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90

물은 짙푸른 청회색이었다.

해가 허슴푸레하게 뜰 무렵의 새벽, 풀은 어두웠다. 천장은 유리로 되어 낮에는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지만 그조차
해가 없는 동안에는 소용이 없어,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공간은 검푸른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몇 미터만 내려가도 시커멍게 시야가 가려질테지만 이 실내풀의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봐야 3 미터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짙푸른 청회색으로 반짝거리는 물속에서 어둑한 정적을 즐긴다.

그러나 무상의 아늑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온 세상에 갑자기 환한 불이 들어왔다,

은은하게 어둡던 수면이 눈 아프도록 하얗게 일렁인다. 누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유리가 풀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어스름하게 어둡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고, 사실
물속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어두컴컴한 그대로 불을 켜지 않고 물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귀를 기울이자 타박타박 사람의 기척이
둔탁하게 들려왔다.

실내에 불을 켜고 들어온 사라이 풀에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수면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예전에도 한 번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속에 잠겨 헤엄을 치다가 하마터면 곤란해질 뻔했던


것이다.

그때도 어두컴첨한 수영장에 불을 켜고 들어와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있었던 한 남자가 수영을 하는데 갑자기
뭔가 별 생각 없이 잠수로 유영하던 유리가 아래로 스윽 지나가기에 기겁을 하다못해 경기까지 일으켰었다.

남자를 풀 밖으로 끌어내며 마사지도 해주고 물도 갖다주고 했는데 정신을 좀 차리자마다 대뜸 욕을 퍼붓는 그
남자때문에 유리는 퍽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애초에 원일 제공을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유리는 말없이 그 욕들을 다 한몸에 받았었다.

그런 상황을 다시 겪는 건 사양이다.

욕먹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고, 물속에서 예기치 못한 쇼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_

긴 숨을 내뿜으며 수면으로 올라간 유리는 인기척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거리가 멀어져 있어서
경기를 일으키도록 놀라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없는 줄 알았던 풀에서 갑자기 누가 불쑥 솟아오르니 움찔할
정도로는 놀라겠구나, 하고 들어온 사람에게 약간 미안하게 생각하며,

그러나 유리의 예상은 어긋났다. 언제쯤 나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링신루였다.

오히려 유리가 놀라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가, 링신루가 "좋아요?"라고 말을 건네는
고리리ㅡㄹ 듣고서야 정신 차리고 그리로 헤엄쳐갔다.
"어쩐 일로 벌써 일어났습니까?

"아 잠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게이블 씨 방문은 열려있는데 안에 사람은 없더라고요, 수영하러 갔나
싶어서 베란다로 내다보니까 실외풀에는 또 아무도 없잖아요. 이 시간에 갑자기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은
생각이 드니까 잠이 깨어서요 "

여기에 있을 줄 알았어요, 하고 중얼거리는 링신루는 그이 말마따나 막 방금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무릎 담요를 어깨 위에 망토처럼 둘둘 감고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와, 제멋대로 비죽거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눈에서 눈꼽을 떼는 모습조차 전혀 흉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본바탕이 중요하긴 중요한가 보다, 하고
유리는 잠깐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외풀에서 헤엄치더니, 실내로 옮겼네요?"

링신루는 유리가 풀 근처에 수건과 함께 놓아두었던 물병을 집어들어 주욱 마시며 주위를 둘어보았다, 맨션의
제일 위층에 거주민을 위해 마련된 짐에는 처음 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거기에 딸려 있는 실내풀에도.

"슬슬 바깥 공기가 차가워져요......

유기는 뭔가 더 말하려다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늘 유리가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질 앟고 있는 링신루가 어느
틈에 그런 걸 다 보고 있었을까 싶다.

아무런 내색도 안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은근히 많이 알고 있는 링신루였다.

"하긴 이제 바깥에서 헤엄지기엔 물이 많이 차갑죠?"

물통을 단숨에 반이나 비운 링신루는 그 옆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뜰어당겨 앉았다. 금방 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아니......., 물은 아직 괜찮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바깥보다 따뜻해요. 하지만 물에서 나왔을 때에
바깥 고익가 차가우면 그게 힘들기 때문에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실내풀을 이용하기로 했다. 추운 계절이 지나 날이 풀릴 때까지.

그렇구나, 하고 고래를 주억거린 링신루는 빙긋이 웃었다.

"게이블씨 때문에 주민 체육시설이 잘 구비된 맨션으로 골라서 들어온 거였는데 정말 보람차네요. 마련된 시설을
이용하지 않으면 아깝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링신루 본인은 풀장은 물론 그 옆에 딸려 있는 체육시설도 전혀 이요하지 않았다.


유리가 알기론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처음일 터였다.

나도 운동을 좀 하긴 해야겠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아무도 없이 텅 빈 공간을 들러보던 링신루는, 유리를


쳐다보더니 픽 웃었다.

"그렇게 물이 좋아요?

"예, 좋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선뜻 대답하자 웃음이 더 짙어진다.

"잠보다 더 좋아요?"

비교급이 나오면 대답에도 약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수면욕을 충족한 다음이라면요."

아무리 그래도, 한숨도 안 잤는데 침대보다 풀장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러자 갑자기 링신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최소한의 수면욕이라니. 게이블 씨는 하루에 두세 시산만 자고 살아요? 어제 나랑 같이 깨어 있다가 세 시


넘어서 잠들었으면서 지금이 몇시인지 알아요?

이제 막 새벽 여섯 시를 가리키는 벽시계를 보면서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늘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기 때문에


늦게 자도 그 시각이 되면 자연히 눈이 떠진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늘 카멜레온처럼 기상시각이 일정하지 않은 링신루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 하지만 게이블 씨 정말 체력 죽인다......., 사람 맞아요? 고작 두세시간 자고도 멀쩡하게


일ㅇ러나서 운동하러를 다 오고."

"운동이라기보다는 쉬러 오는 것에 가깝습니다."

"아, 예, 그러세요?"

역시나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체력이 좋다는 말이야 칭찬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약간 빈정기가 있는 말투로 사람 맞냐는 말을 들으니 꼭 욕을


먹은 것 같아 어쩐지 조금 억울해졌다.

유리에게 있어 물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로 운동이 아니라 휴식이었고, 게다가 정작 체력이 좋은 건 오히려


링신류였다.

당장 어제만 봐도 그렇다. 지난 밤 늦게 잔 건 굳이 따지자면 링신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냥 늦게 잔 건도


아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산행을 하고 왔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정정한 징훠령은 인자요산을 외치면 종종 산행을 하곤 했는데, 어제도 직계 식솔 몇몇을
거느리고 나섰던 것이다.(냉열한으로 이름 높은 링휘렁과 인자 사이에 대체 무슨 개연성이 있냐고 욕을 하는
외부인이 여럿 있다는 것은, 그가 등산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천미터가 약간 넘는 정도인데다 등산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를
먹은 링훠령에게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산세가 조금 험해지는 곳에서는 대부분 링신루가 그를 부축해 다녔다.

다른 사람까지 떠맡고서 산에 올라갔다 오는건 상당히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텐데도, 정상까지 등반하고 내려온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등산 진입로의 입구까지 내려왔을 즈음 즉 산행을 거의 다 마쳤을 즈음. 심각한 얼굴을 한 그의
둘째 형이 산 위에 전자수첩을 두고 내려왔다는 말을 꺼내었다.

다시 구입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일정표가 문제라고 형이 난색을 표하자, 링신루가 선뜻


다시 올라갔다 오겠다고 했다.

덕분에 유리도 그와 함께 다시 올라갔다 와야했다. 더욱 안 좋았던것은 형이 전자수첩을 두고 온것이 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임시 휴게터였다는 점이었다.

결국 다른 가족들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놓고 산에 다시 올라갔다 온 그들이 본가에 들렀다가 맨션으로


돌아왔을때는 밤도 한참 늦은 시각이었고, 유리는 무심한 얼굴로 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팔다리가
묵직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원래대로 따지자면 유리보다 링신루가 더 지쳐야 했다. 두번째로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자칫 미끄러질 뻔해
발목을 아주 살짝 접질린 유리를 부축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집으로 돌아온 링신루는 지친 기색이라곤 없이 멀쩡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의 다른 때와


전혀 다를 게 없어, "눈이 피곤하네요. 마사지해주세요." 라고는 했지만 딱히 평소보다 더 피로를 호소하지는
않았다.

별로 생각할 일ㄹ이 없어서 평소에 잊고 지내지만. 생각해 보면 이 해사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청년은 UNHRDO 의
기 수석이라고 했었다. 하긴, 그렇다면 채력이 화수분처엄 솟아나올 만도 하게싸.

그러고 보면 체력뿐 아니야, 힘도 은근히 쎘던 것 같아...... 맨 션에 들어오고 나서 가구 배치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바꿀때 침대나 옷장까지 아무렇지 않게 옮겨놨었거든......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사람에게 사람 맞냐는 말을 들은게 웬지 억울해지는 유리였다.

"매일같이 물속에 살다 보니까 비인간적으로 체력이 좋아졌나봅니다."

그 나음대로 한껏 빈정을 담다 대꾸했지만 무심한 말투와 무심한 표정으로는 그 빈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링신루는 천진하게 " 정말 그런가 봐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흠......., 요즘 영 체력이 예전만 못하던 참인데...... 나도 한번 들어가 볼까."

링신루는 유리가 목까지 담그고 있는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엉거렸다. 유리는 눈섭을 약간 치켜올렸다.

"풀에는 못 들어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누가 못 들어가요 안들어가는 거지. 수영 할 줄은 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

링신루는 무슨 소리냐는 듯 대꾸하며 철방, 슬리피를 벗은 한쪽발을 풀에 담갔다, 수면을 찰박찰박 발로


두드리면서 어쩔까. 하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거의 십여 년은 물에 안 들어간 것 아닙니까?"

"음....... 대충 그쯤 됐죠, 잘 아시네요. "

누구한테 들었어요? 하고 심상하게 묻는 말에 유리는 잠자코 있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어린애를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던 그 죽일놈만 아니었더라면 나도 물놀이를 좋아하며
자랐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며 발로 물을 휘젓는 링신루에게, 유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봉하고만 있을 분이었다.

다행히 그 가시방석은 오래 가지 않아, 링신루는 다른 데에 생각이 미친 듯 유리를 돌아본다.

"그렇게 오래 안 했으면 잊어버렸을까요?"

"아니, 잊어버리진 않았을 겁니다. 수영은 몸으로 기억하는 거니까. 하지만 자세는 많이 안 좋아졌겠죠.

자세, 하고 따라 말한 링신루는 픽 웃는다.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즐기기 위해 수 영을 하는데도 자세가 중요한가요?"

"대회요?"

그런건 한번도 생각조차 안 했다는 얼굴로 반문한 유리는 곧 아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기본자세를 배우는건, 그게 대회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몸에 부담을 덜 주면서 물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예요, 가장 힘을 덜 들이며 물을 즐길 수 있는 걸 배우는 거죠.

......원래 그렇습니다. "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리며 빤히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문득 빙글거렸다.

"꼭 강사 같네... 물이 그렇게 좋단 말이죠.... 그럼 한번 들아가 볼까"

링신루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무릎담요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잠옷 대 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있던 위에 담요만 두르고 나왔던 모양이다.

"반바지로 들어가도 되겠죠?"

그렇게 말한 링신루는 유리가 뭐라고 말하기조 전에 풀로 뛰어들었다. 첨벙, 물보라가 크게 일며 수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풀 아래로 잠기는가 싶던 인영은 곧 편평하게 몸을 기울인 채 수면 가까이 울라왔다. 서억,서억,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몸은 금세 풀 저편까지 다다랐다.

유연하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몸.

처음 한동안은 거칠게 물살을 가르던 링신루는 얼마간 헤엄치는 동안 조금씩 자세가 정돈되어갔다, 그의 말마따나
대회에 나가기는 어렵겠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반대편에서 멈췄다가 다시 돌아온 링신루는 푸우, 가쁘게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는, 수영도 안하고 풀장도 싫어한다고 헸던 사람치고는 무척 개운해보였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리는 얼굴 위로 흐르는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쳐내면서 눈길을 주는 링신루와


마추치자 잘 갔다 왔습니까? 하고 말을 건넸다. 팔뚝으로 얼굴을 문지르면 빤히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내 자세가 그렇게 이상했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유리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이내 왜 웃는지도 알아차린다.

링신루가 물속에 있는게 좋았다.

자신이 이토록 사랑하는 물을 그가 즐기고 있다는 것이 퍽 반갑고 기뻤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라고 하기에는
유리도 억울한 기분이 적잖이 들었지만 물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그가 물속에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아닙니다. 잘 하던데요. 마지막으로 수영을 한게 십년도 더 됐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뭘 하든 요령만 알면 평균치보다는 잘 해요 수영도 오래 안했다곤 해도 어릴때는 석 잘했었고,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 자랑을 하는것까지도 유쾌하다, 유리는 웃고말았다.

"그런데 생각만큼 몸이 잘 안나가네요. 팔에서 물이 좀 헛도는 느낌이랄까......

아마 팔꾸미가 너무 바깥쪽으로 빠져서 그럴겁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당겨보지 그래요

어쩐지 정말로 수영강사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조차 기꺼웠다.

유리는 그의 앟ㅍ에서 몇 미터쯤 느린 속도로 헤엄을 쳤다, 유리가 헤엄치는 자세를 하나하나 바라본 링신루가
그를 흉내내어 다시 헤엄친다. 뭘 하든 요령만 알면 잘 한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딱히 강조해서 말하지
않아도 어느 것이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인지 그 스스로가 알아내는 것 같았다.

"팔만 조금 더......, 아니. 어깨를 너무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요,....잠시만요."

유리는 수면에 엎드려 몇 차례 가까운 거리에서 헤엄을 쳐 보이는 링신루에게 다가갔다, 보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감을 잡기 어려운 부분이라면 직접 해 보이는것이 제일 나았다.

수면 위에 뜬 링신루가 고개를 들거나 몸의 일부만 움직여도 가라앉지 않도록 한 팔로 그의 배를 끌어안아 수면에


버텨주면서, 그의 등 위로 몸을 기울였다.

몸을 겹쳐 엎드리다시피 한 채 팔을 뻗어 그의 팔목을 잡아 천천히 일정한 각도를 그리며 돌려준다,

그가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이렇게요, 라고 속삭이며 몇 차례 더 거듭하는 동안, 유리는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렇듯 가까이에 있는 그의 몸을 그제야 의식한다.

맞닿은 살잦으로 직접 전해지는 체온은 서늘한 물속에 있어서인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이 뛴다. 그 박동이 살갗 너머로 그에게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커다랗게, 쿵, 쿵, 동시에
감탄하고 말았다. 예븐 몸이었다.

예쁘다고 하면 어폐가 있다, 아름다운 몸이다. 유려하게 선이 흐르는 감탄스럽도록 아름다운 남자 몸

불현듯, 언제였던가 이 몸을 깊이 겪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밤이 떠올랐다. 입을 맞추고 혀를 맛보고 그의


체온이 어느 정도로 뜨거운지 살잧 위로 직접 알아보았던 밤이다. 결국 도중에 그치고 말앗지만.
아쉬움도 후회도 없지만, 그러나 가끔은 생각이 난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그만두자. 그가 알면 언짢아 할 생각을 떠올리는 건.

유리는 링신루가 감각을 체득할 수 있을만큼 그의 자세를 가다듬어준 뒤 그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는 팔에 이내 서늘한 물이 달라붙었다.

따뜻한 체온의 기억을 금방 빼았아가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워진다.

이렇게요 어떤느낌이지 알겠습니가?

"알 것 같아요."

링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가까운 곳을 몇 바퀴 맴돌며 헤엄을 친다. 그러면서 그럭저럭 요령을 잡았는지
홀로 고래를 주억거렸다.

그런 직후였다.

마치 "좋아, 그럼 이건 됐고. " 라고 구분이라도 짓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고래를 들어 유리를 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시선은 얼마간 붙박은 듯 떠나질 않았다.

담담하게 그를 마주보던 유리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웃한다. 그런 유리를 다시금 한동안 보고 있던 링신루는
이윽고 빙긋 진한 웃음을 웄었다.

"가끔씩 생각하곤 하지만. 진짜로 해맑은 사람이다 싶어서요. 아니 좋은 의미예요, 좋은의미

뜻을 알수 없는 수식어에 유리가 얼핏 눈살을 찌푸리자 얼른 좋은 의리말고 덧붙인 링신루는 그러나 아에 좋은


의미만은 아닌 듯 미묘하게 웃었다.

"조금 전에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다른 뜻은 아니고 그냥 궁금한 건데."

"예?"

도중에 말을 끊은 링신루는 잠시 그대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말을 할까, 말까, 그런 눈치였지만 곧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이런 상황에서도 욕심이 안나요?

거의 다 벗고서 뒤엉키는데도? 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링신루의 말을 듣고서야 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링신루의 말을 듣고서야 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맨 살갚을 스치면서 어쩌면 링신루도 유리와 같은 예전을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혹은 이처럼 눈치 빠른 남자니까
조금 전 그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몸이라고 생각했던 걸 알아차리고서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낯이 뜨거워졌다. 천천히 천천히.

아무 말도 안하고 우뚝뚝한 얼굴로 링신루를 쳐다만 보는 유리의 낮빛이 상기되어가는 걸 그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짜로? 하고 깅신루는 고래를 기울이며 어쩔수 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납니다."

아주 잠깐 웃음이 사라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링신루씨는 몸이 예뻐요, 그래서 계속 보고 싶다다는 욕심이 나요."

하물며 어설프게나마 그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꼈던 적도 있는몸이다, 그런 몸이 고운 살갗을 드러내고 눈앞에


있는데. 그런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 편이 더욱 이상하다.

데워진 얼굴로도 전지하게 대답하는 유리를 어딘가 론란하다는 들이 쳐다보던 링신루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매를
찡그렸다. 괜히 물어봤네, 하고 함숨처럼 웃는 혼잣말이 들린다.

"그래도 그 욕심밖에 안단다는 거죠."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의 침묵 뒤. 뜻밖에 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요, 그 정도는."

유리는 눈동자만 들어 그를 보았다, 뭐가 그 정도는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며 그만


됐다는 듷이 웃는 링신루는 크게 불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좋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 예, 저도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니 새삼스러운 인사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대답했다, 그 바로 뒤에,
링신루는 무엇이 '앞으로'인지를 알려준다.

"새벽에 나도 깨워줘요. 체력도 좀 붙일 겸, 수영이라도 해 보게 잘 가르쳐줘요, 선생님."

「몸이 예쁜건 너지」

아네뜨는 수화기가 쟁쟁 울리도록 커다랗게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린 뒤에 딱 잘라 말했다.

........ 그렇습니까?

유리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의 몸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대꾸가


돌아오는지 그 맥락을 모르겠다, 하긴 아네트는 원래 가끔 맥락에서 벗어나 생뚱한 말을 던질 때가 종종 있었다.

새벽마다 고용주와 함께 수영을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우연이었다.

요금 추워져서 실내풀을 이용해야 할 텐데 아쉽겠네,라고 유리가 실내보다는 시외풀을 더 선호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실외풀보다는 바다를 후러씬 더 좋아했지만 아네트가 안부처럼 말했다.

"괜찮습니다. 맨션에 딸린 거라서 좀 좁긴 하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몸이 예쁜 건 너지 」

아네트는 수화기가 쟁쟁 울리도록 커다랗게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린 뒤에 딱 잘라 말했다.


"..... 그렇습니까?"

유리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의 몸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대꾸가


돌아오는지 그 맥락을 모르겠다. 하긴 아네트는 원래 가끔 맥락에서 벗어나 생뚱한 말을 던질 때가 종종 있었다.

새벽마다 고용주와 함께 수영을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우연이었다.

요즘 추워져서 실내풀을 이용해야 할 텐데 아쉽겠네, 라고 유리가 실내보다는 실외풀을 더 선호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실외풀보다는 바다를 훨씬 더 좋아했지만 아네트가 안부처럼 말했다.

"괜찮습니다. 맨션에 딸린 거라서 좀 좁긴 하지만, 두사람이 들어가는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두사람? 돼 두사람이야?」

링신루씨도 얼마전부터 수영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새벽에 같이 가곤해요.

그렇게 말한 유리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혹시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그녀를 불렀다.

'아네트?

「웬일이야, 너 누구랑 같이 수영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잖아? 고용주랑 무지 친해졌나 보네? 」

내가 같이 풀에 가자고 했을 때에도 별로 안 내켜하는 기색으로 따라오더니, 하고 장난스럽게 구박을 하는


그녀에게, 유리는 미안합니다, 하고 뒤늦게 사과했다.

분명히 유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수영하는 걸 그리 즐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풀에는 안 들어간다는 기벽을 부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넉넉하고
한가로운데가 좋았다, 아무렇게도 방해 받지 않고 물을 느낄 수 있는.

......하지만 이런것도 나쁘지 않았다.

낯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같은 물 어딘가에 있다는 감각도.

「어떤데 그래? 수영 잘해? 」

흥미롭다는 듯이 묻는 그녀에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저도 모르게 곧바로 머리를 떠오르는 걸 그래도


말했다. 몸이 예쁩니다, 라고.

그러자 다시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이 조금전보다 더 길었다.
이번에야말로 전화가 끊어졌나, 유리가 다시 "아네트?"하고 불러봐려고 한 순간

「아하하하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하....」

사람 웃는소리 같지 않게 끝없이 늘어지는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웃다 못해 쓰러지는지, 뭔가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아야야야, 하는 소리도 같이 새어나온다.

그 와중에도 자지러질 듯 웃으며 웬일이야, 어쩜 좋아,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옆에서 누군가 정신 차리라며
의자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 웃음을 간신히 멈추었다. 옆에 데릭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웄었네. 네가 그런 말을 할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몸이 예쁜 건 너지」

딱 부러지게 말하는 그녀에게 유리가 미심쩍게' 그렇습니까?"하고 되묻자 당장 「그럼!」하는 확고한 답변이
돌아온다.

「내가, 연인으로 성격이 썩 잘 맛는 것도 아닌 너랑 몇달이나 사귀었던 이유가 뭔데? 오로지 네 몸매가


좋아서였다고. 얼마나 예뻤는데.」

".....창천 고맙습니다."

응, 그러니까 다음엔 나랑도 같이 풀에 가. 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이곤 다시 한동안 웃느라 말을 못 잇는 그녀가


얼른 도로 수화기로 돌아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유리였다.

겨우 웃음이 좀 가라앉은 아네트는, 하지만, 하고 웃는 와중에도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너를 수영강사로 부리다니, 너무 호화로운 사치를 하잖아, 그 막내도련님은, 네 재능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인걸」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아네트,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게 아니었던가요?

「아, 맞아맞아. 하 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될 만한 어렵잖은 일이니까, 너한테는 그냥 이 핑계로 전화


한번 더 걸어본거라고 생각해 줘.」

그렇게 전제를 둔 그녀는 말마따나 어렵잖은 화제를 꺼내었다. 그녀가 현재 업무 관련으로 뒤를 캐고 있는 남자가
최근에 중국에 들어가서 단기간 머무르다 왔는데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연락책이 되어주고 있는 그들은 그들 주위의 동료들과도 거의 비슷한 네트워크를 짜고 있었지만
언제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유리와 같이 다른데에 고용이 되어 있는 경우는 그 본업에 지장이 가지 않는 범위내애서라는 전제가 붙지만,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길게 보아 일반적인 제공이라는건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흔쾌하게 도음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래요. 하지만 제가 직접 알아보러 나닐 수는 없으니까 시간이 필요해요. 넉넉하게 여유가 있는 일이 아니라면


다른 쪽으로도 알아보는게 나을겁니다.

그렇게 답하며, 유리는 그녀가 불러주는 타깃의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알아봐야겠지만 보름쯤은 걸릴 것 같은데요,
다른족에도 말해놨으니까 괜찮아, 하고 의례적인 대화가 오간다.

그러나 잡담을 하는 시간의 1/10 도 걸리지 않아 일 이야기를 마쳐버린 그녀는, 다시 조금 전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아무래도 우스워죽겠는지 또 꺄르륵 웃는다.

가끔 그녀는 유리로서는 이해 할수 없는 포인트에 미친듯이 즐거워할때가 있었는데. 이게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몸이 예쁘다는게 그렇게 이상한 말이었나.

유리는 다시 되새겨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말 같이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도 만일 직접 그를 본다면 정말로 예븐


몸이라고 생각할거다. 시선을 떼기가 아쉬울 정도로 그 자체로 흠잡을 데 없이 완성외더 있는 남자 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유리 스스로가 생각해도 다소 지나치게 몰입해 있는것 같기는 했다.


당장 오늘 새벽만 해도 한소리 들었다. 질책이나 핀잔은 아니지만 수영을 하는 내내 어딘지 미묘하게 웃고있던
링신루가 수영을 마칠 즈음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정말 열심히 쳐다보네요."

그렇게 종아요? 라는 말을 장난처럼 덧붙이면서, 링신루는 유리의 시선이 줄곧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고 내비치며 풀에서 나갔다.

그러나 시선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몸을 닦는 모습은 태연했다.

"몸도 몸이지만, 헤엄치는 것도 예쁩니다."

"헤엄?"

링신루는 그거라면 당신이 더 잘 할텐데요, 라는 눈으로 돌아봐았다. 그러나 잘하고 못하고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링신루는 물속에서 언제나 활기차게 오갔다. 한시도 쉬지않고 쉴새없이 물을 가르는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명 그 차체인듯.... 저런 사람이 체력을 붗여야겠다고 말한다는게 때로는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러나 그 생명력 자체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ㄷ사.

"열대바다에 사는 물고기 같아요"

유리가 담담하게 말하자 링신루는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면서 둥그런 눈으로 빤치 유리를 보왔다.

"생김새로 칭찬을 들은게 한두번이 아니긴한데...... 그거 칭찬 맞죠?

"예"

링신루는 고래를 끄덕이는 유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물 좋아하는 사람은 칭찬도 그렇게 하는구나......... 고마워요. 답변이라기엔 뭇하지만
게이블씨도 물속에 잠겨서 유영하는걸 보면 멋있어요 심해어처럼 아름다워요.

유리는 잠시 눈만 껌벅이면서 링신루를 바라보왔다. 링신루는 왜 그러냐는 듯 유리를 쳐다본다. 말ㅇ릐 맥락을
보면 좋은 말이긴하다.그런데.

"고맙습니다. ..... 그런데 심해어는 아름답게 생긴 물고기가 아닙니다.

"알아요"

대답은 금방 간결하게 돌아왔다.

빛도 닿지 않는 저 깊은곳에서 살아가는 데에 맞게끔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변화해온 모습이, 물에 사는 자들의


눈에 얼마나 기괴하게 보이는지.

그러나 링신루는 웃으면서, 그 대답만큼이나 간결하게 덧붙었다.


"하지만 난 좋아해요. 저 깊은 바다속에서 넉넉하고 느리고 살아가는 그것들을.

좋잖아요, 그렇게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곤란하다. 또 당황해버렸다.

자신이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이 남자를 상대로는 별 것이 아닌 말에도


마음이 별안간 동요할 때가 있었다. 또한 문제는 문제라기보다는 약간 겸연쩍은 것이었지만 이남자는 유리가
당황해 하면 므 무표정한 엉ㄹ굴만 보고서도 잘도 알아차린다는 것이었다.

이때도 묵묵하게 입다물고 있는 유리의 무뚝뚝한 얼굴을 흘끔 보더니 왜 그래요 또" 라며 웃었다.

너무 대놓고 보는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당연한듯이 이루어지ㄴ까 더한 바람까지
부풀어오를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어쩐지 좀 곤란한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이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 정말 만에 하나라도, 서기라도 한다면, 가릴 것도 없는 풀에서, 그를


앞두고 상상만으로도 저 깇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리고 싶었다.

정말로 심해어가 되어서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저 컴컴한 아무도 그를 찾아볼수 없을곳으로.

"....."

철없는 어린애 같은 고민을 이 나이에 하게 될 줄을 몰랐는데, 유리는 무거운 숨을 쉬었다.

「왜 한숨이야?」

슬슬 인사를 하고 끊을 기색을 보이던 아네트가 그 숨소리를 들었는지 멈칫 걱정이 되었는지 따지듯 물었다.

이런 어이없는 곡민은 애초에 할 여지조차 없는 여자가 좀 부럽다.

유리는 아네트가 알게 되면 또 다시 박장대소를 하며 넘어갈 생각을 하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네트

「정말이지?」

그녀는 몇번이나 확인한 다음에야 그래. 그럼. 하고 안심한 듯 말했다.

「난 너는 어디에 던져둬도 걱정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어디에 있으나 걱정돼, 알지? 사랑해, 유리」

수화기 너머로 뽁, 입술소리가 들려놨다. 유리는 웃고만다. 고마워요, 나도 사랑해요, 아네트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세상을 뜨고 없는 지금.어쩌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여자느 이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비록 순수한 친애라 할지라도.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진 뒤에야 유리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와 통화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아주 약간씩은 가벼워진다. 그녀도 틀림없이 누군가에게는 물 같은 사람이리라.

"누구예요? 여자친구?

그때 등 뒤에서 흥미로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링신루가 머리를 닦으면서 관심 어린
눈으로 유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알아맞혀볼까요? 음........아네트?

링신루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아네트의 이름을 말하자, 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놀란 눈치로,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를 본다, 그런 유리를 보고 링신루는 소리 내어 웃었다.

"레이블씨는 여자관계가 너무 단순해요."

그는 맥주캔을 꺼내어들고 쇼파로 가서 않으며" 아, 지친다.........." 하고 중얼거렸다. 저런 말을해봐야


지금 상태로 백 미터짜리 풀을 수십바퀴 돌라고 해도 그럴수 있을만한 체력의 소유자인걸 아는 유리는 속지 않았다.

그래도 눈이 피곤하다며 눈꺼플을 문지르는 걸 보고는 곧 그의 옆으로 다가가고 앉고 말았지만.

"일 부탁하러 전화했던 거예요?"

"예. 그렇게 중요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요"

"흠....., 서로들 돕고 사는 사회군요."

예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유리를 찾는 전화들이 걸려온 적이 수차례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알만한
상대에게 연락을 하거나 부탁을 하는것은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였다. 유리 역시 필요할때에는 그렇게 하지에,
이미 그런 연락은 일상과 같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정말로, 게이블씨한테 연락하는 여자는 손꼽을 정도밖에 안되네요, 아네트 말고 또 나가
있지?

샤오췬이라든가, 하고 꼽아보는 손가락은 아무리 지나도 한손을 넘어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자에게 괸장히
인기가 없는 남자가 되어버린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쪽 일은 대부분 남자가 하거든요. 데스크 업무는 여자도 많습니다만."

남이 모르는 것을 아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에는 험한 상황도 종종 따르기 때문에 실무로 뛰는 건 남자가


대부분이었다.

아네트도 오래전에는 현장에서 뛰기도 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데스크로 옮겼다.

"남자만 그득한 일터라......"

생각만 해도 참 답답하고 어두운 이미지가 떠로은다는 듯 링신루는 서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UNHRDO 도 그랬었죠, 특히나 아시아 지부는 여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말 외출이 안되는
특별훈련기간 같은때에는 여자여자 노래를 부르며 안달하는 놈들도 드물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하고 고래를 끄덕이던 유리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유리도 알고 있었다.

동료들 중에서도 유난히 여자를 밝히는 놈들이 여럿있었고, 가끔 일 때문에 한동안 여자를 만날 상황이 아닌
때에는 신경에 날카로워져서 말끝마다 "하고 싶어, 박고싶어, 싸고싶어"를 달고 사는 놈도 있었다.

남자만 있는 곳이었다면 UNHRDO 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거다.

"......"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링신루를 지르시 응시했다. 웬만한 미녀는 넉넉하게 뺨을 치고도 남을
정도로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게다가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겉으로나마 으레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험한 환경 속에 섞여 있었다니. 힘들일도 많았을거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울하게 그럼에도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링신루를 바라보는 유리를, 문득 무슨생각이 들었는지 링신루도
마주보았다. 생각에 잠겨 지그시 유리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일하면서 일 외적으로 힘든 적은 없었어요?"

"....., 저요? 아니오, 없었습니다.

유리는 예상치도 못하게 자신이 묻고 싶었던 말이 자신의 귀에 들려오자 짐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링신루는 그래요? 하고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게이블씨는 언뜻 그렇게 안보이는데, 가만히 알고 지내다 보면 성격이 은근히 무른데가 있어서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하고 유리는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고개를 기웃했지만, 좀체 납득하지 못하는 그의 기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링신루는 잠시 앉은 자리, 그들 사이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옆으로 가서 앉아봐요."

유리에게 좀 더 떨어져 앉으라고 손짓을 한 링신루는 유리가 물러나앉자 그 자리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아직 덜
마른 머리가 유리의 허벅지 위에 얹힌다. 얇은 면바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듯 눈꺼풀을 문지르는 링신루를 보고 유리는 "잠시만요" 하고 몸을 을으키려 했다.
이시간쯤. 링신루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 유리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으레 더운 수건으로 눈을 덮고 문질러주곤
했다.

유리가 더운 물수건을 가져오려고 일어서려 하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링신루는 "아니에요" 하고 말하며 그의
허벅지를 벤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 치우기 싫어요. 귀찮아요. 그냥 이대로 문질러줘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는다.

유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사박사박, 기다란 속눈썹이 손바닥에 닿아 간지러웠다. 속눈썹만큼 보드랍고 얇은 눈꺼풀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ㅇ러내려 손가락 끝으로 누른다.

그렇게 눈 위와 눈 주위를 풀어주고 있으면 천천히 링신루의 몸이 이완되는 것이 보였다.

길고 기분좋은 숨으 내쉬는 표정부터 시작해, 목에서, 어깨, 등. 몸 전체에서 힘이 빠지며 나른하게 잠들 듯


편안하게 늘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유리까지 마음속에서 편안하게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그는 이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편안하다고, 기분 좋다고 속삭이는 듯한 규칙적인 숨소리.


어떠한 교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리까지 나른하고 편안해져 조용하고 깊은 숨을 내쉰다.

그럴 즈음이었다. 어느 순산. 문득.

"고마워요"

조용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링신루를 내려다보고 있던 유리는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속삭인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정도야 얼마든지 해줄수 있다. 보이지 않는 눈이 너는 아프지 않도록 보이는 눈이 그 이상 피곤하지 않도록
뮨지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고맙다는 마을 듣기에는 유리 자신이 이 시간을 마음 깊이
즐기고 있었다.

그런건 링신루도 알고 있을터였다. 자신의 눈을 문지르면서 유리도 편안한 숨결을 내쉰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도 그의 입매가 언뜻 웃음을 띠며 벌어졌다.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굳이 지금 눈을 풀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여러가지로


고마워요."

유리는 잠시 사이를 두고 "천만에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무엇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가 고맙게 여길만한 어떠한 것을 얻었다면
기쁠 따름이다.

적어도 언짢게 하지는 않았구나 싶어 담담히 웃는다.

"하지만 맨입으로 고맙다는 말만 하는것도. 늘 받기만 하는것 같은데 좀 미안하네....., 혹시 뭐 갖고 싶은것


있어요?

그러나 링신루의 이 물음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리는 난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깊은거라 원래
뮬욕이 있는편이 아니라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오, 없습니다. "

"그래도 생각해봐요 뭐든 주고 깊어서 그러는데."

"글쎄요....., 하지만 요전에 수영복도 선물받았고...., 정말로 없습니다."

유리는 잠깐 고민해보왔지만 역시 갖고 싶은게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말하고 보니 그렇다. 선물로 뭔가를 받는다 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다.

그 수영복만 해도 그랬다.

얼마전 갑자기 링신루가 유리에게 "선뮬이에요."라고 네모난 꾸러미를 불쑥 내밀었을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

선물을 받을 만한날도 아니었고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선물이라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풀어보았다. 하지만 꾸러미 속에서 나온 수영복을 보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분명히 얼마전에 지금 쓰고있는 수영복이 멀쩡하다는 애기를 스쳐가듯이 했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부정형으로
말을 잘못했어나?

흘끔 고래를 돌린 유리는 선물이라면서 꾸러미를 대수롭잖게 던져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링신루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색깔이 마음에 안들어요? 그래도 게이블씨에게 어울릴만한 길로 나름 고심해서 골랐는데 바꿔올까요?

옷차림새를 꾸미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수영복이 빨간색이든 알로하 꽃무늬이든 사이즈만 맞으면 아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유리는,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왜 갑자기 그가
수영복을 던져줬는지 알수가 없어 물끄러미 그 수영복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쨌든 뭔가를 선물로 준다면 상대가 종아할 만한걸로 해야 할테고, 그렇다면 유리가
좋아하는 건 수영이니까 수영복이라면 잘 고른 셈이다.

유리는 나름대로 납득하고는 링신루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했다.

" 잘 아껴서 보관해줬다가 지금 쓰는게 다 낡아 떨어지면 그때 잘쓸게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유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뭔가 대답을 잘못했나 음찔한 만큼 순식간에 링신루의 표정이 식었다.

"지금 쓰는 건 버려요."

"예?.... 아직 입을 만한데요. 멀쩡합니다."

찢어지지도 않았고 해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링신루는 못마땅한 듯 눈을 치켜떴다.

"버려요. 더럽잖아요."

"....."

매일 빨아쓰는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유리를 노려보는 링신루의 시선이 어찌나 삭막한지 차마 그


말을 할수가 없었다.

결국 링신루가 보는 앞에서 몇년이나 애용해 온 수영복을 버린 유리는, 그 뒤로 새 수영복을 이용하고 있었다.

매일 빨아 썼는데도 더러워보였다니 마으에 약간 충격을 먹어 예전보다 훨신 공들여 빨아가면사.

난 샤워도 매일하고 옷도 매일 갈아입는데......, 하고 무심한 얼굴로 우울해하는 유리에게, 링신루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없어요. 갖고 싶은거?"

눈꺼풀이 덮고 있던 유리의 손을 감싸 쥐고서 아주 약간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서 까만 눈이 껌벅거리며 유리를


올려다본다.

"없습니다."

유리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젓자 링신루는 조금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흠, 없단 말이죠, 하고
손에 쥐고 있던 유리의 손바박을 무실결인 것처럼 갉작갉작 긁는다.

링신루는 가끔 기분이 졸을때면 이렇게 고양이 같은 애교를 보일때가 있었다.

요즘에 접어들어서는 꽤 종종 그러곤 했는데. 그게 어쩐지 사랑스러워 유리는 으근히 그 감각을 좋아했다.

그럴때면 흘끔 유리를 쳐다보는 링신루도 유리가 그런 애교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그러면 "내가 애교를 부려주니 고마운 줄 알아." 라는 듯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어딘지 오만하고
사랑스런 고양이 같아서, 유리는 웃고 만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라도 갖고 싶은게 생기면 말해요, 게이블씨에게는 워낙 여러가지를 받아서, 나도 무든 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니까."

링신루는 유리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얼굴 위에 덮었다. 바삭, 눈을 감는 속눈썹이 다시 손바닥을 간질인다.

그러다가 문득, "...... 좋은 냄새."

링신루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유리의 손에 얼굴을 문지르듯이 약간 고개를 들어, 손바닥에 가볍게 코를 묻었다.
손안에서 숨을 들이쉬는 기척이 났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요. 비누 냄샌가."

유리는 고래를 기웃했다. 다른 손을 들어 코앞에 대어 보았지만 딱히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전에 씻었으니 비누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링신루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으니 거기에 옮아온 냄새이거나."

"아니, 그런건 아닌것 같은데."

링신루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덮은 유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채 그대로 잠들기라도 할
듯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었다.

유리도 자신의 손을 덮고 있는 링신루의 손을 언제까지고 그렇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 좋군요, 아주."

"그렇지? 이건 제 아무리 문이ㅗ한에 눈뜬장님이라 해도, 코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지지 않은 한 못 알아볼수가


없는 명주란 말이야."

링탕윈은 대단히 흐뭇한 얼굴로 껄껄 웃으며 유리의 잔에 다시 술을 부어주었다. 얇은 술잔에 연노란 술이


찰랑찰랑 담긴다.

유리는 드물게도 아쉬운 기색으로 손을 저었다.

"아니, 차를 몰아야 해서 더 이상은 못 마십니다. "

"아, 그랬었지, 참, 그럼 기왕 따른 거니 이것까지만 마시도록해."

"......, 그럼 이것까지만요."
잠시 망설였지만 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집었다.

여느 때라면 그 잔도 받지 않고 그만두었을텐데, 술은 정말로 맛있었다.

평소에 술을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닌 유리조차 혀에 술이 감겨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아.

"이게 하남쪽에서만 나는 건데, 거기에서도 한 해에 백여동이도 채 못 빚어내는 귀한 술이야. 이때, 훌륭하지


않나?"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모금 홀짝이는 사이에 금세 잔이 비어 유리는 아쉽게 빈 잔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유리의


기색을 금방 눈치 챈 샤오췬이 와락 웃는다.

"유리 삼촌, 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건 굉장히 맘에 들었나봐, 있죠, 내가 좋은거 가르쳐 줄게요,

울아버지가 말이죠 삼촌 갈 때 주려고 이 술 한 병 따로 놔뒀어요.”

“인석아! 선물은 모름지기 예상치 못하게 줘야 맛이지, 미리 말 하면 그게 뭐냐!”

링탕윈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딸을 나무랐다. 샤오췬은 부러 어깨를 움츠리며 무섭다는 시능을 한다. 옆에서
페이가 손을 내 밀어 잔에 한 방울 남은 술을 핥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맛있네요. 그런데 이거 많이 마시면 숙취 좀 있겠는 걸.”

“그래, 그게 단점이긴 하지……. 게다가 성질이 더운 술이라, 체 질이 열 많은 사람은 마시면 안 돼.”

링탕윈은 사뭇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페이는 빈 잔에 새 로 술을 따라서 천천히 맛을 보며 흘짝인다.

“이거 팔려고요?”

“음……, 조금 손을 봐야겠지만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링탕윈이 말하는 걸 보니, 주류 유통으로도 기 반을 잡고 있는 링가에서 이 술을 새로 다루기


시작할 모양이었 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페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우는 시늉 을 했다.

“아버지, 저 죽어요——. 지금도 일에 짓눌려 과로사를 걱정하 며 밤이면 밤마다 내가 과연 내일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두 려움에 떨며 잠드는 나날인데——

“인석이, 고작 술 하나 더 들어오는 걸 갖고 웬 엄살이야!”

“아버지! 제가 여태 몇 달을 배웠는데, 새로 거래를 트면 일이 그거 하나만 늘어나는 줄 아는 바보로


보이십니까?! 아이고 아버 지,장가도 못간 아들을 총각귀신 만드시려고——

바닥을 치며 목 놓아 외치던 페이는 그러다가 결국 링탕윈에게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고 말았다. 심지어 손바닥도
아니고 주먹이 라, 정말로 아플 것 같은 ‘끄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끄럽다. 네가 그렇게 죽는 시늄하면서 걱정 안 해도, 이 일 은 너한테 안 갈 거야.”


“예? 그래요?”

몸을 틀어 둥짝을 문지르다가 냉큼 일어나 앉은 페이는, 그렇다 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원하게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래. 이 일만이 아니라 주류 쪽은 이제 슬슬 신루에게 넘겨줄 요량으로 있으시더라, 너네 할아버님은.”

링탕윈이 담담하나 묵직하게 중얼거렸다.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나오고 있음을
알려주듯이.물로 입 안을 행구던 유리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술이요? 야아,큰 거 떼어주시네. 배 아파할 사람 여럿 있겠는 데요. 아니,하지만 할아버님이 막내 삼촌


예뻐하는 거 생각하면 오히려, 고작 그거밖에 안 주신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쪽은 이래저래 얽힌 게 많아서 좀 힘들지 않아요? 신루 삼촌은 사업이나 경영 쪽은 따로 배운 적이


없잖아요?’’ 원래는 링가랑 상관없이 UNHRDO 에서 일할 생각이었으니까, 하고 말하는 샤오췬은 좀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러게,하고 중얼 거리는 페이도 비슷한 눈치다. 링탕윈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술을 향부터
음미하며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그런가, 하긴 슬슬 링신루가 가업에 손을 대리라는 이야기는 예 전부터 심심찮게 들어왔다. 지금 당장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쉬 고 있지만,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시작할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 링휘렁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을 그냥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이제 슬슬 링신루도 바빠지겠다. 여태 눈을 핑계로一 순전한 핑계만은 아니었지만一쉬어왔던 몫까지


하려면,매일같이 죽겠다고 울부짖는 페이보다 더 애써야 할 터였다.

게다가 술이라.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술이라고 해도,술과 연관되어 있는 일들을 총합적으로 본다면 상당한 규모일 터였다. 페이가 말했던 대로
‘큰 거 떼어준 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어 1,페이 역시 말했지만 링휘렁이 링신루를 그렇게 지극하게
아끼던 것에 비해서는 의외로 크게 떼 어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고,그 내부에 어떤 사정이 숨겨져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지금,
잠자코 말없 이 있는 링탕윈의 기색을 보아도 그는 ‘적게 떼어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데 삼촌은 아직 멀었나 봐요. 벌써 시간 꽤 지났는데.”

“막내 할머님이 부르셔서 오랜만에 찾아갔잖아. 그렇게 쉽게 놓아주시겠어?”

페이는 ‘아직 한참 멀었을걸’하고 중얼거리며 술을 홀짝였다. 유 리도 페이와 같은 생각이었고,링신루 본인도


가면서 ‘또 한참 잡 혀 있다 오겠己’하고 한숨 섞어 중얼거렸었다.

용하다는 치료사를 데려왔다며 링신루의 어머니가 그를 본가로 불러들인 건 몇 시간 전이었다. 얼른 오라고,꼭


오라고 신신당부 를 하며 맨션에서 출발하기 전까지 몇 번이나 전화를 한 등쌀에 못 이겨, 결국 오후 늦은 시각에
본가로 불려오고 말았다.

링신루는 귀찮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어머니에게 갔고, 그동안 유리는 본채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앉아 있다가 마침 집으로 돌아온 페이에게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나랑 좀 놀아줘요.’라며 끌려온 참이었다.

하지만 설마,어머니의 생일이라며 집에 돌아와 있던 샤오췬과 링탕윈까지 같이 더불어 ‘놀게’ 될 줄은 몰랐다.


(정작 생일을 맞 은 그 어머니는 지금 한가롭게 기사를 대동하고 백화점을 거닐고 있을 터였다.)

“뭐……, 신루라면 잘 하겠지. 어릴 때부터 뭘 맡겨놔도 기본 이상으로는 하는 놈이었으니까.”

그때,줄곧 술 향기를 맡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링탕윈이 술잔 을 내려놓으며 말을 뗐다. 그때까지 링신루에게


맡기게 될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예전과 다르게 불안정한 구석도 많이 없어졌고……. 여전히 좀 주위에서 대하기
어려워하는 면이 없잖 아 있지만 그건 윗사람으로서 좋은 면이라고 볼 수도 있지.”

링탕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카일에게 볼일이 있어 그에게로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시간 을 보니 회사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벨 소리가 딱 한 번 울리자마자 달칵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도대체 바라는 게 뭐야! 우리나라 국가라도 불러줘?!』

고막을 터뜨릴 듯 엄청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정태의였다. 어찌나 소리를 크게 질렀는지, 수화기 밖으로 목소 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일정표를 넘기고 있던 링신루 가 움칫,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도 모 르게 시선을 돌린 유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유리를 본 순간 설핏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던 링신루였지만,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선뜻 일어나 다가오더니 스피커폰으로 전환버튼을 누른 다.

타인의 통화를 고스란히 엿듣겠다는 그 당당한 태도에는 새삼스럽게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한 게,상대가 정태의가 아닌가.

유리는 바로 옆에서 벽에 기대어 선 링신루에게서 전화로 주의를 돌렸다.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들어보도록 하지요. ……오 랜만입니다,정태의 씨_ 그간 잘 지냈나요?’

『……어. ……아. 게이블 씨?』

짧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잠깐 사이를 둔 다음에야 목소리 의 주인이 누군지 떠올린 정태의는 당혹스럽게
유리를 불렀다.

『아. 미안해요. 그놈이 계속 전화를 해대기에 퓨대전화를 꺼놨 더니 이번엔 집으로 전화질을 해서,그놈인 줄
알고……•』

리타가 저를 노려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하고 횡설수설하 는 정태의의 ‘그놈’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 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리그로우 씨는 어디 나갔나 보군요.’

『예,잊그제부터 없었어요. 한 일주일 있다가 온다던데요.』


‘그렇군요. 하지만 계속 전화라니,흑시 댁에 무슨 일이라도 있 습니까?’

『아아,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이 자식이 가끔 한가할 때면 날 갖고 노는데, 지금도 그거예요. 아까부터


전화를 수십 통을 해 대면서’ 아침 먹었냐고 묻고 끊고’ 지금 무슨 잭 보냐고 묻고 끊 고’ 오늘은 무슨 맥주
마실 거냐고 묻고 끊고, 하다 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이제는 아무거나 노래나 해보라고 헛소리를..•』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했는지 정태의가 뭐라고 욕설을 내뱉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뚜,뚜,
통화대기음이 울 렸다. 누군가 전화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이 대화의 흐름 속에서, 지금 전화를 ‘해대고’ 있는
사람이 누구 인지 유리는 알 것 같았다. 정태의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지간히 시달렸나 보다.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도록 유치

한 장난질을 하는 그런 남자가,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맞는 걸까. 유리는 자신의 짐작을 의심했다.

그들이 둘 다 짐묵하는 와중에도 통화대기음은 계속해서 울렸 고, 또한 끈질겼다.

r 아……,그런데 게이블 씨,카일은 지금 없는데요.』

뒤늦게야 말하는 음색이, 전화를 끊으려는 눈치였다. 아마도 유 리의 전화를 끊고 통화대기로 울려대는 저 전화를
받자마자 벌컥 고함을 지르려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무심결에 링신루에게 시선을 주었다. 표정 없이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그가 희미 하게 눈매를 찡그리더니 유리를 노려보았다.

‘……,예. 그럼 카일에게 연락왔다고 전해주세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느릿하게 내려놓는 손 아래 달칵하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링신루를
돌아본다.

링신루는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본다기보다는 노 려본다고 해야 옳을 법한 눈매로.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눈매만큼이나 쌀쌀맞은 목소리로 링신루가 내뱉는다. 유리는 천 천히 고개를 저었다.

‘뭔가 말이라도 나눴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했습니다.’

뭔가 말을 할까 말까, 안부인사 한 마디라도 나눌까 말까, 태이 형,그렇게 말을 걸까 말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링신루는 사납게 낯을 그으며 눈을 치떴다.

‘이럴 때는 내 표정 좀 안 읽으면 안 돼요?’

일그러진 목소리로 나직이 내뱉은 그는, 하, 하고 웃음 없는 헛 웃음을 웃었다.

‘게다가 지금 난 왠지 당신 때문에 더 화가 나는데요. 왜 내 눈 치를 보는 거예요?’

‘미안합니다.’
유리가 주저 없이 사과하자 링신루는 어이가 없다는 듯 더욱 험하게 쳐다보았다.

‘거기서 왜 사과를 하는데요?!’

벌컥 소리친 링신루는 획 등을 돌리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광,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 문 앞에서 유리는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뭐 라고 꼬집기 힘든 껄끄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문을


쳐다보고 있는 데,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던 유리를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흘끔 노려 본 링신루는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아 까 읽다가 엎어놓은 책을 집어 들어
거친 손짓으로 책장을 넘긴 다.

한 장, 두 장쯤 넘겼을 때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불쑥 중얼거렸다.

‘나 화 안 났어요.’

마치 더 이상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다는 걸 일부러 눈앞에 보 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링신루는 책에서


눈동자만 들었다. 그리 고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본다. 조금 언짢게 가라앉은 것 같긴 했 지만 그렇게 험악하지는
않은 눈초리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그 순간 유리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예전에 비해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그때처럼 감정의 기복이 커 불안정하게 들뜨거 나 가라앉지 않는다. 어느 정도까지의 선 안에서一
자신이 스스로 를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선 안에서 그는 화를 내고 괴로워하 고 슬퍼했다.

..그렇구나.

유리는 문득 마음이 풀어졌다. 그렇구나. 이제는 괜찮겠구나-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에서도,덩달아 몸에서도


힘이 풀렸다. 유리는 옆에 있던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나,그러 자 유리를 보고 있던 링 신루가
다시 눈매에 힘을 주었다•

‘왜 거기 앉아요. 화났어요?’

대뜸 날아온 물음에 유리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다가 ‘아닙니 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화 안 났으면 여기 와서 앉아요. 왜 내 옆에는 앉기도 싫다는 것처럼 그렇게 멀찍이 앉고 그래요.’

화가 안 났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화난 게 아닐까, 이 남자,하 고 의심스럽게 링신루를 바라보면서도 유리는


말없이 몸을 일으 켜 그가 가리키는 대로 소파로 가 그의 옆에 앉았다 유리가 앉 기 무섭게 ‘등 좀 돌려봐요. 나
보지 말고.’라고 말하는 걸 봐도, 아무래도 화난 것 같았다.

유리가 얌전히 그의 말대로 등을 돌리고 앉자, 곧 등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렸다. 유리가 등받이 쿠션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대어 앉은 링신루가 한껏 체중을 실었던 것이다. 그대로 책을 읽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팔락,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화내지 마요. 게이블 씨 화내면 무섭잖아요.’

무섭기는커녕 화를 내면 당장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부루퉁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들어도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아서,오히려 갑자기 푸근하게 웃음이 나서,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화 안 났습니다.’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 뒤에는 다시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잠시 지난 뒤 ‘그럼 됐어요.’라는 짤막한 대답고
함께 등에 기댄 몸 에서 천천히 힘이 풀어졌다. 마음 편하게 기대는 것처럼.

그 무게감이, 그 체온이 마치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정말로 뭐든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진심이야. 네 덕분에 신루가 많이 침착해진 것 같아서 진심으로 놀랐고,또 고마워하고 있어.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걸.

하긴 처음에 너를 데려와서 옆에 두겠다고 했을 때부터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놀랐었는데,몰랐나?”

링탕윈은, 비밀인데 이제야 알려주는 거라는 듯이 은근한 말투로 말하며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정말로
비밀이라고는 그도 생 각지 않을 것이었고,유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오,저라도 놀랐을 겁니다.”

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링신루가 늘 사랑스 럽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다 해도 그가
한편으로는 사람을 귀찮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물며 가족과 같은 필연적인 관 계도 아닌데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일 터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유리는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원래 링신루 씨는 저를 불쾌하게 여겼거든요. 처음에는 저를 볼 때마다 화를 냈을 정도라서요. 그런 심경을


스스로 다스려야

겠다며 계약을 하자고 한 겁니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테지만요.”

자존심이 갈가리 찢긴 자신의 속내를 이미 고스란히 드러내었 기에 더 이상은 숨기려거나 감추는 데에 더 애를


쓰지 않아도 되 면서,나름대로 능력도 있는 인물. 그 결과가 유리 게이블이었지 만, 안 좋게 여긴 적은 없었다

“하하,그냥 농담을 했나 보지. 신루는 정말로 사람을 싫어하면 절대로 옆에 두지 않을 아이야. 차라리 아예
죽여 없애버려서라 도 평생 안 보려고 할 아이인데, 자기가 먼저 옆에 두겠다고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일걸.”

링탕윈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유리는 약간 겸연쩍은 마음이 들 었지만 곧 “그런가요.”라고 짧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어떻게 시작되었든,현재의 링신루가 유리를 예전만큼 거슬려하 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링탕윈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 을 대하는 것보다 더 마음을 터놓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됐다. 설령 그가 아직껏 때로는 자신을 보며 욱하게 치미는 마음이 생긴다 하더라도,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안정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미 링신루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 릴 수 있을 만큼.

그러니 괜찮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왜 저 없는 자리에서 제 욕을 하고 그러세요, 큰 형님은.”

그때, 못마땅하게 혀 차는 소리가 장지 너머에서 들려왔다.

곧 장지문이 열리며 낯을 찌푸린 링신루가 고개를 들이민다.

“제가 언제 싫어하는 사람을 죽여 없애서 평생 안 보려고 들었어요. 사람 없는 데서 그런 살벌한 얘기를 하시다니,


너무하신데 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온 링신루는,심각하게 험담은 하지 않았다 하나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남으로 인 해 잠시 대화가 끊겨버린 방의 가운데,유리의 옆에 섰다.

의자에 제대로 앉지 않고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는 링신루는, 그 다지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술 마셨어요? 왜 술잔에다 물을 따라 마시고 있어요?”

링신루는 유리가 들고 있던 조그만 잔을 보고 고개를 기웃했다. “두 잔 정도만 마셨습니다. 운전하는 데에는 별


지장 없을 거예 요.”

“운전이야 다른 사람 시키면 되니까 상관없지만,술은 별로 안 좋아하면서 어쩐 일로 마셨나 신기해서 그랬죠. 뭐


좋은 술이라 도 들어 왔나요?”

테이블 위에 여럿 늘어서 있는 술병들을 훑어보는 링신루 쪽으 로 링탕윈이 그 병들 몇 가지를 밀었다.

“이 김에 몇 병 가져가 봐. 이번에 우리 집안에서 다뤄볼까 검 토하고 있는 것들이니까. 이대로 유통시킬 것도


있고,손 좀 봐서 유통시킬 것도 있고.”

“아아, 예.”

링신루는 별로 의외라는 빛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집안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리라는 건 윗사람들 사이에서 만 도는 얘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최소한 링신루


본인에게는 어 떤 식으로든 말이 들어간 듯했다. 아마도 그가 주류 쪽에 손을 대리라는 이야기까지.

유리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링탕윈이 내민 술병들을 대신 챙 겼다. 그 옆에서 페이가 얼른 일어서 “내가


도와줄게요, 삼촌.”하 고 거든다.

유리가 술병을 챙기는 옆에서 손 놓고 있던 링신루가 얼핏 눈 동자만 돌려 페이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언짢은
빛이 시선 위로 스쳤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그는 걸음을 뗐다.

“그만 가죠,게이블 씨.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큰 형님. 챙겨줘서 고마워, 페이.”

유리가 하려 했던 인사를 가로채어 대신 한 링신루는, 유리가 드는 술병들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곤 방에서 나갔다.

연노란빛 술을 한 모금씩 천천히 맛본다.

본가에서 마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향긋하고 아련했다. 입에 담 아도 목으로 넘기고 나면 다시 갈증이 나는 듯


혀에 감기는 맛이 다.

한 잔 두 잔 따라 마신 게 벌써 몇 잔째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 여섯 잔,일곱 잔쯤 되었을까.

“그 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맛있어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링신루는 술병을 앞에 둔 유리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눈이 뻑뻑한지 일회용 안약을
뜯어 눈에 몇 방울 흘려 넣는 그를 보면서, 유리는 뒤늦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눈은 어땠습니까?”

“예? 아아,어머니가 부른 그 치료사요? 헛돈 썼어요. 아무 들끼판에서나 볼 수 있는 풀을 캐어 와선 그걸 찧어


눈 위에 올려놓 고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주문을 외우는데,내 참 기도 안 차서. 어머니도 용한 치료사람시고
한다는 짓이 그런 걸 줄은 몰랐는지 표정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사람이 힘들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든다더니 딱 그거죠, 하고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늘 정체 모를 약이며 부적이며 주문 같은 걸로 사흘이 멀 다 하고 그를 귀찮게 굴던
어머니가 아연해하는 얼굴을 봐서 유 쾌해진 둣도 했다.

유리는 그렇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링신루와 마찬가지로 유리도 그런 민간처방의 치료들로 그의 눈이 극적으로 낫게 되리라고 진지하게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다음 달쯤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초조한가 봐요. 눈이 이
상태라면 일도 제대 로 못할 것처럼 생각되는 모양인지, 같이 있는 동안 내도록 너 눈이 그래서 일은 어쩌니,너
눈이 그래서 일은 어쩌니, 하고 우 는데, 내가 정말……

마라톤 전구간을 달린 것보다 더 피곤해져요, 하고 한숨을 쉰 링신루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일이라. 페이가 요즘 줄곧 일 배우느라 힘들어 죽겠다고 죽는 소리를 하는 그 길로 링신루도 걸어


들어간다는 뜻이다.

유리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힘들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그의 옆에서 빈틈없이 잘
챙겨주고 도 와줄 사람이 필요하게 될 거다. 유리도 오래전 카일의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으니 그런 걸 아예
못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업에 관련된 보좌에는 약했다. 그런 건 제임스 같은 사람이 제격인데.

제임스를 영입하라고 조언해볼까. ……하지만 그랬다간 카일이 내 다리를 물어뜯으며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유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링신루도 정신적으로 안정되어가기도 했으니,업무 쪽에 약한 자신이 굳이 옆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직 계약기간은 좀 남았지만 서로 협의 하에 조기완료를 해도 될 테고, 아니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이니까


그동안은 자신이 그럭 저럭 끌어가도 될 거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링신루를 보았다. 안약 포장재를 쓰레기통 에 던져넣곤 소파로 와서 막 앉던 링신루는 시선을
느끼고 유리 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하며 빙긋 웃었다. 유리도 웃 고 만다.
여전히 화사하고 고운 웃음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가끔 표 정이 사라질 때면 가슴속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섬뜩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느 때의 그는 더없이 고왔다.

그래서,이제 다시 베를린으로一원래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돌 아갈 생각을 떠올리니 조금 쓸쓸해진다.

“그 술, 그렇게 맛있어요? 벌써 반 가까이 비었잖아요, 그 큰 병이.’’

링신루는 막 잔을 비운 유리가 다시 집어 들던 술병을 턱짓으 로 가리켰다. 아까 링탕윈에게서 받아온 술은,그의


말마따나 어 느새 반 가까이 비어 있었다. 거의 맛과 향이 없는 듯하면서도 입 안에 들어가 혀에 스며들면
아련하고 향긋한 향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그 아스라하고 아쉬운 정취가 좋아 술잔을 몇 잔이나 비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마셔도 괜찮아요? 술 별로 안 마시면서,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어디 좀 줘


봐요.”

링신루는 유리가 막 따른 술잔을 살짝 가로채었다. 입술을 축이 고 잠시 향을 즐기는 듯 침묵한다. 다시 한 모금,


그리고 한 모 금, 그렇게 술잔을 금세 비운 그는 “응. 좋네요.”하고 유리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어찐지 아침에 머리가 좀 아플 것 같은 맛이 나는데,그래도 마시는 동안은 입에서 떼기가 아쉬운 맛이에요. ……
하지만 반이 나 비웠으면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거 은근히 도수 세지 않아요?”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리는 고개를 기웃했다. 반 병 가까이 비워도 취기가 그리 올 라오지는 않는 걸 보면 가볍게 마실 만할 것


같았다.

유리는 술잔 너머로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주류 쪽으로 일을 맡으실 것 같다면서요.”

“아마도요. 큰 형님이 말했어요?”

문득 링신루가 눈가에 미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빙글빙글 웃으 면서 은근하게 묻는다.

“내가 그 일을 맡을 것 같다면서,뭐라고 그래요?”

“글쎄요……, 별다른 말은 없이,링신루 씨라면 잘 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하고 링신루는 픽 웃었다.

“큰형님도 속이 별로 편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아버지가 생각보 다 큰 걸 떼어줘서 셋째형님이나 넷째형님은


난리도 아니었다던 데. 하긴 이미 페이가 다른 걸 맡고 있으니 주류는 어차피 큰형 님 몫이 안 될 거였으니까
욕심을 안 부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유리는 아까 보았던 링탕윈의 미묘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언짢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개운하지도 않은 빛이 었다.

“하지만 링가에서 소유한 전체에 비하면 주류는 그렇게까지 큰 부분은 아닐 텐데요.”

유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술 쪽이면 돈이 크게 걸려 있긴 하지만, 나머지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난 리를 칠 만한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유리의 술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는지 더 이상 그 술에는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 몫의 맥주를 꺼내어 온


링신루는,유리의 말을 듣고는 잠깐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아하,하고 웃었다.

“그게 아니죠. 단순히 술만 넘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알고 계실 텐데, 하고 중얼거리며 맥주캔을 딴 링신루는 맥주를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겉으로 드러내놓고 팔지는 못하는 것들도 많이 거래하는 거,알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
대다수는 술이랑 같이 흘러 다녀요.”

링신루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비밀인 거 알죠? 라고 말하지만,유리에게 말할 정도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링탕윈도,그들 형제들도 그 일을 가볍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뭐 그래봐야 물론 당장 다 주는 건 아니에요. 조금씩 손을 적 시면서 그 물에 발을 담그라는 거죠. 그러다가


이놈한테는 벅차 겠다 싶으면 얼마든지 도로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우리 아 버지는.’’

그래도 물론 예쁘고 귀한 아들이니 평생 핑핑 쓰고도 남을 만 큼 떼어주시겠지만,하고 링신루는 발랄하게


덧붙였다.

그런 링 신루를 보며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과 함께 흘러 다니는 것들.

무시 못할 돈이 오갈 그것들은 틀림없는 양날의 검이다. 막대한 재화財貨, 혹은 막대한 재화災禍.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어가느냐는 오릇이 링신루의 손에 달려 있었다. 복이 되든 화가 되든,그 막대한 것을 과연


다스려나갈 수 있을지는.

잘 하겠지. 어릴 때부터 뭘 맡겨놔도 기본 이상으로는 하는 놈이었으니까.

문득 링탕윈이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 던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그것 이 일의 무게를 알면서, 또한 자신의 동생의 그릇을 알고 있는

그가 심사숙고해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링휘렁이 비슷한 사고 끝에 결론을 내렸을.

“그런데, 그 술 은근히 독한데요. 마실 때는 몰랐는데 뒤늦게 뱃속이 뜨거워지잖아. 괜찮아요?”

맥주를 두어 모금 마시던 링신루가 문득 고개를 기웃하더니 유 리가 든 술병을 가리켰다.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잠시 뒤에야 예?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잠시 뒤에 예,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 괜찮은데요.”
속이 약간 더운 듯싶기는 했지만 그거야 알코올을 마시면 늘 그런 거고,특별히 더 독하거나 뜨겁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 자 링신루는 “그래요?”하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하더니, 뭐 그렇다면 상관없죠, 하고 이내
자신의 맥주를 마신다.

“그래도 그거 빈속에 마시면 안 좋을 것 같은데……. 잠깐만요, 뭐 같이 먹을 만한 것 좀 가져올게요.”

“예? 아니,괜찮습니다.”

“됐어요. 나도 맨입에 맥주만 마시기는 재미없으니까. ……어디 보자,게이블 씨는 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야채샐러드에 두부 정도나 얹을까요.”
링신루는 캔을 내려놓고 선뜻 일어섰다.

주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그새 다시 비어버 린 잔에 도로 술을 따랐다.

그의 삶이 흘러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UNHRDO 에서 자신의 업을 찾으리라고 생각했을 테고,


가업에 손을 대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했을지라도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테지一. 그리고 이제 그는 그의 앞 에 예비된 새로운 길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삶도 비슷하게 나아왔다.

T&R 에 들어갈 줄은 몰랐고,정보원에 들어갈 줄도 몰랐으며, 다시 T&R 으로 돌아갈 줄도,이윽고 이렇게 이


자리에 있을 줄도몰랐다.
누구나 그런가. 누구나 그렇구나.

아무도,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의 바로 앞에 무엇이 있을지.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1 년 전만 해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사람과 더불어 지낼 수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 1 년 뒤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물속에서 평온을 맛보리라는 것 정도일까. 그것 정도는 확실한
삶이라서,그래서 좋았다.

그에게도 뭔가 확실한 것 하나가 생기면 좋을 텐데.

알 수 없는 앞날 가운데서도 이것만큼은 틀림없으리라고 예상 되는 무언가가.

유리는 입속으로 기도했다. 술 때문인지 눈꺼풀이 따끈따끈하게 무거워지고 있었다.

——게이블 씨. ……게이블 씨?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몹시 익숙한 그 이름이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라는 걸 안
다음에도 유리는 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은 마치
저 너머 다른 세상에 있어,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참…•, 반만 마시고 그만두라고 했더니 그새 병을 다 비웠어요? ……게이블 씨? 게이블 씨? 이봐요, 유리


게이블? ••…•. 눈을 뜬 거예요, 만 거예요

낮게 웅웅거리는 그 목소리는 저 너머 다른 세상,그래,꼭 구 름 너머에서 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은 구름 이편. 아니,구름 속이다. 열대바다 위에 비 를 내리는 구름.

더웠다. 구름 속인 탓인가,무더운 수증기로 감싸인 것처럼 덥 다. 곧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답답해져 호흡이


가빠진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덥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래, 힘들다. 초조한 듯,뻐근한 듯한 느낌이 마치 무거운 추처 럼 매달려 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숨을 막는 건, 더위였다.

뱃속부터 뜨거웠다. 불덩이라도 마신 것 같다. 더웠다. 등덜미에 서부터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더워, 더워, 짤막짤막하게 속삭이는 말은 더운 숨을 내뿜는 숨결에 섞여 나왔다.

一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그 술 독하다고 그런 걸 사람 말 안 듣고 병째 그렇게 들이켜니까 그렇죠 좀 있어


봐요 그러다 보면 식을 테니까.

구름 너머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보면’이라는 게 언제 올지는 몰라도 지금은 무더웠다. 낯을


찌푸리며 낮게 신 음한다. 등에서, 몸에서, 얼굴에서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왔다.

—어휴"… 많이 더워요? ……있어 봐요 목소리는 혀를 차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숨 막히게 온몸을 휘감는 더위에 유리는 끙끙거리며 돌아 누웠다. 바닥에 닿은 뺨이 시원해서 잠깐 살 것


같았지만,이내 그 바닥조차 데워졌다.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찬 바닥에 다시 뺨을 대었다. 손도,팔도,배도
바닥에 붙였다. 바닥이 더워질 때 마다 뒹굴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가관이다, 가관이야…"오징어 구워요? 바로 누워 봐요 목소리가 돌아왔다. 허, 하고 어이없이 웃으면서 다가온


목소리 는 유리의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앉았다. 바닥에 몸을 붙인 유리를 돌려 눕히고서 셔츠의 단추를 위부터
풀어나갔다.

살갗이 드러나며 공기가 닿았다. 덥고 답답하던 감각이 아주 조 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옷을
얼른 벗어버릴 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공기가 더운 몸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그때다.

선뜩하게 차가운 느낌이 얼굴 위에 얹혔다. 저도 모르게 움찔해 서 몸을 움츠렸지만, 유리는 끙끙거리던 몸에서
겨우 조금 힘을 풀었다.

얼굴을 덮은 차가운 물수건이 구원줄 같았다.

아,시원해……. 좋아…….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리자 웃음소리가 난 것 같았다.

——고맙죠? 당연히 고맙겠지. 난 남의 시중을 받기는 할망정 들어준 적은 없다고요 고마워해야 해요

너그럽게 아량을 베푼다는 투로 한껏 오만하게 말한 목소리는, 그러나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얼굴에 얹혀 있던


수건을 들어 뜨 겁게 달아올라 있는 몸도 훔쳐주기 시작했다.

목에서 가슴,배. 물수건이 지나가는 데마다 살갖을 적신 물이 증발해 시원함을 전해준다. 갈증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아……,좋아……. 좀 더……. 여기도. 여기도.


수건이 지날 때에는 시원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시 더워지는 몸을, 슬쩍슬쩍 틀면서 수건 가까이로 가져갔다.
몸을 닦아주던 목소리가 허,하고 헛웃음을 웃는다.

——이건 뭐 시종 부리듯 하네. 네,네. 봉사해드립지요

익살스럽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귀찮은 기색도 비치지 않고 유 리의 몸을 닦아갔다. 그러다가 수건이 지나치게
미지근해지면 다 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수건을 차갑게 식혀서 돌아온다•

이윽고 천천히 몸에서 숨 막히는 더위가 가시기 시작했다. 여전 히 후덥지근하고 뜨거웠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나른하게 기분이 풀어졌다. 몸이 이완되면서 늘어진다. 그대로

기분 좋게 땅 속으로 꺼질 것 같았다.

——좋아요?

응,좋아.

—一아직 많이 더워 보이는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낫나… 문득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가 싶었다. 뺨


위에 시원 하고 부드러운 게 닿았다. 손등이다.

온도를 가늠해보는 듯 유리의 뺨 위에 손등을 얹은 목소리가, 아직 뜨겁네, 하고 중얼거리며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그 서늘한 체온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마음 편했다.

그래서 유리는 고개를 돌려, 다른 쪽 뺨도 그 손등에 문지른다. 절로 기분 좋은 숨결이 새어나왔다.

문득,목소리가 잠시 멈칫한 것 같았다. 손등도 움직임을 멈춘 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유리는 손등에 더운 뺨을


문질렀다. 손등 도 곧 미지근해졌지만,그래도 부드러운 느낌이 기분 좋았다.

——좋아요?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도 같고,그러나 약간 찡그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손등을 치우진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손을 움직여 유리 의 뺨이며 이마 따위를 문질러준다. 살짝살짝
쓰다듬듯이.

기분이 좋았다. 나른하고. 편하고. 아직껏 몸속에는 후덥지근한 더위가 고여 있었지만,그 더위마저 기분 좋은
고양감으로 바뀌 어 몸을 감싼다.

——게이블 싸 ……당신 지금 섰어요

문득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혀를 차는 소리도 섞 인다.

섰다. 귀에 들리는데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몽롱한 머리로는 이 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몸을 덮고 있는


후덥지근하고 기분 좋은 더위에 점차 숨이 차오를 뿐이다.

——뺨 좀 쓰다듬어주고 몸 좀 닦아줬다고 이렇게 금방 서면어떡해. .내 참. 그 술 이상한 술 아냐.?


쯧,목소리가 혀를 찬다. 한동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어떻게 할까 생각이라도 하는 둣,혹은 뚫어져라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

유리는 뺨을 감싼 손이 기분 좋아, 나른한 숨을 쉬며 그 손에 코를 묻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다.


그래서 그 손바 닥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은 숨결과 함께.

순간 손이 움칫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손은 사라지지는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짧고 미묘한


망설임.

그것은 곧 나직하게 다가온 목소리로 바뀌었다. 귓가에 가까이 닿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가 말했었조 나 남한테 노력 봉사하는 거 싫어한다고

언제였더라.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긴 하다. 그때 느꼈던 기분이 고스란히 떠올라,문득 유리는 유쾌하게


웃고 말았다. 웃 음이 맺힌 입매에 잠시 시선이 고정되는 듯했다.

一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게이블 씨에게는 워낙 여러 가지를 받아서 나도 뭐든 좀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했었거든요

그런 말도 들었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누구였는지는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잠시 생각을 떠올리려다가 이내 이 기분 좋은 감각 속에서는 뭐든 아무래도 좋아져서 생각을 그만두는 유리의


귓가에, 희미하 게 거칠어진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一그러니까, 운 좋다고 생각해요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앞에는 땀에 젖은 얼굴이 있었다.

분명히 낯익은 얼굴인데도 한동안은 못 알아봤다. 표정이 몹시낯설었던 탓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일어났어요?’

‘아니에요?’

유리는 흐리게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이게 누구더라, 하고 어렴풋한 머리로 생각했다. 유리가 제대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유 리의 입술을 빨았다. 주린 배를
채우는 탐나는 것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거침없이 입술을 빨아먹다가 잠시 떨어진 그는,예의 그 낯선 얼굴로
유리를 내려다본다.

예쁜 얼굴이었다.

기분 좋을 때는 목을 울리는 사랑스러운 새끼고양이처럼 달콤 한 얼굴이다. 그 얼굴이 웃음을 띠면 태양처럼


화사하다는 걸 유 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얼굴은, 여전히 그토록 예쁘고 화사한 얼굴이었 는데도,고양이처럼 보드라운 달콤함은 없었다.
어느새 늘씬하게 자라난 젊은 표범이 되어, 맹수의 눈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고양이가 아니었잖아…….

약간은 얼빠진 생각을 떠올리며,그러면 그 고양이는 누구였을 까를 생각한다.


그건…….

‘좋아요?’

문득 속삭이는 목소리.

그 말을 듣고서야 유리는 아래쪽에서 거침없이 추어올리고 있 는 맹렬한 쾌감을 의식했다.

단단하게 뭉쳐진 부피감이 유리의 성기를 찌르고 있었다. 성기 의 뿌리를, 기둥을, 끄트머리를 찌르며 세차게
비벼대는 더운 살 덩이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자신은 정신없이 달아올라 푹 젖어버린
쾌감 속에서 짧고 밭은 의미불명

의 소리를 신음처럼 내지르고 있었던 걸까.

아프도록 단단해진 두 성기가 마찰하는 틈새로, 이미 한데 뒤섞 여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체가 젖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말도, 안 나와요? 하긴,나도,그래.’

짤막짤막한 단어들이 말을 이룬다. 하아, 기분 좋게 거친 숨결 을 토해내는 그의 코끝에서 흔들리던 땀방울이


이윽고 톡 떨어졌 다. 입술 위로 스며든 땀은 단맛이 난다.

‘그렇게 좋아요? 게이블 씨, 아까부터 넋이 나갔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거칠었다. 숨이 찬 듯 달아오른 숨결은 다시 유리의 입술을 깨문다. 이미 거칠어져


달아오른 숨결이 누 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좋았다.

어렴풋한 머리는 오로지 쾌감을 쾌감으로만 인식했다.

그 이상을一수치나, 이성이나, 곤혹이나, 그런 것 따위를一인식 할 머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아래를


허덕이며 달리는 쾌 감만.

숨이 막혔다. 아래가 조여드는 감각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흐려 진다. 쾌락이 터져나가는 감각, 그 강렬하고도
선명한 쾌감. 묶여 있던 것이 풀려나는 해방감.

그런 것들 속에서,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도 몰랐다. 그리 고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그 떨림이 잦아들


즈음에는 의식도 다시 감감해졌다.

‘자요? ……진짜 자요? ——아무리 노력 봉사하겠다고는 했지만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하게 부풀어 올라 아래를 찔러대는 감각 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는 소리와 섞인다.

아까부터 단단히 등을 부둥켜안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는가 싶 었다. 등 아래를 어루만지며 내려간 손은


엉덩이에서 멈춘다.

‘——그렇게 계속 잘 거예요? 슬슬 일어나는 게 좋을 텐데.’


지금 일어나서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텐데, ……하지만 당신 은 그러길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속삭인 목소리가 귓불을 잘근거린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낯익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오래전 누군가와 몸을 섞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그러나 동 시에 여태 겪었던 그 어떤 느낌과도 동떨어진


낯선 감각이기도 했다.

사타구니를 움켜쥐는 힘이 느껴졌다.

쾌락을 뱉어내고 풀이 죽은 유리의 성기와, 아직껏 해방되지 못 해 햇뻣하게 욕망이 고여 있는 성기를 한 손에


잡는다.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 손은 점차 빨라졌다.

곧 그 감각에 쫓기듯이 다시 부풀기 시작한 욕망 위로,뜨겁고

축축한 느낌이 뿜어져 나왔다. 끈적하게 아랫배 위에 쏟아지는

욕정.

. _,

일순 움직임이 멈추었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춘 듯, 세상이 움직이지 않 는다.

이윽고.

‘뭐야, 또 서려는 거야?’

나른하고 기분 좋은 숨을 내쉬며, 그가 웃었다. 그의 욕망과 부 대껴 함께 훑어올린 유리의 성기는 다시 얼핏


힘을 받고 있었고, 그는 손끝으로 그 끄트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힘없이 흔들거리는 통에 툭툭 부딪힌 그의
성기는, 막 방금 토정을 했으면서도, 전혀 시들지 않고 부피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게이블 씨, 굉장히 야하잖아요. 몸도, 표정도, ……여 태 이렇게 야한 몸을 어떻게 가누고 있었어요?
힘들었겠어.’

들떠서 어른거리는 목소리는 희미한 흥분에 젖어 있었다.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려 반쯤 일어선 유리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성기 뿐 아니라 아랫배도, 그 아래의 사타구니도


천천히 더듬는다.

그 자신과 상대의 토정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아랫도리를 축 축하게 문지르던 손은, 느리게 아래로 움직였다.
아래로.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흥분으로 들뜬 숨소리만 거칠게 들려올 뿐이었다. 간간이 유리의
입술을 빨아먹 는 탐욕스러운 입술이 닿아왔다.

유리는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했다.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낯선 위화감이 들었다.

다리 사이를 문지르며 내려가던 손이 좀 더 아래로,좀 더 안으 로 파고들어, 이윽고 그 가운데 숨죽이고 있던


곳에 닿았다.

잠시 머무르는가 싶던 손은,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몸속으로.

여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거북한 위화감을 동반하고 몸 속으로 밀려들었다.

저도 모르게 퍼득 몸이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움칫 움츠러드 는 몸은 그 안을 파고들던 손가락을 조인다.

유리의 사타구니에 맞닿아 있던 성기가 꿈틀 움직였다. 신음처 럼 나직하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곧,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몸속으로 밀고 들어오던 손길이 조금 거칠어졌다. 인내심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처럼,
사타구니를 죽죽 하게 적시고 있던 정액을 윤활제처럼 그러모아 그 안으로 밀어넣 으며 다른 손가락들까지 둘, 셋,
안쪽을 벌리며 들어온다.

숨 쉬기가 괴로워졌다.

아, 아,하아,아, 짧고 밭은 숨이 흩어져 나온다.

아픈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낯설고 뻑뻑한 위화감이 치밀어올라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몸속을 긁으며 문지르던 손길이 어느 순간인가 파작, 불꽃을 터뜨린다.

‘-!!’

그것은 아주 조그만 불꽃이었지만 분명히 몸속의 뭔가를 건드 렸다. 절로 몸이 튀어 오르며 움츠러든다.

잠시 손길이 멈추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그래. 이쯤이구나……?’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다. 그것 이 놀람인지 쾌감인지 공포인지도.

몸속의 한곳을 연이어 두드리는 자극에,정신없이 눈앞이 하얗 게 튀어 올랐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
어떤 소리를 터 뜨리고 어떻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지도 몰랐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잡아먹을 듯이 유리를 응시하던 시선이, 결국 못 견딘 듯 유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목덜미뿐 아니라 어깨,귓불, 가슴, 닥치는 대로 물고 빨며 흔적을 남긴다.
‘좋아요? 그렇게 좋아? ——그래,얼마든지.’

낮게 쉬어 들뜬 목소리가 거친 탄식처럼 속삭였다.

얼마 있지 않아 유리의 몸속을 적시며 벌리고 들던 손이 자리 를 비웠다. 그러나 손이 사라진 뒤에도 빠듯하게


벌어졌던 이물 감이 남아 맥박 치는 그 자리에, 이윽고 끝없이 꾹꾹 밀려들어오 는 거센 열기가 대신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빠듯한 몸속을 그대로 터뜨려버릴 것처럼 밀고 들이치는 감각 에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어 무작정 앞에 있는 것을


끌어안는다. 팔 안에 가득 차는 땀에 젖은 몸을 정신없이 끌어안고서,유리는 무시무시한 고양감을 자신의 몸속에
밀어 붙이기 시작하는 불길 같은 감각에 쫓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유리는 한동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 깜박, 천장을 넋 없이
올려다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뭔가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하얗게 비어 있는 머리로 자동인형처럼
눈만 깜박였다.

의식을 차린 것은, 그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감각 속에 변화가 생긴 탓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욕실에서


들려오고 있던 물소 리가 몇었다.

그리고 그제야 ‘물소리가 멈췄다.’라는 생각이 의식 위로 떠오르 면서, 사고가 하나하나 살아났다.

다시 의식을 잃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하자마자 뼈마디마디 욱신거리면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늘어진 몸이 인식되었고,


옷가지고 술병 이고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거실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는 자 신의 상황이 인식되었으며,뒤이어
기억이 돌아왔다.

모든 기억이 다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꿈처럼 어렴풋한 기억이 먼저 있었고,그 뒤에 하얗게 사라져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동안이 있고, 그 뒤에 어느


때부터인가 눈을 떠 지금까지 이어진 의식이 있었다.

그래, 아마도 눈을 뜬 지 몇 시간은 지난 것 같다. 그런 인식도 지금에야 했다.

까무룩하게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도 모 르게 정신이 들고서 제일 먼저 인식한 건 거실의


전면유리창 너 머로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던 하늘이었다. 아마도, 여느 때라면 수영을 갈 시각이니 몸이
습관적으로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식한 건, 뒤집힌 개구리 같은 모습으로 누 워 있는 자신의 몸 위에 비스듬하게 엎드려 있는


링신루였다.

‘일어났어요? ……이번에는 정신이 들어요? ……아직 안 들어 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 말을 아마도 여러 번 물어본 모양이 었다. 그러고 보면 아스라한 기억 속에 가물가물
그 말을 들었던 듯도 하다.

그는 느릿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맞춰 유리도 누운 채 흔들렸다. 아랫도리가 이어져
있었던 탓이다.

아직도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현실인지 인식이 되지 않아 멍 한 머리로 어……하고 그를 쳐다보는 사이에,


유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가 싶었다. 그와 함께 아랫도리를 밀어올리며 흔들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이미 감각이 둔중하게 사라지다시피 한 아래에,잠시 후 엉덩이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엉덩이뿐 아니라 허리 아래까지, 둥까지 타고 흘러 몸 아래가 온통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설마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했던 걸까.

멍한 머리로 설마, 하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다리 사이 에 깊이 묻혀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아래를


틀어막고 있던 성 기가 빠져나가자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줄줄 쏟아져 다시 엉덩이 아래가 흥건하게
젖었다. »

반사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일어났어요? ……이번에는 일어난 건가? ……이런. 정신이 안 들어요?’

조용히 중얼거린 링신루는 낮게 혀를 찼다. 눈꺼풀을 할짝거리 며 핥은 그는 입술도 할는다. 고양이 같다.
분명히 아까는 표범이 한 마리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고양이가 돌아왔나 보다.

‘좀 자요. 하긴 말 안 해도 이러다 또 눈 감겠지만. ……나도 이 제 슬슬 지치기 시작해서 잠시 쉬어야겠어요.’

아무래도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체력이 금방 소모되네요, 하고 중얼거린 링신루는 유리의 옆에 모로 누웠다.

체력 소모……,그게 뭐더라……,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뜻이 랑은 다른 것 같아……,유리는 어렴풋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떠 올렸다.

지쳤다는 링신루는,그러나 잠들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나른해 보이기는 했지만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운 채


물끄러미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는 유리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유리는 넋 나간 듯 천장을 바라보는 그대로,그렇게 중얼거리려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조금 달싹거리는 듯했지만, 바싹 말라 쉬어버린 목에서는 바람만 새어나왔다.
유리는 단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리를 내려다보던 링신루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뭐 라고요?’

‘좋았어요?’

이 말을 들으니 어쩐지 조금 화가 날 것도 같았다.

‘어제 게이블 씨 진짜 여러 번 갔는데. ……진짜 체력 좋아요. 계속 흐느끼면서 달라붙어서, 나도 쉬지 않고 계속


했잖아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유리는 눈을 감았다. 잘 거예요?
하고 혼잣말처럼 물어보는 소 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는 유리가 눈을 감은 뒤에도,꼭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계속 유리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머리도 쓰다듬고, 또 가끔은 엉덩이도 쓰다듬는다. 가끔은 풀죽어 늘어진 성기를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一사실은 여전히 멍해서 사고가 제대 로 돌아가지 않는 기분으로一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몰랐다. 그렇게 잠시 누워서 쉬는가 싶던 링신루가 다시 유리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을 줄은.

눈을 뜬 채로 의식이 날아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심경으로 늘어져 있던 유리의 옆으 로,물소리가 및은 욕실에서 곧 링신루가 걸어


나왔다.

깜박깜박 사이가 비어 있으나마 그럭저럭 이어진 유리의 기억 이 맞다면 간밤에 한숨도 자지 않은 링신루는,
그러나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말끔한 얼굴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넋 놓고 링신루를 쳐다보는 유리를, 링신루도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겨우 입을 열었지만 말이 목에 걸려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 러나 바람소리처럼 새어나간 소리는 어떻게든 그의


귀에 닿은 모 양이다.

주방으로 걸어가던 링신루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약 간 눈을 크게 뜨며 유리를 돌아본다.

“일어났어요? ……이번엔 진짜로 일어난 거예요?”

미심쩍은 듯 덧붙이는 말은, 이미 그가 그 물음을 여러 차례 거 듭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


뜬 채 그 물음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유리는, 이번에는 눈동 자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 일어났구나,하고 놀란 듯 중얼거리며 링신루는 걸음을 돌 리다가 멈칫하더니,다시 돌아서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미지근한물을 한 컵 떠서 성큼성큼 돌아왔다.

“여기요. 물 찾은 거죠?”

맞았다.

유리는 링신루가 부축해 일으켜 입에 대어주는 물을 천천히 삼 켰다. 반 이상은 흘렸지만 그래도 몇 모금이나마
입술과 목을 축 이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좀 괜찮아요? 어제는 계속 깼다가 기절했다가 정신을 못 차리 면서 쇼크 상태에 가까울 만큼 너무 느끼기에 좀


걱정했는데.”

제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피곤했다. 몸도 정신도.

유리는 눈동자만 돌려 시계를 보았다. 이미 사람들이 활발하게 이동할 아침 시간이 되어, 바깥에서는 차 소리가
맨션 아래로 연 신 지나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밤을 샜을 것임에 분명한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링신루를,유리는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정말로 이 남자와 잔 걸까. 여러모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건 이 상황이다.

사이사이 비긴 했지만 기억이 없지는 않았다. 어째서 자신이 이 러고 있는지, 자신과 그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어렴풋하 게나마 기억난다.

하지만.

술김에 일을 저지르고 깨어보니 같은 이부자리, 그런 상황 속에 서 무엇보다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앞으로의 향방을 알 수 없는 탓이다.

예상치 못했던 관계를 난데없이 맺고 난 뒤,어떤 얼굴로 상대 를 보며 어떤 말을 하고,앞으로 어떻게 지내면


좋은지,유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여태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사람이 모처럼 큰 맘 먹고 성심성의껏 노 력 봉사를 해 줬는데.”

그때, 유리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가 말했다. 유리는 눈을 낌벅였다. 링신루는 흠,
하고 별다른 표정 없이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나도 설마 게이블 씨랑 이럴 줄은 몰랐는데,어쩌다 보니까 이 렇게 됐네요. 난 내가 안 내키면 아무리 나


좋다고 해도 같이 안 자는데. ……나 정말로 애써서 노력 봉사했어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빙긋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섞인다. 그 얼 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유리는 “……예,


그랬죠.”하고 중얼거렸 다.

혼란스러운 심경이 어권지 좀 가시는 듯했다. 갑자기 이 혼란스 러운 상황에 대한 난감한 기분이 사그라지는 건,
링신루의 태도 가 지난밤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서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마주 대하면 좋 지,그런 생각은 애초에 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예상 치 못한 가볍고 대단찮은 사고가 벌어졌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 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지.

호들갑을 떨며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쩌니 저쩌니 할 만큼 어 린애도 아니고, 이 남자나 자신이나 그런 성격도
아니다. 글쎄, 이 남자의 성격으로는 때에 따라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뒤 책임 지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어쨌든 지금은 그런 경 우가 아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노력 봉사.

잠자리를 노력 봉사 받은 기분이라니, 어찐지 픽 미묘하다. 그 렇게 유쾌한 기분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의 무르팍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를 보 고,링신루가 얼굴에서 잠깐 웃음을 거두었다.

“화났어요?”

유리는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는 그를 쳐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하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하자
어렴풋한 불안이 떠 올랐던 그의 얼굴에 다시 안도가 서렸다.
왜 화가 나겠나.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고,기억이 흐리다고는 하나 유리는 자신이 분명히 ‘좋아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아랫도리에 저릿한 쾌감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데,이제 와서 즐기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화나진 않았다. 그저 기분이,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게 미묘할 뿐이다.

“……,좋았어요?”

다시,이번에는 조금 전과 반대되는 물음이 날아왔다. 웃음이 맺힌 눈초리는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고양이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휘 몰아치는 느낌이라 그 당시의 기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좋긴 했다. 아니 사실은, 여태 그의 인생에 있어왔던 여러 차례의 관계 가운데一라고 해도
그에게 그리 파란만장한 연애편력이 있 었던 건 아니지만一가장 정신없이 느꼈다. 혹시 나는 원래 성향 이
이쪽이었던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유리의 앞에서, 링신루도 빙긋 웃었다.

“나도 괜찮았어요. 아니 사실은 상당히 좋았어요. 한 번 큰 맘 먹고 봉사할 만은 했다 싶을 정도로.”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그는 잠시 입매를 찌 푸리더니 “어제는 정말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니까 다음에 도 이런 일이 또 있을 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하고 혼잣말 비숫 하게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뒷말을 하면서는 다시 유리를 바라 보며 예쁘게 웃어준다.

“다음에도 기분 내키면,뭐.,,

거기서 그는 말을 맺었다. 그리곤 젖은 머리를 닦던 수건으로, 눈물이나 타액 따위가 끈끈하게 말라 있는 유리의


얼굴을 살짝살짝 닦아주었다.

다음에도 기분 내키면, 그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이어질 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해줄게요. ——봉사해줄게요.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수건 으로 살살 닦아주는 손길에 얌전히 얼굴을
내맡기고서, 아니 별 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

굳이 싫다고 거절할 만큼도 아니지만, 그리 내키지도 않았다. 분명히 지난밤의 기억이 나쁘게 남은 건 아닌데도_
아직도 몸속 이 달게 욱신거리는 느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一그랬다.

아무래도 지금 기분이 별로라서 그런가 보다.

유리는 축 늘어진 몸만큼이나 가라앉은 마음으로 링신루를 쳐 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기웃하며 웃음
짓는 그는 평소 와 다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하나만은 다행이다. 저렇듯 평소와 같은 그를, 유 리 자신도 곤혹스러워 할 것 없이 예전처럼


대하면 되었다.

보록. ..보록.

물속에 누워 숨결을 천천히 한 모금, 두 모금 뱉어내면 공기방 울이 반짝반짝 둥글게 춤추며 올라간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커 다랗게 부푸는 방울은, 이윽고 수면을 만나면 팍, 터진다. 그리고 그곳에 남는 것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파문.
그런 사소한 것들이 좋았다.

유리는 폐에 차 있는 공기를 한 모금 한 모금 뱉어내 춤추는 공기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가슴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뱉어내고, 그 공기방울이 수면에 다다르는 것을 보고서야 천천히

“기억이 잘 안 나요? 사람이 모처럼 큰 맘 먹고 성심성의껏 노 력 봉사를 해 줬는데.”

그때, 유리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가 말했다. 유리는 눈을 낌벅였다. 링신루는 흠,
하고 별다른 표정 없이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나도 설마 게이블 씨랑 이럴 줄은 몰랐는데,어쩌다 보니까 이 렇게 됐네요. 난 내가 안 내키면 아무리 나


좋다고 해도 같이 안 자는데. ……나 정말로 애써서 노력 봉사했어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빙긋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섞인다. 그 얼 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유리는 “……예,


그랬죠.”하고 중얼거렸 다.

혼란스러운 심경이 어권지 좀 가시는 듯했다. 갑자기 이 혼란스 러운 상황에 대한 난감한 기분이 사그라지는 건,
링신루의 태도 가 지난밤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서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마주 대하면 좋 지,그런 생각은 애초에 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예상 치 못한 가볍고 대단찮은 사고가 벌어졌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 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지.

호들갑을 떨며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쩌니 저쩌니 할 만큼 어 린애도 아니고, 이 남자나 자신이나 그런 성격도
아니다. 글쎄, 이 남자의 성격으로는 때에 따라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뒤 책임 지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어쨌든 지금은 그런 경 우가 아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노력 봉사.

잠자리를 노력 봉사 받은 기분이라니, 어찐지 픽 미묘하다. 그 렇게 유쾌한 기분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의 무르팍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를 보 고,링신루가 얼굴에서 잠깐 웃음을 거두었다.

몸을 위로 떠올린다.

...아아. 바다에 가고 싶다.

실내풀에 갇혀 있는 추운 계절에는 언제나 바다가 간절하게 그 립다. 입술 안으로 한두 방울 스며들면 짭짤한


맛이 나는 그 묵 직하고 서늘한 물이.

겨울부터 봄까지는, 머나먼 남쪽 바다로 떠나지라도 않는 이상 은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울은 물 바깥의
날씨가 춥기 때 문에, 봄은 물속의 온도가 겨울보다도 더 차갑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봄이 끝날 무렵이면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훌쩍 남태평 양 근처로 날아가기도 했고, 일에 묶여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때 로 물에 소금을 타서 마셔보기도 했다. (그런 유리를 보고 제임스 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유명
정신과의의 명함을 쥐어준 적도 있 었다.)
‘아름다운 산호초를 끼고 있는 열대 바다의 섬에 살고 있는 사 람이 나를 고용해줄 일은 없겠지요……?’

언제였던가, T&R 과 재계약을 할 때 계약서를 물끄러미 쳐다보 던 유리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제임스는 흰
눈으로 그를 바 라보다가 쌀쌀맞게 말했다.

‘글쎄,알 수 없지. 남들이 모르는 일을 비밀리에 알고 싶어 하 는 사람은 온 세상에 널려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남태평양에 개인 섬을 가진 부호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 사람이 널 고용하느냐,
그리고 널 고용한다 해도 그 사람이 과연 고용인을 자신의 섬에서 여유자적 헤엄이나 치면서 놀팽놀팽하게
놔두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제임스. 요즘 살기 팍팍한가 보군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걸 보니.’

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잔말 말고 계약서에 사인이나 해!’

벌컥 소리를 지르는 제임스는, 그 당시 카일이 중고 고서적 경매장에서 사기를 당했다고 길길이 뛰며 난리를 치는
통에一이미 지불한 돈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가 낙찰 받은 내 책을 내놓으 라고 펄펄 뛰고 있었다一몹시 기분이
안 좋았다. 현명한 유리는 군말 없이 사인을 했고, 제임스는 거기에 직인을 찍음으로써 한 해의 계약 갱신을
마쳤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고용주로 나타난다면 날 소개해주면 좋 겠군요. 그런 사람이라면 종신계약이라도


하겠어요.,

‘차라리 어디서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책을 찾아와서 카 일에게 섬이랑 교환하자고 해. 그게 빠를 거야.’

제임스의 냉랭한 대꾸에 유리는 그렇군요, 하고 크게 고개를 끄 덕였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 뒤로 벌어지지 않았고一마니아도 그런 마 니아가 없는 카일조차 구하지 못한 책을 문외한인


유리가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一,유리는 봄마다 바다를 그리워했다.

지금도.추운 계절은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바다에 들어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으로서는 계약에 묶여 마 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보록보록 올라가는 공기방울을 따라 수면으로 올라간 유리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욱, 결국은 물에서 살
수밖에 없는 그는 공기 속에서 호흡을 골랐다.

그러나 실내풀이라도,기분은 나아졌다. 당장 우울할 때에는 열 대바다 같은 사치스러운 소리는 그만두고 바로


근처에 있는 실내 풀에라도 잠기는 게 제일 좋았다.

“굉장하네요, 2 분 30 초.”

속눈썹에 맺혀 눈에 스며드는 물을 걷어내는 유리의 앞에서, 감 탄스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을 쓸어 올리자 링신루가 레일 위에 올라앉아 다리를 물속에서 설렁설렁 젓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어요, 물속에서?”

“글쎄요. 3 분 조금 넘게까지는 견뎌봤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 습니다. 일일이 시간을 재면서 물속에
머무르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마도 그 이상은 좀 힘들겠지요,하고 덧붙이는 유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링신루는 “3 분.”하고


눈썹을 치켜올린다.
“대단하네요. 나는 1 분만 숨을 못 쉬어도 눈앞이 까매지던데. 3 분씩이나는 절대로 못 견딜걸요. ……그때는
시간이 얼마나 됐었 으려나.”

예전 언젠가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띄우는 그를 유리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유리의
눈길을 깨닫곤 링신루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바다에 빠져죽을 뻔한 적이 있거든 요.”

“……. 아,예……

유리는 그를 바라보던 눈동자를 아무렇지 않게 굴려 시선을 돌 렸다. 미리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경우에


변함없는 포커페이 스로 임할 수 있었지만,이렇게 예고 없이 닥쳐오는 일격에 대한 임기응변에는 약한 유리였다.

“조류에 휩쓸려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어요.


몸은 마음대로 움 직일 수 없고, 숨은 막히고,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공포스럽기도 하고,

.그런데도 의식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괴로워했었는데, 실제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네요.’’

체감상으로는 수십 분쯤은 되는 것 같았는데요,하고 중얼거리 는 링신루에게 유리는 ‘당신도 3 분은 견딜 수


있어요.’라고 속으 로만 말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구해줬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의식을 잃어가는 링신루 씨 옆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유리가 잠시 침묵하다 은근히 물어보자 링신루는 아, 그랬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불쾌한 기 억을 되새겼는지 미간에 한 줄 주름이 진다.

“그렇다면 이대로 의식을 잃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좀 덜 불안하지는 않았습니까?”

“죽을 것 같지는 않았어요. 게이블 씨 말대로, 이대로 기절해도 살 것 같긴 했죠. 그런데.”

링신루의 눈에 불쾌한 빛이 분노와 함께 스몄다.

“바로 옆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가 의식을 잃기를 기 다리면서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 알아 요?,’
“……,굳이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그 사람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에는
본인에게 충분한 확신과 자신이 있지 않으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작 은 어린애라 해도,죽음의 공포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달라붙으면 힘 좋은 장정 하나를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중립에 선 척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슬그머니 변호해주는 유리 였지만, “그건 알아요.”라고 잘라 말하는 링신루의
음색은 싸늘했 다.

“문제는 그것보다 다른 거였죠. 그때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쳐다 봤는지 알아요? 의식을 잃어가면서 괴로워서
바둥거리는 나를 넋 나간 것 같은 눈으로 쳐다봤어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 것만큼은 뚜렷이 보이더군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 눈만큼 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링신루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그리고 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시선을 아무데로나 띄웠다.
어쩐지 얼굴에 핏기가 가실 것 같다. 그때의 자신을 그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는 어린애를 그렇게 황홀하게 쳐다보다 니, 그놈은 최악의 사드변태였어요. 혹시 또
모르죠. 사람을 목 졸라 죽이면서 희열을 얻는다는 게 그런 놈일지.”

그렇지 않다고 정말로 간절하게 변호해주고 싶은데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시선을 피한 채
“그런가요…… 하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링신루는 생각하자 다시 분노가 치솟는지 삭막한 얼굴로 허공 을 노려보았다. 그 허공에 과거의 그놈이 매달려
있기라도 한 듯, 시선이 무섭다.

“내가 그 뒤로 싫어졌어요. 나 좋다고 넋 놓고 쳐다보는 눈길들 이.’’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어떠한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다니,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생명의 은인인데,하고 여태 은연중에 품 어왔던 생각이 조각조각 깨어져 흩어졌다.

“오죽하면 물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졌었겠어요. 물에 빠져죽을 뻔했었다는 것보다는,그때 그 기억 때문에 치가


떨려서 더 싫었 어요.”

심지어는 이 평화롭고 아늑한 물에서 그를 멀어지게 만든 것조 차 자신이었다. 유리는 말을 잃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 유리에게, 문득 링신루는 분노를 감춘 산뜻한 시선을 주었다.

“그래도 게이블 씨 덕분에 수영은 다시 하게 되었으니 잘 됐죠. 고마워요.”

화사한 눈웃음으로 유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링신루였다. “아니오, 뭘요…….”라는 대답이 겸양이 아니라는
건 유리만 알고 있다.

참 무거운 화제라고 생각했다. 링신루는 먼 과거의 일을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유리는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졌다. 그래 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물속에 찰방찰방 몸을 담근다.

그렇게 짤막한 침묵이 흐르자 다행히도 링신루는 다른 데에 생 각이 미친 듯 지그시 유리를 보았다.

“그런데, 수영은 좀 할 만해요? 아까부터 보니까 다른 때보다 거의 안 움직이는 것 같던데.”

하루쯤 더 쉬지 그랬어요, 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유리는 이 화제도 그리 마음 편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며칠 만에 들어온 풀이었다. 거의 나흘, 닷새 가량일까. 물이 근 처에 있는 환경임에도 이렇게 며칠 줄곧 못


들어온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도 욕조에는 한참 잠겨 있곤 했지만.

들어오려야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물에 있으면 늘 아늑하 다지만 이번만큼은 이 상태로 물에 들어가면
빠져죽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반쯤은 진지하게 했다.
남자와 관계를 하는 게 이렇게 몸에 부담이 큰 일이라고는 생 각도 못 했다. 처음 몸이 늘어질 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한숨 자고 일어나자 몸 이 더 나른하게 늘어졌다. 낯선
근육통 때문에 열까지 났다.

그렇게 거의 하루 반은 고스란히 뻗어 있었고, 다시 하루쯤도 집에서 못 나갔다. 그 뒤에는 그럭저럭 움직일


만은 했지만 물속 에서 편안하게 몸을 가눌 만큼이 될지 자신이 없어서 침울하게 욕조만 찰방거렸다.

‘게이블 씨 의외로 몸 약하네요. 그거 좀 했다고 이렇게 뻗어요?’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의외네, 하고 놀랐다는 투로 링신루가 중 얼거렸을 때,언제나 담담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링신루를 사랑스 럽게 지켜봐 왔던 유리는 처음으로 ‘의외라고 한다면, 이 남자를 두 대쯤 때려주는 것도 의외로
기분이 상쾌할지도 몰라.’라는 폭 력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불쑥 솟았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다.

원래부터 분노처럼 부정적이고 격렬한 감정을 오래 품을 수 있 는 성정도 아니었거니와,링신루는 얄밉게 말을 한


것치고는 몹 시 싹싹하게 유리를 돌봐주었던 것이다.

‘정말,이 정도로 앓아누워서 어떡해요.’

혀를 차면서 중얼거리는 말은 밉게 보려면 밉게 볼 수도 있었 지만 미안한 듯이 유리의 눈치를 가끔 살피면서도


저렇게 말을 하는 게 또 이 남자답다면 이 남자답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요.’ 자리에 누워 축 늘어진 채로도 조금 억울해져서


유리가 대꾸하 자 링신루는 이상한 얼굴로 낯을 찜그렸다.

‘다들 이쯤은 하는 거 아니에요?’

유리의 상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가볍게 한두 번, 조금 더 열 정적으로 한다고 해야 거기서 한두 번 더.


적어도 유리는 그랬다. 다른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여태 그와 사귀었던 몇몇
여자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로 봐선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예전에 얼핏, 처음 했을 때 여남은 시간쯤 이것저 것 시험해보면서 요령을 익혔다고 링신루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 다. 그야 물론 순수하게 몸만으로 하룻밤 꼬박을 보내지도 않았 을 거고 어느 정도는 어린 치기에
과장해서 말한 것도 있으려니 했는데,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들 이쯤은 해요.’

유리가 미심쩍은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자 링신루가 타이르듯 이 못박아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던 유리는,하지만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 이 어떤 밤 생활을 보내는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닌데 그 렇게 확고하게 부정해도 되는 걸까 잠시 의심했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하고 생 각하자 남자로서의 자신감이 좀 쪼그라들었다. 우울해졌다.

그 우울함까지 더해져 완전히 뻗어버린 유리였지만, 어찌 되었 든 링신루는 뜻밖에 세세하게 잘 챙기면서


보살펴주었다. 그런 일은 전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유리가 의외로운

마음으로 ‘사람 잘 돌보는군요.’라고 말했더니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늘 이렇게 챙겨주거든요.
그래서,내가 직접 해본 적은 없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는 걸 실천하 는 거야 일도 아니죠.’라고
말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여러 곳에서 의외성이 많은 링신루는, 그 고운 외모에는 의외인 괴력으로 유리를 가볍게 달랑 들어 씻겨주거나,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치고는 몹시 의외인 손재주로 소화가 잘 될 만한 먹 을거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그가 만들어주는 것들을 받아먹 은 유리가 딱 하나 아쉬워한 거라고 해봐야,풀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릴 때마다 ‘그 몸으로요?’라며 들은 척도 안 했던 정도밖에 없다.

정말로 스스럼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링신루는 유리를 대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리는 물속으로 한 번 자맥질을 했다가 나오는 링신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게 차라리 다행이기는 하다.

오히려 일이 있었다고 태도가 바뀌었더라면, 그 태도에 따라 유 리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퍽 난감했을지도


몰랐다. 서른 중반 이나 되어서一혹자의 말에 따르면 사사오입해서 마흔인 나이에一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고로
며칠이나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이니까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몸 상 태가 안 따라줘서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구해주려고 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링신루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에 빠진다는 말이 자신에게 날 아오는 것이 픽 희한했던 유리도 웃고 만다.

문득 링신루의 시선이 유리의 입매에 맺히는 듯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유리를 아무렇지 않게 쳐다본 링신루는
신기하단 말야,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게이블 씨는, 그렇게 물 좋아해서 만날 잠겨 있으면서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한 번쯤은 빠져죽을 뻔했을 만도
한데.”

“아니오……, 없는 것 같군요. ……없습니다.”

유리는 잠시 생각을 더듬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어릴 때 에는, 물에 오래 잠겨 있어서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이 혼비백산 해서 끄집어내려고 한 적은 몇 번쯤 있었다. 그러나 물로 인한 위험은,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늘 편안했던 것 같습니다.”

유리가 다시금 기억을 체크해본 뒤에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링 신루는 낯을 찡그리며 웃었다.

“게이블 씨, 이상하다는 소리 여러 번 들었을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매 일 운동을 다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으니,그가 매일 수영을 하러 다닌다고 해도 이상하게 들릴 건 없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도로 레일 위에 올라 앉아 재미있다는 듯이 유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루는, 문득 몸을


뒤로 젖혔다. 물속에 첨벙 뒤로 몸을 담가,거꾸로 돌아 유리의 앞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곤 풀 가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슬슬,그들이 으 레 풀에서 나가곤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도 시계를 보곤 그 뒤를
따른다.

“난 당신이 부러웠나 봐요. 어쩌면 그래서 더 밉게 보였나 봐.”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슬슬 헤엄쳐가던 링신루가 불쑥 말했 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유리가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이 유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 나아가던 링신 루는 평연한 투로 말한다.

“예전에 말했었잖아요. 물속에 잠겨 있으면 무거운 생각이 소금 처럼 녹아버린다고.”

유리는 링신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그 말은 적어도 유리에게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바로 지금도,이렇게 물속에 잠겨 있으니 묵직하고 답답하게 가 슴속에 담겨 있던 느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유 감스럽게도, 이 남자를 보니 다시 그 무게감이 슬근슬근 돌아와 쌓이는 것도 같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굉장히 부러웠어요.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를 만큼. 욱하고, 뜨겁게.”

질투였을까요? 하고 익살스럽게 웃는 링신루가 그 말을 들었던 그 언젠가를 유리는 떠올렸다.

그가 힘들었던 때다. 아마도 여태 살아오는 가운데 가장 고통스 럽고 좌절에 빠져 있었던 때.

도망갈 곳도 해결할 방법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르작거리는 그 의 귀에 유리의 말은 얼마나 부럽게 들렸을지.

“그렇잖아요. 나는 그렇지 않은 걸 아니까. 게이블 씨의 무게는 물에 녹아버려도,내 무게는 그렇지 않죠.


도리어 솜처럼 더 무거 워지면 모를까.”

자신의 마음에 쌓이는 무게를 떨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 를 테고,유리가 물에 잠겨 평온을 얻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방식대로 평온을 얻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런데 그때부터,나는 그렇지 않은 걸 아는데도, 부러워지는 거예요. 물이.”

풀 가장자리에 다다른 링신루는 벽을 짚고 돌아섰다. 천천히 그 의 뒤로 다가선 유리도 멈춰 선다. 찰박,


손바닥으로 물을 걷어올 린 링신루는 주르륵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를 쳐다보다가 뭐, 하 고 가뿐하게 한숨을 쉰다.

“역시 나한테는 딱히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지는 않고, 그냥 운 동을 해서 개운해지는 정도밖에는 안 되지만,


그래도 뭐.,괜찮아요.

……사람 마음이란 게 얄팍해서,힘들 때에는 그게 몹시 간절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부 러운 마음은 안 들더라고요.”

“……. 힘들지 않다는 건 좋은 일이군요.”

“그러게요. 최근에는 그렇게 힘들다 싶은 일도 없었고, 기분도 썩 괜찮아요.”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유리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물었다. 거의 언제나 옆에 함께 있었으니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는데도,어찌 되었든 링신루의 마음이 그만큼 안정된 것 같아 다행스럽게 여긴 다.

링신루는 좋은 일,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딱히 의식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를 그제야 생각해보는 듯 잠시


턱을 문지르 며 시선을 띄우고 있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딱히 없긴 한데요. 눈 상태도 그대로고, 이렇다 하게 재미있는 일도 없고,생활 패턴도 매일


비슷하고, 만나는 사람도 거기서 거기고……. 그러게,왜 기분이 좋을까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하고 링신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웃었다. 잘


됐구나,그렇게 생각 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힘들었던 게 마모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유리가 말하자 링신루는 그 말에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않는 눈 치였지만, 그러나 딱히 별다른 해답을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런 지도 모르겠네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 각이 들었는지 유리를 웃음 띤 눈으로 쳐다본다.

“게이블 씨는, 이렇게 사람 좋아해서 가슴앓이로 힘들어했던 적 이 있어요? 아니면 첫사랑의 기억이라든가. ……
사람이 워낙 담 담해 보여서 그런지 어찐지 상상이 안 가긴 하는데.”

상상만으로도 이상하고 우습다는 듯 낮게 소리 내어 웃는 링신 루의 옆에서, 유리는 첫사랑이라는 말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무심결에 떠올리고 그 자신도 당황한 그 기억은, 처음으 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사람을 보았던
기억이다. ……링신루의 기억에는 악몽으로 남아 있는 그날,물속에 피었던 꽃.

그 순간 갑자기 당혹스러운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의 첫사랑은 혹시 그 소년이었던 걸까. 지금 옆에서, 당혹 스레 침묵하는 자신을 보고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를 보았다. 링신루 역시, 가볍게 물어본 자신의 말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깜박이는 유리를 보 면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있습니다. 첫사랑. .혼자서 일방적으로 넋을 잃고 시선을빼앗겼던 거라,


그렇게 힘들어할 만한 기억은 남지 않았지만요.” 유리는 느린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아아
그게 정말로 내겐 첫사랑이었나 보구나,하고 다시금 생각한다. 그 뒤로도 줄곧 잊히지 않고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곤 하던 기억.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마주쳤던 때에도 금세 그 기억을 떠올리며 알아보았던 그 면영.

그렇구나,그랬어, 하고 그제야 납득을 하는 유리를,링신루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어찐지 몹시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 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둣.

이윽고 그는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입을 열어,그렇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뒤에도 다시 한참 말을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社 링신루는 빙긋 웃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 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하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어권 지 평소보다 화사하게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발을 뻗어 유리의 발 을 집적거린다.

“별로 안 그럴 것 같은 얼굴로,인생 살아오면서 겪어야 할 단 계는 다 겪었네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보다


예뻐요?”

“……,비슷합니다.”

“비슷? 나랑 비슷한 정도로 예뻐요?”

“예,……닮았어요.”

어찐지 미묘하게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거짓말은 아닌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첫사랑은 바다에 빠져 의식을 잃어가 던 당신이었고 나는 그때 넋 놓고 쳐다보느라


당신을 얼른 구하 지 못했다, 라는 말은 할 수 없지 않은가.

묵직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유리의 앞에서 ‘나랑 닮아요?’하고 미심쩍게 중얼거리던 링신루는,문득 입을 다문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뚫어져라 유리를 보았다.

“혹시 나 좋아한다는 것도,그 첫사랑이랑 닮아서 그래요?”

약간 웃음 띤 입매가 미묘하게 식어 있었다. 유리를 쳐다보는 눈도 차갑다.

유리는 그를 마주보며 눈을 깜박였다. 생각도 못힌一생각할 여 지도 없었던一말을 듣고 잠시 대답이 어려워진


탓이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뒤에 ‘아마도,가 붙긴 했지만 유리의 조용한 음성은 단호했다. 닮아서 좋아한다, 누구에게든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닮다 니, 그런 이유로 좋아할 만큼 닮은一얼굴과 성격과 몸짓과 말투 따위기一사람은 없었다.

유리를 바라보던 링신루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러나 조금 전보다는 웃음기도 많이 흐려진 얼굴로,
그는 “그만 나가죠.”하고 돌아섰다.

언짢아진 건가,유리는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나섰지 만,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보곤


“몸은 이제 움직 이는 데에 아무렇지 않은 거죠?”하고 물어보며 눈웃음을 짓는 얼 굴은 어느새 여느 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반짝,어느 순간 깨어 눈을 뜬 유리는 잠시 어두컴컴한 천장을올려다보다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잠든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아직 이른 새벽도 되지 않 았다는 건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잠시 링신루의 방문을 바라보다가 습관 처럼 그리로 걸어가 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잘 자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링신루가 밤에 약 없이 잠들어 잘 자게 된 지는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

유리는 조용히 걸음을 물렸다. 방으로 가는 대신,아무래도 한 번 잠기운이 가신 눈에는 금방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거실 소파 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는 걸 보고 집 어 들어 입술을 축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말랐는지 반 컵쯤 남아 있던 물을 다 비워버렸다.

가벼운 숨을 내쉬며 유리는 묵직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꿈을 꿨다.

안 좋은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꿈이랄 것도 못 된다. 남 에게 말하기 어려운, 낯 붉어지는 꿈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숙여 물끄러미 자신의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화장실에 갔다 나온 아랫도리는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바 로 조금 전까지 옷감을 슬쩍 들춰 올리며 서 있었던 물건이다.

……무슨 풋풋한 어린애도 아니고.

유리는 혀를 차며 아랫도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풀죽은 물 건은 손끝으로 툭툭 건드려도 얌전히 잠자코


있었다.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된 말로 ‘개화 M7E 했다’는 게 이런 것이기라도 한지, 요즘은 부 쩍 민감해진 것 같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이 곤두 선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한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평 소에도 날카로워진 것
같진 않았다.

그저 가끔. 때로 사소한 접촉으로,민감해진 신경이 달팽이의 움츠러든 촉수처럼 비죽이 일어난다.

‘아……. 좋아.’

지금처럼, 이렇게 문득 귓가에 감도는 목소리를 떠올린 것만으 로도, 저도 모르게 손이 움칫하고 움츠러든다.

특히나 민감해졌다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촉감.

링신루는一예전에도 그런 편이긴 했지만一유리를 스스럼없이 건드리곤 했다. 대단하게 건드린 것도 아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혹은 책을 읽 으면서도 발목을 유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게^一그래놓고 스스 로는 전혀 의식도 못하는 것처럼 책에 집중했^ᅡ一,그런 정도다. 자신이 의식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고 대수롭잖은.

고작해야 하룻밤이었는데. ……그것이 좀 길고 끈질기긴 했지 만.

유리는 긴 숨을 내쉬었다. 목이 더 타는 것 같아 일어서 주방으 로 갔다. 아예 물병을 들고 돌아와 컵 가득


붓는다.

오늘도 그랬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이 되어, 링신루는 눈이 피곤하다며 유리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리고 유리는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이 더 운 수건으로 그의 눈을 덮고 그 위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더운 수건. 피어오르는 김. 기분 좋게 흘러나오는 숨결-

그런 것들 속에서, 요 얼마간 자신이 민감해졌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기에 약간 긴장하고 있었던 유리도 천천히
어깨에서 힘 을 풀었다. 마음도 같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잠잠해진 것도 소용없이,링신루가 나른하게 중얼 거리는 혼잣말에 도로 어깨가 긴장하고 말았다.

아,좋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분 좋은 숨을 내쉬고 있던 링신 루는, 문득 그의 눈을 문지르고 있던 유리의


손을 쥐었다. 손등을 덮듯이 감싸쥐는 그 손길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춘다.

‘역시 여기서 나는 것 같아.’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링신루는 눈을 덮고 있던 손을 조금 끌어내려, 유리의 손바닥에 코를 갖다 대었다.


그렇게 잠시 있다 가 ‘역시 맞았어.’라고 중얼거린다.

‘냄새가 나요. 아주 희미하게……. 비누 냄새도 아니고……,그 렇다고 체향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냄새인데, 하고 속삭이며 링신루는 유리 의 손에 코를 가볍게 비볐다.

코와,그 결에 스치는 입술과,나른한 숨결,그런 것들이 손바닥 을 간질인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크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아주 희미하게 움츠러드는 손을 링신루가 모를 리 없었다.

수건 아래로 그가 눈을 뜨는 듯했다. 보일 듯 말 듯 움츠러든 손에 여전히 코를 묻은 그는,문득 웃었다.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걸 유리에게도 알려주듯이 곱고 거침없는 웃음을 띤다.

이거 참,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이,조금은 곤란한 것처럼 그렇 게 웃던 링신루는 다른 손을 들어 눈 위에서


수건을 걷어내었다. 그 아래에 있던 까만 눈이 유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죄를 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시선도 피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 는 유리를,링신루는 아래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가볍게 웃 었다.

정말이지,어쩔 수 없지,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냄새 난다는 거, 안 좋은 의미로 한 말 아니에요.“

‘……, 냄새요?’

‘예. 어디선가 맡아본 것처럼 낯익은 냄샌데……, 그게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좀 신경이 쓰여요. 어디였더라
……

유리는 링신루의 손에, 이번에는 좀 더 바싹 코를 대었다. 이번 에도 무심결에 움찔하는 유리의 손 아래에서


피식 웃는 숨결이 닿는다.

‘간지러워요?’

간지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그가 물었다. 속삭일 때마다 입술이 손바닥에


닿을락 말락 간 질여서, 그때마다 유리는 움츠러드는 손에서 신경을 돌리려 애쓴 다.

할 수 없지,그렇게 웃는 것 같았다.

링신루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리의 뺨을 쓰다듬듯이 가만히 감쌌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링신루를 내려다보는
유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뺨도,목덜미도. 그리곤 정말로 크게 인심을 쓴다는 것처럼 웃었다.

이 남자의 오만한 너그러움은, 요 얼마간 종종 느낄 수 있었다.


유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여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책을 읽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유리의 허벅지에 올린
발을 꼼지락거리 거나 해서 유리가 묵묵히 미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오래지 않아 알아차린 그는 꼭 그렇게
인심 쓴다는 웃음을 웃고는 보다 상냥하고 친밀한 손길을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유리가 느끼는 건 난처하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어 떻게 대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오만한 인심도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 아,그 손길이 기분 좋다는 것.
아무래도 좋은가.
물을 술처럼 홀짝이던 유리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 손길을 밀어낼 이유는 없었다. 깊이 있게 사귀거나 하 는 사이도 아닌데 밀고 당기기를 할 이유도 없었고,
또 애초에 유리는 그럴 성격도 못 되었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一그것이 그릇되거나 불쾌한 상황 이 아니라면一유리의 방식이다.

이제는 꿈까지 낯부끄러운 꿈을 꾸게 된 실정이지만, 이대로도 괜찮겠지,하고 그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다.

기척 없이 안방 문이 열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방에서 한 발짝 나온 링신루가 이쪽 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몇 초쯤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아.”

의미 없는 말을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그를 알은체한 유리에게, 묵묵히 서 있던 그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안 자고 나와 있어요? 아직 수영 가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 인데. ……잠이 안 와요?”

찌푸린 눈을 반쯤만 뜨고 잠긴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아직 잠 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눈꺼풀을 문질러도


잠기운이 가시지 않 는 모양이다.

“금방 잘 겁니다. 들어가세요.”

유리는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조용히 대답하면 서,여태 줄곧 머릿속에 담고 있던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잠이 들러붙어 반쯤 감긴 눈을 낌벅이며 찌푸린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 는 부스스한 얼굴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니,이거야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링신루는 잠에 취해 찌푸린 얼굴 그대로 유리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잠이 안 와서 그래요? 그럼 이리 와요. 같이 자 줄 게.’’


졸음에 잠겨서도 선선히 인심 써 중얼거린 링신루는 유리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곤 하품을 하며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리고 유리는,어차피 잠은 다 깨어 있었지만 정말로 잠이 싹 달 아나버린 유리는,그 자리에
단정하게 앉은 채 눈만 낌벅였다.

어,하고 당혹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는 그의 귀에 얼마 있지 않 아 “뭐해요,안 오고.”라고 잠투정 섞어 외치는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유리는 어,……어,하고 눈을 낌벅이면서도 그 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숱하게 드나들어 익숙한 링신루의 침실에는 커다란 침대 와 협탁,그리고 작은 조명밖에 없었다. 잠잘


때에는 뭐든 거치적

거리는 게 싫다며 필요최소한의 것들만 남기고는 모두 치워버렸 다.

적막할 정도로 널찍한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고 있는 커다란 침 대 위에, 링신루는 이불에 파묻혀 엎드려 있었다

그새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천천히 오르내리는 등만 유일하게 움직인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유리가 그냥 이대로 조용히 나갈까 생각 할 즈음,귀찮은 듯이 한 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링신루가 도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뭐해요,안 눕고 얼른 자요. 안 그래도 잠이 적은 사람이.”

그래도 몇 초쯤 망설이고 있자,다시 한 번 눈꺼풀이 올라간다. 이번에는 그 아래에 있던 졸린 눈동자가


짜증스럽게 번쩍여, 유 리는 얌전히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링신루는 침대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있었지만 침대가 워낙 큰 덕에 유리는 그럭저럭 그에게서 거리를 두고


비스듬하게 누울 수 있었다.

기우뚱한 통나무처럼 누운 유리는,눈동자만 돌려 흘끔 링신루 를 보았다. 거치적거려서 다른 사람이랑은 같이 못


잔다고 얘기 한 적이 있었던 걸 떠올리며, 그가 잠에 취하긴 취했던 모양이라 고 생각했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그가 잠에서 깨기 전에 조용히 나가주는 게 좋겠지,하고 유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 치쯤 열린 방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거실의 빛. 그 한 줄 기 빛을 빼고는 어두컴컴한 방안. 옆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규칙 적이고 편안한 숨소리.

그런 것들 속에서 천천히 유리의 마음도 이완되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몸에서 힘이 풀린 탓인지 조금 나른해졌다.

그때.

‘‘왜 자다 깨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나직한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다가왔다.

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링신루는 한 번 졸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로 잠꼬대인지, 아니면 비몽사몽인지 모르겠다. 정신은 들 었는데 졸려서 반쯤 의식을 놓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그냥 꿈자리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유리는 잠들어 있다시피 한 그를 방해할까, 들릴 듯 말 듯한 목 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꿈결에서


들려오는 둣, 응, 하고 링신루는 눈을 감은 채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시능을 했다.

“ 디 JJ. ”

졸음에 겨운 잠꼬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식었다.

얼마 전 그와 밤새워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一제대로 기억나 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一재생한 꿈이었다는 말은


입에서 나오 지 않았다.
유리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 한참의 사이를 두고 다시 링 신루의 무거운 눈꺼풀이 한 번 낌벅였다. 흠……,
낮은 한숨을 내 쉰 그는 도로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침대 위에 늘어져 있 던 팔을 뻗은 그는 유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유리의 허리 위에 팔을 얹는다.

가까이 끌어당겨 허리 위에 얹어놓은 팔의 무게가 몹시 무거웠 다. 일순 숨이 멈출 정도로.

링신루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유리를 끌어안다시피 팔 아래 에 둔 채 여전히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웅얼거렸다.

“귀신 꿈이라도 꾼 거예요……? 그만 자요……

이제 안 나올 테니까……,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흐려졌다. 유리는 한 탬이나 떨어졌을까 싶은 거리에 있는


링신루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 상태로는,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허리 위에 나른하게 얹힌 팔에 온 감각이 몰리는 것 같았다. 따 뜻한 체온이 이쪽으로 옮겨오는 듯하다.

귀신 꿈이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걸요……,하고 입속으로 중얼 거리며 유리는 그의 얼굴을 눈길로 덧그린다.

긴 속눈썹도 매끈한 콧날도 도톰한 입술도,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눈에


낀 콩깍지 때 문인지도 모르겠지만,그러나 유리는 그가 어릴 적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반듯하고 고운 선을 그리는 예쁜 얼굴인데도 여자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걸
보면,역시 어느 정도는 성격이 얼굴에 드러 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럼 무슨 꿈인데……

그때, 잠들어 있는 줄 알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입술이 갑 자기 움직였다. 불쑥, 짧은 말마디가 튀어나온다.

혼잣말보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 고 보면 잘 때에는 한층 더 청각이 예민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꿈속에 반 이상 발을 걸치고 있는 링신루는 꿈자리가 사나웠을 유리를 위로라도 해주려는 건지 허리에 얹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등을 툭,툭, 느리게 두드렸다.

“좋은 꿈이라 그래요…"? 그래서 잠이 안 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유리에게 링신루는 느리게 웅얼거리 다가 피식 웃는다. 첫사랑이라도 봤나 보지……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의식이 꿈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듯 느릿하게 등을 두 드리던 손길이 뜸해졌다. 고른 숨을 내쉬며 편안한


얼굴로 잠들 어 있는 링신루를 유리는 숨소리까지 죽이고 바라본다.

변덕스럽고 개인적이고 가끔은 비뚤어진 심술보도 드러내는 예 쁜 고양이다. (고양이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표범인 것 같긴했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심성이 곱다고도,올곧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내키는 대로 친절을


베풀고,내키는 대 로 잔인하게 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가끔 이렇게 내비치는 상냥함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등 위에 얹혀 있는 따뜻한 손의 무게도,잠이 안


오면 같이 자주 겠다는 변덕스러운 말도.

그래서 유리는 천천히,깊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으면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때.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링신루의 얼굴에서 불현듯 나른한 온기 가 씻은 둣 걷히는가 싶었다. 반짝, 눈꺼풀을 연
그의 눈에는 순 식간에 잠기운이 사라진다.

‘‘.?’,

막 눈을 감으려고 하던 유리도,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 만다.

잘 자다가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눈을 뜬 링신루는, 느 릿느릿 가끔 한 마디씩 중얼거리면서도 꿈결을


헤매던 게 언제냐 는 듯 새파랗게 정신이 깨어난 얼굴로 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 다.

“정말이에요?”

웃음기라곤 없이 서늘한 얼굴로 한참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 가 갑자기 꺼낸 말을, 유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말 자체 는 알아들었지만 뭘 묻는 건지 몰랐다.

“ 예?”

어리둥절해진 유리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묻자,링 신루는 아예 고개를 들어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 꿈 궜어요?”

재차 캐묻듯이 물어보는 링신루가 하는 말을, 이번에도 유리는금방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데없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얼떨떨하게 링신루를 마주보며 눈을 껍벅이던 유리는, 천천히 기억 속의 대화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몇 초쯤
지난 뒤에야 깨닫는다. 첫사랑의 꿈.

대답은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유리의 시선에서,링신루는 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갑자기 입매가 움칫


움츠러들었다.

잘 자다가 갑자기 첫사랑의 꿈을 꿨냐면서 벌떡 일어난 링신루 를,유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뜬금없이 ‘소금 몇
숟가락 넣을까’라 고 잠꼬대를 하는 사람과 마주친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는 유리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던 링신 루는 잠시 비스듬하게 고개를 틀어 허공을


노려보다가,곧 자신 이 이렇게 캐물을 이유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 침대에 풀썩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잠잘 듯 눈을 감는다.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링신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 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도로 눈을 떴다.

“……. 어떤 꿈이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데이트했던 때? 아니면 그냥 꿈에 나오기만 했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어보는 질문 앞에서,


유리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 꿈이냐는 말 에 저절로 머리를 스친 기억에는
눈앞의 남자가 심란할 정도로 적나라한 모습으로 나왔던 것이다.

겸연쩍은 빛을 띠며 아주 잠깐 시선을 피한 유리를 보고,링신 루는 다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얼핏 그의


이마에 핏줄이 오 르는 듯했다.

“남한테 말하기 뭣한 꿈을 꼈나 봐요.”

유리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아무것도 없이 컴컴한 천장만쳐다보았다. 그러자 링신루의 말투가 더 언#아졌다.

“그런데 왜 조금 전부터 사람 얼굴을 제대로 안 쳐다봐요.”

“혹시 아까부터 나 무시하는 거예요?”

“……. 꿈이 생각나서요.”

결국 침묵으로 밀고 나가는 데에 한계를 느낀 유리가 속으로 혀를 차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링신루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첫사랑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낸 꿈이라면서 왜 내 얼굴을 보 면 생각이..,..


의아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한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 는, 두어 번 입을 열었다 닫길 거듭하다가 미심쩍게


말문을 뗐다.

“ 닮아서요?”

닮아서, 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달리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유리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조차 않았다.

오로지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시선만 선명하게 느껴졌을 뿐 이다.


어느 순간, 링신루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박차고 나간 그는 불을 켜더니 벌컥 문을 열고 바깥으 로 나갔다. 저벅저벅 커다란 발소리가 주방 쪽으로


멀어졌다.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물 따르는 소리,벌컥벌컥 물 마시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져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빈
컵을 식탁 위 에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까지.

다시 발소리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갈 때 문을 벌컥 열어젖혔던 반동으로 다시 반쯤 닫혀 있던 문을


광, 하고 두드려 열며 링신루가 방으로 들어온다.

찬 물이라도 들이켜고 온 듯 주먹으로 아무렇게나 입을 문지르 며 들어온 링신루는 침대 앞에 버티고서 싸늘한


눈으로 유리를내려다보았다.

난데없는 일련의 흐름에 얼떨떨하게 침대에 앉아 그를 올려 다보고 있던 유리를,그는 “게이블 씨.”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예, 하고 유리가 얌전히 대답하자 그는 사나운 눈으로 잠시 동 안 그를 쳐다보다가 나직나직하게 말을 꺼내었다.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말하는 건데요. 사 람 얼굴 보면서 다른 사람 생각하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요.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또박또박,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강세를 주며 링신루가 느리게 말했다.

습관적으로 바른 자세를 하고 침대에 앉아 있던 유리는 당혹스 럽게 그를 쳐다보았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안합니다.”

링신루가 따지고 드는 걸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유리는 얌전히


사과했다. 하긴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듣 는다면 기분이 유쾌하진 않다. 특히나
링신루는 자존심이 세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니,그런 기 분이 들어 마음이 상했나
보았다.

유리가 조금 우울하게, 그럼에도 변함없이 무심한 얼굴로, 시선 을 떨어뜨리고 있자, 그런 유리를 사납게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 루는 문득 언짢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됐어요. 그만 자죠.”

잠이 다 깨긴 했지만, 하고 삭막하게 중얼거리며 도로 불을 끈 링신루는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언짢은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 며 누운 그를 쳐다보던 유리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가며 “예, 그럼 편하게 주무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러나 ‘편하게 주무’까지 말한 순간 링신루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더니 유리 의 팔을
확 끌어당겨 눕혔다.

“그냥 좀 자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니까.”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한 링신루는 유리 가 “……예.”라고 대답하는 걸 듣고서야 누웠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평온하고 편안한 고요와는 거리가 먼 불온한 정적 속에서, 통나 무처럼 꼼짝도 않고 누워 있던 유리는 길게 소리


없는 숨을 내쉬 었다.

아무래도 잠은 안 올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이대로 지새워야 할 모양이다. 차라리 나가서 책이라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여 기서 뒤척이기라도 했다간 다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올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언제쯤 잠이 들까, 하지만 잠귀가 밝은데 눈치 채이 지 않게 일어나는 건 좀 힘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장의 무 늬를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많이 닮았어요?”

불쑥,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별로 내색은 하고 싶 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부루퉁한 빛이 언뜻


배어나온다.

“……,뭐 그냥……,그렇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썩 기꺼워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적당히 얼 버무렸다. 사실은 대답을 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도 어찐지 속이는 것 같아서 一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괴로운 바닷가의 기억에
대해 해명해 주지 않고 입을 다물기를 선택한 죄책감인지도 몰랐다一,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거짓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물자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옆에서 흘끔, 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옆 얼굴에 시선이 닿는다.

“나는, 내가 누구랑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지만,하고 말하는 링신루는 아무래도언짢은 기분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쾌감을 드러내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누가 나랑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싫어하죠.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라면 그럴 것 같았다•

“얼굴 느낌 좀 비슷하다고, 닮은 인종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고.’’ 다시 고개를 끄덕한다.

링신루는 잠시 입을 다물고 유리를 바라보다가 언짢은 한숨을 쉬었다.

“나랑 다를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은. 성격이든,행동이든.”

이 말에는 얼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얼결에 머뭇거리는 유리 를 보고 링신루는 눈썹을 휘었다•

“비슷해요?”

“..그냥.”

이번에도 애매하게 대답하고 만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나 을까 싶은 생각은,말을 한 다음에야 들었다.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시선이 지그시 유리를 바라본 다. 점점 더 온도가 떨어져가는 듯한 그 시선을
마주보며 유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느 순社 그의 입매가 꿈틀했다.

“그러면, 이런 것도 비슷해요?”

그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링신루는 유리의 턱을 움켜쥐더니 잡아당겼다.

입술을 뜯어먹을 듯이 덮쳐오는 더운 입김•

곧 입 안까지 헤집으며 말캉한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어, 짤막하게 중얼거린 소리는 링신루의 입속으로 먹혀버렸다. 움찔, 유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허공에 떠서
갈 곳을 잃은 손도,뻣뻣하게 굳어버린 몸도 그대로 멈춘다.

잔 숨결 하나하나까지 모두 삼켜버릴 것처럼 유리의 입술을 먹 어치우던 링신루는’ 아주 잠깐 입을 떼는가


싶었다, 그러나 여전 히 입술을 바싹 붙인 채,

간간이 유리의 입술이며 혀 따위를 핥으며, 나직이 내뱉는다.

“이런 것도 비슷해요? 그래,비슷할 수도 있겠지?! 하, 첫사랑. 당신 첫사랑이라면 여자겠구나.”

문득 입술 위에서 잠깐 그의 입이 멈추는가 싶었다.

“——그러면 이런 건 해준 적이 없겠네.”

나직하고 서늘한 속삭임 이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허리를 세게 움켜쥐고 있던 손이 유리의 바지


속으로 파고들었 다. 손바닥 전체로 쓸듯이 허리 뒤로 타고 내려간 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리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흠칫한 유리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그 안쪽,닫혀 있는 살 안으로 손 가락을 밀어
넣었다.

“--!!’’

유리의 몸이 펄떡 뛸 듯이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당기며 그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른 손으로


유리의 허리를 세게 부둥켜안은 팔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깐, ——

낯익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경한 감각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링신루를 밀어내었지만,그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오히려 더욱 세게 힘을 주며 바싹 끌어당겼다.

“설마 이런 것도 해줬다고는 하지 않겠죠. ……. ……있어요?!”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아래를 벌리며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 때 문에 유리가 차마 대답을 못하자, 링신루는 울컥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더욱 깊숙이 찔러 넣는 탓에, 유리는 다시 몸을 퍼득 움 츠리고 만다.

“설마요! 안 그랬습니다! 그 어릴 때 무슨——

허덕임이 섞여 뒤집힌 목소리로 대답한 유리는 아, 하고 도중에 말을 및었다. 몸속을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을
찔러올린 순간 저 릿한 감각이 아래에 번진 탓이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었지만,그렇다고 익숙할 수는 없었다. 무덥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어깨를 움칫

거리는 유리를,링신루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어릴 때라면, 언제 만났었는데요.”

“열——열두세, 살,……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보다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 해 제대로 계산해서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그 무렵의 그를 떠올리며 적당히 대답한 유리는 자신을 부둥켜 안고 있는 링신루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 낯선


감각에 몸이 무너 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뭐든 붙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몸속을 거칠게 헤집던 감각이 딱 멈추었다.

“……. 열두세 살? 마지막으로 만난 건요.”

“그, 그때一딱 한 번——

몸속을 더듬는 움직임이 멈추어도, 이미 불씨를 붙여버린 몸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저린 감각이 들러붙은 허리
아래로 사타 구니가 부풀기 시작한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몸속에 있던 손가락이 확 빠져나갔다. 몸을 확 긁 고 지나가는 이물감에 저도 모르게 짤막한 숨을


내쉬는 유리를 얼굴이 제대로 마주보일 만한 거리까지 밀어젖히며, 링신루가 기 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노려봤다고 하는 편이 옳을 만큼 힘이 들어간 눈으로 뚫어져라 유리를 쳐다보던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거칠게 내뱉었다.

“그건 첫사랑이라기보단 그냥 소꿉친구잖아요.”

“열 살짜리들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에요. 그건 첫사랑 아니에 요. 당신 첫사랑은 그거 아니라고요.”

험하게 눈을 부라리며 딱 잘라 말하는 링신루에게 이 순간 ‘하 지만 당시 나는 스물다섯이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의 눈 치는 있는 유리였다.

“게다가 어릴 때 얼굴이랑 커서 얼굴이 얼마나 다른데요. 닮긴 뭐가 닮았어요, 지금은 전혀 다른 얼굴일 텐데.”

링신루는 사납게 말을 내뱉고는 혀를 찼다. 갑자기 맥이 빠지는지 앓는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니,그 얼굴 그대로일걸요,라고 대꾸하지 않을 만큼의 눈치 도 있는 유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링신루는 등을 돌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획 드러누웠 다. 그리고 유리는 반쯤 일어나 앉은 채 그런


뒷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이 벌어진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렇게 뚝 끊긴 것까지. 지금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사고가 돌아오면서, 지금 자신이 느껴야 할 올 바른 감정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누군가와 닮았다고 한 것에 대해 그가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一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는 모르겠지만一도를


넘어선 분풀이를 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화를 내야 한——.

“화났어요?”

감정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사고가 막 정리되었을 때,갑자기 링신루가 이불을 목 아래로 걷으며
돌아보았다.

지금 막 화가 나려는 참이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하고 잠시 고 민하던 유리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링신루가 도로


일어나 유리를 마주보고 앉았다.

“미안해요.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조금 전과는 대조적으로,어둡게 흐려진 얼굴이 나직하게 말했 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시선을 떨어 뜨린 링신루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 유리를 흘끔 눈동자만 들어 쳐다 본 그는, 조금 더 기운이 빠진 듯 도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약간 찌푸린 얼굴이,자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잠깐 기분이 상해서 그랬어요. 내가, 잠에서 막 깨면 감정 기복이 좀 심해지거든요. 그래서…….
꿈자리도 안 좋았거든요.

보기 싫은 놈들이 다 튀어나오는 꿈을 꿔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서,좀


감정적으로 불안정 했나 봐요. ……미안해요. 화내지 마요. 잘못했어요.”

진지한 얼굴로 유리 앞에 앉아서 단숨에 긴 말을 늘어놓는 통 에, 유리는 화가 났다는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게다가 화가 났다 고 하기도 전에一게다가 정작 화가 난 감정을 떠올리기도 전에一 먼저 고개를 숙이며 풀죽은
얼굴로 사과를 하는 링신루를 보자, 슬금슬금 고개를 들까말까 하던 화가 다시 스르륵 가라앉았다.

“함부로 굴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고개까지 꾸벅,깊이 숙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링 신루를 내려다보던 유리는, 잠시 눈을 깜박이고
있다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 예.”

유리는 짤막하게 한 마디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순순히 사과를 하는 사람에게까지 오래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는 것


같고,게다가 그 렇게까지 화라는 감정이 솟지도 않았다.
대답을 듣고서야 숙인 고개를 들어 유리를 살핀 링신루는,조심 스럽던 얼굴에 천천히 웃음을 떠올렸다. 미안해요,
다시 한 번 말 하는 그에게 유리는 이제 됐다고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미안한 듯이 유리를 쳐다보고 있던 링신루는 이윽고 가 뿐한 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옆을


돌아보며 유리에게 도 누우라는 듯 가볍게 자리를 두드린다.

유리는 이번에야말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지금은 돌아가면 마치 화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사실은
화가 난 것처 럼 보일 것 같아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링신루는 다시 자리 를 두드렸고, 유리는 주섬주섬
자리에 눕고 말았다.

나란히 얌전하게 누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 었다.

유리는 한 뼘쯤 되는 거리를 두고 누운 링신루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오십,백,이백까지 세었을 즈음에도 옆자리의 기척이 흐려지지 않는 걸 보면 링신루 도 쉽게 잠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매일 일어나서 수영하러 가는 시각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는 낮은 한숨을 쉬며
몸을 움츠렸다.
“추워요?”

링신루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불 을 당겨 유리 쪽으로 넉넉하게 덮어준다.


“아니,괜찮습니다. 춥지도 않고 이불도 넉넉해요.”

“흑시 추워서 못 자는 건가 해서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서 덮어주며 말하는 링신루였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난방이 잘 되어 한겨울에도 반팔


셔츠를 입고 지낼 수 있는 맨션 안에서 새삼스럽게 추울 일은 없었다.

“아니 그것 때문에 못 자는 건 아닙니다. 그냥,잠이 다 깨서 그래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아까부터 잠기운은 다 달아났다. 머릿속도 환하게 깨어 졸리지 않았다.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유리 쪽을 향해 몸 을 기울이는 듯했다. 한 탬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반 탬보다 가 깝게 줄어든다.

“안 잘 거예요?”

“예,아마도요.”

“그러면,”

문득 그의 목소리가 바싹 낮아졌다. 고개를 기울여 유리의 귓가 에 입술을 가까이 댄 링신루가 나직이 귀


엣말처럼 속삭였다.

“아까 하던 것, 마저 해줘요?”

아까 하던 것이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유리 의 어깨를 쓸어내린 손이 허리 아래, 엉덩이


근처에서 멈춰 머물 고 있었다.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몸속을 찔러 올려 심지에 붙여놓았던 불은, 지금은 거의 가라앉 았다. 어중간하게 자극해서 묵직하게 괴로웠던
아랫도리도 그럭 저럭 괜찮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여전히 저릿한 감각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그러나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그 감각도 마저 지워질 터였다.

게다가,그런 걸 떠나서라도, 겸연쩍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마저 해줄게요. 아까,도중에 그만둬서 힘들었을 텐데. 미안해 요.”

가만히 뻗어온 손이 유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좀 더 바싹 몸 이 당겨져,몸이 맞닿았다. 가슴부터 닿은 몸이


천천히 더 움직 여,배까지 맞닿는다. 그 아래로 어렴풋한 부피감이 스쳤다.

평소보다 약간 더 부푼 듯하던 그 부피는, 곧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잘못 느꼈나 싶어 유리가 눈을 낌벅이는


동안 또 조금 더.

“……게다가 나도 그럴 기분이 좀 들고.”

링신루가 유리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며 허리 아래를 가까이 대었다. 맞닿은 것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감각
속에서, 링신루는 희미하게 거칠어진 숨결을 가만히 유리의 귀에 불어넣었다.

“하기 싫어요?”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 듯 벌어진 입술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기 싫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어찌 되었든 몸속은 점점 불씨가 가라앉아 간다곤 하지만 여태 욕구를 호소하고
있었고, 그와 몸 을 섞었던 기억에는一매우 힘에 부치긴 했지만一강렬한 쾌락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굳이 하고 싶으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몸 이 얼핏 달아올랐다고는 하나 어렵잖게 참을 수


있는 정도였고, 무엇보다도 ‘봉사’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역시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난감한 듯 생각에 잠긴 유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링신루는 어쩐지 초조해진 듯했다. 유리의 귀를
입술로 잘근거리 며 조금 더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기 싫어요, 정말?”

허리를 쓰다듬는 손이 느리게 몸을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는 유리를 다시 가까이 당겨 아랫도리를


맞붙인 그는, 이미 확연하게 부피감을 가지기 시작한 성기를 유리의 사타구니 에 문지르고 있었다. 허리를
추어올리는 몸짓이 조금씩 더 거침 없어지는 이유는, 그러는 동안 유리 역시 점점 발기하기 시작했 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곤란한데,이 이상 가면 정말로 몸이 넘어가버릴 것 같아,그런 생각을 한 유리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하고 싶어요.”

링신루가 속삭였다.

이미 옷 두 겹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성기는 서로에게 욕망을 비비며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링신루도,유리도.

점차 거칠어지는 아래의 감각에 점점 더 의식이 몰리고 있던 유리는 난처한 얼굴로 링신루를 보았다. 하고 싶어요,
하고 그가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유리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곧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목이 뜨끈뜨끈해졌다.

곧 머리 위에서 기쁜 듯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미신이라고 그렇게 우습게 볼 것만은 못 되는 모양이다.

유리는 오늘자 달력 귀퉁이에 빨갛게 적혀 있던 흉예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매일 한 장씩 찢어내는 달력에는 날짜를 표시하는 한자 왼쪽 위에 그날의 역운을 나타내는 조그만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그 리 잦지는 않아도 때로 흉이 적혀 있을 때가 있었다.

‘이런 글자를 보면 하루 종일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이건 왜 적어놓는 겁니까?’

중국에 온 지 달포나 지나서야 달력에 그날의 길흉화복을 알려 주는 글자가 적혀 있다는 걸 깨달은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링신루는 대수롭잖게 ‘옛날 어른들이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그냥
조심하라는 거죠 뭐. 신경 안 써도 돼요.’라고 대꾸했었다. 이 세상 사람이 몇인데,천편일률적으로 운이 좋고
나쁘고 하겠어요,하고 우습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그렇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인 유리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 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에 달력을 뜯 다가 ‘흉’이 적힌 걸 보고 ‘몸조심해야 할 날이네요.’라고 농담처 럼 말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아예 안 맞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당장 그 달력장을 뜯어낸 그 순간부터 그랬다.

『유리,잘 지내고 있나? 이쪽에는 언제쯤 돌아올 거야?』라고, 제임스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글쎄요. 당분간은 예정이 없는데요. 그쪽은 어때요. 다들 잘 있 어요?’

『아아, 나만 빼곤 다 잘 있지. 때 아닌 도서전을 주최하겠다고 기획을 짜보자는 헛소리를 하는一아니 도대체


군수회사랑 도서전 이 무슨 상관이야?! 군수품 카탈로그라도 전시해보자는 건가?!一 카일도 잘 있고, 국제수배범
주제에 가끔 어딜 가는지 멋대로 사 라져서 범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눈치인 둘째도 잘 있고, 사람 잘못 만나
인생 망쳤으나마 그 가운데서 소박한 행복을 찾겠다고 카일의 서재에서 살다시피 하는 태이 씨도 잘 있고.』
또 누가 궁금해,아네트? 데릭? 하고 부루퉁하게 말하는 제임스 의 말투를 보니,아무래도 최근에 또 카일이 골
아픈 짓을 벌인 모양이었다.

‘요즘 힘든가보군요.’

살기가 힘들어지면 사람이 팍팍해지게 마련이지요, 라고 중얼거 린 유리는 저도 모르게 흘끔 눈을 들어, 식탁에
앉아 커피를 내 리고 있던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하필 그 순간 유리를 쳐다본 링 신루와 눈이 마주쳐,속으로
혀를 차고 만다.

더 이상 링신루는 예전 같지는 않았다. 리그로우나 정태의의 이 름이 귀에 들어오더라도一그 속이야 어떻든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그놈은 여전히 그러고 사나요.’라고 코웃음 치거나 ‘하하, 태이 형도 힘들겠어요.
보고 싶은데.’하고 환하게 웃곤 했다.

더 이상은 예전의 힘들었던 무렵처럼,그와 관련된 사소한 실마 리 하나에도 금세 표정을 없애고 창백한 얼굴에
살기를 피워 올 리며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도리어 ‘태이 형한테 안부 차 편지를
써야겠어요. 그놈이 보고 열받게 하 트마크를 군데군데 열 개쯤 넣어야지.’라고 본인이 농담을 꺼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리는 링신루의 앞에서 그들의 화제를 일부 러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 지만, 그러나 가능하면 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제에도 금세 태연한 듯이 표정을 감추는 법을 터득했 다고는 하나, 링신루는 여전히 그들괴一주로
리그로우와一관련된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이나마 눈썹을 찡그렸다. 꿈틀,주 먹을 쥘 듯 절로 굽어지는
손가락은 손바닥에 닿기도 전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연해지지만, 그런 것들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나아질 테지만,아마 평생이 가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진정한 의미로 자연스럽게 나누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링신루의 왼눈이 시력을 되찾는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一아니 시력을 되찾더라도一.

그러나 무심한 표정으로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한 유리였지만, 저 눈치 빠른 남자에게 뭔가를 온전히 감추기란
어려웠다. 이 순 간도 그렇다.

‘누구 전화예요? 여기 커피 다 내렸어요.’라고 입모양으로만 말 하던 링신루는,이럴 때만큼은 안타깝게도


눈치도 감도 남들보다 몇 배로 좋은 그는, 흘끔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본 유리의 눈동 자에서 뭔가를 읽어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하고 조금 진지하게 의아한 빛을 띠는 링신루를 보고 유리는 내심 혀를 찼다. 내가 더 신경 쓰는


기색을 보여서 어쩌려고.

『그래,넌 언제 올 거야. 그나마 너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힘들어서 당장 내일이라도 과로사로 죽을 것


같다고.』

‘글쎄요. 일단 저는 한동안은 그럴 예정이 없지만 당신이 과로 사를 한다면 장례식에는 꼭 가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제임스 당신에게 유효할 만한 충고를 드리자면——

그렇게 말하다 말고 유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의아하게 유리 를 쳐다보던 링신루의 표정이 아주 잠깐 사라진


탓이다. 제임스 라는 이름에서, 그는 유리가 어째서 난처하게 자신을 보았는지 알아차렸을 터였다.

유리는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정태의 씨에게라도 도움을 청해보도록 하세요. 한동안 부 자유한 상황이라 시간은 많을 테니.’

『흠? 흠. 그래,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그리 오래 같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머리회전이 빠르고 응용력 이 좋은 청년이었다. 일을 맡겨놓으면 전문적인


일이 아닌 한은 최소한 기대한 만큼은 해낼 거다.

유리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제임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그 래, 그렇군. 어째서 여태 그를 써먹을 생각을 안
했었지?!』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곧 『어쨌든 돌아올 때엔 미리 연락해. 너를 필요로 하는 자리는 한가득 넘쳐나니까.』라는


인사를 마지막으 로,전화가 끊겼다. 아마 당장 정태의에게 전화를 돌리려는 모양 이었다.

유리가 전화를 내려놓자 잠시 사이를 두고 링신루가 여상한 말 투로 재촉했다.

‘커피 식어요. 게이블 씨, 식은 커피 안 좋아하잖아요.’

‘아,예.’

유리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식탁에는 유리가 전화를 하는 동안 이미 간단한 식사거리들이
올라와 있었 다.

‘짤까 봐 소금을 덜 넣었더니 너무 싱겁네요. 다음엔 좀 더 넣 어야겠어.’

에그 스크램블을 집어먹으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링신루의 앞 자리에 앉으며 유리는 그런가요,하고 중얼거렸다.
링신루는 유리 의 앞에 커피 잔 하나를 내려놓고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역시 나는 커피보다는 우유가 더 좋긴 한데, 그래도 마시다 보 니 커피도 그리 나쁘진 않네요.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커 피를 마시면 속 쓰리지 않아요?’

‘글쎄요, 습관이 돼서요.’

아하,그렇구나, 하고 링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물끄 러미 유리를 바라본 그는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태이 형이나 그놈 얘기 나올 때마다 나 흘끔 쳐다보는 것 도 습관 됐나 보네요.’

멈칫,유리는 잠시 포크를 멈추었다. 그러나 곧 다시 아무렇지 않게 샐러드를 찍으며 ‘제가 그랬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그랬어 요,하고 링신루는 여상하게 말하며 커피를 마신다.

‘형은 잘 산대요?’

‘그렇다는군요.’

‘그놈은 그 성질머리로 못 산다면 그게 이상할 테고.’

유리는 잠깐 눈동자만 들어 링신루를 보곤 다시 식탁으로 시선 을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예전에 가볍게 툭탁거린 친구 얘기 라도 하는 것 같다. 유리는 그렇지요, 라고만
맞장구쳤다.

‘그런데요.’

와작,파프리카를 통째로 집어 들어 사과처럼 베어 물면서 링신 루가 말을 꺼내었다.

‘별 생각 안 하려고 무던히 애 쓰는데, 게이블 씨가 내 눈치를 보면 더 생각이 잘 떠올라서 오히려 마음 상하는


거 알아요?’

유리는 다시 포크를 멈추었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멈춰 있다 가, 그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와작, 와작, 몇 입 만에 파프리카를 다 먹어치운 링신루는 입에 있는 것을 삼킬 때까지 얼마간 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가 쯧, 하고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 로 훔쳐 날름 핥으면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당장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태이 형 소식이라도 가끔 들으면 좋은 거고, 그놈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 든 한 번쯤은 짓밟을 기회가 올 테니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보 기로 했고. 물론 그놈 이름
듣는 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 만,더 이상 내 속 뒤집으면서 내 몸 망치지는 않을 거라고요. 그 러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렇게 말하고 잠깐 고개를 기웃한 링신루는,입매를 찡그리며 유리를 흘끔 노려보았다.

‘……아니,애초에 원한이 있는 건 난데,왜 나보다 게이블 씨가 더 신경 쓰는 거예요?’

마지막 말은 과장스런 불평으로 농담을 건넨다. 그제야 유리는 얼핏 웃으며 ‘그러게요.’하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예전과 같은 불안정한 모습은 거의 지워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이름을 듣더라도, 혹은 이제 어쩌면 리그로우와 정면으 로 맞닥뜨리더라도,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의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링신루는 담담한 얼굴로 소리없는 숨을 내쉬는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가볍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말한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걸로 그 화제를 접었다. 오늘 재활센터 예약이 몇 시였죠,지 겨워서 가기 싫은데, 그런 말들을 하며 접시를
비웠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은 없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태도도,때로 심술궂은 장난을 떠올리는 눈매도,평소와 같았다.


어쩌면 아직껏 그들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건 자존심이 상하기 때 문인지 유리 앞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 알 수 없 었지만,그는 더 이상은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침의 기억을 떠올린 유리는 느린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 그는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자신에게 닥치는 일에 냉정 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차라리 그렇게 불안정한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여기 저기에 찢기고 다쳤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시기가 이르게 지나갔 다는 것이.

이제부터 그가 배우고 손대야 할 거칠고 복잡한 일들 속에서, 그 일들을 능란하게 다루면서 자신의 걸음을 걸어
나가는 데에 흔들림이 없도록.

……그 일들이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그의 삶에 유용한 거름 이 되어주었다고 할 수 있기를.

유리는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슬슬 링신루가 돌아올 시각이 되었다.

묵직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 탓인지,오늘은 정말로 달력에 표시되었던 것처럼 아무래도 그리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지는 않 았다. 차 막힐 시간대가 아닌데 차가 막혀 재활센터 예약시간에 늦었고, 링신루가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음료 를 사마시며 거리에 서 있던 유리는 괜히 지나가던 공안에게 신 분증을
보여줘야 하기도 했다.

오늘의 나머지 일정은,저녁에 본가에 들렀다 오는 것뿐이다. 이제 곧 링신루가 재활센터에서 나오면 곧바로
본가로 가면 된 다.

부디 이 이후로는 나쁜 일이 없기를.

미신을 떠올린 유리는 옛날 외할머니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조 그닿게 성호를 그었다.

그때, 조수석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링신루가 차에 올라타며 “어 우, 날이 갑자기 추워졌는데요.”라고


중얼거렸다. 유리는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켜며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어땠습니까?”

“으음, 쓸데없는 돈 낭비,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아요,아무래도.”

링신루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눈만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라니 까요,라며 눈꺼풀 위를 꾹꾹 누른다.

유리는 말없이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력 여하에 따라,보조 기구를 이용하면 어렴풋이 물건의 형태 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은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링신루는 코웃음 치며 ‘노력해서 성공해봐야 거의 장님 수 준이란 얘기네.’라고
했지만, 재활센터에는 순순히 나가주고 있었 다.

가끔 기분이 안 좋을 때에는 가기 싫다고 낯을 찌푸리기도 하 지만,유리가 몇 번이고 설득하면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면서도 나갈 채비를 시작해, 여태 재활센터에 안 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딱히 차도는 없었다.
“오늘 프로그램은 많이 힘들었습니까? 평소보다 더 지친 것 같 은데요.”

유리가 리어뷰미러로 링신루를 보며 말하자,차창에 머리를 기 대어 바깥을 보고 있던 그가 유리에게 시선을


주더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고 혀를 찬다.

“프로그램은 평소랑 별로 다를 게 없었는데,큰형님과 둘째형님 이 연달아 전화해서 사람을 귀찮게 해서 그래요.”


‘‘.<?,,
“이제 더 꾸물거리지 말고 본격적으로 일을 맡아 배워봐야 할 텐데 눈이 이 꼴잖아요. 나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머 니가 엄청나게 반대를 하는 모양이에요. 눈이 그런데 어떻게 힘 든 일을 하겠냐고.”

원래라면 이미 얼마 전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야 하는데 어 머니가 한사코 반대를 하니 어머니한테는 무른


아버지가 딱 자르 지를 못하는 거죠,하고 링신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링가에서는——링휘렁은 링가의 주류 관련 일체를 링신루 에게 넘겨주려고 낙점해놓은 상황이었다.

그 결정을 마땅찮아 하는 사람은 숱하게 많았다.

링신루와 나이차가 픽 나는 형님들을 비롯해 이권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링휘렁의 결정 에 찬동하는 사람들보다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링휘령에게 대놓고 반대를 말하지 못했 고,링신루는 얼마 있지 않아 관련 일을 배우기


시작할 예정이었 다.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일임에도 하루 이틀씩 늦어지는 이유는, 링신루의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하는 탓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몸이 온전하지 않고 허약한 아이가 어떻게 그 힘든 일을 하겠냐는 것이 요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일과 는 멀리 떨어져 편안하고 한가로운 삶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당사자인 링신루는 그 결정에 대해 별 이 견이 없었고 결국은 늦든 빠르든 그가 맡게 될


일이었지만,그것 이 조금씩 연기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도 아마 다다음주 정도부터는 조금씩 일을 거들며 다닐 것 같아요. 나로서도,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끄는 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링신루는 본인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신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더 이상 그의


어머니도 반대만 하 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눈이 나은 다음에나 일을 하라니,그러면 난 평생 백수 로 지내야 할걸요.”

어머니가 바라는 게 아무래도 그것 같지만,하고 링신루는 웃었 다.


유리는 흘끔 그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할 수 있는 노력은 거의 다 해봤다. 여태 차도가 없었던 눈이 앞으로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유리는 물론 링 신루 본인도.

그렇다면 ‘곧 나아지겠지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처럼 링신 루가 여태 수백 번은 들었을 말은 해봐야


허공에 울리기만 할 뿐 이었다.

“일을 배우게 된다면, 어느 분과 함께 일하게 됩니까?”

“아마도 작은 숙부님일 것 같아요. 주류에 손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나를 챙길 만한 여유가 되는 사람은


그분뿐이니까.”

이미 주류를 다루고 있는 사람의 아래에서,그와 함께 다니며 어깨 너머로 일을 배우는 게 시작일 터였다. 그렇게
1 년, 2 년, 5 년, 10 년, 오랜 시간에 걸쳐 일을 물려받는 것이다.

“링가의 사업은, 대부분을 친족분이 맡아보시나 보군요.”

유리가 묻자 링신루는 웃었다. 알면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투다.

“그야 멀쩡한 사업이면 남에게 맡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 돈줄이 되는 일 중에 좀 많이 위험한 것들은 아무래도


직계를 중심 으로 맡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알다시피 우리 집 사람들이 원체 의심이 많잖아요. 천년만년 알고
지내도 함부로 안 믿고.”

큰형님도 호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별다를 바 없으니까 너무 믿지 마요, 하고 장난스레 덧붙인다.

유리는 말없이 앞만 보며 운전했다.

처음부터 링신루는 그들 혈연 중에서도 가장 심장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리라 고 예비된 사람이다.

그날이 어느새 이렇게 바싹 다가와 있었다.

“아……,귀찮은데.”

링신루는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말없이 운전만 계속하던 유리는 충분히 공기가 데워진 차의
히터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피하거나 다른 일로 택할 수는 없습니까? 혹은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거라면 상황이


적절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이것은 그가 입을 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들 중 누 군가와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의 영역에 포함 되어 있지 않았고,그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들 혈연 가운데 누가 어떠한 역할을
맡든 그 분담에 대해 뭐라고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술만 넘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겉으로 드러내놓고 팔지는 못하는 것들,……그런 것들 대다수는 술이랑
같이 흘러 다녀요.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위험이다.

그러나 물건 자체의 위험과 함께, 유리는 링신루가 그런 물건들을 다루지 않길 바랐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유리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링신루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을 테지만 만일 그가 원치 않는다면 부디 술에——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거래될 약이 나 그 외의 어떠한 일그러진 물건들에 손을 대지 않기를.

링가 내부의 일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할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 유리로서는 입을 댈 수 없으나 가능하면


절대로 권하고 싶 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을,링신루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안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 말하면 정말로 주제넘은 참견이 된다.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보고 있었다. 어찐지 이상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깜박이며 한동안 말없이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어느 순간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 다.

“아무래도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하기 싫다’가 아니라 ‘귀찮다’였어요,내가 말한 건. ……이제는


나도 슬슬 게이블 씨의 심성을 좀 알 것 같아서, 당신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렴풋 이 알 것 같은데……,
뭐 이제 와서 내 성격을 모르지도 않을 테 니 그냥 탁 까놓고 말하죠. 나는 그 일들이 해악을 끼치는 일이 라서
하기 싫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귀찮을 뿐이지. 그리고 ‘귀 찮다’와 ‘하기 싫다’는 동의어가 아니지요.”

이상하네,나에 대해서도 알만큼 알면서 왜 그런 오해를 했지? 하고 중얼거리며 링신루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알잖아요. 내가 일단 일을 맡으면 남보다 못한다는 소리는 듣 기 싫어하는 거. 그러려면 아무래도 신경을 좀


쓰긴 해야 할 건 데,그게 귀찮아요. 일이 내용 때문에 꺼려지는 게 아니라.”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하고 뒤늦게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이상은 입을 댈 생각은
없었다. 애초부터,

그리 도덕적이지 않은 자신이 그들에게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놓 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가 그 일을 꺼려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거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나 이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잖아요?”

침묵하는 유리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링신루가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실망이라도
하냐는 둣.
유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링신루 씨가 다치기 쉬운 일을 하게 되는 게 싫습니다.”

그래. 그게 싫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부도덕한 일에 손을 담그 는 것보다는 그로 인해 위험해지는 게 싫었다.

무뚝뚝하게 말하고 입을 다무는 유리를, 조수석에 앉은 링신루 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신도 생각보다는 이기적이너 1, 그렇게 낯부끄러운 말도 막 하 는 거야?,어쩌면 빙글거리는 얼굴에 그런 빛이


떠올라 있을지도 몰라서, 유리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 유리를 쳐다보던 링 신루가 빙긋 웃은 것 같아도.

“차 좀 세워 봐요.”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말했다. 약간 더 나른한 빛을 띠어서일 까, 조금 전보다 미묘하게 부드러워진 것 같은


목소리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링신루는 웃고 있었다. 드물게 픽 기분이 좋은 때 그러는 것처 럼 흐릿하고 연한 웃음이다.

“갑자기 마음이 풀어져서 그런가,나른해졌어. 동생의 눈 걱정 은 안 하고 일에 써먹을 수 있을지만 관심을 가진


무정한 가족들 따위는 천천히 보러 가도 돼요. 그러잖아도 계속 눈 운동 하다 와서 눈이 뻑뻑하고 피곤한데,
잠깐 쉬었다 가자고요.”

저 옆쪽으로 대요,이 길은 잠깐 세워놔도 되니까,라며 링신루 가 손짓하는 쪽으로 간 유리는 갓길, 커다란
버드나무가 길게 늘 어진 아래에 차를 세웠다. 본가에서는 다들 링신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래도
괜찮을까 잠깐 염려했지만,아직 저 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마음이 그리 조급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일진이 그다지 안 좋았어. 하루 종일 기분이 영 별로였거든요.”

링신루는 차 시트를 약간 뒤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유리는 아침부터의 기억을 되새기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 덕인다. 오늘은 링신루에게도,그리고 유리에게도


그렇게 좋은 날 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유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링신 루는 이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침’
이라는 말에서 그 자신도 아침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다.

링신루는 멈칫하더니 유리를 흘끔 쳐다보았다.

“태이 형 때문은 아니에요.”

“……. 예.”

유리는 잠깐 침묵했지만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안 믿는 눈치였는데요?”
“……. 믿습니다.”

“아냐, 안 믿는 눈친데.”

링신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리를 노려보았다.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믿습니다.”라고 한 번 더 말했다.
링신루는 그런 유리를 노려보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근거가 없어 씁쓸하게 입매만 찡 그리고 만다.

그는 흠,하고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태이 형 때문은 아니에요.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리그로우 때문이기는 해요.”

나도 아직 심성이 덜 다스려졌다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링

신루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쉰다.

“그 녀석이 편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사실은 속이 뒤틀려요. 어디서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평연하게 내뱉는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리그로우가 죽으면 기뻐할 사람들이 세상에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그러나 링신루의 말에 동의하기에는


리그로우에게 큰 악감정이 없는 유리는 잠자코 있었다.

링신루는 리그로우를 떠올리고 다시 불쾌해졌는지 잠시 입매를 찌푸리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도


그에게 어설픈 위 로나 동의는 하지 않고 조용히 차 시동을 꼈다. 링신루가 차 시 트를 뒤로 미는 걸 보니 금방
출발하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시트를 아주 약간 뒤로 기울이며 자세를 고친 유리는, 그때 자신의 어깨 위를 묵직하게 눌러오는 무게감을


느끼고 멈칫 했다.

시트에 어깨를 대고 반쯤 등을 돌린 링신루가 유리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등받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중을 싣고


유리의 어 깨 위에 머리를 올린 링신루는,조금씩 몸을 뒤척이다가 이윽고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편안하게 한숨을 내쉬었 다.

순식간에 등받이가 되어버린 유리는 그대로 꼼짝도 못하고 눈 만 낌벅이며 링신루를 쳐다보았지만,아무래도 금방
비킬 기미는 보이지 않아 이내 단념하고 그 역시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어깨 가 좀 무겁긴 했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게이블 씨는 내가 그렇게 좋아요?”

그대로 잘 셈인지 눈을 붙이고 있던 링신루가 어느 순간 갑자 기 불쑥 물었다. 덩달아 잠깐 눈을 감았던 유리는


다시 눈을 떴 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는 링신루를 내려다본 다.

“……. 예,좋습니다.”

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말했었다.

설령말로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시선으로, 몸짓으로, 숱하게 그 에게 전해왔을 것이다. 링신루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도록■
“내가 태이 형을 좋아하는 게 서운하지 않아요?”

링신루가 뒤이어 한 말은,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먼저 정태의의 화제를 꺼내는 것도
거의 없는 일이 다.

유리는 침묵하다가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하고 링신루는 건성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一혹은 잠든 사람처럼一오래도록 그렇게 침묵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社 혼잣말처럼 입을 연다.

“같이 있으면 좋고,재미있었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나 좋다고 넋 놓고 쳐다보는 게 빤히 보였거든. 그냥


흔해빠진 벌레 중 하 나려니 했는데 그런 벌레가 유명한 천재의 동생이라니 그것도 희 한하다 싶어서 지켜보기도
했고. ……그런데, 사람이 참 좋은 거 예요. 계속 옆에 두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소한 입장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마침 태이 형도 날 좋아하고 있었고,나도 태이 형이 좋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죠, 하고 말하며 링신루가 웃는 기척이 났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어떤 사람을 계속 내 옆에 두고 싶 고,그 사람이랑 놀거나 이야기하거나 같이


자거나 하고 싶고, 그 랬던 적은 그 전엔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런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링신루의 말이 및었다. 어렴풋이 배어 있던 웃음이 목소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 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게이블 씨가 나에게 말했었죠. 나는 단지 리그로우를 싫어하는 게 아니냐고. ……요하네스버그로 태이 형을


데려갔을 때,태이 형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나는 그놈을 미워하기 때문에 형을 갖고 싶어 하는 거라고.”

유리는 말없이 링신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봐야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나는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분명히, 리그로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 기 위해 형을 내 옆에 데려다놓았던 건 사실이죠. 놈이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형을 약에
절여놓을까 했던 것도 진심이었어

요. .그런데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좋아하는 건 뭐예요?”

링신루가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기척이 났다. 눈이 마주칠 만큼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유리에게 묻는 말이었 다.

그러나 유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기쁜 것. 슬픈 것. 괴로운 것. 환희. 증오. 고통. 그중 어떠한 것 은 결코 좋아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누가


선을 긋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나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 는데. ……그렇다면 나는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인가요?” 말꼬리에 씁쓸한 웃음이 밴다. 그러나 필경 그렇게 웃는 입매는 일그러져 있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표정은 분명 그럴 터였다.

안타까워졌다. 유리는 심장이 묵직하게 아파 깊이 숨을 들이쉬 었다.

그것은 링신루가 스스로를 수없이 채찍질하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수십 수백 번이나 담금질해 겨우 불안정을


단단한 안정 으로 굳혀 놓은 뒤에도,헤아릴 수 없이 거듭 생각했을 의문이다. 내가 틀린 거라면 어떤 게 옳은
건지. 그 옳은 것을 나는 받아들 일 수 없는 건지. 그렇다면 언젠가는 또 다시 이렇게 괴로워해야 할지.

“사람들의 좋아하는 방식이 모두 다 같을 수는 없겠지요.”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 옳은지,무엇이 그른지 자신은 선을 그을 수 없었다. 이 런 문제에 일률적인 선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링신루 씨가 정태의 씨를 억지로 끌어오려고 했 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게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 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글쎄요. 좋아하는 게 반드시 격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유리는 깊이 생각하며 드문드문 말했다. 누구나 다를 테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먼발치에서 우연히
스쳐보면 그걸로 만족 하고,그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고,그 사 람이 좋아했던 걸 보면서
기분 좋게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런 것도 좋으리라고.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유리의 어깨에 기대어 등 돌린 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그는,


맥빠진 듯 웃었 다.

“그런 게 정말로 좋아하긴 좋아하는 거예요?”

싱거운 풀을 씹는 것 같은데, 하고 링신루가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유리는 그런 링신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 용히 말했다.

“하지만 전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그런 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링신루가 유리에게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싱거운 풀처럼 조용하고 끈질긴


사랑이라 하더라도.

문득 유리는 어깨에 기댄 링신루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 지만,그렇게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과 그의 차이점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게이블 씨는 나랑 성향이 너무 달라……•”

한동안 침묵하던 링신루는 한숨처럼 피식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해요. 나는 그냥 넋 놓고 쳐다만 보는 건 성 에 안 맞아요.”

그건 내가 택할 방식이 아니에요,그렇게 딱 잘라 말한다.


링신루도 자신과 유리 사이에는 표범과 풀만큼이나 커다란 차 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별 일이 있지
않고서는 연관조차 없었을 그들이다. 그러니 그는 유리의 말에 단칼에 고개를 저은 것과 같이,유리처럼 누군가를
좋아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데,”

잠시 사이를 둔 링신루는 약간 낯을 찡그리면서도,선선히 말했 다.

“게이블 씨의 방식이 싫지는 않아요. 좋아요. 게이블 씨다워서.” 말꼬리에 웃음이 섞였다. 아니, 실제로도
웃었다. 기분이 유쾌해 진 듯 소리 내어 잠시 동안 웃었다.

유리는 링신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도 픽 웃고 말았다. 무엇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마음이 가벼워 졌다면 그걸로 좋았다.

유리는 자신까지 기분이 가벼워지는 듯해,가뿐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좀 더 어깨를 올려 봐요,기대기 편하게, 자신의 편의에 맞춰 주문까지 넣으면서 유리의 자세를 고친 링신루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붙이기라도 하려는 듯 편하게 기대어 앉아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머리를 유리의 어깨에
비비듯이 기댄다.

문득 링신루는 움직임을 멈추고 얼마간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아,역시 또 나네, 냄새,하고 중얼거린 그는 몸을 옆으로 틀더 니 유리의 가슴팍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향수는 안 뿌리죠, 하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링신루 는 유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또 냄새가 납니까?”

“음.., 뭘까요. 분명히 익숙한데. 기분 나빠하지 마요. 나쁜

냄새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뭐랄까, 마음이 편안하고 아늑하 게,…一.”

링신루는 나른하게 소리를 낮추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유리의 가슴에 뺨을 문지르며 깊은 숨을 들이쉰 그는 그대로 잠들기라도 할 듯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이윽고.

“……아아. ……물 냄새다.”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

그렇구나. 그거였어.

마치 탄성처럼 낮게 속삭이며,그는 유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 다. 유리의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간다.
유리는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멈춰버린 링신루를 내려다보았다. 잠시라도 힘을
했다간 그 희미 하고 어렴풋한 향을 놓쳐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움켜쥐고서, 링신루는 유리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물 냄새.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몸에 코를 가까이 했지만, 역시 그의 코에는 별다른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부터 링 신루가 어딘지 낯익은 냄새가 난다고 했을 때부터, 유리는 알 수 없었던 냄새다.

물 냄새.

마음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풀어지는 곳의 냄새다.

링신루는 거기에서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알아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녹아버리는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이. 소금 처럼. ……그래. 이거구나.”

띄엄띄엄, 어순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그는 ‘이거였어.’하 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링 신루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꼭 잠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품에 묻은 채, 유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늑하게 잠겨 있는 그가 깨어버릴까 봐.

그러나 그는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느라 등이 뻐근해진 유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약간만 허리를 펴려고 움직이자,이내 고개를 들며 몸을 뗀 다.

“불편해요?”

“예,약간 ……이제 됐습니다. 다시 기대도 돼요.”

유리가 자세를 고친 뒤 말하자 링신루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자세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으면 불편할 텐데,”

“저야 그렇다 쳐도,그보다는 조수석에 앉아서 제게 기대는 링 신루 씨가 더 불편할 텐데요.”

“불편하지 않아요.”

링신루는 곧바로 대답했다. 유리가 시선을 주자 평연하게 마주 보며 눈웃음을 웃는다. 정말이에요,불편하지


않아요, 하고 선선 하게 말하며.

링신루는, 그러나 유리가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못할 게 가엾었 는지 조수석에서 고개만 옆으로 기울여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얹 었다.
“이걸로 됐어요,지금은.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니까 진짜로 나른해지는 것 같아. 좀 잘게요,나.”

“깨워줄까요?”

“음……,아니오. 그냥 자게 내버려둬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낮고 고 른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유리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어깨 위의 무게감이 조금 더 늘어났다. 정말로 잠들었나 보다.

유리는 링신루를 내려다보다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자신도 덩달아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유리는 시계를 흘끔
보곤 눈을 감 았다. 짧은 낮잠만큼 달콤한 것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물 냄새.

유리는 다시금 팔을 들어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링신 루의 무거운 마음을 녹여준다면,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헤드쿠션에 머리를 기대었다. 졸음이 물결처럼 다가왔 다.

어깨 위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이 기분 좋았다•

유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의 체온과 숨소리, 그런 것들이 담겨 있는 이 차 안이 꼭 물속 같다고


생각하며,평온하 게 의식을 놓았다.

여전히 그는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링신루의 무거운 마음을 녹여준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헤드쿠션에 머리를 기대었다. 졸음이 물결처럼 다가왔다.

어깨 위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이 기분 좋았다.

유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의 체온과 숨소리, 그런것들이 담겨 있는 이 차 안이 꼭 물속 같다고


생각하며, 평온하게 의식을 놓았다.

찰박,손가락으로 수면을 두드려 물소리를 내었다.


물소리, 손가락을 두드리는 물의 감촉, 서늘한 듯하면서도 이내 익숙해지는 물의 온도,모든 것이 낯익어 마음이
가라앉았다. 언 제나 그러듯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들을 물속에 흘려버리며 유리 는 물을 쓰다듬었다.

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유리가 링가의 본가 에 머물렀던 동안 아침저녁으로 수십 번은


이곳에서 헤엄을 쳤는 데도 다른 사람과 같이 풀을 이용했던 건 고작해야 한두 번이었 다. 그냥 지나가면서라도
이곳을 누군가 이용하는 모습을 본 건 손으로 꼽고도 남았다.

아무래도 링가의 사람들은 수영을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라 고 유리는 생각했다. 하긴 오래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그 옛날 링탕윈一및 그의 가족一과 바다에 놀러갔었을 때에도 그는 ‘수영 을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
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집에 개인풀을 가진 사람이 왜 오랜만에 수영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집에 들어와서 보니 정말로
풀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실외로 되어 있는 이 풀은,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온이 30 도가 넘도록 맞춰져 있었다.
긴 차양이 지붕

처럼 드리웠고 샤워장도 바로 옆에 딸려 있어,겨울에도 풀에 들 어갈 때와 나올 때 잠깐만 추위를 견디면


얼마든지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없다니.

아무도 이용을 하지 않을 거라면 이렇게 훌륭한 설비를 갖추어 놓은 풀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유리는 이 멋진 풀을 낭비하는 데에 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하늘은 캄캄해져 있었다. 시각은 오후 8 시를 조금 넘어가 고 있었다.

난데없이 평영을 가르쳐 달라면서,금방 저녁을 먹고 갈 테니 풀에서 만나자고 했던 페이가 슬슬 올 즈음이


되었는데 아직 근 처로 다가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링신루가 돌아오려면 두어 시간 남짓은 있어야 할 거다. 그 정 도면 페이에게 평영을 충분하게는 아니나마


기본적인 자세 정도 를 가르쳐주기에는 충분한 시각이었다.

본가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시간 조금 전이었다.

차를 세워놓고 잠시 눈을 붙였다 해도 고작 수십 분 정도,본가 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아, 개운해. 진짜 달게 잘 잤어요.’

본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 링신루는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웃었다. 기지개를 켜면서 기꺼운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 니, 고작 일이십 분이었는데도 정말로 단잠을 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 묵직하게 쌓였던 기분이 다 풀린 것 같아서 유리도 눈매를 휘었다. 다행이군요,하고.

링신루는 그런 유리를 돌아보더니 얼굴 한가득 웃으며 ‘예, 덕 분에요. 나 때문에 어깨 저리지 않아요?’라고
미안한 듯 고개를 기울였고, 실제로 아직 어깨가 좀 저리긴 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가뿐한 얼굴을
한 링신루가 보기 좋았다.

담담하게 웃기만 하는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링신루는,갑 자기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통에 조금씩 어색하게
얼굴에서 웃음 을 지우는 유리에게 픽 웃어 보였다.

‘갑자기 생각이 들었는데,게이블 씨, 혹시 전생에 용왕님의 열 두 번째 아들쯤 되지 않았을까요?’

‘예? 용왕?’

‘물 냄새가,一…’

링신루는 입을 열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것저것
떠올려도 모두 다 딱 맞는 느낌은 아니었는지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미처 적당한 말을 생각해내기 전에 본채 쪽에서 사람이 나오며 ‘막내 도련님 오셨습니까.’라고 그들을


맞이했고,링신루는 갑자기 흥이 깨진 듯 얼굴에 피었던 웃음을 약간 거두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버님이_링휘령이一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다는 그의 말에 링신루는 ‘그럼 나중에 봐요.’라며 유리에게 손을


흔들고 그를 따 라갔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는 그가 완전히 시야 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걸음을
돌렸다.

본가에 찾아오면 거의 비슷하게 시간을 보낸다. 링신루가 식사 를 마치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올
때까지, 유리는 별 채에서 홀로 고적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때로는 자정에 가깝도록 길어졌고,
때로는 식사와 차만 마시고 온 듯 하 늘이 새카매지기도 전에 ‘그만 돌아가요.’라며 링신루가 문사이로 고개를
비죽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아홉 시나 열 시, 그 사이쯤 오곤 했다.

유리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채에 가려고 걸음을 돌 렸지만,도중에 발이 막히고 말았다.

그들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갑자기 전화가 울렸던 것이 다. 발신인은 페이.

『유리 삼촌, 왔다면서요!』

평소라면 시간이 여유로운 경우엔 전화를 하지 않고 직접 별채 로 찾아와 수다를 떨고 가곤 하는 페이가 웬일로


전화를 해서 유 리를 찾은 용건은 간단했다. 평영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다.

회사에 나가면서 사내 수영동호회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다음 달에 수영대회가 있다며,자신은 제비뽑기로 평영


종목으로 나가 게 되었는데 동호회 안에 마음에 둔 아가씨에게 잘 보이고 싶다 고 천진한 흑심을 다 털어놓는
페이였다.

『나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거의 다 왔어요. 얼른 밥 먹고 갈 테니까, 목단원 옆에 있는 풀에서


봐요.』

30 분 안에 갈게요,라는 말을 남기곤 마음이 급한지 금세 전화 를 끊어버리는 페이에게 ‘그런데 왜 하필


평영이야, 아무리 잘 해 도 멋져 보이기는 힘든 자세인데’라는 말을 미처 해주지 못한 유 리는, 이놈이
아무래도 평영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 중에 보면 시무룩해지겠구나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찌 되었든,어떤 방법으로 헤엄을 치건 별채에서 책을 읽으며 링신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풀에서 헤엄을 치며
기다리는 편이 훨씬 즐거운 유리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곤 곧바로 풀에 와서 앉 아 있었던 것이다.

벤치를 풀에 바싹 당겨 앉은 유리는 발로 살짝살짝 수면을 차 며 풀 바로 옆에 있는 목단원으로 시선을 주었다.

초여름이면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몹시 화려하고 아름다웠지 만, 지금은 모란 대신 화단과 길목 사이에 담처럼


심어놓은 동백 나무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동백이 그 정취를 대신하고 있었다.

겨울꽃이 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물과 차가운 공기를 넘나들며 수영이라니, 정말로 근사한 사치다.

발을 아예 풀에 담근 채 기분 좋게 가늘어진 눈으로 동백을 바 라보던 유리는,그때 문득 동백나무 담장 너머로


사람이 지나가 는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들었다.

오늘따라 늦게 귀가를 한 둣, 수행원 두셋에 둘러싸여 본채 쪽 으로 걸어가고 있던 링탕윈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느낀 링탕윈 역시 눈을 들어 유리를 발견했다. 딱딱하고 위압적이던 링탕 윈의 얼굴 위로 언뜻 반가운


웃음기가 서렸다.

“벌써 와 있었군. 아아, 하긴 오늘은 내가 늦었지. 수영하려고?”

“페이가 평영을 가르쳐달라고 해서요. 아마 곧 올 겁니다.”

“평영?”

그놈이 요즘 일이 좀 손에 익는다 싶으니 한가해졌나 보군, 다 음 주부터 더 호되게 가르쳐야겠어, 라고 허허


웃은 링탕윈은 수 행원들을 먼저 보내곤 동백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유리에게 다 가왔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쉬어가려 는 모양인지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그
모습이 여느 가정집의 아버지 같아,유리는 웃고 말았다.

“그래, 신루는 요새 좀 어때. 별 일 없이 지 내지?”

“예. ……다다음주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할 거라고 말하던데, 결정은 된 겁니까?”

“어,아마 그렇게 될 거야. 더 늦춰지지는 않을걸.”

링탕윈은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눈가에 찡그린 주름을 지었다.

링신루가 일에 손대게 되는 걸 내켜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든 말든, 일단 결정되고 난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 래야 다른 일들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고 매끄럽게 나아가는데, 신루의 경우는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며 가로막는 바람에 여러 번 에 걸쳐 연기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은 안 될 거라고,링탕윈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친족들 사이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마 친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잠자코 있던 유리는 “그러면,”하고 시선을 들었다.

“링신루 씨는 예정대로 작은 숙부님께 일을 배우게 되는 겁니까?”

주류를 다루는 사람 가운데 링신루를 챙겨볼 만한 여유가 되는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 예전에 링신루가 말했었다.

유리도 그 작은 숙부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이야 기를 나누거나 만난 적은 없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 자리에 서 몇 마디씩 말을 거드는 건 봤었다. 링휘링의 친동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유리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래도 마음을 좀 놓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그 사람 아래에서 일을 배울 것 같다고


링신루가 말했 을 때 속으로 안도했었다.

그러나 유리의 물음에 링탕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곧 “아아, 아니야.”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뜻밖이라는 기색으로 고개를 기웃한다.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비치테이블 위에 있던 조그만 빈 접 시에 툭툭 털며, 링탕윈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 딘지 입맛이 개운치 않은 듯 탐탁찮은 침묵을 지키는 그를, 유리 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든다. 링탕윈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 건 뭔가 걸리는 게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유리가 진지한 기색으로 묻자 링탕윈은 아니, 그건 아니고, 하 고 손을 저었다.

“작은 숙부님이 지난 주말 밤에 뇌일혈로 쓰러지셨어. 다행히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데, 한동안은 좀 쉬실
것 같아. 엊그제 뵙고 왔는데 이대로 일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생각중이라고 하시 더군.”

하긴 이미 연세가 연세이시니 쉬고 싶으실 만도 해,라고 말하 며 링탕윈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한 대 더


피울까 어쩔까 고 민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링신루 씨는……

“응, 그래서 일을 배우는 순서를 좀 바꾸게 될 거야. 주류 쪽으 로는 달리 여유가 나는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
아마 다른 쪽부터배우겠지.

거기까지 말하곤 말을 맺었다. 그 녀석이 바빠지면 너 도 같이 바빠지겠군,하고 유리에 게 말을 돌리는 모습이,


그 화제 에 대해서 그리 깊이 얘기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링탕윈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가 말하기를 내켜하지 않 는 이유까지 이내 알아차린다.

술과 함께 흘러 다니게 될 것들.

비록 암묵적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나, 친족이 아 닌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말할 수는 없는 그


부분을 링신루가 먼 저 익히게 되리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링탕윈은 아마도 자신의 그 짤막한 말과 태도에서 유리가 그 내용을 짐작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는 유리를 잘 알고 있었고,그럼에도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 큼은 유리를 신뢰하고 있었다.

유리는 말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낮게 중얼거린다.

“링신루 씨가 힘들어지겠군요.”

“아, 그래. 배울 게 많으니까 힘들겠지. 하지만 그 녀석이라면 뭐든 익히는 게 빠르니까 그리 어려워하지 않을


거야. 그냥 일이 좀 많은 회사에 다닌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걸.”

힘들어지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일의 양이 많다고 그 가 힘들어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링신루는 어떠한 의미로든 힘들어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힘들어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귀찮다’고는 했을지 언정 ‘하기 싫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유리가 입을 댈 일은 아니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의 유리라면 이런 경우에 결코 입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이미 결정된 일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짚어두고만 넘어갔을 터였다.

그런데도, 유리는 입에 담고 말았다. 하지 말아야 할, 타인의 참 견을.

“차라리 주류 관련一합법적인 부분•一부터 배운다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시간을 둘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부분

불법적인 부분부터 먼저 익힌다니, 끓는 물에 갑자기 집어넣는 격이에요.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링신루 씨에게도, 일의 측면에서도 ”

유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링탕윈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그 는 일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유리를 쳐다 보았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얼 굴이다.

그들의 관계는 줄곧 지킬 것을 지키는 관계였다. 가족과 더불어 사귈 정도로 허물없이 친하다 하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서로가 정확하게 알고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 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링가에서 손대고 있는, 타인에게는 드러내지 않는一타인에게서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一•일.

아무리 친하다 하나 유리는 그들에게 타인이었다.

“……,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링탕윈은 별반 불쾌한 빛은 띠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목소리 속에서 명백한 벽을 느끼면서,
유리는 침묵한 다.

링신루의 일만 아니었더라면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가 미리 예 비된 단계도 없이 난데없이 머리부터 처박힐 끓는


물이 걱정되지 않았더라면.

“가능하다면 다른 일부터 먼저 익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관련된 일은 전혀 배우지 않은 아이를 갑자기 가장 험한 곳으로 집어넣는 셈이니까.

그런데 말이지, 유 리. 너는 신루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여태 그아이를 줄곧 옆에서 봐


왔으면서?”

링탕윈은 눈가에 웃음까지 띠었다. 의외로 선선히 말을 진행시 키면서, 그는 두 개비째의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너도 눈치는 채고 있겠지만,나는 신루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그 나이대 아이들의 풋풋한 구석이 없거든.
아직은 어린 치 기가 많이 남아 있어 함부로 날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정말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질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아 이를 안 좋아해. 내 힘에 부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미 쉰을 넘은 링탕윈은 자기 나이의 반 남짓밖에 되지 않는 막냇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그러듯


눈살을 찌푸렸 다. 그건 버릇인 것 같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담뱃재를 툭툭 떨어낸 그는, 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어느 밑바닥에 집어넣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기어 올라올 거야. 하물며, 그 아이가 들어갈 곳은


밑바닥도 아니 지. 유통 과정이 좀 골치 아프고 위험부담이 있는 물건을 다루어 서 그렇지, 그 아이가 배울 것은
엄연히 "머리’가 해야 할 노릇이 거든. ……즉 다른 쪽보다 더럽고 추잡한 꼴을 더 많이 보게 되 긴 하겠지만,
어차피 늦든 빠르든 그것도 그 아이가 익히게 되었 을 일 중의 하나야.”

거기까지 말한 링탕윈은 담배를 딱 한 모금 더 빨았다. 잠시 이 야기가 끊겼다. 그는 연기를 후욱 불어내곤,


아직 길게 남은 담배 를 그대로 비벼 꼈다. 이걸로 더 이상은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고 간접적으로 알려주며.
링탕윈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를 살 피는 가느스름한 눈이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신루가 많이 염려되는 모양이지. 형으로서는 참 믿음직스러운 일이야. 우리 막내를 그렇게 챙겨주다니 고맙군.”

“……,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링탕윈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손을 젓는다.

“아니지,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할 정도면 신루가 정말로 염려 되는 게 아닌가. 입 밖으로 꺼내어도 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 말을 해도 되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네가,나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인데.”

링탕윈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았다. 넉넉한 아저씨처럼 유연 하고 모난 데가 없는 목소리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분명하게 유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유리가 말한 내용은 그가 넘어선 안 될 선을 건드렸다고. 거기에 대해서 그가 당장 유리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 을 터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말은 묻힐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선을 넘었고,링탕윈은 거기에 대한 경고를 주었 다. 그 이상 발을 들이지 말라고.

“뭐어……어찌 되었든,신루를 잘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은 진심 이야. 게다가 나도 설마 네가 이렇게 나설


성격이라고는 전혀 생 각을 안 했는데,뜻밖의 일면을 봐서 제법 재미있기도 했고.”

링탕윈은 얼굴 가득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경고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시 가까운 친구의 얼굴을 한다.

그렇다면 유리도 이즈음에서 다시 여느 때와 같은 친구의 얼굴 로 돌아가야만 했다.

“저도 이런 말을 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습니다. ……저는 링신 루 씨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이런. 나도 이래 봬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링탕윈은 짐짓 쓰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그 나이대의 보통 아저씨처럼 살집이 잡힌 배가 통통 울린다.

그래,이런 삶도 좋겠지.

유리는 링탕윈을 보며 생각했다.

링탕윈은, 비록 가까운 사이가 아닌 타인에게는 냉정하고 이기 적이고 악하기도 한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 고 마음도 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리의 옆에서 “이런,너무 지체했군. 슬슬 가봐야겠는데.” 하고 걸음을 돌리던 링탕윈은, 막


돌아서려다가 멈춰 섰다. 그리 고 멀뚱하게 유리의 어깨 너머를 쳐다본다.

“넌 왜 거기 장승처럼 섰어.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옷은 그 게 또 뭐야?!”

링탕윈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곳을 향해 유리도 고개를 돌 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수영복 위에 두꺼운
패팅을 입은 기괴한 차림새를 한 페이가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다.
늘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이 감도는 그 얼굴에 천진한 걱정 을 담고서,그는 눈을 낌벅낌벅했다.

“아니,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요. 괜히 나섰다가 새우등 터질까 봐. 이제 얘기 다 끝나신 거예요?”

“울 아버지 은근히 쪼잔하죠?”

페이가 은근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린 것은, 물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풀을
뒤뚱뒤뚱 세 번쯤 오갔을 무렵이었다.

평영이라는 게 웬만해서는 멋져 보일 수 없는 자세의 수영법이 라는 것을 알고 좌절한 페이였지만, 비록 마음에


둔 아가씨에게 멋있게 보이기는 힘들더라도 어찌 되었든 대회에 나가게 되었으 니 배우긴 배워야 한다면서
침울하게 유리의 가르침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원래부터 기본적인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었던 페이가 그럭저 럭 평영 비슷한 자세로 풀을 오갈 수 있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세 요령을 터득한 페이는,저렇게 해 학적인 포즈로 어떻게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느냐고 절망했던게 언제냐
싶게 금방 그 해학적인 자세로 찰방찰방 재미나게 풀 장을 오갔다.

그렇게,풀을 세 번쯤 오가 더 이상 유리에게 조언을 듣지 않아 도 될 만큼 평영에 익숙해졌을 즈음,생각에 잠겨


풀에서 기우뚱 거리던 페이가 불쑥 말했던 것이다. 울 아버지 은근히 쪼잔한데, 라고.

물속을 한 바퀴 유영하고 나오던 유리는 페이를 쳐다보았다. 페 이는 씁쓸하게 난처한 웃음을 웃는다.

“웃으면서 말해도 한번 귀에 담긴 말은 오래도록 기억하는 분 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자기는 자기 욕을 해도 남은


자기 욕을 하면 안 된다고, 집안 일에 대한 안 좋은 말도 친족들끼리는 곧 잘 투덜거리지만 남 입에서 말이
나오면 굉장히 언짢아한다고요. 유리 삼촌도 알면서 왜 그랬어요.”

탓한다기보다는 안쓰러워하는 기색을 담고서 말하는 페이는, 아 마도 유리와 링탕윈이 나누었던 대화를 제법 들은
모양이었다.

엿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밀스러운 내용을 이야기했 던 것도 아니고,게다가 원래 이 자리에는 페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설 타이밍을 찾지 못해 그늘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페이는 한숨을 쉬며 물속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선뜻 뛰어올라 풀장 벽의 사다리 위에 앉았다.

“막내 삼촌은 괜찮을 거예요. 일 힘든 거야 걱정 안 해도 알아 서 잘 배우고 익힐 사람이고,……그쪽이 좀


더러운 꼴은 많이 본다고 나도 소문으로만 듣긴 했지만,어차피 더러운 꼴은 어릴 때부터 은근히 보고 자랐어요.”

이렇게 여기저기 얽히고설킨 게 많은 집안에서 도련님으로 자 라면서 더러운 꼴을 안 보고 자랐겠어요,하고


페이는 웃었다. 유 리는 묵묵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주제넘은 말을 했지.”

“에이,또 뭘……. 안 하는 게 서로 좋을 말이긴 했죠.

이쪽도나름대로 치부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그래도 주제넘었다고


할 만큼은 아니고.”
뭐 사실 다들 눈 가리고 아웅이잖아요,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페이는 웃었다.

나름대로 유리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이 다정한 조카를 바라보 다가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주제넘었던 건 맞아. 사실은 내가 꺼낼 말이 아니 었지. 네 아버지에게 할 말도 아니었고,링신루


씨에 대한 말을 본인도 아닌 내가 꺼낼 이유도 없었는데, 내가 잘못했어.”

링탕윈 씨가 언짢아할 만도 하지, 하고 중얼거리며 조용히 한숨 을 쉰다. 그러자 페이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에이, 왜 그래요.” 하고 말했다.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는 유리에게 헤엄쳐 다가가 그를 위로하 려는 셈으로 가볍게 팔을 두드렸다.

“막내삼촌을 걱정해서 한 말이잖아요. 나도 알겠던데,그걸 아 버지가 모르려고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링신루 씨의 의지로 결정할 일인데 내가 선불리 말을 섞었다는 뜻이야. 그는 일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본 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더욱 싫어할 테니.”

유리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링신루는 딱히 표시를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예비된 일에 대해 그의 어머니가 반대를 하거나 청을 넣거나
해서 참견을 하 는 것도 내키지 않아 했다. 자신의 일에 타인이一그것이 친어머 니라 하더라도一입을 대어
휘두르려고 하는 것은 결코 기꺼워하 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설픈 염려로 그를 위한다는 꼴이라니, 심지어 자신 이 참견해서는 안 될 그의 집안 일에 입을


대면서까지.

이건 정말로 오랜만에 ‘실패’를 한 기분이다.

“뭐……,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네 아버지에 게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낫겠어. ——위로해줘서


고맙다,페이.”

어찌 되었든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 지어진 셈이었다. 일은 결정이 된 대로 흘러갈 테고,유리는 그 결정


아래에서 최 선을 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은 유리는 페이에게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조금 전부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천만에요. 고맙긴요,뭘, 우리 사이에.”하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인 페이는,곧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말로, 유리 삼촌은 정말로 이상적인 피고용인이라니 까요.”

“뭐?”

유리는 페이의 뜬금없는 말에 눈을 낌벅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페이는 몸을 젖히더니 수면 위에 누웠다. 물 위에


둥둥 떠서 눈 앞에 뜬 달을 쳐다보면서 웃음 섞어 중얼거린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나한테 자주 한 말 중에 하나가,유리 같은 녀석을 아래에 두면 좋을 거다, 였어요.


옛날부터 아버지는 삼촌을 탐냈거든요. 일을 맡겨놓고 잊어버려도 될 만큼 안심할 수 있을 인간은 보기
드물다면서.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 하는 일 에는 유리 삼촌의 능력을 유효하게 쓸 만한 일이 별로 없다고 아 쉬워
하셨어요.”

유리는 말없이 페이를 바라보았다.

가끔 ‘여차하면 내 밑으로 들어와서 일해.’라고 스치듯 말하곤 했던 링탕윈의 제안이 아예 빈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 일 링탕윈이 정말로 진지하게 계약 의사를 타진했더라면 유리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이가 한 말대로, 크고 작은 실마리를 모아 유효한 결 론을 이끌어내는 데에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하는


유리의 일이,그 에게는 크게 유효하게 쓰일 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로만 여태 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들으며 자라다 보니까요,

나도 무심결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리 삼촌 같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면 좋은 거구나,하고.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계산적인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고요.”

내가 삼촌 좋아하는 거 알죠? 하고 짐짓 환하게 웃어 보이는 페이에게, 유리도 피식 웃고 만다.

“나도 이제 머리가 굵어지고,알량하게 배운 것도 좀 있고,그 러다 보니까 보여요. 어떤 사람을 내 아래에 두고


가장 유효하게 그의 능력을 부릴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윗사람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나도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그런 생각은 들어요. 유리 삼촌이랑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고맙군. 하지만 나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네 아버지의 부하들 중에서도 나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을걸.”

“그건 그렇죠. 유리 삼촌이라고 뭐 무소불위의 능력자도 아니 고.”

페이는 개구지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물에 둥둥 뜬 채 머리로 유리의 허리를 장난스레 슬쩍 들이받았다. “실컷


치켜세워주더니 당장 떨어뜨리는 거냐?”하고 유리도 손가락으로 페이의 얼굴에 물을 튀긴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하고 물결에 흔들리며 머리로 슬쩍슬쩍 허리를 들이받는 페이를 보며, 어릴 적에도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이면서 은근히 애교가 있었던 걸 떠올리고 유리는 웃고 만다•

“업무 쪽으로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든든하게 받쳐줄 것 같아요. 자칫해서 내가 좀
실수를 하더라도 이 사람이 있으니 괜찮아,라고 할까. 음……,굳이 말하자면,업 무상의 부인 같은 느낌?”

그래, 확실히 내가 하는 일은 대외적으로 눈에 띄는 활동은 아 니지, 하고 중얼거리며 물을 튀기던 손가락을,


페이가 꾹 쥐었다. 눈에 물 들어가면 아프다고요, 하고 투덜거리며.

“하여간……,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난데없이 막내삼촌한테 고용됐다면서 떡하니 오다니 이게 뭐래요. 중국에 와서 지내는 것도 승낙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먼저 계약하자고 할 걸. 쳇.’’

농담조로 푸념을 늘어놓던 페이는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혔다. 유리를 거꾸로 올려다보면서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 는 그를,유리도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문득 유리의 손가락을 쥔 페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막내삼촌이랑은 계약 언제 끝나요? 계약 끝나면 내 밑으로 안 들어올래요?”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유리는 금방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페이도,더 이상은 유리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개구진 어린애가 아니다. 그도 이제 집안
내에서 자신의 몫으로 하나의 사업을 가질 때가 되었고,사람 욕심이 나기 시작 할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그래도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이렇게 빤히 드러나다니. 링신루보다 몇 살 더 많은데도 오히려 더


어린애 같아서, 유리는 픽 웃었다. 그리고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막 입을 연 순간.

“안 끝나.”

짧고 냉담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버석,동백나무를 헤치고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물 위에 태평하게 누워서 떠 있던 페이 도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넉넉한 반바지에 아무렇게나 손 을 찔러 넣은 링신루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풀
앞에 섰다. 풀 에 몸을 담그고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어딘지 차다.

“벌써 얘기 다 마치고 온 거예요? 바로 돌아갈 겁니까?”

오늘은 어른들과 일 얘기를 할 눈치라 좀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유리는 풀 옆에 놔두었던 시계를 보고 풀에서 나왔다. 촤악,주 위로 쏟아지는 물이 링신루에게 튀지 않도록 한


걸음 비켜서 수 건을 걸쳤다.
“벌써 가려고요?”하고 아쉽게 유리를 쳐다보는 페이에게도 수 건을 한 장 던져준다. 페이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긴 했지만 풀에 서 나오지는 않고,장난스럽게 빙글거리며 링신루에게 말을 건네 었다.

“에이,모처럼 유리 삼촌이랑 둘이 재밌게 놀고 있는데 왜 벌써 왔어요,막내삼촌? 아버지랑 숙부님들 분위기를


보아하니, 막내삼 촌 붙들고 한동안 안 놓아줄 것 같더니만.”

그러나 친근한 웃음이 섞인 그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표정 없이 서늘한 눈길만 흘끗 돌아갔을
뿐이다.

페이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 그제야 유리도 링신루 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
수건으로 몸을 문 지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버지와 나이 많은 형님들에게 둘 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용하긴 하지만
어쩐지 상당히 기분 이 틀어진 기색이다. 보기 드물게,무서울 만큼.

“링

그러나 유리가 미처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말없이 페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인데,다른 데 가서 찾 아봐. 물건은 얼마든지 내주고 대체할 수 있어도,
인재는 대체할 수가 없거든. 그리고 모르나 본데, 나는 뒤늦게 나타나서 남의 옆 에 있는 사람 빼앗아가는 걸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야.”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링신루에게서 희미하게 이를 가는 소리 가 섞여 나왔다. 동시에, 유리는 그의 말에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 린다.
뒤늦게 나타나서 남의 옆에 있는 사람 빼앗아가는 것.

리그로우가 채어가 버린,원래는 링신루의 몫이어야 했을 정태의.

그것 역시 그의 가슴 속에 조그만 가시로 박혀 빠지지 않는 기 억이다. 시간이 지나 그 위에 굳은살이 박여 더


이상은 아파지지 않는다 해도 그 안에 남아 있을 작은 가시였다.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고 가슴 밑바닥에 새겨져 있는 기억은, 조그만 계기라도 있을 때마다 잊히지 않고


되살아난다.

평온해졌다고 생각해도, 이제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아, 과연. 웃음이라곤 하나 남지 않고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저 시퍼런 분노는,
그래서인가.

마음이 살짝 욱신거렸다. 금방 물속에 흘려내고 나온 무게감이 다시 가슴 위에 묵직하게 얹힌다.

수건을 내려놓은 유리가 그에게 뭐든 말을 건네려고 입을 열었 을 때, 하지만, 물속에 서서 웃음을 지운 채


링신루와 똑바로 마 주보고 있던 페이가 잠깐 이상한 얼굴을 하더니 말한다.

“그렇게 따지자면,막내삼촌, 유리를 만난 건 내가 먼저예요. 막 내삼촌의 말대로라면 삼촌이 잘못한 거니, 이제


당연히 내 차례 아니에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 페이는 유리에게 흘끔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종신계약이라도 했어요? 왜 계약이 안 끝나요?”

유리는 어리둥절하게 눈만 낌벅이면서 링신루를 보았다.

순간 말이 막힌 듯 입을 다물고 싸늘하게 페이를 노려보고 있 던 링신루는,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폴끗


눈동자만 돌려 유리 를 보았다. 어쩐지 서슬 퍼런 분노가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만 같 아 유리는 속으로
움찔했지만,별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기색 없 이 잠시 망설이다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 단위 계약이었을 텐데요. 저는 종신계약은 하지 않으니까.”

길어도 3 년 단위였을 텐데,하고 중얼거리는 유리에게,한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칼날 같은 눈으로 한참 말없이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그 눈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 을 던질 뿐이었다.

“옷부터 입어요.”

“ 예?”

“옷이요. 그렇게 다 벗고 있지 말고.”

왜 그러고 있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쌀쌀맞게 말하 는 링신루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유리는


이내 고개를 끄 덕였다. 하긴 링신루의 볼일이 끝났다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수영장에서 안 벗고 있으면,그럼 양복 입고 수영하라고 요?! 하고 페이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 꼬장을
부리는 사람을 대 하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유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 금방 식어버 리는 몸을 수건으로 감싸고
샤워장으로 갔다.

유리는 리어뷰미러로 링신루를 흘끔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그는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아까부터 줄곧 그랬다.

링가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링신루 였다. 그러나 다시 마주친 순간부터는 지금까지
줄곧 무표정하다. 어디에선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유리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가 샤워장 에 들어가기 전처럼 여전히 링신루와 페이 둘만
남아 있는 풀에 서 페이가 반장난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막내삼촌이 나더러는 샤워장 가지 말래요, 오밤중에 수영하겠다고 풀에 들어갔으면 그냥 그대로 빠져죽으래,

하고 고자질하듯이 투덜투덜했지만, 링신루는 눈앞에서 고자질을 당해도 눈 하나 까 딱하지 않고 샤워장에서


나온 유리에게 냉담하게 ‘그럼 돌아가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아직껏, 가끔 한두 마디쯤이나 할까 입을 다 문 채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유리는 다시금 흘끔 리어뷰미러를 보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 리고 있는 냉담한 뺨이 보인다.

어쩌면 집안어른들과 나눈 이야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결론으로 끝난 걸까.

“말씀은 잘 마쳤습니까?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끝났군요.” 결국 유리는 침묵을 깨며 말을 건네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 다면 건성으로 흘려도 될 물음을 던진 유리는 앞만 보며 운전을 했다. 옆얼굴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큰형님이 오늘은 별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다음 주까 지 작은 숙부님 몸 나아지시는 상황 봐서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고 하시더군요. 덕분에 별 얘기 없었어요.”

그렇습니까,하고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벽을 친 웃는 얼굴로 유리와 이야기를 마친 링탕윈이 걸 음을 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웃으면서도 명백하게 ‘거기까지다’라고 선을 그었던 그가, 간접 적으로나마 유리의 청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비록 지금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큰형님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면서요.”

그때,침묵하던 링신루가 불쑥 말했다. 유리는 그제야 약간 고 개를 돌려 링신루를 보았다.

“미안합니다. ……많이 언짢아하시던가요?”

유리는 양전히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하는 유리에게 흘끔 시선 을 준 링신루는 잠깐 침묵하다 도로 눈길을


돌렸다.

“그보다는 아쉬워하는 눈치던데요.”

유리는 의아한 기색을 비추었지만 링신루는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슬쩍 감정이


치밀었는지 낮게 혀를 차며 말을 잇는다.

“가족도 아닌데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고, 잘해주라고 하시더군요. ……형님도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서.’’

당장 제 아들 남겨놓고 오는 것 좀 보라지, 하고 내뱉는 혼잣말 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유리는 묵묵히 앞만 보았다.

아쉬워한다는 링신루의 말도, 언짢아하리라는 자신의 생각도 둘 다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일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남이 간섭하는 걸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도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아쉬움은
없이 언짢음을 더 명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경고를 두 번 세 번 하는 사람은 아니니.

“집안 일에는 말 꺼내지 마요. 큰형님은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일단 한번 눈 밖에 나면 골치 아파지니까.”

링신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희미한 경고를 담아 말한다. 유리는 곧 “미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집안 일을 떠나서 나 개 인적으로도 그래요.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내


일에 참견하는 거 싫어해요.”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에야 한 번 더 미안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럴 것은 알고 있었다. 링신루의 성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자신의 일에 남이 입대는 것을 싫어하는 건 처음


만났을 무렵부 터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건 조금 가슴이 아려,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조차 입술 끝에 잠 시 머뭇거리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자동 차의 낮은 엔진소리, 히터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 따위만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다가 문득.

“하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건성인 듯이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지는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차창을 보고 있는 링신루가 보였다. 차창에
거울처럼 반 사되어 비치는 링신루와 그 안에서 눈이 마주친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거의 표정이 없는 얼굴 위로 눈매만 살짝 휘었지만,부연 차창 속으로도 아마


링신루는 알았 을 것이다. 그 역시 잠깐 있다 언뜻 입매를 올렸으니.

유리는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까지.

이걸로 됐다.

어떤 일이든 링신루가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자신이 뭐라고 할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이제 곧 정말로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면, 한동안은 감 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유리 자신이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사업을 끌고 나가는 일을 돕는 데에 보다 익숙한,유리 보다 전문적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제임스가 매우 아쉽긴 하지만 아마도 그를 데려오는 것은 무리 일 테니,그에게 사람을 알아봐달라고 할까. ‘당신
같은 사람이 좋겠어요.’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어찐지 칭찬으로는 안 들리는데.’ 라고 탐탁찮게 중얼거릴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유리는 고개를 젓고 만다.

또다. 이런 부분은 자신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링신루가 그에게 직접 부탁을 한다면 몰라도, 사람을 고르는 것 은 링신루의 몫이었다. 게다가 굳이 유리가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아도,링가에서 얼마든지 유능한 사람을 구해줄 것이다. 유리가 걱정할 건 없었다.

유리는 오히려 자신의 일을 걱정해야 했다一걱정할 필요는 없 었지만一.

얼마 있지 않아 계약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고 나면 그뒤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마 지금도 베를린의 집 우편함에는 한 통 한 통 우편물이 쌓 이고 있겠지. 한나一유리가 없는 동안 가끔 찾아가


그의 집을 돌 봐주는一가 잘 챙겨서 테이블 위에 놔두었을 거다.

유리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뒤돌아보면 어느새 이렇게 흘러가 있다.

링신루와 지내는 동안은 무척 좋았는데. 가끔 예상치 못한 일들 이 벌어져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니 그 시간들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돌아간 뒤에도 가끔 연락을 나눌 수 있기를.

사람의 관계란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 어떠한 사람과 오래도록 연락을 하며 사귀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라면 십 년, 이십 년 연락을 안 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해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 요.’라고 태연하게 인사를 해올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쩐지 평소에 친밀하게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낼 것 같지는 않았다. 늘 다정하 게 웃고 있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냉정하게 딱 부러지는 데가 있 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가끔 내가 연락하면 되겠지. 설에, 생일에, 크리스마스 에. 그렇게 핑계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쯤 가벼워져,유리는 조용한 한숨 을 내쉰다. 그때였다.

“그런데.”

라디오라도 켜볼까,막 손을 뻗었을 때 링신루가 말문을 열었 다.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춘 유리는 그 손을


도로 거두며 잠 자코 링신루의 말을 기다렸다.

말을 꺼낸 링신루는 한동안 뒷말을 잇지 않았다.

약간 망설이는 눈치로 입을 다문 그는, 결국 그대로 아무 말도 안 할 모양이라고 유리가 짐작할 때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어딘지 조금 내키지 않는 둣, 느릿하게.
“페이랑 사이가 좋은 모양이더군요.”

“페이? 아아, 워낙 오래 알았으니까요.”

난데없이 페이 이야기라니, 뭔가 다른 말을 꺼내려다 말았나, 하고 유리는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나 상관없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리는 희미 하게 웃으며 순순히 링신루의
화제에 따라가 주었다.

“오래는 알았어도 만난 날수로만 따지면 그리 길지 않은데도, 요만한 꼬마 때부터 봐왔더니 속속들이 다 아는


느낌이에요. 게 다가 워낙 붙임성이 좋잖아요. 장난기가 많은 건 어릴 때도 그렇 더니 커서도 여전하고.”

장난을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상대에게도 싱글거리며 쿡쿡 찔러 대는 넉살까지 여전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링신루에게까지 가끔 장난을 걸곤 하던 모습이 생각나 유리는 웃었다.

흘끔, 링신루의 시선이 다가왔다. 그래요,하고 중얼거리는 목소 리가 왠지 떨떠름하다. 다시 잠깐 사이가 떴다.

“친한 건 좋은데 말입니다.”

미묘하게 느린 목소리는 기분 탓인지 날이 서 있는 것 같았지 만,곧 링신루는 한결 음색을 가볍게 올리며


투정하듯이 투덜거 렸다.

“꼭 그 상황에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해야겠어요? 그까짓 계약서, 다시 쓰면 되잖아요. 종신계약으로 다시 쓰면


되지, 뭐가 문제라 고 그놈한테 일일이 종신계약이 아니네,연 단위 계약이네 줄줄 다 말하고 있어요?”

유리는 멈칫했다. 거울에 비친 링신루는 여전히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그 차창에 유리가 아직 비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 ”

가벼운 투로 말은 하지만,아무래도 반쯤은 진심으로 그것 때문 에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 자존심 강한


청년이,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던 걸까.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링신루는 말해놓고서 금방 그 말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괜히 말을 해서 어린애 같은


속내를 드러냈 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혀 를 차더니 흘끔 유리를
쳐다보았다. 저도 억지스러운 성을 냈다 고 자각은 하는 눈치다.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을 젓는다.

“됐어요. 다음에 재계약할 때 그 부분은 종신으로 고쳐 쓰면 되 니까.”

“ 예?”

‘‘ ‘?”

그러나 말하기 무섭게 얼떨떨하게 반문하는 유리에게,링신루는 왜 그러냐는 듯 도리어 어리둥절하게 마주본다.
유리는 자신이 혹시 뭔가 잘못 이해한 걸까 속으로 고개를 기웃하며 링신루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저는 종신계약은 안 합니다.”


늘 그랬다. 앞으로 몇 년,혹은 몇십 년이나 더 계약 갱신을 해 종신계약에 가깝도록 오래 함께 지낼 수도
있겠지만一실제로 T&R 에서도 십여 _년에 가까운 시간을 일했지만一계약 자체는 그 리 길게 잡지 않았다.
여태껏도 길어야 2, 3 년, 계약 내용상 필연 적으로 계약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에만 그렇게 계약을 했
었다.

링신루는 담담하게 잘라 말하는 유리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 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왜요? 조건은 다른 데보다 물론 잘해 줄 거예요. 보수가 마음 에 걸린다면,해마다 시세를 반영해서 변동


지불한다는 조건을 붙여도 괜찮아요.”

“아니오, 보수나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거랑 상관없이, 저 는 종신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유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링신루의 침묵이 조금 더 길어졌다.

한동안 뚫어져라 유리를 쳐다보던 그는,“왜요?”라고만 묻는다.

유리는 오히려 그 물음이 이상했다.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입을


연다.

“저는 앞으로의 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어질 지, 무엇을 하고 싶어질지. 언제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고 싶 은 곳이 생기면 떠나고 싶으니까요.”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생각도 안 했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들어선 안 되 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일순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 전했나 고개를 기웃한 유리는, 어 쩌면 오해를 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곧 손을 저었다.

“아니, 하지만 물론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대로 가버리겠다 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계약 기간이


끝나면——

“가겠다고요?”

유리의 말을 가로채듯,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링신루가 도중에 불쑥 말을 꺼내었다. 낮은 목소리가 어딘지
싸늘하다. 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요,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으로서는 장기적으로 가고 싶은 데가 없어서,딱히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재계약은 하 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링신루가 가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면 유리가 그 를 보좌하는 것보다는, 보다 그쪽 일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그의 옆에 붙는 편이 낫다. 적어도 유리는 아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도 링신루 역시 이미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유리는 그가 자신과의 계약을
단기로 끝내 더라도 상관없다고 말속에 자신의 뜻을 담았다.

그러나,어쩌면 링신루는 그런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유리는 표정이라곤 씻은 듯 사라진


링신루를 바 라보며 생각했다.
“링신루 씨가 일하는 데에 있어 저보다 더 유효적절하게 도와 줄 수 있을一一

“그 생각, 지금 막 떠오른 게 아니죠.”

유리는 그에게 덧붙여 말하려 했지만, 도중에 말을 자르는 링신 루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조금도 온기가 없었 다.

“이미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게이블 씨는. 그렇지 않나요?”

나직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것 같다. 유 리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먼 미래까지는 알 수 없더라도 가까운 미래는 보통 미리 생각해두곤 하니까요.”

“그러면 게이블 씨는 벌써, 이번 계약을 마치면 돌아가겠다고 예정하고 있었던 거군요. 언제부터요?”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계약을 마치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예정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자신보다는 보다 적 합한 사람과 계약하는 편이 링신루에게 있어 나을 테니 자신과 재계약을 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재계약은 할 수 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더 적합한 사람과 계약을 한다 면 굳이
자신과도 계약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낭비가 될 테니까.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유리는 고민에 잠 겨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묵묵히 입을
열지 않는 유리 를 보며,링신루의 얼굴은 조금씩 차갑게 굳어갔다.

“저보다 더욱 적절하게 링신루 씨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게 나을 겁니다.”

결국 유리는 고민 끝에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납득하기 쉬운 말일 터였다.

링신루는 유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래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있던 그는, 그러나
차가운 얼굴 그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이해가 안 가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며,그는 유리를 노려보았다.

“계약 기간 동안 내가 뭘 잘못했나요? 일이 마음에 안 들었어 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은,제가 얻는 대가에 비해 지나치 게 편했지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여태 링신루가 그런 부분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던 눈치인 게 몹시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았다. 노려본다고 하는 게 더 나을 눈으로.

그리고 짤막한 침묵 끝에.


“내가, ——내 옆에 있어서,좋은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확인하듯이 덧붙이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이라는 관계에서 유리가 자신보다 약자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는 그 오만한 물음 앞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에 있어서. ——좋았다.

예쁘고,화사하고,사랑스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유리는 그의 옆에 있어서 좋았고, 그에게서 떠나려는


생각은 한 적이 없 었다. 그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미리 가 슴속에 새겨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게 링신루 씨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유리는 냉정한 결론을 말했다. 그 자신에게 냉정한 결론이다.

좋아하는 건 자신이다. 떠나는 것도一만일 떠나게 된다면 말이 지만一자신이다. 그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질 것도,
우울해질 것도 자신이다.

그러나 동시어 1, 그가 너그러운 은혜처럼 베풀어주려 하는 계약 의 갱신 여부를一갱신 기간 4 一선택하는 것 또한


자신이었다.

링신루는 얼어붙은 듯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새카만 눈은 뚫 어질 듯 유리를 바라본다. 혹여 그 안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 숨 겨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피기라도 하는 듯.

그런 링신루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묵묵히 마주보던 유리 는,어느 순간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 얼거린다.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링신루 씨가 화를 낼 이유는 아무 리 생각해도 없는데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일을 잘 했던가요? 별로 뭔가 일이랄 만한 걸 한 기억도 없는데, 하고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가 왜 화를 내는지, 어째서 자신이 그의 분노를 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일에
대해一계약을 마칠지,새로운 사람 과 계약하게 될지,그런 것들에 대해 유리가 홀로 멋대로 짐작하 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링신루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 카닿게 가라앉은 눈은 시선이 고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를 바 라보았다. 그것은 노려본다고 하는 편이 옳을, 창백한 눈길이었 다.

“그래요.”

이윽고 링신루가 말문을 열었다. 새카닿게 탄 그의 눈과 대조적 으로 얼음이 서릴 듯이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다는 사람을 붙잡을 생각은 없으니까,기간이 다 되기 전에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겠네요. 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

움칫,운전대를 잡은 유리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링신루는 듣는 사람을 얼려버릴 것처럼 싸늘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대로 차창 쪽으로 몸을 틀어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집으로 도착할 때까지 그는 유리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수영? 가서 하고 와요. 난 내키면 갈 테니까.’

짤막하게 그 말만 한 링신루는 다시 책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돌리곤 시선을 주지 않았다.

별 일이 없거나 한가로운 저녁이면 유리는 으레 풀에 가서 저 녁 수영을 즐기곤 했고,그럴 때면 링신루도一그가


수영을 다시 시작한 이래一거의 함께 가곤 했다.

그러나 요 얼마간 그가 유리와 함께 풀에 간 적은 손꼽을 정도 였다. 그나마 새벽에는 곧잘 같이 가지만,


가더라도 거의 아무런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운동을 하듯이 수영만 하고 돌아오곤 했 다.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예,그럼,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 나 홀로 풀에 온 유리는 이미 몇 바퀴나 풀


아래에 가라앉아 유 영을 하고 있었다. 간간이 고래처럼 호흡을 하러 수면으로 올라 와 잠깐씩 머물긴 했지만
이내 다시 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리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저녁에 샤오췬이 막내 할머님一링신루의 어머니一의 부탁으로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러 들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금방 돌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늘은 물에 오지 않는 게 나았을까.

어찐지 물속에 한참을 잠겨 있어도 여느 때와는 달리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비지 않는
탓이다.

아니,오늘만 그런 건 아니다. 요 얼마간은 새벽마다 와서 물에 잠기더라도 나갈 때까지 마음이 썩 개운해지지


않았다. 그 이유 는 유리 본인도 알고 있었다.

156 Yuuji

아까부터 유리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링신루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하고.

이번 주부터 링신루는 일을 익히러 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숙부 는 역시나 은퇴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라, 셋째


숙부 아래에서 일 을 익히게 되었다.

링탕윈이 말했던 대로 ‘일이 좀 많은 회사’에 나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일이 ‘좀 지나치게’


많은 회사이며, 법률이나 도덕률과는 동떨어진 일이 상식처럼 흔하게 흘러간다는 것이 다 를 뿐이었다.

숙부의 곁붙이처럼 그와 함께 다니며 그가 하는 일을 어깨 너 머로 보는 게 링신루의 일이었다. 날마다 숙부가


넘겨주는 지난 과거 수십 해의 기록들을 매일 밤마다 읽고 외우고 익혀야 했고, 낮에는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 을 태연하게 저버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을 섞어야 했다.

그러나 링신루는, 비록 그들과 어울리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 았지만,놀랄 만큼 적응을 잘 하고 있었다.


유쾌하고 즐거운 얼굴 로 그들을 대하며,숙부가 넘겨주는 과제들은 그리 오래 걸리지 도 않아 쉽게 해치워버린다.

억지로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낮에는 그들의 앞에서 웃으 며 밤에는 힘들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여들고 있었다. 염려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던 유리의 걱정이
허무하게 스러질 만큼.
‘뭘 그렇게 봐요. 나 원래 이런 인간인 건 알고 있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설렁설렁 걸어 들어온 철모르고 눈엣가시인 조카를 끓는 물에 머리부터 처박아 혼비백산을 시켜줄
요량이었던지 당장 첫날부터 링신루에게 끔찍한 폭력이 태연하게 자행되는 사업의 뒷면을 들이대어 보여주었던
셋째 숙부의 예상을 멋지 게 배반하고,평연하고 냉정한 눈으로 그 시종을 지켜본 뒤

‘어느 선까지가 탈 없이 무마될 수 있는 한계선입니까?’라고 되물었던 링신루는,그날 저녁 느지막이 회사에서


나와 맨션으로 돌아오면서 유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얼굴로 보지 말라고.

UNHRDO 에서 행정을 거들었던 일 따위는 없었던 둣,마치 처 음부터 이쪽이 적성이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일에 젖었다. 일의 양이 아무리 링신루라도 때로 벅찰 만큼 많긴 했지 만,적어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됐다. 유리는 그렇게 납득하고 링신루를 따라 다 녔다.

그리고 그동안 내도록, 낮 동안 숙부나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내비치는 웃음 이외에는
유리는 링신루가 웃는 걸 보지 못했다.

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링신루는 분명 유리에게 심사가 틀어져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굳이 손꼽아 볼 것도 없다. 그날, 본가에서
돌아왔던 밤부터다.

물밑에 잠겨 느리게 유영해다니던 유리는 산소가 필요해진 고 래처럼 수면으로 올라왔다. 아래에서 불쑥 솟아올라
긴 숨을 내 쉬자,설마 그 아래에 그토록 오래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풀 옆 가까운 곳의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쿨럭, 하고 물을 뱉을 뻔했다.

유리는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곤 유유히 헤엄을 쳤다.

확실히 저녁 시간에는 풀에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고 해봐야 서넛 정도였지만 늘 아무도 없는 새벽에
물에 잠기는 데 에 익숙해 있는 유리는 서넛조차 많은 듯 느껴졌다.

그만 돌아갈까.

풀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혼잡한一서넛을 두 고 사치스러운 말인지도 모르겠지만一곳에서 물에


잠기는 건 그 리 즐기지 않았다.

한 바퀴 정도만 더 돌고 돌아갈까, 아니면 이대로 나갈까, 유리가 벽시계를 쳐다보던 때였다.

그때 막 샤워장에서 풀로 들어오는 링신루가 눈에 들어왔다. 유 리가 집에서 나간 뒤 뒤늦게야 수영을 할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 다.

오래 둘러보기도 전에 이내 유리를 발견한 링신루는, 자신을 바 라보고 있는 유리와 마주치자 반사적인 듯 얼핏


눈살을 찌푸렸 다. 인사 대신 막 손을 들던 유리는 천천히 그 손을 도로 내린다.

시선을 돌린 링신루는 유리에게 알은체도 하지 않고 풀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운동을 하러 온 여느 사람처럼


레일을 따라 헤엄 을 치기 시작한다. 유리에게 말을 걸거나 그와 이야기를 나눌 생 각은 별로 없는 눈치였다.
유리는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져가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나가려던 마음을 접고 다시 물속에 잠겼다. 가장
수심이 깊은 곳 이라고 해봐야 깊이가 얼마 되지 않지만, 바닥까지 바싹 내려가 붙는다. 저 깊은 곳에서
무엇에도一어떤 고민이나 생각, 감정에도 一방해받지 않고 유유히 숨 쉬는 심해어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유리가 타인에게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덤덤한 편이라 지만, 이 상황은 아무래도 무거웠다. 이미 몇
날이 넘도록 이어지 고 있는, 링신루에게 무시에 가까운 냉대를 받고 있는 상황은.

그렇다고 아예 말조차 걸지 않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낮에 링신 루가 일을 익히기 위해 숙부와 함께 다니는


동안에도 유리 역시 동행을 하기 때문에 전적인 무시는 무리였다. 그러나 필요 최소 한의 말만 하면서,시선도
거의 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제법 자주 쳐다보는지도 몰랐다. 가끔 시선이 느껴 져 돌아보면 링신루가 유리를 노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 으니.

최근에 그나마 말이라고 섞은게 언제였더라.

유리는 물속에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을 뒤적였다. 물속에서는 사고마저 느려지는 둣, 잠시 생각을 되짚어본


다음에야 기억이났다.

말을 섞었디——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매서운 감정이 동반되었 던 일이 며칠 전에 있긴 했다.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날이 었다.

평소처럼 돌아오자마자 링신루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유리가 별로 손댈 것 없는 집을 적당히 치우고 그날 있었던


일의 자료와 링신루가 밤새 익혀가야 할 기록들을 정리해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놓던 참이었다.

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링탕윈이었다.

『어때, 좀 잘 지내고 있나? 신루는?』

‘지금 욕실에 있습니다. 볼일이 있으시면 전해드릴까요,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하라고 말씀을 드릴까요.’

유리는 그때 막 물소리가 그치는 욕실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 했다. 이제 다 씻은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면


나오겠다.

그러나 링탕윈은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전화를 한 건 아닌 모 양이었다. 아니, 그럴 건 없어,라고 선선히
말한다.

『조금 전에 셋째 숙부님이 아버지를 뵈러 다녀가셨거든. 그 결 에 나도 인사 정도나 나눴는데, 그러고 나니 좀


어떤가 생각이 나서.』

안부 차 전화를 했다고 하며,링탕윈은 ‘너도 잘 지내고 있겠 지?’라고 뒤늦게 유리의 안부도 같이 묻는다.

링탕윈과는 그 이후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문제가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본가에서 그와 마주치고 돌아왔던 다음날 유리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식으로 사과를 했고, 링탕윈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아니,나는 네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되어서 나름대로 흥미로 웠다니까. 뭐 하지만,그래, 이렇게 다시 전화까지
해서 말할 정 도라니 마음에 걸린 모양인데,잊어버리도록 하지.

이후로는 더 신경 쓰지 마. 실수 없는 사람과 실수 없는 관계도 매력 없잖나.』라고 선선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간결하게 결론을 내리며.링탕윈은 그렇게 터놓고 말한 일에 대해서 나중까지 속에 품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유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링탕윈과의 사소한 마찰一마찰이라고 부르기에는 미묘 했지만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번이 처음 통화하는 것이었다.

유리는 동생의 안부를 묻는 링탕윈에게 ‘별 문제는 없습니다.’라 고 대답했다.

‘일도,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많긴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닌 것 같고요. 걱정할 건 현재로서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내가 말했었잖아. 신루라면 그리 염려할 것 없을 거 라고. 뭐 앞으로도 조금씩 더 궂은 꼴들을 많이


봐야겠지만,괜찮 을 거다. 셋째 숙부님도 ‘생각보다는 쓸 만하다. 할 만큼은 하고 있어’라고 칭찬을 하고
가시더군.』

그 까다로운 양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아주 대단한 칭찬이지, 하고 링탕윈은 쓰게 웃는 기척이었다. 유리는


다행이군요,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링신루가 앞으로 한동안 더불어 다니게 될 셋째 숙부는, 평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긴 손대고 있는


일이 워낙 흉험해 아래에 둔 사람들도 거의 인간백정과 비슷한 격이다 보니 평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눈매가 독살 맞고 꼬장꼬장한 노인 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셋째 숙부는 링휘렁이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던 터라, 그의 아래에서 일하면 쉽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쉽지 않아, 낮 동안 링신루는
어지간히 일을 잘 해치워도 좋은 소리 한 마디 듣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내색 없 이一그래봐야
신경도 안 쓴다는 얼굴로_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숙부가 떠넘기는 일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 숙부가 그래도 모르는 곳에서는 한두 마디 칭찬이나마 한다 니, 유리는 안도를 느꼈다. 무작정 터무니없이
사람을 혹사시키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래,너에 대해서도 말하고 가시더군. ‘그놈一신루 인복도 있는지 아랫사람을 잘 뒀더라’고. 너도 덩달아
혹사당하느라 힘들 텐데 잘 버티고 있나 보더군.』

‘아니오,저는 그렇게 혹사랄 것도 없었습니다.’

유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링신루는 본인이 직접 하 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밑처리까지 어지간해서는
유리에게 맡기 지 않고 스스로 했다. ‘일을 처음 배울 때에는 글자 기재 하나까 지 다 내 손으로 해가면서 익혀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요.’라고, 의외로 매우 정석적인 말을 하면서.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본 인의 손을 거쳐야 할 중요한 일들만 빠짐없이 짚고
넘어가며 부 수적인 일들은 개략만 파악하는 정도의 요령은 부릴 거라고 생각 했는데, 뜻밖일 정도로 성실했다.

그래봐야 워낙에 일의 양이 많다 보니,그중 아주 일부라고 할 만큼만 유리가 맡아봐도 만만치 않은 양이었지만.


……하지만.

‘그러고 보니 링탕윈 씨,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유리는 그러잖아도 링탕윈에게 연락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일이 문득 떠올라 입을 열었다. 링탕윈은 r 부탁?』하고 의외라 는 듯이 되물었지만 『그래,말해
봐.』라고 선선히 말했다.
‘어쩌면 이미 링신루 씨가 말씀을 드렸는지도 모르겠는데,사람 을 좀 알아봐 주세요.’

『사람? 무슨 사람?』

‘저 대신 링신루 씨의 일을 보좌하면서 도와줄 만한 사람이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버티면서 일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좋 을 텐데요.’

『뭐? 너는——, 아아, 계약 기간이 다 되어가나 보군. 왜, 재계

162 Yuuj 丄

약은 안 하기로 했나?』

링탕윈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괜찮은 사람 물색하는 게 쉬 운 듯하면서도 은근히 쉽지 않아서 말이야, 하고


마뜩찮은 투로 중얼거린다.

링신루의 일을 거들면서 유리는 생각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사업을 거들어나가는 데에는 역시 자신보다 더 적합한 보좌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직은 괜찮다. 링신루가 셋째 숙부의 아래에서 시키는 일만 하 면서 지시를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유리가 감당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가 자주적인 권한을 가지고 본인의 일의 영역을 넓히게
되면, 보다 전문적으로 조언을 하면 서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옆에 필요하게 될 터였다.

‘결정을 하는 건 링신루 씨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을 몇 추려서 좀 알려주세요.’

『그래, 내일 나가서 한번 알아는 보지. 하지만 입맛에 딱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시간은 좀


걸린다고 생각하 는 게 나을 거야.』

‘예. 저도 당장 내일 그만둘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시간이 걸 려서라도 괜찮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


편이 좋겠지요.’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하고 유리가 막 인사를 하던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광一!!,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렸다.

움칫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보자,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가 욕 실 문을 세게 걷어찬 듯 벽에 맞은 반동으로 다시


기울어지는 문 사이에 링신루가 서 있었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 지는 아래로 새카닿게 번들거리는 눈이 유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잘 부탁해요.’
불쑥 내뱉는 거친 말에 유리는 일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 고 그를 망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링신루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와 유리의 손에서 수화기를 낚아채었다.

‘여보세요. ……예,큰형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오, 그 러실 것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나중에 달리 부탁드릴 일이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예,그럼 쉬세요.’

사무적이고 냉랭한 말투로 짧은 통화를 마친 링신루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중에 수화기를 빼앗긴 손을 여전히 허공에 띄운 채 그 옆에

서 있던 유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침묵하다가 흘끔 시선

을 옆으로 돌리는 링신루를 보고 움찔했다.

링신루의 눈매가 섬뜩할 정도로 사나웠다. 등골이 차가워진다.

그대로 산 채로 뜯어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으로 유리를 쳐

다보던 링신루는, 이윽고 나직이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게이블 씨가 참견하지 마세요.’

.. ,

‘어디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추려서 목록을 만들어 오든 말든, 그 목록으로 온 집안을 뒤덮든 말든 나는 내가
직접 고른 사람 아니면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을 거니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요. 시간 낭비예요.’

‘……,예.’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시 퍼렇게 날이 선 시선으로 잡아먹을 듯 유리를


노려보던 링신루가 고개를 돌려버렸던 것이다.

하지만,구하려면 빨리 구하는 편이 나을 텐데. 함께 일을 해나 가려면 조금이라도 일찍 일 내용을 접해가는 게


낫다.

유리는 ‘가능하면 빨리 구하세요.’라는 말을 하는 게 나을까 싶 었지만, 어찐지 지금 상황에서는 그 말을 하면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이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그 판단이 현명 했던 둣,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링신루가 갑자기 분에 받친 듯 욕설을 지껄이며


의자를 거칠게 픽 걷어차는 게 보였다.

난처한데…….

유리는 턱을 문지르며 난감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 얼마간 링신루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부분이 그러냐고 물으면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옆에서 보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뭔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파랗게 날이 선 칼이 어느 방향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듯한.

그러나, 딱히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하려니 그것도 어려웠다. 사람들을 대하면서 일을 처리해나갈 때의


링신루의 모 습을 보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냉정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갔다. 일을 그르치거나 사람
사이에서 실수를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그럴 것 같은 느낌도 안 들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끔, 주로 집에서 유리와만 함께 있을 때 문 득문득 내보이는 불안정한 면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갑자기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에게, 피곤한 듯 관자놀이 를 주무르며 소파에 앉아 있던


링신루가 짤막하게 말 했다. 유리가 쳐다보자 흘끔 눈동자만 돌려 싸늘한 시선을 주며 한 번 더 말한다.

‘눈. 피곤해요.’

유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눈 마사지를 하라는 말이다.

얼마 전부터 유리에게 거의 말도 걸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 링신루였지만, 일을 시작하고 피곤하긴 한지 밤마다


유리에게 눈 을 문지르라고 시키는 건 거르지 않았다.

곧 유리가 더운 수건과 물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 앉자 링신루 는 당연한 듯이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유리는 여느 때와 같이 그의 눈 위에 더운 수건을 올린다.

"..........."

".........."

...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유리는 조용히 수건 위로 링신루의 눈이며 관자놀이, 눈 주위를 문질렀고, 링신루는 점차 느려지는 숭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정말로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의 시점은 명확했다. 종신계약의 이야기가 나 왔던


뒤부터다. 그러니 링신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라는 걸 유리는 알고 있었다.

곤란해

유리는 다시 속으로 중얼거리고 만다. 종신계약은 애초에 생각지도 않고, 그 부분에 대해선 협상하거 나 재고할
여지가 전혀 없다.

게다가 사실은 그 자쳬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링신루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예게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생각지 않고.


냄새....

그때, 링신루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의 눈을 문지르던 유리는 멈칫했지만 곧 담담히 물었다. ‘그 냄새입니까? 물 냄새.’ 링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유리의 멱살을 잡고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고 휘청 몸이 휘어진 유리의 가슴팍에 코를 묻는다.

깊이,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듯 가슴 구석구석 낱낱이 코를 가져가며 숨을 들이쉬는 링신루를, 유리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링신루는 갑자기 울컥 초조해진 사람처럼 유리의 셔츠를 뜯었다 · 단추를 풀지도 않고 그대로 옷 여밈을 잡아당겨
위에서 몇개나 되는 단추를 뜯어버린 링신루는 드러낸 맨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살갗 위로 바로 닿는 코, 뺨, 숨결에 유리는 언뜻 몸을 움츠렸지만 그대로 링신루에게 가슴팍을 내어준다.


목덜미, 쇄골, 가슴 아래, 겨드랑이, 어디로든 느리게 얼굴을 옮기며 냄새를 맡던 링신루는 유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더욱

바싹 코를 들이댄다. 얼굴 전쳬를 묻어버릴 듯.

몸 위로 간지럽게 그의 코가, 뺨이, 입술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유리의 가슴을 뺨으로 쓸던 링신루는 볼록하게 솟아 있는 유두를 잠시 냄새 맡다가, 그대로
깨문다.

.'

아파서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움츠렸지만 허리를 단단히 부둥 켜안은 팔에는 힘이 더욱 들어가 물러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이 개미있었는지-혹은 심술이 나던 차에 마침 잘 됐다 싶었 는지-잘근잘근, 더 세게 깨문다.

결국 견디지 못한 유리가 ‘아픕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나서야 유두를 깨물던 입에서 아주 약간 힘이


풀렸다.

‘물 냄새가 아니었나 봐요. 지금은, 이렇게나 냄새를 맡아도 전혀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아. 오히려 더
무거워진 것 같아요.

훨씬 더.’ 아니면 내 마음 속에 담긴 건 소금이 아니라 솜이라도 됐던 건가? 하고 비아냥처럼 웃으면서,


링신루는 일그러진 입매를 꾹 다 물었다.

그대로 한동안 더 유리의 가슴을 입술로, 코로 마구 문지르며 지분거리던 링신루는 문득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내가 좋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악 다문 잇새로 내뱉는 말은 간신히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듯 이 낮았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도, 무시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얼마 있지 않아 떠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거예요?’
.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 간다는 사람 안 잡을 테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돌아갈 수 있어서 흘가분한 거잖아요,


사실은. , 다시 울컥 치민 듯 이번에는 쇄골을 깨문다. 몸이 깜짝 튀어오

를 정도로 아프게 꽉,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처는 나지 않을 정도로.

유리는 움찔, 얼결에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뻔한 입을 다물었다 가 그럭저럭 아픔이 가시자 말했다.

‘이번 계약이 만료되면 돌아가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링신루 씨가 원한다면 재계약을 할 수도 있겠지요.


저도 기꺼이 그렇게 할 의사가 있고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멀리 봐서 당신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계약을 하자고 하면, 유리는 기꺼이 응할 터였다 · 그를 보좌해내려면 자신의 힘에 부칠
텐데, 그가 알게 모 르게 불편해질 텐데 염려하면서도, 일단은 계약을 할 터였다.

그러다가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 더 이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가 원하는 수준까지 보좌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유리 쪽에서 계약을 거절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링신루가 원하면 유리는 재계약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이고, 링신루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링신루는 침묵했다.

유리의 가슴 갚이 얼굴을 묻고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 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더 깊이, 더


가까이 뺨을 문지르며 좀 더 파고들려는 기척만 느껴졌을 뿐이다.

‘게이블 씨. 정말로 나 좋아하는 것 맞아요?’

이윽고 품속에 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의 무 게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나직이 억눌린 목소리다.

‘예, 좋아합니다.’

유리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순순 히 대답한다.


링신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의 품에 얼굴을 묻 은 그대로 몇 번이나 천천히 갚은 숨을 쉰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비틀린 어조로 흘러나온다. 거네요.’

마치 비웃음처럼, 혹은 질책하는 것처럼 중얼거린 링신루는 그 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서울 만큼 어두운 눈이


유리를 올려다보 았다.

유리는 그를 마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연다 ·


‘종종 연락할 생각입니다. 링신루 씨가 받아준다면요. 새해가 오거나, 생일을 맞거나, 연말이 다가오거나,
혹은 가끔은 별다른 용 건이 없을 때라도요. 나중에라도. 시간이 많이 지나도 ·’

링탕윈과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막상 만날 수 있는 날은 몇 년 에 한 번쯤이나 되도록 서로가 바빠질 날이


오더라도. 유리는 계 속 이 사랑스러운 사람과 알아가고 싶었다.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어느 순간 유리를 획 밀쳐버리곤 벌떡 일어났다. 일그러진 눈으로 유리를 노려보면서,


그는 거칠게 내뱉는다.

‘그런 싱거운 풀 같은 건 당신이나 씹어요. 나는 싫어요 · -아니, 당신도 그 따위 건 뱉어버려요. 빌어먹을


풀 따위는 다 태워 버리고 싶어쳤어.’

이를 갈며 외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칠게 문을 닫고 들어간 그는, 결국 그날 밤 내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

줄곧 그랬다. 줄곧 그런 식으로, 링신루는 유리에게 시커먼 분 노가 일렁이는 시선과 얼음처럼 차가운 말마디만
던지고 있었다 ·

‘그래도, 날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떠날 수 있다는

유리는 무거운 추를 단 고래처럼 느릿느릿 수먼으로 올라가며 한숨을 쉬었다. 공기방울이 보르르르 피어오른다.

왠지 이대로는 설령 재계약을 한다 하더라도 링신루는 계속 사 나운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


뭔가 단단히 틀 어져버렸다.

" ,,

“너무하네요, 유리 삼촌. 사람이 온다고 했는데도 집을 비워두 다니 · 어쩜 이렇게 문전박대를 할 수가 있어요?


심지어 전화도 안 받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며 깊은 숨을 들이쉬던 유리는, 그러나 물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대뜸 머리 위로 쏟아지며


챙챙대는 목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풀 밖, 유리가 막 솟아오른 수면에서 몇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쪽빛 원피스를 입은 샤오췬이 한 손에


큼직한 상자를 싼 보퉁이를 들고 서 있었다.

“샤오췬. 언제 왔어?”

유리는 그녀에게로 헤엄쳐가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풀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갔는지 저쪽에서 한


명만 유유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링신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먼저

돌아갔거나 혹은 물속에 잠겨 유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 밖으로 훌쩍 나간 유리는 의자 위에 걸쳐두었던 수건을 집어 들다가 뒤늦게야 그녀가 들고 있던 묵직한 짐을
깨닫곤 얼른 받아 들어 의자에 내려놓는다.

“송이인데, 막내 할머님이 신선할 때 얼른 먹으래요. 생으로 먹어도 되고 익혀 먹어도 되고. 좋은 건가 봐요.


들고 오는데 온 차 에 송이 냄새가 가득 차던데요.”

샤오췬은 보퉁이 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아아, 맛있겠다, 하고 냄새를 깊이 들이쉬는 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웃었다.

“저녁을 먹고 출발하면 좀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그런데 혹시 밥 안 먹었어?”

“예, 아직 안 먹었어요.”

샤오췬이 오리라고 예상했던 때보다는 빠르고, 식사를 안 했다

기에는 늦은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쳐다보던 유리는 “그래? 그럼,”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집에 내려가면
뭔가 먹을거리가 있 을 터였다.

아니면 그녀가 들고 온 이 송이를-주인인 링신루의 허락은 받아야겠지만-그녀가 말한 대로 바로 생으로 먹어도


될 거다.

그러나 샤오췬은 유리가 할 말을 예상했는지 먼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 금방 가봐야 해요. 친구랑


심야영화 보러 가기로 해서,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끼니 거르고 얼른 들른 거거든요.”

샤오췬은 시계를 보먼서, 엄청 깐깐한 친구라서 늦으면 영화표 도 식사도 제가 사야 한다고요, 라고 종알거렸다.

“늦을까 봐 얼마나 밟았는지 몰라요. 덕분에 이렇게 잠깐 삼촌 이랑 수다 떨 만큼은 여유가 남아서 좋지만,
이러다 나중에 속도위반 딱지 날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영화표와 식사보다 그게 더 돈 나가는 거 아니야?”

유리는 픽 웃으며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몇 층 아래가 집이니 공동샤워장을 이용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물기만
닦고 집으로 돌아가 씻곤 했다.

“잠깐 들러서 차라도 마시고 가.”

“그만큼은 여유가 안 돼요. 삼촌 몸 닦는 거 기다려서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갈 정도밖엔. 우와아, 알고는


있었지만 유 리 삼촌 몸 좋구나- . 만져 봐도 돼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을 가까이 내미는 곱고 예쁜 아가씨를, 유리는 순간 움찔해서 쳐다보았다. 무심한 얼굴


속으로 당황감이 스쳐갔다.

누가 몸을 좀 만진들 수줍어 움츠러들 유리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예쁘고 천진한 얼굴을 한 외간처녀가 대뜸
몸 좀 만져 봐 도 되냐며 손을 뻗자 당황하고 말았다.

"--어디를.”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어렴풋한 긴장이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샤오췬이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아이, 삼촌도 참, 제가 만져 봐야 어딜 만지겠어요, 그냥 뭐 팔 뚝이라든가, 어깨라든가, 그런 데지. --


와아. 우리 삼촌 몸매 끝 내준다. 인기 많겠다.”

말꼬리를 길게 늘여 장난스럽게 감탄하며 유리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는 샤오췬을 내려다보면서, 유리는
열없이 웃고 말았다.

“고맙구나. 그래, 그럼 슬슬 내려가자. 그런데

"
링신루는 정말로 먼저 내려간 건가, 하고 뒤를 돌아보던 는, 멈칫했다.

풀 측면 사이드에서 사다리를 짚고 올라오고 있던 링신루와 눈 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와 샤오췬을


차례로 쳐다본

그는 서늘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얼굴의 물기를 훔쳐낸다. 가볍게 목덜미 따위를 주무르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유 리의 시선을 따라간 샤오췬이 뒤늦게 발견했다.

“어머, 막내 삼촌? 막내 삼촌도 여기 있었어요? 웬일이야, 막내 삼촌은 수영 안 하잖아요?”

반갑게 외치면서 활짝 웃는 그녀를,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선 링신루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늘 의례적인


웃음이 떠올라 있곤한 얼굴은 냉랭했다.

흘끔, 어느 결에 유리의 팔에 올려놓고 있는 샤오췬의 손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잠시 그 손에서 떠나지 았다.

곧 아무렇지 않게 링신루에게 돌아선 그녀는 놀랐다는 듯 환하 게 웃으며 발랄하게 말을 건다.

“바다고 수영장이고 물에는 안 들어간다고 그러더니, 이젠 수영 도 하는 거예요? 그럼 올여름에 같이 바다에


놀러 가면 되겠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수영 안 좋아한다면서? 여태 계속 같이 물놀이 가자고 해도
싫다더니.”

이럴 거면 작년에 같이 보라보라 갔음 좋았을 걸, 하고 샤오췬 은 아쉽다는 듯이 종알거린다.

" 안 가. 너랑은.” 링신루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흘끔 유리를 노려본 그는 의자 로 걸어가 마른 수건을


집어 든다. 왜요, 하고 샤오췬이 고개를 기웃하자 돌아보지도 않고 내뱉는다.

“아무한테나 몸 좋다고 만져대는 천박한 여자랑 같은 물에 들 어가기 싫어. 물속예서 정신 산란해져서 빠져죽기
싫거든.”

샤오췬이 입을 다물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유리도 저도 모르게 움칫 움직임을 멈춘다. 농담처럼 말하는 모욕을
듣고, 샤오췬은 꼼짝도 않고 잠시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깜박깜박 눈을 깜박이는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분노와 함께 핏 기가 올랐다. 이를 악물고 링신루를 노려보던
그녀는 곧 생긋 웃 었다.
“아이, 막내 삼촌도. 그 정도로 빠져죽을 만큼 수영 솜씨가 형편없으면 수영장에도 안 들어가야지, 걱정돼서
어떻게 들어가요? 빠져죽을까 봐 수영장에서 연습하다가 죽으면 그게 더 비참하잖 아?”

" ,,

이번에도 유리는 움칫하며 샤오췬을 보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링신루가 흘끔 표정 없이 샤오췬을 돌아본다.
그 정도 말에 도발될 만큼 얄팍하지는 않은 링신루였지만, 기분이 언짢은 참이 라 짜증스러워진 듯했다.

샤오췬에게 대꾸를 할까 말까하는 눈치 이던 링신루는 이내 그조차 짜증스러워진 듯 말없이 도로 등을 돌리고 만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모욕에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샤오췬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링신루의 등덜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나 가봐야 하는 시각을 알리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곤 쯧, 혀를 차 곤 최대한 밉살스럽게 이죽거린다.

“하긴, 유리 삼촌이 있으니까 막내 삼촌이 빠지더라도 뭐, 이번에도 죽기 전에 구해주겠죠. 그래도 옛날에는


어린애니까 구해줬 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다 큰 어른인데, 삼촌 구한다고 유리 삼촌 까지 위험해지면 그건 또
무슨 민폐람. --

어디서 뺨 맞고 와서 남한테 화풀이할 시간 있으면 손발이라도 한 번 더 저으면서 열 심히 연습해요, 삼촌.”

열심히 연습해요, 삼촌, 에 강세를 줘서 말한 샤오췬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가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유리를 본 샤오췬은 살짝 눈에서 힘을 풀고는

“그럼 나중에 봐요, 유리 삼촌. 나 먼저 갈게요.”라고, 링신루에게와는 대조적으로 상냥하게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선 걸음 을 돌렸다.

또각또각 젖은 바닥의 물을 튀기며 걸어가는 구두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었지만, 그 소리는 유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가 풀 바깥으로 사라지고, 마침 수영을 마치고 나온 마지막 사람이 샤워장으로 들어가는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리는 그 자리에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어붙은 듯, 꼼짝 도 하지 않고, 눈만 아주 가끔 끔벅.


이상하다. 조금 추웠다.

실내풀인데다 추위는 별로 안 타는 쳬질이었고 몸에서 물기도 다 닦았는데, 어쩐지 추운 기분이 들었다.


링신루를 뒤에 두고 있는 등덜미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지금 이 순간은 절대로 돌아보고싶지 않았지만,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고요하게 흐르는 정적이 몹시 마음에 걸려서

결국은 조금씩 조금씩 몸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녹슬어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겨우 몸을 반쯤 돌려 돌아본 유리는, 거기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링신루를


보았다.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응 ? 하고, 저 여자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던지고


나가버렸을까

이상하다는 얼굴로 유리를 본다.

" ll
껌벅이는 눈은, 낮잠을 자다가 막 깨어나 오늘이 며칠이고 여기 가 어딘지 분간을 못하는 어린애 같았다. 뭔지
모를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링신루는 그때, 귀에 들어온 그녀의 말들보다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쏠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꼼짝도 안 하더니 삐걱삐걱 어색 하게 몸을 돌려 자신의 눈치를 보듯이 흘끔 쳐다보는
유리의 기색에.

저 남자는 멀쩡히 잘 있다가 갑자기 왜 저런 얼굴로 날 쳐다볼 까, 꼭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그런 얼굴로


링신루는 의아하게 유리를 쳐다보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고개가 다른 방향으로 기우뚱 움직인다.

아차.
유리는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샤오췬이 나가든 말든,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태연한 얼굴을 했 어야 했다. 쟤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가는지


모르겠다는 얼굴 로 천연덕스럽게 눈을 껌벅이며, 저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친구 한테 꼼짝없이 영화표와 밥을
사야 할 건가 봐요,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어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아무렇지 않게 링신루를 돌아보며 ‘그만 돌아갈까요.’
라고 말하고 먼저 돌 아서 나가기라도 했어야 했다.

적어도 이렇게, 발등에 못이라도 박은 것처럼 얼어붙어선 움칫 움칫 돌아서 그의 눈치를 살피듯 흘끔거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되 었다.

봐. 역시. 샤오췬이 나갈 때까지만 해도 ‘쟤가 무슨 소리야?’라는 얼굴로 눈살만 찌푸리던 저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 보는 사이에 천천히 낯빛을 바꾸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 그만 돌아갈까요.”

유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말을 30 초쯤 더 빨리 했어야 한 다고 자신을 질책하며. 그리고 역시나, 25


초쯤 더 빨리 이랬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몇 걸음 가지 않아 뒤에서 조용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게이블 씨?”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하는 걸 저 남자가 봤을까 못 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여 느 때의 포커페이스를 얼굴 전면에 깔고서 “예?”하고 대답한다.

링신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를 보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평연한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면서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 다. 그 의자에는 조금 전 샤오췬이 가지고 왔던 상자가 놓여 있 었다.

" 이건 들고 가야죠.”

"

본인이 들고 가면 된다는 생각은 요만치도 안 하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가급적이면 링신루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상자만 똑바로 쳐다보며 다가간다.

커다랗고 묵직해 보이는 상자였지만 보기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아니 무거웠다고 해도 무게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다. 상자에서 두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링신루가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유리는 한 손으로 상자 보퉁이를 덜렁 집어 들고 다시 돌아섰다. 얼른 도로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에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

도로 서둘러 걸음을 떼어놓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덥석.

팔뚝을 잡는 손이 있었다. 정확하게 조금 전 샤오췬이 잡았던 그 자리를, 샤오췬보다 더 커다랗고 매끈한 손이


잡는다. 가볍게 손을 얹었던 샤오췬과는 달리, 팔을 빼려야 뺄 수 없도록 단단히.
“왜 혼자 가려고 그래요. 같이 가요.”

'' ,,

링신루가 여상하게 말했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저 웃음만 없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링신루는 심상하게 유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내디딘다.

유리의 팔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면서,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잡혀서 따라가다시피 걷는


유리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쳬육시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집으로 들 어갈 때까지, 향긋한 송이 향기와 침묵만이 그들과
함께했다.

그동안 줄곧 생각에 잠긴 듯 담담히 허공의 한곳을 쳐다보고 있던 링신루는, 말없이 주방으로 가 보퉁이를 푸는
유리의 뒤쪽 으로 벽에 기대어 서서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전에 잠깐 말했던 그 사드변태가 말이죠, 생각해 보면 큰형님

친구였어요.”

" ,,

“휴가를 맞아 가족들이랑 같이 놀러가는 자리에 동행해 갈 만 큼 친한 친구였거든요. 큰형님이랑 나이차가 제법


됐던 것 같긴하지만, 큰형님은 워낙 친구를 각계각층에 고루 두고 있으니까 좀 젊은 친구가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어요. 하지만 가족이랑

물놀이 가는데 같이 갈 만큼 허물없이 친한 사람은 별로 없는데 말이죠

보퉁이 매듭을 푸는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어찌나 단단히 졸라 묶어놨는지 손톱이 아프도록 매듭을 잡아당겨도
느슨해지지조차 않았다.

유리는 뒤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링신루의 말에서 주의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매듭이랑 씨름만 했다.

" 잘 안 풀려요?”

그때, 잠시 말을 멈추고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가 어깨 너머를 흘끔 넘겨다보더니 뒤로 다가왔다. 멈칫


움직임을 멈춘 유리의 뒤에 붙어선 링신루는 유리를 끌어안듯이 두 팔을 허리 양쪽으로

뻗어, 유리가 여태 붙들고 있던 매듭을 잡았다.

등에 가슴이 닿았다. 귓불에 숨결이 닿는다. 매듭을 뭐 이렇게 꽁꽁 묶었어, 하고 혀를 차면서도 살살 매듭 을


풀어가는 느릿한 손매는 짜증이 스미지 않고 여유로웠다. 그 러면서 링신루의 말은 이어졌다.

“내가 그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 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나서 대뜸 ‘그 물귀신 같은
놈, 물속에 처 박아서 영영 못 나오게 해버릴 테다.’라고 이를 갈며 말해버린 탓

에, 그때 이미 내 성격을 다 알고 있었던 큰형님이 누가 날 물속 에서 데려왔는지 말을 안 해줬거든요. 널


구해준 고마운 사람인 데 그러먼 안 되지, 하고 타이르먼서.”
" "

“그래서 내가 반성하고 생각을 고쳐먹은 척 방글거리면서 ‘날 구해주신 고마운 분한테 꼭 인사를 하고 싶은데
어느 분이세요/ 라고 물어봐도, 안 속더라고요”

큰형님이 그래 봬도 눈치가 되게 빨라요, 하고 덧붙이며 링신루 는 혀를 찬다.

그러는 사이에 보퉁이의 매듭이 풀리고 상자가 드러났다. 잘 깎 아 다듬은 나무상자는, 뚜껑을 열기도 전부터
송이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송이 냄새 따위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 았다.

매듭을 풀고 난 뒤에도 그 손은 물러나지 않고 테이블을 짚고 있었다 · 테이블과 링신루의 팔 사이에 갇힌 유리는,


그러나 비켜 달라고 하거나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꼼짝없이 서 있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도 링신 루였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가늘게 우는 새끼고양이처럼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바싹 닿도록 등 뒤에 선 링신루는 유리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 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유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링신루가 고양이처럼 웃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 미안합니다. 곧바로 도와주지 않아서.”

유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살려주고도 미안하다고 하는 이 상

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은 안 웃고 입만 웃는

저 웃음은, 왠지 유리가 죄인이 된 상황 같았다.

왜일까 생각하던 유리의 귀에 빙긋이 웃는 링신루의 목소리가 그 답을 들려준다. “여태 말을 안 해서 미안한 게


아니라?” 맞다. 그거였구나.

유리는 흘끔 눈동자만 들었다. 링신루가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 고 있었다. 여전히 입매만 곱게 웃으면서.

미안합니다, 다시 유리가 중얼거리자 링신루는 얼굴 전쳬에 웃 음을 띠었다.

“뭘요. 나도 알아요.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야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이겠어요? 작은 어린애라 해도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온 힘을 다해 달라붙으며 힘 좋은
장정이라도 위험해질 텐데.”

유리는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들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요, 하고 환하게 웃는 그에게 뭘요, 하고 중얼거릴 따름이다.

링신루는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기울인 채 빙글빙글 웃으면서 유리를 보았다. 먼 과거를 떠올리는 듯 눈매가
가느스름하다.

“그렇구나, 그게 게이블 씨였구나 . 사람을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더니, 과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귀에 유난히 선명하게 파고든다. 유리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묵묵히
발치만 쳐다봤다 ·

그러다가 불쑥,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 핀 것 같아서.”

“예? 뭐라고요?”

링신루는 눈쩝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를 구부려 유리의 입술 근처에 귀를 댄다. 유리는 자신의
눈앞에 비스듬하 게 기울어져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물속에 꽃이 핀 것 같아서,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뭘 그렇게 넋을 잃고 본 건, 저도 처음이었


고.”

꽃, 하고 중얼거린 링신루는 눈을 깜박이며 유리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헛웃음을
웃을 것 같은 얼굴로 유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은 하, 하고 헛웃음을 웃고 만다.

“열두 살짜리 남자애가 무슨 꽃이 핀 것 같다고 넋을 잃어요, 넋을. 나 참,

약간 날이 선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던 링신루는, 그러나 문득 입 을 다문다. 설핏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한 그는 유리를 쳐다보다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미심쩍게 도로 닫힌 입 술은, 한 번 더 열렸다
닫힌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가 말을 꺼낸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게이블 씨. 당신 첫사랑.” 불쑥, 짤막하게 늘어놓은 몇 개의 단어를 듣고 유리는 움칫 눈동자를 굴렸다.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표정 하나 놓칠세라 뚫어져라 유리를 주시하고 있던 링신루의 눈매는
더더욱 가늘어졌다.

" 누구예요?”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묻는다. 유리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던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이곤 조용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게 등을 펴며 링신루를 보았다.

" 링신루 씨입니다.”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마주보는 유리에게, 어느 순간
피식 웃는다.

“대놓고 말하네.”

유리는 아주 약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숨 길 일은 아니니까요, 라는 듯.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미 유리는 링신루에게 좋아한다고 했었고, 링신루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를


좋아하는 게 처음이든 두 번째든, 새삼스럽게 감출 이유는 없었다.

첫사랑이라는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긴 하지만-오래전 그 어 린 소년을 보고 사랑이라고 인식할 만한 감정을


느꼈던 건 아니 었으니- , 그러나 분명 처음으로 넋을 빼앗긴 상대는 이 남자였 다.

유리는 한숨을 쉬곤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도 예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을만큼.”

과거를 천천히 머릿속에서 짚으며 느리게 말하는 유리를 보며 링신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쯤의
어 이없다는 표정과, 아주 약간쯤의 쓴웃음,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어떠 한 감정, 그런 것들이 그의
얼굴 위에 고여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표정들은 사라졌다.

서늘하게 식은 눈이 유리를 노려본다.

“그럼 그 뒤엔 왜 연락 안 했어요.”

“예?”

“그렇게 사람 물에서 건져놓고, 깨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냥 달아났잖아요. 그 뒤에도 한 번 나타나지도


않았죠.”

나타나거나 연락을 해서 ‘내가 너를 구했었다’고 했더라면 필경 물속에 처박아서 영영 못 나오게 물귀신을


만들어버리려 들었을 링신루를 유리는 쳐다보기만 했다.

구해놓고 연락을 할 생각은 아예 안 했다. 그냥 그 뒤 링탕윈에 게 ‘막냇동생은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걸로


만족했고, 그걸로 끝 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링신루도 자신이 한 말이 억지라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 에도 그는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이제 와서
유리에게 따지고 있었다.

“사람은 정말 안 변하나 봐요.”

문득 링신루가 웃었다뀁 입매를 비틀어올린 그 얼굴은 웃음을 지 으면서도 어딘지 쓴 빛이 감돌았다.

“그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냥 가버리려고 하잖아요, 게이블 씨는.”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나온다.
유리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도록 괴로운 사람을 끌어내어 놓고서 이제 그럭저럭 마음이 좀 가라앉아서 사람이 좀 살
만하다 싶으 니까, 당장 계약 안 하고 가버리겠다는 말을 꺼내네요. ,,

링신루는 유리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원망마저 드러난 그 눈을 보며, 유리는 순간 말이 막히고 만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었고-그야 종신계약은 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


가 버리겠다고

한 적도 없다-개계약을 안 한다면 돌아가긴 하겠지만- .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조금씩 말 내용을


구부려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을 늘어놓는 링신루를, 유리는 당혹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링신루의 귀에는 유리 의 말이 정말로 저렇게 들렸던 건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말을 듣는 생물이고 같은 것을 두고도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임의대로 해석을 하니,


그는 지금

그 스스로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하지만’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마음이 얼핏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가 그렇 게 생각을 했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

“재계약, 할까요.”

유리는 링신루에게 말했다.

곧 계약 만료 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계약 갱신 여부에 대해 생각해 볼 즈음이었다.

비록 유리는 링신루의 입장에서는 자신과의 계약을 이번으로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계약을 원치 않는 건 아니었다.

괜찮다 . 한동안은 자신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정도쯤은.

링신루는 담담하게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는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까만 눈이 한동안 반들거리며
그를 응시 하다가 간결하게 결론을 낸다.“종신계약으로 하죠.”

" "

유리가 금방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에 링신루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

게이블 씨가 말했었죠. 어차피 매년 계약을 갱신하며 재계약을 하면 될 텐데 굳이 종신계약을 할 이유가 뭐냐고,


종신계약은 하 지 않겠다고. 그 말이 맞아요. 그때그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 는데 굳이 계약 기간을 길게
잡는 건 대부분의 상황에서 어리석 은 일이죠, 그래서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

“그런데,”

그러면 그냥 여태 그랬던 것처럼 연 단위로 재계약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하려던 유리의 말을


링신루는 도중에 막았다.

“당신은 그러다가 언제든 가먼 끝이더라고요.”

일순 의례적인 웃음기마저 사라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유리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링신루를 가만히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링신루는 예쁘게 웃음 지었다.

“게이블 씨, 당신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요?” 링신루가 한 발짝 유리에게 다가왔다. 그만큼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며, 유리는 지금 저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게 어떤 얼굴일 까를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소중한 것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봐요.”


그랬던가. '

유리는 자신에게 부드럽게 속삭이며 예쁜 눈웃음을 짓는 링신 루를 바라보았다. 제일 예쁘고 소중한 것.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적어도 지금은, 유리에게 있어 가장 예쁘고 소중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혼잣말이라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유리를 바라보고 있 는 링신루의 귀에는 틀림없이 그 말이 들렸을 터였다. 링신루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서도 당신은 언제든 갈 수 있더라고요.”

한숭처럼 낮은 목소리는 정말로 한숨으로 변한다.

“새해나 생일 같은 때 연락하겠다고, 오래도록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이나 하면서. 그게 정말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데.”

한숨은 점차 으르렁거리는 숨결로 바뀌었다. 웃음도 더 이상은 웃음이 아니다.

링신루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열심히 생각했어요. 하루의 23 시간쯤은 생각한 것 같 아. 자는 동안에도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유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나 좋아해요? 정말로?”

그가 다시 물었다. 유리는 바로 얼마 전에 들은 것과 같은 질문 임에도 얼마간 찬찬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예.”

“·一--그래, 그런 것 같아요.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데 안 좋아할 리가 없지. 그런 눈으로 당신은 날 보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 죠, 나는 정말로 모르겠어요.”

링신루는 몸을 아주 약간 앞으로 구부렸다. 그것은 정말 아주 약간이었는데도 까만 눈이 마치 코앞으로 다가온


듯 뚜렷하게 보 였다. 그 속까지 들여다보일 듯이.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안 보고 살 수 있어요?”

따지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닌, 정말로 궁금하다는 투였다.

링신루는 그대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그는 유리의 목덜미에 코를 대었다. 아주 가까이 닿을락 말락, 그러나
닿지는 않을 정도 로.

천천히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정말로 상냥하게 말한다.
“게이블 씨, 나는 당신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같이 있으면서 당신처럼 편안한 사람은 없었고요. 게다가,
그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나는 당신에게 아주 유리한 제안을 할게요. ,,

링신루가 한 걸음 물러섰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다정하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종신계약으로 재계약을 해요. 그러면 나를 얹어줄게요.”

톡톡, 하얗고 긴 집게손가락이 자신의 가슴 위를 두드렸다.

이걸 얹어주겠다고.

이걸 같이 줄 테니, 말하는 대로 하자고.

그것은 당신에게 아주 유리한 졔안이라고, 링신루의 웃음이 말 하고 있었다. 그의 너그러운 오만함이.

유리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침착하게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링신루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유리가
따라주면 그 반대급부 로 유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 처음에 계약할 때에는 마음대로 바라봐도 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통째로 얹어준다니. 정말로
탐나는 제안 군요/'

유리는 잠시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줄 겁니까?”

“게이블 씨가 바라는 대로.”

링신루는 간결하게 답했다.

“단순히 넋 놓고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 고 있는 거예요.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이보다
더 나은 제안은 없을 거라며, 링신루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몹시 예뻐 유리는 다시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원하시는 겁니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링신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줄 알 면서.

그는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깜박이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입술 은 한동안 우물거리기만 하다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손에 들어왔던 게 사라지는 게 싫어요. . 내 마음에 든 거먼 더욱.”

그 순간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 우물거리며 말을 뱉어내는 그 의 표정 위로 일순 불안스러운 빛이 스쳤다.


자신도 모르는 어떠 한 것이 가슴속에 그늘을 드리운 듯. 그러나 그게 무언지 모르는 것처럼 희미하고 정쳬를 알
수 없는 불안이다.

유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재차 물었다.

“절 좋아하십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대답을 모르는 것처럼 유리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좋아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얼굴을 하고.

“제가 소중하고, 절 존중하고, 제가 힘들지 않길 바랍니까? 설 령 그게 지금 당장 당신이 바라는 바에


어긋나더라도?”

이번에도 링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차차 표정 이 지워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굉장히 손해 보는 거래를
하는 거 예요.”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에게 몹시 이득이 되는 거래라고 생각지 도 않는다.

유리는 자신이 삶에 있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그가 알게 된 건 그것 하나였다.

예를 들면 말입니다, 하고 유리는 입을 열었다.

“저는 누군가와 평생을 보낸다면, 서로를 위하는 삶을 보내고 싶어요. 링신루 씨가 싱거운 풀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밋밋하고 조용하고 오래가는, 그런 게 좋습니다. 상대예게 베푼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일방적인
욕심을 채우지도 않고, 서로를 망가뜨리지 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혹 은 당장 눈앞에 떠오른 욕심 때문에 오래도록
후회할지도 모를 제안을 하는,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망가뜨리고, 이윽고는 그
자신마저 망가뜨릴 터 였다.

“날 좋아한다면서요.”

표정 없이 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링신루가 속삭였다. 맞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유리는 하지만, 하고 말을 잇는다.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건 아주 유사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 기만 하는 표정없는 얼굴은 그 이상 뭔가 말을


할 것 같지도 않 았다.

한동안 그가 뭔가 말을 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유리는,묵묵한 시선을 주는 그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 을 확신할 만큼의 침묵이 흐른 뒤, 말했다.

“링신루 씨가 원하신다면 재계약을 해도 좋습니다. 만료일이 가 까워지고 있으니 그 전의 아무 때나 편할 때에


갱신 서류를 쓰면 되겠죠.“

새로운 한 해의 계약에 있어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계약 갱신을 하실 거라면→경각해두세요, 라고


유리가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거기 내 책상 제일 위 서랍에 빨간 장부 있으니까 그것 좀 가지고 와. 서랍은 바이샹한테 열어달라고 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를 확인도 하지 않는 늙수레한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왔다.

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금방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답답했는지 다시 『못 알아들었나?』 하고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바로 가져와. 지하로 내려와서 윈안에게 주 면 돼. 젊은 놈이 멍청하게 넋이나 놓고 있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그 너머에서 끌끌 혀를 차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유리가 침묵한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막 방금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해 떠올리고 있던 목소리가 바로 그


목소리라서, 잠시 그 말의 내용을 새기는 데에 시간이 걸린 탓이다.

- -저놈 왜 저래.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차던 저 목소리가, 오전부터 거듭해서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선쟁님께 연락이 왔는데, 혹시 연락 받으셨나요?”

유리가 막 전화를 품에 집어넣는데, 문이 달칵 열리며 바깥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리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그녀에게도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하긴 유리가 다짜고짜로 그녀에게 가서 책상 서랍을 열어달라고 하면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열어주 지 않았을


거다.

“예, 제일 위 서랍에서 빨간 장부를 가져오라고 하시던데요.”

그녀는 유리의 대답을 확인하고는 조르륵 걸어와 허리에 찬 열쇠꾸러미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든다. 어머,
이게 아닌가, 그럼 이건가, 수많은 열쇠들 사이에서 몇 가지라 헛갈리는 듯 당혹스럽게 중얼거리며 이 열쇠 저
열쇠를 맞추어보는 그녀를 기다리며, 유리는 주머니에 넣었던 전화를 도로 꺼내어 시각을 확인했 다.

그들이 지하로 내려간 지 고작해야 십여 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유리가 장부를 들고 내려가면
한창 진행되 고 있는 험한 꼴을 보겠다.

흠, 유리는 담담하나마 한숨을 쉬었다. 험한 꼴이라면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봤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키지 않는 것은 냄새였다.

그들이 유리를 부른 지하는 늘 퀴퀴한 곰팡내와 비린내로 절어서 오래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서 그 냄새를 맡고 있을 링신루를 떠올린 유리는, 잠시 장부를 전해주러 간 동안 맡는


냄새쯤이야 뭐 대수 로울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냄새야 대수로울 것 없다. 험한 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이며


냄새며, 그런 것 따 위는 상관없었다.

그런 것보다 더 머릿속에 남아 떠오르는 것은, 미심쩍다는 듯이


남자∥-링신루의 셋째 숙부가 던진 말이었다.

저놈 왜 저래, 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셋째 숙부의 말을 마침 그 가까이에 있 던 유리가 들은 건


우연이었지만, 숙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건 우연만은 아니었다.

셋째 숙부는 눈쩔미가 퍽 좋은 사람이었다. 눈쩔미가 좋다고 할까, 사람의 눈치를 읽는 게 빠르다. 아마도 늘
수백 번, 수백 방 향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을 오래도록 하는 동안에 그런 습관이 붙은 듯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유리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한 숙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숙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쫓아 가본다. 거기에는 링신루가 앉아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밝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옆에,건너편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끔 한두 마디 나 거들 뿐 거의 대부분은 듣기만 하고 있었지만.

유리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자리에 앉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낮 동안 링신루가


그의 숙부에게 일을 익히러 올 때마다 유리도 동행하곤 했지만, 친족이 아니먼

들려주기 꺼려하는 내용들도 종종 있는 탓에 숙부는 늘 유리에게 링신루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유리 는 보통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가 그를 도와줄 일이 있을 때 에만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그때도, 유리는 그들이 수다처럼 대수롭잖게 떠들며 나누는 이야기는 들리지만 소리를 조금만 낮추어 속삭이면
들리지 않을 만 한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찾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숙부와 더 가까운 위치에서.매일은 아니고 가끔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숙부가 호출하곤 하는 남자 두셋과 링신루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미심쩍게 보고 있던 숙부는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놈 왜 저래’

그렇게 말하곤 눈썹을 찡그리고 잠시 그들을 더 바라보던 숙부는, 유리를 돌아보며 그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놈 왜 저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 글쎄요. ,

유리는 숙부의 시선을 쫓아가 링신루를 보고는 잘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기웃했다. 숙부는 다시 미심쩍게
링신루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투덜투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는 다시 링신루를 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말하고, 듣고, 표정을 짓는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불안정했다.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리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
였다. 다른 때와 무엇이 다른지 좀쳬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왜 그런지도.

그러나 분명히 어딘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거대한 지진 을 앞두고 튼튼한 성벽에서 모래 한두 알이
아무도 모르게 토독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치-그 때와 같이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격렬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예전, 세링게에서 베를린으로 옮겼던 그 직후처럼.

유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불안정한 것도 막연한 느낌일 뿐, 이렇다 하게 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딱 하나 평소와 다른 것이라면, 링신루가 유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서 필요한 때면 말을 걸기도 하고 가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연인 듯이 눈이 마주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러나 눈이 마주치는 빈도수는 현저하게 줄었다

. 철 저하게는 아니지만 일부러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오늘도 사무실에 온 뒤로 그와 눈을 마주친 건 한두 번쯤, 잠시 스치던 눈길이 마주쳤던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링신루의 미묘한 태도를 알아차린 것은 유리, 그리고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별달리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그 의 숙부뿐인 듯했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요? 계속 빙글빙글 웃는 게 뭐 좋은 일 있어 보이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 하나, 링신루의 대각선 쪽 자리에 앉 은 까만 점퍼의 남자가 불쑥 말했다. 링신루는
그에게 시선을 주 더니 ‘그래요?’하고 눈웃음을 웃었다.

‘그러게, 그 말 듣고 보니 그러네. 오늘 뭐 데이트라도 있는 거 아냐? 여자 생겼나?’

‘에이,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데이트야! 이제 좀 있다 지하로 내 려가서 돼지 잡을 건데, 그럼 옷 다 버려,


안 돼. 진짜로 여자 만 날 약속 잡았으면 다른 날로 약속 새로 잡아요.

이건 내가 뭐, 막내도련님이 여자 만난대서 질투하는 게 아니라 막내도련님을 위 해서 말하는 거야. 온통 피


칠갑을 하고 가면 어디 여자가 남아 나겠어?’

‘직접 나설 것도 아닌데 피 칠갑은 좀 과장이다. 하긴 그래도 좀 튀긴 튀겠지. 그런데 진짜 여자 섕겼어요?’

옆자리에 앉은 더벅머리 남자도 흥미진진하게 고개를 주욱 빼고 링신루를 쳐다본다. 링신루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 별 일 없어요. 그냥 하시는 말들이 재밌어서 웃었나봐요. 나는 내가 웃는 줄도 몰랐는데.’

‘진짜 별 일 없어요? 그런데 막내도련님은 여자 좀 있을 것처럼 생기셨는데.’ 까만 점퍼가 부러 링신루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익살스러운 눈짓을 했다. 링신루는 ‘아니에요/하고 웃는다.

‘야야, 오히려 사람이 너무 해사하니 말쑥하게 생기면 여자가 안 따라. 도련님 저 예쁘게 생긴 거 봐라, 어디
여자들이 부끄러 워서 옆에 서겠냐!’더벅머리가 괜히 핀잔을 주며 까만 점퍼에게 헛주먹질을 한다 ·

야,그래도 얼굴로 여자 후리는 거 아냐, 도련님이 아래 솜씨가 훌륭하실지 또 어떻게 알아, 하고 자기네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린다.

유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내색 하지 않고 표정을 지운다. 정작 그들과 같이


있는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얘 기를 하든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건성으로, 그러나 적당히 맞장구 를 칠 만큼의 웃음을 지으면서.

셋째 숙부의 아래에서 일하는 저들은 소위 ‘험한 일’을 할 때에 주로 불려오곤 했다. 거래업쳬들을 돌아다니며
일반적인 일도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종종 얼굴을 마주치긴 하지만,

험한 일을 할 때에는 거의 늘 그들을 부르곤 했다.

이미 이쪽 일로 십 년 이십 년씩 일했다는 그들은, 셋째 숙부의 아래에서 일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링신루를 막내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그들 나름대로는 깍듯하게 예우해주었지만, 은근히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기는 언행을 보여줄 때가 있 었다.

집안이 좋아서 도련님이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그래봐야 곱게 자라 철없고 멋모르는 애송이라고 여기는 듯, 간혹
그렇게 듣기 에 따라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다.

그나마 요즘은 퍽 나아진 편이었다.

처음에 링신루가 숙부 아래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던 동안은 말만 존대어를 쓸 뿐 태도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 더 흐르먼서 링신루가 처음이라는 것치고는 일을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면서 상황에 따라 강단
있는 기색도 내비쳐, 지금은 많이 수그러든 축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막내도련님도 은근히 보통내기가 아니야, 몇년 지나면 우리가 못 당하겠는데.’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한 말에 지금 그들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감탄할 만한 솜씨를 인정은 하되 아직은 우리의 밑이다,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치를 뻔히 알 텐데도 링신루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경을 쓸 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 다·

그의 앞에는 그가 해치우고 익혀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 여 있었고, 그들 따위는 벌레가 날아다니는


것보다도 더 사소했 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이 떠들든 말든 담담히 웃기만 하며 넘기는 링신루였다.

아니, 어쩌면 뭐라고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도 모르겠 다.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지 건성으로 그들을 보 고 있었다.


그 가운데 문득문득, 아주 짧은 찰나 스치고 가는 불안정한 기색. 그것이 유리는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왜,
1 층에서 안내처에 앉은 여자도 도련님을 볼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던데. 너 전에 마음에 든다고 했던 그 여
자.’

까만 점퍼가 낄낄거리자 더벅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 보았다·


내가 뭐 마음에 든다고 했어, 그런 뚱뚱한 여자를, 하고 벌컥 소리를 지른 그는 혀를 찼다. 그러다가 흘끔
링신루에게 시 선을 돌린다.

‘그런데 우리 도련님은 좀 너무 해사하니 곱게 생기셨단 말이야 · 사람이 너무 순하면 또 실속이 없어요. 좀


독한 데도 있 고 그래야지.’

‘왜 그러냐. 막내도련님 보기보다 강단 있는 거. 전에 삼협 실장 이 찍소리 못하고 쫓겨 가는 거 못 봤어?’

‘야, 사내놈들이랑 대거리하는 게 여자 후리는 거랑 같냐! 안 그 렇습니까, 도련님?’ 더벅머리가 링신루에게


말을 돌렸다.

그는 ‘그럼요.’하고 웃는다. ‘사람 사이야 미리 알 수 있나요. 막상 때가 닥치기 전에는 모 르는 거죠/

담담하게 말하는 링신루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는지,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도련님은 보면 참 너무 다정한 것 같아서, 여자 고를 때는 좀 조심해야 할 것 같긴


해요.

사람이 너무 순하게 잘해주면 실속이 없는 거ㅣ, 단물은 다 빼먹고 결국은 딴 놈한테 떠나더라고요’

더벅머리는 아무래도 아예 남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좋다좋다 먼저 엉겨


붙어서 간이고 쓸개 고 다 빼줬더니 나중에 가서는 발뺌을 하더래, 그냥 오빠동생 사 이로 한 말이었다고.’
라면서 어느 여자를 마구 욕하는 게, 그와

친한 동생이 겪은 일이라는 모양이었다.

링신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어느 순간 설핏 웃으며 ‘그랬어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니까요. 지금은 어느 딴 놈이랑 붙어먹으면서 잘 살고 있다나.’


동생만 병신된 거지, 하고 혀를 차는 그에게 링신루는 말없는 시선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턱을
문지르먼서 입에 붙은 가면처럼 웃고 있는 그의 시선이 회미하게 푸르러진다.

눈동자 속이 설핏 들뜬다. 그 안에 가라앉아 있던 뭔가가 불안 정하게 일렁거리며 흔들리는 것 같다



그래, 오래전 그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던 그 당시처럼, 어딘가 불안정하게- -.
그러나 유리가 얼핏 낯을 찌푸린 순간이었다.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숙부가 벌컥 고함을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슬슬 일어나라.지금쯤이먼 아래에 돼지 묶어놓고 퀸지 다 됐을 텐데 그만 내려가자.


신루 너도 따라오고, --거기 너는 여기서 기다려/ 숙부는 책상에서 일어서며 웃옷을 걸치더니, 그 옆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유리를 보고는 짤막하게 배제령을 내렸다.

오늘은 각별히 험한 상황이 벌어질 모양이었다.

숙부는 거의 대부분의 일에 링신루를 대동하고 다녔고, 그런 링 신루를 유리가 따라 다녔다. 그리고 숙부는
그것을 묵인하고 있 었다.
하지만 가끔 불법적인 일을 맞닥뜨려야 할 때--그중에서도 특히나 외부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일들을 벌일
때에는 유리 만 홀로 사무실에 남겨두고 갈 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아마 도 그런 때인 성싶었다.

아래, 이 건물의 지하로 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잡는 거다.

어설픈 협박이나 본보기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잡는’ 경우도 있다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들려 오기도 했다.

과연 오늘은 어느 정도까지 갈까.

유리는 숙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들과 링신루를 배웅하며 생각했다.

요전에 한 번, 유리까지 링신루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거기에서는 사람 하나가


반쯤 죽어나갔다.

아마 평생 다리 한쪽 정도는 절어야 할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로 실려 나갈 때까지, 유리는 링신루와 나란히 서서


저 남자들이 희 생자를 짓이기는 시종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일에 숙부는 실질적으로 손을 쓰지는 않았고 그저 가끔 희생자에게 어째서 그가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앞으로 그의 처지 가 어떻게 될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마디 말을 던져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먼 흣날 링신루의 역할이기도 했다.

" "

유리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어떠한 일이든 링신루 본인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역시 딱히 유쾌하지는
않다· 아무려먼 어떤가. 위를 봐도 끝이 없고 아래를 봐도 끝이

없다면, 차라리 아래를 보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유 리는 비인간적인 걸로 치자면 한없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에 비하면 그 어떤 악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도 인간적으로 보일 만했는데, 심지어는 국제수배를 당해


표먼적인 부분에서도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 인간도 현재 멀

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 것들보다, 지금 머릿속 한구석을 더 잡아먹고 있는 것은 알 수 없이 불안정한 그 느낌이다. 일렁일렁,


일렁일렁,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언제 무엇이 잘못 틀어질지 알 수 없는.

" "

유리는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었다. 일단 지금은 숙부의 비서 아가씨가 책상 서랍에서 꺼내어
준 장부를 지하로 가져가야 했다.

지하 1 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유리가 윈안을 찾자 철문을 열어주며 들어가 보라고 했다.
유리가 들고 있는 장
부를 흘끔 보는 모습이, 이미 안에서 연락이 있었던 눈치였다. 남자가 가리킨 방향대로, 유리는 널찍한 방
여러 개가 이어져 있는 지하층의 좁다란 길을 걸었다.

지하층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여남은 평쯤 되는 방이 네댓 개 정도. 가끔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 이 텅 비어 있거나


혹은 뭔가 있어봐야 철제 침대 하나 정도라 살풍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눈으로 보이는 광경보다도 더욱 선뜩한 것은, 지하층의 좁은 길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 였다.

사람 몇몇의 기척이 두서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 방에서는 절그렁거리며 쇠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 지익하고
테이프를 뜯는 소리들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각각을 따로 들으면 별다를 것 없 는 여상한 그 소리들은, 저 안에 어떠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예상하고
있는 까닭인지 섬뜩하게 귀에 거슬렸다.

그 앞에서도 한 남자가 망을 보듯이 서 있었는데, 유리가 길목 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선을 주고 있던 그는


장부를 보곤 곧 알은 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안 씨한테 줄 거지? 그런데 어디 보자 ,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막 방금 시작했거든.”

어디 보자, 하고 철문에 네모나게 뚫린 길죽한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 본 남자는 혀를 차며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 을 건데.”하고 말했다. 유리는 이 남자에게 장부를 넘겨주고 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

했지만, 남자는 그런 말은 듣지 못한 듯 유리에게 장부를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유리를 셋째 숙부의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도 안 한다.

나가서 기다리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문지기는 유리에게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어, 배고파.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라는

등의 대수롭잖은 말마디를 건넨다. 아마도 여태 이런 경우에 심부름을 온 사람은 일이 끝날 때까지 앞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시리얼바를-가끔 너무 바빠 요기할 시간 도 없이 일에 파묻힐 때가 있는 링신루를 위해 늘


한둘쯤 여비해 두곤 했다-

문지기에게 건네준 유리는 그의 옆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철문의 눈높이쯤 기다랗게 나 있는 구멍으로는 방 안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링신루였다. 사무실에 있던 때와 같은 웃음은 짓지 않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다는


평연한 얼굴로 그가 바라보고 있는 두어 발짝 앞에는 까만 점퍼가 보였다.

그리 고 그 앞으로, 까만 점퍼가 우악스럽게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있 는 한 남자가 보인다. 박스테이프로 입을


막아놓고 뒤로 돌린 두 팔도 박스테이프로 친친 감아놓은 저 남자가 오늘의 희생자인 모양이었다.
"

약을 빼돌렸어. 반 년 전부터 그랬나 봐. 얼마 전에 좀 많이 빼돌려서 팔다가 걸렸다더군.”

시리얼바를 버석버석 씹으먼서 구멍 안을 들여다 본 문지기는 멍청한 녀석, 하고 혀를 찼다. 하필이먼 빼돌려
판 약이 공안의 수색에 걸리는 바람에 대대적으로 단속이 강화되어, 한동안 장사

는 공치게 생겼다는 게 문지기의 설명이었다. “장사는 공치게 됐고 저놈 인생은 종치게 됐지.”

문지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유리가 문지기 역할을 대신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내 이쪽에서는 신경을 끄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말없이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하게는 링신루를 바라본다. 어차피 희생자에게 직접 손대는 일은


없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기만 할 그는 무심한 시선을 그들예게 향하고 있었다.

죽은 물고기의 눈 같다. 눈앞에 있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눈이다. 그것이 몹시 낯설었다. 링신루는


유리를 저런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요 얼마간은 거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스쳤다 · 간혹 눈이 마주친다 해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링신루는 무심결인 것처럼 가끔 유리를 물끄러미 쳐다 볼 때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유리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계약을 할까 어떻게 할까, 그런 섕각이라도 하는 걸까. 혹은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때로 초조한 듯 이를 악물고 유리를 바라보던 링신루는, 유리가

그를 마주보면 가만히 시선을 돌리곤 했다.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그렇다 · 한두 마디나 오갈까 말까 한 정적 속에 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제임스였다.

『너 슬슬 계약 시기가 된 것 같은데, 올해는 어떻게 할 거야.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아니면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면 네 자리 미리 마련해놔야지.』

정확하게 말하면 카일이 쌓아놓은 일거리를 분배해둬야지, 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제임스의 말을 들으며 유리는
흘끔 링신루를 보았다.

유리가 ‘제임스?’하고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유리를 응시하고 이던 링신루는, 눈이 마주치자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전화를 하던 도중에 자신을 바라보자 의아한 눈치였다.

‘글쎄요 , 아직은 모르겠어요. 이쪽도 아직 애매한 상태라 서 . 결정되면 연락할게요.’

『만기가 언젠데 아직도 애매해? 뭐 좋아. 가능하면 얼른 돌아 오라고. 중국은 너무 멀어.』

가끔 잔일을 부탁할 수도 없잖아, 라고 투덜거린 제임스는 간단한 안부 정도만 묻고 곧 전화를 끊었다. 유리도
수화기를 내려놓 고 다시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링신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도 유리의 말만을 듣고도 제임스가 전화한 이유는 짐작했을 거다.
재계약을 할지 아닐지, 유리는 그 결정권을 링신루에게 주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유리도 향후의
예정을 세울 수 없다. 하지만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만기일이 되는 그 순간까지 미루며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해도, 그가 만족할 만큼 생각해 본 다음에 대답을 해주면 되었다.

계약을 갱신할 것인지 혹은 이대로 계약을 접을 것인지 · " ,,

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링신루를 바라보다가 조용한 한숨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방 안에서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 문지기도 말했던 대로, 아마도 오늘의 ‘일’은 그리
가볍게 마무리되진 않을 것 같았다.

약을 빼돌린 것만 해도 일단 커다란 문제였다 . 특히나 셋째 숙부는 늘 일벌백계를 읊는 사람이라, 이러한


문제가 벌어지면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물며 그가 원인이 되어 한동안 몸을 사리며 지내야 하게 되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곱게 끝나지 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하려고 했어? 네 목숨 하나 살릴지도 못할 그 돈 몇 푼이 그렇게 탐났나? 이 멍청한


친구야 ·”

까만 점퍼가 웃으면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동시에 뚜둑, 귀에 거슬리는 소리, 테이프로 막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 지르는 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나뒹구는

그 남자를, 그 옆에 서 있던 더벅머리가 목덜미를 잡고서 도로 일으켜 앉힌다.

“너는 돈 몇 푼 벌었는데, 이쪽은 손해가 얼만지 알아? 네 몸뚱이 조각내어서 팔아도 그 돈 1/100 도 못 건져.
이걸 어떻게 할 거 야? 엉?”

거친 목소리와 타격음이 섞여서 연신 흘러나온다 · 방 한쪽에는 숙부가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 아마도 가 장 마지막의 결정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그들에게 맡기는 모양 이었다.

링신루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 뜨고 지켜보기 거북해
할 모습에도 그 는 별다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생각이 거기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링신루에게 더벅머리가 말을 건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막내도련님, 괜찮아요?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이는데. ,, 걱정을 한다기보다는 재미나다는 듯이 빙글거리며


링신루를 쳐 다보는 더벅머리는 어딘지 우월감을 느끼는 기잭이었다.

“도련님도 이러다 익숙해지시겠지 · ”하고 대꾸하는 까만 점퍼도 더벅머리 와 비슷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링신루는 그때까지 시선만 그들에게 주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했다 ·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죽은 물고기 같던 눈동자에 어렴풋이 빛이 서렸다.

“안색이 영 안 좋은데? 괜찮아요? 너무 험한 꼴을 보였나? ,,

“아 , 요즘 별로 쉬지를 못해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그렇게 험하지도 않고.’ , 링신루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계속해요, 라고 손짓을 하는 링신루를 보며, 두 남자가 흘끔 시선을 마주쳤다.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사람을 해치는 걸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하고 창백하게 서서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겁쟁이 애송이가 ‘이 정도쯤’이라고 태연한 듯이 중얼거리며 그들의 머리 위에서 명령하듯 말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더벅머리가 슬며시 셋째 숙부를 보았다. 팔짱을 끼고 앉아 구경만 하고 있던 숙부는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뭘 하든 방해하거나 가로막지 않고 그대로 구경만 할 요량인 것 같다. 그것은 무언의
허락이었다.

묶인 남자의 머리통을 움켜쥐고서 허리를 굽혀 앉아 있던 까만 점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스듬히


웃으면서 링신루에 게 말했다.

“어때요, 막내도련님이 직접 손 좀 봐주실래요? 뭐 , 보통은

도련님이 손수 손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이보다 더 험한 일도 종종 볼 테고, 직접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
.
내가요?”

링신루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 이미 그들에게 한바탕 린치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온몸이 피범벅이라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꼴을 하고 있었다.

링신루는 무심하게 남자를 쳐다보다가 더벅머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히죽거리면서 쳐다보고 있던 그에 이어, 그 옆에서 비슷한 얼굴로 쳐다보는 까만 점퍼를 본다.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숙부를.

숙부는 얼핏 미심쩍은 듯이 링신루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디 한번 지 켜보자는 심산인지 참견하지 않는다 ·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볼까요.” 링신루는 다시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걸어가 선다. 허리를 구부려 웅크리고 앉은 링신루는,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떠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 찬찬히

그를 훑어보고서 손을 뻗어, 허리 뒤에서 박스테이프로 친친 감 겨 있던 남자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 지익,


지익, 테이프가 뜯겨 나가자 남자가 부은 눈을 크게 뜨며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꿈틀거리던 몸에 묶여 있던 손이 자유로워졌다. 남자는 움찔거리며 겁먹은 눈으로,


한편으로는 아주 약간 고마운 빛도 담긴 눈으로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

링신루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더벅머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혀를 찼다.

‘【막내도련님, 그놈 그거 풀어주먼 안 되는데 ? 도련님한테는 불쌍해 보일지 몰라도, 그놈은 오늘 본보기로


좀 죽- ·”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

몸을 일으킨 링신루는 그 옆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팔뚝만 한 망치를 집어 들었다. 자루를 잡고 한두 번


흔들어 무게를 가 늠해보는 듯하던 그는,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

비명도 없었다.

깨어진 머리에서 펑펑 쏟아져 나온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물들 였다. 그 위에 널브러진 남자는 꿈틀, 꿈틀,
손가락만 조금씩 경 련하듯 움직일 뿐이었다.

“움직이지는 못 하겠지만 아직 의식은 있지? 그래, 그 상태로 있어. 팔 같은 걸 묶어봐야 제대로 손보기
힘들기만 하거든.”

링신루는 남자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망치가 돌바닥에 떵,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굴렀다. 삽시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링신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움직이는 기척조차 없었다.

“당신이 운이 좀 없긴 해 . 지금 기분이 안 좋거든, 내가. 이 래저래 머릿속도 복갑하고. 그러게 왜 남의 걸


훔쳐서 이 꼴 이 됐어.”

링신루는 혀를 차며 남자를 가볍게 걷어차 뒤집었다. 눈을 까뒤

집은 남자는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아직 의식이 남아 경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무릎 위를,
거침없는 발길 질이 내리찍는다.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륵거리는 신음과 함 께 터져 나왔다.

“나도 내 걸 빼앗긴 적이 있는데 기분 정말 더러워, 그거. 내걸 빼앗아가는 놈은 그냥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란 말이 야.”

그의 해사하고 고운 얼굴에 언짢은 빛이 떠올랐다. 미간에 주름이 지며 입매가 일그러진다. 동시에 남자의
나머지 무릎도 부서 졌다.

이제는 꼼짝할 수도 없는 무릎을 발꿈치로 밟은 채 링신루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렇게 묵묵히
서 있던 그는 흔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게 나았던 것 같아.” 뒤이어 터져 나오는 건 몸통을 짓밟는 소리. 고기를
짓이기는 소리. 뼈가 어긋나는 소리.
“지금은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냥 그 자체가 아주 끔찍하게- -."

무서워, 그렇게 속삭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낮은 속삭임은 남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묻 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옥도였다.
과거의 경험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옥도 따위는 숱하게 봐 익숙해 있던 유리였는데도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링신루뿐이었다. 이미 그의 발아래에 깔린 남자는 축 늘어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죽은 건지도 몰랐다.
그의 뒤에서 두 남자는 표정을 앓은 얼굴로 그를 보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럼예도 여전히 무표정하게 남자를 짓이기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던 링신루 외에 처음으로 움직인 것은,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 던 셋째 숙부였다.

“죽일 셈이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는 링신루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링신루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천히
숙부를 돌아본다.

“제게 맡긴 건 죽이라는 뜻 아니었나요?”

링신루는 난처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던 숙부는 혀를 찼다.

“이놈이 , 손을 쓸 때에는 머리를 식히고 있어야 돼. 차가운 머리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제 이성은 아주 멀쩡해요, 숙부님.”

링신루는 비스듬히 웃으며 숙부를 보았다. 곤란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웃은 링신루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핏덩이를 냉랭하게 내려다본다.

“제머리는 전혀 뜨겁지도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요. 이 놈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퍽, 가볍게 그를 걷어차는 발길은 증오도 분노도 없이 기계적이기만 했다.

숙부는 눈썹을 찌푸린 채 그런 링신루를 쳐다보다가 그 뒤에서 희미하게 질려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야, 야, 신루 저놈 데리고 나가. --신루,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숙부가 혀를 차며 손을 내젓자, 두 사람은 멈칫거리며 링신루에게 다가갔다.

링신루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곤, 차마 건 드리지도 못하고 문 쪽으로 이끄는 그들 가운데에서 걸음을
돌렸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숙부님.”

“가기 전에 사무실에 들러서 좀 씻고 옷이나 갈아입고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피범벅으로 나가면 누구든
천 리 밖으로 달아나겠다.“

두 사람이 열어주는 문 바깥으로 발을 내딛던 링신루는 등 뒤에서 숙부가 냉랭하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었다.

“무슨 상관이에요. 누가 달아…-. "

그러나 농담처럼 중얼거리던 링신루의 말은 도중에 멎어버렸다. 문밖에 서 있던 유리와 정면으로 맞닥뜨려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 ,,

" l,

말만 멈춘 게 아니었다‘ 움직임도 멈추었다. 내디딘 발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표정마저 굳어버린 링신루가
유리를 바라본다.

유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약간 떨어뜨렸다. 막 문을 열어주던 더벅머리에게 장부를 내민다.


더벅머리는 장부와 유리를 두어 번 번갈아보다가 곧 장부를 받았다.

갖다 줘서 고마워요, 하고 중얼거린 그의 뒤로 유리는 셋째 숙부와 눈이 마주쳤다. 숙부는 유리가 설마


거기까지 들어와서 서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낯을 찌푸리며 혀를 찼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유리는 다른 두 남자에게도 눈짓

으로 인사를 한 뒤에야 다시 링신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링신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망연히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를 찔린 것처럼 넋 놓은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는 그를 잠시 마주보고 있던 유리는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그만 갈까요.”

삽시에 일렁이며 불안정하게 반들거리던 눈동자가 뇌리에 박혔다.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리는 링신루가 숙부에게 자신의 이성은 아주 멀쩡하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감정이라곤 죽어버린 것처럼 새카맸지만 그의 눈은 차갑고 이성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이 유리를 본 순간.

그 눈은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금세 스멀거리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은 듯이 까맣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시커먼 빛을 띠며 반들거렸다.

왜 여기에 있냐고, 일순 소리 없이 달싹거린 그의 입술이 말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는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유리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곧 다른 곳으로 향해,
그 눈 속에서 일렁거리는 빛을 감추었다.

유리는 식탁 앞에 앉아 눈앞의 컵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던 컵은 어느새 조금 식었는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멎었다.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않고 조용히 멈추어 있던 문이 얼마 있지 않아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링신루가


나온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가운을 걸친 그는 머리를 닦는 수건도 하얗다 ·


조금 전까지 온통 거무스름한 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들이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싶다.

“차 끓여놨습니다.”

유리가 말하자 문 앞에서 말없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던 링신루가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묵묵히 식탁으로 다가와
유리의 건너편 자리, 컵이 놓여 있던 곳에 앉았다. 그리고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그가 마시기에 딱 좋을
정도로 식었을 차를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한다.

유리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씩 목을 적시며 천천히 마셨는데도 유리가 자신의 잔을 비울
때까지 링신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다 식었을 테니 다시 끓여드리겠습니다.”

유리는 자기 몫의 차를 한 잔 더 끓일 겸해, 자신의 빈 잔과 링신루의 다 식은 잔을 들고 일어섰다.

유리가 막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자신의 눈앞에서 빈 잔이 사라져가는 걸 어딘지 초조한 듯 눈으로 좇던


링신루가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빛이 가득 메운 그 눈을 보며 유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화났어요?“

링신루가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눈동자만큼 떨리는 것 같다. 실제로는 떨리지 않았는데도 몹시
불안정한 듯이 들렸다.

유리는 깜박깜박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화났냐고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유리의 얼굴에는 조금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유리의
얼굴을 낱낱이 살피듯 쳐다보던 링신루는 얼핏 눈살을 찌푸린다.

“당신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상하는 건 안 좋아하잖아요.”

그제야 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링신루는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을 본 유리가 그것 때문에 화나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설마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 때문에-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잠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던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다치는 걸 보면서 좋아하고 즐길 사람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요. 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링신루씨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 -…무섭거나 소름끼치진 않았나요?”

링신루가 다시 묻는다. 그가 꺼내는 물음마다 그답치 않아 유리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건 이미 숱하게 봤습니다. 새삼스럽게 무섭지도, 소름끼 치지도 않아요.”


굳이 여태 일하면서 돌아다녔던 수많은 위험한 곳들을 거론할 것도 없었다. T&R 에 있는 동안 때로 리그로우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보았던 험한 모습만 해도 두 손으로 꼽을 수 없다.

눈앞 에서 사람이 문자 그대로 ‘맞아죽는’ 것도 몇 차례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런 일 자쳬로 무섭거나 소름끼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놀라긴 했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링신루에게 조용히 말했다.

눈을 아까 그곳에서 링신루와 마주쳤을 때 유리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정한 동요를 보았듯, 링신루도
유리에게서 충격에 가까운 놀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화나지 않았다는 말에도, 두렵지 않다는 말에도 순순히 납득을 못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놀랐다는 말에 그 미심쩍은 빛을 아주 약간 풀었다.

“링신루 씨가 직접 누군가에게 손을 쓰는 건 처음 봤으니까요.

오늘은 어쩐 일이었던 겁니까? 그런 일은 안 할 줄 알았는데.

,,

유리는 찻물을 올리며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안 해요· 그냥 어쩌다가 하게 된 거예요. 내 입장에서는, 사실은 굳이 직접 나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다시 이럴일은 없어요·

아까는 그냥, 이것저것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화풀이 삼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며 흘끗 유리를 보는 눈이, 그런 말을 하면 유리가 또 다시 별로 안 좋은 빛을 띨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동안 찾아든 침묵 속에 조용히 차를 끓인 유리는 다시 뜨겁게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찻잔을 링신루의 앞에


놓았다.

조금식어야 마실 수 있을 테지만, 어차피 아까부터 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던 그는 금방 잔을 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느 정도는 강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이상은 불안정한 빛을 보이지 않고 늘 유쾌하고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당당한 시야로 앞을 바라보는 링신루를 보면서, 더 이상은 예전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제어하지도 못하도록
불안정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조금씩 안정되고 단단하게 다져진 마음은 그 나름의 안정을 찾았다고.

어쩌면 아예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아까 유리와 마주쳤을 때에도, 링신루는 감정적으로 출렁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이성으로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 이었다.
그의 불안정은 형태를 바꾸어, 예전과는 다르게 왜곡된 모양새로 드러나고 있었다.

" ll

곤란한데.
비록 예전처럼 스스로 어쩔 줄을 모르며 다루지를 못해 자칫하면 그 자신까지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르도록
불안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지금도 그는 어딘지 위태로워보였다. 지금, 유리의

앞에서 찻잔을 내려다보며 간혹 시선을 들어 유리를 바라보는 모습도.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유리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 어떠한 면으로는 마음이 편한 걸 느꼈다.

요 한동안 집에서 그들만 있는 동안에는 거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링신루는 아주 짤막하게 몇 마디씩


필요한 말이 아니면 꺼내지 않았다.

유리 역시, 먼저 말을 꺼내기에는 시선조차

마주치려 들지 않는 링신루를 상대로는 어려웠다.

죽은 듯이 짓누르는 침묵이, 어쩌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괴로웠는지도 모르겠다고, 유리는
그제야 인식했다·

이런 식으로 느릿느릿하게, 조금 침울한 음색으로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그래서,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긴 하지만,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었다고 해봐야 무심한 표정
안쪽으로 숨겨져

눈가에 아주 약간 번졌을 뿐이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는 그 웃음을 알아본
듯했다. 기묘한 듯 얼핏 눈썹을 든다.

“예전에 세링게에서 베를린으로 갔던 직후, 같은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링신루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말없이 귀를 기울인다.

“눈을 다친 직후라서 밤마다 고통스러워서 자지도 못하고 뒹굴었던 때가 있었죠.”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가 말하는 게 언제인지는 이내 떠올린 듯했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밤마다, 타는 듯이 눈이 아프고 몸이 아파

온몸이 흥건하게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억지로 참았던 때가. 그리고 유리는
그때마다 그의 옆을 지키면서, 숨도 쉬지 못하도록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덕이는 그를 보며 생각했었다.

“비명이 나오는 걸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릴까 새 파랗게 질린 얼굴로도 억지로 눌러 참는 링신루 씨를 보면서, 나 는 생각했었어요.”

늘 밤마다 물어뜯어서 터지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밤이와 또 터지고, 언제까지고 피딱지가 사라지지
않는 링신루의 입술을 보면서, 다른 곳으로 조금이라도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손등을 물어뜯어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유리는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어떻게든 넘기기 위해 자해를 해서 링신루 씨 스스로의 몸을 해치느니, 차라리 남을 다치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퍽 이기적인 생각이란 건 알고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정말로 그러기를 바랐지요.”

유리가 말하자 링신루는 이상한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그것은 퍽 기괴한 얼굴이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어딘가가 몹시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몰라 울 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표정들이 뒤섞여 이상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링신루 씨가 불안스러워 보이는 와중에도 당신 자신을 해치지는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아까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맨” 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마시기 좋을 정도로 식은 차를 집어


들어 목을 축인다.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여전히 찻

잔을 들 기미도 보이지 않고,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유리를 쳐다본다.

그때 문득 유리는 링신루의 뒤쪽으로 벽에 걸려 있던 달력에 시선을 주었다. 불현듯 눈에 띈 커다란 날짜, 그


옆에 조그맣게 길吉이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별다른 의미도 없고 반드시 그대로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 글자이지만, 그러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유리는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이번 달에는 길이 많더군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좋은 달이 될 모양이에요.”

며칠 남지 않은 이번 달의 달력에 표시된 것은 나빠야 보통이다.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좋은 것만 골라 믿는 건 나름대로 좋지 않을까 싶어 유리는 눈으로 그 글자를 덧그렸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군요.”

저도 모르거ㅣ 불쑥 중얼거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약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유리가 떠올린 생각을 링신루도 거의 동시에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의 입매가 설핏 굳어지는 듯했다.

“재촉할 생각은 없습니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유리는 진심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만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만기를 넘기면, …

그러면 자동적으로 계약은 갱신 없이 끝나게 된다.


결론은 늦어져도 좋았다. 그걸로 그가 납득한다면. 유리는 한 모금 남은 차를 마저 비웠다.

그때.

아까부터 말없이 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가 문득 속삭였다.

“목이 말라요. 물을 마시고 싶어.”

한숨처럼 속삭이는 말에 유리는 그가 손대지 않은 찻잔을 내려다보았지만 곧 일어섰다.

따뜻한 차보다는 시원한 물이 그의 갈증을 달래줄지도 몰랐다.

물을 따라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유리는 “얼음도 필요한가요? ,,

라고 물었다. 링신루는 고개를 저으며 컵을 들었다.

정말로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느리게, 그러나 쉬지 않고 물을 삼킨 그는 이내 컵을 비웠다. 그러고도


모자란 듯 물끄러미 빈 컵을 쳐다보면서 속삭인다.

“목이 말라. 갈증이 나. 목이 타는 것 같아.”

유리는 곧 다시 컵을 채워주었다‘ 찰랑찰랑할 때까지 가득 채운 물을 링신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운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린 그는, 빈 잔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유리를 보았다.

아냐 . 갈증이 그치지 않아요. 목이 말라. 물. ,, 링신루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초조함이 배었다. 애타는
갈증을 호소하며 그는 목을 움켜쥔다.

유리는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조용히 물어보며 그에게로 몸을 내민다. 링신루가 유리를 보았다 ·

뚫어질 듯, 얼마간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초조함이 고이기 시작했다.

뻗어온 손이 유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느리게, 그러나 놓치지 않을 듯 끌어당기는 손을 따라 그에게로 끌려간
유리의 옷깃 사이로 링신루는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깊이까지 숨을 들이쉬는 기척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몇 번이나 느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그는, 이윽고 바람결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갈증이 나요. 목이 타버릴 것처럼. 마시고 싶어.” 제발.

그 짤막한 속삭임 때문이었다. 그 한 마디에 담긴 떨리는 초조함. 애틋한 숨결이 담긴 불안함.

그 때문에 유리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첫 손길은 조심스럽게 닿아왔다.


유리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링신루는, 목이 타 , 하고 속삭이며 아주 조심스럽게, 한
방울 맺혀 있는 물방울을 핥는 것처럼 그의 피부 위에 혀를 대었다. 그게

마치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날름, 날름. 한 방울, 그리고 한 방울 더. 아쉽게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입술에 모으는 것처럼 무척


조심스럽고 보드라운 감촉이 한 번, 두 번 이어졌다.

가슴에 입술을 댄 채 눈길을 들어 유리를 살피는 링신루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유리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짧은 동안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꼭


어색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물방울을 핥아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기갈을 달래던 사람의 앞에 물줄기가 하나 둘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처럼,


링신루의 얼 굴 위로 애타는 갈증이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차라리 입술에 닿는 촉촉한 감각을 몰랐더라면 그대로 목이 말라 죽어버렸더라도 아쉽게 손 놓았을 것을, 이렇게
입술을 축인 다음에는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듯. 마치 광인 같았다.

콰장창, 사기그릇 따위가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몇 가지의 찻잔, 유리컵 따위가 쓸려 내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 유리는 등을 부딪혔다.

거칠고 단호한 손길에 밀려 식탁 위에 쓰러지고 만 유리의 위로, 그가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링신루가


덤벼들었다.

숨 막히는 무게감이 가슴을, 배를, 몸 위를 누르며 얹혔다.

“나는 내가, 아주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예전처럼 불안정하거나 감정에 치달아 나 스스로를
주쳬할 수 없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섕각했어요.”

가슴 위에서 터져 나오는 으르렁거리는 말소리에서 더운 숨결이 확 끼쳐온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감정은 내가 다룰 수 있다고, 이제 다시는 예전 같은 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그래, 그 베를린의 호텔에서, 자기 자신도 억제하지 못하는 미치광이 같았던 나를 보살피는 동안 게이블 씨가
겪었을 궂은일들도 다시는 없을 거라 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목에서 가슴으로, 배로, 살갗 위 어디든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입술의 느낌이
간지럽고 섬뜩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연체동물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유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를 붙 잡아 누르는 무게감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이제는 말이죠, 게이블 씨, 리그로우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나는 냉정할 수 있어요. 놈이 살아서 이 세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하고 머리털 한 올 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냉졍을 유지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놈과 함께 있다면 난 얼마든지 냉정할 수 있다고요. 놈이라도 내
이성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데.“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이 갑자기 유리의 허리를 그대로 틀어쥐었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 유리는 숨이 막혔다.

“당신이 문제야. 당신이 그렇게 안 돼. 당신만 보면--머릿속이 하얘져.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거칠게 내뱉는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유리의 허벅지 안쪽으로 링신루의 사타구니가 닿고 있었다. 다리 사이예 허리를 깊숙이 들이밀어
둘의 사타구니가 맞닿는다.

그리고 유리는 그가 뜯어발길 듯이 옷가지를 벗겨내어 속옷감 한 장만 남은 너머로, 단단하게 발기해 솟아오른
그 의 성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떻게 하면 좋아? 나는 당신을 내 옆에 두고 싶어. 그래야 하고.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은 내 옆에 있

한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날 좋아한다고 한 주 제에, 나랑 떨어져서도 괜찮다고. --


거짓말챙이.”

마지막 말은 낮은 분노처럼 터져 나온다.

귓불 아래쪽을 맴돌던 입이 울컥 솟은 듯 목덜미를 깨물었다.

정말로 그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는 듯--자기 자신을 제어할수 없는 듯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유리의 목덜미를
깨물어대고 있었다.

“잠깐만, 아픕니다.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은 없, -·一.”

유리의 외침은 그의 귀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닿았다 해도 듣지 않기로 한 것처럼, 링신루는 목덜미를


짓씹던 고개를 들어 유리의 입을 막는다.

입속으로 혀가 밀려들어 말을 막았다. 유리의 허리 아래를 더듬던 손이, 유리의 몸에 남아 있던 속옷 하나마저


끌어내렸다.

맨 살갗이 드러난 사타구니에 서늘한 공기가 닿은 것도 잠시.

한 손으로 조급하게 자신의 옷가지를 풀어헤친 링신루가 성기를 꺼낸다. 속옷 밖으로 툭 머리를 내밀며 뻣뻣하게
일어선 성기가 유리의 성기에 맞닿았다.

서늘하던 공기는 그 사이에서 밀려나, 뜨거운 쳬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돌아가면 종종 연락한다고요? 가끔 전화하면서 오래도록 알고


지내자고? 오래도록, 그래, 그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나는 말라 죽어버릴 텐테? 목소리만 들으면서 이걸--
단념하라고?”

유리의 입술을 삼킬 듯이 짓씹으면서 그 사이사이, 링신루가 속삭였다·

더 이상은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니 억누를 생각도 없이, 그는 유리의 몸을 손닿는 대로, 입 닿는 대로
먹어치운다.

“저는, 링신루 씨, 돌아가겠다고 한 적은, 없,”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

유리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링신루는 단언했다. 그 말을 하고 스스로도 울컥한 듯 이를 악무는 턱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 결국은 그 말이야. 매년 계약을 갱신해서 한 해 한 해 더 있은들, 그게 뭐야? 당신


마음은 언제든 가버릴 수 있는 거잖아.

--그럴 거면 나한테 왜 왔어.”

억울하다는 듯 호소하는 원망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링신루가 유리의 무릎을 밀어올렸다. 가슴에 닿도록 무릎을 바싹 밀어붙인 그는, 유리의 발목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는다.

불편한 자세로 움직일 수가 없어친 유리는 힘든 숨을 내쉬며 “저는, 안 그랬,”하고 중얼거렸지만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만다.

아랫배부터 느릿하게 쓸어내린 손이 사타구니를 스쳤다.

풀죽어 늘어져 있는 유리의 성기 위에서 잠시 머무르는가 싶던 손은,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거친 듯하면 서도 아프지는 않을 정도로 훑어 올리는 손 속에서 유리는 자신의 숨이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몸 위를 빠짐없이 핥아 올려 예민해져 있던 감각이, 아랫도리의 직접적인 자극에 단숨에 고양된다.

몇 번 훑지도 않아 이내 발기해 힘을 받기 시작하는 성기를, 그제야 거친 손은 만족스러운 듯 조금 느리게


쓰다듬었다.

“잘 해줄게요.”

문득 귓가에서 낮고 보드라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언제 그에게 화를 내고 원망했냐는 듯, 다정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애교라

도 피우는 고양이처럼 귓불을 잘근거렸다.

“원하는 대로, 뭐든 해줄게요. 나를 줄 테니까, 마음껏 욕심 부려도 돼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해줄게요.”
아랫도리를 어루만지는 손길도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링신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린애를 꾀듯 상냥하게. 바싹 달아올라서도 아래를 느리게 쓰다듬는 손길
때문에 오히 려 그 이상 만족되지 않는 애타는 초조감 속에서, 유리는 흐려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열에 들떠 일렁이는 탓이다.

“해준다고요 ?"

“예.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 저는 해주는 걸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면서, 유리는 머릿속에 멍하게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그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이런 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자신의 성향을 심각하게 의심할 정도로, 유리는 링신루와 몸을 섞는 행위가 좋았다. 결국에는 힘들어서 녹초가
되지만 언제든 그가 원한다면 유리가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지는 게 좋다. ‘해주는’ 것을 ‘받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 왜요. 하기 싫어요? 나랑?”

그때 문득,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전히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그러나 이미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어, 사타구니를 쓰다듬으며 유리의 성기를 문지르던 손 아래로, 링신루가 허리를 깊이 밀어 넣었다.

“아, --!!"

낮게 억눌린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커다랗게 눈을 홉뜬 유리는 순간 숨이 막혀 입을 벌렸지만, 그 입마저


링신루의 입술에 먹히고 만다.

예고도 없이 몸을 벌리며 밀려드는 성기가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깊이 몸에 파묻혔다. 푹, 푹, 거칠게


연이은 추삽질에 그 성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의 몸속 저 안쪽까지 닿는다.

아슬아슬할 만큼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에 고환이 바싹 닿도록 밀어 누른 다.

숨이 막혔다. 유리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입으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링신루의 입에서 달아나 몇 번이나 커다랗게 숨을 들 이쉬고 내쉬었지만, 아래를 엄청나게 압박하며 밀어
올리는 감각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쉰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유리를 링신루가 집요하게 쫓아왔다.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마시는 유리의 입술에, 뺨에,
집요한 입이 달라 붙는다.
링신루도 흥분에 들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해줘. 말이야 어떤 식으로 하든 상관없어. 나는 내가 당신에게 뭐든 해주고 싶지만 당신이
받는 게 싫다면,

그럼 당신이 나한테 봉사해. 이 몸을 나한테 줘. 내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허리를


흔들어. 그렇게, 당 신이 나한테 해줘.”

유리의 뺨을 깨물며 거칠게 속삭인 그는 허리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까지 벌어져 더 이상은 안
되도록 깊이 들어온 성기를, 그보다 더, 더, 더 밀어 넣고 싶은 듯 거침없이 허리를 찔러 올린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떠밀려 흔들리면서, 유리는 어디론가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

았다. 절로 부들부들 떨리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어떻게 가누면 좋을지 몰라,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그래, 그래, 잘 하고 있네요. 그렇게 조여. --, 빌어먹을,

그렇게 이게 먹고 싶었어? 이렇게 조여 대면서 보챌 만큼? 여태 이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왔어요? 앞으로는,


그래, 돌아가 버리면 나 없이 어떻게 살 거야? 이렇게 욕심 많은 몸으로, 나 없이 살 수 있어요? 아니면,
---."

유리에게 쏟아내던 말들이 문득 멈추었다.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유리를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허리를 추어올리던 움직임마저 잠시 멈춘다.

마치 온도가 영점 이하로 떨어지듯 차가운 빛이, 그리고 그 다

음 순간 열풍처럼 밀어닥치는 불길 같은 울분이 터져 나왔다‘

“절대로 그냥 안 둬 ! 만에 하나라도, 어떤 년놈이든 나 말고 다른 인간이 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그게 누구든 죽여 버릴 거야. 당신 눈앞에서 사지를 찢고 살점을 조각내어서 죽여 버릴 줄 알아. 누구든, --
반드시 없애버릴 거야, 절대로, 그 냥 못 둬 !!"

몸속 구석구석까지 찢어발길 듯 범처럼 사납게 포효하며, 링신루는 유리를 몰아붙였다. 머릿속에 일순이나마
떠오른 생각에 시

퍼렇게 눈을 부릅뜬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다.

살갗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심장이 뛰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떠올리다가
유리는 깨닫는다· 뛰고 있는 건 자신의 심장이었다. 두 심장이 가까이 닿아 서로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래, 쟁길지도 모르지. 누구든 몸을 섞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좋아할 사람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적어도 이 남자가 자신을 바라는 한은.


'' ll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혀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칠 듯한 감각을 아래에 퍼붓는 격렬한
열기 때문에 말을 뱉을 여지도 없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리를 움켜쥔 손의 거센 악력도, 입술을 깨무는 단단한 이도, 흔들릴
때마다 밀려나는 유 리의 허리를 잡아당겨 더 바싹 몰아붙이는 몸짓도, 그저 하나의 커다란 감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마치 온몸이 감각, 그 자쳬만으로 이루어진 듯.

헉· 헉. 헉. 자신의 숨소리인지 그의 숨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어쩐지 울음소리가


섞인 것 같아,

유리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뺨도 젖은 것 같다. 눈도. 어쩌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혹여라도 이 남자가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유리는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간신히 되돌리려고 몇 번 이고 눈을 부릅뜨면서 링신루를 보았다.

그러나 얼핏 울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링신루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른 뺨 위로는 땀방울만


뚝뚝 흘러내리고 있 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엉엉 우는 어린애처럼 보이는지 몰라, 유리는 허덕이는 머리로도 열심히 링신루를 쳐다보려고 애쓰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링신루 역시 유리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잡아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래를 빠듯하게 가득 채우고 움직이는 무거운 부피감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뱃속을 더욱 빼곡하게 채우며
벌려드는 느낌에 숨이 막힌다.

호흡이 가빴다. 머리도 아득해져왔다. 이미 아까부터 죽을 만큼 감각이 달아올라 예민해진 몸도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一, 을, 것 같, --."

띄엄띄엄 유리의 입에서 말마디가 흘러나왔다. 바람소리처럼 흘러나오다가 흩어져 버리는 소리를, 그러나
링신루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이미 그 역시 그의 목소리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바싹 쉬어 흥분으로 들뜬 음색으로, 링신루가 속삭인다.

“죽을 것 같아요? --난 이제야 살 것 같아.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음식도 거의 들어가지 않고
머릿속도 엉망이었어.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요? 벌써 그게 얼마나 됐는지 알아? 언제부턴지, 나도 제대로 모르겠어. 요 얼마간은
정말로 이러다가 죽

을 것 같을 정도였는데--이제야 살 것 같아요, 나는.” 허리를 부둥켜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끌어안아 몸을 터뜨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듯이, 손가락 하나만큼 꼼짝할 여

유조차 없도록 세게 끌어안는다.

“정말로 죽을 만큼 피곤했는데, 이렇게 당신을 품에 안고 있으니까, 그 피로가 녹아버리는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살 것 같아·

그동안 계속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았는데, 갈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는데, 링신루는 유리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며 입을 맞추었다.

절대로 못 놔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되더라도, 절대로 못 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옆에 둘 거야.

그렇게 속삭이는 말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녹아버린 듯 흐트러졌다.

" "

죽을 만큼 피곤했다는 건 거짓말일 거라고, 유리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해가 언제부터 떠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에 떠오르다 사라진다.

몇 번이나 의식을 앓고 몇 번이나 깨어나길 거듭하는 동안, 유리는 링신루가 잠들어 있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그는 유리가 눈을 뜨는 어느 순간이건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탐욕스럽게.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시선처럼 유리의 몸도 느리게, 빠르게, 격렬하게 흔들리곤 했다.

-- 면 안 돼요?

문득 귓가에 떠오르는 낮은 목소리. 울 것처럼 흔들리는. 몇 번이나 속삭인 것 같았다. 유리의 의식이 저
너머로 넘어가 있는 동안에도,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그는 수없이 속삭인 것 같았다.

제발 닿기를. 들리지 않는 귀를 스쳐 마음에라도. 그렇게

기도하듯이.

--나한테 좀 더 욕심을 내주면 안 돼요? 날 좀 더 원해주면,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생각해주면 안 돼요?


내게서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 돼요? 풀죽은 어린애처럼 힘없는 목소리였다. " "

유리는 깜박, 눈을 감았다 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도 삑뻑하게 아팠다. 목도 쉬었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도록 늘어 진다. 지난밤의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자신도 어지간 히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던 모양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 결엔지 침대 위로 옮겨와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유리의 옆으로,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당 기고 거기에 앉은 링신루가 있었다.

어딘지 지쳐 보였다. 밤은 새운 탓--은 아닐 거다. 미간에 진주름을 무심결인 듯 문지르고 있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가 깨어난 걸 알았을 텐데도 시선을 주지 않고 링신루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 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도 그 시선을 쫒아간다.

링신루는 팔걸이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한 손에 뭔가 작은 것을 쥐고 있었다. 가끔 느릿하게 문지를 때마다


바삭, 바삭, 조그만 비닐 소리가 난다.

가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였다 말았다 하는 그 네모난 비닐 이 무엇인지, 유리는 잠시 동안 지켜본 다음에야


깨달았다.

" !)

유리의 시선이 그 비닐에 고정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비닐을 손가락으로 구기던 링신루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밑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눈을, 유리는


묵묵히 마주보았다.

“사람의 의지란 터무니없이 약한 거예요.”

링신루는 느릿하게 말했다. 목소리마저 지친 듯 가라앉아 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잡고 있는 그것은 네모난 비닐이었다.


뜯을 수 있는 이음새가 없이 밀봉된, 네모나고 조그만 비닐.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반쯤 차 있었다.

우표만 한 크기의 그 비닐을 지그시 쳐다보던 링신루는 느리게 그것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따라 안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도 사각사각 흔들린다.

유리는 말없이 링신루를 바라본다. 그는 유리에게 무표정한 시선을 주더니 “어제 그놈이 빼돌렸던 거라면서
윈안이 건네줬던 거예요.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고 있었어요.”라고 중얼거린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가루가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손 안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이걸로 망가진 사람을 수도 없이 봤어요. 가끔 그렇게 망가졌다가 재활을 받는다는 사람도 백 명 중 한둘쯤
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정말로 멀쩡해지는 건 그 가운데 또 백 중 한둘 . 끊기가 그렇게 힘든 모양이더라고요.

” 운 좋게 끊는다 하더라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뒤에라도 딱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접하면 그걸로 다시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니까요, 하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의지력이 강하다 싶은 사람도 별 다를 것 없어요. 가벼운 트립뗀 정도라면 모를까,

이쯤 되는 본격적인 물건이먼 백중 구십구는 똑같아요. 몸이 못 견디게 되면 결국 정신도 굽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약이 정신을 좀먹는다고들 하는 거겠지만. 어쩐지 허 무하지 않아요?”

비닐을 가지고 놀듯이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다시 구깃, 비닐

을 접는다 · 그러다가 톡톡, 그 안의 가루들을 두드린다. 마치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

“예전에 태이 형을 약에 절여서라도 내 옆에 끌어다 놓을까 했을 때, 게이블 씨가 그러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그건 영원히 그를 앓는 거라고. 그런데”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입매가 얼핏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잡고 싶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리던 약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 그리고 한동안 더 그 약을 내려다보던


그는 유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 그 속을 짚을 수 없도록 새카맣게 물든 눈이, 이윽고 희미하게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게이블 씨라면 어때요. 도저히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약에 절어버린다면, 본인의 의지로 어떻게든
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리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하는


것처럼 선선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한다.

“제 목숨을 끊을 수는 있을 겁니다.”

조용하고 여상한 대답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순간, 링신루의 얼굴에서 씻은 듯 웃음이 사라졌다.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치럼 얼어붙은 그의 표정에서 얼핏 핏기가 가신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비웃기라도 하듯 하, 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코웃음을 친다.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에요? 그나마 쉽게 끊을 수 있는 약도 흔히 있긴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약쯤 되면


일단 중독이 되

고 나면 그때는 이미 정신을 제정신으로 유지할 수가 없어요 · 목숨을 끊고 말고, 그런 섕각을 할 여지조차 없이


약만 생각하게 된다고요.”

유리는 천장을 보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그렇게 침묵하던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 I. 하지만 짧은 순간순간, 이성이 돌아오는 때가 있어요 ·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은 되는 시간이지
요.”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표정을 잃었다. 흐린 분노도, 울컥한 자포자기도, 단념이 되지 않는 집착도 모두 사라져


창백하게 빛이 죽은

눈이 유리를 쳐다본다.

유리는 링신루를 마주보던 시선을 가만히 돌렸다.

“저한테도 약 때문에 결국은 세상을 뜬 친구가 하나쯤은 있습 니다.”

....

링신루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빛을 앓은 얼굴로 망연히 유리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꿈틀, 손가락
끝이 경련하듯 움직인 듯했다. 그러나 그뿐, 그는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유 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 , 힘이 빠진 헛웃음을 나직이 내쉰다. 일시에 온몸에서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손으로


얼굴을 덮다시피 문질렀다. 죽어버릴 만큼 피곤한 기색으로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해서 말이죠 ·” 눈 위를 문지르면서 링신루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린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그에게 돌린 유리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다 늙은 노인이랑 살고 싶지 않아 하는 어머니를 잡아두려고, 약을 쓰려고 했었어요.”

느슨하게 눈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링신루와 눈이 마주친다. 까만 눈은 절망처럼 시커멓게 유리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기 전에 어머니는 임신을 한 거죠· 그게 나였고, 약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인 족쇄가 생긴 탓에 어머니는 약에 절여지지 않고 그대로 들어앉게 되었는 데

그는 비틀린 웃음을 웃었다.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꺼려해요. 아버지가 이십 몇 년 이나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바라는 건 뭐든지


퍼주면서 환심을 사 려고 갖은 애를 다 써도 말이죠.”

아마도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누군가에게-어쩌면 어머니 본인에게, 혹은 남의 말을 즐기는 호사꾼에게 들었을


이야기는, 어떤 낭만주의자들이 링훠렁과 그의 젊은 아내에 대해 읊곤 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유리는 링신루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버지도 뒤이어 같이 떠올린다.

수국처럼 처연하게 아름다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화사하게 웃지를 않았다. 혹여 유리가 모르는 곳에서는
그렇듯 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이는 나쁘지 않아요. 나름대로 그럭저럭 잘 지내긴 하세요,

두 분은· 어머니도 나름대로는 아버지한테 잘 하시고. 그런데도, 결국 온전하게 서로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아마 두 분 중 누구든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는 줄곧 그렇겠죠.”

사람을 망가뜨려서 껍데기만 남기더라도 곁에 묶어두겠다는 집착은 결국 그렇게 끝나나 봐요, 하고 링신루는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입가에 떠올린 그는

잠시 지그시 유리를 바라본다.

“약을 써도 사람은 못 잡는 거예요. 태이 형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씁쓸한 빛이 그의 말속예 배어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는 조용한 한숨을 쉬었다.

“정태의 씨가 링신루 씨에게 오지 않은 건,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뜨면 무슨 수를 써도 못 잡아요.”

그것은 링신루의 탓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태의의 탓도, 누구의 탓이랄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의 마음이
리그로우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을 옆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혹은 어떠한


강제적인 방법으로 잡아두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을 온전히 옆에 두는 것은 아니다. 정태의는 그때부터 이미
링신루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리는 링신루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건넸다.

“당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요.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의 낯빛이 변했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차갑게 굳은 얼굴이,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유리를 쳐다본다 ·

이윽고 그 눈은 시퍼렇게 질려 반들거리기 시작한다.

“그게 누군데요?”

눈빛만큼이나 서늘하게 들떠 있는 목소리다. 간신히, 정말로 겨우 이성을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링신루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뒤를 잇는 목소리까지 떨린다.

“나에게 맞는 사람? 그게 누군데요? - -나한테 왜 이래요, 다 알잖아요. 왜 모른 척해요? ! 나한테 왜


이래요? !"

떨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 마지막에는 고함처럼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앞두고 유리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한다·

- -다 알잖아요.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안다. 지금 링신루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더할 수 없는


탐욕 으로 가득 차 까맣게 일렁이는 저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유리도 알고 있었다.

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건 어쩌면 링신루 본인조차 모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엇을 바라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어쩐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시선은 현실

속에서 링신루와 마주하고 있는데도, 어딘지 의아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그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당혹스러우면 서도 반갑고 기쁜데도 그랬다.

그래서 그의 불안정이 더 눈에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저는 링신루 씨를 좋아합니다.”

유리는 몇 번이나 했었던 말을 조용히 입에 담았다. 그저 되풀이만 하는 게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찬 찬히 생각해보고 말을 했다.

바로 어제와 달라지지는 않았나. 내 마음을 나는 정말로 알고 있는가. 자신에게만큼은 정직하게 살아 가고자


애쓰며.

창백하게 질린 링신루가 표정 없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금방이 라도 쨍 터지며 산산조각 날 얄팍하고 섬세한


유리조각 같다.
“그리고 링신루 씨가 바란다면 계약도 갱신할 겁니다. 올해에도, 내년에도, --그리고 아마 링신루 씨가 바랄
때까지. 제 능력이 닿는 한은요.”

이것도 이미 링신루에게 했던 말이었다. 또한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유리는 그가


바라는 한, 자신의 힘이 닿는 한 계속 그 옆에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링신루는 불안해했다. 그의 불안정한 마음은 유리가 그렇게 말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당신이 바라는 한 저는 계속 이곳에 있을 테고, 그래요, 그동안은 제가 당신을 바라듯이 당신이 저를 바라면서
지낼 수도 있 겠지요. 그런데, 뭘 더 바라나요?”

그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면.

유리가 어떤 대답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그가 다시 예전과 같이 진심으로 기쁘고 화사한 웃음을 지어줄까.


자신으로 인해 이 사랑스러운 남자가 저토록 불안정하게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유리는 무겁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지만 겨우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바르게 앉아 그를 마주본다.

링신루는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종신계약? 그 종이에 서명만 하먼 되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굳이 서명하지 않아도 재계약을 거듭한다면 현실적으로 별다를 바가 없는
종잇조각 하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꿔 생각하면, 그렇다면 그를 위해 서명 하나쯤 해줄 수도 있었다.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사람을 볼 바에는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의 기분이


풀린다면.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새카만 시선만 주는 링신루는, 이미 자신이 바라는 것이 그 종이 하나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날 좀 더 원해줘요.”

링신루가 불쑥 속삭인다.

“내게 좀 더 욕심을 내줘요. 늘 나를 바라보고, 더, 더, 더 나를 원해줘요. 내가 불안하지 않을 만큼.”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호소하며 당신이 욕심이 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만큼만이라도.

링신루의 새카맣게 일렁이는 눈을 보며, 유리는 대답 대신 난처하게 눈을 깜박였다.

싫은 게 아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이미 그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계속 좋아하고 더욱 좋아하는


게 뭐 어려울까.

하지만.
지금 링신루는, 유리가 그를 좋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도 담담하게 흐르는 물처럼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충분히 만족될 수 있을
만큼 가시적이고 격렬하게. 링신루가 유리를 바라는 방식으로 그래서 유리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성격의 문제였다. 처음부터 타고난 성향의 문제이며, 자신의 손을 벗어난 일이다. 풀을 뜯는 짐승이
육식맹수가 될 수 없 는 것과 같아, 노력과는 동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링신루는 유리의 얼굴에 떠오른 난처함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그 이유도, 그의 생각도 짐작한 게 틀림없었다.

잠시 타는 듯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다가 방에서 나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유리


앞에 내려놓았다.

이불 위에 팔락거리며 떨어지는 것은 계약서 한 장이었다.

링신루는 펜을 들어 계약 기간을 기입하는 란에 ‘종신’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어 계약 당사자의 고용인란에


서명을 한 뒤 그것 을 다시 유리에게 내민다.

“내게 지금보다 더 욕심을 내겠다고 해줘요. 내가 불안하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내가 당신을


욕심내는 만큼만이라도

나를 원하겠다고, 그런 의미를 담아서, 사인해줘요.”

유리는 자신의 몫의 서명란만이 비어 있는 계약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링신루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서린 긴장, 불안, 그런 것들 때문에 굳어버린 얼굴은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시간은 줄게요. 당신의 계약 만기까지는 며칠 더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잘 생각한 뒤에 결정해요. 사인을 할지, 아니면 이대로 계약을 끝낼지.”

.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닌데요.”

“억지로라도 노력해줘요.”

링신루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도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다.

다시 한동안 난감하게 계약서를 내려다보던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링신루와
눈이 마주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러면 더더욱, 약속을 하고나서 꼭 지켜줘요.”

링신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점점 더 울 것처럼 반들거리는 눈으로 유리를 노려본다.


그러나 링신루 역시 자신이 불합리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유리가 굳이 그 점을 짚지 않는 것도,
링신루 자신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고집을 부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화났어요? 나한테 질릴 것 같아요?”

말없이 계약서만 쳐다보며 곤란한 기색을 띠고 있던 유리에게, 링신루가 불쑥 말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불안에 젖어 있었다.

저런 목소리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화내지 마요. 나는 정말로, 게이블 씨가 화를 내면 무서워요.”

거의 화내는 일이 없기에 더, 화를 내면 정말로 미워할 것 같아서.

풀죽어 속삭인 링신루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유리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 손은, 그러나 눈치를 보는 것처럼 그
근처에서 멈칫거린다.

손목을 잡아도 유리는 뿌리치지 않을 텐데도, 그걸 알면서 도 두려운 것처럼 잠시 허공을 맴돌던 손은 결국 그
앞의 이불을 쥐고 말았다. 억울한 듯, 그러나 대신할 거라곤 없어 그거라도 꼭 움켜쥔다는 듯.

“다른 거라면 뭐든 내가 노력할게요.”

그가 애원처럼 속삭였다.

“다른 건 뭐든 내가 게이블 씨에게 맞추겠어요. 하지만 이건 안 돼요. 나는 당신이 그런 것처럼, 멀리


떨어져서도 서로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 나아간다는 데에 만족하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축복하는 데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넉넉하고 담담하게 사랑할 수는 없어요. 나는 그렇게는 못 해요. ,,

링신루는 고개를 저으며 호소했다.

이미 여러 날을 생각해보았다.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유리에 대한 생각으로 보내는 동안 그런


생각도 안 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고 노력해보려고 해도 무리였다.

자신과 멀리 떨어져서도 만족하는 유리를 상상만 해도 눈앞이 새카맣게 흐려졌다.

“당신이 날 구했잖아요.”

심장이 아프고 답답해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결국 불쑥 터져 나 오는 건 비뚤어진 원망이다.

“당신이 날 바다 속에서 건졌잖아요. 당신이 날 세링게에서 데 리고 나갔잖아 · 내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내가 다치는 게 싫어서 당신이 마음대로 날 구했잖아요.”

링신루는 유리를 세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애원을 호소한다.

“그러면 끝까지 구해줘요.”

이번에 구하지 않으면 나는 예전과는 비할 수도 없이 상해버리고 말 테니, 링신루는 협박처럼 말하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사실은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손목을 그렇게 잡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뿌리칠까, 혹시라도 그가 내키지
않아 할까 차마 무서워서 건드리지도 못하며, 주먹의 관절이 하얗게 솟아오르도록 이불만 세게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작고 단조로운 기계음이 들렸다.

노트북을 무릎에 얹고 있던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매시 정각마다 울리는 시계를 쳐다보자 어느새 저녁 시각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넋 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금방 간다 ·

" ,,

유리는 아무도 없는 현관 쪽을 보았다. 링신루의 구두가 보이지 않는 현관을 잠시 쳐다보다가 휴대전화를 보았다.
별다른 메시지가 들어와 있지 않을 걸 보니 이제 슬슬 링신루가 돌아올 즈음이 된 성싶었다.

주말마다 본가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오는 링신루는 오늘도 오후 느지막이 본가로 갔다.

여느 때라면 유리도 동행할 테지만 아직 몸 상태가 썩 나아지지는 않아 집에 홀로 남았다.

(유리는 이 정도라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하며 가겠다고 했지만, 링신루가 딱 잘라 고개를 저으며 얼른
갔다 올 테니 쉬고 있으라고 했다)

친족들과 식사를 하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온다면 밤늦게 돌아을 수도 있을 테지만, 식사만 마치고 금방
온다면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그리고 유리는, 링신루가 딱히 언제 돌아오겠다고 정확하게 말하고 나간 건 아니지만 그가 일찍 돌아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계약이 만료되는 기일이 내일이 었다. 정확히는 오늘 자정을 기해 계약이 끝난다.
그러니 그 전에 -오늘 밤 안에-유리는 링신루가 과제처럼 내어준 계약 여부에 대해 대답을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링신루는 아침부터 정신이 다른 데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행동이 이상하거나 멍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볼일로 인한 외출을 앞둔 사람처럼


어딘지 행동이 침착하지 못하고 얌전히 한 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했다.

설마하니 저러는 이유가 전적으로 오늘이 기일 만료라서 그런 건 때문만은 아니겠지

오전부터 괜히 베란다에 나가서 한참 바깥을 내려다보다가, 욕실로 가서 오늘만 두 번째로 샤워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차를 끓이다가, 책 몇 장을 보다 말고 다른 책을 껴내 넘기곤 하는 링신루를 보며 유리는
설마,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오후 나절 즈음, 유리는 문득 오늘이 주말인 게 떠올 랐다.


‘링신루 씨.’

본가에 가려면 슬슬 준비해야 할 텐데, 싶어 베란다에 나가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루를 불렀다.

그 순간, 눈에 띌 정도로 움찔하고 몸을 움츠린 링신루는 번개

처럼 고개를 돌렸다. 휙 소리가 나도록, ‘링신루 씨’라는 부름이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리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몹시 반들거리고 있었다.

불안, 초조, 기대, 갈망, 그런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듯한 그 눈을 보면서, 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가 아침부터 어수선하게 집안을 돌아다닌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지금 그를 부른 자신이 몹시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가책이 느껴졌다.

‘예? 지금 나 불렀죠?’

링신루는 얼른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와 유리의 건너펀 자리에 앉았다. 무의식적으로 유리를 따라하는지 반듯한
자세로 앉아 무릎 위에 손까지 얹고 얌전히 바라보는 그를 앞두고, 유리는 잠시 말이 막혔다.

오늘 본가에 가봐야 하지 않나요?’

유리가 말하자, 생각했던 대로 링신루의 얼굴에서 대번에 빛이 꺼졌다. 그가 바라던 말이 아니었는지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지 만, 애써 표정 위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연하게 ‘네, 그렇죠.’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겠네요.’

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묵직하게 허리가 욱신거려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았다.

며칠 전 식탁에서 흔들리다가 모서리에 호되게 부딪혀 아직도 아팠다. 게다가 쳬력도 부쩍 떨어졌는지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그럭저럭 움직이지만 그날 당일은 하루 종일 침

대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유리가 허리에 손을 대고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링신루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얼른 유리를 살짝 밀어 도로


자리에 앉혔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 게이블 씨까지 갈 필요 없어요.’

가서 밥만 먹고 올 건데 게이블 씨까지 뭣 하러 가요, 어차피 밖에서 기다리면서, 하고 말하는 링신루였지만,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괜찮습니다. 엊그제 페이에게 책을 빌려주기로해서 오늘 만나기로 하기도 했고, 움직이는
데예도 아무런 무리 가 없어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고 유리는 손까지 저었다. 요 며칠 링신루는 유리가 마치 병자라도 되는 양,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기 발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했다.

요 며칠 링신루는 정말로 유리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웃는 얼굴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고 늘 입 안의 혀처럼


행동을 유리에게 맞추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한결같이 정중했고, 유리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러웠다.

오로지 열기를 담은 시선만이 그 속내를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유리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 페이?’

고개를 기웃하며 되묻는 링신루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그는 곱게 웃으면서 ‘그 책은 내가 가는 길에 갖다 줄게요. 걱정 말고 쉬고 있어요’라며, 다시 일어서려는


유리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어 못 일어나게 꾹 눌렀다.

눈치를 보아하니 정말로 혼자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아서,유리는 난감하게 그를 보다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페이에게는 나중에 짤막하게 문자라도 보내야 할 성싶었다.

그 뒤에도 한동안 유리의 근처를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낸 링신루는,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집에서
나갔다.

밥만 먹고 금방 올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서던 링신루는 잠시 문 앞에 멈춰서 물끄러미 유리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초조한 빛이 어른거리는 얼굴은, 본가에서 돌아온 뒤의 오늘 밤--기한 만료라는 시간을 앞두고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혹시라도, 설마, 그래도, 온갖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을 그에게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그렇게 유리를 쳐다보다가 ' 그럼 갔다 올게요.’라며 문을 닫았다. 유리는 한숨을 쉰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링신루가 아침부터-아니 사실은 이미 며칠 전부터-은근히 유리의 눈치를 보며, 유리가 그를 부를 때마다


초조한 기대에 찬 눈으로 그 입술을 쳐다본다는 건 눈찌 채고 있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 종신이라는 기간을 적은 계약서에는 서명을 해 줄까, 혹은,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불안과 희망이 하루하루 그를 바작바작 태우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태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약속은 가볍게 입에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리는 줄곧 자신을 불안스럽게 쳐다보던 링신루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그 빈자리를 향해 속삭였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왔다. 유리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링신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과연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탐욕스럽게, 그의 모든 것을 갈구하면서, 그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소유하길


바라며 그를 좋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의 성격이란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바뀔 수 없는 법이고, 유리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링신루가
‘싱거운 풀’ 이라고 했던 부분은 결국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노력해줘요.

--약속을 하고나서 꼭 지켜줘요.

그렇게 말하던 링신루의 호소가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자신은 링신루가 바라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고 그가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에게 내어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답을 미루었던 건, 그것이 자신의 노력인 탓이다. 이 한순간 한순간에도 보다 그를 좋아할 수
있도록,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볼 수 있도록 유리는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쯤 결실을 맺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노력해 갈 터였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결론을 지었고, 남은 것은 링신루가 돌아오

면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건네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되먼 적어도 한동안은 이곳에서, 링신루의 옆에서
머무르게 될 터였다. 몇 년, 혹은 그 이상,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유리는 ‘확정’이라는 글자가 뜬 노트북 화면을 확인하고는 창을 닫았다· 마음을 결정한 뒤에는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처리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는 그였다.

노트북을 덮으며 다시 시계를 보았다. 식사만 하고 돌아온다고 치면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던


유리는 문득, 어쩌면 자신도 은근히 초조한 기분인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야 의식했지만, 아까부터 몇 번이나 시계를 보면서 링신루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

유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늦을 것 같다거나 하는 연락은 여전히 없는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유리는


링신루에게 한번 전화를 해볼까 잠시 생각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돌아오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걸 물어보면 어쩐지 링신루는 몹시 좋아할
것 같았다.

어쩌면 예상보다 ‘노력’이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유리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링신루의 전화번호를 누른 그가 막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 .

一- -

,,

전화가 왔다는 메시지가 액정에 뜬 바로 그 순간은 링신루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아래에 뜬 번호는 다른


사람이었다. 국외에서 걸려왔다는 걸 알려주는 긴 숫자는 낯이 익었다.

『유리. 아까 전화했었다면서.』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이 남자는, 상사를 잘못 만난 탓에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임스였다.

“예, 제임스. 루시에게 용건은 말해뒀었는데 얘기하지 않던가요?”

『들었지. 집을 정리하겠다니 무슨 소리야?』

전화 너머에서 제임스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모습이 보이는것 같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베를린에 있는 제 아파트를 처분하고 싶은데 그 처리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갑자기 왜? 안 돌아올 사람처람』

“안 돌아가게 될 것 같아요. 당분간은.”

전화 너머가 고요해졌다. 유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분간이라니, 얼마나.』 제임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얼마나’라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부루퉁해지는 걸 보니, 뭔가 심상찮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 양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종신계약이기는 한데요.”

『종신?!』

성량이 갑자기 세 배쯤 커진 것 같았다. 유리는 수화기를 귀에서 약간 떨어뜨리며 예, 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웬 종신이야? 너 종신계약은 안 하잖아?!』

“예,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번에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려면 진즉에 우리 회사랑 하지! 어디야, 링가랑 재계약을 하는 건가?』

“예.”

링가라기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링신루 개인이라고 해야겠지만, 유리는 구태여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텐데 굳이 전화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뭐야. 나는 네가 지금 계약 이번 텀만 마치면 다시 독

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네게 맡길 일을 미리 뽑아서 추려 놨는데.』

“그러실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연락드리는 거예요.”

바로 조금 전에 결정했거든요, 하고 유리는 덧붙였다.

제임스는 믿고 있던 동료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투덜거리면서 『종신계약을 하려면 이미 너랑 수차례 계약을


한 전적이 있는 상대에게 우선권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 , 『그러면 차후 에 단기계약 가능 여부는 어떻게
되느냐』 등등, 불평과 의문을 늘어놓았다.

제임스는 정말로 아쉬운 눈치였다. 유리 게이블이라는 인재를 놓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아마도 유리가
돌아가면 그에게 맡기려고 준비해두었던 일들 대부분이 카일의 처신에 관련된 뒤치다 꺼리였던 모양이라고, 눈치
빠른 유리는 생각했다.
“어깼든, 그러려면 집도 그렇고, 정리해야 할 게 많으니까 잠시 그쪽으로 돌아가긴 할 거예요.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을 테니까 아파트 처분은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알았어. 적당한 매수자나 중개자를 한번 알아봐주지. 매도 조

건은 어떤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어?』

제임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놔도 이미 떠나간 물고기를 잡기는 글렀다고 단념한 듯,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조건은 그냥 평균 수준으로 유리는 입을 열다 말고 말을 멈추었다.

" ,,

지금 현관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하고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잘못 들었는지, 들어온 사람은 없었고 잠시 그대로 기다려 봐도 별다른 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옆집으로 들어가는 기척이었나 보다.

“뭐 , 전화로 길게 이야기하기도 좀 그렇고, 만나서 얘기해요. ..,,

『언제쯤 들어올 건데?』

“내일 비행기로 예약해뒀어요.”

유리는 조금 전 항공권 확약을 마치고 덮은 노트북으로 툭툭 두드렸다.

생각난 김에 처리할 일들은 빨리 처리하고 싶어 찾아봤더니 다음 주 이후로는 휴가 기간이라 비행기표가 마땅치


않아 그냥 제일 빠른 걸로 끊었다.

『내일? 번갯불에 콩 구워먹겠군.』

“예, 계약 만기가 오늘 자정이거든요. 결정을 내렸으면 우물쭈물할 게 뭐 있나요. 어차피 돌아갈 거면 그냥


빨리 돌아가는 편이 낫죠.”

그곳에서 십수 년 살던 생활을 정리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며칠 안에는 마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이제는 언제

다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아침 비행기로 출발할 테니 내일 저녁에 봐요. 베를린 시각으로는 오후쯤 되겠군요. 회사로 갈게요.”

『오후라. 알았어. 내일 오후에는 외부 일이 있으니까 아마 네 댓 시는 되어야: 회사로 돌아올 거야. 적당히


시간 보고 와.』

“예.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알았어. 별로 반갑지 않은 만남이 되겠지만.』


종신계약이라는 말의 충격이 컸는지 제임스는 전화를 끊기 직전까지 투덜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유리는 피식 웃곤 전화를 끊었다. 그럼 미리 연락을 할 곳에도 했다. 당장은 더 이상 남아 있는 일은 없었다.


남아 있는 일이라 면 유리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링신루가 본가에서 저녁만 먹고 돌아왔다면 이미 도착했을 즈음인데도 아직 안 온 걸 보니, 이야기 를 나누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 의외다. 필경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얼른 돌아올 줄 알았는데.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임스와 통화를 하기 직전에 눌렀던 링신루의 번호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 l

유리는 고개를 기웃했다. 링신루의 전화가 꺼져 있었다.

영화관에 가거나 비행기를 탈 때 등 매우 기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화를 끄는 일이 거의 없는데 희한한


일이다.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본가에서 어른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답이 나온다-.

어서 돌아오면 좋겠는데.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건네줬을 때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불안과 기대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그 얼굴에 기쁜


웃음이 환하게 차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울지.

유리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링신루가 언제쯤 돌아올까 기다리는 마음이 얼핏 초조해졌다.

그는 여태 이런 마음으로 있었던 걸까, 요 며칠간.

유리는 링신루에게 이제야 대답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울렸다.

평소에는 못 듣고 넘어갈 때도 많도록 작은 기계음이었지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집에는 유난히 크게 울린다.

집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의 조명등 하나만 켜놓은 채, 유리는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읽고 있던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덮어놓은 지 오래다.

" ,,

링신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주말에 본가에 가먼, 때마다 다르긴 하지만 빠르면 여덟아홉 시, 늦으면 자정 넘어서 돌아오곤 했다.
보통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간단한 얘기를 나눈 뒤에 자리를 뜨면 열 시를 전후 해서 돌아오게 된다.

가끔 친족들과 이야기가 길어져 늦어질 때에는 자정을 훨씬 넘길 때에도 드물게나마 있었기 때문에, 링신루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늦게 돌아

오곤 하는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찍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어른들과 이야기가 길어지나 보다. 혹은 어머니에게 붙잡혀 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에게 붙잡히면 몇
시간이나 헤어 나지 못하는 때도 가끔 있었으니.

유리는 시계를 한 번 더 보곤 소파에서 일어났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링신루를 기다리며 커피라도 마실까 싶었던 것이다.

언제쯤 올까. 금방이라도 들어올까. 아니면 많이 늦어져서, 예전 언젠가 제일 늦게 돌아왔던 때처럼 새벽 두


시도 넘어서야 들어오는 걸까.

그렇게 늦어지면 연락이라도 주면 좋을 텐데. 아까 처음 전화한 뒤로 혹시나 싶어서 두어 번 더 링신루에게


전화해보았지만 역시나 전원이 꺼져 있었던 걸 떠올리며 유리는 한숭을 쉬었다.

그즈음이었다.

물이 막 끓기 시작했을 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각에 전화할 만한 사람은 따로 없으니 링신루인가


보았다.

유리는 불을 끄곤 거실로 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화면에 뜬 발신자는 링신루가 아니었다. 그래, 웬일이야, 페이.” 목소리에 실망이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유리는 발신자의 이름을 불렀다.

전화 너머에서는 늘 그렇듯 활기찬 목소리가 넘어 왔다.

『삼촌, 책 잘 받았어요. 깨끗하게 보고 돌려드릴게요-.』

“아아, 그래. 천천히 보고 줘.”

책을 빌려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전화한 모양이었다. 변함없이 유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웃음 지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프시다면서요?』

링신루가 본가에 혼자 간 이유를 뭐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리는 링신루를 거짓말챙이로 만들 수는 없어


“괜찮아. 다닐 만해.”라고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페이는 유리의 목소리가 멀쩡하자 안심했는지 다행이네요,
하고 웃었다.

『그래도 이참에 막내삼촌 많이 부려먹으세요. 아플 때 안 부려

먹으면 언제 부려먹겠어요, 그 삼촌을.』 아주 열심히 돌봐주던걸, 하고 웃는 유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요 며칠 몸이 불편했던 유리를 링신루는 성심성의껏 돌봐주었다.
침대로 식사를 날라 오거나 욕실로 반짝 들어 안고 가 머리를 감겨주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너무나
정정스럽게 돌봐주는 바람에 그 호사에 도리어 먼구스러웠을 정도다.

“링신루 씨는, 옆에 있어?”

유리는 페이에게 전화가 온 김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슬쩍 운을 뗐다. 삼촌들과 같이 있다든가, 조금 전에


돌아갔다든가, 뭔가 답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페이에게서 돌아온 답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막내삼촌요? 거기 없어요? 아까 갔는데?』

오히려 페이야말로 이상하다는 듯, 당연히 거기에 있을 줄로 알았다며 대답을 한다. 유리는 잠시 눈만 껌벅이며
침묵했다.

“아까? 언제쯤?”

『저녁 먹고 바로 갔어요. 저녁도 먹는 등 마는 둥 하더니, 차도 안 마시고 바로 일어서던데요. 아.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 봐야겠다고 하더니, 다른 데 약속이 있었나.』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던 페이는 그제야 아까 스치듯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납득한다. 그러나
유리는 이번 에도 다시 침묵했다.

링신루에게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어딘가 들렀다 올 데가 있었다면 나가기 전에 그런


말을 했을 터였다. 링신루가 말했다는 급한 일은 짐작컨대 집으로 돌아오는 일 자체였을 것 같은데.

" "

『한번 전화해볼까요?』

“아니 , 괜찮아.”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전화는 꺼져 있다.

링신루에게 달리 약속도 없었고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다고 말할까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유리 자신이 나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적당히 전화를 끊은 유리는 관 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링가 본가로 가는 길은 큰 길을 따라 주욱 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도중에 길이 어긋날 일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바로 출발했다면 이미 두세 번은 왕복할 만한 시간이 지났으니 아직껏 길 위에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운전을 하다가 피곤해져서 잠시 갓길에 차를 대놓고 자고 있거나, 혹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고가 났을 경우라도 그 길로 가면서 살피다 보면 뭔가 흔적이 보일 터였다.

“왜 하필 이럴 때 전화가 꺼져서 !"

지갑만 주머니에 넣은 유리는 혀를 차며 아무 신발이나 구겨신었다. 이렇게 초조한 마음이 든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누구에게인지 모를 기도를 하면서 유리는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 . . …-‘기 ,,

문이 열리지 않았다.

유리는 현관문을 열던 손을 멈칫하며 의아하게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문고리를 돌리며
밀어보았지만, 당연히 열려야 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샅기“

왜 하필 이렇게 급할 때. 유리는 혀를 차며 조급하게 문고리를 혼들었다. 철걱철걱, 잠기지도 않은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바깥에서 뭔가로 막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문이 어딘가 잘못 걸리기라도 한 건가, 유리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문을 쾅 걷어찼다.


그러자 문이 조금흔들렸다. 아무래도 문 앞을 뭔가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는 문고리를 돌리고 힘껏 밀었다. 단번에 힘을 확 줘서 밀자 문이 반동으로 한 뼘쯤 열렸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한 뼘쯤 열린 것마저 도로 닫히려는 듯 이쪽으로 밀 려왔다. 유리는
당혹스럽게 문을 계속 밀었다.

“뭐야, 앞에 뭐가 막- , " “열지 마요!”

유리가 혀를 차며 중얼거릴 때였다. 문 너머에서 벌컥 외치는 소리가 돌아왔다.

순간 말을 잃은 유리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문이 콰당, 도로 닫힌다. 어?”

유리는 닫힌 현관문을 붙들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는 그 목소리는 분명 링신루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보아서는 문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 ,,

유리는 잠시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문만 쳐다보았다.

일단 찾으러 갈 수고는 던 것 같다. 게다가 걱정했던 것처럼 사고가 나지도 않고, 다른 데를 들르느라 늦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연락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돌아왔다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유리는 문을 통통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시 문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돌리며 밀었지만, 여전히 문은 앞을 가로막힌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링신루가 문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 영문을 모르겠다.
유리는 문에 등을 대고 쳬중을 실어 억지로 밀었다. 다시 문이 한 뼘쯤 열린 틈에 “링신루 씨?”하고 말을
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열지 말라니까요!”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콰당, 바깥에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었는지 문이 닫힌다.

유리는 한동안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문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웃한다. 열지


말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유리는 문에 손을 대고 웅크려 앉아 문을 두드렸다.

“링신루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문으로 가로막혀 있다고는 하나 바깥까지는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여전히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그대로
가로막고 앉아서 문을 열지도 않고 무슨 영문인지 대답도 하지 않을 요량인 성싶었다.

링신루 씨, 링신루 씨,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유리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온 쳬중을 다해 문을 밀자 다시


한 뼘쯤 문이 열렸다. “잠깐만요, 왜 그래요, 문 열고 얘기 좀 .”하고 문 틈

새로 말을 걸었지만 대답도 없이 문을 닫으려고 밀어오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힘으로 밀린 탓에 문이 막 닫히려고 하던 순간. 턱, 1, 2 센티미터쯤을 남겨두고 문이 걸렸다.

“악!! 손, 손!! 손이 !!"

유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문을 우악스럽게 밀어대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화급하게
문이 벌컥 열렸다.

낯빛이 변한 링신루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유리는 문 틈새에 끼웠던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문틀에 올라선 뒤, 덤덤하게 링신루를
내려다보았다.

링신루는 허를 찔린 얼굴로 멍하니 유리를 쳐다보았다.

다친 데 없이 말짱한 손과 유리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그의 표정 위로 ‘속았다’라는 분노가 울컥 스쳤다.


그리고 링신루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핀 유리는 다친 데가 없다는 걸 확인하곤 조용히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걱정스러운 듯 링신루의 표정을 구석구석 살피는 유리를, 그는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유리의 표정 속에 그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이 낱낱이 살핀다.
유리는 표정없는 얼굴로 뚫어져라 자신을 살피는 링신루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다가 문득 대문 옆에 버려지듯 내팽개쳐져 있는 커다란 꾸러미로 시선을 주었다. 누가 거기에 버렸는지


커다란 꽃다발이 거기 있었다.

저걸 들면 앞을 못 보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아름드리 꽃다발을 보고 유리는 링신루에게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링신루 씨가 가져온 겁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 꽃다발을 안아들려고 막 허리를 구부리던 유리를, 순간 흠칫 정신이 든 것처럼 몸을


움츠린 링신루는 마구잡이로 끌어다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

현관 안으로 주춤주춤 밀려가면서 유리는 당혹스레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괜찮아요. 말해 봐요.”

∼나오지 마요. 나가지 마요. 못 나가요. 안 열어줘.”

고집스럽게 입매를 굳힌 링신루가 단호하게 말한다. 이미 문이 열리고 링신루도 현관으로 걸음을 들여놓은 상태라
처음처럼 유리를 집안에 밀어 넣고 바깥에서 문을 닫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유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성공한 링신루는 대문 앞으로 가로막으며 문을 등지고 섰다.

유리는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서늘한 얼굴로 유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그는 몹시 화가 나고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린


입술을 잘근거렸다.

왜 그래요. 문 좀 열어봐요. 계속 밤새도록 거기에 있을 겁니까?”


바깥에 남겨두고 온 거대한 꽃다발이 신경 쓰인 유리가 문 쪽으로 다가갔지만 링신루는 그 앞을 가로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가 지그시 내려다보아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유리의 얼굴에도 언짢은 표정이 언뜻 떠올랐다.

“말을 해줘야 알죠. 늦게 와서 걱정했는데, 문 앞에서 뭐하고 있었습니까? 사람 가둬둔 것처럼.”

“一·-가둬둔 것 맞아요.”

싸늘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링신루는 웃음 하나 없이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안스럽게 일렁이는 눈은, 어딘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터질 것처럼.

“저를요?”

유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링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대답이 묻어나와,
유리는 다시금 말을 앓고 만다.
“어 째서 입 니까?”

"--돌아갈 거잖아요.”

짤막하게 대꾸하는 링신루의 입술이 조금 떨린 듯했다. 다시 입을 닫으려고 굳게 턱을 다문 링신루였지만,


그러나 한 번 터져 나온 말은 그대로 아물어들지 않는 듯 떨리는 입술은 띄엄띄엄 말을 뱉어낸다.

“날이 밝으면 곧바로 돌아가 버릴 거잖아요. … 그래, 이제 자

정도 지났고, 우리 계약도 끝났으니까.”

북받친 듯 말을 쏟아낸 링신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속에 담아두었던 것이 말마디와 함께 넘쳐흐르기 시작한


듯, 새카맣게 죽어 있던 눈이 점점 더 선뜩하게 반들거린다.

유리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유리를 바라보는 얼굴이, 금세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이 그래도 계약을 할 줄 알았어.

가끔씩 문득문득 불안해서 미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옆에 남아줄 줄 알았어요.

나는 틀림없이 그럴 줄 알고, 그럴 줄 알고,”

띄엄띄엄 뱉어내던 말이 흐려졌다. 천천히 느려지던 말은 이윽고 아예 멈춰버린다.

링신루는 마치 밀랍인형처럼 창백하게, 미동조차 하지 않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먼 그대로


무너질 것처럼.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죠?”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가느다란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톡, 톡, 톡, 그의 하안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예쁜 인형이 우는 것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유리만 넋 잃은 듯 바라보며, 링신루는 소리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해요 . 당신을 묶어둘 방법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나는 아무것도

문에 기대어 선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눈에 고여 있던 눈물도 뺨을 덮으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숨을 못


쉬겠어, 짤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링신루 씨, 나는--."

“이럴 거면 나를 왜 구했어요 !"

당혹스럽게 입을 열던 유리는, 그러나,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숨조차 쉬기 힘들도록 억눌린 가슴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듯한 비통한 목소리가 유리를 질책한다.

“왜 날 좋아한다고 했어. 왜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었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왜, 이럴 거면 내


앞에는 왜 나타 나서, 왜 내 눈에 당신만 보이게 만들었어요.
왜 내가 당신만 생 각하게 만들었어, 왜 내 심장이 당신만 보면 뛰게 만들었느냔 말이야 !"

흐느끼며 속삭이던 목소리는 점점 커다랗게, 그 자리를 메우며 외쳤다.

가슴이 터져버릴 듯 고함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통렬하게 유리를 비난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까만 눈이 유리를 노려본다. 눈물로 젖어 더욱 까맣게 반짝이는 눈은 뚫어져라 유리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흐려졌다. 깜박, 깜박, 눈을 깜박일 때마다 쉴 새 없이 흘러나와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긴 속눈썹을 적시며
투두둑 떨어졌다.

숨이 막히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서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링신루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프다고,
숨을 못 쉬겠다고 가느다랗게 호소하먼서.

, 나는, 눈도 한쪽이 안 보이고 , 당신이 싫어하는 일이나 하고 , 당신보다 나이도 적고 흐느끼는 울음 사이로
한 마디씩 비참하게 새어나오는 말이 유리의 귀에 닿는다. 링신루는 차마 유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다.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지르면서, 그래도 그치지 않는 눈물을 언제까지고 쏟아내면서, 그는
속삭였다.

그래도 나라는 인간이 이런데 어떡해요 . 나는 이런 인간인데 어떡해

눈물로 흠삑 젖은 손이 천천히 유리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제발 뿌리치지 말라고 속삭이면서, 그 손은


유리의 팔에 닿았다.

아주 살짝 스치듯이 닿는가 싶던 그 손은, 이내 거세게 그 팔을 잡아당겨 유리를 품에 안는다. 유리의 목에


문지르는 얼굴에서 눈물이 옮아왔다.
“나, 고쳐서 데리고 살면 안 돼요? 노력할 테니까, 나, 정말로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제발 나랑 같이 있어줘요.제발

링신루는 훌쩍거리면서 매달렸다. 유리는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어딘지 현실이 아닌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청년이 바로 앞에, 자신과 바싹 맞닿아 있다는 것이 몹시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해서 현실이 아닌 것 같았는데, 하지만 목을 적시며 타고 내리는 눈물은 너무나 뜨거웠다.

“당신은, 내 물이에요.”

문득 링신루가 속삭였다. 귓가에 가느다랗게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새어든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평생 마음에 무게가 얹히기만 해서, 짓눌려 죽고 말 거야. 당신이 없으면 나는 쉴 수가
없어.”

등을, 허리를 부둥켜안은 두 팔에는 죽어도 놓지 않을 듯 힘이

들어가, 유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팔을 놓아주었다 하더라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남자의 품속에서. 이 아늑한 곳에서. 그런데도 오히려 자신을 아늑하다고 하는, 편안하게 쉬며 숨결을
가라앉힐 곳이라고

하는 이 남자의 품에서 유리는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 링신루 씨. 나는,”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움칫, 유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웠는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못 가요. 이래놓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당신은 가버리겠다고? 못 가요. 절대로 안 보내줘요. 멋대로
가기만 해.

당신이 어딜 가든, … 어느 물에 들어가든, 어느 바다에 들어가든, 그 빌어먹을 물을 모조리 말려버릴 테니


까.”

청산가리라도 풀어버릴 거라고요, 하고 이를 갈며 말하는 목소

리가 다시 울음으로 젖어들었다. 서럽게 흐느끼먼서 유리를 꼭,꼭 끌어안기만 한다.

유리는 평생 놓지 않을 듯 자신을 부둥켜안은 채 움직이지 않 는 링신루의 품속에서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가볍게 얹히는 팔의 무게에 링신루의 어깨가 회미하게 굳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유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는 그를, 유리도 마주 끌어안았다. 꼭.

이러니까, 링신루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제가 링신루 씨를 좋아하기가 힘들 거라고 한 거예요

유리는 조용히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를 기다리면서, 희미한 초조감과 기대감으로 심장이 뛰는 걸 느끼고 그에게
전화를 걸먼서,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노력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아무래도 힘든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선명해쳤다.

하지만 그래도.

유리는 이곳에 있을 터였다.

링신루가 바라는 이상은, 이곳에서 그와 함께 살아갈 터였다.

유리는 가만히, 아주 천천히 링신루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흠칫, 유리를 안고 있던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며 부둥켜 안았다. 유리는 가만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안 갑니다. 놔주세요.”

링신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


은 듯 무시하고, 그저 유리를 꼭 꼭 끌어안기만 했다. 유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바로 입술
앞에 있는

그의 귀에 입을 맞춘다. 가볍게 한 번 입술을 대었다가, 그가 움찔하먼서도 꼼짝도 하지 않자 아주 잠깐만


망설이다가 그 귓불을입술로 물었다.

. 뭐 하는 거예요.”

왜 또 나 실망시키려고 이래요, 아직껏 울음으로 젖어 있는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유리는 귓불에서 입을 옮겨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거기에서 조금씩 내려오면서 귀 앞에, 광대뼈 위에,
볼에, 천천히 입술을 옮겨갔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린 링신루는, 조금씩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가 입 맞추기 쉽도록.

왜 이래요, 나한테 왜 자꾸 이래요, 훌쩍거리면서도 얌전히 유리의 입맞춤을 받던 링신루는 그를 부둥켜안고


있던 팔을 느슨하 게 풀었다.

유리는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누른 뒤 그의 팔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와 마주섰다.

여전히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젖은 얼굴로 불안스럽게 유리를 보고 있는 링신루를 묵묵히 쳐다보던 유리는,
곧 걸음을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링신루는 여전히 현관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다시 한 걸음만큼의 거리를 두고 선 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계약서다.

며칠 전 링신루가 계약 기간을 종신으로 써서 유리에게 건네주었던 종이를, 이제는 유리가 링신루에게 내밀고
있었다.

링신루는 고개를 떨어뜨려 물끄러미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유리 게이블, 그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적은 단정한 글씨쳬가 계약서의 아랫단에 적혀 있었다.

" "
링신루는 믿어지지 않는 듯, 그 종이를 받아들면 꿈에서 깨기라도 할 것처럼 미심쩍게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다시 그에게 종이를 내밀어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주고 싶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겠지요.”

“돌아가지 않아요?”

링신루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이번에는 유리가 기묘한 얼굴을 했다.

“왜 제가 갈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돌아갈 거라고 했잖아요. 계약 만기가 되었으니, 어차피 돌아갈 거 빨리 돌아갈 거라고. 내일 아침에 갈
거라고 했잖아요.“

희미한 불안이 서리는 목소리로 그 말만 하고,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조차 괜히 했다는 것처럼.

유리는 눈을 껌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얼핏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은 금방 떠올랐다. 그에게 한 말도 아

니었고 그가 생각한 의미로 한 말도 아니었지만 유리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계속 밖에 있었던 겁니까?”

날이 풀렸다고는 해도 아직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계절인데,

이 밤중에 혼자서 복도에 서서 문을 지켰다는 걸까. 설핏 눈살을 찌푸린 유리는 어이없는 얼굴로 링신루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 만다. 아직껏 자신의 손에서 그에게로 넘어가지 않은 계약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내민다.

“앞으로 줄곧 여기에 있어야 할 테니까, 독일에 있는 집도 그렇고 주변정리는 하고 와야지요.”

링신루는 담담하게 말하는 유리를 쳐다보았다.

점차 그의 얼굴이 이상한 빛을 띠었다. 미심쩍은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유리는 그의 옆으로 팔을 뻗어 대문을 열었다. 아직 대문 밖예

버려져 있던 거대한 꽃다발을 가리키며 “이거 제 겁니까?”라고 링신루에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것을 두 팔 가득 끌어안고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대문을 통과해 들어올 만큼 커다란 그 꽃다발을 안고 뒤뚱뒤뚱,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으며 거실로
간다.

우두커니 서서 유리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링신루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 꽃다발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 이렇게 거대한 꽃다발이 들어 갈 만큼 큰 항아리는 집에 없었다.

결국 욕조밖에 없겠다.

유리는 예전 어느 때인가도 욕조를 아름답게 장식했었던 오래전의 꽃다발을 떠올리며, 그때보다 몇 배나


커다랗고 화려해진 이번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사올 정도로 링신루는 마음이 들떠 있었던 걸까. 이 커다란 꽃다발만큼이나 커다란 기대와, 그와


비슷할 만큼의 불안감을 안고서.

그리고 저만큼이나 큰 그 불안감에 짓눌려 저 문밖에서 문을 가로막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가 무엇을 생각했을지.

유리는 거실 한가운데에 내려놓은 커다란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링신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한 손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기세로 계약서를 꽉 움켜쥐고서 아까부터 줄곧 유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가서 정리 마치고 오겠습니다.”

정말로 올 거죠.“

나직이 되묻는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여상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그 대답을
확인한 다음에야,

관절이 하얗게 드러난 링신루의 주먹에서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

불안으로 터질 것 같던 얼굴이 일순 울 듯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이를 사리물며 울음을 참았다.

이미 그렇게 울어놓고 이제 와서 참는다 한들 그 얼굴이 태연해 보일 리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며 유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곱고 예쁘고 가슴 벅차게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

유리는 그가 쥐고 있는 계약서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도중에 말을 멈추고 유리가 침묵하자 계약서를 내려다본
링신루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더 이상 당신에게 물이--내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

유리가 말하자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의 눈빛이 얼핏 화가 난 듯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고


나머지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먼 그 계약은 파기하는 걸로, 그렇게 해주십시오.”

유리는 차분하게 거기까지 말한 뒤 입을 다물고는 링신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링신루는‘ 진지하게 유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귀담아듣던 링신루는,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선선히 말했다.

" 얼마든지요. 하지만 대신.”

“그렇지 않은 한, 계속 내 옆에 있어주는 거예요. 내가 말했던 대로 노력해주면서.”

유리는 약간 입을 열었지만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러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미 링신루에게 저 계약서를 넘겨주면서 유리는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대답하지 못한 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였다. 그가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단호하게 말을 맺은 링신루는 대답을 망설이는 유리를 보고 표정을 흐렸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은 평생만큼이나 있으니까 오래 걸려도 괜찮아요. 그때까지는 계속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날 좋아해 주세요.”

날 좋아해 주세요, 고집스럽게 덧붙이는 말은, 그러나 자신이 없어 얼핏 흐려지며 말꼬리가 떨린다. 유리는
그를 한동안 계속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 눈치 빠르고 영리한 남자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지.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자신은 결코 그가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할 일은 만들지 않도록 애쓸 텐데.

유리는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링신루는 그 대답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다시 울기라도 할 듯, 하지만 울면 흉해 보일 테니까 억지로 참는 것처럼.

그가 울든 웃든 화를 내든 그 모든 얼굴이 예삐 보이기만 하는 유리는 가만히 웃었다.

정말이었다. 링신루가 어떤 얼굴을 하든, 그 모든 모습들이 유리는 다 예뻐 보였다.

그래서 유리는 그 사랑스러운 사람을 앞두고 무심한 표정을 아주 약간 허물어뜨리면서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유리를 링신루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뚫어질 듯 바라보는 것도 몰랐다.

“갔다가 언제 올 거예요?”

유리가 꽃다발을 담그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욕실 문틀에 올라서서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가 불쑥 물었다.

유리는 꽃다발을 풀어 꽃들 사이에 넉넉한 공간을 주곤 그를 돌아보았다.

“글쎄요, 대충 정리를 마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군요.”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정리하는 데에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르는 아파트는 제임스를 통해 중개사에게 맡기기도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

았지만, 오래도록 삶의 터전 삼아 살아왔던 곳을 정리하려면 은근히 손 가는 일이 많을 터였다.

시간이 정도 이상으로 많이 걸리겠다 싶은 일들은 사람을 사서 맡길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사소한


일들을 마치려면 얼마나 걸릴까.

최대한 서두를 생각이긴 했지만 정확하게 얼마간이라고 감이 오지 않았다.

링신루는 유리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있다 오겠다고 대답할지,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환자처럼 긴장된 눈으로.

유리는 글쎄요 , 하고 한 번 더 대답했다. 그도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해야 할 일만 마치면 밤


비행기로라도, 한 시간이라도 빠른 비행편으로 돌아을 생각이었다.

그렇지, 그러면,”
유리는 물이 충분히 찬 욕조에 꽃다발을 담갔다. 거대한 꽃다발은 욕조를 가득 메워, 마치 욕실에 꽃이 가득 핀
화단이 생겨난 것 같았다.

유리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그 고운 화단을 바라보았다.

" 이 꽃들이 시들어버리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유리는 그 뒤로도 잠시 동안 그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서 링신루에게 “꽃, 고마워
요.”라고 뒤늦은 인사를 하곤 욕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뒤에 남겨진 링신루는 흘끔 눈동자를 돌려 욕조 가득 찬 꽃들을 쳐다본다.

이제 막 피어나는 봉오리가 수없이 섞여 있는 꽃들을 보는 그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가장 귀한 사람에게 줄 거니까 가장 탐스럽고 아름답고 오래오래 싱싱할 꽃들로만 골라서 달라고 했던 그 꽃다발은
몹시도 싱

그러웠다. 그들이 시들려면 아직 한참은 더 남은 것 같았다.

" "

욕조 마개를 뽑아버릴까, 몸을 기울여 욕조를 들여다보았지만 꽃들로 파묻힌 욕조 바닥은 보이지도 않았다.

고심에 잠겨 묵묵히 꽃들을 노려보고 있는 링신루의 뒤로, 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 유리는 욕조
안으로 조그만 알약

몇 개를 골고루 떨어뜨렸다. 그리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링신루에게 빙긋 웃으며 “아스피린입니다. 아스피린을


녹인 물에 꽃을 담그면 꽃이 더 오래 싱싱하다고 들었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링신루에게 받은 꽃다발이니 가능하먼 오래 오래 싱그럽기를 바라는 유리였지만, 그런 그를 등 뒤에서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링신루의 시선을 그는 몰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게이블 씨를 원망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라는 링신루의 말을 듣고 반성하게 되는 유리였지만, 그것은 아직 한참이나 더 먼 이야기였다.

Epilogue.

『사람을 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링탕윈은 결개 장부를 넘기며 걸리는 부분을
쳬크하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

“사람?”

링탕윈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되묻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장부 처리를 하면서 건성으로 전화를 받다가 자칫 실수로 대답을 잘못했다간 나중에 호된 꼴을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잘못 들을까 싶어서 왼손에 들고있던 전화를 오른손으로 바꿔 들어 좀 더 잘 들리는


오른쪽 귀에 수화기를 대었다.

“무슨 사람?”

링탕윈이 미심쩍게 묻자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한 목소리가 평연하게 대답했다.

『링신루 씨의 일을 보좌하면서 도울 수 있을 만한 사람이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버티면서 일을 도울 수 있을 사람이면 좋겠고요, 라고 덧붙이는 그 말을 들으며 링탕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그 이상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십여 초쯤은 침묵하고 있던 링탕윈은 “그런데 말이지.”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청을, 분명히 예전에도 네게 들었던 것 같은데.”

『예, 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말이야, 그때 신루가 나더러,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

『예, 그랬었죠.』

여전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링탕윈은 흐음, 하고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하루 종 일 일을 했더니 좀 피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깜빡 대답을 잘못 할 수는 없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막냇동생, 링신루가 걸려 있지 않은가.

“유리. 이번에는 별 문제 없는 것 맞나?”

링탕윈은 목소리를 깔고 은근히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짤막한 침묵이 돌아왔지만, 그 뒤에 곧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사람만 조건에 맞으면 괜찮습니다.』

“신루도 괜찮다고 했단 말이지?”

『예.』
링탕윈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 대답 대신 침묵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유리의 대답을 듣고서야 “
그렇다면야 뒈”하고 표정을 폈다. 이미 제법 지난 일이다.

예전에도 한 번 유리는 링탕윈에게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한적이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링신루를 보좌할 만한 능력 좋은 사람을 찾아달라고 전화했던 그에게 링탕윈은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을 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막냇동생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하긴 뭘 잘 부탁하느냐고 유리에게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하는가 싶던 동생은, 냉큼 유리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은 모양이었다.

바로 직전까지 유리와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던 링탕윈의 귀에 ‘여보세요.’라고

막냇동생이 원수에게 전화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었다.

자신을 보좌해 줄 사람을 찾는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정나미 떨어지도록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얘기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동생에게, 링탕윈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링신루에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유리가 마음대로 판단해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링신루의
보좌를 알아봐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사실 링탕윈이 판단하기에는 그만두기 전에 능력 좋은 후임자를 구해놓고 그만두겠다는 유리의 태도가 때우


흡족하게 보였지만, 저 비뚤어진 막냇동생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던가 보다 ·

그 뒤 마주쳤을 때 링탕윈이 웃으면서 타이르자, 링탕윈보다 아주 새파랗게 어린 막내는 ‘내 보좌를 왜 남이


마음대로 결정합니까.’라고, 눈을 시퍼렇게 치뜨면서 친형을 남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었다.

막냇동생은 원래 좀 그런 인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랑스럽고 애교가 많아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긴 했는데-링탕윈도 막내가 여러모로 껄끄러울
뿐 싫어하지는 않았다- , 그 속을 한 꺼풀 들여다보면 정떨어지는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막내와 딱히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링탕윈은 그 뒤로 막내의 보좌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대지않았고, 참견도 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전해 듣기로는 자기 임의대로 링탕윈에게 부탁을 했던 유리도 그 일로 링신루에게 모진 소리 깨나


들었는지, 한동안 새로운 보좌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주말에 친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링신루가 대수롭잖다는 투로 ‘


그러고 보니 유리 게이블과 종신계약을 맺었다’라고 말을 해서, 링탕윈은 매우 놀라는 한편으로 당분간
링신루의 보좌가 바뀔 일은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놀랐다. 몹시 의외였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링탕윈은 유리 게이블과 꽤 오랜 시간을 알아왔지만, 유리는 정보원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라 그를 탐내는
기관이나 회사들이 줄지어 고액연봉을 부름에도 불구하고 종신계약이라는 걸 하지 않는 남자였다.

늘 ‘자유롭게 물을 찾아 떠나는’ 생활을 사랑하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종신계약이라니, 퍽 의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아쉽기도 했다. 유리의 그 특출한


능력은 링탕윈의 사업에는 딱히 유용하게 쓰일 일이 없어 그를 자신의 아래에 두어겠다고 진지하게 탐낸 적은
없다지만, 그래도 남에게 빼앗기기 아쉬운 인재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뭐, 사람들의 관계에도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다고 믿는 링탕윈은 금방 마음을 가다듬고 유리에게 앞으로
신루를 잘 보좌해달라고 형으로서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모처럼 링탕윈에게 연락을 한 그가 부탁을 하는게, ‘링신루를 위한 보좌를 찾아달라’였다.

" ,,

예전 동생이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내 보좌는 내가 찾는다’고 눈을 부라렸던 과거를 떠올린 링탕윈이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링신루도 보좌할 만한 사람을 찾는 데에 동의를 했다니 그 점에 있어서는 걱정이 없겠다.

“그런데 유리 너는 그 녀석과 종신계약을 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 시점에서 또 그 녀석을 보좌할


사람이야?”

과연 링신루 같이 은근히 까다로운 놈을 곁에서 보좌하려면 어떤 완벽한 인간을 갖다 붙여야 할까,

링탕윈은 인명등록부를 꺼내어 슬슬 넘겨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유리가-혹은 링신루가-
또 다른 보좌를 찾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링탕윈이 유리의 능력을 탐내면서도 자신의 아래에 두려는 노력은 굳이 하지 않았던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유리는

정보원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젖혀두더라도 여타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균치보다 뛰어나다’이지, ‘그 방면에서 매우 뛰어난 사람 들만큼 뛰어나다’는 아니었다.

링신루의 곁에서 그의 일을 완벽하게 익보하는 것은 보통 실력으로 될 일은 아닐 터였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링신루도 일을 익히고 있는 신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정도인 유리라도 그를 무난하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시간이 지나 일을 하는 데 있어 링신루의 비중이 커지먼, 그만큼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맡아야
할 일도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질 터였다. 그것은 아마 유리에게는 다소 벅찰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링탕윈은 유리의 대처에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이 부문에서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자신이 앉아있는 위치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이 두 가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교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자신의 능력치와 앞으로 필요하게 될 능력치를 견주어 보고, 자신의 손만으로는 벅차니 더
유능한 보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분수에 넘치는 일을 맡겠다고 독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인간들을
자주 봐온 링탕윈은, 이 현명한 젊은이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유리를 얼마든지 돕고 싶었다.

그래서 링탕윈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비장의 기록부, 사람들과 자주 접하면서 유능한 인물이 있으면
눈여겨보았다가 기록을 해둔 인명등록부를 꺼내어 넘겼다.

“그래, 사람만 조건에 맞으면 괜찮다고 했단 말이지, 신루가?

그럼 어디, 그 조건이라는 게 어떤 건데.”

각종 쓸모 있는 고급자격증을 여럿 소치한 젊은이, 남부럽잖은 학벌을 둔 젊은이, 무언가에 탁월한 채능을 보여


그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업적을 이룬 젊은이, 링탕윈의 등록부에는 장래가 촉망되고 유능한 자들이 여럿 있었다.

아마 조건으로 따져서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거다.

『링신루 씨의 업무를 보좌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일단 갖추고 있어야 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링탕윈 씨가 저보다도 잘 아실 테고,』

유리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링탕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일단 회계 능력이나 법률 지식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좋겠지,

경제경영도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이면 더 좋을 테고, 사교능력도 빼놓을 수 없어, 링탕윈은


동시에 모든것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좀쳬 있기 어려운 조건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면서 등록부를 넘겼다.

이 귀한 등록부에는 그런 모든 조 건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인재도 여럿 있었다.

“그래, 그런 조건들은 갖춘 사람으로 하되, 신루가 제시한 조건도 있을 것 아니야. 그놈은 사람 고르는 데에
은근히 까다로우니

까, 오히려 업무 능력 면에서의 조건보다는 그놈이 제시한 조건이 더 맞추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을


원한다고 그래?”

『 , 그게 말이지요.』

링탕윈은 흥겨운 마음으로 등록부를 넘기다가 잠시 어라,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순간적으로 유리가 말을 망설인 것 같았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고 하는 습관 때문에 대화의 속도가 느려지는 일은 있어도 어지간해서는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일은 없는 유리였다. 그런데 그가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하게

보인다는 건, 제법 까다로운 조건일지도 몰랐다.

“왜. 말해 봐. 중앙공산당 간부라도 보좌로 부리고 싶대?”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링신루 씨가 제시한 조건 자쳬는 별로
맞추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래, 어떤데.”

『 , 일단 외모는 평균 이하여야 하고요.』

다시금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유리가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거기예 맞는 인재를 찾아내겠다는 승부 근성을 불태우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링탕윈은,

일순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어, 잠깐만, 유리. 미안해, 내가 요새 귀가 좀 안 좋아. 잘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주겠나?”

『예, 외모는 평균 이하여야 하고요.』

평균보다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고 하더군요, 라고 덧붙이는 동안 유리는 그런 생뚱맞은 말을 꺼내는 데에 좀


익숙해진 듯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링탕윈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번에는 자신의


이해력을 의심했다.

“외모? 그래, 뭐, 자주 볼 사람을 고르는데 외모도 중요하

긴 하겠지. 그래, 그것 말고는?”

링탕윈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그런데 왜 평균 이상이 아니고 이하일까,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키가 작고 쳬중이 많이 나갈수록 좋고,』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무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어쩐지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링탕윈은 멍하니 넋 놓고 듣고 있다가 “잠깐.”하고 유리의 말을 막는다.

“지금 고르는 게 신루를 보좌할 사람이 맞는 거지? 그러니까, 업무를 도와줄 사람 ?"

『예, 맞습니다.』

"

. 그래, 어디 계속 말해 봐. 조건이 더 있나?”

『생활양식에 있어서 교양은 없는 펀이 좋겠고, 성격은 모가 나 있으면 좋겠으며,』

혹시 오늘이 무슨 만우절이라든가, 흑은 유리가 일종의 벌칙게임 같은 거라도 하는 중인 걸까, 이제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링탕윈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차라리 얼른 다 말해서 입을 다물어 버리고 싶은듯도 한-유리였다.

『이미 기혼으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길 바라고, 그리고 마지 막으로,』

그래, 그나마 이거 하나만은 좀 이해가 간다.

업무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 조건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하지만 ‘모가 나있는 성격’과 ‘가정에 충실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또 어쩔 것이냐.

링탕윈은 애매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화기에 귀를기울였다.

이미 자랑스러운 인명등록부는 덮어버린 지 오래였다.

『물 공포증이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다고 합니다.』

링탕윈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와 마찬가지로, 전화 너머에서 유리도 말이 없었다.

그도 지금 자신이 무슨 말들을 조건이랍시고 읊어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그야 모를 리가 없겠지만- .

“유라”

『예.』

“조건이 왜 그래.”

. 』

“정말로 신루가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을 보좌로 찾겠다고 그래?”

『 예. 반드시 그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으나,

가능하면 여러 부분에서 맞아떨어지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유리가 딱딱하게 대답하는 말을 들으며, 링탕윈은
한참 동안 침

묵하다가 이윽고 끄응, 하고 신음을 중얼거리곤 “알았어, 찾아보 도록 하지.”라고 앓는 소리로 대꾸했다.

허들이 너무 높다.

저 조건들에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정말로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적당히 융통성은 있겠지만, 말하는 조건마다 범상치
않았다.

여태 자신의 中귓동생에 대해 눈이 하늘에 가서 붙어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던 링탕윈은, 그래서 어지간히


유능한 인물로는 눈에 차지도 않으리라 생각해 열심히 인명등록부를 뒤적였던 링탕윈은,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빠졌다.

세상에 완벽한 인물은 없다더니, 성격 까다로운 것 빼고는 그래도 외모면 외모, 능력이먼 능력, 배경이면 배경,
모두 만점에 깝다고 생각했던 막냇동생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취향의 소유자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역시 안 되겠다.

한동안 미간을 주무르며 열심히 막냇동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링탕윈이었지만, 결국 유리와 전화를 끊기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발았다.

“아니 대쳬 못생기고 키 작고 뚱뚱하고 교양 없고 못된 데다

물 공포증이 있는 기혼자를 왜 보좌로 부리고 싶다는 거야? !"

그런 놈을 대쳬 어디서 찾으라고? ! 라고 성질을 부리는 링탕윈에게, 유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큰형님이 화내요?”

유리가 말없이 전화를 끊자, 그 옆에서 전년도 매출기록을 넘겨요.”

링신루는 가볍게 흘리듯 말했다. 유리는 “아니오, 뭘 제가,

"

보고 있던 링신루가 대수롭잖게 물었다. 유리는 “예, 좀”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람 찾기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하지, 뭘 또 화를 내고 그래요, 큰형님도 참.”

링신루는 가볍게 헛웃음을 웃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가 그 기록 뒤에 훑어봐야 할 파일첩들을 그의 옆에 쌓아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유리였지만, 그는 링탕윈의


저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라도 장난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리가 말한 내용은 장난이 아닌 진실이었고-그리고 유리가 말한 이상 링탕윈도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건 알았을 거고- ,

저 조건들은 모두 링신루가 말한 그대로였다.

단순히 링신루의 일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의 유능함만으로 따지자면 보좌할 사람을 찾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

제임스 수준쯤 되면 퍽 까다로워지긴 하겠지만, 그에 비등한 인물이라도 링가의 재력이라면 보좌로 고용하는
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니 그런 능력들은 당연히 링탕윈이 알아서 재고해주겠지만,문제는 다른 부분들이었다.

기본적인-링신루가 필요로 하는-업무 능력을 갖추었다는 전제하에서, 그가 원하는 저런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다 떠나, 조건 자쳬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

비록 링신루가 말하는 조건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지만, 그래도 링탕윈에게 그 말들을 늘어놓으며 유리는 얼마나
겸연쩍었는지 모른다.

“뭐 모든 조건 그대로 들어맞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까, 아마 큰형님이라면 적당히 사람 추려서 몇 명


추천해 줄 거 예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게이블 씨가 고르세라고 말하며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링신루는 기록지에서 시선을 들어 유리를 보더니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당신 보좌인데, 당신이 골라야죠.”

하지만 먼접 볼 때에는 나도 같이 봐요, 라고 덧붙이는 링신루 에게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링탕윈에게는 그 말부터 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링신루의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하긴 하되, 정확하게 말하자면 링신루의 일을 돕는 유리를 도울 사람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하게 될 일은 그게 그거라서 딱히 구분 지어 말하 지 않았다. 라기보다 사실은 유리 자신의 일을


도울 사람을 찾는다고 말하기가 계면쩍었다.

종신계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링신루에게 그의 일을 보다 잘 도와줄 유능한 적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링신루는 별로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 여럿 거느리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새로 보좌라고 사람을 들이면 유리와 함께
주로 셋이서 더불어 다니게 될 텐데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유리가 링신루와의 종신계약-장기계악-을 꺼렸던 이유 중 하나인, 주요 업무능력의 부적절한 배치에


대해서는 링신루도 납득을 했고, 이대로 몇 년 더 지나 링신루가 설 위치가 중심부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되면
유리로서는 다소 일이 힘에 부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수긍했다.

그 결과로 링신루가 낸 결론은, ‘그렇다면 게이블 씨를 보좌해줄 사람을 찾으면 되겠군요.’였다.

어차피 링신루를 도우나, 링신루를 돕는 유리를 도우나 일을 하는 데에 별 차이는 없을 거라며, 링신루는


그렇게 결론을 내고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재고하지 않았다.

다만 조건을 붙인 게 그것이었다.

외모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성격도 좋지 않으며 남에게 눈돌릴 리 없는 기혼, 거기에 물 공포증.

" ,,
다 좋은데 물 공포증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유리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았다.

링신 루는 기록부를 보다 말고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는다. 그러나 그 화사한 웃음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따라서 웃어주지 않자, 그는
차츰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기웃했다.

“왜 그래요?”

“제가 못 미더운 편입니까?”

“예?”

링신루는 한참 고민스럽게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눈을 깜박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눈을 돌릴 것처럼 보이나요?”

유리가 다시 진지하게 묻고 나서야 링신루는 무슨 뜻인지 이해 한 것 같았다.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문득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곤란하다기보다는 멋쩍다는 쪽이 더 가까울
웃음을 짓고서 깜박깜박 유리를 한참 바라보던 링신루는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이건 게이블 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예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할 건 없어요.”

" 링신루 씨의 문제

“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 당신 가까이에 있는 건 보기 싫어요.

다 늙은 할아버지라도 마찬가지고, 아장거리며 걸어다니는 어린애라도 그래요. 당신이 쳐다보는 사람은 다


싫어요.”

링신루는 어차피 보일 거 다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당당하게 턱 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 나라서


싫으냐는 듯, 유리를 빤히 쳐다본다.

유리는 잠시 그를 마주 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는 링신루를 한참 바라보다가 흠,


하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러자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는 기록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 유리에게 입을 맞춘다.

살짝 입술을 빨며 떨어진 링신루는,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싫어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 안 싫습니다.”
잠시 생각한 뒤 유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링신루는 웃었다.

정말로 기쁜 듯이 환하게.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더욱 길게 입을 맞추다가 한참 뒤에야 만족스럽게, 그럼에도 약간은 아쉬운 듯 떨어진 링신루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하고 중얼거렸다. 유리는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어쩐지 조금 난감한 듯 미묘하게 웃으며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 눈치이더니, 유리에게 고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큰형님에게, 일 도와줄 사람을 구할 때 제일 중요 하게 봐야 할 조건에 대해 말하는 걸 까먹었네


요.”

“다시 연락할까요?”

전화를 집어든 유리는, 그런데 그게 무슨 조건이냐며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빙글빙글 예쁘게 웃다가
말했다.

“동성 간의 입맞춤 혹은 그 이상의 관계를 빈번하게 보게 되는 환경이라도 개의치 않을 사람.” 하지만 본인이
동성애자인 남자라면 절대로 안 됨, 하고 덧붙이는 링신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유리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가 아예 바닥은 아닌 링탕윈에게 저 말까지 옮길 자신은 도무지 없었다.

“이미 말한 조건만 해도 벅찰 텐데 그에게 이 이상의 무게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군요.”하고 변명을 중얼거리는
유리를 보며,

링신루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유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낮은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링신루가 무심결인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눈부시게 비쳐드는 햇살이 반짝반짝 그를 감싸고 있었다.

유리는 일손을 놓고 링신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눈이 부셨다.

얼마 있지 않아 유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링신루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창 일에 몰입해 있어 주위에


일쳬신경을 쓰지 않을 때라도 유리가 잠시 쳐다보고 있으면 이내 귀신같이 그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링신루는 웃었다.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정말로 기쁜 듯이 기분 좋게


웃는다.

“날 보고 있었어요? 더 봐줘요. 더 많이. 더 자주.” 링신루는 예쁘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유리의 시선을 좋아했다. 특히나 유리가 가끔 그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으면-가끔은 너무 넋을


놓은 나머지 링신루가 빤히 마주 봐도 한동안 못 알아차릴 정도로 열중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너무나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게다가 드물게 그들이 각자 따로 귀가를 할 경우, 더욱 드물게 유리가 그에게 전화해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오는지 궁금해하기라도 하면 링신루는 뛸 듯이 기삐했다.

심지어는 유리가 전화해서 자신의 소식을 묻는 걸 듣고 싶어서, 집에 다 와서도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서성이기도 할 지경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가끔-보다는 좀 더 자수-링신루를 흰 눈으로 보게 되는 유리였지만, 아마도


그것이 링신루가 바라는 ‘좋아하는 방식’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요 근래에는 의식적으로 그에게 종종 연락을 하고 사소한 것들을 물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놀러 가고 싶다.”

링신루가 노트북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따분해 죽겠다는 투로 말하는 그에게 유리는 부드러운 시선을 주었다.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 그러고 보니 게이블 씨 요전에 바다 나오는 다큐멘터리 무지 열중해서 보던데, 우리 바다 갈까요?”

당장은 가까운 데로 가야겠지만 휴가철에 좀 길게 쉴 때에는 남태평양 쪽으로 가도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링신루 를 보며 유리는 가만히 웃었다.

이런 일상적인 부분에서 링신루는 언제나 유리가 하고 싶어 할 것으로 대답을 하곤 했다.

유리가 기삐할 것, 유리가 좋아할 것, 유리가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링신루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듯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지금은 눈앞에 쌓인 일부터 마쳐야겠지만요.”

유리는 링신루를 바라보던 시선을 떨어뜨려, 잠시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내 링신루가
그 서류를 빼앗 듯이 가져가버렸다.

“이런 건 나중에 해요.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는 재미없다는 듯 서류를 대충 넘겨보곤 어깨 너머로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유리를 향해 돌아앉아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곤 웃음 짓는다.

“알잖아요, 게이블 씨가 해야 할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날 바라보는 거예요.“

언제든지, 얼마든지, 하고 말하며 링신루는 유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졸지에 일거리를 빼앗긴 유리는 잠시 눈을 껌벅거렸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링신루를 마주보다가 이윽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어디 한번 마음껏 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유리는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으며 링신루를 바라본다.
그러자 링신루는 몹시 기쁜 얼굴로 웃었다.

유리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늘 그렇게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것은 몹시 예쁜
웃음이라, 유리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Bonus track.

“어머, 농담이지?!"

아네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저 사람이 제 애인이에요.’라고 하며 시계탑 아래에서 기다리고있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직후에 들은 말이었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참 난감한 저 말에 농담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농담이 아니었으므로- , 농담이


아니라고 하며 저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애인이라고 주장하기에도 어딘지 겸연쩍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답 없이 아네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유리를 보고, 아네트는 더욱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정말이구나.”, 그렇게 말하고 시계탑 아래를 다시 쳐다본다.

하지만 시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곤 다시 “진짜 정말로 맞아? 농담 아니고? 설마 농담이겠지?”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하길 포기했다.

아네트가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는 곳에는 까만 반코트에 스트라이프 머플러를 두른 꽃 같은 청년이 서 있었다.

추운지 손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고 있던 그 청년은 어딘지 따분해 보였다. 심드렁하게 길거리를 둘러보다가,
시계탑을 올려다 보다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어 보다가 하던 그는 이윽고 길 건너에 멈춰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 순간 청년은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에게-정확히는 한 사람에게만-손을 흔들었고, 그


웃음을 목격한 아네트는 가슴을 꼭 움켜쥐며 어머, 어머, 어머, 하고 세 번을 더 속삭였다.

“어머, 정말 놀랐지 뭐예요.”

따뜻한 홍차와 타르트를 앞에 두고 아네트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어머를 연발했던 여자답지 않게 우아하고
매력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를, 건너 자리에 앉은 링신루도 사랑스럽게 웃으며 마주 보았다.

“그러셨어요?”

“그럼요. 유리는, 지금 사귀는 사람이 나를 궁금해하더라는 말만 했지 어떤 사람이랑 사귄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하하, 왜 그랬어요, 게이블 씨? 내가 부끄러웠어요?”


짐짓 눈웃음을 지으며 유리의 허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두드리는 링신루에게, 유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안
부끄럽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를 짐짓 노려보았다.

“정말로 안 부끄러워?”

, 부끄러워야 합니까?”

아네트가 노려보자 조금 움찔한 유리는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번에 “그럼!”하고 외쳤다.

“어쩜, 너보다 열 살도 더 어린, 그것도 남자애를 사귀니? 이런걸 두고 도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뭘
도둑이라고 부르겠어? !"

아네트가 당당히 주장하는 말에 유리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 하고 얌전히 홍차만 마셨다. 그런 유리에게서
고개를 돌린 아네트는 언제 뾰족하게 소리를 쳤냐는 듯 상냥한 웃음을 띠며 링신루를 보았다.

“하지만, 설마 유리가 남자를 사귈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놀라

긴 했지만 심지어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랑 사귀다니, 어쩜!”

세상에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걸 보니까 흑백사친 속예 혼자만 컬러로 찍혀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고 그녀는


감탄하며 덧붙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나는, 유리랑 지금 사귄다는 애인이 날 보고 싶다고 한다기에,이미 헤어진 옛날 애인이라도 머리채를 잡아


뜯으려는 질투심 많은 애인인가 하고 무지 걱정했지 뭐예요. 이렇게 예쁘고 상냥해 보이는 분인 줄도 모르고.”

“아하하, 질투심 많은 애인은 맞아요. 게이블 씨한테 전화할 때마다 Mon sucre 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쳬
누굴까 궁금했거든요.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몰랐네요.”

“어머, 그런 말까지 들었어요? 같이 정보원에서 일할 때 불렀던 애칭 같은 거예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요.”

아네트는 이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청년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보기 드문 눈웃음까지 지었고, 이 싹싹한


청년 역시 유례 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네트를 대했다.

그 사이에서 유리만 홀로 타르트를 씹으면서 침묵했고, 두 사람은 유리가 뭘 먹든 뭘 마시든 아랑곳하지도 않고


연신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 누가 보면 두사람의 데이트를 유리가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던데 왜 헤어지신 거 예요?”

링신루는 그러고 보니, 하고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에게 천진하게 물었다. 그녀는 아아, 그거요, 하고
콧잔등에 주름을 지었다.
“성격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새벽마다 수영하러 갈 시간은 있으면서 나랑 데이트할 시간은 없다는 남자랑은
더 이상 사귀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네트, 그건 정보원에 일이 밀려서 사흘이나 잠도 못자고 일 했을 때의 얘기잖..........." "

“그래도 새벽마다 수영은 꼬박꼬박 갔잖아” 곱게 흘겨보는 아네트에게, 이번에도 유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 다.

그냥 혼자 조용히 타르트나 씹어 먹는 게 본인을 위해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점원을 불러 타르트 한


조각을 더 시킨다.

“수영이라 , 확실히 게이블 씨가 수영을 좋아하긴 하죠.”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죠. 신루 씨는, 자기보다 수영을 더 좋아 하는 사람이랑 사귀어도 괜찮아요?”

“아하하, 물른 안 되죠.”

링신루는 화사하게 웃으먼서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네트는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할끔 유리를 곁눈질했다.

“어머, 그럼 요즘은 수영장보다 데이트 하러 더 자주 가는 거예요? 어쩜--나랑 사귈 때는, 나랑은 안


놀아도 수영장엔 꼭 가더니!”

“그렇다기보다는, 수영하러 갈 때 나도 꼭 같이 가요. 게다가,” 링신루는 예쁘게 눈매를 휘어 눈웃음을


지었다.

“게이블 씨만큼이나, 나도 물을 좋아하거든요.”

“어머, 그래요? 유리만큼 물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없을 줄 알았는데’,

“게이블 씨를 만나면서 나도 좋아하게 됐어요. 게이블 씨 말대로, 물에 들어가면 정말로 가슴에 묵직하게 쌓여
있던 것들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구나, 둘이 잘 맞아서 좋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네트에게 예, 하고 천진하게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인 링신루는,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타르트만 씹는 유리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게이블 씨를 만난 덕분이에요.”

그렇게 속삭인 그는 문득 손을 들었다. 유리의 입가에 붙어 있는 타르트 가루를 가만히 문질러 떼어준다. 곧
말끔해진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링신루는 눈웃음을 웃었다.

“게이블 씨 덕분에 나도 물을 만나게 됐으니까.”

" "
유리는 멈칫, 말없이 링신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그의 앞에서 링신루는 다정하게
웃었다.

" 이제는 나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매일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루라도 그 아늑한 속에 잠겨서 헤엄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느릿한 목소리는 어딘지 위험스러운 달콤함을 품고 있었다.

마치 시선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던 유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천히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그러나 목덜미부터 서서히 빨개지기 시작하는 그 표정 아래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당혹감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다.

그래서 그 얼굴을 보고 링신루도 웃고 만다.

“물속에 잠겨 있으면 얼마나 아늑한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지 몰라요. 그 안에서 헤엄치다가 그대로
잠들기라도 하면 정말로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일 정도로.” 한 마디 한 마디, 이것은 유리에게
들려주려는 말이다.

유리는 꼼짝도 못하고 링신루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차마 그대로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듯 가만히 타르트로 눈길을 떨어뜨린 유리는 “그래요 , 잘 됐네요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머,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잠들기도 해요?”

아네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녀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리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웃음 지은 링신루는 그럼요, 하고 대답한다.

“물속에서 나오기 싫으면 그대로 잠도 자죠. 오늘도 그럴까 싶은데요.”

링신루가 웃으며 말하는 옆에서, 갑자기 타르트의 파이가 목에 걸렸는지 유리가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왜 그래요, 사레 들렸어요?”하고 얼른 다정하게 홍차를 집어준 링신루는 유리의 등을 쓸 어내려 준다. 고마워요,
라고 웅얼웅얼 말하는 유리에게 링신루는 뭘요,하고 곱게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아네트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 다.

“정말로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어쩐지 안심했어요. 아무리 이 미 헤어진 사람이라고 해도,가끔 생각이
나거든요. 잘 살고 있을까,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자 유리의 등을 쓰다듬던 링신루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 다. 입가에만 은은한 웃음을 띠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링 신루는,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웃음을 띠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상냥한 아네트. 하지만 게이블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아주 잘 살고 있답니다.


앞으로도 주욱.”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하고 손을 흔들고 뒤돌아 걸어가는 아네 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안했다.

이윽고 그녀가 길목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링신루가 말했다.

“괜찮은 사람이네요.”

“……예.’’

링신루는 가뿐한 한숨을 내쉬더니,이제 마음이 좀 풀렸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유리의 손을 잡더니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모든 건 Mon sucre 때문이었다.

우연히 아네트와 유리의 통화를 듣게 된 링신루는 그녀가 유리를 부르는 그 호칭을 몹시 마음에 걸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유리가 가까운 친척의 결혼 때문에 잠시 독일로 들어올 때 같이 따라 온 링신루는,유리가 볼일
때문에 아네트를 만날 일이 있다고 하 자 당장 자신도 만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덕분에 예정에도 없게 아네트에게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켜주고만 유리였지만,어렴풋이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나름대로 즐겁 게 식사를 하고 헤어져 안도감 속에서 호텔로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사이 좋아 보이던데요.”

날씨가 춥기 때문인지 사람이 뜸하게 다니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유리가 불쑥 말했다. 링신루는 미묘한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일 것 같은데…….”하고 쓰게 웃었다.

“이상하네요……. 게이블 씨는 눈치도 좋은 사람이 왜 그런 건 모르지? 사이가 좋은 게 아니라 견제였는데요.”

“예?”

“설마 내가,게이블 씨와 사귀었다는 여자랑 사이가 좋을 수 있 겠어요? 하긴 나만이 아니라 그 여자도 내가 어떤


사람인가 열심 히 살피는 눈치였지만.”

그걸 몰랐냐는 투로 말하는 링신루의 말을 듣고서야 유리는 그게 그런 거였나, 하고 눈을 낌벅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이겼으니까.”

당당하게 말하며 턱을 치켜드는 링신루를 유리는 다시 희한하 게 쳐다보았다. 싸운 적도 없는데 언제 또 이겼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기웃거린다.

둔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감이 많이 무뎌졌나보다, 속으로 혀를 차는 유리의 옆에서 링신루가


문득 중얼거렸다.

“어떤 사람인가 보러 나온 걸 후회한다고 말할 것까지는 아니지만,그래도 역시 기분은 안 좋아요.

게이블 씨랑 사귀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랑 같은 자리에 있는 거, 생각보다 훨씬 더 속이 상하더라고요.”

언짢은 기색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링신루를,유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게이블 씨를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것도 싫고, 예전에 사귀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것도
싫고,계속 나더러 어리다 젊다 말하는 것도 듣기 싫었어요. ……나라고 어리고 싶어서 어린 게 아니에요. 나도
게이블 씨와 친구처럼 보낸 세월을 갖고 싶었다고요.”

링신루의 얼굴 위로 얼핏 분한 빛이 스쳤다. 이겼다고 말하면서도,그로서는 도무지 가질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해 분한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분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유리를 두고는 분해할 이유라곤 전혀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멈추는 유리를 링신루가 돌아보았다. 유리는 잠시 발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적 드문 거리를 살피다가,다시 생각에 잠겼다가,그런 끝에 가만 히 링신루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주 가만히,뿌리치려면 쉽게 뿌 리칠 수 있을 정도로.
물끄러미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이내 이상한 얼굴을 했다. 묵묵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는
유리를 빤히 쳐다보 다가 그는 문득 웃는다. 이것이,유리가 링신루에게 준 선택권이 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던
것이다.

비록 길거리이긴 하지만,인적이 드물다 해도 사람들이 드문드 문 다니긴 하지만,그래도 괜찮다면 나는 당신을


끌어안아도 좋아.

살짝살짝 잡아당기는 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신루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이유도 없다.

링신루는 그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유리도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그를 마주 끌어안는다.

“왜 저를 사이에 두고서 링신루 씨가 괴로워해요. 저에 대해서 유리의 무심한 얼굴이 얼핏 붉어지는가 싶었다.
그는 그렇게 붉어진 얼굴로 잠시 묵묵히 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나도 그렇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석해도 좋았다. 둘 다 옳기 때문이다. 유리는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가 링신루의 손을 잡는다.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유리의 뒤로, 링신루도 말없이 따라간다.

유리가 반걸음 앞, 링신루가 반걸음 뒤.

그렇게 한참 가다보면 어느 때인가는 나란히 걸을 때도 있을테고, 어느 때인가는 링신루가 앞설 때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한 가지만은 언제나 똑같을 터였다.

그렇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음은 늘 비슷한 속도를 맞추며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