된 탓이리라.
그 뺨을 꾹꾹 마사지해서 녹이고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
었다.

× × ×

조리실로 돌아와 보니 이미 모두 조리를 마친 상황으로, 모두들 과자


를 먹고 차를 마시며 잡담을 즐기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를 목전에 둔 과자 만들기 이벤트도 이렇게 마지막에
이르렀다. 남은 건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낸 후 막을 내리는 일밖에
없다.
나는 내 짐을 놓아 둔 자리로 걸음을 옮겼고, 거기에는 유키노시타가
있었다. 유키노시타는 청초한 몸짓으로 티 포트와 홍차를 준비하던 중
이다.
조리대에 설치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주전자 물이 이제 막 끓고
있던 참이다. 그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부으며 유키노시타가 홍차를
준비한다.
그 자리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은 익숙한 컵과 찻종지가 아닌 종이
컵이다. 역시 일부러 여기까지 챙겨 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유키노시타는 종이컵에 홍차를 따라 세 명 몫을 마련한 후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깨닫고 말을 건다.
“어머, 고생 많았어.”
“딱히 고생할 일은 없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며 내가 앉자 유키노시타가 종이컵을 슥 내밀어 온다.
그 눈빛에는 나를 놀리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렇니?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촐랑거리던데.”
“뭘 촐랑거리기까지 했다고…”
웬 촐랑? 초콜릿하고 말랑하고 합친 건가?97 말랑말랑한 초콜릿이 말
이 돼?98 어쨌든 내가 촐랑촐랑 돌아다니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
다 보니 차마 부정할 수가 없다.
“이제서야 여유가 좀 생기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가 홍차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나 또한 마
찬가지로 홍차를 후우후우 식히며 마시기로 한다.
평소에 쓰던 찻종지와는 다르게 종이컵은 아무래도 불안스럽고, 열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도 있다 보니 자연히 마시는 속도가 느릿느릿해
진다. 그래도 아까까지 바깥에 있던 탓에 차갑게 식은 몸을 따뜻하게
데우기에는 충분하다. 한두 모금 홀짝홀짝 마시자 후아 하고 한숨이
흘러나온다.
눈을 힐끗 돌리니 유키노시타 역시 피곤한 듯 한숨을 흘리고 있다.
“너도 고생 많았다.”
“그래. 그렇네. ……고생이었어.”

97
チョコだけにですかね(초콜릿이라서요?). ‘ちょこまか(쵸코마카, 촐랑촐랑)’의 말장난.

98
チョコとマカで疲労にはたいそう効きそう(초콜릿과 마카는 피로에 특효라던데). 말장난.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는 조용히 오븐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 시선 끝에는 유이가하마가 있었다.
양손에 주방용 장갑을 단단히 낀 채 오븐 트레이를 들고 후다닥 이
쪽으로 달려온다. 그래, 그런 거였나. 유키노시타가 과자 만드는 걸 지
도한 사람은 미우라와 카와사키만이 아니다. 유이가하마의 과자 만들
기 또한 함께 지도하고 있었을 터. 그러니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힛키~! 이거 한 번 먹어 봐!”
그릇에 담긴 수제 초콜릿 쿠키를 짜잔~! 하고 보여 준다. 계속 오븐
앞에서 대기하다가 바로 가지고 온 건지, 갓 구운 쿠키에서는 향기로
운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쿠키다. 모양은 약간 비뚤비뚤하긴 하지만 태우지
않은 건 확실하고, 얼핏 보기에 이물질이 혼합돼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여기까지는 문제 없다.
이제 남은 건 맛이다.
정면에 있는 유이가하마의 모습을 힐끗 살핀다. 반짝반짝 기대로 가
득 찬 눈동자, 안절부절 불안스럽게 흔들리는 어깨, 자신 없는 듯 애
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입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차마 안 먹을 수가 없다…….
목구멍에서 꿀꺽 하는 소리가 난다. 물론 침 넘어가는 소리는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방금 목구멍으로 넘어간 건 결연한 각오!
“……좋아, 먹어 볼게.”
스읍~ 하아~ 하고 심호흡을 한 후 소매를 단단히 걷어붙이고! 손을
휙 뻗던 그때,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가 훗 하고 태연한 분위기로 입을
열어 말한다.
“뭔가 비장한 각오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괜찮아. 일단은 나도 함
께 만들었으니까.”
“……뭐야, 그럼 안심이네.”
“말이 너무한 거 아냐!?”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쿠키를 입에
쏙 던져 넣는다. 우물우물 우적우적 씹은 후 꿀꺽 삼킨다. 잠시 기다
려 봤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은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우와, 대단한데. 평범하게 먹을 수도 있고.”
“먹을 수 있다니, 말이 뭐 그래……? 당연히 먹을 수 있는 거지, 음식
물이라구.”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솔직한 감상에 유이가하마가 뾰로
통하게 뺨을 부풀린다. 저기요, 님 요리 스킬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엄청난 칭찬이거든요?
하지만 정말로 놀랐다. 유이가하마도 장난 아니게 애를 많이 썼나 보
다. 하긴 그것도 전부 유키노시타의 지도가 있었던 덕분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유키노시타 쪽으로 눈을 돌리자, 유키노시타는 어깨
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분위기로 가슴을 쭉 편다.
“뭐, 당연한 결과야. 틈틈이 똑바로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그거 감시하는 거였어!? 난 그냥 가르쳐 주는 건 줄 알았는데……”
유이가하마는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유키노시타 어(語)에서는 감시와
교육이란 단어가 거의 동의어에 가까우므로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도 유키노시타는 두 단어의 차이를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지금은 쿠키를 트레이에서 종이 접시로 옮겨 담으며 검사를 진행
하는 중이다.
그러더니 턱에 손을 얹으며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문제 없어 보이는구나. 시식도 무사히 끝났으니까. 나도
먹어 보기로 할까?”
“그거 설마 독극물 검식이었냐……? 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그
래?”
“독극물 같은 소리 하기 없기! 그리구 나두 먹을 거거든!”
세 사람 모두 자리에 앉아 쿠키로 손을 뻗는다.
바삭바삭한 식감과 코를 간지럽히는 버터의 향기. 은은한 달콤함과
비터 초콜릿의 쌉쌀한 뒷맛의 조화가 무척 훌륭하다.
“……맛있어.”
한 개 먹어 본 유이가하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유키노시타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더니 유이가하마는 기쁜 듯
이 에헤헤 웃고, 거기에 유키노시타도 미소로 답한다.
그리고 유이가하마가 빙글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한다.
“그치? 맛있지?”
“아니, 그러니까 평범하게 맛있대도.”
아까도 말했구만. 아닌가? 유이가하마의 기세에 밀려 그렇게 답하자,
두 사람이 표정의 희미하게 흐려진다.
“평범……”
“평범, 하구나.”
유이가하마는 어깨를 약간 떨구고, 유키노시타는 힐끗 가볍게 노려본
다. 어어, 잠깐만,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되나……? 머릿속의 히키가
야 하치만 오라버니 어록을 긴급히 끌어내어 대(對) 코마치 용으로 숙
지해 둔 어휘들을 총동원한다.
“아, 어~ 그 뭐냐, 너무 맛있네요. ……고마워.”
조심조심 머뭇거리며 벌벌 떨면서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하마의 표정
이 활짝 폈고, 유키노시타의 시선은 부드러워진다.
“응!”
유이가하마가 밝은 분위기로 대답하고, 유키노시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홍차를 새로 따라 준다.
다행이야, 코마치, 오빠가 무사히 정답을 맞춘 거 같네…….
그런 식으로 괜히 코마치를 팔아먹긴 했지만, 솔직히 쿠키는 정말로
맛있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달콤한 쿠키도, 따스한 홍차도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채워졌다고
느낀다.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입 안으로만 다시 한 번 꽤 즐겁구나,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또각 하고 힐이 바닥을 울린다.
발걸음 소리는 다가오는 기척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존재감을 과시
하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실체를 가지고 나타
난다.
힐 소리를 깨달은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힐끗 내 뒤를 향한다. 그러더
니 유키노시타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뒤에서 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예상할 수 있
었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다.
“언니. 무슨 용무라도?”
그렇게 묻는 유키노시타의 말에 하루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오직 나를 똑바로 응시할 뿐이다. 조용히 손가락으로 입
가를 쓰다듬으며, 그 천천히 요염한 입술을 연다.
“그게 히키가야가 말하는 진실된 거니?”
그 말을 들은 순간 등줄기로 한기가 오싹 흘렀고, 나도 모르게 하루
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하루노는 나에게 도망칠 곳을 허락지
않았고, 나와의 거리를 한 발짝 더 좁혀 온다.
“이런 시간이 네가 말하는, 진실된 거야?”
“……글쎄요.”
그런 의미 없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루노의 목소리에는 차가움이, 그리고 순수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듯한,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
백하는 듯한 그 음성이 나를 강하게 내밀치는 것 같았다.
“언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짓이야?”
“마, 맞아요. 저, 그, 그게……”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입을 여는 것
을 조용히 손을 들어 제지한다. 지금 질문받고 있는 사람은 나다.
실은 그런 짓을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나의 대
답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오직 가만히 내 눈을, 일
거수일투족을, 호흡 하나마저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게 그런 거라고?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거기서 말을 끊고는, 하루노는 등 뒤로 다가와 목덜미 뒤로부터 천천
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네가 그렇게 시시한 아이였니?”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도, 조금이라도 움찔했다가는 피부
가 맞닿을 만큼 곁에 다가와 있는데도, 그 말은 무서우리만치 먼 곳에
서 전해져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재미난 놈이었으면 진작에 반에서 스타가 됐겠죠.”
“그런 부분은 참 좋아해.”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한 내 대답에, 하루노는 진심으로 재미
있다는 양 키득키득 웃고는 그제서야 내게서 한 발짝 떨어져 준다.
그대로 멀리 떠나가 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그
러지 않는다.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
다.
하루노는 한 발 물러난 곳에서 우리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본다.
“……하지만, 지금의 너희 모습은 왠지 시시한걸. 난…… 예전의 유키노
가 더 좋은데.”
그 말에 무심코 숨을 삼킨다. 뺨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숙이고 만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의 표정은 살펴볼 수 없
지만, 그래도 아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멋대로 그렇게 생
각하였다.
아무도 하루노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걸 확인하자 그녀는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바닥을 울리는 힐 소리가 멀어져 간다.
귓가로 전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똑똑히 이해한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넌지시 말했다. 이런 건 진실된 것일 수 없다고.
동감한다.
나는 이 상황에, 이 관계에 분명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단지 익숙지 않아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단순히 그래서 느껴지
는 위화감이라 생각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차차 익숙해지고 받아들
일 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그 위화감을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줄곧 가슴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것. 가라앉지 않던 엷은 한기. 지
금껏 내색하지 않았던, 그 불편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신뢰 같은 게 아니라고. 더 가혹한, 끔찍한 무언가라고.

× × ×

축제가 끝난 후의 분위기는 언제나 적막하기 마련이다.


이 조리실에서의 이벤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잇시키가 간단한 폐
회사를 선언하자 각자 자리를 정리한 후 삼삼오오 해산에 들어간다.
하나둘씩 사람이 줄어들어 가는 사이에, 떠들썩한 분위기였던 조리실
도 어느덧 정적이 내려앉는다. 남아 있는 이들은 현직 학생회와 우리
봉사부뿐이다.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쓰레기 처리 및 시설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
데, 포스터를 회수하러 갔던 잇시키가 돌아온다.
“나머지는 학생회에서 할 테니까 그만 하셔도 돼요.”
그 말에 새삼 실내를 둘러보니 확실히 그리 대단한 일거리는 없어
보인다. 남은 일은 그냥 맡겨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대답은 달랐다.
“웅~……. 그래두, 마지막까지 도울게.”
“그래. 딱히 사양할 필요는 없어.”
유이가하마도 유키노시타도, 그리고 나 역시도. 똑같이 남아서 돕기
를 선택하였다.
우리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잇시키는 확인이라도 하는 양 내 쪽으
로 시선을 힐끗 보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 답하며 생긋 미소를 띄
운다.
“그래요? 그럼, 사양 않고 부탁드릴게요.”
잇시키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마도 정말로 부탁하는 쪽은 우리들이리
라. 이 일이 끝나게 되면 싫어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시점을
조금이라도 유예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저항도 얼마 이어지지 못한다.
정리를 대강 끝내고 나니, 우리가 있던 조리대 주변만이 마지막으로
남게 되었다.
완전히 식어버린 홍차 컵을 꾹 쥐어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고 입구를
단단히 묶고 나니 이제는 더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문단속도 분실물 확인도 마친 후 모두 커뮤니티 센터 밖으로 나온다.
쓰레기 봉투를 지정된 장소에 던져 놓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 선배님, 고생 많으셨어요.”
커뮤니티 센터 입구 근처에서 잇시키가 꾸벅 인사를 한다. 학생회 임
원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다. 돌발적인 이벤트였던 만큼 다들 피
로한 기색이 물씬 묻어난다.
뒷풀이 하러 가자는 소리조차 나오기 힘들 만큼 기진맥진해 있었으
므로, 그대로 다들 흩어져 귀로에 오른다.
진이 다 빠진 건 우리 셋도 마찬가지다.
유키노시타가 가방과 약간 큰 손짐을 고쳐 든다. 내용물은 아마도 홍
차와 조리 기구 같은 물건일 것이다.
“……그만 갈까?”
“그러자.”
유키노시타에 이어 나도 자전거를 밀고 일단 역 방향으로 향하려 한
다. 그러나 거기서 유이가하마가 자전거 짐받이를 꾹 쥔다.
“왜 그래……?”
내 물음에 유이가하마가 약간 난처한 분위기로 웃는다.
“이, 있잖아, 밥, 먹구 가면 안 돼?”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와 유키노시타는 얼굴을 마주본다.
“글쎄. 그러기에는 늦은 시간인데……”
“그럼 말야, 나 오늘 유키농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테니깐 거기서
먹자, 응?”
“하룻밤은 뭔 하룻밤이야…… 그렇게 맘대로 결정해도 되냐?”
하기야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 집에서 종종 묵고 있기도 하고, 이
런 이벤트 전후마다 함께 돌아가는 경우가 왕왕 있는 듯한 이미지다.
“괘, 괜찮지 않아? 안 돼?”
유이가하마가 어리광을 피우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시타
는 한숨을 작게 내쉰다.
“나는 상관없지만……”
“만세~! 그럼 얼른 가자! 힛키, ……어떡할 거야?”
그물음에는 방금 전 유키노시타에게 부리던 어리광과는 다른, 무언가
절박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제대로 거절할 이유도 떠올리지
못한 채 나는 수긍하고 만다.
“나도 갈게, 배도 고프던 참이고. 역에서 모이기로 할까?”
“응!”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자전거의 방향을 빙글 돌려, 그대로 페달을 밟기 시작하였다.

× × ×

내가 약속한 역에 도착하자 때맞춰 두 사람이 개찰구를 나온다.


두 사람은 전철로 이동하였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물론 당연
히 전철이 더 빠르지만, 대기 시간을 감안해 보면 소요 시간에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이번 같은 경우는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약속장소에 모인 후, 우선은 유키노시타의 손짐을 가져다 놓으러 집
부터 들르기로 하였다.
역에서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셋이서 때로는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
며, 때로는 아무 말 없는 시간을 느끼며 걸음을 걷는다.
큰 공원 옆길을 통과하자 낯익은 타워 맨션이 보이기 시작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맨션 입구로 들어서려던 순간 유키노시타가 걸음을
뚝 멈춘다.
“왜 그래?”
“아, 아니……”
무슨 일인지 물어도 유키노시타의 반응이 둔하다. 의아한 시선으로
가만히 무언가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차 한 대가 정차
해 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검은색 고급 차량이다.
저것은 분명.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그 차량의 문이 열리고, 한 여성
이 안에서 내린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리고 기모노 차림으로 걷는 자
세에는 화려함과 함께 위엄이 배어난다.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다.
“엄마……. 여기는 왜……”
“하루노에게 네 진로에 관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 일로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유키노. 너, 이런 시간까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에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떨구고 만다.
그 모습을 보고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나직이 한숨을 흘린다.
“너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리자 유키노시타는 한순간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살짝 깨문 채 시선을 피하고 말 뿐이다. 다정하면서도 차
가운 그 말은 유키노시타를 단단히 얽어매었다. 그녀 자신을 규정하고,
동시에 부정하는 데에는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유키노시타 어머니의 시선은 전혀 날카롭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분노
나 짜증과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탄과도 비슷한 무언
가가 느껴졌다.
“너를 믿고 있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두었는데……. 아니, 내 책임,
내 실수로구나.”
일체의 반론할 여지를 주지 않고,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
하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유키노시타가 연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보지만, 그조차도 고작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사라지고 만다.
“내가 잘못한 걸까……”
미안해하는 것처럼, 후회하는 것처럼, 그렇게 툭 흘러나온 가냘픈 혼
잣말. 그 자책하는 태도는 타인의 비난을 결코 허락지 않는다. 심지어
그 말을 듣고 있는 본인, 유키노시타에게도 말이다.
휴우 하고 유키노시타의 어머니가 회한의 한숨을 흘리자, 대화에 끼
어들 틈을 찾던 유이가하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저기요…… 오늘은, 학생회 이벤트 때문에요, 그게, 늦게까지 도와주
느라……”
“그래, 바래다주러 온 거구나. 고맙단다. 하지만, 벌써 늦은 시간이니
너희 부모님께서도 분명 걱정하실 거야. ……그렇지?”
그러니, 그만 돌아가렴.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
만,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전혀 모나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러
운 미소로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그렇게 고한다.
그러는 동시에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그 말로 확실한 경계선을 그
어 놓는다. 이건 집안 문제니까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이쪽도 물러날 수밖에 없다. 나도 유이가하마도 이 자리에서는
어떤 발언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사뿐사
뿐 거리를 좁혀 와서는 유키노시타의 어깨를 조용히 만진다.
“너는 너다운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아갔으면 한단다……. 하지만 잘못
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건 걱정스러우니까…….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그 말에 대체 얼마만큼의 질문할 의사가 있는 걸까. 그조차도 읽어
낼 수가 없다.
“……제대로 설명할게.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줘.”
“그래……. 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고개 숙인 채 말하는 유키노시타의 말에 어머니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나와 유이가하마 쪽으로 힐끗 시선을 향한다.
“……그럼, 무사히 바래다줬으니, 그만 간다.”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의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
린다. 혼자 사는 딸 곁에 외간 남자가 계속 가까이 있는 것도 염려스
러울 것이다.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건 유키노시타에게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
“나, 나두, ……나중에 봐!”
뒤이어 유이가하마도 그렇게 말하며 탁탁 뛰어온다. 역시 이런 상황
에서 자고 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
몇 미터 정도 거리를 벌리고 뒤를 힐끗 돌아보자, 유키노시타는 어머
니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그 대화를 마치고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차로 돌아간다. 뒤이어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유키노시타도
이윽고 입구 쪽으로 사라져 갔다.
나와 유이가하마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유키노
시타 가의 자동차가 천천히 떠나간다. 뒷좌석에는 선팅 필름이 붙어
있어 밖에서는 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이
쪽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초조함을 떨칠 수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유이가하마가 잰 걸음으로 몇
걸음 앞서 간다. 그러더니 몸을 이쪽으로 몸을 빙글 돌린다.
“그럼 나, 그만 갈께.”
“아, ……바래다 줄게.”
그 말에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역까지 바로 앞인데 뭐. 게다가, 왠지…… 치사하단 생각이
들어서.”
뭐가, 라고는 묻지 않았다.
“……그래.”
맥없는 말로 그렇게만 대답한 후, 걸어 나가는 유이가하마의 뒷모습
을 쳐다본다.
딱히 역까지 들렀다 가더라도 우리 집까지 가는 거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가로등 아래 비치는 유이가하마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후, 그제서
야 나도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바람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겨울 공기가 노출돼 있는 뺨으
로 꽂혀 온다.
무작정 다리를 움직이고 있자, 열이 오르는 몸과는 정반대로 머릿속
은 차갑게 식어 간다.
나다움. 그녀다움. 자기 자신다움.
분명 누구나, 누군가가 규정한 자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그건
항상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건 나도 그녀도 마찬가지다. 우리다운 모
습이란 항상 어딘가에서 엇갈리고 있다.
누구에게 확인을 구할 것까지도 없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내가 말하는 것이다. 예전의 히키가야 하치만이 계
속 외쳐대는 것이다.
그걸로 괜찮냐고. 그게 네 바람이냐고. 그런 게 히키가야 하치만이냐
고.
그 욕설을, 고함을, 포효를, 애써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말을 대신해 뜨겁게 맺힌 숨결을 토했다.
자기 자신조차 그것이 자기답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진실된
것은. 진정한 우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에게 어떻게 관계
를 규정하는 것 따위가 가능하단 말인가.
위화감이라고, 그렇게 이름붙여 버렸다면 그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분명, 이 감정도, 이 관계도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름
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의미를 부여하면 다른 기능을 상실해 버리게 되고 마니까.
틀에 꼭 들어맞출 수 있다면 분명 편했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은 이
유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모양을 만들어 버리면 그 후에는
산산이 부수지 않는 한 모양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서지지 않는 걸 원했기에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를 피하고 있었다.
나도 그녀도, 그저 형태 없는 말에 매달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것들만 온통 생각하고 있었다.
최소한 눈이라도 한번 내려 준다면 온갖 것들을 덮어 가려 줄 테니
괜한 생각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하지만 이 거리에 눈이 내리는 경우는 드문 일이고, 오늘도 밤하늘은
한 점 흐림 없이 청명하기만 하다.
그저 황황한 별빛만이 지금 내 모습을 뚜렷이 비추어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7. 속절없이,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눈동자는 맑기만 하다. (pp.225-261)

발렌타인 데이를 목전에 두고 열린 그 요리 이벤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은 그렇게나 맑던 하늘도 오늘은 흐린 날씨로, 요 며칠간은 계속
불안정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저녁의 추위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것도 어차피 오차의 범주 내에서의 변화일 뿐 치바
의 겨울은 여전히 춥다.
방과 후가 되면 해가 떨어진 만큼 한층 더 추워진다.
꽁꽁 얼어붙은 특별관 복도를 도망쳐 나오듯 부실로 들어와, 난방으
로 기분 좋게 몸을 녹이며 문고본을 펼치고 있었다.
황혼이 다가오는 평소와 같은 부실.
긴 책상에는 티컵과 머그컵, 그리고 그것들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찻
종지가 나란히 있다.
시야 한쪽 끝에서 유키노시타가 잔마다 홍차를 따르는 모습이 보인
다. 나와 유이가하마 앞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컵과 찻종지를 가
져다 놓는다.
그 홍차를 받으려 문고본에서 얼굴을 들자, 마침 맞은편에 앉은 유키
노시타와 눈이 마주친다.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홱 숙이더니 이내 다시금 힐끗 얼굴을 든다. 그
러더니 다시 눈을 내리깐다. 그 초조해하는 태도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낀다. 그건 유이가하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유키농?”
그렇게 말을 걸자 유키노시타는 조심스럽게 유이가하마를 보더니 뒤
이어 나에게도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기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로 입을 연다.
“저번 일은 미안해……. 그, 엄마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그 몸짓과 몇 개의 단
어로 유키노시타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날 있었던 일은 굳이 생각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잊혀지지 않은 채
줄곧 머리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유키노시타의 어머니는 물론이
거니와 하루노에게 들은 말도, 유이가하마가 떠나가면서 남겼던 말도,
내 안에서의 외침도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굳이
토로해 본들 의미도 없을뿐더러, 누군가를 책망할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가볍게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러자 대각선 앞에 앉아 있던 유이가하마도 신경 쓰지 말
라고 손을 크게 붕붕 내젓는다.
“아니야! 나두 툭하면 집에 늦게 온다구 엄마한테 한 소리 듣고 그러
는걸, 뭐.”
“하긴, 엄마들이란 다들 그런 법이지. 괜히 이말 저말 물어보고 싶어
하거든. 덤으로 방도 멋대로 치우고, 뜬금없이 학교에서는 잘 지내냐
고 물어보기도 하고 말이야.”
왜 세상 어머니들은 아들의 거주 공간과 교우 관계, 심지어는 책의
취향까지 관심을 가지는 걸까……. 뭐야? 내 팬이야? 땡큐, 엄마. 그래
도 책상 서랍만은 손대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나와 유이가하마의 말에 유키노시타의 표정이 풀린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 보여 주던 그 분위기로 어깨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휙
쓸어 넘긴다.
“……그래, 히키가야 어머니께서는 유난히 힘드실 것 같구나.”
“힛키네 엄마라~……. 어떤 분이셔?”
“아니 뭐, 딱히 어떠냐 물어봐도 별 건 없는데……. 그냥 평범하셔. 코
마치가 한 명 더 있는 느낌이야. 요즘은 시험도 있다 보니 코마치하고
엄마하고 종종 시끌시끌하더라고.”
보통은 사이좋은 모녀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충돌하기도 한다. 하기야
서로 시끄럽게 언성을 높이게 되는 최대 요인은 주로 아버지의 처우
에 관련된 거긴 하지만……. 코마치를 걱정한 나머지 이것저것 잔소리
를 늘어놓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화를 내고, 코마치도 화를 내고, 결
국 집 안이 살벌한 분위기가 되고 만다. ……아, 이건 모녀 간의 충돌이
아니구만. 그냥 아버지가 미움받고 있을 뿐이로군. 어쨌든 입시나 진
로 때문에 집안이 소란스러운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유이가하마가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코마치두 벌써 내일이 시험이구나. 우리두 입학 시험 때
문에 쉬는 날이구.”
“코마치니까 괜찮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렇지……”
유키노시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고개를 끄덕여
답하는 내 목소리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으리라.
내일은 마침내 고등학교 입학 시험 당일이다. 동시에 발렌타인 데이
기도 하므로 코마치 초콜릿은 보류다. 안됐네요! 내년을 기대하시라!99
뭐 그렇게 내년을 기약하고 싶어지기는 하지만, 내년 역시 어떻게 될
지는 모른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이 어두워진다.
그 마음을 표정으로 알아차렸는지, 유이가하마가 염려하는 미소를 지
어 보인다.
“오빠 입장에선 걱정스럽겠네……”
“그러게 말이야……”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99
残念無念また来年. ‘테니프리’, 키쿠마루 에이지, ‘残念無念また来週(유감 무념 다음주에 봐!)’.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여태까지 줄곧 생각하지 않으려 애
쓰던 미래에 대한 원망과 한탄이 입을 뚫고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
다.
“코마치는 엄청 귀여우니까 보나마나 인기가 철철 넘치겠지? 그럼
꼬여드는 남자 놈들도 일일이 경계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나 같은 막
장 오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못하게 막아야 될 거 아냐. 코마치
의 명예에 관계된 일이니까.”
“걱정이 그거였어!? 게다가 합격 전제야!?”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모르겠구나……”
유이가하마는 경악하는 얼굴로, 유키노시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각각 한숨을 흘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킥킥 웃는다.
오늘은 딱히 손님이 올 기미도 없고, 부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느슨
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거기에 희미한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문고본 페이지를 넘겼다. 유이
가하마는 편안한 분위기로 폰을 만지작거리고, 유키노시타는 포트에
덮어 놓은 보온용 덮개를 벗기고 청초한 몸짓으로 홍차를 한 잔 더
따른다.
그리고는 툭 하고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더니 안에서 장식 없는 소
박한 종이 봉투를 꺼낸다. 입구를 열자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냄새가 은은히 흘러나온다. 아무래도 차에 곁들이고자 준
비해 온 쿠키 류의 과자인 모양이다.
유키노시타는 그것들을 천천히 정성스럽게 나무 그릇에 옮겨 담는다.
힐끗 시선을 돌리자 초콜릿 칩에 잼, 그리고 바둑판무늬와 각양각색의
쿠키가 나란히 담겨 있다. 그 다양함과 종이 봉투로 살펴 보건대 어디
제과점 같은 곳에서 사 온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아, 그거 유키농이 직접 만들어 온 거야?”
유이가하마가 기대로 가득찬 모양새로 반짝반짝 눈을 빛낸다.
유키노시타의 요리 실력은 확실히 보증돼 있다. 저번 요리 이벤트 때
도 그렇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그 실력을 선보인 바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유이가하마가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유이가하마가 별 생각 없이 말한 그 한 마디에, 어째서인지
유키노시타는 대답을 머뭇거린다.
“……그, 그래. 어젯밤에 막 만들었어.”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는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마치 손장난이라
도 치는 것처럼 나무 그릇 가장자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힐끔 살펴보기라도 하는 듯한 시선으로 이
쪽을 쳐다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도 어깨도 미동도 하지 않고 앞머리 사이로
눈길만 살짝 보낼 뿐인, 마치 똑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망
설이는 눈빛. 그 몸짓은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유키노시타의 입가가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 아주 살짝 열렸다가
도로 닫힌다. 그 순수해 보이는 입술이 몹시 마음에 걸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불현듯 부실에 정적이 감돈다.
“그렇구나……. 나두 그 뒤로 살짝 노력해 봤는데, 쪼끔 힘들더라구~”
한순간 내린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유이가하마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는 사과머리를 꼬물꼬물 만작거리며 계속 고개를 갸웃
거린다.
“우리 집 오븐레인지 왠지 고장난 거 같애~. 뭔가 막 부글부글거리
고 그러긴 하는데, 하나두 바삭하게 안 구워지지 뭐야~”
“그거 그냥 전자레인지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후우 하고 한숨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여전히 변한 게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유키노시타도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소심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가방을 끌어당겨 무릎에 얹더니, 안에서 또 하나 작은 종이
봉투를 꺼낸다.
처음부터 유이가하마에게 주려고 가져 온 물건이겠지. 이쪽은 귀여운
핑크빛 리본과 고양이 발자국이 들어가 있다.
“이거, 괜찮다면 받아 주겠니?”
“그래두 돼!? 오옷~! 고마워~!”
“내용물은 거의 똑같겠지만.”
무척 기뻐하며 받는 유이가하마를 보며 유키노시타는 미안한 듯 그
렇게 한 마디 덧붙인다.
“아니야, 너무 좋은걸! 유키농이 만든 과자가 얼마나 맛있는데.”
유이가하마는 그 종이 봉투를 품에 꼬옥 안는다. 그리고 그 종이 봉
투를 새삼 두 손으로 들어 보더니 따스한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그렇게 두세 차례 눈을 깜빡이고는 그 시선을 조심스레 유키노시타
쪽으로 돌린다.
“……있잖아, 내 거뿐이야?”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만다.
손에 든 문고본을 읽어 나가려 애써 시선을 고정시켜 보지만,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나는 왜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걸까…….
귓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볼 소리가 깡깡 메아리치는 기분이다.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몸 안에서 솟아나는 소리에는 귀를 막을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마음속을 사고하는 걸로 꽉 메우
는 게 전부다.
멋대로 속마음을 읽고, 멋대로 의식하고, 멋대로 기대한다. 내 몫이
준비가 되어 있든지 말든지, 어느 쪽이든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 단 세 명뿐인 부활동이다. 별 의미 없는 당연한
배려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심각한 자
의식 과잉이라 할 수 있다. 그딴 걸 머리로 생각하는 것도 소름 돋는
일이고, 그걸 또 필사적으로 타이르고 속으로 삼키려 하는 것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런 역겹도록 소름 돋는 생각은 당연히 빗나가기 마
련이다.
그렇게 머릿속을 애써 생각들로 가득 메워도 초조한 마음은 가라앉
지 않았다. 일부러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을 해 보이고, 흔들리는 시
선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 바람에 시야 한구석에서 유이가하마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
이 눈에 들어오고 만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살짝 움직인다.
“……힛키 꺼는?”
그렇게 일부러 물어볼 것까진 없잖냐, 아니, 딱히 바라지도 않거든?
아니, 진짜라니까?
그런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유이가하마는 목소리도 시선도 언제나 그랬듯이 배려하는 분위기로
소심하게 묻고 있을 뿐이었건만, 그럼에도 손은, 무릎에 놓인 그 왼손
은 스커트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혀 목
소리가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니, 딱히 난……”
그런 허둥대는 목소리만 꼴사납게 흘러나왔고, 그 위로 유키노시타의
한숨 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유키노시타는 무릎에 얹어 둔 채 있던 가방을 꾹 쥐더니, 그것을 옆
구리 아래로 내리고는 조용히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 책상에 몸을 기대기라도 하듯 손을 쭉 뻗더니, 쿠키가 담긴 그릇
을 내 쪽으로 쓱 민다.
“……괜찮다면.”
“으, 으응……”
그렇게 대답해 보아도 유키노시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석양이 은은하게 비춘다.
흐린 날씨 탓인지 저녁놀은 평소 이상으로 더욱 새빨갛고, 부실 안에
도 그 빛이 스며들고 있다.
주홍빛으로 물들인 귀와 목덜미, 어색한 듯 꼬옥 다물고 있는 입술.
바쁘게 깜빡거리는 긴 속눈썹.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버겁던
탓에 나는 다소 거칠게 문고본을 툭 덮고 쿠키 쪽으로 손을 뻗는다.
“……맛있네.”
“그치!”
불현듯 흘러나온 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유이가하마가 몸을 쑥 내
밀며 화답해 온다. 내친김에 쿠키도 한 개 집어가더니 냠냠 먹고는 행
복한 표정으로 뺨에 손을 얹는다.
“……그, 그래? 그냥 늘 하던 대로 만들었을 뿐인데.”
우리의 반응을 보고는 유키노시타는 어깨에 힘을 빼고 그렇게 말한
뒤, 겨우 자리에 도로 앉는다.
바르게 위치된 의자와 한가운데에 놓인 쿠키. 컵과 찻종지에는 따스
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오늘의 홍차와 간식에 대한 감상을 서로 나누고, 때때로 묵묵히 책을
읽고 폰을 만지고, 어느샌가 또 대화가 재개되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다른 누구도 오지 않는 부실의 분위기는 무척 평온하였다.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고, 태양은 바다와 맞닿고 있었다.
겨울의 석양에는 열기가 없기에 아무리 빛을 비추어 밝힌들 차가움
을 녹여 주지는 못한다. 내버려 두면 그대로 계속 얼어붙게 되리라.
그렇기에 무리해서라도 움직여 녹이는 것이다.
설령 거기에 위화감이 있을지라도.

× × ×

결국 그 뒤로도 부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하교 시각을 기점으로


오늘의 부활동은 종료되었다.
문단속을 한 다음 유키노시타가 열쇠를 반납하기를 기다려 교사를
나왔다. 왠지 모르게 부실에서 하던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는 사이 자
전거 주차장까지 도착하게 되었고, 그 답례라 할 것까진 아니지만 나
역시 자전거를 밀며 두 사람을 교문까지 바래다준다.
내가 평소에 이용하는 쪽문 쪽이 아니라, 역으로 이어지는 큰 대로에
접한 정문 쪽으로 돌아간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날은 이미 완전히 어
두워져 있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을 보건대 이런 날씨라면 조만간 비
가 한 차례 쏟아질 것 같다.
“아우~ 추워~!”
“머플러를 똑바로 매는 게 좋겠구나.”
교문을 한 발짝 나선 유이가하마가 몸을 바르르 떨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유키노시타가 부지런히 유이가하마의 머플러를 고쳐 매 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훈훈해지지만, 몸은 그렇
지도 않은 모양이다. 해가 떨어지고 나자 추위는 한층 더 매서워졌고,
가만히 서 있으니 발밑에서 한기가 스멀스멀 빠른 속도로 타고 올라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난 아니게 춥겠는데……”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우울해진다. 이제부터 쌩쌩 몰아치는
찬바람을 뚫고 자전거를 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
나 또한 머플러를 고쳐 매고 장갑을 더 깊게 꾹 낀 후,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다.
“그럼 이만.”
“응, 또 봐.”
유이가하마가 가슴 앞으로 손을 흔들어 온다. 나는 거기에 고개를 끄
덕여 답하고, 자전거에 오르려 한다.
순간, 희미하게 한숨 섞인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저…”
뒤돌아보니 나를 불러 세우기라도 하려던 건지, 유키노시타는 방금
전보다 반 걸음 앞으로 나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눈짓으로 물어도 유키노시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무언가 몹시 말하고 싶어하는 그 입술에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저 왼
쪽 어깨에 멘 가방 입구를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망연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게 되자 차마 무슨 일이냐고 가벼운
분위기로는 물을 수 없었기에, 가만히 먼저 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린
다. 그렇게 소리 없는 입씨름이 계속되던 중, 발 아래쪽에서 모래 밟
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어~ 저기…… 나, 먼저 갈게?”
유이가하마가 난처한 듯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 발은 겨
우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장갑을 낀 손 그대로 사과머리를
쓰다듬더니, 반응을 살피듯 유키노시타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 시선에 유키노시타는 마치 도리질이라도 치는 것처럼 아주 살며
시 고개를 저으며, 지그시 유이가하마에게 매달리는 듯한 시선을 향한
다. 거기에 유이가하마는 한순간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내 고개를 들
어 다정한 시선으로 다시금 묻는다.
“어~…… 어떡할까?”
그 목소리에는 이미 난처한 기색은 사라져 있었고, 오직 상냥하게 확
인하는 듯한 분위기만이 느껴졌다.
“……그게…”
꺼내려던 말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사라진다. 유키노시타는 할 말
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답답한 표정으로 뺨을 붉힌 채 발밑으로 시
선을 돌린다. 너무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지 어깨를 흠칫 떨더니, 가
방을 아까 전보다 더 단단히 쥔다.
이어질 말만 계속 기다릴 뿐, 우리는 서로 한 걸음도 가까이 가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목소리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경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진다.
또각.
아스팔트를 울리는 힐 소리가 느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그 발걸음 소리가 내 심장 뛰는 소
리와 한데 섞여 들린다. 어쩌면 내 귀에만 들리는 환청 같은 소리일지
도 모른다. 줄곧 내 안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위화감이 질량을 가지
고 현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비단 나만이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
이가하마도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
고 깜짝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뚝 그친다. 유이가하마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
던 나와 유키노시타도 눈을 크게 뜬다.
“유키노, 데리러 왔어.”
“언니……”
그 사람의 모습을 앞에 두고 유키노시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다시 한 번 부츠 굽을 또각이며 우리 앞에 선
다. 코트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고는 당돌한 미소를 지으며 유키노시
타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고개를 갸웃한다.
“굳이 데리러 와야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엄마가 시켰어, 당분간 같이 살라고. 아, 남는 방 있지? 짐은 내일
도착할 건데 괜찮아? 오전 중에는 나도 있을 거니까 상관없지만, 오후
에는 외출해야 되니까 부탁 좀 해도 돼?”
하루노는 나와 유이가하마에게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건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 기세에 밀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면
외부인인 우리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남지 않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루노의 말투 자체는 짜증을 유발하는 말이었지만, 너무
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나머지 지극히 당연한 결정 사항을 이야기하
고 있을 뿐인 것처럼 들렸다. 반론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음을 그 태
도로 전달해 온다.
“자, 잠깐만. 왜 갑자기 그렇게……”
비난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모습으로 유키노시타가 말하자, 하루노
는 다소 요란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빼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
한다.
“몰라서 물어~? 짚이는 게 있을 텐데?”
그 물음에 유키노시타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그건, 나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야. 언니하고는 상관없어.”
유키노시타는 하루노를 찌릿 쏘아보며 명백한 거절 의사가 담긴 가
시 돋친 목소리로 단호히 대답한다.
유키노시타가 스스로 할 일. 그건 아마도 얼마 전 어머니와 나누던
대화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때 어머니가 던져 온 물음에 대해 언젠가 그녀 자신이 직접 이야
기할 거라고, 그렇게 약속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키노시타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밤 늦게 돌아오는 딸을 걱정하여 언니를 보
낸 것일까. 거기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유키노시타 어머니의 의도를
아는 이는 오직 하루노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노는 유키노시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머금고 있던 즐거운 미소는 사라지고, 가늘게 뜬 날카로
운 시선은 유키노시타를 붙든 채 놓아 주지 않는다. 유키노시타의 표
정부터 몸짓까지 모든 것을 비추고, 심지어 그 마음속조차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조용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윽고 하루노의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진다.
“……유키노 너한테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있어?”
“무슨…”
돌연히 튀어나온 그 말에 유키노시타가 당황한다. 무슨 소릴 하는 거
냐고 반문하려던 그 목소리를 가로막듯이 하루노는 계속 말한다.
“지금껏 내가 어떡하는지 보고 결정해 온 주제에, 네 생각 같은 걸
얘기할 수 있겠어?”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음에도 목소리는 평소 이상으로 훨씬 차가
웠고, 유키노시타를 꿰뚫는 듯한 시선은 얼어붙을 만큼 매서웠다.
반론하는 목소리도 거부하는 말도 없이, 유키노시타는 망연히 하루노
를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루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어이
없다는 양 한숨을 내쉰다.
“유키노는 항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허락받았지. 하지만 스스로
결정해 온 건 아니야.”
다정한, 혹은 동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유키노시타를 붙들고 있던 연민의 시선이 스르르 움직인다. 옆에 있
던 유이가하마를, 그리고 맞은편에 있던 나를 쳐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키득 웃는다.
“……지금도,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잖니?”
그 질문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유키노시타뿐만 아니라, 나도 다리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루노의
말을 틀어막고 싶어도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유키노는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자매 싸움은 다른 데 가서 해 주시죠?”
하루노의 질문을 가로막고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분명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입에 올리고 말 것이
다. 진실을 들이대고 말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이야기하게 둘 수는
없다. 유키노시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노는 관심이 싹 가신 것처럼, 재미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그
런 말밖에 할 줄 모르냐고 비웃는 듯한 눈초리였다.
“싸움? 이런 건 싸움도 못 돼. 옛날부터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
었으니까.”
“싸움이든 아니든, 이런 데에서 할 얘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서로 싸늘한 시선을 부딪친다. 눈을 피하고 싶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다.
“저, 저기요…… 제대로, 제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유키농두, 저두요.”
유이가하마가 감싸 주듯이 중간에 들어와 그렇게 말한다. 유키노시타
의 옆에 똑바로 서서 힘 있는 목소리로 입에 올린 말. 하지만 그 목소
리도 하루노의 시선에 노출되자 서서히 약해져 간다. 그리고 얼마 가
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만 유이가하마에게 하루노는 슬픈 듯 보이기
도 하는 상냥한 시선을 보낸다.
“……그래? 그럼 돌아가면 물어봐야겠네. 어차피 유키노가 돌이갈 곳
은 한 군데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덧붙여 말한 후 하루노는 발길을 돌렸다. 힐이 다시 또각거리
기 시작하고, 그 소리가 멀어짐과 함께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려
가는 게 생생히 느껴진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스며 나오는 음산한 저녁놀 사이로 사라지는 하
루노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고서야, 비로소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오랜만에 호흡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남겨진 우리는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
고 있는 유키노시타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서 있고, 유이가하마는 그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
를 한 다음에 어떤 말을 하고 헤어져야 좋을지, 오직 그 생각만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기……. 맞아. 우리 집, 갈래?”
그렇기에, 애써 분위기를 수습하듯이 웃음을 지으며 입에 담은 그녀
의 제안을 거절할 변명거리도 차마 떠올릴 수 없었다.

× × ×

학교에서 역 방향으로 뻗어나오는 큰 길을 따라 잠시 걷자, 대형 맨


션이 여러 채 늘어서 있는 골목에 접어든다.
유이가하마가 사는 맨션은 그 가운데 한 건물이었다.
거기로 향하는 길은 때마침 하교하는 학생들과 귀가하는 회사원들로
붐비는 시간대였기 때문인지 걸어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
득하였고, 아무 말 없이 걷고만 있는 우리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고마웠다.
나와 유키노시타가 한 말이라고는 집에 들어갈 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유이가하마의 방까지 올라온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가까스로 한숨 이외의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 조금 너저분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는 낮은 테이블 앞에 앉더니, 나와 유키노
시타에게 쿠션을 건네 온다.
“……고마워.”
유키노시타는 짧게 답례하고는 그 쿠션을 안고 유이가하마 옆에 조
용히 앉는다. 나도 따라서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는다. 두 사람과는 낮
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건너편 자리다. 짧은 털이 보송보송 깔린 핑크
색 러그 덕분에 바닥은 따뜻했다.
말랑말랑한 감촉의 쿠션을 안은 채 나도 모르게 방을 두리번거린다.
수납장에 빼곡히 들어가 있는 귀여운 잡화류의 물건들과 수수께끼의
동남아틱한 잡화,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 있는 패션 잡지, 그리고 창
고 대용으로 전락해 있는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공부용 책상.
유이가하마 본인 말대로 조금 너저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깔끔한 편에 속하는 방이다. 적어도 내 방보다는 훨씬 깔끔하게 정돈
돼 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는다. 방 안에는 좋은 향기가 감돌고 있
어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몹시 뒤숭숭해진다. 침대 쪽에서 흘러나오
는 그 향을 따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그리로 옮긴다. 그쪽을 언뜻 보
니 침대 옆에 작은 병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다. 병에는 막대 같은 게
여러 자루 꽂혀 있는 게, 아무래도 저게 향기의 원인인 것 같다.
저건 뭐 하는 물건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던 중 헛기
침 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자 유이가하마가 부끄러운
듯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너,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 줬음 좋겠어……”
“엥, 아, 아니, 왠지 튀긴 파스타100 같은 물건이 있길래, 저거, 응?”
삑사리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하마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다.
“저거, 룸 프레이그런스란 건데……”
호오, 말 그대로 풀이한다면 방 안에 두는 향수 같은 물건인가…….
자세히 보니 그 튀긴 파스타 같은 막대가 향수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빨아들여서 방 안에 확산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헤
에, 여자애 방에는 별 게 다 있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시야 한구
석에서 어깨를 떨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튀긴 파스타……”
보아하니 유키노시타가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웃을 건 아니지 않냐……? 변함없이 웃음 포인트가
살짝 이상한 아이로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온다. 유이가하
마도 안도한 것처럼 한숨을 흘린다.
겨우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자, 유키노시타는 쿠션
에서 얼굴을 들고 살며시 앉는 자세를 바로한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폐를 끼치고 말아서……”

100
揚げパスタ(아게 파스타).
“아니야! 신경 안 써두 돼.”
유이가하마가 가슴 앞으로 야단스레 손을 내저으며 짐짓 밝은 목소
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 목소리보다 한결 더 밝은 목소리가 겹
쳐 들려온다.
“그럼~. 전혀 신경 쓸 거 없단다~”
딱히 노크도 없이 갑작스레 문을 벌컥 열고, 차가 담긴 쟁반을 든 한
여성이 등장한다. 두꺼운 니트에 롱 스커트 차림을 한 차분한 이미지
의 옷차림으로, 다소 동안인 것도 한 몫 하여 무척 젊어 보이는 인상
을 받는다. 명랑한 분위기로 웃을 때마다 뒤쪽으로 묶은 사과머리가
신나게 흔들린다.
“엄마~! 갑자기 막 들어오지 마!”
유이가하마가 발끈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그 엄마라는 분은 “어~?”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넘긴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유
이가하마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붙임성 있는 사
근사근한 미소와 멋진 몸매에서 딸인 유이가하마와 동질성이 느껴진
다.
……아니, 언니라고 그래도 믿을 수준인데, 엄마라고 그러니까 엄마
맞겠지? 유이가하마네 엄마, 줄여서 유이가하마로군. 뭐지? 전혀 약칭
도 아니거니와 왠지 입에도 착착 안 붙는데.
그 유이가하마의 어머니는 낮은 테이블 옆에 쪼그려 앉아 차를 준비
하기 시작한다. 그 차를 “자~” 하고 내 앞으로 내민다.
“아, 잘 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예의에 맞는 걸까. 고맙습니다? 감사합
니다? 아니면 황공하옵니다? 남의 집에 방문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도저히 모르겠다. 게다가 상대방이 유이가하마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보니 한층 더 긴장되는 바람에 그만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왠지 살짝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있는데, “와아~” 하고 뭔가 기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슨 일
인지 신경이 쓰여 힐끗 고개를 들자, 유이가하마의 어머니가 나를 빤
히 쳐다보고 있었다.
헤에~ 호오~ 같은 감탄사를 연이어 들으며 한동안 계속 관찰당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 곤혹스러운 탓에 말문이 막힌 채 가만히 있자,
유이가하마의 어머니는 우후후 하고 즐겁게 웃는다.
“힛키…… 맞지? 유이한테서 늘 이야기 많이 듣고 있단다~”
“아, 예……”
자살하고 싶다. 왠지 쪽팔린 나머지 확 자살하고 싶어진다.
“엄마~!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란 말야~!”
당황한 모습으로 유이가하마가 어머니에게 달려든다. 그러더니 그대
로 과자가 든 쟁반을 빼앗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에이~……. 엄마도 힛키랑 얘기하고 싶은데~”
“그런 거 안 해두 돼~!”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체~ 하고 불만을 표시하는 어머니의
등을 유이가하마가 꾹꾹 밀어서 문 바깥까지 쫓아낸다.
그런 모녀의 대화를 유키노시타가 미소 띤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데,
등을 떠밀려 가던 유이가하마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모양이다.
“아, 그렇지. 유키농?”
“……아, 네.”
당황하면서 대답하는 유키노시타에게 유이가하마의 어머니는 방긋
미소를 짓는다.
“오늘 자고 갈 거지? 이불 꺼내서……”
“그것두 내가 다 할 테니깐~!”
유이가하마는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등을 꾹 밀고 문을 쾅 닫는다.
문 너머에서는 아직도 무언가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유이가하마
는 몽땅 무시한 채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아하하~…… 왠지 미안해. 우리 엄마, 유키농 와서 많이 기분이 좋으
신지, 왠지 분위기가 많이 업 되신 거 같애. 아, 부끄러……”
쑥스러워하는 유이가하마에게 유키노시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고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리고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이가 좋구나. ……조금 부러워.”
유키노시타의 표정에는 일말의 쓸쓸함과 회한이 엿보인다. 그런 어머
니에, 그런 언니다. 딱히 유키노시타가 아니더라도 화목하게 지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나와 유이가하마는 무심결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 침묵을 깨닫고 유키노시타가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 한다.
“미안해, 이상한 말을 꺼내서……. 그만 돌아갈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키노시타를 유이가하마가 말
린다. 다시 자리에 앉아 달라고 파닥파닥 손짓을 하며 밝은 분위기로
입을 열어 말한다.
“그거 말인데, 있잖아, 자고 가면 안 돼? 나두 자주 자고 오고 그랬
구. ……가끔 막 집에 가기 싫을 때두 있잖아?”
“어?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당황하였는지 유키노시타는 잠시 망설인다. 고
민하는 것처럼 시선을 안절부절 움직이더니 내 쪽을 힐끗 본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아까 있었던 하루노와의 대화를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에서
유키노시타가 집에 돌아가 본들 같은 상황만 반복될 것임은 명백하다.
게다가 유이가하마의 말투로 보건대 유이가하마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유이가하마를 힐끗 보자, 유이가하마
가 나만 알 수 있게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뭐, 얼굴을 맞대기 버거울 때에는 피하는 것도 원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효한 방법 중 하나다. 물론 그 경우에는 결론을 내릴
기한을 설정해 두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계속 도망만 치는 꼴이 되고
말지만, 아무튼 잠시 유예를 가지는 걸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
다.
“……뭐, 지금은 서로 냉정하기 힘들 거니까, 하룻밤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일단 연락은 해 두고 말이야.”
“응, 그게 좋을 거 같애.”
내 말에 유이가하마도 동의하자 유키노시타는 무릎을 안고 잠시 생
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그래, 네 말대로야.”
가방에서 폰을 꺼내고는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상대방은 아마 하루
노일 것이다. 몇 차례 신호음이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모양이
다. 유키노시타는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보세요. 지금은 서로 냉정하기 힘들 거니까, 하룻밤 생각하고
다시 이야기하러 갈게. 일단 연락은……”
유키노시타가 거의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자, 전화 너머의 상대방은 아
무 대답이 없는 듯 침묵이 흐른다. 유키노시타의 당황해하는 숨결 소
리와, 거기에 섞여 “지금 그거……” 하는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그 목소리 쪽으로 힐끗 눈을 돌리자 유이가하마가 깜짝 놀란 표정으
로 유키노시타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고 하던
그때, 전화 너머로 훗 하고 시시하다는 양 웃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흐응~ 알았어. 어차피 거기 히키가야 있는 거 맞지? 바꿔 줘.』
조용한 방 안에서 전화 너머로부터 들리는 그 도발적인 음성이 생생
히 전달돼 온다. 하루노의 부탁에 유키노시타는 순간 주저한다. 그러
나 전화 너머에서 『얼른』 하고 차갑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엷
은 한숨을 흘리고는 나에게 폰을 내밀어 온다.
“……언니가, 통화하고 싶대.”
나는 말없이 전화를 받아 들고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댄 후, 천천히 입
을 연다.
“……왜요?”
『……상냥하구나, 히키가야는.』
조소라도 하는 것처럼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는 아름답고도 요염하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탓에 마치 도깨비에 홀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
다.
분명 전화 너머의 웃는 얼굴은 지독하게 일그러진 아름다움을 발하
고 있으리라. 그 표정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 얼굴의 모양
새는 분명 그녀와 무척이나 닮아 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보
아도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내 목에서 꿀꺽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나고, 나도 모르게 유키노시타를
쳐다본다.
유키노시타는 무료한 분위기로 자신의 팔을 안고 창가에 서 있었다.
벽에 기대려는 듯한 자세로 몸을 젖힌 채 창밖으로 시선이 쏠려 있다.
점점이 켜진 가로등도 먼 빌딩 숲의 빨간 불빛도 짙게 드리운 밤을
환히 비추기에는 모자랐기에, 유리창은 새카만 거울로밖에 보이지 않
는다.
거기에 비친 눈동자는 한없이 맑은데,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 × ×
하루노는 고작 그 한 마디만을 하고는 멋대로 전화를 끊었고, 그걸로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유키노시타의 폰 화면을 손수건으로 꾹꾹 닦아 돌려주자, 불현듯 피
로가 몰려온다. 깨닫고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
“그럼 난 슬슬 가 볼게.”
“응……”
잡아채듯이 가방을 휙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이가하마도 같이
일어선다. 거기에 한 박자 늦게 유키노시타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무래도 배웅해 줄 생각인 모양이다.
“아니, 그냥 여기서 헤어지면 되는데.”
“여기서 헤어지긴 쫌 이상하잖아?”
그렇게 말하고는 유이가하마가 앞장서듯이 방문을 연다. 그러자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털뭉치 하나가 고속으로 달려온다.
유이가하마의 애견 사브레다. 그러더니 사브레는 그대로 나를 들이받
는다.
“우옷……”
“얘, 사브레!”
유이가하마가 야단을 치고는 내 발밑에서 배를 드러내 보이는 사브
레를 안아 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 유키노시타가 움직임을 뚝 멈춘다.
아, 이런. 이 녀석은 개에 약했지.
현관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유키노시타는 유이가하마보다 세 발짝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게, 최대한 사브레하고 접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양이다. 반면 사브레 같은 경우는 유이가하마의 품에 안겨서도
킁킁 왕왕 짖으며 요란하게 날뛰고 있는 중이다. 음~…… 이거 정말
괜찮으려나……. 일단 유이가하마에게 조심하도록 말해 두는 게 좋을지
도 모르겠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 직전에 유이가하마에게 말을 건다.
“저기, 유이가하마. 오늘 유키노시타 재울 거면 사브레는……”
“히키가야.”
내 목소리가 유키노시타의 정색한 목소리에 가로막힌다.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팔짱을 낀 채 나를 힐끗 노려본다. 아, 예, 그렇게 개한테 약
하다는 말이 하기 싫으십니까……. 하긴 뭐, 친구가 무척 사랑하고 아
끼는 존재니까, 그걸 보고 자기는 그런 거 질색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룻밤 묵고 가는 입장에서 그
런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리라. 그렇다면 그 의
사를 존중해 줘야 한다.
허나 이미 꺼내버린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마련이다.
유이가하마는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어~ 저기, 사브레는? 사브레가 왜?”
그렇게 재차 질문을 받으니 뭐라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아~ 그게……. 사브레는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인내하
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거든. 걔는 특히 그래.”
“응, 그건 걱정 안 해두 돼!”
내가 대충 그럴싸하게 떠들자 유이가하마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
덕인다. 호오, 설마 교육에 자신이 있었을 줄이야……. 근데 그런 것 치
고는 그 녀석, 네 말은 전혀 안 듣는 거 같던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유이가하마가 어깨를 축 떨군다.
“……사브레 말야, 집 안에서는 엄마한테만 착 달라붙어 있거든.”
“아~ 그렇구만……”
강아지는 계급 의식이 강하니까, 아마 유이가하마는 사브레에게 만만
하게 보이고 있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렇다면 유키노시타에게 가까
이 접근할 확률은 낮겠지. 게다가 잘하면 이번 일을 계기로 개에 익숙
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난 간다.”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안고 있는 사브레의 머리를 가볍게 쓰
다듬는다.
“응, 나중에 또 봐.”
“그럼, 또 봐.”
두 사람의 배웅을 받고 밖으로 나온다. 복도로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끄응~ 끄응~ 하고 서운해하는 사브레의 목소리에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움직여 유이가하마네 집을 뒤로하였다.

× × ×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에는 코타츠에 들어가 계속 뒹굴거리


며 책을 읽고 있었다.
웬일로 일찍 귀가한 부모님은 이미 취침 중이고, 지금 거실에는 나와
카마쿠라밖에 없다. 하기야 카마쿠라는 계속 코타츠 이불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잠들어 있었으므로, 지금 안 자고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 거실 문이 딸깍 열리더니, 파자마에 잠옷 모자를 쓴 코마치가 들
어왔다.
“아직 안 자?”
“응. 이제 잘 건데, 그 전에 잠깐 들렀어.”
내가 말을 건네자 코마치는 그대로 주방 쪽으로 돌아간다.
“딱히 상관없긴 한데, 얼른 자.”
“응~”
내일이 시험날인데 이런 시간까지 안 자고 있어도 괜찮을지 내심 초
조해하며 말했는데, 정작 본인은 무척 느긋하게 대답해 온다. 얼마 안
있어 칙칙칙 하고 가스레인지 켜지는 소리가 난다.
무슨 요리라도 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찬장 뒤지는 소
리가 들려온다. 배고파서 잠이 안 와서 저러나 생각하고 있는데, 코마
치가 코타츠까지 다가온다.
“자, 이거.”
“응. 오~ 땡큐.”
코마치가 내밀어 온 건 MAX 커피다. 받아들어 보니 따끈따끈한 온
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집에 사다 놓은 맥캔을 중탕으로 데워 준 모
양이다. 녀석, 제법인데…….
“오빠, 발 치워.”
그렇게 말하며 내 발을 툭 차면서 코마치도 꼬물꼬물 코타츠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둘이서 따뜻한 맥캔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한다.
휴우~ 하고 코마치가 만족스런 한숨을 흘린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그래. 이거 마시면 얼른 자. 입학 시험 전날이잖아.”
뭐, 취침 전에 따뜻한 맥캔을 마셔 준다면 푹 잠들 수 있겠지. 이 맥
캔, 언제 의약품으로 인정되는 걸까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다. 헤헤, 약
빨 죽이는구만……. 뭐 그런 소릴 하면서 마시면, 이 부자연스러운 달
콤함에 뭔가 위험한 물건을 마시는 기분이 들 것이므로 적극 추천하
는 바이다.
그러나 코마치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거 말고, 발렌타인 데이. 남자라면 당연히 막 두근두근 콩닥콩
닥 설레야 될 거 아냐?”
어이가 없다는 양 하아~ 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해 온다.
시험 전날에 그런 생각이 나냐……? 우리 집 프린세스는 간이 배 밖
으로 나온 모양이다. 일부러 “각오는 됐겠지?” 101 하고 확인할 필요까
지도 없어 보인다.
“두근두근 콩닥콩닥거릴 일이 어딨냐. 오히려 난 머릿속에 코마치 생
각만 꽉 차있다고.”
“오빠는 코마치한테 너무 무르니깐 말야. 와~ 소오름~. 자기 자신한
테도 그만큼 무르면 좋을 텐데.”
“난 충분히 나 자신한테 무르다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아니, 확실히 무르긴 해도……”
맥캔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하자 코마치가 훗 하고 코웃음을 친다.
……근데 나, 아까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한 소리 들었던 거 아닌가?
이 오라버니를 보고 소름이네 어쩌네 그러면, 진짜로 소름 돋는 짓이
어떤 건지 똑똑히 가르쳐 주마. 그 시작으로 코타츠를 통통 두드리며
애교를 떨어 보기로 했다. 와~ 소오름.
“맞다, 이왕 얘기도 나온 겸 나 초콜릿 좀 주라, 초콜릿~”
“비슷한 거 줬잖아?”
코마치는 턱짓으로 맥캔을 휙 가리킨다. 아니아니, 하나도 안 비슷하
구만. 이거 심지어 커피하고도 안 비슷하다고. 사랑이 안 담겨 있잖아,
사랑이.
“……코마치, 오빠 좋아하지?”
“딱히. 전혀.”
코마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양 웃으며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나도
모르게 으흑 하는 오열이 흘러나온다.
너무해……. 그래도 뭐, 적어도 얼굴을 맞대고 그런 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은 사이가 좋은 셈이겠지.

101
お覚悟はよろしくて? ‘Go! 프린세스 프리큐어’
농담조로 이야기해도, 반장난으로 이야기해도 이렇게 좋다 싫다 서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 대답 내용에 상관없이 깊은 속마음을 거리낌 없
이 드러낼 수 있다.
나와 코마치가 함께 쌓아 온 15년이라는 시간은 장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는, 그 모녀는 어떨까.
15년보다 오래 함께하고,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기억과 추억을 공유
하고,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고. 그럼에도 엇갈리고 서로 이해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남매의 관계는 코마치가 있기에 성립될 수 있다. 나는 이 아이
에게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초콜릿은 초콜릿.
“초콜릿 달라고, 초콜릿……”
그렇게 징징거리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만 계속 끄적거리고 있자, 코
마치가 귀찮다는 듯 에효 하고 한숨을 쉰 후 코타츠에서 나오더니 어
디론가 쪼르르 걸어가 버린다.
결국은 애정이 식어버렸구나……. 그렇게 절망하여 코타츠에 털썩 엎
드려 있는데, 또 코마치가 빠른 발걸음으로 쪼르르 돌아온다.
“자.”
그리고는 엎드려 있는 내 등을 콕콕 찌르더니 무언가를 건네 온다.
몸을 돌려 확인해 보니,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거 나 주는 거야?”
“뭐, 간단한 거지만. 달라고 그랬으니깐……”
어쩐지 뾰로통하게 언짢은 표정으로 코마치가 말한다. 나는 그 초콜
릿을 꼬옥 끌어안은 채 울먹이는 눈으로 “고마워어, 고마워어……” 하
는 말만 되풀이한다. 일부러 챙겨 두었던 모양이다. 어쩜 이리 야무진
여동생이람…….
그렇게 훌쩍이고 있으니 코마치가 기가 막힌다는 듯 쓴웃음을 흘린
다.
“코마치 아니더라도 그렇게 막 조를 수 있어지면 참 좋을 텐데 말야.”
“이런 쪽팔리는 짓을 너 말고 누구한테 하라고. ……애초에 자기 입으
로 달라고 해서 받는 건 별 가치가 없잖아?”
내 말에 코마치가 정색한 눈으로 쳐다본다.
“얘기하는 게 왠지 코마치가 주는 초콜릿은 가치가 없단 소리처럼
들리거든……?”
“……어, 아~ 아니…… 아닌데? 코마치가 주는 초콜릿은 별개야. 특별
하다고. 코마치 최고~ 코마치 완전 귀여워~”
“참 대충이라니깐~ 이 오레기.”
우와~ 하고 코마치가 진저리가 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쉰다.
“……그래도, 그렇게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한테 받을 수 있다면,
살짝 기쁠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코마치는 평소 이상으로 훨씬 어른스런 얼굴로 미소
를 짓는다. 코타츠에 턱을 괸 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는
그 시선은 올곧고 따스했다.
그 다정한 시선이 못내 부끄러웠던 나머지, 나는 콧바람을 내쉬고 시
선을 피한다. 그러자 코마치도 조금 쑥스러워졌는지 일부러 생긋 웃어
보인다.
“어때? 지금 거 코마치 기준으로 포인트 높았다?”
“그런 부분이 포인트 낮거든……?”
씁쓸한 표정으로 미지근하게 식은 달콤한 커피를 들이켠다. 무척이나
달콤한 그 맛에 그만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만다.
코마치는 고개를 젖혀 단숨에 꼴깍꼴깍 캔을 다 비운 뒤, 영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그만 자러 가 볼까~?”
“그래, 슬슬 자.”
코마치는 빈 캔을 살랑살랑 흔들더니 부엌 쓰레기통에 버린다. 문 앞
까지 오자 흠칫 일어난 카마쿠라가 쫄랑쫄랑 코마치를 따라간다.
“오~ 카 군? 같이 잘래?”
카마쿠라는 울음소리로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코마치의 다리에 몸을
부비적거린다. 그 행동에 흐흥 하고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코마치는
카마쿠라를 안아 들고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그 뒷모습을 향해 말을 건다.
“코마치.”
“왜?”
손잡이를 쥔 채 코마치가 윗몸을 돌려 돌아본다.
“늘 응원 중이야. 잘 자.”
“응, 고마워. 열심히 할게. 잘 자.”
말수는 적지만 코마치의 표정은 차분하다. 코마치는 영차 하고 카마
쿠라를 고쳐 안더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뒤, 머리 뒤로 팔짱을 낀 채 그대로
드러눕는다.
“속이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
코마치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나는 거기에 자신 있게 그렇
다고 수긍할 수가 없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끌어당기지도 않고.
의식하고, 명확하게 선을 긋고, 빈틈없이 덮고, 평소 이상으로 무뎌지
고, 생각하지 않도록 애쓰고, 똑똑한 관찰자라도 되는 양 지극히 자각
적으로 비겁하게 한 발 물러난 위치를 고수하였다.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을 위화감이라고 인식하지 않도록 거리
를 유지해 왔다.
그건 그저 착각하지 않기 위한 행동일 뿐, 그게 유일한 정답은 아니
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억누르려고 한다.
그렇기에, 그 사람은 꿰뚫어 보았던 것이리라.
다시금 내 안에서 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게 히키가야 하치만이냐고. 그런 게 네 녀석이 바라던 거냐고.
시끄러, 멍청아.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게 어디 함부로 떠드는 건
데, 제발 입 좀 닥쳐.
결국 그것을 끝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Interlude (pp.262-265)

Yui “유키농……. 아직 안 자?”


Yukino “……그래.”
Yui “……있잖아, 유키농은 어떡하구 싶어?”
Yukino “나는……”

Yui “난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 제대루 정했어.”

Yui “내일 있잖아, 데이트 안 할래?”


Yukino “……어?”
8. 어디까지나, 유이가하마 유이의 시선은 상냥하고 따스하다.
(pp.266-305)

그 날은 웬일로 눈이 내렸다.
치바는 눈이 별로 내리지 않는다. 북쪽 바다에서 흘러오는 습한 구름
은 혼슈(本州)를 척추처럼 잇고 있는 수많은 산맥군에 가로막혀 거기
서 눈을 뿌리기 때문에 태평양 쪽, 특히 평야 지대인 치바에는 마른
바람만 불어오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가끔 이런 식으로 이상한 타이밍에 눈이 내리는 경우가 있다.
내 17년 동안의 경험 속에서도 눈이 새해 첫날에 내리기도 하고, 성
년의 날에 102 내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3월 말에 뜬금없이 눈보라가
몰아친 적까지 있었다.
이번에는 그 타이밍이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코마치 시험 날하고 겹
치고 만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바람은 그리 강하게 불지 않아서, 눈송이는 마치
꽃잎처럼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늘 입던 대로 교복에 코트와 머플러, 장갑을 장착하고 발에는 장화를
신은 완전 무장한 코마치가 현관을 나온다. 예정된 시각보다 한참 이
르기는 하지만, 교통이 혼잡할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정도쯤 출발하
는 편이 나으리라.
“수험표 챙겼어? 지우개하고 손수건, 오각 연필은?”
오각 연필이란 우리 아버지가 코마치의 합격 기원을 위해 텐진을 참
배하러 갔을 때 사 온 물건으로, 단면이 오각형으로 돼 있는 연필이다.
솔직히 평범한 연필 쪽이 쓰기에는 훨씬 편할 거라 본다. 다만 대부분

102
일본의 성년의 날(成人の日)은 1월 둘째 주 월요일, 공휴일.
의 수험생들은 이 오각 연필 면마다 A~E, 혹은 1~5, 또는 아~오 103
등의 기호를 적어 넣고 모르는 객관식 문제가 나올 때마다 기도하면
서 이 연필을 힘껏 굴리게 된다. 쓰기보다는 오히려 굴리기 위해 태어
난 연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마치는 마지막으로 가방 속을 힐끗 확인하고는 응 하고 힘차게 고
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우산을 기울이더니 척 하고 경례를 한다.
“괜찮아! 그럼, 오빠……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바닥 조심하고.”
“응~. 아우, 추워~. 사인, 코사인, 탄젠트~……. 아, 이거 안 나왔나?”
몸을 바르르 떨더니 콧노래 비슷한 걸 흥얼거리며 또박또박 걸어가
는 코마치. 그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약간의 불안감이 스친다. 쟤 진짜
괜찮은 건가……. 설마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니겠지…….
아무튼, 마침내 입시 당일이 찾아오게 되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소용없는 일이다. 세기말 같
은 건 좀처럼 찾아오지 않지만, 시험날과 마감일은 무슨 수를 써도 피
할 수 없이 도래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기도를 올리는 정도뿐. 무심결
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낮고 두껍게 드리운 구름은 아무리 보아도 맑게 갤 기미가 느껴지지
않고, 그저 하늘에서 고요히 하얀 눈만 뿌릴 따름이다. 아무래도 오늘
은 하루 종일 눈이 내리려나 보다.
나는 추위에 몸을 바르르 떨며 집 안을 향해 한 걸음 걷는다. 그 순
간, 다시 또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103
오십음도, 아, 이, 우, 에, 오 순서.
그 진동이 전해져 오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내 폰에
전화가 오고 있었다. 화면을 보니 거기에는 『★☆유이☆★』라는 이름
이 표시되고 있다. 유이가하마다. 예전에 본인이 그 이름으로 등록한
이후로 딱히 변경하는 일 없이 계속 그대로 두고 있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몇 초 가량 고민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전화
는 끊기지 않았고, 여전히 폰은 계속 진동을 거듭하고 있다. 결국 포
기하고 통화 버튼을 눌러 살며시 귀에 가져다 댄다.
“……여보세요.”
그렇게 말한 순간, 전화 너머로부터 한없이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힛키, 데이트 하자!』
“……뭐?”
전화 첫머리부터 인사도 뭣도 없이 말해 오는 그 한 마디는 예상의
범주를 완전히 뛰어넘어서, 내가 봐도 얼이 쏙 빠진 기묘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 × ×

그 전화가 있고 난 다음 천천히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교통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한번 확인해 봤더니, 지금
타러 갈 노선 쪽은 혼잡도 다소 완화돼 있는 모양이다. 이걸로 적어도
약속 장소에 지각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실제 칸토 쪽의 교통망은 눈에 대단히 취약하다.
특히 치바 현은 에도(江戸) 강과 토네(利根) 강이 있다 보니, 그쪽에
놓인 다리가 불통이 되기라도 하면 육지의 고도(孤島)는 고사하고 『독
립국가 치바』 수립까지 선포될 위험성까지 있다.
밖으로 나와도 날씨에는 변함이 없고, 아스팔트 위로는 엷게 서리가
내린 것처럼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중이다.
발이 빠지고 그럴 정도의 적설량은 아니지만, 셔벗처럼 길가에 깔린
눈 때문에 아차 하다가는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바퀴 자국과 발자국으
로 다져진 길을 따라 천천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버스에서 전철로 환승한 후 잠시간 바다를 바라본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보는 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휙휙 흘러간다.
태양은 이미 제법 높은 고도에 올라 잿빛을 띤 흐린 하늘 사이로 하
얗게 지상을 비추고 있다.
해안가를 달리는 노선은 다소 혼잡했다. 딱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이 노선은 이벤트 같은 게 있을 때마다 대혼잡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마쿠하리(幕張) 멧세에서 게임쇼나 모터 쇼가 열린다든지, 빅 사이트
에서 코미케가 열린다든지, 아니면 신키바(新木場)에서 라이브 이벤트
가 열린다든지 그럴 때에는 특히 더 혼잡하다.
무엇보다도 이 노선의 역 중에는 국내 최대의 놀이공원 도쿄 디스티
니 리조트, 줄여서 TDR이 있다.
게다가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다.
눈이 내려도 입장객들의 분위기는 고조돼 있다. 같은 전철을 탄 커플
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자니,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로맨틱
하네 뭐네 하면서 이 눈을 반기고 있는 분위기이다.
확실히 발렌타인 데이 데이트에는 제법 어울리는 시츄에이션이리라.
이윽고 전철이 가는 방향 쪽으로 순백의 성과 연기를 분출하는 화산
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 방송이 역에 정차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차체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진다.
육중한 흔들림이 있은 후 전철이 완전히 정차하고, 푸슉 하고 문 열
리는 소리가 난다.
차가운 공기와 눈이 안으로 불어 들어오고, 그와 자리를 바꾸기라도
것처럼 탑승해 있던 커플들이 앞다투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이 닫힘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린다. 여기 역 특유의 디스
티니 노래를 어레인지한 발차 멜로디.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완전히 사람이 줄어든 차내의 문에 기댄다.
순백의 성도 활화산도 시야 왼쪽으로 멀리 벗어나 사라진다.
오늘 내릴 역은 여기가 아니다.
언제였던가, 언젠가 여기에 같이 오게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약속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약속은, 말로써 나눈 그대로의 형태가 아닌
다소 변경된 조건으로 이행되었다.
새로이 약속된 약속 장소는 한 정거장 다음에 있는 역이다.
큰 다리를 건너 현(県) 경계선에 위치한 강을 지나자 거대한 관람차
가 보이기 시작한다. 분명 일본 최대 크기라고 선전하던 관람차일 것
이다.
오늘 아침에 왔던 전화를 떠올린다. 갑작스럽게 입에 올린 제안을 거
절하지 못했던 건 단지 당혹감과 놀라움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처
음에 제안했던 사람은 나다. 단지 그 실행을 차일피일 계속 미루어 왔
을 뿐이다.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을까. 문득 그런 의구심이 스쳐간다.
거기에 대한 답을 찾는 사이 전철은 속도를 떨어뜨렸고,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 차례 크게 흔들린 후 움직임을 뚝 그쳤다.

× × ×

개찰구를 나오자 대관람차가 시야에 들어온다.


역 앞 분수 광장에서 직면한 관람차는 일본 최대 크기라는 선전답게,
가까이에서 보니 실로 대단한 박력이 느껴진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에서도 유유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대관람차를 곁눈으로 보면서 나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여기는 어렸을 때 가족끼리 온 적이 있기 때문에 딱히 걸음을 망설
일 것도 없다. 그 무렵의 기억과 안내판의 정보를 비교해 가며 목적지
로 서둘러 이동한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긴 대로를 따라 걷고 있자, 얼마 안 가 왼편에 돔
형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아래에 수족원 입구 홀이 위치해
있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거기다.
지붕 아래로 들어가 우산을 접고 주위를 한번 쭉 살핀다. 평일이라
그런 것도 있는지 이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덕분에 파란 코트를 몸
에 걸친 유이가하마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힛키~!”
아마도 바로 앞 전철을 타고 한 발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유이가하
마는 걸어오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 이름을 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연
분홍빛 비닐 우산을 천천히 흔든다.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나는 걷는 속도를 약간 높여 그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내 그 걸음이 뚝 멈추고 만다.
“……아.”
유이가하마의 뒤에서 회색 코트 자락이 나부낀다.
유이가하마 뒤에 딱 겹친 것처럼 서 있던 한 소녀는 내 쪽을 돌아보
더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히키가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는 유키노시타 유키노였다. 왜 여기에 그녀가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두 사람의 정면에 선다.
“유키노시타 너도 와 있었어……?”
당연히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구태여 입으로 묻는다. 사정
이 잘 이해되지가 않는다. 그건 유키노시타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유키노시타는 어색한 분위기로 몸 둘 바를 몰라 하더니, 유이가하마
를 힐끔 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 저기…… 혹시, 그런 거면 나, 돌아갈게……”
“괜찮아! 셋이서 같이 놀자!”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는 당장이라도 돌아갈 것 같은 유키노시타
의 팔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동시에 내 소매를 끌어당긴다.
꼬옥 힘을 넣어 가슴속에 품듯이 우리의 손을 쥐고, 유이가하마는 고
개를 숙인다.
“셋이서, 가고 싶어……”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나직이 중얼거린다.
눈은 내리뜨고 있고, 표정은 살펴볼 수 없다.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람
이 느껴지는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나와 유이가하마는 말을 잃은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유키노시타의 시선은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곤혹스러워하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모습을 알아차린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들고 다정한 시선을 향하자, 유키노시타는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고
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유이가하마는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에게 별다른 이의가 없다면, 나도 이견은 없다.
다만 딱 하나 묻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었다. 그 물음을 입에 담으려
니 차마 유이가하마의 얼굴을 직시하기 어려웠던 탓에 시선을 약간
돌린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지독하게 꼴사나운 짓이라
는 생각이 들었기에 좀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을 어떻
게든 쥐어짠 끝에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한다.
“……여기로, 괜찮겠어?”
“여기가 좋아.”
유이가하마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내 물음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고, 아마 그녀의 대답
의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었으리라. 아니, 과연 그럴까. 의
외로 평범하게 별다른 의미 없이 이야기한 건 아닐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유이가하마가 그러기를 원한다는데 내가 반대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래……?”
“응! 여기서 놀면 눈 와두 상관없잖아! 다 같이 놀려면 여기가 좋을
거 같애.”
그렇게 답하며 유이가하마는 자신 있게 가슴을 쭉 편다. 확실히 다
같이 논다고 치면 이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곳은 셋이서 가기에는
조금 번잡해 보이니까. 그러니 뭐, 어쩌면, 언젠가 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 가 볼까?”
오늘 갈 곳은, 다 같이.

× × ×

멀리서 보던 유리로 된 돔 안으로 들어가자 눈부신 햇볕이 느껴진다.


수많은 유리로 구성된 돔은 이런 예상치 못한 궂은 날씨에도 빛을 모
아주고 있는 모양이다. 높은 천장도 함께 어우러져 무척 밝은 분위기
다.
반면에 수족원으로 이어지는 긴 에스컬레이터는 바닥으로 나아갈수
록 점점 더 어두워진다.
서서히 지상의 빛이 멀어져 가는 모습은 마치 상영이 시작되기 전의
영화관 같아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렌다. 그렇게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끝에 마치 스크린 같은 거대한 수조가 등장한다.
헤에, 굉장한데~ 하고 그 수조를 쳐다보고 있자, 유이가하마가 후다
닥 뛰어나간다.
“상어다~!”
유이가하마의 말대로 그 수조에는 상어가 있었다. 흑기흉상어라는 종
류인가 보다. 근데 흑기흉이 뭐지? 흑 기흉? 흑기 흉? 아, 흑기 흉상
어구만.104
상어 외에도 같은 수조 안에서 도미와 넙치가 춤추고,105 아, 실수. 가
오리와 정어리가 춤추고 있다. 유이가하마는 즐겁게 수조 안을 들여다
보더니 사진을 찰칵 찍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옆을 보고 에헤헤 웃더니, 또다시 수조를 손가락으
로 척 가리키며 말한다.
“상어다~!”
“……상어구나.”
뒤를 따르던 유키노시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유이가하마를 본다.
목소리에는 약간 기막혀 하는 분위기가 섞여 있다.

104
このツマグロ、マグロというわりに全然マグロじゃない。(이 츠마구로, 이름은 참치인데 전혀
참치가 아니다). 흑기흉상어(ツマグロ, 츠마구로)와 다랑어(マグロ, 마구로)의 말장난.

105
タイやヒラメが舞い踊り. 문부성 창가 ‘우라시마 타로(浦島太郎)’ 노래 가사.
그러자 유이가하마도 난감한 듯 아하하 웃으며 사과머리를 꼬물꼬물
만지작거리더니, 유키노시타에게 몸을 스윽 기댄다.
“유키농~ 미리 얘기 안 한 건 미안해. 우리 쪼끔만 더 신나게 놀자~”
“그렇게 얘기해도……”
둘이서 나누는 대화에는 아랑곳없이 나도 수조 앞에 선다.
유이가하마가 일일이 말 안해도 되겠구만. 척 봐도 상어네. 와~ 상어
쩔어…….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유난히 유유하게, 그리고 우
아하게 두둥실 등장하는 존재가 시야에 들어온다.
홍살귀상어다. 그 독특한 생김새 덕분에 일부러 해설 표지판을 볼 필
요도 없이 바로 이름이 떠오른다.
남자라면 어릴 적에 한 번쯤은 상어에 빠지기 마련이다.
정확하게는 공룡 도감이나 해양 도감 같은 걸 무척 좋아하던 시절이
있는 법이다. 제~ 이름은 히키가야 하치만~ 세 살~입니다~ 좋아하는
공룡은 트리케라톱스~ 좋아하는 심해어~는 데메니기스~입니다, 뭐
그런 말을 하던 시절이 반드시 있게 돼 있다.
그렇게 수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중 나도 모르게 오옷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이미 완전히 트럼펫을 갖고 싶어하는 소년 106
상태나 마찬가지다. 투티! 같은 느낌. 마음을 몽땅 빼앗겨 버리고 말았
다.107
“오~ 귀상어다……. 엥? 뭐야, 이거 사진 찍어도 돼?”
옆에 있던 유이가하마에게 상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묻자, 유이
가하마는 응응 하고 누나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와아~ 사
진 찍어도 되는구나~……!

106
신용카드사 JACCS의 과거 CF. 정식 발행본 2권 32번 각주 참고.

107
‘울려라! 유포니엄’ ED, ‘Tutti!’ 가사, ‘투티! 우리가 마음을 빼앗을 거야’.
그렇게 사진을 찰칵찰칵 찍고 있는데, 시야 한구석에서 유이가하마가
유키노시타에게 다가간다. 그러더니 소곤소곤 귀엣말을 한다.
“봐, 힛키두 저렇게 재밌어 보이구.”
“하아……”
유키노시타가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내쉰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그걸 끝으로 옆에서 속삭이던 대화 소리가 뚝 끊긴다. 그 묘한 침묵에
신경이 쓰여 옆을 힐끗 보았더니, 관자놀이에 손을 얹은 채 이쪽을 빤
히 쳐다보던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친다.
“……뭐, 뭔데?”
하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길래 쑥스러운 나머지 그렇게 묻자, 유키
노시타는 어깨로 내려온 머리를 휙 쓸어 넘긴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희미하게 웃는다.
“아니야. 조금 의외여서. ……사진, 상어하고 같이 찍어 줄게.”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손을 내민다. 아무래도 폰을 넘겨주면 홍살
귀상어하고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진짜? 코마치한테 자랑해야지!”
사양 않고 살포시, 화면에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신중하게 폰을 넘긴
다.
“귀상어라고, 알았지? 귀상어 왔을 때 셔터 눌러 줘. 되도록이면 망
치 머리가 옆으로 누워서 잘 보일 때 찍어 주라.”
“의외로 주문이 많구나……”
유키노시타는 눈살을 찡그리면서도 몇 번이나 촬영에 도전해 준다.
그 옆에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유이가하마가 생글생글 웃고 있다.
“이런 건 어떠니?”
돌려받은 폰을 보니, 거기에는 주문한 대로 마치 귀상어가 나를 물려
는 듯한 베스트 타이밍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오~……. 이거 괜찮은데?”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유키노시타는 약간 피로감이 섞인, 안도와도 같은 숨결을 흘린다. 그
유키노시타의 팔을 유이가하마가 찰싹 달라붙어 꾹꾹 당긴다.
“그럼, 다음 거 보러 가자!”
“……그래.”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유키노시타는 유이가하마를 따라 걷는다. 처음
에는 그렇게나 마지못해 따라오는 분위기이던 유키노시타였는데, 의외
로 이 수족원 탐방에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귀상어와 작별을 고한 뒤 두 사람의 뒤를 따른다.

× × ×

수족원 안은 평일인 것도 있어서인지, 관람객의 발길이 뜸했다.


간혹 보이는 이들도 노부부나 얌전해 보이는 커플, 아기를 동반한 부
부, 그 외에 젊은 여자들끼리 온 관람객 등,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의
사람이 많다.
만약 주말이나 공휴일이었다면 아이들이나 가족 단위 관람객으로 붐
비고 있었을 것이다.
어둑어둑한 공간에는 여러 개의 수조가 조명을 밝히고 있다. 여러 개
의 스크린이 나란히 늘어선 듯한 그 광경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목소
리를 낮추게 되는 듯 보인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참다랑어가 있는 거대한 수조의 박력 앞에 감
탄을 터뜨리고, 『세계의 바다』라는 이름이 붙은 몇 개 구역으로 나누
어진 수조들 중 하나에 모인 남태평양 물고기들의 화려함에 시선을
뺴앗긴다.
자연의 웅대함과 강인함,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대단하다”, “아름답다”, “맛있겠다” 정도
밖에 없다. 잠깐, 맛있겠다는 또 뭐야……?
하지만, 물론 그 중에서는 예외도 있다.
어떤 물고기가 들어가 있는 수조 앞을 지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발걸음을 뚝 멈춘다. 거기에 뒤따라 나와 유키노시타도 그 자리에 멈
춘다.
얼핏 보니 그 수조는 어둡고 칙칙한 게, 주변의 다른 물고기들이 들
어가 있는 수조에 비하면 다소 볼품이 없다. 조명도 없는 건 물론이고
쌓여 있는 진흙 위로 가느다란 나무 하나만이 홀로 쓸쓸하게 서 있다.
그 안을 뭔가 멍청해 보이는 물고기가 멍하니 의욕 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아니, 헤엄친다는 표현은 별로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물고기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그냥 떠다니는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우와~ 징그러……”
유이가하마가 별 생각 없이 불쑥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해설 표지판
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서리 피시래.”
“진흙으로 탁한 강물 속에서 거의 헤엄치지 않고 생활한다…… 그렇
다는데?”
유키노시타가 해설을 읽더니 나를 힐끔 본다. 이분은 왜 날 쳐다보시
나 싶어 나도 해설 표지판으로 눈을 돌렸더니, 아직 이어지는 내용이
더 있었다. 호오……. 새우 같은 게 눈앞에 지나가면 단숨에 낚아채서
삼킨다고……?
“이상적인 삶이네…….”
“공감 중이야!?”
무심결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감상에 유이가하마가 경악한다. 그 말
을 들은 유키노시타가 훗 하고 미소를 흘린다.
“듣고 보니 이 물고기, 꼭 누구하고 닮은 것 같구나. 그렇지, 물고기
가야?”
“하나도 안 닮았거니와, 이름도 안 닮았거든……?”
얘는 왜 웃으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거래……. 하지만 뭐, 너서리 피시
는 일명 코모리우오라고도 한단다. 아마 아이 돌보미 108 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겠지만, 이 녀석이 히키코모리 물고기여서 그런 이름이 붙
었던 거라면 아주 안 닮은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애도 잘 보지만 말입니다. 어린애들 완전 좋아!
그런 식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유이가하마는 어느새 대
화는 뒷전이고 수조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뭔가 푹 빠진 듯한 표정으로 후훗 웃더니 즐거운 분위기로 한
마디 한다.
“우와~ 징그러~”
“야, 징그럽다 그러지 마, 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잖아?”
같은 우주선 지구호의 동료 아니겠냐고. 근데 얘, 왠지 은근히 기분
좋아 보이는데…….
유이가하마가 계속해서 너서리 피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유
키노시타도 거기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는다. 둘이서 징그러~, 기분나
쁘구나 하고 신나게 떠든다.
그러다 불현듯 유이가하마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두…… 살짝 귀여울지두.”
“귀여운가는 차치해 두더라도, 애교는 있어 보이는구나.”

108
子守(코모리)
그렇게 말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킥
웃는다.
“징그럽다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이미 귀여운 건 물 건너간 거 아니
냐……?”
무엇보다도 너서리 피시는 그냥 얼굴부터가 징그럽다. 저게 도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건데?
소녀의 감성이란 정말 알 수가 없구만. 혹시 그건가? 행동이 귀엽다
거나 헤어스타일이 귀엽다거나 목소리가 귀엽다거나, 미팅이나 친구
소개할 때 남자들한테 얘기하는 그거지? 얼굴은 안 귀엽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야 될 때 쓰는 그 표현 맞지? 인터넷에서 봤거든?
여자들이 말하는 『귀엽다』는 표현은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 오늘도
1승 추가.

× × ×

가시복에 흰동가리. 해마, 나뭇잎해룡. 좌 넙치 우 가자미. 갈치에 바


다술까지…….
세계의 바다에서 심해까지 수많은 물고기를 보며 걷다 보니, 다음 코
너는 외부로 이어져 있었다.
오랜 시간 어두운 공간에 있었던 탓에, 궂은 날씨임에도 햇살이 눈부
시게 느껴진다. 자동문을 지나 외부 복도로 나오자, 바다에서 불어오
는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와 동시에 강한 바다 내음이 코를
찌른다.
여기는 갯가의 생태계를 재현한 곳인 모양이다. 게, 따개비 또는 불
가사리 같은 해변의 생물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그 앞으로 더 이동하자 지붕 아래에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
에 도착했다.
눈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어 지금 현재는 적게 조금씩 내리고 있는
정도다. 물론 요즘 들어서는 한파의 영향으로 기후가 불안정한 상태라
고 들었으므로 이 다음에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아무튼 아직 이
시간대, 한낮인 지금은 날씨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아, 왠지 막 사람 많이 몰려 있어.”
내가 날씨를 걱정하는 사이 앞에서 걷던 유이가하마가 뒤돌아보며
앞쪽을 가리킨다. 보아하니 앞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와아~
꺄아~ 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번 가 볼까?”
그렇게 말하며 무슨 놀이공원이라도 차린 것처럼 변해 있는 곳으로
가 보니, 거기에는 외부 복도를 따라 옆으로 길게 뻗은 작은 수영장
같은 수조가 있었다. 다른 수조들과는 다르게 덮개가 덮혀 있지 않아
서 수면이 외부로 노출돼 있다.
벽에 붙은 해설 표지판을 한번 보니 『두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세요』
라고 써 있다. 아무래도 직접 만지고 교감할 수 있는 코너인 듯하다.
그럼 과연 어떤 해양 생물과 교감할 수 있을까 하여 수조를 들여다
본다.
상어.
거기에 있던 건 이번에도 상어였다.
소형 상어 및 가오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해설 표지판을
보니 개상어,109 괭이상어, 노랑가오리, 흑가오리라고 써 있다.
“이거 봐, 힛키, 개상어래!”
유이가하마가 잔뜩 흥분한 어조로 내 어깻죽지를 톡톡 치더니 그 개

109
イヌザメ. 흑점얼룩상어.
상어라는 물고기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콕콕 만진다.
개상어는 만지고 있어도 딱히 별 반응도 없이 얌전하게 있다. 이윽고
유이가하마가 무언가 납득한 양 고개를 끄덕거린다.
“……사브레랑 살짝 닮은 거 같애!”
어디가? 뭔가 갈색 비슷한 게? 이 상어, 개하고는 개털만큼도 안 닮
았는데 괜찮냐, 너? 아니 근데, 이거하고 닮았다는 너네 집 개, 그거
진짜 개는 맞아? 상어 아니냐?
근데 왜 이건 이름이 개상어일까……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데,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는 녀석이 또 있는 모양이다.
바로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는 턱에 손을 얹고 찬찬히 괭이상어를 관
찰 중이었다.
괭이상어는 개상어에 비해 몸집이 약간 작고, 몸에는 독특한 줄무늬
가 들어가 있어서 구별하는 건 쉽다.
“괭이상어……”
유키노시타는 그렇게 한 마디 툭 던지더니 헤엄치는 괭이상어를 지
그시 쳐다본다.
“이해가 안 가……. 어느 부분이 고양이같은 걸까……. 명명된 걸 보면
비슷한 부분이 어딘가는 있을 텐데……”
호오, 고양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반응 안 하고는 못 배기시는구만.
놀랍구나, 고양이 짱짱걸.110
유키노시타는 마음을 굳힌 듯 팔을 걷어붙이고 지체 없이 괭이상어
를 향해 손을 뻗더니 한동안 쓰담쓰담한다. 그러더니 훗 하고 흡족하
게 웃는다.
“……촉감은 고양이 혀하고 비슷할지도.”

110
ネコ大好きフリスキー. 고양이 식품 브랜드 ‘프리스키’의 캐치프레이즈.
“상어 피부는 다 그렇거든?”
그렇게 말해 보지만 유키노시타에게는 안 들리나 보다. 괭이상어를
계속 쓰다듬는 데 여념이 없다.
“고양이, 괭이상어, 고양이……. 냐~…… 아니, 샤~일까……?”
“영어로 샤크라고 샤~ 하고 울진 않을 텐데…….”
애초에 상어는 울지도 않을 거고……. 아마도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개상어에서 새 타깃을 찾고 있나 보다. 유
이가하마의 손이 물속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아, 가오리두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유이가하마가 에잇 하고 손을 뻗는다. 뭘 믿고 저렇
게 용감하시담. 오리하고 착각했나?111
“히얏!?”
하지만 곧바로 비명을 지르더니 허둥지둥 손가락을 쏙 뺀다.
“막 미끈거렸어! 미끈거렸다구!”
그렇게 우는소리를 떠들자, 여태껏 괭이상어에 열중하고 있던 유키노
시타가 유이가하마에게 달려와 걱정스럽게 묻는다.
“뭘 만졌니? 히키가야? 빨리 손을 씻어야 해.”
저기요? 애먼 사람 가오리 취급하지 말지 그래? 이래봬도 최소한 점
액은 안 나오거든? 아니, 그래도 여자와 접촉하고 그러면 거의 확실하
게 손에서 땀이 줄줄 흐르니까 가오리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여자 여러분들은 저를 만지면 손을 꼭 깨끗하게 씻어 주시길!
하지만 상어나 가오리 등을 만질 기회가 그리 흔한 건 아니다. 나도
팔을 쓱 걷어붙이고 마음껏 개상어와 괭이상어, 가오리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쓰다듬는다.

111
エイだけにですかね、えい(가오리라서 그러시나요, 에이). ‘エイ(에이, 가오리)’의 말장난.
까끌까끌 미끌미끌한 감촉을 한창 즐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유이가
하마는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있었다. 그저 따스한 눈길로 상어와
가오리들을 바라보기만 한다.
“뭔데, 이제 다 만졌어?”
“응, 너무 많이 만지면 얘네들도 피곤할 테니깐.”
“그래? 유이가하마답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온다. 하긴 동물들 입장에서 보면 자꾸 쓰
다듬는 것도 일종의 스트레스 요소겠지. 우리 집 고양이도 내가 쓰다
듬으면 냥냥 펀치를 시전해 오니까. 그런 식으로 배려심이 많은 부분
은 솔직히 마음에 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입에 올린 말일 뿐이었다. 그러나 유이가하
마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고개 숙인 자세로 시선을 피한다.
“……나다운 게, 어떤 걸까?”
유이가하마가 지그시 바라보는 쪽으로 나도 시선을 옮긴다. 하늘하늘
눈송이가 춤추며 떨어지더니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어서 유이가
하마가 나를 엿보듯 천천히 고개를 든다.
“……나, 힛키가 생각하는 만큼 착한 거 아닌데.”
그 눈동자는 마치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덧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고,
속삭이듯이 덧붙인 말은 독백을 듣는 듯 느껴졌다.
그 말에 나는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그녀답다고, 유이가하마 유이답다고 말한 걸
까.
다시 또 내 안에서 위화감이 기어나오기 시작하고, 가슴께가 싸늘해
진다. 무언가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초조함이 끓어올랐
고, 그만 주먹을 꽉 쥐고 만다.
그럼에도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입을 열어 보려 하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오들오들 떨리는 입술을 보며, 유이가하
마는 슬픈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내리깔 뿐이다.
말도 목소리도 모두 사라지니 주변의 소리가 한층 더 크게 귀에 닿
는다.
그 가운데 뀨이~ 하고 카랑카랑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걸 들은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휙 들더니 벌떡 일어선다.
“아, 펭귄이다! 힛키, 유키농, 우리 보러 가자~!”
유이가하마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유키노시타 쪽
으로 눈을 돌리자, 망연한 모습으로 줄곧 이쪽을 바라보던 유키노시타
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나와 유이가하마를
염려하는 듯 둘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고 있었다.
“가자, 응?”
“그, 그래. ……그러자.”
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이가하마에게 유키노시타는 힘없는 미소
로 답한다. 아까 그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유이가하마의
그 표정을 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의 팔을 붙들고 바위산 쪽으로 향해 간다.
그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그 뒷모습이, 그것도 즐거워 보이는 그 태도가 아까까지 하던 이야기
는 이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셋이서 즐겁게
놀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음을 새로이 하고자 숨을 한 번 토하고, 나도 그녀들의 뒤를 따른
다.

× × ×

잠시 걸어가자 눈앞에 황량한 바위산이 펼쳐진다.


거기에는 수많은 펭귄들이 뀨이뀨이 울면서 풀 안으로 첨벙첨벙 뛰
어들기도 하고, 바위 그늘 아래서 몸을 녹이듯 옹기종기 모이기도 하
고 있었다.
“와아, 귀여워~!”
“……그렇구나.”
즐겁게 떠들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대는 유이가하마와, 그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다소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차례 셔터를 누르는
유키노시타. 역시 펭귄님, 소녀들에게 인기 만점이십니다.
그러는 나도 그 유선형의 동글동글한 체형, 귀여운 눈망울, 아장아장
걷는 몸짓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우와, 뭐야 이거, 너무 귀여운 거 아냐? ……코마치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야지.”
울타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최대한 접근하여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그러는 사이에 좋은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이 사진을 시험이 끝난 코마치에게 보여준다면 “코마치도 갈래!” 하
는 말이 나오게 될 건 자명한 이치. 거기서 “그럼 같이 갈까?” 하고
말하면 코마치도 홀랑 넘어올 테니 여동생과 합법적으로 데이트 할
수 있게 된다 이거지요, 누루후후후후후후.112
그런 식으로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
는 이미 다음 코너로 가고 있었다. 아, 안 돼, 나만 두고 가지 마~!113
사진 촬영도 대충 마무리 짓고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의 뒤를 쫓
는다. 두 사람은 그대로 경로를 따라 반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
간다.
펭귄 구역에는 통상적인 코스 외에도 거대한 풀을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코너가 있어서, 거기서 펭귄이 수영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
다.
거기서 본 펭귄들은 지상에서 뒤뚱거리던 굼뜬 움직임과는 전혀 다
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속에서의 펭귄들은 민첩하게 방향 전환을 하면서, 마치 날아다니는
듯한 놀라운 스피드로 씽씽 헤엄쳐 다녔다.
그걸 보던 유이가하마가 감탄사를 흘리며 유키노시타의 소매를 자꾸
당긴다.
“와~ 굉장해, 굉장해~! 막 헤엄쳐! 이거 보니깐 펭귄이 꼭 새 같애!”
“……펭귄은 원래 새인데.”
유키노시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한다. 두통이라도 오는지 손바닥으
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있다. 그 말에 유이가하마는 멍하니 입을 떡
벌리고 있었지만,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말한다.
“……어, 나, 나두 알아.”
허둥지둥 한 마디 덧붙이는 유이가하마에게 유키노시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도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뭐, 그러는 심정이야

112
‘암살교실’, 살생님(殺せんせー).

113
おいてかれちゃう! 인터넷 유머글 ‘お父さんが置いてかれちゃう!’가 소스인 듯.
이해하지만.
화려하게 물속을 누비는 펭귄들의 모습을 만끽하고 반지하 코너에서
위로 계단을 오른다.
거기서부터는 훔볼트 펭귄들이 바위산을 올라가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온다.
그 가운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펭귄 두 마리가 있었다. 사이좋게 찰
싹 달라붙어 털 고르기를 하면서 연달아 서로 울어대고 있다.
그 모습을 훈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앞에 있는 해설 표지판으로
눈을 돌린다. 흐음 하고 읽고 있는데, 내 옆으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
하마도 한번 읽어 보자는 양 고개를 빼꼼 내밀어 온다. 둘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자 느린 걸음으로 물러나 표지판의 문장을 눈으로 쭉 훑
는다.
아무래도 그 해설에 의하면 서로 착 붙어 있는 두 마리 펭귄들은 부
부 사이라는 모양이다. 사육되는 훔볼트 펭귄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한 쪽이 죽지 않는 한 같은 파트너와 계속 부부로 살아간단다.
그 내용을 읽은 후 다시금 두 마리의 펭귄을 바라보고 있는데, 앞에
있던 유키노시타의 어깨가 흔들리더니 아, 하고 숨을 삼키는 게 느껴
졌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왜 그래?”
서두르듯 발걸음을 옮기는 게 신경이 쓰여 묻자, 유키노시타는 윗몸
으로만 돌아보며 말한다.
“……안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간단히 말하고는 다시 돌아보는 일 없이 수족원 안쪽으로 돌
아간다.
펭귄 구역은 야외다. 날씨를 생각해 보면 그만 슬슬 안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도 이만 가 보자고 말하려 몸을 돌렸더니, 유이가하마는 아직도
두 마리의 훔볼트 펭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만 갈까?”
“아, 응……. 쪼끔만 더 보구 갈게. ……아, 저 쪼끄만 거 사진도 찍어야
되구! ……그러니깐 금방 갈게.”
그렇게 말하며 페어리 펭귄 쪽을 가리키더니 폰을 들어 보이더니, 도
로 훔볼트 펭귄 쪽으로 몸을 돌린다. 손에 든 폰도 쓸 기미가 없이,
그저 강하게 꼬옥 쥐고 있기만 할 뿐이다.
“……그래.”
그런 모습을 보아버리니 뭔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다. 짤막하게
대답한 후, 나는 한 발 먼저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등 뒤로는 서로 뀨이뀨이 울어대는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조금 슬프
게 들려오고 있었다.

× × ×

계속 바깥에 있던 탓인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따뜻한 공기에 후우


하고 한숨이 흘러나온다.
펭귄 구역에서 코스를 따라 나아가니, 내려가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플로어가 나온다.
거기에는 한층 더 큰 수조가 있었다. 해설 표지판에는 『해초의 숲』
이라고 써 있다. 커다란 해초는 자이언트 켈프라고 한다는데, 그 자이
언트 켈프가 가지를 길게 뻗고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이 멀리서 보
아도 한눈에 들어온다.
깜깜한 플로어로는 연갈색 켈프 외에도 빨갛고 파란 말미잘과 산호
류가 선명하게 비춰지고 있다.
그 수조 앞에는 일부러 벤치까지 마련해 놓고 있는 게, 마치 작은 영
화관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한산한 분위기만 느껴진다.
그저 수조 너머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유리벽 앞에 서 있는 이의 실
루엣을 희미하게 비추어 보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만히 선 그 모습.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다.
수조의 어둑어둑한 빛에 비치는 그녀의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
림 같아 좀처럼 말을 걸 수가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할 호흡이 가슴 깊
은 곳에서 턱 막힌 채 나오지 않는다. 그 바람에 거기서 발길을 멈추
고 만다.
그러자 도중에 끊어진 발소리를 깨달았는지, 유키노시타가 이쪽을 돌
아본다.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여 오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겨
우 걸어갈 수 있었다.
“유이가하마는?”
옆에 나란히 선 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수조만 바라
보며 유키노시타가 말했다.
“페어리 펭귄 사진 찍어. 금방 온다고 그랬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면
돼.”
“그래……”
그것을 끝으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수조만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거대한 해초를 비추고, 그 주위를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미덥지 못하게 한들한들 흔들리는 자이언트 켈프 사이를 무수히 많
은 물고기들이 오가고 있다. 푸른 빛깔 비늘로 덮힌 작은 물고기는 해
초 그늘 아래로 숨어들고, 반면에 유달리 화려한 빨간 물고기는 당당
한 모습으로 유유히 헤엄친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유키노시타가 문득 입을 연다.
“……자유로운 것도 있구나.”
“응? 아~ 저 물고기는 몸집이 크니까.”
유키노시타의 나직한 목소리는 딱히 누구를 향한 게 아닌 혼잣말 같
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같은 물고기를 보며 하는 말일 수도 있
으리라. 자연스레 그 말에 화답한다.
후우 하고 옅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
“의지할 데가 없으면 자기가 머물 자리도 찾지 못해……. 숨고, 떠내
려가고, 무언가를 따라다니고,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유키노시타가 유리벽을 만지려는 듯 살며시 손을 뻗는다. 하지만 이
내 그 손은 힘없이 아래로 조용히 내려가고 만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자, 유키노시타의 눈동자는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채 오직 가만히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물고기 얘긴데?”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묻는다.
그러자 유키노시타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평온한 분위기로 한숨을
흘린다.
“……내 얘기야.”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여 쓸쓸히 미소를 짓고는, 살며
시 수조를 만진다.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데,
벽에 가로막힌 나머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덧없는 모습이었다.
고요한 플로어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수조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오는 거품 소리도 유리에 가로막혀 여기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수조 안을 바라보는 유키노시타를 가
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플로어로 또박 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따스한 시선으로 유키노시타를 지켜보는 유이가하마
의 모습이 있었다. 그 표정은 어디까지나 한없이 상냥하였고, 자칫하
면 눈물이 터져 나올 듯 보이기까지 했다.
“얘들아, 많이 기다렸지~!”
유이가하마는 내 시선을 깨닫자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늘 보여주
던 그 미소로 말을 건네 왔다.

× × ×

자이언트 켈프가 전시돼 있던 플로어를 빠져나오자, 건물 안은 갑자


기 밝은 분위기로 변한다.
상부 벽면은 채광을 위해서인지 유리벽으로 돼 있고, 천장도 높다.
바닥 역시 그제까지 계속 이어지던 검은색 바닥재가 아닌 크림색 패
널이 깔려 있다.
덕분에 또박또박 명랑하게 걷는 유이가하마의 발걸음 소리도 한층
더 경쾌하게 들린다.
그러다 불현듯 그 발소리가 멈춘다.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다.
“아, 잠깐 여기 좀 봐봐!”
그렇게 말하며 나와 유키노시타를 손짓해 부른다.
그 자리에 있던 건 여러 개의 동그란 원 모양 수조다.
분홍색과 보라색, 마린 블루. 다양한 색깔의 조명으로 장식된 수조
안을 해파리들이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유이가하마가 유키노시타의 팔에 달라붙고, 둘이서 나란히 수조를 바
라본다. 둥근 창문 같은 수조는 셋이서 보기에는 조금 비좁아 보인 탓
에, 나는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왠지 막 불꽃놀이 같애……”
하늘하늘 흔들리는 해파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유이가하마가 어딘가
그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
하지만 해파리는 해파리일 뿐이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불꽃놀이 같
다는 건지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는데, 유이가하마가 나를 돌아보더니
수조 한쪽을 척 가리킨다.
“안 보여? 봐, 저것도 그렇구, 피융~ 팡~하는 것도 그렇구……”
유이가하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에 있는 해파리는, 별 모양의
몸을 접었다 펼치고 접었다 펼치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어, 그러게. 뭐, 동그랗게 펼치는 걸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그 대답에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살짝 젓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유
리창을 손가락으로 톡 만진다.
“거기 말구, 여기……”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가리킨 건, 더 안쪽에 있는 긴 팔이 달
린 해파리였다.
긴 촉수를 잠시 수축시키더니 단숨에 확 펼친다. 환한 조명 속에서
반짝반짝 실처럼 늘어져 나온 촉수가 아래로 떨어지고, 마치 골든 샤
워처럼 물속에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예전에 그런 종류의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다.
여름이었다.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공원에서, 별 무리처럼
퍼지는 초대형 연발 폭죽이 몇 개나 쏘아지고, 매직 미러로 된 포트
타워 벽면에 비쳤다. 분명 그 피날레를 장식했던 게 골든 샤워. 밤하
늘에 언제까지고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은 금색 물방울을 수놓고 있었
다.
그 광경을 회상하며 수조를 보고 있자, 앞에 있던 유이가하마가 유키
노시타의 어깨에 기댄다.
“……가까워.”
“에헤헤……”
유키노시타가 곤혹스러운 분위기로 몸을 꼼지락거려도 유이가하마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어서 유키노시타의 팔을 끌어안고 기댄 채 수
조 정면에 자리를 잡더니,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제대로
뒤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유이가하마는 한순간 눈을 감는다.
“셋이서 봐서,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처럼 들리는 그 말.
그 말에 이상하게도 고개가 끄덕여지게 된다. 유키노시타도 희미하게
턱을 당겨 고개를 끄덕인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순간 우리가 가슴속으로 느꼈
던 마음은 서로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환상을 품었다.

× × ×

밝은 회랑을 빠져나오자 레스토랑과 상점이 있는 플로어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으로 돌면 바깥으로 이어진다. 아무래도 관람 코스는 여기
까지가 끝인 모양이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면 출입구에 이르게 된다.
안쪽을 쳐다보니 아까 그 플로어를 오른쪽으로 돌면 처음에 보았던
귀상어가 있는 수조가 나오는 듯하다. 요컨대 이로써 한 바퀴 다 둘러
봤다는 뜻이다.
“골인~!”
유이가하마가 힘차게 폴짝 뛰더니 우리 쪽을 돌아본다.
“있잖아, 우리 한 바퀴 더 돌자!”
“안 돌 거거든……. 똑같은 곳 계속 돌면 뭐가 재밌냐?”
“그, 그래……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유이가하마와는 대조적으로 유키노시타는 약간 지쳐 보인다. 제법 오
래 걸어다닌 까닭도 있어서인지, 원래부터 체력이 떨어지는 유키노시
타는 녹초가 된 모양새다.
그런 유키노시타의 상태나 좀 보라고 유이가하마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자 유이가하마는 사과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
을 아쉬운 듯 바라본다.
“그럴까……? 재밌을 거 같은데……. 게다가, 아직 시간두 남았구……”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는 시간을 확인한다. 그러던 그때, 그 시야
에 무언가 들어온 모양이다.
“앗!”
짧은 외침과 함께 우뚝 서 있는 대관람차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킨다.

× × ×

국내 최대 클래스의 관람차는 확실히 거대했다.


주머니에서 관람차 티켓을 꺼내어 한번 살펴보니, 거기에는 직경
111m, 전고 117m라고 써 있다. 그게 실제로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는
적절한 예가 떠오르지 않아 뭐라 표현하기 난감하지만, 굳이 한 마디
로 표현하자면, 높다. 그리고 무섭다. 그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만
큼 무섭다.
유이가하마의 제안으로 타게 된 관람차는 딱히 줄을 설 필요도 없이,
티켓을 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공포가 덮쳐왔다.
생각해 보면 관람차를 마지막으로 탄 것도 벌써 십 년 전쯤 일이다.
이게 이렇게 살 떨리는 거였나 싶을 만큼 발밑이 마구 후들거린다.
점점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묘한 모험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바람이 불어 미묘하게 흔들릴 때마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무섭다……”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는 것도 다 두 소녀 앞에서 당
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신사적인 마음가짐에서 나온 행동
이다. 만약 나 혼자서 탔으면 이미 양손으로 머리를 싸맨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거다.
그럼 그 둘은 어쩌고 있느냐 하면, 일단 내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중이다.
“우와~! 높다~! 무서워~! 그리구 막 엄청 흔들려!”
유이가하마는 반쯤 일어선 상태로 창밖에 착 달라붙어 엄청 즐거운
분위기로 떠들고 있다. 덕분에 내가 중얼거린 공포의 표현도 싹 묻힌
상태다.
반면 유키노시타 같은 경우는 창백한 얼굴로 바깥 풍경 같은 건 전
혀 구경도 못한 채 발밑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내가 얘기했잖아? 못 탈 거 같으면 타지 말자고.”
유키노시타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와 그만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러자 유키노시타는 내 쪽을 살짝 노려본다.
“무, 문제 없어. ……다들, 함께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린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아래쪽 풍경
이 시야에 들어와 버렸던 모양이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러더니 마치 도움이라도 요청하는 것처럼 서 있던 유이가하
마에게 손을 뻗더니, 팔을 딱 붙잡고 자리에 강제로 앉힌다.
“유이가하마. 관람차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 못 읽었
니?”
“유키농, 눈이 무서워! 미, 미안, 왠지 즐거워져서……”
“딱히 즐기는 건 상관없지만, 절도는 지켜 주렴.”
아하하 웃으며 사과하는 유이가하마를 유키노시타가 차가운 표정으
로 야단친다. 하지만 꼭 쥐고 있는 손은 떨어질 기미가 없다.
유이가하마도 계속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그 손을 꼬
옥 마주잡으며 유키노시타와의 거리를 좁히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
니 그녀들 쪽에서 오른쪽 방향을 척 가리킨다.
“저기 좀 봐! 유키농네 집, 아마 저기쯤일 거야. 아, 저쪽으로 쪼끔
더 가면 보일 거 같애.”
“……사양할게. 여기서 봐도 충분히 잘 보이니까.”
유이가하마의 말에도 유키노시타는 전혀 움직일 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쭈뼛쭈뼛 조심스러운 분위기로 창밖을 엿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아 하고 흡족한 분위기로 탄성을 터뜨린다.
거기에 이끌려 나 역시 턱을 괸 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본다.
눈 아래 펼쳐져 있는 광경은 눈이 쏟아지는 치바의 저녁 풍경이었다.
구름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받은 눈송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하얀 화
장을 엷게 바른 거리가 멀리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예쁘다……”
유이가하마가 입 밖으로 꺼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참으로 동
감이다.
“그러게, 역시 내 치바답네……”
“언제 돈 주고 사기라두 했어?“
“일단, 지금 있는 곳은 도쿄인데……”
“카사이(葛西) 정도면 거의 치바 아니냐? 에도가와(江戸川) 구는 도쿄
23구 취급도 안 해 주잖아.”
그런 소리를 하자 유이가하마는 킥킥대며 웃고, 유키노시타는 기가
막힌다는 양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밖으로 펼쳐진 광경을 한없이 바
라본다.
여느 때와 같은 대화의, 일상적인 분위기의, 우리다운 모습이라 생각
하였다. 그런데, 발밑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관람차는 점점 고도를 낮추어 간다.
불안정한 상황을 감춘 채 천천히 계속 돌아간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
고, 오직 같은 곳만 언제까지고. 빙글빙글.
그래도, 얼마 안 가.
“……곧 있음, 끝나겠네.”
그녀는 중얼거렸다.
9. 봄은, 내리쌓이는 눈 아래 맺혀, 움트기 시작한다. (pp.306-319)

관람차를 내리고 나서도 아직 눈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야 할 정도의 양은 아니며, 때때로 바람에 흩날리며 빛을
반사해 온다. 공원의 잔디밭에는 하얀 눈이 엷게 깔려서 조용히 시간
의 시간의 경과를 가르쳐 준다.
왠지 모르게 아무 말 없이, 공원 안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유이가하마는 앞장서듯이 걸어 나갔고, 그 뒤를 나와 유키노시타가
따라간다.
얼마 안 있어 좁은 길은 역으로 이어지는 길고 큰 대로에 직면한다.
여기서 왼쪽으로 돌면 그대로 역으로 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돌면 해
변으로 갈 수 있다.
유이가하마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저기……”
어디 들를 데라도 있냐고 물으려 말을 걸자, 유이가하마는 빙글 돌아
보더니 말없이 길 끝자락을 가리킨다.
그 끝에는 유리벽으로 된 건물이 있다. 표지판에 의하면 크리스탈 뷰
인가 하는 건물인 모양이다. 아마 도쿄만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일
것이다.
시계를 힐끗 보니 아직 돌아가기에는 여유가 있는 시간대이다.
“어서 가자.”
멈춰 서 있는 나에게 유키노시타는 그렇게 재촉한 후, 기다리고 있는
유이가하마에 따라붙으려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을 따라 잠시 걷는다.
전망대 자체는 이미 폐관됐지만, 다행히도 테라스처럼 되어 있는 부
분은 개방돼 있었다. 거기서도 도쿄만을 바라보기는 충분했다.
고요히 흔들리는 바다로 눈이 내린다. 구름 사이로는 석양이 스며나
오고 있었다.
옅은 주홍빛과 깊은 푸른빛에 무색투명한 하얀색이 어우러져 화려하
게 빛난다.
“오~”
눈앞의 광경에 유이가하마가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거기서 몇 걸음
뒤에 있던 유키노시타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누르며 감개무량한
시선으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우리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다. 눈앞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먼 곳에
서는 거리의 불빛이 여기저기를 밝히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밖에 볼 수 없는 풍경이리라.
느긋하고도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 시간은 오래 계속되지 못한다.
유이가하마는 몸을 내밀고 있던 테라스 울타리에서 물러나 우리 쪽
으로 뒤돌아본다.
“이제 어떡하지?”
“집에 가야지.”
“그거 말구……”
내가 가볍게 농담조로 말하자 유이가하마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 목소리에는 진지한 무게가 담겨 있다. 천천히 나와 유키노시타 앞
으로 한 걸음 내딛고는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유키농 얘기. 그거랑, 내 얘기. ……우리 얘기야.”
그렇게 던져온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줄곧 떠나지 않던 위화
감이 빠른 속도로 형태를 갖고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건, 무슨 뜻이니?”
망설이듯이 뜸을 들인 후 유키노시타가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묻는다. 그러나 유이가하마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진지
한 시선만 보내 올 뿐이다.
“힛키. 이거, 그때 답례야.”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가방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꺼낸다. 양손
으로 받쳐 든 그것은 예쁘게 포장된 쿠키였다.
그걸 본 순간 깜짝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 한쪽에서
유키노시타가 가방을 꼭 쥐고,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 듯 보였다. 그리
고는 고개를 떨군 채 발밑을 쳐다본다.
그러는 유키노시타의 옆을 지나 유이가하마가 내 앞으로 다가온다.
“내 의뢰, 기억나?”
“……그래.”
거의 목소리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봉사부가 처음으로 받은 의뢰니까. 결
국 그때도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고는 세 치 혀로 때웠을 뿐인, 해결
과도 해소와도 거리가 먼 의뢰였지만.
그럼에도 유이가하마는 자신의 힘으로 똑바로 해결하려 노력해 왔다.
뚜렷한 형태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유이가하마는 당혹스러움에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내 손을 잡
고, 거기에 쿠키를 꼭 쥐어준다. 손 안에는 분명한 무게가 느껴졌다.
투명한 비닐 포장지 안으로 보이는 쿠키는 모양이 비뚤비뚤한 것, 군
데군데 탄 자국이 있는 것, 이상한 색깔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보니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만큼 한눈에 봐도 직
접 만든 쿠키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생김새에서 요리에 서투른 그녀의 노력과 진지함이 전해져 온다.
내 손 안에 있는 쿠키를 망연히 바라보던 유키노시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연다.
“수제 쿠키……. 이걸, 혼자서?”
“살짝 실패했지만 말야.”
수줍음을 감추듯 웃는 유이가하마에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라
는 듯 유키노시타는 나직이 고개를 젓는다.
“유이가하마. 너…… 대단하구나.”
부러운 듯 말하는 그 다정한 목소리에는 마치 동경과도 비슷한 감정
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유키노시타는 눈부신 듯 유이가하마를 바라
본다. 그 시선에 유이가하마는 기쁜 미소로 화답한다.
“……나 스스로 노력해 보려구. 내 나름대로 노력해 보려구 했거든.
그게 이거야.”
그리고 유이가하마 유이는 그녀 나름대로의 답을 내렸다.
“……그러니깐, 그냥 답례.”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는 가슴을 펴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때의 답례라면 그 문제는 진작에 끝났을 터이다. 과거의 일은 이미
다 청산된 상태고, 그걸 이제 와서 다시 꺼낼 생각은 없다. 답례라면
지금까지 보내온 나날 속에서 이미 과분할 만큼 받아 왔다. 따라서 이
걸 답례로 받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잘못되었던 시작은 완전히 끝을 맺음으로써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담긴 마음과 답이 변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
능한 일이다.
만약에. 혹시 만약에. 그 마음이 무언가 특별한 것이었다면.
나는 유이가하마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답례라면 벌써 받았어.”
정말로 답례인지 아닌지는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이를 그냥
답례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순순히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정면에 서 있던 유이가하
마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그냥 답례인걸?”
유이가하마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그리고 눈가에 반짝이는 빛을 감추듯 등
을 홱 돌린다.
“난 전부 다 갖고 싶어. 지금도, 앞으로도. 나, 치사하니깐. 비겁한 애
라구.”
어딘가 토라진 듯한 말투로 허공을 향해 말을 잇는다. 그 말은 대답
도 반론도 요구하지 않는 독백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그저 그 뒷모습
만 바라보며, 어떻게든 한 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귀를 기울이는 수밖
에 없었다.
말을 끝내자 하아 하고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고, 허공에 녹아들어 간
다.
그리고 유이가하마는 몸을 돌려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난 벌써 제대루 정했어.”
유이가하마의 눈동자는 이미 물기가 사라져 있었고, 그 눈빛에는 강
한 결의가 전해져 왔다.
“그래……”
유키노시타는 체념과도 같은 한마디를 흘리고, 나는 의미 없는 말 한
마디조차 입에 올리지 못한다. 유이가하마는 우리를 보며 조금 쓸쓸하
게 웃는다.
“만약에, 서로 무슨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 이대로는 지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깐, 아마 이게 마지막 상담. 우리 마지막 의뢰
는 우리에 대한 거야.”
무엇 하나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버리면 확
정되고 마니까. 그러기를 피해 왔던 것이다.
어렴풋하게, 막연하게, 그 사실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그녀는 말
한다. 그렇기에 나와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실이 완전히 똑같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지낼 수 없다는 그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나 자신이 줄곧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던 의심이자, 유이가하
마 역시 강하게 인식 중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유키노시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표정은 살필 수
없지만, 그래도 반론도 없이, 추궁도 없이, 묵묵히 듣고 있다. 아마 유
키노시타도 실감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있잖아, 유키농. 그 승부, 아직 계속하고 있는 거지?”
“그래. 이긴 사람이 명령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는……”
갑작스럽게 묻는 그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로 유키노시타가 대
답한다. 그러자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의 팔을 살며시 만지며, 정면
으로 마주보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키농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 나, 답이 뭔지 알아.”
그렇게 말하며 유이가하마가 천천히 유키노시타의 팔을 어루만진다.
유키노시타가 안고 있는 문제, 그것은 줄곧 그녀의 행위 속에, 언어
속에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키노시타 하루노가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지금의 유
키노시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거라고. 그건 무엇에 대해서일
까. 어머니, 언니, 그리고 이 관계. 어느 하나일 수도 있고, 전부 다일
지도 모른다.
“나는……”
유키노시타가 곤혹스러운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모르겠어, 하고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이가하마는 응 하고 다정
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키노시타에게서 손을 뗀다.
“아마도, 그게…… 우리들의 답일 거라 생각해.”
모르는 것이다, 결국. 나도, 그녀도.
이해해 버리면 그것은 분명 부서져 버리고, 애써 덮어놓고 계속 무시
해도 조금씩 썩어 없어져 간다.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도 끝을 맞게
되고, 잃어버리는 건 피할 수 없다.
그게 나아간 끝에 기다리고 있는 답, 결론이다.
유이가하마는 거기서 일단 말을 끊고 머리를 작게 흔든다. 그리고,
그래서 얘긴데…… 하고 덧붙이더니 그녀는 돌연 나와 유키노시타를
똑바로 쳐다본다.
“내가 이기면, 전부 가질게. 치사할지두 모르겠지만……. 그거밖엔 모
르겠어……. 계속, 이대로 지냈으면 좋겠어.”
따라서, 유이가하마는 우선 답을, 가정도, 조건도, 방정식도, 모두 무
시하고 단 하나의 결론을 먼저 명시했다.
비록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성립
이 불가능한 등식이라도, 그 답만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한 것
이다. 거짓말처럼 즐거운 시간을 계속 이대로.
“어때……?”
“어떠냐니…… 그건……”
유이가하마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결론부터 역산해서, 다소 식을 왜곡시키더라도, 증명을 속여서라도
그 답을 가져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불가능하지만 명령하는 건 무엇
이든 들어준다는 강제력이, 아니, 면죄부가 있다면 그 소원은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런 핑계가 준비돼 있다면 나는 분명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다.
얼마간의 위화감이 있더라도 오늘 같은 시간이 계속된다면 그건 행
복의 범주에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유이가하마는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만은 계속, 올바른 답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받아들이게 된다면 분명 편하지 않
을까. 하지만──.
일그러진 것을 일그러진 그대로 두는 게 올바르다 할 수 있을까. 그
게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의 정체란 말인가.
이를 악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를 유이가하마는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옆에 선 유키노시타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유키농, 그래도 돼?”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묻듯이, 유이가하마는 그렇게 묻는다. 그 물
음에 유키노시타는 어깨를 흠칫 떤다.
“나, 는……”
도망치듯이 눈을 돌리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대답해야만 한다는 생각
에 가냘픈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하고 말았다.
그렇다, 이건…… 틀렸다, 잘못됐다.
유키노시타가 자신의 미래를 누군가에게 맡긴다니, 그런 일이 일어나
도 괜찮을 리가 없다.
유이가하마가 치사한 소녀라니, 그런 소릴 하게 두어도 괜찮을 리가
없다.
“나는 그래도……”
“아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한 걸음 다가선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유
키노시타가 놀란 기색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본다.
“그 제안은 못 받아들여. 유키노시타의 문제는, 유키노시타 자신이
해결해야 돼.”
주먹을 굳게 불끈 쥐고, 정면에 있는 유이가하마를 응시한다. 유이가
하마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평소와는 다른 당당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유이가하마 유이는 상냥한 소녀다.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강한 소녀다. 그렇게 이상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줄곧 거기에 기대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맡
겨서는 안 된다. 그 상냥함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 그 상냥함에 거
짓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이가하마 유이는 상냥한 소녀이고,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강한 소녀니까.
“……게다가, 그딴 건, 단순한 기만일 뿐이잖아?”
내뱉은 말은 파도에 사라진다. 그저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잔물결이
밀려와서는 휩쓸어 간다.
누구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키노시타는 물기로 흐려진 눈으로 입가를 떨고 있고, 유이가하마는
따스한 눈동자로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려 주고
있다.
“애매한 답이고, 형식적인 관계고…… 그딴 건 필요없어.”
원하는 건 다른 것이다.
멍청한 놈이라 생각한다.
그딴 건 없다는 건 알고 있는데. 끝까지 찾아본들 손에 넣을 수 없다
는 건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래도, 똑바로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발버둥치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쥐어짜내던 말은 이제 목소리로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게 올바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즐겁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만 하면 그걸로 좋을지도 모른다. 있을 수 있는 미래나 아름다운
가능성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아무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이상을 강요하고 싶다. 눈감은 채 살아갈 수 있을 만
큼 강하지는 않으니까. 스스로를 의심한 끝에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에
게 거짓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똑바로 된 답을. 속이지 않고, 내가 바라는 답을, 손에 넣
고 싶다.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오고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
자, 유이가하마는 똑바로 내 얼굴을 본다.
“……힛키라면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
유이가하마는 다정하게 생긋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그 순간 물방울
이 주륵 뺨을 타고 내린다. 내 경우는 어떨까, 꼴사나운 표정은 아니
었으면 좋을 텐데.
나와 유이가하마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그녀의 소원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 그 형태는
아주 조금은 엇갈려 있어서 완전히 서로 딱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입으로 내뱉는 만큼 보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 들어맞
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유키노시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유키노시타는 가슴을 꼭 쥐고, 물기 어린 눈 그대로 나와 유이가하마
를 번갈아 본다. 불안스러운 시선이 아련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내 시선은 계속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자, 작게
심호흡을 한다.
“……내 마음을 멋대로 단정하지 말아 줘.”
유키노시타는 조금 토라진 것처럼 그렇게 말한 후, 눈가를 슥 닦는다.
“게다가, 마지막은 아니야. 히키가야, 네 의뢰가 남아 있어.”
내 의뢰라니, 그렇게 반문해 보려 했지만 유이가하마의 은은한 미소
에 가로막히고 만다.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에게, 그렇지, 하고 고개
를 끄덕여 보인다.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짓만으로 미소를
나눈다.
“……그리고, 또 하나.”
유키노시타가 미소를 거두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나와 유이가하마
쪽으로 천천히 향한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자 그녀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 쪽으로.
살며시 한 걸음.
“……내 의뢰, 들어줄 수 있겠니?”
부끄러운 듯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말하자 유
이가하마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응, 들려 줘.”
그렇게 대답하며 한 걸음 더 유이가하마가 거리를 좁히고 살며시 손
을 내민다.
이윽고 바다로 저물어 가는 황혼 녘의 석양이 하얀 캔버스에 실루엣
을 비춘다.
그것은 어슴푸레하여 미덥지도 않고, 비뚤어진 모양은 윤곽조차 명확
치 않다.
하지만 확실하게 이어져 있고, 똑바로 하나가 돼 있다.
만약에, 원하는 것에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끝)
후기 (pp.320-321)

안녕하세요, 일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계절도 어느새 완전히 초여름으로, 완전히 더워졌
습니다. 그래도 때때로 갑자기 싸늘해지는 날도 있다 보니, 이 계절은
매회 매번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담 같은 말이 나오곤 합니다.
더운지 추운지 확실치 않으면 결국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선택
지를 취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만, 사축질을 하고 있는 몸이다 보니
그것도 불가능.
그렇다 보니 매일 “오늘은 이 옷이면 되려나……? 가르쳐 줘, 피코!114”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입을 옷을 고르고 일터로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뭐, 옷 고르는 법에 절대적인 정답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아니
다 싶은 잘못된 코디는 있다고 봅니다. 위에 언급한 날씨나 기온 같은
것도 기준이겠습니다만, 그밖에도 비즈니스 매너라는 기준이나 특정
장소에서의 드레스 코드. 요컨대 남들로부터의 시선도 그렇겠지요.
코디 센스에 자신이 없으면 길을 걷다가도 묘하게 불안해져서 “지금
저 사람 내 옷 보고 웃는데……. 아, 저 사람도……. 해님도 웃고 있고
…… 가, 강아지도 웃고 있어! 룰~루루루루~♪ 115 ” 이런 식으로 번뇌하
게 되는 경우도 있을 거라 봅니다. 없거든?
그런 객관적인 기준 외에도 자기 스스로 “오늘 이 옷,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항상 따라다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화감과 함께하면서 정답과 오
답, 주관과 객관이라는 선택지에 휘둘린 끝에, 마지막에는 어떤 옷을

114
패션 평론가. 정식 발행본 10권 12번 각주 참조.

115
‘사자에상’ 주제가 가사.
입게 될까요.
그런 느낌으로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11권이었습
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 코너.
퐁칸⑧신. 또 신이 되어버린 건가. 표지는 오랜만에 가하마 양으로,
멋지다~! 우와~. 귀여운데~? 쩔어~! 항상 감사합니다!
호시노 담당 편집자님. 크하하! 이야~ 이거 죄~송합니다! 크하하! 저
기, 정말로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뭐어~ 다음은 여
유롭다고요, 크하하!
미디어믹스 관계자 여러분. TV 애니메이션을 비롯하여 여러모로 폐를
끼쳐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사오니 계속 잘 부탁드리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 늘 변함없이 잘못을 거듭하고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다
가 일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1권. 이 이야기도 간신히 가경에 접
어들었다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및 만화와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응원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지면도 바닥났으니 이번에는 이쯤에서 붓을 놓도록 하
겠습니다.
다음은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12권에서 뵙겠습니
다.
5월 모일 뭐가 어떻든 MAX 커피를 마시며
와타리 와타루
* 원문의 기본적인 호칭 관계
유이, 토베, 오오오카>하야마 : 하야토 군(隼人くん)
에비나>하치만 : 히키타니 군(ヒキタニくん)
하치만>에비나 : 에비나 상(海老名さん)
유키노, 메구리>잇시키 : 잇시키 상(一色さん)
유이, 타마나와>잇시키 : 이로하 짱(いろはちゃん)
유키노, 하루노, 메구리>하치만 : 히키가야 군(比企谷くん)
하치만>하루노(대화, 지문 동일) : 하루노 상(陽乃さん)
유키노, 토츠카>사키 : 카와사키 상(川崎さん)
유키노, 메구리>유이 : 유이가하마 상(由比ヶ浜さん)
유키노>하야마 : 하야마 군(葉山くん)
하치만>학생회 서기 : 서기 짱(書記ちゃん)
메구리>하루노 : 하루 상(はるさん)
이로하>하루노 : 하루 상 선배(はるさん先輩)
자이모쿠자>토츠카 : 토츠카 씨(戸塚氏)
케이카>하치만 : 하아 짱(はーちゃん)
케이카>사키 : 사아 짱(さーちゃん)
사키>케이카 : 케이 짱(けーちゃん)
유이, 토츠카>케이카 : 케이카 짱(京華ちゃん)
하루노>시즈카 : 시즈카 짱(静ちゃん)
하루노>유키노 : 유키노 짱(雪乃ちゃん)
하야마>하루노 : 하루노 상
하야마, 유미코>유키노 : 유키노시타 상(雪ノ下さん)
케이카>토츠카 : 사아 짱→사이 짱(さいちゃん)
유이>유이네 어머니 : 마마(ママ)
유이네 어머니>하치만 : 힛키 군(ヒッキーくん)
유이네 어머니>유키노 : 유키농 짱(ゆきのんちゃ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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