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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러브, 트러블, 에세트라(Love, Trouble, etc.

) 1

어려울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우리들은 모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 Gilles Maheu

00.

낡은 원룸의 복도는 마치 숲의 덤불 속 같았다.

공용 전등이 고장 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위가 어둡고, 침침해서 시야를 확보하려면 계단 아래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어스름한 달빛에 의지해야 했다.

층이 낮고 꽤 낙후된 건물이라 가구 수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자연히 인적은 드물었다. 사계절 중 가장 추운


구간에 속하는 2 월의 날씨를 자랑하듯 냉랭한 한기마저 감돌았다.

제건욱은 벌써 30 분째 그 덤불 안에 자발적으로 외로이 갇혀 있었다. 하루아침에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꿔 버린


서림 때문이었다.

복도 창밖 어두운 하늘을 힐끗 올려다본 그는 마음 졸이는 기색으로 잇새를 짓이기곤 현관을 세차게 두드렸다.

쾅쾅! 쾅쾅! 그러고는 철제로 된 현관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하, 이 새끼 독한 거 봐. 대체 안에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질이 좋은 잿빛 코트를 여민 건욱은 냉기가 도는 계단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검은색 하의에 감싸인 압도적으로


긴 다리를 척, 땅에 내디뎠다.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신경질적으로 꺼낸 그는 손바닥 위에 두 물체들을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조함이 배가되자 담배가 급격하게 말렸다. 그러다 승강기 옆에 비치된 소화전을 물끄러미 응시하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구서림.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곧고, 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지난 30 분간 지겹도록 들은 기계 음성이 그를 반겼다.

- 전원이 꺼져 있어…….

쯧, 혀를 찬 그는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죄다 씹고.〉

툭. 제 허벅지 위를 휴대폰으로 내려친 건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모양이 예쁜 입술이 찰나간 하얗게
질렸다가 그가 치아를 떼어 내는 순간 색이 맑고 붉은 빛깔로 서서히 물들어 갔다.

입술 위에 연이어 늘씬하게 자리 잡은 높은 콧마루와 눈썹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매가 형형한 눈동자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우주를 담은 듯 새카만 색이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그는 마치 그린 듯한 미남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 짙은 색 동공이 휴대폰 화면을 주시했다.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일렀다면 도어록을 갈아 주는 업체에라도 연락을 했을 텐데, 야심한 시각이라 문을 연 곳을 찾기 쉽지 않을
듯했다.

〈하……. 미치겠네, 진짜.〉

‘우리 헤어지자’라는 간단한 메시지만 덜렁 보낸 서림은 벌써 며칠째 연락 두절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던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건욱은 혹여 서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정말이지
미친 사람처럼 그의 행적을 좇아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집에 와 보니 생활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어서 그저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며칠 사이 짬이 생길 때마다 여기로 와 봤지만, 번번이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건욱도 서림의 어머니 시신


처리 문제나 제 업무 따위로 해야 할 일이 많아 계속 타이밍이 엇갈렸던 것이다. 가뜩이나 서림을 만나지 못해서
금단 증세로 돌아 버릴 지경인데 자신이 몇 번 집에 들어가 헤집어 놓은 것을 안 모양인지 오늘은 아예
비밀번호를 바꿔 놓은 듯했다.

〈야박한 새끼.〉

하아. 한숨을 내쉰 건욱의 눈동자가 검은색 도어록에 불현듯 꽂혔다.

부술까.

다소 파괴적인 문제 해결 방법에 생각이 미친 그는 벌떡 일어났다. 건욱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문고리를 단단히


쥐었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 그 위를 구둣발로 걷어차려고 자세를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너 뭐 하냐, 여기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건욱은 제 귀의 가청 주파수가 반응하는 자리를 향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의 창백하리만치 하얀 안색이 바로 그의 시야에 잡혔다. 매끈한 얼굴선의 테두리 안에
커다란 눈동자와 늘씬한 콧대가 정교하게 빚은 듯한 모양새로 오밀조밀 들어차 있었다.

서림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겨우 숨통이 트인 건욱이 마치 짓이기듯 한 자, 한 자, 단어를 꼭꼭 씹어 뱉어 냈다.

〈구서림. 너 어디 갔다 이제 와. 도대체 며칠 내내 왜 연락이 안 돼!〉

〈내가 어딜 가든 언제 오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왜 상관이 없어. 나 말고 누가 너한테 상관할 수 있다고. 헤어지자는 말은 또 뭐야.〉

어두운 눈동자는 건욱이 여기에서 기다리리라는 것을 내심 예상했던 모양인지 특별한 동요를 비치지는 않았다.
서림은 그저 대답 대신 건욱을 꽤 한심하다는 듯 직시하다가 그를 지나쳐 제집 앞으로 향했다. 표정이 썩 좋진
못했다. 지친 듯도 했고, 질린 듯도 했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곤 문을 연 서림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심히 상대가 누르는 비밀번호를 지켜보던
건욱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1111. 그들이 처음 사귀기로 결정했던 기념일에서 너무나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닌 숫자로 바꿔 놓아 기가 막혔다.

〈구서림.〉

헛웃음을 터트린 건욱은 서림을 쫓아 들어가 마른 어깨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인기척을 감지한 현관의 센서가 작동했다. 주황빛 불이 잠시 들어왔다 꺼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두 사람은 한동안 첨예한 시선만 교환할 뿐 별말이 없었다. 앞서 침묵을 깬 건
역시나 마음이 급한 건욱이었다.

〈현관 비밀번호 왜 바꿨어.〉

〈더는 너랑 공유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바꾼 게 1111 이야? 난 대체 왜 여기서 시간 낭비한 거야. 눌러 보기라도 할걸.〉

〈누가 기다리래? 너 왜 다시 왔어. 내가 이제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내가 다 설명할게. 우리 고작 이런 문제로 갈등하지 말자. 앞으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결별의 이유를 ‘고작’ 같은 단어로 치부해 버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다루는 듯한 그의 말투 때문에 서림은
필연적으로 발끈했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끝은 날카로웠다.

〈고작 이런 문제? 너한텐 이게 고작이야? 내가 너한테 몇 번이나 말했었지. 우습지만 엄말 미워하는 게 내가


사는 이유이자 이때까지 버틴 기제라고. 그러니까 그건 건드리지 말라고! 쓸데없는 짓 관두라고!〉

〈서림아, 내가 그걸 몰라? 아니까 그런 거잖아. 나 이해 못 하겠어?〉

〈이해? 내가 경고를 안 했어? 널 안 말렸어? 내 말 안 듣고 일은 혼자 저질러 놓고, 난 그냥 이런 문제로


갈등하면 안 되니까 입 닥치고 이해나 해 주고 있어야 돼? 제건욱,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단순하게
싸운 게 아니야. 헤어진 거지. 이제라도 알아들었으면 꺼져.〉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돌아선 서림의 어깨를 건욱이 붙잡았다. 서림은 바로 그것을 매정하게 쳐 냈다. 그러고는
운동화를 내팽개치듯 벗어 던져 집 안으로 아주 들어가 버렸다. 그가 빠르게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집이 워낙 좁아서 숨을 곳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욱이 서림의 손목을 붙잡았다. 완력으로 제 쪽에 붙들어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와락, 몸을
끌어안았다. 놀란 서림은 있는 대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상대의 의지가 워낙 거세서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놔.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끝내. 난 아직 안 끝났어.〉

나지막한 중저음이 서림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는 기미가 여실히 느껴졌다. 서림은
자신도 모르게 애틋해져 그의 옷자락을 붙잡을 뻔했다.

그러나 입술을 꽉, 깨물어 충동을 참아 내고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건욱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그제야 겨우 상체가 조금 떨어졌다.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제 팔을 휘둘러 건욱의 매끄러운 뺨 위를 내려쳤다.

철썩!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건욱은 오뚝이처럼 도로 서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엄정한 눈길을 흘려보냈다. 이윽고 다시 안아 오려고 해서 서림이 두 팔을 척 뻗어 그의 접근을
저지했다.

〈오지 마.〉

〈얘기 좀 해.〉

〈오지 말라고. 너랑 닿는 거 싫으니까.〉

그들은 서로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건욱은 서림의 차가운 거절에 다소 상처 입은 듯했으나, 그걸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더욱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 기회가 아니면 제대로 서림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듯 매우 호소력
있고 절박한 말투였다.

〈너희 어머니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생사를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셨다면 나도 괜히 품 팔아서 그렇게 안 해.


하지만 정확히 널 찾아왔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심지어 내가 그걸 알게 됐는데. 이 한겨울에 그냥
길바닥에서 돌아가시게 뒀어야 돼? 진짜 그게 맞는 거야?〉

〈뭐가 맞는지가 왜 중요해. 내가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 그게 훨씬 중요한 거 아니야? 내가 왜 널 좋아하게


됐는데. 내 말만 들어주고, 나만 보고, 너한테 나밖에 없으니까!〉

처음 건욱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그 이후로 서서히 좋아하게 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감정 발현의 기제들이


꽃처럼 피어났지만, 제일 서림의 마음을 흔들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건욱은 서림이 친모로부터 받은 해묵은 상처를 신경 쓰여 했다. 그걸 알고 싶어 했고, 위로하려 들었고,


그러면서 서림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태어나서 제게 그렇게 대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구서림. 난 변한 거 없어. 여전히 네 말만 듣고, 너만 보고. 너밖에 없어.〉

〈하지만 제일 중요할 때 내 의견은 묵살했잖아. 내가 그러지 말라는데도! 그냥 길바닥에서 죽게 두라는데도!〉

〈널 위해서야. 네가 죽은 그 사람 생각하면서 더 힘들어질까 봐. 그냥 깨끗하게 잊으라고.〉

〈정말 날 위했다면 네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해 줬어야지!〉

건욱이 자신을 배려하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차라리 제 오랜


트라우마의 기제와 깔끔하게 끝을 내 주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림에게 친어머니란 그런 식의 결말로 눙치기엔 너무 끔찍한 존재였다. 어릴 땐 정말이지 매일 밤 차라리


죽었으면 기도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종종 잊고 지내지만 어쩌다 그녀와 비슷한 외양을 한 또래 여자들을 볼
때마다 시체처럼 손이 차갑게 얼어붙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그런 그녀가 죽기 직전이 되니 이제 와 함께 사는 내내 학대하고 끝내 버렸던 자신을 찾아 장기 이식을 도모하며


연명할 방법을 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징그럽고 역겨웠다.

하필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 고이 보내 주었다는 걸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너 때문에 더는 엄마를 극복할 수가 없어졌어.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까지 비약해야 돼? 서림아, 그냥 잊어버려. 너한테 평생을 나쁜 사람이었고 이제 죽었어. 그럼 다 끝난


거잖아.〉

〈끝은 너랑 나 사이에 난 게 끝이지.〉

〈구서림! 너 진짜.〉

아연해진 건욱을 조용히 직시하는 서림의 눈동자에 슬픔이 깃들었다. 줄곧 억누르고 있던 게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는 모양인지 퍽 느릿하지만, 착실하게 물들어 갔다. 이를 증명하듯 한층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둘 사이를
에워쌌다.

〈나 그 여자 죽는 날 병원에 갔었어.〉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던 듯했다. 건욱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서림을 바라보았다. 당시 명인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던 그녀는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이송되어 온 그날 오후 숨을 거뒀다. 그때 종일 서림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왔었다고?〉

〈갔어. 엄마 섬망 와서 너 보고 나인 줄 알더라.〉

〈…….〉

〈웃던데, 그 여자.〉

당황한 건욱이 서림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서림은 본능적으로 물러서면서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때 무슨 생각 했을까? 아, 내 아들 서림이가 나를 용서했나 보다? 아니면…… 나를 이 고통에서 구해 줄
장기가 왔구나? 평생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만들어 놓고 그 여잔 적어도 기분 좋게 죽었겠지. 어느 쪽이든
제건욱 네가 다 망쳤어.〉

만에 하나 그저 10 여 년 만에 보게 된 서림이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잠시 미소 띤 얼굴을 해 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일을 해명해 줄 당사자는 이미 죽고 재가 되어 없어졌다. 그 때문에 서림은 평생 자학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건욱이 아니었다면 그때 병원에 달려갈 일도 없었고, 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서림은 제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엄마의 존재가 여전히 두려웠고, 시시때때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미소가 어떤 의미였을지를 상상하다 소름 끼쳐 하며 해답이 없는 문제에 골몰하게 됐다.

차라리 그냥 추운 겨울 고독하게 홀로 버티다 죽게 뒀다면 자신이 이겼다고 정신의 승리라도 도모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 어긋나고 만 것이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우리, 차라리 시간을 좀 갖는 걸로 하자. 마음 정리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기다릴게.〉

〈‘그러니까’ 같은 건 없어. 기다리지 마. 이제 가. 난 할 말 다 했어.〉

〈어떻게 그냥 가! 그렇게 못 해. 우리 시간이 얼만데. 자그마치 3 년 사귀었어. 아무 문제 없었다곤 못 해도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가능한 한 차분히 대화하려 애쓰던 건욱이 격해지자 서림의 언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너만 나 이해했어! 너만 배려했다고. 노력도 너만 했고, 너만 나 챙겨 줬고, 무엇보다 네가 훨씬 더 나


좋아했어. 너 놓치는 게 등신인 거 내가 모를까? 나 그런데도 너 그만 보고 싶어. 널 보면 엄마 웃던 게
떠올라서 구역질 나. 내가 사람 아니고 간덩이 된 느낌이야!〉

연인 간 헤어짐의 이유라는 건 대중없었다.

치약을 중간에서 짜느냐 밑에서부터 짜느냐로 싸우다가도, 갑자기 밥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투다가도
겪는 게 연인 사이의 이별이었다.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도, 소소한 가치관의 차이로도 그것은 얼마든지
찾아왔다.

해서 서림은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이유라고 되뇌었다.

이쪽의 의지가 확고해 보였는지, 꽤나 절실하게 서림을 향해 손을 뻗던 건욱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그는 몹시


혼란스러운 듯했다. 이러는 서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당혹스러워하는 기미와 원시적인 공포가 얼핏
비쳤다.

평소의 건욱은 워낙 빈틈이 안 보였다. 타인의 논리에 밀리는 법도 전혀 없었다. 유달리 능글맞은 성격 덕분에
그와 논쟁하는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기를 들고 흔들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서림은 지금 그가
드물게 감정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이 대화의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건욱, 나 뉴욕 갈 거야.〉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서림은 제 목소리를 단속해 침착을 가장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인지하지도
못했다.

〈나 입사 안 하겠다고 통보했어. 유학 갈 거야. 교수님이 제안해 주셨어. 좋은 기회 같아.〉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랑 아무 상의도 없이 이러는 게 말이 돼?〉

〈너한테 상의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 너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모든 걸 결정하면 너 후회해. 나한테도 제발 이러지 마.〉

〈후회를 해도 내가 해. 나 휴대폰 가지러 들어온 거라 다시 나가 봐야 돼. 대충 정리되면 너도 가. 다신 오지


마. 꼴 보기 싫어.〉

비좁은 거실 협탁에 둔 휴대폰을 챙겨 든 서림이 차갑게 건욱을 지나쳤다. 옆을 스칠 때 그가 바로 어깨를 붙들어


왔으나 억지로 팔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은 채 집 안을 빠져나갔다.

〈구서림. 구서림!〉

잠시 아득한 상념에 빠져 있던 건욱이 뒤늦게 서림을 쫓았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니 애초에 건물 앞에
택시를 기다리게 한 상태로 잠시 올라왔던 모양인지 서림이 시동 걸린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다. 뒤이어 ‘타악’
하고 택시의 뒷문이 무자비하게 닫히는 소리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끝났다는 운명의 알림음
같았다.

바로 며칠 전까진 사랑했던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건욱은 솔직히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이 순간이


자신이 버려지기 직전이라는 것만은 명확히 인지한 그로선 절박하게 애원하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깐 내려 봐! 내려! 서림아!〉

덜컥덜컥, 뒷문을 열어 봤지만 이미 안에서 잠겨 무의미했다. 쾅쾅! 단단하게 주먹을 말아 쥐고 뒷좌석 창문까지
있는 힘껏 두드렸으나 서림은 끝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의아해하는 기사에게 가 달라는 듯
손짓하는 게 건욱의 시야에 잡혔다.

〈구서림!〉

그는 구조 요청을 하듯 간절함을 담아 이름을 불렀다. 하나 무거운 배기음을 내는 차를 타고 차츰 멀어져 가는


서림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앞뒤 가릴 정신이 아닌 건욱은 급한 대로 택시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서서히 속도를 내며 주행하는 운송 수단을


두 다리로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무시하고 언덕을 한참 뛰어 내려가 봤으나,
이미 택시는 도로의 한복판으로 끼어든 뒤였다.

〈하, 하아…… 헉…… 빌어먹을.〉

허리를 숙인 채로 호흡을 고르던 건욱이 망연히 차량의 뒤꽁무니만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뽀얀


연기가 그의 입 주변으로 구름이 걷히듯 흩어졌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제 차로 뒤쫓을 생각조차 못 했던 건지. 그제야 허무함이 밀물처럼 떠밀려 왔다. 힐끗
아득한 언덕 위를 올려다보던 그는 ‘퍽’ 하고 담벼락을 걷어찼다.
당연히 서림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평생을 미워하고 대갚음해 주겠다 마음을
다져 왔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죽어 버린 데다, 그 끝이 본인이 생각했던 처참한 결말이 아니라 좌절했을 테니
여러 가지 의미로 혼란스러울 터다.

하지만 그 방식이 이런 형태라면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서림도 진심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저 너무
복잡하고 화가 나서 제게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리라.

〈너 사람 잘못 봤어. 뉴욕 같은 소리 한다. 보내 줄 줄 알고.〉

서림의 말대로 자신은 언제나 그를 배려하고, 노력했다. 이럴 때 참아 주고 견뎌 주는 건 어려운 일의 축에도 못


꼈다. 그는 자신이 맹목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건욱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서림을
향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훨씬 더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건욱은 정작 그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아주 잘 알았다. 때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했으니까.

그러니 그는 반드시 마음을 돌려줄 것이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힌 건욱은 자신이 미친 듯이 뛰어내려 온 언덕 위와, 서림이 연기처럼 사라진 도로를 번갈아
직시하고는 잇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건욱은 그 순간의 결별이 영원한 끝이 되어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 월 20 일. 자정이 이제 막 지난 시점이었다.

01.

- 승객 여러분, 오늘도 우리 한국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기장 한태주입니다.


탑승하신 본 비행기는 한국 항공 092 로 현재 미국 뉴욕 JFK 공항을 출발, 대한민국 인천 국제공항을 목적지로
하여 고도 35,000 피트 상공을 순항하고 있습니다.

환절기 오후의 기류가 오묘했다. 기체 창밖에는 공중에서 일으킨 바람이 물보라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한국 항공 092 편에 탑승한 서림은 목소리가 유난히 근사한 기장의 안내 멘트를 귀에 담으며 조금 전까지 쓰고
있던 새카만 색 안대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오전부터 분주했던 터라 몸도 정신도 종일 피곤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아마 최종 목적지가 한국이어서일 것이다.

서림은 현재 뮤지컬 「크리스타」의 무대를 올리기 위해 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크리스타」는 제 험난한 인생에도 볕 들 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최초의 희망을 품게 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운이 좋으면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브로드웨이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중요한 분기점이었지만, 이건
제게 숙제 같은 것이라 커리어보다 이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의 한국 방문은 꼬박 5 년 만이었다. 선조들의 말에 의하면 강산이 반 정도는 변했을 테니 못 본 사이 누군가


제 존재를 완전히 지웠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졸업 후 급작스럽게 미국행을 택했던 서림은 그간 단 한 번도 모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뉴욕 땅을 디딘 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때, 도저히 건욱이 걱정돼 견딜 수가 없어 한 차례 몰래 다녀간 적은


있었다. 하나 만 하루도 못 돼 다시 돌아갔으니 없었던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 뒤론 국경을 넘은 일이 없었다.
여태까지 꿋꿋하게 자존심의 발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치졸한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5 년…….”

씁쓸한 혼잣말을 삼킨 서림은 좁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릴 때 사락, 하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가벼이 흩날렸다.

창공에 눈길을 두기 직전, 정면에 꽂혀 있는 얇은 잡지 한 권을 스치듯 발견했다. 한국 항공에서 제작하는


기내용 출판물인 듯했다. 표지에서 익숙한 이름을 읽은 서림은 홀린 듯이 책자를 꺼내 들었다.

“제건욱?”

자신이 아는 ‘그’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일단 성씨가 특이했고, 아울러 그를 수식하고 있는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두꺼운 종이 오른쪽 상단에는 딱딱한 고딕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뮤지컬의 역사를 다시 쓰다! 화려한 무대를 지휘하는 마술사, 제건욱 감독〉

서림의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절로 글자 위에 닿았다. 이름을 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윽고 책자를
뒤로 넘겨 건욱의 인터뷰를 눈에 담는 표정이 꽤나 애틋했다.

원체 얇은 발행물이라 기사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두 장가량의 짤막한 인터뷰와 업무 현장을 촬영한 듯


보이는 몇 장의 사진이 다였다. 진중한 표정으로 무대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건욱의 잘난 얼굴은 5 년 전에
비추어도 여전했다. 도리어 그때보다 더욱 원숙함이 덧대져 한층 근사해진 느낌을 받았다.

일부러 이쪽의 소식에는 무뎌지려고 노력했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건욱의 근황은 한국인 동료들을 통해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조금만 대한민국 뮤지컬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그의 이름은 산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몇 년 전 국내에서 뮤지컬 연출자로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른 그는 빠른 속도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듯했다.

그는 기본기에 충실한 서림과 반대로 무척 저돌적이고 창의적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건욱의 대학 동기인
자신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극대화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기사의 내용은 바로 그 과감한 연출 기법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와, 상을 뭐 최근까지 이렇게 많이 탔어. 시상식 다니느라 일할 틈도 없겠다.’


기사 하단에 별첨된 건욱의 이력은 각종 수상으로 빼곡했다.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 선정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이나, 2 년 연속 한국 뮤지컬 대상 연출상, 최우수 작품상 따위의 굵직굵직한 행보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마치 연혁처럼 촘촘하게 집대성해 놓으니 그 양이 꽤 많았다. 자신이 귀동냥으로 들어 아는 것들 중 여기 적히지


않은 수상 기록도 있었다. 지면이 모자라 기록하지 않은 듯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건욱이 대한민국 뮤지컬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건 참 기분이 묘했다.

예전의 건욱은 뮤지컬과 같은 종합 예술은커녕 영화나 드라마조차 잘 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진로를
단숨에 바꿀 만한 계제를 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안색 좋네…… 개자식.”

자신이 없으면 곧 죽을 것처럼 굴었던 그는 놀랍게도 아주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쓸쓸한 숨을 삼킨 서림이 그의 사진 위를 아주 천천히 쓰다듬듯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를 못 만진 지 너무


오래돼서 건욱의 보드라운 피부 위를 더듬는 게 어떤 기분인지 까마득했다. 예전엔 이렇게 자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그가 여지없이 제 목이나 손목, 옆구리 같은 곳을 꽉 물어 오곤 했었으나, 이제는 그것조차 아득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사실 한 번쯤은 제 앞에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5 년 동안 건욱에게선 그 어떤 연락 한 통도 없었다. 다시


그가 구덩이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찾아낸다면, 그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 내던질 작정이었는데. 건욱은 더
이상 제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림도 서서히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게 됐다. 제게 건욱은 너무 과분했다.

자신들은 거기까지가 맞았다.

탁. 잡다한 상념들을 애써 떨어내듯 고개를 저으면서 책자를 덮은 서림이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한국에서 설마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미래 때문에 심란해졌다. 기대인지, 거북함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서림은 바깥의
풍경이 평지에서 상공이 된 순간부터 줄곧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탑승하기 전 수신한
메시지의 글자들을 다시금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오늘따라 각진 한글의 모양이 왠지 낯설었다.

[구서림 감독님. 도착하시면 공항 청사에 차량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내리셔서 이 번호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한국예술단]

글자를 계속 집중해서 곱씹고 있자니 귀가 먹먹했다. 그는 옆을 지나가는 객실 승무원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친절한 미소를 띤 승무원 한 사람이 서림에게 다가와 살짝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고객님, 혹시 뭐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고막이 약해서 기압 차 때문에 피로하네요. 항공성 중이염 약 먹었는데도 그래요.”

“아직 착륙 전인데도 그러세요?”


“네, 껌이나 사탕 같은 씹을 거리 있으면 좀 주실래요?”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승무원에게 재차 눈인사하며 감사 인사를 표한 그는 약을 기다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의 직감은 때때로


적중했다. 좋은 방향으로는 오차 범위가 있었지만 안 좋은 방향으로는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서림은 막연히 오늘 이 비행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어쩌면 앞으로 한국에서의
생활까지도 말이다.

이번만큼은 부디 자신의 직감이 빗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제 16 회 한국 예술인 종합 대상이 한국 대학교 부속 건물 함신관 공개홀에서 개최됐다.

내빈석 첫 줄에는 문화 체육 관광부 장‧차관과 각종 언론사 간부들이 심사위원 자격으로 착석했다. 그 뒤의 수백


석 규모 좌석은 각종 예술 산업 종사자들이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

한 시간 반가량의 행사는 모두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올해의 대상 수상만이 남아 있었다. 1 층


중앙의 프레스석 기자들은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무대 위를 향해 셔터를 누를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를 아는
듯 유명 배우인 여성 사회자가 공개홀 내를 두루 둘러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대망의 대상 수상만을 남겨 두고 있는데요. 지난해에 이어 이번 상반기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예술 인물이 누구였을지. 다들 궁금하시죠?”

객석에서 기대감에 찬 은근한 환호성이 터졌다.

이런 공개홀의 모습을 백 스테이지에서 지켜보던 건욱은 능숙하게 타이를 한 번 고쳐 맸다. 셔츠 깃이 감싼


기다란 목이 인상을 시원해 보이게 만들었다. 매끄러운 턱선과 하얀 피부를 거쳐 윤곽이 선명한 이목구비가
자리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순간 어두운 기미가 비쳤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온 양
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가 잡념을 떨치려 차분히 숨을 고르는 사이, 사회자의 음성이 선율처럼 귓전에 꽂혀 들었다.

“대상 시상에는 작년도 예술인 대상 수상자이시기도 하고요. 우리 대한민국 뮤지컬계의 혁명이자 희망인 제건욱
감독님이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바로 이 무대로 모셔 볼게요.”

이제 자신이 움직일 차례였다.

후우. 숨을 몰아쉰 그가 극찬 섞인 사회자의 호명에 이어 무대로 올라갔다.

마이크 앞에 선 그의 늘씬한 몸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와 동시에 전광판의 세로 길이가 꽉 찼다. 카메라의


파인더가 그의 다리를 겨냥해 얼굴까지 도르래 끌어 올리듯 쭉 훑어 틸 업 하니, 함신관 내부에 요란한 환호가
일었다. 공연 예술 관계자 좌석 내빈들의 음성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이럴 땐 시상이 수상만큼 기분 좋아요.”

여유 있는 태도의 그가 큰 소리가 난 해당 좌석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고는 큐시트가 담긴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는 수상자를 발표하기 전, 간단한 소회를 밝혔다.

“작년에 제가 이 상을 수상했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창작 뮤지컬 「야생 동물 보호 구역」으로 받았는데요. 꽤


실험적인 작품이라 여러모로 고생했다는 취지로 주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너무 기뻐서 그날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올해는 어떤 예술인께서 그와 같은 짜릿함과 감격을 누리실지 저도 정말 궁금하군요.”

마침내 건욱이 봉투에 담긴 종이를 꺼내자, 긴장감을 높이는 배경 음악이 사방에서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한 박자 사이를 둔 뒤 입을 열었다.

“네. 올해는 미디어 예술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왔네요. 드라마 「랭고리얼」의 연출인 TBC 방송국 지건주
감독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발표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덤덤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오는 미남형의 남자가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가 아마 지건주 감독 본인인 것 같았다.

건욱은 그에게 꽃과 트로피를 건넸다. 그러고는 살짝 눈을 마주쳐 인사했다. 뒤이어 남자가 마이크 앞으로
향하기에, 그는 정중앙에서 살짝 뒤로 빠져나와 수상 소감을 귀에 담았다.

물론 살면서 한 번 탈까 말까 한 이런 상을 수상한 건 축하할 만한 일이나 사실 지금 그는 남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머리로는 무대 뒤에서 그랬듯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시간 비행은 기압 차 때문에 귀에 안 좋은데.’

오늘은 서림이 귀국하는 날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몹시 심란한 마음이 일었다.

“제 감독님! 끝났어요.”

계속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자신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돌아보니 무대 스태프 중 한 사람이었다.


수상자의 소감이 그렇게 길지 않았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지루해하는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자리를 지켜 주고 있던 건욱도 그제야 축하한다는 듯 지건주 감독과 한 번 더 눈인사하며
백스테이지로 빠져나왔다.

“제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지난번 「작은 아씨들」 무대 너무 잘 봤어요.”

“예술인 대상 올해도 건욱 씨가 타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오는 길에 그를 발견한 공연 예술계의 인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인사를 해 왔으나, 그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묵례할 뿐 여느 때처럼 잠시 머물러서 환담을 나눈다든지 안부를 묻는다든지 할 여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행사장 건물을 벗어나서야 그는 시종일관 목을 답답하게 느끼게 만들었던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서림이 비행기 안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 새끼 또 열나는 거 아니야.”
넥타이에 이어 셔츠의 제일 위 단추까지 두 개 풀었는데도 갑갑함이 잔존했다. 기체 안에 있는 이의 소식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한 조바심만 커졌다.

빠른 걸음으로 익숙한 뒷문을 거쳐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스마트키를 꺼내는 손마저
힘 조절이 어려웠다. 결국 애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연락을 하려는데, 마침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바람에 모든 행동이 중단됐다.

“건욱아!”

아주 익숙한 음성이었다. 돌아보니 얼굴 역시 그가 생각했던 이의 것과 동일했다. 건욱은 상대를 보자 조금


마음이 안정된 듯 편안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제 원장님.”

그의 아버지였다.

언제 어디에서나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건욱에게 가르쳤던 제 원장은 스스로 그 말을 증명하듯 격식 있는


차림새를 선호했다. 오늘도, 외부에 나올 때마다 대체로 그렇듯 스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건욱을
빼닮은 날카로운 눈매까지 더해져 다소 딱딱하고 완고한 인상을 풍겼으나, 그럼에도 아들을 향한 다감하고 따뜻한
시선만큼은 감추질 못했다.

“네가 우리 병원 직원이야? 원장 타령은.”

“오랜만에 봬요.”

“그렇구나. 시간이…… 벌써 반년 만인가? 많이 바쁘니? 어딜 서둘러 가는 것 같던데.”

“예술단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병원 일은 어쩌시고요.”

“한국대 병원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네가 여기 행사에 잠깐 참석한다길래 이쪽으로 급히 내려왔다. 원래도 아들


얼굴 보기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요즘은 정말 힘들어. 네 엄마도 섭섭해해.”

본래도 그는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크고 작은 생의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통보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결코 자신을 함부로 막아서거나 섣불리 충고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지켜보며 지지하고,
응원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방임을 끝내고 조금씩 참견하고 싶어 할 때마다 아버지가 제동을 걸어 준 영향이
컸다. 그는 건욱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사생활을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특히 아버지와의 유대는 각별했다.

건욱이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양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자 등 뒤에 손을 숨기고


있던 제 원장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느닷없는 꽃을 보고 이유를 알 수가 없어진 건욱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이게?”

“이 근방에서 급하게 산다고 샀는데. 미리 포장돼 있던 것밖에 없더라.”

“전 오늘 수상자가 아니라 시상자였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조금 전에 비서실장 말이 넌 시상자라더라. 난 당연히 네가 탈 줄 알았지. 어디 행사 갔다


그러면 꼭 트로피 같은 걸 받아 오니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아버지에게 꽃을 받는 아들은 지구를 다 뒤져 봐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기실
건욱은 가족에게 자신이 어떤 상을 타게 됐으니 축하해 달라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 원장이 종종 인터넷을
검색해 제 업무적 근황을 살피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시기가 늦었더라도 꼭 챙겼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건욱이 픽 웃었다. 제 원장이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억지로라도 의대를 계속 다니게 했으면 그것도 잘해 냈겠지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지금 모습도 좋아


보여.”

“믿어 주신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아, 들어가 봐야 한다고? 시간을 뺏었다. 얼른 가 봐. 많이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좀 전엔 너답지


않게 많이 초조해 보이더구나.”

워낙 건욱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웬만한 일은 구렁이 담 넘듯 흘려 넘겼다.


덕분에 타인이 그의 속내를 선뜻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예리한 제 원장이 정확히 내면의 핵심을 찔러 들어온 터라 건욱의 덤덤하던 얼굴도 어설프게 굳어 갔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앞이라서일까, 서림을 곧 만난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는 여느 때의 경계를 잃고 무너졌다.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게 돼서요. 너무 간만이라 긴장이 되네요.”

“네가 긴장을 다 해? 어떤 동기길래.”

“하반기에 우리 예술단에서 같이 일하게 될지 모르거든요. 오늘이 최종 계약일이에요.”

제 원장의 안경 너머 엄격한 눈매가 아들을 지그시 향했다. 아버지로서의 염려가 깊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주제넘은 충고를 하는 대신 격려하듯 건욱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을 택했다. 이윽고 그가 이만 가
보라는 양 차량을 향해 손짓했다.

“네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보면 너만 한 인재인가 보구나. 행운을 빈다. 급할 텐데 얼른 가 봐라. 나도


선약이 있어 올라가 봐야 해. 엄마한테 가끔 전화 좀 하고.”

“그럴게요.”

향긋한 꽃 내음을 맡으면서 묵례한 건욱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퉁이를
빠져나오는 길에 룸미러를 힐끗 살피자, 제 차의 뒤꽁무니를 계속 보다가 뒤늦게 비서실장의 안내에 따라 차에
탑승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까다로운 건욱이 생각하기에도 퍽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사가 가정에서도
같은 질량의 성공을 거두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 원장은 해냈다. 그는 자식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너그러움을 보이지만, 결코 소유물 취급 하지 않는다. 삶에 참견하지 않았고, 늘 선을 지켜 대했다.
이성적이고,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뜨거운 햇볕과 차가운 비, 그뿐만 아니라 온갖 풍파를 다 막아 주는 든든한 천장과도 같았다.
건욱은 자식을 낳을 거라면 저 정도 인격은 갖추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들을 술래잡기하듯 꼬리에 꼬리를 이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겐 당연한 것들을 한 번도 누려 본 적이
없는 서림에게로 사고가 귀결됐다.

그는 지금 창공 어디쯤을 날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딱딱한 핸들을 굳게 움켜쥐는 그의 손짓에 어울리지 않는 조바심이 흠뻑 묻어났다.

* * *

사력을 다해 이곳까지 달려온 듯 차량이 주차하는 모양새가 퍽 난폭했다.

서류 한 부를 품에 안고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연은 익숙한 세단이 ‘끼이이익’ 하고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선 순간, 황급히 차를 향해 달려갔다.

“단장님!”

그녀의 부름에 화답하듯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기다란 다리가 바깥으로 빠져나와 성큼 땅을 내디뎠다.
차에서 내리는 이는, 타이는 물론이고 셔츠의 위 단추 두어 개마저 풀려 꽤 흐트러진 상태의 건욱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연에게 떠넘기듯 건넸다. 그러고는 한국 예술단 사옥 방향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평소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 마음이 급해 보였다.

“뭐 맡겨 놓은 거 찾으러 가세요? 천천히 좀 가시지……. 그런데 웬 꽃? 또 여자가 줬어요?”

“그럼 여기까지 안 가져왔지. 우연히 아버지 만났다. 꽃은 화병에 담아 놔.”

“원장님 마주치셨어요? 아, 혼자 있는 거 보셨으면 저 일 안 하는 줄 아실 거 아니에요. 그러게 제가 밀착


수행한다니까요. 아니, 그렇게 큰 시상식에, 다른 것도 아니고 대상을 시상하러 가면서 직접 운전을 하시는 게
어디 있어요.”

“나 보여 주기식 의전 필요 없어. 그런데 너 손에 든 서류는 뭐야.”

“저요? 아, 이거요. 오전에 준비해 두라고 하신 구서림 선배 이력서입니다.”

빠른 속도로 건물 내부에 진입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승강기에 나란히 올라탔다. 단장 집무실이 있는 3 층 버튼을
누르고 난 건욱이 보연에게 커다란 손을 척 내밀었다. 그녀가 그의 손바닥 위에 이력서 한 부를 조심스럽게
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기계의 문이 다시 열렸다. 3 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집무실 안으로


입성했다.

들어오는 동안 신중하게 종이를 펼쳐 보던 건욱의 눈썹이 꿈틀했다.

“구서림……. 얘 한국 정확히 언제 도착이래?”

“오후 2 시쯤요. 2 시 5 분. 공항에서 이쪽으로 오시면 3, 4 시쯤 되지 않을까요? 오늘 바로 미팅하실 거죠?”


“그래야지. 공항에 차는. 보냈어?”

“네. 사옥에서 1 시 반쯤 출발 예정입니다.”

“그러다 비행기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면 어떡할 거야. 구 감독 기본적인 거에서 어긋나면 성질 안 참는


편이니까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좀 더 일찍 출발해.”

“알겠습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건욱은 시종일관 이력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연이 담당 운전기사와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심지어 그러고 나서 그의 앞으로 되돌아왔을 때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 검은색 글자들에 눈길을 고정한
상태였다.

물끄러미 그런 건욱을 주시하던 보연이 고개를 저었다.

“단장님, 구 선배 이력서 이미 다 확인하시지 않았어요? 뭐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구서림은 이 기획 최종 책임자 나인 거 모르지?”

“모르실걸요? 단장님이 처음부터 예술단 신임 단장으로 취임하신 거 서림 선배한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혹시 몰라 에이전시 측에만 전달하고 비밀에 부쳤어요.”

대꾸를 듣는 그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건욱과 서림은 한국 대학교 예술학과 같은 학번 동기였다. 건욱을 보좌하는 수행 비서 보연은 한 학번 후배로,


과거에 그들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기억하는 산증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림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며
수심에 잠긴 건욱의 모습이나 계약 말이 오갈 때 서림에게 본인의 존재를 꿋꿋하게 지우려 했던 그의 태도 따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건욱 선배.”

“단장님.”

“네, 제 단장님.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

“본인 존재는 왜 감추신 거예요? 서림 선배랑 싸우셨어요?”

그 순간, 건욱이 손에서 놓은 종이들이 꽃잎처럼 나풀거리면서 책상 위로 떨어져 안착했다. 이윽고 그의 곧고


기다란 손가락이 책상 위를 느긋하게 툭툭 건드렸다.

최소한 서림이 자신을 반가워하지 않을 건 확실했다.

그들의 끝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다. 원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 최악의 결말이었다.

“도장 찍으러 왔다가 인주 뚜껑 열어 보지도 않고 이 자리 박차고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내 생각엔 내 얼굴


보면 십중팔구 뉴욕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것 같다.”

“이 계약을 파기하실 거라고요? 이미 본인 동의하에 대리인이 작품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오늘은 우리


예술단이랑 나머지 세부 고용 협의하는 것뿐이고요. 위약금이 얼만데요.”

그 부분은 건욱도 궁금했다.

“얼만데?”

“본인 부담금만 이미 수억 대죠. 두 분 학부 때 엄청 친하셨잖아요. 단장님 우리 과로 전과하기 전에 의예과


계실 때부터 서림 선배랑 가깝지 않으셨어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서림 선밴 단장님 계시면 박차고 나가실
거라고 하시질 않나. 뭐가 정답이에요?”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냐. 통달할 수 있으면 다 공자에 간디게.”

“두 분 얼굴은 얼마 만에 보시는 건데요?”

머릿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계산하던 건욱이 고개를 살짝 젖혔다.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 뒤 몇 년 만이더라.

“5 년쯤 됐나 보다. 구서림 얼굴 못 본 지.”

“어? 그럼 졸업하시고 한 번도 안 만나신 거예요?”

“걔 졸업장 잉크 마르기도 전에 뉴욕 갔잖아.”

“아무리 그래도요. 이동 수단들 뻔히 있는데 왔다 갔다 한 번 본 적도 없다고요?”

“없어.”

“왜요?”

“더는 만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뜩이나 중저음인 건욱의 음성이 살짝 가라앉아 무척 덤덤하게 들렸다.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실
머릿속은 그와 반대로 어느 한 공간에 염증이라도 생겨 열이 나고 부은 것처럼 매우 방어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건욱은 지난 5 년간 구서림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 안 되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원치 않게 억눌러야 했다. 그는 원체 호기심을 참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줄곧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미 자신과 헤어진 구서림을 궁금해해도 되는 걸까.

정말 지겨울 정도로 오래 고민했는데,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를 불러들이면 되는 것이다.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연락은요. 통화나 메시지 같은 것도 안 하셨어요?”

“안 했다.”

“그것도요?”
“그것도. 할 이유가 없으니까.”

씁쓸함을 삼키듯 마른침을 넘기는 건욱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들썩였다.

“헉, 싸우신 거 맞는구나. 그러면 관계 불편하실 텐데 왜 이 공연에 추천하셨어요?”

제 안의 이유를 보연에게 모두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건욱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눙쳐 대꾸했다.

“구서림의 연출 기법이 이 공연과 잘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

이 대꾸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던지 계속 눈동자를 굴리던 보연은 별안간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살짝 묵례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커다랗고 정적인 공간에 홀로 남겨진 건욱은 턱을 괴고 서림의 이력서를 다시 색이 짙고 깊은 눈동자로 들여다봤다.

“하…….”

절로 한숨이 샜다.

보연의 말대로 학부 시절 둘은 친밀한 사이였다. 신입생일 때는 학과가 달라 이따금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우연히
서로를 알게 돼 그때부터 서서히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건욱이 의대생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예술학과로 본격적으로 전과를 했을 때는 매일 주야장천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은 진지하게 사귀고 있었다.

거의 1 년을 건욱이 끈질기게 구애했고, 결국 서로의 마음이 닿아 3 년 넘게 교제했다. 하지만 공유한 4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헤어짐은 너무 쉬웠고, 또 일방적이었다.

서림의 어머니 장례 문제로 갈등을 빚던 와중, 그는 건욱을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안녕을 고했다.
그들은 서림이 헤어짐을 말한 직후부터 열흘간 간헐적으로, 지난 4 년 동안 다툰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횟수로
치열하게 싸워 댔다.

그러다 마침내 서림은 상대가 이별을 받아들일 틈도 주지 않은 채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건욱이 애타게 설득하고
붙잡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직 당사자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들이 결별했을 때 슬퍼해 줄 사람이 오롯이 건욱 혼자뿐이었다는 게


다소 안타까운 점이었다.

계속 활자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길쭉한 손끝으로 이력서 끄트머리를 툭, 쳤다.

‘위약금 낸다고 하는 건 아니지. 우리 진짜 그러지 말자, 구서림.’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고 매달려 있을 만큼 그는 한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쁜 와중 굳이 짬을 내 서림 때문에


골치 아파 하는 시간 낭비를 이제는 좀 끝내고 싶었다. 어떤 방향이어도 상관없이 바람이 불었으면 했다.
그러려면 서림의 도움이 필요했다.

“크리스타…….”

한 사람, 어쩌면 두 사람 모두의 인생을 바꿔 놓은「크리스타」 정도면 그들 사이에 가라앉은 과거라는 무게에
견줄 만할 터다.

* * *

「한국 예술단」은 대한민국 행정부 소속인 문화 체육 관광부 협력 기관이었다. 나라에서 이사장을 선임하는 데
일정 부분 관여하고, 기관이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매년 감사도 진행한다. 연장선상으로 수익형 모델의 공연도
올리지만 비수익형 모델의 자선 공연 또한 일부 제작했다.

서림이 이 예술단을 선택한 건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크리스타」는 제게 아주 특별한 작품이었던 데다


한국에서의 기념비적인 처음이니 돈을 벌기 위한 수단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수단으로 이 무대를 활용하고
싶었다.

마침내 예술단 사옥에 도착한 서림은 느리게 움직이는 「한국 예술단」 본관 출입문의 회전문 안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자전과 같은 그 회전의 안으로 기꺼이 입성하던 그는 여닫이형 옆문을 통과하고 있는 어떤 남자의
인영을 보고 멈칫했다.

남자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비상계단에 진입한 뒤라 뒷모습만 겨우 확인이 가능했는데, 길고 늘씬한 데다 어깨가


떡 벌어진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낯이 익었다.

계속 신경 쓰고 있어서 헛걸 보나.

의아해하며 회전문에서 빠져나온 순간, 상냥한 인상을 한 예술단 직원이 서림을 마중했다. 40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그녀와 마주 선 서림의 안색이 순간 긴장으로 살짝 식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는 죽은 엄마 또래의 여자들이 어려웠다. 그녀는 이미 한 줌


흙이 되고, 자신은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엄마는 40 대 여자고 자신은 미취학 아동인 것처럼 순간순간 과거에
매몰됐다.

“구서림 감독님 맞으시죠? 저는 한국 예술단 홍보 팀장입니다.”

명함을 받아 든 서림이 정중하게 팀장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구서림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평온을 가장해 살짝 웃어 보이자 마주 미소 지어 준 그녀가 승강기 방향으로 자신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승강기로 함께 향하는 사이, 서림은 깔끔한 인테리어의 로비를 둘러보았다. 이 한국 예술단 사옥 건물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대체로 깨끗하고 단정했다. 이 공간을 건축해 달라고 요구한 사람의 취향이 보이는
듯했다. 출근할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릴 풍경인데 썩 마음에 들어서 일단 합격점을 주고 싶었다.

이윽고 묵묵히 승강기에 올라탄 서림이 팀장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오늘 누구누구 오시는 겁니까?”

“오늘은 상견례라 저랑 인사 팀장, 그리고 저희 예술단 단장님 정도만 참석하십니다.”


“아, 그 이번에 새로 오셨다던 단장님 말씀인가 보네요.”

“맞아요. 아, 저희 단장님이 제가 알기로 구 감독님과 같은 대학 출신이세요.”

“한국대요? 그럼 학번이…….”

서림이 되묻는 찰나, 승강기의 문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홍보 팀장이 앞장서고, 서림이 그녀를 뒤따랐다. 3 층의
회의실 문 앞에 선 그녀가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

“들어가세요, 구 감독님.”

“네,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입성한 서림은 창가에 서 있던 뒷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건물 출입구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무늬가 없는 하얀 드레스셔츠와 검은색 슬랙스가 몸의 예쁜 뼈대를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그
근사한 모양이 서림에게 아주 익숙했다.

기시감이 느껴져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서서히 돌려세웠다.

기억이 다시 재생되는 속도는 때때로 무서울 만큼 빨랐다.

차츰 드러나는 얼굴이 서림의 눈에 비쳤을 때, 그의 외양은 오래전 자신이 알던 누군가의 모습과 분명하게
겹쳐졌다. 마치 그림을 그린 듯 매끈한 턱선과 높은 콧대, 길고 큰 눈 안에 비친 어두운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부럽다고 느꼈던 여유로운 표정까지. 모두 자신이 아는 사람의 것과 똑같았다.

‘꿈인가.’

일순 서림은 서로의 얼굴을 더듬었던 손끝의 온기가 새삼스럽게 다시 도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안면이
창백하리만치 질려 굳어 갔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그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아랫입술이
파들거리는 걸 막을 수도, 숨길 수도 없었다.

겨우 뱉어 낸 음성이 주체하지 못한 파동으로 조금 떨렸다.

“제건욱?”

매일 제 입 안에 침처럼 고여 있다시피 했던 이 세 글자를, 대체 얼마 만에 그에게 직접 뱉어 보는 건지 모르겠다.


서림은 물고기를 방류하는 것처럼 분명한 파동을 직접 만들어 내 놓고도 여전히 아무런 현실감이 안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다만, 긴장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의 매끈한 입은 너무나도 손쉽게 벌어져서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임을 겨우 알아챘다.

“오랜만이다, 구서림. 잘 지냈어?”

역시, 꿈이 아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여유로운 태도마저 예의 건욱이었다.

자신은 지금 무려 5 년 만에 제건욱을 바로 눈앞에서 만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늘 달콤한 언어와 음성으로 제게 속삭였던 밀어가 아니라 ‘오랜만이다’ 따위의 의례적 인사를
태연히 해 대고 있었다.

이런 그가 낯설기 때문일까. 일순 건욱이 제게 했던 언젠가의 서투른 고백이 느닷없이 서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넌 지금 이대로도 아주 좋아. 난 그런 네가 좋고.〉

까마득한 예전 일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스산해졌다. 아무리 혼자 몰래 그리워해 봤자, 이제 그때의 그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은 꽤 많이 흘렀는데 건욱에겐 서림을 향한 마음 이외에는 변한 게 거의 없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훤칠한 외모도, 자신만만한 표정도, 어딘지 능청스러운 태도나 듣기 좋은 중저음까지 전부
다 그대로였다.

한국에 와서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불안한 예감이나 본관 로비에서 봤던 남자의 정체 모두 서림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가 곧은 걸음으로 다가오는 동안, 서림은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작동하지 못하고 그대로 제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이윽고 서로가 마주 본 순간, 서림의 마음속에 두 가지 감정이 충돌했다. 손을 뻗어 진짜 그의 몸에 피가 돌고


있는지 만져 보고 싶은 충동과, 이대로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이 치열하게 싸웠다. 그 어느 쪽의 손도 들어 주지
못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서림의 뒤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서림 선배! 오셨네요. 저 보연이에요. 기억하세요?”

“보연이 넌 또 여기 왜…….”

설상가상으로 건욱을 잘 따르던 후배인 보연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되니 서림은 이게 꿈도, 환상도 아니라는
걸 명명백백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건욱에게는 상황 설명을 들을 엄두가 안 났다. 평온한 표정으로, 여상한 말투로, 오랜만에 만난 동기를
대하듯 형식적인 말들을 해 대는 걸 아무 준비 없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갈등하던 서림은 홍보 팀장에게
설명을 요구하듯 시선을 던졌다. 난감한 기색의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음성을 내뱉었다.

“여기 제건욱 PD. 우리 새로 온 단장님이 이분이세요. 원래 연출 위주로 하다가 이번에 「크리스타」


오리지널로 처음 제작 들어가는 거예요. 두 분 동문에, 같은 과에. 서로 잘 알지 않아요?”

물론 그가 누군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그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전 이 계약 이야기가 오갈 때 제건욱의 제 자도 들은 바가 없는데요.”

연신 떨리는 서림의 목소리에 분노인지 당혹인지 선뜻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가득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도리어 홍보 팀장이 당황해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제발 도와 달라는 듯 건욱을 향해 눈짓했으나
그는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서림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결국 홍보 팀장이 뒷수습을 마저 해야만 했다.

“아, 그게……. 애초에 제 단장이 한국 예술단으로 오시면서 「크리스타」에 구서림 감독을 추천했어요. 연출로
잘 어울릴 것 같다고요. 우리도 그래서 작품 판권 계약하면서 동시에 와 달라고 오퍼부터 적극적으로 넣었던 거고.
음, 이걸 아직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군요. 제 단장이 그 부분은 맡겨 달라고 해서 당연히 했을 줄 알았는데…
….”

“네. 전 처음 듣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너희 에이전시엔 정보 제공했고, 너도 지금 들었으면 된 거 아닌가? 우선 이쪽으로 앉아.”

대화 중에 끼어든 건 이 사달의 시발점인 건욱이었다. 그가 서림에게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나


서림은 오직 홍보 팀장만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제 쪽에선 사전 고지를 전혀 못 받았고요. 제가 법 지식은 짧지만 이 계약이 원천적으로 무효가 가능하다는 건


알겠네요. 이렇게 중요한 계약 조건을 감추고 도장을 찍게 하다니요. 에이전시 통해서 절차 밟겠습니다. 먼저
실례할게요.”

“감독님, 구 감독님!”

역시 홍보 팀장에게만 꾸벅 인사한 서림이 공간을 빠져나갔다. 황망해진 그녀와 계속 침묵하고 있던 보연이


이제는 나서야 한다는 신호를 건욱에게 마구 쏘아 보냈다.

“선배…… 어떡해요? 우리 연출 서림 선배로 확정일 줄 알고 다른 감독들 다 깠는데. 진짜 인주 뚜껑도 안 열어


보고 가시네.”

보연이 걱정을 내비치자, 서림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던 건욱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서림이 이 안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퍽 여유롭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허물어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올 게 왔으니 해결해야지. 너무 걱정 마요. 내가 쫓아가 볼게요.”

두 사람과 골고루 눈을 마주친 그가 접견실을 나섰다. 걸음이 빠른 건욱이 승강기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서림은 육중한 기계에 올라탄 직후였다. 면전에 사람이 서 있는데도 눈을 마주치지조차 않고 닫힘 버튼을 몇
번이고 누르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완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구서림! 잠깐만.”

완전히 닫힐세라 건욱이 양문형 문틈에 손을 넣어 봤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서서히 빈틈이 좁아지더니
문이 닫히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계기판을 힐끗 본 그는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구서림, 잠깐 기다리라니까.”

전속력으로 내려가니 로비를 걷고 있는 서림이 바로 보였다. 그를 발견하고 어깨를 붙잡자, 상대는 건욱을
냉정하게 쳐 냈다. 차가운 태도로 건욱을 뿌리치고 다시금 성큼성큼 걷던 서림은 어느 틈에 회전문에 함께 끼어든
그를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

“어디 가는데. 호텔? 술집? 레스토랑? 구서림 너 여기 차 없지. 내가 데려다줄게.”

끝끝내 대답하지 않은 채 뚜벅뚜벅 대로로 나온 서림이 마침 길가에 주차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려는 찰나였다.
건욱이 그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사방을 철통 봉쇄 하며 통로를 차단하는 통에 돌파구가 안 보였다. 결국,
애써 태연하려 애쓰던 서림이 자신의 판정패를 인정하고 입을 벌렸다.

“제건욱 단장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랑 얘기 좀 해. 시간 오래는 안 빼앗아. 잠깐이면 돼.”


“난 할 얘기 없어요. 누굴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사람을 뉴욕에서 여기까지 똥개 훈련을 시키는 배짱 견적이 참
궁금하네. 비행시간이 몇 시간인 줄은 압니까? 엿 먹으라는 건가?”

“저기요. 구서림 감독.”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서림이 그를 무시하고 간신히 차에 타려 하자, 급기야 건욱이 택시의 뒷좌석 차 문 사이에
아예 버티고 서 버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표출하지 않고 도로 쪽에 있는 반대편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떼는데,
동시에 그가 느닷없이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상체가 의도치 않게 마찰했다.

“헉…….”

당황한 서림이 정신없이 그를 밀어내며 자신도 모르게 차의 문을 확 닫아 버렸다.

그 때문에 ‘퍽!’ 하고 건욱의 몸에 부딪친 차 문이 반동으로 튀어나왔다. 모서리에 손등이 찍혀 벌겋게 피가


비쳤다. 병 주고 도리어 더 크게 놀란 서림이 그에게 한 걸음을 다가가려다가 화내던 중이었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그 틈에 건욱이 두꺼운 차 문을 받쳐 들고 고개를 저었다.

“윽……. 진짜 성질머리 여전하네. 구서림 너 이거 폭행이야. 심지어 도구 사용.”

난처해서 숨만 삼키고 있던 서림이 건욱의 상처를 미안한 듯 응시하며 겨우겨우 대꾸했다.

“갑자기 당기면 어떡해. 나야말로 놀랐잖아. 굳이 따지자면 정당방위야.”

그러자 그제야 건욱의 굳어 있던 입매가 겨우 풀렸다. 그는 픽 웃었다.

“이제야 좀 구서림 같네. 낯 뜨겁게 웬 존대.”

그 말과 함께 건욱은 택시 안쪽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기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황당해하는 서림의


팔목을 이끌어 사옥 방향으로 억지로 다시 데려왔다. 저항하려 했으나 서림의 완력으로는 건욱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얘기 좀 하자고. 여기 내가 있다는 걸 미리 말 안 한 건 네가 이럴까 봐 그런 거지 널 갖고 놀 거나 기만하려던


게 아니야.”

“때려 놓고 그러려던 게 아니야, 그러면 생긴 통증이 없어져?”

“사소취대라고 생각해. 같이 일하자. 대학 때 기억 안 나? 너랑 나 손발 잘 맞았잖아.”

자신이 그를 향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그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이미 볼 장


다 보고 만남부터 결별의 수순까지 모두 겪은 과거의 연인과 어떻게 한데 부대끼며 일할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다소 보수적인 사고관의 서림으로선 납득이 안 갔다. 이런 제 성향을 건욱이 모를 리가 없어서, 더 용납이 안
됐다.

“제건욱 너 변태야? 우리가 어떻게 같이 일해!”

“왜 못 해.”
“난 촌스러워서 그걸 못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너 할 수 있어. 네 잠재력 못 믿어? 구서림. 이거 「크리스타」야. 이걸 나 말고 누구랑


올릴 건데.”

계속 파르르 떨면서 황망함을 주체하지 못하던 서림이 불쾌한 듯 이마를 확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 오늘 자신은 「크리스타」를 위한 최종 계약서에 서명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지금 제겐 건욱에 대한 생각밖에 안 남았다.

대체 왜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건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게 같이


일하자고 할 정도로 이제는 아무 느낌이 없는지. 모든 게 미궁이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난 너한테 알아볼 거야.”

“너 정말 왜 이래!”

부디 이러지 말아 달라는 양 절박함을 담아 피력하니 그가 대뜸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뭔가 서림의 안에


제안을 거절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듯했다. 그러다 어떤 결론에 이른 모양인지 좀
허탈해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또 추근거릴까 봐 그래?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 지금 여기 한국 예술단 예술 감독이자 단장으로 서


있는 거야. 구 감독과의 계약 성사를 위해서. 너 프로잖아. 이게 무슨 의민지 몰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한일자로 꾹 다물고 상대를 응시하자, 그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정 마음에 걸리면 안 집적대겠다고 각서라도 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러니까 그렇게 싫다고만 하지 말고
재고해 줘. 우린 다 준비돼 있어. 연출인 너만 오면 돼.”

얌전히 건욱의 말을 듣는 동안 서림의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5 년 전과 외견상 크게 달라진 적


없는 그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차이를 실감했다.

어딘가 초월한 듯한 다소 느른한 인상의 그는 실제 성격도 여유 넘치는 편이었다. 어떤 일 앞에서도 조바심 내지


않았고, 대체로 능글거리는 데가 있었다. 그럼에도 어울리지 않게 그는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아주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반드시 제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지금 건욱은 그저 답을 구하듯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열정 없이 무덤덤해진 그의 눈동자를 직시한 지금 이 순간, 서림은 지난 5 년을 통튼 것보다도 훨씬 더 뼈저리게


자신들이 이미 끝났음을 깨달았다.

귀책사유가 어느 쪽에 있었든, 결과적으로 냉정하게 결별을 고한 건 제 쪽이었는데도, 차갑게 식은 그를 보니


아주 기분이 이상했다.

이래서 한국에 오기 싫었다. 변한 그를 마주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서림이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하겠어. 내가 좀 더 세련됐으면 좋았을 텐데. 더 좋은 연출자가 있을 거야.”

“내가 필요한 건 너라니까.”

“얼굴 좋아 보인다. 앞으로도 그렇게 잘 지내.”

“구서림.”

두 사람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완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서림이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편법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는 듯 한쪽 눈을 슬쩍 찌푸린 서림이 그가 잠시 빈틈을 보인 틈을
타 그의 정강이를 빠르게 걷어찼다.

“아까 부딪친 데랑 같이 약 발라, 미안.”

“윽……!”

빠각, 뼈가 타격을 받는 아찔한 소리가 나면서 훅 허리를 숙인 건욱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그사이 서림이
재빠르게 뛰어 아까 전 타려던 택시를 골라 탔다.

“구서림!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야박할 정도로 순식간에 뒷문이 닫히는 모습이 건욱의 시야에 들어왔다.

서림을 쫓아가려던 그는 한발 늦었음을 깨닫고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언젠가의 일이 떠올라 기시감이
일어서 기분이 나빴다.

이윽고 택시가 출발하는 모습을 망연히 보고 있는 사이, 보연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안색에 드리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미루어 한참 전부터 뒤쪽에서 그들의 알력 싸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장님, 괜찮으세요?”

현재 그는 전혀 안 괜찮았다. 아주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아니, 여기저기 난타당해서 시름시름 말라 가고 있다.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이건가.”

그는 대답과 동시에 제 손등에 남은 상처를 내려다봤다. 보연의 시선도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어머, 손에 피 나요!”

대수롭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든 건욱이 제 손등에 고인 피를 닦아 내는 동안 두 사람은 침묵했다. 먼저 균열을


깬 것은 보연이었다.

“그럼 우리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들어 보니 구 선배 고집 보통 아니시라는 것 같던데요. 홍보 팀장님


말씀으론 그쪽에서도 유명했대요. 하긴, 우리 학부 때도 서림 선배 성깔은 전 학년이 다 알았잖아요.”

“쟤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유순하고 착해. 건드리니까 그렇지.”

“건드렸다가 손등 만신창이 되신 분이 하신 말씀이니 맞겠네요. 어휴.”


그는 씁쓸함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여전히 심각한 보연의 안색을 보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덧붙였다.

“쟨 뭐 저렇게 내가 싫어? 나 돈 많고 잘생겨서 저렇게 과하게 싫어하기 쉽지 않은데.”

“모르는 사이에 뭐 크게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인지 건욱이 입술을 달싹였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입장 차이’였다. 건욱의 입장에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는 사안이었고, 그런 판단하에 저질렀는데 서림은 끝내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의 마음과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질 않았던 듯했다. 건욱은 그런 서림이 어느 날은 이해가 되다가도, 또 갑자기 안 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차이가 갈등을 낳았고, 결국 그들은 3 년 뜨거운 연애의 종지부를 무척이나 허탈하게 찍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끝날 수가 있었던 건지, 애초에 서림이 자신을 좋아하긴 했던 건지, 그 일련의 과정을 다시
생각해도 건욱은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였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대화를 좀 더 했으면 싶었는데, 그는 제
앞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제대로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던 서림에게, 그때 자신은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옳았던 것일까.

서림이 평생을 죽도록 증오했던 그의 어머니가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 가도록 방조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미 그 시간이 지나 버린 미래에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걔 입장에선 그랬나 보더라.”

제게 분노해 뜻을 굽히지 않고 떠나기를 강행했던 서림은 끝내 한 번을 돌아봐 주지 않았다. 자신은 서림이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쫓아가다 교통사고까지 당했는데도, 그 후로 5 년이 되도록 연락
한번이 없었다.

직접 와 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안부 정도는 물어봐 줄 것이라


여겼는데. 끝내 서림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애타게 매달리던 건욱도 이 일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그를 포기하는 수순을 밟았다. 처음엔
미치도록 미워했고, 그다음엔 죽도록 원망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보다 본인의 기분과 상처가 먼저였던
서림의 결정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잊게 됐다. 잘못을 용서해 주거나,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할 만큼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서로 업계가 같아서 간간이 소식 정도는 들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자신 또한 먼저 연락한 적은 없었다.


건욱에게도 일말의 자존심은 있었기 때문이다.

5 년.

그 시간을 물을 가르듯 지나쳐 오는 동안 이제 건욱의 안에서도 모든 게 산화되어 남은 게 없었다. 작은 미련의


찌꺼기들마저 전부 사라졌다고 믿었다.

“하. 골치 아프게 됐네.”


그의 혼잣말은 짐짓 이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그러게요. 혹시 모르니까 새로 연출을 물색해 볼까요? 제건욱 감독 첫 제작이고, 한국 예술단에서 올리는


작품이니 아무리 우리 쪽에서 한 번 깠어도 하겠다는 사람은 넘칠 거예요.”

“아니, 그러지 마. 우린 구서림이랑 일할 거야.”

“벌써 튼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게요? 사실 우리한테 유책 사유 있는 건 맞잖아요. 서림 선배가 작정하고 소송


걸면 우리가 져요.”

“그러니까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손수건을 고이 접어 챙긴 건욱이 앞서 걸었다. 보연이 그를 얌전히 뒤쫓았다.

“아프세요?”

“아파.”

“아까 보니까 정강이도 엄청 세게 걷어차신 것 같던데.”

“봤으면 진작 좀 말리지 그랬냐.”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 두 분 사이에 어떻게 끼어듭니까. 손등에 상처 꽤 큰데 파상풍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됐고. 보연이 넌 본가 실장님한테 연락해서 지금 쟤가 묵는 데가 어딘지, 휴대폰 번호 살아 있으니까 인적 사항


토대로 좀 확인해 달라고 해.”

그 지시를 듣자마자 보연은 펄쩍 뛰었다.

“그렇게 바쁜 분한테 연락해서 남 개인 정보 침해해 달라고 부탁하라고요?”

“응. 그러라고. 은밀하게. 추가로 내가 여태까지 연출한 작품들 실황 영상 준비해 줘.”

“어쩌시게요.”

“구서림은 내가 잘 알아.”

“하…… 단장님이 서림 선배 후폭풍 다 책임지세요.”

“언젠 내가 안 졌어?”

뚜벅뚜벅 걷던 와중 서림이 남기고 간 음성을 떠올린 건욱은 이미 그가 사라지고 없는 대로변을 불현듯 돌아보았다.

〈얼굴 좋아 보인다. 앞으로도 그렇게 잘 지내.〉

그의 눈엔 자신이 잘 지낸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누구에게도 아프다거나 힘들다고 말한 적 없지만 사실 그 결별은 제 쪽에서도 큰 상처였다. 그 때문에 건욱은


아직도 연애가 꺼려졌다. 어제까지 뜨겁게 사랑해도 오늘 크고 작은 이유로 완전히 끝날 수 있는 게 연애라면,
애초에 그걸 왜 하나 싶었다.

삶의 모든 건 타이밍이다. 결국 서림이 또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건욱은 하고 싶었던 말들의 10 분의 1 도 뻥끗


못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기가 싫어서 널 부른 건데, 나더러 앞으로도 이렇게 살라고?’

그렇겐 못 해 주겠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이긴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제 손등 위 상처를 힐끗 살피곤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02.

차락. 비좁은 침실의 커튼을 걷어 내니 오전의 햇살이 따사롭게 스며들었다.

이곳은 서림이 대학 졸업 전까지 살던 집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허름하고 위치도 좋지 않은 곳에 있어서 주변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동네였다.

이제 서림은 서울시 내에 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며칠 투숙할 여력이 충분히 됐지만, 그곳은 제집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 좁고 낡은 공간이 훨씬 마음 편했다.

게다가 이곳은 서림이 직접 몇 년간 과외를 해서 번 돈을 모아 매매했던 그날의 뿌듯한 기억이 남아 있어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울러 여길 팔게 된다면 뉴욕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연고 없는 자신이 갈 곳을 잃게 될
것 같아 최후로 벙커로 남겨 두었다.

“하……. 이제 어떡하지.”

마음을 완전히 굳히고 왔는데 당장 반년간의 일정이 어그러진 셈이다.

햇볕을 정통으로 몸에 맞으면서 광합성을 하던 서림은 푹신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고 보니 이건 몇 년 전 종종 이곳에서 자고 갔던 건욱이 원래의 침대가 작고 좁다며 선물했던 것이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던 바람에 처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괜히 울컥한 서림은 침대 위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굴렀다.

“하필 거기서 제건욱을 만날 건 뭔데.”

어젠 밤을 꼬박 지새웠다.

비행기를 오래 타서 피곤했던 탓도 있었지만 가장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건 역시 건욱의 존재였다. 잘난 얼굴,


훤칠한 몸매, 뻔뻔한 표정, 거기에 능글맞은 태도와 타고난 여유로움까지, 너무나 예전의 제건욱 그대로여서
조금 놀랄 지경이었다.
건욱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일은 일일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과거를 떨치기가 어려운 자신은
그처럼 가벼워질 수도, 쿨해질 수도 없었다.

정말 자신을 많이 좋아했다면 뉴욕행 비행기를 탔을 때 쫓아와 줄 줄 알았다. 계속 밀어내도 지구력을 발휘해


설득하려고 애쓸 거라 생각했다. 중간에 일이 잘못됐더라도 어떻게든 늦게라도 뒤쫓아 와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이 아는 한 건욱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다. 많은 사안에 게으른 태도를 견지하는
대신 하나에 꽂히면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되는 기동력을 발휘했다. 아홉 번 차이고도 열 번 고백해서 결국 자신을
얻어 냈던 근성을 기억하고 있는 서림의 사고 회로는 자연히 그런 식으로밖에 안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때에 그러지 않았다. 승부욕을 발휘하기는커녕 어울리지 않게 겸허히 헤어짐을


받아들였다. 5 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어이없이 끝났다.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난 서림은 급한 대로 에이전시 담당 매니저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다행히 시차가 있는데도 상대는 금세
음성을 들려주었다.

- 서림 씨?

“네, 저 구서림인데요. 아직 퇴근 안 하셨나 봐요. 실은…… 여기 일이 좀 틀어졌어요. 바로 뉴욕으로


돌아가야겠거든요.”

- 지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어쩐지 미팅했을 텐데 가타부타 전화가 없다 했어요.

“통화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자세한 건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뉴욕행 티켓 예매 좀 대신 해 줄래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가능하면 한국 항공 비즈니스로요.”

- 잠깐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아뇨. 이쪽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서요.”

타닥타닥. 미약하게 귓전을 파고들던 타자 치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간 기다리자 매니저가 덤덤한 음성을
돌려주었다.

-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순 없어요. 위약금이 꽤 걸려 있거든요.

“상대에게 귀책이 있어도요?”

- 그렇다면 우리가 결과적으로 이길 순 있겠죠. 하지만 두 나라 오가는 데 드는 비용은 물론이고 소송 기간도 꽤


걸릴 거예요. 그 시간 동안 구 감독은 다른 작품 계약을 할 수가 없게 계약서상에 명시되어 있고요. 그래도
비행기 예약해 드려요?

마음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민이 많아진 서림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그래 주세요. 변호사랑 상의 먼저 좀 해 봐야겠어요.”

- 우린 서림 씨 생각이 제일 중요하니까, 알겠어요. 제일 빠른 걸로 예약해서 E 티켓 보내 둘게요.


“네, 항상 고마워요.”

간단한 끝인사를 마친 서림이 휴대폰을 내던지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거실이라고 해 봐야 주방과 연결된 길고 좁은 공간이었으나, 어쨌든 안방과는 분리되어 있어 환기를 해야 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펼친 그는 순간 창밖을 내다보다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익숙한 형상이 가시거리 안에 있어 매우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다시 커튼을 닫은 뒤 돌아서서 숨을 길게 골랐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당황한 서림이 조심스럽게 커튼을 도로 걷자, 조금 전 목격한 존재가 환각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바깥의 길쭉한 인영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구서림!”

설상가상으로 마침 차에서 내리고 있던 건욱이 서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연해진 서림이 어린아이들 장난치듯
재차 커튼을 쳐 버린 뒤 몸을 낮춰 주저앉았다.

“헉, 저 새끼 뭐야. 여길 왜……. 어제 내가 여기서 잔 건 어떻게 알았지?”

한껏 상체를 웅크리고 생각을 거듭하던 서림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책을 떠올려 내곤 벌떡 일어났다. 와서
잠만 잤기 때문에 어질러 둔 것도 없었다. 이미 씻었으니 이대로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됐다. 건욱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신경이 쓰인다면 자신이 집을 비워 종일 안 보고 안 들으면 되는 것이다.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 서림이 휴대폰과 지갑만을 챙긴 채 집을 나섰다.

일부러 계단을 걸어 내려가 도망치듯 조용히 공동 현관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쪽으로 나올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욱과 맞닥뜨렸다.

“헉…….”

“네 생각이야 뻔하지.”

서림은 일단 모른 체했다. 그러나 건욱이 왼쪽, 오른쪽을 모두 봉쇄하며 몇 번이고 제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우뚝 멈춰 선 서림이 그를 지그시 직시했다.

“너 어지간히 한가한가 보다? 어제 나 여기서 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뻔한 거 아닌가. 설마 했는데 아직 저 집 안 팔았어? 휴대폰 번호도 5 년 전 그대로던데. 이렇게 물건


못 버리고 그러면 안 돼. 공수래공수거 몰라? 인생 단조롭게 살아야지.”

“좆 까세요. 내가 너한테 어쭙잖은 충고해 달라고 했어? 시간 많으면 잠이나 처자.”

차갑게 일갈한 서림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자 대략적인 그림은
보였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욱을 발견한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는 모든 계산에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이는 행동을 취한 데 자존심이 상하고 그들의 과거 기억을 행동 양식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적극 활용하는 건욱 때문에 불쾌했다.

“아침부터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동행할까?”

워낙 집이 지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건물 후문의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서림은 좁은


샛길로 빠져나와 도로변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배기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내딛는 사이 서림의 뒤를 쫓은
건욱이 은근하게 물어 왔다. 이 목소리가 쓸데없이 감미로워서 두 배로 기분이 상했다.

“언성 높아지기 전에 꺼져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나 바쁜 사람이야. 시간 쪼개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정성이 아까워서 그렇겐 못 하지.”

“뭘 더 어쩌자는 거야. 내가 어제 잘 설명했잖아.”

“이제 보니 구서림 씨는 본인 행동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네. 너 설명 잘 안 했어. 내 정강이 걷어차고


도망갔지. 기억 안 나?”

할 말을 잃은 서림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걸음마저 멈췄다. 그러자 그가 틈새시장을 공략하듯 제


손등의 상처를 서림의 눈앞에 내밀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밴드를 붙인 곳 양옆으로 살짝 찢어져 벌겋게 된 부위가
보였다.

“이거 보여? 나 아직도 아파.”

그 쓰라린 고통이 전이되기라도 한 듯 살짝 이마를 찌푸린 서림이 겨우 대꾸했다.

“그래 보인다. 약이라도 바르지 그걸 그냥 뒀어?”

“네가 봐도 아프겠지. 미안하지?”

“응, 그래도 계약은 안 해.”

명확한 의사 표현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지치지도 않고 건욱이 뒤따랐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크리스타」 연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거라면 서림은 절대 그것만큼은 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출이 제일 많이 부딪쳐야 하는 게 제작자였다. 그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열정이
사라진 그의 공허해진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자신이 느낄 부정적 감정들이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다. 아마 매일같이
후회를 거듭할 것이다.

그때 헤어지자고 하지 말걸.

그냥 내가 나쁜 사람이 되고 네 옆에서 좀 더 버틸걸.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자신이 그려졌다. 그러다 모든 결심이 무너지게 될까 두려웠다.

“그냥 계약하자, 구서림. 연말 1 주일 공연이야. 나랑 반년이면 돼. 그것도 못 견뎌? 포스트 프로덕션까지는


지켜보라고도 안 해. 라이선스 작품이잖아. 대본이랑 음악도 다 개발했겠다, 프리도 필요 없어. 딱 프로덕션
과정만 털고 가.”

“나 네가 이렇게까지 할 매력 없어. 나 같은 연출자 쌔고 쌨으니까 잘 뒤져 봐.”


“나 보는 눈 있어. 스스로를 깎아 먹는 건 자유지만 내 판단력까지 함부로 폄훼하면 안 되지. 그리고 나 네
기획안 봤다. 「크리스타」.”

농담하듯 장난치듯 껄렁거리던 건욱의 음성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덕분에 서림도 걷다 말고 또다시 길 한복판에
멈춰 서게 됐다. 오전의 나른한 햇빛이 그들의 위로 비쳤다.

예전부터 건욱은 사람을 앉혀 놓고 몇 마디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을 홀리는 법을 잘 알았다. 그의 화법은


대체로 논리적이었고, 때론 비합리적이었다. 모르는 사이 무슨 요사라도 부리는 건지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정신을
차려 보면 그에게 설득돼 있었던 일이 숱했다.

5 년 사이 면역이 흐려진 서림은 그의 이런 태도에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됐다.
계속 제 청각이 건욱의 중저음을 좇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연히 네가 3 년 전에 문체부에 제출한 기획서랑 포트폴리오가 나한테 왔어. 좋더라. 난 네 방식이 마음에 들어.
아니, 매우 좋아. 정도를 지키고, 섬세하고, 따뜻해. 연말연시 단발성 이벤트로 올릴 가족 뮤지컬로 너만 한
연출이 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판단했으면 내가 따라야 돼? 부하 직원 취급 할 거면 월급도 주지 그러셔.”

과찬이 멋쩍어서 괜히 뾰족하게 반응하는데도 건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알다시피 우린 스타일이 반대니까 서로 미비한 부분 보완하면 좋잖아. 내 무대의 완성도를 위해서 네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너한테도 내가 분명히 도움될 거라고 확신해.”

“실체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은 여전하시고.”

“무엇보다 「크리스타」가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니까. 네가 그걸 얼마나 열심히, 소중하게 만들어 줄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야. 너도 나한테 그게 어떤 의민지 알잖아.”

「크리스타」는 어렸던 서림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었고, 어른인 건욱의 삶에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 무대를 같이 올리자는 건 오래전 그들이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너무 마땅해서 그런 것이었을 뿐 반드시 함께일 거라고 여겼다. 한때 당연했던 일들이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시간의 힘인지 마음의 힘인 건지는 모를 일이다.

애정을 지니고 임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덕분에 그의 설득에 마음이 조금
움직이려 들어서 곤란했다. 서림이 머뭇거리는 듯하자 그가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여지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너 프로 아냐? 제대로 된 공연 하고 싶은 욕심 없어? 난 있어. 그래서 이러는 거고.”

넌 참 공사 구분 확실해서 좋겠다.

서림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필사의 의지를 끌어모아 침묵했다. 진지하게 말을 섞기


시작했다가는 건욱의 페이스에 말릴 게 뻔했고 그런다면 결말은 암담한 방향으로 흐를 게 명백했다.

“너도 이 공연 좋은 취지니까 아이들 돕고 싶은 마음에 온 거 아냐. 이런 식으로 걷어차고 갈 거야? 쪽팔려도


차인 내가 쪽팔리지, 넌 뭐가 그렇게……. 나도 괜찮다는데.”

결국 발끈한 서림이 토로했다.


“넌 뭐가 그렇게 쉬워?”

“어려울 게 없으니까. 정말 우리랑 소송하게? 너 그동안 일도 못 할 거야. 딱 이럴 것 같아서 계약서에 그


조항을 넣었거든. 이중 계약 절대 불가.”

“이 새끼가. 사람 면전에다 대고 나를 속였다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한 거야.”

“제건욱!”

“쉬면 감 떨어져.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그의 말마따나 이 공연은 지금부터 준비해서 연말에 무대를 올리면 끝나는 단발성이었다. 정부에서 일부 지원하고
개입도 하는 이벤트성 공연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회차가 늘어날 일도 없었고, 행사가 끝난 뒤로 서로
질척거릴 상황도 웬만하면 만들어지지 않을 터다. 바꿔 말해 건욱의 말대로 반년만 눈 딱 감으면 더는 그와 볼일
없으리란 의미다.

게다가 그의 말마따나 건욱과 자신은 성향도 스타일도 반대라 합을 맞춰 가는 보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괜찮은 무대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자신은 그에 비해 촌스러워서, 괜찮다는 그와 달리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속적으로 건욱을 볼 자신이 없었다.

“구서림, 계약하자. 나 이제 너한테 아무런 사적인 관심 없어. 털끝 하나 안 건드릴게. 각서도 쓴다니까.”

내심 혼란스러워하던 서림은 일순 멈칫했다. 건욱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꺼내 든 최후의 카드가 도리어 가장


나쁜 패가 되어 제게 돌아왔다. 얼굴 피부 아래의 체온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간 시야가
어룽거리는 듯한 기분도 일었는데, 흐린 눈을 비비면 그가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 서림은 애써
덤덤하게 대꾸했다.

“출근 시간 안 됐어? 돌아가.”

“구서림.”

“가라고. 나 집으로 다시 올라갈래. 너도 살펴 가라. 상처 꼭 치료하고.”

“어딜 가.”

대꾸 대신 팔을 냉정하게 뿌리친 서림은 왔던 길을 빠르게 돌아갔다.

황급히 서림을 쫓던 건욱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가는 모양새를 주시했다. 왠지 허무해 보이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윽고 몇 미터쯤 멀어진 서림이 회귀하듯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가 데시벨을 조금 높여
외쳤다.

“고민 좀 해 봐. 내일 또 올게.”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그러나 건욱은 서림이 제 음성을 들었다는 걸 잘 알았다. 분명하게 움찔한 어깨 위의
파동이 그의 시야에 박혔던 탓이다.
서림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건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서 쉽게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서림은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건욱은 마음을 다잡듯 외벽이 죄다 벗겨진 남루한 건물을 직시했다.

“새끼, 돈을 벌었으면 좋은 데로 이사를 좀 할 것이지. 괜히 신경 쓰이게.”

오래전에도 종종 느꼈던 것이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좀 외롭게 만드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숨을 삼킨 그는 마지못해 돌아섰다.

* * *

아이스커피를 오른편에 내려놓은 서림은 정면의 커다란 스크린을 직시했다. 마치 해가 진 저녁처럼 어스름한
사위의 이 밀폐된 공간에 있자니 조금 낯설었다.

왠지 어제처럼 오전부터 건욱이 찾아오진 않을까 싶어서 이른 시간에 영화관으로 나왔다.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았다. 관람하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커다란 소음이 들려오는 게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고막이 파열된 영향으로 줄곧 귀가 약했다. 항상 신경 써서 다루어야 했다. 뮤지컬 연출은 커다란


음악 소리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에 평상시 생활에서 더욱 주의를 요했다. 단지 오늘은 외출 시간이 생각보다
이른 탓에 선택지가 워낙 좁았다.

“영화 제목이…….”

아무거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가장 시간이 가까운 것을 대충 예매했더니, 제목을 뒤늦게야 확인하게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주연 배우의 얼굴 정도만 확인해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 나타나 자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이라 빈자리가 무척 많았는데도 자신의 바로 뒷좌석에 착석하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똑같은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기 생수. 안 필요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전방의 스크린에 다시 시선을 고정하는 서림의 어깨 위로 뚜껑을 따지 않은 생수통이 쑥


넘어왔다. 굳이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건욱의 음성이었다. 식겁한 서림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창백해진 얼굴이 뻔뻔한 낯의 건욱을 정통으로 향했다.

“너 미쳤…… 여기까지 따라왔어? 어떻게 알고?”

“그러게. 나도 이렇게까지 질척거리고 싶진 않았는데. 피차 괴롭게 됐다.”

“야, 제건욱.”

“나 피해서 여기 온 거면 차라리 다른 데로 가지? 여긴 사운드가 매우 빵빵해 보이는데.”


그가 서림의 귀를 가리키다가 그 손가락을 고스란히 출입문 방향으로 옮겼다. 굳이 약한 귀를 혹사할 필요가
있느냐고 에둘러 묻는 듯했다. 서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나 안 지긋지긋해? 딱 사흘 연달아 봤는데 난 너 벌써 그렇거든.”

“글쎄. 오랜만이라 그런가. 난 나름대로 반가운데? 좀 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어.”

“…….”

“나가자. 영화가 정 보고 싶으면 볼륨 줄이고 집에서 보고. 얼른. 봐, 영화 시작한다.”

“제건…….”

쉿. 그가 검지를 입술 위에 댄 순간 타이밍 좋게 광고가 모두 끝나고 막막한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애꿎은


입술을 질끈 깨문 서림이 하는 수 없이 상영관의 밖으로 나갔다. 건욱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탁. 출입문이 닫히자마자 서림이 건욱을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안에서와 달리 거리낄 게 없으니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뭐 하자는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혼자 영화관 전세 냈나. 너 연봉 어지간히 많이 받나 보다? 그런 건 나 같은 중간 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인데.”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열받게 하려고.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열받게 하려는 건 아니고, 일부러 그러는 건 맞고. 네가 어디 있는지는…… 본가에 있는 능력자의 도움을 조금
받았고.”

그의 입에서 마지막 문장이 떨어지자, 서림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치 순간적이지만 정물화처럼 모든
몸짓과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한 건욱이 꼭 필요한 정보 외에 다른 걸 침해하진
않았다고 변명하듯 말을 덧붙이려 하는데, 상대의 입이 열리는 게 한 박자 빨라 무산됐다.

“또 어제랑 똑같은 얘기 하자고? 안 지겨워?”

“앵무새처럼 반복하기 지겹지, 나도. 그런데 오늘 허락 안 하면 난 내일 또 올 거야.”

“넌 시간 낭비가 취미야?”

“삼고초려 뭐 비슷한 거야. 유비도 제갈량 모시려고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데. 촉망받는 연출자 구서림한테도
그런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지.”

가뜩이나 복잡한데 그가 하루에 한 번씩 나타나 뒤흔들고 있어서 머릿속이 아비규환이었다.

서림은 지그시 그를 보다가 더 말 섞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망설임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건욱이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영화관 건물을 빠져나온 서림은 표지판을 따라 인근에 있는 멀티플렉스 건물로 향했다.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마침내 멀티플렉스 입구로 들어가자 바로 위 2 층에 서점이 있었다. 홀린 듯이 그곳으로 향한 서림은 책 냄새가
물씬한 서가들 사이를 거닐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산란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이윽고 고전 소설 칸에 서자마자 눈에 띄는 책이 있어 몇 권 꺼내 들었다. 그러자 형체가 기다란 누군가 옆에서


바람처럼 스윽 나타났다.

누군진 안 봐도 뻔했다.

“안 무겁냐.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생겨 가지고.”

역시나, 자신이 잘 아는 나지막한 음성이 귓전에 맴돌았다.

건욱을 쳐다봐 주지도 않은 서림은 한 손에 여러 권을 겹쳐 쥔 채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을 한 권 더 골라


꺼냈다. 그게 아슬아슬해 보였는지 옆에 서 있던 건욱이 손을 뻗는 기척이 느껴졌다. 왠지 그가 짐을 들어 줄
기세여서 피하려고 했는데 그 바람에 몸의 균형이 옆으로 쏠려 늘씬한 두 다리가 휘청했다.

“어…….”

마른 몸이 옆의 진열대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민첩하게 팔을 내민 건욱이 기울어진 어깨를 받쳐 들듯 지탱했다.


‘탁’ 하는 마찰음과 함께 그의 살갗이 닿자마자 안도로 손에 힘이 풀린 서림이 들고 있던 책들을 놓치고 말았다.
여러 권의 책들이 와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툭, 툭. 서적들이 힘없이 추락하는 동안 그들은 잠시간 치열한 시선을 교환했다. 건욱의 눈빛이 꽤 집요해서
서림의 얼굴이 별안간 벌게졌다. 그러다 문득 지금 두 사람이 거의 끌어안고 있는 형태라는 걸 깨닫고 낭패스러운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비, 비켜.”

건욱은 허리를 숙여 떨어뜨린 책들을 전부 주워 들며 태연히 대답했다.

“조심해야지.”

“내가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너거든.”

“고맙긴. 네가 안 다쳤으면 됐다.”

그가 감사인사는 됐다는 양 너스레를 떨었다. 민망해진 서림은 애써 서가의 높은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제일
위에 놓인 책들부터 가장 아래 있는 것들까지 눈대중으로 쭉 훑었다. 그런 뒤 「달과 6 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따위의 유명 고전 소설들을 하나씩 꺼내 차곡차곡 건욱의 손 위에 올렸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잠언을 착실하게 이행하기 위함인지 그를 짐꾼으로 쓸 요량인 듯했다.

묵묵히 서림이 고른 책들을 내려다보던 건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머싯 몸은 다 봤잖아.”

그들은 이제 와 모른 척하기엔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내가 같은 책을 열 번 보든 백 번 보든 아는 척 관두고 짐이나 들어.”

“넌 헤세 좋아하지 않나?”
“관심도 끄고.”

“촛불도 아니고 뭘 자꾸 끄라는지……. 난 이거. 고전 문학의 정수라고 본다. 열 번 백 번 재탕할 거면 이


정도는 돼야지.”

대꾸를 한 귀로 듣고 흘린 건욱이 존 밀턴의 「실낙원」을 꺼내 쌓인 책 가장 위에 척 올렸다. 서림이 이 모습과


책등을 번갈아 힐끗 보곤 혀를 찼다.

“난 밀턴 싫어.”

“너 그런 거 없지 않았나.”

“생겼어.”

거북할 만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겨우 피한 서림은 건욱의 손아귀에서 쌓인 책들을 전부 빼앗았다.


그러고는 「실낙원」만 그의 품에 던지듯 넘기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결제를 하려고 지갑을 찾는 찰나, 뒤편에서
건욱이 대신 카드를 내미는 바람에 한 발짝 늦고 말았다.

“구 선생 이제 어디로 가시나. 내가 모실게.”

직원으로부터 책을 돌려받은 서림은 대꾸 없이 건욱을 두고 혼자 서점을 빠져나갔다.

멀티플렉스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서점 근방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을 찾아 입성한 서림은 아까 전


상영관에 두고 나온 차가운 음료를 떠올리며 똑같은 커피를 주문했다.

곧이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데, 어느 틈에 건욱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잡는 동안 이것들을 전부 산 건지 매장 내에서 판매하는 베이커리류를 종류별로 테이블 위에 산처럼
올려놓았다. 뒤이어 제 앞에 앉는 순간, 서림의 뺨 언저리에 느닷없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부의 여자 손님들 몇몇이 수군거리면서 근사한 외양의 건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서림은 예나 지금이나 그게 참 싫었다.

마음 같아선 이 새끼가 생긴 것만 이렇게 멀쩡하지 사실은 변태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서림.”

“혼자 있고 싶다. 누가 좀 안 비켜 주나?”

“고민은 좀 해 봤어?”

살짝 펼친 책을 도로 거세게 덮은 서림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걸치고 건욱과 또렷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제건욱 단장, 댁의 아는 척은 이런 때 발휘해야지.”

“그렇지, 넌 밤새 고민했을 성격이지.”

사실 그의 말대로 간밤에 잠 한숨 못 자며 고민을 거듭했다. 덕분에 거의 이틀째 밤잠을 설치며 뇌의 기능을 쥐어


짜낸 터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건욱의 제안이 솔깃한 건 맞았다. 그런 데다 소송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고 손발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건 현시점에서 받을 수 있는 리스크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계약을 수락하는 일 외엔 뾰족한 수가 안 떠올랐다.

이제 와서 이럴 거면 뉴욕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진작 나타날 것이지.

제게 미약한 용기라도 남아 있을 때 와 줬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서 자신의 수심만
깊어졌다.

“나는 너를…….”

겨우 말문을 연 서림의 음성 끄트머리가 조금 떨렸다. 그걸 의식한 건지 잠시간 사이를 둔 서림이 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뗐다.

“나는 너를 보는 게 솔직히 쉽지가 않아.”

“우리가 예전에 사귀었기 때문에?”

“그걸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서머싯 몸 다 읽은 걸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기억할


거야. 나는 별로 너처럼 어른스럽지 못하고, 중간중간 예전 일 때문에 내 업무에 지장을 줄 것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네가 불편해.”

이렇게 건욱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를 사랑했던 기억과 끝날 때 입혔던 상처 따위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지금도 이런데 보다 잦은 횟수로 건욱을 보게 되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게 다야? 내가 연출만 경험해 보고 한 번도 제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신뢰가 안 간다든지, 감독으로서 내


능력치가 의심스럽다든지. 뭐 그런 이유는 하나도 없어?”

“나도 귀 있고 눈 있어. 네가 얼마나 일 잘하는진 나도 알아.”

그간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5 년 전만 해도 서림은 가장 가까이에서 건욱이 어떤 무대를 만들어 올리는지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그 능력치에 대한 신뢰는 구축이 되어 있는 듯했다.

충분한 대답이 됐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건욱이 별안간 재킷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속
진동이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화면을 통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곤 테이블을 커다란 손으로 짚었다.

“맞아. 우리의 사적인 관계는 관점에 따라 중요한 포인트지. 이해해. 그런데 구서림, 나는 왜 그 말이 내가
너무 신경 쓰여 죽겠다는 말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움찔한 서림이 테이블 아래 얌전히 놓아둔 두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라 그런
기색을 감추느라 입술에서 힘이 들어갔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네 예전 애인이 아니라 한국 예술단 단장으로서 구서림 감독을 설득하러 온 거라고.
그런데 넌 자꾸 나를 너랑 사귀었던 제건욱으로만 보고 있잖아.”

“…….”
“맞아. 국어 잘하면 영어 잘하고, 수학 잘하면 과학도 잘해. 원래 하나 잘하면 두 개 세 개 다 잘하는 거야.
알지? 게다가 난 원래 뭐든 잘해. 아마 제작도 잘할 거야. 그래서 난 네가 좀 더 프로다워졌으면 좋겠다. 나 좀
불편하다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해.”

너무 일차원적으로 이 사안을 지켜본 자신을 에둘러 탓하는 것 같았다. 목청 높여 혼나는 것보다 훨씬 더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건욱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제 몸을 일으켰다.

“회의를 더는 못 미룬대서 이만 가 봐야겠다. 나는 내일 또 올게. 좀 더 생각해 봐. 참, 귀찮다고 아침 거르지


말고. 공복에 무슨 커피야.”

“또 무슨 생각을, 제건욱!”

“이거 먼저 먹어. 간다.”

그는 서림의 앞에 놓인 커피를 옆으로 치우곤 베이글 포장을 까서 내밀더니, 손 인사와 함께 바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이윽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서림은 완전히 그가 사라지자 책 위에
이마를 떨어뜨리듯 부딪치며 고개를 수그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탱글한 베이글의 표면이 어룽거렸다.

〈나는 왜 그 말이 내가 너무 신경 쓰여 죽겠다는 말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그건 진짜로 신경이 쓰여 죽겠기 때문이다.

“미치겠다…….”

건욱이 제집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요란하게 뛰어 대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힘주어 쥐어 본


서림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 * *

이튿날 늦은 저녁. 서림은 집 인근에 있는 실내 사격장 안에 있었다.

사격은 총탄 소리 때문에 조심하느라 영화처럼 평소 자주 경험하진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속내를 어딘가엔 쏘아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던 탓이다. 남이 입던 방탄조끼, 남이 끼웠던
귀마개 따위들이 거슬렸으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이만한 여가는 없었다.

그는 실탄 구역 가장 구석 자리에서 권총을 들고 과녁을 조준했다.

탕. 탕. 사방에서 총성이 퍼져 나갔다. 그 소리들을 배경 음악 삼아 서림 역시 정자세로 손을 뻗었다. 목표물을


향해 총구를 겨눈 손끝이 리드미컬하게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탕! 방아쇠를 당긴 순간 빛처럼 빠르게 전진한 실탄이 과녁에 꽂혀 들었다. 동시에 좌측 모니터를 통해 어디에
탄환이 박혔는지 나타났다. 중앙 하단의 6 점 위치였다.

‘오늘 잘 안 받네.’

집중력이 흐트러져서인지, 다른 때보다 명중률이 현저히 낮았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이틀 내내 이른 시간부터


자신의 집으로, 혹은 제 동선을 따라 집요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건욱이 오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고작 몇 번의 반복 행동으로 손쉽게 자신을 내심 기다리게 만든 건욱 때문에 화가 났다. 멍청하게 휘둘리고 있는


자신은 더 답답했다. 그런 데다 하필이면 마침 매니저 측으로부터 모레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아서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넌 자꾸 나를 너랑 사귀었던 제건욱으로만 보고 있잖아.〉

그의 이성적인 말을 곱씹다 보니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프로다운 태도를 고수하겠답시고 사귀었던 걸 안 사귄 척할 순 없는 게 아닌가.

마침 권총에 마지막 한 발을 남긴 상태였다. 총기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서림은 전방에 제건욱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고 총구를 10 미터 전방에 겨눴다. 그러고는 마지막 한 발의 방아쇠를 부드럽게 당겼다.

탕! 탄환이 튀는 아찔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거리가 꽤나 멀었는데도, 마지막 한 발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좌측 모니터에도 목표물 가운데에
정확히 꽂힌 화면이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귀마개를 빼고 화면을 눈으로 확인하는데 사대 유리창 뒤에서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이 신기해하며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멋쩍어진 서림은 기계를 통해 제 쪽으로 건너온 종이를 구겨 쥐고 도망치듯 사격장을
빠져나왔다.

“하……. 하늘 엄청 맑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또 하루를 허비하는 사이 밤이
가까워진 모양인지 어둑어둑했다. 별은 많지 않았으나 대신 창공이 깨끗하고 청명했다. 곧 본격적인 여름이 올
텐데 그때가 되면 하루는 훨씬 길어지고 밤은 상대적으로 짧아질 것이다. 그 전에 많이 누려 두고 싶었다.

“혼자 노는 거 별로 재미없었나 보다?”

눈에 익은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계속 그를 생각하느라


시달려서 환청을 듣나 했다. 그러나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다 시선 끝에 걸린 건욱을 발견하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재킷 없이 깔끔하게 갖춰 입은 정장이 그의 매끈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흐트러진 면 하나 없는 모양새의 그를 보고 있자니, 서림은 괜히 조금 지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살피게 됐다.


그의 철저하고 완벽한 인생에 어그러진 부분이란 건 왠지 자신뿐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밤은 사람을 이상할 정도로 감상적이게 만든다.

“뭐야, 이 시간에?”

“기다렸어?”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든 서림이 힘겹게 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농담한 건데. 진짜 기다렸어?”

“그랬을 리가 있어?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서 그렇지. 왜 왔어. 여기까지.”


“내가 어제 오겠다고 했잖아.”

막상 나타나니 반갑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제 마음을 먼지처럼 떨어내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서림이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건욱이 능숙하게 제 옆에서 함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더
빨랐다. 듣기 좋은 저음은 덤이었다.

“좀 생각해 봤어?”

“제건욱 너 무슨 타령하니? 매일 나타서 똑같은 소리…….”

열없이 대꾸하고 있는 와중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과녁지를 슬쩍 빼앗아 가는 바람에 말문이 닫혔다. 그사이


건욱은 종이를 펼쳐 뚫린 자리들을 눈대중으로 훑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명중률이 이 지경이야. 연습을 좀 해라.”

그러고는 중앙에 명중한 자리를 손끝으로 툭 쳤다.

“그래도 하나는 성공했네.”

“아, 그거. 네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쐈어. 바로 명중하던데?”

“내 생각을 했다 이거지?”

“네가 정확히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체념한 듯 도로 종이를 수거해 온 서림이 오직 정면만 보이는 사람처럼 뚜벅뚜벅 걸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동안 숨이 조금 차올랐다.

“그러고 보면 이 언덕도 진짜 오랜만이네.”

옆에서 나란히 걷던 그가 혼잣말하듯 하는 소리를 듣고, 서림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꼈다. 짧지


않은 기간 사귀었어도, 그사이 쉼 없이 별처럼 수많은 대화를 나눴어도, 헤어짐이 오는 순간 결별한 연인은
소소하게 공유할 수 있는 화제를 잃고 만다.

그들도 똑같았다. 은은한 달빛을 무대 조명 삼아 언덕을 거니는 동안 사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럴
계제가 없었다.

조용히 한마디 한 건욱은 언덕배기에 오를 때까지 잠시간 침묵했다. 제집 건물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하니
그제야 건욱이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듯 말을 붙여 왔다.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내 공연의 예비 연출을 위해 저녁 두 끼 먹어 줄 의향 있거든.”

“1 주일을 굶었어도 안 먹어. 넌 지구의 유해 물질이야.”

“너무하네. 내가 이 사회에 기여도가 얼만데.”

퍽 억울하다는 투였으나 그게 말뿐임을 서림은 쉽게 눈치챘다. 건욱은 서림이 하는 말에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기억하고 자신의 기분을 살피던 그는 이제 없었다.

그러고 보면 건욱은 원래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 외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 서림이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머리론 5 년 전부터 알았는데 자꾸 실감할수록 기분이 왜 이렇게 별로인지 모르겠다.

엿 같다. 되게.

“어, 구서림. 잠깐만.”

마침내 건물 앞 지상 주차장에 도착하자, 건욱이 서림을 길목에 세워 두더니 자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조수석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안에 물건들이 담긴 것으로 유추되는 납작한 상자였다. 그는 그것을 서림의 두
손에 얌전히 쥐여 주었다.

“이게 뭔데?”

“나의 최후 변론. 회심의 일격이라고도 부르고.”

“무슨 최후 변론. 제 단장은 여기가 법정인 줄 아시나 본데.”

미심쩍어하는 서림의 시선이 상자 안을 두루 살폈다. 그러다 멈칫했다.

“블루레이 같은데?”

“혹시 내가 연출한 거 본 적 있어? 뭐, 인터넷에서 짧은 클립 같은 거라도.”

“없어, 한 번도.”

이 대답에 건욱이 제 아랫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랬을 것 같더라. 고민은 알아서 오래 하고 있을 거고. 이젠 기름 좀 부으려고. 그거 내가 연출한 거야.


내부에서 공유하는 실황 영상. 여태 내가 올린 무대 몇 개 가져왔어.”

“이걸 날 왜 줘.”

“일단 한 번 봐. 난 네 기획서를 보고 마음이 이끌렸고, 자연스럽게 네가 연출한 작품들을 보면서 너여야 한다고
판단했어. 이제 네 차례야.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크리스타」의 제작자로 내가 적절할지 냉정하게 평가해 줘.
난 같이 잘해 보자는 거지, 네 무대를 망치려는 게 아니야. 이걸 보고도 내가 아니다 싶으면 나도 진지하게
연출자 교체 생각해 볼게.”

“대체 네 밑도 끝도 없는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시는데?”

“실력과 능력. 고로, 밑도 끝도 제대로 있어.”

그는 자신만만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본 모든 모습 중에 가장 그랬다. 일단 한 번 제 공연을 보기만 한다면


반드시 서림이 자신을 선택하리라는 믿음마저 얼핏 엿보였다. 본인 실력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것이다.
대중적으로도 성공하고, 평론가에게도 좋은 평가를 듣는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위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다.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린 서림이 조심스럽게 박스 밑의 갈라진 부분을 매만졌다. 자신이 그 납작한 상자에
마음을 뺏긴 사이, 그가 제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밀어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또 혼자서 의식한다고 생각할까 봐 당황한 서림이 한 걸음을 물러서자, 건욱이 물었다.


“그렇게 싫어?”

그의 목소리가 여유 만만하던 조금 전과 달리 조금 씁쓸해하는 듯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느닷없이 남의 살 닿는 게 좋진 않아.”

제 대답이 밖으로 새어 나온 순간, 건욱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서림에게
갑작스럽게 성큼 다가와 마른 어깨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고개를 돌릴 때처럼 피해서 뿌리치고 싶었으나 그의 완력이 서림의 저항하는 힘보다 강했다. 상자를 던질까도
싶었지만 차라리 제건욱을 던지면 모를까 그의 작품들을 길가에 팽개치는 건 너무 나간 것 같아 브레이크가 걸렸다.

서림은 쌀쌀맞게 덧붙였다.

“이거 놔.”

“나랑 닿는 걸 싫어하는 건 확실하네.”

“그러니까 놔.”

건욱의 날카로운 눈매가 대꾸하며 시선을 피하는 서림을 빤히 주시했다. 연이어 그의 모양 좋은 입이 열렸다.

“그래도 고려해 줄 거지. 싫어하는 사람과의 지루한 소송보단 싫어하는 사람과의 타협이 네 정신 건강에도 훨씬
낫잖아.”

액면 그대로의 말로는 그의 논리가 맞지만, 서림에겐 건욱이 모르는 복잡한 내부 사정이라는 게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와의 타협이 더 힘들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직 어떤 확신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 쪽에서 잠잠히
있으니 건욱도 말을 아꼈다. 서로의 어깨 위에 순간적으로 아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까득, 불현듯 상자를 세게 쥔 서림이 어깨를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놓아주곤 처음의 간격을 유지하듯
한 걸음 물러섰다. 이와 동시에 서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렇게 해. 넌 약속 지켜. 내가 이걸 보고도 제건욱은 아니다 싶으면 상황 정리해 줘. 소송 같은 거 필요 없이


예술단 차원에서 계약 파기하는 거야.”

이 말을 곰곰이 곱씹던 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넌 솔직해야 돼. 네 판단 근거는 한국 예술단의 제건욱이지 네 예전 애인이 아니야. 공과 사 철저하게


분리해 줬으면 좋겠어.”

그의 요구는 실상 아주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건욱은 집요한 구석이 있는 탓에 대충 눙치는 것으로는 설득할
수 없었다. 서로 한 가지씩 양보하지 않으면 계속 이런 평행선일 듯했다. 조심스럽게 붉은 입술을 달싹인 서림이
뒤늦게 대꾸했다.

“좋아.”

그제야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건욱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서림은 즉각 미간을 구겼다.

“뭐가 웃긴데?”
“꼭 웃겨서 웃나.”

“뭐가 널 웃게 했는데.”

“간다.”

“야, 제건욱!”

그는 여전히 시동이 걸려 있는 차량에 올라타더니 어제 멀티플렉스에서 그랬듯 손 인사를 하곤 느긋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사실 오히려 건욱이야말로 자신을 기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게 한 일이 미안해서든, 일방적으로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미워해서든 그는 자신을 봐서 기분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걸
보면 해묵은 감정들을 뛰어넘는 무대의 큰 시너지가 그의 눈에는 보였던 모양이다. 이제 자신에게 그 주사위를
넘긴 것이다.

좋은 공연에 대한 욕심은 서림에게도 분명히 존재했다. 아울러 더는 제 허약한 방패로 건욱이 휘두르는 칼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서림은 손에 들린 상자에 꽉 힘을 주었다.

03.

거실의 창문 너머로 하얗게 동이 트는 모습을 응시하던 서림은 또 하루가 지났음을 겨우 인식했다. 한국에 온
첫날부터 계속 밤잠을 설친 탓에 피곤이 어깨와 머리, 그리고 눈두덩에까지 뭉쳐 온몸이 무거웠다.

“죽겠네, 아주.”

그걸 의식이 아닌 몸이 받아들인 순간 무거운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더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그는 이틀 내내 집에 틀어박혀서 그제 제건욱이 넘기고 간 영상들을 내리 시청했다. 그동안은 동종 업계 사람들의


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직접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왠지 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것들을 전부
보고 난 뒤로 서림은 크게 후회했다. 진작 봤거나, 아니면 영영 보지 말았어야 했다.

건욱이 지난 5 년간 연출한 작품들은 소규모 창작극부터 국내 대중 예술 작품 원작, 혹은 해외에서 판권을 사 온


라이선스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범주가 넓고 다양했다. 장르에도 저항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만들기만
하고 끝인 게 아니라 대체로 흥행몰이에도 성공했던 모양이었다.

한 줄로 놓여 있는 케이스들을 물끄러미 보던 서림은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렸다. 저 블루레이 안에는 그간


제건욱이 왜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고스란히 증거로 남아 있었다. 이제 보니 왜 제건욱이 이걸 회심의
일격이라 칭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귀동냥으로 억지로 듣다가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냉정하게 평가해 줘. 난 같이 잘해 보자는 거지, 네 무대를 망치려는 게 아니야.〉


“백 점이다, 이 새끼야……. 환장하겠다.”

특히 지난해 올린 창작 뮤지컬 「야생 동물 보호 구역」은 그의 과감하고 실험적인 무대 연출이 빛을 발했다.


게다가 어린아이들을 적극 활용한 공연인 탓에 시종일관 매우 사랑스러웠다. 서림은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
크리스타」도 이렇게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당장 출국 시간이 오전 10 시경이었다. 최소한 두 시간 전까지는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해야만 제때 탑승이


가능할 것이다.

짐은 왔을 때 그대로였다. 따로 풀어 놓지 않아서 도로 갖고 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준비하고 출발하기만


하면 됐다. 단지, 자꾸 눈꺼풀이 속절없이 내리감겼다.

얼굴을 차가운 유리 위에 파묻은 바람에 음성이 외부로 퍼질 때 웅얼거렸다.

“왜 웃나 했더니.”

그는 이걸 보면 제 마음이 어떤 식으로 요동칠지를 알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도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건욱이라는 건 복잡한 감상을 몰고 왔다.

“인천공항 2 터미널. 한국 항공. 10 시 10 분.”

머릿속에든 일정을 곱씹듯 혼잣말한 서림은 계절에 안 맞게 러그를 깔아 둔 거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퍽.


그가 다소 세게 무너지며 세워 두었던 캐리어에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커다란 물체가 함께 쏠려 넘어갔다.

“졸려…….”

뒤이어 지퍼를 닫아 두지 않은 캐리어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 * *

〈한국 예술단〉 로비에는 개인 카페가 마련돼 있었다. 처음에 이 자리의 입찰을 받을 때 건물주가 조건으로
제안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반드시 커피가 맛있을 것.

아침 출근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마실 모든 예술단 관계자들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단장님, 이제 출근하세요?”

“오늘도 근사하세요!”

건물 밖 카페테라스에 모여 있던 임직원들이 출근하는 건욱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일일이 눈을 맞춰 인사해 주곤 로비로 들어섰다. 마침 안쪽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해 나오고 있던 보연이
건욱을 발견하고는 뒤쫓았다.

“선배 무슨 연예인 같아요. 다들 뭐가 그렇게 좋아 죽을까. 그래 봤자 직장 상산데.”


“단장님.”

“아, 맞다. 단장님. 이거 드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이렇게 쓰고 차가운 게? 차라리 사약을 주지 그래.”

“그거 아세요? 야사에 의하면 사약은 원래 진짜 고급 약초들로 만드는 거래요. 능지처참 이런 극형이랑 달리
시체 보존을 해 주고 싶은 아끼는 죄인한테만 하사하는 거죠. 신체발부 수지부모.”

“그래서 사약은 못 주시겠다?”

“대신 이거. 진짜 안 드실 거예요?”

“내놔. 월급 주고 차가운 마음으로 되돌려 받기 억울해서라도 마셔야겠다.”

그녀가 내미는 아이스커피를 받아 든 건욱은 3 층에 위치한 예술 감독 집무실로 향했다. 건욱이 재킷을 벗는 것을


도와주던 보연이 이내 능숙하게 그가 읽어야 할 결재 서류와 보고서들을 책상 위에 야무지게 펼쳐 두었다.

이윽고 그가 앉아 서류에 눈을 두기 시작하자 의아한 듯 물어 왔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신 거예요? 제가 구 선배 오늘 출국하시는 날이라고 보고드렸잖아요. 오전 10 시 10


분이요. 에이전시발 정보라 정확한데, 되게 태평하시네요. 쫓아가서 바짓가랑이 안 잡으세요?”

“그러게. 왜 난 그런 거 안 해도 구서림이 올 거 같지.”

사락, 종이를 뒤로 한 장 넘긴 건욱은 손목시계를 힐끗 살폈다. 10 시 5 분. 한국 항공의 비행기가 예정대로


출발한다면 정확히 5 분 뒤일 것이다.

“뭘 어쩌셨는데 1 주일도 안 돼서 설득돼 올 거라고 짐작하시는 거예요?”

건욱이 한 건 별게 아니었다. 그저 그의 기질적 자존심과 직업으로서의 긍지를 건드렸다. 그 누구보다도 「


크리스타」를 괜찮은 공연으로 만들고 싶은 건 서림일 테니까.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던 건욱이 다시 한 장을 넘기면서 덤덤히 대꾸했다.

“저도 보는 눈이 있으면 올 거고. 아니면 뉴욕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난 구서림이 감각 있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결국 확실한 건 본인 직감뿐이라는 거네요? 서림 선배랑 꼭 이번 작업 하신다면서요. 그런데 그렇게 결과를


하늘에 맡기면 돼요?”

“하늘에 맡긴 거 아니야. 구서림한테 열쇠를 쥐여 준 거지. 잠겨 있는 상자를 여느냐 열지 않느냐는 걔한테 달린


거고. 당연히 책임은 내가 지는 거고. 뭐, 엿 돼도 별수 없고.”

이 불분명한 설명을 통해서 보연이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건욱이 제 커리어에도 무척
중요하게 작용할 첫 제작 작품의 연출로 서림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듯 말 듯 했다. 서림은 분명 좋은 연출자지만
본인만의 주관이 다소 뚜렷하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욱은 제 의견을 꺾고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면서 일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살살 구슬리는 타입이라고 봐야 옳았다.
과거의 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며칠 사이 알게 된 바로 이제 그들은 과거만큼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건욱이라면 적당히 입맛에 맞게 움직여 줄 연출을 하나 구해서 원하는 대로 1 부터 10 까지 전부 잡아 주는
쪽이 훨씬 더 어울렸다.

“이해가 안 돼요. 구 선배, 뭐 좋은 감독이긴 하지만 굳이 싫다는 사람 계속 붙잡으면서 이러시는 이유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서림 선배가 단장님 좀 불편해하시는 거 같던데……. 게다가
단장님 스타일도 싫다고 가는 사람 안 막고, 좋다고 오는 사람은 방치하는 거잖아요.”

이런 질문을 하는 상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건욱은 쓰게 웃었다.

처음엔 그가 극구 거절하기에 아직 제게 미련을 남기고 있는 건가 잠시 착각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사고 회로를


돌려 보니 역시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어제 자신이 올린 무대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던 서림의 말은 거짓 같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듯했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 미련이 있었다면 지난 5 년간 그렇게 쥐죽은 듯
감감무소식이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버리기 전 어떤 여지라도 남겼을 터다. 하지만 서림은 그러지 않았다.

다시 만나 보니 알겠다. 5 년간 붙들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보연이 네 눈에도 걔가 나 불편해하는 거 같아 보였어?”

“네, 완전히요.”

프로 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그를 몰아붙였지만, 사실 서림이 업무 파트너로 자신을 꺼림칙해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3 년이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공유했고, 그 덕에 서로를 지나치리만큼 잘 알았는데,
하필이면 끝이 나빴다.

“나는. 괜히 의식하는 것 같진 않았고?”

“단장님요? 단장님은 뭐…… 평소 다른 사람 대하실 때랑 비슷했는데.”

“하, 다행이다.”

건욱은 슬쩍 고개를 숙여 무거운 숨을 토해 냈다.

“왜요?”

“그런 게 있어. 약자의 비애라고나 할까. 을의 숙명이라고 할까.”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부연 설명을 기대하는 눈치를 비쳤는데도 건욱은 그 이상 답해 주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살폈다. 보연도 자연스럽게 그 반짝반짝한 호기심의 기운이
전이돼 디지털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어느새 정확히 서림이 비행기에 탑승했을 10 시 10 분이었다.

“구 선배 비행기 탔을까요.”

“안 탔다에 건다.”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세요? 이러시니까 더 불안해요.”


“실은 나도 불안해. 원래 센 척이 취미야.”

괜히 의미 없는 대화만 나누던 바로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바깥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인기척의 주인은 깡마른 어떤 남자였다. 그는 제대로 잠을 못 자 피곤한 모양인지 다소 떼꾼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분한 입매와 늘씬한 콧대, 그리고 그 위를 매끄럽게 타고 올라가면 드러나는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초췌한 기운들을 잘 용해했다.

서림이었다.

“서림 선배……!”

새로운 등장인물의 이름을 부른 보연이 ‘헙’ 하고 제 입을 손으로 막으며 비명을 겨우 참아 냈다. 초연한
태도의 건욱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으며 만년필을 습관적으로 손가락 사이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막판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펜대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는 매우 뒤늦게
서림에게 말을 건넸다.

“노크 안 해?”

무단 침입자인 서림이 안으로 들어오다 말고 활짝 열린 문 위를 무성의하게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집무용


책상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에는 약간의 체념과 아직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듯
미약한 저항감이 정신없이 혼재돼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보연이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고 발소리를 죽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딸칵. 문이 닫힐 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그들의 입이 약속이라도 한 양 동시에 열렸다.

“또 밤 꼬박 새웠나 보다?”

“네가 이긴 거 같냐?”

그러다 말이 뒤엉켜서 건욱이 먼저 하라는 듯 손짓했다. 서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건욱 네가 이긴 것 같냐고.”

“그렇다고 말하면 네가 싫어하겠지?”

“당연하지.”

“하지만, 이번 라운드는 내가 이긴 것 같네. 반박해도 돼. 합당한 근거를 댄다면.”

엄밀히 말하면 틀린 소린 아닌지라 서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러자 건욱이 회유하듯 꽤나 온화해진
말투로 덧붙였다.

“너무 억울해하지 않아도 돼. 난 처음부터 너 올 줄 알았어.”

“무슨 자신감?”
“넌 욕심이 아주 많으니까. 아울러 나는 네가 버리는 카드로 쓰기엔 너무 뛰어나거든. 그래도 어느 정도 안도는
되네. 회심의 일격이자 최후 변론 안 통했으면 격해질 뻔했어. 바로 뉴욕 쫓아갈 뻔했다.”

이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 듯하던 서림이 넌지시 물었다.

“납치라도 하게?”

“못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뉴욕까지 날아와 납치를 하실 줄 안다는 거네?”

같은 말을 교묘히 바꿔 되묻는 서림의 음성 끝이 일순 날카로운 모서리처럼 날 섰다.

“티켓 끊고, 찾아가서 데려오면 되는 거 아냐. 모르는 사람도 있어?”

상대의 대답을 곱씹는 듯한 서림의 표정이 몹시 묘했다. 그러나 순간이었을 뿐 금세 안면 위에서 그런 기색은
사라졌다.

“그렇구나. 그건 알겠고. 나 지난 이틀 내내 네가 연출한 공연 돌려 봤어. 덕분에 딱 두 시간 눈 붙이고, 씻고


바로 여기로 온 거야.”

“겨우 이틀밖에 안 걸렸어? 감동받아서 눈물 콧물 짜내면서 하나 보고 다섯 시간 감동받고 그랬어야 정상


아니야?”

“헛소리 관두고. 한 가지 확실히 할 게 있어. 나 일할 때 타협 잘 안 해. 특히 제작자랑은 매일 싸워. 나에


대해서 사전 조사를 했다면 아마 들었을 거야. 게다가 상대가 너라면 아마…… 더 심할 거고. 나 솔직히 지금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조차 잘 모르겠거든. 헷갈려서 필요 이상으로 못되게 굴 수도
있는데 이거 다 감당되겠어?”

“그런 거 안 해도 네 성격은 내가 잘 알지. 나만큼 잘 맞춰 주는 사람 없을걸.”

“놀고 있네. 입으론 누가 못 해. 해 봐야 알지.”

원색적인 비난에도 건욱은 제 생각에 조금의 변화가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서림을 떠보듯
은근하게 질문했다.

“어떻데?”

“인정하긴 싫지만. 뭐, 좋더라. 대체로 기조가 야하고 화끈하던데.”

“좋자고 보는 건데 돈값을 해야지. 그래서, 비행기 티켓은 취소하고 오는 건가?”

“맞다. 취소를 안 했네. 비용은 네가 물어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퍼스트로 끊는 건데.”

진짜로 까먹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서림은 표정과 말투로 이미 자신이 알면서도 굳이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건욱의 농간 아닌 농간에 휘말려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걸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던 건욱이 팔짱을 척 꼈다.

“혹시 나를 소소하게 엿 먹이고 싶어서 일부러 취소를 안 한 거라면 이런 방식은 타격이 아주 미미하다는 걸 전해
주고 싶네. 기억력이 평균 이상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주 부자라서 말이야. 분쟁을 만들고 싶다면
다른 방법 찾아봐.”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오른 서림이 이마를 찌푸렸다.

“돈 자랑하는 건 여전하시다.”

“살아 있을 때 자랑할 수 있으면 해야지. 관 뚜껑 닫으면서 하면 누가 알아줘.”

“네 그 관 뚜껑 내가 꼭 닫아 주고 싶다. 허락해 줄래?”

“백년해로하자는 건가. 뭐, 난 좋아. 네 얼굴은 늘 취향이라.”

말장난으로 부끄러움도 잘 모르고 그저 뻔뻔한 그를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으득. 잇새를 짓이긴 서림이
마치 백기를 들어 항복을 선언하듯 앞에 놓인 서류들을 그에게로 던져 버렸다. 나풀나풀 낙엽처럼 떨어진
종이들이 건욱의 발치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좋아, 계약해.”

이 말에 짓궂은 빛을 띠고 있던 건욱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덕분에 그를 직시하고 있던 서림이


흠칫했다.

예전엔 건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타인이 된 상태로 마주하자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아리송했다. 건욱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어 거북했다. 언제 물러섰다가 또 훅 치고
들어올지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 계속 긴장하게 됐다. 그러자 이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달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림은 시소놀이를 하듯 자연히 미간을 구겼다.

“또 웃네.”

“좋아서.”

당황한 나머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침묵하니 그가 덧붙였다.

“역시 내가 원했던 게 이거였던 것 같다.”

“무슨 뜻이야?”

“네가 와 주길 바랐다고. 구서림, 우리 한국 예술단에 온 걸 환영해.”

“…….”

“당장 법무 팀 부를게. 서명 끝나고 간단하게 상견례도 좀 하자. 오늘 마침 같이 일할 직원들 전부 나오는


날이거든.”

친절하게 오늘의 일정을 설명한 그는 내선으로 전화를 걸어 보연을 소환했다.

“보연아, 구서림 감독 계약한단다. 접견실에 관계자들 올라오라고 해. 그리고 오늘 직원들 다 출근하는 날이지?
계약 회의 끝나고 상견례 세팅해. 구 감독 인사 시키게.”

- 진짜요? 진짜죠. 네, 알겠습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건욱이 서림을 또렷이 마주 보았다. 그가 보연과 대화하는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서림이
그제야 건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말 없는 시간이 수 초쯤 흘렀을까. 그는 입에도 대지 않은 아이스커피를 서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해하지 마. 안 마신 거야.”

“누가 뭐래?”

“여긴 좀 갑갑하고, 준비하는 동안 테라스에서 둘이 얘기 좀 하자. 나와.”

“둘이? 무슨 얘기?”

이미 단둘이 있는데 왜 자리까지 옮기면서 대화를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 선뜻 납득하지 못한 서림이 초록색 교통
표지판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건욱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는 듯 제 목을 슬쩍 긁으면서
답했다.

“둘이 핵심이 아니고 얘기가 핵심이야. 최소한의 유도 지표는 줘야 할 거 아냐. 당장 이 건물 몇 층에 뭐가 붙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뭘 할 건데. 그런 거 얘기해 준다고. 나와.”

자리를 깔아라, 개자식.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서림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제안을 수락하기로 한 이상 자신으로서도 그를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존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건욱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어쨌든 최소한 앞으로 반년간은 그와 부딪치며 일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반복 학습해 내재화하는 게 옳았다. 사실 이미 혼자서만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먼저 3 층 테라스로 나온 건욱이 조용히 쫓아온 서림을 발견하고 중문을 열어 주었다. 나란히 난간 앞에 선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미지근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날씨 좋네.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던 서림이 찰나간의 침묵을 깼다.

“줘 봐. 그 유도 지표.”

건욱이 창밖을 등지고 서림과 반대로 서며 말을 이었다.

“건물 올라오는 길에 안내판에서 대강은 봤겠지만 네가 주로 활용할 건 2 층이랑 3 층이야. 내가 선 자리


기준으로 왼쪽이 대회의실, 이사장실, 오른쪽이 네 사무실, 내 집무실, 그리고 단원실. 휴게실은 여기서
정반대편. 흡연은 여기 이 테라스에서.”

“4 층에 수면실이랑 샤워실 다 있던데. 나도 쓸 수 있는 거지?”

“물론이지. 보연이가 출입 카드 바로 만들어 줄 거야. 그런데 웬만하면 퇴근을 해라. 굳이 회사에서 밤새울 거
뭐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아래층에 리허설장이랑 연습실 있는 건가?”


“응, 영상실이랑 조명, 음향실 전부 아래층에 있어. 시설은 훌륭해. 돈 많이 들였거든.”

차가운 커피를 감싼 슬리브를 만지작거리던 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 안엔 더 많은 활용 공간이 있지만


반경이 좁은 서림이 거기까지 쓸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바꿔 말하면 건물 안내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다.

할 말이 사라진 두 사람 사이에 고요가 불현듯 들이닥쳤다. 이번엔 그가 적막을 부쉈다.

“구서림.”

“왜.”

“나 싸움 좋아해. 얼마든지 맞아 줄게. 건설적인 대립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내니까.”

“그 말 후회 안 해?”

“원래 그게 잦은 편은 아닌데. 만에 하나 하게 되더라도 맞아 줄게.”

후회라는 말과 건욱은 노력이라는 단어만큼 좀처럼 안 어울렸다.

그는 모든 것에 타고났다는 수식을 하는 편이 훨씬 걸맞은 사람이었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보다


게으르게 움직여도 정신을 차려 보면 결승선에는 제일 먼저 도착해 있곤 했다. 그런 그가 했던 몇 안 되는 후회의
범주 안에 자신이 있을까 두려웠다.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가 별안간 손끝으로 제 코끝을 툭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촉감에 당황해서 손등으로 코 위를
문지르자 건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닦을 정도로 싫어? 우린 그냥 사귀다 갈등이 생겨서 헤어진 거야. 철천지원수 아니고.”

“나도 알아. 그래서 말했잖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도 아직 어려워. 구서림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네가? 별로 안 믿기네.”

“난 네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게 안 믿긴다. 꿈꾸는 기분이야.”

그가 말하는 꿈꾸는 기분이란 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서림은 모르지 않았다. 처음 예술단 건물에서 건욱과
마주쳤을 때 제 기분이 꼭 그랬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고, 깨어나면 그게 스러질까 두려웠다.

그도 그런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는 말일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건욱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 바람에 모든


생각들이 서림의 머릿속에서 휘발된 듯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 너 종종 보고 싶었거든.”

일순 마른침을 삼킨 서림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각자의 동공이 서로의 얼굴 위를
바람처럼 훑고 나자, 부끄러움을 느낀 서림의 뺨이 달아올랐다.

보고 싶었거든.
그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내 여러 번 곱씹는 동안, 서림은 뭘 뒤집어도 나쁜 패였던 제 인생에 조커가
찾아와 준 기분을 순간적이나마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여우의 신 포도인 걸 알기에 매우 빠르게 체념했다. 어차피 용기 없는 자신은 끝내 이 패를 열어 볼 수


없음을 알았다.

그와 달리 자신은 동요도 잘 못 감추고, 여러 면에서 들키기가 쉬웠다. 이렇게 계속 눈빛을 교환하고 있다가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해 버리게 될 것 같았다.

서림은 빠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호로록 마신 커피의 끝 맛이 유독 썼다. 입맛이 쓴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향이 좋고 목 넘김이 시원해 기분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

“여기 커피 맛있네.”

말을 돌리자 건욱이 다행히 자연스럽게 응수했다.

“다행이다. 입에 맞아서.”

“오늘은 직원 상견례 하고. 단원들은 언제 볼 수 있어? 대본이랑 음악 얼개 잡혔으면 작가나 작곡가는 섭외가 된
것 같고, 음악 감독이랑 안무가는?”

“판권 가져올 때 우리 예술단에 기술 팀이 오리지널 제작 팀에서 노하우를 받아 왔어. 네가 따로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논의해서 그 사람을 추가로 선임하는 건 가능해.”

“지인한테 조연출로 추천받은 사람이 있어. 그럼 일단 면담부터 해 봐야겠다.”

“그렇게 해. 그런데, 구서림.”

애써 건욱에게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바깥을 내다보던 서림이 근사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힐끗 살피자, 줄곧
제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모양인지 건욱과 곧바로 눈길이 부딪쳤다.

“또 뭐.”

“진짜 밀턴 싫어하냐?”

서림은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댁이 무슨 상관.”

“그럼 단테도?”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싫어.”

“진짜 그 이유 때문에 싫은 거였어? 내가 좋아해서?”

장난처럼 어깨를 으쓱할 뿐 음성으로 답하진 않자, 그가 황당해하는 기색으로 이어 말했다.

“충고하는데 본인의 취향 아닌 다른 기준으로 뭔가를 싫어하지 마. 그게 음식이든, 문학작품이든, 자동차든


특정한 시간이든. 그건 너만 손해야. 식견 좁아져.”
이미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누군가 때문에 무엇을 좋아하게 되고, 또 싫어하게 되는지는 순간적인 기분일
뿐이다. 결국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도 밀턴은 별로야. 원래부터 진짜 별로. 만연체도 끔찍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작가 메리 셸리가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 밀턴의 「실낙원」 속 아담의
절규가 서림은 참 싫었다. 꼭 제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적은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신이여, 제가 애원했습니까. 흙을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신이여, 제가 간청했습니까. 어둠에서 나를 이끌어 달라고?〉[1]

건욱이 밀턴을 좋아해서 그게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는 말도 한 번 못 했다.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혀 몰랐어. 나 읽을 때 종종 같이 읽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말을 안 했으니 몰랐겠지.”

“왜?”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서림은 곰곰이 예전에 함께 책을 읽던 때의 일들을 떠올렸다. 덕분에 계속 굳히고 있던


입매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전문가들이 때로 사람들의 추억은 매우 부정확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확실하게 그 순간의 전부를
기억했다.

두 사람이 제집 좁은 거실에서 한쪽 다리를 걸치고 나란히 엎드려 책을 읽는다든가, 그의 집 넓고 커다란 소파


위에서 자신이 건욱을 침대 시트처럼 등져 누운 채 손을 뻗어 책을 들고 있는 장면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그때의 훈훈한 실내 공기, 함께 먹었던 과일의 상큼한 향기, 그날 창밖의 날씨, 제게 닿은 그의
따스한 체온. 모든 게 생생했다.

덕분에 이 낡은 기억을 되새기면 따뜻한 기분이 절로 제 입가에 맴돌았다.

제겐 추억인데, 이제 건욱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알 길이 없었다. 물어볼 엄두는 안 났다. 그래도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네 눈치 정돈 봤거든.”

뒤늦게 물음에 응답하자, 이 대답이 믿기지 않았던지 건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

“믿지 말든지.”

건욱이 뭔가 되물으려는 찰나, 중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밖을 내다보니 보연이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바로 지금이 돌이킬 수 없는 추억에서 빠져나와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먼저 나간다.”

서림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서 나갔다. 건욱이 의아한 듯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겨우 따라나섰다.

* * *

건욱과 서림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양옆으로 예술단 법무 팀 직원과 인사 팀장이
나란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대충 봤으면 서명해.”

“하나 확인할 거. 「크리스타」 판권은 스몰 라이선스로 가져온 거네. 음악이랑 대본만 산 거면 우리가 일부
재창작도 가능한…….”

묵묵히 계약 서류를 넘겨 보던 서림이 말허리를 중간에 자르고 고개를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고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던 듯한 건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천연덕스럽게 서림의 눈동자를 더 또렷이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응, 가능해.”

“예…… 예전에 한국에서도 순회공연 몇 번 했던 걸로 아는데, 나름대로 차별화 두려면 대본 잘 빠져야겠다.


노래들은? 있는 넘버 그대로 쓰는 거야?”

“대부분. 그런데 우리가 따로 작곡도 하고 있어. 네가 크리에이터들 만나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서림은 다시 계약서에 시선을 돌리려다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건욱의
눈앞에서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쳤다.

건욱은 이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 눈앞에 대고 무례하게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그만 좀 뚫어져라 쳐다봐.”

“널 안 보고 어떻게 대화를 해.”

“그럼 좀 살살 보든지. 어디 찢어 버릴 기세로 빤히 보지 말고. 부담돼서 뭘 못 하겠잖아. 도장 찍고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해.”

“의견은 잘 접수됐고, 검토해 볼게. 일단 찍어.”


너무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미소 지은 건욱이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조금 기세가 잦아들긴 했지만 고정된
시선의 위치는 여전했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으니 아쉬운 대로 서림 쪽에서 먼저 피해야만 했다. 그는 불편해하는 표정으로 계약서에


눈을 고정한 뒤 차분하게 글자들을 읽었다. 그러다 또 한 가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건욱의 눈길은 제게 꽂힌 상태였다. 이젠 익숙할 지경이었다.

“왜, 또 쳐다보지 마?”

“이거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어서. 공연 일체 내 기획서대로 가는 거지.”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중에라도 돈 문제 끼어드는 거 아닌가 해서. 이 모델은 손해를 감수하고 여는 자선 공연이야. 돈 많이 들 것


같아서 나중에 딴소리하면 난 이 공연 안 올려.”

“구 감독 기획서대로 취약 계층 아이들을 불러서 공연을 보여 주는 방식이 어떨까 싶어.”

“예산은 어디서 끌어올 건데?”

“일단 지금까지 인건비를 포함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의 모든 예산은 정부가 일부 부담, 우리 예산에서 일부
부담, 그리고 투자금. 여기서 모자란 건 나랑 실무자들이 계속 발로 뛰어서 추가 투자 금액을 만들어 낼 거야.
그게 제작자의 일이기도 하니까.”

“나라는 할 일 하는 거고. 투자자들은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는 걸 텐데. 이사장님은 딱히 얻어 가시는 게


없네. 좋은 일 하신다. 좋은 분이신가 봐.”

이 말에 건욱이 웃을 듯 말 듯 한 오묘한 얼굴을 했다. 서림은 다시 계약 서류에 시선을 돌린 바람에 이를 미처


보지 못했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서림이 테이블 위를 더듬어 펜을 찾았다. 건욱이 기다렸다는 듯 만년필 캡을
열어 그에게 넘겼다.

“이 선택이 네가 한 최고의 결정이 될 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맞은편의 남자를 차분한 눈빛으로 직시한 서림은 이윽고 하얀 서류 맨 뒷장 하단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마치 톱으로 나무를 베듯 펜촉으로 종이 위를 꾹꾹 눌러 본인의 고유 표식을 남겼다. 펜을 내려놓자 법무 팀
직원이 둘 중 한 부를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보연의 안내에 따라 배석한 직원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림을 힐끗 본 건욱이 상체를 살짝 기울여 은근하게 속삭였다.

“너 이제 못 물러. 제 10 조. ‘갑’과 ‘을’은 본 계약 사항을 수행함에 있어 본인의 귀책사유로 인해 상대방이


손해를 입은 경우, 제 6 조 가 항의 위약금과는 별도로 전액 손해 배상 하여야 한다. 이 조항 나 때문에 열받을
때마다 꼭 한 번씩 정독해 봐.”

서명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그의 말대로 이미 끝까지 온 이상 무르는 건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재정적 조건이
받쳐 주는 건욱이야 정 내키지 않는다면 천문학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파기할 수도 있겠지만 서림은 그와 달랐다.
이 계약서에 제 이름 석 자를 스스로 적어 넣는 순간 상대적 약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수락한 이유는 하나였다.

가장 완벽한 「크리스타」를 만드는 것.

소박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제일 원대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너나 잘하세요.”

만년필을 건욱에게 휙 던지며 대꾸한 서림은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계속 그의 수작에 말려든 기분이라 썩
유쾌하진 않았는데 펜촉의 잉크가 그의 하얀 셔츠 위에 퍼지는 걸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제 옷이
더러워졌는데도 건욱은 어떤 힐난도 하지 않고 조용히 캡을 닫을 따름이었다. 지은 죄를 알긴 아는 모양이다.

“공연장은 예산 절감 차원에서 우리 별관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구 감 생각은 어때?”

“이미 거기로 정한 거 아니었어? 난 그렇게 들었는데.”

“아직 아니야. 연출자 이야기도 들어 봐야지.”

“별관 무대는 어떤 식인데?”

“프로시니엄.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이랑 모양 똑같아.”

“거긴 수용 인원이 좀 적은 것 같더라.”

“평범한 소극장 정도야.”

고개를 끄덕이던 서림이 덧붙였다.

“보연이 말론 이벤트성 공연은 유명 극장에서 소문낼 거 다 내고 떠들썩하게 했다던데. 좀 전에 홍보 팀장님이


우리 별관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

“직원들 강약 조절은 내 몫이지. 구서림 너 어떠냐고.”

“난 공연장은 어디든 상관없어.”

“잘됐네. 우선 거기로 기안을 올릴게.”

“그럼 오늘 일정은 끝난 건가? 나 일단 좀 자야 할 것 같은데. 죽겠다.”

“20 분만 더. 직원 상견례 남았어. 일어나. 1 층으로 내려가자.”

먼저 일어난 건욱이 익숙한 태도로 손을 뻗었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듯 무심결이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림을 향해 내밀어진 그의 큼지막한 손을 황망하게 응시했다. 앉거나 누워 있는 서림을


일으키기 위해 이걸 잡으라는 뜻으로 건욱이 종종 했던 행위였다. 피차 난감해진 그들 사이에 눅눅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서림이 스스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건욱도 멋쩍어진 손을 거두고 앞서 나가 접견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 * *

낮 시간이 되자 습도가 한층 높아진 모양이었다. 쾌적한 실내에 있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니 잠시간이지만
목구멍에 텁텁함마저 느껴졌다.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나오던 서림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나부낀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날은 다소 더웠지만 최소한 머릿속은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상쾌했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지루한 고민을 끝냈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건욱과 달리 원래 제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끝끝내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다.

“구서림, 차 안 가져왔어?”

고개를 떨어뜨린 서림이 다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데, 뒤쪽에서 귀에 익은 주파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됐다. 서림이 답을 주기도 전에 건욱의 자문자답이
이어져서 짐작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아, 그렇지.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가서 한국엔 차가 없겠구나. 너 귀국할 때 공항에 우리가 차를 보냈던 걸
까먹고 있었네.”

“택시 타면 돼.”

“결재 올리라고 할게. 구 감독한테 차 한 대 내주라고. 지원 제도가 있거든.”

“여기 정부 보조받아서 사업하는 예술단 아닌가? 나랏돈을 막 쓰시네.”

“연계는 하지만 독자적인 단체야. 특별한 경우 일부 지원은 받을지언정 자체적으로도 수익을 내서 운영해.”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맥락을 못 잡겠다.”

“음, 내가 너무 에둘러 설명했나?”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하듯 서림이 건욱을 직시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돈이라고.”

서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인드가 완전히 썩었네. 이사장 돈이 왜 네 돈이야. 댁도 고용되신 거 아니야? 단장 된 지 몇 달 안 됐다며.


말은 잠정적 행동이야.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 비리 저지르겠다?”

“투자 내가 했어. 저 건물 내 거야.”

“뭐?”

“로비 커피 진짜 맛있지. 입찰할 때 그거 하나 봤거든.”


“…….”

“그간 경력이 없어서 취임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어. 연차 5 년 이상 쌓았으니까 올해 자격을 갖춘 거고. 〈한국
예술단〉 이사장이 우리 막내 이모야. 그런데 이름만 올린 거라서, 모든 실질적 결정권은 나한테 있다고 봐야지.
이거 말 안 했나?”

안 했다.

“너희 이모가 바지 사장 같은 거란 말이야?”

“이를테면, 내가 이사장까지 한다 그러면 사람이 너무 완벽하지 않나.”

“「크리스타」도 투자 네가 하는 거란 소리네?”

“네 말에 의하면 나는 좋은 일 하는 좋은 사람인 셈이지. 이야, 감동적이더라.”

그가 능청맞게 말을 이으며 마른 어깨에 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올리는 통에, 서림은 수 초간 뭐가 문제인지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뒤늦게 제 신체 일부에 마찰한 타인의 손길을 인식하자마자 팔을 슬쩍 비틀어 건욱을
뿌리쳤다.

“난 대체 몇 가지를 속은 거야.”

“하나. 내가 여기 있다. 나머진 그냥 말을 안 한 거고. 겸손했더니 칭찬이 돌아오네.”

“넌지 몰랐으니까.”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차 준다고.”

“됐다고.”

“너희 집에서 여기 오긴 대중교통 편이 좀 불편할 텐데?”

「크리스타」가 소중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투자를 감행했겠지만 제 입장에선 왠지 모르는 사이 빚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차량 지원은 소속된 연출자로서 예술단 측으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될 호의였는데도,
건욱의 호주머니에서 그게 나온다고 생각하니 썩 내키지 않았다.

대꾸 없이 뚜벅뚜벅 인도 끄트머리로 걸음을 옮긴 서림은 도로변을 살피면서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오라는
택시는 몇 대나 눈앞을 지나쳐 가고 웬 새빨간 스포츠카가 그의 앞에 주차하는 것이었다.

끼익. 이내 멈춰 선 사치스러운 차량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 댔다. 이윽고 서서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좀 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택시를 잡으려던 서림은 그 안에 탑승해 있던 여자가 부르는 이름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발걸음이 아스팔트 위에 묶이고 말았다.

“제건욱! 여기!”

서림은 몇 발자국 뒤에 서 있는 건욱을 돌아보았다. 지상 주차장에 그의 차가 있을 텐데 굳이 이 도로까지 나온


이유가 이 여자였던 모양이다. 본능적으로 차 안을 들여다보니 이목구비가 무척 뚜렷한 미인이 건욱을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다.
그와 나란히 서면 그림은 꽤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깊숙이 내려앉았다.

“여자 친구?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연애하시나 봐?”

떠보듯 질문하자 건욱이 서림을 지나쳐 조수석 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너 이렇게 큰 굼벵이 봤어?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서 오셨나.”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는 안 한다.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맞긴 한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이런 시간에 건욱을


만나러 여기까지 찾아오기도 했을 터다. 거기까지 생각이 전개된 서림은 자연히 제 말투에 날이 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더럽게 바쁘면서도 인생에 꾸준히 여자가 있으니 하는 말이다.”

물론 건욱은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그를 선망했다. 좋은 집안, 잘난 외모,


비상한 두뇌. 의예과 출신이라는 그의 특이한 이력까지 눈길을 끌기에 딱 좋았고, 실제로 그도 그 기대치에 늘
부응하는 퍽 괜찮은 인간이었다.

그는 그동안 거절당해 본 적 없었고, 이기는 싸움만 해 왔다. 고비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있다면 그건
건욱이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타고난 기질 덕분인지 성격도 자신만만했다. 좋게 말하면 주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때때로 무례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다시금 차 안의 여자를 힐끗 살핀 서림은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갓 20 대 초반이


될까 말까 한 어린 여자였다.

이 여자앤 대체 몇 살이야. 저 새낀 꼬실 여자가 없어서 양심도 없이.

“꾸준히? 내가?”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황당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서림은 계속 대거리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 서 있다간 제 기분이 상했다는 걸 건욱에게 고스란히 들킬 것
같았다. 인연이 끝난 지가 언젠데 이런 문제로 아직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몹시 당혹스러울
터다.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다.

결국 서림은 건욱을 두고 도망치듯 차량의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아무튼 난 버스 타야겠다. 먼저 간다. 데이트 잘하셔.”

“구서림!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빠앙. 돌아선 서림을 급히 붙잡으려던 건욱이 왜 안 타는 거냐고 닦달하듯 울려 대는 경적 소리와 음성 때문에


우뚝 멈춰 섰다.

“제건욱! 안 타?”

건욱은 반복되는 채근에도 작아지는 서림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라야 미간을
구기곤 차 안을 들여다봤다.

“동네 시끄럽다. 적당히 하지?”


“그러니까 빨리 타면 될 거 아냐! 엄마 아빠 30 분 전부터 레스토랑에서 기다려. 식구끼리 점심 한 끼 먹자는데
왜 이렇게 굼떠. 그리고 저 사람은 또 누구야? 기분 나쁘게 왜 나더러 네 여자 친구래? 눈이 하반신에 달렸나.
다시 오라 그러면 안 돼? 얼굴 좀 보자.”

“네가 봐서 뭐 하게.”

“아, 누군데……. 어? 오빠 옷에 그 얼룩은 뭐야. 잉크 같은데? 웬일로 실수래?”

건욱은 힐끗 시선을 돌려 제 셔츠 위에 묻은 검은색 잉크 자국을 살폈다. 아까 전 서림이 던진 만년필촉에서 번진


것이다.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허탈하게 가로저었다.

서림은 붙잡아도 늘 심사숙고 없이 저렇게 떠나 버린다. 가겠다고 하면 그냥 담백하게 보내면 되는데,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야멸친 그를 계속 붙들고 싶어 문제였다.

“피곤해. 허튼소리 그만하고 운전이나 해.”

타악! 신경질적으로 차에 탑승한 건욱은 팔짱을 척 꼈다.

그러고는 더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양 눈을 지그시 감았다.

04.

정확히 몇 시간 잠들어 있던 건지는 모르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대 위로 무너져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처음엔 어두워서 밤인 줄 알았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날이 샌 새벽이었다.

서림은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동이 트는 것을 확인하고 뒤늦은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을 벗어나기 전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 거울을 쳐다보자 제 등판이
밝은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눈에 띄었지만 어깨부터 등 정 가운데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이 가장 길고 컸다.


이 흉터는 어린 시절 화상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서림의 목을 조르고 반쯤 실신한 아이의 등을 가스레인지 불에 오래 지졌다. 그러고는 화기가 주는


고통을 참지 못한 서림이 몸부림치다 자신을 발로 걷어찼다는 이유로 그를 보육원에 버렸다. 마치 그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넌 언제 봐도 징그럽다.”

새살이 돋아날 때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모습이 꽤 흉측했다. 그래서 서림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의를 탈의한 적이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항상 화장실에 가서 몰래 체육복을 갈아입어 사내자식이 유난이라는 소리를 몇 번이고 듣곤 했다.


반의 거친 아이들 중에선 얌전을 떠는 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종종 폭력을 썼던 일도 있었다.

역시 제 인생이 물 흐르듯 술술 꼬인 건 마음이 가난한 여자의 배 속에 잉태됐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드르륵. 욕실 문밖에서 요란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기억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는 황급히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와 메시지를 확인하니 보연이었다. 앞으로의 회의 일정 따위를 고지하는 내용이어서 머릿속에 입력해
두기 위해 꼼꼼히 읽어 내렸다. 동시에 간단하게 끼니를 챙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부질없는
행동을 했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식사로 때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물도 없어?”

이틀 전 급하게 구비해 두었던 생수마저 전부 떨어진 상태였다. 아쉬운 대로 단 하나 남은 캔 콜라를 마시면서


거실로 향했다. 아가리를 쩍 벌린 캐리어를 지나쳐 소파에 앉은 서림은 수납장에 꽂혀 있는 DVD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해 만든 오래된 영화, 「크리스타」였다.

고아원에 사는 크리스타는 얼굴과 목에 커다랗게 팬 흉터가 있는 여덟 살 난 어린아이였다. 육안으로 보이는


혐오스러운 상처 탓에 시설에 같이 있는 아이들마저 은근하게 크리스타를 따돌리며 무시하자, 아이는 점점 주눅이
들고, 자꾸 스스로를 어두운 곳으로 숨기게 된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늘 기저에 품고 진짜 자신을 알아봐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러던 와중 제프리라는 이름의 현명한 어른을 만나게 되고, 그가 상처받은 크리스타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는 이야기다.

서림은 어릴 때 보육원에서 틀어 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 결심했고, 또 장차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꿈도 꾸기 시작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일을 한 편의 영화가 해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제겐 아주 특별했다.

몸과 마음에 상처투성이인 자신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 알아봐 줄 것 같았다.

화면을 재생하니 다소 어둡고 낡은 빛깔의 배경과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운드 트랙이 흘러나왔다. 여자아이의
명랑하고 맑은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언제나 쓸쓸한 한밤중, 음산한 겨울의 한복판. 생기 없는 나무와 타 버린 검불.

아름다운 꽃이 시들고, 조약돌은 산산이 깨어질 때, 멀리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목이 쉰 소프라노의 낡은


오페라.

하지만 채비를 서둘러요. 따뜻한 봄은 결국 찾아오니까.〉

화면을 틀어 놓고 약간의 소음을 만들어 낸 서림은 거실 안을 빙 둘러보았다. 6 주든 6 개월이든 이곳에서 생활할


거라면 어느 정도의 정리는 필요했다. 그는 캐리어부터 다시 세웠다. 그런 그의 귓전에 영화 속 고아원 아이들의
합창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따뜻한 모포와 튼튼한 가구,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푹신한 벨벳은 아득히 먼 곳에.〉

창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빛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공복이었다. 가까운 편의점에 음식부터 사러 나갈까 하던 그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친구 아서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걸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원장님! 크리스타가 또 꽃을 죽였어요! 제비꽃을 따서 저 화병을 만들었어요! 이 화단을 모두 어질렀어요!〉

“아, 치운다고…….”

〈어지른 건 크리스타예요! 얼굴에 흉측한 천연두 흉터가 있는 크리스타!〉

“알았다니까. 되게 보채네.”

비척비척 움직인 서림은 최대한 열심히 집 안을 쓸고 닦았다. 옷장에는 옷들을 넣고. 신발은 신발장에, 각종
디지털 기기들은 협탁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불현듯 못 볼 걸 발견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뭐야, 이건.”

수납장에 건욱의 속옷이 남아 있었다. 당황한 그는 집 안 이곳저곳을 뒤져 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도처에 그가 신었던 스니커즈, 입었던 셔츠 따위는 물론이고 사용했던 수저나 유리컵 따위들이 널려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묘하게 다들 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긴 졸업 직후 그와 헤어졌고, 서림은 교수님의
제안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급작스럽게 뉴욕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곳을 정리할 여유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이제는 치울 시간이 있는데, 선뜻 버릴 엄두가 안 났다.

물끄러미 그것들을 내려다보던 서림은 아주 낡아서 버려야 할 것만 제외하고 쓸 만한 것들은 일단 그냥 두었다.

마무리로 캐리어를 옷장 위에 올려 두자 두 시간짜리 영화도 거의 반절이 넘게 지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공간을 둘러보니 좁은 원룸이 조금이나마 더 넓고 쾌적해 보였다.

“와,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지친 몸으로 침대에 풀썩 엎드린 서림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건욱과 함께 누웠던 시트와, 오래된 이불, 그리고 베개 커버 정도는 새로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몸을 누일
때마다 필연적으로 그를 떠올릴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구질구질했다.

일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몸이 한가하니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어제의 일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화려한 색의 스포츠카를 타고 와서 건욱을 데려가던 여자는 다시 생각해도 무척 미인이었다. 아주 오묘하게 낯도


익었다.

“연예인인가…….”

그녀의 외양으로 미루어 건욱과 경제적 사정이나 제반 환경 따위들도 비슷할 터다.

건욱의 동의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쳐 가던 서림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때마침 그의 귓가에 거실에 틀어 놓은 영화 대사가 들려왔다. 주인공 크리스타의 처연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그 누구도 절 사랑할 리가 없어요.〉

너무 여러 번 본 영화라 어떤 장면인지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어린 크리스타가 음식을 훔쳐 먹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독방에 갇혀 하는 혼잣말이라는 걸 머리론 아는데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건욱을 다시 만났을 때 서림이 정말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던 건 그에게 속아 여기까지 날아온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5 년 전 결별에 연연해 그와 일을 하느니 마느니 고심하고 있는데 건욱은 도리어 모든 걸
깨끗하게 청산하고 공과 사를 분리해 자신을 추천하기까지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신을 만난 그가 크게 동요하기까지 바랐던 건 아니지만 제게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눈동자는 충분히 낯설었고
또 충격이었다. 농담처럼 그간 보고 싶었다는 말을 편안히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자신은 그에게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남은 애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지는 경기 같은 건 하기 싫었다. 이렇게 그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로 앞으로 잘해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너무 섣부르게 경솔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에이전시에도 통보를 한 상황이라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쁜 새끼…… 사람 속도 모르고.”

건욱이 자신을 훨씬 더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믿었는데, 결국 그는 잊었고, 자신만 여전히 연연하는 걸 보면 그가


아니라 제 마음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는 서림의 몸 위로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채비를 서둘러요. 따뜻한 봄은 결국 찾아오니까.〉


* * *

「크리스타」는 1950 년대 미국 보스턴에서 초연한 뮤지컬로 1980 년대 리바이벌에 이어 다년간 해외


순회공연까지 전 세계에서 이미 많이 무대로 올린 유명한 뮤지컬이지만 실상 한국에서는 그리 인기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단장님, 여태 이런 공연은 예당 오페라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하는 게 관례였는데요. 그래야


동네방네 소문이 나죠. 충무아트센터나 그것도 안 되면 각종 시어터들에서 해도 되잖아요. 우리가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요. 우리 별관에서 하면 홍보 문건에 뭘 써요.”

「크리스타」 팀 회의에 잠시 들른 홍보 팀장이 건욱에게 이의를 선언했다. 그녀는 처음 서림이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부터 별관이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기운을 풍기더니 결국 첫 제작 회의 시간에 들어와서 의견을 적극
표명하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그거 큰일 났네. 보연아, 아직 회의 중이니까 일단 나가시게 도와 드려.”

다정한 음성으로 대꾸한 그가 연이어 보연에게 지시하며 냉정하게 눈짓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녀가 팀장을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안에 남아 있던 작가, 음악 감독, 안무가 등의 스태프들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서림이 차분한 어투로
정적을 꿰뚫었다.

“제 단장, 공연장 이대로 괜찮겠어요? 반발이 좀 있어 보이는데요.”

눈치를 살피던 작가가 서림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저, 단장님. 홍보 팀장님 말씀도 일리는 있어요. 외부에서 하는 게 관례였잖아요.”

그러나 건욱은 초연했다.

“약속이나 관례 이런 건 깨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린 구 감독 기안에 충실하죠. 큰 공연장을 끼고 하면


대관료나 티켓값 같은 문제도 생기고요. 우리가 공연장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자고요. 이 기획서의 취지가 그래요. 화려하지 않게. 맞죠, 구서림 감독.”

서류에 척 손을 얹은 건욱이 서림의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서림이 좀 걱정스러워하는 눈치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가벼운 고갯짓이 건욱에게 큰 도움이 됐던 모양인지 어조에 힘이 실렸다.

“홍보 팀장이랑은 내가 잘 얘기할게요. 촉망받는 연출자인 구서림 감독 섭외했다고 좀 알리고, 배우도 개런티가
허락하는 한 가장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뽑고, 좋은 일 한다고 여기저기 좀 홍보하고. 그러면 될 겁니다. 돈
문제로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면 절대 안 된다고 누가 신신당부를 하셔서.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여기저기에서 우려를 표하는 것과 별개로 실제로 이 예술단 별관에서 하는 건 그다지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혜화 인근이니 문화 예술의 중심지에 위치했고, 지하철역과 인접해 있어 접근성도 좋았으며, 주변에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 묵을 만한 괜찮은 숙소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건물이 깨끗하고 시설이 훌륭했다. 아울러 제작
비용까지도 절감됐다.

다이어리에 장점들을 하나씩 메모하던 서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건욱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저렇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듯했다.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말려 봤지만 건욱은
듣지 않았다.

“캐…… 스팅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왠지 난처해진 서림이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질문했다. 홍보 팀장과 대화를 마친 모양인지 보연이
들어오면서 대답을 주었다.

“정석대로 오디션으로 해야죠. 제 단장님 이름을 좀 팔아 보면 꽤 모일 거예요. 행사의 취지도 워낙


좋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고요. 아, 기술 디자이너들도 슬슬 섭외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윤 비서님한테 명단 있어요?”

“네. 그건 단장님께서 이미 목록을 주셔서…… 여기요.”

그녀가 명단이 적힌 종이를 건네며 덧붙였다.

“의상이랑 분장 디자이너 선생님들도 다 섭외 완료됐습니다.”

서림이 서류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는 동안 좌중은 적막이 감돌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서 이쯤이면 될 것
같다는 시선을 건욱에게 보내자, 그가 스태프들의 이목을 제 쪽으로 집중시켰다.

“우리끼리 지금부터 왈가왈부해 봤자일 것 같고. 무대는 윤색 고가 나와야 세부 회의 가능하지 싶네요. 완고가
나오면 그때부턴 주기적으로 회의할 거니까 번거롭더라도 출퇴근해요. 첫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하죠. 오늘은 이만
해산합시다.”

건욱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 듯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서림도 가죽 다이어리를 접고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예기치


않게 이름 석 자를 불리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구서림 감독.”

하나둘씩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건욱과 서림에게 눈인사했다.

이윽고 둘만 남겨지자 서림의 입도 뒤늦게 열렸다.

“뭐 할 말 남았어?”

“어, 있어. 당장 목숨과 맞바꾼대도 손색이 없는 중요하고. 다급한 이야기.”

우리에게 당장 해결해야 할 만한 위급한 상황이 있던가?

단어들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필연적으로 긴장하게 된 서림이 손에 쥔 물건들을 괜히 꽉 쥐어 봤다. 기분 탓인지


손바닥에 땀이 차는 느낌도 들었다.

“뭔데 그래? 겁나게.”

“와,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너한테 아직 안 했을 수가 있지?”

“글쎄 그게 뭐냐니까.”

“진짜 말도 안 돼. 그렇지.”
“야, 제건욱. 이럴래?”

“나 배고파. 밥 먹자.”

탁.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서림은 일순 긴장이 풀려 발을 크게 굴렀다. 혹시 중간에 일이 잘못돼 첫 단계부터 공연


준비에 차질을 빚는 건 아닌가 염려하던 마음이 빠르게 수몰됐다. 남은 건 허전한 느낌 그 자체였다. 헛웃음을
터트린 서림이 허탈하게 대꾸했다.

“그게 다급한 얘기야? 놀랐잖아.”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저게 진짜.”

상대가 분노하든 허탈해하든 관계없다는 듯, 건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덧붙였다.

“시간 단축해야지. 식사하면서 일 얘기도 하고. 일석이조 아냐.”

아직 저녁 식사 전이고, 그와 할 일 이야기라면 넘쳤고, 이제 완벽한 타인이 된 그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연습도 해야 했으니 함께 밥을 먹자는 건 나쁜 제안은 아니다. 다만 며칠 전 건욱을 차로 데리러 왔던 여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찰나간 망설이던 서림은 끝내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일석에 일조만 할 거다. 안 먹어.”

그러자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뻔뻔히 대꾸했다.

“그냥 협조하는 게 나을걸. 안 따라오면 내가 쫓아갈 거야. 어느 쪽이 낫지?”

“또 집까지 쫓아오시게?”

“안타깝게도 내가 너희 집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잖아. 서로에게 비극이지. 해남이나 제주도쯤에 땅을


사서 출퇴근을 하지 그랬어. 귀찮아서 거기까진 안 갔을 텐데.”

느물거리는 말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선뜻 분별이 안 갔다. 아마 51 퍼센트쯤의 모호한 확률로 진담일 터다.
그가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하는 사람인 것과, 쇠뿔도 단김에 빼는 편인 성미인 것을 아울러 기억해 낸 서림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이 돌아갔을 때의 상상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확언받듯 책상
위를 툭 쳤다.

“일 얘기를 하긴 하는 거지?”

“당연하지. 나 바빠서 한 번에 두 가지 일 해야 돼.”

“다른 꿍꿍이는.”

“그런 거 없다니까. 내친김에 하나 만들어?”

거절과 타협 사이에서 갈등하던 서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 가, 그래.”
건욱은 이 체념 섞인 대답에 만족한 듯 차 키를 허공에 훅 던져 올렸다가 제 손으로 낚아챘다.

* * *

밀폐형 객실은 사면이 벽으로 되어 있었다.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 알맞았다.

예전부터 서림은 사방이 꽉 막힌 이런 공간을 좋아했다. 한적한 곳에 혼자 숨어 자신을 감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또 한편으론 막다른 환경 안에 갇혀 보호받는 느낌도 받았다. 건욱은 정반대였다. 막힌 공간은
답답하다며 트여 있는 환경을 훨씬 선호했다.

그런데 오늘 식사 자리에 이런 레스토랑을 선택한 걸 보면 단순한 우연인지 익숙한 배려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난번 제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관성적 습관일지도 모른다.

내심 심란해하고 있는데 건욱이 입을 여는 바람에 상념들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너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사람이 뭐 어떻게 살면 21 세기에 영양실조로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 다녀.”

듣던 중 서림은 어이가 없었다. 주말 내내 편의점에 내려가는 것도 귀찮아 대충 배달 음식 따위로 때운 건


사실이다. 그마저도 입맛이 없어 몇 숟가락 먹다 내려놓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큰 오류는 없는 셈이지만 제
생활을 지켜본 것도 아닐 텐데 다 알고 있다는 양 구는 게 거슬렸다.

“미리 말하는데 이런 사적인 관심은 사절이야.”

“오버하지 마. 사적 관심 아냐. 공적 의무이자 책무지. 내가 너 관리하는 사람이잖아.”

“반장 선거 나왔나 봐?”

“그럼 그렇게 그릇되게 부르든지. 네가 틀린 거지 내가 틀린 거 아니니까.”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

“오늘 밥 많이 먹으면 져 줄게.”

왠지 분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보니 얇은 피부 위가 아렸다. 서림은 괜히 애꿎은 메뉴판을 들고


끄트머리를 짓이겼다. 이것저것 고른다는 핑계로 손장난을 계속하고 있는데 직원이 들어와 그들 사이에 섰다.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빨리 골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하지만 서림은 원래 입이 짧아 먹고


싶은 게 별로 없는 탓에 식당에서 뭘 선택할 때 유독 취약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듯 건욱을 힐끗 쳐다봤다.

“못 고르겠어?”

그때까지 서림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던 건욱이 뒤늦게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단 한 번 쭉


살피더니 메뉴를 척척 골라 직원에게 주문했다.

“전채랑 후식은 생략하고 음식은 한 번에 다 주세요. 동행인이 식사 중에 사람 왔다 갔다 하는 걸 싫어해서요.”

“그러겠습니다. 4 번, 7 번, 9 번, 16 번 맞으시죠?”
주문 번호를 재차 확인한 직원이 메뉴판을 챙겨 들고 객실을 빠져나갔다.

건욱의 말마따나 서림은 먹고 있는 와중에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무척 불편하게 여겼다. 게다가
자신이 선택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건욱이 나서서 제 입맛에 맞춘 메뉴들을 주문하는 수순도 익숙했다.

이쯤 되니 이 장소를 고른 것도 그의 배려가 맞았던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굳이 그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혼자 계속 연연하는 것 같아 보일까 봐 말을 아끼게 됐다.

“내가 사는 거니까 너 주문한 거 전부 4 분의 1 이상씩 먹어.”

서림이 조용히 있으니 건욱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정확히 10 원 단위로 반반 낼 거야. 계좌 보내.”

“너도 참 어지간히 정 없다.”

“넘치는 정을 제건욱 너랑 나누기가 싫은 거지.”

쌀쌀맞은 대답에 이어 황량한 침묵이 따라왔다. 서림은 타인과 함께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밤의 기류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만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동료로서의 배려와 호의를 이런 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그런 기분을 자아냈다. 뱉어 놓고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괜히 기본 찬으로 나온 샐러드 채소들만 쿡쿡 찌르고 있는데 건욱이 손을 뻗어 그 행위를


만류했다.

“애꿎은 애들 괴롭히지 말고, 혹사시킬 거면 차라리 입에 넣어서 치아로 씹어.”

“제건욱, 나 뭐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물어봐.”

“너 사실은 일 얘기 할 거 없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묵언이 충분히 답이 되었다. 서림의 깊은 한숨이 막막한 공간을 에워쌌다.
뒤이어 건욱의 낮은 음성이 모양 좋은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왔다.

“네가 나 불편해하는 거, 영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그런데 무대는 다 알아. 우리가 불협화음인지, 제대로 된


화음인지 귀신같이 안다고. 그래서 난 구서림이랑 반년 동안 친해질 거야. 이렇게 밥도 먹고, 가끔 술도 마시고.
싸울 땐 싸우더라도 우린 가까워질 필요가 있어. 너도 그 정도 각오는 했으면 좋겠다.”

이곳이 한국이고, 분업 시스템이 미국만큼 잘돼 있지 않다는 건 서림도 알았다. 그는 요컨대 공조를 위해서 두
사람이 날 선 부분을 일정 부분 깎을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루어 불편해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덕분에 탓하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지만, 서림에겐 자신을 향한 힐난처럼 다가왔다.

“나는…….”

망설이던 서림이 변명인지 해명인지 스스로조차 명확히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이 등장했다.
다림질이 잘된 유니폼을 차려입은 남자가 주문한 음식들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는 동안 서림은
살짝 열렸던 입을 도로 꾹 다물었다.

막상 직원이 사라지고 도로 문은 닫혔는데 응답할 타이밍을 놓쳐 흐름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그걸 느꼈는지


건욱이 입술을 살짝 감쳐물곤 말을 돌렸다.

“먹어. 먹어야 힘쓰지.”

“내가 알아서 잘 써.”

“매가리도 하나 없으면서. 너 그러다 애인한테 차인다. 물론 있다는 전제하에.”

얌전히 듣고 있던 와중, 이 말에 서림은 발끈했다.

“내가 왜 차여? 찼으면 찼지.”

“에너지 없으면 차여도 싸지. 너 정도 무기력이면 섹스하다 체력 달려서 자는 거 아니야?”

“너 이거 성희롱인 건 알아? 진짜 수준 떨어져서 상종을 못 하겠네.”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섞어 대꾸하자 음료를 마시던 건욱이 급작스럽게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그러고는
묵직하고 은근한 시선으로 서림을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반전된 그의 태도 때문에 서림은 숙명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싫었다. 그는 너무 태세의 전환이 빠르고, 더는 제 페이스에 맞춰 주지도 않으므로 종잡기가 어렵다.
당혹스러워하던 서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음성을 쥐어짜 내 공기 중에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 불손한 눈동자는 뭐야. 제 단장 너 지금 나한테 작업 걸어?”

“진짜 성희롱이 뭔지 보여 주는 중이야. 네가 개념이 잘 안 잡혀 있는 것 같아서.”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하더니, 서림의 눈부터 코끝, 입술, 그리고 울대뼈에 이르기까지 얼굴 주위를
눈으로 핥듯이 훑었다. 음험하고도 게걸스러운 눈빛이 이목구비 위를 야릇하게 지분거리기 시작하자 필연적으로
서림의 목울대가 들썩거렸다.

“그만해라?”

“왜, 뭐 좀 느껴져? 난 그냥 쳐다보기만 한 건데.”

“진짜 그 얼굴이 아깝다. 그걸 널 줄 게 아닌데. 조물주가 배달 잘못했나 보다.”

“제대로 한 거야. 나니까 이렇게 우아하게 쓰는 거지.”

어설프게 떨리던 서림의 손이 테이블보를 쥐었다. 그러다가 냅킨에 손끝이 닿아 그걸 그에게로 날렸다. 얇은
하얀색 천이 종이비행기처럼 건욱의 어깨에 맞고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높이 던졌으면
저 잘난 얼굴에 맞출 수 있었는데 유감이었다.

“너 성희롱은 명백히 범법이야. 내가 남자니까 법망에서 안전할 것 같냐? 그만하라고.”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참지 않겠다는 듯 서림의 목소리 또한 단호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런 서림을 주시하던


건욱이 종전을 선언하듯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면서 턱짓했다.

“말 나왔으니 말인데 그사이 연애는 많이 했어? 5 년 동안.”

호흡을 고르던 서림이 그를 힐끗 살폈다. 사실 자신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건욱의 지난 5 년간이 계속 궁금했는데,
그걸 물어보는 게 이상해 보이진 않을지 걱정이 돼서 일부러 억눌러 뒀다. 똑같은 질문을 그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오는 바람에 좀 씁쓸했다.

“남 사생활에 웬 관심.”

“관심이자 호기심.”

“두 개가 결이 같은 거 아니야?”

“완전히 다르지. 관심은 끌림이 전제돼 있는 거고 호기심은 궁금증 그 자체니까.”

“한 달에 한 명씩 주기적으로 갈아 치웠다, 왜.”

건욱이 대꾸 대신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세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던 서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뭐야.”

“도저히 안 믿어져서.”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봐?”

“꼭 믿을 거여야 물어봐? 넌 반드시 다 먹을 거라서 주문하나 보지?”

“네가 시켰잖아. 뭐 이렇게 많이 시켰어.”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가짓수가 인원수의 두 배였다. 입이 짧은 편인 서림이 먹기엔 버거운 양이었다. 제


말에 건욱이 음식들에 잠시간 시선을 두다가, 식기 전에 입에 넣으라는 듯 손짓했다. 이에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둘둘 말던 서림이 불현듯, 손에 쥐고 있던 식탁 용구를 얌전히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열받았다.

“너 내가 진짜 한 달에 한 사람씩 갈아 치웠으면 어쩔 건데.”

“잠깐 우월감을 느끼겠지. 그렇게 변덕이 심한데 나랑은 꼬박 3 년을 사귀었으니까. 그리고 계속 짜증 나겠지.
네가 날 버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겠구나.”

“…….”

“그런데 나 너 그런 주변머리 없는 인간인 거 알아. 그래서 우월감도 안 느껴지고, 짜증 나지도 않고. 대답


됐어?”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지 않는 한 관계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리란 걸 잘 알았다. 서로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이런 식으로 불시에 서림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사실 건욱이 지금 한 대답은 대상만 바꿔서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과 헤어진 뒤 최소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왔던 여자뿐인 건 아니리라. 5 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왠지 아무것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서림은 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한 우월감은커녕 짜증만 치밀었다.


이런 상태에선 제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어 기제로 그에게 못된 말만 해 댈 터다. 그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결말이다. 이쯤에서 관두는 게 옳았다.

아직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상태였지만 서림은 모두 두고 가방을 챙겼다. 건욱이


의아해하며 시선을 끌어 올려 자신을 주시했다.

“밥 먹다 뭐 해. 앉아.”

“밥은 제 단장 혼자 먹어야겠다. 나 약속 있어.”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약속이 갑자기 생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물론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은 했지만 돌이킬 의향은 없었다. 서림은 꿋꿋한 태도로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처음부터 대충 장단 맞춰 주다 가려고 했었어. 지금 가 봐야 돼.”

“이 시간에?”

“어, 술 마실 거야.”

의구심이 가득 섞인 건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림을 직시했다. 그는 냅킨으로 손등 위를 스윽 닦아 내면서 분명한


말투로 물었다.

“누구랑.”

“네가 말하면 아냐?”

“지금부터 수줍게 천천히 알아 가면 되지. 누구?”

“여자 친구다, 왜.”

계속 여유롭게 받아치던 건욱의 눈매에 일순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말투도 날카로웠다.

“혹시 심즈 해? 구서림 너 게이잖아.”

그사이 출입문 쪽에 당도한 서림이 그대로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서였다.

“나 게이 아니야.”

“믿기지가 않는데. 둘 다 된다고? 그럼 여자랑도 해 봤겠네. 어땠어?”

입술을 질끈 깨문 서림이 끝내 약간의 분노를 섞어 응답했다.

“너 성희롱이 습관이다. 나랑 친하게 잘 지내보고 싶은 건 맞아?”

“어. 본의 아니게도 지금 네 태도를 보니 순조롭게 망한 것 같지만.”


건욱의 허무한 음성 끝이 깊은 수심의 바다로 물체가 가라앉듯 서서히 내려갔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까지는 제
쪽에서 판별할 수 없으나 적어도 느끼기엔 진심 같아 서림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걸 인지한 건지 건욱이
셔츠 깃을 여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자신을 뒤쫓아 올 기세기에 서림이 손을 척 내밀어
그의 접근을 저지했다.

“제건욱, 따라오지 마. 오늘은 여기서 찢어지자.”

“약속 장소가 어디야. 차 없잖아. 데려다줄게.”

“내가 알아서 해. 쫓아오면 그땐 진짜 화낸다. 넌 시킨 거 먹고 나와.”

쓸데없는 소모전은 이만 관두고 싶다는 듯 꽤나 절박한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가 어떤 방식이 최선일지를
바로 재 보는 기색이었다. 건욱이 멈춰 있는 사이, 서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객실을 홀연히 빠져나갔다.

딸칵. 문이 닫히고 바깥과 내부의 공간이 명확히 분리됐다.

1 분여 전까지만 해도 서림과 마주 보고 있다가 별안간 혼자 남겨지게 된 건욱은 제 이마를 슬쩍 짚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후우. 깊은 숨이 터져 나왔다. 계속 단속하고 있던 얼굴의 근육들이 무너져
내렸다. 서서히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자 친구다, 왜.〉

서림의 살짝 떨리는 듯하던 음성이 계속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는 괜히 냅킨 위에 손을 닦다가, 이내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잇새를 짓이겼다.

“같이 밥 한 번 먹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몹시 허탈해진 그의 한숨이 유난히 깊었다.

05.

작열하는 태양이라는 표현은 다소 식상한 묘사였으나, 창밖의 광경은 그것보다 더욱 그럴싸한 수식어가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구고, 빌딩의 표면을 아슬아슬하게 녹아내리게 만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두꺼운 창문을 두드리며 시원한 실내로 침투하기를 몇 번이고 시도했다.

계절의 순환은 예상보다 늘 한 박자가 빨라서, 이번에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을이 성큼 와 있을 듯했다.

“구 감, 정 작가랑 통화했어? 원고 얼마나 걸린대. 왜 이렇게 굼떠.”

두 사람은 단장 사무실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독대하고 있었다. 건욱이 넌지시 묻자,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대답을 하려는데, 제게 닿은 그의 시선이 꽤 집요해서 당황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말을 좀 더듬게 됐다.

“아, 그…… 안 그래도 아까 작가님이랑 통화했는데 거의 정리됐다고 오늘 내로 보낸다고 하셨어. 작곡가님도


편곡 맡긴 거 회수 중이라고 하셨고. 그런데 별관은 소극장 사이즈라 라이브 연주는 안 되는 거지? MR 쓰기는 좀
아쉬운데.”

“아쉽긴 하지만 여태까진 대체로 그래 왔어.”

“그럼 오케스트라 자리는 좌석으로 빼고……. 아, 오프닝넘버는 가사가 원작이랑 거의 똑같던데 일부러 그렇게
직관적으로 번역한 거야?”

그 순간 두 사람 모두의 머릿속에 경쾌한 멜로디와 아이들의 발랄한 음성이 적절한 배율로 혼합돼 한 곡의 노래를
만들어 냈다.

〈아름다운 꽃이 시들고, 조약돌은 산산이 깨어질 때, 멀리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목이 쉰 소프라노의 낡은


오페라.

하지만 채비를 서둘러요. 따뜻한 봄은 결국 찾아오니까.〉

대답 대신 물끄러미 서림을 쳐다보고 있던 건욱이 뒤늦게 대꾸했다.

“응, 그게 좋아서.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이 응답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 서림도 잠깐 동안 침묵했다. 「크리스타」의 오프닝넘버 「봄」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였다. 잠시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서림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덧붙였다.

“크리에이터들 머리 터지는 것 같더라. 오리지널이 있으니까 더 어렵다고.”

“구서림 머리도 같이 터져야 돼. 하나부터 열까지 네 눈으로 직접 꼼꼼하게 확인해. 네 그 점을 높이 사서 연출


제안한 거니까.”

“그런 걱정이라면 집어치워. 나 일 잘해.”

유독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자 건욱도 여러 번 잔소리하지는 않았다. 납득시키기 위해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그 정도 믿음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는 듯 맞은편만 빤히 직시하고 있던 건욱은 탁상 달력을 서림의 앞에 척


내밀었다. 뒤이어 한 장 뒤로 넘겨 첫째 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려던 서림은 멈칫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손을 뒤로 뺐다. 혹여 살갗이


닿기라도 하면, 자신이 계속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키게 될 것 같았다. 건욱은 이 복잡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배우 오디션 날짜는 내달 이때부터 이때까지. 라인업은 가능한 한 빠르게 확정하자.”

서림은 제 예상보다 일정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다소 당황했다.

“이렇게 급하게?”

“연말 공연이니까 준비 기간이 아주 짧진 않지만, 주요 배우들이 애들이라는 거 생각하면 또 그렇게 길진 않아.


완벽하게 연습시키려면 최대한 빨리 인원 고정해야 돼.”

“배우들이 준비 안 됐을 텐데. 오디션 본다고 여기저기 글 올린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안타깝지만 올 배우가 다 거기서 거기야. 몇몇은 우리가 지목해서 비공개 오디션으로 할 거고. 아마 괜찮을
거야.”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데 크리에이터 두 분 왜 이렇게 핏대 세우고 싸워? 원래 그래? 무슨 구마하는 거


보는 줄 알았네.”

“누구. 작가랑 작곡가?”

다시 생각해도 질린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림을 힐끗 살핀 그가 픽 웃었다.

“원래 열 번 만나서 서른 번 전쟁하는 인간들이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더라. 중간에 말리다가 애먼 내가


한 일곱 번쯤 죽었다가 부활했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보아하니 건욱은 이미 그들의 다툼을 많이 관찰해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일해.”

“둘 다 일을 잘하거든.”

“넌 일만 잘하면 그 외에 아무것도 상관없어?”

“없으니까 구 선생한테도 러브콜을 했겠지.”

“대단한 프로 의식이시다. 박수라도 쳐 줘?”

“됐어, 나 대단한 건 내가 알아. 생략.”

헛웃음을 터트린 서림은 다이어리 일정표에 몇 가지 메모를 적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고개를 살짝 수그렸는데,
정수리 위에 닿는 얄궂은 시선이 느껴져 서서히 글자를 쓰는 팔뚝이 굳었다. 괜히 제 머리의 가마 모양이
어땠는지까지 신경 쓰였다.

자꾸 이러다간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구서림은 소멸하게 될 것 같았다. 진지하게 이런 고민이 들 정도로


끊임없이 건욱을 의식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건욱을 볼 때 담담해질 수 있는 건지,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건지. 해법이 제 안에 완전히 결여되어 있어 가슴이 답답했다.

불편함을 견디다 못한 서림이 불시에 고개를 분연히 쳐들었다. 역시나 제 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건욱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왜 또 저렇게 봐.

테이블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건욱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눈길을 보냈다. 감추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빤한 시선을 서림에게 고정했다. 마치 그의 밤을 닮은 짙은 눈동자가 외려 투명한
유리처럼 자신을 오롯이 담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성격이 보였다. 건욱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선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 왜.”

서림이 대놓고 물었으나 건욱은 고개를 갸웃할 뿐 속 시원히 답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 상황이 더 거북한 사람 쪽이 먼저 말을 돌리게 됐다. 솔직히 매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참, 티켓 말이야. 보연이가 전국에 있는 아동 복지 센터들로부터 지원서를 받아서 우리가 사연을 읽어 보고


추첨을 하는 걸로 하면 어떻겠냐는데, 괜찮은 의견 같아서. 대신 교통비나 숙소 같은 것도 일체 우리가 제공을
하는 거지. 그건 제 단장이 직접 발로 뛰어서 그 두 가지 후원해 줄 데 물색해 볼 수 없나?”

“그렇게 할게. 어차피 투자 제안서 쓰는 게 내 일이니까.”

“수고 좀 해 줘. 그럼 이 정도면 당장 짚고 넘어갈 건 대강 정리 끝난 건가?”

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반응을 신호탄으로 해서 서림이 서류들을 챙겨 제 집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건욱이 펜대를 손가락
끄트머리로 문지르다가 그것을 서림의 방향으로 쓰윽, 밀었다.

대구루루 구른 펜이 용케 정확히 서림의 다이어리 앞에서 멈췄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던 서림이 펜을


주워서 건욱에게 휙 던졌다.

“단장님, 장난질 사절입니다. 전 이만 연출실로 가 보겠습니다. 준비할 게 많아서요.”

“나 장난하는 거 아닌데.”

“그럼 뭐. 왜 쳐다보는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제대로 안 하면서.”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술? 무슨 술.”

별생각 없이 되묻던 서림이 뒤늦게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고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역시 아무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웬만하면 안 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 이렇듯 불시에 수습까지 해야 돼서 거짓말은


끝이 대부분 좋지 않았다.

“아, 술……. 어, 누가 일찍 보내 주신 덕분에. 넌 혼자 여유롭게 식사 잘하셨겠다.”

“그래서 누구랑 마셨어?”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한데 왜가 어디 있어. 그냥 궁금한 거지. 누구냐니까.”

왠지 어제 그를 두고 레스토랑을 빠져나갈 때부터 결말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긴 했다. 예전에도 건욱은


지금처럼 본인이 모르는 게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경향은 사건이나 상황에 서림이 조금이라도 연루되어
있으면 아주 심해졌다.

“여자 친구라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닐걸.”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맞는다는데.”

“그러지 마. 나 승부욕 생기니까.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널 앞에 앉혀 놓고 계속 밥


먹자 그런다.”

대꾸하는 건욱의 음성이 달빛이 창에 은은하게 비치듯 부드러웠다. 그래서일까.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를 휘감는
순간 서림은 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제 자신이 그 자리 면피를 위해 그를 어설픈 거짓으로 속였다는 건 피차 분별력 있는 성인인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5 년 만에 한국에 왔는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뚝딱 여자 친구가 생겼을 리도, 평소 사적인 인간관계가
지극히 협소한 서림이 오후 8 시에 술자리를 느닷없이 가질 일도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이다.

겁에 질린 강아지의 목소리가 도리어 커진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이 사안에 관한 한 할 말이 별로 없는 서림은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됐다.

“그냥 적당히 좀 넘어가지?”

“그럼 그럴까.”

“…….”

“……라고 대답할 줄 알았어? 누구 좋으라고.”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팔짱까지 척 끼고는 어설프게 일어선 서림을 올려다봤다.

구도상 분명히 서림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의 기세는 건욱 쪽이 압도적으로
떨쳤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 파동이 여느 때에 비해 조금 건조하고 쌀쌀맞은 모양새로 변한 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너 어제 그냥 집으로 들어가던데. 그 좁은 집에서 설마 동거해? 그건 실제인지 가상인지 모르는 네 심즈 여자


친구한테 너무 못 할 짓 아닌가. 거주지 따로 마련해 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제 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그가 제 뒤를 밟았다는 뜻이 됐다. 사색이 된 서림이 책상을 두


팔로 짚어 허리를 숙이곤 건욱과 눈을 마주쳤다. 미세한 분노가 깃든 서림의 형형한 눈빛이 상대를 차갑게
들여다봤다

“너 어제 나 미행했어?”

“몰래 따라간 걸 미행이라고 하지 않나. 난 대놓고 쫓았는데 너 전혀 모르더라.”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나 지금 소름 돋으려고 해.”

“동거는 하지 마. 그것도 내가 매일같이 너랑 뒹굴었던 그 집에서. 다음부턴 밥 먹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리


뜨지도 말고. 내가 원하는 건 이 두 가진데, 다 들어주실 건가?”

움찔한 서림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발끈하게 했던 미행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있었다. 직접 눈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쫓았다는 건, 건욱이 제 애정사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말과 상통했다. 덕분에 아주 약간의 희열이 일었던 탓이다. 조용히 동요하던 그는 겨우 제 마음을
다잡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왜.”

“그런데 왜 물어봐.”

“반드시 다 먹을 거라서 주문하는 거 아니라면서.”

이번엔 본인이 했던 말을 토대로 고스란히 역습을 받은 건욱의 입이 다물렸다. 순간이긴 했지만 그의 빈틈이
드러났다. 서림으로선 이걸 놓칠 수가 없었다.

“넌 스토킹 짓 하는 거 보니까 좀 이불 뒤집어쓰고 걷어차여야 돼. 미행 한 번만 더 해라.”

“더 하면.”

“해 봐. 어떻게 되는지 내가 폭력과 강제력이란 게 뭔지 A 부터 Z 까지 차근차근 알려 준다. 이건 선금.”

퍽! 주먹을 단단히 쥐어 그의 쇄골 위를 힘껏 친 서림이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건욱을 내려다보았다. 잠시간


그러다 그대로 뒤돌아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늘씬한 뒷모습이 가시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계속 문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건욱은 온전한
혼자가 되자 의자 등받이에 제 상체를 길게 늘어뜨리듯 걸쳤다.

“하…….”

사실 어제 건욱은 서림의 뒤를 쫓지 않았다. 잠시 그럴까도 했으나, 얌전히 혼자 식사를 하다 그대로 귀가했다.


정말 만에 하나 서림에게 진짜로 약속이 있었고, 또 그 상대가 사귀고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아주아주 희박한
가능성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만큼은 제 눈으로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은 전부 추측과 짐작으로 떠본 것에 불과했는데, 그물에 걸린 서림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건욱은 어제 서림이 얌전히 집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그의 시야에 하얀 천장과 단조로운 모양새의 조명이 함께 들어왔다. 어제 자신이 뒤를


쫓아간 줄 알고 질린 기색을 내비치던 서림의 굳은 표정이 일순 그 위를 해일처럼 덮쳐 왔다. 건욱은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눈을 여러 번 차분히 깜빡였으나, 별반 소용이 없었다.

“새끼가 사람을 표정 하나로 들었다 놨다…….”

결국 허탈해진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 * *

「크리스타」의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이 대기실에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작진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인원이 극 중 역할을 따내기 위해 모여들었다. 자선 공연인 만큼 높은 출연료를 보장해 주진
못하지만, 실패해 본 적 없는 연출자인 건욱의 이름이 기획자로 올라간 것이 이 반향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뮤지컬 「크리스타」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두루 등장했다. 덕분에 오늘 참석한 인원도 아이가 반, 어른이
반이었다. 아이들 오디션이 끝난 뒤, 조연출이 대기실로 나와 잠시간의 휴식 뒤 어른 배역의 공개 오디션이
시작될 것임을 천명하고 회의실로 도로 들어갔다.

“어때요? 눈에 띄는 아이들 있어요? 다들 예쁘고 귀엽긴 한데.”

회의실 내부에는 작가와 안무가, 음악 감독, 그리고 서림과 건욱이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제일 끝에 앉아
있던 작가가 반대편 끝에 있는 건욱 쪽으로 몸을 틀어 질문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서류를 툭,
손끝으로 내려친 건욱이 제일 먼저 응답했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아니라 맞은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보연을
향했다.

“아까 그 여자아이 있지. 이름이 손예영이던가? 목소리 낭랑한데 주눅이 좀 들어 있던 애.”

“네, 단장님. 13 번이네요.”

“걔 촬영한 영상 좀 스크린에 띄워 봐.”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 제작진의 시선이 절로 정면으로 향했다.

조금 전 대본의 일부를 읽어 보던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흐릿한 스크린 위에 흐르기 시작했다. 짤막한 영상이
모두 끝날 때까지 다들 집중했으나, 아이 자체에서 특별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낭랑해서 바로 귀에
꽂힌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묘하게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이윽고 화면이 까맣게 변하자, 의외로 그때까지 계속 침묵하고만 있던 서림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실은 저도 이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대부분 엄마 손잡고 왔는데 왜 혼자 매니저랑 같이 왔는지 궁금해서
확인해 봤거든요. 예영이 부모님이 두 분 다 작년에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뒷이야기는 선뜻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듯, 한 박자 숨을 고른 그가 덧붙였다.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아이 아버지가 생전에 손버릇이 많이 나빴나 봐요. 크리스타 얼굴에 있는 것처럼 애
몸에도 상처 같은 게 좀…… 많이 보인다는 것 같더라고요. 주눅 들어 있는 것도 그런 두려움 때문인 것 같고.
그래서, 우리 극 취지에는 부합해요.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게 치유라면, 제일 어울리는 주인공
아닐까 싶어요.”

“사연이 안타깝긴 한데 너무 얌전해 보여서. 배우로 매력이 있나? 크리스타는 초반엔 좀 어둡지만 점점 원래
성격을 되찾고 밝아지는 캐릭터예요. 게다가 본인이 캐스팅된 이유와 이 극의 상관관계를 본인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잖아. 예영이라는 애한텐 그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작가가 합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서림이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차마 강력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있자,
건욱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연출은 저 애가 마음에 든다는 거네. 맞아요, 구 감독?”

“반응 보니 예영이가 마음에 든 건 저뿐인 것 같긴 하지만요.”

“한 사람 아닙니다. 두 사람이지.”
그가 본인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서림이 기가 막혀 하는 기색 반, 고마워하는 기색 반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건욱이 좀 더 의견을 밀어붙였다.

“목소리도 예쁘고 동작도 군더더기가 없어요. 노래할 땐 레아 살롱가도 떠오르고, 난 좋던데. 한 분만 더 의견


보태 주세요. 그럼 과반수가 넘겠군요.”

그의 말에 안무가와 음악 감독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누굴 캐스팅하든 대단한


연기력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 공연 자체가 서로를 위로하자는 공익적 취지기 때문에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표정이 어둡고 주눅이 들어 있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음색이 예쁘고 성량도 나쁘지 않다는 분명한 장점도
존재했다. 원석은 열심히 세공하고 다듬으면 제 가치를 하는 법이었다.

“우선 예영이는 우리랑 얼굴 다시 보는 걸로 하고, 소수 의견도 존중해야죠. 작가님이 원하는 아이도 캐스팅해요.
어차피 역할은 연기시켜 보다 보면 바뀌기도 하니까.”

“제 단장은 처음부터 예영이란 애 찍었네. 어후, 저 능구렁이. 나랑 안 맞아.”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든 작가가 건욱을 흘기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는 눈치껏 그녀를 쫓았다. 서림은 아마
그들이 함께 회의실에 돌아올 때쯤이면 작가가 이미 건욱의 논리에 설득되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 동안, 서림은 예영의 사진이 박혀 있는 서류 위를 손으로 슬쩍 훑었다.

자신처럼 부모님의 폭력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몸에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예영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작은 몸으로 성인 남자의 폭력을 감당하는 일은 아마 공포 그 자체였을 터다. 어머니에게
학대당했던 기억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서림으로선 아이의 상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그게
염려스러웠다.

괜히 예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머니가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제 등의 화상 흉터들마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시간 15 분 남았습니다. 현재 성인 연기자들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똑똑. 문을 노크한 보연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지했다. 서림이 바깥을 향해 손짓하며 건욱과 작가가 잠시
나갔다는 것을 전하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테라스로 향했다.

예영에 이어 눈에 띄던 다른 아이들의 이력서들을 눈대중으로 훑던 서림은 일순 제 몫의 생수가 모두 바닥난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복도 반대편에 있는 탕비실로 천천히 걸음하고 있는데, 목적지 앞 벤치에 웬 여자아이 하나가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사진과 영상으로 계속 모습을 접하던 예영이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역들은 오디션을 마치고 모두 돌아갔을 시점이었다. 그런 와중 어른도 없이 혼자


남아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탕비실로 들어가서 아이가 마실 만한 음료와 물을 함께 꺼내 온 서림이 예영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동시에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예영이지?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음료의 뚜껑을 따서 빨대까지 꽂아 내밀자, 예영이 순순히 받아 들며 대꾸했다.


“매니저 언니 기다려요.”

“어디 갔는데?”

“은행.”

“아…… 그래? 그동안 돌봐 줄 다른 어른은 안 계시고?”

아이는 답이 없었다. 이 또래 애들을 오래 다뤄 본 적이 없는 서림으로선 지금 예영의 정서를 정확히 알기가


어려웠다. 이 침묵 때문에 목이 탔다. 특히 아이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알기에, 그와 같은 성인 남자인
자신이 계속 말을 붙이는 게 적절한 일인지도 혼란스러웠다.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힐끗 쳐다보자, 예영 역시 자신이 건넨 음료를 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앉은 방향을 몰래 훔쳐보기에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이 거북한 건 아닐까 싶었다.

“음, 그럼 잘 놀다 가.”

왠지 미안해진 서림이 고민 끝에 어색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해 주려던 때였다. 예영이 옷자락을 살짝 붙들어
그를 만류하는 것이 더 빨랐다. 가지 말라고 차마 말하진 못하고 행동으로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는 듯 보였다.
서림은 왠지 이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직 어려서 정확히 한 단어로 본인의 기분을 표현하진 못할 테지만, 어른인 제 눈에는 명확히 들여다보였다.
아이는 퍽 낯선 사람에게라도 의지해야 할 만큼 마음이 쓸쓸한 듯했다. 서림은 그게 무엇인지, 어떤 감각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동질감인지, 연민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짠한 기분을 느끼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도로 자리에 앉은 그는


고개를 아이 쪽으로 기울였다. 모르긴 몰라도 대화를 시도해도 되는 타이밍처럼 느껴졌다.

“여긴 오고 싶어서 온 거야?”

곧바로 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오고 싶었는데?”

“뮤지컬 배우 되고 싶어서요.”

“왜 그게 되고 싶은데?”

“내가 노래하고 춤추면 엄마가 좋아했어요.”

작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던 사전 정보를 머릿속에 끄집어낸 서림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한 손엔 그의 옷자락을 못 가게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음료를 마시면서 계속 제 눈치를 봤다. 이 조그만
머리로 뭘 걱정하는 건지 서림으로선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때때로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은 알았다.

망설이다 손을 뻗은 서림이 결이 부드러운 예영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양 쓰다듬었다.

그 순간, 허겁지겁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와 자신들 앞에 서는 인영이 있었다.

“헉, 예영아. 오래 기다렸지.”


아이의 매니저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고 대충 상황의 맥락을 이해한 것인지 매니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왔다. 서림은 그녀와 똑같이 했다.

그때였다.

“구 감독님! 5 분 후 성인 배우 세팅 시작합니다. 착석 부탁드립니다!”

서림은 보연의 쩌렁쩌렁한 음성을 듣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회의실 방면을 쳐다보자 건욱과
작가가 대화를 끝낸 건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건욱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기에 서림은 예영을 향해 도로 고개를 틀었다.

계속 자신의 셔츠 밑단을 쥐고 있던 아이의 작은 손을 떼어 내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손쉬웠는데, 마음이 어려웠다. 그는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예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딜 가느냐는 듯
빤히 직시하는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귀여웠다.

“예영이 노래를 정말 잘하더라. 행운이 있을 거야.”

쑥스럽게 웃는 아이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그걸 눈으로 목격하자 좀 더 확실하고, 큰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자신이 제작진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는 건 아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림은 최선의 방법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또 보자, 예영아.”

아이와 눈을 또렷하게 마주치고 상냥하게 웃어 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영에겐 한 번 더 손 인사를 해 준


뒤 두 사람을 등져 회의실로 걸어가려던 때였다.

걷던 도중, 서림은 여전히 회의실 문간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건욱을 발견했다. 그는 팔짱을 척 끼고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좀 복잡한 눈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건욱이 할
말이 있는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구서림.”

“왜, 뭐 할 말 있어?”

그는 제 이름을 한 번 나지막이 부르더니, 돌연 예영이 앉아 있던 복도 끝을 힐끗 살폈다. 뒤이어 다시 제게


시선을 돌렸을 때, 눈에 미묘하게 낙담한 빛이 깃들어 있어 당황스러웠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하…… 아니다. 일단 들어와.”

재차 묻는데도 그는 어중되게 굴었다. 혀를 쯧, 하고 차더니 통보와 함께 회의실로 앞장 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왜 저래.”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 서림은 마지못해 그를 조용히 뒤쫓았다.

* * *
〈예술 감독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단장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으로 건욱과 보연이 들어와 회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사흘에 걸친 오디션은 모두 끝났다. 캐스팅을 마무리할 시점이었다.

“인원은 대충 추렸고요. 다들 워낙 매의 눈이시라 한 번 보고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셔서 2 차 오디션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보연이 그의 앞에 최종 명단이 적힌 서류를 한 부 놓아 주며 간단하게 부연 설명했다.

“크리스타 역은 예영이로 하고, 여기 보육원 애들이랑 관계자들 목록이고. 나중에 크리스타 아버지가 되어 주는
물리학자 제프리 역할은 이분. 고맙게도 좋은 취지라고 노 개런티로 가능하시대요. 단장님이랑 구 감독님이 최종
결정하시면 계약서 사본 바로 보낼 예정입니다. 구 감독님은 벌써 서명하셨어요.”

그때까지도 건욱은 별말 없이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계속 침묵하자 보연이 독촉하듯 손가락 등으로
책상 위를 두어 번 내려쳤다.

“단장님, 제건욱 단장님?”

“아, 응. 여기에 서명하면 된다고?”

그녀가 끄덕이자 뒤늦게 건욱이 결재란에 만년필로 사인했다. 그러고는 뭔가 목구멍에 걸려 불편을 느끼는
사람처럼 펜대를 툭,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개마저 뒤로 훅 젖히고 긴 숨을 뱉어 내는 그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일이 잘 풀리고 있어서 나쁠 게 없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보연이 넌지시 물었다.

“단장님 요새 이상하세요. 원래 기분 이렇게 잘 드러내는 분이셨어요? 평화주의자시면서.”

“뒤늦게 전쟁광으로서의 본능이 차오르나 보지.”

“남 일처럼 말씀하실 거예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제 마음을 가라앉힌 건욱은 서서히 고개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보연을 쳐다보았다.

“미국에서, 구서림 오프브로드웨이 극장들 전전하며 오래 있었다 그랬지.”

“네, 뭐, 이력서에 의하면 그랬다고 하대요. 거기 연출 중 한 사람이 서림 선배 예뻐해서 운 좋으면


브로드웨이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한국에 온 거라고 들었어요.”

“애들 데리고 공연한 적은 없는 거지? 내 기억엔 그런데.”

“필모그래피에 아이들 중심인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으. 괴로운 신음을 토해 낸 그가 골치 아프다는 양 제 관자놀이를 긴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 댔다. 그의 눈에


어제 예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서림의 애틋한 모습이 자꾸 밟혔던 탓이다. 아무래도 서림은 그 아이를 통해
자신의 유년을 비춰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치유를 위해 이 공연을 올리자고 했던 것이지, 오랜 상처를 헤집어 놓고자 했던 게 아니다. 건욱은 서림이 어릴
때의 기억으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벌인 판이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염려됐다.

“하, 나 머리 좀 식혀야겠으니까 정리됐으면 넌 이만 나가 봐.”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양 축객령을 내리며 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보연이 주섬주섬 서류들을
챙기면서 건욱을 미심쩍게 관찰했다. 그사이 건욱이 피곤하다는 양 좌우로 목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욱 선배.”

“단장님.”

“단장님!”

“왜.”

“혹시 저 모르게 연애하세요?”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목울대의 피로를 풀고 있던 건욱이 멈칫했다. 그는 어설프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보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니?”

“대답이 늦으신데요?”

“아니라니까.”

“정말 아니에요?”

“정말로 전혀 아니신데?”

“이상하네.”

“그러니까 뭐가.”

“환절기도 아니고 성격 지랄 났잖아요. 낯설게. 모두의 왕자님이던 제건욱을 돌려주세요.”

“까분다. 윤 비서님, 상상력이 넘치면 작가를 하세요. 뭐 하러 내 밑에서 재능을 썩혀.”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테이블 위의 펜을 들어 허공으로 휙 던지자 보연이 손을 뻗어 그것을 능숙하게 잡으며


이어 말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 보여요. 단장님 원래 그런 거 별로 없고 무던한 분인 건 본인이 제일 잘 아시죠? 성격


까다롭기야 원래 그러셨지만, 그건 우리 업무에서나 그런 거지 대체로 사람들한테 관심도 없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셨는데…….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있으면.”

“빨리 해결하시라고요. 항상 중심 잡던 분이 그러면 밑에선 불안해해요. 어빙 벌린이 한 말 모르세요? 성공의


가장 힘든 점은, 성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심 찬 첫 제작이잖아요. 보란 듯이 성공해야죠.”
“난 늘 성공해.”

그의 인생에 유일한 실패는 서림뿐이었다. 다시는 같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했는데,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지워야 하고, 또 떠올리며 반성해야 하는지가 흐려서 아직까지도 구서림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서림이 힘들어할 게 시시로 걱정됐고,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야기할까 봐 종종 우려됐다. 왜


그렇게 잔인했어야 했는지까지는 납득하지 못하나, 어쨌든 그의 말에 의하면 결별의 사유를 제 쪽에서 제공한 건
맞았다. 그건 건욱에게 약간의 트라우마였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나가. 머리 아파.”

“약 드려요? 잘 듣는 거 있는데.”

“네가 나가 주는 게 특효약이야.”

“선배 단원들한테 워낙 어려운 사람이라서 저 아니면 이런 충고 해 드릴 사람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말 꼭


들으셔야 돼요.”

“나가라니까.”

더 이상 보연의 말대꾸는 없었다.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건욱에게 반복해서 잔소리하는 건 도리어 역효과인
것을 오래전부터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손하게 꾸벅 인사하고 공간을 비웠다. 홀로 된 건욱이 다시 머리를 뒤로 확 젖히고 제 수행 비서의 애정


어린 쓴소리를 곱씹었다.

〈혹시 저 모르게 연애하세요?〉

꼭 어린애처럼 서림의 앞에서만 퉁퉁거리는 최근의 자신이 평소 같지 않게 기복이 있고 심지어 그것을 잘 감추지도
못한다는 건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걔랑 연애라도 하면서 이러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는 허탈해져 깊은숨을 삼켰다.

06.

밤인데도 매우 무더웠다. 낮 동안 뜨겁게 땅을 달구던 대지 열이, 이제는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는데도 그 기세를


잃지 않고 온도를 꾸준히 높여 갔다.

끼익. 건욱을 태운 차량이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를 꾹꾹 눌러 가며 운전하다 멈춰 섰다. 그는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주변에 가구 수가 많지 않은 외진 동네였다.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어 외부인의 접근성도 나빴다. 그러나
건욱은 이곳이 아주 익숙했다.

“뭔 놈의 날씨가 중간이 없어. 언제 겨울 오나.”

그는 주변을 두루 살피다 낯익은 벤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하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이 위에,
그와 서림은 낮이고 밤이고 몇 번이고 앉아 서울 한복판을 내려다보았다. 전망이 좋은 것에 비해 인적이 드물어서
종종 산책을 하다 여기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물론 오래전 과거에 말이다.

건욱은 편안하게 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치고는 고개를 젖혔다. 뒤쪽에 거꾸로 보이는 산책로 끝에 서림의 집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었다.

“구서림…….”

추억이란 정말 잔인하고도 친절했다.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릴수록 금세 그리운 기분이 물씬 아지랑이처럼


일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신은 서림이 나타난 이후로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그를 보면 본능적으로 여러 가지
감각들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불러들일 때부터 이미 이럴 줄은 알았으나, 제 예상보다 훨씬 동요가 심했다. 그는 요사이 서림 때문에 정말이지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그런데 이걸 설명할 단어가 마땅치 않았다. 이게 자신이 익히 아는, 그 신열처럼 뜨거운
감정이 아니었으면 싶은데 왜 자꾸 그런 쪽으로밖엔 생각이 치닫지 않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를 다시 제 곁으로 부른 게 잘못인 걸까.

하지만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구서림…….”

조용히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 보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의 발소리 같았다.
사람의 행동이야말로 본인의 기질과 품성을 드러내 주는 분명한 지표였다. 이 규칙적이고, 분명한 발걸음이 소리
주인의 명확한 성격을 증명했다. 그리고 건욱은 그런 군더더기 없는 성향의 누군가를 잘 알았다.

감은 눈의 새카만 시야 위로 단정한 서림의 얼굴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아니겠지.’

그가 안일하게 생각을 삼키는 동안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벤치의 근처까지 도달한 모양인지 서서히
균일한 소음이 잦아들었다. 안 좋은 예감이 오로라처럼 일었다.

결국 버티다 못한 건욱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제일 먼저 가시거리 내에 들어온 건 청바지를 입은 어떤 남자의 늘씬한 하반신이었다. 긴 종아리가 감춰진 옷


너머로도 고스란히 도드라졌다.

‘젠장.’

그 순간, 설마가 진짜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는 속으로 감탄사를 욱여넣었다. 뾰족하게 울대뼈가 선 건욱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뒤이어 제 아랫입술을 슬쩍 감쳐문 그가 카메라 앵글을 끌어 올리듯 길게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구서림.”

마침내 허탈한 음성이 그의 육성을 타고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이와 동시에 상대의 손바닥이 그의 이마를 툭,
손뼉 치듯 내려쳤다. 건욱이 미간을 구겼다.

“아파.”

“네. 선생님 제가 구서림이에요. 뭐 용건 있으세요?”

난감해진 건욱의 얼굴이 미세하게 창백한 빛으로 질렸다. 서림은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너 뭔데 변태처럼 이 시간에 남의 동네 와서 남의 이름 애타게 부르고 그러냐. 진짜 징그러워 죽겠네. 내가


이거 하지 말라 그랬지. 폭력과 강제력의 A to Z 보여 준다고.”

달빛을 고스란히 등지고 있는 서림의 눈가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은 오차 범위
없는 진심 같았다. 잠시 제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던 건욱은 자세를 고쳐 앉아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팔을 척 걸친 채 서림을 돌아보았다.

“너 뭐 하냐, 여기서?”

도리어 건욱이 묻자 서림이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내가 물어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 동네잖아.”

“이 동네 땅 구서림 씨가 다 전세 냈어?”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다만 이 언덕 위가 제건욱이 살면서 올 일이 그다지 없는 고지대고, 하필이면 여기


5 분 거리에 내가 살지. 대체 왜 왔는데?”

사전에 건욱의 반격을 원천 차단한 서림은 이번엔 네가 설명할 차례라는 듯 턱짓했다.

대충 눙치고 넘어가 볼까 했던 건욱은 괜히 머리 위로 뜬 달을 올려다봤다. 깨끗한 하늘을 배경 삼아 잘 발광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새침데기 같았다. 그가 다시금 시선을 내리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는 도망가거나
사라지지 않고 제 시야 안에 머물러 주고 있는 상태였다. 건욱은 한참이나 별말 없이 제 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직시할 따름이었다.

“야, 제건욱. 대답 안 해?”

“너 어디 가, 야심한 시각에.”

“집에 생필품이고 식료품이고 아무것도 없어서 사러 편의점 간다. 문제 있어?”

“없어. 없으니까 나 차 한잔 주라.”

이 느닷없는 논리 점프에 서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 뭘로 들었어. 집에 뭐가 없다니까?”

“인스턴트커피도 괜찮아. 입에는 안 맞지만 지구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지랄한다. 그런 것도 당연히 없어. 물 한 병 겨우 있다고.”

“그럼 아쉬운 대로 물 주면 되겠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 집이 우물이고 네가 무슨 나그네야?”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서림의 얼굴이 말을 매조지고 입을 다무는 순간 하얗게 질렸다. 영문을 모르는 건욱은
그가 아픈 게 아닐까 벌떡 일어나서 서림 쪽으로 다가오려 걸음을 뗐다. 동시에 서림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그가 아주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는 바람에 간격은 금세 좁혀졌다.

“구서림, 너 괜찮아?”

“안 괜찮을 일이 뭔데. 당연히 괜찮아.”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찰나간 눈앞이 아찔해질 만한 상상을 했을 뿐이었다. 서림은 조금 전 무심코
건욱이 제집에 잠시 들어오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러다 아직 그가 5 년 전 쓰던 물건들이 집 안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되새겼다.

그 생각의 나래는 망망대해를 건너 자연스럽게 그 광경을 본 건욱의 반응으로까지 이어졌다. 건욱이 지을 의아함
섞인 질린 표정을 상상하자, 뿌연 안개가 찬 듯 가슴이 턱 막혔다.

애써 당혹감을 감춘 서림이 덤덤한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럼 나한텐 용건 없는 거지?”

어떤 형태로든 대답이 떨어진 순간 가 버릴 기세자, 그건 두고 볼 수가 없겠다는 듯 건욱이 서림의 팔을 서둘러


붙잡았다. 어느 틈에 팔이 붙들려 있어서 서림이 어깨를 들썩였다. 놓아 달라는 의미였는데 그가 도통 알아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려 제 의사 표현을 명확하고 공고히 해야만 했다.

“놔.”

“기다려, 구서림.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냐. 네 생각이 났으니까 왔지. 난 용건 더 있어.”

“그러게 말을 하라니까. 뭔데.”

몇 번이고 건욱이 제게 천명했듯 ‘한국 예술단의 제건욱’의 말이라면 들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걸 입증하듯
서림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 주고 있자니, 건욱이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양 차분히
한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입을 달싹였다. 모양새 좋은 그의 입술이 몇 번 제 위아래의 살갗끼리
쓸리다가 결별을 고하고 멀어졌다.

“구서림.”

“그러니까 빨리 말을 하…….”

“나 손 좀 잡아 주라.”

사락, 두 사람의 옷자락 위에 스친 바람이 미세한 마찰음을 일으키곤 떠나갔다. 그러는 동안 서림은 깊이
침묵했다.

마음을 근육처럼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일까.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서림은 큰 동요 없이 대처하는 방법을 제발 좀 깨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늘 서툴기만 해서, 건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처음엔 장난을 치는 건가도
싶었다. 그런데 건욱의 표정이 꽤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이럴 때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은 회피였다. 서림이 도망치듯 걸음을 내디뎠다. 힘을 안 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제


팔을 붙들고 있는 건욱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서서히 벌어졌다. 쫓아오는 기척 따위는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걷던 서림이 불현듯
뒤돌아보았다. 무표정한 건욱은 여전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 저 새끼 장단에 맞출 수가 없네.”

나지막이 혼잣말한 서림은 다시 그에게로 다가섰다. 제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뾰족하게 날을 세워


쏘아붙였다.

“별안간 남의 손은 왜. 욕구 불만이신가?”

“넌 내가 널 그런 취급 했으면 좋겠어? 욕구 해소용?”

장난이나 어떤 특정한 의도를 지닌 게 아니고서야 남자끼리, 그것도 넓은 의미의 직장 동료끼리 친근하게 손잡을
일이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서림이 그의 속내를 가늠하듯 깊은 눈동자를 신중하게 들여다봤다. 눈에 담긴 애틋한 사랑은 없었다. 안달이 난
듯한 열기 따위도 종적을 감췄다. 서림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었을 때의 건욱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게 함께 보여서,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 왜?”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

“아주 중요한 거.”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하실 생각은 없으시다? 그런데 궁금하니까 손은 잡게 해 달라.”

정확하고 명료한 정리라는 듯 건욱이 짧게 끄덕여 보였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서림은 세련되게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머릿속에서 쥐어짜 냈다. 그러고는 결심이 선 듯 이렇게 말했다.

“돈 내. 그럼.”

“돈? 무슨 돈.”

“공짜가 어디 있어. 난 이거 싫은데 넌 원한다며. 타협하려면 적당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지. 우린 피차


서로한테 원하는 게 없으니까 가장 보편적인 돈으로 하자고. 금전.”

손바닥을 척 내밀자, 건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수표를 마구 꺼내더니 서림의 얇은


재킷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진짜로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서림이 미간을 확 구겼다. 안 된다는 소리를 에둘러 한 거였는데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 눈치 빠른 건욱은 외려 뻔뻔하게 나왔다.

울컥한 나머지 질 수 없다는 듯 그걸 꺼내 그가 보는 앞에서 얼마인지 노골적으로 세어 볼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건욱이 갑작스럽게 확, 마른 손목을 끌어당겨 서림의 손을 쥐었다. 불편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서림이 뿌리치려
하자 계단 한 층을 더 오르듯 깍지까지 단단히 꼈다.

익숙한 촉감이 제 손을 사로잡은 순간, 서림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건욱의 살갗을
만지게 된 터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 대기 시작했다. 이 떠들썩한 맥박이 그에게 전해질까 봐
불안했다.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있어 봐.”

“나랑 손깍지 껴 가면서 알고 싶은 게 뭔데 대체!”

“끌어안아 봐도 돼?”

당황한 서림은 저항하다 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돼. 그러다 키스까지 한다 그러겠다?”

“그건 돼?”

“제건욱 너 진짜 미쳤어? 왜 이래.”

“믿기지 않겠지만 멀쩡해.”

결국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건욱을 밀어낸 서림이 그에게 잡힌 손도 빼냈다.

그도 억지로 행위를 이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인지 순순히 놓아주었다. 서림은 어쩌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멀쩡히 잘 협력하다 퇴근해 놓고 예고도 없이 집 앞에 찾아와 있질 않나, 연인 간에나 할 법한
스킨십을 해도 되냐고 물어 오질 않나. 숨기고 있는 건욱의 의중이 무엇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뭐 하자는 거야. 미친 거 아니면 취했냐?”

“한 방울도 안 마셨어.”

“그런데 왜 이래. 이것도 친밀감 형성의 일환이야?”

“아니. 궁금한 게 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뭔데 그게!”

“너한테 아직 떨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다. 덕분에 서림의 속눈썹이 요란할 정도로 움찔 떨렸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면
육안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건욱은 두 개의 손이 겹쳐졌던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느라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저 나른하게 덧붙였다.

“내가 슬슬 진짜로 좀 헷갈려서.”

‘헷갈리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오래였든 찰나였든
그런 착각이 들었던 정황이 건욱에게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걸 증명하듯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깊이 생각하는 게
있는 듯 보였다.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진 서림이 떨리는 음성을 감추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물었다.

“그래서, 떨려?”

물 흐르듯 술술 잘도 대답하던 건욱이 돌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체로 정답이 아닐지언정 질문엔 대꾸를 하는
편이었다. 제 기억에 의존해 보면 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이 즉각적인 반응에 왜 자신이 허탈한 기분이 드는지, 서림은 그걸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론이든
마음에 차지 않을 게 자명했다. 꼭 아무도 오지 않을 어둡고 아득한 골목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외로움, 쓸쓸함. 그런 것들 말이다.

“하,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이 정도면 자격증 줘야 돼. 진짜 기가 막히네.”

“그런데 너 손이 너무 뜨겁다. 열 있는 거 아냐? 열 자주 나잖아.”

너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지, 이 씨발 새끼야.

서림은 으득 치아를 씹었다.

“내 손이 뜨겁든 발이 차든 신경 꺼.”

“내 신경을 왜 널 위해서 꺼야 되는데.”

“진짜 이게.”

“그래서 물 진짜 안 줄 거야?”

그는 잊었는지 모르겠다. 했던 말 또 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안 준다니까. 흙탕물도 너한텐 아까워.”

“와, 너무하네. 구 감독 계약금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데.”

“파기하든가.”

“또 그렇게는 못 하지.”

삑. 산뜻한 대답과 함께 스마트 키로 차의 시동을 건 건욱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벤치에서 일어나


창백해진 서림을 향해 다가왔던 이후 처음 걸음을 이동한 것이었다. 계속 왔다 갔다 하던 서림과 달리 그는 계속
거기 산처럼 서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또한 보폭이 큰 그쪽에서 물러나고자 하니 이렇듯 쉽게, 또
빠르게 서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을 뻔한 서림이 괜히 제 바지춤을 닦는 것으로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건욱이
닿았던 자리의 온기가 날아갈 것 같아서 금세 관뒀다.

떠나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한 박자 늦게 서림도 돌아서려는데, 건욱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넌 살이 더 부드러워졌다.”

짐작도 못 했던 말을 듣고 서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정말 별말 아닌데, 이상하게 외설적이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버퍼링이 걸린 듯 찰나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미간을 흠씬 구겼다.

“놀고 있네. 계절 타세요?”

“그런가 보다. 갈게, 쉬어.”

심플하게 미소 지으며 손 인사 한 건욱은 완전히 서림을 등져 뚜벅뚜벅 걸었다.

여유롭게 능청을 부리던 그의 얼굴이, 돌아서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지그시 깨문 그는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쥔 제 손을 힐끗 내려다본 그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언덕을 주행해 동네를 벗어났다. 룸미러로 뒤편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조차 하지 않고
직진 일변도였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서림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뒤늦게야 건욱에게 붙들려 있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대편 손으로 그 위를 쓸자 죄다 식은 뒤였다. 조금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스스로 깍지를 껴
봤지만, 제 것에 비해 큰 그의 손만 한 안정감이 없었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쉰 서림이 깍지를 풀었다. 그러다 불현듯 건욱이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간 수표들이 떠올라 그것들을
꺼내 들었다.

100 만 원 권이 여덟 장. 총 800 만 원이었다.

“손 한번 잡아 보겠다고 많이도 넣었네.”

그는 얇은 종이들을 손아귀에 꽉 쥐어 구기고는 건욱이 앉아 있던 흰색 벤치를 힘껏 ‘뻑!’ 하고 걷어찼다.

“윽……! 아파.”

그러다 발등이 아파 울상이 됐다. 결국 서림은 걷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뾰족한 무릎 위에
이마를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의 무대에서 건욱이 남기고 간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번잡하게 만들었다.

〈너한테 아직 떨리나.〉

그게 궁금했던 주체는 건욱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졸지에 애먼 서림이 답을 얻고 말았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는데도, 서림은 도색 잡지를 처음 본 사춘기 남자아이처럼 얼굴이 연신 화끈거렸다.

역시나였다. 염려한 그대로였다. 건욱을 자주 볼수록 자신은 5 년 전의 일이 미치도록 후회됐다. 헤어지지 말걸.
좀 버틸걸. 매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가능하대도 자신은 아마 같은 선택을 할 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알면서 예술단으로 와 달라는 제안을 수락했으니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럽고, 또 비참했다.

* * *

달력의 날짜상으로 아직까진 후덥지근할 시기였는데, 오늘따라 날이 좋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날씨가
화창해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온화했다.

커피의 향과 맛이 좋은 로비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한 잔 주문한 서림은 건물 외부에 있는 테라스로 나와


자료들을 점검했다. 오늘은 캐스팅된 전체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첫 상견례를 하는 날이었다.

아직 서림이 외부인이라 여기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범접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 건지 친숙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많진 않았다. 그래서 앉아 있는 그를 보고도 대체로 눈인사 정도만 하고 지나갔는데, 누군가 한 사람은
아예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었다. 뒤이어 서림이 손에 든 커피를 쓱 빼앗는 통에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인물 특정이 가능했다.

제게 동의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은 건욱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좋은 아침.”

고개를 옆으로 틀자 뻔뻔한 얼굴의 그가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건욱 때문에 잠을 설쳐 전혀 좋은


아침이 아니었던 서림은 기계적으로 미소 지었다.

“네에, 좋은 아침입니다. 제 단장님.”

“왜 그래. 둘밖에 없는데.”

“슬슬 거리감을 좀 형성하고 싶어서요.”

“어제 내가 손잡은 것 때문에 그래? 유난은. 자빠뜨린 것도 아닌데.”

놀란 서림이 혹여 들은 사람이 없을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다행히 가시거리 내에 지나다니는 단원들은 안
보였다. 헛소리를 부디 요주의해 달라는 듯 싸늘하게 그를 쏘아보다가, 자신이 물었던 빨대로 고스란히 커피를
마시는 건욱을 인지하곤 미간을 구겼다.

“커피 내놔. 졸려서 마시는 거란 말이야.”

“왜 졸려. 구 선생 어제 잠을 못 잤어? 왜, 나 때문에 설레서?”

영 비껴 나간 소린 아니지만 그 이전에 매우 황망해진 서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진짜 가끔 또라이 같은 거 알아?”
“뭐, 주제 파악은 좀 하는 편이라서.”

“그거라도 하니 다행이다. 안 내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건욱은 서림이 보고 있던 태블릿 PC 화면을 눈에 담으며 어깨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인체가 아슬아슬하게 맞닿는 순간 서림이 몸을 비틀어 밀어냈으나, 건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깨알 같은 글씨들과
사진 따위들을 꼼꼼하게 훑었다.

“제 단장. 무거워, 좀 비켜.”

일순 건욱이 고개를 서림 쪽으로 휙 돌렸다. 그 바람에 서로의 얼굴이 조금만 앞쪽으로 기울이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숨을 내쉬면 숨결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너갈 듯했다. 크게 당황한 서림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건욱이 그 붉고 촉촉한 살결 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로의 시선이 몹시 지근거리에서 부대끼는 통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좀…… 떨어져.”

꽤 절박하게 내뱉었으나 그는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두 손으로 어깨도 밀어 봤지만 간격이 좁아서 제
완력으론 소용이 없었다.

“제건욱,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좀 떨어지라고!”

언성을 좀 높이니 건욱이 그제야 서서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하나 거리가 여전히 가깝긴 마찬가지였다. 겨우겨우
제 몸을 뒤로 젖혀 틈을 번 서림이 그의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 주고, 상박까지 힘껏 밀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순히 장난감처럼 자신이 하는 대로 움직여 주던 건욱이 예고도 없이 제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읏, 또 뭐!”

“나도 못 잤어.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나 너 때문에 못 잔 거 아니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건강 관리 잘해.”

탁. 거의 다 비운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테라스와 연결된 카페 카운터로


가서 서림이 마신 커피와 똑같은 걸 하나 주문하더니 저쪽으로 가져다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고는 뒤이어
테라스를 완전히 빠져나갔다. 도대체 느닷없이 나타나서 또 별안간 가 버리는 그의 심리를 모르겠다.

망연히 앉아서 그의 동선을 눈으로 좇던 서림은 뒤늦게 건욱을 붙잡았다.

“야, 제 단장!”

건물 출입구로 향하던 건욱이 돌아보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마주하니 늘씬한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떨어져 있는데도 인상이 분명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림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쩌면


그저 처음부터 이유 같은 건 없었고 가는 그를 붙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냐. 이따 봐.”

시선을 피하며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하자, 고개를 갸웃한 건욱이 돌연 제 쪽으로 걸음을 재촉해 되돌아왔다.
가까이 오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의 행보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어느 틈에 제게 접근한 그가 자신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붙들어 마사지하듯 길게 밀어 올렸다.

“읍,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응답하지 않은 그는 한 번 더 서림의 입꼬리를 올려 주려 손을 뻗었다. 한 번은 참아 줬지만 두 번째부터는 허용


외 범위였다. 서림이 결국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리를 쳐올릴 때 ‘뻑’ 하고 묵직한 뼈마디가 강타당해 큰
타격을 입는 소리가 네모난 모양의 테라스 안에 골고루 울려 퍼졌다.

“윽……. 와, 진짜 아파.”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사람을 정신없게 해.”

“아, 넌 건드릴 때 돈 내야 되지? 말만 해. 아시다시피 남는 게 그거라서.”

이 대답이 기가 막힌 서림은 이를 갈았다.

“그건 싫단 소리였지. 진짜 돈을 줘? 돈이면 단 줄 알아? 하, 800 만 원. 자선 사업 하냐?”

“그럼 딱 잘라 거절을 하지. 먼저 돈 타령한 게 누군데. 네가 돈 내면 만져도 된다니까 근검절약하던 내가 자꾸


사치하고 싶잖아.”

“…….”

“덥다, 적당히 하고 올라와라.”

손가락 등으로 서림의 이마를 가볍게 툭, 건드린 그가 단번에 돌아섰다. 시야가 그의 손 때문에 가려진 서림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차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은 탓에 건욱은 이미 한참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로비로 들어가는 문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아쉬웠다. 선뜻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는 열망이 전신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가 입을 대고 마셨던 제 음료는 이미 얼음밖에 안 남아 있었다. 물끄러미 그 위를 살피던 서림이 슬리브에 손을


댔다. 작심한 듯 그걸 들어서 검은색 빨대 위 건욱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빨았다. 쪽, 하고 한껏 묽어진
커피가 넘어오는 소리는 꼭 경쾌한 입맞춤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나 지금 뭐 한 거지.’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타악. 테이블 위에 음료를 내려놓은 서림은 두 뺨을 벌겋게 붉혔다.

* * *
아역과 성인을 막론한 출연 배우들과 「크리스타」 연출진들이 거의 다 모인 한식당 내부가 바글거렸다. 거기에다
아이들의 경우 돌봐 줄 어른들도 동행해야 해서 총 수용 인원이 100 명이 훌쩍 넘는 공간이 빈틈없이
시끌벅적했다.

대본이나 안무가 완성될 동안 연출이 집중해야 할 건 배우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서림은 부모들이 밥을 먹여 주는 아역 배우들을 한 명씩 살펴봤다. 그러다 시선 끝에 닿는 건욱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는 작가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건욱은 이렇게 멀리서 봐도 매우 눈에 띄었다. 군중 속에 있어도 그가 제일 먼저 시야에


박혔다. 늘씬한 옆모습과 굴곡이 분명한 윤곽은 근사했다. 그의 얼굴은 누구라도 한 번쯤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바람마저 그가 선 방향으로 불고자 할지 모른다.

‘또 왜 이래.’

그를 관찰하고 있자니 서림은 왠지 모르게 감기 환자처럼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괜히 애꿎은 제 손바닥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피가 돌아 조금 붉어져 있었다.

제게 떨리나 헷갈리기 시작했다던 그는 고민을 모두 끝내고 정상 궤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능청스럽고,


여유롭고, 안정적인 여느 때의 그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매 순간 계속 마음 한구석이 파도가 일렁이듯
요동쳤다.

가까이 있는데도 그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물리적 거리가 먼 해외에 체류할 때에 비하면 매분 매초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슬슬 그냥 간과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제 마음을 모르는 건욱이 도리어 은연중
자신을 부추기고 있어서 꼬인 매듭을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자, 여기 집중해 주세요!”

서림이 벌게진 제 손을 보며 사념에 빠져 있는 틈을 타 회식 참석자들의 집중을 요구하는 조연출의 음성이


들려왔다. 건욱이 고개를 돌렸다. 서림도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듯했는데 그
틈에 조연출이 벌떡 일어서 정확히 서림의 앞을 가리는 바람에 시야가 죄다 가려졌다.

제건욱의 모습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제 눈앞에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그게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다.
서림이 입술을 감쳐문 사이, 이윽고 조연출이 소주병을 숟가락으로 탁탁 치는 까랑까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우리 배우들, 스태프들 아까도 연습실에서 뵀지만 서로 인사들 하시고요. 특히 아역들 싸우지 말고,
착하지? 또…… 완성도 있는 공연 만들려면 배우들과 연출진 간의 호흡이 선행되어야 해서, 워크숍이라 쓰고 MT
라고 읽는 1 박 2 일 정도 합숙을 다녀올까 합니다. 일정 곧 저희 연출 카페에 고지할 테니까 참고해 주시고요.”

워크숍이나 MT 가 무엇인지 주변 어른들에게 묻던 아이들이, 단순히 놀러 여행을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지 화색을


띠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연출이 덧붙였다.

“아역 배우들은 제가 부모님들 편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막간 공지 사항 여기까지입니다. 맛있게 식사


마저 하시면 됩니다!”

씩씩하게 안내 방송을 하던 조연출은 박수를 받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림은 워크숍으로 예정되어 있는 날짜를 휴대폰 달력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다들 신나 있는 와중에 혼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극의
주인공인 ‘크리스타’ 역할의 예영이었다. 예쁜 이름이 있긴 했지만 작중 이름에 친숙해지기 위해서 다들 원작을
따라 크리스타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사실 서림은 처음부터 저 아이가 노골적으로 신경 쓰였다. 세상에 혼자 동떨어진 어린아이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너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그가 예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 순간 제게 닿은 시선을 느껴 힐끗


돌아보자, 어느 틈에 건욱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림은 그걸 회피하고 예영에게 말을 붙였다.

“예영아, 음식이 입에 안 맞아? 별로 못 먹네.”

“그런 거 아니에요.”

“고기 별로면 전 같은 거 주문해 줄까?”

“아니요.”

“그럼 음료수?”

그제야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던 예영이 서림과 눈을 마주치며 끄덕였다. 3 수 끝에 정답을 찾게 돼


다행이었다. 종업원을 불러 탄산음료 두 병을 주문한 서림은 다시 예영을 지켜봤다. 그때까지도 먼발치에 있는
건욱의 눈길은 여전히 따갑도록 서림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는 계속 모른 체했다.

“먹고 싶으면 진작 말을 하지.”

음료의 뚜껑까지 따서 잔에 따라 준 뒤라야, 다시금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미묘하게 조금 전과 느낌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건욱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그가 담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표정이 무심했다.
그런 건욱의 뒤를 상기된 얼굴의 여배우가 따르는 게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서림이 혼잣말하며 궁싯댔다.

“대체 몇 다리나 걸치는 거야. 발기 부전이라고 소문이나 나라.”

“감독님, 발기 부전이 뭐예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예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 왔다. 당황한 서림의 얼굴이 어찌할 바를
몰라 차갑게 식었다. 곧이어 궁여지책으로 아이의 양쪽 귀를 정화해 주듯 손으로 막았다가 떼어 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외국 말이야. 그런데 예영이는 이런 거 먹는 것보다 음료수 마시는 거 더 좋아하나


보네?”

“그게 아니고 이가 빠져서요.”

예영은 그 말에 ‘이’ 하고 제 치아를 보이더니 동그란 눈동자를 서림에게 옮겼다. 순간적으로 귀여워서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서림이 빈 잔에 조금 더 음료를 따라 주려 하자, 아이가 직접 탄산음료 주둥이에 빨대를 꽂아서
작은 입으로 꼴딱꼴딱 마시는 모양새가 야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몇 번 했더니
습관이 될 것 같았다,

“또 만나게 돼서 반가워.”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 제 말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예영은 서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음료를
마시다가, 병을 내려놓았다.

“감독님.”

“응?”

“감독님도 제가 노래하고 춤추는 게 좋으세요?”

“그러니까 크리스타가 되어 달라고 했겠지?”

“그렇구나.”

왠지 누군가 본인의 존재를 긍정해 주고, 또 환영해 주길 원하는 투였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테이블의 예영 또래 아이들은 이미 저들끼리 무리를 형성해서


삼삼오오 어울리고 있었다. 예영만 혼자였다.

제게도 분명히 이런 나이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정확히 문제의 원인 파악이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된
서림의 입장에선 아이가 주인공이라서 시기 질투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거나, 예영의 성격이 좀 수줍은 편이라
겉돌고 있는 게 아닐까 정도밖에 안 떠올랐다.

그는 짠한 기분이 들어서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였다.

“이 공연 같이해 주겠다고 결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아이도 그제야 안도가 되는 듯 웃어 보였다. 서림이 함께 웃어 주며 예영의 앞에 먹을 만한 반찬들을 덜어 놓아


주고 있는데, 마침 옆자리의 스태프들이 불 이야기를 꺼내며 소란을 피우는 게 느껴졌다. 흠칫한 서림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딸려 갔다. 역시나, 우려한 대로 그들이 주방 안쪽에서부터 휴대용 버너를 받아 와서 테이블
위에 놓는 게 보였다.

딸깍, 딸깍. 불을 켜는 소리가, 기억 속 제 엄마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점화하던 스산한 소리와 겹쳐졌다.

이윽고 팟, 하고 버너에 푸른색 불꽃이 들어왔다. 서림의 몸이 필연적으로 긴장했다. 메뉴가 다 조리되어
순차적으로 나오는 한정식집이라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중에 갑자기 표류하는 배처럼 오갈 데가 없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안간 초조하게 구는 제 모습이 이상했던지 예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어?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그는 아이에게 하는 말인지, 제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짤막한 위로와 함께, 예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때였다. 몇 미터 전방에서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에 있던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서림과 예영의 것도 함께였다.
두꺼운 창문 밖에는 건욱이 서 있었다. 그는 삐딱하게 서서 자신이 한 행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한 번 더 창을
세차게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드리더니, 정확히 서림을 겨냥해 손짓했다. 나오라는 양 손가락을 까딱,
했을 때 대다수의 시선이 서림 쪽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덕분에 예기치 않게 집중받게 된 서림의 얼굴이 수치로
조금 붉어졌다.

“왜 저래, 갑자기.”

어정쩡하게 앉은 상태로 혼잣말하듯 대꾸하자 그가 뭔가 말을 내뱉었다. 소리까지 들리진 않았으나 입 모양으로


미루어 ‘뭐 해, 나와’ 정도의 말인 것 같았다. 서림은 일단 무시했다.

그러자 어느 틈에 안으로 빠르게 들어온 건욱이 제 팔을 덥석 붙잡는 것이었다.

“왜 그래, 너.”

“나와. 급히 할 얘기가 있어.”

“나랑?”

“너니까 네 팔을 잡고 있겠지. 어제 이 얘길 한다는 걸 깜빡했어. 잠깐 좀 따라 나와.”

이윽고 그가 어이없어하는 서림을 이끌고 그대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07.

식당의 출입문 왼편에는 외부 흡연장이 위치했다. 건욱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이다. 서림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직통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선 아까 전 그를 쫓아 나가던 배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중요한
대화를 하기에는 썩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서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건욱이 자리를 좀 비켜 달라는 듯 여자를 향해 가벼이 눈짓했다.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마지못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

“보니까 같이 나가던데. 막간 데이트하시던 거 아니었어? 왜 도로 들어가라 그래.”

그의 팔을 겨우 뿌리친 서림이 은근한 비난을 섞어 내뱉었다. 건욱은 좀처럼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곤 뒤늦게 눈살을 찌푸렸다.

“넌 내가 여자하고 같이 있기만 하면 다 노는 거 같지. 기대를 배신해 미안하지만 난 같은 업계 사람이랑은 연애


절대 안 해.”

“그럼 왜 여기 단둘이 있었는데. 앞뒤 맥락이 너무 훤하잖아.”

“이 흡연장이 내 거야? 라이터 꺼내고 보니 따라 나와 있더라. 괜한 오해 받으면 안 되니까 우리 내외하자고, 넌


다시 들어가라고 했어야 맞나 보다. 앞으론 참고할게.”

억울하긴 했던지 대꾸하는 내내 표정이 안 좋았다.

조금 전에 목격한 것으로 미루어 대화 중 함께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여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건욱을 따라 나왔던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가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뒤쫓았던 게 꽤나 잦았던 일이라
서림은 그게 면피용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할 말이 없어진 서림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차츰 식당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방향으로 시선이 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예영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손을 흔들어 주는데 건욱이 갑작스레
서림을 시야가 차단된 사각지대로 몰았다. 인사 중에 얼떨결에 구석진 자리에 서게 돼 황당했다.

자세를 고쳐 짝다리를 짚고 선 서림이 그를 힐끗 살피며 물었다.

“뭐야.”

건욱은 이런 추궁을 받는 제 쪽이 도리어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뭐긴. 난 널 구해 준 거야.”

“네가 뭔데 날 구해.”

“네가 앉아 있던 자리가 총체적 난국의 한 국면 같아 보여서. 건너편에선 버너에 불 피우지, 옆에는 예영이가…
….”

쿨럭. 전혀 영문을 몰라 황당해진 서림이 헛기침했다. 가스 불이야 제 오랜 스트레스 기제인 걸 그도 알고


있다지만 밤톨만 한 예영의 핑계는 뭔가 싶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제건욱 네가 훨씬 더 불편해.”

“구서림 너 괜찮겠어?”

그의 염려는 진심 같았다. 축 가라앉은 음성으로 미루어 기분이 썩 유쾌하지도 못한 듯했다. 그런데 서림으로선
정확히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건욱의 눈을 보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니, 대꾸를 기다리려는 건지 그가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건욱은 서림을 그 자리에 세워 둔 채로 주변 난간에 걸터앉았다. 장초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동안,


서림은 고민을 거듭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해답이 안 나왔다.

“간접흡연이 직접 흡연보다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거 아시는지 모르겠네.”

서림이 혼잣말하듯 그러자, 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희뿌연 담배 연기를 서림을 향해 훅


불어 날렸다. 서림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나 일찍 죽기 싫어. 한 번만 그 짓 더 해. 확 좆 대가리를 날려 버리는 수가 있다.”

“뭐 생식 기관을 어떻게 날리시게. 궁금하다. 방법 좀 공유해 봐. 꼴 보기 싫은 새끼 있을 때마다 나도


써먹자.”

“민감하게 나오네. 고자 되는 건 좀 걱정되나 보지?”


“아주 우려되지. 너도 잘 생각해 봐. 나한테 그게 달린 게 나을지, 잘린 게 나을지.”

그걸 왜 제게 묻는 건지 모르겠다. 뺨이 홧홧해진 서림이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걸 왜 나한테 생각하래?”

“너 아직 내 첫 질문에 대답 안 했어. 그거 먼저 하고 다른 대화 이어 가야지. 그게 순서야. 네가 그거부터


대답하면, 나도 이 말에 대답할게.”

한쪽 다리를 척 꼬고 앉은 그가 퍽 황망해 보이는 서림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래서 서림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 예영이랑 있는 거 불편해 보여?”

“예영이한텐 문제없어. 다만 네가 저 애를 보면서 너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여. 어떤 부정적인 일이


반복되고 잦아지면 인간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야. 그거에 익숙해지거나, 더 힘들어지거나. 너 이대로
괜찮겠냐고.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정곡을 찔려서 입이 절로 다물렸다. 동시에 그들의 숨이 약속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이를 보면서 제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불행의 결은 다르지만, 서림은 지구상에 혼자
동떨어진 것만 같은 외로운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혼자가 된 어린아이가 현재 느끼고 있을 불안과 쓸쓸함
따위들을 짐작하며 오래전 제 괴로움들을 다시 떠올려 재생하고 있던 것도 맞았다. 이를테면 시간을 가로지른
불행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제 단장도 예영이 원했잖아.”

“너를 힘들게 하면서까지 저 앨 쓰고 싶진 않아. 배우 교체는 지금이 제일 적기야. 본격적으로 연습 시작하면


호흡도 흐트러지고 안 좋아. 좀 더 발랄한 아이로 새로 캐스팅을…….”

“난 이대로가 좋아.”

이 응답에 그는 서림을 빤히 직시했다. 눈썹이 힐긋 올라가는 기색도 뺨이 실룩거리는 기미도 없었다. 그저


상대의 외부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듯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며 눈길만 던졌다. 그의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으나, 우아한 백조의 다리처럼 그 물밑에서 아주 바빠 보였다. 그것은 자신을 읽기 위해 신중하게 깊어지는
중이었다.

건욱의 치열한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서림이 분명하게 강조했다.

“내가 또 보자고 약속했어. 행운이 있을 거라고. 예영이가 이 공연 거치면서 좋은 기억이 많이 생기면, 나도


뿌듯할 거야.”

이 세상에 자신 같은 인간이 또 없었으면 좋겠다는 건 서림의 해묵은 바람이기도 했다. 그걸 잘 아는 건욱이 꽤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점점 적막이 지속됐다. 결국 서림도 그의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건욱의 옆에 놓여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제 쪽으로 끌어와 한 대를 입에 무는 순간, 힐끗 자신을 본 그가


라이터를 쏙 빼앗아 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입술 사이에 박혀 있던 담배까지 수거했다.
“와, 제건욱. 치사하게. 이 담배 한 5 천만 원쯤 하나 보지?”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편의점에 파는 거야.”

“그럼 왜 빼앗아.”

“네가 불이라면 벌벌 떠는 인간이니까. 붙여서 줄 테니 기다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있던 담배를 완전히 비벼 끄고 한 개비를 더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직접 라이터로 붙을 붙여 ‘후우’ 하고 길게 숨결을 뱉더니 불붙인 장초를 내밀었다. 그걸 보는 서림의
마음은 미로에 갇힌 듯 혼란으로 요동쳤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으면 되는데 필터에 그의 입술이 닿은 터라
선뜻 손이 안 나갔다.

미동도 없는 자신 때문에 의아해하던 건욱이 하는 수 없다는 양 제 쪽으로 와서 턱을 쥐고 담배를 입술에 물려


주었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담배의 뿌연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자 보다 서림의 시야에 명확하게 그의
얼굴이 노출됐다. 너무 가까웠다. 둔부를 달싹여 뒤로 피하려는 제 속내를 눈치챈 건지 건욱이 더 턱을 단단히
쥐면서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비뚜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구서림.”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문 채로 왜, 하듯 눈짓하자 그가 덧붙였다.

“이제 나도 왜 너한테 생각하라고 했는지 대답하려고.”

그 말을 하는 건욱의 눈동자가 몹시 진지했다. 마치 미세한 독이 얇은 실선을 타고 외줄 타기 하듯 제 안으로


들어와 느릿한 속도로 온몸에 퍼져 나가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뒤이어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붉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우리 잘래?”

쿨럭. 서림이 당황한 나머지 또 기침을 뱉어 냈다. 자연히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제 턱을 쥐고
있던 건욱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내지 않았다면 뜨거운 불이 얼굴 피부 위를 스쳤을지도 몰랐다. 엄마의
영향인지 화기는 늘 서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상상을 하자 눈앞이 아찔해서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는 동안 능숙하게 서림의 몸을 부축해 준 건욱이 장초마저 비벼 끄곤 자신을 태연자약하게 응시했다. 서림은
여러모로 어이가 없었다. 그의 손바닥이 담뱃불로 살짝 지져진 걸 알았지만 황당해서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당기는데, 약간.”

“네 몸이 당기는 데 왜 나한테 자자고 해.”

“내 몸이 당기는 게 너니까.”
일순 할 말을 잃었으나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건 왠지 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별 동요 없이 무표정해서
그런 기분은 더했다.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내뱉은 서림의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몸 위를 어루만졌다.

“내가 그렇게 섹스를 잘하는지 몰랐네.”

“솔직해도 돼?”

“안 그러려고 그랬어?”

“너 못해. 넣을 땐 통나무같이 뻣뻣하고. 박을 땐 그냥 자지러질 줄만 알…….”

“이 새끼가.”

듣다못해 끝내 분개한 서림이 벌떡 일어나 건욱의 멱살을 확 쥐었다. 깨끗한 눈동자가 서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충분히 서림을 밀어내거나 뿌리칠 수 있는데도 그는 얌전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건욱은 앉아 있고, 자신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으니 계산상 이로운 건 제 쪽이다. 하지만 서림은 이런 태도를
통해 그가 이미 감정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을 직감했다.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이게 반전 드라마인 줄 알아?”

“넌 못하는데. 무슨 꿀 발랐나. 나 지금 되게 너랑 자고 싶다.”

결국 오른손을 그의 셔츠 깃에서 떼어 낸 서림이 꽤 많은 감정을 손안에 담아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건욱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윽…….”

일순 건욱의 상체가 비틀거렸다.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몸도 조금 쏠리고 기울어져서 사각지대에서 벗어났다. 그


바람에 식당의 창 너머로 몇몇 단원들이 휘청거리는 그를 보게 된 모양이었다. 그가 제 턱을 재조립하듯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유리창에 노크를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서림이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눈길을 쏘아 보내자 건욱이 번거로워하는 표정으로 제 몸을 꼿꼿하게
일으켰다. 그러고는 금세 싹 안면을 바꿔 스태프들을 향해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해 보였다.

다행히 별문제 없다고 인식한 듯한 몇몇 사람들이 창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아. 그 짧은 시간 안에 우주와 지구를 오간 것처럼 지친 서림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너 성희롱에 취미 붙였어?”

“그래서 안 자?”

“안 자, 미친 새끼야.”

“나 턱 아파. 너도 깽값은 물어야지.”


제 살짝 부은 턱을 가리키며 그러는 통에 열받은 서림이 다리를 움찔했다. 씨근덕거리며 이번엔 정강이까지
걷어차려 오른발을 뻗으려 하자, 건욱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내가 자체적으로 지불할게.”

“얻어터진 거 억울하면 인생을 똑바로 살아.”

냉정한 경고와 동시에 서림이 가차 없이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구서림!”

그가 이름을 불러도 상대는 다시는 돌아봐 주지 않았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서림의 뒷모습과, 텅 비어 식어 가는 자리를 번갈아 살피던 건욱이 허탈한 얼굴로 도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두 팔을 뒤로 짚어 자세를 편하게 고쳐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드문드문 떠 있었고,
구름이 달을 조금 가린 전형적인 밤하늘이었다. 창공에 뜬 모든 것들이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걸 시야에서 반이라도 가리고 싶어 제 한쪽 손을 들어 올린 건욱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바닥 위의 담배


자국을 눈에 담았다.

서림의 충고대로 인생은 똑바로 사는 게 맞는데, 건욱은 그만 보면 자꾸 막살고 싶어졌다. 얼쩡거리고, 건드리고,
찔러보면서 복잡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 손을 들여다보자 자연스럽게 며칠 전 서림의 집 앞에 찾아갔던 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손바닥에 닿았던 그


보드라운 촉감과 따뜻한 체온이 아직까지도 애틋하다면 서림은 믿을까.

〈그래서. 떨려?〉

그때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당황스러워서 답을 못한 것이다.

“하…… 사춘기 애송이도 아니고. 큰일 났네.”

심사가 복잡해진 그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더니 미간을 구겼다.

* * *

명목상 주말이고 실제로 서림도 출근을 하지 않긴 했지만, 그게 ‘일하지 않는다’의 동의어는 아니었다. 서림은
집에서도 사옥에서와 별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대부분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 오전에도 서림은 거실 납작한 좌식 테이블 위에 각종 서류들과 필기구들,
태블릿 PC 까지 모서리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놓고 업무 삼매경이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의상 디자이너가 샘플로 보내 놓은 사진들이 떠 있었다.

옷을 전부 따로 제작을 하는 편이 제일 좋긴 했지만 「크리스타」는 단발성 공연인 만큼 차후 활용도가 낮았다.


그렇다고 남이 입던 기성복들을 빌리자니 자신들이 원하는 100 퍼센트의 디자인이 나올 리 만무했다. 필연적으로
무대의 완성도가 아쉬워질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만든다면 아이들 몸이 반년 사이에도 금방 자라니까 원래 치수보다 조금 크게…….”

배우들의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찾아내 구체적인 수치들을 눈대중으로 살피던 그는 배우 여러 명의 얼굴을 연달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모든 행동을 중단했다. 어설프게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종이가 사락,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 잘래?〉

그의 나지막한 주파수의 음성을 함께 떠올리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안면의 홧홧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건욱은 어쩌자고 자신에게 그딴 소리를 했을까. 혹시 놀린 건가. 그런 거였는데 제 쪽에서 폭력까지 가하면서
진지하게 반응했던 것이었다면 할 수 있었던 모든 반응 중 최악이다.

머릿속에서 그를 지우기 위해, 서림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걔 제건욱이다. 제건욱. 정신 차려.”

반성의 의미로 제 뺨을 손바닥으로 쳐 가며 다시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그 위에 건욱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니, 왜 자꾸 생각나.

“구서림,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푹. 테이블 위 서류들에 머리를 박은 서림이 눈동자를 열없이 굴렸다.

집에만 박혀 있어서 그런가 계속 잡생각만 일었다. 실내의 공기가 탁해지면 종종 환기를 하듯, 정신도 그런
과정이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서림은 대충 짐들을 정리했다. 차라리 바깥의 카페
같은 곳에 가서 업무를 이어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끝으로 휴대폰을 찾고 있는데 마침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건욱이었다. 처음엔 이것도
그를 생각하다 착시를 본 줄 알았으나, 분명한 현실이었다. 안 받을까도 싶었지만 일 이야기일 가능성이 커서
그러지도 못했다.

“쉬는 날인데 단장님께서 웬 전화.”

회식 때의 일을 떠올리며 꽤 쌀쌀맞게 응답했는데도 건욱은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예상치 못했던


말로 서림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지금 너희 집 가는 길이야. 준비해서 나와. 한 10 분 정도 걸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뜬금없이? 왜? 나 일정 있어. 지금 외출하려는 길이야.”

- 갈 데도 없으면서 무슨 외출. 또 혼자 영화 보러 가게? 너 그거 귀에 나쁘다고 자주 하지도 않잖아.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재능 있고, 네가 잘하는 걸 해.
“집은 능률이 안 올라서 자리 옮긴 다음에 내가 잘하는 일 하려는 건데요.”

- 네 말대로 오늘 휴일이야. 나 그렇게 악덕 단장 아니다.

“내가 워커홀릭이야. 일 말곤 할 것도 없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완벽하게 문장을 마무리할 기회가 서림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중간에 건욱이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 요는 오늘 할 일이 없다는 거네. 그러니까 나와.

“내 말 뭘로 들었냐? 코로? 눈으로? 사람이 귀를 써야지. 쓰라고 달린 건데.”

- 그냥 보자는 거 아니야. 너 나랑 공연 하나 관람하자. 「올리버」라고 아이들 뮤지컬인데, 너한테 도움이 될


거 같기도 해서.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원작으로 하여 만든 「올리버」 역시 한국에선 그리 인기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중 하나였다.

「크리스타」와 같이 아이들이 주요한 인물들이고. 극에서 그들이 처한 불우한 환경도 비슷했다. 그러니 그걸
본다면 어떤 각도로든 제 일에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 전에 의아한 게 있었다. 서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한국에서 공연하고 있어? 올해 국내 공연 라인업에 없었던 거 같은데.”

- 아마추어들 공연이야. 우리 사옥 별관에서 해. 가끔 공연은 하고 싶고 장소는 없는 아마추어들한테 무료로


빌려주거든. 왜, 안 내켜? 생각보다 발상 전환하는 데 큰 도움이 돼.

학부 시절, 이미 졸업해 필드에 나가 있던 그들의 선배들도 아마추어인 후배들의 공연 보러 와 그런 취지의


말들을 했었다. 상대적으로 덜 원숙하고 덜 정제된 공연을 보고 있자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서림도 물론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가뜩이나 그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싫어서 외부로 도망을 치려던 건데, 혹 떼러 갔다 붙인 격으로 아예


실체를 만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었다. 최근 공연 준비 때문에 거의 매일 건욱의 얼굴을 마주하던 차에, 겨우 보지 않을


기회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소중한 이틀 중 하루인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그를 만나야 했는데 오늘도 보는
게 부담됐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냥 내가 혼자 보러 가면 안 돼?”

- 이미 데리러 가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차를 그대로 돌려서…….”

그때였다.

건물 바깥에서 경적 소리가 꽤 크게 여러 번 울렸다. 황급히 말을 끊고 거실 창밖의 지상 주차장을 내다보던


서림은 건욱이 차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건욱도 서림을 목격한 모양인지 운전석 안으로 다시 손을
집어넣어 경적을 요란하게 한 번 더 울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서림이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야, 10 분 걸린다며?”
- 너 나올 준비 하라고 매너를 발휘한 거지. 봤으면 고민 그만하고 내려와라.

뚝.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울컥한 마음에 바람을 맞힐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서림은 건욱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미 자신이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그가 여기까지 올라오거나 혹은 저 주차장에서 어떤
행동을 해 민폐를 끼칠지 가늠도 안 갔다. 얼굴이 두꺼운 그는 초연하고 자신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건 불 보듯
훤했다.

잠시 망설이던 서림은 일단 나가는 것을 택했다. 건물을 벗어나니 건욱이 운전석 문을 친히 활짝 열어 주며


이쪽으로 타라는 듯 턱짓했다.

서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다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왜 운전석을 열어 줘?”

대꾸 대신 그가 차 키를 휙 던졌다. 서림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매끄러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온


스마트 키가 보드라운 손바닥 위에 얌전하게 안착했다.

“나보고 운전하라고?”

“보시다시피 누구 덕분에 손에 상처가.”

제 손바닥 위에 거즈로 덮은 부분을 보여 주는 건욱을 보고 있자니, 황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젓던


서림은 운전석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이런 일은 미리미리 언질을 해. 내가 약속이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너 친구 없잖아. 외출할 줄 몰랐지.”

“꼭 친구 있어야 외출해? 도착해서 전화하면 늦어. 엇갈렸으면 어떡하려고.”

“만났으면 된 거 아냐.”

말을 말자, 하듯 건욱을 지나치려다가 그의 손 위를 덮은 거즈에 절로 시선이 닿았다.

“1 주일째 손에 그거 달고 다니는 거 민망하지도 않냐? 그 담뱃불 자국?”

“1 주일째 달고 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어? 나한테 관심이 아주 많으신가 봐.”

“착각도 병이지. 보연이가 연고 사 오는 거 보고 안 거거든. 너 사실은 상처 다 나았지?”

“와, 적반하장도. 이거 궁극적으로는 너 때문에 생긴 상처인 거 몰라?”

“원인 제공을 누가 하셨는데.”

“그래서 철퇴 맞고 고통을 감수하잖아. 아무튼 운전은 네가 해. 당분간 네가 몰 차니까.”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오늘 그로부터 들은 문장 중 가장 납득이 안 갔다. 형태소 하나하나가 모두 미궁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 검은색 세단은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 차였다. 건욱이야 원래 차가 여러 대 있는 터라 처음 보는
차를 몰고 나타난 게 의아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가 이걸 몰 권한을 제게 넘긴다면 거기서부턴 생각해 볼 여지가
많았다.
“제건욱 네 차 아냐? 이걸 왜?”

“괜히 사서 찝찝해할까 봐 사족 다는데 뽑은 지 얼마 안 돼서 내 손 거의 안 탔어. 혹시 운전할 때 문제는 없나


몇 번 시승 정도만 한 차니까 안심하고 타.”

“핵심이 그게 아니라…….”

“너 계속 택시로 다니는 거 같아서 직원 복지 차원으로 가져온 거야. 원래 회사에서 연출한테 계약 기간 내에


차량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고 지난번에 말했었잖아.”

그의 여자 친구가 사옥 앞으로 그를 데리러 왔던 날,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사이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건욱에게 따로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 중인 기색이 없었는데 대관절 어떤 방식으로 연인을
만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서림은 애써 진짜 궁금한 의문점을 억누르고 피상적인 질문을 이어 갔다.

“그걸 왜 네 차로 해.”

“예술단 예산은 한계가 있어. 기안을 올리라고 했더니 좀 더 계약 기간이 길면 끌어올 수 있을 텐데 짧아서
어렵대. 내 공연 연출해 주실 분인데 기왕이면 비싸고 좋은 차 타셔야지.”

“나 그런 건 하등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배우들과 연출진들도 다 눈, 귀, 입 있다. 부디 품위 유지하시라고. 조연출 보다 작은 차를


타게 할 순 없잖아.”

뭔가 적절한 대꾸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 버린 건욱이 먼저 서림을 지나쳐 조수석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가 차에 탑승하더니 여전히 바깥에 서 있는 서림을 창밖으로 힐끗 내다보았다. 그러다 서림에게 탈 생각이


없다고 여긴 건지 운전석의 창문을 내렸다.

지잉, 두꺼운 유리가 하강하면서 그들의 사이의 인공적인 벽이 사라졌다.

이어 미지근한 바람이 서림으로부터 건욱을 향해 느리게 흘렀다.

“안 타?”

“하…… 네 신세 지는 거 싫단 말이야.”

“한국 예술단 단장이 배려한 거야, 제건욱 아니고. 그 차이를 구 선생은 언제쯤 인지할까.”

“내가 아니어도 이렇게 했을 거라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타라는 양 손짓했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타. 공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못마땅해하는 시선으로 건욱을 직시하던 서림은 일단 올라탔다.


솔직히 매일 택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집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해서, 시간을 단축하려면 매일 오전 집 앞으로 차를 부르는 게 필수였다.

그런데 사옥까지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은 데다 이 가파른 언덕을 기피하는 기사들도 꽤 있어서 부르는 데 한
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전체 시도의 반 정도밖에 안 됐다. 무엇보다 초면인 다른 사람과 단둘이 차 안에 있는 숨
막히는 시간이 불편하기도 했다.

차를 뽑을까도 싶었으나 연말 공연을 마치면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고 또 한동안 이곳에 올 마음은 없었던 터라
선뜻 내키질 않았다.

진짜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시선을 조수석으로 돌리자 건욱이 도로 허리를 곧추세워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물끄러미 살피던 서림은 더
고민을 거듭하기가 지겨워져 마지못해 핸들을 쥐었다.

* * *

별관 공연장의 내부는 초등학생들로 북적였다. 무대 위는 물론이고, 관객석마저 압도적인 비율로 그 또래의


아이들이 채워 넣고 있었다. 특히 객석에 어른들이라곤 인솔해 온 선생님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다였다.

큰 기대 없이 관람하기 시작했던 아이들의 무대는 생각보다 훨씬 큰 감동을 몰고 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 무대 곳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일 터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뮤지컬 교육을 받은 게 아니고 서울 일부 지역의 초등학교 몇 군데에서 교외 활동으로 시작해
어렵사리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 여러모로 서툴긴 했다. 무대 연출은 둘째 치고 아이들은 춤출 때 동작을 틀리거나
노래 가사를 잊어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다 보고 나니 서림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마침내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출연진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른바 커튼콜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와 상기된 얼굴로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그 과정에서 키가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풀썩
넘어졌다.

맨 뒷좌석에 건욱과 나란히 앉아 있던 서림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헉, 어떡하지.

다행히 멀리 있는 서림이 미처 손써 볼 틈도 없이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생님 한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가


남자아이를 일으켰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비규환이네.”

건욱이 나지막이 하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서림이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를 잡은 서림은 배우들이 한 송이씩 꽃을 받고 무대 뒤로 들어간 뒤, 객석에 있던


아이들이 나름대로 질서를 맞춰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그들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공연 관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는 공연을 실제로 보니까 손볼 게 많아 보인다. 특히 저 막선 말이야. 면막 다 내렸을 때 무대에 아예
닿으니까 좀 버거워 보이지 않아?”

“나도 그 생각 했어. 한 5 센티미터 정도 걷어 올리라고 할게.”

서림이 텅 빈 무대 위를 가리키며 그러자 건욱이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러고는 또 꽤 오래 침묵이 이어졌다.

건욱은 모든 공연이 끝났는데도 특별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보고 난 후의 느낌이나 소회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일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서림이 조금 머쓱해졌다.

이미 사람들이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객석은 적막이 맴돌았다. 서림은 침묵을 견디다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건욱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전 공연을 볼 때도 계속 저런 표정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제일 진지한 얼굴로 무대를 포함해


객석까지 신중하게 관찰했다. 서림은 그게 건욱답다고 느꼈다.

예전에도 그는 주변이 어떤 눈으로 보고, 또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곤 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대상이 서림 자신이었던 때도 있었던 터라
타인이 되어 지켜보는 게 기분이 묘했다.

“구 감독은 어때?”

이윽고 건욱의 잠긴 목소리가 서림의 상념을 깨웠다. 제 생각을 들킬까 서림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응시했다.

“뭐가? 아, 공연? 사실 나 「올리버」는 영화로만 봤지 뮤지컬은 처음 보는데. 아이들이 만들어서 그런가,


애들 노역하는 장면이랑 장의사한테 3 파운드에 팔려 가는 것 장면 같은 게 막 어둡지 않고 경쾌해서 좋더라.
네가 연출한 「야생 동물 보호 구역」도 생각나고.”

“그런 거 말고, 어른인 네 감상 말고. 애들 눈으로 봐야지.”

허를 찔린 서림이 다시 건욱에게 눈길을 던지자,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다음에 내뱉는 말들이라는 듯


차분하게 덧붙였다.

“구서림 넌 어른이니까 어른 눈높이는 쉽게 맞출 테지만 아이들 눈높이는 어떻게 맞추게. 직접 눈으로 봐야 알지.
아이들이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좋아하고 열광하는지. 그 또래가 주축이 되어서 만든 거니까 연출과 관객 모두의
입장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의미에서, 어땠냐고.”

그래서 그는 무대를 포함해 관객의 반응까지 전방위적으로 살폈던 모양이다. 수익과 관계가 없는 공연이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극의 성패가 판가름이 날 터다. 그러려면 타깃이
된 관객에게 공감을 받는 게 가장 중요했다.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던 건 자신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보니 무대를 대하는 건욱의 태도가 제


것보다 훨씬 신중하고, 또 진지한 것 같아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저렇게 어떤 하나에 미칠 수 있는 그의 열정이
부럽기도 했다.

“글쎄. 내가 포인트를 잘못 잡고 본 것 같다. 복기하면서 생각해 봐야겠어.”

사실 계속 무대에만 집중하고 있던 서림은 할 말이 딱히 없어서 자세를 고쳤다.


그러다 우연히 손이 건욱의 것에 살짝 스쳤다. 화들짝 놀라 제 손바닥 아래 마찰한 거즈 붙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큰 손은 언제 봐도 모양이 곧고 예뻤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질 때까지 건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서히 시선을 끌어 올린 서림이 그를 봤을 때, 눈이 아주 쉽게 마주쳤다.

“손을 잡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

“난 안 받을게. 800 만 원.”

이 말에 당황한 서림이 뒤늦게 손을 확 떼어 냈다. 부딪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떼어
내야겠다는 데는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뇌리에 닿은 것이다. 그러다 너무 과잉 대응하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어, 윽…….”

건욱이 제 몸을 받침대이자 지지대 삼아 자연스럽게 받쳐 들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이마를 부딪쳤을지도 몰랐다.


덕분에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서림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새벽이슬 맺힌
이파리처럼 힘없이 파들거렸다.

그걸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던 건욱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혹시 제게 입을 맞춰 올까 봐 몹시 긴장한 서림이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그를 밀어냈다. 순순히 뒤로 밀려나 준 건욱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고는 감사 인사 같은
건 됐다는 양 여상하게 내뱉었다.

“부축해 줘서 고맙긴. 천만에.”

“일어나기나 해. 무대 좀 살펴보게.”

도망치듯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서림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무대로 내려갔다.

그는 계단을 걸어가는 동안 최대한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심지어 건욱과는 이미 알몸으로 볼
장 다 본 사이였는데 왜 자꾸 이런 사소한 일에 심장이 뛰는 건지 골치가 아팠다. 얼굴과 귓전에 달아오른 열기가
좀 식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인력으로 쉽게 되지 않아 괴로웠다.

후우. 마침내 무대 앞에 다다른 서림은 깊은 숨을 몰아쉰 뒤 발돋움을 해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관객석과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건욱이 자신을 따라 뒤늦게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애써
그쪽으론 시선을 피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여기서 보니까 생각보다 단차가 없네. 그리고 무대 높이가 애매해. 배우가 손 뻗으면 닿겠어. 아까 보니까
애들은 흥분하면 막 달려 나가던데. 막이라도 쳐야 하나.”

“그럼 미관상 안 좋지 않나.”

“안전도 중요하잖아. 아, 그리고 아동 센터 같은 덴 가끔 입소 안 되는 엄청 어린애들도 알음알음 받는대.


아기들 좌석도 놔야 할까?”

“걔들이 어떻게 들어와. 사전에 만 7 세 미만은 입장이 불가하다고 고지를 해야지.”


건욱이 대꾸와 동시에 무대로 다가와 서림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괜히 가까운 자리에서 느껴지는 체온을
의식하게 된 서림이 그와 또 닿을까 무대를 짚은 손을 떼어 내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가 픽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넌 나랑 닿는 게 그렇게 싫어?”

“……싫어.”

“대답이 좀 늦다?”

그 말을 하는 건욱의 표정이 오묘했다. 상대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지금 그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지 왠지


알 것 같았던 서림은 애꿎은 입술을 꽉 깨물곤 덧붙였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말도 모르시나.”

여봐란듯이 대꾸해 준 서림이 순간적으로 코끝을 스치는 흐릿한 타는 냄새에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후각이
자극되어서 다른 감각들도 영향을 받은 건지 미세하게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제건욱, 무대 뒤에서 뭐 타는 냄새 안 나?”

“글쎄. 나는 거 같기도 하고.”

무대 위로 내려온 장막이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서림이 막선 부분을 슬쩍
들어 올려 안쪽을 살펴봤으나 역시나 딱히 문제될 거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직감이 위험
경보등을 올리듯 끊임없이 걱정을 뇌수 안에 쏟아 내는 기분이었다. 제게는 오랜 화상 트라우마가 있어서 혹시
커다란 화염일까 두려운 나머지 몹시 민감해지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우스 매니저한테 한번 싹 훑어 달라고 할게. 불안하면 이만 나가자.”

먼저 무대에서 내려간 건욱이 서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내려오라는 듯해서 서림은 그걸 야멸치게 쳐 내고


스스로 한 걸음을 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덜컹’ 하고 작지만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분명하게 그들의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서로의
시선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조금 엇갈렸다.

“무슨 소리 난 거 맞지.”

“백스테이지 쪽인가 본데. 내가 가 볼 테니까 구서림 넌 여기 있어.”

“야, 제 단장! 어디 가!”

건욱이 빠르게 장막을 가르고 무대로 올라갔다. 얌전히 앉아만 있는 게 더 불안할 것 같았던 서림이 그를
뒤따랐다. 제일 뒤편에 배우들이 출입하는 입구에 다다르자 무언가 연소하는 냄새가 점점 더 확실해졌다.

이윽고 그들이 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마자, 출연자 대기실 맞은편 복도 모퉁이 쪽에서 화재가 인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바닥에서 타들어 가는 이동식 행거가 두 사람이 들은 덜컹거리는 소리의 근원인 듯했다.

테이블 아래 미처 수거하지 못한 케이크와 폭죽 따위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촛불에 남아 있던 아주 미세한


불꽃으로 인해 뒤늦게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화마를 확인하고 미간을 구긴 건욱이 자신을 쫓아온 서림을 힐끗 돌아보았다.

“구서림, 일단 넌 나가. 공연장 밖으로 가서 아직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나 선생님 있으면 내보내. 혹시


누락된 인원 없는지도 교차 확인하라고 하고. 직원들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의 말에도 서림은 딱딱하게 굳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얼굴은 하얗게 식은 채였다. 다소 겁에 질린


기색으로 건욱을 향해 손만 겨우 뻗었다.

“제건욱 너는.”

“난 여기 수습해야지.”

“너는!”

“구서림!”

“그러다 위험해지면 어떡해. 그냥 같이 나가자. 119 부르면 되잖아.”

“나 여기 책임자야. 할 수 있는 건 할 거야.”

눈앞에 불이 점점 거세지는 모양을 보는 게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서림이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 그럼 나도 여기 있을게.”

“너 불 무서워하잖아. 있어 봤자 도움 안 돼. 뭐 해, 안 나가고. 밖에 사람들 있나 확인하라니까.”

결국 강제로 서림을 무대와의 연결 문 쪽으로 밀어낸 건욱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화재 장소로 도로


들어가며 관리실과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근방에 불을 끌 만한 두꺼운 천이나 물 따위들이 있는지를
착실히 찾아내 불꽃들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탁’ 하고 천 따위로 화염의 위를 덮는 소리 위에 건욱의 긴박한 음성이
어우러졌다.

“제건욱입니다. 별관 백스테이지 복도 쪽인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불이 났거든요. 지금은 한…… 두 평 정도


돼서 범위가 작은데 여기 바닥이 엉망이라 자칫하면 사이즈 금방 커질 것 같아요. 아뇨.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고
다행히 관객은 다 빠져나간 지 한참 뒤에 발생한 것 같습니다. 통화할 시간에 빨리 와서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119 도 부르시고요.”

그가 그러는 동안 처음 이 안에 들어섰을 때는 분명히 작았던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서서히 마치 대나무에 불을 붙인 양 소리가 거세졌다. 화염의 크기도 함께 커져 갔다. 당장 물을
끌어다 쓸 수 없어서 의상들로 불꽃을 일일이 덮어야 했는데, 혼자 수습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건욱은 장막이라도 뜯어 와야 하는 건지를 고민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인영과 몸이 부딪쳤다. 놀란 그가 돌아보았다.

“구서림?”

억지로 백스테이지 밖으로 내보냈던 서림이 어느 틈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허옇게 뜬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긴장한 듯 식은땀마저 흘렸다. 눈동자가 공허했다. 사시나무처럼 파들거리는 속눈썹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마 낡은 트라우마 때문일 터다.

“나가라니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

그가 완력으로 밀어냈으나 서림은 고개를 저으면서 건욱의 옷자락을 덥석 쥐었다. 닿은 자리마다 얼마나 덜덜
떨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렇게 무서우면서 왜…….’

“구서림!”

“건욱아, 같이 나가자. 제발! 제발……. 안으로 더 들어가지 마. 그냥 나랑 같이 나가자. 응?”

붉은 화염과 건욱을 번갈아 주시하는 서림의 동공이 형편없이 떨렸다.

불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흉기였던지라 그의 어머니가 학대의 도구로


종종 사용했던 것 같았다. 그것도 몇 년에 걸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말이다. 그 때문에 서림은 예전부터 불을
매우 무서워했다.

라이터나 성냥 따위의 생활 속 작은 불꽃 정도야 피치 못하니 견뎠지만, 그의 어머니가 서림의 등을 지졌던 게


가스레인지 불이었던 탓에 거기에서 이는 푸른 불꽃은 논외였다. 이 때문에 서림은 화재 위험이 없는 인덕션이
아니고서야 직접 뭔가를 만들어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건욱은 지금 이 순간 당장 가능한 이곳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어 하는 표정이면서도 굳이 다시 돌아온


서림의 심리가 이해될 듯 말 듯 했다. 자꾸 제 쪽으로 옷을 당기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가는 모양새가, 아마
건욱을 이곳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번져 가는 화마를 힐끗 본 그는 겁에 질려 있는 서림의 시야를 최대한 가린 뒤 마른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먼저 나가 있으면 나도 곧…….”

“그럼 나도 여기 있을래.”

“지금 이럴 때야? 구서림, 사람 말 좀 들어!”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던 바로 그때였다.

“제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그가 버럭 소리친 순간, 무대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그들의 손에 다행히 화재를 진압할 만한 정수기
물통 따위와 소화기, 두툼한 담요들이 들려 있었다.

“119 에 신고는 했습니다. 아니, 이게 갑자기 웬 불이랍니까.”

관리인의 말에 건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좀 부탁하겠다는 양 조용히 안쪽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나쳐 와르르 들어갔다.

갑자기 분주해진 통에 서림이 넋을 놓고 있는 틈을 타, 건욱이 그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러자 서림이 놀라서


바로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다 자신을 안아 든 게 건욱임을 확인하곤 파들거리는 두 팔을 들어 건욱의 목을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귓전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전이됐다. 닿은 자리에 느껴지는 몸의 떨림은 덤이었다.

“그러게 나가 있으라니까. 이렇게 떨 거면서.”

허탈함 반, 안쓰러움 반을 섞은 복잡한 음성으로 건욱이 속삭이듯 내뱉었다. 서림은 대꾸 없이 그저 건욱을 더


힘껏 안을 따름이었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한 건욱은 서림의 부드럽고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에 커다란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인내심을
발휘해 몇 번이고 정성껏 쓰다듬으면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온갖 집기들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서림의 머릿속에 어떤 괴로운 기억들이 스쳤는지 명확히는 몰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신만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 아득한 두려움을 헤치고 힘겹게 되돌아왔을 다정한 마음이 너무
애틋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이 촉감을 못 느낀 건지 느꼈지만
견디는 건지 서림은 침묵했다.

뒤이어 눈을 질끈 감고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절박한 감촉이 건욱의 어깨 위로 와 닿았다. 천만다행으로


가빠져 있던 서림의 숨이 차츰 진정되는 게 실감이 났다. 깊은 안도를 느끼면서,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너는 대체 왜 아직까지.

서림을 꼭 품에 안은 채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건욱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08.

누군가 제 침대 위에 누운 걸 보는 기분이 유독 낯설었다. 너무 오랜만인 일이기 때문일 터다. 처음도


서림이었고 기억하는 마지막도 서림이었는데 그가 몇 년 후 또다시 이 침대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어, 건욱에게
이 시간의 흐름이 기묘하게 다가왔다.

서림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가 그게 한꺼번에 풀린 모양인지 차 안에서 깊이 잠들었다. 처음엔 그도 그냥 집으로
데려다줄까 했다. 다만 이런 상태의 서림을 혼자 두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양단간의 고민을 거듭하다 하는 수 없이
이쪽으로 데려왔다. 의사에게 보일 때도 그편이 나을 성싶었다.

“잠든 거 확실해요?”

차분히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욱이 주치의를 향해 질문했다. 나이 든 남자가 링거에
남아 있는 수액의 양을 확인하면서 차분하게 응답했다.

“다행히 잠든 게 맞아요.”

“아까는 많이 놀란 것 같았어요. 원래 몸이 약한 편이라 피로가 좀 잦고, 워낙 본인이 스트레스에 취약하기도


해서 좀 염려됩니다.”

“안정제를 투여했으니 심박 수는 점차 안정될 겁니다. 너무 근심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는 대충 상황이 정리됐다고 여겼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걱정스럽게 서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욱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화기 때문에 도련님 손에 물집이 좀 잡혔던데 제가 좀 볼까요?”

“이런 건 혼자 해도 됩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아, 이분은 깼을 때 두통이 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약을 두고 가죠. 그 외에 다른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그럴게요. 살펴가세요.”

당부 끝에 꾸벅 인사한 남자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건욱은 침묵 속에서 서림을 주시했다.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설명하자면, 엿 같다고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표정이 한결 어두워진 건욱의 한숨이 깊었다. 예전부터 늘 서림의 이런 부분이 신경 쓰였다. 서림은 강한
척하지만 건욱이 아는 누구보다 약했다. 모친이 준 유년기의 상처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제대로 극복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거기엔 그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서림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선을 넘었던 건욱의 탓도 큰
부분 존재했다.

아직도 그 낡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은 차일 만했는지도 모른다.

“잘 자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서림의 눈가를 가린 앞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살짝 움찔하는 모양새가 수면에


방해가 되는 듯했다.

서림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그게 지나쳐서 숨쉬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꼭 손톱
아래를 누군가 날카로운 물체로 찌르는 것처럼 불편하고 기분 나쁜 감각들이 휘몰아쳤다.

물론 지난 5 년간 서림을 종종 원망하기도 했다. 마음이 철로 된 게 아닌 이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 우리의 끝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의지해 줄 수는 없었던 건지, 수많은 단죄 방법들을


놔두고 그의 선택은 하필이면 자신을 버리는 것이어야 했는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그래서 종종 골치가 아팠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서서히 그런 감각도 흐려지고 본질적인 궁금증만이 남았다. 그렇다고 여겼다.

그런데 서림을 다시 만나게 된 뒤로 지난 5 년의 시간이 허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쩔 수가 없으니


무뎌진 척했을 뿐이고 자신은 아직도 서림에게 귀속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보자니 억눌렀던
마음속의 응어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해서 터져 나와 이리저리 파편이 튀는 듯했다.

“하……. 이러면 또 내가 을이 되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릴 때부터 건욱은 줄곧 기호가 풍부하지 않은 편이었다. 좋은 것도 별로 없었고 싫은 것도 많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다는 편이 적확한 표현일 터다. 대부분 너그럽게 수용했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 인생에 끼어든 서림을 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각들이 북받치기 시작했다.
그가 불쌍했고, 안쓰러웠다. 그런가 하면 사랑스러웠고, 같이 있어 주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서림의
목구멍이 터질 때까지 저 안에 제 것을 쑤셔 넣고 싶은 음험하고 추잡한 욕구까지 일었다.

자신이 같은 남자에게 그런 기분이 드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답이 안 나와 힘들었던 시간이 너무 허탈하리만치 단순했다.

아, 나는 네가 좋구나.

그게 애정이자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 건 퍽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고, 오히려 눈치가 빠른 건욱으로선 인지가 늦은


감마저 있었다.

그 이후로는 정말이지 끈질기게 구애해서 끝내 사귀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구서림 너 안 자는 거면 진짜 반칙이다.”

나지막하게 서림에게 말을 건 건욱은 미동도 없이 숨만 쌔근쌔근 쉬고 있는 서림의 이마를 쓸었다. 그러고는 그


매끄러운 피부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때처럼 서림은 살짝 눈꺼풀을 움찔하긴
했으나, 다행히 깨어나는 기미는 없었다.

서림이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을 때 어떤 모습을 하는지, 건욱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잠든 사이엔
스스로의 상태를 볼 수 없으니 어쩌면 서림 본인보다도 더 그럴 것이다.

그의 정신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확신한 건욱이 조금 더 제 턱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서림의 붉은
입술 위에 제 것을 부드럽게 맞물렸다.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벌리면서 진입하자 잠결에 서림이 입을 열었다.

“응…….”

마치 한숨 같은 서림의 탄성이 색정적이었다. 정처 없이 움찔거리던 건욱의 손이 결국 계속 만지고 싶었던 서림의


보드라운 뺨 위를 붙잡았다. 뒤이어 뾰족한 혀끝을 뜨거운 입 안으로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상대가 잠들어 있어 호응은 없었으나, 얌전히 제 혀를 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건욱은 충분히 흥분됐다. 잠시간
그 안에서 질척하게 얽히는 살덩이의 촉감을 만끽한 뒤 차츰 입술을 떼어 내자, 길게 실선이 이어지다 툭
끊어졌다.

고요한 호수처럼 잠들어 있는 서림을 응시한 순간, 그는 또 한 번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나는 여전히 네가 좋구나.

자신을 불편해하는 서림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는 아직 흐렸으나,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분명히 결심이 섰다. 줄곧 헷갈린단 핑계를 대고 있다가 이제야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여지 준 건 너다? 네가 날 못 버리고 구하러 되돌아왔잖아.”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걸 알면서도 건욱은 어제 자신의 옷자락을 쥐었던 떨리는 손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보고


싶었다. 안심한 듯 제 목을 끌어안았던 마른 두 팔에 의지하고 싶어졌다.

잠든 서림의 하얀 빰을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건욱이 매조지듯 마른 손등 위에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입 맞췄다.

“잘 자.”

곧이어 그는 조금이나마 수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명을 어스름하게 조절했다. 그러고는 제집의 가정 사적인
공간을 서림을 위해 비워 주었다.

타악. 문이 굳게 닫혔다.

* * *

깨어났을 때 서림이 발견한 건 낯설면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천장이었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제 기분이 정확히
그랬다. 오래전 자주 본 적이 있던 것이긴 하나, 또 한동안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인가?

눈을 깜빡여 본 서림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꿈 같은 게 아니라 현실이
맞았고, 제 기억에 의하면 건욱의 침실인 것도 맞았다.

다만 이 안을 가득 채웠던 자신의 물건들이 깨끗하게 없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5 년 전과 달리 새로운 집기나


가구 따위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는 점이 예전과 달랐다. 서림은 왠지 초장부터 진 기분이 들었다.

“으, 머리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자, 머릿속에 먼지가 뿌옇게 찬 느낌이 서림을 바람처럼 찾아왔다.

그것들을 떨어내듯 고개를 저은 그는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어제 일은 대충 기억에 남아 있었다. 차를 탄


것까지만 생생하니 아마 그 안에서 잠들거나 기절했거나 했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건욱에게 신세를 진 듯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시트라도 정리하고 돌아가려고 침대의 각을 잡고 있는데 뒤쪽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당연히 집주인인 건욱이었다.

“노, 노크 안 해?”

놀라서 침대 위에 넘어질 뻔한 서림이 히스테릭하게 내뱉었다. 그러다 제 말에 큰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해졌다.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불청객은 자신인 것이다.

“그러게. 내 집, 내 침실이지만 노크를 반드시 했어야 했는데. 큰 실례 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비슷한 일이 오래전에도 있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서림은 당황해서 제 방에 들어온 그에게 왜 노크하지 않는 것이냐고
벌컥 성을 냈다. 건욱이 그걸 기억할진 모르겠다. 가능하면 떠올리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의 표정이 이미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졌음을 알리듯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이거 기시감 느껴지지 않아? 노크.”

그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낭패감이 서린 서림이 고개를 저었다. 창피해서 헛기침을 억지로
하다가 화제를 돌리듯 넌지시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아, 그렇지. 두통은 없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조금. 관자놀이 찌릿찌릿해. 뒤통수도 울리고.”

“일단 약부터 먹고. 그다음에 얘기하자.”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건욱이 서림을 침대에 얌전히 앉혔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물과 하얀색 알약을 함께
내밀었다.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던 서림이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 들고 동시에 꿀꺽 삼켰다. 목으로 넘기는
동안 식도가 꺼끌꺼끌한 게 느껴졌다. 괜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으면서 건욱을 올려다보는데,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흐트러졌을 게 뻔한 자신과 달리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게
열받았다.

“뭐가 궁금해?”

울림이 좋은 낮은 음성마저도 자신을 주눅 들게 하는 기분이다. 서림은 미간을 구겼다.

“나 왜 여기 있어. 네가 여기서 재웠어?”

“그럼 나밖에 더 있나. 왜, 납치라도 했을까 봐? 내 인생이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거든.”

“나도 대충 기억은 나. 공연장에서 작게 불이 났고…… 우리가 그걸 봤고. 같이 나와서 차를 탔고, 그다음부턴


기억이 없는데.”

그 순간, 그들의 위에 암전과 같은 틈이 생겼다.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도 불을 두려워한다는 건 엄마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 역시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하필이면


건욱에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원했던 바가 아니었다. 오래전 헤어질 때의 일로 그가 새삼스럽게
죄책감을 느낄까 그게 조금 걱정이었다. 엄마의 죽음 때문에 자신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림이야말로 못 견딜 것 같았다.

건욱의 눈치를 힐끗 살핀 서림이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덧붙였다.

“나 혹시 기절했어?”

“의사 말이 그냥 잠든 거래. 내 판단에도 그런 것 같아서 이쪽으로 데려온 거고.”

“공연장 불은 잘 끈 건가?”

“잘 수습했다고 보고받았어.”

“하, 다행이다. 아무튼 고마워. 신세 졌다.”


제 감사 인사에 일순 건욱은 입술을 꽉 깨물면서 뭔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할
말이 꽤나 많은 얼굴을 하고 서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끝내 제 의사를 피력하려 들진 않았다. 해서
서림이 덧붙여야 했다.

“얼굴이 왜 그래. 불도 잘 껐다며.”

은근슬쩍 부추기니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그제야 겨우 내뱉었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 네가 어떻게 살지 심히 걱정돼서. 성인 남자가 눈앞에서 화재 좀 봤다고 덜덜 떨다가 긴장


풀려 잠드는 게 정상이야?”

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미간을 미세하게 구긴 서림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알아서 잘 살거든요.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라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구서림, 우리 그냥 같이 살래?”

대화의 랠리 중 뜬금없는 제안이었던 터라 서림이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적막이 그들 사이를 휩쓰는 동안,
서로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건 서림이었다.

“내가 왜.”

“내가 너 걱정되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난 너랑 살고 싶은데 뭘 자꾸 다른 데 가서 알아보래.”

쏘아붙이듯 한 마디 더 하려던 서림은 어찌 됐든 잠든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와 돌본 게


건욱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까득, 치아를 씹어 참아 냈다.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대충 제집에 짐 넘기듯 두고 갈 수도 있었는데 집에까지 데려와 보살핀 정성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관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숨을 고르고 차분히 덧붙였다.

“이런 일이 흔하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일에는 지장 안 줄 거야. 그러니까 단원들한테는 어제 일은 못 본


척해 줘. 괜히 쓸데없이 입 나불거리지 말라고.”

“봤는데 어떻게 못 본 걸로 해. 그렇겐 못 하지.”

“어떻게든 상황 평화적으로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너 정말 비협조적으로 나올래?”

발끈한 서림이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깨 위에서 건욱이 제 팔을 쓰윽 내미는 통에 시도만으로 그쳤다.
그가 뻗은 모양새 좋은 손 위에서 아찔한 향기가 풍겼다.

혹여 또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건가 싶어 거절하려고 입을 달싹이는데, 건욱이 소매를 눈앞에서 두어 번


부채질을 하듯 우아하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의 커프스에 붙박이로 달려 있는 커프 링크스가 시야에서
어룽거렸다.

“어쩌라고.”
“버튼 채워 봐.”

“이걸 내가 왜?”

“입 닫아 달라며. 오는 게 필요하면 너로부터 가는 것도 있어야 할 거 아냐.”

“너 진짜 야박하다. 공짜가 없네.”

“원래 세상엔 그게 없어. 하다못해 거지들도 구걸이라는 걸 해. 노동을 해야 네가 원하는 걸 취하지.”

“야, 내가 살면서 건강한 외모에 변태 같은 알맹이 딱 한 명 봤는데.”

“그래, 알았어. 나야. 나 바빠. 얼른.”

아주 간편한 거래 조건이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행동으로 침묵의 보답을 받겠다고 하는 건지


건욱이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서림은 대체로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건욱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관철하는 데 능했다. 바꿔 말하면 적당히 해 주고 한시라도 빨리 매조지는 게 서림의 정신 건강도 편한
길이라는 뜻이다.

마지못해 손을 뻗은 서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면서 짜증스럽게 그의 셔츠 소매를 잡아채 버튼을 구멍
안에 채워 넣었다. 그러는 동안 물끄러미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건욱의 시선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느껴졌는데, 왠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엄두가 안 났다. 계속 시선을 소매에 두고 있자니 그의 손바닥에 투명한
거즈가 눈에 띄었다.

“와, 넌 이걸 아직도 붙이…….”

남지도 않은 담뱃불의 흔적 때문에 보란 듯이 붙이고 나타났던 것과 같은 거즈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슬쩍


손으로 눌러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부위도 컸고, 동그란 형태가 꼭 물집이 잡혀 있던 자리에 물만 빼낸
모양새였다. 말을 중간에 멈춘 서림의 눈동자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 마침내 건욱에게 닿았다.

“혹시 불 끄느라 손에 물집 잡혔어? 부위가 엄청 큰데?”

“아플까 봐 걱정돼?”

정곡을 찔린 서림은 움찔했다.

“누가 그렇대?”

그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제 대답을 이미 예측했기 때문인지, 은혜도 모르는 제게
질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건욱의 목소리는 여상해서, 그의 기분을 유추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 오늘 인터뷰 때문에 일찍 나가 봐야 돼서 회사까지 못 데려다줘. 씻고, 새 옷이랑 속옷 같은 것도 다


있으니까 옷은 드레스 룸에서 아무거나 대충 꺼내 입어. 그런데 내 옷이 네 몸에 맞을진 모르겠다. 새끼가
종잇장처럼 말라 가지고.”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가 품 안에서 차 키를 꺼내 침대 위로 그것을 휙 던졌다. 어제 그가 주었던 스마트


키였다. 서림이 정신이 없었던 통에 공연장에서 미처 제대로 수습을 못 했던 걸 그가 챙겨 온 것 같았다. 이걸
보니 제 소지품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나 지갑이랑 휴대폰은?”
“둘 다 나한테 있어.”

“돌려줘.”

“그걸 돌려주면 너 이대로 일어나서 꾸역꾸역 집에 갈 거 뻔하고, 내가 그 꼴은 또 못 보겠다.”

“못 보면. 어쩌시게.”

“차 지하 주차장에 있을 거야. 아침도 하우스 키퍼한테 차려 달라고 했으니까 다 먹고 나와. 그러면 회사에서
휴대폰이랑 지갑 돌려줄게. 내가 직접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검사할 거니까 혹시라도 꼼수 부리지 말고.
알아듣지?”

“야, 왜 이렇게까지…… 야! 제건욱!”

제 할 말만 빠르게 내뱉은 그가 서림을 등졌다. 그러고는 대답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수 초 사이에 남의 침실에 혼자 남겨진 서림은 어이가 없었다. 뒤늦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건욱을 쫓자, 걸음이
빠른 그가 어느 틈에 현관에 가서 구두를 꿰어 신고 있는 게 보였다.

“너 그 말 후회 안 해? 집 다 뒤집어 놓는다. 난 이런 거 사양 안 해.”

“얼마나 사양 안 하시는지 사이즈 좀 보자. 먼저 간다.”

띠릭. 그가 현관을 빠져나가자 문이 닫히는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황망해진 서림은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놓인


스마트 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제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도 왠지 그의 통증이 제게까지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러게 거기서 빨리 나오라니까.

“그 정도 크기면 엄청 쓰라릴 텐데…….”

지그시 입술을 깨문 서림은 뒤늦게 복도를 거쳐 되돌아와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구조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론데 가구들이 죄다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층 다른 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차 키를 내던진 서림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었다. 드레스 룸의 문을 활짝 여니 침실과 거실에서 받았던
느낌을 똑같이 받았다.

괜히 짜증이 나서 이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려다가, 정작 어지럽히면 여길 치울 사람은 제건욱이 아니라


도우미 아주머니이리라는 데 생각이 미처 관뒀다.

건욱은 이미 나가고 없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은 이곳에 남아 서림을 계속 괴롭혔다.

삶이란 유구한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지루한 과정이다. 서림은 건욱에게 자신을
더하는 것보단, 빼는 게 훨씬 나으리라는 걸 타인으로부터 똑똑히 배웠다. 그래서 자꾸 그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건욱은 지치지도 않고 자신을 흔들어 온다.

내가 그 미끼 덥석 물어서 너랑 같이 살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사람 심란하게 왜 자꾸 잘해 줘.”


제 마음을 가다듬듯 낮은 숨을 쉬며 수납장을 열어 본 서림은 가지런히 정리된 그의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포장을 뜯지 않은 아무거나 대충 골라 들고 욕실로 향했다.

* * *

건욱은 젊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또 아주 유능한 연출자였다. 무엇보다 실패가 없었다. 그런 그가 기획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자 취재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워낙 바쁜 터라 현재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집요할 만큼


주기적으로 요청을 해 오는 잡지사가 있었다.

오늘의 인터뷰는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계속 거절로 일관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보연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련된 자리였다.

“제 감독님, 아니, 이제 피디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기자가 묻자 건욱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대꾸했다.

“그것보단 단장이란 호칭이 더 듣기에 좋네요. 우리 예술단을 아우르는 책임감도 함께 느껴지고요.”

“아, 그렇죠. 취임식도 없이 조용히 입단을 하셔서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더군요.”

“한국 예술단은 저희 이모님께서 이사장이시라 괜한 오해를 받을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결과로 먼저 보여


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에게 호의가 가득 담긴 눈길을 보내던 기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앞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단장님은 워낙 연출 스타일이 확고하시죠. 저돌적이고, 관능적이고, 화려한 걸로 정평이 나 있으신데요.


그런데 연출이 아니라 제작자로서의 첫 발돋움이 왜 하필 아이들이 주인공인 「크리스타」일까요? 사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은 아니잖아요.”

“물론 흥행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첫 작품인 만큼 예술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들에 조명을 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타」를 선택한 건 필연이었다고 봐요. 이번 무대의
키워드는 위로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함께 위로받는 뮤지컬요.”

“음, 그러면 키워드가 위로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좀 더 세부적으로 인터뷰를 들어가기 전에 이 땅의 수많은
크리스타에게 한 말씀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족을 달자면 단장님의 음성을 지면에 싣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목소리가 정말 좋으신데.”

차분하게 미소 지은 그가 잠시간 침묵했다.

건욱에게 「크리스타」는 과거에도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늘 서림일 터다.

그는 서림으로 인해 「크리스타」를 알았다. 이 한 편의 뮤지컬 영화가 상처 입은 새처럼 유약했던 서림에게 어떤


위로를 해 주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선로를 틀어 전혀 알지 못했던 방향으로 들어서게 됐다.
당시 부모님의 말 없는 반대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강행해야만 했다. 서림의 마음을 빼앗은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었고, 또 종합 예술이라는 장르에 개인적으로도 몹시 흥미를 느꼈다. 뭔가에 관심을 갖는
일은 그에게 아주 드문 일이었다.

서림을 생각하는 그의 눈가에 아주 커다란 애틋함이 깃들었다. 건욱은 이걸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상태로


생각을 거듭했다. 꽤 오랜 적막이 이어지자 기자가 의아한 듯 건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가 입을
뗐다.

“극 중 크리스타는 어린아이지만 저에겐 반드시 그렇진 않아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이 버거운 상태로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모든 사람이 크리스타라고 봅니다. 꼭 눈에 보이는 게 아니더라도 다들 상처 하나쯤은
근저에 있으니까요. 제가 영화 「크리스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제프리라는 물리학자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고 있는 크리스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게 뭘까요?”

“물리는 모든 사물의 이치라는 원대한 뜻이지만, 사실 세상은 물리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
아주 많아. 이를테면 사랑이나 신의, 자존심 같은 것.”

“물리학자가 평생 본인이 연구해 온 과제들을 부정하는 거군요. 흥미롭네요.”

“네. 내 마음이 단단해지면 아무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고요. 너는 강하다고.”

서림이 그래 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건욱은 이 인터뷰만큼은 그가 읽어 줬으면 싶었다.

이미 서림으로 꽉 찬 머릿속을 비집고 문득 오래된 어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사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방금 깨달은 건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 예쁘군.〉

오늘 오전 제 침대 위에서 흐트러져 있던 서림의 모습을 곰곰이 되새기던 그는 픽 웃었다.

* * *

인터뷰를 마친 건욱이 보연과 함께 1 층의 로비로 내려왔다. 어젠 서림이 혹시 새벽녘에 뒤척일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데다 이른 시간부터 한 시간 넘게 기자에게 시달렸던지라 당장 카페인이 필요했다. 주문한 커피를 한
잔씩 쥐고 외부 테라스로 나오는데, 보연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내려쳤다.

“왜. 나 다시 올라가야 돼? 10 분만 쉬자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단장님 휴대폰 꺼 두셨어요?”

“내가?”

재킷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보니 제 것이 아니었다.

“아, 맞다. 이거 구서림 건데. 나오는 길에 정작 내 휴대폰을 안 챙겼네.”

“단장님이 뭐 까먹고 그러기도 해요?”


“그러게. 나도 처음 본다.”

“그런데 서림 선배 걸 아침부터 왜 단장님이 갖고 계세요? 어제 별관 불났을 때 같이 계셨다더니 그거 때문에?”

“어, 뭐. 어쩌다 보니.”

무성의하게 대꾸한 그가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사이 보연이 제 것의 화면을 건욱의 눈앞에서 척


내밀어 보였다. 전화가 오고 있는 모양인지 기계가 열심히 몸을 떨며 진동했다.

“뭔데. 누구 전환데 날 줘.”

“제건욱 단장님의 미모의 여동생.”

“나 미모의 여동생은 없는데. 그냥 여동생만 있지.”

“그 소리 미지가 들으면 비웃어요. 타격도 전혀 안 받을걸요?”

뒤늦게 휴대폰을 낚아채듯 빼앗은 건욱이 화면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역시나, 미지였다.

“좀 받는다.”

보연은 끄덕이곤 난간에 팔을 걸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건욱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통화를 시도했다.

“왜, 제미지.”

- 아, 왜 전화 안 받아!

귀가 따갑다는 양 기계를 귓전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떼어 낸 건욱이 다시 그것을 원위치 했다.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어.”

이 대답이 아주 놀랍다는 양 미지가 주파수를 한층 높여 응답했다.

- 네가? 웬일이야? 너 요새 이상해. 옷에 막 뭐 묻히고 다니질 않나.

“그래, 내가. 안 받으면 그런가 보다 하지 왜 바쁜 보연이한테까지 전화야.”

- 그 언니가 오빠 수행 비서잖아. 칠칠맞지 못한 상사를 뒀으면 감수해야지.

“바빠. 용건만 빨리 말해. 나 일하는 중이야.”

- 일 같은 소리 한다. 모든 일엔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거거든?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고.”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그가 진짜로 끊을 거라는 걸 잘 아는 미지가 황급히 만류했다.

- 아, 안 돼! 나 지금 엄마랑 오빠 회사로 가고 있어. 곧 도착해.

“어머니가 여길? 갑자기 왜 오시는 건데. 용건도, 나한테 미리 연락도 없이.”


- 거기 별관에서 마티네 있다던데. 이거 평일 낮 공연 말하는 거 맞지? 엄마가 같이 보자고 그러더라고. 이거
핑계로 확인하고 싶은 가 봐.

“확인? 뭘.”

- 어제 본가 주치의 불렀다며. 오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아. 미지가 토해 낸 단어들이 귓전에 꽂힌 순간 그가 짤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입이 무거운 주치의가 제집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서림을 쫓아 공항에 가던 일에 일어난 큰 사고 때문에 어머니는 특히 제 건강 문제에 예민하게
나서는 편이었다.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적당한 핑계를 떠올리며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허리를 곧추세워 앉으면서
대꾸했다.

“그냥 수면제 좀 처방받은 거야.”

- 나 말고 엄마한테 설명해. 어? 오빠 밖에 나와 있어? 보인다.

전방에서 건물 쪽으로 진입하는 빨간 스포츠카를 확인한 그는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도로 보연에게 내밀었다.
급한 대로 그녀를 먼저 들여보내고 차량 쪽으로 다가서자, 어머니가 급히 하차하는 게 보였다. 뒤이어 단정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검은색 스틸레토 힐을 신은 미지가 따라 내렸다.

“어머니 저 멀쩡해요. 수면제 좀 달라고 한 것뿐이에요.”

“그 정도 일로 집에 의사를 불러? 엄마도 의사야. 엄마가 보면 다 알…… 어머 세상에.”

가까이 선 그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녀가 건욱의 손바닥을 거의 덮다시피 한 거즈를 눈에 담고는


안절부절못했다. 난감해진 그가 어머니의 어깨를 살짝 쥐고 미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건 그냥 좀, 예술단에 일이 있었어요. 걱정하실 일은 아니고요.”

“하, 밖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엄마. 오빠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 제건욱 성격 알면서 그래.”

지원군으로 나선 미지가 중간에 끼어들어 봤지만 어머니의 염려를 막진 못했다.

“건욱이 너, 자꾸 이렇게 험한 일 생기는 거 생활이 안정이 안 돼서 그래. 연애 좀 하고, 결혼도 슬슬 생각하고


그럴 때 됐어. 넌 너무 밖으로만 돌고 안정을 몰라. 그러니까 아프지.”

배울 만큼 배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무논리라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사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저 어디 하자 없어요. 아프지도 않고요.”

물론 어머니가 왜 이런 말을 뜬금없이 하는지 건욱도 아주 까맣게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3 년이나 지속했던


서림과의 관계는 불문이자 비밀이었고, 서림을 제외하면 건욱은 누군가와 깊이 사귄 적도, 관계를 오래 지속한
적도 없었다. 그와 헤어진 뒤에는 연애 혐오자에 가까웠다.
바꿔 말하면 어머니로선 건욱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 같은 건 해 본 적 없으며, 여자에게 관심도
흥미도 없다고 여길 만했다. 번식은 인간의 본능인데 하나뿐인 아들에게 그게 거세된 듯하니 위기의식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완벽하게 제 의사를 존중해 주는 아버지의 앞에선 이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아 내친김에 꺼내는
것이다.

“아들, 수신제가가 제일 먼저야. 네가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러는데…….”

“어머니, 저 그거 뭔지 되게 잘 알아요.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게다가 건욱은 제 마음에 둔감하지 않았다. 감정에 흐리던 까마득한 20 대 이전이라면 모르지만 이젠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심한 그로기 상태가 되는지를 다년간의 경험으로 배웠다.

어머니는 그의 말이 믿을 수가 없다는 양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손에 상처를


계속 살피기에, 그가 괜찮다는 듯 천천히 그녀를 밀어냈다.

“저희 별관에 공연 보러 오셨다면서요. 재미있을 거예요. 보고 가세요.”

그가 에둘러 제 의사를 전한 뒤 미지에게 한 번 더 도와 달라는 듯 눈짓했다. 대화하는 두 사람의 중간에


심판처럼 서 있던 미지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내가 뭐라 그랬어. 엄마 이러는 거 오빠 별로 안 반가워할 거라 그랬지. 주책이야 그만해. 엄마 의사잖아.


보면 몰라? 제건욱 멀쩡해. 가자, 공연 시간 늦겠어.”

옆에서 당기는 대로 이끌려 가던 어머니가 연신 건욱을 돌아보았다. 그는 미소 지으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탄 그녀가 아쉬운 숨을 삼켰다.

타악. 어머니를 태운 조수석 문을 닫은 미지가 보닛을 돌았다. 그러다 별안간 건욱에게 다가왔다. 그가
의아해하며 시선을 던졌다.

“왜.”

“여기 고개 살짝 숙여 봐 봐.”

모친이 여기저기 헤집는 통에 살짝 비뚤어진 그의 옷깃을 가다듬어 주려는 것 같았다. 사양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데, 쀼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통에 계속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가 살짝 얼굴을
기울이자, 미지가 옷을 여며 주었다.

“너 요새 진짜 수상해.”

“가라.”

귀찮다는 듯 그가 턱짓했다. 얄밉게 그 모습을 보던 미지는 건욱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치고는 마저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은 매끄럽게 공연장이 있는 별관 방향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형체가 가시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차를 지켜보던 건욱도 제 목덜미를 괜히 쓸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요란했던 한 막이 끝나고 등장인물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 암전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무대 위로 나타나면서 아직 이 장면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제건욱 어머니인 것 같은데…….”

뒤늦게 대로 쪽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서림이 주차장을 한 번, 건욱이 들어간 예술단 건물 입구를 한번 확인하곤
그 중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중년 여자는 건욱의 어머니였다. 실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유명한 의사라서 몇 번 찾아본 적 있는 통에 눈에 익었다. 같이 온 젊은 여자 쪽은 지난번에
건욱을 데리러 왔던 여자였다. 착각일 리가 없었다. 똑같은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났으니까.

“둘이 집안끼리 아는 사이구나. 그럼 진지한 관계겠네.”

혼잣말 끝에 그는 제 손이 쥐고 있는 페이퍼 백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식사 중에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이 출근길 내내 마음에 걸렸다. 건욱이 뭘 한 건지 간밤을 꼴딱


지새우고 오전에 커피만 한 잔 겨우 마시고 나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을 계속 살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불면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양심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주차까지 해 두고 일부러 도보로 도로
걸어 나가 인근에서 샌드위치와 신선한 주스 따위를 사 온 거였는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서림. 우리 그냥 같이 살래?〉

선뜻 휘말리지 않길 잘했다. 역시 그건 그냥 건욱의 수많은 치레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냉담해진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아주 조그만 형태로 만든 서림은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꽤 묵직한 페이퍼 백을 아주 미세한 희망에 부풀어 있던 제 기대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듯 버려 버렸다.

〈2 권에서 계속〉

주석

[1] John Milton, Lost Paradise, Penguin Classic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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