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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nt) 더 모먼트 (The moment) 1권
(Xant) 더 모먼트 (The moment) 1권
The moment 1 권
목차
01. 서막
02. 탁상시계
03. 가스라이팅
04. 동경(憧憬)
05. 고백
06. 그, 소년
07. 토마토 스튜
08. 꿈속
09. 허상
10. 족쇄
11. 발버둥
12. 모순
13. 상기
14. 우리
#01 서막
“커넌.”
참 우스운 일이다.
남자와 마주친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계속해서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
“거기서부터 얽혔군요?”
똑딱똑딱.
“…흠흠.”
“우리 2 주 만에 만났어요.”
“…….”
끼익끼익-
그녀의 행동에 맞추어 철제의자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원래도 오래된 탓에 소리가 컸으나, 오늘은 여자의 과잉된 행동처럼 유난히도 소음이 컸다.
“그렇지 않아요?”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
“커넌도 마찬가지예요.”
커넌.
“흠흠.”
이제 잘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
“…….”
면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도 녹음기를 틀면 지직거리는 잡음과 초라한 제 목소리만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하아….”
낮게 터지는 닥터 셰인의 한숨 속에 어린 두 딸과 어머니의 얼굴이 함께 흩어졌다.
정말로 그는 범죄에 함께 가담하지 않은 걸까? 정말로 단순히 피해자였던 걸까?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확실해질 뿐이었다.
“커넌.”
커넌이 입을 열었다.
“…!”
마치 그의 머리카락처럼 말이다.
정말 그가 말한 것인가?
“그 사람이요?”
무려 2 개월 만이었다.
한 달 전에는 얌전히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기에 바빴고, 2 주 전에는 자해를 시도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그랬군요.”
“앞뒤가 다른 남자였나요?”
역시… 이 모든 건 당신 덕분이야.
#02 탁상시계
“크림, 도우넌.”
“…크림, 도우넌.”
끼익-
“…….”
커넌이 가진 미세한 틈.
크림 도우넌.
도심에 즐비해 늘어져 있는 빌딩 숲에서 조금 벗어나면, 보기만 해도 음침한 사무실 하나가 나오거든요?
[피해 전문 변호 사무실]
간판의 네온이 군데군데 나가서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그런 허름한 간판 하나에 기대어 일을
했었죠.
뭐, 바란 적도 없지만….
하는 일이요? 별거 없었어요.
“탁상시계.”
그날도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멍하니 눈동자를 굴렸던 것 같아요.
**
남자는 책상에 납작 엎드려 똑딱똑딱,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테이블 칸막이 너머의 사람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을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도망칠까.”
“어디로?”
“어디긴 그냥…….”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서 테이블 칸막이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날카로운 표정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일은 다 끝내고 쉬는 건가?”
“…아, 아서….”
아서 페트룸.
하이스쿨 시절 럭비부 주장이었던 그는 6.3 피트에 육박하는 키와 청록빛 눈동자가 매력적인,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그냥 불편해요, 그냥.
‘할 일은 다 끝내고 쉬는 건가?’
“…이번에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좀 더 골려줄까.
“…….”
그리곤 두툼한 서류뭉치를 남자의 테이블 위로 내리니, 남자가 열심히 쌓아둔 서류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일이야.”
“…….”
미쳤지, 커넌 트윌턴.
“아, 아서.”
소름 끼쳐.
‘오, 신이시여.’
“…주의할게요.”
머그컵에 맺힌 물방울에 의해 서류가 조금 젖기는 했지만, 다행히 글자가 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꼭 저렇게 심술이지.”
알잖아? 알긴 뭘 알아!
커넌도 아는 것이다.
***
닥터 셰인이 허공 위로 손을 휘저었다.
“평소라면 했을 거예요.”
“…….”
평소라면 말이죠?
“…무슨 뜻이에요?”
역시 알 수 없는 여자야.
닥터 셰인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던 커넌이 시선을 모로 던지며 푸식- 바람 빠지는 입소리를 내었다.
“잘 안 보이더라고요.”
내 붉은 머리가.
데이븐의 금발과 아서의 흑발이 동일해 보였고, 거기에 나도 뒤섞여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몹시요.”
“그래서 도망쳤나요?”
그런 이유가 없진 않았어요.
커넌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고, 그녀의 말처럼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풍을 떠날 것 같았다.
“더럽네요.”
“엄청 뜨겁더라고요.”
그에 커넌이 코를 찡긋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빨간 머리 병신, 누구도 환영하지 않지.
**
“도망갈까.”
도망가자.
#03 가스라이팅
후-
일부러 가로등 불빛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서 그런지, 아니면 도망쳤다는 허탈한 두려움에 질려서 그런지.
고작 이게 뭐라고.
“…….”
하지만 정작 추락한 것은 담배꽁초였다.
그냥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구세요?!”
“누, 누구신데....”
“저 좀 도와주세요.”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끌어당겨 골목 쪽으로 소년을 이끌자, 소년의 얼굴에 희미한 환희가 지나쳤다.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말씀하세요.
***
앤드류 필립.
“…….”
“종종 생각해요.”
“사람답게?”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어떻게 사람답게요?”
평소처럼 오줌 지린내가 나는 자리에 처박혀서, 동료라고 불리는 타인이 강제로 떠맡긴 일에 허덕이는
거요?
“…커넌.”
그는 날 구원했고, 우린 함께 타락했어요.
“대체….”
앤드류 필립.
“우리는 닮아 있어요.”
그런 닥터 셰인을 비웃듯, 커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다예요.
**
어두운 탓에 주변의 지형이나 조형물을 판단하기가 어려웠고, 급기야 커넌이 핸드폰을 귓가에서 떨어뜨려
주변을 비췄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 살려주세요….”
워낙 어둡기에 안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참하게 살해된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으으-
“살려주세요.”
푸흐-
남자가 입방귀 소리를 내며 커넌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커넌이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바르르 떨며, 칼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곤 두 손을 모아 남자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나는 어떨 것 같아요?”
“날... 날, 죽일 건가요?”
“어떨 것 같아요?”
안 죽였으면 좋겠어요.
하아-
“이름이 뭐예요?”
팅-
“커넌.”
“커넌.”
이건 미친 거야.
“예쁘다.”
-의-
#04 동경(憧憬)
그런 말 많이 듣죠?
“…이름이 뭐예요?”
커넌이 물었다.
알고 싶어요.
크림 도우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크림 도넛’이 별명일 것 같았고, 어렸을 때엔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에 혼자
눈물을 찔끔했을 것 같기도 했다.
“크림… 도우넌….”
“웃긴 이름이죠?”
예쁘다.
“눈이 예뻐요.”
머리카락이랑 잘 어울려요.
괜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에요. 내가 뭐라고….”
그러면서도 그를 보면 자꾸 울고 싶어졌다.
“아팠어요?”
다 잊었어요.
이따금 귓바퀴에 크림의 다른 손가락들이 희미하게 닿았고, 그 간지러운 감각에 커넌이 쭈뼛거렸다.
“아팠겠다.”
그 역시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아팠어요?
크림에게 똑같이 묻는다면 그도 자신처럼 다 잊었다며 고개를 저을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건 잊을 수 없는 상처잖아요.”
“크림….”
커넌!
“도와줄까요?”
“달리기 잘해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자세를 취하던 크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저었다.
“도와줘요.”
하아- 하아-
아쉬워.
이 모든 게 거짓일까 봐 두려웠다.
턱 끝까지 숨이 찼고, 지친 몸은 아픈 생각만 가져왔다.
헉. 헉. 몰아쉬는 숨에 짠 내가 섞여 있었다.
“죄, 죄송해요.”
“이리 와요.”
그러자 크림이 커넌의 등으로 큰 손을 뻗으며 골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에 커넌의 시선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에 바빴다. 왠지 모르게 위험한
기분이었다.
“왜 웃어요?”
그는 궁금증이 많은 남자였다.
커넌은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늘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아서처럼 두렵지 않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데이븐처럼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햇살 아래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넌이 작게 대답했다.
너무 작게 말해 아마 그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죠.”
그저 자세를 고칠 뿐이었다.
그러면 안 돼.
“아아.”
***
“크림 도우넌.”
“…….”
“그를 사랑했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처음이었거든요.
“하지만 셰인.”
사랑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요? 대체 어디까지! …상대방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요.”
#05 고백
“여기서 일해요?”
[피해 전문 변호 사무실]
“뭐… 그렇죠.”
대답을 머뭇거리던 커넌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기분 탓일까.
어쩌면 워커 홀릭으로 어린 나이부터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집안의 사업에
치이며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는 부자.
“왜 웃어요?”
알고 싶어요.
“…왜요?”
방황하는 커넌의 엄지와 다르게 크림의 엄지는 커넌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의 툭 튀어나온 뼈를 매만졌다.
“그래야죠.”
하지만 커넌은 짧은 대답과 함께 미련 없이 크림의 손을 놓았다. 유일하게 자신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던
것이 떨어져 나가자, 지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팅- 탁.
“크림.”
커넌이 불필요한 생각과 함께, 크림을 따라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쓰고 차가운 사람. 그런데도 그의
중독은 지독하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대로 이별인가요?
원래는 이걸 묻고 싶었다.
“커넌이 원한다면.”
정말 웃긴 사람이야.
작은 불씨를 지키던 담배가 무력하게 그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던 크림이 고개를 들었다.
“커넌.”
“크림?”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고귀하고 소중한 공주님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서 왕자님을 가로채는 못된
악녀일까? 커넌은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뭐든….”
없애면 되지.
“좋아요.”
“지금은 어때요?”
닥터 셰인이 굳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커넌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제는 상관없어요.”
“이미 내가 가졌거든요.”
닥터 셰인은 어떠한 반응도 없이 커넌을 내버려 뒀고, 곧 두 사람을 품은 공간에 깊은 침묵이 자리 잡았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닥터 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말투와 달리 커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커넌의 흉터를 매만져주던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
“커넌, 뭐 해요?”
어머니께서 엄청 미인이시네.
“집이 예뻐요.”
입구에서부터 고급 아파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했더니, 역시나 내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후-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검지에 입김을 불어내며 커넌이 고개를 들자, 크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혼자 살면 집이 더러워지기 십상이죠.”
항상 청소에 신경 쓰고 있어요.
“이리 와요.”
앞서 걷던 크림이 물었다.
크림은요?
“음…. 글쎄요.”
“아, 그리고….”
사람도 죽여요.
“…네?”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요?’
‘나는 어떨 것 같아요?’
“사, 살려주세요.”
으윽.
고통에 커넌이 신음을 터뜨리자 크림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퍼석하게 죽어 있던 눈에도 묘한 생기가
돌았다.
“아아, 커넌!”
커넌.
그 눈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애틋함과 만족스러운 날카로움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참 예뻐요.”
나는, 내 머리는 너무 밝아서….
“아아- 피가 튀면 물이 들더라고요.”
지금껏 자신에게 계속 웃어주었기 때문인지, 커넌은 그런 크림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철컥.
“커넌.”
진짜예요.
커억!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더니. 나쁜 놈.
아주 아주, 조금.
#06 그, 소년
-쉐일, 준비됐어요?
태양에 그을린 듯 새까만 피부와 상반되는 하얀 은발.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보석같이 빛나는 청회색빛
눈동자.
-쉐일 톰슨, 17 살.
-…그리고?
-….
-…엄마를 미워했나요?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망설였고, 어쩌면 엄마를
미워했을 거라는 말에는 반대로 애정이 묻어 나왔다.
-…….
-창녀, 창부, 매춘부, 몸 파는 여자. 그런 말 듣는 걸 싫어했는데, 일부러 그렇게 부르곤 했죠. 가끔은
목에 시퍼런 멍을 달고 오기도 했고, 손목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했어요. 아, 하루는
누구한테 그렇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서 집에 왔었거든요? 입에 담배를 탁- 물고 얼음찜질하는
모습이 진짜 가관이었죠.
공허한 눈빛과 달리 입술은 최대한 비열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닥터
토마스가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담배 좀 피워도 되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매춘을 했으니, 제 버릇 남 못 준 거죠. 아직도 엄마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또렷해요. 서럽게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환희에 찬 웃음 같기도 했죠.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늘
두 귀를 막고 멍하니 TV 만 바라봤었어요.
-주로 어떤 걸 봤죠?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었다.
실제로 그가 담당했던 환자들 중 대다수의 환자들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가학적인
영상을 보지 못했다.
-그게 다예요.
솔직히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고작 해봐야 7 살도 안 된 꼬마였는데.
그냥 그 춤이 참 좋아 보였어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그러면서 늘 기도했죠.
-커넌.
-커넌? 그가 누구죠?
“커넌.”
-다음 타깃이었나요?
소년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상대를 마주했고, 잠시간 정적이 지독히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음 타깃….”
라고 말이다.
**
다급하게 끊기는 전화를 붙잡고 경찰관, 클로이 제크가 애타게 상대방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통화는
종료된 상황이었고, 짧은 통화 탓에 수신자 조회도 어려웠다.
“…무슨 일이야?”
워낙에 넓은 외곽 도시이고, 범죄율도 높았기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길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 씨….”
허름한 코트에 싸인 어깨는 잔뜩 움츠려 있었고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는 등,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가 보는 이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여성의 손목에서 둥근 테이블로 시선을 매끄럽게 마무리한 케리가 커피잔을 여성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선생님, 좀 진정하세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청소년 가출 신고서]
“아무래도 좀 이상해.”
“…뭐가?”
“…그냥….”
“케리!”
“…거짓말 안 해요.”
제 아이들인 걸요.
단순히 경찰의 양심이었는지, 아니면 케리의 불량한 태도에서 비롯된 연민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똑똑-
“앉아서 이야기하죠.”
테이블 위로 평소 자신의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던 녹음기를 올려놓은 셰인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셰인 역시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하지만. 셰인. …사랑이잖아요. 사랑엔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우린 사랑을 위대하다고 말하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세상 모두가 슬퍼졌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슬퍼지면, 모두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이 온다면. 그럼 그 안에서 우리도 정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하고, 우리를 축복하며, 응원하는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도 오는 날이 있을까?
‘그럼.’
‘토마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닥터 셰인과 비슷한 말을 주고받았었다.
-의-
#07 토마토 스튜
흐음, 흠-
어색한 듯 잘 어울리는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냄비 뚜껑을 열어보기도 했고, 음식의 간을 맛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또 토마토 스튜예요?’
지지리도 맛이 없었지.
나무 주걱으로 냄비 속 토마토 스튜를 휘젓던 크림이 당시를 회상하듯 입꼬리를 진득하게 끌어올렸다.
‘또 토마토 스튜예요?’
‘…먹기 싫으니?’
탁.
이제는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조금만 더 세게 쥐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얇던 목의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살려주세요, 크림.’
‘더 빌어봐요. 더!’
코, 눈,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그 작은 손짓 하나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뼈에 사무치도록.
나는 늘, 생각했어요.
세상에서 도태된 방랑자마냥… 인생의 귀퉁이에 덩그러니 남겨져, 하루는 신을 원망하고 또 하루는 신에게
구걸도 했어요.
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자신을 재촉하는 손바닥에 손톱을 세우기도 하고, 힘줄이 끊어질 것처럼 세게 주먹을 쥐어보기도 했으나
도무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악!”
오히려 두 사람의 움직임이 격정적으로 변해가며 거리를 좁히니, 감히 몸싸움이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한
모양새였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을 담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만 좀 해요.”
“커넌.”
“그럼요?”
그럼 왜 내게 온 거예요?
“다 당신의 착각이잖아.”
“아니에요, 커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할 수 있잖아.”
남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왜 나만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원해야 하는 거예요?
“…….”
감히 알 수 없었다.
#08 꿈속
잠에서 깬 듯이 몽롱한 의식 속, 맛있는 냄새가 났다.
끼익- 낡은 문이 버거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에 부엌에서 무언가에 열중을 하던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에 자꾸만 손끝으로 시선이 향했으나, 그것을 억지로 붙잡아 엄마와 마주했다.
왠지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엄마.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힘겹게 엄마를 불렀다. 그에 테이블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토마토 스튜를
내려두던 엄마가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쓸어주었다.
커넌. 예쁜 우리 아들.
똑똑.
뭐, 이제는 익숙하지만.
“커넌.”
커넌의 생각 틈에 불쑥 존이 끼어들었다.
건드리지 마. 선을 넘지 마.
“…다시 준비해올게요.”
“커넌.”
닥터 토마스.
심장학 박사인 아버지를 따라 의사를 꿈꾸던 청년은 아주 섬세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었다.
“존은 그만 나가봐요.”
“커넌.”
닥터 토마스가 매끄럽게 올라간 커넌의 입꼬리에서 더러워진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경을 벗으면 안경 코 받침에 눌려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이 퍽이나 웃겼다.
가끔은 그 표정을 보려고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고는 했었다.
“커넌.”
똑 부러지는 발음과 정확한 악센트의 낮은 목소리에 커넌이 등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커넌.”
“커넌.”
그럼에도 닥터 토마스는 계속해서 커넌을 불렀다.
**
커넌.
커넌, 깼어요?
‘…크림?’
그곳에 크림이 있었다.
어색한 듯 잘 어울리는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크림이 연신 허밍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기라도 하면,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에 홀라당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다.
‘지금 아침이에요?’
분명 저녁이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커넌, 잠이 덜 깼나 봐요.
‘토마토 스튜예요?’
질문은 그저 그를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맛있겠다.’
또 토마토 스튜예요?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거든요.
크림이 넓적한 접시 가득히 토마토 스튜를 담아내며 커넌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끝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쉽고,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단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나는 늘, 생각했어요.’
하지만 크림의 손은 커넌도, 그렇다고 자기 자신도 아닌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냄비로 향했다.
‘크림.’
온몸을 돌아다니는 불길한 마음에 커넌이 애써 크림의 이름을 불렀지만, 몸은 반대로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숙여 난감한 눈빛으로 슬리퍼를 내려다보는데, 촤아악 순식간에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저 차츰차츰 바닥을 적시는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냄새에 질식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할 뿐이었다.
‘……크림.’
그의 모든 걸 사랑하겠다고 했잖아.
‘봐요.’
나도 결국 커넌과 같아요.
‘어때요?’
크림이 두 팔을 벌리며 커넌에게 물어왔지만, 커넌의 시선은 크림의 턱에 힘겹게 매달린 것으로 향했다.
미처 으깨지지 못해 유난히도 붉은 토마토 덩어리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09 허상
툭.
‘똑. 똑.’
어린 시절.
당연하게도 엄마는 그 소리가 싫다며 늘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럼에도 어린 커넌에게는 유난히도 조용했던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과연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크림?”
크림, 거기 있어요?
양쪽 발목에 하나씩 채워져, 그 사이를 잇는 사슬이 느슨하게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족쇄에 연결된 사슬이 좀 전에 누워 있던 침대 기둥에 묶여 있으니, 아무래도 행동반경을 정해둔 듯이
보였다.
“…….”
그러나 커넌은 크게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크림?”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에는 혹시라도 크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오히려 적막감이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꿀꺽.
“하하….”
마치 커넌의 마음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것처럼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멀리 도망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으아악!”
하아- 하아-
“누, 누구 있어요?”
한 명, 두 명, 세 명에서 여섯 명. 열 명에서 스무 명.
“똑같이.”
커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잔뜩 들떴다가 한순간에 주저앉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슬로우 모션처럼 커넌의 두 눈에 온전히
담겼다.
“…허상.”
누구든지 좋으니까, 신이든 악마든 그 무엇도 상관없으니까 어서 빨리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 달라고.
하아-
마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사람처럼.
“……크림.”
크림은 조금 상기된 것처럼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였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은 너야.’
지금은 그런 때였다.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때.
역한 피비린내도,
‘살려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우리 좀 도와주세요.’
“…참아야 해.”
‘아이, 씨 X.’
그때, 시체를 치우던 크림이 짜증스레 커넌을 돌아봤다.
붉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10 족쇄
이제 그만 올라가 봐요.
그 단호함에 내심 서운한 감정이 일다가도, 하룻밤의 ‘허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에,
그래야죠.
커넌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 툭툭 털어내듯, 담담히.
그러다가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휩쓸린 커넌이, 사무실 입구의 문턱에 서서 크림을 돌아봤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커넌.’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손바닥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커넌이 걸음을 재촉하여 한달음으로 크림의
앞에 마주 섰다.
‘좋아요.’
탁.
문고리를 돌려서 철컥이는 소리를 최대한 줄인, 그 미적지근한 배려가 지독히도 역겨웠다.
“커넌.”
현관에 들어선 크림이 작은 목소리로 커넌의 이름을 불렀다.
요컨대 현관에 들어서서 곧바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서 주변의 흐름을 살피는 행동이나,
묵직한 구두 대신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는 것들 말이다.
“커넌, 일어났어요?”
그러다가 피곤한 듯 눈 사이를 지압하기도 했고, 근근이 손으로 벽을 짚어 중심을 바로 하기도 했다.
꿀꺽.
“커넌, 뭐 해요?”
터진 울음에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두려움에 몸이 이리저리로 비틀리며 떨렸으나, 팔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
결국 나도.
‘다음은 너야.’
‘도망갈래요?’
내가.
‘다음은 너야.’
왜 내게 약을 먹였어요? 나를 정말 죽일 건가요?
“크림.”
그때까지도 주머니를 뒤적이던 크림이 의아함에 고개를 숙이는 찰나, 커넌이 죽기 살기로 크림의 귀를
물어뜯었다.
“아악!”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이 줄줄 흘렀다.
못한 것이다.
살 수 있어.
“안 돼.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불과 3 피트 앞에 현관문이 보였다.
절그럭-
“하. 하하….”
“제발… 제발!”
그저 커넌의 간절함만 높아질 뿐이었다.
-의-
#11 발버둥
“이런 건 오랜만인데.”
후우-
그러다가 기대감에 찬 듯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허망한 표정으로 쇠사슬을 잡고 있는 커넌의 모습이
보였다.
“커넌.”
씨 X, 이게 뭐냐고요.
“아- 죽일 뻔했네.”
예상대로 라이터였다.
‘살려주세요.’
“불 한 번 붙여 볼래요?”
크림이 손을 펴, 안에 쥐어진 담배를 내보였다.
“아니요….”
하고 싶지 않아요.
“붙여봐.”
“그거 알아요?”
나는 사람 묶는 걸 좋아해요.
오른쪽 입가를 비틀어 만들어진 공간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표정이 싸늘해 보였다.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아요?”
살려주세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더라고요.
“이것도 이제 좀 낡았네.”
***
오늘은 잠에 들고 싶지 않았다.
꼭 누군가가 죽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더 해봐, 더!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12 모순
‘커넌.’
예뻐요.
탁.
‘다음은 너야.’
온통 피투성이인 손들이 한데 뒤엉켜,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커넌의 발목을 마치 족쇄처럼 붙잡고 있었다.
게다가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커넌의 발목, 종아리, 허벅지를 지나 치골, 갈비뼈, 쇄골, 목, 마침내
얼굴까지 뒤덮으니, 무엇이 커넌이고 또 무엇이 손인지 알 수 없었다.
꿈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혹시나 악몽과 현실이 이어져 있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모든 게 현실이었구나.
“2 시 54 분.”
오전일까, 오후일까.
오후 2 시 54 분.
“젠장!”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누구 하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안 돼….”
“…크림.”
“크림.”
그에 커넌이 소리높여 크림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그저 그가 보고 싶었다.
그에 쉼 없이 크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순간, 조심스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방.”
쯧.
가볍게 혀를 찼다.
“크림.”
탁.
“…왜 그런 표정이에요?”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살기만이 가득하던 눈에는 온통 절실함이 가득했다.
아늑해.
간질거리는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만지고, 지금은 세상이 무너진 듯 절실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에게 안겨 있었다.
모순.
“커넌, 그거 알아요?”
사실 저 시계는 고장 난 시계예요.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크림도 그런 때가 있을까?
“그리고 난 그게 싫지 않아요.”
마치 처음 그때처럼. 커넌의 새끼손가락에 크림의 검지가 닿고, 반대로 커넌의 검지에는 크림의
새끼손가락이 닿았다.
방황하는 커넌의 엄지와 다르게 크림의 엄지는 커넌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의 툭 튀어나온 뼈 위를
맴돌았다.
나처럼 되고 싶은 거야?
커넌도 나와 같아요?
그에 커넌이 의아하다는 듯 크림을 바라보는데, 마찬가지로 커넌의 손목을 붙잡아 제 입가로 끌어당기던
크림이 대뜸 커넌의 손목을 세게 물었다.
아악!
“세게 물어요, 커넌.”
더, 세게.
#13 상기
‘커넌.’
커넌, 트윌턴.
트윌턴.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그 흔한 이름도, 생일도 하물며 제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렇기에 남들이 가진 두 마디의 이름이 지독히도 부러웠다고 했었다.
‘체이시 글렌.’
커넌, 트윌턴.
난 그게 더 잘 어울리니까.
“…커넌, 트윌턴.”
작고 왜소했던 아이.
devil.
책상 위에 지워지지 않고 늘 쓰여 있던 단어였다.
“…맞아. 악마 아니야.”
그런 그에게 감히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그를 눈치챈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넌지시 묻기라도 하면,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발뺌했다.
멍청하게도.
“얼른 가라고.”
곧 날이 밝을 거니까.
“어서 가.”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못다 한 말도 좀 있고.”
“…커넌?”
듣고 있어요?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요?”
“…그냥 뭐든지요.”
아마도 습관이겠지.
알죠? 나 헛것 보는 거.
나 참… 나빴죠.
그는 곧 자신의 과거였으니까.
지나간 시간은 돌릴 수 없다며 냉정하게 반응해야 할까, 아니면 꿈에서만 그리던 그녀의 품에 안겨
지난날들을 눈물에 섞어 보내야 할까.
“지독히도 멍청했지.”
아주 어릴 땐, 그 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뒀었다.
하지만 그것은 며칠 후면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자신은 또다시 지옥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Gloomy Town.”
사람들은 그를 줄여 G. T, 라고 불렀다.
Gloomy Town. 웬만한 갱단도 가지 않는다고 하여 갱단에게 쫓기는 방랑자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고,
어제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이 다음 날 죽어서 발견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때로는 젖가슴을 다 드러낸 여인들이 커넌을 보며 까르르 웃었고, 가끔은 얼굴까지 문신이 빼곡한
남자들이 천국이 궁금하지 않으냐며 정체 모를 가루를 들어 보였다.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 (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보여?”
일부러 발음을 강하게 하여 내뱉는 시비조의 말투에도 닥터 토마스는 동요하지 않았고, 커넌은 그것이 더
짜증스러웠다.
보이냐고-
“아, 맞다.”
커넌!
그에 놀란 닥터 토마스가 한달음으로 커넌의 앞으로 다가와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아악!
하핫.
“It's not your mind that you're sick, it's your heart. (당신이 아픈 건 정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는 햇빛, 바람의 정도,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었고, 때로는 오롯이 커넌만을 담아내기도 했다.
쾅쾅쾅.
“…닥터 토마스?”
그러나 커넌의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 있는 닥터 토마스에게로 향했다.
단정하던 하얀색 티셔츠는 어디에 갖다버렸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색 티셔츠에 벨트까지 풀어헤친
꼴이라니.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옷은 또 언제 갈아입은 거야?
푸흐-
“커넌 트윌턴!”
게다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니, 커넌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닥터 토마스를 놀릴 기대감에 잔뜩 들떠 있던 탓인지 아니면 그녀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는 탓인지,
마주한 닥터 셰인의 얼굴이 유난히 싫게 느껴졌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둬요.
커넌이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며 최대한 애달픈 목소리로 호소했지만, 닥터 셰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또 자해를 했던가….
“…닥터 셰인.”
“셰인….”
아무것도.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상해, 혹은 살인죄로 수사를 받을 것이고 어쩌면 크림이 있는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요.”
철커덕.
붉은 자국은 커넌의 발목에 도장처럼 선명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족쇄와 다르니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크림 차례예요.
“크림이 내 족쇄예요.”
…크림만이, 할 수 있잖아요.
끼익-
낡은 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크림….
커넌이 발의 앞꿈치를 들어 걸음을 멈추고는 크림을 빤히 올려다보자, 그를 눈치챈 크림이 멋쩍게 웃으며,
방으로 걸음을 옮겨 어둠을 등지고는 커넌과 마주했다.
크림이 어깨를 으쓱이며 추측성 가득한 말들을 나열했지만, 커넌은 그런 불확실함에도 믿음이 갔다.
어때요?
그렇게 물으며 어린아이같이 말갛게 웃는 얼굴에 열심히 고개도 끄덕였다.
“아무도 없어.”
커넌이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크림?”
주변이 어두운 탓에 쭈그리고 앉아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커넌은 그게 조금
겁이 났다.
“마음에 들어요?”
“내가 채워줄게요.”
그런 말도 굳이 전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의도를 파악했듯이,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커넌의 노력이 통한 건지, 이때까지 커넌을 바라보던 크림이 말갛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했다.
-의-
더 모먼트(The moment) 1
지은이 | Xant
표지 | 형향
펴낸곳 | 글빚는이야기꾼
등록 | 2017 년 6 월 1 일
[제 2017-000041 호]
ISBN | 979-11-972368-2-2
©2020, X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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