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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스트럭 3 권

지은이 하태진

발행일 2021 년 7 월 8 일

8.

별을 찾아서

한숨도 못 잤다.

유재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강의실로 향했다. 술 한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지금껏 겪었던 그 어떤 숙취보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기분이 따랐다. 머리가 멍할 정도로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어젯밤 집행부 일을 끝내고
나서 녹초가 되어서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든 건 아닐까. 사실 어제 한준을 찾아 체육관에 갔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모든 게 다 자신의 망상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결국 다음 날 오전 강의 시간에 이르렀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끝에, 유재는 정각에 딱 맞춰 강의실에 도착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재는 자연히 그 넓은 공간을 빙 둘러보았다. 단 한 명을 찾아 움직이던 눈이 마침내


한곳에서 멈추었다. 서한준은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유재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운 것투성이였음에도 제 자리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는 한준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피로 때문인지 발갰다. 그 역시 밤을 꼬박 새운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왔냐?”

“어.”

유재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떠들 틈도 없이 바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똑바로 앉은 채 앞을 보았다. 한준이 말없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첫 키스를 했다. 서한준이랑.

유재는 열심히 강의 중인 교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수없이 돌려 보았던 기억을 또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체육관 탈의실. 낡은 로커 룸. 막 씻고 나와 젖어 있던 서한준에게서 나던 보들보들한 샴푸 향. 여백 하나
없던 대화. 숨 막히던 공기. 눈물.
그리고 키스.

사춘기 때 들끓던 성욕으로 섹스는 수도 없이 그려봤지만 키스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연애에 낭만을 품은 적이
없어 로맨틱한 입맞춤조차 꿈꿔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섹스를 하는 상대와 침대 위에서 자연히 하게 되는
행위라 여겼다.

그런 키스를 섹스 상대가 아닌 친구 서한준과 했다. 침대가 아닌 로커 룸에서, 그것도 화를 내다가.

“하아…….”

유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꿈을 꾼 게 아닐까? 그러나 모든 것을 상상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기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손아귀 안에서 벙긋거리는 입술에 온 신경이 빼앗겼던 게 기억났다. 유재야. 헐떡헐떡 울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서한준이, 그 당시 그 순간만큼은 새로운 느낌으로 색다른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한준은 자신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말다툼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아 짓무른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을 움켜잡은
손목을 한 손으로 뜨겁게 감싸 쥐었다. 뿌리쳐 밀치지 말라는 것처럼, 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처럼
절박했다. 그런 한준을 다시 제 품으로 이끌어 안았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음을 삼키는 순간에 서한준은 고개를 비틀었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길을 따라 고개를 들이박은 유재가
정신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는 부드럽지 않았고, 단순한 전희 과정으로써 흥분만을 촉진시키지도 않았다.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고 머릿속도 눈앞도 새하얘져서 짐승처럼 마구 입을 붙이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흥분보다
서한준의 반응에 몰두하느라 본능과 이성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미끌거리는 혀를 빨아당길 때마다 뺨에 눌린 서한준의 코에서 밭은 숨이, 목 끝에서는 낮은 신음이 터졌다.


한준이 두 손으로 등허리를 꽉 껴안았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안고 또 안으면서 붙들어 오는 손에 연달아
충격을 받았다. 그가 더 간절하게 제게 매달리길 바라며, 유재는 처음 듣는 친구의 신음 소리를 남김없이 핥고
젖은 입술을 비벼댔다. 입가에 침이 번져 입술이 엉망으로 녹아나고 허벅지에 단단한 것이 눌릴 때까지.

서한준이 운동할 때 입는 반바지는 옷감이 가볍고 얇았다. 그 얄팍한 옷감 너머로, 지금껏 막연하게만 그려
보았던 서한준의 욕망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한준이 거침없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수도 없이 자신을
생각하며 자위했었다는 놈이, 어떤 소리를 내며 흥분하고 어떻게 앞을 세우는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았다.

발기한 곳이 또다시 제 허벅지를 찌르는 순간 유재는 한준을 밀어냈다. 서한준은 맥없이 떨어져 나가 벽에
부딪혔다. 얼룩덜룩하게 상기된 채,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유재는 우두커니 서서 한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벌리고 선 다리 사이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면서 선 채로 몇 초가 지났다. 아마 몇 분일지도 몰랐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지만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한준은 천천히 중심을 잡고 서서 매무새를 고쳤다.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며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머무른
후, 먼저 자리를 뜬 건 한준이었다.

그렇게 넋이 빠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유재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정리하고 계획할 수도 없었다.

“그 아래 지문을 보면…….”

교수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유재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종이였다.

나는 왜 키스했지?

유재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욱해서 입을 갖다 댄 서한준을 진정시키진


못할망정 왜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나?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처음 해 본 키스가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충동을 자제할 수 없었던 걸까? 요즘 계속 남자끼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왔기에 한준이
다짜고짜 키스했어도 거부감이 없었던 건가? 아니면 정말…….

서한준을 그런 식으로 좋아하기라도?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놈을, 이제 와서? 지금까지 여자한테만 욕구를 느꼈으면서, 고작 몇달 동안 동성애를
숙고해 봤다는 이유로 갑자기 게이가 됐다?

아니면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에야 깨닫기라도 한 건가? 서한준을 그렇게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흥분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키스였다. 유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서한준과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어쭙잖은 마음으로 행동했다간 한준을 영영 잃을 수 있었다.

서한준을 잃는다.

욕구에 기반한 사랑은 한계가 명확하다. 서한준과 만약 애인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관계보다
무조건 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수많은 애인, 부부 사이가 파멸에 이른다. 유재는 제 부모를 떠올리고는
자조했다. 그들 역시 한때는 분명 사랑한다고 입을 맞추고 관계를 가졌을 테지만, 지금은 여유가 생기자마자
각방을 쓰기에 이르렀다. 더 끔찍한 사실은 사랑이 식을 만한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배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월이 그들의 애정을 무디게 깎아내렸다. 시간이 흐른 것, 그게 다였다.

욕구는 지나간다. 여러 번 몸을 섞다 보면 익숙해지고 새로울 게 없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은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욕구가 사라지는 순간 한준이 자신을 보며 할 생각을 헤아리다 보면…….

무서웠다.

“쉬는 시간인데 편의점 갈래?”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유재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의자가 덜컹 흔들리도록 놀란 유재가 움찔 돌아보자


한준이 물러섰다. 유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뒤늦게 시간을 확인했다. 치열하게 생각하느라 쉬는 시간인
줄도 몰랐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피곤해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한준이 천천히 시선을 내려, 옆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멀찍이 벌어져 있는 틈을 보았다.
유재는 그제야 자신이 의자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한준은 그가 자세를 고쳐 앉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재는 긴 한숨을 뱉으며
엎드려 누웠다.

수업이 끝날 때쯤엔 피로가 극도에 달했다. 잠도 설쳤는데 삼 일간 이어지는 축제가 아직 한창이라 오늘도
집행부 일을 도와야 했다. 게다가 축제 기간임에도 오전 강의를 맡은 교수는 두 시간을 틈 없이 빡빡하게
수업했다.

공강 시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다음 수업에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비척비척 일어서는 유재에게 한준이
다가와 물었다.

“점심 어떻게 할 거야?”

“어? 글쎄.”

“같이 먹을래? 후문 쪽에 맛있는 돈부리 집 있대.”

서한준이 먼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다니.

유재는 저절로 끄덕이려던 고개에 힘을 주었다. 서한준은 지금 단순히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분명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서한준이 키스 얘길 꺼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무슨 생각으로 키스에 응했냐고 물으면?

혼자 더 생각하고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은 삼십 분이라도 눈부터 붙이고. 유재는 욱신거리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다음에 가자. 나 너무 피곤해서 잠깐이라도 좀 자야겠어.”

“…그래?”

한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대화가 끝났음에도 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우리 어제 말이야.”

“야.”

그때, 민희가 불쑥 나타났다. 민희는 거침없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섰다. 말을 나누는 건 꽤


오랜만이었음에도, 그녀는 다른 인사말 하나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발표 이제 슬슬 제대로 준비해야 돼. 곧 우리 조 차롄데 다들 기약 없이 손 놓고 있길래.”

생명과 환경 발표. 매주 강의에 들어갈 때마다 다른 조의 발표를 보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민희가 미리 준비한 듯 줄줄 말을 쏟아냈다.

“혜리였나? 우리 조에 한 명 더 있던 다른 과 애. 걔는 수업도 안 나오고 문자도 다 씹더라. 안 나오려는


모양인데 그냥 우리끼리 해.”

“…….”

“여기서 나만 통학이지? 난 집 머니까 평일 중에 만나. 역할 분담도 다 다시 해야 돼. 본격적으로 해야


되니까 단톡도 만들자.”

유재가 끄덕이자 한준도 마주 끄덕였다. 한준은 가방 끈을 묵묵히 어루만지던 끝에 먼저 인사했다.

“그럼 난 가 볼게. 밥 먹고 집행부 부스 가 있으려고. 이따가 보자.”

그는 간단하게 자신의 일정을 읊어 주고는 뒤를 돌았다.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유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한준이 떠나자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맥없이 마른세수를 하고 있노라니 민희가 실소를 뱉었다.

“뭐야? 싸웠어?”

“아니.”

“다행이네. 발표에 지장 안 갔으면 좋겠어.”

“알았어.”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잠깐만 시간 내줄래?”

“다음에. 나 피곤해.”

“다음? 다음 같은 건 없어.”

유재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 민희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무시하고 갈 생각이었으나 마주한 이민희는
퍽 진지했다. 순전히 신경을 긁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점심 먹자. 잠깐이면 돼.”

“학식 먹어,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유재는 바닥이 난 인내심을 겨우 긁어모아 대답했다.

그들은 1 층 교내 식당으로 내려가 학식을 주문해 마주 앉았다. 유재는 줄이 가장 짧은 물냉면을 골라 들고


출입구와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충 구색만 맞춰 놓은 것으로, 대화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물냉면을 성의 없이 뒤적거리며 기다리던 때였다. 민희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얘기는 하고 끝내야 할 거 같아서. 물론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너는


주장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사람 사이에 예의라는 게 있는 거니까.”

유재는 고분고분 끄덕였다. 분을 풀고 싶은 모양인데, 이걸로 다신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리를 하든


상관없었다.

“이해가 안 갔어. 네가 왜 갑자기 그날 눈을 뒤집고 화를 냈는지. 내가 딱히 못 할 말을 했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내가 서한준하고 친하게 지내 보려고 연락 좀 했다는 게 솔직히 화낼 일은 아니니까.”

서한준. 그의 이름이 나오자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민희는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말을 이었다.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자기 친구들이 소중한가 싶어서 일부러 열받게 하려고 집부 애들한테 싹 연락
돌렸는데.”

“…….”

“글쎄. 내가 보기엔 너 친구들한테도 관심 없어. 애들한테 화내긴커녕 변명도 안 했잖아?”

“그냥 넘어가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불렀어?”

유재는 냉면을 휘저으며 물었다. 민희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어때, 이젠 내가 좀 지겹니?”

하, 짧은 웃음이 터졌다. 반 엠티에서, 하나도 안 지겹다고 살살 놀려 먹었던 일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말이었다.

유재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민희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난 너 궁금했고 알고 싶었어. 단순히 네 얼굴만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니라.”

“…….”

“종일 나대다가 밤에 혼자 테라스에서 별 쳐다보는 놈 궁금해서. 가볍게 행동하지만 정작 전혀 쉽지 않은 게


좋아서. 쉽지 않다 못해 결국 친구라고는 서한준 하나밖에 없어 보이는 네가.”

테라스? 새터 때 얘기다. 의외의 말에 민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참이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 교내 편의점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서한준이 입고 온 후드 티셔츠. 옷을 먼저 알아보고, 그가 막 사 들고 나온 편의점 김밥 한 줄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얼굴 쪽으로 눈을 들었다.

“네 앞에 계속 얼쩡거리다 보면 네가 갑자기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유만이라도 말해 줄 줄 알았어. 근데


너한테 나는 그냥 그걸로 끝이었지. 집부 애들한테 네가 단 한마디도 변명할 필요를 못 느꼈듯이.”

한준은 방금 수업에서 봤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어색해서 괜히 웃거나,


힐끔 쳐다봤다가 딴청을 피우거나 하던 산만한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한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몸을 틀었다. 그는 서두르느라 부딪친 사람에게 꾸벅 고개 숙여 사과하고는
성큼성큼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민희가 식판을 든
채 일어서 있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는 소리야, 조유재.”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 * *

—오늘 애가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서요. 미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어떡하죠?

한준은 버스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일곱 시 과외인데 여섯 시 사십오 분이었으니, 이미 과외 학생이 사는


동네에 접어든 차였다. 아이는 어려서인지 자주 아팠고, 수업을 못 한다는 연락은 항상 너무 늦은 시간에 왔다.
한준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다고 웃어넘겼을 일이었으나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웃음이 안 나왔다.

—여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수업 때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웬만하면 그냥 시키려고 했는데 애가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는 순간 버스 뒷문이 열렸다. 한준은 하차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서 내렸다.

차비만 버렸다. 몇 번 수업도 안 했는데 벌써 세 번이나 취소당한 게 짜증이 났다. 생각 같아서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과외를 새로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새빨간 신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준은 조유재를 생각했다. 강의 내내 멍하니 허공만 들여다보고 있던 놈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은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유재의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져 슬펐다.

퀭한 눈을 깜박이며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조유재. 눈썹 뼈를 문지르며 식사 제안을 피하던 조유재.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고 상처받아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피한 적 없던 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드러운 거절에도
속이 사정없이 문드러졌다.

조유재가 입에 올렸던 ‘예전처럼’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렇게 되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홧김에 고백해 놓고 네가 원하면 볼 일이 없을 거라며 다급히 덧붙였을 때도, 수능이 끝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잠시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조차 유재를 영영 보지
못하리라고 진정으로 믿은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조유재가 노골적으로 벌려 놓은 거리를 앞에 두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끝장이 나고 말리라는 것을.

신호가 바뀌었다. 한준은 길을 건넜다.


후문 앞에서 내린 한준은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힘든 마음을 달래고 싶다고 술부터 찾는 게 우스웠다. 그는 안주도 고르지 않고 소주 한 병만
계산했다.

학교 친구들을 마주치지 않을, 인적이 드문 골목을 일부러 고른 터라 편의점 앞 테이블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아무도 여기 앉아 식사를 한 적이 없는 듯했다. 한준은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과 의자를
닦았다.

물티슈 넉 장이 새까매질 때까지 테이블을 닦는 동안에도 유재와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유재가 코앞에서 눈을
감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밀려들어 오는 혀에 입안이 다 녹아 버리는 듯했다. 나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 쓸데없이 계속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물러서긴커녕 꽉 끌어안아 오는 손이 좋아서 정신이
나갔다.

그 키스를 잊기 위해, 한준은 빈속에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린 맛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눈가가


화끈거리고 목 끝이 따끔하던 것도 전부 술 탓을 할 수 있어 편했다. 그는 소주병을 쳐다보며 코를 훌쩍
마셨다. 한 병이면 충분히 취하겠지? 그 자식이 그렇다고 했으니까.

휴대폰에 톡이 반짝 떴다. 유재가 민희와 자신을 초대해 단톡방을 만든 것이었다.

소주를 병째로 마시며 한참 휴대폰을 노려보던 한준은 단톡방 나가기를 눌렀다. 교양 수업 하나 정도야
재수강을 하면 그만이다. 학점이 아깝긴 하지만 다음 학기에 꽉 채워 들으면 되지. 나가자마자 유재가 다시
초대했다. 한준은 한 번 더 방을 나갔다. 그 짓을 너덧 번 정도 더 하니 유재도 더 이상 초대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취하고 싶었으므로, 한준은 소주병 입구에 입을 붙인 채 조금씩 조금씩 쉬지 않고 마시기


시작했다. 시야가 조금씩 어그러지고 가슴의 통증이 둔해지는 기분이 좋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시는 동안
무음으로 바꿔 놓은 휴대폰이 끊임없이 깜박거렸다.

* * *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한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머리를 부여잡았다.

편의점 앞에 앉아 혼자 술을 깐 건 기억 나는데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전혀 생각이 안 났다. 그는 등


아래로 느껴지는 푹신한 느낌에 안심했다. 그래도 다행히 무사히 기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일어났어?”

“헉!”

익숙한 목소리에 한준이 깜짝 놀라 튀어 올랐다. 벌떡 일어나 앉자마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핑핑 돌았지만 그는 힘껏 눈을 부릅떴다. 잘못 들은 거라 믿고 싶었지만, 식탁에 앉아 있던 이와 기어이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뜨거운 차라도 한 잔 줄까?”

정윤이 물었다. 한준은 허겁지겁 일어나 앉았다. 이제 보니 자신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여,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집.”

“제가 왜 여기?”

“너 어제 술에 진탕 취해서 전화했는데 기억 안 나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났다. 한준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나도 간만에 친구 집에서 자고 한 한 시간쯤? 전에 돌아온 거니까. 나보다는 거기 편의점 주인한테


고마워해. 하마터면 못 찾아갈 뻔했어.”

정윤이 말을 잇는 동안 드문드문 어제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뺨을 대고 누워 눈물


콧물을 줄줄 쏟아내고 있을 때, 어쩔 줄을 모르고 제 앞에 꿇어앉아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나, 유재가…….

한준이 움찔 허리를 펴고 앉았다. 조유재의 이름이 함께 떠오르는 순간 숙취가 싹 잊혔다. 정윤은 그런 그를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너 술집도 아니고 무슨 편의점 앞에 앉아서 술 먹었더라? 처음부터 나 부르지 그랬어.”

“네. 어…… 죄송해요. 왜 누나한테 전화를 했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괜찮아.”

“술 혼자 마셔 본 거 처음인데, 빨리 마시니까 필름이 바로 끊기더라고요. 제가 생각보다 잘 못 마시나


봐요.”

한준은 소파 바로 아래에서 가방을 찾아 급하게 멨다. 이렇게 필름이 쉽게 끊길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서 혼자


마실걸. 차마 정윤을 똑바로 볼 엄두가 안 났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대충 문지른 다음, 한준은 벌떡
일어서서 인사했다.

“저 이제 가 볼게요. 일단 좀 씻고 나서 연락 바로 드릴게요. 진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맹세.”

“괜찮아?”

진땀을 빼며 억지로 웃고 있을 때, 정윤이 물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한준은


가만히 미소를 올린 채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세수만 하고 가. 많이 부었어.”

정윤이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제야 얼굴이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한준은 고분고분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단순히 얼굴이 부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퉁퉁하게 부은 눈두덩 때문에 눈이 평소 크기의 절반이었다.

“아, 씨발.”

한준은 찬물로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세수했다.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도 이 지경으로 울진 않았는데, 조유재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한준은 찬물을 피부가 얼얼할 때까지 끼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를 또 버리게 둘 줄 알고.
조유재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한준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손이 닿는 순간 멀어지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피하는 조유재를 보면서, 한준 역시 그에게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선물한 초콜릿을 내던지며
마음을 접고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 때보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노력을 강요했을 때보다, 오히려 눈을
돌리고 대충 둘러댄 말로 자리를 빠져나가는 조유재를 맞닥뜨렸을 때의 고통이 훨씬 컸다.

한준은 매무새를 정리한 후 티셔츠에 대충 물기를 문질러 닦고 나왔다.

“누나, 저 가 볼게요. 제가 다음 달에 꼭 밥 살게요.”

“됐어, 신경 쓰지 말고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 그리고 너 폰도 챙겨. 배터리가 나가서 내가 충전해 뒀어.”

“아,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준은 휴대폰을 받아 들고는 꾸벅 인사했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한준이 멈칫 섰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정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한준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재빨리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따끔따끔한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들자 지금이 몇 시인지가 궁금해졌다. 오늘은 열한 시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한준은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열한 시 사십칠 분. 늦어도 너무 늦었네.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던 한준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부재중 전화 31 통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준은 급히 통화 내역을 확인해 보았다.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재빨리 톡방을 찾자 그곳에도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한준은 시간 순서대로 하나하나 전부 읽어 내렸다.


조유재☆

야 아깐 내가 피곤해서 미안 지금 일어났네 우리 좀 볼까? 술 한잔 하자

오후 8:07

조유재☆

오후 8:32

조유재☆

자냐?

오후 8:41

조유재☆

서한준?

오후 8:42

조유재☆

오후 8:45

조유재☆

안읽씹하기냐?

오후 8:50

조유재☆

어디 아파?

오후 8:52
조유재☆

너 그리고 왜 조별과제방 자꾸 나가? 안 해?

오후 8:54

조유재☆

알았어 내일 봐 그럼 내일 점심 때 그 맛있다던 돈부리 집 같이 가자

오후 8:58

조유재☆

알았지?

오후 9:14

5 월 30 일 금요일

조유재☆

야 너 오늘 수업 왜 안 나왔어?

오전 11:12

조유재☆

전화는 왜 안 받아

오전 11:22

조유재☆

서한준

오전 11:23

조유재☆

야 너 어디야

오전 11:42
메시지를 읽는 동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조유재☆

괜찮아? 어디야

오전 11:51

천천히 나눠 뱉은 숨이 떨렸다. 불안과 혼란. 유재 역시 자신과 별다를 게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조유재☆

그때 못했던 얘기 마저 해야지

오전 11:52

조유재☆

한준아

오전 11:53

계속 도착하는 메시지를 들여다보던 한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휴대폰 전원을 끄고는 가던 걸음을 이었다.

한준은 집에 들러 씻은 다음 바로 바다 여행을 검색했다. 대충 훑어보고 기차로 바로 갈 수 있을 곳을 찾았다.


한 블로거가 올린 정동진 바다 사진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그는 곧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금요일 수업을 전부 째고 하루 묵을 짐을 싸서 숙소도 잡지 않고 떠났다. 차비에 식비 그리고
숙소까지, 선불로 받은 과외비를 뭉텅 끌어다 써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역에 도착해 표를 끊고 기어이 기차에 오르는 순간에도 의식이 붕 떠서 멍했다. 숙취에 속이 아직도 아팠다.
그제야 일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준은 맥없이 웃으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두 시간 정도 자다가 깨다가 하다 보니 정동진에 도착했다. 맥이 풀릴 정도로 금방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학생이 되니까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보러 올 수 있구나. 사소한 일에서 자유를 느끼자 답답하던
속이 잠시나마 후련했다. 한준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늦은 오후의 뿌연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한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자 바다 냄새가 났다. 역 바로 앞에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윤의 집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흐렸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한준은 수평선을 따라 찬찬히 눈을
굴리며 걸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휴대폰 전원을 끄고 온전히 홀로 남았다. 완전한 고립의 순간, 그는
자유를 느꼈다.

시원하다. 한준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푸른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때까지,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릴 때까지 새파랗게 부서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물씬 풍기는 짭조름한 물비린내와 차가운 풍경에 감각이
둔해질 때쯤,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오자고 했었는데.

발목을 미지근하게 적시던 바닷물 그리고 포근하고 익숙한 체취가 함께 생각났다. 테라스 카페에 가고 싶다고
조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준은 있지도 않은 카페를 그리며 두리번거렸다. 바다. 하늘. 모래사장.
승강장. 나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며 그는 연거푸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수능 공부를 하면서도 바다 여행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준은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 2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던 날이었다. 그날 한준은 떨어진 성적을 두고 교무실에서 담임과 상담을 했다.

[겨울 방학 때 열심히 해서 3 월 모의고사 성적 다시 올려놓지 않으면 안 돼. 넌 수능 잘 보는 수밖에 없잖아.


너 정시로 가야 되잖아. 수시는 생각도, 준비도 안 할 거잖아.]

고 2 를 마칠 무렵이라 시간이 촉박해서였는지 담임의 조언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매년 바뀌는 수시는 정보


싸움이다. 정보를 얻는 데에도, 그에 맞춰 준비하는 데에도 돈이 든다. 한준에게는 수능을 잘 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동기부여를 해 주려고 한 말이라는 걸 이해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정이 많이 들었던 선생님이라


새삼스럽게 마음이 다쳤다. 나란히 집으로 향하던 길에, 시무룩한 기분이 얼굴에 티가 났는지 유재가 무슨
일이냐며 들들 볶았다.

유재 역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괜히 말을 옮겼다간 그까지 기분이 상할 것 같았다. 한준은 성적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둘러댔고 유재는 곧바로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속아 넘어가는 법이 없는 놈이
이럴 땐 곧잘 모른 척해 주었다.

그날의 화제는 바다였다.

누가 들으면 바다 한 번 못 가 본 사람인 줄 알겠네. 한준은 당시 자신이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조유재가 어찌나 열심히 바다 여행 계획을 짜는지, 가만히 귀만 기울이고 있어도 바다에 다녀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가 했던 말 중 아직도 기억나는 건 선크림 이야기였다. 선크림을 너는 오른쪽 다리에만, 나는 왼쪽 다리에만


바르고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놀아 보자. 선크림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테스트도 할 수 있고, 다리 색이 왼쪽
오른쪽 크게 차이 나 짝짝이가 되면 짝짝이끼리 같이 다니는 거다.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어찌나 웃겼던지
서로 허겁지겁 한마디씩 얹으며 눈물 빠지게 웃었다. 그러다 보니 담임에게 섭섭했던 마음도 금방 잊었다.
까짓거 수능 잘 보고 대학 들어가서 선크림 짝짝이로 바르고 놀면, 그때 가서는 정시로 입학했나 수시로
입학했나 그딴 게 무슨 상관이겠냐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반 엠티 때에도 그런 장난은 못 쳤네. 괜한 생각에 한준은 웃었다. 고등학교 2 학년 말이면 불과


일 년 반 전인데, 그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조유재와 마구 뒤엉켜 마음껏 울고 웃던 시절.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그 마음을 굳이 전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시절.

교실. 학원. 놀이터. 우엉 반찬. 웰치스. 문제집. 농구. 피구. 축구. 쉬는 시간. 급식. 시장. 여름. 시험
공부. 그 어떤 좋은 추억을 떠올려도 그 속엔 전부 조유재가 있었다.

한준은 넋이 빠져 있던 조유재의 얼굴을 재차 그려 보았다. 안 된다고 다급히 손을 붙들던 그가 떠올라 목이


막혔다. 이번에도 유재가 어떤 말을 할지가 쉽게 상상이 되었다. 행여나 잠깐 흔들렸을지 몰라도 결국 그가
내릴 결론은 같았다.

그는 이번에도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지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이 지나 온, 쌓아 온 것들을 끌어안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준은 교복 차림으로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조유재를 떠올리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젠 조유재 말대로 노력해야 할 때였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도록.

한준은 참았던 신음을 터트렸다. 수평선이 어그러지는 순간, 아슬아슬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뚝,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 * *

집행부 사람들이 열어 준 깜짝 파티,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깃집을 빌린 지승민의 파이트 클럽 파티.
연달아 이어진 생일 파티에 얼굴을 비치고 나니 하루가 금방 끝났다. 6 월 1 일 일요일, 생일날 눈을 뜬
후부터 연달아 서프라이즈 파티와 축하 문자 그리고 전화가 쏟아지는 지금까지도, 유재는 단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유재야. 좀 먹어. 너 왜 그렇게 못 먹냐? 다들 너 때문에 모인 건데.”

승민이 집게로 다 구운 고기를 앞에 놓아 주었다. 유재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점심때
억지로 떠 넣은 케이크 조금 말고는 종일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음식을 보면 허기가 지긴커녕 구역질이
났다. 꾸역꾸역 감사 인사를 한 게 최선이었다. 그 이상 꾸며 낼 기력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 아홉 시. 생일이 끝나기까진 세 시간이 남았다. 서한준은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쭉 휴대폰을
꺼놓고 문자에는 답도 없었다. 집까지 찾아가 봐도 기척이 없었다. 월요일엔 다시 수업에 오겠지만, 어쨌든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도 비치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바로 확인했으나 민희였다.

이민희

너네 정말..발표가 다음 주인데 자료 안 보낼 거니..? 피피티도 발표도 다 내가 해?

네? 미친놈들아?

오후 9:04
유재는 휴대폰을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승민이 채워 놓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속이 쓰린 게 차라리
나았다.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들을 전부 토해 내고 싶었다.

“근데 한준이는 도대체 어디 간 거냐? 유재 너도 몰라? 전화를 안 받던데.”

“뭐…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는 거 같아요.”

“그래? 미리 선물은 주고 간 거야?”

“저희는 원래 선물 같은 거 안 주고받아요. 워낙 어릴 때부터 친구라서.”

“아, 하긴. 나도 내 동생 선물은 안 준다.”

승민의 농담에 주변 모두가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유재는 묵묵히 휴대폰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서한준은 연락이 없었다.

그날 눈을 붙인 게 고작 반나절이다. 일어나서 바로 문자를 보냈지만 그때부터 답이 없었다.

이게 쉬운 결정이야?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와중에, 그들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걱정되고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아갈 수도 없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머리만 쥐어뜯고 있는 게 현재의 상태였다.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면, 그렇게 하자고 결정한다면, 그 이후로는 무를 수
없다.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은 데다가 서한준은 남자고 그들은 너무 어렸다. 누구 하나가 여자였으면
결혼으로라도 평생을 약속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고, 살아 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긴데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일생일대의 결정을 어떻게 그렇게 급하게 할 수 있다고…….

고작 반나절 뜸을 들였다고 지 멋대로 잠수를 타?

미친놈.

지밖에 모르는 새끼.

“왜 고기는 안 먹고 술만 먹냐. 무슨 일 있냐?”

옆에 앉아 있던 성우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유재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젓고는 잔을 내밀었다.

그는 알림이 없는 휴대폰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확인한 톡을 또 읽었다. 서한준은


메시지를 다 읽어 놓고도 답이 없었다. 괘씸한 마음에 주먹이 불끈거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시위라도 하는 건가?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이렇게 도망치고 말겠다고?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을 딱 한 번


거절했다고 이렇게 바로 잠수를 타? 생일이고 나발이고, 조금만 거스르면 언제든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게 아니면 도대체 이게 뭐지?

우리가 이렇게 위태로운 관계였나?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는 건 나 혼자뿐인가? 가족도 뭣도 아닌 놈이,


포기하지 말라 버리지 말라 따라다니며 지긋지긋하게 구는 게 넌더리라도 났나?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상처받는 걸 뻔히 알면서, 그걸 모를 수가 없도록 미친놈처럼 전화하고 문자를 했는데 그걸 전부
보고도 무시할 수 있다니.

이 새끼가 나랑 하고 싶은 건 그냥 연애뿐일까?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그랬을까? 그래서 굶고


다니는 내 밥까지 챙기고 그렇게도 다정하게 곁을 지킨 걸까? 그래서 엄마 아빠가 내게 좆같이 굴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채고 위로한 걸까? 나랑 사귀고 싶어서? 그게 아니면 나는 서한준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인가?

사귀고 나면, 키스하고 데이트하고 섹스하고 연인들이 하는 걸 전부 하고 나면? 내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에도 이 자식은 내 곁에 있어 줄까? 이렇게 쉽게 멀어질 수 있는 놈이?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어지면 나는 뭘로 서한준을 붙들어 둘 수 있지?

나는 어떻게 ‘우리’를 유지해야 하지?

유재는 잔을 한 번 더 비워냈다.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시간이 흐른 것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깎여


나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일 분 일 초가 서한준과 제게 남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생일 케이크가 앞에 놓였다. 모두가 소리 높여 축하 노래를 합창했다. 사랑하는 조유재. 폭죽이 터지고
색색깔의 종잇조각이 흩날렸다. 유재는 초를 불었다. 하나씩 사그라드는 불빛에 실낱처럼 남아 있던 기대마저
죽어 버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무심히 휴대폰을 내려다본 유재가 꿈틀 미간을 찌푸렸다.

한준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액정을 밝히고 있었다. 유재는 급히 메시지를 눌러보았다.

한준이

(사진)

야 별 보러 와라

오후 9:17

놀이터 사진이었다. 텅 빈 그네 위로 익숙한 아파트 단지와 밤하늘이 보였다. 사진을 확대해서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사진 속 그 어디에도 한준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명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미친 새끼.”

거의 다 끝나갈 때가 되니 이제 와서. 화가 치밀어 이가 갈리는 와중에도 유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서한준이 그 놀이터에서 정확히 어디에 앉아 있을지까지 빤히 알 수 있었다.


고깃집을 나서기 무섭게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수없이 시간을 보냈던,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택시가 섰다. 유재는 익숙하게 단지 내의 놀이터를 향해 걸었다.

드넓은 아파트 단지는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열 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라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탁 트인 공간을 둘러보던 유재의 시선이 그네를 지나 구석의 벤치에서 멈췄다. 앉아서 서로 영단어 시험을
내주곤 했던 벤치. 서한준은 그곳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씨발.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별을 보겠다고 위를 쳐다보고


있는 서한준의 모습이 너무나 낯이 익었다.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는 아파트 단지의 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눈치챈 서한준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녀석은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밝은 웃음을 짓는


얼굴에 기시감이 들었다. 불빛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유재는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왔어?”

한준이 다리를 쭉 뻗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제법 뻔뻔하게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쇼핑백에 박힌 로고만 봐도 그게 운동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준은 쇼핑백을 벤치 위에 턱 올려놓고는 그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선물.”

“장난 까냐?”

유재가 잇새로 물었다. 전화를 백 통이 넘게 했다. 잠깐만 시간을 달라는 문자 한 통만 보냈어도 이렇게까지
열받진 않았을 것이다.

한준은 눈썹을 모은 채 눈치를 보았다. 아니, 눈치 보는 시늉을 했다.

“미안. 나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바다 보고 왔거든. 좋더라.”

“얼마나 재밌었길래 문자에 답 한 통 못 보냈냐?”

“휴대폰 꺼 놓고 있었어. 그래도 늦지 않게 왔잖아.”

“…….”

“안 뜯어 봐? 내가 뜯어 줄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유재는 상자를 여는 한준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에는 예상대로 운동화가 한 켤레 들어 있었다. 다른 색이 들어가지 않은 새하얀 운동화였다. 한준은
힐끔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사실 갑자기 이래저래 지출이 좀 커서…… 더 좋은 거 사 주고 싶었는데, 내년엔 더 좋은 거 사 줄게. 그래도


예쁘지? 직접 신어 보고 산 건데 편해.”

“지금 이딴 게 중요해?”

“네 생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거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서한준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놈이 아홉 시가 넘어서야 연락을
해?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였다. 유재는 운동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키스했잖아. 너랑 나.”

더는 잡아뗄 수 없게 내놓은 말에 한준은 난감하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그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날 우리 둘 다 너무 흥분했었던 거 같지 않냐?”

“뭐?”

“솔직히 나 진짜 여러 번 상상했었거든. 너랑 그러는 거.”

“…….”

“근데 막상 해 보니까 상상이랑 좀 달랐던 거 같기도 하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뭐,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서한준은 거짓말을 했다. 속이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는 당당했다. 마치 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줄 것을 안다는 것처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루 꼬박 잠수를 타고 생일이 끝나기 직전에 이런 곳으로
불렀으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해야 했다. 열이 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다는 소리야.”

“심각하게 생각할 게 없어?”

유재는 코웃음을 치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는 바로 옆에 풀썩 주저앉아, 경고도 없이 손을 뻗어 한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준은 순간 움찔 몸을 굳혔으나 기어이 표정을 정돈했다. 그가 운동화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나 신어 봐. 좀 크게 나왔다는데 안 맞으면 내일 교환해야 되니까.”

“딱 봐도 맞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장단을 맞춰 주길 원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짓이 얼마나


명이 짧은지 직접 눈으로 목격해야만 알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었다. 유재는 바짝 긴장한 몸을 더 세게
품으로 당겼다.

“혼자 어디 다녀왔어?”

“정동진.”

“그래? 가 보고 싶었는데. 저번에 같이 가자고 약속했으면서 왜 혼자 갔어?”

유재는 서한준이 지어 보인 태연한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하며 물었다. 손바닥이 따뜻해질 때까지 어깨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한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유재는 그 균열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갔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

“자위도 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한준이 퍽 소리 나게 가슴을 밀쳤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신경질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동요해 버리고 만 그를 향해 유재는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 분도 못 버틸 뻘짓을 왜 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무슨 말이 듣고 싶었냐고? 네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거잖아, 새끼야!”

상자를 쇼핑백에 집어넣던 한준이 별안간 왈칵 소리쳤다. 그가 내던진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태연을
가장하던 낯이 마침내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동요한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재는 마주 일어서서
소리쳤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뭔데? 지금까지 멋대로 굴어놓고 이제 와서 내 생각 하는 척하지 마.”

“넌 없던 일이었으면 하잖아.”

“그러면 그게 없던 일이 되냐? 지금까지 없던 일인 척해서 나아진 게 있어?”

“그럼 어쩔 건데. 나랑 절교라도 할 거야?”

절교.

단어 하나에 목이 잘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까맣게 점멸했던 시야가 돌아왔을 땐, 한준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쥔 채였다.

“그 말이 너한텐 어떻게 그렇게 쉬워.”

낮고 조용한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목이 붙잡힌 건 서한준이었는데 도리어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눈과 코가 따가웠다.

한준이 사납게 팔을 뿌리쳤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소매로 대충 눈가를 비벼 닦았다. 몇 번 문지르고


나니 그는 금세 다시 태연스러운 낯빛을 찾았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이어진 말은 그렇지 않았다.

“쉽겠냐? 널 못 보고 살 순 없으니까 나도…… 수습해 보려는 거잖아. 이 놀이터까지 와서.”

조용한 놀이터에 서한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재는 순간 숨을 멈추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가득한 놀이터. 이젠 둘 다 동네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한준은 이곳으로 유재를 불렀다.
매번 앉아서 놀던 벤치에 앉아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속은 저처럼
말이 아닐 텐데도 태연자약하게 앉아 뻔뻔한 연기를 했다.

나를 못 보고 살 수 없어서.

무서워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충격이 서서히 번져나가면서 두피가 저릿저릿 아팠다.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한준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쓸어넘기고, 쇼핑백을 정리해서 그네 근처에 가져다 두는 동안 유재는 멍하니 서서
쳐다만 보았다.

한준이 멀찍이서 손짓했다.

“쪽팔리니까 그만하자. 알았으면 이리 와서 그네나 타.”

그는 그넷줄을 잡고 흔들었다. 유재는 천천히 발을 떼어 그네 쪽으로 걸었다. 가까워지는 동안 한준은 시선을


피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밤하늘을 응시하는 옆얼굴이 익숙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 밝은
아파트 단지까지 오는 내내, 매번 기대했던 광경은 바로 이 모습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맑아서 별도 좀 보이네.”


홀린 듯 걷다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섰을 때, 한준이 말했다. 그가 하늘을 쳐다보는 동안 유재는 그의 얼굴만
보았다. 창백한 뺨. 짙은 눈동자. 매끈한 콧날 아래 작게 다문 입.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목구비를 보고 또
보았다. 차가운 별빛이 그의 얼굴 위로 부서져 내려, 그 외의 풍경은 까맣게 흐려지고 말았다.

서한준은 언제나 저런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떠들고는 했다. 반찬
투정부터 친구 험담, 성적 고민에 문제집에서 찾은 오타 얘기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채 나누었던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추억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퉁명스럽게 찡그리던 서한준,
다투고 나서 곁눈질을 하던 서한준, 과자를 사 주겠다며 허세를 부리던 서한준, 어려운 단어를 골라 물으려고
한참 단어 책을 노려보던 서한준…….

“한준아.”

이름을 부르자 한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먼 하늘에 닿아 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제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재는 입을 열었다.

“난 여기 별 보러 온 적 없어.”

한준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불안한 숨을 들이마셨다. 충격이 가시기 전에, 그가 숨을 다시 내뱉기 전에,


유재는 그의 목뒤를 잡아끌어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기 무섭게 어깨가 붙들렸다. 몸 전체가 덜컹 흔들릴 정도의 힘으로 밀려난 유재가 순간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고 눈을 다시 떴을 땐, 온통 혼란스러운 표정의 서한준이 앞에 있었다.

“뭐라고?”

“…….”

“갑자기 뭐야?”

한준이 충혈된 눈을 신경질적으로 깜박였다.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게서


혼란이 배어 나오면 배어 나올수록 유재는 안정을 찾았다. 주체할 수 없도록 치밀어 오른 감정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그는 한준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당황스러웠던 마음에 화가 섞이고 산만하게 움직이던 손이
단단한 주먹을 움켜쥐는 모양을.

“장난치지 마. 나한테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 줄 알아? 내가 어떻게든 네 곁에 있으려고.”

한준이 입술을 꾹 깨물면서 말이 끊겼다. 유재는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 봐.”

“뭐?”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

“어떻게든 내 곁에 있으려고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해 보라고.”

유재는 한 발짝 다가갔다. 한준이 물러서고 물러서다가 그네 기둥에 등이 부딪쳐 더는 갈 곳이 없어질 때까지.

한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유재는 그의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지는 미간과 우그러드는 입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응?”

재차 이어진 물음에도 한준은 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깜박이던 눈에 물이 맺혀 반짝거렸다. 유재는 제 앞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한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불안이 기꺼웠다. 유재는 조심스럽게 한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코끝을 상냥하게 마주 댄 채,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비틀어 다시 입을 맞췄다. 입술은 뜨거웠지만 턱은 꽉 다물린 채 안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재는 닫힌 이를 혀로 핥으며 한준의 턱을 잡아 비틀었다.

“아….”

한번 열리고 만 틈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유재는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는 뺨이 눌리도록 깊게 틈을


붙였다.

그네가 삐걱삐걱 울었다. 유재는 멍하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이
아직 얼얼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릿속이 뿌옜다. 택시를 잡아탔을 때만 해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무작정 놀이터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서한준을 보면서는, 그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음에도 분통이 터졌다. 전부
다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고 서한준의 속을 알 수가 없어 울분이 치밀었다.

널 못 보고 살 순 없으니까.

한준이 외친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한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묵을 깼다. 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재는 제 무릎에 올려 둔 운동화 상자만 가만히 어루만졌다.

곁눈질을 하던 한준이 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한번 해 보고 싶다는 거야?”

한번 해 본다? 유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연애.”

“‘연애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할 순 없어.”

“그럼?”

“하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친구, 애인, 부부가 하는 걸 전부 하게 되는 거지.”

유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말을 이으면서도 속으로는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남자와, 그것도
서한준과 연애를 한다…….

키스는 좋았다. 서한준 역시 자신만큼이나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기에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혀가 얽히면서 가슴이 화끈화끈 달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을 알았다.

돌이킬 수 없어 결국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고르고 말았다. 여기서 주저하면 엉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단호한 말투와 달리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막상 시작했는데 끔찍하면
어쩌지.
한준은 한참을 대답 없이 조용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제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끼익끼익 흔들리는 그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술 마시다 왔지?”

“취해서 하는 소리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알아.”

“…….”

“…….”

“근데 넌 네가 날…….”

한준은 말을 끊고 잠시 주저했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미처 가시지 않은 충격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날 좋아한다고 어떻게 확신해?”

한준은 간신히 말을 마쳤다. 물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나야 너를 워낙 오래 좋아했지만 너는 당장 반년 전만 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생각도 안 해 봤잖아. 좀


갑작스러운 거 같아서.”

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도 갑작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각을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전했다.

“나도 몰라. 일단 키스는 좋았어. 하고 싶어서 했고.”

“…….”

“어차피 미룰 수 있는 결정이 아니잖아.”

유재는 잘라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고심하는 시간만큼 서한준은 멀어진다. 반나절 잠 좀 잤다고
그새 바다로 떠난 놈이 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뱉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매일 이 놀이터에 온 건 서한준을 보기 위해서였다. 키스도 하고 싶어서


했다. 서한준과 처음 해 본 키스는 혀가 얽힐 때마다 오싹했다. 한준이 온전히 제게 집중해 있는 게 좋았다.
한준이 제 품 안에 얌전히 기대어 있는 게 좋았다. 한준이 키스 한 번에 뜨끈뜨끈 달아오르는 게 좋았다.
한준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 게 좋았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겠지.

옳은 결정일 거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너무 섣부르게 정한 거 아니야? 내가 하루 잠수 탔다고 열받아서.”

“뭐? 날 뭘로 보고.”

“너 열받았잖아. 전화를 백 통이 넘게 했던데. 제정신 아니었을 수도 있어.”

“백 통이 넘는 전화를 다 씹은 새끼는 제정신이고?”


“그건—.”

“너 만약 나랑 사귀면, 반나절 이상 연락 두절 금지야.”

휴대폰 전원을 끄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는 일이었다. 유재가 울컥 덧붙인 말에 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가 막힌 건지 충격을 받은 건지, 잘은 몰라도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타박이든 말장난이든, 무슨 대답이라도 이어지기를 기다렸으나 서한준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순순히 눈을 내리까는 것을 보자 조금이나마 분이 풀렸다. 연락 두절 금지. 친구일 땐 하지 못했던 요구를
해도 한준은 지랄한다며 웃어넘기지 않았다.

이참에 요구하고 싶은 게 몇 있었다. 유재는 그네를 천천히 흔들어 타며 덧붙였다.

“나는 애인이 생기면 무조건 하루에 한 끼는 같이 먹고 싶어. 둘이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지금 사는 오피스텔 공간 넓은 편이니까 같이 살아도 괜찮고.”

줄줄 말을 잇다 보니 수능 공부하면서 대학에 가면 뭘 할까 떠들던 얘기와 비슷했다. 한준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자신감이 생겼다. 겁먹을 것 없다. 유재는 바닥을 툭 걷어차며 말했다.

“사귄다고 해도 생각보다 별 차이 없을지도 몰라. 그냥 우리가 하던 대로 하는 거지. 같이 놀고, 밥 먹고.”

“유재야.”

한준이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차분한 목소리에 가슴이 선득거려 돌아보자,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말대로 안일한 마음으로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

“나 어디 안 가고 연락도 다 받을 테니까 당장 결정하지 말고 며칠 동안만 좀 생각해 봐. 네가 진짜 나랑


하고 싶은 게 연애가 맞는지.”

“더 생각한다고 마음이 바뀔 거 같지 않은데.”

“사귀게 되면 네 생각보다 차이가 클 거야. 나는 너랑 지금까지 안 해 본 걸 잔뜩 해 보고 싶거든.”

한준이 그넷줄을 감싸 붙들었다. 그 단단한 손 너머로 순식간에 꺼풀이 벗겨진 얼굴이 보였다. 장난을 치고
웃으며 떠들 때와는 너무나 다른, 애정과 욕망이 뒤얽힌 빛이 눈동자에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유재는 가만히 미간을 모았다. 그간 자신과 닿아 있을 때, 샅샅이 반응을 관찰하며 목격했던 모습과는 또 다른
서한준이었다. 지금껏 한준이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억눌러 왔을 것들을 앞으로 적나라하게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유재가 마침내 끄덕이자 한준은 다시 천천히 눈을 내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던 끝에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 봐. 그리고 결론 나면 솔직하게…….”

“…….”

“제대로 말해 줘.”

한준이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는 아직 자신이 줄 수 없는 확신이 필요한 듯했다. 그런 그의 불안이,


신중함이 좋았다. 서한준이 며칠 더 마음을 졸여 가면서도 얻고자 하는 게 ‘그들이 앞으로도 쭉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라서 좋았다. 유재는 미소 지었다.

“그래.”

“가자, 이러다 차 끊기겠다. 선물 챙겨.”


한준이 그네에서 폴짝 뛰어 일어섰다. 유재는 내던져지고 굴러 더러워진 쇼핑백에서 툭툭 먼지를 털어 낸 후
뒤를 따랐다. 선물이라고 산 운동화도 딱 지 스타일인 걸 고른 게 웃겼다.

“아!”

성큼성큼 걷던 한준이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막차 시간을 보여 주며 한숨을 쉬었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자정에 가까웠다. 막차는 몇 분 전에 떠났다.

“아이 씨, 십 분만 빨리 일어날걸.”

“택시 타자.”

유재는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고는 걷기 시작했다. 한준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들은 단지 입구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한준이 곁눈질을 했다. 유재는 단지 앞 횡단보도를 노려보고 있다가 힐끔 한준을 보았다. 한준은 휙 고개를
돌려 차가 드문드문 지나가는 길 저편을 빼꼼 쳐다보았다.

괜히 민망했다. 유재는 이마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오 분이면 오겠다. 조금만 기다려.”

“야. 나 엊그제 과외 갔는데 바람맞았다.”

한준이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그는 입술을 씹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듯 웃었다.

과외 하러 갔다가 바람맞은 서한준. 문득 이전에 승민에게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더 이상 제게는
하지 않는 것 같았던 소소한 일상 이야기.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다양한 표정으로
떠들곤 했던 서한준.

과외 갔다가 바람맞았다는 그 얘기가 뭐라고 단번에 마음이 녹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유재는 손을 뻗어 한준의 손끝을 살짝 잡아 보았다.

한준은 쳐다보지 않았지만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유재는 단단한 손끝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자주 그러는 거야?”

“얼마 안 한 거치고는? 그래서 거기 동네까지 갔다가 다시 왔어. 아프면 미리 연락하지, 맨날 버스 다 타서야


연락해. 왕복 차비 아깝게. 근데 갑자기 이게 왜 생각났지.”

막차 놓치고 택시 타야 하니까 차비 생각이 났겠지. 간만에 속이 읽히게 구는 서한준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유재는 손가락 하나를 꽉 잡아당겼다.

“그만두고 새로 구해. 내가 같이 찾아 줄게.”

“첫 달 소개 수수료만 해도 몇십인데 그걸 또 내긴 아깝지.”

“학교 커뮤니티에서도 구할 수 있어. 있어 봐. 내가 구해 줄 테니까 새로 구하면 바로 그만둬.”

한준이 코를 찡그린 채 끄덕였다. 뺨 가장자리부터 귓불까지가 발갰다. 덩달아 괜히 어색해진 유재가 슬쩍


손을 놓았다.

곧 택시가 도착했다. 그들은 함께 택시에 올랐다.


* * *

유재는 옆에서 에이드를 쭉쭉 빨고 있는 서한준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오늘 아침 아홉 시부터 여섯 시가 넘은 지금까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수업 두 개를 듣고,


점심으로는 돈부리도 함께 먹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선 부랴부랴 곧 있을 발표 준비를 하러 카페에 왔다. 내내
꿈꿔왔던 대학 생활 그대로였다. 너무나 어렵기만 하던 일이 이렇게 간단하게 풀렸다.

서한준은 제 손바닥만 한 노트북으로 파워 포인트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희가 혼자 다


찾아서 정리한 자료를 받아, 모레 있을 발표를 다급하게 준비하는 중이었다. 한준이 피피티 제작을, 유재가
발표를 하기로 했다. 이민희는 오늘 밤 열 시 전까지 완성된 피피티를 보내지 않으면 교수에게 메일을 보낼
것이라 통보했다. 덕분에 유재는 저녁 과외를 취소하고 한준과 카페에 왔다.

늦은 밤까지 카페에서 같이 과제를 하고 있으니 진정한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유재는 라떼를 홀짝거리며
지금껏 정리한 발표 대본을 훑어보았다. 발표야 중고등학교 때도 매번 도맡아 하던 거라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대본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읽었다.

글을 읽어 내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서한준과 놀이터에서 했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자신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라던 서한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게 뭐가 그리 어렵겠나 싶었다. 서한준이나
저나 혈기 왕성한 남성이고 키스도 했는데, 그 이상을 그리는 거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남자랑은 뒤로 한다. 여자랑 달리 좆이 달렸으니 잠자리에서 만지고 빨아도 줘야 할 것이다. 남자 성기라…….


아직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한준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한준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헐떡거리며
신음했을 때 분명히 흥분했었으므로.

유재가 컵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한준이 테이블을 툭툭 두드려 주의를 끌었다.

“야. 어때? 봐봐.”

한준이 노트북을 살짝 돌려 피피티를 보여 주었다. 유재는 그 작은 화면을 제대로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폰트가 구리다. 글자도 못생겼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이탤릭체로 기울여 놓아서 더 못생겨 보였다.
고른 테마도 영 별로였다. 고등학교 때도 피피티를 잘 못 만들던 놈이다. 그래도 열심히 해 보려고 한 티는
났다.

답을 하려고 돌아보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한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준은 노트북 화면으로 훌쩍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봐.”

그가 갑자기 엔터를 탁탁탁 연달아 눌렀다. 야심 차게 준비한 장난이었는지, 사방에서 이미지가 빙글빙글 돌며
요란하게 날아와 꽂혔다. 못생긴 데다가 쓸데없이 오래 걸리기까지 하는 효과였다. 노트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놈을 생각하니 황당했다. 유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쩔지.”

뻔뻔스럽게 되묻는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그와 실없이 히죽거리는 게 그저 좋았다. 유재는 다시


모니터를 돌아보며 천천히 피피티를 확인했다. 그동안 서한준은 곁에서 에이드를 마시고, 얼음을 우득우득
씹었다.

유재는 언제라도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게 턱을 괴었다. 힐끔 쳐다볼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피드백을 얌전히 기다리는 녀석이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텍스트 좀 줄이자. 어차피 내가 발표하면서 다 설명할 내용이니까 요점만 간단히 해서.”

“응.”

“그리고 테마 뭐 다른 거 없어?”

“왜? 이거 잘 보이지 않냐?”

“다른 것도 잘 보일걸?”

그들은 머리를 맞댄 채 함께 테마를 골랐다.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몸이 붙었다.


서한준은 테마를 이것저것 살펴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닌 척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진 게 보였다. 테마고
나발이고 제 생각으로 여념이 없을 놈이다.

한준이 큼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이거 어때?”

“아까 거보다 낫다.”

유재는 모른 척 대답했다. 어깨가 닿자 한준은 물러섰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언대로 테마를 바꾸고
텍스트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껏 자신을 의식하는 한준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렇게 서한준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사귀기 전이라 오히려 더 예민하게 제게 집중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마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한 지금이 가장 정성스러운 시기일 것이다.

서한준이 옳았다. 신중히 생각하되 서두를 필요가 없다. 널린 게 시간이었다.

대본을 거의 다 완성해 갈 즈음이었다. 열심히 피피티를 고치던 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나 슬슬 배고픈데.”

“뭐 먹을래?”

“나 저녁은 그냥 집에서 먹을게. 톡으로 얘기하면서 하자. 열 시까지 보내랬나?”

“어. 그때까지 충분히 할 수 있어. 지금 바로 집에 가게?”

“아니. 나 잠깐 체육관 들러서 삼십 분만 뛰려고.”

체육관? 오늘은 쉬는 줄 알았는데. 유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준을 살폈다. 체육관 간다는 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건만 한준은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그냥 힘 좀 빼려는 거야. 한 한 시간쯤 있다가 접속할게. 알았지?”

“그래.”

유재는 탐탁지 않게 끄덕였다. 한준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간다?”

“어.”

그는 빈 컵을 든 채 잠시 망설였다.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듯, 괜히 테이블 언저리를 겉도는 눈동자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이따 봐.”

한준은 휘휘 고개를 젓고는 인사했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재는 픽 실소를
흘렸다. 어제 이후로 서한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운동을 하러 가나 했더니. 힘이, 다시 말해 욕구가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체육관에 가서까지 제


생각을 할 서한준이 눈에 선했다. 놀이터에서는 차분하고 단호하게 시간을 주겠다고 해 놓고, 속으로는 아주
안달이 나 있는 게 분명했다.

너랑 지금까지 안 해 본 거.

유재는 한준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발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서한준은 자신과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던


동안에도 내내 자위를 했다고 했었다. 어젯밤, 택시에서 내려 헤어지고 나서도 집에 가서 혼자 그 짓을 했을까?
우리가 수도 없이 탔던 그 그네에서 한 키스를 생각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유재야. 키스로 무르게 녹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재는 집에 오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들어가 미지근한 물로 몸을 덥히면서, 그는 지체 없이 밑으로


손을 내렸다.

서한준을 생각하면서 자위를 해 보자.

일단 해 보면 서한준이 현재 제게 품고 있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듯했다. 어차피 사귀게


되면 섹스는 당연히 하게 될 테니 미리 예행 연습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결심을 마친 유재는
샴푸로 미끌미끌하게 거품을 내서 매끄럽게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흠.”

슬슬 주물러 만지자 성기는 손안에서 금세 단단해졌다. 자위를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행위 자체는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막말로 무슨 생각을 하든 만지면 서고 흔들면 싸게 되어 있는 게 자지다.

유재는 동했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놀이터로 돌아가 있었다. 그네 기둥에 기댄 채 이어나가던 키스가 얼마나 격렬하고
너저분하던지가 기억났다. 이를 꽉 닫고 씨근덕거리던 서한준의 턱이 결국 열리고 말았던 순간을 기억했다.
뜨거운 탄성과 마주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듯했던 혀. 맞닿은 뺨이 울리도록 내던 신음. 끝내는 제 양 뺨을
감싸고 말았던 두 손까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키스를 처음 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유재는 자신이 서한준 외 그 어떤 누구와 키스해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한준이 엉망으로 복받쳐 오른 채 제 입 안에 이름을 속삭이던
모습이 선명했다. 그의 입 속, 그 깊은 곳에 혀를 쑤셔 넣자 순순히 벌어지던 입술의 감촉이 기억났다. 닿는
곳을 전부 핥고 빠는 동안 얌전히 입을 열고 자신을 받아내던 그의 체온, 그리고 키스가 깊어질수록 딱딱하게
허벅지에 눌리던 성기.

“…읏.”

유재는 움찔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잠깐 만졌을 뿐인데 발기가 빨랐다. 팽팽하게 일어선 자지가
배에 달라붙을 정도로 휘어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기둥을 훑으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자위할 때마다
불특정 다수의 몸과 입술을 떠올리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탁한 회색 타일 위로 입을 연 서한준이
그려졌다.
너무나 잘 아는 놈의 외설스러운 모습을 상상하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소름 돋게 이상하기도 하고 낯설고
낯익기도 했으며 귀두가 젖어 들도록 흥분이 되기도 했다.

이걸 빨고 싶었던 적이 있을까?

막상 녀석의 입에 물리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노골적인 것들이 궁금해졌다. 한번 떠오른 저질스러운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한준은 안 해 본 걸 잔뜩 해 보고 싶다고 했었다. 혀도 버겁게 물던 녀석이 과연 자지는
제대로 빨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유재는 좀 더 빠르게 팔을 흔들었다. 허옇게 일어난 샴푸 거품 사이로 벌건 귀두가 큼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끝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유재는 점차 뜨거워지는 체온을 느꼈다.

서한준의 입에 박아 보면 어떨까. 다음 의문은 보다 난폭했다.

“후윽, 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입 안 전체가 울릴 것이다. 키스할 때 혀로 느꼈던 그의 흐트러진 호흡과 헐떡이는
울음이 온전히 자지 위로 쏟아질 것이었다. 침이 줄줄 흘러 엉망으로 녹은 입술이 더 깊이 성기를 물어,
마침내 자지 뿌리와 음낭까지 그 진동이 전해지게 될 터였다.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유재는 낮게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족하다. 조금만 더……. 절정의 문턱에서 그는 세차게 손을 흔들며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서한준이 다리를 벌렸다. 긴 키스에 가장자리가 질펀하게 녹아 났던 입술처럼, 그의 뒷구멍도 부드럽게 긴장이
풀려 있었다. 서한준이 이런 걸 좋아할까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유재는 바로 안에 처박고 흔드는 상상을
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 가슴을 세게 모아 주무르고 젖꼭지에 손톱을 세우는 상상을 했다. 한준이
처음으로 내지를 소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면서.

“윽!”

절정에 오르는 순간 긴장이 단번에 풀렸다. 유재는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 잡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흔들자
성기가 정액을 투둑 툭 토해 냈다. 그는 긴 자지 기둥을 끝에서 끝까지 훑어 올리며 남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냈다.

“하아….”

씨발. 그는 욕을 읊조리며 벽에 이마를 쿵 박았다.

싸고 나니 자괴감이 들었다. 죄책감 같기도 했다.

한준이 눈이 벌게지도록 울면서 신음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버겁게 성기를 빨고, 종래에는 다리를 벌려 마구
들이닥치는 자신을 받아내는 상상을 한다니. 아무리 서한준이 자신을 생각하며 여러 번 딸을 쳤다고 해도 이런
생각까지 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한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겠다고 시작한 행위였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천박한 상상으로 끝이 났다. 상상 속의
서한준은 서한준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질감이 느껴졌다. 잘 아는 놈의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과
자세를 상상하다 보니 기분이 야릇했다.

유재는 물을 맞으며 멍하니 사색했다. 미지근하던 물이 점점 차가워졌지만 방금 했던 행위에 정신이 팔려


아랑곳 않았다.

막상 했는데 이상하면 어쩌지. 고대하고 고대해 왔을 서한준이 대차게 실망이라도 한다면?

유재는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체육관에서 자신을 갈망하며 에너지를 태우고 있을
서한준이 떠올랐다.
* * *

이번 주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가 두 개, 끝내야 하는 발표가 하나, 다다음 주엔 기말고사 기간이다. 서한준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중에도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유재는 마지막으로 피피티를 확인했다.

오늘 발표를 무사히 끝내면 해야할 일 여럿 중 하나는 해결된다. 수업 시작 십 분 전에 미리 도착한 유재가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야.”

고개를 들자 서한준이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툭 인사를 던졌다. 유재는 살짝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짓는 것으로 인사에 답했다.

어제 서한준과 새벽 두 시까지 톡을 했다. 같이 듣는 전공 보고서를 쓴다는 핑계로 늦은 밤에 온라인에서 만나


쓸데없는 잡담을 한참 주고받았다.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다 나왔다. 서한준은 학교에서 버스를 조금 타고
가면 시장이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냉장고에 사둔 반찬도 다 그곳에서 산 거라고 했다.

어머니 얘긴 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반찬 가게가 아니라 굳이 시장을 찾은 건 분명 향수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유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고, 한준은 최근 머리를 한 그녀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한창 떠들 땐 예전과 하나 다를 게 없어서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잠깐 의식이 다른 데로 튀면
서한준을 두고 했던 추잡스러운 상상이 떠올랐다.

유재는 한준의 입가에 두었던 시선을 돌렸다. 다시 발표 준비에 집중한 지 얼마 안 되어 민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내 시큰둥하던 문자와 달리 제법 쾌활하게 인사했다.

“화해했어?”

인사말이라기보단 질문이었다. 서한준이 발표 때문에 만든 단톡방을 자꾸 나가던 때, 민희에게 그를 대신해


대충 변명했었다. 술자리인 것 같다, 취해서 장난을 치는 것 같다, 등. 나름 그럴듯하게 둘러댔으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조금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싸웠다고는 할 수 없다. 유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싸운 적 없어.”

“그렇겠지.”

민희는 성의 없이 대꾸하고는 말을 돌렸다.

“됐고, 나 꼭 에이 받아야 되니까 오늘 발표 잘해.”

“잘할 거야. 이런 노잼 교양을 재수강할 순 없지.”

“주변에서 이걸 왜 듣냐고 다 뜯어말릴 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민희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유재는 슬쩍 한준을 곁눈질했다.

툭툭 대화가 오가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한준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는 눈썹을 둥글게 밀어 올린 채


어색하게 웃었다.

“화이팅.”
분위기를 환기하는 한마디에 민희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턱을 들었다. 유재는 그들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학이나 고등학교나 시험 기간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이 주 전부터 과제 몰아서 하기, 시험 공부는


벼락치기. 기말고사가 곧이었다. 유재는 가방을 챙긴 다음 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후 3:07

야 도서관 ㄱ?

주말이었지만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은 붐빌 듯했다. 시험 공부가 힘들어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나면 기분이 꽤나 괜찮았다. 일곱 시쯤 저녁을 먹으러 나오면 막 해가 져서 하늘은
푸르스름했고 도서관 불빛은 더욱 밝게 빛났으며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분수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을 지나 서한준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다 보면 피로가 싹 증발했다. 어제는 같이 차돌박이 떡볶이를
먹었다. 뻘건 국물 속에서 차돌박이를 열심히 건져 먹는 녀석이 귀여웠다.

오늘 역시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준이 의외의 문자를
보냈다.

한준이

야 우리 집행부실에서 공부할래?

오후 3:10

오후 3:11

거기 비었어?

한준이

응 아무도 없던데 주말에


오후 3:11

유재는 미소 지었다. 한준이 도서관이 아닌 집행부실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짐작이 되어서다. 단둘이
있고 싶은 거겠지. 물론 집행부실이 공간도 넓고 큰 테이블도 있어서 쾌적하기도 하겠지만, 예전에 한 방에
나란히 엎드려서 수능 공부하던 때가 그리운지도 몰랐다. 잡담을 그렇게나 많이 하면서도 공부는 어찌저찌 잘해
냈던 기억이 있었다.

유재는 바로 집행부실에서 보자고 답을 보내곤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음료도 두 잔 샀다.

지난 며칠 서한준과 지내면서 대충 생각이 정리됐다. 한준의 말이 옳았다. 마음이 정해지면 ‘제대로’


말해달라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사귀게 되면
지금껏 해 보지 않은 것들을 하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많이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처음이지만 못할 거 없다. 서한준이 정확히 자신과 어떤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지 먼저 파악하기만 한다면.

유재가 집행부실에 도착했을 때, 한준은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왔냐?”

“응. 이거 마셔.”

“고마워.”

한준이 음료를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그는 자주 입는 보라색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진한 보라색 때문인지


얼굴이 한층 더 밝아 보였다. 유재가 어깨에 턱 손을 올리자 한준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머리카락이 손을 스쳤다. 간지럽고 따뜻했다. 한준은 느긋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간식 행사 한대. 도서관 앞에서 샌드위치랑 음료수 나눠 줘야 된다던데.”

“집행부 언제 그만둘 거야? 지금 그만두면 안 되냐?”

“종강하고 그만두는 게 낫지. 어정쩡하잖아.”

“샌드위치 나눠 주는 거 솔직히 우리 없어도 충분히 해.”

지긋지긋한 집행부. 언제까지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 보람찬 일이라 정신승리를 해야 하는 건지. 투덜거리던
유재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올려다보는 서한준이 웃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

“뭐가?”

“집행부.”

“싫은 것까진 아니고 귀찮아.”

너무 불평을 해 댔나 싶어 둘러댄 말에 한준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왜 따라 들어와? 생명과 환경도 그렇고.”

“몰라서 묻냐?”
다 아는 걸 또 묻다니 웃기는 놈이었다. 약이 올라 턱을 덥석 붙잡아 당기자 배에 한준의 정수리가 눌렸다.
서한준이 웃을 때마다 손바닥에 얕은 진동이 느껴졌다. 거꾸로 뒤집힌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천천히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키스했었지.

새삼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아퍼.”

한준이 머리로 배를 툭툭 쳤다. 붉어진 얼굴에 은근히 동했다. 깨닫자마자 유재는 머리를 놓아주었다.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는 서한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그는 느릿느릿 입꼬리에서 긴장을 풀었다.

한준이 헛기침을 하며 힐끔 돌아보았다. 미묘한 긴장을 그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유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씨익 웃으며 발을 내밀었다.

“나 네가 준 거 신었어.”

한준은 자신이 선물한 운동화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장난스럽게 한 바퀴 돌아보라고 손짓하는 요청에 따라,
유재는 슬렁슬렁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보란 듯 다리까지 쭉 뻗어 내밀자 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멋진데.”

“그래?”

“어.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모델이 좋으니 안 어울리기 힘들지.”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농담을 서한준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한쪽 다리를 길게 뻗은 자세 그대로 선


채, 유재는 한준을 보았다. 운동화를 바라보고 있던 서한준이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리를 지나
얼굴까지 도달하는 동안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들은 한동안 마주 보았다. 한참 후 유재가 먼저 한 발짝 물러설 때까지.

유재는 슥 코를 문지르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한준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와서


공부는 안 하고 얼마나 떠들었는지, 책상에 두었던 찬 음료 주변에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만 떠들고 공부하자. 지금부터 딱 한 시간 집중.”

“응.”

그들은 책을 펴고 각자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유재는 두꺼운 경영학개론 책을 펼쳤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시험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앉아서 한참 책을 들여다보았으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노트에 큰 틀부터 정리해서 써보려고 했지만 당최


집중이 되지 않아 받아쓰기만 했다. 그렇게 꼬박 삼십 분이 넘게 하는 둥 마는 둥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헐. 야, 너네 여깄었냐? 톡에 답도 없더니.”

열린 문 너머에는 신지훈과 박하영이 서 있었다. 유재와 한준을 보고 놀란 신지훈의 뒤로 박하영이 입을 크게


벌린 채 들썩들썩 팔을 흔들었다. 유재는 한껏 호들갑을 떠는 그들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우리 여기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너희도 공부하러 온 거야?”


“아니. 우리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이제 집에 가려고. 가기 전에 좀 여기서 떠들고 갈까 했지.”

“카페가 낫지 않나?”

“여기 좋잖아. 소파도 있고.”

지훈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들이 나타나자 팽팽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슬렁슬렁 다가온 하영이
밀매라도 하듯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휴대폰에는 처음 보는 여자애들
사진이 있었다. 하영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너네 미팅 안 할래?”

미팅?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재는 바로 한준을 보았다. 한준은 별 동요 없이 하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영은 슬쩍 지훈의 눈치를 살핀 후 소곤거렸다.

“내가 우리 집부 축제 때 같이 찍은 사진 보여 줬더니 난리야. 신지훈은 무조건 하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


사진 보여 주고 쟤만 데려갈 순 없잖아.”

“다 들리거든?”

지훈이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날아오는 킥을 피해 저편으로 도망친 하영이 대답을 재촉했다.

“응? 하자.”

미팅이라니. 유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안 해.”

“왜?”

“할 이유가 없으니까.”

더 붙일 것도 덜어낼 것도 없었다. 하영이 비죽 입술을 우그러뜨리고는 말했다.

“차라리 일정이 안 된다고 변명이라도 해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신지훈 혼자 미팅에 환장한 놈 되잖아.”

“그래! 나 환장했다! 환장했어.”

지훈이 소파에 누운 채 짜증을 부렸다. 그 광경이 재밌었는지 한준이 쌕 눈을 접었다. 낯익은 빛으로 휘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영이 이번에는 한준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한준이 너는?”

“음, 나도…….”

한준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신지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난감한 듯 웃는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 자식들이 나만 환장한 놈 만들려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서한준이 말했다.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유재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예상치 못한 순간 훅 들어온 한마디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서한준은 그런 소리를 들으라는 듯 뱉어 놓고도


이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영이 한참 입을 벙긋거리던 끝에 속닥속닥 물었다. “혹시 유빈이?” 목소리가 커서 다 들렸다. 한준은
눈썹을 장난스럽게 밀어 올린 채 고개를 저었다.

원래 저렇게 뻔뻔한 구석이 있었나? 나한테는 천천히 생각해 보라더니, 지는 남들 있는 데서 저런 말을 대놓고


해? 유재가 속으로 기막혀하는 사이 지훈이 황당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서한준, 너 요즘 거의 종일 우리랑 같이 있지 않았냐? 집부 개 빡세게 일하면서 도대체 언제 여자를 만나고


다닌 거냐? 설마 파이트 클럽에서는 아니겠지?”

파이트 클럽?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유재가 오만상을 쓰고 끼어들었다.

“끔찍한 소리 하네. 너 한번 구경 와 볼래?”

짜증을 내는 순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겨 죽겠다는 듯 터져 나와 숨이 모자랄 때까지 멎지 않는 웃음.


유재는 간만에 듣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한준이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려 누운 채
배를 붙잡고 있었다. 그새 배가 아프도록 웃느라 눈에는 눈물이 맺힌 채였다.

유재가 지훈을 휙 돌아보았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고 물었다.

“너네 안 가냐? 안 갈 거면 우리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간다, 가. 야, 그냥 카페 가자.”

“한준이는 인정. 조유재 넌 생각 바뀌면 문자 해.”

신지훈을 쫓아 달려 나가며, 하영은 휴대폰을 흔들어 인사했다.

문이 닫혔다. 유재는 미소를 거두었다. 방금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나자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서한준은 뻔뻔스럽게 그새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래프가 있는 저 페이지를 아까 전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몇 분 동안이나 읽고 있는 건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유재는 노트에 필기체로 ‘meeting’을 휘갈겨 쓰면서 중얼거렸다.

“대학에 오면 한 번쯤 해 보고 싶은 게 미팅일 텐데, 단칼에 거절할 정도로 그 사람이 좋은가 보네.”

“…….”

“되게 괜찮은 사람인가 봐. 잘생겼을 듯.”

뻔뻔한 놈에게 똑같이 뻔뻔한 말을 돌려주었더니 서한준이 책장 가장자리를 구겼다. 계속 장난을 치고 싶어져
한 번 더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발을 퍽 걷어찼다.

“크윽!”

하얀색 새 운동화에 쏟아지는 발길질에는 자비가 없었다. 유재는 발목을 의자 밑으로 싹 끌어다 숨겼다.

그는 ‘meeting’을 열 번 더 날려 썼다. 볼펜 똥을 노트에 닦아 내고 책을 조금 읽었다. 방금 읽은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곁눈질을 했다. 서한준은 아직도 같은 그래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재는 펜을 내려놓았다.

“집중 존나 안 되네.”

“나도.”

“농구 한 판 하고 올래?”

“농구?”
“어. 좀 뛰고 오면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더웠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등 근육이 욱신거렸다. 아예


운동을 좀 해서 주의를 환기하고 긴장을 푸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래.”

한준이 끄덕이며 먼저 일어섰다. 따라 일어선 유재가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를 발견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집어 들고 한준의 뒤를 따랐다.

주말이라 아이들이 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농구장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농구대
하나를 차지했다.

유재는 농구장을 두어 바퀴 달리며 몸을 풀었다. 시험 공부를 하러 나온 거라 운동에 적합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청바지가 아닌 트레이닝 팬츠를 입어서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한준이 맨투맨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다가왔다.

오후의 햇빛이 나긋나긋하게 쏟아졌다. 수도 없이 같이 한 농구였다. 유재는 익숙하게 내기를 제안했다.

“다섯 골 먼저 넣기.”

“콜. 뭐 걸까? 음료수?”

“음료수 방금 먹었잖아.”

“뭐 원하는 거 있어?”

탕, 탕, 공이 바닥에 부딪힌 후 튀어 오르는 소리가 시원했다. 매일 보던 녀석인데도, 가까이 선 서한준은


오늘따라 단단해 보였다. 햇볕 아래 선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졌다. 유재는 짓궂은 눈웃음을 건네며
대답했다.

“업고 운동장 세 바퀴?”

한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고등학교 때 곧잘 했던 장난이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하고는 드리블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고 수비하기. 시선은 상대의 눈과 팔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공. 그걸로 상대가 어떤 슛을 던질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판단하여 수비한다. 유재는 물끄러미 서한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몸을
숙인 자신을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야가 지나치게 넓었다. 공의 흐름이 아니라 서한준이 짓고 있는 표정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하고 있을


생각에까지 신경을 빼앗겼다. 잠깐 방심한 사이 한준이 공을 세게 튕기며 훅 달려 들어왔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 공을 따라 몸을 돌린 유재가 재빨리 뒤를 따라붙었다.

“후읏.”

점프한 한준의 등 뒤에서, 유재가 힘껏 높이 뛰어올랐다. 쭉 뻗은 손에서 공을 쳐낸 순간 한준이 숨을


들이켰다. 발이 땅을 딛자마자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는 몸을 유재가 멈춰 세웠다. 단단한 등이 가슴에
눌렸다. 목뒤가 코앞이었다. 중심을 잡아 주려고 붙잡았던 팔이 불끈거렸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한준과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그의 목뒤를 엄지로 부드럽게 누르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유재는 싹 손을 거두고는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한준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이번엔 유재가 뚫고 나갈 차례였다. 일부러 오른쪽 발을 앞세우자 한준이
다리를 쭉 뻗어 막았다. 그가 더 올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유재는 역방향으로 내달렸다.

밀착하여 따라붙은 서한준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입을 맞췄을 때, 그의 턱이 손아귀 안에 있었을 때,


한준은 지금과 비슷한 소리를 냈었다. 손안에서 턱이 열리던 감각이 떠올랐다. 유재는 링을 노려보며 공을
던졌다.

자세가 엉망이다. 유재는 공이 제 손을 떠나자마자 빗나갈 것을 직감했다. 링에 부딪혀 튕겨 나온 공을 잡으려


뛰어오르자, 함께 뛰어오른 서한준의 숨이 제 숨과 섞였다. 공을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길을 잃고 추락하여
한준의 열린 입술을 찾았다.

바로 눈앞에 최근에 한 번, 그 후로 이따금씩 상상하곤 했던 얼굴이 있었다. 위를 향해 바짝 고개를 치켜든


채 한껏 상기되어 있는 서한준. 평소엔 키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볼 수 없었던 각도에서,

제 앞에 무릎을 꿇려 놓으면 볼 수 있을 법한 얼굴.

뱃속에 오싹한 감각이 들어차면서 순간 오금이 쑤셨다. 유재는 공을 놓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한준이 낚아챘을
거라 생각한 공은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 텅, 소리를 내며 낙하했다.

공이 데굴데굴 굴렀다. 유재는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도록 침을 삼키고는 허리를 펴고 섰다. 한준이 무릎을
짚은 채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플레이다. 자신의 평소 실력을 알고 있는 놈이니 농담으로라도 핀잔을 던지리라 생각했지만


한준은 조용했다. 그는 잠자코 공을 주우러 갔다.

유재는 방금 했던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속이 뜨거웠다.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감각은 간데없고


난폭하고 묵직한 충동이 열 손가락 끝에 고였다. 정신 줄을 놓치는 순간 바로 샤워기 아래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쏟아지는 물에 씻어 냈던 진득진득한 절정의 흔적들.

한준이 공을 주워 돌아오고 있었다. 유재는 제 한쪽 귓불을 세게 잡아당겨 주의를 붙들었다.

정신 차려.

서한준을 관찰하고 살펴 그와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이성이


먹힐 순 없다.

고개를 든 유재의 앞에 한준이 멈춰 섰다. 그는 신중히 드리블을 하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유재는 정신을
다잡은 후 자세를 잡았다.

오른쪽? 왼쪽? 페이크? 움직임을 읽으려고 바삐 눈을 굴리던 중이었다.

한준이 뛰어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존나 힘들어서 욕구고 나발이고 그냥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유재는 세


바퀴를 다 돌아 원점에 도착하자마자 업고 있던 서한준을 내던졌다.

한준이 운동장 바닥에 널브러졌다. 쓰러진 그의 주변으로 모래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서한준은 모랫바람을 다
먹을 기세로 웃어댔다. 유재가 악을 썼다.

“너무 피곤해서 졸리잖아, 새끼야! 이래서 공부는 어떻게 하냐?”

“야, 우리 한 시간만 자고 하자. 나 움직이질 못하겠어.”

“지금 낮잠 자면 또 금방 저녁이라 저녁 먹어야 돼.”


“일 났다. 나 배도 고파.”

“저녁 햇반 사가서 너 냉장고에 있는 우엉이랑 먹을까?”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너처럼 무거운 벼룩이 어딨냐?”

나란히 쓰러져 누운 유재가 한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고등학교 땐 곧잘 업었던 것 같은 놈인데, 그새


자라기라도 했는지 무거워서 잘 굴러가지도 않았다. 한준은 머리카락에서 모래를 털어 내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웃음기가 그득 남은 얼굴이 발갰다.

서한준 말대로 배가 고팠다. 얼음이 다 녹아 물맛이 나는 음료를 남김없이 마시고도 허기가 졌다. 유재는
비척비척 땅을 짚어 일어나서는 한준을 꼬드겼다.

“반찬이랑 햇반 사 가지고 가서 집에서 먹자. 너네 집이든 우리 집이든.”

“그래. 이 근처 반찬가게?”

“너 맨날 간다던 시장 가도 되고.”

간만에 시장 구경을 해도 좋겠다 싶었다. 사실 시장보다는 시장을 걷는 서한준을 보고 싶었던 거지만.

물끄러미 쳐다보던 한준이 코를 쓱 문지르고는 말했다.

“거기 좀 먼데. 버스 타고 한 십오 분은 가야 돼.”

“그 정도면 우리 놀이터 걸어 다니던 거랑 비슷하겠는데, 뭐.”

“…….”

“가자. 시장 한 바퀴 돌면서 잉어빵도 사 먹고 과일도 좀 사고.”

유재는 지저분한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지르며 일어섰다. 가만히 지켜보던 한준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왼쪽 뺨에 알알이 붙은 모래를 마저 닦아 낸 다음 배시시 웃었다.

“그래.”

한준이 힘차게 일어서서 자리를 털었다. 그들은 가방을 두었던 벤치로 향했다. 먼저 집에 들러서 씻고
만나자며 간략히 다음 일정을 논하던 때, 한준이 대뜸 신발을 가리켰다.

“야, 너 신발 끈 풀렸다.”

유재는 뒤늦게 끈이 풀린 운동화를 발견했다. 모르고 그냥 밟고 다녔는지 신발 끈이 새까맸다. 워낙 희었던 새


운동화라 때가 탄 게 더욱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는 발을 들어 납작하게 밟힌 끈을 확인하고는 짜증을 냈다.

“아, 씨발. 더러워졌어.”

“앉아 봐.”

한준이 팔을 당겼다. 순순히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서한준은 가방 앞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넌 무슨 그런 것도 들고 다니냐?”

“그냥 길에서 나눠 준 거 안 꺼내고 넣어 가지고 다니다 보니까.”

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티슈를 뜯었다. 그가 티슈를 여러 장 빼내는 걸 심드렁히 쳐다보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서한준이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것이다.

바짝 긴장한 유재가 아래를 보았다. 한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그는 물티슈로 신발 끈을 쓱쓱 문질러
닦아 내는 데에 집중해 있었다.

유재는 벤치 위에 올려두었던 두 손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자신의 허벅지에서 양 무릎 사이의 틈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자신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한준이 꿇어앉아 있었다.

“검은색으로 살 걸 그랬나?”

한준이 끈을 당겨 묶으며 고개를 들었다. 반질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유재는 숨을 멈췄다.

“리본을 두 번 묶으면 안 풀려.”

한준이 묶은 리본을 다시 한번 양옆으로 당겼다. 열중한 채, 그는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둥글게 훑었다.


유재는 찬찬히 눈을 움직여 한준의 턱 아래에 희뿌옇게 붙은 모래 가루를 보았다.

“뭐 묻었어.”

일부러 계산하거나 떠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재는 손가락 끝으로 한준의 턱 밑을
살살 털어 내고 있었다. 끈을 다 묶은 한준이 턱을 들어 올렸다.

또 한 번, 손아귀 안이었다. 이대로 그의 머리를 당겨 다리 사이에 파묻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상상하며,
유재는 손을 거두었다.

“가자.”

유재가 먼저 일어서서 가방을 멨다. 한준은 걷어붙였던 소매를 정돈한 후 옷으로 얼굴을 샅샅이 털어 냈다.
유재는 그가 매무새를 정리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한준이 다가오자 유재는 걷기 시작했다. 그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오랜만에 우엉 맛있겠다.”

“우리 종강하면 바다 가자.”

우엉 얘기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서한준은 난데없이 바다 얘기를 꺼냈다. 유재는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한준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바다를 가자는 것 이상의 뜻으로 꺼낸 말일 터였다.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바다에 갈 때쯤엔 서한준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에게 답을 해야 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마감 기한이자 디데이였다.

한준은 작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맨날 가자, 가자 했었는데 저번엔 재밌게 못 놀았으니까.”

바다.

학창 시절에 머리를 맞댄 채 여러 번 얘기하고 여러 번 약속했던 곳. 이유 없이 해외나 산보다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곳.

서한준과 마침내 처음으로 바다에 갔을 땐 아이들 틈에 섞여 앉아 이것저것 먹은 기억밖에 없었다. 약속했던


거라곤 하나도 함께 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 아쉬웠던 기억을 뒤로 한 채, 서한준은 새로운 약속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
유재는 약속했다. 그러곤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1 학기 시험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한준은 마지막 시험을 치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렇게 부실하게 시험 공부를 한 건 처음이었다. 아예 공부를 안 했으면 몰라도, 내내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노려보고 있었는데도 머리에 남은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땐 줄창 조유재와 함께 공부했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 그를 두고는 도저히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유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곧 시험이
끝나면 어떤 대답을 할지, 혼자 다양한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 정신력을 전부 소진하고 말았다.

웃긴 건 그 과정이 결코 괴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시장을 걷고 같이


장난을 치면서, 한준은 자신이 어떻게든 조유재를 좋아할 운명이었음을 확신했다. 피할 수 없었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종강이었다.

한준은 조용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시험을 치고 있을 조유재를 생각하며 그와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시험이 한창인 지난 며칠간은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한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내일은 함께 바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내일이 되려면 아직 하룻밤을 더 자야
한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는 대충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마트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대형 마트로 향했다.

내일 바다에 가서 입을 새 옷을 사야지. 벌써 초여름인데 아직도 지난 겨울 때 외투 안에 입었던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바지도 사계절 내내 너덧 개를 가지고 계속 돌려 입었다. 최근 지출이 너무 커서 남은 돈이
거의 없었지만, 싸구려라도 좋으니 유재가 처음 보는 새 옷을 사고 싶었다.

마트 입구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서 한준은 속옷 매대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려던 걸음이 뚝


멎었다. 제자리에 서서 망설이던 그의 시야에 남성용 드로즈가 들어왔다.

저렴한 가격에 깔끔한 색상.

가진 속옷이 전부 다 낡고 못생겼긴 한데.

새 속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 뺨에 열이 올랐다. 그냥 바다만 보고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속옷까지


구경하며 설레발을 치는 자신이 우스웠다.

놀이터에서 키스했던 이후, 조유재와는 분위기가 좋았다. 자신이 처음 반했던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모습
그대로였다. 평생 이렇게 지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기에 유재가 마음을 달리 먹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키스를 하고 연애를
하기보다는 지금 이대로가 더 좋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행여나 친구로 지내자는 결론이 난다 하더라도 처음 거절당했을 때만큼 아플 것 같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기대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조유재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고 나니 그와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이어지든
상관없었다. 이어지기만 한다면.
“지금 한 상자에 세 장 들은 거 만오천 원이에요. 이거 이 가격에 잘 안 나오는 건데 행사 중이라서.”

“앗, 네.”

한창 쳐다보고 있다 보니 점원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한준은 쑥스럽게 웃으며 슬쩍 한 발짝 물러섰다. 그는


매대를 빙빙 돌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결국 상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어차피 새로 살 때가 됐으니까.

누가 볼세라 후다닥 걸음을 옮길 때였다. 움켜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움찔 놀란


한준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누군가의 주소와 휴대폰 번호가 문자로 와있었다. 발신자는 조유재. 다음 문자가 이어 도착했다.

조유재☆

고 1 남자애 수학 2 등급 주 2 회 2 시간 3 학년 때까지 책임져줄 선생님 구한대 연락해봐

오후 7:42

문자를 확인한 한준이 미소 지었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얘기를 조유재는 잊지 않았다. 한준은 메시지 옆에
찍힌 시간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앞으로 열두 시간만 지나면 바다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꼬박
하루가 지나면 어떤 쪽으로든 대답을 들었을 것이고.

오후 7:44

고맙다

유재는 바로 문자를 읽었다.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만큼이나 생각이 많을 유재를 생각하며, 한준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새벽 다섯 시에 깼다. 꿈에는 조유재가 나왔다. 꿈속에서 그들은 난데없이 마트에서 해산물 쇼핑을 했는데,
커다란 참치가 즉석에서 해체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유재는 참치회보다는 보쌈 고기를 사는 게 낫다며
한준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자신은 참치회를 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침내 조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에 성공한 한준은 신나게 참치회를 들고 카트를 돌아보았다. 회를
넣으려고 들여다본 카트 속에는 수백 개가 넘는 드로즈가 가득 들어 있었다.

조유재가 이게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한준은 카트를 힘껏 밀어 도망쳤다. 마구 달려서 에스컬레이터에


오르자마자 점원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속옷의 그램 당 가격을 읊으며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말했다.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자 버리고 도망쳤던 카트가 있었다. 그 안에는 조유재가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그런 끔찍한 꿈을 꾸고도 다시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준은 뻑뻑한 눈을 비벼 떴다. 졸려 죽을 것 같았다.

“피곤해 보이네.”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하자, 보다 못한 유재가 말했다. 한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을 하는 조유재


역시 다크서클이 눈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좀 자.”

“피곤한데 잠은 안 와. 몇 시간 남았지?”

“한참 남았어.”

“으악.”

짤막한 대답에 유재가 미소 지었다. 아침에 만났을 때부터 버스에 올라 두 시간 넘게 달리는 지금까지, 내내
어딘가 긴장한 듯 보이던 그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올린 웃음이었다. 창밖을 내다볼 때도, 잠깐 눈을 감은 채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유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오늘 무슨 말을 할
예정인지는 몰라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통영 바다였다. 혼자 훌쩍 다녀왔던 정동진보다, 반 엠티에서 같이 밟았던 바다보다, 더 풍경이


예쁘고 학기 중에는 가기 힘든 곳으로 조유재가 직접 골랐다. 버스로도 한참이나 가야 하는 곳이었다.

바다에 가면 같이 해 보고 싶었던 것들. 한준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일단 도착하면 밥 먹고 바다부터 가자. 너 가고 싶다던 테라스 카페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바다에서 놀고.”

“우리 호텔 앞에 바로 바다 있어. 바로 짐 풀고 나가서 보면 돼.”

“신난다. 피곤하면 잠깐 누웠다가 또 나가고, 아침에도 바닷가에서 산책할 수도 있고.”

생각하다 보니 긴장한 와중에도 마음이 들떴다. 신이 나 재잘거리자 유재가 휙 몸을 돌려 앉았다.

“일단 내일 일출은 무조건 봐야 돼. 알람 백 개 맞춰 놓고 자자.”

“또 우리 뭐 하고 싶었더라?”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십만 원짜리 코스 요리 먹어 보기.”

“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기도 했었다.”

예전이 생각나 한준이 피식 웃었다. 급식을 먹고도 한창 배가 고플 때 했던 소리였다. 막연히 십만 원이면


최고급 식사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으리라 상상하면서. 웃긴 건 굳이 바닷가 근처로 상상하면서 식당은
횟집이 아닌 고급 중식집을 생각했었다는 점이다. 우연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이 중식집에 간 걸 봤는데,
접시를 비우고 또 비워도 계속 음식이 새로 나오던 걸 인상 깊게 봤다는 게 이유였다.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조유재도 바다 얘기를 할 때 종종 중식 얘기를 하곤 했다. 메뉴 이름도 잘 몰라서 짜장면이니 짬뽕이니 했던
게 고작이었지만.

조유재가 또 하나 생각났는지 쿡 옆구리를 찔렀다.

“스쿠버다이빙.”

“그건 컨디션 봐서. 조심해야 되겠던데.”

“불꽃놀이 보면서 맥주 먹기.”

“좋아.”

“호텔 룸서비스 시켜 먹으면서 오션뷰 즐기기.”

“뭔 죄다 먹는 거냐. 우리 그때 배 많이 고팠나 봐.”

“룸서비스로 치킨 시켜 먹으면서 바다 보자.”

“우리 방 오션뷰였냐?”

“오션이 근처긴 하지. 까치발 들면 보일지도?”

장난기 가득한 말에 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찾아서 예약한 저렴한 호텔은 오션뷰까진 아니었지만 바다와
꽤 가까웠다. 방에선 바다를 볼 수 없어도 루프탑에 올라가면 바다가 보인다는 후기가 있었다. 한준은 숙소
이름을 검색해서 후기를 더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곧 도착할 텐데…….

문득 함께 봤던 후기에 첨부되어 있었던 객실 사진이 떠올랐다. 침대 두 개가 덩그러니 붙어 있던 방.

유재가 고개를 삐딱하게 떨어트렸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뺨 위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준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다음에 제주도도 가 보자.”

“좋아. 스쿠버다이빙은 그럼 제주도에서 하면 되겠다.”

“제주도 가려면 너나 나나 둘 중 하나가 면허 따야 돼.”

“할 것도 없는데 이번 방학 때 따지, 뭐. 제주도 해안 따라서 드라이브 하자. 거기 별채 같은 데 묵고.”

“고기국수 먹자.”

“수상 스키도 재밌겠다.”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한마디씩 실속 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한준은


창밖의 풍경과 시계를 느릿느릿 번갈아 보았다. 숫자가 하나하나 바뀌는 걸 지켜보며, 그는 문득 이 여행이,
그들의 첫 바다가, 어쩌면 유재와 친구로서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또 한 번 바뀌었다. 한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텔은 끝내줬다. 후기에서 봤던 사진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다. 여유만 있다면 일주일 정도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두 개와 커다란 창이 보였다. 한준은 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는 바로 창으로
달려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포근한 색의 커튼을 열자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깥으로는 푸른
하늘과 오래된 집들이 보였다.

“사진 찍어야 돼.”

한준은 휴대폰으로 창밖의 풍경을 여러 장 찍었다.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을 잔뜩 찍는 동안 조유재는 방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미니 냉장고를 열어 보고 준비되어 있는 녹차를 들여다보고 옷장 안에서 샤워 가운을
꺼내 가슴 앞에 대 보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서 샤워 가운을 대보고 있는 게 귀여워서 조유재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 유재가 돌아보았다. 한준은 휴대폰으로 포착한 찰나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조유재는 웃고 있었다.

티끌 없이 웃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어젯밤부터 느꼈던 은근한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다. 웃으며 고개를 들자 유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가까웠다. 눈을 맞춘 채 바라보기를 한참, 유재가 입가로 시선을 내렸다. 훑어보는 눈길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준은 재빨리 주의를 돌려 간소하게 들고 나갈 짐을 챙겼다.

“나갈까?”

“잠깐만.”

유재가 배낭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는 작은 케이스와 모자를 하나 꺼내 들고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게 뭐야?”

“밖에 햇빛이 심하니까. 넌 이거 써.”

유재는 모자를 건네주고 케이스를 열었다. 뭔가 했더니 선글라스였다. 한준은 어디 한번 잘 어울리는지 보자는
듯 짓궂은 태도로 팔짱을 끼고 섰다. 유재가 거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선글라스를 써 보았다.

“어때?”

조유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선글라스를 쓴 건 처음 봤다. 잘 어울리긴 했지만 못 보던 모습이라 그런지 괜히 낯간지러웠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입술이 근질거렸다. 간신히 참고 있을 때 유재가 휙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놈을 마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이 씨, 멋있는 척 토 나와.”

“……뭐? 멋있으려고 산 게 아니라 햇빛 때문에 산 거야.”

“웃기고 있네. 여기서 쓰려고 일부러 샀지?”

“그럼 안 되냐? 너도 이거 샀잖아, 새끼야.”

유재가 왁 달려들어 소매를 움켜잡았다. 오늘 입으려고 새로 산 반팔 티셔츠였다. 그래, 어쩔래? 하고


웃어넘겼어야 했으나 그의 품으로 당겨지는 순간 한준은 반응하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트에서 한참 고르다 산 티셔츠. 몸에 안 맞을 리가 없는 프리사이즈 티셔츠를 입고 거울 앞을 한참


서성거렸던 어젯밤. 안 맞는 교복 바지, 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면 양말, 하도 입고 다녀서 낡아빠진 체육복,
몇 벌 없어서 전부 눈에 익었을 사복, 어머니가 한번은 비뚤게 잘라 주셨던 앞머리, 너덜너덜한 운동화.
그간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보며 지냈음에도 새삼스럽게 잘 보이고 싶어 골랐던 티셔츠. 그게 조유재에겐
선글라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사고가 멈추었다.

유재가 서서히 입꼬리를 내렸다. 그의 멱살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이 이상
부담을 줄 수 없어 단단하게 다져만 두었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든 상관없으니, 오늘 밤이 가기 전에는 꼭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덥다. 우리 나가서 뭐 마실 것 좀 사 먹자.”

한준은 아슬아슬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웃었다. 유재가 말없이 끄덕였다. 선글라스 때문에 너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준은 궁금해하는 것을 그만두고 앞을 보았다.

테라스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신 후 바다에서 물놀이를 몇 시간이나 했다. 빠지고 빠뜨리고 소금물을 잔뜩
먹고 뱉고 모래에 낙서를 한 후 사진을 찍고, 할 수 있는 물장난은 다 치고 나니 완전히 녹초가 다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씻고 나자 슬슬 이른 저녁을 먹어도 좋을 시간이 되었다. 유재는 예상대로 수많은 횟집을
제쳐두고 중식집을 찾았다.

“우리 이거 먹자. 코스 요리.”

조유재는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골랐다. 한준은 코스 요리에 포함된 메뉴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버섯, 소고기, 볶음밥 등, 아는 것도 많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요리도 꽤 있었다. 어차피 코스 요리를 시키게
될 걸 알면서도 한준은 물었다.

“샥스핀. 이거 그거지, 상어 지느러미. 맛있을까?”

“샤크의 핀. 상어의 지느러미. 아, 대박. 나 이거 지금 알았어.”

“헛소리하지 말고, 임마.”

“몰라, 시켜 봐. 꽃빵? 이건 뭐지? 디저트?”

“밀가루 빵 같은 거 아냐? 찍어 먹는 건가?”

“일단 시켜. 나 짜장면 좋아하니까 이것도 다 맛있을 거야.”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바로 코스 요리를 2 인분 주문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니 힘이 쫙 빠졌다. 바닷가를 거닐며 조금씩 마음을 터놓으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미친놈들처럼 물에 뛰어들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놀았다. 수영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면서 깊은 곳까지 개헤엄을 쳐서 가 보았다가 어푸어푸 난리도 나 보고, 튜브를 빌려서
유재를 끼운 다음 이곳저곳 끌고도 다녔다. 완전히 지쳐서 뻗어 누운 제 위로 조유재가 모래를 잔뜩 쌓아서
배불뚝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아, 선글라스 존나 비싼 건데.”

유재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을 눌렀다.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멋있는 척 파도를 타다가
선글라스가 물에 쓸려 가 버린 것이다. 가방에 두고 오라고 열 번을 넘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그게 머리띠냐? 그렇게 머리에 걸쳐 놓고 있으면 당연히 없어지지.”

“그때 너 물에 빠질까 봐 전방 주시하다가 그런 거 아냐.”

“발 살짝 안 닿는 정도 깊이였는데 뭘 또 물에 빠진대.”
“너 때문에 튜브 빌린 거거든? 수영도 못하는 게 자꾸 깊은 데로 가니까.”

“튜브 네가 제일 신나서 썼잖아.”

“존잼.”

장난을 치는 사이 애피타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냉채를 먹으면서도 한준은 밤이


완전히 깊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분명히 잠이 들기 전에 대답을 듣게 될 테니,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슬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 자신과 달리 조유재는 넋을 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한준은 힐끔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부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연애 땐 불같고 좋았죠. 근데 아무래도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면 그런 감정은 얼마 안 가잖아요.

연예인 부부가 결혼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고 있었다. 왜 전 국민이 다 보는 데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사생활을
밝히는지 한준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남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한가득해서 시청률은 좋은
듯했다. 조유재 역시 남의 부부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이제는 솔직히 애 보면서 살아요. 내 새끼 예쁜 거 보면 잠깐 짜증 났던 것도 금방 잊을 수 있고.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텔레비전을 보던 유재가 중얼거렸다.

“애 낳는 게 문젠가? 육아하다가 정떨어지는 부부가 많아 보이네.”

“애가 예뻐서 같이 사는 데 도움 된다는 거 아냐?”

“제대로 보고 하는 소리냐? 지금 애가 예쁜 거지 배우자가 예쁘다는 게 아니잖아. 애 때문에 참고 산다, 이거


아냐.”

유재가 인상을 쓰고 설명했다. 한준은 관심도 없는 연예인들 얘기를 한 귀로 흘렸다. 조유재 말대로 제대로 안
본 게 맞았다. 저런 것보단 당장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서 있을 일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유재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도 저처럼 긴장해서 애써 예능 프로그램에 집중한 척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말 있잖아요. 같이 식사를 하는데 쩝쩝대는 게 꼴 보기 싫어지면 정떨어진 거다. 근데 저는 그런


것보다 숨소리가 그렇게 거슬리더라고요. 비염이 심하거든요.

“하, 숨도 쉬지 말라는 건가?”

혼잣말을 하는 조유재를 보며 한준은 마음을 다잡았다. 코스로 나오는 요리 양이 꽤 많을 거 같은데 과식하지


말아야지. 허기지는 것과 별개로 소화가 잘될 것 같지 않았다.

—부부 관계는 안 한 지 오래됐어요. 하는 게 특이 케이스일 걸요. 제 주변 다 그래요.

“아니…… 아직 젊잖아.”

유재는 예능에 잔뜩 몰입해서는 계속 코멘트를 덧붙였다. 이어 나온 음식을 살펴보고 있던 한준이 고개를


들었다. 조유재는 오만상을 찡그린 채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었다. 한준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 주의를
끌었다.

“야, 이거 맛있어. 빨리 먹어 봐.”

유재는 그제야 다시 수저를 들어 두부를 조금 입에 떠넣었다. 녹여 먹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조용조용 한참을 우물거리기만 하는 걸 보니 그 역시 눈앞의 식사보다는 곧 나누게 될 대화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행여나 체할세라 한준은 물을 한잔 따라 건넸다. 식사 내내 유재는 말이 별로 없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 잠깐 쉰 다음, 마지막으로 그들은 불꽃놀이를 하러 해변으로 나갔다.

테라스 카페, 물놀이, 비싼 코스 요리, 룸서비스로 시켜 먹자고 약속한 치킨까지, 하기로 했던 걸 전부 해


버리고 남은 게 불꽃놀이였다. 오늘만 날이 아닌데, 약속했던 걸 한 번에 허겁지겁 해내느라 피차 정신이 없는
게 웃겼다. 어두운 해변으로 걸어 나가며 한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새까만 어둠이 깔려 별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대신 해변가에 듬성듬성 깔린 불꽃이 컴컴한 해변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사 올게.”

유재가 등을 툭 치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한준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몇 없는 바닷가를 둘러보고는 유재가
기다리라고 한 곳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어둠이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파도 소리만 들렸다. 묵직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집중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모래에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폭죽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난 조유재가 쪼그리고 앉아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마구 구멍을


파내며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있어 봐. 내가 하늘에 별 쏴 준다.”

귀여운 놈. 한준은 씩 웃으며 일어나 같이 폭죽을 심었다. 열 개나 사 왔는데 이걸 한 번에 터트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폭죽을 터트릴 준비를 했다. 다 심고 나자 유재가 물러서라며 손짓을 했다.
한준은 불꽃을 가장 예쁘게 볼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서서 기다렸다. 영상으로 담아 간직하기 위해 휴대폰
카메라도 켜두었다.

불을 붙인 후, 유재가 우다다다 달려와 한준의 옆에 섰다. 그는 잔뜩 흥분하여 탄성을 내질렀다.

“와!”

펑, 펑,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새까맣던 하늘 위로 반짝반짝 별빛이 튀었다. 길어야 몇 초. 그


짧은 시간 동안 한준은 지금껏 봤던 것 중 가장 화려한 밤하늘을 넋 놓고 보았다.

환하게 빛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옆을 보니,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조유재가 보였다.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한준을 마주 보았다.

“존나 비싼 십 초였다.”

“덕분에 호강했습니다.”

한준이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하자 유재가 큭큭 웃었다.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는 그를 따라, 한준도
부드러운 모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말이 없는 사이 파도 소리가 세차게 들이쳤다. 한준은 잠잠해진 하늘을 쳐다보다가 유재를 곁눈질했다.


한껏 흥분했던 모습은 간데없이, 조유재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봐도 그의 복잡한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준은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유재의 손등 위에 뿌렸다. 조유재가 힐끔 쳐다보자 그는 태연히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하기로 한 거 원 없이 다 해 보니까 재밌다. 상상했던 거 이상으로 재밌었어.”

“나도. 또 오자.”
“이대로도 좋은 거 같아.”

담담히 꺼낸 말에 유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준은 모래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다졌다. 단단해진 흙이 꼭


제 마음 같았다. 그는 용기를 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부담 갖거나 미안해하지 마라.”

“…….”

“그냥 이렇게 평생 너랑 같이 놀러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는 것도 뭐…….”

너무 좋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긴 팔이 어깨에 감겼다.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옭아맨 손이 몸을 힘껏 끌어당겼다.


깨달았을 땐 이미 시야 가득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한준은 모래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조유재가 천천히 고개를 비틀고 있었다.

“평생.”

바로 숨이 겹칠 수 있는 각도에서, 그는 멈추었다. 소곤소곤 속삭이는 한마디가 입술을 간질였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작았지만 눈동자는 또렷했다. 세찬 파도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눈부신 불꽃이 남긴
잔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요 속에서 오로지 조유재만 남았다.

한준은 홀린 듯 끄덕였다.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숨이 들러붙었다.

* * *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미묘하게 어색했다.

한준은 바닷가에서 했던 키스를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키스했다. 홧김에
부딪쳐 뒤엉키는 게 아니라 진득하고 부드럽게. 키스는 좋았지만 이대로 연애하게 된 거냐 묻는다면 애매했다.
입을 맞췄으니 친구 먹자는 소린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키스 한 번에 바로 태도를 바꾸기도 뭐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호텔 방에 가까워지자 한준은 힐끔 유재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입술이


얼얼할 때까지 키스했던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뗀 채 콧등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먼저 손이라도
잡아서 어떻게 나오나 볼까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유재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들어간 방은 유난히 비좁아 보였다. 침대가 방의 삼 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라 갈 곳이 달리


없었다. 한준은 괜히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동안 조유재는 아까 이미 다
봤던 녹차 티백을 한 번 더 집어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유재가 멋쩍어하니 덩달아 가시방석이었다. 한준은 한껏 코를 찡그린 채 냉장고 안을 노려보았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냐? 간단한 말이었음에도 차마 먼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유재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데 성급히 굴고 싶지 않았다.

술이 좀 들어가면 답이 나오려나. 한준은 캔맥주를 꺼냈다.

“야, 우리 맥주 한 캔씩 딸래?”
“그래. 안주는 룸서비스?”

“그만 먹어, 임마. 배 터질 것 같다고.”

조유재는 그렇게 먹고 또 룸서비스를 제안했다. 대번에 거절했지만 그는 오늘 하루 운동량을 생각하면 많이


먹는 게 당연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재잘거리는 게 귀여우면서도 미묘한
실망감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했다. 키스로 오른 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한준은 헛기침을 하며 침대에 앉았다. 하필 침대끼리 붙어 있어 괜히 쑥스러웠다. 힐끔 쳐다보자 유재가


맥주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묵묵히 건배를 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조용해졌다. 배가 부른 데다가 맥주는 별로 맛도 없었다. 한준은 슬쩍 캔을 옆의


협탁에 올려 두고는 입술을 핥았다.

키스는 좋았다. 조유재랑 처음 해 본 거라 잘은 몰랐지만, 꽤 기분이 괜찮은 걸 보면 나름 합이 잘 맞는


듯했다. 이번엔 이도 안 부딪치고 부드럽게 핥고 빨면서 등줄기를 따라 간지러운 감각을 끊임없이 느꼈다.
멍하니 앉아 입맛을 다시다 보니 입술에 보드랍게 붙던 온기가 떠올랐다. 껴안을 때마다 닿았던 단단한 가슴이
생각났다. 그리고 결국에는 새로 산 드로즈까지.

완전히 환장한 놈 같네. 한준은 자괴감을 삼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 찍은 사진을 훑어보며 주의를
돌리고 있으려니, 유재가 훌쩍 넘어와 옆에 앉았다.

“뭐 하냐?”

“나 사진 오늘 찍은 거 보고 있어.”

“어디 봐.”

조유재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가 코앞이었다. 땡볕에서 뛰어놀아서 그런지
피부가 살짝 붉었다. 조유재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양 순진한 빛으로
낄낄거렸다.

“이거 사진 좀 너무하네.”

“잘 나왔는데 왜?”

“너만 눈 동그랗게 뜨고, 난 눈도 못 뜨고 있잖아.”

“프사 해야지.”

한준이 사진을 확대해서 유재의 못나온 얼굴이 잘 보이게 크롭했다. 프로필 사진 변경을 누르자마자 유재가 확
휴대폰을 낚아챘다.

“네 얼굴로 해!”

“거기 내 얼굴도 있어. 내놔, 새끼야.”

조유재는 휴대폰을 빼앗아 제 침대로 풀쩍 도망쳤다. 확 약이 올라 방금까지 들었던 음심은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한준은 그를 쫓아 침대로 뛰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이라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건만, 조유재는
용케 한준을 피해 방 구석구석 도망치다가 끝내는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 작은 방 안에서 도망칠 곳이라곤 하나뿐이라 욕실 행은 예정되어 있었다. 한준은 닫히는 문에 어깨를 쾅


들이박았다. 조유재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면서 버텼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여튼 간에 장난을 치면
설렁설렁 하는 법이 없었다. 한준은 소리쳤다.

“야! 적당히 해, 이러다 문 부순다.”

“너 얼굴 무서워서 안 돼.”
“내 얼굴이 뭐?”

문틈으로 빼꼼 내다보며 종알거리는 게 얄미워 한준이 문을 주먹으로 쿵 쳤다. 유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느라 숨이 모자란 듯 헐떡이는 틈을 타 한준이 사이에 발을 밀어 넣었다.

“나 맨발이야! 너 밀면 나 발 문에 찡겨. 다쳐. 어?”

“이거 순 자해공갈단 아냐.”

새빨개진 얼굴로 버티던 유재가 결국 조금씩 밀려났다. 문이 확 열리자마자 왈칵 들이닥친 한준이 유재의 몸을
두 팔로 꽉 붙잡았다.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몸이 웃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아, 잠깐만. 잠깐만.”

“개수작 부리지 말고 폰 내놔.”

조유재는 팔을 쭉 뻗어 휴대폰을 사수하며 문 쪽으로 도망쳤다. 한 발이 문밖으로 빠져나가기 직전, 한준이


그를 힘껏 당겨 끌고 들어와 벽에 밀쳤다.

“후우, 하….”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비좁은 욕실에 가득 울렸다. 한준은 마주 헐떡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웃었는지 그의 두 눈은 푹 젖어서 반짝거렸다.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눈매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마주한 얼굴에 웃음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떠한 조짐도 없이, 유재가 고개를 떨어트려 입을 맞췄다. 동시에 도망칠 수 없도록 목뒤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중심을 잃은 한준은 유재의 품으로 떨어졌다. 놀라 벌린 입 안으로 곧바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밤바다에서 부드럽게 주고받았던 입맞춤과는 전혀 다른 키스가 이어졌다. 정적인 온기보다는 세차게 들이닥치던
파도와 더 닮은 키스였다. 강하게 빨아당기는 힘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 뜬 느낌이 뱃속을 간질였다. 한준은
고개를 유재 쪽으로 더 깊이 파묻으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순식간에 흥분해 씨근덕거리는 숨이 귓가를 덥혔다.

목덜미에 머무르던 손이 티셔츠 안을 파고들어 등 언저리를 쓸었다. 언제 이렇게 흥분해 있었는지, 조유재는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으며 낮은 신음으로 가슴을 울렸다. 마구 누르는 힘에 밀려 기울어지는 상체를, 유재가
한 팔로 꽉 잡아당겼다.

“으읏.”

몸이 틈 없이 붙는 순간 다리 사이가 눌렸다. 초여름 바닷가에서 놀 때 입은 바지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얇은 면 위로 흥분한 성기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조유재는 발기한 상태였다. 깨닫자마자 속옷 안이 뜨거워졌다.

유재의 것에 짓눌린 채, 제 성기 역시 무섭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흥분이 압박에 못


이겨 터져 흐르기 시작했다. 살짝 젖은 속옷이 살갗에 착 달라붙어 더웠다. 신음을 깨물며 눈을 들자 주의
깊게 내려다보는 얼굴과 맞닥뜨렸다.

이마를 맞댄 유재가 숨을 길게 뱉었다. 그는 한껏 상기된 채, 거칠게 밀어붙였던 방금의 키스를 잊은 듯


신중히 속삭였다.

“자위할 때 했던 상상, 얘기해 봐.”

“…….”

“그대로 보여 줄게.”

한준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폭죽을 터트린 것까진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지쳐 돌아와 그대로 잠든 채 허겁지겁 빠져든 엉큼한 꿈이라 해도 놀랍지 않았다. 흥분에 의식이 몽롱했다.
매번 혼자 할 때마다 그렸던,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위하는 조유재의 모습이 뇌리를 지배했다.

“응?”

유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의 숨이 떨렸다. 맞닿은 가슴이 울렸다. 대답을 기다리며, 유재는 고개를 비틀어
목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게 피부를 빨아 당기는 입술이 기분 좋았다. 한준은 결국 그의 귓가에 털어놓고야
말았다.

“네가… 다 벗고 혼자 하는 거.”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한 적 없는 말이었다. 유재가 빤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유재가 손을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한준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자꾸만 엉망으로 흩어지는 숨을 주워


삼켰다. 침대 곁에 선 유재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렸다. 걸치고 있던 티셔츠가 손길 한
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러 번 봤던 몸이었음에도 입안이 말랐다. 조유재가 호흡할 때마다, 그가 팔을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구석구석 스민 잔근육이 섬세하게 움직이는 모양이 보였다. 유재가 바지 밴드에 손가락을 걸었다. 아찔한
기분에 한준은 양 무릎을 세워 발끝에 힘을 주었다.

유재는 주저하지 않고 바지를 벗었다. 동시에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가 튀어나와 배를 두드렸다. 한준은 숨을
멈췄다.

완전하게 발기한 성기는 거대했다. 크고, 길고, 굵었으며 불그스름했다. 검붉은 핏줄이 보일 정도로 곧게
일어선 기둥 아래, 얼마나 흥분했는지 음낭까지 빳빳해져 있었다.

유재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적극적으로 굴기에 태연할 줄 알았는데, 그는 가슴팍까지 새빨갛게 상기된 채였다.
불안정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게 조유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함께 놀고먹고 떠들었던 친구.
그가 여실한 흥분을 드러낸 상태로 제 앞에 서 있었다.

유재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갑자기 배낭을 뒤졌다. 그가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내어 침대로 던졌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던지고 받았던 터라 한준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냈다. 손안에 착 들어온 상자를 살펴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콘돔이었다. 이어 놀란 그의 앞에 젤 한 통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드로즈를 고르면서도 차마 살 생각을 않았던 것들이었다. 한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너 이거 준비해 온 거야? 아예 이럴 작정으로?”

“닥쳐.”

유재가 오만상을 쓰고 대꾸했다. 귀까지 뻘겋게 붉힌 그가 성큼 다가와 한준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쑥스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젤을 손에 쭉 짜낸 유재가 바로 제 성기를 감싸 잡았다.


미끌미끌하게 젖어 드는 자지 기둥을 본 한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후우….”

한 번 길게 기둥을 손으로 훑은 유재가 크게 숨을 골랐다. 그는 커다란 손을 벌려 음낭부터 주물러 올라가


귀두 끄트머리까지 만졌다. 천천히 위아래를 오가는 동안 숨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윽, 읏….”

누워서 올려다본 광경은 한준이 수없이 그려 보았던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유재의


손안에서 큼직한 성기가 꿈틀거리며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그의 상체 근육이 실룩거렸다.
충동에 못 이겨 손끝으로 그의 배를 더듬자 유재가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벅찼다. 단지 유재가 자위하는 모습에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상상에서조차 유재와 기어코 눈을 맞추고
말았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 절정을 맞으면서도,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유재가 자신을 발견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계속 상상했다. 수도 없이 그의 눈길을 상상하면서 흥분했다.

눈이 얕게 젖어 드는 순간 유재가 불쑥 손을 뻗었다. 그는 젤이 묻지 않은 손을 그대로 한준의 입에 쑤셔


넣었다. 검지와 중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자 한준은 고분고분 그것을 빨았다. 침에 푹 젖어 삽입이
수월해지자 유재는 손가락으로 혀 가운데를 세게 눌러 비비기 시작했다.

“우읍.”

“여기 부드럽네.”

허리를 굽혀 엎드린 유재가 숨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입가로 침이 새서 흘렀지만 아랑곳 않고 빨았다.


입술을 모아 손가락을 물자 유재가 신음했다. 그가 내는 신음에 귀를 곤두세운 채 혀로 손가락을 핥고 있을
때였다.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눈을 뜬 한준은 자신의 가슴 바로 위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는 조유재를 발견했다. 그가 움켜쥔 커다란


자지가 얼굴 바로 위에 있었다. 유재는 입을 쑤시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한 바퀴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그대로 저 성기가 버겁게 입 안으로 틀어박힐 것만 같았다. 한준은 입가에 힘을 빼고는 더운 숨으로 입술을
녹였다. 그러나 유재는 꿈쩍 않고 그 자세 그대로 한참 한준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에서 눈으로 느릿느릿 시선이 올라왔다. 유재는 입을 꾹 문 채 물러섰다.

젤 때문인가? 먹으면 안 되니까. 의아하여 살펴보던 중, 유재가 명령했다.

“벗어.”

아직 혼자만 옷을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한준은 티를 벗은 다음 바지도 내렸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성기가 근질근질했다. 잠시 마주 보고 있던 차에, 유재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안 해 본 걸 잔뜩 해 보고 싶다더니, 말이랑 다르게 적극적이지 못한데.”

말로는 도발하고 있었지만 유재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한 발짝 다가갔다가 물러서서 탐색하고, 또 한


발짝 다가갔다가 탐색하길 반복했다.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렇겠지. 어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걸지도.

괜찮다. 뭐든 함께 해 보면서 좋은 지점을 찾아가면 된다. 한준은 콘돔을 하나 뜯어 들고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유재의 다리 사이, 그 비좁은 공간에 꿇어 앉았다.

“뭐 하는 거야?”

“입으로 해 볼게. 처음이긴 한데…… 웬만하면 기분 좋지 않겠냐?”

한준은 괜스레 장난기를 섞어 대답하며 콘돔을 성기 끝에 가져갔다. 고무가 두꺼운 성기에 들러붙어 피부를
감쌌다. 한 번에 쑥 씌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콘돔을 쓰면 자극이 둔하겠지? 입을 세게 모아서 빨아야겠다. 한준은 기둥을 잡고 천천히, 조금씩 성기를
삼켰다. 지름이 꽤 넓어 전부 받아 물려고 하니 턱이 아팠다. 밀어 넣어도 넣어도 남아, 마침내 귀두가
목구멍을 꾸욱 누를 지경이 되었다.

숨쉬기가 버거웠지만 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입에는 남은 공간이 하나도 없어 코로 헐떡헐떡 밭은 숨을


쉬어야만 했다. 그는 유재의 허벅지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어 지지한 채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바짝 힘주어 조이고 혀를 써서 압력을 가했다. 유재가 손가락을 비비며 부드럽다고 했던 곳으로 그의 자지를
감싸 빨았다.
“으음… 읍, 후으.”

숨이 차고 턱이 아팠지만 입에 물고 있는 게 조유재의 성기라고 생각하니 만지지도 않은 중심에 뻐근한 열이


몰렸다. 한준은 눈꺼풀을 들어 위를 보았다. 유재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주름이 지도록 이불을
끌어다가 움켜쥔 손이 보였다. 입가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힘껏 빨았다. 턱이 다 젖어 질퍽질퍽 소리가 났다.

“후우으, 읍, 움.”

고개를 왼쪽으로 비틀어 각도를 바꿔가며 머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유재가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제
자지로 불룩 튀어나온 볼을 상냥하게 쓰다듬고는, 젖은 입가를 닦아 주는가 싶더니 천천히 목 뒤를 감쌌다.

처음엔 너무 미미한 힘이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끝에 한층 단호한 힘이 맺히고 나서야 한준은 유재가 제
머리를 당기고 있음을 알았다. 땀으로 젖은 손가락이 귓가와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준은 이끄는
대로 더 깊이, 더는 숨을 쉬기 어려울 때까지 성기를 제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모자랐다. 크기가 너무 커서 배에 숨이 닿도록 쑤셔 넣기가 힘들었다. 더 움직이지 못한 채 헐떡이는


동안 턱밑으로 질질 흐른 침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유재는 여전히 목뒤를 감싼 채였다. 버티며 코로 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가슴으로 쑥 미끄러진 손이 유두를 콱 비틀었다.

움찔 놀라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래가 뜨거웠다. 다급히 밑을 더듬어 아직 사정하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나


단번에 절정에 도달했다는 착각이 일 정도의 자극이었다. 유재는 가슴을 놓아주지 않고 젖꼭지를 빙글빙글 돌려
세웠다.

“여기 좋아? 만지자마자 질퍽질퍽 난리가 났는데.”

“으으, 흐…….”

질퍽거리는 곳은 입이었다. 단번에 힘이 풀려 헐거워진 입가로 맑은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매번 자위를 할


때마다 가슴을 혼자 만졌던 터라 자극에 익숙할 거라 생각했는데, 남의 손이 닿을 때의 느낌은 스스로 만질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유재가 손톱을 세워 바짝 선 유두를 툭툭 올려 쳤다. 근질거리는 자극에 익숙해지려던 찰나, 반대쪽 젖꼭지도
잡혔다.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한준은 목 끝으로 힘겹게 침을 삼키며 날것의 흥분을 견뎠다.

유재의 단단하고 거친 손. 농구공을 만지고 어깨를 붙들어 안던 손이 양 가슴을 잡고 좌우로 비벼대고 있었다.
예민한 피부가 납작하게 눌려 비틀릴 때마다 성기가 더욱더 곧게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씨발.”

욕을 짓씹는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손이 이번에는 뺨을 쓰다듬었다. 그 온기는 금세 다시 목뒤로 옮겨 갔다.

목을 감싸고만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굵은 귀두가 목구멍을 짓누르고 들어왔다. 구역질이 치밀어


한준은 왈칵 성기를 뱉어 냈다.

숨이 모자랐다. 한준은 젖은 눈을 비벼 닦고는 헐떡였다. 숨이 잦아들 때까지 정신없이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허리를 숙여 다가온 유재가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는 조금 풀이 죽은 듯,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상상 속에서 난 어땠어?”

조유재가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왜 지금껏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 상상했던 것,


원했던 것을 궁금해하며 멈춰 서는 걸까? 그것보다 중요한 건 ‘현재 우리가 뭘 하고 싶은가’인데. 한준은
체액으로 젖은 얼굴을 유재의 허벅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거칠었어.”

입술이 부풀었고 가슴은 얼얼했다. 지금 당장의 감상을 전하려던 것뿐인데 공교롭게도 상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상상 속 조유재는 언제나 다소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한준은 이불을 꽉 움켜잡고 있는 유재의 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질 때까지.

다시 입을 열 준비를 하고 있던 한준은 그대로 붙들려 일어섰다. 당황할 틈도 없이, 유재는 한준을 침대에
눕히고 올라타 다짜고짜 하체를 맞댔다.

“흐윽.”

맨 성기끼리 닿자 한준이 흠칫 허리를 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배 위로 유재가 젤을 한바닥 짜냈다. 그러고는
몸을 겹쳐 미친놈처럼 마구 아래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마찰이 이어지며 가뜩이나 뜨거운 곳에 점점 열이 고였다. 녹아내릴 것 같은 열에 시달리면서도 성기는 점차


딱딱해져 갔다. 귀두 모양, 핏줄이 선 기둥, 조유재의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석구석을 알 수 있었다.
한준은 정신을 놓고 다리를 벌린 채 신음했다. 조금이라도 더 깊이 닿아, 더 강렬한 압력에 눌려 사정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벌리고 있던 다리로 유재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유재가 눈을 들었다.

번질거리는 눈동자가 내리꽂혔다. 심장이 무겁게 뛰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을 뒤로 빼서 제


허리에 감긴 다리를 더듬어 본 유재가 미소 지었다. 바로 다음 순간, 무자비하게 문질러지던 성기가 보다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졌다.

엉덩이골을 타고 미끄러져 꽉 오그라든 곳에 성기가 눌리는 순간,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상상에 몸이


뜨거워졌다. 뒤가 뚫리는 감각보다는 제 몸 안을 파고들 것이 조유재의 성기일 것에 온몸의 감각이 달아올랐다.

더웠다. 한준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유재는 여전히, 눈도 한번 깜박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맞춘 상태로 한준의 다리를 젖혔다. 엉덩이가 들리자 회음부와 그 아래 구멍까지 훤히 드러났다. 바로 그
위에 성기 기둥을 꼭 눌러 맞춘 채, 유재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흣.”

이상한 느낌이 반복되며 성감이 쌓였다. 발기한 성기가 배 위에서 꿈틀거렸다. 한 번도 뭔가 넣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뒷구멍 위로 미끌미끌한 것이 계속 문질러졌다. 열감에 들떠, 한준은 두 손으로 제 무릎 뒤를
잡아 젖혔다. 허리를 움직이며 가만히 탐색하던 유재가 그곳에 손을 댄 건 그때였다.

꿀럭 젤을 짜내는 소리와 함께 뒤에 차가운 감각이 닿았다. 몸을 움츠릴 새도 없이 유재가 뜨거운 손을 비벼


젤을 녹였다. 구멍 위만 집요하게 문지르던 손가락이 안을 눌렀다. 낯선 이물감에 한준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유재의 손가락이 제 엉덩이 사이로 차츰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윽!”

손가락 하나가 끝까지 푹 들어갔다. 유재는 남은 손으로 콘돔을 쭉 밀어 벗어 버리고는 자위하기 시작했다.
구멍을 쑤시는 제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유재가 움찔 미간을 찡그렸다. 이어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번엔 아팠다. 한준은 힘을 빼려 노력하며


밭은 숨을 쉬었다. 안에 넣고 흔드는 손길이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 유재야, 유재야… 읏, 아!”

“하아…….”

한동안 그 짓을 해 댄 끝에, 구멍 속으로 손가락이 하나 더 비집고 들어왔다. 가장자리가 느슨해질 때까지


흔들어 넓혔던 구멍은 어렵지 않게 손가락을 받아 냈다. 한준은 머리를 들어 제 다리 사이를 쑤시는 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빼고, 나머지 손가락이 모두 틀어박힌 채 쩔걱쩔걱 흔들리고 있었다.

유재가 잘근잘근 씹어 물던 입술을 놓쳤다. 그는 새빨개진 입을 벌려 헐떡였다. 관자놀이부터 가슴까지 땀으로


푹 젖은 채였다.

“더 못 참겠어.”
그가 잇새로 말했다.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완전히 정욕에 흐트러진 얼굴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한준은
두 손으로 볼기를 벌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린 엉덩이를 노려보던 유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런 짓을 허락하는 건 앞으로도 평생 나뿐이어야 해.”

답할 틈도 없이 다리가 벌어졌다. 유재는 콘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무것도 덧쓰지 않은 자지를 구멍에


맞췄다. 한준은 발가락을 힘껏 오므렸다.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갔으니 덜 아플 것이라 생각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두꺼운 자지가 주름을 벌리기 시작하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준은 안간힘을 써서 신음을 참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튀어 나갈 것이었다. 가슴에
힘을 주고 몸이 흔들리지 않게 버텼다. 팽팽하게 벌어져 갈라지는 듯한 통증 사이로 요동치는 성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윽!”

악다문 잇새로 기어이 비명이 샜다. 철퍽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까슬한 음모가 느껴졌다. 입에 넣기 버거웠던
성기가 기어이 그 좁디좁은 구멍을 열고 커다란 몸집을 전부 쑤셔 넣은 것이다. 유재가 몸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하는구나. 친구의 자지가 몸속에 쑤셔 박히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날카로운 감각은 상상도
꿈도 아니었다. 아파서 땀을 줄줄 흘리는 중에도 아래에서는 방대한 양의 젤 때문에 질퍽질퍽한 소리가 났다.

보고 싶었다. 제 안에 들이박는 조유재를, 낯선 신음을 뱉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를, 금방이라도


찢길 것 같지만 아슬아슬하게 자지를 받아내고 있는 자신의 다리 사이도.

한준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들어 아래를 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유재는 더욱 흥분해 허리를 흔들었다. 골반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아 눌러 놓고 짐승처럼 처박아 대기 시작했다. 한준은 다시 고꾸라져 흔들렸다. 박을
때마다 이불이 주욱주욱 밀려 올라가 침대 머리까지 도달했다.

“보고 싶어? 어떻게 박히고 있는지.”

확 엎드린 유재가 입술 위로 속삭였다. 끄덕이기 무섭게 다리가 어깨까지 짓눌리면서 엉덩이가 들렸다. 한준이
눈을 들었을 때, 시야 가득 그들의 맞닿은 하반신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고 있는 성기가 보였다.

“욱, 으, 으으, 아! 학, 하.”

“후읏, 하, 읏.”

묵직하게 꽂히는 감각에 시각적인 충격이 더해지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유재의 커다란 성기가 푹푹 드나들며
내벽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 열은 더해지고 더해지기만 해서 안쪽이 다 녹아 흐무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내벽을 단단한 자지가 무자비하게 쑤시고 들어왔다가, 연약한 살이 주르륵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게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구멍에 힘을 주고 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최대치로 벌어진 채 범해지는 게
고작이었다.

“흐윽, 아.”

조유재의 신음 소리를 따라 한준은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껏 풀린 눈으로 그는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주저하고, 탐색하고, 살피는 빛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한준은 유재의 팔을 더듬어
매달렸다.

정신이 나간 채로도 조유재는 손을 맞잡아 주었다. 갑자기 성기가 쑥 빠져나가는 감각에 구멍을 바짝
오므리자마자 몸이 뒤집혔다. 엉덩이가 강제로 들렸다. 한준은 무릎을 세우고 엎드린 채 이불을 세게 쥐어
잡았다. 곧 들이닥칠 충격을 예감하고 있었다.

붙들린 허리가 뒤로 홱 당겨짐과 동시에 자지가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삽입이 수월해지면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하반신이 부딪쳤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한준은 이불을 침과 눈물로 적신 채
손을 내려 자위했다.

“흐, 으, 하, 으윽!”

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조유재의 성기가 다른 각도로 처박히며 뱃속 모든 곳을 샅샅이 녹였다. 난폭하게


뒤가 뚫리면서도 쉬지 않고 자위하자 착실히 성감이 쌓였다. 척추부터 두피까지 근질근질한 열이 퍼졌다.
이토록 난잡하게 제 뒤를 쑤시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조유재임을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한준아.”

목뒤가 뜨거웠다. 조유재의 숨으로. 입술로.

키스로.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조유재가 등 뒤를 뜨겁게 안았다. 그는 한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 덮은 채 올라타,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젖혔다. 드러난 목과 귀를 따라 키스하고, 한준이 움찔 뒤를 조였다가 풀 때까지 귓불을 빨았다.
한준은 신음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아닌, 흥분과 기쁨에 들뜬 신음을 마음껏 들려주었다.

“아, 응, 크읏.”

유두가 꼬집히자 한준은 흠칫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이미 깊숙하게 박혀 있던 성기가 더욱 깊은 곳을 찔렀다.


유재는 집요하게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뾰족하게 서도록 당겨 놓고, 손톱으로 긁어 눌렀다가, 유륜을 따라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간질인 다음, 방심하고 있을 때 또다시 유두를 잡아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세게 비틀어
눌렀다. 찌릿한 느낌에 스스로 하체를 흔들기 시작하자 뺨에 닿아 오던 숨이 거칠어졌다.

유재가 무릎을 세워 앉았다. 한준은 그를 따라 엉덩이를 들고 엎드렸다. 공간이 생기자 유재는 바로 손을 쑤셔


넣어 한준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그러곤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아! 흐악, 아아, 유, 유재야, 윽!”

정액을 가득 담고 부풀어 있던 성기가 마구 쥐어짜였다. 한준은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을 더듬었다.


습관적으로 찾은 유두는 조유재가 가지고 놀아 동그랗고 단단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작은 돌기를 살살
당기는 동안 뒤로는 자지가 푹푹 처박혔다. 사정감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쌀 것처럼 속이 들떴다. 배뇨감과
닮은 감각에 바들바들 떨고 있을 때, 짝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화끈거리는 열이 번졌다.

엉덩이를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유재가 귀에 입을 맞췄다. 그가 귀두를 엄지로 느긋하게 눌러
비벼대자 다시금 이성이 흐려졌다. 임박한 절정을 위해 다리를 더 넓게 벌리자마자 한 번 더 손이 날아왔다.

“아!”

매서운 손길에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뜨겁고 아픈 감각이 사정감과 섞이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한준은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던 끝에 구멍을 꽉 조였다. 유재가 마지막으로 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훑어 올린 순간,
탁한 정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한준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엎어져 누운 채 그는 남은 액을 마저 줄줄 싸 냈다. 한번 액이 터져 나오자마자


성기에서 손을 뗀 유재가 골반을 움켜잡고 마지막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것이 구멍을 뚫고 들어올
때마다 덜렁덜렁 흔들리는 성기에서 정액이 튀었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쓰라릴 지경이었다. 한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잔뜩 배어 나와 콧대를 타고 흘렀다.

“읏, 야.”

“하아…….”

“사랑한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 주고 싶었던 말. 괜찮은 타이밍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전부 놓치고 결국은 이렇게


엉망이 되고 나서야 떠올랐다. 그들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뱉고 나니 무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성기가 내벽을 흉흉하게 짓누르며 고동치고 있었다. 한준은 이불에
이마를 박고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쪽팔려져서 베개까지 끌어다가 머리에 덮었다.

조유재가 베개를 빼앗아 내던졌다. 그의 힘줄 선 팔이 머리 옆을 짚었다. 무게가 앞으로 실리며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목뒤에 숨결이 닿았다. 나도. 입술이 닿기 전, 그가 민감해진 살갗 위에 뜨겁게 속삭였다.

* * *

“이것도 하나 주세요.”

이것저것 반찬을 고른 한준이 마지막으로 미역 줄기를 한 팩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반찬 가게 아주머니는


미역 줄기에 명란젓, 멸치볶음까지 얹어 주며 한준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많이 먹어. 다 먹고 또 와, 아줌마가 보고 싶으니까. 아유, 그새 얼굴빛이 더 좋아졌네.”

“공짜로 주지 마세요. 저도 엄마 가게에서 일 도운 적 있는데, 엄마가 이렇게 다 퍼주면 속 터졌을 거예요.”

한준은 단호하게 말한 다음 명란젓과 멸치볶음 가격까지 계산해서 이체해 버렸다. 아예 금액을 입력해 이체를
해 버리니 마다할 수조차 없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가 먹으려고 사 두었다는 자두를 세
개 넣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다 먹고 또 올게요.”

한준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며 웃었다. 거저 주는 반찬은 마다해도, 아주머니가 고마운 마음에 챙겨 주는


자두 세 개 정도는 넙죽 챙기며 고마워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싹싹하고 넉살 좋고 융통성까지 겸비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시장에서 어머니 일손을 도우던 놈이라 아주 제 세상이었다. 유재는 반찬 가게
아주머니를 만나고 한층 낯빛이 밝아진 한준을 보곤 웃었다.

시장에 온 건 오늘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다. 매일 끼니는 때워야 하고 요리는 하기 싫고, 마침 외식도


지겹던 참이었다. 밥만 지어다가 반찬이랑 소박하게 차려 먹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좋았다. 방학인데 둘 다
누굴 만나 돌아다니지 않으니, 반찬도 먹고 라면도 먹고 가끔 외식도 하면서 거의 매일 식사를 함께했다.

“가자.”

서한준은 반찬을 다 사고도 신이 나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걷는 동안 쉬지 않고 이리저리 시장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어머니가 생각나서 반찬을 사러 온 게 아니었다. 이 녀석은 그냥 시장을 좋아했다. 완전히 어릴 때부터
시장 바닥에서 자랐을 그를 생각하면 귀여웠다.

한준이 팔을 살짝 당기며 물었다.

“너 식혜 먹을래?”

“식혜 말고 아이스크림 먹자. 더워.”

대답하는 동안에도 유재는 슬쩍 팔짱을 낀 한준의 손을 신경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팔꿈치 바깥쪽 관절을
꼬집어 붙들고 있더니, 어느새 팔이 접히는 안쪽까지 살살 손가락을 감아 놓았다. 유재는 괜히 쑥스러워
딴청을 피웠다. 어깨동무를 하고 업고 뛰는 등 온갖 난리를 다 치며 놀았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다닌 적은 없었다.

잠자리도 해 놓고 이러는 게 우스울 수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땐 정신이 나가서 별말 별짓을 다


해도 싸고 나면 누구나 그렇듯 바로 이성을 되찾는 게 사람인 법이다. 게다가 서한준은 그대로였다. 그의
말대로 안 해 본 짓을 하면서도, 일상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그들만의 한결같은 모습을 띠고 있어 문득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메로나.”

한준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팔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가 장난을 쳤다. 힐끔 옆얼굴을 곁눈질로 보자 실룩거리는
입이 보였다. 무더운 날, 열이 가득 맺힌 얼굴 위 미지근하게 녹은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나아가 더한
짓도.

한 번 하고 돌아 버린 모양이지. 유재는 억지로 한준에게서 눈을 돌리며 자조했다.

항상 그 생각뿐인 또래 놈들에 비해 자신은 성욕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혼자 할 때 속으로


그리는 상상만 조금 거칠 뿐, 제때 잘 빼 주고 나면 평소엔 딱히 음란한 생각이 안 났다. 애인을 사귀고
싶지도 않았다. 비로소 성인이 되어서 자취방까지 얻었음에도, 캠퍼스 곳곳에서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는
동기들을 심드렁하게 봤었다.

그랬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시선이 느껴졌다. 저편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던 한 남자가 대놓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려주던 유재는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성인 남자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게 놀라웠던 모양이었다.

남자의 기색을 눈치챘을 텐데도 서한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아예 겹쳐 잡은 손으로 이쪽저쪽을 가리켜


가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당황한 빛이라곤 조금도 없는 태도가 그다워 기꺼웠다.

계산을 해야 될 때가 오고 나서야 한준은 손을 놓았다. 유재는 주머니에 덜렁 들어 있던 카드를 꺼내 쑥


꽂았다. 한준은 눈썹 언저리를 긁적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 주는 거냐?”

“어.”

한여름이라 그런지 땀으로 축축한 얼굴이 붉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울 게 분명한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한준은 땀을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재촉했다.

“빨리 가서 에어컨 틀자.”

“우리 이제 자립해서 에어컨 있는 자취방에도 살고, 좋지 않냐?”

“맞아. 여름 때마다 그런 말 했었는데, 우리.”

기억났는지 한준이 웃었다. 반드시 에어컨이 있는 원룸에 살 거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방이
좁으면 좁을수록 금방 냉방이 될 거라는 말에 떠들썩하게 맞장구를 쳤었다.

유재는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자마자 한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얽어 잡았다. 남자가 쳐다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아 해.”

가게 입구 앞에 선 한준이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겨 내밀었다. 유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물었다. 그들은 나란히


땡볕을 걸었다.

점심을 같이 먹은 후 저녁 반찬까지 함께 사러 나와서 이렇게 간식도 먹고, 이따가 해가 지면 농구도 할 거고


별일 없다면 자고 가겠지. 온종일 같이 있으니 좋았다. 방학이라 집에만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단둘이
지내는 게 좋았다. 마치 갈 곳이라곤 놀이터밖에 없었던 옛날처럼.
“야, 있잖아.”

앞을 보고 걷던 한준이 불쑥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던 끝에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이런 거 자제하자.”

“뭘. 손잡는 거?”

“응. 난 상관없는데 넌 친구도 많고,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잖아.”

“내 친구가 네 친구 아냐? 난 상관없어. 오래 볼 사이도 아니고.”

유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멀어질 사람은 멀어질 것이고 남을 사람은 남을 것이다. 친구야 언제든 새로
사귀면 되니 괜찮았지만 서한준은 동의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예상대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오래 볼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오래 볼 사이가 될 수 있는 좋은 친구지만 연애는 터놓고 말할 수 없다?”

웃으며 반박하자 한준이 입을 다물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하면서 심각하게 허공을 노려보는 게 웃겼다.
새삼 둘이서만 공유하는, 남들에겐 털어놓기 어려운 사실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유재가
꽉 맞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마음이 상한 척 장난을 걸었다.

“네 말이 맞아. 밖에선 자제하자.”

“야!”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던져 놓고 앞장서자 한준이 다다닥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안아 줄 거라


생각해 방심하고 있던 몸이 휘청 흔들렸다. 한 팔로 목을 감아 숨이 막히는 중에 녀석이 들고 있던 반찬
봉지가 투두둑 몸을 때렸다.

“아, 더워, 이 새끼야! 비켜!”

“싫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서한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매달려 업힌 채 어깨에 코를 묻은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귓가에 바짝 닿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숨에서 풍기는 메로나 향이 향긋했다.

꿈 같았던 지난 잠자리가 떠올랐다. 바다를 까맣게 잊은 채 완전히 눈이 뒤집혀 해 버렸던 첫경험. 꼭 껴안고
제 귀에 가득 불어넣던 숨.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점차 이성을 잃으며 난폭하게 차오르던 성감.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던 모든 것과 서한준같지 않았던 서한준.

유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한쪽으로 홱 기울였다. 한준이 비틀거리는 틈에 그의 허리를 한 팔로 세게


안아 일으켜 세웠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한준은 휘청거리다가 결국 똑바로 섰다. 가슴이 맞닿고
어깨가 겹친 거리에서, 유재는 한준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서히 웃음이 멎었다. 한준은 멋쩍게 코를 훌쩍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가자.”

유재는 입에 물고 있던 나무 막대를 빼든 채 걸었다. 그는 앞서 걷는 한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긴 다리 아래로 발목이 드러나 있었다. 허리에 단단히 감긴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다가 손에 닿았던 발목.

유재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집에 도착해 장을 봐 온 것을 풀어놓기도 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 받고 끊을까 했지만 한준이
쳐다보고 있었다. 유재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자 봤어?

어머니는 다짜고짜 물었다. 그녀가 매번 보내는 문자야 아버지의 전화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주식으로
새로이 얼마를 벌었고, 그렇게 거금이 들어왔으니 가족 모임을 조만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 밖이라 답 못했어.”

—아빠가 이번 주말엔 꼭 가족이 다같이 ‘성대한’ 저녁을 먹자고 하더라. 갈수록 심해지는 꼴값 나 혼자 감당
못 하니까 와서 칭찬 좀 해 줘. 네 아버지 그 낙에 사는 거 너도 알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는 멸시가 가득 배어났다. 매일 피시방에만 처박혀 조용히 살던 아버지가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이유를 그녀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유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엄마가 해.”

—나야 맨날 진절머리 날 정도로 해 주지.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인정은 또 다른 거 아니겠니?

“웃기네. 평소엔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잔말 말고 오라면 와. 네가 자기 무시한다고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는 개소리 더는 못 들어 주겠으니까.


미친놈. 애는 나 혼자 키웠나.

번갈아 가면서 염병은 씨발. 짜증이 솟구쳐 휴대폰을 꽉 움켜잡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 유재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났지만 한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화가 누그러졌다.

“어머니?”

한준이 눈썹을 모으고 물었다. 유재는 건성으로 끄덕였다.

“뭐라셔?”

“또 주식 얘기. 많이 벌었나 봐.”

“그래? 그건 그래도 잘된 일이네.”

애써 위로하려고 꺼낸 말에 웃음이 났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웃으니 이상했는지 한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웃냐?”

“그냥. 듣고 한 번도 기분 좋았던 적 없는 소식인데 너라도 잘됐다고 해 주니까 좋아서.”

좋다는 말이 무색하게 목소리는 제 귀에도 맥이 없었다. 유재는 주의를 돌려 찬거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념히 행동하는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날 선 말들에 새삼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다.
자식 교육이니 뭐니 멋대로 떠들어도 상관없었다. 유재의 의식을 사로잡은 건 새로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그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서로를 미워하게 됐을까?

“나 장학금 신청하려고.”

냉장고를 닫고 돌아서자 앞에 선 서한준이 보였다. 한준은 턱짓을 하더니 남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외출복을 입고 눕는 걸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기에, 유재도 옆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그들은 나란히


천장을 보며 대화했다.

“국가 장학금?”

“응. 생활비 지원도 같이 받을까 해.”

“그래. 되면 좋겠다.”

“성적 보니까 막판에 너 때문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한준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성적 그닥인
과목은 나중에 재수강해야겠더라. 겨울 방학 땐 계절학기 들으려고.”

“성적 잘 나왔냐? 봐봐.”

“잠깐만. 보여 줄게.”

한준은 휴대폰으로 캡처해 둔 성적을 보여 주었다. 엄청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은 게 대체로


자신과 비슷했다. 유재는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그래도 경영학개론은 에이쁠 받았어.”

“다음 학기는 잘해야 돼. 시험 어렵지도 않았는데.”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연히 집중 안 될 만했지.”

“나 앞으로 과외를 두 개 더 구하고 배달 일은 이제 안 하려고 하거든?”

장난스레 옆구리를 쿡 찔렀으나 이어지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돌아보자 서한준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어 신경이 곤두섰다. 유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자전거는?”

“자전거야 뭐 돌아다닐 때 타도 되고. 풀타임으로 일하는 거 아닌 이상 배달보다 과외가 나아. 일단 과외


구인 사이트 몇 개에 글은 올려뒀어.”

“…….”

“갑자기 이런 얘길 왜 하냐면.”

한준은 천장을 쳐다보며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말을 고르는 사이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네가 앞으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있을 때마다 나 신경 쓸 거 알아서 미리 말하는 거야.


이번 방학 때 알바도 새로 더 구하고 장학금이랑 생활비 신청도 하면 아마 하반기쯤엔 사정 더 나아질 거
같아.”

“지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갑자기 돈 나갈 일이 생겼다든지.”

“응? 아니?”

“정색하고 말해서 놀랐잖아, 짜샤!”

유재가 발을 퍽 걷어차자 한준이 발길질을 피해 굴렀다. 침대에서 떨어진 한준이 다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와
누웠다. 도리어 깜짝 놀란 듯한 낯짝에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 난 줄 알았다고.”

“그게 아니라! 넌 사람 말을 왜 마음대로 곡해하냐?”


한준은 입을 꾹 다물더니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겨울에 사정 좀 나아지면… 데이트도 자주 하고 맛있는 것도 더 많이 먹으러 다니자고. 2 학년 되면 돈


모아서 이곳저곳 여행도 많이 가자.”

찡그렸던 미간에서 순간 힘이 탁 풀렸다. 유재는 팔베개를 벤 채 옆으로 누워 한준을 보았다.

쉴 새 없이 계산을 하며 빠듯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서한준은 자신을 배제하지 않았다. 서한준의 계획엔 항상
그들이 함께였다.

빤히 쳐다보는 사이 한준의 뺨에 점점 색이 들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방학인데 나 때문에 너까지 너무 집에만 있는 거 같아서, 미안해서 한 소리야. 혹시 다른 일정 생기면—.”

“우리 방금 집에 들어오지 않았냐?”

“못 알아들은 척하네.”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한준이 시큰둥하게 미간을 모았다. 유재는 그의 얼굴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늘을
드리웠다.

“모르겠는데?”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준은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지금에 만족했다. 서한준의 일과가 자신의
일과였다. 그가 털어놓는 모든 시답잖은 이야기는 전부 제 귀에 들어왔다.

한준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벌어졌다. 유재는 그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한참을 더운 날씨에 시달린
피부는 말랑말랑하고 뜨거웠다. 더 깊이 숨을 겹치며, 유재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현재를 공유하며 이따금씩 과거를 추억했고 미래를 기약했다.

이대로 평생 지낼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9.

유재는 밝은 고층 아파트를 심드렁하게 올려다보았다. 간만에 온 집이다. 환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탁 트인


하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놀이터. 별반 다른 점이 없었는데도 한준과 어울려 놀던 아파트
단지가 제집보다 더 집같이 느껴진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유재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한준이 ‘


화이팅!’을 외치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 놓았다. 그는 과외를 하러 가는 중이다. 떨어져 있을 때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을 서로에게 보고하는 게 좋았다. 언제라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이런 게 연애인가? 유재는 가라앉은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7:32
체할 것 같음ㅋㅋ

한준이

ㅋㅋㅋㅋㅋ조금만 먹어라

오후 3:35

서한준은 빈말로라도 괜찮을 거란 소리를 안 했다. 하긴,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으니. 12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재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기에 이미 상은 차려져 있었다. 유재는


이미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좀 막혔어.”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그제야 식탁에 와 합류했다. 따로 앉아


기다린 모양이었다. 잠시라도 같이 마주 앉아 있기 싫었나? 유재는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빨리 먹고 나가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그때, 아버지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어른이 먼저 수저 들 때까지 기다려야지, 넌 예절 교육이 어떻게 된 거냐?”

유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황당한 소리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참아 보려 했으나 이미
입꼬리는 한껏 올라간 채였다.

“살면서 한 번도 차린 적 없는 밥상 예절을 갑자기?”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밖에 나가 봐라, 너같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또 있나.”

우스웠다. 권위적인 아버지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 갑자기 뭐라도 된 듯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일일드라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사를 그대로 읊고 있는 것 같아 같잖았다. 막 이사를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못 본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 많아졌네.”

유재는 수저를 내려놓고는 미소 지었다. 그냥 닥치고 먹으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는 그만큼 비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신호로, 결국 아버지가 딱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던졌다.

“쟤 저거 봐. 당신이 애 교육을 제대로 했으면 저렇게 말대답을 하겠어? 당신부터 가장을 무시하니까 애가 다
보고 배운 거 아냐?”

“피시방 그만 가고 돈 벌어 오라고 했던 게 무시한 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소릴, 그게 더 당신 우습게


만드는 거야. 알아? 그리고 애는 나 혼자 키워? 입만 열면 자식 교육이 어떻다 저떻다, 야, 너나 잘해!”

“말 다 했어? 당장 이번 달부터 생활비 끊겨 봐야 정신 차리지?”


“그래라? 내가 생활비로 니 밥밖에 더 차려?”

다툼이 이어지자 유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오가는 말들은 수천 번도 더 들어 온 것이었다.


용돈도, 등록금도 필요 없었다. 오피스텔도 빼라면 빼면 된다. 독립을 하고 나서도 이딴 지랄을 참아 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거실 소파 옆에 두었던 가방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와장창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을 쿵, 딛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엎어진 상 옆에서 몸싸움을 시작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매번 뒤집어지게 싸웠어도 몸싸움까지 한 적은 없었는데. 충격으로 굳어 버린 그의 시야에, 멱살을 붙든


어머니를 거칠게 흔드는 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밀리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어깨를 손톱으로 세게
움켜잡았다.

유재는 달려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미끄덩한 음식을 밟아 중심을 다시 잡으려던 찰나 귓가에서 뻑
소리가 났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뺨이 따끔한 열로 화끈거렸다.

“여편네고 자식새끼고 아주,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아버지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노려보는 두 눈은 울분과 증오로 시뻘겋게 충혈된


채였다.

유재는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끝에 가방을 문가에 내려놓았다.

전화 너머로도 전해지던 분노. 거듭할수록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가족 모임. 처음 목격한 광경.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리면 이 지긋지긋한 꼴도 끝이었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옷장 앞에 웅크려 앉은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안에 든 옷을 전부 끄집어내며 옷장


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유재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왜?”

어머니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조용히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 여러 개를 훑어보았다. 자리가 비좁았던 저번 집에서는 키가 작은 냉장고


위에 올려 두었던 것들이었다. 그때는 여러 개의 액자를 한곳에 잔뜩 쌓아 두었던 터라 사진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사진 속 풍경이 하나하나 전부 눈에 들어왔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가득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옷을 입고 다양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
유재는 그중 가장 큰 액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산 정상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찍은 사진이었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 있었는데, 시선 역시 카메라가 아닌 그녀를 향한 채였다.

유재는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

옷장 정리를 하던 어머니가 고개를 빼고 쳐다보았다.

“글쎄. 결혼하자마자 너 가졌으니까 네 나이만큼 됐겠지.”

“결혼 왜 했어?”

그 질문에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유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갑자기 뭐 그런 걸 물어?”

“궁금해서. 그 시대엔 결혼하는 게 당연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어? 혼기가 차서? 아니면 주변에서


강요했어?”

어머니는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다시 몸을 숙여 옷장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은 탓에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정리를 계속하며 이어 말했다.

“네 아빠가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고, 강요는 무슨. 너희 할아버지는 죽어도 안 된다고 반대했었어.”

“…….”

“그렇게 가난한 집에 시집 못 보낸다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는 걸 네 아빠가 거의 몇 달을 찾아와서


설득했지. 정말 행복하게 잘살 거라고, 한 번만 믿어 달라고,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방문 앞에 꿇어앉아
있다가 갔어.”

“엄마는?”

“나 뭐?”

“그렇게 무릎까지 꿇고 매달리는 게 불쌍해서 결혼했어?”

이번에는 제대로 웃음이 터졌다. 짤막한 실소가 아니라, 그녀는 수그린 몸이 크게 들썩일 만큼 웃어 댔다.
옷장 문을 꽉 쥔 어머니가 발간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순간 몽롱하게 흐려진 눈으로 대답했다.

“사랑했지.”

“…….”

“꿇어앉은 게 얼마나 안쓰럽던지. 마음이 찢어져서 매일 밤 울다 잠들 정도로 사랑했어.”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현실과 멀어져 점점 흐릿해졌다. 유재는 다시 사진을 돌아보았다.
사진 속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작 스무 해가 흘렀다.

“여자친구라도 생겼니?”

어머니가 옷가지 몇 개를 내던지며 물었다.

“체했냐?”

머리를 식힐 겸 나간 농구장에는 이미 한준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한준을 보자 신기하게도 바로 기분이


괜찮아졌다. 표정이 제대로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섰을 때,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던졌다.

소화제였다. 유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거의 먹지도 않았어.”

“그렇게 안 좋았어?”

“좋을 때가 있었나.”

유재는 소화제를 바닥에 세워 놓고 일어섰다. 작은 병이 우뚝 일어서 있는 게 귀여웠다. 정확히는 그걸 사


들고 기다리고 있었을 서한준이.

한참 병을 내려다보고 있다보니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액자 속 부모님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각도를 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턱이 확 붙잡혀 고개가 돌아갔다.

“너 여기 왜 이래?”

눈앞에는 사납게 경직된 표정의 서한준이 있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곳은 왼쪽 뺨이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맞고 상처가 남은 모양이었다.

“이젠 너한테 손찌검까지 해?”

한준이 잇새로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의 얼굴을 세심하게 훑는 눈이, 분노로 일그러진 미간과 힘이 들어간
손이, 제 일처럼 분개하는 서한준이 좋았다. 괜찮다고 달래진 못할망정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고 싶었다.
유재는 제 얼굴을 붙든 손을 부드럽게 겹쳐 잡으며 웃었다.

“아파.”

“다음에 또 그러면 신고하겠다고 해.”

“너한테 맞았을 때도 멍들지 않았냐?”

“알았지?”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서한준은 웃지 않았다. 단호하게 힘주어 묻는 말에 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제를 주워 들고, 한준은 잠시 바닥을 쏘아보고 서 있었다. 유재는 속이 단단히 상한 듯 보이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나 배고파.”

“…….”

“떡볶이 먹을래?”

태평하게 묻는 말에 한준이 턱을 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노려보던 그가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눈을 감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입에 따뜻하게 내려앉은 온기를 느꼈다. 짧게 입을 맞춘 후, 한준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가자. 나도 출출하네.”

유재는 앞서 걷는 한준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느린 걸음을 걷는 동안 부글부글 끓던 속이 서서히


차분해졌다. 한준이 우뚝 멈춰서 고갯짓을 했다.

“빨리 와. 좀 있으면 문 닫겠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 느슨해지면서 긴장이 풀렸다. 입가가 미소로 달싹거렸다. 유재는 다리를 쭉
뻗어 단번에 거리를 좁히고는 한준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안았다.

* * *
백 세 인생 시대다. 고령화 시대에 의술까지 발전하며 수명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니 앞으로 대략 여든 해를 더 살아가게 될 것이다.

팔십은 이십의 네 배나 된다. 안일하게 관계를 유지했다간 연달아 네 번 좆되고도 남을 긴 시간이라는 소리다.

시계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드디어 정시가 되었다. 유재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완벽하게 짜 둔
시간표에 맞춰 과목을 하나씩 클릭했다. 일부러 피시방까지 나온 만큼 반드시 수강 신청에 성공해야 했다.

주 4, 전공과 교양을 적절하게 골고루 배치해 서한준과 완벽하게 맞춰 둔 시간표였다. 이번만큼은 한준도
요상한 교양 과목을 골라 모험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아서, 선배들에게 추천받은 과목으로 신중히 골랐다.
훗날 대기업 취업에 흠이 가지 않도록 2 학기에는 성적을 제대로 관리해야 했다.

원하던 과목을 무사히 다 신청한 유재가 두 팔을 쭉 뻗어 허공에 만세를 했다. 과목명과 교수를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자마자 그는 옆에 앉은 한준의 의자를 확 끌어 젖혔다.

“됐어?”

“가만있어 봐, 아직 하는 중이야.”

“아직도 하는 중이면 어떡해?”

서한준은 주먹만 빠르지 의외로 굼뜬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믿을 건 파이트 클럽뿐이다. 유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뒤에 앉은 승민을 불렀다.

“형, 됐어요?”

“됐지. 당연한 걸 묻냐?”

승민이 다리를 꼰 채 거드름을 피웠다. 역시 학교를 오 년째 다니고 있는 사람다운 여유다. 믿고 서한준의


수강 신청을 맡긴 보람이 있었다. 한준은 정신없이 목록을 확인하며 외쳤다.

“저 된 거예요?”

“됐어. 다 담은 거니까 실수로 빼지나 마.”

“아자!”

한준이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았다. 그는 은인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감사합니다!”

유재는 재빨리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한준을 마주 껴안았다. 한준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그대로 안긴 채
어깨 너머로 승민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샴푸 냄새가
풍겼다.

기분이 묘했다. 직접 묻힌 냄새도 아닌데.

그만.

유재는 한준을 놓아 주고는 매무새를 정돈했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다시 한번 다짐을


굳혔다.

그들의 신뢰와 우정은 사귀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다. 서한준과의 관계에서 달라진 건 서로를 성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이 친구이자 애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이용하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애인 사이에 하는 일들을 하되 현재 그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균형을
잘 유지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동한다고 무조건 본능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본능이 강해질수록 이성과는 멀어진다. 너무
자주 하면 관계의 성질이 바뀔 수도 있고, 한준이 질릴 수도 있고, 스스로의 난폭한 충동을 자제하기도 어렵다.
유재는 문득 아버지의 멱살을 잡아 쥐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서한준한테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들의 몸싸움에 이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렇게 싸우고도
바로 화해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제 부모처럼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이십
년 때리다 보면 분명 일상에서도 손이 날아갈 것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단 일주일에 한 번, 애인으로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빈도로 잠자리를 조절하고
자제하면서 균형을 찾을 생각이었다.

한준이 곁눈질을 하는 게 보였지만 유재는 모른 척 승민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형 살이 좀 빠지셨네요.”

“나? 아, 그런가? 유럽 여행을 좀 길게 다녀왔는데 음식이 별로 입에 안 맞았어. 너무 짜더라.”

“유럽 어디요?”

한준이 고개를 들이밀고는 물었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보자 웃음이 났다.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새로운 게 없어질 때쯤에는 유럽 여행을 같이 가도 좋을 것이다.

유럽 여행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있을 때, 승민이 대답했다.

“프랑스.”

“어때요? 건물 멋있어요?”

“어, 뭐. 근데 내가 건축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이지. 사진 보여 줄까?”

승민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찾아 보여 주었다. 프랑스 풍경을 담은 수많은 사진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형 여자친구예요?”

“응. 예쁘지?”

승민이 여자친구 얼굴을 확대하며 벌쭉 웃었다. 한준은 입을 벌렸다가, 유재를 힐끔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재는 사진을 쭉 넘겨 보았다.

“여기서부턴 형 혼자네요.”

“아, 얘는 휴가를 오래 못 써서 중간에 가고 여기 이때부터는 나 혼자 여행했어.”

“얼마나 사귀었어요?”

“우리…… 오 년 좀 안 됐어.”

“진짜요? 엄청 오래됐다.”

한준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감탄했다. 유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 년이 그렇게까지 오래는 아니지 않냐? 백 세 인생인데.”

“뭐?”

인상을 쓰고 되묻는 한준을 뒤로 하고, 유재는 승민을 돌아보았다. 오 년을 사귀었으면서 함께 있는 내내 애인


얘기를 거의 한 적이 없는 게 이상했다.

“형은 여자친구 얘기를 거의 안 하는 거 같아요.”


“아, 그래? 워낙 오래 사귀다 보니까 너무 당연해서 그랬나? 아니면 우리 주말에만 만나거든. 그래서 평일에
너네랑 있을 땐 얘기할 일이 없었나 싶기도?”

주말에만? 주말 부부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대학생이 애인을 주말에만 만난다니. 유재는 콕 집어
물었다.

“주말에만요?”

“어.”

“여자친구 서울에 안 살아요?”

“서울에 살아. 근데 회사원이라 평일에 너무 피곤해하더라고. 내가 회사 앞까지 갈 때도 있는데, 걔가 야근할


때도 많고 그래서 거의 주말에만 봐.”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지. 그래도 뭐 어떡해. 대기업 야근이 장난 없어. 만나기로 한 날에 갑자기 야근하는 경우도 많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유재가 휴대폰을 돌려주자 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네 이제 뭐 할 거냐? 난 체육관 갈 건데.”

“이제 점심 먹어야죠. 형은 드셨어요?”

“난 먹긴 했는데, 형이 밥 사 줄까?”

한준이 끼어들어 고개를 저었다.

“형 점심 먹었는데 뭘 또 가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그래, 그럼. 나 간다?”

“들어가세요. 수강신청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니타임!”

승민이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를 보내고 나서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복잡한 심정으로 인터넷 창을 쳐다보고 있을 때, 한준이 발을 톡 걷어찼다.

“야. 너네 집 갈까?”

“우리 집? 반찬 사 놓은 거 다 먹었잖아.”

“잠깐 들렀다가…… 점심은 밖에서 먹으면 되지.”

중간에 잠시 말을 멈추고, 한준은 입술을 핥았다. 그가 곧잘 하는 행동에서 의도가 읽혔다. 착각이 아니었다.
서한준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잠깐 집에 들르면…… 방금 전에 맡았던 샴푸 향이 떠오르자 가슴이 뛰었다. 동그란 귀 가장자리를 따라


느릿느릿 시선을 굴리던 유재가 허리를 곧추 펴고 앉았다.

균형 유지. 그는 속으로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 배가 너무 고픈데. 일단 근처에서 밥부터 먹자.”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하자 한준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는 머쓱했는지 코를 찡그렸다.


“그래.”

그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걷는 동안 유재는 ‘야근 없는 대기업’을 검색했다.

* * *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배가 고파서

한준 서한준 hanjun 은 보쌈 조아함

조유재는 필기를 하겠답시고 앞에 둔 태블릿 PC 에 펜으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잔뜩 휘갈겨 쓰고 있었다.


한창 수업에 집중하고 있던 한준은 무시하고 앞을 보았다. 교수는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상대적인 빈곤이 문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진짜 돈이 없어서 불행할까요? 아닙니다. 나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진 것과 내 것을 비교하는 데서 불행이 시작돼요.”

인기 교양 수업 ‘나와의 대화’는 매주 해야 하는 과제의 주제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점만 제외하면 꽤 재밌는


축에 속했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어릴 때부터 막연히 궁금했으나 학업에 치여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것보다 ‘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는


건 위험했다. 그 장본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이.

SO NOJAM DROP 이미진 교수님 BYE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 이번에는 파란색 펜으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한준은


손가락으로 액정 위에 엑스 자를 그렸다. 이번엔 절대로 수업을 쉽게 드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유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한준은 다시 교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상대적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탈감.
욕구불만. 그녀가 나열하는 단어에서 뻗어 나온 무의식의 가지가 익숙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조유재.

놈과의 관계에서 안달이 난 건 나뿐인가?


“이 수업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가 들어야 돼.”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유재가 말했다. 그는 단단히 질린 표정이었다.

“과제도 죄다 무슨, ‘나의 상처’? 내가 유명인도 아닌데 자서전을 써야 되냐?”

투덜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웃음소리다 싶어 돌아보자 신지훈이 서 있었다.

“너네도 이거 듣는구나. 수강 신청 빡셌는데 용케 둘이 같이 신청했네. 한유빈은 광탈했는데.”

방학 내내 유재와 둘이서만 놀다가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한준은 씩 웃으며 물었다.

“집행부는 어때? 다들 잘 지내?”

“잘 지내지. 집행부실 놀러 와.”

“좀 그렇지 않냐? 나갔는데.”

“뭐 어때? 너네 나가고 새로 들어온 애들이 더 많은데. 말 나온 김에 이따가 같이 가자.”

“빈손으로 가도 되나? 음료수 같은 거라도 사갈까?”

“누가 있을 줄 알고? 오버야.”

유재가 불쑥 끼어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바람을 좀 쐬고 오자며 한준을 강의실 밖으로 이끌었다. 대화가 뚝
끊긴 탓에 집행부실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들이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유재의 자리에는 못 보던 쿠키가 놓여 있었다. 한준은 또
한 번 조유재가 누군가의 호감을 샀으리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고등학교 때에도 이런 소소한 선물을 밥
먹듯이 받던 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재는 놀란 기색 없이 바로 쪽지를 펴 보았다. 한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보았다.

이 수업을 듣는 사람이겠지. 개강한 지 얼마 안 됐고 같은 학과생이 많지 않은 교양 수업이라 생판 남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는 사이가 아닌 만큼 연락처만 써 놓았을 줄 알았건만, 쪽지를 읽는 유재의 눈동자가
옆에서 옆으로 다섯 번이나 움직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섯 줄이나 쓸 말이 있나?

쪽지를 낚아채서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별말 아닐 테고, 주변에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쪽지를 멋대로 읽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필기를 읽는 시늉을 하던 중, 유재가 마침내 쪽지를 내려놓았다.

“잘생겼대.”

“잘났다.”

한준은 헛웃음을 뱉으며 대꾸했다. 이런 경우가 워낙 많았던 터라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유재는 같은
학교 아이들에게 쪽지나 과자는 물론이고 한 번은 직접 그린 초상화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그는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종종 저런 실없는 소리를 흘리곤 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 같았다. 잘났다. 좋겠네. 꺼져.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넘기면서도
마음이 조금씩 깎여 나가던 기억이 선연했다.

펜으로 노트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를 따라 그리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조유재가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넌 질투도 안 하냐?”

툭 던진 한마디에 한준은 입을 벙긋거렸다. 질투? 놀란 한준을 본 유재가 피식 웃었다. 그는 쪽지와 쿠키를


가장자리로 밀어 놓은 다음 고개를 돌렸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한준은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펜 끝에 검은 잉크가 동그랗게 고여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매번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터라 솔직한 마음을 말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질투.

자신의 질투를 당연하게 여기는 유재가 새삼 낯설었다. 진짜 사귀는 거구나. 이런 걸로 실감이 나는 게 웃겼다.
괜히 민망해 힐끔 곁눈질을 하자 턱을 괴고 있던 유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번지는 웃음을 보자 또 한 번 교수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우리가


욕구불만을 느끼는 이유는…….

수업이 끝났다. 한준은 한숨을 쉬었다.

재밌는 만큼 피곤한 수업이었다. 앉아서 일방적으로 강의를 들은 게 고작이었지만 지난주 과제였던 ‘우리 집’
이야기를 제출한 후 강의를 들으면 이 모든 과정이 훨씬 사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오늘 강의 내용이 ‘가난이
우리의 무의식에 끼치는 영향’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조유재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써 냈을 ‘우리 집’ 이야기. 대충 지어서


썼을지도 몰랐지만, 무슨 이야기를 썼든 간에 조유재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터였다. 수업 내내 심드렁히 낙서를
하던 유재가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유재는 가방을 챙기는 동안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금방 밥을 먹으러 갈 텐데 답지 않게 왜 저렇게


보채나 했더니, 곧 그가 본심을 슬쩍 섞어 물었다.

“아, 배고프다. 집부실 들를 거야?”

“다음에 가자.”

싫어하는 일을 구태여 하게 둘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혼자 들르기로 하고 일어선 한준은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쿠키를 발견했다. 조유재는 가지고 나갈 생각이 없는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신경 쓰였다. 분명히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선물했을 거고, 지금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보란 듯 버리고
갈 생각인가. 쿠키를 집어 들자 유재가 멈칫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버려.”

“가다가 버리더라도 보는 앞에서 그러지 말고 일단 가져가.”

“이게 질투는커녕 남이 준 걸 아예 먹으라고 밀어 주네.”

“네가 내 초콜릿 버렸을 때 생각 나서 그래.”

한준이 고개를 까딱 기울인 채 대꾸하자 유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새까맣게 잊고 있었을 테지. 한준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쿠키를 내밀었다. 유재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땐 미안해.”

그가 딱 잘라 사과했다. 군더더기 없는 사과에 웃음이 났다. 아픈 기억이었지만 이젠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다.


한준은 유재의 가방에 떡하니 팔을 올린 채 고갯짓을 했다.

“가자.”

그들은 함께 강의실을 나와 걸었다. 조유재는 복도 끝에 있는 쓰레기통에 쿠키를 툭 버리고 한준을 돌아보았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눈빛을 귀여워하다 보니 강의 중에 잠깐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안달이 난
자신과 달리 쿨해 보이는 조유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던 참이었다.

한준은 여름 바다를 생각했다. 습한 공기와 작은 호텔 방.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유재와 차마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짓을 해 댄 밤. 그날 주고받았던 말들. 완전히 이성이 나갔던 우리.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을, 한준은 그날 밤을 생각했다.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몸이 달았다. 그때와 같은 열기를 좇아 몇 차례 더 행위를 했지만 뭔가 달랐다. 조유재는 좀처럼
그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땐 분명히 조유재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어쩌면 첫 경험의 기억이 지나치게 미화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이후로 삽입 섹스는 한 적이 없으니, 삽입
당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자극으로 치환했던 걸지도 모르고. 하는 동안 거의 엎드려 있었으니 표정을 구석구석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유재가 그날 유난히 흥분했던 것 같다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히려 조유재는 별로였을지도 모른다. 원래 남자를 좋아하던 놈도 아니고, 처음이라 기대가 높았을 테니까.
요즘 자취방에 둘만 있기를 은근히 꺼려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아주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딴생각 그만해.”

갑작스럽게 떨어진 한마디에 한준이 흠칫 눈을 들었다. 조유재는 무심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음에도 제 복잡한 속내를 훤히 읽힌 것 같아 민망했다. 한준은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점심 뭐 먹지? 너네 집 갈까?”

“우리 집은 지금 좀 더러워서 그렇고, 밥부터 먹자.”

조유재는 예상대로 대답했다. 집이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말만 두 번째였다.

정말 둘만 있는 자리를 피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준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졌을 때부터.”

유재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코웃음을 쳤지만 얼굴이 대번에 뜨거워졌다. 한준은 재빨리 덧붙여
물었다.

“그럼 우리 집은? 우리 집은 깨끗해.”

“거기 먹을 게 있었나?”

“시켜 먹으면 되잖아.”

“그럼 오래 걸리잖아. 배고파. 그냥 식당으로 바로 가자.”

“…….”
“왜?”

유재가 태연한 낯으로 물었다. 한준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그는 이어 말했다.

“한준아. 우리 이제 사귀기 시작했어.”

“……어?”

“이제 사귄 지 한 달 좀 넘었다고. 연애 초기에 그렇게 서로 자취방 들락거리진 않잖아.”

“그런가?”

“당연하지. 그리고 이렇게 날씨도 좋은 가을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너랑 자취방이 아니라 여의도
공원 걷고 싶어. 그냥 차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도 좋으니까.”

아.

유재의 말에 한준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하고 무안했다. 머릿속이 온통 그런 생각뿐이니 유재가 하는 말을


멋대로 해석해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모두가 놀러 다니느라 바빴던 여름 방학을, 조유재는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2 학기 생활비를 모으는 제 곁에서 지루하게 보냈다. 그가 자취방을 지긋지긋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걸 두고 섹스가 별로라는 둥 같이 있는 걸 피한다는 둥 제멋대로 생각했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며 서로의 집을 매일 오갔던 터라 자취방에 들락거리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때 사치라고 생각했던 연애를 욕심을 내서 시작한 만큼 제대로 잘하고 싶었다. 한준은 어깨를
맞대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점심 맛있는 거 먹고 잔디밭에 앉아서 놀자.”

“그래. 뭐 먹고 싶어? 족발집 갈래?”

“야, 무슨 낮부터 족발이냐. 연애 초기라며?”

족발집은 데이트 분위기로 영 아니지 않나. 분위기 운운하며 거절하고 나자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 헛웃음이
났다. 한창 배고플 땐 낮밤을 안 가리고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전부 먹어 치우곤 했다. 먹다 남은 라면 스프에
밥을 볶아서 먹은 적도 있었고, 가끔 주말에 어머니 일을 돕다 보면 근처 만두 가게 아저씨가 만두를 주고는
했는데, 그걸 굳이 나눠 먹겠다고 문자를 해서 조유재가 달려올 때까지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연애한답시고
까탈스러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노라니 감개무량했다.

마침 지나가던 인문관 근처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강의가 시작될 즈음이라 바삐 걷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맞은편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인파 가운데, 유재는 데이트 메뉴로 어울리는 음식을 하나씩 꼽아 보고 있었다.

“일식. 고등어 조림. 쌀국수. 아, 맞다. 새로 생긴 체인 있는데 거기 1 인 밥상으로 한식 괜찮게 나온다고…


….”

한준이 유재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면서 말이 끊겼다. 몸이 가까이 붙자 허리에 팔을 감아 품으로 바짝


당겼다. 여럿이 무리 지어 성큼성큼 지나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어깨가 스쳤다. 무리가 다 지나가길 기다린
후에야 한준은 허리를 놔 주었다. 찰나의 순간 가까워지면서 가슴이 뛰었지만 무시했다. 자꾸 그런 생각만
하다 보니까 유재의 행동을 멋대로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약지 끝이 꾸욱 눌렸다. 조유재가 세게 힘주어 눌렀다가 놓았다가 다시 눌러 잡고 있었다. 바닥을 노려보며


걷던 그가 불쑥 물었다.

“오늘 며칠이지?”

“오늘 15 일. 왜?”

“……아니야.”
유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배가 많이 고픈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별로 재미 없다고 생각했던 복싱이 달가울 때가 있었다. 유재는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글러브를 벗은 한준이 터벅터벅 정수기를 향해 걷고 있었다. 오늘따라 빡세게 운동하던 서한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절어 있었다. 살갗에 착 들러붙은 티셔츠를 노려보다가, 유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키스도 제대로 안 한 지 이틀이나 지났다. 혀를 넣는 순간 옷을 벗어 버릴 것 같아 자제하다 보니 그랬다.


마침 서한준은 새로 시작한 과외로 주말엔 내내 바빴고, 유재 역시 과외를 하나 더 잡아서 정신이 없었다.
조금 욕구가 쌓였지만 목요일이 코앞이라 참을 만했다.

목요일은 그들이 주 4 로 시간표를 짜면서 함께 쉬려고 빼 놓은 날이자, 모두가 바빠 오히려 식당이나 카페가
한산한 평일이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그 분위기를 타서 잠자리까지 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대략적인 주기를 지키는 건 힘들었지만 나름 보람이 있었다. 저번 주에 한 번, 손으로만 했던 행위에서


서한준은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키스하면서 미친 듯 엉겨 붙다가 마지막에는 제 손안에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박아 넣었다. 자신을 두 팔로 꽉 안고 매달리던 그가 꽤나 절박해 보여서 좋았다.

그때를 회상하던 유재가 미소 지었다. 너무 자주 해서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뜸하게 해서 성행위 자체가 그들


사이에 특별한 이벤트가 되는 편이 좋았다. 오래 사귀어도 잠자리를 생각하면 설렐 수 있도록. 적당한
욕구불만은 오히려 관계에 긴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유재는 횟수를 거듭하며 성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설프게 한준의 머리채도 잡지 않았고, 난데없이
엉덩이도 때리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질 때면 예능에 나오는 섹스리스 부부를 생각하며 인내했다. 배우자의
취향이 감당이 안 돼서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이의 질릴 대로 질린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하는
중에도 종종 흥분이 살짝 가라앉곤 했지만 사정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꾸준히 돈도 모으고, 수업도 열심히 들으면서 과제도 잘하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데이트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함께 밤을 보낸다. 이 모든 과정을 둘이 함께하고 있었다. 학기 중 모은
돈으로 겨울 방학 땐 계절학기도 같이 듣고 국내 여행도 같이 갈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유재는 물을 마시고 있는 한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불거져 나온 날개뼈와 곧은 등이 잘 보였다. 그


등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올라탔던 여름밤이 떠올라 유재는 물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한준이 돌아보곤 미소
지었다.

“나 오늘 과외 토요일로 미뤄졌어. 애가 담임이랑 상담한다고 늦게 끝난대.”

“잘됐네. 솔직히 좋지?”

“어. 수업 듣고 맨날 과외 두 개씩 하려니까 힘들어서. 오늘 그럼 우리 둘 다 쉬겠다.”

한준이 쌕 웃으며 입꼬리를 말았다. 유재는 따라 웃었다.

“맛있는 거 먹자.”

“그래. 우리 저녁 먹고 너네 집에서 영화 볼래? 나 보고 싶은 거 있는데.”


영화? 텔레비전이 없으니 노트북으로 볼 텐데, 분명 같이 눕거나 엎드려서 보겠지. 서한준과 침대에 눕는 순간
끝이다. 유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영화관에 가자.”

“피곤한데. 그냥 집에서 보면 안 돼?”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 재밌는 거 있어. 신지훈이 말해 줬는데, 뭐였더라.”

그렇지 않아도 한준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있었다. 검색을 해 보려던 참에 한준이 불쑥 물었다.

“내가 네 자취방 들락거리는 게 그렇게 싫냐?”

“뭐?”

“언제는 같이 살자더니.”

서한준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유재는 순간 당황했다.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심 섭섭했던 건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승민이 나타났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저 과외 취소된 거 얘기하고 있었어요.”

한준은 시무룩한 색을 지우고는 대충 둘러댔다. 과외 힘들지? 승민이 대견하다는 듯 한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는 짓만 보면 어르신이 따로 없었다.

“너 요즘 맨날 과외하는 거 같더라. 쉬엄쉬엄해.”

“그래도 과외가 웬만한 알바보다 안 힘들어요. 애들도 다 말 잘 들어서요.”

“고생한다. 우리 엄마도 옛날에 안 해 본 알바가 없었는데…… 그런 거 생각하면 과외가 좋긴 해.”

유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부잣집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승민이 의외의 말을 했다.

“형도 아르바이트 해요?”

“왜? 난 놀고먹기만 하는 줄 알았냐?”

“그건 아니지만 보통 안 해도 되면 안 하잖아요.”

“해야지. 우리 집도 처음부터 잘산 건 아니었거든. 티 안 났냐? 주변에서는 다들 나더러 졸부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벼락부자 플렉스. 무슨 느낌인지 알지?”

그 말에 서한준이 눈동자를 굴려 힐끔 쳐다보았다. 유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쳐다보는 거지? 설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승민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어 말했다.

“너무 과하게 퍼다 주면 그런 느낌이 나나 봐? 허세 떤다고 하는 놈들도 있고. 근데 난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내 사람들한테 돈 쓰는 거 좋아. 베풀면서 채워지는 만족감이 있거든. 없이 살 땐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걸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잘 알았다. 유재는 노트북을 떠올렸다. 서한준을 위해서 산, 사실상


첫 선물이나 다름없었던 노트북. 상자를 열어 보던 얼굴이, 작은 노트북을 한참이나 이리저리 뒤집어 보던
녀석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동감했던 것도 잠시, 승민은 바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너무 여유가 없고 궁핍하면 주변 사람들도 다 떠나게 되어 있어. 있을 때 잘해야 된다니까.”

시선이 저절로 한준을 향했다. 한준은 정수기용 봉투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 분의
일로 접은 작은 종잇조각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놈에게 마음이 쓰였다. 유재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형, 아까 성우한테 들었는데 아마추어 복싱 대회 나가신다면서요.”

“아, 맞다. 이번에도 나갈 거야. 한준아, 넌 관심 없냐?”

승민이 난데없이 한준에게 물었다. 유재는 흠칫 놀라 한준을 돌아보았다.

절대 안 돼. 다른 스포츠도 아니고 복싱이면 다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준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되물었다.

“저요?”

“어. 너 잘하니까. 좀 준비가 빡세긴 한데, 경험도 쌓고 재미 삼아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음…… 글쎄요. 생각해 볼게요.”

“그래. 관련 정보 보내 줄 테니까 한번 읽어 보고 결정해. 성우는 하기로 했거든? 내가 보기엔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이 이상 헛소리를 하기 전에 여기서 대화를 끊어야 한다. 유재는 자연스럽게 승민의 등에 손을 얹었다.

“형,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잠깐 얘기 좀.”

“어어, 그래.”

유재는 일단 승민을 체육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할 말이 딱히 없어 걸어 나가는 잠깐 사이에 대충 생각해


냈다. 짜증 나는 교양 과제에 방금 승민의 이야기가 유용할 것 같았다.

“바깥에서 해야 될 말이야?”

승민이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유재는 그의 앞에서 잠시 주저하는 척을 하다 물었다.

“저 교양 과목 ‘나와의 대화’ 신청했었는데, 형 혹시 이거 들어 보셨어요?”

“아니? 왜?”

“이게 매주 자아탐색 같은 걸 시키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인 얘기를 매번 써 가야 하는데 어려워서요.”

“그냥 솔직히 써. 어차피 교수만 볼 거 아냐?”

“남한테 말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려워요. 근데 방금 들어 보니까 저랑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거
같아서.”

유재는 조심스럽게 말끝을 늘이며 미간을 모았다. 바로 알아들은 승민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어야지. 상상력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유재는 쓸 만한 질문을 골라 던졌다.

“저도 집에 갑자기 돈이 많아졌거든요. 형은 어땠어요? 그냥 좋기만 했어요?”

“좋았지.”

승민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때 어렸어서 나도. 좋기도 하고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어.”

‘혼란’이라는 말에 유재가 눈을 들었다. 승민은 고심하며 말을 이었다.

“친척들이랑 나름 사이가 좋았거든? 근데 아빠 사업이 좀 잘되고 나니까 할아버지가 첫째 삼촌한테만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해서 가족들이 대판 싸웠어. 이게 돈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빠가 차남인데 장남이랑
차별받으면서 그동안 쌓인 게 있었나 봐. 그 후로 매년 명절마다 갔던 할머니 집을 몇 년간 안 갔어. 지금도
나만 가끔 가고 아무도 안 가. 할아버지는 아직도 완고하시고.”

“음…….”

“신기하지 않냐? 그래도 아빠한테는 할아버지가 부모인데, 그렇게 연을 뚝 끊고 살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재산 그거 우리 안 물려받아도 되거든.”

“돈은 하나의 계기고, 결국 쌓였던 게 터지는 거죠.”

유재는 돈을 벌면서 서서히 이상해진 아버지를, 친했던 한준의 어머니와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하나의 계기가 대개 존나 파괴적이어서 그렇지. 실소를 삼키고 나니 승민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촌 누나랑 나랑 원래 진짜 친했는데.”

“…….”

“결혼했을 때도 우리 쪽 아무도 초대를 안 해서 말로만 들었는데, 최근에 프사 보니까 딸이 누나랑 똑


닮았더라고. 누나 어릴 때랑.”

우울해 보이는 승민의 앞에서 유재는 침묵했다. 어른들의 사정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여파는 익히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털어놓곤 했던 녀석에게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 모두의 부모님을 통해
전교에 퍼진 소문.

너덜너덜한 신발 끈을 쑤셔 넣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서한준.

묻지도 않은 사정까지 너무 자세히 알아 버렸다. 유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땀을 쫙 뺀 후 샤워까지 하고 나오자 배가 고팠다. 유재는 한준의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서한준에게서


체육관 샤워실에 비치되어 있는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부드러운 향을 맡고 있으니 한결 기분이 나았다.

오늘은 한준이 원하던 대로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는 게 낫겠다. 최대한 자제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융통성 있게 조절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서운하게 할 이유는 없다. 같이 살자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가
투덜투덜 불평하던 서한준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마추어 복싱 대회 얘기도 있었지. 유재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척 화제를 꺼냈다.

“맞다. 너 복싱 대회 나갈 거야?”

“아니.”

한준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그거 그냥 재미로 한번 나가 봐야지, 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취미로 틈틈이 하는 게


재밌어. 어차피 그런 거 할 시간도…….”
그가 대뜸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입술을 씹던 한준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신지훈이 재밌다고 한 영화 뭐야? 알아봤어?”

별안간 화제가 바뀌었다. 유재는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다며. 그건 나중에 보고 오늘은 우리 집 와.”

“아니, 그냥 가자. 너 보고 싶다는 거 궁금해. 가서 영화도 보고 팝콘도 사 먹자.”

“…….”

“거기 팝콘 말고 먹을 거 또 안 파나?”

한준은 중얼중얼 말끝을 늘이며 검색하기 시작했다. 옆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야, 이거 봐. 팝콘이 너 머리통만 하겠다.”

한준이 웃으며 내민 휴대폰엔 누군가의 블로그 후기가 있었다.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며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스크롤을 쭉 내리면서 사진을 살펴보는 서한준은 왠지 조금 노곤해 보였다.

아까만 해도 피곤하다고 비죽거렸던 녀석이 왜 마음을 바꿨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너무 여유가 없고 궁핍하면 주변 사람들도 다 떠나게 되어 있어.]

승민의 말에 잠자코 눈만 깜박이던 놈이었다.

유재는 한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어차피 집에 들르긴 해야 되니까 우리 집 가자. 요 앞이잖아.”

“왜 들러? 카드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지갑 안 가지고 왔어.”

“임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지갑도 안 들고 나오냐.”

툴툴거리면서도 한준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하자 그가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가지고 내려와.”

“같이 가.”

지갑 하나 가지러 다녀오는데 왜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느냐 되물을 차례였지만 서한준은 그러지 않았다.
물끄러미 이어지는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벙긋거렸을 뿐이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마침내 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는 앞장서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유재는 뒤를 돌았다. 우뚝 선 서한준의 등 뒤로 문이 막 닫히고 있었다.

잠금장치 소리가 났다. 한준은 유재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갑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는 말간 눈을 깜박이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유재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한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쓸데없는 소리 신경 쓰지 마. 백 세 인생인데, 너나 나나 살면서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지.”

“…….”

“과외 미뤄진 김에 여기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가라.”

뽀뽀할까.

말을 마치는 순간, 따뜻하게 품에 든 서한준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바로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멋쩍은 표정만 잠깐 짓고 말았다. 유재는 큼 헛기침을 하고는 물러섰다.

“들어와.”

한준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와 보는 것도 아니면서 시선이 바빴다. 그는 어색하게


입맛을 다셨다.

“방 깨끗하네.”

“그래? 잠깐 있어 봐.”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향수를 발견한 유재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허공에 몇번 칙칙 뿌리고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자 한준이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이 풀린 듯 활짝 웃는 걸 보니 좋았다. 유재는 장난스럽게 향수를 든 손을 흔들었다.

“냄새 어때?”

“이거야? 너 맨날 뿌리는 향수.”

“응.”

“네가 샀어?”

“엄마 친구가 나 대학 선물이라고 줬다는데 나쁘지 않아.”

대답을 하는 도중 서한준이 성큼 다가왔다. 코를 살짝 찡그린 그가 대뜸 목께에 고개를 묻었다. 킁킁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거지?

유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시선을 천장으로 올렸다.

“거기엔 향수 안 뿌렸는데.”

“그래?”

“……배 안 고프냐? 시켜 먹자. 뭐 먹을래?”

눈앞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벌겋게 자국이 남을 때까지 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작이군. 유재는
일부러 고개를 비틀어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배달 앱을 찾아 손을 움직이려는데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멱살을 그러쥐었다.

서한준이 힘주어 당기자 이마가 부딪쳤다. 코가 스치는 순간 그가 훅 입을 맞추었다.

따끈따끈한 입술이 부드럽게 입맞춤을 쪼았다. 간지러운 기분에 뱃속이 들떴다. 서한준이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벌리는 게 느껴졌다. 그 말랑말랑한 감촉을 잘근잘근 씹어 빨고 싶었지만…… 유재는 한준의 머리가 살짝
밀릴 정도의 힘으로 쪽 입을 맞췄다.

밀려난 한준이 반짝 눈을 떴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한발짝 물러서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유재는 미소 지었다.

“치킨 시킬까?”

웃으며 물었으나 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주 웃지도 않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던 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너 나랑 이러는 거, 아직 좀 어색하냐?”

“아니? 괜찮은데.”

“별로 안 내켜 하는 거 같아서. 솔직히 말해도 돼.”

“안 내키다니? 너 저번 주에도 내 손에다가 쌌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받아치자 한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테이블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래. 치킨 시켜.”

쭉 뻗은 눈썹과 팬 미간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골이 난 것 같았다. 유재는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 놓고는


다가가 섰다.

“화났냐?”

“아니.”

“왜? 내가 키스 피해서?”

키스가 깊어질까 봐 입술로 꾹 도장을 찍은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려던
참이었다. 서한준이 번뜩 눈을 들었다.

“피한 거 맞지?”

“어?”

“너 방금 네 입으로 피했다고 했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뒤룩뒤룩 굴리는 사이 한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에 돌던 빛이 까무룩 죽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막상 해 보니까 별로냐?”

한준은 답을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했다.

“나 간다.”

“야, 어디 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달려가 팔을 붙들어 당기자 새빨개진 귓가가 시야에 들었다. 돌아보는 얼굴도, 눈가도 불그스름했다. 서한준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꽉 물고 있던 말들을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무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너랑 친구로 남는 것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대신 이번에 결정하면 끝이야. 또


한 번 이랬다저랬다 하면 쥐어 터질 줄 알아!”

“쥐어 터……? 너 나한테 벌써부터 그따위로 말할 거야?”


“비켜.”

“맨날 할 순 없잖아!”

알아듣게 설명해야 했다. 유재는 한준을 한 번 더 힘주어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붙들려 들어온
한준이 되물었다.

“뭐?”

“꼴린다고 맨날 하냐? 적당히 하면서 살아야 할 거 아냐. 남은 인생이 얼마나 긴데. 지금 우리 스물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언제 맨날 했어?”

“인생 길게 보라는 소리야.”

한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정리를 마쳤다.

“인생을 길게 봐야 해서 섹스는 적당히 해야 한다?”

“그래.”

“하면 닳냐?”

“존나 닳지.”

유재는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웬만하면 제 입으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으나 한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바다에서 기억 안 나? 미쳐 가지고 또라이처럼 머리채 잡고 손찌검하고.”

“내가 언제 그랬어?”

“너 말고 내가.”

손찌검 얘기가 나오자마자 제 발 저려서는. 유재는 쯧 혀를 찼다. 앞으로는 서한준 역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귀기로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쥐어 터질 줄 알라고 협박을 하다니. 앞으로는 때마다 확실히 경고할
생각이었다. 관계가 다면적일수록, 세월이 흘러 점차 깊어질수록 서로를 존중해야 했다. 유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천천히 조심히 해야지. 꼴리는 대로 막 하다가 좆될 거야? 앞으로 넌 나랑만 하게 될 텐데, 적당히 선을
지켜가면서 해야 감정이 오래가고 긴장도 쭉 유지될 거 아냐.”

“길게 보라는 소리가 그럼…….”

“오십 살 돼서도 넌 나한테만 꼴려야 돼.”

유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섹시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서한준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팔짱까지 끼고 진지함을 피력했으나 한준의 얼굴에서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눈매도 입매도
둥글어지고 말았다.

“미친 새끼.”

한준이 천천히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냐고 물으려던 찰나, 다시 한번 멱살이 붙들렸다.
이번 손길은 부드럽지 않았다.

“으읍.”
서한준이 입가에 제 입술을 뭉갰다. 입을 맞췄다기보단 뭉갰다는 말이 어울렸다.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친
유재가 중심을 잡고 섰다. 두 손으로 한준의 허리를 붙든 채 밀려들어 오는 키스를 받아 내야 했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발끝이 저릿했다. 간질거리는 감각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뒤통수까지 낱낱이 간질이고 지나갔다. 한준이 두 손으로 머리통을 꽉 잡고 숨을 바짝 붙였다. 낮은 신음이
입속을 울렸다.

겹친 몸이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올라타서 마구 키스를 퍼붓는 한준을 안고, 유재는 그의 허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허리는 탄탄했으나 입술은 말랑말랑했다. 맞붙을 때마다 녹아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기분 좋았다. 아랫입술을 살살 깨물어 틈을 벌린 다음, 발간 피부를 꼼꼼히 핥아 주었다. 허리에 머무르던
손이 천천히 내려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키스를 하는 동안 뺨을 스치는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한준이 입가에서 목을 따라 입을 맞춰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하고 싶어.”

순간 한준의 무게 아래 눌린 성기가 꿈틀거렸다. 유재는 제 목에 고개를 묻은 한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목젖 부근을 열심히 빨던 서한준은 곧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주 비벼지는 성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딱딱해졌다.

담백하되 만족스러운 섹스.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유재는 재차 되뇌며 한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샤워도 막 하고 왔겠다,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바지 안에 손부터 쑤셔 넣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자제력이
있었다. 유재는 꽉 붙든 하체를 아래위로 흔들어 사타구니가 틈 없이 맞물리도록 했다. 서한준이 신호를 읽고
무릎을 벌리고 엎드린 채 허리를 움직였다.

“유재야, 후읏….”

“더 빨리.”

짓눌린 채 사정없이 비벼지는 성기가 욱신거렸다. 유재는 제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서한준을 올려다보았다.
헐떡거리며 신음하는 얼굴이 좋았다. 발갛게 상기된 채 미간을 찌푸린 표정도 좋았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낯선 빛으로 물드는 광경에 완전히 넋이 팔리고 말았다.

서한준은 시키는 대로 더 빠르게 아래를 비벼댔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바지 위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제 성기를 문질렀다가, 허벅지와 골반에도 마구 짓눌렸다. 유재는 입술을 꽉 악문 채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때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아귀가 빳빳해지도록 힘을 준 모양이었다. 볼기를


터질 듯 움켜쥐자 한준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움찔 패는 미간과 얼룩덜룩한 뺨이 좋았다. 저 발간
살갗에 제 것을 사정없이 비비다가, 벌어진 입에 한 번에 쑤셔 넣고 싶었다.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유재는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엉덩이를 벌렸다. 아래가 뜨겁게 마찰하는
동안 볼기를 벌렸다가 놨다가 하며 인내했다. 참아야지. 참아야…….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는 순간 한준이
허리를 숙여 입술 위로 속삭였다.

“할래?”

눈가가 붉었다. 흥분에 맛이 간 눈이었다. 순간 가학심이 들어, 유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뭘?”

서한준이 소리 내어 말하는 걸 듣고 싶었다. 정확히 그가 원하는 게 뭔지, 그가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저속한 말을 뱉어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준은 대답 대신 팔을 뒤로 뻗어 제 뒤를 움켜잡고 있는 유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엉덩이골 안쪽으로


손을 이끌었다. 상기된 눈은 온전히 자신을 향한 채였다. 바라보는 눈동자 위로 말간 빛이 떠올랐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오는 동안 마주 보았던 평상시의 눈이었다.

항상 자신을 보던 얼굴 그대로, 서한준은 조금 더 무릎을 벌렸다. 골이 벌어지면서 엉덩이 안쪽에 손끝이


닿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골을 따라 더듬어 내려가자 한준이 신음을 악물었다.
“여기?”

“읏, 응…….”

한준이 신음하며 입술을 붙였다. 키스하면서 목을 울리는 신음 소리를 꿀떡꿀떡 삼켜내는 놈을 보고 있노라니
점차 숨이 거칠어졌다.

처음 했을 땐 눈이 뒤집혀서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렸지만, 뒤로 박히는 게 정말 기분 좋을까 싶어 고민이


많던 참이었다. 섹스하라고 뚫린 곳이 아닌 구멍에다가 삽입하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많으니 차근차근
생각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먼저 뒤로 하고 싶어 하다니.

바지 위로 골 사이를 문지르자 서한준이 볼기를 바짝 조였다. 기분 좋았을까? 여기로 하는 게 처음부터 마냥


좋았을 리가 없는데. 그냥 내가 좋아서, 내 거라서 좋은 건가? 아니면 타고 나기라도?

서한준이 상체를 일으켜 앉더니 옷을 벗어 던졌다.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잡아 내리며 그가 내려다보았다.

“젤 어딨어?”

“저기.”

한준은 서랍장에서 젤을 꺼내와 손에 잔뜩 짜냈다. 그러고는 앞이 아니라 뒤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만 기다려.”

그가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뒤를 만지는 놈을


지켜보다가, 유재는 벌떡 일어나 바지를 벗었다.

“이리 와서 엎드리고 해.”

“어?”

“내가 볼 수 있게 여기 엎드려서 하라고.”

한준은 망설이다가 결국 침대에 뺨을 댄 채 엎드려 누웠다. 고개를 시트에 박은 채 엉덩이를 훤히 위로


치켜들고, 움찔대는 구멍과 발간 주변 색까지 전부 보이도록 다리를 벌렸다.

그곳이 젤로 번들번들 젖도록 비비다가, 한준이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녀석의 투박한 중지가 꾸물꾸물
엉덩이 사이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윽, 흐…….”

손가락으로 뒤를 쑤시는 서한준을 보자 잠시 머릿속이 멍했다. 저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만지다니.


남자랑 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저렇게 자위한 적이 있을까? 내 생각을 하면서는? 바닷가 호텔에서
뒷구멍이 녹아날 정도로 미친 듯이 하고 났을 때, 서한준은 기분이 좋았을까?

“야.”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을 때 한준이 조용히 불렀다. 그는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귀가 새빨갰다.

“내가 이러는 거…… 보기 좋냐?”

“어.”

“…….”
“넌? 그거 기분 좋아?”

“응.”

“…….”

“안 되겠다. 얼굴 보면서 할래.”

한준이 뒤돌아 누운 채 무릎을 벌렸다. 이제 보니 가슴 아래까지 온통 열이 올라 벌겠다. 그는 유재를


쳐다보며 밑을 쑤시기 시작했다. 손가락 두 개가 두 마디까지 들어가 안을 휘젓고 있었다.

유재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한준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손만 살짝 댔을 뿐인데 한준이 흠칫 허리를 튕겼다.

당연히 여길 자극하는 게 제일 기분 좋겠지? 한준이 서툴게 제 것을 빨아 줬던 기억이 났다. 유재는 입맛을


다시며 제 손안에서 단단해지는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빨아 볼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으로만 만졌지 아직 한 번도 입은 대 본 적 없는 자지를 빨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정확히는 헐떡헐떡 우는


서한준을 보고 싶었다. 유재는 한마디 예고조차 없이 기둥뿌리 쪽에 입술을 묻었다.

“윽! 야, 으으….”

한준이 놀라 허리를 뒤틀었다. 기둥 아랫부분부터 두툼한 귀두 끝까지 핥아 올리자 제 것이 빨리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야릇했다. 어찌나 단단하게 발기했는지 입에 넣으려고 밑으로 당기려는데 버티는 힘이 대단했다.
유재는 입을 크게 벌려 흥분하여 끝이 젖은 성기를 그대로 삼켰다.

빨리 움직여야 마찰 때문에 기분이 좋던데. 제 것을 빨던 한준을 떠올리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왔다.


유재는 질척하게 혀를 감으면서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릴 때면 항상 한준의 머리통을 붙잡고
거칠게 박아 넣고 싶었다. 그는 당시의 욕구를 떠올리며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머리를 움직였다. 입술로
기둥을 조인 채 고개를 비트는 순간 한준이 하체를 들썩였다.

“아!”

문득 아래에서 찔걱찔걱 구멍을 쑤시는 소리가 멎었다. 내려다보니 손가락 세 개가 거의 끝까지 틀어박힌 채
멈춰 있었다. 고개를 든 유재가 미소 지었다.

한준이 무릎을 활짝 벌린 채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흥분에 무르게 젖은 눈가가 붉었다. 그는 작게 튀어나온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였다.

싸고 싶을 때마다 서한준은 가슴을 만졌다. 그곳이 민감하다는 건 몇 번 함께 절정을 맞으면서 알게 되었다.


한준이 앞을 질질 적실 때까지 젖꼭지를 꼬집어 당기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유재는 그 대신 그 예민한
피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입술을 모아 쪽 소리 나게 빨아올리자 젖꼭지가 금세 단단하게 섰다. 혀로 살살 튕기다가 힘껏 압력을 가해


빨았다. 한준이 밭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읏! 아, 좋아. 좋, 아….”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으며, 한준은 유재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남자 가슴을 보고 흥분했던 적이 없었는데, 제 침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젖꼭지가 너무 야했다. 유재는 돌기
위에 혀를 뭉갠 채 고개를 움직였다. 물렁물렁한 혀 아래로 딱딱해지는 유두가 느껴졌다. 멈췄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한준의 다리 사이에서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젤이 열에 녹아 침대를 엉망으로 적셨다. 한준의 허벅지 안부터 엉덩이 아래가 다 젖어 미끌거렸다. 가슴을
빨면서 다른 쪽 젖꼭지를 손톱으로 긁고 있을 때, 한준이 목뒤를 잡아당겼다. 당기는 힘에 이끌려 올라오자
완전히 말캉하게 풀어진 입술이 입가를 눌렀다.

“야.”
이마를 맞댄 채 한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평소보다 더 낮게 들렸다.

“넌 뭐가 제일 좋냐?”

“뭐가. 이런 거? 난 다 좋아.”

“특히 좋은 게 있을 거 아냐. 하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거? 아까 체육관에서 봤던 등이 떠올랐다. 그 등을 훤히 내려다보고 올라타서, 두 팔을 등 뒤로


비틀어 포개어 잡은 다음 꼼짝 못 하게 누른 채 박고 싶었다.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푹푹 찍어 눌러서,
하체가 거칠게 부딪칠 때마다 경련하는 엉덩이를 보고 싶었다.

정신 차려. 엉덩이가 아니라 서한준이다.

유재는 재빨리 예능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권태와 짜증에 찌든 이들의 얼굴을 그리자 단번에 흥이 식었다.
그렇게 폭력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있을 때, 한준이 갑자기 어깨를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해 보면 알겠지.”

그는 유재를 밀어 눕히고 올라타서는 유재의 성기를 세워 제 뒤에 조준했다. 자지 끝으로 뜨겁게 입을 벌리는


구멍이 느껴졌다. 가장자리가 윤활로 벌어져 있었지만 누르는 순간 빠듯할 것을 알았다. 유재는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한준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기둥이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느릿느릿, 엉덩이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성기 피부를 남김없이
조이는 압력이 점차 이성을 집어삼켰다.

“윽… 으, 흐으, 아, 아아….”

좌우로 쫙 찢어 벌린 한준의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유재는 그의 허리를


붙들어 힘껏 아래로 당겼다.

“윽! 흣.”

철퍽 주저앉으며 완전히 꿰뚫리는 순간 한준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울먹임이 번지면서 코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유재는 살살 허리를 흔들어 부추겼다.

“읏, 움직여.”

한준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유재의 가슴에 두 손을 얹어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하체를 위아래로 흔들어
발기한 기둥 위로 푹 내려앉았다.

“아, 아아, 윽! 앗.”

“후우… 흣, 더 빨리.”

눈앞이 핑핑 돌았다. 서한준이 움직일 때마다 자지가 남김없이 빨렸다. 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갈 땐 질척하게
들러붙으며 압박하던 내벽이, 빠져나갈 땐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끝까지 따라붙었다. 시트를 세게 붙잡은 채
눈을 뜨자 거칠게 움직이는 서한준이 보였다. 그가 내려앉을 때마다 쭉 뻗어 발기한 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음낭을 세게 쥐어 주무르는 순간 한준이 뒤를 꽉 조였다.

“으윽, 헉, 으!”

참을 수가 없었다. 한준이 잠깐 멈춘 틈을 견디지 못하고 유재가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버티던 몸이 제 위로


무너져내렸다. 가슴 위로 엎어진 몸을 한 팔로 끌어안은 채 유재는 마구 허리를 흔들었다. 방금 자세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 안달이 났다.

“하아, 흣.”
유재는 한준을 옆으로 돌려 눕히고는 한쪽 다리를 홱 위로 들어 올렸다. 다리가 젖혀지면서 힘이 들어간
엉덩이에 골이 팼다. 그곳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볼기를 벌려, 젖은 구멍에 다시 한번 성기를 맞추었다. 쑤욱
밀어 넣으면서 한준이 밀려나지 않도록 그의 배를 꽉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하아, 으….”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나서, 유재는 고개를 숙여 한준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옆얼굴이 젖어 있었다. 붙잡은
허리도 온통 젤로 미끌거렸다. 짐승 새끼처럼 허공에 들어 올린 한쪽 다리가 처박는 힘에 밀려 속절없이
흔들렸다.

버티지 못해 아래로 떨어지는 다리 사이에 유재가 무릎을 밀어 넣었다. 한준이 헐떡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젖은 목소리를 더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입술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질퍽거리는 소리가 신음에 섞였다. 고여 있던 침이 줄줄 흘러 뺨을 적셨다. 드러난 목이
길었다. 유재는 그 매끈한 살갗에 이를 세웠다.

“으응, 윽! 아, 아!”

“헉, 흣, 좋아?”

입속을 휘젓는 손가락 때문에 한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빨아서 적신 유재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에 물렁물렁한 유두가 닿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재는 뜨거운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빨아 줬는데 또? 응?”

“흐, 읏…….”

“또 어떻게 해 줘? 제대로 말해.”

“쌀 때까지, 윽, 만져 줘.”

“이렇게?”

“더 세게.”

한준이 잇새로 애원하며 제 성기를 더듬어 잡았다. 절정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유재는 자위하는 한준을
품에 안은 채 동그랗게 심지가 선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렸다.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세게
눌렀다가, 길게 잡아당긴 다음 비틀었다.

“유재야, 유, 헉, 흐.”

한준이 더 빨리 팔을 흔들었다. 유재는 입술을 깨물고는 한준의 허리를 붙들었다. 쩍쩍 안에 처박으며 임박한
사정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한준이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하아… 흐, 너도 기분 좋아?”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한준이 물었다. 유재는 그의 젖은 뺨에 제 뺨을 맞댄 채 대답했다.

“좋아.”

그 순간 한준이 흠칫 떨었다. 그가 절정을 맞았음을 눈치챈 유재가 한준을 엎어트렸다. 움찔거리는 등 근육을
내려다보며, 그는 난폭하게 하반신을 부딪쳤다. 철썩철썩 성기가 꽂히는 동안 한준은 남은 정액을 모조리 싸
냈다.

“으윽!”

유재가 힘껏 한준의 안에 처박으며 사정했다. 그는 씨근덕거리는 한준의 등에 이마를 박은 채 쓰러졌다.


“아, 배고프다.”

체액이 식어 축축한 침대가 차갑게 느껴질 때쯤, 한준이 중얼거렸다.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던 유재가
휴대폰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킨?”

“어.”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온 유재가 침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누워 있던 한준이 옆구리에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했다. 벌러덩 쓰러져 눕자 서한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허니콤보 라지랑 콜라 세트.”

“그래. 햇반 있을 거 같은데. 그거랑 먹자.”

메뉴를 고르던 중,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든 유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상체를
뒤로 뺐다. 더 넓어진 시야에 한준의 몸이 훤히 들어왔다.

오른쪽 가슴에 뻘겋게 잇자국이 나 있었다.

“뭐야? 이리 와 봐.”

“어? 자국났네.”

한준이 웃으며 손을 내쳤다. 빨다가 몇 번 깨물었던 거 같긴 한데 저렇게 상처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고?


충격에 잠시 말을 잃은 사이 한준이 휴대폰을 주워 메뉴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는 다른 치킨 메뉴를 주욱
둘러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거 시킨다?”

“지금 치킨이 중요하냐? 봐봐, 멍든 거 아냐?”

“아이 씨, 오버하지 말고 빨리 주문이나 해. 나 배고파.”

“봐봐!”

“야, 이거 내일이면 없어져.”

“그럼 내일 나한테 와서 검사받아.”

단호하게 잘라 명령하자 유유히 받아치던 한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유재는 잇자국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유륜 주변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던 자국이 선명했다.

섹스할 땐 미친놈이라도 되는 건가. 경험이 적어서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며 가슴을
살펴보고 있는데 살갗이 서서히 상기되는 게 보였다. 힐끔 눈을 들자 한준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아니면…….”

“없어질 때까지 매일 와서 검사받아.”

유재는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 이런 걸 당연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한준은 큼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붉어진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 * *

옆구리가 찔리는 순간 한준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옆을 보자 조유재가 눈썹을 둥글게 밀어 올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졸았다. 한준은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제 새벽 두 시에 잤더니 너무 피곤했다. 하루에 과외를 두 탕씩 뛰고 집에 오면 보통 열 시가 넘었다. 씻고


과제를 하다 보면 기본이 새벽 두 시였다.

“e 클래스에 주말까지 과제 업로드하세요.”

교수의 한마디를 끝으로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한준은 유재의 발을 톡 걷어차며 물었다.

“뭐야. 끝났어?”

유재는 대답은 않고 큭큭 웃으며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등록금이 얼만데, 과외 하느라 피곤해서 정작
수업은 다 흘려듣다니. 한준은 고개를 휘휘 저어 잠기운을 털어 내고는 기지개를 켰다. 생각 없이 홱 상체를
젖히던 그가 움찔 수그렸다.

“아.”

가슴이 아팠다. 정확히는 조유재가 깨문 상처가.

처음 조유재가 유난을 부릴 땐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생각보다 세게 깨물긴 했던 모양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잇자국이 남아 있어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가방 지퍼를 잠그던 유재가 돌아보았다. 민망해진 한준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나 오늘 정윤이 누나랑 점심 먹는 거 알지?”

“어. 누나 몇 시에 만난다고 했지?”

“삼십 분.”

“그럼 시간 좀 있네. 우리 집 잠깐 들렀다 가.”

유재가 목뒤에 턱 손을 올리며 내려다보았다. 약속 시간까지 지금부터 사십 분. 캠퍼스가 넓어서 유재의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정문으로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자취방에 들러도 겨우 이십 분 정도 머무르는
게 고작이겠지만,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한준은 유재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채 강의실을 벗어났다.
창밖으로 비치는 가을날이 맑아 기분이 좋았다.

우습게도, 언제 피곤했냐는 듯 금세 정신이 또렷해졌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한준은 안을 둘러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방은 깨끗했다. 옷가지가 이것저것 널려 있는 침대


빼고.
섹스는 적당히 해야 한다고 헛소리를 늘어놓던 놈이 떠올랐다. 침대에 눕지 못하게 일부러 저렇게 둔 건
아니겠지? 잠시 의심했지만 억측이 과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유재가 그 정도로 또라이는 아니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조유재가 다가왔다. 갑자기 시야를 꽉 채운 그에게 밀려 등이 벽에 부딪혔다.
물러설 곳이 없어 고개를 들자 코앞에서 바라보는 유재와 눈이 마주쳤다.

한준은 눈을 느릿느릿 내리깔았다. 고개를 기울인 채 거리를 좁히며, 곧 맞닿을 입술을 기대하면서.

입술이 닿기 직전, 조유재가 속닥거렸다.

“옷 걷어 봐.”

“뭐?”

“상처 나았어?”

한준은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마주 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도 진지하게 하는 소린가 의구심이 들었던


말이었다. 조유재는 뻔뻔스럽게 쳐다보면서 눈썹을 밀어 올렸다.

진짜 다친 게 걱정스러운 건지, 음란한 장난인지 저 태연한 얼굴로는 분간이 안 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놈인데 연애를 하다 보니 알쏭달쏭할 때가 많았다. 한준은 티셔츠 밑단을 잡고 목 끝까지 걷어 올렸다.

“자.”

“아직도 안 나았네. 뭐 약 같은 거 발라야 되나?”

“아니, 그냥 좀만 더 있어 봐.”

“아파? 아까 강의실에서도 아파하는 거 같던데.”

유재가 상처 위를 엄지로 스윽 문질렀다. 차가운 손이 스치자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예민해진 피부에 집요한 눈길이 닿았다. 한준은 괜히 입맛을 다시고는 유재의 어깨 언저리만 노려보았다. 그런
의도가 아닌데 혼자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유재가 대뜸 딴소리를 했다.

“정윤 누나는 언제 소개해 줄 거야?”

“아직도 그 소리냐? 왜 소개해 달라고 하는데?”

“너랑 많이 친한 거 같아서 궁금하니까. 나도 같이 잘 지낼 수 있잖아.”

“싫어. 네 친구는 네 친구고 내 친구는 내 친구지.”

딱 잘라 거절하자 유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경고 없이 티셔츠를 홱 잡아 내리는 통에 옷감에


상처가 스쳐 따가웠다. 한준은 저도 모르게 유재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찡그린 얼굴을 본 유재가 물었다.

“아, 미안. 옷 때문에?”

“됐어. 몇 시냐? 이제 슬슬 가 봐야 될 거 같은데.”

키스라도 할 수 있을 줄 알고 따라왔건만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가기 전에 짧게라도 입을 맞추고 싶어


틈을 노리고 있을 때였다. 물어본 시간은 확인할 생각도 않고, 조유재는 난데없이 한준의 티셔츠 아래쪽을
작게 꼬집어 쥐고 살살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뭐지? 한준은 턱을 숙여 밑을 보았다. 상처에 옷감이 쓸리고 있었다.

워낙 사뿐하게 스치는 감각이라 아프다기보단 묘했다. 힐끔 올려다본 조유재의 표정이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친 걸 걱정해서 하는 짓 같진 않았다. 한준은 웃음으로 실룩거리는 입가에 힘을 주고
물었다.

“너 이런 거 좋아하냐?”

“뭐?”

조유재가 화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또렷한 초점이 정확히 한준의 얼굴에 꽂혔다. 유재는 바로 손을 뗐다.

“누굴 변태로 아냐? 아플까 봐 테스트해 본 거야.”

“테스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자. 지금 나가야 삼십 분까지 갈 수 있어.”

재빨리 말을 돌리는 유재가 귀여워 웃다가, 한준은 가방을 주워 멨다. 잠깐 떠들었을 뿐인데 벌써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유재가 따라 나와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

“너도 지금 나가게?”

“어. 나도 밥 먹으러 나갈 거라 어차피 가는 길이야.”

정윤을 소개해 주지 않겠다고 해서 일부러 따라 나오는 건 아니겠지. 괜한 의심이 든 한준이 다리를 쭉 뻗어


길을 막았다. 멈칫 선 유재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따라올 생각이면 꺼지라고 경고하려던 참에, 유재가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려 쪽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이 한 번 더 부드럽게 키스를 쪼았다.

“가자.”

고개를 든 유재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미소 지었다. 눈에 익은, 그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유재는 정문까지 바래다주겠답시고 따라왔다. 따라오지 말라고 할 방도가 없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바래다주는 것이고 바래다주다보니 우연히 정윤과 마주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주친 김에 인사는 인간 된 도리였다. 조유재는 정윤을 만나자마자 유들유들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 자식이 진짜. 이럴 줄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한준은 정윤이 당황하지 않도록 말을 보탰다.

“누나, 제 친구 유재예요. 맥주 축제에서 보셨을 텐데 기억하세요? 제가 누나 만난다고 하니까 지나가는 길에


인사만 드리고 가겠다고 따라왔어요.”

굳이 인사만 드리고 갈 거라는 말을 강조하자 유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준은 모른 척 정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놀랐을 텐데도 그녀는 반색을 하고 인사했다.

“어어, 그럼. 조유재 씨 맞죠?”

“말 편하게 하세요, 누나. 저번에 맥주 마시러 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조유재는 능청스럽게 정윤을 ‘누나’라고 불렀다. 훤칠한 놈이 생글생글 웃으며 치대는 걸 싫어할 이는 없을
터였다. 고등학교 때도 저러고 다니면서 모두의 환심을 샀던 놈이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냥 누나를 누나라고 불렀을 뿐인데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한준은 오가는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니에요. 잘 지냈어요?”

“네. 맞다, 누나 중국어과시죠?”

“네.”

“저 중국어에 관심 많거든요. 이번에 어쩌다 보니까 혼자 기초 중국어 수업을 듣게 돼서요.”

“진짜요?”

교양 얘기를 하며 유재가 슬쩍 눈을 흘겼다. ‘혼자’ 중국어 교양을 듣게 됐다고 말하는 걸 보니 아직도 꽁해


있는 모양이었다.

똑같이 맞춰서 신청했던 시간표가 바뀐 건 개강 첫 주, 정정 기간 때였다. 교양 수업 하나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함께 수업 도중에 나와서 컴퓨터실로 가 바로 다른 수업으로 갈아타려 했었다. 나란히 앉아서 같은
강의를 골라 보려고 삼십 분을 버텼으나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한준은 ‘시민생활과 법’을,
유재는 ‘기초 중국어’를 잡았다. ‘시민생활과 법’에 딱 한 자리만 남아 있던 탓이었다.

조유재가 정정 기간 내내 휴대폰을 붙잡고 대기를 탔지만 결국 ‘시민생활과 법’에는 끝까지 자리가 나지


않았다. 유재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중국어 수업을 같이 듣자며 끈질기게 굴었으나 한준은 거절했다. 실생활에
유용한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양 수업이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사귄다고 수업을 전부 같이 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정윤이 중국어과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유재는 능숙하게 공통 화제를 캐내어 대화를 이었다.
한국대학교 외국어 강의는 어떻고, 교양 기초 강의는 어떻고, 정윤이 성심성의껏 설명하는 동안 유재는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집중했다.

한 귀로 흘리고 있을 게 뻔한 주제에, 그는 정윤이 뱉은 말을 머릿속에 전부 새기기라도 할 기세로 맹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척했다. 정윤은 처음 만난 제게 술 게임을 한참 설명해 줬을 정도로 도움을 주는 일을
기꺼워하는 성격이었다. 조유재는 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잠시 이어지던 대화는 적당한 때에 끊을 줄 아는 조유재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얘기


나눠요.” 그는 아쉬운 듯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눈썹을 모은 채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는 유재를 정윤이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예의를 차렸다.

“나중에 한번 한준이랑 셋이 식사해요. 중국어 관련해서는 아는 게 좀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어, 저야 좋죠. 혹시 그럼 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저 새끼가 결국.

정윤이 예의상 한 말을 유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정윤의 번호를 받고는 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인사했다.

“갈게, 이따 봐.”

한준은 입꼬리를 억지로 당겨 짧게 웃었다. 원하는 바를 달성한 조유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한창 식사를 하던 중, 조유재로부터 문자가 왔다.


유재☆

뭐 먹냐? 난 냉면 먹으러 옴ㅋㅋ

오후 1:58

어쩌라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말았다. 한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정윤이 샤브샤브 고기를
남김 없이 털어넣으며 말했다.

“우리 엄청 오랜만 아냐?”

“맞아요. 너무 바빠서…… 저 일주일 내내 과외 하고 있거든요.”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한준은 괜히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바쁠 때가 있지. 너 이제 배달은 안 해?”

“네. 과외가 나아요.”

“애들은 말 잘 들어? 난 지금 일 년째 가르치는 애가 있는데 엄청 사춘기야. 수업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기획사 오디션을 준비 중이라면서 자기 춤추는 영상을 보여 주더라니까.”

정윤이 집게를 든 채 팔을 휘적거리며 춤을 추는 시늉을 했다. 한준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전 재밌게 잘 하고 있어요. 애들이 숙제를 좀 안 하긴 하는데 그거야 뭐, 저도 중학교 땐 그랬으니까.”

“너도 그랬어? 성실했을 거 같았는데.”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성실한 편은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가서부터 정신 차리고 빡세게 했죠.”

“유재? 걔도 너랑 같은 고등학교 다녔다고 하지 않았어? 걔는 어땠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까지 조유재와 대화를 했고, 마침 그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임을 알고 있기에 자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불편했다. 정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유재가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했던 게 걸려서
그랬다. 유재 얘기를 이어가다 보면 계속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유재와의 합의 없이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한준은 죄책감을 누른 채 대답했다.

“유재는 뭐든 잘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다 예뻐했어요.”

“그랬을 거 같아. 엄청 싹싹하더라.”

“근데 아까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중국어도 재밌을 거 같더라고요.”

유재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한준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중국어 수업 좋지. 우리 학교가 제 2 외국어 교양이 대체로 다 괜찮아. 넌 외국어 안 들어?”

“아, 저는 이번에 교양 그거 들어요. ‘나와의 대화’랑 ‘시민생활과 법’이요.”


“어? 시민생활과 법?”

“네. 이거 들어 보셨어요?”

정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거 재밌어. 난 상속법 부분이 제일 재밌더라. 은근히 유용한 정보가 많아. 뭐 법 관련해서 궁금한 거
교수님한테 그냥 물어봐도 친절하게 잘 알려 주시고.”

“이거 시험 어려워요?”

“역시 그게 제일 궁금하구나? 어려워. 교수가 깐깐하거든.”

한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주에 배우는 양이 상당해 시험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수업을 듣는 데
도움이 될 참고 도서만 여러 권이고, 나눠주는 유인물은 수업 내용 요약본에 가까웠다. 그 두꺼운 참고 도서를
전부 읽을 순 없었으므로 수업 시간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는데, 하도 피곤하다 보니 강의를 듣는 중에도
많은 내용을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이 수업을 정정 기간에 잡은 거라 첫 주에 못 갔었는데 그날도 수업을 두 시간 꽉 채워서 했다고


하더라고요. 교재가 차라리 뭐 하나 딱 정해져 있으면 나은데 그것도 아니고.”

“그 수업 필기 잘해야 돼. 같이 듣는 친구 없어?”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도서관에서 참고 도서 찾아서 조금씩 읽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정윤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거 지금 나 친한 후배가 듣는 걸로 아는데, 소개해 줄까?”

“정말요? 좋죠!”

“걔도 내가 완전 강추해서 들은 거거든. 너랑 같은 학번 남자애야. 아예 지금 물어보고 번호 줄게.”

정윤은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정윤이 문자를 보내는 동안 한준은 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조유재가 새로 보낸 문자가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유재☆: ㅡㅡ (6 분 전)

* * *

오전 11:26

나 없으니까 심심하지
유재는 문자를 보내곤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수업 중이라 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법에 관심이 많았다고. 그 교양 수업을 그렇게 혼자서라도 들어야 했나? 강의 하나였지만 그 때문에
점심을 같이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아르바이트니 강의니 바빠서 부실하게 먹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집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찬을 사러 갈 시간도, 인터넷에서 잘 찾아 제때 주문해 먹을 여유도 없을
테니 서한준 혼자 점심을 먹는다면 분명 그날 가장 싼 학식 메뉴나 컵라면 따위로 대충 때울 게 뻔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신지훈이 팔을 쭉 뻗어 손짓했다.

“야! 여기!”

옆에서 메뉴판을 들고 있던 한유빈이 고개를 흔들어 인사했다. 유재는 미소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다른 강의를 듣고 있는 서한준 대신, 지훈과 유빈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시에 중국어 교양 수업이
있는 탓이었다. 고를 수 있는 강의 중에 최대한 비슷한 시간으로 잡은 게 그거였다.

“뭐 시킬까?”

“전에 먹었던 거. 함박 스테이크였나?”

“난 치킨 그라탕 먹을래.”

메뉴를 고른 후, 유재는 다시 한번 휴대폰을 확인했다. 한준이 막 답장을 보냈다.

한준이

ㅋㅋㅋㅋ

오전 11:42

한준이

야 이 수업 재밌어 이따가 만나서 말해줄게

오전 11:43

오전 11:44

수업이나 들어ㅡㅡ

법이 재밌어 봤자지 무슨. 유재는 못마땅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골라 보냈다.


나는 1 학기 때 인기 교양도 포기했는데, 이 자식은 이게 뭐라고 하나 양보를 안 했다. 그러고는 재밌다고
약을 올리기까지 해? 중국어는 존나게 재미없는데.

아예 안 나가서 F 를 받고 기록을 없애고 싶었지만 조만간 정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섣불리 버릴 순
없었다. 유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지훈과 유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한유빈, 너 ‘나와의 대화’ 광탈한 거 다행인 줄 알아. 그거 과제 진짜 존나 야마 돌게 한다.”

“왜? 공짜 테라피 아냐? 난 궁금하던데.”

“아니야.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잘 알 필요가 없어. 알아봤자 피곤하다니까.”

곧 백 일이었다. 유재는 캘린더를 켜서 또 한 번 기념일을 확인했다. 다음 주 금요일. 운이 좋게 기념일이


금요일이라 마음만 먹으면 이른 저녁부터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을 듯했다.

뭘 해야 하지. 서한준은 그날도 과외를 하려나?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미리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빼길 바라는
마음 반, 하루 과외를 빼면 밀리는 돈을 계산할 서한준을 이해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서한준과 과외 아르바이트 생각을 하다 보니 입안이 썼다. 요즘 한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깐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게 하고 싶은데 뭘 하면 좋을까. 바다에 한 번 더 갈까? 놀이공원은 너무
피곤하겠지? 아니면 유명한 식당을 예약해서 맛있는 걸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갈까? 기념일이니 커플링을
선물하면 어떨까.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으면 아무한테나 번호를 따이는 일이 없을 텐데.

머리가 아팠다. 테이블을 한참 노려보던 유재가 불쑥 물었다.

“보통 백 일 선물로 뭐 해?”

신나게 재잘거리던 유빈과 지훈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백 일 사귀면 보통 뭐 하냐고. 선물이나 이벤트나.”

“너 연애해?”

“어.”

“백 일이나 됐어? 왜 말을 안 하냐? 그럼 언제부터 사귄 거야?”

그들은 묻는 말엔 대답을 안 하고 다른 소리만 했다. 유재는 좀 더 범위를 좁혀 질문했다.

“커플링 같은 거 맞추지 않냐?”

“커플링? 너무 이르지.”

유빈이 질색을 하고 대답했다. 우그러드는 미간을 본 유재는 놀랐다. 그렇게 이른가? 고등학교 때도 커플링
맞추는 애들이 있었는데.

지훈이 제 손을 쭉 내밀어 보이며 반박했다.

“뭐가 일러? 나도 맞췄는데.”

약지에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유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받아쳤다.

“네가 맞추자고 했지?”

“어. 걔도 좋다고 했는데 그게 뭔 상관?”


“이런 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아. 백 일 너무 이르지, 겨우 세 달 정돈데.”

“부담스러워? 이거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그냥 액세서리처럼 하고 다녀도 돼.”

마침 가격대가 얼마 정도일까 궁금했던 참이었다. 유재는 지훈의 손가락을 잡아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얼마야?”

“이거 한 십 얼마? 은이야. 가볍고 노 부담.”

“같이 샀어?”

“응. 같이 가서 골랐어.”

“아니, 네가 돈 다 냈냐고.”

유재의 질문에 지훈이 푸핫 웃었다. 그는 제 말을 달리 오해했는지 돈 얘기였냐며 히죽거렸다.

십만 원대 반지. 반지치고는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한 끼 외식조차 고민하는 한준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노트북을 줬을 때도 반응이 영 시원찮았는데 반지까지 또 사 주면 싫어하겠지.

그냥 받으면 안 되나? 어차피 평생 같이 지낼 거, 그때그때 여유가 있는 사람이 돈 쓰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고등학교 땐 내가 밥을 얻어먹었지만 지금은 사 줄 수 있는 것처럼. 막말로 서한준이
빚더미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취업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형편은 어련히 나아지게 되어 있다.
고심하고 있을 때 지훈이 말했다.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고. 반씩 냈어.”

“싫어할까?”

“사람 나름이겠지? 싫어할 거 같아?”

“어.”

단호한 대답에 유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멋쩍은 듯 입을 가렸다.

“너 연애할 때도 약간 뻔뻔스러운 타입일 줄 알았는데 은근히 눈치 본다.”

“애인 눈치를 안 볼 수가 있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유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에 부응할 만큼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유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커플링은 일주년 되면 하고 지금은 하지 마. 장담하는데 좋아할 확률보다 싫어할 확률이 높아.”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결혼도 아니고, 커플링은 그냥 끼면 되는 건데.”

“세 달이면 아직 불안한 시기잖아. 거기다가 이제 우리 다 성인이고 커플링인데 아예 싸구려로 맞출 수도 없고,


최소 십만 원은 넘게 들 텐데. 만약 헤어지면 그거 어따 써? 금이면 팔기라도 하지. 내다 버려야 될걸?”

내다 버리다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재는 이어 물었다.

“서로 웬만큼 잘 맞으니까 백 일이나 사귄 거 아닌가?”

“세 달 가지고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내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친이랑 성인 되고 술 마셨는데,


술버릇 때문에 깨졌어.”

“왜?”
“술만 먹으면 그렇게 전화해서 했던 말을 백 번씩 했대. 진짜 극혐이지 않냐?”

“……고작 그걸로?”

“그게 얼마나 짜증 나는데. 그리고 둘이 대학 다른 데로 가서 눈에서도 멀어졌는데 워낙 괜찮은 사람들도 많고


하니까.”

술버릇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군.

문득 한창 원서를 쓰고 발표가 날 시기에 연락 한 통 없었던 서한준이 떠올랐다. 인연을 이어붙이려고


안간힘을 썼던 자신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모두 음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재는 슬쩍 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나
졸까 봐 깨우려고 보낸 문자였다. 녀석은 최근에 피곤한지 자주 졸았다.

답은 바로 도착했다.

한준이

안 졸거든ㅡㅡㅋㅋ

열공중

오후 12:11

오후 12:11

웬일? 재밌냐?

한준이

ㅇㅇ 나 친구도 사귐

오후 12:12

친구?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전공 수업도 아니고, 혼자 듣는 교양 수업에서? 오늘 처음 간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지금?
오후 12:12

누구?

문자를 읽었지만 한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열띤 토론을 이어 가던 끝에 지훈이 말했다.

“사실 부담스럽다는 사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반지가 상징하는 게 있잖아. 일종의 약속이라고 해야


하나?”

“맞아. 그거 쉽게 할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진짜 이 사람이다 싶을 때 하면 될 듯? 난 얘 만나자마자 딱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아, 그러세요?”

약속.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을 무심히 내려다볼 때였다. 잠시 꺼졌던 휴대폰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준이

이따가 말해줄게ㅋㅋ

오후 12:15

유재는 화면이 검어질 때까지 메시지를 계속 쳐다보았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배가 고프긴커녕 속이


더부룩했다.

“안 먹어? 다 식겠다.”

유빈이 부르고 나서야 자신이 한참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재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302 호. 강의실을 확인한 유재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시민생활과 법. 자리 하나가 안 나서 속을 썩였던 게 무색하게도, 강의실은 군데군데 빈 자리가 많았다.


서한준은 재밌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드롭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반이 넘게 남겼는데도 속이 안 좋았다. 괜히 양식을 먹었나. 묵묵히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 강의실 뒷문이


열렸다. 유재는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서한준은 평소의 태평한 성격답게,
사람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느긋하게 얼굴을 비쳤다.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는, 말끔한 빛의 한준이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옆에 선 남자는 한준과 키가


비슷해서 마주 보자 눈높이가 맞았다. 모자를 뒤로 쓰고 있어 시원하게 드러난 얼굴이 바로 보였다.
가느다란 눈썹과 쌍꺼풀 없는 눈. 양아치 같은 인상의 남자가 메고 있는 가방에 한준은 살짝 손을 얹은 채였다.
서로의 어깨에 팔을 감고 가방에 손을 올리는 건 그들의 습관이었다.

“한준아.”

유재는 이름을 부르고는 미소 지었다. 그를 발견한 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너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렸지.”

“뭐? 일단 잠깐만.”

한준은 말을 끊고는 옆에 선 남자를 돌아보았다.

“현아, 점심은 다음 주에 같이 먹자.”

현아?

이름이 뭔데 현아라고 부르지? 외자 이름인 듯했으나 어감이 너무 다정했다. 애칭도 아니고.

“알았어. 그럼 다음 주 돈부리?”

“어.”

돈부리?

후문에 있는 그 돈부리 집? 맛있다고 해서 같이 갔던? 약속을 잡자마자 바로 메뉴까지 튀어나오는 걸 보니


찾아오지 않았다면 함께 점심을 먹었을 기세였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갈게. 친구분도 들어가세요.”

“네, 현아 씨도요.”

일부러 던져 본 말에 남자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숨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그는 그 잠깐 사이에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 이름은 현아가 아니라 이현입니다. 중국어과구요.”

“한준이 친구니까 동갑인 거 같은데 말 편하게 하세요. 경영학과 조유재입니다.”

“그럴까?”

남자는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바로 말을 놓았다. 그는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인지 낯을 전혀 가리지 않았고,


예상대로 외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유재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며 손을 맞잡았다.

지켜보던 한준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우리 셋이 같이 점심 먹을까? 나 원래 얘랑 지금 돈부리 먹으러 갈까 했던 거라서.”

“안 돼. 우리 다음 수업 과제 해야 되잖아.”

유재는 대충 지어낸 말을 던졌다. 있지도 않은 과제를 끌어오자 한준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뻔히


알면서도 그는 토 달지 않고 묵묵히 입꼬리만 올렸다. 현이 한준의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그냥 다음에 먹자. 후딱 가서 과제 하십쇼.”


“그래. 연락해.”

“엉.”

남자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한준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가방에 툭 손을 얹으며 쳐다보았다.

“수업은. 쨌냐?”

“이현. 이렇게 불러. 현아가 뭐냐? 느끼하게.”

“…너 수업 진짜 안 들어가?”

“쨀 거야. 어쩌다 친해졌어?”

“정윤 누나가 이 수업 듣는 애 안다고 소개해 줬어.”

그거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네. 유재는 헛웃음을 삼키고는 물었다.

“돈부리 거기 후문 말하는 거지?”

“어. 우리 갔던 데 거기.”

“먹고 싶었으면 말하지 그랬냐.”

어제만 해도 땅기는 게 없다고 해서 같이 라면이나 끓여 먹었건만. 짜증이 났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한준이 픽 웃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녀석이 가방을 홱 당긴 탓에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어깨가 부딪히자 한준이 입을 열었다.

“점심 먹었어?”

“먹으러 갔었는데 별로여서 거의 다 남겼어.”

유재는 아직 밥을 안 먹었을 서한준을 생각해서 슬쩍 밑밥을 깔았다. 반도 안 먹고 나온 건 사실이라 한 번


더 먹으라면 먹을 수 있었다. 한준이 기다린 대답을 내놓았다.

“돈부리 먹으러 갈래?”

“가자.”

흔쾌히 응한 후, 유재는 한준의 어깨를 안은 채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갔다. 한준은 잠깐 휘청거렸지만


바로 중심을 찾고 같이 뛰기 시작했다.

속이 귀신같이 편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현은 담배와 휴대폰을 든 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막 도착한 문자를 보고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었다.
서한준

여기 어때?

Http://blog.mystory.com/02198473567

오후 1:51

레스토랑 후기글로 이어지는 링크였다. 이현은 사진만 대충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한준. 외모만 봤을 땐 잘 놀고 쿨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저번 수업 때도


휴대폰으로 내내 데이트할 때 갈 식당을 열심히 고르고 있더니, 아직도 결정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루 밥
먹는 거에 뭘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냐 물었더니 기념일이라고 했다. 그게 뭐 별건가? 호텔 뷔페나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중 아무 곳이나 골라 예약하면 그만인 것을.

안타깝게도 서한준이 블로그 후기를 열심히 읽어 가며 고른 식당은 구렸다. 맛집으로 유명해 줄을 서서 먹는


곳이라고는 하나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가격대 역시 생색을 내기에 애매했다.

오후 1:52

저게 뭐냐 친구랑 놀다가 배고파서 들어가는 데도 아니고ㅋㅋㅋㅋㅋㅋ 저기 데려가면 여친 빡친다에 오마넌

서한준

그렇게 별로인가?

오후 1:53

오후 1:53

저거 줄 서서 먹는 거 좁아서 그런 거야 넓었으면 존나 널널했을듯

서한준

맛있다고 유명하던데

오후 1:53
오후 1:54

저런 데는 빨리 먹고 일어나야 돼 좁아서 옆 테이블 대화도 다 들리고 어수선하고 별로..그냥 호텔 뷔페 가


인당 한 10-20 잡고

할인이나 이벤트를 잘 찾아보면 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도 괜찮은 뷔페를 예약할 수 있다. 이현은 그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찾아보겠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애’니까.

정윤이 소개할 때 했던 말이 떠올라 실소가 터졌다. 여자들은 저런 순진한 태도에 지나치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었다.

등나무에 도착한 이현은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던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한준의 친구. 이름은 잊었지만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는 마침 비어 있던 벤치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인문관 옆 작은 등나무는


흡연자들의 공간으로, 주로 인문관에서 전공 수업을 듣는 학과의 흡연자 학생들이 여기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보니 매번 보던 사람들을 보곤 했는데,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놈을 보니 자연히 시선이 갔다.

첫인상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키도 거의 자신만큼이나 컸다. 복도에 서한준과 셋이
잠깐 서 있을 때, 그 짧은 사이에도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클럽에 한번 같이 가면 무조건
앞쪽 테이블을 받을 수 있겠다.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말을 걸지 조용히 담배만 피우다가 올라갈지 고민하던
참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곁눈질을 하자 눈이 마주쳤다. 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웃었다.

“서한준 친구. 맞지?”

“어, 안녕.”

반색을 하고 인사하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반가워졌다. 그는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대화를 이었다.

“이름이 뭐였지? 현아밖에 기억 안 나.”

“일부러 이러냐?”

“한 번만 더 알려 줘.”

“이현. 너는? 나도 까먹었어.”

“조유재.”

그는 큭큭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더 알려 주었다. 조유재.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이현은 담배를 내밀며 물었다.

“하나 줘?”

등나무는 흡연자가 아니고서야 오지 않는 곳이다. 담배를 물고 있지도 않으면서 간접흡연에는 아무렇지 않은


조유재가 이상했다. 혹시 담배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먼저 권해봤지만 조유재는 시원하게 눈을 휘며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안 피우나? 물어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유재가 턱짓했다.

“케이스 예쁘다.”

이현은 들고 있던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담배 케이스는 존나 비싸게 주고 산 명품이었다. 일부러 로고가


크게 박힌 것으로 샀는데 알아봐 주니 뿌듯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케이스를 옆으로 치우고는 담배를 한번 깊이 빨았다.

“여기서 뭐 해? 누구 기다려?”

“세 시에 수업 있어서 그때까지 돌아다니면서 시간 때워.”

“한 시간이나 뜨네? 도서관 가서 자. 난 맨날 공강 때 도서관 가서 자는데.”

“자취 안 해?”

“하는데 학교 근처에서 안 해. 이 동네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왜?”

“그냥 길도 더럽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던 이현이 입을 다물었다. 대학가는 길이 지저분하고 술집도 많아서 싫다. 매번 하던


생각이었지만 행여나 이 동네에 살지도 모르는 놈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이현은 재빨리 덧붙였다.

“여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조용한 데가 좋더라고.”

“나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급히 덧붙인 말에서 티가 났는지 유재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현은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난 네가 여기서 자취할까 봐.”

“자취하긴 하는데, 그게 내 욕도 아니고 뭐 어때.”

쿨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하기야 매사에 예민하게 굴고 열등감을 내비치는 놈들은 담배 케이스 하나에도
오만 꼽을 다 주곤 했다. 역시 타고 나길 잘난 놈이라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동네 욕을 주절거리고 싶진 않았기에 이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가


자리를 뜨면 되는 일이었지만 왜인지 자신을 유유히 훑어보는 눈길 앞에서 멍청한 소리를 하기 싫었다.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조유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키 몇이냐?”

“나? 백팔십오 정도?”

“크네. 나랑 비슷한 사람 생각보다 몇 명 못 봤거든. 너도 혹시 농구했어?”

“아니. 유전이야.”

별거 아닌 농담에 유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한번 웃음이 터지고 나자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유재는


장난스럽게 이어 말했다.

“그럼 네 취향인 집은 여기서 멀어?”

“그냥 차로 한 삼십 분?”
“차 타고 통학해?”

유재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문득 얕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며 대답했다.

“어. 전철 타면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근데 차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면허 딴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님이 좀 과하다 싶은 차는 못 사게 하셨거든.”

비싼 차가 아닌 게 걸려 밑밥을 까는 동안 조유재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놈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가 쌕 입술을 휘었다.

“뭐 타는데?”

조유재가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이현은 휴대폰으로 SNS 에 접속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모델명을
대는 것보다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을 보여 주는 게 나았다.

“이게 내 계정인데…… 너도 이거 해? 팔로하자.”

“차 이거야?”

“아, 그건 내 드림카고. 이게 내 차야.”

중고로 반값 이하에 샀지만 새것처럼 깨끗했다. 신경 써서 찍은 사진은 말끔하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조유재는 이현이 SNS 에 올려둔 사진들을 쭉 훑어보았다. 스크롤을 쭈욱 내려 끝까지 훑어본 그가 미소 지었다.

“멋지다. 취향 좋네.”

단순히 ‘차가 좋다’를 훌쩍 넘어선 칭찬이었다. 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냥 좋아하는 거 이렇게 SNS 에 저장해 두면 기분이 좋더라고.”

“외국 살았어? 왜 글을 다 중국어랑 영어로 써 놨냐.”

“아, 내가 외국인 친구들이 많아서. 정기적으로 이태원에서 랭귀지 익스체인지 모임도 주최하고 있거든. 너도
심심하면 놀러 와.”

그럴듯하게 다듬어 꺼낸 말에 유재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너 1 학년 아냐? 진짜 부지런하다.”

“내가 과가 언어학과라서 문화 교류하고 언어 배우고 그런 데에 원래 관심 많아. 모임 여는 거 별로 어렵지도


않고.”

“스터디 룸 빌려서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 가르치고 그런 건가?”

순간 조유재가 따분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이현은 대번에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내가 그런 거 주최할 것처럼 생겼냐? 말이 그렇고 그냥 술 마시는 모임이야.”

“아, 그래? 뭐 그것도 영어는 늘겠다.”

“늘지. 특히 네가 미드에 나오는 슬랭 배우고 싶다? 교과서 영어는 싫다?”

“주입식 수능 교육의 피해자다?”

“그러면 바로 모임 와서 술 까야 돼.”

“솔깃한데? 좀 더 해 봐. 살게.”
“한 세 달만 오면 미드 자막 없이 볼 수 있어요.”

조유재가 왁 웃음을 터트렸다. 수준도 코드도 비슷한 놈을 만나자 간만에 재밌었다. 더 친해지고 싶은데
돌이켜 보니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았다. 이현은 조유재에 대해 더 알 수 있을 질문을 골라 던졌다.

“넌 뭐 재밌는 거 안 하냐?”

“술 좋아해?”

“나? 어, 나 술 좋아해. 너도 좋아해?”

“아니, 난 잘 못 마시는데 넌 좋아하는 거 같아서. 술 모임 정기적으로 여는 거 보통 술 좋아하지 않으면


못하지 않나.”

“술 못해도 오는 애들 많아. 거긴 아무도 술 강요 안 하고 아무 때나 집에 가고 싶을 때 빠져도 돼. 프리한


분위기고 멤버가 고정된 모임이 아니라서 부담도 없어.”

“너 근데 쉬는 시간에 나온 거 아냐? 수업 다시 시작했을 거 같은데.”

신나게 떠들고 있을 때 유재가 시간을 확인하곤 물었다. 어느새 정각이 훌쩍 넘어 있었다. 조금 늦게


돌아간다고 깐깐하게 구는 교수는 아니었다. 이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괜찮아. 좀 늦으면 어쩔 건데?”

“어쩌긴, 찍히지. 들어가. 난 슬슬 가 봐야겠다.”

유재가 어깨를 툭 치고는 일어섰다. 이현은 그를 따라 일어서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줘. 연락할게.”

빤히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유재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는 번호를 찍은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너 한준이랑 밥 먹을 때 불러.”

* * *

한준은 며칠간 하루 종일 검색하면서 골랐던 식당 후기를 또 한 번 찾아 읽었다. 독특한 분위기와 소문난


맛집이라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식당 내부 사진을 여러 장 찾아보며 생각해 보니 현의 말대로 좁고
시끄러울 것 같긴 했다.

무슨 상관이야? 조유재랑 가면 어디든 좋을 텐데. 그냥 무시하려다가도 더 괜찮은 곳을 찾을 능력이 없는 제


처지를 합리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준은 잠깐 검색해서 보았던 호텔 뷔페 사진을
떠올렸다.

깨끗하고 괜찮았다. 음식도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 둔 예산으로는 턱도 없었다. 무작정 고급스러운
곳을 고집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기념일엔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라,
적어도 ‘저게 뭐냐’ 정도는 아니었으면 했다.

이현의 가차 없는 코멘트에 고민이 깊어졌다. 제일 괜찮아 보였던 식당이었는데, 경험이 적어 보는 눈도 영


형편없는 게 아닐까.
차라리 식사 말고 선물을 하나 하는 게 나을까? 괜찮은 브랜드 로션 세트 정도는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기념일이니까 꽃다발도 하나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꽃은 잘 모르지만 꽃을 들고 있는 조유재를 보고 싶었다.
하얀색이나 노란색 꽃이 어울릴 것 같았다. 꽃을 든 유재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 행복해졌다.

예산이 조금 넉넉하면 좋으련만. 한준은 캘린더에 표시한 과외 일정을 훑어보았다. 애매하다. 자주 취소하는
애가 있어서 과외비를 월초에 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다. 횟수가 거의 다 찬 다른 학생 하나는
기념일인 금요일에 수업을 빼야 해서 과외비가 일주일 밀리게 된다. 다른 요일에도 보충이 어렵다.

일단 식당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맛도 있고 공간도 협소하지 않은 곳 중 예산 내에서 식사할 수 있는 곳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한준이 추려 놓았던 식당 몇 개를 하나하나 다시 검색해 보던 때였다.

전화가 왔다. 유재의 이름을 확인한 한준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과외 가고 있어?

“어.”

—저녁은 뭐 먹었어?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나 했더니.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조유재는 식사 여부를 참 성실하게도 묻곤


했다.

“나 도시락 사 먹었어. 계란이랑 볶은 김치랑 같이 파는 거 있잖아.”

—그걸로 되겠냐.

다정한 목소리에 피로가 가셨다. 한준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미소 지었다. 이렇게 그냥 대화만 나누고 있어도
좋은 것을, 혼자 후기 글을 여러 개 읽어 가며 고민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과외 끝나고 연락해.

“야.”

전화가 끊어지기 전, 한준이 유재를 불렀다. 혼자 골머리를 앓느니 같이 의논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주가 백 일 기념일인데 우리 뭐 할까? 이렇게 대놓고 묻는 건 왠지 닭살이 돋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준은 괜히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우리 다음 주에 뭐 할까?”

—금요일?

조유재가 웃으며 되물었다. 역시나 알고 있었다.

—너 그날 과외 뺄 거야?

“응. 맛있는 거 먹자.”

—뭐 먹고 싶어?

“너는?”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맨날 가던 데 가도 되고.

“맨날 가던 데?”
—어. 떡볶이나… 돈가스 먹을래? 너 좋아하는 데 있잖아.

지금 기념일에 분식집에 가자는 거냐 따져 물으려던 한준은 입을 다물었다. 유재가 자신을 생각해서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으니 부담 가지지 말라는 뜻일 터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 자식이 떡볶이라니.

“아, 싫어.”

—특별한 날 앞으로도 존나 많을 건데 뭐 어때. 백 일만 날이냐?

“나 찾아본 데 있어.”

—어디?

울컥해서 뱉은 말에 유재가 물었다. 한준은 답을 망설이며 입술을 핥았다. 열심히 찾았지만 이현 때문에 고민
중이던 곳이 입속에 맴돌았다.

조유재는 좋아할 수도 있지. 함께 메뉴나 숙박을 고를 때도 까다롭게 굴지 않는 놈이다. 한준은 고민 끝에


물었다.

“맛은 있다는데 좀 시끄럽대. 시끄러우면 별로냐?”

—시끄러우면 좋지. 우리 대화가 묻히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을 거 아냐.

“먹고 빨리 나가야 되는 데보단 여유롭게 앉아서 얘기할 수 있는 데가 낫나?”

—야, 먹었으면 나가야 식당도 장사를 하지. 뭐 얼마나 앉아 있으려고?

“그렇지? 잘 고른 거 같다.”

—이거 순 답정너 새끼 아냐.

유재가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주고받고 나니 순식간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설사


형편없다 하더라도 뭐 어떤가 싶었다. 조유재가 장난스럽게 갈구면 마주 웃으면 되는 일이다. 애초에 떡볶이를
먹자는 놈의 기대치가 높을 리 없었다. 한준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그럼 맛있는 거 사 줄게. 찾아본 데 있어.”

—알았어. 끝나고 문자 해.

전화를 끊고 나자 기분이 좋았다. 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수시로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을 저울질하느라 피곤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


지치는 중에도 조유재와 우당탕탕 해내고 있는 연애를 생각하면 즐거웠다. 주고받는 말이나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더 애틋해진 구석이 있었다. 하루 종일 주고받는 연락도, 간지러운 접촉도, 날을
잡고 하는 섹스도 전부 좋았다.

처음 골랐던 식당에서 밥을 사 주고, 커다란 꽃다발도 하나 사 줘야지. 하얀색 꽃이 뭐가 있을까? 배낭 안에


숨겨서 내내 메고 다니다가 집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건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한준은
웃었다.

“다음 주 숙제는 여기까지. 오늘 나랑 덜 고친 것도 혼자 마저 고쳐 보고, 질문 있으면 문자로 찍어서


보내.”
“넵.”

성운이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끄덕였다. 한준은 문득 아홉 시에 가까운 시간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종일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와서도 이 시간까지 과외를 하려니, 저도 저지만 성운이 참 힘들겠다 싶었다.
오늘은 저녁도 거른 모양인지 성운은 과외를 하면서 허겁지겁 김밥 한 줄을 까 먹었다.

조유재와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우엉에 맨밥으로만 끼니를 때운 후 정신없이 문제집을 풀던 때가 떠올랐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칼로리 소모가 커서 이 시간 즈음이면 어김없이 배가 고프곤 했다. 한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썹을 모았다.

“배고프겠다.”

“괜찮아요. 샘, 김밥 까먹지 말고 가져가세요. 여기 참치김밥 진짜 맛있어요.”

성운이 비닐봉지에 김밥을 넣어 챙겨 주었다. 그는 제 저녁을 챙기면서 한준의 몫까지 잊지 않았다.

귀여운 놈이었다. 과제로 속을 좀 썩여서 그렇지 성격도 좋고 어리광도 곧잘 피워서 친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쾌활하던 녀석이었는데 요즘 들어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지 피곤해
보였다. 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니. 안쓰러운 마음에 한준이 김밥을 다시 내밀었다.

“너 배고프면 한 줄 더 먹어.”

“아니에요. 이거 한 줄이 꽤 굵어요.”

“알았다. 잘 먹을게.”

“안녕히 가세요!”

살갑게 인사하는 성운에게 웃어 준 후, 한준은 조용한 집을 빠져나왔다.

성운의 부모님은 맞벌이라 집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말에 보충하러 갔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


본 게 다였다. 그래도 외로운 기색 없이 씩씩하게 공부하네. 한준은 속으로 성운을 기특해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좁은 공간에 김밥을 들고 서자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와 식욕을 자극했다.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한준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밥을 뜯었다. 참치가 두툼하게 들어
있는 끄트머리 김밥 하나를 입에 문 채 버스 정류장으로 걷던 중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박성운 어머니. 발신자를 확인한 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성운이 엄마예요. 지금 통화 가능할까요?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방금 성운이 수업 마치고 나왔는데.”

—아이고, 성운이 잘하고 있나요?

“네. 열심히 하고 수업 시간엔 집중도 잘해요.”

—저녁 안 먹었다고 해서 선생님이랑 맛있는 거 시켜 먹으라고 했는데.

“성운이가 김밥을 사 놔서, 그거 먹으면서 수업했어요.”

—아아, 그렇구나.

서론이 길었다. 한준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본론을 기다렸다. 다정한 웃음소리가 멎고 나서야 그녀는 용건을
꺼냈다.

—선생님. 다름이 아니고…… 성운이가 같은 반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


“아, 네.”

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과외를 그만둘 땐 열이면 아홉 학원이 이유다. 한준은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바삐
머리를 굴렸다. 성운의 과외비는 바로 지난주에 받았다. 8 회분의 과외비를 받았고 오늘까지 3 회분을 했으니
아직 5 회분이 남아 있었다.

—애가 친구들도 좋아하고 같이 공부하면 재밌어하고 해서, 과외보다는 학원이 맞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거든요. 저는 사실 과외가 일대일로 케어를 해 주는 시스템이니까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애들이
엄마 마음 같지가 않잖아요.

“알죠. 성운이는 어딜 가나 잘할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일단 과외비 지불한 것까진 다 하고 가자, 해서 그 학원


일정을 알아봤는데, 거기는 또 아무 때나 받아 주지 않더라고요. 당장 다음 주 아니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요.

“아, 네.”

—그래서 오늘까지만 하고 과외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너무 잘 가르쳐 주셨는데 저도 너무


아쉽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오는 건데.”

입학하자마자 가르쳤으니 반년이 넘었다. 과외비도 과외비였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이 든 참이라 섭섭했다.

—오늘 성운이가 말 안 했나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인사하라고 했는데.

한준은 휴대폰을 고쳐 잡고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참치김밥 한 줄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집중도 잘하고


열심히 한다 했더니, 마지막 인사였던 모양이다. 성운의 말대로 김밥에는 참치가 실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마 머쓱해서 말을 못 한 거 같아요.”

—애가 참,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어떡하나 몰라요. 성운이가 저랑 얘기할 때는 선생님이랑 헤어지는 게
서운하다고 그랬었는데.

“학원에서도 잘할 거예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리고 저… 과외비 지금 제가 확인했는데 5 회치가 선지급이 된 상태인 거죠?

“아, 돌려드리겠습니다.”

한준은 바로 대답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5 회분의 수업료는 당연히 반납해야 했다.

—제가 너무 죄송스러우니까 4 회치만 받을게요.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과외비는 5 회분 전부 드릴 거고요, 성운이 학원에 잘 적응하길 바라고… 혹시
또 보충이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 주세요.”

—꼭 그럴게요. 너무 감사했어요, 선생님.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기 무섭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준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성운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신 못 보겠지? 서운한 마음을 삼킨 채 그는 돌려줘야 할 돈을 계산해 보았다.
기념일에 쓰려고 예산으로 잡아 두었던 돈을 전부 뱉어 내고도 모자랐다.

긴 문자를 보내고 난 후, 한준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김밥 꽁다리가 가슴에 콱 걸린 듯


답답했다.

* * *

솔직히 말하고 밥은 그냥 사 달라고 해야겠다. 대신 선물을 줘야지.

며칠을 꼬박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새로 과외를 구하려고 찾아봤지만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땅을


파서 돈이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었다. 기념일은 당장 이번 주 금요일이다.

선물은 이미 주문해 두었다. 확 줄어든 예산을 가지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한준은 효과가 좋다고 유명한
립밤을 세트로 하나 샀다. 조유재는 트든 말든 입에 뭘 바르고 다니는 놈이 아니라서, 이번 기회에 선물하면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유재의 튼 입술을 지적했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던
참이었다.

꽃은 다음에 주자. 유재 말대로 앞으로 이백 일도 있고 삼백 일도 있을 테니까.

아쉬움을 달래며 주문 내역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엎어져 있던 이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속 아퍼.”

“술 작작 마셔.”

“1 학년 때 안 마시면 언제 마시냐? 전공도 아닌 이딴 교양 수업, 안 째고 나온 것만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현은 끙끙대면서도 주절주절 말이 많았다. 한준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립밤 후기글을 눌러 읽어


보았다. 후기 사진을 보니 포장이 고급스럽고 예뻤다. 애인이나 친구 선물로 샀다는 글이 많아 안심이 됐다.

“맞다. 나 저번에 네 친구 만났어. 조유재.”

사진을 확대해 보고 있던 중, 이현이 불쑥 말했다. 한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재? 어디서?”

“나 등나무에서 담배 피우다가 우연히 봤어. 재밌는 애더라? 나랑 코드가 잘 맞아.”

“그래? 무슨 얘기 했냐?”

이현은 재밌는 성격을 갖고 있긴 했지만 조유재와 유달리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진 않았다. 궁금해서 던진


질문에 이현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걔도 나처럼 차에 관심이 좀 있는 거 같더라고? 뭐 타냐고 물어봐서 내 차 사진 보여 주고 그랬더니


멋있다고 하던데.”

“차?”

“어. 너 시간 나면 셋이 드라이브나 가자. 내가 자주 놀러 다니는 동네 보여 줄게. 너 클럽은 안 좋아하냐?”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잡으면서 대화는 끊겼다. 한준은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조유재가 차에 관심이 있다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취방이 코앞인데 차를 탈 일이 있나?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종일 같이 있는 놈이라 동선을 알기에 더욱 의아했다.

하긴, 필요하지 않아도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지. 당장 타진 않지만 가까운 미래에 하나 살 수도 있을 테니까.
어떤 스타일의 차를 가지고 싶을까. 멋있다고 생각한 차는 어떤 걸까. 차에 대해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었지만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전부 듣고 싶었다. 딴 세상 이야기라도 그게 조유재의 세상이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리자 삼만 원짜리 립밤 세트 상세 페이지가 떠 있었다. 리뷰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조유재가 제게 주식 얘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걸로 울고불고 다투었던 게 까마득하게
어렸을 때의 일 같았다.

이따가 만나면 물어봐야지. 한준은 미소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늘 점심 같이 먹는 거지?”

남아 있는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울 생각을 하고 있던 한준이 움찔 눈을 들었다. 이현은 벌써 가방을 다 챙겨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연하다는 태도에 당황한 한준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저번 주에 갑자기 나타난 유재 때문에 식사는
다음 주로 미루자고 흘리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대로 말하고 취소했어야 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웬만하면 한 끼 사 먹겠지만 선물을 사고 과외비를 다 토해 낸 후라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한준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 오늘은 좀.”

“왜?”

“기념일 때문에 지출이 커서 다 털렸거든.”

또 한 번 약속을 미루는 게 미안해서 한준은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번 주부터 기념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던 걸 빤히 알 테니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살게.”

“어? 아니야.”

“다음에 네가 사. 네가 먹자고 해서 약속도 안 잡았는데 나 두 번이나 바람맞히지 마라.”

웃으며 하는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주저하던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달아 약속을 취소하는 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다음 달에 과외비가 들어오면 사면 되니까.

“뭐 먹자고 했지? 돈부리였나?”

“어. 가자.”

강의실을 벗어나 걷는 동안에도 머리가 쉬지 않고 돌아갔다. 오늘 안 먹은 컵라면으로 내일 점심을 때우면,


다음 과외비가 들어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문관을 나서서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때, 이현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한준은 그의 등을 툭 치며


물었다.

“왜 그래?”
“여기서 유재 만나서 같이 가자. 이리로 오라고 했어.”

“뭐?”

한준이 찡그리며 되물었다. 이현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셋이 같이 먹자고 했었잖아.”

“걔 지금 수업 있을걸?”

“다 왔다는데?”

이현이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돌아본 한준이 작게 탄식했다.

저편에서 조유재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밝게 웃는 조유재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가 가끔 하는 지랄을 오늘도 어김없이 볼 수


있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한준은 신중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이현한테 뭐라고 했더라? 기념일 때문에 다 털렸다고 했었지.
잔고가 바닥난 건 사실 기념일을 챙기느라 그런 게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과외비 환불 때문이었는데, 안일하게
변명했던 게 문제였다.

잡담을 하다가 행여나 장난으로라도 그 얘기가 나온다면 유재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계산할 때 필연적으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이현이 제 몫을 계산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유재가 이유를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잔고가 얼마더라? 이번 한 끼를 긁을 돈 정도는 남아 있을 듯하니 그냥 내겠다고 해야겠다. 한준은 한숨을


삼키며 유재를 돌아보았다. 뺀질뺀질 쳐다보고 있는 놈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새끼는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중국어 수업은 이제 아예 안 듣기로 한 건가? 당연하다는 듯 이


자리에 와 있는 조유재가 반갑다기보단 황당했다. 시선이 마냥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유재가
웃는 얼굴 그대로 눈썹만 슬쩍 치켜 올렸다.

‘뭐, 임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상 뱉어낸 말은 그보다 훨씬 다정했다.

“표정이 안 좋네. 어디 아파?”

“아니. 야, 너 근데 중국어 버렸어? 원래 지금 수업 듣고 있을 시간이잖아.”

“고민 중이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유재가 앞장섰다. 혹시 이현이 신경 쓰여서 중국어 교양을 버리기로 한 걸까? 한준은 더
캐물으려다가 억측이 과한 듯해 그만두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돈부리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 한준은 고민했다. 별것도 아닌 문제로 유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바로 결심이 서지 않았다. 아예 지금 이현에게 밥을 살 필요가 없다고 문자를 보낼까?
옆에 있으면서 문자를 했다가는 이현이 오히려 말을 꺼낼 위험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려 자리를 비울 때를 노려 얘기하는 게 최선이었다. 한준은 묵묵히 찡그린 채
걸음을 옮겼다.

식당엔 마침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조유재는 항상 그러했듯 먼저 자리를 잡은 후


메뉴판을 가운데에 놓아주었다. 이현은 자연히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남아 있는 빈 의자 둘 중,
한준은 이현의 옆자리를 택했다. 뭣하면 테이블 아래로 문자를 보여 준다든가 하여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현은 눈치도 빠르고 똑똑하니, 미리 눈치를 주면 섣불리 행동하진 않을 터였다.

이현의 옆에 앉아 메뉴판을 펼치려는데 테이블 아래로 발이 툭 부딪쳤다. 눈을 들자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조유재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 임마. 한준은 유재를 흉내 내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유재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메뉴판으로 주의를 돌렸다.

“우리 저번에 같이 왔을 때 너 에비동이 제일 맛있다고 했지? 우리 특에비동 먹을까?”

“난 그냥 가츠동 먹을래.”

한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에비동이나 가츠동이나 둘 다 맛있었다. 이현이 메뉴를 대충 훑어보더니 한준의
팔꿈치에 제 팔꿈치를 바짝 붙이며 물었다.

“가츠동 맛있어?”

“어. 여기 다 맛있어.”

“그럼 나도 그거. 유재 너는?”

유재는 얌전히 테이블 위에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들어 주문했다. “여기 가츠동 세 개요.”

주문을 했으니 메뉴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끔 화제를 잘 골라야 했다.
이현은 좋아하는 주제에 한해 말이 많은 편이었다. 한준은 이현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맞다. 아까 물어보고 싶었는데, 나도 차 사진 보여 줘.”

“아, 그래.”

이현이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꺼내 차 사진을 보여 주었다. 고급스러운 광이 도는 검정색 차. 차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한준의 감상은 그게 전부였지만, 유재가 멋지다고 평할만큼 그와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한준은
사진을 괜히 확대해 보면서 운을 띄웠다.

“조유재, 너 차 좋아한다며. 어떤 거 좋아하냐?”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유재가 눈썹을 둥글게 올렸다. 그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대답했다.

“나 차 잘 몰라.”

“그래? 현이가 네가 관심 많아 보인다고 그랬는데.”

“그냥 뭐, 차 끌고 다닌다니까 궁금해서 그랬지. 브랜드나 모델 이런 거 하나도 몰라도 좋아 보이긴 하니까.”

유재가 이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현은 우쭐하여 사진 여러 장을 더 보여 주었다. 번쩍거리는 계기판과


핸들을 잡고 있는 팔목 그리고 시계가 잘 보이는 사진들이었다.

언젠간 조유재도 차를 타겠지? 이렇게 밤에 야경을 보면서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운전하는


조유재를 보고 싶기도 했다. 복싱을 시작했을 때처럼, 처음엔 잠깐 헤매다가도 금방 감을 잡을 것이다.
조유재는 못하는 게 별로 없었다. 한준은 이현의 사진 수십 장을 하나하나 전부 넘겨보며 운전하는 조유재를
상상했다.

차라니. 아파트 놀이터에 있는 흔들 목마에 나란히 올라타 미친놈들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눈 깜빡할 사이에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드라이브 재밌겠다.”

한준은 휴대폰을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이현이 그 말에 바로 캘린더를 띄웠다.


“날 잡아. 너 저녁때 언제 시간 돼?”

“나 저녁은 안 돼.”

“일주일 내내 안 되진 않을 거 아냐. 너 될 때 내가 맞출게. 내가 좋은 데 데려가 준다.”

이 자식은 나랑 얼마나 친하다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는 거지? 사교성이 좋은 거야 장점이었지만 데려가


준다는 곳은 술집일 게 뻔했다. 매일 아르바이트가 있어 안 된다고 말하려던 한준이 입을 다물었다. 돈을
버느라 바쁘다는 말을 꺼내면 이번 기념일 얘기가 튀어나올까 걱정이 됐다.

주저하는 사이 유재가 대신 대답했다.

“얘 맨날 과외하느라 시간 안 돼.”

“주말에도?”

“어.”

“무슨 알바를 그렇게 하루 종일 하냐. 탈탈 털어서 여친이랑 데이트하려고?”

이현이 옆구리를 찌르며 짓궂게 눈을 휘었다. 수저가 앞에 놓이는 소리에 한준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숟가락을 똑, 소리 나게 테이블에 놓아 주던 조유재와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웃고 있었지만 방금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거스른 게 확실했다. 돈부리고 뭐고 그냥 집에서 혼자 컵라면이나 먹고 싶었다.

화제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한준은 이현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주의를 끌었다.

“너 운동은 안 하냐? 우리 복싱 동아리 하는데 관심 있으면 놀러와.”

“복싱? 중앙 동아리야?”

“어. 파이트 클럽.”

“뭐냐, 그 쪽팔리는 이름은?”

“유재도 처음에 너랑 똑같은 반응이었는데 결국 재밌게 잘하고 있어.”

“어쩐지 둘 다 몸들이 좋더라니. 복싱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잔근육? 뭐 그런 거 예쁘게 붙는다던데, 진짜


그래?”

“그런 건 모르겠고 탄탄해지긴 해.”

“복싱하면 종아리 알 존나 생기지 않냐? 줄넘기 빡세게 하고 그러면 장난 없을 거 같은데.”

이현이 상체를 슬쩍 뒤로 빼서 테이블 밑을 보았다. 긴 바지를 입고 있는 한준의 종아리를 훑어보던 그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마침 반바지 차림이었던 조유재의 다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매끈하네?”

“뭐…… 그렇지.”

뭐라고 맞장구는 쳐야겠고 딱히 할 말은 없어, 한준은 목뒤를 긁으며 얼버무렸다. 유재의 긴 다리에서 시선을
돌린 한준이 쩝 입맛을 다셨다. 조유재가 제 애인이고 잘난 놈이긴 했지만 남한테 다리까지 칭찬하고 있기가
뭐했다.

다른 곳도 다 잘생겼지만 조유재는 다리가 특히나 길었다. 길고, 매끈하고, 탄탄했다. 늘씬한 허벅지 안쪽에
손을 대보면 돌처럼 단단했다.

생각하다 보니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제 다리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재는 컵 세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하나씩 물을 따르고 있었다. 어딜 가나 매너 하나는 좋은 놈이었다. 한준이 큼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였다.

아직 테이블 밑을 쳐다보고 있는 이현의 앞에 유재가 물컵을 쑥 밀어놓았다. 움직임이 급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자리를 찾아가던 손이 컵 아래쪽을 쳤다. 가장자리까지 물이 찰랑찰랑 들어차 있던 컵이 대번에
고꾸라졌다.

“으악!”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이현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왈칵 쏟아져 나온 물이 그의 티셔츠 아랫부분과


바지를 적셨다. 손 쓸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한준이 의자를 뒤로 빼 물러섰다. 테이블 가장자리로 줄줄 흘러내리는 물을 목격하고 휴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때, 이미 조유재는 휴지를 한 뭉텅이 뽑아 건네고 있었다.

“아, 진짜 미안. 괜찮아? 물 주려다가 실수했어.”

“괜찮아. 물은 어차피 마르니까.”

“미안해. 여기 휴지.”

“나 좀 씻고 올게. 화장실 밖에 있나?”

“화장실 저기 밖에 있어.”

이현은 젖은 옷을 대충 털어 내고 유재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휴지로 테이블을 닦던 한준이 멈칫 눈을 들었다. 바로 지금이 이현에게 제 사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참이었다.

따라가서 오늘 식사는 알아서 계산하겠다고만 하면 되었다. 한준은 이현이 사라진 쪽을 고개를 길게 빼고


보았다. 한 명씩 들어가는 좁은 화장실이 아니라 건물 화장실일 테니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아주 눈을 못 떼는데.”

슬슬 따라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쯤, 갑작스러운 한마디가 날아왔다. 가볍게 흘릴 수 없도록 대놓고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한준은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보았다.

“뭐?”

“눈을 못 뗀다고.”

조유재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토라진 듯한 얼굴이 귀여웠지만 오늘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준은
유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달래고는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뭐?”

“화장실 갔다 올게.”

“계속 쳐다보더니 하필 지금 따라가겠다고?”

“그냥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거니까 헛소리 좀 하지 마.”

“참아.”

돌아서려던 한준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성질을 누른 채 되물었다.


“뭐?”

그러자 조유재는 생글거리며 손을 잡았다. 더운 날도 아닌데 맞잡은 손이 뜨겁고 축축했다. 한준은 유심히
유재를 살폈다.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목이 뻣뻣했다.

“이현 돌아올 때까지 참으라고. 심심하게 나 혼자 두고 갈 거야?”

방금 던졌던 명령조의 한마디보다 훨씬 부드럽게 정돈된 말이었지만 한준은 조유재를 잘 알았다. 눈앞에서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고 있는 놈은 사실 보기보다 훨씬 골이 난 상태일 것이다.

그래도 일단 이현에게 얘기하는 게 최선이었다. 한준은 유재의 손을 마지막으로 한번 꽉 잡았다가 놓고는


말했다.

“급해. 금방 올게.”

젖은 옷을 정돈하는 거라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너무 미적거렸다. 한준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 건물


화장실을 찾았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던 그가 귀를 곤두세운 채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발소리가 좁은 복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한준이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조유재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따라오고 있었다.

“뭐 해?”

“나도 가려고. 밥 먹기 전에 손 씻고 싶어.”

짧게 답한 후, 유재는 잠깐 멈춰 서지도 않고 그대로 한준을 지나쳐 걸었다.

아오, 저게 진짜. 한준은 이를 악문 채 유재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마침내 화장실에 발을 들였을 때,


앞장선 유재가 멈춰 서는 바람에 등에 가슴이 부딪쳤다. 어깨 너머로 놀란 얼굴의 이현이 보였다.

“뭐야, 너네?”

그는 바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털어 내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다 여기 있으면 지금 테이블 비어 있겠다. 직원 존나 당황하는 거 아냐? 빨리 와라.”

이현이 성의 없이 손짓하며 떠나고 나자 화장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건 조유재였다. 그는 세면대


앞에 서서 느긋하게 손을 씻었다. 유재의 등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헛웃음이 났다.

늑장을 부리다가 결국 말을 못 했다. 새삼 이 상황이 웃겼다. 친구랑 돈부리 한 번 먹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건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돈에 쪼들리며 사는 건 괜찮았다. 컵라면도 먹을 만했고 아르바이트로 피곤해도 버틸


만했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놈 앞에서 구질구질해지는 순간들.

맥이 탁 풀리자 더 생각하기 싫었다. 한준은 눈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뒤를 돌아 나가려던


그가 멈칫 턱을 들었다. 조유재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유재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냥 나가?”

“…….”

“못 참을 지경이라서 내가 조금만 기다리라는 데도 뿌리치고 온 거 아니었어?”


한준은 그제야 유재의 눈에 제 행동이 이상해 보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와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으니.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입술이 벙긋거렸다. 솔직하게 털어놓기엔 너무나 구구절절하고
옹색한 이야기였다.

가르치던 애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과외비 일부를 돌려줘야 해서…… 같이 먹자고 해 놓고 또 약속을 취소할 수가
없어서…… 다음에 사면 되니까…….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그때그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한 선택. 그 변변찮은 과정을 낱낱이 설명해야 한다니
속이 쓰리다 못해 모멸감까지 들었다.

“싸.”

그때, 흐르던 의식을 날카로운 한마디가 자르고 들어왔다.

바로 이해하지 못한 한준이 고개를 들었다. 유재는 다시 한번,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싸라고. 그러려고 온 거잖아.”

그는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턱짓했다. 한준은 유재가 가리킨 소변기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목구멍이 틈 없이 들러붙었다. 꽉 닫힌 속 안에서, 유재의 날 선 한마디가 심장을 찔렀다. 침을 삼키자


신맛이 났다. 그 맛이 역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한준은 잇새로 말했다.

“그따위로 말할래?”

“급하다며. 아니야?”

조유재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의 신경질적인 미소를 마주한 채 한준은 발을 뻗었다.

한 발짝 다가서기 무섭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중년 남자 한 명이 그들을 뚱하게 번갈아 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준은 이를 악문 채 화장실을 나갔다. 유재가 그 뒤를 따랐다.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써, 애인 옆자리를 두고 외간 놈 옆에 앉아, 내내 애인보다 외간 놈 얼굴을 많이


쳐다봐, 외간 놈이 지 다리 품평하는데 얼굴이나 붉히고 있어, 이제는 거짓말을 하고 화장실까지 쫓아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질투에
미친놈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어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열받을 만한 일이다.

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평소엔 관심도 없던 차 사진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 같이 수업을


듣다가 마음이 가기라도 한 건가? 도통 안 하던 짓을 하는 서한준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유재는 한준의 뒤를
쫓으며 애써 불안을 가라앉혔다.

돌아간 식당에서는 이미 이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그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테이블 위엔
주문한 메뉴가 모두 나와 있었다.

“야, 빨리 와. 다 식겠다.”

“한 명도 테이블에 없어서 놀라셨대?”

“몰라? 나 오니까 이미 나와 있었어.”

서한준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태평히 이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유재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자리에 앉았다. 저 둘이 나란히 앉아 떠드는 걸 보며 식사를 해야 한다니, 입맛이 돌 리가 없었다. 마지못해
수저를 들자마자 이현이 킁 코웃음을 쳤다. 밥맛 떨어지는 소리였다.

“너넨 근데 무슨 화장실도 같이 가냐. 동시에 신호 온 거?”

“밥 먹는데 화장실 얘기 하냐?”

유재는 웃으며 농담을 했다. 웃어넘기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아는지, 서한준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히 식사에
몰두해 있었다. 볼이 불룩해지도록 밥을 물고 우물우물 씹어 넘기면서.

지금 밥이 넘어가나? 순간 확 열이 올랐지만 혹시 그 정도로 배가 고팠나 해서 안쓰러운 마음 역시 들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을 때도 이 시간 즈음이면 항상 배고파하던 녀석이었다.

유재는 열받은 채로 손을 들어 주문했다.

“여기 새우튀김 사이드 하나 추가해 주세요.”

“새우튀김?”

이현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유재는 메뉴판을 펼쳐 튀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기 새우튀김 맛있어. 비주얼 봐라.”

“에비동 먹고 싶었으면 시키지 그랬냐?”

서한준이 불쑥 끼어들어 빈정거렸다. 굳이 따로 새우튀김을 주문해서 얹어 먹을 거면 처음부터 에비동을


시키라는 소리였다. 지 가츠동 위에 새우튀김 하나 얹어 주고 싶은 마음도 모르고 어디서 적반하장인지.
유재는 주먹에 불끈 힘을 준 채 미소 지었다.

“같이 하나씩 얹어 먹으면 좋잖아.”

“아, 우리도 하나씩 주려고? 땡스!”

“당연히 하나씩 주지. 나 혼자 먹겠냐?”

새우튀김 하나에 신이 나 하는 이현에게 웃어 주는 동안에도 온 신경은 서한준에게 닿아 있었다. 한준은


어느새 무심하게 식사에 열중해 있었다. 한 번 힐끔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보니 점점 열이 뻗쳤다.

한창 좋아야 할 시기에 벌써부터 이렇게 뒷전이 된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그따위로 말을 하냐고? 그럼, 다른
남자를 화장실까지 따라갔다가 길이 어긋나니까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하는 놈한테 말이 좋게 나가?

“현아.”

그때, 한준이 이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해 속이 끓었다. 고개를 들자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한준과 눈이 마주쳤다.

한준은 심드렁하게 유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 중국어 교양 자꾸 째는데, 중국어 재미 붙이게 좀 꼬셔 봐.”

“엥. 중국어 왜 째? 재미없어?”

이현이 다리를 달달 떨면서 물었다. 유재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한준을 마주 보았다. 갑자기 중국어 수업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이 자리에 자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영 못마땅한 기색이더니, 새 친구와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유재는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난 영 재미를 못 붙이겠네. 한자가 싫어.”


“그래도 중국어 잘 배워놓으면 존나 유용해.”

“팁 좀 줘 봐.”

“일단 나부터 팔로해. 그럼 내가 초급 중국어로 너한테 댓글 달아 줄 테니까 그거 공부해. 하루에 한 번 일상


중국어 표현 무료 제공.”

“그런 식으로 팔로워를 늘리시겠다?”

그 말에 이현이 건들건들 상체를 들썩였다. 가만히 눈만 굴리며 그들을 바라보던 한준이 피식 웃었다.

“둘이 쿵짝이 잘 맞는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러네.”

아무렇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유재는 뒤따른 실소의 의미를 알았다. 자신이 사실 이현에게 관심이라곤 좆도
없다는 걸, 서한준은 뻔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새우튀김 나왔습니다.”

그때, 주문한 새우튀김이 나왔다. 막 튀겨 노릇노릇한 튀김 세 개가 큼직했다. 접시를 가운데에 놓기 무섭게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이현이었다.

“잘 먹을게. 엄청 통통하네.”

“맛있게 먹어.”

이현이 튀김 하나를 전부 먹어 치울 때까지도 서한준은 새우튀김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바삭바삭한 튀김옷


때문에 입천장이 다 까져도 아랑곳 않고 복스럽게 먹어 치우던 녀석이, 일부러 보란 듯 저렇게 굴고 있었다.

이현이 갑자기 짝 손뼉을 쳤다.

“방금 중국어 얘기하다 보니까 생각나네. 야, 유재는 술 잘 안 마시는 거 아는데 너도 안 마시냐? 나


이태원에서 외국인 애들이랑 교류하는 거 너도 와.”

그는 신나게 재잘거리며 옆에 앉은 한준을 어깨로 툭 밀었다. 얼마 먹지도 못하고 필름이나 픽픽 끊기는


주제에, 한준은 태연하게 헛소리를 했다.

“안 마시진 않아.”

“너 한 병 겨우 마시고 필름 끊기잖아.”

유재가 생글거리며 덧붙인 말에 한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거야 작정하고 취하려고 먹으면 그러는 거고.”

“나랑 마셨을 때도 작정하고 취하려고 먹었다고?”

“어.”

뻔뻔한 대답에 유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작정하고 취할 작정이었다니 아주 대단한 놈이었다. 그렇게


작정하고 꼬셨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꼬셔서 사귀기로 해 놓고, 백 일도 안 됐는데 화장실까지 외간 놈 뒤를 졸졸 따라가?

지켜보던 외간 놈이 끼어들었다.

“술 잘 못해도 돼. 너도 시간 되면 이태원 놀러 와. 내가 외국인 친구 소개해 줄게. 주말 아무 때나 시간


나면 콜.”
“재밌겠다.”

“너네 온다고 하면 내가 픽업 갈게. 드라이브하면서 가끔 분위기도 좀 환기해 주고 그래야지. 문화 교류도


하고, 어? 우리 술만 마시지 않아.”

이현은 한준을 향해 반쯤 돌아앉은 채 떠들어댔다. 열려 있는 자세에 한준의 어깨 역시 자연히 돌아갔다.


유재는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한번 같이 시간 날 때 있으면 연락할게.”

“내가 문자 할게.”

서한준은 굳이 ‘내가’로 주어를 바꿔 한 번 더 대답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속이 긁혔다. 인내심이


바닥 난 유재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가만가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재밌을 거 같은데 나도 데려가.”

“그래. 다 같이 가자.”

이현이 한준을 옆구리로 쿡 찔렀다. 진심으로 드라이브에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서한준은 이어 물었다.

“바 같은 데서 하는 거야? 무슨 술 마셔?”

“그냥 그때그때 장소 정해서 다양하게 돌아다녀. 보통 바를 많이 가. 그런 덴 맥주나 양주, 칵테일, 없는 게


없으니까. 너 술 뭐 좋아하냐?”

“난 소주랑 맥주밖에 안 마셔 봤는데, 애들 말로는 사람마다 맞는 술이 있대.”

“맞아. 나는 와인이 완전 안 받아.”

나란히 앉아 즐겁게 떠드는 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숨이 흐트러졌다. 단순히 분노라고 칭하기엔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조였다. 유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턱을 괴었다.

“재밌겠네.”

간신히 한마디를 거들었을 때, 한준이 새우튀김을 집어 들었다.

다 식었을 튀김을 절반 뚝 베어 문 채, 한준은 어색하게 제 그릇 가장자리만 한참 훑어보았다. 남은 밥을


마저 떠넣은 다음 나머지 새우 절반을 우물우물 먹어치웠다.

“맛있다.”

기름에 반질반질해진 입술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린 한마디. 그 짧은 한마디에 가슴을 빳빳하게 조이던 긴장이
풀렸다. 서한준이 힐끔 눈을 들어 올리자 시선이 만났다. 유재는 그가 손에 묻은 기름을 티슈에 비벼 닦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다른 곳을 보다가 어김없이 제게 돌아오는 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내장이 꼬인 듯 거북하던 속이 한결 나았다. 유재는 다시 수저를 들고 멈췄던 식사를 이었다.

“내가 살게.”

계산대 앞에서 이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배도 아니고 동기끼리, 동아리도, 같이
듣는 수업도 없는 사이에 얻어먹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한준 역시 마찬가지다. 유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왜 사. 선배도 아니고.”

“어차피 한준이 거 내가 사기로 했던 거라 계산 귀찮잖아. 너도 그냥 나중에 밥 한 번 사.”

네가 왜? 웃으며 대꾸하려던 유재가 입을 다물었다. 이현의 어투로 미루어 보건대 미리 한준과 약속이 된
듯했다. 등 뒤에서 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외비 다음에 들어오면 내가 사기로 했어.”

“여친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번 주부터 종일 식당 예약한다 선물 고른다 하더니 다 털렸대.”

이현이 히죽거리며 덧붙인 말이 순식간에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번 흘려들은 말이 다시 돌아와 바짝


곤두선 신경을 건드렸다.

카드를 내미는 이현을 막아선 찰나의 순간, 유재는 한준의 얼굴을 목격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시선.
그리고 낯선 빛으로 붉어진 목.

유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알았으면 진작 신세 갚았을 텐데.”

먼저 카드를 낸 유재에게 밀려 이현이 한 발짝 물러섰다. 그는 지갑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물었다.

“아, 한준이가 너한테 돈 빌려줬어?”

“내가 많이 얻어먹었지. 오늘은 내가 살게.”

유재는 더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잠깐 보았던 서한준의 표정이 또렷하게 뇌리에 남았다. 함께 배고팠을
때도, 고백하고 뒤집어지게 싸웠을 때도, 단 한 번 본 적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색으로 물든 얼굴. 그의 온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속이 뒤집어졌다.

“커피 한잔할까? 커피는 내가 쏠게.”

식당을 나오자마자 이현이 근처 카페를 가리켰다. 유재는 적당한 미소를 올린 채 한준을 돌아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마주한 한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곧 기다리던 대답을 했다.

“아니, 나는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눈 좀 붙이려고.”

“아, 그래? 그럼 그냥 다음에 보자. 시간 나면 잊지 말고 연락하고.”

이현은 쿨하게 인사하고는 터벅터벅 걸어 멀어졌다. 제자리에 서서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좇던 유재가


돌아보았다. 이현이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나한테 안 한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우리 집 가서 얘기 좀 할까?”

한준은 가방을 고쳐 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수없이 나란히 걸었던 보폭이 자꾸만
어긋났다. 조금 늦춰서 기다리면 앞서가고, 따라잡기 무섭게 다시 뒤처졌다. 표정은 정돈되었지만 서한준의
귓가는 여전히 붉었다. 억지로 침을 삼켜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 속이 울렁거렸다.

오직 서한준만이 이처럼 격렬한, 펄떡펄떡 살아 숨 쉬어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학창시절엔 가난했을지언정 거의 모든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공부 머리가 있어서 조금만 하면 쉽게


남들을 추월할 수 있었고, 잘 타고난 외모로 쉽게 호감을 얻었으며, 열받게 구는 새끼들은 눈앞에서 치워 내
다신 안 봤고,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어른들의 신뢰를 샀다. 부모는 독립할 날만 세면서 무시하면 인생이
편했다. 대학에 입학해 세상에 나오면서는 더욱 멋대로 자유를 만끽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태평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서한준이 짓는 표정 하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돌아 버릴 지경이라니.

“과외를….”

오피스텔 문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내내 조용하던 서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외를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과외비 일부를 돌려줬어. 그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지출이 커서 그런 거지
기념일 준비한다고 오버한 거 아니야.”

유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어젖힌 채 돌아보자 한준이 마지못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을 벗는 한준의 뒤로 문이 닫혔다. 유재는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며 물었다.

“그럼 그 자식이 네가 하지도 않은 말을 옮겼다?”

이현은 한준이 기념일 준비로 털렸다고 했다. 그런 말을 멋대로 상상해서 했을 것 같지 않았다. 한준은 한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걔한테 이런 거 구구절절 떠들 필요 없잖아. 그냥 오늘 밥 같이 못 먹는다고 대충 둘러대다가 그랬어.”

“…….”

“그냥 취소하려고 하니까 두 번이나 바람맞히냐고 서운해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한번 얻어먹고 다음에 내가


사야지, 했어. 네가 올 줄 알았으면 그냥 취소했을 거야.”

“내가 안 왔으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건 독이라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유재는 꽉꽉 씹어 삼켰던 감정을


잇새로 내보냈다.

“그럼 끝까지 나한테 말 안 했겠네. 과외 그만둔 것도, 사정 어려운데 기념일 챙겨야 되는 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빚진 것도?”

“무슨 또 빚을 졌대?”

“화장실 왜 따라갔어?”

“그냥 내 건 내가 계산한다고 하려고 했어. 쓸데없이 너랑 다투기 싫어서.”

이렇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었다는 듯 한준은 말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지워졌던 색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내 얘기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잖아.”

“내가 있는데 왜 그래야 되지? 다른 놈한테 하는 소리 나한테는 왜 못 해.”

“…….”

“비위 맞춰 가면서 받는 용돈에 과외로 번 돈까지, 나는 딱히 필요도 없는 돈이 차고 넘치는데 왜.”

“이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니까—.”

“알아서 한 게 이거야?”

한준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상기되었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있었다.


한준은 한참 말이 없었다. 가방을 멘 채로, 겨우 신발만 벗고 문가에 서서.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점차 평소의 낯빛을 되찾았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입이 열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너랑 나누면 두 배가 돼.”

무슨 뜻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한준이 남은 말을 마저 뱉어 냈다.

“네가 나눠 질 슬픔까지 전부 다 내 거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하는 서한준은 의연한 얼굴이었다. 단순히 자존심이 상해서 의지하기 싫다는 연약한
소리가 아니었다. 유재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역시 한준이 느꼈을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제
것처럼 느꼈기에 그토록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한준은 뒤를 돌아, 그대로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내가 누구 만날 때 따라 나올 필요 없어. 네가 걱정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뭐?”

“나 수업 듣고 돈 버느라 새 친구 사귀면서 놀러 다닐 여유 없어. 드라이브도 술자리도, 초대해 주니까


분위기 맞추려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나 하는 거지. 다 아는 놈이 뭐 하러 쓸데없는 일에 일일이 질투하면서
힘을 빼?”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한준이 비스듬히 미소 지었다. 웃음을 머금은 눈이 차가웠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히고 나갈 줄 알았지만 그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말 매력 없지 않냐?”

“…….”

“하기 싫더라, 너한테.”

한준은 조용히 미소를 거두고는 등을 돌렸다. 유재는 답답한 가슴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4 권에서 계속>

@ㅋㄹ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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