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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더욱 깊어지기 전에
성조의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훈련원이었다.

결을 따라 한양으로 돌아온 군사들, 특히 체탐자는 거의 대부분이 이 훈련원 소속으로


배치된 상태였다.

그중 성조가 찾는 인물이 있었으니…….

“어이, 이보게. 진위!”

“성조 형님?”

살가운 부름에 진위가 눈을 크게 뜨며 성조를 반겼다.

“이 얼마 만인가. 자네도 못 본 사이에 더욱 듬직해졌으이. 어째 나만 빼고 다 커지는


듯해.”

“형님……. 아, 이제는 좌랑 나리라고 불러야겠군요. 나리께서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풍채가 더 좋아지셨습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나야 뭐, 벼슬자리 하나 잡아 아비 권세 등에 업고 호의호식하였지.”

자조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성조는 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왔네.”

“하문하십시오.”

성조의 눈매가 호기심을 품으며 긴 호선을 그렸다.

“결이 여연에서 데려온 새 다비 말일세. 대체 어떤 여인인가?”

“벌써 그 아이를 보셨습니까?”

“아직 직접 본 건 아니고, 이미 저잣거리에 소문이 자자하네. 북방 귀신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온 도성이 들썩일 만한데 새 다비까지 데려왔다니, 어디 입방아에 안 오르고
배기겠는가?”
가뜩이나 결이 한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제 자식이 다동으로 끌려갈까 노심초사하던
사람들이라.

북방 귀신의 새 다비 이야기에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말을 옮기기 바빴다.

무수한 소문 중 한 자락을 떠올린 성조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듣기론 제법 미색이 있는 여인이라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미색 말씀이십니까?”

미색이란 말에 진위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단이를 떠올려보았다.

자고로 그에게 미색 있는 여인이란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그야말로 자기주장


확실한 몸매의 소유자라.

제 눈엔 한없이 작고 여린 계집아이 같던 단이에게서 무슨 미색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치켜뜬 눈을 한참이나 좌우로 굴리던 진위는 전혀 공감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대체 어디를 보고 그런 말이 퍼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서 잘못된 소문이 퍼진 모양이로군.”

“분명 그럴 겁니다. 여인이라 하기에도 좀 애매한 정도라…….”

“그 정도라고?”

얼마나 박색이기에 여인이라 말하기도 어렵다던가.

성조는 심각한 얼굴로 저잣거리 소문의 와전과 과장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다.

여인이 아니라 아이라고 말하고 싶은 진위의 뜻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진위가 사뭇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좀 특이한 점은 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니?”

“나리께선 장군의 절친한 벗이시니, 조금 더 면밀히 살펴주십사 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위를 살핀 진위가 성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었다.

처음 단이를 만난 일과 더불어 한양으로 돌아오는 중에 있었던 사건까지.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성조의 날렵한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지며 묘한 빛을 띠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을 처음 본 것이 조선의 국경 밖이었고…….”

이야기를 되짚어가는 목소리가 더욱 은밀해졌다.

“감히 저주받은 북방 귀신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는 말이지.”

“…….”

“그것도 접문으로 말이야.”

진위가 제게 거짓을 말할 리는 없으니 분명 사실일 터.

하지만 듣고도 쉬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성조는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남들이 저주라 부를 만큼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결이다.

그 빛깔이 맑고 투명할수록,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해버리는.

그런 결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그것도 직접 입을 맞춰서.

‘참으로 배짱 두둑한 여인이 아닌가.’

남들은 눈조차 마주치기 두려워하는 상대에게 손을 댄 것으로도 모자라 입까지 맞추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색이건 박색이건, 어떤 여인인지 꼭 한번 보고 싶군.’


성조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결의 새 다비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더 깊어진 순간이었다.

***

아직 저녁노을조차 거두어지지 않은 시각.

남준백의 집터에 있는 커다란 누각에선 벌써부터 음악과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있었다.

한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술, 그리고 기생들의 가무를 맘껏 즐겼다.

그 가운데 제일 상석에 앉은 준백은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아무 생각 없이 풍류를 즐기기엔 마음이 심히 어지러웠다.

‘주상께서 기어이 우리들을 등지시겠다 이건가.’

탁,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술잔 소리에 다른 대신들이 준백의 눈치를 살폈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안광은 여전히 형형하였다.

한순간 매서워진 공기가 분위기를 흐리는지라.

준백의 곁에 앉은 기생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대감, 오늘따라 어찌 이리 굳어 계시옵니까? 제 춤에 웃어주시지도 않고서.”

하나 애기(愛妓)의 교태에도 준백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조정의 관료들을 한데 아울러 결의 제수식을 참관하게 한 이선의 뜻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들을 향한 경고였다.

과거의 일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겠다는.

다른 대신들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은 바, 눈치껏 기생들을 물리고선 은근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벌써 10 년도 더 된 일입니다. 그때 북귀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니, 이제 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관료가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말하였다.

그러나 안일한 기대는 오히려 준백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와신상담이 괜히 있는 말이겠습니까.”

“…….”

“얼마나 한양을 떠나 있었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어떠한 곳에서 어떠한 생각으로


버텨 왔는지가 문제지.”

날카로운 말에 관료는 반박조차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준백은 빈 잔에 스스로 술을 채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북귀는 결코 ‘그 일’을 잊을 자가 아닙니다. 10 년이 걸리든, 20 년이 걸리든, 놈은 분명


우리에게 검을 겨눌 겁니다.”

“그, 그럼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이미 주상께서 직접 북귀에게 관직제수를 하셨는데


…….”

“꺾어야지요. 놈이 앞뒤 구분 못하고 검을 휘두르기 전에.”

준백의 눈빛이 더욱 시리게 굳어졌다.

“그깟 애송이 때문에, 우리 일에 차질이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에 주변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일’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에 함부로 뒷말을 보태기가 어려웠다.

준백의 눈엔 그저 간덩이 작은 겁쟁이들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준백은 시선을 돌려 제 근처에 앉은 이에게 질문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좌찬 대감.”

좌찬성, 한정회가 술잔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췄다.

줄곧 술잔만 기울이며 말 한마디 보태지 않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일순 복잡한 감정이 두 눈에 담겼으나, 끝내 스치듯 사라질 뿐이었다.

“제아무리 검날을 갈았다 한들, 대감의 말씀대로 한낱 애송이일 뿐입니다. 이 한양


땅에 어디 북귀의 편이 하나라도 있답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여타 관료들의 그것과 다르게 흔들림이 없었다.

“홀로 자라난 대나무는 거센 풍랑 앞에 그저 들풀과도 같은 법입니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어찌 그리 신경 쓰냐는 듯.

“제까짓 게 감히,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눈동자 깊은 저변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 낮게 깔려 있었다.

권태, 염증, 회한.

그리고…… 죄책감.

필사적으로 마음속 깊이 묻어버린 그것들은 이따금 불쑥 검은 눈동자에 비치곤 하였다.


그것을 못 보았는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가만히 정회의 눈을 들여다보던 준백은 짧게 실소를 내뱉으며 술잔을 들었다.

“대감의 말씀도 옳지만, 글쎄요.”

알고도 기만하는 자 특유의 미소였다.

“본디 두려움을 모르는 개가 범 앞에서 잘 짖는 법이지요.”

“…….”

“곧 물려 죽게 될 것도 모르고.”

섬뜩한 뒷말이 대신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훑었다.

준백은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래. 한낱 개 따위가 이를 드러낸다 한들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 봤자 이 땅에 내릴 뿌리 하나 없는, 저주받은 놈이거늘.

‘겁을 한번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감히 이를 드러낼 생각조차 못하게끔.

서서히 목줄을 조여 갈 생각에 탐욕스러운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

결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서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던 단이는 어수선한 바깥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단이야, 차를 준비해야겠다.”

곧 예상대로 덕원이 그녀를 부르러 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단이는 나가다 말고 문득 벽에 걸린 옷을 보았다.

새벽에 결의 목욕 시중을 들 때 입었던 옷이었다.

물을 끓여 빨래 방망이로 몇 번을 두드렸거늘.

아직 축축한 치맛단엔 짙게 우려내었던 찻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제가 결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별것도 아닌 걸로 결의 미움을 샀다는 생각에 괜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싫다, 쳐다보는 것도 싫다.

‘그냥 내가 하는 건 다 싫으신 건가…….’

기껏 데려와서 공연히 피를 말리니, 북방 귀신의 다동이 단명한다는 게 괜한 소문은


아닌가 보다.

폭 한숨을 내쉰 단이는 다신당에서 차제구와 떡차를 챙겼다.

묵직한 찻상을 들고 걸음을 옮기던 그때.


저 멀리 사랑채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결이 보였다.

평소와 다른 복장에 평소와 다른 분위기.

노을마저 사라진 늦저녁의 어둠이 죄 그의 눈으로만 흘러든 걸까.

어쩐지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들판에 결 혼자만 서 있는 것 같았다.

“…….”

시선을 느꼈는지 결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새벽의 일이 떠오른 터라. 단이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 순간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다구들이 휘청거리더니, 결국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진 물건들에 단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단이는 허둥거리며 나뒹구는 물건들을 주웠다.

그나마 눈 덮인 땅에 떨어져 안 깨어졌으니 망정이지.

하나라도 깨어졌으면 제 목까지 이렇게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무릎걸음으로 다구들을 주워 담던 단이가 없어진 찻잔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울상으로 변했다.

저 조그만 게 어찌나 멀리 갔는지.

데굴데굴 굴러가 결의 발 앞까지 가 있는 것이었다.

‘망했다…….’

단이는 차마 주우러 가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한 채 찻잔만 바라보았다.

얼른 일어나 찻잔을 주워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이 결이 직접 허리를 숙여 굴러온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단이의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가뜩이나 새벽에 있던 일로 주눅이 들어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명백히 제가 잘못한 것이니, 책임을 묻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마침내 결의 발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정식 다비가 되기 전에 이렇게 쫓겨나겠구나, 생각하던 그때.

“어찌 그러고 있느냐.”

뜻밖에도 결의 목소리에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안타까이 여기는 것 같았다.

조금은, 지친 것 같기도 했고.

“일어나거라.”

엉거주춤 일어난 단이는 더러워진 무릎을 털 생각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새벽엔 눈만 마주쳐도 서늘한 기색을 내뿜던 나리.

그런 나리가 지금은 귀한 물건들을 떨어트렸는데도 아무런 내색을 안 하신다.

거기에 친히 주운 찻잔을 건네주시기까지.

“새것으로 도로 가지고 오거라.”

고개를 드니 결이 무감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결과 찻잔을 번갈아 보던 단이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스치는 손끝에서 전해진 온기가 신기루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단이가 결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리.”

그 말간 목소리에 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단이의 눈망울이 전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그래, 이 눈.

이 투명하리만치 순수한 눈동자 때문이리라.

평소답지 않게 군 것도, 설명 못할 감정이 제 속을 헤집어놓은 것도, 종일 이 아이가 떠오른


것도.

전부 이 눈이 마음에 걸려 불편했기 때문이리라.

나와는 다른 맑은 눈이어서.

저 맑은 눈 속에 자꾸만 나를 위하려는 마음이 보여서.

그 마음으로 나를 살려서.

나는 그걸, 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럼 얼른 다시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어요.”

설핏 미소를 지은 단이가 찻상을 들고서 다신당으로 향했다.

같은 실수를 할까 봐 몸에 바짝 힘을 주는 것이 뒤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단이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괘념치 말거라. 별거 아니니.”

그러나 목소리는 끝내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휘 흩어졌다.

처음부터 전할 생각이 없었기에.

궐 밖으로 나왔는데도 내가 입은 관복엔 여전히 무수한 가시들이 박혀 있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 가시들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향해 있다.

‘네게는…… 이 가시가 향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네가 특별한 것일까.

답지 않게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고도 이상하였다.

너무도 오래 이 감정을 잊고 살아온 까닭이라.

이것이 더 깊어지기 전에 끊어내야만 한다.

저 아이가, 이 이상 내 삶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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