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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병동 6 인실 구석 자리

한 여자가 벌써 다섯 통째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군데군데 깨지고 금이 간 스마트폰 구석에는 4 월 10 일이라는 날짜가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었다.

짧으면 삼 개월, 길면 육 개월, 기적이 일어난다면 십이 개월.

배수로 딱딱 떨어지는 이 숫자는 의사가 말한 그녀의 남은 인생이었다.

원인은 다양했다. 망가진 식습관과 생활패턴, 끔찍한 스트레스와 그걸 달래기 위해 밤마다 혼자 마시던
소주.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의 원인이 바로 지금 전화조차 받지 않는 여자의 남편이었다.

간병을 해달라거나 보고 싶다거나,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로 전화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한 적도 없었고. 그저 네가 갖고 있는 내 돈으로 병원비를 정산해 달라고 연락한


것뿐인데.

남편은 그 메시지마저 깨끗이 무시하고 며칠째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여자는 보풀이 인 낡은 카디건을 걸치고 산책하러 가는 척 병원에서 나왔다.

그녀가 혼자 암과 싸우는 동안, 아니. 암세포에게 먹혀들어 가는 동안 열심히 피어난 벚꽃이 머리 위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봄이었다.

“택시!”

운 좋게도 큰길가에 내려서자마자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아마 이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행운이겠지.

여자는 자조적인 생각을 뒤로하고 익숙하게 목적지를 설명했다.

“우야노, 마이 아픈가베.”

백미러로 그녀를 흘긋 본 택시기사가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말했다.

무심결에 쳐다본 백미러 안에서는 환자복에 낡은 카디건, 푹 눌러쓴 모자로도 감춰지지 않는 민머리를
가진 여자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죠, 뭐.”

많이 안 아프다면 그게 더 이상한 꼴이다.

“금방 나을낍니더. 하모, 열 밤 자모 훌훌 털고 인나제. 인자 봄이다 아잉교?”

서울 토박이라면 선뜻 알아듣기 힘들 만큼 심한 사투리였다.

하지만 여자는 그 사투리에서 익숙함을 넘어 그리움마저 느꼈다.

여자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해주던 아빠와, 아빠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여자의 고향이 부산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여자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 과거를 더듬었다.

열아홉 살.
꿈 많은 소녀는 서울에서도 내로라하는 대학교에 합격했다.

당연히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자취를 할 생각이었지만, 누구보다 기뻐할 줄 알았던 아빠가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아내도 없이 혼자 키운 딸을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안 된다, 거가 어디라고 니가 가노! 마 부산대나 댕기라!”

“아빠가 내 인생 대신 살아줄끼가? 부산대 그래 좋으모 아빠나 가라!”

“이노무 가스나, 키아 놨드마 말하는 꼬라지 보소! 아빠가 니 그래 가르치드나?”

“치아라! 아빠가 허락 안해주도 내는 서울 갈끼다!”

철없는 소녀는 아빠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문을 쾅 닫았다. 평생 부산에서 벗어난 적 없는 아빠가 처음으로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엉엉 운 다음 날, 아빠가 조용히 소녀의 방에 들어와 앉았다.

“부동산에 집 내놨다. 아빠캉 서울 가자.”

여자의 아빠는 건설 기술자였다. 평생 부산에서만 살아온 부산 토박이기도 했다.

그런 아빠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집을 팔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기로 한 결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열아홉 소녀는 알 길이 없었다.

꿈꾸던 대학에 가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저 좋아 팔짝팔짝 뛰면서 아빠의 뺨에 얼굴을 마구 비볐을


뿐이었다.

“그래 좋나, 가스나야.”

기억 속 아빠가 껄껄 웃었다.

여자는 거칠거칠한 수염과 아빠 냄새를 떠올리며 메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퍽 우울해 보였는지, 택시기사가 다시 백미러를 향해 말을 걸었다.

“힘내이소. 그 와, 요새 그런 말도 있다 아입니까. 오늘은 어저께 디지뿐 아아가 그래 가꼬싶다 하던


내일이다……. 맞능교? 내 하도 무식해가 고마 가물가물하네.”

익숙한 부산 사투리가 도화선이 된 걸까. 다 묻었다 여겼던 그리움이 왈칵 역류했다.

이제 곧 만나겠지.

여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물렸다.

“오늘 당장 죽는다고 내일을 원할 것 같진 않네요. 내일이 되어봤자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와 안 생기는교? 생기게 해뿌믄 되제.”

말 끝나기 무섭게 택시가 곡예하듯 빼곡한 차 사이를 비집었다.

큰길을 벗어나 접어든 골목은 여자가 처음 보는 길이었다. 갑자기 낯선 길이 나타나자 여자는 멈칫


당황해서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를 잡았다.

“기사님, 이쪽 길 아닌데요.”

“내만 믿으이소. 아가씨 가는 데까지 고마 칼같이 데비다 줄 테이께네.”

택시는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을 요리조리 잘도 내달렸다.


점점 커지는 불안감이 무색하게도, 마지막에 멈춰선 곳은 틀림없는 여자의 집 앞이었다.

“보이소. 내 아는 길이 전부가 아이라 카이. 쪼매만 대가리 굴리모 이래 편하게 올 수 있는데, 만다꼬 앞만
보고 갑니꺼.”

여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갑을 찾아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기사가 휘휘 손사래를 치며 극구 그


돈을 밀어냈다.

“어차피 드가는 길에 아가씨 태웠다 아잉교. 느 놨다가 까까 사드이소, 이? 아빠가 용돈 줏다, 그래


생각하고.”

아가씨도 아니고 용돈 받을 생각도 없었다.

여자는 연신 내젓는 기사의 손을 덥석 잡아 억지로 돈을 쥐여 주었다.

“그래도요. 왔으면 요금을 내야죠.”

“그라모예, 아가씨.”

기사가 그 돈을 천천히 두 번 접었다.

“다 잘될낍니더. 하모, 잘되제. 그음방 팔팔해지가 뛰댕기고, 돈도 마이 벌고, 아가씨 말이모 고마 죽는


시늉도 하는 머스마 만나가 결혼도 할 낍니더. 내 시방 오늘 운행이 막날이라 안 하요. 아가씨가 마지막
손님인께로, 그래 잘 산다 약속카모 그게 마 요금입니더. 아나, 손 주이소.”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의사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내렸고 병원비를 낼 돈조차 없어 야반도주해야 할지도 모르며, 이미 결혼한
남편은…….

“……네, 약속할게요.”

그런데도 여자는 홀린 듯 대답하며 돈을 받았다.

저 말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사가 격려하듯 여자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뒤에 차오노. 조심해서 내리이소.”

뒤에서 들어온 차 한 대가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렸다. 여자가 황급히 내려서 문을 닫자 택시는 곧장


출발했다.

열린 운전석 창문 밖으로 흔드는 손이 여자에게 보내는 인사 같기도, 뒤에서 경적을 울리던 차에 대한 사과


같기도 했다.

여자는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다 손에 든 지폐를 펼쳤다.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구석에 누구의
작품인지 모를 파란색 하트 하나가 삐뚤빼뚤 그려져 있었다.

이상하게 푸스스 웃음이 났다.

여자는 지폐를 지갑에 넣는 대신 다시 작게 접어 한쪽 주머니에 넣었다.

“……고마워요.”

이 시궁창 같은 인생에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 하나 남겨줘서.

**
강지원. 올해로 서른일곱 살.

평탄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어머니는 지원이 여섯 살 되던 해에 집문서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갖고 도망쳤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현장이 있는 곳이면 마다 않고 달려가 일을 해야 했다.

부모를 대신해 지원을 키워준 할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원의 손을 놓지 못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살뜰한 손길을 받지 못해 촌스럽고 숫기 없는 지원을 또래들마저 따돌렸다.

그럼에도 지원이 삐뚤어지지 않고 자라 어엿한 사회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쁠지언정 늘 애정을 퍼부어
준 아버지와 유일한 친구인 정수민 덕분이었다.

그 아버지마저, 지원이 학사모를 쓴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슬픔을 딛고 아무도 오지 않는 졸업식을 치르고 나서 지원은 제법 괜찮은 기업에 입사했다. 그리고


박민환을 만났다.

‘박민환이라고 합니다. 직책은 보시다시피 대리.’

그는 제 가슴에 걸린 사원증을 가리키며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신입이라 떨리죠? 필요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아, 번호가 뭐예요?’

과 대표가 연락처를 걷은 이후로 남자가 번호를 물어온 건 처음이었다.

지원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향해 왜 이렇게 염치가 없냐고 나무라면서 민환이 내민 핸드폰에 번호를
찍었다.

나 같은 애한테 관심 가질 리가 없잖아. 그것도 저렇게 괜찮은 남자가. 그냥 직장 동료니까, 상사라서


당연히 번호를 물어본 거야.

습관적인 부정이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날아온 문자메세지는 철벽처럼 단단한 그 부정을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했다.

[굿모닝. 잘 잤어요? 오늘 비 온다니까 우산 꼭 챙겨요.]

민환은 아침이면 기분 좋은 인사를.

[집에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네.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요. 좋은 꿈 꾸고.]

저녁이면 다정한 멘트를 번갈아 보냈다.

어느덧 지원은 그의 메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뭐라고 답장할지 고민하면서 몇 번이나 메세지를 썼다
지웠다 하기도 했다.

대리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이건 너무 딱딱해.

좋은 꿈 꾸세요, 대리님.

이건 너무 낯간지럽고.

야근하시던데 안 피곤하세요?

이건 관찰하는 것 같잖아.
결국, 지원은 그의 메세지에 단 한 번도 답장하지 못했다.

바쁜 시즌이 끝나고 마련된 첫 회식자리에서 민환이 옆자리에 앉기 전까지.

‘반만 마시고, 잔은 내 자리에 놔둬요.’

민환은 아닌 척 안주를 지원 앞에 당겨 주고 슬쩍슬쩍 술도 대신 마셔 주었다. 지원은 술이 아니라 민환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이고 회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취했어요?’

시끌벅적한 틈을 타 몰래 물어보는 민환의 목소리가 심장을 마구 두드려 댔다.

‘괜찮아요.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아닌데. 평생 벽만 치고 살아온 지원은 무뚝뚝하게 튀어나오는 자신의 대답에 절망했다.

‘감사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민환이 웃음기 섞인 말투로 속삭였다.

‘말씀하세요.’

‘내 문자에 답장 좀 해줄래요? 그냥 네, 한글자라도 좋으니까.

그 후, 지원과 민환은 연애를 시작했다. 멋지고 다정한 그는 평생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살아온
지원에게 있어 세상의 반쪽이었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달려가는 모습조차 엄마 없이 자라온 지원에게는 그저 부럽고


좋아 보이기만 했다.

그런 민환이 프러포즈를 해 왔을 때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결혼하자, 지원아. 너는 내 인생의 동반자야.’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지원은 정말 행복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거의 매일같이 쳐들어와 남편 아침밥을 줬니 안 줬니, 청소를 했니 안 했니,


심지어 정수기 버리고 보리차를 끓여 먹이라며 잔소리를 퍼붓는 시모조차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너 이뻐서 며느리로 들인 거 아니다. 우리 아들 잘 챙길 것 같아서 허락한 거야. 그런데 아침상에 어제 한


밥을 올려? 정신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너, 몸에 문제 있는 거 아니니? 왜 애가 안 들어서?’

‘집 안 꼴이 이게 뭐니? 돈 좀 번다고 유세하는 거야? 퇴근하고 청소도 못 해?’

‘시간이 몇 신데 늦잠을 자? 주말이면 빨리빨리 일어나서 남편 보양식도 차리고 그래야지!’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가슴에 울화가 켜켜이 쌓여 터질 것 같은 날이면 혼자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그 노래방 앞에서 시모와 마주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밤일 하고 다니느라 남편도 못 챙겼지? 이래서 부모 없는 것들은 안 된다니까! 부모가


뭔짓 하다 죽었는지 알 게 뭐야!’
지원은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시모에게 대들었다. 어머니가 뭘 아시냐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느냐고
길거리에서 소리쳤다.

그 뒤로 민환은 변했다. 그냥 변한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네가 그런 여자일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지!’

시모가 찾아와 동네가 떠나가라 통곡을 하자 민환은 다짜고짜 지원에게 소리부터 질렀다.

‘착하고 알뜰한 줄 알고 결혼했더니, 뒤에선 우리 엄마한테 이딴 식으로 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냐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민환은 늘 폭언을 퍼부었고 시모의 괴롭힘은 갈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민환이 연애 시절부터 조금씩 손대던 주식까지 점점 중독되더니 퇴직금을 모조리 당겨 쓰는 것도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서 거의 전 재산을 날렸다.

결혼한 지 꼭 육 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살았다.

내일은 괜찮아지겠지. 다음 달은,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부질없는 희망은 절망이 되었고 종양은 그 절망을 먹이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다.

무기력에 잠식된 지원이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남은 거라곤 커질 대로 커진 암세포와 대출을 갚고 간신히 건진 낡은 아파트 전세금뿐이었다.

지금 지원이 택시에서 내려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그곳이었다.

지원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식 아파트 맨 끝 집으로 향했다.

원래 이런 집에 살았던 건 아니다.

한때는 성실하게 일해서 모은 돈과 민환이 주식으로 번 돈을 합쳐 번듯한 새 아파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땐 행복했다.

그 기억으로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텼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일이 잘 안 되니까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에 자기 자신도 제어가 안 되는 거라고 천 번도 더 되뇌었다.

녹슨 철문에는 그 흔한 도어락조차 없었다. 지원은 열쇠를 꽂기 전에 습관적으로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철컥.

민환이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한 모양이었다.

지원은 너무 쉽게 열린 문손잡이를 잡아당겨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빛 하나 없던 지원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인 갈색 남자 구두 한 켤레, 그 옆에 뒹구는 새빨간 스틸레토 힐.

그것은 둘 다 지원이 사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갈색 구두는 세상의 반쪽인 박민환에게, 빨간 스틸레토 힐은…….

‘꺄앗, 이거 뭐야?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신어, 지원아!’

‘키 작은 거 싫다며? 빨리 신어 봐. 너는 예쁘니까 뭐든지 잘 어울려.’


나머지 반쪽, 정수민에게.

2 화. 과실치사
유난히 작고 마른 정수민은 지원의 고향 친구였다. 그것도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지낸 유일한 친구.

지원은 인복이 없었다.

멀대같이 크고 마른 몸에 머리카락은 눈꼬리가 쫙 찢어지도록 멋없이 묶고 뺑뺑이 안경을 쓴 그녀를


모두가 멀리했다. 그나마 말을 몇 마디 나누던 친구들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원을 피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지원이 먼저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더 깊은 굴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민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며 그런 지원을 항상 챙겨주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좋게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은 지원이 서울로 진학하면서 헤어졌고, 먼저 취직한 지원이 지인 추천으로 정수민을 입사시켜 한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늘 함께였다. 지원은 수민이 제 세상의 반쪽이라고 여겼다. 수민이 아니었다면 친구 하나 없이 우울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졸업도 못 하고 자퇴했을 거라고.
그런 수민이 지금 내 집에서, 내 남편과 함께 있다.

너무나 분명한 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닐 거야.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그래, 수민이가 내 짐을 갖다 주려고 잠시 들른 거 아닐까? 얼마 전에


내가 속옷이 더 필요하다고 했잖아. 맞아.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새하얗게 굳어 버린 머리가 애써 변명했다. 하지만 본능은 머리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한겨울이 온 것처럼
이가 딱딱 맞부딪히고 온몸이 가누기 힘들 정도로 벌벌 떨렸다.

지원은 턱이 아프도록 이를 꽉 다물고 신발도 벗지 않고 발을 거실로 내디뎠다. 소파에 여자 코트가 걸쳐져


있는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까지, 지원의 발자국이 한 줄로 이어졌다.

“……고 나면, 전세금 빼서 이사 가자.”

닫힌 안방에서 마시멜로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나란히 앉았던 회식날, 지원의 귓가에
속삭였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결혼하고 6 개월이 지난 후부터 한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치이. 여기 전세금 얼마 한다고? 나 새아파트에 살고 싶어, 자기야아.”

지원이 아는 것보다 더 야릇하고 앙탈스러웠지만 틀림없는 수민의 목소리였다.

“당연하지. 보험금 나오면 당장 집부터 계약하자.”

“흐응……. 보험금이 얼만데?”

“오 억.”

아직도 생각을 제대로 굴리지 못하는 지원은 민환이 말한 보험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지원에겐 사망보험금이 오 억이나 나오는 보험 따위 없었다. 그뿐일까. 생활이 어려울


때 하나하나 해약한 덕에 그 흔한 암보험 하나 없어 수술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진짜? 그렇게 많다고? 어떻게?”

수민이 기쁜 듯, 놀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제 아빠가 암으로 죽었거든. 암은 유전이라잖아? 자꾸 체하고 속이 쓰리다길래 병원 보내기 전에 보험부터


들었지.”

정말 오래간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환이 다정했을 때였다.

병원에 가려는 지원에게 그는 소화제를 내밀며 무리하지 말고 좀 더 누워 있으라고 했다. 계속 아프면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 두 켤레와 마주쳤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피가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내달았다가 한꺼번에 땅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지원은 제 것이 아닌 듯 감각이 없는 손을 힘껏
끌어당겨 문고리 위에 놓았다.

“암보험금도 나왔겠네? 자기야, 나 가방 하나만 사주면 안 돼?”

“지난달에도 사줬잖아. 조금만 참아. 알았지? 길어봤자 육 개월이니까 너 갖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지원의 세상에는 민환과 수민뿐이었다. 그 세상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원은 호흡조차 멈춘
채 문고리를 아래로 꾹 눌렀다.

-끼익.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지원이 혼수로 해온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정수민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커다래졌다.
“지, 지, 지원아?”

“여보!”

정수민과 똑같이 알몸인 박민환이 후다닥 일어나 앉았다. 그 뒤에서 정수민이 엉거주춤 이불로 몸을
가렸다.

한 쌍의 짐승 같은 그 꼴이 어찌나 기가 막히고 현실감이 없는지. 지원은 피식피식 웃으며 그 끔찍한 방


안에 한 발을 밀어 넣었다.

“여, 여보. 그런 게 아니라…….”

“미친 새끼.”

꽉 깨문 잇새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지원에게서 처음 듣는 욕설에 박민환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뭐? 지금 뭐라고…….”

“이 더러운 새끼야!”

화산이 폭발하듯, 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네 잘난 엄마한테 그렇게 배웠어?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해,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지원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화장대에 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이 상황에서도 박민환이란


놈은 정수민을 이불로 감싸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지원, 너 미쳤어!”

박민환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지원은 잘못한 게 없어도 움츠리고 사과부터 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미쳤어? 너 지금 나한테 미쳤냐고 한 거야?”

부릅뜬 지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 미쳤다! 내가 제정신이게 생겼어? 너 같은 미친놈이랑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제정신이면 그게 더


미친 거 아니냐고!”

지원이 힘껏 던진 탁상거울이 민환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날아가 와장창 깨졌다.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알아? 위자료 받고, 회사에 대자보 붙이고, 너네 둘 집안에 알리고 얼굴 싹 다
인터넷에 뿌려서 평생 고개도 못 들게 할 거야! 보험금? 꿈도 꾸지 마, 지금까지 받은 것도 토해내게 될
테니까!”

“지원아!”

대자보를 붙이고 얼굴을 뿌린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정수민이 이불을 둘둘 감은 채 허겁지겁 기어


내려왔다.

“그러지 마, 응? 우리 친구잖아. 베스트 프렌드잖아!”

“친구?”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실소가 터졌다. 지원은 카디건 자락을 붙잡는 수민의 손을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거칠게 털어냈다.

“세상에 어느 친구가 죽을 날 받아놓은 친구 남편이랑 붙어먹어? 그것도 보험금 얼만지 계산기


두드리면서?”
“지원아, 내가 이렇게 빌게. 집이랑 회사에는 알리지 마. 제발…….”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지원은 툭하면 질질 쏟아지는 저 눈물 때문에 수민에게 꼼짝도 못
하던 지난날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너는 집이랑 회사가 중요해? 이 상황에?”

“그럼 어떡해, 흐어엉…….”

정수민이 엉엉 울면서 이불자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좀 봐주라, 응?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넌 어차피 죽을 거잖아, 흑…….”

지원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선이 탁 끊어졌다. 역겹고 끔찍해서 속까지 울렁거렸다.

“정수민, 죽여 버릴 거야!”

지원은 바닥에 꿇어앉은 정수민의 머리채를 콱 휘어잡았다. 두 사람이 언쟁하는 동안 주섬주섬 팬티부터
주워 입던 박민환이 기겁하고 달려와 지원을 말렸다.

“강지원, 너 이거 안 놔!”

“못 놔, 이 새끼야! 너나 이거 놔!”

바싹 말라 뼈만 남은 몸에서 무슨 힘이 나는지, 지원은 정수민이 거의 날아다닐 정도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발로 퍽퍽 차댔다.

“꺄아아악! 자기야, 살려 줘! 꺄아아아아악!”

“야, 강지원!”

박민환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철썩, 지원의 눈앞에 불꽃이 번쩍 튀고 안경이 날아갔다.

그동안 갖은 폭언과 재산 탕진으로 위암까지 선물한 박민환이지만 직접 손찌검을 한 건 처음이었다. 터진


입술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커서 아프지도 않았다.

“……지금 나 때렸어?”

지원의 손에 힘이 풀린 사이 박민환이 얼른 정수민을 챙겨 자신의 뒤로 숨기고 비아냥거렸다.

“왜? 남은 때려도 되고 너는 맞으면 안 되냐? 뒈질 거면 곱게 뒈져. 멀쩡한 남의 인생에 똥이나 뿌리니까


처맞는 거 아냐!”

민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공기를 쨍쨍 울렸다. 지원은 바닥에 엎드려 더듬더듬 안경을 주워 썼다. 다리가
휘어져 크게 삐뚤어진 안경 너머로 혐오 가득한 박민환의 표정이 보였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뒈지는데? 다 너랑 네 부모 때문이잖아. 같잖은 것들이 나 엄마 없이 컸다고, 우리


아빠 돌아가셨다고 꼴값 떠는 동안 너는 내 돈 주식한답시고 다 털어먹고 뻑 하면 소리지르고! 아니,
병원만 일찍 갔어도 살았을 거야. 이 살인자 새끼야!”

지나온 세월이 너무 분해서 울컥 눈앞이 흐려졌다. 지원은 눈물이 떨어질까 봐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민환을 노려보았다.

“나 뒈질 때 다 데려갈 거야. 너네 부모, 그리고 너네 둘! 절대 곱게 못 죽을 줄 알어!”

“이게 진짜!”

박민환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 힘껏 휘둘렀다. 이번에 맞은 뺨에서는 철썩 소리가 아니라 퍽 소리가 났다.


그러잖아도 약해진 몸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해 튕겨 나간 지점에는, 지원이 혼수로 장만한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퍽!

뾰족한 모서리에 관자놀이가 정통으로 부딪혔다. 무너지는 몸을 지탱하려 내민 손은 화장대를 붙잡지


못하고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다리가 부러진 안경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지원의 머리에서 미지근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와 흰 모자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꺄아아악!”

“가…… 강지원!”

꽉 눌러 참았던 눈물이 옆으로 주르르 흘렀다. 부릅뜬 눈에는 발을 동동 구르는 정수민과 정신없이 상처
부위를 지혈하려고 애쓰는 박민환이 담겼다.

하지만 곧 그마저 형광등이 꺼지듯 어둠에 묻히고, 희미한 의식에 남은 것은 기계음처럼 윙윙거리는
소음뿐이었다.

“주, 죽은 거 아냐, 자기야?”

“몰라. 어차피 죽을 거였잖아. 아 씨, 재수 더럽게 없네.”

그 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툭 꺼졌다.

짧으면 삼 개월, 길면 육 개월, 기적이 일어난다면 십이 개월.

서른일곱 살 강지원은, 그 시한부 인생마저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

“지원 씨, 점심시간 다 끝났어!”

지원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소스라쳐 번쩍 눈을 떴다. 그 바람에 지원을 깨운 사람이 깜짝 놀라


수선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깜짝이야! 지원 씨, 왜 그래? 어휴, 식은땀까지 흘리네.”

뭐지. 죽기 직전에 본다는 환각인가?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지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만져 보았다.

멀쩡했다. 화장대 모서리에 부딪혔던 관자놀이는 피가 나지도, 움푹 들어가지도 않았다. 귀에 걸려 있는


안경다리도 멀쩡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이상한 것은 손가락 끝에 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항암치료를 받기 전처럼, 하나로


묶여 단정하게 목 뒤로 내려온 긴 머리카락.

말도 안 돼.

홀린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지원에게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디 안 좋아? 얼굴이 창백해, 지원 씨.”

지원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제법 오래 봐왔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은 양주란 대리. 이게 만약 죽기 전에


보이는 환각이라면 이 사람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양…… 대리님?”

“괜찮아? 물 좀 줄까?”

양 대리가 얼른 컵 하나를 꺼내 정수기에 대고 눌렀다.

“어떻게 여기 계세요?”

오래전에 퇴사하셨잖아요.

지원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양 대리만 쳐다보았다.

“뭐?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이렇게 건망증이 심해서 어쩐대?”

양 대리가 깔깔거리며 종이컵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컵 안에는 미지근한 물이 반 조금 넘게 채워져


찰랑거리고 있었다.

“나 얼마 전에 육휴 끝났잖아, 지원 씨. 이제 워킹맘이야.”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원의 기억에 의하면 양주란 대리는 십 년 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했다가 얼마 못 가 퇴사했다. 그것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지원이 그해에 박민환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뭐라고? 시집도 안 간 아가씨? 내가?

지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낡은 카디건을 입고 병원에서 나올 때와 똑같은 벚꽃이 도로 위에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양 대리님.”
넋 나간 듯 창밖을 응시하던 지원이 다시 양 대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 다 마셨어? 더 줘?”

“오늘…… 며칠이죠?”

“4 월 10 일.”

4 월 10 일. 병원에서 나오기 전 핸드폰에서 보았던 날짜였다.

“아, 연도요. 지금 몇 년도예요?”

지원의 물음에 양 대리가 심각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2009 년인 거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새해 바뀐 지 너무 오래됐잖아.”

숨이 턱 막혔다.

미쳤어. 그럴 리가 없잖아.

지원은 허겁지겁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박민환이 던져서 액정이 다 깨진 스마트폰이 아니라 표면에서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빛나는 폴더폰, 속칭 롤리팝이었다. 같은 대리점에 가서 박민환은 파란색, 지원은 분홍색을 샀던 그 롤리팝.

떨리는 손이 굳게 닫힌 폴더를 열었다. 달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드러난 액정에는 2009 년 4 월 10 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죽은 날. 2019 년 4 월 10 일.

오늘은 2009 년 4 월 10 일.

시궁창 같은 결혼 생활 끝에 남편과 내연녀에게 살해당한 한 여자의 인생이, 10 년 전으로 돌아왔다.

3 화. Thank U, Daddy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일지도 몰라. 생각이 가장 쉬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꿈이라면 어느 쪽이 꿈이지? 지난번의 그 끔찍한 삶, 아니면 말도 안 되게 과거로 돌아온 지금?

지원은 고개를 들었다. 절대 꿈이 아니었다. 반쯤 열린 창에서 들어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봄바람도, 조금 쏟아져 손등을 적신 물의 감촉도 완벽하게 현실 그 자체였다.

신이 주신 선물인가? 신 같은 건 믿어 본 적도 없는데. 핸드폰을 손에 들고 눈만 껌벅거리는 지원에게 양


대리가 뭔가를 내밀었다.

“지원 씨, 이거 떨어뜨렸어.”

“아, 네…….”

귀퉁이에 삐뚤빼뚤한 하트가 그려진 만 원짜리 지폐. 무심결에 내민 지원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내 어차피 드가는 길에 아가씨 태웠다 아잉교. 느 놨다가 까까 사드이소. 이? 아빠한테 용돈 받았다, 그래


생각하고.”
폐가 코르셋처럼 꽉 조였다. 지원은 숨을 멈추고 그 지폐를 펼쳤다. 안경알에 눈물이 고여 세종대왕님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빠.

기술이 좋고 성실했던 아빠는 서울에서도 금세 일자리를 얻었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나와 보면 아빠는


없고 식탁에는 따뜻한 아침밥과 오천 원 혹은 만 원짜리 지폐, 서툰 글씨로 쓴 쪽지가 놓여 있곤 했다.

“아나, 연필 사고 남은 거는 까까 사무래이.”

“반찬이 영 아이네. 가꼬 가서 배고프모 까까 사무라.”

어엿한 대학생이 된 스무 살의 지원이 아빠에게는 아직도 까까 사 먹는 어린 딸이었다.

‘느 놨다가 까까 사드이소. 이? 아빠한테 용돈 받았다, 그래 생각하고.’

스물일곱 살의 지원도, 서른일곱 살의 지원도 그랬다.

왜 몰랐을까. 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알았다면 아빠라고 불러 볼걸. 한 번 더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할걸.

까칠한 아빠의 수염에 뺨을 비비듯, 지원은 만 원짜리 지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리 더듬어도 택시에서
본 아빠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 기억에만 화이트를 칠한 것 같았다.

‘다 잘될낍니더. 하모, 잘되제. 그음방 팔팔해지가 뛰댕기고, 돈도 마이 벌고, 아가씨 말이모 고마 죽는


시늉도 하는 머스마 만나가 결혼도 할 낍니더.’

만 원짜리를 주면서 당부하던 목소리만 선명하게 머리를 맴돌았다.

“그래 하께……. 내 아빠 말 들으께.”

‘그래 잘 산다 약속카모 그게 마 요금입니더.’

약속할게.

지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처음에 눈물로 시작한 울음이 곧 소리로 새어 나왔다.

기적도, 환각도 아니었다. 딸을 당신보다 더 사랑했던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이다.

지원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그냥 엉엉 울었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우는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도 울음보다 웃음이


먼저 나올 정도로, 지원은 지쳐 있었다.

양 대리는 지원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티슈 상자를 슬그머니 끌어 옆에 놓고는 탕비실에서 나왔다.


우는 것을 달래 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지원 씨, 어디 아픈가 본데.”

밖으로 나온 양 대리가 민환의 자리에 가서 파티션을 톡톡 두드렸다. 민환이 외근을 나가려고 막 서류


가방을 챙기다가 이마를 찡그렸다.

“지원 씨가요? 아까 좀 어지럽다길래 들어가 있으라고 했는데.”

“어지러운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울기까지 해.”

"어머머, 양 대리님도.”

맞은편에서 열렬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수민이 꺄르륵 웃었다.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우리 지원이는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여자예요.”

“내가 봤다니까. 아주 대성통곡을 해. 민환 씨가 좀 들어가 봐.”

민환은 서류 가방을 책상에 대강 던져 놓고 탕비실로 향했다. 슬림 라인의 수트를 멋들어지게 빼입은 그의


뒷모습에 수민의 시선이 꽂혔다가 금방 떨어졌다.

“지원아?”

의자 위에 웅크린 지원을 향해 민환이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때까지도 지폐에 코를 묻고 있던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에 민환이 눈을 껌벅였다.

“왜 그래? 울었어?”

‘뒈질 거면 곱게 뒈져. 멀쩡한 남의 인생에 똥이나 뿌리니까 처맞는 거 아냐!’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 위에 그 끔찍한 독설이 겹쳐졌다. 지원은 손에 든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안경을
대강 닦았다.

걱정 가득한 저 얼굴은 가짜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감정 같은 건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이


쓰레기 옆에서 빨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리 비켜.”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랭하게 말하자 민환이 멈춰섰다.

“어디 아파? 반차 쓸래?”

‘몰라. 어차피 죽을 거였잖아. 아 씨, 재수 더럽게 없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지원의 손목을 민환이 잡았다.

“컨디션 안 좋아? 약 사다 줄까?”

“이거 놓으라고!”

지원은 잡힌 손목을 힘껏 뿌리쳤다. 이 상황이 꿈이라도, 환각이라도, 내가 미친 거라도 저 쉬어 터진


음식물 쓰레기 같은 인간만은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말 걸지 마. 쳐다도 보지 마!”

민환이 멍하니 지원을 쳐다보았다. 다정한 척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토악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지원은 몸서리를 치며 탕비실 문을 홱 열어젖혔다.

“꺄앗!”

지원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여자가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산 넘어 산. 이번에는 정수민이었다.

“왜 그래, 지원아? 안에서 큰소리 나던데.”

‘좀 봐주라, 응?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넌 어차피 죽을 거잖아, 흑…….’

자신이 피해자라도 되는 양 흐느껴 울던 정수민이 지금 말짱한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가 수백 개 달린 벌레가 눈앞에서 꿈틀거려도 이보다 징그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안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년.”

“응? 뭐라고 했어?”


가증스러운 말투에 헛웃음이 났다. 도대체 몇 년, 몇십 년이나 속고 산 걸까. 지원이 갑자기 피식피식
헛웃음을 흘리자 수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원아……?”

“강지원 씨!”

멀리서 굵직한 목소리가 지원을 불렀다. 지원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수민을 지나쳐 그의 책상으로 갔다.
투박한 타이를 메고 셔츠 소매를 대강 걷어 올린 남자가 뿔테 안경 너머로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부르셨어요? 저기, 그…….”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지원은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모든 게


총천연색으로 뚜렷한 십 년간의 기억 속에서 오직 이 남자에 대한 것만 뿌연 흑백이었다.

“강지원 씨?”

남자가 다시 한번 불렀다.

“괜찮습니까?”

“네, 저……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숙인 지원의 눈에 책상에 놓인 사원증이 들어왔다.

U&K food 부장 유지혁.

그제야 기억의 파편이 조금씩 돌아왔다.


커다란 키에 늘 똑같은 수트 차림, 필요한 말 외에는 절대 하지 않는 유지혁 부장은 회사 내에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런데 지원이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돌연 퇴사했고, 그 후로 유지혁을 보거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송한 거 알면 앞으로 조심하세요.”

그의 말투는 높낮이가 거의 없어서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티가


났는지, 유지혁이 눈썹을 아주 약간 찡그렸다.

“여기는 직장입니다. 공과 사는 구분합시다.”

그제야 아까 박민환을 뿌리쳤던 게 사랑 싸움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은 불쾌감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겨우겨우 반듯하게 만들고 고개를 까딱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유지혁이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 왜 주는 거지?

엉거주춤 손수건을 받아든 지원을 향해 그가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여기.”

그를 따라 만져 본 눈가에 물기가 촉촉했다. 지원은 급히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죽었다 살아나자마자 쓰레기들과 마주친 것도 모자라 상사에게 지적까지 받았다. 늘 평탄하지 못했던
인생다웠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탓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다.

“……일단 세수하고.”

유지혁이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외근 나갔다가 바로 퇴근하세요. 여기 서류 전달하고 도장만 받으면 됩니다.”

그는 책상에서 명함 한 장을 고르더니 서류봉투와 함께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선명한 기시감이


지원의 감각을 건드렸다.

이 상황, 분명 한 번 겪은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지원은 잡힐 듯 말 듯 한 기억을 건져내느라 서류를 쥔 채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런 지원을 아까와 똑같이 건조하게 쳐다보던 유지혁이 집게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강지원 씨.”

“아, 아니……. 아니요. 다녀올게요.”

꾸벅 인사한 지원이 돌아선 순간.


“앗!”

책상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발이 걸렸다.

몸이 바닥을 향해 크게 기울어졌다. 발밑에 뒹구는 쓰레기통 탓에 균형도 잡을 수 없었다.

맞다. 서류 받아서 가다가 넘어졌었지.


뒤늦게 떠오른 기억과 함께 나동그라지기 직전,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휙 감았다. 이미 눈을 꼭 감고 넘어질
준비를 하던 지원은 안심하는 한편 얼떨떨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부장님?”

두꺼운 뿔테 너머로 보이는 유지혁의 눈빛이 놀란 듯, 안타까운 듯 복잡했다. 지원은 그게 아까 안경을 벗고


다시 쓰지 않은 탓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바로 코앞에 있는 사물조차 흐릿하게 보였으니까.

“어지러운 것 같은데. 외근 갔다가 병원도 다녀오세요, 강지원 씨.”

지원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진 몇 초가 흐른 후, 유지혁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서둘러 안경을 닦아 쓰니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다. 지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책상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그때 들고 다니던 가방, 작은 수첩, 열쇠고리. 지금 시점에서 보면 모두 촌스러웠지만 물건
하나하나가 애틋하고 반가웠다.
“지원아.”

그런데 왜 하필 옆자리가 박민환일까. 지원은 그녀를 부르는 민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도망치듯
사무실에서 나왔다. 혹시 따라오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로비로 내려가 회전문을 통과한 지원의 머리 위로 오후의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와아…….”

지원은 그 시절, 매일매일 봐서 아무런 감흥도 없던 풍경을 향해 탄성을 내뱉었다.

하늘이 파랬다. 벚꽃 핀 계절의 서울 하늘이 어떻게 물감처럼 새파랄 수 있을까. 아무리 깊숙이 숨을
들이마셔도 텁텁한 미세먼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왔어. 진짜 돌아왔다고.

가슴이 벅찼다. 지원은 손을 올려 머리에서 고무줄을 풀어냈다.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어깨를 덮었다.

이제 뭘 하지? 어떻게 하지? 아니, 어떻게 살지?

일단 주어진 일부터 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지원은 기억을 더듬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늘 갖고 다니던 수첩을 뒤져 보니 명함에 적힌 주소로 가는 길이 적혀
있었다.

잘했어, 스물여섯 강지원. 뭐든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구나.

지원은 스스로를 칭찬하고 때마침 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역삼동. 무사히 거래처에 도착해서
서류를 내밀자 담당 직원이 복사를 마친 뒤 도장을 찍고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부장님께는 따로 연락 드리겠다고 전해 주실래요?”

“그럴게요.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지원이 마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때, 옆에 놓인 A4 용지 상자에 발이 걸렸다.


“!!”

이번에는 아무도 잡아 주지 않았고, 지원은 그대로 넘어져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어머, 괜찮아요?”
직원이 벌떡 일어났다. 지원은 그녀가 손을 내밀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옷을 탁탁 털었다.

“괜찮아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도 외근 나갔다가 넘어졌던가? 거래처에서 나오는 내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 였다. 적어도 거래처에서 넘어진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원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길을 거닐었다.

유지혁 부장은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지원에게 필요한 건 커피였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가장 먹고
싶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길 건너에 익숙한 초록 간판이 보였다. 건널목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지원의 시선이 작은 천막과 거기
적힌 팻말에 멈췄다.

[성명, 사주. 당신의 운명을 점쳐드립니다.]

“운명이라…….”

지원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원래 운명대로라면 곧 박민환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지옥의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그리고 부케를 정수민에게 던지겠지.

지원은 으으, 하고 몸서리를 쳤다.

머리에 총이라도 안 맞는 이상 이제 그럴 일은 없다. 정수민에게 뭔가를 던진다면 부케가 아니라 칼이나


캐틀벨일 것이다.

그러면 운명은, 미래를 아는 사람에 의해 바뀐다고 봐도 되는 걸까.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 지원은 천막에서 눈을 떼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들이면 머리가 맑아질 게 분명했다. 암세포를 발견하기 전에 항상 그랬으니까.

-위이잉.

반대편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분홍색 폴더폰을 꺼내 펼치자마자 지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박민환]

운명이 바뀐다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쓰레기였다.

4 화. 쓰레기는 버리고, 돈은 줍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이잖아, 라고 누군가 말하면 할 말은 없다. 끔찍하고 처참한 결혼 생활도, 암투병도,
박민환과 정수민의 바람과 과실치사도 오직 지원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지금은 2009 년이다. 불구덩이에는 아직 뛰어들지 않았고 두 사람은 회사에서 공식적인 연인 관계였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이 관계를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지원아, 너 어디야?]

통화 버튼을 누르자 민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삼동.”

[나도 역삼동 나왔어. 회사 들어가기 전에 시간 있으니까 거기로 갈게.]


“여긴 왜?”

지원의 목소리는 스스로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싸늘했다. 당황한 민환이 머뭇거렸다.

[아니……. 너 오늘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어디 아파? 병원이라도 같이 가 줄까?]

빌딩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날려 얼굴을 간질였다.

카페의 유리문에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손에는 서류 뭉치를 든 젊은 여자의 실루엣이 지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매 순간 가슴 벅찬 현실이 지원에게 민환과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그럼 사거리 별카페로 와. 그 이 층짜리 큰 거.”

[알았어. 근처니까 오 분만 기다려.]

민환이 전화를 끊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카페 안은 한산했다. 지원은 낡은 지갑을 열어 카드를 내밀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에 샷 하나 추가요.”

커피는 곧 나왔다. 종이컵을 들고 이 층 창가 자리에 앉으니 먼 기억 속 역삼동 거리가 한눈에 펼쳐졌다.

수첩을 펼친 지원은 서류를 전달한 시각과 담당 직원의 이름을 메모하고 외근 보고를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예, 강지원 씨.]

신호음이 울리기 무섭게 유지혁이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보원푸드에 서류 전해 드렸고요. 나중에 따로 부장님께 연락드린다고 하셨어요. 아직 퇴근 한참


남았는데 회사로 복귀할까요?”

[괜찮습니다. 사무실 한가하니까 바로 퇴근하세요.]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핸드폰 너머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내가 뭔가 말실수했나. 지원은 끊어지지 않은 화면을 흘깃 보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저, 부장님? 전화 끊으면 될까요?”

[아,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내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랬나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러면 월요일에 뵐게요.”

[병원, 다녀오세요.]

“알겠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폴더를 덮기 직전, 누군가 뒤에서 지원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지원아.”

박민환의 목소리였다. 등골에 쭉 소름이 끼치고 손에 힘이 풀렸다. 그 바람에 핸드폰이 높은 의자 밑으로 툭


떨어졌다.

“아, 미안. 나 때문에 놀랐어?”


민환이 얼른 핸드폰을 주워 내밀었다. 아직 펼쳐진 화면에는 통화 중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지원은 그것을 탁 닫고 가방에 밀어 넣었다.

“아니야.”

“어쩐 일이야? 아메리카노를 다 먹고.”

어쩐 일이냐니. 조금 마신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원은 자신이 이맘때쯤 카푸치노만 마셨던 걸


기억해 냈다.

당시는 지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자가 그랬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수제 명품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와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몸이 바뀌는 드라마에서 등장한 카푸치노 거품 키스 장면 때문이었다.

“시원하잖아. 텁텁하지도 않고.”

지금 박민환이 거품 키스를 한다면, 지원은 그 커피잔으로 박민환의 머리를 후려칠 자신이 있었다.

“그것보다 할 말 있어. 우리…….”

헤어지자.

지원이 뒷말을 잇기 전에 민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 부장님이야.”

민환은 한 손으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고 폴더를 열었다.

“예, 부장님. 아……. 네. 아니요, 끝났습니다. 예, 예.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사무실 바쁘다고 바로 들어오라네. 퇴근하고 너네 집으로 갈게.”

이사부터 해야겠네.

민환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지원은 다시 똑바로 앉아 빨대를 입에 물었다.

설탕과 시나몬 가루를 뿌린 카푸치노 거품은 달콤했다. 그걸 먹으면 꼭 속이 안 좋아졌는데도, 그 맛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매일 카푸치노를 마셨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신 아메리카노는 썼다. 이 한약 같은 걸 왜 마시나 싶었다.

그런데 몇 번 먹다 보니 그 씁쓸함 뒤에 고소함이 있더라. 한 번, 두 번 마시다가 익숙해지고 나서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었다.

카푸치노 같은 새끼.

지원은 빨대로 커피를 휘저었다. 얼음이 청량하게 달그락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다시 수첩을 꺼낸 지원은 업무 메모가 빼곡하게 적힌 부분을 지나 맨 뒤쪽 여백을 펼쳤다.

이번 생은 절대 바보처럼 살지 말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고,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이야.

“돈이 더 필요한데…….”

아빠는 평생 알뜰하게 돈을 모았지만 재테크에는 어두웠다. 그 흔한 보험 하나도 없었던 탓에 암 치료비로


가진 재산을 다 써야만 했다.

지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과외로 번 돈에다 아빠 몰래 대출까지 받아 치료비에 보탰다.


그러다 보니 지금 지원이 가진 돈은 월세 보증금 천만 원과 차마 쓸 수 없어 갖고 있던 부조금 천만 원,
그리고 은행빚 이천만 원뿐. 당장 이사가려면 못 갈 것도 없지만, 그러면 생활비부터 걱정해야 하는
판이었다.

로또 번호라도 외워둘걸.

지원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돈 생각에 한숨부터 쉬었겠으나 지금은 그냥


웃음만 났다. 바닥도 없이 떨어졌던 지난번 삶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빚을 갚고 돈부터 모으자. 하지만 어디서?

습관적으로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던 지원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졌다.

박민환. 주식에 미친 놈.

박민환은 주식에 아주 해박했다. 한 번 돈맛을 본 뒤로 손대는 주식마다 폭등에 폭등이었다.

비록 나중에 이익금은 물론, 퇴직금과 대출금까지 쏟아붓고 지원의 월급으로 생활했지만.

정확한 종목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이맘때쯤 박민환이 첫 돈맛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갔던 기억만 선명했다.

“민환 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무리는 무슨. 나 이번에 대박 터졌어. 이런 거, 평생 떡볶이처럼 먹게 해줄게.”

수첩에 꾹 누른 볼펜 끝에서 잉크가 천천히 번졌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꽃잎이 흩날리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박민환. 적어도 이번 생에는, 나한테 도움이 되어 줘야겠어.

지원은 천천히 핸드폰을 집었다. 손에 착 달라붙는 롤리팝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울린 줄도 몰랐는데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반쪽]

세상에, 반쪽이라니. 그냥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릴걸. 지원은 혀를 차면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바로 퇴근해? 나중에 치킨 사서 너희 집 갈까?]

우리 집이 쓰레기통도 아니고, 웬 쓰레기가 이렇게 모여.

이사부터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지원은 그 문자를 끄고 민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까는 기분이 좀 안 좋았어. 퇴근하고 포장마차 갈래?]

[그러자.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

폴더를 닫기도 전에 답장이 왔다. 지원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수첩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팔팔해져서 뛰어다니자. 돈도 많이 벌고,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자. 약속해요, 아빠.]

행복해지자. 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자.

지원은 남은 커피를 마시면서 민환을 상대로 한 뒷공작을 계획했다.

2009 년, 민환은 주식 몇 가지로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2010 년에는 지원과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아예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주식에 몰두했다.

2011 년부터는 지원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너 때문에 재수 옴 붙어서 손대는 것마다 족족 말아먹는다고.

왜 그렇게 살았을까.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혼자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았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지원은 카페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다. 출퇴근 시간이면 사람에 치여 잘 볼 수
없는 차창 밖 한강의 풍경이 상쾌하게도 펼쳐졌다.

도어락 비밀번호는 민환의 생일이었다. 지원은 으으, 하고 육성으로 끔찍해하며 당장 비밀번호를 바꿨다.

090410,

2009 년 4 월 10 일.

시궁창 같은 결혼 생활 끝에 남편과 내연녀에게 살해당했던 한 여자의 인생이, 10 년 전에서 다시 시작된


날이었다.

**

“어? 박 대리님, 우리 지원이는요?”


민환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수민이 쪼르르 달려와 등 뒤를 기웃거렸다. 훌쩍 크고 마른 지원과 달리 160
센티가 간신히 될랑 말랑 하는 수민은 잘 꾸미고 귀여웠다. 민환은 씩 웃으며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바로 퇴근했어요. 이제 좀 나아진 것 같던데요.”

“다행이다. 그런데 왜 내 문자에는 답이 없지?”

수민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곧 씩씩하게 고개를 들곤 민환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못 봤나 봐요! 퇴근하고 치킨 사서 서프라이즈 해주러 가야겠어요.”

민환은 당황했다. 나중에 지원과 술 마시기로 했다는 말을 해야겠는데, 지금 그 말을 하면 수민이 상처받을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박 대리님?”

그의 머뭇거림을 본 수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게……. 실은, 나중에 지원이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랬구나.”

수민의 어깨가 또 축 처졌다. 괜히 나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에 민환은 또 머뭇거렸다.

“그럼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 술은 제가 살게요. 너무 걱정돼서 그래요.”

지원이한테는 비밀. 수민이 속닥속닥 덧붙이며 집게손가락을 세워 조그만 입술에 갖다 댔다.

“우리 지원이가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은 엄청 여리거든요. 알죠? 혼자 방바닥 긁을 때 서프라이즈로


가서 짠, 해주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지원이 전에 만나던 남자친구도…….”

“여기가 사무실입니까, 카펩니까?”

굵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돌아보니 유지혁 부장이 일어서서 파티션 너머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부장님. 커피 한 잔 타드릴까요?”

수민이 애교스럽게 두 손을 모아 살짝 비볐다.

“됐습니다. 두 사람 다 일에 집중하세요.”

유지혁의 모습이 다시 파티션 뒤로 사라졌다. 수민은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민환을 향해 눈꼬리를 조금
휘어 보였다.

“알겠죠? 나중에 같이 가요! 내가 이래 봬도 우리 지원이 비타민이거든요.”

수민이 입사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두 사람이 친하다는 건 유명했다. 민환 외에는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는 강지원에게 이렇게 예쁘고 외향적인 친구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잘 웃지 않는 지원도 수민과 함께 있으면 표정이 풀어지곤 했다. 민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수민이 폴짝폴짝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로 그 맞은편이 민환의 자리, 거기서 옆으로 두 칸 떨어진 책상이
지원의 자리였다. 민환은 아까 가져온 박스와 서류를 들고 창가에 있는 유지혁의 자리로 갔다.

“샘플 받아 왔습니다. 보고서는 메일로 보냈고, 여기 결재해 주시면 됩니다.”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든단 말야.


민환은 부장이 굵고 긴 손가락으로 서류를 넘기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민환 씨.”

서류를 끝까지 살피고 샘플 수를 헤아린 유지혁이 건조하게 민환을 쳐다봤다.

“예?”

“샘플 제대로 확인한 거 맞습니까? 열 개 와야 합니다.”

얼른 눈으로 헤아리니 작은 상자는 총 아홉 개였다. 직원에게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열 개였던 기억이


났다. 아무래도 차에 떨어뜨리고 온 듯했다.

“아홉 개네요.”

“아홉 개네요?”

유지혁의 눈썹 사이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닙니까? 제가 분명히 사무실 바쁘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차에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빨리 가져오세요. 확인하고 연구팀에 갖다 줘야 하니까.”

재수 없는 새끼.

민환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떡하니 부장 자리에 앉은 유지혁을 속으로 욕하며 돌아섰다.

사실 샘플 픽업 같은 건 말단 사원에게 시키고 메일로 보고받으면 될 일이었다. 이런 허드렛일을 굳이


자신에게 시킬 때부터 짜증이 치솟았다.

민환은 자신의 책상에서 지원과 커플로 맞춘 파란색 롤리팝을 집어 들었다. 그때, 파티션 뒤에서 작고 하얀
손이 꼬물꼬물 올라오더니 노란 포스트잇 하나를 붙이고 다시 쏙 내려갔다.

[기분 풀어요, 박 대리님. 나중에 우리 지원이랑 맛있는 거 먹어용!]

지원이었다면 업무적 실수라며 신경도 안 썼을 텐데.

기분이 조금 풀어진 민환은 포스트잇에 대한 답으로 파티션을 두번 톡톡 두드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뒷좌석 바닥에서 샘플을 찾아 챙기고, 내려온 김에 쓰레기도 챙겨서 갖다 버렸다.

지원은 좀 지저분한 차도 익숙하지만, 정수민은 더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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