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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림은 유니콘이다.

비 갠 뒤의 무지개, 사막의 오아시스, 밤하늘의 제일 밝은 별, 설한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 없는 잘못까지도 실토하고 싶게 만드는 미의 남신.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이쁘장한 말
없나? 아, 한국어 공부 좀 더 할걸!

아무튼간 온 세상 좋은 단어는 전부 가져다가 그를 수식하는 데에 쓰고 싶다. 새벽부터 일찍 깨어서는


그의 잠든 얼굴을 구경하노라면 그랬다.

보라색 어둠이 깔린 방 안으로 아침 햇빛이 기어들어 올 때까지 나는 그를 바라봤다. 숨소리도 작게


죽이고 발끝까지 오므리고는 가진 집중력을 죄 썼다. 봐도 봐도 새롭고 멋있고 잘생긴 이 남자가 내
남편이란 사실을 음미하자니 침마저 달게 느껴졌다.

입술 밑에 그림자 진 선까지 모든 것이 반듯한 이 남자가 달콤한 목소리로,

‘좋아해.’

그렇게 말해 주었단 사실이 내 가슴을 떨게 했다.

전형적인 올빼미족인 내가 부지런한 아침 새인 태림 씨보다 2 시간씩 일찍 깨는 이유는 비단, 그를 몰래


감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는 여느 핀잔에 ‘네!’, 명랑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그를 감상하기가 잠보다 기쁘긴 했다. 그러나 내 긴 잠을 방해하는 진짜 원인은
각인 증세에 있었다.

피로감도 느끼지 못할 지경으로 각성 상태에 접어든 탓에 잠을 길게 잘 수 없었다. 독한 커피를 서너 잔


연거푸 들이켠 사람처럼, 나는 천태림의 페로몬에 취해 버렸다. 기분은 붕 떴고 정신은 몹시 또렷했다.

그 증세를 더욱 강화하는 심리적인 요인이라면, 글쎄… 내가 나라서.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러니까… 내가 아닌 타인들의 기준이 어떤지야 나는 모른다. 어느 정도의 기쁨에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얼마나 깊은 상처여야 아프다고 인지하는지, 어떤 환경과 장소에서 그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라고 확신하는지… 내가 아는 것은 나의 기준뿐이다.

나와 견주자면 누구라도 쉽게 A+를 따낼 것이었다. 강해아의 기준으로는, 마이너스가 평균 점수니까


말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으니 불행한 기분이 평균. 어디 한 군데 혹이건 멍울이건 맞은


흔적이 남은 상태가 일상이니까 그게 평균. 여섯 살 무렵부터 성인이 되도록 유랑하듯 살다 겨우 불려
들어온 서울에서조차 몸 둘 바를 모르는 채 동동거리며 헤맨 인생이 내게는 평균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학벌만 그럴싸하지 나는 빈 깡통, 허수아비, 헛똑똑이였다. 남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이해하는 게 외롭게도 힘들었었다. 한창 자기중심적이던 십 대 시절에는 ‘나는 싸이코패스야’
하는 우스운 착각에 빠졌을 정도였다.

열 살 무렵에 아직 어눌한 불어 실력으로 파리의 영재 예술 학교를 다녔었다. 그 시절에는 따듯한 감정을


색채로 표현하라는 과제가 어려웠었다. 방학을 맞이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짐을 싸는 친구들이
어째서 기뻐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풍이 몰아쳐 기숙사가 정전된 밤에는 아이들이 ‘엄마’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게 신기했다.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넓은 방 침대 위에 모여들어 친구들은 ‘엄마’, ‘엄마’ 하고 우는데, 나는


건조한 눈을 끔벅거리며 창밖에서 번쩍대는 빛만 바라봤었다.
그날의 벙찐 기분이 내겐 디폴트값이었다. 그게 딱, 평균치. 어차피 부를 이름도 없는데 누굴 찾아서 뭘
하나. 달래 줄 사람도 없는데 울기는 또 왜 우나. 내일도 모레도 비슷할 텐데 오늘의 불행에 뭣 하러
집중하나. 그런 벙찐, 기분이.

하지만 작금의 불안은 결이 달랐다. 전에는 꿈속에서나 내 옆자리에서 편안한 얼굴을 한 태림 씨를


보았다가도, 깨고 나면 큰 침대에 혼자 누워 한숨을 쉬었었는데 이제는 반대였다. 태림 씨가 나를 떠나
버리는 꿈을 꾸고는 화들짝 놀라 깼다가, 좋은 꿈을 꾸는지 미소마저 짓는 그를 내 옆자리에서 발견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유니콘이다. 무지개이고 오아시스다. 불꽃이건 신이건 못 될 것이 없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좋은 말도 아깝지 않다.

AOM 대표 천태림이 오늘 여기, 내 옆자리에 누워 있어선 안 되는데 나의 남편 천태림은 그렇게 해 버렸다.

그의 이번 출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나조차도 진작 알았다. 미국 지사 설립은 AOM 의 초기 구상부터


고대해 온 일이자 사업의 큰 갈래인데, 그 중요한 일정을 미뤄 놓고 천태림이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이틀 정도는 일정을 미뤄도 괜찮다며 나를 달래고, 일방 각인의 후유증이 가실 때까지 함께 있겠다며
위로해 주었다.

그 상냥함이 좋았다. 불안정한 강해아를 혐오하기는커녕 더욱 좋아해 주는 그의 태도가 나를 너무나


기쁘게 했다. 내 팔뚝 옆에 제 팔뚝을 대고, 천태림이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번쩍 창밖에서 빛나던 번개가 왜 이 순간 떠오르는지 몰랐다. 눈부시게 번쩍이며 밤하늘을 밝히고는,


이내 ‘쿠르릉’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던 천둥소리가.

‘행복해.’

괜한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노력은 했지만 물거품이었다. 말수 적은 열 살 꼬맹이 강해아의


머릿속에는 상념밖에 든 게 없었다.

입 안으로 씁쓸한 침이 가득 차올랐다. 이내 코끝이 아려 왔다.

‘행복해….’

이런 행복을 언제 느껴 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정말로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나


보다.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이, 두 번째 생까지 통틀어 처음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훌쩍 코 먹는 소리를 내는데, 태림 씨의 손이 느릿느릿 내 머리를 만졌다. 그러고는


이불을 끌어 올려 목 위까지 덮어 주었다. 두 눈을 꾹 감고 나는 숨만 조용히 쉬었다.

내 어깨 위를 두드리는 그의 손이 묵직했다. 잠에 취한 손이 토닥토닥 나를 만지다가 이내 느릿하게


늘어졌다. 그 손길이 다정해서 열이 올랐다.

당연하다는 듯 내 안에 똬리 틀던 불안도 이제는 자리를 비웠다. 내 옆자리에 태림 씨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창밖의 천둥이 그쳤다. 배 속에서 따끈따끈한 열이 올랐다.

‘좋아.’

그가 영영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은 출장은 별수 없다는 걸 알지만. 오늘 옆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오메가여서 누릴 수 있는 기적인 것도 알지만. 그래도, 영영….

‘좋아해….’
들뜬 숨이 색색 코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이내 거칠어졌다. 흉곽 안에서 쿵쾅대는 지진이 났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아드레날린 같은 것이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잠든 태림 씨의 팔에 나는 이마를 붙였다. 그리고 그의 손을 조심조심 만지고, 허벅다리 위를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후우’… 더운 숨이 태림 씨의 코 밖으로 나왔다. 손바닥 밑으로 그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힘 들어간 근육과 누워 있던 그의 남성에 내 손이 닿았다. 잠결에 반쯤 발기했는지 벌써
감촉이 딱딱했다.

‘안 돼….’

잠든 그를 더듬어 대는 내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알았다. 알면서도, 손으로 그의 것을 쓰다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애매한 죄책감은 찌릿하니 나를 자극할 뿐이었다.

그만둘 이유보다는 계속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이를테면, 태림 씨의 몸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내 속이 따끈해진다는 것. 그리고… 음…, 사실 그게 전부였다.

후덥지근한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나는 태림 씨의 향을 코로 빨아들였다. 그의 팔뚝에 코끝을 문지르고


입술을 맞추면서, 바지 위로 두드러지는 태림 씨의 것을 만져 댔다.

낮은 신음성이 문득 들려왔다. 잠결에 태림 씨가 내쉰 숨이 뜨겁고 컸다. 그의 날숨에서 짙은 향기가


났다, 비에 젖은 수풀에서 으레 풍기듯이 눅눅하고 깊어진 향기가….

내 심장은 더욱 붉어졌다. 그를 안고, 빨고, 핥고 싶은 충동이 나를 이끌었다. 슬금슬금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갈 땐 설렌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조심스럽게,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고 엎드렸다.

소리 죽여 태림 씨의 파자마 바지를 내렸다. 그러자 검은 속옷 안에서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 윤곽이


몹시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의 체취가 진동했고 내 입 안에는 침이 고였다.

헐떡거리며 나는 검은 속옷 위를 핥기 시작했다. 그가 흘린 프리컴에 내 침이 섞였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둔 채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 올리고, 입술을 모아 빨아 대자 태림 씨의 허리가 들썩 움직였다.

“…….”

그의 팬티 위에 고개를 묻은 채로 나는 숨을 멈췄다.

‘깼나…?’

사탕 훔쳐 먹은 어린애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그 바람에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뭐 얼마나 깜찍하고


즐거운 일을 한다고, 잠든 이의 팬티나 빠는 변태 새끼 주제에 흥분이 됐다.

잠깐 침묵하며 기다리자 ‘음’ 하며 뒤척거리는 태림 씨의 기척만 이어졌다. 더운 땀이 오른 그의


아랫배가 살짝 보였다. 배의 근육이 두드러진 채 들숨으로 부풀었다가,

“후….”

이내 가라앉았다.

그가 깨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나는 더 용감해졌다. 그만두고 다시 자는 척, 그의 옆에 누워야


한다고 이성은 소리를 질러 댔으나 양심은 본능의 편이었다. 진한 향이 묻어 나오는 속옷 위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나는 그의 팬티를 살살 내렸다.
그러자 태림 씨의 것이 튀어나오면서 내 뺨을 쳤다.

“…….”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에 맞은 뺨이 얼얼했다. 조금은 우습고 아주 많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멈추기에는, 벌떡 솟은 태림 씨의 남성이 너무했다. 너무 컸고 너무 부풀었으며 너무 야했다. 방울 맺힌
프리컴이 두드러진 핏줄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게… 이게 내 몸에 들어왔었다고?’

태림 씨의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을 벌려 보았다. 용기 내어 빨아 보고는 싶은데 망설임이 내


목덜미를 잡아끌어 댔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태림 씨가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내가 그에 대해 많이 알았다. 베타인 강해아가 6 년 내내 배운


것이라고는 천태림에 대한 지식뿐이니 말 다 한 셈이다. 러트가 온 그를 내 몸으로 만족시켜 줄 방도가
없던 시절에는, 별의별 수를 다 써 봤었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본능에 충실할 때 태림 씨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끝내 발현 못 한 강해아에겐 우성


알파를 달랠 향도 없었고 그럴 배짱도 용기도 없었는데, 딱 하나 다른 연인들처럼 흉내 낼 수 있는 게
펠라티오였다.

그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를 받아들일 용기는 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아프고, 살이 찢어질


테고, 몹시도 무섭다는 걸 몇 차례에 걸쳐 깨달았으므로… 그땐 그랬었다, 그땐 태림 씨가, 그리고 그의
흥분한 모습이 무서웠었다.

그러면서도 ‘남편 노릇’을 포기 못 해 그를 괴롭게 했다. 나를 밀어 내는 그의 배 밑으로 억지로


기어들어 가기도,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의 옷을 벗기기도, 오메가 체향과 비슷한 향이 난다는
미스트까지 뿌려 봤었다.

‘나도 미쳤었지, 그때는.’

그렇게 과거를 반추할 자격이 내겐 없었다.

‘…지금은 더 미쳤고.’

알파의 성기 냄새에 취한 주제에 뭘 어떻게 반성할까.

들뜬 마음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열자마자 뚝, 침방울이 떨어질 정도였다.


핏줄이 두드러진 기둥 옆에 입을 가져다 대고 흘러내리는 프리컴을 핥았다. 기대와 달리 씁쓰레한 땀 맛이
났다.

성욕인지 식욕인지 모를 욕망에 침 흘리는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런 애매한, 땀방울이 아니라…

‘빨리… 싸 줬으면.’

그의 정액을 받아먹고 싶었다.

떨리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그의 성기 끝을 내 입 안에 집어넣었다. 입천장에 닿도록 함박


담았는데도 끄트머리만 넣은 꼴이 됐다.

헉헉거리는 더운 숨이 내 코 밖으로 빠져나갔고,


“음….”

태림 씨의 신음성이 낮게 들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이성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깨면 어쩌지?’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되고 성추행은 중죄가 아니던가? 법에 대한 것이라면 나보다도 태림 씨가 잘


알 것이었다.

‘…….’

당장 입에 사탕처럼 담은 성기의 주인이 검사장 집안의 외동아들이란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성욕이 절로


꺾였다. 망설임 끝에 고개를 떼어 내려는데, 묵직한 악력이 대뜸 내 머리칼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웁…!”

거친 힘에 의해 고개가 불쑥 밑으로 처박혔다. 놀라 벌어진 입 속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울컥 밀려


들어왔다.

“으, 읍!”

성기 끝이 내 입천장과 목젖을 거쳐 억지로 목구멍 안까지 쑤셔 댔다. 좁은 목구멍이 강제로 열리자 볼


안으로 맥없이 더운 숨이 찼다가 빠져나갔다.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며 태림 씨가 허리를 밀 듯이 올려붙이기 시작했다.

“컥…! 우, 웁, 흐웁…!”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너무 강해서, 사지를 팔딱대며 반항해도 내 고개는 끄떡도 않았다. 굵은 성기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탓에 꼬챙이가 된 기분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를 세우지 않으려 턱을 최대한 벌렸다.

눈물과 침이 대번에 줄줄 쏟아졌다.

“우읍….”

태림 씨의 손이 다소 맥없이 내 머리를 놓쳤다가 재차 내리눌렀다. 잠에서 깬 것은, 아닌 듯했다.


그랬더라면 지금과는 정반대로 후다닥 물러섰을 테니까. 당장 그를 움직이는 것은 잠에 취한 본능이었다.

“컥….”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억지로 목구멍을 열었다. 뜨겁고 큰 성기가 벌컥벌컥 목을 쑤셔 댔다. 역한 토기가


치밀어 오르고 숨이 막혔다. 같은 동작이 두 번, 세 번, 거듭 반복됐다.

“커헉, 우, 읍….”

빨리, 싸 주었으면 싶은데 천태림은 잠결에 흥분한 와중에도 정력이 좋았다. 목을 쑤시는 역한
고통보다도 숨이 막혀서 자꾸만 기침이 났다.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줄줄 새어 나갔다.

목 안을 깊이 쑤시는 동작이 점점 거칠어졌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된 채 나는 정신없이 기침했고


그는 신음을 해 댔다. 머리로 오른 열이 시뻘건 빛이 되고 숨통이 옥죄였다.

참지 못해 나는 태림 씨의 허벅지를 마구잡이로 두들겼다.


“우, 웁, 으웁….”

그러나 그의 바지춤을 긁어 쥐고 허벅지를 주먹으로 쳐 대도 태림 씨는 깨질 않았다.

“흑, 욱….”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떨면서도, 내 사타구니는 흠뻑 젖었다. 머리와 성기로
열이 뻗었고 온몸이 땀 범벅이 됐다.

“우….”

그를 깨우길 포기하고 나는 입술을 억지로 오므렸다. 침과 프리컴이 엉겨 흐르는 입술 살이 벌써 부어선


얼얼했다.

흥분한 알파의 열기를 식히는 게 급선무였다. 볼을 애써 좁히는데 눈물로 눈앞이 흐릿했다. 쭙, 쭙 소리


나게 힘주어 그의 성기를 빨자 체취가 더욱 짙어졌다.

축축한 액체와 마찰의 열기가 내 입 안을 적셨다. 혀 위에서 태림 씨의 것이 자꾸만 더 부푸는 것 같았다.

“우, 웅…, 웁….”

조금이라도 더, 잘 빨아 보려 애썼으나 내 혓바닥은 그저 그의 성기 밑에서 꿈질댈 뿐이었다. 눈을 꽉


감고 몇 차례 더 태림 씨의 것을 빨았다. 타액이 턱 밑으로 흘러 목까지 적시고 추릅거리는 게걸스러운
소리가 났다.

이러다 턱이 빠지는 건 아닐까 질겁한 순간,

“헉, 허억….”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내 머리채를 쥔 손이 와락 강해졌다.

“컥….”

내 얼굴이 태림 씨의 사타구니 가까이 뭉개지고 성기가 목구멍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가 사정했다.

“…….”

울컥울컥 두어 차례에 나뉘어, 탁한 액체가 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목울대를 움직거리며 정액을
삼키는 순간 기절할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머리채를 쥔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정신없이 목을 내빼자,

“읏…!”

거듭 빠져나온 태림 씨의 정액이 내 벌어진 잇새에, 그리고 얼굴에 엉망진창으로 튀었다.

알파의 체액을 끼얹은 채 나는 가느다랗게 흐느꼈다. 무릎이 오므라들고 허리가 달달 떨렸다. 입술에 튄
정액을 핥고, 삼키면서 나는 그를 따라 토정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태림 씨의 정액 냄새가 좋았고 그의 성기에 목구멍이 막힌 순간을 즐겼다….


그 바람에 팬티 속이 눅눅해졌다. 배 속이 찌릿찌릿 울렸다.

“컥, 콜록….”
자극받은 목구멍으로 기침이 올랐다. 이불 아래, 태림 씨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혼자
훌쩍였다. 흥분으로 딱딱해진 성기가 아렸다.

손을 들어 얼굴에 튄 것을 닦아 내는데, 불쑥 태림 씨의 다리가 움직였다. 놀란 듯 그의 발이 한 차례


헛발질을 하더니, 이내 이불이 홱 걷혔다.

아침 햇빛이 눈 아프게 쏟아진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바지와 팬티를 끌어 내려 놓고 정액을


뒤집어쓴 나를 보는, 태림 씨의 얼굴이 본 적 없게 새빨갰다.

“뭐….”

그러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 말도 나오질 않는지 그가 의미 없는 소리를 냈다. 수치심에 나는


온몸이 붉어지고야 말았다.

“…….”

뭐라 변명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 와중에 기침이 났다. 눈치 없이 콜록거리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나는 뒤늦게 뺨을 문질러 닦았다. 정액을 뒤집어쓰다시피 한 탓에 얼굴을 닦아 봐야, 허여멀겋고
냄새나는 액체를 문대는 것에 불과했다.

‘어, 어떡해….’

뒤늦게 정신이 든 태림 씨는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해 댔다.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너무 놀라면 그도


혼잣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신음만 흘렸다. 발기한 성기가 눈치도 없이 저릿거렸다.

“태…, 태림… 씨. 그게….”

손을 내려 파자마 바지의 사타구니를 애써 가리면서, 나는 숨을 참았다. 따가운 목구멍 안으로 작은


흐느낌이 솟구쳤다. 수치심으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가,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어, 어… 어떡해….’

성욕의 끈이 훌러덩 벗겨지고 나니 끔찍하고 천박한 자기혐오만 남았다. 기껏 태림 씨가 좋아해 주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는데, 나는 그의 아침을 망쳐 놓는 변태였다. 어디 물그릇이라도 있으면 코를 박고
죽고만 싶었다. 바지춤을 가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태림 씨는 몇 초 늦게 움직였다. 벌겋게 드러난 사타구니를 가리려 그는 속옷과 바지를 다시 올려 입었고,


자세를 고쳐 침대 위에 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뺨을 건드렸다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지다가, 눈썹 위에 튄 멀건 액을 닦아 냈다.

연거푸,

“미안해. 내가…, 하아…. 미안해.”

사과하며 내 얼굴을 닦고 또 닦아 주었다.

‘어….’

나는 멍청하니 얼어 버렸다. 사죄의 말이 왜 내가 아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지 이해되질 않았다. 시선


둘 곳을 못 찾아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데 태림 씨의 낯빛이 홍당무처럼 붉었다. 귓불은 타오르는 듯하고
아랫입술은 짓씹어 대느라 뭉개졌다.
이내 깨달음이 나를 스쳤다. 내가 그의 향에 자극받아 미쳐 버린 것처럼, 그도 나로 인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그러니까, 태림 씨는 강해아가 아침부터 미쳐서는 자진해서 그의 것을 빨았다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나를 상식인으로 생각해 주어서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그, 게 아닌데…. 내가 덮친 건데….’

나는 더 큰 죄책감에 납작하게 짓뭉개졌다.

“그…, 그게 아, 그게요…, 그런 게 아니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내 잇새로 빠져나갔다. 잠든 그를 덮친 것으로도 모자라, 엉겁결에 그를 속이고


미안하다는 말까지 듣게 됐다. 태림 씨가 나를 끌어안고 허둥지둥하는 게, 죄인처럼 연거푸 사죄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미치게 죄스러운데 그 와중에도 좋았다.

그가 나를 덮쳤다고 착각하는 게 좋았다. 분명 그랬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게 설렜다.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다.

“내…, 내가 그…랬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는 자수했다.

“잠… 잠결에 그, 그게… 태림 씨가 옆, 옆에 있는데… 향…, 향이 자꾸…. 그래서 내가…, 내가 먼저


그랬…, 그랬어요.”

그러자 태림 씨의 얼굴이, 더는 빨강일 수 없을 만치 붉어졌다. 사람의 안색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불타오를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새빨갛게 볼을 붉힌 채 그가 날 바라봤다.

“해아…, 네가.”

그러고는 말했다.

“일부러 내 걸 빨았다고?”

“악!”

허둥지둥하며 나는 그를 밀쳤다. 나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 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귓가가 울릴 지경이었다.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뒤로, 뒤로 물러서며 그를 피했다.

왈, 왈… 개 소리가 멀찍이 1 층에서 들려왔다. 낯선 방문자를 향해 도진이가 짖는 소리였다.

“오…, 옥혜 씨 왔나 봐요…!”

허둥지둥하며 침대에서 도망치려는데 내 팔이 홱 당겨졌다. 붙잡아 끄는 힘의 반동으로 나는


나자빠지다시피 매트리스 위로 넘어졌다.

‘힉’, 작은 신음을 내며 나동그라진 내 어깨를 태림 씨의 양손이 짓눌렀다.

“자, 잘못했어요….”

두 번 다신 안 그럴게요…, 사죄하려는 내 입을 태림 씨의 입술이 틀어막았다. 잠든 그의 것을 빨고


정액을 삼켜 댄 내 추잡한 입술에 더운 키스가 내려앉았다. 놀란 입 안으로 밀려드는 혀의 온도가
뜨거웠다.
델 것처럼 달아오르는 키스에 속절없이 바지 속이 묵직해졌다.

“흐으, 응….”

성기가 아려서 눈물이 다 났다. 발기한 걸 풀어 내지도 못하고 고문받는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림
씨는 맞닿은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 냈다. 무릎이 배배 꼬이고 허리에서 힘이 풀렸다.

도망칠 기력도 잃어버린 나를 담는 태림 씨의 눈동자가 그제야 보였다. 찬찬히 내 전신을 훑고 살 내음을


맡으면서 그는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발정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래턱에 ‘쪽’ 소리 나는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의 손이 내 잠옷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여긴 왜 이렇게 됐어?”

“앗, 아, 아니….”

아플 지경으로 힘이 들어간 내 남성이 태림 씨의 손에 움켜쥐어졌다. 거친 자극에 눈물이 찔끔 흐르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윽….”

그는 이미 젖어 버린 내 파자마와 팬티를 한 번에 움켜쥐더니 끌어 내렸다. 빨갛게 달아올라 껄떡대는


성기와 허벅지가 휑하니 드러났다. 민망함에 가려 보려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태림 씨가 내 것을 콱
움켜쥐자마자 나는 항복하며 애원해 댔다.

“아, 아파요! 읏….”

하지 말라는 말이 뭉뚱그려진 목소리로 새어 나갔다.

“잘, 잘못했어요, 태림 씨. 미안해요, 잘못… 읏, 마, 만지지 마요…!”

숨소리 반, 목소리 반으로 빌어도 태림 씨는 아랑곳 않았다. 성기를 쓸어 대는 자극이 연이어 이어졌다.

“…….”

치미는 신음을 억누르는 내 옆구리에 그의 왼손이 달라붙었다. 큼직한 손이 갈비뼈 위를 더듬는 것이


뜨겁게 느껴졌다. 단추 채운 파자마 상의가 가슴 위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가 내 가슴 위에 입을 맞췄다.

“참지 마.”

콧소리가 나도록 내 체향을 맡는 그의 등허리가 내려다보였다.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어깨가 바위처럼


커다랬다. 짓궂은 웃음소리가 아주 낮게 들려왔다.

“아니면, 나도 빨아 줄까?”

“흐윽, 읏….”

손가락으로 성기 끝을 쓰는 자극에 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두 손으로 태림 씨의 어깨와 가슴을 밀어


내는데, 우성 알파인 천태림은 미울 만큼 크고 강했다.

이내 내 것을 쓸어 대는 그의 손길에 질척질척한 소리가 더해졌다. 가슴이 제멋대로 들썩대고 전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고 등허리가 시트 위로 들렸다. 배를 내밀고 ‘히익’ 하는 해괴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자 붕 뜬 허리 밑으로 태림 씨의 손이 들어왔다.

그는 내 상체를 끌어안으면서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힉….”

사정 직전에 가로막히자 두 눈이 커졌다. 자극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 놓고는 싸지 못하게 막아 버린


격이었다. 오갈 데 없는 원망으로 머릿속이 새파래졌다.

“아, 아…, 왜….”

전신이 땀으로 젖고 엉덩이 밑이 미끌거렸다. 시트를 체액으로 적시며 나는 무어라 애원을 해 댔다. 놔
달라고 빌고 아프다고 울었다. 무엇이건 떠오르는 대로 빌어 대는 나를 태림 씨는 아주 가만히 구경했다.

“놔줘?”

그가 물었고,

“놔, 놔주세…요, 앗, 아, 아파요….”

더운 숨을 들이켜는 순간 태림 씨의 체향이 폐를 채웠다.

뒤늦게, 나는 그의 눈을 봤다. 태림 씨의 흥분한 눈동자에는 그래도 이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뿜어져 나오는 이 체향은 순전히 고의적인 것이었다.

허둥지둥 숨을 참았지만 무소용이었다. 고개를 마구잡이로 내저으면서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태림의


페로몬에 젖었다.

온 세상이 달아오르는 순간 그가 꽉 쥐었던 내 성기를 놓아주었다. 찌르르 전신에 쥐가 오르는 동시에


나는 맥없이 사정하기 시작했다. 흰 정액이 태림 씨의 손과 팔에 묻었고 이내 말간 물이 고장 난
분수대처럼 울컥 튀었다.

“학, 히익….”

피부 위가 따끔거리고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듯했다. 목덜미의 힘줄은 너무 팽팽해져서 끊어질 것 같았고


정신이 꺼져 버릴 듯한 충격이 연거푸 나를 점령했다. 태림 씨의 팔에 안긴 채 나는 생선처럼 펄쩍거렸다.
바르르 떨리는 경련이 멈추질 않았다.

“아, 아…!”

성기 끝에서 흰 정액과 말간 물이 번갈아 튀었다. 허여멀건 액이 줄줄 흐르다가 그치면 물이 울컥울컥


나오는 식이었다. 번갈아 사정하고 물을 흘려 대는 게 내 몸이 맞긴 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묵직한 성감에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자꾸만 경련이 났다. 눈이 풀리고 입술이
제멋대로 벌어졌다.

“으, 윽, 으으읏….”

온몸을 옹송그리며 다리를 꼬아 댄 끝에 겨우 떨림이 멎었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눈물부터 났다. 원인


모를 물을 싸 댄 탓에 접힌 배 위가 축축했다. 줄줄 흘린 액체가 오므라든 허벅지 사이에 얄팍하게 고였다.

태림 씨가 나를 고쳐 안자 미지근한 물이 주르륵 무릎을 타고 흘러내렸다. 실금이라도 해 버린 듯


솟아오르는 수치심에 나는 분했다.
‘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는데….’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운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단숨에 식어 버린 숨을 식식거리며 나는 천태림의 품 안에 몸을 붙였다. 한 번 더, 부르르 몸이 떨렸다.


성감이 그칠 줄 모르는 파도처럼 다시 나를 덮쳤다.

“힉….”

더는 나올 것도 없고 발기하지도 않았는데, 사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덜덜 떨었다. 심장이 느릿하게


쿵, 쿵 뛰고 팔다리가 묵직해졌다.

이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됐다. 발현 직후 병원에서도 꼭 이랬었다. 태림 씨가 나를 만진 순간에


이렇게, 먹기 좋으라고 기절한 토끼처럼 맥을 못 추렸었다. 증세는 비슷하지만 지금은, 정도가 심각하게
달랐다.

발목까지 흘러내린 바지도 다시 올려 입고, 더러워진 몸도 닦아 내고, 그에게 사과도 하고 싶고 뭐라고


따지고도 싶고 도망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성감이 준 충격에 잠긴 내 정수리에, 태림 씨가 입을 맞췄다. 머리칼 사이로 단단한 콧대를 문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미안해.”

태림 씨가 속삭였다. 연거푸, 내 귓불에 입술을 문지르면서,

“미안….”

이번에야말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과를 했다.

“너는 왜 각인까지 해 버려서….”

이어지는 속삭임에 내 심장은 멈춘 듯했다. 쿵쿵거리던 박동이 잠깐이나마 멎은 듯 착각이 일었다.


느릿하게 자괴감의 늪에 빠져드는 내 몸을, 태림 씨의 두 팔이 단단히 끌어안았다.

살이 쓸려 아플 정도로 거센 포옹이 닥쳐왔다. 몽롱한 와중에 숨이 막혔다. 힘없이 늘어진 내 상체가


그의 품 안에, 인형처럼 꽈악 안겼다.

“하아….”

내 목덜미에 묻힌 그의 얼굴이 뜨거웠다. 깊게 숨을 들이쉴 적엔 큰 가슴팍이 더욱 크게 부풀어서 내


숨통이 턱 막혔고,

“…네 냄새, 너무 진해졌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 안에 꽃이 폈다.

“좋다…, 해아야.”

언제나 무표정해서 이따금씩 무섭기까지 하던 태림 씨의 얼굴이 환했다. 두 눈동자에 다정한 애정이 넘쳐


흘렀고 호를 그리는 입술이 몹시도 부드러워 애가 탔다.

“좋아.”
그렇게 속삭이며 그가 코끝으로 내 뺨을 밀었다. 힘 빠진 내 고개는 그가 만지는 대로 움직였다. 모로
기울어졌다가, 귀를 잡고 당기는 손길에 그의 낯 앞까지 끌려갔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연이어 이어졌다.

한참을 꿈처럼, 봄처럼 몽롱하니 입술만 문지르다가,

“입술….”

그는 엄지 끝으로 내 입가를 쓸었다.

“…피 나.”

그러고는 내 어깨에 이마를 대뜸 찧었다. 얼떨떨한 채 나는 고개 숙인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제야 아랫입술의 쓰라림이 느껴졌다. 억지로 그의 성기를 담느라 조금 찢긴 모양이었다.

핏기 고인 입술을 혀로 훑는데 비릿한 철 맛이 났다.

부끄러움으로 빨개진 채, 태림 씨와 나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감췄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 누구의 열도


식을 줄을 몰랐다.

태림 씨가 미국에서 가져온 짐이라고는 노트북 한 대가 전부였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AOM


대표님을 찾는 직원들의 연락이 몰려들기에는 말이었다.

덕분에 그는 종일 서재에 머물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긴 화상 회의를 하느라, 우리의 신혼집
서재에서는 낯선 직원들의 목소리와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 논의가 번갈아 울렸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 곧장 일정 수습에 들어간 그와 달리 나는 한량이었다. 미적미적, 옥혜 씨가 욕조에


받아 준 더운물에 잠긴 채 40 분을 허투루 보냈다. 핑계를 대자면 게을러서는 아니었다. 짙어진 체향을
누르기 위해 필요한 약욕이었다.

“흐읍….”

어깨에 코를 대고 맡아 보아도 나는 내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태림 씨가 난다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30 여 분의 긴긴 전화 상담을 마치면서


주치의도 같은 말을 했다. 우성 알파를 상대로 일방 각인을 했다면 내 체향이 더욱 짙어지고 성적 충동도
심해졌을 거라고 말이다.

‘성적 충동이라….’

숨을 길게 내쉬며 나는 욕조 바닥에 허리가 닿도록 몸을 담갔다. ‘퐁당’, 맑은 소리가 울렸다.

몇 해 전에는, 인기 드라마에서 ‘오메가는 알파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잖아요’라는 대사가


등장해 논란된 일이 있었다. 작가가 오메가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런 말을 듣고 기뻐할 오메가는 현실에
없다, 알파 좋을 대로 착각하지 마라… 타당한 비난이 가지각색으로 쏟아졌었다.

그런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오메가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강화시키는, 엉망진창의 유약한 오메가가


오늘의 나였다. ‘알파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개소리는 물론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
알파가 천태림이라면 말이 달랐다.

그라는 우성 알파에게 일방적으로 각인해 버린 내 육신은 아주 그냥 난리도 아녔다. 잠든 태림 씨를


덮치질 않나, 정액을 삼키면서 토정하질 않나, 페로몬을 맡았다고 물을 싸 대질 않나….

결국 주치의가 내린 진단은 편리했다. 내가 각인한 짝이 나에게도 각인을 해 주었으면 하고, 내 몸이


땡깡을 부리는 거랜다.

…물론 의사의 설명은 이것보단 점잖고 더 길었지만, 요지는 같았다.

태림 씨의 반응을 보면 그런 나를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고 말해 주고 안아 준 걸 보면…


내 몸에서 나는 향이라는 게 그리 고약하진 않은 듯했다.

‘아아….’

돌연 내 머릿속에 새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몹시도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시은철 씨가 급을 운운하며 내 형질을 지적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일종의 옐로카드였다,


평생 천태림을 내 사람으로 온전히 가질 수 없을 테니 감히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우성 알파인 태림 씨가 열성 오메가인 내게 각인할 가능성은, 그 경고가 먹혀들 정도로 현저히 낮았다.

태림 씨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쭉 그래 왔다…, 그래서 나를 버리지


못했었다. 제 아버지를 죽음까지 끌어내리고 제 세상을 무너뜨린 결함투성이 강해아를 5 년 동안이나
배우자로 두고 버텨 주었다.

내가 울면서 매달렸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바닥을 기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엉망진창의 러트 사이클을 갖게 된 그의 배 밑에 깔려서 그래도 괜찮다고 우겨 댔기 때문에….

스물여덟의 천태림은 그보다 더할 것이었다. 삶에 때가 묻지 않은 오늘의 그가 얼마나 찬란한지 나는


알았다. 지금의 태림 씨라면, 불완전한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측은함에 매만져 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성 알파의 각인 대상이 될 턱이 없는 열성 오메가가 그에게 반해서, 우울에 빠져 허덕이질 않나


자진해서 그의 것을 빨아 대질 않나…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해 보였을까.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한 소리일 것이었다,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편안해졌다. 과식해서 더부룩했던 위장이 마침내 뚫린 느낌이었다.

‘그래, 그런 거야…. 그런 거겠지.’

숨통이 뻥 트여 가뿐해진 몸을, 분홍기가 도는 욕조에 더욱 깊이 담갔다.

‘그런 거야.’

만에 하나 천태림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할 경우의 수를, 나는 먼 곳에 숨겼다. 아주 버리지는 못하고 내


마음 안의 책장 아주 구석진 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 수를 꺼내어 읽는 일은 없을 테고, 없어야만 했다.

나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게 어울리는 게 어디까지인지 알긴 아니까. 그러니 측은지심에


건넨 호의를 사랑으로 알고 덤비지 않을 것이었다. 주제를 알고 적당히, 태림 씨가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만 까불어야 했다. 정말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대했다가는 다시, 나쁜 결말을 보게 될 테니까.
―이코노미 좌석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해요? 붙여서 두 자리라도 예약해 둘까요?

“자리는 상관없어. 날짜가 문제지….”

서재 밖으로 빠져나온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옥혜 씨가 깎아 준 과일을 들고 문 앞에 선 채 나는 그


음성을 훔쳐 들었다.

―자리가 왜 상관이 없으실까. 비즈니스석도 좁아서 무릎도 못 펴시잖아요. 어휴…, 좀 더 찾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투덜거리는 음성은 낯선 이의 것이었다. 시은철 씨는 아닌 듯하고, 다른 비서, 혹은 부하 직원일 게


분명했다.

그 소리를 몰래 듣고 있자니 내 심장이 쪼글쪼글해졌다. 바쁜 일정을 미루고 와 준 태림 씨에 대한


고마움이 순식간에 가시고, 그 자리에 미안함이 들어섰다. 내 컨디션이 그의 일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걱정이 속을 메꿨다.

“…….”

땀이 찬 손을 옆구리에 문질러 닦고, 나는 서재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열자 노트북을


노려보던 태림 씨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노트북 패드 위로 손을 올렸다.

말없이, 나는 과일 접시와 포크를 얹은 쟁반을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선 내일로 일정 잡혔는데 어떡할까요. 연구 자료 오픈하고 테스트 결과 보고하고, 아무튼 중요한


날인 거 아시잖아요. 대표님, 꼭 오셔야 돼요.

노트북 밖으로 투덜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힐끔 노트북 윗면을 바라보는데 태림 씨가 탁, 탁, 보이지


않는 버튼을 연이어 눌렀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생겼길래 천 대표님이 갑… 기….

말소리가 줄어들더니 이내 음소거 처리됐다.

“어…, 아, 이거… 드시면서 일하시라고….”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나 싶어 나는 더럭 민망해졌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후다닥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물러서는 내 뒤통수에 꽂힌 태림 씨의


눈길이 잠깐이나마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퉁퉁 부은 아랫입술에 앉은 피딱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휴대폰을 찾았다.

‘이코노미 같은 걸 어떻게 타지? 14 시간이 넘는 비행인데… 태림 씨 다리만 넣어도 자리 다 차는 거


아니야? 그럼 어떡해. 내내 옆자리 사람이랑 찰싹 붙어서 간다는 이야긴가?’

항공사 두 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잠깐 훔쳐 듣기로 내일 당장 일정이 있다고 했으니, 오늘 저녁


출발하는 비행기 중 가장 좋은 자리를 요구했다. 휴대폰 너머로 상냥한 직원이, 마침 일등석 여덟 석 중
한 좌석이 남았다는 기쁜 안내를 전해 주었다. 이내 그 자리는 태림 씨 이름으로 예약됐다.

선물용이니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기다리기가 40 분쯤 지났을까, 집 앞으로 비행기 티켓이 도착했다. 퀵


기사로부터 옥혜 씨가 받아다 전해 준 것을, 나는 두 손으로 들었다.
다시 서재로 찾아가기가 한결 가뿐했다. 손에 들린 티켓이, ‘천태림한테 말 걸기’ 찬스가 담긴 쿠폰처럼
생각됐다. 어색했던 아침의 사고를 무마할 기회였다.

“태림 씨, 들어갈게요.”

서재 책상에 앉아 태림 씨는 노트북을 덮던 참이었다. 마침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

대뜸 건넨 봉투에 태림 씨가 눈을 굴렸다. 내 두 뺨을 살피는 시선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1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어 주던 사람인데, 나는 아직 그 미소에 갇혀 허덕이건만 그는 원래의
천태림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딱지 앉은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나는 빳빳한 봉투에 초대권처럼 든 티켓을 꺼내었다.

“내일 아침 뉴욕 도착하는 비행기 표예요. 우리 신혼여행 때처럼 전용 라운지로 가면 되고….”

설렘을 못 감추고 자랑하듯 건네는 안내를,

“이틀은 더 있다 간다고 말했잖아.”

태림 씨가 끊어 놓았다.

그 반응에 나는 다소 머쓱해졌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도 그렇게 말했고 나도 그런 줄 알았지만,


천 대표님을 찾는 직원의 볼멘소리를 들어 버렸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 그의 발목을 잡아 놓겠는가.

“내일 중요한 회의 있다면서요…. 아까 들었어요.”

“…….”

“나 이제 컨디션 괜찮아요. 마침 옥혜 씨도 휴가 끝나고 돌아왔고… 도진이도 있잖아요.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말고… 출장, 마저 다녀오세요.”

“…괜찮다고, 네 그 상태가.”

태림 씨가 중얼거리듯 내 말끝을 물었다. 시비를 따지는 듯한 말투에 나는 마른침만 꼴깍 넘겼다. 입술에


앉은 상처가 여전히 따끔거렸고 목구멍도 침을 삼키기 불편하게 부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머쓱해져 목덜미만 매만지는 내게 태림 씨는 말이 없었다. 황당한 듯 훑어보는 그의 시선 앞에 나는


당당히 허리를 폈다. 약을 펑펑 쏟아부은 입욕을 발가락 피부가 쪼글쪼글해지도록 했으니 내 체향도
확실히 줄었을 터였다.

“응, 괜찮아요.”

나는 확신했다.

“그러니까 저녁 비행기로 다녀오세요. 직원들 다 미국에 있는데 대표님이 자리 비우시면 좀 그렇잖아요


….”

배우자가 열성 오메가인 게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출국하는 데 10 분도 안 걸릴 거고요, 태림 씨 편하게 쉬면서 갈 수 있어요.”

“그래서.”

“…네?”

“나 내보내려고 티켓을, 얼마를 주고 구한 거야?”

“어…, 뭐라고요?”

5 시간 뒤 출발하는 비행기, 가장 좋은 자리로 표를 찾아왔으니 적어도 웃는 얼굴은 보여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안일했나 보다. 태림 씨는 어딘지 언짢은 듯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티켓을
바라봤다.

빳빳한 봉투는 펄감으로 번들거렸고 티켓 역시 빳빳하고 두꺼웠다.

“얼마 안 해요.”

왜 여기서 돈 이야기가 나오나 나는 조금 의아했다. 미닫이문으로 프라이버시도 지킬 수 있고 안에는


데스크랑 모니터도 있고, 제대로 된 기내식도 먹고 침대에 누워 푹 쉬면서 갈 수 있는데 가격 같은 게
대수인가 싶었다.

“강해아.”

태림 씨의 말투가 대번에 딱딱해졌다. 싫대도 ‘해아야’ 하고 부르더니 이제는 ‘강해아’라고 한다.

‘해아야’는 좋지만 ‘강해아’는 싫었다. 큰누나가 아주 가끔 잔소리를 할 적에 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큰누나로 말하자면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고, 선물을 보내도 인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여야만 나를 ‘강해아’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태림 씨는 나를, 이제 와서 그렇게
불러선 안 됐다.

기분이 꾸중 듣는 어린애처럼 삐뚜름해져, 나는 태림 씨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할 말을 걸러


내는 듯 그의 턱이 약간씩 움직였다.

그러나 마침내 태림 씨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허탈하게 짧았다.

“너무 과해.”

네 글자에 내 입이 달칵 열렸다. 소리 없이 다물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대꾸했다.

“장거리 비행인데 돈 좀 쓰면 뭐 어때서요?”

나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인파로 빽빽하게 채워진 국제선 공항도 본 적 있고, 이코노미 좌석이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 그 정도는 알았다. 태림 씨가 조막만 한 자리에 앉아 14 시간 동안 낯선 사람이랑 붙어
앉게 두느니 천사백만 원이면 싼값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내 질투가 너무 옹졸했다.

“…….”

“…….”

서로 간에 입을 다문 채, 그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짧은 눈싸움 끝에 태림 씨가 한숨 쉬었다. 눈싸움은 내가 이겼지만, 할 말을 먼저 찾은 건 태림 씨였다.

“티켓뿐만 아니라 선물들이 전부 과해. 지금 드레스 룸에 쌓인 시계들만 해도 그래.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

시계 이야기에 내 미간이 꿈틀거렸다. 쇼퍼를 연이어 불러다가 골라 온 물건을 전부 구입했으니 그 양이


많기야 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실장들의 센스가 묻어 있고 태림 씨에게 어울릴 법한 것들이라서 안 살
수가 없었다. 이참에 시계만 넣는 수납장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태림 씨 키에 맞게 다리가 긴 장식장도
하나 주문해 둔 참이었다.

“…왜요?”

그래서 그게 왜? 뭐 어쨌다는 거지. 그렇게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만일 시계에게 자아가 있다면 태림 씨처럼 훤한 인물이 저를 차 준다는 거에 고마워할 텐데. 그날 기분에


따라 끌리는 시계를 골라 찰 수 있으면 태림 씨도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만약 그게 귀찮다면 넥타이와
시계 정도야 내가 평생 골라 줄 수도 있는데….

“그 많은 걸 전부 차고 다닐 수도 없잖아.”

그런데 태림 씨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들어 본 중에 제일로 엉뚱한 소리였다. 백번 양보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화자가 천태림이라면 나는 돌을 콩이라고 부르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나로서도 지금 이 말에는 져 줄 수가 없었다.

‘우리 태림 씨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내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럼 서재에 있는 책들은요? 책도 항상 읽진 않지만 엄청 많잖아요. 읽고 싶을 때 읽으려고 사 두잖아요.


시계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엄밀히 가격대가 다르잖아.”

그 말에 내 입이 떡 벌어졌고,

“네에? 가격이 왜 중요해요?”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태림 씨가 전에 나한테, 우리 집에 걸 그림 하나 그려 달라고 그랬잖아요. 그건 되는데 시계 선물은 안


돼요? 왜지…? 태림 씨한테 준 시계 다 합쳐도 내 그림 한 점 값이 안 되는데….”

뭐 정확히는, 캔버스장에 처박힌 습작 중 하나를 걸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거지만… 그게 그거니까.

내 말대꾸에 태림 씨는 답이 없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내년 봄 즈음, 홍콩 경매장에 신작을 내놓으면 화가 강해아의 작품 가격은 네 배로 뛸 예정이었다. 인생


내리막길로 치닫기 직전이라곤 하나 화가로서는 전성기 목전인 셈이었다. 물론 지금의 작품값도 나쁘진
않았다. 시리즈 작품 한 점 팔아 시계 서른 개는 더 사 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이러고 싶었는데 그걸 못 하게 해?’


괜스레 분한 마음에 나는 숨까지 씩씩거렸다. 비행기 티켓 가격이 뭐 대수인가? 우리 도진이 호텔링,
유치원비도 그만큼 선입금해 뒀는데.

“그냥 받아 주면 안 돼요?”

고고한 선비님에게 뇌물 바치는 얌체가 된 기분으로,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최대한 비굴하게
말했다.

“비행기도 그냥 타 주시고 시계도 모르는 척 껴 주세요, 네? 제가요… 태림 씨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


멋대로 입히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그냥 태림 씨가 탈 비행기, 차는 시계만… 아니다. 그리고
구두까지만요…. 응?”

날 보는 태림 씨의 낯빛이 휙휙 변했다. 더운 사람처럼 귓불까지 약간 붉어졌다가, 코로 내쉰 작은


한숨과 함께 차분해졌다.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지며 태림 씨가 말했다.

“너는 꼭 이럴 때만 애교를 부리더라.”

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고,

“나 애교 안 부렸는데요….”

작게 대꾸했다.

“…….”

“…….”

이내 태림 씨와 나 사이로, 떨떠름한 기류가 흘렀다. 애걸복걸 굽실거리는 내 목소리가 어땠나 되짚어


보는데 차라리 웃겼으면 웃겼지 애교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가 않았다.

괜스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눈썹 위를 만지작대며, 내가 농담했다.

“많이 귀여웠나 보죠?”

“…….”

아무래도 천태림 씨 앞에서는 혓바닥을 입천장에 붙여 둬야겠다. 그냥 농담한 건데… 저렇게 험악한
표정까지 지을 일인가.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견디는 내 뒤로,

“작가님.”

옥혜 씨가 노크 소리를 들려주었다.

“손님들이 조금 일찍 도착해서요. 거실로 안내하고 음료부터 내드리면 될까요?”

난데없는 소리에 내 눈이 커졌다. ‘손님들’이라니?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그러고는 아차 싶었다. 서울로 돌아와 준 태림 씨의 존재에, 6 년을 거슬러 되찾은 우리 멍멍이 도진이에,


아침부터 너무 큰 사건에 들뜬 바람에 잊고 있었다.
목요일 오후 5 시, 퍼블리시스트와 친한 작가 선생님, 그리고 평론가가 찾아오는 날이었다. 작가
강해아의 새 시리즈 작품을 확인하고 전시회 준비를 돕는다는 명목하에, 나의 프로듀서 겸 감시자들이.

잰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나서는 내 뒤로 태림 씨가 따라 걸었다.

“미안해요, 태림 씨…. 약속 잡힌 걸 잊고 있었어요.”

허둥지둥하며 나는 그에게 손님들을 소개했다. 퍼블리시스트로 말하자면 ‘박 실장’으로, 강해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다듬길 8 년째 업으로 삼은 강씨 집안의 파트너였다. 스물여섯 살의 봄에 그의 쉰 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선물을 보내 줬던 게 기억났다.

작가 선생님은 한국대 교수님으로, 나보다 세련된 그림을 그려 내는 은사님이었다. 강해아보다 나은


제자는 없다는 입버릇이 아직도 여전하신가 궁금했다.

평론가는 물론 임 선생님이었다. 며칠 만에 보는 선생님의 얼굴이 무척 멀끔하게 느껴졌다. 하기야 자정


넘은 시각에 맨투맨 차림으로 급하게 찾아온 지난날에 비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 자르셨네?’

귀 옆으로 살짝 꽂히던 머리칼이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시원시원해 보이는 스타일이 선생님 얼굴형에 잘
어울렸다. 그 점을 칭찬할까 하다가, 박 실장이 태림 씨를 보며 반갑다고 요란을 떠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천 대표님 계실 줄 알았더라면 뭐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봐요, 집들이 선물도 못 드렸네요.”

태림 씨를 보는 눈동자가 이상하게 큼직하고, 안색은 몹시 환했다. 하긴, 천태림을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특히나 오메가들의 반응은 몹시 극적이어서, 베타이던 시절에는 태림
씨와 외출할 때마다 약간씩 소외감을 느꼈었다.

‘으음….’

그와의 맞선 자리에서 나도 저렇게 어벙하니 바보처럼 보였을까 궁금해졌다.

“출장 중에 잠시 들른 겁니다. 집에 새 식구가 생겼거든요.”

태림 씨의 말에 휙, 박 실장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임 선생님도 당황한 기색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그


눈빛에 왠지 볼이 따끔했다.

“왜?”

눈을 끔벅이며 나는 넓은 거실 창을 손가락질했다. 기껏 먹이고 씻기고 빗겨 놓았더니, 정원 나무 밑을


파헤치고 흙투성이가 된 도진이가 보였다. ‘아아’ 하며 박 실장이 제 입 주변을 닦았다.

“귀엽죠? 이름은 도진이야.”

예쁜 똥강아지를 자랑하는 내 팔뚝에 태림 씨 손이 닿았다. 내 어깨를 두른 팔이 큼직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그의 옆구리에 붙어 설 적엔 기분이 아리송했다.

다정한 부부처럼 보이고자 연기하는 게 당연한 정략결혼이었다.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거짓말이 뻣뻣한
태림 씨 대신에 나서는 게 내 일이었다. 웃는 얼굴로 그의 팔짱을 끼고, 설레서 달아오른 뺨도 연기로
치부했었다. 그랬었는데… 며칠을 특별하게 보냈답시고 내 맘이 너무 들뜬 모양이었다. 얌전히 붙어 서서
웃는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떨렸다.
내 손님들을 데리고 작업실로 들어갈까 했는데 의외로, 태림 씨가 거실을 허락해 주었다.

“작업실은 좁잖아.”

그 말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다이닝 룸으로 마련되었던 방인지라 작업실은 ‘좁다’는 표현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세 명이 아니라 열 명도 편하게 있을 수 있을 텐데… 아무튼간 태림 씨 말대로, 손님들은
거실 소파에 착석했다.

세 사람의 뒤로 쫓아 들어온 남학생이 내 그림들을 조심조심 옮겨 주었다.

“요즘 달고 다니는 제자?”

그를 지칭하며 내가 물었다. 흐뭇한 얼굴로 정원의 도진이를 구경하면서, 교수님이 대충 고개만


끄덕거렸다.

‘노인네 따라다닌다고 제 그림이 좋아지진 않을 텐데….’

은사님이 겉으로 보기에만 정 많은 할머니 같지 작품 앞에선 칼 같은 사람이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며


내가 느낀 바로는, 한국에서의 여자 교수는 절대로 남자 교수와 같지 않았다. 뭐랄까…, 남근으로 세워
놓은 사람 인 자 틈으로 이 악물고 비집고 들어선 분들이라고나 할까?

은사님으로 따지자면 개중에서도 보통이 아닌 분이었다. 남성 중심인 데다 폐쇄적이기까지 한 한국


미술계에서, 벌써 30 년도 더 전에 한자리 꿰찬 여류 화가이니 오죽할까.

화가에게 중요한 건 실력과 자기 관리가 전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던 분이다. 곁에서 뺑이를 죽어라
쳐도 작품이 나쁘면 팽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큼직큼직한 공모전 마감일이 몰려 있는 시즌에 제자랍시고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나는 그가


측은하게만 보였다. 저러다 작가는 못 되고 교수님의 조수가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며 힐끔힐끔 살폈다.

“해아야.”

문득 태림 씨의 손이 내 무릎 위를 감쌌다.

“작품 이야기. 궁금한데 같이 있어도 되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굉장히 다정했다. 속절없이 나는 흐물흐물해졌다.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렸다.

“내 그림 다 봤으면서 뭘요….”

그러고는 슬그머니, 태림 씨 가까이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넓은 거실 벽에 줄지어 작품이 놓였다. 그걸 보자니 긴 숨이 푹 나왔다. 안도감 때문이었다.

역시 작가로서의 강해아는 좋았다. 오늘처럼, 관중들을 앉혀 놓고 새 작품을 선보일 적에 ‘모든 게


완벽하다’는 확신이 들 때면 잠깐이나마 스스로를 사랑하게 됐다.

“임 선생님 말씀이 다 맞았네. 완벽한 시리즈네요. 어떻게 터치가 띡하고 묵직한데 색감은 수채화 같지?”

박 실장이 유난스레 목소리를 냈다. ‘강해아’가 그의 주요 업무이니 당근으로 나를 길들이는 거야 오래된


일이다. 내가 아닌 다른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칭찬을 퍼부을까 조금은 궁금해졌다. 특히나 일해 형을
다룰 땐 어떤지… 노하우라도 있다면 배우고 싶었다.

“너무 추켜올리지 마, 짜증 나려고 그래.”


괜히 손사래를 치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심으로는,

‘엣헴! 그래그래, 우리 태림 씨 앞에서 내 칭찬 좀 더 해 봐.’

그렇게 주문했다.

텔레파시가 통한 건지 무언지 박 실장은 더욱 유난스럽게 내 실력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기분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들 앞에 태림 씨와 나란히


앉아 안부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기가 나쁠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정말로, ‘진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내 기분을 망쳐 놓는다면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재주를 교수님의 새 제자가


부렸다.

“그건 왜 가져와요?”

한 톤 내려간 목소리가 내 입 밖으로 불쑥 나갔다. 표정은 대번에 굳어 버렸다. 그러자 남학생이 움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손에 들린, 거무죽죽한 추상화도 움직임을 멈췄다.

머뭇거리며 그가 ‘어’, 애먼 소리를 냈다. 지금 보니 교수님의 조수도 못 될 게 뻔했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는.

“딱 보면 모르나.”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게 여기 어울리는 작품 같아서 가져와? 있던 자리에 돌려놔, 강 작가 습작 건드리지 말고.”

교수님의 말을 좇아 그가 가져왔던 그림을 다시 치웠다. 주춤주춤 게처럼 옆으로 움직이면서 복도


한편으로 치워 버린 캔버스를, 나는 잠시 심란하게 바라봤다.

사실을 따지자면 강해아의 신작은 오히려 저, 퍼렇고 뻘겋고 거무죽죽한 습작이었다. 시간이 남고 물감도
많고 생각도 복잡해져서… 이번에 처음으로 그려 본 그림이었다.

잠깐의 침묵 속에 나는 시리즈 작품들로 시선을 옮겼다. 내 작품을 내가 모작하여 완성시킨,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그림들은 해사하고 맑은 모습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

입을 다문 내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가 총 네 쌍이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심장이 답답해졌다. 치미는


한숨을 억누르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따로 벽에 붙여 놨는데 저걸 왜…. 왜 남의 그림을 확인도 안 하고 막 가져와?’

태림 씨 앞에서 못되게 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친구 나가라고 해요.”

손끝으로 눈썹 위를 문지르며 내가 말했다. 교수님이 따로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학생이 제 발로


도망치듯 내 집 밖으로 나섰다.

이럴 때면 옥혜 씨가 나의 구세주였다. 침전된 분위기를 뚫고 그녀는 차와 함께 등장했다. 교수님 앞에는


꿀차가, 임 선생님과 박 실장 앞에는 커피가, 나와 태림 씨 앞에는 유자차와 데운 우유가 놓였다.
김 오르는 우유가 머그잔에 담겼고 귀여운 종지에 유자청 몇 스푼이 얹어져 있었다. 장모님께서 태림 씨랑
나 먹으라고 만들어 준 귀한 청이었다. 덕분에 내 기분이 풀려 버렸다. 이래서 내가 옥혜 씨를 못 잃는다,
나를 달래는 법을 너무 잘 아니까.

“뭔 소리 할지 다 아니까 간략하게 해요, 나 오늘 바빠요.”

굳었던 표정을 풀면서 그렇게 말했다. 손끝으로는 줄지어 선 작품들을 가리켰다.

“전시할 순서도 다 정했고… 입구에 둘 작품은 저거. 제목도 다 붙였고, 아시겠지만 번복할 생각 없어요.
아, 캡션은 회색으로 통일할 거예요. 그, 얼마 전에 누구지? 아이스크림 그리는 작가 있잖아. 거기
개인전에서 비슷하게 했던데.”

준비한 이야기를 술술 읊는 나를 보는 교수님의 시선이 빤했다. 그림만 그릴 줄 알지 전시 세부 사항은


대체로 여기, 이 세 사람에게 맡기던 그 강해아가 맞긴 한가 신기해하는 눈빛이었다.

그의 무릎 아래에서, 언제 집 안으로 들어온 건지 모를 도진이가 뒷발로 귀를 털고 있었다. 녀석의 하얀


등에 묻은 잔디를 교수님이 털어 주었다.

“작가님, 액자는 요즘 시류대로….”

그 틈을 타 박 실장이 입을 열었고,

“잠시만.”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놓았다. 중요한 대목 앞에서 심장이 퉁퉁 뛰었다.

“그림보다 화려한 건 무조건 사양이야. 액자에 공도 돈도 안 들일 거야. 벌써 정해 둔 게 있으니까


그걸로 씌우려고. 최대한 심플한 나무 프레임으로.”

독재자처럼 선언하고 나니 숨이 트였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을 끌어다가, 미리 찾아 둔 자료까지


열어 보였다.

“캔버스 곁에 안 닿게 사방 여백 띄우고 위에는 유리 관 씌울 거야. 50 호까지는 5 센티미터씩, 100 호는


10 센티미터씩. 여기…. 이런 식으로.”

나무로 된 프레임은 ‘빛과 잎’이라는 전시회 주제에도 잘 어울렸다. ‘액자까지 작품의 일환이다’라고
내가 우긴다면 제아무리 박 실장이라도 참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작가님.”

그런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내 말꼬리를 잡았다.

“액자는… 실장님 의견 한번 들어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호방하게 내놓았던 태블릿 화면이 자동으로 픽 꺼졌다. 깜깜해진 액정 위로 비치는 내 실루엣이 까맸다.
희미한 윤곽으로도 당황한 티가 났다.

“선생님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해요?”

작품 고집이 생긴 척 연기하는 것도 잊고 낸 질문이었다. 그 앞에 임 선생님이,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끔벅거렸다.

“응? 왜냐니요?”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

“작가님?”

당혹감에 시야가 비틀어졌다. 삐뚜름하게 휘어 보이는 선생님의 얼굴을, 나는 멍하니 응시했다.

‘임 선생님이 왜…. 왜 박 실장 편을 들지?’

액자는 무조건 수수하게 골라야 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야만 했다, 베타였던 강해아가 오메가가 된
것처럼.

화려한 세공을 거쳐 도금된 프레임이 안겨 줄 결말을 나는 알았다. 작품을 구매한 의원님들과 천희중
검사장님의 이름이 걸린 기사문에 ‘액자값만 수백만 원’이라는 트집이 실리는 미래도, 나는 알았다.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순간 깊은 슬럼프에 사로잡혀 붓을 들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밤을


새워 붓을 쥐고 때론 울고 좌절감까지 맛봐 가며 이뤄 낸 전시 <빛과 잎>의 모든 것이, 천희중
검사장님을 끌어내리는 빌미로 쓰인 탓이었다.

그림은 내 유일한 장기였다.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내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하나뿐인 긍지였다.


그것들이 천태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의 가족을 무너뜨리는 데에 쓰였다.

오늘로부터 다섯 달쯤 뒤에 벌어질 지옥이 그렇게 설계되었다. 천희중 검사장을 비롯한 여당 쇠뿔


의원들이 강해아의 작품을 구입한 일에 로비 따위의 정치 공작은 없었다는 사실은 주장해 봐야
지지부진하게 파묻히고, 액자값을 따져 대는 생트집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로 오르내릴 것이었다.

그러니 박 실장의 조언이라면 무조건 NO 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기자들 타자기에 오르내릴 일
자체를 막는 게 최우선이라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트집 잡힐 건덕지라면
무엇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심산이었다.

“…….”

그런데 내 뇌가 고장 났다. 난데없이 임 선생님이 끼어든 탓이었다. 박 실장이야 아버지께서 고용한


사람이니 액자 이야기를 꺼내는 게 놀랍지 않다지만 임 선생님은 달랐다. 임 선생님은, 내 사람인데.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멍하니 그를 보는 내 눈앞에 불쑥, 커다란 손바닥이 닿았다. 태림 씨가 내민 손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죠. 오전부터 해아 컨디션이 나쁜지라 안


되겠습니다.”

눈을 끔벅거리며 나는 태림 씨의 손바닥을 구경했다. 단단한 손이 그대로 내 시야를, 뚜껑처럼 가렸다.


사방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발적인 손길에 당황스러울 차례인데, 나는 왜인지 가슴이
차분해졌다.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댄 채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 하지만 액자 이야기가 남았는데.”

박 실장이 아쉬운 소리를 냈고,

“그 얘기라면 진작 끝났습니다.”
태림 씨가 그의 말을 끊어 놓았다. 혓바닥에 절단기라도 달린 게 아닌가 몰랐다.

…아, 나는 어떤지 알지, 참.

“이미 주문 넣었습니다, 액자는.”

“네?”

“결혼하고서 제 남편 첫 전시인데, 제가 맞추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주문 들어간 건이니 더 논의드릴 게


없습니다.”

천태림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당당하게 거짓말을 할까. 내가 액자에 매달리는 이유도 모르면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내 편을 들어 주는 걸까.

정말이지 빈틈없는 사람이다, 태림 씨는. 그 짧은 새 잠깐의 대화를 듣고 자연스럽다 못해 튼튼하기까지


한 거짓말을 지어냈다. ‘공도 돈도 들이지 않겠다’는 내 말에, 액자값을 본인이 낸다는 후일담을 덧붙여
남들이 이래라저래라 말할 건덕지를 없애 버렸다. 이제 와 도금된 액자를 쓰자고 입을 뗀다는 건 천태림의
지갑에 대고 그만한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저 황당했다. 태림 씨에 대해서라면 전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겠다. 얌전히 태림 씨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내가 이상했다. 머리만 숨기면 온몸을 다 숨긴 줄 착각하는 닭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요, 강 작가 작품이 액자 타는 그림은 또 아니지.”

은사님이 슬쩍 말을 얹었다. 제자라고 데려온 놈을 쫓아낸 게 무안해서라도, 대화를 갈무리하고 그만


자리를 뜨고 싶으실 게 뻔했다. 자리를 파하고 나가자마자 학생에게 화내실 얼굴이 벌써 눈에 선했다.

“그럼 이만….”

태림 씨가 아주 종지부를 찍어 놓았다. 손님들은 간다 만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인사부터 꺼낸 것이었다.

그제야 내 시야를 가린 손이 내려갔다. 눈을 좁게 뜨자, 태림 씨가 내 이마를 만지며 열을 재는 시늉을


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왜 이러냐고 따져야 할지 모르게 되어 나는 애꿎은 도진이만 바라봤다.

이내 박 실장이 널브러진 자료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탁,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대고 종이 밑을 쳐


대자 흐트러졌던 프린트물이 차례차례 정리됐다. 빨간 가죽 파일 안으로 내 그림의 자료들과 전시 개요
글이 쏙 들어갔다.

“으음…. 그럼, 다음 주 중으로 사진사 보내려는데 어떠세요? 작품 사진만 찍고 나면 정말 준비


끝이네요.”

빨리 나가라고 빗자루라도 휘두를까 봐 겁이 났는지 후다닥 일어서며 박 실장이 말했다.

“응. 아무 때나 오라고 그래요.”

“…다음 주는 안 됩니다.”

나와 태림 씨의 대답이 엉켰다. 눈을 끔벅이며 그를 돌아보자, 그도 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지그시 내 기를 누르는 게 느껴졌다.

영문도 모르는 채 나는 ‘어, 그렇다네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태림 씨는 제멋대로, 사진사가 올


날짜를 보름 뒤로 미뤄 버렸다.

교수님과 몇 마디 인사 나누는 태림 씨의 옆얼굴을 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웃는 얼굴과 눈동자는 손님을


향해 있는데, 그의 손은 내 왼손을 쥐고 있었다.

“…….”

손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른 채였다.

우르르 닥쳐왔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왠지 힘이 빠져서 나는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지도 못했다.
소파에 앉아 식어 버린 우유를 마셨다.

나를 대신해 세 사람을 돌려보낸 태림 씨는 몇 분 뒤에야 거실로 돌아왔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요즘의 천태림은 정말이지 너무 어렵다. 그는 우주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이, 크고
잘생긴 남자의 사고 메커니즘을 익히고 싶다.

“…왜 도와주세요?”

내가 물었고,

“그럼 저쪽 편을 들까, 강해아 놔두고?”

태림 씨의 대꾸는 빨랐다.

그렇게 말하면 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어떤 액자를 쓰느냐가 나에게나


중요한 일이지 태림 씨 입장으로는, 말 한마디 얹어 주는 게 어렵지 않을 터였다.

“네…. 고맙네요.”

그러고는 무릎 위만 만지작대는 내 머리를 그의 큰 손이, 금방이라도 쓰다듬을 것처럼 건드리려다


그만두었다.

그 애매한 손짓에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전에는 누구의 손이 내 얼굴 가까이 와 닿으면, 눈이 절로


움찔거리고 맞는 상상부터 하곤 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한편으로 무서우면서 한편으로는 설레던 태림 씨의
손이, 이젠 그저 좋았다.

“나, 컨디션 진짜 안 좋아요?”

손등으로 뺨을 닦으며 내가 물었다. 의사도 아닌 타인에게 묻기에는 참 이상한 질문인데, 작금의 내가


태림 씨에게 묻기엔 무척 적절한 질문이었다. 나보다도 내 몸과 반응에 대해 잘 아는 게 태림 씨였다.

“향은 안 나. 너무 걱정하지 마.”

이어 그가 내 그림을 옮기기 시작했다. 캔버스 뒤의 가로 틀을 쥐고, 앞면에는 그 무엇도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드는 동작이 이제 썩 자연스러웠다. 물감도 덜 마른 중간 작업물을 사람 시켜 옮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었다.

느릿느릿 일어나 나는 그를 따랐다. 그와 나의 걸음은 작업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멈췄다. 조금 전,


교수님의 제자가 잘못 가져왔던 거무죽죽한 그림이 벽 한편에 치워져 있었다.

“이건… 뭘 그린 거야?”

태림 씨가 물었다. 새파란 모서리를 보는 그의 눈매가 가느다랬다.


“아…, 이건 전시 걸 거 아니에요. 보여 주기도 뭣해서 빼 뒀는데 아까 그 사람이 어떻게 찾았나 몰라….
금방 치울게요.”

“뭘 그린 거야.”

요즘 보면 태림 씨도 참 그렇다. 대답하기 어려워서 기피하면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줄 법도 한데


그에겐 그런 융통성이 없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그냥 추상화일 뿐인데.”

“그래도 주제는 있을 거 아니야.”

내 변명을 못 들은 체하며 같은 질문을 쐐기 박듯 다시 건네는 게 그의 새로운 취미라도 된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궁금해해 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 성미까지 좋아서 안달 난 내가 더 황당했다.

“…자화상이에요.”

마지못해 대답한 내 목소리를 끝으로 대화를 마쳤다.

태림 씨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떨어져 캔버스로 내려갔다.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 놓은, 슬픈 자화상을


그는 한참 바라보았다. 나의 민낯을 그가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태림 씨의 발목을 잡진 않겠다, 그에게 무어건 줄 수 있는 남편이 되겠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저녁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간단한 짐을 챙기는 태림 씨를 보자니 나는 금세
우울해졌다.

‘떨어지기 싫은데….’

캐리어에 숨어서 미국까지 따라가면 안 되나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화물이 아닌 사람인 게 서럽기는


또 처음이었다.

태림 씨의 옆자리를 끝까지 만끽하고자 나는 배웅을 선택했다. 운전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그의 차


조수석에 홀라당 올랐다. 돌아갈 때는 오 기사를 부를 테니 차는 걱정하지 말라고 너스레도 떨어 보았다.
태림 씨는 별달리 대꾸해 주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운전대를 쥘 뿐이었다.

‘아쉬운 척이라도 해 주지….’

나는 불퉁해진 입술을 꽉 다물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까지 30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전용 라운지로 들어가면 출국 심사야 5 분도


안 걸린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그를 운전석에 잡아 두었다.

“저… 태림 씨.”

그의 차 뒷정리를 해 줄 것 같았으면 오 기사한테 전화만 넣어도 될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짐짝처럼 조수석을 차지한 목적은 사실 따로 있었다.

“음…, 제가 각인을 했잖아요? 그래서 불안증 같은 것도 생기고, 약욕도 해야 되고…. 아무튼 컨디션이
안 좋잖아요.”

큼큼, 목소리를 다듬어 가며 애써 꺼낸 이야기에,

“응.”

태림 씨가 쉽게 답했다.

날 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째선지 평소보다 밝게 느껴졌다. 군인처럼 각 잡힌 표정에 사무적인 말투만


구사하던 천태림 대표님께서, 지난 며칠 사이에 그저 태림 씨, 사석에서의 내 남편이 됐다. 다시 3 주를
더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헤어짐의 순간에서야 그 변화가 실감이 났다.

혹시 3 주 뒤에는 그의 마음이 변해서, 다시 ‘강해아 씨’ 하고 벽을 세운다면 그때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 돌연 두려워졌다.

“제가, 음…. 태림 씨 반말하는 거… 봐드릴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짚어 말했다. 반말해도 된다고, 앞으로도 그러라고, 허락하는 위치에 앉은 척 여유를
부렸다.

태림 씨의 반응은 가뿐했다. 나를 보던 눈이 휘고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내 태도가 어쭙잖아 우스운


모양이었다.

“봐드릴 테니까?”

그러고는 말꼬리를 꼬집어 물어 왔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체향 조금…, 조금만 묻혀 놓고 가지 않을래요? 저, 제가 손….”

‘손수건 가져왔는데, 태림 씨 향 묻혀 가려고’, 준비한 뒷말은 그러했다. 하지만 뒷주머니에 고이 접어


둔 손수건도, 입 속에 머금었던 ‘손수건’이라는 단어도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와락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태림 씨가 대뜸 키스한 탓이었다.

“…….”

깜짝 놀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딱 닫혔다. 얼어붙은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태림 씨는 부드러운


혀끝으로 내 잇새를 훑었다. 그가 엄지 끝마디로 아래턱을 건드리자, 열림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두 팔이 그의 목에 감기고 그의 손은 내 허리를 더듬어 댔다. 역시나 절단기


따위는 그의 입 안에 없었다. 보드랍고 따끈한 혀만이 나를 반길 따름이었다.

눈빛은 차갑고 말투는 단단하고 행동은 철갑을 두른 듯한 천태림이, 키스를 이렇게 잘하는 줄 또 누가
알까. 그가 혀끝으로 내 입천장을 훑고 혀를 맞대 올 때면, 나는 데운 우유에 퐁당 빠진 마시멜로가 된
기분이었다.

더운 숨이 코 밖으로 빠져나가고 온몸이 흐물흐물 풀려 버렸다. 게걸스럽게 달려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만히 혀만 섞는데, 대뜸 태림 씨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술이 떼어지는 게 아쉬워 나는 목을 뻗어 그를 쫓아갔다. 빠끔거리는 내 입술을 그의 검지가 짓눌렀다.

“소리.”

그러더니 대뜸 물었다.
“…일부러 내는 거야?”

“네?”

듣던 중 황당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스의 황홀함이 대번에 가시고, 흐물흐물해졌던 신경이
뾰족하게 서는 듯했다. 당혹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리라니, 내가 무슨 소리를 냈다는 거지.

‘혹시 내 숨소리가 거슬렸나?’

생각이 거기에 닿자 피가 쏠려 딱딱해진 다리 사이가 도로 시무룩해지는 느낌이었다. 바보처럼, 나만


들떠서 매달렸나 하고 자괴감이 드는 한편 그의 태도가 야속했다. 누가 키스해 달랬나, 자기가 멋대로 해
놓고는….

“내가 무슨 소리를 냈다고… 왜 그래요, 진짜.”

“오해하지 마. 나 유혹하려고 그러는 건지 진짜 헷갈려서 그래.”

“네?”

대체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게 되어 나는 눈만 끔벅였다. 불똥처럼 튀어 대는, 영문 모를 말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태림 씨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태림 씨 그렇게 쉬운 남자예요?”

백번 양보해서 내가 태림 씨를 유혹하려 소리를 냈다손 쳐도, 당신께서 어디 넘어올 사람인가 하고 꼬집어


물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허’ 하고 헛웃음을 친다. 실소 안에 담긴 의미가 좋을 리는 없는데,
조금이라도 웃는 그의 얼굴이 나는 좋았다.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웃음이 덜 가신 낯으로 그가 중얼거렸고,

“못하면 뭐요….”

끝까지 말대꾸하는 내 입술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 눈꺼풀엔 자존심도 없나 보다. 태림 씨가 다시 키스해 줄 것만 같아 사르르 눈이 감겼다. 입 다물고


가만히 기다리자 ‘쪽’, 부드러운 입맞춤이, ‘쪽’, 연거푸 이어졌다.

“이제 됐어, 해아야? 체향… 충분히 묻은 거 같아?”

열 오른 이마를 쓰다듬고 관자놀이와 귀를 매만지며 그가 속삭였다. 언성이 내려간 낮은 목소리 끝이 쉰


것처럼 갈라졌다.

“…아뇨, 아직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오메가가 최고다. 누구는 싫다 하고 누구는 불편하다지만, 그런 불평들은 사기꾼


베타로 안 살아 봐서 하는 소리였다. 내게 있어 오메가는 꿈의 형질이었다.

“조금만 더… 안고 있다가 가요.”

이런 소리도 아무렇잖게 해 댈 수가 있고,

“이리 와.”
태림 씨는 또 그걸 받아 주니 더는 소원이 없다.

두 팔 뻗은 그의 품에 나는 냉큼 상체를 기댔다.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그의 손이 내 등을 감싸


주길 기다렸다. 나를 끌어안는 태림 씨의 팔이 따끈따끈했다.

‘강해아 인생에도 이런 날이 있구나, 멀리 가는 태림 씨를 내가 배웅하고, 그가 나를 안아 주는 날이….’

이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남은 한 달을 거뜬히 견딜 것이었다. 자린고비인지 자린고기인지 그 왜,


유명한 구두쇠 이야기처럼. 이 기억을 머릿속에 걸어 놓고 허기질 때마다 올려다보며 버틸 것이었다.

그렇게 다짐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태림 씨가 다시 서울로 날아오기 전까지는.

“뭐예요? 왜 왔어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내가 물었고,

“내 집에 내가 못 와?”

태림 씨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강아지 유치원에서 갓 데려온 도진이를 품에 안은 채 나는 거실을 둘러봤다. 뜬금없이 집으로 돌아온 태림


씨가, 신기루도 고도로 발달한 VR 영상도 아닌 진짜 내 남편이, 가벼운 점퍼 차림새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얀 라운드 넥 티셔츠 하며 긴 다리를 감싼 청바지까지 몹시도 편한 복장이었다.

“어…?”

당황한 채 인사도 못 건네는 나를 대신해 도진이가 꼬리를 치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헥헥거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도진이를 안아 올리는 태림 씨 표정이 떨떠름했다.

“개한테 뭘 입힌 거야.”

하와이안 셔츠에 수박 무늬 스카프까지 두른 도진이를 태림 씨가 쓰다듬었고,

“…다녀오셨어요.”

나는 개보다 늦은 인사를 건넸다.

태림 씨 얼굴이야 물론 반가웠다. 내게도 꼬리가 있었더라면 지금쯤 프로펠러가 되어 엉덩이부터 하늘로


떠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연락도 없이 서울로 돌아왔을까 걱정되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내가 물었다. 전에 없던 방문이니 전에 없던 사건이 발생한 건 아닐까 한껏 심각해진 채였다.

그러자 태림 씨가 짧게 침묵했다. 입을 다문 채 그는, 저야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노려봤다.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집에 왔겠어.”


타박하는 듯한 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뭐라도 대답할 말을 찾으며 나는 입을 열었지만, 떠오르는 일이 없어 다시 다물어야 했다. 지난 한 주간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개인전 일정을 꼼꼼히 점검하고, 도진이를 강아지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퍼피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시킨 것밖엔 없었다.

“…….”

도통 떠오르는 문제점이 없어 골똘해진 내게,

“내일이 네 생일이잖아, 해아야.”

태림 씨가 말했다.

‘생일이 맞긴 한데… 그날 무슨 일이 생겼던가?’

나는 눈만 두 번 끔벅였다. 이어질 보충 설명을 기다리는 나를 놓고 태림 씨는 입을 닫아 버렸다.

“아니…, 그게 다예요?”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마음에 나는 허탈해졌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그제야 펴졌다.

“내 생일이라서…. 그래서 일하다 말고 한국을 들어왔단 말씀이에요?”

“그래.”

“왔다 갔다 비행기에서만 몇 시간인데…. 하루만 있다 가더라도 사흘은 펑크 날 텐데 왜….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일정 맞춰서 왔으니 내 일은 걱정할 것 없어.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갈 예정이고.”

문득, 나는 부스러기가 됐다. 꽉꽉 뭉친 현실에서 툭 떨어져 나오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이 남자… 누구야?’

세상 낯선 천태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사업의 일환으로 결혼 상대를 선택한 태림 씨가, 중대한 출장을
두 번이나 끊어 놓고 나를 찾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오메가라는 게 원래 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걸까. 무관심이 익숙한 베타로 살다 보니 내가 뭘 모르는 걸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고 감성 충만한 십 대도 아니고, 서른두… 아니, 스물여섯 살 성인 남자의
생일이 도대체 뭔 대수라고 비행기까지 타고 온단 말인가.

“왜. 갑자기 찾아와서 기분 상했어?”

내 침묵이 너무 길었나 보다. 태림 씨가 어울리지 않게 내 기분을 떠보는 걸 보면.

“아뇨!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놀라서 그래요. 저, 음…,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


몰랐어요.”

나는 굽신굽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제 옆자리 소파를 툭툭 두들기기에, 느릿느릿 다가가 앉았다.

고맙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이렇게나 반가운 생일은 처음이었다. 내 생일은 절대로 기쁜 날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매년 7 월 7 일은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가족들과 보내 왔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대외적으로 강해아의 생일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때문에 ‘생일’이라 하면 슬프고도 정신없는 기억밖엔
없었다. ‘럭키세븐이라는데 하필 그날이 기일이냐’는 조롱이나 위로 따위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

어차피 진짜 기일이 아니니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세상 사람 전부가 그렇게 믿고 가족들마저 회장님이


벌여 놓으신 거짓말에 익숙한 듯 굴었지만, 나는 7 월 14 일까지 슬픔을 미뤄 놓곤 했다. 그날이 어머니의
진짜 기일이었고, 나 혼자 봉안당에 찾아가 젊으실 적 예쁜 사진 앞에 술잔을 놓는 날이었다.

면역도 되지 않게 정말로 난처한 일은 따로 있었다. 매해 열리는 한성 그룹 자선 행사였다. 어머니 이름


석 자를 걸고 내 생일날 열리는 행사이니 무조건 참여해야 하고, 종일 일해 형 눈치를 보고 피해 다녀야
하는 날인데….

“스물여섯 번째 생일, 축하해.”

그렇게 말하는 태림 씨와 함께 있자니 고난의 기억들이 씻겨 내려가 버렸다.

그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나는 멍하니 응시했다. 새하얀 포장지와 빨간 리본으로 감싼 상자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쭉했다.

그 손에 뭐가 들었는지 나는 이미 알았다.

‘서른세 번째 맞이하는 생일이니까….’

서른세 살치고 나는 참 철이 덜 들었다. 작은 선물 하나에 심장이 널을 뛰는 것을 보면 그랬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태림 씨의 손에서 선물을 빼앗듯이 들었다.

“고마워요.”

뜯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감추려는데,

“열어 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선물로 바꿔 줄 테니까.”

태림 씨가 친절하게 내 등을 떠밀었다.

결국 떨리는 마음으로 선물 상자의 리본을 당길 수밖에 방도가 없었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언지, 이미


아는 내게 주어진 건 무서운 설렘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흰 포장지를 뜯어냈다. 이내 남색 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벨벳 재질의 케이스 위를 소리 없이 쓰다듬자, 뚜껑이 절로 달칵 열렸다.

나는 쓴 탄식을 삼켰다.

‘내 목걸이….’

눈에 익은 물건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6 년 전의 태림 씨가,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야 내게


주었던 바로 그 선물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그날의 태림 씨에 비하면 오늘의 태림 씨는 다른 사람 같았다. 태도만 보자면 그랬다. 그 외의 것은,
변함없이 같았다. 선물을 고르는 안목이 꼭 그랬다.

오므린 꽃잎 모양의 금장식 속에 라일락 컬러의 결정이 박혀 있었다. 사랑스럽고 작은 목걸이를 나는 검지


끝으로 매만졌다.

슬픈 밤의 기억이 휙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사장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날 밤… 그날


밤에 이 목걸이를 잃어버렸었다. 정확히는 빼앗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림 씨에게.

차라리 원망이라도 쏟아 주었으면 싶도록 깊이 침묵하며 날 내려다볼 적에, 그의 손에 이 목걸이 끈이


잡혀 있었다. 그의 주먹 쥔 손 틈새로 빨간 피가 떨어졌고 나는 목덜미를 감싸 쥔 채 주저앉고야 말았었다.
억지로 뜯길 적에 가느다란 목걸이 줄에 쓸려, 내 목에는 얕은 생채기가 났다.

그날 이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 태림 씨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라 몹시 아끼던 목걸이인데,


매일 끼고 다녀 달라는 그의 부탁을 명령처럼 받들었는데. 쓸린 상처가 아문 뒤에도 목걸이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웠었다.

“마음에 안 들어?”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오늘로 돌려놓았다. 퍼뜩 고개를 들고 태림 씨를 바라봤다. 아직 줄이 닳지 않은


새 목걸이처럼, 한 번도 상처 입은 일 없는 말끔한 천태림이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요….”

아직 깨끗하고 아주 완전한 목걸이를,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기뻐 속삭인 말에 태림 씨가 손을 뻗었다. 조그만 결정이 박힌 목걸이를 케이스에서 빼내어, 그는 내


목에 직접 둘러 주었다. 훅을 채우는 큰 손이 몹시도 느릿하고 신중했다.

턱을 숙인 채 나는 마른침만 꿀꺽 넘겼다. 이내 보석의 무게감이 살폿하게 느껴졌다. 익숙하면서 반가운


감각에 정신이 깨는 듯했다.

“…기분은 좀 어때.”

태림 씨의 굵은 손가락이 내 귓가에 맴돌다가 빗장뼈까지 내려왔다. 아쉬움이 남은 사람처럼 그가 내


목덜미를 거듭 매만졌다.

“기분… 좋아요.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그렇게 대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영혼은 창백한데 몸은 달아오른 내 상태를 표현할 말이 따로 없었다.

“생일 선물을 줬으니 말인데.”

태림 씨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쪽 다리를 소파 위에 접어 올리고 오른발만 바닥을 디딘 채 그는 날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소파 등에 걸친 팔이 내 목 옆으로 뻗어 와서, 당장이라도 어깨동무를 할 것만
같았다.

“…너도 나한테 선물을 주면 안 되나 하고.”

그와의 거리가 몹시 가까워서,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음영의 색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태림 씨의 까만


눈이 맹추 같은 내 얼굴을 맑은 우물처럼 비췄다. 짙고 빽빽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리깔렸다. 그는 내
입술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 네?”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는데 머리로만 그럴 뿐, 이내 입술은 얼마큼 내밀어야 하고 혓바닥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든 게 혼잡해졌다. ‘음, 큼’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자 뒤늦게 태림 씨가 눈을 올렸다.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내가 물었고,

“응.”

태림 씨가 즉답했다.

짧은 순간 나는 흥분하고야 말았다. 천하의 천태림이 나에게, 받고 싶은 게 다 있다는데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뭔데요?”

이 순간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줄 수 있었다. 별을 달라 해도 사다 주고, 새 차가


필요하다면 일주일 내내 다른 차를 타도록 일곱 색깔로 뽑아 줄 것이었다. 보석을 원한다면 손가락 위에서
기울어지도록 무거운 다이아몬드를 박은 반지를 선물하고, 금을 원한다면 24K 라 불리는 금붙이를 전부
모아 천태림 동상이라도 지어 줄 것이었다.

그러나 태림 씨의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번 내 생일엔 나한테 말 좀 놔 줄래, 해아야.”

“…….”

그에게 무엇이건 줄 생각에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다. 부풀었던 기대감이 푸쉬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자 허탈감에 화가 났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태림 씨는 나를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왕 강해아에게 선물을 요구할 거면, 그것도 1 년에 단


한 번뿐인 그의 생일날에 받을 특별한 무얼 원할 것 같으면, 강해아만이 줄 수 있는 좋은 것을 말해야 할
텐데 그게 고작 반말이라니.

긴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소파 등에 몸을 기댔다.

‘하긴….’

이래서 천태림을 좋아했다, 나는….

“…생각해 볼게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맥 빠진 내 대꾸에 태림 씨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 본다’고.”

“네. …생각해 볼게요.”

“그래.”
피식 새는 소리를 내며 태림 씨가 웃었다. 나를 쥐락펴락 놀려 놓고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잘생겨서
야속했다.

“생일인데 하고 싶은 건?”

그러고는 물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한참 망설여야 했다. 생일이라고 집으로 돌아와 준 태림 씨를 두고, 그가 내게


돌려준 목걸이를 다시금 목에 걸고서, 하고 싶은 일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딱 하나였다.

“…오늘 자고 가요.”

괜히 도진이의 턱 밑을 긁어 주면서 내가 말했다. 그러자 태림 씨가 눈썹을 슬쩍 올려 보였다.

“그럴 거라고 방금 말했는데.”

“그러니까요….”

한 음절씩 뱉을 때마다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자고 가요, 오늘….”

나는 거의 속삭이다시피 했다.

태림 씨의 무릎에 올라타며 그의 품을 파고들 적에,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감촉, 기분, 분위기


… 모든 게 익숙하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애매모호한 불길함이 피어올랐다.

‘뭐가 문제지.’

기분 좋은 듯 웃음기가 도는 태림 씨의 입매에 입술을 문질렀다. 취했느냐고 농담하듯 묻는 말에는 그저


그런 척 연기했다. 들뜬 마음에 장작을 넣으려 그의 허리를 안으려는 척 더듬어도 보았다.

그러나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지기만 했다. 내 동작을 흉내 내듯이 그가 내게 입 맞추고,


허리를 끌어안고 상의를 벗겨 낼 즈음에도 나는 애무에 집중하질 못했다.

‘뭔가… 이상해.’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오늘 일과를 훑어보았다. 문제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별반 흠집은 찾을 수 없었다. 함께 본 영화는 적당히 스릴 있고 재밌었고 식사도 맛있었다. 옥혜


씨의 레시피대로 내가 만든 샐러드와 반찬들은 그냥 그랬지만, 태림 씨가 구워 낸 고기와 그가 고른
와인이 훌륭한 덕에 풍성한 저녁이었다.

치즈와 살라미로 남은 배를 채우며 나눈 대화도 즐거웠다. 전에 비해 태림 씨는 AOM 일에 대해서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내가 아는 그의 직장 동료라고는 비서실장 시은철 씨가 전부였었는데, 오늘은
개발팀장 김민수라거나 비서실 막내 윤은아라거나 새로운 이름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 뒤에는 알딸딸한 술기운도 깰 겸, 밖으로 나가자는 도진이 소원도 들어줄 겸 정원에서 짧은 산책도
함께했다. 그리고…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 샤워를 했다. 남은 일과가 무언지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씻고 보니 거울 속 내 얼굴이 새빨갛게 들떠 있었다.


‘그러니까요, 자고 가요.’

그렇게나 뻔뻔하게 섹스를 요구했단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양음칠세부동석이거늘!’ 하고 내 안의


선비가 치는 호통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지만,

‘뭐 어쩌라고. 파리에는 그런 말 없었어!’

찬물 세수 한 방으로 털어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피임약을 챙겨 먹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상해.’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내 어깨에 입 맞추고 실크 잠옷을 벗겨 내는 태림 씨는 몹시


동한 듯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데, 내 몸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뻣뻣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 흐물흐물… 그러질 않지?’

어색하고도 애석한 문제를 깨닫자마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오메가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그


특유의 증세가 생기질 않아서 이상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고쳐 말해 엉덩이 골 사이 구멍이 젖지도 않았고,
태림 씨의 페로몬에 취해 몸이 떨리지도 않았으며,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내 체향이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태림 씨.”

허둥지둥하며 나는 그의 입술을 막았다. 내 손가락에 입이 막힌 채 태림 씨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 그게… 제가 지금 평소랑 좀…, 좀 다른데. 그러니까….”

버벅거리며 애매한 문제를 애매하게 설명하자 태림 씨의 표정이 변했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가 내


어깨에 다시 코를 붙였다. 숨을 들이쉬며 살 내음을 맡는 소리가 깊었다.

“혹시 억제제 같은 거 먹었어?”

“네? 아니요.”

그런 걸 왜 먹겠어요, 오메가인 게 얼마나 좋은데… 뒷말을 삼키는데 번뜩 떠오른 다른 약이 하나 있었다.

“아….”

단숨에 머쓱해져 나는 태림 씨의 무릎 위에서 물러났다. 침대 한편으로 비켜 앉는 내 허리로 그의 손이


따라왔다가, 몇 초 늦게 떨어졌다.

“피임약을 먹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벗겨진 잠옷 단추를 다시 채우면서 욕실로 걸어가 거울을
열었다. 오늘 먹었던 약을 찾아 찬장 속을 뒤적이는데, 태림 씨가 불쑥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약이….”

그가 중얼거렸다. 숨긴 뒷말은 ‘이렇게 많아?’ 하는 물음일 것이었다.

나는 약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무슨 약이 이렇게 많냐고 물으신다면, 당신 형질과 정력을 돌아보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열성 오메가인 나로서는 우성 알파인 태림 씨의 페로몬만 쫴도 오금이 저렸다.
섹스를 하고 체내 사정을 했을 때 벌어질 난리도 뻔할 뻔 자였다. ‘지금을 놓치면 언제 다시 이렇게
고급진 정자를 보내 줄지 몰라!’ 하고 허겁지겁 착상 준비를 해 대겠지.

지난번 러트 일이 있고서는 주치의가 지어 준 사후 피임약을 먹었는데, 진료실에 앉아 체내 사정을


했다느니 노팅은 없었다느니 하는 상세한 내용을 말하기가 너무 민망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피임약을
미리 사다 놓았고, 그 결과가 지금 찬장에 가득한 약물의 향연이었다.

오늘 먹은 약의 종이 갑을 찾아 드는 나를 태림 씨가 빤히 내려다봤다.

“피임약을 왜 먹어?”

그가 물었고,

“피임하려고 먹죠.”

어리둥절한 채 내가 대꾸했다.

“우리 사이에 자녀 계획은 없잖아요.”

아이를 낳고 돌보는 내 모습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좋은 짝을 만나 자녀를 출산하는 남성 오메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절개 수술 없이도 숨풍숨풍 순산하고 모유 수유도 한다는데, 으아악…
나는 그러기 싫었다.

그건 남자가 할 짓이 아니네, 여자의 역할이네 뭐네 하는 구시대적인 차별주의자여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가 체력이 좋아서 여자보다 출산의 위험도가 낮다지 않던가. 그런 문제를 다 떠나서 나는 다만, 날
닮은 어린애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만에 하나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는 날에는, 그건 임신이 아니라 고환암 소식일 것이었다.

“으음….”

‘열성 오메가 전용’이라는 라벨이 붙은 설명서가 약상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조막만 한 글씨가
분홍색으로 새겨진 약품 설명서를 노려보는데, 가독성이 최악이었다.

억지로 한 줄 두 줄 읽어 내리자 부작용이 명시되어 있기는 했다.

‘성향에 따라 억제제를 섭취했을 때와 유사한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며, 외부 작용에 관계없이 6 시간


후에 돌아옵니다. 증세가 호전되지 않을 경우 전문의에게 문의 바랍니다.’

그러니 두 알 이상 섭취하지 말라는 문장도 덧붙여진 채였다.

“저는, 이게… 이런 성분인지 몰랐는데. 그냥 준비해 두려고 먹은 건데….”

어설프게 변명하는 날 보며 태림 씨는 말이 없었다. 다만 두 손가락을 집게처럼 뻗어 약품 설명서를 홱


낚아챘다. 그대로 침대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나는 조용히 따랐다.

쪼그만 글씨를 읽어 내리는 눈동자에 심란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피임하고 싶었으면 콘돔을 써도 됐잖아.”

설명서를 주먹 안에 쥐고 구기며, 태림 씨가 말했다. 별 뜻 없는 동작일 게 분명한데 나는 쫄아 붙고야


말았다.
“죄송해요.”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라….”

“콘돔 쓰면 느낌이 안 좋을까 봐 그랬어요.”

“느낌? 무슨 느낌.”

혓바닥이 바싹바싹 말라붙었다. 입 안이 건조해진 채 나는 말을 솎아 냈다.

콘돔 쓰기 싫어하는 알파들이야 그 수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도록 많았다. 피렌체에서 보름인가 만났던


놈 하나는 만난 지 열흘도 안 되어서 섹스를 하자고 제 것을 들이밀었었다. 섹스를 해도 내가 깔리고 싶진
않고 콘돔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말했더니, 저는 성기가 큰 편이라 콘돔을 끼면 답답하다 그랬었다.

그때 그놈 게 나랑 크기가, 뭐 비슷하더만… 그런데 태림 씨는 훨씬…. 그런 허세가 필요 없는 크기니까


….

“콘돔 없이 하는 게 태림 씨한테 더 좋을 거 같아서….”

“…….”

그러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나를 보는 태림 씨의 눈이, 사고 친 어린 동생 보는 듯해서


부끄러웠다.

“해아야.”

그가 입을 열었고,

‘으악, 제발!’

나는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앞으로 약 같은 거 함부로 사다 먹지 마. 담당 의사는 뒀다가 뭐 하려고…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내 나이가 서른둘인데, 따지자면 태림 씨보다 네 살은 더 형인데…. 이런 잔소리를 들을 깜냥이 아닌데,


사실.

“내 느낌이 뭐가 중요해, 응?”

그런데 태림 씨가 나를 어르고 달랜다. 꼬깃꼬깃 구겨진 약품 설명서처럼 내 자존심도 쪼그라들고야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이 대화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네, 죄송….”

…하다고, 습관적으로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태림 씨의 손이 천천히 허공에서 까딱였다.


다가오라는 손짓에 머리 뒤꼭지까지 열이 올랐다. 부끄러웠다, 아주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한 발 두 발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내 팔목을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반사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


버티는 바람에, 반동을 받아 나는 풀썩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허둥지둥 다시 일어서려는데 그의 왼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내 큰 손이 내 귓가로 다가왔다. 눈을 움찔대지 않으려 눈꺼풀에 힘을 준 채, 나는 최대한 여상스럽게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댔다. 이어진 입맞춤은 달콤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내 입술을 핥으며 태림 씨가 내 상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달달한 키스에 홀리는 바람에, 잠시간 나는


그 동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메가 체향도 나지 않고 밑이 젖지도 않고, 목석같은 나를 그가
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고개를 저으며 나는 애써 입술을 떼어 냈다.

“그냥 하려고요?”

그렇게 묻자,

“왜. 싫어?”

태림 씨는 저야말로 당황했단 표정이었다.

“아니, 저 향도 안 날 텐데요. 그리고 안… 그러니까… 안 젖…, 시, 신체적인 반응도 없고요.”

“상관없잖아. 로션이든 젤이든 쓰면 돼.”

“왜 상관이 없어요? 이러면 베타 같잖아요!”

허리에 감긴 태림 씨의 팔을 밀어 내며, 나는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길 두 번째 했다. 이불 위로 물러서


앉으며 헤집어진 파자마를 도로 여미는데, 날 보는 태림 씨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향도 안 나고, 몸도 뻣뻣하고, 태림 씨 페로몬도 못 느끼는데 그게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베타가


아니에요. 이런 상태로는 싫어요.”

“난 상관없어.”

태림 씨의 덤덤한 목소리가 말릴 새 없이 내 몸 위로 떨어졌다.

“그래도 너는 너잖아. 베타 같아도 상관없어.”

‘거짓말!’

황당한 기분에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가 닫혔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고 심장이 놀란
사람처럼 뛰어 댔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같은 단어가 빙글빙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짝이 베타면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면서… 거짓말이다. 베타인


강해아는 백번 안아도 만족을 못 줄 텐데… 거짓말이지. 갑자기 러트라도 왔다가는, 대단하신 오메가
페로몬이 아니면 피 냄새를 맡아도 정신을 못 차릴 거면서… 거짓말쟁이.

“해아야.”

그런데 믿고 싶다. 저 눈을 보면… 그가 나를 동정하는 것이라고 애써 쳐 둔 가림막이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천태림이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사실 알지 않느냐고 나 자신을 달래고 싶어진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그건 그저 나를 좋아한다는 의미, 그뿐이라고…. 지금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나의
형질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아껴 주고, 품어 주고, 받아 준다고.
“해아야, 손 이리 줘 봐.”

태림 씨가 말했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웅크린 내게로, 그가 기는 듯한 자세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뻗은 손 위에 내가 오른손을 올렸다. 내 손은 중지가 약간 휘어 있을 뿐 방구석 화가의 손인데,


태림 씨의 손은 농구공이든 역기든 펜싱 검이든 다뤄 본 티가 역력했다. 거친 손바닥 위를 문질문질
매만지자 그가 작게 웃었다.

“이제 진정됐어?”

그러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헤드에 나란히 등을 댄 채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괜히 옛 생각에


혼자 화가 나서, 분하고 억울해서, 속으로 열을 낼 적에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니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럼 입만 맞추자.”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태림 씨가 말했다. 그러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내 눈만 바라보기에, 나는


먼저 허리를 일으켜야 했다. 입맞춤이라면 좋으니까… 고개를 뻗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눌렀다.
맞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손으로만 해 주는 건?”

가까이 얼굴을 맞댄 채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벅지 위를 매만지자,


그도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잠옷 안으로 쑥 파고드는 큰 손이 벌써 뜨거웠다.

단단해진 그의 남성을 바지 위로만 만지는 나에 비해 태림 씨는 적극적이었다. 다소 거칠게 내 것을


움켜쥐는 바람에 내 손은 금세 갈 길을 잃었다. 쓱쓱 문지르는 손길에 허리에 힘이 빠지고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시트 위로 미끄러진 내 몸 위로 태림 씨가 올라탔다.

“벗어.”

벌어진 파자마 사이로 검지 끝을 꾹 쑤시며 그가 말했다. 할딱할딱 더운 숨을 내쉬며 나는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축축해진 상의가 팔목에 걸릴 때쯤 그가 내 바지를 단숨에 끌어 내렸다.

“윽….”

성기 끝을 문질문질 만져 대는 자극에 눈이 절로 감겼다. 신음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리고 무릎이 세워졌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태림 씨가 보였다. 재밌는 장난을 즐기는 사람처럼 그는 호기심과 애정이 한데


섞인 눈빛으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붉은 상상을 했다. 칼이 있다면 내 가슴을 반으로 갈라다가 심장을 쪼개서 보여 주고만 싶었다. 그
속에, 서른두 살의 베타가 얼마나 새빨간 수치심으로 남아 있는지….

“아.”

왼쪽 허벅지 밑으로 태림 씨의 손이 닿았다. 이내 종아리 한 짝이 그의 어깨에 걸렸다. 배 위에 접힌


선이 하나 생겼고 엉덩이 골 새로 그의 검지가 들어왔다. 앞을 만지는 손길이 부드럽게 나를 달랬다.
“아프게 안 해.”

그가 말했다.

“다치게 하지 않을게….”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에 가슴팍이 절로 들썩였다. 헉, 헉 더운 숨을 연거푸 뱉으며 나는 의미 없이


도리질을 쳤다. 뻑뻑한 뒤로 들어온 검지 하나가 벌써 나를 아프게 했다.

‘안 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태림 씨가…, 태림 씨가 좋다는데….’

내 두 손은 도리 없이 그의 가슴을 만져 댔다.

그렇게 한참 애무가 이어지다가, 태림 씨가 자세를 고쳤다. 발기한 제 것을 내 허벅다리 밑에 가져다


대고는, 소리 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 눈짓의 의미를 알았다. 내 몸에, 집어넣으면… 어디까지
들어가나 눈대중을 하는 것이었다.

작은 깨달음에 움찔 허리가 굳었다. 자진해서 다리를 벌리면서도 내겐 자신감이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무작정 품은 애정과 무턱대고 샘솟는 용기뿐이었다. 그 용기마저 겁보인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서웠다…, 이성 잃은 그에게 억지로 안기는 감각을 나는 이미 알았다. 오메가가 아닌 채 그를 받아


보려 애를 썼던 기억이, 그리고 실패의 기록들이 내 생애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피가 날 테고
자괴감이, 수치심이, 평생 빠지지 않는 보라색 멍울이 비 오는 날마다 흐를 것이었다.

“해아야.”

벌어진 내 다리 두 짝을, 태림 씨가 다시 모아 주었다.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는 그의 성기를 손으로


만졌다.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태림 씨가 좋았고 그에게 안기는 게 좋았다. 섹스라면 하고 싶었다.
아파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까.

그런데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손은 괜찮다고 그를 만지는데, 허리는 빳빳하게 굳고 표정은 공포에


얼어 버렸다. 설움에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괜찮아.”

그렇게 달래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이내 태림 씨가 협탁 서랍을 뒤적였다. 그가 우성 알파이고 내가 열성 오메가인 이상 이 집 안에 젤


따위가 존재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로션을 찾아야 했다.

민망함에 나는 괜히 얼굴만 붉히다가,

“장미 향, 바닐라 향?”

로션 두 개를 쥐고 태림 씨가 묻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둘 중 뭐가 내 냄새랑 비슷한데요….”

맥이 빠지도록 웃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태림 씨는 말이 없었다. 한쪽 눈썹을 올리고 입술 끝은 호를


그린 채였다. 한참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 다 너랑은 달라.”

그러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될 정도의 로션을 손바닥에 쥐어짜 냈다. 로션 튜브가 쭈글쭈글해질 정도였다.

“네 냄새는 그냥, 네 냄새야.”

재차 뒤를 파고들어 오는 손가락이 이번엔 매끄러웠다. 긴장이 풀린 내 근육도 전보다 쉽게 이물감을


받아들였다. 모로 누운 모양새로 낯선 애무를 받기가 부끄러운 동시에, 묘한 기대감에 숨이 막혔다.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태림 씨가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쉽게 안길 수 있었는데…


후회하는 내 입술이 벙긋벙긋 열렸다가 다물렸다. 문득 흥분이 내 뒤통수로 솟구쳤다.

“으, 음.”

숨을 할딱대며 나는 엉덩이를 좌로, 우로 뺐다. 꿈틀거리며 도망치려는 내 반항을 태림 씨는 손쉽게


저지했다. 남는 손으로 덥석 내 엉덩이 한 짝을 움켜쥐고 벌리더니 그는 손가락을 늘렸다. 검지와 중지가
쑥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지나치게 쉽게 들어오는 이물감에 나는 어깨를 떨었다.

입술 새로 침이 고였다.

“아, 아…!”

꾹, 꾹 태림 씨의 손가락이 내 몸 안을 쑤셨다. 그의 손마디가 내 속에서 굽는 것이 느껴졌다.

내벽을 꽉 누르는 손짓에,

“아!”

나는 허벅지를 꽉 모아야 했다. 성기 끝으로 프리컴이 방울져 고였다. 그의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베타나 다름없는 상태인데, 그런데 흥분이 되고 열이 올랐다.

“아, 잠깐! 하, 하지 마요….”

두 손으로 시트를 쥐고 엉금엉금 벗어나려는데 내 등을, 그가 손바닥으로 쥐고는 콱 눌렀다. 배가 시트에


닿고 발기한 성기가 내 체중에 눌렸다. 헐떡거리는 더운 숨이 기침처럼 나왔다. 거듭 그의 손끝이 내
속을 찔러 댔다. 뒤로 빠졌다가 쑤시며 들어오는 손가락에 나는 이상하게 높은 신음을 지르며 손을 뒤로
뻗었다.

“아, 앗….”

허둥지둥하며 그를 밀쳐 내려다가, 한쪽 무릎을 엉거주춤 세운 채 사정하고야 말았다.

“…….”

허리가 굽고 이마는 뜨거워졌다.

“으읏….”

벗어나려 도망치려던 자세 그대로 나는 완전히 엎어졌다. 정액이 울컥울컥, 두어 번에 거쳐 빠져나왔다.


찔끔찔끔 길게 토정하는데 자꾸만 몸이 떨렸다.

태림 씨는 이제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허리를 벌벌 떨며 계속해서 느껴 대는 내 지랄 맞은


몸뚱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페로몬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수치심에 눈물이 땀처럼 삐질삐질 흘렀다. 코끝으로 서러운 숨소리가 빠져나갔다. 태림 씨가 흘리는,
왠지 모를 탄식이 들렸다.

“왜 또 울어.”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깊은 포옹 탓에 그의 발기한 남성이 내 엉덩이에 닿는 게 느껴졌다. 고민하는 사람처럼 문질거리며 피부


위를 맴도는 감촉에 나는 안달이 났다. 아랫입술을 악문 채 그의 몸 가까이 허리를 밀착시켰다. 그러자
더운 신음이 태림 씨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질척하게 로션이 묻은 손이 내 아랫배에 닿고, 말끔한 한 손은 목덜미를 문질거리며 만져 댔다. 내


떨리는 숨이 그의 손바닥으로 느껴질까… 궁금증이 드는 순간 굵직한 검지 손가락이 내 입을 벌렸다.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검지를 고리 걸듯 내 입 안에 쑤셔 넣은 이유도 곧장 알 수 있었다.

그가 발기한 것을 내 뒤에 밀어 넣었다.

“웁, 으….”

태림 씨의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나는 그의 팔 안에 안겼다. 내


뒷구멍이 따끔따끔 달아오르고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팽팽한 감촉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아팠다.

아파서 눈물이 났다.

“우, 읏….”

주사 맞은 아이가 사탕을 먹듯이 나는 태림 씨의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그의 손에서는 눈물 맛이 났다.


빨갛게 열 오른 내 엉덩이를, 태림 씨가 한 손으로 움켜쥐고 벌렸다. 좁은 구멍을 강제로 늘리면서 밀려
들어오는 성기의 압박감이 끝도 없었다.

“어무, 너, 어무 커요….”

침으로 흥건해진 태림 씨의 손가락 때문에 말이 어눌하게 나왔다. 내 말을 어렵사리 알아들은 듯, 그가


쑤셔 박다시피 밀던 몸을 멈췄다. 그러고는 ‘후욱’ 더운 숨을 뱉었다.

“힘 빼.”

그리고 명령했다.

“힘 빼고 엉덩이 벌려.”

“…….”

헐떡대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내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체향도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쏟아지는 향 때문에 눈물 콧물을 뺐을까 상상하니
속이 찌릿했다.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뒤로 뻗어, 나는 내 엉덩이를 스스로 벌렸다. 더운 숨이 학, 학, 연거푸 새어


나갔다. 오일 제형의 로션이 풉, 뿍, 이상한 소리를 내며 쥐어 짜내졌다. 남은 로션을 아낌없이 짜내어
내 엉덩이 골에 묻혀 대는 손길이 다급했다.

미끌대는 뒷구멍으로 한결 수월하게, 태림 씨의 것이 밀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나는 작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악…!”

차라리 술을 마실걸! 그런 도피성 생각부터 번뜩 떠올랐다.

“아, 아파, 아파….”

눈으로는 눈물을, 성기에서는 프리컴을 질질 흘리며 나는 애원했다. 뒤를 쑤시는 두께 때문에 살이


찢어질 것 같았고 속을 쑤시고 들어오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장기가 눌리고 배가 불러 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컥, 콜록…!”

잘못 삼킨 침 때문에 기침을 해 대자 더욱 가관이었다. 내 뒷구멍이 움찔거리며 그의 성기를 더욱 조여


대는 꼴이 됐다.

“헉…, 해아야.”

태림 씨가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힘 좀… 빼 봐.”

“흑, 뺀 거란, 말이에요!”

네가 해 봐! 하는 애먼 소리까지 솟구쳤다.

“아, 아파, 흑…, 윽, 으응….”

진짜, 네가 해 보라고, 너나 힘 빼 봐라, 그게 되는지.

“읏, 응…, 으응, 태림 씨!”

…그런데 그게 됐다. 속을 찌르는 감각이 목구멍 위까지 울렁대며 밀려들더니, 성감에 휩쓸리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 빠져서 시트 위에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벌러덩 무너지는 내 허리를 태림 씨의 두 손이 붙들었다. 핏줄 선 팔뚝이 언뜻 보였고 그 뒤로는 온통


캄캄했다.

“태림, 씨, 태림 씨….”

눈을 감고 나는 눈물을 질질 흘렸다. 퍽 소리가 나도록 그가 박을 때마다 컥, 컥… 밭은 신음이 났다.


그때마다 태림 씨가 끓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움찔거리며 조이는 감각을 즐기는 소리였다.

“흐윽, 응….”

이를 악문 내 가슴 밑으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정신없이 헐떡거리는 몸이 잠깐 번쩍 들리더니, 이내


푹신하게 가라앉았다. 가슴 밑으로 받쳐진 베개 위에서 나는 몽롱했다.

“아파?”

그가 물었고,

“아, 뇨, 아뇨….”
상체를 안은 굵은 팔을 나는 세게 끌어안고 붙들었다.

“그럼.”

“좋아…, 좋아요.”

그러니까 계속 안아 주세요, 그렇게 애원한 것도 같았다.

“좋아?”

“응, 네. 좋아요….”

푹신하고 부드러운 베개가 땀으로 젖을 때까지 같은 동작만 반복됐다. 내 등허리 위에 배를 붙인 채 그는


허리를 움직였고, 나는 엉덩이를 들고 몰아치는 감각에 집중했다. 로션 때문에 접합부에서는 다소 난잡한
물소리가 났다.

마침내 태림 씨가 사정했다. 울컥 그의 정액이 몸 안으로 밀려들 때에서야 나는 아주 희미하게 그의 향을


맡을 수가 있었다. 둔해진 코끝을 맵게 파고들 정도로 거센 향이었다.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내 몸이 단숨에 축 늘어졌다. 태림 씨의 향 때문에 숨이 막혔고 몇 번이고 정액을


뱉어 낸 성기는 덜렁거리며 늘어졌다. 오줌이라도 쌀 것처럼 성기 끝이 찌릿찌릿했다. 그러나 약효
때문인지 전처럼 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맥빠진 내 것을 손으로 쥐고 매만졌다.

“응, 으응….”

싸고 싶은데, 애매한, 배뇨감도 사정감도 아닌 감각이 나를 흔드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약… 싫어요….”

짜증으로 미간을 구기고 그렇게 말하자 태림 씨가 웃었다.

맥빠진 나를 강하게 안고서,

“이것 봐.”

그가 말했다.

“아무 약이나 먹으니 이렇게 힘들지. 자꾸 울고.”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약효 때문에 성감이 막힌 듯한 느낌에 힘들기는 하였지만, 내 눈물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의 슬픔을 부작용이라고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체향도
페로몬도 잃어버린 강해아도 좋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를 울린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내가
혐오스러운데 당신은 이런 나를 안아 주어서, 그래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할 수 없었다.

훌쩍거리는 나의 팔과 다리를 태림 씨가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에 상체를 기대고 어깨에는 볼을


붙인 채 나는 서글픈 개처럼 안겨 울었다.

“흑, 태림 씨….”

“그래.”
“태림 씨….”

“그래, 알았어.”

새가 부리를 맞대듯이 그가 내 입술을 쪼아 댔다. 알기는 뭘 알았다는 건지… 뭐라 말하려다 나는 귀여운


입맞춤에 굴복했다.

끼잉….

서글픈 소리가 침실 안으로 파고들었고,

“…네가 내는 소리야?”

태림 씨가 물었다.

“네? 아니에요, 나, 아닌데….”

취한 듯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 깨는 듯했다. 고개를 들고 닫힌 방문을 쳐다보자 재차, ‘끼잉’ 하는


가느다랗고 서글픈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벅벅, 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도진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나를 눌러 눕혀 놓고, 태림 씨가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흰 개가


헥헥거리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침대 위로 훌쩍 점프하더니, 도진이는 급히 이불만 두른 내 배 위로 거의 박치기하듯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내 눈물을 핥기 시작했다.

“아, 아니…, 형 좀, 좀 씻고….”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나는 도진이를 말릴 수 없었다. 착한 개의 목을 끌어안은 채 나는 지쳐 버렸다.


이불 위로 풀썩 도진이를 눕혀 놓고 녀석의 배를 마구마구 만져 주었다.

그러고서 고개를 들자, 허탈한 듯 웃는 태림 씨가 보였다. 이번에, 이리 오라고 옆자리를 두들기는 건 내


몫이었다. 그러자 그가 터벅터벅 다가와 나와 도진이 옆에 앉았다. 팔을 올려 나는 태림 씨의 목을
끌어안았다.

“해아야.”

이마까지 붉어진 채 파고드는 나를, 그의 큰 품이 받아 주었다.

“…생일 축하해.”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럭키세븐. 7 월 7 일의 자정이 넘은 순간 행복한 생일이 마침내 나에게 주어졌다…. 내가 태어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내 사람이, 나에게도 생겼다.

천장에는 신경 써 구해 놓은 조명이 달렸고 은은한 불빛 아래 백색 파티션마다 강해아의 신작이 줄지어


걸렸다. 두 번째 하는 일인데도 처음처럼 힘들었던 준비 과정을 거쳐, <빛과 잎> 오픈식이 시작되었다.

친숙한 얼굴들을 나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피부 밖을 흐르는 1 분, 1 초의 순간들이 죄 익숙해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천희중 검사장님이 선 위치며 장모님의 감탄하는 얼굴, 그들 내외를 보기 위해 찾아든 정계
인사들의 복장과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지난번과 고스란히 똑같았다. 달라진 점이 전혀
없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아니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미소 지었다. 오픈식 진행을 도맡은 박 실장이 작가 소개를 시작했고, 대다수
손님들께선 그것이 박 실장 자신의 업적 소개임을 모르는 채 들었다.

시선을 돌리면 딱 한 사람, 이전과는 사뭇 다른 남자가 보였다. 내가 골라 준 옷을 입고 내가 선물한


시계를 차고서 웃으며 날 보는, 천태림의 애정 어린 눈길만큼은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안겨
주는 ‘처음’이 나를 안심시켰다.

한결 편안해진 눈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반대편에 선 내 아버지, 강준일 회장님이 보였다. 내 안에 흐르는
연기자의 피는 아마도 아버지 유전일 것이었다. 저렇게나 편안하고 물욕 없어 보이는 얼굴로 가볍게 아들
자랑을 하며, 친탁의 대상인 국회의원 옆에 아무렇잖게 선 것을 보면… 그는 내 아버지가 맞았다. 남들
보기에 내 모습도 저렇게나 뻔뻔할까 싶었다.

칼라가 좁은 셔츠에 면바지, 남색 카디건을 가볍게 걸친 아버지에게 한성 그룹 회장이라는 격식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기업인이 아니었더라면 영화감독을 하고도 남을 연출 실력이었다.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팔불출 아버지 같은 말투에 속아, 여당 의원님마저 가까이서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제아무리 가식을 떤다 한들 재벌 기업인과는 연이 없을 의원들이었다. 검사들이 쓰는


은어로 괜히 ‘쇠뿔’인 게 아니었다. ‘융통성 없다’거나 ‘까탈스럽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적을
만들길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가는 신념 있는 정치가들이 모여든 이유가 강해아였다.

보다 정확히는, 강해아가 천희중 검사장님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를 국회 갤러리에서 열기


위해 다리를 놓아 준 게 검사장님이시기 때문에….

“그럼 이어서 작가님 말씀과 전시 소개를 들어 볼까요?”

…그래서 검사장 집안과 결혼하라고 억지로 내 등을 떠민 것은 분명했다. 강준일 회장님께선 강태공이고


나는 미끼였다. 도무지 꾀어낼 방도가 없는 청렴결백한 정치판 인물들 사이로 해사한 그림을 들고
터벅터벅 들어가 자리를 깔아 주는 미끼.

지금도 회장님께선 막내아들 자랑을 하며, 내심으로는 3 년 뒤의 사업을 내다보고 있을 터였다.

“…작가님?”

하지만 단 한 가지,

‘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사람의 쓸모와 효율을 중시하는 회장님께서 강해아라는 카드를… 다소 낭비했다는 점이 그랬다.

‘몇 번은 더 쓸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베타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 잡고 그림값도 껑충 뛴 최전성기의 강해아를 너무 빨리, 급하게 버렸다는 게
이상했다. 지금껏 몇백 번, 몇천 번을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는 의문이었다.

왜 내 작품들을 로비를 위한 떡밥으로 이용해 버렸을까? 어째서 그 공작과 의혹들을 끊어 내려 장인어른을


검사장 자리에서 은퇴까지 하게 만든 걸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굳이… 사업 판의 새로운 태양이나
다름없는 천태림을 나와 척을 지게 몰아붙였을까.

“작가님, 저….”

10 년, 20 년, 아니… 30 년은 더 쓸모가 있었을 터였다, 강해아는. 나는 회장님과 박 실장이 20 하고도


6 년의 세월 동안 공들여 빚어낸 아이콘이었다. 예술가 강해아가 지닌 효과로 한성이 벌어들인 돈이
얼만데, 그런데 그걸 정치계에 입성하기 위한 재료로 한 번 쓰고 버리다니.

내 외형이 쭈그러들고 그림 실력이 전보다 못해질 때까지, 몇십 번은 더 굴리다가 버려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죽은 엄마까지 이미지 세탁에 써먹는 회장님께서….

“해아야.”

불쑥 친근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아!”

깜짝 놀라 내가 소리를 쳤다. 내 어깨를 쥔 태림 씨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고,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박 실장이, 그리고 웃음을 터뜨린 손님들이 보였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머쓱하니 웃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괜찮아?”

태림 씨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고 나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묻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리고서, 나는 연기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웃었다. 입꼬리는 높게 올리고, 콧등은 너무 찡그리진 말고. 허리는 곧게, 어깨는 넓게 펴고, 웃었다.
강해아답게.

“…<빛과 잎>은 제겐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여태까지의 작품들의 궤를 이어,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게
되어 몹시 기쁘고 설렙니다.”

여기까지는 전과 같은 대본이었다. 박 실장이 점검하고 회장님께서 대략으로나마 보고를 받으셨을, 작가


강해아가 읊어야 할 대본.

그 대본을 나는 내 의견이고 생각이고 신념인 양 말했다. 달달 외운 티가 나지 않게 긴장한 척 침도


삼키고, 수줍은 척 손님과 눈이 마주치면 더욱 웃음 짓고, 내놓은 작품에 발린 물감처럼 티 없고 흠 없이
곧게 섰다.

“그리고….”

그리고 바퀴를 뺄 때였다.

“저는 오늘을 끝으로 붓을 꺾고자 합니다.”


반복되는 굴레에서 나는 절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작가로서 세상에 내보이고픈 이야기를 전부 마쳤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한번 예술가는 영원히


예술가라지만, 화가로서 제 작업은 오늘 전시로 완결입니다.”

수십 명의 얼굴이 대번에 나를 향했다. 뾰족하게 놀란 표정을 지은 이는 두 사람뿐이었다. 강해아가


작가가 아니게 되어서는 안 되는 퍼블리시스트 박 실장, 그리고 내 형 강일해였다.

선 자리에서 나는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붓을 꺾는다고 선언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무렇지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 판매된 작품의 수익은 전액 연두 어린이 재단에 기부됩니다. 캔버스 속에 그려 넣은


희망과 빛의 이야기가 작품 바깥, 세상의 내일에 전해질 수 있도록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준비해 온 마지막 인사를 마치면서 나는 회장님부터 바라봤다. 두 번 다시 강해아라는 카드를 쓸 수 없게


자폭하고, 오늘 팔린 작품을 로비로 연결 지을 고리를 끊어 버리고자 전액 기부라는 수를 내놓은 나를
보며…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수를 쳤다. 점잖은 미소와 함께 그가 응원의 박수를 보내자 그를 따라 손님들이 박수를 쳐
댔다. 나의 돌발 발언이, 사전에 논의된 계획처럼 비춰지는 순간이었다.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나는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왜?’

마음 안에는,

‘왜… 왜 웃지?’

검은 혼란이 가득했다.

계획을 내가 전부 망쳐 놓았는데, 궤도에서 이탈해서 바깥으로 뛰어내렸는데, 왜 비난도 성난 기색도


없으신 건지 회장님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그가 억센 감정을 전부 감출 만큼 천부적인 연기자여서일지도
몰랐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감추면서,

“자랑스럽다, 해아야.”

겉으로만 내 어깨를 감싸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번 작품도, 거기 담긴 뜻도 정말 자랑스러워.”

그러나 만에 하나, 지금의 이 미소가 연기가 아니라면… 애초에 회장님께서 낚고자 한 물고기는 오늘로
다지게 될 친목이 전부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꽉 막힌 정계 의원님들과의 친탁, 딱 거기까지라면….

창백해진 심장을 미소로 감추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회장님의 그림자 뒤에 뻗은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에 선 붉은 얼굴이 보였다. 내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끝없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증오하던 나의 형, 강일해가.

그 순간 찌릿한 깨달음이 내 목울대를 쳤다. 일순 숨이 막혔다. 온몸의 온도가 2 도 정도 훅 내려가는 듯


서늘한 착각마저 들었다.

‘강일해….’
강일해였다.

천희중 검사장님을 끝내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천태림을, 궁극적으로는 나를 망칠 사람. 장기적인


이득보다는 당장의 분풀이가 더욱 중한 사람. 우성 알파인 누나에게 부사장직을 빼앗기고, 위로
기어오르는 것보단 남을 떨구기에 집중하는 사람.

검사장님 내외와 무슨 정신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깨달음이 준 충격으로 얼이 빠진 채 나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무어라 칭찬하는 말들에 미소 지었고, 잠시 붓을 꺾더라도 한번 화가는 영원히
화가라며 나를 안아 주는 품을 느꼈다.

이내 여럿, 중요한 손님들이 연이어 나를 거쳤다. 묻는 말에 맞는 대답과 리액션을 선보이면서도 내 셔츠


안으로는 퍼런 땀이 흘렀다. 하나둘 사람들의 관심이 그림으로 흩어질수록 형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아주 짧은 순간 혼자가 되자, 내 어깨에 형의 손이 닿았다.

와락 움켜쥐고는,

“잠깐 나 좀 보자.”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을 뱉었다.

그 순간 내 형제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그의 관자놀이에 솟은 빨간 뿔이 보이는 듯했고 나를 잡아끄는


손아귀는 독수리 발톱인 양 생각됐다. 제자리에서 흔들리도록 나를 강제로 끌다가, 형은 이내 내 어깨를
놓았다. 그러고는 전시 관람에 열중인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나섰다.

정언 따위에 홀린 노예처럼 나는 일해 형의 뒤를 따랐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억지로 뻗대면 그가 나를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없단 것도, 여차하면 태림 씨 옆에 붙어서 아예
말을 걸어올 수 없게 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러니 굳이 네 살 아이처럼 형을 따라가서는 주먹질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알고는 있었다.

‘확인…하는 것뿐이야.’

고민 없이 움직이는 두 발을 나는 내려다보았다.

‘확인하려는 거야, 진실이 뭔지.’

저주받은 빨간 구두 같은 것은 신겨져 있지 않았다. 차라리 동화 속에서 자주 그러듯이, 강력한 저주에


걸려서 내 잘못일랑 없이 끌려가는 거라면 좋을 텐데… 그럼 내 책임이 없게 될 텐데.

그러나 내 시야에는 그저, 말끔한 디자인의 가죽 구두가 보일 뿐이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형의 뒤를 쫓아 걷기에 바쁜, 무기력한 두 발이.

고개를 들자 복도 끝 모퉁이 앞에 선 형이 보였다. 고개만 비스듬히 돌린 채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의 걷는 방향을 확인하자 그는 홱 몸을 돌려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그
뒤를 느릿느릿 쫓았다.

마침내 갤러리의 몇 가지 조명 장비와 테이블 하나, 말린 카펫 따위가 놓인 창고가 드러났다. 형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내가 애매하게 걸쳐 선 철문을 손가락질했다. 말없이, 나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닫지 마.’
생각하면서도, 손으로는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최대한 느릿하게 시간을 벌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즉시 형의 주먹이 내 배에 꽂혔다. 무어라 말을


꺼낼 새도, 질문을 꾸릴 틈도 없었다. 예상 못 한 주먹질에 ‘켁’, 밭은 기침이 솟구쳤다.

여태껏 행사가 열리는 건물 밖이나 차량 뒷좌석으로 형이 나를 데려가는 일은 빈번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박거나 팔뚝 살을 꼬집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진짜’ 처벌은 집에서나 이뤄졌었다.
그런데, 이건….

“컥….”

각오할 새도 없이 명치를 맞자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픈 기침을 뱉는데 침이 주륵 입술에 매달리며


흘렀다.

형편없이, 나는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허리가 절로 굽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반지르르한 그림과 값비싼 조명이 걸린 개인전의 뒤편, 먼지 쌓인 카펫 위에서 나는 무릎 꿇고 나뒹굴었다.


형의 구둣발이 거듭 내 배를 찼다.

“악…!”

숨이 막히고 열이 올랐다. 배가 찢기는 것 같았다. 장기가 요동을 쳐 대는 통에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성난 욕설과 함께 발길질이 내 팔 위로 거듭 쏟아졌다.

이성을 잃고 몰아치듯 나를, 축구공처럼 차 대면서도 형은 절대로 얼굴은 건드리질 않았다.

폭력이 멈출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그가 가진 힘을 전부 빼 버리고 제풀에 나가떨어질 때까지,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가 걸터앉고 한숨을 쉴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뱃가죽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 댔고 팔뚝
위엔 발길질의 흔적이 묻었지만 나는 그저 기다렸다.

“커헉….”

거친 기침을 뱉는데 입 안이 텁텁했다. 피 섞인 침이 바닥에 엉겨 있었다. 맞던 중에 나도 모르게 볼살을


씹은 모양이었다.

“형….”

역한 냄새와 함께 늘어나는 침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나는 오그라든 달팽이 꼴로 목소리를 냈다.

“형…이었던 거야?”

그걸 확인해야만 했다.

오래도록, 또 죽도록 고민해 온 문제였다. 천태림의 곧은 인생에 불행의 씨앗을 심어 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강일해가 맞는지, 아니라면 다른 누구인지… 상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다. 내 배 같은 건, 구둣발이 아니라 창으로 쑤신대도 괜찮으니까.

“대답해 줘….”

신음 섞인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형이었냐고, 내… 전시회. 의원님들 모은 것도… 천희중 검사장님, 엮으려고, 언론에 가짜 자료 뿌린


것도….”
그러자 일해 형의 표정이 휙 변했다. 그저 분노만이 차 있던 낯에 설익은 감정이 드러났다.

“목소리 낮춰, 강해아. 죽고 싶어?”

협박이 먼저 닥쳐왔다. 애매하게 내 머릿속을 돌던 활촉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나는 고개를 추켜들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었던 거야. 그렇지?”

“무, 슨… 씨발 개소리야? 증거 있어? 새끼야, 하지도 않은 짓을….”

“맞구나, 형…. 형 맞아. 맞지?”

“목소리 낮추라고!”

벌떡 일어나, 그는 잡히는 대로 물건을 찾아 쥐었다. 조명을 다는 용도의 거치대가 그의 손에 장대처럼


들렸다. 회초리를 대신할 물건을 찾자마자, 그대로 내 어깨를 소리 나게 내리쳤다. 일으켜 세웠던 상체가
단숨에 엎어졌다.

아픈 와중에 나는 기뻤다.

‘형이었어.’

6 년을 어리둥절한 채 바보로 살았는데.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내 쓸모가 다해서, 실력이 다 닳아서, 그래서 아버지에게도 버려지고야 만 거라고… 자책으로 얼룩져
장기부터 곯아 들어갔었는데.

“왜…,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해?”

허탈감에 웃음 짓는 내 목소리가, 뭔지 모를 감정으로 벌벌 떨렸다.

“내가 뭘,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거치대가 퍽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향했는데, 빗맞아


머리를 맞고야 말았다. 그 순간 몸에 힘이 풀리고 시야가 까매졌다.

“…….”

멍하니 나가떨어진 채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울렸다. 매질, 발길질이 아랑곳 않고 이어졌다.

기절한 척, 죽은 척을, 너무 자주 했다…. 그래서 형이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내 상태가 정말


이상하다는 걸.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는 걸.

‘그만해, 그만 때려. 아파, 나도.’

몰아치던 고통이 이내 흐려졌다. 감각이 더는 느껴지질 않았다. 몽롱한 와중에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기에 그가 계속 나를 때리고 있구나 알 뿐이었다.

‘나도 사람이야…. 나도 사람이라고….’

이렇게 맞다가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겨우 태림 씨가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도진이도 찾았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들었고, 황량하고 춥던 집이 나와 태림 씨에게, ‘우리 집’,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만 해도 그와 함께, 저녁에는 어디에 가고 식사 메뉴는 뭐가 좋을지 이야기하면서 즐거웠는데…
여기서 죽으면 어떡하지?

퍽, 거친 소리가 내 정신을 흔들었다.

“악!”

새된 비명과 함께 전신의 감각이 돌아왔다. 땀구멍이 시큰거리고 손이 벌벌 떨렸다. 형의 발이 내


가슴께를 걷어차고 짓밟았다.

고통에 속이 뒤틀리는 와중에 나는 물귀신처럼 팔을 뻗었다. 그대로, 형의 바짓가랑이를 쥐고 매달렸다.

“형, 일해 형…, 자, 잠시만… 제발.”

형의 종아리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애원하자, 분한 숨을 씩씩거리는 형의 눈동자에 그제야 인간다운 감정이


스몄다.

지금쯤 그가 떠올릴 생각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이러다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마 그 점을 염려하고 있을 터였다.

“티, 티 나게 때리면 아, 안 되잖아…. 응? 아, 아직… 오픈식 안 끝났고… 밖에 아버지도 계시고….”

나도 그 사실을 강조했다. 나도 사람이니까, 아프니까, 형의 동생이니까 때리지 말아 달라는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강일해는 그런 사실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네가 무슨 사람 새끼냐고
욕하고, 아프라고 때리는 거라며 비웃고,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며 분노하겠지….

“나, 나 도망…, 안 갈게. 못…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래. 이따 이야기하자…, 응?”

그의 무릎 사이에 고개를 대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목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당기고 배에서는, 피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끈한 열감이 올랐다.

“하…. 강해아, 너 왜 이래?”

그러자 일해 형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 냈다.

“안 하던 짓을 해, 왜.”

강해아는, 밟는다고 꿈틀하는 지렁이도 아니었던 탓이었다.

“때리지 마…, 진짜 아, 아파서 그래. 제발 그만 때려….”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기 위해 형이 다리를 움직였다. 그가 털어 대는 대로 내 상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두개골 안에서 뇌가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대뜸 손을 뻗어, 형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거친 손길에 깜짝 놀라 어깨가 굳는데,

“꼴에….”

나를 비웃는 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눈을 뜨고 올려다볼 적에 내 목의, 목걸이 줄이 형의 손에


잡혔다.
“안 돼.”

당황해 속삭이자마자 목걸이 줄이 사정없이 뜯겨 나갔다.

“아, 안 돼, 그건….”

허둥지둥하며 팔을 뻗는 순간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내 목걸이, 돌려줘… 미련을 못 버리고 애원하면서


나는 나가떨어졌다.

“제발, 제발….”

숨이 막혔다. 이젠 웅크릴 기운조차 나질 않았다.

‘아파….’

아파서, 머릿속이 오히려 해맑아졌다. 잠깐 도진이 생각을 한 듯도 했다.

그래도 잘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천 검사님은 무사하실 테고 태림 씨가 나를 오해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게 됐으니까.

매처럼 손에 쥔 거치대를 고쳐 잡는 형이 보였다. 쏟아질 폭력을 짐작하며 나는 눈을 움찔 감았다.

“악!”

그러나 거센 비명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눈꺼풀을 들자 사물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다리가, 그 위에 올라탄 커다란 남자의 등이 보였다.
나는 흐린 눈을 끔벅거렸다.

“콜록….”

피가 엉긴 분홍색 침을 뱉으며 기침하길 두어 차례, 멍하니 울리던 귓속으로 낯선 소음이 섞여들었다.


‘퍽’, 무얼 박살 내는 듯한 소리가, ‘퍽’, 연이어 들려왔다.

거친 주먹을 휘두르는 뒷모습을 나는 뒤늦게 알아보았다.

“태림아!”

시은철이 소리쳤다. 벌어진 철문을 올려다보자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은철의 말끔한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가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다는 걸, 그렇게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는 전혀 몰랐었다. 자살하기 직전의 서른두 살 강해아조차 동정하지 않던 남자가 나를…
아주 불쌍하고 가엾은 것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강, 해아….”

신음하듯 속삭이는 시은철의 목소리보다,

“악, 씨바알! 윽!”

일해 형의 낯선 비명이 더욱 컸다.

너무 맞아서 뇌가 고장 난 모양이었다. 노골적이고 단순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버거웠다. 시은철의 얼굴,


커다란 뒷모습, 일해 형의 비명… 온통 극적인 퍼즐들이 뒤늦게 맞춰졌다.

‘태림 씨.’
태림 씨가, 태림 씨가 강일해를 패고 있었다. 미친놈처럼 휘둘러 대는 주먹이 묵직하게 형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놀라 얼어붙은 나에 비해 시은철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양, 그가 태림 씨의


뒤로 달려들었다.

“태림아, 이제 그만해.”

확신 어린 동작으로 그가 체향을 뿌렸다. 왜 우성이니 열성이니 하는 유전 형질의 차이가 급처럼


나뉘어지게 되었는지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같은 오메가인 내 코를 파고들
정도로 진했다.

태림 씨의 어깨에 닿는 그의 손이 보였다. 그러나, 밀려드는 꽃나무 향기에 몽롱해진 것은 오히려 나였다.


태림 씨는 그를 뿌리쳤다.

시은철이 단숨에 두어 걸음 뒤로 튕겨 나갔다. 휘청거리다가, 그는 당황한 듯 겹겹이 쌓인 테이블에


골반을 부딪쳤다. 짧은 순간 그가 놀란 눈으로 태림 씨를, 그리고 나를 봤다.

넝마가 된 꼴로 얼굴이 벌게진 채 나는 밭은 기침을 컥컥 뱉었다. 오른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피 섞인


침을 뱉어 대다가, 이내 바닥을 기었다.

“태림 씨….”

거친 숨과 부푼 근육으로 정장 재킷이 찢어질 듯 두드러진, 태림 씨의 등 뒤로 나는 기어갔다. 그때쯤


형은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성 잃은 천태림의 손에 목이 죄여 그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나는 덜컥 두려워졌다.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하는 나 자신을 주어로 두었던 공포보다도, ‘저러다


죽이면 어쩌지’ 하는 태림 씨를 주어로 둔 두려움이 이상하게도 더욱 컸다. 떨리는 두 손을 뻗어 나는
그의 어깨를 만지고, 굵은 허리에 팔을 둘러 묶듯이 끌어안았다. 느릿느릿 힘 빠진 내 상체가 그의 등에
붙었다.

반쯤 업힌 듯한 모양새로 나는 기침했다.

“태, 컥…, 태림 씨, 그만해요…. 그만.”

그러자 위로, 아래로 크게 들썩대던 그의 어깨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훌쩍훌쩍 뒤늦게 눈물이 났다. 그를 껴안은 채 나는 울기 시작했다.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지독한


꿈인지 분간되질 않았다.

“그만해요, 이제….”

온몸이 다 아팠다. 골이 울렸다.

제일 보이고 싶지 않던 모습을 보이고,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에 만나고, 들키고야 말았다….


강해아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식인지. 별것 없는 인간인지를.

“태, 림 씨…, 윽.”

콜록, 콜록 기침하는 내 두 손을 천태림이 움켜쥐었다. 힘주어 묶은 포옹이 그로 인해 쉽게 풀렸다.

그가 나를 돌아보는 새 일해 형이 잠깐 보였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린 그의 벌건 목에, 어찌나 세게


졸랐는지 흰 손자국이 일시적으로 남았다.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신음이
아니었더라면 죽었다고, 시체라고 착각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었다.

허옇게 질린 내 얼굴에 태림 씨의 손이 닿았다.

“너….”

그가 입을 열었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리 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그를


안았다.

뒤늦게, 작은 방 안으로 사람이 찾아들었다. 강준일 회장님의 전속 비서 황종태였다. 황 비서는 방 안의


상황을 훑어보더니, 가장 먼저 형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발 늦게 정신이 든 듯 횡설수설하며 일해 형은 제자리에서 일어서려다, 한 차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나자빠졌다. 콧대 위 피부가 찢어진 채 벌어졌고 턱과 목 밑까지 흘러내린 피가 셔츠를 벌겋게 적셔
놓았다.

“이런, 미친….”

형이 정신없이 중얼거렸고,

“목소리 낮추세요.”

황 비서가 그를 달랬다.

“이런 모습 회장님께 보여 드릴 겁니까?”

“강해아, 너, 이 새끼….”

그러자 불쑥 태림 씨의 몸이 움직였다. 그 바람에 내 무릎이 땅에서 번쩍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태림


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뒤로, 뒤로 그를 잡아당겼다. 사람이 아니라 성난 짐승을 말리는 느낌이었다.
분노한 그의 흉통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태림 씨, 태림 씨….”

콜록, 콜록 자꾸 기침이 났다. 빌어먹게 배가 아팠다. 가죽이 찢어진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 나 봐요…, 제발요.”

천태림이 나를 돌아봤다.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됐고 콧대와 턱, 이마까지 바짝 힘이 들어간 채였다. 그의


왼쪽 뺨이 붉었다. 일해 형의 코를 박살 낼 적에 그도 맞은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내 심장에도 멍이
들었다. 반지에 쓸리기라도 했는지 아주 가느다란 생채기가 보이는데, 나는 그 상처도 빼앗아 갖고
싶었다.

“태림 씨, 뺨….”

더듬거리는 내 손을, 태림 씨가 낚아채듯 쥐었다. 손의 악력이 아플 정도로 강했다.

깊은숨을 길게 뱉는 그의 뒤로 황 비서가 나를 살폈다. 벌어진 철문을 눈짓하자 그가 일해 형을 내보냈다.


도망치듯 사라지면서도 형은 연거푸 나를 돌아보았다. 코의 피부가 으깨지고 뻘건 피로 가슴을 적신
채로도 형은 내게 공포를 줬다.
멍하니 형의 그림자만 보는 내 옷매무새를 황 비서가 정리했고,

“손 떼.”

태림 씨가 그의 팔을 쳐 냈다. 그러자 중년의 비서가 머뭇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가타부타 말은 없었다.


알아챈 것이었다, 천태림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성난 태림 씨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반쯤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번뜩거리는 눈이며 핏대 선


이마를 찡그리는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남은 건 어쭙잖은 흉내 내기였다. 시은철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잘 되지 않는 실력으로 나는


체향이라는 걸 내보려 노력했다. 얼추 성공한 것 같았다, 황 비서가 손으로 제 코를 막는 걸 보면.

부끄러운 기분을 감추며,

“태림 씨.”

나는 그의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붙였다. 구겨지고 붉어진 태림 씨의 이마가 느릿하게 펴졌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흐렸다. 나를 보는 건지, 허공에 떠다니는 내 페로몬을 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색하게나마 그의 열기를 식혀 준 뒤에는 떨리는 다리를 일으킬 차례였다. 멀찍이 얼어 있던 시은철이,


불쑥 손을 뻗어 나를 세워 주었다.

휘청거리며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잠깐 매달려야 했다.

“태림 씨 좀, 잠깐… 봐 줄래요.”

시은철에게 나는 평생 내 입으로 뱉지 않을 것 같던 부탁을 했다.

“무슨….”

당황한 듯 시은철이 나를, 주먹과 옷 소매에 피를 묻힌 태림 씨를 번갈아 살폈다.

“아직 오픈식 안 끝났잖아요.”

그도 태림 씨도 나는 애써 외면했다. 구둣발 자국이 묻은 내 재킷을 그저 조용히, 벗었다.

“나… 재킷 좀.”

그제야 황 비서가 제 재킷을 벗어 주었다. 덩치가 비슷하다 보니 다행히 내 옷처럼 잘 맞았다. 색이 내


옷과 다르기는 했지만… 누가 묻는대도 음료를 엎질렀다고 거짓말하면 그만이었다. 자신 있었다, 전에도
그래 본 적 있으니까….

발자국이 남은 셔츠를 감추기 위해 단추를 채우려는데 손가락이 후들거렸다. 익숙한 듯 황 비서가 허리


숙여 내 단추를 채웠다.

그에게서 받은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과 눈물을 닦는 동안, 황 비서는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구겨진


바짓단을 털어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손길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는 괜찮았을 수도 있었다, 나를 지켜보는 눈이, 두 쌍이나 되지만 않았더라면….

나를 유령 보듯 하는 시은철과 화가 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충격받은 것인지 모를 얼굴로, 우두커니 선


태림 씨만 아니었더라면.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갤러리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돌아가고 싶었다. 나를 얕보는
시은철에게 그럴 만한 모습을 보여 준 지금, 강해아가 아주 귀한 자식인 줄 알고 결혼한 천태림 씨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닌 이 자리를, 어떻게든 떠나고 싶었다.

주춤거리며 내가 뒷걸음질 치자 태림 씨가 와락 손을 뻗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허공에 뜬 채 멈춘 손이 보였다. 나를 붙잡으려던 그의 손은 내 뺨이 아닌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고개 숙인 채 나는 마른 입술만 벙긋거렸다.

“나…, 나중에….”

내 음성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같은 말을 반복한 뒤 나는 횡설수설했다. 시은철에게 태림 씨를 부탁한다고도 말했다. 진정하게 도와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해 놓고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다시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자마자 황 비서는 바빴다. 말끔한 척 다듬은 나를 데리고, 그는 내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귓속말을 하는 게 보였다. 강준일 회장님의 눈썹이 잠시 움직이는
듯하다 이내 펴졌다.

갤러리의 은은한 조명 불빛조차 번쩍번쩍 아프게 느껴졌다.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나는 아예 걷지 않았다.


가만히 선 채 작품을 바라보면서, 일부러 다른 생각에 잠긴 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얼굴의 어른이 내게 다가왔다. 내 그림을 칭찬하고, 미대생인 제 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멀게, 그리고 아주 가깝고 크게 들렸다. 천둥처럼 거칠게 귀를 파고드는
메아리를 들으며 나는 웃어 보였다.

“우리 딸이 아주 팬입니다. 그걸 뭐라고 그러더라, 아. 오마주라 그러던가요. 작가님 화풍을 따라서


과제를 그리더라고요. 오늘도 오픈식에 간다 했더니, 초대권 더 없냐며 어찌나 야단이었는지 모릅니다.”

“하하….”

“작가님처럼 되고 싶다네요.”

“아…, 저처럼….”

그리고 잠시간 몽롱했다. 누구도 나처럼은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불쑥 솟구쳤다가, 내 심장과 함께 팍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머릿속은 얼어붙었는데 혓바닥은 잘도 움직였다.

뻔뻔하게 나는 강해아를 연기했다.

“너무 기분 좋은걸요. 다음에 따님 그림도 보여 주세요…, 궁금하네요.”

애써 웃음 지으며 바라볼 적에 그의 귓불 너머로 회장님이 다시금 보였다. 그 옆에 선 채 심각한 얼굴로


무어라 말을 나누는 임 선생님도, 함께였다.

꼭 이런 식이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이제까지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한 번 주의를


환기하고 둘러볼 때면 그제서야 하나도 아니고 둘, 셋씩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그렇지….’

내 사람… 그만큼 멍청한 말이 내 인생에 또 있을까. 내 사람, 내 편, 내 버팀목… 그따위 것을


타인에게서 찾으려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런 것을, 내 주제에 한 번이라도 가졌다고 착각한 게
잘못이었다.

‘그게 일이 아니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좋은 타이밍에… 그렇게 나를 발굴했을 리가 없는 건데.


그렇게 나를 잘 알고 내게 잘 맞춰 줄 수가 없는 거였는데.’

결국은 강해아다. 껍데기만 남고 속은 텅 빈 인간 강해아. 내가 가졌다고 믿은 것 중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허탈하고 수치스러웠다.

“…작가님? 괜찮으십니까?”

낯선 손님께서 무어라 말을 거는데 더는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뺏기고야 말았다, 내 인생을. 도둑맞았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갤러리를 채운 내 작품, 내


그림, 내 명함에 가진 애정마저도 내 손을 떠나 버렸다. 남이 주고 남이 빚어 놓은 허울이 되고야 말았다.

내가 이룬 모든 게 결국 강준일 회장님의 업적이고 능력이었다. 내, 하나뿐인 장기인 그림마저도…


평론가 임건을 휘둘러 짜고 쳐 놓은 판 위에서, 그게 내 능력인 줄 착각하며 속아 넘어갔다.

벌컥 눈물이 솟구쳤다. 이를 꽉 악물어도 어깨가 떨렸다. 내 이상을 알아채고 이름 모를 의원님께서


당황한 숨소리를 냈다.

“작가님.”

그리고 임 선생님이 다가왔다. 다시 나를 달래려고, 똑바로 빚어다가 원위치에 세워 놓으려고… 나는


그를 외면했다.

고개를 돌리고 더운 숨을 뱉는데 태림 씨가 보였다. 갤러리 문을 지나 들어오면서 그는 시커먼 눈을 곧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눈 밑 살이 파르르 떨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나는 웃어 보였다.

그렇게 연기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되면 좋을 텐데. 한 발, 두 발, 슬픔에 잠겨 죽어 가는 나에게로


태림 씨가 다가온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전시회장의 정중앙에서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가자.”

중력이라도 갖춘 듯 그의 목소리가 툭, 내 발 위로 떨어졌다.

“여기서 나가자.”

뒤이어 태림 씨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주춤거리며 나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잡힌 손안에 땀이 찼고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채 갤러리 밖으로 걷는 나와 태림 씨의 등 뒤로,
숱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주차장에서는 오 기사가 벌써 차 문을 연 채 대기 중이었다. 태림 씨가 나를 차량 뒷좌석에 태웠다.


맥없이 앉아 나는 퉁, 퉁, 북처럼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우리를 쫓아 나온 건 강준일 회장도 임 선생님도 아니었다. 천희중 검사장님과 장모님께서, ‘태림아’


하며 나와 그를 따라잡았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태림 씨가 손을 들어 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나를
만류하더니 그가 차량 문을 닫았다.

문밖에 선 채 그는 장인 내외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를 나눴다. 떨리는 손짓이 이어졌다.


장모님께서 제 입을 틀어막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림 씨가 차에 올랐다. 오 기사가 말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무서운


적막이 흘렀다.

“왜 그런 거지?”

태림 씨가 물었다. 벌겋게, 내 형의 코피가 묻은 손으로 주먹을 쥐어 만 채였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뭐가요.”

그렇게 되묻자,

“왜 강일해가 너를…. 왜 그런 거야?”

태림 씨가 다시 질문했다. 너무 뚜렷한 질문이다, 모르는 척 회피할 수조차 없는 돌직구다.

나는 그저 침묵했다. 그런 적 없다는 듯이. 내가 대답할 때까지 태림 씨는 소리 없이 나를 노려봤다.

그 순간에는 심장이 쿵쿵 소리 내어 뛰는 것조차 나는 부끄러웠다. 벌건 심장이 초라하게 뛸 때마다, 쿵


… 계단 밑으로 내 가치가, 쿵… 한 칸 한 칸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날 보는 태림 씨의 눈빛이 무서웠다.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추측하길 멈출 수가 없었다.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사기당했다고, 속았다고… 별것도 아닌 새끼한테 괜히 공을 들였다고.
나와의 시간을 아까워하고 단숨에 나를 내버리진 않을까.

두려워서 숨이 막혔다.

“병원으로 가.”

오 기사를 향해, 태림 씨가 말했다.

“안 돼, 집으로 가.”

반사적으로 내가 외쳤다.

“나… 별로 안 아파. 의사를 불러도 집으로 부를 거야, 병원 안 가. 진단 기록 남겨서 좋을 거 없어,


가기 싫어.”

“병원으로 가, 당장!”

태림 씨와 나의 언성이 연거푸 커졌다.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채 오 기사가 곤혹스러운 숨소리를 냈다.


손을 뻗어, 나는 운전석을 두어 번 두드렸다.

“집으로 가자, 오 기사. 지금 병원 가면 회장님 난리 나…. 집으로 가.”


태림 씨가 성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제발 집으로 가.”

내 애원이 좀 더 효과적이었다.

자리에 없어도 회장님은 회장님이다. 그의 이름을 대고 핑계를 대는 것만으로도 대다수 싸움에서는 이길


수가 있었다. 오늘도 덕분에, 병원을 피해 집에 도착했다.

넓은 정원과 불 켜진 다정한 신혼집에 도착하자마자, 태림 씨가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화난 사람처럼


큰 동작으로 그러나 탓하는 소리는 없이, 그는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가는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뒤늦게,

“태림 씨!”

소리치며 그를 쫓았다.

비틀거리며 내달려 그를 따라잡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그는 작업실 한구석에 처박아 둔 내 자화상을


끄집어냈다. 핏기 어린 빨강과 멍울진 보라색, 우는 밤의 검정으로 뒤범벅된 너저분한 그림의 캔버스를,
움켜쥐더니 그가 내던졌다.

“악, 태림 씨.”

새된 비명이 내 잇새로 빠져나갔다. 그의 손도 무엇도 내 피부에는 닿지 않는데, 그런데도 비명이 났다.


캔버스 틀을 움켜쥐고 힘껏 부수는 그를 볼 땐 기절할 것처럼 머릿속이 핑 돌았다.

“하지 마요!”

소리 지르며 나는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강해아의 상처를 박살 내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러지 마요…, 하지 마!”

“자화상?”

천태림이 소리쳤다.

“네가 왜 그래야 해!”

비명처럼 소리치는 그의 손에서 망가진 캔버스가 떨어져 나갔다. 이내, 성난 두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네가 왜 그래야 해, 왜 네가 이런 그림이어야 해!”

“하지 마요, 하지 마…, 속여서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태림 씨가 난리를 쳐도, 내가 그를 쫓아 뛰어들어도 얌전하던 도진이가, 갑자기 컹컹 짖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며 내 앞까지 달려오더니 덜 자란 이를 드러냈다.

성난 숨을 헐떡거리며 나는 흥분한 흰 개를 한 번,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태림 씨를 또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최선을 다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 우리 집안이 원래 그래요…. 강씨 집안에는 진짜, 가짜, 그런 거 없어요.”

미소 짓는 나를 보는 태림 씨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듯한데


두 눈동자에는 느릿느릿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이 스민다. 그, 뭔지 모를 어두운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나는 허둥지둥 말을 쏟아냈다.

“그냥, 전부 다 진짜면서 가짜. 그런 거라고요. 네?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속인 건 미안한데….


마음 쓰지 말고 그냥 잊어 먹은 척해요.”

그러자,

“언제부터야?”

태림 씨가 물었다.

“뭐가요?”

눈을 끔벅이며 나는 그의 턱만 바라봤다. 두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나질 않았다.

“언제부터 맞았어, 강일해한테.”

눈길을 피해도 질문이 아팠다.

“…어차피 형이랑은 같이 살지도 않았고요.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거고.”

“화나서 묻는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게 취미야?”

“…….”

“언제부터 맞았냐고.”

그러니까 이런 점이 천태림의, 장점이자 단점…. 내가 좋아하는 그의 수많은 부분 중 하나인데, 그 점이


자꾸만 내 아킬레스건을 찔러 댄다.

“형이… 장난치는 거예요. 가끔 저래요. 오늘은 제가 열받게 해서, 그럴 만했고요. 저 안 놀랐어요,


그럴 거 알았어요.”

애써 해맑은 소리를 내며 내가 대꾸했다.

“…….”

그러나 내 거짓말에, 태림 씨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시커멓게 분노가 스민 눈으로 나를 담을 뿐이었다.

돌아서 그가 나를 떠날까 봐 나는 돌연 두려워졌다. 다른 모든 건 전부 용서하더라도 거짓말만큼은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던 비명 같던 외침도 내 머리를 채웠다.

“…그냥 어릴 때부터 맞았어요.”

그래서 자백했다. 정말 별일 아니라고, 그냥 그런 일이, 잠깐 생겼던 것뿐이라고.

“이제 됐죠?”

“해아야….”

“파리로 유학 가기 싫다고 울다가 여섯 살 때 처음 맞았고요, 그 뒤에는 뭐, 한국 들어올 때마다


맞았고요, 그냥…. 그냥 그런 거지. 말하기 싫은데 뭘 자꾸 캐물어요!”

벌컥 소리를 지른 순간 나는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 꽉 잡아 쥐고 버텨 왔던,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한 풍선이 거침없이 터졌다.

“나는 그래도 돼요. 난 괜찮다고요!”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나는 왈왈 짖어 댔다.

“남들이 어디서는 굶어 죽고 어디서는 얼어 죽고 그럴 때요, 부자는 울어도 람보르기니에서 운다고


농담하잖아요? 그게 나였거든요? 울어도 람보르기니에서 우니까 괜찮은 사람이요. 좀 맞았으면, 그래서
그게 뭐요? 뭐 어쨌다는 건데!”

그냥 괜찮겠거니 생각해 주면 안 될까? 형한테 좀 맞고 아버지한테 이용당해도 그래서 뭐. 쟤는 한성


그룹 막내아들인데, 그러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남들처럼 날 봐 주면 안 될까?

하지만 태림 씨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이 남자는 속일 수가 없다는 걸. 내 삶의 아주 못 난 부분까지


전부 들춰서, 내가 숨긴 멍울 하나 흘린 피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 뻔히 보고 있다는 걸.

전부 들켰다. 들키고 싶지 않은데. 세상 사람 전부 다 내 민낯을 알아 버려도 천태림 씨만큼은 몰랐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정반대였다. 세상 사람 전부 다 내 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데, 천태림 씨만 날 찾았다. 나를


찾아, 내 허울을 벗겨 내고, 우는 여섯 살 꼬맹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태…, 태림 씨도 그러잖아요.”

이를 보이며 나는 웃었다.

“화요일마다 대중교통 이용하잖아요. 회사 이미지 마케팅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나도 비슷해요, 아니…


똑같아요. 그냥… 집안 이미지 마케팅하는 거예요.”

농담하듯 피식거리며 말을 마치자 그제야 천태림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싱크로가 맞지 않는


영상처럼 몇 초 늦게 빠져나왔다.

“아니, 달라.”

고통스러운 듯 들리는 목소리를 나는 애써 못 들은 체했다.

“똑같아요. 똑같잖아요. 다 사람들 보기에 좋으라고 하는 건데 뭐가 나빠요….”

이내 태림 씨의 낯이 일그러졌다. 구겨지고, 달아오른 얼굴에 성화가 번졌다.

“그거랑 이게 어떻게 똑같아!”

맞은 건 나인데 고통스러운 건 오히려 태림 씨 같다. 제 이마를 짚고 신음까지 흘리면서 그가 내 어깨를


긁어 쥐었다.

“화내지 마세요.”

멍하니 내가 중얼거렸고,

“해아야, 제발!”
천태림이 애원을 했다.

“사람 속에 불 질러 놓고 괜찮다는 거짓말을 왜 해? 네 가족 발길질에 개처럼 맞아 놓고 웃으면


그만이야?”

그의 손에 잡힌 어깨가 아팠다. 그보다도, 형에게 걷어챈 배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그보다도, 태림 씨의


슬픈 얼굴이 마음 아팠다.

“그거랑 이게 어떻게 같아…, 응? 회사 이미지 만드는 거랑 남들이 네 인생 주물럭대는 게 어떻게 같아!”

‘어, 운다….’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요일에 지하철 좀 탄다고 나쁜 일 안 생겨. 마케팅을 하겠다고 여섯 살배기 어린애 파리에 던져 놓지도
않고 불러다 쥐어 패지도, 싫다고 우는 사람 전시장에 세워 놓지도 않는다고…!”

“화…내지 마세요.”

“강해아.”

“화내지 마세요, 진짜….”

앞뒤로 내 머리가 흔들거렸다. 고개에서 힘이 빠지고 무릎이 허물어졌다. 그대로 나자빠지지 않은 건


순전히, 태림 씨의 손힘 덕분이었다.

“나, 나 숨 못 쉬겠어요….”

고개를 밑으로 푹 고꾸라뜨린 채 나는 신음했다. 이제는 배가, 마음보다 더 아팠다.

“강해아, 너 왜 그래?”

태림 씨의 손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매만졌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작업실 소파 위에 앉혔다.

땀 묻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해아야.”

억지로 내 고개를 들어 얼굴을 살피는, 태림 씨의 두 뺨이 눈물로 축축했다.

“해아야…, 제발. 제발….”

아주 슬픈 사람처럼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제발 말 좀 해…. 왜 나한테 솔직하게 말을 안 해.”

허벅지로 떨어지는 태림 씨의 눈물방울이 뜨끈했다. 더운 숨을 고르며 씩씩댄 끝에,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니?”

신음하듯 그가 말했다.

“좋아서 하는 거긴 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 본 적은 없었으므로.
‘아니요’라고 대답해선 안 되는데 사실은 ‘아니요’라서, 어려웠다.

태림 씨는 참 똑똑한 사람이라서, 내 침묵의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 그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거의


절망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네가 하는 일 중에 좋아서 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기는 해?”

이번 질문은 비교적 쉬웠다.

“나 태림 씨 남편인 거 좋아해요.”

내 대답이 잇새로 빗겨 흘렀다.

토기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자 한 박자 늦게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이 삽시간에 젖었다.

“태림 씨가 결혼 상대를 잘 골랐다고,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날개 폈다고, 좋아 보인다고, 둘이 잘


어울린다고… 그런 소리 듣게 하는 거…, 나 그거 좋아해요.”

사기당했다, 기가 꺾여 버렸다, 재벌가 갑질에 빨대 꽂혔다, 저것보다 안 어울리는 상대 찾기도 힘들


거다… 그런 소리 말고.

“나 태림 씨 옆에 있는 거 좋아해요.”

내가 좋아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태림 씨… 좋아해요.”

인중 위로 미지근한 무어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코피인가 하고 얼른 훔치는데, 그저 맑은 물이었다.

“태림 씨, 나….”

코 밑을 닦던 손이 툭 의자 밖으로 떨어졌다. 팔이 축 늘어지고 어깨에 힘이 빠졌다. 겁먹은 천태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를 향해 쓰러졌다.

‘괜찮다고 말해 줘야 되는데.’

안 아프다고, 당신 잘못 아니라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달래 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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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골드  ♡
♡재업금지공금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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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편, 내 편

새하얀 천장 타일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응, 잘 바뀌었나 보다.’

배 속이 얼얼하고 흉곽은 아픈 와중에도, 철없는 안도감이 나를 위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눈앞의 하얀 천장이, 허둥지둥 흘려보냈던 스물여섯 살의 나날에는 본 적 없는


종류였다. 낯선 풍경이 진통제처럼 내 고통을 덜어 갔다. 팔뚝에 꽂힌 링거의 수액도 처음 보는 빛깔인
데다 종류가 세 가지에, 수혈 팩까지 하나 매달린 채였다.

도대체 내 몸에 무슨 약을 얼마나 부은 건지, 정신이 몽롱했다. 손끝에 닿는 시트의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몹시 낯설었다.

‘이젠 나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는 이야기야.’

이미 정해져 있던, 한 번 겪어 보고 당해 보고 울어 본 과거는 이제 지나 버렸다. 넘어지고 구르고


엉금엉금 기어도 보았던 최악의 경로 밖으로 몸을 던져 탈주한 셈이었다. 그러니 당장 지금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이를테면, 팔뚝의 수액도 병원에서 으레 풍기는 소독약 냄새도,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검사장님의 얼굴도….

“어….”

얼떨떨한 정신머리로 나는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다.

늠름한 풍채로 기둥처럼 선 검사장님은 무척 속이 타는 듯 미간을 좁힌 채였다. 그의 뒤로, 장모님께서


‘어휴’ 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깼구나, 해아야.”

그러더니 간호사를 호출했다. 어찌나 분주하고 빠른지 의사가 병실로 찾아들기가,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였다.

백색 가운 안에 남색 셔츠 칼라가 반듯한 모습으로 등장한, 의사는 한 사람뿐이었고 간호사도 한 명이


다였다. 내 인생에 의료인들은 늘 군상이었다. 보여 주기 식으로 우르르 몰려들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내겐 낯설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하루 만에 깨셨네요.”

내 얼굴 앞으로 손가락을 좌로, 우로 움직이며 의사가 물었다.

“복부, 특히 비장에 심한 손상을 입으셨어요.”

다행히 복부로 흘러들어 간 출혈은 없지만 이틀은 더 경과를 두고 봐야 안다느니, 추가로 파열이 일어나면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느니 하는 소견이 이어졌다. 백의를 두른 이가 읊어 대는 전문적인 용어들을
듣자니 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걱정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장인 장모님 안 계실 때 말하지, 왜 하필 지금….’


몇 대 맞고 그걸 못 참아서 병원까지 실려 온 게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두 분 듣는 앞에서 줄줄이
설명을 한단 말인가.

“압통이 엄청나서 걷는 것도 힘드셨을 텐데…, 약한 뇌진탕 증세도 있었고요. 다행히 내원을 늦지 않게


해 주셔서 머리에는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눈치 없이, 의사는 끝까지 세세하고도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내 몸 상태 궁금하대?’

자꾸만 삐뚜름하고 못되지는 생각에도 이유가 있었다. 괜히 짜증이 날 정도로 온몸이 저리고 아픈
탓이었다. 애매하고 둔하던 통증이 숨을 쉴 때마다 거세지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죄 없는 의사라도
욕해야 견딜 수준이었다.

미간이 절로 구겨지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더운 숨을 누르는 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간호사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버튼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무통 주사를 놓고 있긴 한데 그래도 통증이 있을 거예요. 아플 때마다 눌러 주시되, 10 분 간격으로


제한해 주세요.”

그가 설명을 마치자마자 나는 버튼을 두 번 연속 꾹꾹 눌렀다. 당황한 간호사가 뒤로 물러섰고, 의사가


한숨 쉬며 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복부에 채워진 깁스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진통제 성분이, 환자분 상황에 너무 자극적일 수 있어서 그래요.”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투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정했다. 눈을 끔벅거리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명찰의 이름 세 글자도 낯설었다. 그런데 뭘 이렇게 친한 척이지….

“히트 사이클 주기를 아직 모르시죠?”

‘아하….’

해답이 금세 나왔다. 의사의 눈에 나는 지금 한성 그룹의 막내아들 강해아가 아니라, 구타당해서 혼절한


채 실려 온 열성 오메가 환자인 것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누워서 절대 안정을 취하라느니 화장실에 가려거든


휠체어에 타라느니 하나같이 과한 진단이었다. 형에게 쥐어박힌 직후에도 내 두 발로 잘 걸어서 갤러리
자리도 지켰는데 말이었다.

‘견딜 만한데, 이 정도면.’

그렇게 생각하는 손안으로 무통 주사 버튼이 꽉 말렸다.

대답 없이 불만스럽게 눈을 추켜 뜨는 나를 두고 의사는 조금도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주먹 쥔 내 손을 천천히 펼치더니, 무통 주사 버튼을 빼냈다. 그러고는 나를 무진 골 때리게
만들었다. 내 손을 다정하게, 힘주어 잡은 것이었다.

‘뭐야….’

얼빤하니 어쩔 줄 모르게 되어 쳐다만 보는데, 그녀는 무통 주사 버튼을 침대 팔걸이에 걸고 일어섰다.


그리고 장모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 태도에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의사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건가? 이러면 꼭, 내가 무슨 불쌍한


피해자라도 된 거 같잖아.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불만 따위는 없었다. 등을 보인 의사에게 내 상태를 묻는 장모님의 모습이 꼭,


내 보호자 같아서였다. 나는 그저 멍하니, 낯선 모습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하기야, 이런 몸으로 누구에게 컴플레인을 건단 말인가. 어차피 침대에서 일어날 상태가 못 됐다. 한발
늦게 밀려드는 약 기운 탓인지 머리까지 둔해져 갔다. 달리 할 말이라도 떠오르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 못
했다.

내가 좋아하는 두 분과 함께하는 자리가 이렇게나 마음이 불편할 수 있다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꼬박 하루를 자 버렸다니….’

병실 창문으로 스미는 볕이 거의 없었다. 시계를 보니 시침이 숫자 3 을 막 지나고 있는데, 새벽 3 시일


리는 없고… 아마도 바깥 날씨가 몹시 흐린 모양이었다. 지난번에도 비가 왔었던가. 음…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전시회 갤러리를 찾는 날마다 재킷 어깨에 빗방울이 묻었었다.

이제는 어제가 된 오픈식 날, 차창 너머로 보이던 장인 내외의 경악스러운 얼굴이 기억났다. 셔츠 소매에
변색된 피를 묻힌 채 말을 솎아 내어 가며 느릿느릿 무어라 말하던 태림 씨의 옆모습과,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장모님이 뇌리에 또렷했다.

그때의 모습에 비해 지금의 장인 내외는 몹시도 침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같았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시는 듯이 보였다.

의사가 병실을 떠나고, 두 사람이 나누는 여상스러운 대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검사장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듯하다가,

“아직은 좀 멍한가 봐요, 괜히 말 걸지 말아요.”

장모님 말씀에 헛기침 소리만 들려주셨다.

‘내가 어떻게 다친 건지… 전부 아셨을까?’

몽롱한 눈으로 천장 타일 무늬만 올려다볼 적에 나는 무서웠다.

‘나 같은 놈한테 아들을 줘 버린 걸… 후회하고 계실까?’

그렇다면 혹시라도 이혼을 요구하실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럴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했다. 하지만
장인 내외를 향한 믿음과 나 자신에 대한 신뢰는 별개의 문제였다. 번듯한 집안에서 사랑을 담아 키워 낸
우성 알파 외아들을, 콩가루 집안의 샌드백이 가져갔다는 걸 어떻게 좋게 생각하실 수 있을까….

전부 들켜 버린 셈이었다, 강해아는 천태림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가짜 매물이었다는 걸.

이불 안에 멍하니 누워서 나는 오가는 이야기를 라디오 청취하듯 들었다. 장인어른께서 과일을 느릿느릿
깎고, 장모님과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나누셨다. 주어가 ‘태림이’였다가, ‘어제 그 그림’이었다가,
다른 의원님이었다가 했다.

“저….”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떠오르는 말로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리고 ‘병문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있었다. 그런데 둘 중 어떤 말도 번듯하게
나오지를 않았다.

그저 얼굴만 새빨갛게 익을 뿐이었다. 내 이마를 덮는 장모님의 손 때문에 그랬다.


‘태림 씨가 이랬었는데….’

변해 버린 내 낯빛을, 장모님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살폈다. 태림 씨가 아주 쏙 빼닮은, 무꺼풀에


속눈썹이 촘촘한… 눈빛에서부터 신중한 성미가 드러나는 검정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그 속에 비친
강해아가 초라했다.

“이번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듣던 중 단단한 목소리였다.

“해아 너는 걱정 말고 회복만 신경 써. 필요한 것 있으면 태림이 부려 먹고.”

‘아….’

속으로 울컥 열이 올랐다. 혹시 아직 모르실 수도 있다고, 아주 상세히는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붙잡았던 희망이 죽은 풀뿌리처럼 쑥 뽑힌 순간이었다. 전부 다, 알고 계신다…, 다 들켜 버렸다.

“왜 우니. 응?”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코 먹는 소리를 냈다. 내 가슴 위를 장모님의 손이 두어 번 토닥토닥 두드렸다.

“태림이 얘는 어딜 가서 안 와…. 내가 불러다 올게, 잠시만 기다리렴.”

속상한 듯 중얼거리는 말끝이 떨렸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꽉 다무시더니 장모님이 병실을 떠났다.


가지 말라고 잡고 싶은 것을 나는 억지로 참아야 했다. 장모님이 비운 자리를 검사장님이 조용히 채웠다.

도통 그분 얼굴을, 단둘이 뵐 면목이 서질 않았다.

“울지 마라, 해아야.”

단단한 얼굴의 천 검사님이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너는 천씨 집안 막내아들이나 다름없다. 네가 태림이 손잡고 결혼할 적에 우리끼리 그렇게 정했다,


앞으로 해아는 우리 집안 막내라고. 선물 받은 기분으로 늦둥이로 들이자고.”

들려오는 이야기가 남의 일 같고, 꿈결 같았다. 내 안의 절망은 너무 탁한 보랏빛인데, 두 분 말씀은


나란히 너무 밝고 예뻤다.

큰일이다. 나는 이런 대화는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면역이 안 된 상태인데.

“어이구…, 왜 또 우니.”

장인어른의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다가, 내 배 위에 닿았다가, 붕대를 만지고는 얼른 떨어졌다.


이렇게나 허둥지둥 당황하신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왜인지 더 눈물이 났다.

“내가 울린 게지.”

힘이 빠진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애써 말을 꺼내 놓고 나는 내 목소리에 놀랐다. 목이 완전히 쉬어 버려서는, 가느다랗게 새는 음성이


몹시 보잘것없고 나약했다.
장인어른께선 그런 내 상태에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태림이가 그런 이야긴 안 하디?”

다만 그렇게 물어 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태림이 그놈이, 네 앞에는 참 이상하게 굴어. 몰랐던 수줍은 구석이 있어. 너한테 부담을 줄까 봐 할
말도 안 하는 게지.”

그런가, 태림 씨가 이상하게 굴었던가… 해맑은 생각을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지 말어.”

무뚝뚝하니 애써 달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구는 태림 씨…, 수줍은 태림 씨.’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새겨 넣고 싶었다. 주어가 태림 씨가 되고 나니 몹시도 귀엽고 좋게 들려서였다.

태림 씨, 태림 씨… 하며 억지로 되뇌는데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에서는 형을 만났다.

“네가 멀쩡하게만 태어났어도 엄만 안 죽었어.”

아직 우리의 키가 마당의 꽃나무를 넘지 못하고, 볼의 젖살은 덜 빠졌는데 유치는 쑥쑥 빠지던 시절이었다.


나란히 서면 예뻐서 네 남매가 아니라 네 자매 같다는 칭찬을 듣던 어린 날의 기억에, 형은 테니스
라켓을 들었고 내 볼에는 라켓의 그물망 모양 상처가 났다.

이날 혼난 일이 평생 잊히질 않았다. 꿈에서의 회상조차 최신 영화처럼 또렷하도록 선명했다.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엄마가 있는 가족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나는 울다가 오줌을 쌀 때까지 맞았다.

“우웩, 더러워!”

성질을 버럭 부리면서 형은 내 몸 위로 수채화 물통을 엎었다.

“오줌도 못 가려? 멍청아! 네가 이러니까 엄마가 버리고 간 거라고. 알아?”

“몰라, 나는 몰라….”

울면서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그맘때엔 나도 다 알았다. 내가 우성 알파로 태어났더라면 어머니가 살아


계실 거라는 걸, 모르는 식구가 없었다.

우성끼리 만나서 본딩한 관계여도 낳기 어렵다는 우성 알파를 허니문 베이비로 출산한 어머니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긴 부족했다. 아이 성별이 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해산을
마치기도 전에 둘째를 가지셨다. 쉬쉬하며 성별 검사를 했더니 이번엔 아들이었지만, 낳고 보니 열성
알파였다.

첫 아들이라고 ‘일’을 붙여 이름 지은, 강일해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셋째가 들어섰다. 많이


허약해진 어머니는 환영받지 못하는 아기를 낳길 그만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태아의 자세가 나빠
검사로도 성별을 알기 어려운 바람에 출산을 강행했고, 딸이었다.

강씨 집안에는 실망을 안겨 준 결과였지만 어머니는 작은누나를 참 사랑했던 것 같다. 예쁜 딸이라는


뜻으로 ‘미’를 붙여 강미해라고 이름 지은 걸 보면 그랬다.

산후조리만으로도 하루가 짧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빌다시피 했다. 할머니가 만난 무당 말에 의하면


‘12 월 보름 전에 넷째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강가에서 두 번은 못 나게 특출 난 사주’라 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몇억짜리 부적을 베개 밑에 넣고 만든 자식이 나였다. 이번에야말로 막내아들이 되길 기도하면서


이름까지 ‘아’를 붙여 해아라고 지어 놓은 나. 알파 발현율이 바닥을 치는 데다가, 오메가 발현 확률만
77 퍼센트인…

“불량품.”

형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테니스 라켓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형을 올려다보며 나는 콧물을 훌쩍거렸다. 당시 형의 폭력은 심통


사납긴 해도, 내가 애교를 부리면 멈출 수준이었다. 헤헤 웃으며 바보 연기 하면서, 화난 형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아버지에게 그러듯이 볼 뽀뽀를 하면 효과가 좋았다.

“멍청이 강해아.”

“헤헤….”

“그냥 내가 우성 알파로 태어났음 좋았을 텐데.”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형이 그런 말을 했다. 얼룩덜룩 물감으로 얼룩진 채 나는 내심 놀랐다.

‘혹시 형도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나처럼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린 마음에 그런 동질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랬으면 너 같은 거 태어날 일도 없었을 거니깐.”

매서운 말과 작은 주먹에 나는 퍽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데구루루 나동그라지면서 나는 느꼈다. 사실 형은, 내 존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래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완벽한 실패작인 나로 인해서 형의, 우성이냐 열성이냐 하는 성향은 감춰졌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형에게 나는 없어선 안 될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린 듯이 완벽한 우성 알파인 큰누나의


그림자가 형의 자존심을 구겨 놓으면, 침을 뱉고 뺨을 때릴 샌드백이 필요하니까.

한바탕 화를 퍼붓고 형이 사라지고 나면 뒷정리는 내 몫이었다. 오줌이 묻은 바지를 벗고, 그걸 걸레


삼아 젖은 바닥을 닦았다. 올챙이처럼 바닥 위를 꼬물거리다가, 나는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웃는
얼굴로 그려 넣은 상상 속의 엄마는 물감이 번져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림 속 엄마에게 입술을 대고 ‘호오’, ‘호오’,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개꿈….’

눈을 감은 채 그저 긴 숨만 내쉬었다. 이왕 개꿈을 꿀 거면 진짜 개인 도진이 꿈이면 좀 좋아?

불쾌감을 못 떨치고 이불 안으로 주먹만 말아 쥐는데,

“일해 잘못이에요, 회장님.”

내 귓가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침전물처럼 잠 아래로 가라앉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눈은 뜰 수 없었다. ‘회장님’ 하는 부름


때문이었고, 들려오는 음성의 주인이 누나인 것 같아서였다.

“걔가 해아 쥐 잡듯이 패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요. 왜 놀라고 그러세요, 몰랐던 사실도 아니잖아요.”

어릴 적부터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목소리가 아주 비슷했다. 서로 성격도 비슷하고 옷 입는 스타일까지


비슷해서, 가까이서 보고 자세히 들어야 분간할 수 있을 때도 많았다.

쌍둥이처럼 꼭 닮아서 늘 다정하게 붙어 다니는 누나들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강준일 회장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네에’ 하고 순응하면
작은누나 강미해였고, ‘회장님’이라 존칭을 쓰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큰누나 강해인이었다.

“일해 코가 무너져서 그게 뭐요.”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큰누나다.

“제 짝을 폭행하는 걸 봤는데 제부 눈이 안 뒤집히고 배겨요? 강일해 걔는 안 죽은 게 다행인 줄 알아야


돼요.”

일어나야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내 속에 어리둥절하니 물음표가 피어올랐다.

첫째로, 작은누나 외에는 세상에 마음 준 사람 하나 없던 차가운 큰누나가 나와 태림 씨 편을 들어 주는


게 이상했다. 평소에는 ‘천 대표님’ 하며 깍듯하게 부르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부라고 칭하는 것도
어리둥절했다.

둘째로는, 그 주장에 섞인 거짓말이 통째로 의문스러웠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강해인.”

회장님도 그 점을 꼬집었다.

‘그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속으로 나도 같은 질문을 되뇌었고,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누나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일해가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도 제부는 무죄라고요.”

미궁에 빠진 듯 내 머리 안의 실타래가 얽혔다. 살짝 실눈을 뜨고 조심조심 살피자니 창가에 선 채 뒷짐을


진 아버지가, 검지와 엄지 끝을 문지르며 날 구경하는 누나가 보였다. 순간 서로 시선이 마주쳤지만
누나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노팅한 상대 건드린 알파 좀 때린다고 그게 요즘 세상에 죄인가요? 그것도 우성 알파 짝을 갖다가 보란


듯이 패 놨으니. 누가 남의 오메가 배를, 터지도록 발로 찬단 말이에요?”

또박또박 발음 좋은 목소리로 아주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누나는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제부랑 해아 짝 맺었잖아요. 본딩했다고요, 서로. 언제 애가 들어설지 모른단 말씀이에요.”

어떤 말이건 누나 입 밖으로 나오면 극적인 데가 있었다.

‘짝 맺었다’는 말에 아버지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베개에 목을 기대고 나는 자는 척 숨을 죽였다.


내려다보는 눈짓에 물리적인 힘이라도 실렸는지, 피부 위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허리 밑으로 식은땀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굳이 나를 깨우지 않았다. 정말이냐고 묻는 말도 없어 안심이었다. 더는 꺼내는


말씀 없이 침묵만 할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10 분 즈음 버텼을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언제나 다정하고 친숙하던


장모님께서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셨어요, 사돈어른.”

인사를 건넸다. 장인어른의 목소리도 느릿하게 이어졌지만, 정확히 어떤 말씀이 오가는지는 잘 들리질
않았다.

‘어쩐지….’

어쩐지, 사람들 시선이라면 몹시도 신경 쓰시는 회장님께서 기꺼이 대낮에 내 병문안을 와 주셨다고
생각했다.

형이 나를 일방적으로 때리는 걸 뻔히 아시면서도 ‘싸우지 마라’는 꾸중으로 일관하던 회장님이셨다. 딱


한 번 형에게 호통을 치신 적이 있긴 했는데, 당장 큰 상장을 받으러 나가야 하는 내 얼굴을 때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게 우리의 아버지였다. 모든 말과 행동에는 다 그만한 목적이 있으신 회장님. 오늘 병문안을 오신


이유는, 내가 아니라 검사장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잠깐 대화하길 청하는 회장님의 목소리가, 천하의 강준일이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착하게만 들렸다.


아버지의 청을 검사장님이 점잖게 받아들이셨다. 두 분 어른이 빠져나가신 뒤 문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별다른 말이 들리지 않기에 장모님도 나가셨나 보다 생각했다.

그제야,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누나….”

내가 입을 열었다.

“엉. 잘 잤니.”

큰누나의 반응은 펀펀했다.


그러고는 침대 옆자리 소파에 풀썩 앉아 다리를 꼰다. 정장 바지 밑으로 백색 운동화를 신은 채였다.
요즘도 출퇴근 시간에만 구두를 신고, 차 조수석에 운동화를 갖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너 도와준 거잖아, 네 남편 옥체 보중하시라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인지 무언지를 확인하면서, 큰누나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작게 ‘찰칵’ 하는


셔터음이 들린 것도 같았는데, 누나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어서 내가 환청을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황망하고 황당해져서 내 잇새로 헛웃음이 나왔다.

“뭐 해, 누나…. 거짓말은 왜 한 거야? 태림 씨랑 나는 노팅 같은 거… 안 했는데.”

그러자 툭, 누나의 휴대폰이 내 침대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무심한 눈이 내 얼굴을 빤히 살피는 것을,


나도 그저 빤히 올려다봤다.

한배에서 난 가족이라고 무조건 화목할 순 없다는 건 일해 형과 내 관계만 봐도 아는 문제였다. 큰누나와


나도 딱 그랬다. 큰누나보다는 차라리, 대학원을 2 년 같이 다녔을 뿐인 혜림이 누나랑 더 친할 정도니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강해아라는 사람은, 밖에서 짧게 만날 때에나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통통 튀는 천재, 해맑은 예술가, 천진한 아들 연기를 평생 해 온 나라도 24 시간 항시 좋을 순 없었다.
태림 씨와 처음 결혼할 적에도 그랬었다. 출장이 잦은 CEO 라는 소개에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가끔 만나면 나한테 덜 질려 하겠지?’

해맑은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러니 아주 가끔, 내가 원할 때에만 만나는 관계인 혜림이 누나는 날 좋아했다. ‘해아 너는 참 멋진


사람이야’,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그런 말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큰누나는 아니었다.

큰누나에게 나는 잘 쳐 줘야 열 살 꼬마였다. 유학 가기 싫다고 울고, 혼나기 싫다고 울고, 일해 형에게


맞았다고 눈물 찔찔 흘리는 덜떨어진 남동생 강해아.

‘그만 울어!’

그렇게 윽박지르던 큰누나가 내 기억 안에 있었다. 그럴 적에 누나의 표정은 몹시 냉담했고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몇 시간은 기본이고, 때론 이틀 내내 울다가 혼절까지 해 대던
내가 안겨 준 노이로제 때문이었다.

‘강해아, 아무리 뭘 잘해도 울면 미움받는 거야. 웃어. 뭘 못해도 그냥 웃기만 해. 넌 웃는 얼굴이


엄마랑 똑같애. 웃기만 해도 다들 널 좋아할 거야.’

내 어깨를 움켜쥐고 조언할 적에 누나는 알았을까?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 될 거라는 걸. 계절처럼 돌고


도는 폭력을 견디는 기술이었다는 걸.

폭력은 내게 여름이었다. 잊을 만하면 주기적으로 돌아와서는 나를 그을려 놓고는 하는 여름.

열두어 살부턴가는, 몸이 아프대도 큰일 같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언제든지, 어디라도 잘못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내 삶이 그나마 서른두 살까지 이어졌던 것조차도 운이 좋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당연했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형은 나를 티 나지 않도록 때릴 줄을 알았고… 시은철은 내 영혼을 교묘하게 죽여 놓았다. …그리고 그들


이름에 병렬로 붙이기가 죽도록 싫지만 태림 씨는, 폭력이 지나간 자리마다 필사적으로 나를 건져 올리기
바빴었다.

그렇게 둔해진 나머지 나는 잊어버렸다, 구태여 같은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다는 걸. 굳이 형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되고, 시은철에게 그저 당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고, 회장님에게 알랑방귀를 껴 가며
비위 맞출 필요도, 임 선생님을 동아줄인 양 꽉 쥘 필요도 없다는 걸.

그런데 나는 나였다. 시간을 돌려 놓아도 나는… 나는 나였다.

미련한 바보 천치 강해아. 혼자 안달복달 애를 써 봐야 아무도 내 속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죽음으로


배워 놓고도, 고리타분하게 구는 성격을 못 버렸다. 모두가 나를 좋아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못되게 굴지
않아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착하게만 보여야 한다던, 아버지의 주문이 이젠 그냥 나 자체가 되어
버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지금… 누나는 알고 있을까.’

웃으며 버티지를 못하고 나가떨어진 날에, 내 편이 생겼다는 걸.

생각이 거기에 닿자 답답하던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뚫린 듯했다. 나는 그 기쁨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알렸다가 빼앗길까 두려운 유아기적 감정 때문이기도 했고, 큰누나와 나의 세 살 터울은
남들의 열세 살 터울보다 거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물여섯 살의 껍데기에 스며든 서른두 살인
지금도, 나는 누나가 어려웠다.

“우리 회장님 겉으론 말짱한 척 구셔도 속은 아주 비틀어진 양반이야.”

그 누가 누나를 편하게,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단언하는 얼굴에 미소 한 조각 없는데.

“해아 너도 알잖아, 베타 시절 너보다는 우성 알파인 날 아끼시지만, 딸인 나보다는 또 아들인 강일해를


좋아하시는 거.”

덤덤하니 사실을 적시하는 말투가 예리했다.

“…회장님이 그것보다 좋아하실 게 뭔지 알아? 독신주의 딸들은 낳아 줄 리 없는 손주 새끼야.”

“…….”

“지금도, 봐. 일해가 네 배를 이 꼴로 걷어차도 놀란 티도 안 내던 양반이, 그 배가 아기 가질 배라니깐


어때. 네 남편이 맏아들 코를 뭉개 놔도 아무 말 않으시지.”

“…형 코 뭉개졌어?”

“잘됐지, 뭐. 이 김에 성형도 받고.”

앞으로의 모든 게 처음이며 낯선 일뿐이라는 건 각오했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기대한 적 없었다.


큰누나와 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누나가 내게 조금이나마 친절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다정함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왜 편을 들어 주고 그래,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리자 누나도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나를 오히려 편안하게 해 주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거친 바람과 함께 쏴아아 거세다가 잠잠해지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난 지난 일은 후회 안 해. 네가 기어 다니던 시절에는 미해였어, 강일해 그 새끼가 손대는 게.”

너무나 낯선 문장 속에 들어간 바람에, 작은누나 이름을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는,

‘그렇구나….’

놀라움도 금세 가셨다.

‘그렇겠지.’

하기야 형 성격에 그 폭력성이 나에게만 국한됐을 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이전까지는
생각을 해 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것 같다…. 형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뭐든지 ‘그냥’, 그저 나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어서, 나 때문에 형이 화가 나서,
그게 뭐든지 다 나 때문이라서.

나는 무통 주사 버튼을 한 번 눌렀다.

큰누나와 나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약발이 돌 즈음에야,

“그래도 미안은 해.”

불쑥 누나가 말했다.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거의 외침처럼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놀란 바람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내게,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너 맞는 거 알면서 그냥 둔 거 말이야.”

“아, 어….”

“그러니까 나한테 문자 하지 마. 쓸데없는 선물도 그만 보내고. …신경 쓰여서 짜증 나.”

“어….”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밖에 나는 할 대꾸를 찾지 못했다. 그저 얼떨떨했다. 가족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 있는 일인데, 기분이 그다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애초에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인지라
어떤 감정이 생겨야 하는지도 모르게 됐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다가, 그냥 웃어 보였다.

날 보는 큰누나의 눈이 빤하다가 이내 일그러졌다. 이마를 찡그린 채 누나가 내쉬는 한숨에 왠지 분한


기운이 묻어났다.

“짜증 난다.”

그러고는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시계를 쳐다보면서, 좀 더 오래 머무를 사람처럼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근데 천 대표는 어딜 가서 이렇게 안 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니다. 뭐, 올 때 되면 오시겠지.”

그 말에 나는 골똘해졌다.

‘그러게…, 이런 꼴 보기 싫어서 안 오나 보지….’

대답은 속으로만 삭였다.

늦은 저녁, 병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새 함께 있어 주겠노라 말하시는 장모님을 설득해 돌려보내고,


큰누나의 애매한 친절에 적응해 내고, 황 비서가 가져다준 선물도 군말 없이 받고 나니 밤이었다.

어둠 안에서 무드 등 하나를 켜 놓은 채 나는 침대 옆 손잡이를 느릿느릿 돌렸다. 침대 매트리스를


직각으로 세워서 앉고 싶은데,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아 어려웠다. 결국 내 등을 받친 매트리스는 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애매한 모양이 되고야 말았다. 고작 그것 좀 건드렸다고, 위장과 흉곽이 찌르르하니
아팠다.

무통 주사 버튼을 누르는 게 하루 만에 습관이 됐다. 약발이 돌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베개를 등 뒤로


받쳤다.

그리고 닫힌 문을 바라봤다. 누구라도 병문안을 오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올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 기대가 짧은 기다림마저 길게 만들었다. 어둠이 눈에 익고 복도를 오가는 걸음 소리마저 커다랗게


들리게 된 때에, 저벅저벅 군인처럼 걷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앉은 자세를 고치고 무릎 위
구겨진 이불을 곧게 폈다.

마침내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장모님이 가져온 과일, 큰누나가 주고 간 에세이 서적, 황 비서가 전해
준 아버지의 선물 보따리가 쌓인 병실에, 가장 늦게 찾아온 손님은 맨손이었다.

“…….”

말없이 나는 어둠 속의 인영을 바라봤다. 잠깐이나마 복도의 불빛이 스미던 문이 그의 등 뒤로 닫혔다.


창의 커튼이 비춘 흰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향해 조용히 팔을 들었다.
두 팔을 높이 들고 벌리며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느릿느릿, 서너 평가량의 방을 점령한 어둠을 지나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침대 자리로 가까워 오는 그의


턱에, 콧등에, 이내 얼굴 전체에 무드 등 불빛이 끼쳤다.

숨죽인 내 품 안으로 반듯한 상체가 기울여졌다. 뻣뻣하게 굳은 몸에서 유달리 사납게 느껴지는 페로몬의
향기와 짙은 비 냄새가 났다. 검은 재킷의 어깨와 허리가 빗물에 젖은 채였다. 두 팔로 힘주어 그를 안는
나에 비해 그는 목석같았다. 내 등에 손 하나를 올릴 뿐 도통 세게는 안아 주질 않았다.

“태림 씨.”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나는 할 말을 솎아 냈다. 미안하다고도 말하고 싶고 많이 놀랐느냐고 달래어


주고도 싶고, 온종일 기다렸는데 왜 빨리 와 주지 않았냐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의 젖은 어깨에 나는 뺨이 눌리도록 얼굴을 댔다. 두 손으로는 날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듯이 그의


날개뼈 언저리를 감싸 쥔 채였다.
“태림 씨….”

비에 젖어 차갑던 태림 씨의 몸이 아주 조금, 느리게나마 따듯해졌다.

“태림 씨, 아직 화났어요?”

조용히 묻자,

“아니.”

깜짝 놀라도록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한테 화난 적 없어.”

이내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 손바닥의 얼음장 같은 온도에 나는 파들짝 떨고야 말았다. 한발 늦게


내게서 떨어지려는 그의 손을, 나는 얼른 움켜잡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어디 다녀왔어요? 비까지 맞고….”

늘상 나보다 2 도는 더 따듯한 큰 손이, 오늘은 뻣뻣하다 못해 딱딱하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이불 안에 넣어 주려는데 손날에 분홍색 줄이 그어져 있었다. 뭔가 묻었나 하고 살펴보니 그제야,
찢어진 상처를 꿰맨 자국과 투명한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왜….”

두드러진 손등 뼈마다 살이 벗겨진 자국과 빨간 멍울이 져 있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태림 씨 얼굴이 나와


몹시 가까웠다.

내게로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정리할 일이 좀 있었어.”

그가 말했다.

쳐다보기만 해도 통증이 전이되는 것만 같이 상처 난 손을, 나는 조심조심 펴 보았다. 갤러리 창고에서의


일을 회상해 보려는데 그날 태림 씨가 어땠었는지, 어쩌다가 손날이 찢어지도록 상처를 입은 건지 도통
기억나질 않았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잠깐 기절이라도 했었나 싶을 정도였다.

속상한 마음에 멍든 손을 가만히 쥐고만 있는데,

“해아야.”

태림 씨가 나를 불렀다.

쉰 듯한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은 더 낮았다.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나는 대답을 미뤘다.


한참 끝에,

“네.”

하고 마른침을 넘기는데 이번에 침묵은 태림 씨 몫이 됐다.

울렁거리는 그의 목울대와 벌어졌다 다물어지길 반복하는 입술이 내게 위안을 줬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가 내게 무어라 하고 나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고민한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참 망설인 끝에 태림 씨가 건넨 질문은 다소 허탈했다.

“아직… 아파?”

그의 시선이 내 배에 닿았다. 벌어진 환자복 틈으로 빳빳하게 감아 놓은 반깁스 붕대가 보였다. 덕분에
배가 평소보다 크고 평평했다.

“아뇨, 이제 안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파요. 약도 먹었고….”

중얼거리며 나는 깁스 위를 부러 퉁퉁 쳤다. 손으로 두들기면서 씩씩한 척 연기하는데, 내 두 손을 그가


잡아 쥐었다. 작은 한숨이 그의 코로 새어 나왔다.

하기야 링거를 셋씩이나 달고 요란스럽게 병실 자리를 차지한 나였다. 뻔한 거짓말을 한 탓에 귓불이


달아올랐다.

이왕 부끄럽게 된 김에 물을 말이 있었다.

“태림 씨,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용기 내어 건넨 질문에,

“그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그런데 왜 대답 안 해요?”

“무슨 대답.”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잖아.”

긴장한 탓에 울렁거리던 심장 소리가 단숨에 가벼워졌다. 통통거리며 목덜미로 오르는 맥박이 느껴졌다.

태림 씨의 무뚝뚝한 얼굴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주먹이 찢어지도록 내 형제를 때려 콧대를 무너뜨려 놓은


남자가, 내 앞에서는 토라진 아이처럼 눈을 흘겼다.

“눈 감고 자는 척하면서 들은 체도 안 하더니.”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럴 때 쓰이는 말이구나 싶었다. 태림 씨 말이 다 맞았다.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한 사람은 태림 씨였으니까.

“…티 났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울시도에서 서울로 오는 내내, 3 시간 동안 눈도 못 뜨고 자는 척했는데.

“티 나지, 그럼….”

기운 빠진 웃음소리가 말끝에 섞였다.

나도 그도 얼굴이 달아오른 채 가만히, 서로를 안은 것도 안긴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머물렀다.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의 다리가 보였다. 검은 바지에 빗자국이 더욱 짙은
동그라미로 남아 있었다.
“태림 씨,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요?”

고개를 들고 그렇게 묻자,

“그래.”

단단한 콧대가 내 코끝에 닿았다.

턱을 들고 입술을 벌릴 때에야 나는 내내 키스만 기다려 온, 숨은 기대감을 깨달았다. 닿을 듯 말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태림 씨가 작게 웃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달아오른 내 얼굴을 담았고,

“아…니.”

무어라 변명하려던 내 입술이 그제야 가로막혔다.

“…….”

다정한 키스에서는 묘하게 씁쓸한 맛이 났다. 바싹 마른 그의 입술 감촉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반면


잇새로 밀고 들어오는 혀만큼은 늘 그렇듯 크고 부드러웠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눈이 사르르 감긴 채로
나는 심장이 끓는 소리를 들었다.

힘이 빠져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진 내 위로 태림 씨가 올라타다시피 했다. 쪽, 쪽… 입 맞추는 소리가


귀여웠다가, 이내 질척거리며 서로의 혀와 입술을 빠는 소리로 추잡해졌다. 더운 콧김을 내쉴 적에 내
뺨을 쥔 태림 씨의 손이 이제는 뜨거웠다.

“집….”

잠시 입술이 떨어진 새 내가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도진이도 보고 싶고… 우리 집….”

그러자 쪽, 쪼는 키스가,

“내일.”

쪽,

“해 뜨자마자 가자.”

연거푸 이어졌다.

다정한 키스 한 번에 나는 흐트러졌고 태림 씨는, 기운을 차린 듯 보였다. 전보다 혈색 도는 얼굴로 그는


내 허리 밑과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었다. 기운 빠진 몸이 번쩍 들리더니 침대 오른쪽, 링거와 가까운
자리로 옮겨졌다. 풀썩 이불 위에 몸이 내려갈 적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태림 씨는, 작정하면 몇 킬로까지 드는 거지?’

누울 자리를 척척 만들어 낸 천태림이 재킷을 벗었다. 하루 온종일의 피로감이, 그의 셔츠에 묻어 있었다.


회색 와이셔츠 소매에 진 커피 얼룩 같은 것에 나는 괜스레 속상했다.

이내 태림 씨가 조심조심 손을 뻗어 왔다. 그의 팔이 내 머리 아래로 파고들더니 이내 베개 자리를 꿰찼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대우에 머쓱하니 웃음만 났다.

“팔베개해요?”
내가 물었고,

“그게 아니면 뭐 같은데.”

그가 날 보며 모로 눕는다.

혼자 눕기에 크다고 느껴지던 병실 침대에 천태림이 들어오니 꽉 찼다. 링거 줄이 거슬려서 그를 안아 줄


수 없는 게 한탄스러웠다. 딱딱한 팔뚝에 뺨을 대고 어렵사리 마주 보며 눕자, 나를 살피는 두 눈동자가
따듯했다. 따듯해…, 따듯해서 좋았다.

“미안해요.”

그제야 작은 용기가 생겼다. 내 모자람을 있는 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 용기가, 눅눅한 마음에 싹텄다.

“태림 씨 놀라게 해서 미안하고…. 또… 들은 말도 못 들은 척하고, 해야 할 말도 안 하고 숨겨서,


그래서 미안해요.”

그런 나를 보는 태림 씨의 눈이 아이 보듯, 한편으로는 괴물 보듯 했다.

“태림 씨한테…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는데, 못 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해아야.”

“목, 목걸이…. 태림 씨가 준 목걸이… 잃어버렸어요. 미안해요.”

“해아야….”

그의 표정을 확인하기 무서워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미안해요.”

재차 사과하는데 코끝이 찡했다. 울지 말자, 여기서 눈물까지 보이면 너무 한심해지니까… 그런 생각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울음을 삼켰다. 더운 숨을 푹푹 내쉬자 그나마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이 풀리고 숨통이
트였다.

“괜찮아.”

한참이나 말 없던 태림 씨가 말했다.

“전부 다, 괜찮아.”

그가 내 뺨을 건드렸다. 느릿느릿한 손가락이 감긴 눈두덩이 위를 지나더니 눈썹을 결대로 문질문질 만져


주었다. 무언가 차갑고 작은 것이 내 콧등에 닿는 느낌도 함께였다.

낯선 감각에 눈을 뜨자 너무 가까이 놓인 탓에 흐릿한, 금색 줄이 먼저 보였다.

“어.”

깜짝 놀라 소리 내며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 코앞에, 자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펼쳐져 있었다.


태림 씨의 손가락에 걸린 채였다.

“이거, 어떻게….”

너무 놀라고 기쁜 탓에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분명 형이, 뺏어 갔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그


방 안에 떨어져 있었나. 어느 쪽이 내 착각인지 분간되지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내내 그립던 목걸이를 태림 씨가 다시 내게로 돌려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내 목에


조심스레 둘러 주고, 자그마한 훅을 조심조심 잠가 준다는 게… 내겐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 순간만큼은
스물여덟의 천태림과 서른넷의 천태림이 분간되질 않았다. 나를 진정 증오하게 된 날에 그가 빼앗았던
목걸이를, 다시금 그가 돌려준 것이라고 착각이 일었다.

그 바람에 나는 큰 감동에 휩싸였다.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펑펑 터져 댔다. 참았던 눈물이


찔끔 흘렀다. 조금 놀란 듯 소리 내는 태림 씨 품에, 링거 줄이 당기도록 내 상체를 파묻었다.

후덥지근한 감동이 내 혓바닥을 말랑하게 바꿔 놓았다. 긴장이 풀리고 머릿속은 꽃밭이 된 순간 나는


주절주절 수다스러워졌다.

“너무 좋아요, 고마워요. 내 목걸이….”

“…….”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못 찾을까 봐 너무 슬펐는데, 정말 고마워요.”

“…그래.”

태림 씨의 대답은 건성건성 들렸다. 내 두 눈을 이리저리 살피는 눈짓도 연이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무신경해졌다. 당황한 듯 살피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웃으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요, 피렌체에서 지낼 때 가명으로 전시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같이 살던 친구들이랑 갤러리를


빌렸는데…, 몇 달 동안 작업한 그림을 전부 가짜 이름으로 걸었어요.”

두 손으로 목걸이를 움켜쥐고 그 위에 입을 맞추면서, 옛날 일을 고백할 정도로 나는 해이해졌다.

“…별채에 쌓여 있는 것들 중 대다수가 그런 그림들이에요. 내 이름으로는 어느 갤러리에도 못 거는 것들


…. 내 그림들이고 내 새끼들이지만 내 것들이 그러면 안 되거든요.”

속이 얼얼해지도록 자극적인 감정들이 널뛰는 순간 내 기분은 최고였다. 나에 비해 태림 씨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회장님이 화내실 거예요. 형도 싫어할 거고…, 누나들은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나를 딱하게 보겠죠.
사람들은… 실망할 거예요. 강해아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강해아는 호감을 주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내 고백에 태림 씨는, 얄밉게도 집중해 주질 않았다. 그는 링거 줄을 올려다보고 선의 갈래를


훑더니, 대뜸 오른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쌌다. 단단한 깁스 아래에 깔려 있던 희미한 이물감이 그제야
가셨다.

무통 주사 버튼을 확인하고, 태림 씨가 작게 신음했다. 짧은 손톱 끝으로 소리 나게 긁어 올리자 그제야


꽉 눌렸던 버튼이 튀어나왔다.

“요즘… 그래서 힘들었나 봐요. 나는 강해아여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하아…, 해아야. 너 지금 약 때문에….”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자꾸 나를 무시하는 천태림 씨의 두 뺨을 나는 움켜쥐었다. 두 손으로 그의 볼살을 꼬집어 당기자,


무뚝뚝하고 도도하던 얼굴이 놀란 듯 굳었다.
“아무 때나 말이에요, 응? 혼자 딴생각하고. 뭔 일만 나면은, 응? 막 주먹부터 나가고. 아주 못됐어,
천태림 씨.”

두 눈이 커진 그의 뺨을 나는 쭉 늘렸다.

“귀여우니까 봐줄게요.”

그러자니 웃음이 났다.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웃으면서,

“좋아해요, 태림 씨.”

고백하고,

“좋아해요….”

또 고백했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눈앞의 천태림은 아주 귀엽고, 내 맘속엔 더는 바위처럼 무거운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양 몸도 마음도 가뿐해져서 나는 웃어 댔다.

“좋아해.”

그러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탄탄하고 커다란 태림 씨의 가슴 근육이 절로 꿈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조금 급한 손으로, 태림 씨가 간호사 호출 벨을 탁탁 연거푸 눌러 댔다.

“왜 그래요. 둘이 있고 싶은데.”

내 두 손이 그의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딴딴한 근육을 이리저리 조물거리자 날 보는 태림 씨의 눈이 여느


때보다 더 휘둥그랬다. 아무도 그의 야한 몸을 이런 식으로 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척자라도 된 듯한 마음에 나는 뿌듯해졌다. 셔츠 위로 침이 묻게 그의 가슴 중앙에 입을 댔다가, 이내


오른쪽 가슴을 콱 깨물었다. 놀란 듯 내는 그의 신음에 앓는 소리가 섞였다.

“…미치겠네, 진짜.”

내 턱을 한 손으로 쥐고, 태림 씨가 중얼거렸다. 껍데기 골격부터 영혼까지 번듯하니, 살면서 한 번도


남의 축에 흔들려 본 적 없었을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갰다.

그 반응에 나는 아주 즐거워졌다.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면서 손으로는 그의 허벅지 위를 만져 댔다.


커다란 성기가 왼쪽 허벅지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었다. 모양을 가늠하듯이 꽉 쥐어 가며 만지자 뜨거운
살덩이가 부풀고 바지가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움직거리는 그의 중심부에서 진한 체향이 물씬 풍겼다. 절로 갈증이 났다.

“해아야, 하지 마.”

내 어깨를 시트 위에 눌렀다가, 간호사 호출 벨을 다시 눌러 댔다가, 나쁜 손을 만류하느라 태림 씨는


몹시 바빴다.

“그만. 그만 만져.”

“왜요?”

“…지금은 안 돼.”
“왜요?”

바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그의 남성이 불쌍했다. 내가 꺼내 주고 해방시켜 줄 수 있는데, 태림 씨는


자꾸 ‘안 돼’라는 말만 했다.

“왜요…. 한 번만 해요.”

그의 바지는 벨트까지 채워져 있어 벗기기 어려웠지만 내 복장이라면 또 달랐다. 헐렁한 환자복 바지를
끌어 내리자 태림 씨의 숨이 더욱 더워졌다. 다급한 손길이 내 바지 허리춤을 꽉 쥐고 붙들었다.

“그냥 자자, 해아야. 착하지…. 손만 잡고 자자.”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꼭, 간식 먹고 싶다는 도진이 달래는 어투였다.

그 바람에 나는 삐뚤어졌다. 한 침대에 누워서는 팔베개도 해 주고, 뽀뽀도 해 주고 잘생긴 몸도 보여


줬으면서… 다리 사이에 숨은 것도 벌써 커져서 다 티가 나는데 자꾸만 하지 말랜다.

“섹스도 안 할 거면서 손은 왜 잡아요?”

억울하다 못해 서러운 기분까지 들어 내가 빈정거렸고,

“너 진짜 취했구나….”

태림 씨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벌겋게 익은 그의 얼굴이 벌써 2, 3 년은 더 산 사람 같았다. 잘생긴


이마에 오른 핏대를 구경하다가, 나는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취해서 이러는 거 아닌데.”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 이러는데…. 맨날 섹스하고 싶은 거 참는 건데.”

“…….”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어요?”

“아…, 아니.”

태림 씨의 너른 가슴이 쿵, 쿵… 바쁘게 뛰어 댔다. 어휴, 가만히 좀 있지. 심장 소리가 너무 울려서 내


머리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멋대로 팔짝거리는 그의 가슴을 혼내 주려, 나는 이마를 살짝 찧었다.

“…….”

그러자 태림 씨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팔과 넓은 가슴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자니


따로 집이 필요 없다고 생각됐다.

“손….”

잡고 자자며…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어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알 수 없는 게 한이었다. 회장님과 검사장님 사이에 도대체 어떤 협상이 오고


갔는지 듣고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재기를 내 삶의 모토로 삼을 텐데 말이었다. 내가 퇴원할 무렵에는
회장님과 검사장님 중 그 누구도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상황이 싹 정리되어 있었다.

형과 관련된 일로 나를 괴롭게 하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삶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한 일에


대해서도, 회장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최소한 박 실장, 아니라면 임 선생님이라도 나를
찾아와 긴긴 설득을 늘어놓을 거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틀렸다.

내 세계는 아무런 싸움도 불행의 씨앗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의 짐을 챙겨 태림 씨가


태워다 준 차에서 내릴 무렵에는, 내게 달려드는 것이라곤 낑낑거리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도진이뿐이었다.

병원에 누워 책만 읽어 댄 지난 나흘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누구도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탄처럼 나쁜 소식이 나를 덮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날아든 소식이라고는 개인 전시회
그림이 완매되었단 보고뿐이었다.

뒤이어 발 빠른 변화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화가로서 정해진 틀 밖으로 나동그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강 회장님께서는 그런 나조차도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도로 붙여 놓으셨다. 오 기사를 시켜 편지와 명함,
기획안을 전달하는 식이었다.

회장님의 자필 편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필요한 말만 쓰였고 너저분한 감정일랑 한 톨도 묻어 있질


않았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우리 아들’ 하는 다정한 말씀 보다는 동봉된 용돈 몇 장이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됐다.

편지를 쥐고 휴지통을 한참 쳐다보았지만 버리지는 못했다.

박 실장을 대체할 새로운 퍼블리시스트의 명함은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획안 자체는 재밌었다.
내년 봄에는 패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실려 있었다.

‘붓은 꺾었지만 장사는 계속하자’는 소리를 이보다 장황하게 할 수가 있을까. 솔직히 말해 웃겼다.

그래서 싫으냐면 그렇진 않았다. 하나같이 ‘강해아 아직 안 죽었다’고 알려 오는데 왜 싫겠어.


쏟아지는 관심을 받으니 좋았고, 뻔질뻔질 답을 미루며 놀고만 있자니 좋았다.

‘이렇게… 그냥 마음 편하게… 쉬기만 했던 적이 있었던가?’

소파에 길게 누워 도진이를 배 위에 올리고 있노라면,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태림 씨가 소환됐다.

“배 누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듣기 좋은 잔소리를 하며 그가 도진이를 방석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러면 도진이가 작게 아르릉대며 다시


소파로 튀어 오르고, 태림 씨는 녀석을 ‘씁’ 소리 한 번으로 제압해 냈다. 불편한 내 컨디션을
알았는지 도진이는 제 몸으로 나를 감싸고 있길 좋아했고, 태림 씨는 그런 녀석을 만류하느라 바빴다.
평화로운 주말을 꿈결처럼 보내면서 나는 무진 얼떨떨했다.

월요일에는 태림 씨의 서재를 정리했다. 호기심에 열어 본 금고 안에는 빳빳한 다이어리와 글자 없는


엽서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흰색 봉투 속에 든 낯선 서류가 나를 반겼다. 조심조심 꺼내다가 첫
페이지만 훑어보니 접근 금지 명령서 사본이었다.

피해자로 적힌 내 이름과 가해자로 처리된 강일해 세 글자를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서류에
담긴 내용 자체는 단순했다. 일해 형이 나를 만나러 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문자이건 전화이건 통신에
의한 접근도 금지당했다는 것.

깔끔하고 명료한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 이러다가 한성이랑 한 계약까지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처음에는 애먼 태림 씨에게 화가 났다.


‘회장님이 이걸 허락했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협상이 됐길래….’

오후에는 날 선 걱정으로 애가 탔고,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였구나.’

저녁에는 허탈해졌다.

결국 태림 씨가 퇴근하고 돌아올 무렵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종일 나를 들었다 놨다 뒤흔들던


감정들은 풍선을 채웠던 바람처럼 전부 떠나고, 빈자리에 떨떠름한 깨달음만 남았다.

‘원래 이런 거구나. 보호를 받는다는 게….’

그래서 모르는 척 잊기로 했다. 금고 안에 굳이 감춘 서류든 느릿느릿 나아 가는 태림 씨 손날의 생채기든


간에, 그가 내게 들려주는 좋은 말만 남기고 다른 것은 전부 지우기로 했다.

그렇게 바보 행세를 하기가 별수 없이 불편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그를 지켜 주어야 하는데… 하는


부담 역시 앞섰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게, 나는 오늘을 즐겼다. 아무 소식도 못 들은 척 편안한 얼굴로 태림 씨를 맞이할


적에… 나는 즐거웠다.

좋았다, 그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을 떠올리면. 아주 기뻤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에 흐뭇한


애정이 스미는 게.

퇴근하고 돌아온 그의 손이 가방을 내려놓고는 곧장 내게로 뻗쳐 와서,

“오늘은 뭘 했어.”

한량 놀음하는 내 머리칼을 흩트려 놓는 것이.

그리고 나는 천태림과 싸웠다. 두 번째 인생에야 맞이한 말다툼이었다. 이전에도 서로 간에 얼굴 붉히고


싫은 소리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아니 사실은 많았지만… ‘싸움’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 사람이
화내고 한 사람이 비굴하게 벌벌 기는 일방적인 감정 소모는 싸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 싸움의 의미는,

“갈 거예요.”

“안 된다니까.”

“아, 괜찮다니까요, 진짜.”

서로 간에 티키타카 성질머리를 주고받는 데에 있었다.

“같이 갈 거예요. 내 컨디션은 내가 알아서 조절할게요, 태림 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바락바락 고집부리는 내 얼굴을 태림 씨가 황당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허’ 하고는 혀까지 쯧 차는


모습에 나는 속에 열이 올랐다.
감정 표현에 서툰 어린아이들이 왜, 화가 나면 빽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러 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몹시 이성적이고 한편으로는 절박한 내 말에 꿈쩍도 않는 천태림의 얼굴을 보자니 나까지도,

‘아, 간다고, 같이 갈 거라고오!’

하고 소리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졌다.

오늘로 말하자면 8 월 10 일로, 8 월 9 일과도 8 월 11 일과도 완전히 다른 특별한 날이었다. 나의 붉은


‘미래 일지’에 별표를 여섯 개나 그려 가면서 표시한 대대적인 역사의 날, 태림 씨의 기분이 여느
때보다도 좋고 그가 드물게 내게 웃어 주었던 밤, AOM 이 기술 혁신 종합 대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기업인들이 모여드는 큰 파티가 열리는 밤이었다.

그러니 내 컨디션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그랬다. 내 인생을 뽑아다가 지나온 밭에 심은 이가 신인지 우주의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믿었다.

나 강해아는, 태림 씨와 내 인생에 닥쳐올 비극을 막아 내고 새 삶의 타래를 풀어내기 위해서 돌아온


것이라고. 마침내 ‘강해아’가 사기꾼, 빈대, 초라한 베타가 아니게 되면 그날에는, 태림 씨 옆자리가
내게 걸맞게 되고 아무도 날 비웃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같이 가고 싶어….’

그러니 확인받고 싶었다. 지나간 8 월 10 일에는 태림 씨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따라갈 용기도 나지


않아 덩그러니 집만 지켰었지만 이젠 달랐다. AOM 과 관련된 기업인의 명단이라면 죄 외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모르는 나중 일의 시류까지도 전부 아는 채였다.

그런데 천태림이 자꾸만 나를 짓눌렀다. 그의 셔츠 칼라에는 내가 골라 준 넥타이가 매달려 있건만, 나


하나 더 매달고 가는 건 안 된다며 거절로 일관했다.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자꾸.”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는 고집을 부렸다. 태림 씨의 눈이 지친 듯 나를 담았다. ‘퇴원하고 나흘도


안 지났어’, 까만 눈동자가 그렇게 대꾸하는 것 같았다.

“나 정말 괜찮다고요.”

몸은 정말 괜찮았다. 팔과 배의 멍울은 한참 번지고 흘러내려서 누구라도 보았다간 비명을 지를


몰골이지만, 옷을 입으면 전혀 티가 나질 않았다. 그 옷도 어디 보통 옷인가? 달력 위에 큰 별 다섯 개를
그려 놓고는 꼭 이날 입고 가겠다고, 얇고 가벼운 소재에 격식 차린 디자인으로 한 벌 떡하니 맞춘
정장이었다.

그러니 나는 괜찮았다. 파티장에서 마라톤 경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진탕 마실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태림 씨의 옆에서 그의 기쁜 순간에 함께하는 것, 그게 내 바람의 전부였다. 그의 인생에 강해아가
깊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만끽하고 싶었다. 훗날 태림 씨가 좋았던 날을 회상할 적에, 기억 속에 내가
함께였으면 바랐다.

‘그냥 그게 다인데….’

내 컨디션을 걱정한 거절이 열 번째 떨어진 순간 나는 지쳐 버렸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탈해서 어깨가


축 처졌다. 기껏 꾸며 넘긴 머리칼이며 꺼내 입은 정장이며 모든 게 다 우습게 됐다.

“…….”
현관에 선 태림 씨에게서 나는 등을 돌렸다. 터덜터덜 거실로 가 소파에 몸을 앉히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나쁜 착각이 일었다.

‘전에도 이랬었는데….’

저 혼자 다녀오겠다는 태림 씨를 따라갈 이유를 대지 못해서, 결국 소파에 앉아 와인이나 마셨던


여름밤이었다. 이번에는 지하실에 내려가 술을 가져올 기운조차 나질 않았다. 실망감에 축 늘어진 몸이
풀썩 모로 쓰러졌다.

소파 위에 가로로 누운 내 몸 위로, 태림 씨의 그림자가 덮였다.

“해아야.”

말끝을 흐리며 그가 나를 불렀다. 전부 다 싫고 무기력해져서 나는 일부러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납작한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의 모서리만 노려보는데,

“…알겠어.”

태림 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졌어. 그러니까 좀 일어나 봐.”

그 말에 정신이 반짝 뜨였다. 냉큼 상체를 일으키자 복부에서 저릿한 감각이 일었지만, 참을 만했다.

“진짜죠?”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 누르면서, 침착한 척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태림 씨가 말을 무르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잰걸음으로 나서자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푹푹 들려왔다. 그렇게 백 번을 한숨 쉬어 봐라,
내가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치는지.

놀이동산에 가는 아이처럼 신이 난 채 나는 차에 올랐다.

“나랑 같이 가는 거, 절대 후회 안 할 거예요.”

그렇게 자부했다.

태림 씨를 후회시키긴커녕 그의 두 어깨에 날개가 돋게 해 줄 생각이었다. 자신 있었다, AOM 에 대한


것은 물론이며 그와 관련된 타사 경향들까지 전부 꿰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너무 잘 아는 티를 내지 않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산업 스파이라는 오명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늦여름의 밤은 그렇게 기뻤다. 화가 강해아가 아닌 천태림의 남편 강해아로 선 자리에서 나는 맡은 바 할


일을 다 했다. 다가오는 누구 하나, 들려오는 문장 하나 그 무엇도 나를 웅크리게 만들지 못했다. 모든
게 쉬웠다. 벌써 몇 차례고 머릿속으로 예습해 본 일이었다, 천태림의 파트너로 서기란.

AOM 대표 천태림의 이름으로 수상을 마친 뒤 파티는 더욱 무르익었다. 몇 가지 지루한 인사를 거치자


손목시계가 9 시를 가리켰다. 그때쯤 시계를 본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 때문에, 파티를
파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음….’
귓가로 빙빙 맴도는 말들이 하나같이 ‘웅성웅성’, 뭉개져 들렸다. 소음처럼 울리는 소리를 전부 이해한
척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아픔은 티 내지 않고 행동거지는 자연스럽게, 태림 씨 팔뚝을 한 번
쓰다듬고는 애초에 비어 있던 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는 찬물에 손을 씻었다. 입 안까지 헹궈 내고 나니 다시 정신이 들었다. 밖으로


나서자 나를 찾겠다고 복도까지 나온 태림 씨가 보였다.

“이야기 마저 나누지 왜 나왔어요.”

웃는 얼굴로 그 앞에 다가가는데, 속으로는 한숨이 절로 흘렀다.

‘들켰구나.’

그런 생각이 났다. 이제 천태림이라는 남자에게 강해아의 가짜 미소와 연기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냉방 때문에…, 파티장 안이 너무 추워서 잠깐 나온 거예요. 들어가요, 나 괜찮으니까.”

그래서 가짜 자백을 했다. 차가워진 손으로 그의 손등을 살짝 밀자 태림 씨도 내 말을 믿어 주는 눈치였다.

“컨디션 안 좋으면 꼭 말해. 시상식도 끝났고, 이제 집에 가도 되니까.”

그렇게 말할 적에 다정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게 들렸다.

‘시상식이 끝났으니 이제 가도 된다’니, 너무나 편리한 거짓말이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태림 씨가 못내 귀여웠다.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상을 받은 천태림 대표가 훌러덩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됐다. 남편 핑계를


댄다면야 그를 욕할 사람이 없겠지만, 대충만 둘러보아도 읽히는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당장 천태림이
빠지는 순간 이 파티장을 채운 인원의 절반이 흥미를 잃고 귀가할 듯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뻔한 거짓말을 믿는 척, 나는 찬 손가락을 그의 정장 소매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태림 씨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귀여워….’

내색하지 않을 뿐 그의 기분이 몹시 좋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단단한 입매가 호를 그리고 잘생긴


귀에 은은한 홍조가 묻은 채였다.

아마 지금쯤 나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덕분에 아직은 몰랐던, 향후 2 년 내로 AOM 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될 기업체 사장과도 대화를 텄으니까.

그러니 태림 씨에게 오늘은 행운이 따르는 날이었다. 그가 지닌 능력과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날이자,
좋게 연을 끌어갈 인맥의 물꼬도 트이는 기념비적인 밤.

“정말 괜찮은 거지, 해아야?”

“응. 나 괜찮아요.”

그러니 1 시간쯤, 흐릿한 어지럼증을 참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태림 씨 팔을 잡아끌며 나는 파티장 안으로 다시 그를 데려갔다. 성큼걸이로 다가오는 최 사장으로부터는


일부러 방향을 틀어 주었다. 외국 자회사에 횡령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는 사장이랑 우리 태림 씨를 친구
시킬 수는 없지.

그럴 적에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에 와 꽂혔다. 무어라,

“아, 팀장님도 참….”

그러고는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적당한 거리를 둔 채 태림 씨의 뒤를 따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오늘 시상식에 함께했던 AOM 개발팀장 김민수 씨와, 비서실장 시은철, 그리고 처음 보는 직원
하나였다.

세 사람이 저들끼리 무어라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나를 봤다. 정확히는, 시은철이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고 개발팀장은 어리바리하며 그의 시선을 좇다가 같이 힐끔거렸다. 잠깐이지만 몹시 진한,
어색한 기류가 시은철과 나 사이에 오갔다.

“…….”

그러고 보면 <빛과 잎> 오픈식 이후로 시은철을 만난 일이 없었다. 그와 내가 다정한 안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다 보니, 시은철에게 강해아라는 사람은… 친형의 발에 매달려 때리지 말라고 울어
댄 게 마지막 모습일 터였다.

떨떠름하니 쪽팔리는 와중에 나는 모른 척 등을 돌렸다. 밀려드는 어지럼증 때문이었다.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하고 내 머릿속 추가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들대기 시작했다.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10 시쯤 되었을까 했건만 처음 어지럼증으로부터 고작 20 분 지났을 뿐이었다.

‘20 분….’

그 정도 주기라면 무시할 수 있다는, 무식한 믿음으로 나는 좀 더 버텨 보았다. 그러나 10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눈앞이 흐려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한참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울컥 토기마저 치밀었다.

“…….”

역류한 위액에서는 지독한 맛이 났다. 억지로 쓴 침을 삼키고서, 나는 기업인들의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태림 씨의 고개가 부드럽게 따라오기에,

“좀 지루해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웃어 보였다.

테라스 방향을 손가락질하고서 나는 태림 씨의 손을 살짝 떼어 냈다. ‘지루하다’는 핑계를 듣고 그가


나를 철없다고,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해 준다면 고마울 성싶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테라스 밖으로
나서자마자,

“우욱….”

재차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콜록거리며 기침했지만 나오는 토사물은 없었다. 하얀색 아이언 의자 위에 몸을 앉히자,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차가워진 내 피부를 뒤덮었다. 눅눅한 밤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기침을 해 댄 탓에 다쳤던 복부가 얼얼했다. 다시 시계를 확인하려는 때, 테라스 커튼이 살짝 걷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시은철이 보였다.

“…….”

말없이 그가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걷었던 커튼을 도로 치고 유리문을 닫는 동작이 재빨랐다. 상기된


얼굴로 나는 마른침을 삼켜 댔다.

“왜요…, 태림 씨가 또 나 확인하래요?”

농담으로 건넨 말에 시은철의 표정이 홱 변했다. 수라나 나찰처럼 날 보는 얼굴이 오늘따라 무서웠다.

“걔가 보내서 온 거 아니니까 신경 꺼요.”

차가운 말과 행동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왜, 굳이 바깥으로 도망까지 온 나를 찾아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내 안색을 살피고, 왜 손을 뻗어서 내 이마는 만져 보고, ‘쯧’
하고 혀는 또 왜 차는 거냐고 따지고도 싶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는 가느다란 신음만 나갈 뿐이었다.

‘타이밍도 참 얄궂어….’

열기가 확 얼굴로 몰리더니 사방이 흐려지는 어지럼증이 다시 도졌다. 기절할 것처럼 시야가 흔들리고
상체가 앞으로 확 쏠렸다.

의자에 앉은 그대로 넘어지려는 내 몸을, 시은철의 손이 재빨리 받쳤다. 그는 나를 떠받다시피 하며 의자


등에 도로 기대 놓았다. 내 고개는 맥없이 그의 가슴 언저리에 닿았다가, 다시 푹 고꾸라졌다.

“언…, 했, …어요?”

시은철이 묻는 말이,

“…씨.”

창밖에서 들리는 소음처럼 희미했다.

“…아, 씨. 강해아 씨.”

툭, 툭, 그의 손이 내 뺨을 쳐 댔다. 홧홧한 아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숙였던 고개를 드는데 시은철의


귀가 보였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좁았다. 눈만 끔벅거리는 내 코앞에 제 고개를
댄 채, 그는 내 날숨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좌우로 일렁거리는 시은철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누가 날 저렇게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내 눈이 저랬던 적은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나오지 말고.”

시은철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 생각을 끊어 놓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제 외투를 벗었다. 은회색 정장
웃옷이 내 몸 위에 덮였다.

나는 잠깐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뺨이 축축했다. 얼굴로 물이 튀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자, 시은철이 보란 듯
손가락을 더 튕겨 댔다. 그가 손에 적신 찬물이 거듭 내 얼굴을 적셨다.

“뭐예요.”

둔한 정신에 짜증이 올라 내가 말했고,

“약 먹으라고.”

그가 내 턱을 쥐더니 벌어진 입 안에 알약을 집어넣었다.

“태림이 알러지 때문에 열 오를 때 같이 먹이던 해열제인데 이거라도, 일단 한 알 먹어요.”

그러고는 작은 생수병을 쥐여 주었다.

‘나도 나지만 은철 씨도 참….’

쓴 약을 억지로 삼키는데,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다면적인지 몰랐다. 어제는 시은철 씨와 나는 결단코 서로를 좋아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또 다른 식이었다. 그가 보기엔 강해아가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또라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시은철이야말로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또라이였다.

“왜 나한테 갑자기….”

친절한 얼굴의 시은철로 인해 나는 곤혹스러웠다. 번지르르한 얼굴로 ‘태림이가’, ‘태림이는’ 하고


천태림 지식 자랑이나 해 줬으면, 다시 내게 못되게나 굴었으면 싶을 지경이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시은철이 미간을 퍽 구겼다. 잠깐이나마 연민하는 듯 촉촉하던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그래, 그러니까 좀 친숙하네.’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시은철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강해아 씨야말로, 왜 나한테.”

이내 매미인지 귀뚜라미인지 모를 벌레 우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왔다. 내 몸에서 빠져나온 땀이 어찌나


많은지 그가 덮어 준 외투 안감을 다 적신 듯했다. 미끌거리는 몸을 억지로 고쳐 앉으며,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다 알죠?”

다소 난데없는 질문이 떨어졌지만,

“다 알면서 왜 태림이한테 말 안 해요?”

내겐 놀랍지가 않았다.

“으음….”

목소리를 깔고 나는 그저 신음했다. 시은철의 짐작이 옳았다. 나는 다 알았다. 이 난데없는 질문이


뜻하는 바를, 시은철 씨의 종잡을 수 없던 태도의 이유를… 전부 알고야 말았다. 그날… <빛과 잎>
개인전 오픈식 날에, 형에게 불려 간 방구석에 나자빠진 채 서로 간에 눈을 마주칠 적에 알아챘다.
시은철 씨는 거짓말쟁이에 못된 사람이었다. 지난 생에, 이미 지친 나를 더욱 못살게 달달 볶아 댄 인물
중 하나였고, 죽어도 나를 천태림의 남편으로는 인정하지 않던 그의 절친한 친구였고, 과거에는 베타라는
이유로 현재에는 열성이라는 이유로 나를 낮잡아 보는 재수탱이였다.

그래도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왜 그렇게 태림 씨의 곁을 고집하며 그와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알아 버린 지금은, 나는 그가 불쌍했다.

“내가… 뭘 아는데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도도한 우성 오메가인 시은철의 자존심을 지켜 주어 보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 앞에서 인정하기가


죽도록 싫을 테니까… 저도 각인했다는 걸, 천태림에게.

그것도 아주 일방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몹시도 오래전에.

본인 입으로 번번이, ‘우리’라는 말로 천태림과 자신을 묶어 온 시은철이었다. 그러나 그들 형질에도


차이가 있었다. 시은철은 보편적인 우성 오메가지만, 천태림은 보통의 우성 알파보다 대단한 남자였다.
섹스 없이 일방 각인을 해 버렸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바가 그러했다. 시은철조차 천태림 옆에서,
동급으로는 묶일 수 없는 오메가라는 것.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은철 씨.”

나는 그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내주기로 했다. 외면하기로 한 것이었다. 내가 몰라야… 그가 계속


태림 씨 옆에서 친구라는 명함을 들 수 있을 테니까.

내 남편의 성격을 나는 알았다. 공과 사의 구분이 몹시도 명확한 나의 알파 천태림은, 제게 일방 각인한


오메가에겐 친구라는 역할도 곁도 절대로 내어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AOM 에서 떠나보내지야 않겠지만
적어도 비서실에서는 나가야 할 터였다.

‘그럼 고통스럽겠지….’

시은철에게 몰아칠 고통 또한 나는 알았다. 일방 각인한 알파와 떨어졌을 때 밀려들던 극심한 우울과


자괴감, 내 머리통을 박살 내서라도 멈춰 버리고 싶게 몰아치던 슬픔과 자살에 대한 깊은 충동을 이미
겪어 보았다.

그러니까,

‘안 좋아합니다!’

지난날 차고에서 외친 시은철의 말은 아주 거짓이라고 할 수 없었다. 천태림을 좋아하는 건 마음이 하는


일이지만 그에게 각인하는 건 몸이 하는 일이었다. 기분이라는 게, 결국은 호르몬의 작용인지라 그
경계가 어찌나 흐릿한지 몰랐다.

천태림이 떠나 버렸을 때 아플 게 싫어서… 그래서 친구라는 자리를 계속 넓히고, 그 역할에 소유권을


주장하고, 결국 태림 씨의 옆자리를 꿰찬 게 돈만 많은 열성 오메가라는 게 죽도록 싫었겠지.

그런 시은철이라면 밉지 않았다. 그런 시은철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였으므로. 전처럼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나는 그를 향해 못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허탈한 웃음소리가 내 잇새로 흘러나왔다.

“은철 씨 자리 나는 안 뺏어요….”

그러고 미소 짓자 불쑥, 시은철이 내 뺨을 움켜쥐었다. 꽃게 발에 잡힌 것처럼 볼살이 무진장 아팠다. 내


두 뺨을 꽉 꼬집어 당기는 손에 살이 떨어지겠다고 생각하는데, 시은철이 고개 숙였다.

한 가지 확실해진 사실이 있었다. 시은철보다는 내가 더 잘했다, 뽀뽀는.

총평을 내리자면 나는 9 점, 시은철은 5 점 정도 된다고나 할까. 그가 기습적으로 맞춘 입술은 너무


거칠었다. 그와 내 윗니가 부딪치는 바람에 아파서 정신이 쏙 빠져 버릴 지경이었다. 물론 내 인생에,
만점자는 우리 태림 씨뿐이고….

정신이 몽롱한 탓에 잠깐 넋을 놨나 보다. 머리에 스몄던 허튼 생각이 날벌레처럼 퍼뜩 떠났다. 도장


찍듯이 꽉 맞대고 머무르던 시은철의 입술도 그때쯤 떨어졌다.

놀란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볼 적에 보이는 귓불이 순도 높은 빨강이었다.

“네가…, 네가 뭔데 날 동정해.”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재수 없는 새끼.”

그러더니 욕을 했다.

‘지가 먼저 키스해 놓고, 왜 나한테….’

그렇게 따지기에는 내겐 자격이 없었다. 저 입을 막아 보겠다고 먼저 안기고 입술을 맞댄 건 나였으니까.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어째선지 나는 편편하고 시은철이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면서 그는 눈동자를 좌우로 떨어 댔다.

“또라이 새끼. 네가 이상한 새끼인 건데, 왜… 왜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시은철이 말했다. 목소리 끝이 쉰 듯이 갈라져 나왔다.

테라스로 나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됐다. 누가 보았더라면 내가 아주, 끔찍하게 못된 짓이라도 벌인


줄로 착각할 것이었다.

“풉….”

바람 새는 소리가 내 잇새로 새어 나갔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건 파리


취급하더니, 시은철 꼴 좋다. 무섭게 도도하더니 완전 바보 아냐, 입술 박치기 좀 했기로서니 흔들리다니.
그것도, 본인이 허접 열품 취급하던 나한테.

‘바보야. 난 그냥… 맞기 싫어서 그런 건데.’

어깨를 떨며 웃어 대는 나를 시은철은 귀신 보듯 했다. 충동적으로 입 맞출 적에 내 반응이 이럴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 진짜 웃겨….”

크게 웃어 댄 탓에 배가 아팠다.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끙끙거리면서도 나는 실소했다.


“왜 그런 거예요? 시은철 씨, 나 좋아해요?”

그러자 시은철이 치를 떨었다. 잠시간 복잡한 감정을 실은 눈길로 나를 쪼는가 싶더니,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후….”

테라스 난간을 움켜쥐고 허리를 펴는 시은철은 여느 때보다 뻣뻣해 보였다. 그는 나로부터 떨어진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착…각, 착각하지 마. 페, 페로몬 냄새 때문이야. 잠깐 미쳐서 그런 거라고. 이래서 열성은….”

지난날에 내가 그의 향을 맡은 것처럼 그도 내 향을 맡은 모양이었다.

‘어…라.’

그러면 안 되는데.

‘지금 향이… 난다고?’

안정기에 접어든 지 오래이고 약욕도 잘 마쳤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

“…빨리 노팅이나 해 버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시은철이 말했다. 그의 날렵한 옆얼굴이 제법 매서웠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게 성화 때문인지 쪽팔려서인지 분간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몹시 복잡한 한숨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아직 너를 싫어하는 내가 비참해서 못 참겠으니까…, 그렇게라도 해 버리라고.”

말끝에, 그는 ‘후우’ 소리 나는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사납고 예민한 그와 달리 나는 머릿속이


초 단위로 둔해져 갔다.

‘노팅이나 해 버리라니. 노팅하면 뭐가 해결되나? 아…, 예전에, 노팅… 뭐더라? 의학지를 읽은 것도


같은데….’

흥미롭게 살폈던 글이 있었는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뇌세포가 백 개씩 잠드는 듯했다.

멍하니 눈만 끔벅대는 날 두고 시은철은 도망쳐 버렸다.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가는 걸음걸이가 도둑처럼
재빨라서, 내겐 그를 놀릴 잠깐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그에게 잡혔던 두
뺨이 아직도 아릿했다.

‘싫어한다면서 뽀뽀는 왜 해.’

허탈한 마음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면서, 나는 밤공기가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
여름밤의 무더위가 갑자기 가셨을 리는 없고, 내 몸의 온도가 그만큼 올라간 모양이었다.

허튼 생각을 늘리길 1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태림 씨가 나를 찾아왔다. 어느새 사람 좋은 비서로 돌아간


시은철도 그와 함께였다.

“해아야! 너, 얼굴이 왜 그래?”

태림 씨는 빨개진 내 뺨에 몹시 관심이 많았고, 그 바람에 시은철의 반듯한 미소가 조금 일그러지는


듯했다.
“나가자, 큰일 나기 전에.”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매만지면서 태림 씨가 말했다. 매일매일 이렇게 만져 대면 조금씩 깎여서, 10 년


뒤에는 내 얼굴이 주먹밥만 해지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아, 아니에요. 태림 씨 상도 받았는데… 어떻게 바로 나가 버려요. 나 괜찮아요, 오 기사도 다시


부르기 좀 그렇고….”

“아직 밑에서 대기 중일 거야. 없으면 내가 운전할게. 술 안 마셨어, 나.”

그의 기쁜 날을 망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태림 씨는 도무지 몰라주었다.

“내 말 들어, 해아야. 당장 집에 가야 해.”

좀비 아포칼립스라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로, 그는 정장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덕분에 내 웃옷에 시은철 옷에 태림 씨 재킷까지, 나는 소매 부자가 됐다.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 체격인데 태림 씨는 하여간 너무 컸다. 그의 재킷도, 너무 큰 데다 좋은


향수 냄새와 체향이 폴폴 풍겨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태림 씨의 손을 잡고 나는 파티장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교통정리 경찰처럼 시은철이,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는 옆문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 덕이었다.

건물 밖을 나서서 온전한 바깥 공기를 쐬는데 오히려 내 몸의 열은 더욱 올랐다. 컨디션이 나쁜 수준이


아니라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멍한 정신을 애써 붙들며 차 앞까지 비틀비틀 걸었다.

퇴근한 줄 알았던 오 기사가 헐레벌떡 모습을 보였다. 아직 대기 중일 거라던 태림 씨 말대로였다.

‘언제부터 내가 아니라 태림 씨가 오 기사를 더 잘 알게 됐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가, 푹 꺼졌다.

내 상태가 안 좋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은철이 차 문까지 열어 주는 것을 보면.

“다음에 봐, 은철이 형.”

그가 열어 준 차 안으로 쏙 들어가 앉으면서 내가 말했다. 없는 기운에도 웃음을 걸치고 올려다보자


시은철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입을 떡하니 벌리고 눈썹을 퍽 구기더니,

“미친놈이….”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렸다. 허둥지둥 사라지는 시은철의 뒷모습을 나는 즐겁게 지켜봤다.

태림 씨의 시선이 잠시 그를 쫓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은철이랑 이제 호형호제하는 사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뒷좌석 문에 손을 댄 채 그가 물었다. 몹시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을 나는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친하게


지내라고 나에게 그를 소개하고, 몇 번씩이나 심부름을 시켜서는 우리 집으로 보낸 게 누군데….

“태림 씨는 몰라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따로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오메가들끼리 통하는 게 있거든요.”


그렇게 덧붙이자 태림 씨는 몇 초 침묵하더니, 문을 퉁 닫아 버렸다. 나더러 비켜 달라 하면 될 걸 굳이
차를 둘러 걸어 옆자리에 오르면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제 절친과 내가 친한 척을 해서 혹시 기분이 상했나, 그렇게 좀스러운 사람은 아닌데… 느릿느릿 생각할


적에 내 몸은 매초 한풀 더 흐물흐물해졌다.

풍선 빠진 바람처럼, 아, 아니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깜빡… 눈을 뜨니 온몸이 덥고 가슴 위는 무진장 무거웠다. 침실 벽면에 밤의 어둠이 기어 다녔다.


협탁에 놓인 작은 전등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가슴 위에 돌이라도 얹은 걸까 하고 시선을
내리고 보니, 세 장인지 네 장인지 모를 이불이 겹겹이 내 몸을 덮은 채였다.

“흐, 음….”

앓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갔다.

침대 밖으로 나서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른한 피로감이 가위처럼 내 몸을 짓눌러 댔고,


등허리 밑은 땀에 젖어 엉덩이까지 축축했다. 감기 몸살이라도 걸린 걸까 곤혹스러웠다.

억지로 눈알을 굴리는데, 어둠 속에 앉은 태림 씨가 보였다. 침대에서 다섯 발짝 떨어진 암체어에 앉아


그는 상체는 숙이고 두 팔은 무릎 위에 괴고 있었다. 그림자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나 차에서 잠들었나 봐요. 태림 씨가 나… 옮겨, 줬어요?”

더듬더듬, 둔하게 새는 발음으로 말했다. 열심히 꾸려 낸 내 말에, 야속하게도 태림 씨는 답해 주지


않았다.

혹시 태림 씨가 아닌가… 하고 눈을 좁히고 자세히 보려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그가 아니라, 내가


이상했다….

피부 속을 웃도는 열기가 감기 몸살의 열기와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파서 뜨겁다기보다는


흥분해서 뜨거웠다. 등허리를 적신 것은 땀이 맞았다. 그러나 팬티 안에 흐르는 건 정액인지 프리컴인지
모를 체액이었다.

이상하게 학학거리는 신음이 들린다 싶었는데 내 입에서 나간 소리였다.

“태림 씨….”

눈을 세게 눌러 감았다가, 다시 뜨자 비로소 태림 씨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에는 핏대까지 오른 채 그는


흥분한 숨을 삭이고 있었다. 나를 덫에 놓인 토끼 보듯, 굶주린 짐승처럼 갈구하는 눈동자에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안아 주세요.”

이불을 발끝으로 밀어 열면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안아 줘….”

처음 겪는 발정기였다.
늦은 발현만큼이나 난데없는 발정기는 몹시도 고역스러웠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기고 딱 그만큼이나 거듭,
나는 기절을 해 댔다.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풍경은 비슷한데 자세만이 달랐다.

“으응, 응….”

낯선 신음성에 정신을 차려 보면 내 입 밖으로 흐르는 소리였고,

“헉….”

물에 젖는 불쾌감에 눈을 떠 보면 내가 흘린 정액이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하면 다시 눈앞이 흐려지고, 잠에서 깼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기진맥진
고꾸라지기를 연거푸 반복했다. 내가 무얼 하고 있고 어떤 말을 뱉는지, 표정은 어떻고 팔다리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나를 마비시켰다.

애써 눈을 떴을 때엔 내 입술 위에 태림 씨의 손바닥이 덮여 있었다.

“읍….”

꽉 막힌 입술 틈으로 달짝지근한 액체가 삐져나와 흘렀다. 낯설고 인공적인 약품 맛에 당황한 나는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버둥거렸다. 뒤통수와 어깨가 침대 매트리스에 파묻히다시피 처박혀 있었다. 허리는
번쩍 들렸고 두 다리는 태림 씨의 옆구리를 껴안듯이 두른 채였다.

숨 막히는 신경전의 한가운데에서, 손을 뻗어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어깨를 밀었다. 굵은 땀방울로 범벅이


된 태림 씨의 어깨와 팔에 오른 근육이 터질 듯 팽팽했다.

“우…, 웁!”

그도 나도 알몸이라는 것에 먼저 놀랐고, 그가 내 반항에도 꿈쩍 않고 연신 입을 틀어막기에 충격을


받았다. 뭔지 모를 상황에 눈물부터 흐르는데 눈가 살이 벌써 한참은 울어 댄 사람처럼 쓰라렸다.

‘왜…, 왜?’

두 눈을 꾹 감고 나는 그의 손바닥에 젖은 콧김을 씩씩 내쉬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입 안의 약물이 울컥거리며 자꾸만 내 입술 밖으로, 태림 씨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삼켜.”

그가 명령했다.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릿한 팔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삼켜, 어서.”

“읍, 흐….”

끅끅거리며 억지로 입 안의 액체를 넘기려는데 본능적인 거부감에 토기가 치밀었다. 신경이 뾰족해지고
속이 서러워지는 순간 나는 잡힌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더욱 조이면서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 댔다.
내 주먹에 팔뚝이며 어깨를 맞으면서도 태림 씨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이마엔 핏대가 서고 턱의 골격이
도드라진 게, 꼭 성난 사람 같아 무서웠다.

“으, 으븝, 읏….”

입 안의 약을 절반가량 흘리면서 나는 목소리를 냈다.

“우…, 읍…, 이이….”

훌쩍이며 애써 부른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기회를 틈타 얼른 그의 팔을 쳐 내고,


나는 컥컥거리며 기침했다. 침과 섞여 입 안에 흥건하던 분홍색 액체가 시트와 내 가슴 위로 마구잡이로
흘렀다.

“윽, 흑….”

턱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침실인데, 창밖의 해는 밝았다. 혼란스럽고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해아야?”

태림 씨의 손이 와락 내 어깨로 다가왔다.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 손에 잡힐 수


없었다. 화들짝 놀라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허둥지둥하며 나는 침대 위를 기었다.

불쑥, 매트리스를 짚어야 할 내 손이 허공에 떨어졌다. 심장이 철렁하는 순간 ‘쿵’ 소리와 함께 힘


빠진 몸이 카펫 위로 추락했다.

“윽.”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 자체는 심하지 않았지만, 이미 멍들고 아픈 배를 부딪친다면 말이 달랐다. 나는


배를 끌어안은 채 고통에 나뒹굴었다. 눈물을 흘릴 때마다 눈가 피부가 짓무른 양 아팠다.

다시 보니 온몸에 빨간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손목과 허리, 팔과 다리 할 것 없이 얼룩덜룩하니


시뻘겠다. 고개 숙여 살핀 허벅다리로는 멀건 정액이 삐질삐질 흘렀다.

엉덩이 사이로 울컥거리며 액체가 밀려 나오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해아야, 아니야.”

꼭 나처럼 놀란 얼굴로, 태림 씨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반쯤 선 그의 성기와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왜, 왜….”

말을 더듬으며 나는 뒤로 기었다. 침실 벽에 뒤통수가 닿을 때까지 엉금엉금 물러서는 나를, 그는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왜 나… 나를….”

뒷말은 쉽게 뱉어지지 않았다. 대뜸 따지기에 너무 무거운 말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천태림 씨가 나를


…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끝을 흐리며 혼란스러워 눈물만 떨구는데,

“아니…, 아니야!”
태림 씨가 불쑥 외쳤다.

“내가 아니야, 해아야…!”

그의, 그렇게나 절박한 얼굴은 몹시도 간만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못 감추고 외치는 소리가 아주 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나는 그 변명의 의미를 알았다. 당장 내 무릎을 만지는 손부터가, 잇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

내 입이 절로 벌어지고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태림 씨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보다도 그가 더,


빨갛고 멍들고 다쳐 있었다. 손가락, 손날, 심지어는 손목까지 웬 짐승 새끼가 마구잡이로 물어 놓았는데,
잇자국이 사람이 남긴 듯 둥그런 모양이었다.

시선을 들어 다시 살피자 그제야 그의 목과 어깨에 맺힌 핏방울이 보였다. 잇자국이 지독히도 깊었다.


파란색 멍울과 빨갛게 맞은 자국이 어깨와 가슴, 배에 잔뜩이었고 목에는 누가 조른 듯 손자국까지 보였다.

조금 전과는 다른 충격에 눈물이 차올랐다.

“흑….”

놀란 이성으로 사실을 직시하기도 전에,

“괜찮아.”

태림 씨의 손이 다시 내게로 뻗쳐 왔다.

이번에 나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강제로 안진 않았다는 걸. 그보다는


내가…

“내가 그런 거예요?”

그를 덮친 모양이었다.

서럽고 부끄럽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훌쩍훌쩍 울며 나는 최대한 구석으로 물러났다. 태림 씨가


억지로 나를 제압했던 까닭을 깨닫자 온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끊어진 기억을 이어 붙이려 노력해 봐도 도통,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머릿속이 그저 컴컴하니 미궁
같았다.

“어떡해.”

손바닥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나는 고개를 연거푸 흔들었다.

“어떡해요….”

미안하고 죄스러워 나는 그를 똑바로 살필 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내 무릎을 만지는 팔뚝에 긁힌 자국이


잔뜩이었다. 웬 짐승이 다녀갔나 싶은데 그 짐승이 나였다.

“괜찮아.”
그런 와중에도 태림 씨는 다정했다. 조심스러운 손이 내 턱을 잡더니 부드럽게 당겼다. 볼썽사납게
울면서 나는 그를 마주 봤다. 빨갛게 쓸린 입술을 닦아 주는 엄지 끝이 두툼했다.

“네가 다칠까 봐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마.”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태림 씨가 말했다. 울상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히트 사이클 때문이니까 자책하지도 말고. 나 안 다쳤어.”

이내 태림 씨의 두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손등 위에 손을 감싸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에 안심한 듯, 그가 팔을 펼쳤다. 나는 무얼 해야 할지 즉시 알았다. 냉큼 그의 품 안으로 기어가,


굵은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언뜻 내려다보이는 어깨와 등에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다시 눈물이 솟았다.

“다쳤잖아요.”

서러운 소리를 내며 내가 말했고,

“괜찮대도.”

‘쉬이’ 달래는 숨소리를 들려주며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오고 첫 발정기를 맞이하면 본능이 더 강해지는 줄이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한


나의 발정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오메가가 발정이 나 봐야 그냥… 나를 안아 달라고 엎드려 빌고
태림 씨 발에 매달리기나 할 줄 알았었다.

퉁퉁거리며 크게 뛰는 태림 씨의 심장 소리를 느끼는데, 피부 위로 지난 싸움의 흔적이 엿보였다. 내


몸에는 잡힌 손자국만 남은 것을 보면…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지 싶었다.

가해자가 나라는 건 몹시도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태림 씨를 때리다니….’

이미 너저분해진 침대로 돌아와 태림 씨가 나를 눕혔다. 그대로 일어서서 내게서 떨어지려는 그의 팔을,


나는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화났어요?”

불안한 마음에 애처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내가…. 나는, 몰랐, 모르고 그랬는데… 가 버리면 어떡해요. 나는…, 나는 기억이 안 나요.
태림 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화, 화났어요?”

조리 없이 지껄이는 내 말에 태림 씨가 한숨 쉬었다.

“물수건 좀 가져오려던 것뿐이야.”

그가 말했고,

“그래도… 가지 마요….”

나는 억지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지는 척 시늉하며 태림 씨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 옆자리에 걸터앉는 그의 무릎 위로 나는
상체를 뻗었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부둥켜안고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벌게진 살결이 따듯하게
뭉개졌다.

그제야 절망스럽던 마음에 볕이 들었다. 무섭고 혼미하고, 서럽던 정신이 서서히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때려서 미안해요.”

그의 멍든 어깨에 나는 조심조심 입을 맞췄다. 그가 내 머리칼을 넘겨 주기에 그 손도 가져다가,


잇자국이 남은 손마디에 입술을 문질렀다.

“많이 아팠어요?”

그러자 나를 보는 태림 씨의 미소가 다정하다가, 아주 느리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 위에 턱을


올린 채 나는 그의 눈동자를 감상했다. 좌우로 잘게 흔들리며 내 두 눈을 번갈아 살피는 눈에 작은
깨달음이 비치는 듯했다.

“해아야.”

내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면서,

“…약 안 삼켰어?”

그가 물었다.

“무슨 약이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되묻자마자 태림 씨가 협탁으로 팔을 뻗었다. 뚜껑 열린 갈색 약병을 쥐는 그의 몸


위로 나는 힘껏 올라탔다.

병이 시트 위로 굴러떨어지고 조금 전, 내가 전부 뱉어 냈던 분홍색 물약이 왈칵 쏟아졌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벌거벗은 태림 씨가 크게 넘어졌다. 머릿속이 둔해진 내 엉덩이가 그의 아랫배를


깔고 앉았다.

놀라 벌어진 태림 씨의 입술을 나는 몰입해 빨아 댔다. 자꾸만 안으로 숨으려는 혀를 찾아내 혀끝을 밀어


넣고, 오돌토돌 느낌 좋은 그의 입천장을 훑었다. 헐떡대는 숨소리가 거칠게 빠져나오고 흥분한 몸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쏟아져 나오는 내 페로몬이 너무 짙은 나머지 피부 위에 맺힌 땀방울마저 지독한 향수처럼 생각됐다.

“해아, 야….”

태림 씨의 굵은 목이 단숨에 빳빳해졌다. 벌어진 입을 다물고 억지로 숨을 참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헐떡였다. 축 내려갔던 성기가 움찔거리며 다시 서고 축축한 프리컴이 벌써 진득하게
흘렀다.

태림 씨의 손이 내 허리에 닿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내가, 상대를 말리는 일에 있어 전문가였다. 나는


흥분한 태림 씨를 막는 법을 알았고 심지어는, 나를 말리려는 그를 막는 법도 알았다.

내 배의 멍 자국에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윽….”
아픈 척 울상을 지으면 그만이었다.

뻔한 연기에 당황한 듯 태림 씨가 손을 치웠다. 허공에 뜬 그의 두 손을 붙잡아 깍지 끼며, 나는 두 팔을


시트 위에 내리눌렀다.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자 반쯤 선 그의 성기가 엉덩이 밑에 닿았다.

뜨거운 살덩이를 엉덩이 사이에 대고 앞뒤로 문질거리며 나는 더운 숨을 헐떡였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당혹감에 물든 태림 씨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내게 속았다는 걸 뒤늦게 안 눈치였다.

이내 힘 싸움이 이어졌다. 그는 나를 떼어 내려 꿈틀대며 움직였고, 나는 온 체중을 실어 그의 두 손을


짓눌렀다.

“학….”

크게 부푼 태림 씨의 남성에서 알파의 향이 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심장에 기대감이 가득 차고 입 안이


침으로 흥건해졌다.

“태림 씨, 으응….”

단단하고 뜨거워진 것을 뭉개다시피 하며 엉덩이로 누르자 그가 이를 악물었다. 잡혔던 손을 홱 빼내더니


내 어깨를 잡고, 침대 옆으로 밀어 치우려 했다.

그제야 나는 지나간 사건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너무 약골로 아는 거 아냐?’

천태림은 나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억압한다면 벌레 새끼 잡듯이 뭉갤 수야 있겠지만,


그러질 않았다. 당장 어깨를 쥔 손만 해도 세게 힘을 싣지 못해서, 흔들거리게나 할 뿐이지 나를
치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키가 백팔십이고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그렇게 어정쩡한 태도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본능적인 싸움꾼인 태림 씨도 그 사실을 알 터였다.

이내 작은 깨달음이 내 심장을 데웠다. 태림 씨에게는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겠단 욕심이 없었다…,


실수로 잘못 건드렸다가 내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다만 그것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정 충만한, 의도 자체로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나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아파요.”

멍한 눈으로 양심도 없이,

“그러면 나, 아파요…, 태림 씨.”

그가 절대로 거부하지 못할 소리를 지껄여 댔다.

그러자 태림 씨의 두 눈에 슬픔이 찼다. 고통스러운 듯 그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나는 그의


배에 내 배를 붙이며 냉큼 엎드렸다. 상처 입혀서 미안하고 곤혹스럽게 해 죄스럽지만 그보다도… 좋았다.

“태림 씨….”

나를 밀어 내지 못해 끙끙거리는 그의 숨결이 좋았고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하는 가슴이 좋았고,


“제발, 해아야….”

흥분에 차 신음하는 목소리가 좋았다. 좋아서, 온몸에 전율이 찌르르 올랐다.

얼굴을 가린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는 더욱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그러자 태림 씨의 신음성이 한층


짙어졌다.

“네가 이러면… 참을 자신이 없어. 안 다치게 할… 자신이 없어.”

끓는 듯 쉰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몸 위에 마저 내 살을 문질렀다. 할딱할딱 기분 좋게 숨이 차고


엉덩이 밑이 체액으로 축축해졌다.

잇새로 신음이 절로 흘렀다.

“으응, 응….”

단단하게 발기한 그의 것을 떨리는 손으로 세우고, 내 뒤에 대고 맞춰 보았다. 체액이 흥건하고 흥분한


몸이 떨리는 탓에 두꺼운 성기 끝이 뒷구멍에 들어오진 못하고 겉에서 미끌거렸다.

두어 번 헛손질한 끝에 억지로, 주저앉다시피 하며 그의 남성을 내 안에 욱여넣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 꼭대기로 열이 올랐다. 허벅다리가 부들거리면서 무너졌고 천천히, 시트 양쪽으로 미끄러지며
무릎이 벌어졌다. 몸이 서서히 내려가자 속을 쑤시는 감각이 점점 깊어졌다.

“학, 흐윽, 응….”

벌어진 입가로 뚝 침방울이 떨어졌다. 짐승처럼 아둔해진 내 머리를 채운 충동은 단 하나였다. 눈앞의
알파, 천태림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열망… 그게 전부였다.

“…….”

이마와 목울대에 핏대가 오른 채 태림 씨가 얼굴을 붉혔다. 나에 비해 이성적인 그의 눈빛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허벅지를 쥐고 밀어 내는 손길에는 순간 화가 났다.

손을 휘둘러 나는 그의 뺨을 때렸다.

“…하.”

짝 소리 나게 볼을 맞고 태림 씨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입을 벌린 채 황당하다는 듯 날 보는 그의 가슴을 나는 두 손으로 짚었다. 씩씩거리며 코 밖으로


빠져나오는 숨이 뜨거웠다.

“가만히….”

…있어요, 뒷말은 신음성과 함께 뭉개졌다.

움찔움찔 껄떡이는 그의 성기 위로 나는 마저 내려앉았다. 속을 채운 이물감이 거대해지고 장기가


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차, 태림 씨가 내 이름을 부른 것도 같았다. 헉헉거리며 눈물과 침을 흘려 대는 내 허리를 그가 잡고는


치워 버리려 밀쳤다. 이를 악물고 버티며 나는 그의 굵은 목을 두 손으로 잡고 눌렀다.

‘컥’, 밭은 숨소리를 흘리며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단단한 목을 세게 조르면서 나는 뒷구멍의 근육을


움찔움찔 오므렸다.
“허억…, 헉….”

태림 씨의 이마 위에 핏줄이 울퉁불퉁 올랐다. 내 팔뚝을 쥐고 버티는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에게로, 나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할딱할딱 더운 숨을 묻혀 가며 그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고 귓불을


혀로 훑어 낼 적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목을 쥔 내 손이 느슨해지자마자 태림 씨는 나를 밀어 냈고,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윽….”

짧은 신음을 흘리며 태림 씨가 손을 휘둘렀다. 무심결에 휘두른 손등에 뺨을 맞고 나는 곧장 나가떨어졌다.

“악!”

가느다란 신음이 주체할 새 없이 흘러나갔다. 맥 빠진 상체는 옆으로 고꾸라졌다.

“해…, 해아야.”

놀라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가 들렸고,

“흐윽, 윽….”

몽롱했던 정신이 깨자마자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진이 빠지도록 울면서도 나는 속을 찌르는 감각에


부르르 떨었다. 천태림의 성기를 욱여넣었단 사실만으로 흥분돼서, 벌써 사정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흐윽, 태림 씨이….”

영문 모를 내 행동이 부끄러워 죽기 직전이었다. 수치심이 내 영혼을 빨갛게 물들였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눈물은 자꾸만 쏟아지는데, 들썩대는 몸을 멈출 수 없었다.

“흑, 으윽…, 응, 응….”

엉거주춤 허리를 세우자마자 나는 발정 난 짐승처럼 움직였다.

“읏, 흐윽….”

갈 곳 잃은 태림 씨의 손을 잡아다가 맞은 쪽 뺨에 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에 거친 손바닥이 닿게


하자,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어루만지는 손길이 이어졌다.

그럴 적에, 애원을 담아 내려다보는 내 눈빛을 그도 이해한 듯 보였다. 분명 내 몸이고 내가 저지르는


짓인데, 손끝 하나 의지대로 통제되질 않았다. 입을 벌리고 신음을 흘리면서 나는 천태림 위에서
들썩들썩 움직였다. 그의 성기로 자위하는 꼴이었다.

“흑….”

굵은 눈물방울이 태림 씨의 배 위로 떨어졌다.

“안아 주세요….”

움찔움찔 뒤를 조이며 애걸복걸할 적에 나는 소망했다. 이 말까지도 발정 나서 그냥 하는 소리로 치부하진


말아 주었으면….
“안 참아도, 흑, 돼요, 노팅해요, 제발… 하고 싶어요. 해 주세요…, 응? 제발, 제발….”

그저 섹스하기 위한 거짓말로 오해받았다가는,

“사랑해요….”

서러워서 정말이지 못 살 것만 같았다.

“사랑해요, 태림 씨. 정말로 많이… 가끔은 울고 싶을 만큼… 내가, 많이… 사랑해요.”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백이 눈물처럼 쏟아졌다. 애절하고 무섭고 한편으로는 창피해서 나는 울었다. 누가


이런 고백을 상상이나 했을까.

“으응…, 아, 아…!”

억지로 그의 위에 올라타서는 허리를 흔들면서,

“사랑해….”

엉엉 울다가 또 앙앙 신음했다.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녹음기가 든 테디 베어처럼 연거푸 외치며 나는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태림


씨의 남성이 속을 찌르고 장기를 다 뭉개 놓도록 두 다리를 벌리고 박아 대다가, 이내 말을 잃고 짐승처럼
신음했다.

“…….”

눈물이 그치고 숨이 멈춘 순간 나는 그의 배에 대고 토정했다. 질질 빠져나온 정액의 양은 많지 않았다.


모르는 새, 체감으로만 벌써 여러 번 싸 댄 탓이었다.

녹진녹진해진 몸이 그의 위에 무너져 내렸다.

“흐, 읏….”

힘이 죄 빠져 버려 떨리는 허벅다리를 억지로 세워야 했다. 속을 쑤시는 태림 씨의 성기가 아직도 부푼


채였다.

헉헉거리며 그의 배를 짚고 몸을 빼내려는데, 이상한 감각이 솟구쳐 올랐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박힌


물건이 꿈틀대며 더욱 커지고 있었다.

“아….”

눈물 묻은 얼굴로 바라볼 적에 태림 씨의 두 눈에 끓는 불씨가 홧홧했다.

이내 그의 두 손이 급작스럽게 내 허리를 움켜쥐었다. 휙 하고 엉덩이가 들리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태림 씨의 상체가, 커다란 건물처럼 나를 덮쳤다.

‘사고 쳤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천태림이 본능 앞에 세운 마지막 댐을 무너뜨렸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상황을 수습할 기회도 의지도 내겐 없었다. 단숨에 쏟아져 내리는 그의 체향과 체중에 뭉개지면서
나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한테 어떻게 발정기라는 말을 써?’

그랬던 시절이 저한테도 있었는데요. 짜잔, 없어졌습니다….

퉁퉁 부은 눈을 반쯤 뜬 채 침대에 처박혀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알파든 오메가든 결국 인간인데,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 ‘발정’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너무 천박하지 않으냐고, 담배를 입에 물고
‘허, 참’ 혀를 차 대던 스무 살 시절 강해아가.

‘네가 뭘 알아?’

궁둥이 사이로 퉁퉁 부은 피부가 느껴지고 온몸이, 내 것인지 태림 씨 것인지 모를 정액으로 뒤범벅이 된


채 멍을 때리고 있자니 화가 났다.

‘네가 뭘 아냐고, 이 자식아. 어?’

애먼 과거의 자신을 미워하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속이 저릿거리고 피부가 얼얼한 와중에


아직도 반쯤 발기한 성기 때문에 울화가 곱절이었다.

식식거리며 날숨을 푹 내쉬는데, 불쑥 내 팔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단숨에 내 허리를 옥죄더니 당기는


굵은 팔에 의해, 나는 누운 채로 주르륵 뒤로 끌려갔다. 뜨끈하고 더운 근육 덩어리 몸에 안기자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태림 씨….”

바짝 쉬어 버린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이제 못 해요.”

엉덩잇살을 쿡쿡 찌르는 묵직한 성기를 밀어 냈다.

“음….”

그러자 아쉬운 숨소리가 내 어깨에 닿았다. 귓가를 맴도는 더운 숨결에 속이 따끈해졌다.

지난, 하루인지 며칠인지 모를 시간 동안의 기억이 온통 희미하고 뿌옇기만 했다. 내가 그와 뭘 얼마큼


뒹굴었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배가 이렇게나 아프고 온몸이 저릿저릿 떨리는데 떠오르는 게 없다니 억울하기도 잠깐이었다. 본능적인
충족감이 차오른 덕이었다.

나는 내내 갈구하던 그 무어를 받아 냈음을 알았다. 태림 씨의 품에 안긴 순간에야, 여태껏 몰라 왔던


갈증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내가 그의 오메가이듯이 그가 나의 알파가 되었다…. 그 사실에는 이렇다 할
증거도 설명도 필요치 않았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각인했고 그는 내게 노팅을 해
주었다는 걸.

가만히 나는 웃었다. 창을 타고 스미는 아침 햇볕이 종아리 위로 기어오르는 것을 느끼자니 기분이 좋았다.

“왜 웃어.”

얕은 잠이 묻은 목소리로 태림 씨가 중얼거렸고,
“그냥….”

나는 웃음소리를 흘려 댔다.

“…좋아서요.”

그러고는 그의 배에 등허리를 붙였다. 태림 씨의 낮은 숨소리가 내 어깨에, 귓불에, 가슴에 스몄다.

이내, 발정기에 대한 내 감상이 바뀌었다.

‘참 좋은 거네, 이거.’

오전 내내 태림 씨와 낮잠을 자고, 점심에는 서로를 껴안고 피부를 문질러 대자니 행복할 수밖에 없게
됐다. 몇 번을 안겨도 무릎이 배배 꼬이고 속이 찌르르하니 좋기만 한 품에 안겨, 다섯 번째인지 열
번째인지 모를 관계를 하자니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주박이라도 걸린 듯 침대에 묶였던 몸은 오후가 되어서야 풀렸다. 내 배에서 엄청나게 큰 ‘꼬르르륵’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

“…….”

배를 맞대고 살을 비비다 말고, 태림 씨가 먼저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는 한참은 더 늦어서야 열기를


식혔다. 그를 따라 침실 밖을 나설 적에 걸음걸이가 별수 없이 어기적거렸다.

가운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채 거의 절뚝거리다시피 계단을 내려갈 적에, 텅 빈 집이 휑했다. 도진이도


보이지 않고 옥혜 씨도, 오 기사도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태림 씨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도진이는 다니는 유치원에 호텔링을 맡겼고, 옥혜 씨와 오 기사에겐 휴가를 줬다고 했다.

“왜….”

라는 질문은 나오자마자 쏙 들어갔다. 내게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내 상태와 태림 씨의 모습을 보면,


답은 뻔했다. 엉엉 울면서 그의 위에 올라탄 나나 나 때문에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태림 씨나, 둘 중
하나의 몰골만 보여도 그날로 건전한 고용 관계는 끝이었다.

“…그래도 도진이는 집으로 오라고 해요.”

태림 씨가 간단히 데워 준 식사를 먹으면서, 한발 물러서 그렇게 결정했다.

“걔도 집밥을 먹여야죠…. 도진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호텔에 자꾸 맡겼다가 다시 버려진 줄 알면


어떡해요? 우리 불쌍한 도진이…. 나 도진이 보고 싶어요.”

“알았어. 내일 데려와 달라고 연락할게.”

“응….”

굶주렸던 배를 채운 뒤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스파 욕조에 들어갔다.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더운물에


몸을 담그자니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달리 상의하지 않아도 같이 씻는 게 자연스럽다니, 묘한
유대감이 생경한데 벌써 내 것이었다.

절로 웃음이 나 조용히 미소 지을 적에 태림 씨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얼룩덜룩 잇자국이 남은 그의


몸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넓은 욕조를 굳이 좁게 쓰기로 결정 내린
것이었다.
“…….”

가만히 그의 옆자리에 붙어 몸을 기대자,

“이리 와.”

진작 다가온 내 어깨를 태림 씨의 팔이 감쌌다.

내, 젖은 머리칼에 입 맞추는 그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웃으며 그의 코끝에 내 코끝을 붙이고 입술


위에 입술을 문질러도 보았다. 전에는 쉽지 않던 동작들도 이제 전부 내 것이었다.

오늘처럼 유복한 날이 내 인생에 또 있을까.

“…일주일은 더 지나야 나아질 것 같은데.”

내 뺨에 코를 붙이며, 태림 씨가 말했다.

“같이 갇혀 지내는 거야, 이 집 안에.”

걱정 어린 목소리에 나는 철없이 웃음이 났다.

“…난 좋은데요, 같이 있는 거.”

“그럼 다행이지.”

덤덤한 태림 씨의 대답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폭 기댔던 몸을 떼어 내고 살필 적에 그의 표정이


무덤덤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자니 찬물이라도 맞은 기분이 됐다.

“태림 씨는 싫어요? 나, 뭐… 고칠 부분 같은 거 있으면 말만 해요.”

충만했던 자신감이 사라져 버려 묻는 말에, 태림 씨는 잔잔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지.”

그러고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그의 턱 밑에 고였던 더운물이 ‘똑’ 소리를 내며 욕조로


떨어졌다.

“네가 말해 봐. 건의 사항 보고라고 치고.”

“네? 뭘요?”

“분명 있을 것 아냐, 나한테 할 이야기가.”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눈만 끔벅거렸다. 갑자기 왜, 무슨 건의 사항을 보고하라는 걸까 둔한 얼굴로


쳐다만 보는데,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태림 씨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

그 말이 내 속을 얼마나 뜨끔하게 자극하는지 그는 모를 것이었다. 노팅의 영향이 내게만 미칠 거라고


쉽게 착각한 내가 바보스러웠다. 열성 오메가인 나야 행복한 유대감에 취할 뿐이라지만, 우성 알파인
천태림은 나라는 인간을 조금 더 꿰뚫어 보게 된 모양이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태림 씨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라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라면 없었다.

죽는 날까지 나는, 벌써 한 차례 겪은 삶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셈이었다. 실패한 결혼의


기억을 태림 씨에게 알리기는커녕 내 머릿속에서도 할 수만 있다면 지워 버리고 싶었다.

“음…, 우리 침대 담요가요.”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에둘러 보고할 만한 건의 사항이, 찾아내자면 있기는 했다.

“태림 씨가 그걸, 가끔 위아래가 바뀐 채로 덮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엄청 신경 쓰여요.”

“…담요가.”

“네.”

‘그리고’, 하며 나는 침묵을 메꿀 이야기를 계속해서 찾아냈다.

“…태림 씨 스킨이랑 로션도 바꾸고 싶어요. 이건 그냥… 그냥 하는 말이니까 마음에 담진 말고요, 지금


쓰는 브랜드는 동물 실험 때문에 논란된 적도 있고 개인적으로 불매 중이라서요. 비슷한 제형에 더 성분
좋은 걸로 사다 줄 테니까 바꿨으면 좋겠어요.”

조잘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태림 씨가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표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태림 씨가 쓰는 비누요. 알파 향 지우는…. 그거 주말에는 안 쓰면 좋겠어요. 집에 나랑


둘이서만 있는 날에는… 태림 씨 향 마음껏 맡고 싶어요.”

“네, 네. 빠른 시일 내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음….”

진지하게 보고라도 받는 양, 고개를 끄덕이는 태림 씨 반응에 나는 조금 신이 났다. 몰래 속으로만


쌓았던 작고 사소한 불만이 이렇게나 많았나 신기하기도 했다.

들뜬 바람에 나도 모르게,

“가끔씩요…, 태림 씨가 나를 쳐다볼 때 표정이 무서워요.”

진심이 툭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나를 볼 때 조금만 더 웃어 주면 좋겠어요.”

이번에 태림 씨는 ‘네네, 알겠습니다’ 하는 웃기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물었고,

‘또 이런다.’
나는 그의 굳은 얼굴에 겁먹지 않으려 애를 썼다.

“태림 씨가 나 볼 때…, 가끔… 화난 사람처럼 쳐다보잖아요. 노려볼 때도 있고, 무표정할 때도 있고.


완전히 고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좀 더 웃어 주면 좋겠어서….”

“아니, 해아야.”

내 말을 끊어 놓으며 태림 씨가 제 얼굴을 문질렀다. 젖은 손으로 닦아 낸 낯에 아리송한 표정이 떠올랐다.


골똘한 얼굴로 눈을 굴리길 잠깐, 그가 단언했다.

“나 그런 적 없어.”

“네?”

“널 보면서 화낸 적도 없고 너를 노려본 적도, 무표정했던 적도 없다고.”

“…에이, 태림 씨는 본인이니까 잘 모르는 거죠.”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 말이 맞았다. 가볍게 생각만 해 보아도 태림 씨가 나를 보던 차가운 순간들이


많이도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오금이 저리고 가끔은 두렵기까지 했던 나인데, 정작 태림 씨는 의도한
바가 없었다니 오히려 그 점이 더 신기했다.

여전히, 태림 씨는 답이 없었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구긴 채 그는 내 두 눈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덕분에 속이 답답하게 되어 나는 머리를 굴렸다. 본인이 모르겠다는 걸 말로 고집부려 봐야 이해시키기


어려울 테고… 기록이 남은 날이 어디 없을까 생각하는데 떠오르는 갈래가 있었다.

“아!”

퍼뜩 얼굴을 들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가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내 목소리가, 넓은 욕실 천장에서


메아리를 치는 듯했다.

“…그럼 내가 증거 보여 줄게요.”

한결 줄어든 목소리로 내가 작게 속삭였다. 내 말보다는 동작이 우스운 듯 태림 씨가 실소했다.

스파를 마치고 근육이 말랑해진 뒤에야 나는 ‘증거’를 찾아냈다. 보송보송한 잠옷 차림으로 TV


진열장에 쪼그려 앉은 내 뒤로, 태림 씨는 나초와 팝콘 봉지를 뜯어 놓았다. 운동에 미친 남자인 그가
먹을 리는 없고 다 나 먹으라는 의미인데, 과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재밌는 거 보면서 놀자는 게 아닌데….’

나를 보는 제 표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됐다.


그런 내 손에 들린 것은 홈 비디오였다. 민트색 비디오테이프 겉면에는 신혼여행지에서 돌아온 뒤 열었던
가든파티의 날짜가 쓰여 있었다.

그때 고용했던 업체에서 서비스로 찍어 준 걸, 내심으로는 ‘요즘 시대에 무슨 홈 비디오냐’ 하면서도


웃는 낯으로 챙겼었다. 반년 전엔가, 레트로풍 사진들을 ‘강해아’ SNS 계정에 잔뜩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성의 광고 기획팀에서 보낸 사진에 요구하는 멘트까지 곧이곧대로였었다.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을 아무렇잖게 전시한 결과, 나는 내가 아닌 나로 알려지는 데에 익숙해졌다. 그


바람에 오늘은,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감는 거더라….”

제대로 써 본 일이 없는 비디오 플레이어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야 했다.

“해아야. 잘 안 돼? 도와줄까?”

어깨 너머로 태림 씨가 물었고,

“아니에요! 찾았어요.”

나는 빨리 감기 버튼을 꾹 눌렀다. 손님들에게 선물을 받는 장면을 지나고 회장님과 큰누나가 담긴 장면도


지나고, 장인 내외와 내가 선 장면에서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느릿해졌다.

긴장한 미소를 지으며 곧게 선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뒤로 살살 물러나 바닥에 앉았다. 시은철과 내가


대화하는 모습이 찍히긴 했지만 대화 소리까지는 담기지 않았다. 잠깐 화면이 손님들을 느릿느릿 담다가,

―오늘 기쁜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란 테이블 자리 앞에 선 나와 태림 씨에게로 돌아왔다.

“…….”

그 순간 나는 돌처럼 얼어붙었다. 이리저리 뻗쳤던 생각이 굳고 벌어졌던 입술이 딱 다물렸다.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내 팔뚝을 감싸 안고 선 태림 씨가 웃고 있었다. 어떠한 어두운 감정도 화난


기색도 없이 그는 미소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 팔뚝을 짓누르던 손의 무거운 압박감과 나를 빤히 꿰뚫어
보던 시커먼 눈동자가 뇌리에 남아 있는데, 화면 속의 천태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순전히 기쁜 날을 즐기는 새신랑이었다. 내 팔뚝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두 눈동자에는 애정 어린


호의를 실은 채, 웃는 얼굴로 나와 함께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올려다볼 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화면 밖으로 푸른 하늘과 녹색의 불빛이 쏟아져
내려 내 얼굴을 덮쳤다.

등 뒤로 태림 씨가 무어라, 그날 내가 입은 옷과 날씨를 감상했다. 즐거운 듯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얼굴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경멸하는 찬 얼굴을 보게
될까 무서웠다. 그 얼굴이 사실이 아닐까 봐 무서웠다. 내가 미친 것일까 봐… 사실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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