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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나요?
― Gilles Maheu
00.
복도 창밖 어두운 하늘을 힐끗 올려다본 그는 마음 졸이는 기색으로 잇새를 짓이기곤 현관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 이 새끼 독한 거 봐. 대체 안에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전원이 꺼져 있어…….
툭. 제 허벅지 위를 휴대폰으로 내려친 건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모양이 예쁜 입술이 찰나간 하얗게
질렸다가 그가 치아를 떼어 내는 순간 색이 맑고 붉은 빛깔로 서서히 물들어 갔다.
전화를 받지 않던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건욱은 혹여 서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정말이지
미친 사람처럼 그의 행적을 좇아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집에 와 보니 생활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어서 그저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야박한 새끼.〉
부술까.
바로 그때였다.
〈너 뭐 하냐, 여기서?〉
〈내가 어딜 가든 언제 오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어두운 눈동자는 건욱이 여기에서 기다리리라는 것을 내심 예상했던 모양인지 특별한 동요를 비치지는 않았다.
서림은 그저 대답 대신 건욱을 꽤 한심하다는 듯 직시하다가 그를 지나쳐 제집 앞으로 향했다. 표정이 썩 좋진
못했다. 지친 듯도 했고, 질린 듯도 했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곤 문을 연 서림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심히 상대가 누르는 비밀번호를 지켜보던
건욱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1111. 그들이 처음 사귀기로 결정했던 기념일에서 너무나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닌 숫자로 바꿔 놓아 기가 막혔다.
〈구서림.〉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두 사람은 한동안 첨예한 시선만 교환할 뿐 별말이 없었다. 앞서 침묵을 깬 건
역시나 마음이 급한 건욱이었다.
결별의 이유를 ‘고작’ 같은 단어로 치부해 버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다루는 듯한 그의 말투 때문에 서림은
필연적으로 발끈했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끝은 날카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욱이 서림의 손목을 붙잡았다. 완력으로 제 쪽에 붙들어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와락, 몸을
끌어안았다. 놀란 서림은 있는 대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상대의 의지가 워낙 거세서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놔. 안 놔?〉
나지막한 중저음이 서림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는 기미가 여실히 느껴졌다. 서림은
자신도 모르게 애틋해져 그의 옷자락을 붙잡을 뻔했다.
철썩!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건욱은 오뚝이처럼 도로 서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엄정한 눈길을 흘려보냈다. 이윽고 다시 안아 오려고 해서 서림이 두 팔을 척 뻗어 그의 접근을
저지했다.
〈오지 마.〉
〈얘기 좀 해.〉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 기회가 아니면 제대로 서림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듯 매우 호소력
있고 절박한 말투였다.
〈구서림! 너 진짜.〉
아연해진 건욱을 조용히 직시하는 서림의 눈동자에 슬픔이 깃들었다. 줄곧 억누르고 있던 게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는 모양인지 퍽 느릿하지만, 착실하게 물들어 갔다. 이를 증명하듯 한층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둘 사이를
에워쌌다.
〈나 그 여자 죽는 날 병원에 갔었어.〉
〈왔었다고?〉
〈갔어. 엄마 섬망 와서 너 보고 나인 줄 알더라.〉
〈…….〉
〈웃던데, 그 여자.〉
건욱이 아니었다면 그때 병원에 달려갈 일도 없었고, 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서림은 제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엄마의 존재가 여전히 두려웠고, 시시때때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미소가 어떤 의미였을지를 상상하다 소름 끼쳐 하며 해답이 없는 문제에 골몰하게 됐다.
차라리 그냥 추운 겨울 고독하게 홀로 버티다 죽게 뒀다면 자신이 이겼다고 정신의 승리라도 도모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 어긋나고 만 것이다.
가능한 한 차분히 대화하려 애쓰던 건욱이 격해지자 서림의 언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치약을 중간에서 짜느냐 밑에서부터 짜느냐로 싸우다가도, 갑자기 밥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투다가도
겪는 게 연인 사이의 이별이었다.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도, 소소한 가치관의 차이로도 그것은 얼마든지
찾아왔다.
평소의 건욱은 워낙 빈틈이 안 보였다. 타인의 논리에 밀리는 법도 전혀 없었다. 유달리 능글맞은 성격 덕분에
그와 논쟁하는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기를 들고 흔들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서림은 지금 그가
드물게 감정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이 대화의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건욱, 나 뉴욕 갈 거야.〉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서림은 제 목소리를 단속해 침착을 가장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인지하지도
못했다.
〈구서림. 구서림!〉
잠시 아득한 상념에 빠져 있던 건욱이 뒤늦게 서림을 쫓았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니 애초에 건물 앞에
택시를 기다리게 한 상태로 잠시 올라왔던 모양인지 서림이 시동 걸린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다. 뒤이어 ‘타악’
하고 택시의 뒷문이 무자비하게 닫히는 소리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끝났다는 운명의 알림음
같았다.
덜컥덜컥, 뒷문을 열어 봤지만 이미 안에서 잠겨 무의미했다. 쾅쾅! 단단하게 주먹을 말아 쥐고 뒷좌석 창문까지
있는 힘껏 두드렸으나 서림은 끝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의아해하는 기사에게 가 달라는 듯
손짓하는 게 건욱의 시야에 잡혔다.
〈구서림!〉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제 차로 뒤쫓을 생각조차 못 했던 건지. 그제야 허무함이 밀물처럼 떠밀려 왔다. 힐끗
아득한 언덕 위를 올려다보던 그는 ‘퍽’ 하고 담벼락을 걷어찼다.
당연히 서림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평생을 미워하고 대갚음해 주겠다 마음을
다져 왔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죽어 버린 데다, 그 끝이 본인이 생각했던 처참한 결말이 아니라 좌절했을 테니
여러 가지 의미로 혼란스러울 터다.
하지만 그 방식이 이런 형태라면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서림도 진심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저 너무
복잡하고 화가 나서 제게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리라.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힌 건욱은 자신이 미친 듯이 뛰어내려 온 언덕 위와, 서림이 연기처럼 사라진 도로를 번갈아
직시하고는 잇새를 지그시 깨물었다.
2 월 20 일. 자정이 이제 막 지난 시점이었다.
01.
환절기 오후의 기류가 오묘했다. 기체 창밖에는 공중에서 일으킨 바람이 물보라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한국 항공 092 편에 탑승한 서림은 목소리가 유난히 근사한 기장의 안내 멘트를 귀에 담으며 조금 전까지 쓰고
있던 새카만 색 안대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5 년…….”
“제건욱?”
자신이 아는 ‘그’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일단 성씨가 특이했고, 아울러 그를 수식하고 있는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서림의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절로 글자 위에 닿았다. 이름을 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윽고 책자를
뒤로 넘겨 건욱의 인터뷰를 눈에 담는 표정이 꽤나 애틋했다.
일부러 이쪽의 소식에는 무뎌지려고 노력했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건욱의 근황은 한국인 동료들을 통해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조금만 대한민국 뮤지컬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그의 이름은 산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기본기에 충실한 서림과 반대로 무척 저돌적이고 창의적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건욱의 대학 동기인
자신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극대화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기사의 내용은 바로 그 과감한 연출 기법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예전의 건욱은 뮤지컬과 같은 종합 예술은커녕 영화나 드라마조차 잘 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진로를
단숨에 바꿀 만한 계제를 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탁. 잡다한 상념들을 애써 떨어내듯 고개를 저으면서 책자를 덮은 서림이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미래 때문에 심란해졌다. 기대인지, 거북함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서림은 바깥의
풍경이 평지에서 상공이 된 순간부터 줄곧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탑승하기 전 수신한
메시지의 글자들을 다시금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오늘따라 각진 한글의 모양이 왠지 낯설었다.
[구서림 감독님. 도착하시면 공항 청사에 차량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내리셔서 이 번호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한국예술단]
“고맙습니다.”
그리고 서림은 막연히 오늘 이 비행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어쩌면 앞으로 한국에서의
생활까지도 말이다.
* * *
그가 잡념을 떨치려 차분히 숨을 고르는 사이, 사회자의 음성이 선율처럼 귓전에 꽂혀 들었다.
“대상 시상에는 작년도 예술인 대상 수상자이시기도 하고요. 우리 대한민국 뮤지컬계의 혁명이자 희망인 제건욱
감독님이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바로 이 무대로 모셔 볼게요.”
마침내 건욱이 봉투에 담긴 종이를 꺼내자, 긴장감을 높이는 배경 음악이 사방에서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한 박자 사이를 둔 뒤 입을 열었다.
“네. 올해는 미디어 예술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왔네요. 드라마 「랭고리얼」의 연출인 TBC 방송국 지건주
감독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발표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덤덤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오는 미남형의 남자가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가 아마 지건주 감독 본인인 것 같았다.
건욱은 그에게 꽃과 트로피를 건넸다. 그러고는 살짝 눈을 마주쳐 인사했다. 뒤이어 남자가 마이크 앞으로
향하기에, 그는 정중앙에서 살짝 뒤로 빠져나와 수상 소감을 귀에 담았다.
“제 감독님! 끝났어요.”
완전히 행사장 건물을 벗어나서야 그는 시종일관 목을 답답하게 느끼게 만들었던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서림이 비행기 안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 새끼 또 열나는 거 아니야.”
넥타이에 이어 셔츠의 제일 위 단추까지 두 개 풀었는데도 갑갑함이 잔존했다. 기체 안에 있는 이의 소식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한 조바심만 커졌다.
빠른 걸음으로 익숙한 뒷문을 거쳐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스마트키를 꺼내는 손마저
힘 조절이 어려웠다. 결국 애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연락을 하려는데, 마침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바람에 모든 행동이 중단됐다.
“건욱아!”
“제 원장님.”
그의 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봬요.”
그럼에도 부모님은 결코 자신을 함부로 막아서거나 섣불리 충고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지켜보며 지지하고,
응원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방임을 끝내고 조금씩 참견하고 싶어 할 때마다 아버지가 제동을 걸어 준 영향이
컸다. 그는 건욱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사생활을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특히 아버지와의 유대는 각별했다.
“뭡니까, 이게?”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그러나 예리한 제 원장이 정확히 내면의 핵심을 찔러 들어온 터라 건욱의 덤덤하던 얼굴도 어설프게 굳어 갔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앞이라서일까, 서림을 곧 만난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는 여느 때의 경계를 잃고 무너졌다.
제 원장의 안경 너머 엄격한 눈매가 아들을 지그시 향했다. 아버지로서의 염려가 깊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주제넘은 충고를 하는 대신 격려하듯 건욱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을 택했다. 이윽고 그가 이만 가
보라는 양 차량을 향해 손짓했다.
“그럴게요.”
향긋한 꽃 내음을 맡으면서 묵례한 건욱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퉁이를
빠져나오는 길에 룸미러를 힐끗 살피자, 제 차의 뒤꽁무니를 계속 보다가 뒤늦게 비서실장의 안내에 따라 차에
탑승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까다로운 건욱이 생각하기에도 퍽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사가 가정에서도
같은 질량의 성공을 거두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 원장은 해냈다. 그는 자식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너그러움을 보이지만, 결코 소유물 취급 하지 않는다. 삶에 참견하지 않았고, 늘 선을 지켜 대했다.
이성적이고,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뜨거운 햇볕과 차가운 비, 그뿐만 아니라 온갖 풍파를 다 막아 주는 든든한 천장과도 같았다.
건욱은 자식을 낳을 거라면 저 정도 인격은 갖추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들을 술래잡기하듯 꼬리에 꼬리를 이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겐 당연한 것들을 한 번도 누려 본 적이
없는 서림에게로 사고가 귀결됐다.
그는 지금 창공 어디쯤을 날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 *
“단장님!”
그녀의 부름에 화답하듯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기다란 다리가 바깥으로 빠져나와 성큼 땅을 내디뎠다.
차에서 내리는 이는, 타이는 물론이고 셔츠의 위 단추 두어 개마저 풀려 꽤 흐트러진 상태의 건욱이었다.
빠른 속도로 건물 내부에 진입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승강기에 나란히 올라탔다. 단장 집무실이 있는 3 층 버튼을
누르고 난 건욱이 보연에게 커다란 손을 척 내밀었다. 그녀가 그의 손바닥 위에 이력서 한 부를 조심스럽게
얹었다.
“알겠습니다.”
“건욱 선배.”
“단장님.”
“뭔데.”
“얼만데?”
“없어.”
“왜요?”
가뜩이나 중저음인 건욱의 음성이 살짝 가라앉아 무척 덤덤하게 들렸다.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실
머릿속은 그와 반대로 어느 한 공간에 염증이라도 생겨 열이 나고 부은 것처럼 매우 방어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를 불러들이면 되는 것이다.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안 했다.”
“그것도요?”
“그것도. 할 이유가 없으니까.”
제 안의 이유를 보연에게 모두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건욱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눙쳐 대꾸했다.
이 대꾸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던지 계속 눈동자를 굴리던 보연은 별안간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살짝 묵례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
절로 한숨이 샜다.
보연의 말대로 학부 시절 둘은 친밀한 사이였다. 신입생일 때는 학과가 달라 이따금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우연히
서로를 알게 돼 그때부터 서서히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건욱이 의대생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예술학과로 본격적으로 전과를 했을 때는 매일 주야장천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은 진지하게 사귀고 있었다.
서림의 어머니 장례 문제로 갈등을 빚던 와중, 그는 건욱을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안녕을 고했다.
그들은 서림이 헤어짐을 말한 직후부터 열흘간 간헐적으로, 지난 4 년 동안 다툰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횟수로
치열하게 싸워 댔다.
그러다 마침내 서림은 상대가 이별을 받아들일 틈도 주지 않은 채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건욱이 애타게 설득하고
붙잡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크리스타…….”
한 사람, 어쩌면 두 사람 모두의 인생을 바꿔 놓은「크리스타」 정도면 그들 사이에 가라앉은 과거라는 무게에
견줄 만할 터다.
* * *
「한국 예술단」은 대한민국 행정부 소속인 문화 체육 관광부 협력 기관이었다. 나라에서 이사장을 선임하는 데
일정 부분 관여하고, 기관이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매년 감사도 진행한다. 연장선상으로 수익형 모델의 공연도
올리지만 비수익형 모델의 자선 공연 또한 일부 제작했다.
마침내 예술단 사옥에 도착한 서림은 느리게 움직이는 「한국 예술단」 본관 출입문의 회전문 안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자전과 같은 그 회전의 안으로 기꺼이 입성하던 그는 여닫이형 옆문을 통과하고 있는 어떤 남자의
인영을 보고 멈칫했다.
계속 신경 쓰고 있어서 헛걸 보나.
의아해하며 회전문에서 빠져나온 순간, 상냥한 인상을 한 예술단 직원이 서림을 마중했다. 40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그녀와 마주 선 서림의 안색이 순간 긴장으로 살짝 식었다.
“구서림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승강기로 함께 향하는 사이, 서림은 깔끔한 인테리어의 로비를 둘러보았다. 이 한국 예술단 사옥 건물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대체로 깨끗하고 단정했다. 이 공간을 건축해 달라고 요구한 사람의 취향이 보이는
듯했다. 출근할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릴 풍경인데 썩 마음에 들어서 일단 합격점을 주고 싶었다.
“한국대요? 그럼 학번이…….”
서림이 되묻는 찰나, 승강기의 문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홍보 팀장이 앞장서고, 서림이 그녀를 뒤따랐다. 3 층의
회의실 문 앞에 선 그녀가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
“들어가세요, 구 감독님.”
“네,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입성한 서림은 창가에 서 있던 뒷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건물 출입구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무늬가 없는 하얀 드레스셔츠와 검은색 슬랙스가 몸의 예쁜 뼈대를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그
근사한 모양이 서림에게 아주 익숙했다.
기시감이 느껴져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서서히 돌려세웠다.
차츰 드러나는 얼굴이 서림의 눈에 비쳤을 때, 그의 외양은 오래전 자신이 알던 누군가의 모습과 분명하게
겹쳐졌다. 마치 그림을 그린 듯 매끈한 턱선과 높은 콧대, 길고 큰 눈 안에 비친 어두운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부럽다고 느꼈던 여유로운 표정까지. 모두 자신이 아는 사람의 것과 똑같았다.
‘꿈인가.’
일순 서림은 서로의 얼굴을 더듬었던 손끝의 온기가 새삼스럽게 다시 도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안면이
창백하리만치 질려 굳어 갔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그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아랫입술이
파들거리는 걸 막을 수도, 숨길 수도 없었다.
“제건욱?”
역시, 꿈이 아니다.
“보연이 넌 또 여기 왜…….”
설상가상으로 건욱을 잘 따르던 후배인 보연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되니 서림은 이게 꿈도, 환상도 아니라는
걸 명명백백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건욱에게는 상황 설명을 들을 엄두가 안 났다. 평온한 표정으로, 여상한 말투로, 오랜만에 만난 동기를
대하듯 형식적인 말들을 해 대는 걸 아무 준비 없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갈등하던 서림은 홍보 팀장에게
설명을 요구하듯 시선을 던졌다. 난감한 기색의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음성을 내뱉었다.
연신 떨리는 서림의 목소리에 분노인지 당혹인지 선뜻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가득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도리어 홍보 팀장이 당황해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제발 도와 달라는 듯 건욱을 향해 눈짓했으나
그는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서림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결국 홍보 팀장이 뒷수습을 마저 해야만 했다.
“아, 그게……. 애초에 제 단장이 한국 예술단으로 오시면서 「크리스타」에 구서림 감독을 추천했어요. 연출로
잘 어울릴 것 같다고요. 우리도 그래서 작품 판권 계약하면서 동시에 와 달라고 오퍼부터 적극적으로 넣었던 거고.
음, 이걸 아직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군요. 제 단장이 그 부분은 맡겨 달라고 해서 당연히 했을 줄 알았는데…
….”
“감독님, 구 감독님!”
보연이 걱정을 내비치자, 서림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던 건욱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서림이 이 안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퍽 여유롭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허물어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구서림! 잠깐만.”
완전히 닫힐세라 건욱이 양문형 문틈에 손을 넣어 봤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서서히 빈틈이 좁아지더니
문이 닫히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계기판을 힐끗 본 그는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구서림, 잠깐 기다리라니까.”
전속력으로 내려가니 로비를 걷고 있는 서림이 바로 보였다. 그를 발견하고 어깨를 붙잡자, 상대는 건욱을
냉정하게 쳐 냈다. 차가운 태도로 건욱을 뿌리치고 다시금 성큼성큼 걷던 서림은 어느 틈에 회전문에 함께 끼어든
그를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
끝끝내 대답하지 않은 채 뚜벅뚜벅 대로로 나온 서림이 마침 길가에 주차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려는 찰나였다.
건욱이 그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사방을 철통 봉쇄 하며 통로를 차단하는 통에 돌파구가 안 보였다. 결국,
애써 태연하려 애쓰던 서림이 자신의 판정패를 인정하고 입을 벌렸다.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서림이 그를 무시하고 간신히 차에 타려 하자, 급기야 건욱이 택시의 뒷좌석 차 문 사이에
아예 버티고 서 버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표출하지 않고 도로 쪽에 있는 반대편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떼는데,
동시에 그가 느닷없이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상체가 의도치 않게 마찰했다.
“헉…….”
“왜 못 해.”
“난 촌스러워서 그걸 못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너 정말 왜 이래!”
“정 마음에 걸리면 안 집적대겠다고 각서라도 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러니까 그렇게 싫다고만 하지 말고
재고해 줘. 우린 다 준비돼 있어. 연출인 너만 오면 돼.”
“구서림.”
두 사람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완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서림이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편법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는 듯 한쪽 눈을 슬쩍 찌푸린 서림이 그가 잠시 빈틈을 보인 틈을
타 그의 정강이를 빠르게 걷어찼다.
“윽……!”
빠각, 뼈가 타격을 받는 아찔한 소리가 나면서 훅 허리를 숙인 건욱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그사이 서림이
재빠르게 뛰어 아까 전 타려던 택시를 골라 탔다.
서림을 쫓아가려던 그는 한발 늦었음을 깨닫고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언젠가의 일이 떠올라 기시감이
일어서 기분이 나빴다.
안색에 드리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미루어 한참 전부터 뒤쪽에서 그들의 알력 싸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장님, 괜찮으세요?”
그는 대답과 동시에 제 손등에 남은 상처를 내려다봤다. 보연의 시선도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어머, 손에 피 나요!”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입장 차이’였다. 건욱의 입장에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는 사안이었고, 그런 판단하에 저질렀는데 서림은 끝내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의 마음과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질 않았던 듯했다. 건욱은 그런 서림이 어느 날은 이해가 되다가도, 또 갑자기 안 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차이가 갈등을 낳았고, 결국 그들은 3 년 뜨거운 연애의 종지부를 무척이나 허탈하게 찍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끝날 수가 있었던 건지, 애초에 서림이 자신을 좋아하긴 했던 건지, 그 일련의 과정을 다시
생각해도 건욱은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였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대화를 좀 더 했으면 싶었는데, 그는 제
앞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제대로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던 서림에게, 그때 자신은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옳았던 것일까.
서림이 평생을 죽도록 증오했던 그의 어머니가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 가도록 방조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징그러울 정도로 애타게 매달리던 건욱도 이 일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그를 포기하는 수순을 밟았다. 처음엔
미치도록 미워했고, 그다음엔 죽도록 원망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보다 본인의 기분과 상처가 먼저였던
서림의 결정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잊게 됐다. 잘못을 용서해 주거나,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할 만큼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5 년.
“아프세요?”
“아파.”
“어쩌시게요.”
“구서림은 내가 잘 알아.”
“언젠 내가 안 졌어?”
뚜벅뚜벅 걷던 와중 서림이 남기고 간 음성을 떠올린 건욱은 이미 그가 사라지고 없는 대로변을 불현듯 돌아보았다.
그렇겐 못 해 주겠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이긴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제 손등 위 상처를 힐끗 살피곤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02.
이곳은 서림이 대학 졸업 전까지 살던 집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허름하고 위치도 좋지 않은 곳에 있어서 주변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동네였다.
이제 서림은 서울시 내에 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며칠 투숙할 여력이 충분히 됐지만, 그곳은 제집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 좁고 낡은 공간이 훨씬 마음 편했다.
“하……. 이제 어떡하지.”
어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자신이 아는 한 건욱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다. 많은 사안에 게으른 태도를 견지하는
대신 하나에 꽂히면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되는 기동력을 발휘했다. 아홉 번 차이고도 열 번 고백해서 결국 자신을
얻어 냈던 근성을 기억하고 있는 서림의 사고 회로는 자연히 그런 식으로밖에 안 돌아갔다.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난 서림은 급한 대로 에이전시 담당 매니저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다행히 시차가 있는데도 상대는 금세
음성을 들려주었다.
- 서림 씨?
- 잠깐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타닥타닥. 미약하게 귓전을 파고들던 타자 치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간 기다리자 매니저가 덤덤한 음성을
돌려주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구서림!”
설상가상으로 마침 차에서 내리고 있던 건욱이 서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연해진 서림이 어린아이들 장난치듯
재차 커튼을 쳐 버린 뒤 몸을 낮춰 주저앉았다.
한껏 상체를 웅크리고 생각을 거듭하던 서림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책을 떠올려 내곤 벌떡 일어났다. 와서
잠만 잤기 때문에 어질러 둔 것도 없었다. 이미 씻었으니 이대로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됐다. 건욱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신경이 쓰인다면 자신이 집을 비워 종일 안 보고 안 들으면 되는 것이다.
일부러 계단을 걸어 내려가 도망치듯 조용히 공동 현관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쪽으로 나올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욱과 맞닥뜨렸다.
“헉…….”
“네 생각이야 뻔하지.”
서림은 일단 모른 체했다. 그러나 건욱이 왼쪽, 오른쪽을 모두 봉쇄하며 몇 번이고 제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우뚝 멈춰 선 서림이 그를 지그시 직시했다.
차갑게 일갈한 서림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자 대략적인 그림은
보였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욱을 발견한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는 모든 계산에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이는 행동을 취한 데 자존심이 상하고 그들의 과거 기억을 행동 양식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적극 활용하는 건욱 때문에 불쾌했다.
그때 헤어지자고 하지 말걸.
농담하듯 장난치듯 껄렁거리던 건욱의 음성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덕분에 서림도 걷다 말고 또다시 길 한복판에
멈춰 서게 됐다. 오전의 나른한 햇빛이 그들의 위로 비쳤다.
5 년 사이 면역이 흐려진 서림은 그의 이런 태도에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됐다.
계속 제 청각이 건욱의 중저음을 좇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연히 네가 3 년 전에 문체부에 제출한 기획서랑 포트폴리오가 나한테 왔어. 좋더라. 난 네 방식이 마음에 들어.
아니, 매우 좋아. 정도를 지키고, 섬세하고, 따뜻해. 연말연시 단발성 이벤트로 올릴 가족 뮤지컬로 너만 한
연출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언젠가 그 무대를 같이 올리자는 건 오래전 그들이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너무 마땅해서 그런 것이었을 뿐 반드시 함께일 거라고 여겼다. 한때 당연했던 일들이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시간의 힘인지 마음의 힘인 건지는 모를 일이다.
애정을 지니고 임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덕분에 그의 설득에 마음이 조금
움직이려 들어서 곤란했다. 서림이 머뭇거리는 듯하자 그가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여지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너 프로 아냐? 제대로 된 공연 하고 싶은 욕심 없어? 난 있어. 그래서 이러는 거고.”
넌 참 공사 구분 확실해서 좋겠다.
“제건욱!”
그의 말마따나 이 공연은 지금부터 준비해서 연말에 무대를 올리면 끝나는 단발성이었다. 정부에서 일부 지원하고
개입도 하는 이벤트성 공연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회차가 늘어날 일도 없었고, 행사가 끝난 뒤로 서로
질척거릴 상황도 웬만하면 만들어지지 않을 터다. 바꿔 말해 건욱의 말대로 반년만 눈 딱 감으면 더는 그와 볼일
없으리란 의미다.
게다가 그의 말마따나 건욱과 자신은 성향도 스타일도 반대라 합을 맞춰 가는 보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괜찮은 무대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구서림.”
“어딜 가.”
황급히 서림을 쫓던 건욱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가는 모양새를 주시했다. 왠지 허무해 보이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윽고 몇 미터쯤 멀어진 서림이 회귀하듯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가 데시벨을 조금 높여
외쳤다.
“고민 좀 해 봐. 내일 또 올게.”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그러나 건욱은 서림이 제 음성을 들었다는 걸 잘 알았다. 분명하게 움찔한 어깨 위의
파동이 그의 시야에 박혔던 탓이다.
서림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건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건욱은 마음을 다잡듯 외벽이 죄다 벗겨진 남루한 건물을 직시했다.
오래전에도 종종 느꼈던 것이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좀 외롭게 만드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이스커피를 오른편에 내려놓은 서림은 정면의 커다란 스크린을 직시했다. 마치 해가 진 저녁처럼 어스름한
사위의 이 밀폐된 공간에 있자니 조금 낯설었다.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았다. 관람하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커다란 소음이 들려오는 게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
아무거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가장 시간이 가까운 것을 대충 예매했더니, 제목을 뒤늦게야 확인하게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주연 배우의 얼굴 정도만 확인해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 나타나 자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제건욱.”
“…….”
“제건…….”
탁. 출입문이 닫히자마자 서림이 건욱을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안에서와 달리 거리낄 게 없으니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열받게 하려는 건 아니고, 일부러 그러는 건 맞고. 네가 어디 있는지는…… 본가에 있는 능력자의 도움을 조금
받았고.”
그의 입에서 마지막 문장이 떨어지자, 서림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치 순간적이지만 정물화처럼 모든
몸짓과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한 건욱이 꼭 필요한 정보 외에 다른 걸 침해하진
않았다고 변명하듯 말을 덧붙이려 하는데, 상대의 입이 열리는 게 한 박자 빨라 무산됐다.
“넌 시간 낭비가 취미야?”
“삼고초려 뭐 비슷한 거야. 유비도 제갈량 모시려고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데. 촉망받는 연출자 구서림한테도
그런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지.”
서림은 지그시 그를 보다가 더 말 섞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망설임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건욱이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영화관 건물을 빠져나온 서림은 표지판을 따라 인근에 있는 멀티플렉스 건물로 향했다.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마침내 멀티플렉스 입구로 들어가자 바로 위 2 층에 서점이 있었다. 홀린 듯이 그곳으로 향한 서림은 책 냄새가
물씬한 서가들 사이를 거닐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산란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누군진 안 봐도 뻔했다.
“어…….”
툭, 툭. 서적들이 힘없이 추락하는 동안 그들은 잠시간 치열한 시선을 교환했다. 건욱의 눈빛이 꽤 집요해서
서림의 얼굴이 별안간 벌게졌다. 그러다 문득 지금 두 사람이 거의 끌어안고 있는 형태라는 걸 깨닫고 낭패스러운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비, 비켜.”
“조심해야지.”
그가 감사인사는 됐다는 양 너스레를 떨었다. 민망해진 서림은 애써 서가의 높은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제일
위에 놓인 책들부터 가장 아래 있는 것들까지 눈대중으로 쭉 훑었다. 그런 뒤 「달과 6 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따위의 유명 고전 소설들을 하나씩 꺼내 차곡차곡 건욱의 손 위에 올렸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잠언을 착실하게 이행하기 위함인지 그를 짐꾼으로 쓸 요량인 듯했다.
“서머싯 몸은 다 봤잖아.”
“넌 헤세 좋아하지 않나?”
“관심도 끄고.”
“난 밀턴 싫어.”
“너 그런 거 없지 않았나.”
“생겼어.”
곧이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데, 어느 틈에 건욱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잡는 동안 이것들을 전부 산 건지 매장 내에서 판매하는 베이커리류를 종류별로 테이블 위에 산처럼
올려놓았다. 뒤이어 제 앞에 앉는 순간, 서림의 뺨 언저리에 느닷없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부의 여자 손님들 몇몇이 수군거리면서 근사한 외양의 건욱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서림.”
“고민은 좀 해 봤어?”
건욱의 제안이 솔깃한 건 맞았다. 그런 데다 소송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고 손발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건 현시점에서 받을 수 있는 리스크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계약을 수락하는 일 외엔 뾰족한 수가 안 떠올랐다.
제게 미약한 용기라도 남아 있을 때 와 줬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서 자신의 수심만
깊어졌다.
“나는 너를…….”
이렇게 건욱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를 사랑했던 기억과 끝날 때 입혔던 상처 따위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지금도 이런데 보다 잦은 횟수로 건욱을 보게 되면 더욱 심해질 것이다.
충분한 대답이 됐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건욱이 별안간 재킷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속
진동이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화면을 통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곤 테이블을 커다란 손으로 짚었다.
“맞아. 우리의 사적인 관계는 관점에 따라 중요한 포인트지. 이해해. 그런데 구서림, 나는 왜 그 말이 내가
너무 신경 쓰여 죽겠다는 말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움찔한 서림이 테이블 아래 얌전히 놓아둔 두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라 그런
기색을 감추느라 입술에서 힘이 들어갔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네 예전 애인이 아니라 한국 예술단 단장으로서 구서림 감독을 설득하러 온 거라고.
그런데 넌 자꾸 나를 너랑 사귀었던 제건욱으로만 보고 있잖아.”
“…….”
“맞아. 국어 잘하면 영어 잘하고, 수학 잘하면 과학도 잘해. 원래 하나 잘하면 두 개 세 개 다 잘하는 거야.
알지? 게다가 난 원래 뭐든 잘해. 아마 제작도 잘할 거야. 그래서 난 네가 좀 더 프로다워졌으면 좋겠다. 나 좀
불편하다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해.”
너무 일차원적으로 이 사안을 지켜본 자신을 에둘러 탓하는 것 같았다. 목청 높여 혼나는 것보다 훨씬 더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건욱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제 몸을 일으켰다.
“또 무슨 생각을, 제건욱!”
“미치겠다…….”
* * *
탕! 방아쇠를 당긴 순간 빛처럼 빠르게 전진한 실탄이 과녁에 꽂혀 들었다. 동시에 좌측 모니터를 통해 어디에
탄환이 박혔는지 나타났다. 중앙 하단의 6 점 위치였다.
‘오늘 잘 안 받네.’
마침 권총에 마지막 한 발을 남긴 상태였다. 총기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서림은 전방에 제건욱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고 총구를 10 미터 전방에 겨눴다. 그러고는 마지막 한 발의 방아쇠를 부드럽게 당겼다.
그 순간, 거리가 꽤나 멀었는데도, 마지막 한 발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좌측 모니터에도 목표물 가운데에
정확히 꽂힌 화면이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귀마개를 빼고 화면을 눈으로 확인하는데 사대 유리창 뒤에서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이 신기해하며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멋쩍어진 서림은 기계를 통해 제 쪽으로 건너온 종이를 구겨 쥐고 도망치듯 사격장을
빠져나왔다.
“하……. 하늘 엄청 맑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또 하루를 허비하는 사이 밤이
가까워진 모양인지 어둑어둑했다. 별은 많지 않았으나 대신 창공이 깨끗하고 청명했다. 곧 본격적인 여름이 올
텐데 그때가 되면 하루는 훨씬 길어지고 밤은 상대적으로 짧아질 것이다. 그 전에 많이 누려 두고 싶었다.
“뭐야, 이 시간에?”
“기다렸어?”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든 서림이 힘겹게 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막상 나타나니 반갑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제 마음을 먼지처럼 떨어내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서림이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건욱이 능숙하게 제 옆에서 함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더
빨랐다. 듣기 좋은 저음은 덤이었다.
“좀 생각해 봤어?”
“내 생각을 했다 이거지?”
체념한 듯 도로 종이를 수거해 온 서림이 오직 정면만 보이는 사람처럼 뚜벅뚜벅 걸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동안 숨이 조금 차올랐다.
그들도 똑같았다. 은은한 달빛을 무대 조명 삼아 언덕을 거니는 동안 사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럴
계제가 없었다.
조용히 한마디 한 건욱은 언덕배기에 오를 때까지 잠시간 침묵했다. 제집 건물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하니
그제야 건욱이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듯 말을 붙여 왔다.
엿 같다. 되게.
마침내 건물 앞 지상 주차장에 도착하자, 건욱이 서림을 길목에 세워 두더니 자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조수석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안에 물건들이 담긴 것으로 유추되는 납작한 상자였다. 그는 그것을 서림의 두
손에 얌전히 쥐여 주었다.
“이게 뭔데?”
“블루레이 같은데?”
“없어, 한 번도.”
“이걸 날 왜 줘.”
“일단 한 번 봐. 난 네 기획서를 보고 마음이 이끌렸고, 자연스럽게 네가 연출한 작품들을 보면서 너여야 한다고
판단했어. 이제 네 차례야.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크리스타」의 제작자로 내가 적절할지 냉정하게 평가해 줘.
난 같이 잘해 보자는 거지, 네 무대를 망치려는 게 아니야. 이걸 보고도 내가 아니다 싶으면 나도 진지하게
연출자 교체 생각해 볼게.”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린 서림이 조심스럽게 박스 밑의 갈라진 부분을 매만졌다. 자신이 그 납작한 상자에
마음을 뺏긴 사이, 그가 제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밀어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느닷없이 남의 살 닿는 게 좋진 않아.”
제 대답이 밖으로 새어 나온 순간, 건욱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서림에게
갑작스럽게 성큼 다가와 마른 어깨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고개를 돌릴 때처럼 피해서 뿌리치고 싶었으나 그의 완력이 서림의 저항하는 힘보다 강했다. 상자를 던질까도
싶었지만 차라리 제건욱을 던지면 모를까 그의 작품들을 길가에 팽개치는 건 너무 나간 것 같아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거 놔.”
“그러니까 놔.”
건욱의 날카로운 눈매가 대꾸하며 시선을 피하는 서림을 빤히 주시했다. 연이어 그의 모양 좋은 입이 열렸다.
“그래도 고려해 줄 거지. 싫어하는 사람과의 지루한 소송보단 싫어하는 사람과의 타협이 네 정신 건강에도 훨씬
낫잖아.”
액면 그대로의 말로는 그의 논리가 맞지만, 서림에겐 건욱이 모르는 복잡한 내부 사정이라는 게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와의 타협이 더 힘들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직 어떤 확신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 쪽에서 잠잠히
있으니 건욱도 말을 아꼈다. 서로의 어깨 위에 순간적으로 아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까득, 불현듯 상자를 세게 쥔 서림이 어깨를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놓아주곤 처음의 간격을 유지하듯
한 걸음 물러섰다. 이와 동시에 서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의 요구는 실상 아주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건욱은 집요한 구석이 있는 탓에 대충 눙치는 것으로는 설득할
수 없었다. 서로 한 가지씩 양보하지 않으면 계속 이런 평행선일 듯했다. 조심스럽게 붉은 입술을 달싹인 서림이
뒤늦게 대꾸했다.
“좋아.”
그제야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건욱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서림은 즉각 미간을 구겼다.
“뭐가 웃긴데?”
“꼭 웃겨서 웃나.”
“뭐가 널 웃게 했는데.”
“간다.”
“야, 제건욱!”
좋은 공연에 대한 욕심은 서림에게도 분명히 존재했다. 아울러 더는 제 허약한 방패로 건욱이 휘두르는 칼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03.
거실의 창문 너머로 하얗게 동이 트는 모습을 응시하던 서림은 또 하루가 지났음을 겨우 인식했다. 한국에 온
첫날부터 계속 밤잠을 설친 탓에 피곤이 어깨와 머리, 그리고 눈두덩에까지 뭉쳐 온몸이 무거웠다.
“죽겠네, 아주.”
“왜 웃나 했더니.”
“졸려…….”
* * *
〈한국 예술단〉 로비에는 개인 카페가 마련돼 있었다. 처음에 이 자리의 입찰을 받을 때 건물주가 조건으로
제안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단장님, 이제 출근하세요?”
“오늘도 근사하세요!”
“그거 아세요? 야사에 의하면 사약은 원래 진짜 고급 약초들로 만드는 거래요. 능지처참 이런 극형이랑 달리
시체 보존을 해 주고 싶은 아끼는 죄인한테만 하사하는 거죠. 신체발부 수지부모.”
이 불분명한 설명을 통해서 보연이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건욱이 제 커리어에도 무척
중요하게 작용할 첫 제작 작품의 연출로 서림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듯 말 듯 했다. 서림은 분명 좋은 연출자지만
본인만의 주관이 다소 뚜렷하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욱은 제 의견을 꺾고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면서 일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살살 구슬리는 타입이라고 봐야 옳았다.
과거의 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며칠 사이 알게 된 바로 이제 그들은 과거만큼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건욱이라면 적당히 입맛에 맞게 움직여 줄 연출을 하나 구해서 원하는 대로 1 부터 10 까지 전부 잡아 주는
쪽이 훨씬 더 어울렸다.
애초에 자신을 버리기 전 어떤 여지라도 남겼을 터다. 하지만 서림은 그러지 않았다.
“네, 완전히요.”
“하, 다행이다.”
“왜요?”
“구 선배 비행기 탔을까요.”
“안 탔다에 건다.”
서림이었다.
“서림 선배……!”
새로운 등장인물의 이름을 부른 보연이 ‘헙’ 하고 제 입을 손으로 막으며 비명을 겨우 참아 냈다. 초연한
태도의 건욱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으며 만년필을 습관적으로 손가락 사이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막판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펜대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는 매우 뒤늦게
서림에게 말을 건넸다.
“노크 안 해?”
“또 밤 꼬박 새웠나 보다?”
“네가 이긴 거 같냐?”
“제건욱 네가 이긴 것 같냐고.”
“당연하지.”
엄밀히 말하면 틀린 소린 아닌지라 서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러자 건욱이 회유하듯 꽤나 온화해진
말투로 덧붙였다.
“무슨 자신감?”
“넌 욕심이 아주 많으니까. 아울러 나는 네가 버리는 카드로 쓰기엔 너무 뛰어나거든. 그래도 어느 정도 안도는
되네. 회심의 일격이자 최후 변론 안 통했으면 격해질 뻔했어. 바로 뉴욕 쫓아갈 뻔했다.”
“납치라도 하게?”
“못 할 것 같아?”
상대의 대답을 곱씹는 듯한 서림의 표정이 몹시 묘했다. 그러나 순간이었을 뿐 금세 안면 위에서 그런 기색은
사라졌다.
원색적인 비난에도 건욱은 제 생각에 조금의 변화가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서림을 떠보듯
은근하게 질문했다.
“어떻데?”
진짜로 까먹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서림은 표정과 말투로 이미 자신이 알면서도 굳이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건욱의 농간 아닌 농간에 휘말려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걸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던 건욱이 팔짱을 척 꼈다.
“혹시 나를 소소하게 엿 먹이고 싶어서 일부러 취소를 안 한 거라면 이런 방식은 타격이 아주 미미하다는 걸 전해
주고 싶네. 기억력이 평균 이상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주 부자라서 말이야. 분쟁을 만들고 싶다면
다른 방법 찾아봐.”
“돈 자랑하는 건 여전하시다.”
말장난으로 부끄러움도 잘 모르고 그저 뻔뻔한 그를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으득. 잇새를 짓이긴 서림이
마치 백기를 들어 항복을 선언하듯 앞에 놓인 서류들을 그에게로 던져 버렸다. 나풀나풀 낙엽처럼 떨어진
종이들이 건욱의 발치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좋아, 계약해.”
예전엔 건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타인이 된 상태로 마주하자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아리송했다. 건욱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어 거북했다. 언제 물러섰다가 또 훅 치고
들어올지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 계속 긴장하게 됐다. 그러자 이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달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림은 시소놀이를 하듯 자연히 미간을 구겼다.
“또 웃네.”
“좋아서.”
“무슨 뜻이야?”
“…….”
“보연아, 구서림 감독 계약한단다. 접견실에 관계자들 올라오라고 해. 그리고 오늘 직원들 다 출근하는 날이지?
계약 회의 끝나고 상견례 세팅해. 구 감독 인사 시키게.”
짤막한 통화를 마친 건욱이 서림을 또렷이 마주 보았다. 그가 보연과 대화하는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서림이
그제야 건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해하지 마. 안 마신 거야.”
“누가 뭐래?”
“둘이? 무슨 얘기?”
이미 단둘이 있는데 왜 자리까지 옮기면서 대화를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 선뜻 납득하지 못한 서림이 초록색 교통
표지판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건욱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는 듯 제 목을 슬쩍 긁으면서
답했다.
어쨌든 최소한 앞으로 반년간은 그와 부딪치며 일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반복 학습해 내재화하는 게 옳았다. 사실 이미 혼자서만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날씨 좋네.
“줘 봐. 그 유도 지표.”
“물론이지. 보연이가 출입 카드 바로 만들어 줄 거야. 그런데 웬만하면 퇴근을 해라. 굳이 회사에서 밤새울 거
뭐 있어.”
“구서림.”
“왜.”
“그 말 후회 안 해?”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가 별안간 손끝으로 제 코끝을 툭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촉감에 당황해서 손등으로 코 위를
문지르자 건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닦을 정도로 싫어? 우린 그냥 사귀다 갈등이 생겨서 헤어진 거야. 철천지원수 아니고.”
“네가? 별로 안 믿기네.”
그가 말하는 꿈꾸는 기분이란 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서림은 모르지 않았다. 처음 예술단 건물에서 건욱과
마주쳤을 때 제 기분이 꼭 그랬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고, 깨어나면 그게 스러질까 두려웠다.
“나 너 종종 보고 싶었거든.”
일순 마른침을 삼킨 서림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각자의 동공이 서로의 얼굴 위를
바람처럼 훑고 나자, 부끄러움을 느낀 서림의 뺨이 달아올랐다.
보고 싶었거든.
그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내 여러 번 곱씹는 동안, 서림은 뭘 뒤집어도 나쁜 패였던 제 인생에 조커가
찾아와 준 기분을 순간적이나마 분명히 느꼈다.
그와 달리 자신은 동요도 잘 못 감추고, 여러 면에서 들키기가 쉬웠다. 이렇게 계속 눈빛을 교환하고 있다가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해 버리게 될 것 같았다.
서림은 빠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호로록 마신 커피의 끝 맛이 유독 썼다. 입맛이 쓴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향이 좋고 목 넘김이 시원해 기분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
“여기 커피 맛있네.”
“다행이다. 입에 맞아서.”
“오늘은 직원 상견례 하고. 단원들은 언제 볼 수 있어? 대본이랑 음악 얼개 잡혔으면 작가나 작곡가는 섭외가 된
것 같고, 음악 감독이랑 안무가는?”
애써 건욱에게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바깥을 내다보던 서림이 근사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힐끗 살피자, 줄곧
제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모양인지 건욱과 곧바로 눈길이 부딪쳤다.
“또 뭐.”
“진짜 밀턴 싫어하냐?”
“댁이 무슨 상관.”
“그럼 단테도?”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작가 메리 셸리가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 밀턴의 「실낙원」 속 아담의
절규가 서림은 참 싫었다. 꼭 제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적은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건욱이 밀턴을 좋아해서 그게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는 말도 한 번 못 했다.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전문가들이 때로 사람들의 추억은 매우 부정확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확실하게 그 순간의 전부를
기억했다.
“나도 네 눈치 정돈 봤거든.”
“거짓말.”
“믿지 말든지.”
“먼저 나간다.”
* * *
건욱과 서림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양옆으로 예술단 법무 팀 직원과 인사 팀장이
나란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나 확인할 거. 「크리스타」 판권은 스몰 라이선스로 가져온 거네. 음악이랑 대본만 산 거면 우리가 일부
재창작도 가능한…….”
묵묵히 계약 서류를 넘겨 보던 서림이 말허리를 중간에 자르고 고개를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고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응, 가능해.”
고개를 끄덕이던 서림은 다시 계약서에 시선을 돌리려다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건욱의
눈앞에서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쳤다.
“일단 지금까지 인건비를 포함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의 모든 예산은 정부가 일부 부담, 우리 예산에서 일부
부담, 그리고 투자금. 여기서 모자란 건 나랑 실무자들이 계속 발로 뛰어서 추가 투자 금액을 만들어 낼 거야.
그게 제작자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맞은편의 남자를 차분한 눈빛으로 직시한 서림은 이윽고 하얀 서류 맨 뒷장 하단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마치 톱으로 나무를 베듯 펜촉으로 종이 위를 꾹꾹 눌러 본인의 고유 표식을 남겼다. 펜을 내려놓자 법무 팀
직원이 둘 중 한 부를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보연의 안내에 따라 배석한 직원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림을 힐끗 본 건욱이 상체를 살짝 기울여 은근하게 속삭였다.
서명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그의 말대로 이미 끝까지 온 이상 무르는 건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재정적 조건이
받쳐 주는 건욱이야 정 내키지 않는다면 천문학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파기할 수도 있겠지만 서림은 그와 달랐다.
이 계약서에 제 이름 석 자를 스스로 적어 넣는 순간 상대적 약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수락한 이유는 하나였다.
“너나 잘하세요.”
만년필을 건욱에게 휙 던지며 대꾸한 서림은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계속 그의 수작에 말려든 기분이라 썩
유쾌하진 않았는데 펜촉의 잉크가 그의 하얀 셔츠 위에 퍼지는 걸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제 옷이
더러워졌는데도 건욱은 어떤 힐난도 하지 않고 조용히 캡을 닫을 따름이었다. 지은 죄를 알긴 아는 모양이다.
낮 시간이 되자 습도가 한층 높아진 모양이었다. 쾌적한 실내에 있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니 잠시간이지만
목구멍에 텁텁함마저 느껴졌다.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나오던 서림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나부낀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날은 다소 더웠지만 최소한 머릿속은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상쾌했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지루한 고민을 끝냈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건욱과 달리 원래 제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끝끝내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다.
“구서림, 차 안 가져왔어?”
고개를 떨어뜨린 서림이 다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데, 뒤쪽에서 귀에 익은 주파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됐다. 서림이 답을 주기도 전에 건욱의 자문자답이
이어져서 짐작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아, 그렇지.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가서 한국엔 차가 없겠구나. 너 귀국할 때 공항에 우리가 차를 보냈던 걸
까먹고 있었네.”
“택시 타면 돼.”
“연계는 하지만 독자적인 단체야. 특별한 경우 일부 지원은 받을지언정 자체적으로도 수익을 내서 운영해.”
“내 돈이라고.”
“뭐?”
“그간 경력이 없어서 취임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어. 연차 5 년 이상 쌓았으니까 올해 자격을 갖춘 거고. 〈한국
예술단〉 이사장이 우리 막내 이모야. 그런데 이름만 올린 거라서, 모든 실질적 결정권은 나한테 있다고 봐야지.
이거 말 안 했나?”
안 했다.
“「크리스타」도 투자 네가 하는 거란 소리네?”
“난 대체 몇 가지를 속은 거야.”
“넌지 몰랐으니까.”
“됐다고.”
대꾸 없이 뚜벅뚜벅 인도 끄트머리로 걸음을 옮긴 서림은 도로변을 살피면서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오라는
택시는 몇 대나 눈앞을 지나쳐 가고 웬 새빨간 스포츠카가 그의 앞에 주차하는 것이었다.
끼익. 이내 멈춰 선 사치스러운 차량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 댔다. 이윽고 서서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좀 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택시를 잡으려던 서림은 그 안에 탑승해 있던 여자가 부르는 이름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발걸음이 아스팔트 위에 묶이고 말았다.
“제건욱! 여기!”
그는 그동안 거절당해 본 적 없었고, 이기는 싸움만 해 왔다. 고비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있다면 그건
건욱이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타고난 기질 덕분인지 성격도 자신만만했다. 좋게 말하면 주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때때로 무례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꾸준히? 내가?”
그러나 서림은 계속 대거리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 서 있다간 제 기분이 상했다는 걸 건욱에게 고스란히 들킬 것
같았다. 인연이 끝난 지가 언젠데 이런 문제로 아직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몹시 당혹스러울
터다.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다.
“제건욱! 안 타?”
건욱은 반복되는 채근에도 작아지는 서림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라야 미간을
구기곤 차 안을 들여다봤다.
“네가 봐서 뭐 하게.”
서림은 붙잡아도 늘 심사숙고 없이 저렇게 떠나 버린다. 가겠다고 하면 그냥 담백하게 보내면 되는데,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야멸친 그를 계속 붙들고 싶어 문제였다.
04.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을 벗어나기 전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 거울을 쳐다보자 제 등판이
밝은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나 있었다.
“넌 언제 봐도 징그럽다.”
새살이 돋아날 때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모습이 꽤 흉측했다. 그래서 서림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의를 탈의한 적이 없었다.
드르륵. 욕실 문밖에서 요란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기억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는 황급히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와 메시지를 확인하니 보연이었다. 앞으로의 회의 일정 따위를 고지하는 내용이어서 머릿속에 입력해
두기 위해 꼼꼼히 읽어 내렸다. 동시에 간단하게 끼니를 챙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부질없는
행동을 했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물도 없어?”
그러던 와중 제프리라는 이름의 현명한 어른을 만나게 되고, 그가 상처받은 크리스타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는 이야기다.
화면을 재생하니 다소 어둡고 낡은 빛깔의 배경과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운드 트랙이 흘러나왔다. 여자아이의
명랑하고 맑은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따뜻한 모포와 튼튼한 가구,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푹신한 벨벳은 아득히 먼 곳에.〉
“아, 치운다고…….”
“알았다니까. 되게 보채네.”
비척비척 움직인 서림은 최대한 열심히 집 안을 쓸고 닦았다. 옷장에는 옷들을 넣고. 신발은 신발장에, 각종
디지털 기기들은 협탁에 올려놓았다.
“뭐야, 이건.”
이제 보니 도처에 그가 신었던 스니커즈, 입었던 셔츠 따위는 물론이고 사용했던 수저나 유리컵 따위들이 널려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묘하게 다들 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긴 졸업 직후 그와 헤어졌고, 서림은 교수님의
제안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급작스럽게 뉴욕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곳을 정리할 여유 시간이 모자랐다.
“연예인인가…….”
건욱을 다시 만났을 때 서림이 정말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던 건 그에게 속아 여기까지 날아온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5 년 전 결별에 연연해 그와 일을 하느니 마느니 고심하고 있는데 건욱은 도리어 모든 걸
깨끗하게 청산하고 공과 사를 분리해 자신을 추천하기까지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신을 만난 그가 크게 동요하기까지 바랐던 건 아니지만 제게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눈동자는 충분히 낯설었고
또 충격이었다. 농담처럼 그간 보고 싶었다는 말을 편안히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자신은 그에게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크리스타」 팀 회의에 잠시 들른 홍보 팀장이 건욱에게 이의를 선언했다. 그녀는 처음 서림이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부터 별관이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기운을 풍기더니 결국 첫 제작 회의 시간에 들어와서 의견을 적극
표명하는 중이었다.
다정한 음성으로 대꾸한 그가 연이어 보연에게 지시하며 냉정하게 눈짓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녀가 팀장을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안에 남아 있던 작가, 음악 감독, 안무가 등의 스태프들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서림이 차분한 어투로
정적을 꿰뚫었다.
서류에 척 손을 얹은 건욱이 서림의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서림이 좀 걱정스러워하는 눈치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가벼운 고갯짓이 건욱에게 큰 도움이 됐던 모양인지 어조에 힘이 실렸다.
“홍보 팀장이랑은 내가 잘 얘기할게요. 촉망받는 연출자인 구서림 감독 섭외했다고 좀 알리고, 배우도 개런티가
허락하는 한 가장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뽑고, 좋은 일 한다고 여기저기 좀 홍보하고. 그러면 될 겁니다. 돈
문제로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면 절대 안 된다고 누가 신신당부를 하셔서.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여기저기에서 우려를 표하는 것과 별개로 실제로 이 예술단 별관에서 하는 건 그다지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혜화 인근이니 문화 예술의 중심지에 위치했고, 지하철역과 인접해 있어 접근성도 좋았으며, 주변에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 묵을 만한 괜찮은 숙소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건물이 깨끗하고 시설이 훌륭했다. 아울러 제작
비용까지도 절감됐다.
다이어리에 장점들을 하나씩 메모하던 서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건욱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저렇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듯했다.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말려 봤지만 건욱은
듣지 않았다.
왠지 난처해진 서림이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질문했다. 홍보 팀장과 대화를 마친 모양인지 보연이
들어오면서 대답을 주었다.
서림이 서류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는 동안 좌중은 적막이 감돌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서 이쯤이면 될 것
같다는 시선을 건욱에게 보내자, 그가 스태프들의 이목을 제 쪽으로 집중시켰다.
“우리끼리 지금부터 왈가왈부해 봤자일 것 같고. 무대는 윤색 고가 나와야 세부 회의 가능하지 싶네요. 완고가
나오면 그때부턴 주기적으로 회의할 거니까 번거롭더라도 출퇴근해요. 첫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하죠. 오늘은 이만
해산합시다.”
“구서림 감독.”
“뭐 할 말 남았어?”
“글쎄 그게 뭐냐니까.”
“진짜 말도 안 돼. 그렇지.”
“야, 제건욱. 이럴래?”
“나 배고파. 밥 먹자.”
“저게 진짜.”
“또 집까지 쫓아오시게?”
느물거리는 말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선뜻 분별이 안 갔다. 아마 51 퍼센트쯤의 모호한 확률로 진담일 터다.
그가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하는 사람인 것과, 쇠뿔도 단김에 빼는 편인 성미인 것을 아울러 기억해 낸 서림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이 돌아갔을 때의 상상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확언받듯 책상
위를 툭 쳤다.
“일 얘기를 하긴 하는 거지?”
“다른 꿍꿍이는.”
“하……. 가, 그래.”
건욱은 이 체념 섞인 대답에 만족한 듯 차 키를 허공에 훅 던져 올렸다가 제 손으로 낚아챘다.
* * *
“못 고르겠어?”
“그러겠습니다. 4 번, 7 번, 9 번, 16 번 맞으시죠?”
주문 번호를 재차 확인한 직원이 메뉴판을 챙겨 들고 객실을 빠져나갔다.
건욱의 말마따나 서림은 먹고 있는 와중에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무척 불편하게 여겼다. 게다가
자신이 선택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건욱이 나서서 제 입맛에 맞춘 메뉴들을 주문하는 수순도 익숙했다.
쌀쌀맞은 대답에 이어 황량한 침묵이 따라왔다. 서림은 타인과 함께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밤의 기류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만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동료로서의 배려와 호의를 이런 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그런 기분을 자아냈다. 뱉어 놓고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물어봐.”
“너 사실은 일 얘기 할 거 없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묵언이 충분히 답이 되었다. 서림의 깊은 한숨이 막막한 공간을 에워쌌다.
뒤이어 건욱의 낮은 음성이 모양 좋은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왔다.
이곳이 한국이고, 분업 시스템이 미국만큼 잘돼 있지 않다는 건 서림도 알았다. 그는 요컨대 공조를 위해서 두
사람이 날 선 부분을 일정 부분 깎을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루어 불편해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덕분에 탓하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지만, 서림에겐 자신을 향한 힐난처럼 다가왔다.
“나는…….”
망설이던 서림이 변명인지 해명인지 스스로조차 명확히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이 등장했다.
다림질이 잘된 유니폼을 차려입은 남자가 주문한 음식들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는 동안 서림은
살짝 열렸던 입을 도로 꾹 다물었다.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섞어 대꾸하자 음료를 마시던 건욱이 급작스럽게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그러고는
묵직하고 은근한 시선으로 서림을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반전된 그의 태도 때문에 서림은 숙명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싫었다. 그는 너무 태세의 전환이 빠르고, 더는 제 페이스에 맞춰 주지도 않으므로 종잡기가 어렵다.
당혹스러워하던 서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음성을 쥐어짜 내 공기 중에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하더니, 서림의 눈부터 코끝, 입술, 그리고 울대뼈에 이르기까지 얼굴 주위를
눈으로 핥듯이 훑었다. 음험하고도 게걸스러운 눈빛이 이목구비 위를 야릇하게 지분거리기 시작하자 필연적으로
서림의 목울대가 들썩거렸다.
“그만해라?”
어설프게 떨리던 서림의 손이 테이블보를 쥐었다. 그러다가 냅킨에 손끝이 닿아 그걸 그에게로 날렸다. 얇은
하얀색 천이 종이비행기처럼 건욱의 어깨에 맞고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높이 던졌으면
저 잘난 얼굴에 맞출 수 있었는데 유감이었다.
호흡을 고르던 서림이 그를 힐끗 살폈다. 사실 자신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건욱의 지난 5 년간이 계속 궁금했는데,
그걸 물어보는 게 이상해 보이진 않을지 걱정이 돼서 일부러 억눌러 뒀다. 똑같은 질문을 그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오는 바람에 좀 씁쓸했다.
“남 사생활에 웬 관심.”
“관심이자 호기심.”
“두 개가 결이 같은 거 아니야?”
“도저히 안 믿어져서.”
“잠깐 우월감을 느끼겠지. 그렇게 변덕이 심한데 나랑은 꼬박 3 년을 사귀었으니까. 그리고 계속 짜증 나겠지.
네가 날 버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겠구나.”
“…….”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지 않는 한 관계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리란 걸 잘 알았다. 서로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이런 식으로 불시에 서림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사실 건욱이 지금 한 대답은 대상만 바꿔서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과 헤어진 뒤 최소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왔던 여자뿐인 건 아니리라. 5 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밥 먹다 뭐 해. 앉아.”
물론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은 했지만 돌이킬 의향은 없었다. 서림은 꿋꿋한 태도로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이 시간에?”
“어, 술 마실 거야.”
“누구랑.”
그사이 출입문 쪽에 당도한 서림이 그대로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서였다.
“나 게이 아니야.”
쓸데없는 소모전은 이만 관두고 싶다는 듯 꽤나 절박한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가 어떤 방식이 최선일지를
바로 재 보는 기색이었다. 건욱이 멈춰 있는 사이, 서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객실을 홀연히 빠져나갔다.
05.
작열하는 태양이라는 표현은 다소 식상한 묘사였으나, 창밖의 광경은 그것보다 더욱 그럴싸한 수식어가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구고, 빌딩의 표면을 아슬아슬하게 녹아내리게 만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두꺼운 창문을 두드리며 시원한 실내로 침투하기를 몇 번이고 시도했다.
계절의 순환은 예상보다 늘 한 박자가 빨라서, 이번에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을이 성큼 와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은 단장 사무실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독대하고 있었다. 건욱이 넌지시 묻자,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대답을 하려는데, 제게 닿은 그의 시선이 꽤 집요해서 당황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말을 좀 더듬게 됐다.
“그럼 오케스트라 자리는 좌석으로 빼고……. 아, 오프닝넘버는 가사가 원작이랑 거의 똑같던데 일부러 그렇게
직관적으로 번역한 거야?”
그 순간 두 사람 모두의 머릿속에 경쾌한 멜로디와 아이들의 발랄한 음성이 적절한 배율로 혼합돼 한 곡의 노래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급하게?”
“안타깝지만 올 배우가 다 거기서 거기야. 몇몇은 우리가 지목해서 비공개 오디션으로 할 거고. 아마 괜찮을
거야.”
“둘 다 일을 잘하거든.”
헛웃음을 터트린 서림은 다이어리 일정표에 몇 가지 메모를 적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고개를 살짝 수그렸는데,
정수리 위에 닿는 얄궂은 시선이 느껴져 서서히 글자를 쓰는 팔뚝이 굳었다. 괜히 제 머리의 가마 모양이
어땠는지까지 신경 쓰였다.
불편함을 견디다 못한 서림이 불시에 고개를 분연히 쳐들었다. 역시나 제 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건욱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테이블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건욱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눈길을 보냈다. 감추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빤한 시선을 서림에게 고정했다. 마치 그의 밤을 닮은 짙은 눈동자가 외려 투명한
유리처럼 자신을 오롯이 담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성격이 보였다. 건욱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선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 왜.”
이 반응을 신호탄으로 해서 서림이 서류들을 챙겨 제 집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건욱이 펜대를 손가락
끄트머리로 문지르다가 그것을 서림의 방향으로 쓰윽, 밀었다.
“나 장난하는 거 아닌데.”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술? 무슨 술.”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대꾸하는 건욱의 음성이 달빛이 창에 은은하게 비치듯 부드러웠다. 그래서일까.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를 휘감는
순간 서림은 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그럴까.”
“…….”
구도상 분명히 서림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의 기세는 건욱 쪽이 압도적으로
떨쳤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 파동이 여느 때에 비해 조금 건조하고 쌀쌀맞은 모양새로 변한 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너 어제 나 미행했어?”
움찔한 서림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발끈하게 했던 미행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있었다. 직접 눈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쫓았다는 건, 건욱이 제 애정사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말과 상통했다. 덕분에 아주 약간의 희열이 일었던 탓이다. 조용히 동요하던 그는 겨우 제 마음을
다잡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왜.”
“그런데 왜 물어봐.”
이번엔 본인이 했던 말을 토대로 고스란히 역습을 받은 건욱의 입이 다물렸다. 순간이긴 했지만 그의 빈틈이
드러났다. 서림으로선 이걸 놓칠 수가 없었다.
“더 하면.”
늘씬한 뒷모습이 가시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계속 문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건욱은 온전한
혼자가 되자 의자 등받이에 제 상체를 길게 늘어뜨리듯 걸쳤다.
“하…….”
* * *
뮤지컬 「크리스타」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두루 등장했다. 덕분에 오늘 참석한 인원도 아이가 반, 어른이
반이었다. 아이들 오디션이 끝난 뒤, 조연출이 대기실로 나와 잠시간의 휴식 뒤 어른 배역의 공개 오디션이
시작될 것임을 천명하고 회의실로 도로 들어갔다.
회의실 내부에는 작가와 안무가, 음악 감독, 그리고 서림과 건욱이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제일 끝에 앉아
있던 작가가 반대편 끝에 있는 건욱 쪽으로 몸을 틀어 질문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서류를 툭,
손끝으로 내려친 건욱이 제일 먼저 응답했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아니라 맞은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보연을
향했다.
조금 전 대본의 일부를 읽어 보던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흐릿한 스크린 위에 흐르기 시작했다. 짤막한 영상이
모두 끝날 때까지 다들 집중했으나, 아이 자체에서 특별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낭랑해서 바로 귀에
꽂힌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묘하게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실은 저도 이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대부분 엄마 손잡고 왔는데 왜 혼자 매니저랑 같이 왔는지 궁금해서
확인해 봤거든요. 예영이 부모님이 두 분 다 작년에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아이 아버지가 생전에 손버릇이 많이 나빴나 봐요. 크리스타 얼굴에 있는 것처럼 애
몸에도 상처 같은 게 좀…… 많이 보인다는 것 같더라고요. 주눅 들어 있는 것도 그런 두려움 때문인 것 같고.
그래서, 우리 극 취지에는 부합해요.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게 치유라면, 제일 어울리는 주인공
아닐까 싶어요.”
“사연이 안타깝긴 한데 너무 얌전해 보여서. 배우로 매력이 있나? 크리스타는 초반엔 좀 어둡지만 점점 원래
성격을 되찾고 밝아지는 캐릭터예요. 게다가 본인이 캐스팅된 이유와 이 극의 상관관계를 본인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잖아. 예영이라는 애한텐 그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작가가 합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서림이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차마 강력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있자,
건욱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 아닙니다. 두 사람이지.”
그가 본인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서림이 기가 막혀 하는 기색 반, 고마워하는 기색 반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건욱이 좀 더 의견을 밀어붙였다.
표정이 어둡고 주눅이 들어 있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음색이 예쁘고 성량도 나쁘지 않다는 분명한 장점도
존재했다. 원석은 열심히 세공하고 다듬으면 제 가치를 하는 법이었다.
“우선 예영이는 우리랑 얼굴 다시 보는 걸로 하고, 소수 의견도 존중해야죠. 작가님이 원하는 아이도 캐스팅해요.
어차피 역할은 연기시켜 보다 보면 바뀌기도 하니까.”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든 작가가 건욱을 흘기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는 눈치껏 그녀를 쫓았다. 서림은 아마
그들이 함께 회의실에 돌아올 때쯤이면 작가가 이미 건욱의 논리에 설득되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똑똑. 문을 노크한 보연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지했다. 서림이 바깥을 향해 손짓하며 건욱과 작가가 잠시
나갔다는 것을 전하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테라스로 향했다.
회의실 복도 반대편에 있는 탕비실로 천천히 걸음하고 있는데, 목적지 앞 벤치에 웬 여자아이 하나가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사진과 영상으로 계속 모습을 접하던 예영이었다.
“어디 갔는데?”
“은행.”
“음, 그럼 잘 놀다 가.”
왠지 미안해진 서림이 고민 끝에 어색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해 주려던 때였다. 예영이 옷자락을 살짝 붙들어
그를 만류하는 것이 더 빨랐다. 가지 말라고 차마 말하진 못하고 행동으로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는 듯 보였다.
서림은 왠지 이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직 어려서 정확히 한 단어로 본인의 기분을 표현하진 못할 테지만, 어른인 제 눈에는 명확히 들여다보였다.
아이는 퍽 낯선 사람에게라도 의지해야 할 만큼 마음이 쓸쓸한 듯했다. 서림은 그게 무엇인지, 어떤 감각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 오고 싶었는데?”
“뮤지컬 배우 되고 싶어서요.”
“왜 그게 되고 싶은데?”
작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던 사전 정보를 머릿속에 끄집어낸 서림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한 손엔 그의 옷자락을 못 가게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음료를 마시면서 계속 제 눈치를 봤다. 이 조그만
머리로 뭘 걱정하는 건지 서림으로선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때때로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때였다.
서림은 보연의 쩌렁쩌렁한 음성을 듣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회의실 방면을 쳐다보자 건욱과
작가가 대화를 끝낸 건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건욱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기에 서림은 예영을 향해 도로 고개를 틀었다.
쑥스럽게 웃는 아이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그걸 눈으로 목격하자 좀 더 확실하고, 큰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자신이 제작진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는 건 아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림은 최선의 방법으로 이렇게
말했다.
“구서림.”
“왜, 뭐 할 말 있어?”
“뭐 때문에 그러는데.”
“왜 저래.”
* * *
〈예술 감독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단장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으로 건욱과 보연이 들어와 회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크리스타 역은 예영이로 하고, 여기 보육원 애들이랑 관계자들 목록이고. 나중에 크리스타 아버지가 되어 주는
물리학자 제프리 역할은 이분. 고맙게도 좋은 취지라고 노 개런티로 가능하시대요. 단장님이랑 구 감독님이 최종
결정하시면 계약서 사본 바로 보낼 예정입니다. 구 감독님은 벌써 서명하셨어요.”
그때까지도 건욱은 별말 없이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계속 침묵하자 보연이 독촉하듯 손가락 등으로
책상 위를 두어 번 내려쳤다.
그녀가 끄덕이자 뒤늦게 건욱이 결재란에 만년필로 사인했다. 그러고는 뭔가 목구멍에 걸려 불편을 느끼는
사람처럼 펜대를 툭,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개마저 뒤로 훅 젖히고 긴 숨을 뱉어 내는 그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일이 잘 풀리고 있어서 나쁠 게 없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보연이 넌지시 물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제 마음을 가라앉힌 건욱은 서서히 고개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보연을 쳐다보았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양 축객령을 내리며 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보연이 주섬주섬 서류들을
챙기면서 건욱을 미심쩍게 관찰했다. 그사이 건욱이 피곤하다는 양 좌우로 목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욱 선배.”
“단장님.”
“단장님!”
“왜.”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목울대의 피로를 풀고 있던 건욱이 멈칫했다. 그는 어설프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보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니?”
“대답이 늦으신데요?”
“아니라니까.”
“정말 아니에요?”
“정말로 전혀 아니신데?”
“이상하네.”
“그러니까 뭐가.”
“있으면.”
그의 인생에 유일한 실패는 서림뿐이었다. 다시는 같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했는데,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지워야 하고, 또 떠올리며 반성해야 하는지가 흐려서 아직까지도 구서림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약 드려요? 잘 듣는 거 있는데.”
“네가 나가 주는 게 특효약이야.”
“나가라니까.”
더 이상 보연의 말대꾸는 없었다.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건욱에게 반복해서 잔소리하는 건 도리어 역효과인
것을 오래전부터 학습했기 때문이다.
꼭 어린애처럼 서림의 앞에서만 퉁퉁거리는 최근의 자신이 평소 같지 않게 기복이 있고 심지어 그것을 잘 감추지도
못한다는 건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는 바였다.
06.
그는 주변을 두루 살피다 낯익은 벤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하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이 위에,
그와 서림은 낮이고 밤이고 몇 번이고 앉아 서울 한복판을 내려다보았다. 전망이 좋은 것에 비해 인적이 드물어서
종종 산책을 하다 여기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건욱은 편안하게 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치고는 고개를 젖혔다. 뒤쪽에 거꾸로 보이는 산책로 끝에 서림의 집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었다.
“구서림…….”
“구서림…….”
조용히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 보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의 발소리 같았다.
사람의 행동이야말로 본인의 기질과 품성을 드러내 주는 분명한 지표였다. 이 규칙적이고, 분명한 발걸음이 소리
주인의 명확한 성격을 증명했다. 그리고 건욱은 그런 군더더기 없는 성향의 누군가를 잘 알았다.
‘아니겠지.’
그가 안일하게 생각을 삼키는 동안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벤치의 근처까지 도달한 모양인지 서서히
균일한 소음이 잦아들었다. 안 좋은 예감이 오로라처럼 일었다.
‘젠장.’
그 순간, 설마가 진짜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는 속으로 감탄사를 욱여넣었다. 뾰족하게 울대뼈가 선 건욱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뒤이어 제 아랫입술을 슬쩍 감쳐문 그가 카메라 앵글을 끌어 올리듯 길게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구서림.”
마침내 허탈한 음성이 그의 육성을 타고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이와 동시에 상대의 손바닥이 그의 이마를 툭,
손뼉 치듯 내려쳤다. 건욱이 미간을 구겼다.
“아파.”
난감해진 건욱의 얼굴이 미세하게 창백한 빛으로 질렸다. 서림은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달빛을 고스란히 등지고 있는 서림의 눈가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은 오차 범위
없는 진심 같았다. 잠시 제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던 건욱은 자세를 고쳐 앉아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팔을 척 걸친 채 서림을 돌아보았다.
“너 뭐 하냐, 여기서?”
“이 동네 땅 구서림 씨가 다 전세 냈어?”
“너 어디 가, 야심한 시각에.”
“내 말 뭘로 들었어. 집에 뭐가 없다니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서림의 얼굴이 말을 매조지고 입을 다무는 순간 하얗게 질렸다. 영문을 모르는 건욱은
그가 아픈 게 아닐까 벌떡 일어나서 서림 쪽으로 다가오려 걸음을 뗐다. 동시에 서림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그가 아주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는 바람에 간격은 금세 좁혀졌다.
“구서림, 너 괜찮아?”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찰나간 눈앞이 아찔해질 만한 상상을 했을 뿐이었다. 서림은 조금 전 무심코
건욱이 제집에 잠시 들어오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러다 아직 그가 5 년 전 쓰던 물건들이 집 안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되새겼다.
그 생각의 나래는 망망대해를 건너 자연스럽게 그 광경을 본 건욱의 반응으로까지 이어졌다. 건욱이 지을 의아함
섞인 질린 표정을 상상하자, 뿌연 안개가 찬 듯 가슴이 턱 막혔다.
“놔.”
몇 번이고 건욱이 제게 천명했듯 ‘한국 예술단의 제건욱’의 말이라면 들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걸 입증하듯
서림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 주고 있자니, 건욱이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양 차분히
한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입을 달싹였다. 모양새 좋은 그의 입술이 몇 번 제 위아래의 살갗끼리
쓸리다가 결별을 고하고 멀어졌다.
“구서림.”
“그러니까 빨리 말을 하…….”
“나 손 좀 잡아 주라.”
사락, 두 사람의 옷자락 위에 스친 바람이 미세한 마찰음을 일으키곤 떠나갔다. 그러는 동안 서림은 깊이
침묵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서서히 벌어졌다. 쫓아오는 기척 따위는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걷던 서림이 불현듯
뒤돌아보았다. 무표정한 건욱은 여전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별안간 남의 손은 왜. 욕구 불만이신가?”
장난이나 어떤 특정한 의도를 지닌 게 아니고서야 남자끼리, 그것도 넓은 의미의 직장 동료끼리 친근하게 손잡을
일이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서림이 그의 속내를 가늠하듯 깊은 눈동자를 신중하게 들여다봤다. 눈에 담긴 애틋한 사랑은 없었다. 안달이 난
듯한 열기 따위도 종적을 감췄다. 서림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었을 때의 건욱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게 함께 보여서,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 왜?”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
정확하고 명료한 정리라는 듯 건욱이 짧게 끄덕여 보였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서림은 세련되게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머릿속에서 쥐어짜 냈다. 그러고는 결심이 선 듯 이렇게 말했다.
“돈 내. 그럼.”
“돈? 무슨 돈.”
익숙한 촉감이 제 손을 사로잡은 순간, 서림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건욱의 살갗을
만지게 된 터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 대기 시작했다. 이 떠들썩한 맥박이 그에게 전해질까 봐
불안했다.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있어 봐.”
“끌어안아 봐도 돼?”
“그건 돼?”
그도 억지로 행위를 이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인지 순순히 놓아주었다. 서림은 어쩌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멀쩡히 잘 협력하다 퇴근해 놓고 예고도 없이 집 앞에 찾아와 있질 않나, 연인 간에나 할 법한
스킨십을 해도 되냐고 물어 오질 않나. 숨기고 있는 건욱의 의중이 무엇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한 방울도 안 마셨어.”
“그러니까 뭔데 그게!”
“너한테 아직 떨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다. 덕분에 서림의 속눈썹이 요란할 정도로 움찔 떨렸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면
육안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건욱은 두 개의 손이 겹쳐졌던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느라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저 나른하게 덧붙였다.
‘헷갈리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오래였든 찰나였든
그런 착각이 들었던 정황이 건욱에게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걸 증명하듯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깊이 생각하는 게
있는 듯 보였다.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진 서림이 떨리는 음성을 감추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물었다.
“그래서, 떨려?”
물 흐르듯 술술 잘도 대답하던 건욱이 돌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체로 정답이 아닐지언정 질문엔 대꾸를 하는
편이었다. 제 기억에 의존해 보면 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이 즉각적인 반응에 왜 자신이 허탈한 기분이 드는지, 서림은 그걸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론이든
마음에 차지 않을 게 자명했다. 꼭 아무도 오지 않을 어둡고 아득한 골목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내 손이 뜨겁든 발이 차든 신경 꺼.”
“진짜 이게.”
“그래서 물 진짜 안 줄 거야?”
“파기하든가.”
“또 그렇게는 못 하지.”
“넌 살이 더 부드러워졌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서림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뒤늦게야 건욱에게 붙들려 있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대편 손으로 그 위를 쓸자 죄다 식은 뒤였다. 조금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스스로 깍지를 껴
봤지만, 제 것에 비해 큰 그의 손만 한 안정감이 없었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쉰 서림이 깍지를 풀었다. 그러다 불현듯 건욱이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간 수표들이 떠올라 그것들을
꺼내 들었다.
“윽……! 아파.”
그러다 발등이 아파 울상이 됐다. 결국 서림은 걷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뾰족한 무릎 위에
이마를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의 무대에서 건욱이 남기고 간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번잡하게 만들었다.
〈너한테 아직 떨리나.〉
역시나였다. 염려한 그대로였다. 건욱을 자주 볼수록 자신은 5 년 전의 일이 미치도록 후회됐다. 헤어지지 말걸.
좀 버틸걸. 매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가능하대도 자신은 아마 같은 선택을 할 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 * *
달력의 날짜상으로 아직까진 후덥지근할 시기였는데, 오늘따라 날이 좋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날씨가
화창해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온화했다.
아직 서림이 외부인이라 여기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범접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 건지 친숙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많진 않았다. 그래서 앉아 있는 그를 보고도 대체로 눈인사 정도만 하고 지나갔는데, 누군가 한 사람은
아예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었다. 뒤이어 서림이 손에 든 커피를 쓱 빼앗는 통에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인물 특정이 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좋은 아침.”
놀란 서림이 혹여 들은 사람이 없을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다행히 가시거리 내에 지나다니는 단원들은 안
보였다. 헛소리를 부디 요주의해 달라는 듯 싸늘하게 그를 쏘아보다가, 자신이 물었던 빨대로 고스란히 커피를
마시는 건욱을 인지하곤 미간을 구겼다.
“너 진짜 가끔 또라이 같은 거 알아?”
“뭐, 주제 파악은 좀 하는 편이라서.”
일순 건욱이 고개를 서림 쪽으로 휙 돌렸다. 그 바람에 서로의 얼굴이 조금만 앞쪽으로 기울이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숨을 내쉬면 숨결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너갈 듯했다. 크게 당황한 서림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건욱이 그 붉고 촉촉한 살결 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좀…… 떨어져.”
꽤 절박하게 내뱉었으나 그는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두 손으로 어깨도 밀어 봤지만 간격이 좁아서 제
완력으론 소용이 없었다.
언성을 좀 높이니 건욱이 그제야 서서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하나 거리가 여전히 가깝긴 마찬가지였다. 겨우겨우
제 몸을 뒤로 젖혀 틈을 번 서림이 그의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 주고, 상박까지 힘껏 밀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순히 장난감처럼 자신이 하는 대로 움직여 주던 건욱이 예고도 없이 제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읏, 또 뭐!”
“나 너 때문에 못 잔 거 아니야.”
“야, 제 단장!”
건물 출입구로 향하던 건욱이 돌아보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마주하니 늘씬한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떨어져 있는데도 인상이 분명해 보였다.
시선을 피하며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하자, 고개를 갸웃한 건욱이 돌연 제 쪽으로 걸음을 재촉해 되돌아왔다.
가까이 오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의 행보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어느 틈에 제게 접근한 그가 자신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붙들어 마사지하듯 길게 밀어 올렸다.
“윽……. 와, 진짜 아파.”
“…….”
손가락 등으로 서림의 이마를 가볍게 툭, 건드린 그가 단번에 돌아섰다. 시야가 그의 손 때문에 가려진 서림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차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은 탓에 건욱은 이미 한참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로비로 들어가는 문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아쉬웠다. 선뜻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는 열망이 전신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와, 나 지금 뭐 한 거지.’
* * *
아역과 성인을 막론한 출연 배우들과 「크리스타」 연출진들이 거의 다 모인 한식당 내부가 바글거렸다. 거기에다
아이들의 경우 돌봐 줄 어른들도 동행해야 해서 총 수용 인원이 100 명이 훌쩍 넘는 공간이 빈틈없이
시끌벅적했다.
‘또 왜 이래.’
가까이 있는데도 그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물리적 거리가 먼 해외에 체류할 때에 비하면 매분 매초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슬슬 그냥 간과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제 마음을 모르는 건욱이 도리어 은연중
자신을 부추기고 있어서 꼬인 매듭을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제건욱의 모습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제 눈앞에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그게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다.
서림이 입술을 감쳐문 사이, 이윽고 조연출이 소주병을 숟가락으로 탁탁 치는 까랑까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우리 배우들, 스태프들 아까도 연습실에서 뵀지만 서로 인사들 하시고요. 특히 아역들 싸우지 말고,
착하지? 또…… 완성도 있는 공연 만들려면 배우들과 연출진 간의 호흡이 선행되어야 해서, 워크숍이라 쓰고 MT
라고 읽는 1 박 2 일 정도 합숙을 다녀올까 합니다. 일정 곧 저희 연출 카페에 고지할 테니까 참고해 주시고요.”
씩씩하게 안내 방송을 하던 조연출은 박수를 받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림은 워크숍으로 예정되어 있는 날짜를 휴대폰 달력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다들 신나 있는 와중에 혼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극의
주인공인 ‘크리스타’ 역할의 예영이었다. 예쁜 이름이 있긴 했지만 작중 이름에 친숙해지기 위해서 다들 원작을
따라 크리스타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사실 서림은 처음부터 저 아이가 노골적으로 신경 쓰였다. 세상에 혼자 동떨어진 어린아이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요.”
“그럼 음료수?”
음료의 뚜껑까지 따서 잔에 따라 준 뒤라야, 다시금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미묘하게 조금 전과 느낌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건욱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그가 담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표정이 무심했다.
그런 건욱의 뒤를 상기된 얼굴의 여배우가 따르는 게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서림이 혼잣말하며 궁싯댔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예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 왔다. 당황한 서림의 얼굴이 어찌할 바를
몰라 차갑게 식었다. 곧이어 궁여지책으로 아이의 양쪽 귀를 정화해 주듯 손으로 막았다가 떼어 냈다.
예영은 그 말에 ‘이’ 하고 제 치아를 보이더니 동그란 눈동자를 서림에게 옮겼다. 순간적으로 귀여워서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서림이 빈 잔에 조금 더 음료를 따라 주려 하자, 아이가 직접 탄산음료 주둥이에 빨대를 꽂아서
작은 입으로 꼴딱꼴딱 마시는 모양새가 야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몇 번 했더니
습관이 될 것 같았다,
“또 만나게 돼서 반가워.”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 제 말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예영은 서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음료를
마시다가, 병을 내려놓았다.
“감독님.”
“응?”
“그렇구나.”
제게도 분명히 이런 나이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정확히 문제의 원인 파악이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된
서림의 입장에선 아이가 주인공이라서 시기 질투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거나, 예영의 성격이 좀 수줍은 편이라
겉돌고 있는 게 아닐까 정도밖에 안 떠올랐다.
이윽고 팟, 하고 버너에 푸른색 불꽃이 들어왔다. 서림의 몸이 필연적으로 긴장했다. 메뉴가 다 조리되어
순차적으로 나오는 한정식집이라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중에 갑자기 표류하는 배처럼 오갈 데가 없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그때였다. 몇 미터 전방에서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에 있던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서림과 예영의 것도 함께였다.
두꺼운 창문 밖에는 건욱이 서 있었다. 그는 삐딱하게 서서 자신이 한 행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한 번 더 창을
세차게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드리더니, 정확히 서림을 겨냥해 손짓했다. 나오라는 양 손가락을 까딱,
했을 때 대다수의 시선이 서림 쪽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덕분에 예기치 않게 집중받게 된 서림의 얼굴이 수치로
조금 붉어졌다.
“왜 저래, 갑자기.”
“왜 그래, 너.”
“나랑?”
07.
식당의 출입문 왼편에는 외부 흡연장이 위치했다. 건욱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이다. 서림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직통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선 아까 전 그를 쫓아 나가던 배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중요한
대화를 하기에는 썩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서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건욱이 자리를 좀 비켜 달라는 듯 여자를 향해 가벼이 눈짓했다.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마지못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의 팔을 겨우 뿌리친 서림이 은근한 비난을 섞어 내뱉었다. 건욱은 좀처럼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곤 뒤늦게 눈살을 찌푸렸다.
할 말이 없어진 서림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차츰 식당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방향으로 시선이 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예영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손을 흔들어 주는데 건욱이 갑작스레
서림을 시야가 차단된 사각지대로 몰았다. 인사 중에 얼떨결에 구석진 자리에 서게 돼 황당했다.
“뭐야.”
“뭐긴. 난 널 구해 준 거야.”
“네가 뭔데 날 구해.”
“네가 앉아 있던 자리가 총체적 난국의 한 국면 같아 보여서. 건너편에선 버너에 불 피우지, 옆에는 예영이가…
….”
“구서림 너 괜찮겠어?”
그의 염려는 진심 같았다. 축 가라앉은 음성으로 미루어 기분이 썩 유쾌하지도 못한 듯했다. 그런데 서림으로선
정확히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건욱의 눈을 보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니, 대꾸를 기다리려는 건지 그가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아이를 보면서 제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불행의 결은 다르지만, 서림은 지구상에 혼자
동떨어진 것만 같은 외로운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혼자가 된 어린아이가 현재 느끼고 있을 불안과 쓸쓸함
따위들을 짐작하며 오래전 제 괴로움들을 다시 떠올려 재생하고 있던 것도 맞았다. 이를테면 시간을 가로지른
불행 공동체 같은 것이다.
“난 이대로가 좋아.”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왜 빼앗아.”
순간적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담배의 뿌연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자 보다 서림의 시야에 명확하게 그의
얼굴이 노출됐다. 너무 가까웠다. 둔부를 달싹여 뒤로 피하려는 제 속내를 눈치챈 건지 건욱이 더 턱을 단단히
쥐면서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비뚜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구서림.”
“우리 잘래?”
쿨럭. 서림이 당황한 나머지 또 기침을 뱉어 냈다. 자연히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제 턱을 쥐고
있던 건욱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내지 않았다면 뜨거운 불이 얼굴 피부 위를 스쳤을지도 몰랐다. 엄마의
영향인지 화기는 늘 서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상상을 하자 눈앞이 아찔해서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는 동안 능숙하게 서림의 몸을 부축해 준 건욱이 장초마저 비벼 끄곤 자신을 태연자약하게 응시했다. 서림은
여러모로 어이가 없었다. 그의 손바닥이 담뱃불로 살짝 지져진 걸 알았지만 황당해서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내 몸이 당기는 게 너니까.”
일순 할 말을 잃었으나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건 왠지 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별 동요 없이 무표정해서
그런 기분은 더했다.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내뱉은 서림의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몸 위를 어루만졌다.
“솔직해도 돼?”
“안 그러려고 그랬어?”
“이 새끼가.”
듣다못해 끝내 분개한 서림이 벌떡 일어나 건욱의 멱살을 확 쥐었다. 깨끗한 눈동자가 서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충분히 서림을 밀어내거나 뿌리칠 수 있는데도 그는 얌전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건욱은 앉아 있고, 자신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으니 계산상 이로운 건 제 쪽이다. 하지만 서림은 이런 태도를
통해 그가 이미 감정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을 직감했다.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윽…….”
당황한 서림이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눈길을 쏘아 보내자 건욱이 번거로워하는 표정으로 제 몸을 꼿꼿하게
일으켰다. 그러고는 금세 싹 안면을 바꿔 스태프들을 향해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해 보였다.
“너 성희롱에 취미 붙였어?”
“그래서 안 자?”
“안 자, 미친 새끼야.”
“구서림!”
식당으로 들어가는 서림의 뒷모습과, 텅 비어 식어 가는 자리를 번갈아 살피던 건욱이 허탈한 얼굴로 도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두 팔을 뒤로 짚어 자세를 편하게 고쳐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드문드문 떠 있었고,
구름이 달을 조금 가린 전형적인 밤하늘이었다. 창공에 뜬 모든 것들이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림의 충고대로 인생은 똑바로 사는 게 맞는데, 건욱은 그만 보면 자꾸 막살고 싶어졌다. 얼쩡거리고, 건드리고,
찔러보면서 복잡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떨려?〉
* * *
명목상 주말이고 실제로 서림도 출근을 하지 않긴 했지만, 그게 ‘일하지 않는다’의 동의어는 아니었다. 서림은
집에서도 사옥에서와 별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대부분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 오전에도 서림은 거실 납작한 좌식 테이블 위에 각종 서류들과 필기구들,
태블릿 PC 까지 모서리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놓고 업무 삼매경이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의상 디자이너가 샘플로 보내 놓은 사진들이 떠 있었다.
배우들의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찾아내 구체적인 수치들을 눈대중으로 살피던 그는 배우 여러 명의 얼굴을 연달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모든 행동을 중단했다. 어설프게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종이가 사락,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 잘래?〉
그의 나지막한 주파수의 음성을 함께 떠올리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안면의 홧홧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건욱은 어쩌자고 자신에게 그딴 소리를 했을까. 혹시 놀린 건가. 그런 거였는데 제 쪽에서 폭력까지 가하면서
진지하게 반응했던 것이었다면 할 수 있었던 모든 반응 중 최악이다.
아니, 왜 자꾸 생각나.
집에만 박혀 있어서 그런가 계속 잡생각만 일었다. 실내의 공기가 탁해지면 종종 환기를 하듯, 정신도 그런
과정이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서림은 대충 짐들을 정리했다. 차라리 바깥의 카페
같은 곳에 가서 업무를 이어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끝으로 휴대폰을 찾고 있는데 마침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건욱이었다. 처음엔 이것도
그를 생각하다 착시를 본 줄 알았으나, 분명한 현실이었다. 안 받을까도 싶었지만 일 이야기일 가능성이 커서
그러지도 못했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문장을 마무리할 기회가 서림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중간에 건욱이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타」와 같이 아이들이 주요한 인물들이고. 극에서 그들이 처한 불우한 환경도 비슷했다. 그러니 그걸
본다면 어떤 각도로든 제 일에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 전에 의아한 게 있었다. 서림은 고개를 갸웃했다.
- 이미 데리러 가고 있다니까?
그때였다.
“야, 10 분 걸린다며?”
- 너 나올 준비 하라고 매너를 발휘한 거지. 봤으면 고민 그만하고 내려와라.
뚝.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울컥한 마음에 바람을 맞힐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서림은 건욱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미 자신이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그가 여기까지 올라오거나 혹은 저 주차장에서 어떤
행동을 해 민폐를 끼칠지 가늠도 안 갔다. 얼굴이 두꺼운 그는 초연하고 자신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건 불 보듯
훤했다.
“왜 운전석을 열어 줘?”
“나보고 운전하라고?”
“만났으면 된 거 아냐.”
“핵심이 그게 아니라…….”
“그걸 왜 네 차로 해.”
“예술단 예산은 한계가 있어. 기안을 올리라고 했더니 좀 더 계약 기간이 길면 끌어올 수 있을 텐데 짧아서
어렵대. 내 공연 연출해 주실 분인데 기왕이면 비싸고 좋은 차 타셔야지.”
“나 그런 건 하등 상관없어.”
“안 타?”
“하…… 네 신세 지는 거 싫단 말이야.”
“한국 예술단 단장이 배려한 거야, 제건욱 아니고. 그 차이를 구 선생은 언제쯤 인지할까.”
“당연한 거 아니야?”
“알아들었으면 얼른 타. 공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런데 사옥까지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은 데다 이 가파른 언덕을 기피하는 기사들도 꽤 있어서 부르는 데 한
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전체 시도의 반 정도밖에 안 됐다. 무엇보다 초면인 다른 사람과 단둘이 차 안에 있는 숨
막히는 시간이 불편하기도 했다.
차를 뽑을까도 싶었으나 연말 공연을 마치면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고 또 한동안 이곳에 올 마음은 없었던 터라
선뜻 내키질 않았다.
진짜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시선을 조수석으로 돌리자 건욱이 도로 허리를 곧추세워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물끄러미 살피던 서림은 더
고민을 거듭하기가 지겨워져 마지못해 핸들을 쥐었다.
* * *
큰 기대 없이 관람하기 시작했던 아이들의 무대는 생각보다 훨씬 큰 감동을 몰고 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 무대 곳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일 터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뮤지컬 교육을 받은 게 아니고 서울 일부 지역의 초등학교 몇 군데에서 교외 활동으로 시작해
어렵사리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 여러모로 서툴긴 했다. 무대 연출은 둘째 치고 아이들은 춤출 때 동작을 틀리거나
노래 가사를 잊어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다 보고 나니 서림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마침내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출연진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른바 커튼콜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와 상기된 얼굴로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그 과정에서 키가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풀썩
넘어졌다.
헉, 어떡하지.
“아비규환이네.”
건욱은 모든 공연이 끝났는데도 특별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보고 난 후의 느낌이나 소회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일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서림이 조금 머쓱해졌다.
이미 사람들이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객석은 적막이 맴돌았다. 서림은 침묵을 견디다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건욱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구 감독은 어때?”
이윽고 건욱의 잠긴 목소리가 서림의 상념을 깨웠다. 제 생각을 들킬까 서림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응시했다.
“구서림 넌 어른이니까 어른 눈높이는 쉽게 맞출 테지만 아이들 눈높이는 어떻게 맞추게. 직접 눈으로 봐야 알지.
아이들이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좋아하고 열광하는지. 그 또래가 주축이 되어서 만든 거니까 연출과 관객 모두의
입장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의미에서, 어땠냐고.”
그래서 그는 무대를 포함해 관객의 반응까지 전방위적으로 살폈던 모양이다. 수익과 관계가 없는 공연이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극의 성패가 판가름이 날 터다. 그러려면 타깃이
된 관객에게 공감을 받는 게 가장 중요했다.
“…….”
이 말에 당황한 서림이 뒤늦게 손을 확 떼어 냈다. 부딪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떼어
내야겠다는 데는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뇌리에 닿은 것이다. 그러다 너무 과잉 대응하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어, 윽…….”
“일어나기나 해. 무대 좀 살펴보게.”
그는 계단을 걸어가는 동안 최대한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심지어 건욱과는 이미 알몸으로 볼
장 다 본 사이였는데 왜 자꾸 이런 사소한 일에 심장이 뛰는 건지 골치가 아팠다. 얼굴과 귓전에 달아오른 열기가
좀 식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인력으로 쉽게 되지 않아 괴로웠다.
“여기서 보니까 생각보다 단차가 없네. 그리고 무대 높이가 애매해. 배우가 손 뻗으면 닿겠어. 아까 보니까
애들은 흥분하면 막 달려 나가던데. 막이라도 쳐야 하나.”
“넌 나랑 닿는 게 그렇게 싫어?”
“……싫어.”
“대답이 좀 늦다?”
여봐란듯이 대꾸해 준 서림이 순간적으로 코끝을 스치는 흐릿한 타는 냄새에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후각이
자극되어서 다른 감각들도 영향을 받은 건지 미세하게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무대 위로 내려온 장막이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서림이 막선 부분을 슬쩍
들어 올려 안쪽을 살펴봤으나 역시나 딱히 문제될 거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직감이 위험
경보등을 올리듯 끊임없이 걱정을 뇌수 안에 쏟아 내는 기분이었다. 제게는 오랜 화상 트라우마가 있어서 혹시
커다란 화염일까 두려운 나머지 몹시 민감해지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덜컹’ 하고 작지만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분명하게 그들의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서로의
시선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조금 엇갈렸다.
“무슨 소리 난 거 맞지.”
건욱이 빠르게 장막을 가르고 무대로 올라갔다. 얌전히 앉아만 있는 게 더 불안할 것 같았던 서림이 그를
뒤따랐다. 제일 뒤편에 배우들이 출입하는 입구에 다다르자 무언가 연소하는 냄새가 점점 더 확실해졌다.
이윽고 그들이 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마자, 출연자 대기실 맞은편 복도 모퉁이 쪽에서 화재가 인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바닥에서 타들어 가는 이동식 행거가 두 사람이 들은 덜컹거리는 소리의 근원인 듯했다.
“제건욱 너는.”
“난 여기 수습해야지.”
“너는!”
“구서림!”
“나 여기 책임자야. 할 수 있는 건 할 거야.”
“그, 그럼 나도 여기 있을게.”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탁’ 하고 천 따위로 화염의 위를 덮는 소리 위에 건욱의 긴박한 음성이
어우러졌다.
“구서림?”
억지로 백스테이지 밖으로 내보냈던 서림이 어느 틈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허옇게 뜬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긴장한 듯 식은땀마저 흘렸다. 눈동자가 공허했다. 사시나무처럼 파들거리는 속눈썹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마 낡은 트라우마 때문일 터다.
그가 완력으로 밀어냈으나 서림은 고개를 저으면서 건욱의 옷자락을 덥석 쥐었다. 닿은 자리마다 얼마나 덜덜
떨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구서림!”
“그럼 나도 여기 있을래.”
“제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그가 버럭 소리친 순간, 무대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그들의 손에 다행히 화재를 진압할 만한 정수기
물통 따위와 소화기, 두툼한 담요들이 들려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건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좀 부탁하겠다는 양 조용히 안쪽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나쳐 와르르 들어갔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한 건욱은 서림의 부드럽고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에 커다란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인내심을
발휘해 몇 번이고 정성껏 쓰다듬으면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온갖 집기들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서림의 머릿속에 어떤 괴로운 기억들이 스쳤는지 명확히는 몰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신만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 아득한 두려움을 헤치고 힘겹게 되돌아왔을 다정한 마음이 너무
애틋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이 촉감을 못 느낀 건지 느꼈지만
견디는 건지 서림은 침묵했다.
너는 대체 왜 아직까지.
08.
서림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가 그게 한꺼번에 풀린 모양인지 차 안에서 깊이 잠들었다. 처음엔 그도 그냥 집으로
데려다줄까 했다. 다만 이런 상태의 서림을 혼자 두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양단간의 고민을 거듭하다 하는 수 없이
이쪽으로 데려왔다. 의사에게 보일 때도 그편이 나을 성싶었다.
“잠든 거 확실해요?”
차분히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욱이 주치의를 향해 질문했다. 나이 든 남자가 링거에
남아 있는 수액의 양을 확인하면서 차분하게 응답했다.
“다행히 잠든 게 맞아요.”
“그럴게요. 살펴가세요.”
당부 끝에 꾸벅 인사한 남자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건욱은 침묵 속에서 서림을 주시했다.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설명하자면, 엿 같다고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표정이 한결 어두워진 건욱의 한숨이 깊었다. 예전부터 늘 서림의 이런 부분이 신경 쓰였다. 서림은 강한
척하지만 건욱이 아는 누구보다 약했다. 모친이 준 유년기의 상처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제대로 극복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거기엔 그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서림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선을 넘었던 건욱의 탓도 큰
부분 존재했다.
“잘 자네.”
서림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그게 지나쳐서 숨쉬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꼭 손톱
아래를 누군가 날카로운 물체로 찌르는 것처럼 불편하고 기분 나쁜 감각들이 휘몰아쳤다.
아, 나는 네가 좋구나.
“구서림 너 안 자는 거면 진짜 반칙이다.”
서림이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을 때 어떤 모습을 하는지, 건욱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잠든 사이엔
스스로의 상태를 볼 수 없으니 어쩌면 서림 본인보다도 더 그럴 것이다.
그의 정신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확신한 건욱이 조금 더 제 턱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서림의 붉은
입술 위에 제 것을 부드럽게 맞물렸다.
“응…….”
상대가 잠들어 있어 호응은 없었으나, 얌전히 제 혀를 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건욱은 충분히 흥분됐다. 잠시간
그 안에서 질척하게 얽히는 살덩이의 촉감을 만끽한 뒤 차츰 입술을 떼어 내자, 길게 실선이 이어지다 툭
끊어졌다.
아, 나는 여전히 네가 좋구나.
자신을 불편해하는 서림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는 아직 흐렸으나,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분명히 결심이 섰다. 줄곧 헷갈린단 핑계를 대고 있다가 이제야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잘 자.”
곧이어 그는 조금이나마 수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명을 어스름하게 조절했다. 그러고는 제집의 가정 사적인
공간을 서림을 위해 비워 주었다.
타악. 문이 굳게 닫혔다.
* * *
깨어났을 때 서림이 발견한 건 낯설면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천장이었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제 기분이 정확히
그랬다. 오래전 자주 본 적이 있던 것이긴 하나, 또 한동안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인가?
눈을 깜빡여 본 서림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꿈 같은 게 아니라 현실이
맞았고, 제 기억에 의하면 건욱의 침실인 것도 맞았다.
“으, 머리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자, 머릿속에 먼지가 뿌옇게 찬 느낌이 서림을 바람처럼 찾아왔다.
“노, 노크 안 해?”
두 사람이 사귀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서림은 당황해서 제 방에 들어온 그에게 왜 노크하지 않는 것이냐고
벌컥 성을 냈다. 건욱이 그걸 기억할진 모르겠다. 가능하면 떠올리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의 표정이 이미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졌음을 알리듯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이거 기시감 느껴지지 않아? 노크.”
그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낭패감이 서린 서림이 고개를 저었다. 창피해서 헛기침을 억지로
하다가 화제를 돌리듯 넌지시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건욱이 서림을 침대에 얌전히 앉혔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물과 하얀색 알약을 함께
내밀었다.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던 서림이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 들고 동시에 꿀꺽 삼켰다. 목으로 넘기는
동안 식도가 꺼끌꺼끌한 게 느껴졌다. 괜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으면서 건욱을 올려다보는데,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흐트러졌을 게 뻔한 자신과 달리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게
열받았다.
“뭐가 궁금해?”
“나 혹시 기절했어?”
“공연장 불은 잘 끈 건가?”
“잘 수습했다고 보고받았어.”
“구서림, 우리 그냥 같이 살래?”
대화의 랠리 중 뜬금없는 제안이었던 터라 서림이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적막이 그들 사이를 휩쓰는 동안,
서로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건 서림이었다.
“내가 왜.”
“내가 너 걱정되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난 너랑 살고 싶은데 뭘 자꾸 다른 데 가서 알아보래.”
대충 제집에 짐 넘기듯 두고 갈 수도 있었는데 집에까지 데려와 보살핀 정성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관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숨을 고르고 차분히 덧붙였다.
발끈한 서림이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깨 위에서 건욱이 제 팔을 쓰윽 내미는 통에 시도만으로 그쳤다.
그가 뻗은 모양새 좋은 손 위에서 아찔한 향기가 풍겼다.
“어쩌라고.”
“버튼 채워 봐.”
“이걸 내가 왜?”
마지못해 손을 뻗은 서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면서 짜증스럽게 그의 셔츠 소매를 잡아채 버튼을 구멍
안에 채워 넣었다. 그러는 동안 물끄러미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건욱의 시선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느껴졌는데, 왠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엄두가 안 났다. 계속 시선을 소매에 두고 있자니 그의 손바닥에 투명한
거즈가 눈에 띄었다.
“아플까 봐 걱정돼?”
“누가 그렇대?”
그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제 대답을 이미 예측했기 때문인지, 은혜도 모르는 제게
질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건욱의 목소리는 여상해서, 그의 기분을 유추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 지갑이랑 휴대폰은?”
“둘 다 나한테 있어.”
“돌려줘.”
“못 보면. 어쩌시게.”
“차 지하 주차장에 있을 거야. 아침도 하우스 키퍼한테 차려 달라고 했으니까 다 먹고 나와. 그러면 회사에서
휴대폰이랑 지갑 돌려줄게. 내가 직접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검사할 거니까 혹시라도 꼼수 부리지 말고.
알아듣지?”
제 할 말만 빠르게 내뱉은 그가 서림을 등졌다. 그러고는 대답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수 초 사이에 남의 침실에 혼자 남겨진 서림은 어이가 없었다. 뒤늦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건욱을 쫓자, 걸음이
빠른 그가 어느 틈에 현관에 가서 구두를 꿰어 신고 있는 게 보였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서림은 뒤늦게 복도를 거쳐 되돌아와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구조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론데 가구들이 죄다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층 다른 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차 키를 내던진 서림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었다. 드레스 룸의 문을 활짝 여니 침실과 거실에서 받았던
느낌을 똑같이 받았다.
삶이란 유구한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지루한 과정이다. 서림은 건욱에게 자신을
더하는 것보단, 빼는 게 훨씬 나으리라는 걸 타인으로부터 똑똑히 배웠다. 그래서 자꾸 그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건욱은 지치지도 않고 자신을 흔들어 온다.
* * *
건욱은 젊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또 아주 유능한 연출자였다. 무엇보다 실패가 없었다. 그런 그가 기획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자 취재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늘의 인터뷰는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계속 거절로 일관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보연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련된 자리였다.
그에게 호의가 가득 담긴 눈길을 보내던 기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앞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물론 흥행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첫 작품인 만큼 예술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들에 조명을 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타」를 선택한 건 필연이었다고 봐요. 이번 무대의
키워드는 위로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함께 위로받는 뮤지컬요.”
“음, 그러면 키워드가 위로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좀 더 세부적으로 인터뷰를 들어가기 전에 이 땅의 수많은
크리스타에게 한 말씀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족을 달자면 단장님의 음성을 지면에 싣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목소리가 정말 좋으신데.”
“극 중 크리스타는 어린아이지만 저에겐 반드시 그렇진 않아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이 버거운 상태로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모든 사람이 크리스타라고 봅니다. 꼭 눈에 보이는 게 아니더라도 다들 상처 하나쯤은
근저에 있으니까요. 제가 영화 「크리스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제프리라는 물리학자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고 있는 크리스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게 뭘까요?”
“물리는 모든 사물의 이치라는 원대한 뜻이지만, 사실 세상은 물리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
아주 많아. 이를테면 사랑이나 신의, 자존심 같은 것.”
* * *
“내가?”
뒤늦게 휴대폰을 낚아채듯 빼앗은 건욱이 화면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역시나, 미지였다.
“좀 받는다.”
보연은 끄덕이곤 난간에 팔을 걸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건욱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통화를 시도했다.
“왜, 제미지.”
- 아, 왜 전화 안 받아!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어.”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고.”
“확인? 뭘.”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적당한 핑계를 떠올리며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허리를 곧추세워 앉으면서
대꾸했다.
전방에서 건물 쪽으로 진입하는 빨간 스포츠카를 확인한 그는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도로 보연에게 내밀었다.
급한 대로 그녀를 먼저 들여보내고 차량 쪽으로 다가서자, 어머니가 급히 하차하는 게 보였다. 뒤이어 단정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검은색 스틸레토 힐을 신은 미지가 따라 내렸다.
게다가 건욱은 제 마음에 둔감하지 않았다. 감정에 흐리던 까마득한 20 대 이전이라면 모르지만 이젠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심한 그로기 상태가 되는지를 다년간의 경험으로 배웠다.
타악. 어머니를 태운 조수석 문을 닫은 미지가 보닛을 돌았다. 그러다 별안간 건욱에게 다가왔다. 그가
의아해하며 시선을 던졌다.
“왜.”
“여기 고개 살짝 숙여 봐 봐.”
모친이 여기저기 헤집는 통에 살짝 비뚤어진 그의 옷깃을 가다듬어 주려는 것 같았다. 사양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데, 쀼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통에 계속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가 살짝 얼굴을
기울이자, 미지가 옷을 여며 주었다.
“너 요새 진짜 수상해.”
“가라.”
귀찮다는 듯 그가 턱짓했다. 얄밉게 그 모습을 보던 미지는 건욱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치고는 마저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은 매끄럽게 공연장이 있는 별관 방향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형체가 가시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차를 지켜보던 건욱도 제 목덜미를 괜히 쓸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뒤늦게 대로 쪽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서림이 주차장을 한 번, 건욱이 들어간 예술단 건물 입구를 한번 확인하곤
그 중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중년 여자는 건욱의 어머니였다. 실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유명한 의사라서 몇 번 찾아본 적 있는 통에 눈에 익었다. 같이 온 젊은 여자 쪽은 지난번에
건욱을 데리러 왔던 여자였다. 착각일 리가 없었다. 똑같은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났으니까.
불면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양심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주차까지 해 두고 일부러 도보로 도로
걸어 나가 인근에서 샌드위치와 신선한 주스 따위를 사 온 거였는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서림. 우리 그냥 같이 살래?〉
순식간에 냉담해진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아주 조그만 형태로 만든 서림은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꽤 묵직한 페이퍼 백을 아주 미세한 희망에 부풀어 있던 제 기대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듯 버려 버렸다.
〈2 권에서 계속〉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