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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하태진
발행일 2021 년 7 월 8 일
8.
별을 찾아서
한숨도 못 잤다.
유재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강의실로 향했다. 술 한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지금껏 겪었던 그 어떤 숙취보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기분이 따랐다. 머리가 멍할 정도로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어젯밤 집행부 일을 끝내고
나서 녹초가 되어서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든 건 아닐까. 사실 어제 한준을 찾아 체육관에 갔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모든 게 다 자신의 망상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결국 다음 날 오전 강의 시간에 이르렀다.
“왔냐?”
“어.”
유재는 열심히 강의 중인 교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수없이 돌려 보았던 기억을 또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체육관 탈의실. 낡은 로커 룸. 막 씻고 나와 젖어 있던 서한준에게서 나던 보들보들한 샴푸 향. 여백 하나
없던 대화. 숨 막히던 공기. 눈물.
그리고 키스.
사춘기 때 들끓던 성욕으로 섹스는 수도 없이 그려봤지만 키스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연애에 낭만을 품은 적이
없어 로맨틱한 입맞춤조차 꿈꿔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섹스를 하는 상대와 침대 위에서 자연히 하게 되는
행위라 여겼다.
“하아…….”
유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꿈을 꾼 게 아닐까? 그러나 모든 것을 상상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기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손아귀 안에서 벙긋거리는 입술에 온 신경이 빼앗겼던 게 기억났다. 유재야. 헐떡헐떡 울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서한준이, 그 당시 그 순간만큼은 새로운 느낌으로 색다른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한준은 자신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말다툼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아 짓무른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을 움켜잡은
손목을 한 손으로 뜨겁게 감싸 쥐었다. 뿌리쳐 밀치지 말라는 것처럼, 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처럼
절박했다. 그런 한준을 다시 제 품으로 이끌어 안았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음을 삼키는 순간에 서한준은 고개를 비틀었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길을 따라 고개를 들이박은 유재가
정신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는 부드럽지 않았고, 단순한 전희 과정으로써 흥분만을 촉진시키지도 않았다.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고 머릿속도 눈앞도 새하얘져서 짐승처럼 마구 입을 붙이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흥분보다
서한준의 반응에 몰두하느라 본능과 이성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서한준이 운동할 때 입는 반바지는 옷감이 가볍고 얇았다. 그 얄팍한 옷감 너머로, 지금껏 막연하게만 그려
보았던 서한준의 욕망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한준이 거침없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수도 없이 자신을
생각하며 자위했었다는 놈이, 어떤 소리를 내며 흥분하고 어떻게 앞을 세우는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았다.
발기한 곳이 또다시 제 허벅지를 찌르는 순간 유재는 한준을 밀어냈다. 서한준은 맥없이 떨어져 나가 벽에
부딪혔다. 얼룩덜룩하게 상기된 채,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유재는 우두커니 서서 한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벌리고 선 다리 사이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아래 지문을 보면…….”
나는 왜 키스했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놈을, 이제 와서? 지금까지 여자한테만 욕구를 느꼈으면서, 고작 몇달 동안 동성애를
숙고해 봤다는 이유로 갑자기 게이가 됐다?
아니면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에야 깨닫기라도 한 건가? 서한준을 그렇게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흥분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키스였다. 유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서한준과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어쭙잖은 마음으로 행동했다간 한준을 영영 잃을 수 있었다.
서한준을 잃는다.
욕구에 기반한 사랑은 한계가 명확하다. 서한준과 만약 애인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관계보다
무조건 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수많은 애인, 부부 사이가 파멸에 이른다. 유재는 제 부모를 떠올리고는
자조했다. 그들 역시 한때는 분명 사랑한다고 입을 맞추고 관계를 가졌을 테지만, 지금은 여유가 생기자마자
각방을 쓰기에 이르렀다. 더 끔찍한 사실은 사랑이 식을 만한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배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무서웠다.
“아니. 좀 피곤해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한준이 천천히 시선을 내려, 옆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멀찍이 벌어져 있는 틈을 보았다.
유재는 그제야 자신이 의자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한준은 그가 자세를 고쳐 앉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재는 긴 한숨을 뱉으며
엎드려 누웠다.
수업이 끝날 때쯤엔 피로가 극도에 달했다. 잠도 설쳤는데 삼 일간 이어지는 축제가 아직 한창이라 오늘도
집행부 일을 도와야 했다. 게다가 축제 기간임에도 오전 강의를 맡은 교수는 두 시간을 틈 없이 빡빡하게
수업했다.
공강 시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다음 수업에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비척비척 일어서는 유재에게 한준이
다가와 물었다.
“어? 글쎄.”
유재는 저절로 끄덕이려던 고개에 힘을 주었다. 서한준은 지금 단순히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분명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서한준이 키스 얘길 꺼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무슨 생각으로 키스에 응했냐고 물으면?
혼자 더 생각하고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은 삼십 분이라도 눈부터 붙이고. 유재는 욱신거리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한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대화가 끝났음에도 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우리 어제 말이야.”
“야.”
생명과 환경 발표. 매주 강의에 들어갈 때마다 다른 조의 발표를 보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민희가 미리 준비한 듯 줄줄 말을 쏟아냈다.
“…….”
그는 간단하게 자신의 일정을 읊어 주고는 뒤를 돌았다.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유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한준이 떠나자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맥없이 마른세수를 하고 있노라니 민희가 실소를 뱉었다.
“뭐야? 싸웠어?”
“아니.”
“알았어.”
“다음에. 나 피곤해.”
“다음? 다음 같은 건 없어.”
유재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 민희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무시하고 갈 생각이었으나 마주한 이민희는
퍽 진지했다. 순전히 신경을 긁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점심 먹자. 잠깐이면 돼.”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자기 친구들이 소중한가 싶어서 일부러 열받게 하려고 집부 애들한테 싹 연락
돌렸는데.”
“…….”
“어때, 이젠 내가 좀 지겹니?”
“…….”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민희가 식판을 든
채 일어서 있었다.
* * *
—여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차비만 버렸다. 몇 번 수업도 안 했는데 벌써 세 번이나 취소당한 게 짜증이 났다. 생각 같아서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과외를 새로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새빨간 신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준은 조유재를 생각했다. 강의 내내 멍하니 허공만 들여다보고 있던 놈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은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유재의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져 슬펐다.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고 상처받아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피한 적 없던 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드러운 거절에도
속이 사정없이 문드러졌다.
학교 친구들을 마주치지 않을, 인적이 드문 골목을 일부러 고른 터라 편의점 앞 테이블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아무도 여기 앉아 식사를 한 적이 없는 듯했다. 한준은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과 의자를
닦았다.
물티슈 넉 장이 새까매질 때까지 테이블을 닦는 동안에도 유재와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유재가 코앞에서 눈을
감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밀려들어 오는 혀에 입안이 다 녹아 버리는 듯했다. 나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 쓸데없이 계속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물러서긴커녕 꽉 끌어안아 오는 손이 좋아서 정신이
나갔다.
소주를 병째로 마시며 한참 휴대폰을 노려보던 한준은 단톡방 나가기를 눌렀다. 교양 수업 하나 정도야
재수강을 하면 그만이다. 학점이 아깝긴 하지만 다음 학기에 꽉 채워 들으면 되지. 나가자마자 유재가 다시
초대했다. 한준은 한 번 더 방을 나갔다. 그 짓을 너덧 번 정도 더 하니 유재도 더 이상 초대하지 않았다.
* * *
“으윽….”
“일어났어?”
“헉!”
익숙한 목소리에 한준이 깜짝 놀라 튀어 올랐다. 벌떡 일어나 앉자마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핑핑 돌았지만 그는 힘껏 눈을 부릅떴다. 잘못 들은 거라 믿고 싶었지만, 식탁에 앉아 있던 이와 기어이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정윤이 물었다. 한준은 허겁지겁 일어나 앉았다. 이제 보니 자신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제가 왜 여기?”
누나, 유재가…….
“괜찮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세수만 하고 가. 많이 부었어.”
정윤이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제야 얼굴이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한준은 고분고분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아, 씨발.”
나를 또 버리게 둘 줄 알고.
조유재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한준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손이 닿는 순간 멀어지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피하는 조유재를 보면서, 한준 역시 그에게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선물한 초콜릿을 내던지며
마음을 접고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 때보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노력을 강요했을 때보다, 오히려 눈을
돌리고 대충 둘러댄 말로 자리를 빠져나가는 조유재를 맞닥뜨렸을 때의 고통이 훨씬 컸다.
“아, 맞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한준이 멈칫 섰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정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시원한 바람이 따끔따끔한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들자 지금이 몇 시인지가 궁금해졌다. 오늘은 열한 시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한준은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31 통
“…뭐지?”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조유재
오후 8:07
조유재☆
오후 8:32
조유재☆
자냐?
오후 8:41
조유재☆
서한준?
오후 8:42
조유재☆
오후 8:45
조유재☆
안읽씹하기냐?
오후 8:50
조유재☆
어디 아파?
오후 8:52
조유재☆
오후 8:54
조유재☆
오후 8:58
조유재☆
알았지?
오후 9:14
5 월 30 일 금요일
조유재☆
야 너 오늘 수업 왜 안 나왔어?
오전 11:12
조유재☆
전화는 왜 안 받아
오전 11:22
조유재☆
서한준
오전 11:23
조유재☆
야 너 어디야
오전 11:42
메시지를 읽는 동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조유재☆
괜찮아? 어디야
오전 11:51
조유재☆
그때 못했던 얘기 마저 해야지
오전 11:52
조유재☆
한준아
오전 11:53
계속 도착하는 메시지를 들여다보던 한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휴대폰 전원을 끄고는 가던 걸음을 이었다.
역에 도착해 표를 끊고 기어이 기차에 오르는 순간에도 의식이 붕 떠서 멍했다. 숙취에 속이 아직도 아팠다.
그제야 일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준은 맥없이 웃으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정윤의 집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흐렸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한준은 수평선을 따라 찬찬히 눈을
굴리며 걸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휴대폰 전원을 끄고 온전히 홀로 남았다. 완전한 고립의 순간, 그는
자유를 느꼈다.
같이 오자고 했었는데.
발목을 미지근하게 적시던 바닷물 그리고 포근하고 익숙한 체취가 함께 생각났다. 테라스 카페에 가고 싶다고
조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준은 있지도 않은 카페를 그리며 두리번거렸다. 바다. 하늘. 모래사장.
승강장. 나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며 그는 연거푸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수능 공부를 하면서도 바다 여행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준은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 2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던 날이었다. 그날 한준은 떨어진 성적을 두고 교무실에서 담임과 상담을 했다.
교실. 학원. 놀이터. 우엉 반찬. 웰치스. 문제집. 농구. 피구. 축구. 쉬는 시간. 급식. 시장. 여름. 시험
공부. 그 어떤 좋은 추억을 떠올려도 그 속엔 전부 조유재가 있었다.
한준은 참았던 신음을 터트렸다. 수평선이 어그러지는 순간, 아슬아슬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뚝,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 * *
집행부 사람들이 열어 준 깜짝 파티,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깃집을 빌린 지승민의 파이트 클럽 파티.
연달아 이어진 생일 파티에 얼굴을 비치고 나니 하루가 금방 끝났다. 6 월 1 일 일요일, 생일날 눈을 뜬
후부터 연달아 서프라이즈 파티와 축하 문자 그리고 전화가 쏟아지는 지금까지도, 유재는 단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민이 집게로 다 구운 고기를 앞에 놓아 주었다. 유재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점심때
억지로 떠 넣은 케이크 조금 말고는 종일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음식을 보면 허기가 지긴커녕 구역질이
났다. 꾸역꾸역 감사 인사를 한 게 최선이었다. 그 이상 꾸며 낼 기력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 아홉 시. 생일이 끝나기까진 세 시간이 남았다. 서한준은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쭉 휴대폰을
꺼놓고 문자에는 답도 없었다. 집까지 찾아가 봐도 기척이 없었다. 월요일엔 다시 수업에 오겠지만, 어쨌든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도 비치지 않았다.
이민희
네? 미친놈들아?
오후 9:04
유재는 휴대폰을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승민이 채워 놓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속이 쓰린 게 차라리
나았다.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들을 전부 토해 내고 싶었다.
승민의 농담에 주변 모두가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유재는 묵묵히 휴대폰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서한준은 연락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면, 그렇게 하자고 결정한다면, 그 이후로는 무를 수
없다.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은 데다가 서한준은 남자고 그들은 너무 어렸다. 누구 하나가 여자였으면
결혼으로라도 평생을 약속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고, 살아 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긴데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일생일대의 결정을 어떻게 그렇게 급하게 할 수 있다고…….
미친놈.
커다란 생일 케이크가 앞에 놓였다. 모두가 소리 높여 축하 노래를 합창했다. 사랑하는 조유재. 폭죽이 터지고
색색깔의 종잇조각이 흩날렸다. 유재는 초를 불었다. 하나씩 사그라드는 불빛에 실낱처럼 남아 있던 기대마저
죽어 버렸다.
한준이
한준이
(사진)
야 별 보러 와라
오후 9:17
놀이터 사진이었다. 텅 빈 그네 위로 익숙한 아파트 단지와 밤하늘이 보였다. 사진을 확대해서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사진 속 그 어디에도 한준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명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미친 새끼.”
“왔어?”
“생일 축하한다.”
“선물.”
“장난 까냐?”
유재가 잇새로 물었다. 전화를 백 통이 넘게 했다. 잠깐만 시간을 달라는 문자 한 통만 보냈어도 이렇게까지
열받진 않았을 것이다.
“…….”
“안 뜯어 봐? 내가 뜯어 줄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유재는 상자를 여는 한준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에는 예상대로 운동화가 한 켤레 들어 있었다. 다른 색이 들어가지 않은 새하얀 운동화였다. 한준은
힐끔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지금 이딴 게 중요해?”
서한준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놈이 아홉 시가 넘어서야 연락을
해?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였다. 유재는 운동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키스했잖아. 너랑 나.”
“뭐?”
“…….”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루 꼬박 잠수를 타고 생일이 끝나기 직전에 이런 곳으로
불렀으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해야 했다. 열이 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딱 봐도 맞네, 뭐.”
“혼자 어디 다녀왔어?”
“정동진.”
“…….”
“자위도 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한준이 퍽 소리 나게 가슴을 밀쳤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신경질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동요해 버리고 만 그를 향해 유재는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 분도 못 버틸 뻘짓을 왜 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상자를 쇼핑백에 집어넣던 한준이 별안간 왈칵 소리쳤다. 그가 내던진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태연을
가장하던 낯이 마침내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동요한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재는 마주 일어서서
소리쳤다.
“넌 없던 일이었으면 하잖아.”
절교.
단어 하나에 목이 잘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까맣게 점멸했던 시야가 돌아왔을 땐, 한준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쥔 채였다.
조용한 놀이터에 서한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재는 순간 숨을 멈추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가득한 놀이터. 이젠 둘 다 동네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한준은 이곳으로 유재를 불렀다.
매번 앉아서 놀던 벤치에 앉아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속은 저처럼
말이 아닐 텐데도 태연자약하게 앉아 뻔뻔한 연기를 했다.
나를 못 보고 살 수 없어서.
무서워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충격이 서서히 번져나가면서 두피가 저릿저릿 아팠다.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한준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쓸어넘기고, 쇼핑백을 정리해서 그네 근처에 가져다 두는 동안 유재는 멍하니 서서
쳐다만 보았다.
서한준은 언제나 저런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떠들고는 했다. 반찬
투정부터 친구 험담, 성적 고민에 문제집에서 찾은 오타 얘기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채 나누었던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추억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퉁명스럽게 찡그리던 서한준,
다투고 나서 곁눈질을 하던 서한준, 과자를 사 주겠다며 허세를 부리던 서한준, 어려운 단어를 골라 물으려고
한참 단어 책을 노려보던 서한준…….
“한준아.”
“난 여기 별 보러 온 적 없어.”
입술이 닿기 무섭게 어깨가 붙들렸다. 몸 전체가 덜컹 흔들릴 정도의 힘으로 밀려난 유재가 순간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고 눈을 다시 떴을 땐, 온통 혼란스러운 표정의 서한준이 앞에 있었다.
“뭐라고?”
“…….”
“갑자기 뭐야?”
“계속 말해 봐.”
“뭐?”
“…….”
한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유재는 그의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지는 미간과 우그러드는 입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응?”
재차 이어진 물음에도 한준은 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깜박이던 눈에 물이 맺혀 반짝거렸다. 유재는 제 앞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한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불안이 기꺼웠다. 유재는 조심스럽게 한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코끝을 상냥하게 마주 댄 채,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비틀어 다시 입을 맞췄다. 입술은 뜨거웠지만 턱은 꽉 다물린 채 안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재는 닫힌 이를 혀로 핥으며 한준의 턱을 잡아 비틀었다.
“아….”
그네가 삐걱삐걱 울었다. 유재는 멍하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이
아직 얼얼했다.
널 못 보고 살 순 없으니까.
한준이 외친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한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묵을 깼다. 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재는 제 무릎에 올려 둔 운동화 상자만 가만히 어루만졌다.
“뭘?”
“연애.”
“그럼?”
유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말을 이으면서도 속으로는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남자와, 그것도
서한준과 연애를 한다…….
돌이킬 수 없어 결국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고르고 말았다. 여기서 주저하면 엉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단호한 말투와 달리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막상 시작했는데 끔찍하면
어쩌지.
한준은 한참을 대답 없이 조용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제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너 술 마시다 왔지?”
“취해서 하는 소리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알아.”
“…….”
“…….”
“근데 넌 네가 날…….”
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도 갑작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각을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전했다.
“…….”
유재는 잘라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고심하는 시간만큼 서한준은 멀어진다. 반나절 잠 좀 잤다고
그새 바다로 떠난 놈이 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옳은 결정일 거야.
“뭐? 날 뭘로 보고.”
휴대폰 전원을 끄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는 일이었다. 유재가 울컥 덧붙인 말에 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가 막힌 건지 충격을 받은 건지, 잘은 몰라도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애인이 생기면 무조건 하루에 한 끼는 같이 먹고 싶어. 둘이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지금 사는 오피스텔 공간 넓은 편이니까 같이 살아도 괜찮고.”
“유재야.”
한준이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차분한 목소리에 가슴이 선득거려 돌아보자,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한준이 그넷줄을 감싸 붙들었다. 그 단단한 손 너머로 순식간에 꺼풀이 벗겨진 얼굴이 보였다. 장난을 치고
웃으며 떠들 때와는 너무나 다른, 애정과 욕망이 뒤얽힌 빛이 눈동자에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유재는 가만히 미간을 모았다. 그간 자신과 닿아 있을 때, 샅샅이 반응을 관찰하며 목격했던 모습과는 또 다른
서한준이었다. 지금껏 한준이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억눌러 왔을 것들을 앞으로 적나라하게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
“제대로 말해 줘.”
“그래.”
“아!”
“아이 씨, 십 분만 빨리 일어날걸.”
“택시 타자.”
유재는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고는 걷기 시작했다. 한준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들은 단지 입구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한준이 곁눈질을 했다. 유재는 단지 앞 횡단보도를 노려보고 있다가 힐끔 한준을 보았다. 한준은 휙 고개를
돌려 차가 드문드문 지나가는 길 저편을 빼꼼 쳐다보았다.
과외 하러 갔다가 바람맞은 서한준. 문득 이전에 승민에게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더 이상 제게는
하지 않는 것 같았던 소소한 일상 이야기.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다양한 표정으로
떠들곤 했던 서한준.
과외 갔다가 바람맞았다는 그 얘기가 뭐라고 단번에 마음이 녹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유재는 손을 뻗어 한준의 손끝을 살짝 잡아 보았다.
늦은 밤까지 카페에서 같이 과제를 하고 있으니 진정한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유재는 라떼를 홀짝거리며
지금껏 정리한 발표 대본을 훑어보았다. 발표야 중고등학교 때도 매번 도맡아 하던 거라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대본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읽었다.
한준이 노트북을 살짝 돌려 피피티를 보여 주었다. 유재는 그 작은 화면을 제대로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폰트가 구리다. 글자도 못생겼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이탤릭체로 기울여 놓아서 더 못생겨 보였다.
고른 테마도 영 별로였다. 고등학교 때도 피피티를 잘 못 만들던 놈이다. 그래도 열심히 해 보려고 한 티는
났다.
답을 하려고 돌아보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한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준은 노트북 화면으로 훌쩍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봐.”
그가 갑자기 엔터를 탁탁탁 연달아 눌렀다. 야심 차게 준비한 장난이었는지, 사방에서 이미지가 빙글빙글 돌며
요란하게 날아와 꽂혔다. 못생긴 데다가 쓸데없이 오래 걸리기까지 하는 효과였다. 노트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놈을 생각하니 황당했다. 유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쩔지.”
“응.”
“그리고 테마 뭐 다른 거 없어?”
“다른 것도 잘 보일걸?”
“이거 어때?”
유재는 모른 척 대답했다. 어깨가 닿자 한준은 물러섰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언대로 테마를 바꾸고
텍스트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껏 자신을 의식하는 한준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렇게 서한준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사귀기 전이라 오히려 더 예민하게 제게 집중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마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한 지금이 가장 정성스러운 시기일 것이다.
“야, 나 슬슬 배고픈데.”
“뭐 먹을래?”
체육관? 오늘은 쉬는 줄 알았는데. 유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준을 살폈다. 체육관 간다는 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건만 한준은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그래.”
“간다?”
“어.”
“왜? 할 말 있어?”
“아니. 이따 봐.”
한준은 휘휘 고개를 젓고는 인사했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재는 픽 실소를
흘렸다. 어제 이후로 서한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너랑 지금까지 안 해 본 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유재야. 키스로 무르게 녹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흠.”
그들은 어느새 놀이터로 돌아가 있었다. 그네 기둥에 기댄 채 이어나가던 키스가 얼마나 격렬하고
너저분하던지가 기억났다. 이를 꽉 닫고 씨근덕거리던 서한준의 턱이 결국 열리고 말았던 순간을 기억했다.
뜨거운 탄성과 마주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듯했던 혀. 맞닿은 뺨이 울리도록 내던 신음. 끝내는 제 양 뺨을
감싸고 말았던 두 손까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키스를 처음 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유재는 자신이 서한준 외 그 어떤 누구와 키스해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한준이 엉망으로 복받쳐 오른 채 제 입 안에 이름을 속삭이던
모습이 선명했다. 그의 입 속, 그 깊은 곳에 혀를 쑤셔 넣자 순순히 벌어지던 입술의 감촉이 기억났다. 닿는
곳을 전부 핥고 빠는 동안 얌전히 입을 열고 자신을 받아내던 그의 체온, 그리고 키스가 깊어질수록 딱딱하게
허벅지에 눌리던 성기.
“…읏.”
유재는 움찔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잠깐 만졌을 뿐인데 발기가 빨랐다. 팽팽하게 일어선 자지가
배에 달라붙을 정도로 휘어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기둥을 훑으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자위할 때마다
불특정 다수의 몸과 입술을 떠올리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탁한 회색 타일 위로 입을 연 서한준이
그려졌다.
너무나 잘 아는 놈의 외설스러운 모습을 상상하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소름 돋게 이상하기도 하고 낯설고
낯익기도 했으며 귀두가 젖어 들도록 흥분이 되기도 했다.
이걸 빨고 싶었던 적이 있을까?
막상 녀석의 입에 물리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노골적인 것들이 궁금해졌다. 한번 떠오른 저질스러운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한준은 안 해 본 걸 잔뜩 해 보고 싶다고 했었다. 혀도 버겁게 물던 녀석이 과연 자지는
제대로 빨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유재는 좀 더 빠르게 팔을 흔들었다. 허옇게 일어난 샴푸 거품 사이로 벌건 귀두가 큼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끝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유재는 점차 뜨거워지는 체온을 느꼈다.
“후윽, 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입 안 전체가 울릴 것이다. 키스할 때 혀로 느꼈던 그의 흐트러진 호흡과 헐떡이는
울음이 온전히 자지 위로 쏟아질 것이었다. 침이 줄줄 흘러 엉망으로 녹은 입술이 더 깊이 성기를 물어,
마침내 자지 뿌리와 음낭까지 그 진동이 전해지게 될 터였다.
부족하다. 조금만 더……. 절정의 문턱에서 그는 세차게 손을 흔들며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서한준이 다리를 벌렸다. 긴 키스에 가장자리가 질펀하게 녹아 났던 입술처럼, 그의 뒷구멍도 부드럽게 긴장이
풀려 있었다. 서한준이 이런 걸 좋아할까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유재는 바로 안에 처박고 흔드는 상상을
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 가슴을 세게 모아 주무르고 젖꼭지에 손톱을 세우는 상상을 했다. 한준이
처음으로 내지를 소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면서.
“윽!”
절정에 오르는 순간 긴장이 단번에 풀렸다. 유재는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 잡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흔들자
성기가 정액을 투둑 툭 토해 냈다. 그는 긴 자지 기둥을 끝에서 끝까지 훑어 올리며 남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냈다.
“하아….”
한준이 눈이 벌게지도록 울면서 신음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버겁게 성기를 빨고, 종래에는 다리를 벌려 마구
들이닥치는 자신을 받아내는 상상을 한다니. 아무리 서한준이 자신을 생각하며 여러 번 딸을 쳤다고 해도 이런
생각까지 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한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겠다고 시작한 행위였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천박한 상상으로 끝이 났다. 상상 속의
서한준은 서한준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질감이 느껴졌다. 잘 아는 놈의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과
자세를 상상하다 보니 기분이 야릇했다.
유재는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체육관에서 자신을 갈망하며 에너지를 태우고 있을
서한준이 떠올랐다.
* * *
“야.”
유재는 한준의 입가에 두었던 시선을 돌렸다. 다시 발표 준비에 집중한 지 얼마 안 되어 민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내 시큰둥하던 문자와 달리 제법 쾌활하게 인사했다.
“화해했어?”
엄밀히 말하면 조금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싸웠다고는 할 수 없다. 유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싸운 적 없어.”
“그렇겠지.”
“화이팅.”
분위기를 환기하는 한마디에 민희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턱을 들었다. 유재는 그들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후 3:07
야 도서관 ㄱ?
오늘 역시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준이 의외의 문자를
보냈다.
한준이
야 우리 집행부실에서 공부할래?
오후 3:10
오후 3:11
거기 비었어?
한준이
유재는 미소 지었다. 한준이 도서관이 아닌 집행부실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짐작이 되어서다. 단둘이
있고 싶은 거겠지. 물론 집행부실이 공간도 넓고 큰 테이블도 있어서 쾌적하기도 하겠지만, 예전에 한 방에
나란히 엎드려서 수능 공부하던 때가 그리운지도 몰랐다. 잡담을 그렇게나 많이 하면서도 공부는 어찌저찌 잘해
냈던 기억이 있었다.
“왔냐?”
“응. 이거 마셔.”
“고마워.”
지긋지긋한 집행부. 언제까지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 보람찬 일이라 정신승리를 해야 하는 건지. 투덜거리던
유재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싫어?”
“뭐가?”
“집행부.”
“몰라서 묻냐?”
다 아는 걸 또 묻다니 웃기는 놈이었다. 약이 올라 턱을 덥석 붙잡아 당기자 배에 한준의 정수리가 눌렸다.
서한준이 웃을 때마다 손바닥에 얕은 진동이 느껴졌다. 거꾸로 뒤집힌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천천히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키스했었지.
“야, 아퍼.”
한준이 머리로 배를 툭툭 쳤다. 붉어진 얼굴에 은근히 동했다. 깨닫자마자 유재는 머리를 놓아주었다.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는 서한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그는 느릿느릿 입꼬리에서 긴장을 풀었다.
“나 네가 준 거 신었어.”
한준은 자신이 선물한 운동화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장난스럽게 한 바퀴 돌아보라고 손짓하는 요청에 따라,
유재는 슬렁슬렁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보란 듯 다리까지 쭉 뻗어 내밀자 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멋진데.”
“그래?”
“그러니까.”
“응.”
“카페가 낫지 않나?”
지훈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들이 나타나자 팽팽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슬렁슬렁 다가온 하영이
밀매라도 하듯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휴대폰에는 처음 보는 여자애들
사진이 있었다. 하영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너네 미팅 안 할래?”
미팅?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재는 바로 한준을 보았다. 한준은 별 동요 없이 하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영은 슬쩍 지훈의 눈치를 살핀 후 소곤거렸다.
“다 들리거든?”
지훈이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날아오는 킥을 피해 저편으로 도망친 하영이 대답을 재촉했다.
“응? 하자.”
“난 안 해.”
“왜?”
“할 이유가 없으니까.”
“차라리 일정이 안 된다고 변명이라도 해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신지훈 혼자 미팅에 환장한 놈 되잖아.”
지훈이 소파에 누운 채 짜증을 부렸다. 그 광경이 재밌었는지 한준이 쌕 눈을 접었다. 낯익은 빛으로 휘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영이 이번에는 한준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한준이 너는?”
“음, 나도…….”
한준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신지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난감한 듯 웃는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간다, 가. 야, 그냥 카페 가자.”
문이 닫혔다. 유재는 미소를 거두었다. 방금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나자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유재는 노트에 필기체로 ‘meeting’을 휘갈겨 쓰면서 중얼거렸다.
“…….”
뻔뻔한 놈에게 똑같이 뻔뻔한 말을 돌려주었더니 서한준이 책장 가장자리를 구겼다. 계속 장난을 치고 싶어져
한 번 더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발을 퍽 걷어찼다.
“크윽!”
하얀색 새 운동화에 쏟아지는 발길질에는 자비가 없었다. 유재는 발목을 의자 밑으로 싹 끌어다 숨겼다.
유재는 펜을 내려놓았다.
“집중 존나 안 되네.”
“나도.”
“농구 한 판 하고 올래?”
“농구?”
“어. 좀 뛰고 오면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
주말이라 아이들이 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농구장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농구대
하나를 차지했다.
“다섯 골 먼저 넣기.”
“음료수 방금 먹었잖아.”
“뭐 원하는 거 있어?”
자세를 낮추고 수비하기. 시선은 상대의 눈과 팔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공. 그걸로 상대가 어떤 슛을 던질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판단하여 수비한다. 유재는 물끄러미 서한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몸을
숙인 자신을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읏.”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한준과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그의 목뒤를 엄지로 부드럽게 누르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유재는 싹 손을 거두고는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한준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이번엔 유재가 뚫고 나갈 차례였다. 일부러 오른쪽 발을 앞세우자 한준이
다리를 쭉 뻗어 막았다. 그가 더 올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유재는 역방향으로 내달렸다.
뱃속에 오싹한 감각이 들어차면서 순간 오금이 쑤셨다. 유재는 공을 놓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한준이 낚아챘을
거라 생각한 공은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 텅, 소리를 내며 낙하했다.
공이 데굴데굴 굴렀다. 유재는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도록 침을 삼키고는 허리를 펴고 섰다. 한준이 무릎을
짚은 채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정신 차려.
고개를 든 유재의 앞에 한준이 멈춰 섰다. 그는 신중히 드리블을 하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유재는 정신을
다잡은 후 자세를 잡았다.
한준이 뛰어올랐다.
한준이 운동장 바닥에 널브러졌다. 쓰러진 그의 주변으로 모래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서한준은 모랫바람을 다
먹을 기세로 웃어댔다. 유재가 악을 썼다.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서한준 말대로 배가 고팠다. 얼음이 다 녹아 물맛이 나는 음료를 남김없이 마시고도 허기가 졌다. 유재는
비척비척 땅을 짚어 일어나서는 한준을 꼬드겼다.
“그래. 이 근처 반찬가게?”
“너 맨날 간다던 시장 가도 되고.”
“…….”
유재는 지저분한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지르며 일어섰다. 가만히 지켜보던 한준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왼쪽 뺨에 알알이 붙은 모래를 마저 닦아 낸 다음 배시시 웃었다.
“그래.”
한준이 힘차게 일어서서 자리를 털었다. 그들은 가방을 두었던 벤치로 향했다. 먼저 집에 들러서 씻고
만나자며 간략히 다음 일정을 논하던 때, 한준이 대뜸 신발을 가리켰다.
“야, 너 신발 끈 풀렸다.”
“앉아 봐.”
한준이 팔을 당겼다. 순순히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서한준은 가방 앞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넌 무슨 그런 것도 들고 다니냐?”
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티슈를 뜯었다. 그가 티슈를 여러 장 빼내는 걸 심드렁히 쳐다보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서한준이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것이다.
바짝 긴장한 유재가 아래를 보았다. 한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그는 물티슈로 신발 끈을 쓱쓱 문질러
닦아 내는 데에 집중해 있었다.
“검은색으로 살 걸 그랬나?”
“뭐 묻었어.”
일부러 계산하거나 떠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재는 손가락 끝으로 한준의 턱 밑을
살살 털어 내고 있었다. 끈을 다 묶은 한준이 턱을 들어 올렸다.
또 한 번, 손아귀 안이었다. 이대로 그의 머리를 당겨 다리 사이에 파묻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상상하며,
유재는 손을 거두었다.
“가자.”
유재가 먼저 일어서서 가방을 멨다. 한준은 걷어붙였던 소매를 정돈한 후 옷으로 얼굴을 샅샅이 털어 냈다.
유재는 그가 매무새를 정리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오랜만에 우엉 맛있겠다.”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바다에 갈 때쯤엔 서한준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에게 답을 해야 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마감 기한이자 디데이였다.
바다.
“그래.”
유재는 약속했다. 그러곤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한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내일은 함께 바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내일이 되려면 아직 하룻밤을 더 자야
한다.
놀이터에서 키스했던 이후, 조유재와는 분위기가 좋았다. 자신이 처음 반했던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모습
그대로였다. 평생 이렇게 지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기에 유재가 마음을 달리 먹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키스를 하고 연애를
하기보다는 지금 이대로가 더 좋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행여나 친구로 지내자는 결론이 난다 하더라도 처음 거절당했을 때만큼 아플 것 같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기대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조유재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고 나니 그와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이어지든
상관없었다. 이어지기만 한다면.
“지금 한 상자에 세 장 들은 거 만오천 원이에요. 이거 이 가격에 잘 안 나오는 건데 행사 중이라서.”
“앗, 네.”
어차피 새로 살 때가 됐으니까.
누군가의 주소와 휴대폰 번호가 문자로 와있었다. 발신자는 조유재. 다음 문자가 이어 도착했다.
조유재☆
오후 7:42
문자를 확인한 한준이 미소 지었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얘기를 조유재는 잊지 않았다. 한준은 메시지 옆에
찍힌 시간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앞으로 열두 시간만 지나면 바다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꼬박
하루가 지나면 어떤 쪽으로든 대답을 들었을 것이고.
오후 7:44
고맙다
유재는 바로 문자를 읽었다.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만큼이나 생각이 많을 유재를 생각하며, 한준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새벽 다섯 시에 깼다. 꿈에는 조유재가 나왔다. 꿈속에서 그들은 난데없이 마트에서 해산물 쇼핑을 했는데,
커다란 참치가 즉석에서 해체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유재는 참치회보다는 보쌈 고기를 사는 게 낫다며
한준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자신은 참치회를 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침내 조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에 성공한 한준은 신나게 참치회를 들고 카트를 돌아보았다. 회를
넣으려고 들여다본 카트 속에는 수백 개가 넘는 드로즈가 가득 들어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좀 자.”
“피곤한데 잠은 안 와. 몇 시간 남았지?”
“한참 남았어.”
“으악.”
짤막한 대답에 유재가 미소 지었다. 아침에 만났을 때부터 버스에 올라 두 시간 넘게 달리는 지금까지, 내내
어딘가 긴장한 듯 보이던 그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올린 웃음이었다. 창밖을 내다볼 때도, 잠깐 눈을 감은 채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유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오늘 무슨 말을 할
예정인지는 몰라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도착하면 밥 먹고 바다부터 가자. 너 가고 싶다던 테라스 카페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바다에서 놀고.”
“또 우리 뭐 하고 싶었더라?”
“스쿠버다이빙.”
“좋아.”
“우리 방 오션뷰였냐?”
장난기 가득한 말에 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찾아서 예약한 저렴한 호텔은 오션뷰까진 아니었지만 바다와
꽤 가까웠다. 방에선 바다를 볼 수 없어도 루프탑에 올라가면 바다가 보인다는 후기가 있었다. 한준은 숙소
이름을 검색해서 후기를 더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곧 도착할 텐데…….
“고기국수 먹자.”
사진이 찍히는 순간 유재가 돌아보았다. 한준은 휴대폰으로 포착한 찰나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조유재는 웃고 있었다.
티끌 없이 웃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어젯밤부터 느꼈던 은근한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다. 웃으며 고개를 들자 유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가까웠다. 눈을 맞춘 채 바라보기를 한참, 유재가 입가로 시선을 내렸다. 훑어보는 눈길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준은 재빨리 주의를 돌려 간소하게 들고 나갈 짐을 챙겼다.
“나갈까?”
“잠깐만.”
“그게 뭐야?”
유재는 모자를 건네주고 케이스를 열었다. 뭔가 했더니 선글라스였다. 한준은 어디 한번 잘 어울리는지 보자는
듯 짓궂은 태도로 팔짱을 끼고 섰다. 유재가 거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선글라스를 써 보았다.
“어때?”
유재가 서서히 입꼬리를 내렸다. 그의 멱살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이 이상
부담을 줄 수 없어 단단하게 다져만 두었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준은 아슬아슬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웃었다. 유재가 말없이 끄덕였다. 선글라스 때문에 너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신 후 바다에서 물놀이를 몇 시간이나 했다. 빠지고 빠뜨리고 소금물을 잔뜩
먹고 뱉고 모래에 낙서를 한 후 사진을 찍고, 할 수 있는 물장난은 다 치고 나니 완전히 녹초가 다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씻고 나자 슬슬 이른 저녁을 먹어도 좋을 시간이 되었다. 유재는 예상대로 수많은 횟집을
제쳐두고 중식집을 찾았다.
조유재는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골랐다. 한준은 코스 요리에 포함된 메뉴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버섯, 소고기, 볶음밥 등, 아는 것도 많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요리도 꽤 있었다. 어차피 코스 요리를 시키게
될 걸 알면서도 한준은 물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니 힘이 쫙 빠졌다. 바닷가를 거닐며 조금씩 마음을 터놓으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미친놈들처럼 물에 뛰어들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놀았다. 수영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면서 깊은 곳까지 개헤엄을 쳐서 가 보았다가 어푸어푸 난리도 나 보고, 튜브를 빌려서
유재를 끼운 다음 이곳저곳 끌고도 다녔다. 완전히 지쳐서 뻗어 누운 제 위로 조유재가 모래를 잔뜩 쌓아서
배불뚝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유재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을 눌렀다.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멋있는 척 파도를 타다가
선글라스가 물에 쓸려 가 버린 것이다. 가방에 두고 오라고 열 번을 넘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발 살짝 안 닿는 정도 깊이였는데 뭘 또 물에 빠진대.”
“너 때문에 튜브 빌린 거거든? 수영도 못하는 게 자꾸 깊은 데로 가니까.”
“존잼.”
연예인 부부가 결혼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고 있었다. 왜 전 국민이 다 보는 데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사생활을
밝히는지 한준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남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한가득해서 시청률은 좋은
듯했다. 조유재 역시 남의 부부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유재가 인상을 쓰고 설명했다. 한준은 관심도 없는 연예인들 얘기를 한 귀로 흘렸다. 조유재 말대로 제대로 안
본 게 맞았다. 저런 것보단 당장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서 있을 일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유재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도 저처럼 긴장해서 애써 예능 프로그램에 집중한 척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아직 젊잖아.”
유재가 등을 툭 치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한준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몇 없는 바닷가를 둘러보고는 유재가
기다리라고 한 곳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어둠이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파도 소리만 들렸다. 묵직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집중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모래에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그들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폭죽을 터트릴 준비를 했다. 다 심고 나자 유재가 물러서라며 손짓을 했다.
한준은 불꽃을 가장 예쁘게 볼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서서 기다렸다. 영상으로 담아 간직하기 위해 휴대폰
카메라도 켜두었다.
“와!”
환하게 빛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옆을 보니,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조유재가 보였다.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한준을 마주 보았다.
“존나 비싼 십 초였다.”
“덕분에 호강했습니다.”
한준이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하자 유재가 큭큭 웃었다.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는 그를 따라, 한준도
부드러운 모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또 오자.”
“이대로도 좋은 거 같아.”
“…….”
너무 좋지.
“평생.”
* * *
한준은 바닷가에서 했던 키스를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키스했다. 홧김에
부딪쳐 뒤엉키는 게 아니라 진득하고 부드럽게. 키스는 좋았지만 이대로 연애하게 된 거냐 묻는다면 애매했다.
입을 맞췄으니 친구 먹자는 소린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키스 한 번에 바로 태도를 바꾸기도 뭐했다.
“야, 우리 맥주 한 캔씩 딸래?”
“그래. 안주는 룸서비스?”
완전히 환장한 놈 같네. 한준은 자괴감을 삼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 찍은 사진을 훑어보며 주의를
돌리고 있으려니, 유재가 훌쩍 넘어와 옆에 앉았다.
“뭐 하냐?”
“나 사진 오늘 찍은 거 보고 있어.”
“어디 봐.”
조유재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가 코앞이었다. 땡볕에서 뛰어놀아서 그런지
피부가 살짝 붉었다. 조유재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양 순진한 빛으로
낄낄거렸다.
“이거 사진 좀 너무하네.”
“잘 나왔는데 왜?”
“프사 해야지.”
한준이 사진을 확대해서 유재의 못나온 얼굴이 잘 보이게 크롭했다. 프로필 사진 변경을 누르자마자 유재가 확
휴대폰을 낚아챘다.
“네 얼굴로 해!”
“너 얼굴 무서워서 안 돼.”
“내 얼굴이 뭐?”
문틈으로 빼꼼 내다보며 종알거리는 게 얄미워 한준이 문을 주먹으로 쿵 쳤다. 유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느라 숨이 모자란 듯 헐떡이는 틈을 타 한준이 사이에 발을 밀어 넣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버티던 유재가 결국 조금씩 밀려났다. 문이 확 열리자마자 왈칵 들이닥친 한준이 유재의 몸을
두 팔로 꽉 붙잡았다.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몸이 웃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후우, 하….”
어떠한 조짐도 없이, 유재가 고개를 떨어트려 입을 맞췄다. 동시에 도망칠 수 없도록 목뒤가 강한 힘으로
당겨졌다. 중심을 잃은 한준은 유재의 품으로 떨어졌다. 놀라 벌린 입 안으로 곧바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밤바다에서 부드럽게 주고받았던 입맞춤과는 전혀 다른 키스가 이어졌다. 정적인 온기보다는 세차게 들이닥치던
파도와 더 닮은 키스였다. 강하게 빨아당기는 힘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 뜬 느낌이 뱃속을 간질였다. 한준은
고개를 유재 쪽으로 더 깊이 파묻으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순식간에 흥분해 씨근덕거리는 숨이 귓가를 덥혔다.
목덜미에 머무르던 손이 티셔츠 안을 파고들어 등 언저리를 쓸었다. 언제 이렇게 흥분해 있었는지, 조유재는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으며 낮은 신음으로 가슴을 울렸다. 마구 누르는 힘에 밀려 기울어지는 상체를, 유재가
한 팔로 꽉 잡아당겼다.
“으읏.”
“…….”
“그대로 보여 줄게.”
한준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폭죽을 터트린 것까진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지쳐 돌아와 그대로 잠든 채 허겁지겁 빠져든 엉큼한 꿈이라 해도 놀랍지 않았다. 흥분에 의식이 몽롱했다.
매번 혼자 할 때마다 그렸던,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위하는 조유재의 모습이 뇌리를 지배했다.
“응?”
유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의 숨이 떨렸다. 맞닿은 가슴이 울렸다. 대답을 기다리며, 유재는 고개를 비틀어
목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게 피부를 빨아 당기는 입술이 기분 좋았다. 한준은 결국 그의 귓가에 털어놓고야
말았다.
“네가… 다 벗고 혼자 하는 거.”
유재는 주저하지 않고 바지를 벗었다. 동시에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가 튀어나와 배를 두드렸다. 한준은 숨을
멈췄다.
완전하게 발기한 성기는 거대했다. 크고, 길고, 굵었으며 불그스름했다. 검붉은 핏줄이 보일 정도로 곧게
일어선 기둥 아래, 얼마나 흥분했는지 음낭까지 빳빳해져 있었다.
유재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적극적으로 굴기에 태연할 줄 알았는데, 그는 가슴팍까지 새빨갛게 상기된 채였다.
불안정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게 조유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함께 놀고먹고 떠들었던 친구.
그가 여실한 흥분을 드러낸 상태로 제 앞에 서 있었다.
유재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갑자기 배낭을 뒤졌다. 그가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내어 침대로 던졌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던지고 받았던 터라 한준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냈다. 손안에 착 들어온 상자를 살펴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닥쳐.”
“후우….”
“윽, 읏….”
벅찼다. 단지 유재가 자위하는 모습에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상상에서조차 유재와 기어코 눈을 맞추고
말았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 절정을 맞으면서도,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유재가 자신을 발견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계속 상상했다. 수도 없이 그의 눈길을 상상하면서 흥분했다.
“우읍.”
“여기 부드럽네.”
그대로 저 성기가 버겁게 입 안으로 틀어박힐 것만 같았다. 한준은 입가에 힘을 빼고는 더운 숨으로 입술을
녹였다. 그러나 유재는 꿈쩍 않고 그 자세 그대로 한참 한준을 내려다보았다.
“벗어.”
“뭐 하는 거야?”
한준은 괜스레 장난기를 섞어 대답하며 콘돔을 성기 끝에 가져갔다. 고무가 두꺼운 성기에 들러붙어 피부를
감쌌다. 한 번에 쑥 씌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콘돔을 쓰면 자극이 둔하겠지? 입을 세게 모아서 빨아야겠다. 한준은 기둥을 잡고 천천히, 조금씩 성기를
삼켰다. 지름이 꽤 넓어 전부 받아 물려고 하니 턱이 아팠다. 밀어 넣어도 넣어도 남아, 마침내 귀두가
목구멍을 꾸욱 누를 지경이 되었다.
“후우으, 읍, 움.”
고개를 왼쪽으로 비틀어 각도를 바꿔가며 머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유재가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제
자지로 불룩 튀어나온 볼을 상냥하게 쓰다듬고는, 젖은 입가를 닦아 주는가 싶더니 천천히 목 뒤를 감쌌다.
처음엔 너무 미미한 힘이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끝에 한층 단호한 힘이 맺히고 나서야 한준은 유재가 제
머리를 당기고 있음을 알았다. 땀으로 젖은 손가락이 귓가와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준은 이끄는
대로 더 깊이, 더는 숨을 쉬기 어려울 때까지 성기를 제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으, 흐…….”
유재가 손톱을 세워 바짝 선 유두를 툭툭 올려 쳤다. 근질거리는 자극에 익숙해지려던 찰나, 반대쪽 젖꼭지도
잡혔다.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한준은 목 끝으로 힘겹게 침을 삼키며 날것의 흥분을 견뎠다.
유재의 단단하고 거친 손. 농구공을 만지고 어깨를 붙들어 안던 손이 양 가슴을 잡고 좌우로 비벼대고 있었다.
예민한 피부가 납작하게 눌려 비틀릴 때마다 성기가 더욱더 곧게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씨발.”
“거칠었어.”
입술이 부풀었고 가슴은 얼얼했다. 지금 당장의 감상을 전하려던 것뿐인데 공교롭게도 상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상상 속 조유재는 언제나 다소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한준은 이불을 꽉 움켜잡고 있는 유재의 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질 때까지.
다시 입을 열 준비를 하고 있던 한준은 그대로 붙들려 일어섰다. 당황할 틈도 없이, 유재는 한준을 침대에
눕히고 올라타 다짜고짜 하체를 맞댔다.
“흐윽.”
맨 성기끼리 닿자 한준이 흠칫 허리를 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배 위로 유재가 젤을 한바닥 짜냈다. 그러고는
몸을 겹쳐 미친놈처럼 마구 아래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유재가 눈을 들었다.
더웠다. 한준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유재는 여전히, 눈도 한번 깜박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맞춘 상태로 한준의 다리를 젖혔다. 엉덩이가 들리자 회음부와 그 아래 구멍까지 훤히 드러났다. 바로 그
위에 성기 기둥을 꼭 눌러 맞춘 채, 유재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흣.”
이상한 느낌이 반복되며 성감이 쌓였다. 발기한 성기가 배 위에서 꿈틀거렸다. 한 번도 뭔가 넣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뒷구멍 위로 미끌미끌한 것이 계속 문질러졌다. 열감에 들떠, 한준은 두 손으로 제 무릎 뒤를
잡아 젖혔다. 허리를 움직이며 가만히 탐색하던 유재가 그곳에 손을 댄 건 그때였다.
“윽!”
손가락 하나가 끝까지 푹 들어갔다. 유재는 남은 손으로 콘돔을 쭉 밀어 벗어 버리고는 자위하기 시작했다.
구멍을 쑤시는 제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하아…….”
“더 못 참겠어.”
그가 잇새로 말했다.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완전히 정욕에 흐트러진 얼굴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한준은
두 손으로 볼기를 벌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준은 안간힘을 써서 신음을 참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튀어 나갈 것이었다. 가슴에
힘을 주고 몸이 흔들리지 않게 버텼다. 팽팽하게 벌어져 갈라지는 듯한 통증 사이로 요동치는 성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윽!”
악다문 잇새로 기어이 비명이 샜다. 철퍽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까슬한 음모가 느껴졌다. 입에 넣기 버거웠던
성기가 기어이 그 좁디좁은 구멍을 열고 커다란 몸집을 전부 쑤셔 넣은 것이다. 유재가 몸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하는구나. 친구의 자지가 몸속에 쑤셔 박히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날카로운 감각은 상상도
꿈도 아니었다. 아파서 땀을 줄줄 흘리는 중에도 아래에서는 방대한 양의 젤 때문에 질퍽질퍽한 소리가 났다.
한준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들어 아래를 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유재는 더욱 흥분해 허리를 흔들었다. 골반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아 눌러 놓고 짐승처럼 처박아 대기 시작했다. 한준은 다시 고꾸라져 흔들렸다. 박을
때마다 이불이 주욱주욱 밀려 올라가 침대 머리까지 도달했다.
확 엎드린 유재가 입술 위로 속삭였다. 끄덕이기 무섭게 다리가 어깨까지 짓눌리면서 엉덩이가 들렸다. 한준이
눈을 들었을 때, 시야 가득 그들의 맞닿은 하반신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고 있는 성기가 보였다.
“후읏, 하, 읏.”
묵직하게 꽂히는 감각에 시각적인 충격이 더해지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유재의 커다란 성기가 푹푹 드나들며
내벽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 열은 더해지고 더해지기만 해서 안쪽이 다 녹아 흐무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내벽을 단단한 자지가 무자비하게 쑤시고 들어왔다가, 연약한 살이 주르륵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게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구멍에 힘을 주고 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최대치로 벌어진 채 범해지는 게
고작이었다.
“흐윽, 아.”
조유재의 신음 소리를 따라 한준은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껏 풀린 눈으로 그는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주저하고, 탐색하고, 살피는 빛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한준은 유재의 팔을 더듬어
매달렸다.
정신이 나간 채로도 조유재는 손을 맞잡아 주었다. 갑자기 성기가 쑥 빠져나가는 감각에 구멍을 바짝
오므리자마자 몸이 뒤집혔다. 엉덩이가 강제로 들렸다. 한준은 무릎을 세우고 엎드린 채 이불을 세게 쥐어
잡았다. 곧 들이닥칠 충격을 예감하고 있었다.
붙들린 허리가 뒤로 홱 당겨짐과 동시에 자지가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삽입이 수월해지면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하반신이 부딪쳤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한준은 이불을 침과 눈물로 적신 채
손을 내려 자위했다.
“흐, 으, 하, 으윽!”
“한준아.”
키스로.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아, 응, 크읏.”
엉덩이를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유재가 귀에 입을 맞췄다. 그가 귀두를 엄지로 느긋하게 눌러
비벼대자 다시금 이성이 흐려졌다. 임박한 절정을 위해 다리를 더 넓게 벌리자마자 한 번 더 손이 날아왔다.
“아!”
매서운 손길에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뜨겁고 아픈 감각이 사정감과 섞이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한준은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던 끝에 구멍을 꽉 조였다. 유재가 마지막으로 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훑어 올린 순간,
탁한 정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읏, 야.”
“하아…….”
“사랑한다.”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성기가 내벽을 흉흉하게 짓누르며 고동치고 있었다. 한준은 이불에
이마를 박고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쪽팔려져서 베개까지 끌어다가 머리에 덮었다.
* * *
“이것도 하나 주세요.”
한준은 단호하게 말한 다음 명란젓과 멸치볶음 가격까지 계산해서 이체해 버렸다. 아예 금액을 입력해 이체를
해 버리니 마다할 수조차 없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가 먹으려고 사 두었다는 자두를 세
개 넣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다 먹고 또 올게요.”
“가자.”
“너 식혜 먹을래?”
대답하는 동안에도 유재는 슬쩍 팔짱을 낀 한준의 손을 신경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팔꿈치 바깥쪽 관절을
꼬집어 붙들고 있더니, 어느새 팔이 접히는 안쪽까지 살살 손가락을 감아 놓았다. 유재는 괜히 쑥스러워
딴청을 피웠다. 어깨동무를 하고 업고 뛰는 등 온갖 난리를 다 치며 놀았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다닌 적은 없었다.
“나는 메로나.”
한준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팔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가 장난을 쳤다. 힐끔 옆얼굴을 곁눈질로 보자 실룩거리는
입이 보였다. 무더운 날, 열이 가득 맺힌 얼굴 위 미지근하게 녹은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나아가 더한
짓도.
그랬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시선이 느껴졌다. 저편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던 한 남자가 대놓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려주던 유재는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성인 남자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게 놀라웠던 모양이었다.
“사 주는 거냐?”
“어.”
한여름이라 그런지 땀으로 축축한 얼굴이 붉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울 게 분명한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한준은 땀을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재촉했다.
기억났는지 한준이 웃었다. 반드시 에어컨이 있는 원룸에 살 거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방이
좁으면 좁을수록 금방 냉방이 될 거라는 말에 떠들썩하게 맞장구를 쳤었다.
유재는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자마자 한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얽어 잡았다. 남자가 쳐다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아 해.”
유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멀어질 사람은 멀어질 것이고 남을 사람은 남을 것이다. 친구야 언제든 새로
사귀면 되니 괜찮았지만 서한준은 동의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예상대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웃으며 반박하자 한준이 입을 다물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하면서 심각하게 허공을 노려보는 게 웃겼다.
새삼 둘이서만 공유하는, 남들에겐 털어놓기 어려운 사실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유재가
꽉 맞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마음이 상한 척 장난을 걸었다.
“야!”
“싫어.”
꿈 같았던 지난 잠자리가 떠올랐다. 바다를 까맣게 잊은 채 완전히 눈이 뒤집혀 해 버렸던 첫경험. 꼭 껴안고
제 귀에 가득 불어넣던 숨.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점차 이성을 잃으며 난폭하게 차오르던 성감.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던 모든 것과 서한준같지 않았던 서한준.
“가자.”
“여보세요.”
—문자 봤어?
어머니는 다짜고짜 물었다. 그녀가 매번 보내는 문자야 아버지의 전화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주식으로
새로이 얼마를 벌었고, 그렇게 거금이 들어왔으니 가족 모임을 조만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빠가 이번 주말엔 꼭 가족이 다같이 ‘성대한’ 저녁을 먹자고 하더라. 갈수록 심해지는 꼴값 나 혼자 감당
못 하니까 와서 칭찬 좀 해 줘. 네 아버지 그 낙에 사는 거 너도 알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는 멸시가 가득 배어났다. 매일 피시방에만 처박혀 조용히 살던 아버지가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이유를 그녀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유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엄마가 해.”
번갈아 가면서 염병은 씨발. 짜증이 솟구쳐 휴대폰을 꽉 움켜잡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 유재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났지만 한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화가 누그러졌다.
“어머니?”
“뭐라셔?”
애써 위로하려고 꺼낸 말에 웃음이 났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웃으니 이상했는지 한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웃냐?”
좋다는 말이 무색하게 목소리는 제 귀에도 맥이 없었다. 유재는 주의를 돌려 찬거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념히 행동하는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날 선 말들에 새삼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다.
자식 교육이니 뭐니 멋대로 떠들어도 상관없었다. 유재의 의식을 사로잡은 건 새로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나 장학금 신청하려고.”
냉장고를 닫고 돌아서자 앞에 선 서한준이 보였다. 한준은 턱짓을 하더니 남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국가 장학금?”
“그래. 되면 좋겠다.”
“성적 보니까 막판에 너 때문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한준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성적 그닥인
과목은 나중에 재수강해야겠더라. 겨울 방학 땐 계절학기 들으려고.”
“잠깐만. 보여 줄게.”
장난스레 옆구리를 쿡 찔렀으나 이어지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돌아보자 서한준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전거는?”
“…….”
“갑자기 이런 얘길 왜 하냐면.”
“응? 아니?”
유재가 발을 퍽 걷어차자 한준이 발길질을 피해 굴렀다. 침대에서 떨어진 한준이 다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와
누웠다. 도리어 깜짝 놀란 듯한 낯짝에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 난 줄 알았다고.”
쉴 새 없이 계산을 하며 빠듯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서한준은 자신을 배제하지 않았다. 서한준의 계획엔 항상
그들이 함께였다.
“못 알아들은 척하네.”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한준이 시큰둥하게 미간을 모았다. 유재는 그의 얼굴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늘을
드리웠다.
“모르겠는데?”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준은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지금에 만족했다. 서한준의 일과가 자신의
일과였다. 그가 털어놓는 모든 시답잖은 이야기는 전부 제 귀에 들어왔다.
한준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벌어졌다. 유재는 그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한참을 더운 날씨에 시달린
피부는 말랑말랑하고 뜨거웠다. 더 깊이 숨을 겹치며, 유재는 눈을 감았다.
9.
오후 7:32
체할 것 같음ㅋㅋ
한준이
ㅋㅋㅋㅋㅋ조금만 먹어라
오후 3:35
“버스가 좀 막혔어.”
유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황당한 소리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참아 보려 했으나 이미
입꼬리는 한껏 올라간 채였다.
유재는 수저를 내려놓고는 미소 지었다. 그냥 닥치고 먹으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는 그만큼 비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신호로, 결국 아버지가 딱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던졌다.
“쟤 저거 봐. 당신이 애 교육을 제대로 했으면 저렇게 말대답을 하겠어? 당신부터 가장을 무시하니까 애가 다
보고 배운 거 아냐?”
거실 소파 옆에 두었던 가방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와장창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을 쿵, 딛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엎어진 상 옆에서 몸싸움을 시작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유재는 달려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미끄덩한 음식을 밟아 중심을 다시 잡으려던 찰나 귓가에서 뻑
소리가 났다.
전화 너머로도 전해지던 분노. 거듭할수록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가족 모임. 처음 목격한 광경.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리면 이 지긋지긋한 꼴도 끝이었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왜?”
젊은 시절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가득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옷을 입고 다양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
유재는 그중 가장 큰 액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산 정상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찍은 사진이었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 있었는데, 시선 역시 카메라가 아닌 그녀를 향한 채였다.
“결혼 왜 했어?”
그 질문에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유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갑자기 뭐 그런 걸 물어?”
“네 아빠가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고, 강요는 무슨. 너희 할아버지는 죽어도 안 된다고 반대했었어.”
“…….”
“엄마는?”
“나 뭐?”
이번에는 제대로 웃음이 터졌다. 짤막한 실소가 아니라, 그녀는 수그린 몸이 크게 들썩일 만큼 웃어 댔다.
옷장 문을 꽉 쥔 어머니가 발간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순간 몽롱하게 흐려진 눈으로 대답했다.
“사랑했지.”
“…….”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현실과 멀어져 점점 흐릿해졌다. 유재는 다시 사진을 돌아보았다.
사진 속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여자친구라도 생겼니?”
“체했냐?”
“그렇게 안 좋았어?”
“좋을 때가 있었나.”
“너 여기 왜 이래?”
눈앞에는 사납게 경직된 표정의 서한준이 있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곳은 왼쪽 뺨이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맞고 상처가 남은 모양이었다.
한준이 잇새로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의 얼굴을 세심하게 훑는 눈이, 분노로 일그러진 미간과 힘이 들어간
손이, 제 일처럼 분개하는 서한준이 좋았다. 괜찮다고 달래진 못할망정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고 싶었다.
유재는 제 얼굴을 붙든 손을 부드럽게 겹쳐 잡으며 웃었다.
“아파.”
“알았지?”
소화제를 주워 들고, 한준은 잠시 바닥을 쏘아보고 서 있었다. 유재는 속이 단단히 상한 듯 보이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나 배고파.”
“…….”
“떡볶이 먹을래?”
“가자. 나도 출출하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 느슨해지면서 긴장이 풀렸다. 입가가 미소로 달싹거렸다. 유재는 다리를 쭉
뻗어 단번에 거리를 좁히고는 한준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안았다.
* * *
백 세 인생 시대다. 고령화 시대에 의술까지 발전하며 수명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니 앞으로 대략 여든 해를 더 살아가게 될 것이다.
팔십은 이십의 네 배나 된다. 안일하게 관계를 유지했다간 연달아 네 번 좆되고도 남을 긴 시간이라는 소리다.
시계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드디어 정시가 되었다. 유재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완벽하게 짜 둔
시간표에 맞춰 과목을 하나씩 클릭했다. 일부러 피시방까지 나온 만큼 반드시 수강 신청에 성공해야 했다.
주 4, 전공과 교양을 적절하게 골고루 배치해 서한준과 완벽하게 맞춰 둔 시간표였다. 이번만큼은 한준도
요상한 교양 과목을 골라 모험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아서, 선배들에게 추천받은 과목으로 신중히 골랐다.
훗날 대기업 취업에 흠이 가지 않도록 2 학기에는 성적을 제대로 관리해야 했다.
원하던 과목을 무사히 다 신청한 유재가 두 팔을 쭉 뻗어 허공에 만세를 했다. 과목명과 교수를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자마자 그는 옆에 앉은 한준의 의자를 확 끌어 젖혔다.
“됐어?”
“가만있어 봐, 아직 하는 중이야.”
서한준은 주먹만 빠르지 의외로 굼뜬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믿을 건 파이트 클럽뿐이다. 유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뒤에 앉은 승민을 불렀다.
“형, 됐어요?”
“저 된 거예요?”
“아자!”
“감사합니다!”
유재는 재빨리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한준을 마주 껴안았다. 한준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그대로 안긴 채
어깨 너머로 승민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샴푸 냄새가
풍겼다.
그만.
그들의 신뢰와 우정은 사귀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다. 서한준과의 관계에서 달라진 건 서로를 성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이 친구이자 애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이용하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애인 사이에 하는 일들을 하되 현재 그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균형을
잘 유지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동한다고 무조건 본능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본능이 강해질수록 이성과는 멀어진다. 너무
자주 하면 관계의 성질이 바뀔 수도 있고, 한준이 질릴 수도 있고, 스스로의 난폭한 충동을 자제하기도 어렵다.
유재는 문득 아버지의 멱살을 잡아 쥐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서한준한테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들의 몸싸움에 이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렇게 싸우고도
바로 화해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제 부모처럼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이십
년 때리다 보면 분명 일상에서도 손이 날아갈 것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단 일주일에 한 번, 애인으로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빈도로 잠자리를 조절하고
자제하면서 균형을 찾을 생각이었다.
“형 살이 좀 빠지셨네요.”
“유럽 어디요?”
한준이 고개를 들이밀고는 물었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보자 웃음이 났다.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새로운 게 없어질 때쯤에는 유럽 여행을 같이 가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
“어때요? 건물 멋있어요?”
승민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찾아 보여 주었다. 프랑스 풍경을 담은 수많은 사진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형 여자친구예요?”
“응. 예쁘지?”
승민이 여자친구 얼굴을 확대하며 벌쭉 웃었다. 한준은 입을 벌렸다가, 유재를 힐끔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재는 사진을 쭉 넘겨 보았다.
“여기서부턴 형 혼자네요.”
“얼마나 사귀었어요?”
“우리…… 오 년 좀 안 됐어.”
“진짜요? 엄청 오래됐다.”
“뭐?”
주말에만? 주말 부부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대학생이 애인을 주말에만 만난다니. 유재는 콕 집어
물었다.
“주말에만요?”
“어.”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지. 그래도 뭐 어떡해. 대기업 야근이 장난 없어. 만나기로 한 날에 갑자기 야근하는 경우도 많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유재가 휴대폰을 돌려주자 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먹긴 했는데, 형이 밥 사 줄까?”
“애니타임!”
“야. 너네 집 갈까?”
“우리 집? 반찬 사 놓은 거 다 먹었잖아.”
중간에 잠시 말을 멈추고, 한준은 입술을 핥았다. 그가 곧잘 하는 행동에서 의도가 읽혔다. 착각이 아니었다.
서한준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 * *
“상대적인 빈곤이 문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진짜 돈이 없어서 불행할까요? 아닙니다. 나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진 것과 내 것을 비교하는 데서 불행이 시작돼요.”
한준은 다시 교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상대적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탈감.
욕구불만. 그녀가 나열하는 단어에서 뻗어 나온 무의식의 가지가 익숙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조유재.
유재가 불쑥 끼어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바람을 좀 쐬고 오자며 한준을 강의실 밖으로 이끌었다. 대화가 뚝
끊긴 탓에 집행부실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들이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유재의 자리에는 못 보던 쿠키가 놓여 있었다. 한준은 또
한 번 조유재가 누군가의 호감을 샀으리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고등학교 때에도 이런 소소한 선물을 밥
먹듯이 받던 놈이었다.
쪽지를 낚아채서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별말 아닐 테고, 주변에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쪽지를 멋대로 읽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잘생겼대.”
“잘났다.”
한준은 헛웃음을 뱉으며 대꾸했다. 이런 경우가 워낙 많았던 터라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유재는 같은
학교 아이들에게 쪽지나 과자는 물론이고 한 번은 직접 그린 초상화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그는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종종 저런 실없는 소리를 흘리곤 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 같았다. 잘났다. 좋겠네. 꺼져.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넘기면서도
마음이 조금씩 깎여 나가던 기억이 선연했다.
펜으로 노트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를 따라 그리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조유재가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넌 질투도 안 하냐?”
질투.
자신의 질투를 당연하게 여기는 유재가 새삼 낯설었다. 진짜 사귀는 거구나. 이런 걸로 실감이 나는 게 웃겼다.
괜히 민망해 힐끔 곁눈질을 하자 턱을 괴고 있던 유재와 눈이 마주쳤다.
재밌는 만큼 피곤한 수업이었다. 앉아서 일방적으로 강의를 들은 게 고작이었지만 지난주 과제였던 ‘우리 집’
이야기를 제출한 후 강의를 들으면 이 모든 과정이 훨씬 사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오늘 강의 내용이 ‘가난이
우리의 무의식에 끼치는 영향’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가자.”
신경 쓰였다. 분명히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선물했을 거고, 지금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보란 듯 버리고
갈 생각인가. 쿠키를 집어 들자 유재가 멈칫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버려.”
한준이 고개를 까딱 기울인 채 대꾸하자 유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새까맣게 잊고 있었을 테지. 한준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쿠키를 내밀었다. 유재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땐 미안해.”
“가자.”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을, 한준은 그날 밤을 생각했다.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몸이 달았다. 그때와 같은 열기를 좇아 몇 차례 더 행위를 했지만 뭔가 달랐다. 조유재는 좀처럼
그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어쩌면 첫 경험의 기억이 지나치게 미화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이후로 삽입 섹스는 한 적이 없으니, 삽입
당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자극으로 치환했던 걸지도 모르고. 하는 동안 거의 엎드려 있었으니 표정을 구석구석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유재가 그날 유난히 흥분했던 것 같다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히려 조유재는 별로였을지도 모른다. 원래 남자를 좋아하던 놈도 아니고, 처음이라 기대가 높았을 테니까.
요즘 자취방에 둘만 있기를 은근히 꺼려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아주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딴생각 그만해.”
갑작스럽게 떨어진 한마디에 한준이 흠칫 눈을 들었다. 조유재는 무심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음에도 제 복잡한 속내를 훤히 읽힌 것 같아 민망했다. 한준은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정말 둘만 있는 자리를 피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준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유재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코웃음을 쳤지만 얼굴이 대번에 뜨거워졌다. 한준은 재빨리 덧붙여
물었다.
“거기 먹을 게 있었나?”
“…….”
“왜?”
“……어?”
“그런가?”
“당연하지. 그리고 이렇게 날씨도 좋은 가을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너랑 자취방이 아니라 여의도
공원 걷고 싶어. 그냥 차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도 좋으니까.”
아.
족발집은 데이트 분위기로 영 아니지 않나. 분위기 운운하며 거절하고 나자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 헛웃음이
났다. 한창 배고플 땐 낮밤을 안 가리고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전부 먹어 치우곤 했다. 먹다 남은 라면 스프에
밥을 볶아서 먹은 적도 있었고, 가끔 주말에 어머니 일을 돕다 보면 근처 만두 가게 아저씨가 만두를 주고는
했는데, 그걸 굳이 나눠 먹겠다고 문자를 해서 조유재가 달려올 때까지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연애한답시고
까탈스러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노라니 감개무량했다.
마침 지나가던 인문관 근처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강의가 시작될 즈음이라 바삐 걷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맞은편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인파 가운데, 유재는 데이트 메뉴로 어울리는 음식을 하나씩 꼽아 보고 있었다.
“오늘 며칠이지?”
“오늘 15 일. 왜?”
“……아니야.”
유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배가 많이 고픈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막 글러브를 벗은 한준이 터벅터벅 정수기를 향해 걷고 있었다. 오늘따라 빡세게 운동하던 서한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절어 있었다. 살갗에 착 들러붙은 티셔츠를 노려보다가, 유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목요일은 그들이 주 4 로 시간표를 짜면서 함께 쉬려고 빼 놓은 날이자, 모두가 바빠 오히려 식당이나 카페가
한산한 평일이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그 분위기를 타서 잠자리까지 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게다가 유재는 횟수를 거듭하며 성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설프게 한준의 머리채도 잡지 않았고, 난데없이
엉덩이도 때리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질 때면 예능에 나오는 섹스리스 부부를 생각하며 인내했다. 배우자의
취향이 감당이 안 돼서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이의 질릴 대로 질린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하는
중에도 종종 흥분이 살짝 가라앉곤 했지만 사정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꾸준히 돈도 모으고, 수업도 열심히 들으면서 과제도 잘하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데이트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함께 밤을 보낸다. 이 모든 과정을 둘이 함께하고 있었다. 학기 중 모은
돈으로 겨울 방학 땐 계절학기도 같이 듣고 국내 여행도 같이 갈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맛있는 거 먹자.”
그렇지 않아도 한준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있었다. 검색을 해 보려던 참에 한준이 불쑥 물었다.
“뭐?”
“언제는 같이 살자더니.”
한준은 시무룩한 색을 지우고는 대충 둘러댔다. 과외 힘들지? 승민이 대견하다는 듯 한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는 짓만 보면 어르신이 따로 없었다.
시선이 저절로 한준을 향했다. 한준은 정수기용 봉투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 분의
일로 접은 작은 종잇조각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놈에게 마음이 쓰였다. 유재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요?”
“어어, 그래.”
“바깥에서 해야 될 말이야?”
“아니? 왜?”
“남한테 말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려워요. 근데 방금 들어 보니까 저랑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거
같아서.”
유재는 조심스럽게 말끝을 늘이며 미간을 모았다. 바로 알아들은 승민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좋았지.”
“음…….”
유재는 돈을 벌면서 서서히 이상해진 아버지를, 친했던 한준의 어머니와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하나의 계기가 대개 존나 파괴적이어서 그렇지. 실소를 삼키고 나니 승민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
우울해 보이는 승민의 앞에서 유재는 침묵했다. 어른들의 사정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여파는 익히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털어놓곤 했던 녀석에게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 모두의 부모님을 통해
전교에 퍼진 소문.
오늘은 한준이 원하던 대로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는 게 낫겠다. 최대한 자제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융통성 있게 조절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서운하게 할 이유는 없다. 같이 살자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가
투덜투덜 불평하던 서한준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맞다. 너 복싱 대회 나갈 거야?”
“아니.”
“…….”
“거기 팝콘 말고 먹을 거 또 안 파나?”
한준은 중얼중얼 말끝을 늘이며 검색하기 시작했다. 옆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한준이 웃으며 내민 휴대폰엔 누군가의 블로그 후기가 있었다.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며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스크롤을 쭉 내리면서 사진을 살펴보는 서한준은 왠지 조금 노곤해 보였다.
“같이 가.”
지갑 하나 가지러 다녀오는데 왜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느냐 되물을 차례였지만 서한준은 그러지 않았다.
물끄러미 이어지는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벙긋거렸을 뿐이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잠금장치 소리가 났다. 한준은 유재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갑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는 말간 눈을 깜박이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유재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한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
뽀뽀할까.
말을 마치는 순간, 따뜻하게 품에 든 서한준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바로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멋쩍은 표정만 잠깐 짓고 말았다. 유재는 큼 헛기침을 하고는 물러섰다.
“들어와.”
“방 깨끗하네.”
“그래? 잠깐 있어 봐.”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향수를 발견한 유재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허공에 몇번 칙칙 뿌리고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자 한준이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냄새 어때?”
“응.”
“네가 샀어?”
뭐 하는 거지?
“거기엔 향수 안 뿌렸는데.”
“그래?”
눈앞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벌겋게 자국이 남을 때까지 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작이군. 유재는
일부러 고개를 비틀어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배달 앱을 찾아 손을 움직이려는데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멱살을 그러쥐었다.
따끈따끈한 입술이 부드럽게 입맞춤을 쪼았다. 간지러운 기분에 뱃속이 들떴다. 서한준이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벌리는 게 느껴졌다. 그 말랑말랑한 감촉을 잘근잘근 씹어 빨고 싶었지만…… 유재는 한준의 머리가 살짝
밀릴 정도의 힘으로 쪽 입을 맞췄다.
밀려난 한준이 반짝 눈을 떴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한발짝 물러서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유재는 미소 지었다.
“치킨 시킬까?”
웃으며 물었으나 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주 웃지도 않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던 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너 나랑 이러는 거, 아직 좀 어색하냐?”
“아니? 괜찮은데.”
“그래. 치킨 시켜.”
“화났냐?”
“아니.”
“왜? 내가 키스 피해서?”
키스가 깊어질까 봐 입술로 꾹 도장을 찍은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려던
참이었다. 서한준이 번뜩 눈을 들었다.
“피한 거 맞지?”
“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뒤룩뒤룩 굴리는 사이 한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에 돌던 빛이 까무룩 죽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나 간다.”
“야, 어디 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달려가 팔을 붙들어 당기자 새빨개진 귓가가 시야에 들었다. 돌아보는 얼굴도, 눈가도 불그스름했다. 서한준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꽉 물고 있던 말들을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맨날 할 순 없잖아!”
알아듣게 설명해야 했다. 유재는 한준을 한 번 더 힘주어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붙들려 들어온
한준이 되물었다.
“뭐?”
“꼴린다고 맨날 하냐? 적당히 하면서 살아야 할 거 아냐. 남은 인생이 얼마나 긴데. 지금 우리 스물이야.”
한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정리를 마쳤다.
“그래.”
“하면 닳냐?”
“존나 닳지.”
“내가 언제 그랬어?”
“너 말고 내가.”
손찌검 얘기가 나오자마자 제 발 저려서는. 유재는 쯧 혀를 찼다. 앞으로는 서한준 역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귀기로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쥐어 터질 줄 알라고 협박을 하다니. 앞으로는 때마다 확실히 경고할
생각이었다. 관계가 다면적일수록, 세월이 흘러 점차 깊어질수록 서로를 존중해야 했다. 유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천천히 조심히 해야지. 꼴리는 대로 막 하다가 좆될 거야? 앞으로 넌 나랑만 하게 될 텐데, 적당히 선을
지켜가면서 해야 감정이 오래가고 긴장도 쭉 유지될 거 아냐.”
유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섹시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서한준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팔짱까지 끼고 진지함을 피력했으나 한준의 얼굴에서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눈매도 입매도
둥글어지고 말았다.
“미친 새끼.”
한준이 천천히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냐고 물으려던 찰나, 다시 한번 멱살이 붙들렸다.
이번 손길은 부드럽지 않았다.
“으읍.”
서한준이 입가에 제 입술을 뭉갰다. 입을 맞췄다기보단 뭉갰다는 말이 어울렸다.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친
유재가 중심을 잡고 섰다. 두 손으로 한준의 허리를 붙든 채 밀려들어 오는 키스를 받아 내야 했다.
“하고 싶어.”
담백하되 만족스러운 섹스.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유재는 재차 되뇌며 한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샤워도 막 하고 왔겠다,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바지 안에 손부터 쑤셔 넣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자제력이
있었다. 유재는 꽉 붙든 하체를 아래위로 흔들어 사타구니가 틈 없이 맞물리도록 했다. 서한준이 신호를 읽고
무릎을 벌리고 엎드린 채 허리를 움직였다.
“유재야, 후읏….”
“더 빨리.”
짓눌린 채 사정없이 비벼지는 성기가 욱신거렸다. 유재는 제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서한준을 올려다보았다.
헐떡거리며 신음하는 얼굴이 좋았다. 발갛게 상기된 채 미간을 찌푸린 표정도 좋았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낯선 빛으로 물드는 광경에 완전히 넋이 팔리고 말았다.
서한준은 시키는 대로 더 빠르게 아래를 비벼댔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바지 위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제 성기를 문질렀다가, 허벅지와 골반에도 마구 짓눌렸다. 유재는 입술을 꽉 악문 채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유재는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엉덩이를 벌렸다. 아래가 뜨겁게 마찰하는
동안 볼기를 벌렸다가 놨다가 하며 인내했다. 참아야지. 참아야…….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는 순간 한준이
허리를 숙여 입술 위로 속삭였다.
“할래?”
“뭘?”
“읏, 응…….”
한준이 신음하며 입술을 붙였다. 키스하면서 목을 울리는 신음 소리를 꿀떡꿀떡 삼켜내는 놈을 보고 있노라니
점차 숨이 거칠어졌다.
먼저 뒤로 하고 싶어 하다니.
“젤 어딨어?”
“저기.”
“잠깐만 기다려.”
“어?”
그곳이 젤로 번들번들 젖도록 비비다가, 한준이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녀석의 투박한 중지가 꾸물꾸물
엉덩이 사이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윽, 흐…….”
“야.”
“어.”
“…….”
“넌? 그거 기분 좋아?”
“응.”
“…….”
유재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한준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손만 살짝 댔을 뿐인데 한준이 흠칫 허리를 튕겼다.
빨아 볼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윽! 야, 으으….”
“아!”
문득 아래에서 찔걱찔걱 구멍을 쑤시는 소리가 멎었다. 내려다보니 손가락 세 개가 거의 끝까지 틀어박힌 채
멈춰 있었다. 고개를 든 유재가 미소 지었다.
젤이 열에 녹아 침대를 엉망으로 적셨다. 한준의 허벅지 안부터 엉덩이 아래가 다 젖어 미끌거렸다. 가슴을
빨면서 다른 쪽 젖꼭지를 손톱으로 긁고 있을 때, 한준이 목뒤를 잡아당겼다. 당기는 힘에 이끌려 올라오자
완전히 말캉하게 풀어진 입술이 입가를 눌렀다.
“야.”
이마를 맞댄 채 한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평소보다 더 낮게 들렸다.
“넌 뭐가 제일 좋냐?”
“뭐가. 이런 거? 난 다 좋아.”
유재는 재빨리 예능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권태와 짜증에 찌든 이들의 얼굴을 그리자 단번에 흥이 식었다.
그렇게 폭력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있을 때, 한준이 갑자기 어깨를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해 보면 알겠지.”
기둥이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느릿느릿, 엉덩이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성기 피부를 남김없이
조이는 압력이 점차 이성을 집어삼켰다.
“윽! 흣.”
철퍽 주저앉으며 완전히 꿰뚫리는 순간 한준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울먹임이 번지면서 코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유재는 살살 허리를 흔들어 부추겼다.
“읏, 움직여.”
한준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유재의 가슴에 두 손을 얹어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하체를 위아래로 흔들어
발기한 기둥 위로 푹 내려앉았다.
“후우… 흣, 더 빨리.”
눈앞이 핑핑 돌았다. 서한준이 움직일 때마다 자지가 남김없이 빨렸다. 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갈 땐 질척하게
들러붙으며 압박하던 내벽이, 빠져나갈 땐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끝까지 따라붙었다. 시트를 세게 붙잡은 채
눈을 뜨자 거칠게 움직이는 서한준이 보였다. 그가 내려앉을 때마다 쭉 뻗어 발기한 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음낭을 세게 쥐어 주무르는 순간 한준이 뒤를 꽉 조였다.
“으윽, 헉, 으!”
“하아, 흣.”
유재는 한준을 옆으로 돌려 눕히고는 한쪽 다리를 홱 위로 들어 올렸다. 다리가 젖혀지면서 힘이 들어간
엉덩이에 골이 팼다. 그곳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볼기를 벌려, 젖은 구멍에 다시 한번 성기를 맞추었다. 쑤욱
밀어 넣으면서 한준이 밀려나지 않도록 그의 배를 꽉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하아, 으….”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나서, 유재는 고개를 숙여 한준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옆얼굴이 젖어 있었다. 붙잡은
허리도 온통 젤로 미끌거렸다. 짐승 새끼처럼 허공에 들어 올린 한쪽 다리가 처박는 힘에 밀려 속절없이
흔들렸다.
버티지 못해 아래로 떨어지는 다리 사이에 유재가 무릎을 밀어 넣었다. 한준이 헐떡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젖은 목소리를 더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입술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질퍽거리는 소리가 신음에 섞였다. 고여 있던 침이 줄줄 흘러 뺨을 적셨다. 드러난 목이
길었다. 유재는 그 매끈한 살갗에 이를 세웠다.
“으응, 윽! 아, 아!”
“헉, 흣, 좋아?”
입속을 휘젓는 손가락 때문에 한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빨아서 적신 유재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에 물렁물렁한 유두가 닿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재는 뜨거운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흐, 읏…….”
“쌀 때까지, 윽, 만져 줘.”
“이렇게?”
“더 세게.”
한준이 잇새로 애원하며 제 성기를 더듬어 잡았다. 절정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유재는 자위하는 한준을
품에 안은 채 동그랗게 심지가 선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렸다.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세게
눌렀다가, 길게 잡아당긴 다음 비틀었다.
“유재야, 유, 헉, 흐.”
한준이 더 빨리 팔을 흔들었다. 유재는 입술을 깨물고는 한준의 허리를 붙들었다. 쩍쩍 안에 처박으며 임박한
사정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한준이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하아… 흐, 너도 기분 좋아?”
“좋아.”
그 순간 한준이 흠칫 떨었다. 그가 절정을 맞았음을 눈치챈 유재가 한준을 엎어트렸다. 움찔거리는 등 근육을
내려다보며, 그는 난폭하게 하반신을 부딪쳤다. 철썩철썩 성기가 꽂히는 동안 한준은 남은 정액을 모조리 싸
냈다.
“으윽!”
체액이 식어 축축한 침대가 차갑게 느껴질 때쯤, 한준이 중얼거렸다.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던 유재가
휴대폰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킨?”
“어.”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온 유재가 침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누워 있던 한준이 옆구리에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했다. 벌러덩 쓰러져 눕자 서한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메뉴를 고르던 중,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든 유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상체를
뒤로 뺐다. 더 넓어진 시야에 한준의 몸이 훤히 들어왔다.
“뭐야? 이리 와 봐.”
“어? 자국났네.”
“이거 시킨다?”
“봐봐!”
단호하게 잘라 명령하자 유유히 받아치던 한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유재는 잇자국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유륜 주변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던 자국이 선명했다.
섹스할 땐 미친놈이라도 되는 건가. 경험이 적어서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며 가슴을
살펴보고 있는데 살갗이 서서히 상기되는 게 보였다. 힐끔 눈을 들자 한준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유재는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 이런 걸 당연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한준은 큼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붉어진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 * *
“뭐야. 끝났어?”
유재는 대답은 않고 큭큭 웃으며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등록금이 얼만데, 과외 하느라 피곤해서 정작
수업은 다 흘려듣다니. 한준은 고개를 휘휘 저어 잠기운을 털어 내고는 기지개를 켰다. 생각 없이 홱 상체를
젖히던 그가 움찔 수그렸다.
“아.”
“삼십 분.”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조유재가 다가왔다. 갑자기 시야를 꽉 채운 그에게 밀려 등이 벽에 부딪혔다.
물러설 곳이 없어 고개를 들자 코앞에서 바라보는 유재와 눈이 마주쳤다.
한준은 눈을 느릿느릿 내리깔았다. 고개를 기울인 채 거리를 좁히며, 곧 맞닿을 입술을 기대하면서.
“옷 걷어 봐.”
“뭐?”
“상처 나았어?”
진짜 다친 게 걱정스러운 건지, 음란한 장난인지 저 태연한 얼굴로는 분간이 안 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놈인데 연애를 하다 보니 알쏭달쏭할 때가 많았다. 한준은 티셔츠 밑단을 잡고 목 끝까지 걷어 올렸다.
“자.”
“아니, 그냥 좀만 더 있어 봐.”
유재가 상처 위를 엄지로 스윽 문질렀다. 차가운 손이 스치자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예민해진 피부에 집요한 눈길이 닿았다. 한준은 괜히 입맛을 다시고는 유재의 어깨 언저리만 노려보았다. 그런
의도가 아닌데 혼자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너 이런 거 좋아하냐?”
“뭐?”
조유재가 화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또렷한 초점이 정확히 한준의 얼굴에 꽂혔다. 유재는 바로 손을 뗐다.
“테스트는 무슨.”
재빨리 말을 돌리는 유재가 귀여워 웃다가, 한준은 가방을 주워 멨다. 잠깐 떠들었을 뿐인데 벌써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유재가 따라 나와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
“너도 지금 나가게?”
혹시라도 따라올 생각이면 꺼지라고 경고하려던 참에, 유재가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려 쪽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이 한 번 더 부드럽게 키스를 쪼았다.
“가자.”
고개를 든 유재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미소 지었다. 눈에 익은, 그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유재는 정문까지 바래다주겠답시고 따라왔다. 따라오지 말라고 할 방도가 없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바래다주는 것이고 바래다주다보니 우연히 정윤과 마주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주친 김에 인사는 인간 된 도리였다. 조유재는 정윤을 만나자마자 유들유들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 자식이 진짜. 이럴 줄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한준은 정윤이 당황하지 않도록 말을 보탰다.
조유재는 능청스럽게 정윤을 ‘누나’라고 불렀다. 훤칠한 놈이 생글생글 웃으며 치대는 걸 싫어할 이는 없을
터였다. 고등학교 때도 저러고 다니면서 모두의 환심을 샀던 놈이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냥 누나를 누나라고 불렀을 뿐인데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한준은 오가는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니에요. 잘 지냈어요?”
“네.”
“진짜요?”
정윤이 중국어과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유재는 능숙하게 공통 화제를 캐내어 대화를 이었다.
한국대학교 외국어 강의는 어떻고, 교양 기초 강의는 어떻고, 정윤이 성심성의껏 설명하는 동안 유재는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집중했다.
눈썹을 모은 채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는 유재를 정윤이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예의를 차렸다.
저 새끼가 결국.
정윤이 예의상 한 말을 유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정윤의 번호를 받고는 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인사했다.
“갈게, 이따 봐.”
한준은 입꼬리를 억지로 당겨 짧게 웃었다. 원하는 바를 달성한 조유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오후 1:58
어쩌라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말았다. 한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정윤이 샤브샤브 고기를
남김 없이 털어넣으며 말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성실한 편은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가서부터 정신 차리고 빡세게 했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까지 조유재와 대화를 했고, 마침 그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임을 알고 있기에 자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불편했다. 정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유재가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했던 게 걸려서
그랬다. 유재 얘기를 이어가다 보면 계속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네. 이거 들어 보셨어요?”
“응. 그거 재밌어. 난 상속법 부분이 제일 재밌더라. 은근히 유용한 정보가 많아. 뭐 법 관련해서 궁금한 거
교수님한테 그냥 물어봐도 친절하게 잘 알려 주시고.”
“이거 시험 어려워요?”
한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주에 배우는 양이 상당해 시험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수업을 듣는 데
도움이 될 참고 도서만 여러 권이고, 나눠주는 유인물은 수업 내용 요약본에 가까웠다. 그 두꺼운 참고 도서를
전부 읽을 순 없었으므로 수업 시간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는데, 하도 피곤하다 보니 강의를 듣는 중에도
많은 내용을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수업 필기 잘해야 돼. 같이 듣는 친구 없어?”
“없어요.”
“정말요? 좋죠!”
유재☆: ㅡㅡ (6 분 전)
* * *
오전 11:26
나 없으니까 심심하지
유재는 문자를 보내곤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수업 중이라 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법에 관심이 많았다고. 그 교양 수업을 그렇게 혼자서라도 들어야 했나? 강의 하나였지만 그 때문에
점심을 같이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아르바이트니 강의니 바빠서 부실하게 먹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집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찬을 사러 갈 시간도, 인터넷에서 잘 찾아 제때 주문해 먹을 여유도 없을
테니 서한준 혼자 점심을 먹는다면 분명 그날 가장 싼 학식 메뉴나 컵라면 따위로 대충 때울 게 뻔했다.
“야! 여기!”
옆에서 메뉴판을 들고 있던 한유빈이 고개를 흔들어 인사했다. 유재는 미소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다른 강의를 듣고 있는 서한준 대신, 지훈과 유빈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시에 중국어 교양 수업이
있는 탓이었다. 고를 수 있는 강의 중에 최대한 비슷한 시간으로 잡은 게 그거였다.
“뭐 시킬까?”
“난 치킨 그라탕 먹을래.”
한준이
ㅋㅋㅋㅋ
오전 11:42
한준이
오전 11:43
오전 11:44
수업이나 들어ㅡㅡ
아예 안 나가서 F 를 받고 기록을 없애고 싶었지만 조만간 정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섣불리 버릴 순
없었다. 유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지훈과 유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뭘 해야 하지. 서한준은 그날도 과외를 하려나?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미리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빼길 바라는
마음 반, 하루 과외를 빼면 밀리는 돈을 계산할 서한준을 이해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신나게 재잘거리던 유빈과 지훈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너 연애해?”
“어.”
“커플링? 너무 이르지.”
유빈이 질색을 하고 대답했다. 우그러드는 미간을 본 유재는 놀랐다. 그렇게 이른가? 고등학교 때도 커플링
맞추는 애들이 있었는데.
약지에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유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받아쳤다.
마침 가격대가 얼마 정도일까 궁금했던 참이었다. 유재는 지훈의 손가락을 잡아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얼마야?”
“같이 샀어?”
“응. 같이 가서 골랐어.”
“아니, 네가 돈 다 냈냐고.”
“싫어할까?”
“어.”
단호한 대답에 유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멋쩍은 듯 입을 가렸다.
유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에 부응할 만큼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유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커플링은 일주년 되면 하고 지금은 하지 마. 장담하는데 좋아할 확률보다 싫어할 확률이 높아.”
“왜?”
“술만 먹으면 그렇게 전화해서 했던 말을 백 번씩 했대. 진짜 극혐이지 않냐?”
“……고작 그걸로?”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모두 음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재는 슬쩍 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나
졸까 봐 깨우려고 보낸 문자였다. 녀석은 최근에 피곤한지 자주 졸았다.
답은 바로 도착했다.
한준이
안 졸거든ㅡㅡㅋㅋ
열공중
오후 12:11
오후 12:11
웬일? 재밌냐?
한준이
ㅇㅇ 나 친구도 사귐
오후 12:12
친구?
누구?
“맞아. 그거 쉽게 할 게 아니라니까.”
“아, 그러세요?”
약속.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을 무심히 내려다볼 때였다. 잠시 꺼졌던 휴대폰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준이
이따가 말해줄게ㅋㅋ
오후 12:15
“안 먹어? 다 식겠다.”
유빈이 부르고 나서야 자신이 한참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재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한준아.”
“너 기다렸지.”
“뭐? 일단 잠깐만.”
현아?
“알았어. 그럼 다음 주 돈부리?”
“어.”
돈부리?
“네, 현아 씨도요.”
“그럴까?”
“안 돼. 우리 다음 수업 과제 해야 되잖아.”
“엉.”
“수업은. 쨌냐?”
“…너 수업 진짜 안 들어가?”
“어. 우리 갔던 데 거기.”
“점심 먹었어?”
“가자.”
* * *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현은 담배와 휴대폰을 든 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막 도착한 문자를 보고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었다.
서한준
여기 어때?
Http://blog.mystory.com/02198473567
오후 1:51
레스토랑 후기글로 이어지는 링크였다. 이현은 사진만 대충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후 1:52
서한준
그렇게 별로인가?
오후 1:53
오후 1:53
서한준
맛있다고 유명하던데
오후 1:53
오후 1:54
할인이나 이벤트를 잘 찾아보면 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도 괜찮은 뷔페를 예약할 수 있다. 이현은 그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찾아보겠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애’니까.
정윤이 소개할 때 했던 말이 떠올라 실소가 터졌다. 여자들은 저런 순진한 태도에 지나치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었다.
등나무에 도착한 이현은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던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한준의 친구. 이름은 잊었지만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첫인상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키도 거의 자신만큼이나 컸다. 복도에 서한준과 셋이
잠깐 서 있을 때, 그 짧은 사이에도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클럽에 한번 같이 가면 무조건
앞쪽 테이블을 받을 수 있겠다.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말을 걸지 조용히 담배만 피우다가 올라갈지 고민하던
참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 안녕.”
“일부러 이러냐?”
“한 번만 더 알려 줘.”
“조유재.”
“하나 줘?”
“케이스 예쁘다.”
“여기서 뭐 해? 누구 기다려?”
“자취 안 해?”
“왜?”
“그냥 길도 더럽고….”
급히 덧붙인 말에서 티가 났는지 유재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현은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쿨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하기야 매사에 예민하게 굴고 열등감을 내비치는 놈들은 담배 케이스 하나에도
오만 꼽을 다 주곤 했다. 역시 타고 나길 잘난 놈이라 여유가 있었다.
“너 키 몇이냐?”
“아니. 유전이야.”
“그냥 차로 한 삼십 분?”
“차 타고 통학해?”
유재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문득 얕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며 대답했다.
“뭐 타는데?”
조유재가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이현은 휴대폰으로 SNS 에 접속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모델명을
대는 것보다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을 보여 주는 게 나았다.
“차 이거야?”
“멋지다. 취향 좋네.”
“아, 내가 외국인 친구들이 많아서. 정기적으로 이태원에서 랭귀지 익스체인지 모임도 주최하고 있거든. 너도
심심하면 놀러 와.”
“너 1 학년 아냐? 진짜 부지런하다.”
“그러면 바로 모임 와서 술 까야 돼.”
“솔깃한데? 좀 더 해 봐. 살게.”
“한 세 달만 오면 미드 자막 없이 볼 수 있어요.”
조유재가 왁 웃음을 터트렸다. 수준도 코드도 비슷한 놈을 만나자 간만에 재밌었다. 더 친해지고 싶은데
돌이켜 보니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았다. 이현은 조유재에 대해 더 알 수 있을 질문을 골라 던졌다.
“넌 뭐 재밌는 거 안 하냐?”
“술 좋아해?”
“번호 줘. 연락할게.”
* * *
깨끗하고 괜찮았다. 음식도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 둔 예산으로는 턱도 없었다. 무작정 고급스러운
곳을 고집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기념일엔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라,
적어도 ‘저게 뭐냐’ 정도는 아니었으면 했다.
예산이 조금 넉넉하면 좋으련만. 한준은 캘린더에 표시한 과외 일정을 훑어보았다. 애매하다. 자주 취소하는
애가 있어서 과외비를 월초에 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다. 횟수가 거의 다 찬 다른 학생 하나는
기념일인 금요일에 수업을 빼야 해서 과외비가 일주일 밀리게 된다. 다른 요일에도 보충이 어렵다.
“여보세요.”
—과외 가고 있어?
“어.”
—저녁은 뭐 먹었어?
—그걸로 되겠냐.
다정한 목소리에 피로가 가셨다. 한준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미소 지었다. 이렇게 그냥 대화만 나누고 있어도
좋은 것을, 혼자 후기 글을 여러 개 읽어 가며 고민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야.”
전화가 끊어지기 전, 한준이 유재를 불렀다. 혼자 골머리를 앓느니 같이 의논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다음 주에 뭐 할까?”
—금요일?
—너 그날 과외 뺄 거야?
—뭐 먹고 싶어?
“너는?”
“맨날 가던 데?”
—어. 떡볶이나… 돈가스 먹을래? 너 좋아하는 데 있잖아.
지금 기념일에 분식집에 가자는 거냐 따져 물으려던 한준은 입을 다물었다. 유재가 자신을 생각해서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으니 부담 가지지 말라는 뜻일 터였다.
“아, 싫어.”
“나 찾아본 데 있어.”
—어디?
울컥해서 뱉은 말에 유재가 물었다. 한준은 답을 망설이며 입술을 핥았다. 열심히 찾았지만 이현 때문에 고민
중이던 곳이 입속에 맴돌았다.
“그렇지? 잘 고른 거 같다.”
—알았어. 끝나고 문자 해.
“배고프겠다.”
귀여운 놈이었다. 과제로 속을 좀 썩여서 그렇지 성격도 좋고 어리광도 곧잘 피워서 친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쾌활하던 녀석이었는데 요즘 들어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지 피곤해
보였다. 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니. 안쓰러운 마음에 한준이 김밥을 다시 내밀었다.
“너 배고프면 한 줄 더 먹어.”
“아니에요. 이거 한 줄이 꽤 굵어요.”
“알았다. 잘 먹을게.”
“안녕히 가세요!”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한준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밥을 뜯었다. 참치가 두툼하게 들어
있는 끄트머리 김밥 하나를 입에 문 채 버스 정류장으로 걷던 중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아, 그렇구나.
서론이 길었다. 한준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본론을 기다렸다. 다정한 웃음소리가 멎고 나서야 그녀는 용건을
꺼냈다.
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과외를 그만둘 땐 열이면 아홉 학원이 이유다. 한준은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바삐
머리를 굴렸다. 성운의 과외비는 바로 지난주에 받았다. 8 회분의 과외비를 받았고 오늘까지 3 회분을 했으니
아직 5 회분이 남아 있었다.
—애가 친구들도 좋아하고 같이 공부하면 재밌어하고 해서, 과외보다는 학원이 맞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거든요. 저는 사실 과외가 일대일로 케어를 해 주는 시스템이니까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애들이
엄마 마음 같지가 않잖아요.
“아, 네.”
—애가 참,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어떡하나 몰라요. 성운이가 저랑 얘기할 때는 선생님이랑 헤어지는 게
서운하다고 그랬었는데.
“아,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과외비는 5 회분 전부 드릴 거고요, 성운이 학원에 잘 적응하길 바라고… 혹시
또 보충이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 주세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기 무섭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준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성운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신 못 보겠지? 서운한 마음을 삼킨 채 그는 돌려줘야 할 돈을 계산해 보았다.
기념일에 쓰려고 예산으로 잡아 두었던 돈을 전부 뱉어 내고도 모자랐다.
* * *
선물은 이미 주문해 두었다. 확 줄어든 예산을 가지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한준은 효과가 좋다고 유명한
립밤을 세트로 하나 샀다. 조유재는 트든 말든 입에 뭘 바르고 다니는 놈이 아니라서, 이번 기회에 선물하면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유재의 튼 입술을 지적했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던
참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주문 내역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엎어져 있던 이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속 아퍼.”
“술 작작 마셔.”
“유재? 어디서?”
“그래? 무슨 얘기 했냐?”
“차?”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잡으면서 대화는 끊겼다. 한준은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조유재가 차에 관심이 있다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취방이 코앞인데 차를 탈 일이 있나?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종일 같이 있는 놈이라 동선을 알기에 더욱 의아했다.
하긴, 필요하지 않아도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지. 당장 타진 않지만 가까운 미래에 하나 살 수도 있을 테니까.
어떤 스타일의 차를 가지고 싶을까. 멋있다고 생각한 차는 어떤 걸까. 차에 대해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었지만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전부 듣고 싶었다. 딴 세상 이야기라도 그게 조유재의 세상이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오늘 점심 같이 먹는 거지?”
그 당연하다는 태도에 당황한 한준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저번 주에 갑자기 나타난 유재 때문에 식사는
다음 주로 미루자고 흘리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대로 말하고 취소했어야 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왜?”
또 한 번 약속을 미루는 게 미안해서 한준은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번 주부터 기념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던 걸 빤히 알 테니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 아니야.”
웃으며 하는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주저하던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달아 약속을 취소하는 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다음 달에 과외비가 들어오면 사면 되니까.
“어. 가자.”
“왜 그래?”
“여기서 유재 만나서 같이 가자. 이리로 오라고 했어.”
“뭐?”
“걔 지금 수업 있을걸?”
“다 왔다는데?”
이현이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돌아본 한준이 작게 탄식했다.
망했다.
한준은 신중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이현한테 뭐라고 했더라? 기념일 때문에 다 털렸다고 했었지.
잔고가 바닥난 건 사실 기념일을 챙기느라 그런 게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과외비 환불 때문이었는데, 안일하게
변명했던 게 문제였다.
잡담을 하다가 행여나 장난으로라도 그 얘기가 나온다면 유재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계산할 때 필연적으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이현이 제 몫을 계산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유재가 이유를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민 중이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유재가 앞장섰다. 혹시 이현이 신경 쓰여서 중국어 교양을 버리기로 한 걸까? 한준은 더
캐물으려다가 억측이 과한 듯해 그만두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돈부리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 한준은 고민했다. 별것도 아닌 문제로 유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바로 결심이 서지 않았다. 아예 지금 이현에게 밥을 살 필요가 없다고 문자를 보낼까?
옆에 있으면서 문자를 했다가는 이현이 오히려 말을 꺼낼 위험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려 자리를 비울 때를 노려 얘기하는 게 최선이었다. 한준은 묵묵히 찡그린 채
걸음을 옮겼다.
뭐 임마. 한준은 유재를 흉내 내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유재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메뉴판으로 주의를 돌렸다.
“난 그냥 가츠동 먹을래.”
한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에비동이나 가츠동이나 둘 다 맛있었다. 이현이 메뉴를 대충 훑어보더니 한준의
팔꿈치에 제 팔꿈치를 바짝 붙이며 물었다.
“가츠동 맛있어?”
“어. 여기 다 맛있어.”
주문을 했으니 메뉴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끔 화제를 잘 골라야 했다.
이현은 좋아하는 주제에 한해 말이 많은 편이었다. 한준은 이현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아, 그래.”
“나 차 잘 몰라.”
“드라이브 재밌겠다.”
“나 저녁은 안 돼.”
“얘 맨날 과외하느라 시간 안 돼.”
“주말에도?”
“어.”
이현이 옆구리를 찌르며 짓궂게 눈을 휘었다. 수저가 앞에 놓이는 소리에 한준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숟가락을 똑, 소리 나게 테이블에 놓아 주던 조유재와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웃고 있었지만 방금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거스른 게 확실했다. 돈부리고 뭐고 그냥 집에서 혼자 컵라면이나 먹고 싶었다.
화제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한준은 이현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주의를 끌었다.
“복싱? 중앙 동아리야?”
“매끈하네?”
“뭐…… 그렇지.”
뭐라고 맞장구는 쳐야겠고 딱히 할 말은 없어, 한준은 목뒤를 긁으며 얼버무렸다. 유재의 긴 다리에서 시선을
돌린 한준이 쩝 입맛을 다셨다. 조유재가 제 애인이고 잘난 놈이긴 했지만 남한테 다리까지 칭찬하고 있기가
뭐했다.
다른 곳도 다 잘생겼지만 조유재는 다리가 특히나 길었다. 길고, 매끈하고, 탄탄했다. 늘씬한 허벅지 안쪽에
손을 대보면 돌처럼 단단했다.
아직 테이블 밑을 쳐다보고 있는 이현의 앞에 유재가 물컵을 쑥 밀어놓았다. 움직임이 급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자리를 찾아가던 손이 컵 아래쪽을 쳤다. 가장자리까지 물이 찰랑찰랑 들어차 있던 컵이 대번에
고꾸라졌다.
“으악!”
“미안해. 여기 휴지.”
“화장실 저기 밖에 있어.”
“아주 눈을 못 떼는데.”
슬슬 따라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쯤, 갑작스러운 한마디가 날아왔다. 가볍게 흘릴 수 없도록 대놓고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한준은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보았다.
“뭐?”
“눈을 못 뗀다고.”
조유재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토라진 듯한 얼굴이 귀여웠지만 오늘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준은
유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달래고는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뭐?”
“화장실 갔다 올게.”
“참아.”
그러자 조유재는 생글거리며 손을 잡았다. 더운 날도 아닌데 맞잡은 손이 뜨겁고 축축했다. 한준은 유심히
유재를 살폈다.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목이 뻣뻣했다.
방금 던졌던 명령조의 한마디보다 훨씬 부드럽게 정돈된 말이었지만 한준은 조유재를 잘 알았다. 눈앞에서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고 있는 놈은 사실 보기보다 훨씬 골이 난 상태일 것이다.
“급해. 금방 올게.”
“뭐 해?”
“뭐야, 너네?”
“왜 그냥 나가?”
“…….”
가르치던 애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과외비 일부를 돌려줘야 해서…… 같이 먹자고 해 놓고 또 약속을 취소할 수가
없어서…… 다음에 사면 되니까…….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그때그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한 선택. 그 변변찮은 과정을 낱낱이 설명해야 한다니
속이 쓰리다 못해 모멸감까지 들었다.
“싸.”
그는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턱짓했다. 한준은 유재가 가리킨 소변기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그따위로 말할래?”
“급하다며. 아니야?”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질투에
미친놈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어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열받을 만한 일이다.
돌아간 식당에서는 이미 이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그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테이블 위엔
주문한 메뉴가 모두 나와 있었다.
“야, 빨리 와. 다 식겠다.”
서한준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태평히 이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유재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자리에 앉았다. 저 둘이 나란히 앉아 떠드는 걸 보며 식사를 해야 한다니, 입맛이 돌 리가 없었다. 마지못해
수저를 들자마자 이현이 킁 코웃음을 쳤다. 밥맛 떨어지는 소리였다.
유재는 웃으며 농담을 했다. 웃어넘기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아는지, 서한준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히 식사에
몰두해 있었다. 볼이 불룩해지도록 밥을 물고 우물우물 씹어 넘기면서.
“새우튀김?”
한창 좋아야 할 시기에 벌써부터 이렇게 뒷전이 된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그따위로 말을 하냐고? 그럼, 다른
남자를 화장실까지 따라갔다가 길이 어긋나니까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하는 놈한테 말이 좋게 나가?
“현아.”
그때, 한준이 이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해 속이 끓었다. 고개를 들자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한준과 눈이 마주쳤다.
이현이 다리를 달달 떨면서 물었다. 유재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한준을 마주 보았다. 갑자기 중국어 수업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이 자리에 자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영 못마땅한 기색이더니, 새 친구와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팁 좀 줘 봐.”
그 말에 이현이 건들건들 상체를 들썩였다. 가만히 눈만 굴리며 그들을 바라보던 한준이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유재는 뒤따른 실소의 의미를 알았다. 자신이 사실 이현에게 관심이라곤 좆도
없다는 걸, 서한준은 뻔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새우튀김 나왔습니다.”
“잘 먹을게. 엄청 통통하네.”
“맛있게 먹어.”
“안 마시진 않아.”
“너 한 병 겨우 마시고 필름 끊기잖아.”
“어.”
지켜보던 외간 놈이 끼어들었다.
“내가 문자 할게.”
“그래. 다 같이 가자.”
이현이 한준을 옆구리로 쿡 찔렀다. 진심으로 드라이브에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서한준은 이어 물었다.
“바 같은 데서 하는 거야? 무슨 술 마셔?”
나란히 앉아 즐겁게 떠드는 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숨이 흐트러졌다. 단순히 분노라고 칭하기엔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조였다. 유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턱을 괴었다.
“재밌겠네.”
“맛있다.”
기름에 반질반질해진 입술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린 한마디. 그 짧은 한마디에 가슴을 빳빳하게 조이던 긴장이
풀렸다. 서한준이 힐끔 눈을 들어 올리자 시선이 만났다. 유재는 그가 손에 묻은 기름을 티슈에 비벼 닦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다른 곳을 보다가 어김없이 제게 돌아오는 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내가 살게.”
계산대 앞에서 이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배도 아니고 동기끼리, 동아리도, 같이
듣는 수업도 없는 사이에 얻어먹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한준 역시 마찬가지다. 유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왜 사. 선배도 아니고.”
네가 왜? 웃으며 대꾸하려던 유재가 입을 다물었다. 이현의 어투로 미루어 보건대 미리 한준과 약속이 된
듯했다. 등 뒤에서 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드를 내미는 이현을 막아선 찰나의 순간, 유재는 한준의 얼굴을 목격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시선.
그리고 낯선 빛으로 붉어진 목.
유재는 더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잠깐 보았던 서한준의 표정이 또렷하게 뇌리에 남았다. 함께 배고팠을
때도, 고백하고 뒤집어지게 싸웠을 때도, 단 한 번 본 적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색으로 물든 얼굴. 그의 온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속이 뒤집어졌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이현이 근처 카페를 가리켰다. 유재는 적당한 미소를 올린 채 한준을 돌아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마주한 한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곧 기다리던 대답을 했다.
한준은 가방을 고쳐 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수없이 나란히 걸었던 보폭이 자꾸만
어긋났다. 조금 늦춰서 기다리면 앞서가고, 따라잡기 무섭게 다시 뒤처졌다. 표정은 정돈되었지만 서한준의
귓가는 여전히 붉었다. 억지로 침을 삼켜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 속이 울렁거렸다.
오직 서한준만이 이처럼 격렬한, 펄떡펄떡 살아 숨 쉬어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과외를….”
“과외를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과외비 일부를 돌려줬어. 그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지출이 커서 그런 거지
기념일 준비한다고 오버한 거 아니야.”
이현은 한준이 기념일 준비로 털렸다고 했다. 그런 말을 멋대로 상상해서 했을 것 같지 않았다. 한준은 한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
“내가 안 왔으면?”
“그럼 끝까지 나한테 말 안 했겠네. 과외 그만둔 것도, 사정 어려운데 기념일 챙겨야 되는 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빚진 것도?”
“무슨 또 빚을 졌대?”
“화장실 왜 따라갔어?”
“…….”
“알아서 한 게 이거야?”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하는 서한준은 의연한 얼굴이었다. 단순히 자존심이 상해서 의지하기 싫다는 연약한
소리가 아니었다. 유재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역시 한준이 느꼈을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제
것처럼 느꼈기에 그토록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뭐?”
“이런 말 매력 없지 않냐?”
“…….”
한준은 조용히 미소를 거두고는 등을 돌렸다. 유재는 답답한 가슴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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