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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테스트 종료3
베타 테스트 종료3
‘좋아해.’
허우대만 멀쩡하고 학벌만 그럴싸하지 나는 빈 깡통, 허수아비, 헛똑똑이였다. 남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이해하는 게 외롭게도 힘들었었다. 한창 자기중심적이던 십 대 시절에는 ‘나는 싸이코패스야’
하는 우스운 착각에 빠졌을 정도였다.
‘행복해.’
‘행복해….’
‘좋아.’
‘좋아해….’
들뜬 숨이 색색 코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이내 거칠어졌다. 흉곽 안에서 쿵쾅대는 지진이 났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아드레날린 같은 것이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안 돼….’
“…….”
그의 팬티 위에 고개를 묻은 채로 나는 숨을 멈췄다.
‘깼나…?’
“후….”
이내 가라앉았다.
“…….”
‘이게… 이게 내 몸에 들어왔었다고?’
‘…지금은 더 미쳤고.’
‘빨리… 싸 줬으면.’
태림 씨의 신음성이 낮게 들렸다.
‘이러다… 진짜 깨면 어쩌지?’
‘…….’
“웁…!”
“으, 읍!”
“컥…! 우, 웁, 흐웁…!”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너무 강해서, 사지를 팔딱대며 반항해도 내 고개는 끄떡도 않았다. 굵은 성기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탓에 꼬챙이가 된 기분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를 세우지 않으려 턱을 최대한 벌렸다.
“우읍….”
“컥….”
“커헉, 우, 읍….”
빨리, 싸 주었으면 싶은데 천태림은 잠결에 흥분한 와중에도 정력이 좋았다. 목을 쑤시는 역한
고통보다도 숨이 막혀서 자꾸만 기침이 났다.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줄줄 새어 나갔다.
“흑, 욱….”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떨면서도, 내 사타구니는 흠뻑 젖었다. 머리와 성기로
열이 뻗었고 온몸이 땀 범벅이 됐다.
“우….”
“헉, 허억….”
“컥….”
“…….”
울컥울컥 두어 차례에 나뉘어, 탁한 액체가 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목울대를 움직거리며 정액을
삼키는 순간 기절할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읏…!”
알파의 체액을 끼얹은 채 나는 가느다랗게 흐느꼈다. 무릎이 오므라들고 허리가 달달 떨렸다. 입술에 튄
정액을 핥고, 삼키면서 나는 그를 따라 토정했다.
“컥, 콜록….”
자극받은 목구멍으로 기침이 올랐다. 이불 아래, 태림 씨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혼자
훌쩍였다. 흥분으로 딱딱해진 성기가 아렸다.
“뭐….”
“…….”
‘어, 어떡해….’
‘어, 어… 어떡해….’
연거푸,
‘어….’
“내…, 내가 그…랬어요.”
“해아…, 네가.”
그러고는 말했다.
“일부러 내 걸 빨았다고?”
“악!”
“오…, 옥혜 씨 왔나 봐요…!”
“자, 잘못했어요….”
“흐으, 응….”
성기가 아려서 눈물이 다 났다. 발기한 걸 풀어 내지도 못하고 고문받는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림
씨는 맞닿은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 냈다. 무릎이 배배 꼬이고 허리에서 힘이 풀렸다.
“발정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앗, 아, 아니….”
“윽….”
숨소리 반, 목소리 반으로 빌어도 태림 씨는 아랑곳 않았다. 성기를 쓸어 대는 자극이 연이어 이어졌다.
“…….”
“참지 마.”
“아니면, 나도 빨아 줄까?”
“흐윽, 읏….”
“힉….”
전신이 땀으로 젖고 엉덩이 밑이 미끌거렸다. 시트를 체액으로 적시며 나는 무어라 애원을 해 댔다. 놔
달라고 빌고 아프다고 울었다. 무엇이건 떠오르는 대로 빌어 대는 나를 태림 씨는 아주 가만히 구경했다.
“놔줘?”
그가 물었고,
“학, 히익….”
“아, 아…!”
묵직한 성감에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자꾸만 경련이 났다. 눈이 풀리고 입술이
제멋대로 벌어졌다.
“으, 윽, 으으읏….”
“힉….”
“미안해.”
“미안….”
“하아….”
“좋다…, 해아야.”
“좋아.”
그렇게 속삭이며 그가 코끝으로 내 뺨을 밀었다. 힘 빠진 내 고개는 그가 만지는 대로 움직였다. 모로
기울어졌다가, 귀를 잡고 당기는 손길에 그의 낯 앞까지 끌려갔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연이어 이어졌다.
“입술….”
“…피 나.”
덕분에 그는 종일 서재에 머물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긴 화상 회의를 하느라, 우리의 신혼집
서재에서는 낯선 직원들의 목소리와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 논의가 번갈아 울렸다.
“흐읍….”
‘성적 충동이라….’
‘아아….’
내가 울면서 매달렸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바닥을 기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엉망진창의 러트 사이클을 갖게 된 그의 배 밑에 깔려서 그래도 괜찮다고 우겨 댔기 때문에….
‘그런 거야.’
“…….”
“…방해해서 미안해요.”
“태림 씨, 들어갈게요.”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
태림 씨가 끊어 놓았다.
“…….”
“…괜찮다고, 네 그 상태가.”
‘괜찮…지 않나?’
“응, 괜찮아요.”
나는 확신했다.
“그래서.”
“…네?”
“어…, 뭐라고요?”
“얼마 안 해요.”
“강해아.”
“너무 과해.”
나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인파로 빽빽하게 채워진 국제선 공항도 본 적 있고, 이코노미 좌석이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 그 정도는 알았다. 태림 씨가 조막만 한 자리에 앉아 14 시간 동안 낯선 사람이랑 붙어
앉게 두느니 천사백만 원이면 싼값이라고 생각됐다.
“…….”
“…….”
“…왜요?”
“그 많은 걸 전부 차고 다닐 수도 없잖아.”
‘우리 태림 씨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내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말에 내 입이 떡 벌어졌고,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그냥 받아 주면 안 돼요?”
고고한 선비님에게 뇌물 바치는 얌체가 된 기분으로,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최대한 비굴하게
말했다.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지며 태림 씨가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고,
“나 애교 안 부렸는데요….”
작게 대꾸했다.
“…….”
“…….”
“…….”
아무래도 천태림 씨 앞에서는 혓바닥을 입천장에 붙여 둬야겠다. 그냥 농담한 건데… 저렇게 험악한
표정까지 지을 일인가.
“작가님.”
옥혜 씨가 노크 소리를 들려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머리 자르셨네?’
귀 옆으로 살짝 꽂히던 머리칼이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시원시원해 보이는 스타일이 선생님 얼굴형에 잘
어울렸다. 그 점을 칭찬할까 하다가, 박 실장이 태림 씨를 보며 반갑다고 요란을 떠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으음….’
“왜?”
다정한 부부처럼 보이고자 연기하는 게 당연한 정략결혼이었다.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거짓말이 뻣뻣한
태림 씨 대신에 나서는 게 내 일이었다. 웃는 얼굴로 그의 팔짱을 끼고, 설레서 달아오른 뺨도 연기로
치부했었다. 그랬었는데… 며칠을 특별하게 보냈답시고 내 맘이 너무 들뜬 모양이었다. 얌전히 붙어 서서
웃는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떨렸다.
내 손님들을 데리고 작업실로 들어갈까 했는데 의외로, 태림 씨가 거실을 허락해 주었다.
“작업실은 좁잖아.”
화가에게 중요한 건 실력과 자기 관리가 전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던 분이다. 곁에서 뺑이를 죽어라
쳐도 작품이 나쁘면 팽 당하기 십상이었다.
“해아야.”
문득 태림 씨의 손이 내 무릎 위를 감쌌다.
“내 그림 다 봤으면서 뭘요….”
“임 선생님 말씀이 다 맞았네. 완벽한 시리즈네요. 어떻게 터치가 띡하고 묵직한데 색감은 수채화 같지?”
그렇게 주문했다.
“그건 왜 가져와요?”
“딱 보면 모르나.”
사실을 따지자면 강해아의 신작은 오히려 저, 퍼렇고 뻘겋고 거무죽죽한 습작이었다. 시간이 남고 물감도
많고 생각도 복잡해져서… 이번에 처음으로 그려 본 그림이었다.
“…….”
“저 친구 나가라고 해요.”
“전시할 순서도 다 정했고… 입구에 둘 작품은 저거. 제목도 다 붙였고, 아시겠지만 번복할 생각 없어요.
아, 캡션은 회색으로 통일할 거예요. 그, 얼마 전에 누구지? 아이스크림 그리는 작가 있잖아. 거기
개인전에서 비슷하게 했던데.”
그 틈을 타 박 실장이 입을 열었고,
“잠시만.”
나무로 된 프레임은 ‘빛과 잎’이라는 전시회 주제에도 잘 어울렸다. ‘액자까지 작품의 일환이다’라고
내가 우긴다면 제아무리 박 실장이라도 참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작가님.”
호방하게 내놓았던 태블릿 화면이 자동으로 픽 꺼졌다. 깜깜해진 액정 위로 비치는 내 실루엣이 까맸다.
희미한 윤곽으로도 당황한 티가 났다.
“응? 왜냐니요?”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
“작가님?”
액자는 무조건 수수하게 골라야 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야만 했다, 베타였던 강해아가 오메가가 된
것처럼.
화려한 세공을 거쳐 도금된 프레임이 안겨 줄 결말을 나는 알았다. 작품을 구매한 의원님들과 천희중
검사장님의 이름이 걸린 기사문에 ‘액자값만 수백만 원’이라는 트집이 실리는 미래도, 나는 알았다.
그러니 박 실장의 조언이라면 무조건 NO 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기자들 타자기에 오르내릴 일
자체를 막는 게 최우선이라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트집 잡힐 건덕지라면
무엇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심산이었다.
“…….”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 얘기라면 진작 끝났습니다.”
태림 씨가 그의 말을 끊어 놓았다. 혓바닥에 절단기라도 달린 게 아닌가 몰랐다.
“네?”
천태림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당당하게 거짓말을 할까. 내가 액자에 매달리는 이유도 모르면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내 편을 들어 주는 걸까.
“그럼 이만….”
“…다음 주는 안 됩니다.”
“…….”
우르르 닥쳐왔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왠지 힘이 빠져서 나는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지도 못했다.
소파에 앉아 식어 버린 우유를 마셨다.
“…왜 도와주세요?”
내가 물었고,
태림 씨의 대꾸는 빨랐다.
“네…. 고맙네요.”
“이건… 뭘 그린 거야?”
“뭘 그린 거야.”
“…자화상이에요.”
‘떨어지기 싫은데….’
“저… 태림 씨.”
“음…, 제가 각인을 했잖아요? 그래서 불안증 같은 것도 생기고, 약욕도 해야 되고…. 아무튼 컨디션이
안 좋잖아요.”
“응.”
태림 씨가 쉽게 답했다.
그래서 일부러 짚어 말했다. 반말해도 된다고, 앞으로도 그러라고, 허락하는 위치에 앉은 척 여유를
부렸다.
“봐드릴 테니까?”
“…….”
눈빛은 차갑고 말투는 단단하고 행동은 철갑을 두른 듯한 천태림이, 키스를 이렇게 잘하는 줄 또 누가
알까. 그가 혀끝으로 내 입천장을 훑고 혀를 맞대 올 때면, 나는 데운 우유에 퐁당 빠진 마시멜로가 된
기분이었다.
“소리.”
그러더니 대뜸 물었다.
“…일부러 내는 거야?”
“네?”
듣던 중 황당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스의 황홀함이 대번에 가시고, 흐물흐물해졌던 신경이
뾰족하게 서는 듯했다. 당혹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리라니, 내가 무슨 소리를 냈다는 거지.
“네?”
“못하면 뭐요….”
“…아뇨, 아직이요.”
“이리 와.”
태림 씨는 또 그걸 받아 주니 더는 소원이 없다.
“뭐예요? 왜 왔어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내가 물었고,
“내 집에 내가 못 와?”
태림 씨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어…?”
“개한테 뭘 입힌 거야.”
“…다녀오셨어요.”
“…….”
태림 씨가 말했다.
“아니…, 그게 다예요?”
“그래.”
‘이 남자… 누구야?’
세상 낯선 천태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사업의 일환으로 결혼 상대를 선택한 태림 씨가, 중대한 출장을
두 번이나 끊어 놓고 나를 찾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강해아의 생일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때문에 ‘생일’이라 하면 슬프고도 정신없는 기억밖엔
없었다. ‘럭키세븐이라는데 하필 그날이 기일이냐’는 조롱이나 위로 따위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
그 손에 뭐가 들었는지 나는 이미 알았다.
“고마워요.”
태림 씨가 친절하게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쓴 탄식을 삼켰다.
‘내 목걸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그날의 태림 씨에 비하면 오늘의 태림 씨는 다른 사람 같았다. 태도만 보자면 그랬다. 그 외의 것은,
변함없이 같았다. 선물을 고르는 안목이 꼭 그랬다.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어요….”
“…기분은 좀 어때.”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내가 물었고,
“응.”
태림 씨가 즉답했다.
“뭔데요?”
“…….”
‘하긴….’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본다’고.”
“그래.”
피식 새는 소리를 내며 태림 씨가 웃었다. 나를 쥐락펴락 놀려 놓고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잘생겨서
야속했다.
“생일인데 하고 싶은 건?”
그러고는 물었다.
“…오늘 자고 가요.”
“그러니까요….”
나는 거의 속삭이다시피 했다.
‘뭐가 문제지.’
‘뭔가… 이상해.’
그 뒤에는 알딸딸한 술기운도 깰 겸, 밖으로 나가자는 도진이 소원도 들어줄 겸 정원에서 짧은 산책도
함께했다. 그리고…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 샤워를 했다. 남은 일과가 무언지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태림 씨.”
“네? 아니요.”
“아….”
“피임약을 먹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벗겨진 잠옷 단추를 다시 채우면서 욕실로 걸어가 거울을
열었다. 오늘 먹었던 약을 찾아 찬장 속을 뒤적이는데, 태림 씨가 불쑥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약이….”
오늘 먹은 약의 종이 갑을 찾아 드는 나를 태림 씨가 빤히 내려다봤다.
“피임약을 왜 먹어?”
그가 물었고,
“피임하려고 먹죠.”
어리둥절한 채 내가 대꾸했다.
“으음….”
‘열성 오메가 전용’이라는 라벨이 붙은 설명서가 약상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조막만 한 글씨가
분홍색으로 새겨진 약품 설명서를 노려보는데, 가독성이 최악이었다.
“느낌? 무슨 느낌.”
“…….”
“해아야.”
그가 입을 열었고,
‘으악, 제발!’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네, 죄송….”
“잠깐…, 잠깐만요.”
“그냥 하려고요?”
그렇게 묻자,
“왜. 싫어?”
“난 상관없어.”
‘거짓말!’
황당한 기분에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가 닫혔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고 심장이 놀란
사람처럼 뛰어 댔다.
“해아야.”
“이제 진정됐어?”
“그럼 입만 맞추자.”
“…손으로만 해 주는 건?”
시트 위로 미끄러진 내 몸 위로 태림 씨가 올라탔다.
“벗어.”
“윽….”
나는 붉은 상상을 했다. 칼이 있다면 내 가슴을 반으로 갈라다가 심장을 쪼개서 보여 주고만 싶었다. 그
속에, 서른두 살의 베타가 얼마나 새빨간 수치심으로 남아 있는지….
“아.”
그가 말했다.
“다치게 하지 않을게….”
‘안 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두 손은 도리 없이 그의 가슴을 만져 댔다.
“해아야.”
“괜찮아.”
“둘 중 뭐가 내 냄새랑 비슷한데요….”
그러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될 정도의 로션을 손바닥에 쥐어짜 냈다. 로션 튜브가 쭈글쭈글해질 정도였다.
“으, 음.”
입술 새로 침이 고였다.
“아, 아…!”
“아!”
“아, 앗….”
“…….”
“으읏….”
수치심에 눈물이 땀처럼 삐질삐질 흘렀다. 코끝으로 서러운 숨소리가 빠져나갔다. 태림 씨가 흘리는,
왠지 모를 탄식이 들렸다.
“왜 또 울어.”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가 발기한 것을 내 뒤에 밀어 넣었다.
“웁, 으….”
“우, 읏….”
“어무, 너, 어무 커요….”
“힘 빼.”
그리고 명령했다.
“힘 빼고 엉덩이 벌려.”
“…….”
헐떡대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내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체향도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쏟아지는 향 때문에 눈물 콧물을 뺐을까 상상하니
속이 찌릿했다.
“아악…!”
“컥, 콜록…!”
“헉…, 해아야.”
“힘 좀… 빼 봐.”
네가 해 봐! 하는 애먼 소리까지 솟구쳤다.
…그런데 그게 됐다. 속을 찌르는 감각이 목구멍 위까지 울렁대며 밀려들더니, 성감에 휩쓸리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 빠져서 시트 위에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태림, 씨, 태림 씨….”
“흐윽, 응….”
“아파?”
그가 물었고,
“아, 뇨, 아뇨….”
상체를 안은 굵은 팔을 나는 세게 끌어안고 붙들었다.
“그럼.”
“좋아…, 좋아요.”
“좋아?”
“응, 네. 좋아요….”
“응, 으응….”
싸고 싶은데, 애매한, 배뇨감도 사정감도 아닌 감각이 나를 흔드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약… 싫어요….”
“이것 봐.”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가 나의 슬픔을 부작용이라고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체향도
페로몬도 잃어버린 강해아도 좋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를 울린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내가
혐오스러운데 당신은 이런 나를 안아 주어서, 그래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할 수 없었다.
“흑, 태림 씨….”
“그래.”
“태림 씨….”
“그래, 알았어.”
끼잉….
“…네가 내는 소리야?”
태림 씨가 물었다.
“도진이!”
“해아야.”
“…생일 축하해.”
‘아니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미소 지었다. 오픈식 진행을 도맡은 박 실장이 작가 소개를 시작했고, 대다수
손님들께선 그것이 박 실장 자신의 업적 소개임을 모르는 채 들었다.
한결 편안해진 눈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반대편에 선 내 아버지, 강준일 회장님이 보였다. 내 안에 흐르는
연기자의 피는 아마도 아버지 유전일 것이었다. 저렇게나 편안하고 물욕 없어 보이는 얼굴로 가볍게 아들
자랑을 하며, 친탁의 대상인 국회의원 옆에 아무렇잖게 선 것을 보면… 그는 내 아버지가 맞았다. 남들
보기에 내 모습도 저렇게나 뻔뻔할까 싶었다.
“…작가님?”
하지만 단 한 가지,
‘왜….’
“작가님, 저….”
“해아야.”
“아!”
“괜찮아?”
웃었다. 입꼬리는 높게 올리고, 콧등은 너무 찡그리진 말고. 허리는 곧게, 어깨는 넓게 펴고, 웃었다.
강해아답게.
“…<빛과 잎>은 제겐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여태까지의 작품들의 궤를 이어,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게
되어 몹시 기쁘고 설렙니다.”
“그리고….”
그러더니 박수를 쳤다. 점잖은 미소와 함께 그가 응원의 박수를 보내자 그를 따라 손님들이 박수를 쳐
댔다. 나의 돌발 발언이, 사전에 논의된 계획처럼 비춰지는 순간이었다.
‘왜?’
마음 안에는,
‘왜… 왜 웃지?’
검은 혼란이 가득했다.
“자랑스럽다, 해아야.”
그러나 만에 하나, 지금의 이 미소가 연기가 아니라면… 애초에 회장님께서 낚고자 한 물고기는 오늘로
다지게 될 친목이 전부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꽉 막힌 정계 의원님들과의 친탁, 딱 거기까지라면….
창백해진 심장을 미소로 감추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회장님의 그림자 뒤에 뻗은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에 선 붉은 얼굴이 보였다. 내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끝없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증오하던 나의 형, 강일해가.
‘강일해….’
강일해였다.
와락 움켜쥐고는,
“잠깐 나 좀 보자.”
…알고는 있었다.
‘확인…하는 것뿐이야.’
고민 없이 움직이는 두 발을 나는 내려다보았다.
‘닫지 마.’
생각하면서도, 손으로는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컥….”
“악…!”
“커헉….”
“형….”
“형…이었던 거야?”
그걸 확인해야만 했다.
“대답해 줘….”
신음 섞인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추켜들었다.
“목소리 낮추라고!”
아픈 와중에 나는 기뻤다.
‘형이었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내 쓸모가 다해서, 실력이 다 닳아서, 그래서 아버지에게도 버려지고야 만 거라고… 자책으로 얼룩져
장기부터 곯아 들어갔었는데.
“…….”
멍하니 나가떨어진 채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울렸다. 매질, 발길질이 아랑곳 않고 이어졌다.
몰아치던 고통이 이내 흐려졌다. 감각이 더는 느껴지질 않았다. 몽롱한 와중에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기에 그가 계속 나를 때리고 있구나 알 뿐이었다.
“악!”
아마 그 점을 염려하고 있을 터였다.
“안 하던 짓을 해, 왜.”
“꼴에….”
“아, 안 돼, 그건….”
“제발, 제발….”
‘아파….’
“악!”
떨리는 눈꺼풀을 들자 사물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다리가, 그 위에 올라탄 커다란 남자의 등이 보였다.
나는 흐린 눈을 끔벅거렸다.
“콜록….”
“태림아!”
시은철이 소리쳤다. 벌어진 철문을 올려다보자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은철의 말끔한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가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다는 걸, 그렇게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는 전혀 몰랐었다. 자살하기 직전의 서른두 살 강해아조차 동정하지 않던 남자가 나를…
아주 불쌍하고 가엾은 것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강, 해아….”
일해 형의 낯선 비명이 더욱 컸다.
‘태림 씨.’
태림 씨가, 태림 씨가 강일해를 패고 있었다. 미친놈처럼 휘둘러 대는 주먹이 묵직하게 형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태림아, 이제 그만해.”
“태림 씨….”
반쯤 업힌 듯한 모양새로 나는 기침했다.
“그만해요, 이제….”
“너….”
그가 입을 열었고,
“…….”
“이런, 미친….”
형이 정신없이 중얼거렸고,
“목소리 낮추세요.”
황 비서가 그를 달랬다.
“강해아, 너, 이 새끼….”
“태림 씨, 태림 씨….”
콜록, 콜록 자꾸 기침이 났다. 빌어먹게 배가 아팠다. 가죽이 찢어진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태림 씨, 뺨….”
“손 떼.”
“태림 씨.”
“무슨….”
“나… 재킷 좀.”
‘아.’
“나…,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요….”
“하하….”
“작가님처럼 되고 싶다네요.”
“아…, 저처럼….”
“…작가님? 괜찮으십니까?”
“작가님.”
“나가자.”
“여기서 나가자.”
“왜 그런 거지?”
나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뭐가요.”
그렇게 되묻자,
두려워서 숨이 막혔다.
“병원으로 가.”
“안 돼, 집으로 가.”
반사적으로 내가 외쳤다.
“병원으로 가, 당장!”
내 애원이 좀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태림 씨!”
소리치며 그를 쫓았다.
“악, 태림 씨.”
“하지 마요!”
“자화상?”
천태림이 소리쳤다.
그러자,
“언제부터야?”
태림 씨가 물었다.
“뭐가요?”
“화나서 묻는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게 취미야?”
“…….”
“언제부터 맞았냐고.”
“…….”
“이제 됐죠?”
“해아야….”
“태…, 태림 씨도 그러잖아요.”
이를 보이며 나는 웃었다.
“아니, 달라.”
“화내지 마세요.”
멍하니 내가 중얼거렸고,
“해아야, 제발!”
천태림이 애원을 했다.
‘어, 운다….’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요일에 지하철 좀 탄다고 나쁜 일 안 생겨. 마케팅을 하겠다고 여섯 살배기 어린애 파리에 던져 놓지도
않고 불러다 쥐어 패지도, 싫다고 우는 사람 전시장에 세워 놓지도 않는다고…!”
“화…내지 마세요.”
“강해아.”
“나, 나 숨 못 쉬겠어요….”
“강해아, 너 왜 그래?”
땀 묻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해아야.”
아주 슬픈 사람처럼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신음하듯 그가 말했다.
“좋아서 하는 거긴 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 본 적은 없었으므로.
‘아니요’라고 대답해선 안 되는데 사실은 ‘아니요’라서, 어려웠다.
“나 태림 씨 남편인 거 좋아해요.”
“나 태림 씨 옆에 있는 거 좋아해요.”
“태림 씨… 좋아해요.”
“태림 씨, 나….”
‘괜찮다고 말해 줘야 되는데.’
♡ ♡ ᕬ 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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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골드 ♡
♡재업금지공금절갠♡
┗━♡━━━━♡━┛
남 편, 내 편
모든 것이 몹시 낯설었다.
‘이젠 나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깼구나, 해아야.”
그러더니 간호사를 호출했다. 어찌나 분주하고 빠른지 의사가 병실로 찾아들기가,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였다.
다행히 복부로 흘러들어 간 출혈은 없지만 이틀은 더 경과를 두고 봐야 안다느니, 추가로 파열이 일어나면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느니 하는 소견이 이어졌다. 백의를 두른 이가 읊어 대는 전문적인 용어들을
듣자니 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걱정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누가 내 몸 상태 궁금하대?’
자꾸만 삐뚜름하고 못되지는 생각에도 이유가 있었다. 괜히 짜증이 날 정도로 온몸이 저리고 아픈
탓이었다. 애매하고 둔하던 통증이 숨을 쉴 때마다 거세지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죄 없는 의사라도
욕해야 견딜 수준이었다.
‘아하….’
‘뭐야….’
…하기야, 이런 몸으로 누구에게 컴플레인을 건단 말인가. 어차피 침대에서 일어날 상태가 못 됐다. 한발
늦게 밀려드는 약 기운 탓인지 머리까지 둔해져 갔다. 달리 할 말이라도 떠오르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 못
했다.
이제는 어제가 된 오픈식 날, 차창 너머로 보이던 장인 내외의 경악스러운 얼굴이 기억났다. 셔츠 소매에
변색된 피를 묻힌 채 말을 솎아 내어 가며 느릿느릿 무어라 말하던 태림 씨의 옆모습과,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장모님이 뇌리에 또렷했다.
의사가 병실을 떠나고, 두 사람이 나누는 여상스러운 대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검사장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듯하다가,
그렇다면 혹시라도 이혼을 요구하실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럴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했다. 하지만
장인 내외를 향한 믿음과 나 자신에 대한 신뢰는 별개의 문제였다. 번듯한 집안에서 사랑을 담아 키워 낸
우성 알파 외아들을, 콩가루 집안의 샌드백이 가져갔다는 걸 어떻게 좋게 생각하실 수 있을까….
이불 안에 멍하니 누워서 나는 오가는 이야기를 라디오 청취하듯 들었다. 장인어른께서 과일을 느릿느릿
깎고, 장모님과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나누셨다. 주어가 ‘태림이’였다가, ‘어제 그 그림’이었다가,
다른 의원님이었다가 했다.
“저….”
‘아….’
“왜 우니. 응?”
“어이구…, 왜 또 우니.”
“내가 울린 게지.”
힘이 빠진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다만 그렇게 물어 왔다.
“태림이 그놈이, 네 앞에는 참 이상하게 굴어. 몰랐던 수줍은 구석이 있어. 너한테 부담을 줄까 봐 할
말도 안 하는 게지.”
“울지 말어.”
꿈에서는 형을 만났다.
“우웩, 더러워!”
“몰라, 나는 몰라….”
우성끼리 만나서 본딩한 관계여도 낳기 어렵다는 우성 알파를 허니문 베이비로 출산한 어머니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긴 부족했다. 아이 성별이 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해산을
마치기도 전에 둘째를 가지셨다. 쉬쉬하며 성별 검사를 했더니 이번엔 아들이었지만, 낳고 보니 열성
알파였다.
“불량품.”
형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멍청이 강해아.”
“헤헤….”
회장님도 그 점을 꼬집었다.
‘그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오셨어요, 사돈어른.”
인사를 건넸다. 장인어른의 목소리도 느릿하게 이어졌지만, 정확히 어떤 말씀이 오가는지는 잘 들리질
않았다.
‘어쩐지….’
어쩐지, 사람들 시선이라면 몹시도 신경 쓰시는 회장님께서 기꺼이 대낮에 내 병문안을 와 주셨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내가 입을 열었다.
“엉. 잘 잤니.”
‘그만 울어!’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답답하던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뚫린 듯했다. 나는 그 기쁨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알렸다가 빼앗길까 두려운 유아기적 감정 때문이기도 했고, 큰누나와 나의 세 살 터울은
남들의 열세 살 터울보다 거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물여섯 살의 껍데기에 스며든 서른두 살인
지금도, 나는 누나가 어려웠다.
“…….”
“…형 코 뭉개졌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누나도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나를 오히려 편안하게 해 주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거친 바람과 함께 쏴아아 거세다가 잠잠해지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그렇구나….’
놀라움도 금세 가셨다.
‘그렇겠지.’
하기야 형 성격에 그 폭력성이 나에게만 국한됐을 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이전까지는
생각을 해 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것 같다…. 형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뭐든지 ‘그냥’, 그저 나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어서, 나 때문에 형이 화가 나서,
그게 뭐든지 다 나 때문이라서.
나는 무통 주사 버튼을 한 번 눌렀다.
약발이 돌 즈음에야,
“너 맞는 거 알면서 그냥 둔 거 말이야.”
“아, 어….”
“어….”
“짜증 난다.”
그러고는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시계를 쳐다보면서, 좀 더 오래 머무를 사람처럼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근데 천 대표는 어딜 가서 이렇게 안 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니다. 뭐, 올 때 되면 오시겠지.”
그 말에 나는 골똘해졌다.
마침내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장모님이 가져온 과일, 큰누나가 주고 간 에세이 서적, 황 비서가 전해
준 아버지의 선물 보따리가 쌓인 병실에, 가장 늦게 찾아온 손님은 맨손이었다.
“…….”
숨죽인 내 품 안으로 반듯한 상체가 기울여졌다. 뻣뻣하게 굳은 몸에서 유달리 사납게 느껴지는 페로몬의
향기와 짙은 비 냄새가 났다. 검은 재킷의 어깨와 허리가 빗물에 젖은 채였다. 두 팔로 힘주어 그를 안는
나에 비해 그는 목석같았다. 내 등에 손 하나를 올릴 뿐 도통 세게는 안아 주질 않았다.
“태림 씨.”
“태림 씨, 아직 화났어요?”
조용히 묻자,
“아니.”
“너한테 화난 적 없어.”
“왜….”
내게로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정리할 일이 좀 있었어.”
그가 말했다.
“해아야.”
태림 씨가 나를 불렀다.
“네.”
울렁거리는 그의 목울대와 벌어졌다 다물어지길 반복하는 입술이 내게 위안을 줬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가 내게 무어라 하고 나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고민한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참 망설인 끝에 태림 씨가 건넨 질문은 다소 허탈했다.
“아직… 아파?”
그의 시선이 내 배에 닿았다. 벌어진 환자복 틈으로 빳빳하게 감아 놓은 반깁스 붕대가 보였다. 덕분에
배가 평소보다 크고 평평했다.
이왕 부끄럽게 된 김에 물을 말이 있었다.
“태림 씨,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용기 내어 건넨 질문에,
“그래.”
“…그런데 왜 대답 안 해요?”
“무슨 대답.”
긴장한 탓에 울렁거리던 심장 소리가 단숨에 가벼워졌다. 통통거리며 목덜미로 오르는 맥박이 느껴졌다.
“눈 감고 자는 척하면서 들은 체도 안 하더니.”
“…티 났어요?”
“티 나지, 그럼….”
“그래.”
“아…니.”
“…….”
“집….”
그러자 쪽, 쪼는 키스가,
“내일.”
쪽,
“해 뜨자마자 가자.”
연거푸 이어졌다.
“팔베개해요?”
내가 물었고,
그가 날 보며 모로 눕는다.
“미안해요.”
그제야 작은 용기가 생겼다. 내 모자람을 있는 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 용기가, 눅눅한 마음에 싹텄다.
“해아야.”
“해아야….”
“미안해요.”
“괜찮아.”
한참이나 말 없던 태림 씨가 말했다.
“전부 다, 괜찮아.”
“어.”
“이거, 어떻게….”
“…….”
“…그래.”
“회장님이 화내실 거예요. 형도 싫어할 거고…, 누나들은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나를 딱하게 보겠죠.
사람들은… 실망할 거예요. 강해아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강해아는 호감을 주는 사람이거든요.”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두 눈이 커진 그의 뺨을 나는 쭉 늘렸다.
“귀여우니까 봐줄게요.”
“좋아해요, 태림 씨.”
고백하고,
“좋아해요….”
또 고백했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눈앞의 천태림은 아주 귀엽고, 내 맘속엔 더는 바위처럼 무거운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양 몸도 마음도 가뿐해져서 나는 웃어 댔다.
“좋아해.”
“왜 그래요. 둘이 있고 싶은데.”
“…미치겠네, 진짜.”
“해아야, 하지 마.”
“그만. 그만 만져.”
“왜요?”
“…지금은 안 돼.”
“왜요?”
“왜요…. 한 번만 해요.”
그의 바지는 벨트까지 채워져 있어 벗기기 어려웠지만 내 복장이라면 또 달랐다. 헐렁한 환자복 바지를
끌어 내리자 태림 씨의 숨이 더욱 더워졌다. 다급한 손길이 내 바지 허리춤을 꽉 쥐고 붙들었다.
“너 진짜 취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어요?”
“아…, 아니.”
“…….”
“손….”
박 실장을 대체할 새로운 퍼블리시스트의 명함은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획안 자체는 재밌었다.
내년 봄에는 패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실려 있었다.
‘붓은 꺾었지만 장사는 계속하자’는 소리를 이보다 장황하게 할 수가 있을까. 솔직히 말해 웃겼다.
피해자로 적힌 내 이름과 가해자로 처리된 강일해 세 글자를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서류에
담긴 내용 자체는 단순했다. 일해 형이 나를 만나러 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문자이건 전화이건 통신에
의한 접근도 금지당했다는 것.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였구나.’
저녁에는 허탈해졌다.
“오늘은 뭘 했어.”
진짜 싸움의 의미는,
“갈 거예요.”
“안 된다니까.”
애초에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그랬다. 내 인생을 뽑아다가 지나온 밭에 심은 이가 신인지 우주의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믿었다.
‘같이 가고 싶어….’
“나 정말 괜찮다고요.”
‘그냥 그게 다인데….’
“…….”
현관에 선 태림 씨에게서 나는 등을 돌렸다. 터덜터덜 거실로 가 소파에 몸을 앉히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나쁜 착각이 일었다.
‘전에도 이랬었는데….’
“해아야.”
“…알겠어.”
태림 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죠?”
“나랑 같이 가는 거, 절대 후회 안 할 거예요.”
그렇게 자부했다.
‘음….’
귓가로 빙빙 맴도는 말들이 하나같이 ‘웅성웅성’, 뭉개져 들렸다. 소음처럼 울리는 소리를 전부 이해한
척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아픔은 티 내지 않고 행동거지는 자연스럽게, 태림 씨 팔뚝을 한 번
쓰다듬고는 애초에 비어 있던 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들켰구나.’
“알겠어요, 알겠어.”
‘귀여워….’
그러니 태림 씨에게 오늘은 행운이 따르는 날이었다. 그가 지닌 능력과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날이자,
좋게 연을 끌어갈 인맥의 물꼬도 트이는 기념비적인 밤.
“응. 나 괜찮아요.”
‘어?’
“…….”
‘20 분….’
“…….”
“좀 지루해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웃어 보였다.
“우욱….”
“…….”
“왜요…, 태림 씨가 또 나 확인하래요?”
‘타이밍도 참 얄궂어….’
열기가 확 얼굴로 몰리더니 사방이 흐려지는 어지럼증이 다시 도졌다. 기절할 것처럼 시야가 흔들리고
상체가 앞으로 확 쏠렸다.
“언…, 했, …어요?”
시은철이 묻는 말이,
“…씨.”
시은철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 생각을 끊어 놓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제 외투를 벗었다. 은회색 정장
웃옷이 내 몸 위에 덮였다.
나는 잠깐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뺨이 축축했다. 얼굴로 물이 튀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자, 시은철이 보란 듯
손가락을 더 튕겨 댔다. 그가 손에 적신 찬물이 거듭 내 얼굴을 적셨다.
“뭐예요.”
“약 먹으라고.”
“왜 나한테 갑자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시은철이 미간을 퍽 구겼다. 잠깐이나마 연민하는 듯 촉촉하던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다 알죠?”
내겐 놀랍지가 않았다.
“으음….”
‘그럼 고통스럽겠지….’
그러니까,
‘안 좋아합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허탈한 웃음소리가 내 잇새로 흘러나왔다.
“은철 씨 자리 나는 안 뺏어요….”
“네가…, 네가 뭔데 날 동정해.”
“재수 없는 새끼.”
그러더니 욕을 했다.
“풉….”
“아, 진짜 웃겨….”
“후….”
테라스 난간을 움켜쥐고 허리를 펴는 시은철은 여느 때보다 뻣뻣해 보였다. 그는 나로부터 떨어진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라.’
그러면 안 되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시은철이 말했다. 그의 날렵한 옆얼굴이 제법 매서웠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게 성화 때문인지 쪽팔려서인지 분간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몹시 복잡한 한숨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멍하니 눈만 끔벅대는 날 두고 시은철은 도망쳐 버렸다.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가는 걸음걸이가 도둑처럼
재빨라서, 내겐 그를 놀릴 잠깐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그에게 잡혔던 두
뺨이 아직도 아릿했다.
허탈한 마음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면서, 나는 밤공기가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
여름밤의 무더위가 갑자기 가셨을 리는 없고, 내 몸의 온도가 그만큼 올라간 모양이었다.
“미친놈이….”
“태림 씨는 몰라요.”
“흐, 음….”
“태림 씨….”
“안아 주세요.”
“안아 줘….”
처음 겪는 발정기였다.
늦은 발현만큼이나 난데없는 발정기는 몹시도 고역스러웠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기고 딱 그만큼이나 거듭,
나는 기절을 해 댔다.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풍경은 비슷한데 자세만이 달랐다.
“으응, 응….”
“헉….”
물에 젖는 불쾌감에 눈을 떠 보면 내가 흘린 정액이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하면 다시 눈앞이 흐려지고, 잠에서 깼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기진맥진
고꾸라지기를 연거푸 반복했다. 내가 무얼 하고 있고 어떤 말을 뱉는지, 표정은 어떻고 팔다리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나를 마비시켰다.
애써 눈을 떴을 때엔 내 입술 위에 태림 씨의 손바닥이 덮여 있었다.
“읍….”
“우…, 웁!”
‘왜…, 왜?’
‘뭐야…, 뭐 하는 거야?’
“삼켜.”
“삼켜, 어서.”
“읍, 흐….”
끅끅거리며 억지로 입 안의 액체를 넘기려는데 본능적인 거부감에 토기가 치밀었다. 신경이 뾰족해지고
속이 서러워지는 순간 나는 잡힌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더욱 조이면서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 댔다.
내 주먹에 팔뚝이며 어깨를 맞으면서도 태림 씨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이마엔 핏대가 서고 턱의 골격이
도드라진 게, 꼭 성난 사람 같아 무서웠다.
“윽, 흑….”
턱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침실인데, 창밖의 해는 밝았다. 혼란스럽고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해아야?”
“윽.”
“해아야, 아니야.”
“왜, 왜….”
“왜 나… 나를….”
“아니…, 아니야!”
태림 씨가 불쑥 외쳤다.
그의, 그렇게나 절박한 얼굴은 몹시도 간만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못 감추고 외치는 소리가 아주 컸다.
“…….”
“흑….”
“괜찮아.”
태림 씨의 손이 다시 내게로 뻗쳐 왔다.
“내가 그런 거예요?”
그를 덮친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끊어진 기억을 이어 붙이려 노력해 봐도 도통,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머릿속이 그저 컴컴하니 미궁
같았다.
“어떡해.”
“어떡해요….”
“괜찮아.”
그런 와중에도 태림 씨는 다정했다. 조심스러운 손이 내 턱을 잡더니 부드럽게 당겼다. 볼썽사납게
울면서 나는 그를 마주 봤다. 빨갛게 쓸린 입술을 닦아 주는 엄지 끝이 두툼했다.
다시 눈물이 솟았다.
“다쳤잖아요.”
“괜찮대도.”
‘내가 태림 씨를 때리다니….’
“화났어요?”
“미안해요, 내가…. 나는, 몰랐, 모르고 그랬는데… 가 버리면 어떡해요. 나는…, 나는 기억이 안 나요.
태림 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화, 화났어요?”
조리 없이 지껄이는 내 말에 태림 씨가 한숨 쉬었다.
그가 말했고,
“그래도… 가지 마요….”
나는 억지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지는 척 시늉하며 태림 씨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 옆자리에 걸터앉는 그의 무릎 위로 나는
상체를 뻗었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부둥켜안고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벌게진 살결이 따듯하게
뭉개졌다.
그제야 절망스럽던 마음에 볕이 들었다. 무섭고 혼미하고, 서럽던 정신이 서서히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때려서 미안해요.”
“많이 아팠어요?”
“해아야.”
내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면서,
“…약 안 삼켰어?”
그가 물었다.
“무슨 약이요?”
“해아, 야….”
“윽….”
아픈 척 울상을 지으면 그만이었다.
“학….”
“태림 씨, 으응….”
“아파요.”
“태림 씨….”
“으응, 응….”
벌어진 입가로 뚝 침방울이 떨어졌다. 짐승처럼 아둔해진 내 머리를 채운 충동은 단 하나였다. 눈앞의
알파, 천태림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열망… 그게 전부였다.
“…….”
손을 휘둘러 나는 그의 뺨을 때렸다.
“…하.”
짝 소리 나게 볼을 맞고 태림 씨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가만히….”
“윽….”
“악!”
“해…, 해아야.”
“흐윽, 윽….”
그러나 한편으로는,
“흐윽, 태림 씨이….”
“읏, 흐윽….”
“흑….”
굵은 눈물방울이 태림 씨의 배 위로 떨어졌다.
“안아 주세요….”
“사랑해요….”
“으응…, 아, 아…!”
“사랑해….”
엉엉 울다가 또 앙앙 신음했다.
“…….”
“흐, 읏….”
“아….”
‘사고 쳤다.’
그러나 상황을 수습할 기회도 의지도 내겐 없었다. 단숨에 쏟아져 내리는 그의 체향과 체중에 뭉개지면서
나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한테 어떻게 발정기라는 말을 써?’
‘네가 뭘 알아?’
“태림 씨….”
바짝 쉬어 버린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이제 못 해요.”
“음….”
배가 이렇게나 아프고 온몸이 저릿저릿 떨리는데 떠오르는 게 없다니 억울하기도 잠깐이었다. 본능적인
충족감이 차오른 덕이었다.
“왜 웃어.”
얕은 잠이 묻은 목소리로 태림 씨가 중얼거렸고,
“그냥….”
나는 웃음소리를 흘려 댔다.
“…좋아서요.”
‘참 좋은 거네, 이거.’
오전 내내 태림 씨와 낮잠을 자고, 점심에는 서로를 껴안고 피부를 문질러 대자니 행복할 수밖에 없게
됐다. 몇 번을 안겨도 무릎이 배배 꼬이고 속이 찌르르하니 좋기만 한 품에 안겨, 다섯 번째인지 열
번째인지 모를 관계를 하자니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
“…….”
“왜….”
“응….”
“이리 와.”
내 뺨에 코를 붙이며, 태림 씨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지.”
“네? 뭘요?”
태림 씨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
“음…, 우리 침대 담요가요.”
“…담요가.”
“네.”
“네, 네. 빠른 시일 내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음….”
들뜬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물었고,
‘또 이런다.’
나는 그의 굳은 얼굴에 겁먹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니, 해아야.”
“나 그런 적 없어.”
“네?”
“아!”
“…그럼 내가 증거 보여 줄게요.”
“해아야. 잘 안 돼? 도와줄까?”
어깨 너머로 태림 씨가 물었고,
“아니에요! 찾았어요.”
“…….”
멍하니 텔레비전을 올려다볼 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화면 밖으로 푸른 하늘과 녹색의 불빛이 쏟아져
내려 내 얼굴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