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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The moment 1 권

목차

01. 서막

02. 탁상시계

03. 가스라이팅

04. 동경(憧憬)

05. 고백

06. 그, 소년

07. 토마토 스튜

08. 꿈속

09. 허상
10. 족쇄

11. 발버둥

12. 모순

13. 상기

14. 우리

#01 서막

“머리카락이 참 예뻐요, 커넌.”

남자의 손끝에 커넌의 머리카락이 어설프게 스쳤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이 못내 서운한 듯, 두 눈을 마주했다.

머리카락이 예쁘다니, 그런 간지러운 말은 처음 들어봤다.

하물며 자신의 엄마조차도 그런 칭찬은 해 준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찬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남자를 안아야 진정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커넌은 남자의 손을 내쳤다.

차가운 커넌의 손에 그보다 더 차가운 남자의 손이 닿았다.

커넌은 처음으로 자신의 체온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 생소한 느낌에 커넌이 숨을 헐떡였다.


“마, 만지지 마요.”

고작 그 한마디를 내뱉는데도 색색거리며 숨이 벅찼다.

남자는 숨 쉬는 것처럼 벅차면서도 아쉬운 존재였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단 말인가.

커넌은 이 이질적인 감정을 감히 알고 싶지 않았다.

“커넌.”

그때 다시 한번 남자가 커넌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무대가 끝난 후 커튼콜, 그 어딘가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관중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참 우스운 일이다.

무대에 단 한 번도 서 본 적 없는 사람이 커튼콜을 논한다는 게 말이다.

커넌이 저도 모르게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커넌은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와 마주친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계속해서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표현을 해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표현은 없었다.


태양에 검게 그을려 새까맣게 탄 것만 같은 피부와 상반되는 하얀 은발의 머리를 가진 남자.

태양이 사랑으로 어루만지면 저런 형상이 되는 걸까.

문득 든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커넌은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

“거기서부터 얽혔군요?”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남자의 상념을 깨웠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남자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시계가 채웠다.

똑딱똑딱.

일정한 박자로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 여자와 남자를 포함한 공간에서 가장 분주해 보였다.

시간은 흐르지만 두 사람의 시간만 멈춰 있는 것처럼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흠흠.”

여자는 작게 헛기침을 하기도 했고, 일부러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여자가 포기한 듯 턱을 괴고 남자를 응시했다.


“커넌, 오늘도 이대로 끝낼 건가요?”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억지로 힘을 주어 말하는 것과 달리, 여자의 눈도 자신처럼 빛을 잃고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런 사람이 무슨 상담을 해 주겠다고.

남자가 다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바라봤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살에 차가운 쇠붙이가 닿자 기분이 묘했다.

“우리 2 주 만에 만났어요.”

여자가 고개를 바로 하며 조금 과장되게 말했다.

원래도 행동이 크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심했다.

덕분에 단정하던 여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

“좋아요, 좋아.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야기를 듣고 갈 거니까.”

여자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끼익끼익-
그녀의 행동에 맞추어 철제의자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원래도 오래된 탓에 소리가 컸으나, 오늘은 여자의 과잉된 행동처럼 유난히도 소음이 컸다.

“어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의자를 좀 바꿔야겠어요. 좀 더 쿠션감이 좋은


걸로요! 커넌처럼 마른 경우에는…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 테니까요.”

여자가 과잉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었다.

물론 틈틈이 남자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아마도 남자가 무어라 대답해주길 바라는 듯싶었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요?”

여자가 남자의 대답을 유도하려고 재차 질문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에 여자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좁은 공간에서 벽 한 면을 차지한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 공기가 무거웠다.

벽부터 바닥까지 온통 하얀 방 안으로 뜨거운 햇살이 넘쳐흘렀다.

“수갑이 불편하죠? 정말… 커넌이 범죄자도 아닌데, 꼭 그렇게 과하게 다루네요.”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과한 연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남자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여자는 자신에게 말한 걸 수도 있다.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무래도… 좀 더 편하게 대화를 하려면 수갑은 푸는 게 좋겠어요. 안 그래요, 커넌?”

여자가 일부러 남자에게 좋은 조건을 내보였다.

그럼에도 남자의 입은 벌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에 지친 듯 여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무게중심을 양쪽 팔꿈치로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지자, 여자가 남자의 옷에 적힌 문구를 눈으로 훑었다.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

“It’s your heart.(당신의 마음입니다.)”

특별하게 잘 지은 문구는 아니었지만, 여자는 이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처럼 면담이 있는 날이면,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수십 번 문구를 곱씹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커넌도 마찬가지예요.”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 닥터 셰인이 자신의 가슴 부근을 손가락으로 콕콕 짚었다.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남자가 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까득까득.

남자가 제 손톱을 잡아 뜯었다.

배려 없는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길게 뜯어진 손톱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커넌?”

남자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닥터 셰인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물어봤다.

커넌.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유난히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이라든지, 붉게 상기된 두 뺨이 인상적이 남자였다.

얼굴 전체에 주근깨가 번진 얼굴에는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이 번져 있었다.

“흠흠.”

커넌이 대답을 하지 않자, 닥터 셰인이 일부러 콧바람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야 그가 좀 더 쉽게 경계를 푼다는 것을 지난 2 개월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닥터 셰인의 노력이 통한 건지, 커넌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닥터 셰인이 한쪽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잠시 방황하던 손은 곧장 주머니로 향했고, 이윽고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제 잘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

닥터 셰인이 커넌의 눈치를 살피려 시선을 옮기는데,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닥터 셰인이 흔들리던 시선을 급하게 창밖으로 던졌다.

며칠 전까지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인 것처럼, 유난히도 날이 맑았다.

“어, 언제쯤 비가 그치려나 했더니….”

닥터 셰인이 일부러 크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크게 기지개를 켜는 척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는 것도 성공했다.

그럼에도 조마조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날씨가 좋네요. 햇살도 좋고.”

“…….”

“어쩐지. 오늘따라 도로가 꽉 막혀서 혹시나 지각할까 조마조마했거든요. 다들 소풍이라도 가는 걸까요?”

상담실 안에는 닥터 셰인의 목소리만 울렸다.

지칠 법도 한데, 그녀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얗게 각질이 들뜬 커넌의 입술은 도무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던질 뿐이었다.

오늘도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면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도 녹음기를 틀면 지직거리는 잡음과 초라한 제 목소리만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하아….”
낮게 터지는 닥터 셰인의 한숨 속에 어린 두 딸과 어머니의 얼굴이 함께 흩어졌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따라 어깨가 무거운 기분이었다.

“햇살 하면 뭐 떠오르는 거 없어요? 예를 들면, 해바라기라든가…….”

시간이 지날수록 닥터 셰인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덕분에 그녀의 음성에서 신경질이 묻어났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실망했던 걸지도 모른다.

닥터 토마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증거를 찾아오겠다고. 눈앞에 있는 남자, 커넌.

그가 단순히 범죄 피해자가 아닌 범죄에 함께 가담했다는 명백한 증거.

금방이면 될 줄 알았던 일을 2 개월이나 질질 끌고 있었다.

닥터 토마스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때마다 닥터 셰인은 자신을 합리적으로 의심했다.

정말로 그는 범죄에 함께 가담하지 않은 걸까? 정말로 단순히 피해자였던 걸까?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확실해질 뿐이었다.

그는, 범죄에 함께 가담한 사람이다.

“커넌.”

닥터 셰인은 조급증을 억누르며 다시 남자를 불렀다.

물론 목소리에 섞인 짜증스러움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저, 이번에도 대답 없는 공허한 부름이겠지, 단념하는 찰나.


“…그 사람이 떠올라요.”

커넌이 입을 열었다.

“…!”

하얗게 각질이 들뜬 입술과 달리 그 속은 유난히도 붉었다.

마치 그의 머리카락처럼 말이다.

닥터 셰인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그가 말한 것인가?

소년미가 엿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잔뜩 쉰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사람이요?”

닥터 셰인이 커넌과 달리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무려 2 개월 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공격성 때문에 구속복을 착용시켰었다.

한 달 전에는 얌전히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기에 바빴고, 2 주 전에는 자해를 시도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입을 연 이유는 무엇일까? 햇살? 날씨에 대한 질문을 좋아했나?

닥터 셰인이 상체를 조금 더 커넌 쪽으로 숙였다.

커넌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커넌의 표정이나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태양이 사랑으로 어루만져서 만든 사람 같았어요. 밤에 만났을 때에도 밝았는데, 빛을 받으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빛났어요. 하얗게….”

“그랬군요.”

“그러면서도 어둠 속에 숨어서 나를 감시하고 끊임없이 시험했죠. 입술은 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눈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어요.”

“앞뒤가 다른 남자였나요?”

닥터 셰인은 일부러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커넌을 자극했다.

그에 대한 커넌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덕분에 그녀의 엉덩이가 의자 위로 들썩들썩거렸다.

그런 닥터 셰인을 바라보던 커넌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닥터 셰인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닥터 셰인의 눈에는 커넌 자신에게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아무도 그를 잘 몰라요.”

커넌이 기도를 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들끓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려고 해도 모난 시선까지 갈무리하기엔 벅찼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모른다는 건가요? 그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죠?”

닥터 셰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커넌이 그 눈동자를 증오하듯 바라봤다.

저 눈빛. 유치하고 시시껄렁한 가십거리를 엿보는 듯한 표정.

커넌은 그것이 퍽이나 짜증스러웠지만 이제는 짜증을 내는 것도 지쳤다.

몸이 먼저 지친 건지, 마음이 먼저 지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제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뭐든 좋으니까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커넌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역시… 이 모든 건 당신 덕분이야.

“…크림. 크림, 도우넌.”

#02 탁상시계

“크림, 도우넌.”

고작 그의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크림, 도우넌.”

그렇기 때문에 닥터 셰인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의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굳이 비슷한 감정을 끌어다가 붙인다면 ‘살인 욕구’ 였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줄래요?”


닥터 셰인이 의자를 좀 더 당겨 앉았다.

끼익-

바닥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고, 더불어 커넌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물론, 닥터 셰인이 그를 놓칠 사람은 아니었다.

“커넌.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

“이 세상에, 커넌 말고 크림 도우넌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거예요. 그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거라고요. 어때요?”

커넌이 가진 미세한 틈.

닥터 셰인이 그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커넌은 그게 불편하면서도, 그녀가 하는 말에 관심을 쏟았다.

“나도 좀 알고 싶어서 그래요-”

크림 도우넌.

그 개 같은 새끼가 당신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애초에 당신은 어떤 인간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인지.
닥터 셰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상체를 온전히 테이블에 붙였다.

덕분에 그녀의 가슴이 터질 듯 눌려 퍼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커넌이 닥터 셰인을 따라 테이블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말하니.

도심에 즐비해 늘어져 있는 빌딩 숲에서 조금 벗어나면, 보기만 해도 음침한 사무실 하나가 나오거든요?

[피해 전문 변호 사무실]

간판의 네온이 군데군데 나가서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그런 허름한 간판 하나에 기대어 일을
했었죠.

사무실은 늘 어두웠어요. 다루는 일이 음침하기도 했지만, 전기세를 아끼겠다며 간판처럼 깜빡이는 조명


아래에서 일을 했거든요.

사실 그중에서 내 자리가 가장 어두웠어요.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있었거든요.

복도 끝 출입문에서 가장 멀고, 화장실과 가장 가까운.

7 년이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일했는데, 제대로 된 직급 하나 없었어요.

뭐, 바란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금 씁쓸하네요.

하는 일이요? 별거 없었어요.

그냥 간단한 서류정리나 누군가가 하기 귀찮아 떠넘긴 일을 도맡아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평소처럼 일하기가 싫어서 빈둥대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탁상시계.”
그날도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멍하니 눈동자를 굴렸던 것 같아요.

**

남자는 책상에 납작 엎드려 똑딱똑딱,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이블 칸막이 너머의 사람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을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남자가 공허한 두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초침을 바라본 탓인지 눈두덩이가 화끈한 기분이었다.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을 좀 더 괴롭히고 싶었다.

다그치고 또 다그쳐서, 막다른 길에 몰아넣으면 지금의 병신 같은 모습을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우스운 생각을 수십 번 반복했다.

“…도망칠까.”

“어디로?”

“어디긴 그냥…….”

남자의 혼잣말에 뜬금없이 대답이 들려왔다.

그에 깜짝 놀란 남자가 급하게 허리를 펴 자세를 바로 했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서 테이블 칸막이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날카로운 표정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일은 다 끝내고 쉬는 건가?”

“…아, 아서….”

곧이어 상대방을 확인한 남자가 어정쩡한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본인은 물론, 보는 사람마저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불만스레 바라보던 상대방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서 페트룸.

하이스쿨 시절 럭비부 주장이었던 그는 6.3 피트에 육박하는 키와 청록빛 눈동자가 매력적인,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아서가 몹시도 불편했다.

‘아니, 아서가 왜 그렇게 불편한 거야? 막말로 네게 뭘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예전에 딱 한 번, 아서와 친한 동료 데이븐이 남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 불편해요, 그냥.

남자는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그만큼 명확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스미스 씨가 의뢰한 건에 오류가 많다고 하던데.”

‘할 일은 다 끝내고 쉬는 건가?’

굳이 말을 끝맺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좌우로 날카롭게 찢어진 아서의 두 눈이


매섭게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저런 게 불편한 거라고.

남자가 아서의 눈을 피해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나름 정리한 건데, 그럼에도 테이블 위가 지저분했다.

“…이번에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대변했다.

마냥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떳떳하지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변명은 변명이었다.

“우선 내가 처리했으니, 내일 바로 연락드려.”

아서의 말에 남자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진심으로 반성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불편하기에 얼버무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서는 빤히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냥 생각하기를 접기로 했다.

“커넌, 자꾸 일을 그르치면 모가지야.”

아서가 한쪽 손날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에 맞추어 남자가 꼴깍, 침을 삼켰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좀 더 골려줄까.

그 모습을 보던 아서가 짓궂은 생각과 함께 상체를 숙여 남자와 가까이했다.


“알잖아. 구석에 처박혀 서류나 뒤적일 놈은 차고 넘친다는 거.”

“…….”

“…긴장하긴. 그러니까 잘 좀 하자고, 응?”

아서가 코웃음을 치며 자세를 다시 바르게 했다.

툭툭,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리곤 두툼한 서류뭉치를 남자의 테이블 위로 내리니, 남자가 열심히 쌓아둔 서류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일이야.”

“…….”

“다 끝내면 데이븐 책상 위에 올려두고, 퇴근하면 돼.”

남자가 허망하게 아서를 올려다봤다.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단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했다.

일종의 반항이었지만, 그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남자, 커넌 트윌턴은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커넌이 서류 뭉치 한 움큼을 집어 테이블 위로 두드려 모서리를 맞추었다.

자신이 일을 시작한다는 무언의 표시인 셈이었다.

“오늘 안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더하기도 전에 서류 사이에 끼워져 있던 사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급하게 낚아챈 커넌이 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중요한 단서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도… 커넌이 눈동자를 굴려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미쳤지, 커넌 트윌턴.

커넌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자신은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커넌은 그게 몹시도 싫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아서.”

“이번에 맡은 것들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야. 복사본 하나 없는 원본이니까 조심해서 다루라고.”

아서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에 맞추어 뚜둑,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 끼쳐.

커넌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돌림 바퀴 중 하나가 빠진 탓에 커넌의 의자가 옆으로 기우뚱거렸는데 끼긱. 듣기 싫은 소리가 1+1 특가


상품처럼 그 뒤를 따랐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더군.”

아서가 사진 위로 손가락을 퉁 튕겼다.

짓궂은 말투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덕분에 커넌의 시선이 아서에게서 사진으로 옮겨졌다.


“…….”

‘오, 신이시여.’

커넌이 절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현장의 참혹함을 느끼게 해주는 자료였다.

때문에 커넌은 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아서가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껏 다룬 사건들 중에서 이번 사건이 가장 끔찍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성이 나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빨간 머리 혐오자인 건지.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서류 클립에 사진을 꽂아 넣었다.

거친 행동 탓에 사진 끝이 살짝 구겨지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아서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현장에 나가서 시체를 보면, 피해자의 모든 것이 다 소중하게 느껴지거든?”

하지만 아서 역시 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지?”

“…주의할게요.”

결국 이번에도 아서의 승리였다.

커넌의 항복 깃발에 만족한 듯, 아서가 웃으며 머그컵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으려 커넌이 손을 뻗는데, 머그컵은 커넌의 손을 지나 서류 탑 꼭대기에 안착했다.


“그럼. 수고해, 커넌.”

아서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커넌이 다급하게 머그컵을 들어 올렸다.

머그컵에 맺힌 물방울에 의해 서류가 조금 젖기는 했지만, 다행히 글자가 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꼭 저렇게 심술이지.”

커넌이 아서의 자리를 노려봤다.

물론 아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커넌, 자꾸 일을 그르치면 모가지야.”

알잖아? 알긴 뭘 알아!

커넌이 좀 전의 아서를 따라 하며 빈정거렸다.

그러면서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커넌도 아는 것이다.

아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구석에 처박혀 서류나 뒤적일 놈은 차고 넘친다는 거.’


“……일이나 하자.”

커넌이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

“아서가 조금… 밥맛이었네요.”

잠시 말을 고르던 닥터 셰인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그에 커넌이 설핏 웃으며 동의했다.

“밥맛이었죠. 유명한 맛집이라서 2 시간 동안 웨이팅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그런


밥맛이요.”

커넌의 적절한 비유에 닥터 셰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5 살짜리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그 후로도 닥터 셰인은 한참을 웃었고, 커넌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웃음은, 그런 커넌을 인지하면서 끝이 났다.

“...흠흠. 그래서 일을 다 끝냈나요? 아니, 잠깐만! 끝낼 수 있는 양이긴 했어요?”


서류 탑이었다면서요.

닥터 셰인이 허공 위로 손을 휘저었다.

얼핏 자신의 서류 탑과 비슷한 높이였는데, 아마 닥터 셰인 역시 그런 서류 탑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했을 거예요.”

“…….”

“이틀이 걸리든, 사흘이 걸리든. 밤새 야근을 해서라도 데이븐 책상 위에 똑같이 서류 탑을 올려뒀겠죠.”

평소라면 말이죠?

닥터 셰인이 키포인트를 콕 짚어 말했다.

그에 커넌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서류를 뒤적이는데, 전등이 깜빡-깜빡. 안 도와주더라고요.”

“커넌이 전등의 경고를 무시한 건 아니고요?”

“…무슨 뜻이에요?”

갑자기 그렇진 않잖아요. 평소에도 깜빡였을 거 아니에요.

닥터 셰인이 ‘깜빡’에 맞추어 손을 오므렸다가 펴 보였다.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매번 갈아야지, 갈아야지 하면서도 방치했거든요.”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요?”

닥터 셰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유롭게 웃는 것처럼 보였으나 초조해 보였고, 그러면서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 알 수 없는 여자야.

닥터 셰인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던 커넌이 시선을 모로 던지며 푸식- 바람 빠지는 입소리를 내었다.

“하루는 소란스럽게 비가 내린 적이 있어요.”

천둥 번개를 동반해서 시끌벅적했죠.

평소에도 어둡던 사무실이 아예 깜깜해졌는데,

“잘 안 보이더라고요.”

내 붉은 머리가.

데이븐의 금발과 아서의 흑발이 동일해 보였고, 거기에 나도 뒤섞여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마음에 들던지.

커넌이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제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형광등 빛에 일렁여 제 색을 잃어갔다.

“…전등을 바꾸기 싫었겠네요.”

“몹시요.”

“그래서 도망쳤나요?”

그런 이유가 없진 않았어요.
커넌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고, 그녀의 말처럼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풍을 떠날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자신은 살면서 ‘소풍을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커넌이 쓴맛 나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캐비닛을 열어서 전등을 꺼냈어요. 거기에 얼마나 박혀 있던 건지 전등 위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데,


불어도 날아가지 않더라고요.”

“더럽네요.”

닥터 셰인이 짓궂게 대답했다.

커넌이 못 말리겠다는 듯,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조명이 Pixar(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같은 거였는데, 전등을 빼려고 안으로 손을 넣었거든요?”

“와우…. 엄청 뜨거울 텐데.”

“엄청 뜨겁더라고요.”

닥터 셰인과 커넌이 동시에 말했다.

닥터 셰인이 그럴 줄 알았다며 장난스레 검지로 커넌을 가리켰다.

그에 커넌이 코를 찡긋거렸다.

“후후 불다가 아서가 갖다 준 머그컵에 열기를 식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빨간 머리 병신, 누구도 환영하지 않지.

커넌이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었다.

**

사무실 한 면을 가득 채운 투명한 유리창.

커넌이 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태양이 잠든 하늘은 어둑했고, 며칠 안에 하얀 눈이 펑펑 내릴 것이다.

온 세상이 하얘지면, 자신만 붉게 물들어 있겠지.

차라리 자신의 머리 위에만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며 울부짖던 어린 자신이 떠올랐다.

멍청하고 가여웠던 아이.

커넌이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도망갈까.”

자신이 불러온 작은 불씨가 크게 타올랐다.

도망가자.

이내 마음이 동요하여 재촉하니, 몸뚱어리는 그냥 따를 뿐이다.

커넌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 하나 커넌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단 걸 알고 있다. 아무 곳이나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의 이 갑갑한 기분을 없앨 수 있다면 말이다.

#03 가스라이팅
후-

커넌이 내뱉은 담배 연기가 세상에 퍼져 사라졌다.

일부러 가로등 불빛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서 그런지, 아니면 도망쳤다는 허탈한 두려움에 질려서 그런지.

“마냥 홀가분하지만도 않네.”

커넌이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를 한 모금 머금었다 깊이 내뱉었다.

텁텁하면서 적당히 쓰고, 그러면서도 단 것이 딱 자신의 인생 같았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춥네.”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점퍼의 지퍼를 올렸다.

긴장감에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무는데, 문득 그를 확인하고는 한번 웃기도 했다.

고작 이게 뭐라고.

기세 좋게 도망친 곳은 고작 사무실 바로 아래였고, 만약 아서에게 호출이 온다면 당장에 달려갈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애써 포장해봐도, 허탈함을 안고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
하지만 정작 추락한 것은 담배꽁초였다.

거친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끝까지 불씨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커넌이 담배꽁초를 짓이겨 뭉갰다.

그것이 정말로 담배꽁초였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빨간 머리 병신. 누구도 환영하지 않지.”

끝없는 자기혐오에 빠지면서도 그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바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마침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길가에 즐비한 것이 칵테일바였고, 굳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뒤에서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커넌의 팔목에 매달려왔다.

“살려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어떤....”

“누구세요?!”

커넌이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잡혔던 손목이 시큰거렸다.

붉게 물든 제 손목을 살피던 커넌이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탐색했다.


“…….”

무자비하게 제 손목에 매달렸던 상대방을 바라본 커넌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보다 한 뼘 이상 작은 키와 잔뜩 상기된 얼굴.

구겨진 허름한 옷이 그의 상황을 더욱 위태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누, 누구신데....”

“저 좀 도와주세요.”

어떤 미친 살인범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겨우 도망쳤는데 곧, 곧 따라올 거예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소년이 커넌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쉼 없이 말을 하는 게 퍽이나 급해 보였고, 두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꼭 쥐고 있었다.

커넌이 시선이 그 위를 맴돌았다.

소년의 간절함에 커넌의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우, 우선… 골목으로 숨으세요.”

커넌이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끌어당겨 골목 쪽으로 소년을 이끌자, 소년의 얼굴에 희미한 환희가 지나쳤다.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이 하도 험하다 보니, 의심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도움을 준 이유는 정말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평소와 다른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우, 우선 경찰에…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좋겠어요.”

커넌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내심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커넌이 벌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마치 자신의 손에 소년의 목숨이 쥐어진 것 같았다.

긴장감이 실체화되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기분에 커넌이 숨을 헐떡였다.

-네, 911 입니다.

“아, 여, 여보세요? 저기… 그, 도움이 필요해서요.”

-네, 말씀하세요.

“그… 어, 어떤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게… 누군가가 자신을 주, 죽이려고 한다고….”

-살해 협박을 받으셨다는 건가요?

“그게… 제가 받은 건 아니고…. 네네. 제가 지금 같이 있어요. 아, 여기 위치요? 여기가 어디냐면….”

***

“MG 타운 751B, V.S.A. office 에서 도보로 3 분 떨어진, 가로등이 꺼진 골목길.”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커넌이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위치한 것처럼 공허한 기분이었다.

MG 타운 751B, V.S.A. office 에서 도보로 3 분 떨어진, 가로등이 꺼진 골목길.

만약 그때 자신이 위치를 말했다면, 그 소년은 살 수 있었을까? 커넌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커넌은 당시 그곳의 위치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건 죽은 그 소년에 대한 최소한의 위로이고, 예의였다.

그때 커넌이 위치를 말하지 않아서 죽은 그 소년 말이다.

“24 번째 피해자, 앤드류 필립. 맞죠?”

닥터 셰인이 서류를 뒤적여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미끄러뜨렸다.

앤드류 필립. 24 번째 피해자이자, 23 번째 피해자인 크리스 필립의 형.

커넌이 사진 속 소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 필립.

24 번째 피해자이자, 23 번째 피해자인 크리스 필립의 형.

어쩌면 자신이… 살릴 수 있었던 피해자.

물론…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신고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커넌이었군요.”

닥터 셰인의 말에 커넌이 다시 한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위치를 말하지 않았나요? 그랬다면 커넌도, 앤드류도….”


“살 수 있었을까요?”

“…….”

“종종 생각해요.”

만약 내가 위치를 말했다면... ‘그’가 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에요.

커넌이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공허하던 그의 눈빛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나도, 닥터 셰인도… 하물며 앤드류, 그도 알고 있잖아요.”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셰인.

나를 탓한다고 상황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에요.

커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곧게 편 허리와 깍지 낀 손이 그를 고집스레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그를 살렸다면…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답게?”

하핫. 커넌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그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갈 뿐이었다.

“어떻게 사람답게요?”
평소처럼 오줌 지린내가 나는 자리에 처박혀서, 동료라고 불리는 타인이 강제로 떠맡긴 일에 허덕이는
거요?

하루하루를 비관하고, 매일매일의 자신을 비난하면서 살아가는 거요?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건가요?”

난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두 번 다시, 아무 말도 못 하는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를 보고 ‘살인범이다’, ‘악마다’, 수군거리지만, 내게 그는 구원이고 천사였어요.

커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악에 받쳐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는데, 이상하리만치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커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알아요?”

*1938 년 <가스등(Gas Light)>이라는 연극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이다. 해당 연극에서는 남편이 집 안의


모든 등을 어둡게 조절한 후, 집 안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아내에게 그렇지 않다며 그 탓을 돌린다. 결국
아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고 점점 남편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교묘하고 지능이 높은 범죄자가 주로
사용하는 행위이다.

“보통 본인은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못해요. 대부분이 그렇죠.”

“닥터 셰인. 나는 아니에요.”


그는 반대예요.

집 안이 어둡지 않냐고 하는 나를 위해, 불을 환하게 켜줄 사람이에요.

커넌이 닥터 셰인을 설득하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생은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커넌.”

“그를 만난 다음 내 인생은 비로소 완성되어 갔어요.”

“…후. …좋아요. 좋아, 좋아. 다 좋은데…. 그와 만나 커넌의 인생이 망가지고 달라졌잖아요. 그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스럽거나… 그런 게 없어요?”

“셰인. 내 인생은 망가지지 않았어요.”

It was… just the beginning.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죠.)

그는 날 구원했고, 우린 함께 타락했어요.

우리의 첫 만남은 그를 알리는 총성이었고,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달렸을 뿐이에요.

“구원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커넌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닥터 셰인 역시 굳이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본래 사람의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한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만남이었나요?”

“그렇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럼… 앤드류 필립. 그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내가 그에게 죄책감이라도 가져야 하나요?

커넌의 날카로운 지적에 닥터 셰인이 자세를 뒤로 물러,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대체….”

허탈한 웃음이 터져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닥터 셰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분한 감정이 일었다.

앤드류 필립.

그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인지, 아니면 쉐일 톰슨과 커넌.

두 사람에 대한 증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길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푹 빠져서 누군가가 죽는 것에 그토록 태연하고,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는 거예요?

닥터 셰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이번에도 커넌, 그가 대답하지 않기를 바랐다.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닮아 있어요.”
그런 닥터 셰인을 비웃듯, 커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닥터 셰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게 다예요.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미안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그리움. 그것만이 가득했다.

**

“아, 여기 위치요? 여기가 어디냐면….”

커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끌었다.

어두운 탓에 주변의 지형이나 조형물을 판단하기가 어려웠고, 급기야 커넌이 핸드폰을 귓가에서 떨어뜨려
주변을 비췄다.

“MG 타운… 751… B….”

-여보세요? MG 타운 751B, 그다음은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커넌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니, 어둠을 닮은 손이 그것을 받았다.


쉿-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커넌을 달래면서도 커넌의 목울대 부근에 갖다 댄 칼을 좀 더 들이밀었다.

조금만 움직이거나 침을 삼킨다면 금방이라도 살점을 벨 것처럼 칼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어떤… 어떤 미친 살인범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겨우 도망쳤는데 곧,


곧 따라올 거예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커넌이 떨리는 숨을 고르며 시선을 골목 안으로 던졌다.

워낙 어둡기에 안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참하게 살해된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으으-

커넌이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평소와 다른 짓을 하니, 부작용이 따른 것이다.

그냥 얌전히 사무실에 있었다면 적어도 집에 돌아갈 수는 있었을 텐데.

커넌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살려, 살려주세요.”

그저 살고 싶었다. 웃기지만, 그냥 살고 싶었다.

평소 죽지 못해 하루를 산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살고 싶기에 살아갔던 모양이다.

커넌의 하얀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손을 뻗어 커넌의 눈물을 훔쳤다.

차갑게 얼어붙은 뺨 위로 그보다 더 차가운 남자의 손이 닿았다.

커넌은 처음으로 자신의 체온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 생소한 느낌에 커넌이 숨을 헐떡였다.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요?”

남자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그에 힘입어 커넌이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청회색빛 보석을 품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자신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커넌을 남자는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렇듯 패닉 상태일 테니까.

푸흐-
남자가 입방귀 소리를 내며 커넌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곤 자신이 쥐고 있던 칼의 손잡이 위로 커넌의 손을 끌고 가, 그것을 잡게 했다.

나무 손잡이 위로 두 사람의 손이 마주하니, 새파랗게 질린 커넌의 하얀 손과 검게 그을린 남자의 손이


대조되어 돋보였다.

그는 꼭 어둠을 닮은 모양새였지만, 동시에 커넌에게는 두려움의 실체와도 같았다.

“살려만 주시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살게요.”

커넌이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바르르 떨며, 칼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곤 두 손을 모아 남자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기껏 남자가 닦아준 눈물이 다시금 줄줄 흘렀다.

“나는 어떨 것 같아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을 것 같아요?

남자가 칼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커넌은 확신했다.

남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목을 벨 수 있다는 사실을.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커넌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남자의 말을 부인했다.


마치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이 살 수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던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날... 날, 죽일 건가요?”

커넌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그런 커넌을 아무런 대답 없이 살폈고, 그럴 때마다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될


뿐이었다.

“어떨 것 같아요?”

“...안... 안, 죽일 거... 같아요.”

안 죽였으면 좋겠어요.

커넌이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커넌의 대답에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이내 커넌의 목에서 칼을 치웠다.

하아-

그제야 커넌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공기를 들이마셔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름이 뭐예요?”
팅-

남자가 지포라이터 뚜껑을 열며 물었다.

두어 번 부싯돌을 굴려,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깊이 내쉬었다.

날씨가 추운 탓이었는지, 아니면 남자의 위협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안도감 탓이었는지.

커넌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커넌.”

그에 커넌이 홀린 듯 제 이름을 말했다.

그러다가 이내 부족함을 느꼈는지,

커넌 트윌턴. 그렇게 덧붙였다.

“커넌.”

남자가 커넌을 따라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하여 커넌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뱉어냈다.

덕분에 커넌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커넌.”

이건 미친 거야.

커넌이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비상벨을 울려도, 판단력이 흐려진 아득한 정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커넌. 얼굴도… 머리카락도, 온통 붉네요.”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에도 커넌은 몽롱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모든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예쁘다.”

커넌은 자신이 속마음을 내뱉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말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두 귀를 의심하기는 했으나, 남자는 커넌이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커넌, 머리카락이 참 예뻐요.”

남자의 손끝에 커넌의 머리카락이 어설프게 스쳤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이 못내 서운한 듯, 두 눈을 마주했다.


이건 미친 거야. 도망쳐야 해.

아무리 머릿속에서 비상벨을 울려도,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커넌의 두 다리는 여전히 땅에 박혀 있었고, 두 눈은 뚫어져라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의-

#04 동경(憧憬)

“머리카락이 참 예뻐요, 커넌.”

그런 말 많이 듣죠?

남자의 능청맞은 물음에 커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니, 가슴이 들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예쁘다니, 그런 간지러운 말은 처음 들어봤다.

하물며 자신의 엄마조차도 그런 칭찬은 해 준 적이 없었다.

들뜬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커넌이 물었다.

누군가를 향해 사적인 질문은 제법 오랜만인 것 같았다.

자기 딴에는 나름 용기를 내어 물은 것 같았으나, 일렁이는 가슴을 추스르지는 못한 듯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쪽 이름도 알려줘요.”

알고 싶어요.

거기까지 말하자, 커넌은 지금의 자신이 퍽이나 낯설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어정쩡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토록 명확하게 전달하다니.

아니, 그보다도 누군가의 눈동자 색을 이토록 음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에 대한 궁금증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남자는 커넌에게 있어서 처음, 그 자체였다.

“…도우넌. 크림, 도우넌.”

크림 도우넌.

달달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우스운 이름이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크림 도넛’이 별명일 것 같았고, 어렸을 때엔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에 혼자
눈물을 찔끔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커넌은 작은 웃음 하나 나오지 않았다.

“크림… 도우넌….”

그저 그의 이름을 계속해서 입에 굴릴 뿐이었다.

설탕 시럽을 잔뜩 바른 도넛을 계속해서 입에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달고, 동시에 너무 달아서 썼다.


동그란 그의 이름이 입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웃긴 이름이죠?”

크림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고, 커넌은 고개만 저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이 콱 잠긴 기분이었다.

커넌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자신의 운동화 앞코로 내렸다.

하릴없이 발이나 동동 구르며 시간을 끄는데, 머리 위로 크림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크림과 두 눈을 맞췄다.

예쁘다.

어둠에 삼켜진 크림을 대신해서 그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빛이 없어 한껏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마 해가 있는 아침이나 오후에는 지금보다 더 푸르게


빛날 것이다.

하지만 커넌은 그것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깊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 싶었다.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닌, 음습하고 어두운 그를.

“눈이 예뻐요.”

머리카락이랑 잘 어울려요.

기어코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벅찬 감정을 숨기려 입을 꾹 다무는 커넌을 바라보던 크림이 말갛게 웃었다.


“갖고 싶어요?”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가질래요?

크림의 짓궂은 농담에 커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커넌이라면 기꺼이 줄 수 있어요.”

“…아니에요. 내가 뭐라고….”

커넌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낡고 오래된 제 운동화와 닮아 있었다.

군데군데가 헤어지고, 오래되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가득하지만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운동화.

잘 닦여 광이 나는 크림의 구두와 대조되는, 자신의 운동화. 괜스레 씁쓸함이 밀려와 커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 그렇게 자기비하를 일삼아요?”

“…크림이야말로 왜 그렇게 다정하게 굴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그럼 안 돼요?”

커넌이 고개를 들어 크림을 마주했다.

청회색 빛 눈동자. 하얀 은발. 검게 그을린 피부.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를 보면 자꾸 울고 싶어졌다.

잔잔하던 감정에 누군가 커다란 바위를 던진 것 같았다.


예고도 없이 던져진 바위에 ‘잔잔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지독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아팠어요?”

크림이 커넌의 왼쪽 관자놀이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오래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흉터를 용케 발견한 것이다.

그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커넌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워낙 오래된 상처라서….”

다 잊었어요.

커넌이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그를 바라보던 크림이 두어 번 더 흉터를 매만지고는 손가락으로 뺨을 훑어 내려왔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커넌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이따금 귓바퀴에 크림의 다른 손가락들이 희미하게 닿았고, 그 간지러운 감각에 커넌이 쭈뼛거렸다.

“아팠겠다.”

그 역시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그에 커넌의 시선이 크림의 턱 끝에 있는 흉터로 옮겨갔다.

오래된 상처는 이미 자리를 잡은 듯 자연스레 존재했다.

아팠어요?
크림에게 똑같이 묻는다면 그도 자신처럼 다 잊었다며 고개를 저을 것 같았다.

원래 상처란, 다쳤을 때보다 아물었을 때 더 아픈 법이니까. 그에 커넌은 그저 두 눈을 감았다.

크림의 간지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지금은 그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보다,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사실… 그런 건 잊을 수 없는 상처잖아요.”

크림이 검지로 제 턱 끝을 톡톡 두드렸다.

같은 상처. 고작 그 하나로 그와 함께가 된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감정들을 토해내야 할 것 같았다.

“크림….”

커넌!

그때 아서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자신을 발견하고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그에 커넌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처럼 아쉬웠다.

“도와줄까요?”

크림이 묘한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커넌이 대답 없이 크림과 사무실 건물을 번갈아 보는데, 크림이 커넌의 손을 세게 잡아 왔다.

“달리기 잘해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자세를 취하던 크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열심히 고개를 젓는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도와줘요.”

커넌이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 절실함에 처음으로 크림이 진실되게 웃었던 것도 같다.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는 이 시점에서 심장이 뛰는 이유는 단순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착각한 그의 진실된 웃음 때문일까.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맞잡은 손에 의해 그의 손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어두운 골목 위로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가 겹쳐 울렸고,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허상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지금 잡고 있는 손이 당장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쉬워.

커넌이 크림의 검은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어둠 속의 검은 손.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모든 게 거짓일까 봐 두려웠다.
턱 끝까지 숨이 찼고, 지친 몸은 아픈 생각만 가져왔다.

“크림,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커넌이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크림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맞잡은 손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가늘고 여렸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것 같았다.

크림이 커넌의 손을 잡아당기는 대신 제 몸을 돌렸다.

뒤로 바짝 따라붙던 커넌의 어깨를 끌어안음과 동시에 좁은 골목이 둘을 삼켰다.

헉. 헉. 몰아쉬는 숨에 짠 내가 섞여 있었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커넌이 고개를 들자 크림이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림과 제 가슴팍이 가깝게 맞닿아 있었다.

“죄, 죄송해요.”

커넌이 크림의 가슴 부근을 손으로 밀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뼈만 남아 그것에서 비롯된 자신의 단단함과는 달랐다.

커넌이 크림을 밀어내던 제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더불어 어정쩡한 자세로 크림과 거리를 두었다.

“이리 와요.”
그러자 크림이 커넌의 등으로 큰 손을 뻗으며 골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크림의 손에 떠밀려 커넌 역시 골목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덕분에 두 사람의 가슴이 닿을 듯 말 듯 다시금 가까워졌다.

그에 커넌의 시선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에 바빴다. 왠지 모르게 위험한
기분이었다.

고요한 적막 속 무더운 열기만이 두 사람을 덮쳤다.

며칠 후면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무더운 열기라니.

제 생각이 우스워 커넌이 설핏 웃었다.

“왜 웃어요?”

작게 사그라지는 웃음을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크림이 낮게 물었다.

그는 궁금증이 많은 남자였다.

그리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질문을 삼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커넌은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늘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아서처럼 두렵지 않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데이븐처럼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햇살 아래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태양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넌이 작게 대답했다.
너무 작게 말해 아마 그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더 물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에게서 아까의 담배 냄새가 났다.

희미하지만 알싸하고 어딘가 시원한 향.

앞으로 이와 비슷한 향을 맡게 된다면 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커넌은 그런 자신이 어쩐지 조금 두려워졌다. 자신이 낯설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걸까.

지금 상태로 정신병원에 간다면 분명 입원을 시키겠지.

이곳에서, 이 생각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커넌이 크림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최대한 의식하지 않겠다고 하는 행동 같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 어색함을 커넌 자신도 모르진 않았다.

“그러죠.”

크림은 긍정적으로 말했으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자세를 고칠 뿐이었다.

덕분에 크림의 구두 앞코와 커넌의 운동화가 맞닿았다.

그를 향해 시선을 내리던 커넌의 이마와 크림의 어깨가 부딪혔다.


“미안해요.”

커넌이 걸음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크림과 제 키가 엇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괜한 민망함에 이마를


쓸어내리는데, 문득 그의 넓은 어깨도 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면 안 돼.

하지만 커넌은 참는 게 익숙한 남자였다.

지금처럼 크림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대신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아.”

크림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을 흘렸다.

그에 커넌은 크림이 자신에게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크림 역시 다른 생각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대답에서 묘한 아쉬움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같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처음 만난 남자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동경. 어쩌면 그런 단순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동경? 정말 그렇게 생각했나요?”


칼을 들이밀면서 위협한 사람인데…. 커넌, 생각보다 겁이 없네요?

닥터 셰인이 능글맞게 말했다.

“평생 눈칫밥만 먹고 살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거든요.”

커넌이 검지로 한쪽 눈두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닥터 셰인이 그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하얀 얼굴에 사방으로 퍼진 주근깨는 눈 주변에도 존재했다.

주근깨 위로 맴돌던 시선은 곧 흐릿한 흉터로 향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그의 상처에 동요라도 했나요?”

자신과 닮았기에, 그도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닥터 셰인이 진저리를 쳤다.

이제야 알았다. 크림이 연쇄살인범이든, 자신에게 모진 상처를 준 사람이든.

그런 건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처음부터 크림에게 빠져 있었고, 점점 더 깊어질 뿐이었다.

“커넌. 쉐일 톰슨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크림 도우넌.”

“…….”

“난 지금, 크림 도우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에요. 당신은… 그를 잘 모르잖아.”


커넌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닥터 셰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손깍지를 낀 손 위로
턱을 괴었다.

“그를 사랑했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처음이었거든요.

나보다 남을 더 걱정하고, 더 생각하고 그러는 거요.

커넌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닥터 셰인을 바라봤다.

“그는 범죄자이고, 당신에게 있어선 가해자죠.”

“하지만 셰인.”

사랑이잖아요.

커넌이 상체를 숙여 닥터 셰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다리의 길이가 맞지 않는 테이블이 그에 맞추어 기울어졌다.

닥터 셰인이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러, 기울어진 테이블을 바로 했다.

“사랑엔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우린 사랑을 ‘위대’하다고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위험’한 거고요.”

닥터 셰인이 커넌의 말을 꼬집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다.

덕분에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닥터 셰인이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 모습을 보던 커넌 역시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세상 모두가 슬퍼졌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슬퍼지면, 모두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이 온다면.

그럼 그 안에서 우리도 ‘정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하고, 우리를 축복하며, 응원하는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도 오는 날이


있을까?

커넌이 닥터 셰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대답을 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커넌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커넌이 좀 두려워졌다.

더불어 커넌을 이렇게 만든 쉐일 톰슨. 아니, 크림 도우넌도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요? 대체 어디까지! …상대방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요.”

“…난 언제나 크림과 함께 행복해지는 나날을 그렸어요.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어둠을 칠했죠.”

크림. 아니, 우리는 어둠과 더 잘 어울리거든요.

커넌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것이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조차 속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닥터 셰인은 성선설*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는 학설을 믿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봐도 그렇고, 제 사랑스러운 두 딸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성선설을 내세우는 근거는 커넌이다.

그는 과연 어린 시절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 셰인은 결단코 아니라고 장담한다.

과거의 그가,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에는 악한 기운이 일조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쉐일 톰슨, 그도 태어났을 무렵에는 선한 인물이었을까.

이번엔 감히 맞다고 단언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모순인가. 아니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이 가엾은 인물이 만들어낸 혼돈인가.

#05 고백

“여기서 일해요?”

크림이 커넌의 사무실을 올려다봤다.

4 층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에 위치했기 때문에 크림의 고개가 한껏 꺾였다.

[피해 전문 변호 사무실]

낡은 간판이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고, 추위에 지친 파리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간판 불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뭐… 그렇죠.”
대답을 머뭇거리던 커넌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질문을 하는 크림의 안색을 살피는 데 집중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기분 탓일까.

사무실을 바라보는 크림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딱딱한 사무환경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성공한 샐러리맨처럼 보였다.

어쩌면 워커 홀릭으로 어린 나이부터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집안의 사업에
치이며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는 부자.

뭐가 되었든지 사무실과 잘 어울릴 것 같은 그가 사무실을 싫어한다니.

그에 커넌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크림이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커넌은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진득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싶어요.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의 눈을 마주한 이라면 그 누가 되었든 막힘없이, 술술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물론 커넌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림을 보면 워커 홀릭에 히스테릭하고, 성공한 샐러리맨 같거든요. 그런데 사무실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좀 모순적이네요.”
커넌이 ‘모순적’, 그 단어를 흐리며 말했다.

부정적인 단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주던 할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들었던 동화처럼, 커넌에게 있어서


크림은 재미있는 존재였다.

재미있고, 뒷내용이 궁금한 동화 같은 남자.

그에게 자신은 어떨까? 다른 사람들처럼 제 붉은 머리를 보며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소심하고 답 없는 제 성격을 지긋지긋해할까. 어느 쪽이든지 별로였다.

그냥 날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커넌이 큰 욕심을 품었다.

“모순이라…. 난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모순 같아요.”

“…왜요?”

“그냥… 서로 끌리는데,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니까?”

크림이 손을 뻗어 커넌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왔다.

완전하게 잡지도, 그렇다고 놓칠 것처럼 위태롭지도 않았다.

제 새끼손가락에 크림의 검지가 닿고, 반대로 제 검지에는 크림의 새끼손가락이 닿았다.

방황하는 커넌의 엄지와 다르게 크림의 엄지는 커넌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의 툭 튀어나온 뼈를 매만졌다.

차가운 제 손에 더 차가운 그의 손. 크림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커넌이 제 엄지로 힘겹게 크림의 엄지를 감싸 쥐었다.

아쉬운 감정이 일었다.

“이제 그만 올라가 봐요.”


크림이 다른 한 손으로 라이터에 불을 지폈다.

라이터의 불꽃에서 아서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가기 싫다.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가지 말라고 해주길. 이 길고 어두운 밤을 함께 하자고 해주길.

“그래야죠.”

하지만 커넌은 짧은 대답과 함께 미련 없이 크림의 손을 놓았다. 유일하게 자신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던
것이 떨어져 나가자, 지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억지로 달라붙는 미련을 떨쳐냈다.

조금의 미련도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놓아줘야 하는 사람. 크림은 그런 사람이었다.

“조심히 가요…. 크림.”

커넌이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팅- 탁.

크림이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반복해서 여닫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커넌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사무실 입구의 문턱 위에 올라설 것이다.


커넌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사형 직전의 죄수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가만히 두 주먹을 세게 쥐던 커넌이 용기를 내어 크림을 돌아봤다.

“크림.”

물 밖에서 아가미를 빠끔거리는 물고기처럼, 커넌이 다급하게 크림을 불렀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가 너무 고조되어 있었는데, 크림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필터가 반쯤 타들어 간 담배가 들려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데도 이가 하얗구나.

커넌이 불필요한 생각과 함께, 크림을 따라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쓰고 차가운 사람. 그런데도 그의
중독은 지독하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대로 이별인가요?

원래는 이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크림이 그렇다고 말할까 두려웠다. 그를 마지막으로 정말 이별이 될까 봐.

“커넌이 원한다면.”

크림은 어떤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일까? 커넌이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느릿하게 등을 돌려, 그보다도 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사형집행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다.

작고 초라한 몸에 어찌나 힘이 들어가 있는지, 크림이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봤다.

정말 웃긴 사람이야.

작은 초식동물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작은 육식 동물이었다.

그럼 자신은 어떠한가? 후우- 크림이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를 끝으로 짧아진 담배를 메마른 땅에 떨어뜨렸다.

작은 불씨를 지키던 담배가 무력하게 그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던 크림이 고개를 들었다.

“커넌.”

크림이 어두운 사무실 계단을 오르고 있는 커넌을 불러 세웠다.

얼마나 가기 싫어하는지는 그가 이동한 걸음 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웃긴 사람이다. 아무리 끌어 내려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범한 세상이 재미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한 생각에 ‘커넌’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크림?”

상체와 고개만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커넌에게 크림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에 커넌이 완전하게 몸을 돌렸다.

희미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데, 색색- 한숨처럼 작게도 부른다.

그리고 크림은 그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가기 싫다면, 나랑 같이 갈래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왼쪽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좀 전과 똑같은 그의 모습에 커넌이 작게 웃었다.

공주님을 에스코트하는 왕자님. 그와 잘 어울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고귀하고 소중한 공주님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서 왕자님을 가로채는 못된
악녀일까? 커넌은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고귀한 공주님이든, 악랄한 악역이든.

누가 되어도 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뭐든….”

커넌이 엉성한 폼으로 내달려 크림의 앞에 섰다.

그대로 달려 품에 안길까, 그런 충동적인 생각도 했으나 커넌은 여전히 겁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이다.

만약 자신이 공주님이라면 왕자님은 당연히 제 몫이었다.

만약 자신이 악녀라면? 다른 공주님이 존재한다면?

없애면 되지.

커넌이 홀가분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좋아요.”

커넌이 제 어깨를 크림과 나란히 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또렷한 목소리가 제 귓가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 커넌이 다시 한번 웃었다.


***

“지금은 어때요?”

공주님이에요? 아니면… 악랄한 악녀?

닥터 셰인이 굳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커넌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제는 상관없어요.”

커넌이 깍지 낀 손을 배 위로 얹으며, 몸에서 힘을 뺐다.

의자에 걸쳐진 이불처럼 널브러진 자세가 닥터 셰인의 심기를 건드리길 바라며.

“이미 내가 가졌거든요.”

커넌이 비밀을 떠벌리는 것처럼 은밀하지만, 크게 속삭였다.

닥터 셰인은 어떠한 반응도 없이 커넌을 내버려 뒀고, 곧 두 사람을 품은 공간에 깊은 침묵이 자리 잡았다.

누구 하나 그 침묵을 깨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팽팽한 긴장감이 홀로 지쳐, 찢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닥터 셰인이 급격한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커넌.”

닥터 셰인이 목소리를 낮춰 커넌을 불렀다.

진정하라는 의미였지만, 흥분한 커넌은 좀처럼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커넌의 말을 단칼에 자른 닥터 셰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라도 났다는 것처럼, 종이 하나를 커넌에게 내밀었다.

[사이코패스, 쉐일 톰슨. 종신형 210 년 확정. 인권 보호 협회 ‘차라리 사형을 시켜달라.’ 다툼


일어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눈으로 훑던 커넌이


가만히 종이를 들었다.

“눈을 뜨고 현실도 좀 보고 그래요, 커넌.”

좁은 새장 안에 한껏 몸을 구기고 들어가 있지만 말고요.

닥터 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말투와 달리 커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커넌의 흉터를 매만져주던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닥터 셰인이 면담실을 벗어났다.

쾅- 철제문이 날카로운 소음과 바람을 일으켰다.

그에 커넌이 들고 있던 종이가 팔랑이니, 작은 바람에도 이리 힘없는 것이 어찌 그리도 묵직한지.

가슴마저 짓눌리는 듯 괴롭기 짝이 없었다.

**

“커넌, 뭐 해요?”

크림이 커넌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커넌이 서둘러 크림과 눈을 맞췄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어릴 때인가 봐요.”

커넌이 멋쩍게 웃으며 들여다보던 액자를 크림에게 들어 보였다.

액자 안에 담긴 앳된 모습의 크림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고작 해봐야 대여섯 살로 보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머니께서 엄청 미인이시네.

커넌이 사진 속 크림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린 크림은 지금보다 좀 더 생기 있고, 진실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제 어머니의 팔에
매달리듯 서 있는 자세가 불안해 보였다.

커넌이 그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 인기가 많았다고는 하더라고요.”

크림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사진을 들여다본 탓인지, 그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커넌이 크림의 눈치를 살피다가 액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집이 예뻐요.”

커넌이 뒤늦게 집 안을 둘러봤다.

분위기를 전환할 겸 뱉은 말이기는 했지만, 무작정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입구에서부터 고급 아파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했더니, 역시나 내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좋은 향기까지 은은하게 풍겼는데, 덕분에 사람 사는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깔끔해서 그런가?

액자를 빤히 바라보던 커넌이 검지로 신발장 위를 닦듯이 밀어냈다.

먼지 한 톨 없는 신발장 위로 뽀드득- 커넌의 살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후-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검지에 입김을 불어내며 커넌이 고개를 들자, 크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혼자 살면 집이 더러워지기 십상이죠.”

항상 청소에 신경 쓰고 있어요.

크림의 말에 커넌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남의 집 살림살이에 참견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에 커넌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니, 크림이 손을 뻗어 커넌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리 와요.”

그 손길에 놀란 커넌이 서둘러 신발을 밀어내고, 실내화에 발을 욱여넣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처럼 실내화가 묵혀둔 한기를 뿜어냈다.

그에 커넌이 몸을 부르르 떨며 크림의 뒤를 따랐다.

“보통 집에서는 뭘 하는 편이에요?”

앞서 걷던 크림이 물었다.

그에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던 커넌이 크림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은은한 조명 덕분에 크림의 머리카락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노을을 연상케 하는 것이 퍽


예뻤다.

커넌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매만졌다.

고작 그 하나만으로 심장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거의 잠만 자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거든요.”

크림은요?

커넌이 크림에게로 황급히 질문을 넘겼다. 말주변이 없는 탓에 이게 최선이었다.

“음…. 글쎄요.”

책도 읽고, 요리도 해요.

앞서 걷던 크림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독서와 요리. 하나같이 그와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아이같이 웃는 크림을 따라 커넌도 넌지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사람도 죽여요.

크림이 어린아이처럼 코를 찡그렸다.

장난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그가 내뱉은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기분 좋게 호를 그리고 있던 커넌의 입꼬리가 그에 맞추어 점점 굳어갔다.

“…네?”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요?’

‘나는 어떨 것 같아요?’

문득 그가 들이밀었던 칼이 지금도 똑같이 제 목을 겨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골목을 쉼 없이 내달렸던 때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커넌이 벅차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커넌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고.”

나는… 이곳에서 사람을 죽이고.

크림의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커넌만이 담겼다.

두려움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 혼란의 사이에서 허덕이던 커넌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 살려주세요.”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커넌이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신을 믿지 않았던 터라, 자세가 어정쩡했다.

그런 커넌을 지켜보던 크림이, 커넌과 같이 자세를 낮추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고, 동시에 둘의 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내가 커넌을 왜 죽여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크림이 한 손으로 커넌의 두 뺨을 세게 쥐었다.

당장에라도 턱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으윽.

고통에 커넌이 신음을 터뜨리자 크림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퍼석하게 죽어 있던 눈에도 묘한 생기가
돌았다.

“아아, 커넌!”

한숨처럼 웃으며 크림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에 맞추어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춤을 췄다.

하아-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던 크림이 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커넌.

크림이 젖힌 고개를 원상태로 돌리며 애처롭게 그를 불렀다.

맥없이 풀린 눈동자에 울고 있는 커넌의 모습이 비췄다.

그 눈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애틋함과 만족스러운 날카로움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참 예뻐요.”
나는, 내 머리는 너무 밝아서….

크림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줌을 잡아채 제 눈앞으로 가져갔다.

“아아- 피가 튀면 물이 들더라고요.”

크림이 불만스럽다는 듯 인상을 썼다.

지금껏 자신에게 계속 웃어주었기 때문인지, 커넌은 그런 크림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커넌이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커넌이 희미한 의식의 끈을 애써 다잡았다.

그런 커넌을 가만히 지켜보던 크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철컥.

현관문 외시경으로 밖을 살피던 크림이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그곤 다시 커넌의 앞에 앉았다.

“커넌.”

크림이 경련하는 커넌의 양쪽 어깨를 제 손에 가두었다.

큰 손에 잡힌 어깨는 유난히도 작고 동그랬다.

그 위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크림이 다정하게 커넌을 불렀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요. 난 커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거든요.”

진짜예요.

믿고 싶은 목소리가 절절하게 말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믿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커넌이 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크림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커억!

그리고 그와 동시에 커넌의 어깨에 머물던 크림의 손이 점차 올라가 그의 목을 쥐었다.

막힌 숨을 토해내며 커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목을 세게 누르는 압력에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는데, 그게 무서우면서도 퍽이나 서러웠다.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더니. 나쁜 놈.

커넌이 크림을. 정확하게는 크림의 형체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나름 발악을 하던 몸뚱이에서 한순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냥 조금 괴롭힐 거예요.”

아주 아주, 조금.

흐릿해지는 의식의 끝자락에 환하게 웃고 있는 크림의 입꼬리가 걸렸다.


신발장에 놓여 있던 액자 속 어린 크림의 미소와도 닮아 있었다.

그것은 더없이 해맑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살인자의 웃음이었다.

#06 그, 소년

[13. 애정 결핍에 의한 폭력성 및 사고력의 한계 관찰 기록장 - 쉐일 톰슨(17)]

낡은 비디오테이프 위로 오래된 듯, 잉크가 번진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훑던 닥터 토마스가 플레이어 안으로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왜 이리도 마음이 심란한지, 닥터 토마스가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쉐일 톰슨이라고… 내 조수가 담당했던 아이지. 워낙에 오락가락하는 아이라서 관찰 기록장도 여러 개


찍었을 거야. 그중에서 13 번째인가…. 거기에서 그러더군. 자기가 엄마를 죽였다고. 뭐, 다음
관찰에서는 거짓이라면서 바로 부인했지. 물론 우리도 그런 걸 온전히 배제하고 환자를 봐야 하니까, 그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에 종신형 선고받은 거 봤지? 그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 아이… 정말로 제 엄마를 죽인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담당 교수였던 그레이븐 박사의 깊은 한숨이 옮은 듯, 닥터 토마스가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쉐일, 준비됐어요?

그때 모니터 화면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레이븐 박사가 말했던 그의 조수인 모양이다.

그에 닥터 토마스가 시선을 모니터 화면에 고정시켰다.

화면 속에는 목소리의 주인 대신 앳된 소년의 모습이 보였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쉐일 톰슨.”

태양에 그을린 듯 새까만 피부와 상반되는 하얀 은발.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보석같이 빛나는 청회색빛
눈동자.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닥터 토마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와의 만남이 정신병원이 아닌 흔한 길거리나 술집이었다면, 자신도 남들처럼 그의 외모에 감탄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해볼까요?

-쉐일 톰슨, 17 살.

-…그리고?

-…얼마 전에 엄마를 죽였어요.

하지만 이곳은 정신병원이었고, 그는 환자였다.

앳된 소년은 거짓말에 거리낌이 없었고 그를 능숙하게 숨겼으며,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순수했다.

‘마음 굳게 먹어, 토마스.’

그에게 매료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그레이븐 박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했다.

마치 모든 것이 그를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어딘지 자꾸만 초조한 기분이 들어 닥터 토마스가 손톱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새끼손가락부터 검지까지로 옮겨지는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쉐일, 진실만을 말하고 있나요?

-….

-…엄마를 미워했나요?

상대방의 질문에 제 신발만 바라보며 발장난을 하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 맞추어 닥터 토마스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치켜세우자, 화면 속의 소년과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쩌면요. 어쩌면 미워했을 거예요.

엄마를 미워할 명분은 수도 없이 많았거든요.

소년의 차가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렸다.

그는 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망설였고, 어쩌면 엄마를
미워했을 거라는 말에는 반대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애증. 그 무엇보다도 소년의 감정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때였다.

-우리 엄마는 매춘부였거든요.

자기 말로는 하루에 수십 명의 지명을 받는, 흔히 말하는 인기녀였대요.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해서 늘


비웃기는 했지만… 예뻤어요, 우리 엄마. 피부는 내 머리만큼 하얗고, 얼굴은 오밀조밀 인형처럼
생겼거든요. 그래봤자 결국 창부지만요.

-엄마가 매춘을 하는 게 싫었나요?

-딱히 상관은 없었어요.

-…….

-창녀, 창부, 매춘부, 몸 파는 여자. 그런 말 듣는 걸 싫어했는데, 일부러 그렇게 부르곤 했죠. 가끔은
목에 시퍼런 멍을 달고 오기도 했고, 손목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했어요. 아, 하루는
누구한테 그렇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서 집에 왔었거든요? 입에 담배를 탁- 물고 얼음찜질하는
모습이 진짜 가관이었죠.

소년이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처럼 시선을 멀리 두었다.

공허한 눈빛과 달리 입술은 최대한 비열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닥터
토마스가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담배 좀 피워도 되죠?

소년이 질문과 함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가까이에 라이터를 두고, 두어 번 부싯돌을 굴리자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스읍- 깊이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다시 길게 내뱉으며 소년이 상대방을 주시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매춘을 했으니, 제 버릇 남 못 준 거죠. 아직도 엄마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또렷해요. 서럽게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환희에 찬 웃음 같기도 했죠.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늘
두 귀를 막고 멍하니 TV 만 바라봤었어요.

-주로 어떤 걸 봤죠?

어린아이가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이었나요? 예를 들면 폭력성이 다분한 영화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같은


거요.

상대방이 소년을 몰아세웠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었다.

폭력성이 있는 범죄자들은 그와 비슷한 것들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착각.

닥터 토마스는 그것을 ‘정신의학의 부조리’라고 부르곤 했다.

실제로 그가 담당했던 환자들 중 대다수의 환자들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가학적인
영상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현재 소년에게 던져진 질문은 아주 큰 잘못이었다.

-…탱고 영상이었어요. 아주 오래된 흑백 영상이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인상 깊은 장면이라도 있었나요?

-표정이요. 춤을 추는 이들은 즐거운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무감각했죠. 어쩌면 그 영상을 찍기 위해 수십 번 춤을 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영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죠?

-그게 다예요.
솔직히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고작 해봐야 7 살도 안 된 꼬마였는데.

그냥 그 춤이 참 좋아 보였어요.

그때까지 춤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그러면서 늘 기도했죠.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누가 나를 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악마여도 좋으니까 나를 좀 구해달라고. 그럼 난 그와 함께 환희에 찬 표정으로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말을 마친 소년은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점점 짧아지는 담배 필터만큼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영상은 그 어떤 소리도 없이 그저 소년의 모습만을 담았고, 닥터 토마스 역시 그저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커넌.

그때 소년이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그에 깜짝 놀란 닥터 토마스가 스피커를 조작하여 볼륨을 높였다.

-커넌? 그가 누구죠?

-…심부름을 하다가 만난 남자였는데, 머리카락이 몹시 붉었어요.

처음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시체인 줄 알았죠.


내가 죽였던 인간들 피가 딱 그런 색깔이었거든요.

하핫. 소년이 쩍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몸을 접으며 과장스럽게 웃어 보였다.

마치 재미있는 코믹스를 본 것처럼 말이다.

그에 닥터 토마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커넌.”

-다음 타깃이었나요?

상대방의 질문에 닥터 토마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년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상대를 마주했고, 잠시간 정적이 지독히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닥터 토마스는 화면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자신은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애정을 갈구하는 가정 학대 피해 아동의 눈빛이었고, 술에 찌들어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는 제 청춘을


그리워하는 절도범들의 눈빛이었다.

아주 가끔은 제 아내도 저런 눈빛을 하곤 했다.

턱도 없이 비싼 명품 가방을 볼 때나, 혹은 자신이 오랜만에 꽃다발 선물을 할 때 말이다.

토마스는 소년의 눈빛에서 희망과도 같은 무언가를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잔뜩 잠겨 있었고,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다음 타깃….”

닥터 토마스가 허망한 심정으로 영상을 멈추었다.

굳이 소년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빛을 본 사람들은 숨겨진 그 대답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Yes. (네.)

라고 말이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선생님, 말씀하세요!”

다급하게 끊기는 전화를 붙잡고 경찰관, 클로이 제크가 애타게 상대방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통화는
종료된 상황이었고, 짧은 통화 탓에 수신자 조회도 어려웠다.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클로이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야?”

클로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케리 러셀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물어왔다.

그런 케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찝찝한 기분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아, 여기 위치요? 여기가 어디냐면….’

“MG 타운, 751B.”


신고자의 주소를 상기한 클로이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뒤집어,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끄적였다.

워낙에 넓은 외곽 도시이고, 범죄율도 높았기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길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 씨….”

결국 위치 조회 시스템을 실행시켜 [MG 타운, 751B]를 검색하자 총 2,894 개의 결과가 조회되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클로이가 복잡한 심정을 담아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상쇄시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어? 어떻게 오셨죠?”

그때 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맞추어 클로이가 고개를 들어 케리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고, 시선 끝에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허름한 코트에 싸인 어깨는 잔뜩 움츠려 있었고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는 등,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가 보는 이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클로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 클로이를 바라보던 케리 역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두 사람을 주시하던 중년 여성이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겨 두 사람과의 거리를 좁혔다.


“제… 아이들이 실종되었어요.”

“…좀 더… 정확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우선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시죠.”

케리의 안내에 따라 클로이와 여성이 자리를 옮겼다.

여성은 자리에 앉아서도 불안한 듯 시선을 바쁘게 움직였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테이블 위로 커피잔을 내려놓던 케리가 여성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40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은 얼굴에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손목에는 푸른 멍 자국까지


보였다.

여성의 손목에서 둥근 테이블로 시선을 매끄럽게 마무리한 케리가 커피잔을 여성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아이들이라고 하면 몇 명을 말씀하시는 거죠?”

“…두 명이요. 제 아들들이에요.”

“나이는 어떻게 되죠?”

“한 명은 17 살이고, 한 명은 14 살이에요. 어리기도 하고, 지금까지 밖에서 잠을 잔다거나 한 적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좀 진정하세요.

케리가 차분한 음성으로 여성의 말을 끊어냈다. 그에 놀란 클로이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케리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원래도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타이밍이었다. 그에 클로이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하루 정도는 단순 가출일 수도 있어서… 보통 최소 3 일은 기다려보는 편이거든요.”

“아니요. 아니에요.”

케리의 말에 여성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서류를 뒤적이더니, 이내 원하는 것을 발견한 듯 그것을 가지고 다시 여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이 서류를 작성하고 집에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청소년 가출 신고서]

여성이 케리가 건넨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눈으로 훑다가 클로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여태껏 가만히 있던 클로이에게 확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여성에게 클로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부인.”

클로이의 말에 여성 역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클로이는 그 모습에 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뒤섞여 감정이 시끄러웠다.

그때 케리가 팔꿈치로 클로이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케리를 바라보니 눈을 찡그리며 턱짓으로 여성을 가리켰다.


클로이가 그를 따라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쥔 여성이 열심히 신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

“…뭐가?”

“…그냥….”

케리가 클로이의 귓가로 속삭이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물러났다.

아마도 클로이의 냉랭한 반응에 주춤한 모양이었으나, 별로 그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진술 내용 중 거짓이 포함되어 있으면 바로 철창행이에요.”

“케리!”

“…거짓말 안 해요.”

제 아이들인 걸요.

여성이 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경찰의 양심이었는지, 아니면 케리의 불량한 태도에서 비롯된 연민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클로이는 그저 여성이 작성한 신고서를 눈으로 훑고 또 훑을 뿐이었다.

“앤드류 필립과 크리스 필립.”

“네. 앤드류가 형이에요.”

“좋아요. 그런데, 부인.”


주소가 MG 타운 750B 네요.

클로이가 신고서를 바라보던 시선을 여성에게로 옮겼다.

그런 클로이에게 여성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었고, 그는 좀 전에 케리에게 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

똑똑-

밀려오는 피곤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닥터 토마스가 노크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어느새 바깥이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토마스, 들어가도 될까요?”

닥터 셰인의 차분한 목소리에 닥터 토마스 역시 차분하게 그러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닥터 셰인이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커넌과 상담이 있다고 하더니, 그녀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죠, 셰인?”

“…오늘 커넌과 상담을 했어요.”

“스케줄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었습니다.”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티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가 푹신한 소파 위에 앉으니, 마치 구름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안락함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던 닥터 토마스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죠.”

내게 찾아왔다는 건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죠?

닥터 토마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닥터 셰인을 꿰뚫어 봤다.

그에 닥터 셰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 닥터 토마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실 잘 모르겠어서 왔어요.”

테이블 위로 평소 자신의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던 녹음기를 올려놓은 셰인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닥터 토마스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셰인 역시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어떻게 해야 이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에 셰인은 그저 녹음기를 재생시킬 뿐이었다.

어쩌면 닥터 토마스를 찾아온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자신처럼 괴로워지면,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면. 자신도 함께 발버둥 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범죄자이고, 당신에게 있어선 가해자죠.

-하지만. 셰인. …사랑이잖아요. 사랑엔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우린 사랑을 위대하다고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위험한 거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세상 모두가 슬퍼졌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슬퍼지면, 모두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이 온다면. 그럼 그 안에서 우리도 정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하고, 우리를 축복하며, 응원하는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도 오는 날이 있을까?

난 언제나 크림과 함께 행복해지는 나날을 그렸어요.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어둠을 칠했죠.

커넌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녹음기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닥터 토마스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오래 지속되었다.

“그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에요.”

닥터 셰인이 제 의견을 피력했고, 닥터 토마스 역시 그녀의 의견에 반문하지 않았다.

닥터 토마스는 커넌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때를 떠올렸다.

‘정말 단순 사건 피해자, 맞습니까?’

‘…범인이 모든 죄를 인정했다고 하더군.’

‘토마스는 저게 피해자의 눈빛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토마스.’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닥터 셰인과 비슷한 말을 주고받았었다.

당시에도 자신은 닥터 셰인에게 같은 말을 물었었다.

“별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번에도 닥터 토마스는 닥터 셰인에게 물었다.

그렇게 묻는 닥터 토마스의 미간 사이에 짙은 주름이 그어졌다. 예전에는 조금 더 순하고 젠틀한


느낌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닥터 토마스의 얼굴이 마냥 무겁게 느껴졌다.

온전히 그를 느끼며 닥터 셰인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목이 빳빳한 느낌이었다.

-의-

#07 토마토 스튜

흐음, 흠-

부엌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크림이 연신 허밍을 흥얼거렸다.

어색한 듯 잘 어울리는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냄비 뚜껑을 열어보기도 했고, 음식의 간을 맛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어렸을 때, 부엌 냄비에는 항상 토마토 스튜가 가득 있었어요.”

끓이기도 쉽고 한 번 만들면 족히 일주일은 먹을 수 있으니, 엄마의 꼼수였죠.

‘또 토마토 스튜예요?’

그렇게 물으면 엄마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미안한 듯 애매하게 웃었던가.

이상하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식당에서 파는 것과는 맛이 아예 달랐다는 것이다.

가끔은 하나도 익지 않은 탓에 토마토의 형체가 그대로였고, 때로는 새까맣게 태워 씁쓸하기도 했다.

지지리도 맛이 없었지.

나무 주걱으로 냄비 속 토마토 스튜를 휘젓던 크림이 당시를 회상하듯 입꼬리를 진득하게 끌어올렸다.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여자가… 최선을 다해서 만든 결과물이었으니까.

크림이 손등에 토마토 스튜를 조금 떨어뜨리고는 혀로 핥아 올려 맛을 봤다.

딱 알맞게 익은 것이 식욕을 돋웠으나, 이상하게 새까맣게 타 쓴맛을 내던 것보다도 맛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에 크림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어째 영 뒤통수가 따갑다 했더니….

마냥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커넌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을 등지고 앉은 탓인지, 아니면 그냥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아 있는 탓인지.

처음의 말갛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동자가 탁하게 죽어 있었는데,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또 토마토 스튜예요?’

‘…먹기 싫으니?’

불현듯 떠오른 엄마의 메마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보다 더 완벽했을 정도로.

탁.

크림이 손을 뒤로 뻗어 가스 불과 더불어 자신의 생각 스위치를 꺼버렸다.

지금은 그저 커넌의 탁한 눈동자에 취해 허덕이고 싶었다.

지나가 버린 시시한 과거를 회상하느라 지금의 기쁨을 헛되이 보내기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예전에는 토마토 스튜를 생각하면 엄마가 떠올랐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크림이 끈적이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커넌의 눈, 코, 두 뺨에 자리 잡은 작은 멍과 메마른 입술,


갸름한 턱, 그 밑에 파랗게 멍든 가는 목까지.

‘살려주세요.’
조금만 더 세게 쥐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얇던 목의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를 상기시키듯 크림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느슨하게 펴기를 반복했다.

‘살려주세요, 크림.’

‘더 빌어봐요. 더!’

차라리 그 가는 목을 부러뜨렸다면 이렇게까지는 아쉽지 않았을까.

크림이 다시 한번 세게 주먹을 쥐었다.

네 개의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고, 두드러진 뼈마디 사이사이로 터질 것처럼 힘줄이 솟아도 여전히


부족한 기분이었다.

‘…날 죽이면… 평생 후회할 텐데, 괜찮겠어요?’

그에 크림이 굶주린 포식자의 눈으로 커넌을 다시 훑어 올라갔다.

파랗게 멍든 가는 목과 갸름한 턱, 메마른 입술과 두 뺨에 자리 잡은 작은 멍.

코, 눈,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아무래도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붉은색을 보면 기분이 들떠서는… 도통… 도통, 가라앉질 않더라고요.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온통 어둠인 곳에서도 희미한 빛에 기댄 머리카락이 겨우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안고 있었다.


단숨에 바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이.

그 하찮은 사랑스러움에 크림의 마음이 일렁거려 자꾸만 자신을 재촉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하고 싶었다.

“토마토 스튜, 붉은 피.”

그리고 커넌의 머리카락.

단숨에 커넌의 앞에 쭈그려 앉은 크림이 나른한 손길로 커넌의 머리카락을 툭 건드렸다.

그 작은 손짓 하나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빛 한 줌 없이도 그의 눈은 황홀하게 빛났고,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꿈을 꾸는 어린아이의


것과 닮아 있었다.

“…….”

그에 홀린 듯 커넌이 끈적이는 시선으로 크림을 훑어내렸다.

반듯한 이마 밑으로 그린 듯 잘생긴 눈썹. 그 아래엔 보석을 숨긴 동굴이, 다시 그 아래엔 높은


내리막길이 매끄럽게 호를 그리는 입술로 자신을 인도했다.

고작 그 하나에 두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든 두려움이 상실되고, 지금 당장 그의 손에 목이 졸려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황홀할 것만 같았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그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크림이 커넌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 멈추어 엄지로 원을 그리기도 하고, 새끼손가락으로 턱 끝의 톡 튀어나온 뼈를


살며시 건드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크림의 손바닥 군데군데에 박인 굳은살들이 커넌의 매끄러운 뺨을 둔탁하게 두드렸다.

“나는 늘 그것들을 갈망했어요.”

뼈에 사무치도록.

크림이 허탈한 한숨과도 같은 웃음에 진심을 뒤섞어 내뱉었다.

어렸던 자신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그때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비웃음인지.

돌이켜보면 자신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고,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던 때.

이를테면 엄마의 따뜻한 눈빛이나 낭비된 자신의 삶 같은 것 말이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탐한다고 하잖아요.”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만,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일이죠.

크림이 꿈을 꾸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고,


커넌은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나는 늘, 생각했어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지.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선물로 준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가 나약한 건지, 아니면 그저 신이 내게만 무자비한 건지.

세상에서 도태된 방랑자마냥… 인생의 귀퉁이에 덩그러니 남겨져, 하루는 신을 원망하고 또 하루는 신에게
구걸도 했어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제발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만들어달라고.”


설령 그것이 나를 좀먹고, 망가뜨린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크림이 말의 끄트머리에서 눈을 떴다.

마치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끝냈다는 듯이.

그때까지 크림을 빤히 바라보던 커넌이 갑작스럽게 얽힌 시선에 놀라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옮겼다.

그에 크림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커넌이 한 박자 느리게 그를 따라 했다.

어둠에도 삼켜지지 않는 그의 머리카락부터 창백한 두 뺨에 가득 채워진 주근깨,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자신의 손도장이 찍힌 목. 자신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목 주변이 다 늘어난 티셔츠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그런 의미로, 난 커넌의 머리카락도 참 좋아요.”

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오로지 나만을 위해.

크림이 커넌을 빤히 바라봤다.

얄밉도록 꾹 다물어진 입술이 자꾸만 조바심을 일게 했다.

마치 그를 재촉하는 것처럼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자신을 재촉하는 손바닥에 손톱을 세우기도 하고, 힘줄이 끊어질 것처럼 세게 주먹을 쥐어보기도 했으나
도무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크림이 그를 참지 못하고 커넌의 팔뚝을 덥석 잡으니, 그에 맞추어 커넌의 몸이 앞뒤로 격하게


흔들렸다.

“커넌은요? 커넌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림이 커넌의 팔뚝을 잡은 손에 좀 더 세게 힘을 주었다.

당장에라도 으스러뜨릴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세게 말이다.

“아악!”

그에 커넌이 고통스럽게 소리치고 크림을 향해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크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움직임이 격정적으로 변해가며 거리를 좁히니, 감히 몸싸움이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한
모양새였다.

크림이 커넌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면 커넌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왔고, 그러다가 놀라 도망치면


크림이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커넌 역시 나를 똑같이 마주했으면 좋겠어요.”

나와 똑같이, 나를 미워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고 갈망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다 배제하고, 그냥 온전히 나만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크림이 커넌의 팔뚝에서 그의 어깨로 손을 옮겼다.

자꾸만 자신을 피하려는 그가 얄미워, 일부러 힘 조절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어깨를 세게 쥐고, 나머지 손으로 그의 턱을 고정시켰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을 담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봐요. 얼마나 좋아요.”

“…그만 좀 해요.”

“커넌.”

“그만 좀 해요, 크림!”


참다못한 커넌이 크림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텅 빈 거실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이건 비정상이야.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야.

커넌이 괴로운 듯 인상을 썼다.

나는 그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크림에게 뱉은 말이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왔다.

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거세게 충돌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럼요?”

그럼 왜 내게 온 거예요?

크림이 무릎걸음으로 커넌과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크림의 두 손이 황망하게 커넌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커넌이 그를 따라 자신의 무릎을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니, 그냥 그렇게라도 해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에 의해 상처받은 그를 마주하는 것이 지독히고 고통스러웠다.

“다 당신의 착각이잖아.”

“아니에요, 커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크림이 커넌의 두 손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힘 조절이 어려운 듯 손에서 손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커넌의 감정을 더욱 북받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그에 대한 원망인지, 아니면 가슴 절절한 미안함인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커넌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쉴 틈 없이 울었다.

“할 수 있잖아.”

나를 미워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할 수 있잖아요.

크림이 참지 못하고 커넌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쩌면 일종의 심술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답 없이 울기만 하는 커넌이 얄미워서.

혹시라도 제 심술에 지레 겁을 먹고 꾹 다문 입술을 벌려, 속에 있는 진심 한마디를 툭 뱉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못 해요, 크림.”

하지만 커넌의 대답은 크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차라리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면 덜 얄미웠을 텐데…. 제 심술에 지레 겁을 먹고 툭 뱉은 진심 한마디는


듣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하려고 노력해봐요. 왜 노력도 안 해보고 그래요. 그냥 나를 미워하라니까요? 그 누구보다도, 하물며


나 자신보다도 나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좀먹고, 망가뜨려도 상관없으니.”

나를 좀… 사랑해달라고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남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왜 나만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원해야 하는 거예요?

이걸 부당하다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면 안 되는 건가요?


왜 나에게만 그런 건데요?

“그냥 커넌이 나를 좀 사랑해주면 안 돼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딱 그거 하나만 바랄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그거 하나만요.

크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도르륵 떨어졌다.

다 큰 어른이 어울리지도 않게 떼를 쓰는 것이 왜 그리도 안쓰러운지, 커넌이 못 이기는 척 크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자신을 이토록 원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자신을 미워하라고 하면서도 사랑해달라고 조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눈물 한 방울에 이토록 심장이 철렁한 적도, 누군가가 주는 고통이 아프지 않고 기쁜 적도 모두


처음이었다.

“…….”

어둠에 잔뜩 물들어 모든 색을 상실한 것처럼 덩그러니 그곳에 놓여 있음에도 밝게 빛나는 것이, 감히 알


수 없었다.

태양이 사랑으로 어루만진 남자.

그렇다면 자신은 태양인 것일까?

나는 정말 그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 걸까?

감히 알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감히… 감히 알 수 없었다.

#08 꿈속
잠에서 깬 듯이 몽롱한 의식 속, 맛있는 냄새가 났다.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엄마가 해주던 토마토 스튜.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커넌이 눈을 떴다.

방 안 가득 햇살이 넘쳤고,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에 햇살에 섞인 먼지들이 날아다녔다.

그를 바라보며 잠이 깰 때까지 기다리던 커넌이, 이내 눈을 두어 번 비비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쩐지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허공에 뜬 발을 앞뒤로 흔들다가 시야 속으로 갈색 문이 들어왔다.

낡아서 문의 가장자리 페인트가 벗겨진 낡고 오래된 갈색 문.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무엇이 있더라.

고개를 든 궁금증에 작은 발이 낡은 침대에서 투둑 떨어졌다.

여린 아이의 발은 군데군데 터지고 갈라져 딱지가 앉아 있었는데, 그럼에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끼익- 낡은 문이 버거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에 부엌에서 무언가에 열중을 하던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니?

다정한 그 목소리에 커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부끄러운 기분에 자꾸만 손끝으로 시선이 향했으나, 그것을 억지로 붙잡아 엄마와 마주했다.

왠지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엄마.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힘겹게 엄마를 불렀다. 그에 테이블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토마토 스튜를
내려두던 엄마가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쓸어주었다.

커넌. 예쁜 우리 아들.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아, 꿈이구나.

똑똑.

사무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커넌이 눈을 떴다.

흐릿한 초점 사이로 소등된 조명이 들어왔다.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소등과 점등을 반복하는 조명이 꺼져 있는 것을 보니, 어느덧 해가 뜬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하루가 마치 2 시간인 것처럼 시간이 흘렀다.

뭐, 이제는 익숙하지만.

커넌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식판을 들고 있는 존을 바라봤다.

원래도 밥을 잘 먹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입이 썼다.

꿈에서 크림과 엄마의 토마토 스튜가 나와서 그런가.

“커넌.”

오늘은 닥터 토마스와 면담이 있어요.

그러니 꼭 밥을 먹어야 합니다.

커넌의 생각 틈에 불쑥 존이 끼어들었다.

그에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존에게서 식판을 빼앗아, 그대로 바닥에 팽개쳤다.


먹기 좋게 잘라져 있던 바게트빵과, 방울토마토, 샐러드와 수프가 순식간에 바닥을 어지럽혔다.

그중 터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방울토마토를 커넌이 맨발로 짓밟아 터뜨렸다.

존을 향한 일종의 협박인 셈이었다.

건드리지 마. 선을 넘지 마.

존 역시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미루다가 어렵게 잡은 면담이었다.

이번에도 미룬다면 반의 반으로 삭감된 월급을 받게 될 것이었다.

“…다시 준비해올게요.”

“커넌.”

존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우려는 그때, 낮고 음산한.

더불어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토마스.

심장학 박사인 아버지를 따라 의사를 꿈꾸던 청년은 아주 섬세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돌봐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존은 그만 나가봐요.”

닥터 토마스가 존의 허리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5.5 피트를 겨우 넘는 닥터 토마스가 제법 장신인 존의 어깨를 두드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그림이었으나 커넌은 굳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커넌.”
닥터 토마스가 매끄럽게 올라간 커넌의 입꼬리에서 더러워진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가 커넌의 발에 으깨진 방울토마토를 보고는 깊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습관적으로 썼던 안경을 벗어, 눈과 눈 사이를 꾹 눌러 지압했다.

자신과 면담을 할 때에도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안경을 벗으면 안경 코 받침에 눌려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이 퍽이나 웃겼다.

가끔은 그 표정을 보려고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고는 했었다.

“커넌.”

바로 지금처럼 대답을 회피하면 보통 몇 번 더 자신을 채근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는


했는데, 오늘은 단단히 벼른 듯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닥터 토마스가 계속해서 커넌의 이름을 불렀다.

똑 부러지는 발음과 정확한 악센트의 낮은 목소리에 커넌이 등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에 나풀거리며 퍼지는 머리카락이 마치 사건 현장에 튀긴 핏방울처럼 일어섰다.

“커넌.”

닥터 토마스가 다시 한번 커넌을 불렀고, 자신을 닦달하는 닥터 토마스에 커넌이 괴롭다는 듯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커넌.”
그럼에도 닥터 토마스는 계속해서 커넌을 불렀다.

아니, 그는 지금 커넌과 심리전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커넌을 점점 더 몰아세워서 그가 이를 보이고, 발톱을 세우길 기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커넌. 커넌. 커넌!”

**

커넌.

꿈속을 헤매던 커넌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빛에 두 눈이 고통스러워했으나,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숨쉬기뿐인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커넌, 깼어요?

그러다가 상대방의 재촉에 못 이겨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크림?’
그곳에 크림이 있었다.

어색한 듯 잘 어울리는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크림이 연신 허밍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기라도 하면,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에 홀라당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런 자신의 끈적한 시선을 느꼈는지, 크림이 고개를 돌려 커넌에게 진득이 웃어 보였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커넌이 느릿하게 주변을 살폈다.

‘지금 아침이에요?’

분명 저녁이었는데….

언제 날이 밝은 건지, 지독했던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작열하는 태양 빛이 텅 빈 거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커넌, 잠이 덜 깼나 봐요.

크림이 손을 뒤로 뻗어 가스 불을 끄고는, 푸흐- 우습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에 커넌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크림이 등을 돌려 냄비 뚜껑을 여는 바람에 가볍게 묵살되었다.

그와 더불어 시큼하면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커넌의 위를 자극하니, 그에 그냥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토마토 스튜예요?’

커넌이 크림의 어깨에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크림의 어깨선에 커넌의 턱 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에 크림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커넌의 자리를 마련해주었으나, 커넌이 다시 걸음을 옮겨 크림과의 거리를 좁혔다.

질문은 그저 그를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운 좋게 크림을 기분 좋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맛있겠다.’

커넌이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굽혀 냄비 가까이에서 토마토 스튜 냄새를 맡았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바로 닿았으나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향이 좋았다.

게다가 당장에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만큼 붉은 것이, 마치 음식 잡지에서 미관을 고려하여 식용색소를


넣은 것처럼 보였다.

냄비 속에서 연신 용암처럼 들끓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계속 시선이 갔다.

‘어렸을 때, 부엌 냄비에는 항상 토마토 스튜가 가득 있었어요.’

또 토마토 스튜예요?

그렇게 물으면 엄마는 메마른 표정에 미안한 감정을 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어요.

그렇다고 토마토 스튜가 싫은 건 아니었어요.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거든요.

크림이 넓적한 접시 가득히 토마토 스튜를 담아내며 커넌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 시간 푹 끓여, 제 색이 다 우러나온 토마토 스튜보다도 더 붉은 것이 창문 밖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루비처럼 빛났다.

‘그런 의미로 커넌의 머리카락도, 참 좋아요.’


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거 같거든.

크림이 나른한 손길로 툭- 커넌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고작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손끝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쉽고,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단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탐한다고 하잖아요.’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만,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일이죠.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가두었다가 슬며시 놓았다.

혹시라도 힘이 약한 것이 무리에서 떨어져, 손가락에 걸리지는 않을까.

그런 못난 욕심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못난 마음이나 못된 마음이나 종이 한 장 차이니, 기어코 못난 것이 크기를 부풀렸다.

‘나는 늘, 생각했어요.’

내가 못난 게 뭘까. 도대체 내가 남들보다 못난 게 뭐길래… 남들은 함박웃음을 짓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죽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크림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태어나 신을 미워하던 그 순간부터 키워 온 작지만 끝이 없는 비난이었고 갈망이었다.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수치이자 들키고 싶은 내면이었고, 그 위를 꽁꽁 둘러싼 갑옷을 벗길 아주


작은 나뭇가지가 필요했다.

‘돈? 가족? 친구? 아니? 그런 것들이 아니야.’


내가 탐한 건… 고작 색깔이었어, 색깔.

내 들끓는 감정을 표현해줄 강렬하고 화려한 색깔….

어디에 처박혀도 티가 나지 않을 이딴 빌어먹을 색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한 번에 매료시키고 마음을


빼앗아 굽고 삶고 지져버려도 모를 정도로…. 이를테면 커넌의 머리카락 같은 거요.

크림이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커넌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어 제 머리에 뒤집어쓰고 싶었다.

하지만 크림의 손은 커넌도, 그렇다고 자기 자신도 아닌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냄비로 향했다.

‘크림.’

온몸을 돌아다니는 불길한 마음에 커넌이 애써 크림의 이름을 불렀지만, 몸은 반대로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커넌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고요한 부엌에 시끄럽게 울렸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숙여 난감한 눈빛으로 슬리퍼를 내려다보는데, 촤아악 순식간에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는 것을 재빠르게 본능이 막았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가 무엇인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차츰차츰 바닥을 적시는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냄새에 질식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할 뿐이었다.

마치 숨 쉬는 방법을 까먹은 것마냥 계속해서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던 커넌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깊이 내쉬었다.

이미 슬리퍼는 붉은 것에 잠식되어 질척하게 젖어 있었고,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친 탓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에 커넌이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이 왜 이리도 긴 건지,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길이처럼 길게 느껴졌다.

‘……크림.’

커넌이 황망하게 크림을 불렀으나, 과연 그가 크림이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 좀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던 사람인데 주체 되지 않는 두려움에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마치 온몸에 진도 9.0 의 강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두려움에 잠식된 두뇌는 계속해서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의 모든 걸 사랑하겠다고 했잖아.

부디 그의 모든 결여까지 끌어안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잖아.

커넌이 계속해서 자신을 꼬집고 할퀴었다.

‘봐요.’

나도 결국 커넌과 같아요.

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게 물들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를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에 대한 모든 동정심과 애정, 연민, 갈망, 동경이 한순간에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어때요?’

크림이 두 팔을 벌리며 커넌에게 물어왔지만, 커넌의 시선은 크림의 턱에 힘겹게 매달린 것으로 향했다.
미처 으깨지지 못해 유난히도 붉은 토마토 덩어리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미 붉게 물든 바닥에 좀 더 붉은 것이 떨어진다고 해서 티가 날까 싶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장이 그


무엇보다도 크다는 것을 커넌 역시 모르지 않았다.

#09 허상

툭.

죽은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커넌의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사라졌다, 다시 닿아오기를 반복했다.

사르륵거리며 닿는 곳곳마다 간지러움을 남기고는 미련 없이 사라지는 것이, 별것 아님에도 사람의 마음을


애태웠다.

그에 커넌이 부스스하게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된, 텅 빈 싸늘함만이 가득한 곳.

의심할 여지 없이 크림의 집이었다.

‘봐요. 나도 결국 커넌과 같아요.’

두 팔을 벌리며 자유를 만끽하던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집 어디에도 그의 온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커넌은 이런 적막함이 싫었다.

마치 큰 파도가 오기 전, 잠잠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긴 바다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에 억지로 눌러둔 두려움이 빼꼼히 고개를 들어오는 그때.


똑. 똑.

어디선가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물방울들이 끼리끼리 모여 더 큰 곳으로 찰바당 뛰어드는 듯, 일정한 소음이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똑. 똑.’

어린 시절.

몇 번의 이사 끝에 겨우 자리를 잡은 집에는 가끔 녹물이 흘러나올 만큼 낡은 수도꼭지가 있었다.

어린 커넌이 제아무리 세게 잠가도 늘 물방울들이 하수구로 탈출을 했고, 매일매일 그 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어린 커넌은 혀로 입천장을 두드려 똑. 똑. 그 소리를 따라 하곤 했었다.

‘망할 집구석. 어쩜 수도꼭지마저 속을 썩여?!’

당연하게도 엄마는 그 소리가 싫다며 늘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럼에도 어린 커넌에게는 유난히도 조용했던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엄마가 집을 나가면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어김없이 들려오는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고는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휘두른 망치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커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그리워하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고작 그런 일로 엄마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처럼 마음이 뒤숭숭할 때엔, 아주 가끔씩 수도꼭지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커넌.’

그리고 수도꼭지만큼이나 그리운 목소리가 연신 귓가에 울렸다.

낮고 정중한, 그의 짓궂은 미소가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그냥 커넌이 나를 좀 사랑해주면 안 돼요?

그렇게 물어왔던 그는 과연 현실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그린 허상이었을까.

멍한 머리는 생각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이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눈물이었던가, 아니면 미처 으깨지지 못한 토마토 덩어리였던가.

지금 당장 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설령 그게 자신을 속이는 핑계라고 해도 말이다.

“…크림?”

크림, 거기 있어요?

커넌이 괜스레 소리높여 크림을 불렀다.

텅 빈 집에 울리는 제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지만, 일정하고도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에 용기를 얻고 침대 밑으로 두 발을 내려놓는 순간, 절그럭거리는 쇳덩이 소리가 들려왔다.

커넌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내리니, 발목에 연결된 족쇄가 보였다.

양쪽 발목에 하나씩 채워져, 그 사이를 잇는 사슬이 느슨하게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족쇄에 연결된 사슬이 좀 전에 누워 있던 침대 기둥에 묶여 있으니, 아무래도 행동반경을 정해둔 듯이
보였다.

“…….”
그러나 커넌은 크게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지독한 공포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커넌은 그런 자신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지금 제 모습을 본다면 아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의 표정이 괜스레 궁금해졌다.

그에 커넌이 족쇄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발자국처럼


남겨졌다.

“…크림?”

거실로 나온 커넌이 다시 한번 크림을 불렀으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에는 혹시라도 크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오히려 적막감이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주변을 둘러보던 커넌이 시선을 내려 족쇄에 연결된 쇠사슬을 바라봤다.

아직 넉넉한 모양인지, 쇠사슬이 구렁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꿀꺽.

묘하게 마음은 편안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혀가 말렸다.

어쩌면 오랜 시간, 물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커넌을 벌써 예상했던 건지, 거실 테이블 위에 물병과 물컵이 놓여 있었다. 꺼내둔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물병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맞는 것들끼리 뭉쳐, 테이블 위에 고인 물로 찰바당 추락하고 있었다.


똑. 똑.

고인 물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것이 시간이 지나자 소나기처럼 쏴아아 쏟아졌다.

그에 커넌이 두 손을 들어 꾸욱- 귀를 세게 누르자, 그제야 적막함이 찾아왔다.

“하하….”

커넌이 허탈함을 웃음처럼 내뱉었다.

‘그냥 커넌이 나를 좀 사랑해주면 안 돼요?’

믿고 싶었던, 그의 말대로 해주고 싶었던 모든 마음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혀진 기분이었다.

애써 다시 주우려고 툭툭 먼지를 털어봐도, 상한 마음까지 털어지지는 않았다.

“크림… 빌어먹을, 개자식.”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의 물병과 물컵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그에 두꺼운 유리병이 깨지고, 수많은 파편들을 만들어냈다.

마치 커넌의 마음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것처럼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멀리 도망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으아악!”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커넌이 허리를 접어, 제 속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듯 소리를 질렀다.

배신감과 두려움, 미운 감정과 분이 한데 뒤섞여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봐요. 나도 결국 커넌과 같아요.’

크림은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일까.

커넌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들고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았다.

다른 방들과 달리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곳이 크림의 방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향해 커넌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문 손잡이로 손을 뻗는 순간, 절그럭.

발목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커넌의 뺨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졌다.

나름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독히도 간절했던 모양이다.

‘책도 읽고, 요리도 해요. 아, 그리고… 사람도 죽여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잡혔던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다시 한번 깨져 여러 파편으로
흩어졌다.

그 모든 장면들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파편의 반짝이는 무지개도, 파편의 개수도 모두 또렷하게 느껴졌다.

커넌은 그게 지독히도 짜증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하, 크림. 크림, 크림, 크림. 크림!!!”

커넌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도무지 분노가 추슬러지지 않았다.

자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맺힌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에 좀 전처럼 귀를 막으려는데,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크림의 발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웠고, 집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누, 누구 있어요?”

커넌이 고개를 바삐 돌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많아질 뿐이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에서 여섯 명. 열 명에서 스무 명.

보이지 않는 발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똑. 똑.

그에 더해져 손바닥의 상처에서 핏방울이 맺혀, 손바닥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방울 소리와 사람의 발자국 소리.

자신의 감정이 들끓는 소리까지.

시끄러운 소리가 온 집 안에 고여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마치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허탈감에 눈물이라도 터졌으면 좋겠건만,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웃는 것뿐이었다.

‘커넌 역시 나를 똑같이 마주했으면 좋겠어요.’

그다음에는 뭐라고 했더라? 아니, 뭐라고 하기는 했던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똑같이.”

커넌이 입을 꾹 다물었다.

크림이 원하던 것은 무엇일까?

당신과 똑같이 당신을 마주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살려주세요!’

그때 누군가가 새된 비명 소리를 남기며 커넌을 지나쳐, 현관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절뚝이는 다리로 필사적으로 달리다가 불안한 듯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고, 그러다가 커넌과 눈이


마주쳤다.

커넌은 그녀의 눈에서 지독한 공포를 봤다.

자신이, 크림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 묘한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었는지, 커넌이 여자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커넌의 눈앞으로 은발이 흩날렸다.

잔뜩 들떴다가 한순간에 주저앉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슬로우 모션처럼 커넌의 두 눈에 온전히
담겼다.

아주 느리게. 마음만 먹으면 쉽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 커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툭 건드렸으나, 마치 허상처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허상.”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것은 크림의 기억인 것일까, 아니면 이 집이 품고 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주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가 어떻게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 제압하고 죽이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까.

크림은, 사람을 죽일 때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 주먹과 발만 사용할 뿐이었다.


그에 맞춰 여자의 뼈가 뒤틀리고, 눈동자가 튀어나왔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았다.

수십 분의 시간이 지날 동안에도 여자의 새된 비명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서 죽여요… 어서….”

그에 커넌은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차라리 빨리 죽이라고. 제발 주먹보다 칼을 쓰라고.

누구든지 좋으니까, 신이든 악마든 그 무엇도 상관없으니까 어서 빨리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 달라고.

그리고 잠시 후, 커넌의 기도가 통한 건지 여성의 지독히도 처절하던 비명 소리가 끝이 났다.

커넌이 한숨과 함께 손으로 제 뺨을 훑자, 손바닥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과연 이것은 그녀의 피일까, 아니면 자신의 피일까.

멀리서 크림이 굽혔던 허리를 펴는 실루엣이 보였다.

자신처럼 제 손에 묻은 피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크림이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나른한 행동에서 깊은 만족감이 묻어나왔다.

하아-

크림이 한숨을 몰아쉬다가 줄이 탁 끊긴 꼭두각시처럼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마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사람처럼.

“……크림.”

크림을 부르자, 그가 커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 덕분에 두 사람이 오롯이 서로를 마주했다.

크림은 조금 상기된 것처럼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였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은 너야.’

크림이 누군가를 가리켜 말했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커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다가 그에게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연신


토악질을 참아내야 했다.

지금은 그런 때였다.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때.

역한 피비린내도,

‘살려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우리 좀 도와주세요.’

끊이지 않는 악에 받친 비명 소리도 모두 참아내야만 했다.

“…참아야 해.”

‘아이, 씨 X.’
그때, 시체를 치우던 크림이 짜증스레 커넌을 돌아봤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혹시나 그가 제 목소리를 들었을까, 커넌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크림이 혹시라도 자신의 앞에 설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크림은 커넌을 지나쳐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아악! 또 다른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하나, 둘. 비명 소리가 집 안을 채울 때마다 크림의 머리도 점점 더.

붉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나중에는 커넌의 것보다도 더 붉게.

‘너는 네 차례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하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그런 커넌을 향해, 입을 빠끔거렸다.

부릅뜬 눈은 실핏줄이 터져, 제 색을 가늠하기가 어려웠고, 그 속엔 미처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에 커넌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분노에 온전히 공감해줄 수 없으니,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10 족쇄

이제 그만 올라가 봐요.

후- 크림이 담배 연기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 단호함에 내심 서운한 감정이 일다가도, 하룻밤의 ‘허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에,

그래야죠.

커넌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 툭툭 털어내듯, 담담히.

그럼에도 뚝뚝 떨어지는 미련이 끈적하게 커넌을 붙잡았다.

조심히 가요, 크림.

그러나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뿐이었다.

미련 섞인 조바심이 당장 크림에게로 달려가 안겨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고 재촉했으나, 커넌은 힘겹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다가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휩쓸린 커넌이, 사무실 입구의 문턱에 서서 크림을 돌아봤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갈망한다면 언젠가는 재회하리라 믿었다.

그에 커넌이 고집스런 미련을 거두며 고개를 바로 하려는데,

‘커넌.’

크림이 커넌을, 아니, 그의 미련을 불러세웠다.

고작 이름 한 번 불린 것뿐인데, 당장이라도 크림의 품에 달려들어 그의 체취에 질식하고 싶은 마음이


무섭게 들끓었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아까 미처 묻지 않은 질문이 목에 턱 걸려, 색색- 숨이 벅찬 기분이었다.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해줄까.

커넌이 원한다면, 기꺼이.


지금 그의 모습처럼 여명을 닮아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런 달콤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까?

그게 아니면 조바심에 쫓겨 아까처럼 둘만의 또 다른 추격전을 하지는 않을까?

커넌이 세게 주먹을 쥐어, 간질거리는 감정을 손 속에 가두었다.

‘그렇게 가기 싫다면, 나랑 같이 갈래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왼쪽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손바닥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커넌이 걸음을 재촉하여 한달음으로 크림의
앞에 마주 섰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내달려 그의 품에 안길까.

그런 충동적인 생각도 했으나, 혹여라도 그가 도망갈까 겁이 났다.

‘좋아요.’

커넌이 홀가분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크림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내렸다.

탁.

다시 눈을 뜬 것은 조심스레 닫히는 문소리 때문이었다.

문고리를 돌려서 철컥이는 소리를 최대한 줄인, 그 미적지근한 배려가 지독히도 역겨웠다.

“커넌.”
현관에 들어선 크림이 작은 목소리로 커넌의 이름을 불렀다.

크림의 행동에는 명확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갔다가, 다시 아무도 모르게 집에 돌아오는 것.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집에만 있던 것처럼.

그것은 그의 치밀함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몸에 배어 있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요컨대 현관에 들어서서 곧바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서 주변의 흐름을 살피는 행동이나,
묵직한 구두 대신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는 것들 말이다.

“커넌, 일어났어요?”

크림이 낮게 한숨을 뱉으며,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옮겼다.

그러다가 피곤한 듯 눈 사이를 지압하기도 했고, 근근이 손으로 벽을 짚어 중심을 바로 하기도 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커넌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본래 사람이 사는 곳이니 주변을 둘러보면 무기가 될 만한 것이야 수두룩했지만, 과연 그것을 가지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당장 모래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광장에 들렀는데 무슨 공연이라도 하는지,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보러 가요.

그러는 사이에도 크림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구석에 몸이라도 숨겨야 할 것 같았으나 몸이 너무 무거웠다.


족쇄는 분명 발목에만 채워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온몸이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그에 커넌이 몸을 숙여 땅에 가슴을 바짝 대었다.

그리곤 크림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 팔꿈치로 땅을 짚고, 다리를 질질 끌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의 군인을 연상케 했다.

머리 위로 무수히 많이 쏘아지는 총알 비를 피해 자세를 낮춘 전쟁터의 군인 말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원래 있던 곳에서부터 대략 3.3 피트 가까이를 기어, 소파와 테이블 사이의 틈에 다다르기 직전,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바로 옆. 자신의 얼굴선을 따라 길게 음영이 드리워지니, 크림의 그림자였다.

꿀꺽.

커넌이 차마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만약 그를 올려다본다면 그는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까.

잔뜩 메마른 살인자의 눈빛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정을 연기하는 눈빛을 하고 있을까.

그게 뭐든지 간에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커넌은 그저 소리를 낮춰 흐느꼈다.

“커넌, 뭐 해요?”

커넌의 머리 위로 묵직한 한숨이 떨어지니, 그를 신호탄으로 커넌이 좀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터진 울음에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두려움에 몸이 이리저리로 비틀리며 떨렸으나, 팔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본능이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

“어디로 향하고 있어요?”

크림이 커넌과 속도를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커넌은 수차례 팔을 움직여야 겨우 도달하는 거리를, 크림은 단 한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그에 커넌의 흐느낌은 더 짙어졌고, 크림은 굳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내 집인데.”

크림이 커넌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의 반항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커넌 역시 그를 모르지 않았다. 다만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탐한다고 하잖아요.’

살아도 그와 함께이고, 죽어도 그와 함께이다.

그 어떤 수를 동원해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설령 벗어나더라도 의도된 것이 아닌 단순히 그의


변덕에 의해 벌어진 변수인 것이다.

“아니면,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 볼래요?”


혹시 알아요? 내 기분이 좋아져서 커넌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라도 풀어줄지.

크림이 허리를 숙여 제 복숭아뼈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그에 커넌이 크림의 손을 따라 그의 복숭아뼈 부근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그럴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사무실에서 읽은 사건일지에는 살인자의 말은 믿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살인자들은 늘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굴지만, 결국 끝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고 했다.

죽음.

모든 피해자들이 끝내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나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고개를 들었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가는 대답은 없었다.

‘다음은 너야.’

그렇게 말하던 여성의 울부짖음이 끊임없이 귓가를 스쳤다.

그는 지금까지 몇 명의 사람을 죽였을까.

‘도망갈래요?’

지독히도 다정하던 크림의 목소리가 여성의 울부짖음을 뒤따랐다.

당시의 크림과 지금의 그는 전혀 달랐음에도, 굳이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살아도, 죽어도 그와 함께해야 한다면 그냥 그를 믿고 싶었다.

정말로 족쇄를 풀어줄 건가요? 나를 살려줄 거예요?

커넌이 고개를 뒤로 젖혀 크림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너무 멀리 있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 커넌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고, 크림 역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크림은


지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처음 커넌을 이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가장 바라고 기다렸던 장면이 드디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크림.’

그저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면 더없이 좋으련만.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하는지, 지금 당장에 그의 머리를 갈라서 그 속을 파헤쳐본다면


좋을 텐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품은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넌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에 크림이 커넌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어 넣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커넌의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커넌, 약발이 잘 받네요.”

예전에 어떤 놈은 약발이 너무 안 받아서 고생 좀 했거든요.

내가.

크림이 히죽이며 커넌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얹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옷걸이에 흘러내리듯이 걸린 옷과 같았다.

그에 크림이 어깨를 들썩여 커넌을 추스르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곤 아래 부근을 퉁퉁 두드리듯 움직이니, 담배 한 개비가 톡 하고 튀어 올라왔다.

크림이 그것을 잽싸게 입에 물고 무언가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꺼내어 바지 위를 툭툭 두드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원하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든 장면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커넌이 문득 크림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게 물들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갔는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은발만이 조명에 비춰 반짝거렸다.

커넌이 그를 탐욕스런 눈빛으로 훔쳤다.

커넌에게 있어서 크림의 머리카락은 면죄부였다.

그가 저지른 모든 행동들을 잊게 하여, 그를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그의 뺨에 입을 맞춰 이 떨림을 함께 하고 싶었다.

‘다음은 너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자신에게 족쇄를 채운 그가 너무 미웠다.

손에 수많은 이파리를 들고는 죽일까, 살릴까 장난치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왜 내게 약을 먹였어요? 나를 정말 죽일 건가요?

“크림.”

커넌이 목을 쭉 빼어 크림의 얼굴에 바짝 붙었다.

그의 체취가 좀 더 짙게 느껴졌으나, 들끓는 애증만 타오를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주머니를 뒤적이던 크림이 의아함에 고개를 숙이는 찰나, 커넌이 죽기 살기로 크림의 귀를
물어뜯었다.

“아악!”

살이 찢기는 고통에 소리친 크림이 신경질적으로 커넌을 밀쳐냈다.


그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커넌의 입에서 귀의 살점이 뱉어졌다.

그것을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은 커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이 줄줄 흘렀다.

크윽- 고통 속을 허우적거리던 크림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던 커넌이 필사적으로 현관문을 향해서 기었다.

평소 겁이 많아서 공포 영화를 즐겨 보지는 않았지만, 매번 같은 의문이 들었었다.

왜 주인공들은 달리지 않고 꼭 네 발로 기어서 도망치는 걸까? 그게 훨씬 느릴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그들은 달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못한 것이다.

‘너는 네 차례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하지?’

여성의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가 커넌을 재촉했다.

그에 커넌이 후들거리는 두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곤두선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돌면 현관문이 나올 것이다.

그를 따라서 자발적으로 이 집에 들어올 때 봤던 옆집이 떠올랐다.

현관문만 연다면, 그래서 소리 높여 구조요청을 한다면.

살 수 있어.

미세했던 희망이 커다란 빛을 내며 커넌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안심되자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안 돼.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커넌이 모퉁이를 돌면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서서 신경질적으로 귀를 만지고 있는 크림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불과 3 피트 앞에 현관문이 보였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두 발이 닿고, 문손잡이로 손을 뻗는 순간.

절그럭-

팽팽하게 조여진 쇠사슬에 의해 커넌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대리석 바닥에 무릎과 팔꿈치를 세게 찧었으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커넌이 급히 고개를 들어 발목 부근으로 시선을 내리니, 제 발목을 세게 옥죄고 있는 족쇄가 보였다.

“하. 하하….”

커넌이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주먹으로 족쇄를 내려쳤다.

손날 부분이 새빨갛게 변하고, 더 이상 감각이 없을 때까지.

하지만 손쉽게 망가지는 찰흙 고리도 아니고서야, 여린 손으로 백 날 천 날 내리쳐 봤자 족쇄가 풀릴 일은


없었다.

“제발… 제발!”
그저 커넌의 간절함만 높아질 뿐이었다.

-의-

#11 발버둥

크림이 제 목선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귓가의 박동이 심장의 뜀박질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들끓는 분노에 못 이겨 주먹을 쥐니, 손안에서 담배가 속절없이 구겨졌다.

“이런 건 오랜만인데.”

크림이 한쪽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목 뒤가 뻐근하게 당기는 것이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커넌은 벌써 어디론가 도망간 듯, 그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크림을 자극하니, 크림이 시선을 내려 바삐 커넌을 뒤쫓는


쇠사슬을 바라봤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지렁이처럼 움직이는 모양새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럼, 어디 한번 잡으러 가볼까?”

크림이 메마른 두 손을 마주 비비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움직이던 발이 점점 속도를 붙여 빠르게 움직였다.

그에 단숨에 모퉁이까지 다다른 크림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숨을 골랐다.

후우-

크림이 마지막 숨을 끝으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한 걸음.

모퉁이에서 벗어나 현관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가 기대감에 찬 듯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허망한 표정으로 쇠사슬을 잡고 있는 커넌의 모습이
보였다.

“커넌.”

크림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니, 커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에, 콧물, 입술 근처에는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피까지.

엉망진창인 얼굴에 애써 관리했던 표정이 무너지고, 입가가 비틀렸다.

“아아, 커넌. 이게 뭐예요.”

씨 X, 이게 뭐냐고요.

크림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커넌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어 세차게 잡아당겼다.

어찌나 세게 당겼는지, 커넌의 엉덩이가 바닥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 탓에 무게중심이 아래로 가니, 금방이라도 머리가 뜯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에 커넌이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크림의 손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그저 살고자 하는 발악이었으나, 크림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크림이 낱말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커넌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일반적으로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을 때리는 것이 크림인지, 아니면 그의 분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커넌의 뺨을 내려치던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집어 던지듯이 놓았다.

크림의 손에서 도망친 커넌의 머리카락이 핏방울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죽일 뻔했네.”

크림이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는, 좀 전처럼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번에는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크림이 그것을 밖으로 꺼내었다.

예상대로 라이터였다.

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나는 은색 지포 라이터.

크림이 그것을 손에서 몇 번 굴리다가 이내 으스러뜨릴 듯이 세게 쥐었다.

그에 반짝이며 빛나던 것이 검은 손안에서 점점 죽어갔다.

‘살려주세요.’

당장에라도 그런 말을 쏟아낼 것만 같이.

커넌이 그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불 한 번 붙여 볼래요?”
크림이 손을 펴, 안에 쥐어진 담배를 내보였다.

지금껏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강압적이지 않은 협박이었으나, 따르고 싶진 않았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하고 싶지 않아요.

볼 안쪽의 여린 살이 부은 탓인지 발음이 뭉그러졌다.

그럼에도 크림이 그를 무시하며 커넌의 손에 라이터를 욱여넣었다.

그리고는 큼직한 제 손으로 커넌의 손을 덮어 라이터를 가두었다.

“붙여봐.”

크림과 커넌의 두 눈이 온전히 마주했다.

그에 망설이던 커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팅-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자신도 제법 어린 나이부터 담배를 시작했지만, 이렇게까지 라이터가 낯선 적은 처음이었다.

두어 차례 부싯돌을 굴리자 미세한 가스 냄새와 함께 라이터가 불을 뿜었다.

그것을 조심히 들어 크림이 물고 있는 담배 부근에 갖다 대자, 크림이 고개를 조금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거 알아요?”
나는 사람 묶는 걸 좋아해요.

후우- 크림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오른쪽 입가를 비틀어 만들어진 공간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표정이 싸늘해 보였다.

사람마다 뼈의 굴곡이 다 다른데, 그게 묶어놓으면 훨씬 더 정확하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커넌도 묶어봤는데… 커넌은 너무 삐쩍 곯아서 하나도 안 예쁘더라고요.

괜히 눈만 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그냥 그 족쇄나 달아준 거예요.

크림이 커넌의 족쇄를 톡톡 두드렸다.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아요?”

크림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는 중지 끝으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려주세요.

본능적으로 내뱉은 말에 처절함이 뒤섞여 있었으나, 크림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커넌이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다- 내가 할 수 있게 해줬다는 거죠.”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더라고요.

나름 배려도 해 주고 아프지 않게 힘 조절도 했는데, 그냥 다… 내가 무섭고 미운가 봐요.

크림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고, 그를 끝으로 크림은 연신 담배만 피웠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커넌은 그가 내뱉는 연기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고, 크림은 그런 커넌을 빤히 관찰했다.

흡연자였으니, 담배가 고플 때도 된 듯싶었다.


“피우고 싶어요?”

크림의 물음에 커넌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크림이, 자신의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필터를 커넌에게 건네었다.

커넌이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 들어, 재빠르게 입에 물었다.

그리곤 깊이 들이마시고 그보다 더 깊게 내뱉었다.

곧 죽을 것처럼 어둡던 얼굴에 희미한 행복이 스쳤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크림이 커넌의 족쇄로 시선을 내렸다.

커넌은 고작 다 피우고 남은 담배 하나에 정신을 팔고 있었고, 그에게 물린 귀에서는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의 권유는 쉽게 거절했다.

본래 사람들은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나름의 배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 배려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크림이 신경질적으로 족쇄의 이음새를 잡았다.

“이것도 이제 좀 낡았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는 족쇄를 보며 크림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족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돌리니, 순식간에 커넌의 몸이 신발장 타일에 엎어졌다.

크림이 한 손으로는 족쇄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커넌의 얼굴 옆으로 내리며 자세를 낮추니, 커넌의 등에


자신의 갈비뼈부터 배가 온전히 맞닿았다.
하핫.

그에 크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굴곡이라는 단어도 함께 태어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맞아떨어질 수가 없지.

크림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커넌의 뒤통수에 제 뺨을 대었다.

머리카락이 붉어서 그런지 핏물에 잠긴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느끼며 눈을 감자, 금방이라도 단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삼켜질 뿐이지. 그럼에도 하고 싶다면… 한 번 해봐.”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곤 팔을 조금 뒤로 물렀다가 힘을 실어 내려치니,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커넌의 이마가 수차례


부딪혔다.

처음에는 그의 머리 색 때문에 피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나, 점점 더 그보다도 검붉은 무언가가 묻어났다.

그 모습을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크림이 미동도 없이 엎어진 커넌을 내려다봤다.

붉은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더 짙게 물들어 있었다.

크림이 그를 탐욕스럽게 매만졌다.

질척한 피가 크림의 손에 묻어 끈적하게 늘어지니, 크림이 고개를 숙여 제 손에 묻은 피를 핥았다.

비릿한 것이 진한 여운을 남겼고, 크림은 눈을 감고 그를 만끽했다.

***

커넌이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달이 차올랐는데도 점등되지 않은 방이 컴컴했다.

중앙에서 관리하는 것이 커넌의 방만 빼먹었을 리는 없고, 커넌이 전등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어둠에 물든 바깥 풍경과 방 안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에 한달음으로 다가간 커넌이 창문에 입김을 불어 ‘cream’, 그의 이름을 새겼다.

창밖이 제법 추운지, 맞댄 손가락 부분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 덕분에 정신없이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당신 때문일 수도 있어.”

커넌이 창틀에 온전히 몸을 기대었다.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이마를 기대니, 동그랗게 말린 몸이 퍽이나 작았다.

오늘은 잠에 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꼭 악몽을 꿨으니까.

크림이 죽는다거나 자신이 죽는다거나, 혹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를 죽인다거나.

꼭 누군가가 죽었다.

그러면 자신은 온몸이 붉어져, 솟구치는 피 분수 속에서 웃는 듯이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손을 내려 제 발목을 매만졌다.

족쇄는커녕, 선명하던 자국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데 이상하게 매끄러운 제 발목만은 늘 낯설었다.

그에 커넌이 양손을 동그랗게 포개어, 제 발목을 세게 조였다.

이렇게 해서 자국이 남는다면 이유 모를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삼켜질 뿐이지.”


발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가하자 피가 통하지 않는 발이 빨갛게, 그리고 파랗게 색을 바꿔갔다.

고작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지, 커넌이 꿀꺽 메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더 해봐, 더!

성난 목소리로 커넌이 자신을 부추겼다.

당장 발목이 부러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발목은 본래의 색을 잃어 갔고, 커넌이 그를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는 그때,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린 커넌이 시선을 문으로 던졌다.

복도에는 센서 등이 있기에 보통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동으로 불이 켜졌는데, 이번에는 여전히 어둠에


삼켜져 있었다.

그럼에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가끔은 닥터 토마스가 교묘하게 센서를 피해 방에 침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요, 닥터 토마스.”

오늘 아침에 겨룬 신경전이 떠올라,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똑똑똑.

다시 한번 뒤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제자리에 멈춘 커넌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창문 밖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무엇이 그리고 무서운지, 겁먹은 눈으로 커넌을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흉터가 있는 붉은색 머리의 아이.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껏 움츠린 저 어깨가 얼마나 작고 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낯선 익숙함에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양손을 가슴 위로 교차시켜 그 위를 쓸어내리던 커넌이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야?”

커넌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자, 아이가 눈을 번뜩이며 미소를 지었다.

#12 모순

‘커넌.’

봐요. 나도 결국 커넌과 같아요.


크림이 온통 새빨간 머리를 한 채로 웃어 보였다.

그 색이 어찌나 곱고 쨍한지, 도무지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 혹시나 눈이 멀어버릴까 덜컥 겁이 나면서도 커넌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크림의 머리카락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의 웃는 얼굴을 매만지고 싶었던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도, 웃는 얼굴도 모두 하나같이 예뻤으니까.

예뻐요.

커넌이 색색 가는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이내 커넌의 손끝에 크림의 것이 닿으려는데,

탁.

무언가가 커넌의 발목을 세게 붙잡아 왔다.

그에 놀란 커넌이 서둘러 시선을 내리니,

‘다음은 너야.’

온통 피투성이인 손들이 한데 뒤엉켜,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커넌의 발목을 마치 족쇄처럼 붙잡고 있었다.

그에 커넌이 제아무리 발버둥 치고 그것을 떼어내려고 해봐도, 더 세게 엉겨 붙을 뿐이었다.

게다가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커넌의 발목, 종아리, 허벅지를 지나 치골, 갈비뼈, 쇄골, 목, 마침내
얼굴까지 뒤덮으니, 무엇이 커넌이고 또 무엇이 손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네 차례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하지?’


헉.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커넌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제 온몸을 손으로 훑어내렸다.

꿈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혹시나 악몽과 현실이 이어져 있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그에 커넌이 더듬더듬 손을 내려, 제 발목에 채워진 족쇄 위를 매만졌다.

뜨끈한 열기에도 차가움을 잃지 않는 쇳덩이에 이리도 마음이 놓인 적은 처음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커넌이 무릎을 세워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두 팔로 앙상한 다리를 겨우 끌어안자, 그제야 이마와 뺨이 아려왔다.

모든 게 현실이었구나.

커넌이 고개를 들어, 몽롱한 시선 끝에 걸린 시계로 초점을 맞췄다.

“2 시 54 분.”

오전일까, 오후일까.

창문 하나 가득히 햇살이 담겨 있는 걸 보니 오후인 것 같았다.

오후 2 시 54 분.

평소였다면 지긋지긋한 사무실에 처박혀 점심도 거른 채, 수많은 서류뭉치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보내준 돈을 다 쓴 어머니가 독촉 전화라도 걸어온다면, 그를 신경질적으로 거절했을


것이다.
“제길.”

생각을 끝내자 절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아마도 어머니는 당분간 자신의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돈을 다 써갈 때쯤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눌렀는데, 이번에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액수를


요구했다.

그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술의 힘을 빌려서 어머니께 난생처음으로 욕을 했다.

엿 같으니까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만약 한 번만 더 내게 연락을 취하면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고.

어차피 이번 생에는 미련이 없으니 두고 보자며 반협박으로 외쳤다.

대답 없이 정적만 흐르던 전화를 거칠게 끊은 지 벌써 한 달도 더 넘었고, 그동안 어머니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는 참이었다.

“젠장!”

그렇다면 누가 지금의 자신을 구해줄 것인가.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을 끊은 어머니? 사적인 친분 하나 없던 회사 동료들? 부패한 경찰? 다 부질없는


기대였다.

사무실 사람들은 그저 커넌이 자신의 일도 다 끝내지 않은 채 도망쳤다고 짜증을 낼 것이다.

평소에도 일에 흥미가 없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고.

경찰들은 평소 멍하고 의욕 없는 제 모습이 찍힌 CCTV 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겠지.

복잡하게 일을 키우긴 싫을 테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단순 가출이나 자살에 초점을 둔 채로 사건


조사가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대충 2, 3 주를 때우다가 사건을 흐지부지 덮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누구 하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커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애써 닦은 눈물길 위로 다시 눈물이 흐르면 그저 또 닦아낼 뿐이었다.

지금은 멍청하게 앞날을 걱정하며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크림.”

커넌이 문득 떠오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삼켜질 뿐이지.’

그제서야 크림이 했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크림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삶과 죽음이 오간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크림.”
그에 커넌이 소리높여 크림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다시는 당신에게 발버둥 치지 않을 테니, 제발 나를 삼키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모든 순간의 커넌에게는 굴욕감도, 창피함이란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에,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보고 싶었다.

당장 눈앞에 있다면 이 앙상한 두 팔로 크림의 온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그의 체취에 질식할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에 쉼 없이 크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순간, 조심스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돌려서 철컥이는 소리를 최대한 줄인, 미적지근한 배려.

그 작고 미세한 소리에 커넌이 오감을 집중했다.

바닥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온 집 안을 돌아다녔다.

“옷방.”

집에 들어온 그는 곧장 옷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보온성이 좋은 만큼 두껍고 무거운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을 것이다.

그리곤 화장실로 향해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와 잠시 거실에 멈춰 섰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쯧.

가볍게 혀를 찼다.

고작 그 작은 화풀이에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소음을 높였다.

그러다가 크림이 다시 걸음이라도 옮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심장마저도 온통 숨을 죽였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커넌의 애를 태우던 발자국 소리가 마침내 문 앞에 딱 멈춰 섰다.

그에 커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깊은 안도와도 같았으나, 더불어 광기를 닮아 있었다.


끼익-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어두운 밖에 서 있던 크림이 밝은 안으로 들어왔다.

“크림.”

커넌이 반가움을 못 이겨 먼저 크림을 아는 체했으나, 곧장 커넌에게 다가올 것만 같던 크림은 그를


지나쳐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 냉담한 반응에 커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가는데,

탁.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방 안을 가득 채우던 태양이 빛을 잃었고, 그에 맞춰 곧장 어둠이 찾아왔다.


커넌이 그를 멍청하게 바라봤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설마 빛이 어둠을 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크림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커넌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살기만이 가득하던 눈에는 온통 절실함이 가득했다.

그에 크림이 몸을 낮추곤, 커넌의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팔 하나에도 넉넉하게 안기는 작은 몸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축축하고 따뜻했다.

아늑해.

커넌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아늑함이 있었다.


깡마르긴 했어도 메마르진 않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금방 울기 일쑤였다.

간질거리는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만지고, 지금은 세상이 무너진 듯 절실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에게 안겨 있었다.

모순.

그는 언제나 모순 덩어리였고, 자신은 그런 커넌에게 자꾸만 심술이 났다.

“커넌, 그거 알아요?”

사실 저 시계는 고장 난 시계예요.

크림이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하얀 이를 다 보이며 웃는 그 모습을 ‘개구지다’ 외에 달리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설사 다른 표현이


있다고 해도, 자신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저 환하게 웃는 크림에게 처음과 같은 간질거리고, 동시에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지금은 새벽 4 시가 넘었고, 커넌이 도망을 시도했던 때보다 꼬박 하루가 더 지났어요.”

다른 집들은 어둠을 피하려 잠에 들었고, 우린 이렇게 어둠에 취해 있고….

크림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에 의해 귀의 살점이 떨어져 피딱지가 자리 잡은 상처가 가깝게 보였다.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살고자 버둥거렸던 결과물이었고, 어쩌면 그로 인해 죽을 뻔한 모순의 결정체였다.

“나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모순인 것 같아요.”


크림이 고개를 다시 바로 하여 커넌과 눈을 맞췄다.

어둠에 물든 탓에 그의 밝은 은발도, 보석 같은 눈동자도, 새까만 피부도 온통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이진 않아도 자신 역시 그렇겠지.

문득 붉은 머리를 숨기려 늘 어둠을 찾아 돌아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크림도 그런 때가 있을까?

지독한 태양의 사랑에 지쳐 그늘 아래에서 그를 따돌리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던 때가 있을까.

“그리고 난 그게 싫지 않아요.”

크림이 손을 뻗어 커넌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완전하게 잡지도, 그렇다고 놓칠 것처럼 위태롭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 그때처럼. 커넌의 새끼손가락에 크림의 검지가 닿고, 반대로 커넌의 검지에는 크림의
새끼손가락이 닿았다.

방황하는 커넌의 엄지와 다르게 크림의 엄지는 커넌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의 툭 튀어나온 뼈 위를
맴돌았다.

커넌이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망쳐. 그에게 넘어가지 마.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게 될 거야.’

나처럼 되고 싶은 거야?

여자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고여 흘러넘쳤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지금 맞잡은 그의 손은 지독히도 따뜻하고 다정했으니까.

만약 그녀의 말처럼 이 손에 죽게 된다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도 좋을 것 같아요.”

크림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시선으로는 커넌의 대답을 재촉했다.

커넌도 나와 같아요?

그렇게 묻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아니라며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저 그에게 매달리듯 그의 손을 마주 잡을 뿐이었다.

혹시나 그가 이 손을 뿌리치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마음이 초조했다.

“…귓가에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자꾸만 도망치라고, 크림이 날 죽일 거라고 말해요.

난 계속 아니라고… 크림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래도 자꾸만 날 재촉해요.

커넌이 끊임없이 자신을 대변했다.

당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내가 어떻게 크림을 밀어낼 수 있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안 들리게 해줄까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들리게. 설령 들리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도와줄까요?

크림이 짙게 웃으며 제 손목을 커넌의 입가로 갖다 대었다.

그에 커넌이 의아하다는 듯 크림을 바라보는데, 마찬가지로 커넌의 손목을 붙잡아 제 입가로 끌어당기던
크림이 대뜸 커넌의 손목을 세게 물었다.

아악!
“세게 물어요, 커넌.”

더, 세게.

자신의 속삭임이 커넌의 가슴에 울려 퍼지도록.

그래서 평생토록 그 말이 잊혀지지 않도록 말이다.

더 세게, 더 세게 물어요. 커넌.

#13 상기

‘커넌.’

커넌, 트윌턴.

아이가 커넌의 이름을 불렀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고 쨍한 목소리가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익숙한 듯 낯설고, 그러면서도 잘 알고 있는 아이.

그 낯선 익숙함을 상기시키려는 듯, 커넌이 아이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트윌턴.

그것은 ‘윌튼’ 보육원에서 자란, 어머니가 제멋대로 지어낸 이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그 흔한 이름도, 생일도 하물며 제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렇기에 남들이 가진 두 마디의 이름이 지독히도 부러웠다고 했었다.

뭐, 당연하게도 그녀가 자란 보육원은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신경 써 줄 수 없었고,


어머니는 그렇게 홀로 이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순적이게도 트윌턴, 그 이름을 갖지 않은 채 완전하지 못한 이름으로 20 여 년을 살았지만 말이다.


그녀의 이름이 비로소 완전해진 것은 아버지를 만나, 그의 이름을 따라 ‘글렌’이 되는 날이었다.

‘체이시 글렌.’

그때 아이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낯설고, 더불어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어머니의 이름, 체이시 글렌.

문득 떠오른 이름은 아득하고 마냥 멀게 느껴졌지만, 그와 동시에 거대한 응어리처럼 가슴을 압박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커넌 글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커넌, 트윌턴.

난 그게 더 잘 어울리니까.

아이의 말에 커넌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제야 그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커넌, 트윌턴.”

작고 왜소했던 아이.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서 오징어의 먹물을 모아 숨기던 아이.

‘정말 너에게만큼은 내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술에 취한 어머니의 모진 말에도 애써 웃어 보이며, 자신의 이름을 사랑했던 아이.

“정말 커넌이구나, 너.”

커넌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커넌 역시 아이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 번, 같은 클래스에 있던 맥스라는 아이가 말했었다.

붉은 머리는 악마가 낳은 거라고, 그러니 사람이 아니라 악마라고.

devil.

책상 위에 지워지지 않고 늘 쓰여 있던 단어였다.

그를 지우려고 매일 아침마다 일찍이 학교에 도착하곤 했었다.

지우개로 열심히 지우면, 그날 점심시간에 더욱 진하게 쓰여 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했다.

‘우리 엄마, 악마 아니야.’

“…맞아. 악마 아니야.”

고작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갑작스런 허탈함에 한숨과도 같이 웃음이 터졌다.

이제야 모든 것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어떤 아이였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하다못해 그의 작은 소원이 무엇이었는지까지 말이다.

바보같이 한심하고 지독히도 순수했던 아이.


엄마의 사랑에 목이 말라 허덕이며 자란 아이.

그런 그에게 감히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어렵게 취업한 직장에서는 몇 년째 그 흔한 직책도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줄까?

부당함에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밖에 쌓인 쓰레기 봉투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화장실의 지린내가 물씬 풍기는 제 자리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는 빨간 머리가 좋다고… 자기도 빨간 머리를 갖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 사람은 굳이 빨간 머리를 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인데, 그럼에도 내 머리카락까지


욕심을 부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엄청 눈에 띄고 모두가 그를 매력적이라고 표현하는데도 말이야.

커넌이 기억 속의 크림을 덧그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그가 당장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그와 마주하는 느낌에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를 눈치챈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넌지시 묻기라도 하면,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발뺌했다.

“그는 꼭 태양이 사랑했던 사람 같아.”

태양이 열렬히 사랑했던 사랑의 증거가 온몸에 빼곡하게 남아 있거든.

검은 피부와 타오르지 않은 머리카락.

태양의 눈물을 모아 만든 보석 같은 눈동자.

단 한 순간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일까.


그를 어루만진 태양인가, 아니면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인가.

‘나도 먼 훗날에 그를 만나게 되는 거야?’

미래에는 지금과 달리,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아이가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멍청하게도.

커넌이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했다.

혼자만 당하기 억울했던 건지, 아니면 크림에 대한 아쉬움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두 개의 복합적인 감정이었던 것도 같다.

어린 커넌도 자신과 똑같이 고통받고, 똑같이 무서움을 견뎌내기를.

어쩌면 자신보다 더 훌륭하게 말이다.

그러면 자신보다 더 완전하게 그를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그를 보여줄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끊임없이 들끓었다.

“그러니까… 어서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가.”

돌아가서, 하루라도 더 빨리 무럭무럭 자라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커넌이 발길을 돌려, 침대로 향했다.

싸구려 철제 침대는 고작 125 파운드 정도인 커넌의 몸무게도 버거워했다.

꿈에서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연신 삐걱대며 앓는 소리를 내었고, 덕분에 어렵게 든 잠에서 깨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때문에 커넌은 평소에 침대를 별로 좋아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얼른 가라고.”

커넌이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자신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겁이 많은 아이이니, 조금만 화를 내면 금세 겁을 먹고는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겁에 질린 것은 자신이었다.

긴장감에 발밑이 끈적이는 기분이었다.

꼭 무언가가 달라붙은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온몸이 묶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족쇄인지, 아니면 그저 신경 쇠약의 하나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곧 날이 밝을 거니까.

그렇게 되면, 어둠에 반사되어 기생하던 저 아이도 곧 사라질 것이다.

“어서 가.”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들끓는 화를 참지 못한 커넌이 분한 듯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데, 문 쪽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깜짝 놀란 커넌이 퍼뜩 고개를 들자, 닥터 토마스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커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전에 한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조금 이르지만 면담을 시작할까 하는데….”


“…….”

“못다 한 말도 좀 있고.”

닥터 토마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를 말 없이 바라보던 커넌이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자,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참새들이 연신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는 일찍이 도망간 듯했다.

“…커넌?”

듣고 있어요?

더불어 닥터 토마스가 재촉하니, 커넌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발바닥에 짙게 밴 땀에 의해 바닥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왔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요?”

“…그냥 뭐든지요.”

저번 면담에선 아무런 대화도 없었으니까.

닥터 토마스가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마도 습관이겠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커넌이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무런 말을 고르고 고르며.


“좀 전에, 어렸을 때의 환영을 봤어요.”

알죠? 나 헛것 보는 거.

한… 여섯 살쯤 됐으려나?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미래에서는 지금과 달리 행복하냐고.

아니라고 하기에 뭣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 참… 나빴죠.

커넌의 말에 닥터 토마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나, 커넌은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나도, 속으로는 바쁘게 뇌를 굴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아무리 더럽혀도 툭툭 털어낼 수 있었나 봐요.”

온몸에 울긋불긋 멍이 들어서는, 말갛게 웃는 꼴이라니….

그저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들끓는 화를 참아낼 수 없었다.

차라리 억울하다고,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울고 싶은 만큼 펑펑 울었더라면, 조금이나마 나았을 텐데.

그럼에도 차마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아이가 울면 자신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곧 자신의 과거였으니까.

“다 커서는 거의 매일을 어머니와 싸웠던 것 같은데….”

하루는 쓰레기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당신은 엄마가 아니라고.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정말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자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엄마가 고개를 젓더라고요, 하하.

커넌이 허탈함을 숨기지 못했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나는 적어도 엄마가 울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순수했어, 내가.

그렇게 말하는 커넌이야말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에 커넌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닥터 토마스가 고개를 모로 돌려, 가만히 한숨을 내뱉었다.

“적어도 엄마가 울 줄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때로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술에 취해 흐느끼는 그녀를 알았으니까.

만약 울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은 돌릴 수 없다며 냉정하게 반응해야 할까, 아니면 꿈에서만 그리던 그녀의 품에 안겨
지난날들을 눈물에 섞어 보내야 할까.

그런 멍청한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지새우기도 했다.

“지독히도 멍청했지.”

당신도 알지? 우리 엄마가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말이야.


나를 어떻게 키웠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지옥을 버텼는지 말이야.

그 년은 엄마도 아니야. 아니? 사람도 아니야.

쌕쌕- 커넌이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지옥, 그 자체였다.

가끔 길거리에 나가면 신앙에 미친 인간들이 커다란 십자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신을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아주 어릴 땐, 그 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뒀었다.

내가 신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온 거구나.

그런 생각에 뾰족하게 깎인 연필로 손바닥에 십자가를 수도 없이 새겼었다.

하지만 그것은 며칠 후면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자신은 또다시 지옥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Gloomy Town.”

그곳은 내게 지옥, 그 자체였어.

빛이 없는 할렘가 외곽 도시. 속되게 Gloomy Town 이라고 불리던 곳.

사람들은 그를 줄여 G. T, 라고 불렀다.

Gloomy Town. 웬만한 갱단도 가지 않는다고 하여 갱단에게 쫓기는 방랑자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고,
어제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이 다음 날 죽어서 발견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서 커넌은 유일한 아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몰랐어요.”


또래 아이 하나 없는 곳에서 어머니는 매번 친구들과 놀고 오라고 재촉했고, 그에 떠밀려 문고리를 돌리면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이 풀린 어른들이 커넌을 바라봤다.

때로는 젖가슴을 다 드러낸 여인들이 커넌을 보며 까르르 웃었고, 가끔은 얼굴까지 문신이 빼곡한
남자들이 천국이 궁금하지 않으냐며 정체 모를 가루를 들어 보였다.

어린 커넌은 그 모든 것이 무서워, 늘 햇빛을 따라다녔다.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는 건물들이 만든 그림자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홀로 햇살을 향한 춤을 췄다.

태양 빛에 취한 듯 눈을 감으면, 그 뜨거운 열기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순간에도 머리가 아팠던 것 같아요.”

보통 우리처럼 머리가 아픈 사람들은 마음이 아픈 거라고 하잖아요. 우리 환자복에 적힌 것처럼 말이야.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 (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커넌이 제 환자복에 적힌 문구를 중지로 가리켜 보였다.

“보여?”

일부러 발음을 강하게 하여 내뱉는 시비조의 말투에도 닥터 토마스는 동요하지 않았고, 커넌은 그것이 더
짜증스러웠다.

보이냐고-

그에 닥터 토마스와의 거리를 한달음으로 좁히며, 툭툭-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약에 취한 것도 같고, 깊은 숙면 끝에 내뱉는 잠꼬대와도 같았다.


“…그만하죠.”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닥터 토마스가 제 어깨를 치는 커넌의 손을 뿌리치며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구속되지 않은 환자들에게 등을 보이는 행위를 이리 쉽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커넌이 내뱉은 모든 말들에 동요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겪은 유년 시절의 아픔 따위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지금 너도 나 무시하는 거야?”

그럼 내 귓가에 들리는 이 소리들은 뭔데? 아까 그 아이는?

커넌이 닥터 토마스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돌려세우며 말했다.

그에 닥터 토마스가 다시 한번 그 손을 뿌리치니, 바락바락 악을 쓰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닥터 토마스가 겁에 질린 듯 문을 향해 뒷걸음질 치는데, 대뜸 커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맞다.”

이럴 땐 세게 물으라고 그랬는데. 세게, 더 세게.

커넌이 다짜고짜 제 팔목을 들어 이를 세우니, 하얀 바닥 위로 새빨간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커넌!
그에 놀란 닥터 토마스가 한달음으로 커넌의 앞으로 다가와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아악!

닥터 토마스가 갑작스런 고통에 두 손으로 자신의 왼쪽 귀를 감싸 쥐었고, 포개진 그의 두 손 사이로 붉은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작은 키에 덩치가 있는 닥터 토마스가 바닥에 누워 고통에 꿈틀거리니, 그 모습이 마치 굼벵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핫.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던 커넌이 제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서서 닥터 토마스를 완전히 깔아봤다.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 (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근데 네까짓 게 어떻게 우리를 이해하겠어, 안 그래? 그건 절대로 불가능이야. 절대로.

닥터 토마스의 얼굴 위로 피가 섞인 타액을 뱉은 커넌이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수차례 적었던 cream 의 이름이 먼지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주했던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질문에 조금은 대답이 되었겠지.

그런 생각에 커넌이 만족스레 웃었다.

손목의 욱신거림이 지금이 현재임을 알려줬고, 창문을 통해 쨍한 햇살이 들어오니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4 우리

커넌은 그 태양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창문에 써진 ‘cream’을 바라봤다.

그는 햇빛, 바람의 정도,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었고, 때로는 오롯이 커넌만을 담아내기도 했다.

그에 커넌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 눈에 담아냈다.

그의 체취에 몸을 담그고, 그의 두 눈에서 쉼 없이 달렸다.

그러다가 크림과 슬쩍 닿기라도 하면, 그 황홀함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연신 허우적거려야 했다.

이제 그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순 없어요.

커넌이 온전히 크림의 품에 안겨 두 눈을 감으니, 그제야 비로소 그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새 황홀함에 도취된 커넌이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데,

쾅쾅쾅.

누군가가 거세게 문을 두드려왔다.

어쩌면 야만적이고 몰상식할 정도로 거세게.

그에 크림의 품에서 벗어난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잔뜩 상기된


표정의 닥터 셰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닥터 토마스?”
그러나 커넌의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 있는 닥터 토마스에게로 향했다.

그가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설마 크림과 보낸 시간들을 모두 지켜본 거야?

커넌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는 혐오감 어린 시선으로 닥터 토마스의 온몸을 훑어내렸다.

단정하던 하얀색 티셔츠는 어디에 갖다버렸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색 티셔츠에 벨트까지 풀어헤친
꼴이라니.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지 변태가 따로 없네.”

옷은 또 언제 갈아입은 거야?

커넌의 시선이 유난히도 붉은 그의 티셔츠로 향했다.

우선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치고, 할렘가의 street market(노상 시장)에서 산 것마냥 싸구려 티가 물씬


나는 티셔츠였다.

푸흐-

그에 커넌이 굳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더 자세히 보고자 무릎을 굽히려는데, 잠깐 잊고 있던


닥터 셰인이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문을 두드려 제 존재감을 어필했다.

“커넌 트윌턴!”

게다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니, 커넌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닥터 토마스를 놀릴 기대감에 잔뜩 들떠 있던 탓인지 아니면 그녀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는 탓인지,
마주한 닥터 셰인의 얼굴이 유난히 싫게 느껴졌다.

“…셰인, 오늘은 면담이 없는 날이에요.”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둬요.

커넌이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며 최대한 애달픈 목소리로 호소했지만, 닥터 셰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에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자는 마음의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할 뿐이었다.

그에 커넌이 아쉬운 눈빛으로 닥터 토마스를 한번 돌아보고는 이내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뭐든 가장 재미있을 때 방해꾼이 등장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

그때 커넌의 시선이 문고리를 잡은 제 손으로 향했다.

평소 희멀겋기만 하여 볼품없던 제 손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또 자해를 했던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꼬박 하루가 지난 건지 크림은 다시 들끓는 노을을 입고 있었고, 일하기를


거부하는 뇌는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행동이 굼떴다.

마치 깨진 유리처럼 기억의 파편들이 커넌을 마구잡이로 찔러 왔다.

‘근데 네까짓 게 어떻게 우리를 이해하겠어, 안 그래?’


자신의 행동과 차가운 말투, 제 분에 못 이겨 들끓는 눈빛, 그런 자신을 지켜보던 닥터 토마스의 겁먹은
눈동자와 비명 소리, 무언가가 깨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에 맞춰 으득거리는 소리까지.

커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닥터 셰인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문고리를 내리니 굳게


잠겼던 것이 버거운 신음을 흘리며 활짝 열렸다.

“…닥터 셰인.”

텅 빈 허공을 사이에 두고 닥터 셰인과 마주한 커넌이 황망히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닥터 토마스의 하얀색 티셔츠를 온통 붉게 물들인 것의 정체와 꼬박 하루 동안 갈기갈기 찢어진 기억들,


그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었다.

“셰인….”

커넌이 최대한 절절한 목소리로 닥터 셰인에게 매달렸다.

비록 지금은 가장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녀는 냉정한 만큼 제법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날씨나 자연 경관과 연관된 질문을 자주, 많이 던졌다.

‘햇살 하면 뭐 떠오르는 거 없어요?’

그렇게 묻던 그녀에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셰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커넌이 피가 굳어 거칠거칠한 제 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일부러 과장해서 어깨가 들썩이는 것 같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는 환자였다.

그에 닥터 셰인이 커넌에게 꽂혔던 시선을 거두고는, 옆에 있던 보안요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니 그


모습을 손 틈 사이로 훔쳐보던 커넌이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아마도 곧, 길게는 수일 안에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상해, 혹은 살인죄로 수사를 받을 것이고 어쩌면 크림이 있는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다.

아주 잠깐 그 생각에 희비가 교차 되기도 했으나, 곧 이성이 그건 안 된다며 커넌을 꼬집었다.

“커넌, 닥터 토마스는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지금 이 순간부터 커넌은 가해자 신분이고, 여기 있는 존과 보안요원 크리슨, 토머. 그리고 저는


증인이에요.

닥터 셰인이 최선을 다해 감정을 배제하며 말했다.

그에 커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수갑을 채우라는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요.”

닥터 셰인이 작은 목소리로 커넌을 안심시키며 보안요원의 허리 뒤춤에 걸린 수갑을 빼 들었다.

그리곤 한숨과 함께 커넌의 손목에 그것을 채우니, 커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곧 자신의 편에 서서 함께 눈물을 흘려줄 유일한 사람, 그게 바로 그녀였다.


**

철커덕.

이 집에 있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족쇄가 단숨에 벗겨졌다.

그 갑작스러운 해방감에 적응하지 못한 여린 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과 사투를 해야 했고, 작은


세포들은 피의 홍수에 허덕여야 했다.

그에 커넌이 슬며시 웃으며 크림을 바라보는데, 그가 아쉬움을 담아 족쇄가 남긴 흔적 위로 제 손을


미끄러뜨렸다.

붉은 자국은 커넌의 발목에 도장처럼 선명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족쇄와 다르니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던 것을 실감하니, 그제야 아쉬운 기분이 자신을 감싸 안았다.

“왠지 커넌이 내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요.”

아쉽고, 괜히 서글프고, 그러면서도 그러면 안 되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냥 내 욕심이란 것도요.

크림이 설핏 웃어 보이며 고개를 들어 커넌과 시선을 얽었다.

그에 커넌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크림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그러다가 제 모진 손길에 놀란 머리카락이 고개를 숙이면, 그 간지러운 감촉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크림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다시 묶어도 좋아요.”


사실 나는 자유와 어울리지 않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묶여서 살아왔잖아요. 어려서는 어머니께, 커서는 직장 동료들에게.

이제는 크림 차례예요.

커넌이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는 크림과 눈높이를 같게 했다.

그리곤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그의 손을 주워 다시 제 발목에 감으니, 그제야 비로소 안정감에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크림이 내 족쇄예요.”

…크림만이, 할 수 있잖아요.

커넌이 제 발목을 잡은 크림의 손을 다시 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에 누가 누구를 잡은 건지,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붙잡힌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 작은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크림이 그를 빤히 내려보다가, 대뜸 제 손을 감싼 커넌의 손 위로 엄지를


끄집어 올렸다.

“나는, 커넌이 그럴 줄 알았어요.”

원래 커넌처럼 위태롭고, 외롭고, 겁이 많은 사람들은 족쇄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크림이 커넌의 발목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발목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도 보고, 툭 튀어나온 귀여운 복숭아뼈를 만지며 넌지시


웃어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만 밀려오는 아쉬움에 잠식되어, 영영 커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리 와봐요.”

그에 크림이 커넌의 손을 이끌어, 집에서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방 앞으로 도망치듯 향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얼핏 봤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깨끗한 집과 어울리지 않는 유난히도 낡은 문고리. 커넌이 그를 빤히 바라보는데,

끼익-

낡은 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온 집 안이 태양 빛에 환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 안만큼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그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당장에 한 걸음 내딛는 일도 겁이 났다.

크림….

커넌이 발의 앞꿈치를 들어 걸음을 멈추고는 크림을 빤히 올려다보자, 그를 눈치챈 크림이 멋쩍게 웃으며,
방으로 걸음을 옮겨 어둠을 등지고는 커넌과 마주했다.

“이곳을 커넌의 방으로 꾸며주고 싶어요.”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이라 한기가 돌고 조명도 나갔지만, 꾸미면 멋있을 거예요.

원래 아늑한 내 공간만큼 나를 잡아주는 족쇄는 없는 거잖아요.

크림이 어깨를 으쓱이며 추측성 가득한 말들을 나열했지만, 커넌은 그런 불확실함에도 믿음이 갔다.

어때요?
그렇게 물으며 어린아이같이 말갛게 웃는 얼굴에 열심히 고개도 끄덕였다.

‘내 공간’ 고작 그 말에 마음이 일렁인 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그저 정해진 답에 응했을 뿐이었다.

커넌 트윌턴, 어린아이처럼 굴지 마. 이 세상에서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커넌이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크림은 이미 방 안의 어둠에 삼켜져 있었고, 검은 입이 멍청히 서 있는 자신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에 커넌이 서둘러 어둠으로 먹혀들어 가니, 지독한 어둠에 거부감이 일었다.

그럼에도 이 어둠만이 지금의 자신이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 무엇에도 기댈 수 없고, 당장 벼랑 끝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과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크림?”

그러다가 그 어둠 속에서 작은 불씨라도 피어난다면, 일렁이는 마음은 걷잡을 수 없겠지.

커넌이 시선을 내려 크림이 들고 있는 작은 랜턴을 바라봤다.

기껏 해봐야 제 엄지손톱 정도의 아주 작은 불씨였으나, 찰나에 마음을 빼앗기기엔 차고 넘쳤다.

그에 커넌이 홀린 듯 걸음을 서두르는데, 크림이 대뜸 커넌의 발밑으로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쭈그리고 앉아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커넌은 그게 조금
겁이 났다.

만약 또다시 환각이 보인다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이 점점 존재감을 키웠으나 크림은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결국 커넌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것을 집어 드는데, 그에 맞춰 크림이 랜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커넌을 생각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크림의 목소리에 커넌이 슬며시 눈을 떠 제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는데, 목줄이었다.

강아지 목줄. 그것은 거친 직물을 짜서 만들었는지 손에 닿은 감촉이 부드럽지 않았고, 새것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에 커넌이 아무 말 없이 목줄을 바라보기만 하자,

“내가 채워줄게요.”

크림이 그것을 가로채 커넌의 목에 채워주고는, 상체를 뒤로 물러 잠시간 그 모습을 관찰했다.

그에 할 일을 잃은 커넌은 그저 목 주변을 긁적일 뿐이었다.

목줄에는 족쇄에 달려 있던 것보다 짧고 얇은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온몸이 묶인


것처럼 묵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곳을 커넌의 방으로 꾸며주고 싶었어요.’

‘원래 아늑한 내 공간만큼 나를 잡아주는 족쇄는 없는 거잖아요.’

그 따뜻하고 다정하던 말이 이걸 의미하는 줄은 몰랐는데….

크림이 말 한마디 없이 전한 명확한 의도에 커넌은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크림, 이건 방이 아니라 ‘우리’예요.

그런 말도 굳이 전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의도를 파악했듯이,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이제는 정말로 이 ‘우리’가 자신의 방이 될 것이었다.

그에 지금의 커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을 관찰하는 크림에게 밉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커넌의 노력이 통한 건지, 이때까지 커넌을 바라보던 크림이 말갛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했다.

<2 권에서 계속>

-의-

더 모먼트(The moment) 1

지은이 | Xant

표지 | 형향

펴낸곳 | 글빚는이야기꾼

등록 | 2017 년 6 월 1 일

[제 2017-000041 호]

ISBN | 979-11-972368-2-2

©2020, X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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