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48

726 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1)

“흐으으음.”

눈앞에 놓인 비급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빠진 글귀는 없고…….”

비급이란 생각보다 민감하다.

사실 화산의 제자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만일 그들이 청명이 없는 상황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


이나 매화검결, 자하신공 등을 찾아냈다면?

“……대참사가 벌어졌겠지.”

강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야 우연히 동굴에서 천고의 비급을 발견하고 그걸 홀로 익혀


고수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비급이라는 건 그걸 보고 무공을 배우라고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


기 때문이다.

상승 무학의 복잡한 운용과 심도 깊은 무리(武理)를 한 권의 서책에 모두 담는다는 건, 손바닥만


한 전낭에 황소를 욱여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로 풀어 설명하자면 수십 권의 서책으로도 모자랄 텐데, 무슨 수로 한 권짜리 비급에 모든 무


학의 정수를 담아 낼 수 있겠는가?

결국 비급이란 소의 뿔을 살짝 긁어 내고, 털을 몇 가닥 뜯어 넣고, 발굽을 조금 잘라 넣는 식으


로 소의 부분 부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식의 극단적인 요약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 비급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승을 찾게 되는 법이다. 스승은 비급


안에 있는 무리를 말로 풀어 설명해 줄 수 있으니까.

응?

그럼 비급은 왜 필요한 거냐고?

“사람이 이걸 무슨 수로 평생 외우고 있어. 까먹지.”

그러니 결국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비급이란 배우는 이를 위한 게 아니라 가르치는 이를 위


한 지침서에 가깝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이가 화산의 무학에 대한 이해도 없이 비급만으로 무학을 익히게 되면


진양건과 같은 경우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놈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무학을 익히고 거의 펼치지 않았으니 그래도 멀쩡하긴 했지만, 만일
그대로 몇 년쯤 지났으면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들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지.”

진양건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지금 이 시점에 청명을 만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쨌든 횡액은 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하튼 그만큼이나 무학을 익힌다는 것은 섬세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어디보자…….”

촤라라라락!

매화검결이야 눈 감고도 구결을 줄줄 외울 수 있지만, 자하신공만은 아니다. 과거의 청명도 본


적이 없는 무학이니까.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내가 좀 익히라고 했잖느냐!

“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니까 그러시네!”

청명이 버럭 역정을 냈다.

“당장 내일 칼질하러 가야 하는 판에 새 무학을 언제 익히고 있어요! 그러다간 균형이 깨진다니


까!”

완벽하게 다스려 놓은 육체에 이전까지와 결이 다른 무학이 뒤섞이게 되면 순간적으로 무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낮아진다.

시간을 들여 그 새로운 무학을 완전히 체화하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면 이전보다 더 강해지겠지


만, 당시의 청명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쩝. 조금 아쉽긴 하지, 솔직히…….”

자하신공을 빤히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청명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야 했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자하신공을 익혀 뒀다면, 어쩌면 마지막


전투의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현종 역시 앞으로의 강호가 그리 녹록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을 터. 쓸데없는 권위를


챙기는 것보단 제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만드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본디 사람이란 제 손에 있는 것은 쌀 한 톨도 내어 놓기 싫어하는 마련이다.

권력을 혐오하던 사람도 자신이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면 그 달콤함에 취한다. 과거 아무것도 없
는 삼류 문파였던 화산의 장문인과 지금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화산의 장문인은 분명 다
른 자리다.

손안으로 권력이 모여들고, 그에 따라 다른 이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확연히 느꼈을 텐데도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을 제자들에게 선뜻 내어 놓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
이다.

“장문사형도 못 했던 건데.”

- 야! 내가 못 한 게 아니잖아! 분명히 너 익히라고…….

“여하튼 좀생이 같은 양반……. 후예만도 못하네.”

- 이 개새…….

청명은 귀를 후비적거리고 손가락을 훅 불었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고민할 문제가 있었다. 살짝 애매한 문제라 청명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흐으으음.”

그가 보고 있는 건 뜯어낸 자하강기의 비급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조심조심 훑어보던 자하신공 비급과는 달리, 자하강기의 비급을 훑는 청명의 손
길에는 조심성도 없고 무심함 기운이 역력했다.

“이건 이제 쓸모가 없네.”

사실 자하신공과 자하강기는 한배에서 난 형제 같은 무학이다.

자하강기도 훌륭한 무학이지만, 자하신공이 있다면 굳이 익힐 필요가 없다. 그래 봐야 자하신공


의 하위 판에 불과하니까.

“읏차.”

청명은 쥐고 있던 자하강기 비급을 뒤로 휙 내던졌다.


그 역시 과거에 익혔던 무학이니 묘하게 미련이 남기는 했지만…… 미련 때문에 남겨 두었다가
는 무학의 가짓수만 늘릴 뿐, 오히려 후예들의 선택을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쉬움이 남더라도 자하강기는 여기서 폐기하는 게 맞다.

자하강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하신공으로 더 강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 물


론 익히는 게 좀 더 난해하고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미련을 깔끔하게 끊어 낸 청명은 자하신공의 비급을 다시 펼쳐 들었다.

“흐으으음. 이거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훌륭한 무학이다.

그가 익혔던 자하강기보다 적어도 두 걸음은 더 나아갔다. 모든 화산 무학의 집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론 청명 역시 자하강기를 자체적으로 변형해서 썼으니 그 위력이야 못지않았겠으나, 역시 자


하신공이 자하강기보다 훨씬 더 우월한 무학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화산 선대들의 모든 정수가 이 한 권의 비급에 모여 있다.

“……모든 정수?”

순간적으로 청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끝이 미미하게 느려지기 시
작했다.

“아니지, 아니지. 모든 정수는 아니지.”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

“화산 역사에 전무후무한 최고수의 입김이 안 들어갔는데, 감히 화산 무학의 정수라 불릴 수는


없지!”

터덕.

그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잘만 사락사락 넘어가던 책장이 갑자기 턱 들러붙은 듯 잘


넘겨지질 않았다. 하지만 청명은 저항하는 듯한 비급의 책장을 강제로 휙 넘겨 버렸다.

“뭐 지금도 훌륭하지만……. 암. 지금도 훌륭하지만?”

휘어진 두 눈이 빛을 뿜었다.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그렇지?”


- 아, 안 돼! 안 돼, 이 새끼야! 그것만은…….

“에이. 어디서 자꾸 이렇게 개가 짖어? 야수궁 그 양반들은 왜 개를 두고 가서!”

- 개 아니야! 이 새끼야! 나야! 나라고!

또다시 귀를 파바박 후빈 청명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무릇 고인 물은 썩고, 무학도 마찬가지일지니, 과거를 그대로 답습해서야 미래가 없다! 무학도
언제나 진일보해야 하는 법! 이것이 화산 십삼 대 장문인 청문의 가르침이니라!”

- 그런 말 한 적 없어! 야! 야, 인마!

“그럼 어디…….”

비급을 눈을 훑으며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금만 내 취향대로 바꿔 볼까? 조금만……. 진짜 조금만.”

무릇 무학이란…… 아주 작은 수정만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청명은 남은 한 손으로 바닥에 놓인 매화검결을 잡았다. 양손에 자하신공과 매화검결. 화산 무


학의 최정화라 할 수 있는 두 무학을 든 청명이 낄낄대며 웃어 젖혔다.

“뭐? 내 무학은 전수가 안 돼? 청진이 이 새끼! 전수하면 네가 뭘 어찌할 건데?”

만일 선계에서 청진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아마도 그 말을 했던 자신의 입을 후려치고


있지 않을까?

“낄낄낄낄.”

양손에 쥔 떡……. 아니, 비급을 바라보는 청명의 두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매화검존의 심득을 아주 그냥 듬뿍듬뿍 담아 줄 테니까!”

화산에…… 망조가 드는 순간이었다.

***

“……며칠째지?”

“글쎄요.”
현종이 걱정과 우려가 가득한 눈으로 청명이 꿰차고 들어간 매화동(梅花洞)을 응시했다.

보통 폐관용으로 쓰이는 저 굴 안에 청명이 들어간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아, 거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그게 수련하러 들어간 제자한테 할 말입니까?”

“부, 불안하니 그러지 않느냐! 새로운 무학을 익힌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인데, 혹시 안에서 주
화입마라도…….”

“입! 그놈의 입 좀 조심하십시오! 으이구, 입!”

“……내가 장문인이다, 현영아.”

“아……. 잠시 잊었습니다. 죄송.”

“…….”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선은 다시 굳게 닫힌 매화동 쪽으로 돌아갔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화산에서 저 상승 무학을 완전히 파악하고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이 청


명밖에는 없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아도 그럴 방법도 없고, 능력도 안 되었다. 결국은 청명이 무사


히 비급을 익히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괜찮겠지?”

“으이구, 늙으면 걱정만 는다더니!”

현영이 혀를 차며 역정을 냈다.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저놈이 어디 문제 생길 놈입니까? 저놈 때문에 다른 놈들한테 문제가


생기지!”

“그야 그렇지만…….”

“거 실없는 소리 마시고 잠자코 지켜나 보…….”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고요하던 산이 산사태가 나듯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인가?”

세 사람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멀쩡하고 고요하던 산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원인이야 빤하지 않겠는가?

“어어…….”

현상이 커다란 석벽으로 닫힌 매화동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매화동을 막고 있던 석벽이 아주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안에서 자


줏빛의 기운들이 광활하게 뻗어 나왔다.

“…….”

동그란 동굴의 입구가 붉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매화 향과 함께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모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벌리고 그 압도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쿠웅!

“후우우우우.”

이윽고, 동굴 안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청명……아?”

쿠웅. 쿠웅.

입에서 불그스름한 증기를 내뿜으며 청명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압도적인 무게감


이 느껴졌다.
“후우우우우우!”

“…….”

어……. 무공을 익히라고 했더니…… 혹시 잠시 어디 먼 데라도 다녀왔니? 지옥이라든가?

그때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살짝 붉은 기를 띤 자주빛 안광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세 노인은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때 청명의 입이 열렸다.

“자, 이제…….”

“……응?”

우둑. 우둑.

목을 좌우로 꺾은 그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시작하시죠.”

세 노인은 불현듯 같은 생각을 했다.

어째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걸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727 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2)

“여기요.”

“……이게 뭐냐?”

“새로 쓴 비급들이에요. 보기 편하실 거예요.”

청명이 내민 비급들을 보며 현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자하신공이라 써진 비급과 매화검결이라 써진 비급. 그 깨끗한 것들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하나


들 수밖에 없었다.

“……전에 그 비급은 어찌하고?”

“아, 그거요?”
청명이 히죽 웃었다.

“너무 삭아서 그런지, 무공을 익히다 보니 바스러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옮겨 뒀으니까.”

“……바스러져?”

“네.”

현종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사, 사조께서 남기신 비급이 없어졌단 말이냐?”

“에이. 비급이 뭐가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내용이죠.”

“…….”

“사조께서도 뭐 꼭 그 서책 자체를 남기려 하신 건 아닐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암, 당연히 괜찮아야지. 뒈지기 싫으면.

청진의 유해를 수습하며 나름 애틋함이야 느꼈다지만, 어디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겠는가.

“……미리 옮겨 적었다고?”

“네.”

청명이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청명의 표정이 밝은 만큼 현종의 속은 말 그대로 썩어 들어갔다.

“자, 잠깐!”

대체 이 엄청난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현종은 불현듯 한 가


지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자하! 자하강기는 어찌되었느냐?”

“네?”

“왜 비급이 두 권뿐이더냐! 자하강기는 어디다 팔아먹고!”

“아, 그거요?”
청명은 이번에도 가볍게 헤헤 웃었다.

“그건 못 살렸어요.”

“뭐?”

현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모, 못 살리다니. 그게 그…… 그게 무슨…….”

“어…… 그러니까…….”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듯 눈알을 슬쩍 위로 굴린 청명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대충 살펴보니까 그건 굳이 남길 필요 없는 잡무공인 것 같아서 안 옮겨 적었거든요. 그런데 다


른 비급들 날아갈 때 같이 날아간 모양이더라고요?”

“나, 날아가?”

“뭐, 괜찮아요. 자하신공이 더 좋은 거니까!”

“그, 그러니까 지금 서, 선조의 유진을…… 날려 먹었다고?”

“어…….”

현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몇 년은 더 늙은 듯 핼쑥해졌다. 그의 간절한 눈빛을 배반하며 청명


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요? 넓은 마음으로다가.”

“어억!”

“자,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현종이 끝내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를 보면서도 시큰둥하기만 했


다.

“어차피 쓸 데도 없는 무공인데 너무 화를 내시네…….”

“뭐, 인마?”
뒤로 넘어갔던 현종이 별안간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청명에게 콱 달려들었다. 청명은 이크, 하
며 빠르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야, 이놈아! 그게! 그게 어떤 물건인데!”

“에이. 그거 애초에 없었던 물건이잖아요.”

“응?”

청명은 짐짓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없었던 것이 다시 없어졌으니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한낱 다 집착일 뿐인 것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에라!”

현종이 청명을 뻥 걷어찼지만 청명이 얄밉게도 그 발길질을 슬쩍 피해 버렸다.

“아니, 그건 진짜 필요 없는 거라니까 그러시네.”

“저놈이 그래도! 이리 와! 이리 안 와?!”

청명에게 달려들기 위해 퍼덕거리는 현종을 현영과 현상이 잡고 꾹 눌렀다. 흡사 한 마리의 활


어 같은 생기였다.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놔라! 이거 놔!”

“거 왜 그러십니까.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시면서.”

“끄으으으응.”

정곡을 찔린 현종은 검게 죽은 얼굴로 이를 갈았다.

“내 죽어서 선조들을 어떻게 보느냐! 무량수불, 무량수불! 원시천조오온!”

역시 자하신공이 장문인 전용 무학인 건 이럴 때 패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장문인 전용 무학으로 바꿔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해 보았지만, 이미 청명이


놈이 자하신공을 익히고 나와 버렸으니 다 틀렸다.
“끄으응……. 앓느니 죽어야지.”

“포기하시면 편해요.”

“…….”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저놈을 원껏 패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현종이었다.

“자자. 됐으니까. 일단은 비급부터 보세요.”

현종이 뭔가 더 역정을 내려 했지만, 슬슬 귀찮아진 현영이 선수 쳐서 입을 막아 버렸다.

“이걸 외우면 되는 거냐?”

“네. 구결 암송부터요. 천천히 느긋하게 하세요. 서두르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알겠다.”

현영이 비급을 집어 들고는 현종을 재촉했다.

“이미 지나간 일 자꾸 물고 늘어지지 마시고 얼른얼른 합시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결국 이를 갈던 현종도 체념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현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래, 이제 와


서 뭘 어쩌겠는가. 이미 선조의 유진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린 뒤인데.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힘없이 자하신공을 펼쳐 들었다.

‘그래, 미련을 놓자.’

자하신공이 자하강기보다 우월한 무학이라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자하신공이 사라지고


자하강기만 남은 상황보다는 백배 낫…….

어?

자하신공의 구결을 읽던 현종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쫙 펼쳐진 비급 위로 그의 눈이


쓱 올라와 청명을 주시했다.

“……청명아.”

“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구결이 내가 전에 본 것이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이에요.”

“……정말 기분 탓이냐?”

“하하하하. 장문인께서도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럼 설마 제가 구결을 바꾸기라도 했을까


봐서요?”

“…….”

“에이. 제가 그럴 능력이 있으면 대종사죠, 대종사. 자하신공쯤 되는 무학의 구결을 제가 무슨


수로 바꿔요. 하하. 너무 웃기다. 그럼 제가 화산신룡이 아니라 무신(武神)이죠. 화산무신!”

현종은 의심이 남은 눈빛으로 살짝 삐딱하게 비급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자하신공은 화산의 정화가 집약된 화산 최고의 신공이다.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나, 지금 청명의 무위가 과거 화산의 쟁쟁했던 선조들에 미치지는 못할 것


이다. 천하제일검을 두고 다툴 만한 이들을 드물지 않게 배출하던 화산이 아니던가?

그러니 청명이라고 해도 자하신공에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하는데……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현종의 눈알이 불안하게 여기저기로 굴렀다.

청명이 놈이 그 안 되는 일일 되게 만드는 놈이란 점이 불안했다. 솔직히 그동안 청명이 저지른


일 중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 대체 몇 가지나 있었던가?

“아니지?”

“그럼요.”

“진짜 아니지?”

“에이, 속고만 사셨나?”

현종의 촉이 묘한 울림을 보내고 있었다.


‘이놈 지금 분명 뭘 숨기고 있는데…….’

하지만 불안에 떠는 그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현영이 이제 대놓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 정 그러시면 빠지십시오!”

“…….”

“안 그래도 바빠 죽겠다니까요! 시간이 없다고요, 시간이!”

현종이 시무룩한 시선을 보냈지만, 현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청명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일단 구결부터 암송하도록 하마. 그럼 되지?”

“네네!”

“알겠다.”

자기들끼리 척척 손발이 맞는 걸 보며 현종은 눈을 흘겼다.

저, 저…… 청명이 놈이 하는 짓이라면 돌로 차를 끓인다고 해도 믿을 놈 같으니.

“그런데 청명아.”

“네?”

지금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현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너는 자하신공을 익힌 것이냐?”

“네, 그렇죠.”

“어떠하더냐?”

청명이 그 말에 살짝 고민하는 듯싶더니 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조금 더 고민한 후에 부연했다.

“아시다시피 신공이라는 건 얼마나 익히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양지차잖아요?”

“그렇지.”
현상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는 무학의 숙련도를 일 성부터 십이 성까지로 분류한다.

검으로 따지자면 검법의 초식을 완전히 기억하고, 어설프게나마 그 투로를 펼쳐 낼 수 있게 되


면 일 성이라 칭한다.

그리고 검을 완벽하게 체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십이 성(十二成), 즉 대성했다 칭하


는 것이다.

일 성만 익혀도 나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법과는 달리, 신공은 일 성, 즉 초입일 때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경지가 높아지면 놀라울 만큼 커다란 힘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정도가 좀 더 심해요.”

“심하다니?”

청명이 뺨을 긁적였다.

“일 성일 때는 그냥, 어…… 시냇물? 아니, 시냇물도 과하지. 물웅덩이? 아니……. 찻잔 안에 물? 아


니다, 아니다. 숟가락으로 한 술 뜬…….”

……어디까지 작아지니, 청명아? 그걸 신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여하튼 진짜 별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경지가 높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게 되어 있더라


고요.”

“으음.”

“정말 대성하게 되면 사람의 몸으로 하늘에 진짜 자줏빛 노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황당무계한 말에 현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 되는…….”

“아니.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현종이 청명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내가 알기로도 지금까지 화산의 역사상 자하신공을 십이 성 대성한 이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


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예?”
현상이 당황한 얼굴로 현종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이라 익히고 수련한 이가 많지 않다지만, 아직 대성


한 이가 없다니?

현종은 그가 황당해하는 이유를 안다는 듯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난해한 무학이라는 의미겠지. 심지어 자하신공을 창안하신 조사께서도 자신이 만든 무


학을 완전히 익혀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과거의 장문인들께서는 자하신공을 겨우 칠 성가량 익
혀 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천하일절(天下一絶)이라 불리셨지.”

“아…….”

현종의 말을 가만 듣던 청명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하일절이라…….”

- 뭐? 뭐, 이 새끼야,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내가 뭐 입이나 뗐나?

현상은 현종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자하신공만 잘 익혀 낼 수 있다면…….”

얼버무리긴 했으나 현종은 그 뒷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현상의 두 눈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현종 역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지한 눈으로 비급을 보았


다.

눈앞에 있는 이가 까마득히 배분이 낮은 제자라고 하나, 배움은 배움이다. 배움에 있어서 경건


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수도 없이 강조했었다.

현종은 진중한 얼굴로 청명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큰 파도가 밀려들 거라는 사실과, 화산이 더욱 힘겨운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우


리 모두가 알고 있다.”

“…….”
“너희가 아무리 우리를 존중한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 너희의 존중만으로 문파를 이끌어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현종이 정광이 넘치는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더 힘들게, 더 혹독하게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우릴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망설


일 것 없다!”

“예?”

청명이 조금 당황한 듯 되묻자 현종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강조했다.

“내가 장문인이고, 이들이 장로라 하여 사정 봐줄 것 없다.”

“…….”

“마음에 미혹이 있다면 떨쳐 내거라! 그리고 우리를 다른 제자들처럼…….”

“저…… 장문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응?”

하지만 청명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사정을 봐줘요?”

“…….”

“왜요?”

순간 말문이 막힌 현종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잠시 잊었네.’

그와 장로들을 위해서 껄끄러움을 이겨 내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가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


는데 사정을 봐준다는 말 자체를 이해 못 하는 얼굴을 보니 지금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뼈저
리게 실감되었다.

마음을 다잡은 현종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청명아.”

“예?”
“……좀 살살해라.”

“…….”

“나이가 드니 뼈마디가 쑤셔서.”

의욕은 저만치 앞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종의 슬픔이 담긴 한마디였다.

728 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3)

백매관 안에 까드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엄지손톱이 살짝 뜯겨 나갔다.

하지만 정작 손톱을 물어뜯는 이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저기…… 사숙.”

“응?”

“……그러다 피나겠습니다.”

까득.

참다못해 만류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손톱을 다시 한번 물어뜯은 백천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윤종을 바라보았다.

“와, 씨!”

그제야 백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윤종은 순간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평소의 단정하고 고운 얼굴이 아니었다. 피부는 거칠기 짝이 없고, 눈 밑에서 시작된 검은 음영


이 거의 턱 끝까지 내려온 몰골이 아주 반송장이 따로 없었다.

“아니, 뭘 잘못 드셨습니까? 얼굴이 왜……?”

“윤종아…….”

“예?”

“……괜찮을까?”

“…….”

백천은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더 불안해지는지 귀신이라도 마주친 듯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이제 아예 입술까지 덜덜 떠는 걸 보니 윤종마저 괜스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백천이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을까?”

앞뒤 다 잘라 먹은 질문이지만 윤종은 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우리한테 하는 식으로 하겠습니까? 청명이 놈도


머리가 달린 놈입니다.”

“머리는 달렸지.”

백천이 다시금 손톱을 물어뜯었다.

“……머리 안에 뭐가 없어서 그렇지.”

어……. 그건 반박하기가 좀 어려운데.

백천은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우리야 이제 뭐…… 그래, 이미 버린 몸이니까.”

“잠시만요, 사숙. 남의 몸 마음대로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장문인께서는…… 장로님들께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청명이 놈을 겪는 건데.”

백천이 부들대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늘 지저분한 곳도 없이 결 좋고 깔끔하게 내려와


있던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 말려야겠


지?”

“아니……. 그래도 설마…….”

윤종은 백천을 달래면서도 말끝을 개운하게 끊질 못했다. 그도 슬슬 불안해진 탓이다.

“……그래도 그놈이 위아래는 있……. 아니, 없나? 아니, 있……. 없어?”

윤종의 얼굴이 점점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게 그…… 위아래가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불안하지?”
“……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째 위장이 뒤틀리며 아파 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불안으로 점차 얼룩져 가자 옆에서 쉬고 있던 조걸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두 분 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걱정도 많아.”

“응?”

“거 수련이라는 게, 빡세게 시키고 싶다고 다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게 뭐 검술이나


경공 같은 거면 죽어라 굴려 댈 수 있지만, 신공을 익히면서 무슨 수로 사람을 굴립니까? 기운
이야 결국 자기가 움직이는 건데.”

“…….”

“…….”

조걸의 태연한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멍해졌다. 조걸은 잠깐 주춤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백천이 머뭇거리자, 윤종이 그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네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 때도 있구나 싶어서.”

“아니. 이분들이…….”

조걸이 발끈하거나 말거나 백천과 윤종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요.”

“그러게……. 확실히 그렇구나. 제아무리 청명이 놈이라고는 해도, 신공을 수련하는 사람을 갈아
댈 수는 없을 테니.”

이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나 그들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까?”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여태 말없이 앉아 있던 유이설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

딱 두 음절만으로 사람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사고 생각은 다르신 거예요?”

“어떻게든 괴롭힐 놈.”

“……그 말도 맞네요.”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슬쩍 가 볼까?”

“일반 제자들은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괜히 갔다가 걸리면 운암 사숙조께서 대노하


실 겁니다.”

“……그래, 그러면 안 되지.”

백천이 몸을 살짝 떨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운검이야 호통을 쳐도 너스레를 떨며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운암은


백천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차라리 운암보다는 현자 배들이 더욱 친숙할 정도이니
말이다.

‘문파에는 반드시 그런 분이 계셔야 하는 법이지.’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는 문파의 기강을 잡고 쓴소


리해 줄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운자 배에서는 운암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 백자 배에서
는 백상이 그런 사람이다.

“끄응. 속이 타도 확인해 볼 수가 없으니.”

“일단 비명 소리가 안 들리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런데…….”

백천이 막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백매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백상이 안으로 급히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사형! 장문인과 장로님들께서 내려오십니다!”

“뭐?”

백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돌진했다.

“비켜!”

“으악!”

심지어는 문을 반쯤 막고 서 있던 백상을 걷어차 치워 버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다른 오검이 급히 뒤따랐다.

“어디? 어디지?”

“저쪽입니다!”

백천의 시선이 윤종이 가리킨 곳으로 획 돌아갔다. 과연 화산 뒤쪽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몇몇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멀쩡한데?”

“멀쩡하신데라고 해야지, 이 싸가지 없는 놈아!”

윤종이 반사적으로 조걸의 목을 잡고 졸랐다.

“켁! 케엑! 죄, 죄송!”

조걸의 목을 짤짤 흔들어 대는 윤종을 보며 백천이 식은땀을 흘렸다.

‘가만 보면 저 새끼도 항상 조걸이 놈 팰 준비만 하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이건 누가 보아도 윤종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윤종을 저렇게 만든 조걸과 그 조걸을 저


리 만든 청명이 놈의 잘못이었다.

“이, 일단 가 보자.”

“예!”

백천을 필두로 한 오검이 장문인이 오는 쪽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일단 절뚝대거나 휘청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이 우려했던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청명이도 사람이네.’

‘양심이 있으면 장문인께 그러면 안 되지.’

‘마귀 같은 놈이지, 진짜 마귀는 아니었네!’

모두가 한시름 놓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엥?”

“저, 저거…….”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다가가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자, 장문인?”

백천이 당황한 듯 현종을 불렀다. 그러자 현종이 고개를 슬쩍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움찔.

백천은 깜짝 놀라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아, 아니……. 왜…… 왜 이렇게 수척해지신……. 그…….”

그도 그럴 게, 현종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백천의 얼굴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지만, 지금 현종의 얼굴에 비하면 한잠 늘어지게 잔 뒤 쌀뜨


물로 세수까지 마친 뽀얀 얼굴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피골이 상접했는데?’

‘아니,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무서워.’

현종뿐 아니라 현영과 현상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사이에 사람이 거의 목내이(木乃伊:


미라)가 되어 버린 것 같지 않은가?

“자, 장문인. 대체 무슨 일이…….”

현종은 아주 힘없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니다.”

아니, 되게 별거 같은데요?

“아우. 개운하다.”

그때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저 뒤쪽에서 청명이 놈이 잘 자고 일어난 고양이 같은 얼굴로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힌 백천이 와락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하지만 꿈은 그저 꿈일 뿐, 백천은 달려들었던 속도보다 더 빨리 튕겨 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


렀다.

“헐, 씨. 뭐야.”

청명은 내뻗어진 제 주먹과 백천을 번갈아 보다 혀를 찼다.

“아,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간다니


까?”

“끄으으……. 저 새끼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백천이 원독 가득한 두 눈을 부라렸다.

“야, 이 미친놈아! 장문인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위아래도 모르는 놈 같으니!”

“아, 이거? 이건…….”

“법도도 모르고 예의도 없는 놈!”

“아, 그러니까 그게…….”

“육시를 할 놈! 치도곤을 내어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할 놈! 허리를 분질러 놓…….”

“에라, 진짜!”

퍼억!

청명이 벗어 날린 신발이 백천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비로소 조용해진 백천이 옆으로 스르륵 쓰
러졌다.
털썩.

“……아주 신이 났지, 신이 났어. 쯧쯧.”

쓰러진 그를 보며 청명은 혀를 차 댔다. 예전에는 그나마 좀 멀쩡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게,


가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는지 몰라.

그때 유이설이 빠르게 현종을 향해 다가갔다. 퍼뜩 정신이 든 윤종이 외쳤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너희도 가서 빨리 부축해 드려라!”

“예!”

유이설과 당소소, 조걸이 재빠르게 장문인과 장로들을 부축했다. 윤종은 사색이 된 얼굴로 청명
에게 물었다.

“오늘 자하신공 익히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그, 그런데 왜 이런 것이냐? 설마 입마(入魔)라도……?”

“입마는 얼어 죽을. 그것도 뭘 좀 익혀야 걸리는 거지. 하루 만에 주화입마 들면 역사에 남을 일


이지.”

“그, 그럼 왜?”

“아아.”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냐. 그냥 첫 운용을 하는데, 도통 감을 못 잡으시는 것 같아서.”

“같아서?”

“시간을 들여 할까 하다가…… 그것도 낭비다 싶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가 몸 안으로 기운을 넣


어서 강제로 돌려 버렸거든?”

“……남의 몸 안으로 기운을 넣어서 강제로 기운을 돌렸다고?”

“응.”

“어…….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 진기도인이잖아. 그건 이전에도…….”


“아니지.”

“응?”

청명이 빙긋 웃었다.

“진기도인은 원래 기운이 흐르는 곳으로 기운을 보내는 거고. 이건 안 가던 곳으로 강제로 뒤틀


고.”

뒤틀어?

“기혈을 뚫고?”

뚫어?

“긁어내고, 부수고, 으스러뜨리고, 찢어 가며!”

장로를 부축하며 듣고 있던 조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흐음. 어…… 뭐 큰 문제는 없지. 어쨌거나 첫 흐름을 잡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이제는 좋아질 일


만 남았지.”

윤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문인의 상태가 왜…….”

“별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좋은 건데 평생 기운을 돌리던 데서 다른 곳으로 흐름을 바꾸다 보


면…… 음, 그러니까 조금 아프거든.”

“……얼마나?”

“음. 그걸 어떻게 비유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청명이 생각난 듯 환하게 웃었다.

“몸속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가락 두께로 구멍을 파내는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까? 기
혈을 따라서 꼬불꼬불하게?”

“히이이이이익.”

윤종이 사색이 되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야…… 야, 이 미친놈아 사람이 맨정신으로 그걸 어떻게 버텨!”

“버텨, 버텨. 다 할 수 있어. 저기 봐. 훌륭하게 버티셨잖아.”

저게? 넋이……. 아니, 영혼이 사라졌는데 이 새끼야?

“괜찮으세요, 장로님?”

윤종이 다가가 장문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초점이 사라졌던 현종의 눈에 희미하게 빛이 돌
아왔다.

“윤종아…….”

“예, 장문인! 접니다! 저 윤종입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문적(門籍).”

“예?”

“……저 새끼 문적 파서 쫓아내.”

“…….”

“……썩을.”

현종의 몸이 기어이 옆으로 털썩 넘어갔다.

“으아아! 장문이이이인!”

“장로님! 장로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 미친놈아 뭘 하면 내공 익히다가 사람이 기절을 하냐!”

“의약당! 의약당으로 모셔라, 어서!”

난장판이 된 주변을 멀뚱히 보던 청명이 혀를 차 댔다.

“쯧쯧. 이리 나약해서야.”

뭐, 그래도 이제 곧 나약하지 않게 될 테니까 괜찮지.

청명은 기지개를 쭉 켰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가 저지른 이 일이 화산에 어떠한 태풍을 몰고 올지 말이다.

729 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4)

이 일 차.

“……사숙.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게 큰 무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뭐가?”

“……저러다 진짜 등선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백천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산을 내려오는 현종과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안쓰


러움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게 죽어 있는 세 사람의 얼굴과 그 뒤를 따라 내려오는 청명이 놈의 반질


반질한 얼굴이 너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흡성대법이라도 쓰나?”

누가 봐도 청명이 놈이 세 사람의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모양새가 아닌가.

“어제보다 안색이 더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려? 무슨 수로?”

백천의 막막한 목소리에 윤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청명이 놈이 혼자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건, 물론 끔찍하지만, 어쨌거나 그놈만 말리면 끝나


는 일이다. 그 과정이 숟가락으로 산을 파서 길을 뚫는 것보다 힘들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시도
는 해 볼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 세 분은 다르다. 극도로 힘들다 해도 어쨌든 청명이 놈은 어떻게든 말려 볼 수 있는


존재인데, 저 세 분은 그들의 입장에선 손도 발도 써 볼 수 없는 존재다.

장문인과 장로를 말린다?

누가? 오검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차라리 저 망할 종남파 놈들을 말리지, 문파의 장문인과 장로를 한낱 이대제자와 삼대제자가 무
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하지만 저러다가 정말 큰일 치르겠습니다.”

“아는데…… 나도 아는데.”

백천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하겠다 하시는데, 우리가 막아서고 나설 순 없잖느냐?”

“……지금쯤이면 생각이 바뀌지 않으셨을까요?”

백천은 검게 죽은 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며칠만 더 두고 보자.”

“……예.”

물론 그런 그의 두 눈에도 걱정은 여전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뒤쪽에서 따라 내려오는 청명이 놈의 뿌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째 불안이 점점 더 증폭되


어만 갔다.

사 일 차.

“자,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현종이 멍한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식탁 위에 조금 전 그가 쥐고 있던 젓가락이 널브러


져 있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은 형편없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괜…찮다.”

‘안 괜찮은데?’

‘너무 안 괜찮은데?’

‘세상에, 젓가락질할 힘도 없으시다고?’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밥을 먹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현종을 보았다.


“……거 그렇게 기력이 없으셔서야.”

그때 옆에 앉은 현상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밥을 뜨는 그의 젓가락도 태풍 만난 사시나무처럼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밥알 다 떨어지네.’

‘뭘 드시긴 드시는 건가? 아까부터 흘리시는 게 구 할인 것 같은데.’

‘진짜 괜찮을까? 이래도 되는 건가?’

그래도 그나마 현상은 아직 장로로서의 체면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현상의 반대쪽에 앉은


현영은 애초에 젓가락질을 포기하고 맨손으로 밥을 퍼먹고 있었다.

‘현실적이네.’

그래.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젓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현종이나, 품위 있게 공기만 퍼먹고


있는 현상에 비하면 정말 실리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저게 과연 한 문파의 장로로서 해도 될 행동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것만은 어


쩔 수 없었다.

“저…… 저희가 먹여 드릴까요?”

“……괜찮다.”

“……할 수 있다.”

“손으로 먹으니 먹을 만한데? 손으로 드십시오, 손으로.”

실로 참담한 그 광경을 망연히 보던 모두의 시선이 돌연 한쪽으로 돌아갔다.

촵촵촵촵촵촵!

꿀꺽! 꿀꺽! 꿀꺽!

“크아아아! 오늘 국물 누가 냈냐! 시워어어어언하네!”

“…….”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화산의 제자들이라고 밥을 뜰 수 있을 리 없


었다. 눈치를 운운하기 이전에 다들 세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가득이니까.
그런데…….

“뭐야? 왜 안 먹어? 벌써 배불러?”

저 마귀 같은 새끼.

식당 내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놈이 앞쪽에 놓인 닭에서 다리를 뜯어내더니


호방하게 먹기 시작했다.

“크으. 역시 수련 뒤에 먹는 밥이 꿀맛이지! 이러다 살찌겠네.”

그의 요란스러운 식사를 보던 모두가 다시 죽어 가는 세 사람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던졌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눈가가 자꾸만 촉촉해졌다.

칠 일 차.

털썩.

화산 제자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어?”

현종이 돌연 힘없이 옆으로 털썩 쓰러진 것이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 장문이이이인!”

“의약당! 의약당에서 사람을 불러와라! 장문인께서 쓰러지셨다!”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사람이 하루살이도 아닐진대, 왜 길 가다가 말고 옆으로 픽 쓰러진단 말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진 장문인의 머리를 무릎 위로 누인 백천은 소매로 땀을 닦아 주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현종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장문인! 정신이 좀 드십니까! 장문인!”

“…….”

핏기 하나 없는 낯빛에, 갈라진 입술, 초점 없는 눈동자까지. 누가 봐도 반송장 꼴이었다.


초점 흐린 눈동자가 느릿하게 이곳저곳을 헤매더니 백천의 얼굴에 닿았다. 희게 질린 입술이 달
싹이며 열렸다.

“아아…….”

“예, 장문인! 백천입니…….”

“……사부.”

엥? 누구요?

“……저를 데리러 오셨군요, 사부. 저는 정말 열심히…….”

“아아아악! 뭘 보시는 겁니까! 장문인! 장문인! 저 백천입니다!”

그러자 당황한 조걸이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외쳤다.

“훠이, 물렀거라! 물렀거라, 악귀야! 장문인은 안 된…….”

“야, 이 미친 새끼야!”

윤종의 돌려차기가 조걸의 얼굴에 작렬했다.

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진 조걸이 이번에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


다. 동시에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자 조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 왜 때립니까! 이번에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악귀가 장문인을 끌고 가려 하지 않습니까!”

“악귀? 악귀? 야, 이 새끼야! 장문인의 사부시면 사조신데, 사조한테 악귀라니!”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조걸과 윤종이 왁왁거리며 싸우는 와중에도 백천은 현종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문인! 장문인!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아아…… 사부……. 화산……. 지금의 화산을 보시면…….”

“비켜 보세요, 사숙!”

그때 나타난 당소소가 백천의 손을 훅 밀치더니 제 소매에서 커다란 대침을 뽑았다.


아니, 그건 대침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으랏차!”

푸우우우욱!

그 거대한 대침이 현종의 정수리에 거침없이 꽂혔다. 백천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악했다.

“히이이이이이익!”

푸우우웃!

현종의 머리에서 피가 살짝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내내 흐릿하던 동공이 마침내 점점 또렷해


지기 시작했다.

“……음? 내가 혹시 쓰러졌었느냐?”

“…….”

“이런……. 추태를 보였구나.”

현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켰다. 화산의 제자들이 사색이 되어 그런 그를 만류했다.

“자, 장문인!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쉬셔야 합니다!”

“그러다 죽어요!”

“허허허허.”

하지만 현종은 제자들이 괜히 과하게 군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후 수련이 있는데 쉴 수는 없지. 하루를 쉬게 되면 이틀을 더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너희도


늘 이 사실을 잊지 말거라.”

아니, 죽는다고!

그러다 진짜 죽는다고!

“허허허허.”

끝내 몸을 일으킨 현종은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다시 걸어갔다. 태연히 걷는 그의 정수리에선


작고 빨간 샘이 퐁퐁 솟고 있었다.
“……소소야.”

“네?”

“빨리 저 침 좀 뽑아 드려라.”

“……네.”

백천이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감싸 쥐었다.

‘화산은 망했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십오 일 차.

“……아무래도.”

백매관에 옹기종기 모인 오검의 얼굴에는 더없이 확고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혁명을!”

백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가 호응했다.

“이러다가 화산은 장문인을 잃게 된다.”

“……청명이 그 미친놈이 급기야…….”

현종과 현상, 그리고 현영의 몰골은 날이 갈수록 기괴해져 갔다. 살이 보기 좋게 올라 보기만 해


도 인자함과 근엄함이 동시에 느껴지던 현종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젓가락처럼 빼빼 말라비
틀어진 사람만 화산을 유령처럼 배회했다.

“서 계시기만 해도 옷이 줄줄 흘러내리던데…….”

“저는 새벽에 소피보러 가다가 마주쳐서 비명 질렀습니다. 귀신인 줄 알았어요.”

“……진짜 등선하시겠던데.”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청명이 놈도 워낙에 똥고집이라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는데.”

그때 내내 말이 없던 유이설이 뜬금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사매?”

그러더니 말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잡아 뽑았다.

스르르릉.

“장문인의 원수. 죽인다.”

“야야! 잡아! 쟤 빨리 잡아!”

당소소와 윤종이 몸을 날려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유이설을 붙잡고 늘어졌다.

“진정하세요, 사고!”

“혼자서는 무립니다! 상대는 청명이라고요!”

“장문인의 원수!”

유이설의 이마에 살벌한 핏대가 섰다.

그녀에게 현종은 단순한 문파 장문인이 아니다. 아비의 스승이자, 할아버지이고, 어린 시절 자신


을 구해 준 은인이다. 그러니 열이 받을 수밖에.

“후안무치! 방약무인! 오만불손! 극악무도!”

“……틀린 말 하나 없지만, 일단 좀 진정해라. 사매.”

백천이 강제로 유이설을 끌어와 앉힌다. 그러자 유이설이 뚱한 얼굴로 항변했다.

“전 침착해요.”

“그럼 검 좀 넣어!”

나까지 찔릴 뻔했잖아, 인마!

자리로 돌아온 백천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단…… 우리끼리 이러는 건 소용이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는 법.”


“네?”

백천의 두 눈이 새파란 안광을 내뿜었다.

“청명이 놈에게 가서 따지자! 우리가 전부 몰려가면 제아무리 그놈이라고 해도 듣는 척은 하겠


지!”

“……걔가요?”

모두가 말만 안 했을 뿐,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게 왜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사숙?’

하지만 백천은 굴하지 않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조걸!”

“예! 사숙!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저, 조걸!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놈의 목을…….”

“가서 혜연 스님도 모셔 와라!”

“……네?”

진지한 얼굴로 백천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쪽수를 하나라도 더 늘려야지.”

“…….”

“뭐? 왜?”

“……아닙니다.”

모두 고개를 저었다. 백천이 많이 변했다, 변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적응하기가 참 힘들었다.

***

평상에 길쭉하게 누워 술이나 홀짝이던 청명은 우르르 몰려온 오검과 ‘여긴 어디? 나는 누
구?’를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혜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아니.”

“뭐 한다고 다들 몰려왔어? 시간이 남아돌아?”


반원형으로 청명을 둘러싼 이들이 백천에게 눈짓했다. 사숙이니 네가 말하라는 의미였다. 백천
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개새끼들.’

평소에는 취급도 안 해 주다가 꼭 이럴 때만 대접을 깍듯하게도 한다.

“크흠. 청명아.”

“왜.”

“우리가 어…… 그러니까 우리가 네 지도 방식에 딱히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 불만이야 항


상 있지만 그 효용에 대해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서론부터 던져 놓고 슬슬 눈치를 살피던 백천이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수련 강도를 조금 조절하는 게 어떻겠


느냐.”

“그래. 너무 심하다.”

“우리야 젊으니까 버티는 거지, 장문인과 장로님들은 연세가 있으시잖냐!”

윤종과 조걸의 맞장구에 힘입어 백천이 다시 힘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다가 어디 크게 상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조금만 낮춰요, 사형. 예? 조금만!”

“장문인의 원수! 읍! 으읍!”

검을 뽑으려던 유이설이 조걸과 윤종, 당소소에게 잡혀서 뒤로 질질 끌려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수련을 못 버틴다?”

“……아니, 뭐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쥐가 고양이 걱정해 주고 있네.”

“……응?”
청명이 피식 웃고는 술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카아.”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켜 평상에 걸터앉았다.

“백 번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눈으로 보면 알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

“안 그래도 지금쯤이면 슬슬 효과가 나올 때가 됐거든.”

“……응?”

“보고 당황하지나 마. 낄낄낄낄낄.”

신나게 웃어젖히는 청명을 보며 백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새끼가 또 뭘 하려고…….’

어떻게 이 문파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가.

이러다 내가 먼저 등선하겠네, 내가!

좋다고 실실 웃는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안으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730 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5)

십육 일 차.

“끄으으으…….”

현종이 거의 반쯤 기다시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몇 쌍의 눈동자가 뒤에서 지켜보았다.

“……딱히 달라진 건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다.”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이 헛소리는 쉴 새 없이 해 대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인데.”


“……굉장히 이상한 소리지만 맞는 말이네요.”

백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이렇다 할 변화는 안 보이는데.’

청명은 이제 곧 눈으로도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장문인의 모습에서는 그런


기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백천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자. 놈이라고 항상 맞을 수는 없으니까.”

“예.”

이윽고 방의 불이 꺼졌다. 백천을 비롯한 오검은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섰다.

십칠 일 차.

“끄으…….”

이불을 걷어 낸 현종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우드드득!

“끅.”

허리가 비명을 질러 댔다. 딱히 몸을 혹사시킨 건 아니건만, 그래도 늙어 버린 몸뚱이에는 부담


이 큰 모양이었다.

허리를 콩콩 두드린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이 얼마나 더 버티려나.’

아직 의욕은 잃지 않았다. 몸속을 바늘로 찔러 대는 고통이야 말로 다 할 수 있겠냐마는, 그 정


도 고통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화산이 망해 가던 때 홀로 이 방에 앉아서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아 내던 고통, 그 오장육


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의 육체가 정신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타고난 몸이 자하신공을 감당하기엔 허약한 것인지는 알 수 없


었지만, 하루하루 나아지는 게 없으니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나.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지.’

현종은 자신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몸뚱이가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설령 신공을 익히다가 입마가 와서 쓰러진다 해도, 그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화산 장문인으로서의 책임감은 둘째 치고, 그와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수련을 참아 내는 사제들이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기를 도인하는 청명이 놈의 얼굴을 봐
서도 못 하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죽기 살기로 버텨 내야 한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쉰 현종이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손을 뻗을 때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삐걱거렸지만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이불을 개고 의복까지 갈아입
었다.

‘늦지는 않았겠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지만 청명이 놈의 수련은 해 뜨고 나서 시작하는 법이 없다.

익숙하고도 섬세한 손길로 방 안을 모두 정리한 현종이 문 앞에 섰다.

‘기운을 잃지 말자.’

몸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다. 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 제자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가자!”

자신을 다독이듯 짧게 외친 현종이 문을 잡고 벌컥 열었다.

그리고.

콰드드득!

“엥?”

현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손을 보았다.


앞으로 쭉 뻗은 그의 손에 뜯겨 나온 문이 대롱대롱 잡혀 있었다.

“……아니, 이게 왜……?”

문에 박혀 있던 경첩들은 통째로 부러져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리고 있었다.

“거, 문은 왜 부수고 그러십니까?”

“으응?”

어느새 채비를 마치고 온 현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부서진 문과 현종을 번갈아 보았다. 현종은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뼈마디가 쑤셔서요.”

“…….”

“…….”

현영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문짝은 왜 뜯으신 겁니까?”

“내가 뜯은 게 아니라 이게 절로 뜯어졌구나. 아무래도 경첩이 낡아서 그런 모양이다.”

“경첩이 낡다니요. 이번에 건물 짓고 수리하면서 다 새로 갈았는데.”

“그래? 그럼 불량인 모양이지.”

“쯧쯧쯧. 이래서 경첩 하나도 일일이 확인을 해야 하는데. 거 은하상단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검수를 좀 더 철저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그 옆에다 두십시오. 애들 시켜서 다시 달라고 하겠습니다. 얼른 가시지요. 늦으면 또 청명이


놈 입이 댓 발은 나옵니다.”

“……그렇지.”

현종이 막 한숨을 쉬며 한마디 하려는데, 현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청명이가 참 착하지 않습니까? 예의도 바르고.”

뭐?

현종은 순간 멍한 얼굴로 현영을 보았다. 제 귀도 의심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다 못


해 귀신이 따로 없는 현영이, 오늘따라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헛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
다.

“다른 놈들이 수련에 늦으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깨 놨을 텐데, 그래도 어른이라고 입만 삐쭉


내미는 것 보십시오. 욕은 할 만할 텐데 말입니다. 얼마나 착합니까.”

“……욕은 할 만해?”

“어른이고 나발이고 잘못하면 욕먹어야죠.”

“…….”

“그런데 욕도 안 하는 걸 보십시오. 세상에, 얼마나 착하고 귀엽습니까. 하하핫.”

현영아. 아무래도 네 머릿속에서 ‘착하다’의 개념이 조금 비틀어진 것 같구나. 어쩌다 그리되어


버렸느냐, 사제야…….

“……일단은 가자꾸나.”

“예, 마침 저기 사형도 옵니다.”

“그래.”

현종이 시선을 돌려 아직 하늘에 머물러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어두운 길을 가는 제자들을 은은하게나마 저 달처럼 비춰 줄 수 있을 테니까.

이십 일 차.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죄송합니다.”

걱정하는 제자 하나를 물리며 현영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끄으응. 어떻게 날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아무렇게나 퍼져 앉은 현영을 보며 현상이 눈을 찌푸렸다.

“애들 있는 데서 체면 상하게.”

“지금 체면이 중요합니까? 당장 뒈지게 생겼는데. 사형은 힘들지도 않습니까?”

“허허. 힘드냐니……. 나는 잘 모르겠구나.”

“예?”

현영이 놀라 바라보자 현상이 빙긋 웃었다.

“그냥 뒈지면 딱 편하겠다. 뭐 그런 생각뿐이구나.”

“…….”

“……내가 다 늙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자하신공이고 나발이고 그냥…….”

“에헤이! 에헤이! 애들 있는데!”

되레 현영이 현상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입이 터진 현상은 도무지 정신이 잡히질 않는다는 얼굴로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
렸다.

“무학이고 나발이고 그냥 땅이나 파먹고 살 것을, 내가 뭐 한다고 화산에 들어와서는 말년에 염


병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차라리 고향에 있던 영영이한테 장가들어서 오손도손 땅이나 파먹
고…….”

“귀 막아! 귀 막아 이놈들아!”

현영의 고함에 제자들이 일제히 양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한숨을 내쉰 현영은 장문인에게


도 도움을 청했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장문인.”

“……그런데 현영아.”

“예?”

“현상이 말이 썩 일리가 있지 않느냐?”


“…….”

현영은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사형들이 모조리 노망이 나고 있단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때


백천이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 말했다.

“장로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끄응. 굳이 그럴 것까진 없다.”

“제가…….”

“아니, 됐다. 내 힘으로 일어나마.”

“그러지 마시고, 제가…….”

“에잉, 됐다니까.”

현영이 가볍게 백천을 밀쳤다. 정말 가볍게, 그저 투정하듯 손을 내민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으아아악!”

퍼억! 퍼억! 퍼억! 퍼억!

당황한 현영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아니, 현영뿐 아니라 그 광경을 본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돌연 집채만 한 거인의 발에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백천이 가공할 속도로 뒤로 튕겨 나가 바닥


에 몇 번이나 처박히며 튀어 오르더니 저 먼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저 아래에서 백천의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현영과 절벽 쪽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입을 뗀


건 현상이었다.

“아, 아니……. 그 부축 좀 하겠다 했다고 애를 절벽으로 날려 버려? 이놈이 진짜 미쳤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형!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저는 그냥 정말 살짝 민 것뿐입니다! 제


가 무슨 힘이 있어서 저 힘 좋은 놈을 저리 날려 보냅니까!”

“……어?”
듣고 보니…….

현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저놈은 왜 저런 거냐?”

“……그러게요?”

두 장로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절벽 쪽을 보았다.

그 괴이한 광경을 지켜보던 화산 제자들의 등에 슬금슬금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십오 일 차.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으냐?”

“……사숙. 그때 난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습니다. 괜찮다니까요. 아주 멀쩡해 보입니다.”

“아니, 나 말고!”

“네?”

윤종의 말에 울컥하여 얼굴을 붉힌 백천이 심호흡을 하더니 젓가락을 놓고 식당의 가장 안쪽


상석을 가리켰다.

“저분들 말이다.”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니 장문인과 장로들이 보였다. 윤종은 아, 하며 탄


성을 흘렸다.

“듣고 보니…… 뭔가 달라진 것 같기는 한데.”

“네 눈에도 그러냐?”

“그런데 정확하게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확실히…….”

“으음.”

백천은 미묘한 얼굴로 장문인들을 바라보았다. 윤종의 말대로였다. 분명히 뭔가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하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눈여겨봐야 차이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변화의 정
도는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일단…… 살이 다시 조금 오르신 것 같은데.’

여전히 다른 사람이 보면 송장이라 여길 만큼 피골이 상접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 해골 같은 얼


굴에 미묘하게나마 살이 붙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살이 조금?”

“역시 그렇지요?”

윤종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좋은 징조 아닐까?”

“어쨌거나 상태가 좋아졌다는 의미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표정에 살짝 놀라움과 안도가
스쳤다. 초를 치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 분위기가 오래 갔을 것이다.

“……거 티도 안 나는구만.”

“조용히 이 새끼야, 조용히!”

“확 그냥 주둥이를!”

백천과 윤종이 동시에 획 노려보며 타박하자 조걸이 움찔하고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두 분은 요즘 뭐 제가 말하기만 기다리고 사십니까?”

“…….”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청명이처럼 대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청
명이 취급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사람이 할 짓……. 아아아아악!”

그 순간 조걸이 무언가에 얻어맞고는 저만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쿠우웅!

“뭐, 뭐야?”

“습격인가?”
밥을 먹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들 중 절반은 벽에 처박혔다가 스
르륵 흘러내리는 조걸을 바라보았고, 나머지 절반은 정확하게 반대편에서 젓가락을 쥔 채 넋을
놓은 현상을 보았다.

“아, 아니…….”

현상은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조걸과 제 젓가락을 번갈아 보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는…… 아니, 얘들아. 나는 그냥 고기가 잘 안 집어지기에 힘을 좀 준 것뿐인데…….”

“…….”

“왜, 왜…… 젓가락에서 검기가…….”

넋을 놓고 현상을 보던 이들 중 몇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걸에게로 달려갔다.

“걸아! 걸아! 괜찮으냐?”

“괜찮다! 역시 바보는 안 죽어!”

“이 새끼 거품 물었는데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조걸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식당을 빠져나갔다. 누구도 지금의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흡사 귀신에라도 홀린 듯했다.

백천은 천천히 현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영이 그를 열심히 구박하고 있었다.

“아니! 애를 왜 패고 그러십니까?”

“아, 아니라니까! 나, 나는 정말 그냥 고기를…….”

“이제는 하다하다 젓가락에서 검기도 뿜으시네! 그러다가 애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


고요!”

“정말 아니라니까!”

억울해 죽겠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는 현상을 보며, 백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백 번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눈으로 보면 알 거야.

- 안 그래도 지금쯤이면 이제 슬슬 효과가 나올 때가 됐거든. 보고 당황하지나 마. 낄낄낄낄낄.

“서, 설마…….”
백천의 두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겨우겨우 음식을 집어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세 노인의 뒤로 알 수 없는 기


운들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쯤 되니 백천은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뭔가……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