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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지) 패션 RAGA 2 완
(유우지) 패션 RAGA 2 완
해가 허슴푸레하게 뜰 무렵의 새벽, 풀은 어두웠다. 천장은 유리로 되어 낮에는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지만 그조차
해가 없는 동안에는 소용이 없어,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공간은 검푸른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몇 미터만 내려가도 시커멍게 시야가 가려질테지만 이 실내풀의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봐야 3 미터가
고작이었다,
유리가 풀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어스름하게 어둡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고, 사실
물속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어두컴컴한 그대로 불을 켜지 않고 물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귀를 기울이자 타박타박 사람의 기척이
둔탁하게 들려왔다.
그때도 어두컴첨한 수영장에 불을 켜고 들어와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있었던 한 남자가 수영을 하는데 갑자기
뭔가 별 생각 없이 잠수로 유영하던 유리가 아래로 스윽 지나가기에 기겁을 하다못해 경기까지 일으켰었다.
남자를 풀 밖으로 끌어내며 마사지도 해주고 물도 갖다주고 했는데 정신을 좀 차리자마다 대뜸 욕을 퍼붓는 그
남자때문에 유리는 퍽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애초에 원일 제공을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유리는 말없이 그 욕들을 다 한몸에 받았었다.
그런 상황을 다시 겪는 건 사양이다.
욕먹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고, 물속에서 예기치 못한 쇼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_
긴 숨을 내뿜으며 수면으로 올라간 유리는 인기척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거리가 멀어져 있어서
경기를 일으키도록 놀라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없는 줄 알았던 풀에서 갑자기 누가 불쑥 솟아오르니 움찔할
정도로는 놀라겠구나, 하고 들어온 사람에게 약간 미안하게 생각하며,
그러나 유리의 예상은 어긋났다. 언제쯤 나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링신루였다.
오히려 유리가 놀라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가, 링신루가 "좋아요?"라고 말을 건네는
고리리ㅡㄹ 듣고서야 정신 차리고 그리로 헤엄쳐갔다.
"어쩐 일로 벌써 일어났습니까?
"아 잠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게이블 씨 방문은 열려있는데 안에 사람은 없더라고요, 수영하러 갔나
싶어서 베란다로 내다보니까 실외풀에는 또 아무도 없잖아요. 이 시간에 갑자기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은
생각이 드니까 잠이 깨어서요 "
링신루는 유리가 풀 근처에 수건과 함께 놓아두었던 물병을 집어들어 주욱 마시며 주위를 둘어보았다, 맨션의
제일 위층에 거주민을 위해 마련된 짐에는 처음 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거기에 딸려 있는 실내풀에도.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늘 유리가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질 앟고 있는 링신루가 어느
틈에 그런 걸 다 보고 있었을까 싶다.
물통을 단숨에 반이나 비운 링신루는 그 옆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뜰어당겨 앉았다. 금방 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아니......., 물은 아직 괜찮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바깥보다 따뜻해요. 하지만 물에서 나왔을 때에
바깥 고익가 차가우면 그게 힘들기 때문에요."
"게이블씨 때문에 주민 체육시설이 잘 구비된 맨션으로 골라서 들어온 거였는데 정말 보람차네요. 마련된 시설을
이용하지 않으면 아깝잖아요.
"그렇게 물이 좋아요?
"예, 좋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선뜻 대답하자 웃음이 더 짙어진다.
"잠보다 더 좋아요?"
"운동이라기보다는 쉬러 오는 것에 가깝습니다."
"아, 예, 그러세요?"
일흔이 넘어서도 정정한 징훠령은 인자요산을 외치면 종종 산행을 하곤 했는데, 어제도 직계 식솔 몇몇을
거느리고 나섰던 것이다.(냉열한으로 이름 높은 링휘렁과 인자 사이에 대체 무슨 개연성이 있냐고 욕을 하는
외부인이 여럿 있다는 것은, 그가 등산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천미터가 약간 넘는 정도인데다 등산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를
먹은 링훠령에게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산세가 조금 험해지는 곳에서는 대부분 링신루가 그를 부축해 다녔다.
다른 사람까지 떠맡고서 산에 올라갔다 오는건 상당히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텐데도, 정상까지 등반하고 내려온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등산 진입로의 입구까지 내려왔을 즈음 즉 산행을 거의 다 마쳤을 즈음. 심각한 얼굴을 한 그의
둘째 형이 산 위에 전자수첩을 두고 내려왔다는 말을 꺼내었다.
원래대로 따지자면 유리보다 링신루가 더 지쳐야 했다. 두번째로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자칫 미끄러질 뻔해
발목을 아주 살짝 접질린 유리를 부축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별로 생각할 일ㄹ이 없어서 평소에 잊고 지내지만. 생각해 보면 이 해사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청년은 UNHRDO 의
기 수석이라고 했었다. 하긴, 그렇다면 채력이 화수분처엄 솟아나올 만도 하게싸.
그 나음대로 한껏 빈정을 담다 대꾸했지만 무심한 말투와 무심한 표정으로는 그 빈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링신루는 천진하게 " 정말 그런가 봐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링신루는 유리가 목까지 담그고 있는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엉거렸다. 유리는 눈섭을 약간 치켜올렸다.
"아니, 잊어버리진 않았을 겁니다. 수영은 몸으로 기억하는 거니까. 하지만 자세는 많이 안 좋아졌겠죠.
"대회요?"
그런건 한번도 생각조차 안 했다는 얼굴로 반문한 유리는 곧 아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링신루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무릎담요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잠옷 대 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있던 위에 담요만 두르고 나왔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한 링신루는 유리가 뭐라고 말하기조 전에 풀로 뛰어들었다. 첨벙, 물보라가 크게 일며 수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처음 한동안은 거칠게 물살을 가르던 링신루는 얼마간 헤엄치는 동안 조금씩 자세가 정돈되어갔다, 그의 말마따나
대회에 나가기는 어렵겠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반대편에서 멈췄다가 다시 돌아온 링신루는 푸우, 가쁘게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는, 수영도 안하고 풀장도 싫어한다고 헸던 사람치고는 무척 개운해보였다.
자신이 이토록 사랑하는 물을 그가 즐기고 있다는 것이 퍽 반갑고 기뻤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라고 하기에는
유리도 억울한 기분이 적잖이 들었지만 물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그가 물속에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유리는 그의 앟ㅍ에서 몇 미터쯤 느린 속도로 헤엄을 쳤다, 유리가 헤엄치는 자세를 하나하나 바라본 링신루가
그를 흉내내어 다시 헤엄친다. 뭘 하든 요령만 알면 잘 한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딱히 강조해서 말하지
않아도 어느 것이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인지 그 스스로가 알아내는 것 같았다.
유리는 수면에 엎드려 몇 차례 가까운 거리에서 헤엄을 쳐 보이는 링신루에게 다가갔다, 보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감을 잡기 어려운 부분이라면 직접 해 보이는것이 제일 나았다.
맞닿은 살잦으로 직접 전해지는 체온은 서늘한 물속에 있어서인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이 뛴다. 그 박동이 살갗 너머로 그에게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커다랗게, 쿵, 쿵, 동시에
감탄하고 말았다. 예븐 몸이었다.
유리는 링신루가 감각을 체득할 수 있을만큼 그의 자세를 가다듬어준 뒤 그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는 팔에 이내 서늘한 물이 달라붙었다.
"알 것 같아요."
링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가까운 곳을 몇 바퀴 맴돌며 헤엄을 친다. 그러면서 그럭저럭 요령을 잡았는지
홀로 고래를 주억거렸다.
그런 직후였다.
마치 "좋아, 그럼 이건 됐고. " 라고 구분이라도 짓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고래를 들어 유리를 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시선은 얼마간 붙박은 듯 떠나질 않았다.
담담하게 그를 마주보던 유리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웃한다. 그런 유리를 다시금 한동안 보고 있던 링신루는
이윽고 빙긋 진한 웃음을 웄었다.
"예?"
맨 살갚을 스치면서 어쩌면 링신루도 유리와 같은 예전을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혹은 이처럼 눈치 빠른 남자니까
조금 전 그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몸이라고 생각했던 걸 알아차리고서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납니다."
데워진 얼굴로도 전지하게 대답하는 유리를 어딘가 론란하다는 들이 쳐다보던 링신루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매를
찡그렸다. 괜히 물어봤네, 하고 함숨처럼 웃는 혼잣말이 들린다.
"좋아요, 그 정도는."
...? 예, 저도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니 새삼스러운 인사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대답했다, 그 바로 뒤에,
링신루는 무엇이 '앞으로'인지를 알려준다.
........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맨션에 딸린 거라서 좀 좁긴 하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몸이 예쁜 건 너지 」
「두사람? 돼 두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유리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혹시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그녀를 불렀다.
'아네트?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풀에는 안 들어간다는 기벽을 부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넉넉하고
한가로운데가 좋았다, 아무렇게도 방해 받지 않고 물을 느낄 수 있는.
그러자 다시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이 조금전보다 더 길었다.
이번에야말로 전화가 끊어졌나, 유리가 다시 "아네트?"하고 불러봐려고 한 순간
「아하하하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하....」
그 와중에도 자지러질 듯 웃으며 웬일이야, 어쩜 좋아,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옆에서 누군가 정신 차리라며
의자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 웃음을 간신히 멈추었다. 옆에 데릭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웄었네. 네가 그런 말을 할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몸이 예쁜 건 너지」
딱 부러지게 말하는 그녀에게 유리가 미심쩍게' 그렇습니까?"하고 되묻자 당장 「그럼!」하는 확고한 답변이
돌아온다.
".....창천 고맙습니다."
「너를 수영강사로 부리다니, 너무 호화로운 사치를 하잖아, 그 막내도련님은, 네 재능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인걸」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아네트,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게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전제를 둔 그녀는 말마따나 어렵잖은 화제를 꺼내었다. 그녀가 현재 업무 관련으로 뒤를 캐고 있는 남자가
최근에 중국에 들어가서 단기간 머무르다 왔는데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연락책이 되어주고 있는 그들은 그들 주위의 동료들과도 거의 비슷한 네트워크를 짜고 있었지만
언제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답하며, 유리는 그녀가 불러주는 타깃의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알아봐야겠지만 보름쯤은 걸릴 것 같은데요,
다른족에도 말해놨으니까 괜찮아, 하고 의례적인 대화가 오간다.
"헤엄?"
링신루는 그거라면 당신이 더 잘 할텐데요, 라는 눈으로 돌아봐았다. 그러나 잘하고 못하고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링신루는 물속에서 언제나 활기차게 오갔다. 한시도 쉬지않고 쉴새없이 물을 가르는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가 담담하게 말하자 링신루는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면서 둥그런 눈으로 빤치 유리를 보왔다.
"예"
"아, 진짜. 물 좋아하는 사람은 칭찬도 그렇게 하는구나......... 고마워요. 답변이라기엔 뭇하지만
게이블씨도 물속에 잠겨서 유영하는걸 보면 멋있어요 심해어처럼 아름다워요.
유리는 잠시 눈만 껌벅이면서 링신루를 바라보왔다. 링신루는 왜 그러냐는 듯 유리를 쳐다본다. 말ㅇ릐 맥락을
보면 좋은 말이긴하다.그런데.
"알아요"
이때도 묵묵하게 입다물고 있는 유리의 무뚝뚝한 얼굴을 흘끔 보더니 왜 그래요 또" 라며 웃었다.
너무 대놓고 보는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당연한듯이 이루어지ㄴ까 더한 바람까지
부풀어오를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어쩐지 좀 곤란한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
「왜 한숨이야?」
슬슬 인사를 하고 끊을 기색을 보이던 아네트가 그 숨소리를 들었는지 멈칫 걱정이 되었는지 따지듯 물었다.
「정말이지?」
「난 너는 어디에 던져둬도 걱정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어디에 있으나 걱정돼, 알지? 사랑해, 유리」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세상을 뜨고 없는 지금.어쩌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여자느 이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비록 순수한 친애라 할지라도.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진 뒤에야 유리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와 통화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아주 약간씩은 가벼워진다. 그녀도 틀림없이 누군가에게는 물 같은 사람이리라.
"누구예요? 여자친구?
그때 등 뒤에서 흥미로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링신루가 머리를 닦으면서 관심 어린
눈으로 유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알아맞혀볼까요? 음........아네트?
링신루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아네트의 이름을 말하자, 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놀란 눈치로,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를 본다, 그런 유리를 보고 링신루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유리를 찾는 전화들이 걸려온 적이 수차례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알만한
상대에게 연락을 하거나 부탁을 하는것은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였다. 유리 역시 필요할때에는 그렇게 하지에,
이미 그런 연락은 일상과 같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정말로, 게이블씨한테 연락하는 여자는 손꼽을 정도밖에 안되네요, 아네트 말고 또 나가
있지?
샤오췬이라든가, 하고 꼽아보는 손가락은 아무리 지나도 한손을 넘어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자에게 괸장히
인기가 없는 남자가 되어버린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긴 UNHRDO 도 그랬었죠, 특히나 아시아 지부는 여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말 외출이 안되는
특별훈련기간 같은때에는 여자여자 노래를 부르며 안달하는 놈들도 드물지 않았어요.
동료들 중에서도 유난히 여자를 밝히는 놈들이 여럿있었고, 가끔 일 때문에 한동안 여자를 만날 상황이 아닌
때에는 신경에 날카로워져서 말끝마다 "하고 싶어, 박고싶어, 싸고싶어"를 달고 사는 놈도 있었다.
"......"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링신루를 지르시 응시했다. 웬만한 미녀는 넉넉하게 뺨을 치고도 남을
정도로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게다가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겉으로나마 으레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우울하게 그럼에도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링신루를 바라보는 유리를, 문득 무슨생각이 들었는지 링신루도
마주보았다. 생각에 잠겨 지그시 유리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유리는 예상치도 못하게 자신이 묻고 싶었던 말이 자신의 귀에 들려오자 짐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게이블씨는 언뜻 그렇게 안보이는데, 가만히 알고 지내다 보면 성격이 은근히 무른데가 있어서 말이에요
유리에게 좀 더 떨어져 앉으라고 손짓을 한 링신루는 유리가 물러나앉자 그 자리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아직 덜
마른 머리가 유리의 허벅지 위에 얹힌다. 얇은 면바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듯 눈꺼풀을 문지르는 링신루를 보고 유리는 "잠시만요" 하고 몸을 을으키려 했다.
이시간쯤. 링신루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 유리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으레 더운 수건으로 눈을 덮고 문질러주곤
했다.
유리가 더운 물수건을 가져오려고 일어서려 하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링신루는 "아니에요" 하고 말하며 그의
허벅지를 벤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사박사박, 기다란 속눈썹이 손바닥에 닿아 간지러웠다. 속눈썹만큼 보드랍고 얇은 눈꺼풀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ㅇ러내려 손가락 끝으로 누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유리까지 마음속에서 편안하게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그는 이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요"
이정도야 얼마든지 해줄수 있다. 보이지 않는 눈이 너는 아프지 않도록 보이는 눈이 그 이상 피곤하지 않도록
뮨지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고맙다는 마을 듣기에는 유리 자신이 이 시간을 마음 깊이
즐기고 있었다.
그런건 링신루도 알고 있을터였다. 자신의 눈을 문지르면서 유리도 편안한 숨결을 내쉰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도 그의 입매가 언뜻 웃음을 띠며 벌어졌다.
무엇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가 고맙게 여길만한 어떠한 것을 얻었다면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링신루의 이 물음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리는 난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깊은거라 원래
뮬욕이 있는편이 아니라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말하고 보니 그렇다. 선물로 뭔가를 받는다 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다.
그 수영복만 해도 그랬다.
흘끔 고래를 돌린 유리는 선물이라면서 꾸러미를 대수롭잖게 던져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링신루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색깔이 마음에 안들어요? 그래도 게이블씨에게 어울릴만한 길로 나름 고심해서 골랐는데 바꿔올까요?
옷차림새를 꾸미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수영복이 빨간색이든 알로하 꽃무늬이든 사이즈만 맞으면 아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유리는,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왜 갑자기 그가
수영복을 던져줬는지 알수가 없어 물끄러미 그 수영복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쨌든 뭔가를 선물로 준다면 상대가 종아할 만한걸로 해야 할테고, 그렇다면 유리가
좋아하는 건 수영이니까 수영복이라면 잘 고른 셈이다.
그러나 유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뭔가 대답을 잘못했나 음찔한 만큼 순식간에 링신루의 표정이 식었다.
"지금 쓰는 건 버려요."
"버려요. 더럽잖아요."
"....."
"없습니다."
유리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젓자 링신루는 조금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흠, 없단 말이죠, 하고
손에 쥐고 있던 유리의 손바박을 무실결인 것처럼 갉작갉작 긁는다.
요즘에 접어들어서는 꽤 종종 그러곤 했는데. 그게 어쩐지 사랑스러워 유리는 으근히 그 감각을 좋아했다.
그러면 "내가 애교를 부려주니 고마운 줄 알아." 라는 듯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어딘지 오만하고
사랑스런 고양이 같아서, 유리는 웃고 만다.
링신루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유리의 손에 얼굴을 문지르듯이 약간 고개를 들어, 손바닥에 가볍게 코를 묻었다.
손안에서 숨을 들이쉬는 기척이 났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전에 씻었으니 비누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링신루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으니 거기에 옮아온 냄새이거나."
링신루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덮은 유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채 그대로 잠들기라도 할
듯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었다.
"......, 그럼 이것까지만요."
잠시 망설였지만 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집었다.
"그렇군요"
"유리 삼촌, 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건 굉장히 맘에 들었나봐, 있죠, 내가 좋은거 가르쳐 줄게요,
링탕윈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딸을 나무랐다. 샤오췬은 부러 어깨를 움츠리며 무섭다는 시능을 한다. 옆에서
페이가 손을 내 밀어 잔에 한 방울 남은 술을 핥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팔려고요?”
바닥을 치며 목 놓아 외치던 페이는 그러다가 결국 링탕윈에게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고 말았다. 심지어 손바닥도
아니고 주먹이 라, 정말로 아플 것 같은 ‘끄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링탕윈이 담담하나 묵직하게 중얼거렸다.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나오고 있음을
알려주듯이.물로 입 안을 행구던 유리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르겠다.
단순히 술이라고 해도,술과 연관되어 있는 일들을 총합적으로 본다면 상당한 규모일 터였다. 페이가 말했던 대로
‘큰 거 떼어준 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어 1,페이 역시 말했지만 링휘렁이 링신루를 그렇게 지극하게
아끼던 것에 비해서는 의외로 크게 떼 어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까지는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고,그 내부에 어떤 사정이 숨겨져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지금,
잠자코 말없 이 있는 링탕윈의 기색을 보아도 그는 ‘적게 떼어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링신루는 귀찮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어머니에게 갔고, 그동안 유리는 본채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앉아 있다가 마침 집으로 돌아온 페이에게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나랑 좀 놀아줘요.’라며 끌려온 참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예전과 다르게 불안정한 구석도 많이 없어졌고……. 여전히 좀 주위에서 대하기
어려워하는 면이 없잖 아 있지만 그건 윗사람으로서 좋은 면이라고 볼 수도 있지.”
링탕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카일에게 볼일이 있어 그에게로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시간 을 보니 회사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벨 소리가 딱 한 번 울리자마자 달칵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고막을 터뜨릴 듯 엄청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타인의 통화를 고스란히 엿듣겠다는 그 당당한 태도에는 새삼스럽게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한 게,상대가 정태의가 아닌가.
짧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잠깐 사이를 둔 다음에야 목소리 의 주인이 누군지 떠올린 정태의는 당혹스럽게
유리를 불렀다.
『아. 미안해요. 그놈이 계속 전화를 해대기에 퓨대전화를 꺼놨 더니 이번엔 집으로 전화질을 해서,그놈인 줄
알고……•』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했는지 정태의가 뭐라고 욕설을 내뱉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뚜,뚜,
통화대기음이 울 렸다. 누군가 전화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이 대화의 흐름 속에서, 지금 전화를 ‘해대고’ 있는
사람이 누구 인지 유리는 알 것 같았다. 정태의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장난질을 하는 그런 남자가,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맞는 걸까. 유리는 자신의 짐작을 의심했다.
뒤늦게야 말하는 음색이, 전화를 끊으려는 눈치였다. 아마도 유 리의 전화를 끊고 통화대기로 울려대는 저 전화를
받자마자 벌컥 고함을 지르려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느릿하게 내려놓는 손 아래 달칵하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링신루를
돌아본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미안합니다.’
유리가 주저 없이 사과하자 링신루는 어이가 없다는 듯 더욱 험하게 쳐다보았다.
‘나 화 안 났어요.’
이제 더 이상은 그때처럼 감정의 기복이 커 불안정하게 들뜨거 나 가라앉지 않는다. 어느 정도까지의 선 안에서一
자신이 스스로 를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선 안에서 그는 화를 내고 괴로워하 고 슬퍼했다.
..그렇구나.
‘왜 거기 앉아요. 화났어요?’
유리가 얌전히 그의 말대로 등을 돌리고 앉자, 곧 등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렸다. 유리가 등받이 쿠션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대어 앉은 링신루가 한껏 체중을 실었던 것이다. 그대로 책을 읽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팔락,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화 안 났습니다.’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 뒤에는 다시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잠시 지난 뒤 ‘그럼 됐어요.’라는 짤막한 대답고
함께 등에 기댄 몸 에서 천천히 힘이 풀어졌다. 마음 편하게 기대는 것처럼.
“아니, 진심이야. 네 덕분에 신루가 많이 침착해진 것 같아서 진심으로 놀랐고,또 고마워하고 있어.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걸.
링탕윈은, 비밀인데 이제야 알려주는 거라는 듯이 은근한 말투로 말하며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정말로
비밀이라고는 그도 생 각지 않을 것이었고,유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링신루가 늘 사랑스 럽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다 해도 그가
한편으로는 사람을 귀찮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물며 가족과 같은 필연적인 관 계도 아닌데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일 터였다•
“하하,그냥 농담을 했나 보지. 신루는 정말로 사람을 싫어하면 절대로 옆에 두지 않을 아이야. 차라리 아예
죽여 없애버려서라 도 평생 안 보려고 할 아이인데, 자기가 먼저 옆에 두겠다고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일걸.”
어느 쪽이든 괜찮다.
그렇다면 됐다. 설령 그가 아직껏 때로는 자신을 보며 욱하게 치미는 마음이 생긴다 하더라도,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안정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미 링신루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 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온 링신루는,심각하게 험담은 하지 않았다 하나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남으로 인 해 잠시 대화가 끊겨버린 방의 가운데,유리의 옆에 섰다.
“아아, 예.”
유리가 술병을 챙기는 옆에서 손 놓고 있던 링신루가 얼핏 눈 동자만 돌려 페이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언짢은
빛이 시선 위로 스쳤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그는 걸음을 뗐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링신루는 술병을 앞에 둔 유리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눈이 뻑뻑한지 일회용 안약을
뜯어 눈에 몇 방울 흘려 넣는 그를 보면서, 유리는 뒤늦게 물었다.
사람이 힘들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든다더니 딱 그거죠, 하고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늘 정체 모를 약이며 부적이며 주문 같은 걸로 사흘이 멀 다 하고 그를 귀찮게 굴던
어머니가 아연해하는 얼굴을 봐서 유 쾌해진 둣도 했다.
“다음 달쯤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초조한가 봐요. 눈이 이
상태라면 일도 제대 로 못할 것처럼 생각되는 모양인지, 같이 있는 동안 내도록 너 눈이 그래서 일은 어쩌니,너
눈이 그래서 일은 어쩌니, 하고 우 는데, 내가 정말……
유리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힘들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그의 옆에서 빈틈없이 잘
챙겨주고 도 와줄 사람이 필요하게 될 거다. 유리도 오래전 카일의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으니 그런 걸 아예
못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업에 관련된 보좌에는 약했다. 그런 건 제임스 같은 사람이 제격인데.
제임스를 영입하라고 조언해볼까. ……하지만 그랬다간 카일이 내 다리를 물어뜯으며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유리는 고개를 들어 링신루를 보았다. 안약 포장재를 쓰레기통 에 던져넣곤 소파로 와서 막 앉던 링신루는 시선을
느끼고 유리 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하며 빙긋 웃었다. 유리도 웃 고 만다.
여전히 화사하고 고운 웃음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가끔 표 정이 사라질 때면 가슴속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섬뜩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느 때의 그는 더없이 고왔다.
“어찐지 아침에 머리가 좀 아플 것 같은 맛이 나는데,그래도 마시는 동안은 입에서 떼기가 아쉬운 맛이에요. ……
하지만 반이 나 비웠으면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거 은근히 도수 세지 않아요?”
“우리 집에서는 겉으로 드러내놓고 팔지는 못하는 것들도 많이 거래하는 거,알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
대다수는 술이랑 같이 흘러 다녀요.”
술과 함께 흘러 다니는 것들.
문득 링탕윈이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 던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그것 이 일의 무게를 알면서, 또한 자신의 동생의 그릇을 알고 있는
“ 괜찮은데요.”
속이 약간 더운 듯싶기는 했지만 그거야 알코올을 마시면 늘 그런 거고,특별히 더 독하거나 뜨겁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 자 링신루는 “그래요?”하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하더니, 뭐 그렇다면 상관없죠, 하고 이내
자신의 맥주를 마신다.
“예? 아니,괜찮습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물속에서 평온을 맛보리라는 것 정도일까. 그것 정도는 확실한
삶이라서,그래서 좋았다.
——게이블 씨. ……게이블 씨?
몹시 익숙한 그 이름이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라는 걸 안
다음에도 유리는 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은 마치
저 너머 다른 세상에 있어,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더워, 더워, 짤막짤막하게 속삭이는 말은 더운 숨을 내뿜는 숨결에 섞여 나왔다.
살갗이 드러나며 공기가 닿았다. 덥고 답답하던 감각이 아주 조 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옷을
얼른 벗어버릴 걸.
그때다.
선뜩하게 차가운 느낌이 얼굴 위에 얹혔다. 저도 모르게 움찔해 서 몸을 움츠렸지만, 유리는 끙끙거리던 몸에서
겨우 조금 힘을 풀었다.
아,시원해……. 좋아…….
목에서 가슴,배. 물수건이 지나가는 데마다 살갖을 적신 물이 증발해 시원함을 전해준다. 갈증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익살스럽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귀찮은 기색도 비치지 않고 유 리의 몸을 닦아갔다. 그러다가 수건이 지나치게
미지근해지면 다 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수건을 차갑게 식혀서 돌아온다•
이윽고 천천히 몸에서 숨 막히는 더위가 가시기 시작했다. 여전 히 후덥지근하고 뜨거웠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기분 좋게 땅 속으로 꺼질 것 같았다.
——좋아요?
응,좋아.
——좋아요?
하지만 손등을 치우진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손을 움직여 유리 의 뺨이며 이마 따위를 문질러준다. 살짝살짝
쓰다듬듯이.
기분이 좋았다. 나른하고. 편하고. 아직껏 몸속에는 후덥지근한 더위가 고여 있었지만,그 더위마저 기분 좋은
고양감으로 바뀌 어 몸을 감싼다.
‘일어났어요?’
‘아니에요?’
유리는 흐리게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이게 누구더라, 하고 어렴풋한 머리로 생각했다. 유리가 제대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유 리의 입술을 빨았다. 주린 배를
채우는 탐나는 것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거침없이 입술을 빨아먹다가 잠시 떨어진 그는,예의 그 낯선 얼굴로
유리를 내려다본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얼굴은, 여전히 그토록 예쁘고 화사한 얼굴이었 는데도,고양이처럼 보드라운 달콤함은 없었다.
어느새 늘씬하게 자라난 젊은 표범이 되어, 맹수의 눈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요?’
문득 속삭이는 목소리.
단단하게 뭉쳐진 부피감이 유리의 성기를 찌르고 있었다. 성기 의 뿌리를, 기둥을, 끄트머리를 찌르며 세차게
비벼대는 더운 살 덩이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자신은 정신없이 달아올라 푹 젖어버린
쾌감 속에서 짧고 밭은 의미불명
좋았다.
숨이 막혔다. 아래가 조여드는 감각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흐려 진다. 쾌락이 터져나가는 감각, 그 강렬하고도
선명한 쾌감. 묶여 있던 것이 풀려나는 해방감.
여전히 단단하고 뻣뻣하게 부풀어 올라 아래를 찔러대는 감각 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는 소리와 섞인다.
욕정.
. _,
일순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윽고.
‘이제 보니 게이블 씨, 굉장히 야하잖아요. 몸도, 표정도, ……여 태 이렇게 야한 몸을 어떻게 가누고 있었어요?
힘들었겠어.’
그 자신과 상대의 토정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아랫도리를 축 축하게 문지르던 손은, 느리게 아래로 움직였다.
아래로.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흥분으로 들뜬 숨소리만 거칠게 들려올 뿐이었다. 간간이 유리의
입술을 빨아먹 는 탐욕스러운 입술이 닿아왔다.
낯선 위화감이 들었다.
몸속으로.
곧,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몸속으로 밀고 들어오던 손길이 조금 거칠어졌다. 인내심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처럼,
사타구니를 죽죽 하게 적시고 있던 정액을 윤활제처럼 그러모아 그 안으로 밀어넣 으며 다른 손가락들까지 둘, 셋,
안쪽을 벌리며 들어온다.
숨 쉬기가 괴로워졌다.
‘-!!’
‘……아,그래. 이쯤이구나……?’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곧.
몸속의 한곳을 연이어 두드리는 자극에,정신없이 눈앞이 하얗 게 튀어 올랐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
어떤 소리를 터 뜨리고 어떻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지도 몰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유리는 한동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 깜박, 천장을 넋 없이
올려다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뭔가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하얗게 비어 있는 머리로 자동인형처럼
눈만 깜박였다.
그리고 그제야 ‘물소리가 멈췄다.’라는 생각이 의식 위로 떠오르 면서, 사고가 하나하나 살아났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 말을 아마도 여러 번 물어본 모양이 었다. 그러고 보면 아스라한 기억 속에 가물가물
그 말을 들었던 듯도 하다.
그는 느릿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맞춰 유리도 누운 채 흔들렸다. 아랫도리가 이어져
있었던 탓이다.
조용히 중얼거린 링신루는 낮게 혀를 찼다. 눈꺼풀을 할짝거리 며 핥은 그는 입술도 할는다. 고양이 같다.
분명히 아까는 표범이 한 마리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고양이가 돌아왔나 보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조금 달싹거리는 듯했지만, 바싹 말라 쉬어버린 목에서는 바람만 새어나왔다.
유리는 단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좋았어요?’
깜박깜박 사이가 비어 있으나마 그럭저럭 이어진 유리의 기억 이 맞다면 간밤에 한숨도 자지 않은 링신루는,
그러나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말끔한 얼굴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넋 놓고 링신루를 쳐다보는 유리를, 링신루도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여기요. 물 찾은 거죠?”
맞았다.
유리는 링신루가 부축해 일으켜 입에 대어주는 물을 천천히 삼 켰다. 반 이상은 흘렸지만 그래도 몇 모금이나마
입술과 목을 축 이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유리는 눈동자만 돌려 시계를 보았다. 이미 사람들이 활발하게 이동할 아침 시간이 되어, 바깥에서는 차 소리가
맨션 아래로 연 신 지나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밤을 샜을 것임에 분명한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링신루를,유리는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정말로 이 남자와 잔 걸까. 여러모로 알 수 없었다.
사이사이 비긴 했지만 기억이 없지는 않았다. 어째서 자신이 이 러고 있는지, 자신과 그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어렴풋하 게나마 기억난다.
하지만.
그때, 유리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가 말했다. 유리는 눈을 낌벅였다. 링신루는 흠,
하고 별다른 표정 없이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혼란스러운 심경이 어권지 좀 가시는 듯했다. 갑자기 이 혼란스 러운 상황에 대한 난감한 기분이 사그라지는 건,
링신루의 태도 가 지난밤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서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마주 대하면 좋 지,그런 생각은 애초에 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예상 치 못한 가볍고 대단찮은 사고가 벌어졌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 다.
호들갑을 떨며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쩌니 저쩌니 할 만큼 어 린애도 아니고, 이 남자나 자신이나 그런 성격도
아니다. 글쎄, 이 남자의 성격으로는 때에 따라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뒤 책임 지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어쨌든 지금은 그런 경 우가 아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노력 봉사.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의 무르팍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를 보 고,링신루가 얼굴에서 잠깐 웃음을 거두었다.
“화났어요?”
유리는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는 그를 쳐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하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하자
어렴풋한 불안이 떠 올랐던 그의 얼굴에 다시 안도가 서렸다.
왜 화가 나겠나.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고,기억이 흐리다고는 하나 유리는 자신이 분명히 ‘좋아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아랫도리에 저릿한 쾌감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데,이제 와서 즐기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화나진 않았다. 그저 기분이,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게 미묘할 뿐이다.
“……,좋았어요?”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휘 몰아치는 느낌이라 그 당시의 기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좋긴 했다. 아니 사실은, 여태 그의 인생에 있어왔던 여러 차례의 관계 가운데一라고 해도
그에게 그리 파란만장한 연애편력이 있 었던 건 아니지만一가장 정신없이 느꼈다. 혹시 나는 원래 성향 이
이쪽이었던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그는 잠시 입매를 찌 푸리더니 “어제는 정말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니까 다음에 도 이런 일이 또 있을 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하고 혼잣말 비숫 하게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뒷말을 하면서는 다시 유리를 바라 보며 예쁘게 웃어준다.
“다음에도 기분 내키면,뭐.,,
——해줄게요. ——봉사해줄게요.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수건 으로 살살 닦아주는 손길에 얌전히 얼굴을
내맡기고서, 아니 별 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
굳이 싫다고 거절할 만큼도 아니지만, 그리 내키지도 않았다. 분명히 지난밤의 기억이 나쁘게 남은 건 아닌데도_
아직도 몸속 이 달게 욱신거리는 느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一그랬다.
유리는 축 늘어진 몸만큼이나 가라앉은 마음으로 링신루를 쳐 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기웃하며 웃음
짓는 그는 평소 와 다르지 않았다.
보록. ..보록.
물속에 누워 숨결을 천천히 한 모금, 두 모금 뱉어내면 공기방 울이 반짝반짝 둥글게 춤추며 올라간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커 다랗게 부푸는 방울은, 이윽고 수면을 만나면 팍, 터진다. 그리고 그곳에 남는 것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파문.
그런 사소한 것들이 좋았다.
그때, 유리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가 말했다. 유리는 눈을 낌벅였다. 링신루는 흠,
하고 별다른 표정 없이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혼란스러운 심경이 어권지 좀 가시는 듯했다. 갑자기 이 혼란스 러운 상황에 대한 난감한 기분이 사그라지는 건,
링신루의 태도 가 지난밤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서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마주 대하면 좋 지,그런 생각은 애초에 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예상 치 못한 가볍고 대단찮은 사고가 벌어졌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 다.
호들갑을 떨며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쩌니 저쩌니 할 만큼 어 린애도 아니고, 이 남자나 자신이나 그런 성격도
아니다. 글쎄, 이 남자의 성격으로는 때에 따라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뒤 책임 지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어쨌든 지금은 그런 경 우가 아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노력 봉사.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의 무르팍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를 보 고,링신루가 얼굴에서 잠깐 웃음을 거두었다.
몸을 위로 떠올린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머나먼 남쪽 바다로 떠나지라도 않는 이상 은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울은 물 바깥의
날씨가 춥기 때 문에, 봄은 물속의 온도가 겨울보다도 더 차갑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언제였던가, T&R 과 재계약을 할 때 계약서를 물끄러미 쳐다보 던 유리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제임스는 흰
눈으로 그를 바 라보다가 쌀쌀맞게 말했다.
벌컥 소리를 지르는 제임스는, 그 당시 카일이 중고 고서적 경매장에서 사기를 당했다고 길길이 뛰며 난리를 치는
통에一이미 지불한 돈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가 낙찰 받은 내 책을 내놓으 라고 펄펄 뛰고 있었다一몹시 기분이
안 좋았다. 현명한 유리는 군말 없이 사인을 했고, 제임스는 거기에 직인을 찍음으로써 한 해의 계약 갱신을
마쳤다.
지금도.추운 계절은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바다에 들어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으로서는 계약에 묶여 마 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보록보록 올라가는 공기방울을 따라 수면으로 올라간 유리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욱, 결국은 물에서 살
수밖에 없는 그는 공기 속에서 호흡을 골랐다.
“굉장하네요, 2 분 30 초.”
속눈썹에 맺혀 눈에 스며드는 물을 걷어내는 유리의 앞에서, 감 탄스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을 쓸어 올리자 링신루가 레일 위에 올라앉아 다리를 물속에서 설렁설렁 젓고 있는 게 보였다.
“글쎄요. 3 분 조금 넘게까지는 견뎌봤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 습니다. 일일이 시간을 재면서 물속에
머무르지는 않으니까요.”
예전 언젠가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띄우는 그를 유리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유리의
눈길을 깨닫곤 링신루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했다.
“……. 아,예……
유리가 잠시 침묵하다 은근히 물어보자 링신루는 아, 그랬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불쾌한 기 억을 되새겼는지 미간에 한 줄 주름이 진다.
“바로 옆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가 의식을 잃기를 기 다리면서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 알아 요?,’
“……,굳이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그 사람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에는
본인에게 충분한 확신과 자신이 있지 않으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작 은 어린애라 해도,죽음의 공포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달라붙으면 힘 좋은 장정 하나를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중립에 선 척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슬그머니 변호해주는 유리 였지만, “그건 알아요.”라고 잘라 말하는 링신루의
음색은 싸늘했 다.
“문제는 그것보다 다른 거였죠. 그때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쳐다 봤는지 알아요? 의식을 잃어가면서 괴로워서
바둥거리는 나를 넋 나간 것 같은 눈으로 쳐다봤어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 것만큼은 뚜렷이 보이더군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 눈만큼 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링신루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그리고 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시선을 아무데로나 띄웠다.
어쩐지 얼굴에 핏기가 가실 것 같다. 그때의 자신을 그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는 어린애를 그렇게 황홀하게 쳐다보다 니, 그놈은 최악의 사드변태였어요. 혹시 또
모르죠. 사람을 목 졸라 죽이면서 희열을 얻는다는 게 그런 놈일지.”
그렇지 않다고 정말로 간절하게 변호해주고 싶은데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시선을 피한 채
“그런가요…… 하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링신루는 생각하자 다시 분노가 치솟는지 삭막한 얼굴로 허공 을 노려보았다. 그 허공에 과거의 그놈이 매달려
있기라도 한 듯, 시선이 무섭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어떠한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다니,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생명의 은인인데,하고 여태 은연중에 품 어왔던 생각이 조각조각 깨어져 흩어졌다.
화사한 눈웃음으로 유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링신루였다. “아니오, 뭘요…….”라는 대답이 겸양이 아니라는
건 유리만 알고 있다.
참 무거운 화제라고 생각했다. 링신루는 먼 과거의 일을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유리는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졌다. 그래 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물속에 찰방찰방 몸을 담근다.
들어오려야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물에 있으면 늘 아늑하 다지만 이번만큼은 이 상태로 물에 들어가면
빠져죽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반쯤은 진지하게 했다.
남자와 관계를 하는 게 이렇게 몸에 부담이 큰 일이라고는 생 각도 못 했다. 처음 몸이 늘어질 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한숨 자고 일어나자 몸 이 더 나른하게 늘어졌다. 낯선
근육통 때문에 열까지 났다.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의외네, 하고 놀랐다는 투로 링신루가 중 얼거렸을 때,언제나 담담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링신루를 사랑스 럽게 지켜봐 왔던 유리는 처음으로 ‘의외라고 한다면, 이 남자를 두 대쯤 때려주는 것도 의외로
기분이 상쾌할지도 몰라.’라는 폭 력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얼핏, 처음 했을 때 여남은 시간쯤 이것저 것 시험해보면서 요령을 익혔다고 링신루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 다. 그야 물론 순수하게 몸만으로 하룻밤 꼬박을 보내지도 않았 을 거고 어느 정도는 어린 치기에
과장해서 말한 것도 있으려니 했는데,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몰랐다.
마음으로 ‘사람 잘 돌보는군요.’라고 말했더니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늘 이렇게 챙겨주거든요.
그래서,내가 직접 해본 적은 없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는 걸 실천하 는 거야 일도 아니죠.’라고
말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문득 링신루의 시선이 유리의 입매에 맺히는 듯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유리를 아무렇지 않게 쳐다본 링신루는
신기하단 말야,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게이블 씨는, 그렇게 물 좋아해서 만날 잠겨 있으면서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한 번쯤은 빠져죽을 뻔했을 만도
한데.”
“늘 편안했던 것 같습니다.”
유리가 다시금 기억을 체크해본 뒤에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링 신루는 낯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에 대해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매 일 운동을 다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으니,그가 매일 수영을 하러 다닌다고 해도 이상하게 들릴 건 없었다.
유리는 링신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자신의 마음에 쌓이는 무게를 떨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 를 테고,유리가 물에 잠겨 평온을 얻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방식대로 평온을 얻을 터였다.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란 게 얄팍해서,힘들 때에는 그게 몹시 간절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부 러운 마음은 안 들더라고요.”
“게이블 씨는, 이렇게 사람 좋아해서 가슴앓이로 힘들어했던 적 이 있어요? 아니면 첫사랑의 기억이라든가. ……
사람이 워낙 담 담해 보여서 그런지 어찐지 상상이 안 가긴 하는데.”
있었다. 무심결에 떠올리고 그 자신도 당황한 그 기억은, 처음으 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사람을 보았던
기억이다. ……링신루의 기억에는 악몽으로 남아 있는 그날,물속에 피었던 꽃.
유리는 물끄러미 링신루를 보았다. 링신루 역시, 가볍게 물어본 자신의 말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깜박이는 유리를 보 면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슷합니다.”
“예,……닮았어요.”
묵직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유리의 앞에서 ‘나랑 닮아요?’하고 미심쩍게 중얼거리던 링신루는,문득 입을 다문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뚫어져라 유리를 보았다.
뒤에 ‘아마도,가 붙긴 했지만 유리의 조용한 음성은 단호했다. 닮아서 좋아한다, 누구에게든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닮다 니, 그런 이유로 좋아할 만큼 닮은一얼굴과 성격과 몸짓과 말투 따위기一사람은 없었다.
유리를 바라보던 링신루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러나 조금 전보다는 웃음기도 많이 흐려진 얼굴로,
그는 “그만 나가죠.”하고 돌아섰다.
꿈을 꿨다.
유리는 고개를 숙여 물끄러미 자신의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화장실에 갔다 나온 아랫도리는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바 로 조금 전까지 옷감을 슬쩍 들춰 올리며 서 있었던 물건이다.
속된 말로 ‘개화 M7E 했다’는 게 이런 것이기라도 한지, 요즘은 부 쩍 민감해진 것 같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이 곤두 선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한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평 소에도 날카로워진 것
같진 않았다.
‘아……. 좋아.’
지금처럼, 이렇게 문득 귓가에 감도는 목소리를 떠올린 것만으 로도, 저도 모르게 손이 움칫하고 움츠러든다.
오늘도 그랬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이 되어, 링신루는 눈이 피곤하다며 유리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리고 유리는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이 더 운 수건으로 그의 눈을 덮고 그 위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더운 수건. 피어오르는 김. 기분 좋게 흘러나오는 숨결-
그런 것들 속에서, 요 얼마간 자신이 민감해졌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기에 약간 긴장하고 있었던 유리도 천천히
어깨에서 힘 을 풀었다. 마음도 같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코와,그 결에 스치는 입술과,나른한 숨결,그런 것들이 손바닥 을 간질인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크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아주 희미하게 움츠러드는 손을 링신루가 모를 리 없었다.
‘……, 냄새요?’
‘예. 어디선가 맡아본 것처럼 낯익은 냄샌데……, 그게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좀 신경이 쓰여요. 어디였더라
……
‘간지러워요?’
할 수 없지,그렇게 웃는 것 같았다.
링신루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리의 뺨을 쓰다듬듯이 가만히 감쌌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링신루를 내려다보는
유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뺨도,목덜미도. 그리곤 정말로 크게 인심을 쓴다는 것처럼 웃었다.
굳이 그 손길을 밀어낼 이유는 없었다. 깊이 있게 사귀거나 하 는 사이도 아닌데 밀고 당기기를 할 이유도 없었고,
또 애초에 유리는 그럴 성격도 못 되었다.
그때다.
기척 없이 안방 문이 열렸다.
“……아.”
유리는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조용히 대답하면 서,여태 줄곧 머릿속에 담고 있던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잠이 들러붙어 반쯤 감긴 눈을 낌벅이며 찌푸린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 는 부스스한 얼굴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니,이거야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적막할 정도로 널찍한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고 있는 커다란 침 대 위에, 링신루는 이불에 파묻혀 엎드려 있었다
그때.
정말로 잠꼬대인지, 아니면 비몽사몽인지 모르겠다. 정신은 들 었는데 졸려서 반쯤 의식을 놓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그냥 꿈자리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 디 JJ. ”
“그럼 무슨 꿈인데……
여전히 꿈속에 반 이상 발을 걸치고 있는 링신루는 꿈자리가 사나웠을 유리를 위로라도 해주려는 건지 허리에 얹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등을 툭,툭, 느리게 두드렸다.
변덕스럽고 개인적이고 가끔은 비뚤어진 심술보도 드러내는 예 쁜 고양이다. (고양이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표범인 것 같긴했지만.)
그래서 유리는 천천히,깊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으면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때.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링신루의 얼굴에서 불현듯 나른한 온기 가 씻은 둣 걷히는가 싶었다. 반짝, 눈꺼풀을 연
그의 눈에는 순 식간에 잠기운이 사라진다.
‘‘.?’,
“정말이에요?”
웃음기라곤 없이 서늘한 얼굴로 한참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 가 갑자기 꺼낸 말을, 유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말 자체 는 알아들었지만 뭘 묻는 건지 몰랐다.
“ 예?”
어리둥절해진 유리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묻자,링 신루는 아예 고개를 들어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 꿈 궜어요?”
재차 캐묻듯이 물어보는 링신루가 하는 말을, 이번에도 유리는금방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데없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얼떨떨하게 링신루를 마주보며 눈을 껍벅이던 유리는, 천천히 기억 속의 대화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몇 초쯤
지난 뒤에야 깨닫는다. 첫사랑의 꿈.
잘 자다가 갑자기 첫사랑의 꿈을 꿨냐면서 벌떡 일어난 링신루 를,유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뜬금없이 ‘소금 몇
숟가락 넣을까’라 고 잠꼬대를 하는 사람과 마주친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링신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 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도로 눈을 떴다.
“……. 어떤 꿈이었어요.”
“……. 꿈이 생각나서요.”
“ 닮아서요?”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물 따르는 소리,벌컥벌컥 물 마시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져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빈
컵을 식탁 위 에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까지.
“예. 미안합니다.”
유리가 조금 우울하게, 그럼에도 변함없이 무심한 얼굴로, 시선 을 떨어뜨리고 있자, 그런 유리를 사납게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 루는 문득 언짢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됐어요. 그만 자죠.”
“많이 닮았어요?”
“……,뭐 그냥……,그렇습니다.”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도 어찐지 속이는 것 같아서 一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괴로운 바닷가의 기억에
대해 해명해 주지 않고 입을 다물기를 선택한 죄책감인지도 몰랐다一,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거짓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물자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옆에서 흘끔, 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옆 얼굴에 시선이 닿는다.
“비슷해요?”
“..그냥.”
“그러면, 이런 것도 비슷해요?”
어, 짤막하게 중얼거린 소리는 링신루의 입속으로 먹혀버렸다. 움찔, 유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허공에 떠서
갈 곳을 잃은 손도,뻣뻣하게 굳어버린 몸도 그대로 멈춘다.
“——그러면 이런 건 해준 적이 없겠네.”
“--!!’’
“잠,깐, ——
낯익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경한 감각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링신루를 밀어내었지만,그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오히려 더욱 세게 힘을 주며 바싹 끌어당겼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아래를 벌리며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 때 문에 유리가 차마 대답을 못하자, 링신루는 울컥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더욱 깊숙이 찔러 넣는 탓에, 유리는 다시 몸을 퍼득 움 츠리고 만다.
허덕임이 섞여 뒤집힌 목소리로 대답한 유리는 아, 하고 도중에 말을 및었다. 몸속을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을
찔러올린 순간 저 릿한 감각이 아래에 번진 탓이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었지만,그렇다고 익숙할 수는 없었다. 무덥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어깨를 움칫
“열——열두세, 살,……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보다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 해 제대로 계산해서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몸속을 더듬는 움직임이 멈추어도, 이미 불씨를 붙여버린 몸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저린 감각이 들러붙은 허리
아래로 사타 구니가 부풀기 시작한 걸 알 수 있었다.
링신루는 사납게 말을 내뱉고는 혀를 찼다. 갑자기 맥이 빠지는지 앓는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화났어요?”
감정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사고가 막 정리되었을 때,갑자기 링신루가 이불을 목 아래로 걷으며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잠깐 기분이 상해서 그랬어요. 내가, 잠에서 막 깨면 감정 기복이 좀 심해지거든요. 그래서…….
꿈자리도 안 좋았거든요.
고개까지 꾸벅,깊이 숙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링 신루를 내려다보던 유리는, 잠시 눈을 깜박이고
있다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 예.”
유리는 이번에야말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지금은 돌아가면 마치 화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사실은
화가 난 것처 럼 보일 것 같아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링신루는 다시 자리 를 두드렸고, 유리는 주섬주섬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매일 일어나서 수영하러 가는 시각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는 낮은 한숨을 쉬며
몸을 움츠렸다.
“추워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아까부터 잠기운은 다 달아났다. 머릿속도 환하게 깨어 졸리지 않았다.
“안 잘 거예요?”
“예,아마도요.”
“그러면,”
“아까 하던 것, 마저 해줘요?”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몸속을 찔러 올려 심지에 붙여놓았던 불은, 지금은 거의 가라앉 았다. 어중간하게 자극해서 묵직하게 괴로웠던
아랫도리도 그럭 저럭 괜찮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여전히 저릿한 감각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그러나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그 감각도 마저 지워질 터였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링신루가 유리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며 허리 아래를 가까이 대었다. 맞닿은 것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감각
속에서, 링신루는 희미하게 거칠어진 숨결을 가만히 유리의 귀에 불어넣었다.
“하기 싫어요?”
하기 싫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어찌 되었든 몸속은 점점 불씨가 가라앉아 간다곤 하지만 여태 욕구를 호소하고
있었고, 그와 몸 을 섞었던 기억에는一매우 힘에 부치긴 했지만一강렬한 쾌락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 난감한 듯 생각에 잠긴 유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링신루는 어쩐지 초조해진 듯했다. 유리의 귀를
입술로 잘근거리 며 조금 더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고 싶어요.”
링신루가 속삭였다.
점차 거칠어지는 아래의 감각에 점점 더 의식이 몰리고 있던 유리는 난처한 얼굴로 링신루를 보았다. 하고 싶어요,
하고 그가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중국에 온 지 달포나 지나서야 달력에 그날의 길흉화복을 알려 주는 글자가 적혀 있다는 걸 깨달은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링신루는 대수롭잖게 ‘옛날 어른들이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그냥
조심하라는 거죠 뭐. 신경 안 써도 돼요.’라고 대꾸했었다. 이 세상 사람이 몇인데,천편일률적으로 운이 좋고
나쁘고 하겠어요,하고 우습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유리,잘 지내고 있나? 이쪽에는 언제쯤 돌아올 거야?』라고, 제임스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요즘 힘든가보군요.’
살기가 힘들어지면 사람이 팍팍해지게 마련이지요, 라고 중얼거 린 유리는 저도 모르게 흘끔 눈을 들어, 식탁에
앉아 커피를 내 리고 있던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하필 그 순간 유리를 쳐다본 링 신루와 눈이 마주쳐,속으로
혀를 차고 만다.
더 이상은 예전의 힘들었던 무렵처럼,그와 관련된 사소한 실마 리 하나에도 금세 표정을 없애고 창백한 얼굴에
살기를 피워 올 리며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도리어 ‘태이 형한테 안부 차 편지를
써야겠어요. 그놈이 보고 열받게 하 트마크를 군데군데 열 개쯤 넣어야지.’라고 본인이 농담을 꺼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리는 링신루의 앞에서 그들의 화제를 일부 러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 지만, 그러나 가능하면 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제에도 금세 태연한 듯이 표정을 감추는 법을 터득했 다고는 하나, 링신루는 여전히 그들괴一주로
리그로우와一관련된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이나마 눈썹을 찡그렸다. 꿈틀,주 먹을 쥘 듯 절로 굽어지는
손가락은 손바닥에 닿기도 전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연해지지만, 그런 것들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나아질 테지만,아마 평생이 가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진정한 의미로 자연스럽게 나누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심한 표정으로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한 유리였지만, 저 눈치 빠른 남자에게 뭔가를 온전히 감추기란
어려웠다. 이 순 간도 그렇다.
유리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제임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그 래, 그렇군. 어째서 여태 그를 써먹을 생각을 안
했었지?!』하고
‘아,예.’
유리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식탁에는 유리가 전화를 하는 동안 이미 간단한 식사거리들이
올라와 있었 다.
에그 스크램블을 집어먹으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링신루의 앞 자리에 앉으며 유리는 그런가요,하고 중얼거렸다.
링신루는 유리 의 앞에 커피 잔 하나를 내려놓고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역시 나는 커피보다는 우유가 더 좋긴 한데, 그래도 마시다 보 니 커피도 그리 나쁘진 않네요.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커 피를 마시면 속 쓰리지 않아요?’
‘형은 잘 산대요?’
‘그렇다는군요.’
‘그런데요.’
마지막 말은 과장스런 불평으로 농담을 건넨다. 그제야 유리는 얼핏 웃으며 ‘그러게요.’하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링신루는 담담한 얼굴로 소리없는 숨을 내쉬는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가볍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말한다.
그걸로 그 화제를 접었다. 오늘 재활센터 예약이 몇 시였죠,지 겨워서 가기 싫은데, 그런 말들을 하며 접시를
비웠다.
이제는, 차라리 그렇게 불안정한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여기 저기에 찢기고 다쳤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시기가 이르게 지나갔 다는 것이.
이제부터 그가 배우고 손대야 할 거칠고 복잡한 일들 속에서, 그 일들을 능란하게 다루면서 자신의 걸음을 걸어
나가는 데에 흔들림이 없도록.
묵직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 탓인지,오늘은 정말로 달력에 표시되었던 것처럼 아무래도 그리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지는 않 았다. 차 막힐 시간대가 아닌데 차가 막혀 재활센터 예약시간에 늦었고, 링신루가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음료 를 사마시며 거리에 서 있던 유리는 괜히 지나가던 공안에게 신 분증을
보여줘야 하기도 했다.
오늘의 나머지 일정은,저녁에 본가에 들렀다 오는 것뿐이다. 이제 곧 링신루가 재활센터에서 나오면 곧바로
본가로 가면 된 다.
부디 이 이후로는 나쁜 일이 없기를.
“오늘은 어땠습니까?”
노력 여하에 따라,보조 기구를 이용하면 어렴풋이 물건의 형태 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은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링신루는 코웃음 치며 ‘노력해서 성공해봐야 거의 장님 수 준이란 얘기네.’라고
했지만, 재활센터에는 순순히 나가주고 있었 다.
링신루와 나이차가 픽 나는 형님들을 비롯해 이권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링휘렁의 결정 에 찬동하는 사람들보다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일임에도 하루 이틀씩 늦어지는 이유는, 링신루의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하는 탓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몸이 온전하지 않고 허약한 아이가 어떻게 그 힘든 일을 하겠냐는 것이 요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일과 는 멀리 떨어져 편안하고 한가로운 삶을 보내기를 바랐다.
이미 주류를 다루고 있는 사람의 아래에서,그와 함께 다니며 어깨 너머로 일을 배우는 게 시작일 터였다. 그렇게
1 년, 2 년, 5 년, 10 년, 오랜 시간에 걸쳐 일을 물려받는 것이다.
처음부터 링신루는 그들 혈연 중에서도 가장 심장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리라 고 예비된 사람이다.
“아……,귀찮은데.”
링신루는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말없이 운전만 계속하던 유리는 충분히 공기가 데워진 차의
히터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단순히 술만 넘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겉으로 드러내놓고 팔지는 못하는 것들,……그런 것들 대다수는 술이랑
같이 흘러 다녀요.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보고 있었다. 어찐지 이상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깜박이며 한동안 말없이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어느 순간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 다.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하고 뒤늦게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이상은 입을 댈 생각은
없었다. 애초부터,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나 이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잖아요?”
침묵하는 유리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링신루가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실망이라도
하냐는 둣.
유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게 싫었다.
무뚝뚝하게 말하고 입을 다무는 유리를, 조수석에 앉은 링신루 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 좀 세워 봐요.”
저 옆쪽으로 대요,이 길은 잠깐 세워놔도 되니까,라며 링신루 가 손짓하는 쪽으로 간 유리는 갓길, 커다란
버드나무가 길게 늘 어진 아래에 차를 세웠다. 본가에서는 다들 링신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래도
괜찮을까 잠깐 염려했지만,아직 저 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마음이 그리 조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유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링신 루는 이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침’
이라는 말에서 그 자신도 아침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다.
“……. 예.”
“지금 안 믿는 눈치였는데요?”
“……. 믿습니다.”
“아냐, 안 믿는 눈친데.”
링신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리를 노려보았다.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믿습니다.”라고 한 번 더 말했다.
링신루는 그런 유리를 노려보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근거가 없어 씁쓸하게 입매만 찡 그리고 만다.
“그 녀석이 편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사실은 속이 뒤틀려요. 어디서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순식간에 등받이가 되어버린 유리는 그대로 꼼짝도 못하고 눈 만 낌벅이며 링신루를 쳐다보았지만,아무래도 금방
비킬 기미는 보이지 않아 이내 단념하고 그 역시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어깨 가 좀 무겁긴 했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 예,좋습니다.”
링신루가 뒤이어 한 말은,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먼저 정태의의 화제를 꺼내는 것도
거의 없는 일이 다.
유리는 침묵하다가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하고 링신루는 건성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一혹은 잠든 사람처럼一오래도록 그렇게 침묵했다.
유리는 말없이 링신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봐야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나는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분명히, 리그로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 기 위해 형을 내 옆에 데려다놓았던 건 사실이죠. 놈이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형을 약에
절여놓을까 했던 것도 진심이었어
좋아하는 건 뭐예요?”
링신루가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기척이 났다. 눈이 마주칠 만큼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유리에게 묻는 말이었 다.
“나는 지금도 링신루 씨가 정태의 씨를 억지로 끌어오려고 했 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게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 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글쎄요. 좋아하는 게 반드시 격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유리는 깊이 생각하며 드문드문 말했다. 누구나 다를 테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먼발치에서 우연히
스쳐보면 그걸로 만족 하고,그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고,그 사 람이 좋아했던 걸 보면서
기분 좋게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런 것도 좋으리라고.
문득 유리는 어깨에 기댄 링신루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 지만,그렇게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과 그의 차이점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게이블 씨의 방식이 싫지는 않아요. 좋아요. 게이블 씨다워서.” 말꼬리에 웃음이 섞였다. 아니, 실제로도
웃었다. 기분이 유쾌해 진 듯 소리 내어 잠시 동안 웃었다.
좀 더 어깨를 올려 봐요,기대기 편하게, 자신의 편의에 맞춰 주문까지 넣으면서 유리의 자세를 고친 링신루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붙이기라도 하려는 듯 편하게 기대어 앉아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머리를 유리의 어깨에
비비듯이 기댄다.
이윽고.
그렇구나. 그거였어.
……물 냄새.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몸에 코를 가까이 했지만, 역시 그의 코에는 별다른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부터 링 신루가 어딘지 낯익은 냄새가 난다고 했을 때부터, 유리는 알 수 없었던 냄새다.
물 냄새.
“불편해요?”
“불편하지 않아요.”
링신루는, 그러나 유리가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못할 게 가엾었 는지 조수석에서 고개만 옆으로 기울여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얹 었다.
“이걸로 됐어요,지금은.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니까 진짜로 나른해지는 것 같아. 좀 잘게요,나.”
“깨워줄까요?”
“음……,아니오. 그냥 자게 내버려둬요.”
유리는 링신루를 내려다보다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자신도 덩달아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유리는 시계를 흘끔
보곤 눈을 감 았다. 짧은 낮잠만큼 달콤한 것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물 냄새.
여전히 그는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링신루의 무거운 마음을 녹여준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링가의 사람들은 수영을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라 고 유리는 생각했다. 하긴 오래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그 옛날 링탕윈一및 그의 가족一과 바다에 놀러갔었을 때에도 그는 ‘수영 을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
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집에 개인풀을 가진 사람이 왜 오랜만에 수영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집에 들어와서 보니 정말로
풀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실외로 되어 있는 이 풀은,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온이 30 도가 넘도록 맞춰져 있었다.
긴 차양이 지붕
본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 링신루는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웃었다. 기지개를 켜면서 기꺼운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 니, 고작 일이십 분이었는데도 정말로 단잠을 잔 모양이다
링신루는 그런 유리를 돌아보더니 얼굴 한가득 웃으며 ‘예, 덕 분에요. 나 때문에 어깨 저리지 않아요?’라고
미안한 듯 고개를 기울였고, 실제로 아직 어깨가 좀 저리긴 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가뿐한 얼굴을
한 링신루가 보기 좋았다.
담담하게 웃기만 하는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링신루는,갑 자기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통에 조금씩 어색하게
얼굴에서 웃음 을 지우는 유리에게 픽 웃어 보였다.
‘예? 용왕?’
‘물 냄새가,一…’
링신루는 입을 열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것저것
떠올려도 모두 다 딱 맞는 느낌은 아니었는지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본가에 찾아오면 거의 비슷하게 시간을 보낸다. 링신루가 식사 를 마치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올
때까지, 유리는 별 채에서 홀로 고적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때로는 자정에 가깝도록 길어졌고,
때로는 식사와 차만 마시고 온 듯 하 늘이 새카매지기도 전에 ‘그만 돌아가요.’라며 링신루가 문사이로 고개를
비죽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아홉 시나 열 시, 그 사이쯤 오곤 했다.
어찌 되었든,어떤 방법으로 헤엄을 치건 별채에서 책을 읽으며 링신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풀에서 헤엄을 치며
기다리는 편이 훨씬 즐거운 유리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곤 곧바로 풀에 와서 앉 아 있었던 것이다.
겨울꽃이 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물과 차가운 공기를 넘나들며 수영이라니, 정말로 근사한 사치다.
“평영?”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쉬어가려 는 모양인지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그
모습이 여느 가정집의 아버지 같아,유리는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은 안 될 거라고,링탕윈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친족들 사이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마 친 모양이었다.
주류를 다루는 사람 가운데 링신루를 챙겨볼 만한 여유가 되는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 예전에 링신루가 말했었다.
그러나 유리의 물음에 링탕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곧 “아아, 아니야.”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뜻밖이라는 기색으로 고개를 기웃한다.
“작은 숙부님이 지난 주말 밤에 뇌일혈로 쓰러지셨어. 다행히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데, 한동안은 좀 쉬실
것 같아. 엊그제 뵙고 왔는데 이대로 일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생각중이라고 하시 더군.”
“응, 그래서 일을 배우는 순서를 좀 바꾸게 될 거야. 주류 쪽으 로는 달리 여유가 나는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
아마 다른 쪽부터배우겠지.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술과 함께 흘러 다니게 될 것들.
링탕윈은 아마도 자신의 그 짤막한 말과 태도에서 유리가 그 내용을 짐작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는 유리를 잘 알고 있었고,그럼에도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 큼은 유리를 신뢰하고 있었다.
“링신루 씨가 힘들어지겠군요.”
그들의 관계는 줄곧 지킬 것을 지키는 관계였다. 가족과 더불어 사귈 정도로 허물없이 친하다 하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서로가 정확하게 알고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링탕윈은 별반 불쾌한 빛은 띠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목소리 속에서 명백한 벽을 느끼면서,
유리는 침묵한 다.
링탕윈은 눈가에 웃음까지 띠었다. 의외로 선선히 말을 진행시 키면서, 그는 두 개비째의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너도 눈치는 채고 있겠지만,나는 신루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그 나이대 아이들의 풋풋한 구석이 없거든.
아직은 어린 치 기가 많이 남아 있어 함부로 날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정말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질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아 이를 안 좋아해. 내 힘에 부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신루가 많이 염려되는 모양이지. 형으로서는 참 믿음직스러운 일이야. 우리 막내를 그렇게 챙겨주다니 고맙군.”
링탕윈은 얼굴 가득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경고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시 가까운 친구의 얼굴을 한다.
그래,이런 삶도 좋겠지.
링탕윈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곳을 향해 유리도 고개를 돌 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수영복 위에 두꺼운
패팅을 입은 기괴한 차림새를 한 페이가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다.
늘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이 감도는 그 얼굴에 천진한 걱정 을 담고서,그는 눈을 낌벅낌벅했다.
페이가 은근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린 것은, 물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풀을
뒤뚱뒤뚱 세 번쯤 오갔을 무렵이었다.
금세 요령을 터득한 페이는,저렇게 해 학적인 포즈로 어떻게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느냐고 절망했던게 언제냐
싶게 금방 그 해학적인 자세로 찰방찰방 재미나게 풀 장을 오갔다.
물속을 한 바퀴 유영하고 나오던 유리는 페이를 쳐다보았다. 페 이는 씁쓸하게 난처한 웃음을 웃는다.
탓한다기보다는 안쓰러워하는 기색을 담고서 말하는 페이는, 아 마도 유리와 링탕윈이 나누었던 대화를 제법 들은
모양이었다.
나설 타이밍을 찾지 못해 그늘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페이는 한숨을 쉬며 물속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선뜻 뛰어올라 풀장 벽의 사다리 위에 앉았다.
링탕윈 씨가 언짢아할 만도 하지, 하고 중얼거리며 조용히 한숨 을 쉰다. 그러자 페이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에이, 왜 그래요.” 하고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링신루 씨의 의지로 결정할 일인데 내가 선불리 말을 섞었다는 뜻이야. 그는 일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본 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더욱 싫어할 테니.”
링신루는 딱히 표시를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예비된 일에 대해 그의 어머니가 반대를 하거나 청을 넣거나
해서 참견을 하 는 것도 내키지 않아 했다. 자신의 일에 타인이一그것이 친어머 니라 하더라도一입을 대어
휘두르려고 하는 것은 결코 기꺼워하 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은 유리는 페이에게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조금 전부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
가끔 ‘여차하면 내 밑으로 들어와서 일해.’라고 스치듯 말하곤 했던 링탕윈의 제안이 아예 빈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 일 링탕윈이 정말로 진지하게 계약 의사를 타진했더라면 유리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
“고맙군. 하지만 나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네 아버지의 부하들 중에서도 나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을걸.”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하고 물결에 흔들리며 머리로 슬쩍슬쩍 허리를 들이받는 페이를 보며, 어릴 적에도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이면서 은근히 애교가 있었던 걸 떠올리고 유리는 웃고 만다•
“업무 쪽으로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든든하게 받쳐줄 것 같아요. 자칫해서 내가 좀
실수를 하더라도 이 사람이 있으니 괜찮아,라고 할까. 음……,굳이 말하자면,업 무상의 부인 같은 느낌?”
난데없이 막내삼촌한테 고용됐다면서 떡하니 오다니 이게 뭐래요. 중국에 와서 지내는 것도 승낙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먼저 계약하자고 할 걸. 쳇.’’
농담조로 푸념을 늘어놓던 페이는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혔다. 유리를 거꾸로 올려다보면서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 는 그를,유리도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문득 유리의 손가락을 쥔 페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끝나.”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넉넉한 반바지에 아무렇게나 손 을 찔러 넣은 링신루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풀
앞에 섰다. 풀 에 몸을 담그고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어딘지 차다.
그러나 친근한 웃음이 섞인 그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표정 없이 서늘한 눈길만 흘끗 돌아갔을
뿐이다.
페이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 그제야 유리도 링신루 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
수건으로 몸을 문 지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버지와 나이 많은 형님들에게 둘 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용하긴 하지만
어쩐지 상당히 기분 이 틀어진 기색이다. 보기 드물게,무서울 만큼.
“링
그러나 유리가 미처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말없이 페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인데,다른 데 가서 찾 아봐. 물건은 얼마든지 내주고 대체할 수 있어도,
인재는 대체할 수가 없거든. 그리고 모르나 본데, 나는 뒤늦게 나타나서 남의 옆 에 있는 사람 빼앗아가는 걸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야.”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아, 과연. 웃음이라곤 하나 남지 않고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저 시퍼런 분노는,
그래서인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칼날 같은 눈으로 한참 말없이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그 눈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 을 던질 뿐이었다.
“옷부터 입어요.”
“ 예?”
링가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링신루 였다. 그러나 다시 마주친 순간부터는 지금까지
줄곧 무표정하다. 어디에선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유리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가 샤워장 에 들어가기 전처럼 여전히 링신루와 페이 둘만
남아 있는 풀에 서 페이가 반장난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가족도 아닌데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고, 잘해주라고 하시더군요. ……형님도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서.’’
아쉬워한다는 링신루의 말도, 언짢아하리라는 자신의 생각도 둘 다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일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남이 간섭하는 걸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도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아쉬움은
없이 언짢음을 더 명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경고를 두 번 세 번 하는 사람은 아니니.
링신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희미한 경고를 담아 말한다. 유리는 곧 “미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건 조금 가슴이 아려,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조차 입술 끝에 잠 시 머뭇거리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자동 차의 낮은 엔진소리, 히터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 따위만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다가 문득.
건성인 듯이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지는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차창을 보고 있는 링신루가 보였다. 차창에
거울처럼 반 사되어 비치는 링신루와 그 안에서 눈이 마주친다.
여기까지.
이걸로 됐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이제 곧 정말로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면, 한동안은 감 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유리 자신이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사업을 끌고 나가는 일을 돕는 데에 보다 익숙한,유리 보다 전문적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제임스가 매우 아쉽긴 하지만 아마도 그를 데려오는 것은 무리 일 테니,그에게 사람을 알아봐달라고 할까. ‘당신
같은 사람이 좋겠어요.’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어찐지 칭찬으로는 안 들리는데.’ 라고 탐탁찮게 중얼거릴
테지만.
링신루가 그에게 직접 부탁을 한다면 몰라도, 사람을 고르는 것 은 링신루의 몫이었다. 게다가 굳이 유리가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아도,링가에서 얼마든지 유능한 사람을 구해줄 것이다. 유리가 걱정할 건 없었다.
사람의 관계란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 어떠한 사람과 오래도록 연락을 하며 사귀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 ”
“ 예?”
‘‘ ‘?”
그러나 말하기 무섭게 얼떨떨하게 반문하는 유리에게,링신루는 왜 그러냐는 듯 도리어 어리둥절하게 마주본다.
유리는 자신이 혹시 뭔가 잘못 이해한 걸까 속으로 고개를 기웃하며 링신루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링신루는 담담하게 잘라 말하는 유리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 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저는 앞으로의 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어질 지, 무엇을 하고 싶어질지. 언제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고 싶 은 곳이 생기면 떠나고 싶으니까요.”
링신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겠다고요?”
유리의 말을 가로채듯,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링신루가 도중에 불쑥 말을 꺼내었다. 낮은 목소리가 어딘지
싸늘하다. 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요,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도 링신루 역시 이미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유리는 그가 자신과의 계약을
단기로 끝내 더라도 상관없다고 말속에 자신의 뜻을 담았다.
유리는 그에게 덧붙여 말하려 했지만, 도중에 말을 자르는 링신 루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러면 게이블 씨는 벌써, 이번 계약을 마치면 돌아가겠다고 예정하고 있었던 거군요. 언제부터요?”
이번 계약을 마치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예정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자신보다는 보다 적 합한 사람과 계약하는 편이 링신루에게 있어 나을 테니 자신과 재계약을 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재계약은 할 수 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더 적합한 사람과 계약을 한다 면 굳이
자신과도 계약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낭비가 될 테니까.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유리는 고민에 잠 겨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묵묵히 입을
열지 않는 유리 를 보며,링신루의 얼굴은 조금씩 차갑게 굳어갔다.
링신루는 유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래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있던 그는, 그러나
차가운 얼굴 그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이해가 안 가요.”
그렇게 확인하듯이 덧붙이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이라는 관계에서 유리가 자신보다 약자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는 그 오만한 물음 앞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에 있어서. ——좋았다.
좋아하는 건 자신이다. 떠나는 것도一만일 떠나게 된다면 말이 지만一자신이다. 그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질 것도,
우울해질 것도 자신이다.
“그래요.”
링신루는 듣는 사람을 얼려버릴 것처럼 싸늘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대로 차창 쪽으로 몸을 틀어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찐지 물속에 한참을 잠겨 있어도 여느 때와는 달리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비지 않는
탓이다.
156 Yuuji
억지로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낮에는 그들의 앞에서 웃으 며 밤에는 힘들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여들고 있었다. 염려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던 유리의 걱정이
허무하게 스러질 만큼.
‘뭘 그렇게 봐요. 나 원래 이런 인간인 건 알고 있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설렁설렁 걸어 들어온 철모르고 눈엣가시인 조카를 끓는 물에 머리부터 처박아 혼비백산을 시켜줄
요량이었던지 당장 첫날부터 링신루에게 끔찍한 폭력이 태연하게 자행되는 사업의 뒷면을 들이대어 보여주었던
셋째 숙부의 예상을 멋지 게 배반하고,평연하고 냉정한 눈으로 그 시종을 지켜본 뒤
UNHRDO 에서 행정을 거들었던 일 따위는 없었던 둣,마치 처 음부터 이쪽이 적성이었던 것처럼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게 일에 젖었다. 일의 양이 아무리 링신루라도 때로 벅찰 만큼 많긴 했지 만,적어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내도록, 낮 동안 숙부나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내비치는 웃음 이외에는
유리는 링신루가 웃는 걸 보지 못했다.
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링신루는 분명 유리에게 심사가 틀어져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굳이 손꼽아 볼 것도 없다. 그날, 본가에서
돌아왔던 밤부터다.
물밑에 잠겨 느리게 유영해다니던 유리는 산소가 필요해진 고 래처럼 수면으로 올라왔다. 아래에서 불쑥 솟아올라
긴 숨을 내 쉬자,설마 그 아래에 그토록 오래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풀 옆 가까운 곳의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쿨럭, 하고 물을 뱉을 뻔했다.
확실히 저녁 시간에는 풀에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고 해봐야 서넛 정도였지만 늘 아무도 없는 새벽에
물에 잠기는 데 에 익숙해 있는 유리는 서넛조차 많은 듯 느껴졌다.
그만 돌아갈까.
아무리 유리가 타인에게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덤덤한 편이라 지만, 이 상황은 아무래도 무거웠다. 이미 몇
날이 넘도록 이어지 고 있는, 링신루에게 무시에 가까운 냉대를 받고 있는 상황은.
‘지금 욕실에 있습니다. 볼일이 있으시면 전해드릴까요,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하라고 말씀을 드릴까요.’
그러나 링탕윈은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전화를 한 건 아닌 모 양이었다. 아니, 그럴 건 없어,라고 선선히
말한다.
안부 차 전화를 했다고 하며,링탕윈은 ‘너도 잘 지내고 있겠 지?’라고 뒤늦게 유리의 안부도 같이 묻는다.
링탕윈과는 그 이후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문제가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본가에서 그와 마주치고 돌아왔던 다음날 유리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식으로 사과를 했고, 링탕윈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아니,나는 네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되어서 나름대로 흥미로 웠다니까. 뭐 하지만,그래, 이렇게 다시 전화까지
해서 말할 정 도라니 마음에 걸린 모양인데,잊어버리도록 하지.
그 숙부가 그래도 모르는 곳에서는 한두 마디 칭찬이나마 한다 니, 유리는 안도를 느꼈다. 무작정 터무니없이
사람을 혹사시키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래,너에 대해서도 말하고 가시더군. ‘그놈一신루 인복도 있는지 아랫사람을 잘 뒀더라’고. 너도 덩달아
혹사당하느라 힘들 텐데 잘 버티고 있나 보더군.』
유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링신루는 본인이 직접 하 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밑처리까지 어지간해서는
유리에게 맡기 지 않고 스스로 했다. ‘일을 처음 배울 때에는 글자 기재 하나까 지 다 내 손으로 해가면서 익혀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요.’라고, 의외로 매우 정석적인 말을 하면서.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본 인의 손을 거쳐야 할 중요한 일들만 빠짐없이 짚고
넘어가며 부 수적인 일들은 개략만 파악하는 정도의 요령은 부릴 거라고 생각 했는데, 뜻밖일 정도로 성실했다.
『사람? 무슨 사람?』
162 Yuuj 丄
약은 안 하기로 했나?』
아직은 괜찮다. 링신루가 셋째 숙부의 아래에서 시키는 일만 하 면서 지시를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유리가 감당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가 자주적인 권한을 가지고 본인의 일의 영역을 넓히게
되면, 보다 전문적으로 조언을 하면 서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옆에 필요하게 될 터였다.
‘뭘 잘 부탁해요.’
불쑥 내뱉는 거친 말에 유리는 일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 고 그를 망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 ,
‘어디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추려서 목록을 만들어 오든 말든, 그 목록으로 온 집안을 뒤덮든 말든 나는 내가
직접 고른 사람 아니면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을 거니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요. 시간 낭비예요.’
‘……,예.’
난처한데…….
그럼에도 이렇게 가끔, 주로 집에서 유리와만 함께 있을 때 문 득문득 내보이는 불안정한 면이 마음에 걸렸다.
‘눈. 피곤해요.’
"..........."
".........."
...
유리는 조용히 수건 위로 링신루의 눈이며 관자놀이, 눈 주위를 문질렀고, 링신루는 점차 느려지는 숭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곤란해
유리는 다시 속으로 중얼거리고 만다. 종신계약은 애초에 생각지도 않고, 그 부분에 대해선 협상하거 나 재고할
여지가 전혀 없다.
게다가 사실은 그 자쳬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링신루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링신루는 갑자기 울컥 초조해진 사람처럼 유리의 셔츠를 뜯었다 · 단추를 풀지도 않고 그대로 옷 여밈을 잡아당겨
위에서 몇개나 되는 단추를 뜯어버린 링신루는 드러낸 맨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리의 가슴을 뺨으로 쓸던 링신루는 볼록하게 솟아 있는 유두를 잠시 냄새 맡다가, 그대로
깨문다.
.'
아파서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움츠렸지만 허리를 단단히 부둥 켜안은 팔에는 힘이 더욱 들어가 물러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이 개미있었는지-혹은 심술이 나던 차에 마침 잘 됐다 싶었 는지-잘근잘근, 더 세게 깨문다.
‘물 냄새가 아니었나 봐요. 지금은, 이렇게나 냄새를 맡아도 전혀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아. 오히려 더
무거워진 것 같아요.
그대로 한동안 더 유리의 가슴을 입술로, 코로 마구 문지르며 지분거리던 링신루는 문득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유리는 움찔, 얼결에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뻔한 입을 다물었다 가 그럭저럭 아픔이 가시자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계약을 하자고 하면, 유리는 기꺼이 응할 터였다 · 그를 보좌해내려면 자신의 힘에 부칠
텐데, 그가 알게 모 르게 불편해질 텐데 염려하면서도, 일단은 계약을 할 터였다.
그러다가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 더 이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가 원하는 수준까지 보좌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유리 쪽에서 계약을 거절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링신루가 원하면 유리는 재계약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이고, 링신루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링신루는 침묵했다.
이윽고 품속에 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의 무 게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나직이 억눌린 목소리다.
‘예, 좋아합니다.’
"
줄곧 그랬다. 줄곧 그런 식으로, 링신루는 유리에게 시커먼 분 노가 일렁이는 시선과 얼음처럼 차가운 말마디만
던지고 있었다 ·
유리는 무거운 추를 단 고래처럼 느릿느릿 수먼으로 올라가며 한숨을 쉬었다. 공기방울이 보르르르 피어오른다.
" ,,
“샤오췬. 언제 왔어?”
샤오췬은 보퉁이 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아아, 맛있겠다, 하고 냄새를 깊이 들이쉬는 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웃었다.
“예, 아직 안 먹었어요.”
기에는 늦은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쳐다보던 유리는 “그래? 그럼,”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집에 내려가면
뭔가 먹을거리가 있 을 터였다.
샤오췬은 시계를 보먼서, 엄청 깐깐한 친구라서 늦으면 영화표 도 식사도 제가 사야 한다고요, 라고 종알거렸다.
“늦을까 봐 얼마나 밟았는지 몰라요. 덕분에 이렇게 잠깐 삼촌 이랑 수다 떨 만큼은 여유가 남아서 좋지만,
이러다 나중에 속도위반 딱지 날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유리는 픽 웃으며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몇 층 아래가 집이니 공동샤워장을 이용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물기만
닦고 집으로 돌아가 씻곤 했다.
누가 몸을 좀 만진들 수줍어 움츠러들 유리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예쁘고 천진한 얼굴을 한 외간처녀가 대뜸
몸 좀 만져 봐 도 되냐며 손을 뻗자 당황하고 말았다.
"--어디를.”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어렴풋한 긴장이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샤오췬이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말꼬리를 길게 늘여 장난스럽게 감탄하며 유리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는 샤오췬을 내려다보면서, 유리는
열없이 웃고 말았다.
"
링신루는 정말로 먼저 내려간 건가, 하고 뒤를 돌아보던 는, 멈칫했다.
그는 서늘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얼굴의 물기를 훔쳐낸다. 가볍게 목덜미 따위를 주무르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유 리의 시선을 따라간 샤오췬이 뒤늦게 발견했다.
“아무한테나 몸 좋다고 만져대는 천박한 여자랑 같은 물에 들 어가기 싫어. 물속예서 정신 산란해져서 빠져죽기
싫거든.”
샤오췬이 입을 다물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유리도 저도 모르게 움칫 움직임을 멈춘다. 농담처럼 말하는 모욕을
듣고, 샤오췬은 꼼짝도 않고 잠시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깜박깜박 눈을 깜박이는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분노와 함께 핏 기가 올랐다. 이를 악물고 링신루를 노려보던
그녀는 곧 생긋 웃 었다.
“아이, 막내 삼촌도. 그 정도로 빠져죽을 만큼 수영 솜씨가 형편없으면 수영장에도 안 들어가야지, 걱정돼서
어떻게 들어가요? 빠져죽을까 봐 수영장에서 연습하다가 죽으면 그게 더 비참하잖 아?”
" ,,
이번에도 유리는 움칫하며 샤오췬을 보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링신루가 흘끔 표정 없이 샤오췬을 돌아본다.
그 정도 말에 도발될 만큼 얄팍하지는 않은 링신루였지만, 기분이 언짢은 참이 라 짜증스러워진 듯했다.
또각또각 젖은 바닥의 물을 튀기며 걸어가는 구두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었지만, 그 소리는 유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가 풀 바깥으로 사라지고, 마침 수영을 마치고 나온 마지막 사람이 샤워장으로 들어가는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지금 이 순간은 절대로 돌아보고싶지 않았지만,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고요하게 흐르는 정적이 몹시 마음에 걸려서
" ll
껌벅이는 눈은, 낮잠을 자다가 막 깨어나 오늘이 며칠이고 여기 가 어딘지 분간을 못하는 어린애 같았다. 뭔지
모를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링신루는 그때, 귀에 들어온 그녀의 말들보다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쏠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꼼짝도 안 하더니 삐걱삐걱 어색 하게 몸을 돌려 자신의 눈치를 보듯이 흘끔 쳐다보는
유리의 기색에.
아차.
유리는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어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아무렇지 않게 링신루를 돌아보며 ‘그만 돌아갈까요.’
라고 말하고 먼저 돌 아서 나가기라도 했어야 했다.
적어도 이렇게, 발등에 못이라도 박은 것처럼 얼어붙어선 움칫 움칫 돌아서 그의 눈치를 살피듯 흘끔거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되 었다.
봐. 역시. 샤오췬이 나갈 때까지만 해도 ‘쟤가 무슨 소리야?’라는 얼굴로 눈살만 찌푸리던 저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 보는 사이에 천천히 낯빛을 바꾸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 그만 돌아갈까요.”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하는 걸 저 남자가 봤을까 못 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리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여 느 때의 포커페이스를 얼굴 전면에 깔고서 “예?”하고 대답한다.
링신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를 보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평연한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면서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 다. 그 의자에는 조금 전 샤오췬이 가지고 왔던 상자가 놓여 있 었다.
" 이건 들고 가야죠.”
"
유리는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가급적이면 링신루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상자만 똑바로 쳐다보며 다가간다.
커다랗고 묵직해 보이는 상자였지만 보기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아니 무거웠다고 해도 무게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다. 상자에서 두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링신루가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 ,,
링신루가 여상하게 말했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저 웃음만 없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링신루는 심상하게 유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내디딘다.
쳬육시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집으로 들 어갈 때까지, 향긋한 송이 향기와 침묵만이 그들과
함께했다.
그동안 줄곧 생각에 잠긴 듯 담담히 허공의 한곳을 쳐다보고 있던 링신루는, 말없이 주방으로 가 보퉁이를 푸는
유리의 뒤쪽 으로 벽에 기대어 서서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친구였어요.”
" ,,
보퉁이 매듭을 푸는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어찌나 단단히 졸라 묶어놨는지 손톱이 아프도록 매듭을 잡아당겨도
느슨해지지조차 않았다.
유리는 뒤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링신루의 말에서 주의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매듭이랑 씨름만 했다.
" 잘 안 풀려요?”
“내가 그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 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나서 대뜸 ‘그 물귀신 같은
놈, 물속에 처 박아서 영영 못 나오게 해버릴 테다.’라고 이를 갈며 말해버린 탓
“그래서 내가 반성하고 생각을 고쳐먹은 척 방글거리면서 ‘날 구해주신 고마운 분한테 꼭 인사를 하고 싶은데
어느 분이세요/ 라고 물어봐도, 안 속더라고요”
그러는 사이에 보퉁이의 매듭이 풀리고 상자가 드러났다. 잘 깎 아 다듬은 나무상자는, 뚜껑을 열기도 전부터
송이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송이 냄새 따위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 았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유리는 흘끔 눈동자만 들었다. 링신루가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 고 있었다. 여전히 입매만 곱게 웃으면서.
“뭘요. 나도 알아요.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야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이겠어요? 작은 어린애라 해도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온 힘을 다해 달라붙으며 힘 좋은
장정이라도 위험해질 텐데.”
링신루는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기울인 채 빙글빙글 웃으면서 유리를 보았다. 먼 과거를 떠올리는 듯 눈매가
가느스름하다.
“예? 뭐라고요?”
링신루는 눈쩝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를 구부려 유리의 입술 근처에 귀를 댄다. 유리는 자신의
눈앞에 비스듬하 게 기울어져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꽃, 하고 중얼거린 링신루는 눈을 깜박이며 유리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헛웃음을
웃을 것 같은 얼굴로 유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은 하, 하고 헛웃음을 웃고 만다.
" 누구예요?”
링신루는 물끄러미 유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마주보는 유리에게, 어느 순간
피식 웃는다.
“대놓고 말하네.”
과거를 천천히 머릿속에서 짚으며 느리게 말하는 유리를 보며 링신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쯤의
어 이없다는 표정과, 아주 약간쯤의 쓴웃음,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어떠 한 감정, 그런 것들이 그의
얼굴 위에 고여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표정들은 사라졌다.
“그럼 그 뒤엔 왜 연락 안 했어요.”
“예?”
“그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냥 가버리려고 하잖아요, 게이블 씨는.”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나온다.
유리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도록 괴로운 사람을 끌어내어 놓고서 이제 그럭저럭 마음이 좀 가라앉아서 사람이 좀 살
만하다 싶으 니까, 당장 계약 안 하고 가버리겠다는 말을 꺼내네요. ,,
링신루는 유리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원망마저 드러난 그 눈을 보며, 유리는 순간 말이 막히고 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링신루의 귀에는 유리 의 말이 정말로 저렇게 들렸던 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재계약, 할까요.”
비록 유리는 링신루의 입장에서는 자신과의 계약을 이번으로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계약을 원치 않는 건 아니었다.
링신루는 담담하게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는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까만 눈이 한동안 반들거리며
그를 응시 하다가 간결하게 결론을 낸다.“종신계약으로 하죠.”
" "
"
“그러면- -."
“그런데,”
일순 의례적인 웃음기마저 사라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유리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링신루를 가만히 마주보았다.
“게이블 씨, 당신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요?” 링신루가 한 발짝 유리에게 다가왔다. 그만큼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며, 유리는 지금 저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게 어떤 얼굴일 까를 생각한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혼잣말이라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유리를 바라보고 있 는 링신루의 귀에는 틀림없이 그 말이 들렸을 터였다. 링신루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서도 당신은 언제든 갈 수 있더라고요.”
“나 좋아해요? 정말로?”
“예.”
링신루는 그대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그는 유리의 목덜미에 코를 대었다. 아주 가까이 닿을락 말락, 그러나
닿지는 않을 정도 로.
천천히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정말로 상냥하게 말한다.
“게이블 씨, 나는 당신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같이 있으면서 당신처럼 편안한 사람은 없었고요. 게다가,
그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나는 당신에게 아주 유리한 제안을 할게요. ,,
링신루가 한 걸음 물러섰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다정하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이걸 얹어주겠다고.
유리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침착하게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링신루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유리가
따라주면 그 반대급부 로 유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 처음에 계약할 때에는 마음대로 바라봐도 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통째로 얹어준다니. 정말로
탐나는 제안 군요/'
“어떻게 줄 겁니까?”
“단순히 넋 놓고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 고 있는 거예요.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이보다
더 나은 제안은 없을 거라며, 링신루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몹시 예뻐 유리는 다시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절 좋아하십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대답을 모르는 것처럼 유리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좋아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얼굴을 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굉장히 손해 보는 거래를
하는 거 예요.”
“저는 누군가와 평생을 보낸다면, 서로를 위하는 삶을 보내고 싶어요. 링신루 씨가 싱거운 풀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밋밋하고 조용하고 오래가는, 그런 게 좋습니다. 상대예게 베푼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일방적인
욕심을 채우지도 않고, 서로를 망가뜨리지 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혹 은 당장 눈앞에 떠오른 욕심 때문에 오래도록
후회할지도 모를 제안을 하는,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망가뜨리고, 이윽고는 그
자신마저 망가뜨릴 터 였다.
“날 좋아한다면서요.”
* * *
『거기 내 책상 제일 위 서랍에 빨간 장부 있으니까 그것 좀 가지고 와. 서랍은 바이샹한테 열어달라고 하고.』
“아닙니다. 알아들었습니다.”
- -저놈 왜 저래.
유리가 막 전화를 품에 집어넣는데, 문이 달칵 열리며 바깥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리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그녀에게도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유리의 대답을 확인하고는 조르륵 걸어와 허리에 찬 열쇠꾸러미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든다. 어머,
이게 아닌가, 그럼 이건가, 수많은 열쇠들 사이에서 몇 가지라 헛갈리는 듯 당혹스럽게 중얼거리며 이 열쇠 저
열쇠를 맞추어보는 그녀를 기다리며, 유리는 주머니에 넣었던 전화를 도로 꺼내어 시각을 확인했 다.
그들이 지하로 내려간 지 고작해야 십여 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유리가 장부를 들고 내려가면
한창 진행되 고 있는 험한 꼴을 보겠다.
그들이 유리를 부른 지하는 늘 퀴퀴한 곰팡내와 비린내로 절어서 오래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셋째 숙부는 눈쩔미가 퍽 좋은 사람이었다. 눈쩔미가 좋다고 할까, 사람의 눈치를 읽는 게 빠르다. 아마도 늘
수백 번, 수백 방 향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을 오래도록 하는 동안에 그런 습관이 붙은 듯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유리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한 숙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숙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쫓아 가본다. 거기에는 링신루가 앉아 있었다.
들려주기 꺼려하는 내용들도 종종 있는 탓에 숙부는 늘 유리에게 링신루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유리 는 보통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가 그를 도와줄 일이 있을 때 에만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그때도, 유리는 그들이 수다처럼 대수롭잖게 떠들며 나누는 이야기는 들리지만 소리를 조금만 낮추어 속삭이면
들리지 않을 만 한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저놈 왜 저래’
그렇게 말하곤 눈썹을 찡그리고 잠시 그들을 더 바라보던 숙부는, 유리를 돌아보며 그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글쎄요. ,
유리는 숙부의 시선을 쫓아가 링신루를 보고는 잘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기웃했다. 숙부는 다시 미심쩍게
링신루에게 시선을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리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
였다. 다른 때와 무엇이 다른지 좀쳬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왜 그런지도.
그러나 분명히 어딘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거대한 지진 을 앞두고 튼튼한 성벽에서 모래 한두 알이
아무도 모르게 토독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치-그 때와 같이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격렬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예전, 세링게에서 베를린으로 옮겼던 그 직후처럼.
그러나 그런 링신루의 미묘한 태도를 알아차린 것은 유리, 그리고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별달리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그 의 숙부뿐인 듯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 하나, 링신루의 대각선 쪽 자리에 앉 은 까만 점퍼의 남자가 불쑥 말했다. 링신루는
그에게 시선을 주 더니 ‘그래요?’하고 눈웃음을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더벅머리 남자도 흥미진진하게 고개를 주욱 빼고 링신루를 쳐다본다. 링신루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야야, 오히려 사람이 너무 해사하니 말쑥하게 생기면 여자가 안 따라. 도련님 저 예쁘게 생긴 거 봐라, 어디
여자들이 부끄러 워서 옆에 서겠냐!’더벅머리가 괜히 핀잔을 주며 까만 점퍼에게 헛주먹질을 한다 ·
야,그래도 얼굴로 여자 후리는 거 아냐, 도련님이 아래 솜씨가 훌륭하실지 또 어떻게 알아, 하고 자기네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린다.
그들이 무슨 얘 기를 하든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건성으로, 그러나 적당히 맞장구 를 칠 만큼의 웃음을 지으면서.
셋째 숙부의 아래에서 일하는 저들은 소위 ‘험한 일’을 할 때에 주로 불려오곤 했다. 거래업쳬들을 돌아다니며
일반적인 일도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종종 얼굴을 마주치긴 하지만,
집안이 좋아서 도련님이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그래봐야 곱게 자라 철없고 멋모르는 애송이라고 여기는 듯, 간혹
그렇게 듣기 에 따라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다.
그러나 며칠 더 흐르먼서 링신루가 처음이라는 것치고는 일을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면서 상황에 따라 강단
있는 기색도 내비쳐, 지금은 많이 수그러든 축이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링신루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는지, 링신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순하게 잘해주면 실속이 없는 거ㅣ, 단물은 다 빼먹고 결국은 딴 놈한테 떠나더라고요’
숙부는 거의 대부분의 일에 링신루를 대동하고 다녔고, 그런 링 신루를 유리가 따라 다녔다. 그리고 숙부는
그것을 묵인하고 있 었다.
하지만 가끔 불법적인 일을 맞닥뜨려야 할 때--그중에서도 특히나 외부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일들을 벌일
때에는 유리 만 홀로 사무실에 남겨두고 갈 때도 있었다.
어설픈 협박이나 본보기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잡는’ 경우도 있다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들려 오기도 했다.
" "
어떠한 일이든 링신루 본인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역시 딱히 유쾌하지는
않다· 아무려먼 어떤가. 위를 봐도 끝이 없고 아래를 봐도 끝이
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
" "
유리는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었다. 일단 지금은 숙부의 비서 아가씨가 책상 서랍에서 꺼내어
준 장부를 지하로 가져가야 했다.
지하 1 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유리가 윈안을 찾자 철문을 열어주며 들어가 보라고 했다.
유리가 들고 있는 장
부를 흘끔 보는 모습이, 이미 안에서 연락이 있었던 눈치였다. 남자가 가리킨 방향대로, 유리는 널찍한 방
여러 개가 이어져 있는 지하층의 좁다란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눈으로 보이는 광경보다도 더욱 선뜩한 것은, 지하층의 좁은 길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 였다.
사람 몇몇의 기척이 두서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 방에서는 절그렁거리며 쇠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 지익하고
테이프를 뜯는 소리들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각각을 따로 들으면 별다를 것 없 는 여상한 그 소리들은, 저 안에 어떠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예상하고
있는 까닭인지 섬뜩하게 귀에 거슬렸다.
나가서 기다리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문지기는 유리에게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리는
시리얼바를 버석버석 씹으먼서 구멍 안을 들여다 본 문지기는 멍청한 녀석, 하고 혀를 찼다. 하필이먼 빼돌려
판 약이 공안의 수색에 걸리는 바람에 대대적으로 단속이 강화되어, 한동안 장사
문지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유리가 문지기 역할을 대신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내 이쪽에서는 신경을 끄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링신루는 무심결인 것처럼 가끔 유리를 물끄러미 쳐다 볼 때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유리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계약을 할까 어떻게 할까, 그런 섕각이라도 하는 걸까. 혹은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정확하게 말하면 카일이 쌓아놓은 일거리를 분배해둬야지, 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제임스의 말을 들으며 유리는
흘끔 링신루를 보았다.
가끔 잔일을 부탁할 수도 없잖아, 라고 투덜거린 제임스는 간단한 안부 정도만 묻고 곧 전화를 끊었다. 유리도
수화기를 내려놓 고 다시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링신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도 유리의 말만을 듣고도 제임스가 전화한 이유는 짐작했을 거다.
재계약을 할지 아닐지, 유리는 그 결정권을 링신루에게 주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유리도 향후의
예정을 세울 수 없다. 하지만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만기일이 되는 그 순간까지 미루며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해도, 그가 만족할 만큼 생각해 본 다음에 대답을 해주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방 안에서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 문지기도 말했던 대로, 아마도 오늘의 ‘일’은 그리
가볍게 마무리되진 않을 것 같았다.
까만 점퍼가 웃으면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동시에 뚜둑, 귀에 거슬리는 소리, 테이프로 막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 지르는 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나뒹구는
“너는 돈 몇 푼 벌었는데, 이쪽은 손해가 얼만지 알아? 네 몸뚱이 조각내어서 팔아도 그 돈 1/100 도 못 건져.
이걸 어떻게 할 거 야? 엉?”
링신루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 뜨고 지켜보기 거북해
할 모습에도 그 는 별다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도 이러다 익숙해지시겠지 · ”하고 대꾸하는 까만 점퍼도 더벅머리 와 비슷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링신루는 그때까지 시선만 그들에게 주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했다 ·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죽은 물고기 같던 눈동자에 어렴풋이 빛이 서렸다.
“아 , 요즘 별로 쉬지를 못해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그렇게 험하지도 않고.’ , 링신루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계속해요, 라고 손짓을 하는 링신루를 보며, 두 남자가 흘끔 시선을 마주쳤다.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사람을 해치는 걸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하고 창백하게 서서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겁쟁이 애송이가 ‘이 정도쯤’이라고 태연한 듯이 중얼거리며 그들의 머리 위에서 명령하듯 말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더벅머리가 슬며시 셋째 숙부를 보았다. 팔짱을 끼고 앉아 구경만 하고 있던 숙부는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뭘 하든 방해하거나 가로막지 않고 그대로 구경만 할 요량인 것 같다. 그것은 무언의
허락이었다.
링신루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 이미 그들에게 한바탕 린치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을
흘리고 있는
히죽거리면서 쳐다보고 있던 그에 이어, 그 옆에서 비슷한 얼굴로 쳐다보는 까만 점퍼를 본다.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숙부를.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볼까요.” 링신루는 다시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걸어가 선다. 허리를 구부려 웅크리고 앉은 링신루는,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떠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 찬찬히
"
비명도 없었다.
깨어진 머리에서 펑펑 쏟아져 나온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물들 였다. 그 위에 널브러진 남자는 꿈틀, 꿈틀,
손가락만 조금씩 경 련하듯 움직일 뿐이었다.
“움직이지는 못 하겠지만 아직 의식은 있지? 그래, 그 상태로 있어. 팔 같은 걸 묶어봐야 제대로 손보기
힘들기만 하거든.”
집은 남자는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아직 의식이 남아 경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무릎 위를,
거침없는 발길 질이 내리찍는다.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륵거리는 신음과 함 께 터져 나왔다.
그의 해사하고 고운 얼굴에 언짢은 빛이 떠올랐다. 미간에 주름이 지며 입매가 일그러진다. 동시에 남자의
나머지 무릎도 부서 졌다.
이제는 꼼짝할 수도 없는 무릎을 발꿈치로 밟은 채 링신루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렇게 묵묵히
서 있던 그는 흔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게 나았던 것 같아.” 뒤이어 터져 나오는 건 몸통을 짓밟는 소리. 고기를
짓이기는 소리. 뼈가 어긋나는 소리.
“지금은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냥 그 자체가 아주 끔찍하게- -."
그것은 지옥도였다.
과거의 경험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옥도 따위는 숱하게 봐 익숙해 있던 유리였는데도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럼예도 여전히 무표정하게 남자를 짓이기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던 링신루 외에 처음으로 움직인 것은,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 던 셋째 숙부였다.
“죽일 셈이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는 링신루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링신루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천히
숙부를 돌아본다.
링신루는 난처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던 숙부는 혀를 찼다.
“이놈이 , 손을 쓸 때에는 머리를 식히고 있어야 돼. 차가운 머리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링신루는 비스듬히 웃으며 숙부를 보았다. 곤란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웃은 링신루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핏덩이를 냉랭하게 내려다본다.
숙부는 눈썹을 찌푸린 채 그런 링신루를 쳐다보다가 그 뒤에서 희미하게 질려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링신루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곤, 차마 건 드리지도 못하고 문 쪽으로 이끄는 그들 가운데에서 걸음을
돌렸다.
“가기 전에 사무실에 들러서 좀 씻고 옷이나 갈아입고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피범벅으로 나가면 누구든
천 리 밖으로 달아나겠다.“
두 사람이 열어주는 문 바깥으로 발을 내딛던 링신루는 등 뒤에서 숙부가 냉랭하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농담처럼 중얼거리던 링신루의 말은 도중에 멎어버렸다. 문밖에 서 있던 유리와 정면으로 맞닥뜨려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 ,,
" l,
말만 멈춘 게 아니었다‘ 움직임도 멈추었다. 내디딘 발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표정마저 굳어버린 링신루가
유리를 바라본다.
으로 인사를 한 뒤에야 다시 링신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링신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망연히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를 찔린 것처럼 넋 놓은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그만 갈까요.”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리는 링신루가 숙부에게 자신의 이성은 아주 멀쩡하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는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유리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곧 다른 곳으로 향해,
그 눈 속에서 일렁거리는 빛을 감추었다.
“차 끓여놨습니다.”
유리가 말하자 문 앞에서 말없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던 링신루가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묵묵히 식탁으로 다가와
유리의 건너편 자리, 컵이 놓여 있던 곳에 앉았다. 그리고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그가 마시기에 딱 좋을
정도로 식었을 차를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한다.
유리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씩 목을 적시며 천천히 마셨는데도 유리가 자신의 잔을 비울
때까지 링신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다 식었을 테니 다시 끓여드리겠습니다.”
“화났어요?“
링신루가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눈동자만큼 떨리는 것 같다. 실제로는 떨리지 않았는데도 몹시
불안정한 듯이 들렸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화났냐고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유리의 얼굴에는 조금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유리의
얼굴을 낱낱이 살피듯 쳐다보던 링신루는 얼핏 눈살을 찌푸린다.
링신루가 다시 묻는다. 그가 꺼내는 물음마다 그답치 않아 유리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놀라긴 했습니다.”
눈을 아까 그곳에서 링신루와 마주쳤을 때 유리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정한 동요를 보았듯, 링신루도
유리에게서 충격에 가까운 놀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화나지 않았다는 말에도, 두렵지 않다는 말에도 순순히 납득을 못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놀랐다는 말에 그 미심쩍은 빛을 아주 약간 풀었다.
,,
아까 유리와 마주쳤을 때에도, 링신루는 감정적으로 출렁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이성으로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 이었다.
그의 불안정은 형태를 바꾸어, 예전과는 다르게 왜곡된 모양새로 드러나고 있었다.
" ll
곤란한데.
비록 예전처럼 스스로 어쩔 줄을 모르며 다루지를 못해 자칫하면 그 자신까지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르도록
불안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지금도 그는 어딘지 위태로워보였다. 지금, 유리의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유리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 어떠한 면으로는 마음이 편한 걸 느꼈다.
죽은 듯이 짓누르는 침묵이, 어쩌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괴로웠는지도 모르겠다고, 유리는
그제야 인식했다·
그래서,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긴 하지만, 유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었다고 해봐야 무심한 표정
안쪽으로 숨겨져
눈가에 아주 약간 번졌을 뿐이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리를 보고 있던 링신루는 그 웃음을 알아본
듯했다. 기묘한 듯 얼핏 눈썹을 든다.
온몸이 흥건하게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억지로 참았던 때가. 그리고 유리는
그때마다 그의 옆을 지키면서, 숨도 쉬지 못하도록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덕이는 그를 보며 생각했었다.
“비명이 나오는 걸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릴까 새 파랗게 질린 얼굴로도 억지로 눌러 참는 링신루 씨를 보면서, 나 는 생각했었어요.”
늘 밤마다 물어뜯어서 터지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밤이와 또 터지고, 언제까지고 피딱지가 사라지지
않는 링신루의 입술을 보면서, 다른 곳으로 조금이라도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손등을 물어뜯어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유리는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어떻게든 넘기기 위해 자해를 해서 링신루 씨 스스로의 몸을 해치느니, 차라리 남을 다치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리가 말하자 링신루는 이상한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그것은 퍽 기괴한 얼굴이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링신루 씨가 불안스러워 보이는 와중에도 당신 자신을 해치지는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정말 며칠 남지 않았군요.”
저도 모르거ㅣ 불쑥 중얼거렸다.
아마도 유리가 떠올린 생각을 링신루도 거의 동시에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의 입매가 설핏 굳어지는 듯했다.
유리는 진심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만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만기를 넘기면, …
그때.
그러나 눈살을 찌푸린 그는, 빈 잔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유리를 보았다.
아냐 . 갈증이 그치지 않아요. 목이 말라. 물. ,, 링신루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초조함이 배었다. 애타는
갈증을 호소하며 그는 목을 움켜쥔다.
“괜찮아요?”
뻗어온 손이 유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느리게, 그러나 놓치지 않을 듯 끌어당기는 손을 따라 그에게로 끌려간
유리의 옷깃 사이로 링신루는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느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그는, 이윽고 바람결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순간.
차라리 입술에 닿는 촉촉한 감각을 몰랐더라면 그대로 목이 말라 죽어버렸더라도 아쉽게 손 놓았을 것을, 이렇게
입술을 축인 다음에는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듯. 마치 광인 같았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몇 가지의 찻잔, 유리컵 따위가 쓸려 내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 유리는 등을 부딪혔다.
“나는 내가, 아주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예전처럼 불안정하거나 감정에 치달아 나 스스로를
주쳬할 수 없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섕각했어요.”
-그래, 그 베를린의 호텔에서, 자기 자신도 억제하지 못하는 미치광이 같았던 나를 보살피는 동안 게이블 씨가
겪었을 궂은일들도 다시는 없을 거라 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목에서 가슴으로, 배로, 살갗 위 어디든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입술의 느낌이
간지럽고 섬뜩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연체동물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유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를 붙 잡아 누르는 무게감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이제는 말이죠, 게이블 씨, 리그로우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나는 냉정할 수 있어요. 놈이 살아서 이 세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하고 머리털 한 올 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냉졍을 유지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놈과 함께 있다면 난 얼마든지 냉정할 수 있다고요. 놈이라도 내
이성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데.“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이 갑자기 유리의 허리를 그대로 틀어쥐었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 유리는 숨이 막혔다.
“당신이 문제야. 당신이 그렇게 안 돼. 당신만 보면--머릿속이 하얘져.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언제부터인가 유리의 허벅지 안쪽으로 링신루의 사타구니가 닿고 있었다. 다리 사이예 허리를 깊숙이 들이밀어
둘의 사타구니가 맞닿는다.
그리고 유리는 그가 뜯어발길 듯이 옷가지를 벗겨내어 속옷감 한 장만 남은 너머로, 단단하게 발기해 솟아오른
그 의 성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그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는 듯--자기 자신을 제어할수 없는 듯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유리의 목덜미를
깨물어대고 있었다.
한 손으로 조급하게 자신의 옷가지를 풀어헤친 링신루가 성기를 꺼낸다. 속옷 밖으로 툭 머리를 내밀며 뻣뻣하게
일어선 성기가 유리의 성기에 맞닿았다.
더 이상은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니 억누를 생각도 없이, 그는 유리의 몸을 손닿는 대로, 입 닿는 대로
먹어치운다.
동시에. 링신루가 유리의 무릎을 밀어올렸다. 가슴에 닿도록 무릎을 바싹 밀어붙인 그는, 유리의 발목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는다.
불편한 자세로 움직일 수가 없어친 유리는 힘든 숨을 내쉬며 “저는, 안 그랬,”하고 중얼거렸지만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만다.
풀죽어 늘어져 있는 유리의 성기 위에서 잠시 머무르는가 싶던 손은,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잘 해줄게요.”
“원하는 대로, 뭐든 해줄게요. 나를 줄 테니까, 마음껏 욕심 부려도 돼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해줄게요.”
아랫도리를 어루만지는 손길도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다.
링신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린애를 꾀듯 상냥하게. 바싹 달아올라서도 아래를 느리게 쓰다듬는 손길
때문에 오히 려 그 이상 만족되지 않는 애타는 초조감 속에서, 유리는 흐려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해준다고요 ?"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면서, 유리는 머릿속에 멍하게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그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자신의 성향을 심각하게 의심할 정도로, 유리는 링신루와 몸을 섞는 행위가 좋았다. 결국에는 힘들어서 녹초가
되지만 언제든 그가 원한다면 유리가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어, 사타구니를 쓰다듬으며 유리의 성기를 문지르던 손 아래로, 링신루가 허리를 깊이 밀어 넣었다.
“아, --!!"
링신루의 입에서 달아나 몇 번이나 커다랗게 숨을 들 이쉬고 내쉬었지만, 아래를 엄청나게 압박하며 밀어
올리는 감각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쉰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유리를 링신루가 집요하게 쫓아왔다.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마시는 유리의 입술에, 뺨에,
집요한 입이 달라 붙는다.
링신루도 흥분에 들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해줘. 말이야 어떤 식으로 하든 상관없어. 나는 내가 당신에게 뭐든 해주고 싶지만 당신이
받는 게 싫다면,
유리의 뺨을 깨물며 거칠게 속삭인 그는 허리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까지 벌어져 더 이상은 안
되도록 깊이 들어온 성기를, 그보다 더, 더, 더 밀어 넣고 싶은 듯 거침없이 허리를 찔러 올린다.
았다. 절로 부들부들 떨리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어떻게 가누면 좋을지 몰라,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유리를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허리를 추어올리던 움직임마저 잠시 멈춘다.
몸속 구석구석까지 찢어발길 듯 범처럼 사납게 포효하며, 링신루는 유리를 몰아붙였다. 머릿속에 일순이나마
떠오른 생각에 시
살갗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심장이 뛰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떠올리다가
유리는 깨닫는다· 뛰고 있는 건 자신의 심장이었다. 두 심장이 가까이 닿아 서로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래, 쟁길지도 모르지. 누구든 몸을 섞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좋아할 사람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혀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칠 듯한 감각을 아래에 퍼붓는 격렬한
열기 때문에 말을 뱉을 여지도 없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리를 움켜쥔 손의 거센 악력도, 입술을 깨무는 단단한 이도, 흔들릴
때마다 밀려나는 유 리의 허리를 잡아당겨 더 바싹 몰아붙이는 몸짓도, 그저 하나의 커다란 감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유리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뺨도 젖은 것 같다. 눈도. 어쩌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고 있는지도 몰랐다.
유리는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간신히 되돌리려고 몇 번 이고 눈을 부릅뜨면서 링신루를 보았다.
그런데도 왜 엉엉 우는 어린애처럼 보이는지 몰라, 유리는 허덕이는 머리로도 열심히 링신루를 쳐다보려고 애쓰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링신루 역시 유리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잡아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래를 빠듯하게 가득 채우고 움직이는 무거운 부피감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뱃속을 더욱 빼곡하게 채우며
벌려드는 느낌에 숨이 막힌다.
"-·一, 을, 것 같, --."
띄엄띄엄 유리의 입에서 말마디가 흘러나왔다. 바람소리처럼 흘러나오다가 흩어져 버리는 소리를, 그러나
링신루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아요? --난 이제야 살 것 같아.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음식도 거의 들어가지 않고
머릿속도 엉망이었어.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요? 벌써 그게 얼마나 됐는지 알아? 언제부턴지, 나도 제대로 모르겠어. 요 얼마간은
정말로 이러다가 죽
" "
. 그는 유리가 눈을 뜨는 어느 순간이건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탐욕스럽게.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시선처럼 유리의 몸도 느리게, 빠르게, 격렬하게 흔들리곤 했다.
-- 면 안 돼요?
문득 귓가에 떠오르는 낮은 목소리. 울 것처럼 흔들리는. 몇 번이나 속삭인 것 같았다. 유리의 의식이 저
너머로 넘어가 있는 동안에도,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그는 수없이 속삭인 것 같았다.
기도하듯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 돼요? 풀죽은 어린애처럼 힘없는 목소리였다. " "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도록 늘어 진다. 지난밤의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자신도 어지간 히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던 모양이었다.
" !)
유리의 시선이 그 비닐에 고정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비닐을 손가락으로 구기던 링신루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우표만 한 크기의 그 비닐을 지그시 쳐다보던 링신루는 느리게 그것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따라 안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도 사각사각 흔들린다.
유리는 말없이 링신루를 바라본다. 그는 유리에게 무표정한 시선을 주더니 “어제 그놈이 빼돌렸던 거라면서
윈안이 건네줬던 거예요.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고 있었어요.”라고 중얼거린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가루가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손 안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이걸로 망가진 사람을 수도 없이 봤어요. 가끔 그렇게 망가졌다가 재활을 받는다는 사람도 백 명 중 한둘쯤
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정말로 멀쩡해지는 건 그 가운데 또 백 중 한둘 . 끊기가 그렇게 힘든 모양이더라고요.
“게이블 씨라면 어때요. 도저히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약에 절어버린다면, 본인의 의지로 어떻게든
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목숨을 끊을 수는 있을 겁니다.”
조용하고 여상한 대답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순간, 링신루의 얼굴에서 씻은 듯 웃음이 사라졌다.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치럼 얼어붙은 그의 표정에서 얼핏 핏기가 가신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리는 천장을 보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그렇게 침묵하던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 I. 하지만 짧은 순간순간, 이성이 돌아오는 때가 있어요 ·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은 되는 시간이지
요.”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눈이 유리를 쳐다본다.
....
링신루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빛을 앓은 얼굴로 망연히 유리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꿈틀, 손가락
끝이 경련하듯 움직인 듯했다. 그러나 그뿐, 그는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유 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기 전에 어머니는 임신을 한 거죠· 그게 나였고, 약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인 족쇄가 생긴 탓에 어머니는 약에 절여지지 않고 그대로 들어앉게 되었는 데
수국처럼 처연하게 아름다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화사하게 웃지를 않았다. 혹여 유리가 모르는 곳에서는
그렇듯 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두 분은· 어머니도 나름대로는 아버지한테 잘 하시고. 그런데도, 결국 온전하게 서로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아마 두 분 중 누구든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는 줄곧 그렇겠죠.”
사람을 망가뜨려서 껍데기만 남기더라도 곁에 묶어두겠다는 집착은 결국 그렇게 끝나나 봐요, 하고 링신루는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입가에 떠올린 그는
그것은 링신루의 탓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태의의 탓도, 누구의 탓이랄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의 마음이
리그로우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의 낯빛이 변했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차갑게 굳은 얼굴이,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유리를 쳐다본다 ·
“그게 누군데요?”
- -다 알잖아요.
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건 어쩌면 링신루 본인조차 모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엇을 바라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속에서 링신루와 마주하고 있는데도, 어딘지 의아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그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당혹스러우면 서도 반갑고 기쁜데도 그랬다.
유리는 몇 번이나 했었던 말을 조용히 입에 담았다. 그저 되풀이만 하는 게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찬 찬히 생각해보고 말을 했다.
그럼에도 링신루는 불안해했다. 그의 불안정한 마음은 유리가 그렇게 말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당신이 바라는 한 저는 계속 이곳에 있을 테고, 그래요, 그동안은 제가 당신을 바라듯이 당신이 저를 바라면서
지낼 수도 있 겠지요. 그런데, 뭘 더 바라나요?”
유리는 무겁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지만 겨우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바르게 앉아 그를 마주본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굳이 서명하지 않아도 재계약을 거듭한다면 현실적으로 별다를 바가 없는
종잇조각 하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다.
유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새카만 시선만 주는 링신루는, 이미 자신이 바라는 것이 그 종이 하나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날 좀 더 원해줘요.”
링신루가 불쑥 속삭인다.
하지만.
지금 링신루는, 유리가 그를 좋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도 담담하게 흐르는 물처럼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충분히 만족될 수 있을
만큼 가시적이고 격렬하게. 링신루가 유리를 바라는 방식으로 그래서 유리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성격의 문제였다. 처음부터 타고난 성향의 문제이며, 자신의 손을 벗어난 일이다. 풀을 뜯는 짐승이
육식맹수가 될 수 없 는 것과 같아, 노력과는 동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유리는 자신의 몫의 서명란만이 비어 있는 계약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링신루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서린 긴장, 불안, 그런 것들 때문에 굳어버린 얼굴은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노력해줘요.”
링신루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도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다.
다시 한동안 난감하게 계약서를 내려다보던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링신루와
눈이 마주친다.
말없이 계약서만 쳐다보며 곤란한 기색을 띠고 있던 유리에게, 링신루가 불쑥 말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불안에 젖어 있었다.
풀죽어 속삭인 링신루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유리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 손은, 그러나 눈치를 보는 것처럼 그
근처에서 멈칫거린다.
손목을 잡아도 유리는 뿌리치지 않을 텐데도, 그걸 알면서 도 두려운 것처럼 잠시 허공을 맴돌던 손은 결국 그
앞의 이불을 쥐고 말았다. 억울한 듯, 그러나 대신할 거라곤 없어 그거라도 꼭 움켜쥔다는 듯.
그가 애원처럼 속삭였다.
“당신이 날 구했잖아요.”
이번에 구하지 않으면 나는 예전과는 비할 수도 없이 상해버리고 말 테니, 링신루는 협박처럼 말하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사실은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손목을 그렇게 잡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뿌리칠까, 혹시라도 그가 내키지
않아 할까 차마 무서워서 건드리지도 못하며, 주먹의 관절이 하얗게 솟아오르도록 이불만 세게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노트북을 무릎에 얹고 있던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매시 정각마다 울리는 시계를 쳐다보자 어느새 저녁 시각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넋 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금방 간다 ·
" ,,
유리는 아무도 없는 현관 쪽을 보았다. 링신루의 구두가 보이지 않는 현관을 잠시 쳐다보다가 휴대전화를 보았다.
별다른 메시지가 들어와 있지 않을 걸 보니 이제 슬슬 링신루가 돌아올 즈음이 된 성싶었다.
(유리는 이 정도라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하며 가겠다고 했지만, 링신루가 딱 잘라 고개를 저으며 얼른
갔다 올 테니 쉬고 있으라고 했다)
친족들과 식사를 하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온다면 밤늦게 돌아을 수도 있을 테지만, 식사만 마치고 금방
온다면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계약이 만료되는 기일이 내일이 었다. 정확히는 오늘 자정을 기해 계약이 끝난다.
그러니 그 전에 -오늘 밤 안에-유리는 링신루가 과제처럼 내어준 계약 여부에 대해 대답을 해야 했다.
오전부터 괜히 베란다에 나가서 한참 바깥을 내려다보다가, 욕실로 가서 오늘만 두 번째로 샤워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차를 끓이다가, 책 몇 장을 보다 말고 다른 책을 껴내 넘기곤 하는 링신루를 보며 유리는
설마, 하고 생각했다.
본가에 가려면 슬슬 준비해야 할 텐데, 싶어 베란다에 나가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링신루를 불렀다.
처럼 고개를 돌렸다. 휙 소리가 나도록, ‘링신루 씨’라는 부름이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리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몹시 반들거리고 있었다.
‘예? 지금 나 불렀죠?’
링신루는 얼른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와 유리의 건너펀 자리에 앉았다. 무의식적으로 유리를 따라하는지 반듯한
자세로 앉아 무릎 위에 손까지 얹고 얌전히 바라보는 그를 앞두고, 유리는 잠시 말이 막혔다.
유리가 말하자, 생각했던 대로 링신루의 얼굴에서 대번에 빛이 꺼졌다. 그가 바라던 말이 아니었는지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지 만, 애써 표정 위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연하게 ‘네, 그렇죠.’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묵직하게 허리가 욱신거려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았다.
며칠 전 식탁에서 흔들리다가 모서리에 호되게 부딪혀 아직도 아팠다. 게다가 쳬력도 부쩍 떨어졌는지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오, 지금은 괜찮습니다. 엊그제 페이에게 책을 빌려주기로해서 오늘 만나기로 하기도 했고, 움직이는
데예도 아무런 무리 가 없어요.’
고개를 기웃하며 되묻는 링신루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정말로 혼자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아서,유리는 난감하게 그를 보다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도 한동안 유리의 근처를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낸 링신루는,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집에서
나갔다.
어딘지 초조한 빛이 어른거리는 얼굴은, 본가에서 돌아온 뒤의 오늘 밤--기한 만료라는 시간을 앞두고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 종신이라는 기간을 적은 계약서에는 서명을 해 줄까, 혹은,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사람의 성격이란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바뀔 수 없는 법이고, 유리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링신루가
‘싱거운 풀’ 이라고 했던 부분은 결국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노력해줘요.
그렇게 말하던 링신루의 호소가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자신은 링신루가 바라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고 그가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에게 내어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답을 미루었던 건, 그것이 자신의 노력인 탓이다. 이 한순간 한순간에도 보다 그를 좋아할 수
있도록,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볼 수 있도록 유리는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쯤 결실을 맺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노력해 갈 터였다.
면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건네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되먼 적어도 한동안은 이곳에서, 링신루의 옆에서
머무르게 될 터였다. 몇 년, 혹은 그 이상,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유리는 ‘확정’이라는 글자가 뜬 노트북 화면을 확인하고는 창을 닫았다· 마음을 결정한 뒤에는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처리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는 그였다.
이제야 의식했지만, 아까부터 몇 번이나 시계를 보면서 링신루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돌아오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걸 물어보면 어쩐지 링신루는 몹시 좋아할
것 같았다.
어쩌면 예상보다 ‘노력’이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유리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링신루의 전화번호를 누른 그가 막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 .
一- -
,,
『유리. 아까 전화했었다면서.』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이 남자는, 상사를 잘못 만난 탓에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임스였다.
『종신?!』
“예.”
링가라기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링신루 개인이라고 해야겠지만, 유리는 구태여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텐데 굳이 전화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제임스는 정말로 아쉬운 눈치였다. 유리 게이블이라는 인재를 놓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아마도 유리가
돌아가면 그에게 맡기려고 준비해두었던 일들 대부분이 카일의 처신에 관련된 뒤치다 꺼리였던 모양이라고, 눈치
빠른 유리는 생각했다.
“어깼든, 그러려면 집도 그렇고, 정리해야 할 게 많으니까 잠시 그쪽으로 돌아가긴 할 거예요.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을 테니까 아파트 처분은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제임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놔도 이미 떠나간 물고기를 잡기는 글렀다고 단념한 듯,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 ,,
그러나 잘못 들었는지, 들어온 사람은 없었고 잠시 그대로 기다려 봐도 별다른 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옆집으로 들어가는 기척이었나 보다.
다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아침 비행기로 출발할 테니 내일 저녁에 봐요. 베를린 시각으로는 오후쯤 되겠군요. 회사로 갈게요.”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임스와 통화를 하기 직전에 눌렀던 링신루의 번호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 l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본가에서 어른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답이 나온다-.
어서 돌아오면 좋겠는데.
" ,,
평소 주말에 본가에 가먼, 때마다 다르긴 하지만 빠르면 여덟아홉 시, 늦으면 자정 넘어서 돌아오곤 했다.
보통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간단한 얘기를 나눈 뒤에 자리를 뜨면 열 시를 전후 해서 돌아오게 된다.
가끔 친족들과 이야기가 길어져 늦어질 때에는 자정을 훨씬 넘길 때에도 드물게나마 있었기 때문에, 링신루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늦게 돌아
하지만 오늘은 일찍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어른들과 이야기가 길어지나 보다. 혹은 어머니에게 붙잡혀 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에게 붙잡히면 몇
시간이나 헤어 나지 못하는 때도 가끔 있었으니.
그즈음이었다.
외로, 화면에 뜬 발신자는 링신루가 아니었다. 그래, 웬일이야, 페이.” 목소리에 실망이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유리는 발신자의 이름을 불렀다.
책을 빌려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전화한 모양이었다. 변함없이 유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웃음 지었다.
오히려 페이야말로 이상하다는 듯, 당연히 거기에 있을 줄로 알았다며 대답을 한다. 유리는 잠시 눈만 껌벅이며
침묵했다.
“아까? 언제쯤?”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던 페이는 그제야 아까 스치듯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납득한다. 그러나
유리는 이번 에도 다시 침묵했다.
" "
『한번 전화해볼까요?』
“아니 , 괜찮아.”
링신루에게 달리 약속도 없었고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다고 말할까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운전을 하다가 피곤해져서 잠시 갓길에 차를 대놓고 자고 있거나, 혹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고가 났을 경우라도 그 길로 가면서 살피다 보면 뭔가 흔적이 보일 터였다.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누구에게인지 모를 기도를 하면서 유리는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 . . …-‘기 ,,
문이 열리지 않았다.
유리는 현관문을 열던 손을 멈칫하며 의아하게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문고리를 돌리며
밀어보았지만, 당연히 열려야 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샅기“
그러나 그 이상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한 뼘쯤 열린 것마저 도로 닫히려는 듯 이쪽으로 밀 려왔다. 유리는
당혹스럽게 문을 계속 밀었다.
일단 찾으러 갈 수고는 던 것 같다. 게다가 걱정했던 것처럼 사고가 나지도 않고, 다른 데를 들르느라 늦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다시 문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돌리며 밀었지만, 여전히 문은 앞을 가로막힌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링신루가 문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 영문을 모르겠다.
유리는 문에 등을 대고 쳬중을 실어 억지로 밀었다. 다시 문이 한 뼘쯤 열린 틈에 “링신루 씨?”하고 말을
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열지 말라니까요!”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콰당, 바깥에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었는지 문이 닫힌다.
문으로 가로막혀 있다고는 하나 바깥까지는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여전히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그대로
가로막고 앉아서 문을 열지도 않고 무슨 영문인지 대답도 하지 않을 요량인 성싶었다.
"
유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문을 우악스럽게 밀어대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화급하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유리는 문 틈새에 끼웠던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문틀에 올라선 뒤, 덤덤하게 링신루를
내려다보았다.
저걸 들면 앞을 못 보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아름드리 꽃다발을 보고 유리는 링신루에게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고집스럽게 입매를 굳힌 링신루가 단호하게 말한다. 이미 문이 열리고 링신루도 현관으로 걸음을 들여놓은 상태라
처음처럼 유리를 집안에 밀어 넣고 바깥에서 문을 닫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유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성공한 링신루는 대문 앞으로 가로막으며 문을 등지고 섰다.
유리는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서늘한 얼굴로 유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一·-가둬둔 것 맞아요.”
링신루는 웃음 하나 없이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안스럽게 일렁이는 눈은, 어딘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터질 것처럼.
“저를요?”
유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링신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대답이 묻어나와,
유리는 다시금 말을 앓고 만다.
“어 째서 입 니까?”
"--돌아갈 거잖아요.”
그러던 어느 순간.
숨조차 쉬기 힘들도록 억눌린 가슴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듯한 비통한 목소리가 유리를 질책한다.
가슴이 터져버릴 듯 고함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통렬하게 유리를 비난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서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링신루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프다고,
숨을 못 쉬겠다고 가느다랗게 호소하먼서.
, 나는, 눈도 한쪽이 안 보이고 , 당신이 싫어하는 일이나 하고 , 당신보다 나이도 적고 흐느끼는 울음 사이로
한 마디씩 비참하게 새어나오는 말이 유리의 귀에 닿는다. 링신루는 차마 유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다.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지르면서, 그래도 그치지 않는 눈물을 언제까지고 쏟아내면서, 그는
속삭였다.
링신루는 훌쩍거리면서 매달렸다. 유리는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어딘지 현실이 아닌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무나 이상해서 현실이 아닌 것 같았는데, 하지만 목을 적시며 타고 내리는 눈물은 너무나 뜨거웠다.
“당신은, 내 물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평생 마음에 무게가 얹히기만 해서, 짓눌려 죽고 말 거야. 당신이 없으면 나는 쉴 수가
없어.”
들어가, 유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팔을 놓아주었다 하더라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남자의 품속에서. 이 아늑한 곳에서. 그런데도 오히려 자신을 아늑하다고 하는, 편안하게 쉬며 숨결을
가라앉힐 곳이라고
. 링신루 씨. 나는,”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움칫, 유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웠는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못 가요. 이래놓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당신은 가버리겠다고? 못 가요. 절대로 안 보내줘요. 멋대로
가기만 해.
가볍게 얹히는 팔의 무게에 링신루의 어깨가 회미하게 굳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유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는 그를, 유리도 마주 끌어안았다. 꼭.
지금 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를 기다리면서, 희미한 초조감과 기대감으로 심장이 뛰는 걸 느끼고 그에게
전화를 걸먼서,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노력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아무래도 힘든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선명해쳤다.
하지만 그래도.
“안 갑니다. 놔주세요.”
. 뭐 하는 거예요.”
유리는 귓불에서 입을 옮겨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거기에서 조금씩 내려오면서 귀 앞에, 광대뼈 위에,
볼에, 천천히 입술을 옮겨갔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린 링신루는, 조금씩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가 입 맞추기 쉽도록.
여전히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젖은 얼굴로 불안스럽게 유리를 보고 있는 링신루를 묵묵히 쳐다보던 유리는,
곧 걸음을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링신루는 여전히 현관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계약서다.
며칠 전 링신루가 계약 기간을 종신으로 써서 유리에게 건네주었던 종이를, 이제는 유리가 링신루에게 내밀고
있었다.
" "
링신루는 믿어지지 않는 듯, 그 종이를 받아들면 꿈에서 깨기라도 할 것처럼 미심쩍게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다시 그에게 종이를 내밀어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주고 싶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겠지요.”
“돌아가지 않아요?”
돌아갈 거라고 했잖아요. 계약 만기가 되었으니, 어차피 돌아갈 거 빨리 돌아갈 거라고. 내일 아침에 갈
거라고 했잖아요.“
희미한 불안이 서리는 목소리로 그 말만 하고, 링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조차 괜히 했다는 것처럼.
유리는 눈을 껌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얼핏 얼굴을 찌푸린다.
이 밤중에 혼자서 복도에 서서 문을 지켰다는 걸까. 설핏 눈살을 찌푸린 유리는 어이없는 얼굴로 링신루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 만다. 아직껏 자신의 손에서 그에게로 넘어가지 않은 계약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내민다.
버려져 있던 거대한 꽃다발을 가리키며 “이거 제 겁니까?”라고 링신루에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것을 두 팔 가득 끌어안고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대문을 통과해 들어올 만큼 커다란 그 꽃다발을 안고 뒤뚱뒤뚱,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으며 거실로
간다.
결국 욕조밖에 없겠다.
그리고 저만큼이나 큰 그 불안감에 짓눌려 저 문밖에서 문을 가로막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가 무엇을 생각했을지.
정말로 올 거죠.“
나직이 되묻는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여상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그 대답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고 그 계약서,”
유리는 그가 쥐고 있는 계약서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도중에 말을 멈추고 유리가 침묵하자 계약서를 내려다본
링신루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미 링신루에게 저 계약서를 넘겨주면서 유리는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은 평생만큼이나 있으니까 오래 걸려도 괜찮아요. 그때까지는 계속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날 좋아해 주세요.”
날 좋아해 주세요, 고집스럽게 덧붙이는 말은, 그러나 자신이 없어 얼핏 흐려지며 말꼬리가 떨린다. 유리는
그를 한동안 계속 바라보았다.
그래서 유리는 그 사랑스러운 사람을 앞두고 무심한 표정을 아주 약간 허물어뜨리면서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갔다가 언제 올 거예요?”
유리가 꽃다발을 담그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욕실 문틀에 올라서서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가 불쑥 물었다.
정리하는 데에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르는 아파트는 제임스를 통해 중개사에게 맡기기도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
그렇지, 그러면,”
유리는 물이 충분히 찬 욕조에 꽃다발을 담갔다. 거대한 꽃다발은 욕조를 가득 메워, 마치 욕실에 꽃이 가득 핀
화단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답한 유리는 그 뒤로도 잠시 동안 그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서 링신루에게 “꽃, 고마워
요.”라고 뒤늦은 인사를 하곤 욕실에서 나갔다.
가장 귀한 사람에게 줄 거니까 가장 탐스럽고 아름답고 오래오래 싱싱할 꽃들로만 골라서 달라고 했던 그 꽃다발은
몹시도 싱
" "
욕조 마개를 뽑아버릴까, 몸을 기울여 욕조를 들여다보았지만 꽃들로 파묻힌 욕조 바닥은 보이지도 않았다.
고심에 잠겨 묵묵히 꽃들을 노려보고 있는 링신루의 뒤로, 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 유리는 욕조
안으로 조그만 알약
Epilogue.
“사람?”
어쩐지 장부 처리를 하면서 건성으로 전화를 받다가 자칫 실수로 대답을 잘못했다간 나중에 호된 꼴을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사람?”
『예, 했었습니다.』
『예, 그랬었죠.』
링탕윈은 목소리를 깔고 은근히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짤막한 침묵이 돌아왔지만, 그 뒤에 곧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링탕윈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 대답 대신 침묵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유리의 대답을 듣고서야 “
그렇다면야 뒈”하고 표정을 폈다. 이미 제법 지난 일이다.
자신을 대신해서 링신루를 보좌할 만한 능력 좋은 사람을 찾아달라고 전화했던 그에게 링탕윈은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을 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막냇동생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보좌해 줄 사람을 찾는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정나미 떨어지도록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얘기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동생에게, 링탕윈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링신루에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유리가 마음대로 판단해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링신루의
보좌를 알아봐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막냇동생은 원래 좀 그런 인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랑스럽고 애교가 많아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긴 했는데-링탕윈도 막내가 여러모로 껄끄러울
뿐 싫어하지는 않았다- , 그 속을 한 꺼풀 들여다보면 정떨어지는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링탕윈은 유리 게이블과 꽤 오랜 시간을 알아왔지만, 유리는 정보원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라 그를 탐내는
기관이나 회사들이 줄지어 고액연봉을 부름에도 불구하고 종신계약이라는 걸 하지 않는 남자였다.
하지만 뭐, 사람들의 관계에도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다고 믿는 링탕윈은 금방 마음을 가다듬고 유리에게 앞으로
신루를 잘 보좌해달라고 형으로서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 ,,
그러나 이번에는 링신루도 보좌할 만한 사람을 찾는 데에 동의를 했다니 그 점에 있어서는 걱정이 없겠다.
링탕윈은 인명등록부를 꺼내어 슬슬 넘겨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유리가-혹은 링신루가-
또 다른 보좌를 찾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링탕윈이 유리의 능력을 탐내면서도 자신의 아래에 두려는 노력은 굳이 하지 않았던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유리는
지금은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링신루도 일을 익히고 있는 신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정도인 유리라도 그를 무난하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시간이 지나 일을 하는 데 있어 링신루의 비중이 커지먼, 그만큼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맡아야
할 일도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질 터였다. 그것은 아마 유리에게는 다소 벅찰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링탕윈은 유리의 대처에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이 부문에서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자신이 앉아있는 위치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이 두 가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교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자신의 능력치와 앞으로 필요하게 될 능력치를 견주어 보고, 자신의 손만으로는 벅차니 더
유능한 보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분수에 넘치는 일을 맡겠다고 독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인간들을
자주 봐온 링탕윈은, 이 현명한 젊은이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유리를 얼마든지 돕고 싶었다.
그래서 링탕윈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비장의 기록부, 사람들과 자주 접하면서 유능한 인물이 있으면
눈여겨보았다가 기록을 해둔 인명등록부를 꺼내어 넘겼다.
『링신루 씨의 업무를 보좌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일단 갖추고 있어야 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링탕윈 씨가 저보다도 잘 아실 테고,』
“그래, 그런 조건들은 갖춘 사람으로 하되, 신루가 제시한 조건도 있을 것 아니야. 그놈은 사람 고르는 데에
은근히 까다로우니
『 , 그게 말이지요.』
링탕윈은 흥겨운 마음으로 등록부를 넘기다가 잠시 어라,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순간적으로 유리가 말을 망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거기예 맞는 인재를 찾아내겠다는 승부 근성을 불태우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링탕윈은,
링탕윈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그런데 왜 평균 이상이 아니고 이하일까,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무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어쩐지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지금 고르는 게 신루를 보좌할 사람이 맞는 거지? 그러니까, 업무를 도와줄 사람 ?"
『예, 맞습니다.』
"
업무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 조건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하지만 ‘모가 나있는 성격’과 ‘가정에 충실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또 어쩔 것이냐.
“유라”
『예.』
“조건이 왜 그래.”
. 』
가능하면 여러 부분에서 맞아떨어지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유리가 딱딱하게 대답하는 말을 들으며, 링탕윈은
한참 동안 침
묵하다가 이윽고 끄응, 하고 신음을 중얼거리곤 “알았어, 찾아보 도록 하지.”라고 앓는 소리로 대꾸했다.
허들이 너무 높다.
물론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적당히 융통성은 있겠지만, 말하는 조건마다 범상치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인물은 없다더니, 성격 까다로운 것 빼고는 그래도 외모면 외모, 능력이먼 능력, 배경이면 배경,
모두 만점에 깝다고 생각했던 막냇동생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취향의 소유자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역시 안 되겠다.
한동안 미간을 주무르며 열심히 막냇동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링탕윈이었지만, 결국 유리와 전화를 끊기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발았다.
“큰형님이 화내요?”
"
제임스 수준쯤 되면 퍽 까다로워지긴 하겠지만, 그에 비등한 인물이라도 링가의 재력이라면 보좌로 고용하는
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비록 링신루가 말하는 조건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지만, 그래도 링탕윈에게 그 말들을 늘어놓으며 유리는 얼마나
겸연쩍었는지 모른다.
링신루의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하긴 하되, 정확하게 말하자면 링신루의 일을 돕는 유리를 도울 사람이라는 말을.
어차피 사람 여럿 거느리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새로 보좌라고 사람을 들이면 유리와 함께
주로 셋이서 더불어 다니게 될 텐데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딱 잘라 말했다.
다만 조건을 붙인 게 그것이었다.
외모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성격도 좋지 않으며 남에게 눈돌릴 리 없는 기혼, 거기에 물 공포증.
" ,,
다 좋은데 물 공포증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는다. 그러나 그 화사한 웃음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따라서 웃어주지 않자, 그는
차츰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기웃했다.
“왜 그래요?”
“예?”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문득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곤란하다기보다는 멋쩍다는 쪽이 더 가까울
웃음을 짓고서 깜박깜박 유리를 한참 바라보던 링신루는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 링신루 씨의 문제
그러자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링신루는 기록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 유리에게 입을 맞춘다.
. 안 싫습니다.”
잠시 생각한 뒤 유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링신루는 웃었다.
이번에는 더욱 길게 입을 맞추다가 한참 뒤에야 만족스럽게, 그럼에도 약간은 아쉬운 듯 떨어진 링신루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하고 중얼거렸다. 유리는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다시 연락할까요?”
전화를 집어든 유리는, 그런데 그게 무슨 조건이냐며 링신루를 쳐다보았다. 링신루는 빙글빙글 예쁘게 웃다가
말했다.
“동성 간의 입맞춤 혹은 그 이상의 관계를 빈번하게 보게 되는 환경이라도 개의치 않을 사람.” 하지만 본인이
동성애자인 남자라면 절대로 안 됨, 하고 덧붙이는 링신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유리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이미 말한 조건만 해도 벅찰 텐데 그에게 이 이상의 무게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군요.”하고 변명을 중얼거리는
유리를 보며,
“날 보고 있었어요? 더 봐줘요. 더 많이. 더 자주.” 링신루는 예쁘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유리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드물게 그들이 각자 따로 귀가를 할 경우, 더욱 드물게 유리가 그에게 전화해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오는지 궁금해하기라도 하면 링신루는 뛸 듯이 기삐했다.
심지어는 유리가 전화해서 자신의 소식을 묻는 걸 듣고 싶어서, 집에 다 와서도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서성이기도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요 근래에는 의식적으로 그에게 종종 연락을 하고 사소한 것들을 물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놀러 가고 싶다.”
링신루가 노트북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따분해 죽겠다는 투로 말하는 그에게 유리는 부드러운 시선을 주었다.
“어디로 갈까요.”
유리가 기삐할 것, 유리가 좋아할 것, 유리가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링신루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듯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지금은 눈앞에 쌓인 일부터 마쳐야겠지만요.”
유리는 링신루를 바라보던 시선을 떨어뜨려, 잠시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내 링신루가
그 서류를 빼앗 듯이 가져가버렸다.
졸지에 일거리를 빼앗긴 유리는 잠시 눈을 껌벅거렸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링신루를 마주보다가 이윽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어디 한번 마음껏 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유리는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으며 링신루를 바라본다.
그러자 링신루는 몹시 기쁜 얼굴로 웃었다.
유리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늘 그렇게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것은 몹시 예쁜
웃음이라, 유리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Bonus track.
“어머, 농담이지?!"
아네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시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곤 다시 “진짜 정말로 맞아? 농담 아니고? 설마 농담이겠지?”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하길 포기했다.
추운지 손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고 있던 그 청년은 어딘지 따분해 보였다. 심드렁하게 길거리를 둘러보다가,
시계탑을 올려다 보다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어 보다가 하던 그는 이윽고 길 건너에 멈춰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을 발견했다‘
따뜻한 홍차와 타르트를 앞에 두고 아네트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어머를 연발했던 여자답지 않게 우아하고
매력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를, 건너 자리에 앉은 링신루도 사랑스럽게 웃으며 마주 보았다.
“그러셨어요?”
“정말로 안 부끄러워?”
, 부끄러워야 합니까?”
“어쩜, 너보다 열 살도 더 어린, 그것도 남자애를 사귀니? 이런걸 두고 도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뭘
도둑이라고 부르겠어? !"
아네트가 당당히 주장하는 말에 유리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 하고 얌전히 홍차만 마셨다. 그런 유리에게서
고개를 돌린 아네트는 언제 뾰족하게 소리를 쳤냐는 듯 상냥한 웃음을 띠며 링신루를 보았다.
“아하하, 질투심 많은 애인은 맞아요. 게이블 씨한테 전화할 때마다 Mon sucre 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쳬
누굴까 궁금했거든요.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몰랐네요.”
링신루는 그러고 보니, 하고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에게 천진하게 물었다. 그녀는 아아, 그거요, 하고
콧잔등에 주름을 지었다.
“성격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새벽마다 수영하러 갈 시간은 있으면서 나랑 데이트할 시간은 없다는 남자랑은
더 이상 사귀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새벽마다 수영은 꼬박꼬박 갔잖아” 곱게 흘겨보는 아네트에게, 이번에도 유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 다.
“아하하, 물른 안 되죠.”
링신루는 화사하게 웃으먼서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네트는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할끔 유리를 곁눈질했다.
“게이블 씨를 만나면서 나도 좋아하게 됐어요. 게이블 씨 말대로, 물에 들어가면 정말로 가슴에 묵직하게 쌓여
있던 것들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게이블 씨를 만난 덕분이에요.”
그렇게 속삭인 그는 문득 손을 들었다. 유리의 입가에 붙어 있는 타르트 가루를 가만히 문질러 떼어준다. 곧
말끔해진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링신루는 눈웃음을 웃었다.
" "
유리는 멈칫, 말없이 링신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그의 앞에서 링신루는 다정하게
웃었다.
" 이제는 나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매일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루라도 그 아늑한 속에 잠겨서 헤엄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느릿한 목소리는 어딘지 위험스러운 달콤함을 품고 있었다.
마치 시선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링신루를 바라보던 유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천히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그러나 목덜미부터 서서히 빨개지기 시작하는 그 표정 아래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당혹감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다.
“물속에 잠겨 있으면 얼마나 아늑한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지 몰라요. 그 안에서 헤엄치다가 그대로
잠들기라도 하면 정말로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일 정도로.” 한 마디 한 마디, 이것은 유리에게
들려주려는 말이다.
유리는 꼼짝도 못하고 링신루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차마 그대로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듯 가만히 타르트로 눈길을 떨어뜨린 유리는 “그래요 , 잘 됐네요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링신루가 웃으며 말하는 옆에서, 갑자기 타르트의 파이가 목에 걸렸는지 유리가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왜 그래요, 사레 들렸어요?”하고 얼른 다정하게 홍차를 집어준 링신루는 유리의 등을 쓸 어내려 준다. 고마워요,
라고 웅얼웅얼 말하는 유리에게 링신루는 뭘요,하고 곱게 웃었다.
“정말로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어쩐지 안심했어요. 아무리 이 미 헤어진 사람이라고 해도,가끔 생각이
나거든요. 잘 살고 있을까,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자 유리의 등을 쓰다듬던 링신루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 다. 입가에만 은은한 웃음을 띠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링 신루는,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웃음을 띠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하고 손을 흔들고 뒤돌아 걸어가는 아네 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안했다.
“괜찮은 사람이네요.”
“……예.’’
링신루는 가뿐한 한숨을 내쉬더니,이제 마음이 좀 풀렸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유리의 손을 잡더니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연히 아네트와 유리의 통화를 듣게 된 링신루는 그녀가 유리를 부르는 그 호칭을 몹시 마음에 걸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유리가 가까운 친척의 결혼 때문에 잠시 독일로 들어올 때 같이 따라 온 링신루는,유리가 볼일
때문에 아네트를 만날 일이 있다고 하 자 당장 자신도 만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두 사람,사이 좋아 보이던데요.”
날씨가 춥기 때문인지 사람이 뜸하게 다니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유리가 불쑥 말했다. 링신루는 미묘한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일 것 같은데…….”하고 쓰게 웃었다.
“예?”
“다른 사람이 게이블 씨를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것도 싫고, 예전에 사귀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것도
싫고,계속 나더러 어리다 젊다 말하는 것도 듣기 싫었어요. ……나라고 어리고 싶어서 어린 게 아니에요. 나도
게이블 씨와 친구처럼 보낸 세월을 갖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어째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는 유리를 링신루가 돌아보았다. 유리는 잠시 발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적 드문 거리를 살피다가,다시 생각에 잠겼다가,그런 끝에 가만 히 링신루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주 가만히,뿌리치려면 쉽게 뿌 리칠 수 있을 정도로.
물끄러미 유리를 쳐다보던 링신루는 이내 이상한 얼굴을 했다. 묵묵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는
유리를 빤히 쳐다보 다가 그는 문득 웃는다. 이것이,유리가 링신루에게 준 선택권이 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던
것이다.
“왜 저를 사이에 두고서 링신루 씨가 괴로워해요. 저에 대해서 유리의 무심한 얼굴이 얼핏 붉어지는가 싶었다.
그는 그렇게 붉어진 얼굴로 잠시 묵묵히 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