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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아카데미

1-151 완결 || 야식먹는중 作

#Prologue

수인 아카데미.

이곳은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아카데미로, 현재까지도 우수한 졸업생들을 배출하며


명성을 자랑했다.

도드라지는 특징이라면 재학생 전부가 육식 수인, 즉 맹수로 이루어진 정도.

“학장님, 신입생 명단입니다.”

수인 아카데미 학장, 밀란느는 비서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날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차 한잔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얼그레이 향이 좋구먼. 그런데 이 서류가 뭐라고?”

“신입생 명단.”

“자네는 내가 정신을 팔 때마다 말이 짧아지는군.”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보다, 입학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학생에게-”

외알 안경을 추켜올린 비서는 드물게 망설이며 말을 골랐다.

“-문제가 있습니다.”

“어차피 엄선된 학도들인데 문제라 해 봤자.”

“제법 큰 문제입니다.”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라도 저지른 겐가? 그럼 입학을 취소하면 될 일이고.”


“그게.”

“문제라……. 뭐, 종족이 초식 수인인 것만 한 게 있을까.”

허허, 우스갯소리를 흘린 밀란느 학장이 학적부에 눈길을 뒀다.

“하긴, 이곳에 제 발로 오는 초식 수인이 어디 있겠나?”

“…….”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호랑이, 곰, 늑대 등등. 신입생 명단을 대강 훑던 시선이 멈췄다.

[수석 - 벤디 레피]

시선이 머문 곳은 단연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신입생의 초상화였다.

“벤디 레피? 이 학도가 문제 있다는 그 수석인가?”

“예.”

“흠, 부정행위를 저지를 인상은 아닌데.”

물감으로 그린 듯 부드러운 얼굴을 마주한 밀란느 학장이 짐짓 인상 썼다.

“……독특하군. 육식 수인 중에 이런 희끄무레한 외모는 처음 보는구먼.”

새침데기처럼 앙다문 입술하며, 총명한 눈동자와 느슨한 눈매가 묘하게 잘 어우러진 생김새였다.

“종족은 어떻게 되지? 어디 보자…… 사!”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던 밀란느 학장은 돌연 벌떡 일어났다. 푸른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확장된 꼴이었다.

사, 사.

떠듬떠듬 튀어나온 말은 멀쩡한 단어가 되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사!”

밀란느 학장이 놓친 벤디 레피의 학적부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특이사항 - 사슴]

#<1 화>

털썩.

손쓸 도리도 없이 마지막 남은 동료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육식 동물 토벌은 무릇 희생이 따르는 여정이었다.

이미 많은 동료의 생명이 스러졌고, 한껏 기세등등해진 백호랑이가 협곡 입구를 가로막았다.

‘이런.’

퇴로를 확인한 내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더 이상 물러날 자리 따위는 없었다.

“한낱 육식 동물이 내 동료를……!”

동료들의 시신을 넘은 나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냈다.

크르릉, 거대한 마력에 감응한 백호랑이가 발을 구르며 포효했다.

짙은 혈 향을 머금은 바람이 협곡 사이사이로 휘몰아쳤다. 대륙의 평화와 안녕이 걸린, 역사로 남을


대서사시의 막이 올랐다.

“뭐야…….”
페트리온 중앙 호숫가. 이곳에 모여 나의 모험기를 듣던 아이가 주르륵,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훔쳤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진짜로 혼자 백호랑이를 무찔렀어?”

“마법으로 백호랑이를 공격했지?”

꼴깍. 마른침을 삼킨 아이들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괜히 뜸 들인 나는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주물렀다.

“아이참, 벤디,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마법을 쏜 거지? 그렇지?”

몸이 단 아이들이 옷자락이 늘어날 만큼 내 몸을 흔들어 댔다.

“어떻게 되긴. 평화를 지켜 냈으니 너희가 호숫가 탐방도 하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하는 거 아니겠니?”

“그럼 벤디 네가…… 이 고구마를 지킨 거나 다름없네?”

감탄한 아이가 꼬챙이에 꽂힌 군고구마를 들이밀었다.

“거봐, 벤디는 엄청난 마법사라니까?”

“역시 마법사의 핏줄!”

“날쌔게 고구마를 캘 때부터 알아봤어. 글쎄, 손놀림이 안 보였대도!”

협곡의 난폭한 지배자, 백호랑이를 마법 한 방으로 무찌르다니.

곧이곧대로 믿은 마을 모험대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 나머지 내 입꼬리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는데, 갑자기 옆으로 누군가가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백호랑이가 웬 말이래요? 벤디 님께서는,”

“쉬잇.”

갑작스러운 몸종의 등장에, 미간을 모은 내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몸종은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외쳤다.

“벤디 님께서는 고양이 한 마리도 못 잡는 진성 사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나는 백호는커녕, 길고양이만 봐도 심정지를 일으키는 순혈 사슴 수인이었다.

“그 소식, 들었나?”

사슴 영역, 페트리온에 흉흉한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페트리온을 다스리는 레피 가문의 직계, 벤디 레피가 사자 수인과 혼인한다는 괴이한 흉문이.

“벤디가 내가 아는 벤디를 말하는 건가?”

그 왜, 종종 상점가에 놀러 오는 특이한 귀족 영애.

“사자 수인과 혼인을?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여기는 사슴 영역이라고.”

“글쎄, 레피 가문 고용인들 입에서 나온 소문이라지 않나.”

“기어코 숙부가 조카를 팔아넘겼군. 쯧, 딱하기도 하지.”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마을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페트리온 모험대 대장, 모니는 급히 아지트로 소집령을 내렸다.

“……말이 돼?”

무거운 침묵을 지키기도 잠시, 분개한 모험대 아이 하나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사자 수인이랑 결혼이라니, 말이 되냐고!”


그 외침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봇물 터지듯 떠들기 시작했다.

“말 안 돼! 그냥 헛소문 아니야?”

“걔네는, 걔네는…… 육식 수인이잖아. 우리 사슴을 잡아먹잖아!”

육식 수인.

사슴 영역에서 금기시되는 존재의 등장에, 아이들을 둘러싼 공기가 경직됐다.

이윽고 그들의 떨리는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벤디!”

안달 난 아이들이 쪼그려 앉은 소문의 당사자, 나를 채근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사자 수인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지? 어른들의 거짓말이지?”

흔들흔들, 여러 명이 밀어 대는 탓에 내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무릎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곧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이야.”

담백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모니가 사색이 된 채 빽 외쳤다.

“벤디, 너 설마 진짜 사자 수인이랑 결혼할 생각이야?!”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먼 곳을 바라봤다.

아지트는 언덕에 위치했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페트리온이 눈에 담겼다.

울창한 밀림이 시가지를 감싸고, 구황 작물이 맛있는 땅.

부모님은 이 아름다운 땅을 다스리는 레피 가문의 가주였다. 대대로 이어진 마법사의 혈통 덕분에 귀족이
된 사례였다.
‘벤디, 이리 오렴.’

부모님은 시가지를 돌며 마법으로 밭에 물을 주거나, 부서진 농가를 수리할 때면 꼭 나를 데려가곤 했다.

‘벤디 너도 크면 우리처럼 멋진 마법사가 될 거란다.’

‘엄마랑 아빠는 별로 안 멋진데?’

‘말본새가 벌써 마법사구나, 우리 벤디는.’

그들과 지낸 어린 나날은 행복한 색깔로 채워졌다.

아홉 살 무렵, 두 분이 불의의 사고로 이승을 등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부모님의 부재로 인하여, 숙부네 가족이 레피 저택을 차지한 이후로는…… 글쎄.

적어도 머릿속에 행복했던 기억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 기존 고용인들이 해고되며 빈자리가 숙부 측 사람들로 채워지고.

‘죽은 듯이 살거라, 이곳에서.’

낯설어진 레피 저택에서, 나는 데리고 있자니 번거롭고 내치기에는 혈통이 아까운. 딱 미운 오리 새끼에


걸맞은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며칠 전, 열아홉 생일날.

‘네 혼처가 정해졌다, 벤디.’

숙부는 대뜸 혼서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 레피 가문과 연이 있는 가문이니, 네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다.’

사자 수인이고, 더 자세한 사안은 나중에 알려 주마. 일방적으로 통보한 그는 무심한 음성으로 설명을
이었다.

‘조금 이르긴 하다만, 너도 이제 성인이니 혼인을 치러도 이상할 건 없지.’


이유 따위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숙부의 아들이 도박 빚에 허덕인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어느 돈 많은 가문에 팔아넘겼다고 추측할 수밖에.

끝까지 나를 요긴한 이익 수단으로 사용한 꼴이었다.

“벤디이!”

비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벤디,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결정된 일인걸. 나는 괜찮,”

잠깐 말을 멈춘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괜찮…….”

울컥. 줄곧 잘 억눌러 온 감정이 지금에서야 요동쳤다.

애초에 레피 가문을 물려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고. 언젠가 내 혼인이 욕심 많은 숙부의 이용


수단으로 사용될 건 예상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자 수인이라니.’

숙부의 결정이 최소한 상식선에는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 안 되잖아.’

자연스레 머릿속에 어리둥절한 사슴과 침을 줄줄 흘리는 사자의 결혼식이 그려졌다.

“……지 않아.”

“벤디, 뭐라고?”
“괜찮지 않아.”

하나도 괜찮지 않아.

속삭이듯 토해 낸 진심을 듣게 된 아이들은 눈을 크게 떴다.

“하기 싫어, 결혼 같은 거.”

애써 참아 봤지만, 이미 가득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눈가를 거칠게 비빈 나는 허공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자 수인이랑. 내가 왜 그래야 돼? 왜? 내가 왜…….”

“벤디…….”

“도망치고 싶어…….”

물에 잠긴 듯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섣불리 위로조차 못 한 아이들이 덩달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나긴 정적이
지나갔다.

“잘은 모르지만…… 어른들이 그랬어.”

이윽고 진지한 표정을 한 모니가 고요를 깨뜨렸다.

“벤디의 숙부는 고얀 놈이라고, 사자 수인이랑 결혼하면 벤디는 죽은 목숨이래. 그러니까 벤디.”

모니는 양손으로 감싸듯 내 손을 맞잡았다.

“도망가.”

“……뭐?”

도망.
짧은 단어가 뭐라고 가슴 한편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 작은 파문은 곧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2 화>

‘도망…….’

두근, 두근.

고요한 울림을 애써 무시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왜? 너는 마법사의 핏줄이라며. 뭐든 할 수 있다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태껏 아이들 앞에서 마법사의 핏줄이라며 으스댔지만, 실은 고구마나 겨우 구울 정도의 마법 실력이니까.

우월한 마법사인 숙부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벤디, 내가 도와줄게.”

그러든 말든, 눈을 반짝 빛낸 모니가 낮게 말했다.

“오늘 밤에 우리 집 뒤뜰로 와. 안 쓰는 낡은 오두막, 알지?”

“…….”

“꼭이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었다.


바스락. 수풀을 가른 나는 낡은 오두막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것을 반복했다. 낡은 문을 여는 게 마치 선택의 기로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벤디, 도망가.’

지금의 한 걸음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한 걸음이지 않을까.

망설이듯 문고리를 만지작거린 나는 새벽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대륙.

이곳에는 뚜렷한 경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 간의 경계.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두 종족은 철저하게 분리된 상태였다.

수인이 짐승보다 사람에 가까운 존재라 해도. 수인 간의 섭식을 엄금하는 법이 있다고 해도.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육식 수인이 초식 수인을 해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어떤 대륙에서는 토끼가 앞발로 흑표범을 다스리며 산다고도 하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람.’

호사가들이나 떠드는 현실성 없는 궤변이었다.

고로, 사자 수인과의 혼담은 곧 연고 하나 없는 사지로 던져지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할 수 있을까…….’

시선을 내린 나는 왼쪽 발목을 옥죈 발찌를 응시했다.

얇은 보석 발찌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어릴 적, 숙부가 선물이랍시고 채운, 위치 추적이 가능한 구속구였다. 지금껏 도망치지조차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참으로 숙부다운 조치였다.

“…….”

족쇄와도 다름없는 발찌. 내 마력으로는 숙부의 마력이 담긴 이 구속구를 깨뜨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상하리만치 실전 마법에 약했으니까. 주야장천 이론 공부를 해도 큰 차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숙부이기에 내가 밖으로 나돌든 말든 방치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마법사의 혈통을 이은 레피 가문 어쩌고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무서워.’

그간 이 구속구를 억지로 깨뜨리려다가 몇 번이나 고통에 몸부림쳤던지.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오두막에서 물러나던 내가 기겁하며 멈칫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지나는 구름이
마치 사자의 머리통처럼 보였기에.

‘저렇게 지독하게 생긴 구름은 또 처음이네.’

바르르 진저리 친 나는 천천히 손을 구속구로 가져갔다.

꼴깍. 마른침 삼키는 소리를 신호로 마력을 흘려보내자 옅은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윽.”

이를 악문 내가 계속해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휘이잉- 태풍 같은 바람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온 숙부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쯧, 성가신 것.’

파직, 파지직.
구속구에서 불꽃이 튈 때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극통이 밀려들었다.

‘귀족다운 생활을 누리게 해 주는 것에 감사하거라.’

그럼 뭐 하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더 이상 숙부의 고분고분한 이용 수단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흐으…….”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거의 혼절에 이르려는 찰나, 챙강, 구속구가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성공…… 했다고?’

이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놀란 마음에 입만 뻐끔거리는데, 끼이익, 오두막 문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벤디, 왜 그래? 안 들어와?”

기척의 주인은 모니였다. 나는 피가 흥건한 발목을 황급히 감추며 둘러댔다.

“으응, 이제 막 들어가려고 했어.”

“안 오는 줄 알았지 뭐야. 빨리 들어와, 어서. 아버지께 들키겠어!”

소곤소곤 채근한 모니가 내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암흑 속에서 한 쌍의 안광이 번득였다.

“뭐, 뭐야.”

타박타박, 이윽고 우람한 갈색 사슴 한 마리가 어둠을 가르며 걸어 나왔다.

사슴의 풍채에 약간 겁먹은 내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거 사슴 맞아?”

“당연하지. 우리 집 사슴 농장이잖아!”

“……진짜 사슴 맞아?”

“벤디도 참, 그렇다니까? 얘는 짐을 나르는 사슴인데, 이름은 해피라고 해.”

겉모습이랑 굉장히 거리가 먼 이름이었다.

푸르릉.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뭔지, 사슴이 사납게 콧김을 뿜어 댔다.

“봤어? 해피는 맨날 성질이야.”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글쎄. 아무튼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아버지가 조만간 팔아넘길 거래.”

천진하게 설명하던 모니는 대뜸 낯빛을 굳히며 안장을 넘겼다. 꼬마가 짓기에 퍽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해피를 타고 도망가는 거야, 멀리멀리.”

“얘를 타고?”

생명줄이라도 붙들듯 안장을 틀어쥔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멀리…….’

최소한, 혼담이 파기될 때까지만이라도 몸을 숨기고 싶었다.

‘초식 수인의 영역은 금세 발각될 확률이 높은데.’

머뭇거린 나는 품에서 얄팍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

[수인 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요강]


얼마 전, 일방적으로 사자 수인과의 혼인을 통보받은 당시. 시가지 구석의 게시판에서 발견하고는
충동적으로 떼어 온 홍보지였다.

숙부의 눈이 닿을 수 없는 곳.

이곳 사슴 영역, 페트리온에서 가장 먼 곳.

내가 있으리라곤 숙부가 상상도 못 할 장소.

‘그런 곳이라면…….’

육식 수인들의 영역. 그곳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갈 곳은 정했어?”

모니의 채근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든 가야지.”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가장 위명 높은 교육 기관, 수인 아카데미라면 아무리 육식 수인의 영역이라도


일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벤디.”

모니는 내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죽지 마.”

잔뜩 찌그러진 표정 덕분에 웃음이 터질 뻔한 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중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몸을 굽힌 나는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모니의 양 뺨을 짚었다.

“죽긴 내가 왜 죽어.”

“고얀 숙부한테, 흑, 잡히면 안 돼.”

“……응.”
“대장의, 흡, 명령이야.”

“명령을 어길 순 없지.”

나는 모니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편지 쓸게. 대원들한테는 대신 인사 전해 줄래?”

모니는 꾸역꾸역 울음을 참으며 내 품에서 고개만 주억였다.

쓰게 웃은 나는 모니의 까치집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중한 친구였다. 부모님이 사라진 후, 텅 빈 페트리온 거리를 채워 준 아이들.

그렇기에 가문 고용인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아이들을 만나러 외출을 일삼았겠지.

어쩌면 이들은 텅 빈 거리가 아닌, 내 마음의 공백을 채워 준 모양이었다.

“고마웠어, 모니.”

마지막으로 모니의 몸을 꽉 안아 준 내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

비로소 작별이었다. 시작의 바람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나는 휙, 해피의 등에 올라탔다.

“악!”

그리고 해피의 몸부림에 튕겨서 짚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훌쩍, 훌쩍. 코를 삼킨 모니가 바닥에 엎드린 나를 향해 말했다.

“해피가 좀 까다로워서 사람을 안 태워.”

“그럼 어떻게 타고 도망치라는 건데?”

불안한 시작이었다.
“해피, 그쪽이 아니래도.”

푸르릉.

“틀렸다는데 당당하게 가슴은 왜 펴.”

끝끝내 해피는 등에 나를 올리지 않았다.

결국 해피의 몸을 수레에 연결한 채, 지도를 보며 겨우겨우 도착한 수인 아카데미 정문.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해피의 인장을 당기며 수레를 세웠다.

‘여기가 아카데미라고?’

성이 아니라?

정문 하나만으로도 주는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끝없는 황금빛 철창을 올려 보던 나는 다시금 문서를 확인했다.

[수인 아카데미 입학시험

결과 통지서]

한 달 전, 사슴 영역을 떠나자마자 들른 초식 수인의 영역.

그곳에 개설된 시험장에서 어영부영 입학시험을 치르긴 했는데.

제아무리 초식 영역이라도 응시생이 두세 명은 있을 줄 알았건만, 나 혼자인 쾌거를 이뤘다.

그것도 모자라…….

[수험번호 129]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내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통지서를 펼쳤다.

[합격 – 수석]
벌벌 떨면서 치른 입학시험에 정말 합격한 것도 모자라, 수석이라니.

어려웠던 이론 관련 부문에서 고득점을 차지했다는데, 뭐가 됐든 현실성 없는 결과였다.

통지서를 꼬깃꼬깃 접어 품에 넣은 나는 정색한 채 팔짱을 꼈다.

‘흠.’

애초에 여기 서 있는 것부터 현실성이 없는데 뭐.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어떡하지.’

막상 입구에 당도하니, 직전까지만 해도 넘치던 자신감이 죄다 달아난 게 문제였다.

과연 육식 수인이 드글드글한 이곳에 발을 들여도 될까.

초식 수인은 단 한 명도 응시하지 않았던 텅 빈 시험장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멀리서 육식 수인을 본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는데, 가까이서 보는 건 아무래도 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사자의 신부 자리를 피하려다가 도리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아닌가 싶은 염려가 밀려들었다.

“……해피, 우리 일단 돌아가서 다시 생각을 해 보자.”

다정하게 제안하는 동시에 해피가 크게 몸을 들썩이며 뒷다리를 휘둘렀다.

“악!”

철퍼덕, 이제 꽤 익숙하게 수레에서 날아간 나는 허둥지둥 옷자락을 털며 일어났다. 저 멀리, 우리를


수상히 여긴 경비들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3 화>

한 걸음, 두 걸음.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툭, 딱딱한 무언가가 내 등을 가로막았다.

정수리 위로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뭐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가로막은 건 머리를 깔끔히 넘긴 장신의 미남이었다.

유독 존재감 강한 외알 안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남자가 먼저 말문을 뗐다.

“벤디 레피 님, 맞습니까?”

사무적인 태도와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하려던 나는 쩍 굳고 말았다.

“저는 학장님의 비서인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학장님께서 입학 전에 은밀히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조곤조곤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열린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내겐 없는 무언가가


반짝였기에.

‘……육식 수인.’

올 게 왔구나.

말로만 듣던 육식 수인의 송곳니였다. 가슴에 손을 얹은 나는 어린 날,

‘벤디, 새겨듣거라.’

부모님이 귀에 때려 박다시피 하던 충고를 떠올렸다.


‘육식 동물을 마주치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단다. 당황하지 말고 일단…….’

뼈와 살이 되는 충고를 속으로 되뇐 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어린 날의 가르침.

“무릎부터 꿇으면 될까요?”

“……예?”

자고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슴일수록 오래 살아남는다는 내용이었다.

수인 아카데미 학장, 밀란느는 깍지 낀 손에 지그시 이마를 묻었다.

“후.”

흘끔. 실눈으로 확인한 벤디 레피의 학적부는 유난히 한 단어가 도드라졌다.

사슴.

설마하니 수인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초식 수인이 있을 줄은. 뭐가 되었든 보통 사슴이 아닌 건 확실했다.

도대체 뭐 하는 사슴일까.

밀란느 학장이 추측 속에서 헤엄치는 사이, 똑똑, 누군가 학장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학장님, 아이작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비서의 목소리였다.

“벤디 레피 님과 함께 왔습니다.”

올 게 왔구나. 내심 긴장한 밀란느 학장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문을 응시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익히 아는 비서가 들어오고, 뒤따라 풍채 좋은 갈색 사슴이 들어섰다.

푸르릉.

방자한 눈빛의 사슴을 맞대면한 밀란느 학장의 눈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예상대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백호 수인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위풍당당한 것이, 과연 예사 사슴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동물형으로 나타난 걸까.

좌우간 갈색 사슴의 기세에 잠시나마 압도당한 밀란느 학장이 손을 내밀었다.

“밀란느 학장일세. 만나게 되어 반갑네, 벤디 학도.”

“학장님, 그쪽은 해피입니다.”

대신 대답한 비서가 제 뒤편을 가리켰다.

“벤디 님은 이쪽.”

장신인 비서에게 완전히 가려져 있던 벤디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제야 진짜 벤디를 뜯어보게 된 밀란느 학장은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돌아보게.”

“……네?”

“그대로 한 바퀴 돌아보도록.”

느닷없는 요구에, 벤디는 망설이다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나풀나풀 흩날렸다.

“제자리에서 뛰어 보게.”
폴짝.

“양팔을 들어 보게.”

만세.

“웃어 보게나.”

대체 뭘 원하시는 걸까.

영문 모를 지시를 차마 거부 못 한 벤디가 히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눈은 부릅뜬 채 입만 웃는


희한한 미소였다.

“자네, 정말…….”

동시에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지은 밀란느 학장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사슴이군.”

밀란느 학장의 푸석푸석한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학적부의 초상화도 초상화였지만, 실제로 대면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벤디의 색소 옅은 밀색 머리카락과 물기 어린 순한 눈동자는 육식 수인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였다.

그뿐인가.

발톱에 살짝 긁히기만 해도 찢어질 듯한 피부하며, 쓸데없이 물렁물렁한 생김새하며.

모든 요소가 육식 수인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할 가능성이 컸다.

‘안 돼, 절대 안 돼.’

일순 아카데미를 누비는 괴물 같은 재학생 몇몇의 낯짝이 밀란느 학장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비단 그 녀석들만 위험한 게 아니지.’


만일 아카데미 내에서 인명 사고라도 터지면…….

심지어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 간의 사고라면 종족 문제로 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악의 가설을 그린 밀란느 학장은 비틀비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앉게.”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깨달은 벤디가 밀란느 학장을 힐끔거렸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수인 아카데미의 학장, 밀란느 에던트.

그녀는 ‘아카데미 학장’이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인자한 인상과는 정반대인, 짧은 머리의 노년


여성이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았으며, 손에 든 궐련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굳이 꼽자면 학장보다는 교관이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눈치를 살핀 벤디가 조심스럽게 소파에 착석했다.

“-벤디 학도.”

“말씀하세요, 학장님.”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초식 수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아카데미일세.”

“…….”

“즉, 재학생과 교직원 전부가 육식 수인으로 이루어진 곳이야. 초식 수인을 만나 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대다수고.”

한 박자 쉰 밀란느 학장이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초식 수인의 몸으로는 위험하다 못해 목숨의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는 곳. 벤디는 그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행위를 하고 있단 의미였다.
“이곳에 자네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소리일세.”

밀란느 학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강 눈치챈 벤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학장이나 학장의 비서와도 시선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는데.

성장기, 그러니까 훨씬 날것의 육식 수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고개 숙인 벤디를 훑은 밀란느 학장이 쿵,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입학을 불허하네.”

“학장님.”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벤디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마나 눈을 매섭게 뜬 밀란느 학장이 턱을 괬다.

“난 말일세, 이래 봬도 이 아카데미를 꽤나 아껴서 말이야. 명성에 흠집이 생길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아.”

“……그 말씀은.”

“자네가 초식 수인인 이상 반드시 문제에 휘말릴 걸세. 굳이 그런 위험 부담을 떠안고 싶지는 않군.”

“위험 부담.”

작게 읊조린 벤디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확인한 밀란느 학장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타일렀다.

“대신 타 아카데미로 추천서를 넣어 주겠네. 초식 수인들이 재학하는 아카데미 중에 가장! 수준 높은


아카데미로.”

“…….”
“아까운 목숨을 잃을 바에야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학장의 은근한 회유를 마주한 벤디가 이를 까득 물었다.

아주 예상 못 한 전개는 아니었다. 코앞에 닥친 위험이 두렵기도 하고.

‘하지만…….’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혼인 상대가 나이 대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초혼이라고 하니, 몹시 괜찮은 상대지.’

숙부에게 잡혀 육식 수인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 않나.

벤디 입장에서는 숙부가 있는 페트리온보다 차라리 이곳이 안전했다.

더군다나 지금쯤이면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초식 수인의 영역을 뒤지고 있을 터였다.

‘돌아가면 더 큰 지옥이 기다리겠지.’

숙부의 시선을 피해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곳.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울타리가 바로 여기, 수인 아카데미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입생 수석이 된 순간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교복 지급!

일인 기숙사!

전액 장학금!

수석이 받게 되는 온갖 수혜가 밀색 눈동자를 금화 모양으로 만들었다.

눈을 감았다 뜬 벤디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네요.”
그녀의 빠른 수긍에, 의아해진 밀란느 학장이 벤디의 낯빛을 살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이리 쉽게 수긍한다고?’

쓸데없이 무표정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 학장님.”

미심쩍게 쳐다보는 밀란느 학장에게서 등을 돌리던 벤디가 잠깐 멈췄다.

“수인 아카데미는 초식 수인의 입학을 금지한다는 교칙이 없지 않나요?”

“……벤디 학도?”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입학을 거부하시고, 정당한 절차 없이 타 아카데미로 보내기 위한 추천서까지


써 주시겠다니요.”

일순 말문이 막힌 학장이 뻐끔뻐끔 입술을 여닫았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밀란느 학장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부정이네요.”

캐리어를 뒤적거린 벤디는 야무지게 접어 둔 지도를 꺼내 들었다.

“저희 사슴 일족은 불의를 목격하면 바로바로 신고하는 습성이 있어서요. 어디 보자, 교육부 위치가…
….”

끄응, 밀란느 학장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하니 초식 수인의 입학을 교칙으로 금지시키지 않은 걸 들먹일 줄은.

‘초식 수인이 입학 신청을 할 거라 누가 예상이나 했을꼬.’

애당초 사슴 일족이 수인 아카데미 학장실에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됐다.

나아가 저 돌아 버린 사슴은 교육부가 여기구나, 지도까지 짚어 가며 해피라는 근육 사슴과 상의하는


중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즉시 교육부에 진정서라도 넣을 기세였다.

‘이런 빌어먹을.’

만일 정말로 교육부에 항의라도 해 버린다면.

지금껏 밀란느 학장이 대외적 이미지에 신경 써 온 만큼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수인 아카데미가 다 뭔가?’

순간 웬 꼬장꼬장한 영감탱이 한 명이 밀란느 학장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의 추락만 고대하는, 옆


대륙 아카데미 학장이었다.

‘벨헬름 아카데미에 비하면 잡스럽기 짝이 없군. 이번에 학생회장이 된 우리 토끼는 말이야…….’

수인 아카데미와 밀란느 학장의 대외적인 망신이냐.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느냐.

두 선택지 중에서 밀란느 학장의 끊임없는 저울질이 시작됐다.

#<4 화>

쉬운 결정이 아닌 만큼 질겅질겅, 궐련을 씹는 횟수만 늘어났다.

초조하게 타들어 가는 궐련을 곁눈질한 벤디가 몰래 미소 지었다. 이제 학장의 고민을 끝내 줄 마지막 한


방을 날릴 차례였다.

“해피, 이만 가자.”

과장되게 해피의 안장을 끄는 동시에 벤디는 절망했다. 이놈의 갈색 사슴이 또 말을 듣지 않고 석상처럼


딱 버티고 있기에.

흡, 흡.
숨넘어가도록 해피의 안장을 당겨 봤자 제자리에서 발만 질질 끄는 꼴이었다.

멋지게 돌아서며 학장을 안달 나게 만들겠다는 벤디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벤디 학도.”

학장의 부름에 움찔, 어깨를 떤 벤디는 짐짓 태연한 척 고개를 틀었다.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밀란느 학장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교육부로 가서 깽판을 치는 꼴을 볼 바에야 눈앞에 두는 편이 나았다.

벤디 정도면 불의의 사고에 휘말려도 학장의 선에서 덮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신분이니까.

그리고 육식 수인만 가득한 교내 분위기에 못 이겨, 진저리 치며 뛰쳐나갈 가능성도 농후했다.

“입학을…….”

그 가능성에 걸기로 결심한 밀란느 학장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허가하겠네. 교육부에는 얼씬도 않겠단 조건으로.”

“정말요?”

반색한 벤디가 양손을 모아 쥐었다.

“감사합니다, 학장님. 조용히 학업에만 열중,”

“대신.”

“……?”

밀란느 학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벤디를 훑어 내렸다.

도자기 같은 하얀 피부하며, 우람한 사슴 하나 못 끌어당기는 악력하며.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사슴인 저 외관 정도는 숨겨야 하지 않을까.


판단 내린 그녀는 대뜸 제 얼굴 앞에서 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얼굴.”

“얼굴…… 이요?”

“그래, 그 얼굴.”

어리둥절해진 벤디가 제 뺨을 반죽 주무르듯 문질렀다.

한숨 쉰 밀란느 학장은 서랍에서 가느다란 실 팔찌 하나를 꺼냈다. 외형을 바꿔 주는 마도구였다.

“그 얼굴부터 어떻게 해 보자고.”

쾅!

벤디의 숙부, 웬스턴은 소득 없는 보고서를 짜증스레 내려 뒀다.

양 영역, 말 영역, 염소 영역, 카피바라 영역, 토끼 영역. 하다못해 잡식 쪽인 다람쥐나 두더지까지.

벌서 한 달째 초식 수인의 영역이란 영역은 다 헤집었지만, 벤디 레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증발이라도 하여 사라진 것처럼.

“벤디 레피…….”

심부에서부터 쥐어짜 낸 음성이 흘러나왔다.

속이 타들어 갈 대로 타들어 간 웬스턴이 화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언제나 얌전한 얼굴로 웬스턴의 의견을 따랐기에,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가 직접 제작한 구속구. 어린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발찌를 끊고 달아났다.

이는 벤디 레피의 마력이 수준급에 다다랐다는 의미인데.

‘제 주제에 어떻게…….’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웬스턴이 눈을 뒤룩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론은 몰라도, 실전 마법에 있어서는 분명히 일반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는데.

“제길!”

여태껏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든가, 다른 조력자가 있었다든가. 둘 중 하나였다.

웬스턴이 본바, 벤디 레피의 마력 흐름은 크게 변동이 없었기에 확률은 후자에 가까웠다.

‘조력자.’

조력자, 조력자라…….

그러나 벤디 레피의 탈출을 도울 실력자는 고사하고 그럴 고용인조차 이 저택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는 찰나,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들어가겠습니다.”

마침 웬스턴의 수족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흘끔, 곁눈질로 화병의 잔해를 살핀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벤디 님과 혼담이 오간 가문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민감한 사안이 나오자 웬스턴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벤디 레피의 소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에, 현재까지 연락을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슴 한편이 무거워진 웬스턴이 마지못해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세 달의 말미를 준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혼담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를 기피한다면, 혼담을
파기하겠다는 연통입니다.”

“…….”

“그리고, 벤디 레피를 조건으로 건네준 15 억 실링 또한 즉시 돌려받겠다고,”

“성질 급한 사자 새끼들이!”

쾅, 웬스턴이 듣다못해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눈에는 핏발이 붉게 선 상태였다.

“그 많은 돈을 세 달 안에 어떻게 구하란 말인가!”

몇 달 전, 사자 영역의 듣도 보도 못한 가문에서 뜬금없이 혼서를 보내왔다.

조건은 레피 가문의 순수 혈통.

혼인 지참금은 30 억 실링.

저택은 이미 저당 잡힌 상태에, 아들의 도박 빚에 허덕이고 있던 웬스턴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냉큼 혼담을 수락했다.

눈이 먼 것도 먼 거지만, 어차피 크게 이용 가치 없던 벤디 레피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15 억 실링을 갑자기 어디서…….”

앓는 소리를 낸 웬스턴이 손톱을 딱딱 물어뜯었다.

사자 측 가문에서 선금으로 내민 15 억 실링. 그 돈은 빚을 갚느라 이미 한 푼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혼담 파기로 분노한 사자 측 가문에서 당장 돈을 돌려 내라고 한다면…….

저택은 물론이고 레피 가문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자비한 육식 수인인 것도 모자라, 조사한바 사자는 말이 좋아 호전적이지, 막무가내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일족.

그만큼 보복을 해 올 가능성까지 존재했다.

‘빌어먹을.’

웬스턴의 연갈색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들이 내건 세 달의 말미, 그 안에 사라진 벤디 레피를 찾아야만 한다.

반드시.

부르르. 교탁 앞에 선 나는 왠지 모를 소름에 잘게 몸을 떨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꼭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던데.

입맛을 다신 내가 얌전히 뒷짐 졌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입학이 고작 하루 늦었을 뿐인데, 왜 자기소개 같은 번거로운 일을 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자기소개는 무슨.

뻘쭘한 마음에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밀색 머리카락이 아닌, 낯선


주홍빛이었기에.

‘아 참, 바꿨지.’

머리카락은 진한 주홍색이었으며, 눈동자도 같은 빛깔의 주홍색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여우 수인으로의 둔갑.

며칠 전, 밀란느 학장님이 내민 제안은 바로 가짜 신분이었다.

‘입학 전에 최소한 그 얼굴이라도 바꿔 보자고.’

‘얼굴을요? 왜요?’
‘자네 얼굴엔 문제가 몹시 많지.’

학장님이 내민 손거울 속에는 19 년간 보아 온 익숙한 얼굴이 자리했다.

남의 얼굴더러 문제라니.

심오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자, 학장님이 덩달아 심오한 낯빛으로 말했다.

‘그 얼굴로 입학하면 바로 이승을 등지지 않을까 싶네만.’

육식 수인 중에서 가장 머릿수가 많은 여우 수인으로 종족을 바꾸면, 튀지 않고 묻혀 가는 게


가능하다는데.

마침 육식 수인 사이에선 레피란 성도 흔하기에, 신분 조작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지원해 주는 건 여기까지일세. 그로 인한 결과는 전부 자네가 짊어질 책임인 게지.’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내 입장에서는 이득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은 육신의 안전도 보장되고, 숙부에게 발각될 확률도 더욱 낮아지니까.

‘할게요, 여우 수인.’

결정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마도구로 외모를 바꾸고, 학적부를 바꾸고.

그리고 학장님 나름의 배려인 건지, 족제비 등 비교적 순한 육식 수인이 모인 X 클래스로 입학이
결정됐다.

“…….”

그렇게 교탁 앞에까지 서게 된 현재. 나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정적이 길어진 탓인지, 교수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벤디 학도?”
아차.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정면을 바라봤다.

주홍색, 적색, 금색, 녹색.

형형색색 화려한 빛깔의 눈동자가 죄다 내게 꽂힌 상태였다.

“쟤가 수석이라며. 여우 같은데?”

“딱 봐도 여우네.”

“뭐야, 별거 없는 종족이잖아. 어떻게 수석을 차지했대?”

속삭임에 은근한 실망이 묻어났다. 확실히 흔하디흔한 여우 수인은 흥미를 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육식 수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점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안 돼, 떨지 않기로 했잖아.’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육식 수인 따위에게 움츠러드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 들판이 아름다운 사슴 영역을 다스리는 레피 가문의 적통 후계.

‘떨지 말자.’

담백하게 이름만 말하고 들어가면 되는 쉬운 절차였다.

튀지 않게, 의연하게.

“반가워요, 저는-”

다짐하며 입을 떼는 순간, 어느 학생의 조용한 음성이 귀를 때렸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 안 나?”

“-별로 맛이 없습니다.”
공포 앞에서는 위대한 레피 가문의 적통 후계도 말실수를 하는 법이었다.

들었어? 맛없단다.

육식 수인들은 몸을 틀어 나를 보며 노골적으로 키득거렸다.

자리에 착석한 나는 양손을 모은 채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없는 듯 조용히 지내긴 무슨.’

시작부터 내가 바로 먹이라며 공작새처럼 뽐내고 만 처지였다.

“얘.”

순탄하게 망해 가고 있음을 직감하는데, 콕콕, 누군가가 나를 가볍게 찔렀다.

그 손길을 눈치채지 못한 나는 그저 묵념을 지속했다.

“그렇게 맛없어 보이진 않는데.”

무시무시한 언사에, 번쩍 고개를 들자마자 화려한 인상의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앞자리에 앉은 클래스메이트인 모양이었다.

“나는 라일라야.”

“…….”

“너 수석이라며?”

내 쪽으로 반쯤 뒤돈 그녀가 씩 웃어 보였다.

“나도 수석이야, 뒤에서.”

몹시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다.
#<5 화>

그보다, 문제는 여자가 말할 때마다 얼핏얼핏 보이는 송곳니였다.

제발 말 걸지 말아 줄래.

애써 눈을 피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네 얼굴이 무서워서 그런다.

그렇게 말하진 못한 내가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훔쳤다.

“그런데, 너한테서 조금 희한한 냄새가 나는데.”

약간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빼며 킁킁거렸다.

“음, 달달한 냄새?”

육식 수인은 코가 좋구나.

몰래 혀를 찬 나는 혹시 몰라 챙겨 온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페트리온 모험대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벤디, 그거 알아? 육식 수인들도 우리 사슴 영역 고구마에 환장한대!’

스윽, 말없이 종이봉투를 내밀자, 여자는 넋 나간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군고구마……?”

이 냄새를 말한 게 아닌데. 작게 중얼거린 여자는 고구마를 꺼내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중얼거림을 미처 듣지 못한 나는 만족스럽게 턱을 괬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고구마를 우물거리는 동안은 송곳니도 안 보이고,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있잖아, 그거 알아?”

생각보다 맛있는데. 고구마를 처음 먹어 보는 양,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여자가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수석은 자동으로 학생회장 후보에 올라간대.”

“……?”

“그러니까 너도 후보로 올라갈 거란 말이지.”

학생회장 후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일단 머리가 되잖아, 머리가.”

여자는 검지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가리켰다.

그녀가 설명하기를, 이곳 수인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은 꽤나 권위 있는 자리였다.

아카데미에서 영향력을 가진 일족이란 의미도 됐으며, 일개 학생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대륙의 대소사에


말을 얹을 권한을 받기도 했다.

아카데미 건물 신설 결정권이나 학자금 관리 같은 실리적 권한도 빵빵했다.

과거에는 학생회장 자리를 얻기 위해 알력 싸움까지도 벌어졌다는데. 그럴 만했다, 귀한 신분의 자제가


많은 이곳에서는 자존심 싸움과도 다름없으니까.

한마디로 학생회장 선거는 잘난 육식 수인들의 전쟁터란 의미였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네.’

따라서, 후보에 올라 봤자 내가 뽑힐 일은 전혀 없다는 소리.

‘조용히 지내게.’

밀란느 학장님의 엄중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얘,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불만 섞인 여자의 목소리에, 아차 싶었던 내가 연거푸 식은땀을 훔쳤다.

“너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한 거 알아? 나 혼자 떠들고 있잖아.”

조용히 지내려면 클래스메이트와 아예 척을 져선 안 될 일.

그러나 아직은 육식 수인의 송곳니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무례하지 않도록 대화를 끝맺자.

겨우 결심한 내가 여자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은 순간, 그녀가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송곳니가 눈앞까지


확대되듯 다가왔다.

“수석, 왜 말이 없냐니까?”

“입 다물어.”

그렇게 사회성과 친구 하나를 잃고 말았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도 안 하지를 않나. 어깨를 다독이며 입 다물라고 하질 않나.

“쟤 그때 대꾸하는 거 봤지? 진짜 제정신인가?”

“아서라, 상종하지 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나는 X 클래스에서 겉도는 외로운 도토리가 되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클래스메이트들과 힘들여 교류하지 않고 학업에 집중하면 되니까.

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수인 아카데미는 명성만큼이나 넓고 화려한 규모를 자랑했다.

검붉은 첨탑이 높이 치솟은 본관하며, 체육관 또한 둥근 돔형으로 불필요하리만치 웅장했다.


도서관은 1 관, 2 관 등 숫자를 매길 정도로 많았고, 연구실이나 실험실은 열 손가락에 꼽기 힘든 수준.

고로, 잘만 피해 다니면 육식 수인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덕분에 나는 쥐 죽은 듯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임무에 성공했다.

늘 벽에 밀착해서 다니며, 이동 시에도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했다. 밤중에 외출하는 일도 최대한


줄였다.

그렇게 육식 수인과의 치열한 사투를 이어 간 지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재학생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죠? 드디어 학생회장 선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학생들을 따라 광장에 모인 나는 단상에 선 사회자를 올려다봤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고 하는데요. 아주 간발의 차로 결정되었죠.”

아아. 짧고도 강한 울림이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빨리 좀 끝나라.’

뒷짐 진 나는 몰려든 육식 수인들을 피해 구석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요 며칠 저놈의 선거 유세 때문에 아카데미가 어찌나 떠들썩했던지.

‘제가 학생회장이 된다면!’

물구나무를 서서 교정을 걸어 다니는 건 약과에,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지를 않나.

‘말을 타고 등교할 수 있도록 교칙을 바꾸겠습니다!’

백마 수십 마리를 타고 선거 유세를 다니는 경우도 왕왕 목격됐다.

웬만한 도시 축제의 배는 되지 않을까.

‘규모도 크지.’

으. 몰래 표정을 구긴 나는 단상 쪽의 게시판을 바라봤다.


[기호 18 번, 벤디 레피]

입후보자에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저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어차피 학생회장은 S 클래스.

선거 기간 동안 학생들이 입을 모아 떠들던 말이었다.

오직 힘이나 두뇌, 가문, 돈.

약육강식이 팽배한 이곳에서 세 가지를 모두 가진 이들이 모인 클래스가 바로 S 클래스였다.

수인 아카데미는 입학순보다는 가문이나 힘의 여부가 클래스를 좌우하는 곳이었다.

필수 교과목만 빼면 수강하고 싶은 강의를 자유롭게 듣는 곳이기에, 상급생 하급생의 구분도 크게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올해도 S 클래스에서 학생회장이 나올 거란 게 학생들의 정론인데.

‘학생회장이고 뭐고.’

그저 이대로 숙부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 지내다가, 졸업해서 홀로서기에 성공하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좋아. 다시금 의지를 다진 내가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었다.

“선출 결과, 학생회장.”

그래, 몇 년만 잘 버티고.

“X 클래스의,”

조용히 졸업하면 모두가 바라는 해피엔딩이야.

“벤디 레피.”

뭐?

주먹을 말아 쥐고 있던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의 털을 쭈뼛 곤두세웠다.


‘방금 내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상을 올려다보자, 사회자 또한 혼란스러운 얼굴로 결과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회자는 저도 모르게 확성 마도구에 대고 중얼거렸다.

“……벤디 레피라고? X 클래스에 입학한 그 여우 수인?”

그거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사색이 되다 못해 낯빛이 까맣게 변한 내가 도리도리,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침 나와 시선이 마주친 사회자가 당황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도리도리, 으쓱.

도리도리, 으쓱.

도리도리와 으쓱 나부랭이로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식은땀을 훔친 사회자는 뒤이어 개표를 담당한 학생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저희도 몰라요.

그들은 개표 결과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팔로 엑스를 그렸다.

“선출 결과가…….”

무언의 대화를 끝낸 사회자가 큼, 헛기침을 했다.

“선출 결과가 참…… 이례적이네요……. 신입생이 학생회장으로 뽑히는 건 유례없는 일인데…….”

덩달아 내 입도 천천히 벌어졌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마, 받아들이지 말라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데.

모든 걸 갖춘 S 클래스 일원을 두고, 존재감이 희미하다 못해 사라져가는 내게 왜 표를 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째서?’

머리 굴려 봤자 육식 수인들의 알량한 머릿속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넋이 나가 버린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기숙사에 들어섰다.

당선된 이후 어떻게 기숙사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흐물흐물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눈에는 초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

멀거니 허공만 응시하던 나는 문득 전신 거울을 돌아봤다.

목에는 축하 화환이 걸려 있고, 품에는 학생회장 임명장을 든 상태였다.

이 또한 언제 받은 건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임명장에 쓰인 학생회장이란 글자가 가슴을 짓눌렀다.

가져본 직책이라곤 페트리온 모험대 1 소대 행동대장에 불과한 내게는 너무나 무거운 단어였다.

‘왜 나야?’

부글부글,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돌연 화환과 임명장을 팽 소리가 날 만큼 내팽개친 내가 벌떡 일어났다.


‘왜!’

팡, 분노에 찬 주먹이 거칠게 베개를 가격했다.

“왜-!”

팡, 파팡, 아무리 베개를 때려 봤자 나오는 보상은 깃털뿐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제대로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베갯잇에 얼굴 자국이 날 정도의 눈물만
흘렸을 뿐.

결국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아카데미의 모든 재학생이 모인 광장.

“이상, 연설을 마치겠소.”

밀란느 학장님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다음은 새로운 학생회장으로 임명된 여우 수인, 바로 이 벤디


레피의 당선 소감이 있을 차례였다.

후.

심호흡한 나는 의연하게 계단을 올랐다.

단상으로 올라서자마자 보기 힘든 장관이 펼쳐졌다.

‘호랑이, 사자, 늑대……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내가 살던 사슴 영역, 페트리온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맹수들의 향연이었다.

더군다나 나를 보는 육식 수인들의 눈초리는 하나같이 아니꼽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내가 호의로 인해 학생회장이 된 게 아니란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

무심하게 둘러본 나는 확성 마도구를 점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제아무리 육식 수인밖에 없다 해도 고작해야 또래.


더군다나 지금은 사슴도 아닌, 같은 육식 수인인 처지기에 기죽을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많은 육식 수인 앞에서 움츠러드는 건 사슴 일족의 망신이요, 나아가 초식 수인 전체를


욕보이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지긋지긋한 육식 수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는 연설문을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벤디 레피, 나는 긍지 높은 사슴 수인이다. 나는 긍지 높은,

“사, 사슴 여러분.”

아, 망했어요.

#<6 화>

학장의 비서는 제 속도를 따라 종종걸음 치는 벤디를 힐긋 뒤돌아봤다.

밀란느 학장은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벤디를 학장실로 호출했다.

정례 연설에서 저지른 말실수 때문인지, 아니면 학생회장이 되어 버린 벤디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비서의 예상으로는 후자에 가까웠다.

흘끔, 흘끔.

저도 모르게 곁눈질하던 비서가 괜히 벤디를 불러 세웠다.

“벤디 님?”

“네, 말씀하세요.”
“아뇨,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행히 벤디는 아까의 실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차분한 태도였다.

내심 안심한 비서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학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학장실 앞에서 멈췄다.

내심 저를 호출한 이유가 궁금했던 벤디는 비서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학장과 제 또래로 추정되는 남자가 보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발견한 벤디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누구지?’

남자는 헐렁한 쥐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카데미에서 지급하는 니트의 일종이었다.

이를 미뤄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란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다.

웃을 때마다 남자의 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으며, 움직임에 따라 결 좋은 은색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얼핏 인형으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학생이었다.

일편, 광장에서 학장실로 돌아온 밀란느 학장은 참담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

조금 전, 오른팔과 오른발을 함께 움직여 단상에 오른 벤디 레피는 아주 훌륭한 연설을 선보였다.

단 한 마디로 육식 수인들을 사슴으로 만드는 연설을.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수진마저 꺽꺽 웃느라 후에는 제대로 된 정례 연설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진실을 아는 밀란느 학장과 비서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레넌.”

밀란느 학장의 떨리는 시선이 소파에 널브러진 남자에게 머물렀다.

“레넌, 그만 웃거라.”

“…….”

“속도 없는 놈! 시국이 이런데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남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뒤이어 누구보다 진중한 낯을 한 채 연설하듯 손을


그러쥐었다.

“사, 사슴 여러분.”

일순 침을 튀길 뻔한 밀란느 학장은 급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틀었다. 살짝 드러난 옆모습은 광대가 불룩


치솟은 상태였다.

“아니…….”

비장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남자의 다음 대사가 이어졌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가슴 부근을 짚으며.

“그, 여러분은 육식 수인이시고요. 제가 사슴, 아니 여우입니다.”

푸핫. 결국 폭소를 참지 못한 밀란느 학장이 무너지듯 탁상에 엎드렸다.

잇따라 웃음이 터진 남자 또한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파에 쓰러졌다.

까르륵. 그들은 미친 듯이 웃느라 가까이 다가온 기척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학장의 비서가 양손으로 벤디의 귀를 살포시 덮었지만, 이미 모두 들어 버린 후였다.

“베, 벤디 학도. 언제 온 겐가?”


갑작스러운 벤디의 등장에 장난 좀 작작 치거라, 하며 괜히 남자를 타박한 밀란느 학장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 봤자 벤디는 으르렁 소리만 안 냈지, 이미 한 마리의 야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육식


수인의 탈을 쓴 사슴다웠다.

‘저런…….’

흘끔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핀 밀란느 학장은 한층 시름이 깊어졌다.

사슴도 사슴이지만, 어설프게 다린 티가 팍팍 나는 교복이 걱정을 더했다.

입학한 지 겨우 한 달 남짓 된 신입생에게 학생회장의 권력이 넘어가다니.

제멋대로 올라가는 눈썹을 간신히 내린 밀란느 학장이 말문을 뗐다.

“학생회장이 된 걸 축하하네. 일 년 동안 수고해 줘야겠어.”

“저를 대체할 적임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학장님. 저는…….”

나, 사슴, 사슴.

학장실에 자리한 정체 모를 남자를 의식한 벤디가 입만 뻐끔거렸다.

밀란느 학장은 오동통한 붕어 같은 입 모양을 노골적으로 외면했다.

“안타깝지만 안 되네.”

학생들의 직접 투표로 이루어 낸 결과이기에 번복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 경력은 마을 모험대 행동대장이 다라고요.”

“오, 그것참 듬직한 경력이군.”

“학장님!”

“학생들의 의사가 반영된 자리를 내 독단으로 바꿀 순 없어.”


강경하게 거절한 밀란느 학장이 덧붙였다.

“잘 듣게, 결정을 무르면 학생들이 반발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이곳에서 학생회장은 그런 자리야.”

“사퇴하는 건요?”

“당선되기 전에 후보일 때 사퇴했어야지. 자퇴 외에 다른 방법은 없네.”

학장의 매서운 표정을 마주한 벤디가 빈 깡통처럼 쭈그러들었다.

‘정말 당선될 줄은 몰랐지.’

도저히 홀로 육식 수인들을 어우를 자신이 없었다. 당연히 그럴 만한 재주 또한 없고.

그동안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림자처럼 벽에 붙어 다닌 덕분이었다.

이제 겨우 육식 수인을 보아도 무릎 꿇지 않을, 딱 그만큼만 적응했는데.

“벤디 학도.”

밀란느 학장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벤디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지, 곧 가루가 되어 사라질 듯 착잡한 몰골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찝찝하게 입맛을 다신 밀란느 학장은 여전히 소파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잡아끌었다.

“너무 걱정하진 말게. 이 미친놈이, 아니, 이 학도가 당분간 벤디 학도의 호위를 맡을 걸세.”

“호위요?”

“그래. 레넌, 어서 이리 오거라.”

밀란느 학장에게 멱살을 잡히다시피 끌려온 남자가 벤디 앞에 섰다.

그와 마주 서게 된 벤디는 일순 숨을 멈추었다.

최악의 첫인상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사슴 여러분을 연기한 육식 수인은 미모 하나로 나라를 뒤흔들
만큼 아름다웠기에.
“자, 인사 나누게.”

밀란느 학장은 달래듯 벤디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레넌이라고, 백호 수인이지. 앞으로 벤디 학도의 신변을 책임져 줄 게다.”

‘백호 수인이라고?’

으.

꺼림칙해진 벤디가 레넌을 살폈다.

기껏 사자를 피해 왔는데 이번에는 호랑이라니.

사슴인 제 정체를 고려하여 학장 나름 호위를 붙여 주는 것 같은데. 백호와 함께 다니는 게 과연 호위일까


싶은 염려가 밀려들었다.

더욱이 레넌은 청순한 겉모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형용할 수 없는 껄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위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태까지 마주친 다른 클래스메이트나 육식 수인들과는 결이 달랐다.

상급 맹수. 본능적으로 경계하던 벤디는 곧 레넌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학장님이랑 약간 닮은 느낌인데?’

힐끔. 벤디가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밀란느 학장이 부언했다.

“손주놈일세.”

역시나. 밀란느 학장이 보증한 육식 수인이기도 하니, 없는 용기를 끌어 올린 벤디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레넌은 그저 가만히 벤디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서서히 옮겨진 그의 물색 눈동자가 벤디의 주홍색 눈동자에 머물렀다.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던 레넌은 밀란느 학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한 시간 전, 레넌을 호출한 학장은 휙, 대뜸 벤디 레피의 학적부를 내밀었다.

‘당분간 벤디 레피, 이 학도를 호위하거라.’

터무니없는 명령이었으나, 학장이 내민 조기 졸업이란 조건에 혹해 수락하고 만 실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여우가 약하다지만 호위까지 필요할 일인가?’

‘정확히는 호위를 겸한 감시지.’

‘감시?’

‘그래, 학생회장의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대충 회상을 마친 그가 목을 까딱이며 뭉친 근육을 주물렀다.

일개 여우에게 학생회장이란 권한이 넘어간 게 걱정일 순 있지만, 감시까지 붙이는 건 지나친 감이 있는데.

떨떠름한 밀란느 학장의 표정을 미루어, 벤디 레피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뭐…….’

호위든 감시든 상관없지.

자신은 조기 졸업이란 소정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니, 각자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벤디는 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였다. 슬슬 팔이 아플 때가 되었는데,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허공에서 어색하게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본 레넌이 다시 벤디를 마주 봤다.

‘-이게 여우라고?’

흔히 아는 여우 특유의 인상이긴 한데. 어딘지 제멋대로 생겨 먹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우?’

코와 입술은 둥글둥글한데, 눈꼬리만 억지로 끌어 올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멍한 표정도 조금 거슬렸다.

일편, 그가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벤디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왜 이렇게 빤히 쳐다봐?’

무언가 냄새를 맡기라도 했나.

벤디는 살짝 곁눈질로 밀란느 학장과 비서를 살폈다. 그들 또한 레넌의 침묵이 걱정스러운지, 굳은


낯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들킬 리 없으니, 아무런 걱정 말아요.

입 모양으로 두 사람을 안심시킨 벤디는 긴장을 누르며 다시 레넌을 올려 봤다.

사슴인 사실을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도구의 마법이 풀린 게 아닌 이상, 자신은 현재 완벽한


여우의 모습이니까.

‘이 백호가 무슨 수로 알아내겠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벤디가 숨 막히는 침묵을 뚫고 레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가워요.”

쿵, 쿵, 다잡은 마음과 달리 심장은 급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저는 벤디 레피예요. 여우 수인이고요.”

쿵, 쿵, 쿵.

“앞으로 잘 부탁드,”

“그거같이 생겼네.”
곧 내내 다물려 있던 레넌의 입술이 열렸다.

“사슴.”

덜컥. 벤디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나, 여기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까.

#<7 화>

학생회실이 꾸려지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학생회장 벤디 레피]

심정을 복잡하게끔 만드는 명패를 만지작거린 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회장석에 마련된 의자는 몹시 푹신했으나, 현재는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레넌 에던트와


학생회실에 남겨진 상황이니까.

‘사, 사슴 여러분.’

실수를 연기까지 하며 놀리고 들지를 않나. 정말이지 최악의 첫인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최악인 건, 학생회실에 단둘만 남겨진 지금 이 순간이었다.

백호 수인과.

단둘이.

으.

미간을 구긴 나는 팔락팔락, 심오한 표정으로 법전을 뒤적였다.


아주 옛날, 수인 간의 영역이 분리되기도 전.

여러 일족이 뒤섞여 살던 시절엔 끔찍한 사고가 잇따랐다고 한다. 바로 육식 수인들의 우발적인 초식 수인


사냥.

수인은 이지가 있는 인간이지만, 본능 또한 함께 존재하니까.

육식 수인은 본능적으로 초식 수인을 쫓았고, 초식 수인은 본능적으로 육식 수인을 꺼렸다.

그리하여 생긴 법이,

[대륙법 제 563 조. 수인 간의 포식을 엄금한다.]

나는 조금 오싹한 법조가 적힌 면을 만지작거렸다.

갈등이 거듭될수록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은 철저히 분리되었고, 세월을 걸쳐 우리 세대는 육식 수인을


설화쯤으로 여기는 수순까지 이르렀다.

‘엄마, 이 그림은 뭐게?’

‘육식 동물인 것 같긴 한데…….’

‘호랑이잖아, 하얀 호랑이. 근데 얘 같은 육식 동물은 우리가 맛있게 보일까?’

‘아마도?’

‘그럼 육식 수인은?’

‘어, 글쎄……?’

‘엄마는 아는 게 뭐야?’

‘야.’

‘그러고 보니…….’

상상만 하던 육식 수인과 함께 있는 게 새삼스러워진 나는 슬그머니 레넌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액체처럼 소파와 한 몸이 된 그답게, 교복 타이는 저 멀리 던져 두고 온 행색이었다.

덜렁 걸친 쥐색 니트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자마자 움찔 굳고 말았다. 레넌과 시선이 부딪히고 말았기에.

황급히 시선을 피한 나는 법전에 고개를 박았다.

‘아무리 호위라 해도 학생회실에서까지 같이 있을 필요가 있나?’

뭐가 됐든 레넌은 무서운 육식 수인이었다.

맹수 특유의 나른한 움직임도 그렇고, 언뜻언뜻 비치는 눈빛도 날카로웠다.

가장 난감한 건, 여우 행세를 하는 중인 이상 무서워도 무서운 티를 낼 수 없는 점이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레넌의 저음이 귓가를 긁었다.

“회장.”

낯선 호칭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계속 법전에 고개를 박은 상태를 유지했다.

“벤디 회장.”

“네?”

소스라친 내가 뒤늦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 편하게 해도 되는데. 일단은 내가 호위이기도 하고?”

레넌의 오만한 말투 덕분인지 “내게 하대하라.” 따위의 명령으로 각색되어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하대라니. 밀란느 학장님의 손자라면, 맹수네 동네에서는 최소 귀한 도련님일 게 분명한데.

내심 당황한 나는 심중을 읽기 위해 레넌을 곁눈질했다.

“하대가…… 제가 아는 하대가 맞나요?”

“하대에 다른 의미가 또 있나?”


턱을 긁적인 레넌은 의도 따위 없다는 듯 청아하게 웃어 보였다.

심호흡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과거 초식 수인을 핍박했던 육식 수인을 하인처럼


거느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주 오만하게 하대하는 거야.

“그러시다면 지금부터 말을 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극존칭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혀는 뇌의 명령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쭙고 싶은 게, 아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괴감에 몰래 몸부림친 내가 이번에는 먼저 말문을 뗐다.

“왜 내가 학생회장으로 뽑힌 거야?”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하나하나 실마리를 풀어 가야만 했다.

“아직도 몰랐어?”

게으름뱅이처럼 소파를 구르던 레넌이 돌연 자세를 바로잡았다. 굳은 그의 표정처럼 덩달아 진지해진 나도


눈썹을 모았다.

“벤디 회장이 뽑힌 이유는…….”

드디어 본론이구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

“내 역할은 호위까지만.”

그럼 왜 물어보라고 하는데.

청순한 얼굴 말고는 딱히 쓸모없는 호랑이였다.


콧잔등을 움찔움찔 떤 나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째깍째깍, 견디기 힘든 어색한 침묵이 길어져만 갔다.

육식 수인과 밀폐된 공간에 단둘. 시간이 흐를수록 애써 묻어 둔 두려움이 발끝부터 피어올랐다.

심지어 저 청순한 호랑이는 어제부터 알게 모르게 은근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뭔가 눈치챈 거 아니야?’

괜한 노파심에 머리카락을 확인했지만, 손에 잡힌 건 밀색이 아닌 선명한 주홍색이었다.

내심 불안해진 나는 연신 혀로 입술을 쓸었다.

“회장.”

그때 턱을 괸 레넌이 물색 눈동자를 반달로 접었다. 초승달처럼 아름답지만 이상하리만치 위험하게


느껴졌다.

“말씀하세요, 아니 말해 봐.”

“알잖아, 그거.”

“알다니, 뭐를?”

“육식 수인 사이에선 유혹하는 행위인데.”

톡톡, 그가 검지로 입술 부근을 가볍게 두드렸다.

“……?”

“혀로 입술 쓰는 거.”

“아.”

너희 맹수네 구애 문화를 내가 어떻게 알아.

이후 나는 어디서든 절대 혀로 입술을 쓸지 않았다. 절대.


새도 잠든 깊은 새벽.

은밀히 기숙사를 나선 나는 본관과 멀찍이 떨어진 마구간에 다다랐다.

“해피, 어디 있니?”

램프를 든 팔을 뻗자 주홍색 불빛이 마구간을 밝혔다.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둠 속 갈색 사슴을 발견하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저건 사슴이야 괴수야.’

마구간의 주인인 말들을 밀어내고, 명당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저 근육질 사슴을 보라.

심지어 처음 봤을 때보다 약간 살이 오른 대장부 같은 모습이었다.

“지낼 만한가 봐? 간식 좀 가져왔, 앗!”

푸르릉, 콧김을 뿜은 해피는 아부용으로 챙겨 온 견과류를 채 건네기도 전에 빼앗아 갔다.

저런 괴수 같은 사슴이 아카데미의 유일한 초식 동료라니.

부르르 떨며 분개하던 나는 문득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해피를 만난 그날, 내 마력으로


숙부의 구속구를 끊어 낸 기억을.

‘어떻게 그걸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사슴 영역에서 도망치고, 수인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기 급급했던 탓이었다.

마법을 실제로 구현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스스로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이론만은 빠삭할 정도로 꿰고 있으니, 마법으로 구현하는 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구현하지 못한 내가 이상한 거니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타난 우연인지, 실력인지.


‘좋아.’

판가름하기 위해 손을 뻗자, 해피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짐승인 만큼 위험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손끝으로 마력을 집중시키자 미약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은 곧 소용돌이처럼 내 몸을 타고 올랐다.

여태까지와는 현저히 다른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지금.’

번쩍 눈을 뜬 내가 폭발할 듯한 마력을 손끝으로 방출했다.

그와 동시에 퐁, 구름만 한 회오리가 손바닥 위로 떠올랐다. 램프 불보다 작은 크기였다.

망할 퐁. 김샌 마음에 중얼거리는 순간,

“악!”

나는 강렬한 고통을 느끼며 지푸라기로 나가떨어졌다. 해피가 몸통 박치기로 날려 버린 탓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자신을 긴장케 만든 나를 단죄하려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손을 싹싹 비비던 나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해피에게 물린 주홍색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아.”

마법 지속 시간이 끝나서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사라졌다.’

콕, 손끝을 찌르던 송곳니도 머지않아 평평하게 변했다.


이윽고 내 것 같지 않은 주홍색 머리카락이 완전한 밀색으로 변했다. 아마 눈동자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올라간 눈꼬리도 내려왔을 것이었다.

나는 밀란느 학장에게 선물받은 실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마도구에도 한계가 있기에, 24 시간 내내 여우 모습으로 있는 건 불가능했다.

따라서 마도구에 마력이 채워질 동안은 기숙사에 박혀 있어야만 했다.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기숙사로 돌아갈 때는 후드를 써야겠구나.’

질겅질겅, 해피가 내 머리카락을 씹는 소리가 마구간에 울려 퍼졌다.

지푸라기에 엎드린 나는 초췌한 낯빛으로 마구간 벽을 바라봤다.

지난 한 달간 관찰한 육식 수인은 오만한 성정을 가진 자가 대다수였다.

안 그래도 초식 수인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데, 내가 여우가 아닌 걸 들킨다면.

하물며 학생회장, 그러니까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단 사실을 들킨다면…….

‘멀쩡히 죽기는 글렀네.’

여기까지 왔는데 뭐 어쩌겠어, 내일의 벤디 레피가 해결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차분해진 나는 마구간의 지푸라기 수를 헤아렸다. 가로로 흘러내린 눈물이
지푸라기를 짙게 물들였다.

사실은 무서워요.

조금 많이.

분홍색 꽃잎이 휘날리기 시작하는 오후였다.

터덜터덜 교정을 걸어가는 벤디의 뒤로 은밀한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대뜸 벤디가 학생회장이 된 탓에, 자신만만하게 입후보를 했음에도 낙선한 하이에나 수인, 야닉 펠이었다.

‘저딴 정체 모를 여우 수인이.’

경계조차 않는, 만만한 뒷모습을 주시하던 야닉의 암갈색 눈이 사나워졌다.

여우 수인답게 반반한 외양 빼곤 보잘것없는 모양새였다.

학생회장이 된 지도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만일 모종의 이유로 학생회장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숨만 붙여 둔다면…….’

마침 보는 눈도 없는 한적한 장소.

음침한 마음이 고개를 든 야닉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돈 벤디가 척척 걸어와 그가 숨은 교목 아래에 선 것은.

#<8 화>

‘내 미행을 알아챈 건가?’

일순 긴장한 야닉이 더욱 기척을 죽였다.

‘한낱 여우가?’

힘이 약하기로 소문난 여우 일족 주제에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동시에 아래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할 육식 수인들.”

오늘따라 기분이 저조하기 짝이 없는 벤디는 손을 뻗어 나무에 가져다 대었다.

‘벤디 님이 아직 조수가 없는 관계로, 제가 가져다드리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학생회실에 찾아온 학장의 비서가 내민 건 산더미만 한 서류였다.

‘한 달 치 업무입니다. 음, 아무래도 업무를 도울 학생회부터 꾸려야겠군요.’

쾅, 쾅. 서류철이 어찌나 두꺼운지, 책상에 내려 둘 때마다 무너지는 소음이 울렸다.

‘학생회는 어떻게 모으는 건데요? 아니, 애초에 누가 저랑 학생회를 해 주나요?’

‘그건 벤디 님이 해결하실 문제죠.’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악문 벤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 모든 건 자신을 학생회장으로 선출한 육식 수인들의 탓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마구간에서 느낀 마력의 바람을 떠올리며 손에 힘을 모았다.

“……망할 육식 수인들.”

‘뭐라고?’

조용한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야닉이 작게 인상 쓰는 순간.

“장풍!”

벤디의 근엄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짜증 어린 숨을 삼킨 벤디는 몸을 휙 돌려 교정을 가로질렀다.

‘……장풍?’

마침 몰래 벤디의 뒤를 호위하고 있던 레넌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의 물색 눈동자가 거침없이 걸어가는 벤디와, 나무 위에 숨은 하이에나 수인 야닉을 번갈아 오갔다.

흠. 두 사람을 여러 번 번갈아 본 레넌은 야닉이 눈치챌 수 없게끔 나무 뒤로 돌아섰다. 뒤이어 교목을


발로 힘껏 차 버렸다.

쿠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교목이 무너져 내렸다.

“이, 이 무슨!”

기겁하며 바닥에 착지한 야닉은 이를 딱딱 물었다.

‘나무가.’

나무가…….

분명히 마력을 사용하는 건 못 느꼈는데. 망연자실한 암갈색 눈동자가 벤디가 사라진 방향에 길이길이
머물렀다.

벤디는 오늘 태어난 이래 가장 큰 계획을 세웠다. 바로 육식 수인에게 먼저 다가설 계획을.

‘업무를 도울 학생회부터 꾸려야겠군요.’

밀란느 학장의 비서가 언급한 학생회 꾸리기.

산처럼 쌓인 학생회장 업무를 처리하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최대한 양순한 느낌의, 친절할 것 같은 육식 수인으로.

이왕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면 일석이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뒤에서 수석인 앞자리 하이에나 수인은 제외였다.

어디 보자…….

관통하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교실을 훑은 벤디가 배낭을 만지작거렸다.

육식 수인을 구슬릴 수 있는 비장의 무기. 손수 구워 온 고구마가 든 배낭이었다.

최근 X 클래스메이트들의 대화 동향을 엿들은 결과, 고구마란 단어가 꽤나 자주 들렸다.


바스락거리며 고구마 봉투를 꺼낸 벤디는 늘 옆자리에 앉는 족제비 수인을 지그시 바라봤다.

구황 작물이 일품인 사슴 영역, 페트리온에서는 고구마를 나눠 먹으면 친목 도모가 되는 법이었다.

족제비 수인은 보라색 단발머리에 다소 차가운 인상을 가졌지만, 마주치면 가끔 눈인사를 해 주곤 하는


학생이었다.

‘말 거는 것쯤이야.’

누워서 군고구마 먹기지.

목표물을 지정한 벤디는 차분히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나,

“…….”

한참이 지나도 말문을 떼지 못한 그녀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강의 시작 전에 말을 걸어야 하는데, 잇새로 보이는 송곳니 때문에 도통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지?’

일편, 독서를 멈춘 족제비 수인은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오른편의 진득한 눈길 덕분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이글이글한 눈빛을 묵묵히 감내하던 족제비 수인은 결국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왜, 할 말이라도 있니?”

고개를 틀자마자 벤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긴장한 벤디는 포장해 온 군고구마를 꺼내 들며 뚝딱거렸다.

“군고구마.”

좋아해? 실수로 뒷말을 생략해 버리고 만 꼴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모든 클래스메이트의 몸이 얼어붙었다.


‘또야?’

어쩐지 강의실 전체에 고구마 냄새가 풀풀 풍긴다 싶더니.

저 또라이 같은 학생회장이 하루가 멀다 하니 가방에 군고구마를 싸 들고 오고 있었다.

이는 물론 벤디가 며칠째 말 걸기에 실패했다는 증거이지만, X 클래스 구성원이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군고구마를 뭐 어쩌라고. 대꾸하려던 족제비 수인은 순간 멈칫했다.

‘그 얘기 들었어? 야닉의 무리가 떠들고 다니는 학생회장에 대한 소문.’

‘설마, 순 허풍이겠지.’

최근 아카데미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이 생각난 탓이었다. 학생회장이 교목도 가볍게 으스러뜨리는 악력을
가졌다는 소문이.

하필 소문의 근원지가 하이에나 수인들의 우두머리인 야닉이기에, 헛소리라 치부하기도 힘들었다.

긴장한 족제비 수인이 혀로 입술을 축이자, 벤디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레넌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벤디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육식 수인 사이에선 유혹하는 행위인데.’

‘혀로 입술 쓰는 거.’

갑자기 유혹은 왜 해.

벤디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준 바람에, 우지끈, 고구마가 무참히 짜부라지고 말았다.

“…….”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한 클래스메이트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경고다.

저건 괜히 말 걸었다간 이 군고구마처럼 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경고가 틀림없었다.


“하.”

결국 어제와 같이, 벚나무 아래에 홀로 남겨진 벤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등 뒤로 낙엽 떨어지는 배경이
어울릴 정도의 고독함이었다.

못 볼 거라도 본 듯 우수수 흩어지던 클래스메이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찌그러져서 그런지 껍질도 잘 안 벗겨지네.’

고구마 껍질을 벗긴 벤디는 한 입 거칠게 베어 먹었다.

군고구마 먹을래? 꽤 맛있는데.

학생회에 입회하지 않을래?

“그 몇 마디가 이렇게 힘들 일인가.”

긴장하면 실수만 남발하는 방만한 주둥이를 어쩌면 좋을까.

오늘도 식이섬유 섭취만 열심히 하는 입이었다.

편백 나무 향이 풍겨 오는 아카데미 도서관의 끝자리.

턱을 괸 남자는 감흥 없이 두꺼운 서적을 뒤적였다.

반쯤 열린 창에서 스민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살랑였다. 따분한 오후였다.

붉은 타이를 정돈하는 와중, 남자의 뒤편으로 인기척이 일었다.

“안녕, 늑대.”

서슴없이 다가간 레넌은 자연스럽게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남자가 읽던 서적을 당긴 그는 얼핏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덮어 버렸다. 초식 수인과 관련된 서적이었다.

“또 쓸데없는 거나 읽고.”
“너보다는 쓸 데 있을걸.”

빼앗긴 서적을 다시 제 쪽으로 당긴 남자가 건조하게 답했다.

나른히 늘어진 레넌의 자세와 반듯한 남자의 자세가 퍽 대조적이었다.

두 다리를 책상에 걸친 레넌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태평하네, 신입생한테 학생회장 자리를 빼앗겼는데.”

늑대 수인, 원 리오나드.

남자는 전년도 학생회장으로, 역대 학생회장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외모, 성적, 가문, 재력, 깔끔한 일 처리.

거기에 뼛속까지 귀족다운 태도까지 더해져, 올해 가장 유력한 학생회장 후보였다.

혜성처럼 나타난 벤디 레피가 그 자리를 채어 가기 전까지는.

덕분에 원의 추종자들은 벤디 레피를 비방하고 다니는 데 혈안이 되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원은 태연히


시간이나 죽이고 있는 꼴이었다.

“원, 다시 뺏고 싶지 않아? 학생회장 자리.”

혀에 설탕을 바른 듯 은근한 질문이었다.

“딱히.”

“왜?”

“한 번이면 족하니까 떠보지 마.”

대충 대답한 원이 레넌을 훑어 내렸다.

“특히 네가 즐거워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눈앞 백호의 장난기는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도 유효했다. 끔찍하게도


성정으로 자리 잡은 꼴이었다.

“……레넌 에던트.”

작게 인상 쓴 원은 금안을 느리게 깜박였다.

“너야말로 무슨 속셈이지?”

“뭐가?”

“시치미 떼지 말고.”

제멋대로인 레넌이 학생회장의 호위를 맡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감흥 없는 금안이 자신을 향하자, 레넌은 그저 속 모를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밀란느 학장께서 좋은 조건을 내걸었거든.”

“조기 졸업?”

“뭐, 비슷한 거.”

“그리고 하나 더.”

레넌에게 묻고 싶은 게 있지만, 어울리지 않게 뜸 들인 원이 입술을 여닫았다.

최근 하이에나 수인들이 쉬쉬하는 믿을 수 없는 소문, 장풍.

어릴 적 읽던 화서에서나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무술이었다.

일체의 마력 없이 손바닥에서 기를 뿜어내는, 말도 안 되는 미지의 기술.

잠깐 망설인 원이 주먹을 쥐었다 펴는 일을 반복했다. 입 밖으로 내기에도 왠지 수치스러운 단어였다.

“학생회장이 장풍을 부린단 건 뭔데.”

입학 당시엔 조용하더니,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는 점도 이상했다.


무감한 낯빛으로 장풍이란 단어를 잘도 입에 올린 원에 비해, 도리어 얼굴이 일그러진 건 레넌이었다.

“…….”

드물게 할 말을 잃은 레넌이 습관적으로 귓불의 피어싱을 매만졌다.

별생각 없이 저지른 장난이었는데, 아무래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그를 수상히 여긴 원이 눈썹을 살짝 들었다.

“사실이냐니까.”

이 악문 레넌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천천히 엎드렸다.

“……아마도.”

쥐어짜 내듯 간신히 답한 그는 결국 교복 소매가 젖을 만큼 눈물을 쏟고 말았다.

웃겨서.

#<9 화>

대체 왜 날 학생회장으로 뽑은 거야.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 의문을 곱씹으며 걷던 벤디가 우뚝 멈춰 섰다.

일부러 육식 수인들이 지나지 않는 길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전방에 웬 낯선 얼굴의 학생 다섯이 길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으.

뚫고 지나갈 용기가 없었던 벤디는 침착하게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지만, 그 또한 불가능했다.


어느새 다가온 학생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말았으니.

“어딜 그렇게 가는 거지?”

바로 뒤편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벤디가 암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누구?”

“그때 네 실력은 잘 봤다.”

“네?”

무슨 실력?

도통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들은 벤디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시치미가 수준급이라고 생각한 하이에나 수인, 야닉 펠은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긴장한 하이에나 무리는 일정 거리를 두고 벤디 주변을 에워쌌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벤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분명…….’

인적 드문 곳에, 무리를 지어 다니고, 쓸데없이 세기말 대사를 던지는.

‘주의하는 편이 좋을 걸세. 자리가 자리인 만큼, 쓸데없이 접근하는 학도들이 늘어날 테니.’

밀란느 학장이 말한, 학생회장이 되면 접근할 거라는 불량 학생 무리가 틀림없었다.

드디어 때가 왔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스린 벤디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여차하면 엎드리는 거야.’

그리고 손을 세차게 비비며 자비를 구한 후, 방심했을 때 달아나야 했다.


청순한 호랑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럴 때만 안 보여?’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호위가 있는 거 아닌가. 호위랍시고 붙은 백호 수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벤디가 묘한 자세를 취하자, 둘러싼 하이에나 무리가 바짝 경계했다.

“아직 접근하지 마라.”

손을 들거나 발을 내밀려는 자세를 취해야 신속한 공격이 가능한데, 벤디는 서적을 품에 안은 채 주춤대며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설마…….’

아무 기량도 뿜어내지 않는 벤디를 마주한 야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간혹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 중, 전투를 벌일 때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는 고수가 있다.

벤디는 기운조차 완벽히 갈무리했는지 일말의 살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상당한 달인. 고수의 냄새가 났다.

예의주시하던 야닉의 시선이 벤디가 품에 안은 서적으로 향했다.

붉은색에,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은 표지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 책은 뭐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난 벤디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이 책은 지난 시간 동안 육식 수인에 대해 기록한 관찰 일기와도 다름없었기에.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각종 육식 수인 서적에서 발췌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걸 들킨다면…….’

벤디의 낯빛이 새파랗게 바뀌었다. 사슴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 서적을 지켜야만 했다.

‘책을 감춘다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발견한 야닉은 기민하게 서적을 살폈다. 홀로 몰래 연마하는 무공 서적이나, 학생회
관련 기밀일지도 몰랐다.

같은 생각에 다다른 하이에나 무리가 눈길을 주고받았다.

“저 책을 뺏어!”

“아, 안 돼!”

큰일이다.

“진짜 장풍을 사용한다고?”

“맞다는데 그만 좀 확인,”

“절대 안 돼!”

인적 드문 도서관 바깥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선을 주고받은 원과 레넌이 드르륵, 창문을 열자 아래로 장관이 펼쳐졌다.

“이거 놔!”

바닥에 드러누운 벤디는 무얼 집어넣은 건지 불룩한 배를 부여잡은 채고,

“제길!”

엉거주춤 손을 뻗는 하이에나 무리의 습격이 이어졌다.

열심히 발을 내젓는 벤디를 상대하던 하이에나 수인이 고개를 틀었다.


“야닉 님, 아무래도 고수가 아닌 것 같은…….”

“방심하지 마라, 낙법의 한 종류다.”

팔짱 낀 야닉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벤디는 현재 실력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랬기에 며칠 전, 굳이 야닉을 끌어내지 않고 나무를 무너뜨림으로써 경고한 거겠지.

그때 교복 속에 꾸역꾸역 서적을 숨긴 벤디가 왁 소리쳤다.

“저리 가라고, 이 하이에나 같은 것들!”

일순 야닉 일행의 동공에 떨림이 일었다. 꼬리나 귀를 일절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하이에나란 사실을


간파하다니.

아카데미 구성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입생인 걸 감안하면, 역시 보통 여우가 아닌 게 틀림없었다.

“레넌.”

위에서 바보들의 행진을 관망하던 원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장풍을 다루는 고수라고 하지 않았나?”

“봐, 배에 기를 모으고 있잖아.”

“기?”

옷 속으로 네모나게 기를 모으는 고수가 세상에 어디 있는데.

진지하게 고찰한 원이 돌아보자, 레넌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개구쟁이 소녀처럼 웃었다.

“꼭 기를 동그랗게 모으란 법은 없잖아?”

미친놈이 미친 짓을 벌인 건가.

장풍이 레넌의 장난질이었단 사실을 대강 간파한 원이 일순 멈칫했다.


아래로 깔린 금안이 벤디의 얼굴에 머물렀다. 가까운 거리에서 처음 보게 된 학생회장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착각인가. 생각에 잠긴 원의 정신을 커다란 목소리가 일깨웠다.

“저 책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사실처럼 외치지 마, 진짜 아무것도 없대도!”

와중에도 드러누운 벤디와 어정쩡하게 선 하이에나 수인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장관인데.”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레넌은 밀란느 학장이 벤디의 호위를 명령하며 덧붙인 말을 떠올렸다.

‘……약간이지만 겁을 줘도 좋다.’

호위하면서 겁을 주라니,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었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밀란느 학장은 저 여우가 제 발로 아카데미를 나가길


원하는 눈치였다.

저 정도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하나.

창틀에 팔을 걸친 채 구경하던 레넌이 가느다랗게 눈을 휘었다. 속셈 가득한 웃음이었다.

“원.”

“거절하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멸시 어린 원의 눈빛을 본 척도 안 한 레넌이 아래쪽을 콕콕 가리켰다.

“쟤네 좀 기절시켜 봐.”

“네가 해.”
“나는 검사라서 원거리는 불가능하잖아.”

못마땅하게 눈썹을 든 원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네모난 배를 간신히 사수한 벤디는 죽어라 발을 내젓고 있었다.

붉은색 교복은 이미 흙먼지로 가득했고, 모자가 벗겨진 머리는 산발이 된 딱한 꼴이었다.

작은 체구로 잘도 버틴다. 원은 벤디를 둘러싼 네 명의 하이에나 수인에게 마력을 집중적으로 흘렸다.

“이거 놓으라니까!”

“컥!”

순간이었다.

털썩, 벤디의 팔을 당기던 하이에나 수인이 쓰러지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은 벤디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 갑자기 뭐지?’

상황이 믿기지 않는 벤디와, 뒤편에 서 있던 야닉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완전히 기절해 버린 하이에나 무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이럴 수가……. 주춤거린 야닉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벤디의 조력자를
찾는 것이었다.

아래를 구경하던 레넌은 곧장 원의 입을 틀어막으며 벽 쪽으로 기척을 감췄다.

“지저분한 손 치워, 고양이 냄새 나니까.”

“그럼 발로 막을까, 강아지야?”

“죽고 싶어?”
“일단 쉿.”

위까지 확인하고, 다른 기척도 없음을 깨달은 야닉이 낯빛을 까맣게 물들였다.

최측근인 하이에나 수인 넷을 한 번에 기절시키다니. 이는 야닉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쓰러진 최측근들을 한 번, 그리고 겁에 질려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한 번. 떨리는 눈으로 번갈아 본


야닉이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에 느낀 적 없는 패배감이 휘몰아쳤다.

“빌어먹을.”

작은 손과 체구, 약한 여우 수인이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무구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면 천재적인 재능이라든가.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포식자들이 벤디 레피에게 투표한 건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듯했다. 자신의
실력 따위로는 범접할 수 없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벤디는 책을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

“그런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겸손을 떨다니.”

“네?”

“시치미 떼지 마라. 지난번에도 틀림없이 장풍으로 나무를 박살 냈지 않나.”

그런. 야닉의 확신 어린 답변을 들은 벤디는 문득, 괜히 나무에 화풀이를 했던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 나무가 박살 났다고?’

털썩. 줄곧 소중히 품어 온 붉은 서적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슴 영역에서 부순 숙부의 위치 추적 마도구. 그리고 부서진 나무.

머릿속이 멍해진 벤디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주홍색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내가……?’

맙소사.

주먹을 불끈 말아 쥔 벤디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 네게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거 아니야.

차마 그렇게 외치진 못한 레넌이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렸다. 우스워 기절할 것만 같았다.

대단한 사실을 깨달은 듯, 부들부들 손을 떨던 벤디는 도서관 뒤편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원과 레넌이 뒤따랐지만, 벤디를 찾아온 학생회실은 텅 빈 상태였다.

“이거 놓지.”

레넌에게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들어선 원이 짜증 어린 숨을 삼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레넌을 비롯하여,


화제의 중심인 학생회장과 엮이는 건 지극히 사양이었다.

탁, 탁. 불결한 걸 떨쳐 내듯 구겨진 교복을 터는 와중, 집무 책상 위의 붉은 서적에 원의 금안이 닿았다.

“이건…….”

학생회장이 하이에나 무리의 공격에서 불굴의 의지로 지켜 낸 물건이었다.

#<10 화>

“원, 왜 그래?”

무심코 다가선 원이 공책을 집어 들자, 호기심이 일은 레넌이 뒤따랐다.


모여 선 두 사람이 벤디의 공책을 빤히 응시했다.

민무늬의 붉은 표지에, 무공 비법서처럼 닳은 외관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긴 했다.

나약한 여우 수인이 몸까지 던져 가며 사수한 귀물.

원과 레넌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팔락, 두 쌍의 눈동자가 원이 펼친 서적에 머물렀다. 그리고 꼼꼼한 글씨를 확인하자마자 정적이


지나갔다.

[백호 수인은 성격이 조금 별로다.]

서적 속의 백호 수인은 혹 자신을 말하는 걸까. 깊이 고뇌한 레넌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모았다.

“잘못된 문장인데?”

“확실히.”

수긍한 원은 펜으로 ‘조금’ 위에 엑스를 그었다.

음. 만족한 레넌은 눈짓으로 다음 장으로 넘기란 신호를 보냈다. 이쯤 되니 서적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원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팔락, 공책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육식 수인을 길들이는 법

첫 번째,

새끼 때부터 기르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원, 학생회장은 우리를 길들일 셈인가?”

“알고 싶지 않아.”
뭐가 됐든 듣는 육식 수인을 떨떠름하게끔 만드는 문장이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흘러가는 소리가 학생회실을 치웠다.

봐도 봐도 모르겠는 서류를 뒤적이던 벤디가 소파를 곁눈질했다.

그곳에는 드러누운 자세로 가십지를 읽고 있는 레넌이 자리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저조한 건지 뭔지,
늘어진 자세가 유독 한량 같았다.

어느덧 레넌의 전용 자리가 되어 버린 소파를 바라보던 벤디는 조심스럽게 배낭을 뒤적였다.

며칠 전처럼 다른 학도들이 시비를 거는 경우가 또 있을지도 모르니…….

달갑진 않지만, 호위인 레넌과 친분을 다져서 나쁠 건 없었다.

배낭 속 종이봉투를 꺼낸 벤디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레넌 님, 아니 레넌.”

“네?”

“……배고프지 않아?”

소심한 제안에, 가십지에서 떨어진 레넌의 시선이 벤디를 향했다.

겁쟁이 학생회장치곤 썩 용기 낸 질문이긴 했다.

벤디의 주홍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넌이 제 은발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부터 벤디는 둘만 남는 상황이면 학생회실에 딸린 창고로 푸드덕 들어가기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창고 정리를 핑계로.

평소에도 책상보다 거기 있을 때가 더 많은 나머지, 현재 창고는 기숙사로 사용해도 될 만큼 깨끗해진


상태였다.

하물며 지금도 저 청소왕은 창고에 숨어 몸을 반만 드러낸 꼴이었다.


심지어 저런 이상한 꼴을 하고서도 표정은 매사 진지한 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회장.”

“네, 아니, 응?”

“나 배고파,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그럼 이거라도 먹을,”

“그 전에.”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괸 레넌이 눈짓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일단 거기서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한참 망설인 벤디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입구를 지나 벽에 붙은 후 슬금슬금. 레넌은 벤디의 동선을 따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여우가 겁이 많다곤 해도 너무 심한데.’

약해 빠진 여우 수인인 걸 감안하더라도 벤디는 유달리 겁이 많았다.

‘배가 고프지 않냐고?’

함께 있으면 인내심이 바닥나는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여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드는 단어를 곱씹는 중, 그는 벤디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하자마자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대체 왜 여우가 매일같이 육류도 아닌 저런 걸 싸 들고 다니는 건지.

뭐라고 말하려던 레넌은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벤디의 해괴한 서적을 떠올렸다.


[육식 수인을 길들이는 법

두 번째,

먹이를 주며 안면을 익히자!]

빛바랜 물빛 눈동자가 벤디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 머물렀다. 속셈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레넌이 입매를
비틀었다.

‘고구마가 내 먹이인가 보네.’

육식 수인에게 고기도 아니고 고구마라니, 진짜 또라이인가. 정서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헛웃음 치던 그는 일순 시야가 흐려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술에 전 듯 몽롱한 기분.

의지를 벗어난 감각에 저항하던 레넌은 표정을 굳혔다.

이 낯선 감각의 근원지. 그건 바로 머리카락 끝이 어스름하게 빛나는 벤디였다.

가까스로 소파까지 다다른 나는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상해.’

호수라도 담은 것처럼 늘 반짝이던 레넌의 물색 눈동자에…….

‘나를 보고 있지 않아.’

초점이 없었다.

“레넌?”

주춤, 주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데, 순식간에 시야가 뒤흔들렸다.

“아!”
정신을 차렸을 땐 초점 없는 물빛 눈동자가 코앞이었다.

레넌과 소파 사이에 갇힌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온몸을 옭아맨 탓이었다.

“레넌, 왜 그래?”

내 위에 올라탄 레넌을 간신히 마주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낯설기 짝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

그리고 그 두려운 눈길이 향한 곳은 정확히 내 목 언저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더운 숨결이 닿았다.

부드러운 은발이 목을 간질였고, 입술이 그 언저리를 가볍게 지분거렸다. 탐색에 가까운 행위였다.

쿵, 쿵. 귀에 들릴 정도로 심장이 우레처럼 뛰기 시작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죽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 채 굳어 있을 때, 소파에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경악한 내가 숨을 들이켰다. 주홍색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점점 옅어지고 있었기에.

모습을 바꾸는 마도구의 마력이 다 되어,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째서?’

아직 한두 시간 정도는 거뜬할 텐데.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수, 숨겨야…….’
퍽!

계산할 새도 없이 레넌을 밀친 나는 손이 닿는 대로 천을 뒤집어썼다.

숨어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쾅, 학생회실을 박차고 나선 나는 미친 듯이 기숙사로 달음박질쳤다. 와중에도 천으로 가린 머리카락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숨이 가빠지고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번지게 만들었다.

기숙사로 박차고 들어온 내가 다급히 문을 걸어 잠갔다.

문고리를 여러 번 흔들어 완전히 잠근 것까지 확인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하…….”

주르륵, 문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나는 무심코 거울을 돌아봤다.

색소 옅은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송곳니 없는 밋밋한 이와 순한 이목구비.

더 이상 여우가 아닌, 원래의 내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익숙하기보단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던 나는 으스러져라 손에 쥔 천을 내려다봤다.

머리에 덮어쓰고 온 건 레넌이 벗어 둔 교복 카디건이었다.

부들부들한 카디건을 만지작거리기를 한참, 차츰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왜 레넌은 이성을 잃고 본능에 잠식된 듯한, 그런 기이한 태도를 보인 건지.

‘내가 초식 수인으로 변하려 했기 때문에?’

아니다.

아무리 육식 수인이 초식 수인에게 면역이 없다 해도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지가 없는 동물이 아닌 수인이니까.

마주치자마자 사냥 욕구가 들 정도면 육식 수인과 초식 수인의 양립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짤랑, 손목에서 흔들리는 마도구 팔찌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육식 수인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초식 수인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 반동으로 육식 수인이 사냥 충동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흘러나올지도.

이런저런 추측만 하고 있으니, 돌연 밀란느 학장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자네가 초식 수인인 이상 반드시 문제에 휘말릴 걸세.’

나는 멀리 치워 둔 레넌의 카디건을 힘 빠진 얼굴로 응시했다.

막연한 상상과 실제로 느낀 공포는 정말이지 천지 차이였다.

‘아까운 목숨을 잃을 바에야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이제야 입학할 때 들은 밀란느 학장님의 경고가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학장실로 호출된 원과 레넌의 동공이 옅게 흔들렸다.

평소 다과를 즐기지 않던 밀란느 학장과 그녀의 비서가 웬 고구마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기에.


저건 분명. 기시감을 느낀 레넌은 나지막이 물었다.

“뭔데 그거.”

“벤디 학도가 가져다주더군.”

“품질이 상당히 우수합니다.”

심지어 학장의 비서마저 동조하고 들었다.

“일단 앉거라.”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인 학장은 우두커니 선 원과 레넌에게 자리를 권했다.

“레넌, 너는 벤디 학도의 호위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게냐?”

“멀쩡히 고구마 가져다준 거 보면 제대로 한 거겠지.”

고구마, 고구마, 빌어먹을 고구마.

제집처럼 소파에 누워 되뇌던 레넌은 멈칫했다.

어제, 그러니까 학생회장이 자신을 군고구마로 길들이려 시도한 그때부터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학생회실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소파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소파에 널브러지는 건 습관처럼 일삼는 일이고. 잠들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학생회장과 대치하는 그 순간에 잠이 든다고?’

웃기지도 않는 경우가 아닌가.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분명 기억을 잃기 직전, 학생회장에게서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이성을 잠식할 정도의 충동이 치밀었고.

충동의 정체는 호기심과 식욕이 뒤엉킨 욕망의 어떤 종류였다.


#<11 화>

생각에 잠긴 레넌을 무시한 밀란느 학장은 맞은편의 원에게 차를 권했다.

“원 학도, 자네를 호출한 이유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겠지.”

원의 황금색 눈동자 위로 순간이지만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전년도 학생회장인 자네가 당분간 벤디 학도에게 업무를 좀 알려 주려무나. 번거롭더라도 잘 부탁,”

“번거롭습니다.”

노골적인 거절에, 밀란느 학장의 낯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제아무리 학장이라 해도, 늑대 영역을 다스리는 가문의 직계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그냥 직계도 아니고 차기 마탑주 후보라 일컬어지는 이가 아닌가.

원의 신분을 되짚은 학장이 호소하듯 말했다.

“자네도 혼자 업무를 익힌 건 아닐 터인데. 분명 그 전해 학생회장의 도움이 있었던 걸로 아네만.”

“…….”

“인수인계 또한 전년도 학생회장의 역할일세. 부디 자네가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라네.”

학장이 저자세로 나온 이상, 대놓고 거절하기도 뭐했던 원이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불편한 정적이
지나갔다.

싸한 정적을 뚫고,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괸 레넌이 입을 열었다.


“어제.”

답지 않게 심각한 목소리라,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누가 내 교복 카디건을 훔쳐 갔어, 아끼던 건데.”

동시에 모든 이가 시선을 거뒀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레넌은 고매한 탐정처럼 눈을 빛냈다.

“범인은 분명 나를 탐내던 자야.”

쌩하니 외면한 학장과 원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원 학도, 모쪼록 잘 부탁하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말 듣고 있냐고. 이상한 일이라니까?”

이상한 레넌에게 일어나는 이상한 일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달달달, 달달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집무 책상이 진동했다.

붙박이처럼 집무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인지하지 못한 채 다리를 달달 떨었다.

‘슬슬 시간이 됐구나.’

지난밤, 레넌은 대뜸 오늘 내에 전년도 학생회장이 찾아올 거란 소식을 전했다.

귀족 중의 귀족에, 신사적이라고 하니 다행이기도 하고.

또 까마득한 학생회장 업무에 대해 알려 주겠단 목적은 좋으나…….

문제는 종족이었다.
‘늑대라니.’

육식 수인 중에서도 상급 중의 상급.

윤기 나는 털과 번득이는 눈동자를 상상한 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사슴의 천적인 늑대와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라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바로 며칠 전에 육식 수인에 대한 공포를 직면한 이 시점에.

더 큰 문제는, 이제 종족을 바꾸는 마도구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에 맞춰 딱 변하는 게 아니라 미세한 시간 차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런 속사정도 모른 채, 레넌이 해맑게 덧붙인 충고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신경질적이니까 조심하는 편이 좋을걸.’

늑대가 신경질적이기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하게 눈을 굴린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보았다. 안간힘을 써 봤자 장풍 따위는 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을 텐데.’

더욱이 전년도 학생회장은, 이번에 내가 당선됨으로써 낙선한 인물이란 의미였다.

그러므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안 좋은 쪽일 게 확실하고.

계속해서 다리를 떨던 나는 곧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학생회장이든 뭐든 이 상황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 회피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한번 낯짝이나 보자고.’


한편, 학생회실 앞에 다다른 원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금안 아래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멈춘 원은 레넌의 음산한 조언을 상기했다.

‘걔 또라이야.’

‘네가 해선 안 되는 말이지 않나.’

‘아니, 장난이 아니라…… 됐어. 만나 보면 알겠지.’

레넌이 타인을 또라이라고 조롱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고.

또한 얌전하게 생긴 벤디의 첫인상은 또라이와는 꽤 거리가 멀었다. 물론 기를 네모나게 모으는 이상한


장면을 보긴 했지만.

번듯한 외모인 벤디를 떠올린 원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한창 미리 준비한 물품을 매만지던 벤디가 움찔 몸을 떨었다.

늑대가 왔구나. 심호흡을 반복한 벤디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들어오세요.”

수없이 연습한 덕분에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서던 원의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곧이어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잔잔한 금안


위로 파문이 퍼져 나갔다.

“…….”

손님용 탁상에는 다과로 고구마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고, 벽에는 ‘환영합니다.’ 따위의 발랄한 문구가
걸려 있었다.

정작 파티를 준비한 학생회장은 집무 책상이 아닌, 창고에서 몸의 반쪽만 드러내곤 경계하는 상태.

게다가 파티 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장 역력한 표정이었다.

“……하.”
어이가 없어진 원은 흑발을 이마가 보이게끔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피차 이딴 걸 준비할 만큼 정다운 관계는 아닐 텐데.

이런 성대한 깜짝 환영식은 어린 날 탄생일에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주르륵,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조잡한 종이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대충 흘려들은 레넌의 조언이 메아리가 되어 원의 머릿속을 울렸다. 걔 또라이야.

잠시 후, 잉크로 꽃무늬 장식까지 해 놓은 환영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원이 소파에 착석했다.

푹신, 솜이 가득한 손님용 방석이 그의 착석을 환영했다.

잔뜩 경계하는 벤디의 표정과 달리 아주 융숭하고 극진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또라이 나름의 아부인가.

원은 왜 요즘 레넌이 학생회장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침 심심하던 백호의 덫에


걸린 모양이었다.

탁상에 놓인 수제 고구마 케이크에 머물렀던 금안이 곧 창고에 숨은 벤디를 향했다.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탁상을 두드리자, 벤디는 노골적으로 못 본 시늉을 했다.

뭐 하자는 건지. 이마에 혈관이 불거진 원은 일순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레넌의 말을 떠올렸다.

‘겁이 많으니까 살살 다뤄.’

창고에서 억지로 끌어내기도 난감했던 원은 가져온 서류를 분류했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자, 창고 쪽에서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고의 시간도 잠시. 곧이어 벽과 혼연일체가 된 학생회장이 뽈뽈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히 눈길을 줬다간 저 힘든 여정에 방해가 될까 싶어, 그는 짐짓 모른 척 서류 다음 장을 넘겼다.


부스럭,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기척과 함께 회장의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

만신의 힘을 다해 맞은편에 앉는 데까지 성공한 벤디는 불안하게 손을 매만졌다.

‘진짜 늑대잖아.’

새까만 머리카락과 화려한 금안도 모자라, 입질 한 방이면 사슴 따위는 관으로 입장해야 할 송곳니까지.

턱턱 막혀 오는 숨을 간신히 몰아쉰 벤디는 긴장한 채 허리를 세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주 웃는 레넌과 달리 원은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기에, 맹수 특유의


송곳니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결 안심한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처음 마주하게 된 늑대는,

‘……뭐가 이래.’

과할 정도로 예뻤다.

육식 수인이 뭐 저렇게 생겼담.

서류에 고정되어 반쯤 내리깐 금안은 황금 같았고, 굳게 닫힌 붉은 입술은 수인을 홀리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원은 뚫릴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벤디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이런 걸 상대하라고.’

그는 난생처음 이 아카데미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꼈다.

수인 아카데미는 서대륙 최고 교육 기관이자 앞으로 대륙을 이끌 인재를 보유한 곳. 이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은 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자리 정도가 아니었다.

작은 영역 하나는 쥐락펴락할 예산.


우수한 인재를 원하는 대륙 내 고위층과의 연계.

이쯤이야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권한들이 주어지는 만큼, 아카데미 재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멋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자리였다.

애초에 그만두는 이도 없었고.

그런 자리를 겁 많은 건 고사하고, 환영 파티나 준비하는 여우 수인이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뭐…….’

어차피 자신의 손을 떠난 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도 귀찮았던 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예산 관리부터.”

“잠깐만요, 먼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놀라운데요.”

“뭐가요?”

“질문이란 걸 할 줄은.”

사람을 뭐로 보고 있었으면.

벤디는 대놓고 의외란 표정을 짓는 원을 흘기며 말했다.

“학우들은…… 왜 저를 학생회장으로 뽑은 거예요?”

“그걸 아직도 모릅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힌 벤디가 목을 움츠렸다.

그야 아무도 알려 주지 않으니까. 애초에 레넌이 아니면 말을 섞어 주는 이조차 없었다.

오늘 내에 인수인계를 끝내는 건 힘들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원이 되물었다.


“그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팔짱 낀 벤디는 새삼스러운 고민에 휩싸였다.

이유가 짐작이라도 갔으면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가령 저 서류의 산을 내게 떠넘기고 싶었다든가.

“……육식 수인은 대체로 게으르고 나태하니까?”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혼잣말을 듣게 된 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 쳤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육식 수인 아닌가. 말을 희한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쪽을 뽑지 않으면,”

원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소파에 기대었다.

“또다시 내가 학생회장으로 당선될 테니까.”

“……네?”

“내가 유력한 다음 대 학생회장 후보였으니, 그걸 저지하기 위해 표를 그쪽에게 몬 겁니다.”

#<12 화>

온갖 의문이 휘몰아친 벤디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뭔데. 애당초 왜 하필 나냐고.

원은 벤디의 마음속 절규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라, 느릿하게 귀를 매만지며 부언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여우를 허수아비 학생회장으로 내세우고, 전권을 나눠 먹을 속셈이었겠죠.”


“아.”

“나와 달리 추종자는 물론 힘이나 재력도 없고, 뒷배까지 없으니 겁박하기도 쉬울 테고.”

이용하기 위해서.

진상을 알게 된 벤디는 굳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아카데미 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뽑혔다.

반박하기 힘든 뼈아픈 사실이 가슴 언저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딱히 위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학장께서 왜 그쪽에게 레넌 에던트 정도의 인물을 호위로 붙인 걸까요.”

벤디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레넌이 제 호위나 할 인물이 아닌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학장의 손주란 말은 곧 백호 영역을 휘어잡는 에던트 가문의 직계란 의미니까.

밀란느 학장이 그런 레넌을 호위로 붙인 이유.

‘그건 내가 사실은 여우가 아닌 사슴이니까.’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생각할 때, 원은 막힘없이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학생회장의 권한을 탐내는 무리가 접근하는 걸 일시적으로라도 막기 위해서.”

일순 벤디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시작부터 물어뜯기는 꼴을 방관할 순 없었겠죠.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원래 피라미들의 손속이 더 잔인한 법이니까. 살벌한 언사와 달리 서류를 정리하는 원의 행동은 한없이
무심했다.
“여기는 그런 곳입니다.”

육식 수인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런 육식 수인들의 표적이라니.

솜털이 쭈뼛 선 벤디는 발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곳. 약육강식의 세계.

육식 수인들 한가운데에서도 막연히 생각만 하던 현실이 뼈저리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학장실 창가에 선 밀란느 학장은 바깥 전경을 눈에 담았다.

붉은 첨탑과 하얀 건물 사이사이로 봄이 만연한, 그녀가 매해 보아 온 아름다운 교정이었다.

그리고…….

“떠났나?”

이 완벽한 교정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 그를 언급하자 뒤편에서 비서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막 후문에 다다랐습니다.”

“어떤 모습이지?”

“짐 가방과 캐리어를 끌고, 해피를 대동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 근육질 사슴 말인가.”

“예. 일단 경비 기사들에게 막지 말라고 전달해 두었습니다.”

벤디 레피가 제 발로 떠났다. 그것도 아주 적절한 시기에.

학장의 입가에 퍽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원 학도가 제 역할을 아주 제대로 해 주었군.”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비서가 되물었다.


“벤디 님에게 일부러 원 리오나드 님을 붙이신 겁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말할 때 거침이 없잖은가.”

전년도 학생회장이란 위치도 있으니, 벤디도 원의 말을 허투루 넘기진 않을 터였다.

“그리고 원 학도는 눈치가 빠르지. 내가 벤디 학도에게 자신을 보낸 이유를 짐작했을 걸세.”

원은 학장이 벤디가 학생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걸 원치 않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을 것이었다.

좋든 싫든 그가 학생회장으로 있던 지난 1 년간 많은 교류를 해 왔으니.

학장이 아카데미 명성에 신경 쓰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원이었다.

“레넌 녀석은 영 쓸모가 없어. 겁을 주라고 붙여 놨더니,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기만 하니.”

그놈이 그럼 그렇지.

쯧, 혀를 찬 밀란느 학장은 창밖을 돌아봤다.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전경이 눈동자에 담겼다.

“좋은 날씨군.”

아주 좋아.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금 빙그레 휘어졌다.

수인 아카데미가 자리한 도시, 디아트.

이곳은 사람이 거리를 끊임없이 채우는 대도시였다. 어딜 가나 생동감이 가득하고 인파로 붐볐다.

흠칫, 흠칫.

티 나게 움츠린 나는 해피의 안장을 끌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답답한 후드를 벗자, 옅게 구불거리는 주홍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카데미 일대를 완전히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슴 수인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디아트는 육식
수인의 도시니까.
“음…….”

도망치듯 아카데미를 뛰쳐나왔는데, 막상 도심으로 나오니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푸르릉, 와중에도 해피는 옆에서 거칠게 콧김을 뿜어 댔다.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부려 대는 게, 아카데미를 떠나온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마구간


생활이 제법 호화로웠던 모양이다.

한 걸음 간격을 벌린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길에서 지나치는 육식 수인조차 무서운데. 학생회장의 권한을 노리고 달려들 육식 수인들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사실은 해피에게 하는 변명 따위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변명이었다.

본능에 잠식된 레넌의 물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이유를 마주한 순간.

그때마다 든 생각은 하나였다.

죽고 싶지 않아.

정신 차리니 손은 짐을 싸는 중이었고, 발은 아카데미 밖을 향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벽에 기대어 앉은 나와 해피는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부지런히 향할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오도카니 앉아 있기를 한참.

저린 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일어난 내가 해피의 안장을 끌었다.


“일단 출발하자.”

어디로든 가야 하긴 하니까.

최소한 마도구의 마력이 다해 사슴으로 돌아가기 전에 육식 수인의 영역을 떠나야 했다.

‘그 전에…….’

과연 숙부가 얼마나 독이 올라 있을지.

현재까지는 페트리온의 상황을 알고 싶어도 알 길이 없었다.

모험대 아이들에게 연락하여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내 위치가 노출되거나, 자칫하면 모험대 아이들이 위험해질 가능성까지 존재했다.

떠나기 전에 초식 영역의 대략적인 동향이라도 알아보는 게 좋겠지.

나와 해피의 발걸음이 상점 쪽으로 향했다.

첫 번째 상점.

“초식 영역 쪽 일간 신문? 그런 걸 누가 들여놓나?”

두 번째 상점.

“없소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아 글쎄, 없대도!”

열다섯 번째 상점 문을 쾅 닫고 나온 내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된 게 취급하는 상점이 단 한 곳도 없어?”


아무리 교류가 없기로서니, 이 정도면 도가 지나쳤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던 나는 곧 이성을 되찾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내가 숙부의 눈을 피해 육식 수인의 영역에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

“해피, 저기가 마지막. 진짜 저기가 마지막이야.”

해피의 이마에 핏줄이 서 보이는 건 착각일까.

나는 여러 번의 허탕에 화가 난 해피를 달래며 열차역 부근의 구멍 상점을 가리켰다.

“실례합니다…….”

끼이익, 낡은 문을 열자 곧장 상점 주인이 꼬장꼬장하게 외쳤다.

“에잉, 어디 동물을 들이는가!”

앗. 화들짝 문을 닫은 나는 입구 기둥에 안장을 잘 둘러맸다.

“해피, 금방 나올 테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콧김을 뿜은 해피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려 댔다.

영 못 미더운 근육 사슴을 곁눈질한 내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상점으로 들어섰다.

“혹시 초식 영역 쪽 신문을 취급하나요? 어떤 영역이든 상관없어요.”

“초식 영역 신문?”

노주인장은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딴 걸 누가 취급하는감.”

역시나. 실망 어린 얼굴로 돌아서려는데,

“아!”
노주인장의 탄성이 발길을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흘 전에 잘못 들여온 게 몇 부 있지. 물류가 꼬여서 말이야.”

“살게요. 어느 영역의 신문인가요?”

“그 뭐냐, 염소였나. 어디더라…….”

선반 아래를 뒤적인 노주인장이 신문 한 부를 꺼내 들었다.

“그래, 염소 영역이랑 사슴 영역 쪽 신문이구먼.”

사슴 영역.

일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려 하자, 노주인장은 잽싸게 신문을 높이 들어 올렸다.

슉, 슈슉. 빼앗고 뺏기지 않으려는 공방이 몇 번 오갔다.

“거-”

등 뒤로 냉큼 신문을 숨긴 그가 히죽 웃었다.

“초식 영역 쪽 신문을 취급하는 건 우리 상점밖에 없을 터인데.”

“이익…….”

그딴 걸 누가 취급하냐고 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노주인장은 끝끝내 값을 두 배로 치르고 나서야 신문을 건네주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상점을 채 나서기도 전에 사슴 영역 신문부터 펼쳤다.

팔락팔락, 빠르게 훑던 눈길이 신문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
그곳에는 내 초상화가 박혀 있었다. 찾으면 고액의 사례금을 지급한다는 문구와 함께.

‘설마.’

다급해진 손이 염소 영역 신문을 들췄다. 마지막 장에 내 초상화와 함께 동일한 문구가 기재된 상태였다.

‘미쳤어.’

신문을 그러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의 직계인 내 얼굴을 이렇게 방방곡곡 공개하는 건, 숙부가 작정하고 나를 찾고 있다는
의미였다.

신문에 기재한 이상, 모든 초식 영역을 뒤집고 있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고.

결국 몸을 숨길 만한 초식 영역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상점을 나서던 나는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없어.’

상점 기둥 옆이 텅 빈 상태. 해피가 없었다.

기둥에 동여맨 안장은 그대로인 걸 보아, 그 근육 빵빵한 사슴이 탈출을 감행한 듯했다.

안색을 파랗게 물들인 나는 툭, 신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13 화>

해피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나 혼자.
삐이- 이명마저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멀거니 굳어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기둥의 안장을 풀었다.

‘찾아야 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해피를 찾아 나서야 했다.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홀로 돌아다니는 초식 동물이라니. 아무리 흉악하게 생겼다 한들 사슴은 사슴이었다.

다급히 발을 떼던 중, 상점 뒤편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릉, 푸르릉.

이런 교양 없는 콧김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세상에 단 한 마리뿐.

“해피!”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가자, 웬 노란 공과 씨름을 벌이는 해피가 보였다.

“해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빽 소리 지른 내가 양손으로 노란 공을 잡아챘다.

물컹, 노란 공은 공이라기엔 퍽 기묘한 감촉을 가지고 있었다.

‘……물컹?’

이게 뭐람.

노란 공은 다시 보니 푹신하기도, 약간은 깔끄럽기도 한 노란 빛깔의 짐승이었다.

집어 올린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코앞에서 관찰하게 된 노란 짐승은 둥근 귀에 긴 꼬리를 가진…….

‘으.’
다른 건 몰라도 육식 동물의 새끼임은 분명했다.

고양이 같기도 하고, 사자의 새끼치고는 작고. 내가 모르는 종류의 육식 동물일 확률도 존재했다.

냥냥거리며 사납게 앞발을 휘두르던 새끼 짐승이 돌연 뚝 멈추며 나를 바라봤다.

놀란 건지, 겁먹은 건지. 동그란 눈동자가 세차게 진동했다.

이윽고 떨리는 앞발을 움직인 노란 짐승은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톡, 내 뺨을 건드렸다. 그러곤 화들짝


소스라치며 앞발을 떼어 냈다.

육식 동물이 나를 만지다니.

힉, 덩달아 소스라친 나도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어 댔다.

톡, 도리도리. 톡, 도리도리.

희한한 과정을 반복하는데 푸르릉! 냅다 주둥이부터 들이민 해피가 새끼 짐승을 위협했다.

“해피, 진정해. 아직 새끼 짐승이야.”

해피의 기세에 지지 않은 노란 짐승도 공중에서 미치광이처럼 앞발 뒷발을 휘둘렀다.

“둘 다 그만하라니까.”

두 짐승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만해. 둘 다 그만 좀……!”

만류하던 나는 일순 입을 꾹 다물었다. 후두둑, 두 눈 가득 차오른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제야 싸움을 멈춘 두 짐승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아…….”

왜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조차 이유를 알지 못한 내가 눈을 깜박였다.


그럼에도 멎지 않은 눈물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방울방울 떨어졌다.

돌아갈 곳을 영영 잃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게 슬퍼서?

육식 수인이 잔뜩 도사린 이곳이 두려워서?

툭, 투둑. 떨어진 눈물이 흙바닥을 진하게 물들였다.

‘웃기지도 않지.’

뒤이어 눈을 살짝 내리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이런 작은 짐승도 저보다 훨씬 큰 짐승에게 덤비는데, 지레 겁먹고 달아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일지도.

이유야 뭐가 됐든 떳떳한 눈물은 아니었다.

“…….”

얌전히 있던 새끼 짐승은 휙, 그 틈을 타 내 손에서 탈출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선 노란 짐승은 우리를 잠깐 일별하곤 총총거리며 떠났다.

이번만 봐준다 같은, 후일을 기약하는 듯한 사나운 눈빛이었다.

해피는 어쩌다 저런 쪼그마한 짐승과 시비가 붙은 건지.

새끼 짐승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도망 나온 주제에 눈물이나 흘려 대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말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육식 수인의 영역으로 왔다지만, 사실 정말 죽을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던 거니까.

“해피.”

주저하며 떠나 온 방향을 돌아본 나는 입을 달싹였다.

“……가자.”
이내 마음을 다잡은 내가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돌아가자.”

아카데미로.

달빛이 밤거리를 어스름하게 비췄다.

아카데미를 나설 땐 정신없이 박차고 나왔지만, 들어갈 땐 이야기가 달랐다.

정문이나 후문으로 들어가는 건 무단 외출을 확인받는 거나 다름없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교칙을 어기면 어떤 처벌이 가해질지 몰랐다.

‘해피까지 데리고 담을 넘을 수 있을까?’

인적이 드물고, 비교적 낮은 아카데미 담장 앞에 다다른 나는 멈칫했다. 불침번으로 보이는 기사 세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슨…….”

조심스럽게 다가서는데, 머리 위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단 외출은 즐거웠나?”

순간 긴장한 내가 목을 빳빳이 세웠다.

담장에 걸터앉은 남자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상태였다.

순찰 기사들을 쓰러뜨린 장본인인 건 따로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구름에 가린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달빛을 등진 이의 정체가 드러났다.

“……레넌.”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물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그가 육식 수인이란 사실이 다시금 실감 났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 나는 회장이 있어야 하거든.”

그 능구렁이 학장이 며칠 호위했답시고 조기 졸업을 시켜 줄 리는 없어서.

여상한 미소를 지은 레넌이 의미 모를 말을 덧붙였다.

‘조기 졸업?’

다른 건 몰라도, 나를 호위하는 조건으로 학장님과 무언의 약속이 오간 듯했다.

대답 없는 나를 가만히 내려 보던 레넌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느릿한 시선이 캐리어와 해피를 스치듯


지나갔다.

“다 포기하려고?”

여러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그때까지 망설인 나는 아무것도 없는 먼 허공을 돌아봤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이 있는 방향이었다.

‘포기…….’

숙부에게 붙잡혀 육식 수인과 결혼해도 죽고, 여기서도 자칫하면 육식 수인에게 사냥당해 죽는다.

똑같이 죽는 거라면 우리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아등바등 발버둥이라도 치는 게 나았다.

적어도 그런 자유라도 찾기 위해 페트리온에서 도망쳐 나온 거니까.

“……포기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거치적거리는 로브를 벗은 내가 레넌을 올려다봤다.

“잠깐 급한 볼일 좀 보고 온 거야.”

캐리어를 손에서 놓은 나는 청순한 호랑이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일전에 내 목을 노린 일 때문에 껄끄러우면서도, 이 자리에 나타나 준 레넌이 처음으로 호위답게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나 좀 올려 줘, 도와주려고 기다린 거 아냐?”

“회장은 몰라도 저건 좀 무거워 보이는데.”

해피 쪽으로 시선을 던진 레넌이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육식 사슴?”

“해피는 초식이야.”

“저게?”

“초식 사슴이야.”

단호히 부정했지만…….

아무리 새끼라 해도 육식 동물이랑 맞붙질 않나, 백호 수인을 앞에 두고 턱을 치켜들질 않나.

안하무인인 해피를 볼수록 점점 확신이 사라졌다.

“……아마도.”

푸르릉, 오만방자한 콧김 소리가 밤을 물들였다.

“머리가 개운하구나.”

창가에 선 밀란느 학장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근심거리가 사라진, 오랜만에 홀가분한 아침이었다.

“하루빨리 학생회장 재선거를 준비해야겠구먼. 무척 바빠지겠어.”

불평하는 사람치곤 만면에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

“이제 막 아카데미 행사를 떠맡을 때인데, 시의적절하게 사라져…… 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밀란느 학장은 돌연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시야로 있어선 안 될 게 들어왔기에.


허리께에 닿은 주홍색 머리카락과 비교적 작은 체구.

도무지 머릿속을 읽기 어려운 새초롬한 표정.

벽에 찰싹 밀착하여 이동하는, 경이로울 정도로 하찮은 자세.

그녀가 아는 한 저런 괴짜는 수인 아카데미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저…… 저…….”

쨍그랑, 바닥으로 떨어진 찻잔이 산산조각 났다.

“저 사슴이 왜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겐가!”

체면도 잊고 꽥 외친 밀란느 학장이 창밖을 손가락질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을 따라 힐긋 살핀 비서가


부언했다.

“……다시 돌아온 모양입니다.”

“자네는 뭘 은근히 반기고 앉아 있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다 보았네! 어제만 해도 힘없이 도망가더니, 다시 일어서려 노력하는 저 아이가 제법 기특하단


표정을 지었지 않나!”

“구체적으로 모함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표정을 고수한 비서가 외알 안경을 살짝 추켜올렸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 밀란느 학장은 허둥지둥 집무 책상을 헤집었다.

“자퇴서는, 자퇴서는 따로 받아 둔 게 없나?”

“자퇴서는 학장님께서 직접 수리하는 게 원칙이지 않습니까.”

우뚝 멈춘 밀란느 학장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벤디 레피가 떠날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들뜬 나머지, 자퇴서를 받기는커녕 두근대는 심장을 붙잡고 학장실을 서성거린 게 전부.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까득, 손톱을 깨문 학장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무단 외출은? 허가 없이 외출한 걸 트집 잡아서,”

“어제 학장님께서 기록을 남기지 말고, 그냥 나가게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그랬다고……?”

“그랬습니다. 덧붙여 벤디 님이 돌아온 기록도 없습니다. 출입 기록이 없으니 무단 외출에 대한 증거도


없는 셈이죠.”

어젯밤, 북쪽 담장에서 순찰 기사 세 명이 괴한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하니, 담장을 넘지 않았나 추측


중입니다.

설명이 이어졌으나 밀란느 학장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비서의 말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석상이 된 그녀를 뒤로한 비서는 조용히 학장실을 나섰다.

달칵, 문을 닫는 동시에 학장의 절규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14 화>

원 리오나드. 그는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 자리에 지극히 어울리는 인재였다.

늑대 일족 수장의 직계, 상위권 성적, 품행 단정.

이를 다 제쳐 두더라도 그 자체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차기 마탑주 자리에 오를 정도의 힘은 자연히 그를 우러러보게 만들었고, 냉철한 성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육식 수인들을 통제하기에 적합했다.

더욱이 전년도 학생회장 역할을 완벽히 수행함으로써 그 능력까지 인정받았다.

힘의 논리에 순응하는 육식 수인들이 따를 수밖에.

무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들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곧 있으면 레펠튼이네. 너는 참가할 거냐?”

“글쎄, 생각해 보고. 리오나드 님은 올해도 불참이시죠?”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무리가 선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원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

뒤편의 뚫릴 듯한 시선을 신경 쓰느라. 과장하면 등이 콕콕 쑤실 지경이었다.

몸을 돌린 원은 멀리, 아주 먼 곳을 주시했다.

그곳엔 커다란 교목 뒤에서 몸을 반만 내민 채 그를 미행 중인 벤디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꽤나


살벌했다.

원의 무감한 시선이 벤디를 넘어, 더 뒤쪽 나무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벤디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중인 레넌이 자리했다. 이글거리는 눈빛까지 따라 하는


상태였다.

재미 들인 건지 뭔지.

원래 인생에 맥락이 없는 존재이기에, 왜 저러는지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미친놈이었다.

‘문제는…….’
또다시 옮겨진 시선이 이번에는 위를 향했다.

학장실 창문에 달라붙은 밀란느 학장이 눈을 홉뜬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마저 모든 걸
꿰뚫을 기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세 사람을 번갈아 살핀 원은 거칠게 이마를 쓸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리오나드 님?”

“괜찮으십니까?”

주변 학생들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펼쳐지는 세 사람의 헛짓거리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무슨.’

그를 정말 미치게 만드는 건, 세 사람의 저 짓거리가 벌써 닷새째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석양이 하늘을 물들였다.

주홍빛으로 물든 교정을 바라보던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오늘도 늑대, 그러니까 원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원 하나만 있어도 어려운데. 그 늑대 주변엔 육식 수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말 그대로 여럿이 몰려다니는 늑대 무리 같아서 도저히 말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일을 기약하며 학생회실을 나서던 나는 멈칫했다. 복도에 손님이 있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 했으나 탁, 문틈 사이에 끼어든 발로 인해 저지당했다.

끼이익, 나는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문이 열리는 방향을 따라 뒷걸음질 쳤다.

벽이 등을 가로막고, 문이 내 앞을 차단한 상태가 되었다.


하, 문 너머에서 헛웃음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골이 난 상대가 예고 없이 문을 잡아당겼다.

“아!”

덩달아 튕겨 나온 나는 단단한 가슴팍에 코를 박고 말았다.

나타났다.

쿵, 쿵.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코를 부여잡고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원 리오나드. 그가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나 보죠, 5 일째 뒤를 밟은 이유.”

막상 대면하니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눈만 굴리자, 원은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렸다.

“두 번은 없습니다. 다시는 쫓아다니지,”

“우두머리.”

마음이 급해진 내가 뒤통수에 대고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육식 수인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요.”

한차례 정적이 지나갔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원은 미간에 균열이 인 상태였다.

“……범죄 조직이라도 형성할 생각입니까?”

나는 원의 이 눈빛을 알고 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또라이를 보는 눈빛. 내가 레넌을 대할 때의 눈이었다.

그제야 말을 잘못했단 사실을 깨달은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요.”

원의 눈빛이 레넌보다 더한 또라이를 보는 눈빛으로 변했다.

“이미 학생회장인 걸로 아는데. 기억도 오락가락하는 겁니까?”

“아뇨, 아니. 그러니까 허울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학생회장이요.”

“…….”

“당신처럼.”

겨우 멀쩡한 본론을 꺼낸 나는 간신히 원과 시선을 맞췄다.

보잘것없는 존재라서 학생회장으로 뽑았고, 허수아비로 부릴 심산이라면.

그렇다면 보잘 것 있는 존재가 되고, 허수아비가 되지 않도록 내 위치를 견고히 하면 될 일이었다.

지독히도 현실성 없는 결론이지만, 애당초 내가 학생회장인 사실부터 현실성이 없으니까.

더군다나 모두가 탐내는 권한이 내 손에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힘만 가지고 있다면. 나를 지지할 이만 있다면.

그를 위한 길을 알려 줄 이는 당장 눈앞의 원 리오나드뿐이었다.

“도와주세요.”

양손을 모은 내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학생회장 역할을 최소한이라도 이수할 시, 성적이나 학적부에 보탬이 될 일은 당연지사.

이를 발판으로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 그 이후부터는 탄탄대로였다.


특히 마법사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마탑에 입사하거나, 대륙 공인 마법사가 된다면 작위까지 보장이 됐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 함부로 내 자유를 휘두를 수 없겠지.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눈을 반짝 빛냈다.

아카데미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결심했다.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힘을 기르기로.

그리고 숙부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할 존재가 되어, 살아남을 것이다.

반드시.

바로 거절할 거라 예상했던 원은 꽤 오래 침묵을 지켰다.

이상하네, 거절하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두 번째 계획도 세워 뒀는데.

의아함에 허리를 펴는 동시에 원이 입을 열었다.

“도망가지 않았군요.”

“…….”

“그럴 줄 알았는데.”

앞뒤가 생략된 그의 말이 뭘 뜻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 나는 모른 척 뒷짐을 졌다.

시치미 떼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재차 입술을 뗐다.

“조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요? 감사합,”

“그런데.”

“……?”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당혹스러워진 나는 땀이 배어난 손을 교복 자락에 비볐다.

아무리 원이 전년도 학생회장이라 해도, 굳이 나와 엮일 이유는 없기에.

“대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줄 수 있는 게 있긴 합니까?”

도움의 대가로 줄 수 있는 이득이 아무것도 없다. 하다못해 금전마저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고작…….’

스윽, 배낭에서 꺼낸 군고구마 봉투를 내밀자, 건네받은 원이 낮게 감탄했다.

“어음 봉투는 많이 봤지만, 이런 봉투는 처음이군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군고구마 봉투가 그의 손에서 화르르 소멸했다. 마법이었다.

짐짓 생각에 잠긴 원이 턱을 쓸었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대뜸 손을 펼쳐 내밀었다.

“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요구한 덕에, 반사적으로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뭐, 일단은 학장께 부탁받았기도 하고.”

“…….”

“빚을 지우는 게 나쁘진 않겠네요, 허울이라도 학생회장이니까.”

동시에 원의 손바닥에서 떠오른 엄지손톱만 한 빛이 내 손으로 향했다.

마법진의 형상을 띤 빛이 피부에 스며들며 곧 흐릿하게 사라졌다.


“이게 무슨……!”

“가벼운 계약서. 계약이 끝나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계약서의 역할은 뭔데요?”

“계약 사항에 한해서 위치 추적.”

“…….”

“회장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라지면 위치 추적이 가능하죠.”

돈을 빌리고 튀면 직접 찾으러 오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 아닌가.

“예전부터 배신을 많이 당하는 편이라.”

그래서 배신을 생각조차 못 하게 족쇄부터 거는 게 원의 정론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답도 못 하고 있는데, 그새 손님용 소파에 자리 잡은 그가 다리를 꼬았다. 제집처럼


오만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청소가 덜 됐군요. 이런 곳부터 쓰라고 예산이 있는 건데.”

검지로 느릿하게 협탁을 쓴 원은 손끝에 묻어난 먼지를 털어 냈다.

“보나 마나 혼자 쓸고 닦고 했겠죠.”

정곡을 찔린 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대가는 회장이 지금보다 쓸 만해지면 필요한 걸 요구하겠습니다.”

그의 입가에 보기 드문 옅은 웃음이 걸렸다.

눈은 웃지 않는 미소를 바라보던 나는 덩달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이 늑대, 조금 밉상이다.

회의용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너른 학생회실 중앙에 있으려니 영 마음이 불안했다.

심지어 늑대와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란 긴장감이 몸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우선.”

맞은편에 자리한 원은 팔락, 여유로운 손짓으로 서류를 넘겼다.

“본인의 편을 만드세요.”

“학생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학생회의 힘은 곧 학생회장의 힘이니까.”

“학생회 모집…….”

원이 설명하길, 학생회 선발은 전적으로 학생회장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역대 학생회장들은 본인의 측근이나 추종자를 학생회에 입회시켰다고.

텅 빈 학생회실을 둘러본 원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가장 쉽지만, 회장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겠네요.”

벤디 레피. 학생회 입회 희망자 0 명의 쾌거를 이룩한 최초의 학생회장이었다.

#<15 화>
원을 따라 썰렁한 학생회실을 둘러본 나는 경계 어린 눈길로 곁눈질했다.

“원 님도 제 권한을 노리는 건 아니겠,”

“굳이?”

그는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으음, 곧 실낱같은 의심이 빠르게 사라졌다.

원 정도의 인물은 굳이 학생회장 자리를 탐낼 필요가 없었다. 전년도 학생회장이었던 건 그저 당선됐기


때문이겠지.

“무지렁이들이나 탐내는 권한이죠.”

한순간에 무지렁이들의 왕이 된 나는 얌전히 쭈그러들었다.

그렇다면. 눈치를 살피던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원 님, 그럼 혹시 학생회에 들 생각은,”

“나를?”

“…….”

“감히?”

아무래도 이 늑대는 진실을 말하지 않곤 못 배기는 뚫린 입을 가진 모양이었다.

몰래 흘겨보는데, 다시금 늑대의 입이 뚫렸다.

“하지만 목표는 이왕이면 높은 게 좋겠죠.”

탁, 그가 내민 서류는 S 클래스 학생들의 명단이었다.

S 클래스.
원과 레넌이 속한 이곳은 귀한 가문의 자제가 대부분인, 수인 아카데미의 최상위 클래스였다.

간단히 말하면 잘난 육식 수인들을 한 무더기로 모아 둔 맹수굴이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 포섭할 만한 인물을 살피세요.”

“제외해야 할 몇몇이라 하면?”

“우선은 레넌 에던트, 그 백호.”

“레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해했어요.”

레넌의 명단 위에 있던 원의 손가락이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사자, 헤일린 이스단.”

샛노란 털에 북슬북슬한 갈기.

밀림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사자를 피하려다 이곳까지 오게 된 과거사가 무채색으로 스쳐 지나갔다.

“사자는 왜요?”

“백호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사자는.”

원은 설명할 만한 말을 고른 듯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인성이 없는 수준이죠.”

“…….”

“괜히 엮였다가 몸이 반으로 접힐 겁니다.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뇨, 충분해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앓는 소리를 낸 나는 곧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놓칠 정도의 작은 몸짓이었다.

“어쨌든 노력해 볼게요,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니까.”

“웃기는군.”

“방금 뭐라고요?”

“아닙니다.”

저 못된 늑대가. 입을 삐죽이며 명단을 살피던 나는 어딘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하이에나 일족을 다스리는 가문의 직계, 야닉 펠.

야닉 펠, 야닉 펠.

열심히 곱씹고 있으니, 불현듯 장발을 대충 풀어 헤친 남자가 떠올랐다.

‘그런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겸손을 떨다니.’

‘네?’

‘시치미 떼지 마라. 지난번에도 틀림없이 장풍으로 나무를 박살 냈지 않나.’

일전에 내 서적을 빼앗으려고 들었던 하이에나 수인의 이름이었다.

“아, 야닉 펠!”

“그자는 안 됩니다.”

준비라도 한 듯 칼같이 잘라 낸 원이 문 쪽으로 턱짓했다.

“마침 권한을 노리는 자가 오는군요. 잘 봐 두세요.”


“네?”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쾅, 학생회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데. 호랑이가 아닌 하이에나, 야닉 펠이 냅다 외쳤다.

“학생회 입회를 신청한,”

탁, 원은 야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뒤이어 산뜻할 정도의 단정한 손길로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문 열어, 원 리오나드! 젠장, 문 열라고!”

쾅쾅, 밖에서 야닉이 부서질 듯 문을 두드렸지만 안타깝게도 굳게 잠긴 후였다.

“야닉 펠이 회장의 권한을 노리는 인물인 걸 떠나서.”

문을 등진 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혈기만 가득한 바보는 해롭습니다. 저런 것부터 걸러 내는 게 그쪽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죠.”

“음.”

어느 정도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쾅. 나오라고, 쾅.

리듬감 있는 외침이 배경음처럼 학생회실을 채웠다.

다시 명단에 집중하는 와중, 문득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학생회장이 있으면, 부학생회장도 있지 않나요?”

조금 의외란 표정을 지은 원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용케 생각해 냈다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저게 정말.’

S 클래스 명단을 짚고 있던 원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이동했다.


이윽고 잘 뻗은 그의 검지가 한곳에서 멈췄다.

안나 스웰든.

이번 해 부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인물이었다.

얼룩 한 점 없는 새하얀 문이 벤디의 앞을 가로막았다.

[S 클래스]

별다를 것 없는 문패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선사했다.

위축될쏘냐.

코웃음 친 벤디는 까치발을 들어 문에 난 유리창을 들여다봤다.

들어가기 무서워서가 아니라, 맹수 사냥의 필수 요소인 정탐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강의실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원은 칼로 잰 듯 반듯한 자세로 서적을 읽는 중이고, 책상에 다리를 걸친 채 가십지로 얼굴을 덮은 이는


안 봐도 레넌이었다.

반갑지 않은 얼굴들을 외면한 벤디가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렸다.

바쁘게 움직이던 시선이 이윽고 어느 학생에게서 멈췄다.

‘있다.’

좋아,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덮치자.

그렇게 다짐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벤디의 등을 팡 갈겼다.

“드디어 이 야닉을 모시러 온 건가?”

허리에 손을 얹은 야닉 펠이 호방하게 웃어 젖혔다.


“그럼 그렇지, 막상 이 몸의 학생회 입회를 거절하고 나니 아쉬웠겠지.”

이 망할 하이에나가, 누가 너 보러 왔대?

“아암, 그래. 내가 따로 속셈이 있어서 입회하려는 게 아니라니까?”

아무도 안 물어봤거든. 그리고 속셈이 다분해 보이거든.

벤디가 으르렁 이를 갈며 위협했지만, 나약하게 밀려난 몸뚱이는 맹수 소굴에 들어서고 말았다.

불청객의 등장으로 인해 일순 강의실 분위기가 급변했다.

숨 막힐 정도로 불편한 정적 속, 벤디는 괜히 손을 교복에 비비적거렸다.

S 클래스 학생들이 보내는 눈빛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상대를 배척하는 적의에 가까웠지.

‘모르겠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벤디는 눈을 감다시피 하며 무작정 발을 옮겼다.

어차피 이런 상황까지 온 거, 목적이라도 달성해야 했다.

성큼성큼, 막힘없이 움직인 걸음이 강의실 중간에서 멈췄다.

“부회장, 안나 스웰든.”

벤디의 나직한 부름에,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맞나요?”

학생은 대답 없이 빤한 눈길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벤디는 곁눈질로 관찰하듯 학생을 살폈다.

단정히 묶은 진녹색 머리카락과 안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부학생회장, 안나 스웰든.
원이 알려 준바, 안나는 벤디처럼 타 학년 수석이기에 원치 않게 학생회장 후보에 오른 사례였다.

그러다 조작된 학생회장 선거에 휘말려, 얼떨결에 부학생회장이 되었다고.

고로 어느 알력 다툼에도 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만큼 학생회에 적합한 인물이 어디 있겠나.

더욱이 상업 가문의 직계인 안나는 학생회 예산 관리에 무척 필요한 존재였다.

‘반드시 끌어들여야 돼.’

벤디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찰나, 안나의 입이 열렸다.

“용무가 뭐죠?”

냉담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다름이 아니라, 학생회 관련 일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학생회 관련 일을 왜 저랑?”

“부회장이면 일단은 학생회 소속인데, 대화를 나누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벤디를 바라보던 안나는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부회장이 학생회 활동을 한 경우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말문이 막힌 벤디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이곳에서 부학생회장 직은 허울뿐인 자리입니다.’

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무릇 부회장이 학생회 활동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아카데미에서만은 지극히 예외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당선된 학생회장들은 학생회를 죄다 제 최측근으로만 채웠다고 하니까.

여기서 부회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안나는 탁탁, 서적 두 권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정 없는 눈이 벤디를 위아래로


훑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노골적인 거절이 벤디의 뺨을 확 달구었다.

짚어 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많은 학생 앞에서 저런 말을 듣는 게 부끄럽고, 이 자리를 뜨고 싶고, 화도 나고.

갖가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범람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힌 벤디는 자리를 뜨려는 안나를 불렀다.

“부회장에게 별 볼 일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걸음을 멈춘 안나가 비스듬하게 몸을 돌렸다.

“……글쎄요.”

그녀는 속을 읽기 어려운 눈으로 시선을 부딪쳤다.

“곧 있을 레펠튼의 우승자 정도?”

레펠튼이 뭐람?

어리둥절해진 벤디가 손을 만지작거리자, 냉소한 안나가 다시 발걸음을 뗄 때였다.

“같잖아서 원, 그깟 게 뭐라고. 우승 정도야 누워서 육포 먹기지.”


호전적인 걸 넘어, 건방지기까지 한 답변을 들은 안나가 번개처럼 고개를 틀었다. 온도 낮은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섬뜩한 눈과 마주친 벤디는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나 아니야.

“이 야닉을 이긴 학생회장이 그딴 것도 못 할 리가.”

벤디의 뒤에 선 하이에나 수인, 야닉 펠이 의기양양하게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도전, 받아들이겠다.”

아니, 누가 도전을 했는데.

눈을 휘둥그레 뜬 벤디는 야닉의 옷을 틀어쥐며 입만 뻐끔뻐끔 여닫았다.

“감히 누굴 무시하는 거냐? 겁도 없이.”

대체 왜 네가 나한테 자부심을 갖는 거냐고.

#<16 화>

“안나 스웰든, 회장이 우승하면 입 닫고 우리 학생회의 발닦개나 되어라.”

너나 입 닫아.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학생회인데.

벤디는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입술을 꾹 다문 안나는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새초롬한 표정의 학생회장 옆에 선 야닉이 사냥개처럼 왈왈


짖어 대는 꼴을.

‘우습구나.’
최근 학생회장이 야닉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돌지만, S 클래스 학생들만큼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비록 레넌 에던트나 원 리오나드와 견줄 정도는 아니라도, 야닉 펠이 결코 약한 이는 아니었기에.

단지 뇌까지 근육으로 이뤄진 바보일 뿐이었다.

근육 바보를 학생회장이 영특한 술수로 이겨 먹은 정도겠지.

따라서 학생회장은 전혀 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로 학장이 저 레넌 에던트를 호위로 붙이지
않았나.

“좋아요, 대신.”

침묵을 깬 안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우승하지 못하면 회장의 권한을 나눠 갖는 것도 괜찮겠네요.”

덧붙인 음성에 전에 없는 싸늘함이 묻어났다.

“특히 예산 부문 말이죠.”

야닉은 강의실을 나서는 안나의 등에 대고 호기롭게 외쳤다.

“바라던 바다!”

쓰러지기 직전인 벤디는 사색이 된 채 양 뺨을 쓸어내렸다.

너어는…….

“수발 들 준비나 하라고!”

입 다물어…….

“하하하!”

제발…….
덜컹, 학생회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온 벤디는 허둥지둥 서류의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레펠튼.’

레펠튼, 레펠튼.

한참 만에 서류 더미 속에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빠르게 읽어 내리는 와중, 입구 쪽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해 봄마다 열리는 아카데미 정기 행사야.”

언제 왔는지 모를 레넌이 문설주에 기대어 선 상태였다.

“레펠튼 숲에서 진행되는 행사라서, 대충 레펠튼이라고들 부르지.”

“행사? 무슨 행사인데?”

“사냥 대회.”

사냥 대회라니. 레펠튼의 정체를 파악한 벤디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론이면 몰라도, 사냥 대회 같은 실전에서 승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레넌과 함께 온 원을 발견한 그녀가 아스라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제게 승산이 있을까요?”

“꿈도 희망도 없다고 봐야죠.”

저놈의 입, 저 뚫린 입.

벤디가 원의 입을 노려보고 있을 때, 레넌이 느릿하게 제 턱을 문질렀다.

“승산이 아주 없진 않을지도.”
호수를 닮은 물색 눈동자가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레펠튼은 마법이나 검기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조금 독특한 규칙이 있어.”

“독특한 규칙이라니?”

“동물과 함께 참가하는 규칙.”

본인이 속한 종족의 동물을 말하는 건가. 대강 추측한 벤디는 레넌을 쳐다보며 답을 재촉했다.

“동물이 뭘 뜻하는데?”

“말 그대로야. 대개 자신이 속한 종족의 동물을 데려오곤 하지.”

하지만 여우 수인이라고 꼭 여우일 필요는 없어. 덧붙인 레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동물이라고?’

뜻밖의 규칙을 마주한 벤디는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했다.

살벌하게 마법을 쏘아 대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단 훨씬 나은 규칙 같기도 하고.

그저 안나 스웰든의 의사를 들으러 갔을 뿐인데, 어쩌다 이런 걸 고민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 님은 참가하시나요?”

“흥미 없습니다.”

“레넌은?”

“나도 아직 참가한 적은 없는데.”

흠. 고민이 깊어질 즈음, 벤디는 일순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의 불안이 밀려들었다.

‘본인이 속한 종족의 동물이라면…….’

이곳은 육식 수인만 한 무더기인 수인 아카데미였다.


그럼 학생들이 데리고 오는 동물은 당연히 육식 동물이겠지.

입을 쩍 벌리며 포효하는 짐승들을 상상한 벤디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미처 잊고 있던 사안을 떠올린


탓이었다.

초조하게 엄지로 입술을 문지른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안나 스웰든의 종족이 뭐였죠?”

고저 없는 질문에, 원과 레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곰 일족.”

“곰.”

그렇군.

의연하게 끄덕인 벤디는 먼 곳을 바라봤다.

호랑이나 사자에 비해 과소평가된 감이 있지만, 실제론 후려치기 한 방으로 생물을 무생물로 만든다는,
바로 그 곰.

말간 주홍색 눈동자에서 점차 빛이 꺼져 갔다.

원은 벤디가 찾아 둔 레펠튼 관련 서류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의외인데.’

안나 스웰든은 가진 힘에 비해 아카데미 내의 알력 싸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하물며 여태껏 화내는 것 한번 본 적 없을 정도로 차분한 성정.

그런 이가 벤디와 야닉, 두 또라이의 하찮은 도발에 말려든 걸 보면 아무래도…….

“건드린 부분이 레펠튼인 게 문제였군. 안나 스웰든은 작년 우승자인데, 생각보다 자부심이 컸던


모양입니다.”

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벤디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문을 느낀 레넌은 소리 없이 집무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턱을 괸 벤디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까꿍.”

레넌이 얼굴을 눈앞에 불쑥 디밀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심오한 표정.

휙휙, 코앞에서 손을 흔들어 본 그는 천연히 미소 지었다.

“눈 뜨고 기절했네.”

비록 사냥 대회 우승은 못 할지언정, 신기한 재주를 가진 학생회장이었다.

며칠 사이 눈 밑이 퀭하게 변했다.

유령처럼 교정을 떠돌던 나는 숨죽이며 수풀 속에 숨어들었다.

부스럭, 수풀에서 눈만 내민 나는 신중히 전방을 주시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레펠튼은 위험이 동반되는 사냥 대회인 만큼 교수들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당장 학생회에 커다란 역할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문제가 세 가지 존재했다.

첫 번째 문제는, 벌써 레펠튼 참가 신청일이 다가온 것.

“뭐야, 너도 참가하게?”

“5 위 안에만 들어도 성적 가산점이잖아. 해 볼 만하지.”

참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분주히 어딘가로 이동했다.

두 번째 문제는…….

어흥!
크르릉.

그들과 함께 이동 중인 육식 동물의 존재였다.

호랑이와 치타, 흑표범에 뱀도 모자라…….

“악!”

끼이익! 하늘을 맹렬히 가로지르는 독수리를 발견한 내가 수풀 안으로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진짜 아니야.’

양팔을 모은 채 오들오들 떨자, 수풀도 덩달아 부들부들 진동했다.

이쯤 되니 여기가 아카데미인지 밀림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함께 참가할 동물이 없는 것.

‘참가 조건을 갖춰야 우승이든 뭐든 노려보기라도 할 거 아냐.’

마구간에서 군림 중인 해피를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나, 아무리 생각해도 해피와 함께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 근육 사슴은 분명 레펠튼이고 나발이고 나부터 사냥하려 들겠지.

해피를 대동하는 순간 협동은커녕 적을 하나 더 만드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해피는 절대 안 돼.’

마구간에서 말을 훔칠 수도 없고.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괴는 중, 마침 살짝 구불거리는 주홍색 머리카락이 시야로 들어왔다.

사실 여우 수인 행세를 하는 만큼, 여우를 대동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데.


‘뒷산에 올라 아무 동물이라도 잡아 와야 하나?’

여우를 포획하려다가 도리어 내가 기절하는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참가 신청 마감까지 그럴싸한 동물 동료를 찾아야 한다.

부담감에 손톱만 깨물던 나는 일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웬 노란 물체가 휙, 아카데미 담장을 넘어왔으니.

유유히 걸어가는 노란 짐승을 발견한 내가 수풀에서 솟아올랐다.

아카데미에서 도망친 날, 디아트 도심에서 해피와 격전을 벌인 새끼 짐승이었다.

“너……!”

실낱같은 목소리를 들은 노란 짐승이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어쩐지 표정을 구긴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러나 마나 이미 눈이 먼 나는 맞잡은 손을 비볐다.

붙잡을 수 있을 만한 짐승이 하늘에서 톡 떨어지다니.

지금만은 육식 동물의 새끼가 아닌 수호천사요, 빛과 소금이었다.

‘수인일 확률도 없고.’

의심할 여지도 없지.

날 때부터 인간의 외형인 수인은 어린아이일지언정 동물형은 다 자란 성수이기에, 수인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살금살금 접근을 시도하자 노란 짐승이 눈을 부라렸다.

“……?”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도망갈 거라 생각한 노란 짐승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기에.

‘이게 아닌데.’

도리어 움츠러든 내가 접근하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아무리 콩알만 한 송곳니라도 송곳니는 송곳니였다.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사이 껄렁껄렁하게 발치까지 접근한 노란 짐승은 툭, 앞발로 내 발목을 건드렸다.

동시에 노란 짐승의 털이 파도치듯 쭈뼛 섰다.

아니, 제가 먼저 쳐 놓고 왜 경악한담.

두리번두리번, 얼어붙은 짐승은 연신 제 앞발과 나를 번갈아 봤다. 갓 태어난 송아지가 처음 걸음마를 뗀


양 당황한 모양새였다.

우왕좌왕하는 노란 짐승을 내려 보던 나는 허리를 굽혀 양손으로 집어 올렸다.

공중에 떠오른 노란 짐승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잡았다.”

이게 이렇게 쉽게 잡힐 일인가.

뚜벅뚜벅, 복도에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맞물렸다.

어슬렁어슬렁 걷던 레넌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회장은 레펠튼에 같이 참가할 동물은 구했나?”

“알아서 하겠지.”

성의 없게 답한 원은 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인수인계를 위한 벤디와의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원이 하는 모양새를 발견한 레넌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디밀었다.


“수상하네, 네가 순순히 남한테 협조할 리가 없는데.”

“…….”

“왜지?”

“관심 꺼, 그리고 얼굴 치워.”

정다운 대화를 나누며 학생회실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에서 한 박자 늦게


작디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던 원과 레넌은 그대로 멈춰 섰다.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두 사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17 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파에 뻣뻣한 자세로 앉은 벤디의 모습쯤이야 이제는 익숙했다.

그러나 그런 벤디의 바로 옆, 나란히 앉은 새끼 짐승의 존재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심지어 벤디와 새끼 짐승은 내외라도 하듯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전방만 바라보는데. 보는 사람마저


어색해질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였다.

넋을 놓았던 레넌이 허탈하게 웃으며 원에게 속삭였다.

‘회장은 저걸 어디서 주워 왔지?’


‘……글쎄, 나도 궁금하군.’

‘사람이 저렇게 매일매일 새롭기도 쉽지 않은 법인데.’

‘동감하는 바야.’

벤디의 옆에 다소곳이 앉은 노란 짐승은 사자 일족 수장의 직계, 헤일린 이스단이었다.

S 클래스의 최고 바보, 야닉 펠이 기피하는 대상을 서술하시오.

이 문제를 들은 학생들은 맞춘 듯 세 가지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레넌 에던트. 이유는 정신이 집 나가서.

원 리오나드. 이유는 머리 꼭대기에서 놀아서.

그리고 헤일린 이스단. 이유는 셋 중에 가장 성격이 나빠서.

특히 헤일린 이스단은 야닉과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왜냐. 야닉이 조금만 심기를 거스르면 거꾸로 꽂아 버리니까.

덕분에 아무리 위아래 없이 날뛰는 야닉도 헤일린 이스단 앞에서는 한 수 접는 수준이었다.

후진 없는 헤일린 이스단의 돌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위 귀족이 대놓고 도박장을 드나들고, 강의는 간헐적으로 출석하고.

심지어 그는 모종의 이유로 동물형이 성수가 아닌, 새끼 사자인 특이점이 있었다.

더 특이한 건, 그걸 숨기지 않는 태도였다.

보통의 육식 수인이라면 이 약점을 숨기기 위해 동물형을 절대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헤일린


이스단은 심심하면 새끼 사자의 모습으로 아카데미를 쏘다녔다.

거동이 편하고, 개구멍을 통해 아카데미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이유로.


이 행동의 이면엔 새끼 사자일지언정 타인에게 질 일 따윈 없다는 진의가 깔려 있었다.

아무튼 학생들은 물론 교직원, 나아가 교수마저 기피하는 그 망나니가.

현재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약하다고 봐도 무방한 벤디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실정이었다.

“…….”

탁상을 중간에 두고 마주 앉은 벤디와 원, 레넌 사이로 싸한 정적이 휘몰아쳤다.

원과 레넌은 빤한 눈길로 헤일린 이스단을 바라봤다. 도대체 의도가 뭐냐는 눈길로.

시치미를 뚝 뗀 헤일린 이스단은 진짜 동물이라도 된 양 길게 하품했다. 알려 줄 심산이 없어 보였다.

그들 사이에 곧게 허리를 펴고 앉은 벤디는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못마땅하게 턱을 괸 원을 한 번.

실실거리는 레넌을 한 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노란 짐승을 한 번.

‘분위기가…….’

번갈아 살핀 벤디는 슬그머니 배낭 속에 새끼 짐승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노란 짐승은 저항 없이 배낭 속으로 들어와 머리만 쏙 내밀었다.

‘수상해.’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원과 레넌의 시선이 새끼 짐승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기에.

노란 짐승은 제게 닥친 위기도 모른 채 이젠 도롱도롱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응시하던 원은 곧 손을 내밀었다.

“넘겨요.”
두서없는 말이지만, 주체가 뭔지 단번에 알아들은 벤디는 모른 척 중얼거렸다.

“뭘 넘기라는…….”

“알면서 뭘 되묻는 건지.”

말문이 막힌 벤디는 고개부터 도리도리 저었다.

“데려가려는 이유를 먼저 알려 주세요.”

“회장.”

레넌은 눈짓으로 배낭을 가리키며 수상쩍게 미소 지었다.

“순순히 넘기는 편이 신상에 좋을걸.”

협박성 짙은 발언을 들은 벤디는 순간 사고가 마비됐다.

원과 레넌의 입에서 반짝이는 송곳니가 배낭 속 짐승의 슬픈 말로를 예상하게끔 만들었다.

이런 새끼 짐승을 데리고 있다 한들 제 신상에 무슨 피해가 있을 거라고 저러는지.

오히려 원과 레넌이 이 짐승을 탐낸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겁먹은 벤디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더 이상 멀끔한 수인이 아니었다. 식욕에 눈이 먼 육식 동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배낭끈을 당긴 벤디가 배낭을 꽉 끌어안았다. 지난번에 제 목을 노리던 레넌의 모습이 노란


짐승의 위로 겹쳐 보였다.

“미안하지만…….”

작은 짐승에게 연민과 동질감이 휘몰아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 풀어 주면 풀어 줬지, 두 사람에게 노랑이를 내줄 순 없어요.”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벤디는 쾅, 도망치듯 학생회실을 나섰다.


남겨진 원과 레넌은 멍하니 열린 문을 바라봤다.

그새 노랑이란 애칭까지 붙인 건지 뭔지.

동물 행세를 하는 헤일린 이스단이나, 그것도 모른 채 들고 다니는 학생회장이나.

굳어 있던 원은 목을 조이는 교복 타이를 짜증스럽게 풀었다.

“어째서 학생회장이 헤일린 이스단을 데리고…….”

“원.”

오랜만에 냉랭한 눈빛을 보인 레넌이 원의 말을 잘랐다.

“틀렸어.”

저 기묘한 상황의 전말을 알고 있나 싶어, 원이 물끄러미 레넌의 물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뭐가 틀렸단 거지?”

“저 사자는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야.”

“그럼 누군데.”

“노랑이 이스단이래.”

원은 레넌의 정신이 언제까지 가출해 있을 예정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안 됩니다.”

레펠튼 참가 신청 담당 교직원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노란 짐승이 든 배낭을 앞으로 쭉 디밀었다.

조그마한 새끼 짐승을 마주한 그의 동공이 흔들렸으나, 곧 이성을 찾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안 됩니다.”

“어떤 동물을 대동하든 자유라고 알고 있는데요. 다시 한번 재고 부탁드려요.”

스윽, 책상 밑으로 군고구마가 든 종이봉투를 건넸지만, 스윽, 교직원의 손에 막혀 튕겨 나왔다.


뇌물조차 통하지 않았다.

“불가합니다.”

그러니까 왜.

물러나지 않은 나는 재차 노란 짐승이 든 가방을 들이밀었다.

“안 되는 건 알겠는데요, 최소한 이유라도 말씀해 주셔야지요.”

“이봐요, 학생!”

높아진 언성으로 인해 놀란 내가 찔끔 움츠렸다.

“그거야 당연히 이분은!”

그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려는 찰나, 번개처럼 가방에서 튀어나온 짐승이 교직원의 입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찰싹, 찰싹. 공중에서 연타로 입을 갈기는 속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해피와 호각을 이룬 인재답게, 천하를 호령할 법한 매서운 기세였다.

어리벙벙하게 구경하던 나는 뒤늦게 노란 짐승을 당기며 만류했다.

“노랑이 너, 그만해! 괜찮으세요?”

“저,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또 입을 맞을까, 손으로 입을 가린 그는 노랑이를 외면하며 눈을 뒤룩거렸다.

“아직 새, 새끼이지 않습니까. 보호! 보호 차원에서 사냥 대회 참가가 불가능…… 아무튼


불가능합니다.”
납득할 만한 사유였지만, 설명하는 모습이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그럼 이만.”

교직원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양 꽁무니 빠져라 어딘가로 뛰어갔다.

허둥지둥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노란 짐승을 다시 배낭에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 거야.”

타박을 쌩하니 무시한 노란 짐승은 언제 깨어 있었냐는 듯 도롱도롱 졸기 시작했다. 새끼답게 조금만


활동해도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한숨 쉰 나는 노란 짐승을 넣은 배낭을 주섬주섬 등에 멨다.

‘……어쩔 수 없긴 해.’

이렇게 어린 짐승을 사냥 대회에 데려가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수순이긴 했다.

하. 울적한 심정과 다르게 맑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본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레펠튼의 날이 밝았다.

푸른 하늘 아래, 저마다 동물을 한 마리씩 낀 학생들이 레펠튼 숲 입구에 도열했다.

사냥 대회란 주제에 걸맞게 호전적인 공기가 맴돌았다.

참가자들은 바른 자세로 허리를 곧게 세운 상태였는데, 특이점이 하나 존재했다.

그들의 고개가 전부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


관중석에 자리한 학생들마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

수많은 시선의 중심에는 바로 학생회장, 벤디 레피가 서 있었다.

안나 스웰든과의 승부 때문일까.

평소에는 속을 읽기 어려운 새초롬한 무표정이 오늘만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흘끔.

학생들이 대동한 맹수들을 곁눈질한 벤디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다시 전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흘끔, 흘끔.

곁눈질은 계속됐다.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질려 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벤디의 그런 기이한 행동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벤디가 아닌, 정확히는 그녀가 대동한 동물에 고정되어 있으니까.

심지어 안나마저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너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한 학생이 옆 학우에게 속삭였다.

“뭐로 보이냐, 저거?”

“몰라, 저런 동물이 있었나? 네 눈엔 뭐로 보이는데?”

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건 다름 아닌 벤디의 파트너, 해피였다.

도드라진 울룩불룩한 근육.

수많은 맹수들을 앞두고 콧방귀나 뀌는 담력.


다 자란 말보다 큰 덩치.

강렬하다. 너무도 강렬한 인상이었다.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지만, 단연 그들의 시선을 잡아끈 건,

“저거…… 사슴…… 아닌가? 여우가 왜 사슴이랑…….”

오직 수사슴만이 가지는, 머리 위에 자라난 뿔이었다.

“사슴? 저게 사슴이면 대륙은 이미 사슴들이 제패했겠다.”

만에 하나 저게 사슴이라면, 영물을 넘어 괴수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18 화>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별다른 제어 장치 없이 동물을 자유롭게 대동한 상태였다.

옆에 함께 서거나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조류의 경우는 어깨에 얹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학생회장은…….

움직인 시선이 해피의 몸통에 매인 가죽끈을 지나 수레에 머물렀다.

그리고 수레 안에 의연히 선 벤디에게서 멈췄다.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던 학생이 꿀꺽, 목울대를 울렁였다.

“저, 전차전이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미친……. 사냥 대회에 무슨 전차전이냐? 바퀴 소리에 사냥감들 다 달아나겠네. 애초에…….”

애초에 말도 아니고, 사슴을 이용하여 전차전을 벌인단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는 물론 등에 사람을 태우지 않는 해피 때문에 나온 방편이지만, 학생들이 알 길이 없었다.

괴상한 장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한편, 단상 위.

사슴에게 홀린 학생들을 내려다보던 밀란느 학장이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눈에 띄지 말라 했는데 가장 눈에 띄고 있구먼.’

육식 수인과 육식 동물로 가득한 이곳에서 벤디와 해피, 두 사슴이 왜 전장에 나선 장수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 돌린 그녀는 자신의 손주인 레넌을 찾았다.

백호와 함께 참가자들 사이에 낀 레넌은 벤디 쪽을 보며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미친 듯이 웃는데, 저리 행복해 보일 수가.

‘정신머리 없는 녀석.’

저 반푼이를 감시랍시고 붙인 게 과연 잘한 선택일까.

밀려드는 회의감을 삼킨 밀란느 학장은 큼, 크게 헛기침하며 주의를 끌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건 학우들의 안전일세.”


기나긴 연설보다 안전을 강조하는 담백한 말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준비를 마쳤음을 확인한 학장은 지팡이를 쿵 내려찍었다. 엄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무운을 비네.”

뿌우- 사냥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레펠튼 숲에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빗살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가고, 누군가는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높였다.

기세에 눌려 호방하게 치고 나가지 못한 나는 시선을 돌렸다.

결국 참가하지 못한 노란 짐승은 저 멀리, 관중석 한자리를 차지한 채 동네 왈패처럼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쟤는 대체 정체가 뭐람.’

아카데미 자체에서 기르는 동물이라도 되나.

‘차라리 해피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머뭇거리던 나는 일순 움찔 어깨를 떨었다.

노란 짐승의 바로 옆, 원 리오나드의 얼굴이 섬뜩하리만치 굳어 있었기에.

원래 표정 변화가 큰 편이 아님에도, 지금은 황금색 눈동자가 번득일 정도로 살벌했다.

더군다나 그 살기 어린 눈빛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어째서?’

바로 나였다.

눈빛을 피하지도 못한 나는 안장을 틀어쥔 그대로 굳었다.

시간이 멈춘 캄캄한 공간 속, 원과 나만 남겨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와중, 새하얀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신경 꺼.”

익숙한 은발이 바람을 맞아 흩날렸다. 집채만 한 백호의 등에 올라탄 레넌이었다.

“저 늑대는 예전부터 초식 수인이나 초식 동물만 보면 과민 반응하니까.”

간헐적 변태야, 간헐적 변태.

원 쪽으로 고개를 까딱 기울인 그가 선선히 웃어 보였다.

“그럼 해피를 보고……?”

“그렇겠지, 그 우람한 사슴도 일단은 초식 동물이니까.”

“왜 저러는 건데?”

“글쎄, 초식 수인 중에 없애고 싶은 녀석이라도 있나?”

대수롭지 않게 넘긴 레넌이 뚜둑 소리 나게 목 근육을 풀었다.

반면 대수롭게 받아들인 나는 두근, 두근, 우레처럼 뛰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초식 수인한테? 대체 왜?’

초식 수인과 초식 동물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니.

이유야 몰라도, 사슴 수인인 사실을 들키는 순간 원의 살의가 나를 향할지도 모른단 의미였다.

애써 두려움을 삼킨 내가 괜히 한 마디 덧붙였다.

“늑대가 초식 수인이랑 엮일 일이 뭐가 있다고.”

“갯과는 보통 하나에 꽂히면 저렇게 굴더라고.”

호응하며 기지개를 켜던 레넌이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회장, 활도 다룰 줄 알았어?”
빤한 시선이 관찰하듯 내가 든 활에 머물렀다.

“약간은.”

머쓱하게 답한 나는 슬그머니 등 뒤로 활을 감췄다.

과거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배우긴 했지만, 호신용은커녕 겉치레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뭐, 일단 출발하지. 미적거리다가 실격할 순 없으니까.”

레넌이 길을 인도하듯 살짝 비켜섰다.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푸르른 색감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레펠튼 숲 초입, 끝이 보이지 않는 밀림의 시작이었다.

드르륵, 수레바퀴가 흙바닥을 요란하게 긁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며든 빛이 전방을 밝혔고, 군데군데에서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숲을 두리번거리던 내가 앞서가는 레넌을 불렀다.

“레넌, 너는 왜 지금까지 레펠튼에 불참했는데?”

“공정성을 위해서. 학장의 손자를 상대하는 건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부담일 테니까.”

웬일로 멀쩡한 발언을 한담.

“-라고 노인네가 그러더군.”

그럼 그렇지. 밀란느 학장님다운 판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왜 참가하는 거야?”

“회장을 호위해야지, 그러니까 회장.”


“응.”

“우승을 노릴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

“꼭 나를 처리해야겠어?”

저 호랑이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아무리 레넌이라도 우승 자리는 넘길 수 없기에, 뒤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내가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동시에 갑자기 멈춘 그가 나와 해피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작됐네.”

저기. 비스듬하게 몸을 튼 레넌이 숲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쐐애액-

어떤 참가자가 던진 날붙이가 수풀 사이에 나타난 하이에나를 꿰뚫었다. 캐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하이에나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무, 무슨…….”

대체 왜.

아연실색한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수레에서 내려섰다.

하이에나가 사냥당한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사냥 대회인 만큼 살생을 각오하고 왔으니까.

다만…….

‘어째서?’

참가자가 사냥한 하이에나는 숲에 서식하는 동물이 아닌, 다른 참가자가 데려온 동물이었다.


“어째서 참가자와 함께 온 동물을 공격하는 건데?”

경악 어린 질문에, 레넌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사냥 대상이 꼭 숲에 있는 동물이라곤 하지 않았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당연히 동행하는 동물과 함께 숲의 생물을 사냥하는 거라 생각했지.

동행하는 동물까지 사냥 대상에 포함되어 있을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얼어붙은 나는 절명한 하이에나의 주인인 참가자를 바라봤다.

참가자는 하이에나가 죽어서가 아니라, 하이에나가 죽는 순간 참가 자격을 상실한 제 처지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에 동행할 정도면 서로 어느 정도 유대를 쌓은 동물 아니야?”

간신히 뱉은 목소리는 깔끄럽게 갈라진 상태였다.

“유대? 회장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레넌은 도통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부리는 동물을 데려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런 건 너무 매정,”

“동물에게 해피나 노랑이 따위의 애칭을 붙이는 회장이 특이한 거지.”

“…….”

“숲에 사는 동물과 대동하는 동물에 무슨 차이가 있는데?”

“그건…….”

말끝을 흐린 나는 결국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휘이잉- 불어온 바람에서 짙은 혈 향이 묻어났다.

축 늘어진 하이에나를 태연히 바라보는 레넌이 전에 없이 낯설었다.

‘달라.’

동요 없는 물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나와 레넌은 달랐다.

해피를 나름 친구이자 동료로 여기는 나와 달리, 레넌에게 동물은 말 그대로 거느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너무 달라.’

안일했다.

안일하게도,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격이 존재함을 간과하고 말았다.

사냥하지 않으면 사냥당한다.

육식 수인들은 한평생 이런 논리에 따라 살아오지 않았을까.

사슴과 토끼가 마주쳐도 서로 풀만 뜯다 헤어지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천지 차이였다.

“아직 레펠튼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데.”

웃음기 어린 레넌의 목소리가 사념을 깨뜨렸다.

“우승 기준은 확인했어?”

달달 외우다시피 한 레펠튼 관련 서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승 기준. 어떤 동물인지도, 몇 마리인지도 제대로 정해 놓지 않은,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기준이었다.

주춤, 주춤. 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승 기준은…….”
의문스럽기 짝이 없던 우승 기준이, 육식 수인의 시선에서 생각하면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이 숲에 있는 모든 동물 중, 가장 강한 동물을 사냥한 참가자.’

정답에 도달한 순간 이끼에 미끄러진 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

기우뚱하는 몸을 손쉽게 잡아챈 레넌이 나를 백호 위로 올렸다. 체 향이 훅 끼쳐 옴과 동시에 등에 단단한


몸이 닿았다.

“회장은.”

눈을 내리깐 레넌은 내 손등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쉽게 다치네.”

수레에 오르느라 부딪혔을 때 멍이 든 모양이었다.

흠칫한 나는 반사적으로 손등을 가렸다. 육식 수인은 이 정도로 멍이 들지 않는, 튼튼한 육체를 가진


사실이 떠올랐다.

#<19 화>

“이건,”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데, 쾅!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나무에 날아가 부딪힌 늑대의 몸이 주르륵,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쿵, 쿵.
묵직한 걸음으로 늑대 앞에 선 암갈색 곰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레펠튼 숲 입구에서 대기하며 보았던 육식 동물들과는 체구, 기세를 비롯한 모든 게 압도적이었다.

‘……안나 스웰든.’

그런 곰의 뒤에 자리한 안나가 우리 쪽을 돌아봤다.

힐긋, 나와 레넌을 일별한 그녀는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마치 상대할 가치조차 없단 듯.

‘아무리 곰이라도 저만한 크기의 늑대를 어떻게 한 번에…….’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현실감 없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안나 스웰든이 작년 우승자인 이유.”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한 레넌이 발랄하게 물었다.

“뭘 것 같아?”

물색 눈동자가 환하게 휘어졌다.

“저 둘의 조합을 아무도 쓰러뜨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귀를 찢는 듯한 곰의 포효가 레펠튼 숲 일대를 뒤덮었다.

짹짹, 짹짹짹.

머리 위에서 정오를 알리는 활기찬 새소리가 울렸다.

신경을 곤두세운 나는 뒤를 돌아봤으나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상하좌우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레펠튼 숲 한가운데. 이곳의 참가자들과 동물들은 나와 해피에게,


“…….”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짹짹, 짹짹짹.

지저귀는 새들 아래에 덩그러니 선 나와 해피가 시선을 교환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외로운 도토리
신세였다.

나약한 여우 수인과 근육질 사슴.

‘관심이 없을 수밖에.’

사냥 가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공들여 우리를 사냥해 봤자 우승 실적에는 하등 도움 되지 않을 테니까.

하다못해 우승을 걸고 승부 중인 안나마저 우리를 사슴 똥 취급하며 지나가지 않았나.

호위할 것처럼 굴던 레넌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현기증이 나네.’

현기증은 무슨,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으니 재미가 없었겠지.

그렇게 두꺼운 팔뚝을 갖고선 가녀린 척해 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이쯤이면 호위가 아니라 그냥 화상에 불과했다.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레넌은 나를 돕지 않을 테니까.

애당초 내 호위를 맡는 것도 학장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 중요한 순간엔 방관자의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로, 레넌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거나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자리를 비우곤 했다.
캥, 끼이익!

와중에도 밀림 사이로 생사를 오가는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안장을 꽉 틀어쥐었다.

육식 수인들에겐 일상일지는 몰라도 우리에겐 아니니까. 마물 사냥과는 결이 달랐다.

‘자칫 해피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조급해진 내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해피, 우리,”

무어라 입을 떼려는데, 끼약, 기겁한 해피가 날뛰어 댔다. 대뜸 튀어나온 족제비가 엉덩이를 덥석 깨문
탓이었다.

“뭐야?”

놀란 내가 휙 고개를 틀자, 참가자로 보이는 학생이 경계하며 주춤거렸다.

해피의 엉덩이를 물고 늘어지는 족제비의 주인인 듯했다.

활을 겨냥하는 순간, 뒷다리를 들썩인 해피가 수풀을 헤치며 내달렸다.

“멈춰, 해피!”

수레 또한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굴러갔다.

“진정하래도!”

거칠게 안장을 당겼지만, 해피의 우람한 근육은 더욱 불거져만 갔다.

없던 길도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두두두두, 투우라도 하듯 맹렬한 속도로 숲을 질주하는 찰나,

“해피, 안 돼!”
휘청거린 해피의 몸이 내리막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레펠튼 숲 깊은 길목.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안나는 엎어진 곰을 쓸었다.

곰의 등에는 화살이 여러 발 꽂힌 상태였고, 쌕쌕거리는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늘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치료가 늦춰지면 목숨이 위험할 만한 상처였다.

‘등의 상처가 제법 깊어.’

화살 자체보다는 화살촉에 발라진 독이 문제였다.

‘쓰레기 같은 수작을.’

그녀의 녹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학생회장의 권한을 두고 내기를 벌인 만큼, 권한을 노리는 이들의 방해 공작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다.

공들여 벤디 레피를 학생회장직에 앉혔는데, 안나가 권한을 가로채는 건 그들의 예상 범위 밖일 테니.

그러나 아카데미 자체 행사에서 독까지 사용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아니, 차라리…….’

뒤에서 수작이나 부리는 소인배답게, 살상력 없는 마비 독을 쓴 거에 감사해야 하나.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약한 마비 독의 한 종류였다.

깊게 한숨 쉰 안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뭐가 됐든 자신의 실책이었다.

‘이래서야…….’

한결 차분해진 그녀는 오르락내리락 가슴이 바쁘게 움직이는 곰을 훑었다.


응급 용품도 변변찮은 탓에 화살을 함부로 뽑아낼 수도 없는 노릇. 아쉽지만 이쯤에서 기권하는 편이
나았다.

기권 의사는 신호탄. 던져 둔 가방을 가지러 가려던 안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거기, 누구지?”

경계 어린 눈길이 고요한 수풀에 박혔다.

저벅저벅, 이윽고 기척을 드러낸 이가 검으로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얼씨구, 곰이 전투 불능이구만?”

“……야닉 펠.”

“우승은 물 건너갔군, 안나 스웰든.”

크르릉, 일개 하이에나의 두 배나 달하는 몸집을 가진 하이에나가 야닉의 다리를 에워쌌다.

막아서듯 앞으로 나선 안나는 이를 짓이겼다.

보통 때면 하이에나 따위는 위협조차 되지 않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상황이 안 좋아.’

상처 입은 곰을 등진 그녀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도주가 불가능한 상태.

곰을 지키며 야닉을 상대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닉 펠 또한 나름 S 클래스에서 날고 기는 축에 속하니까. 단지 바보라 저평가 되었을 뿐,

안나는 승복하듯 천천히 검을 내렸다.

사력을 다해 덤벼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녀 역시 앞선 기습에 방어하느라 심신이 지친 상태였기에.

“말마따나 우승은 포기했으니 비켜 주지 그래요.”


“기권하게 둘 순 없지, 저 곰을 죽여서 학생회장에게 넘길 거니까.”

“학생회장에게……?”

의문 어린 안나의 눈빛에, 야닉은 짐짓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뭐, 이쪽도 회장한테 잘 보여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투우처럼 들이박고 보는 야닉이 저토록 저자세라니. 안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학생회장이 당신을 쓰러뜨렸다는 게 사실이었나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헛소문이면 이 야닉이 가만히 있겠냐? 모르나 본데, 회장은 기합만으로 나무를…… 아니, 됐다.”

쩝. 입맛을 다신 야닉은 뒷말을 뭉그러뜨렸다.

아무래도 학생회장은 힘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그렇지 않고서야 약골처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기행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가 정신이 팔린 사이, 안나는 바닥에 놓인 제 가방을 곁눈질했다. 야닉이 덤벼들기 전에 기권 신호탄을


쏘아 올려야 했다.

‘지금.’

휙, 그녀가 몸을 날림과 함께 야닉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어딜.”

서걱, 신호탄과 함께 가방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안나가 채 탄식하기도 전에 야닉의 하이에나가 곰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곰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안 돼!”

“뭐야, 저거한테 정이라도 붙였냐?”


코웃음 친 야닉은 곰의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순간 안나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세미!”

드물게 필사적이 된 그녀가 손을 뻗는데 부스럭, 수풀이 요동쳤다.

우뚝. 허공에서 검을 멈춘 야닉이 수풀 쪽을 돌아봤다.

부스럭, 부스럭.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곧 꼬질꼬질한 두 인영이 불쑥 솟아올랐다. 벤디와 해피, 두 사슴이었다.

이마에 나뭇잎을 붙인 벤디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했다.

‘왜 하필.’

단지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졌을 뿐인데, 왜 이런 장면이.

정색한 벤디는 스르륵, 잠수하듯 수풀로 들어갔다.

꾹꾹. 머리를 누르는 강한 손길에 못 이긴 해피 또한 스르륵, 수풀 아래로 사라졌다.

“…….”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수풀을 마주한 안나와 야닉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오세요.”

“나와.”

미처 숨기지 못한 사슴뿔이 수풀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멀찍이 선 나와 해피, 그리고 안나와 야닉의 오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해피 뒤로 은근슬쩍 몸을 숨긴 나는 찬찬히 상황을 살폈다.


등에 화살을 꽂은 채 흙바닥에 쓰러진 곰. 그런 곰의 앞을 두 팔 벌려 막아선 안나.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야닉.

‘뭔지는 몰라도…….’

보아하니 안나의 곰이 부상을 입었고, 야닉과 하이에나가 공격 중인 모양이었다. 안나는 쓰러진 곰을


지키려는 중이고.

나름 추측하던 나는 휙 소리 나게 곰을 돌아봤다.

‘잠깐, 곰을 지킨다고?’

육식 수인에게 동물은 별 가치가 없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부리는 동물을 데려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앞서 레넌이 말한 내용과는 판이한 상황이었다.

‘왜?’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야닉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걱정 마, 회장. 어차피 곰 머리통은 회장에게 넘길 거였으니까.”

부웅, 검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슬아슬한 장면을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멈춰!”

검을 멈춘 야닉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구겼다.

“이걸 죽여야 회장이 우승하는 거 몰라?”

알아, 아는데. 나는 초조하게 뒤꿈치를 들썩였다.

“왜 막는 건데?”

왜냐고 물어 봤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입이 마음대로 움직인 걸 어떡하라고.


‘이럴 때 육식 수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뒤로 감춘 손을 연신 만지작거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 곰은, 내.”

“내?”

“내 먹이야.”

#<20 화>

단호한 주장에 검을 쥔 야닉의 손이 움찔 경련했다.

이게 통하네. 어이가 없어진 내가 두 눈을 여러 번 끔벅였다.

‘사냥감을 두고 괜히 저들끼리 치고받는 게 아니었구나.’

탐욕스러운 육식 수인들에겐 먹이의 소유권 여부도 중요한 모양이었다.

“직접 처리하겠다면 뭐…….”

순순히 검을 내린 야닉이 숲 쪽으로 걸어갔다.

안도한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기 무섭게, 반쯤 뒤돈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회장.”

“응?”

“왜 내 눈엔 회장이 저 곰을 감싸는 걸로 보이지?”


쓰러진 곰을 가리키는 눈이 전에 없이 싸했다. 크르릉, 야닉의 기세에 반응한 하이에나가 거친 숨을
뱉었다.

“회장이 우승을 포기하는 건 곤란하지. 안나 스웰든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건 나도 반대하니까.”

한순간에 공기가 스산하게 얼어붙었다.

싸움만 아는 왕 바보라는 게 사실인지, 야닉은 이런 상황에서는 감이 좋았다.

노골적인 의심을 마주한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말로 곤란해.”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한 야닉이 따지고 들려 할 때, 내가 먼저 선수를 가로챘다.

“학생회에서 뭐라도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어?”

얼떨떨해진 그가 채 반박하기도 전에 내 말이 따발따발 쏘아졌다.

“학생회에서 일하고 싶은 거 아니었냐고.”

“그, 그런데?”

“그런 사람이 벌써부터 내 먹이를 탐내고 그러면 나야말로 곤란하지.”

“지금 그 말은 나를 학생회에…….”

고장 난 사람처럼 더듬거리던 야닉은 황급히 검을 갈무리했다.

“……그래, 먹이를 탐내면 안 되지, 안 돼. 괜한 의심을 했군, 내 실수야.”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꿀세라, 뒷걸음친 야닉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 말 번복하지 마라! 내일 학생회실로 튀어갈 테니까!”


단순해서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바람처럼 사라지는 와중에도 쩌렁쩌렁 외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허무하게 남겨진 나는 수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피, 이쪽으로 와.”

겨우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다리가 종잇장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상태였다.

달달달, 얼마 후 내가 끌고 나온 건 나뭇잎이 덕지덕지 붙은 수레였다.

의미 모를 행동에, 숨도 제대로 쉬고 있지 않던 안나가 한 걸음 물러났다.

한참 안나와 그녀의 곰을 노려보던 나는 간신히 입을 웅얼거렸다.

“……려요.”

“네?”

“여기 올리세요, 그 곰.”

“그게 무슨,”

“데려가서 치료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안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속셈이죠?”

“속셈은. 그 곰이 죽지 않았으면 하잖아요.”

“……웃기는 소리.”

“상태 안 좋은 거 안 보여요?”

차마 가까이 가진 못한 나는 소심하게 곰을 손가락질했다.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는다.
그게 레넌이 주장한 육식 수인의 법칙이지만, 안나가 곰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세미!’

아까 안나가 무심코 외친 이름은 곰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결론에 다다르니 도저히 내 손으로 곰을 사냥할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권력 하나 얻자고 약한 생물을 죽이라 가르치진 않았기에.

쓰러져 있어도 사냥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곰을 시선으로 훑다 눈을 돌렸다. 아무튼, 지금만큼은 약한


생물이긴 했다.

홀로 합리화를 반복하는 나를 주시하던 안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같잖은 동정 필요 없어요.”

“제 도움은 싫은 거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설마 그 곰을 살리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죠?”

그녀는 정곡을 찔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거면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곰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나 말든지.

빤한 거짓말을 마주한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곰의 목숨보다 남의 시선이 더 중요해요?”

“그건…….”

“육식 수인 사이에는 동물을 경시하는 문화라도 있나 봐요.”

내 비아냥에 안나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냥 말해 본 건데 정곡이라도 찔린 표정이라니.
“…….”

침묵으로 일관한 그녀는 쌕쌕 숨을 몰아쉬는 곰을 내려다봤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치료의 시급함을


알렸다.

망설이듯 하얗게 질린 손이 몇 번이나 쥐었다 펴는 일을 반복했다.

우득,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문 안나가 발걸음을 뗐다.

“비켜요.”

수레를 지나친 그녀가 곰의 상체를 번쩍 들었다.

쿠웅, 비상한 괴력으로 던지듯 수레에 올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맞닥뜨린 나는 연거푸 눈을 비볐다.

‘저 무게를 혼자 든다고?’

저 괴수 같은 곰을……?

곰을 싣느라 정신이 팔린 안나는, 나와 해피의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드드득, 수레바퀴가 묵직한 소음을 냈다.

안나는 앞뒤에서 수레를 끄는 벤디와 해피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조금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경직된 뒷모습이었다.

마침 슬그머니 뒤돌아보다가 안나와 시선이 부딪힌 벤디가 눈에 띄게 뚝딱거렸다.

“해, 해피, 더 성실히 끌어야지.”

푸, 푸르릉…….
안나의 진득한 눈길을 느낀 해피마저 뚝딱거리며 수레를 끌었다.

곰도 던지는 괴력 앞에서 체면 따윈 없는 법이었다.

두 뚝딱이를 바라보던 안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해피라고…….’

사슴에게 이름을 붙인 건가.

자신 외에 동물에게 애칭 따위를 붙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름을 지어 주고 싶다니? 안나, 웃기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진짜 별종을 다 보네.’

곰과 애착을 형성하는 제게 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지 않았나. 생소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이동한 시선이 수레에 엎어진 곰에게 닿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세미…….’

기어 다닐 때부터 내내 함께였다.

똑같은 새끼 곰인 주제에 걸음마를 도와주고, 자신이 할퀴고 주물러도 입질 한 번 안 한.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 몸살로 앓아누웠을 때, 시험을 망쳐 우울할 때.

사교계에 데뷔하여 새로운 친우를 사귀느라 소홀해졌을 때에도.

맹목적일 정도로 곁을 지켜 준 존재였다.

‘그 곰의 목숨보다 남의 시선이 더 중요해요?’

‘타인의 시선이 네 목숨에 비견될 수 있냐고?’


그럴 리가.

오기를 부렸을 뿐, 벤디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이미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학생회장.”

“네?”

“왜 돕는 거죠? 야닉 펠을 말리지 않았으면 손쉽게 우승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이 곰을 살리는 게 그보다 가치 있진 않을 텐데. 그런 의미가 내포된 질문이었다.

수레를 끄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체력만 보아도 야닉을 이긴 건 요행이 틀림없었다.

멈칫한 벤디는 다시 흙바닥이 파일 만큼 수레를 끌었다.

“무자비한 육식 수인은 설명해 봤자 몰라요.”

육식 수인, 육식 수인.

아까부터 남 일처럼 얘기하는데, 그러는 본인도 육식 수인 아닌가.

도통 이해가 어려운 답변이었다.

나뭇잎이 붙은 동그란 뒤통수를 멍하니 응시하던 안나가 재차 쏘아붙였다.

“뭐가 됐든 아둔한 선택이에요. 세미가 살아 있는 이상 우승은 물 건너간 거니까.”

“…….”

“회장의 권한이 제게 넘어와도 상관없는 건가요?”

“……아요.”

“뭐라고요?”

“자꾸 말 시키지 말아요, 수레만으로도 힘들어 죽겠으니까.”


내가 왜 육식 동물을 살리려고 이 고생을. 내가 왜 이런 곰돌이를.

곰돌이 타령을 이어 가던 벤디는 불현듯 수레 속 곰을 내려다봤다. 생각에 잠긴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네요, 이 곰을 사냥하면 우승인 거나 다름없었죠. 숲의 동물 중 가장 강하니까.”

벤디는 품속에 넣어 둔 레펠튼 참가 안내서를 떠올렸다.

강자만을 추구하는 육식 수인들이 만든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기준.

‘어쩌면…….’

이 기준의 허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굳이 우승을 포기할 필요가 없을지도.

“이 곰을 사냥하면 우승…….”

벤디의 혼잣말을 들은 안나는 내심 불안이 피어났다.

곰을 유심히 살피는 벤디의 행동이, 세미를 사살하고 우승을 차지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회장?”

경계하며 다가서던 안나는 돌연 나무를 올려다봤다.

“회장, 위!”

번개처럼 움직인 안나가 쐐애액- 날아드는 화살을 단검으로 쳐 냈다.

기겁한 벤디가 얼른 활을 꺼내 들었다.

“무슨……!”

“세미를 저 꼴로 만든 놈들이니 조심해요!”

그 말은 곧 학생회장의 권한을 노리는 인물이라는 것.


나무 위, 붉은 교복과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존재가 벤디의 시야를 스쳤다.

수레 앞을 가로막은 안나가 이를 짓씹었다.

“혹여 회장이 기권할 수도 있으니, 세미를 확실히 사살해서 회장을 우승시킬 심산인가 보군요. 우리가
함께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사살이라니…….”

겁을 집어먹기도 잠시, 울컥한 벤디가 교목 위를 노려봤다.

누구 마음대로. 제 의견은 묵살된 채 육식 수인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벤디는 정신을 집중하며 활을 조준했다.

‘목표는 나무 위.’

피융. 대차게 날아간 화살은 이내 흐물흐물 힘을 잃으며 애꿎은 바위를 공격했다.

화살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안나가 옅은 감탄사를 뱉었다.

“어쩜, 이토록 유능할 수가.”

“……괴력 곰돌이.”

“다시 말해 봐요.”

슬그머니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벤디가 시치미를 뗐다.

팍, 파팍.

그사이 날아든 화살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안나가 막아 내곤 있다지만, 화살이 언제 곰의 몸을 꿰뚫어도 이상하지 않은 급박한 상황이었다.


#<21 화>

푸르릉, 콧김을 뿜은 해피가 뒷다리를 휘두르며 화살을 쳐 냈다.

“해피, 피해!”

그 광경을 마주한 벤디의 낯빛이 파리하게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해피마저 위험할지도.

점점 커진 불안이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현실감 없게끔 만들었다.

‘이걸 어떻게…….’

우왕좌왕 갈피를 못 찾은 벤디는 화살 비가 쏟아지는 위를 올려다봤다.

푸른 숲을 바삐 오가던 주홍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나, 나무예요! 저 나무를 쓰러뜨려요!”

“나무는 갑자기 왜,”

“위에서 활을 쏠 수 있을 만한 나무는 이 주변에서 저 나무뿐이에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안나의 안광이 번쩍 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팔을 걷어붙인 그녀가 교목을 감싸 안았다.

“흐읍!”

우직, 우지직. 바닥에서 뿌리가 들리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급한 대로 말해본 건데 진짜 저걸…….’

저 곰돌이의 괴력은 어디까지인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벤디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새 교목에서 뛰어내린 정체 모를 자들이 수풀 사이로 도망가고 있었다.

피융, 흐물흐물 날아간 화살이 죄 없는 흙바닥을 공격했다.

“제가 저들을 한쪽으로 모는 동안 수레를 끌고 입구로 뛰어요.”

활을 거둔 벤디는 다급히 안나를 돌아봤다.

“이대로 보내면 또다시 공격해 올 테니까, 최대한 멀어지세요.”

“잠깐, 회장 혼자서는 위험해요!”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예요, 어떻게 뽑은 무능한 학생회장인데.”

벤디의 직구에 순간 말문이 막힌 안나가 입을 여닫았다. 사실을 집은 탓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해피를 부탁할게요.”

활을 든 벤디가 수풀 속으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아무리 뒤쫓아도 상대방들과 거리가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이 된 뒷모습이 끝끝내 자취를 감췄을 즈음, 멈춰 선 나는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정도면 거리를 좀 벌렸겠지?’

애초에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끝까지 추격할 용기도 없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나는 녹색으로 빽빽한 숲을 둘러봤다.

타인과 함께일 땐 평화롭기 짝이 없는 숲이었는데, 홀로 남으니 괜히 음산한 느낌이었다.

‘빨리 돌아가자.’
식은땀을 훔치며 휙 몸을 트는 순간 검은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레펠튼 참가자 전용 로브를 두르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춘.

조금 전까지 내가 쫓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나를…….’

학생회장으로 만들고, 내 권한을 탐내는 자.

간담이 서늘해진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툭, 커다란 나무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게끔 등을 가로막았다.

눈 깜짝할 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의문의 학생이 내 앞에 섰다.

진정해, 이자는 나를 해치지 못해.

떨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달랜 내가 입술을 축였다.

이왕 이렇게 마주하게 된 거,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듣고 싶었다.

그 후에 잘 구슬리든가, 하다못해 경고라도 하든가.

“……경고하는데.”

결심한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더 이상 쫓지 않을 테니 곱게 가세요.”

“…….”

“제발.”

안타깝게도 생존 본능에 충실한 내 입은 오늘도 뇌의 명령을 거슬렀다.

검은 천 아래의 얼굴이 뭔가 말하려는 듯 움찔거리는 찰나,


“컥!”

콰직, 나무 위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학생을 깔아뭉갰다.

차마 비명도 못 지른 나는 커다랗게 뜬 눈을 껌벅였다. 떨어진 물체는 정체 모를 웬 남자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대충 걸친 교복 셔츠에 머물렀다.

‘아카데미 재학생?’

레펠튼 참가자들은 방어용 로브를 걸쳐야 하니, 따라서 이 남자는 참가자가 아니란 의미였다.

고개를 꺾다시피 한 내가 바로 앞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약간 부스스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어딘지 무료한 붉은 눈동자. 숨 막힐 정도로 신비롭고 기묘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누구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처음 보는 얼굴.

또한 입술 사이로 얼핏 보인 송곳니가 육식 수인임을 증명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생겼어?’

레넌이나 원이나, 이 남자나.

혹시 육식 수인들은 육식 수인답지 않게 생긴 게 특징인가. 흉포한 내면을 얼굴로 감추는 거라든지.

새삼스러운 고뇌에 잠겼을 때, 아래로 시선을 내린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가 한쪽 발을 들자, 바닥에 찌그러진 학생이 드러났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앞을 위협적으로 가로막고


있던 자였다.

“실수.”
정말 실수일까. 측은한 눈으로 바닥의 학생을 살폈지만, 기절했는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곧 주섬주섬 학생의 로브를 벗겼다.

이윽고 드러난 학생의 교복 타이를 푼 남자는 제 목에 둘러매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람?’

의문스러운 눈길을 눈치챘는지, 타이를 대충 맨 남자가 한 박자 늦게 설명했다.

“타이를 잃어버려서.”

잃어버린 네 타이를 왜 그 학생한테서 찾는 건데. 그러한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쨌든 잃어버린 타이를 되찾은 남자는 여전히 얼어 있는 나를 휙 돌아봤다.

“늑대나 백호랑 붙어 다니니까 따로 찾아와야 하잖아.”

귀찮게, 남자가 성가시단 듯 덧붙였다.

백호나 늑대.

그게 레넌과 원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 내가 되물었다.

“나를 왜 찾았는데? ……요?”

“확인할 게 있어서.”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세상에.’

널찍한 가슴팍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만져 봐.”

경악한 내가 홱 소리 나게 고개를 꺾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뭐…… 를?”

되묻는 목소리가 티 나게 갈라졌다.

“얼굴 색깔이 굉장히 불순하네.”

눈을 반쯤 내리깐 그가 헛웃음 쳤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전부 가렸다. 눈앞의 몸뚱이를 계속 보고 있으면 정말로 생각이
불순해질 것만 같았다.

“시간 끌지 말고 아무 데나 만져 보라고.”

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건지.

주춤거린 나는 망설이며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남자의 부드러운 뺨이 닿는 순간, 움찔 어깨를 떤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황금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언뜻 커다란 고양이가 소스라치는 모양새였다.

한 걸음, 두 걸음.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을 벌린 그가 내 손이 스친 뺨을 짚었다.

뭔가를 가늠하듯 제 뺨을 만지작거린 남자는 곧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너.”

“……왜, 왜?”

“앞으로 허락 없이 만지지 마.”

“누구를?”

“누구긴 누구겠어, 나지.”

도리어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 된 내가 울컥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방금 전에 만지라 한 게 누군데.’

그리고 허락해도 만질 생각 요만큼도 없거든.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반박을 애써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반발하기에는 너무 무서우니까. 옆으로 살짝 찢어진 남자의 눈매가 성질머리를 예측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마치 수상한 무언가를 대하는 양 나를 일별한 남자가 등을 돌렸다.

자리를 뜨려던 그는 멈칫하더니 발밑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기절한 상태인 학생을 무심코 밟아 버린
탓이었다.

“…….”

잠깐 침묵을 이어 간 남자는 곧 학생의 발목을 잡은 채 수풀을 헤치고 멀어졌다.

질질질, 기절한 학생 또한 바닥에 지렁이를 그리며 멀어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푸르른 수풀을 멍하니 바라봤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난 탓에.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단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육식 수인…….’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다.

수풀 사이를 헤치며 걸어가던 남자가 멈춰 섰다.

“으윽…….”

발목을 잡고 끄는 중인 학생에게서 작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기절한 게 언젠데 이제야 깨어나려는


기색이었다.

뒤돌아 수그려 앉은 남자는 학생의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을 휙 벗겼다.


막 기절에서 깨어나 인상을 찌푸리던 학생이 돌연 눈을 부릅떴다.

“헤, 헤일린 이스단!”

“너는…….”

말끝을 흐린 헤일린은 팔짱 낀 채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미간이 짐짓 심각하게 굳었다.

“누구세요.”

제가 속한 S 클래스 학생도 다 모르는데 이런 조무래기를 기억할 리가.

정말 모르는 듯한 반응이라, 얼빠진 학생은 이내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헤일린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행동이었다.

“모르는 편이 낫다. 우리는 학생회장을,”

“모르라면서 뭘 또 친절하게 설명해.”

듣는 시간조차 사치라고 생각한 헤일린은 자비 없는 손길로 학생의 목뒤를 쳤다.

“컥!”

결국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못 한 학생이 다시금 바닥에 뻗었다.

손을 털며 일어난 헤일린은 문득 학생회장이 만졌던 뺨을 옅게 쓸었다.

‘아직도 뜨겁네.’

여전히 불에 덴 듯 열기가 남은 상태였다.

새끼 사자의 모습일 때에 닿으면 몸이 타는 듯 뜨거웠는데. 아무래도 사람 모습으로 접촉해도 동일한


모양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레펠튼 숲까지 숨어 들어와 학생회장을 만나는 수고를 거치지 않았나.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는 헤일린에게서 곧 화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탁.

이윽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 조그마한 새끼 짐승이 나타났다.

#<22 화>

동물 모습으로 변한 헤일린은 뒷다리로 서며 앞발로는 나무를 짚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작은 몸이었다.

보통의 수인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나고, 새끼 시절을 거치지 않고 성수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단 가문에서는 아주 간혹 동물형이 성수가 아니라 새끼 짐승인 사자 수인이 태어나곤 했다.

다행히 도중에 성수로 변하는 경우도 있으나, 평생 동물형이 새끼 짐승인 채로 살아간 선례도 있었다.

운 나쁘게도 헤일린은 성수의 모습을 갖출 수 없는 경우로 태어났다.

그 결과는 어떠했나.

날 때부터 가문의 걱정거리임은 물론, 헤일린이 동물형으로 변하기를 기피하자 귀족들은 은근히 무시하고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동물형의 강인함은 육식 수인들 사이에서는 서열의 일종이 되기도 하니까.

어느 정도 힘을 얻은 이후부터는 가문의 걱정거리가 아닌 골칫거리가 되었긴 하지만. 새끼 사자의 모습이


거슬리는 건 현재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솜뭉치 같은 앞발을 내려다보는 헤일린의 눈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 꼴을 십수 년간 보아 온 자신은 알 수 있었다.

미묘하게 자랐다. 학생회장과 닿을 때 불에 덴 듯한 감각을 느낀 이후부터.

처음 닿았을 때는 정전기가 튄 거라고 여겼는데, 두 번째부터는 우연일 수가 없었다.

이내 가볍게 혀를 찬 헤일린이 뒷발로 귀를 팍팍 긁었다.

‘아직은…….’

겨우 이 정도 단서로는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학생회장의 주변에 붙어 조금 더 관찰하는 수밖에.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벤디를 두고 온 방향에 머물렀다.

레펠튼 숲 입구.

쿵, 쿵. 천막 앞에 사체가 쌓여 층을 이뤘다.

작은 사냥감은 참가자가 직접 옮기고, 무게가 나가는 사냥감은 이송팀이 따로 옮겨 오는 중이었다.

레펠튼 종료까지는 앞으로 십분 남짓.

참가자들이 하나둘 귀환하는 가운데, 화제의 중심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보여?”

“아직.”

학생회장과 안나 스웰든.

그들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호기심에 몸이 단 이들이 숲의 초입을 바라보는데, 이름 모를 누군가가 외쳤다.

“저기 온다!”

숲 어귀에서 언뜻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즈음,

“…….”

그곳의 모든 이는 말을 잃고 말았다.

넝마에 가까운 꼴이 된 벤디와 해피, 그리고 안나 스웰든.

심지어 이들이 같이 돌아오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나 스웰든이…… 이긴 건가?”

“아니, 사슴이 살아 있잖아. 반대로 수레 속 곰은 죽었…… 어? 숨을 쉬는데?”

그들이 전진할 때마다 인파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안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벤디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오다니. 뒤쫓던 자들은 또 어떻게 된 거고.”

뒤쫓던 자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남은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의 발이 처리했지.

하고픈 말이 매우 많은 벤디가 입을 움찔움찔 떨었다.

‘오른쪽으로 가든지 말든지.’

낯선 남자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직진하니, 야수처럼 수레를 끄는 중인 해피와 안나 스웰든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이며, 무얼 확인하려 했던 걸까.

“의료용 천막은 저쪽이에요.”

안나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벤디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대로 의료용 천막으로 곰을 데려가면…….’

어떠한 사냥물도 제출하지 않은 자신은 실격. 바닥을 디딘 발에 망설임이 일었다.


하필 나란히 자리한 두 천막이 벤디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냥물 제출 천막과 의료용 천막.

두 천막을 번갈아 보는 눈이 아스라이 떨렸다.

입술을 꾹 다문 벤디는 멈춘 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장, 어디로 가는 거죠?”

당황한 안나가 수레 앞을 가로막았다.

벤디와 해피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 의료용 천막이 아니었기에. 걸음 끝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냥물을


제출하는 천막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안나의 만류를 뒤로한 벤디가 그대로 직행했다.

“흠…….”

사냥물 제출 천막 앞, 담당 교직원은 수레 속 곰을 난감하게 내려다봤다.

“원칙상 살아 있는 동물은 제출이 불가능합니다.”

역시나. 예상한 거절을 맞닥뜨린 벤디는 식은땀이 배어난 손을 로브에 비볐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벤디가 품에서 꼬깃꼬깃 접은 레펠튼 참가 안내서를 꺼내 들었다.

“그런 원칙은 기재되어 있지 않던데요.”

기재되어 있을 리가. 일순 말문이 막힌 교직원이 입을 뻐끔거렸다.

사냥이란 주제에 미루어,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부분이기에 기입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아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사냥의 의미가…….”

“그럼.”

진땀 흘리는 교직원을 마주한 벤디는 검지로 곰을 가리켰다. 담담하려 했으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제가 여기서 이 곰을 죽이면 제출이 허가되는 건가요?”

“그건…….”

“이미 무력한 상태인데 죽인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저 사체 더미에 한 마리 추가될 뿐이겠죠.”

달달 떨리는 벤디의 손끝이 이번엔 쌓이다시피 한 동물 사체에 머물렀다.

“사냥도 끝났으니 저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깨끗한 건 식용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소각하거나 버려지겠지.

교직원은 차마 그렇게까지 답하진 못했다.

“제가 살던 사, 아니, 아니.”

하마터면 또 사슴 염불을 외울 뻔한 벤디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제가 살던 여우 영역에서는 꼭 죽이는 것만이 사냥은 아니에요. 식량이 동나지 않는 이상, 포획한
사냥감은 상처 없이 방생하죠.”

벤디의 말을 들은 여우 수인들이 조금 억울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방생을 했는데.

몰라, 그런 지역도 있겠지 뭐.

묘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반박할 용자는 없었다.

“특히 종족 보존에 필요한 암컷일수록 방생은 의무에 가까워요.”


덧붙인 벤디가 곰의 곁에 선 안나를 돌아봤다.

그 신호의 의미를 파악한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세미는 수컷이에요.”

“아.”

그 한마디로 주장에 신뢰성을 잃은 벤디가 쪼그라들었다.

헷갈리게 왜 수컷한테 세미란 이름을 붙인 건데.

하여간 저 곰돌이 콤비는 하나같이 도움 되는 구석이 없었다.

“어쨌든 지역마다 사냥의 기준이 다르니!”

뺨이 불그스름해진 벤디는 괜히 목청을 드높였다.

“꼭 죽이지 않아도 사냥감으로 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사냥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눈을 뾰족하게 뜬 그녀가 강조하듯 레펠튼 참가 안내서를 흔들었다.

“기준이.”

꼬깃꼬깃한 참가 안내서가

“명확하지.”

교직원의 코앞에

“않은 만큼.”

척 디밀어졌다.

그……. 반박할 것처럼 입만 움찔거리던 교직원이 휙, 구조의 눈길을 보냈다. 아카데미 내 최고 권력자의
의견이 필요했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밀란느 학장에게 집중됐다.


지정석에 앉아 관망하던 밀란느 학장은 손잡이에 얹은 손에 힘을 가했다.

‘난감하구나.’

밀란느 학장이 질끈 눈을 감았다.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유순한 생김새와 소심한 행동거지에 비해 이따금 당돌하고, 생각보다 똘똘하다.

물론 종이 인형처럼 덜덜 떨리는 다리와는 별개로.

뭐가 됐든 사슴 수인이란 이유로 이곳에서 쫓겨나기엔 꽤나 아까운 인재였다.

‘하지만…….’

그게 학장이 위험을 떠안을 이유까지는 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저 곰이 사냥감으로 인정되면, 우승은 볼 필요도 없이 벤디 레피.

‘굳이 저 아이를?’

아카데미를 나가야 하는 이가 두각을 드러내게 놔둘 필요까지야.

자고로 인정받을수록 그 자리에 남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였다.

고민을 끝마친 학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허하,”

“저는 학생회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느슨한 목소리가 학장의 발언을 막으며 튀어나왔다.

언제 나타난 건지, 오른팔을 높이 든 레넌이었다.

대번에 눈초리가 사나워진 밀란느 학장이 뿌득 이를 갈았다.


‘무슨 속셈이냐, 이 썩을 놈이.’

그러나 마나 관중석으로 걸어간 레넌은 노란 짐승의 덜미를 낚아챘다.

“회장의 발언이 노랑이의 심금을 울렸다네요.”

그의 손가락이 강제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자, 노랑이도 의견 표시를 해야지. 짖어 봐.”

“…….”

“노랑 노랑.”

저 미친놈. 천막에 자리한 모든 이가 동일한 생각을 하는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도 잠시. 단순한 장난질 같았으나, 아니 장난질이 분명했으나 어쨌든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조금 달랐다.

뭐가 됐든 학생회장의 의견에 거물이 두 명이나 동의한 것과 다름없기에.

그렇다면 남은 한 사람은.

자연스레 학생들의 눈길이 관중석의 원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원은 해피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턱을 괸 채 사슴만 뚫어져라 주시하는데, 오죽하면 동물인 해피마저 그 시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중이었다.

“나도.”

큼. 누군가 적막을 뚫고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도, 동의한다.”

야닉 펠이었다.
저 싸움질밖에 모르는 바보가 진지하게 남의 편을 들다니. 학생들의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

오묘한 침묵 속, 서로 곁눈질만 하던 학생들이 술렁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확실히 레펠튼의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

“그러게, 곰은 이미 뻗었는데 뭐. 도망도 못 치는 걸 죽여 봤자 사냥의 의미도 없고.”

여론이 점차 학장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벤디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레넌을 쳐다봤다.

‘왜?’

왜 학장을 거스르면서까지 돕는 건지. 때마침 눈이 마주친 레넌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

속 모를 웃음을 건 그는 곧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격노한 노란 짐승의 날아 차기를 피하기 위해. 노랑이 사칭죄는 아주 무거웠다.

#<23 화>

“학생회장의 주장은 궤변이지. 암묵적인 약속이란 말이 괜히 있겠어?”

“죽이지 않아도 사냥물로 인정되면 그게 사냥이냐고!”


당연히 몇몇 비판의 목소리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벤디만 아니면 우승이 코앞인 소수의 참가자들이라 의견에 큰 힘을 얻지 못했다.

‘저놈의 자식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랜 밀란느 학장은 원흉인 레넌을 무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마나 레넌은 노란 짐승과 치열한 추격전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결정을 내릴 학장의 입에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렸다.

“그 곰의 제출을.”

소리 나게 이를 간 밀란느 학장이 질끈 눈을 감았다.

“……허가하네.”

이미 여론이 한쪽으로 기운 상황에서 불필요한 살생을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학장이 벤디의 손을 든 순간부터 판은 이미 기울었다.

가장 강한 레넌의 백호가 멀쩡한 이상, 그다음으로 강한 동물을 사냥한 자.

이로써…….

‘우승이야.’

암묵적인 우승을 따낸 벤디는 해피를 향해 휙 몸을 틀었다.

“해피.”

푸르릉!

처음으로 의기투합한 두 사슴이 앞발굽과 손을 짝 마주쳤다.

수레 옆에 선 안나는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봤다.


“어…… 음…….”

학생들은 세미, 그러니까 곰의 등에 꽂힌 화살의 주인이 벤디라고 여기는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벤디의 무기가 활인 탓에.

벤디가 활을 쏘아 곰을 쓰러뜨렸을지언정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는 않은 것이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미에게 상처를 입힌 건…….’

그러나 화살의 주인들은 따로 있지 않나.

화살이 흐물흐물 날아가는 벤디의 유능한 활쏘기로는 쥐새끼 한 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

진실을 알려야 할지, 조용히 묻어야 할지.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확성 마도구 앞에 선 벤디는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연설, 연설, 연설.

이놈의 아카데미에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연설이 많은지.

‘레펠튼 우승 소감 겸 학생회장의 축사를 하라니.’

학생회장 벤디가 우승자 벤디를 축하하란 말이나 다름없었다.

꿀꺽.

목울대를 울렁인 그녀는 확성 마도구에 손을 얹었다.

조금 전만 해도 수많은 이들 앞에서 말했는데, 이미 몇 번이나 한 연설쯤이야.

수많은 육식 수인들을 뚫고 우승을 차지한 사슴. 그게 바로 이 몸, 벤디 레피였다.


“사슴 여러분.”

이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사슴을 학생으로 바꾸어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긴장한 탓에 실수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벤디가 입을 열었다.

“성공적으로 레펠튼을 끝마친 여러분께 축하의 말을,”

말끝을 흐린 벤디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축하의 말을.”

축하의 말을…….

결국 문장을 끝맺지 못한 그녀는 저 멀리, 사냥감이 쌓인 천막을 응시했다.

‘축하…… 라고?’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도저히 저 장면을 앞두고 축사를 늘어놓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운 좋게 공격을 받지 않아 다행이지, 만일 해피가 저곳에 있었어도 축사를 말할 수 있었을까.

옮겨진 벤디의 시선이 의료용 천막에 머물렀다.

안나 스웰든의 곰, 세미를 데려간 의료용 천막에 동물을 치료하는 담당 의원은 없었다. 당연하다시피
모든 게 수인을 위한 것들뿐.

덕분에 세미는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응급 치료만 한 상태로 숨을 쌕쌕 몰아쉬는 중이었다.

“뭐야, 왜 저래?”

“벌써 끝난 건가?”

갑자기 축사가 끊기자 학생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입술을 달싹인 벤디는 곧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사냥에 꼭 살생이 필요할까요?”

종이에 적힌 연설문과 전혀 다른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아요, 사냥하지 않으면 사냥당하는 세상인 거. 레펠튼 또한 그를 위한 훈련이라는 명목도.”

먹이사슬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게 사냥이었다.

“하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에서까지 살생을 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력해진 동물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강함이 증명되는 걸까요.”

연설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시선을 떨어뜨린 벤디는 망설이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까지 해서 강함을 증명해야 할 이유를.”

숙부의 괴롭힘과는 별개로, 평화로운 페트리온에서 한평생 살아왔으니까.

마주치기만 해도 죽일 듯이 싸우는 맹수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요, 살생이 아니더라도 힘을 증명할 방법은 많다는 거.”

여러 아카데미에서 사냥 대회를 주최하고 있기에 반박할 만도 한데, 의외로 학생들은 조용히 벤디의
연설을 경청했다.

“아카데미 행사를 조율하는 데에 학생회장의 권한이 닿는다면.”

뜸 들인 벤디는 내리깐 시선을 들며 학생들을 똑바로 마주했다.

“저는 레펠튼의 규칙을 바꾸고 싶어요.”

앞선 벤디의 언행을 미뤄, 살생을 금하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말뜻을 이해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비소를 머금었다. 대단한 걸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 크게 와닿는 건
없기에.

“그럴 바엔 아예 레펠튼을 없애지 그러냐.”

“사슴이랑 노닥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동물이 뭐라고. 곳곳에서 김새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비웃은 이의 대부분은 레펠튼에 참가했음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는 곧 동행한 동물이 죽든 말든 제 몸만 건사했다는 증거.

“…….”

안나는 무심코 곰이 있는 의료용 천막을 돌아봤다. 제 팔을 길게 가로지른 상처에 손을 얹은 채.

몇 없는 소수의 학생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레펠튼의 규칙을 바꾼다.

모두가 웃어넘긴 한마디는 몇몇 학생의 가슴에 고요한 울림을 가져왔다.

레펠튼 다음 날, 학생회실 앞에 다다른 원은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으득,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으로 이를 짓이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찾고자 하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단서라고는 고작 초식 수인이라는 게


전부인데.

‘죽지 말고 기다려.’

‘내가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과거의 제 목소리를 떠올린 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흔한 일이다.

말이나 사슴, 토끼 등은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초식 동물.

그러니 초식 동물을 대동한 벤디 또한 희귀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저 여우 수인이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게 조금 특이할 뿐.


세상에 널린 게 초식 수인인데, 언제까지고 초식 수인이나 초식 동물을 볼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원이 달칵,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의 잔꾀에는 나도 꽤 감탄했어.”

“……고마워.”

“곰을 살려서 안나 스웰든을 회유하고, 우승까지 차지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지.”

쏟아지는 칭찬에 벤디는 겸연쩍어하면서도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긴 해.”

“단!”

쿵, 사람 키만 한 빗자루가 바닥을 거칠게 내려찍었다.

“이 야닉 펠에게!”

쩌렁쩌렁한 괴성이 학생회실을 뒤덮었다.

“감히!”

콰콰콰, 엄청난 먼지가 빗자루를 타고 퍼져 나갔다.

“빗자루질 따위를!”

으아아아, 비통한 외침과 함께 현란한 빗자루질이 이어졌다.

“학생회장 네가 약속했잖아, 학생회에 넣어 주겠다고! 빗자루질이 아니라!”

“넣어 주겠다곤 안 했어. 뭐라도 하고 싶은 거 아니냐고 했지.”

“그게 그 말 아니냐?!”
“아니, 아주 달라.”

“젠장, 대꾸는 잘하네. 나와!”

빗자루를 던진 야닉은 벤디가 숨은 창고를 부술 듯이 두드렸다.

“나오라고, 이 여우 같은 자식아!”

“여우 같은 게 아니라 나는 원래 여우야.”

“……진짜 죽인다!”

“…….”

창고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저 창고일 뿐이었다.

창고와 야닉의 기 싸움을 지켜보던 원은 자괴감이 고개를 들었다.

저런 창고를 상대로 과민 반응한 어제의 자신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 찾은 평정을 잃을 뻔한 그는 가십지로 얼굴을 덮은 레넌에게 다가갔다.

레펠튼에서 시간이나 때우다 온 주제에, 피로를 핑계로 소파에 늘어진 꼴이었다.

“레넌 에던트.”

가십지를 휙 치운 원은 벤디와 야닉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회장이 그러더군. 운 좋게 권한을 노리는 무리 외에 다른 참가자들의 공격은 거의 없었다고.”

레펠튼이 처음인 벤디야 모를 수 있지만, 운이 좋다고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벤디와 사슴만 있을 땐 몰라도, 다친 곰을 옮기는 순간까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다는 게.

안나 스웰든의 곰이 부상을 입은 절호의 기회를 다른 참가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습격도 없었다는 건 누군가 도왔다는 의미.


“너지.”

학생회장에게 위해를 끼칠 만한 참가자들을 모두 처리한 거.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레넌은 질문의 뜻을 알아들었을 터였다.

“왜 그렇게까지 학생회장을 도운 거지?”

원이 보아 온바 레넌은 위해를 가하면 가했지, 나서서 남을 도울 성정은 아니었다.

추궁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레넌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쌔근쌔근.”

대답하기 싫으면 차라리 입을 닫지. 진저리 친 원은 가십지로 레넌의 얼굴을 내려치듯 덮었다. 부디
영면에 들기를.

“그리고 학생회장.”

“네?”

원의 부름에 내내 야닉을 무시하던 창고가 냉큼 대답했다.

“안나 스웰든의 학생회 입회는 어떻게 된 겁니까.”

벤디가 우승하면 학생회에 입회하겠다는 조건.

질문의 의미를 알아챈 벤디는 고개를 저었다.

“……안나 스웰든은 오지 않을 거예요.”

#<24 화>
정당하지 않은 우승이었다.

곰에게 누군가 사용해선 안 되는 마비 독을 묻혔고, 활을 쏜 것도 벤디가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침묵을 조건으로 안나에게 학생회 입회를 강요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괜찮아요, 적합한 사람은 다시 찾으면 되니까.”

그를 끝으로 벤디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차분한 면모를 마주한 원은 새삼스러운 감회가 들었다.

레펠튼 규칙의 모호성을 이용한 기지도 그렇고. 겉으로 보기엔 만만할진 몰라도 의외로 속내엔 무언가가,

“말이 안 통하네. 이봐 학생회장, 따로 찾을 게 아니라 이 야닉을 학생회에 넣으면 될 일 아니야!”

“육식 수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대도.”

“여기 있는 게 다 육식 수인인데 자꾸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무언가가 있을 리 없었다.

“나와, 학생회장!”

결국 폭발한 야닉은 빗자루로 풍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막 창고 문을 부수려는데, 학생회실 문이 달칵 열렸다.

예고 없이 등장한 인물은 한참 만에 목소리를 냈다.

“노크해도 답이 없기에.”

이 목소리는.

내내 닫혀 있던 창고 문이 슬쩍 열리며, 벤디가 눈만 빼꼼 내밀었다.


잔머리 없이 올려 묶은 진녹색 머리, 구김 하나 없는 교복.

안나 스웰든이었다.

‘……왜?’

저 괴력 곰돌이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행차를.

놀란 벤디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나가 먼저 말문을 텄다.

“학생회장.”

“네?”

“레펠튼의 규칙을 어떻게 바꿀 심산인지 묻고 싶은데요.”

무게감 있게 물었던 안나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맥이 탁 풀렸다.

다름 아닌 벤디의 표정 때문에.

레펠튼의 규칙. 그런 건 내일의 벤디 레피가 해결하지 않겠냐는 어벙한 얼굴이었다.

‘저건…….’

아무 생각도 없다. 분명히 아무 생각도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당장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

여기에 온 선택이 희대의 실수는 아닐까. 찰나의 후회를 삼킨 안나가 벤디의 집무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장부 관리가…….”

팔락팔락, 장부 한 권을 살피는 그녀의 진녹색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이렇게 훌륭할 수가. 전부 갈아엎어야겠군요.”

“새치기하지 마, 안나 스웰든. 입회 신청은 이 야닉이 먼저 했으니 순서를 지켜!”


“외부인은 청소나 계속하시죠.”

“외부인? 외부이인?”

뚜벅뚜벅, 입구 쪽으로 걸어간 원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뒤돌아봤다.

학생회실에 펼쳐진 광경이 그림처럼 황금색 눈동자에 박혔다.

창고와 물아일체가 된 학생회장과, 서류를 죄다 폐지함에 쑤셔 넣는 안나 스웰든.

빗자루를 검처럼 휘두르는 중인 야닉, 소파에 늘어져 가십지나 읽으며 키득거리는 레넌까지.

심지어…….

마지막으로 원의 눈길이 벤디의 배낭 속에서 머리만 덜렁 드러낸 노란 짐승에게 머물렀다.

왜 저런 꼴로 학생회장에게 붙어 다니는지 묻는 것조차 진절머리 났다.

“…….”

원은 조용히, 그리고 가차 없이 문을 닫고 나섰다.

저 근본 모를 무리와 한군데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절대.

아침 햇살이 뺨을 뜨겁게 달궜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쓰고 있던 주홍색 가발을 벗자 스르륵, 주홍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여우 수인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가슴 졸이고 살다가 명이 짧아지겠어.’

답답하지만 어쩌겠나. 순간순간이 위태로운 나날인데.

얼마 전 레넌의 앞에서 모습이 변할 뻔한 이후, 자는 동안에도 주홍색 가발을 쓰고 자는 실정이었다.

혹시나 자는 동안 사슴 수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걸 누군가 목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확률이야 낮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린 후 교복을 착용하고.

‘벌써 시간이…….’

시계를 확인한 나는 기숙사 문고리를 잡았다.

요즘 이 문을 열면 새로 반복되는 일상이 하나 생겼다.

끼이익,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노란 짐승이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벌써 일주일째 반복되는 기다림이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나고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도통 정체를 예측할 수조차 없는 짐승이었다.

조금 꺼림칙하게 내려다보던 나는 쪼그려 앉아 배낭을 열었다. 오늘도 반나절은 내 배낭에 붙어 있을


예정인 듯했다.

“넌 어미는 따로 없니?”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는 노란 짐승은 그저 멀뚱히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미가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큰일이 아닐까.

‘얘가 혹시라도 고양이가 아니라 사자라면…….’

사자들은 대부분 무리 지어 다닌다지.

어슬렁거리는 암사자 무리를 상상한 내가 눈가를 비볐다. 상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됐다, 됐어.”

설마 사자겠어. 그럼 나를 벌써 물고도 남았겠지.


그사이 노란 짐승은 내 배낭이 빵빵해질 만큼 제 몸을 쑤셔 넣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배낭을 단단히 여민 나는 껄끄러운 눈으로 노란 짐승을 흘겼다.

아주 웃긴 짐승이었다.

배낭에는 잘만 들어오면서, 내 손이 닿을 것 같으면 하악질을 하질 않나.

손끝만 스쳐도 꼬리는 물론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우곤 했다.

‘나도 굳이 닿고 싶진 않거든.’

덕분에 종일 붙어 다니면서도 서로 내외 아닌 내외를 하는 중이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다.

심지어 노란 짐승은 이따금 나를 굉장히 수상한 눈초리로 흘겨보는데…….

왜 자기가 더 수상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걸까.

똑똑하다곤 해도 짐승의 한계인 모양이었다.

“가자.”

폭 한숨 쉰 나는 털끝 하나 스치지 않게끔 조심스레 배낭을 멨다.

그나마 아무도 이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걸 지적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클래스 학우들의 침묵은 물론,

‘죄송해요, 교수님. 잠깐 맡고 있는 반려동물인데, 도통 떨어지질 않으려 해서요.’

‘……그렇군요, 주인과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반려동물이 많지요. 수고가 많습니다, 학생회장.’

교수님들마저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육식 수인들이 비정하다곤 해도, 새끼는 보호가 필요한 존재란 인식 정도는 가진 듯했다.

흘끔. 게슴츠레 등 뒤를 돌아본 나는 발걸음을 뗐다.


육식 동물과 함께 육식 수인들 사이로 들어가는,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생포한 동물도 사냥물이라니, 말이 되냐?”

3 층 복도를 걷던 학생이 레펠튼에서의 일을 화두로 꺼냈다.

“사실 나는 꽤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레펠튼 규칙의 허점을 찌른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어? 학생회장이다.”

“또 구석에서 궁상떠네.”

마침 벤치에서 홀로 도시락을 먹는 벤디가 보였다.

창가로 다가선 학생들은 경악 어린 눈으로 벤디를 내려다봤다.

학생회장이 부와 권력을 등에 업었다!

그러한 소문을 증명하듯, 배낭 속에 헤일린 이스단을 집어넣은 채였다.

“어째서 헤일린 이스단이 저런 취급을 당하면서 얌전히 있는 거지?”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냐?”

“약점?”

“……있을 리가 없긴 한데.”

약점만큼 헤일린 이스단과 어울리는 않는 단어가 있을까.

학생들의 눈앞에 두 해 전, 드물게 도심을 넘어 아카데미까지 침투한 마물이 그려졌다.

밀란느 학장은 마침 보이는 헤일린 이스단에게 마물 퇴치를 명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그렇게 마물과 함께 아카데미 중앙 건물 한 채가 자취를 감췄다.


부스러기만 남았던 건물 잔해와 새끼 사자 모습으로 도주한 헤일린 이스단. 그리고 학장의 절규를 떠올린
학생들이 부르르 떨었다.

약점은 무슨. 차라리 걷기조차 귀찮아진 헤일린 이스단이 학생회장에게 자신을 업고 다니라 협박한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그보다 학생회장은 진짜 동물쯤으로 여긴다는 말도 있더라.”

“뭐?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건데? 그건 좀 너무하다 야.”

“헤일린 이스단이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나서서 알려 주겠냐. 네가 알려 주든가.”

“아니, 그냥 내버려 두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벤디의 주홍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 가던 학생들은 새삼스러운 생각이 앞섰다.

‘죽이지 않아도 사냥감으로 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사냥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목을 노려 숨통을 끊는다.

이를 사냥의 기초로 배워 온 육식 수인이라면 미처 생각하지 못할 빈틈이긴 했다.

그래, 최소한 육식 수인이라면.

“……회장 말이야, 생김새가 묘하지 않냐? 체격도 작고.”

“여우 수인은 대체로 작은 편인데 뭘. 생긴 거야 뭐…… 분위기가 좀 독특하긴 하지.”

육식 수인 특유의 기개나 혈기 같은 게 없다고 해야 하나.

학생회장을 주제로 한참 떠들던 학생들이 흠칫 몸서리쳤다. 창틀에 팔을 걸치고 있는 레넌을 뒤늦게


발견한 탓이었다.

“왜? 계속 떠들어. 그냥 없다고 생각해.”

“아뇨, 아뇨, 아닙니다.”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고 멀어지는 그들을 뒤로한 레넌은 창틀에 걸친 팔 위로 턱을 묻었다.

오독오독, 길쭉한 쿠키가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제법 성실히 벤디의 호위 겸 감시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누구 하나 믿어 주지 않지만.

그때 부지런히 식사하던 벤디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힐긋. 영 못마땅한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뭘 보는 거지?’

호기심이 인 레넌이 고개를 살짝 뺄 즈음, 벌떡 일어난 벤디가 전방으로 직행했다.

발걸음이 도착한 곳은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게시판 앞. 워낙 구석진 곳이라 고용인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게시판이었다.

#<25 화>

“신경 쓰여서 밥을 못 먹겠네.”

종알거린 벤디는 엉망으로 나열된 공고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뚤어진 공고문을 바로 하고, 반쯤 접힌 공고문을 펴서 압정을 꽂았다.

공고문을 전부 정렬한 후 제자리로 돌아가던 벤디는,

“악!”

그만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고작 그게 뭐라고 갈린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노랑이 넌 뭘 구경만 하고 있는 거야.”

구슬피 제 신세를 토로하는 벤디에게 노란 짐승의 한심한 눈길이 닿았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레넌은 고개를 기울여 팔에 옆얼굴을 묻었다.

‘진짜 쉽게 다치네.’

‘레넌 에던트, 너지.’

레펠튼에서 벤디를 공격하려던 참가자들을 처리한 게 레넌이라는 원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도울 생각은 없었다.

밀란느 학장이 벤디의 호위를 지시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죽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으니까.

“어휴, 또 의무동에 들러야 하잖아.”

어느덧 식사를 끝마친 벤디가 도시락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녀가 이동하기 시작하자, 입에 문 쿠키를 완전히 삼킨 레넌이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부지런히 걸어가는 벤디와 일정 간격을 두고 느릿하게 따라붙었다.

자박자박,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같은 속도로 맞물렸다.

레넌은 무심코 벤디의 무릎 부근을 응시했다. 상처에서 배어난 피가 하얀 양말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학생회장을 도운 거지?’

왜 도왔냐고. 그는 원의 질문을 되뇌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딱히 도울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 해 보는 호위 놀이가 꽤나 재밌어서?

조기 졸업을 하려면 학생회장이 필요하니까?


너무 겁먹고 또 아카데미를 그만두려 하면 곤란하니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야닉 펠이 이상했다.

학생회실로 들어선 나와 노란 짐승을 떨떠름하게 보더니, 지금은 뽀독뽀독 소리 나게 창틀을 닦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청소를 시킬 거냐며 먼지만 일으키던 어제와는 딴판인 반응이었다.

뽀독뽀독, 뽀독뽀독.

나는 반질반질해질 만큼 유리창을 닦는 야닉을 돌아봤다.

그는 구릿빛 피부에 긴 장발을 풀어 헤치고, 교복 위로도 근육이 두드러지는 외양을 갖고 있었다.

확실히 유리창을 부수면 부쉈지, 닦는 모습은 안 어울리긴 해.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마침 야닉과 배낭 속 노란 짐승의 눈이 마주쳤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온 얼굴 근육을 움찔대던 그가 대뜸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거 요즘 이상하네. 징그럽게 가방 속엔 자꾸 왜 들어, 으아악!”

순식간에 날아오른 노란 짐승의 뒷발이 야닉의 턱에 명중했다.

야닉이 걸레를 팽개친 채 달아나자, 노란 짐승이 잽싸게 뒤를 추격했다.

쿵, 나는 묵직하게 닫히는 문을 손가락질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야닉 펠이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서류를 검토하던 원이 단칼에 잘라 냈다.


“원래 이상한 놈입니다. 서류에나 집중하세요.”

음.

납득한 내가 서류를 들여다보다 말고 헛숨을 삼켰다.

‘무슨 일정이 이렇게 많아?’

하루가 멀다 하니 빽빽하게 달력을 채운 아카데미 일정 때문이었다.

‘마력…… 측정일?’

레펠튼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마력은 모든 이능의 기본인 만큼, 매해 학생들의 마력을 측정하여 기록한다.]

관련 서류에는 위처럼 적혀 있었다.

마력.

쉽게 말하면 몸에 흐르는 기운인데, 마력이 방대할수록 강한 힘을 가질 수 있고, 강한 마법 소환이


가능했다.

대개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대대로 마법사인 레피 가문이 귀족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거고.

[마력 측정은 클래스별로 진행되며,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클래스에는 특별한 포상이 주어진다.]

‘특별한 포상? 포상이 뭐지?’

[포상은 성적 가산점과 함께 닷새간 타 영역으로의 체험 학습이 보장된다.]

활동비는 아카데미 측에서 전액 지원.

말이 체험 학습이지, 클래스 전원이 함께하는 자유 여행과도 같았다.

수인 아카데미는 엄격한 기숙사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꽤나 구미 당길 만한 조건이었다.

‘그럼 체험 학습 장소는…….’

휙, 휙. 서류를 빠르게 넘기던 손이 어느 한 페이지에서 뚝 멈췄다.

[마력 측정은 학기 초에 진행되기에, 체험 학습 장소는 전년도 학생회장이 미리 지정한다.]

‘이런 것까지 학생회장이 정해?’

오, 이렇게 번거로울 수가.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내년에 있을 체험 학습 장소만 지정하면 되는 점이었다.

‘잠깐, 그럼 올해 체험 학습 장소는 어디지?’

전년도 학생회장이 지정한 장소라면. 자연스레 내 눈길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전년도 학생회장, 원 리오나드.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답을 알려 줄 수 있는 이였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지만 잠깐 나를 일별한 원은 서류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답답함에 움찔움찔, 미간을 찡긋거리자 결국 원도 미간을 짜증스레 일그러뜨렸다.

“왜요.”

“왜라뇨, 대답을 기다리잖아요.”

“뭐를 말이죠?”

“……알고 계시면서.”

“그 이상한 미간만 보고 어떻게 압니까. 무슨 서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꼭 말을 해도.
못 들은 척 시치미 뗀 나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폈다. 분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마력 측정일 포상 말이에요. 전년도 학생회장이 체험 학습 장소를 정한다고 적혀 있어서요.”

“…….”

“어느 영역으로 정했는데요?”

질문이 나오자마자 펜을 돌리던 원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그의 낯 위로 찰나의 감정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유심히 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작은


변화였다.

원은 다시 펜을 휘휘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사슴 영역.”

눈을 크게 뜬 나는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페트리온.”

쿵, 오랜만에 심장이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꾸욱. 압정을 누르자 게시판에 공고문이 고정됐다.

학생회 일꾼이 없는 관계로, 교정을 돌며 게시판에 공고문을 부착해야 하는 실정.

폭 한숨 쉰 나는 공고문을 아련한 손길로 쓸어내렸다.

“학생회장 봐라, 저기서 또 청승 떤다.”

“왜 저러냐 진짜.”

등 뒤로 학생들의 노골적인 조롱이 들려왔다.

지긋지긋한 육식 수인들. 몰래 치를 떤 나는 반듯한 공고문을 만지작거렸다.

[마력 측정 관련 안내문]
마력 측정일은 내게 새로운 걱정을 안겨 줬다.

자칫 레펠튼에서처럼 고득점을 차지하면 그대로 사슴 영역행.

어떻게 도망쳐 나온 건데, 제 발로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신문에 초상화가 박제된 이상 페트리온 일반인들도 나를 알아볼지도 모르고.

더욱이 귀족이 대부분인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방문할 만한 체험 학습 장소라면 뻔했다.

페트리온 전시관, 호수 뱃놀이, 유적 박물관, 페트리온 최고 디자이너의 의상점.

이곳들은 모두 페트리온의 귀족들 또한 많이 오는 장소였다.

아무리 여우 수인의 모습이라도, 그런 곳이라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나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절대 우리 클래스가 우위를 차지해선 안 돼.’

내가 속한 X 클래스가 일등을 차지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절대로.

그러한 결심이 무색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나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저기,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어?”

“여기는 내가 늘 앉던 자리라서.”

“아…… 미안.”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 X 클래스 학생이 쟁반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따로 지정석이랄 게 없는 학생 식당에서.
그리고 또,

“이상하다, 내 마도구가 안 보여.”

“아까 가방에 넣은 거 아니었어?”

“짜증 나네, 비싼 건데. 조금 전에 뛰어오면서 떨어뜨렸나…….”

대화를 나누던 두 학생의 시선이 때마침 지나가는 X 클래스 학생에게 머물렀다.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학생이 미심쩍게 말했다.

“저 녀석이 주워 간 거 아니냐? 쟤네는 그런 거 구경도 못 하잖아.”

이쯤 되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지위나 성적이 낮고, 재력이 부족하거나 힘이 약한 자. X 클래스는 그런 이들을 모아 둔


곳이란 사실을.

당연한 수순으로 X 클래스는 매해 마력 측정에서 가장 낮은 평균치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냉정히 말하면 X 클래스가 일등을 차지할까 걱정하는 건 오만이요, 사치였다.

오히려 걱정거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력 측정이 힘의 지표나 다름없는 만큼, 타 클래스 학생들의 무시나 업신여김이 뒤따르는 점이었다.

더 큰 걱정거리는,

“벌써 마력 측정일이야?”

“귀찮네, 결과야 올해도 똑같을 텐데.”

이미 X 클래스 학생들조차 그 결과를 당연시 여기는 것이었다.

“이번 강의에서 마도구 제작에 성공한 사람?”


“있겠냐? 학생 식당이나 가자고.”

“그래, 오늘 코스 요리라더라.”

까르륵, 까르륵. 해맑기만 한 클래스메이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가방을 앞으로 고쳐 멨다.

가방 속 노란 짐승을 내려다보자, 빤히 시선을 맞추던 노랑이는 타이밍 좋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결과는 글러 먹었단 의미 같았다.

‘얘 봐라?’

이쯤이면 때가 됐다 싶으면 사람 말을 할지도.

의심 어린 심정으로 살핀 내가 도리도리 흔들리는 노랑이의 고개를 고정시켰다.

볼이 눌린 노랑이가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자,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일등도 안 되지만, 꼴찌는 더더욱 안 된단 말이야.”

말 그대로 꼴등은 안 된다.

마력 측정에서 꼴등을 기록한 클래스에는 일 년 동안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기에.

진절머리 날 만큼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장학금.

대부분이 귀족인 학생들에겐 있어도 그만인 정도겠지만 내겐 얘기가 달랐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수인 아카데미에 머물 수 없게 되니까.

#<26 화>
‘설마.’

나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가진 건물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학장실을.

밀란느 학장님은 내가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 이런 일을 염두에 두고 나를 X


클래스에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대로는…… 곤란해.’

정말이지 이대로는 곤란하다.

레펠튼처럼 나 홀로 좋은 점수를 딴다고 될 일도 아니고. 어떤 식으로라도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집무 책상에 앉은 나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없어.’

없어, 없다, 없다고.

슬프게도 방법이 없었다.

단기간에 무슨 수로 X 클래스 학생들의 마력 수치를 끌어올린단 말인가.

차라리 안나의 곰돌이와 재대결을 펼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끙끙 머리를 싸매며 마력 측정일 관련 서류를 검토하던 중, 팔락팔락, 문서를 넘기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웬 명단 한 장을 발견한 내가 부르르 손을 떨었다.

“이게…….”

이게 다 뭐람.

구겨진 명단을 쥔 나는 박차듯 학생회실을 나섰다.

탁탁, 빠른 걸음이 뜀박질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온 교정을 뒤지며 복도를 가로지르던 내가 급히 발에 제동을 가했다. 창문 밖, 내내 찾던 이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내가 손을 흔들었다.

“늑대, 아니 원 님!”

내 외침에 어떤 학우와 대화를 나누던 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원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가 등을 확 미는 게 느껴졌다. 기우뚱, 시야가 뒤흔들리며 바닥이


가까워졌다.

눈을 크게 뜬 원이 팔을 뻗는 모습이 느리게만 보였다.

떨어진다.

고통을 직감한 나는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시간이 지나도 상상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조차 뜨지 못하는 와중, 귓가로 익숙한
저음이 파고들었다.

“슬슬 떨어져 주시죠.”

원의 목소리였다.

“질식시킬 셈입니까?”

“……!”

그제야 원의 목을 으스러져라 조르고 있음을 깨달은 내가 황급히 팔을 풀었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할 거면 뛰지를 마십시오.”


나를 안아 든 상태인 원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야. 안색이 창백해진 나는 다급히 창문을 가리켰다.

“뛴 게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제 등을 밀었어요!”

그의 금안이 내 손끝을 따라 이동했다. 열린 창문 주위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원은 물끄러미 창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보나 마나 회장의 권한을 노리는 피라미 짓이겠죠.”

“설마 나를 죽이려고…….”

오싹해진 나는 양팔을 끌어안았다.

안나의 곰에게 마비 독까지 사용한 그들의 손속이 떠올랐다.

“저 정도 높이에서는 안 죽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정도지.”

“그럼 왜……?”

“레펠튼 때처럼 설치지 말고 몸 사리고 있으란 경고겠죠.”

학생회장이 두각을 드러내는 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까. 부언한 원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내려다봤다.

“레넌 에던트의 호위가 없을 때는 인적 드문 곳에 혼자 있지 마세요.”

“레넌은 저를 호위한 적이 없는데요?”

어리둥절하게 맞받아치자, 잠깐 말을 잃었던 원이 떨떠름하게 조언했다.

“그럼 그거라도 들고 다니세요.”

“그거?”
“그 노란 거.”

노란 거라니.

뒤늦게 귀가 동그란 샛노란 짐승을 떠올린 내가 되물었다.

“노랑이를 말하는 거예요? 왜요?”

“웬만하면 아무도 건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왜.

의문에 사로잡힌 나는 곧 심오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평소 노란 짐승을 슬슬 피하는 학생들의 태도나, 떨떠름해하는 야닉의 반응이 눈앞을 스쳤다.

이 모든 정황을 조합하면…….

노랑이의 주인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노랑이나 노랑이의 어미가 영물이라든가.

추측을 늘어놓기도 전에 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혼자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맙소사. 그제야 아직도 원의 품에 안겨 있음을 인지한 내가 몸을 파닥거렸다. 송곳니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한 태도와 달리 바닥에 제대로 내려설 수 있게끔 허리를 낮춰 줬다.

사사삭. 빠르게 거리를 벌린 후 감사를 표하려는데, 그러한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은 원이 물었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가 뭡니까.”

아차, 이유.

“이거요.”

나는 그때까지 꽉 틀어쥐고 있던 명단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마력 측정일 외부 초청객 명단입니다.”

“아뇨,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답답해진 내가 쫙 펼친 명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 영역의 수장 대리도 모자라, 마탑 장로까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초청객들의 신분이 문제였다.

“이런 분들이 왜 아카데미 행사 초청객으로 오는 거예요?”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은 원이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이 곧 힘의 지표니까요. 젊은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죠.”

“그렇다 해도 무슨 아카데미 행사에,”

“인재를 발굴하기 가장 쉬운 장소인데 안 올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반박하지 못한 내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확실히 대륙에서 손에 꼽는 아카데미인 만큼 인재가 넘칠


테니까.

“그리고 학생회장 직인으로 초청장을 발송해야 합니다. 고위급 인사와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기회이니
제대로 하세요.”

더 이상 원의 설명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카데미는 사실상 졸업 후가 더 중요했다. 애초에 사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발판으로 이곳에


입학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사회에서 마주쳐야 할 상급자들 앞에서, 심지어 거물들이 관전하는 공개석상에서 마력 측정 꼴등을
차지하니까 X 클래스 취급이 그 모양일 수밖에.
그러니 X 클래스 학생들도 의욕 자체를 상실하는 수순이고.

‘결국 꼴등을 벗어날 순 없는 건가.’

어쩐지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이상,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다가오는 마력 측정일을 대비하여 심신을 잘 다스리도록.”

명료하게 말한 교수가 강의실을 벗어났다.

“어우, 왜 이렇게 뻐근하냐.”

“교내 상점 갈 사람?”

학생들이 기지개를 쭉 켜는데, 왼팔 왼쪽 다리를 삐거덕거리며 함께 움직인 누군가가 교탁을 차지했다.


학생회장, 벤디 레피였다.

저게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쌩하니 무시하고 나가려던 X 클래스 학생들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노란 짐승이 든 배낭이 강의실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기에.

‘……와.’

‘젠장할.’

‘이건 반칙 아냐?’

희대의 난제를 마주한 학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학생회장의 입에서 나올 말을 얌전히 경청할 것인가. 아니면 헤일린 이스단의 머리 위를 넘어서 밖으로
나갈 것인가.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였다.

감히 문밖으로 나서지 못한 모든 클래스메이트가 강의실에 남았다.


역시 노랑이를 넘지 못하는구나.

웬만하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거란 원의 조언을 실감한 벤디가 눈을 감았다.

‘레펠튼 때처럼 설치지 말고 몸 사리고 있으란 경고겠죠.’

누군가 등을 밀어 몸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의 섬뜩함이 발끝을 휘감았다.

이윽고 입술을 깨문 그녀는 고개를 저어 공포를 떨쳐 냈다.

마음 같아선 졸업할 때까지 창고에 숨어 있고 싶지만, 이쪽도 양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좋은 말로 학생들을 잘 구슬린 후, 본론을 꺼내는 거야.

이제 육식 수인들 앞에 서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이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던 벤디는 긴장한 마음에 냅다 본론을 꺼냈다.

“꼴등,”

“꼴등?”

“아니, 아니. 마력 측정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형형색색의 눈동자가 벤디에게 집중됐다.

육식 수인들의 시선을 못 견딘 그녀는 손으로 슬그머니 눈을 덮었다.

앞이나 보고 얘기하시지. 클래스메이트들은 목구멍까지 울컥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아시다시피 우리 X 클래스는 매해 평균점 꼴등을 지키고 있어요.”

부스럭, 벤디는 준비해 온 문서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바로 작년, 우리 앞 등수를 차지한 E 클래스와 비교해도 평균점이 200 점이나 뒤처지죠.”

뭐 어쩌라고.
대단한 꼴등이라고 치켜세워 주는 거야 뭐야.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클래스메이트들의 얼굴에 떠오른 반감을 읽은 벤디는 급히 다음 말을 꺼냈다.

“X 는 수학에서 미지수나 변수로 해석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번 마력 측정에서 우리가,”

“-변수가 되자?”

늘 벤디의 옆자리에 앉는 족제비 수인이 작게 받아쳤다.

바로 그거야.

벤디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데, 여기저기서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이야 편하지, 무슨 수로?”

“마력 측정일까지 고작 한 달도 안 남았는데.”

회의적인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

아직 결론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도르륵 눈을 굴린 벤디는 탕, 일부러 교탁을 양손으로 내리쳤다.

“지정석이 없는 학생 식당에서 자리를 비키고.”

척, 학생 식당에서 자리를 빼앗긴 학생.

“지나가던 행인인데 마도구를 훔친 도둑이 되고.”

척, 난데없이 의심을 받은 학생.

“장학금도 못 받고 학비는 학비대로…… 이건 아니다. 취소.”

척, 저도 모르게 자신을 가리키던 벤디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여러분은 이대로도 괜찮아요? 무려 졸업할 때까지?”

시끌시끌하던 강의실에 오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익숙해지기야 했지만 괜찮은 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좋아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논지가 뭔데?”

잠자코 있던 족제비 수인은 다시 나직이 물었다.

“꼴등을 벗어날 방법이 있기라도 하니?”

그녀의 질문에 학생들은 이번에는 조금 다른 눈으로 벤디를 바라봤다.

뜬소문일지언정 야닉을 쓰러뜨렸다는 말이 있고, 레펠튼에서 우승도 모자라 안나 스웰든까지 끌어들인.

나사가 빠진 듯한 허점이 있지만, 어쨌든 벤디라면 그럴싸한 묘안을 가져왔을지도 몰랐다.

“꼴등을 벗어나려면.”

그러나 기대한 벤디의 입에서 나온 건,

“마력을 높여야지요.”

열심히 공부하면 일등이 된다는 답변이었다.

#<27 화>

벤디는 또다시 울컥한 학생들이 입을 떼기 전에 검지를 쭉 내밀었다.


“대단한 성과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한 등수. 딱 한 등수만이라도 올려 보자는 말이에요.”

“그게 쉬웠으면 다들 지금 이러고 있겠,”

“그래서.”

반발의 싹부터 끊어 버린 벤디가 재차 교탁을 탕 내리쳤다.

“아주 유능한 강사진을 모셨어요. 오늘부터 매일 저녁 식사 이후, 7 연무장에서 모이는 거예요.”

애애앵-

공중을 두어 번 유영한 파리가 정수리에 안착했다.

푸드득 머리를 털어 날려 보냈지만, 애애앵- 멀리 떠나지 않은 파리가 내 주변을 돌며 조롱했다.

저녁 식사 직후, 기숙사 앞 7 연무장.

이곳에는 슬프게도 파리만 날렸다.

‘너무해.’

적어도 한 명은 올 줄 알았는데.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나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대체로 육식 수인에 대한


욕이었다.

쪼그려 앉아 아련하게 빈자리를 응시하고 있으니,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워졌다.

“아무도 안 왔네.”

내 뒤에서 허리를 숙인 상태인 레넌이 턱 아래에 꽃받침을 했다.

“이렇게 예쁜 내가 기다리는데.”

차마 반박도 못 한 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각도의 중요성조차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얼굴인 건 사실이었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텅 빈 연무장을 둘러봤다.

작년 마력 측정 상위권인 레넌 에던트와 안나 스웰든. 이 둘을 겨우겨우 설득하여 강사진으로 모셨는데.

‘단기간 훈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이미 등수가 바뀌고도 남았겠죠.’

비웃음과 함께 아무도 훈련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던, 그러한 원의 추측이 정답의 과녁을 쏘았다.

팔을 열심히 돌리며 몸을 푼 내가 레넌에게 손짓했다.

“시작하자.”

“혼자서라도 하게?”

“마력 측정일까지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이렇게 된 거 마력 단련이라도 해야지.”

“생각보다 의욕이 넘치네.”

가십지를 품에 꽂은 레넌은 뚜두둑,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

평소 팔랑거리는 성정과 다르게 훈련은 대충 넘어갈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런 레넌을 곁눈질한 나는 넌지시 내내 궁금했던 사안을 꺼냈다.

“……있잖아, 원 님은 왜 그렇게 초식 수인에게 민감한 거래?”

“갑자기 늑대는 왜?”

“체험 학습 장소를 그…….”

“그?”

“……사슴 영역으로 정했기에.”

“신경 쓰여?”
눈치를 살핀 나는 별거 아닌 양 몸을 쭉쭉 풀며 말했다.

“아니 뭐, 육식 수인이 그러는 게 특이해서.”

“그래? 내 눈엔 회장이 더 특이한데.”

의미심장한 웃음을 건 레넌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손가락을 펼쳤다.

“여우 수인이 근육 사슴이나 데리고 다니고.”

엄지가 접히고,

“생김새도 여우보다는 사슴 쪽이고.”

이어서 검지가 접혔다.

“지금 보니 사슴 영역에도 관심을 가지네.”

중지까지 접은 레넌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가슴팍을 쳐다보던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물빛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덫에 걸린 듯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레넌이 육식 수인이기 때문인지, 내가 제 발 저린 탓인지.

추궁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숨 쉬는 사실조차 잊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이래저래 변명하다가는 도리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김샌 듯 한순간에 분위기가 풀어진 레넌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늑대가 그러는 이유를 어떻게 알겠어. 찾는 사람이 있다고 얼핏 듣긴 했는데.”

“찾는 사람?”
“기세만 보면 아마 원수 아닐까.”

팔짱 낀 내가 동의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철천지원수겠지, 해피를 봤을 때만 해도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찾아내자마자 찢어 버릴 기세였다.

그럼 체험 학습 장소를 사슴 영역으로 정한 건 이 잡듯 온갖 초식 영역을 뒤지려고…….

오싹한 추측을 이어 가던 나는 문득 레넌을 흘끔거렸다.

“레넌 너는 왜 조기 졸업을 하려고 하는데?”

“나? 나는…….”

레넌은 허리를 굽힌 채 아래에서 나를 빤히 올려 봤다. 오늘따라 유독 어두운 물색 눈동자가 곧 환하게


휘어졌다.

“말 그대로 아카데미를 빨리 나가고 싶어서.”

“왜?”

“그런 게 있어.”

그는 가련한 모습으로 제 양팔을 끌어안았다. 눈가에는 언뜻 물기마저 비쳤다.

“사랑스러운 주인공에겐 풍파와 시련은 필수 요소거든.”

“…….”

“읽던 책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토끼인 채 사람이 되지 못하기도 하지.”

“그런 건 어디에 나오는데?”

“가십지.”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누구고?”

“나.”

풍파와 시련을 겪는 주인공 중에 이토록 자기애 충만한 주인공은 본 적이 없는데.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사연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쌩하니 무시한 내가 시작하자는 의미로 주섬주섬 훈련복을 추스르자, 바로 선 레넌이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회장.”

“응?”

연무장을 잠깐 둘러본 그가 눈을 동그랗게 휘었다.

“참고로 훈련에 자비는 없어.”

앞으로 펼쳐질 지옥 같은 훈련의 시작을 알리는 예쁜 미소였다.

털썩, 누더기에 가까운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기진맥진한 벤디는 엎드린 채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사람을 이렇게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재주였다.

벤디 곁에 선 레넌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나 마법사나 마력 운용 방법은 똑같아. 마법사는 허공에 만들 뿐이고, 검사는 이렇게.”

푸른 기운이 뱀처럼 그의 검신을 휘감았다.

“마력을 검에 흘려보내면 이게 곧 검기가 되는 거지.”

바닥에 널브러진 벤디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쉬운 건데.”

으.

검기를 손쉽게 구현하는 레넌을 째려보는 눈초리만 형형했다.

반 기절 상태인 벤디는 움찔움찔 떨리는 제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다.

말마따나 이론은 쉬웠다.

모든 힘의 근원인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에 따라 훈련법이 달랐다.

따라서 검사는 검술 훈련에 매진하면 될 일이고, 마법사인 벤디는 마법 소환에 매진하면 될 일이었다.

안나처럼 몸통 박치기가 주력일 경우 몸의 어느 한 곳에 마력을 집중시키는 거고.

그러나 말이야 간단하지, 벤디에게 있어선 차라리 책을 통째로 외우는 일이 훨씬 쉬웠다.

‘이상하군.’

레넌은 종이 인형처럼 흐물거리는 벤디를 내려다봤다.

괜히 수석을 차지한 게 아니듯 이해도 곧잘 하고, 감도 좋았다.

그러나 마법 소환이 이상하리만치 부진했다. 몸속에서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

굳이 짚자면 어딘가에서 꽉 틀어 막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평범한 의원이 벤디를 본다면 일반인이라고 정의 내릴 정도였다.

“회장, 혹시 지병 같은 게 있어?”

“집에 가자고?”

“아니, 지병.”

거의 넋을 놓은 탓에, 질문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벤디가 몸을 꾸물거렸다.


“없어…….”

“그럼 어렸을 때 내상을 크게 입었다든가.”

끔벅끔벅. 느리게 눈을 깜박인 벤디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레넌, 엄마 아빠가 불러.”

“어디서?”

“저세상.”

“따라가면 위험할걸, 돌아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벤디를 마주한 레넌은 포기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일편, 연무장 외곽.

기숙사로 돌아가던 X 클래스 학생들은 벌써 일주일째 보이는 광경에 진저리를 쳤다.

훈련 첫날.

추레한 노란색 훈련복을 착용한 벤디는 그래도 사람다웠다.

그러나 이틀, 삼 일,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체구가 쭈글쭈글하게 보일 정도로 쪼그라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넌 에던트의 훈련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제는 밥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러, 보다 못한 노랑이…… 아니, 헤일린 이스단이 입에 군고구마를 꽂아


넣어야 간신히 씹는 꼴이었다.

오늘도 벤디는 훈련 후 일어나지 못했고, 레넌에게 업혀 기숙사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X 클래스 학생은 답답해하며 말했다.

“할 거면 다른 곳에서 하든가, 하필 우리 기숙사 앞에서 하냐. 분위기 이상해지게.”


“내 말이. 겨우 삼 주도 안 남았는데 뭘 저렇게까지 하는지.”

“아무리 저 레넌 에던트가 가르친다곤 해도…….”

한참 불평을 늘어놓던 그들이 옆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벤디의 옆자리에 앉는 족제비 수인, 신시아 폴릿이 자리했다.

“안 그래, 신시아?”

신시아는 멀어지는 벤디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자연스레 눈앞에 며칠 전, 도서관에서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아, 뭐야. 일부러 일찍 뛰어왔구만.’

행운의 자리라는, 앉아서 공부하면 수석이 된다는 도서관 명당 앞에 선 D 클래스 학생들이 투덜거렸다.

짜증스러운 눈길이 책상 위에 올려진 짐에 박혔다.

‘누구 거냐?’

‘조금 전에 X 클래스 녀석들이 두고 1 관으로 가던데.’

‘확실해?’

‘어, 아는 얼굴이야. 수험서를 빌리러 갔겠지.’

시선을 주고받은 학생들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도 잠깐, 책상 위 짐에 손을 뻗었다.

‘저 멀리 치워 버려.’

‘바닥에 둘까?’

X 클래스 학생들의 짐이 제멋대로 널브러졌다.

자리를 뺏다시피 한 그들이 낄낄거리며 돌아서는 순간, 스윽,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어둠의 손이 짐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학생들이 뒤돌아봤을 때 이미 짐은 제자리로 돌아온 상태였다.

‘뭐야, 누구야?’

오싹해진 그들이 다시 자리를 빼앗았지만, 스윽, 어디선가 튀어나온 어둠의 손이 짐을 원 상태로


돌려놨다.

‘야!’

골이 난 D 클래스 학생이 왈칵 소리 지르자, 화들짝 놀란 검은 손의 주인이 책장 뒤로 달아났다.


벤디였다.

#<28 화>

‘학생회장, 너 미쳤냐?’

책장 뒤에서 몸을 반만 내민 벤디는 망설이더니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인의 짐에 멋대로 손대면 안 돼.’

‘뭐라는 거야?’

‘그리고 거기는 X 클래스 학생들 자리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임자인 규칙 몰라? 저기 자리 많아.’

일순 말문이 막힌 학생들이 목울대를 크게 울렁였다.

‘……회장, 네가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겨우 평정을 되찾은 학생들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뻗대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한테는 그래도 되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고. 어차피 아무 말도 못 할걸?’

‘아, 그러고 보니 너도 X 클래스였네. 동병상련 아니냐?’

놀라운 인성. 저도 모르게 생각을 밖으로 내뱉어 버린 벤디가 입을 텁 막았다.

‘저게 진짜!’

또다시 울컥한 학생들이 턱을 악물었다. 책장 뒤에 숨은 주제에 또박또박 할 말은 다 하는 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입니까.’

정숙해야 할 곳에서. 그때 깐깐하기로 소문난 도서관 사서가 벤디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소란이 거슬리는지 사냥 직전의 매처럼 눈이 번쩍 빛났다.

‘저 학생들이 다른 학생의 물건에 손을 댔어요. 자리도 빼앗고요.’

이때다 싶은 벤디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미주알고주알 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정도는 해도 괜찮은 일이라네요.’

‘호오.’

‘심지어 제가 뭘 모른다며 소리를 질렀어요. 이렇게.’

벤디는 한껏 삐딱한 자세로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었다. 불량 학도의 표본이었다.

D 클래스 학생들은 차마 어찌하진 못한 채 벤디를 무섭게 노려봤다. 촉새처럼 일러바친 후 사서 뒤에


숨어 있는 꼴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호오.’

도서관 사서의 의미심장한 눈길이 D 클래스 학생들을 향하자, 벤디를 노려보던 그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제길!’
허둥지둥 짐을 챙긴 D 클래스 학생들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도서관 사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러모로
좋을 게 없었다.

‘……어? 짐이 그대로네?’

잠시 후, 돌아온 X 클래스 학생들은 어리둥절하게 명당자리에 착석했다.

‘누가 치웠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도서관에서 자리 빼앗기는 일이 좀 줄어든 것 같지 않냐?’

‘어? 그러고 보니 그런 듯하기도 하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던 신시아는 레넌에게 업혀 멀어지는 벤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레넌과의 체격 차 때문인지, 안 그래도 작은 등이 더욱 작아 보였다.

“신시아 네가 제일 신경 쓰이겠다, 하필 바로 옆자리라.”

워낙 말수가 적기에 대답이 없어도 신경 쓰지 않은 X 클래스 학생들이 수다를 이었다.

“안 그래도 책 읽는데 거슬려 했잖아.”

“맞아, 요즘은 더하겠네.”

연무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신시아는 짧은 단발을 습관적으로 넘겼다.

“적당히 하지.”

그녀의 날 선 중얼거림에, 주변 클래스메이트들이 동의하며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괜히 마음만 불편하게.”

“차라리 다른 연무장에서 훈련하라고 말이라도 해보,”

“아니, 너희 말이야.”
이어지는 불평을 신시아가 냉정히 끊어 냈다. 떠들던 학생들은 퍽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신시아?”

“무슨…….”

“만에 하나.”

“…….”

“저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인해 평균점이 오르기라도 하면.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편승할 거 아니었니?”

“아니, 신시아…… 말이 안 되잖아.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냐고.”

답하지 않은 신시아는 기숙사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막 걸음을 떼려던 그녀는 비스듬히 돌아서서 말했다.

“가능하든 말든.”

“…….”

“구경만 하는 우리가 비웃을 자격은 없어.”

원래도 냉담하던 표정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남겨진 X 클래스 학생들은 이미 점이 되어 가는 신시아를 황망히 바라볼 뿐이었다.

연무장 중앙에 선 안나는 짜증 어린 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훌륭하군요.”

부웅, 주먹이 살벌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도대체.”

퍽,

“이게.”
쿵,

“왜 안 되는 건지.”

쾅. 주먹질에 당한 목각 인형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부스러기가 되어 있었다.

“회장, 마법사든 체술가든 원리는 똑같아요. 마력을 한곳에 모으는 거라고요, 이 주먹에.”

반듯하게 머리를 묶은 안나가 움켜쥔 주먹을 내밀었다.

멀찍이, 아주 멀찍이서 웅크려 앉은 나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퍽쿵쾅 한 번에 나무를 부스러기로 만드는 건 너 같은 괴력 곰돌이나 가능한 일이지.

마음 같아선 따져 묻고 싶었으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크헝!”

퍽,

“크허헝!”

쿵,

“크르르!”

쾅. 또 다른 곰돌이에게 당한 목각 인형이 생을 마감했다.

안나는 그나마 만족스러운 낯빛으로 뒷짐 졌다.

“나쁘지 않아, 세미.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구나.”

의기양양해진 곰이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아니꼬운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괴력 곰을 째려봤다.

‘저건 곰이야 고릴라야.’


혼종인가.

말없이 노려보는데, 안나의 칼 같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세미도 쉽게 하는데, 학생회장씩이나 되어서 이걸 못 하면 어떡하나요?”

저게…… 저거가…….

차마 항변도 못 한 내가 곰을 손가락질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우리 세미가 왜요.”

그러니까 너희 세미가 대단한 거라고, 저 곰돌이가.

괜히 쟤만 사냥하면 레펠튼 우승이었겠냐고.

“언제까지 거기 박혀 있을 건가요. 빨리 이쪽으로 안 와요?”

안타깝게도 안나는 본인이 뛰어난 것과 별개로, 남을 가르치는 능력은 없었다.

초조해진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페트리온을 떠날 때, 숙부의 구속구를 깨뜨린 힘.

기연이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힘이 마력 측정 때 나와 주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평균치라도 점수를 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스승을 상대로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 곰돌이 세트를 어떻게 치워 버리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찰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고개를 꺾어 누군지 확인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의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족제비 수인이었다. 덧붙여 지독할 정도로 말수도, 표정도 없는.
“너는…….”

서적 여러 권을 가지런히 내려 둔 그녀가 건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신시아 폴릿.”

그제야 정신이 확 든 내가 벌떡 일어났다.

“왜 여기에…….”

“네가 불렀잖아.”

말을 잇지 못한 나는 신시아를 훑어 내렸다. X 클래스 학생들을 회유하기 위해, 자금을 털어서 지급한


노란 훈련복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아니, 그러니까.”

어쩌다 훈련에 참가할 마음이 생긴 건지. 당황한 탓에 완성형 문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충 의미를 짐작했는지, 신시아는 바닥에 둔 서적을 힐긋 일별했다.

“도서관에서 더 이상 자리를 비켜 주고 싶진 않아서.”

그녀는 짧은 보라색 단발을 바짝 당겨 묶었다. 뒤이어 망설임 한 점 없이 안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깜박 정신을 차리며 뒤따랐다.

“같이 가.”

그때의 나는 도통 웃지 않는 안나 스웰든의 입에 악마 같은 미소가 걸린 걸 미처 알지 못했다.

퍽, 쿵, 쾅.

X 클래스 학생들은 연무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최근 X 클래스 강의실에는 깊은 마수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존재가 출몰했다.


좀비.

그 단어 말고는 벤디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으며, 뚜두둑, 걸을 때마다 뼈 부러지는 기괴한 소리를 내는 건 예사였다.

아으으, 다 죽어 가는 비명은 덤이었다.

학생회장이야 원래 이상했으니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다만…….

“후.”

신시아 폴릿이 백 살 먹은 노인처럼 움직이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벤디가 오기 전까진 X 클래스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평정을
잃지 않는 이였다.

시린 연보라색 눈동자와 흐트러지지 않는 단발은 단정의 표본이자 상징이었다.

그런 신시아 폴릿이.

눈동자는 빛을 잃은 지 오래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하기 짝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술을 얼큰하게 마신


동네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심지어 학생회장이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지급한 노란색 훈련복까지 착용하고선…….

“가자, 신시아.”

아카데미 깃발을 지팡이처럼 짚은 벤디가 부들부들 걸음을 뗐다. 밀란느 학장이 보면 거품을 물
광경이었다.

“어서. 늦으면 안나 스웰든이 우릴 세미의 밥으로 넘길 거야.”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신시아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세미가 누군데.”
“그 고릴라 같은 곰돌이.”

“빌어먹을…….”

병든 두 병아리가 비척비척 움직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벤디와 신시아에게 여러 쌍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머물렀다.

“신시아가 훈련에 참가하고 있는 게 사실이야?”

“보면 모르겠냐.”

“대체 왜……?”

“나 신시아가 욕하는 거 처음 봐…….”

X 클래스 학생들은 아연한 낯빛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다른 클래스의 태도에 불만을 품어 온 학우면 몰라. 가장 관심 없을 것 같던 신시아가 밤낮으로


훈련에 참가하니 내심 동요한 탓이었다.

사실 그들도 처음부터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마력 훈련에 매달린 적도 있었고, 하다못해 마력 수치만이라도 높이려 약을 복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우수한 가문과 좋은 혈통,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타 클래스 학생들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

떨떠름한 정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쾅, 누군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X 클래스에서 벤디에게 가장 처음 말을 걸었던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였다.


#<29 화>

“……라일라?”

“왜 그래?”

어리둥절한 시선이 라일라에게 집중됐다.

이를 악문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을 불러낸 야닉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학생회장에겐…… 뭔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요.’

‘아니, 힘을 숨기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그러니 같은 클래스인 네가 감시 좀 해.’

학생회장의 동태가 수상하니 감시하라는 귀찮은 명령이었다.

‘무슨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거야?’

그런 약골이.

명령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졸업하면 하이에나 영역으로 돌아가니. 수장의 자제인
야닉에게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실 즈음, 야닉은 라일라를 회유할 격언을 두고 떠났다.

‘라일라, 너 혼자라도 가능하다고 본다.’

‘…….’

‘하이에나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법이니까.’

도대체 누가 저딴 말을 멋있다고 한 건지. 벌써 수십 번째 듣는 중인 격언이었다.


멋있다고 칭찬한 자를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한 라일라가 입을 뗐다.

“진짜 짜증 날 정도로 거슬리네.”

날 선 그녀의 눈길이 신시아가 나간 문에 박혔다.

“족제비 수인한테 뒤처지기나 하고. 야닉 펠이 알면 돌아가시겠어.”

씨근거린 라일라는 강의실 뒤편의 사물함을 우악스럽게 헤집었다.

야닉 펠. 그 이름이 나오자 하이에나 수인들이 잘게 몸을 떨었다.

만일 야닉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족제비에게 밀렸다며 자신들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할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열 받네, 다른 클래스 새끼들.”

“그러니까. 마력 좀 약하다고 이렇게 무시당할 일이야?”

호전적인 몇몇 하이에나 수인이 슬그머니 라일라를 거들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라일라는 사물함에서 벤디가 지급한 노란색 훈련복을 꺼내 들었다.

너, 너, 그리고 거기 뒤의 너.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하이에나 수인들을 속속들이 짚었다.

아무리 학생회장 감시를 명령받았다지만, 자신만 저 지옥 같은 훈련에 뛰어들기엔 배알이 뒤틀렸기에.

“가자. 우리가 이론 성적만 뒤에서 일등이지, 근성까지 뒤에서 일등은 아니잖아!”

라일라는 호방한 외침과 함께 닫힌 문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사람 모양으로 뚫린 문을 마주한 학생들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라일라, 이론 성적이 뒤에서 일등인 건 너뿐이야…….

완벽을 추구하는 성미인 안나는 훈련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일어나세요, 회장.”

벤디가 연무장에서 안나에게 한창 패대기쳐질 즈음.

‘온다.’

무언가 오고 있다.

불길한 기운을 느낀 벤디는 쏜살같이 신시아의 뒤에 몸을 숨겼다.

어디서 온 기운인진 몰라도, 맹수를 피하는 사슴의 촉이 몸을 숨기라 말하고 있었다.

“붙지 마.”

등 뒤에 선 벤디가 거치적거린 신시아가 팔꿈치로 밀어냈다.

“그건 안 돼.”

“왜 이래?”

“뭔가 오고 있어.”

“뭐?”

신시아는 먼지바람이 일어나는 곳을 휙 돌아봤다.

얼마 안 가 X 클래스 소속인 하이에나 수인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쾅, 목각 인형에 선방부터 날린 라일라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외쳤다.

“학생회장!”

신시아의 뒤에서 몸의 반만 내민 벤디는 즉각 대응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미안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어처구니없이 반박한 라일라는 곧 벤디와 신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목뒤를 매만졌다.

“……줘.”

“잘 안 들려. 뭐라고?”

“우리도 훈련에 끼워 달라고…….”

요란한 등장과 다르게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노란 훈련복을 착용한 다른 하이에나 수인들도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벤디는 보았다. 안나 스웰든, 저 괴력 곰돌이의 안광이 흡족하단 듯 번쩍 빛나는 장면을.

“우리도 참가할게.”

“조금 늦었지만 나도…….”

“나도!”

하이에나 수인들이 훈련에 참가한 후부터는 눈에 띄게 머릿수가 늘어났다.

훈련에 끼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해지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휑하기 짝이 없던 7 연무장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레넌 님, 제발, 제발.”

“나는 빌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던데.”

“예에? 아아악!”

레넌 에던트의 검에 썰리고,

“안나 님, 목각 인형을 악력만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

“그럼 당신이 대신 부서지든지요.”


“컥!”

안나 스웰든의 주먹에 날아가고,

“마력 훈련인데 이 곰은 왜?!”

크허헝!

거대 곰 세미와 일대일 특훈까지.

하루, 이틀, 일주일.

연무장에 퍽쿵쾅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수인 아카데미에 노란색 좀비 무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져
나갈 무렵.

끼이익, 마구간 문이 조용히 열렸다.

“해피, 자?”

비실비실한 걸음으로 들어선 벤디가 해피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훈련의 여파로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푸르릉.

해피의 관심은 오로지 벤디가 들고 온 간식 바구니에 있었다.

바구니만 뒤적이는 사슴을 가늘게 노려보던 벤디가 지푸라기 위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무섭거나 긴장되는 밤이면 저도 모르게 자꾸만 해피를 찾게 됐다.

누구보다 괴수 같은 사슴임에도 같은 사슴이란 사실 하나가 더 없는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같은 초식인 말들까지도.

약간이나마 육식 수인에게 익숙해졌다곤 해도, 자신을 해칠 만한 이들이 아예 없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남달랐다.
‘내일이면…….’

드디어 마력 측정일.

지푸라기에 드러누운 벤디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숙부의 구속구를 끊어 낸 건 우연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활용하지만 못할 뿐, 뭐가 됐든 내게도 대대로 마법사인 레피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을 테니까.

몸속 마력을 손에 모아 밖으로 방출한다.

듣기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이론을 되뇐 벤디가 눈을 감으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훈련의 성과.

퐁, 이윽고 손에서 작은 공기주머니가 생성됐다. 그마저도 푸슉,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금방


소멸됐지만.

“…….”

무슨 뚱딴지같은 짓을 하느냐는 듯한 해피의 지긋한 눈길이 머물렀다.

어느덧 해피의 부하로 전락한 마구간의 다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음. 벤디는 태연히 옷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일찍 자야 돼서 이만 가 볼게.”

부끄럽기는 했는지 마구간을 벗어나는 종종걸음이 오늘따라 재빨랐다.

그때였다. 후드득, 벤디가 누워 있던 자리의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린 건.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해피는 천장과 벤디가 나간 문을 휙휙 번갈아 봤다.

저 미친 사슴이 내 소중한 보금자리를 부수고 갔다.


벌떡, 부스스한 머리통이 이불을 박차며 침대에서 솟구쳤다.

길게 하품한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몽롱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며, 이윽고 완전히 초점을 되찾았다.

기숙사 창가로 달려간 내가 커튼을 휙 젖혔다.

“초청객을 모실 정문은 개방했나?”

“그 천막은 조심히 다뤄!”

비품을 들고 분주히 이동하는 교직원들이 보였다.

그 장면을 내려다보던 나는 커튼을 꽉 그러쥐었다.

‘장학금.’

마침내 마력 측정일의 아침이 밝았다.

얼굴이 눌리도록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은 나는 지난 몇 주를 돌이켰다.

마력 훈련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진전이 없는 이가 다수였고, 강행군인 만큼 탈주자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훈련에 참가한 대부분의 클래스메이트는 열심히 따라와 줬다.

‘다들 나름 설움이 깊었겠지.’

뭐가 됐든 레넌이나 안나 같은 실력자에게 직접 지도받는 게 진귀한 경험이기도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던 나는 길게 심호흡했다.

솔직히 극적인 결과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훈련 기간이었으니까.

그건 다른 클래스메이트들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력은 죽도록 노력해도 타고난 이들이나 뛰어난 스승 아래서 기초부터 닦은 이들을 뛰어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그러나 일단은 나도 사람인지라 혹시나, 근소한 차이로라도 등수가 바뀌지 않을까. 싶은 바람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오늘이 와 버린 걸 어쩌겠어.’

한번 해 보자고.

전의를 불태운 나는 거칠게 몸을 씻은 후 두피가 당길 만큼 북북 머리를 빗었다.

‘걱정이야 끝나고 나서 해도 돼.’

흡. 마지막으로 교복 타이를 단단히 조인 내가 기숙사 문을 박차고 나섰다.

“가자, 노랑아!”

기세 좋게 배낭 뚜껑을 열었으나 노란 짐승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문 앞은 텅 빈 상태였다.

“……?”

매일 뻔질나게 기다리더니 웬일로 자리를 비웠담.

“노랑아?”

복도 진열장 아래,

“노랑아?”

장식용 항아리를 들여다봐도 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육식 동물이 따라다니는 게 껄끄럽기 짝이 없었는데, 막상 안 보이니 은근한 걱정이 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복도를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얼쩡거리던 내가 소스라쳤다. 하마터면 뒤편에 선 신시아와 부딪힐
뻔했기에.

“안 가니?”

“아니, 출발해야지.”

“그럼 왜 그러고 있는데.”

“그게…….”

미련 어린 눈길로 복도를 힐긋거리자, 신시아가 내 배낭끈을 붙잡았다.

“다른 곳으로 샐 생각하지 마, 네가 빠지면 곤란하니까.”

나는 신시아에게 이끌려 가며 뒤를 돌아봤다.

새끼 짐승이 사라진, 텅 빈 배낭이 신경 쓰이는 아침이었다.

해는 쨍쨍한데 유독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씨였다.

마력 측정 장소는 천장이 뚫린 형태인 돔형 건물 안이었다.

중앙에 너른 대리석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관중석이 단상을 둥글게 에워싼 형태였다.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건물에 다다른 나는 팔짱 낀 채 심오하게 고찰했다.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 아카데미는 어쩌다가 상식을 벗어나 버린 걸까.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금을 덕지덕지 바른 정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이쯤 되니 건물 하나하나가 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30 화>

척 봐도 고급스러운 의자에 착석한 안나는 만족스레 다리를 꼬았다. 학생회장과 학생회 임원에게만
제공되는 좌석이었다.

“학생회에만 제공되는 자리가 이 정도일 줄은. 이래서 매해 선거마다 난리를 떠는 거였군요.”

권력은 한번 맛보면 잊지 못한다더니……. 읊조린 안나가 배부른 맹수처럼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주변을 의식한 나는 검지를 입가에 대며 주의를 가했다.

“듣는 귀가 많아요.”

“그렇게 말하는 회장은 이미 눈동자가 돈 모양인데요.”

헛기침한 내가 몰래 안나를 째려봤다.

첫인상은 지적인 모범생이더니, 볼수록 오만방자한 괴력 곰돌이에 불과했다.

“아니, 내 자리는?”

그때 쩌렁쩌렁한 외침이 골을 울리게 만들었다.

“내 자리가 없잖아, 이 야닉 펠의 자리가!”

억울해 쓰러지기 직전인 야닉이었다.

그런 그를 안나가 달갑지 않은 눈으로 훑어 내렸다. 야닉이 레펠튼에서 세미를 죽이려 한 이후부터 묘하게
적대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외부인의 자리가 있을 리 없지요.”

“네가 이렇게 배짱이 두둑할 줄은 몰랐는데, 안나 스웰든.”


야닉과 안나 사이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맹수 싸움에 사슴 등 터질까, 의자 뒤에 몸을 숨긴 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야닉, 아직 네 자리가 있어선 안 돼.”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너는 우리 학생회의 비밀 요원이니까.”

움찔, 일순 야닉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내가 세뇌하듯 은근하게 속삭였다.

비밀.

요원.

잠깐의 정적 후, 급격히 누그러든 야닉이 학생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비밀


요원이란 멋스러운 임무가 취향을 저격한 게 틀림없었다.

기가 찬 얼굴로 쳐다보던 안나가 중얼거렸다.

“바보를 구슬리는 재주가 좋네요. ……끼리끼리인가.”

이 곰돌이가 누구랑 엮는 거야. 막 따지려는 와중, 웬 걸걸한 목소리가 돔을 울렸다.

“이번 마력 측정의 심사 대표를 맡은 스카론 장로입니다.”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단출한 로브를 걸친 그는 어딜 보나 마법사였다.

마탑 장로 중 한 명, 스카론.

깐깐하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그는 작년에도 마력 측정 심사를 일임 받은 자였다.

고로 부정행위나 허튼수작을 부리다가는 곧바로 들통나기 십상.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결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진행 방식은 작년과 동일합니다.”


스카론 장로는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원형 마법진 앞에 섰다.

“이 원형 마법진에 일격을 가하면 모래시계 속 액체가 붉은색을 띠게 되죠.”

나는 스카론 장로가 가리키는 뒤편을 바라봤다.

그의 뒤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 큰 모래시계가 자리했고, 모래시계 안은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마력이 강할수록 액체는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이걸 수치로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마력을 증명하라니.

마법진과 모래시계를 번갈아 볼수록 긴장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나는…….’

팔걸이에 올려 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레넌과의 훈련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을 소환하지 못했다. X 클래스 학생 중 유일하게.

사실상 마력 측정이 아닌,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불안함에 괜히 엉덩이를 들썩이기 무섭게 안나가 일침을 가했다.

“얌전히 있어요. 얕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

그녀는 곁눈질로 귀빈석을 가리켰다. 귀빈석에는 내가 직접 초청장을 보낸, 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신분의 초청객들로 그득했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학생회장석에 앉아 있어서 관심을 기울이는 참이니까.”

곧바로 납득한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안나의 말대로 귀빈 몇몇의 눈길이 우리 쪽을 향한 상태였다.

여기서 잘 보이면 졸업 후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턱 들고, 허리 세우고.”
속삭임에 가까운 안나의 면밀한 지시가 이어졌다.

“양손은 팔걸이에 얹고, 눈빛은 위엄 있게.”

지시하던 안나는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보냈다.

“아주 훌륭해요, 위엄은커녕 궁지에 몰린 사슴 같은 눈빛이라니.”

“누가 사슴이야?!”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비유인 탓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흔들리는 내 표정을 못 본 안나가 전방을 턱짓했다.

“이상, 노파심에 말하지만 부정행위는 엄격히 판정하겠습니다.”

어느새 설명을 끝마친 스카론 장로는 몸을 틀어 어느 한 방향을 돌아봤다.

우리가 앉은 좌석 옆, S 클래스 학생들이 정렬해서 앉은 방향이었다.

“그럼 작년과 같이 S 클래스부터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레넌 에던트 학생.”

가십지를 얼굴에 덮고 있는 레넌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잠을 자는


대단한 한량이었다.

“레넌 에던트 학생.”

“…….”

“레넌 에던트 학생!”

재차 호명한 스카론 장로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퍽, 원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갈기자 레넌의 몸이 움찔 경련했다.


“나가, 레넌 에던트.”

“저 영감은 매번 나를 먼저 시키네.”

비적비적 겨우 일어난 레넌이 가십지를 품에 꽂았다.

휙, 난간을 뛰어넘어 마법진 앞에 선 그가 스카론 장로에게 물었다.

“측정 순서는 미모순인가?”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맛 간 질문을 완벽하게 무시한 스카론 장로가 시작 신호를 보냈다.

스르릉, 검사인 레넌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자 주변이 고요해지는 게 느껴졌다.

청순한 얼굴과 잘 벼린 검이 안 어울릴 듯하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별다른 준비 자세조차 취하지 않은 레넌은 마법진을 향해 내려치듯 검을 그었다. 동시에 모래시계 속


액체가 핏빛보다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모래시계가……!”

고요하던 돔 건물이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그새 검을 갈무리한 레넌은 태연히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레넌 님은 동작이 군더더기 없는 만큼 본보기로 삼기에 좋아서 늘 먼저 호명되죠.”

……행실과는 다르게. 옆에서 안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손에 배어난 땀을 교복 치마에 비볐다.

레넌이 저럴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늘 곁에서 팔랑팔랑 뛰어다니다가 저러니 격차가 심할


수밖에.

모래시계를 살피며 수치를 기록한 스카론 장로가 눈짓했다.


“다음은 원 리오나드 학생.”

이미 대기하고 있던 원은 곧장 단상 위로 올라갔다. 왼손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드러나는 장갑을 착용한


그가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준비를 마친 원이 나서자, 스카론 장로는 고갯짓으로 살짝 예를 취했다.

저 늑대가 차기 차기 마탑주라더니.

새삼 원의 위치를 실감한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만나 볼 일조차 없는 아득한


존재였다.

휘오오, 마법진에 왼손을 뻗은 원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을 집어삼킬 듯한


새카만 어둠이었다.

섬뜩한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

의문 어린 안나의 부름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저 광경…….’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낯설지만 않은 광경이지, 막연한 기시감이 전부였다.

‘어디서?’

열심히 기억을 돌이켜도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애초에 사슴 영역에서 살아온 이상 저런 위협적인 마법을 겪었을 리도 없고.

“회장,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우일까.
안나의 질문에 답하며 다시 자리에 착석할 즈음, 스스로 움직인 검은 기운이 마법진을 향해 쏘아졌다.

콰앙!

커다란 소음과 함께 주위가 검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모래시계까지 뒤덮고 있던 기운이 서서히 흩어지며, 액체가 레넌과 같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역시!”

“과연, 대단한 마력입니다.”

또다시 환호 소리가 돔을 뒤흔들었다.

“보시다시피 원 님은 깔끔한 성정에 비해 손속이 잔인해요. 저게 마법진이 아니라 생명체였으면 아마


소멸됐을 테니까.”

안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얼굴을 원의 마법처럼 까맣게 물들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에게만은 초식 수인인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

사슴인 걸 들켰다가는 저 마법에 갈기갈기…….

“다음은 야닉 펠 학생…… 아니, 호명도 하기 전에 뭐 하는 짓이오?”

부들부들 떠는 사이, 날아간 야닉 펠이 마법진에 다짜고짜 발차기를 날렸다.

레넌이나 원 정도는 아니지만 모래시계가 꽤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봤냐? 이 야닉 펠의 실력을!”

허리에 양손을 짚은 야닉이 호걸처럼 웃어 젖혔다.

그의 화려한 활약을 지켜보던 안나는 비장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요.”
넌 왜 자꾸 아닌 척 야닉한테 전의를 불태우는데.

안타깝게도 이 생각은 안나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순식간에 단상으로 올라간 그녀가 야닉과 똑같이 쾅,
마법진에 발차기를 날렸기에.

“다음은 안나 스웰…… 호명을 다 하면 나오게! 호명을!”

모래시계가 조금 전의 야닉보다 조금 더 짙게 물들었다.

막 단상에서 내려가려던 야닉이 경악 어린 얼굴로 펄쩍 뛰었다.

결과를 납득 못 한 그가 스카론 장로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뭔가 잘못됐어, 다시 시켜 주쇼!”

“당장 내려가지 않으면 실격시키겠소!”

언제 발차기를 날렸냐는 듯 차분해진 안나가 소란을 뒤로하며 사뿐사뿐 단상에서 내려왔다.

저 괴력 곰돌이. 레펠튼만 해도 그렇고, 차분한 겉모습에 비해 승부욕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음은 에밋 스톤 학생.”

“시에라 모어 학생.”

다른 S 클래스 학생들의 마력 측정도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S 클래스의 대부분이 측정을 끝마쳤을 즈음.

“다음은.”

다음 순서를 호명하려던 스카론 장로가 짧게 탄식했다. 마치 골칫덩이라도 맞닥뜨린 듯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헤일린 이스단 학생.”


#<31 화>

장내가 물속에 잠긴 듯한 정적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경직된 분위기였다.

S 클래스의 사자 수인, 헤일린 이스단.

이전에 원에게 들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사자는 인성이 없는 수준이죠.’

‘괜히 엮였다가 몸이 반으로 접힐 겁니다.’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 그런 평가를 듣는 건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는데, 장신의 남자가 단상 위로 훌쩍 올라섰다.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탓에, 나도 모르게 몸이 난간으로 가까워졌다.흰빛을


띠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어?’

저 남자는 분명.

‘앞으로 나 만지지 마.’

레펠튼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사 빠진 육식 수인이 분명했다.

“저!”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질하자, 반사적으로 움찔한 안나가 물었다.

“또 왜요?”

“수상한……!”
“수상한?”

수상한 육식 수인.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으려던 내가 입을 합 가로막았다.

괜히 엮였다가는 몸이 반으로 접힌다는 원의 충고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무어라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진 나는 나오는 대로 둘러댔다.

“너무 예쁜 게 수상하네요.”

“그럴 수 있죠.”

쓸데없는 부분에서 공감한 안나가 고개를 주억였다.

‘설마하니…….’

사자 수인이었을 줄은.

지금껏 상상해 온 흉포한 사자 수인과는 몹시, 매우 거리가 멀었다.

타이를 또 잃어버렸는지, 셔츠만 대충 걸친 헤일린 이스단을 찬찬히 살핀 스카론 장로가 입을 뗐다.

“이번에도 단상을 부수면 실격시키겠소.”

저게 무슨 소리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나를 채근하자, 그녀는 단상 위 광경에 집중하며 입만 움직였다.

“지난 마력 측정 때 헤일린 님이 마력을 광역으로 방출한 탓에, 단상이 전부 박살 났거든요. 복원하느라


시간이 꽤 걸린 걸로 알아요.”

그렇군.

“혹시 모르니 난간에서 떨어져요. 마력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

사자가 마력을 방출해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회장.”

“네.”

“기둥 뒤에 숨을 필요까진 없어요.”

슬금슬금 기둥 뒤에서 나온 내가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어쨌든 엮여서 좋을 게 없는 분이네요.”

머쓱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읊조리는데, 안나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제 입을 툭툭 때렸다.

“왜 그래요?”

“아뇨, 저도 제 안위가 우선인지라.”

안위라니. 무슨 의미인지 묻기도 전에 스카론 장로의 시작 신호가 들렸다.

전방을 돌아보기 무섭게 헤일린 이스단의 팔이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움직였다.

쾅!

섬광처럼 날아간 헤일린 이스단의 주먹이 마법진과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시야는 물론 돔 건물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며, 액체가 짙은 붉은색으로 물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단상을 제외한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기에.

단상을 부수지 말란 스카론 장로의 말을 지킨 셈이긴 한데. 말 그대로 단상만 멀쩡히 남겨 둔 꼴이나
다름없었다.

단상을 부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단상만 빼고 부수다니, 대단한 인성이었다.

관자놀이를 짚으며 옅은 한숨을 내쉰 스카론 장로가 말했다.


“이상 S 클래스의 마력 측정을 마치겠습니다.”

인성도 인성이지만, 가볍게 주먹을 때려 박는 느낌인데 이 정도의 여파일 수가.

동그랗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 자리로 되돌아가던 헤일린 이스단은 돌연 학생회 쪽을 돌아봤다.

“…….”

하필 시선이 마주쳐 버린 나는 피하지도 못한 채 눈을 껌벅였다.

방금 전의 난폭한 광경 때문인지, 붉은 눈동자에 집어 삼켜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던 헤일린 이스단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소 띤 그가 무어라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지?’

자연스레 느리게 움직이는 붉은 입술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이윽고 헤일린 이스단의 시선이 떨어지자, 맥이 탁 풀린 내가 의자에 미끄러지듯 늘어졌다.

고작 눈이 마주친 정도로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기운 빠진 내 반응을 살핀 안나가 물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렇다기엔 회장의 표정이 별거인데요.”

“…….”
표정을 가다듬은 나는 헤일린 이스단의 입술 모양을 떠올렸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짜증 나게.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짜증 나게?’

제대로 해석했는지조차 모를 말을 곱씹은 내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만졌다고 저러는 거야?”

또다시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은 안나가 내 어깨를 짚었다.

“회장.”

“네?”

“만졌어요.”

“아니, 저렇게 멀리 있는데 뭘 어떻게 만져요?”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내 뒤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노란 짐승이 자리를 비운 갈색 배낭이었다.

“지금 만졌다기보다는 어제 만졌죠.”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한 말을 미처 듣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뭐라고요?”

“잘 들어요, 대체로 독이 든 버섯일수록 예쁘고 화려한 법이에요.”

“……갑자기 그 말은 왜 나와요?”

녹색 눈에 깃든 감정은 틀림없는 측은지심, 즉 동정이었다.

“되도록 예쁜 걸 조심해요.”
대체 뭐라는 거야, 이 곰탱이는.

전교생이 다 치러야 하는 만큼 마력 측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우리 앞 순서인 E 클래스의 마력 측정이 한창인 와중, 노란 인영이 의자 손잡이 위로 확 튀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너!”

내내 보이지 않던 노란 짐승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은근한 반가움에 검지를 내밀자, 동그란 앞발에 내 손가락이 찰싹 내쳐졌다.

만지지 말라는 듯 아니꼽게 나를 훑은 노랑이는 빈 배낭 속에 몸을 끼워 넣었다. 또다시 내외의


시작이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안나가 예쁜 걸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육식 동물은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얄미운 마음에 발끝으로 배낭을 슬쩍 굴리는 즉시 노란 짐승이 하악질을 해 댔다.

“이상으로 E 클래스의 마력 측정이 끝났습니다.”

입질을 화들짝 피하는 찰나, 스카론 장로의 눈길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X 클래스 학생들이 모여 앉은 좌석이었다.

“끝으로 X 클래스의 마력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비장하게 의자에서 일어나자, 안나가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어디 가나요?”
“클래스메이트들이랑 있으려고요.”

“이 명당을 두고?”

안나는 굳이 싶은 얼굴로 내 좌석을 가리켰다.

“일단은 나도 X 클래스의 일원이니까요. 다녀올 동안 제 배낭 좀 잘 부탁해요.”

노랑이를 넣은 배낭을 가리킨 내가 X 클래스 쪽으로 걸어갔다.

카피바라 수인들은 초식 수인만 만났다 하면 친애의 표시로 야채 꾸러미를 건네던데.

어쩐지 육식 수인은 초식 수인에 비해 소속감 같은 게 딱히 없는 느낌이었다.

실상 나도 여기에 소속감을 느낄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새삼스러운 생각과 함께 X 클래스 좌석에 다다랐을 때, 스카론 장로가 짧게 호명했다.

“첫 번째로 신시아 폴릿 학생.”

훈련 때와 달리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신시아가 단상으로 나섰다. 칼로 잰 듯한 보라색 단발이 세찬


바람을 맞아 옆으로 흩날렸다.

“호, 이번 신입생들의 마력 수준이 꽤 높네요.”

하지만 X 클래스의 마력 측정은 초청객들의 관심 밖이었다.

“작년과 달리 기사로서의 소질을 보이는 학생들도 제법 많군요.”

“C 클래스의 이 학생은 어떻습니까? 졸업 후 좋은 조건으로 영입해도 괜찮을 듯한데.”

그들은 이미 마력 측정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인재 선발 관련으로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훈련한 사실을 아는 다른 클래스 학생들은 벌써 낄낄거리며 야유할 준비에 임했다.

족제비, 파이팅.

일부러 말아 쥔 주먹을 흔들어 봤으나, 당연하다시피 무시한 신시아가 자세를 잡았다.


화아악, 그녀의 손에서 나타난 마법이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모래시계 속 액체가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금방 투명해졌다.

X 클래스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지만, 앞선 E 클래스의 학생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결과였다.

모래시계를 담담히 살핀 신시아는 몸을 돌려 자리에 돌아왔다.

“어땠어?”

내 질문에 주먹을 쥐었다 편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딱히.”

큰 표정 변화는 없지만 꽤 만족스러워하는 중인 건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작년에 비해 마력 수치가 오르긴 했나 봐.

괜스레 뿌듯해진 내가 신시아의 어깨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차마 육식 수인에게 먼저 닿지는 못한


소심한 응원이었다.

투명 어깨를 두드리는 나를 쳐다보던 신시아가 이내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이젠 벌레 취급이니?”

만난 이래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라일라 프리스던트 학생, 단상으로.”

“홀튼 리 학생.”

“에버릿 머드 학생.”

순차대로 마력 측정이 진행되었으나 눈에 띄게 주목할 만한 결과는 없었다. 간간이 들리는 비웃음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최소한 E 클래스보다는 평균점이 높아야 할 텐데. 겸여히 결과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슬슬 심장 울림이 가빠지기 시작할 즈음, 스카론 장로의 중후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벤디 레피 학생.”

#<32 화>

왼팔 왼 다리를 동시에 움직인 벤디가 단상으로 나섰다.

삐거덕거리는 모습을 관전하던 원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학생회장 차례군.”

“벌써?”

레넌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던 가십지를 살짝 내렸다. 반쯤 가린 시야로 단상 위에 덩그러니 선 벤디가


보였다.

새침한 표정 덕분에 얼핏 태연해 보이지만 그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건 많고 많은 새침한 표정 중,


기절을 준비하는 비장한 새침함임을.

“훈련 결과는?”

원의 짧은 질문에, 주변을 둘러싼 S 클래스 학생들이 은근히 주의를 기울였다.

팔짱 낀 레넌은 벤디의 혹독한 훈련을 돌이켰다.

‘다시.’
‘합!’

퐁.

‘다시.’

‘하압!’

퐁.

안타깝게도 벤디가 훈련 기간 동안 소환한 마법은 고구마보다 작은 공기주머니가 전부였다.

“훈련 결과는…….”

참담한 지난날을 떠올린 레넌은 깊이 묵념했다.

“고구마.”

의미 모를 말을 해석하기조차 싫은 원이 태연히 대답했다.

“보나 마나겠군.”

“과연 그럴까.”

드물게 얌전히 앉아 있던 야닉이 두 사람 사이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불쾌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원이 야닉의 얼굴을 레넌 쪽으로 밀었다.

“치워, 죽여 버리기 전에.”

아랑곳 않은 야닉이 가슴께에 닿은 장발을 쓸어 넘겼다.

“쯧, 회장의 실력은 네놈들이라도 얕볼 수준이 아니야.”

호언장담을 들은 S 클래스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왜 쟤가 학생회장한테 자부심을 갖는 건데?’


‘난들 알아, 괜히 엮이지 마.’

‘아니, 너무 자신만만하잖아.’

불신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게 된 야닉은 햇살을 등지며 일어났다. 암갈색 눈동자가 번쩍 섬광을 발했다.

“보여 주지, 회장의 능력을.”

“호들갑 떨지 말고 자리에 앉아.”

“원 리오나드, 네놈은 말을 재수 없게 하는 재주가 있어!”

실랑이를 벌이던 그들은 단상 위를 보고 맞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마법진 앞에 선 벤디가 손에서 하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심호흡 한 벤디는 오로지 빛을 발하는 마법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야닉 때문에 소문만 무성했지, 학생회장이 직접 마법을 소환하는 건 본 적이 없네.”

“무슨 속성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글쎄……. 장풍을 날린 게 사실이면 바람 속성 아닌가?”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귀에 똑똑히 들렸다.

대부분이 부정적인 의견이었으나 신경 쓸 여유 따위 있을 리가.

레넌과 안나와의 훈련에서 배운 대로 실행하는 자체부터 힘에 부쳤다.

양손에 마력을 흘려보내자, 손에서 새하얀 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큰 걸 터뜨릴 것 같은데?”

“저건 제법 위력이…….”

의외의 활약을 마주한 관중들이 숨죽여 집중했다.


휘오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벤디의 옷자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기운을 읽던 벤디는 양손을 모았다.

일순 곁에 선 스카론 장로가 눈을 크게 홉떴다.

“합!”

퐁.

양손에서 노랑이 앞발만 한 공기주머니가 쏘아져 나갔다.

익숙한 광경인 만큼 당황하지 않은 벤디가 다시금 마력을 쏘았다.

“합!”

퐁.

“합!”

퐁, 퐁. 퐁.

스카론 장로를 비롯한 관중들은 느리게 전진하는 공기 열차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렇게까지 소질이 없기도 힘든데.

하필 공격력까지 약해서, 마법이 마법진에 채 닿기도 전에 소멸하는 꼴이었다.

마법을 소환하려 공들인 시간에 비해 참담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야, 예상한 장면이네.”

“……저럴 줄 알았다.”

“역시.”

“나는 기대도 안 했다고.”


벤디와 훈련을 함께했던 X 클래스 학생들은 조용히 외면했다. 훈련 내내 매일같이 보아 온 신통한 마법
실력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벤디는 다시금 힘차게 마법을 쏘았다.

“합!”

……퐁!

그나마 조금 힘찬 공기주머니가 튀어나왔다.

“너무 힘이 들어갔소.”

여러 번 입을 달싹인 스카론 장로는 벤디만 들리게끔 나직이 조언했다.

“반드시 마법을 소환할 필요는 없네. 그냥 가볍게 건드리는 느낌으로 마법진을 쳐 보시오.”

“건드리는……?”

도리어 머릿속이 복잡해진 벤디가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손을 갖다 대라고?’

어째 마법을 쏘라는 말보다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데.

장풍을 날릴 때처럼 손을 반듯하게 편 벤디는 스카론 장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흘끔.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그의 새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인내심이 바닥을 향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실격당할지도.

제발. 마음이 조급해진 벤디는 정권을 날리는 것처럼 마법진을 팡 쳤다.

“…….”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래시계 속 액체는 요지부동이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모래시계를 살핀 스카론 장로가 수치를 기록하며 말했다.

“이상으로 마력 측정을 끝마치겠습니다.”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 벤디는 모래시계를 등졌다. 예상을 비껴 나가지 않는 결과였으나 입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게 장풍이냐?”

“연무장에서 그렇게 요란을 떨더니.”

곳곳에서 조소를 넘어 박장대소까지 터져 나왔다.

귀를 발갛게 물들인 채 단상을 벗어나려던 벤디는 마침 노란 짐승과 시선이 마주쳤다.

난간에 올라선 노란 짐승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끼 짐승의 표정이 진지해 보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덩달아 심각해진 벤디가 시선을 맞추는데, 쩌적, 등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음을 뒤늦게 인지한 벤디가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한
모래시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쩌적, 쩌저적.

모래시계에 금이 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도망가야 해.

저절로 발이 움직이는 중에 휙, 노란 물체가 눈앞에 뛰어들었다. 난간에서 대체 언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를 노란 짐승이었다.

‘어?’

노란 짐승은 망설임 없이 앞을 막아섰다.


비스듬히 몸을 튼 노란 짐승과 벤디의 시선이 뒤엉켰다.

밀가루처럼 하얗게 질린 벤디를 살핀 노란 짐승은 쯧 혀를 찼다. 어떻게 얻은 몸에 대한 단서인데, 하필


이런 약골이라니.

성가시긴 하지만 귀중한 단서를 상하게 둘 순 없었다.

‘안 돼.’

왜 네가 여기에. 사색이 된 벤디는 노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째깍, 째깍.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필사적으로 뻗은 손끝이 노란 짐승의 꼬리를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벤디의 얼굴에 절망이 번지는 동시에 펑! 엄청난 폭발음이 전신을 덮쳤다.

“무슨…… 학생회장!”

안색을 파랗게 물들인 안나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런 폭발에 휘말린 이상 무사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벤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의 시간도 잠시, 단상 전체를 뒤덮은 잿빛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연기 속에서 세 개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방어 마법으로 겨우 몸을 건사한 스카론 장로와 바닥에 주저앉은 벤디, 그리고…….

벤디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인영을 올려다봤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은색 뒤통수. 누군가의 등이 지금만큼 커다랗게 보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직전까지만 해도 관중석에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조차 모를 레넌이 철컹, 가벼운 동작으로 검을


갈무리했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폭발에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이는 벤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숨 쉬는 방법마저 잊은 벤디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어, 어떻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침착하려 해도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레넌이 아니었다면 다치는 걸 넘어 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빙글 뒤돈 레넌은 눈높이에 맞춰 숙여 앉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벤디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눈만


껌벅였다.

속 모를 미소를 지은 레넌이 콕, 벤디의 이마를 눌렀다.

“어때.”

고개가 살짝 뒤로 꺾였다가 돌아온 벤디는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이번에는 좀 호위 같았어?”

조금 전의 급박한 상황이 별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놀라서인지, 안도해서인지.

매번 얄밉다고 생각한 의뭉스러운 웃음인데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던 벤디는 헉,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노, 노랑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랑이는?”

말까지 더듬은 벤디가 허둥지둥 두리번거렸다.


“저기.”

레넌의 엄지가 제 뒤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새끼 짐승이 퉤, 퉤, 먼지를 뱉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윤기 나는 노란 털은 까맣게 물들고, 털이란 털은 죄다 치솟은 몰골이었다.

그래도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확인한 벤디는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뛰어들어.

달려간 벤디가 까맣게 변한 노란 짐승을 당겨 끌어안았다.

과도한 접촉인 탓에 노란 짐승의 온몸이 타는 듯 따갑고 뜨거웠다.

만지지 말라니까 그러네.

버둥거리던 노란 짐승은 곧 등이 축축해지는 감촉에 움직임을 멈췄다. 벤디가 얼굴을 묻은 부위였다.

이걸 발로 밀어낼 수도 없고.

한숨 쉰 노란 짐승은 결국 털이 비 맞은 양 젖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등이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원은 빛이 맴도는 오른손을 가볍게 털었다. 소환하기 직전이었던 방어계 마법이 공중에서 소멸했다.

천천히 착석한 그는 방금 전까지 레넌이 앉아 있던 빈자리를 일별했다. 벤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뛰어 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폄을 반복했다.

딱히 연관조차 없는 이를 구하려 들다니.


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방어계 마법 주문을 외운 상태였다.

낯선 제 행동에 작은 불쾌감을 느낀 그는 노란 짐승을 끌어안고 웅크린 벤디를 바라봤다.

#<33 화>

레넌 에던트와 헤일린 이스단. 두 사람 모두 모래시계의 폭발을 막기 위해 뛰어들었다.

레넌이야 심심해서 그랬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는 성정이지만, 헤일린은 구경하면 구경했지 제 발로


뛰어들 위인이 아니었다.

대체 벤디 레피에게 뭐가 있기에.

벤디에게 닿은 의미심장한 눈길이 이어서 산산조각 난 모래시계로 옮겨졌다.

‘그보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모래시계가 자체적으로 폭발하는 불의의 사고.

그게 아니라면…… 벤디의 마력이 모래시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거나.

“진짜 저런 건 처음 보네.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마도구가 폭발하기도 한다더니…….”

관중들은 당연히 모래시계의 자체적 폭발이란 결론에 의견을 모았다.

급히 단상으로 올라선 밀란느 학장은 주변을 정리하며 우선 벤디를 내려보냈다. 뒤이어 모래시계의 잔해를
수습할 교직원들이 단상 위로 모여들었다.
일편, 학생회장석으로 돌아간 벤디는 잘게 몸을 떨었다. 아직 폭발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드물게 걱정 어린 얼굴을 한 안나는 검댕을 덕지덕지 묻힌 벤디와 노란 짐승을 번갈아 봤다.

귀를 탈탈 터는 노란 짐승이야 염려할 필요조차 없지만……. 약골 중의 약골인 벤디는 이야기가 달랐다.

“회장, 다친 곳은?”

다행히 크고 작은 검둥이만 묻었을 뿐, 이렇다 할 생채기는 없었다.

넋 놓고 앉아 있던 벤디는 안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왜…….”

“네?”

“왜 폭발한 건가요?”

수습이 한창인 단상을 돌아본 안나가 대답했다.

“아직 추측이긴 하지만, 간혹 마도구가 폭발하는 사고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

뜸 들인 벤디는 망설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레펠튼처럼 제 권한을 노리는 자들이 수를 쓴 건,”

“불가능해요. 이미 만들어진 마도구에 수작질을 부리는 건 저기 저 원 리오나드 님이라도 어려우니까.”

안나의 단호한 말에,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은 벤디가 몸을 늘어뜨렸다.

적어도 모래시계 폭발에 대한 책임이 자신을 향할 가능성은 없다는 소리였다.

벤디는 학장과 심각히 토론하는 스카론 장로를 바라봤다.


‘……큰일이야.’

모래시계 폭발 건을 미뤄 두더라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우선은 마력 측정 결과.

자신이 어떠한 성적도 내지 못한 이상, X 클래스 평균점에 누를 끼친 꼴이었다.

다들 지난해보다 수치가 오른 만큼, 부디 한 등수라도 오르길 오매불망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학장과 기나긴 대화를 끝마친 스카론 장로가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평가를 시작했다. 학장은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연신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제발.’

맞잡은 양손을 무릎 위에 모은 벤디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X 클래스가 꼴등을 차지하면 장학금 없이 어마어마한 학비를 어떻게 감당하나.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오래지 않아, 결과지를 든 스카론 장로가 다시 단상 위로 올라섰다.

“우선 예기치 못한 사고로 놀라셨을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먼저 사과의 말을 전한 그가 설명을 이었다.

인명 사고는 없었으며, 모래시계의 폭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다행히 모든 학생의 마력을 측정한 후에 사고가 발생한바, 재측정 할 필요 없이 결과가 나왔습니다.


마력 수치를 평균 낸 결과…….”

수많은 관중을 한번 둘러본 스카론 장로가 입을 뗐다.

“가장 평균점이 높은 클래스는 작년과 같이 S 클래스입니다.”

거의 예정된 결과나 다름없기에 환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A 클래스, B 클래스, D 클래스.

스카론 장로는 지체 없이 평균점이 높은 순으로 클래스를 호명했다.

이윽고 아직 호명되지 않은 E 클래스와 벤디가 속한 X 클래스만 남았다.

드디어 결과구나.

긴장한 벤디는 저도 모르게 노란 짐승의 꼬리를 꼭 붙들었다.

찌릿. 마치 전기가 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털을 쭈뼛 세운 노란 짐승이 곧장 손을 쳐 냈다.

배낭에 숨어 으르릉거리는 새끼 짐승을 마주한 벤디가 고찰했다.

이럴 거면서 얘는 왜 이렇게 나를 꼬박꼬박 찾아오는 걸까. 새삼 구하러 와 줬던 아까의 감동이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검은 털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노란 털도 매한가지였다.

“다음은.”

스카론 장로의 목소리에 벤디는 휙 소리 나게 단상을 돌아봤다.

X 클래스, X 클래스.

X. X.

암시라도 걸듯 주홍색 눈동자가 X 모양으로 활활 타올랐다.

“E 클래스입니다.”

아…….

어떠한 탄식도 내뱉지 못한 벤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로써 굳이 듣지 않아도 꼴등의 영광은 X 클래스가 차지한 격이었다.

“뭐, 기대도 안 했어.”


“그럼 그렇지.”

체념 어린 말과 달리 내심 기대하고 있던 모양인지, X 클래스 학생들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벤디는 차마 클래스메이트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 결과가 어떠한 점수도 내지 못한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기에. 죄책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지막으로 X 클래스는…….”

말끝을 흐린 스카론 장로는 팔락, 결과지를 한 장 넘겼다.

“측정 불가입니다.”

그래, 당연히 측정 불가겠지.

납득하던 벤디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아니.’

방금 뭐라고?

“X 클래스는 사정상 정확한 평균 수치를 내지 못했습니다.”

스카론 장로가 심사위원석을 돌아보자, 다른 심사위원들이 동의를 표하며 작게 끄덕였다.

“다만 저희 심사위원들의 회의 끝에 어렵게나마 수치를 조합한바,”

“…….”

“이번 마력 측정에서만 S 클래스와 결과를 나란히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돔에 자리한 모든 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쥐 죽은 듯 고요하던 돔이 곧 소란으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탓이었다.

당사자인 X 클래스 학생들조차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저게?”

“S 클래스랑 동일 선상이라니…….”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연신 귀를 후볐지만, 결과 발표를 끝마친 스카론 장로는 유유히 단상을 내려가고 있었다.

“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래, 조금 있다가 번복하겠지.”

여전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대화를 뚫고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글쎄, 번복은 없을지도. 저건 이미 밀란느 학장님의 승인이 떨어진 결과니까.”

“그러니까 학장님은 왜 저런 결과를 승인한 거냐고!”

“너 방금 나한테 소리 질렀냐?”

“라일라 네게 그럴 리가. 혼자 외친 거야, 혼자…….”

언성을 높이던 X 클래스 학생들은 이내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신시아 폴릿.

이들 중 가장 지식인인 그녀라면 해답을 내어 주지 않을까 싶은 희망에서였다.

부담스러운 눈빛을 한 몸에 업은 신시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X 클래스 대부분은 이미 그저 그런 마력 수치를 얻었는데, 평균치가 측정 불가라는 말은 곧.”

“…….”

“마력을 측정하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굳이 S 클래스와 나란히 세운다는 건, 그


누군가의 마력 수치가 측정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높다든가.”

마력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 누군가라면…….


X 클래스 학생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내내 공기주머니만 소환하다가 갑작스러운 폭발에
휘말린.

“시, 신시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래, 학생회장이 힘을 숨기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강의에 참석할 때면 벽에 붙어 이동하고, 매일같이 군고구마를 싸 들고 다니는 그 괴짜가.

훈련 내내 공기주머니를 소환해서 연무장 공기만 청정하게 만든 그 학생회장이.

‘X 는 수학에서 미지수나 변수로 해석하죠’

무시하고 비웃으며 지나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미지수로 인한 측정 불가.

현실성 없던 발언을 사실로 만든 꼴이었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X 클래스 학생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움직인 그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향했다.

‘설마.’

‘어쩌면 학생회장은…….’

‘이 모든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한 기대를 안은 채.

그곳에는 햇빛을 등지며 학생회장석에 의연히 선 벤디가 있었다.

상상조차 못 한 결과인 듯, X 클래스 학생들처럼 눈과 입을 확장한 모습으로.

‘너까지 놀라면 어떡하는데.’


잠깐이나마 경의를 담았던 X 클래스 학생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기나긴 침묵 속, 신시아의 나직한 음성이 얼빠진 X 클래스 학생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어쨌든 일등이네.”

움찔, 그들의 몸이 일시에 잘게 경련했다.

일등.

지금껏 바라는 것마저 사치였던 숫자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당장 입 밖으로 내기조차 생소한
단어니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라일라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뭐가 문제야? 일등이라는데. 마력 측정 때마다 비웃은 놈들부터 차례로 조져야겠어.”

누가 하이에나 수인 아니랄까 봐, 야닉과 말투가 똑 닮은꼴이었다.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환기되자, X 클래스 학생들이 망설이며 하나둘 덧붙였다.

“하긴, 일등이라는데 우리가 나서서 부인할 필요까지야…….”

“그, 그것도 그렇긴 하지.”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정정당당한 꼴등보다는 의문스러운 일등을 택하겠지.

X 클래스 학생들은 휙, 한층 상기된 얼굴로 학생회장석을 돌아봤다.

일등을 안겨 준 당사자와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동시에 휙, X 클래스 학생들을 돌아본 벤디는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덩달아 격양된 X 클래스 학생들이 벤디를 따라 움켜쥔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훈련, 훈련을 외치더니. 학생회장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새였다.

“학생회장! 이게 다 네 덕분,”
“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벤디가 무어라 입을 달싹였다. 제대로 듣지 못한 X 클래스 학생들은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하필…….”

아래로 축 늘어진 눈썹이 벤디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대변했다.

“회장, 잘 안 들려!”

“왜 일등이야?”

#<34 화>

“뭐?”

“누가…… 누가 일등이나 하자고 훈련한 줄 알아?”

“……?”

“왜, 왜……! 왜!”

육식 수인들이란 것들이 뭐 이렇게 넙죽 일등을 내주는데!

바락바락 외치며 허공에 주먹질하던 벤디는 곧 뽀르륵 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갔다.

“저게 뭔…….”

“뭐야, 왜 저래?”

당황한 X 클래스 학생들이 학생회장석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기절한 벤디의 얼굴 위로 둥글게 머리를 맞대었다.

혹여 모래시계의 폭발로 인한 기절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보다는…….

“일등, 일등을 하면 어떡…….”

그냥 화병인 모양이었다.

중얼중얼 알아듣기 힘든 말을 계속하는 벤디를 내려다보던 X 클래스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건데?”

“일…… 등인 거?”

도통 영문을 모르겠는 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일등 하고 싶어서 훈련한 거 아니었냐?”

“아서라, 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허망한 눈빛이 끙끙 앓아누운 벤디에게 머물렀다.

평범함을 넘어 약해 보였는데, 사실은 어마어마한 힘을 숨긴 인물.

레넌이 가십지를 읽을 때마다 키득거리며 발까지 동동 구르기에, 벤디가 호기심에 훔쳐 읽었을 때 나온


주인공의 한 유형이었다.

만약 X 클래스 마력 측정 결과가 정말 벤디 때문이라면, 의도치 않게 가십지 속 주인공과 같아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법이…….”

정작 당사자인 벤디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억울함을 담은 흐물흐물한 주먹이 복도 벽을 팡 가격했다.

“왜 일등이냐고…….”

쥐어짜 낸 목소리가 팔십 산 할아버지 같았다.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힘이 있으면 뭐 하냐고. 당장 페트리온행 열차에 탑승하게 생겼는데.

“왜……!”

서럽게 중얼거린 벤디는 벽에 이마를 묻었다.

하필 배낭을 앞으로 멘 탓에, 벽에 찌그러지다시피 한 노란 짐승은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벌써 한 시간째 발광하는 벤디 덕분에 가만히 있는데도 시야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얼마 안 가 덩달아 눈에 초점을 잃은 벤디가 중얼거렸다.

“자퇴할까…….”

의식이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데, 사박사박,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느덧 가까워진 금색 드레스 자락을 발견한 벤디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부채를 든 웬
귀부인이 자리한 상태였다.

오늘 같은 날, 아카데미 내에 이런 차림새로 있을 만한 사람은 마력 측정에 초청된 귀빈뿐.

붕어 입 같은 눈을 연거푸 비빈 벤디는 귀부인을 유심히 살폈다.

눈앞에 달달 외운 초청객 명단이 책장 넘기듯 스쳐 지나갔다.

풍성한 금발을 틀어 올리고, 눈꼬리가 살짝 찢어진 미인이라면…….

‘아!’

인상적인 초청객이었기에, 쉽게 정체를 파악한 벤디가 눈을 크게 떴다.


사자 일족을 다스리는 이스단 가문 소속 귀부인. 즉 헤일린 이스단의 어머니였다.

“희한한 광경이구나.”

중얼거린 이스단 부인은 신문물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벤디를 훑었다.

“그런 꼴로 고분고분 있을 녀석이 아닌데.”

척, 부채 끝이 벤디가 앞으로 멘 배낭을 가리켰다.

미심쩍은 눈초리로 접근한 이스단 부인은 부채 깃털로 배낭 속 노란 짐승의 코를 살살 긁었다.

깃털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까만 콧등을 간질였다.

“다른 새끼 사자일 리도 없고…….”

크르릉, 오늘도 참지 않은 노란 짐승이 막을 새도 없이 부채를 씹어 댔다.

“이런.”

인상을 찡그린 이스단 부인이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버르장머리 없는 걸 보아 내가 아는 녀석이 확실하군.”

쯧 혀를 찬 그녀가 부채를 쫙 펼쳐 입가를 가렸다. 노란 짐승에게 요리당한 부채는 너덜너덜을 넘어


덜렁거리는 상태였다.

부채 너머의 눈으로 관찰하듯 벤디를 살핀 이스단 부인은 이내 휙 몸을 틀었다.

“일정이 바쁜지라, 자세한 건 내 다음에 묻지.”

뭐라고 대꾸할 틈조차 주지 않은 그녀가 우아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어느새 복도에는 벤디와 노란 짐승만 남겨졌다.

제 할 말만 쏟아붓고 가 버리는 급한 성격하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외양. 누더기 부채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까지.
벤디는 어쩐지 헤일린 이스단의 특징들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 것만도 같았다.

눈물이 쏙 들어간 벤디는 부채 깃털을 퉤 뱉어 내는 노란 짐승을 내려다봤다.

‘이 짐승…….’

이스단 부인과 관련이 있었구나.

불현듯 수많은 장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노란 짐승을 피하는 학생들과 교수들, 껄끄러워하는 야닉과 은근히 정중하게 구는 안나까지.

이러한 정황을 모두 미뤄 두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스단 가문의 권속으로 보이는 이 새끼 짐승의 정체는…….

“너…….”

서늘한 벤디의 눈길에, 일순 노란 짐승의 몸이 바짝 경직됐다.

필사적으로 숨긴 건 아니지만 아직 정체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신체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과, 몸집이 자란-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기에.

이 상관관계를 알아내려면 지금의 상태가 벤디에게 접근하기 훨씬 수월했다.

“너!”

노란 짐승을 배낭째로 바닥에 내려 둔 벤디가 안광을 번득였다.

드물게 긴장한 노란 짐승이 목울대를 울렁였다.

아직은 들키면 안 돼.

아직은.
벌써 정체가 드러나, 저 겁보 학생회장이 자신을 설설 피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고양이도 아니고 사자였어?”

빽 외친 벤디는 눈 깜짝할 사이 기둥 뒤로 이동했다. 거뭇한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진짜 사자야?”

복도 기둥 뒤에서 고개만 내민 벤디가 오들오들 떨어댔다.

자주 냥냥거리기에, 고양이가 아닐까 싶었던 일말의 희망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사자…… 내가 사자를 데리고 다녔다니……. 그것도 이스단 가문의 사자를…….”

멍청이.

맥 빠진 노란 짐승은 퉤, 입안에 남은 부채 깃털을 마저 뱉어 냈다.

척 봐도 사자인데 뭘 보고 고양이라 믿고 있었던 건지. 저런 걸 상대로 잠깐이나마 긴장한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갑자기 고귀해 보이는 새끼 짐승을 바라보던 벤디는 문득 해사한 금발을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

헤일린 이스단. 대뜸 나타나 만져 보라는 둥, 만지지 말라는 둥 오락가락한 요구를 하던 건 어쩌면 노란


짐승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음……?’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노란 짐승에 대한 의문도 다시금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헤일린 이스단의 권속인 건 확실한 듯한데. 왜 집요하다시피 내 배낭에 붙어 다니는 걸까.

노란 짐승의 성질머리가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다 보니, 그에게 박해라도 당한 건지.


자연스레 머릿속에 접시 위 노란 짐승과, 포크와 나이프를 든 헤일린 이스단이 그려졌다.

‘노랑이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구나.’

벤디의 짠한 눈길이 노란 짐승에게 닿았다.

동정 어린 눈길을 받게 된 노란 짐승은 별생각 없이 퉤, 재차 깃털을 뱉어냈다. 벤디가 뭘 상상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학장실은 밀란느 학장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검붉은 카펫과 짙은 색상의 가구들이 고풍스러움을 더했으며, 구하기조차 힘든 고서적들이 책장에


즐비했다.

귀빈석에 앉은 스카론 장로는 이 공간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다과를 응시했다. 접시 위, 모양새 좋게


자른 다과는 다름 아닌 군고구마였다.

지금껏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접할 수 없었던 다과가 아닌가.

군고구마의 출처에 대해 잠깐 고민한 스카론 장로가 맞은편을 바라봤다.

“이건……?”

“선물받은 건데, 겉보기엔 그래도 제법 맛이 좋으니 입에 맞을 겁니다. ……그보다.”

시름에 잠긴 밀란느 학장은 벌써 몇 번이나 확인한 질문을 다시 꺼냈다.

“정말 모래시계…… 그 마도구의 폭발이 벤디 학도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 우연이 겹치거나 마도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간결하게 답한 스카론 장로가 다과로 나온 군고구마를 한 입 먹었다.

일순 자글자글한 그의 얼굴 주름이 확 펴졌다. 학장의 말마따나 맛이 아주 좋았다.

“그 말씀은 곧 벤디 학도가 가진 마력이 모래시계가 담을 수준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그렇게 볼 수 있지요.”

“만에 하나, 혹시라도 착각한 건,”

“제 말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스카론 장로의 눈빛이 단번에 차갑게 식었다.

“저는 마탑 고위 장로입니다.”

“알지요. 아는데…….”

“모래시계 폭발 직전에 분명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고, 그 마력의 출처는 벤디 레피 학생이었습니다.”

“…….”

“투명한 마력 측정을 위해 학장님께서 직접 저를 심사 대표로 초청하셨지 않습니까.”

달리 할 말이 없어진 밀란느 학장이 여러 번 입을 달싹였다.

스카론 장로가 마탑의 고위 장로를 일임하고 있는 만큼, 마력을 읽고 느끼는 부분에서는 밀란느 학장보다
한 수 위였다.

“밀란느 학장님, 실력은 형편없을지언정 방대한 마력을 가진 게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학장을 살핀 스카론 장로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학장님께서 인재가 나온 것을 기꺼이 여기실 줄 알았는데. 시야가 좁은 저의 착오였나 봅니다.”

“물론 기껍지요, 당연히 기꺼이 여길 일인데…….”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요. 특히 여우 일족 중에는 매우 드문 경우인데.”

밀란느 학장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낯으로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야 보통의 학생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차후 아카데미의 명성을 떨칠 인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그러나 하필 그 학생이 이곳을 졸업할 확률이 낮은 존재라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제아무리 뛰어나도 이곳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그 학생은.

“그 학생은…… 그 아이는!”

사슴이라고, 사슴.

학장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지 않기 위해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부릅뜬 눈에는 실핏줄이


선명했다.

#<35 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스카론 장로는 로브를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고구마가 놓여 있던


접시는 텅 빈 상태였다.

“다음 일정이 있는 관계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팔십 산 노인답지 않게 벗어나는 발걸음이 바람과도 같았다.

닫히는 문을 등진 학장은 탕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후…….”

뻑뻑한 눈꺼풀을 문지른 그녀가 곧장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문 앞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들어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와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네.”


“하찮게 여긴 벤디 님이 알고 보니 모래시계도 깨부수는 실력자였다는 사실 말씀이십니까?”

굳이 사실을 콕 집는 비서 덕분에 학장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거졌다.

“그거 말고, 벤디 학도의 레피라는 성 말일세!”

“이런, 그 부분을 간과하고 말았군요.”

곧게 허리를 편 비서가 외알 안경을 살짝 추켜올렸다. 학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으레


나오는 습관이었다.

저놈 저거 또 알아들은 척이나 하고. 용암처럼 끓는 속을 다스린 밀란느 학장은 커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낮췄다.

“알다시피 레피라는 성이 이곳 육식 영역에서는 무척 흔한 성이지 않은가.”

“널리고 널렸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죠.”

“그래. 우리는 당연히 벤디 학도가 하급 귀족이나 부상의 자제 정도라고 판단했지. 그렇기에 굳이 벤디


학도에 대한 조사를 따로 거치지 않았고.”

애당초 벤디를 지체 높은 귀족이라 여기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모두가 귀족가 자제임을 팍팍 티 내는 지원서도 공란으로 제출했고, 차림새를 비롯하여 장학금에 눈을


빛내는 모습은 몰락 귀족이라 여기기에도 무리가 있었으니까.

벤디와의 첫 만남을 상기한 비서가 턱을 쓸었다.

“초식 영역은 이곳과 경우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여기서야 레피란 성이 흔해 빠졌을지 몰라도, 초식 영역에서는 아닐 수도 있겠지.”

밀란느 학장은 궐련을 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창문 너머, 사슴 영역이 있을 방향에
머물렀다.

평민은 무슨. 그런 마력을 가졌다면, 최소한 못해도 귀족 이상은 될 것이었다.

“사슴 영역에 레피란 성을 가진 자 모두를 조사해 오게. 벤디 레피의 정체는 뭔지, 왜 수인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는지 낱낱이. 잘만 하면 아카데미에서 쫓아낼 만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
“초식 수인 영역에서 그렇게 상세한 정보를 얻는 건 한계가,”

“조사해 오게.”

“……예.”

마지못해 답한 비서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초식 영역의 세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개인이나 정보상을 찾는 것부터 녹록지 않을 텐데.

최소 한 달간 잠은 다 잤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긴 로브가 바닥에 끌렸다.

학장실을 나선 후 복도를 걷던 스카론 장로가 멈춰 섰다. 그는 윗사람에 대한 예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탈하셨습니까.”

기둥에 기대어 있던 원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스카론 장로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신장이 더 자란 원을 살폈다.

지난해만 해도 소년티가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당장 마탑주 자리에 올라도 손색없을 모습이었다.

흡족한 마음을 뒤로한 그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학장님과 마력 측정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참입니다. 올해 학생회장은 제법 독특한


학생이더군요.”

“뭐…….”

“현재 인수인계를 맡고 계시다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어떻냐니. 스카론 장로의 질문에 일순 원의 눈썹이 잘게 경련했다.

귀찮고 짜증 나고 성가신 데다, 거슬리는 것도 모자라 어디로 튈지 예상조차 안 가는 골칫거리.


황금색 눈동자에 우르르 스쳐 지나가는 글자를 읽은 스카론 장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재된 마력이 출중해 보이니, 추후 마탑 인재로 선발하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은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벤디가 알면 땅을 치며 오열할 기회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큼, 그보다.”

헛기침한 스카론 장로가 말을 돌렸다.

“이번 마력 측정 포상 장소를 초식 영역으로 정하신 걸로 압니다.”

“그래, 사슴 영역이지.”

여상히 대답하는 원에 비해 스카론 장로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육식 수인의 영역에 비해 초식 수인의 영역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육식 수인에 대한 초식 수인의 경계가 삼엄한 만큼, 고위급 귀족이나 신분이 확실한 자, 또는 유통


상인들만이 겨우 드나들 정도였다.

그런 실정 속에서 굳이 여행지를 사슴 영역으로 지정한 이유는…….

“아직도 그 수인을 찾고 계신 겁니까.”

원 님의 목숨을 구한 이름 모를 수인을.

뒷말을 생략한 스카론 장로가 잠시간 말을 망설였다.

어릴 때부터 마탑주 후보로 자라 온 원은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타인의 도움으로 목숨 부지에 성공한


건 종종 있어 온 일이었다.

생면부지의 원을 살린 게 무척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데다, 어느 종족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수인을 찾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단서는 고작해야 초식 수인이란 것, 그리고 원의 또래 여자아이라는 정도였다.


“지난 몇 년간…….”

잠시간 망설인 스카론 장로가 염려 어린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암암리에 대부분의 초식 영역을 뒤졌음에도 찾지 못한 거면,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

“노인네의 잔걱정으로 들리실진 모르지만…… 중요한 시기입니다. 원 님의 행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가


많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의 지나간 인연일 뿐입니다.”

마탑 내에서 파벌이 나뉘는 만큼, 아직 차기 마탑주인 원은 위협과 감시가 일상.

마탑주가 되어 자리를 공고히 하기 전에 허점이나 약점을 드러내어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무어라 덧붙이려던 스카론 장로가 말끝을 흐렸다.

이 정도로 찾았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원이 찾는 존재가 이미 명을 달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스카론.”

“말씀하십시오.”

“나도 알아.”

이 모든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원이 창틀에 걸터앉았다. 불어온 바람이 단정한 검은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금안을 반쯤 내리깐 그는 보일 리 없는 먼 곳을 바라봤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야.”

같은 시각, 벤디를 찾는 또 다른 인물.


벤디의 숙부, 웬스턴은 애꿎은 궐련을 씹어 뜯듯 질겅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벤디 레피의 꼬리를 잡지 못했나?”

“그것이…….”

긍정적인 대답을 꺼내지 못한 측근이 고개를 조아렸다.

“후.”

탄식한 웬스턴이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제아무리 잘 숨어 봤자 도망자 신세에 불과하거늘. 분명히 가져간 자금도, 체력도 바닥을 보이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벤디 레피의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다니.

“어디 골짜기 같은 곳에 몸을 숨겼을 리도 없고.”

“척박한 환경이라, 하루 이틀이 아니고서야 그분의 체력으론 불가능할 겁니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이 잡듯 뒤지는데, 어찌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하는 건가!”

인내심이 바닥난 웬스턴이 노성을 터뜨렸다.

“가주님, 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망설이며 운을 떼던 측근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인 웬스턴은 엄중한 목소리로 하명했다.

“말하라.”

“정말 별건 아닙니다만……. 벤디 님이 사라진 당일, 변방 마을의 사슴 농장에 도둑이 들었다고 합니다.”

농장주가 경비대에 신고 기록을 남긴,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다.

“도둑이 들었다?”
“예, 사슴 한 마리를 도둑맞았는데……. 워낙 다루기 어려워, 농장주가 시장에 내놓을 예정인
사슴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농장에 도둑 하나 든 게 무슨 큰일이라고. 연관 없어 보이는 보고를 들은 웬스턴이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루걸러 일어나는 흔한 사건이지 않은가. 그게 벤디 레피의 행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혹 쓸모없는 보고를 하는 건 아닌지. 어물쩍거리며 눈을 굴린 측근이 말을 이었다.

“농장주의 딸이 벤디 님과 종종 붙어 다니던 마을 아이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 같지도 않은 마을 수호대 놀이나 하고 다니던. 웬스턴이 뭔가를 떠올려 냈다.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일지언정, 그들은 페트리온에서 벤디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기색을 보인


존재였다.

사소한 단서라도 경시할 수 없는 입장인 웬스턴은 이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농장주를…… 아니, 그 여아를 만나 봐야겠군.”

늘 혈색 좋게 하얀 벤디의 얼굴빛이 유독 창백했다.

“흠.”

의관은 소파에 누운 벤디를 조심스럽게 진찰했다.

화제의 중심인 학생회장이 혼절했다기에, 연락을 받자마자 급히 학생회실로 달려온 참이었다.

‘이 증상은.’

한참 벤디의 몸을 살피던 의관의 낯빛이 짐짓 심각해졌다.

경직된 분위기 속, 진료를 끝마친 의관이 곁에 선 원과 레넌을 돌아봤다.

“벤디 학생은…….”
말을 망설이는 의관 때문에 원과 레넌이 시선을 교환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진단 결과를 듣게 된 레넌이 혼절한 벤디를 가리켰다.

“분명히 경련하다가 쓰러졌는데. 영양실조 같은 건 아니고?”

“아뇨, 굳이 집자면 아침에 과식을 했군요.”

“과식? 아침은 샐러드였을 텐데?”

오늘 아침 식당 메뉴는 학생 대부분이 원성을 뱉은 풀떼기뿐이었지 않나. 희한한 일이었다.

#<36 화>

“아무튼 굉장히 안정된 상태입니다. 바로 운동을 해도 될 정도로.”

그렇다 함은…….

의관을 비롯하여 원과 레넌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벤디에게 꽂혔다.

잠자코 있던 노란 짐승은 둥근 앞발로 벤디의 눈꺼풀을 강제로 개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원은 벤디가 기사회생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레넌 에던트, 먹어.”

“뭐를?”
원은 벤디의 머리맡에 오도카니 앉은 노란 짐승을 눈짓했다.

“저 노란 거.”

원 리오나드 같은 이가 저런 장난질을. 경악 어린 눈빛을 비친 의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만류했다.

“그런 방법이 통할 리가,”

“아, 안 돼.”

통하는구나. 의관은 되살아난 벤디를 보고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학생회장.”

냉랭한 원의 목소리로 인해 벤디의 몸이 찔끔 떨렸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번거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왜 꾀병입니까. 쉬고 싶으면 쉬고 싶다고 말을,”

“쉬고 싶은 게 아니라!”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벤디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페트리온에 가지 않으려 수작이란 수작은 다 부리는 중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누가 잘난 아카데미 아니랄까 봐, 의관마저 유능해도 너무 유능했다.

‘이 방법은 안 되겠어.’

진료 도구를 정리하는 의관을 바라보는 벤디의 눈이 요요히 빛났다.

다음 날.

학생회실 창가에 선 벤디가 창틀을 꽉 그러쥐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높아 보이지.’

아래를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꾀병도 다 잡아내는 의관이 있는 이상 아픈 시늉을 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럼 정말 어디 하나 부러뜨리기라도 하면…….

조금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내로라하는 의관들이 한가득인 이곳에선 해 볼 만한 시도였다.

상상과는 달리 쉽게 시도하지 못한 벤디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내가 어디 하나를 부러뜨려야 하는 거냐고.

난생처음 페트리온 여기저기를 쏘다닌 자신의 과거가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유일하게 외출이 가능한 장소가 페트리온 시가지였을 뿐이고, 저택이 답답했을 뿐인데.

‘괜히 얼굴을 비추고 다녀 가지곤.’

아무리 여우 수인으로 외관을 바꾸고 학생들 사이에 숨는다 해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만한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했다.

가령 숙소 고용인이라거나, 관광지 직원들이라든가. 또는 그곳을 지나는 귀족들이나 마을 사람들까지.

그때 드르륵, 바깥에서 바퀴 구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벤디의 시야에 줄지어 아카데미 교정을 가로지르는 마차가 들어왔다.

하물며 보통 마차도 아닌 웬만한 귀족가 소유에 버금가는 마차 수십 대가.

‘저게 다 뭐람.’

입을 뻐끔뻐끔 여닫으며 안나를 돌아보자, 부학생회장석에 앉은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페트…… 지명이 뭐였죠? 아무튼 거기까지 걸어갈 순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저런 마차를…….”


“회장이 직접 승인한 마차예요.”

누가 저택 같은 마차 수십 대를 가져올 줄 예상이나 했냐고.

저 정도의 고급 마차라면 몸이 불편해도 안락히 페트리온까지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두 번째 계획은 시도하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창가에 달라붙은 벤디가 망연자실하게 있을 즈음,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 참, 회장. 여행 일정도 회장이 조정할 수 있는 건 알죠?”

“그래요?”

의외의 사실을 접한 벤디가 안나를 휙 돌아봤다.

어쩐지 은은한 광기마저 맴도는 눈빛이라, 저도 모르게 움찔한 안나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네, 뭐……. 수정하고 싶은 부분은 알아서 수정하세요.”

“보통은 어디로 가는데요?”

“뻔하죠. 유적지나 미술관, 뱃놀이 정도?”

말이 체험 학습이지, 귀족이 대부분인 수인 아카데미의 체험 학습은 휴양여행과 맥을 같이했다.

루온 전시관, 페트리온 호수 뱃놀이, 고대 유적 방문.

황급히 여행 일정을 훑은 벤디가 깃펜을 꽉 움켜쥐었다.

페트리온 귀족들이 몰리는 관광지에 갈 순 없었다.

아무리 숙부의 꼭두각시로 살았기로서니, 혹여나 아는 귀족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니까.

‘모두에겐 미안하지만…….’

회장에게 수정 권한이 주어진다는데 어쩌겠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 벤디가 여행 일정에 엑스를 북북 그리기 시작했다.

드물게 자신만만한 벤디를 발견한 안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머리를 싸매다시피 한 나는 강의실 책상에 엎드렸다.

‘여기, 아니, 여기?’

일정 수정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페트리온 귀족들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일정을 거의 통으로 바꿔야 했으니까.

심지어 신문을 통해 내 얼굴이 방방곡곡 알려진 이상, 사슴 수인 자체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끄적거리며 경로를 짜고 있을 때, 클래스메이트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페트리온이 대체 어디 붙어 있는 곳인데?”

“내 말이, 들어 본 적도 없구만.”

“어떤 띨띨한 녀석이 체험 장소를 그딴 곳으로,”

“야, 말조심해!”

“아차.”

대화를 들은 나는 풀 사냥을 앞둔 사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X 클래스 학생들은 처음 가게 되는 체험 학습 장소가 페트리온, 즉 초식 영역임을 마땅찮게 여겼다.

화려한 건축물이 줄을 이룬다는 백호 영역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마탑이 우뚝 선 늑대 영역.

또는 뛰어난 무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사자 영역을 기대해 왔을 테니까.


어디 있는지는커녕 존재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사슴 영역이 성에 찰 리 없었다.

‘이거다.’

어차피 온전한 일등도 아니니, 저들을 잘 구슬려 X 클래스 자체가 체험 학습 참석 거부를 하면…….

‘페트리온에 가지 않아도 될지도.’

새로운 계획을 세운 내가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사실상 이번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저기.”

여론 조작을 위해 막 입을 떼려는데, 웬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페트리온은 울창한 밀림이 시가지를 감싼 아름다운 땅이다.”

“지도를 보니 밀림이 영역을 둘러싼 구조네. 그래서인지 초식 영역 중에서도 베일에 싸인 곳이래.”

뭐야, 이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는.

휙 소리 나게 돌아보자, 여행 안내서를 든 클래스메이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육식 영역에서 코빼기도 찾을 수 없는 물건을 어디서 구한 건지.

태도만 퉁명스럽지, 은근히 체험 학습을 기대하는 중인 게 틀림없었다.

말문이 턱 막힌 내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특히 페트리온은 구황작물이 유명한 영역이기도 하다.”

“웬 구황작물?”

“맛이 남다르다고 적혀 있네. 특산물이 어디 보자, 황금…… 군고구마?”

군고구마.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들은 곧 일시에 내 쪽을 돌아봤다. 군고구마라는 단어가 나를 떠올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하필 오늘도 군고구마를 들고 와선. 애써 배낭을 등 뒤에 숨긴 나는 쭈뼛거리며 주장했다.

“아니, 솔직히 초식 영역에 뭐 볼 게 있다고……!”

“밀림에 둘러싸인 페트리온은.”

막 흉을 보기 시작하려는데, 여행 안내서를 든 클래스메이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쇄적인 지형 특성 덕분인지 구하기 힘든 고서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서적?”

그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지금껏 본 모습 중 가장 생기 있는 신시아의 보라색 눈동자를.

외면한 내가 여론을 바꾸기 위해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 봐. 솔직히 거기 가 봤자 시간 낭비,”

“얼마만의 외출이냐, 진짜.”

어느덧 바짝 다가온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가 턱 어깨동무를 해 왔다.

“이게 다 학생회장 네 덕분이야. 안 그래?”

화룡점정으로 그녀는 코앞에서 씩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치미는 공포를 간신히 누른 내가 강경하게 주장했다.

“너무 기대된다.”

이로써 화려한 페트리온행의 막이 올랐다.

수인 아카데미 정문을 떠난 수십 대의 마차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이 있는


곳이었다.

마차는 3 인 1 조로 배분되었는데, 신분 여부에 따라 자연스레 원과 레넌, 헤일린이 한 조로 나뉘었다.

레넌은 분명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자리를 응시했다.

“사자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은 원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도박판에 있겠지.”

“이미 아침인데?”

“출발일인 걸 잊었다거나.”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었다.

금방 납득한 레넌은 벤디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헤일린의 행보를 떠올렸다.

지금껏 이런 행사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간


셈이었다.

“회장을 따라다니는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목적이 있으니까.”

“무슨 목적?”

레넌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원은 딱 잘라 말했다.

“알 바 없잖아.”

“하긴. 그건 그렇고, 회장의 마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제어하지 못하니까 그동안 티가 안 났겠지.”

“흠…….”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린 레넌이 마차 벽에 옆머리를 묻었다.

제어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훈련 당시, 벤디가 가진 방대한 마력을 그가 읽을 수조차
없었지 않나.

훈련을 담당한 레넌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각자 생각에 잠긴 그들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당장 벤디나 헤일린 이스단에게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는 원은 미묘하게 경직된 자세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야.’

스카론 장로에게 호언한 대로 사슴 영역이 마지막이었다.

페트리온에서마저 그가 찾는 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미약할 정도로 얇은 과거의 끈을 끊어 버릴


것이었다.

#<37 화>

상념에 사로잡힌 원은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차기 마탑주란 호칭이 주는 무게는 생각 이상으로 무겁고 위험했다. 고작 열 살 난 어린아이일지라도 매일


같이 암살 위협이 쏟아질 만큼.

하루는 검에 배를 관통당하여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날.

‘너…… 육식 동물이야?’

소녀의 목소리가 이제는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소녀를 만난 곳이 어느 영역인지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쇠창살로 가로막힌
어두컴컴한 감옥이란 걸 알아차렸을 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 먼지 묵은 퀴퀴한 냄새, 그리고 몸이 기억하는 차가운 공기만이 전부였다.

“…….”

회상을 멈춘 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맞은편에는 언제 생각에 잠겼냐는 듯, 가십지를 읽으며 키득거리는 레넌이 있었다.

더 이상 회상 따위 하고 싶지 않아진 그는 삐딱하게 다리를 꼬았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 호랑이 앞에서 과거 회상은 사치이자 시간 낭비였다.

“그거 알아?”

엎드려 누운 레넌은 가십지를 넘기며 말했다.

“저쪽 동대륙에서는 토끼가 흑표범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한대.”

“헛소리 말고 조용히 가지.”

“진짠데.”

읽은 부분까지 꼼꼼히 접어 표시한 레넌이 몸을 일으켰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원을 훑었다. 원은 다른 때에 비해 유독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올린 레넌이 툭 물었다.

“원한이라도 있어?”

“무슨 말이지?”

“네가 계속 찾고 있는 대상한테.”
굳이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원은 무시를 택했다.

그럼에도 황금색 눈동자는 창밖, 사슴 영역이 있는 방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웬만한 건 버러지 보듯 행동하는 원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대상.

새삼 그가 찾는 존재가 약간 궁금해진 레넌이 따라서 창밖을 돌아봤다.

수인 아카데미는 입학 나이대에 따라 교정과 등급이 나뉜다.

영유아에서 십 대 초반까지는 노이, 십 대 초중반은 지니어, 십대 후반부터 이십 대까지는 시즈.

원이 노이 등급으로 입학한 이후부터 쭉 초식 영역을 헤집고 있으니, 거의 십 년에 가까운 햇수였다.

그간 관심이 없어서 인지하지 못했지만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었다.

레넌은 오묘한 표정으로 원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정나미 없는 차가운 얼굴이 유독 굳은 상태. 만약 원한이라면 보통 원한이 아닌 수준이었다.

저 늑대가 찾고 있는 존재라.

이내 흥미를 잃은 레넌이 다시 엎드려 누우며 가십지를 펼쳤다.

‘거, 누군지는 몰라도…….’

조금 불쌍하네.

끼이익-

페트리온 숙소 인근에 다다른 마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숙소까지 들어가는 길목이 절경이기에, 학생들이 이를 만끽하길 바라는 마부들의 배려였다.

페트리온은 신비로운 땅이었다.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대부분의 육식 영역과 달리, 푸른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곳.


그러나 S 클래스 학생들은 이런 대자연을 앞두고도 도통 관광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알짱거리며 시야를 방해하는 학생회장 때문에.

슉, 슈슉.

온갖 건물 및 나무 뒤에 숨는 속도가 날다람쥐처럼 재빨랐다.

본인 딴엔 그림자처럼 행동하려는 모양인데, 도리어 오감이 예민한 S 클래스 학생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꼴.

“의도가…… 뭐지?”

“저 행동에 의도가 있긴 하냐?”

숨고 싶은 건지, 눈에 띄고 싶은 건지. 전문가의 해석이 필요한 행위예술 수준의 거동이었다.

“이런 곳까지 오는데 왜 교복을 착용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의상점에서 옷도 주문했는데.”

반면 벤디의 저런 기행이 익숙한 X 클래스 학생들은 태연히 관광에 집중했다.

심지어 잘 숨고 있다고 착각 중인 벤디를 모른 척하는 배려까지 베풀었다.

한편, 수많은 시선을 등에 업은 벤디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택을 바라봤다.

자연경관이 풍부한 페트리온은 초식 수인 귀족들이 요양차 많이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도심과 떨어진 곳에 지은 저택 겸 숙소.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묵을 장소는 바로 저 저택이었다.

‘……역시 잘 선택했어.’

불안요소밖에 없는 페트리온행.
이는 걱정했던 거에 비해서는 해 볼 만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제 정체를 알아볼 만한 이들은 물론, 일반 사슴 수인들과도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게끔 일정을
짰고.

여행을 보조할 사용인도 전부 수인 아카데미의 육식 수인으로 데려왔다.

게다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꾼 만큼,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테고.

초식 수인에 비해 체구가 큰 육식 수인들 사이에 끼어서 이동하면 숨기도 수월했다.

‘애초에…….’

육식 수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접근하는 사슴 수인이 있을 리가.

자유 시간에는 외출하지 않고 숙소에 잘 숨어 있으면 될 일이었다.

또 다행인 점은 레피 가문, 즉 숙부가 관광 허가 외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귀족들이 대거 몰려든 수준인데도 친분을 다지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니.

그만큼 육식 수인들과의 연계가 얄팍하다는 증거였다.

“학생회장.”

“응?”

“떨어져.”

그새 신시아의 뒤에 숨은 벤디가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어.”

“대답만 하지 말고 떨어져.”

약 일 센티 정도 거리를 벌린 벤디는 풀 내음을 맡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 오랜 시간 떠나 있던 것도 아닌데 벌써 그리운 향이 났다.


하마터면 향수에 젖어 든 모습을 보일 뻔한 벤디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배낭끈을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나흘.’

부디 나흘 후에는 무사히 페트리온을 벗어날 수 있기를.

사슴 영역, 페트리온 열차역.

정차한 열차에서 내린 헤일린은 우욱, 헛구역질을 하며 숙여 앉았다.

안 그래도 탈것에 멀미를 하는데, 열차 같은 이동 수단은 쥐약이었다.

‘죽을 뻔했네.’

이른 아침, 도박장에서 아카데미로 돌아왔을 때부터 어쩐지 학생회장이 보이지 않더라니.

이스단 가문의 사자인 사실을 직시한 후부터 은근히 거리를 두기에 피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페트리온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몸집이 자란 데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려면 종일 붙어 감시해도 모자란데. 닷새간의 여정은 떨어져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

덕분에 열차에 오르는 번거로운 일까지 감수한 헤일린은 짐짓 주변을 둘러봤다.

인산인해인 열차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 곳만 티 나게 한산했다.

육식 수인을 알아본 사슴 수인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벌린 탓이었다.

주변으로 암묵적인 빈 공간이 생긴 와중,

“얘 사자 아냐? 송곳니도 있어!”

허리께도 오지 않는 웬 어린아이들이 주위를 빙 둘러쌌다. 여러 쌍의 의심 어린 눈빛이 헤일린에게


머물렀다.

“흐음, 조금 약해 보이는데…….”
“그러게.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 아냐?”

약간 부스스한 황금색 머리카락에 어딘지 허술한 붉은 눈동자.

사슴을 찢는다는 육식 수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페트리온 모험대 대장, 모니는 곧 근엄한 표정으로 뒷짐질했다.

“사자는 맞아.”

화려한 금발과 송곳니는 사자의 상징 중 하나.

헤일린의 주변을 빙글, 관찰하듯 한 바퀴 돈 모니가 호언했다.

“하지만 진정한 사자는 아냐.”

저 보송보송한 피부를 보라, 어느 누가 사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수상하다 했어.”

“그래! 벤디가 그랬잖아, 육식 수인은 죄다 흉악하다고.”

진정한 사자가 아니다.

꿈틀, 헤일린의 미간이 작게 경련했다. 지금껏 동물형이 빌어먹을 새끼 사자인 그로서는 꽤나 뼈아픈
발언이었다.

아이들은 재미 삼아 떠들었지만, 의도치 않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다.

몸을 굽혀 앉은 헤일린이 모니와 지그시 시선을 맞췄다.

모니는 갈색 곱슬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눈 감고 봐도 사슴 같은 생김새였다.

빤히 응시하던 그는 쿡, 검지로 모니의 이마를 살짝 밀었다.

“사슴 주제에.”
사슴 주제에. 사슴 주제에.

짧은 한마디가 메아리치듯 아이들의 귀를 강타했다.

분기탱천한 그들은 둥글게 모여 웅성웅성 떠들어 댔다. 곧 한마음 한뜻이 된 아이들이 맹렬하게 외쳤다.

“가짜 사자 주제에!”

“너! 지금 우리 1 소대 행동대장이 자리를 비워서 무사한 줄 알아!”

사슴들의 위협적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사정없이 헤일린을 몰아붙일 즈음, 그들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니 양, 잠깐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움찔한 모니가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이름을 부른 이는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허리에 검을 찬 남자였다.

“아…….”

곧 남자의 정체를 생각해 낸 모니는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자신들과 놀던 벤디를 끌고 가듯 저택으로 데려간, 레피 가문 가주의 측근이었다.

“싫어!”

남자가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비명 지른 모니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어리둥절해진 모험대 아이들도


따라서 뒷걸음쳤다.

“대장, 왜 그래?”

“저 아저씨는 누군데 그래?”

“고얀 놈의 부하야!”

모니의 외침에 아이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고얀 놈의 부하. 그간 벤디를 핍박해 온 숙부의 수하라는 소리였다.

겁먹은 그들이 쥐구멍에 숨듯 헤일린의 뒤로 다닥다닥 붙었다.

절대 끌려가지 않겠노라 다짐한 모니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사자야, 도와줘. 나쁜 사람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해.”

헤일린의 옷자락을 꼭 틀어쥔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전히 수그려 앉은 상태인 헤일린은 전방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허리에 찬 검으로 보나, 입은 복장을 보나 평범한 이는 아니었다.

이유야 모르지만, 대체로 이런 자가 일반인을 끌고 가는 경우 중에 좋은 사례는 없었다. 하물며 한창


흙장난이나 치며 놀 나이대의 어린아이를.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던 헤일린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

“진정한 사자도 아닌데.”

#<38 화>

뒤끝이 다분히 느껴지는, 냉랭한 반응을 맞닥뜨린 모니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제, 제발 어떻게 안 될까?”


감흥 없이 눈을 깜박인 헤일린은 스윽,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확인한 모니는 저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이은, 금전을 표현하는 손 모양이 아닌가.

“…….”

미묘한 정적이 지나갔다.

“너는 나 같은 아기한테 돈을 바라?”

“아기치곤 언변이 너무 유창하지 않나.”

“이익, 이래서 육식 수인은!”

더듬더듬, 다급히 옷 속을 매만진 모니는 절망 어린 심정이 되었다.

군것질거리는 몰라도 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급한 대로 바지 뒤춤을 뒤적거린 모니가 헤일린의 손에 조그마한 브로치를 쥐여 줬다.

“우리 페트리온 모험대 대원만 가질 수 있는 증표야. 앞으로 너를 5 소대 행동대장으로 임명할게.”

쏟아붓듯 말한 모니는 황급히 뒤돌며 외쳤다.

“다들 도망쳐!”

제각각 소리 지른 모니와 모험대 아이들이 헐레벌떡 인파 사이로 파고들었다.

“잠깐……!”

당황한 남자가 뒤쫓으려는데, 불쑥 튀어나온 팔로 인해 다리가 가로막혔다. 팔의 주인은 헤일린이었다.

여전히 수그려 앉은 헤일린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에 불길이 어렸다.

“당장 치우시오!”
분노한 남자가 난데없는 방해꾼을 무섭게 노려봤다.

방해꾼은 한눈에 육식 수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사자 수인.’

가라앉은 남자의 눈이 탐색하듯 헤일린을 훑어 내렸다. 허리에 대충 걸친 검과 의복이 얼핏 봐도


고급스러웠다.

‘하필이면…….’

벤디 때문에 사자 일족의 귀족과 갈등을 빚는 중에, 신분도 모호한 또 다른 사자 일족과 마찰을 빚기도
곤란하고.

더욱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청년이었지만, 이유 모를 위압감 때문에 경거망동하기가 꺼려졌다.


기묘할 정도로 껄끄러운 느낌을 주는 자였다.

무감한 표정인 헤일린 앞에 엉거주춤하게 선 남자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 아이에게 용무가 있으니, 관련이 없다면 비켜 주십시오.”

헤일린은 손에 들린 브로치를 가볍게 흔들었다.

“5 소대 행동대장.”

“무슨……!”

“브로치 받은 값은 해야지.”

기가 막힌 답변에, 남자의 목에 핏대가 서며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들부들 떠는 그를 구경하던 헤일린은 문득 뒤로 고개를 틀었다.

‘벤디가 그랬잖아, 육식 수인은 죄다 흉악하다고.’

아이들은 이미 인파 속에 섞여 사라진 후였다.

불어온 바람이 헤일린의 부스스한 황금색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벤디……?’

……가 뭐더라.

치이익, 출발을 준비하는 기차 소리가 작은 기시감을 뒤덮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숙소는 기숙사처럼 일인실로 배정되었다.

고로 마도구의 마력이 다하여, 초식 수인으로 돌아가더라도 룸메이트에게 정체를 들킬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돈 많은 아카데미인 게 이럴 때 좋다니까.’

방 열쇠를 찾기 위해 짐 가방을 뒤적이던 내가 멈칫했다.

‘……물컹?’

가방에서 느껴져선 안 되는 기이한 감촉이 손바닥을 스쳤다.

‘설마.’

설마, 설마.

걷잡을 수 없이 불길해진 나는 짐 가방을 확 열어젖혔다.

“너!”

가방 안에는 아카데미에 남은 줄 알았던 노란 짐승이 자리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꼴이었다.

“도대체 언제 가방에 들어온 거야?”

얘를 어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내가 난감하게 가방 속을 들여다봤다.

당황한 나와 달리, 뻔뻔하게 하품한 노란 짐승이 옷가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덕분에 여벌로 챙겨온
교복이 엉망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거리를 둘 생각이었는데.’
밀림의 왕. 그러니까 사자인 사실도 모자라 이스단 가문의 권속인 건 정말이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자를 데리고 다니다가 괜히 헤일린 이스단과 접점이 생기기라도 하면…….

‘몸이 반으로 접힐 겁니다.’

‘몸이 반으로…….’

‘몸이…….’

안색을 파랗게 물들인 나는 부르르 진저리쳤다.

단상을 제외한 바닥을 주먹질 한 번으로 날려 버린 헤일린 이스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안 그래도 인생이 고달픈 와중에 그런 존재와의 접점은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래시계의 폭발, 제가 위험한 순간 망설임 없이 뛰어든 노란 짐승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렇게까지 나를 따라다니고 싶어 하는 짐승을 내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떨쳐 내야 돼.

하지만…….

아냐, 떨쳐 내야 돼.

하지만…….

머리 위에서 천사와 악마가 치열하게 싸워 댔다.

“저리 가.”

질끈 눈을 감은 내가 홱 고개 돌리며 노란 짐승을 외면했다.

“앞으로는 그만 따라다녀.”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질긴 시선이 머무는 게 느껴졌다.

‘절대 안 돼.’

송곳니를 숨긴 육식 짐승의 순진한 얼굴에 넘어가선 안 됐다.

저러면서 막상 가까이 접근도 못 하게 하며 성질만 부리는걸.

입술까지 잘근잘근 무는데, 손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가방을 쥔 내 손


아래로 제 앞발을 집어넣은 노란 짐승이 보였다.

함께 다니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친근하게 접근한 순간이었다.

“진짜…….”

짐승은 주인이 자신을 버리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더니.

말랑거리는 앞발을 차마 내치지 못한 나는 결국 교복에 둘둘 말린 노란 짐승을 잡아 들었다. 혼자


페트리온을 돌아다니게 놔둘 수도 없고.

“이번만이야, 알겠어?”

쪼그려 앉은 내가 엄하게 경고했다.

‘어?’

잔소리를 늘어놓던 나는 노란 짐승과 꽤 오랜만의 접촉임을 깨닫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얘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데.

한창 자랄 시기이긴 하니, 대수롭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안 자라면 걱정해야겠지.

찰칵.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잘 아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
“……?”

뒤돌아보기 무섭게 원이 내 품에서 노란 짐승을 낚아챘다.

크르릉. 뒷덜미를 잡힌 노랑이가 발차기를 날렸지만 슬프게도 사정거리가 짧아도 한참 짧았다.

“정도가 있어야지.”

휙, 원은 마치 지저분한 거라도 대하듯 노란 짐승을 뒤로 내던졌다.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경악한 내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노랑아!”

“이건 압수.”

빙그르르 공중에서 회전하는 노란 짐승을 잡아챈 레넌이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노랑이는 도박을 좋아하니 밤새 카드놀이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과 함께.

복도에 홀로 남겨진 나는 뻐끔뻐끔 입을 여닫았다.

‘대체…….’

언제부터 너희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하지만 답을 줄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휙, 레넌은 노란 짐승을 헤일린의 숙소 방에 던져 넣었다.

빙그르르 공중을 회전한 노란 짐승이 착, 침대에 착지했다.

“원칙적으로 혼숙은 금지야.”

주머니에 손을 꽂은 레넌이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노랑이 이스단이 진짜 동물은 아니잖아?”

곧 노란 짐승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오며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사람으로 돌아온 헤일린은 침대에 늘어진 채 느릿하게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원칙을 지켰다고.”

“자꾸 반항하면 노랑이의 정체를 까발리는 수가 있어.”

“잘도.”

레넌의 협박을 마주한 헤일린이 비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원이나 레넌이 학생회장에게 제 정체를 알리고자 했으면 진작 말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니까 너희도 그냥 입 닫고 있는 거 아닌가.”

“그냥?”

일순 레넌의 입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이게 그냥 입 닫고 있는 거로 보여?”

“그럼?”

“입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거라고.”

확실히 팔랑거리는 레넌의 성정을 미루면 오래 참고 있는 중이긴 했다.

“그 성격에 오래 참긴 했네.”

“그러니 회장한테 붙는 이유나 먼저 알려 주지.”

추궁하듯 묻는 레넌을 응시하던 헤일린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늘 되면 좋고 아니어도 좋아하던 레넌이 집요하게 묻는 걸 보아, 제가 학생회장을 따라다니는 이유가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나 이건 이스단 가문의 태생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함부로 발설할 순 없었다.

원인 모를 이유로 가끔씩 동물형이 새끼인 자가 태어나는 거야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아직까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은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만큼 가문에도 학생회장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는데, 일개 백호한테 알릴 필요까지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헤일린이 물었다.

“너야말로 왜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데.”

실상 헤일린이야말로 레넌이 거슬리는 참이었다.

하필 학생회장이 주로 레넌과 붙어 다녀서 행동에 제약이 걸렸기에.

괜히 경거망동하다가는 몸이 자란 원인을 찾기도 전에 눈치 빠른 백호에게 모든 걸 간파당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학,”

헤일린의 질문에 학장의 제안이라고 대충 답하려던 레넌이 일순 멈칫했다.

분명히 처음에는 감시가 목적이었데. 요즘에는 그 목적은 희미해진 채 그저 따라다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미묘한 기분을 지워 낸 레넌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호위니까?”

뻔한 핑계였다. 김빠진 헤일린이 문밖으로 고갯짓했다.

“그럼 여기서 알짱대지 말고 가서 개처럼 주인이나 지켜.”

“가장 개 같은 노랑이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두 고양잇과 사이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발발했다.


눈을 반쯤 내려 뜬 헤일린은 은근히 우월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랑이는 개보다 귀엽기라도 하지.”

일 할도 밀리지 않은 레넌이 여상한 웃음을 걸었다.

“팔다리가 짧아 슬픈 짐승은 아니고?”

금방이라도 부딪힐 듯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39 화>

주인 하나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고양잇과들을 지켜보던 갯과, 원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둘 다 나가.”

문설주에 기대어 선 원은 손짓으로 문패를 가리켰다.

“내 방에서.”

원 리오나드. 헤일린의 숙소 방인 줄 알았던 문패에는 그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지저분하게. 원의 죽일 듯한 시선이 레넌과 헤일린에게 닿자, 두 사람이 순서대로 말했다.

“그 방이 그 방 아닌가?”

“귀찮게, 네가 내 방으로 가든가.”

원의 인내심이 바닥나며 그가 잡고 있던 문고리가 빠각, 생을 마감했다. 갯과까지 참전한 2 차 전쟁의


시작이었다.
고구마밭 한가운데 선 안나는 멀거니 전방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슉, 슈슉, 신들린 손놀림으로 고구마를 캐는 벤디가 있었다.

한평생 고구마를 수확하며 살아온 고구마 캐기 장인 수준의 기술이었다.

호미를 든 안나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저, 저…….’

저 미친 학생회장이.

여행 일정을 수정해 봤자 얼마나 수정하겠나 싶었건만. 아예 일정을 통으로 바꿔 버린 셈이었다.

당장 반발하며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랜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레넌, 잘하는데?”

고구마밭 중앙, 이미 호미를 든 레넌은 벤디와 함께 열심히 고구마를 수확하고 있었다.

“회장, 이거 봐. 슬프게 생긴 고구마야.”

“진짜네?”

“회장 닮았다, 눈물 고구마.”

“다시 말해 봐.”

벤디의 얼굴과 눈물 고구마를 나란히 둔 레넌이 눈을 활짝 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안나는 힘이 조금 빠졌다.

전시관 일정이 어쩌다가 고구마밭으로 바뀌었을까 싶다가도, 저런 눈부신 얼굴로 고구마를 캐니 여기가
바로 전시관이요, 조각상이었다.

더군다나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원과 고구마를 베개 삼아 잠든 노란 짐승까지.


S 클래스에서 발언권이 강한 저들이 반기를 들지 않으니, 나서서 반발하기에도 꺼림칙한 심정이었다.

하물며 반대편에서는…….

“뭐 어떻게 하는 거라고?”

“몰라, 그냥 마법으로 밭을 갈면 안 되나?”

“그러면 고구마가 다친다잖아.”

X 클래스 학생들이 기계처럼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벤디의 기행에 어느 정도 적응한 그들은 이 이상한 여행 일정에 대해 의문조차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S 클래스 학생들이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대체 학생회장을 막지 않고 뭐 했냐.

S 클래스 학생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안나는 몰래 이를 갈았다.

학생회 임원 된 입장으로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고.

망연자실하게 선 S 클래스 학생들을 돌아본 그녀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전시관 같은 장소는 줄기차게 갔지 않나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삶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자는


학생회장의 뜻입니다.”

거기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왜 나오는데.

그러한 눈빛을 애써 무시한 안나가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반항적인 표정으로.


흘끔.

호미를 깔짝이기 시작한 S 클래스 학생들을 곁눈질한 벤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센 반발을
각오했으나 입 꾹 닫고 따라 주어 다행이었다.

‘조금 미안하네.’

색다른 경험 정도로 생각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입맛을 다시던 벤디는 돌연 우뚝 굳었다. 저 멀리, 수풀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탓이었다.

‘저 콩알만 한 머리통은…….’

간담이 서늘해진 벤디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어느덧 고구마 수확에 열중한 학생들에게서 슬그머니 거리를 벌린 벤디는 수풀 쪽으로 이동했다.

은밀히 따라붙어 커다란 교목 뒤에 숨자,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흑, 큰일 났어!”

“왜 그래?”

역시나. 페트리온 모험대 아이들이었다.

‘저 사고뭉치들이.’

나무에 한층 바짝 붙은 벤디가 인상을 찡그렸다.

육식 수인들이 페트리온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겁도 없이 구경나온 게 틀림없었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문득 밀려드는 그리움과 반가움에 눈시울을 붉힌 벤디는 곧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접근해 올지 모르는 게 먼저였다.

제법 먼 거리라서, 아직까진 자신을 알아보진 못한 모양인데.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와중, 육식 수인과 전혀 관련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새, 생선 가게 아저씨가 그러는데, 흐윽.”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으응. 어제…… 어제 모니 대장이, 흑, 잡혀갔대.”

모니가 잡혀가다니.

두서없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벤디가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뭐어?!”

“모니가 잡혀갔다고?”

“고, 고얀 놈의 부하한테……. 흑, 어떡하면 좋지?”

일순 숨을 멈춘 벤디는 눈을 크게 떴다. 자연스레 주먹에 힘이 들어간 탓이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이 고얀 놈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이라면.

‘숙부.’

벤디가 아는 한 그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유명한 사슴 동산에 들러 사슴들에게 먹이 주기, 페트리온 전통 의상 체험, 밀림 한복판에 지어진 소담한


찻집 방문 등등.

체험 학습 일정은 제법 빠듯하게 진행됐다.

어느덧 출발을 하루 앞둔 여행 마지막 밤.


숙소 정원에 피운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학생들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직접 수확한 고구마를 모닥불에 구워 먹으며 소원이나 비는 유치한 일정인데. 분명 하기 싫어 죽기


직전이었던 일정인데.

‘이게 뭐라고…….’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한 양가감정이었다.

심지어 앞선 여행 일정 또한 은근히 알차고 신선한 경험이었지 않나.

귀족으로서도 육식 수인으로서도 한평생 상상조차 못 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심정을 삼킨 학생들은 괜히 집게로 모닥불 속 고구마를 뒤적였다.

한편, 학생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벤디는 무릎을 오므렸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이 말간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습관적으로 발목을 만지작거린 벤디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틈만 나면 모험대 아이들의 대화가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열차역에서 도망치고 나서 다시 잡힌 거야?’

‘으응, 집으로 찾아왔다나 봐.’

‘세상에!’

‘글쎄, 생선 가게 아저씨가 몰래 지켜봤는데, 끌고 가면서 벤디가 간 곳을 말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고 그랬대!’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모니 대장이 그랬잖아.’

‘대장은 알아도 말하지 않을걸? 분명 벤디를 잡아 와서 사자 수인이랑 결혼시킬 테니까.’

‘내가 방금 대장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어. 모니 대장의 아빠도.’


여행 내내 학생들의 눈을 피해 모니 부녀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쩌면 레피 저택에 직접 들어가지 않는 한 해결 방도가 없을지도.

‘레피 저택은…….’

일순 망설인 벤디가 재차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구속구를 끊어 낸 흉터가 있는 발목이었다.

‘쓸모없는 것.’

감정 없는 숙부의 얼굴과 끔찍한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잘게 몸이 떨렸다.

‘모니…….’

두려움과 자괴감에 집어삼켜질 뻔한 벤디는 으득, 입술을 피 나게 깨물었다. 혀끝을 적시는 비릿한 피
맛과 함께 모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니까 벤디, 도망가.’

그때 모니가 오두막으로 부르지 않았더라면.

‘죽지 마.’

제 손에 직접 해피의 안장을 쥐여 주지 않았다면.

벤디는 일면식 하나 없는 사자 수인과 혼인하고,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곳에 앉아 한가로이 고구마를 구워 먹는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

그 작은 아이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고 있는


건지.

숙부를 대면하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그 아이만은 구해야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벤디가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봤다.


며칠간 끝없이 외면한 단 한 곳. 모니가 있을 만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창밖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뜬눈으로 밤이 내리기만을 기다린 나는 미리 써 둔 편지를 손에 쥐었다.

만약 지금 내가 가려 하는 곳에 모니가 있다면. 그리고 모니의 무사를 확인한다면. 그다음을 위해 준비한


편지였다.

품 안 깊숙이 편지를 넣은 나는 텅 빈 숙소 방을 돌아봤다.

원과 레넌이 밤마다 꼬박꼬박 노란 짐승을 데려가는 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노란


짐승이 또 기를 쓰고 나를 따라오려 했을 테니까.

사슴 수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후드를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무리 밤이라도 페트리온을 돌아다니려면 육식 수인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나았다. 애초에 외형을 바꿔
주는 마도구의 마력이 다했기도 하고.

덜컹.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저택 뒷문을 열자, 새까만 밀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목울대를 울렁인 내가 지체 없이 발을 내디뎠다.

육식 영역도 아닌 사슴 영역인 만큼, 이런 밀림에서 위험한 동물이 튀어나올 확률은 낮았다.

우연히 다른 영역에서 흘러들어 온 맹수라면 모를까. 사슴 영역에서는 육식 동물의 가죽이 귀한 만큼,


그마저도 거친 밀렵꾼들로 인해 씨가 마른 수준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가. 이 벤디 레피가 나고 자란 앞마당과도 같은 페트리온…… 바스락.

“악!”

갑작스러운 기척에 질겁한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곧 마른 나뭇잎을 밟은 소리임을 깨달은 내가 머쓱하게 후드를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앞마당과도 다름없으니 이깟 밀림 정도는 일도 아니란 의미였다.

#<40 화>

‘보인다.’

밀림을 가로지르고, 언덕에 다다른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밤이 깊은 와중에도 곳곳에 불이 켜진 레피 저택이 반짝였다.

저택을 바라볼수록 왠지 납덩이가 가슴 부근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애써 상념을 떨친 나는 언덕을 우회하여 저택과 조금 떨어진 숲으로 향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시야 확보가 꽤나 어려웠다.

“어디쯤이었더라…….”

엎드리듯 몸을 굽힌 내가 기억을 되짚으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차기 가주님, 이리 와 보세요.’

까마득한 어린 날,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손짓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숲에는 말이야, 무시무시한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단다. 궁금하지 않니? 막 모험심이 들썩들썩
샘솟지?’

‘아빠의 모험심만 들썩들썩 샘솟아 보여.’

‘우리 벤디는 정말 엄마를 똑 닮았구나.’

짜게 식은 아버지는 구시렁거리며 잔디가 자라난 바닥을 더듬었다.


‘이 통로는 정말 위급할 때만 사용해야 돼서, 레피 가문의 가주 말고는 아무도 모른단다. 엄마도 모르는
우리만의 비밀이야.’

‘그런 걸 나한테 벌써 알려 줘도 돼?’

한순간 멈칫한 아버지는 곧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주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자리거든.’

기억 속 아버지의 희미한 미소가 물에 비친 모습처럼 번지는 동시에 달칵,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찾았다.

긴장한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잡이를 당겼다.

끼이익, 땅처럼 보이던 바닥에 성인 한 명이 통과할 만한 구멍이 열렸다.

레피 저택의 감옥으로 연결되는 통로.

‘모니.’

제발 무사하기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로를 들여다본 나는 이윽고 지체 없이 몸을 내렸다.

같은 시각,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레피 저택 외곽 벽을 쓸었다.

가벼운 경장 차림의 원은 무언가를 가늠하듯 벽을 매만졌다. 오른손에서 검은빛이 옅게 뿜어져 나왔다.

‘마법진은…….’

제법 꼼꼼하게 벽을 살핀 원이 손을 거둬들였다.

별다른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따로 설치된 방어진 같은 건 없는 듯했다.

대저택마다 마법 방어진을 설치하는 육식 수인 영역과는 전혀 다른 현장이었다.

초식 수인 영역을 조사할 때마다 겪는 생소한 현장을 뒤로한 원이 로브를 눌러썼다. 검은 머리카락이 후드


속에 완전히 감추어졌다.

‘사슴 영역이 마지막인 겁니다, 원 님.’

부스럭, 스카론 장로가 보내온 보고서를 꺼내 든 그는 텅 빈 담장과 주변을 둘러봤다.

이 저택의 주인은 마법사.

제 몸을 건사할 능력이 충분한 마법사일수록 경비가 허술한 건 영역 공통인 모양이었다. 성정이 오만한
마법사일수록 특히.

별다른 감흥 없이 보고서를 읽던 그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웬스턴 레피.

저택 주인의 이름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성이 같군.’

지금쯤 숙소에서 뻗어 있을 누군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페트리온에 가기 싫은 기색을 비추더니, 막상 와서는 호미를 들고 날아다니는 그 작자가.

헛웃음 친 원은 이내 머릿속에서 고구마 장인을 지워 냈다.

어차피 흔하디흔한 성에 불과하니까. 하잘것없는 곳에 신경을 기울일 여유 따위 없었다.

“…….”

웃음기가 사라진 그는 높게 솟은 저택을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고요히 일렁였다.

분명 페트리온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주먹을 쥐었다 편 원은 천천히 뒤로 걸음을 물렸다. 목적지는 이 저택의 감옥이었다.


똑, 똑.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정수리에 부딪혀 튀었다.

석벽에 배치된 램프 빛에 시야를 의존한 나는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기나긴 통로처럼 생긴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는…….”

복도 중간중간, 샛길에 자리한 철창 안을 살폈으나 모니는 물론 죄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없다.

잠깐 전진을 멈춘 나는 생각에 잠겼다.

죄수들이야 선대 레피 가문의 가주가 지은 페트리온 수용소에 있다 쳐도, 모니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모니를 추궁해 내 거처를 알아내야 하는 만큼, 굳이 저택과 멀리 떨어진 수용소에 가뒀을 리는 없고.

숙부의 성격상 저택 내에 둘지언정 안락한 장소를 제공하지도 않을 테니까.

모니가 페트리온 어디에도 없다면 반드시 이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해…….’

게다가 사용하지 않는 감옥이라 쳐도 너무 조용하지 않나.

꽤 복도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초 한 명 마주치지 않은 상황이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주의를 기울이며 걷던 나는 휙, 다급히 샛길로 숨어들었다. 감옥 앞을 지키는 경비병을 발견한 탓이었다.

숨죽인 채 주시하는 와중, 묘한 위화감을 느낀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
미동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경비병은 의자에 축 늘어진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조금 더 지켜보던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차 보았다.

탁, 데구르르.

돌 구르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으나 경비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든 건가?’

벽에 바짝 몸을 밀착한 내가 슬금슬금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수인 아카데미에서의 사투 덕분에 이 정도는


누워서 고구마 먹기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랐을 즈음 스르륵, 경비병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죽……!”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내가 황급히 입을 가로막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주춤주춤 접근해서 경비병의 코 부근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손끝에서 옅은 숨결이 느꼈다.

잠든 것보단 기절한 것 같은데.

얼굴 앞에서 손을 저어본 나는 문득 경비병이 지키던 감옥을 돌아봤다.

철창 안에는 모니와 모니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맙소사.

안색이 파리해진 나는 허둥지둥 경비병의 허리춤을 뒤적였다. 달그락, 열쇠 뭉치가 손에 잡혔다.

“모니!”
감옥을 열고 들어간 내가 쓰러진 모니를 안아 들었다.

“모니, 모니!”

뺨을 찰싹찰싹 가볍게 치자 인상을 찌푸린 모니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응, 더 잘래…….”

이리저리 살펴봐도 다른 상처나 고문 흔적은 없었다.

그냥 잠든 거였구나.

한시름 놓은 내가 재차 뺨을 두드리려는 순간 모니의 눈꺼풀이 열렸다.

“모니, 정신이 들어?”

“누구…… 앗!”

초점을 되찾은 모니는 대뜸 휙 눌러쓴 후드를 잡아 벗겼다. 후드 속에 숨겨 둔 옅은 밀색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벤디!”

소리치다 말고 깜짝 놀란 모니가 내 입을 찰싹 때렸다.

“조용히 해, 이 바보야.”

목소리는 제가 높였으면서 왜 내가 입을 맞아야 하는 걸까.

작은 의문을 묻어 둔 나는 조용히 하겠다는 의미로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어찌 됐든 안심한 모니가 내 멱을 짤짤 흔들며 속닥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벤디 네가 왜 여기 있어?”

“모니 너를 찾으러 왔지.”

“너 진짜 바보야? 고얀 놈한테 잡히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어!”


“너야말로…….”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울컥한 나는 꽉 메인 목을 억지로 삼켰다.

“모니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저 경비병은 뭐고.”

“경비병? 어…… 자는 중인 거 아냐?”

뺨을 긁적인 모니는 감옥 안에 작게 난 창을 가리켰다. 바깥은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잘 시간이잖아.”

하긴, 잘 시간이긴 해.

자연스레 수긍하던 나는 아차 정신 차리며 경비병을 손가락질했다.

“저렇게 쓰러져서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딜 봐도 부자연스럽잖아.

“으음,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잠이 쏟아진 것 같기도 하고…….”

모니가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우리를 확 갈라놓았다.

채 인지하기도 전에 짜악,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급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뺨을 짚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

뺨을 때린 이는 다름 아닌 모니의 옆에 누워 있던 수염 덥수룩한 남자였다. 우리가 바로 지척에서 요란을


떨어서 그런지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아버지!”
기겁한 모니가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왜 때려, 때리지 마!”

제가 때리고도 놀란 듯 잘게 손을 떤 남자가 이내 모니를 억지로 당겼다.

“이, 이리 오너라, 어서!”

“싫어! 벤디 왜 때려, 내 친구 왜 때리냐고…….”

아버지의 품에 갇힌 모니가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부녀를 마주한 나는 아릿한 뺨을 어루만졌다.

분노, 당황, 두려움.

모니 아버지의 낯빛에 떠오른 여러 감정의 원인을 모를 수가 없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 나는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리며 양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죄송합니다.”

사죄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당장 내 상황만으로도 벅차, 페트리온에 남겨진 이들을 고려하지 못했으니까.

어린아이들이야 나를 그저 대저택에 사는 부자 정도로 인식하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작은 농장주가 귀족인 숙부의 추궁을 견디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수척한 모니 아버지의 얼굴이 그를
증명했다.

긴 시간 후에 고개를 들자 그는 다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자 신세라도 귀족인 이상, 내게 사죄를 받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한 표정이었다.

신분만 귀족이지 그럴싸한 취급도 받지 못했는데 뭐.


쓴 속을 삼킨 나는 어느새 다가온 모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벤디, 뺨이 빨개졌어. 내가 미안해…….”

“나야말로 미안하지. 감옥이 무섭진 않았어?”

멈칫한 모니는 배를 쭉 내밀며 허세를 부렸다.

“딱히? 모험대 총대장이 감옥 따위를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

“……거짓말.”

늘 곱게 땋던 머리는 산발이고, 치마 끝단은 다 해진 모습으로 무슨.

‘어디로 가는지 네게는 알렸어야 했는데.’

로브 속에 손을 넣은 나는 미리 써 온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41 화>

“이게 뭔데?”

모니는 호기심이 이는지 얼른 쪽지를 펼쳤다.

“모니에게, 벤디가.”

어린아이의 낭창한 목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모니, 잘 지내? 나는 요즘 페트리온을 떠나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뭐야, 벤디 너 육식 수인의


영역으로 갔어?!”

어렵사리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모니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런 모니의 양어깨를 붙든 내가 낮게


말했다.
“감옥에 갇힐 때 다른 일은 없었어? 경비병이 옷을 뒤진다거나.”

“으음. 나는 그냥 주머니만? 아버지는 옷을 바꿔 입혔어.”

“좋아. 잘 들어, 모니. 이걸 숙부에게 건네줘. 감옥살이에 못 이겨서 실토하는 것처럼.”

“고얀 놈한테?”

“응,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지 않았고, 계속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고 말해. 실제로 네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쓸게.”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린 모니가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진짜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지내는 중이야?”

“응.”

“그럼 이걸 전해 줬다가 벤디 네가 숨은 곳을 들키면 어떡해?”

“괜찮아, 육식 수인의 영역은 숙부도 함부로 뒤지지 못할 테니 꽤 시간이 걸릴 거야. 그리고…… 방도가
있어.”

짐짓 입을 다문 나는 마력 측정 당시를 떠올렸다.

폭발한 모래시계와 그 원인을 나라고 인정한 스카론 장로의 판단.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힘……. 시간을 버는 동안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숙부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지금껏 숙부가 두려웠던 이유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니까.

‘여차하면 마법으로 콱,’

무심코 약육강식에 입각한 육식 수인처럼 사고하던 내가 부르르 떨었다.

육식 수인들이랑 지내다 보니 야만적으로 변해 가는 걸까.


휙휙 고개를 내저은 나는 타이르듯 모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그걸 숙부에게 주면서 앞으로 받게 되는 내 편지를 보여 주겠다고 말해. 그럼 굳이 너와 아버지를


가둬 둘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물론 모니 아버지가 내가 이곳에 왔단 사실을 숙부에게 말해 버리면 소용없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모니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상태였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페트리온에 와 있는 도중, 내가 나타났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숙부는 육식 수인의 영역을 뒤질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게 되면…….’

으음, 그때 가서 다시 방도를 찾아야지 뭐.

어쨌든 수인 아카데미 재학생인 이상, 지금까지처럼 무력으로 끌고 갈 순 없을 것이었다.

밀란느 학장님이 어떻게 나오실진 모르겠으나, 일단은 나도 그분의 비호 아래에 있는 학생이니까.

“벤디…….”

“모니, 괜찮아.”

어깨를 으쓱인 나는 모험대 아이들 앞에서 으레 떨던 허세를 부렸다.

“이미 육식 수인이 무더기로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걸. 시집간다고 죽기야 하겠어?”

“미쳤어?!”

“너는 아버지를 지켜야지.”

“…….”

“페트리온 모험대 1 소대 대장으로써 하는 충언이야.”

대장은 부하의 충언을 새겨들을 것. 모험대 수칙을 상기하며 눈을 맞추던 우리는 곧 약속이라도 한 듯
움찔 굳었다.

뚜벅, 뚜벅.

희미한 발소리가 아주 멀리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감옥 안은 고요했다.

텅 빈 철창 여러 곳을 살핀 원은 손끝으로 먼지 쌓인 벽을 살짝 쓸었다.

‘사용하는 감옥은 아닌가.’

보초는커녕 인적 자체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삭막한 복도를 지체 없이 가로지르던 그가 멈춰 섰다.

다른 초식 영역을 뒤지며 보아 온 수많은 감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감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끝에서부터 피어오른 이질감이 계속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금 발걸음을 뗀 원은 이윽고 바닥에 널브러진 경비병 앞에 다다랐다. 툭, 발끝으로 몸을 건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그가 미리 흘린 수면 향에 취한 경비병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느릿하게 옮겨진 시선이 자물쇠가 걸린 감옥 입구를 지나, 철창 안을 향했다.

서늘한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친 모니와 모니 아버지가 서로 바짝 부둥켜안았다.

구석에서 덜덜 떠는 두 사람을 발견한 원이 후드를 끌어 내렸다.

“꽤 독한 수면 향을 뿌렸는데.”

무위는커녕 무력조차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깨어 있는 건지. 타인이 의도적으로 깨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있었군.”
흔적 없이 다녀갈 생각이었는데.

성가시게 됐다고 생각한 원이 낡은 철창을 툭툭 두드렸다.

“누구였지?”

감정 하나 없으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일순 덜컥 겁이 난 모니 아버지가 아랫입술을 떨었다.

벤디가 말만 번드르르하게 해 놓고, 결국 그들을 외면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육식 수인이 내뿜는 위협적인 기운에 판단이 흐려진 그가 몸을 크게 들썩였다.

“그……!”

“아버지.”

아버지의 손목을 꽉 붙든 모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철창 밖 남자는 아무리 봐도 저택 내부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사슴 수인에겐 없는 저 송곳니.

남자는 정체는 물론 종족조차 불분명한 데다, 지나치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모니의 아버지는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도 절대 손목을 놓지 않는 딸을 내려다봤다. 망설이듯 여러 번


달싹인 그의 입이 이내 꾹 다물어졌다.

부녀는 끝끝내 실토하지 않았다.

“뭐, 됐어.”

딱히 신경 쓰지 않은 원이 적막한 복도를 둘러봤다. 그 누군가가 감옥 보초든 밤손님이든, 어차피 한낱


쥐새끼에 불과했다.

“직접 찾으면 그만이니까.”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이 감옥 깊은 곳으로 향했다. 벤디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급한 대로 복도 모퉁이에 숨은 벤디는 거북이처럼 목을 쭉 뺐다.

모니가 있는 감옥 앞에 선 커다란 장신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였지?’

복도를 작게 울리는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어두운 색감의 로브를 두른 걸 보아 자신과 같은 밤손님인 듯한데.

‘얼굴이 잘 안 보이네.’

없는 시력도 끌어 올려 밤손님을 관찰하던 벤디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뒤이어 등딱지에 숨듯 황급히 목을 움츠리며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커다란 키와 짙은 흑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선연히 빛나는 금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 저…….’

저 늑대가 왜 여기 있는 건데.

온 얼굴 구멍을 확장한 벤디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순간 자신의 뒤를 밟았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모니에게 누가 있었냐는 질문 따위를 할 리가 없지 않을까.

추측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원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발소리도 점점 뚜렷해졌다.

램프 빛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겨우 몸을 숨긴 벤디가 입을 가로막았다.


‘안 돼.’

여기 있는 걸 늑대에게 들킨다면.

심지어 지금은 마도구로 외형을 바꾼 것도 아닌, 사슴 수인의 모습이었다.

마도구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달라지게 했으나, 그 외에는 이목구비만 미세하게 바꾼 정도이니…….


안면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저 똑똑한 늑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제발 이 어둠이 감춰 주기를.

숨 쉬는 것마저 잊은 벤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깥까지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어 댔다.

저벅, 저벅.

어느덧 선명하리만치 가까워진 발소리가 몸을 숨긴 장소를 지나쳤다.

한결 안도한 벤디가 살짝 실눈을 뜨는 순간 원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와.”

동시에 벤디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기숙사에 누군가 숨어 있을까, 이따금씩 텅 빈 방에서 홀로 외치곤 하던 말인데.

그 한 마디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음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혹시 몰라.’

떠보기 위해 던져 본 말일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벤디가 버티고 있을 즈음, 원의 다음 말이 울려 퍼졌다.

“나오지 않으면 벽을 없애는 수밖에.”

미친 늑대였다.

‘왜 얘기가 그렇게 돼?’


그냥 평범하게 끌어내는 경우의 수는 없었던 걸까.

꿈도 희망도 잃은 벤디는 로브로 얼굴과 체형을 최대한 꽁꽁 감췄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내딛자, 복도에 우뚝 선 원의 발이 보였다.

땅에 고개를 박다시피 한 벤디가 미적미적 다가섰다.

“…….”

원은 어둠 속에서 나오는 검은 괴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예상보다 체구가 작아도 한참 작았다.

슥, 후드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검은 괴한이 미끄러지듯 피했다.

스윽, 홱. 스윽, 홱.

나무늘보보다 느리게 나온 조금 전과 동일 인물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빠른 발재간. 순종할지언정


후드만큼은 결코 벗을 수 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원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동시에 팍, 그를 밀친 검은 괴한이 도주를 시도했다. 허를 찌른 회심의


도주라기엔 온몸에 빈틈이 넘쳐났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은 원이 후드를 가볍게 잡아챘다.

“서,”

휙, 후드가 벗겨지며 밀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흘러내렸다.

“…….”

눈앞을 스치는 머리카락을 마주한 원은 일순 사고가 정지했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괴한은 그 틈을 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뻣뻣하게 굳은 원의 손가락 사이로 모래 쓸려 가듯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탁탁, 겁에 질린 듯 여러 번 삐끗한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괴한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있던 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잠깐,”

어이없을 정도로 당황한 원은 괴한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디뎠다.

‘너 육식 동물이야?’

사용하지 않는 듯 오래된 감옥.

‘괜찮아, 여기는 아무도 오지 않아.’

먼지 묵은 퀴퀴한 냄새.

‘얼른 건강해져야 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적막.

자신은 이 복도의 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바랬던 기억이 걸음걸음마다 색채를 찾으며 선명해졌다.

내내 찾던 기억 속 그곳. 바로 이곳이었다.

#<42 화>

깊은 밤, 늑대로 변한 아홉 살의 원은 달리고 또 달렸다.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이 밀림인지 산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밤중의 추격전.

차기 마탑주로 지정된 후부터는 늘 있는 일이긴 했다.


음식에 독이 섞여 나오는 건 예사였고, 호위가 적은 밤이면 자객이 습격해 오는 건 일상이었다.

다만 오늘은 조금 위험한 함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원 님.’

초식 영역의 길목에 들어선 마차 안, 측근의 독 묻은 단검이 원의 배를 관통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믿고 의지해 온 이의 배신이었다.

가까스로 마차에서 탈출한 원은 마지막 기력까지 짜내어 발을 움직였다.

초식 영역의 대회의장에서 마법사 집회가 열린다기에 뜬금없다고는 생각했는데.

원을 지지하는 육식 수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처리하기 위함인 듯했다.

‘시야가…….’

출혈이 심한 탓에 눈앞이 흐릿하게 미어졌다. 이 숲길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숲길이 넓어서인지, 아니면 길을 잃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원이 힘겹게 다리를 뻗는 순간 콱, 발에 엄청난 극통이 가해졌다.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이었다.

‘하필.’

자객들이 바짝 추격해 오는 와중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원이 떼어 내려고 발을 흔드는데, 수풀 곳곳에서 튀어나온 밧줄이 몸을 휘감았다.

“옳지!”

“아직이다, 방심하지 말고 그대로 당겨!”

숲속에서 은신하고 있던 이들이 사방에서 밧줄을 당겨댔다.

“이야, 얼마만의 늑대냐.”


“검은 쓰지 마, 털이 상한다고.”

“이미 복부에 상처를 입었는데?”

어느 영역에나 있는 밀렵꾼이었다.

크르릉, 이를 드러낸 원이 엎치락뒤치락 발을 굴렀다.

“어어어?”

“힉!”

발버둥 치는 방향에 따라 밀렵꾼들의 몸이 속절없이 딸려 갔다. 그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가


착지하기를 반복했다.

“이놈 이거 힘 좀 봐라.”

“마취 침 가져와! 빨리!”

“저런 상처를 달고 잘도 날뛰는구먼. 독한 놈이 걸렸어.”

휘리릭, 원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물이 드리워졌다. 쏘아진 마취 침에 정통으로 맞은 그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잡았다!”

환호하는 밀렵꾼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해지고, 이제야 온몸에 입은 상처가 쓰라리기 시작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 제 배에 칼을 찔러 넣은 것도 모자라 비틀던 측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형처럼


따르던 이였다.

‘죽어 주십시오.’

또 지긋지긋한 배신이었다.

말마따나 이쯤에서 죽어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으로 나약한 생각을 한 원의 의식이 곧 완전히 끊어졌다.

“가만, 이놈 늑대 수인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아까 그물에 걸렸을 때 사람으로 변해서 살려 달라고 했겠지.”

거대한 늑대를 간신히 옮긴 밀렵꾼들이 감옥에 던지듯 내려 뒀다.

철컹철컹, 철창을 단단히 잠근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고놈 참 때깔도 곱군. 지금껏 잡은 놈 중에 최상이지 않나?”

“진짜 여기에 두려고? 아무리 그래도 밀렵한 육식 동물을 저택 안에 숨기는 건 좀…….”

“얼마 전에 선대 가주가 밀림에서 암살을 당했어. 안 그래도 페트리온 자체 경비가 삼엄해질 텐데,
이놈을 어디 두나?”

“하지만…….”

마지막까지 망설인 밀렵꾼이 말끝을 흐렸다.

“오래전에 용도를 폐기한 감옥일세. 벌써 몇 년째 나 혼자 관리하는 중이니 걱정 넣어 두게나.”

“흠, 하긴……. 게다가 숲에서 해체하면 가죽이 많이 상하니…….”

“그래, 알아서 죽을 놈이니 며칠 좀 내버려 두면 될 일이야. 경매가 열리면 바로 팔아 치우자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즈음, 닫혀 있던 원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대화를 미루어, 밀렵꾼들은 아무래도 이 저택 소속 고용인들인 모양이었다.

‘상처가…….’

쿨럭, 원이 잔기침을 내뱉었다.


배를 관통한 상처도 문제였으나, 더 큰 문제는 상처에 묻은 독이었다.

밀렵꾼들의 말대로 오래가지 못할 목숨이었다. 그저 바로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둬 주어 명이 약간이나마


연장된 셈.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려 시도해도 실패하는 건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였으니까.

원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헤엄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끔벅, 끔벅.

끔벅. 다시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웬 여자아이가 시야에 나타났다.

기척을 느끼지 못해 놀란 것과 별개로, 반응할 힘조차 없는 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런 새파란 어린아이가 다 무너져 가는 감옥에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는 자신의 또래라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원의 앞에 쪼그려 앉은 여자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표정이 없었다. 밀색 눈동자는 텅 비어 있다는 표현이


맞았다.

관찰하듯 원을 바라보던 여자아이가 대뜸 물었다.

“너 육식 동물이야?”

굴러서 봐도 늑대일 텐데.

기가 찬 마음에 픽 콧김을 뱉던 원은 뒤늦게 여자아이의 입가를 발견했다. 송곳니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다.

‘초식 수인.’

멈칫한 원은 신기한 걸 보듯 여자아이를 응시했다. 인지하지 못했으나, 돌이켜 짚어 보면 밀렵꾼들도


마찬가지로 송곳니가 없었다.

미동 없는 늑대를 살핀 여자아이는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아?”
원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 여자아이를 빤히 응시했다.

“나를 잡아먹어.”

어린아이의 장난이라 여기기에는 태도가 지나치게 무감하고 태연했다.

어이가 없어진 원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여자아이를 살폈다.

소녀는 대충 풀어헤친 옅은 밀색 머리카락과 그와 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특이점이라면 또래 아이들이 주로 입는 알록달록한 의복이 아닌 검은 원피스를 입은 정도.

‘잡아먹으라고?’

거의 죽여 달란 말과 다름없지 않나.

하물며 저런 어린애를-또래임을 또다시 망각한 원의 시선- 먹어 봤자 간에 기별조차 가지 않았다.

잡아먹긴커녕 반응조차 없는 원을 마주한 여자아이는 김샌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낡은 철창문이 열렸다.

“나올래?”

안타깝게도 원은 발끝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숨만 색색 몰아쉬는 그를 기다리던 소녀는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손뼉을 마주쳤다.

“다쳐서 나를 잡아먹을 수가 없는 거구나.”

‘그걸 이제 안다고?’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애초에 원은 문을 열어 줘도 나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당장 움직일 처지도 안 되고, 나가 봤자 이런 상태로는 금세 추격자들에게 잡힐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감옥 안이 안전할 지경.

“…….”

복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힐끗. 피가 낭자한 상처를 곁눈질한 소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 파리한 안색을 보아, 직접 만져 볼 용기는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원을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철창을 잠그기 시작했다.

힘겹게 자물쇠를 건 소녀는 까치발을 들어 벽에 열쇠를 걸었다.

다다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원은 다시 수마에 빠져들었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몸을 스쳤다.

의식을 되찾은 원은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목숨이 질겨도 너무 질긴 거 아닌가.

게다가 상태가 악화되었어야 하는데, 어쩐지 한결 나아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눈을 감은 채 생각하던 원은 돌연 눈꺼풀을 부릅떴다.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휙. 옆을 돌아보자, 아까의 여자아이가 그의 상처에 푸른 액체를 치덕치덕 바르는 중이었다.

‘무슨 짓을!’

소리치려던 원은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그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한 늑대의 모습이니까.

크르릉, 원의 위협적인 숨소리에 일순 소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깼어?”
여자아이는 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작은 손은 상처에 푸른 액체를 부지런히 바르느라 바빴다.

“아빠가 준 영약이야.”

귀한 약이라기엔 마구잡이로 액체를 바르는 소녀의 손길엔 망설임이 없었다.

눈동자는 한 치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상태. 반쯤 정신이 빠진 사람 같기도 했다.

원의 불신 어린 눈빛을 뒤늦게 발견한 소녀가 덧붙였다.

“엄청 비싼 포션이래. 상처에 바르면 피도 멎고 새살이 돋고, 또…… 뭐더라.”

짐짓 설명을 멈춘 여자아이는 약병과 상처를 번갈아 봤다.

‘너무 치덕치덕 발랐나?’

늑대의 몸에는 더 이상 액체를 바를 만한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

흠. 잠깐 고민한 소녀는 원의 주둥이에 냅다 약병을 꽂아 넣었다.

“마시는 것도 좋아.”

벌컥벌컥, 강제로 수상한 액체를 마시게 된 원이 뱉어 내려는 찰나,

“해독 효과가 있어서.”

약병을 쳐 내려 공중을 가로지르던 앞발이 뚝 멈췄다.

그사이 다시금 빗살처럼 병을 꽂아 넣은 소녀는 만족스레 이마 땀을 훔쳤다. 실상 초식 수인 입장에서


육식 동물의 주둥이로 팔을 가져가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기에.

탁탁 손을 턴 소녀는 퍽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른 건강해져야 할 텐데.”

누가 봐도 다친 짐승을 걱정하는 마음씨 고운 어린이였다.


“그래야 나를 잡아먹지.”

뒤에 덧붙인 말만 아니었다면.

원은 이 새침하게 생겨 먹은 초식 수인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윽, 스윽.

제 옷에 닦긴 싫은지, 원의 털에 약 묻은 손을 꼼꼼히 닦은 소녀가 이번에는 바구니를 뒤적였다.

바구니 속은 온갖 구황작물의 온상이었다.

특히 구운 고구마와 메밀 빵이 굉장히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보기만 해도 목이 텁텁해진 원은 고기 씹던 힘을 쥐어짜 내어 앞발을 휘저었다.

당장 허기보다는 갈증 해소가 먼저 아닐까.

환자는 물. 물이 간절했다.

‘물.’

드물게 필사적이 된 그가 의견을 피력하자, 곧잘 알아들은 소녀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야 말을 좀 알아듣는구나.”

먹여 달란 의미로 해석한 소녀는 재차 주둥이에 고구마를 꽂아 넣었다. 수준급 검사도 울고 갈 날카롭고


정확한 솜씨였다.

“환자는 잘 먹어야 돼.”

안 그래도 건조한 목에 퍽퍽한 고구마까지 더하게 된 원이 툭 혼절했다.

회복하면 진짜 잡아먹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43 화>

“이야, 고놈 새끼 아직도 쌩쌩하네.”

“포획할 때 힘을 생각해 보게, 며칠은 더 살고도 남지.”

간간이 원을 확인한 경비병들이 자리를 떴다.

구석에 자리 잡은 원은 감옥 안에 작게 난 창문을 돌아봤다.

하루 이틀이야 계산했지, 이제는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갇혀 있으니 일분일초가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창에서 시선을 뗀 그는 복부 쪽 상처를 확인했다.

소녀는 경비병을 의식한 건지 뭔지, 치료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

또한 영약이란 말도 사실이긴 한지 몸이 회복되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과장하면 당장 달리기도 가능한 수준.

하지만 아직 추격자들이 인근에 있을지도 모르니, 밖으로 나서기보단 힘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하는 게


나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풀떼기와 고구마만 가져오던 소녀가 어제부터 스테이크 비슷한 걸 챙겨 오기 시작한
사실이었다.

‘어때, 고기랑 제법 비슷한 맛이 나지 않아?’

버섯을 고기처럼 만든 음식이라는데. 원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구황작물 파티보다 훨씬 나았다.

사육당하는 듯한 기분을 애써 외면한 원은 철창을 응시했다.

깊은 밤. 아니나 다를까 끼이익, 소리와 함께 작은 여자아이가 철창을 열고 들어섰다.


야무지게 바구니까지 챙겨 온 소녀는 늑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쪼그려 앉았다.

“이제 나를 좀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니?”

기가 막힌 감정을 숨기지 못한 원이 주둥이를 벌렸다.

대체 뭐야, 이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은. 아홉 살 평생 이딴 해괴한 질문은 처음이었다.

뒤늦게 나사 풀린 이 초식 수인의 정체가 궁금해진 원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일개 고용인이 그런 영약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낮고. 그렇다고 귀족 영애라기엔 차림새가 너무 조촐했다.

소녀는 매번 까만 원피스를 입고 오는데, 흔한 장식물 하나 없는 단출한 옷이었다.

‘이 감옥에는 어떻게 드나드는지.’

원이 슬슬 정체를 의아하게 여기는 반면, 소녀는 호기심이라곤 없어 보였다.

심지어 아이답지 않게 생을 포기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삶의 의욕이 아예 없다고 해야 할까.

‘부모 얼굴이 궁금하군.’

원이 그런 생각을 이어 갈 즈음, 바구니를 내려 둔 소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

“오늘 엄마 아빠를 흙에 묻었어.”

의도치 않게 고인을 모독해 버린 원이 찝찝하게 입맛을 다셨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래.”

소녀는 울었는지 눈가는 붉고, 눈꺼풀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

얼굴에서 내려간 원의 시선이 새까만 원피스에 닿았다. 이제야 내내 검은 원피스를 입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반대편 구석에 웅크려 앉은 소녀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 갔다.


“그 영약은 유품이었는데.”

여자아이는 입을 열 때마다 원을 머쓱해지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관없어, 어차피 사용할 곳도 없으니까.”

그래서 자신을 잡아먹어 달라 한 건가.

요컨대 원에게 잡아먹혀서 죽은 부모를 따라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뜻이었다.

사정을 대강 짐작한 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발찌에서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도구인가.’

금방 흥미를 잃은 원이 발찌에서 시선을 뗐다.

죽음에 이를 만한 상처를 고치는 영약도 갖고 있었는데, 마도구 하나쯤 달고 다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죽는 방법을 모르겠어.”

종알종알 홀로 떠들던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차라리 나도 엄마 아빠랑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피곤했는지 말하는 도중에 잠들어 버린 듯했다.

“…….”

감옥 안에 익숙한 고요가 찾아왔다.

엎드린 원은 겹친 앞발에 턱을 걸쳤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부모가 죽었다고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못 할 텐데.

이는 삶보다 죽음이 나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소리였다.


‘뭐, 저런 어린애가 밤마다 감옥에 드나드는 게 가능한 것만 봐도…….’

소녀의 앙상한 팔다리를 떠올리자 이상하게 속이 불편해졌다.

이건 동정일까.

흘끔. 느릿하게 움직인 원의 시선이 잠든 소녀에게 머물렀다.

대체로 일족마다 특유의 이목구비가 두드러지는 육식 수인과 달리, 초식 수인은 외양만으로는 종족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제가 육식 수인이기에 더더욱 초식 수인을 구분하기 힘든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원은 아직까지도 소녀의 종족을 몰랐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저 피부도 초식 수인의 특징일까.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미지의 존재처럼 여긴 초식 수인도 결국 자신들과 같은 수인이란 정도였다.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인간의 몸으로 감옥은 제법 쌀쌀했다. 가을인 만큼 밤공기는 굉장히 차니까.

최선을 다해 외면하던 원은 곧 짜증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간 원은 여자아이를 감싸듯 웅크려 엎드렸다.

“엄마…….”

잠꼬대에 가까운 칭얼거림에 물기가 묻어났다.

으응, 소녀는 잠결에 온기를 찾아 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몸이 털에 폭 감싸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이 쌀쌀한 날씨에, 왜 얼굴이 더운 건지 모르겠는 원이 앞발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


얼마 전에 측근의 검에 배를 관통당한 주제에. 그 배신을 겪고서 정체 모를 소녀에게 곁을 내어주는
스스로의 안일함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신분도, 종족조차 불분명한 자를.

‘원 님께서는 필시 훌륭한 마탑주가 되실 겁니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마탑 장로, 스카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이딴 모습으로 대체 여기서 뭘 하는가.

자괴감이 일었지만 차마 소녀를 떨치지 못한 원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마탑주는커녕 훌륭한 모포가 된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소녀는 밤이 깊으면 어김없이 철창을 열고 들어서는데, 유독 방문이 늦어지는 날이었다.

원은 초조하게 철창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바로 전날 있었던 일 때문에.

‘물어보라니까.’

갑자기 어깻죽지를 드러낸 소녀는 제 어깨를 물어보라고 요구했다. 잡아먹히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딱 한 번만.’

강요에 못 이긴 원이 콕, 어깨에 송곳니를 가져가자마자 소녀의 눈에서 홍수가 났다.

소리 없이 줄줄 눈물을 쏟아 내는데, 무덤덤한 표정 아래 두려움을 감추고 있던 모양이었다.

겨우 울음을 그친 소녀는 철창 밖에서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나쁜 늑대.’

하루 내내 원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한마디였다.

설마 마음 상해서 이대로 영영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초조하게 제자리를 돌던 원은 대뜸 허공에 앞발을 날렸다.

그 조그마한 소녀가 뭐라고 제가 전전긍긍하는 건지.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부리던 원은 곧 후다닥 구석으로 달려가 엎드렸다. 복도 끝에서 여자아이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기에.

이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구분이 가능했다.

끼이익, 철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던 원은 의아함에 고개를 틀었다. 오늘따라 소녀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

원은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뺨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늑대의 지긋한 눈길이 뺨에 박혔다.

뚫어질 듯한 시선에, 멋쩍게 얼굴을 만지작거린 소녀는 주방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야, 벌레. 뭐 하냐?’

한 시간 전, 식자재 창고를 뒤지다가 그만 사촌에게 들키고 말았다.

‘너 요즘 수상하다? 밤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데?’

‘이거 놔.’

그렇게 음식 바구니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씨름하는 도중, 골이 난 사촌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뻑, 남자아이인 데다 저보다 키도 커서 그런지 손이 꽤나 매웠다.

그래도 끝까지 바구니를 사수해 낸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 소녀가 대충 둘러댔다.

“오라버니가 예전부터 조금 짓궂어.”


전혀 납득하지 못한 원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잡아먹을 부위도 없는 판국에 때릴 곳은 더 없지 않나. 오라버니가 아니라 그냥 폐기물 수준이었다.

폐기물을 폐기하는 상상에 빠진 와중, 소녀의 목소리가 원을 일깨웠다.

“이제 쌩쌩한가 봐?”

저도 모르게 발로 바닥을 긁고 있던 원은 침착히 다시 누웠다.

상처가 벌어진 시늉을 하자, 소녀는 불신 어린 눈빛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늑대를 쓰다듬었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에 또다시 자괴감을 느낀 원이 한숨을 쉬었다.

상처야 뜀박질이 가능할 정도로 나았고. 시일이 지난 만큼 추격자들도 그리 가까이 있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감옥에 있고 싶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밥 먹자.”

심지어 배 속에 고구마 싹이 자라겠다 싶을 수준으로 고구마만 먹어도.

“이거 만져도 돼?”

꼬리를 붙잡고 붕붕 흔드는 치욕을 당해도 뒷발질 한번 할 수가 없었다.

건방지게. 웬만한 대귀족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원에 대한 대접이 길거리 똥개만도 못했다.

더 미치겠는 건, 이딴 모욕을 겪으면서도 이곳에 있는 자신이었다.

속이 갑갑해진 원은 창밖에 걸린 달을 올려 보며 소리 질렀다.

그날 밤, 페트리온 사슴 수인들은 출처 모를 늑대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탁탁탁,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다급한 발소리였다.

감옥에 들이닥치다시피 한 소녀가 다짜고짜 원의 털을 잡아끌었다.


“도망쳐야 해, 어서!”

만난 이후 처음 당황한 기색을 보인 소녀는 허둥지둥 철창 밖으로 원을 떠밀었다.

“경비병들의 대화를 들었는데, 오늘 너를 죽이겠다고 그랬어.”

#<44 화>

원은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새벽쯤 가죽 밀매 일정이 잡혔겠지 싶었다.

반면 안색마저 파랗게 변한 소녀는 빨리빨리, 재촉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원이 마땅찮게 뒤를 따라가는데, 복도 끝자락 즈음 대뜸 멈춘 소녀가 벽을 더듬었다.

크게 다를 것 없는 석벽을 건드리자, 쿠르릉, 벽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앞뒤로 튀어나오던 벽은 이윽고 성인 한 명 정도 통과할 너비의 통로로 변했다.

‘이건…….’

여자아이가 자유롭게 감옥을 드나든 방법. 그건 비밀 통로였다.

이런 통로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을 숨기지 못한 원은 황급히 뛰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쏙, 땅에 난 통로에서 소녀의 머리통이 불쑥 솟아올랐다.

비밀 통로는 흔히 볼 수 있는 숲으로 이어졌다.

발을 옮기다가 멈칫한 원은 제가 나온 통로를 돌아봤다. 통로는 이미 평범한 흙바닥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이리로 와, 어서.”

소녀는 까마득한 숲을 제집인 양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되도록 멀리 가야 돼.”

부스럭, 작은 여자아이와 커다란 늑대가 빠르게 수풀 사이사이를 지나갔다.

소녀의 작은 손에는 늑대 털이 한 움큼 쥐어진 상태였다.

‘털은 좀 놓지.’

머리채를 잡힌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인데. 쯧 혀를 차던 원은 무심코 위를 올려다봤다.

삐이이-

밤하늘 아래, 매 한 마리가 탐색하듯 공중을 돌고 있었다. 배신한 측근이 부리는 매였다.

‘질기긴.’

늑대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생사 확인을 위해 아직까지도 숲을 뒤지는 모양이었다.

공중의 매에게 발각되고 추격자들을 마주치는 건 시간문제.

‘이 이상은…….’

함께 있는 이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소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원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외면해 온 현실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윽고 늑대의 몸에서 검은 빛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타닥, 열심히 달리던 소녀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왠지 손에 잡힌 감촉이 바뀐 듯한 기분이었기에.

분명 부드러우면서도 뻑뻑한 털이 만져져야 하는데, 다른 걸 맞잡고 있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완전히 멈춰 선 소녀는 휙 뒤돌자마자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어……?”

손에 잡고 있는 건 털 따위가 아닌, 제 것과 똑같이 생긴 인간의 손이었다.

“……?”

늘 담담하던 소녀의 표정 위로 파란이 스쳐 지나갔다.

“……??”

온갖 물음표가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뻐끔뻐끔, 소리 없이 입을 여닫은 소녀는 손에서 시선을 들었다.

밝은 달 아래 자리한 제 또래의 소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까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 깨끗한 피부와 척 봐도 고급스러운 의복.

달리는 사슴 위에서 봐도 고귀한 신분임이 틀림없는 외양이었다.

다만 피범벅에다, 복부 쪽이 유독 심하게 해진 의복이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귀공자 같은 소년의 얼굴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너,”

충격에 휩싸인 소녀를 마주한 원이 입을 떼는 찰나, 삐이- 또다시 매가 울었다.

매와 원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그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가 틀림없었다.

스르륵, 원은 땀이 밸 정도로 꽉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얼어붙은 소녀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늑대라 여긴 이가 사람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소녀를 등진 원은 곧장 숲 깊숙한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련 따위는 없었다.


‘나를 잡아먹어.’

한 걸음.

‘이제 좀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니?’

두 걸음.

‘차라리 나도 엄마 아빠랑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세 걸음.

거침없이 내딛던 원의 발이 우뚝 멈췄다.

늑대에게 죽기 위해 감옥까지 온 주제에, 도리어 늑대를 살리려 안절부절못하는 소녀의 꼴이 우스웠다.

더 웃긴 건, 배신자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이 소녀를 함께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그랬다. 늑대는 한 가지에 각인되면 죽을 때까지 얽매이는 집요하고 이상한 족속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헛소리라고 치부했는데, 왜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지.

실소를 자아낸 원은 제자리에서 몸을 반쯤 틀었다.

황금색 눈동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마치 수풀 사이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반사적으로 살짝 물러난 소녀를 빤히 바라보던 원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죽지 말고 기다려.”

나지막한 목소리에 뒤로 물러나던 소녀의 발이 멈칫했다.

“내가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살아 있어. 마지막 말과 함께 숲의 어둠이 소년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소녀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이 사라진 길목을 응시했다.


늑대가 사실은 사람이었나?

아니면 사람이 사실은 늑대였나?

언제부터 사람이었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파도 속에서 헤엄치던 소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쥐어짜 낸 목소리는 처참히 떨리는 상태였다.

“어떻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배신감을 누르지 못한 소녀가 콩콩 뛰었다.

동네 사슴들, 글쎄 정성껏 돌본 다친 늑대가 실은 사람이었대요.

지나가는 사슴을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벤디 레피.”

그때 억누른 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던 소녀가 몸을 굳혔다. 사람이 된 원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경직이었다.

덜덜덜, 공포에 질린 아랫입술이 하릴없이 떨렸다.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억지로 움직인 소녀가 뒤돌았다.

“……숙부님.”

급히 나온 듯 숄을 대충 두르고 나온 중년 남자가 물었다.

“밤중에 어디로 가려던 거지?”

남자는 소녀의 발목에 걸린 위치 추적용 발찌를 내려다봤다.


내내 저택 안이나 인근에만 머물던 기척이 갑작스럽게 멀리 벗어나기에, 급히 쫓아온 참이었다.

“그냥 잠깐 산책을…….”

“이런 밀림에서 산책이라, 그것도 한밤중에.”

미처 변명을 생각하지 못한 소녀는 불안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택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아직 가주 승계가 끝나지 않았다.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너는 이곳을 마음대로 나설 수 없다고.”

“…….”

“가주가 바뀌는 시점에 너마저 사라지면, 마치 내가 가주가 되기 위해 네 부모를 처리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순간이지만 소녀의 밀색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가주 자리에 눈이 멀어 부모님의 죽음을 함부로 말하다니.

소녀는 저 탐욕스러운 자가 정말 아버지의 친동생이 맞나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형형한 눈빛을 아니꼽게 내려다본 남자가 마력을 운용했다.

“쯧, 꼴 보기 싫은 눈빛하고는.”

하여간 부모나 자식이나 마음에 안 드는군.

가벼운 공격 마법을 구상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뇌를 찢는 듯한 고통이
소녀를 덮쳤다.

“아아악!”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할 수준의 마법이었다.

털썩, 작은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었다.


중년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소녀를 안아 들었다.

소녀의 얼굴 곳곳에 누군가에게 맞은 흔적이 보였다. 제 아들 녀석의 짓이 분명했다.

‘쯧, 손은 대지 말라 누누이 말했거늘.’

그러니 못 견딘 아이가 밤중에 밀림에 뛰어들 수밖에. 중년 남자의 입장에서 소녀의 행동은 도주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아직 전 가주파가 남아 있는 이상, 명목상으로라도 소녀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이 아이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차후 가주직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른 거니까.

화악, 중년 남자의 손에서 나온 빛이 소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린아이인 만큼 뇌에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기억이 뒤흔들릴 터였다.

제 아들 녀석에게 맞은 기억과 달아나려 한 기억이 사라지도록.

그리고 소녀가 의식을 차렸을 땐, 마법의 여파로 며칠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후였다.

옅은 밀색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원의 눈앞에서 일렁였다.

로브를 두른 여자는 마치 증발하듯 감옥에서 사라졌다.

거의 일직선 지형인 이곳에서, 달리 숨을 만한 장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뒤질만한 곳은 전부 뒤진 원은 이끼 낀 벽 앞에 섰다. 허공에서 잠시 멈칫한 손이 곧 석벽을 탐색하듯


쓸었다.

무작정 여기저기를 건드려 보던 원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까치발을 들고 벽을 이리저리 더듬는 여자아이가 허공에 그려졌다.

소녀의 작은 체구로도 큰 어려움 없이 짚은 지점.


당시 자신과 소녀의 신장을 되짚은 원이 몸을 굽혔다.

네 발로 선 제게는 조금 높고, 소녀는 손을 높이 들면 닿는 위치.

가늠한 원이 석벽의 한 지점을 누르는 순간 쿠구궁, 벽이 진동했다.

이내 성인 한 명이 드나들 크기의 통로가 드러났다.

“……하.”

짧은 숨을 토해 낸 원은 이마를 덮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수년간 그토록 찾아 헤맨 장소가 이렇게 간단히 나타날 줄은.

허무함과 동시에 속이 뻥 뚫린 듯한 해소, 그리고 희열이 밀려들었다.

원의 발이 망설임 없이 통로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45 화>

쿠궁, 잘 닫아 둔 비밀 통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에서 원이 가볍게 뛰어오르는 장면을 목격한 나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말이 돼?’

늑대가 저 통로를 어떻게 아는 건데.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한 나는 불안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내가 통로를 여는 걸 봤나?’


어떡하지, 어떡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안절부절 제자리라도 돌고 싶었으나, 혹여 원에게 들킬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둠이 조금 가시고, 어스름한 새벽이 찾아온 시간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지도 못하는데, 괜히 움직였다가는 꼼짝없이 원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저 늑대가 어디 보통 늑대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휙, 원이 내가 숨은 수풀 쪽을 돌아봤다.

무서울 정도로 감이 좋은 건지, 이 먼 거리의 기척도 눈치챌 정도로 잘난 건지. 이유가 뭐가 됐든


밉살맞은 늑대였다.

“……!”

숨을 삼킨 내가 교목에 한껏 몸을 붙였다. 원이 망설임 하나 없이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기에.

온다, 온다, 오고 있어, 진짜 온다고.

울상 지은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내적 비명을 질렀다.

거의 자포자기에 이른 찰나 확, 누군가 내 몸을 뒤에서 당겼다.

“읍!”

뒤이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끔 검은 장갑 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놀란 내가 몸을 버둥거리자, 입을 막고 있던 손이 검지를 쭉 세웠다. 마치 조용히 하라는 손 모양 같았다.

“…….”

저벅저벅, 발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원이 가까워졌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로브를 두른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찍소리 하나 안 내고 숨죽인 와중,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간발의 차로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원이 숲 깊숙이 멀어졌다.

‘……갔나?’

안도하며 참고 있던 숨을 살짝 내쉬던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정체 모를 괴한과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단 사실을 인지한 탓이었다.

입을 막혀서 뒤를 돌아볼 순 없었지만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체격이 나보다 훨씬 크고, 온몸이 돌처럼 단단한 자.

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 입을 가로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움직임을 속박하던 팔 힘이 없어지자, 이때다 싶은 내가 뒤돌아봤다.

“누구……!”

하지만 뒤에는 사람이 아닌 우뚝 솟은 교목만이 자리했다.

짹짹, 어느새 푸른 새벽이 가시고 날이 밝아 있었다.

아침 해 아래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머리는 산발에, 여기저기 넘어지고 부딪히느라 몸은 자잘한 상처투성이였다.

“대체…….”

늑대는 늑대대로 수상하고, 입을 가로막은 건 또 누구인가.

폭풍 같은 밤이 지나고 남은 거라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뿐이었다.

멍하니 자리를 지키던 나는 아카데미 숙소 방향을 돌아봤다.


다른 건 몰라도 입을 가로막은 괴한.

‘그 백호.’

이것만은 의심스러운 이가 한 사람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더 이상은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원이 아쉬운 숨을 뱉었다.

환한 아침부터 남의 영역, 그것도 남의 저택 인근을 배회하고 다닐 입장이 아니었다.

원은 밤이 지나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쨍한 햇빛 때문인지 한밤중에 본 장면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나풀나풀 흩날리던 밀색 머리카락. 그걸 코앞에서 놓쳤다.

짙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그가 손을 쥐었다 펴는 일을 반복했다.

밀림 한복판에 선 원은 저택을 돌아봤다. 밤중에야 알 수 없었으나 소담하면서도 화려한 저택이었다.

‘레피 저택…….’

사실상 아쉬워할 것 하나 없었다.

여자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단서 하나 없던 감옥의 위치도 알아냈으니까.

초식 영역에 육식 수인인 원의 권위가 닿지 않는다더라도, 소녀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

아침을 준비하는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이 휙 몸을 틀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학장님이 준 마도구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 마력이 되돌아온 마도구에서 화악, 하얀 빛이 일었다.


이윽고 거울 속에 주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우 수인이 나타났다.

거울로 접근한 나는 얼굴을 가까이 디밀었다.

모니 아버지에게 맞은 뺨이 조금 붉긴 하지만, 입가가 터지거나 상처가 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대충 자다가 어디 박았다고 둘러댈 수 있을, 딱 그 정도.

‘됐어.’

교복으로 환복까지 마친 나는 벌컥 문을 열고 숙소 방을 나섰다. 거침없이 내딛던 발이 공중에서 뚝


멈췄다.

“노랑아?”

발치에 털이 온통 진흙 범벅이 된 노란 짐승이 있었기에.

밀림에서 구르기라도 한 듯 가시랭이까지 덕지덕지 붙인 상태였다.

“위험하게 혼자 숲속에 다녀온 거야?”

놀라기도 잠시, 노랑이를 살피던 나는 콧잔등을 움찔움찔 경련했다.

잠깐.

‘밀림에서 구르다 왔다고?’

이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다른 짓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체험 학습 기간 동안은 밤마다 레넌이 노란 짐승을 데려갔는데.

노란 짐승이 이렇게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건, 간밤에 레넌이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입술을 꾹 깨문 나는 조금 전, 밀림에서 내 입을 가로막은 괴한을 떠올렸다. 사슴 수인인 내 모습을


목격한 괴한을.

레넌과 비슷한 체격, 커다란 손. 원에게서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유유자적 홀로 돌아다니고 있는 노란 짐승까지.

‘틀림없어.’

의심에 한층 불이 지펴졌다. 레넌 외엔 있을 수 없었다.

버둥거리는 노란 짐승을 허리에 낀 나는 곧장 남학생들이 묵는 층으로 달려갔다.

‘확인해야 돼.’

레피 저택 주변 지리에 훤한 내가 곧장 지름길을 통해 숙소로 돌아왔으니, 레넌이 나보다 먼저 숙소에


도착했을 리는 없었다.

“뭐야!”

“학생회장?”

깜짝 놀란 복도의 남학생들이 내외하며 제 몸을 가렸다. 의복을 다 갖춰 입었으면서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명 방에 없어야 한다.

순식간에 복도 끝 귀빈 방에 도달한 내가 벌컥, 예고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건 활짝 열린 창문으로 스민 햇살, 너른 침대, 그리고…… 은색 뒤통수. 상의를


탈의한 채 엎드려 자는 중인 레넌이었다.

‘방에…… 있잖아?’

하얀 침구 사이로 불거진 등 근육을 목격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잠이 덜 깬 레넌은 작게 짜증 내며 하얀 베개를 머리 위에 덮어썼다. 움직임에 따라 쪼갠 듯한 근육들이


제각각 꿈틀거렸다.

‘잘못 짚었나?’

아냐, 잠든 연기 중일 수도 있어.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백호로 변해서 달렸으면 나보다 먼저 도착했을 확률도 있으니까.

그렇게 여기면서도 자신감이 점점 사라졌다.

주춤, 주춤. 확신이 조금 없어진 나는 들어온 경로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끼이익, 몇 초 전만 해도 대차게 열렸던 문이 소심하게 닫혔다.

“…….”

이 방에 들이닥친 이유조차 희미해진 나는 그저 눈만 깜박였다.

육식 수인은 발육도 남다른가. 번뇌를 유발하는 등판이었다.

“회장, 이게 무슨 소란이에요?”

소란을 들은 안나가 계단으로 올라왔다.

“남학생들의 층에 멋대로 들이닥치고 그러면 안 돼요.”

내 어깨를 짚은 그녀가 한 소리 하려는 순간 레넌의 방문이 열렸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나와 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부스스한 머리로 등장한 레넌이 반쯤 뜬 눈을 비볐다. 물론 상의는 여전히 탈의한 상태로.

여기가 어디라고 밖으로 나와. 머리카락이 쭈뼛 선 나는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회장, 왜?”

“…….”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문제는 바로 네 몸뚱이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연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냐, 더 자.”

김샌 표정을 지은 레넌이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굳은 내 곁으로 다가온 안나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회장, 코피부터 닦아요.”

그녀는 엉큼하긴, 중얼거리며 대놓고 면박을 줬다.

어쩐지 머리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더라니.

조용히 손수건을 받아 든 나는 코밑을 문질렀다.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충 코를 문질문질 닦은 내가 안나에게 다시 손수건을 건넸다.

“안나도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군요.”

뒤늦게 제 상태를 인지한 안나가 손수건으로 코를 문질렀다.

피비린내가 낭자한 아침이었다.

나는 흩어 놓은 짐을 바쁜 손길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드디어 페트리온을 떠나 수인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이곳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를 알아보는 사슴 수인을 마주치지 않은 걸로 안심하면 뭐 하나.

초식 수인인 모습으로 원을 마주칠 뻔했는데, 그것도 레피 저택 감옥에서.


심지어 숲에서 내 입을 가로막은 괴한의 정체도 오리무중이었다.

‘그 괴한이 레넌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데?’

아카데미 학생이어도 문제요, 제삼자라도 문제. 그냥 다 문제였다.

초조한 마음을 삼키며 캐리어에 꾸역꾸역 짐을 넣는데, 옆얼굴이 뚫릴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왜 시선이 느껴지는 건지.

“……?”

느닷없이 오싹해진 나는 시선의 근원지로 휙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헤일린 이스단이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놀라서 기절할 뻔한 나는 스스슥, 그림자처럼 조용히 구석으로 이동했다.

‘여행 불참 아니었어?’

무엇보다 저 작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 창틀에 대충 걸친 손만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헤일린 이스단도 손이 큰 편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의 발끝부터 긴 다리, 상체를 훑었다.

점점 올라간 시선이 나를 빤히 보는 헤일린 이스단과 딱 마주쳤다.

“뭘 변태처럼 훑어?”
#<46 화>

“누가 변태……!”

왈칵 대답하던 내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예 사심이 없었다기엔 헤일린 이스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멀끔했다.

변명을 생각하며 눈을 굴리는데, 창틀에서 가볍게 내려선 그가 대뜸 다가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순간 탁, 벽이 등을 가로막았다.

벽과 벽 사이에 갇힌 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외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아무리 육식 수인에게 조금이나마 익숙해졌다 해도 이 정도 거리는 무리가 있었다.

눈을 내리깐 헤일린 이스단은 긴 손가락을 내 목 부근으로 가져왔다.

흠칫, 몸을 움츠리자 잠깐 공중에서 멈춘 손이 다시 내 교복 타이에 닿았다. 짐을 싸느라 대충 맨


상태였다.

‘닿지 말라더니 자기는 왜 마음대로 닿는데?’

할 말이야 많지만 곧이곧대로 뱉었다간 이 자리에서 사라질지도.

헤일린 이스단은 사람을 괜히 경직되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엉성하게 맨 내 교복 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뗐다.

“새벽에.”

엄지가 타이를 느리게 스치고 지나갔다.

“방에 없던데.”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내내 시선을 피하던 나는 고개를 꺾어 그를 올려 봤다.

‘설마.’

헤일린 이스단은 손이 크고, 신장도 레넌과 비슷했다.

비슷한 체격. 그리고 원에게서 기척을 숨길 수 있을 만한 또 다른 이.

예쁘면서도 조금 나른한 얼굴이 더없이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초식 수인임을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사람.

‘날…… 떠보는 건가?’

괴한은 대체 누굴까. 백호? 사자?

갈피를 잡지 못한 내가 태연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방에 있었는데?”

시치미를 뚝 떼는데, 갑자기 헤일린 이스단의 검지가 내 볼을 콕 눌렀다.

‘아파!’

말 못 할 고통을 삼킨 내가 양손으로 뺨을 짚었다. 간밤에 모니 아버지에게 맞은 부위였다.

“이제는 맞고 다니네.”

“이건 욕실 수건걸이에 부딪혀서,”

“누구야?”

열심히 준비해 둔 변명을 필요 없게끔 만드는 질문이 아닐까.

뺨을 가린 채 거리를 벌릴 기회만 보고 있자, 그가 내게서 휙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웃긴 얼굴이 울퉁불퉁해졌어.”


저 사자, 부숴 버리겠어.

침착히 잡히는 대로 단화를 벗던 내가 멈칫했다.

헤일린 이스단의 등에 붙은 작은 풀 가시. 노랑이의 털에 붙어 있던 가시랭이와 동일한 종류였다.

‘저건…….’

헤일린 이스단도 숲에 다녀왔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그는 창문 너머로 휙 뛰어내렸다.

“잠깐!”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바로 앞에서 놓친 내가 창가로 뛰어갔다.

바닥에 착지한 그가 이미 유유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 괴한이…….’

저 사자일 수도 있다고?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무엇보다 일단은…….

진득한 내 시선이 헤일린 이스단의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의 목에는 방금 전, 방에 있을 때만 해도 없던 붉은 타이가 자리한 상태였다.

‘저 도둑놈의 사자.’

내 교복 타이 돌려 내.

학생회 전용 마차에 앉은 안나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회장, 다른 마차를 타고 가겠다고요?”


마차 밖에 쪼그려 앉은 나는 노란 짐승의 털에 붙은 가시랭이를 집게로 하나하나 떼어 주며 답했다.

“네, 볼일이 좀 있어서요.”

“혼자 쓰기엔 너무 넓은데요. 뭐, 좋긴 하지만. 말 나온 김에 돌아가면 학생회 인원도 좀 충원하죠.”

“그건,”

뭐라고 더 말을 덧붙이려는데,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학생회는 한 명 더 있을 텐데.”

야닉 펠이었다.

들은 척도 안 한 안나는 탁, 냉정히 창문을 닫았다.

마차에 오르려는 자와 밀어내는 자. 육식 괴수들의 의미 없는 전쟁이 발발했다.

불똥이 튈까 노란 짐승을 배낭에 집어넣은 내가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점점 느려지며 화려한 마차 앞에 다다랐다.

원 리오나드와 레넌 에던트, 헤일린 이스단에게 배정된 마차였다.

살다 살다 제 발로 이 마차에 오르는 날이 올 줄이야.

마치 맹수 소굴에 무기 하나 없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 마차 안에는 페트리온에서의 의문을 해결해 줄 이가 모두 모여 있다.

느닷없이 레피 저택 감옥에 나타난 늑대와, 숲에서 만난 괴한으로 의심되는 사자.

땀이 배어난 손을 비빈 나는 곧바로 문고리를 당겼다.

안에는 원과 레넌, 그리고.

‘……헤일린 이스단은 없네?’


정말이지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인물이었다. 약간 실망한 나는 슬그머니 마차에 올라 빈자리에 착석했다.

“이거 타고 가게?”

기지개를 켜고 있던 레넌이 의아하게 물었다.

“으응, 근데 사자는?”

“거기 있잖아.”

레넌은 돌돌 만 가십지로 의자에 둔 내 배낭을 가리켰다. 노란 짐승이 든 배낭이었다.

아, 얘도 사자였지.

그제야 헤일린 이스단을 이름이 아닌 종족으로 지칭한 걸 깨달은 내가 정정했다.

“아니, 얘 말고. 그…… 이스단은?”

“그러니까 거기 있잖아.”

또다시 돌돌 만 가십지가 내 배낭을 향했다.

정확히는 노란 짐승도 이스단 가문 소속이니까 그 말이 맞긴 한데.

‘누굴 말하는 건지 뻔히 알면서.’

레넌 특유의 소모적인 말장난이었다.

포기하며 한숨 쉬는 동시에 드르륵, 진동한 마차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회장, 아침에 내 방에는 왜 왔는데?”

레넌의 질문에, 자연스레 아침의 살색 광경을 떠올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머뭇거리는 내 반응을
빤히 살핀 레넌이 툭 말했다.

“덮치려고?”
“그래, 덮…….”

미쳤나 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입을 텁 막았다. 안타깝게도 긍정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후였다.

조금 눈을 크게 뜬 레넌은 곧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이러면 곤란해, 나는 보수적이라서.”

네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데, 계속 창밖만 보던 원이 바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신관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네?”

“혼인 자체를 못 할 뻔했지.”

“……?”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접한 나는 벌어지는 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레넌과 신관이라니. 세상에 그만큼 안 어울리는 단어가 없었다.

‘이 호랑이가?’

나는 입을 벌린 모습 그대로 레넌을 돌아봤다.

신관복을 입고선 신을 팔아넘기고 다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불순한 생각을 해 버린 나는 연거푸 신께 용서를 구했다. 그런 내 생각의 흐름을 읽은 레넌이 덧붙였다.

“나 같은 게 신관이 되면 신을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노인네, 아니 학장이 나를 이 아카데미에


처박았어. 그렇게 안 어울리나?”

긴 다리를 쭉 편 레넌이 마차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백은발과 물색 눈동자, 심지어 동물형이 백호인 걸 감안하면 겉모습만큼은 누구보다 성스럽긴 한데.

신의 가호라 말하며 미소 짓는 순간 대지를 밝힐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설득되어 갈 즈음, 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자마자 신의 철퇴라며 야닉 펠의 머리를 깬 주제에.”

신관으로서의 레넌은 가망이 없었다.

“오늘따라 늑대가 묘하게 말이 많네.”

말하는 족족 원에게 가로막힌 레넌이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꽤.”

원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짤막히 대답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교환한 나와 레넌이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답하는 원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무감한 게 아닌, 약간 웃음기 섞인 느낌이었기에.

우리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원을 훑은 레넌이 되물었다.

“찾던 사람이라도 찾았나 봐?”

내내 미동 없던 원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는 선선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찾았지.”

툭, 레넌의 손에 있던 가십지가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나 또한 아랫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지금껏 비웃음이나 예의상 입꼬리만 올리는 정도가 다였는데.

저런 식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뭐가 됐든 나는 저런 원을 몰랐다.

넋 놓고 있던 중 크르릉, 갑작스러운 노란 짐승의 울음소리 덕분에 깜박 정신이 들었다.

“노랑아, 왜 그래?”

멀미라도 하는지 내내 얌전하던 노란 짐승은 침입자라도 마주한 양 하악질을 해 댔다. 타이밍이 마치 저건


가짜 원이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란 짐승이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배낭을 붙든 나는 곁눈질로 원을 살폈다.

‘찾는 사람…….’

불현듯 지금까지 원이 초식 수인과 관련된 무언가를 볼 때마다 과민하게 반응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 레피 저택 감옥에 나타난 것도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였나.

일순 죄수를 찾는 중인가 싶었지만, 어제 레피 저택 감옥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모니, 모니의 아버지.


그리고 끽해야 바닥에 쓰러진 경비병 정도였다.

그런데 찾던 사람을 찾았다니.

원의 저 좋은 기분이 지난밤의 사건에서 비롯된 거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찾는 사람은…….

‘나잖아, 그것도 사슴 수인일 때의.’

방법이야 몰라도, 비밀 통로까지 알아내서 쫓아왔으니까.

‘대체 왜?’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두근거릴 정도의 두통이
일었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바닥에 떨어뜨린 가십지를 주운 레넌이 느지막이 물었다.


“이쯤 되니 왜 찾아다녔는지 조금 궁금한데.”

나도.

나도 궁금해.

이 마차 안에서 가장 궁금한 이가 바로 나였다.

호기심을 주체 못 한 나는 레넌의 질문에 답할 원의 입술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분명 원은 숨어서 나오지 않는답시고 벽을 없애려 하지 않았나. 그러나 후드를 벗긴 후부터는 뒤를 쫓을


때 마법은커녕 무력조차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정확한 이유야 모르지만, 만에 하나 호의에서 찾고 있는 거라면 천군만마의 아군을 얻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잘 회유해서…….’

약간이나마 희망이 생긴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약속했거든.”

이윽고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잡아먹기로.”

내가 언제.

툭, 나는 노란 짐승이 든 배낭을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47 화>
부학생회장석에 앉은 안나는 학생들이 제출한 체험 학습 평가서를 하나하나 넘겼다.

“이색 체험의 현장.”

“초식 수인을 멀리서밖에 보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쉬움.”

“그럭저럭.”

“초식 영역의 역사가 묻어난 숙소가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음, 이하 생략.”

그녀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군요. 뻔한 관광이 아닌 점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나 보네요.”

여행 일정을 고구마밭으로 수정하면 어쩌냐며 멱살을 잡을 땐 언제고, 평가서를 정리하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 평가서는 매해 책정하는 학생회 만족도에 반영된다는데.

언제부터 학생회에 저렇게 진심이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슬프게도 평가서를 검토할 여유가 없는 나는 노란 훈련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훈련해야 돼, 훈련…….”

뭐에 홀린 사람처럼 혼잣말이 중얼중얼 나왔다.

“아니, 훈련은 무슨 훈련이에요? 마력 측정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안나는 훈련복이 늘어날 만큼 나를 당겼다.

“회장이 언제부터 자기 자신한테 그렇게 엄격했는데요?”

“오늘부터 스스로를 채찍질할 계획이에요.”

지금 내 인생이 끝나게 생겼는데 어떡해.

진실을 꺼내지도 못한 나는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원은 잡아먹는다고 하지를 않나.

헤일린 이스단에게 사슴 수인인 사실을 들켰을지도 모르고.

거기다가 숙부에게 내가 육식 수인의 영역에 있다는 단서까지 남기고 왔는데.

지금은 거의 폭풍 전야의 고요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원 리오나드.

‘약속했거든, 잡아먹기로.’

나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고사하고 들키면 죽게 생겼는데 뭘.

천군만마의 아군은 무슨, 회유는 무슨. 그냥 굶주린 늑대에 가까웠다.

‘과거에 만난 적이 있었나?’

요 며칠간 아무리 생각해도 별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장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는데.

안나가 목이 다 늘어날 정도로 훈련복을 잡고 늘어지는 상황이었다.

“이거 놔요.”

“어딜 가려고!”

“악!”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안나가 한 손으로 나를 집어 들어 소파에 던졌다.

못 도망가게끔 내 양 손목을 누른 괴력 곰돌이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했다.

“회장, 잘 들어요.”
들을게, 잘 들을게.

코앞의 송곳니 덕분에 거품 물기 직전인 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안나가 미간 주름을 풀었다. 하나 양 손목을 속박한 손은 풀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요즘 썩 나쁘지 않아요.”

“네? 저와 안나의 관계가……?”

“그런 건 나빠도 되고요.”

너무해.

“생각해 봐요, 학생회를 잘 이끄는 것 또한 훈련이라고요. 회장이 당선됐을 때만 해도 꼭두각시가 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겠거니 생각했는데…….”

너무 무서운 발언 아닌가.

“솔직히 회장이 벌이는 일들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아요.”

“…….”

“회장이 훌륭한 겁보에 구색을 못 갖추고 머릿속을 이해하기 힘들지언정, 그래도 학생회장다워지긴 했죠.
지금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감동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칭찬을 가장한 욕이 이어졌다.

“당장은 그럴싸한 학생회장이 되어, 회장 편이 하나라도 늘어나는 게 곧 힘이고 훈련이라고요.”

사실상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게 원이나 레넌, 헤일린 앞에서만은 무색할 뿐.

“무엇보다 회장은 성적에 욕심이 있어 보이는데.”

움찔, 정곡을 찔린 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죠? 여기서 학생회 역할만 잘해도 졸업 후에 어디서든 환영받는다는 거.”


구천을 떠돌던 정신이 약간이나마 돌아왔다.

그게 본래의 목표였긴 하지.

당장 훈련장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약간 사그라든 나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안나, 그런데요.”

“말해 봐요.”

“안나는 학생회 일에 별로 의욕적이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분명히 원이 그랬지 않나, 예전부터 학생회나 교내 사정에는 딱히 관심이 없던 인물이라고.

이번에는 안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큼, 큼. 헛기침을 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요.”

“뭐라고요?”

“해 보니 적성에 맞더라고요. 아무튼!”

괜히 목청을 드높인 안나가 대놓고 말을 돌렸다.

“조만간 타 아카데미의 학생회가 우리 아카데미에 방문할 거예요.”

“타 아카데미에서요? 왜요?”

“매해 있는 아카데미 간 친선 도모죠 뭐. 작년에는 우리 쪽에서 갔으니, 올해는 그쪽에서 올 차례예요.”

벌써부터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아카데미에서 오는데요?”

“동대륙의 벨헬름 아카데미. 내용은 별거 없어요. 며칠 묵으면서 교내를 돌아보고, 함께 강의를 듣는


정도죠.”

앞선 레펠튼이나 마력 측정이 워낙 규모가 큰 행사여서 그런지 비교적 쉽게 느껴지는 일정이었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떠오르는 동시에,

“단.”

콱, 흉악한 얼굴을 한 안나는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절대 흠 잡힐 일을 만들면 안 돼요.”

수라 같은 안나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내가 외면한 채 물었다.

“왜, 왜요?”

“벨헬름 아카데미 학장이 우리 측 밀란느 학장님의 숙적이니까요. 두 분 다 서로 티끌만 한 흠이라도 잡지


못해 안달이시죠.”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 처음 왔을 때, 교육부란 단어에 과민 반응하던 밀란느 학장님이 떠올랐다.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귀에 들어가선 절대 안 돼!’

물론 학장으로서 아카데미 위신에 민감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허공에 누군가를 향한 욕을 던지던 걸


똑똑히 기억했다.

혹시 그 빌어먹을 영감님이 벨헬름 아카데미 학장은 아닐까.

“그러니 어떻게 보면 가장 무난히 넘어가야 하는 일정이에요.”

겨우 내 팔목을 놓아준 안나가 관련 서류를 뒤적였다.

“더군다나 이번 벨헬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은 다소 별난 작자란 말이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겠죠. 그


전에.”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내려 둔 안나는 주인 없는 빈 책상들을 가리켰다.

“그쪽 학생회를 맞으려면 최소 우리 인원이 다섯 명은 되어야 해요, 저쪽은 최소 여덟일 테니.


구색이라도 맞춰야 한다 이거죠.”
현재는 나와 안나 스웰든, 단 두 명. 조촐한 인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확실히 인원 충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회장, 학생회가 고작 두 사람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잠깐.”

일순 당황한 내가 양손을 휘저으며 만류했다.

그런 말을 크게 하면 누군가가 온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쾅! 학생회실 복도를 청소하던 야닉이 문을 열어젖혔다.

“이 몸을 포함한 세 명이라고!”

쾅! 안나는 빗살 같은 속도로 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최소 두 명은 충원해 오세요.”

내 등을 떠밀다시피 한 그녀가 안경 아래 눈을 번득였다.

“모레까지예요.”

벤디 레피가 학생회장으로 임명된 이래, 처음으로 학생회의가 개최된 기념적인 날.

회의실에 앉은 안나는 부학생회장이란 명패가 놓인 제 좌석을 내려다봤다.

우선은 부학생회장, 안나 스웰든 한 명.

옮겨진 시선이 학생회장석에 머물렀다.

학생회장 벤디 레피까지 두 명.

다시 움직인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전방을 향했다.

맞은편에는 보라색 단발머리와 같은 색 눈동자를 가진 학생.


마력 측정 훈련 때 본 벤디의 클래스메이트, 신시아 폴릿이 자리한 상태였다.

안나의 빤한 눈길을 무덤덤하게 마주하던 신시아가 작게 입을 뗐다.

“학생회에 들어오면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금서를 읽게 해 준다고 해서.”

새로운 학생회 임원은 무슨. 금서로 유인한 지나가는 독서광이었다.

설명하란 안나의 눈초리를 받게 된 벤디가 다급히 말했다.

“서기야, 서기. 학생회엔 서기가 필수잖아.”

서기는 학생회의 문서와 모든 기록을 도맡는 관리자였다.

독서광이라면 필력은 나쁘지 않을 테고, 훈련 때 성과를 보면 꼼꼼한 노력파 느낌이기도 하니.

그럭저럭 수용할 만하다고 생각한 안나는 눈을 감았다.

이로써 서기(금서를 다 읽을 때까지만 기간 한정), 신시아 폴릿까지 세 명.

그리고…….

안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는 순간 우지끈, 회의실 의자가 박살 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엉덩방아를 찍어 버린 곰, 세미가 머쓱하게 어슬렁거렸다.

결국 분통을 참지 못한 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세미를 왜 불러 달라고 하나 싶었더니, 제정신이에요, 회장?!”

분노를 미리 예상하고 있던 벤디는 의연하게 대처했다.

“어떤 모임이든 마스코트는 필수예요. 세미가 마스코트로 부족하단 말은 아니지요?”

“아니, 상식적으로!”

버럭 소리치던 안나가 입을 합 다물었다. 여기서 반박하면 세미의 면전에서 대놓고 흉을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그렁그렁해 보이는 세미의 눈망울에 그녀가 멈칫할 때, 벤디가 얼른 첨언했다.

“이틀 만에 두 명은 무리예요. 일단 지원자도 없는 데다, 제가 그…… 아무 학생이나 뽑을 순 없는


처지잖아요.”

안나는 뒤늦게 벤디를 학생회장으로 만든 무리를 상기했다.

벤디가 의외의 활약을 펼치는 탓에, 숨죽여 기회만 노리고 있는 듯한 그들을.

하는 수 없이 납득한 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세미한테 약한 걸 이용하는 꼴이라니. 그러면서도 곰이 아닌, 세미라고 꼬박꼬박 칭하는


학생회장의 목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세미가 안내 팻말 정도는 들고 다닐 수 있겠죠. 이제 나머지 한 명 남았군요.”

나머지 한 명. 자연스레 벤디의 시선이 회의실 구석 쪽으로 향했다.

뽀독뽀독. 구석에서 천으로 장식용 도자기를 닦는 야닉에게 벤디의 눈길이 닿았다.

#<48 화>

하고 싶다, 하고 싶어, 시켜 줘. 온갖 열망이 야닉의 눈동자 위로 떠다녔다.

기어코 저걸 사용하시겠다.

속이 답답해진 안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알고 있다. 사실상 지금으로서는 속내가 투명하게 보이고, 쓸데없이 끈기 있는 저 하이에나밖에 없음을.

‘세미를 죽이려 했던 녀석이랑.’

후우-
안나의 긴 숨이 암묵적 동의임을 눈치챈 벤디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맞췄다.

“자, 비밀 요원까지 다섯 명.”

“그럼 그렇지, 감히 이 야닉을 빼놓으려고!”

신난 야닉은 냉큼 천을 버린다는 게 그만 도자기를 던지고 말았다.

선대 학생회장이 대신관에게 선물받은 값비싼 도자기였다.

쨍그랑, 산산조각 난 도자기를 바라보던 안나가 첨언했다.

“회장, 저거 빠른 시일 내에 덜 멍청하게 만들어 놔요.”

벨헬름 아카데미 학생회가 도착하기 사흘 전, 이로써 벤디 레피의 학생회가 완성됐다.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 및 서기.

마스코트 한 마리.

그리고 비밀 요원.

결국 도합 셋의 학생회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벨헬름 아카데미 학생회가 도착하는 날이 다가왔다.

‘제대로 썼나?’

맑은 정오, 아카데미 중앙 광장에 선 나는 비뚤어진 붉은 베레모를 고쳐 썼다.

일상생활에선 교복 모자를 자주 쓰지 않아서인지 영 어색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모자를 잘 고정한 내가 뒤를 돌아봤다.

잔머리 하나 없이 머리를 묶은 안나 스웰든이야 늘 단정했고.


보라색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은 신시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괜히 X 클래스를 대표하는 모범생이
아니니까.

그리고 옮겨진 내 시선이 야닉에게 머물렀다.

학생회, 학생회 노래를 불렀으면서 정작 이 자리에 서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

그가 제대로 교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긴 암갈색 장발은 단정히 빗은 상태였다.

거친 들개 같더니, 막상 저렇게 해 놓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몰래 감탄한 나는 배낭 속 노란 짐승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워낙 안 떨어지려 하는 탓에 하는 수 없이 데려온 실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체가 닿거나 만지려 들지만 않으면 얌전하긴 하다는 정도일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삼킨 나는 뒤편에 선 레넌을 돌아봤다.

“너도 계속 여기 있게?”

“학장이 붙어 있으라네.”

안나의 말대로, 밀란느 학장님은 안 그런 척 친선 도모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운 듯했다.

괜한 분란은 금지, 흠 잡히는 것도 금지.

어렵지 않으면서도 어려운 사항을 되뇐 나는 레넌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늑대…… 아니, 원 님은?”

사실상 원은 더 이상 내게 인수인계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제는 안나 스웰든도 있고, 나도 처음 학생회장을 맡았을 때에 비해선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겼으니까.


그러나.

하필 페트리온에서의 사건 이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계속해서 불안을 자극했다.

“몰라, 요즘은 강의실에도 안 와서.”

강의에도 안 온다니. 레넌의 대답이 불안을 더욱 키웠다.

“바쁘겠지 뭐. 원수인지 뭔지를 찾았다고 했으니까.”

“……원수라고?”

“아마? 아무튼 어릴 때부터 쫓은 걸 드디어 찾은 것 같던데.”

내가 그 늑대의 원한을 살 만한 일을 언제 했다고.

‘그리고 어릴 때부터라니.’

기억을 되짚어 봤자 사슴 인생 십구 년 차에 늑대와의 연결고리가 있을 리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은…….’

기어 다닐 때는 몰라도, 그 이후부터는 대부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행복했기에 또렷했고, 두 분이 세상을 등진 기점부터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만약 원을 만났다면 절대 잊을 리가 없는데. 적어도 내 기억 속에 그런 경험은 존재하지 않았다.

억울함과 초조함에 손을 꼼지락거린 나는 다시 말했다.

“사자, 아니 헤일린 이스단도 잘 안 보이던데.”

사슴 수인인 내 모습을 목격한 게 틀림없는데. 조용하기 짝이 없는 그의 동태도 영 신경 쓰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레넌이 툭 물었다.


“왜 백호만 빼고 다 찾아?”

“……뭐?”

너는 여기 있잖아.

당황하며 입을 달싹이는 순간 덜컹덜컹, 마차 두 대가 줄지어 광장에 들어섰다.

벨헬름 아카데미의 심벌이 박힌 고급 마차였다.

끼이익, 이윽고 마차가 광장 중앙에서 멈췄다.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한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특훈을 생각해요.”

뒤편에서 안나의 날카로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난 며칠간의 고된 특훈이 눈앞을 스쳤다.

교양 있고 우아한, 문무까지 겸비한 학생회장으로 탄생하기 위한 특훈이.

고로 겁먹기 금지, 벽에 붙어 이동하기 금지, 군고구마 건네기 금지령이 떨어졌다.

모자를 고쳐 쓰는 와중, 문이 열리며 흑색 교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이어서 같은 교복을 착용한 학생들도 남자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안나의 말대로 최소 여덟 이상이었다.

먼저 내린 남자는 잠깐 우릴 훑더니 곧장 내 쪽으로 직행해 왔다.

초상화를 미리 봐 둔 덕분에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밀러 워든.’

올해 벨헬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인 표범 수인, 밀러 워든.

노란색과 흑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의,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준수한 남자였다.

닿을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온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학생회장인 밀러 워든입니다.”

내 뒤에 선 레넌에게.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 보던 레넌이 밀러 워든을 따라 눈을 휘었다.

“나는 학생회장이 아닌데.”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밀러 워든의 터무니없는 실수에 우리 쪽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미리 학생회 명단을 서로 주고받았으니 초상화를 확인했을 텐데. 명백한 무시와도 다름없었다.

제대로 된 신분도 무엇도 없는 나를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겠지.

“저 자식이,”

이런 건 또 귀신같이 눈치챈 야닉이 몸을 들썩였다.

‘안 돼.’

이 정도 무시쯤이야 지금껏 수인 아카데미에서 당한 일에 비하면 약과. 나는 더 이상 밀란느 학장님께


밉보여선 안 되는 몸이었다.

시의적절하게 꽈악, 발을 짓밟은 안나의 조치 덕분에 야닉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괴력에 차마 아프다는
비명조차 못 지른 거겠지만.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닉과 밀러 워든 사이로 얼른 끼어든 내가 손을 내밀었다.

“학생회장인 벤디 레피예요, 반가워요.”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밀러 워든입니다.”

밀러 워든의 입이 부드럽게 휘어짐에 따라 입가의 송곳니가 반짝였다.


이 표범의 초상화를 보며 특훈한 덕분에, 가까스로 움츠리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악수를 끝낸 밀러 워든은 곧장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았다. 나와 닿았던 손이었다.

‘나도 표범과 악수하고 싶진 않거든.’

으.

덩달아 교복 치마에 악수한 손을 비빈 내가 뒤에서 게슴츠레 흘겼다.

저 표범, 원 리오나드보다 약 백 배 정도 밉상이야.

불편한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교정을 구경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화려한 건물들을 둘러보던 벨헬름 학생회가 흠칫, 몸을 굳혔다.

머리에 나와 같은 붉은 베레모를 쓴 세미가 나타난 탓이었다.

크헝, 세미는 가슴에 앞발을 얹으며 완벽한 예를 취했다.

이어서 입에 팻말을 물고 어슬렁어슬렁 앞서가기 시작했다. 고된 특훈의 성과였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한 몸에 받은 내가 부언했다.

“아카데미 안내를 맡은 학생회 마스코트예요. 수인 아카데미는 동물과의 교감을 중시하거든요.”

“아, 그래서 등에 새끼 사자를!”

“그것참 신기한 문화군요.”

벨헬름 학생회 임원들이 웃음을 자아냈다. 물론 감탄을 가장한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세미의 발치도 못 따라오는 버러지들이…….”

뒤에서 안나의 부들부들 떨리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맙소사.’
이번에는 야닉이 아닌 괴력 곰돌이가 폭주할 낌새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찰나에,

“워.”

조용히 있던 신시아가 묘한 소리를 냈다. 마치 날뛰는 짐승을 진정시키듯 단호한 손짓을 취하며.

어이없게도 그 괴상한 손짓에 이성을 되찾은 안나가 진정하며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 북 치고 장구 치는데, 사고는 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얼른 끝내 버리자.’

일정대로 따르자니 벨헬름 학생회는 비협조적이었고, 우리 쪽 학생회는 폭탄이 많았다.

특히 벨헬름 학생회 측에서 교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데, 그게 또 따져 묻기는 애매한 수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빠른 판단하에 예정보다 빨리 아카데미 교정 안내를 끝마쳤다.

겨우겨우 학생회실 앞까지 도착했을 즈음,

“에던트 가문의 적자분.”

밀러 워든이 대뜸 레넌을 돌아봤다.

“먼 거리이지만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소개드리자면 저는 워든 가문의 차남, 밀러


워든입니다.”

나를 대할 때보다 훨씬 친근한 목소리를 낸 그가 학생회실을 가리켰다.

“다름이 아니라 긴히 상의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만.”

학생회실 앞에서 내가 아닌, 심지어 학생회도 아닌 레넌과 상의하겠다는 건 또 뭔지.

슬슬 불쾌감이 올라온 순간, 밀러 워든을 따라 미소 지은 레넌이 어깨를 으쓱였다.

“영광입니다.”
곧바로 수락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지 반색한 밀러 워든이 활짝 웃었다.

“그럼 어서,”

“그런데.”

“……?”

“저는 점박이랑은 대화를 못 하는 지병이 있어서.”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라리 그냥 표범이 싫다고 하지.

내심 통쾌한 마음에 입꼬리가 경련할 뻔한 나는 입을 슬쩍 가렸다.

“아, 지병이.”

지병이 도진 레넌은 현기증을 일으키며 멀어졌다.

저런 빵빵한 팔로 머리를 짚어 봤자 설득력이 없음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49 화>

말하는 폭탄이 제 발로 사라져 줘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겨우 표정을 관리한 내가 학생회실 문을 열었다.

“상의할 게 있으시면 들어가서 저와,”

“하.”
밀러 워든의 얼굴에 내내 걸려 있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뒤이어 밀러 워든은 나를 대놓고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대체 이런 거랑 뭘 논하라는 거야?”

이 자리에서 가장 지체 높은 귀족인 레넌이 사라지자마자 숨겨 둔 인성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돌변한 것과 별개로, 손바닥 뒤집듯 변한 표정에 놀란 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

시종일관 배시시 웃을 땐 언제고, 지금은 돌도 씹어 먹을 정도의 살벌한 표정.

하필 머리 색도 검정과 노랑이 뒤섞인 탓에, 송곳니를 드러내는 표범과 겹쳐 보였다.

지레 겁먹고 물러나려던 나는 아차 싶어 간신히 자리를 지켰다.

겁먹기 금지, 겁먹기 금지. 세뇌에 가까운 특훈의 성과였다.

나와 내 뒤편에 선 학생회를 찬찬히 둘러본 밀러 워든이 쯧, 짜증스레 혀를 찼다.

“작년에 비해 수준이 낮아도 한참 낮아. 원 리오나드 님은 어떻게 된 거지?”

과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뒤쪽이 너무 조용하지 않나. 의아해진 내가 휙 뒤돌아봤다.

발광 직전인 야닉의 입을 틀어막은 안나가 긍정하듯 끄덕였고, 부들대는 야닉의 다리를 포박한 신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작년 학생회에 비해 수준 낮긴 하지.

일말의 타격감조차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게까지 객관화가 잘될 필요는 없잖아.

왠지 서글퍼진 내가 다시 전방을 돌아볼 때 밀러 워든의 입이 열렸다.

“더 볼 것도 없는 떨거지들이군.”

“…….”

“돌아가지.”
밀러 워든은 학생회실 문 앞에서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떨거지.

그 단어에 기어코 야닉의 눈이 뒤집혔다.

폭발적인 힘에 순간 안나와 신시아는 그만 야닉을 놓치고 말았다.

“야닉 펠!”

아차 싶은 안나가 뛰쳐나가는 야닉을 향해 팔을 뻗었다.

말로 비아냥거리는 정도와 직접적인 마찰을 빚는 건 얘기가 달랐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붙잡지 못한 옷깃이 안나의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밀러 워든을 향해 야수처럼 달려드는 야닉이 느리게만 보였다.

퍽!

밀쳐진 밀러 워든의 몸이 학생회실 안쪽으로 기울었다.

다 끝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안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밀러 워든을 밀친 건 야닉이 아닌…….

“회장!”

벤디였다.

학생회실 바닥에 주저앉은 밀러 워든은 홱 고개를 꺾어 벤디를 올려 봤다. 워낙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학생회장,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러고도 친선,”


“학생회실에서 긴히 상의할 게 있으시다면서요?”

따지려던 밀러 워든은 잠깐 말을 잃었다. 어떤 발언을 하든 초지일관하게 담담하던 벤디의 눈이 더없이


싸늘했다.

“정중히 대해 주신 만큼 저희도 정중히 모셔야지요.”

“이 무슨……!”

“회장,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벨헬름 학생회 측에서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밀러 워든을 일으켜 줄 순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벤디가 떡하니 학생회실 입구를 가로막았기에.

“학생회장 간의 긴밀한 대화입니다. 죄송하지만 떨거지들은 들어오실 수 없어요.”

벨헬름 학생회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듯 훑은 벤디가 쾅,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학생회장을 제외한 두 아카데미의 학생회만이 덩그러니 복도에 남겨졌다.

심지어 벨헬름 학생회보다 더욱 얼빠진 건 다름 아닌 안나와 신시아였다.

누구신지.

두 사람이 아는 한 벤디는 저런 행동을 할 용자가 못 됐다.

심심하면 학생회실 창고와 한 몸이 되는 겁보가. 세미와 여전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겁쟁이가.

뭐가 됐든 방금 전의 벤디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굳은 두 사람과는 다른 의미로 경직된 야닉은 이를 악물었다.

‘방금…….’

이 야닉을 떨거지라고 표현했답시고 저토록 화내 주다니.

감격을 주체 못 한 그가 천천히 눈가를 덮었다. 멋진 동료애였다.


쾅, 벤디는 학생회실 문을 닫자마자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벤디, 새겨듣거라.’

사과는 빠를수록 분노를 덜 산다.

부모님의 조언은 따라서 나쁠 게 없었다.

채 일어나지도 못한 밀러 워든은 화낼 시기마저 놓치고 말았다.

뭐야 이 오락가락하는 또라이는. 살면서 이렇게 빠른 사과는 또 처음이었다.

반면 벤디는 새침한 표정 뒤로 절규를 삼키는 중이었다.

학생회를 떨거지로 지칭하는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는데.

돌이키면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도 쪽을 흘끗 곁눈질한 벤디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야닉은 몰라도, 안나 스웰든이나 신시아까지 떨거지라고 칭한 건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도 사고를 쳤으니 수습해야겠지.

이대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면 괴력 곰돌이가 자신을 짜부라뜨릴지도 몰랐다.

“일단 앉으시지요.”

부르르 떤 벤디는 언제 밀쳤냐는 듯 공손하게 소파로 자리를 권했다.

탁, 탁, 흑색 교복을 털며 자리에 착석한 밀러 워든은 아니꼽게 벤디를 살폈다.


자리를 권해 놓고 창고로 들어가는 저 학생회장이나.

수준 낮다는데 고개나 끄덕이는 학생회나.

안내 팻말을 들고 다니는 곰이나.

‘그리고…….’

밀러 워든의 눈길이 벤디의 배낭 속에서 길게 하품하는 노란 짐승에게 닿았다.

무엇보다 저 새끼 짐승.

일개 짐승이라기엔 기척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잠깐 의심한 밀러 워든은 이내 헛웃음을 쳤다. 설마 수인인데 저런 굴욕을 참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나.

뭐가 됐든 상식을 다분히 벗어난 이상한 집단이었다.

“우선은.”

밀러 워든이 진정하기까지 기다린 벤디가 슬그머니 말문을 뗐다.

“나중에 친선 도모 보고서를 교육부에 제출해야 하는데, 서로 얼굴을 붉혀 봤자 좋을 게 없지 않나요.”

“…….”

“제가 학생회장인 게 마음에 안 드시는 눈치인데.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입을 딱 닫은 밀러 워든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밉살맞은 표범.

벤디는 딴청 피우는 밀러 워든을 보며 생각했다.

전년도 학생회장인 원 리오나드를 찾는 점도 그렇고, 아까 레넌을 콕 집어 긴히 상의하고픈 게 있다는


점도 그렇고.

밀러 워든이 찾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신분이 높고 강하다는 것.


그래도 아쉬운 게 있으니 학생회실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거 아닐까. 뭔가 있어도 있겠다고 생각한 벤디가
은근히 회유했다.

“원 리오나드 님은 만나 보기 어려우실 거예요. 요즘 굉장히 바쁘셔서요.”

아마도 잡아먹어야 할 초식 수인-나로 추정되는-을 찾느라 바쁘겠지.

조금 섬뜩한 상상을 한 벤디가 겨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현재 학생회장은 저예요. 어떻게 생각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 이
자리에 앉은 거고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삐딱하게 구는 이유를 어서 말해 봐. 쉴 새 없이 압박을 가하자, 밀러 워든의 입이 드디어 움찔했다.

“거기서…… 계속 얘기할 겁니까?”

“이 정도 거리감이 딱 좋아요.”

초면의 육식 수인과 실수 없이 대화하려면. 뒷말을 삼킨 벤디가 창고 입구에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그러니 이 이상 접근하지 말아 주세요.”

워낙 태연한 태도라, 심정이 복잡해진 밀러 워든이 되물었다.

“혹시 서대륙 문화의 일종입니까?”

“아뇨, 저희 여우 일족의 문화예요.”

그렇게 여우 일족은 또 한 번 억울해졌다.

한껏 지적하고 싶은 얼굴로 벤디를 쳐다보던 밀러 워든이 마른세수를 했다.

“……뭐, 약초가 하나 필요합니다.”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 그가 푹 한숨 쉬며 말문을 뗐다.


“리울 약초라고, 이곳 서대륙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입니다.”

“약초?”

“네. 게다가 뛰어난 마력을 가진 자가 채약하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구하기가 까다롭죠.”

더군다나 채약 후에도 마력이 담긴 상자에 넣어야 돼서 보관 자체도 어려운 약초였다.

하물며 약효가 초식 수인의 기력을 안정시키는 종류라, 육식 수인 영역에서는 아예 찾아보기 힘들다고.

설명을 듣던 벤디가 되물었다.

“초식 수인의 영역에서나 구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다녀오기엔 시간이 촉박합니다. 채약 자체가 어렵다 보니 구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리고, 약초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않아서.”

그럼 뭐 어떡하라고.

벤디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을 읽은 밀러 워든이 빠르게 부언했다.

“인근에서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요?”

“……밀란느 학장님 소유의 설산입니다.”

벤디는 이제야 밀러 워든의 속내가 투명하게 보였다.

차기 마탑주인 원이 학생회장이면 그런 약초 정도야 손쉽게 구해 줄 테고.

학장의 손주인 데다가 마력도 출중한 레넌이면 따로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부탁할 수 있는 그 둘은커녕 벤디 레피 나부랭이가 알짱거려서 배알이 뒤틀렸다 이거였다.

“그럼 밀란느 학장님께 부탁드려서 직접 채약해 오면 되잖아요? 친선 도모로 여기까지 오신 만큼 거절하진


않으실 텐데.”
벤디의 퉁명스러운 제안에, 일순 말문이 막힌 밀러 워든이 머뭇거렸다.

“……그게.”

“…….”

“그.”

“그?”

“……저희 중엔 채약을 할 수 있을 만큼 마력이 높은 자가 없습니다.”

“뭐요?”

기가 막힌 벤디가 팡, 저도 모르게 제 무릎을 내려쳤다.

#<50 화>

이거 진짜 웃긴 육식 수인들이네. 그러면서 우리더러 떨거지네 뭐네 초장부터 무시를 일삼다니.

다소 격한 반응을 마주한 밀러 워든이 억울하게 항변했다.

“최소 원 리오나드 님이나 아까의 레넌 에던트 님 정도는 되어야 채약이 가능한 약초라고요!”

안 들려, 어쩌라고.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들은 척도 안 하던 벤디가 멈칫했다.

‘……마력이 높아야 채약이 가능하다고?’

일순 제 마력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숙부의 추격을 피하는 것도, 학생회장 역할을 해내는 것도, 이곳 수인 아카데미를 온전히 졸업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걸 이루려면 제일 먼저 힘을 기르는 게 시급하지 않을까.

‘마력이 높아야 채약할 수 있는 약초.’

막연히 추측만 해 온, 몸속에 흐르는 마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우연일 수는 없으니까.

주먹을 쥐었다 편 벤디가 눈을 반짝 빛냈다.

‘어쩌면…….’

시험해 볼 만할지도.

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던 벤디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약초는 왜 필요로 하시는 거예요?”

초식 수인에게만 약효를 발휘하는 약초라며.

그러나 벨헬름 아카데미의 학생회는 전원 다 육식 수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벤디의 질문에 흠칫, 밀러 워든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경직됐다.

무지 수상하네. 더 이상 저 표범을 믿을 수 없는 벤디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저희 학장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눈치라서.”

시선을 피한 밀러 워든은 먼 허공을 보며 설명했다.

“손자며느리분에게 선물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자존심상 밀란느 학장님께 절대 말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의 관계가…….”

“그럼 필요하다고 직접 부탁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기가 막힌 벤디가 팡, 재차 무릎을 내려쳤다.


‘저 파렴치한 표범이!’

학장에게 아첨하고자 한 계획이 틀어질 것 같으니 우리에게 심통 부린 격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학생회장 자리에 오른 건지 올해 최고의 의문이었다.

벤디의 얼굴이 분노로 빨개지자, 밀러 워든은 식은땀까지 훔치며 변명했다.

“수인 아카데미와 달리, 벨헬름 아카데미는 학장님과 교수님의 입김이 무척 강한 곳입니다.”

또다시 벤디가 무릎을 팡 쳤다.

옳거니,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아첨해서 학생회장이 되었구나.

아까의 가식적인 미소와 살랑거리는 태도를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참을 씨근거린 벤디는 느지막이 입술을 열었다.

“……구해 드리면.”

“네?”

“혹시라도 제가 약초를 구해 드리면요?”

눈을 크게 뜬 밀러 워든은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기척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약골이 무슨.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벤디는 예외로 쳐도 될
듯했다.

“회장에겐 기대도 안 합니다.”

“그럼 약속 하나 해요.”

“약속?”

“행여나 제가 약초를 구해 드리면, 교육부에 올릴 친선 도모 보고서를 전체 만점으로 표기하기로.”


지금까지의 친선 도모 보고서에 전체 만점 역사가 있었던가.

잠깐 되짚어 본 밀러 워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죠.”

밑져야 본전이었다. 거기다가 구할 확률도 희박해 보이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밀러 워든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 그리고 하나 더.”

벤디는 밖으로 나서려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무례를 저지른 거 사과하세요.”

“…….”

“저 말고 우리 임원들에게요.”

“약초나 구해 오고 말씀하시죠.”

입꼬리를 비튼 밀러 워든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잠깐.”

아 왜, 왜 또, 또 뭐. 결국 짜증이 치민 그가 홱 뒤돌았다.

얼른 창고에서 뛰어나온 벤디는 집무 책상을 뒤적였다.

곧 서랍에서 나온 백지가 밀러 워든에게 슥 내밀어졌다.

“계약서는 작성하고 가셔야지요.”

안 쓰면 여기서 못 나가.

모든 약속은 서면으로 남겨라. 원에게 몸소 배운 학생회장 철칙 중 하나였다.


“아니, 대체 무슨 자신감인 겁니까?”

“반드시 보고서 만점을 쟁취하겠어요.”

“자신한테 하는 다짐은 마음속으로 하세요!”

반드시 보고서 만점을 쟁취할 것이었다. 덤으로 마력 확인까지.

서대륙의 수인 아카데미.

동대륙의 벨헬름 아카데미.

이 두 아카데미의 교육부 평가 순위가 엎치락뒤치락 바뀌는 건 벌써 몇십 년째 반복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수십 년간 학장을 일임 중인 두 학장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몇 해 전, 웬 토끼 수인이 벨헬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 되었을 때는 어떠했나.

그해 내내 벨헬름 아카데미가 평가 순위 우위를 차지한 걸 생각하면, 밀란느 학장은 자다가도 배가 아파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내 소유의 물건을 필요로 한다고?’

한평생 아쉬운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그 고고한 영감탱이가.

벤디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밀란느 학장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손자며느리한테 껌벅 죽는다는 소문이 있더니.’

약초를 얻은 영감탱이에게 생색낼 상상만 해도 벌써 신나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후후, 후후후.

실없이 웃던 밀란느 학장은 표정 관리를 하며 입 주변을 쓸었다. 아직 학장실에 벤디가 앉아 있었다.


“크흠, 사정은 잘 알겠네.”

헛기침한 학장이 늦게나마 체통을 찾았다.

“그래서, 내 설산에 가서 약초를 가져오는 걸 허락해 달라?”

“네, 부탁드릴게요.”

밀란느 학장 소유의 설산, 런드버그는 아카데미에서 마차로 하루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학장의 관리하에 있는 만큼 위험 요소는 없으나, 설산이란 이름답게 올라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 곳.


약초는 런드버그 설산의 중턱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잠시간 고민한 밀란느 학장이 깍지 낀 손에 턱을 묻었다.

“그 약초는 높은 마력을 가진 자만이 채약할 수 있지. 자신이 있는 건가?”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벤디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호?”

밀란느 학장은 저를 똑바로 마주하는 벤디를 마주 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더니. 여전히 오래 시선을 맞추진 못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문득 밀란느의 눈앞에 산산조각 난 모래시계가 스쳐 지나갔다.

그 정도 마력이면, 활용만 할 수 있다면 약초 채약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

‘하나…….’

아무래도 아직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듯하니, 약초로 제 마력을 가늠해 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벤디 학도.”

“말씀하세요.”

“약초를 가져오지 못할 시에는 오히려 망신만 당할 수도 있네.”

“익숙한 일이에요.”

이미 제가 학생회장 자리에 있는 걸 망신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밀란느 학장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벤디에게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녀오게. 설산을 안내할 안내인도 한 명 붙여 주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

“단.”

“……?”

“레넌은 두고 가게나.”

잠깐 침묵을 지킨 벤디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알게 모르게 레넌의 도움을 받아 온 걸 모르지 않았다. 밀란느 학장의 말은 곧 스스로의 힘으로
약초를 채약하라는 의미.

어떤 의미에서는 학생회장으로서의 시험과도 다름없었다.

달칵, 인사 후 학장실을 나서는 벤디를 바라보던 밀란느 학장이 궐련을 물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설령 벤디가 약초를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밀란느 학장 선에서 쉽게 해결이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나쁠 건 없었다. 아카데미 밖에서의 일은 학장의 책임이 아니니까.

후, 연기를 입 밖으로 뱉은 밀란느 학장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오너라.”

창문 밖으로 검은 인영이 드리워졌다.

이윽고 휙, 창틀을 잡고 내려온 레넌이 학장실 안으로 착지했다.

“레넌.”

쓸데없이 껍데기만 멀끔한 손주를 훑은 밀란느 학장이 인상 썼다.

“내가 호위 겸 감시를 하라 했지, 주인 지키는 똥개처럼 날뛰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똥개가 아니라 백호.”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느냐!”

이번만큼은 조금 억울해진 레넌이 턱을 긁적였다.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벤디와 밀러 워든이 대치할 때


적당한 선에서 빠졌지 않나.

“선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번번이 벤디 레피를 돕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속이 비틀린 학장이 발끈해서 소리 질렀다.

“내 눈엔 아주 신나게 선을 넘나들고 있다 이 녀석아!”

그런 학장은 안중에도 없는 레넌이 빈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뭐!”

“회장 말이야,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


호통치던 밀란느 학장은 답지 않게 수그러들었다.

혹시라도 벤디와 붙어 다니다가 사슴 수인인 사실을 눈치챘나 싶은 걱정이 일었다.

눈치를 살핀 그녀가 눈썹을 들며 물었다.

“이상한 부분이라니?”

“마력도 마력이긴 한데, 조금 억눌린 느낌이 나더라고.”

“……그래?”

다행히 다른 사안이군.

내심 안심한 밀란느 학장은 비서의 보고를 상기했다.

‘초식 영역에 접근부터가 쉽지 않아서, 벤디 님의 행적 조사에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력이라…….’

어차피 비서가 조사만 해 오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밝혀질 일이었다.

밀란느 학장은 손을 내저으며 대강 얼버무렸다.

“이만 관심 끄고, 어쨌든 몰래 벤디 학도에게 따라붙을 생각일랑 접어 두거라. 조기 졸업이 물 건너가는


말로를 보고 싶지 않다면.”

“나도 가고 싶은데. 재밌을 것 같아.”

“어허, 시끄럽다!”

팔짱 낀 레넌은 창가 기둥에 기대어 섰다.

창밖에는 막 학장실 건물을 나서, 학생회실 방향으로 걸어가는 벤디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걷다가도 고꾸라지는 벤디를 내려다보던 레넌이 입술을 쓸었다.

밀란느 학장이 호위를 강요한 이후부터 벌써 몇 달째 지켜보는 허술한 뒷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떨어지는 건가.’

없는 꼬리가 내려간 듯한 레넌의 뒷모습을 발견한 밀란느 학장이 혀를 찼다.

“주인을 못 따라가 시무룩해진 똥강아지 같구먼.”

“비슷하긴 해.”

“뭐라?”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었다.

#<51 화>

기숙사로 돌아온 원은 투명한 구슬에 마력을 주입했다. 마탑과 곧바로 통신이 연결되는 마도구였다.

지직, 지지직.

그의 손보다 큰 구슬이 흐릿하게 미어지더니 노마법사를 비췄다. 스카론 장로였다.

겉치레 인사를 생략한 원이 곧바로 물었다.

“페트리온에 대한 조사는?”

[그것이…… 죄송합니다.]

통신구 속 스카론 장로는 다소 난감한 낯빛으로 보고했다.

[초식 영역 쪽 정보 상인들이 아무래도 육식 수인들에겐 비협조적이라, 우회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조사가


조금 지체되고 있습니다.]

결국은 아직 소녀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


의자에 걸터앉은 원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럼에도 초조하고 답답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 그리고 레피 저택.

이 정도 정보면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는 벌써 찾고도 남았을 텐데.

새삼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이 얼마나 단절되었는지 와닿았다.

[그런데 원 님, 특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특이점?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원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말해.”

[원 님께서 이전부터 소녀의 위로 남자 혈육이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기억을 되짚은 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예전부터 조금 짓궂어.’

여기저기 멍들어 온 여자아이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살의를 불러일으킨 순간이었기에 기억이 틀릴 리는 없었다.

[그러나 레피 가문 가주에겐 아들 한 명이 유일합니다.]

“꼭 가주의 자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을 텐데.”

가주의 친인척, 저택에 방문한 지인, 혹은 저택 고용인 및 그들의 가족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어 둘수록 좋았다.

[그와 관련한 의문점이 하나 있어서요. 현재 레피 가문 가주인 웬스턴 레피는 가주 승계를 받은 지 십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웬스턴 레피 이전의 가주에게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가주인 웬스턴 레피는 그 외동딸의
숙부쯤 되는 인물이죠.]

덜컹, 원은 저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만에 하나 외동딸이 그 소녀라면…….]

통신구 속 스카론 장로는 하얗게 샌 수염을 쓸어내렸다.

[당시 오라버니라고 언급한 자는 남자 혈육이 아니라, 사촌지간인 웬스턴 레피의 아들일 가능성도
보입니다.]

스카론 장로의 말과 동시에 원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래.’

약 십 년 전에 사망한 소녀의 부모. 그리고 가주급이나 되어야 알 수 있을 법했던 비밀 통로. 과할


정도로 생각된 오라버니라는 자의 폭행.

[아직 급서로 받은 정보이니, 사실 확인을 거친 후 제대로 보고드리겠,]

“아니.”

원에게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필요 없어.”

찾았다.

감옥에서 제자리로 돌아간 원이 조금 더 힘을 기르고, 소녀를 찾기 시작하기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찾아다닌 긴 추격전이 막을 내릴 기미를 보였다.

일순 원은 온몸이 전율하는 감각을 느꼈다.


각인인지 뭔지, 세간에서 늑대 수인은 한 대상에게 얽매이는 습성이 있다고 떠들어 대는데.

우스갯소리로 넘긴 그 말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닌 듯했다.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쫓고 있는 자신을 보면.

이 정체 모를 감정이 뭔지는 상관없어진 그가 만족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특이점인가?”

[그건 아니고…….]

물 흐르듯 말을 이어 가던 스카론 장로가 짐짓 뜸 들였다.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든 원은 조용히 물었다.

“……이미 죽었나?”

그 외동딸이라는 자가.

그렇다면 감옥에서 본 건 뭐란 말인가. 어두워지는 원의 표정을 본 스카론 장로가 황급히 부언했다.

[아뇨, 아닙니다. 다만 현재 행방불명 상태라고 합니다. 특이점은 그 외동딸의 이름이…… 음.]

“……?”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늘인 스카론 장로가 입을 열었다.

[벤디 레피라고 합니다.]

짧은 외출이지만 산행 일정인 만큼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마차에 가방을 싣는 중, 뒤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 산행은 제대로 해 봤어요?”

페트리온은 밀림과 산이 아름다운 곳. 앞마당이라며 허세 부리려던 내가 멈칫했다.

“여우 영역은 평야밖에 없는 곳이라고 아는데.”

여우 영역에는 산이 별로 없구나. 하마터면 실수할 뻔한 나는 꾹 다문 입을 오물거렸다.


“안 되겠다, 저도 가겠어요. 회장 같은 허술한,”

옆쪽의 벨헬름 학생회를 의식한 안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훌륭한 사람을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이 곰돌이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얼마나 어폐가 안 맞는지 알고는 있을까.

무시하며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이번엔 야닉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야닉이 따라가겠다!”

“제발 그 거슬리는 3 인칭 좀 집어치우세요.”

안나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야닉이 턱, 큰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회장.”

움찔한 내가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왜?”

“우린…… 동료잖아.”

이 하이에나는 또 무슨 감성에 취한 거람. 훌치듯 야닉의 손을 털어 낸 나는 무시하며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제가 가겠어요.”

“아니, 내가 간다!”

뒤에서는 두 괴수가 아웅다웅 난리도 아니었다.

“모래시계도 망가뜨리는 마력이면.”

그때 금서를 읽던 신시아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회장보다 설산이 위험하지 않을까.”

“…….”

시끌시끌하던 하이에나와 괴력 곰돌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 괴수들을 말 한마디로 얌전히 만들다니. 어째 신시아에게 훌륭한 조련사의 자질이 보였다.

몰래 감탄한 나는 그들을 외면하며 마차에 오를 채비를 마쳤다.

어차피 학장님 소유의 설산이라 위험한 동물이나 마물도 없다고 하고, 설산 안내인이 길을 안내할 거라고
하니.

여우 수인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 시간제한이 있는 이상,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인원수는 적을수록
좋았다.

채약에 실패하면 또 그것 나름대로 부끄러울 것 같기도 하니까.

‘다 됐다.’

손을 탁탁 털며 마차에 오르려던 나는 표정을 굳혔다.

폴짝, 당연하다시피 마차 계단에 오르는 노란 짐승을 발견한 탓이었다.

이번만은 넘어갈 수 없는 내가 노란 짐승의 뒤에 가서 섰다.

페트리온처럼 내가 길을 훤히 아는 곳도 아닌데 어딜 따라가려고.

이스단 가문의 권속이든, 육식 동물이든 뭐든. 엄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안 돼.”

노란 짐승의 매서운 눈빛이 내게 박혔다. 기 싸움에서 밀릴 수 없었던 나는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절대 안 돼. 같이 갔다가 너 혼자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거부 어린 낯빛을 마주한 내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노랑이 너!”

내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방금 저 버릇없는 짐승이 앞발로 계단을 내려치며 거부를 표했기에.

미간을 구긴 나는 단호하게 검지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안 된다고 했어, 저리 가.”

그러자 계단에서 내려선 노란 짐승이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그르릉 소리까지 냈다.

저런 콩만 한 새끼 사자한테 질 수 있나. 사슴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이참에 버릇을 고쳐 놔야 했다.

“자꾸 말 안 들으면 앞으로는 배낭에 넣어 주지 않을 거야.”

지독한 협박에 바닥을 내려치던 노란 짐승의 앞발이 움찔 떨렸다.

바로 지금이었다.

“앉아!”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노란 짐승은 결국 착,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양순한 태도와 달리 눈빛은


웬만한 맹수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

이겼다.

전투에서 승기를 거머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뻑뻑뻑, 뒤편의 야닉이 감격 어린 얼굴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렇게 감격할 일인가 싶지만, 어쨌든 승전한 나는 마차에 오르며 뒤돌아봤다.

“타세요.”

“네?”
우리의 활극을 구경 중이던 밀러 워든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나는 영 못 미더운 밀러 워든을 흘겼다.

“혹시 알아요, 제가 채약해 왔는데 남이 한 거 아니냐고 의심할지. 직접 보고 확인하세요.”

“아니, 제가 그런 짓이나 할 파렴치한으로 보입니까?”

조금 그렇지?

암.

하긴.

그의 따짐에 나를 비롯한 학생회가 맞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 월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데, 뒤편에 서 있던 벨헬름 학생회가 거들었다.

“회장, 가십시오. 어떤 편법을 쓸지 누가 압니까?”

“그래요, 가서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밀러 워든은 떠밀리다시피 마차에 올랐다. 너희는 대체 누구 편이냐,


원망스러운 눈길이 벨헬름 학생회에게 닿았다.

막 마차가 출발하려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레넌이 열린 창문으로 팔을 걸쳤다.

“회장.”

“……레넌?”

겹친 팔에 턱을 묻은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숨기는 거야 아주 많지, 일단 나는 사슴이야.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는 내가 의자에 앉은 채 슬금슬금 움직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딱히 없는데.”

“그래?”

평소처럼 속 모를 웃음을 지은 그가 내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채라도 붙잡나 싶어 순간 긴장했으나, 다행히 잡은 건 머리 끝부분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주홍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끝에서 한 올 한 올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는 레넌의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이 전부 빠져나가자, 레넌은 귀를 톡톡 두드리며 손짓했다.

“귀.”

“……귀?”

바짝 경계하며 슬그머니 옆얼굴을 가져가자, 그가 작게 귓속말했다.

이윽고 창문에서 떨어진 레넌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잘 다녀와.”

귀에 손을 댄 채 멍하니 바라보는데, 덜컹, 마차가 움직임에 따라 창밖의 레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드르륵, 이윽고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을 완전히 나섰다.

귀를 잡은 자세 그대로 굳은 나는 레넌이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늑대를 조심해.’

말 그대로, 행여나 런드버그 설산에 늑대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란 말 같긴 한데.

현재 내 상황에 대입하면 마치 원을 조심하란 의미로 들리기도 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페트리온에서 원에게 쫓기는 나를 보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이 질문은 곧 사슴 수인인 내 모습을 보았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설마…….’

두근, 두근, 얌전하던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그때 레피 저택 소유의 숲에서 마주친 괴한은 틀림없이 헤일린 이스단이라 생각했는데.

그러자니 의뭉스럽게 행동하는 레넌도 영 의심스럽고.

이쯤 되니 그냥 모두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52 화>

넋이 나간 채 귀를 만지작거리는 와중, 밀러 워든의 목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저기.”

“…….”

“이봐요.”

“…….”

“벤디 레피 회장!”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강제로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돌아봤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그…… 옆에 말입니다.”

옆이 괜찮냐는 건 대체 무슨 질문이람.

휙, 별생각 없이 옆을 확인한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간신히 쫓아 버린 노란 짐승이 왜 여기 앉아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노란 짐승은 돌연 우욱, 헛구역질을 했다. 페트리온에서 돌아올 때도


그러더니, 마차 멀미를 하는 게 분명했다.

“얘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저도 방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밀러 워든은 제가 앉은 마차 의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차 의자 색상과 너무 똑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의자는 노란 벨벳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호색이야 뭐야.

경악한 내가 황급히 창밖을 내다봤지만, 아카데미에서 멀어진 마차는 설산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탁탁, 미친 듯이 교정을 가로지르는 원에게 학생들의 시선이 닿았다.

[공교롭게도 이번 해 학생회장과 이름이 같더군요, 이거 참.]

달리는 원의 눈앞에 허허, 난처하게 웃는 스카론 장로가 아른거렸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달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한데 그 학생은 초식 수인이 아닌 여우 수인이었으니……. 시일을 조금만 더 주시면 자세히 조사해


오겠습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땐 뻔질나게 보이더니.

학생회실, X 클래스 강의실, 도서관을 비롯한 어디에서도 학생회장을 찾을 수 없었다.

학생회장의 클래스메이트가 말하기를, 하필 오늘 웬 약초를 구하러 외출증을 끊었다고.

돌고 돌아 아카데미 정문으로 달리는 중인 원은 무심코 벤디를 그렸다.

허리께까지 오는 주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송곳니. 여우 일족으로 기입된 학적부까지.

원이 계속 찾아온 여자아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작하고자 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밀란느 학장이 있는 이상 어렵겠지만, 만약 학장도 가담한 거라면 학적부 조작 정도야 충분히 가능한 일.

‘사, 사슴 여러분.’

원은 돌연 지금까지 벤디가 보인 기행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전교생을 사슴으로 만든 사건.

여우 수인이면서 뜬금없이 레펠튼 숲에 데리고 온 근육질 사슴.

영혼의 동반자처럼 들고 다니는 고구마가 사슴 영역의 주식인 것.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겁이 많은 부분까지.

그냥 보면 이상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모든 단서가 사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지만…….’

확신을 가져야 움직이는 성정임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당장 학생회장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어느새 정문 앞에 다다른 원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휑한 정문에는 레넌만이 우뚝 서 있었다.

“학생회장은?”

다가온 원의 기척을 느낀 레넌이 몸을 틀었다.

“조금 전에 갔어.”

맥이 탁 풀린 원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아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지금의 감정 상태로는 다짜고짜 학생회장을 붙잡고 추궁했을지도 모르니까.

‘학생회장이 진짜 그 아이라면.’

사슴 수인임을 숨기고, 여우 수인 행세를 하면서까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한편, 레넌은 처음 보는 원의 낯선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과음해도 술 냄새 한번 풍긴 적 없는 인물이.

단정한 흑발은 제멋대로 솟구친 상태에, 교복 재킷 또한 어디에 뒀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벨트 대신 타이를 맸군.’

실수하는 와중에도 바지에 맨 타이가 정갈한 모양이라는 데에 박수를 보내야 할까.

굳이 말하지 않은 레넌이 물었다.

“학생회장은 갑자기 왜 찾는데?”

“알 거 없어.”

“밤이면 돌아올 건데, 안 어울리게 초조한 얼굴이네.”


대답하지 않은 원은 곧장 뒤돌았다. 속 모를 백호에게 이 이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성급히 뛰어온 조금 전과 달리, 걸어가는 원의 등에 레넌의 목소리가 꽂혔다.

“네가 찾는다는 사람이 회장과 관련이 있나?”

요즘 그거 때문에 바빴잖아.

덧붙인 레넌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머릿속이 몽롱해질 수준의 화한 미소였다.

하지만 지내 온 시간이 있는 만큼, 심중을 떠볼 때 얼굴을 써먹는 걸 아는 원이 비소를 걸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달릴 줄 모르나 싶었던 늑대가 뛰어다니는데 의아할 수밖에.”

“마침 나도 의아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너야말로 안 질리고 잘도 호위 놀이를 하는군. 원래 금방 싫증을 내면서.”

뒷짐 진 레넌은 새삼 인지하지 못 하고 있던 걸 깨달았다. 요즘 들어 아카데미에 다니는 게 제법 즐겁다는


사실을.

“멋있잖아, 주인과 호위 기사.”

“집사와 고양이겠지.”

“그런 관계도 나쁘지 않네.”

생산적인 대화는 글렀다고 판단한 원이 뒤돌아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넌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학생회장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는 가십지를 채 한 권도 다 못 읽었지 않나.


다음 권을 오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레넌은 앞서간 원을 따라 걸었다.

물론 끝끝내 허리에 맨 교복 타이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다.

런드버그 설산.

이름만큼 하얀 산 초입에 도착한 벤디 일행은 안타깝게도 입구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쏴아아-

맑은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기에.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일 줄 알고 기다렸으나,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나리들. 안 됩니다, 위험해요.”

뛰어나온 안내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바닥도 미끄럽고 시야도 너무 어둡습니다!”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 앞을 딱 막고 섰다.

“산은 저녁이 빨라요. 새벽이면 그칠 듯하니, 오늘은 하루 묵고 내일 오르시는 편을 권해 드립죠.”

안내인의 손끝이 저 멀리, 빛이 반짝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설산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간간이 묵는 여관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에 들어선 밀러 워든은 여관 주인을 불렀다.

“가장 깨끗한 방으로.”

돈을 건네려던 그는 뒤편의 지긋한 시선을 느꼈다. 과장하면 등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등 뒤에는 후드를 눌러쓴 벤디가 짠한 눈으로 밀러 워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든 작은 손지갑에는 끼니만 때울 정도의 돈이 전부.

이대로라면 난로 하나 없는 마차에서 밤을 지새울 처지였다.

벤디의 슬픈 시선이 밀러 워든의 빵빵한 지갑에 닿았다.

‘아니, 아니!’

기가 찬 밀러 워든이 입가를 씰룩였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쯤이면 돈이 차고 넘칠 텐데, 왜 지갑이 텅텅 비었냐고.

보아하니 횡령의 횡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뿐인가.

‘대체 저 새끼 사자는 뭐야?’

오도카니 앉은 노란 짐승이 보내는 눈빛이 제일 가관이었다.

탈것에 약한지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골골거리더니.

돈 내, 마차에서 자면 온몸이 쑤시니까. 그런 의미를 담은 듯한 형형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거 진짜 동물 맞아?’

밀러 워든의 생존 본능이 자꾸만 위험신호를 보내 왔다.

사람 찢을 듯한 시선에 못 이긴 그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가장 깨끗한 방 두 개.”

“감사합니다.”

냉큼 인사한 벤디는 밀러 워든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짐가방을 챙겼다.

“마차에서 잘 뻔했는데 다행이야.”


혹여 잃어버릴까, 노란 짐승을 가방에 잘 챙긴 벤디가 속삭였다.

“그렇지?”

캬옹. 대충 답한 노란 짐승은 뒷발로 귀를 긁었다. 탈것은 멈춰 있어도 사양이었다.

밤이 되자 그나마 빗줄기가 얇아졌다.

여관방 내부는 노후한 외관과는 달리 아늑하고 깨끗했다.

짐가방을 내려 둔 나는 가장 먼저 창문을 확인했다.

행여 노란 짐승이 창밖으로 나설 수도 있으니까.

덜컹덜컹.

창문을 밀어도 옴짝달싹 안 하는 것까지 확인한 내가 안심하며 옷가지를 챙겼다.

“어디 가면 안 된다?”

들은 척도 안 한 노란 짐승은 소파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저 진상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그래도 마차에서 멀미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괜찮아 보이네.’

한결 안심한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 비치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자, 몸에서 인위적인 빛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울 속에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슴 수인이 나타났다. 마도구의 마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

아까는 마차에서 밤을 새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밀폐된 공간에서 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목욕을 마친 후, 잠옷을 입고 나가자 노란 짐승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과장하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냥 머리 색이 바뀐 정도인데.

생각 이상의 반응에 당황한 내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동물도 인간의 외형을 구분하나?’

인간과 친근한 동물의 경우에는 구분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때.’

못 알아보고 입질 안 하는 게 어디야.

다시 욕실로 들어간 나는 따뜻한 물로 적신 천을 가지고 나왔다.

“이리 와, 밖에서 돌아다녔으니 실내에선 잘 닦아야지.”

얼어붙은 노란 짐승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노란 돌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은 내가 조심조심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물론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게끔.

누구세요.

앞발을 잡힌 노란 짐승은 괴생물체라도 보는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53 화>

노란 짐승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나는 짐짓 정색했다.

괜히 소리를 냈다가 천으로 닦기 싫다고 날뛰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조물조물, 조물조물.

조그마한 앞발을 닦아 주고 있자니, 이 콩알 같은 몸으로 모래시계 앞을 가로막던 모습이 떠올랐다.

‘……난감하네.’

조금 정이 들 것 같아.

하긴, 뭐가 됐든 죽어라 나만 따라다니는데 정이 안 드는 게 더 이상했다.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데.’

새끼는 금방 자란다던데.

노란 짐승이 더 자라 성수가 되어, 배낭에 넣을 수 없게 되면 씁쓸할 것 같기도 하고.

상상하던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성수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다.

머리통만 한 바가지인 흉악한 사자랑 어떻게 같이 다녀.

무서운 상상을 멈춘 나는 여관 주인에게 빌린 얇고 긴 끈을 가져왔다.

“짠.”

자랑하듯 끈을 흔든 내가 노란 짐승의 목이 졸리지 않게끔 리본을 묶었다. 그리고 얇은 끈의 반대쪽


부분을 내 팔목에 묶었다.

잃어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크르릉- 진상 고객의 불만이 폭주했지만 수용할 순 없었다.

“스읍, 그러게 따라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끈이 묶인 팔목을 흔들어 보인 나는 노란 짐승을 내려다봤다.


깨끗이 닦아서 그런지 털이 보송보송한 게, 처음으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결에 쓰다듬으려고 하자 찰싹, 곧바로 앞발이 냉정하게 손을 쳐 냈다.

“잘 거야.”

못된 짐승. 입을 삐죽인 나는 등 돌려 침대에 누웠다.

역시 육식 동물과는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영원히.

밤이 내리고 빗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숨소리와 함께 벤디의 몸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깊이 잠든 벤디의 얼굴 위로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의 주인은 스윽, 은밀히 솜방망이를 얼굴 위로 가져갔다.

“…….”

휙.

휙휙, 코앞에서 앞발을 저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잠들었다.

확신한 노란 짐승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윽고 어둠을 밝힐 정도의 빛과 함께 백금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헤일린은 움직이려다 말고 제 손목을 들었다. 붉은 끈이 묶인 상태였다.

조금 전, 학생회장이 목에 매어 준 리본 매듭. 벤디의 손목에서부터 이어진 붉은 끈이었다.

거슬리는 리본을 풀어 버리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

풀어도 다시 묶을 줄 몰랐다.
교복 타이도 매번 대충 묶다가 잃어버리는데, 한 손으로 반대편 팔목에 리본을 묶는 게 가능할 리가.

귀찮게. 머리를 탈탈 헝클어뜨린 그는 잠든 벤디를 내려 봤다.

은은한 램프 불 아래로 조금 낯선 얼굴이 드러났다.

아까 본 옅은 밀색 눈동자와, 육식 수인에겐 잘 찾아보기 힘든 색감의 머리카락.

헤일린은 벤디의 붉은 입술로 손을 뻗었다. 따끔, 살짝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를 감내한 그는 엄지 끝으로 벤디의 입술을 살짝 들췄다. 송곳니 따위 없는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역시.’

초식 수인.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욕실에서 이 모습으로 나왔을 때 순간 헤일린은 제가 술에 취했나 싶었다. 마신 거라곤 마차 멀미에


시달릴 때, 학생회장이 주둥이에 꽂아 넣은 물병뿐인데.

고개를 기울인 헤일린은 벤디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영락없는 초식 수인같이 생긴 외양이 신기한 건 사실. 붉은 눈이 하얀 얼굴을 훑듯이 살폈다.

‘그럼 페트리온에서 사라졌던 것도…….’

페트리온 여행 마지막 밤, 숙소 어디에도 학생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숙소 주변은 까마득한 밀림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으러 나갔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굶주린 승냥이 떼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돌아왔을 때, 벤디는 이미 무사히 돌아온 후였다.

아주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맞은 듯 작은 볼이 살짝 부은 상태였다.

‘패는 건 몰라도 맞는 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그에게 같지도 않은 애칭을 붙이고, 배낭에 넣고, 주둥이에 음식을 꽂고, 명령이나 해 대는. 아무튼 그런
위인이 맞고 다니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잠깐 생각이 샌 헤일린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슴 수인인가.’

어쩐지 이상하긴 했다.

페트리온에 사는 사슴 수인들과 아예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짜고, 묘하게 지리에 밝은 부분까지.

게다가.

헤일린의 무감한 시선이 벤디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당초 이 생김새가 사슴이 아닌 게 더 말이 안
됐다.

‘사슴은 좀 곤란한데.’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헤일린은 짐짓 정색했다.

얼굴이나 종족이 오락가락한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몸에 대한 단서를 가진 귀중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문제는 초식 수인인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약해 빠져서 위태위태했는데, 초식 수인이 육식 수인들 사이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던 거라니.

이쯤이면 잠깐 눈을 뗐을 때 죽을까 봐 염려해야 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학생회장과 있으면 동물로서의 모습이 자라는 듯한 감각에 대한 단서가 하나 더 생겼다.

초식 수인.
그리고 방대한 마력.

부르르, 침대에서 작은 떨림을 느낀 헤일린은 벤디를 돌아봤다.

벤디는 잠결에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둘둘 휘감았다. 군고구마 같은 꼴이 되었음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설산 바로 밑이라 아카데미와는 공기 자체가 달랐기에. 더욱이 여관에서 지급한 여분 잠옷은 얄팍한


재질이었다.

어딘지 단내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 헤일린이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이 묘한 향은 벤디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풍기고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육식 수인이 초식 수인에게 느끼는 본능의 한 종류인 듯한데.

이성을 반한 시선이 자꾸만 목덜미나 입술 쪽에 닿는 게 문제였다.

여기에 있을 바에야 인근 도박장이라도 가서 밤을 새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문으로 걸어가려던 헤일린의 몸이 휙, 강제로 휘청거렸다.

“……?”

아, 맞다. 리본.

드물게 당황한 그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벤디의 손목을 돌아봤다. 뒤이어 제 손목에 묶인 붉은 끈을


내려다봤다.

벤디가 추위에 떨며 몸을 비틀자 화악, 방심하고 있던 헤일린의 몸이 뒤로 딸려 갔다.

팍, 팔로 침대를 짚어 벤디의 위로 넘어지는 상황을 모면한 그가 바짝 긴장했다. 혹시나 이 충격에


벤디가 깨어날까 봐.

다행스럽게도 고른 숨소리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찍소리도 못 낸 헤일린이 안도의 숨을 삼켰다. 잠에서 깨어났으면 속절없이 노란 짐승의 정체가


까발려졌을지도.
바로 앞에서 벤디를 마주하게 된 그는 느릿하게 제 코를 막았다.

‘신종 고문 수준인데.’

붉은 입술과 흰 목을 지난 시선이 움직임을 속박한 리본에 닿았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건 자신인데. 헤일린은 어쩐지 학생회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노란 짐승은 오늘따라 유독 예민했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을 설친 건지, 아니면 귀마개 겸 목도리를 억지로 덮어씌웠기 때문인지.

어쨌든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열심히 설산을 올랐다.

아침이 되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날이 맑게 개었고, 바닥도 그리 습하지 않았다. 설산의 추위에


대비할 겨울옷도 잘 챙겨 입었고.

모든 게 완벽한 와중,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크헝-

캬옹.

전방에서 설쳐 대는 육식 동물 두 마리였다.

노란 짐승이야 그렇다 쳐도.

떨리는 내 시선이 훌쩍 뛰어 산을 오르는 표범에게 머물렀다. 밀러 워든이었다.

동물형으로 산을 오르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게 밀러 워든의 입장인데.

‘왜 불편한 내 입장은 알아주지 않는 걸까.’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표범 특유의 검은 점하며, 노란 짐승보다 몇 배나 큰 앞발하며.


등산하다 말고 오들오들 떨자, 뒤편에서 따라오던 설산 안내인이 말했다.

“추우시죠? 점점 기온이 떨어질 겁니다.”

차라리 추워서 떨고 싶어요.

“그래도 곧 산의 중턱이니 조금만 힘내시면 됩니다.”

“네…….”

이건 뭐 맹수 탐험대도 아니고.

노란 짐승과 노란 점박이 짐승이 교차로 뛰어다니며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못 본 척한 나는 무릎에 힘을 실어 걸음을 옮겼다.

“바로 저기입니다.”

안내인의 손끝이 웬 바위 절벽을 가리켰다.

설산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듯, 새하얀 바위가 모여 절경을…… 아니, 절경이고 나발이고.

“어디라고요?”

“저기입니다.”

“어디요?”

“저기- 저-기입니다.”

정색한 나는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들었다.

약초학 책에서 리울 약초에 대한 설명이 적힌 부분을 오려 온 종이쪽지였다.

“리울 약초는 강한 마력이 요구되기에 채약 자체는 까다롭지만, 서식지는 온도가 낮고 비교적 채약하기
쉬운 장소에 존재한다.”

서술을 입 밖으로 읽은 나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안내인을 돌아봤다.


채약하기 쉬운 장소?

쉬운?

‘저게 어떻게 채약하기 쉬운 장소인데.’

보통 쉽다고 하면 수풀 사이나 끽해야 산꼭대기 정도 아닐까.

그러나 안내인의 손가락은 절벽 한가운데, 고작 나 하나 들어갈 법한 작은 구멍을 가리키고 있었다.

흔들리는 내 눈빛을 마주한 안내인의 눈빛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게…… 육식 수인은 동물형으로 변하면 완만한 바위 절벽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매나


독수리 수인의 경우에는 특히요.”

컹, 밀러 워든은 일도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있으면 반이라도 갈 텐데.

한껏 거들먹거리는 표범을 흘긴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쉬우면 뭐 해, 가 봤자 채약도 못 하는데.”

크허헝, 반발하는 표범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떨리는 시선이 바위 절벽 한가운데에 머물렀다.

#<54 화>

말마따나 나도 사슴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해 볼 만은 한데.


흘끔. 나는 절벽을 함께 바라보는 중인 밀러 워든과 안내인을 곁눈질했다.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저 육식 수인들이 문제였다.

‘그럼 지금 이 모습으로 저기를…….’

심지어 내려가라고?

절벽 끝에 선 나는 아래를 아연히 내려다봤다.

휘오오, 아래에서부터 불어온 칼바람이 머리카락을 어지럽혔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곧 이 악물며 거치적거리는 망토를 벗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내 마력의 실체를 파악도 못 하고, 이 상태로 지낸다면 결국 내 미래도 절벽이었다.

잘하면 평생 숙부에게서 도망이나 다니고, 그조차도 빠른 시일 내에 잡히겠지.

‘게다가…….’

적어도 육식 수인보다는 바위 절벽이 덜 무서웠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외투를 벗고, 간편한 차림을 하자 안내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니, 왜 동물형으로 가시지 않고…….”

“문제가 있어요.”

알려 줄 수 없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은 나는 밀러 워든이 미리 건네줬던 상자를 챙겼다.

전해지는 마력이 끊기는 순간 약초가 시들어 버린다고 하니, 그를 방지할 마력이 담긴 마도구였다.

‘좋아.’
결심을 다지며 발을 내딛던 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뭐 해?”

자연스레 나를 따라 발을 디디려던 노란 짐승이 움찔 경련했다.

“또 말 안 듣지.”

노란 짐승이 냥냥거리며 항변을 시도했지만 통할 내가 아니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했어.”

어딜.

나는 기어코 휙, 먼저 내려가려는 노란 짐승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나와 살갗이 닿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나 다를까 노란 털이 쭈뼛 솟구쳤다.

“노랑이 좀 부탁드릴게요. 꽉 잡고 계셔야 돼요.”

“어이쿠, 예예.”

강제로 안내인에게 떠넘긴 나는 그르릉대는 노란 짐승을 째려봤다.

노란 짐승 또한 곧 죽어도 따라오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파지직, 우리 둘 사이로 보이지 않는 전류가 튀었다.

“…….”

눈싸움을 지속하고 있자니, 모래시계로 뛰어들던 무모함이 아른거렸다.

게다가 페트리온도 모자라 이 먼 곳까지 따라온 것도.

놓고 가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따라오지 않을까.

결국 눈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절벽 끝에 섰다. 배낭 안에는 언제나와 같이 노란 짐승을 넣은 상태였다.


“가자.”

후드득, 발끝의 잔돌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깟 절벽.

“…….”

너무 무서워요.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다.

이 후회를 발판 삼아 일어서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데.

“으…….”

후회는 하지만 발판이 없는 사람은 어떡해야 하나요.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땀이 날 정도로 밧줄을 꽉 거머쥐었다. 바위 절벽을 내려가겠다고 말한


용기는 증발한 지 오래였다.

“줄은 단순한 안전장치일 뿐이니, 바위를 디디며 내려가셔야지요.”

위에서 안내인의 염려 어린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좋을 텐데.

휘오오, 칼바람이 불 때마다 밧줄과 함께 몸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어엉.”

지나치게 겁에 질리니 듣도 보도 못한 울음소리가 나왔다. 안색이 파리하다 못해 눈앞이 점점 부옇게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등 뒤에서 들리는 콧바람 소리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피식, 피식, 배낭 속 노란 짐승의 콧김 소리는 비웃음이 틀림없었다.


편히 배낭 안에서 이동하면서 응원은 못 할망정.

‘내가 떨어지면 너도 같이 떨어지거든?’

제 처지를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육식 동물 덕분에 오기라도 얻은 내가 발을 휘적거렸다.

탁, 발끝이 그나마 평평한 바위에 닿았다.

겨우 내려선 나는 힐긋 아래를 확인했다.

영영 닿지 못할 것 같던 작은 구멍이 약간은 가까워진 느낌. 신중히 한 발 한 발 이동하면 아주 못 갈


거리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아래쪽 바위에 다리를 뻗는 찰나,

“악!”

하얀 이끼에 미끄러진 몸이 순식간에 기울었다.

“아이고, 아이고야! 조심하십시오!”

크허헝-

파닥파닥 팔을 휘저은 내가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바로 섰다.

죽는 줄 알았네. 밭은 숨을 몰아쉰 나는 미간을 굳히며 위를 올려다봤다.

“시,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크헝.

왜 정작 절벽을 내려가는 나보다 구경하는 관객들이 더 야단법석인지. 손에 땀까지 쥐며 몰입하는


중이었다.
특히 밀러 워든은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도 깜박한 채 포효하는데.

머리 위에 맹수가 있다는 압박감까지 주는 격이었다.

‘거의 다 왔어.’

어느새 절벽 한가운데의 구멍 주변까지 다다랐지만 손은 물론 다리도 닿지 않았다.

지금 딛고 있는 바위에서 멀리뛰기 하듯 옆으로 훌쩍 뛰어야 가능한 수준인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망설이는 중, 뒤에서 노란 짐승이 지엄한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응?”

배낭을 앞으로 돌려 확인하니 냥, 냥냥, 회심의 앞발이 구멍 입구와 밧줄을 오갔다.

“응.”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흐릿한 동공으로 알아들은 척하자, 노란 짐승이 세상에 다시없을 무지렁이를 보는 눈빛을 보냈다.

다시는 배낭에 안 넣어 줄 거야.

외면한 나는 밧줄을 한층 꽉 그러쥐었다.

남은 수는 밧줄의 반동을 이용해서 뛰는 수밖에.

“…….”

앞으로 한 걸음.

똑, 턱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위에 떨어졌다. 동시에 나는 그대로 바위를 박찼다.

탁, 밧줄의 반동을 이용하여 입구 주변까지 다다랐지만,

“아!”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손이 미끄러졌다.

“아이고오오옥!”

크헝!

관객 둘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바위 절벽에 메아리쳤다.

가까스로 바위틈 입구에 착지한 나는 곧바로 위쪽을 째려봤다.

“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크릉, 크르릉.

도움은커녕 괜히 소리를 질러 심장만 벌렁거리게 만드는 조합이었다.

다시 전방을 바라보자, 도착한 작은 구멍은 정말 나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맞춤형 동굴 느낌. 그마저도 몸을 잔뜩 낮추어 들어가야 하는 수준이었다.

비좁은 입구를 지나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눈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약초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기에. 얼핏 약초가 아닌 작은 꽃으로 보였다.

심지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어서 따로 램프를 켤 필요도 없었다.

천장까지 약초로 가득한 광경을 둘러보고 있으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초식 수인은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약효가 있다는 리울 약초.

넋 놓고 구경하던 나는 독특한 약초 향을 인지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 냄새…….’

너무 구려.
신비로운 외관과 달리 절로 미간이 구겨질 만큼 구린 냄새였다.

심지어 어디서 맡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리안, 이건 너무 위험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와 구린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약간 불효막심한 고민에 빠져든 와중, 배낭에서 나온 노란 짐승이 뒷발로 귀를 탈탈 털었다.

킁킁, 호기심이 이는지 약초에 코를 가져간 노란 짐승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코를 찌르는 약초 냄새가
거북한 듯했다.

‘으음.’

일단 배낭에서 채약용 호미를 꺼내 든 나는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망설였다.

고구마 캐던 솜씨로 어떻게든 채약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는데.

바위 절벽을 내려오느라 잊고 있던 걱정이 떠올랐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채약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슬그머니 노란 짐승을 돌아보자, 입구에 오도카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암, 길게 하품하는 걸


보아 벌써 약초 구경에 질린 모양이었다.

어째 저 여유로운 태도를 볼수록 모든 걱정이 덧없게 느껴졌다.

‘좋아.’

팔을 걷어붙인 나는 조심스럽게 약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을 흘려보낸다는 느낌으로, 뿌리가 상하지 않게.

줄기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간 내가 심호흡하며 마력을 흘려 넣었다.

마법 소환은 부진하지만, 이 정도 운용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제발.’

리울 약초는 뿌리가 바닥에서 나오는 순간, 채약자의 마력이 조건에 미치지 못하면 시들어 버린다.

흙은 파헤쳤고, 이제 뿌리만 뽑아내면 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못 보겠어.’

나는 땅에서 뿌리를 분리하는 즉시 눈을 꾹 감았다.

채약을 끝마친 리울 약초가 현재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채 실눈을 뜨던 내가 벌떡 일어났다.

“됐!”

쿵, 낮은 천장에 머리를 박은 탓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고통보다는 기쁨에 취한 나는 주저앉은 채 리울 약초를 높이 들었다.

‘시들지 않았어.’

감격 어린 눈으로 채약 전과 똑같은 상태인 약초를 올려다보는데, 구린내와 함께 또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 이건 너무 위험해.’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상태였는데,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울 약초를 먹였으니 곧 안정될 거야.’

‘하지만 네 번이야, 저 어린 게 벌써 네 번이나 각혈했다고.’

‘나이가 차면 이렇게 갑자기 쓰러지는 일은 차차 줄어들 거라고 의원이 말했잖아.’

‘나이가 차는 게 대체 언젠데? 벤디는 이제 고작 다섯 살인데!’


#<55 화>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부모님의 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어머니의 언성만 점점 높아졌고, 아버지는 착 가라앉은 말투였지만.

잠깐 숨을 고른 어머니는 조금 진정된 음성으로 말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지. 솔직히 나는 웬스턴 레피, 당신 동생이 신경 쓰여.’

‘그건…….’

‘내 아이, 벤디가 저런 마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그 탐욕스러운 자는 반드시 벤디에게 위해를 가할 거야. 아직도 레피 가문의 가주 자리를 탐내고 있을


테니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마음 같아선 후환이 없게 그 자식의 목을 따고 싶어.’

‘……아리엘, 벤디가 깰지도 모르니 제발 목소리라도 낮춰 줘.’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벤디의 마력을…… 이런, 벤디야, 정신이 드니?’

‘……엄마.’

‘말해 보렴, 내 아기.’


‘어디서 구린내가 나.’

‘오, 아빠 냄새란다.’

‘뭐? 베, 벤디, 아니야. 약초를 달인 냄새야, 아빠는 결백해!’

그를 끝으로 더 이상 부모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향은 기억을 담는다던데.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곧이어 속이 비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쿨럭.

후드득, 붉은 액체가 하얀 약초 위로 떨어졌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피……?’

손에 번진 새빨간 피를 내려다보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이내 시야가 어질어질해지며 몸이 옆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기울어진 시야로 눈을 크게 뜬 노란 짐승이 보였다.

탁,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진 노란 짐승은 곧바로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름 정이 들었다고 달려와 주네.

아니, 그런데 노랑이가 저렇게 컸나?

왠지 노란 털이 아니라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두서없는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이윽고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아카데미 심벌이 새겨진 마차가 빠른 속도로 샛길을 가로질렀다.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마차에 오른 밀러 워든은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멀쩡히 약초를 캐러 갔던 학생회장은 입가에 피를 묻혀 오질 않나.

학생회장을 들쳐 안은 채 나타난 눈앞의 남자는 누구며.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아카데미로 출발해.’

남자의 명령 아닌 명령에 그저 마차를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남자는 틀림없이 자신보다 강했고, 눈빛은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썰어 버릴 정도로


살벌했다.

표범에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던 밀러 워든은 마차 구석, 학생회장의 배낭을 곁눈질했다.

싹수없던 새끼 사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어렴풋이 맞은편의 남자가 새끼 사자임을 눈치챈 밀러 워든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냥 새끼 사자라며!’

이제야 친선 도모 겸 수인 아카데미에 다녀온 선대 학생회장에게 들은 충고가 떠올랐다.

수인 아카데미에는 새끼 사자 한 마리가 교정을 돌아다니는데, 귀엽다고 함부로 만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선대 학생회장의 얼굴은 곤죽이 된 상태였다.

‘다행이다.’

이상할 정도로 새끼 사자가 껄끄럽더라니.

위험을 감지한 자신의 본능을 백번 칭찬한 밀러 워든은 맞은편을 흘끔거렸다.

남자는 의식 없는 학생회장을 제 품에 안고선 내려 두지 않는 상태였다.


남자의 체격이 큰 탓인지 품에 있는 학생회장이 유독 작아 보였다.

‘……흔들림이 심하지 않아서 내려놔도 될 텐데.’

최고급 마차가 괜히 최고급 마차가 아니지 않나.

하나 밀러 워든은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을 꺼내어 강자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한편, 밀러 워든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중인 남자는 제 품에 있는 벤디를 내려 봤다.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살핀 그는 확신했다.

이건 약하다.

당장 어제 죽으면 어떡하나 생각했는데, 오늘 고작 약초 하나 캐다가 피를 토하다니.

충격적으로 약한 탓에 마차 의자에 올려 두기조차 망설여졌다. 마차의 진동에 죽어 버릴까 봐.

더 문제는, 신기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구경하는 맞은편의 표범 수인이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언제 어제의 사슴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미지수인데.

외형을 볼 수 없게끔, 로브로 휘감은 벤디를 한층 당겨 안은 남자가 선득하게 눈을 빛냈다.

‘저 표범.’

밖으로 던져 버릴까.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꿈에도 모르는 밀러 워든은 은근한 관찰을 지속했다.

곁눈질로 살피던 그는 뒤이어 묘한 특이점을 발견했다.

남자의 손과 살갗 등, 학생회장과 직접 맞닿은 피부 쪽이 유독 붉었다.

‘설산의 추위 때문인가?’
하지만 설산에서도 제법 멀어졌고, 마차 내부는 찬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불에 덴 듯한 느낌이 강했다.

흘끔, 흘끔.

가장 의문인 부분은, 마치 제게서 학생회장을 감추듯 담요로 칭칭 싸맨 점이었다.

‘……왜?’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 가던 밀러 워든은 일순 싸한 감각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동물적 감각.

남자의 빤한 눈길이 밀러 워든에게 머무른 상태였다.

“……음.”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린 밀러 워든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당황한 그를 무표정으로 지켜보던 남자는 이내 붉은 눈을 사르르 휘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 시야가


환해지는 미소였다.

‘괜찮은 건가.’

아암, 그럼. 갑자기 나타난 게 누군데 좀 쳐다볼 수도 있지.

‘생각보다 상식이 통하는군.’

안도한 밀러 워든이 덩달아 하하 웃자, 남자가 정답게 말을 건넸다.

“눈을 뽑아 줄까.”

하하, 하하하.

실없이 웃던 밀러 워든은 자연스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있는 힘을 다해 시선을 피하는 와중, 그의 시야로 늘어진 학생회장의 손이 들어왔다.


동시에 밀러 워든의 눈이 확장되듯 커다랗게 뜨였다.

‘저건 틀림없이…….’

남자가 각혈한 학생회장을 데리고 나타난 순간 약초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학생회장의 손에서 하얀 약초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런드버그 설산은 인근에 민가가 거의 없는 만큼 제대로 된 의원이 없었다.

길에서 시간을 버릴 바에, 아카데미로 돌아온 헤일린은 곧장 벤디를 의무동으로 데려갔다.

“각혈을…… 했다고요.”

한참 진료하던 의관은 조금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각혈을 하더니 쓰러졌다.

헤일린의 설명을 증명하듯 벤디의 입가와 옷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각혈까지 한 것에 비해 속은 진탕은커녕 깨끗했고, 심박 수도 일정했다.

피로에 지쳐 깊이 잠든 상태에 불과하기에, 의관이 따로 조치를 취할 만한 게 없었다.

굳이 한다면 피로 회복에 좋은 영양제 투여 정도.

“현재로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겁니다. 음, 당장 벤디 학생보다는…….”

말끝을 얼버무린 의관은 헤일린을 스치듯 곁눈질했다.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과 팔목 안쪽.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화상을 입은 듯한 모양새였다.

의관이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헤일린은 대충 손을 털었다.


“됐어.”

의관을 내보낸 그는 화끈거리는 제 손바닥과 팔목을 둘러봤다.

그저 접촉하면 따가운 정도라고 알았는데. 접촉이 장시간 지속되면 이런 경상을 입는 모양이었다.

‘대체 뭐야?’

몸에 전기라도 통하나. 헤일린은 침대에 얌전히 누운 벤디를 허무하게 내려다봤다.

곧 죽을 것 같이 손을 뻗으며 쓰러질 때는 언제고. 단잠을 자고 계신다 이거였다.

‘그럼 그 각혈은 뭔데.’

벤디의 입가에 남은 핏자국을 응시하던 헤일린은 설산에서의 기억을 되짚었다.

채약을 성공한 기쁨에 취해 제멋대로 천장에 머리를 박았고.

아픔 때문인지 생각에 빠진 건지 멍하게 있더니, 직후 각혈하며 쓰러졌다.

그렇다면 리울 약초인지 뭔지 말고는 이유가 없지 않나.

벤디의 얼굴에서 옮겨 간 시선이 꽉 틀어쥔 약초에 머물렀다.

여전히 시들지 않고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상태.

혹시나 싶어 오는 동안 손에서 몇 번이나 떼어 내려 했지만, 어디서 나온 힘인지 죽어도 손을 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쉽게 죽어 버릴 것 같이 생겼는데. 그도 모자라 초식 수인에, 이제는 피까지 토하고.

성가신 인간에게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던 헤일린은 느릿하게 문을 돌아봤다.

복도 쪽에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산에서 돌아온 학생회장이 의무실로 옮겨졌다.

그 소식을 듣고 곧장 의무실로 들이닥친 원과 레넌은 잠시 말을 잃었다.


분명 벤디의 몸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온 건데.

의무실에는 벤디는커녕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헤일린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헤일린이 품에 끼고 있는 이불에 머물렀다.

둘둘 말린 하얀 이불은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 크기와 비슷했다.

“학생회장!”

“회장!”

뒤이어 안나와 야닉, 그리고 신시아가 의무실로 들이닥쳤다.

펼쳐진 광경에 똑같이 말을 잃은 그들 또한 멀거니 헤일린을 바라봤다.

저 둘둘 만 이불은 아마도…….

이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작은 발은 아무리 봐도 아는 발이었다.

#<56 화>

왜 헤일린 이스단이 벤디를 감추듯 끌어안고 있는 걸까.

그것도 죽어라 새끼 사자 행세를 할 때는 언제고, 대놓고 사람 모습으로.

이는 헤일린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탁, 레넌은 당혹스러운 정적을 깨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의문을 해소해 줄 거란 기대 어린 눈빛 여러 쌍이 레넌의 너른 등에 머물렀다.

“노랑이 이스단.”

글렀다.

첫 마디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한 안나가 이마를 짚었다.

“내려놔, 그 이불.”

“왜?”

“나도 갖고 싶으니까.”

“생각해 보고.”

당연히 내놓을 생각이 없는 헤일린은 이불을 감추듯 제 몸으로 더욱 당겼다.

넘겨줄 리가.

학생회장이 어떻게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을 넘나드는지 모르는 만큼 넘겨줄 수 없었다.

의식 없는 학생회장이 언제 그 사슴 같은 모습으로 변할지 예측할 수 없으니.

헤일린의 머릿속에 지난밤의 학생회장이 떠올랐다.

옅은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송곳니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입가, 함부로 만지면 부러질 듯한 외양.

떠올릴수록 여우 수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이유가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육식 수인만 널린 이곳에서 초식 수인의 몸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괜히 비밀을 들켰다간 학생회장이 아카데미에서 달아날 확률도 존재했다.

그런 생각에 다다른 헤일린은 으스러질 듯 이불을 끌어안았다.

잃을 수는 없지, 어떻게 얻은 제 동물형을 성장시킬 단서인데.


붉은 눈동자에 스치듯 적의가 서렸다.

절대 내어 주지 않을 듯한 그의 눈빛을 읽은 레넌이 눈가를 휘었다.

“자꾸 회장을 숨기려는 모습이 굉장히 수상하네.”

은발 사이로 드러난 물색 눈동자가 드물게 가라앉았다.

헤일린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제멋대로 살던 이가 무슨 이유로 벤디의 곁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 성정에 벤디의 이름은 외우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일 정도였다.

그런 헤일린이 하필 의무실로 옮겨진 벤디를 감추는 게 더없이 수상하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이불에 감춰진 벤디의 상태는 확인해야 한다.

‘게다가…….’

이불을 감싸 안은 팔을 볼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검 손잡이에 손을 걸친 레넌이 통보하다시피 말했다.

“내가 이불을 확보할게.”

“그럼 난 사자의 발을 묶지.”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원의 대답에 레넌은 일순 멈칫했다. 꽤 오랜 세월 보아 왔으나 이런 군말 한마디


없는 협조는 처음이었다.

“범위가 넓은 마법은 쓰지 마, 이불이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알아서 할 테니 너나 잘해.”

세 사람 사이로 위험한 기류가 흘렀다.

이미 원의 손에서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상태였다.


원과 레넌, 헤일린.

그들을 번갈아 살핀 신시아는 탁, 조용히 서적을 덮었다.

존재감 없이 자리를 피하는 신시아를 목격한 안나는 깊이 갈등했다.

과연 자신이 저 셋을 말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저 족제비 수인처럼 일 초라도 빨리 발을 빼야


하나.

답을 내릴 겨를도 없이 헤일린이 몸을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세 분 다 일단 진정,”

안나가 만류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이불 안에서 웬 주먹이 솟구쳐 나왔다.

“시끄러워…….”

퍽, 주먹은 그대로 헤일린의 코를 가격한 후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위력은 대단치 않지만 헤일린의 고개를 뒤로 꺾이게 만든 역사적인 주먹이었다.

“…….”

의무실 내에 형용할 수 없는 정적이 맴돌았다.

말없이 천장을 보고 있던 헤일린은 느리게 고개를 바로 했다.

동시에 코에서 주르륵,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쌍코피.

차마 비명도 못 지른 안나와 야닉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남의 피는 봤어도 제 피는 본 적 없을 헤일린 이스단을.

불쌍한 이불의 말로가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늑대.”
“알고 있어.”

이번에는 정말로 긴장한 원과 레넌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목적대로 의무실에 옮겨진 벤디의 무사를 확인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피를 본 헤일린이 벤디에게 위해를 가하는 걸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슨…….”

짙은 한숨을 내뱉은 헤일린은 곧 실성한 듯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코밑을 닦은 소매에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폭발 직전. 곧장 달려들던 원과 레넌이 발을 멈췄다.

없는 인내심을 끌어모으며 심호흡 한 헤일린이 다시 이불을 숨기듯 제 품에 당겼기에.

툭, 레넌의 검 끝이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의 마법 또한 바람 빠지듯 공중에서 소멸했다.

저게 과연 우리가 아는 사자가 맞나.

아연한 눈으로 이불을 바라봤지만, 사건의 원흉인 이불에게선 잠꼬대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벤디가 눈을 떴을 때에는 아카데미 의무실에 홀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들은 안나의 설명에 따르면, 의관이 환자의 안정을 위해 모두를 내쫓았다는데.

자세히 설명하기를 꺼리는 눈치라 더 이상은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네 번이야, 저 어린 게 벌써 네 번이나 각혈했다고.’

리울 약초를 채약한 직후의 일을 떠올린 벤디는 손을 쥐었다 폈다.

각혈하고 혼절까지 한 일에 비해 몸이 멀쩡한 건 다행이긴 한데…….

깊은 생각에 빠져들 즈음, 밀러 워든의 목소리가 벤디의 정신을 깨웠다.


“어쨌든 이렇게 약초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친선 도모 기간이 끝나고, 벨헬름 아카데미 학생회가 수인 아카데미를 떠나는 날이었다.

배웅을 위해 중앙 광장에 선 벤디와 밀러 워든이 마주 섰다.

“리울 약초 채약이 가능할 정도의 마력도 마력이지만…….”

밀러 워든은 조금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뜻밖이었습니다, 혼절한 와중에도 약초를 쥐고 계셨던 점이요.”

“…….”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정도로 애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약속보다는 계약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지 않나. 벤디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더군다나 약초를 쥐고 있었던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아마도 리울 약초와 제 마력에 무언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구태여 그 말을 덧붙이지 않은 벤디가 뒷짐 졌다.

“그보다 잊지는 않으셨죠? 약초를 구해 오면 친선 도모 보고서 만점은 물론 우리 측 학생회에게,”

“물론이죠. 정중한 사과는 물론 작게나마 성의를 표시했습니다.”

언제.

의아해진 벤디가 휙 뒤돌아봤다. 뒤편에는 작은 보석함을 든 안나와 야닉, 신시아가 서 있었다.

“사실이에요.”

달칵, 안나는 보석함을 열어 벤디에게 보여 줬다. 안에는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보석이 자리했다.

보석이 자아내는 광채에 눈이 멀뻔한 벤디가 가슴을 탕탕 쳤다.


“저는요?”

“안 그래도 회장께도 사과의 말씀을,”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거 말고 저거, 성의 표시. 벤디의 검지가 안나의 손에 있는 보석함을 가리켰다.

일순 어이가 없어진 밀러 워든이 소리치듯 속삭였다.

‘전에도 묻고 싶었는데,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쯤 되는 사람이 대체 왜 거지입니까?!’

‘누가 거지예요? 지갑이 좀 비었을 뿐인데.’

‘뻔뻔한 얼굴로 주장해 봤자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점잖은 작별을 하마터면 호통으로 망칠 뻔한 밀러 워든이 분노를 다스렸다.

“아무튼.”

큼, 큼. 연거푸 헛기침한 그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는데,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맞아, 쓰러진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주셨죠?”

“어, 그거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밀러 워든은 반사적으로 벤디의 배낭을 바라봤다.

곧바로 그 안에 자리 잡은 새끼 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똘망똘망한 눈이 돌연 수라처럼 번득였다.

알아서 말 잘해라. 단번에 의미를 알아챈 밀러 워든이 식은땀을 훔쳤다.

“예, 바로 접니다.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태도가 어딘지 뻣뻣했지만, 벤디는 선선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오히려 제가 할 말입니다. 이 약초, 벨헬름 아카데미 학장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약초가 든 보관함을 가리킨 밀러 워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실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얼른 전해 드리고 저도 분발해야죠, 다음 해에도 학생회장이 되려면.”

어째 뇌물을 건네고 열심히 알랑거려 보겠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벤디가 그런 생각을 이어 갈 즈음, 밀러 워든은 벤디의 손을 잡아 들었다.

“모쪼록 첫 만남의 무례는 용서하시길.”

허리를 낮춘 밀러 워든이 벤디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춘 밀러 워든은 왠지 기묘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의외군.’

보기와는 달리 벤디의 손등에 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거의 털에 입술을 파묻은 수준.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는 무표정한 노란 짐승과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

그제야 제가 짐승의 앞발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을 인지한 찰나, 노란 짐승의 앞발이 밀러 워든의 얼굴을
강타했다.

“컥!”

“레넌!”

놀란 벤디가 대뜸 노란 짐승을 들이민 레넌을 뒤로 밀었다.

“왜 그래? 노랑이 좀 괴롭히지 마.”


아무리 그래도 새끼 사자인데, 표범의 입이 닿았으니 얼마나 무섭겠어.

벤디는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밀러 워든의 입이 제 손등에 닿지 않은 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표범의 손등 키스라니. 자칫하면 작별을 기절로 물들일 뻔한 위기였다.

“대체 왜 갑자기 심술이야?”

벤디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레넌은 밀러 워든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별 인사가 기네, 점박이 회장. 호위의 다리가 아플 것도 배려해 줘야지.”

살다 살다 이런 고귀한 호위는 또 처음. 한시 빨리 벨헬름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어진 밀러 워든이


허둥지둥 마차에 올랐다.

#<57 화>

“회장.”

출발 직전, 창문을 연 밀러 워든이 벤디에게 살짝 손짓했다.

“왜요?”

벤디가 조금 가까이 다가서자, 밀러 워든은 서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내년에는 수인 아카데미 측에서 우리 벨헬름 아카데미에 방문할 차례죠.”

“그런데요?”

“그때는 이번의 무례를 만회할 수 있도록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밀러 워든의 입꼬리가 빙그레 말려 올라갔다.

“내년에 뵙죠.”

그 말을 끝으로 히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먼지바람 속에 남겨진 벤디는 굳은 채 자리를 지켰다.

저 말은 즉 내년에도 학생회장을 하란 의미인데.

‘이 고생을 또 하라고?’

떠나기 직전에 어쩜 그런 말을.

‘너무해.’

정말이지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육식 수인이었다.

벨헬름 아카데미 심벌이 새겨진 마차가 완전히 광장을 벗어났다.

학장실 창가에 선 밀란느 학장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육부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벨헬름 아카데미 학생회 측에서 친선 도모 보고서 제출을 끝마쳤다고
합니다.”

놀란 밀란느 학장이 비서를 돌아봤다.

“벌써 말인가?”

그들은 이제 막 이곳을 떠났는데.

이는 곧 수인 아카데미에 머무는 동안 이미 보고서 제출을 끝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결과는?”

“전체 만점에, 추후 작성해야 할 학생회 평가 보고서도 만점으로 미리 제출했다고 합니다.”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점수를 깎지 못해 안달이었던 벨헬름 아카데미 측이.

잠시간 침묵을 이어 간 밀란느 학장은 느지막이 물었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거.”

비서는 품에 들고 있던 서류를 집무 책상 위로 내밀었다.

“벤디 님의 행적을 조사한 자료입니다. 대강의 실마리는 잡았으나, 자세한 사안까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뒷짐 진 밀란느 학장은 집무 책상을 등진 채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교목 뒤에 숨은 채 몸을 반만 내민 벤디가 있었다.

그런 벤디의 앞에는 안나가 기르는 곰이 학생회 팻말을 들고 있는 중이고.

‘아직도 육식 동물을 무서워해서야.’

정말이지 다시 봐도 못 미더운 학생회장이었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밀란느 학장이 뒤늦게 입을 뗐다.

“되었네.”

“예?”

“조사는 이제 그만두게나.”

순간 얼떨떨해진 비서는 이내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되물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어, 내쫓을 결심을 하고 학생을 들였으니.”

“…….”
“저 아이가 초식 수인이든 다른 무엇이든 결국은 내 학생일세. 학생은 날개를 펼치려 하는데, 나서서 그
날개를 부러뜨리려는 교육자가 될 순 없지.”

“……밀란느 학장님.”

날개고 자시고. 말이야 멋있게 했지만, 이미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기도 하고.

입맛을 다신 밀란느 학장은 기어코 리울 약초까지 뽑아 온 벤디의 마력을 떠올렸다.

하물며 어영부영 굴러가지만 매 행사마다 나름 성과를 내는 결과까지.

이대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잘만 졸업하면, 수인 아카데미의 역대 인재 반열에 오를 건 확실시되는 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쪽에 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난 그 자료를 읽지 않겠네.”

단호한 밀란느 학장의 등을 마주한 비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확인 정도는 괜찮으실 텐데요.”

“아니, 도로 가져가게나. 지나간 과거보다는 앞으로 저 아이가 무얼 하는지 내 지켜볼 셈이니.”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가 조금 독특합니다.”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흘끔. 곁눈질로 보고서를 살핀 밀란느 학장이 홱 고개를 바로 했다.

“필요 없대도.”

“흥미로우실 텐데.”

“어허.”

“학장님의 뜻이 그러하시니 이 자료는 제가 처분하겠습니다.”


단호한 뜻을 받든 비서가 조사 자료를 챙겨 들었다.

그가 막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잠깐.”

학장의 엄중한 목소리가 학장실을 울렸다.

“딱 한 장만 확인하겠네.”

서류는 한 장이 전부였다.

밀란느 학장이 벤디와 관련한 보고서를 살피고 있을 무렵.

기숙사에 박히다시피 한 원은 붙박이처럼 통신구를 응시했다.

페트리온에서의 사건 이후 스카론 장로의 연락만 기다리는 나날.

치지직. 드디어 통신구가 울리며 스카론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탈하셨습니까.]

공손히 인사를 건네는 스카론 장로를 바라보던 원이 중얼거렸다.

“스카론.”

[하문하십시오.]

“…….”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한 원은 잠깐 기숙사 한편에 자리한 거울을 돌아봤다.

전신거울 속에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 비교적 큰 체격의 남자가 자리했다.

원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감한 표정의 남자 위로 아홉 살의 소년이 겹쳐졌다.


그렇게나 달라진 걸까.

신장이 자라고 선이 강해졌을 뿐, 아주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학생회장이 그때 그 여자아이라면. 어떻게 그대로인 원을 보고도 작은 기시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지.

물론 늑대로 함께하다가 사람으로 변한 게 한밤중의 숲이라곤 하지만…….

원으로서는 학생회장의 안면 인식 능력을 의심해 볼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왜.

한참 만에 결론을 내린 그는 거울에서 통신구 쪽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스카론, 내가…….”

원은 무심결에 제 얼굴을 매만졌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흔해 빠진 얼굴이었던가.”

동시에 스카론 장로는 그만 통신구를 놓치고 말았다.

지지직, 통신구 속 스카론 장로의 모습이 흔들리며 대뜸 바닥을 비췄다.

[소, 송구합니다.]

통신구를 주워 바로 세운 스카론 장로가 손수건으로 이마 땀을 훔쳤다.

흔하긴 무슨, 작은 통신구를 통해서 봐도 부담스러울 만큼 잘난 얼굴인데. 완벽한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안착한 수준이었다.

[……제 대답이 필요하신 겁니까?]

“됐어.”
실상 그리 흔한 얼굴이 아닌 정도는 원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백호처럼 밥 먹듯 써먹을 일이 없기에 무감각해져 있을 뿐.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지만, 스카론 장로의 반응을 미루어 이미 답은 들은 셈이었다.

“학생회장이 그 소녀라면 왜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그분이 그 소녀라면 사슴 수인이 여우 수인 행세를 하고 있는 거니.]

그렇게 여기기엔 학생회장은 첫 만남부터 아예 모르는 사람 상대하듯 원을 대했다.

하물며 원을 능숙히 속일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위인은 더더욱 아니고.

원은 첫 만남 당시, 터무니없는 환영 케이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고구마 케이크였지. 사슴 영역 특산물.

곱씹을수록 소녀에 대한 단서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보고 사항은?”

원의 질문에 스카론 장로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레피 저택 가주…… 아니, 선대 가주의 외동딸이 행방불명된 시기와 벤디 레피 학생의 아카데미 입학


시기가 비슷합니다.]

이로써 추측에 확신을 더한 셈.

원의 손에 의자 손잡이가 으스러질 정도의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육식 수인으로 위장했다 한들, 그 이목구비를 한 학생회장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눈치를 살핀 스카론 장로는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원 님, 일단 그 학생을 추궁하거나 몰아붙이는 선택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당장 감옥에서만 해도 원 님을 뒤로한 채 달아났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나에 대해 상기했을 확률이 높지 않나.”

[그 학생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겁니다. 이 먼 육식 영역으로 건너온 것도 모자라, 신분과 종족까지


숨기고 있으니……. 조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조금 표정이 변한 원은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스카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스카론 장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조언이 아니고서야 굳이 그의 행동에 말을 얹지 않는 편이었다.

[어제 입수한 정보인데, 레피 저택 고용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 외동딸이 행방불명된 이유가.]

잠깐 말을 끊은 스카론 장로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혼담일 거라고 합니다.]

“혼담?”

[예, 혼담이오. 아마 육식 수인과의 혼담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 치지직, 거, 치직, 라고……,]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적, 이어서 스카론 장로의 얼굴이 우그러지며 통신구가 박살 났다.

“아.”

뒤늦게 정신 차린 원이 손에 힘을 풀었지만, 이미 통신구는 생명을 다한 후였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늦은 밤.

해피를 비롯한 마구간의 모든 말이 경계 태세를 갖췄다.


온다.

얼마 전, 그들의 마구간 천장을 부순 몹쓸 수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벤디였다.

푸르릉!

“아악!”

간식을 주러 오자마자 대뜸 근육질 사슴에게 치인 벤디가 구석으로 튕겨졌다.

이유도 모른 채 해피에게 두들김당하던 벤디는 억울하게 외쳤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항변은 더 큰 응징을 불러올 뿐.

푸르릉!

“아야, 아프대도!”

간식까지 강탈당한 벤디는 들어올 때와 달리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누구는 생활비가 남아돌아 사슴 간식을 챙겨 오는 줄 아나.

서러움에 지푸라기를 뜯던 벤디가 구석에서 쪼그라들었다. 해피의 완벽한 졸개로 전락한 말들이 벤디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인부들이 천장을 고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마구간이 부서지는 일 따위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삼엄한 감시하에 벤디는 얌전히 무릎을 모았다.

쫓겨날 순 없으니까. 초식 동물이 가득한 마구간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안심되는 곳이 없었다.
#<58 화>

[모니, 잘 지내? 나는 요즘 악어 영역에서…….]

힘을 기르는 동안 숙부의 시선을 돌릴 편지를 써 내려가던 벤디는 짐짓 눈을 감았다. 기억 저편에서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선 후환이 없도록 그 자식의 목을 따고 싶어.’

‘……아리엘, 벤디가 깰지도 모르니 제발 목소리라도 낮춰 줘.’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벤디의 마력을…….’

‘내 마력을 뭐?’

아, 엄마.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야.

답답해진 벤디가 팡, 지푸라기를 내려치자 해피를 비롯한 말들의 매서운 눈길이 박혔다.

야박하긴. 조용히 웅크린 벤디는 단서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과거부터 가주 자리를 탐낸 숙부.

그런 숙부를 경계한 어머니.

‘내 아이, 벤디가 저런 마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그 탐욕스러운 자는 반드시 벤디에게 위해를 가할 거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제 마력과, 어릴 때부터 각혈을 반복한 자신.

그리고 초식 수인의 기력에 영향을 주는 리울 약초.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벤디의 마력을…….’

‘벤디의 마력을……? 음, 숙부의 눈을 속이려 내 마력을 감추기라도 했나?’

이 벤디 레피의 방대한 마력을.

허세만 한 바가지인 추측을 이어 가던 벤디가 주춤했다.

‘……봉인?’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절묘한 의심을 얻자 공중을 떠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몸으론 버티기 어려운 마력이라 각혈을 한 거고.

그 점도 그 점이지만, 숙부의 존재를 염려한 어머니가 이를 감추기 위해 마력을 봉인했고.

‘리울 약초를 먹였으니 곧 안정될 거야.’

리울 약초 같은 무언가로 조금씩 마력을 개방한 거라면.

‘그럼 애초부터 마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약간씩이나마 늘어나긴 했던 어린 시절의 마력을 생각하면 아주 터무니없는 가설은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을 접으며 햇수를 헤아렸다.

‘부모님이 아홉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숙부가 가주가 된 날을 기점으로 약초는커녕 마력과 관련된 건 구경도 못 해 봤으니.

아무리 공부하고 훈련해도 아홉 살 언저리의 마력 수준에 멈춰 있을 수밖에.

‘설마.’

근 십 년을 억눌려 있던 마력이 리울 약초를 통해 터져 나온 걸지도. 리울 약초는 구린내, 아니 강한


향만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

반신반의한 벤디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산에서 기절한 이후 한 번도 마법 소환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실내 환기만 시키는 공기주머니가 아닌 다른 게 나올지도 몰랐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벤디가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레넌에게 배운 대로, 한곳에 모아 방출한다는 느낌으로.

이윽고 예고도 없이 벤디의 손에서 펑! 대형 공기주머니가 터져 나왔다.

“악!”

반동으로 날아간 벤디가 지푸라기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현실감 없이 굳어 있던 벤디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서, 성공…….’

해냈다.

‘제대로 된 마법을 소환했어.’

해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자연스레 해피를 찾았지만, 해피는 눈을 크게 뜬 채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피의 시선 끝, 마구간 벽에는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생긴 상태였다.

아차. 늦게나마 사태를 파악한 벤디는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미안해……. 내가 내일 바로 처리할게, 응?”

해피는 끼기긱, 기괴하게 고개를 비틀며 벤디를 돌아봤다.


저 미친 사슴이 또 내 보금자리를 부쉈다.

푸르릉, 푸르릉. 분노한 해피가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벤디는 보았다. 사슴의 옹골진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장면을.

푸르릉!

“해피, 잘못, 아아아악!”

히히힝!

사슴의 포효소리와 놀란 말 울음소리, 사슴 수인의 처절한 비명이 뒤섞였다.

바야흐로 초식 동물들이 벌이는 피의 축제였다.

“회장, 이번 친선 도모를 겪으니 알겠죠? 학생회는 세 명으론 턱없이 부족해요.”

“아니, 네 명과 한 마리다.”

“세 명만으로는 어려워요.”

“아니, 네 명과 한 마리라니까.”

오늘도 학생회실에서는 야닉과 안나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집무 책상에 앉은 벤디는 턱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소란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마법 소환에 성공했다.

밤새 잠까지 설치며 곱씹었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대형 공기주머니를 만들다니. 심지어 공기 청정 기능이 아닌 마구간에 구멍을 뚫을 정도의 위력.

“…….”
너무 좋아.

벤디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경련하는 와중, 코앞에 웬 은발이 드리워졌다.

“회장, 뺨에는 왜 발굽 자국을 달고 있어?”

레넌이었다.

예고 없는 얼굴 공격에 눈이 멀 뻔한 벤디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곧장 멀어지려던 벤디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런드버그 설산으로 떠나기 직전, 레넌이 스치듯 한 말이 떠올랐다.

‘늑대를 조심해.’

설산에 있을 늑대를 조심하란 건지, 아니면 원을 조심하란 건지 구분하기 애매했던 말이.

그와 동시에 설산 안내인과 나눈 대화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안내인 아저씨, 설산에 혹시 늑대도 있나요?’

‘아유, 그럴 리가요. 밀란느 학장님의 관리하에 있는 만큼, 인명을 해칠 만한 짐승은 없습니다.’

짐짓 망설인 벤디는 이내 물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레넌.”

벤디가 먼저 시선을 마주쳐 오는 건 흔치 않기에, 흥미가 인 레넌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왜?”

“런드버그 설산에 늑대는 없었어.”

레넌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양발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네가 말한 늑대는 무엇을 지칭하는 거였는데. 벤디의 눈동자에 뚜렷한 의심이 서렸다.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라…….’

그때 페트리온의 숲에서, 너야?

벤디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의문을 애써 삼켰다.

“당신은 청소나 계속하세요.”

“무슨 소리를, 이제 이 야닉 펠도 엄연한 학생회 일원이라고!”

“그럴 리가, 당신은 영원한 입회 희망자에 불과해요.”

안나와 야닉의 고성 속에서 이 주제를 꺼내기엔 장소가 영 마땅치 않았다.

질문을 꺼내지 못한 채 입술을 여닫는데, 달칵, 누군가 학생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원 리오나드였다.

“…….”

내내 소란스럽던 학생회실이 오묘한 정적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게 원은 페트리온에 다녀오기 직전부터 이곳에 발길을 끊었기에.

최근 안나가 어느 정도 원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만큼, 사실상 인수인계도 크게 필요가 없는 시점이었다.

제게 꽂힌 무수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원이 곧장 학생회장석으로 직행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벤디는 자동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경직될 수밖에. 페트리온 감옥에서의 사건 이후, 제대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집무 책상 앞에 다다른 원은 벤디 주변을 둘러봤다.

책상 측면에는 레넌이 걸터앉아 있었고, 책상 아래에는 새끼 사자가 벌렁 드러누워 잠든 상태.

이 기묘한 그림을 맞닥뜨린 원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칠 뻔했다.


자신을 비롯하여 레넌 에던트와 헤일린 이스단까지.

학생회장이 사슴 수인인 걸 알든 모르든 간에, 공교롭게도 초식 수인 하나를 두고 맹수들이 몰려든


꼴이었다.

하필 원으로서도 처리하기 상당히 번거로운 두 사람이.

이어서 원의 시선이 집무 책상에 앉은 벤디에게 머물렀다. 담담한 얼굴에선 뚜렷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여전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저 표정은.

원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올라갔다. 학생회장과 지내는 시간 동안 알아채지 못한 게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찼다.

‘죽는 방법을 모르겠어.’

‘차라리 나도 엄마 아빠랑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원은 최선을 다해 시선을 피하는 중인 벤디를 내려다봤다.

그를 모른 척하는 중이든, 정말 기억하지 못하든. 당장은 살아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 학생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겁니다.’

스카론 장로의 목소리를 상기한 원은 아무 말 없이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눈앞에 있는 이상 시간은 많았다.

네 개인적인 사정이야 알아내면 되고,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하게 만드는 수밖에.

고작 생사 확인이나 하려고 몇 년을 찾아다닌 게 아니었다.

“……?”

원이 대뜸 내민 문서를 받아 든 벤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걸 갑자기 왜…….’


천천히 벌어진 입술이 곧 파리가 들어갈 만큼 확장됐다.

얼어 버린 벤디를 발견한 레넌이 땡, 소리를 내며 콕 찔렀다.

그러나 워낙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은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데 그래?”

벤디의 손에서 문서를 가져온 레넌은 덩달아 얼음으로 변했다.

팔랑팔랑, 그의 손에서 떨어진 문서가 노란 짐승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이것들이 왜 다 호들갑이야?”

뒤이어 다가선 야닉이 문서를 주워 들었다.

“대체 이 종이 쪼가리가 뭐라…… 학생회 입회 신청서?”

“……뭐?”

덜컹,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안나가 문서를 뺏어 들었다.

신분, 리오나드 가문 차기 가주.

경력 사항, 전년도 학생회장 및 대륙 마법 협회 전대 회장, 기타 등등.

현실감 없는 신청서를 읽어 내려가는 눈이 지진이 일 듯 흔들렸다.

횡재다.

“학생회장!”

마음이 조급해진 안나가 쾅,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섰다.

“이건 바로 수락해야 돼요, 마음을 바꾸시기 전에.”

무조건 입회시켜야 한다. 원이 이런 정신 나간 선택을 하는 이유야 알 바 없었다.


#<59 화>

“이봐, 이 야닉 펠이 있는데 순서를,”

“3 인칭 애호가는 입 닫으세요! 회장, 어서!”

벤디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안나의 눈동자를 슬그머니 외면했다.

‘말도 안 돼.’

쿵쿵,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어 댔다.

원이 무슨 의도로 자신을 찾아다닌 건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가능한 한 피하려고 마음먹자마자 이런


식의 접근이라니.

마치 관찰 대상을 곁에 두려는 목적처럼 느껴졌다.

손을 만지작거린 벤디는 흘끔, 원을 올려다봤다.

‘의도가 궁금하긴 하지만…….’

당장 숙부도 모자라 초식 수인인 사실, 그리고 마력까지.

걸리는 게 많은 현재, 당장 곁에 두기엔 너무 위험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학생회 입회를.”

꽤 오랜 시간 고민한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결과를 알릴 입에 학생회실의 모든 눈이 집중되었다.


“거절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설마하니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한 원이 그대로 굳었다.

반문도 못 한 채 멀거니 선 그에게 다가간 야닉이 툭, 어깨를 짚었다.

“참고로 1 호는 이 몸이다.”

“…….”

“선배로서 효과적인 빗자루 사용법을 전수해 줄 테니, 걱정일랑 넣어 둬.”

전년도 학생회장, 원 리오나드.

그가 학생회 입회 희망자 2 호로 전락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마법 물약 제조 강의가 있는 날.

강의실로 향하던 나는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을 잠깐 올려 봤다.

재킷을 벗고, 차림새가 약간 가벼워지는 계절.

얇은 카디건을 걸친 옷차림 때문인지 새삼스러운 감회가 들었다.

레피 저택을 떠날 때만 해도 두꺼운 망토를 걸쳐야 했는데.

‘만약 그때 달아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숨겨진 마력이 있을 거란 건 꿈에도 모른 채, 팔려가듯 사자와 혼인했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이승에 없을


수도 있고.

오소소 소름이 돋은 내가 솜털이 쭈뼛 선 팔을 쓸었다.

‘무조건…….’
어떻게든 이곳 수인 아카데미에서 버텨야만 한다.

힘을 기르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얻을 때까지.

다시 한번 다짐한 나는 푸른 교정을 둘러봤다.

“찾았어?”

“아니, 아직. 별관으로 가 보자!”

느낌 탓일까. 요 며칠 묘하게 교내 분위기가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노랑이의 행방도 묘연하고.

“저기 있다, 학생회장!”

노란 짐승의 행방을 떠올릴 즈음, 웬 여학생 무리가 나를 가리키며 뛰어왔다. 우르르, 과장하면 부연
먼지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머릿수였다.

“여러분, 배낭을 확인해요!”

내 배낭은 왜?

경계하듯 홀쭉한 배낭을 끌어안자,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비친 학생들이 다시 멀어졌다.

고작 몇 초 사이의 일.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소란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저게 무슨……?’

다 같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나.

‘아니면 보물찾기?’

갈피를 못 잡은 채 바라보고 있으니 뎅, 뎅, 시계탑이 울렸다.


아차.

‘지각이야.’

소스라친 나는 얼른 강의실을 향해 달렸다.

“있을 만한 장소는 전부 뒤져!”

“구관은 찾아봤어?”

뛰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바글바글 몰려 교정을 뒤지고 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대부분 여학생들이었다.

마침 교정을 거닐던 밀란느 학장님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뒷짐 졌다.

“이런, 또 그 시기인가? 거 참, 젊은 혈기가 부럽구먼.”

지각인 탓에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내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그 시기가 대체 뭐야?’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 열매 가루 한 스푼.”

한 스푼.

“벌꿀 두 스푼.”

두 스푼.

“마지막으로 본인의 마력을 물약에 흘려보내는 겁니다.”

마력을 흘려라.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물약을 제조하던 나는 마음 한편이 벅차올랐다.

얼마 전에 마법 소환에 성공한 자가 누군가. 바로 나, 벤디 레피였다.


덕분에 최근 들어 자신감이 폭발한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 안의 마력을 흘려보낸다.

복숭아색 물약에 천천히 마력을 흘려보내는 순간, 펑! 유리 비커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 좋은 예시가 나왔군요. 마력 조절에 실패하면 이런 폭발을 일으키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얼굴에 검둥이가 묻은 나를 가리킨 교수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폭발하던 내 자신감도
자취를 감췄다.

“사랑, 우정, 존경, 호의.”

교수님은 강의실을 거닐며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알다시피 이 물약은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죠. 물론 일시적이긴 하지만…… 특히 당부하는데!”

“…….”

“요즘 유행하는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장난으로 섭취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결국 나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물약 제조에 실패하고 말았다.

마력만 높으면 되지, 이게 다 뭐라고.

‘내가 물약 상점을 열 것도 아닌데.’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자괴감을 느끼는 중, 강의실 한편이 유독 소란스러웠다.

손가락 사이로 눈을 뜬 나는 소란의 근원지를 살폈다.

“너는 작년이랑 똑같아?”

“물론.”

대화를 나누는 클래스메이트들은 손에 작은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물약. 직전 강의에서 만든 복숭아색 물약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레넌 님이지.”

“솔직히 이번만은 헤일린 님 아니니?”

“무슨 소리, 원 님이야.”

계속해서 익숙한 이름들이 번갈아 들려오는데…….

세 사람의 공통점은 성격과는 아주 별개인 잘난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대화를 나누는 구성원은 전부 여학생.

불현듯 교수님이 강의실을 나서기 전에 덧붙인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장난으로 섭취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혹시?’

교내가 소란스러운 이유.

왠지 감이 온 나는 홱 소리 나게 신시아를 돌아봤다.

서적을 읽던 신시아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끄덕였다.

“맞아.”

아직 아무 질문도 안 했는데.

“그러고 보니 학생회장은 처음이겠네.”

클래스메이트인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가 대뜸 뒤에서 내 정수리 위에 제 턱을 묻었다.

너무 가까워. 얼굴까지 소름이 돋은 내가 앉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라일라의 설명은 즉 이거였다.

감정과 관련된 물약 제조 강의.


이 강의 시기가 도래하면 여학생의 반절 이상은 사랑과 관련된 물약을 제조한다.

수인 아카데미의 여학생들은 대부분 귀족 영애. 언제 가문을 물려받든 정략결혼을 하든 이상할 게 없는


신분이었다.

대부분 마음을 터놓고 표현하기 어려운 입장인지라, 억눌러 온 감정을 이 시기를 틈타 표출한다는데.

설명을 듣던 나는 의아함에 되물었다.

“사랑에 빠지든 말든, 어차피 약효는 일시적인 거 아니야?”

“어차피 다들 가볍게 즐기는 이벤트 같은 거라 상관없는 것 같던데.”

가볍게라니. 교정에서 벌어지던 격렬한 숨바꼭질 장면을 떠올린 내가 되물었다.

“그게 가볍게 즐기는 거라고?”

“어…….”

잠깐 생각하듯 말끝을 흐린 라일라가 씩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무서운 송곳니 표출 미소였다.

“한 해를 기다리다 보니, 표현 방식이 다소 거칠긴 해.”

비교적 얌전히 건네주기도 하고, 과열되면 다짜고짜 먹이려 한 사례도 있다고.

다만 묘약을 받는 남자가 대체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반복되면서 매해 벌어지는 연례행사처럼 굳어진 게 숨바꼭질 놀이의 전말이었다.

“여학생들이 워낙 열광하다 보니, 마음이 없더라도 묘약을 받아 주는 게 관례가 됐지.”

“안 받아 주면?”

“음……. 수시로 그런 묘약을 받는 것보단 그냥 이 시기에 받아 주는 게 낫다고 보는데. 당장 우리


클래스만 해도 저 머릿수를 봐.”
라일라는 고개로 까딱, 삼삼오오 모여 의논 중인 여학생 무리를 가리켰다. 반대편도,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묘약을 받게 되는 인물도 거의 정해져 있으니까.”

곧장 세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학생들의 입에서 유독 자주 언급되는.

“그 세 명?”

“맞아, 그 세 명이 압도적이지.”

“레넌은 왜?”

질문하자마자 책을 읽던 신시아가 라일라 대신 대답했다.

“미친놈이 내게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대.”

으.

“원 님은?”

“완벽한 모습이 나로 인해 흐트러지는 걸 보고 싶대.”

으.

“헤일린 이스단은?”

“위험한 남자가 오직 내게만 순응하는 모습이 궁금하대.”

으.

얼굴을 잔뜩 꾸긴 내가 팔짱 꼈다.

“대체 누가 그래?”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

얼마나 귀 아프게 들었으면 대답하는 신시아의 목소리에 지긋지긋함이 묻어났다.


저런 거창한 설명보다는 순서대로 화상, 밉상, 진상이 더 어울리지 않나.

다들 묘약을 주고 싶은 대상의 성격은 일절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취향이란 뭘까. 심오하게 고민하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강의실 곳곳에서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클래스메이트들 때문에.

창틀에 기대어 앉아, 책상에 엎드려, 손등으로 이마를 짚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우수에 젖어 있었다.
공통점은 대부분 남학생들이었다.

“모두가 묘약을 받을 순 없으니까.”

그들을 심드렁하게 훑은 라일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부익부 빈익빈.”

“야, 라일라!”

우수에서 깨어난 학생들이 라일라에게 왈왈 따지고 들었다.

“말이 심하지 않냐?”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냐고!”

“이것들이, 어디서 묘약 못 받고 나한테 화풀이야?”

쾅, 라일라의 주먹에 부서지는 책상을 본 나는 조용히 강의실을 나섰다. 모르긴 몰라도, 다들 이 시기에
진심인 건 알겠다.

#<60 화>
소매를 걷어붙인 학생들이 교정을 점령했다.

“반드시 잡는다!”

범죄자를 쫓는 보안관들이 외칠 법한 용맹한 대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저기에 치였다간 뼈도 못 추리겠어.

교정을 지나친 나는 학생회실로 이어진 복도를 걷다가 돌연 멈춰 섰다. 학생회실 앞에 뭔가가 있었다.

신중하게, 들키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한 나는 걸어온 길을 따라 뒤로 걷기 시작했다.

“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일순 삐거덕거린 내가 학생회실 문 앞에 기대어 선 원을 바라봤다.

도망갈 틈조차 주지 않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내 위로 장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벽에 달라붙은 채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달아나기 무섭게 턱, 원의 발이 내 발을 가로막았다.

“제정신입니까?”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너희 육식 수인들에 비하면 가장 제정신이거든.’

억울해하는 나를 내려다본 원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제 입회 신청서를 반려한 겁니까.”

나를 쫓는 데다, 목적도 모르는 늑대를 어떻게 옆에 둬.

차마 그렇게 대답하진 못한 나는 핑계를 찾기 위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원 님이 가르쳐 주신 거잖아요.”

“무슨?”

“제 자리를 위협할 만한 인물은 학생회에 들여선 안 된다고.”

물론 원은 권한을 노리는 자를 지칭한 거였긴 하지만.

어쨌든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벤디 레피의 입지를 위협하는 인물이니,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인수인계 내내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던 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인수인계로 계속 번거롭게 해 드렸는데, 이제는 걸음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저도 어느 정도 서류를 볼 줄 알게 됐고, 부학생회장이 역할을 잘 해 주고 있어서요.”

말문이 막힌 원은 신경질적으로 목을 조이는 타이를 끌렀다.

정적인 얼굴과 흐트러진 교복 차림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완벽한 모습이 흐트러지는 걸 보고 싶다.

하필 그 문장이 머리를 강타한 나는 발끝에 시선을 뒀다. 더 보고 있다가는 내 정신과 이성이 흐트러질 게
분명했다.

불안한 침묵이 지나갔다.

원은 한참 만에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잡아먹으라고 귀찮게 굴 때는 언제고.”

“……?”

“이젠 필요 없으니 꺼지라는 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사색이 된 내가 뒤로 물러나며 등을 벽에 찰싹 붙였다.

‘내가 언제?’

학생회장 업무를 알려 달라고 귀찮게 굴긴 했을지언정, 살아남기 바쁜데 그런 발언을 했을 리가.

“저쪽이다!”

“역시, 이곳에 계실 줄 알았어!”

갑작스레 멀리에서부터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복도 끝에서부터 추격대, 아니 약병을 손에 든 여학생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쯧, 혀를 찬 원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품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냈다. 차원 이동에 사용하는 일회성


마법 스크롤이었다.

휘리릭, 마법 스크롤을 펼치자마자 허공에 이공간이 생겨났다.

그곳으로 발을 들인 원은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나중에 얘기하죠.”

얘기하고 싶지 않아, 후일을 경고하지 마.

입을 가로막은 나는 최선을 다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반쯤 내리뜬 황금색 눈이 스치듯 내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이내 원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킨 이공간이 빠르게 공중에서 소멸했다.

“코앞에서 놓치다니!”

한발 늦게 도달한 학생들이 성마른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귀족이 아닌, 미지의 무언가로 진화할 기세인 그들을 피해 숨죽였다.


“어차피 마법 스크롤로는 멀리 가지 못해요.”

“맞아요, 분명 교내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의기투합한 학생들이 다시금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긴 복도에 홀로 남겨진 나는 굳은 채 자리를 지켰다.

설마 원이 감옥에서 나를 알아봤나 싶은 생각과 함께 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층 깊어진 의문 속, 나는 조금 전까지 원이 있었던 빈 공간을 돌아봤다.

‘게다가…….’

입을 가로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방금 전, 원이 도주에 사용한 일회성 마법 스크롤.

‘저 비싼 걸 도주에…….’

내 삼 년 치 생활비에 버금가는 금액이 원과 함께 공중에서 소멸했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벌써 지친 나는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로 터덜터덜 들어섰다.

문득 장부가 있을 서랍에 눈길이 닿았다.

학생회 자금.

이는 내가 장부를 열었다가 기절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육식 수인들에게 시달리며 아카데미에서 버틸 바에, 차라리 이 기회에 들고 나를까. 저 금액이라면 아예


대륙을 건너서…….

불순한 생각을 해 버린 내가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그런 짓을 하면 숙부도 모자라 밀란느 학장님께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


일 초 만에 포기한 나는 창고로 들어섰다. 독서광 신시아의 엄명을 이수해야만 했다.

‘회장, 이거 아마 다음 권도 있을 텐데.’

창고에 남아 있을 숨은 금서 찾기.

유능한 조련사, 아니 서기를 유혹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을 뒤지고, 안쪽 서랍장을 뒤지고.

원의 생존 위협과는 별개로 몸은 부지런히 일했다.

학생회는 아카데미의 일꾼이라더니. 진짜 일꾼처럼 창고를 뒤적이던 나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시선을 뒀다.

달칵, 상자를 열자 안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가득했다.

“아, 이거 그건가 보네.”

체육 대회 때나 사용한다는 소품을 모아 둔 상자.

혹시나 싶어 상자에 손을 넣고 뒤적이던 나는 기묘한 감촉을 느꼈다.

손끝에 인형 털과는 다른 부드러운 무언가가 잡혔다.

‘인형은 아닌 것 같은데?’

휘어잡고 무 뽑듯 쑥 잡아 올린 나는 그대로 굳었다.

손에 잡은 건 은색 머리카락이었고, 뽑아 올린 건 레넌의 얼굴이었다.

깜박깜박. 머리채를 잡힌 레넌은 인형 더미 위로 얼굴만 내민 채 시선을 마주했다.

세상에나.

정색한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레넌, 여기서 뭐 해?”


변명을 생각하듯 잠시간 침묵한 그는 어물쩍 넘어갈 때마다 쓰는 청순한 미소를 걸었다.

“인형 놀이.”

이상한 인형을 뽑고 말았다.

“레넌, 너도 그 묘약인가 그거 때문에 숨어 있는 거야?”

“…….”

인형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콕콕. 제 코를 가리키는 걸 보아, 코를 눌러야 말을 하는 인형인 설정인 듯했다.

진짜 짜증 난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콕, 코를 눌렀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콕.

“나가 주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불량인 모양이었다.

반품하기 위해 상자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으려는 찰나, 복도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에던트 님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학생회실은 찾아봤어?”

“아직. 그런데 여긴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되잖아.”


“아까 학생회장이 들어가는 걸 봤어, 잠깐 둘러보게만 해 달라고 말해 보자.”

불량 백호 인형을 처분할 좋은 기회였다.

“여기에 레넌 에,”

읍!

여기에 모두가 찾는 백호랑이가 있다. 그렇게 외치려는 동시에 뒤에서 나온 커다란 손이 입을 가로막았다.

뒤이어 몸이 나무 상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달칵, 학생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는데?”

창고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단단한 몸이 닿았고, 목덜미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거의 인형과 레넌의 품에 갇힌 모양새였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기분. 버둥거리려 하자 팔로 몸을 가둔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다른 여자를 따라가도 괜찮아?”

“…….”

“호위가 없어지면 아쉬울 텐데.”

귀에 닿는 요망한 백호의 숨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레넌만 한 호위가 없어지면 득보다는 실이 많긴 한데.

늦게나마 묘약의 효과가 일시적임을 상기했을 때, 창고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봐, 창고가 열려 있어.”


“이, 이만 나가자.”

“온 김에 잠깐만 찾아보면 안 되나? 혹시 모르잖아.”

“멋대로 둘러보다가 안나 스웰든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 몸이 제구실을 못 하게 될걸.”

“……당장 나가자, 빨리.”

여러 개의 발소리가 다급히 학생회실을 벗어났다.

어쩌면 나는 레펠튼에서 터무니없는 사람을 이겨 버린 게 아닐까.

괴력 곰돌이에 대한 공포는 비단 내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듯했다.

탁, 이윽고 문이 완전히 닫히며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갔다.

나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자니, 새삼 레넌 같은 또라이가 피할 정도의 묘약이 궁금해졌다.

“묘약의 효과가 뭔데 그래?”

“대개 마시고 난 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지.”

“마셔 봤어?”

“호기심에 한번 먹었을 때.”

어울리지 않게 말을 끊은 레넌이 잘게 몸을 떨었다.

“헤일린 이스단의 뒤로 꽃 배경이 보였어.”

그 사자를 가장 처음 보고 말았구나.

나를 가두고 있는 레넌의 팔에서 공포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르륵, 뒤에서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너무 가까워.

바로 뒤에서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오싹해진 나는 벗어나려다가 말고 우뚝 멈췄다.

똑같았다.

페트리온의 숲에서 내 입을 가로막은 커다란 손도, 등에 닿은 단단한 몸도. 그리고 새벽 호숫가를


연상시키는 체 향까지.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역시.’

너구나.

#<61 화>

레넌은 원과 내가 있었던 페트리온 숲에 함께 있었다.

확신했음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내가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괴한의 정체를 알아낸 것까진 좋은데.

장본인인 레넌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먼저 말을 꺼내기에도 애매했다.

사슴 수인인 걸 알고 있냐고 굳이 따져 묻기에도 껄끄럽고.


돌아 있는 위인인 만큼 어설픈 설득이나 협박이 먹힐 확률도 낮았다.

“…….”

고요한 창고에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미 상자 속 인형의 절반은 바깥에 어질러진 상태였다.

“선물.”

눈앞에서 웬 하얀 호랑이 인형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백호 인형을 손에 받아 든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레넌은 이 인형처럼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친 자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순간 내가 미친 자가 된 거라고들 하지만. 딱 하나 알 수 있는 건…….

‘말하려면 벌써 말했겠지.’

내가 먼저 판도라의 상자를 열 필요까지야. 일단은 지켜보기로 결정한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형 더미에 파묻힌 레넌은 갑작스레 일어난 나를 올려다봤다.

“선물에 대한 보답.”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물약 제조 시간에 만든 약물을 담은 유리병이었다.

호수 같은 눈으로 유리병을 빤히 응시하던 레넌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사랑의 묘약?”

“아니, 다른 걸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그래도 혹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마셔 봐.”

특히 너는 꼭.

나무 상자에서 나온 나는 구겨진 교복을 탁탁 털며 문으로 걸어갔다.

“뭘 만들고 싶었는데?”

막 창고 문고리를 잡는데, 등 뒤에서 레넌의 질문이 들렸다.


문 뒤로 반쯤 몸을 감춘 내가 진중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식욕 감퇴 약.”

육식 수인들을 위한 사슴 수인표 특제 영약을 만들고 싶었는데.

탁, 닫힌 창고 문 너머에서 레넌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찌감치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잠옷을 입은 채 창밖을 구경했다.

저녁이 늦어도 교내는 환했다.

램프를 들거나, 양손에 불 속성이나 빛 속성 마법을 소환시킨 학생들 덕분에. 간간이 고난도 마법인
번개도 보였다.

다들 점잔 부릴 때는 언제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화려한 숨바꼭질을 벌이는 중이었다.

‘사람 하나 찾으려고 번개를 소환한다고……?’

새삼 수인 아카데미에 인재가 많음을 깨닫는 동시에 훌륭한 재능 낭비의 현장이었다.

“모두 자정 전에는 입실하십시오.”

아래에서 맥 빠진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깐깐한 사감도 오늘만은 통제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저래서 오늘 노랑이가 안 보이는 거구나.’

고양이는 물이나 불을 싫어한다고 하니, 사자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자야겠다.’

막 창문에서 몸을 트는 와중 턱, 뒤편에서 묘한 소음이 일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창틀에 매달린 검은 인영이 보였다.

“헤일……!”
떠올린 건 새끼 사자인데 왜 사자 수인이 나타난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내가 양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반동을 이용해 내 방에 착지한 헤일린 이스단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그는 겨우 한숨 돌린다는 듯 짜증스레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왜 하필 여기 숨어서 쉬는 건데.

최대한 반대편 옷장에 달라붙은 나는 숨을 고르는 헤일린 이스단을 흘끔거렸다.

어째 원이나 레넌보다 두 배는 더 너덜너덜해 보이는데.

교복 셔츠는 겨우 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잔디밭을 구르기라도 했는지 결 좋은 금발 여기저기에 풀잎을


붙인 상태였다.

유독 많이 쫓긴 듯한 그를 살피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깨달았다.

평소에는 아예 접근조차 힘든 만큼 이 기회에 노리는 거구나.

왠지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이나 레넌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헤일린 이스단은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날것의 느낌이 있으니까.
살짝 찢어진 눈과 예쁘장한 얼굴이 주는 느낌과는 별개였다.

실상 내 입장에서는 육식 수인에 제일 가까운 느낌이라, 가장 껄끄러운 이를 뽑으라면 헤일린


이스단이었다.

‘어쨌든 쫓아내야 돼.’

자칫 내 기숙사가 숨바꼭질의 장으로 변할지도. 최악의 가설을 그린 나는 슬그머니 말문을 뗐다.

“대충 쉬었으면 이제…….”

선혈보다 붉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이제?”

“더 푹 쉬면 좋겠어.”

내 입은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거스르는 게 취미인 모양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였어.”

자체적으로 결정한 헤일린 이스단이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온종일 쫓긴 모양인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점점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한 나도 조심스레 옷장을 열어 걸터앉았다. 여차하면 옷장에 숨을 수 있도록.

그런 나를 별종 보듯 훑은 그가 머리에 붙은 풀을 대강 털었다.

고개를 꺾은 탓에 드러난 목선으로 자연스레 눈길이 닿았다.

시선을 내리자 위쪽 단추가 열린 셔츠 사이로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뭇 사슴의 심경을 어지럽히는 장면과 동시에 헤일린 이스단의 중저음이 귀를 때렸다.

“아예 벗어 줘?”

“……네?”

“눈으로 그렇게 말하던데.”

모함이었다.

황급히 양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이미 열이 오르는지 귓가가 홧홧했다.

빨리 안 가나, 짜증 나는 사자.

저 사자를 상대할수록 노랑이가 그리워졌다.

까칠한 데다 귀여운 구석은 하나도 없고, 닿을 것 같기만 하면 바짝 날을 세우고.


‘생각해 보니 노랑이도 괜찮은 구석은 없구나.’

의도치 않게 노란 짐승을 신랄하게 욕해 버린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기숙사에 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부는 적막한데 창밖은 떠들썩한, 오묘한 조용함이었다.

“왜 이곳에 왔는데?”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헤일린 이스단이 먼저 고요를 깨뜨렸다.

“응?”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냐고.”

정말이지 불친절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수인 아카데미에 입학했냐는 의미야?”

“뭐, 비슷해.”

이곳에 온 이후 이런 종류의 질문은 처음이라 약간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이 멀쩡한 질문을 던진 게 헤일린 이스단이란 사실이 더욱 당혹감을 가져다줬다.

“당연히 공부하러 왔,”

“그런 준비된 대답 말고.”

한쪽 눈썹을 든 그가 내 말을 싹둑 끊어 버렸다.

이런저런 핑계를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냥 솔직하게 답하는 걸 택했다.

“……혼인을 피하고 싶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미뤄지기도 하니까.”

물론 앞뒤를 전부 생략해서.

동시에 헤일린 이스단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약혼자가 있었나.”

헤일린 이스단은 의외라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기기 전에 도망쳤지만 세상 어딘가에 존재는 하겠지. 대충 끄덕이자 그가 느릿하게 물어왔다.

“어느 일족?”

성격상 대충 듣고 넘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집요해. 묘한 위화감을 느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사자 일족이었지, 그것도 영역을 다스리는 이스단 가문.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나와 혼담이 오간 사자 일족의 귀족과 연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조용히 읊조렸다.

“……너구리 일족.”

헤일린 이스단은 턱을 괸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시선은 왜 피해, 죄지었어?”

이제 나갈 때도 되지 않았나, 저 진상.

“그런데 너.”

몰래 씨근거리던 내가 약간 날 선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

“머리끝이 빛나고 있는데.”

순간 기절할 뻔한 나는 다급히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주홍색 머리카락 끝이 엷게 빛나고 있었다. 마도구의 마력이 다한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라면 사자의 앞에서 초식 수인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언젠가, 이성이 나간 레넌에게 목을 물릴 뻔한 기억이 아른거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원래도 이성이 없어 보이는 저 사자 앞에서는 특히 더.

마음이 급해진 내가 옷장에서 뛰쳐나와 헤일린 이스단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가.”

“갑자기?”

“빨리, 여기서 나가!”

등을 떠밀려 하자마자 휙, 헤일린 이스단은 더러운 걸 피하듯 몸을 틀었다. 닿기조차 싫은 모양새였다.

휙, 또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

휙.

“이익!”

휙.

초 단위로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내가 제자리를 방방 뛰었다.

“나가, 빨리!”

“갑자기 왜 이래?”

조급한 나에 비해, 여유롭게 창틀에 걸터앉은 그는 심오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카락이 빛나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건가.”

그런 발상을 하는 네가 더 이상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할 즈음, 부지불식간에 몸이 뒤흔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창틀에 앉은 헤일린 이스단의 다리 사이에 갇힌 상태였다.

성격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 그새 허리를 단단히 붙든 그가 내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레넌 때와 똑같았다. 어딘지 초점이 사라진 붉은 눈도, 살짝 풀린 눈꼬리도.

‘얘…….’

지금 눈이 맛이 갔어.

오싹해진 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앗, 헤일린 이스단이다!”

창밖으로 고개를 쭉 뺀 내가 크게 외쳤다.

“뭐? 어디?”

“어디야?”

마침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하이에나들이 곧장 반응했다.

“무슨……!”

내 돌발 행동에 헤일린 이스단의 적안이 크게 뜨였다. 충격요법이 통했는지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저기 창틀, 창틀에 있어!”

“놓치면 안 돼!”

추격대에게 위치를 들킨 그가 창틀 위로 올라섰다.

헤일린 이스단은 막 뛰어내리려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야.”

혹시 보복이라도 당할까, 뒤로 빠르게 물러난 내가 반문했다.

“왜, 왜?”

“웬만하면 위험한 짓 하지 마.”

듣기 좋은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종류였다.

“죽을까 봐 조마조마하니까.”

설핏 웃음 지은 헤일린 이스단이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의 한 끗 차이로 머리 색깔이 옅은 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기숙사 창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단단히 친 나는 스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62 화>

‘크…….’

경각을 오가는 아찔함에 등이 땀으로 축축이 젖은 상태였다.

‘큰일 날 뻔했네.’

겨우 한숨 돌린 나는 뒤늦게 헤일린 이스단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웬만하면 위험한 짓 하지 마. 죽을까 봐 조마조마하니까.’


가까운 사이도 아니면서 왜 그런 걱정 어린-말투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을 하는 걸까.

사자의 말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어 댔다.

하마터면 목을 내어줄 뻔했다, 맹수의 기묘한 분위기에 홀려서.

가끔씩 육식 동물의 외관에 홀려 접근했다가 목을 물리는 초식 동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딱 그 꼴이 될 뻔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안 되겠어.’

특약의 조치가 필요하다. 손 틈 사이로 드러난 눈이 번쩍 빛났다.

“자, X 클래스 여러분.”

짝짝, 교수님이 손뼉을 마주치며 주의를 끌었다.

“오늘은 물약 제조 강의 마지막인 만큼, 원하는 물약을 자유로이 개발해 봅시다.”

반드시 성공한다.

열의를 불태운 나는 결의 어린 표정으로 물약 제조에 임했다.

어젯밤, 헤일린과의 사건으로 깨달았다. 이놈의 육식 수인들에겐 식욕 억제 물약 처방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 삼 인방.’

내 주위를 맴도는 진상, 밉상, 화상에게는 특히.

‘사랑의 묘약이랑 제조법이 한 끗 차이니까…….’

아주 신중히 계량하고 마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최전방을 맡은 장수처럼 진지하게 임하는데, 신시아가 작게 물었다.

“사랑의 묘약?”

“뭐, 비슷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육식 수인들의 식욕을 감퇴시킬 물약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마력 주입만 남겨 둔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해서는 안 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불어넣는 순간, 라일라가 불쑥 귓가에 속삭였다.

“회장,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서 누구한테 쓰려고?”

따듯한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헉!”

덜컥. 놀란 마음에 정해진 수치보다 마력을 많이 주입해 버리고 말았다.

이 망할 하이에나.

‘이렇게 되면 진짜 사랑의 묘약이나 다름없잖아.’

눈으로 열심히 욕을 하는데, 라일라와 신시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심지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왜 그래?”

의아하게 쳐다보던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내가 만들고 있던 비커 속 액체가 부글부글 튀고 있었다.

‘오…….’
퍼엉, 비커에서 쏘아진 복숭앗빛 액체가 위로 솟구쳤다.

넓게 퍼진 액체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광경이 느리게만 보였다.

사슴 살려.

학생회실 소파에 앉아, 경직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나는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왜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붉은 교복 타이로 눈앞을 가린 탓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시야 속, 바로 옆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어떻게 인생을 살면 사랑의 묘약을 뒤집어써요?”

소량이면 상관없겠지만, 이렇게 덮어쓴 수준이면 분명 약효를 발휘할 텐데.

염려 담긴 안나의 중얼거림에 이어, 레넌의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약효가 그냥 풀리진 않을 텐데.”

사랑의 묘약은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야 약효가 끝나는 묘약.

‘육식 수인이랑?’

맙소사, 당장 학생회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사색이 된 나는 눈을 가린 교복 타이를 더 강하게 조였다.

그때 야닉의 환장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차피 묘약 효과도 잠깐인 거 아니냐? 좋다, 내가 이 한 몸 희생하지. 이 야닉은 사랑받는 거에


익숙하니까.”

“입 닫아, 야닉 펠.”
곧바로 원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늑대도 있었구나.’

입회 희망자 2 호가 되어, 학생회실의 청결을 도맡고 있던 모양이었다.

“회장, 일단 기다려 봐요.”

탁탁, 내 어깨를 두드린 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신시아, 그쪽은 어때요?”

신시아도 있었나?

“회장이 그쪽을 그나마 편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까.”

“…….”

시간이 지나도 신시아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억겁 같은 정적 후에 안나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어요, 얼굴 표정으로 말하는 재주를 가졌군요. 회장, 신시아는 거절하겠다네요.”

너무해, 그래도 우리가 강의실 짝꿍인 시간이 얼만데.

“사실 회장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죠. 회장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니……”

그렇게 물어봤자 다 같은 육식 수인이었다.

차라리 이 불안을 빨리 끝내 버리고 싶은 내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냥 아무나 보면 안 돼?”

“안 됩니다.”

“그건 안 돼.”
원과 레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드물게 목소리를 굳힌 레넌이 말했다.

“고작 사랑 고백이나 하는 약효 따위가 아니야. 나는 헤일린 이스단을 가…….”

“…….”

“가두…….”

참담한 목소리로 말하던 레넌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헤일린 이스단을 가두…… 뭐? 대체 뭔데 말을 하다가 말아.’

그와 동시에 캬옹, 노란 짐승의 포효 소리가 학생회실을 울렸다.

노랑이도 있었구나.

뒤이어 챙, 챙챙, 포크와 발톱이 부딪히는 듯한 기묘한 소음이 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불안해진 나는 더듬더듬 소파를 더듬었다.

“레넌 님과 노랑이 님이 장난치는 소리예요. 어쩔 수 없죠, 저밖에 남지 않았군요.”

안나의 목소리를 들은 내가 긴장 어린 숨을 삼켰다.

“회장, 저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어요.”

그것참 감사하긴 한데.

‘그럼…….’

괴력 곰돌이의 뒤로 꽃 배경이 보이게 되는 걸까.

그 생각에 다다른 나는 학생회장 권한을 남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년부터는 사랑의 묘약 제조를 금지하는 교칙을 만들겠노라고.

“교복 타이를 푸는 순간 저를 보는 거예요.”

안나는 떨리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알겠어요?”

끄덕끄덕.

이윽고 내 눈을 가린 교복 타이에 손이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

소란스럽던 학생회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짙은 긴장감마저 맴돌았다.

“회장, 이제 풀게요.”

스르륵, 타이를 풀자 눈을 감았음에도 눈꺼풀 너머로 빛이 어른거렸다.

마른 입술을 축인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나, 눈 뜰까요?”

“네, 지금 바로.”

셋, 둘, 하나.

속으로 숫자를 헤아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와 함께 학생회실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내 몇 번이나 두드렸거늘, 왜 아무도 답이 없어? 이리 사람이 많은데!”

안나의 어깨 너머, 역정 내는 밀란느 학장님의 모습이 그림처럼 내 눈에 박혔다.

정말로 꽃이 피는구나.

학장님의 주변에 붉은 장미가 만개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내 이성이 끊어졌다.


허허. 밀란느 학장에게서 당혹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학생에게 이런 열렬한 사랑을 받아 보는 건 또 처음이구먼.”

벤디의 사랑은 밀란느 학장으로서는 버거운 감이 있었다.

찰싹 달라붙어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않으니. 이는 일어설 때도, 자리에 앉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만 해도 소파에 앉은 밀란느 학장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데.

초식 수인인 만큼 체구가 작아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무릎이 상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허, 참.”

궐련에 불을 붙이려던 밀란느 학장이 다시 거두어들였다. 벤디와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얌전히 붙어만 있는 손녀뻘 학생을 내칠 수도 없고.

“약효는 언제쯤 끝나는 게지?”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사라질 거예요.”

안나가 얼른 대답했다.

“잠들고 일어났을 때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거고요.”

“그럼 두 시간 동안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군.”

“으음…….”

그렇다고는 차마 답하지 못한 안나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학장님께서는 학생회실까지는 무슨 일로?”

밀란느 학장의 물색 눈동자가 책상 위에 앉은 노란 짐승에게 머물렀다.

“헤일린 학도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이네. 불러도 도통 오질 않으니 내 친히 찾으러 올 수밖에.”


제 무릎에 안착한 벤디를 흘긋 본 밀란느 학장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당장은 무리겠구먼. 다음을 기약하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밀란느 학장이 학생회실을 둘러봤다.

벤디 혼자 덜렁 던져졌을 때만 해도 썰렁하던 학생회실이.

안나와 야닉, 신시아, 원과 레넌, 그리고 노란 짐승까지.

이만한 인원이 채워지니 더는 학생회실이 넓어 보이지 않았다.

‘모를 일이군.’

덜렁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구성원이야 어떻든 사람이 모여드는 게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벤디가 초식 수인이기에 본능적인 끌림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본인 자체의 능력인 건지.

아직 판단하기엔 섣부르다고 생각한 밀란느 학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계속 이곳에 있을 순 없으니, 슬슬 일어나지.”

일어난 그녀의 옆으로 벤디가 당연하다시피 따라붙었다.

혹시 업히기라도 할까 불안해진 밀란느 학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가자꾸나.”

귓가를 발갛게 물들인 벤디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주름진 손을 놓칠까,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깍지까지 꼈다.

짐짓 망설인 벤디가 수줍게 말문을 뗐다.


“밀란느, 좋아해요.”

“이름도 나쁘지 않다만 우리 위치를 생각하거라.”

“좋아해요, 학장님.”

“오냐.”

원과 레넌, 노란 짐승은 도란도란 학생회실을 나서는 학장과 벤디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사랑에 빠진 이가 학장인 게 어떻게 보면 가장 나은 선택지이긴 한데. 의외로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게


더 어이가 없었다.

“학장님의 눈에는 호수가 있어요.”

“허허, 소싯적에도 못 들어본 말을. 사랑에 빠지면 들이대고 보는 유형이구먼.”

그런데 왜 짜증이 날까. 이상할 정도로 거슬리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63 화>

다행스럽게도 밀란느 학장에게 사랑에 빠진 벤디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단지 밀란느 학장의
무릎 위에서 사랑만 속삭일 뿐.

두 시간이 이토록 긴 시간일 줄은.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인 밀란느 학장은 학장실 소파에 누운 벤디를 내려 봤다.

묘약에 취해 내내 학장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겨우 잠든 참이었다.

“그래서.”
나직이 읊조린 밀란느 학장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레넌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온 용건은 뭐냐?”

“헤일린 이스단은 왜 찾았는데?”

“과한 호기심은 독이라고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집무 책상으로 걸어간 밀란느 학장이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신음성을 냈다.

“에구구.”

말년에 이 무슨 고생인지. 벤디의 열렬한 사랑 때문에 허벅지 뒷부분마저 뻑적지근했다.

“아무튼 잘 왔다, 마침 네게도 할 말이 있었는데.”

벤디가 누운 소파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레넌이 다리를 쭉 폈다.

“뭔데?”

“이제 벤디 학도의 호위는 그만둬도 좋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뭘까.”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결정했느니라.”

밀란느 학장은 이제 벤디의 거취에서 손을 뗄 예정이었다.

자연스레 레넌의 호위와 감시도 필요 없어진 시점.

애초에 의미가 없기도 했다. 밀란느 학장은 레넌에게 감시에 대한 보고를 들은 기억이 손을 꼽다시피
하니까.

모로 누워 턱을 괸 레넌은 느슨한 목소리를 냈다.

“마음대로 그러시면 안 되지, 내 조기 졸업은 어떡하라고.”


“약속한 조기 졸업은 차차 준비해 두마.”

“죽어도 졸업을 못 하게 수 쓰실 땐 언제고, 이렇게 쉽게?”

일순 레넌의 부드러운 물색 눈동자가 선득한 빛을 띠었다.

금세 나타났다가 사라진 살의를 모르지 않은 밀란느 학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졸업시켜 준다지 않느냐. 네 녀석 정도의 머리면 진작 졸업했어야 하긴 했다만.”

수인 아카데미는 정해진 커리큘럼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는 곳이었다.

필수과목을 이수하고, 적정량의 학점 및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 조기 졸업 등의 유동적인 졸업이


가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장애물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쨌든 원이나 레넌 정도의 인재는 이미 졸업하고도 남았을 시간.

그럼에도 원이 남아 있는 건 마탑주 자리를 완전히 승계받기 전, 외부의 귀찮은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레넌은…….

‘어렵구나.’

밀란느 학장은 벤디와 붙어 있는 동안 간신히 참은 궐련을 입에 물었다.

적자생존.

이는 에던트 가문의 권력 구조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였다,

가장 강한 자가 가주 자리를 차지한다.

암묵적인 법칙에 따라, 에던트 가문의 가주는 늘 형제자매 중에 제일 뛰어난 자가 차지해 왔다.

현재 에던트 가문의 가주는 레넌과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배다른 형제.

그는 역대 가주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또 가혹했다. 특히 날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 레넌을 몹시


경계했다.

갖은 핑계를 대어 레넌의 어미를 처단하고, 채 피어나지도 못한 나이인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끝끝내 레넌을 처리하는 데 실패하자, 가주는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신전으로 보냈다.

성직자가 되어, 추후 신의 가호까지 받게 되면 혼인을 할 수 없는 몸이 되니까.

레넌이 후계를 잇지 못하게 만들어, 가주 자리를 꿈도 못 꾸게 할 심산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기를 틈타 결국엔 레넌을 처리했겠지.

밀란느 학장은 몸이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던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상처투성이인 채로도 물색


눈동자만큼은 야생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던.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소.’

일선에서 물러난 밀란느 학장이 가주와 대립하면서까지 레넌을 아카데미로 끌고 온 지도 어언 십 년.

“어느 정도 힘을 길렀으니, 이만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지금까지는 레넌이 밀란느 학장의 울타리 안에 있었으나, 제멋대로 넘나들기 시작한 이상 이제 울타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거.”

선선한 미소를 지은 레넌이 느지막이 입술을 뗐다.

“가서 모두 죽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리된다면 그리될 일이었겠지. 가문에서 손을 뗀 지가 언젠데,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단호히 대답한 밀란느 학장이 흘끗, 잠든 벤디를 눈짓했다.

“그러니 저 아이와도 이제 그만 엮이거라. 이곳에 더는 무언가를 남겨 둘 필요는 없지.”

“딱히 엮인 적 없지 않나?”
“웃기는 소리. 조기 졸업, 조기 졸업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요즘은 아주 신나게 아카데미를 쏘다닌 걸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그랬던가. 남 일처럼 읊조린 레넌은 학장의 시선을 따라 벤디를 바라봤다.

다른 건 몰라도 가십지를 내려놓을 만큼 웃긴 일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밀란느 학장의 눈이 사냥을 앞둔 매처럼 번득였다.

“네놈 눈치면 이미 알아채고도 남았을 터.”

“뭐를?”

“시치미 떼지 마라, 벤디 학도에 대해서 말이다.”

학장은 거의 확신한 채 떠본 말이지만, 레넌은 정말 모르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몰라, 사슴인 거 말고는.”

“뭐, 모른다면 다행이…… 뭐라?!”

하마터면 꽥 소리를 지를 뻔한 밀란느 학장이 입을 가로막았다.

혹시 깼나 싶어 벤디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벤디는 슬픈 꿈을 꾸며 울상 짓고 있었다.

눈을 홉뜬 밀란느 학장이 입 모양으로 외쳤다.

‘모르긴 뭘 몰라? 다 알고 있잖냐, 이놈아!’

‘이마에 사슴이라고 쓰여 있는데 뭘.’

대수롭지 않게 답한 레넌은 페트리온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잠이 안 와 테라스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온몸을 칭칭 감춘 수상한 자가 숙소를 벗어났다.


본인 딴에는 치밀하고 날렵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타인이 보기엔 하찮기 짝이 없는 움직임.
학생회장이 분명했다.

숲으로 따라나선 레넌의 눈앞에는 의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누군가를 피해 필사적으로 숨으려는 벤디와, 갑자기 숲에 나타난 원.

더욱이 벤디는 레넌이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투명할 정도로 연한 눈동자. 어둠 속에서 봐도 육식 수인은 아닌 외양이었다.

레넌의 시선이 소파 위에 흐트러진 주홍색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저 머리카락이 영 어색하다 싶었는데.’

마치 남의 것을 입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단서는 차고 넘쳤다.

과할 정도로 겁이 많은 점이나, 이따금 풍기는 정체 모를 단내.

여우 수인이면서 자신과 육식 수인은 별개처럼 말하는 괴상한 화법까지.

게다가 학생회장과 있을 때면 묘하게 자제력이 바닥을 기거나, 원초적인 본능이 일 때가 많았는데.


사슴인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영락없는 사슴 같던 모습을 상기한 레넌은 잠든 벤디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침한 얼굴에 짜증이 번지는 것도 마음에 드나, 지금처럼 눈꼬리가 울상인 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넌이 벤디를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음 한편이 불안해진 밀란느 학장은 조용히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지?”

“딱히. 그냥 맛있겠다는 생각?”

밀란느 학장의 낯빛이 까맣게 물들었다.


육식 수인의 본능. 어찌 보면 벤디가 입학한 시점부터 가장 우려한 부분이었는데.

믿고 호위를 맡긴 이가 제일 염려한 부분을 정통으로 찌른 격이었다.

이…… 이…….

“레너어어어언!”

애써 눌러 온 밀란느 학장의 화가 기어코 폭발한 순간이었다.

“레너어어어언!”

왁자지껄한 소란이 깊은 잠을 강제로 깨웠다.

‘골이 울려…….’

묘약의 후유증 때문인지 정신은 깼음에도 눈이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밀란느 학장님의 뒤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미를 본 이후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흐릿하게 미어진 시야로 레넌의 멱을 붙잡고 흔드는 밀란느 학장님이 보였다.

“헤일린 학도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네놈이라도 좀 얌전히 있거라!”

“그러니까 헤일린 이스단은 왜?”

목소리를 높인 게 신경 쓰였는지, 일순 밀란느 학장님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아직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나는 그 상태로 고른 숨을 몰아쉬었다.

자는 중이라 판단한 밀란느 학장님의 안도 어린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레넌에게 말했다.

“이스단 가문에서 혼담이 오가는 모양인데, 헤일린 학생이 도통 가문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더구나. 직접
수족을 보내도 감감무소식이라더군.”

레넌은 멱살을 잡힌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뭐 놀랄 일이라고. 요즘 누구 따라다닌다고 바빠, 그 사자.”

“허어, 내가 고작 그런 걸로 호들갑이나 떠는 작자로 보이느냐?”

속삭임에 가까운 대화라, 청력을 한껏 곤두세워야 간신히 들렸다.

이스단 가문, 헤일린, 혼담.

그마저도 언뜻언뜻 단어 몇 개만 알아듣는 게 고작이었다.

‘헤일린 이스단도 혼담이 오가나?’

단어를 대충 조합하니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실상 열다섯에도 빈번히 혼담이 오가는 귀족 사회에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뭔데 그래?”

“비서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밀란느 학장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괜히 긴장감 조성하지 말고 말해.”

“썩을 놈.”

다른 단어는 몰라도 왜 항상 육두문자만은 선명하게 들리는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헤일린 이스단의 혼담 상대가,”

이번만은 똑똑히 들은 내가 귀를 기울였다. 그 후퇴 없는 사자를 데려갈 안쓰러운 이가 누군지 내심 궁금,

“벤디 학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구나.”


금시초문인데요.

#<64 화>

모두가 제 할 일에 집중한 학생회실은 생각에 빠져들기 딱 좋은 적막이 맴돌았다.

하아.

학생회장석에 앉은 나는 폐부에서부터 끌어 올린 한숨을 토해 냈다.

머릿속에 하루 종일 레넌과 학장님의 대화가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급서로 받은 소식이니. 그래서 가능성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이후에는 두 사람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기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후.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자, 책상에 벌렁 누워 있던 노란 짐승이 아니꼬운 눈초리를 보냈다.

으르릉.

“노랑이는 가만히 있어.”

이제는 안다, 왜 한숨이나 푹푹 쉬고 난리냐는 의미의 으르릉이란 것을.

일개 노랑이가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진짜…….’
나는 천천히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책상 아래 가지런히 둔 다리가 달달 떨렸다.

사랑의 묘약에 당했을 뿐인데, 어쩌다 그런 엄청난 사실을 듣게 된 걸까.

숙부가 말한, 혼담이 오간 가문이 이스단 가문일지도 모른다니.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내가 가문 일에 어둡다 해도 보고 듣는 귀가 있는데.

숙부는 육식 수인, 그것도 이스단 가문과 연을 둘 정도로 발이 넓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만약 이스단 가문과 혼담이 오간 거라면, 이스단 가문 측에서 먼저 접근했다는 말인데.’

왜?

어째서 날고 기는 사자 영역의 이스단 가문이, 작디작은 사슴 영역의 가문에 혼서를 보낸단 말인가.

다른 무엇보다, 하필 육식 수인이 초식 수인에게.

생각할수록 밀란느 학장님이 잘못된 정보를 가져왔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흘긋.

혼담 사실을 아는 레넌을 살폈으나 감히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실없는 웃음도 어딘지 서늘했고, 가십지를 거꾸로 들고 읽는 것도 무서웠다.

‘진짜 어떡하지?’

만에 하나, 혹시라도 이게 사실이면…….

헤일린 이스단을 피해 여기로 도망 와서, 헤일린 이스단 앞에서 나 먹잇감이요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단
의미였다.

‘세상이 이렇게 좁다고?’


그럴 리가.

페트리온에 사는 사슴 수인 대부분이 육식 수인의 머리털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살아갈 텐데.

으으. 이마를 짚는 내게 희한한 걸 다 본다는 듯한 노란 짐승의 눈길이 닿았다.

‘그 사자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내게 접근했나?’

자꾸 뜬금없이 나타나는 게 이상하긴 했지.

당연히 알고 있겠지 싶다가도, 가문 어른들이 자체적으로 밀어붙인 거면 모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장 얼마 전에 혼담 관련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약혼자가 있었나.’

아예 남 일처럼 대답했었으니까.

모른 척 연기하는 중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런 성정을 가진 자가 굳이.

세상만사 거슬린다는 듯 반쯤 뜨인 붉은 눈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더불어 열린 단추 사이로 보인


가슴팍이,

‘아니, 아냐.’

팍팍, 나는 이마를 치며 옆으로 새려는 생각을 바로잡았다. 더는 상종하기조차 싫다는 듯한 노란 짐승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럼 모른다는 전제하에, 나중에라도 헤일린 이스단이 눈치채면.’

숙부 또한 모든 걸 알게 된다.

나는 낯빛을 파리하게 물들였다.

하물며 이 혼담이 나로 인해 어그러진 걸 이스단 가문에서 알게 되는 즉시…….

‘사자 먹이 급행열차.’
쾅, 양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내가 중얼거렸다.

“아, 안 돼.”

“학생회장.”

동시에 부학생회장석에 앉은 안나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제가 분명 동아리 관련 서류를 검토하라고 말했을 텐데.”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뽀각, 그녀의 손에 있던 펜이 종잇장처럼 반으로 접혔다.

“안 돼 같은 소리 말고 일해요, 세미랑 한 공간에 가둬 버리기 전에.”

자칫 헤일린 이스단이고 나발이고,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던 내가 서류에 코를 박았다.

[수인 아카데미 동아리 목록]

서류에는 검술 동아리, 육식 동물 연구 동아리, 유적 탐사 동아리 등등 수많은 동아리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동아리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검토해야 하니 학생회의 일이 많을 수밖에.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관심 가는 동아리명을 하나 발견했다.

“마법 개발 동아리?”

새로운 마법을 고안하는 연구 동아리 같은 걸까.

조용히 읊조렸음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실에 자리한 모든 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응이 왜 이래.

불길한 기운을 느낀 나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봤다.

뽀독뽀독, 장식물의 청결을 담당하고 있던 원이 내 의문을 해소해 줬다.

“거긴 엮이지 마세요.”


저렇게 고고한 모습으로 청소하기도 힘든데.

“왜요?”

“제정신이 아닌 것들만 모여 있으니까.”

설명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않나. 휙, 안나를 돌아보자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연했다.

“마법에 지나치게 몰두한 학생들이 모인 동아리죠. 평범한 마법 동아리와는 결이 달라요. 강의는 뒷전일
정도로 마법에 광적인 자들이라.”

마법사는 기본적인 재능이나 핏줄을 타고나거나, 그게 아니라면 학문을 파헤치다시피 연구해야 하는


존재였다.

주로 후자가 많기에, 학문을 파고들다 보면 거기에 미쳐 버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

돈, 지위, 명예까지 내던지고 은둔하여 마법 연구와 실험에만 몰두하는 마법사.

아무래도 그런 마법사들이 모인 동아리인 듯했다.

“애초에 동아리실에도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고. 방문객을 실험체 정도로 여기니까요.”

“……실험체?”

팔짱 낀 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들의 항의도 있고 해서, 작년에 원 님이 와해시키려고 했었는데…….”

자연스레 그녀의 눈길이 원에게 닿았다. 원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미간을 딱딱하게 굳혔다.

“음침한 것들이 안 된다며 근 한 달을 울고불고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지.”

통칭 마개동.

역대 모든 학생회장이 손을 턴 동아리란 명성을 얻어 낸 곳, 그게 바로 마법 개발 동아리였다.

영원히 엮이지 않겠노라 다짐할 즈음, 끼이익, 학생회실 문이 음산하게 열렸다.


“학생회장, 있습니까?”

열린 문으로 까만 로브를 두른 불청객이 들어섰다.

알이 큰 안경과 덥수룩한 곱슬머리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남자란 정도만 겨우 판별이
가능했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원을 발견하자마자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워, 원 리오나드!”

남자는 아래턱을 덜덜 떨며 원을 손가락질했다.

“다시 학생회장이 되신 겁니까?”

“학생회장은 무슨, 청소하는 거 안 보이냐?”

비질을 하다 만 야닉은 원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대신 답했다.

“학생회 입회 희망자 2 호, 으아악! 이 늑대 자식, 내 몸에 전기를 흘렸어!”

원과 야닉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보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그럼 아직 그쪽이……?”

내가 학생회장이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벌떡 일어난 그가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동시에 나와 남자 사이로 푹, 날카로운 장검이 내리꽂혔다.

“힉! 무, 무슨!”

“거기서 얘기해.”

검을 던져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레넌이 방긋 웃었다. 언제 발검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을 날려 놓고 칭찬해 달란 눈빛을 보내는 저 호랑이를 어쩌면 좋을까.


부들부들 떨며 레넌을 외면한 내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그러고 보니 누군가 직접 나를 찾아온 건 처음이지 않나.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다급히 다가올 때는 언제고, 남자는 망설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의아하게 살피는 와중, 조용히 책을 읽던 신시아가 짤막하게 말했다.

“마개동.”

“마개동?”

커다랗게 뜨인 내 눈이 칭칭 두르다시피 착용한 남자의 검은 로브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경계심이 인 내가 슬금슬금 의자를 뒤로 물렸다.

“……동아리와 관련한 일?”

“예에, 비슷합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 저희 부장이……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부장이라면 마법 개발 동아리의 부장을 말하는 건가.

앞뒤가 전부 생략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일어나지 못하다니, 아프거나 그런 거예요? 그럼 여기로 올 게 아니라 의무동으로,”

“아뇨, 아픈 것보다는 당장 여기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말끝을 얼버무린 남자가 불안하게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한참 머뭇거린 남자는 이윽고 결심한 듯 진중한 음성을 냈다.

“학생회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재는 폐지된 구관 기숙사 앞에는 거대한 천막이 하나 있는데, 지나갈 때마다 종종 궁금증을 느끼곤 했다.

도대체 저 검은 천막의 용도가 뭘까.

드디어 천막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법 개발 동아리]

간신히 버티고 있던 동아리 명패 한쪽이 떨어지며 덜렁거렸다.

휘이잉-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찬바람이 오싹함을 가중했다.

왜 나는 동아리 첫 업무조차 범상치 않은 곳인 걸까.

안나 스웰든에게 훌륭한 무능함이라고 칭찬받는 내가 도울 만한 일이…….

‘과연 있을까.’

노랑이를 넣은 배낭을 단단히 멘 나는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학생회실에 있던 모든 이가 줄줄이 따라붙은


상태였다.

참다못한 야닉이 빽 외쳤다.

“자석이야 뭐야, 왜 다 따라붙어? 학생회만 남고 빠져!”

“그럼 너부터 빠져야겠네.”

“이 호랑이 자식이!”

더군다나 이런 거친 육식 수인들을 데리고. 앞은커녕 앞날마저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65 화>

“도, 도움 주실 인원은 많을수록 좋지요. 이쪽으로.”

남자는 쩔쩔매며 우리를 입구로 안내했다.

천막 내부로 들어가자, 검은 로브를 두른 부원들이 우르르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학생회장?”

“와 주셨군요!”

그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휙, 원이 나를 제 뒤로 감췄다. 덕분에 원을 코앞에서 마주한 부원들이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났다.

“힉!”

“워, 원 리오나드 님이 왜?”

차기 마탑주에다, 과거 동아리를 해체하려 한 원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시야가 원에게 가로막힌 나는 넓은 등을 바라봤다.

내가 구르든 넘어지든 거들떠도 안 보던 늑대가 왜 이러는 걸까.

작은 의문은 일정 거리를 두고 계속 나를 흘끔거리는 마개동 부원들로 인해 흩어졌다. 어째 호의 어린


시선 같기도 하고.

나는 은은한 촛불과 램프만 켜 둔 내부를 둘러봤다.

한쪽에는 마법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각종 비커나 실험 도구로 가득했다.

‘저 사람이 부장인가?’
어두침침한 천막 가운데 덩그러니 누운 사람이 보였다.

곱슬곱슬한 파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아 내리고, 뺨에 주근깨가 있는. 어딘지 모니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여자였다.

여자는 가지런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학생회실에 찾아온 부원의 말마따나 아픈 것 같진 않았다.

분위기만 보면 악마를 소환시키는 둥의 의식 같기도 하고.

여자의 곁으로 다가간 레넌이 같은 생각을 한 듯 툭 말했다.

“제물?”

마개동 부원들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제물이라니요, 저희 부장입니다!”

“의식을 못 찾고 있을 뿐이라고요!”

“왜 의식을 못 찾고 있는 건데?”

“어…….”

레넌의 질문에, 우물쭈물 망설인 부원은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것 때문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부장의 얼굴에서 벗긴 안경을 내밀었다.

안경을 받아 든 원은 탐색하듯 살피다가 돌연 미간을 굳혔다.

“대체 뭘 만든 겁니까?”

마개동 부원들은 거북이가 껍질에 숨는 양 목을 움츠렸다.

‘저게 뭔데 그래.’
덩달아 혼나는 기분이 된 내가 움츠리자, 안나가 뒤에서 등을 꼬집어 비틀었다.

품위 유지, 학생회 기강.

세뇌에 가까운 속삭임을 들은 나는 태연한 척 허리를 세웠다.

“차원 이동, 착시, 환상, 정신계 마법. 꺼림칙한 종류의 마법은 다 걸어 놨군.”

원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는 종류의 마법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신한 레넌이 부장을 가리켰다.

“맞네, 악마를 소환할 제물.”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이러다간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집게손으로 레넌의 옷자락을 당긴 내가 앞으로 가서 섰다.

“도움을 요청하셨잖아요.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저희도 도울 방법을 찾죠.”

“실은…….”

흘끔. 원의 눈치를 살핀 부원 하나가 내게 속삭였다.

“회장만 따로 대화를 나눌 순 없을까요?”

“아니, 여기서 얘기하죠.”

언제 내 뒤에 섰는지 모를 원이 대신 대답했다.

누구 하나 죽일 법한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입을 열었다.

“……안경은 평범한 안경이 아니라, 저희 동아리에서 개발한 마도구입니다.”

“어떤 용도로 쓰는 마도구인데요?”

“일단은 마법 훈련 용도로 만들었는데…….”


마법 훈련?

귀가 솔깃해진 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으로 마법 훈련을요?”

“예에, 저 안경을 착용하면 이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몸이 아닌 정신이요.”

간단히 말하면 가상공간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부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했다.

마법 훈련을 하다 보면 재산과도 같은 몸이 상하기 마련이니, 다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마법 훈련은


없을까.

이 고민이 개발의 시초였다.

그리하여 생각해 낸 게 가상공간.

가상공간으로 넘어가면 현실과 똑같이 훈련하고 다쳐도, 실제로는 멀쩡하니까.

마개동 부원들은 장장 몇 해에 걸쳐 가상공간 개발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당장은 실험 단계에 불과해서, 항상 몇 명씩 짝을 이루어 가상공간에 들어갔습니다만.”

몸이 다치지 않는다니.

음음. 드물게 열정적이게 된 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부장 혼자 가상공간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하루빨리 완성시키고 싶어 안달 난 분이라…….


그런데 이 시간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의 압력으로는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고.

열심히 듣던 나는 문득 기억 저편에 묻어 둔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어? 이거.’
가상공간 같은 건 함부로 개발하면 안 되지 않나. 얼핏 알기로는 마탑의 허가가 필요한 걸로 아는…….

“…….”

데…….

무심코 원을 돌아보던 나는 돌처럼 굳었다.

‘세상에.’

그가 당장이라도 마법을 소환할 기세로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한쪽 손에 장갑을 착용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가상공간은 과거부터 많은 마법사가 시도했지만, 대부분 부작용을 일으키며 끝났지.”

“…….”

“이건 마탑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연구인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원을 빼고 나와 따로 이야기하자고 한 거구나.

검은 로브를 코까지 덮어쓴 마개동 부원들은 구석에 모여 오들오들 떨었다.

“다들 진정해요.”

겉모습은 흑마법사처럼 꾸며 놓고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중간에 낀 나는 울기 직전인 흑마법사 무리와 살기를 풀풀 흘려 대는 늑대를 중재했다.

물론 원의 기에 눌린 나도 반쯤은 우는 상태였다.

“일단은 부장이 깨어나지 못하는 게 문제인 거잖아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예, 예. 정신은 계속 가상공간에서 활동하는 상태라, 이대로라면 육체에도 무리가 옵니다. 한시 빨리


깨워야 해요.”

“깨우는 방법은요?”
“아직은 가상공간에 들어가서 직접 데리고 나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쉽네. 허리에 손을 얹은 내가 곧바로 말했다.

“그럼 당장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야죠. 누가 들어갈 건가요?”

그 말과 함께 마개동 부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곳을 향했다. 바로 나였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손가락으로 콕, 스스로를 가리켰다. 마개동 부원들이 맞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나야.

가상공간의 배경은 미궁이었다.

첫 번째 관문을 지나면 두 번째, 두 번째를 지나면 세 번째 관문이 나오는 식으로, 총 네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관문에는 문지기가 존재하는데, 그들을 무찌르면서 훈련하는 방식이었다.

“부장은 아마 마지막 관문인 네 번째 공간에 있을 겁니다.”

부장 혼자서는 네 번째 문지기를 무찌르지 못했기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데.

“마지막 문지기까지 쓰러뜨려야 가상공간에서 나올 수 있는 거네요.”

“맞습니다.”

설명을 듣던 나는 작은 의문을 느꼈다.

“그럼 부원이 다 같이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부탁할 게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인원을 여섯 명으로 만들어서요. 관문은 고작 네 개인데, 한 무더기로 들어가서


문지기를 무찌르면 훈련의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체계적으로 잘 만들었지요? 되묻는 목소리에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여섯이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면 되잖아요.”

“그, 그건…….”

자신만만하게 답하던 부원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부장을 뺀 저희 부원들만으로는 세 번째 관문까지가 최대라서…….”

“정작 가상공간을 만든 작자들은 스스로 탈출도 못 하는 격이군.”

가만히 듣던 원은 말 한마디로 마개동 부원들을 짓밟았다.

결국 강한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기죽은 그들을 둘러보던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절 찾아온 거예요? 저는 그다지 강하지 않,”

“그럴 리가요, 마력 측정 때 다 보았는데!”

“저희는 그 모래시계가 깨지는 광경은 처음 봅니다!”

마개동 부원들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나를 변호했다.

‘그래서 은근히 호의적이었구나.’

마력 지상주의의 현장이 아닐까. 마력이 높다고 실력도 좋은 건 아닌데.

“학생회장, 부장을 데리고 와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부원 하나가 내 손에 안경을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부장만 있으면 저희도 통과할 수 있는 미궁이니 간단하실 겁니다. 특히 이렇게 든든한 분들도 함께 와
주시고.”

내 뒤에 괴수들이 있긴 해.
뒤편에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던 부원은 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잘게 떨었다.

“……원 님까지 함께 오실 줄은 몰랐지만.”

원은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경고했다.

“부장부터 해결한 후 다시 얘기하죠.”

“제, 제발 동아리 해체만은……!”

“다리 놓으세요, 머리 깨기 전에.”

흉흉한 광경을 애써 뒤로한 내가 안경을 내려다봤다.

‘마법 훈련이라.’

어쩌면 해피의 마구간에서 소환했던 마법을 시험해 볼 기회일지도.

더군다나 다쳐도 다치는 게 아니라니, 그만한 실험 공간이 없었다.

안경을 이리저리 살펴본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에서 다쳐도 실제로는 문제가 없는 게 확실한가요?”

“예, 그 부분만은 저희가 수백 번 실험을 거쳤으니 확실합니다.”

“그걸 위해 만든 마도구니까요!”

“부장을 보십쇼, 멀쩡하지 않습니까!”

광기 어린 눈빛을 한 부원들이 흥분하며 우르르 말을 쏟아 냈다.

조금 무섭다, 이 마법 광신도들.

뒷걸음질 친 나는 내 결정을 기다리는 이들을 돌아봤다.

“가상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최대 여섯이래.”


나와 원, 레넌, 안나와 신시아. 그리고 야닉까지. 숫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딱 여섯 명이네.”

그런데 왜 자꾸 누군가를 빠뜨린 듯한 기분이 들까.

빠졌어, 분명 뭔가 빠뜨렸는데.

출처 모를 위화감을 느끼던 나는 한참 만에 깨달았다.

새끼 사자.

뒤늦게 등 뒤의 배낭을 돌아보자, 홱, 노란 짐승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내가 조심스레 배낭을 앞으로 들었다.

“노랑아?”

노란 짐승은 절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려 애썼지만, 곧 죽어도 돌린 고개를 바로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얘 지금.’

삐졌다.

동그란 뒤통수가 그렇게 엄격해 보일 수 없었다.

#<66 화>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단 사실을 숨긴 채, 토라진 노란 짐승을 회유하기 위해 애썼다.


“노랑아, 어쩔 수 없어. 일부러 널 뺀 게 아니라 동물은 같이 갈 수 없는 곳이야.”

“아뇨, 가능합니다. 진짜 사자라면 몰라도.”

기다렸단 듯 마개동 부원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노랑이는 가짜 사자라는 거예요? 얘가 고양이처럼 생겼긴 해도 사자는 맞아요.”

“예? 저는 조롱의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이분…….”

부원이 허둥지둥 변명하려는 순간, 가방에서 튀어 나간 노란 짐승이 공중 발차기를 날렸다.

“억!”

뻑, 뒷발에 입을 맞은 부원은 가련한 자세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럴 줄 알았어, 저 성질머리.

크르릉!

호통치는 노란 짐승을 피해 몸을 움츠린 부원이 다급히 외쳤다.

“노, 농담이었습니다. 헤, 아니, 진짜 사자도 가상공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분명 노란 짐승은 곧 죽어도 나를 따라오려 하겠지.

‘이렇게 되면 전부 일곱인데.’

마음 같아선 내가 냉큼 빠지고 싶지만…….

마법 훈련, 그것도 훈련 중에 다쳐도 신체에는 문제가 없는. 이 괜찮은 기회를 무섭다는 이유로 날려
버릴 순 없었다.

거기다가 가상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확률은…….

원과 레넌, 안나까지 번갈아 살핀 나는 확신했다.


그럴 확률은 없다. 논하는 것부터가 시간 낭비였다.

문제는 아무도 빠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건데. 고민을 거듭할 즈음, 책을 덮은 신시아가 손을 들었다.

“내가 빠질게.”

“신시아 네가?”

“가상공간에 들어가면 저렇게 무방비 상태가 되는 모양이니까.”

무감한 표정의 신시아는 고갯짓으로 마개동 부장을 가리켰다.

“혹시 모르니 잠든 몸을 지킬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겠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우리를 실험체로 쓸 수도 있겠네.

나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마개동 부원들을 훑었다. 싸한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그들이 곧장 항변했다.

“저희가 그 정도로 몰상식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실험체가 몹시 간절하긴 하지만요!”

“이봐,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 아이고. 입이 방정이지.”

안 그래도 짙은 불신이 더욱 짙어졌다.

“신시아, 그럼 부탁 좀 할게.”

“금서 다음 권.”

……이 독서광 족제비.

“창고를 엎어서라도 찾아 줄게.”

그렇게 가상공간에 들어갈 인원이 추려졌다.


나와 진짜 사자 노랑이, 원과 레넌, 안나 그리고 야닉.

들어갈 준비를 마친 나는 안경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가상공간으로는 어떻게 들어가요?”

“대표격 도전자인 회장이 안경을 착용하고, 마력을 흘려 넣으면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본래 한 사람을 위해 설계한 가상공간이라, 회장과 함께 들어갈 조력자들은 이 마석을 손에 쥐면


되고요.”

부원들은 마석을 하나하나 나누어 주며 설명했다.

모두가 마석을 손에 쥔 것을 확인하던 내가 작은 문제를 발견했다.

노란 짐승의 뭉텅이 같은 앞발로는 마석을 쥘 수 없었다.

“노랑이는 어떡하죠?”

“헤, 아니 진짜 사자는…… 입에 물면 될 것 같습니다.”

노란 짐승은 아니꼬운 얼굴로 마석을 입에 물었다.

“……그럼 해 볼게요.”

심호흡한 나는 조심스럽게 안경을 착용했다.

천천히 마력을 흘려 넣자, 투명한 안경알이 희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부원이 잊고 있었단 듯 황급히 외쳤다.

“아, 참고로 조력자는 도전자가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혹은 의식 한편에 담아 둔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요!”

일순 모두의 시선이 번개처럼 내게 꽂혔다.


“네? 뭐예요 그게?”

“이벤트성으로 제작했는데, 아직 조절이 어려운 오류입니다. 아무래도 정신계 마법 수식이 워낙 정교하다


보니…….”

결국 내 머릿속이 낱낱이 까발려진다는 말이 아닌가. 수치도 그런 수치가 없었다.

‘그런 이벤트 필요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도전자 대표 안 했지. 사색이 된 내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니, 그 중요한 걸 이제 말하면 어떡,”

핏, 반발하기도 전에 의식이 뒤흔들리며 시야가 부옇게 미어졌다.

마개동. 가상공간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해체시켜 버리겠어.

말이 가상공간이지, 눈앞에 나타난 미궁 입구는 현실보다 웅장했다.

검은 구름이 떠다니는 잿빛 하늘 아래, 군데군데 이끼가 낀 거대한 진녹색 건물이 위용을 자랑했다.

절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속, 뜬금없이 곰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허헝, 크헝.

두 발로 선 곰이 가슴을 두드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마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으며, 거대한 발은 뭇 초식 동물들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첫 번째 관문 문지기인가 싶었지만…….

‘어떡하지.’

나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늘 내가 안나 스웰든의 위로 겹쳐 본 환상. 괴력 곰돌이 그 자체였다.


“지, 진정해요. 안나.”

컹, 크르릉.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낸 곰이 무어라 내게 따지고 들었다.

해석은 필요 없었다. 감히 자신을 이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냐는 따짐이 분명하니까.

“세미 때문에 이렇게 변했나 봐요, 세미 때문에.”

나는 진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변명하는 나와 노발대발하는 안나의 사이로 파닥파닥, 등에 쪼그마한 천사 날개가 돋아난 노란 짐승이


지나갔다.

천성이 워낙 악동 같기에, 천사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바람이 저렇게 표출되다니.

공중에서 빙그르르 회전하거나 쏜살같이 쏘아지는 신기술까지 발휘했다.

이쯤이면 더 이상 새끼 사자가 아닌 요정, 아니, 요괴였다.

까르르.

반대편에서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요괴로 탈피한 노란 짐승의 모습이 재밌는지, 엎드려서 바닥까지 치며 웃는 중인 레넌이었다.

“날개, 날개가…….”

눈물을 훔치는 그에게 요괴의 뒷발차기가 내리꽂혔다.

두들겨 맞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내가 나직이 말했다.

“레넌.”

“왜?”

“너도 웃을 처지는 아니야.”


뚝.

폭소를 그친 레넌은 미궁 앞, 갑옷 기사 조각상이 들고 있는 방패에 제 모습을 비췄다.

머리에 돋아난 하얗고 길쭉한 귀를 만지작거리고, 이- 하고 윗입술을 들춰 본 그가 정색하며 나를


돌아봤다.

“회장.”

“응.”

“내 송곳니가 없어졌어.”

“……그러네.”

“평소에 내 몸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건데?”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걸까.

창백해진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백호 수인보다는 토끼 수인이면 덜 무섭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생각은 죄가 없잖아요.

토끼로 변한 백호를 피해 슬금슬금 물러나던 내 발에 툭, 무언가가 걸렸다. 어린아이의 발이었다.

왜 이런 곳에 어린아이가 있을까, 그것도 고작 아홉 살 남짓 된.

새까만 머리카락에 둥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낯이 익은 아이였다.

물끄러미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던 내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원 님, 왜 어린아이가 되셨어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귀여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말투였다.


원은 무감한 표정으로 짧아진 제 팔다리를 둘러봤다.

저 깜찍한 모습으로 공격 사정거리부터 측정하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원을 두고 저런 생각을 했다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떠올려 본 적도 없는데. 왜 원이 어린아이로 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워낙 귀염성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귀여워지길 바랐나?’

심지어 어려진 원의 모습을 볼수록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빤히 올려다보는 원의 시선을 모른 척 피했다. 말간 금안에 왠지 머릿속을 전부 들켜 버릴 것만


같아서.

‘일단 부장부터 구하고 나서 생각하자.’

미궁 입구를 향해 휙 몸을 틀던 내가 몸을 굳혔다.

아직까지 가슴을 치는 중인 괴력 곰돌이와, 파닥파닥 공중을 비행 중인 사자 요괴.

연신 윗입술을 들추며 허전함을 토로하는 토끼 수인과 시릴 정도로 냉랭한 표정의 꼬맹이.

문득 이 기이한 조합으로 가상공간을 벗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들었다.

“가 보자.”

어차피 내 머릿속에서 나온 조합에다, 홀로 온전한 모습인 내가 감히 말을 얹을 순 없었다.

힘차게 미궁 문을 열려던 나는 돌연 멈췄다.

‘……어?’

잠깐.

‘한 명이 빠졌지 않나? 여섯 명이어야 하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시 머릿수를 헤아린 나는 늦게야 한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닉 펠이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어.

“야닉은?”

내 질문에 모두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맞췄다. 다들 이제야 야닉의 부재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설마 도중에 마석을 놓쳐서 가상공간으로 넘어오지 못한 걸까.

두리번거리던 나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저 멀리,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웬 사물이 눈길을 붙들었다.

‘설마.’

아랫입술이 절로 파르르 떨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합리화한 내가 못 본 척 문고리를 잡았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들어가자, 미처 못 따라왔겠지.”

내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긴 레넌이 검지로 사물을 가리켰다.

“저거 아닌가? 야닉 펠.”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말아 줘.

“빗자루.”

나는 통탄하며 눈을 감았다.

나가면 야닉이 얼마나 난동을 피울지. 가상공간에서 벗어나고 난 후의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냥 여기서 살까.
#<67 화>

쿠르릉. 거대한 철문이 무거운 소음을 내며 열렸다.

노란 짐승은 파닥파닥, 힘차게 날갯짓하며 미궁 안으로 쏘아져 나갔다.

네발 달린 짐승이 날개를 얻어서 그런가. 마음껏 비행하는 뒷모습이 꽤 기뻐 보였다.

“…….”

그 모습에 웃는 걸 넘어 우는 중인 레넌이 입을 틀어막았다.

날개, 빗자루. 두 단어만 읊조릴 줄 아는 토끼 수인으로 타락한 지 오래였다.

괜히 데려왔다.

그런 생각을 한 나는 빗자루를 살뜰히 챙겼다.

마지막 관문을 깨면 가상공간에 들어온 사람 모두가 현실로 돌아가니, 마음 같아선 빗자루를 잠깐 어디에
세워 두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돌아가서 야닉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지금만 해도 움직이진 못할지언정 부르르 떨며 분노를 표현하는 중이니까.

타박타박. 일정 간격으로 화로가 타오르는 복도를 지나자, 지금의 내 머리 색과 비슷한 주홍색 문이


나타났다.

첫 번째 관문.

가까이 다가간 즉시 묵직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음침할 거란 상상과 달리 환한 빛이 쏟아졌다.

“기다렸다.”
안쪽에서 메아리치듯 장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틀림없었다.

우리는 넓은 실내 중앙, 왕좌에 앉은 문지기를 바라봤다.

문지기는 상반신은 황소에 하반신은 인간의 육신을 가진 괴물이었다.

온몸에는 황토색 털이 수북했는데, 거대한 몸이 근육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에게 도전할 자는 누구,”

장엄한 목소리가 뚝 멎었다.

후다닥 왕좌에서 내려온 문지기가 와락 표정을 구겼다.

“매일 시커먼 놈들만 오더니, 이번엔 더 해괴한 녀석들이 왔군.”

황소와 인간이 섞인 문지기가 우리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실이 조금 슬프게 다가왔다.

‘가상공간이라더니, 너무 정교하게 잘 만든 거 아니야?’

인지하지 못한 사이 내 몸은 어느새 기둥 뒤에 숨은 상태였다.

쉽게 접근하지 못한 채 몸을 잘게 떠는 도중, 레넌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왜 옷을 아래만 간신히 가리고 있지?”

“옷을 입을 줄 모르겠지.”

“특이하네.”

“그보다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군.”

진지한 레넌의 질문도 문제였고, 코를 막은 원의 대답도 문제였다.

“새파란 것들이 감히!”

저것 봐, 화났잖아.
“네놈들같이 이상한 녀석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설득력 있는 외침이었다.

와중에도 파닥파닥, 공중을 뱅뱅 도는 노란 짐승도 문제였다.

“죽여 주마!”

문지기의 양 주먹이 주홍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가볍게 앞으로 나선 레넌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잘 만든 것치곤 대사가 조금 진부하다.”

그가 발검하려는 순간 거대한 곰이 앞을 가로막았다.

크웡. 문지기와 마주 선 곰은 앞발을 저었다.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레넌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무슨 의미지?”

괴력 곰돌이의 의사를 한눈에 읽은 내가 기둥 뒤에서 대신 대답했다.

“먼저 가래. 이 정도면 힘 대결을 해 볼 만하다는데?”

학생회실에서 매일같이 혼나는데, 이런 수준의 통역이야 누워서 고구마 굽기였다.

크르릉. 고개를 끄덕인 곰이 앞발과 앞발을 마주쳤다.

몸짓의 의미를 알아들은 내가 담담히 호언했다.

“알겠어요, 한시 빨리 부장을 구출해 올게요.”

부장이 이곳에 온 지 하루가 다 되어 가는 이상, 구출은 빠를수록 좋았다. 이런 곳에서 정신이 꼬박


하루를 깨어 있다는 소리니까.

나는 방금 전에 들어온 문이 아닌, 반대편 문으로 달려갔다.

“어딜 도망치려고!”
문지기가 곧장 추격하려 했으나 즉시 괴력 곰돌이가 막아섰다.

주홍색 문 앞에 다다른 나는 뒤를 돌아봤다.

황소 인간과 곰돌이의 대결이라니, 내가 과연 현실에 있는 게 맞나.

‘아, 가상공간이었지.’

두 괴수가 부딪히자 쿠구궁,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 두는 게 신경 쓰이긴 하지만, 다치진 않는다니 뭐. 애초에 안나가 질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끼이익, 두 번째 관문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탁탁탁, 또다시 나타난 긴 복도를 함께 달리던 레넌이 물었다.

“회장, 그런 건 어떻게 알아들어?”

“다 방법이 있어.”

저 경우 없는 노란 짐승과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데.

비교적 상식선에 머물러 있는 안나 스웰든의 의사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조금 더 달리자, 이번에는 칠흑 같은 검은 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문을 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열자마자 빛이 새어 들어온 첫 관문에 비해, 이번 관문은 마치 지옥 어귀에 온 양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발아래는 계곡이라도 온 것처럼 돌이 밟혔다.

이런 배경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다니. 이쯤이면 마개동 부원들이 대단하면서도 무서웠다.


크르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쿵, 쿵,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진동했다.

이윽고 어둠을 뚫고 튀어나온 건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개였다.

높이는 레넌의 두 배를 웃돌고, 몸집은 작은 언덕과 견줄 정도였다.

“회장.”

갑작스레 나를 안아 든 레넌이 뒤로 멀리 뛰었다.

부웅, 개가 휘두른 앞발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을 지나갔다.

앞발이 일으킨 바람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이게 두 번째 관문이라고?’

기껏해야 갑옷 입은 기사 정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세 번째, 네 번째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너무하잖아.’

약간 기절하고 싶기도 하고.

파리해진 나는 현실성 없는 개를 올려다봤다.

물방울 소리의 정체는 머리 세 개 달린 개의 입에서 떨어진 침방울 소리였다.

‘부장만 있으면 저희도 통과할 수 있는 미궁이니 간단하실 겁니다.’

정말 간단하다. 헛웃음조차 사치인 내가 파르르 입꼬리를 떨었다.

한쪽 팔로 나를 안아 든 레넌은 원을 향해 말했다.

“강아지는 강아지가 상대해야지.”


“고양이가 상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앞으로 한 발 나선 원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가.”

평소라면 네 하고 달아났을 일인데,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하필 조그마한 어린아이로 변해서는. 산만한 개 앞에 아이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걱정스레 주시하던 나는 또다시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감옥처럼 어두침침한 공간. 습한 냄새.

늑대를 닮은 거대한 개. 그리고 그 앞에 선 작은 흑발 소년.

‘……어?’

내 동공이 지진이 일 듯 흔들렸다.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본 장면이었다.

“자, 잠깐.”

조금만 더 있으면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레넌의 품에서 내려온 내가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원이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더 다가오면 위험할 텐데요.”

“아.”

“이 개보다는 늑대한테 잡아먹히는 편이 나을걸.”

둘 다 사양이었다.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콰앙! 거대한 개가 일으킨 먼지바람이 원의 몸을 삼켰다.

내 팔을 잡아챈 레넌은 다음 관문이 있을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가자, 금방 따라올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로 큰 개를 혼자서,”

“세 마리가 있어도 가볍게 머리를 딸걸?”

그럴 수가.

나는 레넌에게 이끌려 달리며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기억 저편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 말고 기다려.’

그건 대체 뭐였을까.

세 번째 관문 입구는 짙은 녹색 문이었다.

이쯤이면 이제 문을 열기조차 겁이 났다.

왜 마개동 부원들끼리는 세 번째 관문이 최대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갔다.

문고리를 잡은 나는 남은 일행을 살폈다.

“회장, 이가 허전해.”

아직도 송곳니 타령인 토끼 수인, 그리고 공중의 지배자가 된 노란 짐승밖에 남지 않았다.

아, 그리고 갈색 빗자루까지.

“……열게.”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한 나는 끼이익, 녹색 문을 열었다.


세 번째 관문은 들어가자마자 웬 거대한 벽이 나왔다.

한껏 경계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벽이라니.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나는 조심스럽게 벽을 더듬었다.

“문지기는 어디 있지?”

벽의 감촉은 굉장히 부들부들했는데, 한편으론 하나하나 갈라진 틈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옆으로 이동하며 만져 봐도 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벽이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미로 같은 건가 봐.”

벽을 더듬고, 귀를 대는 나를 얌전히 쳐다보던 레넌이 입을 열었다.

“회장.”

“왜?”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만지지 말아야지.

곧바로 손을 떼어 내는 즉시 스륵,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스르륵.

물 흐르듯 움직인 벽의 중심에서 이윽고 커다란 뱀 머리가 솟아올랐다. 에메랄드색 눈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번쩍 빛을 발했다.

‘벽이 아니라 뱀이었구나.’

왜 현기증이 나는 걸까.

지금껏 목각 인형을 상대로 마력 훈련을 해 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난이도가 높아지기 있나.
채 마력을 시험해 보기도 전에 생을 마감할 것만 같았다.

두 번째 관문의 개보다 몸집이 두 배는 큰 뱀을 올려본 레넌이 헛웃음을 흘렸다.

“취향도 지독하군.”

“무슨 말이야?”

“그 마법사들, 문지기를 전부 신화 속 동물로 만들어 놨어.”

“아.”

황소 인간, 머리 셋 달린 개, 거대한 뱀.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괴물에 가까운 동물들이었다.

평범한 동물을 놔두고 꼭 무언가 추가된 동물을 골라야만 했을까.

#<68 화>

글썽글썽 매달린 눈물을 차분히 훔친 내가 생각했다.

‘그럼 다음 문지기도…….’

반인반마? 날개 달린 말?

어떤 괴물이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새 검을 뽑아 든 레넌은 어울리지 않게 부르르 진저리 쳤다.

“레넌, 왜 그래?”
“-나는 뱀이 개보다 더 싫어.”

그러고 보니 고양이와 뱀은 천적이었지. 고양잇과에 속하는 백호도 싫은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회장, 다음 관문으로 먼저 가. 여기 있다가는 샌드위치가 될지도 몰라.”

협소한 공간에 비해 지나치게 큰 뱀. 괜히 얼쩡거리다가는 도움은커녕 몸통에 치여 찌그러질 확률이


높았다.

“마지막 관문으로 먼저 넘어가도 문제는 없겠지만…….”

힐긋, 공중에서 파닥거리는 노란 짐승을 곁눈질한 레넌이 덧붙였다.

“무서우면 복도에서 기다려도 상관없고.”

“당연히 기다릴,”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회장?”

“…….”

이런 식으로 자꾸 레넌의 도움에 익숙해지면 안 됐다.

조건 없는 호의든,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비롯된 거든.

뭐가 됐든 언제까지나 지속될 도움은 아니니까.

이 도움에만 기댄다면 레넌이 없어지는 순간, 스스로의 힘만으론 제자리를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왜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페트리온을 등지고 떠날 때의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지


않도록.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원이나 레넌, 또는 안나가 오기까지 망연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등에 이미 땀이 흥건할 정도로 두렵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네 번째 관문에 있을 부장의 상태도 걱정이었다.

“일단 복도로 가.”

세 번째 관문을 벗어나는 문 앞까지 인도한 레넌이 손을 내저었다.

“뱀이 슬슬 배가 고픈 모양이니까.”

“레넌.”

“왜?”

문고리를 잡은 나는 그를 돌아봤다.

“……네 번째 관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물색 눈동자가 조금 크게 뜨였다가 본래 크기를 찾았다.

“이상하네, 방금 좀 두근거렸어.”

“어느 부분에서.”

검신을 어깨에 걸친 레넌은 느릿하게 입술을 쓸었다.

“글쎄.”

저 요망한 호랑이.

“그거 하지 마, 유혹인지 뭔지 입술 쓰는 거.”

“어서 가. 내 예상에는 육식 동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반인반마 같은, 초식 동물이 섞인 괴물은 안 되는 걸까. 결심이 무색하게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말이 씨가 되는 건데.’
째려본 나는 문고리를 힘차게 당겼다. 노란 짐승은 기다렸단 듯 레넌을 버리고 문틈 사이로 쌩 날아갔다.

“그런데 회장, 입술 쓰는 거 있잖아.”

“응?”

“유혹이라는 거 사실 거짓말이야.”

“……뭐?”

“초식 수인들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일진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에 우뚝 굳은 내가 닫히기 직전의 문을 돌아봤다.

집채만 한 뱀을 뒤에 두고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레넌의 모습이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입을 한계까지 벌린 뱀이 그를 향해 쏘아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쾅, 문이 완전히 닫혔다.

가상공간의 네 번째 관문.

마지막 관문답게 황금으로 이뤄진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쉽게 들어가지 못한 채 빗자루로 복도를 쓸었다. 네 번째 관문에서 기다리겠다고 호언한 용기는


빗자루에 쓸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화 속 동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것도 빗자루와 사자 요괴, 여우-알맹이는 사슴- 조합으로.

물론 조합만큼은 웬만한 신화 속 동물보다 희귀하지만.

‘뭘 망설이고 있는 거람.’

팍, 빗자루를 팽개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모두가 하나씩 관문을 맡은 가운데, 대표 격인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일단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이라도 거친 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문을 열고 나오자.


그렇게 결심하며 문을 열던 와중 툭,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빗자루였다.

“…….”

돌아가면 야닉이 얼마나 난리일지 벌써부터 걱정된 나는 주섬주섬 빗자루를 챙겨 들었다.

“가자, 노랑아.”

파닥파닥, 내 부름에 노란 짐승이 날아들었다.

이건 새야 사자야. 완전한 요괴로 거듭난 노란 짐승을 흘끗거린 나는 끼이익, 황금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네 번째 관문에 발을 들이려던 나는 전진을 멈췄다. 발밑이 휑한 절벽이었다.

으.

시작부터 바위 절벽이라니, 다른 곳에 비해 배경부터 극악의 난이도가 아닐 수 없었다.

‘왜 나만.’

남들은 다 있는 바닥조차 없는 걸까.

이번 관문은 실내가 아닌, 마치 바위산 어귀에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냥 첫 번째 관문을 맡을걸.

뒤늦은 후회를 하는 도중, 반대편 바위산에 있는 짚더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지기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살피던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파란색 머리카락에 새까만 로브를 두른 여자.

‘마개동 부장?’

동아리실에서 본 부장과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사람이 짚더미 위에 쓰러진 상태였다.


린드버그 설산에서의 경험을 십분 발휘한 나는 바위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때보다는 훨씬 완만해서, 어렵지 않게 짚더미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부장, 정신 차려요.”

쓰러진 부장의 상체를 일으킨 내가 뺨을 탁탁 때렸다.

“으으음…….”

짧은 신음성을 흘린 부장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누구……?”

갈라진 음성으로 묻던 그녀가 품에서 알 큰 안경을 꺼내어 썼다.

“……학생회장?”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몸은 괜찮나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마개동 부장인 만큼 부원들보다 더 음습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조용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부장을 구하러 왔어요, 부원들이 저를 찾아왔거든요.”

“아…….”

“들은 바로는 혼자 이곳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마지막 관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주근깨 있는 뺨을 붉힌 부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부원들 말이 맞아요, 정말 면목이 없네요.”

순순한 반응을 마주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요즘 워낙 이상한 환경에 있어서 그런가, 이런 평범한 반응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일단 송곳니가 있는 육식 수인인 만큼, 슬쩍 거리를 벌린 내가 재차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문지기는 왜 보이지 않고.”

들어서자마자 문지기가 튀어나온 다른 관문과 달리, 이곳 문지기는 부장을 깨울 때까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질문과 동시에 사색이 된 부장이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아차, 그렇지. 학생회장 혼자 온 거예요?”

급변한 기세에 당황한 내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다른 일행들은 각 관문에서 문지기를 상대 중이에요. 저는 부장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왔고요.”

“회장 혼자서는 무리예요, 마지막 관문은 바로,”

부장의 말이 끝나기 전에 휙, 등 뒤에서 강한 돌풍이 일었다. 우리가 앉은 짚더미 위로 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왔다.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바라보던 나는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세상에.’

한순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뒤에는 육식 동물과 육식 동물을 합쳐 놓은, 동물이라고 보기 힘든 괴물이 있었다.

‘내 예상에는 육식 동물이 있을 것 같은데.’

레넌의 입방정이 불러온 저주가 틀림없었다.

부장은 나와 함께 괴물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머리 부분, 즉 앞쪽은 독수리이고, 몸통과 뒷다리는 사자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 날개도 독수리의
날개예요.”

말 안 해도 보여.

“신화 속 동물이고, 통칭 그리핀이라고 하지요.”

알고 싶지 않아.

“정교하게 잘 만들었지요?”

이 상황에서 뿌듯한 기색으로 묻는 걸 보면 괜히 마개동 부장이 아니었다.

펄럭, 펄럭. 그리핀이 날갯짓으로 일으킨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여기는 짚더미가 아니라 둥지였구나.

‘그럼 이곳에 부장이 누워 있었단 건…….’

파리한 얼굴로 부장을 돌아보자,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저를 먹잇감으로 비축해 둔 거지요. 아이참, 이 정도로 현실감 있게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역시 싫다, 이 육식 수인.

‘먹잇감이라니.’

후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리핀을 올려 봤다.

제자리에서 날갯짓 중인 그리핀이 날카롭게 눈을 번득였다.

초식 수인의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사냥감을 탐색 중인 눈빛임을.

무릎 꿇고 빌어도 넘어가 줄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

달아날지, 일단은 맞서 볼지. 갈등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문득 측방을 돌아봤다.

으르릉. 노란 짐승이 손바닥보다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포효하고 있었다.


‘네가 왜 전의를 불태우는데.’

겉모습만 보면 너는 지금 쟤랑 사촌지간이야. 그런 말을 애써 삼킬 즈음, 뒤따라 일어선 부장이 물어


왔다.

“이 빗자루는 뭔가요?”

그녀는 바닥에 내려 둔 빗자루를 가리켰다.

부들부들 진동하는 걸 보아, 노란 짐승처럼 전의를 불태우는 게 분명했다.

“……야닉 펠이요.”

“어머, S 클래스의 유명한 바보?”

빗자루가 또다시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표했다.

“왜 빗자루가 되었을까. 그럼 저 새끼 사자는…… 아, 그분.”

“노랑이가 유명하긴 한가 보네요.”

“아주 유명하지요. 어쨌든 당장은 무엇도 전력이 안 되겠네요.”

작게 탄식한 부장은 무릎을 굽혀 빗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뒤이어 손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부실 정도의 푸른빛이 잦아들 즈음, 야닉, 아니 빗자루가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휴.”

마력 소모가 컸는지 부장은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회장. 앞서 그리핀을 상대하느라 대부분의 마력을 소진해서…… 당장 도움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나는 둥둥 떠오른 빗자루와 부장을 번갈아 봤다.

“……이 빗자루는 왜?”


“타야지요.”

“…….”

“그리핀은 공중전이니까요.”

#<69 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부장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떨어져 죽어도 괜찮아요, 가상공간에서는 다시 살아나니까. 잘 만들었지요?”

죽었다 살아나는 게 마치 동네 산책보다 쉬운 것처럼 말하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살려 줘!”

바위산에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빗자루가 되어 답답하던 차에, 비행 마법이 걸린 야닉이 이때다 싶어 신나게 폭주하고 있었다.

“학생회장, 중심을 잡고 빗자루에 똑바로 앉아야지요!”

아래쪽에서 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으…….”

말이야 쉽지, 빗자루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은 내가 종잇장처럼 펄럭거렸다.

심지어 위쪽에서는 그리핀과 노란 짐승의 격렬한 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리핀이 위협적인 사냥물을 내가 아니라 노란 짐승이라고 판단한 것부터 기가 차는데.

저 콩알만 한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리핀을 유인하는 노란 짐승의 태연함이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노랑아, 피해!”

휘익, 때마침 그리핀의 날카로운 발톱이 노란 짐승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된


오싹한 장면이었다.

‘걱정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팔에 힘이 빠질 것 같아.

칼바람에 뺨을 맞다시피 하는 중인 내가 생리적인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빗자루는 그간의 설움을 복수할 심산인지 공중에서 꿀렁꿀렁 춤을 췄다.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나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야닉, 학생회실에 있는 학생회 임원 전용 사물함.”

“…….”

“한 자리 내놓으라고 노래를 불렀잖아.”

우뚝. 리듬에 몸을 맡기던 빗자루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 틈을 타 얼른 빗자루에 다리를 걸친 내가 낑낑거리며 올라탔다.

어설프게나마 안착한 나는 생명줄인 양 빗자루 대를 꽉 그러쥐었다.

“저 독수리사자를 공격하는 걸 좀 도와줘. 포상은 사물함이야.”

“…….”

“이름표까지 꼼꼼히 붙여서.”

날뛸 때는 언제고, 놀라울 정도로 얌전해진 빗자루가 안전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핀의 뒤쪽으로 가자.”

휘이익, 날아간 빗자루는 그리핀의 뒤로 돌아 시야를 벗어났다.

거대한 뒷모습을 마주하게 된 나는 몸이 기억하는 감각을 돌이켰다.

해피의 마구간에 바람구멍을 뚫고 발굽에 뺨을 맞은 그날의 기억을.

‘마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방출한다.

외우듯 되뇐 내가 손에 마력이 모이게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응집된 마력이 터질 정도로 부푼 느낌을 받은 순간, 손에서 거대한 공기주머니가 터져 나왔다.

펑!

삽시간에 쏘아진 공기주머니가 그리핀에게 명중했다.

‘됐……!’

희열도 잠시, 부연 연기가 걷히며 깃털 끝자락만 약간 상한 그리핀이 드러났다.

‘……을 리가 없지.’

눈빛이 돌변한 그리핀은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사냥 표적을 노란 짐승에서 나로 전환한


모양이었다.

“야닉, 후진, 후진!”

쐐애액-

방향을 튼 빗자루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피부가 아플 만큼 빠른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핀이 뒤를 바짝


추격해 왔다.

콕, 콕콕. 뾰족하고 샛노란 부리가 뒤꽁무니를 노리고 들었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 봐!”

이러다간 잡히겠어.

어지러이 추격전을 벌이는 와중, 아래쪽에서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회장, 주로 바람 속성 마법을 사용하나요?”

알 수 있을 리가. 제대로 된 마법을 소환한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였다.

‘어? 그러고 보니…….’

숙부의 구속구를 깨뜨린 날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구나. 생각해 보면 모래시계를 깨뜨린 날도 제법


바람이 거센 날씨였다.

“아직 제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공격 범위가 너무 커서 오히려 힘이 분산되고 있어요.”

부장의 음성이 다른 길로 샌 정신을 바로잡았다.

“마력 제어가 서툰 경우엔 마법 지팡이 같은 도구의 힘을 빌리는데, 당장은 없으니…….”

으음, 말꼬리를 늘인 부장이 품을 뒤적였다.

“이걸 사용해요!”

휘릭, 나는 그녀가 던진 물건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고맙,”

다는 말은 취소.

손에 잡힌 건 분홍색 막대 과자였다. 마법 지팡이와 공통점이라곤 길쭉한 생김새뿐.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거라…….”

수줍게 뺨을 붉힌 부장은 곧 비장하게 눈썹을 모았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요.”

그 어떤 장인도 막대 과자로 장인 정신을 시도하진 않을걸.

키에엑- 때마침 그리핀이 내뱉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두렵다.

실제가 아님을 알아도 사지가 떨리고 몸이 굳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경계하고, 땅을 달리는 사자를 피해야 하는 초식 수인의 본능이었다.

이내 턱이 아플 만큼 어금니를 깨문 내가 그리핀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해 보는 수밖에.’

시도하지 않으면 부장의 말대로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의 반복.

맞은편으로 날아간 나는 막대 과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력이 응집될수록 바삭거리는 맛있는
소리가 났다.

‘너무 거리가 멀면 위력이 반감되니까…….’

집어삼킬 듯 입을 한계까지 벌린 그리핀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른 나는 막대 과자로 그리핀을 조준했다.

‘지금.’

동시에 소환된 칼날 같은 바람이 그리핀에게로 쏘아졌다.

콰앙!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그리핀이 그대로 바위산에 날아가 처박혔다.

“아악!”

충격에 휘말린 나 또한 반대편으로 튕겨 나왔다.


뒤편은 바위산. 아찔한 광경을 돌아본 나는 닥쳐올 고통을 대비하며 몸을 말았다.

그 순간, 시야로 노란 물체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나타난 노란 짐승이 내 옷자락을 물어 챘지만 이미 바위산이 지척이었다.

쿠웅!

바위산에 부딪힌 내 몸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골이 울리는 데다 온몸이 욱신거렸으나 예상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어디 부러진 곳도 없는 것 같고.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사색이 되었다. 눈앞에 넝마가 된 노란 짐승과 부러진 빗자루가
있었기에.

“노랑아, 야닉!”

내 몸이 이 정도 상처에서 그친 이유는 노란 짐승과 야닉이 쿠션 역할을 해 준 덕분인 듯했다.

‘대체 왜……!’

고작 새끼 사자인 주제에 왜 자꾸 내 대신 스스로를 위험에 던지는 건지.

“아…….”

상처투성이인 노란 짐승의 몸에 손대지도 못한 내가 주춤거렸다. 함부로 건드리기도 겁날 만큼 작은


생명체라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

이런 존재에게 매번 보호나 받는 꼴이라니.

눈에 차오른 물기 때문에 시야가 부옇게 미어질 때, 휘익, 등 뒤로 거센 돌풍이 일었다.

……설마 아직도.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앞가슴에 긴 자상을 입은 그리핀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그새 일어난 노란 짐승이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너덜너덜한 몸으로 또다시 덤빌 요량인 게
틀림없었다.

“안 돼!”

부러진 빗자루를 들고 몸을 날린 나는 노란 짐승을 끌어안으며 엎드렸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더 이상 이런 약한 생물이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나를 대신하여.

버둥버둥, 노란 짐승이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느껴졌다.

뛰어나갈 수 없게끔 꽉 끌어안던 나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괴로워하고 있잖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보다는 고통에 찬 몸부림에 가깝지 않나.

마치 뜨거운 불길 속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몸부림치는 모양새였다.

“왜 그러는,”

당황하며 몸을 반쯤 일으키던 내가 다시금 노란 짐승을 보호하며 웅크렸다.

이미 그리핀이 날아들고 있었기에.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아무리 마력을 모으고 수식을 그려도 완성 직전에 와해됐다. 여실한 경험
부족이었다.

‘제발.’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품에서 화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이를 인지하는 순간 콰아앙- 거대한 굉음이 일며 천지가 뒤흔들렸다.

죽음이란 이렇게 요란한 일일까.


상상에 비해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번쩍 눈을 떴다.

“……?”

죽지…… 않았네?

왼손엔 부러진 빗자루, 오른손은 다 바스러진 막대 과자.

양손을 번갈아 보던 나는 뒤늦게 발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무언가가 내 배낭을 잡고 있었다.

혹시 그리핀에게 잡힌 건가.

오소소 소름이 돋은 나는 휙, 배낭을 잡고 있는 무언가를 뒤돌아봤다. 내 배낭을 물고 있는 건 그리핀이


아닌,

“…….”

거대한 수사자였다.

날개를 퍼덕이는 수사자를 확인한 내가 급속도로 정색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날개 달린 사자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지만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흉악한 사자를 외면한 나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바위산을 돌아봤다.

거대한 굉음의 근원지는 내게 달려들던 그리핀이 제 속도에 못 이겨 바위산에 고꾸라진 소리였다.

조금 더 날아간 수사자는 나를 부장이 있는 둥지에 내려 줬다.

탁, 발이 땅에 닿자마자 섬광처럼 이동한 내가 부장의 뒤에 몸을 숨겼다.


“부장,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요.”

“얼마든지요.”

나는 우선 손에 들고 있던 부러진 빗자루를 내밀어 보였다.

“빗자루가 부러졌는데 왜 부활하지 않죠?”

“죽어야 부활하지요. 빗자루는 사물인데, 사물이 죽지는 않잖아요.”

“그럼 사물처럼 고통도 느끼지 않는 건가요?”

“물론이죠.”

다행히 야닉은 그저 부러졌을 뿐이었다. 약간이나마 안심한 내가 두 번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가상공간 도전자의 조력자는, 도전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네, 맞아요.”

“조력자가 도중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도 하나요?”

“아뇨, 그런 기능까진 넣지 않았어요. 이벤트성으로 만든 부분이라.”

“예외는요?”

“그런 건 없어요. 행여나 동물형으로 들어오더라도 가상공간을 나설 때까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끔
설계했으니까.”

고로 모습을 바꿀 순 없다는 의미.

빗자루는 영원한 빗자루란 소리였다.

‘그렇단 말이지.’

대부분의 궁금증을 해결한 나는 마지막 남은 의문을 가리켰다.

손끝에는 자못 심각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살피는 중인 수사자가 있었다.


“그럼 저분은 대체 누구신지.”

#<70 화>

“……음.”

막힘없이 술술 답하던 부장은 난감하게 뺨을 긁었다.

“일단은 아까의 그 새끼 사자……로 보이는데요.”

“모습이 변할 일은 없다면서요.”

“그러네요, 새로운 오류인 걸까요?”

부장은 제자리를 돌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이 발생한 오류를 용납할 수 없는 기색이었다.

꽤 오래 고민한 부장이 엄지와 검지를 딱 마주쳤다.

“……진화?”

“중간 과정이 너무 생략됐잖아요.”

사자한테도 발랄한 청소년기는 있을 거 아니야.

청소년기는 고사하고, 이미 밀림의 왕 같은 수사자를 등진 나는 울상 지었다. 저 수사자는 앞발만 가방에


넣어도 천이 찢어질 수준이었다.

“돌려줘요.”

나의 작은 노랑이.
슬프게도 낯선 수사자의 정체를 파헤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쿠르릉, 쾅. 바위산을 파헤친 그리핀이 공중으로 솟아올랐으니까.

얼어붙은 나는 가까스로 형체만 남은 막대 과자를 손에 쥐었다.

‘저놈의 독수리사자…….’

진짜 질기다.

이쯤이면 불사조는 아닌가 고민할 즈음, 부장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문지기를 다른 문지기에 비해 너무 강하게 설계했나……. 대중화하려면 조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광기 어린 마법사를 외면한 내가 수사자를 돌아봤다.

수사자는 그리핀을 상대하려는 듯 날아오르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설마 혼자서 가려고. 손을 뻗은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달싹였다.

“노랑아.”

내 부름에 수사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맹수 특유의 동공이 나른하면서도 요요하게 빛났다.

부름에 응답하는 걸 보면 노랑이가 맞긴 한데. 지금은 노랑이가 아니라 노랑 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심지어 사냥 대회에서 보았던 보통 사자보다 몸집이 두 배는 커 보였다.

진화한 노랑이일 뿐이다, 머리가 커진 노랑이일 뿐이야.

자기 최면을 시도했지만 시각적 효과가 주는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노랑이는 무슨.’

최면에 실패한 나는 수사자를 향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가지 마.”

수사자의 빤한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시선을 피한 내가 얼른 빗자루 파편을 부장에게 넘겼다.

“부장, 야닉을 부탁해요.”

막대 과자를 챙긴 나는 반걸음, 또 반걸음, 주춤주춤 발을 옮겨 겨우 수사자 옆에 다다랐다.

“몸은 괜찮아? 아까는…….”

몸이 불타는 것처럼 괴로워했지 않나. 혹시 그게 진화의 전조 증상이라든가.

이제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걸 포기한 내가 본론을 꺼냈다.

“같이 가자. 혼자서는 위험해.”

이거만 있으면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런 의미로 부서지기 직전인 막대 과자를 보여 주자, 수사자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까칠하고 경우 없는 성정을 보면 아무래도 노랑이가 맞는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어슬렁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온 수사자는 대뜸 제 머리를 디밀었다.

“……?”

설마 쓰다듬어 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절대 못 해.’

왜 이래, 우리 그런 정다운 사이 아니잖아.

붕붕 고개를 휘두르자, 수사자가 크르릉 소리를 내며 재촉했다.

손끝만 스쳐도 펄쩍 날뛸 때는 언제고, 왜 나한테 이런 고문을 시키는 거람.

눈물이 찔끔 흘러나온 탓에, 손등으로 눈가를 콕콕 찍은 나는 억지로 손을 가져갔다.


떨리는 손끝이 콕, 수사자의 정수리에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인 수사자는 이윽고 몸을 낮췄다. 위에 올라타라는 의미 같았다.

‘닿는 걸 싫어해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또 괜찮나?’

새끼 사자일 때나 수사자일 때나 비위 맞추기 힘든 건 여전했다.

꼴깍. 목울대를 울렁인 나는 넓은 등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걸쳤다.

갈기를 꼭 붙잡자, 내가 제대로 올라탄 것을 확인한 수사자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키익, 우리 앞으로 날아온 그리핀이 거센 콧김을 뿜어냈다.

이로써 그리핀과의 두 번째 전투가 막이 올랐다.

마지막 관문으로 이어지는 황금 문 앞에 도착한 안나는 헛숨을 삼켰다.

제 딴엔 첫 관문을 빨리 깨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원과 레넌이 이미 황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럼 학생회장이 마지막 관문을 맡은 건가.’

저와 어깨를 부딪친 정도로 튕겨 날아가던 학생회장이 안나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거듭된 훈련에도 근육이 잘 안 붙고, 이상할 정도로 약한 자. 그 흐물흐물한 인물이 마지막 관문이라니.
염려하던 안나는 뒤늦게 노란 짐승을 떠올렸다.

헤일린 이스단이 함께인 이상 문제는 없겠지. 한결 안심한 안나가 원과 레넌을 향해 말했다.

크웡웡.

가시죠, 라고 말하고 싶었건만. 곰으로 변한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단 사실을 잊고 말았다.

‘빌어먹을 학생회장.’

속으로 벤디를 씹어 먹던 안나는 문득 원과 레넌을 돌아봤다. 두 사람은 주인 모를 피를 흥건히 뒤집어쓴


상태였다.

‘저 피는…….’

아마 앞서 다른 관문을 지나오면서 본 개와 뱀의 것이겠지.

피로 점철되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들을 번갈아 본 안나는 새삼 두 사람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이들을 설설 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건데.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란 보통의 학생들과는 결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다만 벤디와 함께일 때만큼은 묘하게 풀어진 분위기라, 이질적인 존재들이란 사실을 미처 잊고 있었다.

“늦었네, 늑대.”

손목에 묻은 피를 느리게 핥은 레넌이 먼저 말문을 뗐다.

“두 번째 관문을 맡았으면 나보다 먼저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실력이 떨어졌나 봐. 놀리듯 말한 그가 여상히 미소 지었다.

원은 피로 젖은 흑발을 짜증스레 넘겼다. 깔끔한 이마가 드러났다.

“머리가 세 개여서 세 번을 죽여야 했으니까. 지저분한 취미하고는.”

덧붙인 말은 마개동 부원들을 향한 욕설이었다.

어린아이가 저런 살벌한 말을 하는데도 어떻게 위화감이 없을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이어 가던 안나는


아차 정신을 차리며 문을 밀었다.

크웡, 컹.

학생회장이 걱정이에요, 안타깝게도 그 말은 원과 레넌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드러난 건 광활한 바위산과 여기저기 부서진 바위, 둥지 안에 있는 부장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너무 빨라! 떨어질 것 같, 악!”

쾅, 콰쾅!

있는 힘을 다해 마법을 소환 중인 벤디였다.

공기주머니 소환이 전부였던 학생회장이 마법 소환에 성공하다니. 경이로운 발전을 바라보던 레넌이
중얼거렸다.

“손에 있는 건 마법 지팡이인가? 어디서 구한 거지?”

크웡…….

그러게요, 저게 뭐죠? 안나 또한 그런 의미를 담아 웅얼거렸다.

뭔지 알 것 같은 원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막대 과자 같은데.”

아카데미 내 유명 제과점에서 판매하는 딸기 맛 막대 과자.

스카론 장로가 수인 아카데미에 들를 때마다 구매하는 다과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지팡이의 정체를 파악한 레넌은 진지하게 말했다.

“회장은 좀 평범해질 필요가 있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원이 곧장 맞받아쳤다.

굳어 있던 안나는 크웡……? 뭉툭한 앞발로 벤디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벤디가 타고 있는 날개 달린


수사자를.

“…….”

저건 누군가.
두 사람과 한 마리의 머릿속에 불가능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벤디의 껌딱지인 새끼 사자가 진화한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비현실적인 장면을 바라보던 레넌이 정적을 깨뜨렸다.

“저 사자는 성수가 될 수 없는 거 아니었나?”

헤일린 이스단은 입학한 이래부터 쭉 새끼 사자의 모습이었으니까.

“가상공간이니까 가능한 건가 보네. 마개동 부장이 변신 마법을 사용했다든가.”

레넌의 추측을 듣던 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아는 바로 부장은 그쪽 마법에 소질이 없어.”

저토록 정교하게 사자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실력이었다.

그럼 저 광경은 도대체 뭔지.

멀거니 서서 사자를 응시하던 원과 레넌은 어렴풋이 같은 가설을 그렸다.

헤일린 이스단이 새끼 사자 행세를 하는 이유.

두 사람의 머릿속에 노란 짐승이 겪은 무수한 수모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의 성장에 좋은 간식 섭취, 서류를 찢은 탓에 엉덩이 맞기, 꼬리에 리본 달기, 앉아 연습하기,


학생회장이 강아지풀을 흔들면 앞발로 장단 맞추기 등등…….

이런 치욕을 겪으면서까지 새끼 사자 행세를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가문에서도 학을 떼는 헤일린 이스단이 한 수 접는 이유는 한 가지 외에 있을 수 없었다.

새끼 사자에서 성수로 변할 만한 단서를 벤디가 가지고 있단 것.

원과 레넌이 정답에 다다르는 동시에,

끼에엑!
벤디와 수사자의 합공이 그리핀을 바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가상공간에 있는 모든 이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요.”

멀리에서부터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려요.”

희미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회장, 정신 차리세요.”

또렷이 알아들은 벤디가 헉, 숨을 들이켜며 벌떡 일어났다. 검은 로브를 코까지 눌러쓴 웬 수상한 자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새, 새로운 문지기!”

경기를 일으키던 벤디는 뒤늦게야 마개동 부원들인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로 돌아온 건가?’

더듬더듬. 다행히 가상공간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는 전부 사라진 듯했다.

동아리실을 두리번거리자 가장 먼저 원이 벤디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래서야…….’

작게 탄식한 벤디가 원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어린아이일 때의 기시감은 대체 뭐였을까. 현재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기시감은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분명히 과거에 내가 모르는 접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뭘 놓친 걸까. 아쉬움을 느끼는 도중, 원의 입술이 열렸다.

#<71 화>

“회장.”

“네?”

“그만 훔쳐보세요.”

“…….”

“다 보입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저 밉상 늑대. 스르륵, 벤디의 시선이 자연스레 원을 피해 레넌에게로 옮겨 갔다.

레넌은 거울 앞에서 윗입술을 들추고 있었다. 머리 위에 있던 하얀 토끼 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오니.”

거울 속에 들어갈 기세로 제 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본 그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소오니가 도아와어.”

송곳니가 돌아온 사실이 굉장히 기쁜 모양이었다. 물론 벤디에게는 더없이 슬픈 소식이고.

아직 정신이 몽롱한 탓에,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벤디는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노란 짐승.
‘설마하니…….’

현실에서까지 그 흉악한 모습으로 변한 건 아니겠지.

“노랑이, 노랑이는요?”

벤디가 다급히 묻자, 마개동 부원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노랑이? 아, 아! 그분은 아직 깨어나지 않으셔서, 저쪽에,”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차고 일어난 벤디는 부원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달려갔다.

노란 짐승의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곳에 늘어져 누워 있는 건,

‘……다행이다.’

도롱도롱 자고 있는 새끼 사자였다. 날개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원래의 모습이었다.

현실에서까지 성수로 변해 버려서, 그 모습으로 배낭에 들어오려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배낭이 찢어지겠지.’

더불어 제 몸도 그 커다란 이빨에 찢기지 않을까.

벤디가 섬뜩한 생각을 이어 가는 찰나, 노란 짐승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신이 들어?”

대뜸 탁상을 박찬 노란 짐승이 쿠당탕,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 잠깐 사이 익숙해졌는지, 습관적으로


비행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모양이었다.

괜찮나?

숙여 앉은 벤디는 안쓰럽게 살피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노랑아, 너는 이제 날 수 없어.”

날개 잃은 짐승은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저 멀리,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직시한 노란 짐승은 이윽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분에 못
이겨 발버둥 치는 모양새였다.

‘왜 이래?’

날개가 없어져서인지, 더 이상 수사자가 아니어서인지.

전자로 판단한 벤디가 슬며시 위로를 건넸다.

“원래 사자는 날개가 없는 동물이야.”

데굴데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부림은 그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괜찮아, 새끼 사자면 뭐 어때? 몇 년 지나면 멋진 사자가 될 텐데.”

우뚝.

발버둥 치던 노란 짐승이 석상처럼 멈췄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원과 레넌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상처를,’

‘찔렀군.’

꿈에 바라 마지않던 성수 모습이 가상공간에서 깨어나자마자 송두리째 날아갔으니.

그러한 사정은 일 할도 모르는 벤디가 열심히 어르고 달랬다.

“원래 아기 시절을 잘 보내야 멋진 어른이 되는 거야.”

캬옹. 새끼 사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동아리실을 물들였다.


노란 짐승의 난동이 끝나고, 뒤이어 깨어난 안나와 야닉의 분노가 지나간 동아리실. 이곳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부장석에 앉은 원은 칼바람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냉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다가 죽을 뻔한 마개동 부원들이 구석에 몰려 오들오들 떠는 상태였다.

안경을 집어 든 원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가를 거치지 않은 이 마도구는 마탑에서 압수하겠습니다.”

“아, 안 돼!”

“제발 그것만은……!”

처절하게 외치던 마개동 부원들이 입을 합 다물었다.

반박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원의 금안이 선득하게 빛을 발했다.

서로 눈빛만 주고받던 그들은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옷을 잡고 늘어졌다.

“학생회장, 부디 도와주십시오. 이게 몇 년에 걸친 연구인데요.”

“학업을 포기하고 제 모든 걸 여기 쏟았습니다!”

“그 큰 뱀을 보셨잖아요. 경이롭지 않습니까? 신화 속 요르문간드를 완벽하게 재현한 겁니다!”

육식 수인들의 육탄 공세에 낯빛이 절로 새하얗게 변했다.

“레, 레넌.”

반사적으로 그를 찾는 동시에 부웅,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레넌이 허리를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린


덕분이었다.

“이거면 되겠어?”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 속에 우뚝 솟은 모양새라, 이것도 좀. 마치 광신도들이 받드는 신 비슷한 구도가
연출됐다.

광신도 사이에서 빼내 준 레넌은 나를 노란 짐승의 뒤편에 내려 줬다.

으르릉. 노랑이의 콧김 한 번에 광신도들은 접근하지 못한 채 멀리서 외쳤다.

“회장,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나한테 호소해 봤자…….”

말끝을 흐린 나는 난감하게 뺨을 긁었다.

애초에 이 사안은 내 권한을 벗어나 있었다. 마법사들의 관리자와도 같은 마탑의 뜻을 거스른 거니까.

오히려 선도 차원에서 내가 먼저 이 마도구를 마탑에 넘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마 마탑으로 가면…….’

원의 기세만 봐도 가상공간은 높은 확률로 폐기되겠지.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아까운 마음이 들긴 했다.

실제 몸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실전 마법을 양껏 사용해 봤으니까. 물론 가상공간에서 겪은 정신적


고통은 별개였다.

난색을 표할 즈음, 구석에서 눈물 콧물을 짜던 부장이 그림자처럼 접근해 왔다.

“회장……. 회장만은 알지요? 저 마도구의 효용을.”

“그렇긴 한데…….”

“원 님께서는 저희 말은 절대 들어주시지 않을 거예요. 과거에 비슷한 사고를 친 전적이 있어서…….”

자랑이다.
팔짱 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상공간은 원의 말마따나 위험성이 다분했다. 애초에 가상공간에 들어간 이유부터 부장을 구하러 간
거였으니.

원이나 레넌 수준의 실력자에겐 필요도 없고, 그 이하인 사람들이 사용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해결해 주신다면 저를 비롯한 부원 모두는 회장을 적극 지지하겠어요.”

그새 내 교복 자락을 붙든 부장이 울먹이며 속삭였다. 적극 사양하고 싶은 제안이었다.

“회장, 레펠튼 때 잘 넘어가셨잖아요, 그때처럼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설득할 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뭐 굳이.

“글쎄 원 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저분은 너무 무서워요.”

나도 쟤가 무서워.

그 후로도 부장은 소곤소곤 계속해서 나를 회유했다. 웬만한 회유 수단은 다 나왔을 즈음, 마음을
뒤흔드는 제안이 귓가를 울렸다.

“상용화에 성공하면 수익의 10%를 드릴게요.”

솔깃.

“…….”

안 돼. 하마터면 속세에 물들 뻔한 나는 귀를 가로막았다.

내 마음속 번뇌를 눈치챈 부장은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 15%를 드리지요.”

15%.

숙소 비용조차 해결할 수 없는 텅 빈 지갑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해피의 간식을 구하기조차 힘든 재정 상황도.

장학금에 포함된 생활비로는 두 학기를 버티기조차 빠듯했다.

안나는 학생회 공금의 일부는 자유롭게 꺼내어 쓰고, 나중에 채우면 된다고 했지만…….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 소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회장, 마탑은 보수적인 곳이라 항상 안전한 길만 추구하지요. 분명 이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폐기할 텐데,


너무 아깝지 않나요?”

“…….”

“잘 생각해 보아요. 상용화에 성공하기만 하면 마법 훈련에 미친 마법사들이 개떼같이 달려들 텐데,


회장은 원 님만 설득해 주시고 떼돈을 버는 거라고요.”

부장의 속삭임에 반쯤 넘어간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30%.”

“어머, 거기까진 저도 곤란해요, 20.”

“25%. 그 이하는 안 돼요, 저도 저 늑대를 설득하는 건 무서우니까.”

잠깐 갈등한 부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손도 못 써 보고 폐기되는 것보단 나을 테니.”

“설득에 성공하면 계약서를 쓰겠다고 약속해 줘요. 25%.”

학생회장의 철칙, 모든 약속은 서면으로 남겨라.

“……알겠어요.”

계약서 약속까지 받아 낸 나는 비장한 걸음으로 원에게 접근했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앞에 도착하는 동시에 원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앉아 있지. 고개를 한껏 꺾어 올려 보자,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원은 입술을 달싹거리기 무섭게 내 말을 잘라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위험했던 게 회장입니다.”

“……대신 가장 많은 효과를 보기도 했고요.”

마법은 수식보다는 몸이 기억하는 것에서 나오는 거라더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쉴 새 없이 마법을 쏘아본 만큼 여전히 그 감각이 선명했다.

“그래서.”

감흥 없던 그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또 그 위험에 뛰어들겠다고?”

되묻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많이 다쳤긴 하지만, 마력 훈련을 위한 장소에서 멀쩡한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수많은 의문이 몰아쳤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분위기가 미묘했다.

마치 가상공간에서 다친 나를 원이 나무라는 듯한 느낌이어서.

매번 동네 무지렁이 보듯 하던 늑대가 왜 이래.

약간 당황한 기색을 비추자,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넘긴 원은 평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다행히 마개동 부원들처럼 곧바로 머리를 깬다는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말은 들은 척도 안 하시더니, 학생회장한테 붙길 잘했네 등등 부원들의 설레발 가득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제발 조용히 해, 이 도움 안 되는 마법사들.

“말씀대로 제가 가장 위험했던 만큼 효과를 본 입장이라…….”

후우, 길게 심호흡한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원 님께서는 위험성을 이유로 폐기를 말씀하셨는데, 몇 가지만 개선되면 마탑에서도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개선점?”

“네.”

그 말과 동시에 마개동 부원들이 울먹울먹 외쳤다.

“개선점이라니요, 그것도 몇 가지씩이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래요, 저희는 완벽하다고요!”

진짜 저 도움 안 되는 마법사들.

안나에게 신호를 보내자,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쿵, 가볍게 발로 바닥을 굴렀다. 푹 꺼진 바닥을
확인한 부원들이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72 화>

“계속 말해도 될까요?”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 나를 내려 본 원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들어나 보죠.”

떨림을 삼킨 나는 손바닥을 펼쳐 엄지를 접었다.

“첫째로 난이도를 조절할 것. 원 님이나 레넌 같은 육식 괴수들은,”

아. 말실수를 깨달은 내가 빠르게 정정했다.

“실력자들은 와닿지 않겠지만, 현재 가상공간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요. 마법 훈련은 초보자에서


중급자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으니까요.”

“난이도 조절만으로는 위험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맞아요, 그래서인데.”

동의한 내가 뒤이어 검지를 접었다.

“둘째, 문지기를 쓰러뜨리지 못하더라도 도전자가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설계할 것.”

“그 두 가지만 개선해도 위험성은 현저히 낮아지겠죠, 하지만.”

내게서 떨어진 금안이 구석에 몰린 마개동 부원들에게 머물렀다.

“저것들은 믿을 수 없는 족속입니다. 개선은커녕 이상한 기능이나 추가하겠죠.”

아암, 동의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깊이 공감한 나는 이어서 중지를 접었다.

“셋째, 이거는 학생회장으로서 마법 개발 동아리 부원들에게 알립니다.”

마개동 부원들 방향으로 휙 몸을 틀자, 그들이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현 시간부로 마법 개발 동아리실을 폐쇄하겠습니다.”


부원들의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아우성이 동아리실을 가득 메웠다.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태어나서 난생처음 듣는 희귀한 괴성이었다.

“목구멍에 사포를 박아 놨나?”

귀를 틀어막은 레넌이 희귀 동물 보듯 그들을 바라봤다.

저 호랑이에게 희귀 동물 취급을 받을 정도면 말 다 했지.

“동아리 강제 해체라니요!”

“안 됩니다, 학생회장!”

그거 아니고 폐쇄. 아직 얘기 다 안 끝났어, 끝까지 들어.

‘부장, 좀 진정시켜 봐요.’

희귀 동물들을 피해 빠르게 물러난 내가 부장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바닥에 쓰러진 부장은 입을 막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혀, 현재의 동아리실은!”

글렀다고 생각한 내가 목청껏 외쳤다.

“주요 건물과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탈을 일삼는 마법 개발 동아리를 관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바!”

그제야 희귀 동물들의 포효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상시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학생회실과 가까운 빈 강의실로 동아리실을 이전하겠습니다. 이는 마도구


폐기와 관련 없이 무조건 시행할 일이고요.”

조금 전까지 울고 난리였던 부원들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 동아리 해체가 아니란 건가?”

“그런가…… 본데?”

그러니까 일단 말을 끝까지 들으라고. 겨우 목소리를 낮출 수 있게 된 내가 말을 이어 갔다.

“만일 마도구를 개선하게 될 시에는, 주에 한 번씩 학생회에서 엄밀히 검토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검토할
학생회 임원은 앞으로 마법부 대표를 맡을,”

내 시선이 마개동 부장에게 닿았다.

“맡을…….”

큰일이다, 이름이 부장은 아닐 텐데. 또박또박 말하던 나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어 갔다.

입을 뻐끔뻐끔 여닫는데, 구석에서 책을 읽던 신시아가 툭 말했다.

“메이지 로튼.”

“그래요, 메이지 로튼입니다.”

“네? 아니, 학생회장!”

가장 먼저 반발한 건 부장도 부원도 아닌, 안나 스웰든이었다.

“마개동 부장을 마법부 대표로 임명하다니, 그게 말이 되……!”

말을 뚝 멈춘 안나가 도르르 눈을 굴렸다.

비록 가상공간에 갇히긴 했으나, 홀로 세 번째 관문까지 돌파한 마법사라면 마법부 대표에 앉기에 부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단점이야 있지만, 마개동을 인질로 잡으면 크게 문제 될 게 없지 않을까.

나와 똑같은 생각에 다다랐는지 급격히 누그러진 안나가 끄덕거렸다.

“말이…… 되는군요. 희한하게 말이 되네요.”


실질적 일인자의 허가를 얻어 낸 내가 다시 부장을 돌아봤다. 부장은 이미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번에 입회한 학생회 마법부 대표, 메이지 로튼입니다.”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빠르네.

“음…….”

덕분에 잠깐 할 말을 잊어버린 나는 원을 올려 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개선하기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어떨까…… 이 말이죠.”

그의 빤한 시선에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되면 마탑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왜 학생회장인 내가 입회 희망자 2 호에게 주눅 들어야 하는 걸까.

눈은 사납게 뜬 반면 손은 자꾸만 공손히 배꼽에 모였다.

시선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주시하는 맹수의 황금색
안광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어디 보통 얼굴이어야지.’

이윽고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가지런한 입술이 열렸다.

“올해까지 기한을 주도록 하죠.”

“정말요?”

“대신.”

“……?”

“마탑에 회부할 때는 회장이 직접 오세요.”


내가 왜. 마개동 부장이나 부원들이 가야지.

그러한 감정이 일순 표정에 드러나고 말았는지, 비뚜름히 웃은 원이 허리를 숙였다. 훅 몸이 가까워지며,


내 왼쪽 귀에 입을 가까이한 그가 작게 속삭였다.

“-다 들었습니다.”

“뭐를……?”

“상용화에 성공하면 회장이 25%를 먹겠다는 거.”

딸꾹.

분명 숨소리 정도로 작게 속닥거린 말인데. 입 모양만으로 유추한 게 틀림없었다.

“장단 맞춰 줬으니, 그만큼의 정성을 보이세요.”

나지막이 속삭인 원이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웠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휜 미소는 더없이 예뻤고, 더없이
악마 같았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딘지 잘못 걸린 느낌이긴 한데.

혹시 모를 졸업 후를 위해, 이참에 마탑에 가서 눈도장이나 찍어 두지 뭐.

‘그런데…… 만약 마탑에 취직하면 나중엔 이 늑대를 모셔야 하는 건가?’

여러모로 심정이 복잡해진 와중, 마침 야닉이 안나에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늑대 자식, 요즘 은근히 회장한테 무르지 않냐?”

“흠, 잘 모르겠는데요.”

“넌 저놈을 제대로 몰라서 그래. 설마…… 이 야닉 펠을 제치고 입회 희망자 1 호에 올라갈 심산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추측 좀 진지하게 하지 마시죠, 듣기에 짜증 나니까.”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 나를 두고 또 새로운 녀석을 입회시켰잖아! 학생회장, 미쳤어?!”

꽥 발작하는 야닉을 외면한 나는 마개동 부장, 메이지 로튼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다가가다가 멈췄다.

메이지를 비롯한 마개동 부원들이 승전하고 돌아온 전쟁영웅 보듯 우러러보고 있었기에.

“입학 이래 저희를 이토록 믿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나도 돈에 넘어갔을 뿐이야.

그대로 뒷걸음질 치기 무섭게 달려온 메이지가 덥석 내 손을 붙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한 안에 개선할게요. 그리고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어요.”

뒤이어 마개동 부원들이 잡은 손 위로 계속해서 손을 겹쳤다.

육식 수인들의 어마어마한 손아귀 힘에, 손을 뺄 시기를 놓친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지 답해 드려야지요.”

“……종족이 어떻게 돼요?”

“어머, 소개가 늦었네요. 저를 비롯한 마개동 부원 대부분은 박쥐 수인이에요.”

박쥐.

그래서 빛에 닿으면 죽기라도 하는 양 부실을 어둡게 하고, 검은 후드를 얼굴까지 뒤집어썼구나.

제발 내 손을 놔줘. 이제 별의별 육식 수인들이 다 나온다고 생각한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회장을 부축해!”
“들 것, 당장 들 것을 가져와!”

또 주변에 육식 수인이 늘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나.

어느덧 겉옷과 카디건을 벗어야 할 계절. 바람에 더운 냄새가 묻어났다.

S 클래스 강의실에도 이 계절이 스며들었다.

나른한 오후에 취한 몇몇 학생들은 꾸벅꾸벅 고개를 기울였고, 몇몇은 한층 푸르러진 창밖을 구경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학생 중 한 명인 헤일린은 가상공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학생회장이 그리핀에게서 노랑이-헤일린-를 보호하기 위해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을 때.

안 그래도 접촉 부위가 많아 온몸이 불타는 고통 가운데, 학생회장은 저도 모르게 헤일린에게 마력을


흘렸다.

그 직후에 어떻게 되었나.

빌어먹을 새끼 사자의 모습에서 성수로 변모했다. 가상공간이 환상이었던 만큼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그


모습은 증발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피식, 피식. 헤일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건너 자리에 앉은 야닉이 긴 장발을 묶으며 인상을 구겼다.

“왜 혼자 히죽히죽 웃냐? 더럽고 소름 끼친다.”

그 한마디를 남긴 야닉은 헤일린의 손짓 한 번에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평화를 되찾은 헤일린이 설렁설렁 교재에 낙서를 그렸다. 갈기가 생긴 사자 그림이었다.

접촉, 학생회장이 가진 마력, 그리고 사슴 수인.


이 셋 중 두 가지는 성수가 될 수 있는 단서와 관련이 있는 게 확실해졌다.

특히 접촉.

직접적으로 살이 닿으면 몸이 타는 듯한 느낌이라, 그간 접촉을 꺼렸는데. 성수로 변했을 때는 회장과


접촉해도 별다른 통증이나 느낌이 없었다.

‘이제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접촉을 늘려야 하나.’

가장 큰 단서는 이쪽인 듯하니까.

#<73 화>

시기 좋게 학생회장은 노란 짐승에게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자꾸 머리나 꼬리를 만지려 들었다.

그동안 화끈거리는 통증 반 짜증 반으로 쳐 내기 바빴으나, 내버려 두는 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슬슬 가문에 보고를 해 볼까.’

고민하던 헤일린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성수화를 바라는 만큼 가문의 주요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안하무인인 느낌이 있지.

괜히 어중간히 아는 상태에서 보고했다가는 내일 당장 이스단 부인이 아카데미에 올 확률이 높았다.

그 제멋대로인 성질머리를 미루어, 확인도 거치지 않고 학생회장을 포대자루에 넣어 납치할지도 몰랐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판단하자고 생각할 때, 교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원이 입을 열었다.

“새끼 사자 행세를 한 이유가 성수화 때문이었나?”

턱을 괸 헤일린은 원을 돌아봤다.
가상공간에서 성수로 변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뭐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헤일린은 벌레 떨치듯 손을 휙휙 저었다.

“관심 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이유도 알았으니까 이제 회장한테 다 이를 거야.”

팔랑, 레넌은 가십지를 넘기며 흥얼거렸다.

“입이 근질거려서 죽는 줄 알았는데.”

노랑이 이스단의 정체를 까발리겠다는 의미였다.

심심한 광인이 오래 참긴 했지. 어차피 학생회장을 제외한 모두가 제 정체를 아는 이상, 그 또한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헤일린이 대답했다.

“말하든가. 뭐가 됐든 학생회장만 따라다니면 되는 거니까.”

일순 멈칫한 헤일린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 모습인 편이 학생회장도 나를 만지기 쉽지 않나.”

확실히 새끼 사자일 때보다야 인간 모습이 만질 부위가 훨씬 많았다.

‘뭘 만져?’

헤일린의 대사를 똑똑히 들은 S 클래스 학생들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이는 강의하던 교수도,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던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치는 강의실 분위기 속, 정작 헤일린은 태연히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면 인간 모습으로 만날 때마다 학생회장의 시선은 제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무서워서 시선을 내렸다 치기에는…… 글쎄, 횟수가 꽤 많지 않나.

‘사슴 수인은 원래 좀 엉큼한가.’


어쨌든 학생회장이 거부만 하지 않으면 인간 모습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던 헤일린이 창문 밖, 시계탑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학생회장의 강의가 끝날 시간. 노랑이 이스단으로 살아갈 시간이었다.

휙, 순식간에 동물형으로 변한 헤일린이 잡을 새도 없이 창문을 넘었다.

어울리지 않게 할 말을 잃은 원과 레넌은 복잡한 심정으로 노란 짐승이 사라진 창문을 응시했다.

“…….”

다른 의문은 다 떠나, 노란 짐승의 정체를 밝히면 아예 인간 모습으로 학생회장을 졸졸 따라다니겠다 이


말인데.

레넌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술을 쓰는 중이고, 원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손에 쥔 깃펜만 부러져 있을


뿐.

그런 두 사람을 확인한 안나는 조용히 앞을 돌아봤다.

당분간 노란 짐승의 정체가 밝혀질 일은 없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S 클래스 담당 교수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의 좀 들어 주렴,


얘들아…….

같은 시각. 아카데미의 다른 곳도 파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오, 오늘 마개동의 시실리 학생이 강의에 출석했습니다.”

“예? 교수님의 강의에도 말입니까?”

“모르보 교수의 강의도 마찬가지로 마개동의 아벨 학생이 출석했답니다.”

마법부 교수진이 사용하는 교수실이 발칵 뒤집혔다.

마법 개발 동아리.

실상 마개동은 아카데미에서 제법 뛰어난 자질-의외로-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스물 가까이.
그러나 머리에 나사가 여러 개 빠져 있는 만큼, 최소한의 학점만 유지하며 마법 연구에 매진하기만을 몇
년째.

따라서 학생들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집단일지언정, 마법부 교수들 입장에서는 몹시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그들만 있으면 마법부 실적이 쭉쭉 올라, 검술부 교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매해 있는 교수 평가마다 마법부 교수들은 아쉬움을 삼켜 왔다.

그런데.

어떤 회유도 듣지 않고 동아리실에 처박혀 있던 마개동 부원들이.

음침한 천막을 집어치우고 멀쩡한 동아리실을 꾸린 것도 모자라, 어제부터는 강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모든 게 학업에도 충실하라는 벤디 레피, 학생회장의 지엄한 뜻이라는데.

“더군다나 이번 학생회 마법부 대표가 메이지 로튼이랍니다.”

“그 괴짜, 아니, 메이지 학생이?”

메이지 로튼은 세간에서도 알음알음 알아주는 뛰어난 마도구 개발자였다.

그러나 화려한 실력에 비해 추구하는 게 남달라서, 매번 말도 안 되는 마도구만 개발하는 실정이었다.

매번 수줍은 얼굴로 설득을 번번이 거절하며, 교수들의 애만 태워 온 메이지 로튼이.

동아리실에 콕 박혀 얼굴조차 보기 힘든 메이지 로튼이.

“……메이지 학생이 학생회라뇨, 학생회장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거 아닙니까?”

“어…… 하지만 이번 해 학생회장은…….”

협박을 당하면 당했지, 할 만한 인물은 아니지 않나.

교수들의 머릿속에 매 연설마다 삐걱대며 단상에 오르는 학생회장이 그려졌다.


‘사, 사슴 여러분.’

통나무 같은 표정도 모자라, 심하게 긴장하여 연설 첫머리를 항상 말실수로 시작하는.

마력 측정 때 모래시계를 깨뜨리는 광경을 연출했다지만, 아직 마법부 교수들도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자연스레 교수들의 시선이 X 클래스 담당 교수인 리우드리, 통칭 리리 교수에게 모였다.

“리리 교수.”

“…….”

“리리 교수!”

덜컹,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리리 교수가 입가의 침을 닦았다.

“밀란느 학장님, 저는 그저 엎드린 채 수인 아카데미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심했을 뿐입니다.”

“……리리 교수, 학장님은 오시지 않았네.”

“아, 뭐야.”

맥 빠진 리리 교수가 무기력하게 자리에 늘어졌다.

“학장님이 오신 줄 알았네. 왜 이렇게 가까이들 몰려들었어? 저 사랑해요?”

주변을 빙 둘러싼 교수들은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바라봤다.

리우드리 교수는 수인 아카데미의 최연소 교수로, 한쪽으로 땋아 내린 분홍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판다 수인이었다. 그것도 미남인.

항상 달려 있는 눈 밑 그늘과 무기력한 표정, 기회주의자인 점만 아니면 정말 괜찮은 남자로 보일 텐데.

입맛을 다신 마법부 교수들이 재차 말문을 뗐다.

“자네가 학생회장이 속한 X 클래스의 담당을 맡고 있지 않은가.”


“우리 클래스에 학생회장이 있었어요?”

“……거참, 본인 학생들에게 관심 좀 갖게나. 벤디 레피 학생 말일세.”

“아- 아무튼 왜요? 우리 애가 사고라도 쳤나?”

“아닐세. 다름 아니라, 학생회장이 마개동 부원들을 휘어잡았다지 뭔가. 그 학생이 그리 실력이


좋았나?”

난데없는 질문을 들은 리리 교수가 일순 우뚝 굳었다.

그의 경직된 반응을 마주한 교수들 사이에서 은은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우직하고 협동심이 짙은 검사에 비해, 마법사는 마개동 부원처럼 개인 활동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학생회장이란 위치에 있는 벤디 레피가 뛰어난 실력자라면, 어쩌면 마법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그러한 교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업은 리리 교수는,

“엥?”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후볐다.

“마개동? 마법 개발 동아리를 휘어잡았다고요?”

“그래.”

“다들 노망나셨나? 벤디 레피는요.”

팔자주름을 길게 늘인 그가 벤디의 마법 실습 강의를 떠올렸다.

‘합!’

퐁.

‘하압!’
포퐁.

“아니, 진짜 그 실력으로 어떻게 입학했지? 밀란느 학장님과 연줄이라도 있나? 레넌 에던트처럼 모셔야
하는 거 아니야?”

교수들은 리리 교수의 혼잣말만으로도 학생회장의 실력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초보.

그것도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마력도 중요하지만, 그게 항상 마법 실력과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의 끈을 놓지 않은 교수들이 타일렀다.

“마력 측정을 생각해 보게, 혹시 모르지 않나. 오늘 강의 때 한번 잘 살펴나 보게.”

“예이, 예이. 이제 볼일들 봐요. 중장년들한테 인기 있고 싶지 않아요.”

설렁설렁한 손짓에 조금 침울해진 중장년들이 제 자리로 해산했다.

팔짱 낀 리리 교수는 의자를 뒤로 까딱까딱 기울였다. 의욕 없는 회색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그 쪼그만 게 마개동을 구워삶았다고?’

그럴 리가.

벤디 레피는 그냥 걸어 다니는 공기 청정 마도구였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일편, 한창 강의에 열중하던 벤디가 부르르 진동했다. 이어진 책상을 통해 진동을 그대로 전달받은
신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래?”

“몰라, 가끔씩 이래. 육식 수인이 나를 생각하고 있나 봐.”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신시아는 다시 책에 고개를 박았다. 무슨 알람도 아니고.


마법부 리우드리 교수의 강의 시간.

실습장 구석에 자리 잡은 벤디는 뿌듯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살아 있는 산소 주머니라고 놀림당하던 이 벤디 레피가.

가상공간을 기점으로 그럴싸한 마법 소환이 가능해졌다.

모니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숙부가 등 뒤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얕은 계단이나마 찾은 기분이었다.

“거기, 학생회장.”

불끈 주먹을 말아 쥐던 벤디가 교수의 부름에 달려갔다.

“네, 교수님.”

뒷짐 진 리리 교수는 제 앞에 선 벤디를 유심히 살폈다.

총명함과 어벙함 사이의, 애매한 곳에 걸치고 있는 듯한 새침한 표정하며. 장신인 그의 앞에 서니 작은


체구가 안 그래도 더 작게 느껴졌다.

보이는 대로 예쁘장한 여우 수인인 것 말고는 큰 특징이 없는데. 특히 비실비실한 외관은 강함과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74 화>

그러나 마법사의 진면목은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거긴 하니…….

리리 교수는 그냥 대놓고 묻기로 결정했다.


“너, 혹시 마법 개발 동아리 부원들을 흠씬 두들기기라도 했어?”

“제가요?”

“괜찮아, 솔직히 답해도 돼. 리리 교수님은 학생들의 주먹다짐에는 아주 관대하거든.”

“리리 교수님.”

“그래그래.”

벤디의 담담한 얼굴 위로 작은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그 박쥐 무리는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역시나.

“나도 그럴 것 같았어, 박쥐가 무섭긴 하지?”

“네.”

“자리로 돌아가 봐.”

꾸벅 인사한 벤디가 제일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당장 클래스메이트들한테도 겁먹어서 구석에만 가는 겁보가 무슨 마개동을 휩쓸어.

‘하여간 호들갑이라니까.’

구시렁거린 리리 교수는 실습장에서 연습 중인 학생들을 불러들였다.

“학생들아, 이리 오세요.”

X 클래스, 그중에서도 마법부에 소속된 학생들이 그의 앞에 차례로 도열했다.

“어……. 오늘 뭐 하려고 했더라?”

살짝 손을 든 신시아가 말했다.
“실전 마법 연습.”

“아, 맞다. 알고 있는데 물어본 거야.”

비적비적 무언가를 준비해 오는 리리 교수에게 학생들의 불신 어린 눈길이 따라붙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저 교수님은 대체 어떻게 교수가 된 거래?”

“그러게. 그리고 교수치곤 너무 젊은 거 아니냐?”

“뭐…… 나름 판다 일족에서는 유명한 마법사라던데. 과거에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다는 소문이 있어.”

판다 일족이었구나. 클래스메이트들의 대화를 엿들은 벤디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판다는 대나무가 주식이라던데.’

육식 동물 중에서는 그나마 잘 지내 볼 만한 일족이 아닐까.

벤디가 은근한 내적 친밀감을 느낄 즈음,

“자, 집중.”

리리 교수는 과녁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끌고 왔다.

“이 과녁은 마법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법을 흡수하는 마도구예요. 마법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탁탁, 과녁을 짚은 그가 영혼 없이 설명을 이었다.

“한 명씩 나와서 실전용 마법을 명중시켜 보도록. 마법 지팡이나 다른 도구를 활용하든가 말든가, 그런


건 알아서 하시고.”

과녁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의자를 설치한 리리 교수가 자리 잡고 앉았다.

“힘내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새싹 여러분.”

진심 없는 응원을 보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고개가 기울기 시작했다.


“또 주무시네.”

암묵적 X 클래스 대표, 신시아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씩 나서서 마법을 사용하는 걸로.”

펑!

콰쾅!

쿵, 쏘아 보낸 마법이 과녁에 명중하며 소음과 흙먼지가 뒤섞였다.

드디어 차례가 된 벤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침 눈을 뜬 리리 교수는 벤디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최소한 후기라도 가져가야 마법부 중장년들이 잔소리를 안 하겠지. 그런 생각에서였다.

씩씩하게 나선 벤디는 엄숙한 얼굴로 품을 뒤적거렸다.

‘가상공간에서 익힌 걸 실험할 기회야.’

비장할 정도의 진지함이라, 뒤편에 선 X 클래스 학생들에게까지 긴장이 전해졌다.

이윽고 벤디의 품에서 길쭉한 마법 지팡이가 나왔다.

아카데미 내 제과점의 대표 제품인 막대 과자였다.

정색한 X 클래스 학생들이 벤디의 마법 지팡이-아마도-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건 또 뭐냐?”

“교내 제과점의 딸기 맛 막대 과자.”

“누가 그걸 물었냐고.”

적응하기 진짜 힘들다.
학생회장의 기행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볼 때마다 새로운 수준이었다.

안타깝게도 벤디에게는 벤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마법 지팡이를 구할 형편도 못 될뿐더러…….

가상공간에 다녀오고 나서 막대기 비슷한 걸로 계속 연습해 봤지만, 막대 과자만큼의 감각을 되살리지


못했다.

겉보기엔 이래도 마법 지팡이에 비해 가성비가 높다고.

조금 침울하게 발끝으로 땅을 긁은 벤디가 자세를 잡았다. 마침 풍향도 제 뒤쪽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이론보다는 경험이라더니.’

훨씬 부드럽게 몸속을 유영한 마력이 제가 가야 할 자리로 움직였다.

바삭바삭, 마력을 집중시킬수록 막대 과자가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냈다.

‘저거 맛있긴 하지.’

갑자기 당기네. 그러한 생각을 이어 가던 리리 교수는 순간 숨을 멈췄다.

퍼엉, 막대 과자 끝에서 터져 나간 화살 형태의 마법이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반동에 튕겨 나간 벤디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회오리처럼 쏘아진 마법은 과녁을 뚫고 뒤에 있는 교목에 명중했다.

쿠구궁.

땅이 뒤흔들리며 두꺼운 교목이 기울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리리 교수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웬만한 마법은 다 흡수하는 과녁인데.’

모래시계를 깨뜨린 건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이거…….’

물건이 나왔다.

벌써부터 중장년들의 환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리리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중인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벤디야, 살아가다가 돈이 없을 때는…….’

노동으로 때우렴.

뼈와 살이 되는 가르침을 반추한 내가 교수님을 불러 세웠다.

“리리 교수님.”

“어어, 말해.”

결의 어린 얼굴을 한 나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말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어리둥절하게 나를 돌아본 그는 회색 눈을 껌벅였다.

“엥?”

“……?”

“우리 학생회장이 고생을 즐기는 취미가 있었나?”

“과녁이랑 교목을 망가뜨려서 교수실로 따라오라고 하신 거 아닌가요? 변상 때문에.”

“난 또 뭐라고. 이 아카데미에 남아도는 게 돈이에요.”

그럼 왜 따라오라고 부른 걸까.
‘어쨌든 변상은 안 해도 되나 봐.’

안심하며 눈가를 훔친 나는 쏟은 말을 얼른 다시 주워 담았다.

“그럼 뭐든 시켜만 달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그건 취소 불가.”

“네? 왜요?”

“아마 중장년분들이 너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을 것 같으니까, 그걸로 때웁시다.”

중장년분들이 누군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뭔가 잘못 걸렸다.

도주할까. 채 고민을 끝내기 전에 마법부 교수실에 다다른 리리 교수님이 달칵 문을 열었다.

“자, 미래의 개선장군 모십니다.”

왠지 싫다, 이 교수님 화법.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침 모여 있던 마법부 교수님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죽 뺐다.

정적도 잠시, 몰려든 그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리리 교수님을 둘러쌌다.

“아니, 확인은 거치고 학생회장을 데려온 건가?”

무슨 확인?

몰래 가까이 붙은 내가 교수님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리리 교수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 됐나?”

“거 참, 아까부터 왜 이렇게 가까이 옵니까. 병아리 같은 학생들도 아니고, 다 자란 닭들은


부담스러워요.”
대놓고 면박을 들은 교수님들이 머쓱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겨우 숨통이 트인 리리 교수님은 뒤에 선 나를 가리켰다.

“방금 실전 연습용 과녁을 개박살 내고 오는 길입니다.”

“그, 그걸 부쉈다고?”

“예에, 학생회장이 메이지 로튼을 굴종시키고, 마개동을 개박살 낸 것도 아마 사실일 겁니다.”

“……!”

“덧붙여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뻥뻥 소리쳤수.”

그렇게 무기력한 얼굴로 누명 씌우기 있나요. 파리해진 내가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그런 적 없……!”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물러서는 즉시 교수님들이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였다.

“됐다, 이제 다 됐어.”

“저기,”

“미안하네, 내 자네의 진가를 몰라봤어.”

“이렇게 걸음을 다 해 주고!”

“아뇨, 잠깐만,”

“자자, 회의실로 가서 긴히 대화를 나눠 보세.”

얼굴이 화사하게 핀 교수님들은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리리 교수님을 바라봤지만,

“리리 교수님, 뭐든 시켜만 주세요.”


“…….”

“크으, 멋진 희생정신. 이런 발언을 할 줄 알아야 수인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지.”

그는 내 발언을 따라 하며 느릿느릿 다음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판다가 괜찮기는 무슨, 그냥 대나무 집착 곰돌이겠지.

은근히 쌓아 둔 내적 친밀감이 모래성 쓰러지듯 무너진 순간이었다.

학생회실 창문에 지금 내 머리 색과 꼭 닮은 노을이 내렸다.

홀로 앉은 나는 집무 책상에 새로 자리 잡은 물건을 뽀독뽀독 닦았다.

메이지가 입회 기념 선물로 가져온 통신구였다. 교내에 통신구가 모든 장소와 연결이 가능한.

‘이 귀한 걸…….’

마법 스크롤보다 두 배 이상은 비싼 마도구였다.

때 빼고 광내며 통신구를 닦은 내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벤디 레피입니다.”

이렇게 답하면 되는 걸까.

누가 통신 안 걸어 주나, 빨리 사용해 보고 싶은데. 기쁨에 심취한 나는 또다시 혼잣말했다.

“네에, 벤디 레피입니다.”

[혼자 뭐 합니까.]

덜컹.

통신구에서 돌아온 답변에 소스라친 내가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의자를 일으킨 나는 다시 통신구 앞에 앉았다. 통신을 걸어 온 이는 원 리오나드였다.

까만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는 통신구 속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지나치게 잘난 얼굴을 마주한 내가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에요?”

[머리가 어떻게 됐습니까?]

이 늑대에게 이런 종류의 말만 몇 번째 듣는 건지. 이젠 놀라지도 않은 내가 관자놀이를 톡톡 눌렀다.

“제 머리는 오늘도 멀쩡해요.”

[그런데 마법부 대표로 출전하겠다고요?]

누가 차기 마탑주 아니랄까 봐, 벌써 귀에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입술을 말아 문 나는 마법부 교수실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75 화>

아카데미 대항전.

서류를 검토하다가 얼핏 본 적이 있는 이것은, 하계 방학 직전에 열리는 대규모 행사였다.

육식 수인 영역의 여러 아카데미가 모여 대항전을 벌인다는데…….

마법부, 검술부, 체술부, 그리고 세 가지 무력을 전부 다루는 종합부까지. 각각 한 명씩, 총 네 명이


아카데미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부디 자네가 우리 마법부 대표로 나서 주게.’


이 대항전 때, 나더러 마법부 대표로 출전해 달라는 게 교수님들의 부탁이었다.

‘원 학생은 알다시피…… 크흠. 솔직히 말을 걸기조차 무섭네.’

‘아니, 루브르 교수님. 교수가 학생을 무서워하면 어쩝니까?’

‘그야 졸업하면 마탑주 자리에 오를 분 아닌가! 톰 교수 자네도 말만 그렇게 하고 막상 나타나니 손부터


비비더구만!’

일단 원은 출전할 확률도 낮을뿐더러, 출전하더라도 차기 마탑주란 지위 때문에 타 아카데미의 항의가


들어올 염려가 있었다.

개인 성향이 강한 마법사 특성상, 다른 뛰어난 학생들은 개별 활동하느라 나 몰라라 중이고.

때문에 번번이 검술부나 다른 부에 비해 성적이 부진하다는 게 교수님들의 고민거리였다.

회상을 끝내기 무섭게 원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상공간이랑은 다릅니다, 대항전은 실전이에요.]

“알아요.”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출전하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

나는 고심 끝에 대항전 출전을 택했다. 두 가지 조건을 달고.

첫째는 리울 약초였다.

‘……그 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오오, 뭐든 말해 보렴!’

‘리울 약초를 좀 구하고 싶어요.’

‘리울 약초?’
‘그 왜 있잖소, 이 아이가 얼마 전에 학장님의 설산에 가서 가져온 약초.’

‘맞아요, 제가 가져온 건 벨헬름 아카데미 측에 선물해 버려서요. 예쁘기도 해서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외출이 어려운 입장이다 보니…….’

‘원하는 만큼 구해 주다마다!’

지금 가진 마력을 잘 다루게 될 즈음엔 또다시 리울 약초가 필요해질지도 몰랐다.

부모님이 마력을 봉인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대로라면, 아직 내 몸에 갇힌 마력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둘째는 대항전을 위한 무료 추가 강의였다.

‘걱정 마라, 담당 교수님이 있잖니? 리리 교수가 확실히 책임져 줄 게다.’

‘허?’

마침 교수실을 나서려던 리리 교수님은 팔자주름을 한계까지 늘였다.

‘자기들은 몸 편히 머릿속으로 앞날 걱정을 해 놓았으니, 몸 고생은 막내가 해라? 귀여운 막둥이를


이렇게 취급해도 되나?’

‘리리 교수, 말 똑바로 하게! 자네는 귀여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출전을 결정했으나, 사실 일 초마다 후회와 오열을 반복하는 중이기도 했다.

‘다만…….’

입을 달싹일 즈음, 감정 없던 원의 목소리에 날이 서렸다.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네?”

[왜 굳이 위험에 뛰어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
[가상공간에서도 무모했죠. 저나 백호가 올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요.]

또다시 혼나는 기분을 느낀 나는 가만히 통신구를 응시했다.

범접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 만큼 당연히 이해할 수 없겠지. 그 힘이 없기에 사슴 영역을 떠나


도망치는 선택밖에 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스스로의 무력함을 다시 체감할 바에야 구르고 다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더군다나 종족까지 숨기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상,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힘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원래도 먼 존재처럼 느끼던 원과의 간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책상 아래 둔 손을 말아 쥔 나는 책망 어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러면서도 의문이 일었다.

마개동에서 개발한 마도구와 관련하여 대화할 때도 그렇고. 내가 다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한


원의 태도에 대해.

“사실 원 님이 왜 이렇게 화내시는지 모르겠어요.”

[…….]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입장이셨잖아요.”

원의 금안이 살짝 확장되었다가 제 크기를 찾았다.

술술 나오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원 님의 생각대로 저는 약해요. 약한 주제에 이길 수 없는 대상한테 부딪치는 거, 무모한 짓인 거 알고


있어요. 저도 죽을 만큼 무섭고 하기 싫어요.”

얼마나 싫냐 하면 화상, 진상, 밉상보다 싫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해서라도 힘을 길러야 해요.”

그사이 원의 표정은 한결 풀어져 있었다. 무서운 무표정이 그냥 무표정으로 변한 정도의 근소한


차이였지만.

[그래도 조급한 감이 있다고 보는데.]

“그건…….”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 눈앞에 자연스레 선택지가 떠올랐다.

너희 육식 수인들한테 죽을까 봐.

숙부에게 쫓기는 중이라서.

어떤 선택지도 고를 수 없었던 내가 턱, 통신구를 짚었다.

“이번에는 제가 원 님한테 물을 차례예요.”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요.]

“제 질문에 대답하면 저도 대답해 드릴게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군.]

늑대의 빈정거림이야 이제 자체적으로 흐리게 듣는 게 가능했다.

질문할 기회를 얻은 나는 망설이며 입을 여닫았다.

원은 페트리온 감옥에서의 마주침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상한 방향으로.


‘약속했거든, 잡아먹기로.’

정확히는 그가 찾던 존재를 찾았다고 주장한 이후부터.

‘잡아먹으라고 귀찮게 굴 때는 언제고.’

‘이젠 필요 없으니 꺼지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질 않나.

뜬금없이 학생회 입회 신청을 하지를 않나.

큰 태도 변화는 없지만, 조금 전처럼 내 안위를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를 않나.

누가 봐도 이상한 태도임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작 내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가상공간에서 본 어린 원의 모습이 순간순간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있긴 있는데.’

원과 나 사이에.

“호옥시.”

최대한 말을 늘인 내가 통신구 속 원의 눈치를 살폈다.

“만에 하나.”

[…….]

“그럴 일은 정말 없겠지만.”

[인내심 시험은 아니겠죠.]

모르겠다. 그냥 눈을 감아 버린 나는 강수를 던졌다.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을까요?”

묻는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자, 통신구 속 원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 모인 미간이 그의


어려운 심경을 대변했다.

원의 입술이 열린 건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회장.]

“네?”

[안면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도리도리.

[어디 바위 같은 곳에 크게 머리를 부딪힌 적이 있다든가.]

도리도리.

[그럼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도리도리.

[…….]

“…….”

우리 사이로 형용 못 할 정적이 지나갔다.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바보입니까?]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뜬금없이 욕을 먹은 나는 양손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그러든 말든 원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움찔거리는 입꼬리. 사실상 무표정에 가깝지만, 추측이 맞으면 이건 분명 토라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분노인지 실망인지, 그도 아니라면 서운함-1%의 확률-인지. 숨을 크게 삼킨 원이 나지막이 말했다.

[직접 생각해 내세요.]

삑.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구 속 원의 모습이 사라지며 반투명한 구슬로 변했다.

입을 벌린 나는 일방적으로 끊어진 통신구를 멍하니 쳐다봤다.

‘저 늑대 지금…….’

삐진 거야?

시험 기간이 도래했다.

책을 여러 권씩 허리에 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썩어 갈 즈음.

나는 무료 추가 강의를 위해 실습장 중앙에 자리 잡았다.

제시간보다 한참 지나서야 미적미적 걸어오던 리리 교수님이 움찔 멈췄다.

두두두두, 조금 전까지 느리게 걷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빨리 달려온 그가 내 앞에 섰다.

“그, 어. 네 이름이 뭐였더라?”

“벤디 레피요.”

“그래, 벤디 레피야. 기습 교수 평가 뭐 이런 거 하는 중이니? 아니면 강의 불시 점검이라든가.”

“네? 갑자기요?”
“그게 아니면 저 호화로운 분들은 왜 여기 계시는 건데.”

리리 교수님의 공손한 손이 실습장 한편에 자리를 깔고 누운 레넌과 노란 짐승을 향했다.

이쯤이면 나도 궁금했다.

하나 사면 하나 더 주는 미끼용 상품같이 나를 따라다니는 저들의 의도가.

“마법 연습에 도움을 받으려고 불렀어? 지금 리리 교수님 눈앞이 아찔하니까 빨리 설명해 봐.”

“아뇨, 그냥 레넌은…….”

그런 거창한 의도가 있을 리가.

더 할 말이 없어진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엎드려서 가십지를 읽던 레넌이 대신 대답했다.

“예쁨 담당.”

“그렇다네요. 그리고 노랑이는…….”

말 못 하는 노랑이를 대신하여 이번에도 레넌이 대답했다.

“노란색 담당.”

“그렇답니다.”

둘의 존재 이유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정색한 나는 리리 교수님을 돌아봤다.

“당장 쫓아낼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실전 마법에서 예쁨 담당과 노란색 담당은 필수 요소니까.”

듣도 보도 못한 필수 요소였다.

딱, 리리 교수님이 엄지와 검지를 마주치자 레넌와 노란 짐승의 위에 넓은 판이 나타났다.


어째 따가운 햇볕을 막아 주는 차단막 같기도 하고.

가슴에 손을 얹은 그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늘 영혼 없던 회색 눈은 생기로 반짝였고, 행동 또한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빠릿빠릿했다.

반대로 눈동자에 영혼이 빠진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리리 교수님 그거구나, 간사한 판다주의자. 아니, 기회주의자.

#<76 화>

이윽고 실습 강의 시간에 한번 부숴 먹은 과녁이 또다시 나타났다.

두 번 부수면 그때는 정말 혼날 것 같은데.

긴장한 나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막대 과자를 꺼내 들었다.

준비와 동시에 리리 교수님의 진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학생회장아.”

“네.”

“그 지팡이 계속 사용하려고?”

“……안 되나요?”

이만큼 손에 착 감기는 게 없는데.


“괜찮네, 싸우다가 기력 떨어지면 먹어도 되고. 무기를 먹는 마법사는 네가 대륙 최초일 거야.”

무기력하고 진심 없는 칭찬이 돌아왔다.

어쨌든 써도 된다는 말이겠지.

리리 교수님은 사고가 열린 건지, 귀찮아서 대충 말로 때우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팡이를 사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한결 안심한 내가 자세를 잡자, 과녁에 널브러지듯 기대어 선 리리 교수님이 입을 뗐다.

“시작 전에 한번 짚고 가자. 네 결점이 뭘까.”

“음……. 몸에 근육이 별로 없어요.”

“또.”

“안나의 말에 의하면 힘이 너무 약하대요.”

대답할수록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또.”

“마법을 사용하면 반동으로 날아가요.”

“또…… 아니, 됐다. 슬프게 만들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그 처진 눈꼬리 좀 바로 하고.”

이미 내 마음은 슬퍼졌어.

“너처럼 거대한 마력을 타고난 애들은요, 초반에는 위력 조절을 못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

미간을 꾹꾹 누른 리리 교수님은 과녁 중앙을 가리켰다.

“그거부터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 돼. 마법을 쓸 때마다 이것저것 부수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음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덩달아 의욕 없이 끄덕여 준 리리 교수님이 부언했다.

“자, 우리는 당분간 이 과녁이 부수어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마법을 소환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위력이 작은 마법이요?”

“그래,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얼마만큼의 마력을 운용해야 할지도 감이 오는 법이니까.”

리리 교수님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이긴 처음. 막대 과자를 그러쥔 내가 의욕을 불태웠다.

“열심히 할게요.”

“벤…… 아, 이름 까먹었다. 학생회장아, 그럼 이 과녁의 이름부터 정해 봅시다. 이왕이면 이기고 싶은


사람의 이름으로.”

“그건 왜요?”

“옛날에 리리 교수님이 해 봤는데 효과가 괜찮거든. 큰 거 한 방으로 끝내면 아쉬우니까 자잘하게 여러 방


팬다는 생각으로 마법을 소환하는 거지.”

육식 수인다운 야만적인 방법이지만 이 또한 그럴싸했다.

이기고 싶은 사람이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곧장 머릿속에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백금발에 붉은 눈동자.

노랑이를 나 몰라라 하는 위인이자 교복 타이 도둑.

마주치기만 하면 왠지 긴장되고, 나와 혼담이 오간 사자 수인일지도 모르는 위인이.

사실상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헤일린 이스단의 동태부터 주시해야 하는데…….

아카데미를 샅샅이 살펴도 찾을 수가 있어야지. 잔디밭에 엎드려 네잎클로버를 찾는 편이 더 쉬울


지경이었다.
학생들에게 봤냐고 물어도 다들 휙휙 빠르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전의를 불태우며 이를 까득 물자, 리리 교수님이 넌지시 물어 왔다.

“과녁 이름은 정했어?”

“네.”

“이기고 싶은 사람?”

“그보다는 혼내 주고 싶은 사람으로.”

“혼내 주고 싶은 게 누군데? 시원하게 말해 봐.”

“헤일린 이스단이요.”

동시에 리리 교수님의 입이 과장하면 바닥에 닿을 만큼 떡 벌어졌다.

휙, 번개처럼 고개를 돌린 그는 레넌과 노란 짐승의 눈치를 살폈다.

레넌은 까르르 뒤로 넘어가고 있었고, 노란 짐승은 픽픽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저기, 학생회장아.”

턱이 빠져라 벌렸던 입을 닫은 리리 교수님이 내 머리를 살짝 짚었다. 회색 눈동자에는 측은함이 서려


있었다.

“네.”

“꼭 마법 배워야겠어?”

“……왜요?”

“배워 봤자 오래 살진 못할 것 같은데. 네 야망이 너무 크다.”

이 막말 판다가 진짜.

육식 수인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왜 이런 걸까. 정말이지 연구 대상이었다.


집무 책상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밀란느 학장이 찻잔을 내려 뒀다. 그녀의 등 뒤로 작은 기척이 일었기에.

“어서 오게.”

창문으로 등장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밀란느 학장이 그대로 굳었다.

몇 번이나 호출한 헤일린 이스단이 드디어 왔긴 한데.

‘대체 왜 새끼 사자 모습인 게야.’

밀란느 학장은 짐짓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S 클래스의 몇몇은 원래도 뱅뱅 돌아 있던 녀석들인데.

벤디 레피가 나타난 이후, 그 사슴을 구심점으로 더 신나게 돌아 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멀뚱멀뚱 기다리는 노란 짐승을 마주한 학장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그 꼴로 얘기할 텐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비친 노란 짐승이 곧 빛에 휩싸였다. 탁, 노을을 등진 금발 남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할 말은.”

사람으로 변한 헤일린은 창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접객용 좌석으로 걸어갈 일말의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얼굴 주름을 부르르 떨던 학장은 복식 호흡을 했다. 저 인성에 학장실까지 와 준 게 어디인가 싶었다.

“가문의 연락을 계속 받지 않는다고 들었다, 헤일린 학도.”

“댁도 알잖아, 새끼 사자 행세하느라 바쁜 거.”

“오늘도 말본새가 남다르구나. 최소한 학장님이라고는 하라고 했거늘.”

“학장.”
“…….”

“님.”

인내하라, 인내하라. 밀란느 학장은 분노로 뒤집히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통제했다.

‘그래, 아주 바쁘셨겠지.’

학장도 모르지 않았다.

노랑이 행세를 하며 학생회장의 배낭에 딱 붙어 다니는 헤일린 이스단의 행적을.

학생회장을 제외한 아카데미 내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무튼 가문의 연락을 받도록.”

“대충 둘러대 줘, 어차피 연회 참석 같은 겉치레나 요구할 텐데.”

“그보다는 중한 일이다. 혼담이 오가는 건 알고 있나?”

“누구 혼담?”

“외동인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만사 귀찮아 보이는 헤일린의 무료한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얼굴로 욕하는 그를 살핀 밀란느 학장이 궐련을 입에 물었다.

‘역시 아예 모르고 있었군.’

혼담 소식과 더불어 혼담 상대까지 알고 있는 그녀가 고심에 잠겼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담이 오가는 곳이 사슴 영역의 레피 가문임을 알게 된 건 벤디의 행적을 조사하다가 얻은 정보.

이스단 가문 쪽에서 나온 정보가 아니었다.


‘희한하구나.’

알아본바, 사자 영역에 비하면 사슴 영역의 규모는 작은 섬 정도에 불과했다.

난다 긴다 하는 이스단 가문에서, 그런 작은 영역의 귀족가와. 그것도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이.

자세한 건 몰라도 모종의 무언가가 있는 혼담이 분명했다.

후. 부연 연기를 뱉어 낸 밀란느 학장은 얼마 전, 사랑의 묘약 사건 당시를 상기했다.

겨우 묘약에서 깨어난 벤디가 학장실을 나선 후.

‘헤일린 이스단한테 말하지 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레넌이 먼저 말문을 뗐다.

‘뭘 말이냐?’

‘혼담 상대가 학생회장인 거.’

‘왜?’

‘그냥.’

보나 마나 재미있을 것 같아서겠지, 저 맥락 없는 놈의 속을 어찌 알까.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던 밀란느 학장은 설마 하는 마음에 홱 레넌을 돌아봤다.

어차피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인 일이건만. 굳이 알리지 말라는 걸 보면 저놈 혹시…….

‘레넌.’

‘왜?’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뭐가?’
‘당장 아니라고 대답하거라.’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레넌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말아 올렸다.

‘…….’

‘……?’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정적이 학장실을 채웠다.

와.

진심 가득한 탄식을 육성으로 뱉어 버린 밀란느가 이마를 턱 짚었다.

‘속에 다 늙은 구렁이가 들어찬 줄 알았더니, 네놈도 제 나이다울 때가 있구나. 호위라고 붙여 놨더니


사랑놀이를 다 하고!’

‘그런 거창한 감정은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뭔데!’

‘죽으면 좀 아쉬울 것 같은 정도?’

‘이놈아, 그건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느낄 수 있는 감정…… 이지만 네놈은 아니겠군.’

레넌은 흥미롭지 않으면 가다가 땅이 꺼져도 꺼진 길을 그냥 지나가는 성정이었다.

어쩐지.

뭘 하든 삼 일이면 질린다고 집어치우던 놈이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 했다. 심지어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일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설마하니 이성적인 감정까지 느꼈을 줄은.

당시를 회상한 밀란느 학장은 제 앞에 있는 헤일린을 응시했다.

레넌과 헤일린, 그리고 원까지.


벤디의 주변으로 우연히 모인 게 아니었다.

하필 초식 수인의 주변에, 하필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세 사람이 모인 게 어떻게 우연일 수 있겠나.

강할수록 본성 또한 짙은 육식 수인들이 자연스레 피식자 주변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허허, 내 참…….’

다리를 꼰 학장이 허한 웃음을 흘렸다.

벤디가 입학할 당시 육식 수인들의 식욕에만 치중한 나머지, 성애를 느낄 가능성을 놓치고 말았다.

한창인 나이에, 본능에 의한 끌림이 이성적인 감정으로 발전하는 게 무리도 아니지.

다만 그 사이에 피식자와 포식자의 간격이 존재하는 게 문제였다.

학장의 물색 눈동자가 창밖을 내다보는 헤일린의 옆모습에 닿았다. 습기 어린 바람이 백금발을


흐트러뜨리며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성정과는 별개로 등 뒤에 걸린 노을이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자유롭고, 도덕 없이 살아온 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장 날것에 가까운 존재였다.

진실을 알릴지, 말지.

깍지 낀 손에 턱을 묻은 밀란느 학장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헤일린 학도.”

창밖을 향해 있던 헤일린의 고개가 느릿하게 학장을 향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지.”

“…….”

“이쯤 기다렸으면 노인 공경 오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세로구나, 이런 싹수없는 녀석.


미간을 움찔거린 밀란느 학장은 화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아무튼 혼담에는 아예 생각이 없는 겐가?”

“있을 리가.”

어떠한 감흥도 섞이지 않은 헤일린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이스단 가문에는 내가 대신 연통을 넣어 두겠네.”

결국 밀란느 학장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굳이 나서서 개입할 필요까지야.

싹수없는 녀석에게 알려 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궐련을 입에 문 그녀는 처음 학장실에 들어서던 벤디를 떠올렸다.

거대한 근육 사슴의 뒤에 숨어 있던, 밀색 머리카락의 사슴 수인.

“…….”

그 아이에게선 학생들 특유의 풋풋함이 물씬 느껴지는데, 왜 주변에 엮여 드는 것들은 풋풋함이라곤 씨가


마른 건지.

표정을 굳힌 밀란느 학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약한 사슴의 주변에 아무래도 풍랑이 불어올 모양이었다.

#<77 화>

깜박, 깜박.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붉은 하늘이 보였다.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이 확 들었다.

왜 실습장 한복판에 누워 있는 걸까.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리리 교수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학생회장?”

“……?”

“강의 도중에 탈진했어.”

“제가요?”

“어떻게 된 게 마력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 연습을 하지? 적당히 스스로 조절해야지, 무서운 학생일세.”

가진 마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직 모르다 보니 그만. 머쓱하게 뺨을 긁은 내가 두리번거렸다.

“레넌과 노랑이는요?”

“연습을 구경하다가 학장실로 갔잖냐. 기억 안 나?”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정신이 덜 깼네. 아무튼 기숙사로 돌아가서 조금 쉬면 돼. 마력 소진은 시간이 약이니까.”

바삭.

분홍색 막대 과자가 리리 교수님의 입으로 사라졌다.

내 지팡이. 아련한 눈으로 응시하는 와중, 리리 교수님이 대뜸 말했다.

“이런 비실비실한 육식 수인은 또 오랜만이네. 예전에 다른 아카데미에서 근무할 때 본 양 수인이 꼭


이랬지.”

철렁. 순간 가슴 언저리가 서늘해졌다.

“……양 수인이라니, 교수님이 계시던 곳은 육식 수인의 영역 아니에요?”


“당연한 말씀을.”

“그런데 왜…….”

“연금술을 배우고 싶었던 모양인데, 서대륙에서 연금술을 다루는 곳은 그 아카데미가 유일했거든.”

막대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삼킨 리리 교수님은 회상하듯 허공을 올려 봤다.

“얼마 못 가서 금방 아카데미를 그만뒀지만.”

내내 영혼 없던 그의 회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왜요?”

“…….”

잠깐 말이 없어진 리리 교수님은 곧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죄다 육식 수인으로 이뤄진 아카데미에서 누가 양 수인을 환영하겠어, 제풀에 지쳐 나갔지 뭐. 자,


일어납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리 교수님이 나를 훅 끌어 일으켜 줬다.

내 처지랑 별반 다를 게 없는 양 수인의 이야기에, 심정이 조금 복잡해진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세상에, 이 이야기가 슬프세요?”

그게 풀 죽은 모습처럼 보였는지, 리리 교수님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안 그렇게 생겨서 공감 능력이 대륙을 뚫네. 오늘은 해산, 딴 길로 새지 말고 기숙사로 바로 가고.”

교수라서 그런가, 판다라서 그런가.

확실히 덜 무섭게 느껴지는 리리 교수님과 헤어진 나는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타박타박, 바닥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누가 양 수인을 환영하겠어.’


리리 교수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별거 아닌 작은 일화일 뿐인데, 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지.

‘제풀에 지쳐 나갔지 뭐.’

새삼 내가 이 아카데미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밀란느 학장님의 염려대로 육식 수인들이 초식 수인을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까.

혐오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미 서로 다른 존재처럼 갈라진 지가 언젠데.

당장 나만 해도 육식 수인들을 매일매일 보는데도 그때마다 새로운 지경이었다.

‘그럼 사슴 수인인 게 드러난다면 나도…….’

자연스레 꺼림칙한 걸 보는 듯한 안나와 신시아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클래스메이트들과 하다못해


야닉까지도.

욱신. 갑자기 조이는 심장 부근을 문지른 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처지인가. 다른 데에 신경 쓰기에도 벅찼다.

얼른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쏴아아-

나뭇잎을 실은 바람이 텅 빈 교정을 지나쳤다.

저녁이 내리기 직전인 붉은 교정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이상하네, 지금 시간에 이 정도로 교정에 사람이 없진 않은데.

‘아, 시험 기간이었지.’

아무래도 모두 기숙사나 도서관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유독 공허하게 느껴지는 교정을 응시하던 내가 다시 기숙사로 발을 옮겼다.

‘얼른 가서 남은 책이나 보자.’

자박자박,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교정에 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멈춘 나는 다시 뒤를 확인했다. 여전히 교정은 텅 빈 상태였다.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일정 속도로 옮기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예전부터 이런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에.

‘그냥 기숙사까지…….’

달리자. 그런 마음으로 발을 떼는 동시에 화악,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갓길로 끌려들어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쿵, 입이 막힌 채 몸이 딱딱한 나무에 밀쳐졌다.

우웁. 버둥거리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면에는 얼굴을 검은 후드로 감춘 괴한이 있었다.

‘설마.’

레펠튼에서 검은 후드를 쓰고 나와 안나를 습격한 인물들.

즉 나를 학생회장으로 만들어 준 존재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검은 후드를 쓴 자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장갑 낀 손에서 반짝이는 건 단검이었다.

‘제발, 제발.’

이미 마법을 소환하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이전 수업에서 마력을 소진한 탓에 손에서는 바람 빠지는


느낌만 일었다.

찔린다.
가까워지는 은색 검날을 마주한 내가 질끈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찔리고 남을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노리던 어깨 부근을 만져 봐도
고통은커녕 상처조차 없었다.

“흐…….”

심지어 왜 검을 휘두르던 자가 겁에 질린 소리를 내는 건지.

당황스러움에 실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헤일린 이스단.’

긴장한 몸에 힘이 풀리는 동시에 뚝, 뚝, 붉은 피가 시야를 채웠다.

내게 겨누어진 단검을 움켜쥔 헤일린의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심한 적안으로 나와 괴한을 번갈아 본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심해야지.”

“…….”

“잠깐 눈만 떼면 저승길 갈 생각부터 하네.”

내가 언제. 억울함에 항변하고 싶었으나 얼어붙은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챙강, 단검을 떨어뜨린 괴한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 상처 입히려 한 게 아니라, 그저 학생회장에게 겁만 주려고…….”

“안 돼, 얘는 겁만 줘도 심정지가 오거든.”

맞는 말이었다.

“히, 히익!”
곧장 도망치려는 괴한의 뒷덜미를 잡아챈 헤일린이 쾅,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손가락만 움찔움찔
떨리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기절한 듯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바라만 보던 나는 아차 정신을 차리며 교목에 등을 붙였다. 헤일린의
살벌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는 상태였기에.

“뭔데 이건.”

무서워.

“아, 아마 내 권한을 노리는…….”

“권한?”

아리송하게 되묻던 그가 아,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미동 없는 괴한을 곁눈질한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요즘은 조용하기도 했고, 학생회 인원도 어느 정도 모여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포기는 했겠지.”

“그럼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헤일린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괴한을 훑었다.

“티끌만 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벌레의 몸부림?”

일말의 자비도 실리지 않은 답변이 돌아왔다.

해야 할 일이 남은 나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직 떨리는 중인 손으로 검은 후드를 들추자,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통통한 남자가 드러났다.

한눈에 정체를 알아본 내가 낮게 읊조렸다.

“……E 클래스의 빈 글레어.”


덩달아 몸을 낮춰 숙여 앉은 헤일린이 물었다.

“아는 자?”

“얼굴만.”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학적부에 있는 이름과 초상화를 모두 외웠으니까.

이제 이 사실을 안나에게 전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회장, 레펠튼에서처럼 권한을 노리는 자가 나타나면 최소한 이름만이라도 알아 오세요.’

‘어떻게 하려고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안나는 뚜두둑, 뚜두둑, 경쾌하게 손 마디마디를 풀 뿐이었다. 표정은 이미 괴력


곰돌이 그 자체였다.

더 이상 빈 글레어의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아진 나는 다시 후드를 끌어 내렸다.

휴. 조금 지친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쳤다.

‘아.’

그러고 보니 헤일린 이스단의 손.

번득 떠올린 내가 곧바로 그의 손을 돌아봤다. 단검에 베인 상처가 얼핏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어디 봐,”

당황하며 상처를 살피려는 와중,

‘앞으로 허락 없이 만지지 마.’

레펠튼 숲에서 들은 경고 아닌 경고가 머리를 스쳤다.

아 참. 나는 헤일린을 향해 뻗던 손을 뚝 멈췄다. 허공에서 멈춘 손을 내려다본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왜 멈추는데?”

“뭐를?”

“손.”

거두어들인 손을 쳐다보는 눈빛이 어딘지 아니꼬웠다.

“네가 만지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슥, 이내 다친 손을 내 쪽으로 내민 헤일린은 책 읽는 어조로 고통을 토로했다.

“아파.”

“…….”

“손이 찢어질 것 같아.”

이미 찢어졌거든.

뻔뻔한 태도 덕분에 두려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이없음만이 들어찼다.

#<78 화>

게다가 헤일린의 표정은 환자치고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불신 어린 눈빛을 보낸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살피기 시작했다.

움찔, 내 손이 닿자마자 살짝 경련한 그의 손이 제자리를 지켰다.


‘으…….’

아프겠다.

겨우 살피게 된 손은 베인 자국이 선명했다.

흘린 피해 비해 몹시 태연해서 반신반의했는데,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상처였다.

“아무래도 바로 의무동에 가야겠어.”

환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르륵,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그의 손이 빠져나갔다.

헤일린은 다친 손으로 제 목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잘 뻗은 목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

이해 못 할 행동을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을 즈음, 제 목을 짚은 그가 말했다.

“여기도 다쳤어.”

손이 아니라 머리를 다쳤나?

꽤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나는 헤일린의 목을 응시했다.

고개를 살짝 꺾고 있는 탓에 매끈한 목선이 드러났다. 마치 목을 만져 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들어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쉬운 표정을 지은 그가 고개를 바로 했다.

“기회를 줬는데 왜 안 만지지?”

“……뭐?”

의도를 파악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헤일린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꽤 좋아하잖아, 내 얼굴이랑 몸.”

“…….”

“아닌가?”

네 얼굴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음껏 만지는 건 아주 별개의 일이 아닐까.

위험해, 이 진상.

가까운 거리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내가 사사삭, 나무 뒤로 돌아 몸을 숨겼다.

“또 순간 이동하지 말고.”

긴 다리를 휘적거린 그가 나무 뒤로 돌아왔다.

사사삭, 나는 다시 반대편으로 신속히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다리를 휘젓는 나와 달리 헤일린은 몇 번만 다리를 움직여도 금세 거리가 좁혀졌다.

교목 하나를 중간에 두고 빙글빙글 돌기를 한참. 이래서는 끝이 없겠다 싶었던 내가 단호히 말했다.

“따라오지 마.”

“따라가고 싶으면?”

그럼 따라와야겠지.

너무 자연스러운 되물음에 하마터면 납득할 뻔한 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자꾸 따라오면.”

“…….”

“예쁜 얼굴이 안 예뻐 보이는 수가 있어.”

졸졸 따라오던 그의 발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이 진짜 통한다고?’

헤일린의 사고를 이해하기를 포기한 나는 이 틈을 타 잽싸게 멀어졌다.

만나면 혼담에 대해 떠볼 생각이었는데, 떠보긴 무슨.

저 사자를 상대로는 혼담의 혼을 꺼내기도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빠르게 말한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달리며 흘끔 뒤돌아보자, 제자리를 지키고 선 그가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오지


않는 걸 보아 안 예뻐 보이긴 싫은 모양이었다.

똑, 똑.

그의 손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에 은근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내가 발을 우뚝 멈췄다.

‘……진짜.’

후. 깊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교복 타이를 풀며 그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페트리온에서 이 사자가 가져가서 다시 구매한 교복 타이인데.

눈물을 삼킨 내가 그의 손에 교복 타이를 가져갔다. 타이로 상처를 두르는 손끝이 옅게 떨렸다.

“잊지 말고 의무동 꼭 가고.”

꼼꼼히 타이를 묶는 양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느릿하게 읊조렸다.

“더 만져 줘.”

제발 맥락 좀.
결국 나는 꽈악, 온 힘을 다해 교복 타이를 조이고 말았다. 사자의 짧은 비명이 교정에 울려 퍼졌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

벤디의 숙부, 웬스턴의 수족은 난감한 상황에 당면했다.

주기적으로 모니에게 도착하는 벤디의 편지를 확인하러 온 현재.

그는 모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농장에 발도 못 들이는 중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농장 입구에 버티고 선 마탑 장로, 스카론은 품에서 증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마탑의 인장이 찍힌 매매


증서였다.

“설명한 대로요. 오늘부로 이 농장은 마탑의 관리하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허가받지 않은 이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소.”

그러니까 농장주조차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인 작은 농장을 왜 마탑이 사들였단 말인가.

심지어 초식 영역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마탑에서.

“귀족의 소유지가 아닌 한, 마탑의 권한은 어느 영역이든 자유로이 넘나드는 걸 알고 있겠지.”

반발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스카론 장로의 안광이 번득였다.

“또한 농장은 원래 주인이 그대로 관리하기로 한바, 관리자 및 그의 가족은 마탑의 보호 아래에 둘
예정이오.”

“…….”

“따라서 위해를 가하는 즉시 마탑의 의지에 반하는 뜻으로 간주하겠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가 찬 수족이 이마를 짚었다.

사자 가문에서 제시한 3 개월의 기한이 다 되어 가서 조급한 와중에, 마탑까지 나타나서 방해하는 실정.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를 흘끔거린 모니는 살그머니 스카론의 옷자락을 당겼다.

“할아버지.”

작은 꼬마를 내려 본 스카론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지?”

“할아버지는 육식 수인이죠?”

“그래, 늑대 수인이란다.”

“늑대! 엄청 멋지다!”

“무섭진 않니?”

“전혀요!”

감탄하며 주위를 빙빙 돈 모니는 이내 그를 향해 손짓했다.

“늑대 할아버지, 빨리, 빨리.”

귓속말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스카론은 기꺼이 몸을 숙여 줬다.

수족의 눈치를 살핀 모니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벤디가 보내서 온 거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벤디의 부하겠네요?”

“…….”

어린아이의 착각에 스카론은 당혹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정확히는 원의 출생부터 그를 보좌해 온 직속 수족인데…….


뜸 들인 그는 요즘 낯설기만 한 원의 행태를 떠올렸다.

일단 집요할 정도로 사슴 영역에 대해 파헤치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문제는 아카데미에서 원을 보좌하는 교직원의 보고에 따르면, 학생회에 들어가고자 했다는 것.

게다가 지원한 자리가 일개 학생회 임원인 사실도 모자라, 그마저도 벤디에게 거절당해 입회 희망자 2
호에서 그쳤다.

지금은 입회 희망자 2 호로서 성실히 학생회실의 청결 관리 및 손님 안내를 도맡고 있다는데.

‘고귀한 차기 마탑주가…….’

그 대목에서 스카론은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벤디와 관련 있어 보이는 모니의 신변 보호는 물론, 이 사소한 일에 직속 수족인 스카론까지


붙이는 실정이었다.

‘벤디 레피에 대한 원 님의 감정은 아마도…….’

늑대는 한번 마음에 담은 대상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지가 있는 수인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본성이 강할수록 뚜렷이 나타나는 습성.

아무리 어릴 때 목숨을 구한 인연이라 해도, 원은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소녀를 찾아다녔으니.

그런 그가 소녀에게 가진 감정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추측할 필요조차 없었다.

“할아버지?”

“흠…….”

고심에 잠긴 스카론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여태껏 원은 수많은 혼담을 걷어차는 걸 넘어, 이성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 님, 오늘에야말로 혼인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사라지고 싶으면 계속 얘기해 봐.’

장로들의 우려 섞인 조언은 원의 손짓 한 번에 강제로 수그러들었다.

이번 생에 혼인은 글렀다고 포기한 시점에, 벤디가 나타난 건 오히려 천운일지도.

이쯤 되면 종족이 다르든, 초식 수인이든 뭐든 원이 혼인에 관심이라도 가지면 다행인 셈이었다.

어쨌든 원에게 벤디 레피의 존재가 무거워진 이상, 앞으로 벤디 또한 스카론이 모실 대상임은 자명했다.

결론에 다다른 그가 모니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 벤디 님을 모시는 사람이란다.”

“역시.”

눈을 반짝인 모니는 스카론의 손에 작은 배지를 쥐여 줬다. 페트리온 모험대 일원만이 얻을 수 있는


배지였다.

“이게 뭐지?”

“벤디의 부하는 곧 내 부하니까요. 부하를 상징하는 배지예요.”

“…….”

심정이 복잡해진 스카론은 손바닥 위의 배지를 바라봤다.

그사이 위풍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간 모니는 웬스턴의 수족을 향해 배를 쭉 내밀었다.

“여기서 썩 나가, 6 소대 행동대장에게 혼쭐나고 싶지 않으면!”

더더욱 심정이 복잡해진 스카론이 배지를 꾹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지위는 6 소대 행동대장인
모양이었다.

5 소대 행동대장 헤일린 이스단.


6 소대 행동대장 스카론 장로.

의도치 않게 페트리온 모험대의 규모가 커져 가고 있었다.

곧장 레피 저택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알린 웬스턴의 수족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마탑에서 간섭해 오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흠…….”

크게 난동 피울 거란 수족의 예상과 달리 웬스턴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걸 보거라.”

그는 수족을 향해 얄팍한 전서 한 장을 내밀었다.

“혼담이 오간 사자 가문에서 삼 개월의 말미를 더 주겠다는 연통이 왔다.”

“예?”

“보아하니 그들도 혼담 대상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모양이더군.”

“그게 무슨…… 이상합니다. 연락이 닿지 않는 건 고사하고, 그들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이런 긴 시간을


준다는 말입니까.”

혼담에 적극적인 듯하면서도 소극적인 반응이라니.

그들로서는 도저히 정체 모를 사자 가문의 의도를 예측할 수 없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마음에 서성거리던 수족이 돌연 멈춰 섰다.

웬스턴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지나치게 잔잔했다. 이미 분노를 토하는 단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의도야 뭐가 됐든 다행이지, 시간을 더 얻었으니.”

“가주님…….”
웬스턴의 손에 있는 궐련이 홀로 타들어 갔다.

“호들갑 떨지 마라, 벤디 레피만 찾으면 모두 해결될 의문이지 않나.”

“…….”

“어쩌면 마탑이 나타난 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벤디 레피가 마탑과 관련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벤디와 같은 밀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마탑이 있는 늑대 영역부터 추적을 좁혀 간다.”

#<79 화>

시험 기간이 지나가자, 학생회실에는 따뜻함을 넘어 약간의 더위가 내려앉았다.

입학 때 지급받은 하복을 개시한 나는 교복 타이를 매만졌다.

하복은 흰 셔츠에 베이지색 치마와 타이를 매는 가벼운 형식이었다.

불안하게 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웬 머저리가 회장을 습격했다는 거죠?”

이 시대의 고자질쟁이로 변모한 내가 미주알고주알 고했다.

“네, E 클래스의 빈 글레어, 너구리 일족의 하급 귀족이에요.”

“쯧, 벌써 한 학기가 끝나 가는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안나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책상이 두 동강 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기에, 한결 안심한 내가 물었다.

“징계위원회를 열까요?”

“아뇨,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숨어 있는 다른 무리를 자극할 필요는 없어요.”

안나는 녹색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빈 글레어는 제가 개인 대 개인으로 처리하죠.”

빈 글레어 입장에서는 차라리 징계위원회가 낫지 않을까.

그러나 굳이 감싸 줄 필요를 못 느낀 나는 팔짱을 꼈다.

“막상 해 보니까 학생회장의 권한이랄 것도 없이 업무만 한가득인데,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예요?”

“회장, 학생회 공금 횡령할 생각 있어요?”

횡령이라니. 난데없는 질문을 받은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알잖아요, 저 담 작은 거.”

“그럼 고위 관료들이랑 친분을 다질 계획은?”

도리도리.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 고위 관료들이라고 해 봤자 전부 육식 수인이겠지.

“학장님을 따라 대륙 여기저기의 위원회에 참석할 의향은?”

도리도리.

위와 비슷한 이유로 사양이었다.

“회장은 그럼 야망이 뭐죠?”


“당장은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안전히 졸업하는 거요.”

“역시. 그냥 딴생각 말고, 학생회장 업무에만 열중해서 학적부 가점에 이바지합시다.”

“좋은 결론이네요.”

이로써 안건이 끝이 났다.

다만 용무가 하나 더 남은 나는 집무 책상 위, 배낭을 가리켰다.

“저는 그럼 의무동 좀 다녀와 볼게요.”

“의무동은 왜요? 설마 다쳤어요?”

“아뇨, 제가 아니라 노랑이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아픈 건 아닌 듯한데…… 약간 이상해요.”

“네?”

당황한 기색을 비친 안나가 빠르게 내 집무 책상으로 다가왔다.

중지로 안경을 추켜세운 그녀는 배낭 속에 얌전히 자리한 노란 짐승을 살폈다.

“……멀쩡한데요?”

“아니에요, 이걸 봐요.”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나는 조심스럽게 노란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움찔할 뿐, 결에 따라 털을 여러 번 쓰다듬어도 평소처럼 앞발로 쳐 내거나 하악질 따위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봤어요?”

또르르,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턱 끝에 매달렸다.

“요즘 제 손길을 쳐 내지 않아요.”


“…….”

“아픈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요.”

“아, 음.”

안나 또한 놀랐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한 채 지그시 턱을 짚었다.

“훌륭한 수사자…… 로 거듭나기 위한 아기 사자의 발돋움?”

“철이 들었다는 건가요?”

“뭐……. 비슷한 의미죠.”

그때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야닉이 노란 짐승의 정수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럴 리가, 이 자식 분명 속셈이아악!”

그대로 손가락을 물린 그가 꽥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도 야닉을 용서치 않은 노란 짐승이 그의 긴 장발을


물고 늘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살짝 막았다.

‘저 성질머리에 설마…….’

내 손길만 허락하는 걸까.

‘친근감이라도 생겼나?’

그런 결론에 다다르니 왠지 가슴 언저리가 몽글몽글해졌다.

하긴, 그래도 우리가 붙어 지낸 시간이 얼만데.

노란 짐승을 만진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서적을 읽으며 들어선 신시아가 출석 도장을 찍었다.

뒤이어 원과 레넌까지 차례로 도착했다.


원은 하복을 깔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고, 레넌은 셔츠 위에 헐렁한 베스트를 대강 걸친 모습이었다.

머리 색깔도 그렇고, 옷차림까지 극명히 대조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작은 공통점을 찾아냈다.

움직일 때마다 두드러지는 팔 근육이었다.

착한 생각.

마음의 평정을 다스리는 동시에 레넌의 물색 눈동자가 불쑥 가까워졌다.

“방금 다 봤어.”

“……뭐를?”

“호위를 훑는 주인의 불순한 눈길.”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며 담담히 부정했다.

“모함이야.”

“더 볼래?”

“응.”

본심이 나와 버린 내가 돌처럼 굳었다.

레넌은 하찮은 유도 신문에 넘어간 나를 조롱하듯 무해하게 웃었다.

진짜 얄미운 호랑이. 몰래 씨근거리던 나는 마침 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일순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서렸다.

딸꾹.

‘아직도 저기압이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는걸.


차마 시선도 못 마주치는 와중, 약간 후덥지근하던 학생회실 공기가 갑자기 시원해졌다.

‘……냉각 마법?’

시원한 공기의 근원지는 학생회실 입구였다.

마법 지팡이로 냉각 마법을 흩뿌린 메이지 로튼이 문 뒤에서 살며시 나타났다. 이 날씨에도 검은 로브를
두른 모습이었다.

“학생회장, 아카데미 대항전에 마법부 대표로 참가하신다고 들었어요.”

“아, 그건,”

“저희 마개동 부원들이 말하길…… 소심한 부원들에게 가해지는 출전 압박을 대신하기 위해 참가하신다고
…….”

메이지는 감격한 표정으로 훌쩍,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아니, 그거 아니야.’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그렇게 와전되는 건지.

“아카데미 대항전?”

“마법부 대표라고?”

미처 변명하기도 전에 안나와 야닉의 다소 격한 반응이 이어졌다.

“회장, 그런 얘기 한 적 없지 않나요?”

시험 기간이라 만나지를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입을 달싹이는 순간 이번에는 치지직, 통신구가 울리기 시작했다. 교내에 있는 누군가가 통신을 걸어 온


모양이었다.

앗.

“…….”
원과의 통신 이후로 사용해 보긴 처음. 손을 뻗지 못한 채 망설이자, 안나의 타박이 날아와 꽂혔다.

“뭘 수줍어하고 있어요? 얼른 받아요.”

살며시 통신구에 마력을 주입하자,

[거기는 여전히 시끌벅적하구먼.]

구슬 속에 밀란느 학장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학장님, 웬일이세요?”

학장실로 호출하려고 부르신 걸까.

가벼운 시작에 비해 학장님에게서는 좀처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

답지 않게 뜸 들인 그녀가 입가 주변을 쓸었다.

[자네가 아카데미 대항전의 마법부 대표로 나간다고 들었네.]

“네, 맞아요.”

[알다시피 아카데미 대항전은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큰 행사지.]

새삼 긴장한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대항전에서 우리 수인 아카데미는 늘 성적이 부진했네.]

수인 아카데미의 성적이 부진했다고?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무심코 원을 바라보자, 그는 홱 고개를 틀었다. 여전히 속이 비뚤어진 원은


곧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곱 아카데미 중 삼등 정도.”


‘일곱 중에 삼등?’

보통 그런 등수를 부진하다고까지 표현하진 않을 텐데.

의문스러운 눈으로 통신구를 마주하기 무섭게 학장님이 단호히 말했다.

[일등이 아니지 않나.]

그러시구나.

[단 한 번도 일등을 차지한 적이 없네.]

그런데 어떻게 레넌 같은 실력자가 있는데 일등을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나도 모르게 레넌을 쳐다보자마자 소파에 늘어진 그가 대답했다.

“귀찮아, 그런 거.”

마법부인 원도 그렇고, 검술부도 본진이 출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깨닫는 동시에 학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다시피 나는 우리 아카데미가 일등이 아니면 속병이 도지는지라, 내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


연락했네.]

“제안이요?”

[이번 대항전에서 일등을 차지하면, 올해만 하계 연회 개최를 허가하마. 이는 다른 학생들도 알 수


있도록 공고문을 게시할 예정이다. 이게 첫 번째 조건이야.]

올해‘만’ 개최한다는 건 지금까지 없었다는 말인데.

“원래는 하계 방학 당일에 늘 연회가 열렸었는데, 삼 년 전부터 없어졌죠.”

설명한 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하이에나와 악어 수인들이 시비가 붙어서요. 단체로 치고받은 탓에 학장님께서 연회를 아예 없애
버리셨으니까.”

크흠, 큼. 얌전히 있던 야닉이 대뜸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 중심에는 어떤 훌륭한 바보가 있었고요.”

“누가 훌륭한 바보야!”

훌륭한 바보의 정체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은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육식 수인들이 한가득인 연회는 오히려 없는 편이


심신에 좋았다.

[둘째로는 대항전 참가자들이 원하는 걸 하나씩 들어주지.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첫째와 달리 두 번째는 귀가 조금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계 방학 기간인 삼 주 동안 기숙사에 콕 박혀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내 눈이 이채를 발하는 걸 본 밀란느 학장님이 입을 뗐다.

[눈에 생기가 도는 걸 보아 내게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네.”

[뭐지?]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말을 잇던 나는 흘끔, 학생회실을 살폈다. 은근한 호기심이 담긴 눈길이 죄다 나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조금. 혹시라도, 만에 하나 일등을 하게 되면 그때 부탁드릴게요.”

말을 얼버무리자 이제는 은근도 아닌, 짙은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사슴 하나에 꽂힌 수많은 맹수들의 시선이라. 창고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무튼 잘해 주었으면 하네.]

“제대로 준비할게요.”

[허허, 무리하지는 말게. 뭐, 꼭 과정이 좋을 필요까지는 없고…… 일등이면 충분하지.]

“…….”

[세상은 일등만 기억하는 법이니까.]

아무리 들어도 아카데미의 학장님이 말할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삑, 통신구 속 학장님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이미 사라졌다.

시험 기간이 끝나니 바로 학생회 업무에, 그도 모자라 행사까지.

숨 돌릴 틈이 없다고 생각한 내가 의자에 몸을 살짝 늘어뜨렸다.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하계 방학…….’

정말 대항전에서 일등을 한다면, 하계 방학 동안 다녀오고 싶은 장소가 한 곳 있었다.

사자 영역, 시세온. 그리고 그곳에 있을 이스단 가문.

내가 레피 가문에서 도망쳐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다.

생각에 잠긴 나는 학생회실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80 화>

학기 말에 있을 아카데미 대항전 대표 선발이 있는 날.

수인 아카데미에는 총 네 개의 전공이 존재한다.


마법부, 검술부, 종합부, 체술부.

마법부와 검술부는 말 그대로 마법과 검을 다루는 이들.

종합부는 검이나 다른 무기, 그리고 마법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이들.

체술부는 마력으로 몸을 강화시켜 육탄전에 임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에 검술부에서는 누가 나가려나?”

“글쎄, 작년에는 야닉 펠이 나갔잖아. 올해도 마찬가지지 않겠어?”

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각자의 전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야닉이 단상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열 번째 도전, 그리고 열 번째 내동댕이였다.

“학생회장이랑, 대항전 대표로…… 나갈 자는 바로 이 야닉…….”

부들부들. 목검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그가 풀썩, 결국 바닥으로 무너졌다. 드디어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단상 위에 선 레넌은 목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부스러지기 직전인 야닉에 비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또 올라올 사람?”

청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검술부 학생들에게 있어선 마귀와도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매해 관심도 없던 괴물이 올해는 왜 저러는 건데.

대항전 대표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찍소리도 못 낸 학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걸 어떻게 이겨.
분명히 얄팍한 목검을 휘두르는데, 어째서 대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또 다른 지원자는 나오지 않았다.

도전 의욕을 상실한 학생들을 둘러본 레넌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대항전 검술부 대표는 레넌 에던트로 결정.”

“…….”

“와, 감사합니다.”

검술부 총괄 교수, 자칼리 교수는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왜 교수가 해야 할 대사를 제가 하고, 대답까지 스스로 하는지.

그러나 굳이 말을 얹지 않은 자칼리 교수가 선정 결과를 보고서에 기록했다. 오랜 교수 생활 경험상,


저렇게 습관적으로 웃는 놈은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검술부 대표가 저 레넌 에던트라니. 대항전에서 검술부의 성과가 가장 우수하리란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올해는 고개 좀 빳빳이 세우고 다닐 수 있겠군.’

이게 웬 떡이냐. 자칼리 교수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일편, 단상에서 내려온 레넌은 밀란느 학장과 벤디의 대화를 떠올렸다.

‘의욕이 생기는 걸 보아 내게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네.’

‘뭐지?’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조금.’


레넌은 벤디의 말이 끝나는 순간 늑대와 사자의 안광이 번쩍 빛나는 장면을 포착했다. 물불 안 가리고
따라갈 심산임이 분명했다.

대항전 우승 시, 밀란느 학장에게 학생회장을 따라가게 해 달라는 요구 사항을 디밀겠지.

그런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빠질 순 없었다.

거기다가 학생회장과의 즐거운 일상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다음 학기부터는 아카데미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치워.”

“음?”

“이 야닉 펠의 존귀한 얼굴에서 발 치우라고, 고양이 새끼야!”

이상하게 바닥이 울퉁불퉁하더라니. 야닉의 얼굴을 밟아 버린 레넌이 발을 들었다.

“예쁘게 발자국 찍어 준 건데.”

결과적으로, 대항전 관련 검술부 보고서에는 아래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검술부 대표 – S 클래스, 레넌 에던트]

종합부 학생들이 모인 연무장에는 정적이 머물렀다.

정적의 원인은 당황, 황당, 놀라움, 슬픔도 아닌…… 아득한 공포였다.

바로 단상 위에 오도카니 앉은 새끼 사자 때문에.

기다림에 지친 노란 짐승은 하암, 하품하며 귀를 탈탈 긁었다.

종합부 총괄 교수, 밀리엄 교수는 파리한 낯빛인 학생들을 안쓰럽게 살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음, 헤일린 학생 외에 다른 지원자는 없는 걸까요?”


벤디의 클래스메이트, 라일라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있겠냐고.’

틀림없이 단상에 발을 걸치려는 순간 그대로 안면이 함몰될걸.

저 노란 괴물을 상대로 승부욕을 불태울 무모한 자는 종합부에 없었다.

흘끔, 그래도 도전이라도 해 보렴.

흘끔, 의무동에 실려 갈 일 있어요?

눈길을 주는 밀리엄 교수와 시선을 피하는 학생들의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하하, 우리 귀여운 학생들이 왜 이리 냉정히 내 눈을 외면할까…….”

“…….”

“……흠, 그럼 다른 지원자가 없는 관계로, 종합부 대표는 헤일린 이스단 학생으로 기입하겠어요.”

헛기침을 한 밀리엄 교수가 보고서에 헤일린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아카데미 대항전이 뭔지도 모를 확률이 높은 헤일린이 왜 자진해서 나서는 건지.

‘하지만…….’

이게 웬 노다지람. 밀리엄 교수의 콧구멍이 연신 벌렁거렸다.

종합부 대표가 헤일린 이스단이라니. 올해 종합부가 가장 월등한 성과를 거둘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헤일린 학생.”

새끼 사자의 높이에 맞춰 몸을 잔뜩 굽힌 밀리엄 교수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여기 이름 옆에 서명 꾹, 한번 부탁해요.”

꾹.
보고서에 사자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종합부 대표 – S 클래스, 헤일린 이스단]

“음……?”

체술부 총괄 교수, 루디악 교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보게, 전공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대체 왜 원 리오나드가 체술부에 와 있는 걸까.

루디악 교수가 학생들에게 눈짓으로 물었지만, 그들이라고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앞으로 나선 원은 얄팍한 서류 한 장으로 그들의 의문을 한 번에 해소했다.

“복수 전공 신청서입니다.”

“체, 체술부에? 그런 보고는 들은 적이 없는,”

서류를 확인한 루디악 교수가 눈을 크게 떴다. 이미 부학장의 승인을 거친 서류였다.

“더불어 대항전 대표에도 지원하겠습니다.”

“잠깐. 체술은 몸에 마력을 모아 육탄전을 벌여야 하네. 대표로 나가게 되면 마법 사용은 불가,”

루디악 교수는 은은히 빛나고 있는 원의 손을 확인했다.

“……불가하지만 원 리오나드 학생에게는 딱히 문제 되지 않겠군.”

체술의 기초만 안다면, 원은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웬만한 실력자는 거뜬히 넘길 수준이 아닐까.

“다른 대항전 지원자, 있나?”

루디악 교수의 질문에 단상 아래에 있던 안나가 이를 악물었다.

제가 대표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원이 끼어들 줄은.


‘그래도 마법을 못 쓰는 상태이니, 저 정도면 도전해 볼 만하지 않나……?’

결심한 안나가 단상으로 발을 떼려는 찰나, 뒤에 있던 신시아가 지그시 어깨를 눌렀다.

“목숨은 하나.”

그랬지.

도전정신으로 불타던 안나의 머릿속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최근 묘할 정도로 학생회장을 따라다니는 원이 대표 자리를 빼앗길 리가 없었다. 단상에 오르는 즉시 아주


정성스럽게 다져지겠지.

“말려 줘서 고마워요, 신시아.”

“보답은 곰 영역의 고서적으로.”

“……가문에 부탁해 보죠.”

이성을 되찾은 안나는 발을 다시 땅에 붙였다.

“아무도 없나?”

지원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자, 정색한 루디악 교수가 꾸짖듯 말했다.

“체술부 학생들의 정신이 이리도 나약할 줄은 몰랐소. 정말이지 아쉽기 짝이 없군!”

엄한 꾸중과 달리 루디악 교수의 마음속은 풍악을 울리는 중이었다.

비록 원거리 마법 사용이 불가할지언정, 원은 어디 가서 패배할 이가 아니었다.

이게 웬 횡재냐. 그것도 체술부 복수전공이라니.

아무래도 올해부터 체술부의 순항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이로써 종합부에 이어, 체술부 대표도 결정이 끝났다.

[체술부 대표 – S 클래스, 원 리오나드]


마법부 총괄 교수, 생텀 교수는 오랜만에 전 인원이 모인 마법부를 둘러봤다.

자율성이 존재하는 학문인 탓에, 통일성 있는 다른 부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제각각이었다.

대항전에 관심은 있지만 참여 의사는 없는 자.

여기까지 와서 관심은커녕 마도구에 열의를 쏟는 자.

끼리끼리 모여 주문을 외우는 자.

그냥 제 할 일 하기 바쁜 자.

오늘도 통합은 글렀다고 생각한 생텀 교수는 제 옆에 선 벤디를 가리켰다.

“그럼 대항전 마법부 대표는 학생회장, 벤디 레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의 있는 학생은 손을 들고 말해


주십시오.”

당연히 장내는 조용했다.

마법부 대표가 벤디로 완전히 결정되는 찰나, 학생들 사이에서 불쑥 손이 올라왔다.

손의 주인을 확인한 생텀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A 클래스의 메이지 로튼이었다.

“메이지 학생? 자네에게 대항전 참여 의사가 있었던가?”

강의조차 밥 먹듯이 빠지는 인물이 왜.

“아니요, 이의가 아니라.”

이목이 집중된 게 부끄러운 듯, 메이지는 파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학생회장이 대표로 나서 주셨는데, 박수라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아.”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 생텀 교수가 뒷짐을 졌다. 박수를 왜 보내나 싶었지만, 딱히 안 보낼 이유도
없었다.
“그럼 마법부 대표로 나서 준 학생회장을 위하여, 박수.”

짝, 짝. 별 반응 없이 앉아 있던 학생들이 마지못해 손을 마주쳤다.

짝짝짝.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린 메이지가 열성적으로 물개박수를 보냈다.

무심코 옆을 확인한 생텀 교수는 허한 숨을 내쉬었다.

너는 또 뭘 쑥스러워하고 있는 건데.

벤디는 새침한 표정을 유지하곤 있다지만 뺨은 발갛게 변한 상태였다.

생텀 교수의 못 미더운 눈길이 벤디의 정수리에 꽂혔다. 대항전 단상에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기권 패 할까
걱정되는 체격이었다.

‘리리 교수가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올해도 걱정이로다, 걱정이야.

[마법부 대표 – X 클래스, 벤디 레피]

이렇게 각 전공 대표가 결정된 채, 대항전 날짜는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81 화>

추가 강의를 끝마친 리리 교수는 실습장 바닥에 주저앉은 벤디에게 푸른 상자를 건넸다.

“학생회장아, 이거.”

강의 때문에 진이 다 빠진 벤디가 흐물흐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뭔데요?”
“네가 마법부 교수님들한테 부탁한 거.”

“아……!”

반색한 벤디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품에 안았다.

리울 약초. 마법부 대표가 되는 조건으로 교수들에게 받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다른 교수님들께도,”

“감사 인사는 대항전 성과로 보이시고요. 오늘 수고했어, 리리 교수님은 이만 간다.”

손을 휘휘 저은 리리 교수가 털레털레 멀어졌다.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벤디는 문득 옆쪽에서 지긋한 시선을 느꼈다.

레넌과 노란 짐승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품 안의 상자에 닿아 있었다.

관심 꺼, 이 육식 동물들아.

그런 의미로 슬그머니 등 뒤로 숨기자, 눈동자에 서린 호기심이 더더욱 짙어졌다.

휙, 노란 짐승은 돌연 리리 교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왜…… 쫓아오십니까?”

두두두.

“혹시 제가 노랑 님의 심기를 거슬렀을까요?”

두두두두.

“일단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무작정 사죄하며 도망치는 리리 교수와 노란 짐승이 석양을 따라 멀어졌다.

저 추격전이 벌어지게 된 경위가 뭘까.


더 이상 수인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기를 포기한 벤디가 몸을 틀었다. 한시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리울 약초를 확인하고픈 마음이었다.

자박자박, 저벅저벅.

자박자박. 저벅저벅.

두 개의 발소리가 엇박자로 겹쳐졌다.

확인하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이 레넌임을 아는 벤디가 조금 느리게 걸었다.

주홍색 눈동자가 석양이 내린 빈 교정을 담았다.

‘이상하네.’

저번에 빈 글레어의 습격이 있었을 때와 똑같이, 석양 내린 인적 없는 교정이었다.

그런데 레넌이 뒤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느낌이 다를 일인가.

그렇게나 두려워했고, 현재까지도 무서운 백호가 등 뒤에 있는 거나 매한가지인데. 마음 한편은 안심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벤디의 뒤편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상자에 있는 게 뭔지 물어도 안 알려 줄 거지?”

“물론,”

“물론?”

“안 돼.”

벤디는 경계하며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초식 수인들에게나 약효가 있는 리울 약초를 필요로 했단 걸 알릴


필요까지야.

“회장은 비밀이 참 많아.”


우뚝. 앞장서던 벤디의 발걸음이 멎었다.

“…….”

반쯤 몸을 튼 벤디가 뒤를 돌아봤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따라가던 레넌은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큰 이유가 있어서 멈춘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경험상, 여기서 몇 걸음 더 접근하면 벤디는 뒤로 이동하니까. 물러나지 않을,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지야.”

“뭐?”

“레넌 너도 마찬가지라고.”

비밀이 많은 건.

굳이 덧붙이지 않은 벤디가 눈을 내리깔았다.

레넌은 어떻게 보면 수인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자였다. 그리고 가장 많이


자신을 도와준 존재.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 나는 회장이 있어야 하거든.’

‘그 능구렁이 학장이 며칠 호위했답시고 조기 졸업을 시켜 줄 리는 없어서.’

초반에야 밀란느 학장과 조기 졸업을 조건으로 호위를 맡았기에 돕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글쎄.

레넌이 자신을 도울 때마다 학장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원 없이 드러냈다.

그때 알 수 있었다, 그저 호위로 붙인 게 아님을. 아마 감시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넌은 늘 의중을 알 수 없는 웃음과 함께 스스럼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슴 수인의 모습으로 원에게 쫓기던 당시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 그때의 일에 대해 일체의 추궁도, 언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벤디는 그의 의도는 물론 그냥 레넌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백호 수인, 에던트 가문의 직계, 그리고 머릿속이 온전치 않다는 것 외에는.

시선을 들어 레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벤디가 침묵을 깼다.

“조기 졸업, 왜 하고 싶은 건지 물어도 돼?”

레넌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웃음이 자리 잡았다. 때때로 위화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위험한 미소였다.

한 걸음, 두 걸음. 두 사람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도착한 레넌이 벤디의 주홍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유를 알려 주면 회장이 여기서 더 도망갈 것 같은데.”

“…….”

“어차피 다음 학기면 이곳에 없을 수도 있으니, 모르는 편이 낫지 않나?”

내내 잔잔하던 벤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바로 졸업하는 거야? 그렇게나 빨리?”

“학장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심정이 복잡해진 벤디는 크게 뜬 눈을 도르르 굴렸다.

레넌이 있었기에 권한을 노리는 무리도 접근하지 못했고, 이제야 둘만 남아도 대화가 가능할 만큼
경계하지 않게 되었는데.

더군다나 사슴 수인인 제 모습을 목격하고도 태도가 변하지 않은 존재였다.


다음 학기에는 그런 레넌이 없다고.

고민에 잠긴 벤디를 내려 보던 레넌이 주홍색 머리카락 끝으로 뺨을 간질였다.

“아쉬워 보이네?”

이내 벤디는 뒤로 물러나며 레넌과 거리를 벌렸다. 스르륵, 그의 손가락 사이로 주홍색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거뭇한 하늘이 드리워졌다. 굳게 닫혀 있던 벤디의 붉은 입술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간.”

툭, 레넌의 손 위에 웬 종이봉투를 올린 벤디가 기숙사로 몸을 돌렸다.

조그마한 뒷모습이 기숙사 안으로 슉 사라졌다.

레넌은 의문의 종이봉투로 시선을 내렸다. 군고구마였다.

그놈의 군고구마.

벤디가 친근감의 표시로 건네는 소중한 식량이란 사실을 아는 그가 실소를 흘렸다.

‘아.’

큰일인데.

이제 와서 아카데미를 떠나는 게 아쉬워질 줄은.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잠옷 차림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품에는 리울 약초가 든 상자를 안은 상태였다.

‘이걸 열어 말아.’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리리 교수님과 한 달 가까이 실전 마법을 연습한 결과, 현재 가진 마력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해졌다.


그런 와중 마침 딱 좋은 시기에 내 마력과 관련이 있는 리울 약초가 손에 들어왔다.

대항전도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리울 약초를 통해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얻게 되면 그만한 이득이 없었다.

또 약초를 통해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때처럼 각혈을 하게 되면?’

의무동에 가서 상자를 열어야 하나.

그러나 의관에게 이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식 수인에게 통하는 약초의 약효 때문이라고 하면, 나 사슴 수인이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상자를 열지 못하게끔 손을 옭아맸다. 달칵, 달칵, 불안한 손끝이 상자 고정 장치를
배회했다.

각혈 후 깨어난 당시, 몸이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일인데.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침대에 확 걸터앉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 미뤄 봤자 심신의 나약함만 길어질 뿐이었다.

달칵.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스멀스멀 피어오른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으.

고약한 냄새를 가만히 맡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울컥 토기가 치밀었다.

이쯤 되니 구린내 때문인지 마력 때문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우욱, 헛구역질한 내가 입을 가로막았다. 잔잔하던 몸속 마력이 울렁울렁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덮쳐 왔다.


‘웬스턴이 우리 벤디에게 세작을 붙인 게 사실이야?’

‘벤디의 시동 중 한 명이 수상한 행적을 보여서 조사 중이긴 한데, 네 살짜리 어린아이다 보니 자백해도


효력을 얻기는 어렵겠지.’

‘이젠 어린아이까지 감시로 써먹는군, 그 개자식!’

‘아리엘, 옆에서 벤디가 자고 있으니 목소리를 좀…….’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소곤소곤 욕을 하라 이거지, 소곤소곤.’

격양된 어머니의 음성과 차분한 아버지의 음성이 번갈아 들려왔다.

비속어와 함께 알아듣기 힘든 속닥거림이 들려오기를 한참.

‘벤디에게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생길 때까지는 웬스턴의 시선을 피할 눈가림이 필요해.’

이윽고 낮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

‘벤디의 마력을 봉인해야겠어.’

그를 끝으로 나는 또다시 의식을 완전히 놓고 말았다.

아카데미 교정에 캄캄한 어둠이 내린 시각.

굳게 잠긴 창문 잠금장치가 찰칵, 마법에 의해 저절로 열렸다.

창문이 열리는 동시에 커튼이 펄럭였다.

검은 인영이 소리 없이 벤디의 기숙사 방에 착지했다. 사람으로 돌아온 헤일린이었다.

그는 몇 시간 전, 리리 교수와의 추격전 끝에 얻은 정보를 상기했다.


‘상자 안에 든 게 뭔지 말해. 허튼 소리 하면 각오하고.’

‘헤일린 학생, 저는 그렇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니, 그런 무서운 얼굴 말아 줘요. 리리 교수님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랍니다.’

‘…….’

‘뭐였더라, 무슨 설산에서 얻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리…….’

‘리울 약초.’

‘역시 헤일린 학생, 첫 글자만으로도 정답을 맞히는 저 통찰력!’

어쩐지 푸른 상자를 보자마자 예감이 안 좋더라니.

각혈까지 한 주제에, 또다시 그 약초를 찾은 학생회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던 헤일린은 멈칫했다. 잠들었다기에는 내부가 고요해도


지나치게 고요했다.

#<82 화>

작은 불을 소환한 헤일린은 벽에 비치된 램프로 손을 가져갔다. 화악, 램프에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방


안이 밝아졌다.

“…….”

시야에 들어온 건 바닥에 떨어진 푸른 상자, 작은 손에 꽉 틀어쥔 리울 약초. 그리고…… 발치에 쓰러져
있는 벤디였다.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비껴가지를 않았다.

무릎을 굽혀 앉은 헤일린이 벤디를 살폈다. 또 각혈을 했는지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더군다나 바닥에는 밀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진 상태.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 있어야 할 송곳니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슴 수인으로 변한 모습.

다시 봐도 낯선 외양이었다.

벤디가 어떻게 여우 수인과 사슴 수인을 오가는지 모르는 헤일린이 입술을 쓸었다.

‘밤이 되면 사슴으로 변하는 건가.’

낮에는 늘 여우 모습이었으니까. 막연히 짐작한 그가 벤디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벤디의 뺨이 닿은 제 목을 비롯하여, 살갗이 닿은 부위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이었다.

벤디를 침대에 내려 둔 헤일린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금방 죽을 것처럼 생겨서는.

안 그래도 초식 수인에게 면역이 없는데, 절대 해쳐선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접근하기가 껄끄러웠다.

창백한 벤디의 얼굴에서 옮겨진 그의 눈길이 리울 약초를 틀어쥔 손에 머물렀다.

또 저 약초.

리울 약초만 관련되면 저런 꼴이 되는데, 그걸 알면서도 약초를 가까이한 학생회장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초식 수인에게 약효가 있다 하니, 몸에 좋으면 좋았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데.

답 없는 추론을 이어 가던 그가 짜증스레 머리를 털었다.


‘의무동에 데려갈 수도 없고.’

하필 사슴 수인 모습이라 아카데미 의관에게 보일 수도 없는 노릇.

학생회장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기숙사에 틀어박혀 약초를 복용했을 확률이 높았다.

헤일린은 주머니를 뒤적여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약초 채약 중에 각혈한 사건을 미루어, 혹시 몰라


챙겨 온 안정제였다.

책상 위의 물병을 챙긴 그가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벤디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밀색 머리카락은 땀에 축축이 젖어 들었고,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순간순간 숨소리가 커졌다.

왜일까.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거슬렀다. 제 몸에 대한 단서이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내려다보던 헤일린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벤디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약초, 봉인, 마력.

그는 잠꼬대에 가까운 작은 중얼거림을 곱씹었다.

‘봉인?’

그러고 보니 설산에 다녀온 이후부터 학생회장의 마력 운용이 한결 자연스러워진 느낌이기도 하고.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려는 와중, 옅은 신음성이 헤일린의 사념을 깨뜨렸다.

“흐…….”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한 벤디가 손발을 바르르 떨었다.

‘약초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한데.’


벤디가 손에 틀어쥔 약초를 떼어 내려고 했으나, 지난번처럼 사력을 다해 놓지 않는 상태였다.

억지로라도 손을 벌려 보려던 헤일린은 이내 포기했다. 힘 조절에 실패해 저 얇은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벤디의 숨이 쌕쌕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쯧. 위험하겠다 싶었던 헤일린이 벤디의 입술을 벌려 안정제를 밀어 넣었다. 뒤이어 물을 흘려 넣었으나,


입안에 고인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삼키질 못하네.’

콜록, 콜록. 벤디가 잔기침과 함께 숨을 헐떡였다.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물병에 남은 물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물기 어린 입술에 헤일린의 시선이 닿았다. 단순한 구조 행위에 불과할 뿐인데, 답지 않게 망설임이


일었다.

이내 그대로 몸을 숙인 그가 벤디의 목덜미를 받쳐 올리며 입술을 겹쳤다.

꼴깍, 물과 함께 약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내리뜬 눈으로 삼킨 걸 확인한 헤일린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는 물기가 남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느리게 쓸어 냈다.

본능에 의한 식욕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다른 감정인지. 벤디의 붉은 입술을 씹어 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탁하게 가라앉았던 적안이 이내 제 색깔을 찾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벤디의 거친 숨소리가 일정 속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불덩이 같던 이마도 원래


온도로 돌아왔다.

툭, 힘이 풀린 벤디의 손에서 약초가 떨어졌다.

푸릇푸릇한 약초는 전달받던 마력이 끊어지자마자 금세 말라비틀어졌다.


“…….”

벤디 특유의 향이 좁은 공간 곳곳에 배어 있었다.

더 이상 있다간 정말로 본능에 잠식될 것 같아, 기숙사를 나서려던 헤일린이 움찔했다. 약초 대신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든 벤디 때문에.

“엄마…….”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게 아닐까. 헤일린은 벤디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가지 마. 울먹임 속에 삼켜진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떨치고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도 짜증 나지만…….

헤일린의 시선이 제 몸에 엉겨 붙는 벤디의 손에 머물렀다.

뭐가 됐든 이 사슴의 취미는 고문이 분명했다.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반짝 눈을 뜬 나는 곧장 이불을 들추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도 따라오는 고통이 없었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몸이 개운했다.

뒤이어 눈을 감고 몸속을 점검하자, 한층 충만해진 마력이 느껴졌다.

‘성공…… 인가?’

의구심에서 벗어나 희열을 느끼던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냥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약초 상자를 열자마자 들려왔던 부모님의 목소리.

가만히 기억을 되짚자, 정신을 읽기 직전에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벤디에게 어느 정도 인지 능력이 생길 때까지는 웬스턴의 시선을 피할 눈가림이 필요해.’


‘벤디의 마력을 봉인해야겠어.’

역시 예상이 맞았다.

어릴 적 내가 방대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다, 숙부를 의식한 부모님이 마력을 봉인한 게.

‘숙부 때문에…….’

이미 아버지가 가주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포기를 못 한 채 레피 가문을 맴돌며 이런저런 수작질을 부린 모양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모님이 죽은 이후부터 투명 인간처럼 지내 온 나날이 떠올랐다.

구속구 때문에 달아나지도 못한 채, 그저 숨만 쉬고 살아온 나날이.

‘더는…….’

휘둘리지 않아.

더 이상 그자의 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더욱 힘이 필요했다.

손을 쥐었다 펴던 나는 뒤늦게 활짝 열린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이 왜?’

깜짝 놀라며 두리번거리는 순간 침대에 웅크린 노란 짐승이 시야에 들어왔다.

‘얘가 왜 여기 있어?’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입을 뻐끔거리던 나는 다시 열린 창문을 확인했다.

‘……어제 창문을 안 잠근 건가?’

그럴 리가, 늘 잘 잠그는데.
그러나 확신하자니 어젯밤의 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당장 어디에서 쓰러졌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니까.

아리송하게 뺨을 긁은 내가 노란 짐승을 내려 봤다.

밤중에 침입해 놓고 태연히 베개 위에서 숙면 중인 꼴이라니.

도롱도롱 자는 노란 짐승을 흘기고 있자, 어깨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력 봉인이니 숙부니 머리가 복잡했는데.

나른히 늘어진 새끼 짐승을 보자 그런 것들이 전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부스럭, 엎드려 누운 나는 턱을 괸 채 노란 짐승을 빤히 관찰했다.

‘조금 자랐나?’

몸통이 처음 봤을 때보단 약간 커진 듯하기도 하고.

갸르릉.

꿈이라도 꾸는지, 뭉텅이 같은 앞발로 눈을 비빌 때마다 털이 부스스하게 섰다.

‘나 참.’

사슴 인생에 육식 동물의 새끼가 귀여워 보이는 날도 오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까만 코에 입술을 붙이기 직전에 노란 짐승의 눈이 반짝 뜨였다. 이미 가까워진 입술이 코끝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미안. 깼어?”

잠시간 시선이 오갔다.

이윽고 다급히 침대를 구른 노란 짐승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원래도 동그란 눈이 한층 똥그랗게 확장된


상태였다.

슬금슬금. 경계하듯 벽에 붙어 이동한 노란 짐승은 휙, 대뜸 창문을 뛰어넘었다.


“노랑아!”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봤으나, 여기저기 잘 짚고 내려간 노란 짐승은 교정을 다다다 질주했다.

굉장히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인데.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정도로 경악하고 도망갈 정도라고.

‘요즘은 곧잘 쓰다듬게 해 주더니.’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입술은 안 되는 걸까.

도통 노란 짐승의 선을 알 수 없는, 약간의 충격이 동반된 아침이었다.

아카데미 대항전 3 일 전.

작년 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패자, 기리온 아카데미에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원 리오나드가 대항전에 참가한다고?”

학생회장이자 마법부 대표, 칸 팰드로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차기 마탑주가 마법부 대표라니,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나?”

“아니, 마법부 대표로 출전하는 게 아니라고 하네.”

소식을 가져온 부학생회장은 팔짱을 끼며 문에 등을 기대었다.

“뭐? 그럼?”

“체술부 대표로 출전한다는데?”

차기 마탑주쯤 되는 인물이 주력인 마법도 아닌 체술부 대표라니.

잠깐 얼이 빠졌던 칸 팰드로가 쾅, 책상을 내리쳤다. 장대한 주먹 힘을 견디지 못한 책상이 빠지직


소리를 냈다.
“헛소리!”

부학생회장의 마뜩잖은 시선이 망가진 책상에 닿았다.

“책상 부수는 데에 근육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시끄럽다! 그보다 그 고지식한 늑대가 마법을 팽개치고 체술부로 옮기면서까지 출전한다고?”

칸 팰드로는 세상 모든 것을 하등하게 보는 듯한 원의 낯짝을 떠올랐다.

“차라리 안 나오면 안 나왔지, 그럴 리가 없다. 실제로 한 번도 출전한 적이 없는데!”

“주최 측에서 나온 정보라서 틀림없어.”

“주최 측에서?”

“그래.”

“원 리오나드가…… 드디어 미쳤나?”

“난들 알아.”

뭐가 됐든 달갑지 않은 소식임은 분명했다.

평범한 마법사가 체술부 대표로 나온다고 하면 코웃음 치겠지만, 원 리오나드는 얘기가 다르니까.

마법을 못 쓰는 정도로 불리해질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야.”

성가시다는 듯 머리칼을 벅벅 긁은 부학생회장이 말을 이었다.

“검술부 대표가 레넌 에던트라는 거지.”


#<83 화>

“……그놈은 또 왜?”

“난들 알겠냐고.”

칸 팰드로의 눈앞에 재작년, 아카데미 협동 마물 토벌 당시 레넌의 모습이 그려졌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실실 웃던 낯을 상기한 칸 팰드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난 개인적으로 그놈이 좀 껄끄럽다.”

“피차 마찬가지야.”

“전 종목을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검술부는 포기하는 걸로 치고, 그럼 종합부는?”

칸 팰드로의 질문에 부학생회장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거기도 문제가 있어.”

“제길, 그래 봤자 앞에 두 명만 하겠나. 누군데 그래?”

“헤일린 이스단.”

“…….”

“못 들은 척하지 마.”

사자 일족의 나사 빠진 망나니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

칸 팰드로는 얼굴에 있는 모든 근육으로 억울한 의사를 표현했다.

원 리오나드와 레넌 에던트, 헤일린 이스단이라니.

이쯤이면 대항전 출전 대표가 아니라 대륙 멸망 조합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묻기가 조금 망설여지는 칸 팰드로가 억지로 질문을 내뱉었다.

“그럼 마법부 대표는?”

“그게 가장 이상해.”

미묘한 표정을 지은 부학생회장이 제자리를 서성였다.

“벤디 레피.”

“벤디 레피라고? 그게 누군데?”

“이번 해 학생회장이라는데…… 그 외의 정보가 아예 없어.”

주최 측에서 전하기를, 세간에 아예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사교 활동조차 일절 안 하는 탓에 베일에


꽁꽁 싸인 인물이라고.

속이 갑갑해진 칸 팰드로가 우악스레 가슴을 두드렸다.

“네놈은 대체 알아 온 게 뭐야?”

부학생회장은 교복이 터질 듯 꽉 끼는 그를 훑으며 말했다.

“근육만 불리기 바쁜 어떤 놈보다는 많이 알아 왔다고 생각하는데.”

마법부 대표, 벤디 레피.

낯빛을 굳힌 부학생회장은 나직이 읊조렸다.

“배후에 있는 인물인 건 확실해.”

앞서 대륙 멸망 조합이 탄생하게 된 이면에는 마법부 대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대항전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던 그 괴물들이 사이좋게 출전할 이유가 없으니까.

한 시간 전, 부학생회장은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수인 아카데미의 야닉 펠에게 통신을 걸었다. 생각은


짧을지언정 누구보다 힘의 우위에 예민한 만큼, 그에 관해서는 객관적일 테니까.
‘학생회장은…… 수인 아카데미의 태풍 같은 존재다.’

당최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사실만큼은 유추할 수 있었다.

“야닉 펠의 말에 따르면 마력 없이 정권만으로 교목을 부러뜨린다던데.”

“……뭐가 됐든 보통 괴물이 아니라는 소리군.”

두 사람 사이로 선득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앞으로 3 일.

3 일 후면 태풍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었다.

퉁, 데구르르.

마법을 소환한 반동으로 튕겨 나온 벤디가 실습장 바닥을 굴렀다.

쪼그려 앉은 리리 교수는 익숙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고찰했다.

“바닥을 굴러야 마법 소환의 완성, 뭐 이런 건가?”

“…….”

비실비실 일어난 벤디는 말없이 리리 교수를 째려봤다.

방대한 마력을 조절하기도 벅찬데, 그 정도 마력을 견딜 완력이 있을 리가.

대나무만 먹기 바쁜 판다가 사슴의 깊은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옷을 탁탁 턴 벤디는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흥얼거리며 구경하던 리리 교수는 무심코 위를 올려 봤다가 쩍 굳었다.

그의 떨리는 회색 눈동자가 실습장과 가까운 3 층 창가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원 리오나드가 싸늘한 눈으로 실습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고귀한 차기 마탑주께서 누추한 실습장에는 무슨 일로.

리리 교수는 이쯤 되니 의구심이 들었다. 벤디와 함께하는 마법 실습 강의가 진짜로 기습 교수 평가는


아닌지.

“……저기, 학생회장아.”

“네?”

마법 소환을 멈춘 벤디가 리리 교수를 돌아봤다.

“위를 좀 봐 주라.”

자연스레 고개를 꺾은 벤디와 아래를 보고 있던 원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깜박깜박.

벤디는 당황스럽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여전히 냉전 중이라서 뭐라 말을 걸기도 애매하고.

화해의 의미로 살그머니 손을 흔들자,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원이 멈칫했다.

하마터면 인사를 나눌 뻔한 원은 의지를 반한 제 손을 아니꼽게 노려봤다.

자신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회장이 뭐가 예쁘다고.

그러면서 눈이 마주친 정도로 눈 녹듯 경계가 풀리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또 실수할까 싶었던 그는 쌩하니 자리를 떠 버렸다.

저 경우 없는 늑대.

보기 좋게 인사를 무시당한 벤디는 곧바로 연습용 과녁을 마주했다.

“리리 교수님, 지금부터 과녁의 이름은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신데.”

“원 리오나드요.”

펑, 펑. 벤디가 소환한 마법이 원 리오나드에게 명중했다.

할 말을 잃은 리리 교수는 멍하니 원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허, 신기한 일일세.’

저 정나미 없는 차기 마탑주가 그 나이 대 학생 같아 보일 때도 다 있고. 생소한 광경을 곱씹은 그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예쁨 담당이 안 보이네.”

“원래 간헐적으로 나타나요, 요즘 유난히 많이 따라다닌 거지.”

“노란색 담당도 안 보이는데?”

뚝.

거짓말같이 벤디의 마법 소환이 멈췄다. 어깨가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며칠 전, 기숙사에서 달아난 이후부터 노란 짐승의 소식이 영 뜸했다.

아픈 건 아니었다. 어제만 해도 멀쩡히 가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도망쳐 버렸으니까.

잠들기 전에 기숙사 문 앞에 빈 배낭을 놓아둬도 노란 짐승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싫어졌나?’

코에 입 좀 맞추는 게 뭐라고.

“노란색 담당은.”
침울해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벤디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가출했어요.”

대체 어디로. 리리 교수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가출 전단지라도 붙여 보는 게 어때, 돌아오라는 문구를 붙여서. 감명받아서 돌아올지도.”

“그런다고 돌아올까요……?”

그래도 붙여나 볼까. 풀 죽은 벤디가 나무에 이마를 묻었다. 서러운 뒷모습이었다.

수심에 잠긴 벤디를 외면한 리리 교수는 연습용 과녁, 아니 원 리오나드를 돌아봤다.

마력 조절에 실패하여 과녁을 부수고 날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현재는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만 닳은
상태였다.

‘오, 이건 제법…….’

노력형 천재란 이런 건가. 마법부 교수실에 있을 중장년들이 쾌거를 부를 만한 성과였다.

어쩌면 대항전에서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지도.

아카데미 대항전 하루 전의 일이었다.

아카데미 대항전 당일.

꼭두새벽부터 화려한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을 빼곡히 채웠다.

대항전 장소로 전교생이 이동해야 하는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이 야닉도! 여기! 탈 권리가 있다고!”

학생회 마차에 오르려고 난동 피우는 야닉을 뒤로한 안나, 신시아, 그리고 메이지까지 마차에 탔다.

뒤따라 마차에 오른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모두가 분주한 가운데, 나 벤디 레피는,

“하아.”

우울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고 있자니, 안나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무서워도 어쩔 수 없어요. 이제 와 마법부 대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물론 대항전 대표로 나가는 것도 긴장되고 무섭긴 하지만…….

눈썹이 내려간 나는 의자에 올려 둔 배낭을 응시했다. 갈색 배낭에 있어야 할 노란 짐승이 없었다.

그렇게 죽어라 따라다닐 때는 떼어 내기 바빴는데, 대항전 장소로 떠날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다.

부담스러운 육식 동물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가도 돌아서면 가슴 언저리가 허전했다.

그래도 우리가 지내 온 시간이 얼만데.

눈을 감으면 노란 짐승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른거렸다.

쓰다듬으려 하면 앞발로 냅다 쳐 내고, 분유를 먹이려 하니 죄다 엎어 버리고.

배낭에 비라도 맞는 날엔 성질을 부리는 데다, 조금만 수틀려도 냥냥거리며 으름장을 놓고.

‘……음.’

어째 떠올릴수록 이대로 절교하는 편이 나을 듯하기도.

‘그게 진짜 이렇게까지 피할 일이야?’

마차 벽에 뺨이 밀리도록 얼굴을 묻은 나는 입을 삐죽였다.

초식 동물들은 조금만 교감하면 뺨을 비비거나 입을 맞춰도 괜찮은데.


육식 동물은 다른가 싶은 의문마저 들었다.

‘알 수가 있어야지.’

하아. 아련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신시아.”

“조용, 중요한 구간이야.”

그래, 독서 중요하지.

“안나.”

“바빠요.”

그래, 장부 처리가 밀렸으니까.

고민 상담을 포기한 와중, 옆쪽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고대하는 메이지 로튼이었다.

“……메이지.”

“고충이 있다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얼굴을 붉힌 메이지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회장의 곁에는 언제나 이 메이지가 있으니.”

정말 고마운 말이긴 한데. 고민 상담자가 마법에 돌아 있는 마개동 부장인 게 문제였다.

망설인 나는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육식 동물은 입을 맞추는 행위에 굉장히 예민한가요?”

멈칫. 시종일관 수줍게 웃는 낯이던 메이지가 일순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한 그녀가 웃는 낯 그대로 입술만 움직였다.

“어떤 동물에게…… 입을 맞췄을까요?”

“노랑이요.”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

툭, 신시아의 손에서 서적이 떨어지고,

“이런.”

안나의 손에서 서류가 흩날리고,

“어머나…….”

메이지가 얼굴까지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젖혔다.

조용하면서도 격한 반응을 마주한 나는 손끝을 꼼질거렸다.

‘그 정도로 잘못한 거라고?’

육식 동물 사이에서는 그게 그렇게 큰 의미야?

차마 묻지도 못한 내가 덩달아 그들처럼 얼어붙었다.

복잡한 심리와는 별개로, 마차는 대항전 장소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84 화>
대항전 장소는 일곱 아카데미 학생 전원을 수용할 정도로 넓은 대회장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단상이 있고, 단상을 중심으로 관중석이 빙 둘러싼 형태였다.

여기서 각 부의 대표끼리 토너먼트 형식으로 실전 대련을 벌인다는데.

대항전이란 단어만 거창하지, 실제로는 학장 및 교수들이 허락한 합법적인 싸움판이었다.

와아아아아-

시작 전인데도 불구하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흘러나왔다.

규모만으로도 기가 눌리는 수준이라, 목을 움츠린 나는 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학생회장은 학장이나 교수들처럼 따로 좌석이 있어서, 위치를 아는 원을 뒤따라가는 중이었다.

저벅저벅,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우리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우뚝.

걸어가던 원이 예고 없이 자리에 멈춰 섰다.

“악……!”

한눈팔며 걷던 나는 쿵, 그의 등에 그대로 얼굴을 박고 말았다. 등이 아니라 벽에 돌진한 수준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코를 움켜 쥔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몸을 돌려 나를 마주한 원이 말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우측에 계단이 나올 겁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학생회장 전용석이고.”

사무적으로 말한 그가 나를 지나쳐 되돌아갔다. 특유의 향료 냄새가 여전히 얼얼한 코를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별안간 원의 발걸음이 멎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겁니까?”

그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그건…….”

여전히 원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다만 순간순간 그에게서 원인 모를 기시감을 느끼곤 했기에,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하기도 애매했다.

대답을 고르고 있는 사이 그가 곧장 내 쪽으로 직행해 왔다.

‘타이는 왜.’

뒤이어 단정히 매고 있던 타이를 풀고,

‘단추는 또 왜.’

목깃부터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점점 근육이 빈틈없이 들어찬 상체가 드러났다.

“무슨…….”

사고 회로가 정지한 나는 그냥 눈을 가려 버렸다. 굉장히 문제가 다분한 몸이었다.

이내 교복 셔츠 단추를 전부 푼 원은 짧게 헛웃음 쳤다.

“손가락 사이로 볼 거면 눈은 왜 가리는데요.”

“황송, 아니 송구합니다…….”

“이거.”

그는 돌연 제 복부를 가리켰다.

“그쪽이 치료한 겁니다.”

“……?”

눈을 가린 손을 치운 나는 원의 손가락이 가리킨 부분을 살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복부 중앙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상흔이 자리했다. 마치 검에 관통당한 듯한
모양새였다.

‘이걸 내가 치료했다고?’

그럴 리가. 이런 상처를 치료하는 게 가능했으면 벌써 의관을 하고 있겠지.

흐음……. 미간을 찌푸린 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상흔을 살폈다.

원은 다시 단추를 채우며 입을 뗐다.

“회장의 어깨에도 상흔이 하나 남아 있을 것 같은데.”

턱.

나는 반사적으로 왼쪽 어깨를 짚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원의 말대로 내 왼쪽 어깨에는 원인 모를 작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저 어릴 때 나뭇가지나 뾰족한 거에 찔렸거니 싶었는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내 송곳니 자국이니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기분이었다.

언제 옷을 풀어헤쳤냐는 듯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원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쯤이면 기억할 때도 됐지 않나.”

“…….”

“일단 올라가세요, 곧 대항전이 시작될 테니까.”

태연히 말한 원은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잠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원과 나 사이에는 무언가 있다. 분명히 무언가 있는데…….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그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혹시 원을 만난 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죽고, 숙부가 저택에 들이닥치고. 한창 정신을 반쯤 빼놓고


다니던 그때가 아닐지.

원을 떠올리려 하면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아픈 것도 그때와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제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뭉뚱그려 말한 나는 조심스럽게 원의 눈치를 살폈다.

만일 그때 만난 거라면. 어쩌면 원도 학장님처럼 내가 사슴 수인인 사실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구태여 묻지 않은 내가 꼭 붙든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움직임에 원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최대한 떠올려 보려 노력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입 밖으로 말하고 나서야 그간 원이 했던 언사들이 떠올랐다.

‘잡아먹으라고 귀찮게 굴 때는 언제고.’

그러고 보니 어깻죽지의 이 흉터도 잇자국이라고 했는데.

진짜 과거에 먹이가 되기로 약속한 건 아니겠지.

‘……아.’

뭔가 굉장히 잘못됐구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이만 가 볼게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내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서.”

원은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삐딱한 생각을 했지만 의지를 반한 내 몸은 이미 그의 앞이었다.

“올라가면 학생회장들 사이에서 알력 싸움이 오갈 겁니다.”

좀 평화로울 순 없는 걸까.

“겁 많은 회장에겐 버거울 듯한데.”

원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기억하기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에 토라진 게 조금은


풀린 모양이었다.

“도와줄까요.”

“네, 도와주세요.”

차기 마탑주가 뒷배인 만큼 든든한 일이 없지.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원은 내 입술 쪽으로 손을


가져왔다.

“올라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전부 해결될 겁니다.”

움찔.

무의식적으로 목을 움츠리자, 다가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고개를 살짝 숙여 내 반응을 살핀 그는 곧 입술 가까이에서 느릿하게 엄지를 움직였다. 마치 실제로


입술을 쓰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앞으로는.”

“……?”

“무지렁이들에게 굽히지 마세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린 그가 뒤돌아 걸어갔다.

매끄러운 미소에 잠깐 넋을 놓았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굽히지 말라는 건 또 무슨 뜻인지.

답해 줄 수 있는 원은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진 후였다.

수인이 모여 사는 서대륙 최초의 아카데미, 수인 아카데미가 아직 유일하게 갖지 못한 왕좌는 바로


대항전이었다.

작년 대항전 1 위, 기리온 아카데미.

그리고 작년 대항전 2 위, 리 아카데미.

두 아카데미는 매해 1, 2 위를 엎치락뒤치락 다퉜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학생은 대부분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인 이들로 이루어진 반면, 리 아카데미는 학자 및
기술을 다루는 학생이 다수였다.

상극 중의 상극.

따라서 두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은 만났다 하면 왈왈거리며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학생회장들이 모인 좌석이 고요했다.

한눈에 보이는 대회장을 훑은 기리온 아카데미 학생회장, 칸 팰드로는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앉을 좌석이었다.

이미 여섯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자리를 채웠는데, 대체 언제쯤 나타날 셈인지.

‘제길, 뭐 이리 늦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칸은 괜히 엉덩이를 들썩였다.

원과 레넌, 그리고 헤일린.

수인 아카데미 세 괴수의 배후에 있는 괴물의 정체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한시 빨리 확인하고 싶다가도 감출 수 없는 긴장이 발끝을 휘감았다.

그런 그의 건너편에 앉은 리 아카데미 학생회장, 헤덴 하츠가 조소했다.

“뭐 마려운 강아지 같구나. 어지간히 수인 아카데미 측이 신경 쓰이나 봐?”

태연한 척했으나, 소식을 알고 있는 헤덴 또한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왜, 아예 눈을 얼굴 옆에 달고 오지.”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파지직, 두 사람 사이로 전류가 튀었다.

이윽고 타박타박,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쭉 빼던 여섯 학생회장들은 짐짓 관심 없는 척 전방을 주시했다.

탁, 계단을 전부 올라선 벤디는 허리를 곧게 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라.

원의 말을 되뇐 벤디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내 자리가…….’

하나 남은 빈자리를 찾은 주홍색 동공이 잘게 진동했다.

오른쪽에는 저보다 몸집이 족히 네 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자리했고, 반대편에는 단아한 생김새의


남자가 다리를 꼬고 있었다.
두 육식 수인의 중간 자리.

‘사라지고 싶다.’

겨우 다가간 벤디가 얌전히 자리에 착석했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양옆에서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졌다.

“…….”

칸과 헤덴은 날카로운 눈으로 벤디를 살폈다.

손끝만 스쳐도 붉어질 듯한 흰 피부에, 체구는 한 손으로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마법사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는 하지만…… 뻣뻣하게 앉은 자세는 누가 봐도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읽기 힘든 새초롬한 표정만 빼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약골.

‘이게…….’

원 리오나드를 제치고, 마법부 대표를 차지한 수인 아카데미의 괴물?

칸과 헤덴의 머릿속에 드물게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하.

만반의 준비를 해 온 스스로가 한심해진 칸이 헛웃음 쳤다. 말 그대로 소문난 사냥터에 사냥감이 없는
꼴이었다.

“그렇게 소문 자자하더니, 별 볼 일 없군그래.”

경직된 벤디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곁눈질했다.

기리온 아카데미 학생회장, 곰 수인 칸 팰드로.

그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조금만 힘줘도 군청색 교복이 터질 듯한 근육질
몸을 갖고 있었다.
꽤나 호남이었으나 벤디의 시선에서는 진화한 괴력 곰돌이에 불과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라.

원의 목소리를 떠올린 벤디는 그저 꼿꼿이 앞만 바라봤다.

“이건 뭐 대꾸도 없고. 말도 할 줄 모르나?”

당연히 말을 섞을 용기도 없는 벤디가 꿋꿋이 전방만 보는 찰나,

“입 닫아, 칸 팰드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벤디의 입에서.

“…….”

왠지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목소리인데.

제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벤디가 뒤늦게 합,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이거.

#<85 화>

표정을 굳힌 칸이 몸을 일으키자, 벤디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파르르. 아랫입술을 떤 벤디가 곧장 사죄를 결심했으나,


“앉아.”

“뭐?”

“머리까지 근육인 거 자랑하지 말고.”

또다시 의지를 벗어난 입이 조곤조곤 떠들어 댔다.

‘왜 이래, 나.’

일순 제 입술 주변을 배회하던 원의 엄지가 벤디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올라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전부 해결될 겁니다.’

무슨 의도인가 싶었더니, 그때 언령 마법을 건 게 틀림없었다.

‘누가 들어도 말투가 그 늑대잖아.’

이제야 입술에 은은하게 맴돌고 있는 마력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무지렁이들에게 굽히지 마세요.’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한 벤디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그냥 굽히고 싶다고.

그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칸 팰드로는 이미 온몸을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인 상태였다.

‘감히 무슨 자신감으로…….’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벤디의 새침한 표정이 더욱 화를 불러일으켰다.

주먹을 떠는 그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벤디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시작 전부터 물의를 일으키고 싶은 거면.”

“…….”

“계속해.”
칸 팰드로는 학생회장석을 관심 있게 주시 중인 학장들과 관중들을 둘러봤다.

시선을 의식한 그는 씩씩 숨을 고르며 거칠게 자리에 착석했다.

“반드시 결승까지 와라, 거기에서 온몸의 뼈를 분리해 줄 테니까.”

용서해 줘, 목구멍까지 차오른 벤디의 말은 전혀 다른 대사로 뒤바뀌어 튀어나왔다.

“네가?”

“이……!”

빠각, 칸 팰드로가 쥔 의자 손잡이가 부서져 떨어졌다. 속을 뒤집어 놓는 언변이 아닐 수 없었다.

턱을 괸 헤덴은 옆에서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 놀라울 정도로 재수 없는 화법, 분명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기시감을 지우지 못한 헤덴이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감이 대단한걸.”

벤디는 미성이 들린 방향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리 아카데미 학생회장, 뱀 수인 헤덴 하츠.

그는 하얀색 단발머리와 자안을 가진 곱상한 인상이었다.

자안을 차갑게 빛낸 헤덴이 입꼬리를 휘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과도하면 오만이 되는 법이지.”

맞는 말이야. 그의 말에 동의한 벤디가 내뱉은 말은,

“네 얘기네.”

그를 단숨에 적으로 돌리는 한마디였다.


표면상 짓고 있던 미소마저 지운 헤덴은 씹어뱉듯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지 두 눈으로 지켜보겠어.”

“감히 누가 누굴 지켜봐.”

“…….”

“뱀 주제에.”

벤디는 이제 거의 해탈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곱 학생회장이 모인 장소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스르륵, 그제야 벤디의 입술을 점령하고 있던 원의 마력이 사라졌다.

따가운 눈초리의 중심.

그곳에서 벤디는 피식, 피식,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그 슬픈 실소가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학생회장들이 으득 이를 갈았다.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다 해결됐네.’

다만 공공의 적이 되었고, 육식 수인들의 찢어 죽일 시선이 쏟아질 뿐.

‘그 밉상 늑대…….’

아주 고오오맙다.

벤디는 여름 직전의 청아한 하늘을 올려 봤다. 기절하기 좋은 날씨였다.

벤디가 학생회장들을 한 치 혀로 구타하고 있을 즈음.

“저게 그 학생회장이라고?”

관중석의 여론은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너무 약해 보이지 않나?”

“마법사는 겉모습과는 상관이 없잖아.”

“그래, 대마법사 로돈도의 초상화를 생각해 봐. 그녀도 겉모습은 피골이 상접한 수준이었다고.”

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시선은 전부 한곳을 향한 상태였다. 관중석 중앙 단상 위, 학생회장석에 앉은


벤디에게.

“자세히 보니 기개가 보통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 거리에서 기개가 느껴지긴 하냐?”

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벤디의 무위 수준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심지어 벤디가 굉장히 강하다는
전제하에.

점점 과열되는 관중석 분위기를 훑은 레넌이 고개를 기울였다.

“회장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명했지?”

“글쎄, 이상하군.”

똑같이 느낀 원이 받아쳤다.

마법부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이름 정도야 알려질 순 있지만, 지금의 관심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좌석 여러 개를 침대 삼아 누워 있던 헤일린이 중얼거렸다.

“누구 하나 반쯤 죽여 놨나?”

그 막대 과자로.

전혀 신빙성 없는 추측을 외면한 원과 레넌이 휙, 반대편을 돌아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S 클래스 학생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음…… 삼 일 전부터 여러 아카데미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서요…….”


“이상한 소문?”

“예, 그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그가 목을 만지작거렸다.

“빨리 말하지.”

헤일린의 적안까지 제게 닿자, 사색이 된 학생이 재빠르게 실토했다.

“바, 발 닦개!”

“발 닦개?”

“학생회장의 발…… 발 닦개 3 인방이라고…….”

“누가?”

순수한 궁금증에 물었던 레넌은 이내 표정을 미묘하게 굳혔다.

덜덜 떨리는 학생의 눈길이 원과 레넌, 헤일린을 오가고 있었기에.

다른 설명 없이도 발 닦개 3 인방의 정체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난데없이 벤디의 발을 닦아 주는 사람이 된 원이 턱을 매만졌다.

“소문의 근원지는?”

“그, 그것까지는. 저도 어제 막 기리온 아카데미의 지인에게 들은 거라…….”

그 말에 가늘게 뜬 헤일린의 눈이 슬며시 자리를 뜨는 야닉에게 박혔다.

“거기 하이에나.”

“…….”

“너 방금 움찔했어.”
덜컥,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한 야닉은 이내 휙 뒤돌며 외쳤다.

“왜, 뭐! 사실이잖아!”

누가 봐도 제 발 저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방만한 호위!”

척, 길게 뻗은 손가락이 레넌을 가리켰다.

“입회 희망자 2 호!”

척, 뒤이어 원,

“배낭 지킴이!”

척, 마지막으로 헤일린까지 가리킨 야닉은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내 말이 틀렸냐? 어?”

세 사람은 난생처음 야닉을 상대로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호위랍시고 벤디의 주변을 팔랑팔랑 맴도는 방만한 호위.

벤디의 곁에 있으려 종일 학생회실을 청소하는 입회 희망자 2 호.

갈색 배낭에 상주하며 떨거지들에게 으르렁거리는 배낭 지킴이.

야닉의 시선에서는 결국 학생회장을 잘 따르는 발 닦개 3 인방에 불과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레넌이 얼른 말했다.

“1 호는 나야.”

현실 순응은 빠를수록 좋은 법.

원과 헤일린은 기가 찬 눈빛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1 호를 빼앗긴 게 뭐라고 기분이


더러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쓸모없는 발 닦개들의 위에는 이 비밀 요원, 야닉 펠이 있다!”

비스듬히 누운 채 턱을 괸 헤일린이 툭 말했다.

“비상용 빗자루겠지.”

“닥쳐라, 발 닦개 2 호!”

“누구 마음대로 2 호야.”

숫자 하나로 공기가 미묘하게 험악해졌다.

그런 세 사람을 비롯한 야닉에게 관중들의 시선이 모였다. 발 닦개란 모욕을 듣고도 부정을 안 함으로써
소문을 온몸으로 증명한 셈이었다.

“저 셋이 학생회장의 강요로 출전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본데?”

“허……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번 우승은 수인 아카데미에서 가져갈지도.”

“젠장, 지금까지 조용하더니 왜 저래?”

그들이 펼칠 활약에 대한 관중들의 호기심이 한층 짙어졌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괜히 허리를 세우거나 가슴을 폈다.

제가 속한 아카데미에 애정이 있든 없든, 일곱 아카데미가 벌이는 경쟁 속에서는 없던 애교심도 생기는 법.

관심의 중심이 된 만큼 우쭐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쪼록 큰 부상 없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를.”

그사이 학장들의 인사치레가 끝나고, 다음은 각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 짧은 연설 겸 포부를 밝힐


차례였다.
자연스레 학생회장들이 앉은 단상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제일 먼저인가 본데?”

“오, 일어난다, 일어난다.”

“벤…… 이름이 뭐였더라?”

벤디의 향방 하나하나에 관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괜스레 거들먹거리며 코를 쓸었다.

“큼, 지금 우리 학생회장이 뭘 하려는 거라고?”

“연설이라는데?”

은근히 콧대를 세우고 있던 그들은 별안간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연…… 설?’

‘연설이라고?’

일순 말을 잃은 학생들이 불안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학생회장의 연설이라 함은…….

같은 생각에 다다른 그들이 전방을 돌아봤을 때, 벤디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삐거덕, 삐거덕.

왼팔과 왼 다리를 함께 움직인 벤디가 확성 마도구 쪽으로 걸어갔다.

저 긴장 어린 발걸음은 분명.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벤디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으스대던 그들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의문이 인 관중들이 숙덕거렸다.

“연설에서 뭔가 할 건가 본데?”

“저길 봐, 저 밀란느 학장마저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그러네? 기선 제압 겸 마법이라도 터뜨리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럼 실격일 텐데…….”

덩달아 심각해진 관중들도 벤디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아아-”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대회장에 퍼져 나갔다.

벤디가 목을 가다듬자, 수많은 인파가 모인 관중석이 고요에 잠겼다.

도대체 뭘 선보일 셈일까.

뜨거운 관심 속, 이윽고 벤디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습니다, 사,”

“…….”

“사슴 여러분.”

아, 제발.

밀란느 학장을 비롯한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수인 아카데미를 넘어, 대회장에 자리한 모든 육식 수인을 사슴으로 만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86 화>

학생회장들이 모인 단상.

‘또…….’

어김없이 사슴 염불을 외워 버린 벤디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원의 언령이었으면 이토록 자괴감이 들지는 않을 텐데.

‘수백의 육식 수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긴장을 안 해.’

내내 이어진 학생회장들 간의 알력 싸움도 긴장에 한몫한 결과였다.

특히 비틀거리며 다른 학장들의 부축을 받던 밀란느 학장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 큰일 났구나.’

자괴감이 침통함으로 바뀌고 있을 사이, 나무 상자를 든 주최 측 직원이 학생회장석으로 올라왔다.

“경기 방식은 언제나와 같이 토너먼트로 진행됩니다. 대진표 또한 추첨으로 작성할 예정이고요.”

상자를 가볍게 흔들어 내용물을 섞은 그가 설명을 이었다.

“뽑은 구슬의 색상이 서로 같은 아카데미끼리 예선전을 펼치게 되죠. 자, 우선 차례로 구슬을 뽑아


주시면 됩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회장들 사이로 은근한 신경전이 오갔다.

누구 하나 선뜻 뽑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와중, 거구들 사이에서 손이 삐죽 올라왔다.

까치발을 들며 손을 뻗은 벤디였다.

“저는 마지막 남은 구슬로 할게요.”


어차피 무작위인데, 육식 수인들의 육탄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 의도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학생회장들이 선득하게 눈을 빛냈다.

‘거만한…….’

대전 상대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더군다나 직전 연설에서 뜬금없이 사슴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그들을 깔보는 조롱의 의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깔끔히 포기한 벤디 때문에, 서로 뽑으려 설치기도 애매해진 학생회장들이 상자와 가까운 순서대로 구슬을
집어 들었다.

주최 측 직원은 얌전한 학생회장들을 당황스레 살폈다.

‘웬일이람.’

이미 나무 상자가 빠개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역대 대항전 중에 가장 평화로운 대진표 뽑기였다.

파란색 구슬을 뽑은 기리온 아카데미와 햄브람 아카데미.

노란색 구슬을 뽑은 리 아카데미와 로돈도 아카데미.

붉은색 구슬을 뽑은 워튼 아카데미와 엔디노스 아카데미.

그리고…….

‘이건……?’

마지막 남은 흰색 구슬을 집어 든 벤디가 눈을 깜박이자, 마침 시선이 마주친 직원이 설명했다.

“오, 짝이 없는 흰색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수인 아카데미는 부전승이네요. 따라서 자동으로 다음


경기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부전승!

하마터면 함박웃음을 지을 뻔한 벤디는 이를 꽉 악물었다.


‘품위 유지, 학생회 기강.’

안나의 세뇌와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림자처럼 사각지대로 이동한 벤디가 주섬주섬 구슬을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부전승이라니.’

거저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마음껏 기뻐할 수 없으니 기념으로라도 가져가는 수밖에.

한편, 빠득, 벤디가 이 가는 소리를 똑똑히 들은 학생회장들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이를 악문다고?’

‘부전승을 한 상황에서?’

부전승이라서 좋아해도 모자랄 판국에, 분하다는 듯 이를 가는 반응이라니.

대전을 치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행동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호전적인 성향이면.

이쯤이면 오만함을 넘어, 제가 가진 힘에 대해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것이었다.

새삼 오싹해진 학생회장들이 벤디를 돌아봤다. 벤디는 대진표 따위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구석에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원 리오나드를 체술부로 날려 보내고,’

‘마법부 대표가 된 인물.’

가녀리게만 보였던 뒷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항전의 막이 올랐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대회장을 뒤흔들었다.

출전자들이 대기하는 천막 아래, 의자에 앉은 벤디는 다리를 달달 떨었다.

부전승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자신은 진상, 밉상, 화상과는 처지가 다르니까.

그 세 사람의 존재로 인해 결승에 진출할 건 거의 확정이고.

만약 작년에 왕좌를 차지한 기리온 아카데미가 결승에 올라온다면, 제 상대는…….

기리온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마법부 대표인 칸 팰드로였다.

힘주면 셔츠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갈 듯한 근육과 핏줄 선 주먹을 떠올리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게 어떻게 마법사야?’

검술부나 체술부도 아니면서 진화한 괴력 곰돌이 같은 외관은 반칙이었다.

‘반드시 결승까지 와라. 거기에서 온몸의 뼈를 분리해 줄 테니까.’

심지어 그런 육식 수인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이게 다…….’

늑대 때문이야. 눈물이 찔끔 난 벤디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원을 째려봤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원은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령 덕분에 편하지 않았습니까?”

“……네에, 뭐.”

덕분에 나는 공공의 적이 됐어.

“그런데 왜 눈꼬리가 올라갔을까.”

“여우 수인은 원래 눈꼬리가 올라가 있어요.”


픽, 그가 노골적으로 코웃음 쳤다.

“잘도.”

“…….”

화가 난다.

아까 학생회장들을 상대할 때 원의 의지대로 말을 내뱉었는데, 그들이 적의를 드러낸 이유가 심히


이해됐다.

몰래 이를 간 벤디는 이번엔 반대편 구석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쪼그려 앉아 손으로 눈을 가린 레넌이 있었다.

“하…….”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슴 여러분이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숨을 뱉거나 배를


움켜쥐기도 했다.

백호의 머릿속은 오늘도 가망이 없었다.

그리고…….

벤디의 시선이 앞자리에 방만한 자세로 늘어진 헤일린에게 닿았다.

사실 저 사자가 제일 모를 인물이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만 해도 만져 달라는 둥 헛소리를 이어 가더니. 오늘은 또 엄격한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었다.

얼마나 엄격한지 시선만 마주쳐도 홱 고개를 틀었다.

더 어이없는 건, 의도적인지 무심결인지 갈색 배낭을 제가 들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카데미에


있을 노란 짐승 대신 다른 이스단이 가방을 차지한 격이었다.

‘내 건데.’

이젠 모르겠다.
앞날이 아득해진 벤디가 그냥 눈을 감았다.

결승은 개인전이지만, 그 전까지는 단체전이라는데.

협동이 필요한 단체전을 이 오합지졸들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와아아아-

또다시 함성 소리가 대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곧 일곱 아카데미의 예선전이 끝나고, 본선에 진출한 네 개의 아카데미가 발표됐다.

기리온 아카데미와 엔디노스 아카데미.

그리고 리 아카데미와 부전승으로 올라간 수인 아카데미.

‘우리는 리 아카데미와 맞붙는구나.’

벤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리 아카데미 학생회장, 헤덴 하츠가 천막 아래로 들어섰다.

“거기, 학생회장.”

예선을 치렀음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헤덴이 곧장 벤디에게로 다가왔다.

품위 유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벤디가 하복 셔츠를 털고 베레모를 바로 썼다.

날카로운 자안과 똘망똘망한 주홍색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원과 레넌, 헤일린은 헤덴과 마주 선 벤디를 응시했다.

뒷모습만으로도 저렇게 위태로울 수 있다니.

하필 호전적인 기운이 팽배한 곳이라 그런지 벤디의 존재가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쯤이면 누구 하나가 들고 다녀도 불안할 지경이었다.

“아까의 건방진,”
경고의 말을 남기려던 헤덴은 일순 주춤했다. 벤디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굉장히 불편한 기운 때문에.

반듯하게 앉은 원과 구석에 쪼그린 레넌, 의자 세 개를 차지한 채 늘어진 헤일린의 눈길이 죄다 헤덴에게


모여 있었다.

허튼짓을 시도하는 순간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선득한 시선.

“…….”

순간 할 말을 잊은 그가 멀거니 뒤편만 바라보자, 의아해진 벤디가 뒤를 돌아봤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원과 여전히 쪼그려 앉아 딴짓하는 레넌, 그리고 헤일린의 태평한 하품이 이어졌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장면에서 눈을 뗀 벤디는 다시 헤덴을 마주했다.

‘하긴.’

남자도 넋 놓을 정도로 잘난 생김새가 셋이나 있으니. 정신이 집 나간 심정이 십분 이해됐다.

벤디가 친절히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 주자, 그제야 아차 이성을 되찾은 헤덴이 입을 달싹였다.

“아까의 건방진 언사는 잊지 않았,”

아, 또다.

또다시 세 사람의 무자비한 살기가 헤덴을 향해 쏘아졌다.

결국 경고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천막을 나선 헤덴이 허, 기가 찬 숨을 토해 냈다.

이름 유명한 원과 레넌, 헤일린의 행태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사람 하나 찢어 죽일 시선을 보내더니, 막상 학생회장이 돌아보면 맞춘 것처럼 내숭이나 떨어 대고.

그에게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야닉 펠이 흘린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완벽한 발 닦개로 전락한 모습이었다.

“수인 아카데미 출전자, 입장!”

진행자의 음성이 확성 마도구를 타고 울려 퍼졌다.

드디어 단상에 오를 차례. 부전승으로 예선을 통과해서인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

긴장하며 입술을 축이고 있던 나는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앞서 나갈 줄 알았던 화상, 진상, 밉상이 나를 빤히 돌아보고 있었다.

의도를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자니, 뒤늦게 뜻을 알아차렸다.

먼저 앞장서라는 의미구나.

이 순간만큼은 내가 이 오합지졸 무리의 대표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 주는 세 사람에게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육식 수인에게는 우두머리 같은 거 엄청 중요하지 않나.

독특한 부분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진행자의 재촉이 들려왔다.

“수인 아카데미, 안 나옵니까?”

이미 리 아카데미 출전자는 모두 단상에 올라온 상태였다.

“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세 사람을 지나쳐 먼저 걸어 나갔다.

뒤편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발소리만으로도 누군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제각각이었다.

장소도 잊고 실소를 흘릴 뻔한 순간,


와아아아아아-!

골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대회장을 채웠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의 환호성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한 나는 막대 과자를 꼭 그러쥐었다.

진짜 대항전의 시작이었다.

#<87 화>

휘익, 삐익, 와아아아-

휘파람 소리가 뒤섞인 함성이 지나가고 남은 건,

“……그런데 저건 대체 뭐야?”

짙은 의문이었다.

관중들의 관심이 나, 정확히는 내 손의 막대 과자에 집중됐다.

가상공간에 다녀온 후부터 줄곧 무기로 사용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 와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이만큼 손에 착 감기는 게 없는걸.

“아무리 봐도 막대 과자 같은데?”

단상으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시선이 모였다.

“저걸 무기로 사용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막대 과자의 정체에 대한 토론이 불거진 가운데, 대뜸 S 클래스 방향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세상에, 저거! 나할리 섬에서 새로 출시한 마법 지팡이잖아?”

안나 스웰든의 목소리였다.

나할리 섬은 마도구 장인들이 모여 사는 마도구의 성지와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학생회 체면을 위한 자작극이라도 그건 너무 갔잖아.

그러나 아랑곳 않은 안나가 퍽, 팔꿈치로 야닉의 옆구리를 찔렀다.

장단 맞추란 눈치를 받은 야닉이 힘차게 외쳤다.

“아주 바삭하고 맛있는! 어, 이게 아닌데?”

“이 멍청한 하이에나가!”

기껏 밥상 다 차려 놨더니, 분개한 안나가 꼬르륵 거품을 물었다. 그때였다.

“아주 바삭하고 맛있는 마법을 소환하겠는걸?”

클래스메이트인 라일라의 목소리였다. 잇따라서 다른 학생들의 새빨간 거짓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게 나할리 섬의 장인이 학생회장을 위해서 제작했다는 지팡이인가?”

“와, 특이하게 생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교내 제과점의 막대 과자가 한순간에 나할리 섬 장인의 신상 지팡이로 탈바꿈했다.

‘다들…….’

내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

감동 어린 눈으로 돌아보는 순간 전교생의 이글이글한 시선이 쏟아졌다.


좋은 말 할 때 없어도 있는 척해라. 네 얼굴이 우리 얼굴이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그런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

아무래도 신경전은 학생회장석에서만 벌어지고 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언의 압박을 등에 업은 나는 결전을 앞둔 장수 같은 얼굴로 읊조렸다.

“드디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지팡이를 사용할 때가 왔군.”

바야흐로 허세에 지배당한 대사였다.

내가 이제 됐냐는 눈빛을 보내자, 전교생의 표정이 미세하게나마 너그럽게 변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나할리 섬의 장인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모양인데?”

“갑자기 어디서 저런 거물이 튀어나왔대?”

여론 조작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뒤늦게 밀려드는 수치심에,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나는 작게 말했다.

“레넌.”

“왜?”

“……일어나.”

웃느라 다리에 힘이 풀린 레넌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까르르. 거슬리는 청량한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자자, 각 아카데미 출전자들은 이쪽으로 정렬해 주시고.”


진행자가 우리를 단상 중앙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리더 격인 나와 리 아카데미의 헤덴 하츠가 마주 섰다. 그의 적의 가득한 눈빛이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출전진 사이에 선 진행자가 확성 마도구에 대고 말했다.

“부전승인 수인 아카데미를 위해 다시 설명 드리자면, 단체전엔 특별한 규칙이 없습니다. 단, 반드시


각자가 대표하여 나온 무위만 사용해야 합니다.”

진행자의 눈길이 잠깐 원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체술부 대표로 출전했는데 마법을 사용하면 실격이다, 이 말이지요. 그리고 먼저 전투 불능이 되는


아카데미가 패하게 됩니다.”

진행자는 단상 한편에 있는 심사석을 가리켰다.

“참가자가 더 이상 전투가 불가하다고 판단되는 즉시 심사석에서 제지할 테니, 너무 무리해서 임하지는


말아 주시고. 그럼 두 출전진 모두 준비되었나요?”

“예.”

“네.”

리 아카데미의 헤덴이 먼저 대답하고, 뒤이어 내가 대답했다.

두근, 두근. 막대 과자 때문에 가셨던 긴장이 다시 발끝을 타고 올랐다.

“……음,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

진행자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뒤쪽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요.”

“……준비가 안 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람.

뒤로 고개를 돌리자, 진상, 화상, 밉상이 둥글게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저 육식 괴수들이 왜 저래.

옥신각신 중인 세 장신을 발견한 내가 황급히 양해를 구했다.

“작전시간. 작전시간 괜찮지요?”

어깨를 으쓱인 진행자가 리 아카데미 측을 돌아봤다.

“리 아카데미 측에서 괜찮다면.”

“상관없습니다.”

허가를 얻어 낸 내가 빙 모여 선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이에 끼려 했지만 어디 보통 체격이어야지.

“잠깐.”

기웃거리며 주변을 한 바퀴 돌 때까지 그들의 관심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두꺼운 팔뚝과 팔뚝 사이로 머리부터 밀어 넣은 내가 세 사람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셋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대체 뭐 해? 단체전 준비 안 하고.”

헤일린은 무성의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나갈지 정하는 중이잖아.”

출전진 전부 나서는 단체전인데, 여태껏 뭘 들은 건지.

발끈해서 설명하려는 동시에 레넌이 먼저 입술을 뗐다.

“회장, 한 명만 나서는 편이 나아.”


“단체전인데 한 명만 나서다니?”

“그게 효율적이야.”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게 무슨…….”

“그냥 한 명만 나가서 넷을 처리하는 게 더 빠릅니다. 옆에서 설쳐 대면 방해만 될 뿐이니까.”

원이 덧붙인 설명을 똑똑히 들은 리 아카데미 측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저 오만한……!”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친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세 사람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졌다.

“나.”

“아니, 나.”

“내가.”

한 명이 넷을 상대하겠다니,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 아카데미의 주장대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 육식 괴수 셋이라면 없던 신빙성도 생기는


수준이었다.

“내가 갈 거라고.”

“아니, 나라니까.”

“내가.”

이대로라면 영영 정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중간에서 갈피를 못 잡던 내가 덥석, 세 사람의 손을 붙잡아 모았다.

내 손과 닿은 세 개의 손이 움찔 경련했지만 다행히 떨쳐 내진 않았다.

“가위바위보.”

“…….”

“사이좋게.”

누구에게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운에 맡기기 싫은 거겠지.

“……그게 싫다면 네 명 전부 나갈 수밖에.”

떨떠름하게 눈짓을 교환한 세 맹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태어나서 본 이래 가장 긴장감 넘치는 가위바위보가 시작됐다.

“수인 아카데미, 준비됐습니까?”

충분한 작전시간을 제공한 진행자가 물었다.

가위바위보 심사를 마친 나는 비장할 정도로 진지하게 호언했다.

“네, 이번엔 정말 준비됐어요.”

“좋습니다. 자, 그럼 리 아카데미와 수인 아카데미의 준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우리 넷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갔다.

가위바위보의 승자, 헤일린 이스단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아갔다. 더없이 예쁜 웃음과 뚜둑, 어깨
근육 푸는 섬뜩한 소리가 부조화를 이뤘다.

정말로 한 명만 앞으로 나서자, 리 아카데미 출전자들이 이를 사리 물었다.

“이딴 식으로 우리를 무시하다니, 후회, 아아악!”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리 아카데미 검술부 대표가 헤일린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갔다.


원과 레넌이 그 장면을 보며 아쉬운 소리를 냈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어.”

“가위를 냈어야 하는데.”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 그리고 사람이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을 아연히 올려 보며 생각했다.

‘결승에서는 정말…….’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나만…….

헤일린 이스단 단독으로 결승 진출권을 가져오기까지는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결승전에 진출한 기리온 아카데미.

이로써 결승전은 수인 아카데미와 기리온 아카데미의 대결이었다.

“…….”

기리온 아카데미 출전자 대기 천막. 이곳은 결승에 진출했음에도 분위기가 어두웠다.

앞서 헤일린 이스단의 가공할 힘을 두 눈으로 보고 말았기에.

리 아카데미의 출전진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나름 타 아카데미에도 이름을 알리고, 좋은


혈통을 이은 실력자들.

그런 이들을 혼자서, 그것도 어려움 없이.

강하다는 정도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현저히 달랐다.

눈으로 쫓기 힘들 속도와 가볍게 몸을 쓰는데도 전해진 마력의 파동.

게다가 원이나 레넌은 아직 나서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기를 한층 저하시켰다.


심지어 결승전은 개인전.

그나마 원의 본래 분야가 마법인 만큼, 부학생회장이 출전하는 체술부 개인전만 해 볼 만한 수준인데.

그마저도 원의 체술이 어느 정도인지 아예 정보가 없으니, 승기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결승전은…….’

필패.

두 글자가 기리온 아카데미 출전진 사이로 내려앉았다.

적막이 맴도는 천막을 훑어본 칸 팰드로는 강하게 탁상을 내리쳤다.

“정신 안 차려? 어디 벌써부터 진 놈들처럼 풀 죽어 있어!”

쩌저적, 대리석 탁상에 금이 갔다.

“하지만 학생회장…….”

“나도 안다, 아무도 우리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겠지. 그런 괴물이 셋이나 있는데. 결승전은 아마 그들의
놀이터가 될 거다.”

“…….”

“그래도 최선을 다해라, 언제 또 그런 실력자들이랑 대련을 해 보겠나. 패하더라도 오명이 아니다.”

일행을 다독인 칸 팰드로는 이내 머리 색과 같은 붉은 안광을 빛냈다.

개인전은 검술부, 체술부, 종합부, 마법부 순.

앞서 세 경기에서 모두 져 승패가 결정 나더라도, 결승전인 만큼 대련은 끝까지 진행된다.

그리고 수인 아카데미에는 아직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자가 한 명 남아 있었다.

‘앉아, 머리까지 근육인 거 자랑하지 말고.’

“질 땐 지더라도, 내가…….”
칸 팰드로는 머릿속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여우 수인 하나를 그렸다.

“반드시 한 명은 꺾는다.”

#<88 화>

결승을 앞두고 짧은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마법 방어용 로브를 단단히 두른 나는 제자리를 서성였다.

큰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준결승 때 헤일린 홀로 내보낸 건 실수였다.

그로 인해 공개되지 않은 내 실력에 관중들의 기대만 더 가중시켰으니까.

증거로 관중석에서는 마법부 및 학생회장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기대치라도 반감시키게 옆에서 알짱거리기라도 할 것을.

초 단위로 어깨의 부담이 늘어 갔다.

쉬는 시간이 끝나가기까지 서성이는 와중, 툭, 누군가의 신발 앞코가 내 신발 앞코에 부딪혔다.

“회장.”

레넌이었다.

“응?”
“세 번째 경기에서 승자는 결정 나. 체술부의 어떤 늑대가 미끄러지지만 않는다면.”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예상한 내가 되물었다.

“……그래서?”

“그러니 네 번째 경기는 기권해도 승패와 무관해.”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 보자, 시선이 마주친 레넌이 물색 눈동자를 가느다랗게 휘었다.

“어차피 관중도 승패가 결정 난 후의 기권은 불필요하게 힘을 빼지 않는 정도로 받아들일 테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있을 때, 탁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원이 말문을 뗐다.

“기리온 아카데미는 무예를 중요시하는 곳입니다. 매해 대련을 통해 학생회장을 선발하는데, 칸 팰드로가


학생회장인 건.”

잠깐 말을 끊은 그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가 기리온 아카데미에서 제일 강하다는 뜻이죠.”

칸 팰드로.

그는 어쩌면 이곳의 세 사람을 제외한 출전자 중에 가장 강할 가능성이 높았다. 곰 수인인 만큼 안나


스웰든처럼 기본 무력도 남다를 테니까.

“회장은 이번이 제대로 된 첫 실전으로 아는데.”

딸까닥, 원은 탁상에 놓여 있던 주사위로 손장난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벽이 높을 필요는 없죠.”

원의 말뜻도 레넌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남은 헤일린을 돌아보자, 의자에 양팔을 걸치고 있는 그와 시선이 부딪혔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적안으로 빤히 쳐다보던 헤일린이 입을 달싹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대항전 결과는 똑같아.”

그 후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계속해서 은근하게 나를 피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세 사람은 내게 퇴로를 권유하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인 마법부 대표전에서 도망쳐도 된다고.

“…….”

당장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이 이런 선택지를 주는 건 내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왠지 분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들의 말대로 발을 빼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드는 스스로가


싫었다.

심지어 나를 염려하는 차원에서 기권을 제안한 걸 모르지 않는데.

그를 뻔히 알면서 내가 무조건 질 거라 판단한 이들에게 미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제일 별로였다. 여기까지 와서 흔들리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 이


상황에.

‘남 탓이나 하는 꼴이라니.’

무섭고 겁이 난다는 이유로.

“나는…….”

지는 한이 있어도 도전하겠다, 또는 승부에게서 도망치겠다.

둘 중 어떠한 답도 선뜻 내놓지 못한 내가 말꼬리를 늘였다.

“기권,”
“기권?”

그 순간 갑작스레 나타난 야닉이 대뜸 소리 질렀다.

“기궈어언? 기껏 응원하러 내려왔더니, 이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야? 회장이 기권을 왜 하냐?”

격분한 그가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보아하니 발 닦개들이 강요했네, 어? 회장이 칸 팰드로를 밟아 주면, 어? 또 다른 발 닦개가 생길까


이러는 거 아니야!”

갑자기 발 닦개가 여기서 왜 나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을 미처 제대로 듣지 못한 나는 일단 야닉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건 몰라도


중재가 필요한 상황인 건 알겠다.

“아니야, 다들 내가 다칠까 봐,”

“다치긴 개뿔, 칸 팰드로 그 곰 자식쯤이야 학생회장이 막대 과자로 후려치면 이길 텐데!”

맹신에 가까운 믿음을 마주한 나는 일순 가슴 한편이 울렁였다.

‘야닉…….’

그러고 보니 야닉은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내 힘을 믿어 줬지, 정작 힘을 가진 나보다도 더.

이어서 낮잠 시간까지 할애하며 추가 강의를 해 준 리리 교수님의 퀭한 얼굴이 스쳤다. 온갖 기대를 안고


있던 마법부 교수님의 얼굴도.

이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물러나긴 싫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어렵다 싶으면 그때 기권하지 뭐.’

모두가 질 거라고 생각하면 뭐 어떤가, 한 명이라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데.

결심한 나는 야닉을 향해 막대 과자를 흔들어 보였다.

“야닉, 걱정 마. 내 사전에 기권은 있지만, 지금 기권하진 않을 거니까.”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야닉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습관적으로 긴 장발을 쓸어 넘겼다. 오늘만큼은 저 장발이 빗자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아, 결승전에 진출한 두 아카데미는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마침 천막 밖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야닉.”

“좋지!”

처음으로 의기투합한 우리가 발맞춰 천막 입구로 걸어갔다.

“응원 와 줘서 고마워.”

“그게 뭐라고, 나 참.”

약간 자신감을 찾은 내가 걸어가며 야닉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칸 팰드로가 막 듣던 만큼 강하지는 않은가 봐?”

“아, 칸 팰드로 그 녀석?”

돌연 야닉의 암갈색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이런 말 하기 더럽게 자존심 상하긴 한데…….”

“……?”

“솔직히 말도 안 되게 강하지.”

순간 치고 나가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야닉 펠이 아카데미 합숙 대련 때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로 해


줘.”
힘차게 막대 과자를 흔들던 손 또한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아까는 막대 과자로 후려치기만 해도 이길 거라며.’

어째 레펠튼 때도 그렇고. 나에 대한 이 하이에나의 자부심이 오히려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감이 수직으로 하락한 사실을 모르는 야닉이 팡, 내 등을 갈겼다.

“자, 회장. 그리핀처럼 박살 내러 가 보자고!”

빗자루 같은 게…….

“개인전 또한 단체전처럼 큰 규칙은 없고, 한 가지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대표로 나온 무예 외의 다른


무예를 사용하는 건 실격.”

단상 중앙에 선 진행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단상 바깥으로 떨어지면 장외 패가 되니 주의하여 주시고. 그럼 올해 대항전의 대미,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귀가 얼얼할 정도의 함성이 넓은 대회장을 가득 채웠다.

특히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아마 이미 우승한 기분이 아닐까.

“첫 번째 경기는 검술부입니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쿤 헤인즈, 그리고 수인 아카데미의 레넌 에던트!”

검 손잡이에 팔을 걸친 레넌이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결승이 아니라 어디 산책 나가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얼마 후 마주 선 두 사람이 진검을 겨눴다. 시끄러운 환호 속, 레넌의 상대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에던트 가문의 방계인 쿤 헤인즈입니다.”

“자기소개 시간인가? 그럼 난 발 닦개 정도로 해 둘,”


멈칫한 레넌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빠르게 첨언했다.

“정정하지, 발 닦개 1 호로.”

삐익- 휘익-

정작 바깥 쪽에선 관객의 응원 소리 때문에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단상 아래에 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다.

“에던트 가문으로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아카데미에 남아 계실 줄은.”

“검이 아니라 입으로 싸우게?”

“현 가주에게 모친을 그렇게 잃으셨는-”

챙,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인 레넌이 상대의 검을 쳐 냈다. 공중을 돌며 단상 밖으로 날아간 검이


바닥에 푹 꽂혔다.

검을 놓친 상대의 패배.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레넌은 순식간에 상대의 발목을 차 넘어뜨렸다.

그 위에 선 레넌이 양손으로 쥔 검을 아래로 겨냥했다, 검 끝이 향한 곳은 상대의 입이었다.

“말이 많아.”

물색 눈동자에 서늘한 살의가 어리는 동시에 검이 움직였다.

설마. 사색이 된 내가 외쳤다.

“레넌, 그만해!”

우뚝.

뾰족한 검 끝이 상대의 입에서 손가락 마디 길이만 남겨 두고 멈췄다.


대회장에 형용할 수 없는 정적이 몰아쳤다.

“히익…….”

온몸을 떨던 상대가 거품을 물며 늘어지자, 그제야 정신 차린 진행자가 다급히 외쳤다.

“레넌 에던트, 승!”

철컹, 검을 밀어 넣은 레넌이 아까와 같은 걸음걸이로 단상을 내려왔다.

내 앞에 선 그는 평소와 같은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보인 섬뜩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오랜만의 진검 대련이라 흥분해서 그만.”

“…….”

“놀랐어?”

흥분은커녕 침착하고 정제된 움직임이었지 않나. 방금 전은 정말 레넌이 상대를 죽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에던트 가문이란 단어밖에 듣지 못했는데, 그 후에 상대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입을 여는 찰나, 진행자의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이어서 두 번째 체술부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루이스 첼시앙, 수인 아카데미의 원


리오나드!”

“세 번째 종합부 경기, 기리온 아카데미의 데릭 그웨인과 수인 아카데미의 헤일린 이스단!”

두 번째, 세 번째 경기 또한 눈 깜짝할 사이 빠르게 지나갔다.

물론 수인 아카데미의 완승으로. 결승전이라 표현하기도 뭐 할 정도의 실력 차이였다.

암묵적인 우승이 확실시된 상태.

“그럼 대망의 마지막 경기입니다. 마법부인 만큼 화려한 경기를 기대해 볼 수 있겠죠?”


뒤이어 울려 퍼진 진행자의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칸 팰드로, 그리고 수인 아카데미의 벤디 레피.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드디어 내 차례.

땀이 배어난 손을 로브에 연신 비빈 내가 계단에 발을 디뎠다.

계단을 전부 올라섰을 때, 단상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중에 못 하겠다 싶으면.”

대항전 내내 데면데면하게 굴던 헤일린 이스단이었다.

“단상 밖으로 뛰어내려.”

“…….”

“어떻게든 받아 줄 테니까.”

*** ㅎㅁ * 쉼터 ** 1412 ***


89 부터 시작...

#<89 화>

저 말이 뭐라고 발목을 휘감고 있던 긴장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을 내려 보고 있을 때, 다시금 헤일린의 입술이 열렸다.

“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유형이니까.”


긴장과 함께 미약한 감동도 증발했다.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진상 사자를 흘겼다. 하복 셔츠나 타이도 대강 주워 입고, 한쪽 어깨에는 내


배낭을 걸친 차림새였다.

내게는 딱 알맞은 배낭을 헤일린이 들고 있으니 그렇게 앙증맞아 보일 수가. 어깨에 멘 배낭끈이 팽팽했다.

“……내 가방을 왜 네가 들고 다녀?”

“내 건데, 이거.”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가 뻔뻔하게 주장했다.

그래, 교복 타이 도둑이 배낭 도둑 못 되겠어.

실랑이를 벌일 때가 아닌 나는 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위를 실은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방금 전의 대화 때문인지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단상 중앙으로 나서자, 머리 위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칸 팰드로의 그림자였다.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두툼한 근육은 마치 불곰을 연상시켰다.

과연 이게 학생이 맞나.

마법 방어용 로브까지 두른 그는 안 그래도 큰 체격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온몸의 뼈를 분리해 주겠단 말, 잊지는 않았겠지.”

이미 기리온 아카데미의 패배가 확정되었음에도 칸의 낯빛에는 호승심이 그득했다.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을 한 내가 대답했다.

“잊었어.”

기억해서 심신에 좋을 게 없는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툭, 이마에 혈관이 불거진 그가 노성을 토해 냈다.

“기억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나를 무시했단 말이군!”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어찌나 목청이 큰지,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도 바람이 훅 불어온 느낌.

다리가 종잇장처럼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남은 대화는 대련 중에 나누시고.”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한 진행자가 확성 마도구에 입을 가져갔다.

“그럼 대항전 마지막 경기, 기리온 아카데미와 수인 아카데미의 마법부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펑!

신호탄 소리와 함께 너른 대회장이 환호로 들썩였다. 승패를 떠나 우리가 선보일 대련을 기대하는
함성이었다.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막대 과자, 아니, 나할라 섬 장인의 지팡이를 그러쥐었다.

불곰을 사냥하고 수인 아카데미의 전승을 가져올 시간이었다.

* * *

쾅, 펑!

쿠구궁-

결승전다운 어마어마한 접전이 벌어졌다.

연기 자욱한 단상 위, 주 속성이 불인 칸 팰드로의 손에서 쉴 새 없이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제대로 안 보이잖아.”

“콜록, 콜록.”

눈살을 찌푸린 관중들은 부연 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시간이 지나자 연기가 조금씩 걷히며 단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러난 단상 위에 펼쳐진 광경은,

쿵, 다다다.

펑, 다다다.

참으로 애매했다.

격렬한 마법이 오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칸 혼자 마법을 남발하고 있었고…….

쾅, 다다다다.

쿠궁, 다다다다.

벤디는 사력을 다해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어찌나 잽싼지, 곰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치열하고 재빨랐다.

독이 바짝 오른 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대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인가!”

펑, 데굴데굴.

“미꾸라지 같은!”

콰쾅, 다다다다.
“서라!”

숨 막히는 추격전을 바라보던 관중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강한 거 맞아?”

“실력을 숨기고 있나…….”

“대련에서?”

“……음.”

바닥을 구르는 몸놀림은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 마법은 또 귀신같이 피하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피, 피해!”

어느 관중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쏙, 머리를 움츠린 벤디가 날아온 불덩이를 간발의 차로 피했다. 다른 의미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대련이었다.

한편,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위기를 감지하고 모면하는 저 뛰어난 능력은…….

아카데미에서 본 학생회장의 일상과 일맥상통했다.

학생 식당에서 그림자처럼 밥 먹기, 괜히 시비 거는 학도들을 피해 달아나기, 벽에 붙어 이동하기 등등.

모두 경험에서 비롯된 순발력과 지구력이었다.

데굴데굴, 또다시 한바탕 바닥을 구른 벤디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쌕쌕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학생회장아, 그…… 마법을 쏘면 반동이 생기는 건 알겠는데, 뒤로 날아가는 것 좀 안 할 수 없냐?’

‘그 부분은 아직 조절이 어려운걸요.’

리리 교수의 무료한 목소리가 벤디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 되겠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 정공법으로 대항전에서 이기긴 글렀어.’

‘저는 치졸한 방법도 괜찮아요.’

‘……정공법만 추구하게 생겨서는 의외네.’

‘일단 살아남고 봐야죠.’

‘흠, 그렇다면 너한테 안성맞춤인 필승법이 하나 있긴 한데…….’


웅크려 앉은 리리 교수가 나뭇가지로 끄적끄적 흙바닥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요 며칠 지켜본 결과 너는 몸뚱이가 많이 약할 뿐, 순발력이나 속도는 나쁘지 않아요. 마치 그 뭐냐,


사슴처럼.’

‘누가 사슴이에요.’

‘비유잖아, 비유. 이게 그렇게까지 정색할 말이냐고.’

그에 따른 리리 교수의 벤디 레피 필승법은 이거였다.

첫째, 초장에는 도망 다니며 최대한 상대방의 마력을 소진시켜라. 물론 날아오는 마법을 피하는 건
본인의 몫.

둘째, 어느 정도 소진시켰다 싶으면 무작정 마법을 쏴라. 앞서 마력을 많이 사용한 상대가 버티지 못할
때까지.

벤디의 방대한 마력을 고려하면 해 볼 만한 작전이라는 게 리리 교수의 주장이었다.

“제길, 한 번에 끝내 주겠다!”

인내심이 바닥난 칸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머리 위에 소환된 불이 세차게 회전하며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저렇게 큰 건…….’

절대 못 피할 것 같은데. 벤디의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마법은 어떻게 하냐고? 비등비등하거나 더 큰 마법을 소환해서 상쇄시켜야지.’

이번엔 달아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 벤디가 막대 과자를 앞으로 뻗었다.

이쯤이면 칸의 마력도 어느 정도 소진시킨 것 같고. 과녁으로 수천 번 연습한 마법을 소환할 시점이었다.

몸에서부터 끌어 올린 마력이 막대 과자에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마법을 완성한 칸이 눈을 홉떴다. 불꽃이 만들어 낸 회오리에 그의 적발이 엉망으로 솟구쳤다.

콰콰콰, 웅대한 화염이 벤디를 향해 몰아쳤다.

‘온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불덩이를 마주한 벤디가 응축시킨 마력을 터뜨렸다.

펑, 막대 과자 끝에서 백색 공기주머니가 터져 나갔다.


콰앙-!

공중에서 붉은 기운과 백색 기운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파지직, 파지직. 쉴 새 없이 마찰하던 두 마법 중, 붉은 기운이 밀리기 시작했다.

‘설마.’

여유만만하게 지켜보던 칸은 일순 눈을 부릅떴다. 제 화염을 집어삼킨 백색 바람이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일편 반대편에선 마법을 쏘아 보냄과 동시에 반동으로 튕겨 나간 벤디의 몸이 단상을 굴렀다.

이대로 계속 굴러가면 단상 밖으로 떨어져서 장외 패.

‘아, 안 돼!’

데굴데굴 굴러가던 벤디가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끼이익, 단상 끝자락에서 간신히 멈춘 벤디는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떠…… 떨어질 뻔했네.”

얼굴을 엉망으로 가린 머리카락을 치워 내는 순간 백금발이 시야를 채웠다.

언제 왔는지 단상 아래에서 양팔을 벌리고 선 헤일린이었다.

잠자코 기다리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아직 아닌가?”

기권.

“아직 아니야.”

맥이 탁 풀린 벤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면 칸은 바닥에 멀거니 주저앉은 상태였다. 대련이 시작된 이후 처음 땅에 엉덩이를 붙인 모습으로.

그는 방금 전까지 제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회심의 공격으로 소환한 불을 와해시킨 것도 모자라, 단상 바닥까지 갈아 버릴 위력이라니.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피하지 않았다면, 갈린 건 단상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급히 피하느라 혀까지 씹은 탓에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군.’

주르륵, 흘러내린 식은땀이 그의 턱 끝에 매달렸다.

‘내 마법이 칸 팰드로의 마법을 꺾고…….’

칸과 함께 부서진 단상을 응시하던 벤디는 휙, 자연스레 교수석을 돌아봤다.


‘리리 교수님!’

고된 연습 끝에 빛을 본 기쁨을 나누고자 했지만, 리리 교수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뜬금없이 반대편 학장석에서 들려왔다.

“밀란느 학장님. 바로 접니다, 학생회장을 저 경지까지 끌어올린 마법부 막내 교수!”

“얼굴이 너무 가깝네.”

“떠오르는 신예, 리우드리 교수!”

“거, 알았으니 퀭한 얼굴 좀 옆으로 치우고…….”

기회주의 판다는 제자와 기쁨을 나누긴커녕 아첨하기 바빴다.

싸하게 식은 벤디는 주섬주섬 로브를 정리하며 막대 과자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칸 또한 자세를 갖췄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유가 사라진 표정이었다.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은 칸과 끝이 부스러진 막대 과자를 든 벤디가 시선을 맞췄다.

“…….”

“…….”

두 사람 사이로 고요가 내려앉은 가운데.

와아아아아-!

정적이 머물던 관중석에서 뒤늦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칸 팰드로의 마법을 단숨에 소멸시키다니!”

“바람으로 불을 꺾는 건 또 오랜만에 보네. 저런 마력을 갖고 있으면서 대체 왜 도망만 다닌 거야?”

“수인 아카데미 녀석들, 종일 거들먹거린 이유가 있었어!”

벌써 으스대고 있을 수인 아카데미 측을 돌아본 관중들은 일순 아연해졌다.

“…….”

재학생 모두 파리가 들어갈 만큼 입을 떡 벌리고 있었기에. 튀어나올 만큼 커진 눈은 덤이었다.

난간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리 아카데미 학생이 굳은 수인 아카데미 학생을 쿡, 손끝으로 찔렀다.

“이봐, 왜 그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쿡, 쿡. 찌르는 대로 흔들리던 수인 아카데미 학생은 한참 만에 입을 움직였다.

“……누군데, 저거?”

“누구냐니…….”
너희 학생회장이잖아.

#<90 화>

과거 마력 측정을 생각하면, 벤디는 마력은 높을지언정 마법 소환에는 소질이 없었다.

고로 칸 팰트로를 상대로 저런 선전을 보일 실력이 절대 아닌데.

대체 마력 측정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전교생의 시선이 비교적 태연한 반응인 X 클래스 학생들에게 모였다.

“라일라,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데?”

“흠, 한 가지 확실한 건…….”

말끝을 흐린 라일라가 이내 담담하게 입을 뗐다.

“나도 몰라.”

매일 이상한 짓을 벌이다 보니 이제 뭘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고.

헤일린 이스단을 배낭에 넣어 다니는 벤디와 생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서서히 상식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다.

“우리도 쟤를 설명할 수 없어.”

“돌아서면 저러고 있는 게 일상이니까.”

“아암, 그렇지. 저기서 고구마 말고 막대 과자 휘두르는 게 다행일 지경인데 뭐.”

X 클래스 학생들이 차례로 떠들어 댔다.

결국 어떠한 해답도 얻지 못한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멍하니 단상을 바라봤다.

쿠궁, 데굴데굴.

콰쾅, 다다다다.

‘큰일인데.’
저 하찮은 뒷모습이 학생회장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펑! 콰광!

쉴 틈 없이 날아오는 칸의 불덩이를 피하고, 마법을 주고받던 벤디는 문득 관중석으로 고개를 틀었다.

“학생회장!”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열띤 응원을 보내고 있었기에.

‘무슨…….’

눈을 동그랗게 뜬 벤디는 전교생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열성적으로 제 이름과 무조건 이기라는 말을 외치는 저들의 얼굴이…….

‘으.’

사기를 저하시켰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벤디가 광분한 그들을 외면했다. 혈기 왕성한 육식 수인들의 포효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허억, 헉.”

맞은편, 지친 기색이 역력한 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길!”

거치적거리는 로브를 벗어던진 그가 벤디와 마주 섰다.

서투른 움직임과 이상한 지팡이, 쓸데없이 발이 꼬여 넘어지는 것하며.

무엇보다 마법 소환이 미세하게 한 박자씩 어긋나거나 버벅거리는 부분까지.

‘초심자다, 틀림없는 초심자인데…….’

벤디의 모든 거동이 초보라고 제 감각이 부르짖고 있는데, 소환하는 마법은 하수가 아닌 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조그마한 게 너무 볼품없이 뛰어다니기에, 마법 한 방이면 금세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벤디는 모든 마법을 피하거나 소멸시켰고, 도리어 그의 마력이 바닥을 보이는 상태였다.

‘……방심했군.’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꼴.

느긋하게 쫓던 사냥감에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제는 칸이 벤디가 쏘는 마법을 피해야 하는 실정이지만…… 더 이상 그럴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문제였다.

마법사의 체력과 마력 소진은 비례하니까.


더 큰 문제는, 벤디에게 남은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 것이었다.

“…….”

엉망으로 치솟은 적발을 쓸어 넘긴 칸은 반파된 단상과 여기저기 박살 난 관중석을 둘러봤다.

뒤이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벤디를 응시했다.

대항전에서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틴 상대는 처음이었다.

저 새치름한 얼굴 뒤로 무엇을 더 감추고 있을지. 아무것도 숨긴 게 없음을 알 리가 없는 그는 조금


오싹해졌다.

상념을 떨친 칸이 양팔을 뻗어 손을 모았다.

‘앞으로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남은 마력을 죄다 끌어모아, 현재의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가장 큰 마법을 만들어야 한다.

드드득, 칸이 자리한 지면부터 시작된 진동이 단상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을 맞닥뜨린 벤디 또한 마력을 운용했다.

지금까지 중에 위력이 제일 큰 공격일 거란,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떡하죠?’

벤디가 곁눈질로 교수석을 쳐다보자, 다른 교수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던 리리 교수가 대강 손을 휘저었다.

너 알아서 하라는 무성의한 수신호.

‘너무해.’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이었다.

막대 과자를 앞으로 뻗은 벤디는 오래전, 어머니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엄마는 바람 마법사야?’

‘굳이 따지면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래서 막 다 날아가는 거구나.’

‘……그건 아빠가 엄마를 속상하게 했을 때만 그렇고. 평소에는 인명을 구하는 데에 쓴단다.’

어머니가 소환한 회오리바람에 날아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장면이었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린 벤디는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리며 마력을 모았다.

휘오오오-
흡사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이내 막대 과자 끝에서부터 시작된 하얀 돌풍이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소용돌이는 곧 거대한


용오름으로 뒤바뀌었다.

‘지팡이가…….’

바삭바삭, 마력을 견디지 못한 막대 과자가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벤디는 직감했다. 이 마법을 끝으로 막대 과자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라고.

서로 마지막 일격임을 예감한 칸과 벤디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먼저 완성된 거대한 불꽃이 칸의 손을 떠났다.

화르르, 위협적인 불줄기가 단상을 타고 벤디를 향해 쏘아졌다.

다가오는 불줄기를 마주한 벤디가 소환한 마법을 사용하려는 찰나,

쿠르릉-

난데없이 뒤편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벤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수인 아카데미 관중석 위, 가림막 용도로 설치된 판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앞선 수많은 대련에서 튕겨 나온 마법에 맞은 데다, 칸과 벤디가 마법을 소환하며 일으킨 진동을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뭐야?”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를 봐! 천장이 무너지고 있다고!”

“피해!”

째깍, 째깍.

수초 동안 벤디의 눈이 빠르게 여러 곳을 오갔다.

단상을 타고 제게 다가오는 칸의 불줄기.

무너지는 판상, 그 아래 있는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

사태를 눈치채고 대처하기 위해 일어난 교수진.

마지막으로 제가 소환한 마법에 눈길이 머물렀다.


째깍.

이 자리에서 가장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째깍.

이윽고 칸을 향하고 있던 막대 과자 끝이 방향을 틀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칸은 그 모든 장면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펑, 벤디가 소환한 마법이 수인 아카데미 관중석 위로 쏘아졌다.

콰아앙!

용오름이 판상에 명중하는 순간 칸이 쏘아 보낸 불줄기가 벤디의 전신을 덮쳤다.

동시에 단상을 비롯한 관중석이 자욱한 연기로 뒤덮였다.

“쿨럭, 쿨럭.”

흙먼지를 뒤집어쓴 학생들이 잔기침을 토해 냈다.

“대체, 쿨럭, 무슨,”

“천장이 무너…… 어? 뭐야 이건?”

학생들의 머리 위로 웬 부스러기가 여우비처럼 흩날렸다. 뒤이어 미처 분해되지 못한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뒤늦게 판상의 잔해임을 깨달은 그들이 번개처럼 단상을 돌아봤다.

판상이 무너지는 순간, 때마침 마법을 소환하고 있던 학생회장이 판상을 처리한 것이었다.

‘그럼…….’

이는 곧 학생회장은 칸의 마법을 무방비 상태로 맞았다는 의미.

“쿨럭,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학생회장은?”

“젠장,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학생들은 답답한 마음에 팔을 내저으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대회장 사이로 옅은 바람이 불어 들며, 단상을 뒤덮은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바닥에 쓰러진 칸. 그리고 그의 목을 한 손에 그러쥔 헤일린이었다.

“…….”

제압당한 칸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 봤다.

선홍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이자가…….’

헤일린 이스단.

여기가 대련을 위한 단상, 그리고 관중이 지켜보는 장소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뒤이어 연기가 걷히며 드러난 건 단상에 검을 꽂고 있는 레넌이었다.

그의 검이 꽂힌 부위를 기준으로 칸의 불줄기가 만든 새까만 길이 끊겨 있었다.

찍소리도 못 낸 대회장의 모든 이들은 레넌의 뒤편에 선 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기 있다!’

그의 품에는 모두가 찾던 벤디가 안겨 있었다.

로브와 교복이 군데군데 찢어졌으며,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동체 시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살핀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충격의 여파로 기절했을 뿐,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모습이었다.

“저…… 미친…….”

벤디의 무사를 확인한 안나가 털썩,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수한 시선에서 벤디를 감추듯 끌어안은 원은 기가 막힌 심정을 삼켰다.

“하.”

안나 스웰든의 말대로 진짜 미친 사슴이었다.

칸의 마법이 쏘아져 오고, 판상이 무너지는 촉박한 시간 속.

짧은 시간 속에서 벤디는 단상 아래에 있는 원과 레넌, 헤일린에게 눈길을 던졌다.

마법의 방향을 틀 거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신호의 의미를 세 사람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은 그런 가설을 떠올린 것만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는 검을 회수한 레넌과, 칸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털며 일어난 헤일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대항전은 대련을 표방한 실전에 가까웠다.

웬만한 부상을 입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주최 측의 제재가 들어오지 않는.

세 사람은 벤디가 단상에 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마법 방어용 로브를 착용하지만, 로브가 보호하는
범위는 육체 단단한 육식 수인이란 기준에 한정되어 있음을.

사슴 수인의 몸이 그 충격을 버텨 낼지는 그들로서도 미지수였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와중,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세 사람의 시선이 까무룩 기절한 벤디에게 머물렀다.


아무리 가까이 있는 그들을 믿고 벌인 일이기로서니, 한 발이라도 늦었으면.

비슷한 생각에 다다른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렁였다. 섬뜩했다.

새삼 벤디가 초식 수인이란 사실이 온몸으로 와닿은 순간이었다.

“…….”

누구 하나 정적을 깨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치직, 치지직.

숨 막히는 고요 속, 진행자의 손에 있던 확성 마도구가 소음을 일으켰다.

그 소리에 아차 정신을 차린 진행자는 고장 나기 직전인 확성 마도구에 입을 가져갔다.

“수인 아카데미.”

“…….”

“……실격.”

#<91 화>

제삼자, 하물며 세 사람이 대련 중에 난입한 사실도 모자라, 출전자를 제지하고 다른 출전자를 도운 것.

원칙적으로 이는 실격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다만 앞뒤 사정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했다.

실격.

귓가에 윙윙 맴도는 단어를 되뇌던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한 박자 늦게 반발하고 나섰다.

“……뭐? 실격?”

“터무니없는!”

“실격은 무슨, 이전 경기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 난 상태였는데!”

“그래, 어차피 우승 확정이었다고!”

활화산 같은 기세에 눌린 진행자가 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그, 불의의 사고였긴 하지만…….”

주최 측 인물들이 앉은 좌석을 흘끔거린 그가 말을 이었다.

“판상이 무너지는 정도는 주최 측에서 대응할 수 있었고, 결국은 출전자들의 의지로 일어난 일이기에…
….”

“무슨 헛소리야? 애초에 건물 관리를 똑바로 했어야지!”

“주최 측에서 대응했을 거란 보장이 있어? 한발 늦었으면 우리가 판상에 깔리게 생겼는데!”

“학생들 지키느라 우리 학생회장 저 꼴 난 거 안 보이냐고!”

버럭버럭 악쓰던 학생들은 불현듯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관중석 난간에 달라붙은 안나와 야닉이 숫제 짐승 같은 숨을 내뿜고 있었기에.

우지직, 안나의 손에 있던 난간이 종잇장 구겨지듯 빠그라졌다.

오, 저게 저런 모양으로 구겨질 수도 있구나.

그러한 생각을 할 즈음,

“잡아.”

신시아의 짤막한 명령이 학생들의 집 나간 정신을 붙들었다.

“자, 잡아!”

“저 두 마리 잡아!”

사색이 된 그들이 안나와 야닉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 둘마저 뛰어들어 날뛰면 결과 재판정이든 재검토든 물 건너가는 건 자명한 일.

그 꼴은 못 보는 학생들이 두 맹수를 겹겹이 둘러쌌다.

“다리부터 붙들어!”

“악! 송곳니에 찔렸어!”

우당탕,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접전이 벌어졌다.

“조용.”

이 목소리는. 먼지 나게 소동을 일으키던 그들이 일동 뚝 멈췄다.

언제 왔는지 모를 밀란느 학장이 관중석 아래에서 뒷짐 지고 있었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둘러본 그녀가 나직이 꾸짖었다.

“품위를 지키게.”

차분하면서도 엄한 밀란느 학장의 태도에, 학생들은 이내 머쓱하게 옷을 정리하거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안나가 아직도 날뛰는 야닉을 잡아끌었다.

“체통을 지키세요, 입회 희망자.”

“같이 날뛰어 놓고 또 나만 갖고 그러네, 또!”

소란이 가신 수인 아카데미 관중석을 지나친 밀란느 학장이 주최 측 좌석으로 걸어갔다.

느긋한 걸음걸이를 내려 보던 관중들은 괜히 입술을 축였다.

까마득한 과거에는 전장을 쓸고 다닌 백전노장.

그러한 명성답게 눈빛은 형형했고, 그저 가까이서 걷고 있을 뿐인데도 이유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

어느덧 주최 측 좌석까지 다다른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야기할 것이 남았을 터.”

* * *

“……깨어나려는 것 같은데요?”

“어머.”

먼 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깜박.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희뿌옇게 미어진 시야에 여러 쌍의 눈동자가 들어찼다.

깜박, 깜박.

안나와 신시아, 메이지가 얼굴을 모은 채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육식 수인의 머리통이 세 개나.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섬뜩한 광경부터 마주한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찾아온 어둠에 안심하고 있자니, 안나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잠들게 해 줄까요.”

“…….”

부스럭, 얌전히 몸을 일으킨 내가 몸을 더듬거렸다. 칸이 쏘아 보낸 마법을 정면으로 받은 것치곤 몸이


너무나 멀쩡했다.

‘그렇다는 건…….’

나는 휙 소리 나게 안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됐어요? 결과.”

내 질문에 안나와 신시아, 메이지가 시선을 교환했다.

“음, 그게 말이지요…….”

말끝을 흐린 메이지가 검은 후드 아래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미묘해진 가운데, 신시아가 먼저 입을 뗐다.

“실격 확정.”

패배 정도로 처리되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었는데.

나는 기절 직전의 상황을 되짚었다.

마법 경로를 틀고, 단상 아래의 원과 레넌, 헤일린에게 신호를 보내고.

그 즉시 단상에 뛰어드는 세 사람을 끝으로 기억이 끊겼다.

‘그 결과가…….’

약간은 예상한 답변이었긴 하지만, 시무룩해진 표정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한 안나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왔다.

“밀란느 학장님께서 주최 측과 대화를 나누긴 했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뭐. 결과가 이렇게


나왔더라고요.”

“그런가요.”

담담히 대답은 하면서도 눈썹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생들 위로 판상이 무너지는 장면을 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으니까.

그러나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리란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 잠긴 와중, 내 어깨를 쥔 안나의 손에 은근한 힘이 실렸다.

괴력 곰돌이의 악력을 상기한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올려 봤다.

“두 번은 안 돼요.”

“……?”

“너무나도 학생회장다웠던 그런 행동.”

언제는 학생회장다워야 한다며 짤짤 흔들더니.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신시아가 들고 있던 서적으로 내 정수리를 꾹 눌렀다.

“혼나.”
두 육식 수인에게 압박당하는 중인 내가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메이지를 바라봤다.

“회장.”

검은 후드 아래의 입에서 조곤조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회장은 피를 빨아먹기 쉬운 약한 몸이라…… 조심해 주세요.”

누가 박쥐 아니랄까 봐, 걱정인지 협박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끄덕끄덕, 부들부들 떨며 연신 고개를 주억이고 나서야 그들은 나를 자유롭게 풀어 줬다.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나는 앉은 곳을 둘러봤다.

흰 침대와 알싸한 약품 냄새.

아무래도 대회장에 설치된 의무실인 모양이었다.

하얀 공간을 잠깐 둘러본 내 고개가 다시 안나를 향했다.

“안나, 야닉은요?”

“실격을 납득하지 못해서 머리채 풀고 주최 측에 뛰어들다가 포박당했어요. 지금은 S 클래스에서 감시


중이고요.”

안 그래도 그럴까 봐 행방을 물었는데, 예상대로였다.

“바깥은 시상식 중인데, 그냥 불참하죠.”

“저기, 그 전에…….”

나는 가장 궁금한 사안을 꺼냈다.

“그…….”

진상, 밉상, 화상은 어디로 간 건지. 묻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안나가 문을 가리켰다.

“세 분은 문밖에 계세요. 체격이 체격이다 보니, 세 분 다 안에 계시면 의무실이 너무 좁아져서요.”

과연. 대회장에 딸린 간이 의무실이라 그런지 우리 넷만으로도 공간이 꽉 찼다.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분명 마법 경로를 바꾸기 전에 눈이 마주친 삼인방 덕분일


텐데.

어쩌면 그들이 없으면 애초에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을지도 몰랐다.

고마움을 전하고자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복도에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세 쌍의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서릿발 같은 차디찬 기운을 마주한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반듯하게 선 원은 안 그래도 감정 없는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고.

팔짱 낀 채 벽에 기댄 레넌은 늘 방긋거리던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바닥에 수그려 앉아 있는 헤일린은 시선만으로 나를 태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싸늘하다.

그들의 저조한 기분을 한눈에 알아본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끼이익,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나가려다 마는 내 모습을 본 안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인사하러 나간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문제가 생겨서.”

“무슨 문제요.”

“문밖에…….”

눈 뒤집힌 맹수 세 마리가 있어.

* * *

석양이 지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각, 학생회 마차 주변으로 가는 길.

마주친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은 다행스럽게도 실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다. 다만…….

“학생회장, 아까는 제법…… 딸꾹.”

“어? 학생회장, 몸은 좀 어떠…… 힉!”

“학생회…… 아이고야.”

하나같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제 갈 길 가기 바빴다.

바로 내 뒤편에서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는 원과 레넌, 헤일린 때문에.

그들은 내게 절대 말을 걸지 않으면서도 마치 호위하듯 일정 거리를 둔 채 따라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무언의 항의를 하는 중인 듯한데.

저들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중, 갑작스레 등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슴의 위험 탐지 기능이


작동한 것이었다.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장.”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위험인물이 서 있었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칸 팰드로였다.

석양을 받은 붉은 머리가 타오르듯 일렁였다.


거침없이 다가오던 칸은 별안간 흠칫 물러났다.

“대화…… 잠시 가능한가?”

그의 눈길은 내 뒤의 삼인방에게 머물러 있었다. 잇따라 눈치를 살핀 내가 슬그머니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얌전하긴 했으니까.

이윽고 칸은 푹, 내 머리 위로 대뜸 무언가를 씌웠다.

‘뭐야?’

우승이란 글자가 새겨진 생화 목걸이였다.

“이건…….”

“나도 입장이 있어서 상패는 못 주고.”

그가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뺨을 긁었다.

“그대로 대련을 이어 갔다면 아마 내가 졌을 테지.”

대항전도 다 끝났는데, 적당히 좋게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겸손의 말을 내뱉으려던 나는 문득 우람한 칸의 몸집을 마주했다.

“나도 내가 이길 것 같았어.”

근육에 기가 눌린 내 입은 오늘도 뇌의 명령에 반항했다.

“정말이지 그 말본새는 어디 가지를 않는군.”

뿌득, 순간 칸에게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마에 혈관이 돋아났다가 사라진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

푹, 거대한 손이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그런 선택은 못 했을 거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유순한 목소리였다.

잠깐 나를 일별한 그가 등을 돌렸다. 교복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뒷모습이 멀어졌다.

“내년에 다시 제대로 붙지.”

악담이었다.

지난번의 밀러 워든이나, 저 진화한 괴력 곰돌이나. 왜 자꾸 내년을 기약하는 거야.


발로 바닥을 팍 구르고 있을 때, 또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세.”

굳은 표정의 밀란느 학장님이었다.

#<92 화>

올 게 왔구나 싶은 심정이 된 나는 얌전히 학장님의 뒤를 따랐다.

학생들의 안위를 우선시했지만, 결과적으론 우승을 코앞에 두고 실격.

이에 대한 학장님의 반응이 어떠할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드르륵.

학장 전용 마차에 오르자, 아카데미 방향으로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둘만 탑승한 마차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잠자코 창밖만 바라보던 밀란느 학장님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

“밤이 늦으면 아마 마도구의 마력이 떨어질 테지. 어떤가, 숨기고 지낼 만한가?”

“가끔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기숙사에 콕 박혀 있다는 전제하에.

그를 끝으로 다시 마차에 정적이 스며들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배경음 삼을 즈음, 학장님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움직였다.

“벤디 학도.”

“네, 말씀하세요.”

“굳이 자네가 나서서 마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위험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네. 그곳에는 판상 정도야
원거리에서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이가 많았으니까.”

그녀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꾸중했다.


“더군다나 우리 학생들은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는 이들이지. 기껏해야 몇 명 정도 긁힌 상처만
입고 끝났을 게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몸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

‘아까 의무실에서처럼 혼나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는 와중, 그녀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허나.”

“……?”

“잘했다.”

흠칫.

쓴소리를 각오하며 무릎만 매만지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때로는 우승보다 값진 것이 있느니라.”

밀란느 학장님은 여전히 옆모습을 보이며 부연했다.

“자네가 살던 초식 수인의 영역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육식 수인의 영역은 어딜 가도 호전적인 기운이


맴돌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전란 발생 빈도도 초식 수인보다 육식 수인의 영역이 훨씬 높다고


들었으니까.

“인의도 잊은 채 아득바득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고. 어떨 때는 학장이란 자리에 있는 나


또한 인의를 잊곤 하네. 그렇기에,”

나와 시선을 맞춘 학장님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승보다 가치 있는 실격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똑같이 느꼈을 테지.”

“밀란느 학장님…….”

“그러니 자네도 그리 죄지은 얼굴하고 있을 거 없어.”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싶었던, 내내 명치를 누르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처음 듣는 학장님의 따스한 어조 때문인지 눈물마저 핑 돌았다.

킁. 조용한 공간에 코를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장을 뚫어져라 보며 눈물을 삼킬 때,

“설마하니 그 오만방자한 세 놈이 단상에 난입할 줄이야.”

속삭임에 가까운 학장님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전전긍긍하는 꼬락서니를 구경하는 내 속이 아주 즐겁다.”

꼴좋구먼,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굴던 교만한 것들이.


마지막에 덧붙인 욕설만 겨우 알아들은 내가 되물었다.

“학장님, 조금 전에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큼, 큼. 헛기침한 밀란느 학장님이 티 나게 말을 돌렸다.

“다만, 실격은 실격이니 학도들 속이 말이 아니겠지. 그러니 하계 연회 개최를 허가할 셈이네.”

“정말요?”

“그래, 학생회에서 살뜰하게 준비해 보게.”

반색한 나는 한시름 놓았다. 아직도 주최 측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육식 수인들을 가라앉힐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리고 벤디 학도 자네도.”

소파에 편안히 몸을 묻은 밀란느 학장님은 지팡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우승했을 시에 내게 부탁하고픈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들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희망에 부푼 내가 냉큼 물었다.

“들어주시려고요?”

“우선 내용부터 듣고 난 후에 결정하지.”

“음…….”

뒷말을 흐린 나는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꼭 들어주시는 게 아니면 말씀드리기 곤란한데. 제 비밀만 빼앗기는 느낌이에요.”

이마 근육을 씰룩인 학장님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사슴 일족이 이리도 영악했던가?”

어투야 여유롭지만, 꽤나 궁금한지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 명예에 누를 끼칠 우려가 있는 부탁만 아니면 들어준다고 약조하지.”

“학장님께 어려운 부탁은 절대 아닐 거예요.”

“그래서, 말해나 보게.”

됐다. 몰래 주먹을 움켜쥔 내가 본론을 꺼냈다.

“하계 방학 동안…… 사자 영역에 다녀오고 싶어요.”

“시세온 말인가?”

“네, 정확히는.”
잠시간 뜸 들인 나는 곧 또박또박 말했다.

“그곳에 있는 이스단 가문이요.”

일순 밀란느 학장님의 물색 눈동자가 짙은 색채를 띠었다.

“이스단 가문이라…….”

턱을 매만진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이스단 가문에 연락을 취해 주면 되겠나?”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이건 굳이 부탁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학생회장으로서도 연락할 수 있고, 아니면 헤일린 학도에게 직접


말하면 될 텐데.”

눈치를 살핀 나는 조심스럽게 뜻을 전했다.

“……헤일린 이스단에게는 알리지 않고요.”

‘헤일린 이스단의 혼담 상대가 벤디 학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구나.’

가능성이라 함은, 확실하지는 않다는 소리.

더군다나 만나고자 하는 이는 아직 혼담에 대해 모를 확률이 높은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었다. 이 이상한


혼담을 추진했을 이들이니까.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학장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혼담에 관해 추궁할지, 아니면 모른 척할지.

내심 긴장한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더불어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호오.”

밀란느 학장님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살필 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심산인 모양이었다.

“학도들 모르게 따로 이스단 가문에 연락을 취할 수야 있지만…… 그래도 부탁이라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군.”

“정확한 부탁은 그게 아니니까요.”

“그럼……?”

나는 품에서 꺼낸 물건을 뒷돈 내밀 듯 슥, 그녀를 향해 밀었다.


“이게 뭔가.”

받아 든 학장님은 이리저리 살피더니 미간을 굳혔다.

작은 손지갑이었다.

물론 속이 텅 빈.

“허…… 벤디 학도, 설마 지금 내게 돈을 내놓으란 소리냐?”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 영역과 아카데미를 오갈 여비가 없었다.

* * *

한편, S 클래스 전용 마차.

그중에서도 원과 레넌, 헤일린 그리고 야닉이 탑승한 마차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어이, 발 닦개들!”

야닉은 긴 장발을 뒤로 묶으며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부렸다.

“너희는 머리가 장식이냐? 어? 장식이야?”

머리가 최고의 장식인 야닉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으나, 누구에게도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은 무료한 손길로 마탑 관련 서류를 처리했고, 늘어진 레넌은 감흥 없는 얼굴로 가십지를 뒤적였다.

헤일린은 파리한 낯빛으로 창문에 몸을 반쯤 걸친 꼴. 마차 멀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행동이야 평소와 변함없지만, 속은 혼잡하게 꼬인 상태였다.

여유만 생겼다 하면 학생회장에게 날아들던 칸의 불줄기, 그리고 마법 경로를 바꾸던 학생회장의 모습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 느낀 섬뜩할 정도의 초조함. 그리고 아직 정의를 내리지 못한 낯선 감정이 뒤섞여 가슴 언저리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회장이 두르고 있었던 게 그 뭐냐, 마법 방어용 로브 아니냐고.”

없는 존재 취급하는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야닉이 빽빽거렸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그거면 웬만한 치명상은 막아 낼 텐데, 뭐 걱정이라고 네놈들이 단상에
난입하는데!”

헛구역질을 반복하던 헤일린은 퀭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성가시네, 저거.

‘밖에 꽂아 버릴까.’
그러한 고민을 꿈에도 모르는 야닉은 발로 마차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설령 칸 그 곰 자식의 마법이 로브를 뚫는다 쳐도 뭐가 문제냐고. 대련에 임하다 보면 다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뭘 신줏단지 모시듯 오두방정 떨고 있어!”

신줏단지.

듣는 시늉도 안 하던 원과 레넌, 헤일린의 시선이 돌연 야닉에게 모였다.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게 된 야닉은 저도 모르게 방어하듯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주눅 들지 않은 채


꽥꽥댔다.

“왜, 뭐! 너무 맞는 말이라 놀랐냐?”

놀랍게도 너무 맞는 말이었다.

야닉한테 머물러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곧 서로에게 옮겨 갔다.

“…….”

머릿속이 학생회장으로 가득 차서 미처 놓친 사실.

야닉의 주장대로 학생회장이 보호 대상이든 뭐든 그 정도로 감싸고 돌 필요는 없었다.

학생회장이 여우 수인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런데 칸의 마법이 학생회장을 덮치는 순간, 세 사람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단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일말의 망설임 따위 갖지 않은 채.

이상하지 않나.

서로를 살피는 원과 레넌, 헤일린의 눈에 선명한 날이 서렸다.

그들은 가깝거나 살가운 사이는 아닐지언정, 아카데미에서 몇 년을 같은 공간에서 부대껴 왔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질 심성 고운 자는 이 자리에 없음을. 심지어 야닉의 말대로, 육체 튼튼한


육식 수인을 신줏단지 모시듯.

그렇다는 건, 이 약아빠진 맹수들이…….

‘대체 언제부터?’

원의 금안이 가늘어지고,

‘나만 아는 게 아니었네.’

레넌의 입술이 비틀리고,

‘눈치만 빨라서는.’

헤일린의 눈매가 삐딱해졌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카데미에 숨어든 사슴에 대해.


#<93 화>

폭풍 같은 대항전이 끝나고도 삼 일이 흘렀다.

그 삼 일간, 마법부 교수들의 기분은 나날이 고공행진을 이어 갔다.

결과만 실격일 뿐, 사실상 칸 팰드로를 꺾은 실력자.

학생회장인 만큼 비교적 협조적인 인재.

골칫덩이인 마개동이 유일하게 따르는 자.

벤디 레피라는, 마법부에 드디어 내로라할 인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특히 교수들 사이에서 평판이 바닥을 치던 리리 교수에 대한 호감도가 하늘을 찔렀다.

“우리 막둥이, 어찌 그런 인재를 만들어 냈나? 자네가 해낼 줄 알았지!”

“더러운 수염 비비지 마세요, 코앞에서 더러운 입김 뿜지도 마시고.”

“앙탈 부리는 것마저 예쁘기도 하지.”

마법부 교수들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판다의 눈 밑 그늘도 깊어졌다.

한편, 학생회실에도 여름이 찾아들었다.

냉각 마법을 걸어 준 메이지가 마개동 부실로 떠나고, 끄적끄적, 벽보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던
벤디는 문득 너른 학생회실을 응시했다.

적막하다.

소파에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킥킥대며 가십지를 읽는 백호가 없었고, 세상 고고한 외모와 태도로 선반을
뽀독뽀독 닦는 늑대가 없었다.

그리고 제 갈색 배낭을 빵빵하게 채우는 새끼 사자의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벤디는 행방이 묘연한 명예 학생회 임원들을 상기했다.

노란 짐승이야 대항전 전부터 자신을 피하고 있고.


남은 삼인방은 대항전 당시에는 너무 흉흉한 기세라,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삼 일 동안 얼굴을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교내에서 헤일린 이스단을 찾는 거야 원래 하늘의


별 따기고.

양손에 턱을 괸 벤디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형형하게 쳐다보던 세 사람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대항전에서 뒤를 좀 맡긴 일이…….’

그렇게나 화낼 일이야? 발길마저 뚝 끊을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어째 입학 초처럼 외로운 도토리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런 벤디의 고뇌를 읽은 안나는 탁탁,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신경 쓰이면 먼저 찾아가 봐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흉악한 육식 수인들이 사라져 주면 속이 다 시원하지. 딱 잘라 대답한 벤디가 다시 펜대를 잡았다.

안나는 새침하게 시치미 떼는 벤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마에 몹시 신경 쓰인다고 적혀 있었다.

안경을 추켜올린 그녀는 선심 쓰듯 세 사람을 찾아갈 명분을 내어 줬다.

“가서 데려와요. 야닉 펠과 다르게 없으면 학생회에 손해인 분들이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냉큼 승낙한 벤디가 펜을 내려 뒀다.

“…….”

그러나 선뜻 일어나지는 못했다. 막상 찾아가려니 혹시 또 그 선득한 분노를 마주할까 두려움이


밀려왔기에.

꿀꺽.

“뭐 엄청난 일이라고 비장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어요? 빨리 나가요.”

마른침을 삼키기 무섭게 안나의 일갈이 돌아왔다.

매정한 괴력 곰돌이. 결국 몸을 일으킨 벤디는 만들고 있던 벽보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럼 시간 나면 교내 곳곳에 이 벽보를 좀 붙여 줄 수 있어요? 중요한 거라.”

“이게 뭐죠?”

벽보를 받아 든 안나는 제법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계 연회 개최 공지인가요? 제법인데요,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흘러나오던 칭찬이 뚝 멎었다. 벽보의 정체를 알게 된 진녹색 눈동자가 옅게 진동했다.

“부탁할게요, 그럼.”

삼인방을 찾아가야 하는 긴장으로 머릿속이 꽉 찬 벤디가 종종걸음 치며 학생회실을 나섰다.

덩그러니 남겨진 안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벽보를 내려 봤다.

‘이걸 붙이라고?’

헤일린 이스단한테…… 죽을 것 같은데…….

두툼한 벽보 뭉치를 그러쥔 손이 잘게 떨렸다.

* * *

아카데미 소속 학생이자 마탑 대리인.

그 특수한 지위로 인해, 원은 재학생 중 유일하게 집무실을 제공받는 특혜를 얻은 인물이었다.

지난 삼 일.

원은 오랜만에 집무실에 연달아 출석하는 중이었다.

안락한 의자와 넓고 고급스러운 책상, 함께 입학하여 업무를 보조해 온 마탑 직속 수행인까지.

업무 능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쾌적한 공간이었다.

수행인은 밀린 서류를 처리하는 원을 곁눈질했다.

이런 집무실을 두고 시끄러운 학생회실에서, 심지어 책상 하나 제공받지 못한 채 소파에 구겨져 업무를


처리하더니.

드디어 외출했던 제 주인의 정신이 귀가한 모양이었다.

수행인의 짠한 시선을 눈치챈 원이 물었다.

“할 말이라도?”

“아뇨, 그저…….”

말꼬리를 흐린 수행인은 학생회실에 들렀을 때 본 충격적인 장면을 상기했다.

서류를 읽으며 먼지떨이로 야닉 펠을 청소하던 제 주인의 모습을.

“이제 학생회실에는 가지 않는 겁니까?”

“안 가.”

“정말요?”

“그래, 다시는.”
더 이상 그 가련한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난 수행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기쁩니다.”

난데없이 벅차오른 수행인을 무시한 원이 업무를 이어 갔다.

서류 위를 능숙하게 유영하던 펜이 일순 멈칫했다.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빈 공간이 생겼다 하면 그곳을 벤디가 채웠다.

후. 잠깐 뒤로 기댄 원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벤디는 의문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우선은 그 비상할 정도로 대단한 마력.

‘그런 마력을 갖고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어린 날 처음 마주쳤을 때도, 그리고 아카데미 학생회장으로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티도 나지 않던


마력이 이제야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혼담.

그 빌어먹을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원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이틀 전 밤, 스카론 장로로부터 전달받은 보고.

[원 님! 지난번에 벤디 님이 가문을 나온 이유가 혼담인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혼담


상대가…… 이상, 이상합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누군데 그래?’

답지 않게 당황한 스카론은 원의 눈치를 살피며 떠듬떠듬 본론을 꺼냈다.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 확실치는 않지만, 혼담 가문이 이스단 가문, 치직, 이라고, 치지직.]

빠각, 뭉그러진 스카론의 얼굴과 함께 두 번째로 들인 통신구마저 원의 손에서 생을 마감했다.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상기하자마자 원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금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세상이 아무리 우연 아래 돌아간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딴 공교로운 접점이 있을 수 있는지.

그나마 다행인 건 벤디와 헤일린 이스단은 서로가 혼담 상대임을 모르는 눈치인 점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데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쓸데없이 들쑤셔서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그 숙부라는 자가 이스단 가문과 결탁한 건가.’

그 작자가 육식 수인과의 혼담을 추진했고, 벤디 레피가 아카데미로 도망 왔다. 그렇게 가정하면 앞뒤가
어느 정도 맞았다.

추측하다 말고 짜증이 치민 원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성마른 숨을 뱉었다.

‘혼담?’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다 못해 뱃속이 들끓었다. 벤디를 만나는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거기다가 사슴인 사실을 파악한 게 분명한 그 두 고양이까지.

툭, 툭, 긴 손가락이 일정 박자로 책상을 두드렸다.

막연히 벤디가 기억을 되찾기를 기다리기에는 주변에 거슬리는 게 너무 많았다. 더욱이 원의 인내심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뭐부터 없애 버려야 할까.

그가 답지 않게 평정을 잃은 가운데, 수행인은 문으로 다가갔다.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기에.

끼이익, 문을 연 수행인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

문고리를 잡은 그가 미동을 보이지 않자, 의문이 인 원이 물었다.

“누구지?”

“아, 그게…….”

그제야 깜짝 정신을 차린 수행인이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학생회장입니다.”

문 앞에는 삼 일 만에 보는 벤디가 서 있었다.

원과 수행인의 눈치를 살핀 벤디는 시험 삼아 한쪽 발끝을 착, 집무실에 들였다.

딱히 환영하는 기색은 아닌 데 비해, 두 사람에게서는 별다른 제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몸 전체를 다 들여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용기를 얻은 벤디가 조심조심 원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원은 가까워지는 벤디를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대로 직행해서 오면 되는데, 굳이 벽을 따라 빙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시간을 벌어 마음을 다잡으려는 의도겠지.

처음 학생회실에서 저 모습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런 기다림이


아무렇지 않은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긴 여정을 끝마친 벤디가 드디어 원의 집무 책상 가까이 다다랐다.

“…….”

“…….”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머물렀다.

뒷짐 지고 선 벤디는 첫 마디를 꺼내지 못한 채 눈을 도르륵 굴렸다. 지독할 정도로 오만한 황금색


눈동자는 삼 일 만에 봐도 여전했다.

멀찍이 자리한 수행인은 이상할 정도의 긴장감에 목울대를 울렁였다.

오랜 정적 끝에, 원이 먼저 고요를 깨뜨렸다.

“찾아온 이유는?”

차마 눈을 쳐다보지 못한 벤디는 칠흑처럼 까만 원의 흑발을 응시했다.

대항전 때 도와줘서 고맙다?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여러 선택지를 생각하며 왔는데, 막상 오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여전히 원의 기세가 집어삼킬 듯 흉흉하다는 것. 이제 와 그때의 일을


꺼냈다가는 더 큰 분노가 돌아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단 게걸음으로 접근한 벤디는 책상에 올려진 원의 손목을 슬그머니 그러쥐었다.

“…….”

하얀 손이 제 손목을 감싸는 순간 원의 머릿속이 부옇게 번졌다.

이깟 접촉이 뭐라고, 내내 그를 괴롭히던 혼담이든 뭐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데리러 왔어요.”

살짝 잡아당겼음에도 원의 몸이 딸려 오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끔.

앞서가던 벤디는 저항 없이 뒤따라오는 원을 살폈다.

‘……순순히 따라오네?’

밉살맞은 말만 뱉던 뚫린 입도 가지런히 다문 상태였다.


수행인은 쪼그만 학생회장에게 손목을 붙잡혀 끌려가는 제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심지어 원은 벤디가 손목을 붙잡기 쉽도록 큰 키를 구부정하게 굽힌 모양새였다.

‘지금…….’

직접 데리러 왔다고 저렇게 맥도 못 추고 따라간다고? 학생회실에 청소나 하러?

‘방금 전만 해도 다시는 안 갈 거라며 이 가셨잖아요.’

수행인이 주춤거리며 손을 뻗어 봤지만, 반항기가 끝난 똥개는 데리러 온 주인을 따라간 후였다.

#<94 화>

입에서 부연 연기를 내뿜은 밀란느 학장과 그녀의 비서가 같은 곳을 응시했다.

학장실 손님용 소파.

그곳에는 삼 일째 무척추동물처럼 늘어진 레넌이 있었다. 좋아라 하던 가십지마저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꼴이었다.

저놈 왜 저러냐.

글쎄요…….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아도 별다른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밀란느 학장의 눈썹이 아니꼽게 치켜 올라갔다.

‘쯧,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 저러는지.’

풀리지 않는 게 있으면 아예 포기하고 늘어져 버리는 습성은 여전했다.

“나가거라, 레넌. 네놈이 그리 뻗어 있으니 오던 손님도 도망가지를 않느냐.”

소파에 등을 기대어 늘어진 레넌은 느릿하게 시선만 움직였다. 늘 웃음 속에 감춰져 있던 무감한 물색


눈동자가 학장을 향했다.

“밖은 더운걸.”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한 그가 다시 천장을 올려 봤다.


밀란느 학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벌하구먼.’

실실거리던 평소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인 행태.

실상 저게 레넌의 원래 모습이었다.

그녀가 레넌을 에던트 가문에서 아카데미로 빼 온 후, 오 년쯤 지났을 때부터야 습관적으로 웃기 시작한


거니까.

에던트 가문은 사람을 비틀리게 만들기 딱 좋은 곳이었다.

육식 수인의 영역에서도 가장 약육강식에 충실한 장소. 약한 자는 매일같이 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밀란느가 가주에 의해 신전에 보내진 레넌을 마주쳤을 때, 레넌은 이미 에던트 가문에 물들대로 물든
후였다.

‘에던트 가문의 직계를 왜 감옥에 가둔 거지?’

‘그, 자신을 신전으로 데리고 온 가문 식솔의 다리를 베어서…… 저희로서는 통제하기가…….’

고작 아홉 살 난 어린아이가 삶과 죽음에 무감각하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레넌에게 드리워진 에던트 가문의 그림자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밀란느 학장의 눈길이 레넌의 허리춤에 머물렀다.

아카데미가 안전한 곳임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늘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검이 그를 증명했다.

‘……저 성미를 누가 감당할꼬.’

언제 날뛸지 모르는 목줄 없는 사냥개 같다고 해야 할까.

혀를 차던 밀란느는 천천히 문으로 눈길을 옮겼다.

아까부터 문밖에서 들어오지 못한 채 복도를 서성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게.”

밀란느 학장의 목소리에 서성이던 기척이 뚝 멎었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벤디가 눈부터 내밀었다. 학장실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곧 소파에 닿았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원을 학생회실에 가두고, 뒤이어 레넌을 찾아낸 벤디가 학장실에 들어섰다.

“벤디 학도,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

흘끔, 레넌을 곁눈질한 벤디가 학장에게 대답했다.

“레넌을 데리러 왔어요.”

“아주 잘 왔다.”

제발 좀 데려가라, 저 놈팡이.

그러한 눈빛을 보낸 밀란느 학장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벤디는 레넌이 늘어져 있는 소파 뒤로 돌아갔다.

고개를 꺾고 있는 레넌과 뒤에서 내려 보는 벤디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어둑한 물색 눈동자를 마주한 벤디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화가 나서 그런가 싶었지만,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랐다.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한 감각을 삼킨 벤디가 입술을 뗐다.

“레넌, 데리러 왔어.”

빤히 시선을 맞추던 레넌은 이내 고개를 바로 했다.

‘또…….’

휘둘리는 느낌.

바닥을 치던 기분이 저 담담한 얼굴 하나 본 걸로 나아지고 있었다.

물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언제부턴가 학생회장에 대한 감정이 재미를 넘어섰음을 알고 있었지만, 대항전을 기점으로 인지했다.

과한 감정이었다.

그때의 그 초조함. 머리로 채 생각하기도 전에 단상으로 난입한 제 몸.

낯선 감정으로 인해 몸이 통제를 벗어난 느낌은 다시 생각해도 별로였다.

사슴인 사실을 저만 아는 게 아니란 걸 알았을 때의 실망감은 또 뭔지.

알량한 소유욕으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내가 졸업을 허가할 때까지는 네 멋대로 에던트 가문에 돌아갈 수 없다, 약조하거라.’

어린 날, 가주의 손에 죽었을 그를 밀란느가 아카데미로 데려오며 내건 조건, 졸업.

드디어 졸업을 허락받고 에던트 가문으로 돌아가, 가주의 머리를 치는 날이 코앞인데.


‘그걸 포기한다고?’

고작 몇 개월짜리 감정으로 이를 미루고 싶어지는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레넌이 입술을 매만졌다. 번거로운 감정 따위는 없는 게 나았다.

“……레넌?”

은색 뒤통수는 미동이 없었다.

노골적인 무시에 조금 무안해진 벤디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장과 비서는 멀리서 무언의 수신호를 보냈다.

‘강하게 나가라.’

한마음 한뜻이 된 두 사람이 쉭쉭,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어떻게 그래요.’

얼굴에 핏기가 가신 벤디는 휙휙,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놈은 좋게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우리를 믿어.’

학장과 비서가 진지하고도 확신에 찬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의 등쌀에 못 이긴 벤디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시에 꽝! 주먹으로 레넌의 정수리를 찍었다.

“……!”

일순 학장과 비서의 표정에 경악이 번졌다.

물리적 강함을 뜻하는 수신호가 아니었는데.

두 사람은 뒤늦게 자신들이 후려치듯 주먹을 휘둘렀단 사실을 깨달았다. 스르륵, 그들은 모른 척 주먹을
풀며 뒷짐 졌다.

일말의 살기도 없는 공격이라, 피할 생각조차 못 한 레넌이 벤디를 돌아봤다.

“무슨…….”

“데리러 왔다니까.”

얼빠진 레넌은 솜방망이에 맞은 것 같은 정수리를 짚었다.

머릿속을 점령하던 잡념을 깨끗하게 날려 버린 한 방이었다.

뭔데 짜릿하지.

맥락 없는 생각이 채 이어지기 전, 슬그머니 접근한 벤디의 손이 그의 손목을 당겼다.

“학생회실, 안 가?”
레넌의 시선이 제 손목을 붙든 손과 긴장 어린 벤디의 표정을 오갔다. 사슴치고는 제법 용기 낸 육식
수인과의 접촉이었다.

“…….”

레넌에게서 허한 숨이 흘러나왔다.

손목에 닿은 온기를 한 번.

말간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볼수록 이미 자리 잡은 감정을 밀어내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핑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학생회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학생회장석에 벤디가 앉아 있는. 적어도 그 시간 동안은 이곳에 남아


있고 싶었다.

순순히 딸려 일어난 레넌이 여상한 미소를 지었다.

“회장.”

쌀쌀맞게 굴 때는 언제고, 급변한 태도에 움찔한 벤디가 경계하며 물었다.

“왜?”

“이왕 끌고 갈 거면 타이를 잡고 끌고 가 줘.”

“……왜?”

그는 벤디의 손을 제 목 언저리에 가져가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짜릿할 것 같아서.”

으.

뭐라는 건지. 벤디가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청순함이 얼굴에서 머리까지 번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혹여 안 간다고 변덕을 부릴까, 레넌의 교복 타이를 단단히 붙든 벤디는 학장과 비서에게 꾸벅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 살펴 가거라.”

그런 이상한 꼴을 하고 예의를 챙길 정신도 있고.

심정이 조금 복잡해진 밀란느 학장은 학장실을 나서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레넌이 말했다.


“내년으로 졸업 유보.”

일방적으로 통보한 그의 은색 머리통이 문틈 너머로 쏙 사라졌다.

탁, 학장과 비서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조기 졸업, 조기 졸업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코앞인 졸업을 미루겠다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저놈이.

여전히 넋 나간 상태인 밀란느 학장이 중얼거렸다.

“사냥개에게…… 목줄이 생겼구먼.”

심지어 목줄을 쥔 사냥꾼은 수줍은 얼굴로 학장의 지갑을 털어간 도둑 사슴.

비서는 외알 안경을 매만지며 첨언했다.

“먹이는 고구마일까요.”

“일리 있는 추측이군.”

학장과 비서의 눈길이 레넌이 사라진 자리에 길이길이 머물렀다.

* * *

늦은 오후.

탁, 아카데미 담장을 넘은 노란 짐승에게서 화한 빛이 일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헤일린은 기지개를 쭉 폈다.

천천히 움직인 붉은 눈동자가 학생회실이 있는 건물에 닿았다. 동시에 밤새 도박장을 전전해도 사라지지
않던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과연 이 이상 노란 짐승으로서 학생회장과 지내도 될까.

“…….”

헤일린의 눈앞에 여우가 아닌, 밀색 머리카락을 한 벤디가 스쳤다.

학생회장은 사슴인 만큼 육식 동물인 노란 짐승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 애썼다.

‘사자…… 내가 사자를 데리고 다녔다니……. 그것도 이스단 가문의 사자를…….’

특히 이스단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어떠했나.


배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방 뚜껑을 집게 핀으로 죄다 고정해 두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앞발로 집게 핀을 빼지 못한 당시의 패배감을 상기하던 헤일린은 문득 제 콧등을 문질렀다.

‘어디 외간 짐승한테…….’

학생회장이 노란 짐승의 콧등에 입을 맞추며 보인 눈빛. 그건 분명한 애착이었다.

학생회장과 붙어 지낼 명분이 생길수록 헤일린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왜 짜증이 나지.’

성에 차지 않는 기분.

이 찝찝한 기분을 떨칠 때까지는 노란 짐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뻐근한 목을 풀며 아카데미 본관에 들어서던 헤일린이 발길을 멈췄다.

“헤, 헤일린 이스단이다.”

“뭐? 어디?”

그가 들어서는 순간 입구 복도에 있던 학생들의 분위기가 급변했기에.

딱히 누군가 입을 연 건 아니지만, 작은 술렁임이 번지고 있음은 확실했다.

‘뭐야?’

평소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피하더니.

의아함도 잠시, 헤일린이 걸음을 옮기자 학생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인파가 흩어지며 그들이 둘러싸고 있던 벽보가 드러났다.

게시판 앞에 도착한 헤일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무슨…….’

얼굴을 표현하는 큰 동그라미 한 개와 다리와 꼬리는 그리다가 만 수준. 삐뚤빼뚤 그린, 형편없는
초상화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94 화 삽화

그는 북, 뜯어내다시피 게시판에 붙은 벽보를 잡아챘다.

[노랑이를 찾습니다.]
학생회장 직인이 찍힌 노란 짐승 수배지였다.

#<95 화>

수치스럽다.

그리고 진짜 못생겼다.

그게 첫 감상이었다.

머리만 한 무더기인 초상화를 내려 보는 헤일린의 눈매가 점점 쪼뼛하게 변했다.

‘어딜 봐서 이게 나야.’

세상에 어떤 새끼 사자의 머리가 몸통보다 큰데. 심지어 다리는 또 왜 이렇게 짧은 건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흉측한 초상화를 보는 와중, 복도 끝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랑이를 찾습니다? 벽보를 붙여 보라 했더니 이걸 진짜 붙였어?”

마침 지나가던 리리 교수가 다른 벽에 붙은 벽보를 손가락질했다.

“와하하하! 성질 나쁘게 생긴 게, 으하하! 헤일린 이스단이랑 판박이…….”

폭소하던 그는 짐짓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헤일린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리리 교수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소형 통신구를 꺼냈다.

“예, 생텀 교수님. 이런, 시험지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지금 바로 가는 중입니다.”

아무도 통신을 걸어 오지 않은 통신구를 귀에 댄 그가 뚜벅뚜벅 멀어졌다.

끓는 분노를 삼킨 헤일린은 다시 벽보를 읽어 내렸다.

[특징 : 몸에 가시랭이를 자주 붙이고 다니며, 굉장히 성질이 고약하니 주의 요망(특히 야닉 펠은 접근


금지)]
휘갈긴 그림에 비해 꼼꼼하기 짝이 없는 글씨가 부조화를 이뤘다.

그저 그림 솜씨만 유달리 남다른 모양이었다.

뒤따른 내용은 자기가 다 잘못했고, 입 간수를 잘하겠다는 호소문.

입 간수. 순간 제 코에 다가오던 입술을 떠올린 헤일린은 왠지 목 뒤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노랑이를 발견한 분은 꼭 이 말을 전해 주세요.]

노란 짐승을 발견하는 학생들은 학생회장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전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

미묘한 심정으로 벽보를 읽어 내려가던 그가 짐짓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학생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평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꺼리던 반응과는 몹시 달랐다.

‘포획이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그러나 시선만 줬다 하면 휙휙 피하는 걸 보아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 왜 안 가고 자리를 지키는 건지.

헤일린의 의문이 짙어질 즈음, 학생들 사이에서 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쯤 가출했으면 돌아가시지.”

클래스메이트인 라일라였다.

“안 그래도 강의 때 애 얼굴색도 수척하던데.”

뚱하게 내뱉은 라일라가 덩치 큰 남학생의 뒤로 슥 숨었다.

헤일린의 눈길이 닿은 남학생이 결백하단 듯 손을 내저었다.

“저, 저 아닙니다!”

뒤이어 구석에서 메이지를 비롯한 마개동 부원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어떻게…… 마물 사냥용 마도구로 잡으면 포획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부장, 목숨과 맞바꿔야 되겠지만 저희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맞아요, 학생회장이 안쓰러워요.”

다 들린다.
심지어 저 음침한 작당에 동조한 몇몇 학생들이 슬그머니 마개동 무리에 끼어들었다.

타박타박, 서적을 품에 안고 걸어가던 신시아는 헤일린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밤마다 기숙사 문 앞에 빈 배낭을 두던데.”

“…….”

“그냥, 알아 두시라고.”

싸늘한 보라색 눈동자가 헤일린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헛웃음이 새어 나온 헤일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돌아가라, 노랑이 이스단.

그러한 의미가 담긴 이글이글한 눈빛이 제게 쏟아지고 있었다.

고작 벽보 하나로 합심하여 그를 몰아붙이는 꼴이었다.

‘언제부터 학생회장을 챙겼다고.’

대항전 이후 묘하게 학생회장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다, 노랑이 이스, 아아악!”

수배자를 잡기 위해 뛰어들던 야닉이 그대로 빗자루처럼 바닥을 쓸었다.

한 손으로 쉽게 야닉을 집어던진 헤일린은 뒤를 돌아봤다. 붉은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노랑이, 또 잡을 사람.”

“…….”

학생들은 이미 흩어지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삼인방 포획 작전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어느덧 교정에 붉은 노을이 졌다.

화상과 밉상은 어찌어찌 따라왔으니, 이제 남은 건 큰 진상과 작은 진상인데…….

헤일린 이스단은 원래 아카데미에서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노란 짐승도 막상 찾아 나서려니 앞이 깜깜했다. 늘 먼저 찾아와 내 배낭에 몸을 욱여넣고 있었으니까.

휴. 학생회실 앞에 다다른 나는 허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이 이상 교정을 돌아다니며 찾기에는 위험 부담이 따랐다.


마도구의 마력을 생각하면, 최소한 저녁에는 기숙사에 있어야 안전하니까.

‘고작 사자 두 마리 찾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찰칵,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내가 발을 멈췄다.

적막한 학생회실.

내 자리, 그러니까 학생회장석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의자에 안락하게 기대어 졸고 있는 헤일린 이스단이었다.

맥이 탁 풀린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원이나 레넌처럼 서식지가 정해진 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 이 넓은 아카데미를 이 잡듯 뒤지고 왔는데.

정작 본인은 여기서 편안하게 늘어져 계셨겠다.

‘누가 진상 아니랄까 봐……!’

한껏 억울해진 내가 쿵쾅거리며 학생회장석으로 다가갔다.

꿀밤을 먹일 각오로 의자 가까이 왔지만, 손만 움찔움찔 떨던 나는 그냥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걸로


대신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짓은 추호도 사양이었다.

털썩,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그대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지친다.

어떻게 된 게 삼인방을 찾아다니는 일이 대항전보다 더 힘들었다.

날도 더운데 노을이 질 때까지 교정을 쏘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

다리를 달랑거리며 창문으로 스민 석양을 보고 있자니, 문득 헤일린 이스단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넌과 원도 늘 떠오르는 분위기가 있었다. 호수나 밤 같은. 안나는 넓은 숲이었다.

그럼 난…….

‘……고구마 밭?’

너무 멋이 없는데.

책상에 앉아 실없는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헤일린을 내려 봤다.

언제나 예쁘긴 해도 살짝 찢어진 눈꼬리 때문에 조금 무서웠는데.

가지런히 눈을 감고 있으니 특유의 사나운 느낌이 아예 없었다.


오히려 유순한 느낌마저 줘서 경계심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무심코 관찰하던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언제 왔어?”

“아까. 네가 불렀잖아.”

“부른 적 없…… 안 자고 있었어?”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내가 되물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쯧 혀를 찼다.

“냄새 때문에 잘 수가 있어야지.”

“무슨 냄새?”

일순 당황한 나는 손목과 옷에 코를 박았다.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육식 수인은 초식 수인보다 냄새에 예민한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 아니야.”

“너 아닌 걸로 해, 그보다.”

대수롭지 않게 답한 헤일린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벽보를 꺼내 들었다.

“당장 회수해, 이거.”

안나가 교내 여기저기에 부착한 노랑이 수배 벽보였다.

“왜?”

“알아서 돌아올 거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벌써 열흘이나 나를 피하는데.”

“그 사자가 내일 돌아간다고 말했어.”

“…….”

“-앞발로.”

호언에 가까운 발언을 들은 내가 불신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노란 짐승과 헤일린 이스단은 무슨 관계인 건지.

이 못된 사자가 일방적으로 노란 짐승을 방치하는 거라고 여겼는데, 또 만나긴 하는 것 같고.

수상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으니, 그가 설렁설렁 무성의하게 벽보를 흔들었다.

“이게 그렇게 좋아?”

탁, 벽보를 빼앗은 나는 헤일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거라니, 아무리 봐도 노란 짐승에 대한 태도가 글러 먹었지 않나.

뭐가 됐든 노란 짐승을 곱게 대하지 않을 거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눈꼬리를 세운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래, 좋아.”

“…….”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아.”

그와 동시에 헤일린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귓불 또한 묘하게 붉어졌는데, 마침 그를 비춘 석양 때문인 듯했다.

갑자기 말을 잃은 헤일린을 내려 보던 나는 아차 싶었다.

티격태격하려고 종일 찾아다닌 게 아닌데. 이 사자와 대화만 했다 하면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문제였다.

“아무튼.”

벽보를 잘 접어 주머니에 챙긴 나는 조금 뜸 들이며 입을 뗐다.

“……고마워.”

그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올려 봤다.

“뭐가?”

“그냥, 대항전도 그렇고. 여러모로.”

감사 인사에도 불구하고 헤일린은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한 듯, 감흥 없어 보인다는


표현이 맞았다.

“고마우면.”

이윽고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쓰다듬어 줘.”

개야 뭐야.

기가 찬 눈길로 쳐다봤으나, 아랑곳 않은 헤일린이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엔 막무가내로 만져 달라고 하더니, 이번엔 요구 사항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한 셈.

머릿속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나는 내 쪽으로 기운 백금발을 응시했다.

쓰다듬어 주기 전까지는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서운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자, 손끝에 머리칼이 닿았다. 생각 이상으로 부드러운 금발이 손끝에서
갈라졌다.

노란 짐승 쓰다듬듯 살살 쓸고 금방 손을 떼니, 고개를 든 헤일린이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짧아.”

나한테는 그게 최선이야.

모른 척 시선을 피하자, 그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료한 얼굴이 어째서인지 나른하게 풀어져 보였다.

“아, 맞다.”

누가 고양잇과 아니랄까 봐, 멀쩡한 출입구를 두고 창문에 올라선 헤일린은 비스듬히 몸을 틀며 말했다.

“다시는 배낭에 집게 핀 꽂지 마.”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그의 뒷모습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체 뭐라는 거람.’

매번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탁, 책상에서 내려서던 나는 멈칫했다.

‘집게 핀?’

혹시 배낭 뚜껑에 집게 핀을 꽂았던 일을 말하는 건가.

자연스레 고개가 헤일린 이스단이 뛰어내린 창문으로 향했다.

‘그때의 일은…….’

나랑 노랑이밖에 모르는 일이지 않나……?

#<96 화>

사자 영역, 시세온을 다스리는 이스단 가문.


그곳의 실질적 권력자는 가주도, 선대 가주도 아니라, 가주의 반려인 이스단 부인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정과 손대는 것마다 번창하는 사업.

더욱이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는 가주가 부인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다소곳해지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이스단 부인의 집무실.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틀었다. 통신구가 울리고 있었다.

삑, 수족이 대신 마력을 주입하자 통신구 속에 밀란느 학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스단 부인, 반갑…… 오늘도 여전히 멋들어진 자세구먼.]

“밀란느 학장님이시군요. 얼마 전에 헤일린의 문제로 연락을 하셨는데, 또 다른 일이 생겼나요?”

[음, 그게 말이네…….]

“저희 집 애물단지가 마음을 바꿔 혼담을 수락하기라도 했나요?”

[그건 아니고.]

고개를 저은 밀란느 학장이 뜸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계 방학 때, 이스단 가문으로 은밀히 아카데미 학생 하나가 갈 거요.]

“음?”

흥미가 돋은 이스단 부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학장께서 이리 직접 연락 주시는 걸 보면 평범한 학생은 아닐 듯한데.”

아암, 평범은커녕 비상할 지경이지.

짐짓 표정을 굳힌 밀란느 학장은 사슴의 뻔뻔한 행태를 떠올렸다.

손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줬는데도 모자랐는지, 슥, 교복 주머니를 살짝 열어 보이던.

요구할 건 다 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게 왠지 더 열 받았다.

한평생 학생에게 돈을 뜯겨 본 건 처음인 밀란느 학장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하튼 자세히 설명할 순 없고, 아마 부인도 만나면 누군지 알게 될 거요.]

학장은 벤디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에둘러 말했다.

벤디가 이스단 가문을 방문하고자 하는 게 혼담과 관련된 것 같긴 하지만, 뭘 의도하는지는 알 수 없기에.

[모쪼록 방문 사실을 부인만 알고 계시게.]

어딘지 초췌한 낯빛인 학장을 살핀 이스단 부인이 팔짱을 꼈다.

헤일린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재밌네요, 입단속 하도록 하죠. 어떤 학생인지 기대되는군요.”


[실망하진 않을 거요, 내 장담하지.]

약간 맛이 간 사슴 하나가 갈 테니까.

학장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조용히 삼켰다.

* * *

자잘한 상시 시험도 끝나고, 이제 하계 방학만 앞둔 시점.

그리고 몇 년 만에 재개되는 하계 연회를 앞둔 시기이기도 했다.

“외출증은 끊었어?”

“아니, 아예 의상가를 아카데미에 불러들였지. 이 기간 동안은 허락되잖아.”

“아, 맞다! 나도 그럴걸, 너무 오랜만이라 깜박했네.”

덕분에 학생들은 대항전의 설움을 까맣게 잊은 채 연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의상을 실은 마차가 오가고, 연회를 준비할 외부 고용인들도 아카데미를 들락거리는 현재.

학생회실은 대항전 직후의 고요는 거짓말인 것처럼 시끌벅적해진 상태였다.

신시아는 독서 삼매경에, 야닉과 안나는 왈왈대고, 메이지는 마개동으로 출석하고.

모두가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 가는 가운데.

“…….”

유일하게 나만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후. 심부에서부터 숨을 끌어 올린 나는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넌.”

“왜?”

내 시선이 책상 위에 누워 가십지를 읽는 레넌에게 머물렀다.

“너무 커서 걸리적거리니까 저리 가.”

가십지를 살짝 내린 그가 물색 눈동자를 깜박였다.

“무슨 소리야? 나 아담해.”

낭창하게 답한 레넌은 다시 가십지를 읽으며 키들거렸다.

‘웃기지 마.’

떡 벌어진 네 어깨를 생각하라고.


고양이들과 함께 자란 백호가 제 몸집을 고양이 크기라고 여기는 꼴과 다름없었다.

대체 왜 멀쩡한 소파를 두고 책상에서 이러는지.

부르르, 잡은 펜대를 떨던 나는 이번엔 반대편을 돌아봤다.

아예 의자까지 챙겨 온 원은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마탑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지긋이 노려보는 내 눈길을 느낀 원이 잠시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

침묵 속에서 불편한 시선이 오갔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원이 입술을 열었다.

“불만이라도?”

많지, 일단 비좁아 죽겠는걸.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쏘아붙였다.

“없어요.”

오늘도 방자한 내 입은 주인을 배반했다.

“그럼 왜 쳐다보는데요.”

“……좀 보고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안 돼요?”

“…….”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잠깐 굳었던 원에게서 이내 바람 새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특유의 비웃음이


분명했다.

원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서류 거꾸로 들었는데.’

정신을 어디에 두고 온 듯한 그를 쳐다보던 나는 이윽고 마지막 관문을 응시했다.

돌아온 노랑이였다.

헤일린 이스단의 주장대로 그다음 날 바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잠을 자는 위치가 책상 아래에서 위로


바뀐 거였다.

‘이게 뭐람.’

오른쪽에는 백호가 누워 있고, 책상 중간에는 새끼 사자가 늘어져 있으며, 왼쪽에는 오만한 늑대가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

심지어 보통 덩치여야지. 건장한 맹수들 사이에 끼이다시피 한 나는 깊이 고찰했다.

‘다투고 화해하면 거리가 가까워진다고들 하지만…….’


보통 심리적 거리감이지, 물리적 거리감은 아니지 않나.

이런 긴장 상태로는 업무고 뭐고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창고, 창고로 들어가야겠다.

점점 이성을 잃어 가던 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노란 짐승을 살폈다.

‘다시는 배낭에 집게 핀 꽂지 마.’

노랑이가 미주알고주알 말을 전하는 게 가능한 존재도 아닌데, 도대체 헤일린 이스단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무의식중에 치고 들어온 의심은 큰 진상과 작은 진상,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었다.

돌이켜 보면 헤일린과 노란 짐승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확단하자니…….

파바바박, 빠르게 흔들리는 강아지풀에 따라 앞발을 휘두르던 노랑이.

캬옹- 콧등에 내려앉은 나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노랑이.

털실을 갖고 놀다 온몸이 뒤엉켜 움직이지 못한 채 구원의 눈길을 보내던 노랑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 같아.’

지금껏 보인 노란 짐승의 행태들이 그 의심을 빛바래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라 일개 노랑이였다. 애초에 새끼 짐승은 수인일 수 없기도 하고.

따라서 가장 가능성 있는 의심은 교감.

정말 노란 짐승이 이스단 가문의 영물쯤 되는 거면, 같은 이스단 가문끼리는 의식이 통한다든가.

‘교감이 가능하면, 혹시 내 비밀 같은 것도 다 얘기하는 거 아니야?’

미심쩍은 눈초리로 노란 짐승을 관찰하던 나는 슬그머니 펜을 뻗었다.

은밀하게 책상 위를 이동한 펜 끝이 쿡, 노란 짐승의 엉덩이를 찔렀다.

순간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운 노란 짐승이 펄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탁, 레넌이 번개처럼 내 손목을 잡아채고, 그 사이에 원이 펜을 뺏어 들었다.

“뭐 해?”

“무슨 짓입니까.”

“그, 그냥…….”
얄미워서 한번 찔러 본 건데.

그러나 노란 짐승은 마치 엄청난 일을 당한 양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원과 레넌은 그런 노란 짐승에게 냉랭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가벼운 내 행동에 비해 전혀 가볍지 않은 맹수 셋의 삼파전을 마주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오로지 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창고…… 창고로 들어가야겠다.

* * *

보름달이 만개한 밤이었다.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벤디는 오랜만에 마구간을 찾았다.

끼이익, 나무 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예상대로 해피와 똘마니들이 덮쳐 오려는 즉시, 벤디는 들고 온 꾸러미를 머리 높이 들었다.

“나를 덮치면 다시는 이런 거 없을 줄 알아.”

빈약한 건초가 아닌, 사슴과 말이 먹을 수 있는 간식으로 가득한 꾸러미였다.

진격을 멈춘 해피와 말들을 마주한 벤디는 의기양양하게 배를 내밀었다.

밀란느 학장 덕분에 처음으로 지갑이 두둑해진 이상, 이곳에서 갑은 바로 이 벤디 레피였다.

푸르릉!

거지 사슴이 제법이라고 생각한 해피가 똘마니들에게 눈짓했다.

말들이 꾸러미를 물어 가져가고, 마구간에 있는 걸 허락받은 벤디가 후드를 벗었다.

옅게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이 로브를 타고 흘러내렸다.

벤디는 이제 약간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여우 수인일 때는 해피가 묘하게 더 사나워져서, 이렇게 마법이 풀렸을 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해피가 저래 보여도 초식 동물이니까.’

물론 날을 거듭할수록 근육이 커지고 있긴 하지만…….

벤디는 자신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해피를 향해 호언했다.

“걱정 마, 이제 여기서 다시는 마법 사용 안 할게.”

해피의 발굽을 흔들며 약조한 벤디가 조용히 구석에 가서 찌그러졌다.


초식 동물들 사이에 있으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느낌.

최근 들어 맞추기라도 한 듯 제 주변을 빙빙 도는 맹수들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데리러 가지 말 걸 그랬나.’

얕은 후회를 반복하는 와중, 바깥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

해피와 시선을 맞춘 벤디는 살그머니 지푸라기를 짚고 기어갔다.

마구간에 난 작은 틈으로 눈을 가져가자, 은은한 램프 불 아래에 선 두 인영이 보였다.

‘……어?’

원과 마법 측정 심사를 맡았던 스카론 장로였다.

두 사람의 만남에 작은 의문을 가졌던 벤디는 이내 의아함을 지워 냈다.

애초에 마탑 관련 인물인 둘이 만나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고, 해피가 있는 마구간은 인적이 드물어서


접선하기도 좋은 장소이니까.

왠지 훔쳐보는 기분이 된 벤디가 틈에서 물러나려는 찰나,

“웬스턴 레피가 늑대 영역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우뚝.

스카론 장로의 목소리가 벤디의 발을 붙들었다.

‘웬스턴…… 레피?’

숙부의 이름이 왜 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걸까. 손끝이 엷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물러날 수 없게 된 벤디는 틈 사이로 눈을 갖다 댔다.

주변을 살핀 스카론 장로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제가 6 소대 대원이 된 탓에,”

“무슨 대원?”

“이런, 말이 잘못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간섭을 한 탓에 벤디 레피 님이 마탑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 모양입니다.”

생각하듯 턱을 매만진 원이 입을 뗐다.

“일단은 시선을 돌려 둬.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

일순 원은 말을 뚝 끊었다.

뒤이어 반쯤 깔린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벤디가 자리한 마구간을 향했다.


#<97 화>

원은 빛이 새어 나오는 마구간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푸르릉, 푸르릉.

마구간에서 한 번쯤 들어 본 적 있는 독특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 그는 끼이익, 나무 문을 당겼다.

열자마자 웬 문짝만 한 동물이 코앞에서 원을 환대했다.

‘이건…….’

레펠튼에서 본 학생회장의 사슴(으로 추정되는 동물).

이 세상의 존재 같지 않은 기골 장대한 사슴을 마주한 원이 헛웃음 쳤다.

“이런 걸 어디서 데려왔나 했더니.”

아카데미 가장 구석진 곳의 마구간에 꽁꽁 숨겨 둔 모양이었다.

벤디와 영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 그가 마구간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푸르릉.

그러나 몸을 슬쩍 옮긴 해피로 인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자 푸르릉, 또다시 따라온 해피가 앞을 막아섰다.

주인 사슴을 닮아 인내심 시험에 소질이 있나.

작은 분노를 느끼던 원은 이내 심호흡하며 가라앉혔다.

벤디의 소유인 동물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밀고 들어가기도 애매해진 원은 해피의 거대한 몸 너머로 마구간을 응시했다. 초식 동물 특유의 냄새가


코를 어지럽혔다.

마구간 구석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말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곳에 군림하는 깡패 사슴 때문인지, 아니면 늑대 수인인 원의 존재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가는
떨림이었다.

“원 님.”

저벅저벅, 원을 뒤따라온 스카론이 의아하게 물었다.

“갑자기 마구간은 왜…… 이런, 사악한 마물이 여기가 어디라고!”

“마법을 거둬, 사슴이니까.”

“아아, 그렇군요.”

태연한 원의 설명에, 무심코 수긍한 스카론은 뒤늦게 동공을 떨었다.

“……아니, 예? 이게…… 말입니까?”

얼빠진 스카론의 반응을 십분 이해한 원이 살짝 끄덕였다.

“일단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초리로 해피를 살핀 스카론은 한참 만에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무튼 경비 기사들이 있는 기숙사나 아카데미 내에 있는 숲 어귀로 가시죠. 오늘은 그……


보름달이 뜨는 날이지 않습니까.”

“지금 모습을 유지하는 게 예전만큼 어렵진 않은데. 스카론, 너는 걱정이 과한 면이 있어.”

“언제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혼자만의 몸이 아니시니.”

원은 스카론에게 떠밀리다시피 마구간 입구를 벗어났다.

끼이익,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이상할 정도로 미련이 남는 마구간을 뒤로한 그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 봤다. 캄캄한 밤하늘에 만월이
걸려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이날이면 늑대 수인은 동물형으로 모습이 바뀐다.

다른 일족에 비해 혈통이 강한 늑대 일족만의 특징이었다.

물론 세월이 거듭될수록 인간에 가까워져 보름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나, 원처럼 순혈에
가까운 자는 예외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진 힘이 클수록 어느 정도 인간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굉장한 마력이 소모되는 게 단점이지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스카론과 헤어진 원은 뻑적지근한 어깨를 풀었다. 억지로 인간형을 유지하려니 마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아악, 원의 몸에서 빛이 일며 이윽고 보통 크기보다 배나 큰 늑대가 드러났다.

푸른빛이 도는 늑대로 변한 원은 돌연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마구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검은 인영이 빠르게 뛰어나왔다.

‘역시 쥐새끼가 있었군.’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늑대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 * *

헉, 헉.

나는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채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은 점점 가팔라졌고, 긴장으로 인해 이미 등은 축축이 젖어 든 상태였다.

간식에 감명받았는지 뭔지, 내칠 거라 생각한 해피가 숨겨 줘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이 모습 그대로


원을 마주칠 뻔했으니까.

‘그 늑대…….’

진짜 뭐야.

‘웬스턴 레피가 늑대 영역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원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숙부의 이름이 나온 이상, 내가 사슴 수인인 걸 넘어 가문이나 여타 다른 사실까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웬스턴.’

듣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이름을 되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구간을 박차고 나가서 따져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이곳의 누군가가 내 가문의 치부를 알고 있다는 게.

무서워서.

어느새 훌쩍 가까워지고 있는 숙부의 그림자가.

힘을 얻는 것과 별개로, 어릴 적부터 기저에 깔려 있던 두려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이 아카데미는 왜 이렇게 넓은 건지.

탁탁, 어둠이 내린 교정을 달리고 있으니 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겁니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례로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거, 그쪽이 치료한 겁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마개가 머릿속 어딘가를 꽉 틀어막고 빠지지 않는 것처럼.

기억 속을 헤엄치던 나는 문득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적막한 교정, 인적 없는 이곳에 내 발소리가 아닌 다른 발소리가 겹쳐지고 있었다.

휙, 뒤를 돌아본 나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

거대한 무언가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짐승의 안광이 번득였다.

‘……육식 동물.’

왜 아카데미에 저런 짐승이 있는지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달아나기 위해 발이 움직였다. 그토록 연습하고 연습한 마법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고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탁탁탁, 휘청거리며 다리를 움직인 나는 그대로 우측 숲으로 뛰어들었다. 자꾸 발에 걸리는 검은 로브도


집어던진 상태였다.

‘무서워.’

눈앞이 부옇게 번졌다. 아카데미 건물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겨우 의지하고 있던 시야가 눈물에


가로막혔다.

“아!”

막무가내로 달리던 나는 탁, 순간 중심을 잃으며 넘어졌다. 한쪽 신발이 벗겨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넘어지며 앞으로 쏟아진 밀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공포가 더해졌다.

바쁜 시간을 보내며 무뎌진 진실. 나는 이곳의 유일한 초식 수인이란 사실이 온몸에 새겨졌다.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던 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왔기에.

“오, 오지 마.”

엉덩방아를 찍은 나는 주저앉은 채 발을 굴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턱, 두꺼운 나무가 등을 가로막았기에.

터벅, 터벅.

다 잡은 먹이를 대하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온 육식 동물이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다.

간헐적인 내 숨소리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짐승의 숨소리가 대조를 이뤘다.

보름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지나가며, 어두운 숲에 달빛이 내렸다.

옅은 달빛 아래 드러난 건 푸른빛이 도는 거대한 늑대였다.

‘늑…… 대?’

참고 있던 숨을 탁 터뜨린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레펠튼에서도 늑대는 멀리서만 보았기에, 이렇게 가까이서 늑대를 보는 건 난생처음인데. 그런데.

‘왜…….’

왜 이다지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심지어 늑대의 동공에서 살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멍하니 눈을 마주하던 나는 아릿하게 옥죄는 머리를 짚었다. 바늘로 뇌를 콕콕 쑤시는 듯한 고통이었다.

“흐…….”

인상 쓰며 머리를 부여잡는 동시에 여러 장면이 책장처럼 넘어갔다.

‘너 육식 동물이야?’

낡고 이끼 낀 감옥에 진동하는 피 냄새.

‘나를 잡아먹어.’

복부에 흥건한 피를 묻힌 커다란 늑대.


‘이제 좀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를 따뜻하게 감싸던 체온.

차라리 나도 엄마 아빠랑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전부 내가 뱉은 말이었다.

뒤이어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년이 아른거렸다. 어두운 숲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색
눈동자도.

‘죽지 말고 기다려.’

가상 공간에서 본 원의 어린 모습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숙부의 목소리.

‘벤디 레피, 밤중에 어디로 가려던 거지?’

기억났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동시에 툭,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버텼나 싶었는데.

밤마다 몰래 아버지가 알려 준 비밀 통로로 들어가, 곁을 내어 주는 육식 동물에게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나를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늑대에게서.

“너…….”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때 그…….”

툭, 투둑.

빗방울 떨어지듯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대체 이런 상황에 눈물은 왜 나는 거냐고.

스스로도 이유를 몰라 메인 목을 삼킬 때, 늑대에게서 화사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억 속 조그마한 소년이 아닌, 내가 아는 원이 나타났다.

보름달을 등진 모습이 무섭도록 잘 어울리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

말을 잃은 나를 가만히 내려 보던 그는 이윽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발이 멈춘 곳은 넘어지며 벗겨진 신발이 떨어진 곳이었다.

그걸 주워 든 원은 내 앞으로 와서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하얗고 긴 손이 내 발목으로 뻗어졌다.

흠칫.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잠깐 멈춘 손이 이내 부드럽게 발목을 감쌌다.

능숙한 손길로 신발을 신겨 준 원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말했잖아.”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내가 죽이러 오겠다고.”

#<98 화>

……또 이런 얼굴.

더없이 낯선 웃음을 마주하며 넋을 잃기도 잠시. 한번 떠올리고 나니 물밀듯 기억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죽어 가는 늑대의 주둥이에 고구마를 꽂아 넣던 나.

늑대가 고구마를 뱉어 내니 그다음에는 메밀 빵을 꽂아 넣던 나.


손이 더러워지면 늑대의 털에 전부 닦아 내던 나.

풍차 돌리듯 늑대의 꼬리를 잡고 장난치던 나.

‘어쩌자고…….’

만행 하나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내 미래도 점점 불투명해졌다.

어릴 때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넘겨도,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를 잡아먹어.’

으.

‘다쳐서 나를 잡아먹을 수가 없는 거구나.’

으으.

‘얼른 건강해져야 할 텐데, 그래야 나를 잡아먹지.’

제발.

과거의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가긴 했구나. 산만한 늑대에게 겁도 없이 그런 망언을 쏟아 낸 걸 보면.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나는 조심스럽게 원의 눈치를 살폈다.

무릎을 굽혀 앉은 그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상태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외면하고 있자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이?”

원은 대뜸 앙다문 이를 드러냈다.

반짝이는 송곳니의 압박에 못 이긴 내가 따라서 이를 앙다물었다.

이 검진하듯 응시하던 그가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어울리지 않게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송곳니 따위를 달고 나타나니까 모를 수밖에.”

아무래도 송곳니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내 입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현재 사슴 수인 모습임을 다시금 인지한 탓에, 위기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

진정해, 그래 봤자 어릴 때의 일인걸. 심호흡하며 태연을 위장한 내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보입니다.”

의외로 순순한 답변이 돌아왔다. 조금 용기를 얻은 나는 말을 이었다.

“일단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당시에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일순 눈매를 둥글게 휜 상태로 멈칫한 그가 되물었다.

“그래서요?”

“현재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강해서.”

“…….”

“그때 했던 말은 전부 취소할게요.”

음. 원은 생각하듯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억겁 같은 침묵이 지나가고, 이내 붉은 입술이 열렸다.

“취소하세요.”

“……!”

“물론 취소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 마음이지만.”

반색하던 내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화상, 진상, 밉상 중에서는 그나마 밉상이 제일 멀쩡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그의 앞을 탈출했다.

이쯤 되니 나를 죽이러 오겠다는 말이 찾아오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의미 그대로 목을 따겠다는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대로 일어나서 줄행랑치려는 동시에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허벅지 밑을 받쳐 나를 안아 올린 원이 미간을 구겼다.

“굽히지 말라고 했지 않나.”

“굽힌 적 없,”

“기어 다니는 것도 포함입니다.”

나를 내려 주지 않은 그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몸이 흔들리자 반사적으로 어깨를 짚은 내가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흘긋 나를 올려 본 원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잡아먹으러.”

“……!”

심정지가 올 뻔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가 보살핀 늑대는 까칠할 뿐, 이런 굶주린 늑대가 아니었는데.

‘구해 주지 말걸.’

바야흐로 암흑이었다.

* * *

학생회 회의실.

회의를 위해 나와 신시아, 안나 그리고 메이지가 회의실에 모였다.

‘머리 아파.’

자리에 앉은 나는 퀭한 얼굴로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묻었다.

눈을 떴을 때는 기숙사 침대에서 이불을 칭칭 감은 채였다.

까무룩 기절한 나를 원이 옮겨 놓은 듯했다.

무엇보다 그는 딴에 주홍색 가발을 씌워 주려 한 모양인데, 뒤집어씌워 놓아 머리카락이 다 엉킨 상태였다.

평생 시중만 받고 살았을 늑대가 누군가에게 가발 같은 걸 씌워 준 적이 있을 리가.

“후…….”

인생 다 산 한숨을 내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선 원이 나를 찾아다닌 이유.

그 성격에 목숨을 구한 은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혹시…….

무심코 간질간질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그 늑대와는 아무리 생각해도 거리가 멀었다.

막연히 추측하던 나는 책상 위 신시아의 손등을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말을 걸 때는 좀 평범하게 걸어.”

곧바로 신시아의 일갈이 돌아왔다.


이런 나무람 정도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육식 수인이…… 초식 수인을 찾아다닌다면 이유가 뭘까?”

뜬금없는 질문은 왜 하니. 그런 표정을 지은 신시아가 이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식욕.”

“…….”

가슴이 차게 식은 나는 그냥 앞으로 살날에 대해서만 고민하기로 결정했다.

‘웬스턴 레피가 늑대 영역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원의 명령을 받은 스카론 장로가 숙부의 행적을 쫓고 있나?’

늑대 영역은 수인 아카데미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숙부의 발자취가 내게 닿기 전에 이스단 가문으로 가야 하는데.

벌써 코앞인 하계 방학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듣고 있어요, 회장?”

안나의 목소리가 멀리 떠난 내 정신을 붙들었다.

“네?”

“하계 연회요. 당장 내일로 다가왔는데, 의상 준비는 마쳤냐고 물었어요.”

“물론이죠.”

이미 준비야 끝났지.

학생의 본분은 자고로 교복. 결코 드레스 따위의 연회복을 준비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웬일로 빠릿빠릿하네요. 처음인 회장을 위해 설명하자면, 분장 같은 걸 준비해도 괜찮아요.”

“분장이요?”

“아카데미인 만큼 격식을 덜어 낸 연회라서, 가면이나 가발 등 많이들 해 오니까요.”

“이 아카데미는 어떻게 된 게 연회조차 평범하지가 않아요?”

팔짱 낀 내가 작게 꿍얼거리자, 안나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높낮이 없이 말했다.

“네가 여기서 제일 평범하지 않아요.”

대꾸할 말을 못 찾은 나는 시치미를 뗐다. 막대 과자를 들고 설치는 입장에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회장.”
소박맞는 나를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메이지가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이상한 게 회장의 매력이니까요.”

이렇게 위안이 안 되는 위로는 또 처음이었다.

그사이 슥, 안나가 내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교직원과 고용인이 준비하겠지만, 연회 일정 확인 정도는 해 둬요.”

서류를 받아 든 나는 큰 감흥 없이 읽어 내렸다.

육식 수인이 무더기로 모인 연회는 가능한 안 가는 게 신상에 좋은데.

감흥 없이 살피는 와중, 별안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연회라 함은…….’

보통 밤에 개최되지.

‘안 돼.’

마도구의 효과가 풀리는 시각. 나는 낯빛을 파리하게 물들였다.

하물며 사슴 수인으로 돌아가고 난 후보다, 마법의 효과가 풀리는 도중이 더 위험했다.

꽁꽁 눌러 둔 초식 수인 특유의 무언가가 터지듯 튀어나와 버리니까.

입술을 깨물어 댄 나는 안나를 향해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연회는 필수 참석인가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빠질 생각일랑 말아요.”

“…….”

“대항전 이후로 학생회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학장님으로부터 연회 개최를 얻어 낸


학생회장이 없어선 안 될 일이죠.”

안나의 어투가 퍽 다정하여, 한 번 더 의견을 피력해 보려던 내가 입을 다물었다.

우지끈, 그녀가 손에 쥔 의자 손잡이가 과자 부스러지듯 우그러졌기에.

부드럽게 눈을 휜 괴력 곰돌이가 내게 물었다.

“훌륭한 학생회장이 불참할 리는 없겠죠?”

“제 마음은 이미 연회장이에요.”

공손하게 대답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연회장에서 머리카락 색이 바뀌고, 눈동자가 옅어지고, 송곳니마저 사라진다면…….

부르르,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큰일이었다.

* * *

노을이 내리기 직전의 시각.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 음침한 그림자가 침투했다.

노랑이도 잠깐 배낭을 비운 현재.

휙휙,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은밀히 창고로 들어섰다.

회의 당시, 안나가 창고를 가리키며 설명해 준 것.

‘연회 분장 도구 같은 건 학생회실 창고에도 많을 거고, 따로 원하는 게 있으면 아카데미 상점가에서


구매해도 되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연회에 다들 분장을 해 오는 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나 혼자 이래저래 가면을 끼고 숨기면 더 수상해 보일 테니까.

만에 하나 모습이 들통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분장이라고 빡빡 우기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이 넓은 창고를 어떻게 뒤져야 할지. 창고는 거의 학생회실 크기와 비례했다.

그뿐인가.

교내 행사에 필요한 물품 및 학생들에게 압수한 금서나 금지품 등등.

역대 학생회가 모아 온 잡동사니의 천국과 다름없었다.

긴 머리카락을 묶은 나는 낑낑거리며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괜히 하계 연회 같은 걸 승낙해 가지고.’

내 죄요, 내 불찰이었다.

‘분장을 어떻게 하지?’

송곳니가 없는 텅 빈 이를 들키지 않도록, 아예 입을 가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뒤적뒤적, 온갖 상자를 열어 보던 나는 돌연 눈을 빛냈다.

‘저거다.’

까마득한 선반 위, 가면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질질질, 삼단 사다리를 끌고 온 내가 그 위로 올라섰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최대한 뻗었으나,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가면을 올려 본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탁.

“잡았……!”

가까스로 가면을 잡아채는 순간 내 몸이 휘청거리며 기울었다. 동시에 가면이 그 옆에 놓인 원뿔 모양


비커를 쳤다.

비커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장면이 느리게만 보였다.

쿠당탕, 쨍그랑!

“아으…….”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게 넘어진 데에 비해, 팔꿈치가 약간 쓸린 것 외에 다친 부위는 없었다.

‘가면은?’

곧장 바닥에 떨어진 가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안성맞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딱 얼굴을 가리기 좋은 여우 가면이었다.

얼른 가면으로 다가가는 와중, 다리를 휘젓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이윽고 제자리에 멈춰 선 나는 불안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면이…….’

왜…… 내 몸보다…… 크지?

#<99 화>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세상이 커다래진 걸까.

잠깐 현실 파악이 늦어진 나는 찬찬히 사방을 둘러봤다.

천장이 지나치게 높고, 바닥에 깨진 자잘한 비커 파편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이 높아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작아진 거구나.

딸꾹.

비극을 깨닫는 순간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내 시선이 바닥에 튄 비커 속 액체를 향했다.

지난번, 사랑의 묘약처럼 괴짜 마법사들이 개발한 약일 확률이 높았다. 그걸 전대 학생회에서 압수한


듯하고.

막연한 추측은 전부 미뤄 두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지금…….’

노란 짐승이 데굴데굴 굴리며 놀던 털실만 한 크기가 된 게 분명했다.

‘어떡해.’

앞이 까마득해진 나는 곧바로 창고 문을 향해 달려갔다. 작아진 몸뚱이 때문인지 열심히 뛰어도 도통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열 수 없는 문을 마주하며 절망할 즈음, 바깥에서 학생회실 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들렸다.

“회장은? 갑자기 사라졌어.”

“아까 회의가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레넌과 안나의 목소리였다.

“벌써? 그러기엔 조금 이른 시각인데.”

“흠……. 오늘따라 창고를 유심히 보던 것 같으니,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요.”

정곡을 찔린 내가 머쓱하게 입을 달싹였다. 애써 창고에 관심을 두지 않는 척했는데, 안나에게 전부


간파당한 꼴이었다.

“내가 찾아볼게.”

“네, 내일 뵙겠습니다.”

가지 마, 괴력 곰돌이.

‘여기서 그나마 믿음직스러운 게 너뿐인데.’

외치던 나는 돌연 입을 텁 가로막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왜?’

사색이 된 사이, 안나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 *

텅 빈 학생회실에 들어선 레넌은 굳게 닫힌 창고를 돌아봤다.

“회장?”

학생회장이 안에 있는 것치고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그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이제 학생회장의 마법 실력이 수준급에 올라섰다곤 하지만, 그래도 시야를 벗어나면 불안했다.

‘벤디 학생, 고맙네. 자네 덕분에 요즘 우리가 면이 서, 면이.’

대항전 직후 마법부 교수들이 번듯한 지팡이를 선물했으나,

‘너무 비싼 거라 그런가……?’

휙, 슉, 아리송하게 휘둘러 보던 벤디는 다시 막대 과자로 돌아갔다. 손에 감기는 맛이 영 탐탁지 않은


듯했다.

적이 나타났을 때 막대 과자를 꺼내 들고 있을 벤디를 상상하니 레넌은 눈앞이 조금 아찔해졌다.

끼이익.

그는 확인차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물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야닉이 청소해 둔 창고가 어지럽혀져 있었기에. 특히 선반 위에 있던 물건들이 엉망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

마치 도둑이라도 다녀간 꼴이 아닌가. 입술을 비튼 그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움직인 시선이 창고 안을 샅샅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편, 창고 구석.

체육 공구함 뒤에 비밀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급한 대로 공구함 뒤에 몸을 숨긴 벤디는 가느다란 눈으로 레넌의 행태를 주시했다. 뒤이어 그가 열어 둔


창고 입구로 눈길을 옮겼다.

돌아 있는 저 백호에게 도움을 청하느냐.

아니면 조금 전에 자리를 뜬 곰돌이를 쫓아가서 도움을 청하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선택은 후자였다.

‘기회는 한 번.’

콩알만 한 벤디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창고를 둘러보던 레넌이 완전히 등을 보였을 때,

‘지금이다.’

공구함 뒤에서 튀어 나간 벤디가 곧장 문을 향해 직행했다.

문틈까지 겨우 다다랐을 때, 탁, 긴 다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로 구두코에 몸을 부딪친 벤디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뭔가 숨어 있겠다 싶긴 했는데.”

비소를 건 레넌은 얼어붙은 벤디를 집게손으로 주워 올렸다.

그리고 잠시간 말을 잃었다. 이게 뭐더라.

“-아, 맞아. 다람쥐.”

쿵, 그 말과 함께 벤디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자각했기에.

‘그저 몸이 줄어든 건 줄 알았는데…….’

아예 다른 동물로 변해 버리다니.

레넌은 얼음 상태인 다람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게 창고를 돌아다니며 선반을 다 치고 다닌 듯한데, 왜 은은하게…….

‘학생회장 냄새가 나지.’

학생회실에 있어서 그런가.

이내 흥미를 잃고 내다 버리려던 레넌이 멈칫했다.

다람쥐는 잡식성. 심지어 이 다람쥐는 성체가 아닌 덜 자란 상태였다.

육식 수인밖에 없는 이곳에서, 벤디가 이거에게 애착이라도 느껴서 데려온 거라면.


‘이걸 찾으러 기숙사에 일찍 들어갔나?’

그의 고운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노란색 담당도 며칠 가출했다고 난리가 났는데, 또 비슷한 걸 잃어버리면 벤디의 반응은 뻔했다.

‘음.’

레넌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었다.

‘확인하고 버려도 되겠지.’

다람쥐를 바닥에 내려 두려던 그가 일순 멈칫했다.

물색 눈동자가 흐트러진 선반에 머물렀다.

이대로 풀어 놓으면 창고를 엉망으로 만들 건 자명한 일.

그렇다고 내일까지 가둬서 방치하자니…… 벤디가 자신을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 육식 수인으로 볼 게


뻔했다. 유독 동물에게 정을 많이 내어 주는 편이니까.

처리가 난감한 다람쥐를 마땅찮게 살핀 레넌이 입술을 열었다.

“가자.”

……어디로?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벤디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가만히 있어, 사지 멀쩡하게 회장한테 돌아가고 싶으면.”

하마터면 다람쥐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한 레넌이 정수리를 톡 건드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손가락으로 누른 수준이었으나, 띵! 골이 울린 벤디가 이윽고 축 늘어졌다.

혼절한 다람쥐를 마주한 레넌은 바람 샌 웃음을 흘렸다.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어디의 누구를 굉장히 닮았다.

* * *

S 클래스 남자 기숙사.

기숙사 방문 앞에 도착한 레넌이 잠깐 멈춰 섰다.

노랑이로서의 일과를 끝마치고, 옆방으로 들어가려던 헤일린과 마주쳤기에.

문고리를 잡고 선 헤일린은 내리깔고 있던 적안을 천천히 들었다.

레넌의 다리를 타고 올라간 시선이 하복 셔츠 위에 걸친 헐렁한 베스트, 그리고 같지도 않은 크로스백.


이윽고 평소와 같은 한가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에 머물렀다.

동시에 헤일린의 동물적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짜증 날까.

종일 실성한 것처럼 실실 웃다가 벽에 이마를 박던 똥개도 그렇고.

원래부터 돌아 있는 저 고양이도 유독 거슬리는 날이었다.

물끄러미 레넌을 살피던 그는 이내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거슬릴 예정인
게 저 작자였다.

관찰하는 듯한 헤일린의 시선을 마주한 레넌은 흘리듯 말했다.

“예쁜 건 알지만 적당히 구경하지 그래, 노란색 담당.”

찰칵, 그리고 문고리를 돌려 여는 순간,

“잠깐.”

발길을 붙드는 목소리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레넌이 고개를 뺐다.

눈을 반쯤 내리깐 헤일린은 레넌의 허리춤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없던 저 쓸데없이 앙증맞은 크로스백이 기묘할 정도로 마음에 걸렸다.

“너무 뜨겁게 쳐다보는 거 아닌가.”

그가 다시금 입을 떼려 하기 무섭게 레넌이 선수를 쳤다.

“왜, 사랑의 묘약 때처럼 또 감금해 줄까?”

“죽고 싶으면 해 봐.”

붉은 눈이 짙어지는 걸 발견한 레넌은 잽싸게 방 안으로 달아났다. 찰칵, 방문을 걸어 잠그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복도에 남겨진 헤일린은 곧 짜증스레 백금발을 털었다.

‘왜…….’

고양이 자수가 새겨진, 손바닥만 한 레넌의 크로스백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그딴 걸 빼앗고 싶은 거지?’

요즘 가방에서 생활했더니 가방 집착증이라도 생긴 건지. 심정이 조금 복잡해지는 저녁이었다.

* * *
저녁 늦어서야 정신을 차린 벤디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어떻게 된 거더라.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에서 벌어진 레넌과의 대치가 퍼뜩 떠올랐다.

파바바박, 벤디는 시야를 가로막은 웬 천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야?’

겨우 크로스백 뚜껑을 열고 얼굴을 쏙 내민 벤디가 입을 살짝 벌렸다.

대저택처럼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 적당한 냉각 마법이 걸린 공간.

그리고 레넌 특유의 향이 가득한 이곳은…….

‘설마.’

청순한 호랑이의 기숙사 방.

이를 인지하자마자 벤디는 앞날이 아득해졌다. 호랑이굴에 들어온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떡하지?’

두리번거리던 벤디가 짐짓 정색했다.

정상급 자제의 기숙사는 격이 다르구나. 소담하고 깨끗한 제 기숙사를 초라해지게 만드는 규모였다.

저도 모르게 넋을 빼앗긴 채 구경하고 있을 즈음, 벤디는 문득 이 넓은 공간이 텅 비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언제든 떠날 수 있게끔 준비한 것처럼.

‘현 가주에게 모친을 그렇게 잃으셨는-’

대항전에서 얼핏 들은 레넌과 대진 상대의 대화.

‘에던트 가문이요? 유명하죠, 거의 야생이에요. 가주가 되면 유능한 형제자매는 물론 그의 부모까지


머리를 치니까.’

이어서 안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현 에던트 가주에게 남은 유일한 형제가 레넌 님이고요.’

‘그러면 레넌이 가문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가주 찬탈, 혹은 가족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

아니면 두 가지 전부.

대강 사정을 알 것 같은 벤디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실상 자신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 부모님을 암살한 괴한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벤디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어렴풋이 숙부의 짓은 아닐까, 예전부터 그런 의심은 하고


있었으니까.

“일어났네?”

레넌의 청량한 목소리가 상념에 빠져든 벤디의 정신을 일깨웠다.

벌떡 일어난 벤디는 물을 마시는 레넌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은발과 울렁이는 목울대, 턱 끝에 매달린 물방울에 자연스레 눈길이 닿았다.

“…….”

꼴깍, 벤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고작 물 마시는 행위가 뭐라고 저렇게 아찔할 일인가 싶었다.

‘안 돼.’

탁탁, 제 이마를 치며 머리를 비운 벤디가 두 발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저 믿음직스럽지 못한 백호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좋아.’

일단 나인 걸 알리는 거야.

결의 어린 표정으로 다가오는 다람쥐를 발견한 레넌은 생각했다.

‘다람쥐는 보통 네 발로 뛰지 않나.’

왜 자꾸 사람처럼 두 발로 뒤뚱뒤뚱 뛰다가 넘어지는 걸까.


#<100 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벤디는 출처 모를 격언을 되뇌며 구두코 앞에 척 섰다.

나, 학생회장.

교복 타이를 매는 시늉.

네 호위 대상.

검을 척 뽑아 드는 시늉.

“…….”

안타깝게도 레넌에겐 다람쥐가 덩실거리는 장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회장 거 맞네.’

학생회실을 벗어나 이곳까지 데려왔는데도 다람쥐에게 남은 벤디의 체취.

기숙사에 특유의 단내가 은은하게 퍼지는 게 제법 나쁘지 않았다.

제 바짓단을 잡고 늘어지는 다람쥐를 집어 든 그가 툭, 침대로 던졌다.

“됐어?”

푸하, 하얀 침구에 처박힌 벤디가 고개를 들었다.

‘되긴 뭐가 돼?’

여기에 올려 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벤디가 다짐하는 동시에 훌렁, 레넌은 예고 없이 베스트를 벗었다.

뒤이어 셔츠 단추를 푸는 손동작을 발견한 조그만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이윽고 셔츠까지 완전히 벗자 빚은 듯한 등이 드러났다.

굴곡진 등을 마주한 벤디는 목석처럼 굳었다.

‘그러고 보니 저 백호…….’
페트리온 숙소에서도 상의를 탈의한 채 자고 있었지.

결코 스스로를 아담하다고 표현해선 안 되는 잘못된 몸뚱이였다.

‘착한 생각.’

그때의 경험을 미루어, 침착하게 레넌에게서 등 돌린 벤디가 코를 붙잡았다. 코에서 피 분수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용모 단정, 품위 유지, 바른 생각.’

이조차 못 하면 방탕한 학생회장이 되기 십상이죠.

안나가 밥 먹듯 내뱉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용모는 다람쥐에, 품위는 있었던 적도 없고, 바른 생각은 레넌이 던져 준 도토리와 함께 굴러간 지


오래였다.

‘안나, 나는…….’

방탕한 사슴인가 봐.

* * *

청순한 호랑이는 글렀다.

지친 나는 쓰러지듯 책상 위에 벌렁 엎드려 누웠다.

온 방 안을 뛰어다니며 의사소통을 시도했지만, 레넌의 시선이 내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백호의 관심을 끄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노랑이랑 야닉은 그렇게 놀려 먹더니.’

아무래도 관심사를 벗어난 대상에겐 극도로 무심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나인 걸 알리지.

동물형으로는 마법 소환도 불가능하기에, 마법을 사용해서 이목을 끌 수도 없고.

퍼질러 앉아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문득 책장에 꽂힌 서적을 돌아봤다.

‘저거다.’

글자.
글자를 짚어서 의사를 표현하는 거야.

묘안을 떠올린 순간, 갑작스레 내 옆에 있던 통신구가 치지직 울렸다.

‘……!’

깜짝 놀란 내가 발이 엉키며 엎어졌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레넌은 그제야 비적비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한 나는 슬그머니 찻잔 뒤에 몸을 숨겼다.

‘온다.’

위험한 몸뚱이가 다가오고 있어.

대충 걸친 가운 때문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었다.

레넌이 책상 앞에 앉으며 마력을 주입하자, 통신구 속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코와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과묵하고 무서운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레넌 님.]

급하게 말을 잇던 남자가 주춤했다.

[옆의…… 동물은 뭡니까?]

“아, 이거?”

턱을 괸 레넌이 톡, 손끝으로 내 뺨을 찔렀다.

‘하지 마.’

넌 살짝 미는 걸지 몰라도 아프단 말이야. 손끝을 꽉 물어 버리자 그가 엷게 웃어 보였다.

“보면 모르겠어? 다람쥐잖아.”

[다람쥐인 건 알겠는데…… 기르시는 겁니까? 아직 성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 주인 건데 대신 맡아 주는 중.”

[주인이라니요?]

일순 남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감히 누가 레넌 님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남자의 엄숙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레넌은 태연스레 대답했다.

“있어, 예쁜 사슴.”

그게 누군데.
이곳에 사슴이라고는 나와 해피밖에 없지 않나. 그리고 해피는 예쁨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 남은 사슴은 나뿐인데?’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별안간 휙 레넌을 돌아봤다.

……예쁜?

진심인지, 또 장난인지. 귀가 뜨거워지는 찰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내가 벌떡 일어섰다.

‘방금 똑똑히 사슴이라고 했어.’

내 이럴 줄 알았다.

이거 봐, 페트리온에서의 일 때문에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이나 하고.

화상과 밉상 둘 다 내 정체를 이미 옛적에 알고 있었다 이거지.

찰싹, 찰싹. 레넌의 손톱을 내리치며 응징하는 가운데, 통신구 속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사안은 나중에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보다 레넌 님, 졸업을 유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내년으로.”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신 거면,]

“그런 건 아니고.”

대화의 흐름이 왠지 들으면 안 될 듯한 종류로 이어졌다.

손톱을 내리치던 것을 뚝 멈추자, 도리어 레넌이 나를 톡 밀어뜨리며 손장난을 쳤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통신구 속 남자의 얼굴이 한층 더 엄중해졌다.

[저희는 언제든 가주의 목을 칠,]

“아니.”

손가락에 의해 데굴데굴 굴려지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목을 치러 가는 건 나 혼자야.”

평소 팔랑거리던 레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레넌 님!]

남자의 목에 혈관이 두드러졌다.

[홀로 에던트 저택에 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가주야 레넌 님 혼자 처리가 가능할진 몰라도,


병사들까지는 무리입니다.]

“지난번에도 내 뜻은 전했을 텐데, 끼지 말라고.”


[…….]

“걱정 마, 죽더라도 가주의 목은 따고 죽을 거니까.”

의도치 않게 대화를 듣게 된 나는 굳은 채 레넌을 올려 봤다.

지금의 대화를 미루어 생각하면, 혈혈단신으로 그 무서운 저택에 쳐들어가겠다는 의미였다.

[하나 레넌 님은 에던트 가문을 이을 유일한,]

“너 같은 방계까지 더하면 가문을 이을 자는 차고 넘치지.”

[레넌 님…….]

“내 사사로운 복수에 대의를 얹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레넌은 통신을 종료했다.

무거울 정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책상에 엎드린 레넌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시무룩하네, 얼굴이.”

원래 목소리로 돌아온 그가 내 코를 톡 건드렸다.

“저 녀석이 좀 험악하게 생기긴 했어.”

주인을 닮아서 겁보인가.

덧붙인 그가 눈가를 접었다. 물색 눈동자가 눈웃음에 가려 사라졌다.

평소와 같은 미소인데도 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레넌은 잠깐이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눈빛을 보였으니까.

어릴 적이지만, 엄마 아빠를 잃었을 때 거울 속의 내가 하고 있던 눈빛과 똑같았다.

어쩐지 죽음의 냄새가 났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어느덧 새벽이 깊었다.

은은한 램프 불 아래, 레넌의 머리맡에 자리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정체를 알리지 못했다. 통신 직후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린 레넌 때문에.

일어나라고 뺨을 찰싹찰싹 내리쳤으나, 손가락질 한 번에 튕겨져 나간 꼴이었다.

‘도대체 약효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람?’


불안해 죽겠는데.

더군다나 약효가 풀리는 시간과 장소도 문제였다. 만약 밤이면 영락없는 사슴 수인의 모습일 테니까.

이대로라면 레넌이 내일 학생회실에 데려다줄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서 안나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아니면 원에게……?’

뭐가 됐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 나는 게슴츠레하게 레넌을 노려봤다.

청순한 호랑이 아니랄까 봐, 자는 얼굴조차 하나의 화폭이었다.

‘너는 잠이 와?’

이 화상아.

누구는 잠 못 이루게 해 놓고, 정작 당사자는 태평히 주무신다고.

갑자기 분노가 용솟음친 나는 아까 레넌이 준 도토리를 팽 내팽개쳤다.

백호 옆, 그것도 한 입 거리인 다람쥐 모습으로 평온히 잠을 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홀로 에던트 저택에 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하물며 그런 무거운 통신구 대화를 들은 이상 더더욱.

제일 큰 문제는 자꾸만 레넌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저 버릇없는 가운. 심신을 어지럽히고 번뇌를
유발하는 사악한 가운이었다.

‘저거부터 처리하자.’

또다시 코에 피가 몰리는 기분을 느낀 나는 엉금엉금, 조심스럽게 기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레넌의 팔 위로 올라선 내가 힘차게 가운을 당겼으나, 노랑이보다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차, 영차. 구호까지 생각하며 당겨 봤자 요지부동이었다.

‘더는 못 해.’

근 한 시간을 가운과 씨름한 나는 털썩,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

여기에 체력을 다 써서 그런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하계 방학을 앞두고 아카데미의 모든 강의가 막을 내렸다.

마지막 일정인 하계 연회만 앞둔 날.

오랜만에 오후까지 늘어져라 잔 레넌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

부스스하게 눈을 끔벅이던 그는 돌처럼 굳었다. 품 안에 정체 모를 말랑한 무언가가 있었다.

경직된 채 시선만 내리자, 주홍색 머리통이 시야를 채웠다.

어제 학생회실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인 학생회장이었다.

‘꿈인가.’

무심코 뒷머리에 손을 넣으며 끌어안던 그가 다시금 경직됐다. 꿈이라기에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레넌의 머릿속에 온갖 수식과 숫자가 지나갔다.

‘회장이 왜…… 여기 있지.’

그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고를 억지로 굴렸다.

기척은커녕 학생회장이 제 침대에 올라오기까지 눈치조차 못 챈 걸 보면…….

‘그 다람쥐.’

레넌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뒤뚱거리며 두 발로 뛰어다니고, 찻잔 뒤에 숨어 저를 훔쳐보던 이상한 다람쥐의 정체.

부스럭.

벤디가 품에 파고드는 순간 다시금 레넌의 사고가 정지했다.

제 살갗에 옅은 숨결이 닿을 때마다 저항 없이 몸에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들 즈음 쾅쾅, 웬 방해꾼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와, 레넌 에던트.”

일순 레넌의 이마에 드물게 핏줄이 섰다. 간밤에 자신을 덮친 가짜 다람쥐와 이렇게 헤어질 순 없었다.

쾅쾅쾅!

이어진 커다란 소음에 벤디의 머리통이 움찔했다.

레넌은 잠이 덜 깨서 몽롱하게 눈만 깜박이는 벤디를 내려 봤다.

방긋 웃은 그는 살살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꿈이야, 더 자.”
동시에 콰직!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방문이 박살 났다.

#<101 화>

“뭐야, 이 굉음은? 연회 때 사용할 폭죽 실험이라도 하나?”

“그런 거 아니니까 지나가, 제발 그냥 지나가.”

복도의 남학생들은 차마 구경할 생각도 못 한 채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쿠궁. 두터운 문이 쓰러지며 헤일린이 먼지를 뚫고 들어섰다.

‘학생회장이요? 안 그래도 저희도 찾는 중이에요, 아침부터 도통 보이지를 않아서. 기숙사도 비어 있고…


….’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게 레넌이란, 안나 스웰든의 설명을 듣자마자 헤일린의 머릿속에 스친 건 하나였다.

유독 거슬리던 레넌의 더러운 고양이 크로스백.

그를 깨달은 즉시 앞뒤 없이 기숙사로 뛰어온 참이었다.

그저 감이었다. 뭐가 됐든 레넌 에던트가 학생회장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는.

넓은 기숙사 방을 느리게 배회하던 붉은 눈이 이윽고 침대에 머물렀다.

하얀 침구를 지나, 레넌에게 안겨 있는 주홍색 머리칼의 여자.

“…….”

헤일린은 그대로 제자리에 굳었다.

심장이 바닥에 쿵 곤두박질치는 느낌. 소심한 사슴이 왜 놀라기만 하면 기절하는지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레넌 에던트가 학생회장의 행방을 어떻게 알고,”

뒤따라 들어오던 원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헤일린이 본 것과 동일한 장면이 황금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뚜벅뚜벅, 헤일린에 비해 딱히 놀라지 않은 그가 되돌아 걸어 나갔다.

복도로 나와 욱신거리는 심장 부근을 누른 원은 다시 레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펼쳐진 장면은 똑같았다.

“…….”

현실이었다.

더 이상 냉정한 판단이 불가능해진 그가 제자리에 굳었다.

노란 돌이 된 헤일린에 이어 검은 돌이 되고 말았다.

싸늘할 정도의 정적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친 벤디가 반짝 눈을 떴다.

이마는 바위 같은 무언가에 눌린 상태였고, 새벽 호수를 연상시키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시야를 가로막은 이 살색은 대체 뭘까.

“……?”

잠시간 상황 파악이 안 된 벤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회장, 내가 저번에 보수적이라고 말했을 텐데.”

베개 대신 팔을 내어 주고 있던 레넌이 물색 눈동자를 접었다.

“간밤에 덮칠 줄은 몰랐어.”

“…….”

“이제 나 책임져야겠다.”

일어나자마자 얼굴 공격을 당한 벤디의 뇌가 정지했다.

저게 다람쥐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회장이라고?’

도르르 눈만 굴리던 벤디가 시선을 내렸다.

시야에 주홍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몸도 털이 아닌 하복을 갖춰 입고, 팔다리도 생긴 상태.

‘돌아왔구나.’

그러나 깨어나자마자 워낙 엄청난 걸 보아서인지 놀랍지도 않았다.

기능을 멈춘 뇌와 달리 심장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어 댔다.

‘나 지금…….’

남자 기숙사, 그것도 청순한 호랑이의 품속이었다.


화르르,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방탕한 학생회장이 되면 어떡하냐고요? 회장이요? 나 참, 그럴 일은 없어요. 그 전에 내가 찢어 버릴


거니까.’

괴력 곰돌이에게 찢기는 장면을 상상한 순간, 벤디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헤일린 이스단.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벤디가 입을 헙 틀어막았다.

‘이 사자는 왜 또 여기에 있는 거야.’

레넌에게서 빼앗듯 벤디를 안아 든 헤일린이 잔잔한 눈으로 올려 봤다.

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친 벤디는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전부 다 설명할게.”

입 밖으로 뱉고 나니 느낌이 영 이상했다. 바람난 연인이 현장을 적발당했을 때 으레 하는 대사 같았다.

‘이게 아닌데.’

낯빛이 파래진 벤디가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레넌을 돌아봤다.

‘저 또라이……!’

넌 왜 거기서 한 떨기 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심지어 가운이 흘러내린 모양새라 그림이 더 이상했다.

벤디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을 때, 헤일린이 나직하게 말했다.

“실수지?”

“…….”

“실수라고 말해.”

레넌은 문을 부수고 들어온 데 비해 차분한 헤일린을 살피다 말고 미간을 굳혔다.

‘아니, 차분한 게 아닌가.’

고요하게 돌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를 인지한 순간 벤디의 몸에서 화한 빛이 일었다.

헤일린의 팔에 있던 무게감이 아예 없어졌다.

이윽고 벤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쪼끄마한 다람쥐 한 마리가 바닥에 착지했다.


“……?”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헤일린이 입을 살짝 벌렸다.

“다시 돌아갔네.”

레넌 또한 답지 않게 난감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회장, 도대체 뭘 먹은 거야?”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두 발로 뒤뚱뒤뚱 물러난 벤디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제야 대강 사정을 눈치챈 헤일린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하.”

온몸의 경직을 풀던 그가 멈칫했다. 진탕이었던 머릿속이 조금 차가워지고 나서야 의문이 일었다.

학생회장이 백호 새끼의 방에서 발견된 게 이 정도로 속이 비틀릴 일인가.

곧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포기한 헤일린이 레넌을 응시했다. 뭐가 됐든 저 고양이를 죽여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 레넌과 헤일린의 눈이 마주쳤다.

우선순위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다람쥐로 변한 학생회장.

같은 생각에 다다랐을 때, 레넌이 먼저 입술을 뗐다.

“찾아낸 건 나야.”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헤일린이 받아쳤다.

“옷이나 똑바로 입어.”

“안 입고도 의무동 가는 데엔 문제없지 않나?”

레넌은 정말 옷 없이도 벤디를 데리고 의무동에 갈 위인이었다.

“동물에 관해선 내가 전문이야.”

“왜, 등에 태워 가기라도 하게?”

“못할 것도 없지.”

두 고양잇과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냥냥거리며 한참을 싸우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벤디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지 않나.

텅 빈 아래를 내려 본 두 사람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람쥐가 없었다.
“…….”

한차례 정적이 치고 지나갔다.

심지어 이 방 어디에도 특유의 은은한 단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깨달은 두 사람은 맞춘 것처럼 박차고 뛰어나갔다.

탁탁, 다시 돌아온 레넌과 헤일린은 아직도 검은 돌 상태인 원을 잡아끌었다.

그 작은 걸 찾으려면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였다.

* * *

하계 연회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재.

아침부터 벤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이 잡듯 뒤진 안나와 신시아, 메이지가 본관 입구에 다시 모였다.

“찾았어요?”

안나의 질문에 메이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마개동 부원들도 찾고 있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요.”

“기숙사도.”

신시아의 답변까지 들은 안나가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점심쯤에 헤일린을 붙잡고 물었으나, 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연회는 필수 참석인가요?’

어제 회의에서도 연회에 참석하기 꺼리는 눈치더니, 이대로 불참하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연회복을 제대로 갖춰 입을지조차 걱정이었다.

‘……절대 안 돼.’

뽀각, 안나의 손에 있던 연회용 부채가 두 동강이 났다.

그 광경을 마주한 신시아와 메이지가 슬쩍 거리를 벌렸다.

이미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안나가 발을 쾅 굴렀다.

‘대항전 덕분에 평판이 좋아진 만큼, 학생회장 자리를 공고히 할 절호의 기회인데!’
방학을 맞으면 그때의 감흥도 흐릿해질 테니, 전교생이 모이는 하계 연회만큼 본인 위치를 각인시키기
좋은 곳이 없었다.

“부회장.”

신시아는 거친 숨을 내뱉는 안나를 불렀다. 마침 밀란느 학장이 그들이 선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짓을 주고받은 안나와 신시아, 메이지가 대화를 멈췄다.

만일 지금 시간까지 학생회장이 보이지 않는 걸 학장이 알게 되면.

들들 볶일 벤디의 암울한 말로가 벌써 눈에 훤했다.

이내 그들의 곁에 다다른 밀란느 학장이 뒷짐 지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이리 모여서.”

부채가 부러진 사실을 깨닫지 못한 안나가 그것을 입가에 가져갔다.

“학생회장이 어떤 의상을 입고 올지 추측하던 중이었지요.”

밀란느 학장은 반 토막 난 부채를 들고 호호 웃는 안나를 꺼림칙하게 응시했다. 뒤이어 세 사람이 입은


연회용 드레스를 훑었다.

이내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걸었다.

‘학생회장의 의상이라.’

그 날강도 사슴이 드레스에 돈을 투자할 리가 없지. 제게서 어떻게 뜯어 간 돈인데.

“추측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

밀란느 학장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벤디 학도는 교복을 입고 올 테니까.”

“네?”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학장이 멀어졌다.

“…….”

잠시간 말을 잃은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했다.

벤디는 교복을 입고 올 거라는 학장의 말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연회든 뭐든, 이곳은 아카데미 내부.

학생들을 대표하는 학생회가 갖춰 입을 의상은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연회복이 아니었다.

이윽고 안나는 풀어 내린 진녹색 머리카락을 당겨 묶으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다들 부를 과시하기 바빴지, 어떤 학생회장도 그런 결정을 하진 않았는데.”


“동감.”

신시아도 머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보석 장식을 뺐다.

“학장님도 파악한 회장의 깊은 뜻을 늘 옆에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부끄러워요.”

메이지 또한 오랜만에 입은 알록달록한 로브를 벗어 내렸다.

벤디를 조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세 사람은 교복으로 환복하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밀란느 학장이 들으면 억울해서 가슴을 칠 해석이었다.

* * *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야닉 펠에게.

레넌과 헤일린이 정신을 판 사이, 엉금엉금 기어 들어온 야닉이 나를 손에 가둔 후 달아났다.

그러고도 한참을 달린 야닉은 교목 위에 몸을 숨기고 나서야 나를 풀어줬다.

“대체 네놈은 뭐야?”

오래 뛰어서 더운지, 그가 긴 머리를 묶으며 중얼거렸다.

“그 괴물들이 요란 떠는 걸 보면 보통 녀석이 아닐 텐데…… 혹시!”

혹시?

“그 마스코트 곰처럼 학생회 자리를 노리는 놈이냐?”

말을 말자.

정체를 알아봐 줄까 싶었던 야트막한 희망이 증발했다.

그냥 거기 내버려 뒀으면 화상과 진상이 의무동에 데려가 줬을 텐데.

원망 어린 눈길로 야닉을 노려보자, 그가 불량 학도처럼 눈에 힘을 줬다.

“콩만 한 게 어디 눈을 부라려?”

움찔.

움츠러든 나는 하는 수 없이 야닉에게 의사소통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홀로 의무동까지 못 갈 거야 없지만, 이런 작은 몸으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니까.

어제 레넌에게 여러 번 시도해도 실패했기에, 일말의 기대도 안 한 내가 설렁설렁 바닥 쓰는 시늉을 했다.

그때 야닉이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말했다.


“빗자루.”

“……!”

천잰가.

#<102 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야닉을 올려 봤다.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릿빛 얼굴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어.’

네 발로 선 내가 시험 삼아 어흥,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하얀 고양이.”

“……!”

뒤이어 엎드린 나는 늘어져라 하품했다.

“노란 고양이.”

“……!”

으르릉, 거칠게 포효한 내가 이를 드러냈다.

“재수 없는 개.”

“……!”

전부 정답이었다.

보통이 아닌데.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말없이 시선을 맞추던 야닉이 턱을 매만졌다.

“너…… 역시 범상치 않은 다람쥐군.”


‘네가 더 범상치 않아.’

다람쥐의 몸짓을 알아듣는 하이에나 수인이 세상에 둘일 순 없었다.

의욕이 폭발한 내가 휙휙, 네모를 그려 책상을 표현했다.

“그래, 계속해 봐.”

팔짱까지 낀 야닉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앉는 시늉에 이어 도도하게 서류를 읽는 동작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조금 어려웠는지, 야닉은 아리송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야수 같은 곰?”

안나가 아니야. 잘 맞추다가 왜 그래.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나는 다시 책상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자세를 취했다.

딱, 엄지와 검지를 마찰시킨 야닉이 화색을 띠었다.

“아, 알겠다. 독서광!”

신시아도 아니라고.

‘왜 나만 빼고 말해.’

답답해하며 가슴을 탕탕 치자, 그가 약간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성난 걸음으로 움직인 나는 나뭇잎 뒤에서 몸을 반만 내밀었다.

일순 야닉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창고.”

“…….”

“너…… 설마 학생회장이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한순간 심정이 복잡해진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맞춘 게 어디인가 싶었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그렇군, 몸을 작게 만들어서 임무라도 수행하고 있었나?”

그냥 사고 쳐서 다람쥐로 변한 걸 알아서 멋지게 포장해 주니 감사해야 할까.

딱히 부정하지 않은 나는 배를 만지며 아픈 행세를 보였다.

“의무동으로 가자고?”

이쯤이면 진짜 천재 아닌가.

귀신같이 알아들은 야닉이 나를 상의 주머니에 꽂았다.


휙, 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교목에서 뛰어내렸다.

주머니 밖으로 얼굴만 내민 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야닉이 정체를 알아주어 다행인데…….

‘다른 건 다 한 번에 맞춰 놓고 왜 나만 창고야.’

마침 시선이 마주친 그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눈꼬리가 시원하게 휘어지는 미소였다.

“어떠냐? 어? 이 야닉 님께 아주 고마워 죽겠지?”

야닉은 왠지 잘생긴 것도 열 받았다.

* * *

“이 다람쥐가 학생회장? 어이쿠, 이거 그거네.”

의관은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내 상태를 알아봤다.

“마개동에서 개발한 다람쥐로 변하는 물약.”

때는 작년.

마법 개발 동아리에서 만들었다가,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원에게 탈탈 털리고 압수당한 물약이었다.

개발 목적은 도청.

‘그 박쥐들.’

정말 온갖 걸 다 만들었구나.

원이 왜 검은 로브만 보면 머리부터 깨려고 하는지 약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약효는 이틀 정도 갑니다. 미제품이라, 부작용 때문에 한 번쯤 사람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다람쥐로


바뀌죠. 음…… 그러고 하루 정도 지나면 약효가 사라질 거예요.”

의관의 설명을 들은 내가 눈을 굴렸다.

‘그럼 내일까지 이 꼴이구나.’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던 나는 문득 야닉의 옷에 눈길이 닿았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흑색 연회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헤일린도 백색 연회복 비슷한 걸 입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차, 연회.’

뺨을 짚은 내가 낯빛을 까맣게 물들였다.

전교생 필수 참석인데. 심지어 학생 대표 연설까지 예정된 상태였다.


‘어떡하지.’

‘죽는 한이 있어도 연설은 하고 죽어요. 알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연설은 반드시 해야 한다며 강조하던 안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불안하게 서성이던 나는 일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내일까지 이 모습이라는 건…….’

오늘 저녁에는 사슴 수인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의 외형이 훨씬 안전할지도 몰랐다.

‘갈 수 있다면 가야지.’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자리인데, 이대로 불참해서 빈자리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특히 안나가 고대했던
만큼.

휙. 야닉을 돌아본 나는 그의 옷자락을 흔든 후, 뒤이어 연회장 방향을 가리켰다.

“엥? 그 꼴로 연회에 참석하려고?”

신기할 정도로 냉큼 알아들은 야닉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하계 연회는 분장을 하고 가도 괜찮다며. 배를 쭉 내민 내가 스스로를 탕탕 가리켰다.

“오, 확실히 다람쥐 분장이 금지된 건 아니니까.”

씩 웃어 보인 야닉은 갑자기 미적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다급히 시계를 가리켰지만, 못 본 척 한 그가 뒷짐을 졌다.

“그렇지, 시간에 맞추려면 내가 죽어라 달려야 하지. 이 야닉 펠이 회장의 다리가 되는 거니까.”

“…….”

“나도 이쯤이면 비밀 요원에서 양지로 올라갈 시기가 된 것 같은데.”

누가 하이에나 아니랄까 봐, 영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큰일이네.’

정이라도 들었는지 저 삼인칭이 거슬리지 않기 시작했다.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 학생 지도 대표는 내가 책임지지!”

아니, 그건 그냥 네가 하고 싶었던 역할이겠지.

경악한 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야닉은 의관의 어깨를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이 야닉 펠이 올해 학생 지도 대표다 이거라고!”

의관의 눈동자가 지진이 일 듯 흔들렸다.

“예? 야닉 학생이 지도 대표를요?”

난 이제…….

“그래, 모범의 표본! 학생 지도 대표!”

괴력 곰돌이한테…….

“하하하!”

죽었다.

* * *

째깍째깍,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연회장 단상에 오른 안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진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학장의 연설이 시작된 지금, 아직까지도 학생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뿐인가.

레넌은 가운만 걸친 채 연회장에 들이닥쳤다가 학장에게 등짝을 맞고 쫓겨나질 않나.

원과 헤일린은 연회장을 거의 뒤지다시피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사이 연회복을 대충 걸치고 온 레넌까지 합세하여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테이블보를 들추고, 커튼을 흔들고. 세 사람 다 언뜻 초조한 기색까지 비쳤다.

점점 학생들의 소란도 짙어지는 가운데,

“모쪼록 연회를 즐겨 주시게.”

평소 그리 길게 느껴지던 학장의 연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지.

밀란느 학장은 단상을 내려가며 안나를 곁눈질했다. 학생회장은 대체 어디로 갔냐는 눈빛.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 안나가 초조하게 손을 비볐다.


“다음은 학생회장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 무색하게 사회자의 말이 이어졌다.

대항전 이후 첫 공식 석상이기에, 학생들의 기대 어린 눈빛이 단상에 모였다.

“…….”

그러나 수십 초가 지나도 팔다리를 삐걱거리는 학생회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긴 정적 후.

“뭐야, 학생회장은?”

“불참이야?”

웅성웅성 소란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음…… 학생회장?”

사회자가 학생회 방향으로 돌아보자,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안나가 앞으로 나섰다.

“흠흠, 죄송합니다. 학생회장은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불참을 선언하려는 순간 쾅! 연회장 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지는 불빛을 등지고 선 야닉이 손에 들고 있던 걸 힘차게 던졌다.

“가라, 학생회장!”

그의 손에서 공보다 작은 물체가 쏘아져 나갔다.

“학생회장이라는데?”

“뭐?”

“어디, 어디?”

학생들의 술렁임에, 바닥을 기고 있던 헤일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중을 가르고 제게 날아오는 작은 털 뭉치를 향해 팔을 뻗는 동시에,

“윽!”

조그만 다람쥐가 헤일린의 이마를 박차고 다시금 도약했다.

탁탁탁, 원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벤디를 향해 달렸다.

그가 다급하게 뛰는 건 처음 보는 학생들이 어벙한 얼굴로 눈길을 옮겼다.

그럼에도 금안은 오로지 다람쥐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기 바빴다.

‘놓치면 다친다.’

받아 주려 팔을 뻗은 게 무색하게 착, 원의 정수리를 박찬 다람쥐가 날아올랐다.


한편, 단상 가까이 있던 레넌은 벤디의 목적지가 어딘지 눈치챘다.

“야 이놈아!”

곧바로 밀란느 학장의 지팡이를 뺏은 그가 단상을 향해 뻗었다.

팍, 지팡이를 박찬 다람쥐는 그대로 안나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큭! 뭐야!”

“학생회장이라니까!”

“뭐라고요? 이게?”

야닉의 외침에 안나가 당황한 사이, 벤디는 그녀의 이마를 디딤돌 삼아 단상에 착지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 하나 대응하지 못했다.

정적 속, 뒤뚱거리며 제 몸보다 큰 확성 마도구 앞에 선 벤디가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이 내려앉은 연회장에 이윽고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찍찍.

“…….”

신선한 충격에 휩싸인 학생들은 멍하니 단상을 올려 봤다.

하다 하다 이제는 사람의 언어를 생략하네.

‘우린 언제쯤,’

‘제대로 된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안나가 탄식하며 이마를 짚고, 밀란느 학장이 목뒤를 잡고 넘어갔다.

하계 방학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연설이었다.

* * *

다람쥐에서 사람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연회에서 찍찍거린 걸로 모자라…… 학생 지도 대표를…… 야닉 펠로 뽑았다고……?’

안나에게 집어 던져져서 소파에 꽂히는 말로가.


폭풍 같은 이틀 후, 아카데미 정문.

수십의 고용인들이 큰 가방을 짐칸에 실었다.

하나둘 떠나는 마차를 보자 새삼 하계 방학이라는 게 실감 났다.

동시에 내가 이 아카데미에서 반년이나 버텼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회장, 한 마디만 할게요. 사고 치지 마세요.”

어깨를 잡은 안나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고구마 나눔 금지, 찍찍 금지, 학생회 인원 충원 금지.

한 마디를 수십 마디로 끝낸 안나가 스웰든 가문 마차에 오를 즈음, 반대편에서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이 야닉은 안 갈 거라고! 바로 이틀 전에 학생 지도 대표가 되었는데!”

머리채를 풀고 날뛰는 중인 야닉이었다. 고용인은 쩔쩔매며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야닉 님……. 지도할 학생들도 다 본가로 돌아갔는데, 누굴 지도하시려고…….”

그런 두 사람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간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가 속삭였다.

“야닉 님, 펠 가주께서 이번 하계 방학 때도 다른 길로 새면,”

“…….”

“이마에 바보라고 쓰인 불 인장을 찍겠다고 경고하셨어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야닉의 암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잠시 후, 떼쟁이는 울상으로 펠 가문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신시아와 메이지까지 배웅한 나는 학장님이 준비해 주신 마차로 향했다.

‘드디어…….’

사자 영역으로 향할 시간이구나.

사색에 잠겨 걷던 내가 별안간 청각을 곤두세웠다.

도도도.

타박타박.

저벅저벅.

걸음마다 발소리 세 개가 따라붙고 있었다. 우뚝 멈추면 겹쳐지던 발소리도 함께 멎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발을 내딛자,


도도도.

타박타박.

저벅저벅.

또다시 등 뒤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완전히 멈춰 선 내가 예고 없이 홱 뒤돌았다.

#<103 화>

곧바로 보인 광경은 노란 짐승을 필두로 줄지어 선 레넌과 원이었다.

차라리 그뿐이면 나았다.

노란 짐승은 웬 봇짐을 두르고, 레넌과 원은 각각 가십지와 서류를 한 아름 안은 상태.

누가 봐도 며칠 떠날 준비를 마친 행색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핀 내가 노란 짐승의 연두색 봇짐을 가리켰다.

“저건 뭐야?”

노란 짐승의 대변인인 레넌이 대답했다.

“아까 안나 스웰든이 묶어 주던데.”

“그러니까 뭘 넣은 건데?”

이번에는 원이 짤막히 답했다.

“멀미약.”

이로써 이들이 내 뒤를 밟는 목적이 명확해졌다.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심산.

심지어 매일같이 서로 다툴 때는 언제고, 오늘따라 사이가 좋은 게…… 내 심사가 뒤틀려 자신들을 놓고


갈까 휴전 중인 게 분명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따라오는 거야?”


날카로운 질문에 세 쌍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모를 수밖에. 밀란느 학장님과 나, 그리고 이스단 가문의 실권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따라오지 마, 경고했어.”

단호하게 말한 내가 뒤돌아 걸어가기 무섭게 세 개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저 맹수들이 진짜.’

멈춰 선 나는 길게 심호흡했다.

팍, 따돌리기 위해 땅을 박차는 동시에 뒤따라오는 발소리도 빨라졌다.

다다다다, 도도도, 타박타박, 저벅저벅.

다다다다, 도도도, 타박타박, 저벅저벅.

결국 마차에 도달할 때까지 의미 없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또 나 혼자만 숨차지.’

씩씩 숨을 몰아쉰 내가 머리에 쓰고 있던 교복 모자를 팽 내팽개쳤다.

“…….”

괜히 모자만 불쌍했다.

다시 주워서 탈탈 턴 나는 이스단 가문까지 안내할 마부를 돌아봤다.

밀란느 학장님이 친히 붙여 주신 마부. 그는 마차 운행 및 호위를 겸하는 만큼, 늠름한 인상과 벌어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척, 내 손가락이 밉상과 화상, 작은 진상을 향했다.

“호위 아저씨, 쫓아 주세요.”

울상이 된 마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단박에 배신당해서 슬픈 한편 그의 마음도 절절하게 이해됐다.

내게도 물리적으로 저 셋을 쫓아 버릴 힘이 없으니까. 입담으로 해결하겠노라 다짐한 내가 마차 문을 탁


짚었다.

가장 먼저 노란 짐승.

영악한 노란 짐승은 이미 마차 계단에 슬그머니 앞발부터 들이밀고 있었다.

“어딜.”

찰싹. 검지로 앞발을 때리자, 돌연 뒤돌아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노란 짐승은 그렇게 노란 조롱이떡이 되었다.


“노랑이 너 또 고집부릴래?”

제 의지대로 안 될 때 늘 하는 무언의 항의였다.

조롱이떡을 바라보던 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목적은 최대한 조용히 이스단 가문을 방문하는 것.

가문에서 일방적으로 혼담을 진행한 거라면, 헤일린 이스단은 아직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 속 모를 사자가……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기왕 학장님을 통해 몰래 다녀오기로 했는데, 저 노란 조롱이떡이 헤일린에게 미주알고주알 고한다면.

“…….”

어차피 이스단 가문 권속이니까 괜찮겠지.

차라리 데려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내가 나직이 읊조렸다.

“통과.”

조롱이떡에서 새끼 사자로 돌아온 노란 짐승이 폴짝 마차에 올랐다.

그런 노란 짐승을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레 마차에 오르려던 레넌이 내 팔에 가로막혔다.

“너는 안 돼.”

생글생글 웃는 낯이,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줄 아나 본데.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니야.”

“회장, 나 책임지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자비 없이 불통과를 외치려는 순간, 허리를 숙인 레넌이 귓가에 입술을 가져왔다.

“남의 몸 마음껏 구경했으면,”

뒤이어 내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책임져야지.”

“…….”

“백호 영역은 원래 그래.”

턱, 귀를 가로막은 내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백호가 아니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아닐까. 요망한 거짓말이 분명했다.

이윽고 천천히 바로 선 레넌은 눈을 반달로 접었다.

“나는 방학 때 딱히 갈 곳이 없는데.”
“……그래서?”

“따라가면 안 돼?”

수심 하나 없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일순 움찔했다.

‘홀로 에던트 저택에 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통신구 대화를 미루면, 레넌은 방학 때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가는 순간 가주와 대척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 또라이를 아카데미에 혼자 남겨 뒀다가 대뜸 백호 영역으로 가 버린다면…….

‘걱정 마, 죽더라도 가주의 목은 따고 죽을 거니까.’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옆에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나는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통과.”

가십지를 한 아름 품에 안은 레넌이 팔랑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이 남은 상태.

“저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나는 무감한 표정으로 주장하는 원을 올려 봤다.

“마탑에 안 가 봐도 돼요?”

“원래 자주 안 갑니다.”

진담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찾은 이후 제대로 마주하는 건 처음.

까만 흑발과 그 아래 자리한 보석 같은 금안을 보고 있자니, 어릴 때 숲에서 본 소년이 겹쳐 보였다.

늑대 수인인 원이 어쩌다 사슴 영역까지 흘러들어 온 건지. 왜 그때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서


늑대로 지낸 건지.

‘궁금한 게 많지만…….’

마음이 약해질 뻔한 내가 탁, 냉정하게 마차 문을 닫았다. 그게 원까지 데려갈 이유는 되지 않았다.


이스단 가문에 가는데 괴물을 둘이나 데려갈 순 없지.

암묵적인 불통과를 마주한 원이 서류 더미 너머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를 두고 가려고?”

끄덕끄덕.

“진짜 두고 가시겠다?”

끄덕끄덕.

심지 굳게 고개를 주억이자, 원은 서류 더미를 든 채 내게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와중 탁, 마차가 등을 가로막았다.

바로 앞에서 멈춘 원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요?”

경직된 내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다 기억난다고.”

“그거 말고.”

그럼 뭔데.

우리 사이에 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원은 도르르 눈을 굴리는 나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때, 학생회장 업무를 알려 주는 조건으로 한 계약.”

“계약?”

뜬금없는 말을 되뇌던 나는 이내 낯빛이 싸해졌다.

‘가벼운 계약서. 계약이 끝나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계약서의 역할은 뭔데요?’

‘계약 사항에 한해서 위치 추적.’

‘…….’

‘회장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라지면 위치 추적이 가능하죠.’

‘오…….’

그랬지 참. 내 손에 스민 마법진까지 떠올린 나는 탄식을 삼켰다.

“대가를 아직 받지 못한 것 같은데.”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밉살맞은 속셈이 그득했다.

‘뭐 얼마나 어마어마한 걸 요구하려고.’

제자리에 굳은 나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데려가면.”

“…….”

“대가를 좀 쉬운 거로 참작해 주나……?”

“하는 거 봐서요.”

죽인다는 둥, 잡아먹는다는 둥. 자신을 살려 준 은인에게 보은하지는 못할망정 아주 배은망덕한 늑대였다.

강하게 따지고픈 마음과 달리, 내 몸은 이미 공손하게 마차 문을 열고 있었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간사한 판다주의자에게 전수받은 기술을 적극 활용할 때였다.

* * *

드르륵, 마차가 사자 영역을 향해 출발했다.

벤디는 창문으로 아카데미 건물을 바라봤다. 청량한 하늘 아래, 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건물이 멀어지고
있었다.

개운하면서도 쌉싸름한 이 기분은 뭘까.

방학을 맞은 아카데미 건물은 쓸쓸하게 느껴진다는 학생들의 대화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내 똑바로 앉은 벤디는 벌써 마차 멀미에 시달리는 노란 짐승의 등을 토닥였다.

‘이럴 거면서 꼭 따라오지.’

뒤이어 벤디의 시선이 맞은편의 원과 레넌을 향했다.

혼자 가려 했는데 줄줄이 셋이나 따라붙다니.

벤디가 잔뜩 경계하며 엉덩이를 슬금슬금 물렸다.

시작부터 평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즈음, 레넌이 정적을 깨뜨렸다.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아?”

“도착하면 어딘지 바로 알게 될 거야.”

원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목적은?”

이번에는 금방 답하지 않은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스단 가문이 레피 가문에 혼담을 제안하기까지의 과정이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지, 이유는 뭔지.

‘솔직히…….’

혼담 가문이 이스단 가문인 걸 알았을 때 조금이라도 안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초식 수인을 탐하는 변태적 성향의 귀족도 아니고.

헤일린은 이상한 방식이긴 해도 어쨌든 제게 호의를 베푼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게 이스단 가문에 기댈 수 있는 요소는 되지 않았다.

혼담은 두 사람만의 관계가 아닌 만큼.

‘네 혼처가 정해졌다, 벤디.’

‘우리 레피 가문과 연이 있는 가문이니, 네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다.’

또한 숙부에게 쫓기는 이유이자, 그런 숙부에게 가장 큰 시련을 줄 수 있는 방법.

입을 달싹인 벤디는 흘리듯 말했다.

“혼담을…….”

혼담. 그 단어가 나오자 원과 레넌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거절할 수 있으면 거절하려고요.”

생각이 많아진 벤디는 창밖을 돌아봤다.

학장님과의 대화를 미뤄 레넌은 혼담에 대해 알고 있고, 원이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아무튼 이런 중요한 일이니 따라오더라도 끼지 말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혼담 거절이라.’

원과 레넌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통제하지 못하며 씰룩거렸다.

여태껏 사슴이 내뱉은 발언 중 가장 기특하고 흡족했다.

분위기상 대놓고 좋아할 순 없는 두 사람이 각각 서류와 가십지로 표정을 감췄다.

한편, 멀미 속에서 벤디의 말을 들은 헤일린도 피식, 피식,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혼담을 피하고 싶어서.’

약혼자인지 버러지인지.

아무튼 그 떨거지를 내친다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만은 벤디가 밥으로 고구마를 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토감이 싹 사라진 헤일린은 창문에 앞발을 짚고 섰다.

눈을 조금 크게 뜬 벤디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랑아, 멀미는 좀 괜찮아졌나 보네?”

캬옹.

멀미는커녕 상쾌할 지경인 헤일린이 콧바람을 들이켰다. 꿉꿉한 여름 바람 냄새가 봄바람처럼 향긋했다.

기고만장한 노란 짐승의 뒷모습을 본 원과 레넌은 끝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104 화>

아카데미에서 사자 영역까지는 마차로 꼬박 3 일은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마저도 사슴 수인으로 변하기 전에 일찍이 숙소로 들어가야 하기에, 일정이 하루 더 늘어났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사슴인 사실을 알든 모르든, 모습이 바뀌는 순간만큼은 육식 수인을 멀리하는 편이 좋으니까.

문제는 반복된 마차 강행군에 못 이긴 노란 짐승이었다.

골골거리는 걸 넘어, 이제는 마차만 탔다 하면 혼절에 이르는 지경.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에 앉은 나는 맞은편을 응시했다.

자장, 자장.
그곳에는 레넌이 늘어진 노란 짐승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둘이 언제부터 사이가 좋았다고.’

포크와 발톱으로 다툰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자, 레넌은 물색 눈동자를 무구하게 깜박였다.

“할 말 있어?”

“응, 언제부터 네가 노랑이를 걱정했다고 그렇게,”

“-걱정할 수밖에. 노랑이는 조만간 하늘이 노랗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노란 세상. 헛소리를 이어 간 레넌은 갑자기 푸스스 웃으며 얼굴을 가렸다.

어깨 떨림에 따라 결 좋은 은발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노란 짐승이 며칠째 멀미 때문에 상태가 별로라면, 레넌은 며칠째 그냥 상태가 별로였다.

심지어 이상한 건 레넌뿐만이 아니었다.

“밥이라도 먹여 둬.”

“…….”

“앞으로는 더 불쌍해질 테니까.”

서류를 보던 원이 동정 어린 말을 뱉었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휜 모습으로.

저 늑대가 노란 짐승에게 자비를 베풀 인성은 아닌데.

기분이 좋아 너그러워진 건지, 아니면 멀미에 시달리는 노랑이가 불쌍한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어서 원은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더니 서류에 집중했다. 서류 너머에서 간헐적으로 픽,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둘이 나 몰래 반주라도 했나?’

미쳐 가는 두 사람을 외면한 나는 창밖을 돌아봤다.

바깥은 어느덧 사자 영역 초입에 진입한 상태였다.

사자 영역, 시세온.

시세온에 대해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수인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강의에서만 몇 번이나 접한 도시니까.

무용이 높은 자로 가득하고, 그만큼 부와 권력을 거머쥔 영역.

그를 증명하듯 화려한 건물이 빼곡했고, 거리는 새로 다듬은 것처럼 깨끗하고 넓었다.

‘여기가…….’
사자의 본거지.

누가 봐도 사자 같은 육식 수인들이 길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더는 못 보겠다.’

스르륵,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친 나는 흠칫 몸을 물렸다.

레넌은 아예 벽을 치며 까르르 웃는 중이었고, 원은 다정다감한 눈으로 노란 짐승을 응시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된 게 마차 밖보다 안이 더 무서운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우아한 사슴이 한낱 맹수들의 속을 어찌 알겠어.

* * *

드르륵, 마차가 이스단 가문의 후문으로 들어섰다.

비공식 방문인 만큼 내방 절차도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후문 앞에 덩그러니 선 나는 뒤를 돌아봤다.

원과 레넌은 예정되지 않은 동행인 탓에, 그들의 신분 확인 절차가 끝나기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먼 곳에 정차한 마차와 두 사람을 뒤로한 내가 배낭을 살폈다.

‘많이 지쳤나 보네.’

노란 짐승은 여전히 물먹은 솜 인형처럼 축 늘어진 꼴이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덜 흔들리려나?’

나는 배낭을 조심스레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핀에게도 덤비는 천방지축의 유일한 약점이 마차 멀미라니. 우습기도 하면서 안쓰러웠다.

혹시 여름에 한기라도 들까, 배낭 뚜껑을 머리에 걸쳐 준 내가 후문을 올려 봤다.

‘……이게 후문이라고.’

다시 확인해도 입이 절로 벌어지는 규모였다.

심지어 본관도 아닌 별관 후문이라는데, 족히 레피 저택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가문에서 레피 가문에 혼서를 보낸 게 말이 안 되는데.

‘설마.’
이제야 물밀듯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혹여 학장님의 잘못된 정보 하나만 믿고 다짜고짜 여기까지 들이닥친 거라면.

낯빛이 까매지는 동시에 쿵, 우측에서 악취와 함께 어마어마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멧돼지 형상을 한 커다란 마물이 있었다.

그 옆에는 고개를 한참 꺾어야 할 정도의 거한이 자리한 상태.

“최근 민가를 덮치고 다닌다는 파르핀이군요.”

단정한 차림새의 남자가 거한을 뒤따르며 종달새처럼 떠들었다.

“직접 처리하시러 갈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꼭! 어휴, 됐습니다.”

나는 기척 없이 주춤주춤 거리를 벌리며 두 사람을 관찰했다.

마물을 바닥에 던진 거한은 준수한 얼굴 아래, 바위 같은 몸을 가진 남자였다.

과묵하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 깔끔하게 넘긴 백금발과 은색 눈동자.

입에 자리한 송곳니와 이곳의 위치를 생각하면 안 봐도 사자 수인이었다.

‘군인…… 인가?’

남자의 하얀 제복 차림을 훑는 순간 눈이 딱 마주쳤다.

“…….”

“…….”

심해에 있는 듯한 고요 속에서 시선이 오갔다.

돌연 눈을 부릅뜬 그는 곧장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으나, 위압감 때문에 다리가 얼어붙고 말았다.

순식간에 내 앞에 다다른 남자는 나를 빤히 내려 봤다.

어찌나 체구가 큰지,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였다.

꿰뚫릴 듯한 눈길로 깔아 보던 그는 대뜸 내게서 확, 배낭을 낚아챘다.

“앗!”

막을 새도 없이 빼앗기고 만 나는 짙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곳이 이스단 가문이긴 하지만, 신분도 불분명한 남자에게 다짜고짜 노란 짐승을 넘길 순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의 거친 손길로 인해 노란 짐승이 웩, 또다시 헛구역질을 해 댔다.

‘안 그래도 흔들면 안 되는데.’

경직된 팔을 뻗은 내가 슬그머니 배낭을 가져왔다.


방심하고 있었는지 쉽게 빼앗긴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휙, 또다시 장대한 팔이 배낭을 잡아당겼다.

배낭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나는 발이 공중에 붕 뜨며 딸려 갔다.

“아……!”

“……!”

내가 딸려 올 줄은 몰랐는지 남자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육식 수인이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무슨 사람 힘이 이래.

땅이 가까워지는 동시에 화악,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

대롱대롱 공중에 떠오른 내가 뒤를 돌아봤다. 흑발이 헝클어진 원이 코앞이었다.

“하…….”

한 팔로 나를 들어 올린 상태인 그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뭐 어떻게 하면 잠깐 시선을 뗀 사이에……!”

평정을 잃고 화내던 원이 옅은 한숨과 함께 분노를 갈무리했다.

“다친 곳은.”

도리도리.

열심히 고개를 저어 봤자 누구 하나 찢어 죽일 법한 금안은 변함이 없었다.

탁, 나를 바닥에 내려 준 원은 배낭 도둑과 지그시 시선을 교환했다.

이러다가는 괜한 마찰을 빚을 것 같아, 어느새 다가온 레넌의 팔을 당긴 내가 슬쩍 원의 눈을 가렸다.

시야가 막힌 원에게서 한참 만에 뻣뻣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는데요.”

눈앞을 가린 손을 떼지 않은 레넌이 방긋 웃었다.

“회장 아닌데.”

“…….”

“누구게.”

“죽일까.”

원이 레넌의 머리채를 잡은 와중, 탁탁, 별관에서 검은 정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빠르게 뛰어나왔다.

우리 앞에 다다른 그녀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사라 님의 직속 수하입니다. 방문 보고가 지체되다 보니,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고개를 저은 내가 대표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진 거라…….”

하물며 예고 없이 따라붙은 동행인 덕분에 입구에서 제지당한 거니까.

내게 양해를 구한 여자는 배낭 도둑에게 다가갔다.

입을 가린 채 무어라 속삭이자, 이내 남자가 작게 끄덕였다.

삽시간에 상황을 정리한 그녀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실례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손짓이 향한 곳은 천장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높은 내부였다.

“우선 여독을 푼 후에 사라 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라 이스단.

헤일린 이스단의 어머니이자, 이스단 가문의 실권자였다.

마력 측정 당시, 복도에서 잠깐 마주쳤던 그녀를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앞으로 벌어질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내가 발을 내디뎠다.

레피 가문에 말도 안 되는 혼담을 제안했을 확률이 높은 사람.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된 존재가 바로 이 안에 있었다.

* * *

별관 후문에 남겨진 남자와 그의 측근은 멀거니 자리를 지켰다.

남자는 멀어지는 무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일행 모두가 수인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몸을 살짝 튼 레넌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레넌은 양손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어 후- 입김으로 날려 보냈다.

“감히……!”

그 행동을 본 측근이 노성을 토하자, 남자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소란 떨지 마라, 내가 그냥 보낸 것이니.”

자신의 정체를 뻔히 알고도 발칙한 도발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자.

에던트 가문의 목줄 없는 애송이가 분명했다.


그리고 방금 전, 여자와 대치한 제게 있는 대로 적의를 드러낸 흑발 애송이. 경우 없기로 유명한 차기
마탑주였다.

남자와 비슷한 시점에 원과 레넌의 정체를 유추한 측근이 중얼거렸다.

“저 두 사람이 무슨 일로 함께 여기까지 왔답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조합. 측근은 채근하듯 말했다.

“너무 위험한 인물들인데요. 정말 이대로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시게요?”

“사라의 비공식 손님이라더군.”

“예? 사라 님의……?”

“그녀가 행하는 일에 토를 달 순 없지.”

“흠, 아카데미 업무 차원에서 방문한 걸까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남자가 멀어지는 벤디 일행을 응시했다. 은색 눈동자가 삐거덕삐거덕 발을


옮기는 벤디에게 머물렀다.

주홍색 머리통을 빤히 주시하던 그는 느지막이 말문을 뗐다.

“너.”

“예?”

“저 여자의 가방 안에 뭐가 있는지 봤나?”

“아뇨,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그것까지는…….”

측근이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셨죠. 왜 그러신 겁니까?”

입을 꾹 다문 남자는 복잡한 심정으로 벤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대체 왜…….

“…….”

다 큰 남의 아들을 배낭에 넣어 다니는 걸까.

#<105 화>
벤디 일행이 별관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그들을 안내 중인 사라 이스단의 직속 수족, 비아는 현재 인생 최대 난제를 맞이한 상태였다.

바로 벤디가 앞으로 멘 배낭 때문에.

빛바랜 갈색 배낭 안에는 그녀가 평생 모셔야 할 차기 가주, 헤일린 이스단이 들어 있었다.

신경 쓰인다.

차기 가주의 성정에 억지로 배낭에 들어갔을 리는 없고.

당연히 용인한 상황이겠지만, 주인이 저 꼴이 된 경위가 미치도록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분한 얼굴 뒤로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던 비아는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송구하나, 그 가방은 어떻게 된 연유인지…….”

노란 짐승을 지칭하고 있음을 금세 알아챈 벤디가 되물었다.

“이스단 가문의 영물이지요?”

“명물이요? 아…… 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명물이라면 명물이긴 하지. 잘못 알아들은 비아가 중얼중얼 말끝을 흐렸다.

골골거리는 노란 짐승을 힐긋 살핀 벤디가 양해를 구했다.

“오는 동안 마차 멀미를 심하게 해서요. 곧 깨어날 텐데, 그때까지만 제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담담하게 묻는 벤디를 마주한 비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 입을 뻐끔거리기도 잠시, 함부로 말을 얹지 않은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치미는 호기심을 겨우 삼킨 비아는 벤디 일행이 머물 손님방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문제는…….

와장창!

“에구머니!”

쨍그랑!

“죄, 죄송합니다!”

쿠당탕!

“어이쿠!”

걸음걸음마다 이어지는 고용인들의 실수였다.

그들의 불찰을 십분 이해한 비아가 모른 척 안내를 지속했다.

“……?”
벤디는 입을 한계까지 벌린 고용인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헛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일행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너무 예쁜 걸 봐서 그런가 본데.”

예쁨 담당인 레넌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달리 반박하지 못한 벤디는 그를 올려 봤다. 뒤이어 또 다른 예쁨 담당인 원을 살폈다.

분명히 실내인데 후광이 비치는 느낌을 받은 벤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넋 놓을 만하긴 해. 몇 개월을 봐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손님방 앞에 다다랐다.

벤디의 방을 중심으로 오른쪽, 왼쪽이 원과 레넌의 숙소였다.

화려한 문 앞에 선 벤디는 꿀꺽, 목울대를 울렁이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원과 레넌의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내놔요.”

“이리 줘.”

이스단 가문으로 오는 내내 지속된 노란 짐승 강탈이었다.

여기가 혼숙 금지인 아카데미 기숙사도 아닌데. 하물며 혼숙 금지를 동물에게까지 적용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잠깐 쉬다가 금방 데리고 나올 건데, 꼭 데려가야겠어?”

“내놔요.”

“이리 줘.”

논리적으로 주장해 봤자 고구마 같은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벤디의 날 선 눈빛이 레넌에게 닿았다.

특히 저 청순한 호랑이는 다람쥐로 변한 자신을 기숙사로 홀랑 데려갈 때는 언제고.

콧잔등을 움찔움찔 떤 벤디가 억울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숙사에서도 같이 잤는데, 뭐 대수라고.”

“뭐?”

“무슨…….”

벤디는 도망치듯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묵직하게 닫히며 찰칵, 안쪽에서 단단히 잠그는 소리가 났다.

“…….”

원과 레넌은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돌이 되었다. 벤디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어차피 기숙사에서도 같이 잤는데.’

‘……에서도 같이 잤는데.’

‘……같이 잤는데.’

대체 언제.

차마 확인하기조차 겁나는 두 사람은 뻗은 손을 거둘 생각조차 못 했다.

비아는 이스단 저택을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변한 그들을 살폈다.

체구는 산만 한 이들이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벤디에게 맥을 못 추는 모습이라니.

잔뼈 굵은 고용인의 직감이 고개를 들었다.

차기 가주를 배낭에 쑤셔 넣은 학생만 잘 모시면 되겠구나.

* * *

손님방으로 들어온 나는 조심스럽게 노란 짐승을 침대에 올려 뒀다.

‘좀 괜찮아졌나?’

갸르릉, 노란 짐승은 이제야 좀 살만한지 몸을 뒤척였다.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등을 내려 보던 나는 조용히 욕실로 들어섰다.

발을 딛기조차 황송한 화려함에 감탄하기도 잠깐, 그럴 여유 따위 없는 내가 커다란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주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송곳니를 가진 여우 수인이 서 있었다.

“…….”

나는 거울 표면을 살짝 쓸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또 심적으로는 불편한 모습.

짧은 감상을 끝낸 내가 왼쪽 팔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딸깍, 버클을 열자 손쉽게 팔찌가 풀렸다.


밀란느 학장님께 외형을 바꾸는 마도구를 받은 이후, 스스로 푸는 건 처음이었다.

이윽고 새하얀 빛이 일며 순식간에 외형이 뒤바뀌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사라진 송곳니. 그리고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올라갔던 눈매가 제자리를 찾았다.

육식 수인이 널린 이곳에서 사슴 수인으로 변하는 게 두렵기 짝이 없지만…….

눈을 살짝 내리깐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네 혼처가 정해졌다, 벤디.’

‘헤일린 이스단의 혼담 상대가 벤디 학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구나.’

사라 이스단을 만나러 가야 할 당사자. 그건 여우 수인으로서가 아닌, 사슴 수인으로서였다.

* * *

잠에서 깨어난 헤일린은 몽롱하게 눈을 깜박였다.

곧장 낯익은 가구와 소품들이 시야를 채웠다. 어딘지 공기마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의문을 품었으나 답을 알 리가 만무했다.

마지막 기억은 흔들리는 벤디의 얼굴과 흔들리는 세상, 흔들리는 정신…… 우욱, 재차 멀미를 할 뻔한
헤일린이 생각을 멈췄다.

“일어났어?”

듣기 좋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로 밀색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허리를 숙여 노란 짐승의 상태를 살핀 벤디가 뺨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힘들어해서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는 어쩌려고 그래?”

질책 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나른하게 몸이 풀린 헤일린은 벤디의 손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또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도 꽤나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그는 제게 쏟아져 내린 밀색 머리카락을 별생각 없이 바라봤다.

‘밀색…….’

아니, 밀색이라고?
뒤늦게 고개를 번쩍 치켜든 헤일린이 멍하니 벤디를 올려 봤다. 세 번째 보게 되는 원래 모습이었다.

심지어 벤디는 그 외형 그대로 시계를 확인하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배낭 속에 몸을 욱여넣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몰라도, 약혼자인지 버러지인지를 버릴


시간이 다가왔음은 확실했다.

‘나도 가.’

그 떨거지 얼굴이나 기억해 두게. 되살아난 헤일린이 눈을 선득하게 빛냈다.

“괜찮겠어?”

노란 짐승의 몸 상태를 고려한 벤디는 배낭을 앞으로 멨다.

뒤이어 가져온 로브를 두르며 후드로 얼굴의 반을 덮었다.

헤일린은 로브 사이로 얼굴만 쏙 내밀었다.

“가자.”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굴던 벤디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한 채 망설였다.

아무리 잘 감췄다고 해도, 이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맹수 무리에 던져진 사슴과도 다름없으니까.

문고리를 잡은 손이 파리하게 떨리자, 벤디는 반대편 손으로 꾹 눌렀다. 청승이나 떨기 위해 사자의


본거지까지 온 게 아니었다.

찰칵, 문을 열고 나온 벤디를 발견한 원과 레넌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째서 마개동 부원처럼 꽁꽁 싸매고 나온 걸까.

심지어 그 상태로 꾸물꾸물 이동하다가 쿵, 쿵, 벽에 돌진하는 꼴이었다. 물론 벽에 얼굴이 찌그러지는


수모는 헤일린이 대신했다.

“회장, 왜 그래?”

“잠깐.”

튕겨 나오는 벤디를 붙잡고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

후드 아래에 자리한 밀색 눈동자. 사슴 수인 모습이었다.

시선이 마주쳐 버린 벤디가 다급히 로브를 푹 눌러썼다.

보는 눈이 있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은 두 사람, 그리고 헤일린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 자리의 누구도 벤디의 현재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세 사람 다 최소 한 번쯤은 보았다는 의미.

서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보게 됐는지 모르는 그들이 미간을 구겼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사라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아의 안내에 따라 벤디 일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라 님?’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된 헤일린은 일순 사고가 정지했다.

앞서가는 여자는 사라 이스단, 그러니까 제 어머니의 오랜 수족이었다.

‘저자가 왜 여기에…….’

휙, 휙. 헤일린의 고개가 전광석화처럼 이곳저곳을 오갔다.

“……?”

복도 벽의 이스단 가문 문양을 확인한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 동시에 일행의 걸음이 멈췄다. 별관에 자리한 사라 이스단의
집무실 앞이었다.

“사라 님께서는 독대를 원하십니다.”

비아의 말에 벤디는 뒤에 선 원과 레넌, 노란 짐승을 번갈아 봤다.

사실 홀로 이곳에 왔다면 두려움에 떨기 바빴을 텐데, 이들이 따라와 줬기에 그리 무섭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고맙다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것 같고.

말을 고르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인 벤디는 후드를 슬쩍 들추어 얼굴만 드러냈다. 이내 열없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다녀올게.”

처음 보는 벤디의 미소. 그 웃음을 본 세 사람은 고장 난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 * *

“사라 님, 비아입니다.”

바깥에서 들린 인기척에, 사라 이스단은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어떤 학생일지 기대되는군요.’

‘실망하진 않을 거요, 내 장담하지.’


밀란느 학장이 친히 보낸 학생의 정체가 제법 궁금하던 참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며 로브로 얼굴은 물론 전신을 가린 음침한 자가 들어섰다.

온통 새까만 존재가 유일하게 가진 색채, 노란색.

로브 사이로 머리통만 덜렁 내민 새끼 사자와 사라 이스단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서로 그러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심호흡한 벤디가 천천히 후드를 벗자, 감춰 둔 밀색 머리카락이 굽이굽이 흘러내렸다.

새침하지만 콕 찌르면 금방 울게 생긴 얼굴.

어디서 본 듯한 낯을 빤히 살피던 사라 이스단은 이내 기억해 냈다.

마력 측정 당시 아카데미에서 잠깐 마주친 학생회장이었다. 현재는 약간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호기심이 동한 그녀가 깍지 낀 손에 턱을 묻었다.

“올해 학생회장이군.”

“……오늘은 학생회장으로서 찾아뵌 게 아니에요.”

“음?”

아스라이 떨리는 손을 맞잡은 벤디는 사라 이스단을 똑바로 마주했다.

“저는 페트리온에 있는 레피 가문의 직계, 벤디 레피입니다.”

움찔. 내리 여유만만하던 사라 이스단의 낯빛이 돌연 굳어졌다.

그녀의 반응에 벤디는 확신했다. 레피 가문과 혼담이 오간 사자 영역의 귀족가가 이스단 가문이 맞았음을.

“그리고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죠.”

“…….”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을 파기하기 위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106 화>

툭, 사라 이스단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펜이 떨어졌다.


떨리는 그녀의 눈길이 로브를 벗는 벤디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이윽고 앞으로 멘 갈색 배낭이 드러났다. 새끼 사자가 몸을 담은 빵빵한 가방이 자태를 뽐냈다.

약혼자를 배낭에 구겨 넣고 혼담을 거절하러 온 이 사슴의 진의는 대체 뭘까.

장난질은 아닌 듯한데, 차분한 표정 아래 숨겨진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스단 가문으로 은밀히 아카데미 학생 하나가 갈 거요.’

‘그 능구렁이 학장이…….’

이 정도로 중한 사안이면 미리 언질을 줬어야지.

왠지 목이 깔깔해진 그녀가 차를 들이켜는 순간,

“헤일린 이스단은 혼담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을 거예요.”

풋, 입에서 차가 뿜어져 나갔다.

헤일린 이스단을 떡하니 데려와 놓고는 모를 거라니, 미치광이 사슴인가.

사라 이스단은 손수건으로 턱을 톡톡 닦으며 벤디를 주시했다.

‘……서로 합의한 사안이 아니었나?’

혼담을 알게 된 제 아들이 저 여려 보이는 사슴에게 파혼을 강요한 거라 생각했는데.

벤디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간 그녀의 눈길이 새끼 사자에게 닿았다.

귀를 바짝 세운 걸로 모자라 앞발로 주둥이를 막은 꼴.

‘모르고 있었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극단 배우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헤일린과 사라 이스단의 시선이 마주쳤다. 모자의 동공이 함께 흔들렸다.

그 순간 헤일린의 눈앞에 무수한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무시하면 그만이었던 평소와 달리, 집요할 정도로 날아오던 이스단 가문의 전서.

‘혼담을 피하고 싶어서.’

혼담 때문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주장하던 벤디의 목소리.


‘약혼자가 있었나.’

‘…….’

‘어느 일족?’

‘……너구리 일족.’

뻔뻔한 얼굴로 사자를 너구리로 둔갑시킨 사슴.

‘혼담이 오가는 건 알고 있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던 능구렁이 학장.

‘노랑이는 조만간 하늘이 노랗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밥이라도 먹여 둬.’

돌았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굴던 똥개와 하얀 고양이까지.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추어졌다.

마지막으로…….

‘아무튼 혼담에는 아예 생각이 없는 겐가?’

‘있을 리가.’

들은 척도 안 하고 혼담을 걷어차던 과거의 자신이 아른거렸다.

사슴의 곁에 있으려 팔자에도 없는 고양이 행세를 하며 온갖 아양을 부렸는데. 이미 오래전에 제 품에


굴러들어 와 있던 사슴을 발로 차 버린 격이었다.

‘있을 리가.’

‘있을 리,’

‘있을,’
미친놈이 네가 뭔데 그걸 거절해.

당장 과거로 돌아가 헛소리를 내뱉는 스스로의 입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부르르, 경련하던 헤일린은 자신을 내려 보는 벤디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왜 몸을 떨고 그래.”

투명할 정도의 밀색 눈동자에 머문 감정은 걱정이었다.

조금 전, 이 하얗고 무구한 얼굴로 파혼을 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쩐지 세상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한 헤일린이 앞발로 눈을 덮었다.

자신만 몰랐던 그 버러지 같은 약혼자의 정체.

‘사슴의 너구리 약혼자는…….’

바로 나였다.

“얘가 왜 이래, 노랑아, 노랑아!”

충격을 견디지 못한 헤일린은 결국 뽀글뽀글 거품을 물고 말았다.

* * *

“다시 멀미가 도졌나?”

소파에 앉은 벤디가 끙끙 앓는 노란 짐승을 안아 들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사라 이스단은 그런 벤디의 말을 곱씹었다.

‘노랑이라.’

아카데미에서도 동물형으로 학생회장의 배낭에 찰싹 붙어 있더니.

아무래도 그녀의 아들은 노랑이 이스단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허.”

대충 전말을 알 것 같은 사라 이스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헤일린은 모종의 이유로 새끼 사자 행세를 하는 중이고. 그로 인해 가문의 연락을 무시하다가,


학생회장이 제 혼담 상대인 사실도 모른 채 쫄래쫄래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성질머리 더러운 아들이 퇴짜 맞는 장면을 코앞에서 직관한 어미의 심정이란.

통쾌하면서도 뒤숭숭한 마음인 사라 이스단이 쯧 혀를 찼다.

‘기껏 예쁘게 낳아 줬더니 써먹지를 못하는구나.’

조각같이 빚어 놓으면 뭐 하나, 차이고 약혼자에게 안겨서 끙끙대는데.


“내버려 두렴, 화병일 테니.”

“화병이요?”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그래, 내 아들 녀석이 그리 부족하던가? 이리 친히 거절하러 올 만큼.”

벤디는 망설이듯 무릎에 올려 둔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결심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파혼, 으븝.”

기사회생하듯 후다닥 일어난 헤일린이 앞발로 벤디의 입을 막았다.

“파혼을, 읍.”

얼굴을 피한 벤디가 재차 말했으나, 또다시 뭉텅이 같은 앞발에 가로막혔다.

“파, 으븝.”

말하지 마. 내가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다며.

헤일린은 이제 파혼의 파만 들어도 발작할 것만 같았다.

초조한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벤디가 팡, 노란 짐승의 엉덩이를 가볍게 갈겼다.

“중요한 얘기할 때는 장난치면 안 된다고 했지, 혼나.”

쉿, 엄한 표정을 짓던 벤디는 아차 싶었다. 사라 이스단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으니.

“죄송합니다, 이스단 가문의 영물을,”

“아니, 마음껏 훈육하려무나. 그걸 그리 다룰 수 있는 건 그대뿐일 테니.”

사라 이스단은 고소한 마음에 입꼬리가 절로 움찔거렸다. 벤디만 없었다면 바닥을 두드리며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말해 보렴, 궁금한 게 많을 듯한데.”

머리카락을 물고 시위하는 노란 짐승을 배낭에 가둔 벤디가 사라 이스단을 마주했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풍성한 금발과 살짝 찢어진 눈매, 붉은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밀란느 학장의 설명에 따르면, 가주도 손을 못 쓰는 이스단 가문의 실권자.

이런 까마득한 사람이 왜…….

“……레피 가문에 혼담을 넣게 된 경위를 알고 싶어요.”

“경위라.”

“사슴 영역은 초식 영역 중에서도 강대한 곳이 아니에요.”

사자 영역 시세온에 비하면 페트리온은 변방에 딸린 섬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혼담으로 이스단 가문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이라곤 풍부한 구황작물뿐이죠. 하물며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


그것도 귀족 간에 혼담이 오간 경우는 본 적이 없어요.”

귀족은 혼담 하나로도 수많은 이익을 창출한다.

그런 혼담을, 그것도 권력의 정점에 선 이스단 가문이 버리는 패로 사용하는 게 말이 안 됐다.

어디로 보나 이상한 혼담.

벤디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현재 눈앞에 있었다.

“별로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꽤나 닮았군.”

사라 이스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아리엘과 말이야.”

쿵.

벤디는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을 느꼈다. 뜻밖의 장소에서 제 어머니의 이름이 튀어나왔기에.

다리를 꼰 사라 이스단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사슴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괴이한 자였단다. 황소였으면 몰라.”

“무슨…….”

발끈해서 반박하려던 벤디는 금세 납득했다.

기억 속 어머니는 무언가를 부수거나, 아버지를 마법으로 날려 버리는 모습이 절반을 차지했다.

“세 살이었나, 네 살이었나. 헤일린은 그즈음에 납치를 한번 당했었지.”

배낭에서 탈출하려 버둥버둥 몸부림치던 헤일린이 멈칫했다.

그는 동물형이 새끼 사자인 탓에, 힘을 기르지 못한 어린 시절에는 수많은 위협에 노출되곤 했다.

그마저도 전부 시도에서 그치긴 했지만, 딱 한 번. 작정을 하고 뭉친 마법사 집단에 납치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헤일린을 데리고 다짜고짜 이스단 가문에 들이닥친 게 그대의 어머니, 아리엘이었단다. 납치한
집단이 추적을 피해 잠시 몸을 숨긴 곳이 페트리온의 밀림이었다더군.”

폐쇄된 지형으로 인해 안전하지만, 그만큼 암암리에 숨어들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페트리온.

과거를 반추한 사라 이스단은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헤일린을 가방에 넣어 왔지.’

마법사 무리를 척살하고, 밀색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이스단 가문을 두드리던 사슴 수인을 잊을 수 있을


리가.

“보은을 하려 하니, 그녀는 신기한 요구를 해 왔어.”

“요구라 함은…….”
“자신의 딸이 성인이 되는 해에 혼담을 제안해 달라고 하더구나.”

“……네?”

벤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스단 가문에 정면으로 들이받은 걸 보면 황소가 맞나 봐. 같은 사슴으로서 도무지 어머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때도 살아 있으면 당연히 혼담을 거절할 것이고,”

벤디의 어벙한 표정에 설핏 미소 지은 사라 이스단이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혼담을 수락한다면 딸을 그곳에서 빼내어 달라고.”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라더군.”

말을 잃은 벤디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어 봤자 이미 눈시울은 붉어진 상태였다.

툭, 툭. 사라 이스단은 벤디의 손등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봤다.

‘저 아이가 이곳에 왔다는 건…….’

그 황소 같은 사슴이 명을 달리했다는 의미.

‘가문 내 권력 싸움인가.’

레피 가문에서 혼담을 수락했을 때 예상은 했지만, 제법 아까운 인물을 잃은 씁쓸함이 잠시간 찾아들었다.

육식 수인 사이에서도 이스단 가문에 찾아와서 뱃심을 부릴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텐데.

쓴 입을 삼킨 그녀는 이내 눈동자를 어둑하게 빛냈다.

사실상 헤일린을 구한 은혜로 퉁치기에 혼담은 값어치가 비싼 감이 있었다.

시간이야 조금 걸렸겠지만, 결국 헤일린을 납치한 집단은 이스단 가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요구를 거절하려는 사라 이스단을 움직이게 만든 건 아리엘의 다음 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동물형이 새끼에서 벗어날 수 없나 본데.’

먼 과거, 아리엘은 잠든 새끼 사자를 넣은 가방을 살짝 흔들었다. 벤디와 똑 닮은 밀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혹시 알아요? 이 혼담이 이스단 가문에 기연을 가져와 줄지.’


#<107 화>

기연.

사라 이스단으로서는 그 의미심장한 단어를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마치 성체로 변하지 못하는 헤일린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어조였기에.

이후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아리엘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은인을 가두고 심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황소 사슴은 그 길로 마중 나온 남편과 이스단 가문을 나섰다.

‘아리엘, 제발. 보는 눈이 많아. 게다가 여기는 육식 수인의 영역이라고.’

‘나 지쳤어, 잠자코 업지 않으면 벤디에게 이를 거야. 고구마 인형에 주스를 쏟은 범인은 아빠였다고.’

‘…….’

‘우리 벤디가 범인이랑은 오백 년 동안 묵언 수행을 하겠다던데.’

그녀의 낭랑한 웃음 소리와, 기꺼이 업어 주는 남편의 뒷모습이 오랜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았다.

귀족의 관례와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거지.

초식 수인은 다 저럴까. 사자 영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제법 인상적이며, 이상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키고자 한 존재라.’

과거를 돌이킨 사라 이스단은 문득 맞은편을 보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곳에는 잠깐 울었다고 벌써 눈이 붕어 입처럼 변한 벤디가 있었다.

뒤이어 옮겨진 눈길이 갈색 배낭에 닿았다.

가방에서 탈출하려고 날뛸 때는 언제고, 눈을 굴리며 사슴 눈치만 살피는 아들놈이라니.

툭, 투둑. 채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흠칫거리는 모습이 기가 찰 정도로 생소했다.


‘……흠.’

과거의 인연에 걸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레피 가문에 혼서를 보낸 거였는데.

반년의 느긋한 기다림 동안, 무슨 우연인지 이미 헤일린은 사슴의 곁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상태였다.

‘혹시 알아요? 이 혼담이 이스단 가문에 기연을 가져와 줄지.’

‘아니, 우연은 아니겠군.’

굳이 새끼 사자 꼴로 붙어 있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겠지.

어렴풋이 예상 가능한 부분은, 헤일린이 사슴에게 가진 감정의 형태 정도였다.

‘어쩐다.’

사라 이스단의 눈길이 헤일린을 향했다.

빤한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그가 미친 듯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혼담 파기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 배낭에 갇힌 몸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습, 앉아.”

냥냥 금지, 장난 금지.

소파가 격동하는 걸 느낀 벤디가 버둥거리는 몸통을 꾹 잡았다.

감금당한 자식을 마주한 사라 이스단이 적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다른 건 몰라도 혼담 파기를 격하게
반대하는 것만은 알겠다.

“이스단 가문에 오면.”

오래도록 닫혀 있던 사라 이스단의 입이 열렸다.

“적응하기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대를 사자 수인에게 팔아넘기는 레피 가문보다는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다.”

노란 짐승을 포박하던 벤디가 천천히 사라 이스단을 돌아봤다.

“종족을 빌미로 반대할 자도 없어, 이곳에서는 내 의견이 곧 법이니까.”

온화하던 붉은 눈동자가 잠깐이나마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의 어머니도 그걸 알기에 이 혼담을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둔 거겠지.”

“…….”

“아름다운 남편은 건실하진 않겠지만 바람 날 걱정이 없고. 애당초 혼인이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던
녀석이니까.”
“그 말씀은…….”

울타리가 있는 고위 귀족 부인으로서의 삶을 주겠다. 사라 이스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엷게 진동했다.

‘……만일.’

레피 가문에서 도망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혼담이 오간 사자 가문이 이스단 가문이고, 약혼자는 헤일린 이스단. 그리고 그 혼담을 주도한 게 숙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는 걸 알았다면.

자신은 그 야밤에 해피의 등에서 몇 번이나 떨어지며 페트리온을 떠나지 않았겠지.

뭐가 됐든 이스단 가문으로 와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안전하고, 귀족가 자제로서 한 번쯤은 그려 본 삶이 아닐까.

설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제 생각은…….”

눈꺼풀을 내리뜬 벤디가 입술을 여닫았다.

“변함이 없어요.”

딱히 놀라지 않은 사라 이스단이 물었다.

“이유는?”

조금 망설인 벤디는 귓불을 살짝 붉혔다.

“우선은 아카데미에서 남은 책임을 다할 거예요.”

아무도 기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빗자루를 닮은 학생 지도 대표 한 명쯤은 나를 필요로 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저는…….”

시선을 든 벤디는 사라 이스단을 응시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자리한 그녀는 표정 변화나 작은 움직임마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말마따나 초원에서
군림하는 사자의 표본이었다.

이런 존재에게는 퍽 우습게 들리겠지만…….

“가문으로 돌아가서 제 자리를 찾고 싶어요.”

더는 숙부에게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투명한 밀색 눈동자를 마주한 사라 이스단은 아리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제 아이를 가문에서 빼내어 주세요.’

어미와 아이의 선택은 다르다, 이건가.

사라 이스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당장 손끝을 벌벌 떨고 있으면서, 혼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려는 선택이 꽤나 나쁘지 않았다.

작은 황소 사슴쯤이려나.

그녀는 무심코 헤일린을 돌아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거세게 반발할 때는 언제고, 포기한 듯 벌러덩 고개를 늘어뜨린 상태.

물론 차인 충격도 모자라 감금까지 당한 덕에 표정에는 영혼이 없었다.

‘저 안하무인인 놈이 존중을 다 할 줄 알고.’

아카데미에 가서 뭘 배워 오려나 싶었는데.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한 그녀가 입가를 꾹 눌렀다.

억겁 같은 고요가 지나갔다.

한참 침묵을 고수하던 사라 이스단이 말문을 뗐다.

“혼담을 제안하며 그대의 숙부에게 선금을 건네었는데.”

무릎을 그러쥔 벤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스단 가문에서 돈을 건넨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큰 액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숙부가 구렁이 담 넘듯 홀랑 수락할 리 없으니까.

불안하게 손을 꼼질거린 벤디가 입을 달싹였다.

“그, 그 돈은 제가 반드시,”

“레피 가문에 제안한 혼담을 파기하고, 선금은 그대의 숙부에게 청구할 셈이다.”

“……!”

“이는 추후 가주가 되면 그대가 짊어질 돈이 되겠지. 혼담은 표면적으로만 파기할 테니, 가주가 되고
나서 다시 대화하는 건 어떤가.”

무언가 다른 조건을 걸 줄 알았는데, 벤디 입장에서는 꽤나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벤디의 얼떨떨한 표정에, 사라 이스단은 오묘한 미소를 걸었다.

미래 며늘아기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빚 독촉을 할 수도 없고.

제 아들의 감정을 미루어 보나, 아리엘의 의미심장한 말을 미루어 보나. 당장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한편, 벤디는 사뭇 새로운 긴장이 밀려들었다.


아마도 혼담이 파기되면 숙부의 분노는 더욱 짙어지겠지. 그러나 애당초 그걸 각오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대화가 꽤나 길어졌군. 노랑이는 여기에 남으렴.”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된 것 같은데도, 흘끔거리는 벤디의 눈길을 느낀 사라 이스단이 되물었다.

“궁금한 거라도?”

“그, 혼담 선금으로 주신 액수가 혹시 어떻게 되는지…….”

차분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묻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식은 차를 입에 머금은 사라 이스단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15 억 실링.”

“…….”

“혼담 성사 시에는 30 억 실링.”

* * *

탁,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명예 마개동 부원이 집무실을 나섰다.

그때까지 벽에 등을 기대고 기다리던 원이 자세를 바로 했다.

눌러쓴 후드 사이로 발이 한 쌍밖에 보이지 않자, 누군가의 부재를 깨달은 벤디가 물었다.

“레넌은요?”

살짝 멈칫한 원이 대답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후드에 시야가 가린 벤디는 일순간 원의 표정이 변한 것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보다, 혼담은?”

그의 질문에 스르륵, 온몸에 힘이 풀린 벤디가 물먹은 솜처럼 벽에 기대어 앉았다.

사라 이스단.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을 주는 육식 수인이었다.

마치 헤일린 이스단 다섯 명을 상대한 느낌인데,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

원은 바닥의 일부가 된 벤디를 내려 봤다.

“일어나세요.”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해요.”

“방으로 가서 취하세요.”
“지금 취해야만 돼요.”

몸을 동그랗게 만 검은 덩어리는 혼이 나간 상태였다.

흘끔, 흘끔. 원과 벤디에게 고용인들의 시선이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이걸 들어서 방에 던질 수도 없고.

주변을 살핀 원은 이내 짜증스레 머리칼을 넘기며 벤디의 옆에 주저앉았다. 레피 저택 감옥에 갇혔을 때


이후 바닥에 앉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원까지 바닥과 한 몸이 되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고용인들이 화드득 자리를 피했다.

“혼담은요.”

“……파혼이에요, 아마도.”

아마도 파혼.

오묘한 답변이었으나, 이미 원의 머릿속에는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뿌뿌 불었다.

춤추는 입꼬리를 손으로 덮은 원이 되물었다.

“목적을 이룬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죽상이냐는 의미였다.

일순 울컥한 벤디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평생을 호화롭게 살아온 차기 마탑주에게 제 심정을 토로할 수 있을 리가.

‘15 억 실링이면…….’

고구마가 몇 개야.

밀란느 학장의 지갑을 몇백 번 가져와도 해결이 안 될 액수였다.

주섬주섬, 품에서 작은 손지갑을 꺼낸 벤디는 한숨을 폭 쉬었다. 가진 재산이라곤 이게 전부.

“원 님.”

“말해요.”

“혼담은 파기됐는데요.”

“그런데요.”

끝끝내 말을 잇지 못한 벤디가 흐물흐물 바닥에 늘어져 누웠다. 해피에게 거지 사슴이라고 괄시당하는 건


이제 슬프지도 않았다.

“원 님, 저요…….”

“왜 이럽니까, 대체?”
사라 이스단의 목소리가 벤디의 귓가에 길이길이 메아리쳤다.

‘15 억 실링.’

‘15 억.’

저요…….

어마어마한 빚쟁이가 될 것 같아요…….

#<108 화>

한순간에 빚쟁이가 된 사슴이 터덜터덜 집무실을 나섰다.

배낭은 열어 주고 가.

헤일린이 냥냥거렸지만, 15 억 실링을 등에 업은 벤디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집무실에 모자만이 남았다.

착, 사라 이스단은 한참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그녀는 낯빛은 물론이며 목까지 붉어진
모습이었다.

약혼자의 배낭에 딸려 온 노랑이가 약혼 사실을 알자마자 퇴짜를 맞고 엉덩이도 맞았다.

그 문장 하나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겨우 웃음을 욱여넣은 사라 이스단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계속 노랑이로 있을 셈이니?”

이대로 사람으로 돌아가면 배낭이 찢어진다.

헤일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또다시 사라 이스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냥 찢고 나오너라.”

그럴 바에 이러고 있고 말지.
쌩하니 무시하는 헤일린 덕분에, 자리를 옮긴 그녀가 칭칭 묶이다시피 한 배낭을 열어 줬다.

이윽고 화한 빛과 함께 백금발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반대편으로 걸어가 걸터앉는 헤일린을 본 사라 이스단은 입맛을 다셨다. 새끼 사자일 때와 다르게 귀여운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자, 이제 말해라.”

“뭐를.”

“노랑이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유.”

꼭 저렇게 말해야 하나. 미간을 팍 구긴 헤일린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사슴과 함께 있으면.”

“……?”

“몸이 커져, 가정이긴 하지만.”

“너는 거기서 더 크면 천장을 뚫는다.”

“신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일순 멍해진 사라 이스단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순간 체통도 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설마 성체로 변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침묵은 곧 긍정.

부채로 입을 가린 그녀가 제자리에 굳었다.

‘혹시 아나요, 이 혼담이 이스단 가문에 기연을 가져와 줄지.’

혹여 그렇진 않을까 야트막하게 가졌던 희망이 기정사실로 변한 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사라 이스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랫입술을 잘게 떨었다.

실수다. 이런 식으로 사슴을 놓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말았다.

“지금…… 지금 그것도 모르고 파혼을,”

“얘기하지 마, 파혼의 파만 들어도 배알이 뒤틀리니까.”

더 말하다간 짜증만 치밀 것 같은 헤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네놈은 왜 그 꼴을 보고만 있었던 거야! 사람으로 변해서라도 막았어야지!”

“가문으로 돌아간다잖아.”

돌아가고 싶다고 우는데 뭐 어쩌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그가 옷을 털었다.

“내게 미리 언질을 줬으면 이스단 가문에 남도록 압박이라도 가했을 거 아니야!”

“안 돼, 걔 그러면 기절해.”

물 없이 고구마만 먹은 심정인 사라 이스단이 헛숨을 삼켰다. 제가 언제부터 남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저러는지.

“사슴이 당장 내일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한 헤일린이 짐짓 인상을 굳혔다. 잠시간 고민에 사로잡힌 그가 해답을 내렸다.

“내가 거기로 가야지.”

“……그럼 이스단 가문은.”

또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 본 헤일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사슴을 따라간 다음에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저 미친 노랑이 놈이. 분노로 인해 숨이 가팔라지기 시작한 사라 이스단이 부채를 그러쥐었다.

“이대로 혼담이 어그러져서, 사슴에게 다른 혼담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건 괜찮아.”

“어째서?”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헤일린이 눈짓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이제부터 알아서 처리할 거 아니었어?”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잠깐 시간이 걸린 사라 이스단은 이를 빠득 물었다.

‘근 반년을 가문에 알리지 않은 채 입 다물고 있다가…….’

이제 와 제게 일부러 성체로 변하는 단서를 흘린 것이었다.

사라 이스단의 성격을 미루어, 앞으로 사슴에게 들어오는 혼담 같은 성가신 건 그녀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발칙한 녀석이……. 필요할 때만 영악해지는구나.”

들은 척도 안 한 헤일린이 창문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는 거지?”

“사슴 혼내러.”

체격에 맞지도 않은 갈색 배낭은 왜 죽어라 메고 가는 건지.

순식간에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사라 이스단이 허한 숨을 뱉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 * *

방 안에 도청 마도구가 없음을 확인한 원이 통신구에 마력을 주입했다.

치직, 통신구가 부옇게 미어지며 스카론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스턴 레피의 경로는?”

원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자입니다. 초식 영역은 직접 조사를 다니더니, 육식 영역은 수족만 보내며 저택에
몸을 숨기고 있더군요.]

“곧 기어 나올 확률이 높으니 제대로 주시해.”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스카론의 질문에, 또다시 원의 머릿속에 나타난 천사가 나팔을 뿌뿌 불었다. 경사였다.

“벤디 레피가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을 거절했으니까.”

턱을 괸 그는 저도 모르게 금안을 부드럽게 휘었다.

주인의 낯선 웃음에 잠시간 멈칫한 스카론이 뒤늦게 되물었다.

[거절했다고요?]

“그래, 곧 웬스턴 레피에게도 연락이 가겠지. 그리고.”

원은 조금 전 다른 수족에게서 받은 급서를 통신구에 보였다.

“백호 영역에 반란이 일어났어.”

뜻밖의 사실을 접한 스카론이 표정을 굳혔다.

[반란이라니요.]

“정확히는 하얀 고양이를 지지하는 자들이 일방적으로 에던트 가문을 쳤지.”

[……그는 아직 아카데미에 머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알지 않나, 제정신 아닌 거. 언젠가 혼자 들이받고 죽을 것 같으니까 아랫것들이 들고일어났겠지.”

벤디가 사라 이스단의 집무실에 들어간 직후, 전령 새를 통해 소식을 전달받은 레넌은 급히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이 어딘지는 안 봐도 뻔했다. 레넌은 에던트 가문이 주제로 나올 때면 안색이 변하니까.

가면 같은 웃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몇 번쯤 목격한 원이 중얼거렸다.


“까딱하면 죽겠군.”

[원 님,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개입하시면 안 됩니다. 영역 내 알력 싸움에서 마탑은 중립이어야


하니까.]

“관여할 생각 없어, 이쪽에는 벤디 레피가 있으니까. 한시 빨리 아카데미로,”

[벤디이?]

스카론 장로의 얼굴을 밀친 웬 어린아이가 통신구에 얼굴을 디밀었다.

[벤디는 우리 1 소대 대장인데?]

“뭐야 이건.”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이 아이가 벤디 님의 탈출을 도운 소녀입니다. 마침 페트리온이라……!]

당황한 스카론이 뒤에서 애타게 말했으나, 떡하니 통신구를 차지한 어린아이가 외쳤다.

[6 소대 대장 주제에 총대장의 말을 끊다니, 무엄하다!]

페트리온 모험대 총대장을 일임 중인 모니였다.

스카론을 꾸짖던 모니는 돌연 통신구에 바짝 코를 붙였다.

[넌 뭐야? 우리 5 소대 대장만큼 예쁘다!]

“5 소대 대장?”

[응, 걔는 사자야, 사자.]

“……사자?”

[머리는 노랗고 눈은 빨간색인데, 아무튼 엄청 예뻐. 좀 무례하긴 한데 공주님 같아서 괜찮아.]

어쩐지 5 소대 대장의 정체를 알 것 같은 원과 스카론이 정색했다.

어떤 경로로 헤일린 이스단이 5 소대 대장이 된 걸까.

또다시 원이 통신구를 박살 낼까 싶었던 스카론이 안절부절 말렸다.

[얘야, 이제 그만,]

[어허, 총대장!]

[총대장, 이제 그만 비켜 주시죠.]

[있어 봐, 넌 뭐냐니까? 우리 1 소대 대장을 어떻게 알아?]

이만 통신을 끊어 버릴까. 원의 낯빛이 점점 굳어 가는 가운데, 모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벤디는 예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데. 벤디의 예비 남편인가?]


통신을 끄려던 원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방금 뭐라고?”

[예비 남편?]

“다시.”

[예쁜 예비 남편?]

“더 길게 말해 봐.”

[벤디의 예쁜 예비 남편?]

스카론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수염을 떨었다. 허투루 총대장 자리를 얻은 게 아닌지, 사회생활이


수준급이었다.

그 후로도 스카론을 제외한 원과 모니의 대화는 오래도록 도란도란 이어졌다.

* * *

여우 수인 모습으로 변한 벤디는 손님방 침대에 폭 몸을 던졌다.

‘이상하지 않나?’

아까는 긴장 때문에 머리가 굳어서 생각지 못했는데, 친절이 과한 감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릴 적 헤일린 이스단을 구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담을 제안했다는
게. 그리고 큰 선금을 건넨 혼담을 유예해 주는 것까지.

‘이스단 가문에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것 같은데.’

……선의를 너무 매도하는 걸까?

열심히 머리통을 굴려 봤자 사라 이스단의 속내를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꿈벅, 꿈벅. 벤디는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으며 화려한 천장을 올려 봤다.

그러고 보니 이미 오후가 늦었는데, 아직까지도 레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알 게 뭐예요.’

원은 고양잇과에겐 관심 한 줌도 아깝다며 마탑과 통신을 주고받으러 자리를 떴다.

그러나 뭔가 찝찝하다고 사슴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왠지 원이 레넌의 행방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 하는 느낌. 마탑과의 통신도 추궁을 피하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팔랑팔랑 놀기 바쁘던 이가 도통 보이질 않으니,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아카데미가 아닌 사자의 본진인데, 그 나사 빠진 화상이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치면…….

‘동행으로 데려온 내 책임.’

낯빛이 파리해진 벤디는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예비 빚쟁이가 된 마당에 밉보이기까지 하면


곤란했다.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열고 손님방을 나선 벤디가 레넌의 방문을 콩콩 두드렸다.

“레넌, 있어?”

귀를 갖다 대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찰칵, 문고리를 돌리자 방문이 손쉽게 열렸다.

“……레넌?”

고개만 내밀어 들여다봤지만 방 안은 텅 빈 상태. 심지어 사람이 머문 흔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고용인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저을 뿐.

출입을 허가받은 후원에 덩그러니 선 벤디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람.’

게슴츠레한 시선이 푸른 연못에 머물렀다.

설마하니 사람이 연못에 있을까 싶지만…… 그 정도 또라이에게는 오히려 편견이 아닐까.

인형 상자에서 무 뽑듯 뽑았던 걸 생각하면 여기서 잠수를 즐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레넌, 있어?”

쪼그려 앉아 소곤거리는 순간,

“고양이는 물 싫어하는데.”

풍덩!

벤디는 그대로 연못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109 화>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는 소리가 고꾸라질 정도로 놀랄 일인가.

첨벙첨벙, 헤일린은 진동하는 연못을 내려 봤다.

인생이 왜 저렇게 이상할까.

친구라고 주장하는 건 마물 같은 사슴에, 밀란느 학장에게 사랑에 빠지질 않나, 다람쥐로 변하지를 않나.

지금은 혼자 연못에 빠지더니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거기 얕아.”

헤일린의 친절한 설명에, 발을 참방참방 구르던 벤디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뒤집어진 채 동동 떠 있던 벤디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대로 허리께까지 오는 수위였다.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된 벤디는 주먹을 말아 쥔 채 헤일린을 노려봤다.

오늘만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리니 놀라 자빠질 수밖에.

‘왜 여기 있는 거야?’

생각해 보니 이스단 가문에 헤일린 이스단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눈치를 살핀 벤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들었어?”

앞뒤 없는 질문에 잠깐 눈을 깜박인 그가 되물었다.

“뭐.”

“그…….”

“네가 빚쟁이가 된 거?”

“…….”

“아니면 나 버린 거?”

벤디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러모로 많은 사정이 얽힌 거지만, 축약하여 말하면 저게 사실이긴 한데…….

어째 지고지순한 약혼자를 내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사슴인 사실까지 다 알겠구나.’

입을 뻐끔거리던 벤디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름날이긴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라 그런지 약간 으슬으슬했다.

가지가지 한다. 툭, 갈색 배낭을 바닥에 내려 둔 헤일린이 연못에 발을 들였다.


익숙한 배낭을 발견한 벤디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 가방.’

저 사자는 왜 자꾸 내 배낭을 제 것처럼 가지고 다니는 거람.

그런 생각에 다다르기 무섭게 몸이 붕 떠올랐다. 그가 다리 밑을 받치며 안아 올린 것이었다.

“……!”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벤디가 잡히는 대로 손을 짚었다.

단단한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헤일린의 어깨였다.

‘스스로…… 나갈 수 있는데.’

똑, 똑.

벤디에게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뺨에 부딪쳐 튀었다.

그림자 진 헤일린의 얼굴을 내려 보게 된 벤디는 일순 숨을 멈췄다.

평소에도 선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심사가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표정이었기에.

또 뭐가 불만인데. 입술을 말아 문 벤디가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꼭.”

채도 높은 적안으로 벤디를 올려 보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혼담을 파기해야만 가문에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그건…….”

곧바로 대답 못 한 벤디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혼담을 파기해야 숙부가 그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팔릴 테니까. 선금으로 받은 15 억 실링이란 금액을


뱉어 내야 하는 만큼 더더욱.

그렇게 시간을 번 동안 자신은 정제되지 않은 힘을 제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애매했던 벤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이 찾아들었다.

“너한테는 딱히 나쁘지 않은 거 아니야……?”

헤일린은 척 봐도 가문 사이에 오가는 혼담 같은 건 질색할 느낌.

이익을 위해 얌전히 혼담에 응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나빠.”

“……왜?”
“왜 내가 너랑 파혼을 해야 되는데.”

“…….”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만지작거려 놓고 이제 와 버리시겠다?”

막힘없는 답변을 들은 벤디가 재차 숨을 멈췄다. 잔잔하던 주홍색 동공이 뒤흔들렸다.

‘만져 줘.’

생각해 보니 그 한마디에 별다른 거부 없이 만지던 제 만행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쳤다.

바르르 턱 끝을 떤 벤디는 홱 고개를 돌리며 시치미를 뗐다.

“그런 적 없어.”

“뻔뻔한 빚쟁이.”

할 말이 없어진 벤디가 눈썹을 바짝 치켜올렸다.

맛 간 사자랑 무슨 대화를 하겠어.

‘사라 님을 찾아가서 망정이지.’

이 사자에게 먼저 혼담에 대해 말했으면 결과가 어떨지 감히 예상도 가지 않았다.

벤디가 구시렁거리는 한편, 헤일린은 뒤늦게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벤디를 안아 들어서 몸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동시에 살갗이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왜 자신은 사슴이 혼담을 파기한 게 이토록 화가 날까.

속이 비틀리다 못해 머리가 깨질 듯한 짜증마저 치밀었다. 차라리 마차를 타고 대륙 방방곡곡을 순회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성체만 되고 나면 혼담은 도리어 성가신 거 아닌가.’

목적만 이루면 필요가 없어지는 관계. 하물며 누구와 혼담이 오가든 자신은 옆에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버러지 같은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을 때 심사가 뒤틀렸는지.

‘그리고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죠.’

그 버러지가 자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찾아온 희열.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을 파기하기 위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사슴이 혼담을 거절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감각.

전부 제 것 같지 않은 감정이었다.

“…….”

들쑥날쑥하는 스스로의 감정에 의문이 인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상 최근 들어 성체가 되겠다는 목적은 뒷전이었지 않나.

습관이자 일상이었다. 눈을 뜨면 사슴의 곁으로 찾아가는 게.

목적이 뒤바뀐 게 언제부터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쿵, 쿵.

생각을 거듭할수록 심장을 넘어 귀가 박동하는 것 같다고 느낀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주홍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헤일린의 속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경계가 무방비하게 풀어지는 생경한 느낌.

“……헤일린?”

평소에도 듣기 좋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박혔다.

그 순간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접촉할 때마다 느끼는 통증뿐만이 아니라, 사슴의 모든 게 제게는 자극이었구나.

‘아.’

나, 이 인생이 이상한 사슴한테…….

‘환장했네.’

* * *

원은 이른 아침부터 벤디의 방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카데미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사자 소굴은 벤디 또한 사양이기에, 벤디도 냉큼 나설 준비를 했으나…….

레넌의 모습이 아침까지 보이지 않는 걸 알았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사라 이스단과 하루 종일 대화한 것도 아닌데, 일언반구 없이 사라지다니. 이상하게 예감이 안 좋았다.


‘아카데미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갔어요.’

거짓말. 원의 말은 특히 신빙성이 떨어졌다.

레넌은 아카데미에서 바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뭔가 있어.’

아카데미로 출발 전.

벤디는 노랑이를 배낭에 넣고 이스단 저택 별관 조사를 시작했다.

자고로 모든 정보는 저택 내 고용인들의 입을 타고 나오는 법.

아카데미에서 익힌 은신법을 십분 발휘한 벤디가 시선을 피해 벽에 등을 붙였다.

고도로 발달한 은밀한 움직임. 물론 벽에 찌그러지는 건 등에 있던 노란 짐승이 대신했다.

벤디의 시선 끝, 빨랫감을 들고 걸음을 옮기던 고용인들은 작게 속삭였다.

“……보셨어요?”

벽 뒤에서 몸을 반만 드러낸 여자가 차기 가주를 등에 메고 있다. 가히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방금 헤일린 님의 용안이 벽에 뭉개졌어요.”

“모른 척, 입조심. 이게 우리가 살 길이야, 알았니?”

“예…….”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헤일린의 존재를 귀신같이 알아챈 고용인들이 우수수 피하기 바빴기에.

영문을 모르는 벤디만 억울할 뿐이었다.

끝끝내 탐색에 실패한 벤디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는 수 없지.’

무섭기 짝이 없지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잡도리하는 수밖에.

노란 짐승이 사라 이스단에게 불려 간 사이, 원의 방문 앞에 선 벤디가 점잖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허가가 떨어지는 동시에 주홍색 눈동자가 섬광을 발했다.

들어가서 탁, 문을 닫은 벤디는 태연하게 뒷짐 졌다.

원은 종이 더미와 함께 침대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밤새 서류를 처리했는지 표정과 자세에 피로가


묻어났다.

눈동자만 움직여 벤디를 본 그가 나직이 물었다.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까?”

이것 봐, 자꾸 출발에 집착하잖아. 사라진 레넌을 버리고 아카데미에 못 돌아가서 안달 난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벤디는 리리 교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가상 공간에서 메이지 로튼이 빗자루를 공중에 띄웠는데, 그걸 하고 싶다?’

벤디가 뇌물로 대나무를 건네자, 자연스레 내팽개친 리리 교수가 말을 이었다.

‘걔가 그쪽 방면으로 뛰어난 거라서 빗자루까진 무리고. 작은 사물을 몇 초 띄우는 정도는 너도 연습하면
돼.’

지금이 그 연습의 성과를 선보일 시간이었다.

간식을 앞둔 해피처럼 번쩍 눈을 빛낸 벤디가 마력을 운용했다.

휘리릭, 삽시간에 날아간 교복 타이가 원의 양 손목을 휘감아 침대 머리에 고정했다.

“……?”

방심하고 있다가 손목을 결박당한 원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코앞에 막대 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접근한 벤디가 을씨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숨기고 있는 걸 말해요.”

습격당한 원은 꾸욱, 제 입술을 누르는 막대 과자를 응시했다.

사물 부양 마법을 사용하는 실력자가, 왜 막대 과자를 먹으면 마법도 끝이라는 사실은 모를까.

‘마법을 배우더니 협박할 줄도 알고.’

허술한 자객 사슴을 마주한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느릿하게 움직인 금안이 묶인 제 손목과 침대, 얽힌 다리, 어깨를 내리누르는 벤디의 왼손을 오갔다.

“지금 이거.”

원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입을 뗐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거 알죠.”


#<110 화>

위험하고말고. 이 벤디 레피 님의 엄청난 마법에 맞아 바람구멍이 뚫릴 위기인데.

음산하게 눈을 빛낸 벤디가 꾹, 막대 과자를 더욱 디밀었다.

똑똑, 그때 밖에서 웬 훼방꾼이 문을 두드렸다.

“원 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든지.”

“말씀대로 출발 준비는 거의 끝마쳤습니다. 혹 마차에 더 실을 짐이 있으시면,”

문을 열고 들어서던 마부가 그 자리에 굳었다.

조그만 여우 수인이 차기 마탑주를 넘어뜨린 걸로 모자라 손목을…….

이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린 그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평안한 시간 보내시길.”

끼이익, 탁.

닫히는 방문을 마주한 벤디가 눈썹을 바투 모았다.

‘평안한 시간?’

뭘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 저런 말이 나오는데. 의아해진 벤디는 무심코 제 밑에 깔린 원을 내려 봤다.

흐트러진 셔츠에서 올라간 눈길이 툭 불거진 목울대, 살짝 상기된 귀와 헝클어진 흑발. 그리고 두 팔목을
속박한 타이에 닿았다.

목적에 눈이 멀어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

“…….”

지금 이건 협박보다는 불장난을 저지르기 직전의 자세가 아닐까.

마부가 뭘 오해하고 나갔는지 깨달은 벤디는 벼락 맞은 듯 파르르 떨었다.

‘지금…….’

위험한 건 이 늑대의 정조였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동시에 벤디의 낯빛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미동이 없자, 원이 낮은 목소리로 부추겼다.

“왜, 계속 안 하고.”

흠칫, 겨우 정신이 돌아온 벤디가 몸을 잘게 경련했다.

“가, 가만히 있어요.”

협박성 짙은 막대 과자가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오만한 밉상이 어릴 때의 그 늑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조금쯤 가깝게 여겨졌는데.

갑작스레 원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손잡고 함께 밀림을 달린 소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깨 널찍한 성인 남성만이 남았기에.

벤디가 손만 달달 떨며 아무 말도 못 하자, 툭, 원이 제 팔뚝에 옆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묶이는 건 취향이 아니긴 한데.”

“…….”

“원하는 게 뭔데요.”

원하는 거라니. 황소처럼 성마른 숨을 뱉을 뻔한 벤디는 그냥 호흡을 멈췄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내뱉으면 어떡해. 자꾸 몹쓸 방향으로 해석되는 게 문제였다.

살아 있는 홍시로 변한 사슴을 올려 보던 원은 마력을 운용했다.

손목을 결박하던 타이가 풀어지는 순간 풀썩, 침대의 진동과 함께 서류가 흩날렸다.

“……!”

벤디의 시야가 뒤흔들리며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협박을 할 거면.”

뚝, 그새 원에게 넘어간 막대 과자가 손쉽게 부스러졌다.

“내 손목이 아니라 마력을 구속했어야지.”

원의 아래에 갇히게 된 벤디가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뀐 꼴. 옴짝달싹 못 한 채 늑대에게 목을 물린 사슴과 다름없었다.

짙게 물든 금안을 마주한 벤디는 아랫입술을 떨었다.

의미가 뭐가 됐든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

위험하다.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벤디가 황급히 몸을 굴렸다.

휘리릭, 구르는 것 하나엔 일가견 있는 몸이 순식간에 침대를 탈출했다.

다다다.
허술한 자객이 도망치듯 방을 벗어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원은 이내 무너지듯 침대에 엎드렸다.

‘-위험했다.’

밤샘으로 인한 피로가 달아난 건 물론 온몸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누가 밀림을 뛰어다니는 사슴 아니랄까 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슴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인내심이 바닥 날 지경. 벤디의 탈출이 조금만


늦었어도 제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감히 예상도 가지 않았다.

한편, 얼른 제 방으로 돌아온 벤디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던 몸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큰일 날 뻔했네.”

무슨 늑대가 저렇게 요사스러운지. 육식 수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해로웠다.

식은땀을 훔친 벤디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얼핏 백호라는 단어를 봤는데.’

원의 침대에 서류와 함께 널브러져 있던 신문 한 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자객의 임무는 실패한


게 아니었다.

‘백호 영역에…….’

기사를 읽어 내린 벤디는 이내 손을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렸다.

‘반란이 일어났다고?’

팔랑, 떨어진 종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 * *

짐 가방을 뒤진 벤디는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 학생회실에서 챙겨 온 것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길 정신도 없는 벤디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채 마력을 주입했다.

초조한 기다림 후, 통신구 속에 밀란느 학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벤디 학도, 또 돈을 갈취하려는 속셈이라면 당장 통신을 끊,]

투덜거리던 그녀가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리 울상인가?]

시종일관 표정을 읽기 어려웠던 벤디는 오늘따라 눈썹과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린 상태였다.

“어제부터 레넌이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백호 영역에 간 것 같아요. 지금 그곳은,”


[알고 있다.]

밀란느 학장이 짐짓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나 또한 백호 수인인데, 내 영역에 관한 일을 모를 리가.]

“학장님, 레넌은.”

왠지 목이 멘 벤디는 무릎에 얹어 둔 손을 만지작거렸다.

‘목을 치러 가는 건 나 혼자야.’

다람쥐로 변한 당시에 들은 레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더라도 가주의 목은 따고 죽을 거니까.’

“레넌은…….”

‘내 사사로운 복수에 대의를 얹지 마.’

내려 깐 눈을 든 벤디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거기에서 죽을 셈이에요.”

[그 또한 알고 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니.]

태연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맞닥뜨린 벤디가 반문했다.

“학장님께서는 레넌이 어떻게 되든 괜찮은 거예요?”

[손주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을 만큼 인성이 터지진 않았느니라.]

잠시간 입을 달싹인 밀란느 학장이 말을 이었다.

[현 에던트 가주는…… 레넌의 어미를 치고 가주직에 앉은 자다.]

“…….”

[그래서 레넌 녀석은 가주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살아왔어. 염원하던 순간을 맞은 그놈이 눈 돌아


날뛰는 걸 막을 수 있는 자가 있어야 말이지.]

말리는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말렸을 게다, 밀란느 학장의 말을 듣던 벤디가 되물었다.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없다. 뭐, 있어도 연락을 받지 않겠지만.]

벤디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한 채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레넌의 사망 소식을 받아야 하는 거고.

‘왜…….’

어느 영역을 가도 권력에 눈이 멀어 가족을 해하는 자가 존재하는 건지. 복수를 위해 삶을 내던진 레넌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뼈저리게 이해됐다.

여린 살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쥔 벤디가 입술을 여닫았다.

“……밀란느 학장님.”

[오냐.]

“저는 레넌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했지 않느냐,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학장님도 레넌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잖아요.”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밀란느 학장은 통신구 너머의 말간 주홍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반년 전에는 백호와 악수하는 것만으로도 질겁하며 기절하더니.

꽤나 오래 학장직을 일임해 왔으나, 한창인 학생들의 변화 속도는 몇 번을 봐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벤디 학도라면…….’

학장의 눈앞에 레넌의 낯선 기행들이 스쳤다.

‘죽으면 좀 아쉬울 것 같은 정도?’

‘내년으로 졸업 유보.’

목줄을 틀어쥔 사슴이라면 조금이라도 그 또라이를 뒤흔들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지나가는 풋사랑 정도일 수야 있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벤디는 육식 수인 간의 알력 다툼에 전혀 연관이 없는 초식 수인. 분쟁 중인 백호 영역에서


모습을 보여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존재였다.

침묵을 고수하던 학장에게서 한참 만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녀석이 있는 곳에…… 직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긴 하지.]

“알려 주,”

[단.]

“……?”

[원이나 헤일린 학도는 도울 수 없어. 육식 수인 영역에서 그들의 지위는 자네 상상 이상으로


무거우니까.]

두 사람이 관여하는 순간 전쟁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

[벤디 학도, 자네 혼자 가야 한다는 말일세.]

의미를 이해한 벤디가 뻣뻣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위험할 수도 있어.]

“위험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요……?”

반사적으로 되묻던 벤디는 말실수를 깨달으며 입을 합 틀어막았다.

여전히 못 미더운 사슴을 마주한 밀란느 학장은 걱정부터 앞섰다.

백호 영역은 백호를 거느린 채 전투에 임하는 경우도 대다수. 백호를 보자마자 쓰레기통에라도 몸을 숨길
벤디의 미래가 눈에 훤했다.

[두려우면 지금이라도 관두게.]

벤디는 파리하게 질린 모습을 하고도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스단 저택인 걸로 알고 있네만.]

“네, 맞아요.”

[내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건 이스단 저택을 빠져나오고 난 이후다. 가능하겠나?]

크게 심호흡한 벤디는 눈을 살짝 감았다. 언젠가 안나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학생회장의 권한을 노리는 이들의 습격이 생각보다 없다고요? 당연하죠, 웬만한 건 레넌 님이 다


처리했으니까.’

‘레넌은 저를 호위한 적이 딱히 없는데요?’

‘그렇게 여길 수밖에요. 회장이 레넌 님의 기척을 읽는 건 야닉 펠이 천재가 될 확률과 비슷할 테니.’

‘너무해요.’

아카데미에 온 이후 레넌은 횟수를 알 수 없을 만큼 자신을 구했다. 그게 밀란느 학장의 지시였든 뭐든,


이번에는 제가 구할 차례.

눈을 뜬 벤디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 볼게요.”

* * *

벤디의 손님방에 네발 달린 수상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텅 빈 방을 배회한 눈길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갈색 배낭에 닿았다.

팍, 팍팍. 안을 파며 몸을 욱여넣던 노란 짐승이 멈칫했다.

‘이대로는…….’

별안간 제 처지를 통감한 헤일린이 배낭을 팡 내려쳤다.

지금 이런 가방에 집착할 때인가.

벤디의 곁에 머물기 위해 새끼 사자 모습을 유용하게 활용했으나,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사슴이 둥개둥개 안고 다니는 노랑이와 헤일린 이스단의 격차가 너무 크니까.

‘노랑아, 우리 나중에는 같이 사슴 영역으로 가서 살까?’

벤디는 노랑이의 가장 많은 면을 알지만, 동시에 헤일린 이스단을 가장 몰랐다.

‘만일.’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사슴이 알게 된다면…….

헤일린의 동그란 눈에서 점점 빛이 꺼졌다.

환심은커녕 자신을 기망했다며 싸늘한 눈길을 던지지나 않으면 다행.

골이 당겨 오기 시작한 그가 앞발로 눈가를 짚었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첫 만남만 해도 해피라는 괴물에게 리본 목줄이나 달고 다니는 이상한 자였는데.

고뇌하던 노란 짐승은 이내 배낭을 끌어와 탁탁 털었다. 그래도 이건 중요했다.

다시 배낭에 머리를 들이미는 와중, 돌연 서늘한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사슴은 어디로 간 거지?’


이 배낭이 방 안에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벤디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항상 가방을 메고 다니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헤일린이 낯빛을 굳혔다.

비상용 군고구마와 막대 과자를 넣은 배낭을, 그것도 사자 영역에서 두고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111 화>

묘하게 불안해진 노란 짐승이 벤디의 방을 둘러봤다.

‘이상한데.’

겉보기에는 아카데미로 떠날 준비를 마친 방이었으나, 자세히 살피면 수상한 점이 많았다.

애지중지 다루던 통신구까지 덜렁 바닥에 두고, 짐을 싼 구색만 대충 갖춘 후 급히 나간 꼴.

이리저리 탐색하던 헤일린은 문득 침대 밑에 시선이 닿았다.

사람이었다면 미처 놓쳤겠지만, 노란 짐승의 눈높이엔 안성맞춤인 장소.

‘이건…….’

깊숙이 숨겨 놓은 웬 종이를 발견한 그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열린 방문 사이로 원이 들어섰다.

“문을 왜 열어 두고 다니…… 뭐지, 그건?”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헤일린이 앞발로 짚고 있던 종이를 집었다.

‘신문 조각?’

내용을 확인한 금안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제가 아침에 읽고 침대에 던진 일간지. 백호 영역에 대한 소식이 기재된 기사였다.

‘설마.’

당했다.

자신을 덮친 후 이걸 가져갔을 줄은.

속이 엉큼한 사슴에게 농락당한 원은 일순 아찔해졌다. 그 팔랑팔랑한 몸으로 백호 영역에 갔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

헤일린은 이성이 날아간 검은 돌을 답답하게 올려 봤다.

평소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주제에 사슴만 관련됐다 하면 얼빠진 똥개가 되는 꼴이라니.

‘정신 차리라고.’

공중을 박차고 뛰어오른 노란 짐승이 뻑, 원의 턱에 박치기를 날렸다.

“윽!”

내 사슴이 사라졌다.

* * *

쾅, 원과 헤일린이 사라 이스단의 별관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혼담에 관해 이스단 가주에게 전달하려던 사라 이스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기 마탑주, 이 무슨 무례한,”

“벤디 레피가 백호 영역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

현재 백호 영역은 세력 갈등으로 들썩일 터. 잠깐 멈칫한 그녀가 곧 천연스레 차를 머금었다.

“설령 가고자 했어도 이스단 저택 어딘가에 있을 테니 염려 말기를.”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내가 막았으니까.”

사라 이스단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어제부로 문지기들에게 출입을 더욱 단단히 통제하라 일렀다.

특히 아카데미에서 온 여우 수인.

벤디는 사라 이스단의 허가 없이는 이스단 저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다정할 예정인 시어머니와 잘생긴 시아버지, 꽃 같은 약혼자가 있는 이곳에 대해 다시금 대화를 나눌


때까지는.

“그 아이는 마음대로 이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지. 변수는 없어요.”

일단 한시름 놓은 원과 헤일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도 아닌 사라 이스단이 호언할 정도면 벤디는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특이 사항 또한 보고받은 게 없으니.”


그녀는 시간별로 보고받은 출입 기록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인력을 동원하여 저택을 살피도록 하지요. 혹시 모르니 초식 수인일 때의 인상착의도 포함해서.”

“부인.”

아직 영문을 모르는 이스단 가주가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어째서 이 저택에서 초식 수인을 찾는 거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당신, 표정이 왜 그래요?”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지한 사라 이스단은 내심 불안이 피어났다.

재촉에 못 이긴 이스단 가주가 설명을 이었다.

“별일은 아니긴 한데, 경비에게 붙잡힌 평범한 사슴 한 마리를 방생했,”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뭉그러뜨렸다.

“사슴?”

캬옹?

원과 노란 짐승의 경악 어린 눈길이 제게 박혔기에.

뒤이어 하얗게 질린 사라 이스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며늘아기……!”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한 이스단 가주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며늘아기라니.’

그저 가엾고 작은 꽃사슴 한 마리를…… 방생했을 뿐인데…….

* * *

이스단 저택을 벗어나는 건 예상만큼 어렵지 않았다.

동물형인 사슴으로 변하여, 바깥과 연결된 숲으로 뛰어들다가 경비에게 잡혔을 때만 해도 어쩌나 싶었는데.

‘이건 뭐지?’

‘아, 기사들이 잡아 온 사슴이 우리를 탈출한 것 같습니다.’

이스단 가문에 방문한 첫날, 배낭을 빼앗으려 했던 남자가 나를 곱게 후문으로 내보냈다.


‘다시는 잡히지 말거라.’

위압적인 체구나 음성과는 다르게 다정한 육식 수인이었다.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저택을 벗어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스단 가문을 나선 후, 인근 산을 넘으면 곧장 곰 영역과 연결되지.]

밀란느 학장님의 설명에 따라, 서둘러 산을 넘은 내가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나 스웰든에게 연락을 취해 두었으니, 백호 영역 초입까지 길을 안내할 게야.]

‘안나는 어디지?’

약속 장소에 다다른 나는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턱, 그 순간 누군가 예고 없이 어깨를 짚었다.

“악!”

기겁한 내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저예요.”

“……아, 안나?”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겁보가 무슨 용기로 백호 영역에 가겠다는 건지, 중얼거리며 혀를 찬 안나가 말을 이었다.

“학장님께 대충 얘기는 전달받았어요, 레넌 님을 만나러 간다고. 최단 거리로 달리면 저녁에는 백호


영역에 도달할 수 있어요.”

끄덕인 나는 무심코 그녀의 의복을 훑었다.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안나가 짤막하게 부언했다.

“사교 모임 중이었어요.”

“괜찮아요? 이렇게 나와도.”


“안 괜찮아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 회장이 아니었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

“이 대목에서 뺨은 왜 붉히는데요.”

괴력 곰돌이는 밀려든 감동을 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중요한 일정을 깨고 온 만큼 제대로 만나고 와요.”

“그럴게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대답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뭘 타고 이동하나요?”

어째 마차는커녕 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요.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빠르니까.”

“네?”

“저.”

“……?”

“저라고요.”

내 입술이 파리하게 떨리는 동시에 안나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퍼져 나갔다.

쿵, 쿵.

이윽고 세미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근육 곰이 자태를 드러냈다. 괴력 곰돌이답게 웬만한 육식


동물은 거뜬히 집어 던질 수 있는 크기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흉악한 곰의 등에 올라 백호 영역까지 가라고.

‘차라리…….’

침착하게 양손을 맞잡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잡아먹히는 게 덜 무섭지 않을까.’

* * *

백호 영역으로 연결되는 숲.

태풍에 휩쓸린 사람처럼 꼬질꼬질해진 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슴 인생에 곰돌이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저는 여기까지가 최대예요.’

안나는 사람을 넝마로 만들어 놓은 채 홀연히 떠났다. 스웰든 가문 또한 곰 영역의 명문가인 이상 더는


함께할 수 없었다.

‘급히 온 거라 이것밖에 챙겨 오지 못했으니, 일단 있는 대로 쓰세요.’

나는 안나가 주고 간 회색 로브와 막대 과자, 램프를 잘 챙겼다.

로브를 주섬주섬 두르고 있으니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빛이 일기 시작했다.

‘……아.’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 보자, 이미 어둠이 내린 상태. 어느덧 저녁이 지나 사슴 수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육식 수인 영역에서 이런 모습이라니. 덜컥 겁이 난 나는 이내 피가 몰릴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온 거잖아.’

백호 영역의 상황을 생각하면 한 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막대 과자를 그러쥔 내가 사박사박,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숲에 물 흐르는 소리, 이따금씩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공포를 자극했다.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직행하면, 작은 폭포 옆에 줄기가 유독 녹색을 띠는 나무가 있을 게다. 사람 몸


둘레보다 두꺼운 나무야.]

고요 속에서 밀란느 학장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포 앞에 다다른 나는 두꺼운 나무마다 램프를 비추기 시작했다.

‘찾았다.’

오랜 시간 끝에 신비로운 색감의 나무를 발견한 내가 그 앞에 섰다.

[그 나무에 마력을 주입하면 공간이 하나 열리지. 레넌의 사유 저택으로 연결된 이공간이다.]


레넌과 학장님밖에 모르는 통로.

레피 저택 감옥에서 밀림으로 연결되는 기밀 통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고차원 마법이지만.

‘마력을 흘리라고.’

램프를 내려 둔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꽤 많은 마력을 주입하자, 정말로 사람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타원형 이공간이 생겨났다.

[반란군이 아직 정문을 뚫지 못했다고 하니, 손주 놈은 아마 저택에 있을 게야.]

‘이곳을 지나면…….’

레넌이 있다.

이윽고 후드를 푹 눌러쓴 내가 이공간에 발을 들였다.

* * *

풀썩.

난데없이 수풀에 떨어진 내가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어째서 기밀 통로를 타고 들어와도 이토록 멋없이 착지하는 인생인 걸까.

‘여긴 어디야?’

잠깐의 자괴감을 떨친 나는 조심스레 수풀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정원……?’

그리고 곧장 선명한 빛을 발하는 짐승의 안광과 마주쳤다. 달빛 아래, 어렴풋이 드러난 짐승의 형체는
백호였다.

‘음.’

백호 영역이니 당연히 백호가 있겠지.

비명도 못 지른 나는 연거푸 눈을 비비며 자기 암시를 걸었다.

‘기절하면 안 돼.’

이건 노랑이보다 다소 큰 고양이일 뿐이다. 그저 하얀색에 줄 그은 노랑이일 뿐이야.

“차, 착하지.”
얌전히. 바르르 떨리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간 내가 노란 짐승 다루듯 타일렀다.

“쉿.”

그와 동시에 크허헝- 귀가 찢어질 듯한 짐승의 포효 소리가 밤을 물들였다.

“침입자다!”

“수풀 쪽이야!”

순식간에 무수한 횃불이 수풀 주위를 에워쌌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휘리릭, 도망칠 겨를도 없이 날아온 쇳줄이 내 발목을 휘감았다.

‘헉!’

쿠당탕, 그대로 엎어진 나는 신음도 못 낸 채 입을 가로막았다.

“흐…….”

아파.

당기는 대로 질질 끌려가던 내가 로브 속에 숨긴 막대 과자를 그러쥐었다. 이미 소란이 불거진 이상,


마법을 사용해서 이 자리부터 피해야 했다.

마력을 막대 과자에 끌어모은 순간,

“침입자?”

박자 느린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

“예, 하나 대체 무슨 수로 이 경비를 뚫고 들어온 건지…….”

“레넌 님, 조심하십시오. 아직 신원 확인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비켜.”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목 언저리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후드를 파고든 검날이 여린 살을 스치며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뒤이어 머리 위에서 고압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 들어.”
#<112 화>

처음 듣는 날 선 음성에 몸이 절로 떨렸다.

검과 맞닿은 목이 아릿했다. 코끝까지 덮어쓴 후드 아래로 가까이 선 두 발이 보였다.

‘자칫하면…….’

베인다.

몸을 짓누르는 선연한 살기를 느낀 나는 투항하듯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목에서 떨어진 검 끝이 얼굴을 가린 후드를 들췄다.

어두침침했던 시야가 확 밝아지며 밤하늘 아래 흔들리는 은발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빛이 꺼진 물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몄다.

“…….”

시간이 지나도 눈을 살짝 크게 뜬 레넌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검이라도 좀 치워 줬으면. 오금이 저린 내가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레,”

“움직이지 마라!”

채 입을 떼기도 전에 확, 발목을 구속한 쇳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악!”

중심을 잃은 내가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흙바닥에 긁힌 팔다리가 쓰라렸다.

바닥을 짚으며 겨우 고개만 들자, 곧장 검을 높이 치켜올린 레넌이 보였다. 은발 사이로 드러난 물색


눈동자가 번득였다.

‘죽는다.’

본능적으로 움츠리는 동시에 챙강, 발목을 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쇳줄을 단번에 끊어 낸 그가 검을 갈무리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레넌 님,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찰나,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나를 안아 올린 레넌이 선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 막지 말고 비켜.”

그가 걸음을 옮기자 당황한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며 길을 텄다.

크르릉, 내 위치를 알리는 데에 일조했던 집채만 한 백호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레넌, 있잖아…….”

불안한 마음에 괜히 꼼지락거리는 와중, 그가 내 뒷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뒤이어 속삭임에 가까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드 똑바로 써.”

표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넌이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사실을.

싸늘한 태도에, 어떠한 말도 건네지 못한 나는 후드를 꾹 눌러 썼다.

* * *

쿵, 두꺼운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레넌은 지켜보는 눈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벤디를 내려 줬다.

‘여기는…….’

바닥에 발을 디딘 벤디는 후드를 슬쩍 들추어 주변을 확인했다.

아카데미에서 본 레넌의 기숙사보다 몇 배는 넓고 화려한 방.

백호 영역 특유의 문양이나 장식품이 진열된 내부를 끝까지 둘러볼 순 없었다. 시야를 레넌이
가로막았기에.

주춤주춤, 물러나던 벤디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벽과 레넌 사이에 갇힌 벤디가 동공을 떨었다.

교복이 아닌, 휘장을 매단 백색 정복 차림이 그의 지위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자, 곧바로 서슬 퍼런 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늘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표정 또한


무감한 빛을 띠었다.

물끄러미 벤디를 내려 보던 레넌은 고저 없이 말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말하자면 아주아주 긴데. 벤디가 섣불리 답하지 못한 채 망설이자,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일 뻔한 레넌이 말을 뚝 멈췄다.

“하…….”

상처 가득한 손이 은발을 짜증스레 쓸어 넘겼다.

후드를 뒤집어쓴 존재가 벤디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현실이 아닌 줄 알았다.

당장 누군가의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 혼자, 그것도 사슴 수인 모습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만일 제가 정원 주변에 없었고, 전투로 인해 약간의 흥분 상태인 다른 백호 수인들에게 먼저 들켰으면.

상상만으로도 피가 싸하게 식었다.

쫄보 사슴이 저지른 일치곤 너무 대담한 일.

똥개와 노란색 담당까지 따돌리고 온 걸 보아, 조력자가 누군지 대충 예상 가는 그가 들끓는 속을 간신히


눌렀다.

“…….”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다.

곁눈질로 레넌을 살핀 벤디는 후드를 벗기는커녕 더욱 눌러썼다.

신경이 곤두선 건 당연했으나, 평소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화가 난


얼굴은 처음이었으니까.

이윽고 레넌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가.”

그것만큼은 할 수 없는 벤디가 단호하게 도리질 쳤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뭐가 됐든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

“더는 말 안 해, 돌아가.”

“……싫어.”

“그러면 강제로라도 돌려보낼 수밖에.”

흠칫, 벤디의 몸이 경직됐다.

저택 밖으로 통하는 이공간에 도로 집어 던질 기세. 당장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일단 도주를 택한 벤디가 발을 박차는 순간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열심히 다리를 휘저어 봤자


공기만 차는 헛발질일 뿐이었다.
“그런 허술한 수가 여기서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머리 위에서 냉랭하기 짝이 없는 일침이 들렸다.

못된 호랑이. 청순한 얼굴을 하고선 말로 때리는 재주가 있었다.

“아……!”

달랑 들린 채 버둥거리던 벤디는 돌연 짤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자잘하게 입은 상처가 쓸린 탓이었다.

“왜 그래.”

당황한 레넌이 깊게 눌러쓴 벤디의 후드를 벗겼다. 숨겨 둔 밀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목의 상처가


드러났다.

일순 눈이 돌 뻔한 그가 목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삼켰다.

쉽게 다치는 약한 몸인 걸 알아서 팔자에도 없는 뒤치다꺼리까지 하며 애지중지한 건데. 정작 제가 상처


입힌 꼴이었다.

“어디 봐.”

곧장 벤디를 침대에 앉힌 레넌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초조한 손길로 로브 끈을 풀자,


생채기가 생긴 무릎과 팔이 드러났다.

“그냥 단순 긁힌 상처야.”

벤디가 변명하며 슬슬 몸을 물렸으나, 발목을 쥔 손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든 레넌이 벤디를 뜯어봤다.

결 좋은 머리카락은 산발에, 여기저기 쓸린 상처로 가득한 데다 교복은 엉망인 꼴.

겁보 사슴이 이렇게 되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화가 치미는 한편 비틀린 만족감이 일었다.

‘미친 새끼.’

진짜 주인만 바라보는 개가 되었나, 레넌은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내일이면 드디어 가주의 목을 칠 수 있는데. 한시 빨리 벤디를 이곳에서 내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의관을 불러올게.”

탁, 문이 완전히 닫혔다.

홀로 남겨진 벤디는 잽싸게 문으로 달려가 귀를 찰싹 붙였다. 밖에서 레넌이 기사들에게 무어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로브 주머니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던 벤디는 그 행위를 이어 갈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 산만 한 호랑이가 퍼질러 앉아 있었기에. 정원에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백호였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쉭, 쉭.

손을 내저어 봤자 하찮은 것 보는 듯한 눈길을 던진 백호가 엎드려 누웠다.

치를 떤 벤디가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그래, 그 속 시커먼 호랑이가 나를 혼자 둘 리 없지.’

바짝 벽에 붙은 벤디는 우선 주머니에서 소형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안나가 주고 간 귀중한 연락


수단이었다.

백호의 동태를 살피며 마력을 주입하자, 이내 통신구 속에 밀란느 학장이 나타났다.

[레넌은 만난 게냐?]

“네, 그런데…….”

말끝을 흐린 벤디는 방금 전까지 본 레넌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쁜 또라이가 무서운 또라이로 변모한 상태. 벤디가 머리에 뿔 난 시늉을 하자, 밀란느 학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보구먼.]

“맞아요, 어떡하죠?”

[별수 있나.]

밀란느 학장 또한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죽으러 뛰어들지 못하도록 묶어 두기라도 한 채 설득해야지.]

묶으라니. 이미 실패한 전적이 있는 벤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해 봤는데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뭐? 누구를 묶었는데?]

“늑대, 아니, 원 리오나드요.”

[…….]

밀란느 학장의 물색 눈동자가 아스라이 떨렸다.

세상에 차기 마탑주를 묶을 수 있는 자가 또 있을까. 맑은 얼굴로 온갖 기행은 다 벌이고 다니는 꼴이라니.

[……백호는 아마 좋아할 게다.]

“백호면 밀란느 학장님도 포함인가요?”

편견 없는 질문을 마주한 밀란느 학장이 부르르 떨었다.


[아니, 레넌 한정이다.]

정확히는 네게 묶이는 걸 좋아하겠지만.

뒷말을 삼킨 그녀가 말을 잇는 순간, 누군가 벤디가 쥐고 있던 소형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역시.”

콰직, 레넌의 손에서 소형 통신구가 부스러졌다.

“여기까지 온 건 학장의 지시였군.”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아, 안 돼…….”

벤디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들킨 것도 들킨 거지만, 보통 통신구보다 네 배는 비싼 보물을…….

절망하는 벤디를 가볍게 안아 든 그가 소파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의관은 긴장하며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왜 이곳에 초식 수인이……?’

심지어 소중한 것 다루듯 하는 레넌의 태도라니. 전장에서 도륙하는 모습만 보아 온 의관에게는 지나치게
낯선 행동이었다.

벤디를 소파에 내려 둔 레넌은 감시하듯 옆자리에 앉았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슴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목의 상처부터 치료한 의관은 뒤이어 쇳줄이 옥죄었던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내려 보던 레넌은 짐짓 미간을 굳혔다. 쇳줄이 휘감은 자국 외에 조금 오래된 듯한 흉터를


발견했기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벤디가 머뭇거리며 흉터를 가렸다.

“……별거 아니야.”

페트리온에서 도망칠 때, 숙부의 구속구를 깨뜨리며 남은 흔적이었다.

흉터를 가린 손을 잡은 레넌이 입술을 뗐다.

“말해.”

탁, 벤디가 그의 손을 쳐 냈다.

“너한테 대답할 의무는 없어.”

저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한 벤디는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보통,”

숨기려는 벤디의 노력이 무색하게, 발목을 살핀 의관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이런 흉터는 몸을 구속하는 마도구를 억지로 파훼했을 때 남는 자국입니다.”

#<113 화>

의관은 벤디의 원망 가득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는 주인인 레넌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었다.

“아직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흔적 같습니다만.”

망치에 맞은 듯한 기분이 된 레넌은 벤디의 발목을 응시했다.

사슴인 벤디가 수인 아카데미까지 오게 된 사정이 있을 거라곤 짐작했으나…….

‘몸을 구속하는 마도구?’

단순히 듣고 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일 년이 되지 않은 흉터라면, 입학 전까지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니까.

머릿속이 차갑게 식은 그가 대략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일부러 초식 수인 영역을 넘어 육식 수인 영역까지 건너왔다. 구속구를 건 자에게서 몸을 숨기기 위해.

‘구속구.’

다칠 구석도 없는 몸에 그딴 걸 달았다고. 속으로 뇌까린 그가 벤디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무슨 소리인지 설명,”

순간 레넌은 심장이 철렁했다.

쇳줄에 묶이고도 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벤디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기에. 밀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일렁였다.

숨기고 싶었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

말문이 막힌 레넌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뒤이어 약간의 후회가 밀려들었다.


‘너무 몰아붙였나.’

밀란느 학장이 종용했을지언정, 초식 수인의 몸으로 백호 영역에 오기까지는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기껏 와서 들은 말이라곤 추궁과 돌아가란 소리가 전부였다.

끓는 화를 애써 누른 그가 허리 숙여 벤디를 올려 봤다.

“아무것도 묻지 말까.”

입술을 꾹 말아 문 벤디가 미세할 정도로 살짝 끄덕였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우는소리만 할 것 같았다.

목울대만 울렁이는 벤디를 빤히 바라보던 레넌이 말했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철컥, 아래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레넌은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제 손목을 내려 봤다.

웬 족쇄 같은 수갑이 왼쪽 손목을 구속한 꼴. 남은 수갑은 벤디의 오른쪽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냐는 말은…….’

속박 마도구를 건 인간을 조져 주겠다는 의미였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제 주인이 구속된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던 의관은 더듬더듬, 허리춤을 매만졌다.

발작하는 환자에게 사용하는 긴급용 수갑이 사라진 상태였다. 심지어 열쇠마저.

‘어느새!’

휙, 의관의 시선이 열쇠를 꼭 그러쥐고 앉은 벤디에게 머물렀다.

“얌전히 있어, 레넌.”

레넌의 입술에 위협적인 막대 과자가 드리워졌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냐고 물은 건 너야.”

깡패 사슴을 마주한 레넌은 멍하니 생각했다. 혹시 앞에 울먹인 것도 연기가 아닐까, 하고.

정답은 벤디만이 알고 있었다.

* * *

의관이 방을 나서고, 침대에 누운 벤디는 천장을 올려 봤다.

레넌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기까지는 성공했는데.


‘밀란느 학장님…….’

유일한 의지처를 잃어버린 벤디가 막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비싼 걸.’

청순한 호랑이가 소형 마도구를 부순 탓에 연락을 취할 수단이 없었다.

다행히 레넌은 열쇠를 빼앗거나 수갑을 억지로 풀지는 않았지만…….

침대에 덜렁 벤디를 내려놓고 자신도 옆에 누워 버렸다.

‘뻔한 수에 넘어갈 줄 알고.’

피로해진 제가 잠든 사이 달아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래도 아까처럼 화내지 않고, 적당히 맞춰 주는 게 어디인가 싶었던 벤디가 게슴츠레 측방을 곁눈질했다.

딱, 마침 시선이 마주친 레넌이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계속 이렇게 붙어 있으려고?”

그가 수갑을 찬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자연스레 벤디의 손목이 딸려 올라갔다.

“이젠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보네.”

없는 용기를 끌어올린 벤디가 허세를 부렸다.

“이미 한 번 같이 잔 적도 있는데 뭘.”

“두 번 덮치는 건 별일도 아니란 의미인가.”

“그건…… 별일이지…….”

실낱같은 용기마저 사라진 벤디는 천장에 고개를 고정했다.

저놈의 맹수는 정복을 제대로 갖춰 입어도 야살스러운 게 문제였다.

피가 몰리는 코를 문질거린 벤디가 몸을 뒤척여 레넌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는 아직 자신을 바라보는 상태. 늘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무감한 표정만이 자리했다.

“있잖아, 레넌.”

벤디는 반항기가 세게 온 호랑이를 향해 슬금슬금 접근했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한층 가까워진 벤디를 마주한 레넌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무구하게 접근한 사슴과 굶주린 호랑이의 머릿속 장르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레넌, 밀란느 학장님은 구두쇠지?”

“알고 있었네, 웬만하면 티 안 낼 텐데.”

알 수밖에. 지갑을 턴 이후, 밀란느 학장은 벤디만 봤다 하면 돈 없다며 으르렁거렸으니까.


“그런 밀란느 학장님이 너를 데려오면 내 손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주시겠대.”

“…….”

“학장님은 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으셔.”

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벤디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랑 통신을 주고받으셨지만, 손끝이 떨리고 계셨으니까.”

“그렇다고 반란을 막을 순 없,”

“나도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일순 멈칫한 레넌은 이내 여상한 미소를 걸었다.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물색 눈동자가 반으로 접혔다.

“그 말도 학장이 시켰어?”

벤디는 어쩐지 레넌의 모습이 부옇게 보인다고 생각하며 눈꺼풀을 여닫았다.

“둘이 머리를 맞댄 것치곤 잘 짰어.”

아니라고, 내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같이, 돌아…… 가…….”

말을 끝맺지 못한 벤디가 수마에 빠져들었다. 의관이 몰래 피워 두고 간 수면 향에 취한 것이었다.

툭, 손아귀 힘이 풀리며 꽉 쥐고 있던 수갑 열쇠가 침대보에 떨어졌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로 수갑을 풀지 않은 레넌이 잠든 벤디를 바라봤다.

뻗어진 손이 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의관이 치료한 상처가 드러났다. 하얀 목에 어울리지 않는


흔적이었다.

“미안.”

작게 중얼거린 그가 수갑으로 엮인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거칠한 제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손이었다.

수면 향 때문인지, 무해한 사슴의 존재 때문인지.

줄곧 긴장 상태였던 어깨가 살짝 풀어진 레넌이 툭, 벤디의 이마에 제 이마를 묻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 * *
이른 아침, 백호 영역 어귀에 진입한 원이 갈림길에 섰다.

벤디의 위치는 어디인가.

에던트 가문일지, 아니면 레넌의 사유 저택일지.

벤디에게 건 위치 추적 마법은 지역 정도만 나타내기에, 정확한 장소를 알아내기까지는 무리가 있었다.

말을 세운 채 갈등하고 있자니, 배낭에 있던 노란 짐승이 빠져나와 그의 뒤통수를 찰싹찰싹 갈겼다.

속이 뒤집힌 원이 노란 짐승의 멱살을 잡았다.

“답답하면 네가 결정하든가.”

앞발로 제 관자놀이를 짚고 고민한 노란 짐승은 에던트 저택 방향을 가리켰다.

벤디가 레넌의 저택이라면 비교적 안전하겠지만, 에던트 가문에서는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잘못 짚더라도 그편이 낫겠군.”

곧장 의미를 알아들은 원이 품에서 마도구 하나를 꺼냈다.

외형을 바꾸는 마도구였다. 로브로 얼굴만 가리기에는 위험성이 따르니까.

팔찌 모형 마도구를 착용하자마자 화악, 빛과 함께 그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다. 뒤이어 금색


눈동자도 은색을 띠었다.

백호 수인을 연상시키는 외양.

그의 변화를 올려 보던 헤일린이 앞발로 저를 가리켰다.

‘내 거는.’

새끼 사자 모습일지언정 알아보는 이가 없다고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네 건 없어.”

알아서 하라고 답하려던 원이 멈칫했다.

헤일린 이스단은 없으면 없는 대로 백호 영역에 쳐들어갈 성정.

그로 인해 백호 영역과 사자 영역이 마찰을 빚으면 중간에 낀 마탑도 골치 아파질 건 자명한 일이었다.

쯧, 혀를 찬 원이 손에서 심이 두꺼운 깃펜을 소환했다.

“줄이라도 그리면 새끼 호랑이로 보이겠지.”

같은 노란색이니까. 반항하는 노란 짐승을 누른 원이 숨겨 둔 그림 실력을 한껏 발휘했다.

죽죽 그리던 원은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어째 그릴수록 호랑이가 아니라 혼종이 되어 가고


있었다.

“…….”

처음 안 사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됐어, 완벽한 호랑이다.”

벤디가 기겁할 만한 제 꼴을 꿈에도 모르는 노란 짐승이 서둘러 배낭에 들어갔다.

목적지는 에던트 가문이었다.

* * *

스륵, 잠결에 누군가가 몸을 만지는 느낌이 일었다.

숙련된 시녀의 부드러운 손길.

기분 좋은 손길에 무심코 몸을 맡기던 벤디는 번쩍 눈을 떴다.

‘……언제 잠든 거지?’

벌떡 상체를 일으킨 벤디가 몸을 더듬었다.

‘이게 뭐야.’

교복은 온데간데없이 웬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꼴. 여우 수인으로 모습을 바꿔 주는 팔찌도 없었고,


치솟은 밀색 머리카락도 정돈된 모습이었다.

창문으로 스민 햇살에 눈을 찌푸리던 벤디가 두리번거렸다.

“레넌?”

방 안에는 레넌은커녕 낯선 남자가 문을 딱 지키고 선 상태였다.

“당신은…….”

얼굴에 긴 자상을 가진 남자. 벤디가 다람쥐로 당했을 당시, 레넌과 통신을 나눈 중년 남자였다.

저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금세 기억해 낸 순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호 영역에 유람 왔다가 휩쓸린 귀족 영애,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시죠.”

그럼 레넌은.

쿵,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든 벤디가 곧장 물었다.

“레넌은 어디 있어요?”

“떠나라는 말씀만 남기셨습니다.”

제 할 말만 쏟아 낸 남자가 벤디를 바라봤다.

어제만 해도 머리는 산발에 온몸은 흙투성이인 괴인이었는데.

차림새를 멀쩡하게 해 두니 알 수 있었다. 일전에 레넌이 말했던 예쁜 사슴의 정체가 누구인지.


경계하며 벽에 찰싹 붙은 벤디를 지켜보던 남자는 레넌이 남기고 간 말을 상기했다.

‘심약하니까 얼굴을 들이밀지는 말고. 넌 너무 악당같이 생겼거든.’

제 얼굴을 떠올린 남자가 애써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억지로 모시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고 갈 법한 흉악한 미소였다.

“바알 님, 큰일 났습니다!”

동시에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사색이 된 채 뛰어든 병사가 곧장 보고를 올렸다.

“에던트 가문에서 급서가 날아왔는데, 레넌 님께서 부상을,”

대화를 끝맺지 못한 두 사람이 흠칫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접근한 벤디가 그들을 향해 막대 과자를 겨누고 있었다.

‘바알, 네가 남아. 이 사슴을 안 다치게 제압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그 정도의 실력자입니까?’

레넌의 충고가 있었음에도, 벤디의 허술한 행동거지에 방심해 버린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비켜 주세요.”

막대 과자 끝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마력이 그의 전신을 옭아맸다.

#<114 화>

남자, 바알과 병사가 은밀하게 눈짓을 교환했다.


벤디는 마력과 별개로 자세는 형편없는 만큼, 틈만 잘 파고들면 제압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신호를 주고받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마법이 쾅!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며 벽에 명중했다.

“……비켜요.”

간담이 서늘해진 바알이 벤디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세 번째는 정말로 명중시킬 거예요.”

두 번째겠지.

긴장해서 숫자도 헷갈리는 주제에 마법은 또 순식간에 재소환하는 실력이 기가 찼다.

“레넌이 부상을 입었다면서요, 시간이 없어요.”

“최전선에서 부상을 입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본인의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어서겠죠. 애초부터 죽을 생각으로 거기 간 거니까.”

“그건…….”

말문이 막힌 바알은 주춤주춤 어설프게 탈출구를 모색 중인 벤디를 응시했다. 그러다 엉덩방아를 찍고


얼른 일어나는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못 미더웠다.

“알고 계시잖아요, 레넌은 가주가 되고 싶은 게 아닌 거.”

레넌의 목적은 가주 찬탈이 아닌 가주 세력의 멸살.

바알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 또한 불나방 같은 레넌 때문에 보고 없이 에던트 가문을 치는 불경을 저지른 것이었다. 하필 레넌이


가까운 사자 영역에 있었던 탓에 허사가 되고 말았지만.

“이미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영애가 가서 할 수 있는 건 없,”

“옆에 있을 순 있잖아요.”

극한의 상황에 혼자 남겨진 사람은 평소보다 자신의 목숨을 경시하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잘 아는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죽는 방법을 모르겠어.’

‘차라리 나도 엄마 아빠랑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

“살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다친 늑대와 함께하며 하루하루를 버틴 과거의 누군가처럼.

“저는 다음 학기에도 레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생다운 소박한 바람과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바알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 보내 주세요.”

“…….”

“뒤에서 안전하게 있으려고 호랑이굴까지 온 거 아니니까.”

‘나는 뒤에서 노닥거릴 생각 따위 없어.’

바알은 의외의 순간에서 레넌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누군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학장의 끄나풀.’

‘아, 밀란느 님의…….’

‘그리고 내게는 약점이지.’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에 걸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에던트 가문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잠든 벤디의 옆을 지키던 제 주인이 스쳤다. 마치 유일하게 남은 미련인
것처럼.

“약조하십시오.”

“갑자기 무슨…….”

“레넌 님께 다다를 때까지는 무조건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바알의 제안에 반색하던 벤디가 점점 표정을 굳혔다. 안 그래도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어째서…….’

왜 몸에서 빛을 뿜는 건데.

왜 동물형으로 변하는 건데.

왜 올라타라는 듯 몸을 낮추는 건데.


얼굴에 흉터가 있는 우람한 백호를 마주한 벤디가 툭, 막대 과자를 떨어뜨렸다.

곰도 모자라 백호라니. 육식 수인들은 왜 하나같이 제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차라리 해피가 낫지…….’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근육 사슴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에던트 가문 주변은 외부 경비도 없을뿐더러, 대피 중인 일반인들과 탈영병들로 인해 어수선했다.

인파에 섞여 저택 주변에 다다른 원은 잠시간 고민에 사로잡혔다.

곧바로 정문을 뚫고 들어갈지, 내부 상황을 모르는 만큼 신중히 접근할지.

이윽고 그의 시선이 갈색 배낭 속 추악한 생물에게 머물렀다. 아주 훌륭한 정탐꾼이 여기에 있었다.

“고양이가 쓸모 있을 때가 다 있고.”

노란 짐승의 덜미를 집어 든 원이 입꼬리를 휘었다.

‘이 똥개 새끼가.’

파박, 헤일린이 현란한 뒷발차기를 날렸지만 안타깝게도 사정거리가 짧았다.

원은 자비 없이 가장 낮은 담장으로 노란 짐승을 던져 넘겼다. 시간이 지나도 안쪽은 잠잠했다.

문제가 있었으면 헤일린 이스단이 뭔가를 박살 내고도 남았을 것.

휙, 후드를 덮어쓴 원이 가볍게 담장을 넘어 착지했다.

바람을 타고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인 전장의 냄새가 났다.

피가 들끓기도 잠시, 이곳에 벤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오히려 원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헤일린 또한 마찬가지인지 불탄 땅을 도도도 뛰어다니며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정문은 이미 정리가 끝났군.’

에던트 가주의 정규군이 레넌 측 사병들에게 투항한 상태. 레넌의 모습은 물론 벤디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원과 정체 모를 더러운 새끼 짐승에게 병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조심해라, 가주 측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레넌의 사병들이 둘을 창으로 겨누며 원형으로 둘러쌌다.


“…….”

원과 헤일린은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이들에게 벤디의 존재를 묻자니 설명하기가 굉장히 모호했다.

여우와 사슴 중에 어떤 모습으로 왔을지도 모를뿐더러, 그렇다고 교복 입은 존재에 대해 묻기도 애매했다.


만일 벤디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굳이 아카데미를 들먹일 필요가 없으니까.

턱을 매만진 원은 이내 가장 그럴싸한 질문을 생각해 냈다.

“막대 과자를 든 자를 찾고 있는데.”

오, 똥개치곤 제법인데. 헤일린이 감탄하며 주둥이를 달싹였다.

반면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병사들이 인상 썼다. 옆에서 손가락을 돌리는 자도 더러 있었다.

“미친놈 아니야?”

“막대 과자를 왜 여기서 찾아?”

원과 헤일린이 시선을 맞췄다.

벤디는 이곳에 없었다. 여기 와서 막대 과자를 휘둘렀다면 병사들의 반응이 이럴 리 없으니까.

그 순간 휘익,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의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보통 호랑이의 갑절은 되는 크기의


백호였다.

“바, 바알 님?”

“바알 님이다, 길을 열어!”

백호의 정체를 알아본 레넌의 사병들이 외쳤다.

원과 헤일린의 눈길이 백호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여자에게 닿았다. 밀색 머리카락과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공중에서 나부꼈다.

탁탁, 백호와 여자의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멍하니 넋을 빼앗긴 원과 헤일린이 짐짓 정색했다.

교복이 아닌 낯선 옷차림이라 설마설마했는데.

“…….”

여자가 손에 그러쥔 건 막대 과자였다.

* * *

피 냄새와 흩날리는 잿가루가 정신을 어지러이 만들었다.

눈을 꼭 감은 채 백호의 목을 얼싸안고 있던 벤디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
저 멀리, 하얀 머리카락의 백호 수인과 웬 꼬질꼬질한 생물이 뒤쫓아 오고 있었다.

“뭔가 쫓아와요.”

그들을 수상하게 훑은 벤디가 바알에게 속닥거렸다.

“백호 수인 한 명이랑…… 마물처럼 문신을 새긴 짐승 한 마리요. 마법으로 따돌릴까요?”

추격자가 붙었나. 바알이 옅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마력을 모은 벤디가 마법을 날려 보냈다.

쏘아져 오는 무형 마법을 마주한 원과 헤일린이 숨을 삼켰다.

벤디에게 공격당했다는 충격도 잠시, 황급히 몸을 피한 그들이 서로를 노려봤다.

‘이 똥개 때문에.’

‘이 고양이 때문에.’

절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은 두 맹수가 계속해서 뒤쫓았다.

콰쾅, 다발성 마법을 소환한 벤디가 연타로 쏘아 보냈으나 죄다 피해 내는 실력까지 선보였다.

‘아직도.’

벤디는 뒤를 살피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표독스럽게 쫓아오고 있어요.”

그럼 확실하게 처리할 수밖에. 눈을 가늘게 뜬 바알이 휙, 인근 수풀로 몸을 숨겼다.

탁탁, 추격자들이 지척까지 다가온 동시에 발돋움한 백호가 높이 뛰어올랐다. 그들을 위에서 내려 보게
된 벤디가 막대 과자를 아래로 겨누었다.

그 순간 공중에서 원과 벤디의 시선이 오갔다.

‘어?’

하얀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

‘백호 수인이 아니라…….’

어딘지 익숙한 남자를 발견한 벤디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위를 올려 보던 원이 눈을 크게 떴다. 벤디가 대뜸 저를 향해 뛰어내렸기에.

“무슨……!”

저 맛 간 사슴이. 떨어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보인 그가 곧바로 팔을 뻗었다.

화악, 단숨에 받아 든 원이 멈췄던 숨을 터뜨렸다.

“제정신이에요?”

“제정신이에요.”
기죽은 채로도 또박또박 대꾸한 벤디가 옆을 가리켰다.

“이렇게 안 하면 호랑이 아저씨가 공격했을 거예요.”

벤디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원과 헤일린을 공격하지 못한 백호가 땅에 착지했다.

‘호랑이 아저씨?’

원은 바닥에 내려 준 벤디를 일단 제 뒤로 감췄다.

한편, 노란 짐승은 드디어 재회한 벤디의 발목에 꼬리를 휘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명이 주는
기분을 다 느껴 봤다.

‘앞으로 사슴과 떨어지면 성을 간다.’

이를 갈던 헤일린은 일순 멈칫했다.

‘사슴의 성으로 가는 건 괜찮지 않나?’

고심하던 그는 문득 의문을 느끼며 위를 올려 봤다.

이쯤이면 호랑이로 분장한 노랑이를 어화둥둥 할 때가 됐는데,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딱, 눈이 마주친 벤디는 겁먹은 표정으로 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어서 꼬리가 닿은 발목을 살짝 털어


냈다.

“이건 뭐…… 노랑이? 세상에.”

뒤늦게 깨달은 벤디가 기함하며 노란 짐승을 들어 올렸다.

“마물인 줄 알았잖아, 이 낙서는 다 뭐야.”

‘호랑이가 아니라 마물이라고?’

그제야 제 꼴을 깨달은 헤일린은 쪼뼛한 눈으로 원을 돌아봤다.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헤일린이지?”

제 솜씨라고 시인하려던 원은 이어진 벤디의 말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굳이 불리한 진술을 할 필요까지야.

‘야비한 똥개가.’

속이 뒤집힌 헤일린이 콩알만 한 발톱을 드러냈다. 원의 곱상한 얼굴에 줄을 그려 주겠다고 결심하는 찰나,
벤디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중에 잘 씻겨 줄게, 지금은 레넌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씻…… 뭐?

원과 헤일린이 눈을 확장하는 동시에 쿠구궁, 저택 본관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본관 대회의장.

반쯤 전의를 상실한 양측 병사들은 귀신 보듯 회의장 중앙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레넌이 곧게 서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피에 시야가 번진 그가 손등으로 턱을


쓸었다.

‘갈비뼈도 나갔네.’

검을 쥔 손에는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럴 수밖에. 앞을 막아서는 가주 세력의 절반을 그가 처리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그만 기어 나오지 그래.”

권력에 취해 제 자리를 지키기 급급했던 가주는 수하들의 뒤에 숨기 바빴다.

“네가 그랬잖아, 약한 자는 죽는 게 마땅하다고.”

약육강식이라며. 덧붙인 레넌이 웃음을 흘렸다.

최전방으로 치고 나올 줄 알았던 가주가 뒷방에서 꼬리나 내린 꼴이라니.

저런 존재에게 어머니를 잃고, 아카데미에 묶여 살아야 했던 사실이 가당치도 않았다.

서걱, 서걱.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무 썰듯 베어 낸 레넌이 가주가 있는 곳으로 직행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가주를 베어 내기 전에 힘이 다할 확률이 높았다.

일순 눈앞이 핑 돈 레넌이 비틀거리는 순간, 파리하게 질린 병사 하나가 외쳤다.

“레넌 님, 피하십시오!”

쐐애액-

마력을 담은 화살이 그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115 화>
곧바로 몸을 비낀 레넌이 화살을 쳐 냈다.

순간이었다.

푹, 뒤에서 튀어나온 검이 그의 옆구리를 베었다. 허리를 벤 검이 빠져나가는 찰나 덥석, 그가 검신을


잡아챘다.

“드디어 나왔네, 엉덩이가 더 무거울 줄 알았는데.”

뚝, 뚝. 검을 쥔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곧 죽을 놈의 힘이…….’

맨손에 검을 붙잡힌 에던트 가주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안간힘을 다해 검을 당겨 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자, 탁한 물색 눈동자가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호수 같은 눈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검을 놓은 에던트 가주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정신이 아니다.’

애당초 사병들보다 먼저 대회의장에 들이닥쳤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처리한다고 네놈이 가주가 될 수 있을 것,”

“아직도 내가 그 자리에 관심 있는 줄 아나 봐, 이렇게 멍청해서야.”

“…….”

“그럴 거면 네놈을 죽이지 않고 투항시키겠지.”

어느 영역이든 반란에 필요한 것은 정당성.

에던트 가문이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지만, 영역민이 납득할 표면적인 이유는 필요했다.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역대 가주들은 전대 가주의 만행을 낱낱이 알린 후, 광장의 사형대에서 목을 쳤다.

“내 목적은 처음부터 네 목 하나였어. 가주는…… 뭐, 누구든 하겠지.”

에던트 가주의 떨리는 시선이 붉게 물든 레넌의 백색 정복에 머물렀다.

정예군의 반밖에 안 되는 사병을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코웃음 쳤는데. 금세 죽을 것 같으면서도 벌써


대회의장에 있는 이를 반절 이상 혼자 처리했다.

오죽하면 가주 직속 병사들조차 기가 질려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챙강, 레넌이 가주의 검을 뒤로 던졌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에던트 가주가 갈라진 음성으로 외쳤다.

“뭣들 하나, 활을 쏘지 않고!”

멀리서 원형으로 진을 친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쐐액- 무수한 화살이 레넌을 향해 쏟아졌다.
“제길!”

“레넌 님을 보호하라!”

사병들이 달려들어 활을 쳐 냈지만 머릿수가 부족했다. 푸욱, 채 막지 못한 화살이 레넌의 팔뚝에 박혔다.

“레넌 님!”

아랑곳 않은 레넌이 오로지 에던트 가주를 향해 걸어갔다.

“힉!”

공포에 질린 가주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목에 핏대를 세운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뭘 하느냐, 쏴! 쏘란 말이다!”

또다시 레넌에게 수십의 화살이 겨누어졌다.

그사이 병사를 베고, 가주의 앞에 선 그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부터 손봤다.

“크아악!”

뒤이어 검을 높이 치켜든 레넌은 제 죽음이 목전임을 느꼈다.

가주를 내려치는 대신 수많은 화살이 몸을 관통하겠지.

‘……그러고 보니.’

노랑이 이스단과의 혼담이 어떻게 됐는지는 묻지 못했는데.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레넌 님, 피하십시오!”

계속해서 활을 쳐 내던 레넌의 사병들이 절망을 삼켰다.

‘반란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레넌 에던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예감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 쿠궁, 갑자기 무너질 것처럼 건물이 진동했다. 레넌마저 휘청거릴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천장이 무너진다!”

“아니, 저기를 봐!”

이윽고 천장에 사람 여럿이 드나들 정도의 둥근 구멍이 생겨났다. 심지어 잔해는 구멍이 뚫리는 동시에
공중에서 소멸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넌이 표정을 굳혔다.

‘가주의 세력 중에 저 정도 실력의 마법사가 있었다고?’

잔해를 아예 소멸시키는 마법을 구사하려면 최소 마탑 장로격의 실력.


검을 쥔 레넌의 손에 핏줄이 섰다. 현재 그런 마법사를 상대할 여력은 제게 남아 있지 않았다.

물끄러미 위를 올려 보던 레넌은 돌연 눈을 의심했다.

구멍에서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밀색 머리통이 빼꼼 드러났다가 자취를 감췄다.

‘설마…….’

염탐하듯 다시 밀색 머리통이 빼꼼 나왔다가 사라졌다.

별안간 날다람쥐처럼 몸을 쫙 펼친 벤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실감 없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넌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챙강, 가주를 죽이기 직전인 상황마저 잊은 그가 검을 내던지며 달렸다.

‘늦어.’

몸을 날려 저를 깔개 삼는다고 쳐도 닿지 못할 거리. 이대로라면 저 약한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칠 건


자명한 일이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절망을 느낀 동시에 벤디의 막대 과자 끝이 바닥을 향했다.

펑, 소환된 거대한 공기주머니가 쿠션 역할을 하며 벤디의 몸이 퉁 튕겨 났다.

레넌의 사유 저택에서처럼 멋없이 착지하고 싶지 않았던 벤디는 이를 악물었다.

착, 멋들어지게 착지하다 말고 원피스를 밟은 벤디가 뒤로 벌렁 미끄러졌다.

“…….”

전투 소리가 난무하던 대회의장이 적막에 사로잡혔다.

꼴에 정체는 감추고 싶은지 코와 입은 두건으로 가리고, 손에는 막대 과자, 갈색 배낭에 더러운 생물을
넣은 괴한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와중, 가장 먼저 이성을 찾은 에던트 가주가 고함쳤다.

“뭐 하나, 처리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몸을 일으킨 벤디가 궁수들을 향해 막대 과자를 겨냥했다.

펑, 펑!

살상력은 없으나 날려 보내기엔 충분한 공기주머니가 터져 나갔다.

“큭!”

“아악!”

“컥!”

순식간에 궁수의 반절이 거대한 바람에 휩쓸렸다.


팔을 벌린 채 굳어 있던 레넌은 뒤늦게 벤디를 잡아 돌렸다.

얼굴을 확인한 그는 숨을 삼켰다.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선 지경.

전장이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레넌 너…….”

레넌을 살핀 벤디는 더욱 희게 질렸다. 피로 칠갑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그를 차마 만지지도 못한 벤디가 손끝을 떨었다.

“레넌, 상처가,”

“죽으려고 환장했어?”

처음 듣는 레넌의 고성에 밀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대체 뭔데 이곳까지 따라와!”

아랑곳 않은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학장이 뭘 내걸었기에 여기까지 와서, 읍,”

푹, 레넌의 입에 분노의 막대 과자가 꽂혔다. 벤디가 눈썹을 매섭게 모았다.

“말해 두는데.”

강제로 입을 봉인당한 그가 눈을 깜박였다.

“학장님이 시켜서 한 건 아무것도 없어.”

“…….”

“전부 내 선택이야.”

물색 눈동자가 요동치듯 일렁였다.

일순 등 뒤에서 기척을 느낀 레넌은 벤디를 품에 감췄다. 물론 배낭 속 더러운 짐승은 예외였다.

다가간 원은 레넌만이 확인할 수 있도록 후드를 살짝 들췄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레넌은 한결 긴장을
풀었다.

“천장을 뚫은 건 너였나.”

벤디를 끌어당긴 원이 제 품에 감췄다. 이번에도 배낭 속 더러운 짐승은 예외였다.

“누가 계단 내려갈 시간도 없다기에.”

벤디의 닦달에 못 이겨 살면서 처음 천장을 뚫어 본 실정이었다.

뒤이어 바알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대회의장 곳곳에서 작은 환호가 터졌다.


“바알 님이다.”

“바알 님!”

바알 에던트, 백호 영역에서도 이름난 무관의 등장.

그리고 약간 미친 것 같지만, 자유자재로 바람을 소환하는 마법사의 존재가 주는 위압감은 컸다.

이미 판은 기울어졌다.

사기가 저하된 가주 측 병사들이 하나둘 제압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 병장기를 내리는 이들을 둘러본 바알이 말했다.

“레넌 님, 친우분들이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으.

원과 레넌, 헤일린이 맞춘 것처럼 미간을 꾸겼다.

서로 혐오하면 혐오했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친우인 적이 없었다.

맞붙으면 하나는 죽고 남은 하나도 온전치 못하기에,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것뿐.

그러나 열심히 끄덕이는 벤디와 험악하지만 따스한 눈빛의 바알 때문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장르만 우정 청춘물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힘이 빠진 레넌은 바알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명령을 어기고 이곳에 온 책임은 나중에 묻지.”

레넌의 걸음에 따라 병사들이 길을 비켰다.

“레넌.”

조심스럽게 다가간 벤디가 피에 물든 옷자락을 꾹 잡았다.

“……어제, 내 발목 흉터가 뭐냐고 물었잖아.”

그 말에 레넌이 뒤돌아 벤디를 마주했다.

“부모님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가주에게서 도망친 흔적이야.”

“너…….”

“나도 가주가 죽을 만큼 싫고,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

“너처럼, 언젠가는 내가 직접 벌하고 싶고.”

목이 멘 탓에 잠깐 말을 멈춘 벤디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훌륭한 가주가 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제일 중요한 건 우리 벤디야. 알지?’

‘꼭 내가 싫어하는 피클 먹일 때만 멋진 말 하는 거 다 알아.’

‘좀 먹으렴, 좀.’

‘엄마 미워.’

“하지만 그런 자를 죽이기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는 않을 거야.”

레넌은 어렵게 말을 잇는 벤디를 가만히 내려 봤다.

“……그래서 나는 아카데미에 왔어, 살고 싶어서.”

망설이며 입을 여러 번 달싹인 벤디가 작게 말했다.

“그런 사람 때문에 너를 죽이지 마.”

“…….”

“나랑 같이 돌아가자.”

레넌에게서는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던 벤디가 흠칫했다. 툭,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기에.

이내 그 투명한 물줄기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마치 평생을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게 뭐라고 서러워진 벤디가 홍수 난 것처럼 눈물을 펑 터뜨렸다.

“왜 우는데.”

어이가 없어진 레넌은 엄지로 벤디의 눈 밑을 훔쳤다.

“나는 원래 남이 울면 울어.”

눈물범벅인 얼굴에 웃음이 터질 뻔한 레넌이 뒤돌았다.

에던트 가주 쪽으로 걸어가던 그가 잠깐 멈췄다.

“아.”

비스듬히 몸을 튼 레넌은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혼담.”

그딴 걸 왜 묻는데, 꺼져, 사라져.

배낭 속에 있던 새끼 사자, 아니, 개떡같이 생긴 호랑이가 냥냥 항의했다.

‘파기됐군.’

반응만으로도 어떻게 됐는지 알게 된 레넌이 빙글 몸을 돌렸다.


병사들에게 포박당한 상태인 에던트 가주가 안색을 파리하게 물들였다.

“힉…… 사, 살려…….”

발버둥 치는 그를 제압한 바알이 레넌의 앞에 무릎 꿇렸다.

레넌은 공포로 인해 거품까지 무는 에던트 가주를 응시했다. 과거 그토록 제 어머니와 저를 괴롭힌 존재의
끝이 참으로 초라했다.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들자, 원이 벤디를 돌려 안으며 귀를 막았다.

휘익, 허공을 가른 검이 에던트 가주를 그어 내렸다.

“…….”

베지 않았다.

끄르륵, 숨이 붙은 채 혼절한 에던트 가주를 확인한 바알이 중얼거렸다.

“레넌 님……?”

어째서 살려 두냐는 뜻.

당혹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한 레넌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목은 붙여 둬야 가주가 되는 데 어려움이 없다며.”

“……?”

“부랑자로 살기에는 다른 놈들의 신분이 너무 쟁쟁해서.”

“……??”

부군이 아무리 예뻐도 부랑자인 건 싫을 거 아냐, 바알은 알아들을 듯 말 듯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뒤룩거렸다.

“회장.”

“……왜?”

벤디를 돌아본 레넌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진짜 나 책임져야겠다.”

#<116 화>
다음 날, 백호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기사가 육식 수인 영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에던트 가문의 가주가 바뀌었다.

이 사실 하나로도 기사를 관심 있게 살필 필요는 충분했다.

각 영역을 다스리는 가주 및 고위 귀족들이 이른 아침부터 신문을 펼쳤으나…….

“이게 1 면 기사라고?”

“쯧, 심심하면 꼭 이딴 헛소리를 나불거리지.”

“대륙 중대사를 다루는 신문사에서 이 무슨…….”

“백호 영역에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뇌물이라도 먹인 거 아니오?”

기사에는 웬 뜬구름 잡는 소리만 구구절절 나열되어 있었다.

모두가 혀를 차는 그때, 스웰든 가문.

“무사히 도착했나 보네.”

기사를 확인한 안나는 비교적 태연하게 차를 즐겼으며.

폴릿 가문.

“……쿨럭.”

주르륵, 신문을 읽던 신시아는 주스를 턱에 다 흘리고 말았다.

로튼 가문.

“어머나.”

메이지는 신문을 잘 오려 보관했다. 학생회실 게시판에 붙여 두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펠 가문.

“진짜 미치도록 멋있다…….”

신문을 쥔 채 부들부들 떨던 야닉이 방을 박차고 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기사 봤어? 봤냐고!”

“그 말도 안 되는 오보?”

“무슨 헛소리야? 이거 다 진짠데!”

“이제는 그딴 허황된 기사를 믿고, 대체 어디까지 바보가 될 셈이냐!”

“감히 이 야닉 펠을 바보라고 칭하다니!”


“이놈이 어디 아비한테!”

대부분이 말도 안 되는 기사라며 비웃고 넘길 때,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만큼은 절대 웃을 수 없었다.

[의문의 구원자, 혼란한 백호 영역에 강림하다]

“엥?”

아침 신문을 확인한 재학생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실을 알리기에 앞서, 이 기사는 백호 영역과 어떠한 거래도 없음을 올리비아 기자의 명예를 걸고
밝힌다……(중략)……목숨 걸고 백호 영역에 잠입한 올리비아 기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새로운 가주로 등극한 레넌 에던트가 위기를 맞았을 때, 구원자는 운명처럼 천장을 뚫고 강림했다.

구원자는 막대 과자를 들고, 등에 멘 배낭에 조그만 수호신을 넣은 독특한 행색이었다.]

“무, 뭐야 이거, 뭔데 이거.”

어떤 이는 눈곱도 떼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막대 과자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매서운 돌풍이 몰아쳤으며, 전대 에던트 가주의 정예군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중략)……취재를 거부하던 구원자는 천장을 뚫은 건 본인이 아니며, 따라서 배상 의무는
없다고 짧게 일축했다.]

막대 과자와 배낭 속 수호신.

이런 이상한 행색으로 돌아다닐 기인은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학생회장은…….’

방학 동안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걸까…….

* * *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에던트 가문. 레넌의 임시 집무실에서 비공식 회의가 개최됐다.

참석자는 벤디를 따돌린 발 닦개 3 인방이었다.

사슴에 대한 서로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인지한 이상, 정답게 회의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그 전에 단


하나, 반드시 상의해야 하는 게 있었다.

벤디의 숙부, 웬스턴 레피.

여럿이 협의도 없이 각자 파고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존재했다. 포식자 세 마리가 먹이 하나를
두고 싸우는 동안, 틈을 발견한 먹이가 달아나는 결과처럼.

툭, 툭.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던 원이 침묵을 깨뜨렸다.

“조용히 처리해야 돼. 놔두면 우환이 될 뿐이니까.”

“아니.”

온몸에 붕대를 감다시피 한 레넌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회장이 직접 벌하고 싶다잖아. 그때 손을 거드는 편이 나아.”

“그게 언제일지 기약이 없어. 그 사이에 놈이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그러니까 그 수작을 막기 위해 모인 거 아닌가?”

두 사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긴 다리를 꼰 원은 절대 밀릴 수 없다는 듯 주장했다.

“무슨 일이든 싹부터 없애는 게 가장 안전해.”

“그 싹을 자를지 말지 결정하는 권한은 회장에게 있어.”

물러나지 않은 레넌이 방긋 웃었다.

“고양이들은 항상 일이 터지고 나서야 후회하지.”

“담벼락도 못 오르는 시야 좁은 강아지가 뭘 알겠어.”

죽여 없애자, 일단은 살려 두자. 저울은 쉽게 기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머리 싸맬 게 뭐가 있는데.”

길어질 듯한 대립에, 의자에 늘어진 헤일린이 감고 있던 눈을 반쯤 뜨며 말했다.

“의견을 절충해서.”

상체를 일으킨 그에게 원과 레넌의 시선이 모였다.

“반만 죽이자.”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숨만 붙여 두면 되잖아.”

“…….”

“그럼 허튼짓도 못 할 테고, 사슴에게도 결정권이 돌아가겠지.”


제법 미친 것 같지만 꽤 설득력 있는데…….

순간 귀가 솔깃했던 원과 레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반만 죽이려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수가


있었다.

“처리하지, 내가.”

“회장이랑 알아서 할게, 내가.”

“반만 죽인다고, 내가.”

결국 회의가 아니라 각자 할 말만 내뱉는 양상이 되어 가는 찰나, 똑똑, 집무실 문에 울림이 일었다.

“들어갈게.”

벤디의 목소리.

대화를 뚝 멈춘 세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추후 다시 논의하자는 신호였다.

달칵, 문을 연 벤디가 문틈 사이로 얼굴만 쏙 내밀었다. 주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여우 수인


모습이었다.

집무실을 둘러본 벤디는 살짝 손짓했다.

“노랑아, 그만 놀고 이리 와. 아카데미로 돌아갈 준비 해야지.”

언제 동물형으로 변했는지도 모를 노란 짐승이 피융, 쏘아지듯 뛰어나갔다.

‘허…….’

‘……하.’

저 추악한 짐승의 실체를 알릴 수도 없고. 이제는 웃기지도 않은 원과 레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만 해도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문제는 본인은 딱히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점이었다.

괜히 나서서 정체를 알렸다가, 사람 모습으로 벤디에게 안겨 있지나 않으면 다행.

“여기 고용인들이 멀미약도 준비해 주겠대.”

벤디와 노란 짐승이 도란도란 집무실을 나섰다.

원은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왜 이렇게 찝찝할까,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기분. 닫히는 문을 응시하던 그는 별안간 낯빛을 굳혔다.

‘조금 전에 헤일린 이스단이 어떤 꼴이었지?’

얼굴이나 교복 아래 피부는 원이 그려 준 예술적인 그림으로 가득했다. 동물형으로 변했을 때도 여전히


마물 같은 모양새였고.

‘나중에 잘 씻겨 줄게.’
“…….”

곧 안색을 까맣게 물들인 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놈 일부러 안 씻고 기다렸다.

“저거 잡아야 돼.”

“갑자기?”

영문을 모르는 레넌은 물을 마시며 눈을 깜박였다.

“씻겨 주러 가는 거라고.”

풋, 레넌의 입에서 물이 직선으로 뿜어져 나갔다.

“……뭐?”

저도 모르게 거칠게 일어난 그가 갈비뼈를 부여잡았다.

“윽.”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게 문제인가. 다급하게 문을 열던 원과 레넌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의료 도구를 움켜쥔 의관과 마탑 소속 마법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가로막았다.

“레넌 님,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가주는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바쁘니까 비키,”

“이 이상 움직이시겠다면 대형 마물용 수면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관의 눈이 결의로 번쩍 빛났다. 이어서 마탑 소속 마법사가 통신구를 디밀었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차기 마탑주께서 이곳에 계시면 어떡합니까.”

“일단 돌아와서 통신,”

“마탑 장로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경위를 설명하지 않으시면 파업을 불사한답니다.”

원과 레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새끼 짐승이든 뭐든. 벤디가 헤일린 이스단의 몸을 주물럭댈 것만 생각해도 질투로 머리에 피가 몰렸다.

“다리 놓으세요.”

“비켜.”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복도에 의관과 마탑 소속 마법사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방으로 돌아온 후, 여전히 꾀죄죄한 노란 짐승을 안아 든 벤디가 욕실로 향했다.

“으쌰.”

고용인에게 빌린 작은 욕조에 노란 짐승을 넣던 벤디는 갸웃했다.

‘음?’

노란 짐승은 다른 새끼 동물들에 비해 자라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렸다. 거의 성장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조금 무거워졌나?’

영물이니까 그저 이 모습을 유지하겠거니 받아들였는데, 아예 자라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찰박찰박, 거품을 풀자마자 투명한 물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진짜 헤일린 이스단…….”

노란 짐승의 뺨을 조물거리며 씻던 벤디가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 이런 못된 짓을 해? 예쁘면 다 용서되는 줄 알아. 아카데미에서 만나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

벤디는 제 뺨에 묻은 거품을 닦으며 호언했다.

“노랑아, 내가 아주 호되게 혼내 줄게.”

사슴의 허세가 하늘을 찔렀다.

누가 누구를 혼내. 노란 짐승이 피식, 피식, 코에서 바람을 뿜었다.

정작 헤일린이 나타나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느라 바쁘면서, 뒤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당당했다.

“손.”

앞발.

“발.”

뒷발.

“꼬리.”

내달라는 대로 내주던 그는 대뜸 털을 바짝 세웠다.

‘꼬리는 좀.’

쫄딱 젖은 노란 짐승이 앞발로 벤디의 손을 밀어냈다. 예민한 부위였다.


갑자기 내외하는 노란 짐승을 마주한 벤디가 허 소리를 냈다.

“이제 와 씻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다시 꼬리를 잡아 조물거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은 노란 짐승이 첨벙, 발을 굴렀다.

“얘가 왜 이래?”

참방참방, 바둥바둥.

목욕이 싫은 명예 고양이와 사슴 집사의 접전이 불거졌다.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벤디의 손을 밀어내던 노란 짐승은 돌연 쩍 굳었다. 씨름하던 벤디가 무의식중에
그에게 마력을 흘려 버렸기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접촉열이 온몸을 덮치듯 다가왔다.

‘가만히 안 있으면 너 피클 준다.’

동시에 어린아이의 발음 짧은 목소리가 헤일린의 귀를 파고들었다.

‘엄마, 고양이 다쳤나 봐.’

‘어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정체 모를 기억이 그의 뇌리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더러워서 씻겨 주는데 이만큼 아파해.’

참방참방, 고사리 같은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타는 듯한 고통이 치밀었다.

‘이상하네, 방금 밀림에서 구해 올 때까지만 해도 다친 곳은 없었는데.’

헤일린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사라 이스단이 말한, 어릴 적 딱 한 번 납치당했던 기억의


단편임을.

‘앗…… 혹시 내 마력 때문에 아픈가? 조절 못 하고 쪼끔 흘렸어. 쪼끔…….’


‘쪼끔?’

‘쪼끔…… 사실 쪼끔 두 번 많이…….’

‘얘가 왜 눈치를 보고 있어. 엄마가 말했지? 모든 생명의 일부는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러니
사람이든 짐승이든 마력을 흘린 정도로 아프진 않으니 걱정…… 아니, 잠깐. 벤디야, 그거 얼른 이리
내.’

밀색 머리카락이 산발로 치솟은 여자가 어린 헤일린의 덜미를 잡아 올렸다.

‘평범한 짐승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은은하게 흘린 마력이 또다시 헤일린에게 불에 덴 듯한 통증을 선사했다.

‘……너 그거구나?’

괴로워하는 새끼 사자를 살핀 여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성체가 될 수 없는 이스단 가문의 사자.’

#<117 화>

성체가 되지 못하는 새끼 사자.

어린 나이지만, 그게 제 결점이란 사실만은 알고 있는 헤일린이 크르릉, 날을 세웠다.

‘어쩐지. 밀림에서 처리한 육식 수인 놈들이 이상할 정도로 짐승을 싸고돈다 싶더니…… 납치당하는
중이었구나? 너.’

이스단의 핏줄이 납치나 당하는 거 보면 아직 어린놈인가 보네.

요놈, 요놈. 여자가 장난치듯 콧잔등을 톡톡 건드렸다.

캬옹, 덜미를 잡힌 헤일린이 앞발을 파바박 휘저었다. 짧은 팔다리는 애꿎은 허공만 강타할 뿐이었다.

‘벤디야, 얘 어때? 돈 많고 집 좋은 녀석이야. 아기라서 약하지만 나중에는 힘도 세질걸?’

‘엄마, 난 이미 혼인했다고 몇 번을 말해.’

‘고구마랑 한 혼인은 무효라고 몇 번을 말하니.’

‘엄마 미워.’

다다다, 뛰어간 어린아이가 고구마 상자를 안고 서럽게 흐느꼈다.

배고프다고 남편을 구워 먹는 아내가 세상에 어디 있니, 무성의하게 외친 여자가 헤일린을 돌아봤다.

‘안 되겠다, 너 차였어. 우리 벤디가 자기 임자는 고구마라네.’

그녀의 입매가 시원스레 올라갔다.

‘뭐, 평생의 운을 다 쓴다면 나중에라도 우리 딸을 만날 수 있을지도. 그때는 성체로…….’

가물가물한 기억이 거기서 끊어졌다. 워낙 오래된 과거인 데다, 납치범들이 먹인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

헤일린은 허공을 바라보며 기억을 곱씹었다.

그 여자, 그러니까 사슴의 어머니는 이스단 가문도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스단 가문에 미래 제 딸의 안위를 위한 혼담을 요구한 것이었다.

성체로 변할 수 있는 단서, 벤디라는 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랑아?”

벤디는 갑자기 얌전해진 노란 짐승을 걱정스레 살폈다.


헤일린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사슴을 올려 봤다.

접촉했을 때 통증이 이는 건 벤디만이 아니었다.

벤디의 어머니 또한 그의 몸에 마력을 흘렸을 때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지.

‘너 그거구나? 성체가 될 수 없는 이스단 가문의 사자.’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단번에 제 정체를 유추해 냈다.

‘혹시…….’

성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벤디의 어머니 쪽 혈통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최근 희미해졌던 성장에 대한 열망에 다시금 불이 지펴졌다.

이걸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슴이 제 정체를 알아야만 가능했다. 무작정 붙어 있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이대로 붙어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헤일린은 조심스럽게 벤디를 올려 봤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 여기서, 헤일린 이스단으로 변하면 사슴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만했다며 화를 낼까, 실망하여 싸늘한 눈길을 보낼까. 아니면 놀라서 기절할까.

이게 뭐라고 덜컥 겁이 났다.

노란 돌로 변한 헤일린을 살핀 벤디가 물었다.

“노랑아, 목욕하는 거 싫어?”

새끼 사자가 엄숙해 보인다고까지 생각한 벤디는 슬그머니 앞발을 잡았다.

“그만 씻을까?”

어르고 달래는 벤디를 올려 보던 헤일린이 허한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를 본 사슴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해 봤자 시간 소모.

노랑이로서도 납작 엎드리고 살았는데, 헤일린으로서도 못 할 건 없었다.

그는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력을 운용했다.

반려동물로서 사슴의 옆에 있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언젠가는 알게 될 일. 그게 지금일 뿐이었다.

몸에서 빛이 이는 순간 벌컥, 벤디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원과 레넌이 들이닥쳤다.


씨름하느라 상처가 터진 레넌을 뒤따라온 의관이 이를 악물었다.

“레넌 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푹, 대형 마물용 마취 침이 레넌의 팔에 꽂혔다.

“너……!”

물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됐다.

이내 축 늘어지는 레넌을 뒤로한 원이 곧바로 욕실에 들어갔다.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마탑 마법사


또한 함께 질질 끌려갔다.

“원 님?”

깜짝 놀란 벤디가 원을 올려 봤다.

‘아직 제대로 씻기기 전인가.’

뺨에 거품을 묻힌 벤디와 여전히 더러운 새끼 사자. 둘을 살핀 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하죠.”

“네? 왜요?”

“예? 원 님께서요?”

벤디와 원의 다리에 붙은 마탑 마법사가 되물었다.

“…….”

의문 어린 눈빛을 마주한 원은 얼굴을 붉히며 나오는 대로 뇌까렸다.

“저 원래 남 씻기는 거 좋아합니다.”

“……!”

벤디와 마탑 마법사가 입을 텁 틀어막았다. 단아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취향이었다.

후다닥, 달아나는 노란 짐승을 발로 제압한 원이 셔츠 소매를 걷었다. 건장한 전완근을 마주한 헤일린의
낯빛이 하얘졌다.

‘놔, 이 똥개 새끼!’

누가 너 좋으라고 안 씻고 기다린 줄 아냐고. 캬옹, 노란 짐승의 절망 어린 비명이 욕실에 울려 퍼졌다.

* * *

갑작스레 날아온 전서를 쥔 웬스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한 시간을 주었음에도 상대자가 나타나지 않은 관계로, 혼담을 파기하겠다는 내용의 전서였다.
덧붙여 선금으로 내민 15 억 실링을 청구하는 청구서까지.

심지어 이전에 주고받던 전서와 달리 내용에 미묘한 강압과 협박이 묻어났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는 그런 사소한 게 아니었다.

‘이스단…… 가문……?’

웬스턴은 전서에 커다랗게 찍힌 인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초식 수인을 원하는 특이 취향을 숨기고자 익명으로 혼담을 제안한 거라 여겼는데. 그 귀족가가 이스단
가문인 건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어째서…….’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대귀족이 왜 변두리에 있는 레피 가문에 혼서를 보냈단 말인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지금의 상황을 되짚던 웬스턴이 이를 빠득 씹었다.

‘……벤디 레피의 어미.’

아리엘 레피.

예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이상한 일의 중심에는 그 정신 나간 여자가 있었다.

“죽어서까지……!”

쨍그랑, 화분을 던지고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한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상대가 이스단 가문이면 15 억 실링을 갚지 않고 내뺄 수도 없는 노릇. 추격대에 잡혀 비명횡사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섣불리 말을 얹지 못한 측근이 입을 여닫았다.

“가주님…….”

“단기간에 15 억 실링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

“한시라도 빨리 벤디 레피를 찾아서 이스단 가문에 넘기는 수밖에. 벤디 레피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어디였지?”

“기린 영역입니다.”

기린 영역은 육식 수인 영역과 가장 가까운 곳이자, 벤디가 수인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른 장소였다.

아직까지 그 사실은 모르는 웬스턴이 나직이 말했다.

“육식 영역을 무분별하게 뒤졌다간 끝이 없다. 거기서부터 다시 차차 짚어 가야지.”

차분하게 말했으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잡기만 하면 된다, 다시 탈출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가지지 않았으니.”

잡기만 하면 돼. 스스로에게 새기듯 말한 웬스턴이 눈을 빛냈다.

“혹시 모르지 않나, 늦게라도 넘기면 이스단 가문에서 자비를 베풀지.”

오랜 숨바꼭질을 끝낼 때였다.

* * *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카데미도 개학을 맞았다.

학기 초답게 나른하면서 약간은 들뜬 분위기의 교정에,

“교복 똑바로 입어!”

야닉이 기강을 잡기 위해 나섰다.

“너, 모자 안 써?”

긴 손가락이 척, 모자 안 쓴 학생,

“야! 타이 어디 갔어, 교복 타이!”

척, 타이 없는 학생을 가리켰다.

학장실 창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밀란느 학장이 중얼거렸다.

“하이에나가 미쳐 날뛰는구먼.”

“이번 학기부터 학생회가 되었거든요.”

나란히 선 벤디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직함이 뭔데 저러는 게냐.”

“학생 지도 대표요…….”

정작 단정해야 할 야닉은 교복 셔츠를 반쯤 풀어 헤치고,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대충 묶은 꼴이었다.

“거기, 왜 교복이 아니라 사복이냐!”

“난 교수다, 이 녀석아!”

본인을 뺀 모두에게 공평한 야닉을 내려 보던 밀란느 학장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무사히 귀환해서 다행이군, 그러나.”

“…….”

“내가 보낸 곳은 레넌의 사유 저택이지, 에던트 가문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간 건 아주 무모한


짓이었어.”
벤디는 엄하게 꾸짖는 밀란느 학장을 곁눈질로 살폈다.

헤벌쭉 올라가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금방 씰룩씰룩 올라갔다.

‘하긴.’

죽을 거라 여긴 레넌이 살아남은 데다 가주까지 되었으니까. 날아갈 듯한 기분을 숨길 순 없는 모양이었다.

“큼.”

헛기침한 밀란느 학장은 이내 뒷짐 진 손을 슬쩍 펼쳤다.

교복 주머니를 뒤적인 벤디는 은밀히 작은 손지갑을 건넸다.

“아주 혼쭐이 나야겠구나.”

“죄송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워진 지갑이 돌아왔다. 지갑을 넣은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빵빵했다.

그러고도 한참의 꾸지람 후, 조금 망설인 벤디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밀란느 학장님,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어요.”

“뭔데 긴장을 하고 그러느냐.”

“제가 사슴 수인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누, 누구?”

밀란느 학장이 홱 소리 나게 벤디를 돌아봤다.

움찔한 벤디는 혹시 도로 빼앗길까, 손지갑을 뒤로 숨기며 실토했다.

“원이랑 레넌이랑, 헤일린이요.”

“아…… 그 녀석들? 뭐, 괜찮다.”

난 또 뭐라고. 심드렁하게 답한 밀란느 학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발 닦개들이 어디 보통 학생들이랑 같나. 나중에 벤디를 따라 사슴 영역에 가겠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조금 머뭇거린 벤디가 슬그머니 말했다.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사슴인 걸 들키면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겠죠?”

잠깐 멈칫한 밀란느 학장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너는 네가 사슴인 걸 아는 육식 수인들 사이에서 지낼 수 있겠느냐?”

“버텨야죠.”

대찬 대답과 다르게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입학 때 말했다시피 학생들도 받아들이지 못할게다. 본능의 문제도 있고, 일부 육식 수인은 초식
수인들이 자신들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니까.”

“…….”

“쉬이 받아들인다면 애초에 육식 수인 영역과 초식 수인 영역이 분리되진 않았겠지.”

벤디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밀란느 학장은 분위기를 환기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자네 기숙사로 편지가 하나 왔더군.”

“편지요?”

“자리를 비운 동안 내가 맡고 있었지.”

편지를 챙긴 벤디는 대화를 마무리 지은 후 학장실을 나섰다.

‘편지?’

탁, 문을 닫고 기대어 선 벤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게는 편지가 올 만한 곳이 딱히 없었다. 페트리온을 떠날 때 모니에게조차 목적지를 알리지 않았으니까.

의문을 삼킨 벤디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어 읽었다.

‘나는 네가 여우 수인이 아닌 사실을…….’

……알고 있다.

#<118 화>

하계 방학이 끝나고, 의문의 편지를 받은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이스단 가문, 그리고 백호 영역에서의 사건도 조금은 과거처럼 느껴질 즈음.

“올해도 개최되는 마물 토벌은…….”

강의실에 리리 교수님의 의욕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좀처럼 강의에 집중하지 못한 내가 턱을 괴었다. 틈만 나면 편지 내용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으니까.

‘네가 여우 수인이 아닌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길로 학장실에 되돌아간 나는 편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고했다.

한참 생각한 밀란느 학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편지 한 장으로 무언가를 추리하기엔 무리가 있는


듯했다.

‘벤디 학도, 일단은 가만히 있거라. 굳이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낸 건 자네가 동요하기를 원하는 걸 수도
있으니.’

정확히 사슴이라고 집은 것도 아닌 이상, 상대가 다시 접촉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게 학장님의


정론이었다.

‘나도 편지의 출처에 대해 알아볼 테니, 경거망동 말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도록.’

그러나 그게 어디 쉬워야지. 애써 태연을 가장했으나, 겁쟁이의 심장을 가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쿵, 굵은 대나무가 내 책상을 내리찍었다.

“학생회장아.”

“예, 리리 교수님.”

“또 대답만 근엄하게 하네, 하나도 안 듣고 있었으면서.”

“…….”

“방금 리리 교수님이 뭐라고 했게.”

구원의 눈길로 옆자리를 곁눈질하자, 눈이 마주친 신시아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뭐.’

정말 아름다운 동료애였다.

“아야.”

내 코를 살짝 꼬집은 리리 교수님은 뒤이어 대나무로 라일라의 의자를 톡톡 쳤다.

“뒤에서 수석인 너도 턱에 침 닦고. 자, 위험이 동반되는 일정인 만큼 다시 설명할 테니 잘 들어. 마물


토벌은-”
개체 수가 쉽게 늘어나는 마물은 주기적인 토벌에 나서지 않으면 도시나 민가를 덮치기 일쑤.

그렇기에 학생들의 실전 연습 겸, 아카데미에서 이 년에 한 번씩 거행하는 일정이 마물 토벌이었다.

“마물 토벌은 레펠튼 때와 동일하게 동물을 동반하는 게 원칙이지. 이동에 유용한 말을 데려와도 좋고,
전투에 필요한 강한 동물을 데려와도 무방하다.”

‘왜 또 동물이야.’

나한테 출전 가능한 동물이라곤 여전히 그 폭군 같은 사슴밖에 없는데. 심지어 해피는 마구간에서


군림하며 몇 달 전보다 한층 괴수에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절망 어린 표정을 지은 나와 시선이 마주친 리리 교수님이 덧붙였다.

“잘 훈련된 육식 동물은 전투에서 병사 몇 사람 몫을 하니까. 다시 말하지만 마물 토벌은 실전이야.”

즉 부상자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일정이었다.

“또한 마물 토벌은 마력 측정 때와 같이 클래스별로 성과를 매기는데…….”

각 클래스 성과표를 뒤적거리던 리리 교수님이 인중을 길게 늘였다.

“X 클래스는 재작년에도 꼴등. 어우 야, 이것도 점수라고…… 엥? 얘들이 왜 의욕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어.”

너희가 언제부터 이렇게 열정적이었다고, 리리 교수님이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마나 이글이글 승부욕을 불태운 X 클래스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야 다른 클래스 녀석들이 좀 순하게 구는데!”

“그러니까, 또 꼴등 할 순 없지.”

“마력 측정 때야 학생회장의 덕을 봤지만, 그 이후로 우리도 계속 연습해 왔잖냐.”

호전적인 기운에 잠이 확 달아난 라일라가 쾅, 책상을 내리쳤다.

“그래, 이번에는 S 클래스도 누르고 단독 일등 한번 해 보자고!”

“얘가 또 책상 부수네. 너네 S 클래스의 괴물 같은 삼 인방을 이길 수 있겠어?”

이어진 리리 교수님의 타박에, 열기로 불타던 학생들의 낯에 꿈도 희망도 사라졌다.

안 봐도 삼 인방의 정체를 유추한 내가 부르르 진저리 쳤다.

괴물 정도로 표현되면 다행.

실제로 레넌은 그렇게 다친 게 언제인 양, 엄청난 회복력을 보이며 나다니고 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온 게 꽤나 즐거운지, 노랑이의 앞발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물리지를 않나, 원에게
자신도 씻겨 달라며 놀리다가 결국 머리채를 잡혔다.

“…….”

잠시간 말을 잃었던 클래스메이트들은,


“좋아, 목표는 이등이다!”

이내 물 흐르듯 계획을 수정했다. 현실 순응이 무척 빠른 편이었다.

질린 얼굴을 한 리리 교수님이 슬금슬금 구석으로 물러났다.

“일등 같은 이등이 돼 보자고!”

“오늘부터 특훈이다!”

결의를 다잡던 그들은 돌연 나를 돌아봤다.

갑작스레 시선의 중심에 선 나는 빠른 속도로 벽에 찰싹 붙었다.

‘왜 이래.’

그런 의미로 눈썹을 움찔거리자, 클래스메이트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S 클래스는 초소형 통신 마도구를 사용하면서 합동 공격한다던데…….”

“그 정도로 많은 개수를…… 갑자기 구하기는 힘들겠지…….”

“마탑이나 마개동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우리가 무슨 주제로 그들에게 부탁하겠어…….”

마개동 부실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게 가능하며, 마탑의 패자인 원 리오나드와 친분이 있는 자.

“…….”

무언의 압박을 마주한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도 걔네가 무섭단 말이야.

‘리리 교수님.’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판다주의자는 창밖을 내다보며 딴청을 피우는 판국.

그사이 좀비 무리는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학생회장…….”

“너도 좋아하잖아…… 일등…….”

오지 마, 이 육식 수인들아. 하얗게 질린 내가 더더욱 벽에 찰싹 붙었다.

“한번!”

“…….”

“물어보기는 할게.”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아카데미 내부, 집무실에 자리한 원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결국 웬스턴 레피에 대한 발 닦개 삼 인방의 의견은 맞춰지지 않았다.

멱을 따 버릴 계획을 짜다가도, 벤디가 원하는 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레넌의 말이 충동을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헤일린의 주장대로 반만 죽이자니, 그러다 아예 골로 보낼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사슴에게 대놓고 물어볼까, 웬스턴 레피를 죽여 주겠다고.

그러나 그게 벤디의 역린임을 아는 이상 함부로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후.”

의자에 목을 기댄 원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운 미간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한편, 유독 예민한 주인을 피해 숨죽이던 마탑 수행인은 문을 돌아봤다.

똑…… 똑……. 망설임이 동반된 음산한 울림이 일었다.

달칵. 수행인이 문을 여는 동시에 확인도 안 한 원이 쏘아붙였다.

“꺼지라고 해.”

감히 말도 못 꺼낼 수준의 저조한 목소리. 기에 눌린 수행인이 문 너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답니다.”

문전 박대를 당한 방문객이 그대로 물러났다.

탁, 문을 닫은 수행인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한참 후에 약간 이성을 찾은 원이 물었다.

“누구였지?”

“학생회장이요.”

일순 원의 황금색 눈동자가 지진이 일듯 흔들렸다.

“뭐?”

“학생회,”

“누구더러 꺼지라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요.

울먹이는 수행인을 빠르게 지나친 원이 벌컥, 문을 열었다.

이미 문 앞은 텅 빈 상태.

문고리를 쥔 채 굳어 있던 원이 멍한 얼굴로 수행인을 돌아봤다.


벤디의 반응이 어땠냐는, 저 멍청한 표정의 의미를 해석한 수행인이 입을 뗐다.

“조금 시무룩해진 게 다입니다.”

“…….”

“손에는 고구마를 들고 있었고요.”

“…….”

“가벼운 방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그거 뇌물이야.”

“예?”

“청탁하러 온 거라고.”

“그게요?”

무너지듯 수그려 앉은 원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사슴이 먼저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잘 없는 일인데


내쫓다니.

“아…….”

뭐든 들어줄 수 있는데. 혼잣말을 들어 버린 수행인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저번에는 차기 마탑주가 똥개로 보여서 안경을 맞췄는데, 이제는 환청이 들리고. 구황작물을 청탁 뇌물로
받아들이는 제 주인의 사고도 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퇴사할까.

* * *

원의 집무실에서 쫓겨난 후, 다음으로 찾아온 마개동 부실에는 신입 부원밖에 없었다.

“요즘 선배님들이 강의에 성실하게 참석하셔서요. 전부 회장의 뜻이라고 들었어요.”

검은 로브를 두른 신입 부원이 숙여 앉아 상자를 뒤적거렸다.

“말씀하신 초소형 통신 마도구는 제작 기간도 길고 구하기도 까다로워서…… 아마 마탑이나 마도구


장인에게 문의하셔야 될 거예요.”

“그런가요.”

신입 부원 옆에 쪼그려 앉은 내가 고구마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늑대에게 가야 하나.

조금 전에 꺼지라는 축객령을 마주한 터라, 다시 찾아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신입 부원은 성심껏 마도구를 찾아보며 종알종알 말했다.


“아무튼 회장과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다니, 영광이에요. 가상 공간에서 그리핀을 홀로
격파하셨다고 부장께 들었는데!”

아무래도 메이지가 나에 대해 여기저기 부풀리고 다니는 모양.

“혼자는 아니고 야닉과,”

새끼 사자와 함께 무찔렀다고 정정하려던 내가 멈칫했다.

머리가 산만 한 수사자가 함께였지. 그분은 절대 새끼 사자라고 칭할 수 없었다.

“동물 한 마리요.”

“동물이요?”

신입 부원이 아리송하게 아래턱을 긁적였다.

“……동물은 들어갈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노랑이는 들어갔는데. 덩달아 아리송하게 눈을 깜박인 내가 부언했다.

“아마 영물이라서 그럴 거예요.”

“영물도 결국은 동물이잖아요.”

“……하지만 분명히 같이 들어갔는데요?”

“……?”

서로 주고받는 시선이 아스라이 떨렸다.

“잠깐만요, 제가 잘못 알고 있나?”

누가 마개동 부원 아니랄까 봐, 마법 얘기가 나오자마자 순한 눈망울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일어서서 책장에 손을 뻗은 신입 부원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완전한 동물이 들어가려면 마법 수식을 추가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빠르게 서류뭉치를 뒤적이던 손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미간을 모은 채 읽어 내린 신입 부원은 곧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들어간 동물이 수인이거나, 수인이 들어가서 동물로 모습을 변형한 이외에,”

“…….”

“동물은 가상 공간에 들어갈 수 없어요.”


#<119 화>

탁, 마개동 부실을 나선 나는 얼빠진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기까지도 넋을 놓은 상태였다.

의자에 멀뚱히 앉은 내가 책상에 올려 둔 갈색 배낭을 바라봤다.

‘수인이 아니고서야 가상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날 텐데, 혹시 뭔가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착각.

신입 부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동물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면…….

‘노랑이는 뭔데.’

유독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배낭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무수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불가합니다, 그거야 당연히 이분은!’

노란 짐승의 레펠튼 참가를 경악하며 거부하던 교직원.

‘이거 요즘 이상하네. 징그럽게 가방 속엔 자꾸 왜 들어, 으아악!’

초반에 배낭 속 노란 짐승을 보고 치를 떨던 야닉.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늘 맥락 없게 느껴지던 헤일린 이스단의 말.

‘내가 언제 만졌다고 저러는 거야?’

‘회장.’

‘네?’

‘만졌어요.’

원과 레넌에게처럼 노란 짐승에게도 유독 깍듯하게 굴던 괴력 곰돌이.

‘정도가 있어야지.’

혼숙 금지란 조항을 걸며 노란 짐승을 빼돌리던 원과 레넌.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귀찮음을 판다화 한 리리 교수님의 빠릿빠릿한 태도까지.

곰곰이 돌이키면 그 외에도 단서는 많았다.

영물이 마차 멀미에 시달리지를 않나, 펜으로 엉덩이를 찔렀을 땐 희롱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지를 않나.

“…….”

그리고 설산에 리울 약초를 채약하러 간 당시. 정신을 잃기 직전, 아른거리는 시야로 보인 건 아마도…….

‘노랑이가 아니라…….’

금발.

배낭에 닿은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노란 짐승 위로 헤일린 이스단의 모습이 겹쳐졌다.

두 존재는 함께 지내 온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설마.’

묻어 둔 기억의 파편을 하나하나 되짚을수록 드는 생각.

‘노랑이와 헤일린 이스단은…….’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혼자서 뭐 하는데요.”

깜짝.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원이 학생회실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까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제가요?”

“꺼졌잖아요.”

아.

뒤늦게 원을 찾아간 사실을 떠올린 내가 끄덕였다.

“초소형 통신 마도구를 구할 수 있나 싶어서…….”

머릿속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건 갑자기 왜, 아, 마물 토벌.”

곧바로 정답을 도출한 그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몇 개가 됐든 구하기야 쉽죠, 다만.”

내 앞에 멈춰 선 그가 톡톡, 책상 위에 올려 둔 지도를 가리켰다.

“전부 마탑에 있는데.”

결국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입을 뻐끔거리는 찰나, 학생회실 문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구더러 명령이야, 네가 직접 열어.”

레넌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크르릉, 분에 찬 노란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문이 노란색이 아니라서 못 여나?”

으르릉.

“아니다, 손이 뭉텅이라 못 여나 보네.”

챙, 챙챙. 레넌의 아무 말 대 잔치와 함께 검과 발톱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이 된 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생각도 정리하지 못한 채 바로 노란 짐승을 마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나를 무표정하게 보던 원은 대뜸 손을 펼쳐 내밀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도망갈까요.”

그가 답할 새도 없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

별안간 오래전 밤, 손을 맞잡고 달린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손. 커다란 손에 내 손이 완전히 감추어졌다.

어느새 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낸 원이 허공에 이공간을 만들어 냈다.

“너 때문에 힘만 다 뺐잖…… 회장?”

문을 열고 들어오던 레넌과 노란 짐승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우당탕, 뒤이어 둘이 달려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뒤흔들렸다.

* * *

늑대 영역, 마탑.

회의장에 모인 마탑 장로들이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원 님의 마탑주 즉위를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너무 오래 공석으로 비워 두었으니까요.”

자연스레 장로들의 시선이 원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스카론 장로에게 모였다.

“흠…….”

스카론 장로는 난감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원이 지금까지 정식 즉위를 미룬 건 행동에 제약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벤디를 찾아내고, 초식 영역을 뒤질 이유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미룰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허공에 이공간이 열렸다.

탁, 그곳을 통해 나타난 원을 본 장로들이 차분하게 허리를 굽혔다. 마탑 어디에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다.

“차기 마탑주를 뵙습니다.”

고개만 끄덕인 원이 벤디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이공간을 지나온 탓에, 어질어질한 정신을 다잡은 벤디가 모자를 눌러쓰며 꾸벅 인사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장로들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레넌이나 헤일린 같은 거물만 보아오다가 마주한
학생다운 학생이 제법 신선했다.

“저리 바른 학생은 오랜만입니다.”

“허허, 그러게요. 기특하기도 하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로들은 뒤늦게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누굽니까? 어째서 원 님이랑…….”

“같은 아카데미 학생 같은데…….”

“스카론 장로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소?”

그들의 손끝은 벤디를 향하고 있었다. 딱히 고민도 거치지 않은 스카론은 태연스레 답했다.

“원 님께서 마탑주 즉위를 미룬 이유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리고 마탑의 차기 안주인이 될 분이시죠.”

“오오.”

“그렇군요.”

덩달아 자연스레 수긍하던 장로들은 이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예에에에에?!”

한 박자 늦게 쩌렁쩌렁한 비명이 마탑 회의장을 물들였다.

* * *

“이 정도면 괜찮으신지요.”

마도구 관리인이 벤디에게 네모난 상자를 안겨 줬다. X 클래스 학생 전원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초소형
통신 마도구였다.

쪼그려 앉아 개수를 헤아리던 벤디는 돌연 엄중한 얼굴로 원을 올려 봤다.

“원 님.”
“왜요.”

……이거 비싸겠지. 상자를 꽉 끌어안은 벤디가 또박또박 주장했다.

“저는 더 이상 빚쟁이가 될 순 없어요.”

눈높이에 맞추어 수그려 앉은 원이 되물었다.

“그냥 달라?”

끄덕.

“갈수록 뻔뻔해지네.”

“마탑에는 차고 넘친다면서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원이 턱을 괬다.

“그러시든지.”

“정말요?”

반색하던 벤디는 몰래 원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응시했다. 밉살맞은 말투는 여전하지만, 평소에 비해 유독


순순했다.

의심으로 쪽 째진 눈매도 그저 좋은 원이 금안을 휘었다.

벤디가 제 공간에 와 있다는 사실이 없는 온정도 생기게 만들었다. 상자를 안고 슬금슬금 경계하는 모습이
다시 뺏고 싶게끔 만들기는 하지만.

일편, 멀찍이 선 마도구 관리인은 둥근 안경을 추켜세우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분위기가 너무 묘한 거 아닌가.’

제가 아는 차기 마탑주는 언제나 날이 선 모습이었는데. 풀어져서 비식비식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어째 장로들이 혼사를 노래하며 나팔을 뿌뿌 불 미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만 돌아가죠.”

탁, 시간을 확인한 원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야 아카데미에서 마탑을 드나드는 걸 허가받았지만, 벤디는 몰래 외출한 실정이었다.

“일어나세요.”

제게 뻗어진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벤디가 입술을 뗐다.

“페트리온에는…….”

망설임도 잠시, 내내 궁금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쩌다 그런 모습으로 오게 된 거예요?”


다친 늑대 모습으로 감옥에 갇힌 이유.

“말했지 않나, 배신이 일상이라고.”

원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날도 그랬을 뿐입니다.”

몸을 일으킨 벤디는 품에 안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원이 흘리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배신을 많이 당하는 편이라.’

어떤 삶을 살아오면 그게 일상이 되는 걸까. 상상도 어렵다고 생각한 벤디는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그러지 않을게요.”

원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배신하지 않겠다는 입에 발린 말이야 수없이 들어왔지만, 가슴 언저리가 먹먹해진 건 처음이었다.

한 사람에게 구속되는 늑대 일족의 특성, 각인.

각인을 감정적 노예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제가 이토록 얽매이는 꼴이라니. 맥 빠진 웃음을 흘린 원이


마법 스크롤을 소환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이공간 앞에 선 그가 벤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배신해도 됩니다.”

자신은 벤디가 몇 번이나 배신해도 몇 번이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입장. 입매를 끌어 올린 원이 순순히
말했다.

“이미 그쪽한테.”

“…….”

“각인했으니까.”

* * *

다음 날, 원과 헤일린이 도착하지 않은 학생회실.

레넌은 가십지 너머, 구석에 웅크려 앉아 수군거리는 벤디와 야닉을 바라봤다.

“야닉, 각인이 뭔지 알아?”

야닉은 제 이름이 각인된 학생회 명패를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이름표 아니냐? 명패.”

무릎에 손을 얹은 벤디가 아리송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이름을 새긴다는 뜻인가?”

“그렇지, 이 야닉 펠은 이름을 심장만큼 중요시하니까.”

“……심장에 이름을 새긴다?”

“회장, 넌 어떻게 말 한마디를 해도 멋지게 하냐……?”

대화가 완벽하게 어긋나는 와중, 각인의 의미는 또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게 기가 찰 노릇.

레넌의 물색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 늑대…….’

설마설마했는데, 이로써 원의 각인 대상이 벤디인 게 확실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식 수인인 벤디가 갑자기 각인이란 단어를 들먹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사이 휙, 뛰어오른 노란 짐승이 창문을 넘어 학생회실로 들어섰다.

평소처럼 갈색 배낭에 들어가려던 노란 짐승은 목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솜뭉치 같은 앞발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

족히 서른 개는 되어 보이는 집게 핀이 가방 뚜껑을 가로막고 있었다.

#<120 화>

동그란 동공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서른 개에 가까운 추악한 집게 핀을 맞닥뜨린 노란 짐승은 눈앞이 노래졌다.

틱, 틱.
집게 핀을 채 잡기도 전에 앞발 사이로 미끄러졌다. 뭉뚝한 앞발로 세밀한 작업이 가능할 리 없었다.

틱, 틱.

틱.

또다시 지독한 패배감을 맛본 헤일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집게 핀만큼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존재가
없었다.

이 정도 개수면 가방 주인조차 뚜껑을 못 여는 수준인데.

마음 같아선 이빨로 다 뜯고 싶으나, 그랬다가는 가방이 상하고도 남았다.

난데없이 배낭 입장 금지령을 받은 헤일린이 머리를 싸맸다.

‘내가…….’

배낭에 들어갈 때 뭔가 잘못을 했던가.

늘 가방에 함께 들어가는 군고구마가 뭉개지지 않도록 보호했고.

다른 룸메이트인 막대 과자 또한 부러지지 않도록 사이좋게 지냈다.

‘딱히 없는데.’

신중하게 기억을 되짚었지만 근래에 잘못한 건 없었다.

일단 배낭을 물어 든 노란 짐승이 쪼그려 앉은 벤디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까지 야닉과 각인의 정의에 대해 숙덕거리던 벤디는 제 발치에 다가온 노란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곧 벤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홱 틀어 버렸다.

도도도, 조금 당황한 노란 짐승은 고개가 돌아간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그러기 무섭게 휙, 벤디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벤디의 노랑이 홀대를 지켜보던 야닉은 헤일린을 향해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너…… 고구마 훔쳐 먹었냐?”

먹었겠냐고.

치미는 성질을 겨우 죽인 헤일린은 입에 문 배낭을 내려놓았다.

‘빼 줘, 이거.’

앞발로 슬그머니 배낭을 내밀자, 벤디가 배낭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뒤이어 집게 핀을 빼 주긴커녕 제
등에 둘러메는 게 아닌가.

배낭박대를 당한 노란 짐승은 충격받은 얼굴로 벤디를 올려 봤다.


‘왜…….’

앞발로 신발 코를 짚자, 발을 흔들어 떨쳐 내기까지 했다.

소파에 누워 그 모든 광경을 목도한 레넌은 풉, 웃음이 터질 뻔한 입을 가로막았다. 신나게 웃기에는


벤디와 노란 짐승의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다.

벌떡 일어난 벤디는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강의가 늦게 끝나서.”

달칵. 마침 안나가 학생회실에 들어오며, 얼빠져 있던 헤일린을 문으로 쳤다. 튕겨 나가는 노란 짐승을
발견한 벤디의 눈이 커다래졌다.

“노랑…….”

반사적으로 부를 뻔한 벤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내 서류를 한 아름 품에 안고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상황을 모르는 안나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회장, 어디 가요?”

“오늘은 기숙사에서 일하려고요.”

서둘러 일어난 노란 짐승이 뒤로 따라붙자, 벤디는 한쪽 발을 쾅 굴렀다.

“따라오면 다시는 얼굴 안 봐.”

끔찍한 협박을 마주한 헤일린이 제자리에 굳었다.

“…….”

싸늘한 눈길이 노란 짐승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쿵, 안나는 문을 세게 닫고 나서는 벤디를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저토록 불같이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판단 끝에, 안경을 추켜올린 그녀가 헤일린을 책망했다.

“고구마를 훔쳐 먹으면 안 되죠.”

아니라니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노란 짐승이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지금껏 제가 벤디를 밀어내면 밀어냈지, 이런 냉대는 처음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까르르, 조용한 학생회실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 레넌이 소파에서 뒹굴었다. 연적의 불행은 행복이요, 삶의 낙이었다.

‘그냥 백호 영역에 평생 처박아 뒀어야 하는데.’


하얀 고양이를 죽일 듯이 노려본 헤일린이 다시금 닫힌 문을 돌아봤다.

‘따라오면 다시는 얼굴 안 봐.’

‘따라오면 다시는…….’

‘따라오면…….’

‘대체 왜…….’

주르륵, 헤일린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그 후로도 노란 짐승의 수난 시대는 계속됐다.

집게 핀이 점점 늘어나며 배낭 진입 장벽이 높아졌고, 학생회실 문에는 동물 출입 금지 벽보가 붙었다.

또한 학생회실 게시판에 기념으로 남아 있던 노랑이 수배 벽보도 자취를 감췄다.

수척해진 노란 짐승이 벤디가 분노한 원인을 찾아다니는 와중…….

“오셨습니까, 부장.”

“좋은 아침이에요.”

마개동 부실로 들어선 메이지는 흠, 짧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부원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부장, 안색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 있으셔요?”

으음. 미간을 모은 메이지가 팔짱 꼈다.

“요즘 학생회실 분위기가 아주 삭막해요. 회장과 노랑이 이스단이 냉전 상태라…….”

곰곰이 생각하던 부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회장이 노랑이 이스단의 정체를 알아챈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메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서서 헤일린의 정체를 벤디에게 알릴 용자는 수인 아카데미에 없었다.


그게 가능한 원이나 레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을 딱 다물고 있고.

그렇다고 헤일린이 직접 말했나 추측하자니, 그건 또 아니었다.

헤일린 또한 영문을 모른 채 벤디를 졸졸 쫓아다니며 소박맞는 중이니까.

안절부절못하던 노란 짐승을 상기한 메이지는 근심 어린 얼굴로 뺨을 짚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마개동 부실에 다녀간 이후부터 관계가 망가진 거라…… 혹 연관이 있을까 걱정이네요.”

영 표정을 풀지 못한 메이지가 덧붙였다.

“알다시피 우리는 원 님께 미운털이 박혔는데, 헤일린 님의 눈 밖에까지 나면 곤란하니까요.”

그때는 동아리 해체가 아니라 줄 서서 지옥행 열차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는 부원들 사이, 누군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손을 들었다. 신입 부원이었다.

“그날…… 제가 회장을 만났는데…….”

“뭐라고요?”

메이지가 얼른 신입 부원에게 다가갔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요?”

“벼, 별말은 안 했고…….”

불길한 마음을 삼킨 메이지는 신입 부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달랬다.

“괜찮으니 편안하게 말해 봐요.”

“단지 가상 공간에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고만…….”

괜찮지 않았다.

메이지를 비롯한 부원들의 입이 턱이 빠질 만큼 벌어졌다.

노랑이 이스단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찾는 존재. 그건 바로 자신들이었다.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메이지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신입.”

신입 부원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 예!”

폭군 사슴의 일방적인 무시하에, 노란 백성의 수심이 나날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예요.”

“…….”

“그러지 않으면 당장 무덤에 묻힐지도 몰라요.”


이로써 벤디의 분노를 풀 실마리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 * *

마물 토벌을 하루 앞둔 날, 학장실.

레넌은 밀란느 학장이 건넨 편지를 살폈다.

“-나는 네가 여우 수인이 아닌 사실을 알고 있다?”

“익명으로 벤디 학도의 기숙사에 전달된 편지다. 짚이는 곳이 있나 싶어서.”

“짚이는 곳이라.”

다시 밀란느 학장에게 편지를 돌려준 레넌이 턱을 매만졌다.

같잖은 장난질로 넘길 수준이다 싶다가도, 진짜 여우 수인이 아닌 벤디 입장에서는 찝찝한 편지였다.

“그 편지, 방학 중에 왔지.”

“어찌 안 게냐?”

“방학 동안 사슴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다녔으니까.”

이스단 가문 내에서는 간헐적으로 변했고, 백호 영역에서는 아예 사슴 수인 모습. 우연히 그걸 보거나


전해 들은 누군가가 보낸 편지일 확률도 있었다.

“하지만 초식 수인인 것까진 모를걸. 그러니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보냈겠지.”

백호 영역에서는 두건으로 입을 가렸고, 애당초 먼 거리에서 육안만으로 초식 수인인 걸 알 수는 없었다.

편지를 서랍에 넣은 밀란느 학장이 짧게 혀를 찼다.

“여전히 벤디 학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학도의 행동일 수도 있다는 거구먼.”

“나타나면 썰어야지 뭐.”

상의를 탈의한 레넌은 붕대를 고쳐 감기 시작했다.

익숙한 움직임을 지켜보던 밀란느 학장이 구시렁거렸다.

“의무동에서 치료받으면 훨씬 편하거늘.”

“나는 이게 편해.”

더 이상 쓴소리를 덧붙이지 않은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

과거 에던트 가문에 머물 당시, 의관에게 독살당할 뻔한 이후 타인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런 놈이 에던트 가주를 직접 죽이지 않고 사형대에 올린 선택을 한 게 아직까지도 신기했다.


흘끔. 눈치를 살핀 밀란느 학장이 헛기침을 했다.

“큼, 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게냐.”

“살아 돌아온 거?”

“그래.”

“막상 죽으려니 아쉽더라고.”

“그래도 네놈이 가주까지 해 먹을 줄은 몰랐는데.”

“음.”

레넌은 물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댁이 가르쳤잖아.”

“무얼 말이냐.”

그의 무해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권력이 없으면 원하는 걸 놓치는 순간이 올 거라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듯한 밀란느 학장은 어쩐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내 손주라지만…….’

제 몸 하나 감당키 어려워하는 사슴에게 망령이 달라붙은 수준이었다.

그런 밀란느 학장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는 레넌이 흥얼거리며 붕대를 당겼다.

권력은 갖췄다. 이스단 가문, 그리고 마탑주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자리를. 다만…….

“늑대가 각인했어, 사슴한테.”

“뭐, 뭣이?”

“과거에 이미 했을걸.”

“허…….”

“노랑이 이스단은 사슴이 성체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뭣이?”

“자세한 건 모르지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겠지.”

“허어…….”

밀란느 학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화했다.

불쌍하다, 그냥…… 벤디가 너무도 불쌍했다.

거무튀튀해진 학장의 낯에도 아랑곳 않은 레넌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둘의 거지 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 못 하는 게 있어.”

네 성격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

밀란느 학장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자기 객관화가 덜 된 인물의 표본이었다.

“절대 못 하는 게 대체 뭔데 그러,”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똑똑, 누군가 학장실 문을 두드렸다.

“밀란느 학장님, 저예요.”

벤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학장과 레넌의 시선이 마주쳤다.

물색 눈동자를 사르르 휜 레넌은 곧 풀썩, 그대로 소파에 무너졌다.

밀란느 학장은 갑자기 쓰러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소파에 흐트러진 결 좋은 은발과 헐벗은 몸, 붕대를 감아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가련함과 청순한 얼굴까지.

원과 헤일린의 성격상 절대 못 하는 것. 정답을 알아낸 밀란느 학장이 부르르 치를 떨었다.

‘저 영악한 놈이…….’

그건 바로 미인계였다.

#<121 화>

“들어오게.”

방문을 허가한 밀란느 학장은 질색하며 레넌을 봤다.

미인계고 나발이고 혈연 입장에서는 그냥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꼬락서니였다.

‘백날 해 봐라, 그딴 게 벤디 학도에게 잘도 통하겠다.’

찰칵, 문을 열고 들어서던 벤디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헐벗은 채 드러누운 레넌을 발견한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탁, 제 코를 꼬집은 벤디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통하는구먼.’

설마하니 저 거지 같은 미인계가 통할 줄은. 허탈해진 밀란느 학장이 기가 찬 한숨을 흘렸다.

“벤디 학도, 계속 밖에 서 있을 건가?”

끼이익, 소심하게 문이 열리며 여전히 코를 막은 벤디가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여기 앉게.”

빨빨거리며 접객용 소파로 오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시선이 잠든 레넌에게 머물렀다.

“……알다시피 몸 상태가 나쁘지 않으냐.”

몸 상태가 아니라 머릿속이 나쁘다.

“붕대를 고쳐 감다가 잠든 거니 내버려 두거라.”

너를 홀리려고 수작 부리는 게다.

학장이 온 얼굴 근육을 사용하여 진실을 알리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벤디는 신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맞은편에 누운 레넌에게서 눈길이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몽롱한 표정의 벤디를 살핀 밀란느 학장은 이마를 짚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시각적 효과에 약한
모양이었다.

“……벤디 학도.”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든 벤디가 끄덕거렸다.

“말씀하세요.”

“내 자네를 호출한 이유는 당부하기 위해서네. 내일이 마물 토벌인 건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비상시에는 학생회의 통솔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올해 학생회는 다른 해에 비해 취약,”

팔락, 벤디가 가져온 학생회 명단을 펼친 학장이 잠깐 굳었다.

· 학생회장 – 벤디 레피

· 부학생회장 – 안나 스웰든

· 서기 – 신시아 폴릿 (기간 한정)

· 마법부 대표 – 메이지 로튼
· 학생 지도 대표 – 야닉 펠

· 마스코트 – 세미 스웰든 (곰)

※ 입회 보류 – 원 리오나드 (청소 담당)

“……원 학도는 왜 입회 보류인 거지?”

“이번 학기에 입회를 승인할까 싶었는데, 야닉이 강력하게 반대해서요.”

“어째서……?”

“자기 존재감이 흐릿해진대요.”

“허, 맛 간 녀석이 또 있구먼.”

S 클래스만 두 명에, 나머지도 실력만 따지면 각 클래스의 대표격.

심지어 학생회장과 수족들이 모여 학생회를 이룬 과거와 달리,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모인 학생회였다.

과연 이 학생회를 약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겁쟁이를 필두로 한 역대 최강 조합에 가까웠다.

“……이 조합이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입맛을 다신 밀란느 학장이 부언했다.

“마물 토벌은 실전이지. 교수들도 있지만, 유사시에는 학생회의 역할도 크니 위기의식을 갖고 임하게.”

“명심할게요.”

마른침을 삼킨 벤디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나가 보,”

얼른 벤디를 내쫓으려던 밀란느 학장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벤디 모르게 툭, 그녀의 손 위에 붕대가 던져졌기에. 레넌의 짓거리였다.

‘발칙한…….’

밀란느 학장은 치를 떨며 꾸역꾸역 벤디에게 붕대를 건넸다.

“시간이 남으면 레넌의 붕대를 좀 묶어,”

묶어…… 말을 끝맺지 못한 그녀가 멈칫했다.

‘묶어 두기라도 해야지. 백호는 아마 좋아할 게다.’

‘밀란느 학장님도 포함인가요?’


왜 이런 순간에 사슴의 편견 없는 질문이 떠오르는 걸까.

맑은 눈과 마주친 밀란느 학장은 답지 않게 위기감을 느꼈다.

설마 자신을 묶겠나 싶다가도, 저 무구한 얼굴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미친 사슴이었다.

“내가 바쁜지라, 모쪼록 부탁하네.”

도망치듯 허둥지둥 나서는 그녀를 뒤로한 벤디가 붕대를 내려 봤다.

‘붕대를 묶으라고?’

경계하며 레넌에게 다가간 벤디가 엉거주춤하게 소파에 걸터앉았다.

무슨 화폭 속 그림도 아니고. 괜히 제 입으로 예쁨 담당이라 주장하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벗은 상체


때문에 자꾸만 코에 피가 몰렸다.

‘안 되겠어.’

이를 악문 벤디는 착, 붕대를 펼쳐 레넌의 눈을 덮어 가렸다. 그릇된 얼굴만이라도 가리고 보자는


취지에서였는데…….

‘왜 더 위험해진 것 같지?’

헐벗은 아름다운 남자의 눈을 가린 꼴이라니. 뭔가 굉장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아.’

청순한 호랑이의 눈을 가릴 게 아니라 제 눈을 가려야 하는구나.

그제야 깨달은 벤디가 질끈 눈을 감았다.

‘여긴가?’

더듬더듬, 어설프게 움직인 손길이 갈라진 상체를 오갔다.

‘아니, 아닌데…….’

손바닥에 닿은 단단한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여기다.’

상처 흔적을 찾은 벤디가 조심조심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스르륵, 조용한 공간에 붕대를 감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한참 만에 겨우 붕대를 감는 데에 성공한 벤디가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은 안 돼.’

이대로라면 레넌의 몸에 코피를 흩뿌릴지도 몰랐다. 코를 꼬집은 벤디는 달아나듯 문을 향해 달려갔다.

쿠당탕!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학장실 문이 닫혔다.


“…….”

다다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레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가린 붕대를 끌어 내린 그는 제 몸을 내려 봤다.

붕대를 감기는커녕 덕지덕지 갖다 붙인 수준. 그 형편없는 솜씨를 보고도 웃지 못한 레넌이 은발을 쓸어


넘겼다.

벤디가 제 몸을 만져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과신도 그런 과신이 없었다.

‘하마터면…….’

자제력의 한계를 맛본 그가 무너지듯 소파에 늘어졌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 * *

마물 토벌은 수인 아카데미와 가까운 디아트 산맥에서 진행됐다.

실전 중의 실전인 만큼 산맥 입구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각자 동물들을 데리고 도열한 학생들의 시선은,

‘또다.’

‘또 나타났다.’

오늘도 X 클래스 대열, 해피에게 머무른 상태였다.

“어째…….”

꿀꺽. 마른침을 삼킨 학생 한 명이 말문을 뗐다.

“지난번보다 더 커진 것 같지 않냐?”

“저 정도면 곧 승천할 수준인데.”

“마물은 마물로 상대한다 이건가.”

레펠튼 때 타고 나타난 수레 또한 여전했다. 벤디는 막대 과자를 들고 경직된 모습으로 선 상태.

심지어 그 옆의 X 클래스 학생들은,

“이게 초소형 통신 마도구다 이 말이지?”

“오늘 한번 휩쓸어 보자고.”

벤디와 해피는 이제 놀랍지도 않은 양 다른 주제로 떠들기 바빴다.


비현실적인 장면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이내 허한 목소리를 냈다.

“그때 신문기사 속 구원자인지 뭔지도…… 학생회장이겠지……?”

“막대 과자를 들고 다니는 마법사가 세상에 둘이겠냐?”

“이쯤이면 일일이 놀라는 우리가 이상한 것 같은데.”

저런 괴짜 같은 꼴을 하고서도 성과를 가져오니, 딴지를 걸기조차 애매했다.

한편,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마물 토벌에 참가한 헤일린이 X 클래스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지난 며칠, 그는 지옥 속을 오갔다.

부둥부둥 사랑받던 노랑이에서 지나가는 노란 짐승으로 타락하기까지.

심지어 폭군 사슴이 아무 설명도 없이 외면하기만 하니,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누명까지 덧씌워진


실정이었다.

똥개와 흰 고양이는 마주쳤다 하면 도둑고양이라고 키득거리질 않나. 배낭 속 고구마를 지켜 온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헤, 헤일린 이스단.’

‘웬일로 참가를 다 했대?’

‘힉.’

오랜만에 노란 짐승이 아닌 헤일린을 마주한 학생들이 길을 비켰다.

어려움 없이 벤디 앞에 도착한 헤일린이 입술을 열었다.

“얘기 좀 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벤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흠칫.

뒤늦게 헤일린을 발견한 벤디가 쌩하니 해피의 뒤로 돌아갔다.

아랑곳 않은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뒤쫓았다.

“잠깐이면 돼.”

다다다, 저벅저벅.

“얘기 좀 하자고.”

다다다, 저벅저벅.

거대한 해피를 중간에 두고 빙글빙글 돌기를 한참. 짜증이 치민 해피가 푸르릉! 지나가는 벤디에게 거센
콧김을 뿜었다.

“헉!”
깜짝 놀란 동시에 헤일린이 벤디의 앞을 막아섰다.

“…….”

벌어진 상체를 마주하게 된 벤디가 조개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깐이면 된다니까.”

“싫어.”

팡, 헤일린을 밀치던 벤디는 힘에 못 이겨 외려 제가 뒤로 날아갔다.

“……!”

“무슨,”

당황한 그가 팔을 뻗어 등을 받쳤다.

뒤로 반쯤 기운 채 멈춘 벤디가 헤일린의 얼굴을 올려 봤다. 주홍색 동공이 잘게 떨렸다.

‘동물은 가상 공간에 들어갈 수 없어요.’

곧은 이목구비를 지나, 백금발에 눈길이 닿자마자 갑작스레 눈물이 줄줄 흘렀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헤일린이 벤디의 등을 받친 채 얼어붙었다.

그 자세 그대로 눈만 깜박이던 그가 곧바로 말했다.

“잘못했어.”

“…….”

“뭐가 됐든.”

그럼에도 눈물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꾹 다문 벤디의 입술에는 피가 몰렸다.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한 그가 나오는 대로 뱉었다.

“나가 죽을까, 나.”

이번에는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쩍 얼어붙었다.

‘저게 지금…….’

헤일린 이스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귀를 의심하며 후비적거려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한편, S 클래스 진영.

허리춤의 검을 정리하던 레넌은 왠지 시끄러운 X 클래스 방향을 돌아봤다.

“무슨 소란이지?”
“알 거 없잖아.”

원은 흑색 장갑을 손에 끼며 성의 없이 답했다.

마침 그들의 주변을 지나가던 E 클래스 학생들이 숙덕거렸다.

“학생회장이랑 헤일린 이스단이 싸운다는데?”

“뭐? 어디, 어디?”

“학생회장 죽는 거 아니냐?”

대화를 들은 원과 레넌이 무기를 정비하던 자세 그대로 우뚝 굳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한순간에


서늘해졌다.

“도둑고양이 새끼가…….”

“잡아 죽여야겠네.”

그들의 참전을 예감한 안나가 안색을 까맣게 물들였다.

이러다가는 마물 토벌 시작도 전에 학생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꼴.

안나는 발을 떼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꽥 외쳤다.

“야닉 펠, 막아요!”

머리를 묶던 야닉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왜? 재밌을 것 같은데. 어차피 회장이 다 이겨.”

“싸움을 막는 게 학생 지도 대표의 역할이라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야압!”

안타깝게도 야닉은 원과 레넌의 다리를 채 붙잡기도 전에 빗자루처럼 바닥을 쓸며 날아갔다.

단상에 올라선 밀란느 학장은 우당탕탕, 아래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을 내려 봤다.

S 클래스 쪽은 먼지 나게 소동이 일어나는 중이었고, X 클래스 주변은 모두가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아직 마물 토벌이 채 시작하기도 전인데.

혈기왕성한 학생들을 바라보던 밀란느 학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허허…….”

말세로구나.
#<122 화>

“비켜.”

“놔.”

정진하는 원과 레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메이지, 속박용 마법을 준비해 줘요! 야닉 펠, 뭘 끌려가고 있어요!”

“너도 끌려가고 있잖아!”

질질질. 짐짝 끌려가듯 딸려가는 안나와 야닉이 서로를 타박했다.

야닉을 업은 원과 안나가 던진 구속 밧줄에 묶인 레넌이 기어코 X 클래스 대열에 다다랐다.

그들의 시야에 마수 같은 해피와 그 옆에 선 헤일린, 그리고 눈물범벅인 벤디가 들어왔다.

저 미친 노랑이 놈이.

뚝,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가위로 자르듯 싹둑 잘렸다.

“…….”

두 사람의 마력 흐름이 심상찮다고 느낀 안나와 야닉이 사색이 된 채 벤디를 불렀다.

“회장!”

“학생회장!”

애타는 외침에 깜짝 정신을 차린 벤디가 소매로 얼굴을 비볐다.

“자리로 돌아가.”

어쩌면 노랑이일지도 모르는 존재와, 노랑이의 정체를 숨긴 가담자들.

꿈쩍도 안 하는 세 사람을 번갈아본 벤디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 절교할 거야.”

주변 학생들이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그런 협박이 잘도 저 괴물들한테,’

원과 레넌, 헤일린의 몸이 티 나게 움찔했다.

‘……먹히네.’
초식 맹수로 전락한 세 사람을 목도한 학생들이 파르르 턱을 떨었다.

교수들은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눈물을 찔끔 훔쳤다.

“……생텀 교수, 보았습니까?”

“전부 보았습니다…….”

말리고 말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것들이 꼬리 내린 맹수로 변한 꼴이라니.

“내년에도 벤디 학도가 학생회장으로 뽑히면 참 좋을 텐데.”

“그러게요, 교수들도 투표권을 달라고 말이나 해 볼까요?”

벤디가 들으면 기절할 만한 희망이 교수들 사이로 조그맣게 퍼져 나갔다.

* * *

마물 토벌은 클래스별로 구역을 나누어 진행됐다. 추후 그 구역 마물 청정도를 기준으로 결과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S 클래스 토벌 구역.

“키에엑!”

마물들의 괴성이 수풀을 뚫고 울려 퍼졌다.

“끼긱!”

서걱, 제게 접근하는 식물형 마물을 벤 레넌이 검으로 헤일린을 겨눴다.

“뭘 하면 애가 그런 식으로 울어.”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던 벤디의 얼굴만 생각해도 기분이 더러웠다. 저로 인해서면 몰라도, 남에 의해
그따위로 우는 건 사양이었다.

“키에엑!”

쾅!

벌레형 마물을 처리한 후, 대형 마물용 마법을 소환한 원이 헤일린을 향해 겨눴다.

벤디는 정말 속이 꼬였을 때는 소리 없이 운다, 어린 날 감옥에서처럼. 조금 전에 본 울음은 그때와


비슷한 종류였다.

“그냥 죽어.”

흘러내린 흑발 사이로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가 살의로 번들거렸다.

심지어 절교 협박에 의한 타격도 상당한 두 사람이 살기를 흩뿌렸다.


헤일린은 대응할 생각도 못 한 채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대화하자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무릎 꿇고 부탁했어야 했나.

철썩, 물컹거리는 슬라임형 마물이 제 머리에 떨어져도 미동이 없었다.

세 사람의 대치에, 그들이 데리고 온 백호와 늑대, 사자도 으르렁거리며 서로 날을 세웠다.

지나가던 야닉은 그 한심한 꼴을 발견하곤 팔짱을 꼈다.

“아니, 회장은 아무 생각도 없을 텐데 왜 자꾸 너네끼리 난리인데?”

“…….”

“잘 들어, 회장은 졸업 후에 이 야닉 펠과 대륙을 제패할 인물이다!”

본의 아니게 초소형 통신 마도구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S 클래스 학생들이 숨을 삼켰다. 제발 그 근본


없는 주장을 멈춰.

“그 정도 재목이 굳이 뭐 하러 너희 같은 나부랭이랑 엮이겠냐?”

“…….”

“패자가 되면 꽃은 알아서 따라올 텐데!”

스윽, 세 쌍의 눈동자가 야닉에게 머물렀다.

‘꽃…….’

원과 레넌, 헤일린은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야닉의 주장이 묘하게 맞는 말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돌게 만들었다.

초식 수인, 그러니까 피식자인 벤디가 포식자인 그들에게 마음을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꽃처럼 생긴 사슴 수인이 나타나서 알랑알랑 꼬리를 흔들면.

겁 많고 얼굴 밝히는 벤디가 굳이 같은 초식 수인을 두고 그들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사슴 두 마리가 언덕을 총총 뛰노는 것을 상상한 세 사람에게서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빗자루부터 썰고 얘기하지.”

“나쁘지 않네.”

“죽어.”

그들의 토벌 대상이 마물에서 야닉으로 바뀌었다. 죄목은 입방정이었다.

“끄아아아악!”

야닉의 처절한 비명이 산맥을 뒤덮었다.

깜짝이야.
인상 쓰며 귀에 꽂은 초소형 통신구를 떼어 낸 안나가 반대편을 돌아봤다. X 클래스 토벌 구역, 벤디가
있는 방향이었다.

확실히 저 세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을 터.

‘마물을 보고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 *

일어나.

먼 곳에서부터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니까.

냉랭한 목소리가 재차 채근했다.

“안 일어나면 마물에게 잡아먹힐걸.”

번쩍, 기사회생한 내가 눈을 떴다. 코앞에는 머리에 족제비를 얹은 신시아가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송충이형 마물을 보고 기절했어.”

“아…….”

“이 마수랑 같이.”

신시아의 손가락이 해피를 향했다.

푸르릉……. 해피는 출발 전에 비해 퀭한 낯을 한 상태였다.

‘너도 마물은 무섭구나.’

해피가 사슴다울 때도 다 있고. 같은 사슴으로서 처음 동질감을 느낀 내가 눈가를 훔쳤다.

터벅터벅, 해피가 걸음을 옮기자 수레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수레에 웅크려 앉은 신시아는 드물게 먼저 말문을 뗐다.

“무서우면 딱히 안 나서도 돼.”

“어째서?”

“다들 미쳐 날뛰고 있어서.”

치지직, 때마침 귀에 착용한 초소형 통신 마도구에서 X 클래스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회장. 너는 통신 마도구를 구해 온 것만으로 다 했다!]


[와, S 클래스 녀석들은 매 마물 토벌마다 이 좋은 걸 사용한 거네?]

[E 클래스 녀석들부터 잡고 간다!]

[라일라, 동쪽에 슬라임형 마물의 서식지가 있어!]

과연. X 클래스 학생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이 끊임없이 오갔다.

달달달, 수레가 천천히 이동했다.

신시아는 곧 가방에서 서적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마물 서식지 치고는 너무도 평화로운 숲.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본 나는 무릎을 모았다.

가만히 있으니 또다시 상념이 머릿속을 메웠다.

‘헤일린 이스단이 노랑이가 맞으면…….’

가장 먼저 따라온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르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단 것까지.

그러나 헤일린 이스단의 성격을 생각하면 약간은 이해가 됐다. 나 같아도 말을 못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와 동시에 무수한 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귀마개를 질색하던 노랑이, 엉덩이를 찔리던 노랑이, 목욕하던 노랑이, 야닉을 싫어하던 노랑이.

특히 코에 입을 맞췄을 때 기겁하며 도망간 노란 짐승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미쳤어.’

팡, 얼굴에 열이 오른 내가 주먹으로 수레 바닥을 갈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번째로 따라오는 의문.

어째서 헤일린은 그 성질머리에 그런 수모를 겪으며 내게 접근한 걸까. 이 부분만은 며칠 내내 고민해도


알아낼 수 없었다.

헤일린 이스단에게 물으면 가장 정확하겠지만…… 당장 그와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툭, 수레에 머리를 기댄 내가 중얼거렸다.

“있잖아, 신시아.”

“말해.”

몇 번 망설이듯 입을 달싹인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싱겁긴.”
내가 사슴인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이런 기분을 느낄까.

마지막에는 꼭 그런 생각으로 끝이 나서, 자꾸만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고민하는 게 두려웠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쨍한 햇볕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아아아아악!]

갑작스레 통신구 너머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자세를 바로 한 나와 신시아가 곧장 귀에 낀 통신구를 짚었다.

“무슨 일이야?”

[제길, E 클래스 녀석 중 한 명이 우리 구역의 산란기 마물을 건드렸어!]

“……뭐?”

산란기 마물. 눈을 크게 뜬 우리가 시선을 마주쳤다.

교수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 주의점, 산란기 마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서식하는 해당
마물의 동족이 죄다 몰려오기에.

낯빛이 하얘진 내가 초조하게 물었다.

“위치는?”

[남서쪽!]

휙, 곧장 수레를 뛰어넘은 신시아가 바닥에 착지했다.

“먼저 갈게.”

체술부인 그녀가 땅을 박차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해피, 우리도 가자.”

막대 과자를 꺼낸 내가 안장을 당기며 재촉했다.

[피해, 에버릿!]

[으아아악!]

수레 방향을 트는 도중에도 통신구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대로는…….’

늦어.

안장을 쥔 손에 핏줄이 섰다. 좁은 지형에서 수레는 기동성이 너무 떨어졌다.

바닥에 내려선 나는 수레와 연결된 고삐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빠르게 풀어 내어 해피에게 다가가자, 해피가 날뛰듯 앞다리를 들썩였다.


푸르릉!

“악!”

몸부림에 튕겨난 내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어도 등에 태우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라일라, 뒤!]

[젠장!]

[아아악, 내 다리!]

와중에도 계속해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해피.”

제발. 검은 고삐를 손에 든 내가 절박하게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부탁할게.”

허공에서 시선이 오갔다.

푸르릉, 푸르릉.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김을 뿜던 해피가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올라타라는 의사 표시.

“해피!”

행여나 마음이 바뀔까, 얼른 고삐를 건 내가 등에 올라탔다.

“가자.”

두두두, 해피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S 클래스 토벌 구역.

야닉을 처리한 원과 레넌, 헤일린의 걸음이 당연하다시피 한쪽을 향했다. 벤디가 있을 곳이었다.

‘발 닦개들이 잠깐을 못 참고.’

그들의 의도를 손쉽게 파악한 안나가 앞을 막아섰다.

“다른 클래스 구역으로 이탈하면 점수를 못 받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가 덧붙였다.

“도움을 받게 되는 회장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들은 척도 안 하는 셋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회장의 미움을 살 텐데.”

맞춘 것처럼 세 사람의 다리가 우뚝 멈췄다. 그 순간이었다.

펑!

퍼버벙!

푸른 하늘에 여러 개의 붉은 줄기가 솟아올랐다.

비상시에 쏘아 올리는 신호탄.

마물 토벌 때 단 한 번도 쏘아진 적 없는 신호탄을 바라보던 네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호탄이 쏘아진 장소. 그곳은 X 클래스 토벌 구역이었다.

#<123 화>

자신들이 없는 곳에서 벤디가 위험하다.

원과 레넌, 헤일린은 그 가정 하나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게 무슨…….”

신호탄을 멀거니 올려 보던 안나가 아차 정신을 차렸다. 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는 이미 텅 빈 후였다.

귀에 착용한 통신구에 손을 댄 그녀가 S 클래스 학생들에게 말했다.

“다들 신호탄 보셨나요?”

[보입니다.]

[봤어요.]

신호탄이 터진 곳은 X 클래스와 E 클래스, 그리고 B 클래스가 있는 산맥. 다른 구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력자가 몇 없는 곳이었다.

“신호탄이 쏘아지면 마물 토벌은 중지입니다. 이 거리면 교수님들보다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 있으니,


지원 부탁드릴,”

[이 야닉 펠은 이미 가는 중이라고! 뭘 미적거리고 있어, 거북이 같은 것들이!]

지긋지긋한 3 인칭이 통신구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얼얼한 귀를 매만진 S 클래스 학생들이 답했다.

[……북서쪽 거북이 출발합니다.]

[북동쪽 거북이도요.]

거북이들 또한 같은 아카데미 학우들의 위기를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통신을 마친 안나는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신호탄이 터진 산맥을 돌아봤다.

‘큰일은 아니기를.’

이상하게 불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 * *

남서쪽 호숫가.

“키에에엑!”

“홀튼, 조심해!”

부상자 여럿과 통신을 듣고 모인 X 클래스 학생들, 뒤섞인 E 클래스 학생 몇몇, 끊임없이 몰려드는 크고
작은 마물들까지.

호숫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털썩, 넘어진 X 클래스 학생의 위로 주둥이를 쩍 벌린 식물형 마물이 달려들었다.

“힉……!”

채 반응도 못하는 동시에 쾅, 마물이 누군가의 몸에 치여 날아갔다.

“신시아!”

빡, 달려드는 또 다른 마물을 때려눕힌 신시아가 곧장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어떤 미친놈이 일부러 산란기 마물을 끄집어내고 내뺐어! 에버릿 말로는 E 클래스 녀석
같았다고,”

“피해.”

쾅, 거대한 줄기가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학생을 들쳐 업고 몸을 피한 신시아는 줄기가


날아온 쪽을 돌아봤다.
‘하필…….’

녹색 구형에, 수십 개의 줄기를 가진 최상급 식물형 마물.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토벌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몰려드는 마물들도 문제였다.

“신시아, 우리만으론 역부족이야.”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 비켜.”

잠깐의 대화도 나눌 틈 없이 마물이 밀려들었다.

그들의 반대편, 라일라는 쓰러진 E 클래스 학생에게 다가갔다.

“멍청하게 앉아서 뭐 하는, 너, 다리가……!”

“흐…….”

다리를 다친 학생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제기랄……!”

라일라는 늘어진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나 다가오는 마물까지 처리하며 부상자를 부축하기엔 힘에
부쳤다.

“야, 정신 차려!”

온몸이 땀에 젖은 라일라가 거칠게 외쳤다.

“모, 못 해, 안 돼…….”

“움직이라고, 이딴 곳에서 뒈지고 싶어?!”

실랑이를 벌이는 그들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위를 봐!”

처음 듣는 신시아의 고성에, 라일라가 휙 고개를 꺾었다. 거대한 줄기가 두 사람을 덮쳐 오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X 클래스 학생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라일라-!”

마물을 상대하느라 발을 뗄 수 없는 그들의 표정에 절망이 번졌다.

‘누가 좀…….’

‘제발!’

피할 시기를 놓친 라일라는 가까워지는 줄기를 멍하니 올려 봤다.

‘죽는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기 무섭게,

퍼엉!

파열음과 함께 후드득, 줄기 잔해가 라일라의 위로 떨어졌다.

쐐애액- 연달아 쏘아진 날카로운 바람이 학생들을 지나쳐 마물 몇 마리를 휩쓸었다.

쿵!

콰광!

폭발로 인해 불거진 자욱한 연기가 걷히며, 학생들의 시야에 들어온 건 사슴의 탈을 뒤집어쓴 흉악한
마물이었다.

‘제길.’

‘또 저런 마물이…….’

절망도 잠시, 마물의 등에 올라탄 벤디를 발견한 그들이 반색했다.

“……회장!”

“학생회장!”

제때 맞춰 겨우 도착한 벤디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몰려드는 마물과 수많은 부상자, 흙먼지와 뒤섞인 피 냄새, 무기가 마찰하는 소리.

도망치고 싶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 버린 벤디가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나약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일깨웠다.

‘비상시에는 학생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곳을 통솔해야 하는 존재는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자신. 늘 알게 모르게 도와주던 화상과 밉상, 진상은


이 자리에 없었다.

‘정신 차려야 돼.’

두려움을 애써 삼킨 벤디는 배낭에서 신호탄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 피융, 펑! 붉은 신호탄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교수들에게까지 전달될 높이로 솟은 것을 확인한 벤디가 지시했다.

“라일라, 부상자를 최대한 옮겨 줘.”

“알겠어!”
“신시아는 라일라의 엄호를 부탁할게.”

어느새 다가온 신시아가 짧게 끄덕이며 되물었다.

“회장, 너는 어쩌려고.”

“나는…….”

말끝을 흐린 벤디는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고삐를 당긴 벤디가 산란기 마물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가자, 해피.”

푸르릉.

콧김을 뿜은 해피가 마수처럼 땅을 박찼다.

“제길, 프레든이 다쳤어!”

“지원은 아직이냐고!”

접전을 벌이는 E 클래스 학생들의 위로 쐐액- 몸이 흔들릴 정도의 돌풍이 불었다.

콰과광!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수많은 마물이 바람에 휩쓸렸다. 손쉽게 뚫린 퇴로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학생들이
외쳤다.

“회장?”

“학생회장!”

“부상자부터 빨리 옮겨, 여긴 내가 처리할게.”

휙, 높이 뛰어오른 해피가 그들의 위를 넘어 지나쳤다.

의지하기에는 퍽 작은 벤디의 등을 마주한 학생들이 목울대를 울렁였다.

아수라장인 장소가 조금이나마 정리되며, 방황하던 학생들이 약간이나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디의 존재 하나만으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학생들의 시선이 저절로 벤디에게 향했다.

쐐애액- 쾅!

“키이익!”

콰광!

“케엑!”
학생회장과 사슴 마물이 지나간 자리마다 퇴로가 뚫리며, 부상자를 옮길 수 있는 틈이 생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무심코 생각했다.

‘여태껏…….’

다른 학생회장들에 비해 있으나 마나 한 무능한 존재라고 여겨 왔는데.

‘아, 우리는…….’

‘학생회장이,’

‘필요하다.’

학생회장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무한한 믿음이 피어오른 동시에 풀썩, 벤디가 종잇장처럼 해피의 등에서 떨어졌다.

“…….”

주섬주섬 다시 오르는 유약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간헐적으로 무능하다고.

* * *

“허억, 헉…….”

벤디에게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마법을 날려서 처리해도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알릭스, 뒤!”

“으아악!”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도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텨, 곧 지원이 올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막대 과자를 쥔 벤디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마력도 반쯤 소진한 상태.

벤디는 힘이 풀리려는 손을 반대편 손으로 붙잡았다. 막연한 불안이 발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력을 다 쓸 때까지 지원이 오지 않으면…….’

작게 피어난 두려움이 덩치를 키워 온몸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어딘데.]
낮은 목소리가 소란과 비명을 뚫고 귀에 꽂혔다.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

‘헤일린 이스단.’

긴장이 풀리며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벤디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매일 못되게 구는 진상의 존재가 뭔데 이토록 안심이 되는지.

다툰 게 무색할 정도로 반가움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네가 어떻게 우리 통신구로,”

[신호탄이 쏘아진 곳으로 가는 길에 마주쳤어!]

초소형 통신구 너머에서 같은 클래스 학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다시금 익숙한 저음이 이어졌다.

[정확한 위치는.]

“남서쪽 산맥 정상의 호수,”

[지금 가.]

대화를 실시간으로 듣게 된 X 클래스 일동은 전투에 임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누군가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어불성설인 헤일린 이스단이 저토록 고분고분하게 굴다니.

왜 정작 대화하는 벤디보다 자신들이 쾌감을 느끼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두근…….

응, 기다릴게. 반드시 버텨서 널 만날게. X 클래스 학생들이 허공을 향해 연신 끄덕거렸다.

통신을 끝마친 벤디가 해피의 등에서 내려섰다. 이어서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라일라를 돌아봤다.

“라일라, 곧 지원이 올 거야.”

“알아, 다 들었으니까. 부상자도 대충은 뒤로 보냈어.”

“그럼 마력을 아끼지 않아도 되겠지.”

작은 종알거림을 들은 라일라가 멈칫했다.

벤디의 시선은 산란기인 식물형 마물에게 머무른 상태였다.

“키에엑!”

마물이 발악하듯 거대한 몸체를 휘둘렀다.

저 마물을 처리하면 다른 마물들이 날뛰는 것도 줄고, 피해나 부상자도 더욱 줄일 수 있다.


뜻을 알아차린 라일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벤디의 막대 과자를 곁눈질했다.

“자칫하면 뒈질걸?”

“……알고 있어.”

수십의 줄기에 칭칭 감싸인 핵. 저걸 파괴하면 이 끔찍한 상황도 비로소 끝이었다.

곧 마력을 운용한 라일라가 씨익 웃어 보였다.

“같이 뒈지자.”

“라일라…….”

꼭 그렇게 송곳니를 다 드러내는 웃음을 보여야 할까, 벤디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키이익! 마물 한 마리를 베어 낸 신시아가 각오를 다지는 두 사람 곁으로 따라붙었다.

“나도 엄호할게.”

“…….”

“둘 다 그런 뭉클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 줄래.”

더럽다는 듯 진저리친 신시아가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쑥스러운가 봐. 서로를 보며 슬쩍 웃은 벤디와 라일라도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저 마물의 핵은 윗부분이 약해. 내가 줄기를 유인하는 동안 위에서 공격해야 돼.”

파악, 신시아가 날아오는 줄기를 쳐내며 부언하자, 라일라가 답했다.

“그럼 내가 회장을 높이 던져야겠네.”

“한 번의 큰 공격으로 끝내. 회장, 할 수 있겠어?”

“……꼭 날아가야 할까?”

무의식중에 반박한 벤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할 수 있어.”

신시아는 자기암시를 거는 벤디를 찜찜하게 훑은 후 앞서 나갔다.

“신호할게.”

미끼가 된 그녀가 달려들자, 핵을 보호하던 줄기의 일부가 그녀에게 쇄도했다.

“키이익!”

잡힐 듯 안 잡힐 듯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덕에, 독이 오른 마물이 남은 줄기를 휘둘러 댔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핵을 발견한 신시아는 곧바로 지시했다.

“지금.”
“가라, 학생회장!”

누가 같은 하이에나 아니랄까 봐, 야닉과 똑같은 대사를 뱉은 라일라가 벤디를 높이 던져 올렸다.

‘보인다.’

공중에 떠오른 벤디가 핵을 향해 막대 과자를 조준했다.

바삭바삭, 거센 돌풍이 이윽고 과자 끝에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명중과 동시에 굉음이 일며 땅이 뒤흔들렸다.

퉁, 데구루루. 공기 주머니를 소환하여 바닥에 착지한 벤디가 곧바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됐나?’

후드득, 후드득. 자욱한 연기 속에서 마물의 잔해가 이리저리 튀었다.

‘명중이다.’

안도하기도 잠시, 벤디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남은 녹색 줄기 하나가 발악하듯 연기를 뚫고


쏘아지고 있었기에.

늦었다.

사색이 된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학생회장!”

“피해!”

그때 튀어나온 노란 무언가가 벤디의 시야를 가렸다.

푸욱, 줄기가 새끼 사자를 뚫는 동시에 둘의 몸이 호수로 굴러떨어졌다.

#<124 화>

풍덩!
차가운 물이 벤디의 온몸을 감쌌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호수는 겉보기보다 훨씬 깊었다.

미약하게 발버둥 치던 벤디의 몸이 곧 물속에서 늘어졌다.

직전의 공격에서 마력을 대부분 소진한 탓인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더라.’

부옇게 흐려지는 의식 속, 제게 헤엄쳐 오는 노란 짐승이 시야에 들어왔다.

짧은 다리를 내저을 때마다 복부 주변에서 붉은색이 번져 나갔다.

‘노랑이…….’

네가 왜 여기에 있을까.

앞뒤 없는 생각을 이어 간 벤디가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노란 짐승의 몸에서 빛이 일기 시작했다.

눈부실 정도의 빛이 잦아들며 백금발에 붉은 눈동자, 헤일린 이스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째깍, 째깍.

놀라움, 당황, 배신감, 체념. 수 초 동안 여러 감정이 엉키고 뒤섞였다.

‘아, 역시…….’

노랑이는 헤일린 이스단이었구나.

눈앞에서 변한 이상 더는 홀로 삭이며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스르륵, 벤디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의식을 잃어 가는 벤디를 당겼다. 이어서 삼키듯 입술을 맞대었다.

다친 제 꼴로는 벤디를 데리고 호수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

그는 망설임 없이 제 남은 숨을 모두 불어넣었다. 둘 중 누구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그건 벤디였다.

와중에도 맞닿은 입술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

눈을 반쯤 내리뜬 그가 입술을 떼어 내며 벤디의 뺨을 쭉 잡아 늘렸다.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되찾은 벤디가 눈꺼풀을 들었다.

반대로 헤일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물의 줄기에 뚫린 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새어 나가고
있었다.

아물아물하게 눈을 뜬 벤디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속여서 미안.

이윽고 헤일린의 몸에서 빛이 일며 다시 노란 짐승으로 되돌아갔다. 상처와 위기로 인한 수인의 방어


기재였다.

축 늘어진 노란 짐승이 점점 벤디에게서 멀어졌다.

‘안 돼.’

정신이 확 깬 벤디가 노란 짐승을 향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눈앞에 무수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모래시계가 폭발했을 때. 리울 약초를 채약할 때. 가상 공간에서 바위에 부딪힐 뻔했을 때.

‘그리고 지금도.’

노랑이든 헤일린 이스단이든, 줄곧 위기마다 제 앞을 막아선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마물의 줄기가 쏘아져 오고, 그 앞을 노란 짐승이 가로막은 직전의 상황을 떠올린 벤디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 마음대로…….’

혼자 구하고 혼자 죽으려는 건데. 그런 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어 헤엄친 벤디가 작은 몸을 품에 감싸 안았다.

‘상처가…….’

맞닿은 교복이 노란 짐승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꺾은 벤디는 멀게 느껴지는 수면을 올려 봤다. 꼬르륵, 위에까지 닿기에는 숨이 모자랐다.

‘노랑이라도 올려보내야 하는데.’

당장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득한 좌절을 느끼는 와중, 두 개의 그림자가 수면 위에 드리워졌다.

풍덩, 풍덩!

레넌과 야닉이었다.

‘끄르륵.’

일단 호수에 뛰어들고 본 야닉이 뽀글뽀글 거품을 뱉어 냈다. 수영은 쥐약인 걸 깜박한 실정이었다.

‘구해 줘, 레넌 에던트!’

눈에 핏대를 세운 그가 바둥바둥 다리를 굴렀다.

구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레넌은 쯧 혀를 차며 벤디를 향해 팔을 뻗었다.

‘……레넌.’
가물가물한 시야에 호수를 닮은 은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이내 단단한 팔이 벤디의 몸을 휘감았다. 이번에는 노란 짐승도 포함이었다.

커다란 손이 벤디의 뒷머리를 감쌌다.

익숙한 품에 안도한 벤디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암전이었다.

* * *

“끄아아악!”

원의 발밑에 깔린 학생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다음은 부러질 텐데.”

비명에도 아랑곳 않은 원이 또다시 그의 팔을 꺾어 돌렸다.

“흐으, 흐…….”

“그러니 알고 있는 걸 말해.”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지고, 모두가 그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방향을 거슬러 내려가던
남자.

E 클래스의 빈 글레어.

‘그러니까 웬 머저리가 회장을 습격했다는 거죠?’

‘제가 개인 대 개인으로 처리하죠.’

이전에 한번 벤디를 습격했다가 헤일린에게 안면을 가격당한 후, 안나에게 강냉이를 털린 작자였다.

그런 자가 허둥지둥 도망치듯 하산하는 행적이 퍽 수상하여, 레넌을 먼저 보낸 후 덜미를 잡아챈 참.

이내 빈 글레어의 팔을 놓아준 원은 불결한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었다.

지속되던 고통이 멈추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원을 올려 봤다.

“학생회장은.”

원은 귀에 손을 댄 채 S 클래스와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무사해요.]

곧장 안나의 답변이 돌아왔다.


“비명 소리가 들리던데.”

[아, 그건 야닉 펠이 호수에 빠져서,]

치직, 더 들을 것도 없이 통신을 끊은 원이 건조한 표정으로 검은 장갑을 꼈다.

그 모습을 마주한 빈 글레어의 낯빛이 싸하게 질렸다.

‘서, 설마…….’

잡음이 끊이지 않는 레넌이나 헤일린에 비하여, 귀족답고 이성적이라는 게 원에 대한 평가.

그러나 그건 원이 인간적이고 너그러워서가 아니었다. 거슬리는 존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치운 것일 뿐.

빈 글레어의 예상대로, 원은 손목을 돌리며 생각했다.

웬스턴 레피를 처리하는 건 사슴의 허락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이런 자 정도는 처리해도 괜찮겠지.’

행여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그에 맞춰 사고하고 있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원이 마법을 소환했다.

“히이익!”

금방이라도 제게 쏘아질 듯한 불을 마주한 빈 글레어가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같은 아카데미 학생에게 해를 입히면 퇴학,”

“아니, 넌 마물 토벌 중에 해를 입은 거로 처리되겠지.”

시시각각 얼굴색이 바뀐 그가 넙죽 엎드렸다.

“제가, 제가 그랬습니다!”

“뭐를.”

“사, 산란기 마물을 끄집어냈습니다!”

“이유는?”

“하, 학생회장이…….”

어물쩍거리며 말꼬리를 늘인 빈 글레어가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꼴 보기 싫어서…….”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듣게 된 원이 픽 헛웃음 쳤다.

뒤는 안 들어도 뻔했다.

산란기 마물을 풀고, 닥쳐온 상황에 겁먹은 벤디가 내빼는 상황을 바랐겠지. 학생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벤디는 징계를 받게 될 테고.

같잖은 머릿속을 쉽게 예상한 그는 뒤이어 작은 의문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어차피 학생회장 임기는 거의 끝나 가는데.”

“…….”

“애당초 너 따위한테 권한이 돌아갈 일도 없고.”

또다시 바로 답하지 않은 빈 글레어가 우물쭈물 손을 매만졌다. 원은 소환한 불을 자비 없이 그의 손에


내리꽂았다.

“흐아악!”

“두 번은 없어.”

“학, 학생회장은 여우가 아닙니다!”

흠칫.

원의 몸이 드물게 경직됐다.

“익명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학생회장이 초식…… 초식 수인이라고.”

“……언제?”

“하, 하계방학이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실제로 백호 영역에서 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돌아다닌 걸 본


사람도 있고요…….”

대체 누가 그런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미간을 굳힌 원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치직, 소형 마도구에서 울림이 일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런 때.’

소형 마도구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그는 살짝 당황하며 빈 글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등 돌린 원이 통신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통신 걸지 말라고 전했을 텐데.”

[쯧, 버릇없는 녀석…….]

간간이 통신을 주고받는 비밀 친구.

[1 소대 대장한테 예비 남편 별로라고 다 이른다!]

정체는 바로 모니였다.

콩알만 한 사슴에게 협박당하는 중인 원이 울컥하는 심정을 억지로 삼켰다.

“……미안하군.”

[그래, 잘하자고. 그보다 6 소대 대장이 할 말 있대.]

그 말과 동시에 통신구 너머, 스카론이 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쯤 되니 원은 스카론의 소속이 마탑 장로인지, 페트리온 모험대 대원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원 님, 큰일입니다.]

“말해.”

답지 않게 뜸 들인 스카론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웬스턴 레피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은 원이 이를 짓씹었다.

“저택에서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붙였을 텐데.”

[그 점이 이상합니다.]

웬스턴 레피는 괜찮은 마법사일지언정, 마탑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날 능력까지는 못 되었다.

[심지어 저택에서 나올 수 있는 통로란 통로는 모두 막았는데…….]

통로.

벼락처럼 깨달은 원이 거칠게 흑발을 쓸어 넘겼다.

감옥과 이어진, 벤디가 드나들던 작은 비밀 통로. 그걸 놓치고 말았다.

* * *

신호탄이 쏘아진 동시에 원과 레넌은 곧바로 동물형으로 변해 앞서 나갔다.

한 끗 차이로 뒤처진 헤일린은 그 순간 제 결핍을 통감했다.

성체로 변하지 못한 새끼 사자.

그 결핍이 가장 중요한 때에 발목을 붙들었다.

통신이 가능한 X 클래스 학생을 가는 길에 마주치지 않았다면.

새끼 사자 모습으로 호랑이 수인인 그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면.

그러한 우연과 운이 받쳐 주지 않는 한,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슴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호숫가에 도착하자마자 본 건 벤디에게 마물의 줄기가 쏘아지는 광경이었으니까.

끙.

악몽에 시달리던 노란 짐승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의식을 되찾은 노란 짐승은 끔벅끔벅, 느리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어떻게 된 거지?’

끔벅, 하얀 천장과 푹신한 침구.


끔벅, 복부를 덮쳐 오는 아릿한 고통.

끔벅, 비장한 사슴의 얼굴.

끔벅,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

잠깐.

……비장한 사슴의 얼굴?

뒤늦게 벤디의 존재를 인지한 노란 짐승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벤디는 그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앞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교복은 피범벅에, 머리카락은 산발인 모습.

상처는 없다.

휙, 휙. 눈으로 벤디의 무사를 살핀 노란 짐승은 돌연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

벤디의 앞에서 변했다, 헤일린 이스단으로.

불리한 제 처지를 깨달은 노란 짐승이 앞발로 머리를 짚었다.

사슴의 미움을 사는 건 고사하고, 자칫하면 경멸 어린 눈빛을 받을지도.

덜컥 겁이 난 노란 짐승은 팍, 발을 굴렀으나 몸이 휘청하며 딸려 갔다.

“……?”

도주에 실패한 노란 짐승이 의문 어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벤디의 손에 칭칭 감긴 끈이 제 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꼬리가…….’

묶였다.

#<125 화>
꼭 묶어도 꼬리여야만 했을까.

노란 짐승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몹시 예민하고 민감한 부위였다.

‘위험해.’

다른 건 다 내어 줘도 이것만은 안 된다.

그는 뭉텅이 같은 앞발로 조심조심 끈을 당기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끈이 팽팽해지는 걸 느낀 벤디는 팍, 제 쪽으로 끈을 당겼다.

또다시 꼬리에 자극이 가해졌다.

미칠 지경인 헤일린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슴은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두근, 두근.

타들어 가는 속을 알 리 없는 벤디가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내내 생각을 해 봤어.”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보는 상태였다.

“왜 네가 굳이 나한테 접근했는지.”

벤디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꼬리를 털어 대던 노란 짐승은 애써 귀를 기울였다.

“그것도 고양이 행세를 하면서까지.”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 사자. 노란 짐승이 앞발을 들며 이의를 신청했다.

이의 제기를 기각한 벤디는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거 알아? 너 최근에 살찐 거.”

“……!”

충격에 휩싸인 노란 짐승이 털썩 퍼질러 앉았다. 살면서 외모에 신경 쓴 적은 없지만, 벤디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사양이었다.

“그게 네 본체라면 자라지 않아야 할 텐데, 알게 모르게 약간씩 자라더라고.”

헤일린 이스단이 아닌, 노랑이에 대한 말이었네. 노란 짐승은 몇 초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 성격에 무언가에 얽매인다면, 그건 성체로 변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벤디의 추측이 점점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체가 되는 것과 내가 관련이 있겠지. 저번에 가상 공간에서 커다란 수사자로 변했던 걸


생각하면…….”

“…….”
“이유는 접촉과 마력 중 하나.”

얼떨떨해진 노란 짐승이 앞발로 입을 가로막았다.

평소 맹하게 다니는 사슴이 이따금씩 정곡을 찌를 때마다 놀라웠다.

헤일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벤디는 잠깐 말을 멈췄다.

어머니는 무언가를 알고 있겠지. 그렇기에 이스단 가문과 저를 엮은 거고.

‘엄마, 저기는 뭐야?’

‘저기? 아빠도 못 들어가는 엄마의 비밀 서고. 엄마의 비밀이 잔뜩 있는데, 벤디만 살짝 보여 줄까?’

‘안에 고구마도 있어?’

‘……없어.’

‘그럼 살짝 안 볼래.’

‘우리 아기는 어쩌다 고구마 광인이 된 걸까…….’

어쩌면 그곳에 가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레피 저택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

상념에 잠겼던 벤디가 재차 입술을 열었다.

“넌 내가 귀중하지?”

뜨끔.

헤일린은 심장이 덜컥했다.

“언제나 몸을 던져 가면서 날 구했으니까.”

계속 앞만 보던 벤디는 고개를 돌려 노란 짐승과 눈을 맞췄다.

말간 눈동자를 마주한 헤일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귀중한 걸 넘어 환장했다. 일부러 이스단 가문의 빚쟁이로 남겨 두면서까지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그는 끄덕이며 순순히 자신의 감정을 시인했다. 그런 노란 짐승을 본 벤디가 초연하게 말했다.

“그렇겠지, 성체가 될 귀중한 수단이잖아.”

“……?”

돌아온 눈치가 왜 갑자기 집을 나가는데. 귀중한 수단 그거 하나 지키자고 너한테 빌빌 기었겠냐고.

발언권이 필요한 노란 짐승이 앞발을 들고 냥냥 항의했다.


뜻을 이해한 벤디가 덧붙였다.

“나도 감사하고 있어, 늘 몸을 던져 날 지켜 준 거에 대해서.”

안타깝게도 헤일린 입장에서는 동문서답이 돌아온 격이었다.

“상처는 책임지고 보살필게, 단.”

강조하듯 끊어 말한 벤디는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꽤 좋아하잖아, 내 얼굴이랑 몸.’

“나, 네 몸 별로 안 좋아해.”

시도 때도 없이 만져 달라며 헛소리하던 헤일린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됐다. 성체로 변하기 위해서.

‘더 만져 줘.’

“이제 만져 주지 않을 거야.”

쿵.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노란 짐승이 부르르 떨었다.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데.’

만져도 되고 입도 맞대도 된다고. 그 외에 더한 것도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필 복부의 상처와 마취약 때문에, 당장 사람으로 변하지 못하고 있는 헤일린이 팡, 팡, 앞발로 침대를
내리쳤다.

“지금껏 날 속인 데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스륵, 벤디는 꼬리와 엮인 끈을 손에서 놓았다. 표정은 새침하면서도 더없이 단호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그는 눈앞이 핑 돌았다.

벌도 정도껏이지, 너무 잔인하고 지독한 처사지 않나.

고구마와 혼인한 자답게 목 막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빈혈을 일으키는 노란 짐승을 뒤로한 벤디가 벌컥, 예고 없이 의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문에 귀를 댄 채 엿듣고 있던 원과 레넌이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올라가는 입꼬리만큼은 숨길 수 없는 두 사람이 입을 살짝 가렸다.

파국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그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나팔을 건넸다.

두 사람은 천사들과 나팔을 뿌뿌 부느라 벤디의 날카로운 눈길이 자신들에게 향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

벤디는 두 장신을 번갈아 훑었다.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면서, 노랑이의 화려한 이중생활에 동조한 가담자들.

뒤늦게 짙은 시선을 느낀 원과 레넌이 벤디를 내려 봤다.

“두 사람과도 당분간은 얘기 안 해.”

왜 우리까지.

“아니, 회장.”

“잠깐만요.”

당황한 그들이 손을 뻗었지만, 찰싹, 찰싹, 손이 연타로 내쳐졌다. 으르렁거리지만 않았지 기세가 해피
못지않게 사나웠다.

절교를 선언한 사슴이 쿵쾅거리며 떠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레넌은 이내 스르릉,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물색 눈동자가 드물게 선득한 빛을


띠었다.

“아직 토벌할 마물이 하나 더 남았네.”

“꼬리부터 썰지.”

원은 이미 검은 장갑을 착용하는 중이었다. 살상력 있는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의무실 내부, 세상 무너진 듯 주저앉은 노란 짐승에게 닿았다.

명칭 노랑이 이스단, 토벌 보상은 헤일린 이스단의 사망.

최상급 마물 토벌을 시작할 때였다.

* * *

산란기 마물을 건드린 주범은 E 클래스의 빈 글레어로 드러났다.

밀란느 학장에게 직접 불려가 중징계를 받고, 퇴학 절차를 밟는다는데…….

학생들의 공분을 산 그는 마물 토벌을 기점으로 행방이 묘연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얼굴이 부어 있었다는 목격담만 전해질뿐.

마물 토벌은 불행 중 다행으로 사망자는 없었으나, 많은 부상자와 나쁜 기억을 남겼다.


이점이라면 학생회장을 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점일까.

아무튼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만큼, 아카데미 측은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가을 끝자락에
있을 축제를 앞당겼다.

따라서, 축제 준비를 위해 개최된 학생회의.

“…….”

회의실에 자리한 안나는 흘끔, 벤디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차분한 표정이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심기가 불편하다.

포크로 고구마를 찍어 먹는 손길이 거칠며, 하루에 한 개씩 배낭의 집게 핀이 늘어났다.

근 며칠 사이, 벤디는 학생회실의 폭군이자 깡패로 재탄생했다.

정확히는 발 닦개 삼 인방 한정으로.

단단히 속이 상한 벤디는 아예 세 사람을 보려 하지 않았다.

서운함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거니 학생회실에 들어오던 세 사람은,

‘안나, 문 잠가 버려요.’

소박맞듯 쫓겨난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거의 며칠간 벤디와 대화를 섞기는커녕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기에.

간간이 노란 짐승의 상처를 확인했지만, 그마저도 붕대를 갈아 주는 잠깐이 전부였다.

인내심이 동난 그들은 학생회실에 밀고 들어오려다, 벤디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본 후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고도 벤디는 때때로 속상한 마음에 팡, 갈색 배낭을 내리쳤다가 다시 탁탁 정리하곤 했다.

대충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것 같은 안나가 큼, 괜히 헛기침을 했다.

‘재밌어라.’

고개 뻣뻣한 그들이 설설 눈치만 살피는 모습을 관전하는 게 이토록 즐거울 수가.

모쪼록 벤디의 폭정이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학생회도 축제 천막을 설치해야 돼요. 천막을 어떤 주제로 운영할지도 정해야 하고요.”

“의견.”

야닉이 의욕을 불태우며 손을 번쩍 들었다. 뚝, 뚝. 손가락 마디마디를 푼 그가 장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육강식답게 피의 전투를 벌이는 거지. 마지막까지 남은 자는 이 야닉 펠을 상대하는 행운을 얻는 거로.
마스코트 곰탱이가 심판을 맡고!”

머릿속이 구체적으로 해맑아서 좋겠다.

자연스레 무시한 안나는 학생회 일원을 둘러보며 제안했다.

“저는 물약 상점 같은 평범한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스윽, 검은 로브를 눌러쓴 음침한 자가 손을 들었다. 메이지였다.

“좋아요. 저희 마개동에 재료도 다 있고, 지금껏 나오지 않은 신약을 개발하는 거지요.”

“신약이라…….”

“회장도 신약 개발에는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회의실 내 모든 시선이 벤디에게 집중됐다.

물약. 섣불리 긍정하지 못한 벤디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밀란느, 좋아해요.’

‘학장님의 눈에는 호수가 있어요.’

아직도 학장에게 간질간질한 사랑을 속삭인 기억이 선명했다.

더군다나 다람쥐로 변해서 레넌에게 납치당한 기억까지.

물약과 관련해서는 하나같이 호되게 당한 경험뿐인데.

그러나 아직 식욕 억제 약물에 대한 미련이 남은 벤디가 작게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됐군요, 회장의 결정이 곧 학생회의 결정이니까.”

이번만은 제발 남들처럼 평범하게, 굴곡 없이 진행하고픈 안나가 냉큼 말했다.

“이견 있는 분?”

“그딴 심심한 거 말고 피의 전투, 커걱!”

꽥꽥대는 야닉의 입에 벤디의 고구마를 꽂아 넣은 그녀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투명한 안경알이 번쩍


빛났다.

“또.”

“…….”

“이견 있는 분?”
새하얗게 질린 학생회 일동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학생회 축제 주제는 신약 개발 및 판매로 결정됐다.

* * *

축제 이틀 전, 마개동 부실.

우당탕, 야닉은 비커에 물약 재료를 건성건성 배합했다.

“전투 같은 멋진 걸 놔두고 신약 개발은 뭔 개소리야. 잘 팔릴 만한 게 하루아침에 나오겠냐고.”

야닉이 만드는 물약에 마력 주입 역할을 맡은 벤디는 문득 창밖을 돌아봤다.

어느덧 더위가 완전히 가시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그 의문의 편지는 누가 보낸 건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화상과 밉상, 진상과의 냉전은 별개로, 평화로우면서도 조용한 하루하루가 내심 불안했다.

“회장, 너 이제 알지? 노란 놈의 정체.”

그때 야닉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벤디의 사념을 깨뜨렸다.

“……어?”

화들짝 놀란 벤디는 야닉과 만들던 물약에 상당량 이상의 마력을 주입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이 대화를 지속했다.

“그래서 싸운 거 아냐. 꼭지 돌 만도 하지, 정체를 그렇게 오래 숨겼는데.”

“…….”

야닉의 키들거림에 벤디는 동조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정체를 숨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저기, 야닉.”

벤디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야닉을 돌아봤다. 그는 벤디가 아닌, 비커 속 물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 회장, 회장.”

“왜 그래?”

사색이 된 야닉이 벤디의 팔을 퍽퍽 미는 동시에 부글부글 끓던 물약이 치솟아 올랐다.


아…….

입을 벌린 채 위를 보는 두 사람에게 촤악, 물약이 쏟아졌다.

졸지에 쫄딱 젖은 꼴이 된 야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역정 냈다.

“야, 회장! 마력을 그렇게 많이 주입하면 어떡,”

투덜거리던 야닉은 벤디를 보자마자 석상처럼 굳었다.

“미안해,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얼굴을 붉힌 채 순순히 사과하던 벤디도 경악하며 입을 막았다.

뭐야, 이 굵직한 목소리는.

더듬더듬, 벤디는 떨리는 손으로 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질 몸과 그을린 듯한 짙은 피부색, 암갈색 장발.

그런 벤디를 멍하니 쳐다보던 야닉 또한 제 몸을 두리번거렸다.

공들인 근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얇은 팔다리, 잘 입지도 않던 교복 카디건과 모자, 단정한 차림새.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은 각자의 몸을 감싸며 서로를 마주 봤다.

“…….”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126 화>

몸이 뒤바뀌었다.

참담한 현실을 직시한 벤디는 우선 야닉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약물로 인해 바뀐 거니까 방도가 있을 거야. 일단 침착해, 야닉. 침착해.”

“회장, 네가 제일 침착하지 못하고 있거든?”

근육질에 장신인 남자가 커튼 뒤에 숨어 오들거리는 모습, 심지어 그게 자신임을 용납할 수 없는 야닉이


빽 외쳤다.

“이 야닉 펠의 얼굴을 하고서 커튼 뒤에 숨지 말라고! 몸도 반만 내밀지 마!”

팍, 답답한 모자를 벗어 던진 그가 제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팔딱거리는 자신을 마주한 벤디는 동공을 떨었다.

‘날뛰는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왜 육식 수인들이 저를 하찮게 여기는지 단숨에 이해됐다.

체구도 작고, 얼굴은 어딘지 멍하고. 새초롬한 표정은 그냥 센 척하는 동네 사슴에 불과했다.

만만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를 관찰하던 벤디는 일단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와 커진 몸이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뒤따라 책상에 걸터앉으려던 야닉은 휘청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빌어먹을, 다리가 왜 이렇게 짧아!”

맞는 말이었다. 반박하지 못한 벤디는 가느스름하게 야닉을 노려봤다.

털썩, 엉거주춤 책상에 걸터앉은 야닉이 목을 조이는 타이를 끌렀다.

새삼 학생회장에게 존경심이 일었다.

학생회장다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딴 단정하고 불편한 꼴로 다니다니.

‘역시 멋지다니까.’

과연 자신과는 재목이 달랐다.

일편, 잠깐 생각에 잠겼던 벤디는 야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닉, 의무동부터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과연, 어서 가자고.”

“그 전에 바로 옆이 학생회실이니까, 배낭을 가져오는 김에 누가 있으면 알리고.”

“몸이 바뀐 걸 알리자고?”

습관적으로 머리를 묶던 야닉은 별안간 고민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지금 학생회장의 모습이다.

그리고 발 닦개 삼 인방은 학생회장의 발을 닦기 위해 노력 중이고.

사랑하는 학생회장의 몸에 이 야닉 펠이 들어온 걸 그놈들이 알면…….

‘이 야닉 펠의 아름다운 몸은…….’

백 퍼센트의 확률로 뼛가루조차 남지 않는다.


오랜만에 오싹해진 야닉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 당장 알리는 건 보류하자.”

“왜?”

“의무동만 가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이런 사고가 터진 걸 알릴 필요는 없지. 괴력


곰이 한 말 기억 안 나냐?”

‘사고 치지 마세요. 특히 회장과 야닉 펠.’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세미의 야식행.

안색을 파리하게 물들인 벤디는 수긍하며 몸을 일으켰다. 야닉의 의견치곤 설득력이 있었다.

“우선은 숨기는 게 낫겠다. 학생회실에 가서 배낭만 금방 가져올게.”

“꼭 필요하냐, 그 배낭?”

우락부락한 몸을 움츠린 벤디가 연신 끄덕거렸다. 배낭 안에는 소중한 손지갑과 막대 과자, 비상용


고구마가 있었다.

“후딱 가져와.”

손을 털레털레 흔들던 야닉은 뒤늦게 경악했다.

야닉 펠의 모습을 한 벤디가 종종걸음으로 부실을 나서고 있었다.

배낭을 가지러 가야 하는 건 저 야닉 펠이 아니라 이 야닉 펠.

“회장, 내가 가야지, 내가!”

“……아!”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한 벤디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후다닥, 얼른 위치를 바꾼 두 사람은 비장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다녀온다, 회장.”

“나처럼 행동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내가 바보냐? 그 정도는 기본이지. 이 야닉 펠만 믿으라고!”

쾅, 야닉이 문을 발로 차며 마개동 부실을 나섰다. 남겨진 벤디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 생각했다.

‘야닉…….’

내가 언제 문을 발로 차고 다녔어.
* * *

자리에 앉은 벤디는 초조하게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야닉과 몸이 바뀐 사실보다, 저녁이 늦으면 사슴으로 변할 제 몸이 문제. 한시 빨리 원래 상태로


돌아가야만 했다.

달칵, 그때 마개동 부실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

“레넌.”

벤디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직, 힘에 못 이긴 의자가 부서졌다.

‘……레넌?’

레넌 에던트가 아니라?

레넌은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야닉을 살폈다.

‘꼴이 왜 저래.’

대강대강 당겨 묶던 머리는 단정한 반 묶음에, 풀어헤치고 다니던 셔츠는 목깃까지 잠근 모습.

‘무슨 실험 중인가?’

의아해진 그가 두리번거렸으나 야닉 외에 다른 자는 없었다.

“회장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회장?”

그제야 제 상태를 인지한 벤디가 허둥지둥 변명했다.

“아, 회장은 학생회실에…….”

레넌의 표정에 일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학생회실 출입 금지를 당한 처지라, 얼굴을 볼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다.

“언제 돌아오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

무심코 제 말투로 핑계를 이어 가던 벤디는 아차 싶었다.

‘야닉처럼.’

이내 주먹을 그러쥔 벤디가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그건 이 야닉 펠과 회장만의 긴밀한 비밀이다!”

“긴밀한?”

“그래, 긴밀한!”
여상히 웃고 있던 레넌의 미소에 금이 갔다.

“단어 선택이 좀 별로네.”

저벅저벅, 벤디는 천천히 다가오는 레넌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늘 가슴팍이었던 눈높이가 똑같은 것도 어색하고,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평소 살살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날것의 맹수가 따로 없었다.

소스라친 벤디가 얼른 커튼 뒤로 장대한 몸을 숨겼다.

벤디처럼 몸을 반만 내민 야닉을 마주한 레넌은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우람한 팔뚝을 하고선
꼼지락거리는 꼴도 화를 돋우는 데 한몫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없애고 싶지.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힌 벤디가 소리쳤다.

“회, 회장이다!”

“어디.”

한순간에 살기를 누그러뜨린 레넌이 쪼르르 밖으로 튀어 나갔다.

회장~ 부르는 목소리에 꽃이 활짝 폈다.

탁, 문이 닫혔다. 벤디가 한숨 돌리기 무섭게 또다시 벌컥 문이 열렸다.

“학생회장은.”

원이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흑발은 흐트러진 상태에,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두려움을 떨칠 시간조차 얻지 못한 벤디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없어요?

원의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차, 저도 모르게 존대를 사용해 버린 벤디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

황금색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었다. 부모나 교수에게조차 존대를 쓰지 않는 야닉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정신이 아득해진 벤디는 구릿빛 피부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이 상황에서 야닉이라면 뭐라고 말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뭔가 숨기고 있군.”

“숨기다니, 네놈에게는 이 야닉 펠의 모든 걸 보여 줬다!”

원의 미간이 한층 굳어졌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듣기 거북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소멸시키고 싶을까.

특히 저 불안하게 일렁이는 암갈색 눈망울, 벤디를 따라 하는 듯한 행동거지. 야닉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열 받았다.

그런 분노와는 별개로, 각인한 늑대의 본능이 부르짖고 있었다. 야닉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화르륵.

손에 마법을 소환한 원이 갈등에 사로잡힌 사이, 벤디는 간절하게 문밖을 가리켰다.

“기, 기억났다! 회장은 레넌 에던트랑 잠깐 아래층으로 갔어!”

“뭐?”

곧바로 뒤돈 원이 쿵, 벽에 돌진했다.

“윽.”

비틀, 얼굴에 손을 짚은 그가 휘청거리며 복도로 나섰다.

간신히 두 번째 고비를 넘긴 벤디는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하나.’

이러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어.

찌직. 두꺼운 커튼을 찢으며 망설이는 찰나, 옆얼굴에 왠지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벤디는 기절할 뻔했다.

창틀에 수그려 앉은 헤일린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이 사자는 왜 자꾸 창문으로 다니는 거야.’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헤일린은 온 얼굴 구멍을 확장한 야닉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따라 유독 던져 버리고 싶은 낯짝을 하고


있었다.

“사,”

하마터면 사슴은 어디 있냐고 물을 뻔한 헤일린이 멈칫했다.


잠시간 말을 고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벤디는.”

딸꾹.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을 처음 들은 벤디가 딸꾹질을 이어 갔다.

“모, 몰라.”

헤일린은 영 수상한 야닉을 느릿하게 훑었다.

네놈 따위가 감히 회장을 찾다니!

그런 앞잡이 같은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야닉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바빴다.

꿰뚫릴 듯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벤디는 황급히 문밖을 가리켰다.

“회, 회장은 밖에!”

“…….”

“레넌 에던트와 원 리오나드랑 함께 있,”

쾅,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헤일린은 마개동 부실을 박차고 나갔다.

겨우 홀로 남겨진 벤디가 참고 있던 숨을 탁 터뜨렸다.

“하…….”

야닉으로서 마주한 세 사람은 분위기가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왜 다른 학생들이 설설 피하는지, 또 그들이 육식 수인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

매서운 세 사람 덕분에 다리에 힘이 풀린 벤디가 책상을 그러쥐었다. 우지직, 책상 모서리가 부서졌다.

‘……빨리 와, 야닉.’

나 너무 무서워.

* * *

“뭐야, 회장. 내 얼굴로 왜 죽상을 하고 있어.”

마개동 부실로 돌아온 야닉은 살짝 당황했다.

배낭을 가지고 오는 잠깐 사이에 자신의 모습이 십 년은 늙어 있었다. 빌빌 바닥을 기고 있는 건 덤이었다.

찔끔 눈물을 훔친 벤디는 절절하게 말했다.

“야닉……. 빨리 가자, 빨리, 의무동으로…….”


동굴 같은 저음으로 울먹이는 꼴이라니. 벤디의 탄탄한 전완근에 떠밀린 야닉이 복도로 나섰다.

겨우 진정한 벤디는 그가 가져온 갈색 배낭을 꾸역꾸역 등에 멨다. 가방끈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야, 회장. 왜 이렇게 들러붙어?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야닉은 어깨를 털어 벤디를 떨쳐 냈다.

그러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벤디는 그의 팔을 꼭 붙든 채 주위를 살피기 바빴다. 원래는 사슴 수인인


스스로의 몸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참다못한 야닉이 듣기 좋은 미성으로 고함질렀다.

“이 야닉 펠의 몸으로 그딴 징그러운 짓 하지 말라고!”

“의무동까지 가는 잠깐인데 뭐 어때.”

숙덕거리며 아웅다웅하던 벤디와 야닉의 걸음이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원과 레넌, 헤일린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에.

야닉-벤디-의 거짓부렁에 속아, 내내 복도를 헤집고 다닌 세 사람이 표정을 굳혔다.

“…….”

천천히 움직인 그들의 시선이 벤디에게 머물렀다.

긴 머리카락을 대충 위로 올려 묶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교만한 자세. 옷차림도 마치 불량 사슴 같은


모양새였다.

뒤이어 시선이 야닉에게 옮겨 갔다.

두꺼운 근육질 몸으로 벤디의 조그마한 체구에 매달리다시피 한 야닉.

가장 의아한 건, 육식 수인이라면 기겁하고 보는 벤디가 야닉의 접촉을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콩달콩한 장면을 마주한 세 사람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야닉 펠…….’

거짓말로 자신들을 따돌리고, 사슴과 이러고 있었겠다.

이성이 홀랑 날아간 그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쩐지.’

오늘따라 야닉 펠이 유독 거슬린다 싶더니. 묘비를 세우는 날인 모양이었다.


#<127 화>

원과 레넌, 헤일린의 형형한 눈빛이 오롯이 벤디를 향했다.

‘왜 나한테…….’

기에 눌린 벤디가 야닉의 뒤에 딱 달라붙어 숨었다. 슬프게도 체격 차이로 인해 몸의 반도 채 가려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그래.”

“떨어지세요.”

“떨어져.”

찰싹 달라붙다시피 한 벤디와 야닉을 본 세 사람은 머리에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지금의 행동이 축제 준비의 일환이든 뭐든 용인할 수 없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정적 속, 이를 짓씹은 레넌이 손을 뻗었다.

“회장, 이리 와.”

찰거머리처럼 붙은 걸 떨어뜨려 놓기라도 해야 야닉 펠을 처리할 수 있었다.

정신이 반쯤 빠진 벤디가 자연스레 가려고 하자, 소스라친 야닉이 벤디의 전완근을 붙들었다.

‘회장, 널 부르는 게 아니라 날 부르는 거라고!’

‘그렇지 참.’

소곤거리는 둘을 본 세 사람의 기세가 더욱 살벌해졌다.

그들의 노골적인 살기에 여과 없이 노출된 벤디는 눈물마저 핑 돌았다.

그 모습에 기겁한 야닉이 벤디의 양 뺨을 붙잡아 당겼다.

‘미쳤어? 이 야닉 펠의 얼굴로 울지 마!’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벤디가 구슬프게 토로했다.

‘사람이 울 수도 있지.’

‘하이에나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라고!’

‘무슨 기준이야 그건.’

속닥속닥.

거의 입을 맞추기 직전인 둘을 본 원과 레넌, 헤일린은 결심했다.


벤디가 보는 앞이든 말든 야닉 펠의 존재를 지워야겠다고.

쭈뼛, 그 순간 야닉의 동물적 감이 고개를 들었다.

저 발 닦개들이 감히 내 몸에 위해를 끼치려 하고 있구나.

“어딜!”

방어 본능이 솟구친 야닉이 퍽, 레넌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

벤디의 발차기에 방어조차 못 한 레넌이 정강이를 그러쥐었다. 고통과 짜릿함이 동시에 덮쳐 왔다.

멈추지 않은 야닉이 곧장 원의 흑발을 잡아챘다.

“무슨!”

찰싹, 찰싹. 연타로 머리통을 갈긴 야닉은 뒤이어 헤일린의 복부에 박치기를 날렸다.

“윽!”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게 아닌 헤일린이 휘청거렸다.

괜히 막다가 다칠까, 세 사람은 벤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 너희 셋. 경고하는데!”

야닉은 양팔을 펼쳐 우람한 벤디의 앞을 막아섰다.

“야닉에게 손끝 하나라도 닿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줄 알아.”

쿵.

이게 뭐라고 상처인지. 세 사람은 더 이상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들과 냉전을 이어 가던 벤디가 그새 야닉과 정분이라도 난 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얻어맞은 것도 모자라 망연하게 선 세 사람을 지켜보던 벤디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실을 알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 결론에 다다른 찰나, 삼 인방을 일방적으로 두드린 쾌감에 취한 야닉이 웃어젖혔다.

“하하하! 이 야닉 펠의 손맛이 어떠냐, 무능한 발 닦,”

습관적으로 3 인칭을 내뱉어 버린 그가 입을 텁 가로막았다.

원과 레넌, 헤일린의 시선이 천천히 벤디에게 모였다.

‘……야닉 펠?’

가출한 이성이 돌아오며 사고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휙, 뒤이어 의문 어린 눈길이 야닉에게 모였다.

벤디는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듬직한 골격을 움츠리며 야닉의 뒤에 숨었다.

“…….”

껄렁한 불량 벤디와 소심한 겁보 야닉.

‘설마.’

이 이상한 구도가 탄생하게 된 정황을 눈치챈 세 사람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에 하나, 마개동 부실에서 마주친 야닉 펠의 몸에 손을 댔다면.

조금 전에 벤디와 야닉의 접촉을 참지 못하고 야닉 펠을 건드렸다면.

그건 벤디에게 직접 해악을 끼치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그들은 다시 휙, 벤디의 탈을 쓴 야닉을 돌아봤다.

“으아악!”

맞는다.

비명부터 지르며 팔로 가로막던 야닉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감았던 눈을 떴다.

발 닦개들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 차마 어떠한 짓도 하지 못했다.

‘아하.’

사랑하는 학생회장의 몸이라 아무 짓도 못 하는군.

야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차피 들킨 거, 한풀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그가 셋을 향해 배를 쭉 내밀었다.

“왜, 뭐, 어쩌게, 쳐 봐, 쳐 보라고!”

쉭, 쉭. 조그만 주먹이 그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뻗어졌다.

정성을 다하여 죽이고 싶다.

부글부글 끓는 속과 별개로, 깐죽대는 야닉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세 사람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닉 펠.’

‘이 하이에나 새끼…….’

‘돌아오면 보자.’

하등한 놈들! 야닉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물들였다.

* * *
아카데미 교정은 이틀 후에 있을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건 어디로 옮기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둬.”

천막을 설치하고, 축제 비품을 정리하던 학생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것들아, 나는 투명 인간이냐? 어?”

우선은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로 꼬장 부리는 학생회장이었다.

“억!”

방방 날뛰던 학생회장이 발이 꼬여 휘청거리자, 감시하듯 뒤따르던 원이 얼른 허리를 받쳤다.

“조심.”

“원 리오나드, 고맙,”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네놈 머리통을 딸 줄 알아.”

“…….”

“잘 관리해.”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반면 입으로는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벤디를 보는 원의 시선 또한 누구 하나 죽일 듯한 눈빛. 얼굴과 몸이 다른 자아를 가진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닉의 허리와 등을 받쳐 안아 든 채 옮기는 중인 레넌이었다.

이윽고 야닉에게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넌, 꼭 이렇게 가야 돼?”

“언제 누가 공격할지 모르니까.”

눈을 가느다랗게 휜 레넌이 타이르듯 말했다.

“야닉은 원한을 많이 산 편이라.”

야닉이 품에 안은 갈색 배낭 속에는 노란 짐승이 들어간 상태.

심지어 야닉의 품이 안온하기라도 한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덜렁거리고 있었다.

의무동 방향으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학생들이 눈을 비볐다.

학생회장 무리와 관련하여 더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자부해 왔는데.

툭, 학생들의 손에 있던 각종 공구나 소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연신 눈을 비벼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의무동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건 의관의 깊은 한숨이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배합이 엉망인 물약을 뒤집어쓰고 오는 마법부 학생들이 태반.

덕분에 의무동에 해약을 항상 구비해 두는 실정이었다.

“이 약을 마시고 한두 시간이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안도한 벤디와 야닉이 물약을 삼킨 순간 쾅! 의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회장,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들이닥친 인물을 본 두 사람의 안색이 까매졌다. 안나였다.

“밀란느 학장님께서 급하게 찾으시는데.”

성큼성큼 걸어온 안나가 벤디의 탈을 쓴 야닉을 붙잡았다.

“회장, 왜 의무동에 있어요. 어디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어서 가요, 긴급한 용무라고 하셨으니까.”

“이봐, 잠깐, 잠깐.”

당황한 야닉이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왜 이래요?”

의아해진 안나가 눈을 깜박이자, 구석으로 몸을 피한 벤디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학장실에는.”

“……?”

“제가 가야 돼요.”

저놈이 돌았나. 안나는 그런 표정으로 벤디를 쳐다봤다.

결국 벤디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실토했다.


“안나가 잡고 있는 건 야닉이에요.”

“뭐요?”

진저리친 안나가 일단 벤디의 팔을 팽개쳤다.

휙, 휙. 안경 아래 녹색 눈이 두 사람을 빠르게 번갈아 봤다.

학생회의 실권자. 그녀의 기세에 눌린 사고뭉치 두 사람이 구석으로 모였다.

“…….”

오싹한 긴장 속에서 수차례 시선이 오갔다.

마지막으로 야닉-벤디-이 멘, 끈이 팽팽한 갈색 배낭에 안나의 눈길이 닿았다. 그 안에 있는 노란


짐승까지.

‘그래서…….’

의무동에 있었던 거군. 정황 파악을 끝낸 안나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난 또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목소리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벤디와 야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고 치지 말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괜히 숨겼나 봐.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하는 동시에 우지끈, 안나가 책상다리 하나를 뽑아 들었다.

“뭘 숨고 그래요, 괜찮아요.”

“…….”

“이승을 등지면 전부 없던 일이 되니까.”

학생회 대표 사고뭉치 콤비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학장실.

밀란느 학장은 접객용 소파에 앉은 다부진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곰에게 뜯기기라도 했는지 긴 머리카락은 산발이었으며, 교복은 물론 몸과 마음도 너덜너덜해 보였다.


“……벤디 학도.”

꽤 오래 닫혀 있던 밀란느 학장의 입이 간신히 열렸다.

“미친 게냐?”

“죄송해요.”

고분고분 돌아오는 목소리마저 굵직하기 짝이 없었다.

“자네 몸은 어디 있지?”

“안나가 안전하게 감시하고 있겠대요.”

분명히 부른 건 벤디인데, 야닉과 대화를 나누게 생긴 밀란느 학장이 궐련을 뻑뻑 피웠다.

그러나 더 짚고 넘어갈 순 없었다. 당장 대화를 나눠야 할 사안이 있었기에.

“자네 신변에 관한 아주 중요한 일이다.”

밀란느 학장은 학장실 내부를 곁눈질했다.

정확히는 소파에 늘어진 레넌과 벽에 기대어 선 원, 배낭에 들어간 노란 짐승을.

벤디가 야닉으로 변하든 말든, 진짜 벤디의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찰거머리들이었다.

“상관없겠느냐?”

그런 사안을 저들이 들어도 무관하냐는 의미.

밀란느 학장의 말에, 벤디는 투박한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지난 며칠간 저들을 피한 건 약간의 심술에 불과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저 세 사람이 수인 아카데미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걸.

그렇기에 노랑이의 이중생활을 숨긴 저들이 남들보다 괜히 더 괘씸하게 여겨졌을 뿐이었다.

‘벤디야, 너 자꾸 고구마랑만 놀면 외톨이 된다?’

‘엄마, 난 고구마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에이, 언젠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야.’

‘엄마가 아빠를 믿는 것처럼?’

‘잠깐, 그거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을 해 보자고.’

엄마, 나도 조금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아.

잠시간 입술을 달싹인 벤디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육식 수인인 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겁 많은 사슴 수인이 처음으로 내비친 표현.

그 귀한 발언을 붉어진 야닉의 얼굴과 수줍은 야닉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니.

원과 레넌, 헤일린은 왠지 한없이 억울해졌다.

#<128 화>

밀란느 학장은 지체 없이 서류 한 장을 탁상에 내밀었다.

“학장님, 이건…….”

“마물 토벌에서 산란기 마물을 건드린 학생 말이네. 그 학생을 추궁하는 도중에 알아낸 정보일세.”

E 클래스의 빈 글레어와 관련한 추적 정보. 서류를 받아 든 벤디가 빠르게 읽어 내렸다.

빈 글레어는 하계 방학 당시, 우연히 백호 영역 인근에서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한 벤디를 목격했다.

‘벤디 레피……?’

의아하게 여긴 그는 평소 감정이 좋지 않던 벤디의 뒤를 파헤쳤다.

그러다 벤디와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자가 양 영역에서 입학시험을 치른 사실까지 다다랐고, 이후


시험관에게 사주하여 벤디의 인적 정보를 받아 낸 것이었다.

“신입생 인적 정보와 방문증을 관리하던 초식 영역 측 시험관이었지.”

“…….”

“자네에게 그 같잖은 편지를 보낸 자도 빈 글레어 본인이라고 실토했네.”

“혹시 사슴 수인인 사실도…….”

“그건 아닐세. 초식 수인인 사실까지만 알고 있었으니.”

뭐가 됐든 명백한 기밀 유출. 손길이 닿기 어려운 초식 영역인 만큼 관리가 부진한 탓이었다.


“아카데미 측…… 그러니까 나의 불찰이지, 면목 없군. 그러나 구구절절한 사과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게
있네.”

밀란느 학장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험관에게 사주하여 인적 정보를 알아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누구,”

“웬스턴 레피.”

벤디의 구릿빛 피부가 백지장처럼 희게 질렸다.

“조사해 보니 벤디 학도, 자네와 성이 같은 걸 넘어, 공교롭게도 종족 또한 같더군.”

벤디를 비롯한 세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호 영역의 반란과 마물 토벌에 정신이 빠진 사이, 웬스턴 레피의 그림자가 어느덧 훌쩍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원과 레넌, 헤일린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세 가문의 압박이 가해지며 궁지에 몰린 차에, 웬스턴 레피의 행적이 묘연해졌다.

저택 기밀 통로, 그것도 단신으로 사라진 후, 그다음 행적이 이곳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밀란느 학장은 뒤이어 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오늘 웬스턴 레피로부터 전서가 왔네. 벤디 학도, 자네 앞으로.”

벤디는 학장이 건넨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숙부…….’

애써 진정하려 했으나, 바람과 달리 손이 벌벌 떨렸다.

힘을 길렀을지언정 오랜 시간 쌓아 온 공포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심호흡한 벤디가 천천히 전서를 펼쳤다.

[데리러 가마.]

전서라고 보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짤막한 한 줄.

그러면서도 숨 막히는 한 줄을 바라보는 와중, 갑작스레 벤디의 시야가 핑 돌았다.

‘혹시.’

약효가 끝나서 몸이 원래대로 뒤바뀌는 걸까.


왜 하필 지금……. 뒤이어 어지럼증이 일며 눈앞이 까무룩 점멸했다.

* * *

한편, 야닉의 탈을 쓴 벤디를 학장실로 보내기 전.

안나는 두 사고뭉치 중, 오로지 야닉의 육체만 집중적으로 족쳤다.

벤디의 육체는 대외적인 장소에 나서야 할 귀중한 것이니까.

원과 레넌, 헤일린은 말려야 하나 약간 고민했으나…… 어차피 한두 시간 후면 야닉에게 고스란히 남을


흔적이기에 방관했다.

어느덧 석양이 내린 교정.

“거긴 끝났어?”

“아직, 재료가 부족해!”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정은 축제를 준비하는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벤디의 탈을 쓴 야닉은 학생들 사이로 지나가며 꽥꽥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괴력 곰! 내 소중한 몸을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단발머리로 자르려다가 참은 거니 입 닫고 따라와요. 학생회 천막에 학생회장이 얼굴을 비추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당기지 마, 아프다고! 제길, 회장은 모든 게 완벽한 주제에 왜 맷집만 없냐고!”

안나는 날뛰는 야닉을 잡아 끌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몸이 바뀌는 것도 유용하군요.”

“뭔 헛소리야?”

“정신은 학장실에 가고, 몸은 다른 일을 하고. 몸은 두 개, 일도 두 번.”

그 말을 듣던 야닉은 새삼 벤디가 안쓰러워졌다. 어쩌다 이런 가혹한 자를 부학생회장으로 거둬서는.

“이 악독한 미친 괴력 곰탱이……!”

“입 닫아요, 3 인칭 변태.”

그때였다.

저벅,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에게 검은 로브를 턱 끝까지 눌러쓴 자가 다가섰다.

메이지, 혹은 마개동 부원인가 싶었던 안나와 야닉이 발걸음을 멈췄다.

“메이지?”
추측과 달리, 이윽고 후드 속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구나.”

“…….”

“벤디 레피.”

* * *

같은 시각, 학장실.

웬스턴이 보낸 전서를 쥔 채 말이 없던 벤디는 대뜸 무릎에 고개를 푹 내리박았다.

“벤디 학도?”

“회장!”

놀란 밀란느 학장과 세 사람이 가까이 가자, 고꾸라져 있던 벤디가 휙 고개를 들었다.

“젠장, 어지러워 죽겠네. 뭐야, 여긴 어디야?”

어질어질한 머리를 그러쥔 야닉이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야에 제게 손을 뻗은 학장과 발 닦개 삼 인방이 들어왔다.

“댁들이 왜 여기 있어? 학장실에 간다며.”

갑작스레 나타난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둘러보던 야닉은 곧 더듬더듬, 제 몸을 매만졌다.

밤낮으로 다진 삼각형 근육.

소중한 전완근.

하이에나의 아름다움을 알릴 장발.

‘약효가…….’

끝났다.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투두둑, 야닉은 목깃까지 옥죄고 있던 셔츠 단추부터 뜯어 버렸다.

머리채 풀고 환호하던 그는 문득 제 손에 있는 웬 종이를 내려 봤다.

“이건 또 뭐야.”

[데리러 가마.]
“데리러 온다고? 누가 데리러 오는데?”

어리둥절한 그의 질문에, 밀란느 학장을 비롯한 세 사람의 몸이 경직됐다.

그들도 야닉 덕분에 지금 막 전서 내용을 알게 된 참이었다.

묘한 반응을 살피던 야닉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거 그건가?”

그의 혼잣말을 들은 밀란느 학장이 얼른 물었다.

“야닉 학도, 뭔가 알고 있는 게냐?”

“뭐, 딱히 별건 아니고. 조금 전까지 학생회장의 몸에 있을 때 누가 찾아와서.”

“찾아…… 왔다고……?”

“뭐라더라, 오랜만이라고 했나? 아무튼 몸이 바뀌었으니 학생회장도 지금쯤 만나고 있을,”

“제길!”

그와 동시에 원과 레넌, 노란 짐승이 학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밀란느 학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야닉은 열린 문을 끔벅끔벅 바라봤다.

쾅, 사람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 헤일린은 벤디의 갈색 배낭을 들고 뛰쳐나갔다.

덕분에 아차 정신을 차린 야닉이 뒤따라 뛰었다.

“왜, 뭔데. 무슨 일인데? 나도 데려가라고!”

* * *

“야닉 펠, 왜 이래요?”

안나는 별안간 비틀거리는 벤디의 몸을 부축했다.

“으…….”

꽝꽝 울리는 머리를 부여 쥔 벤디가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된 거지?’

학장실에서 숙부가 보낸 전서를 읽던 중, 갑자기 시야가 지진이 일듯 흔들렸다.

움츠리고 있던 고개를 든 벤디가 사위를 둘러봤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한창 축제 천막을 준비 중인 학생들.

제가 선 곳은 학장실이 아닌 교정 한복판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약효가 끝났다. 안도한 벤디가 제 몸을 더듬거렸다.

“야닉 펠, 괜찮아요?”

아직 상황을 모르는 안나가 벤디의 팔을 붙잡았다.

“안나, 저 원래대로 돌아왔,”

“야닉 펠? 이곳에서 사용하는 네 이름인가 보군.”

철렁.

설명하려던 벤디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살아가며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목석처럼 굳었던 벤디가 억지로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 검은 로브를 눌러 쓴 존재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숙부…….”

‘숙부?’

벤디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안나가 뒤로 걸음을 물렸다. 옆에 끼어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끌벅적하던 교정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웬스턴을 마주한 벤디는 피가 고이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잡은 마음과는 달리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려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일순 머릿속에 밀란느 학장의 목소리가 스쳤다.

‘신입생 인적 정보와 방문증을 관리하던 시험관이었지.’

‘방문증.’

설마하니 육식 수인들이 가득한 아카데미 한가운데로 찾아올 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예측할 수 없었다.

웬스턴은 일정 거리를 두고 소곤거리는 학생들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하나같이 육식 수인.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도 존재만으로 꺼림칙한 이들이었다.

“간도 크구나, 이런 곳에 숨어 지냈을 줄은.”

그러니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코빼기도 찾을 수 없지. 입술을 비튼 그가 벤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서는 받았을 거다.”

“…….”

“돌아가자꾸나.”

벤디는 제게 뻗어진 손을 묵묵히 응시했다.

“돌아오면 모든 걸 용서하마. 네가 멋대로 사라져서 입은 모든 손해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

책임. 그 알량한 단어에 벤디는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전부 제 욕심으로 자초한 일이 아닌가.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도, 그 많은 빚도.

“숙부, 저는.”

메인 목을 꾸역꾸역 삼킨 벤디가 억지로 입술을 열었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작으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를 들은 웬스턴은 천천히 후드를 벗어 내렸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벤디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레피 저택에서 달아날 때만 해도 번듯한 인상이었는데.

도망자처럼 지저분한 수염과 눈 밑 그늘.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사이에 한없이 늙고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보다시피 나는 더 잃을 게 없지.”

반면 학생들은 벤디와는 조금 다른 감상으로 놀란 상태였다.

벤디와 언뜻 닮은 인상에, 보통의 중년 육식 수인보다는 조금 작은 체격.

자신들에 비해 유순한 이목구비. 그리고…….

“송곳니가…… 없는데?”

“어, 진짜네?”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이내 비슷한 결론에 다다랐다.

“……초식 수인?”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또렷한 목소리를 들은 벤디가 당황하며 고개를 틀었다.

벤디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 웬스턴이 소환한 마법이 벤디를 향해 쏘아졌다.


그 장면을 본 안나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회장!”

챙강, 날아든 마법이 벤디의 팔찌를 깨뜨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화아악-

동시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새하얀 빛이 일었다.

“이 빛은 뭐야?”

“윽, 눈부셔!”

팔로 눈을 가렸던 학생들이 시야를 되찾았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모두가 아는 학생회장이 아니었다.

#<129 화>

팔찌가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주홍색 머리카락이 옅어지는 광경이 벤디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였다.

“…….”

몰려든 인파 사이로 형용할 수 없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밀색 머리카락, 같은 색깔의 눈동자, 선한 눈매.

학생들은 낯선 모습인 학생회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들과 그다지 다를 게 없으나 한편으로는 확연하게 다른 외양. 영락없는 초식 수인의 모습이었다.

숨 쉬는 법마저 잊어버린 벤디는 제게 머무른 수십 쌍의 눈동자를 천천히 둘러봤다.

아득한 고요 한가운데, 학생들의 눈빛이 일순 짙게 물들었다. 모습이 급변하며 퍼져 나간 초식 수인


특유의 향이 그들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설마…….’
초식 수인으로 변하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던 레넌과 헤일린의 모습이 벤디의 눈앞을 스쳤다.

그러나 다행히 학생들의 눈에 떠오른 기이한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밀폐되지 않은 장소와 불어온 바람이 그 특유의 기운을 날려 보낸 듯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우뚝 선 벤디는 속이 울렁거렸다.

‘모든 게…….’

끝났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사슴 수인으로 변했다.

와중에도 이런 상태로 육식 수인들 사이에 무방비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 전신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웬스턴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역시.’

양 영역에서 수인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른 유일한 수험생.

그게 벤디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막막했다.

행적을 쫓을 때 마탑이 개입해 온 것을 고려하면, 벤디가 아카데미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벤디가 육식 수인으로 위장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웬스턴은 아연한 반응인 학생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정체만 드러내도 끝날 일.’

초식 수인이 육식 수인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만큼 이들도 매한가지일 테니까.

더군다나 회장이라 불리는 벤디를 미루어 보아, 초식 수인이 자신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알면 반감을
불러일으킬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다시피.”

얼빠진 학생들에게서 시선을 뗀 웬스턴이 벤디를 마주 봤다.

“이곳은 너 같은 사슴 수인이 있을 장소가 아니지.”

사슴 수인.

조용하던 학생들 사이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의심을 확실시시켜 주는 발언이었다.

“더는 육식 수인이 아닌 네게 이곳은 가혹한 장소일 테니…….”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웬스턴이 벤디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목숨이 중하다면 이제 그만 나를 따라 돌아가자꾸나.”

움찔한 벤디는 거리가 좁혀진 만큼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자신을 지독한 두려움 속으로 끌어들이던 손. 제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내려 보던 벤디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가문을 나온 건…… 사자 수인과의 혼담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조곤조곤한 목소리 끝이 현저하게 떨렸다.

“하지만 돌아가면 숙부는 다시 혼담을 추진하시겠죠.”

웬스턴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어쭙잖은 거짓말을 해 봤자 혼담을 피하려 여기까지 도망쳐 온 벤디가 믿을 리 없으니까.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네가 혼담에 응하지 않으면 레피 가문의 근간이 흔들린다. 네 부모가 사랑해 마지않던 가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지.”

“…….”

“또한 페트리온을 레피 가문의 핏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다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까마득한 어린 날.

눈앞에 푸른 페트리온의 풍경과, 그 가운데 선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고, 귀한 몸으로 어찌 미천한 제 대신…….’

농장주가 안절부절못하며 레피 부부 주위를 맴돌았다.

짚을 엮어 만든 모자를 쓴 레피 부부는 쉬잇-! 맞춘 것처럼 입가에 호미를 가져갔다.

‘우리 딸이 다 듣지 않나.’

‘조기 교육의 일환이니 그대는 저리 가서 쉬고 있게.’

‘하지만…….’

‘어허. 밭을 매든, 고구마를 캐든 페트리온의 모든 일은 레피 가문 소관임을 가르치는 중일세.’

농장주는 휘리릭, 반대편에서 호미를 능숙하게 휘두르는 벤디를 곁눈질했다. 고작 여섯 살 난


어린아이임에도 고구마 캐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있잖아, 엄마.’
남편을 충분하게 수확한 벤디가 돌연 레피 부부를 돌아봤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아빠는 누구보다 페트리온을 사랑하는 사람이잖니.’

조기 교육, 조기 교육. 세뇌하듯 되뇐 레피 부인이 작위적으로 대답했다.

‘영역민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혼인을 결심했지. 엄마는 우리 벤디도 그런 가주로 성장하기를,’

‘엄마, 그게 다야?’

‘다야.’

‘아리엘…… 진짜 그게 다라고?’

‘아니, 여기서 당신이 울먹이면 어떡해?’

결국 조기 교육이란 목적은 실패한 채 다투던 레피 부부의 모습이 벤디의 머릿속을 채웠다.

웬스턴은 물기 어린 벤디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페트리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제 부모로 인해, 벤디는 이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쉽게 무너지곤 했다.

꾹 다물려 있던 벤디의 입이 한참 만에 열렸다.

“레피 가문과 혼담이 오간 가문, 이스단 가문이잖아요.”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눈을 홉뜬 웬스턴이 말끝을 흐렸다.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 경악할 만한 사실을 들은 학생들이 크게 동요했다.

“이스단 가문이면 헤일린 이스단의……?”

“진짜 권력을 등에 업은 거였네.”

감히 헤일린 이스단을 배낭에 쑤셔 넣어 다닌 건 약혼자이기에 가능했던 일. 이제야 벤디의 모든 기행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술렁이는 학생들을 일부러 돌아보지 않은 벤디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를 데리고 돌아가도 혼담은 이어 갈 수 없어요. 가문에 얹어진 빚도 그대로일 거고요.”


“그게 무슨 소리,”

“이스단 가문에 가서 혼담을 거절한 게 바로 저니까.”

“……!”

“분명히 사라 이스단 님의 혼담 파기 전서가 레피 가문에 도착했을 텐데요.”

사자 영역의 무자비한 패자, 사라 이스단.

헤일린 이스단보다 껄끄러운 이름을 들은 학생들이 낯빛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녀가 제안한 혼사를
거절하고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색이 된 또 한 사람, 웬스턴이 노성을 터뜨렸다.

“어쩌자고 그딴 짓을……! 가문의 미래는 생각지도 않는 것이냐!”

숙부가 항상 저를 억압할 때 짓던 익숙한 표정.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츠릴 뻔한 벤디는 애써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숙부가 차지한 레피 가문 따위 망해 버려도 상관없어요.”

웬스턴보다는 차라리 생면부지의 타인이 페트리온을 다스리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는.”

잠깐 말을 끊은 벤디는 결심을 다지며 입술을 열었다.

“혼인 따위 하지 않아요.”

“…….”

“숙부에게 제 자리를 돌려받을 거니까.”

“건방진!”

뿌드득, 웬스턴에게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부모나 자식이나. 특히 아리엘 레피를 빼닮은 올곧은 눈동자가 볼 때마다 속을 역겹게 만들었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강제로 데려가는 수밖에.”

순식간에 손에 마력을 응집한 그가 마법을 소환했다.

커다란 마력구를 마주한 벤디는 땀이 배어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막대 과자가…….’

없다.

긴장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력 응집을 도와주는 무기 없이, 오로지 미숙한 제 마법 실력에 의존해야 했다.


한편, 축제 천막이 모인 곳을 향해 달리던 레넌은 눈을 크게 떴다.

몰린 인파 사이로 웬스턴과 대치 중인 벤디가 보였다.

뒤이어 금방이라도 벤디에게 쏘아질 듯한 마법구를 발견한 그가 숨을 삼켰다.

탁, 천막에서 시식용 꼬치구이를 집어 든 레넌은 급한 대로 벤디를 향해 던졌다.

“회장!”

“……!”

날아오는 꼬치구이를 발견한 벤디가 손을 뻗었다.

가까스로 낚아채자마자 쿠당, 넘어진 벤디는 얼른 일어나서 웬스턴을 향해 겨눴다.

제게 뻗어진 꼬치구이를 마주한 웬스턴은 기가 찬 숨을 흘렸다.

“그딴 걸로 뭘 어찌하겠다고.”

하잘것없는 마력만큼 형편없는 무기였다.

맞아도 생명이 끊이지 않을 만큼의 마법구가 이윽고 웬스턴의 손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꼬치구이 끝에서 거대한 바람이 터져 나갔다.

콰아앙!

두 마법이 공중에서 충돌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파장을 일으키기도 잠시, 벤디의 바람이 웬스턴의 마법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휘오오-

한층 크기를 불린 벤디의 바람이 웬스턴을 향해 쏘아졌다.

제게 쇄도하는 회오리를 맞닥뜨린 그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체…….’

몇 달 전만 해도 작은 마법 하나 소환하지 못했던 비렁뱅이가 어떻게.

휙, 웬스턴은 회오리 너머의 벤디를 당혹스럽게 바라봤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눈빛.

그의 한숨 한 번에도 움츠리던 벤디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컥!”

생각을 채 끝맺기도 전에 쾅! 회오리에 튕겨 나간 웬스턴이 나뒹굴었다.

“끄윽, 헉…….”

몇 번이나 일어나려 들썩이던 그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

쓰러뜨렸다.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벤디는 힘없이 꼬치구이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손쉽게 웬스턴을 제압한 결과에 대한 희열보다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고작 저런 존재에게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묶여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쌔액, 쌔액. 가쁜 숨을 몰아쉬던 벤디는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조금 전의 마법에 휘말린 학생이 있을까 싶은 걱정에서였다.

주춤.

마침 시선이 마주친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그들의 반응을 의아하게 살피던 벤디는,

‘……아.’

뒤늦게 현재 제 모습을 떠올렸다.

탁탁, 레넌에 이어 도착한 원과 헤일린은 낮게 탄식했다.

한발 늦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벤디는 여우 수인이 아닌, 사슴 모습으로 학생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

짙은 정적 속,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렵사리 고개를 움직인 벤디가 안나를 돌아봤다.

안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나…….’

그게 정말 화났을 때 보이는 얼굴임을 아는 벤디는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미간을 굳힌 신시아.

입을 떡 벌린 야닉,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린 라일라.

웬만해선 벗지 않는 후드를 끌어 내린 채 자신을 응시하는 메이지와 마개동 부원 몇몇.

X 클래스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까지.

수많은 이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핀 벤디는 깨달았다.

모두가 즐겁게 축제를 준비하던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130 화>

수인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몇 번이나 상상했다. 사슴 수인인 사실을 모두에게 들키는 순간을.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타인에 의해 밝혀지는 건 바라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윽. 벤디가 약간 몸을 틀자, 학생들이 또다시 주춤거리며 걸음을 물렸다.

껄끄러운 걸 대하는 듯한 태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이 육식 수인을 꺼려 여우 수인 행세를 한 만큼, 이들도 초식 수인이란 존재가 달갑지 않을 테니까.

오랜 세월을 거듭하며 세워진 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예상했다, 예상했는데…….

‘하지만…….’

이 정도로 눈물이 날 듯한 기분일 줄은.

눈치를 살핀 벤디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자박.

발을 뻗을 때마다 학생들이 물러나며 자연스레 길이 트였다.

인파 사이로 지나가는 내내 아무도 벤디를 붙잡지 않았다.

“…….”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학생들이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밀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엷게 흔들렸다.

원과 레넌, 헤일린은 잡지도, 그렇다고 따라가지도 못한 채 자리를 지켰다.


늘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벤디가 지금만큼은 혼자 있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꼬치구이를 든, 오늘따라 유독 작은 뒷모습이 멀어졌다.

* * *

기숙사에 콕 틀어박힌 벤디는 밤이 깊을 때까지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저벅. X 클래스 기숙사 주변에 다다른 원은 아직 불이 켜진 창문을 올려 봤다. 벤디의 기숙사 방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나.’

사라 이스단의 제안을 거절하고, 빚쟁이가 되면서까지 돌아온 아카데미인데.

육식 수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에 대한 상처는 늑대 수인인 그로서는 해결해 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를 잘 알기에 벤디에게 일단 들러붙고 보는 발 닦개 고양이들도 얌전히 있는 거겠지.

오늘 같은 날 알짱거리며 어설픈 위로를 건네다가 도리어 상처만 줄 확률이 높았다.

가만히 창문을 올려다보던 원은 어린 날, 감옥에서 들은 벤디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늑대야. 빛을 뿜는 저 벌레, 뭔지 알아?’

벤디는 감옥에 난 작은 창문으로 들어온 반딧불이를 가리켰다. 관심도 주지 않은 당시의 원이 흥 콧김을


뿜었다.

‘예전에 엄마가 슬픈 일이 있어서, 나랑 아빠가 저 벌레들이 엄청 많은 숲에 엄마를 데려갔거든.’

심드렁한 태도에도 아랑곳 않은 벤디가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랬더니 엄마 기분이 다시 좋아졌어. 그래서 그때부터 쟤 이름은 사랑 벌레야.’

벤디의 그런 한 마디 한 마디를 흘려들은 과거 자신의 머리를 깨고 싶었다.

‘뭐…….’

이제 와서 활용할 수 있는 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낮게 웃은 원이 손에 조그마한 둥근 빛을 소환했다.
한 개, 두 개.

곧 수십 개에 달하는 빛이 원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기숙사 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벤디는 사방이 환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수십 개의 작은 빛이 창밖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랑 벌레였다.

‘……원이구나.’

텅 빈 밀색 눈동자를 반짝반짝한 빛이 채웠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빛을 보고 있자, 바닥을 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지 않나.’

실상 졸업 때까지 완벽하게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숙부가 자신을 찾아내는 순간,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이미 여러 번 했으니까.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벤디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

실은 다가올 내일이 너무 두려웠다.

다들 자신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그런 그들 사이에서 사슴 수인 모습으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눈을 감으면 저를 보며 물러나던 모두의 표정과 움직임이 아른거렸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 * *

[X 클래스]

강의실 문 앞에 선 나는 쉽게 들어가지 못한 채 서성였다.

문을 여는 게 어쩐지 입학했을 때보다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괜히 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학생회장이 사슴 수인이라니, 뭔 헛소리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슴 수인. 그 단어 하나에도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어제 축제 준비를 하던 애들이 다 목격했대.”

“허…….”

“이제야 지금까지의 그 이상한 행동이 다 이해되네.”

뜬금없이 우리더러 사슴이라던 것도 그렇고. 익숙한 목소리 여럿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딱히 상관없지 않나?”

“아니, 기만이지 그건.”

“네가 직접 못 봐서 그래, 이질감이 확 느껴진다고.”

“솔직히 난 껄끄럽다. 초식 수인들은 육식 수인을 야만인쯤으로 여긴다는데, 지금껏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면서 속여 온 거니까.”

“쿠커, 네 생김새는 우리한테도 야만적인 편이야.”

“이 새끼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언저리에 콕콕 파고들었다.

그나마 가깝게 지낸 클래스메이트들의 반응이 이 정도면, 다른 학생들의 반감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가 대뜸 물었다.

“신시아, 넌 알고 있었어?”

일순간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한참 만에 신시아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여전히 감정을 읽기 어려운 삭막한 목소리였다.

“넌 학생회장이 초식 수인인 게 아무렇지도 않아?”

신시아를 향한 연이은 질문에 도리어 긴장한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쿵.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그 이상 듣기가 지레 겁이 난 나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결국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일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짚었다. 밀란느 학장님의 비서였다.

“학장님께서 벤디 님을 찾으십니다.”
올 게 왔다. 또 다른 난관을 맞이한 나는 낯빛을 희게 물들였다.

* * *

탁상을 중간에 둔 벤디와 밀란느 학장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머물렀다.

차로 목을 축인 밀란느 학장은 벤디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 본연의 모습. 여전히 이곳 수인 아카데미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양이었다.

탁, 찻잔을 내려 둔 밀란느 학장이 정적을 깨뜨렸다.

“자네의 숙부, 웬스턴 레피는 현재 손님실에 있네.”

위조한 방문증으로 출입한 것도 모자라, 아카데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점은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밀란느 학장의 소관.

따라서 웬스턴은 취조가 끝날 때까지 자유로이 객실을 나설 수 없었다.

“가문의 사사로운 알력 다툼이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난 건 전대미문의 일일세.”

“……죄송합니다.”

면목 없는 벤디가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불어.”

학장은 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지난밤 동안 내 앞으로 익명의 항의서가 여러 통 왔지.”

“항의서라 하심은…….”

“우선은 자네가 초식 수인임을 감추고 신분을 조작한 데에, 학장의 용인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이전에 얘기했다시피 나는 꼬리를 자를 셈이네.”

‘내가 지원해 주는 건 여기까지일세. 그로 인한 결과는 전부 자네가 짊어질 책임인 게지.’

입학 당시, 학장의 말을 떠올린 벤디가 끄덕였다.

가늘게 떨리는 벤디의 손끝을 곁눈질한 밀란느 학장이 말을 이었다.

“나머지 항의서는 초식 수인의 존재에 대한 우려.”


“…….”

“그럴싸한 표현으로 잘 포장한 항의서지만, 까놓고 해석하면 초식 수인이 학생회장까지 해 먹으면서


우위를 점하는 게 싫다는 의미겠지.”

욱신.

벤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각오했으나, 막상 귀로 들으니 예상보다 마음이 쓰렸다.

벤디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간 기다린 밀란느 학장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다가간 비서는 품에 들고 있던 서류를 탁상에 올려 뒀다.

“이건 손주 놈을 다시 데려온 자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일세.”

“보답이요……?”

두꺼운 서류를 얼핏 확인한 벤디가 표정을 굳혔다.

“지난 십 년간 웬스턴 레피가 저지른 죄목이지. 나중에 자세히 읽어 보면 알겠지만, 가주직에서


끌어내리기엔 충분할 걸세.”

비서는 퀭한 낯으로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학장의 닦달에 못 이겨 잠도 줄여 가며 조사한 자료였다.

온 얼굴 근육으로 고충을 토로하는 비서를 아니꼽게 훑은 밀란느 학장이 궐련을 입에 물었다.

“벤디 학도.”

“네, 학장님.”

“내가 웬스턴 레피를 이곳에 붙들어 둔 지금이 적기다.”

“……!”

학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벤디가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 아카데미를 나가라.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인 벤디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장님.”

“오냐.”

“여기에 남을 방법은 없는 걸까요.”

더군다나 정체를 들키자마자 아무것도 풀지 못한 채 떠나는 건…….

말을 끝맺지 못한 벤디가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벤디 학도, 어리광 부리지 말게. 평생 이곳에 있을 건 아니지 않은가.”


밀란느 학장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슴 수인의 몸으로 육식 수인 영역에 머무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학장님, 저는…….”

“학장과 학생의 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귀족으로서 말하네. 지금이 자네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세.”

“…….”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잊고,”

후, 입으로 연기를 뱉은 그녀가 엄하게 일갈했다.

“당장 떠나게.”

* * *

탁, 어깨를 늘어뜨린 벤디가 학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복도를 걷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듣는 이가 아플 만큼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던 밀란느 학장은 문득 시선을 틀었다.

비서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가신 초식 수인을 이 기회에 내쫓은 악당을 보는 듯한 눈초리군.”

“아닙니까?”

가주 계승은 꼭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아도 가능한 일.

“맞네. 그런데 자넨 대체 누구 편인가?”

“학장님 편입니다.”

“사회생활 잘하는구먼.”

밀란느 학장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넉넉잡아 학생의 반절이 벤디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 감안하면, 괜히 아카데미에서 버텨 봤자 반감만


늘어날 터.

이대로라면 결국 학장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벤디 학도가 상상 이상으로 학생회장 역할을 잘해 주었지.”


그녀의 감회 어린 중얼거림에, 비서가 힘없이 답했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기억나는가?”

턱을 괸 밀란느 학장은 대뜸 물었다.

“입학 초에 벤디 학도가 아카데미에서 달아났을 때, 내가 길길이 날뛰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퇴서를 수리하지 않아서 내쫓지 못했죠. 갑자기 그건 왜…….”

“이번에도 나는 자퇴서를 수리하지 않았네.”

원래 모든 건 없어지면 소중함을 깨닫는 법.

밀란느 학장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131 화>

터덜터덜, 학장실을 나선 벤디의 발걸음이 학생회실 방향으로 향했다.

힘없는 벤디의 뒤로 육식 수인 셋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나란히 숙여 앉은 원과 레넌, 헤일린이 수풀 속에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분명히.”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문 원이 서늘한 눈으로 레넌과 헤일린을 돌아봤다.

“내가 웬스턴 레피부터 처리하자고 말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레넌과 헤일린이 묵념했다.

육식 수인들에게 내쳐진 사슴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전날부터 벤디에게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필 육식 수인 중의 육식 수인이라 더더욱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지는 상황.


이윽고 수풀 속에서 조촐한 회의가 개최됐다.

눈을 감은 채 고뇌한 레넌은 곧 그럴싸한 묘안을 제시했다.

“벗자.”

“뭐?”

“몸에 주의가 쏠리면 우리가 육식 수인인 것도 잊겠지.”

오…….

원과 헤일린이 턱을 매만졌다.

뇌를 거치지 않은 주장치고는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특히 밝히는 사슴에게는 안성맞춤인 수법. 그러나 레넌을 제외한 두 사람에게는 상당한 수치심이
요구되기에 일단 그 의견은 보류됐다.

뒤이어 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중 한 사람이 사슴에게 가서 동태를 살피는 수밖에.”

셋이 함께 나락 가는 것보단 한 놈만 희생하는 게 낫지.

어느덧 학생회실 건물로 들어선 벤디를 바라보던 그가 팔꿈치로 레넌을 찔렀다.

“네놈이 나가서 아양 떨어.”

버티고 앉은 레넌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노랑이 이스단한테 양보하지.”

“꺼져.”

아직 벤디에게 돌려주지 못한 배낭을 껴안은 헤일린이 움츠렸다.

아웅다웅 서로 미루기를 한참, 개중 가장 상식적인 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강제로 한 명을 정하는 수밖에.”

의미를 단번에 이해한 레넌과 헤일린이 뒤따라 일어섰다.

싸워서 셋 중 살아남은 하나가 가면 될 일. 제법 극단적이지만 가장 이상적이었다.

“잠깐.”

전투 발발 직전, 작전 타임을 외친 헤일린이 옷 속에 배낭을 집어넣었다.

“예전부터 죽이고 싶었는데 잘됐군.”

마법을 소환한 원과,

“죽으면 원망은 야닉 펠에게 해.”


검을 뽑은 레넌,

“배는 건드리지 마.”

배불뚝이 헤일린이 마주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란하게 토론하던 세 사람 사이로 위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달칵, 들어선 학생회실은 텅 빈 상태였다.

사슴 수인인 자신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건지, 축제 준비 때문에 자리를 비운 건지.

‘축제 준비 기간이라서 다행인가.’

아니면 영락없이 나로 인한 불참일 테니까.

차라리 축제 준비로 바쁘다고 여길 수 있는 편이 나았다.

서랍에서 소지품을 챙기던 나는 석양이 내린 창밖을 돌아봤다.

더 이상 모습이 바뀔까 걱정하며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어색했다.

다시금 짐을 싸는 와중, 밀란느 학장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잊게.’

바로 선 나는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을 둘러봤다. 창문으로 스민 석양이 적막한 공간을 붉게 물들였다.

‘그거같이 생겼네, 사슴.’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로 웃던 화상.

‘도망가지 않았군요, 그럴 줄 알았는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때려 주고 싶던 밉상.
‘앞으로 허락 없이 만지지 마.’

불쑥불쑥 나타나 맥락 없는 소리만 내뱉던 진상.

‘별 볼 일 없는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마음에 안 들면 부수고 보는 괴력 곰돌이.

‘드디어 이 야닉을 모시러 온 건가?’

나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흐르는 빗자루.

‘고서적.’

마물이 날뛰는 공간에서도 독서에 임하는 독서광.

‘이번에 입회한 학생회 마법부 대표, 메이지 로튼입니다.’

검은 로브를 눌러쓰고 다니는 박쥐들의 수장까지.

‘이 모든 걸…….’

어떻게 잊고 살아가라는 건지.

저절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페트리온으로 돌아가도 지금의 기억은 마음 한편에 남아 영영 지워지지 않겠지.

시선을 내린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명패를 만지작거렸다.

[학생회장 벤디 레피]

이거 하나 정도는 기념으로 가져가도 괜찮지 않을까.

슬그머니 상자에 챙긴 내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일 년 가까이 생활한 거에 비해 짐은 조촐했다.

사실상 가진 거라곤 손지갑과 교복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녁 늦은 시각.

“넌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니까.”

푸르릉!

나는 마구간을 떠나지 않으려 시위하는 해피를 이끌었다.

해피가 졸개들을 보며 슬퍼했지만, 말들은 마치 해방이라는 듯 갈기를 휘두르며 환호했다.

겨우 도착한 후문.

밀란느 학장님이 말을 해 두었는지, 경비 기사들은 나와 해피를 일절 저지하지 않았다.

푸르릉, 푸르릉!

악쓰고 버티는 해피를 끌며 후문을 막 나설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려고?”

리리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학장님께 전달받았거든, 담당 학생 하나가 오늘 아카데미를 탈출한다고.”

연구실에서 바로 온 참인지, 가운을 걸친 리리 교수님이 미적미적 걸어왔다.

“벤디 러피야.”

탁, 내 앞에 선 그가 씨익 웃었다.

“리리 교수님이 말했던 거 기억나니? 이전에 다니던 아카데미의 초식 수인 학생이 금방 그만뒀다고.”

‘죄다 육식 수인으로 이뤄진 아카데미에서 누가 양 수인을 환영하겠어.’

리리 교수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내가 작게 끄덕였다.

“그때 그 학생에게 못 해 준 말이 있거든.”

“……뭔데요?”

“판다는 육식 수인보다 초식 수인을 더 좋아해.”

대나무가 주식인 판다다운 발언이었다.

“그래서 리리 교수님은 지금의 네가 훨씬 더 좋단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대충 헝클어뜨렸다.

울컥, 목이 멘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리리 교수님.”

“그래.”

“벤디 러피가 아니라 벤디 레피예요.”

“괜찮아, 괜찮아. 이름에 작대기 하나 빠진 정도로 안 죽어.”

자기만 괜찮은 리리 교수님이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배웅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인지.

타박타박, 나는 애써 달랜 해피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새, 새슴 얘래분.’

‘라일라, 따라 하지 마.’

두 걸음.

‘오늘 건의가 들어왔다, 실험실에서 X 클래스 학생들이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고.’

‘교수님, 학생회장이 주도했어요.’

‘너무해, 신시아. 같이 먹었으면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별거 아닌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잠깐 멈춘 나는 뒤를 돌아봤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선 리리 교수님이 보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화려한 아카데미 건물을 일별한 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모두 안녕.

* * *
밀란느 학장은 축제 기간을 이용하여 용의주도하게 벤디의 행적을 감췄다.

리리 교수의 입단속 및 기숙사 사감의 협조도 구한바, 벤디는 기숙사에 틀어박힌 것으로 조작됐다.

축제는 미적지근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벤디는 축제 기간 내내 모습을 비추지 않았으며, 이는 축제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출석왕 벤디의 부재가 은근히 신경 쓰이는 X 클래스 학생들이 빈자리를 흘끔거렸다.

“오늘 강의는 끝이에요. 아이고, 드디어 끝났네.”

리리 교수가 퀭한 얼굴로 푸념했다.

강의가 끝나고도 누구 하나 엉덩이를 떼지 못할 때, 탁탁, 교재를 정리한 신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신시아, 어디 가?”

“학생회실.”

“……가려고?”

“그럼 안 가니?”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대답에, 학생들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아니, 그때 분명 학생회장이 사슴 수인인 사실이 놀랍다고…….”

“놀랐어.”

잠깐 벤디의 빈자리를 돌아본 신시아가 덧붙였다.

“걔가 그 사실을 일 년 가까이 안 들키고 버틴 거에.”

“…….”

“어떻게 그걸 숨겼지?”

그 허술한 겁보가.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그녀가 강의실을 나섰다.

탁, X 클래스 학생들은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네?’

별안간 인지 부조화가 온 그들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듣고 보니 사슴 수인인 사실은 신기하지도 않았다.


벽에 밀착해서 다니는 그 어수룩한 행동거지로 정체를 숨긴 게 더 놀랍지.

“솔직히…….”

복잡한 침묵을 뚫고 라일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초식 수인이고 나발이고, 나는 헤일린 이스단이 학생회장에게 차인 게 더 놀라워.”

움찔. 맞춘 것처럼 경련한 학생들이 감싸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실은 나도 그래. 어떻게 된 건지 소름 끼치도록 궁금해서 계속 잠을 설친다고!”

“하아, 하아. 이건 진짜 학생회장이 도입부부터 결말까지 단상에서 연설해 줘야 한다.”

웅성웅성.

X 클래스 학생들 사이에서 벤디가 사슴 수인이란 사실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교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리 교수는 대나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헤일린 이스단이 차이게 된 경로를 연설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수인 아카데미에 없었다.

* * *

한편, S 클래스 강의실.

야닉은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묻은 채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가 드물게 깊이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자,

‘저 바보가 생각이란 걸 하다니.’

기겁한 S 클래스 학생들이 거리를 벌렸다.

학생들의 반응 따위 살필 겨를도 없는 야닉이 미간을 구겼다.

육식 수인이 아닌, 사슴 수인이라니.

학생회장은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자신이 그토록 추앙해 왔는데, 그런 야닉마저 비웃듯 속이고 농락했다.

‘벤디 레피…….’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하…….”

겉으로는 우수한 학생회장인 척하면서, 뒤로는 정체를 숨긴 비열한 악당.


쾅,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난 야닉이 눈물을 글썽였다.

“끝내준다…….”

사슴의 발칙한 이중생활.

가슴이 벅차오른 그가 양팔을 쫙 뻗었다.

“이 야닉 펠과 대륙을 제패하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곧 날아오를 것 같은 야닉의 곁에 선 안나가 일갈했다.

“시끄러워요.”

“괴력 곰, 얼굴이 왜 그러냐.”

야닉은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안나를 못마땅하게 훑었다.

“너, 설마 회장이 정체를 숨긴 걸로 배신이다 뭐다 하는 건 아니겠지?”

흠칫. 드물게 당황한 안나가 어깨를 떨었다.

“저는 그저.”

안나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저…….”

학생회장이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서운할 뿐.

그러나 제 입으로, 하물며 야닉 앞에서 절대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안나, 야닉, 큰일이에요!”

그때 메이지가 S 클래스 강의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검은 후드마저 벗어 내린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마개동에서 학생회장의 사슴에게 추적 마도구를 붙였었거든요. 아카데미 내에서만 추적할 수 있는데
…….”

“그 사슴에게 추적기는 왜 붙였는데요?”

안나의 질문과 동시에 움츠린 메이지가 파란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마물의 피가 섞였는지 궁금해서요.”

생체 실험을 꿈꾸고 있었단 의미.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부터 아카데미 내에서 그 사슴의 신호가 잡히지 않아요!”

이어진 말에 안나와 야닉의 표정이 굳어졌다.

벤디의 이동 수단인 괴수 사슴이 아카데미에서 사라진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학생회장이 증발했다.

#<132 화>

약간의 추위가 찾아들고, 아카데미에서 벤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성큼성큼, 밀란느 학장은 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교정을 가로질렀다.

바로 오늘, 웬스턴 레피를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급서가 도착했다.

무려 사슴 영역의 레피 가문으로부터.

급서에는 레피 가문의 임시 가주가 사용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는 가문으로 돌아간 벤디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

웬스턴 레피가 있는 객실로 이동하던 밀란느 학장이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법이구먼.’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온 걸 보아, 새파랗게 어린 것이 제 나름 그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실거리던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역정 냈다.

“쯧, 빨리 오게. 젊은 것이 이리 느려서야.”

아무리 노인이라도 밀란느 학장은 왕년의 실력자. 따라가기가 힘에 부친 비서가 억울하게 토로했다.

“학장님께서 직접 걸음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몇 번을 말하나, 이 일은 신중을 가해야 한다고.”

발길을 뚝 멈춘 밀란느 학장이 눈을 번뜩였다.

“웬스턴 레피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 추악한 삼 인방이 벤디 학도의 부재를 알아서는 안 되네.”

추악한……?

삼 인방을 지칭하는 표현 때문에 잠시 혼동이 온 비서가 되물었다.

“삼 인방이 제가 생각하는 분들이 맞으면 추악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인성이 추악하다.”

“동의합니다.”

“잘 듣게. 그놈들이 웬스턴 레피로 인해 벤디 학도가 여기를 떠난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아카데미가


폭발,”

콰앙!

학장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귀가 얼얼할 정도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폭발했다.

두 사람의 입이 턱이 빠질 만큼 쩍 벌어졌다. 웬스턴 레피가 머무는 객실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얼빠진 학장과 비서가 그 광경을 바라볼 때, 유유자적 걸어오던 원이 우뚝 멈췄다.

“…….”

정적 속에서 시선이 오갔다.

웬스턴 레피가 머무는 객실 입구는 밀란느 학장의 사병이 지키고 있다.

따라서 폭발시키려면 원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학장과 비서의 의심 어린 눈길을 마주한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는데.

밀란느 학장은 가늘게 뜬 눈으로 원을 훑어 내렸다.

“방금 전에 폭발한 곳은 웬스턴 레피가 머무는 객실이네만.”

“안타까운 일이군요.”

“……죽였나?”

귀에 손을 대며 허공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 원이 답했다.

“숨소리가 들립니다.”

살려는 뒀다는 뜻.

‘뻔뻔한……!’

또라이 사슴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점잖은 또라이로 변한 꼴.

낯빛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인 밀란느 학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원 학도, 상처를 입히면 어찌하나? 웬스턴 레피는 오늘 레피 가문으로 곱게, 으븝!”

“하, 학장님!”
경악한 비서가 무례를 무릅쓰고 학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

그제야 제 실언을 깨달은 그녀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미 들어버린 원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오늘 레피 가문으로 웬스턴 레피를 보내겠다고?’

벤디 레피, 그러니까 가주 적격자가 이곳에 있는데 왜.

밀란느 학장의 말을 찬찬히 되짚던 그가 손으로 입을 덮었다.

아무리 정체를 들켰다고 해도, 사슴은 일주일 가까이 기숙사에 틀어박혀 궁상떨 성미가 아니었다.

겉보기엔 약하지만 의외로 포악한 면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원의 손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학기 초, 벤디에게 인수인계를 약속하며 걸어 둔 위치 추적 마법.

이윽고 허공에 수인 아카데미가 아닌, 광대한 밀림이 그려졌다.

거시적인 단서에도 불구하고 원은 이곳이 어딘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사슴 영역, 페트리온.

깨달은 그가 이 사실을 감춘 두 사람을 느릿하게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친 밀란느 학장과 비서가 번개처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저놈…….’

눈이 돌았다.

* * *

벤디가 행방을 감춘 현재, 학생회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유급 혹은 퇴학을 각오하는 게 아니고서야 동계 방학이 오기까지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

‘전 안 해요.’

안나는 벤디의 부재를 알게 된 그 길로 학생회를 떠났다.


‘저는 학생회장 때문에 학생회가 된 거니까.’

벤디가 없으면 부학생회장 자리 따위 흥미 없다는 게 안나의 정론.

찬란한 우정에 감동한 야닉은 안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뒤이어 기간 한정 서기인 신시아도 그만두고, 벤디 레피 추종자 느낌을 풍기던 마개동의 메이지도


탈주했다.

남은 건 야닉과 마스코트인 세미.

이래봬도 레펠튼에서 벤디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 자의로 학생회에 남은 세미가 한마디 했다.

크웡웡, 크웡.

“대체 뭐라는 거야, 이 띨띨한 곰탱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미와 교정에 쭈그려 앉은 야닉이 마른세수를 했다.

“안 되지, 안 돼. 어이, 곰탱이.”

크헝.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벤디 레피 사단이 뿔뿔이 흩어진 이상, 이 야닉 펠이 자리를 지키며 학생회장을 기다려야 한다.

‘영웅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니까.

마음을 다잡은 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좋아, 그때까지 이 야닉 펠이 임시 학생회장이다!”

“못 들었어, 회장이 뭐라고?”

허공에 소리치던 야닉이 쩍 굳었다.

그런 그의 옆에 숙여 앉은 레넌이 예쁘게 눈을 접었다.

“갑자기 회장은 왜 찾는데?”

나타났다, 벤디 레피 광인.

야닉으로 변한 학생회장을 아랑곳 않고 품에 안은 채 교내를 싸돌아다닌 미치광이.

원래 몸으로 돌아온 직후, 목욕을 다섯 번이나 한 과거를 돌이킨 야닉이 턱을 짚었다.

‘보아하니 이놈…….’
아직 회장이 사라진 걸 모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인 잃은 개처럼 교내를 서성이고 다닐 리 없으니까.

‘아무리 이놈이라도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서 확인할 순 없겠지.’

답지 않게 정답에 다다른 야닉은 게슴츠레 레넌을 훑었다.

레넌 에던트, 위대한 야닉 펠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는 놈.

아카데미 대항전 때도 제가 검술부 대표로 출전해서, 이 야닉 펠이 회장과 함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기회를 강탈했지.

‘회장이 사라진 걸 알려 주나 봐라.’

큭큭. 혼자 웃어 댄 야닉은 곧 엄숙하게 말했다.

“이 야닉 펠은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마에 나 비밀 있다고 써 놓은 꼴.

경직된 얼굴을 빤히 보던 레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회장도 없는데 즐거워 보이네.”

“그럴 리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헙!”

정색하며 외치던 야닉이 입을 텁 막았다.

……돌아오기만을?

방긋 휘어져 있던 레넌의 눈이 점차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어감이 이상했다.

‘사감의 말에 의하면 기숙사에 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더군.’

‘사슴은 그럴 성격이 아니,’

‘제발 좀! 벤디 학도 좀 내버려 두거라! 너희 같은 녀석들이야 모르겠지만, 누구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게다!’

그 능구렁이 학장에게…….

‘당했다.’

레넌의 숨 막히는 살기에 짓눌린 세미와 야닉이 사이좋게 서로를 껴안았다.

“자세히 얘기해 봐, 야닉.”

야닉은 무해한 미소는 사라지고, 더없이 유해해 보이는 레넌의 얼굴을 바라봤다.

‘회장…….’
아무래도 이 야닉 펠이 실수한 것 같다.

* * *

헤일린 이스단이 학생회장에게 차였다.

이 소문은 벤디가 사슴 수인이라는 진실 다음으로 아카데미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 얼굴과 그 배경을 갖고 실연당한 불쌍한 놈.

헤일린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공포에서 동정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며늘아기를 다시 데려오기 전까지 어떠한 지원도 없다.

추신 – 꽃사슴을 방생한 네 아버지도 근신 중이니,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생각일랑 접어 두도록.]

짧은 전서였으나, 글자 하나하나에 사라 이스단의 분노가 묻어났다.

한순간에 알거지가 된 헤일린은 교정 벤치에 걸터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갈색 배낭을 품에 안은 채였다.

마침 지나가던 학생들이 헤일린을 발견하곤 또다시 짠한 눈빛을 보냈다.

‘가여워라…….’

‘배낭에서라도 학생회장의 흔적을 찾는 건가.’

더군다나 얼마 전에 원과 레넌, 헤일린은 후원이 통째로 날아갈 정도로 치고받았다.

셋 다 그때의 타격으로 예쁜 얼굴이 너덜너덜해졌는데, 헤일린은 안 그래도 불쌍한 와중에 더더욱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이 지나가고, 어슬렁어슬렁 길을 가던 리리 교수는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차인 놈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비웃고 말았다.

뚝, 뒤늦게 폭소를 그친 리리 교수가 빠르게 사라졌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헤일린은 툭, 벤치에 뒷머리를 묻었다.

저 교수는 어쩐지 볼 때마다 없애 버리고 싶은데. 그러나 응징하러 갈 기력도 없었다.


언제까지 기숙사에 숨은 학생회장을 얌전히 기다려야 하나.

높은 하늘에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가만히 올려 보던 그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한계다.’

처맞는 한이 있더라도 사슴이 보고 싶었다.

타닥, 노란 짐승으로 변한 헤일린이 기숙사 벽을 엉금엉금 타고 올랐다. 등에는 제 몸만 한 배낭을 멘


상태.

겨우 기숙사 방 창문에 다다랐으나, 짙은 암막 커튼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톡톡, 발톱으로 창을 두드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찰싹 귀를 붙인 노란 짐승은 이내 미간을 굳혔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울다가 탈진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쨍그랑, 뒷발로 유리창 일부를 깨뜨린 그가 기숙사 안으로 침투했다.

“…….”

탁, 착지한 노란 짐승은 앞발로 주둥이를 가로막았다.

옷걸이에 걸린 교복도, 책상에 있던 서적도, 기숙사 구석의 고구마 상자도.

사슴의 흔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벤디를 비롯한 발 닦개 삼 인방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카데미 내 뚜렷한 강자가 자취를 감추니, 송사리들이 슬슬 날뛰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으려는 몇몇 때문에 학생들 사이로 피로감이 만연한 와중, 매달 초에 있는 정례 연설이 개최됐다.

중앙 광장.

콰직, 세미가 다소곳이 앉은 학생회 좌석 의자가 박살 났다.

애써 그 장면을 외면한 사회자가 말했다.

“다음은 학생회장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학생회도 와해되고, 임시 학생회장이 대리로 연설에 임할 차례.

쿵, 쿵.

팔다리를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인 야닉이 단상에 올랐다.


단상에 선 그는 벤디가 매번 보던 풍경을 바라봤다.

형형색색의 눈동자가 오로지 저를 향한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

야닉은 난생처음 제게 무대 공포증이 있음을 깨달았다.

간신히 태연을 가장한 그가 확성 마도구에 입을 가져갔다.

“흠흠.”

그래, 그래, 그거지.

벤디 덕분에 제대로 된 연설을 들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학생들이 끄덕였다.

“하,”

학생 여러분.

“하,”

단상 아래 학생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했다.

“하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야닉이 그대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

결국 연설 자체를 통으로 생략하게 된 학생들은 새삼 벤디를 떠올렸다.

기묘한 행동거지에 가려서 그렇지, 사실상 사슴 여러분을 제외하면 모자람이 없었지 않나.

레펠튼 우승, 마력 측정 우승.

벨헬름 아카데미와의 교류에서도 최고점, 아카데미 대항전 실질적 우승.

거기다가 없어졌던 하계 연회를 부활시키고, 마물 토벌에서의 활약까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무엇보다…….’

벤디의 막대 과자 끝이 향한 것은 언제나 학생들의 반대편.

제 몸을 던져 가면서까지 그들을 지킨 학생회장은 벤디가 유일했다.


#<133 화>

야닉이 임시 학생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페트리온 수용소.

“젠장, 벤디 레피! 네가 나한테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덜컹. 웬스턴 레피의 외아들, 데릭 레피가 발악하듯 철창에 매달렸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선 벤디는 서류를 또박또박 읊었다.

“가문 자금 횡령, 도박, 사문서 조작, 폭행 및 갈취…… 더 얘기해?”

“알 게 뭐야!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네 따위, 읍!”

벤디는 소리치는 그의 입에 막대 과자를 쏙 꽂아 넣었다.

“조용히 해, 데릭.”

다음 순간 말문이 막힌 벤디는 눈을 데굴 굴렸다. 겁박은 처음이라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기에.

‘아, 그거다.’

화상과 진상, 밉상이 으레 하던 말을 떠올린 벤디가 음산하게 말했다.

“주둥이를 따 버리기 전에.”

책 읽는 듯한 경직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주둥이가 아니라 모가지인데.’

잘못 학습했음을 깨닫는 찰나, 다행히 겁박이 통했는지 데릭이 주춤 몸을 물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힘도 세고 키도 커서, 같은 공간에 있는 자체만으로 두려운 존재였는데.

부수고 보는 육식 수인들 사이에서 구르다 와서 그런지 데릭이 순해 보일 지경.

그런 그를 뒤로한 벤디가 수용소를 나섰다.

‘곧 겨울인가.’

휘이잉, 한층 차가워진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지난 일주일간 벤디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장 먼저 밀란느 학장에게 받은 숙부의 죄목을 장로회 및 영역민에게 알렸다.


또한 그의 수족을 잘라 내고, 기존의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냈다.

빈자리는 멀리 쫓겨난 부모님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채웠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반발이 따랐지만, 막대 과자로 마법을 소환하니 금방 수그러들었다.

“…….”

입안이 썼다.

그렇게 어려웠던 일이 힘을 가진 것 하나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니까.

“아기씨.”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사념에 빠진 벤디에게 다가섰다.

과거 레피 부부의 가장 가까운 수족인 수리 할멈이었다.

“할멈, 왜 여기까지 왔어. 마차에 있으래도.”

파들파들, 지팡이를 짚고 선 모습이 보기만 해도 위태로웠다.

“아유, 이게 뭐가 힘들다고.”

홀홀홀, 수리 할멈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따라서 홀홀 웃은 벤디는 습관적으로 수인 아카데미 방향을 바라봤다.

수리 할멈은 그런 벤디의 옆모습을 올려 봤다.

‘아기씨…….’

다시 만나게 된 그녀의 가여운 아기씨는 이따금씩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시선 끝은 언제나 같은 곳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거나 두고 온 사람처럼.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진 수리 할멈이 같은 방향을 바라봤으나, 석양이 내린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벤디가 아카데미에서 사라진 일주일을 기점으로, 어수선하던 페트리온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레피 저택 주변까지 다다르려면 까다로운 신분 검사를 거쳐야 할 겁니다.’

바스락, 영역 경계를 넘은 원이 스카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위조 신분패를 만들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

‘못 기다려. 그리고 그런 절차 없이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밤이 내린 밀림을 지난 원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잡초 돋은 평범한 땅을 몇 번 매만지자 쿠르릉, 기밀 통로가 열렸다.

‘없애지 않았군.’

안도한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벤디가 막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기밀 통로를 지난 원은 이끼 낀 복도를 가로질렀다.

감옥의 습기 어린 공기와 찬 기운이 어릴 적 향수를 자극했다.

자연스레 제가 머물렀던 감옥을 돌아본 원의 낯빛이 변했다. 철창 너머, 웅크리고 누운 벤디가 보였기에.

“무슨……!”

말을 끝맺지도 못한 그가 감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벤디의 상체를 안아 일으키던 원은 팔락,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

부모의 죽음에 관한 내용.

벤디의 부모는 괴한의 마차 습격으로 사망한 게 맞았다.

그러나 이후 사체에서 미미한 독 반응이 나왔고, 사전에 이미 독에 중독되어 습격 당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웬스턴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 그 독을 비슷한 시기에 구입했고, 웬스턴 레피는 이를 은폐했다.

서류를 대강 읽어 내린 원은 벤디를 내려 봤다.

울다가 잠든 건지 속눈썹이 축축이 젖은 상태였다.

푸석푸석한 피부와 평소보다 더 작게 느껴지는 몸. 며칠 내내 한숨도 못 잔 게 분명했다.

‘이딴 감옥에서…….’

숨어 울기나 할 거면서 말 한마디 없이 아카데미를 떠났다고.

하나하나 살피던 원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벤디의 몸이 불덩이였다.

* * *
깊은 밤, 저택을 점검하던 집사는 잠들지 못한 채 복도를 서성이는 수리 할멈을 발견했다.

“수리 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 아기씨가 방에 없기에, 아직 집무실에 계시나 해서…….”

“그럴 리가요, 주무신다고 일찍이 잠자리에 드셨는데.”

그럼 벤디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불길해진 두 사람이 시선을 맞춘 가운데,

“에구머니, 벤디 님!”

“꺄아악!”

아래층에서 고용인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관 입구, 열이 펄펄 끓는 벤디를 안아 들고 들어선 원은 다짜고짜 말했다.

“의관을 불러오세요.”

“대체 누구…….”

“의관부터.”

명령이 익숙한 강압적인 말투.

섣불리 행동하지 못한 고용인들이 주춤했다.

“비키시오.”

그들 사이로 파고든 집사가 눈을 크게 떴다. 원의 품에서 쌕쌕 숨을 내쉬는 벤디의 상태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게! 자네들은 벤디 님을 침실로 모시고!”

그제야 굳어 있던 고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에게 벤디를 인도한 원은 레피 저택을 둘러봤다.

저택 규모에 비해 어수선한 분위기와 턱없이 적은 고용인 수.

그러나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차차 자리 잡아 가면 될 일이었다.

자연스레 벤디를 옮긴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원의 앞을 척, 집사와 수리 할멈이 막아섰다.

수상한 불청객.

두 사람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선사하는 원을 살폈다.

다른 건 몰라도 소름 끼칠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송구하나, 벤디 님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집사의 질문을 들은 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드러난 송곳니를 본 고용인들이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유, 육식 수인이 왜 여기에?”

“힉!”

“아이고!”

벽에 찰싹 달라붙거나 항아리에 들어가는 이들을 둘러본 원은 생각했다.

‘종족 특성인가.’

주인이나, 고용인이나. 하는 짓이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수리 할멈이 일갈했다.

“육식 수인이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은 대체 누구요?”

원은 귓가를 윙윙 맴도는 스카론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절대 차기 마탑주임을 알리시면 안 됩니다!’

마탑주가 직접 움직이는 건 차원이 다르다며 주절거리던 잔소리를 떠올린 그가 이내 입술을 뗐다.

“가주의 예비 남편.”

경계하던 집사와 수리 할멈, 그리고 고용인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스스로 말하고도 마음에 든 원이 입매를 끌어 올리는 찰나 깡, 지팡이가 그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부렁을!”

격노한 수리 할멈의 공격을 미처 막지 못한 원이 머리를 짚었다.

“잠깐,”

“우리 아기씨한테는 옛적에 정혼을 약속한 꽃 같은 사슴이 있다!”

헤일린 이스단 외에 그딴 게 또 있다고. 금시초문을 접한 원은 동공을 떨었다.

“그건 또 어떤,”

“금수 같은 놈, 썩 물렀거라!”

깡, 깡!

원은 현란하게 날아드는 지팡이를 피할 생각도 못 했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맞으면서 깨달았다.

자신은 벤디의 광주리 속 수많은 구황작물 중 하나였음을.


“수리 님…….”

말려야 할지 고민하던 집사는 이내 뒷짐 졌다.

수리 할멈은 과거 레피 부부와 벤디의 신뢰를 등에 업은 자. 현 레피 저택의 대장 사슴과도 다름없었다.

“우리 아기씨가 육식 수인을 잘도 부군으로 들이겠다!”

깡, 까강!

남편 사칭범을 흠씬 두들겨 준 수리 할멈이 씩씩 외쳤다.

“당장 이자를 옥에 가두시오!”

* * *

따가운 햇살이 얼굴을 달구었다.

끄응.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툭, 물수건이 침구에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흐리멍덩한 벤디의 시야에 이윽고 수리 할멈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좀 어떻수? 열은 다 떨어졌는데.”

“할멈, 나 어떻게 된 거야?”

“과로라네요, 과로.”

“아니, 그거 말고.”

“아아, 간밤에 난리가 났었지. 어제 웬 남자가 쓰러진 아기씨를 데리고 들이닥쳤지 뭐요.”

벤디는 저택 감옥에서 몰래 울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어렴풋이 누군가 뺨을 두드리던 것도.

“……누가?”

“놀라지 말고. 글쎄 육식 수인이었수!”

육식 수인이라니.

흠칫, 벤디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어떤…… 육식 수인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미친놈인데, 허우대는 또 멀쩡했수다.”

지팡이를 짚고 침대 옆에 앉은 수리 할멈이 일순 황홀한 얼굴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외모였지요. 흑단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였지.”
벤디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착장은 흰 셔츠에 빨간 타이를 매고 있었고.”

뒤이어 낯빛이 백지장처럼 질려가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수리 할멈이 옷걸이를 가리켰다.

“저 붉은 재킷으로 쓰러진 아기씨를 덮고 왔수.”

아카데미 교복.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는데?”

“말도 마오,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지팡이로 흠씬 두들겼지.”

벤디는 호흡마저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은 옥에 가두었지요. 아기씨가 처벌할 문제이니.”

차기 마탑주를 지팡이로 두들긴 것도 모자라 투옥까지 하다니.

“수리 할멈…….”

아무것도 모르는 수리 할멈이 벤디의 팔을 걱정스레 쓸었다.

“에구, 왜 이리 떠나. 이불을 더 가져올까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벤디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린 참수형이야.”

* * *

거의 십 년 만에, 그것도 같은 감옥에 갇힌 원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체 모를 꽃사슴 정혼자를 족칠 생각에.

뚜둑, 뚜둑. 손을 풀던 그는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틀었다. 철창 너머에 벤디가 서 있었다.

덜컹, 낡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철창으로 다가갔다.

“열은.”

철창 밖으로 나간 손이 벤디의 이마를 짚었다.

온도를 가늠한 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은 내린 상태였다.

그의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난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 순순히 옥에 갇힌 거예요?”


딱히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벤디의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한숨 쉰 벤디는 질문을 바꿨다.

“왜 왔어요?”

“갑자기 아카데미에서 없어졌기에.”

움찔한 벤디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원을 올려 봤다.

감옥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

과거는 과거일 뿐,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일절 엮일 일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

임시 가주로서 업무를 익힐 때마다 제가 함께하던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체감했으니까.

철창을 잡은 벤디가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더 이상 당신들과 엮일 생각이 없어요. 아카데미에도 돌아가지 않을 거고.”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느낌.

원은 답지 않게 날이 뾰족 선 벤디를 내려 봤다.

이렇게라도 내치지 않으면 아카데미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십 년 만에 되찾은 제 자리예요.”

조곤조곤 말하는 벤디를 응시하던 원은 곧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너무하네.”

“…….”

“나한테도 십 년은 긴 시간이었는데.”

생명의 은인을 찾아다닌 것치곤 깊이가 있는 모호한 말.

벤디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철창 밖으로 손을 뻗은 원이 밀색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들었다.

비뚜름하게 미소 지은 그는 밀색 머리카락에 입술을 가져갔다.

“생각해 봐요.”

반쯤 뜨인 황금색 눈동자가 벤디를 향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십 년씩이나 찾아다니는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는지.”


#<134 화>

일순 벤디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가까스로 해석한 벤디가 주춤거리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그러도록 놔두지 않은 원이 철창 밖으로 팔을 뻗어 벤디의 허리를 둘렀다.

“……!”

“잡아먹히기로 한 거.”

팔과 철창 사이에 갇힌 벤디가 숨을 삼켰다.

“여기서 그쪽이 약속했잖아요.”

고개를 모로 기울인 원이 선선히 웃었다.

사실 그는 이렇게 성급할 생각은 아니었다.

벤디가 가주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을 때 혼서를 보낼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나 차일피일 기다리다가는…….

‘우리 아기씨한테는 옛적에 정혼을 약속한 꽃 같은 사슴이 있다!’

그사이에 벤디가 또 얼마나 많은 구황작물을 수확할지 몰랐다.

가주가 되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터.

사슴의 화려한 구황작물 편력에 이를 갈던 원은 멈칫했다.

벤디의 얼굴색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기에.

쿵, 쿵.

튀어나올 듯한 심장 소리가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벤디가 덜컹, 원을 밀쳤다. 뒤이어 저 혼자


발이 꼬이며 바닥을 데굴 굴렀다.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난 벤디는 도망치듯 감옥을 벗어났다.

다다다, 빠르게 멀어진 발소리가 이윽고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원은 미끄러지듯 숙여 앉으며 철창에 이마를 묻었다. 그의 귓바퀴도 벤디처럼 터질 듯이
붉었다.

‘문은…….’

열어 주고 가야지.

* * *

드디어 웬스턴 레피가 페트리온 수용소로 호송됐다.

“…….”

소식을 듣고 그가 수감된 감옥 앞에 다다른 벤디는 할 말을 잃었다.

마법을 사용할 양손을 비롯하여 다리까지 골절에, 머리카락은 불에 탄 모습.

당장 재판에 회부하기는커녕 감옥에 누워 요양해야 할 몰골이었다.

아연하게 선 벤디와 시선이 마주친 웬스턴이 비아냥거렸다.

“뭘 놀라는 게냐, 전부 네가 사주한, 쿨럭, 쿨럭.”

누명을 덮어쓴 벤디는 짐짓 억울해졌다.

도대체 누가 한 짓인지. 한 명만 꼽자니 아카데미에 용의자가 너무 많았다.

등 뒤로 몰래 식은땀을 흘린 벤디가 입을 열었다.

“숙부가 재판장에 갈 상태가 아니니, 데릭 레피의 죄를 먼저 물을 수밖에요.”

“너……!”

“데릭 레피는 사형은 아닐 거예요. 대신 햇빛 한 점 없고, 사람 한 명 없는 감옥에서 죽어 가겠죠.”

눈을 부릅뜬 웬스턴이 노성을 터뜨렸다.

“데릭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 너를 가만두지,”

쾅!

벤디의 막대 과자 끝에서 터져 나간 마법이 웬스턴의 뺨을 스치고 벽에 명중했다. 주르륵, 피부가


갈라지며 선혈이 흘러내렸다.

“……착각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죽이지 못해서 사형대에 올리는 게 아니니까.”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천 번도 그를 난도질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벤디를 마주한 웬스턴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언제나 시선을 내리기 바빴지,
저런 눈을 한 벤디를 그는 몰랐다.
“모든 영역민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예요. 권력과 재물을 탐하여 가주 부부를 살해한 추한 자의 말로를.”

휙, 주저 없이 등 돌린 벤디가 감옥에서 멀어졌다.

저택으로 돌아온 벤디는 소매에 눈물을 꾹꾹 찍어 냈다.

자신은 앞으로 망가지기 직전인 레피 가문을 이끌 자. 지금까지처럼 남의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여선 안


됐다.

‘……이상하지.’

그토록 무섭고 강하던 자가 나약해 보일 줄이야.

이전에는 한숨만 쉬어도 움츠리고, 제 이름을 부를 때면 온몸이 떨렸는데.

그런 숙부는 자신의 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 건 어쩔 수 없기에, 괜히 정원을 서성이던 벤디가 멈췄다.

‘저게 뭐람.’

후원 연못, 그곳에는 해피를 씻겨 주고 있는 원이 있었다.

‘잡아먹히기로 한 거, 여기서 그쪽이 약속했잖아요.’

벤디는 안 그래도 복잡한 심정이 그를 보자마자 더욱 복잡해졌다.

첨벙첨벙, 인상이 험악한 거대 사슴과 오만한 자세로 물을 퍼붓는 남자.

그 괴이한 광경을 바라보는 와중, 수리 할멈이 곁으로 다가왔다.

“에잉, 돌아오셨으면 말씀을 주시지.”

달달 떨리는 벤디의 손가락이 정문 방향을 향했다.

“할멈, 지인이니까 안전하게 저택에서 내보내라고 했잖아.”

“저 육식 수인이 그랬수, 아기씨 밑에서 청소를 도맡아 왔다고.”

일순 말문이 막힌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분명히 학생회실 청소를 도맡아 왔긴 한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기씨.”

수리 할멈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현재 레피 가문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일꾼이…… 없지.”
“그렇죠. 저 정도 건장한 청년은 삼 인분은 하고도 남지요!”

“…….”

“심지어 저 사슴 같지도 않게 생긴 게 계속 목욕을 거부했는데, 저 육식 수인의 손길에는 얌전하잖수.”

“……그러고 보니 그러네?”

계속해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벤디가 입을 벌렸다. 저 까탈스러운 해피가 남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아무래도 저 요물 사슴이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것 같구먼.”

그럼 나는 뭔데. 지금껏 아름답지 않아서 홀대당했다는 건가.

해피의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된 벤디가 정색했다.

멀뚱히 선 벤디를 뒤늦게 발견한 원이 바가지를 내려놓고 다가섰다.

주춤.

벤디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다.

원은 축축이 젖은 흰 셔츠와 바지로 인해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꼴이었다.

맨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해로운 몸뚱이. 눈치도 없이 코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경직된 벤디 앞에 다다른 그가 젖은 흑발을 쓸어 넘겼다.

“어디 갔다 왔어요? 계속 기다렸는데.”

외출한 아내를 오매불망 기다린 남편 같은 대사였다.

어머, 어머. 입을 틀어막은 고용인들이 노골적으로 흘끔거렸다.

“어허!”

수리 할멈은 괜히 그들에게 주의를 가했으나, 자신도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막을 순 없었다.

예쁘고 젊은 맹수가 수작 부리는 것마저 수준급이었다.

“부, 분명 돌아가라고 전했을 텐데요.”

그게 곧 거절의 의사. 벤디는 애써 까칠하게 답했다.

“그리고 원 님이 저를 왜 기다리는데요.”

음. 고민하듯 잠깐 뜸 들인 원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보고 싶으니까.”

순식간에 벤디의 허리를 잡고 높이 들어 올린 그가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잡아먹는 거, 오늘 해도 돼요?”
공중에 떠오른 벤디는 팡, 코피를 분수처럼 터뜨리고 말았다.

후드득, 흩뿌린 코피가 원의 얼굴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아이고, 아기씨!”

수리 할멈의 비명이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벤디가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원을 내려 봤다.

밉상이 진짜 미쳤나 봐…….

* * *

수인 아카데미 학장실.

비서는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보고했다.

“가장 먼저, 아카데미 상공을 보호하는 마법진이 파훼되었습니다.”

밀란느 학장의 입술 사이에 있던 궐련이 툭 떨어졌다.

“뭐라? 멀쩡하던 게 왜 파훼되나.”

“원 리오나드 님이 없애고 나갔습니다.”

“미친놈…….”

팔락, 곧장 다음 장으로 넘긴 비서가 부언했다.

“또한 서쪽 담장이 쑥대밭이 됐습니다.”

“거기는 또 왜.”

“레넌 에던트 님이 담을 넘는 걸 막던 경비 기사들이 널려 있습니다.”

“미친놈…….”

팔락, 연이어 서류를 넘긴 비서는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아카데미 외벽을 수리해야 합니다.”

“외벽은 아직 보수 공사할 시기가 아닐 텐데.”

“헤일린 이스단 님이 벽을 뚫고 나갔습니다.”

“미친놈…….”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밀란느 학장은 창밖 교정을 돌아봤다.

문은 장식인가. 아끼고 마지않던 아카데미가 괴수들로 인해 파괴되고 있었다.

“덧붙여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학생들은 또 왜.”

“임시 학생회장인 야닉 펠 님의 독재로, 졸업식에 있을 연회 주제가 근력 운동이라고 합니다.”

거의 해탈에 이른 그녀는 막심한 후회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벤디 학도를 내보내서는.”

학장님의 눈은 호수고, 입술은 앵두라며 알짱거릴 땐 언제고 이리 쉽게 떠나나…….

“빨리 돌아오게, 벤디 학도…….”

* * *

“이 이상은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척, 기사들이 레넌의 앞을 막아섰다.

레피 가문 내부 사정이 어지러운 현재, 외지인은 레피 저택 주변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레넌은 육식 수인. 그를 경계한 기사들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그럼 레피 가주에게라도 연락해 달라니까.”

“신분패를 건네주셔야 가능합니다.”

곧바로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오느라 신분패도 두고 온 레넌이 난감하게 턱을 긁적였다.

물색 눈동자가 스치듯 기사들의 머릿수를 훑었다.

‘대략 스물.’

제치고 갈까 싶다가도, 이들이 벤디의 사람이면 건드렸을 때 후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레넌은 벙벙한 제 교복 카디건을 디밀었다.

“이게 신분패 대신은 안 되겠지?”

뭔 헛소리야. 기사들이 그런 눈빛으로 레넌을 쳐다봤다.

육식 수인 영역에서는 수인 아카데미 교복이 곧 신분이지만, 초식 영역에서는 무용지물.

답답해진 레넌이 이번에는 제 얼굴을 가리켰다.

“가주한테 연락만 해 줘. 설마 이 예쁜 얼굴로 나쁜 짓을 꾸미겠냐고.”

논리적인 궤변을 들은 기사들이 눈짓을 교환했다.

‘아무리 잘난 얼굴이기로서니 스스로 저딴 말을…….’

‘보통 정신이 나간 게 아니다.’


챙, 여러 개의 창이 레넌에게 겨누어졌다.

“하여간 가주가 바뀌니 별것들이 다 설치는군!”

“요망한…….”

“당장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투옥하겠다!”

결국 뻥 걷어차여 쫓겨난 레넌이 짜증스레 머리를 털 때였다.

탁, 갑작스레 그의 손을 잡아챈 어린아이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와!”

레넌은 얼떨결에 정체 모를 아이에게 이끌려 페트리온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도 꽤 긴 거리를 달려 작은 민가에 끌려 들어갔다.

벌컥, 문을 열자 집 안에 있던 수염 덥수룩한 남자가 미소로 맞이했다.

“모니, 뛰어다니면 넘어진다고 몇 번을…… 유, 육식 수인!”

“아빠, 쉿. 몰래 데려온 거니까.”

대낮에 손을 잡고 마을을 달린 게 몰래는 아닌 것 같은데. 레넌은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이쪽으로 와.”

레넌을 의자에 앉힌 모니는 뒤이어 끈으로 그의 몸통을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눈치를 살핀 모니 아버지가 소곤거렸다.

“저분도 마탑의 일원이시니?”

“그건 몰라, 지금부터 조사해야 돼. 저 육식 수인이 자꾸 벤디를 찾더라고.”

부녀는 여유롭게 집 안을 둘러보는 레넌을 곁눈질하며 숙덕였다.

호수를 닮은 은발과 눈동자, 나른한 눈매. 겉보기에는 악당과 몹시 거리가 멀었다.

척, 품에서 막대 과자를 꺼내든 모니는 레넌의 뺨을 꾹 눌렀다.

“자, 이제 말해 보시지.”

엄숙한 추궁의 시간이었다.

“뭐를?”

“아까 레피 가주를 찾다가 쫓겨났잖아. 목적을 말해.”

익숙한 막대 과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넌이 여상한 웃음을 걸었다.

“가주를 만나서 따질 게 있거든.”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나 같은 부군을 두고 떠난 게 말이 안 되잖아.”

부군……?

그 단어를 들은 모니와 모니 아버지가 떨떠름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묘한 반응을 마주한 레넌이 의아해지는 찰나, 모니의 막대 과자가 그의 입을 찰싹 갈겼다.

“웃기지 마, 이 사칭범.”

“……?”

“벤디에게는 이미 예비 남편과 꽃사슴 정혼자가 있거든?”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접한 레넌의 눈매가 처음으로 굳어졌다.

“거짓말.”

“아빠, 아빠도 알잖아. 그치?”

“그, 그렇지…….”

예비 남편인지 나부랭이인지도 모자라, 사슴 영역에 숨겨 둔 꽃사슴까지 있으셨겠다.

‘이 죄 많은 사슴이.’

분노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진 레넌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꼬르륵. 벌어진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환각을 본 모니가 기겁하며 레넌을 흔들었다.

“정신 차려, 육식 수인!”

태풍 전야의 평화로운 페트리온에 모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135 화>

“이번 역은 페트리온, 페트리온입니다.”


열차에서 낙상하듯 하차한 노란 짐승이 철퍼덕, 바닥에 축 늘어졌다.

‘……뭐가 이렇게 멀어.’

웩,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몸집을 줄여도 빌어먹을 멀미는 여전했다.

제 몸만 한 배낭을 짊어진 노란 짐승은 막대 과자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바삭, 무게를 버티지 못한 막대 과자가 손쉽게 바스러졌다.

쓸모없는 룸메이트 같으니라고.

배낭 속에서 동고동락하며 지켜 줘 봤자 하등 도움 되지 않았다.

막대 과자를 내팽개치는 동시에 화악, 노란 짐승의 머리 위를 검은 가방이 덮쳤다.

“열차역에서 새끼 사자라니, 이게 웬 떡이냐.”

“밀반입한 놈이 실수로 떨구고 갔나?”

“쉬잇,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자리부터 피하자고.”

검은 가방을 둘러멘 밀렵꾼들이 들뜬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가방 속에 노란 재앙을 담은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

페트리온 모험대 아지트.

원래도 왁자지껄한 그곳은 오늘따라 두 배는 시끄러웠다.

“육식 수인, 난 너 싫어!”

“나도 너 별론데.”

“너는 5 소대 대장보다 못돼 먹었어!”

“알 게 뭐야.”

옥신각신하는 모니와 레넌으로 인해서였다.

모험대 아이들의 시선이 모니를 따라온 육식 수인, 레넌에게 머물렀다.

타닥, 타닥. 모닥불 앞에 앉은 그는 고구마 굽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누, 눈표범 같기도 하고…….”

“그거 아냐? 하얀 호랑이.”


레넌과의 말다툼에서 밀린 모니는 팔짱 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백호 일족이라는데, 모른 척해. 글러먹은 범죄자야.”

“버, 범죄자라니……?”

“우리 1 소대 대장의 부군 사칭범이거든.”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심지어 벤디를 만나게 해 주기 전까지 우리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협박했어.”

모니가 뾰족한 눈으로 레넌을 흘겼다.

레넌에게 넉넉한 금전을 챙긴 모니 아버지는 저녁 식사로 진수성찬까지 내어 줬다.

푸짐한 풀떼기와 구황작물을 대접받은 레넌은 깨작거릴 뿐이었지만.

“이노오옴!”

척. 새총과 잘 다듬은 나뭇가지 검, 막대 과자가 레넌에게 겨누어졌다.

“너, 혼나 볼래?”

“부군 사칭범 따위에게 벤디를 넘길 것 같아?!”

“그래! 수용소에 자주 가는 건 비밀, 아앗!”

말실수를 해 버린 모험대 아이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타깝게도 이미 들어 버린 레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탁탁, 옷에 붙은 지푸라기를 털어낸 그가 눈을 포물선으로 휘었다.

“그 수용소로 안내해 주면.”

“…….”

“1 소대 대장을 조금만 잡아먹을게.”

인성이 글러먹은 부군 사칭범.

모험대 아이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 * *

늑대가 미쳐 날뛰고 있다.

그 외에는 원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상 꼭대기에 앉은 것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각종 힘쓰는 일을 도맡지 않나.


저택 내에서는 시종일관 벤디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일과였다.

‘왜 쫓아오는데요?’

‘떨어지기 싫어서.’

‘…….’

‘불만 있어요?’

‘없습니다…….’

벤디가 헐렁한 차림새에 반응하는 걸 학습한 원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흑발도 이마를 전부 덮게끔
청초하고 수수한 모습으로 나다녔다.

심지어 오늘 아침 식사에서는 어떠했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아.’

먹기 좋게 자른 고구마를 벤디에게 내밀었을 땐, 고용인들의 손에 있던 모든 물건이 떨어졌다.

참다못한 벤디가,

‘혹시 각인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각인의 뜻은 알고?’

움츠린 벤디는 야닉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시, 심장에 이름을 새기다……?’

‘비슷한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그쪽이 발에 입 맞추라고 해도 기꺼이 맞추는 거.’

과거의 밉상이 울고 갈, 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


이미 수리 할멈을 제외한 고용인들은 반쯤 남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차에 앉은 벤디는 지금까지의 일을 반추하며 씨근거렸다.

‘어떻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뻔뻔하게…….’

팡, 팡. 무시무시한 주먹이 쿠션을 내리쳤다.

뱀보다 요사스러운 늑대 때문에 종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끼이익, 그때 페트리온 수용소로 향하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벌써 도착했나?’

의아함에 마차 문을 열던 벤디가 표정을 굳혔다.

매캐한 냄새와 비명 섞인 고함 소리. 수용소 건물 한편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가주님!”

벤디를 발견한 수용소 병사가 허둥지둥 뛰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웬스턴 레피가 마법을 사용해서 데릭 레피의 감옥을 부쉈습니다!”

벤디의 낯빛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그를 탈출시킬 요량이 분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구속구를 세 개나 채웠잖아요.”

“생명을 갉아먹는 마력을 사용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죄수 몇몇이 탈출한 거고요.”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더니.

어금니를 악문 벤디가 막대 과자를 챙겨 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영역민의 안전이에요. 인근 영역민부터 대피시키세요.”

“예!”

벤디의 발이 망설임 없이 수용소 안으로 향했다.

* * *

비슷한 시각.

“무, 무슨 일이지?”

“저길 봐, 연기가 솟고 있어!”


페트리온 수용소 주변에 다다른 모험대 아이들과 레넌도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마침 탈출하던 죄수 하나의 앞을 레넌이 가로막았다.

“잠깐.”

“네놈은 뭐냐!”

그 외침에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한 모니는 막대 과자를 꺼내 들며 고함쳤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넋 놓고 수용소를 바라보던 아이들이 아차 정신을 차렸다.

모니를 필두로 한 그들이 기를 모으거나 배를 내미는 등, 제각기 자세를 잡았다.

이어서 그들의 빤한 시선이 레넌을 향하자,

‘……아.’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을 뽑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겨우 만족한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페트리온 모험대!”

빠밤.

“퉤, 이건 뭔…….”

같잖은 무리를 마주한 죄수가 무기를 치켜들었다.

“애들 장난질도 정도껏, 컥!”

뻐억! 거들먹거리던 죄수는 레넌의 발길질에 그대로 날아가 혼절했다.

검을 뽑아 든 레넌은 아이들을 등지며 말했다.

“너희는 이제 돌아가.”

“시, 싫어!”

모니가 앞서가려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저 안에 벤디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치기 싫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하려던 레넌이 입을 다물었다.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뭐가 됐든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제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그를 구하러 온 벤디가 생각나서.

모니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레넌은 곧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뒤이어 모니의 팔목을 붙잡은 그는 도망 중인 죄수를 향해 막대 과자를 겨냥했다.

“몸에 흐르는 힘을 막대 과자에 집중시킨다고 생각해 봐.”

“이, 이렇게?”

“지금, 방출해.”

펑, 막대 과자에서 쏘아져 나간 마력 덩어리가 죄수에게 명중했다.

설핏 웃은 레넌이 모니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재능 있네.”

방금 전은 그의 마력을 얹어 준 거지만. 떡잎이 나쁘진 않았다.

몸을 일으킨 레넌은 주춤거리는 모험대 아이들을 돌아봤다.

“모험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지?”

“여, 영역민을 지키는 거!”

“그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대피 중인 영역민을 따라가.”

“그럼 너는?”

“발 닦개 노릇 하러 가야지.”

방긋 웃은 레넌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반대편으로 뛰어들었다.

남겨진 아이들이 눈을 맞추며 웅성거렸다.

“쟤 방금 발 닦개라고 했지?”

“부군을 잘못 말했나 봐.”

“전체성에 혼란이 왔나 보다.”

“바보. 점체성이야, 점체성.”

그때까지도 멍하니 있던 모니는 천천히 막대 과자를 내려 봤다.

두근, 두근. 마력이 맥동하는 조금 전의 생소한 감각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페트리온에 벤디의 곁을 지키는 포악한 마법사가 탄생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 * *
수용소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부서진 감옥은 얼마 안 되지만, 탈출한 몇몇 죄수들과 병사들이 뒤엉켜 소동을 일으켰다.

챙, 챙. 무기가 마찰하는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소란의 한가운데 선 벤디가 병사에게 물었다.

“웬스턴 레피와 데릭 레피는요?”

“기력이 다한 웬스턴 레피는 포박했습니다. 다만 아직 데릭 레피의 행방이…….”

먼지 바람이 뒤섞인 수용소는 바로 곁에 선 인물의 식별조차 힘들었다.

배회하던 벤디의 눈길이 수용소 가장 높은 곳을 향했다.

정찰병이 올라가는 탑.

‘저거다.’

시야를 방해하는 연기를 헤친 벤디가 앞으로 나아갔다. 탁탁탁, 계단을 올라가는 발에 속도가 더해졌다.

꼭대기에 다다른 벤디는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 봤다.

병사들과 죄수들, 그리고 모래 먼지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오른쪽, 왼쪽. 눈동자가 빠르게 오가는 와중,

“무기를 버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릭 레피.’

벤디가 흠칫 뒤돌자,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데릭 레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 살려,”

인질로 잡힌 조리사가 헛바람 든 비명을 흘렸다.

“두 번은 없다, 무기를 버려.”

벤디가 망설이는 기색을 비치자, 데릭 레피의 검이 인질의 목에 더욱 가까워졌다. 주르륵,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히이익! 가, 가주님!”

“……버릴게.”

막대 과자를 바닥에 내려 둔 벤디가 투항하듯 양손을 들었다.

망나니처럼 살아왔어도 데릭 레피 또한 레피 가문의 핏줄. 인질의 생명 정도는 쉽게 앗아 갈 검을 익힌


자였다.
“네 따위가 이대로 가문을 먹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바삭, 막대 과자를 밟아서 뭉그러뜨린 데릭 레피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리리 스승님이 설명한다, 잘 들어. 지팡이를 사용하면 위력은 커지지만, 손으로 직접 마법을 소환하는
것보단 명중률이 떨어져.’

‘그래서 원 리오나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넌 아직 안 돼, 반동으로 튕겨 나가는 게 부지기수니까.’

“……아니.”

이윽고 벤디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제대로 듣지 못한 데릭 레피가 인상을 찌푸렸다.

‘……웃었어?’

그를 인식함과 동시에 벤디의 손에서 화살 형태의 바람이 소환됐다.

일렁이는 바람 뒤에 자리한 밀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띠었다.

“레피 가문의 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리였어.”

쐐애액-

벤디의 손을 떠난 화살이 인질을 지나쳐 데릭 레피의 허벅지에 명중했다.

“아아아아악!”

그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벤디의 몸이 반동으로 튕겨 나갔다.

난간을 넘어 탑 아래로 추락하는 찰나, 뒤따라 뛰어든 인영이 시야를 채웠다.

‘레넌……?’

답지 않게 여유가 사라진 얼굴.

벤디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확. 단단한 팔이 공중에서 제 몸을 받치자, 그제야 깜짝 정신이 든 벤디가 말했다.

“네가 왜 여기에,”

바르작거리는 벤디를 옭아맨 레넌이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마.”

탑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선 벤디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라리 날 방패막이로 써.”

“…….”

“네가 살린 목숨이니까.”

#<136 화>

벤디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방금 전 레넌의 말은 누가 들어도…….

“아……!”

당황한 벤디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레넌의 몸 또한 함께 기울었다.

두 사람의 몸이 탑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벤디를 안아 든 레넌은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탁, 안정적으로 땅에 착지했다.

“레넌, 괜찮,”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레넌을 올려 보던 벤디는 쩍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표정이 백호 영역으로 찾아갔을 때보다 더 싸늘했기에.

차마 내려 달라고 말하지도 못한 벤디가 손을 꼼질거렸다.

“죄수들의 무장을 풀어라!”

“구속구를 가져와!”

소란스러운 수용소 내부, 두 사람 사이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정적이 머물렀다.

레넌은 시선을 못 맞추는 벤디를 가만히 내려 봤다.


그는 솔직히 벤디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전부 버린 채 홀연히 아카데미를 떠날 줄은 몰랐기에.

가주가 되어야 하는 벤디의 처지도, 그들 사이에 세워진 종족의 벽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 한마디쯤은 해 줄 수 있지 않나.

사실상 벤디에게 후 순위라는 걸 확인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순간 지금껏 해 온 갖가지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불안하게 떨리는 밀색 눈동자도, 어쩔 줄 모르는 손도, 그에 반해 뻔뻔할 정도로 새초롬한 표정도.

벤디의 모든 것이 붕 떠 있던 발밑을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어쩔 수 없나.’

앞으로 나아갈 줄밖에 모르는 벤디에게 마음을 내어 준 건 자신.

레넌은 벤디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사슴 앞에서 철저한 약자이니까.

침묵을 지키던 레넌은 이내 벤디의 이마에 쪽,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

깜짝 놀란 벤디가 찹, 제 이마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얼굴이 꽤 볼만하다고 생각한 그는 이마를 가린 손 위에 또다시 입술을 내렸다.

“버리고 떠나니까 좋았어?”

찹, 경악한 벤디가 입술이 닿은 손등을 반대편 손으로 가렸다.

“한 번만 더 말없이 사라지면.”

고민하듯 잠시 허공을 본 그가 물색 눈을 둥글게 휘었다.

“그때는 가둬도 돼?”

될 리가 없잖아.

벤디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는 찰나,

“저, 저거 육식 수인 아니야?”

“육식 수인이 어째서 이런 곳에…….”

벤디와 레넌을 발견한 병사들이 경계하며 가까워졌다.

“가주님을 보호하라!”

“가주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두 사람을 떨어뜨린 병사들이 레넌의 팔목을 포박하며 무릎 꿇렸다.

순식간에 그의 은발을 휘어잡자, 기겁한 벤디가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은 적이 아니라 그냥 지인,”

“그냥 지인.”

벤디의 말을 끊은 레넌이 낮게 웃었다.

“보통 그냥 지인을 책임진다고 말하진 않지.”

여전히 무릎 꿇은 상태인 그가 말을 이었다.

“가주님은 그냥 지인이랑 이렇게 깊이 엮이나 봐?”

벤디의 입이 감자 크기만큼 벌어졌다.

공포의 주둥이다. 입을 여는 족족 해명이 필요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뺨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젓는 벤디의 반응에, 더 수상하게 여긴 병사들이 레넌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엄한 소리 말고 여기 온 목적을 밝혀라!”

“여기 온 목적?”

머리채를 잡힌 채 고개를 들어 올린 레넌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하자.”

“…….”

“가주님.”

이번에는 병사들이 감자 크기만큼 입을 벌리는 동시에 벤디의 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기씨, 이 수리 할멈이 말했지요? 호랑이는 영물인 만큼 요망하게 사슴을 홀린다우.’

진짜…….

또라이…….

* * *

최근 레피 저택 고용인들의 복지 수준이 하늘을 찔렀다.

물론 복지의 높은 비율은 가주의 암묵적 남편이 차지했다.


육식 수인이라 두려움에 떨기도 잠깐, 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반짝반짝한 시선이 정원에서 가지를 치는 원에게 닿았다.

벌어진 어깨, 훌륭한 전완근, 길게 뻗은 다리, 그 위에 자리 잡은 완벽한 얼굴.

물론 듬성듬성 가지 치는 솜씨는 최악이지만, 행위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때 돌연 원이 공구를 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벤디가 탄 마차가 정원에 들어섰기에.

탁, 벤디가 내리는 동시에 황금색 눈이 크게 뜨였다.

“몰골이 왜 이래.”

벤디의 양 뺨을 짜부라뜨린 그가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꼬질꼬질한 꼴에 비해 상처는 없었다.

“가끔씩 하대하는 것도 짜릿하다 얘.”

“조용히 해, 안 들리니까.”

웅크려서 구경하던 고용인들은 뒤따라 내리는 레넌을 발견하곤 헛숨을 삼켰다.

대단한 게 또 나타났다.

일편, 뜻하지 않은 곳에서 원과 재회한 레넌은 눈살을 찌푸렸다.

교복 아니면 제복에 가까운 정복만 입던 꽉 막힌 늑대가. 가벼운 셔츠 차림에 흑발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짐짓 심각해진 그가 아랫입술을 쓸었다.

“여기 오면 한 꺼풀 벗어야 하는 건가?”

“뭐 어떻게 하면 그딴 결론이 나오는데.”

원과 레넌은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도 벤디를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심신이 지친 벤디는 병든 사슴처럼 골골거리며 두 사람의 가슴팍에 이리저리 파묻혔다.

“여기 취직이라도 했나 봐.”

레넌의 가슴팍.

“알았으면 다시 마차 타고 꺼져.”

원의 가슴팍.

힘없이 이리저리 볼이 찌부러지던 벤디는 곧 발작하듯 그들을 뿌리쳤다.

“나 침실에 가서 쉴 거야.”

꾀죄죄한 벤디가 떠나가고, 한발 늦게 도착한 수리 할멈은 침침한 눈으로 레넌을 훑어 내렸다.

“……이건 또 뭐야.”
은발의 아름다운 미남자. 힘 잘 쓰게 생긴 육식 수인 하나 더 늘어났다.

수리 할멈은 옆에 선 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보게, 아는 자인가?”

“초면입니다.”

원에게 하대하는 웬 노인을 마주한 레넌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분명 레피 저택의 실세다.

순식간에 그의 안에서 수리 할멈의 중요 순위가 2 순위로 치솟았다.

“자네는 뭔가.”

수리 할멈의 질문에, 레넌은 손으로 반쪽 하트를 만들어 제 뺨에 가져갔다.

“가주의 부군 될 사람입니다.”

원은 몰래 입꼬리를 비틀었다. 멍청한 고양이.

“노오옴!”

깡!

아니나 다를까 수리 할멈의 지팡이가 레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막을 생각도 못 한 그가 얼떨떨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꼬르륵, 거품 물기 일보 직전인 수리 할멈이 씹어뱉듯 말했다.

“다시 말해 보게.”

“부군,”

깡, 깡!

“육식 수인이 예가 어디라고 사슴에게 눈독을 들여!”

수리 할멈의 갈색 눈동자가 섬광을 발했다.

“왜, 아주 식장에 단체로 입장하지!”

욕지거리를 내뱉은 수리 할멈의 매서운 지팡이가 레넌을 먼지 나게 두드렸다.

“예비 남편도 모자라 이제는 뭐? 부군? 부구운?”

살다 살다 이런 매타작은 처음인 레넌이 휙, 원을 돌아봤다.

멀찍이 자리를 피한 원은 새침한 얼굴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지팡이 형벌 유경험자였다.
‘저 똥개 새끼가 예비 남편이었네.’

……그럼 자신을 기절하게 만든 꽃사슴 정혼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깡, 까강!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경쾌한 매타작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 * *

한편, 근육 아카데미.

하루가 다르게 팔뚝이 우람해지고 있는 X 클래스 학생들이 하소연했다.

“졸업식 피로연 주제가 근력 운동인 게 말이 되냐고.”

“그거면 다행이지, 메인 이벤트가 팔굽혀펴기 대회라니…….”

“야, 상품은 야닉 펠의 어릴 적 애착 목검이라더라.”

“그걸 누가 필요로 하는데.”

아카데미는 오로지 근육에 의해, 근육을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촉촉한 눈가를 비비던 그들은 문득 벤디의 빈자리를 돌아봤다.

마치 당장이라도 배낭에서 고구마 향을 풍기고 있을 듯한 느낌. 시간이 지나도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흠흠.”

텅 빈 제 뒷자리를 돌아본 라일라는 괜히 헛기침했다.

“신시아, 회장한테 따로 연락할 방법은 없나?”

서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신시아가 입만 움직여 답했다.

“왜?”

“아니, 뭐…….”

말끝을 얼버무린 라일라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없으니까 적적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학우들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사과할 것도 있고…….”

“알다시피 우리가 처음엔 회장을 좀 달가워하지 않았잖아.”

돌이켜 생각하니 마력 측정 훈련 당시, 비아냥대며 아무도 참가하지 않은 순간마저 괜히 미안했다.


“우리가 좀 심했지?”

“그걸 이제 알았냐.”

“아니, 애가 특이하긴 했잖아. 무슨 고구마 유통업자도 아니고…….”

신시아는 웅얼거리듯 한마디씩 거드는 그들을 둘러봤다.

그냥 그립다고 하지, 하나같이 말주변이 없어서는.

서적을 덮은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보고 싶어, 학생회장.”

움찔, X 클래스 학생들의 몸이 맞춘 것처럼 떨렸다.

“연락할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

“들어 볼래?”

신시아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말려 올라갔다.

* * *

단시간에 퀭해진 벤디는 집무 책상에 고개를 박은 채 끙끙 앓았다.

수용소나 가문 일만으로도 복잡한데. 저택에서 알짱거리는 두 맹수로 인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여기가 아카데미인지, 사슴 영역인지.’

구시렁거린 벤디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억지로 읽어 내렸다.

서류는 불법 동물 경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원도 그런 경로로 레피 저택 감옥에 갇혔지.

특히 육식 동물 밀매는 초식 수인 영역에서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최소한 페트리온에서라도 뿌리 뽑히면 좋을 텐데.’

펜을 돌리며 서류를 검토하던 벤디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가장 가까운 밀매 일자가 오늘 밤이잖아?’

첨부 자료에는 당당하다고 봐도 무방할 홍보지까지 있었다.

떨떠름하게 홍보지를 읽던 벤디의 낯빛이 점점 굳어졌다.


결국 벤디는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채 쾅!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팔랑, 바람에 흩날린 홍보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가 기대하는 오늘의 특급 매물! 윤기 나는 노란 털과……(중략)……갈색 배낭을 멘 새끼 사자……(


중략)…….]

* * *

밀렵꾼의 검은 가방에 갇힌 노란 짐승은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열차 멀미의 여파와 함께 가방에 스민 페트리온 특유의 향이 헤일린의 코를 찔렀다.

희미한 의식 속, 덮어 둔 기억의 단편이 가물거렸다.

‘이스단 가문에는 날이 밝으면 데려다줄게.’

납치당하여 아리엘 레피의 손에 구해진 그날. 노란 짐승은 하루 정도 레피 저택에 머물렀다.

어린 벤디는 고구마 상자만 관련되면 예민해졌다.

노란 짐승이 실수로 고구마에 흠집을 내자 곧바로 구슬피 울 만큼.

‘나쁜 고양이……. 어떻게 내 부군을…….’

난생처음 헤일린이 누군가에게 쩔쩔맨 경험.

고구마와 혼인식을 치르는 소꿉놀이에서 하객 역할을 해 주고 나서야 벤디의 기분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벤디는 뒤척이는 노란 짐승의 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비밀은 혼담에 있대. 그게 무슨 뜻일까?’

꼬리 만지지 마. 소스라친 노란 짐승이 찰싹 내치자, 뾰로통해진 벤디가 꿍얼거렸다.

‘됐다, 나도 너 싫다 뭐. 오늘도 싫고 내일도 싫어.’


그리고 또다시 장면이 뒤바뀌었다.

덜컹덜컹, 이어진 장면은 가방에 노란 짐승을 집어넣은 채 질주 중인 아리엘 레피였다.

‘마차가 많이 흔들리지? 내가 성격이 급해서 말이야. 이스단 가문은 아직 머니 더 자 두렴.’

호호호, 바람에 맞아 머리가 산발인 아리엘 레피가 신나게 마차를 몰았다.

오웩, 헛구역질하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헤일린은 반짝 잠에서 깨어났다.

‘탈 것 멀미는…….’

그때부터 생긴 거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낯선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느릿하게 이동한 시선이 어둑한 공간을 오갔다.

개, 치타, 카피바라, 박쥐…….

시커먼 철창 속에 수많은 동물이 뒤섞여 자리했다. 밀렵꾼들이 잡아 온 동물을 보관하는 장소인 듯했다.

‘아차, 배낭.’

등골이 서늘해진 노란 짐승이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갈색 배낭은 제 옆에 놓여 있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와중, 지긋한 시선이 옆얼굴에서 느껴졌다.

고개 돌린 곳에는 웬 사슴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맑은 눈과 오뚝한 코, 밀렵꾼들이 특급 매물로 분류할 수준의 털빛.

해피로 인해 느슨해진 사슴생태계에 긴장감을 가져오는 꽃사슴이었다.

#<137 화>

해피의 우악스러운 생김새와는 결이 달랐다.


‘밀렵꾼한테 잡혀 온 사슴인가.’

어여쁜 꽃사슴과 시선이 마주친 노란 짐승은 앙칼지게 눈을 부릅떴다.

이유는 몰라도 사자의 본능이 저 꽃사슴을 없애라고 말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노란 짐승이 경계하며 갈색 배낭을 둘러멨다.

페트리온까지 와서 어영부영할 시간은 없었다. 배낭 속 막대 과자가 눅눅해질 만큼 벤디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으니까.

‘잘 있어라.’

꽃사슴에게 작별을 고한 노란 짐승은 철창 사이로 머리를 디밀었다.

흡, 흡.

그러나 머리를 끼인 상태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

그제야 노란 짐승은 벤디를 만난 후부터 조금씩 푸짐해진 제 몸집을 상기했다.

이대로 철창을 박살 내야 하나.

잠시간 고민에 빠진 와중, 갑작스레 등 뒤에서 화한 빛이 일었다.

이어서 봄바람을 실은 듯한 산뜻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만히 있어, 금방 빼 줄게.”

커다란 손이 철창에 끼인 노란 짐승의 머리통을 요리조리 만졌다.

제 얼굴에 닿은 거친 손바닥을 마주한 헤일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을 잡는 손.’

쏙, 겨우 철창 사이에서 머리를 빼낸 노란 짐승이 곧장 뒤를 돌아봤다.

함께 철창에 갇혀 있던 꽃사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척 봐도 초식 수인인 남자가 자리했다.

‘수인이었나.’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긴 상아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내린 외양. 육식 수인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의 청초한 미남자였다.

노란 짐승이 미심쩍은 눈길로 훑자, 남자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는 너희를 도우러 온 거야.”

다정한 손길이 노란 짐승을 어루만졌다.

“그러니 괜찮아, 여기서 꺼내어 줄 테니까.”


안 괜찮아, 어딜 만져.

찰싹, 참지 않는 노란 짐승이 앞발로 그의 손을 쳐 냈다.

멋쩍게 손을 물리던 남자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노란 짐승의 배낭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고구마 자수. 그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벤디?”

그 중얼거림을 들은 노란 짐승은 철창을 부수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누구신데 남의 사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헤일린이 사람으로 변하려는 찰나, 두꺼운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남자는 순식간에 동물형인 꽃사슴으로 되돌아갔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밀렵꾼은 노란 짐승과 꽃사슴이 자리한 철창 앞에 섰다.

“어이, 네 차례다.”

철컹, 철창을 열어 꽃사슴을 꺼낸 밀렵꾼이 노란 짐승에게 윙크를 날렸다.

“우리 이쁜이, 넌 조금 있다가 가자?”

나가더라도 네 그 덥수룩한 수염은 다 제모하고 나간다.

으르릉. 콩알만 한 송곳니를 드러낸 노란 짐승은 끌려 나가는 꽃사슴을 응시했다.

‘조금 더 있어 볼까.’

아무래도 저 수상한 꽃사슴의 신상을 파악하기 전까진 이곳에 조금 더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 *

불법 경매장 관객석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이에 우뚝 솟은 원과 레넌은 얼굴을 가린 가면을 매만졌다. 경매 참가자 모두에게 지급되는 사슴


가면이었다.

관객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어두컴컴한 상태. 빼곡한 인파를 둘러본 레넌이 원을 향해 말했다.

“이래서야 우리 가주님을 어떻게 찾지.”

“헤일린 이스단이 여기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될 일이야.”

두 사람은 한발 늦게 벤디의 집무실에 떨어진 홍보지를 확인하고 따라온 참이었다.

홍보지에 묘사된 건 노랑이 이스단의 외관과 일치했지만…….

그 성격에 잡혀 온 것도 모자라 경매까지 고분고분 나간다?


가설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픽 코웃음 친 레넌이 호언했다.

“나는 이미 여기 없다에 송곳니를 걸지.”

“나는 발톱.”

두 사람은 무대 위, 한창 경매 중인 꽃사슴을 바라봤다.

왜 저 꽃사슴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고픈 충동이 들까.

물끄러미 무대를 응시하던 레넌이 중얼거렸다.

“똥개.”

“입 닫아.”

“누굴까, 꽃사슴 정혼자.”

“수리 님이 우릴 쫓아내려고 지어낸 존재라고 보는데.”

“아니, 그러기엔 모니 대장도 꽃사슴을 알고 있었어.”

“……네놈이 모니 대장을 어떻게 아는데.”

“그러는 넌 어떻게 알지?”

벌써 벤디의 주변인에게 손을 뻗쳤겠다.

‘이 영악한 똥개가.’

‘이 약은 고양이가.’

두 사람이 서늘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무대에 오른 사회자가 신나게 떠들었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매물만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관중석을 이렇게 꽉꽉 채운 일등공신이죠!”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악기 소리가 경매장을 채웠다.

두두두두.

웅장한 소리와 함께,

“배낭 멘 새끼 사자입니다!”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단 노란 짐승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으.’

최악이다.

가면 아래 자리한 원과 레넌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 더러운 노랑이의 등장과 동시에 송곳니와 발톱을 잃어버린 격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경매를 시작,”

사회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팻말을 든 레넌은 냉랭하게 말했다.

“1 실링.”

고작 1 실링? 사회자와 노란 짐승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어서 원이 팻말을 들어 올렸다.

“2 실링, 그 이상은 사치지.”

“넉넉하게 3 실링.”

레넌의 외침에 원은 팔짱 끼며 불평했다.

“3 실링? 투자금이 너무 큰데.”

“인심 좀 썼어.”

사실상 막대 과자도 못 사는 금액.

경매 분위기를 흐리는 두 사람을 아니꼽게 훑은 사회자가 눈짓했다.

곧 경비들에게 끌려 쫓겨나는 두 참가자를 바라보던 노란 짐승이 귀를 쫑긋거렸다.

‘목소리가 귀에 익은데.’

저렇게 뒷발차기를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지기도 쉽지 않은데.

그러나 경매장 특유의 울림과 관객들의 소란 때문에 파악이 어려웠다.

이내 사슴 가면을 쓴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5 천 실링!”

“7 천 실링!”

육식 동물이 귀한 사슴 영역에서, 그것도 사자의 새끼.

노란 짐승의 경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 * *

낙찰이 끝나고, 노란 짐승을 집어 든 밀렵꾼이 걸음을 옮겼다. 값을 치른 후 낙찰된 동물들을 인도할


시간이었다.

터벅터벅, 동물들을 가둔 창고에 다다른 밀렵꾼은 돌연 낯빛을 희게 물들였다.

창고를 지키던 제 동료들이 바닥에 쓰러진 꼴.


그도 모자라 철창에서 빠져나온 경매 동물들이 복도로 뛰쳐나왔다.

“도, 동물들이 탈출, 으아아악!”

크르릉!

주둥이를 쩍 벌린 늑대가 삽시간에 밀렵꾼을 덮치고 들었다.

덕분에 노란 짐승은 힘들이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놈이 벌인 일인가?’

벤디를 아는 듯했던 꽃사슴.

노란 짐승은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창문이 죄다 열려 있었고, 달아나거나 우왕좌왕하는 동물들로 인해 난장판이었다.

정체불명의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침침한 어둠을 뚫고 꽃사슴 한 마리가 노란 짐승을 향해


뛰어들었다.

찾았다.

‘또 어딜 만지려고.’

냅다 박치기를 날리려던 노란 짐승은 일순 꼬리가 쭈뼛 섰다.

이 사슴은 건드리면 안 된다.

무의식적으로 발에 제동을 건 순간, 꽃사슴의 몸에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꽃사슴의 모습이 벤디로 변했다.

“노랑아!”

그렁그렁한 눈을 한 벤디가 노란 짐승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내 사슴이다. 털을 곤두세우고 있던 노란 짐승은 망설임 없이 벤디를 향해 앞발을 뻗었다.

극적으로 상봉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와락.

노란 짐승을 안아 든 벤디가 노란 털에 뺨을 비볐다.

“위험하게 왜 이런 곳에 있어.”

울먹이던 벤디는 곧 천천히 노란 짐승을 바닥에 내려뒀다.

“사람이랑 동물들이 너 때문에 위험하잖아.”

상봉하자마자 버림받은 노란 짐승은 허, 기가 찬 숨을 흘렸다.

이중인격도 아니고.
노랑이를 어화둥둥 하는 벤디와 헤일린을 박대하는 벤디. 거의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꼴이었다.

탁탁,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밀렵꾼인가.’

보호하듯 벤디의 앞을 가로막은 노란 짐승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모습으로 변한 아까의 그 꽃사슴 남자였다.

뛰어다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쉰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벤디?”

“시에나…….”

휙, 휙.

노란 짐승은 서로 아는 눈치인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뭐야, 이 아련하고 거지 같은 분위기는.

심지어 분위기가 비슷한 사슴 수인끼리 마주 선 그림이 썩 잘 어울리는 것마저 열 받았다.

“시에나.”

남자와 시선을 맞추던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최근에 불법 경매를 망치고 다닌다는 의인이 너였어?”

그제야 정신이 든 남자가 벤디의 손목을 붙잡으며 등 돌렸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는 위험해.”

“얘기는 무슨.”

“……?”

“너 혼자 해, 그딴 거.”

벤디의 목소리가 이렇게 저음이었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던 남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없던 백금발 머리카락의 육식 수인이 서 있었기에.

“당신은…….”

떨리는 시선이 헤일린의 팔에 끼인 갈색 가방에 머물렀다. 고구마 자수가 새겨진 배낭이었다.

‘혹시 조금 전의 그 새끼 사자…….’

그가 혼란에 잠긴 사이, 헤일린은 남자의 손에 잡힌 벤디의 손목을 조심조심 빼냈다. 뒤이어 남자의 손을
쓰레기 치우듯 내팽개쳤다.

붉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남자를 썰어 버릴 것처럼 번들거렸다.


번견처럼 벤디를 막아선 헤일린을 마주한 남자가 당황스레 눈을 굴릴 때, 벤디가 먼저 말문을 뗐다.

“먼저 가, 시에나.”

“뭐? 하지만…….”

“괜찮아, 나 또한 이 경매를 망치러 온 거니까.”

단호한 목소리에, 벤디와 헤일린을 잠깐 번갈아 본 그가 뒤돌았다.

“건물 밖에서 기다릴게.”

탁탁, 남자는 상아색 장발을 흩날리며 달려갔다.

벤디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와중, 헤일린이 곧장 물었다.

“누군데.”

깜짝.

티 나게 놀란 벤디가 목뒤를 매만졌다.

“소꿉친구야.”

“단지 그뿐?”

“……그럼?”

“아니잖아.”

집요한 추궁에 못 이긴 벤디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첫사랑.”

잘못 들었나. 헤일린은 고장 난 제 귀를 팍팍 때렸다.

“어릴 때 내가 좋아했었어.”

쿵.

귀가 고장 난 걸 넘어, 심장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거절당했지만…….”

뒤이은 말에 이번에는 헤일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만개했다.

사슴을 거절하다니. 늘 사슴에게 차이기만 한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헤일린은 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벤디를 내려 봤다. 쑥스러운지 괜히 축이는 입술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원과 레넌, 헤일린이 서로 못 가져서 안달인 이 사슴을…….

‘얘를 거절했다고?’
얘를 어떻게 차.

얘를 어떻게 거부하지?

얘를 대체 어떻게…….

제자리에 선 채로 기절할 뻔한 헤일린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좋아한 이유는.”

화끈. 벤디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말하고 싶지 않아.”

수줍은 듯 새침하게 답한 벤디가 쌩하니 자리를 떴다.

쿵, 심장이 두 번 바닥에 떨어진 헤일린은 그 자리에서 모래가 되고 말았다.

#<138 화>

경매장 위치는 보안을 위해 페트리온 밀림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깊은 밤, 경매장 밖으로 쫓겨난 원과 레넌은 잠시간 갈등에 사로잡혔다.

어차피 입구와 출구는 통틀어 하나.

안에 들어가서 벤디를 찾을지, 엇갈리지 않게 여기서 기다릴지.

채 결론을 내리기 전에 건물 안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아악!”

“놓치지 마, 붙잡으라고!”

벌컥, 입구가 열리며 경매에서 본 동물들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쨍그랑! 이 층 창문을 깨고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
밤중에 얼핏 기다란 밀색 머리카락을 본 원은 고민 없이 창문 밑으로 뛰어들었다. 만에 하나 벤디라면
반드시 받아야만 했다.

터억.

“…….”

그의 품으로 떨어진 건 벤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장한 남자였다. 착각하게 만든 머리카락 색 또한


상아색이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사슴처럼 아롱아롱한 눈망울로 원을 올려 봤다.

‘뭐야 이건.’

원은 정색하며 그를 받치고 있던 팔을 뒤로 팍 뺐다. 덕분에 남자는 그대로 땅에 추락하고 말았다.

“헌신적이네, 각인한 똥개님.”

까르르 웃어젖히던 레넌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뚝 그쳤다.

‘저 초식 수인…….’

나만큼 예쁘다.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을 주는 외양. 전체적으로 서늘한 레넌과는 결이 다른 청순 미인이었다.

의복을 털며 일어난 남자는 뺨을 붉히며 인사를 건넸다.

“신세를 졌습니다.”

원과 레넌의 눈동자에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

이런 꽃사슴 같은 미모는 어딜 가도 흔하지 않았다.

특히 별것도 아닌 걸로 붉히는 저 얼굴. 의도치 않게 이성을 홀리는 유형, 따라서 유죄였다.

더군다나 봄을 닮은 얼굴과 대조되게 탄탄한 몸까지.

이 정도 인물이라면 욕망에 충실한 벤디가 눈독을 들이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놈이다.’

그들이 가슴앓이까지 하며 애타게 찾아 헤맨 꽃사슴 정혼자.

* * *

도망치는 동물들과 불법 경매 참가자, 그리고 밀렵꾼들이 뒤엉켜 엉망인 경매장 건물 한가운데.


헤일린에게서 배낭을 빼앗은 벤디가 뛰듯이 다다다 걸음을 옮겼다.

헤일린은 앞서나가는 벤디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어디 가?”

“밀렵꾼을 소탕하고 경매장을 무너뜨릴 거야.”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웬 놈들이냐!”

“비켜.”

휙, 벤디의 앞을 가로막은 밀렵꾼을 가볍게 던진 헤일린이 곧장 물었다.

“그래서 좋아한 이유가 뭔데.”

“알아서 뭐 하려고?”

달칵, 벤디가 열려던 문을 대신 열어 준 그가 재차 말했다.

“궁금하니까.”

“딱히 별거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방을 둘러본 벤디는 다시 복도로 나갔다.

뒤따라 나간 헤일린은 벤디의 발밑을 방해하는 무기를 발로 차 치우며 따졌다.

“별거 아니면 말해 주면 되잖아.”

“싫어.”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이내 가장 크고 화려한 방에 도착했다.

여기다, 밀렵꾼의 본거지.

쪼그려 앉은 벤디는 밀렵꾼들의 물건으로 보이는 상자를 열었다.

뒤따라 숙여 앉은 헤일린은 혹시 뒤로 넘어갈까, 벤디의 등 주변에 손을 띄웠다.

부스럭부스럭, 벤디는 상자를 뒤적이며 종알거렸다.

“대체 이유 같은 게 뭐가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한데.”

멈칫.

움직임을 멈춘 벤디는 헤일린을 돌아봤다. 밀색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돌연 지난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저기? 아빠도 못 들어가는 엄마의 비밀 서고. 엄마의 비밀이 잔뜩 있는데, 벤디만 살짝 보여 줄까?’

사실 어젯밤, 벤디는 어머니의 비밀 서고를 찾았다.

저택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공간.

다행히 돈이 될 만한 것 외에 관심이 없었던 숙부는 서고를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탁탁, 케케묵은 먼지를 턴 벤디는 어머니가 남긴 서적을 하나하나 읽었다.

‘신시아가 탐낼 만한 고서적이 대부분이네.’

한참을 뒤적여도 이렇다 할 비밀이나 어머니에 관한 사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벤디는 어깨를 아래로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나마 얻은 수확이라곤 자신의 어릴 적 초상화가 전부.

‘본인 초상화나 남겨 두시지.’

그럼 제게는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 되었을 텐데.

볼이 통통한 제 초상화를 매만지던 벤디가 흠칫 손을 물렸다.

끝부분이 우둘투둘하다, 마치 글자라도 새긴 것처럼.

초상화를 뒤집은 벤디는 손끝으로 우둘투둘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녹, 색…….’

……책장 뒤.

곧장 벤디의 시선이 낡은 녹색 책장에 머물렀다.

‘저기 뒤에 무언가 있다는 말인가?’

와르르, 책을 전부 쏟아 낸 벤디가 온몸으로 책장을 밀었다.

지익, 직.

무거운 책장을 가까스로 밀어내자, 의문의 문이 드러났다.

관리되지 않은 서고와 영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철문.

“흡!”

억지로 열려고 힘쓰던 벤디가 별안간 뒷걸음질 쳤다.

이 문…….

‘마력이 걸려 있잖아.’
오묘한 마력의 흐름이 몸을 통해 전해져 왔다.

문에 손을 대며 조심스럽게 마력을 주입하자, 갑자기 공중에 녹색 글자가 떠올랐다.

[암호]

“암호라니?”

때아닌 난관을 맞이한 벤디는 일단 펜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펜에 마력을 실어 허공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아리엘 레피]

당연히 문은 반응이 없었다.

하긴, 마법을 걸어 둔 당사자의 이름은 너무 뻔하지.

[리안 레피]

아버지의 이름 또한 매한가지였다. 뒤이어 휘갈긴 벤디의 이름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벤디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단다.’

‘그럼 아빠도 사랑해?’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아리엘…… 정말 이러기야?’

……알겠다.

드디어 정답을 알아낸 벤디가 망설임 없이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고구마]

쿠르릉, 그와 동시에 문이 개방되며,


[벤디, 내 아기]

허공에 글자가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구마밖에 모르는 네가 이곳을 찾아낸다면 알고 싶은 게 생겼다는 의미겠지]

[엄마에게 묻지 않고 굳이 여기에 온 건, 답해 줄 수 있는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일 거고]

꾸욱, 벤디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는 사실 걱정이야]

[우리 벤디가 외롭고 힘들지는 않을지]

[너무 힘들면 도망쳐도 괜찮아]

[도망치는 곳에도 언제나 길은 있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왠지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해서 도망친 장소가 수인 아카데미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곳에는 길이 있었다.

[엄마가 괜히 가주씩이나 되는 아빠와 결혼해서 벤디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엄마…….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걸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선택하는 길을 언제나 응원하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내 아기]

[아빠한테는 비밀!]

그를 끝으로 글자는 끊어졌고, 몇 번이나 철문을 닫았다가 열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수식이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인 만큼 일회성이 최대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공간에는 어머니가 모은 여유 자금과 일기, 그리고 가문과 관련한 수많은 정보가 있었다.

“…….”

내가 선택하는 길…….

지난밤을 떠올린 벤디가 눈시울을 붉히자, 헤일린의 어깨가 티 나게 경직됐다.

여전히 벤디의 눈물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입 닫을게.”

벤디는 극단적으로 입을 닥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나긴 정적 후, 한참 만에 벤디에게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옛날 옛적에.”

“……?”

“성체가 되지 못해서 가문에서 쫓겨난 사자 수인이 있었어.”

성체와 관련한 비밀. 벤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헤일린이 낯빛을 굳혔다.

“대륙 전역을 떠돌던 그는 잠시간 페트리온의 밀림에 정착했고, 그때 우리 어머니 가문의 핏줄을 이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지.”

벤디는 지난밤, 서고에서 읽은 책을 풀어 내듯 말을 이어 갔다.

“두 사람은 혼인했고, 그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사슴 영역에서 평생을 살며 생을


마감했어.”

일순 허탈해진 헤일린이 되물었다.

“……그게 끝?”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점이 하나 있었대. 그는 연인과 접촉을 할 때마다 고통을 느꼈고,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사라졌지.”

“설마…….”

“평생 새끼 사자일 줄 알았던 그가 성체로 변한 걸 기점으로.”

“…….”

“그는 어머니 가문 특유의 마력에 비밀이 있음을 알았지만, 이스단 가문에 알리지 않았어. 자신을 내친
가문에 득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한 박자 쉬어 간 벤디는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은 어머니의 가문에만 암암리에 전해졌고.”

“…….”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대화가 뚝 끊어진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시선을 맞췄다.

앞선 이야기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깊은 접촉, 혹은 오랜 접촉으로 인해 성체로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섣불리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한 벤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때 헤일린이 벤디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투.

도리어 당황한 벤디는 얼떨떨하게 헤일린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는데.”

“감상이…… 그게 다야?”

“그럼.”

“…….”

“발정 난 놈처럼 입이라도 부딪쳤어야 되나?”

딸꾹.

경악한 벤디가 감자 크기만큼 입을 벌렸다.

헤일린은 땅에 닿을 듯한 턱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닫아 줬다.

“난 성체로 되는 것보다 네가 먼저라서.”

이어진 말에 흠칫 떤 벤디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기가 왠지 겁이 났다.

“그게 무슨 뜻,”

그 순간 벌떡 일어난 헤일린은 예고 없이 벤디를 잡아당겼다.

방 한편에 있는 좁은 창고에 숨은 그는 뒤에서 벤디의 입을 가로막았다.

“……!”

커다란 손에 입이 막힌 벤디가 눈을 껌벅일 때, 누군가 갖은 성질을 부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 자꾸 경매를 망치는 거야!”

“인력을 풀어서 밀림에 흩어진 동물부터 찾아야 합니다.”

“지부에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해!”


쾅, 무언가를 걷어차는 듯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벤디가 내리 찾아다닌 불법 경매 수뇌부였다.

두근, 두근.

입을 막힌 벤디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뒤에 선 헤일린 이스단이나, 창고 문 너머의 나쁜 놈들이나.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창고에 숨기 직전에 헤일린이 했던 말.

숨죽인 채 그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는 와중,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좋아해.”

#<139 화>

벤디는 갑작스러운 말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등에 닿은 헤일린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쿵, 쿵.

불규칙적인 그의 심장 소리가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졌다.

좁은 공간에서 어찌할 바 모른 채 굳어 있을 때, 다시금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말 잘 들을게.”

귀가 간질거릴 만큼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키는 것도 다 하고.”

말을 고르듯 잠시간 조용해진 헤일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옆이라면 노랑이로 살아도 상관없을 만큼.”

“…….”

“……좋아해.”

숨결이 닿은 벤디의 귀에 열이 화르르 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벤디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의아해진 헤일린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듣고 있어?”

연이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헤일린에게 돌아온 건 묵묵부답이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죽었나.

인내심이 동난 그는 벤디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헉!”

일순 온몸에 힘이 풀린 벤디가 미끄러지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덜컹, 몸에 밀린 창고 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영혼 빠진 눈을 한 채 바닥에 앉은 벤디와 밀렵꾼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

그들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밀렵꾼들이 챙,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놈들은 뭐야!”

“경매를 망친 놈들이냐?”

“쥐새끼 같은!”

무기 끝이 창고에서 나온 두 사람에게 겨누어졌다.

본 체도 안 한 헤일린은 벤디를 번쩍 들어 일으켜 세웠다.

영혼이 산책 나간 벤디의 몽롱한 표정을 빤히 보던 그가 재차 말했다.

“좋아,”

텁, 정신이 확 든 벤디가 양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낯빛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어쩔 줄 모르는 벤디의 반응을 마주한 헤일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조용히 할까?”

끄덕끄덕, 벤디의 고개가 힘차게 위아래를 오갔다.

“알았어.”

그의 뺨 또한 뒤늦게 미약한 열기를 띠었다.

두근…….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밀렵꾼들은 이게 뭐라고 심장이 뛰었다.

벤디를 내려 보는 헤일린의 눈빛이 보는 이마저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그사이, 헤일린을 등진 벤디가 밀렵꾼을 홱 돌아봤다.

“레피 가문 가주의 권한으로.”

밀렵꾼들은 그제야 정신을 추스르며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당신들을 불법 동물 밀매 현행범으로 페트리온 수용소에 인도하겠어요.”

“뭐라고?”

벤디는 얼른 막대 과자를 꺼내 들었다. 배낭 속에서 세월을 거듭하며 습기를 먹은 막대 과자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게 뭐람.’

벤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맥없는 막대 과자를 맞닥뜨린 밀렵꾼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딴 걸로 잘도,”

콰아앙!

그 순간 막대 과자에서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 터져 나갔다.

* * *

같은 시각, 경매장 밖.

원과 레넌은 꽃사슴 정혼자를 뜯어봤다.

“혹 두 분께서도 경매를 막으러 오신 건가요?”

말끔한 외모도 모자라 올곧고 정의로운 눈빛.

때때로 불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위치에 앉은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유형이었다.

달리 말하면 발 닦개 삼 인방을 모두 제치고, 벤디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존재란 소리였다.

이 자리에서 죽사발을 내야 한다.

두 사람이 그런 판단에 이른 찰나,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창문 밖으로 두 인영이 튀어나왔다.


또 이상한 거나 튀어나오겠지.

감흥 없이 올려 보던 원의 두 눈이 확장됐다.

노란 대가리는 알 바 없고, 그 옆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는 건 틀림없는 벤디였다.

공중에서 벤디를 향해 팔을 뻗던 헤일린은 일순 몸을 비껴 쐐액- 날아오는 마법을 피했다.

“……!”

원의 마법이었다.

그사이 팔을 뻗은 원이 풀썩, 벤디를 받아 냈다.

그의 품에 안착한 벤디는 막대 과자를 든 손을 달달 떨었다.

‘눅눅하니까…….’

마법이 여기저기로 튀어 버리는구나.

원은 한눈파는 벤디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친 곳은.”

“없…….”

무심코 대답하던 벤디는 코앞에서 원을 마주하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잡아먹는 거, 오늘 해도 돼요?’

오, 맙소사.

습관처럼 코에 피가 몰린 벤디가 그를 퍽 밀치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러고도 다리가 꼬여 휘청거리는 순간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받쳤다.

“넘어지는 게 취미야?”

밤하늘 아래 자리한 레넌의 얼굴을 올려 본 벤디는 또다시 동공을 떨었다.

‘혼인하자, 가주님.’

오, 세상에.

정신이 혼미해진 벤디가 빛처럼 빠르게 도망치며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다,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면 나 코피 터뜨린다.

자신의 슬픈 미래를 예감한 벤디가 엄하게 경고했다.

궁지에 몰린 사슴과도 같은 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한 삼 인방이 망설일 때, 그들을 지나친 남자가 벤디의 앞으로 걸어갔다.

표정을 굳힌 세 사람은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들이 벤디에게 몰아붙이듯 마음을 전하게 된 불안의 기폭제.

그리고 공공의 적.

씹어 먹을 꽃사슴 정혼자란 것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모르는 원이 중얼거렸다.

“무슨 관계야, 대체.”

“소꿉친구.”

곧바로 헤일린이 대답했다.

“그리고 어릴 때 좋아했다가 거절당한 상대.”

“……?”

휙, 원과 레넌의 고개가 헤일린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돌아갔다.

“누가 누구를 거절해?”

“저놈이 벤디를.”

“……??”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게…… 가능해?

그게…….

원과 레넌의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만 해도 벤디를 잡아서 숨기고 싶은 걸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인데.

넋이 빠진 두 사람의 심정에 처음으로 공감한 헤일린이 되물었다.

“그러는 너희는 왜 저놈이랑 같이 있는데.”

석상처럼 굳은 레넌이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정혼자라는데.”

“누구.”

“내 가주님의.”
누구의 정혼자?

잘못 들었나 싶은 헤일린은 원의 머리통을 철썩 때렸다.

굳어 있다가 난데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원이 백금발을 틀어쥐었다.

“노란 새끼가.”

머리채를 잡힌 헤일린은 두피가 당기는 고통을 체감하며 생각했다.

꿈이 아닌 모양.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어.”

원과 레넌은 들소처럼 달려들려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기다려 봐.”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 보자고.”

두 사람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걸었다.

벤디를 거절하다니, 정혼자란 호칭까지 단 주제에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었다. 더군다나 거절해 줘서


감사하기까지 할 지경.

마침 서로를 바라보던 벤디가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시에나.”

“벤디…….”

그와 동시에 레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감히 누구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건지. 철컥, 엄지로 검을 살짝 밀어 뽑은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그냥 베자.”

이번에는 원과 헤일린이 레넌의 옷자락을 늘어져라 당겼다.

“기다려.”

“이제 한 마디 했어.”

뒤에서 일어나는 살벌한 상황은 전혀 모르는 두 사슴이 대화를 지속했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네.”

“벤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원은 살상력 있는 마법을 사용할 때 쓰는 검은 장갑에 손가락을 넣었다.

“못 한 말은 영원히 못 하는 편이 낫지.”

까딱하면 진짜 죽겠다 싶었던 레넌과 헤일린이 장갑을 빼앗아 땅에 팽개쳤다.


“다음 말은 들어 보고.”

“일단 안전하게 없앤 후에 천천히 듣지.”

“무슨 헛소리야, 그건.”

세 사람이 음소거로 씨름을 벌이는 와중,

“나는 벤디 네가 싫어서 혼담을 거절한 게 아니야.”

시에나에게서 폭탄 같은 발언이 터져 나왔다.

삐걱, 서로의 옷자락과 머리채를 잡고 있던 세 사람은 고장 난 기계처럼 고개를 틀었다.

맹수들의 시야에 둘만의 세계에 빠진 사슴 두 마리가 들어왔다.

시에나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 벤디가 물었다.

“그럼 당시에 왜 혼담을 거절한 건데?”

“너는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널 좋아한 건 진심이었어.”

쿵.

심장이 철렁한 세 사람은 전의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어릴 때고 뭐고, 지금 벤디가 내뱉은 말은 자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말.

벤디의 목소리로 듣는 게 황송하면서도, 그 말이 다른 놈을 향한 게 환장할 지경이었다.

챙, 레넌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원은 손에 마법을 소환한 채 검은 돌이 되었고, 숙여 앉은 헤일린이 마른세수를 했다.

세 사람이 혼절 직전에 이른 사이, 시에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벤디, 아니야. 넌……!”

시에나의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네가 좋아한 건 내 배경이었어.”

“……!”

벤디를 제외한 삼 인방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도 알잖아, 네가 흠모한 건 페트리온에서 가장 많은 고구마 밭을 소유한 내 가문인 것을.”

“그건…….”

“됐어, 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시에나!”
치정 싸움을 끝낸 시에나가 세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퇴장하는
모습조차 청초했다.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삼 인방은 허공에 손을 뻗은 채 얼어붙은 벤디를 돌아봤다.

또라이 사슴을 사로잡는 방법.

그건 구구절절한 고백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미인과 고구마였다.

“…….”

침묵 속에서 발 닦개들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했다.

* * *

한편, 학생들의 육체미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중인 근육 아카데미.

그곳 학생회실에는 오랜만에 회의가 개최됐다.

승모근이 붙은 메이지는 쿵, 책상에 묵직한 모형을 올리며 설명했다.

“이 사슴 모형은 회장이 자취를 감춘 후에 저희 마개동에서 개발한 마도구랍니다.”

신시아는 메이지가 가져온 흉물을 응시했다.

돼지 모형에 뿔을 붙인다고 사슴이 되는 게 아닌데. 거기에 날개까지 달린 혼종이었다.

“이렇게 몸통에 물건을 넣고 날려 보내면 돼요.”

메이지는 임의로 구슬 여러 개를 사슴의 몸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전달받을 대상에게 도달하면 입이 열리지요.”

웩, 사슴 모형의 입이 열리며 방금 전에 넣은 구슬이 책상에 쏟아졌다.

묵묵히 메이지의 설명을 듣던 임시 학생회장, 야닉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니까, 이 돼지를 통해 회장에게 학생들의 마음을 전하자고.”

“돼지가 아니라 사슴이에요.”

단호하게 주장하는 메이지를 외면한 야닉은 신시아를 홱 돌아봤다.

“어이, 독서광! 이게 네가 생각한 일이라고?”

“그런데?”

“네 녀석!”
주르륵, 야닉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보기와 다르게 근사한 우정을 가진 보석 같은 녀석이었군…….”

욕이야, 칭찬이야. 들은 척도 안 한 신시아가 메이지에게 물었다.

“안나는요?”

“틀림없이 이 건에 대해 설명하고 학생회실로 오라고 전달했는데…… 으음.”

메이지는 파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말을 전할 때 안나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던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늦으려나 보네요.”

시계를 확인한 신시아는 야닉을 곁눈질했다.

“큽…….”

우정에 취해 우는 저 하이에나는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

콰직, 또 회의실 의자를 부숴 먹은 세미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머쓱하게 서성이는 세미에게서 시선을 뗀 신시아가 메이지를 마주 봤다.

“일단 우리 둘만이라도 회의하고 있죠.”

회의가 끝날 때까지도 안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140 화>

이른 아침, 저택으로 귀가한 벤디를 본 수리 할멈은 기함을 금치 못했다.

“우리 귀한 아기씨 몰골이……!”

“할멈…… 나 목욕부터…….”

“아이고, 그래요. 어서 갑시다.”

지팡이를 내던진 수리 할멈이 벤디를 호송하듯 데려갔다.


원과 레넌은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벤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야 깨달았다.

벤디는 보석상이 아닌, 채소상에 가서 이 고구마부터 저 고구마까지 전부 달라고 해야 가슴 설렐 사고


회로를 가졌음을.

그리고 머문 시간은 짧지만, 그들이 겪은 사슴 영역은 작은 요새와도 다름없었다.

밀림에 둘러싸여 타 영역의 간섭이 어렵고, 풍요로운 농작물로 인해 영역민들의 삶이 대체로 안정적인 곳.

이는 곧 이상하고 평화로운 사슴 나라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배경은 무용지물이란 의미였다.

어쩌다가 저런 사슴에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졌을까.

각자 생각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문득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

헤일린 또한 지옥의 문지기, 수리 할멈의 지팡이 신고식을 치러야 할 텐데. 그 중요한 과정이 생략됐다.

“…….”

홱, 두 사람의 시선이 번개처럼 벤디가 멘 배낭에 꽂혔다.

제 자리를 찾은 듯 도롱도롱 졸고 있는 노랑이 이스단.

몸의 이점을 사용하여 자연스레 저택에 입성한 꼴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수리 할멈이 잊고 간 지팡이에 머물렀다.

“……이제 정체도 다 들켰겠다.”

“반 죽여 놔도 사슴한테 쓰레기 취급받을 염려가 없지.”

직접 두들겨 주는 수밖에.

비실비실 걸어가는 벤디의 뒤로 눈이 뒤집힌 육식 수인 둘이 뛰어올랐다.

노란 짐승의 정수리에 둥근 혹이 생기기 3 초 전의 일이었다.

* * *

겨울이 부쩍 가까워진 날씨, 벤디의 집무실.

팔락, 팔락. 서류를 검토하던 벤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근래 페트리온의 땅 거래가 심상치 않았다.

투기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게, 그저 타인의 명의를 빌어 고구마 밭만 대거 사들이는 이상한 양상.

‘불법 경매를 해결한 지 얼마 됐다고 또 이런 문제가…….’


머리에 쥐가 내린 벤디는 환기할 겸 창가로 다가섰다.

인력이 부족한 레피 저택.

최근 이곳에는 예쁘고 쓸모없는 세 명의 일꾼이 추가됐다.

“누구야! 대체 언 놈이 정원 나무에 고구마를 매달아 놨어!”

정원사가 역정 내자, 가지치기 담당인 원이 뻔뻔하게 손을 들었다.

“남편 분께서 왜, 왜 그러셨을까요…….”

“미관상으로.”

반대편에서는 머리에 혹이 난 노란 짐승이 파바박, 땅을 파며 정원에 고구마 모종을 심고 있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담당이었다.

바로 아래에서는 고용인들의 식간 담당인 레넌이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굽는 중이었다.

짚을 엮은 모자를 쓴 그가 갑자기 고개를 꺾은 탓에, 아래를 내려 보던 벤디와 시선이 마주쳤다.

사르르 눈을 휜 레넌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고구마 먹을래?’

벤디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자, 그는 손으로 반쪽 하트를 만들어 제 뺨 주변으로 가져갔다.

‘아니면 날 먹어도 되고.’

드르륵.

창문을 닫아 버린 벤디는 귀가 새빨개진 채 집무 책상에 앉았다.

저 일꾼 세 명을 어떡하면 좋을까.

“하…….”

양손에 턱을 괸 벤디는 지난 일 년을 돌이켰다.

페트리온을 떠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여우 행세도 모자라 학생회장이 되고, 힘을 기른 후 숙부를


몰아내기까지.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벤디에게는 치열하고도 긴 일 년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 어지러운 레피 가문 상황에 치이는 와중에.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십 년씩이나 찾아다니는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는지.’

‘혼인하자, 가주님.’

‘좋아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답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세 사람이 제게 말한 건 이제 와 간신히 짚어 보게 되는 낯선 감정이니까.

더군다나 무언가 깊이 생각 좀 하려 하면, 냅다 그 화려한 얼굴부터 디밀어서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벤디 님!”

쿵쿵, 누군가 다급히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선 집사가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 입구에서 벤디 님의 지인으로 보이는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지인이요?”

“예, 육식 수인인데…… 막무가내로 벤디 님을 불러 달라고 하셔서 수리 님과 대치 중입니다.”

번득 한 사람이 떠오른 벤디가 되물었다.

“……혹시 3 인칭을 사용하던가요?”

“예?”

“이 야닉 펠이라며 자기주장 하지 않았어요?”

“……예?”

하이에나는 아닌 모양. 확신한 벤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일단 나가 봐요.”

벤디는 집사를 따라 서둘러 정문으로 나섰다.

‘누구지?’

정문 가까이 다다르자, 시야에 붉은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육식 수인이 보였다.

탁탁, 빠르게 달리던 벤디의 발이 점차 느려졌다.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선 벤디는 수리 할멈의 지팡이를 한 손으로 막은 육식 수인을 바라봤다.

숨을 몰아쉰 벤디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안나.”
수리 할멈에게서 옮겨진 안나의 시선이 벤디에게 닿았다.

그녀의 표정이 여전히 화가 난 듯 딱딱해서, 벤디는 섣불리 말문을 떼지 못했다.

한참 만에 안나가 긴 침묵을 깨뜨렸다.

“제가 찾아오지 않으면.”

“…….”

“영원히 안 볼 생각이었어요?”

“아니에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떠나요?”

“그건…….”

입을 달싹인 벤디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해요.”

사실상 쫓겨나듯 아카데미를 나온 거라, 남겨진 이들의 심정을 고려하지 못했다.

손을 만지작거리는 벤디를 마주한 안나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정체를 숨긴 것도, 멋대로 사라진 것도 진짜 짜증 났는데.”

“…….”

“……이젠 됐어요, 숨길 수밖에 없었겠죠.”

허한 웃음을 흘린 안나는 대뜸 양팔을 벌렸다.

“데리러 왔어요.”

“……?”

벤디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재촉하듯 팔을 흔들었다.

“안 와요?”

의미를 깨달은 벤디는 울컥, 쓸데없이 눈물샘이 차올랐다.

작은 발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달려간 벤디가 매달리듯 안나에게 뛰어들었다.

“이렇게 격하게 안기는 건 좀 부담인데.”

“괴력 곰돌이.”

“이대로 으스러지고 싶어요?”

방금 화해한 이들치고는 살벌한 말이 오갔다.

지팡이를 거둔 수리 할멈은 흐뭇하게 뒷짐 졌다.


“아기씨, 이분은 누굽니까?”

잠깐 안나와 시선을 마주친 벤디가 곧 수리 할멈을 향해 수줍게 속닥였다.

“……제일 친한 친구.”

눈을 조금 크게 뜬 안나는 이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늦은 밤, 손님방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안나는 방문을 바라봤다.

조금 전부터 밖에서 들어오지 못한 채 서성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 봐도 누군지 아는 그녀가 말했다.

“들어와요.”

끼이익, 문이 열리며 긴장 어린 표정을 한 벤디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안나는 밤중에 제 방을 찾은 벤디를 훑어 내렸다.

네글리제 차림에 한쪽 팔에는 커다란 베개를 낀 꼴. 안 봐도 목적과 의도가 뻔했다.

곰 옆에 자러 온 사슴이라니. 간도 크다고 생각한 안나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마음대로 해요.”

반색한 벤디가 쏜살같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안나, 아카데미는 어떡하고 왔어요?”

“삼 일 후에는 돌아가야 돼요. 병가를 내고 온 거니까.”

“……흠.”

벤디는 조금 아쉬운 눈치로 이불을 눈 밑까지 덮어썼다.

책을 덮은 안나는 안경을 벗으며 비스듬히 누웠다.

“그러는 회장은 즐거워요?”

“뭐가요?”

“외출증을 끊을 때 학장님이 그러시던데, 괴물 삼 인방이 아카데미를 부수고 사슴을 따라갔다고.”

턱을 괸 안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때요? 꽃 같은 남편 셋과의 동거 생활.”

딸꾹.
숨을 멈춘 벤디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휙, 안나는 자비 없이 이불을 내렸다. 드러난 벤디의 얼굴색이 아카데미 교복 색과 똑같았다.

동공을 떤 벤디는 필사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뭔 일이 있어도 있었나 본데.’

흥미가 돋은 안나는 휙, 재차 이불을 내렸다.

다시 덮어쓸 수 없게끔 이불을 틀어쥔 그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협박했다.

“또 저한테 뭐 숨기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

“명색이 제일 친한 친구 아니었나.”

움찔한 벤디는 이내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게…….”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자초지종을 듣게 된 안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회장이 원 님의 각인 대상이고.”

끄덕끄덕.

“레넌 님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백호 영역에서 데려왔으며.”

끄덕끄덕.

“헤일린 님을 성체로 변하게 할 열쇠를 쥐고 있다?”

끄덕끄덕.

“그리고 세 사람이 청혼 비슷한 걸 했고, 대답은 하지 못한 상태이고?”

끄덕끄덕, 벤디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허…….”

할 말을 잃은 안나는 죄 많은 사슴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투명한 얼굴을 하고선 맹수들을 사냥한 꼴.

“그래서.”

이쯤이면 그냥 넷이서 사이좋게 손잡고 식장에 들어가야 하는 수준 아닌가. 막연히 생각한 안나가 입술을
여닫았다.

“회장은 어느 쪽에 마음이 기우는데요.”


“모르겠어요.”

“바로 대답하지 말고 한 명 한 명 생각해 봐요. 저도 그간의 일을 되짚어 볼 테니까.”

잠시 대화를 멈춘 두 사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묵직한 정적이 지나갔다.

벤디의 머릿속에 원과 레넌, 헤일린이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눈을 반짝 뜬 벤디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계속 두근거려요. 얼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세 사람을 동시에 떠올린 안나가 깊이 수긍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머리에 피가 몰린 두 사람이 코를 꼬집어 막았다.

글러먹은 인성을 얼굴로 압도하는 수준의 미모.

한창 음흉할 나이인 두 여자에게는 자극이 너무 심했다.

“회장, 가주 차원에서는 생각해 봤어요?”

“그것도 답이 안 나와요.”

가문 간 이익 관계를 따지기도 모호했다.

차기 마탑주, 백호 영역의 수장, 사자 영역을 다스릴 유일한 후계자.

뭐 하나 고르기도 애매할 만큼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

말을 잃은 안나는 가만히 벤디를 마주 봤다.

기실 육식 수인 영역은 이성 간의 만남과 이별이 지극히 가벼운 편이었다.

그런 배경과 외모를 갖고 지금껏 누구 하나 만나지 않은 원과 레넌, 헤일린이 특이한 거지.

그러나 눈앞의 사슴에게는 육식 수인 영역의 정서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다가올 게 뻔했다.

‘회장 성격에 가볍게 대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결국 난제를 포기한 안나는 벤디의 어깨를 짚었다.

“누워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하는 수 없죠.”

묘안이라도 있나 싶은 벤디가 희망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덮쳐 봐요.”

“…….”

“뭐라도 결론 나지 않겠어요?”

벤디의 동공이 아스라이 흔들렸다.

#<141 화>

“덮…….”

벤디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관자놀이에는 식은땀마저 송골송골 맺혔다.

벌써부터 긴장한 벤디를 못 미덥게 훑은 안나가 덧붙였다.

“뭐, 부딪쳐 보면 더 끌리는 상대를 확인할 수 있겠죠.”

“……덮.”

망측한 말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벤디는 미간에 힘준 채 주장했다.

“수리 할멈이 레피 가문 가주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냥 회장이 둔하고 고지식한 건 아니고요?”

“아니에요.”

“네, 네. 보수 사슴 씨.”

건성으로 대답한 안나는 빽빽 떼쓰며 바닥을 구르던 야닉을 떠올렸다.

‘병가는 개뿔, 사슴 영역에 가는 거지? 이 야닉 펠도 간다!’

‘닥치세요. 임시 학생회장이 어디 자리를 비우겠다는 거예요?’

‘몰라! 이 몸도 무조건 간다!’


‘잘 들어요, 야닉 펠. 피를 나눈 진정한 동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법이에요.’

‘곰돌이 너…… 맞는 말도 할 줄 알고…….’

같지도 않은 말로 겨우 달랬지만, 아마 유통기한이 길지 않을 터.

안나의 귀환이 늦어지면 야닉 펠이 임시 학생회장직을 내던지고 이곳에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오싹해진 안나는 이불 속에서 발끝으로 벤디를 밀어냈다.

“뭐가 됐든 빨리 해결 봐요.”

“지, 지금요?”

“아무튼 알아서 해요, 제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안간힘을 다해 버텼지만 괴력에 떠밀린 벤디가 복도로 내쫓겼다.

쿵, 등 뒤에서 단호하게 문이 닫혔다.

뒤이어 달칵, 열린 문틈 사이로 하얀 베개가 튀어나온 후 다시 문이 닫혔다.

“…….”

새도 잠든 시각.

베개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벤디는 저택 복도를 둘러봤다.

“안나…….”

“안나 부르지 마세요.”

무심한 괴력 곰돌이.

미련스레 안나의 방 앞에서 서성인 벤디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부작사부작, 네글리제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이내 안나의 방과 가장 가까운 손님방 앞에서 벤디의 발이 멈췄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살금, 살금.

은밀하게 들어선 벤디는 곧 너른 침대 앞에 도착했다.

꼴깍, 목울대 울렁이는 소리가 바람 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베개를 껴안은 벤디의 왼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덮쳐 봐요.’
‘뭐라도 결론 나지 않겠어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마침 창문을 통해 어스름한 빛이 방 안에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굴곡진 이불이 벤디의 시야에 들어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톡, 이불에 닿는 순간,

“……!”

벤디의 몸이 당겨지며 눈앞이 파도치듯 뒤흔들렸다.

푹, 등이 침대에 파묻히는 동시에 목으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되찾은 시야에 반쯤 뜬 서늘한 물색 눈동자가 들어찼다.

일편, 순식간에 벤디의 위에 올라탄 레넌은 단검을 목 언저리에 가져갔다.

웃음기 빠진 얼굴로 상대를 내려 보던 그가 흠칫했다.

야밤에 제 침대를 덮친 건 자객이나 간덩이 부은 고용인 따위가 아니었다.

“……회장?”

이런 시간에 벤디가 왜 여기에 있을까.

잠깐 현실 파악이 안 된 레넌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얼어 있던 그는 챙강, 던지듯 단검을 치웠다. 꿈이든 현실이든 벤디의
목에 또다시 상처를 낼 순 없었다.

“하…….”

멀끔한 목을 확인한 레넌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가 맞나.’

잠결에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탓에, 조금은 몽롱한 그가 벤디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닿은
보들보들한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아니, 꿈이 아니다.’

뒤늦게 현실임을 자각한 레넌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서 뭐 해?”

아차. 그제야 목적을 상기한 벤디가 그를 팍 밀어뜨렸다.

방심하고 있던 레넌은 삽시간에 벤디와 자리가 뒤바뀌었다.

벤디는 제 밑에 깔린 그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부옇게 변했다.

흐트러진 가운이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다시피 한 모양새. 그 아래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였다.

‘뭐, 부딪쳐 보면 더 끌리는 상대를 확인할 수 있겠죠.’

벤디는 안나의 말을 기계적으로 되뇌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벤디를 올려 보던 레넌이 의아하게 물었다.

“뭐 하는 건데?”

“지금부터 덮칠 거야.”

“……뭐?”

얼빠진 그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보통 덮칠 것을 예고하고 덮치진 않지 않나. 사슴은 덮치는 행위마저 당당하고 정직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있던 레넌은 벤디의 손이 제 가운에 닿자 숨을 멈췄다.

“회장, 잠깐,”

“안 돼?”

“아니, 돼. 그런데…….”

사슴이 술이라도 마신 걸까.

드물게 당황한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벤디를 올려 봤다.

“확인할 게 있어서.”

단호하게 말한 벤디는 새초롬한 얼굴로 레넌을 덮치는 과정에 몰두했다.

‘무슨 확인?’

미친 듯이 궁금했으나, 감히 그 행위를 방해할 수 없는 레넌은 혼란스럽게 물색 눈동자를 굴렸다.

제 손보다 훨씬 작은 손이 그의 상체를 부지런히 오갔다.

무릎 꿇고 애원해도 일어날 확률이 낮은 상황이 급작스레 닥쳐온 꼴.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그는 신관이 될 뻔했을 때도 찾지 않은 신을 떠올렸다.

신은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련이면 당장 내일 죽어도 좋았다.

바스락바스락, 대충 가운을 벗기는 데까지 성공한 벤디는 입술을 달싹였다.


“…….”

다음은…….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되지?

난관에 가로막힌 벤디가 손을 머뭇거렸다.

대범한 움직임이 멈추자, 얌전히 지켜보던 레넌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할 수 있겠어?”

“……?”

“그다음 과정.”

벤디가 의미를 채 깨닫기도 전에 레넌의 팔이 몸을 휘감았다.

풀썩,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다시 또 뒤바뀌었다.

벤디의 얼굴 옆에 한쪽 팔을 짚은 그가 눈을 내려 떴다. 늘 여유롭던 표정은 탁하게 바란 상태였다.

이내 몸을 숙인 레넌은 벤디의 목에 코를 묻었다.

부드러운 은발이 뺨을 간질이자, 벤디는 발끝이 꼿꼿하게 섰다. 훤히 드러난 그의 갈라진 상체가 정신을
혼미하게끔 만들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든 레넌이 중얼거렸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이성이 고갈된 물색 눈동자가 벤디를 내려 봤다.

제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알고는 있나 싶은 무구한 얼굴.

그러나 호랑이굴에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먹이를 놓칠 생각이 없는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느릿하게 벤디의 손을 당겨 온 레넌이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다음 과정은,”

그는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내가 할까.”

헉.

몽롱하게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벤디가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휙, 달아나려 하기 무섭게 탄탄한 팔이 허리를 옭아맸다.

네글리제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그가 나직이 말했다.


“어디 가?”

“…….”

“마저 덮치고 가야지.”

“나, 나중에.”

덮치러 왔다가 도리어 호랑이에게 홀릴 뻔한 사슴이 부리나케 달아났다.

쾅!

복도로 나섰던 벤디는 다시 문을 열고 발을 들였다.

주섬주섬, 카펫에 떨어진 제 베개를 챙긴 벤디가 바람처럼 레넌의 방을 박차고 나갔다.

“…….”

손님방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밤중에 숨어든 자객에게 가운이 벗겨진 레넌은 곧 무너지듯 침대에 쓰러졌다.

하얀 침구에 파묻힌 은색 머리카락이 옅게 떨렸다.

사슴의 느닷없는 미친 짓에 헛웃음마저 날 지경. 제 이성의 끈이 얼마나 긴지 시험당한 수준이었다.

“……아.”

잠은 다 잤다.

* * *

우당탕, 요란하게 안나의 손님방으로 돌아온 벤디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회장?”

덕분에 잠에서 깨어난 안나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때요, 갈피가 좀 잡히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진짜 이 방법으로 답을 찾을 수 있긴 할까요?”

“저야 모르죠.”

거북이처럼 웅크린 벤디는 이불 안에서 머리만 쏙 꺼냈다. 밀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안나, 아무래도 저는 짐승인가 봐요.”

“수인은 원래 반은 짐승이에요.”

“그 의미가 아니라.”
“네, 네. 짐승 사슴 씨.”

잠에 취한 안나는 길게 하품하며 뒤척였다.

“저 너무 졸린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의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상체만 한 베개를 껴안은 벤디는 꼼지락거리며 눈을 굴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심정이 더욱 복잡해진 것 같은데, 과연 이게 맞나.

결국 벤디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 * *

석양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오후.

원은 오늘 조금 이상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우선 레넌이 평소와 달랐다.

종일 혼이 나간 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며 중얼거리는데, 이상하지 않은 게 이상한 놈이니 그러려니


넘기고.

문제는 벤디였다.

파바박. 노란 짐승이 파놓은 땅에 고구마 모종을 심던 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기에.

원인은 집무실 창가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 보는 벤디였다.

학기 초, 제게 학생회장이 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처럼 비장한 눈빛.

심지어 저 의미 모를 시선이 아침부터 해가 떨어진 시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넋 놓고 있던 원은 찰싹, 고통이 느껴지는 손등을 내려 봤다.

노란 짐승이 앞발로 제 손등을 후려친 것이었다.

“뭐.”

일 안 하고 어디 게으름 피우냐는 의미.

크르릉- 밭일에 진심인 노란 짐승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원을 나무랐다.


“성가시게.”

대놓고 무시한 그는 저녁이 가까워지는 하늘을 올려 봤다.

벤디에게 가서 이유를 묻고 싶으나 오늘은 무리였다.

몸이 동물형으로 변하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으니까.

날뛰는 노랑이 이스단을 고구마 밭에 심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먼저 방에 들어갈 테니 나머지는 네가 해.”

시간이 흘러, 만월이 하늘에 걸린 밤. 원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터벅터벅, 원은 밖으로 나서지 못한 채 손님방을 서성였다.

갑갑하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육식 수인 영역도 아닌 만큼, 만에 하나 누군가라도 마주치면 뒤집어질 게 뻔하니까.

그렇다고 굳이 마력까지 써 가며 인간 모습을 유지하기도 번거로웠다.

결국 너른 공간에 엎드려 잠을 청하던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끼이익.

조용히 방문이 열리며 베개를 든 불청객이 찾아왔다.

#<142 화>

목숨을 노리는 밤손님이야 익숙한 일.

밤중에 찾아든 자객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던 원은 의구심이 일었다.

자객치고는 움직임이 하수를 넘어 어설픈 수준. 심지어 발이 꼬여 넘어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실눈으로 정체를 확인한 원은 숨을 삼켰다.

왜 네글리제를 입은 벤디가 이 방에 서 있는 걸까.

‘설마…….’

종일 자신을 노려본 이유와 관련이 있나.

해답을 찾지 못한 원은 일단 자는 시늉을 지속했다. 또라이 사슴의 머릿속은 한 치 앞조차 예상이


불가능했다.

살금, 살금.

조심스럽게 잠입한 벤디는 텅 빈 침대를 확인하곤 멈칫했다.

두리번거리기도 잠시, 벤디의 눈길이 카펫에 닿았다. 그곳에는 웬 거대한 늑대가 엎드려 누운 상태였다.

“……!”

육식 동물.

하마터면 비명 지르며 도망갈 뻔한 벤디가 합 입을 틀어막았다.

‘왜 늑대가 이런 곳에…….’

벌렁거리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은 벤디가 주춤주춤 접근했다. 여차하면 늑대를 두드려 팰 베개를 꽉 쥔


채.

‘그냥 늑대가 아니라…….’

잠든 늑대와 가까워질수록 벤디의 경계가 점차 풀어졌다.

‘원이구나.’

원 리오나드의 동물형이 분명했다. 이토록 고고하고 산만 한 늑대는 세상에 둘일 수 없으니까.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린 벤디가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뭐야…….’

두려움을 넘어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사실 어제와 같은 대범한 짓을 벌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다음 과정은 내가 할까.’

쿵, 쿵.

레넌과의 일을 반추하기만 해도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뛰어 댔다.

눈을 감으면 그 위험한 분위기와 아슬아슬한 공기가 떠올라 숨이 턱 막히는데.


‘이것 봐.’

생각만 했는데도 머리에 피가 몰린 벤디가 코를 꼬집었다.

이 와중에 원을 상대로 또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제 명에 못 살 게 틀림없었다.

코피로 분수도 모자라 홍수를 내지 않을까.

한숨 돌린 벤디는 무릎을 모아 앉았다.

‘그런데 왜 늑대 모습으로 불편하게 자는 거지?’

설마 아프기라도 한가.

그런 생각에 다다른 벤디가 주춤거리며 복부를 어루만졌다. 이어서 조용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원 님, 혹시 아파요?”

그대로 검은 돌이 된 원은 찍소리조차 못 한 채 자는 척을 지속했다.

어딜 만지는 건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내도 모른 채 손길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냥 깊이 잠든 건가?’

추측한 벤디는 무의식중에 복부를 슬슬 만졌다. 털이 손끝을 스칠 때마다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때는 이 늑대의 온기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장소였는데.

마침 당시와 비슷한 쌀쌀한 날씨라, 자연스레 어린 날의 원이 떠올랐다.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딸려오던


까만 머리카락의 소년.

‘죽지 말고 기다려.’

‘내가 너를 죽이러 올 테니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이 제게 각인한 순간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각인의 뜻은 알고?’

‘그쪽이 발에 입 맞추라고 해도 기꺼이 맞추는 거.’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감정.

레피 저택에 온 이후 알아본 늑대 일족의 각인은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종류였다.

툭, 벤디는 무릎에 턱을 묻었다.


“만약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깊은 생각에 잠긴 벤디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한테 각인했을까?”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을 똑똑히 들은 원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화아악, 마력을 이용한 그는 순식간에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

“……!”

깜짝 놀란 벤디가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탁, 바닥에 부딪힐 뻔한 뒷머리를 받친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거의 카펫에 누운 상태인 벤디는 원을 올려 보며 동공을 떨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

“네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빠지는 그딴 감정 아니야.”

이토록 흐트러져서 화내는 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이 아니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만났을 거라고.”

“…….”

“네가 스스로 아카데미에 나타난 것처럼. 그게!”

놀란 벤디의 표정을 마주한 원은 일순 말을 뚝 멈췄다.

제가 흥분해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하…….”

꾸역꾸역 화를 삼킨 원은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네게 각인했을 거야.”

“…….”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설령 네가…….”

툭, 벤디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은 그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선택하든.”

그 말을 끝으로 원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것의 감정을 삼켰다.

어차피 다른 사람을 선택하든 말든 양보할 생각도 없었다.

인생의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져 온 감정이니까. 고작 일이 년짜리에 밀릴 크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말까지 하면 심약한 벤디가 달아나지 않을까.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힌 원은 옆으로 누우며 벤디를 품에 끌어안았다.

바르작거리는 벤디를 양팔로 옥죄듯 안은 그가 중얼거렸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 근육 때문에 숨 막힌다고.

푸하, 겨우 돌파구를 찾은 벤디가 숨을 토해 냈다.

온통 새빨개진 모습에, 바람 샌 웃음을 흘린 원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어둠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벤디에게마저 전해질
정도였다.

“…….”

뺨이 홧홧해진 벤디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콩닥콩닥. 잠을 못 이루게 만든 레넌과는 또 다른 종류의 심장 울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왠지 실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들이 가진 감정의 무게에 못 이겨 쫓기듯 누군가를 선택하려는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재촉받는 기분이었다.

고민이 깊어지는 찰나, 원의 목소리가 벤디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 시간에 찾아온 이유는 뭔데요.”

느릿하게 움직인 그의 시선이 네글리제와 덩그러니 놓인 베개에 머물렀다.

벤디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답했다.

“덮치러…….”

멈칫. 일순 잘게 경련한 원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베개는 뭐고.”

덩달아 흘끔 베개를 곁눈질한 벤디가 조곤조곤 답했다.

“내가 너무 심한 짓 하면 저걸로 막으라고…….”

말끝을 흐린 벤디는 이내 결의 어린 눈빛을 한 채 덧붙였다.

“그런데 안 그러려고요.”
아무래도 이렇게 해서 결론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 단호한 주장에 결코 웃지 못한 원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발 덮쳐,”

그때였다, 간신히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던 마력이 풀리며 늑대로 되돌아간 건.

도리도리, 늑대가 애처롭게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핑 고인 그는 앞발로 이마를 팍 찍었다.

왜 하필 오늘.

왜.

왜…….

레피 저택 사슴들은 그날 밤 늑대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오들오들 떨며 잠을 설쳤다.

* * *

“거기 3 호, 이리 와 보게.”

수리 할멈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일꾼 3 호, 헤일린을 호출했다. 동시에 지팡이 끝이 꽃을 심는 화단을


향했다.

“화단에 고구마 모종을 심으면 어떡하나!”

“내가 한 거 아닌데.”

“화단 담당은 자네이지 않은가!”

헤일린은 억울함이 이를 데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범인은 요 며칠 넋이 빠진 일꾼 1 호와 2 호의 짓이 분명했기에.

그의 울분을 알아주지 못한 수리 할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일터를 다시 배분해야겠어. 잘하는 게 뭔가?”

“부수는 거.”

“철거 작업은 당장 할 만한 게 없네. 다른 건 없나?”

잠시간 고민한 헤일린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귀여운 거?”

미친 것……. 눈썹을 든 수리 할멈이 혀를 끌끌 찼다.

벤디를 따라온 육식 수인 중, 예의 바른 안나를 제외한 삼 인방은 하나같이 멀쩡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냥 그 누렁이인지 노랭이인지 하는 모습으로 잠이나 자러 가게!”


결국 소중한 모종마저 빼앗긴 헤일린은 정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일터를 잃은 그는 서성이다 말고 멈춰 섰다.

뭔가 있다, 일꾼 1 호와 2 호에게.

최근 그들은 가만히 잘 있다가도 대뜸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자책을 일삼았다.

레넌은 그날 밤으로 회귀하고 싶다며 주문처럼 중얼거렸고, 원은 스스로를 동물형도 조절 못 하는


똥개라며 자기 비하를 이어 갔다.

휙, 나무에 뛰어오른 그는 망설임 없이 벤디의 집무실 창문으로 쳐들어갔다.

소파에서 멍하니 고민에 잠겨 있던 벤디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웬일이야?”

헤일린은 다짜고짜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슬금슬금, 벤디는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엉덩이를 물렸다.

누가 봐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한 사슴을 묵묵히 보던 그가 말문을 뗐다.

“하얀 고양이랑 똥개가 이상하던데.”

“…….”

“너지.”

뜨끔.

벤디는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지만, 붉어진 귀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추궁 어린 무시무시한 시선이 벤디의 옆얼굴을 찔렀다.

무언의 압박에 못 이긴 벤디가 작게 실토했다.

“……덮.”

“덮?”

“덮치려고 했어.”

퍼석, 헤일린이 손을 얹고 있던 소파 손잡이가 부스러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벤디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졌다.

“덮…….”

뇌까린 헤일린은 뒤집힐 뻔한 눈을 벅벅 문질렀다. 간신히 평정을 유지한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되물었다.

“왜.”
“혹시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뭐를.”

“그건…….”

“네 감정을?”

눈치를 살핀 벤디가 마지못해 살짝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진 헤일린이 짧은 숨을 뱉었다.

차라리 몸을 탐했다는 이유가 나을 지경. 벤디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숨을 고른 그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조급해 보이네.”

정곡을 쿡 찌르는 말에,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답할 새도 없이 헤일린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도 너한테 당장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았어.”

“…….”

“뭐 때문에 그러는데. 책임감? 의무감?”

“책임감이…….”

문득 벤디의 눈앞에 무수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그쪽한테 각인했으니까.’

죽고 싶을 때 유일한 온기가 되어 준 원.

‘이제 진짜 나 책임져야겠다.’

백호 영역에서 피범벅인 채 저를 향해 웃어 보인 레넌.

‘난 성체로 되는 것보다 네가 먼저라서.’

이유야 뭐가 됐든 늘 저를 위해 몸을 던진 헤일린.

제게는 누구 하나 가볍지 않았다.


세 사람이 아니었다면 현재 자신은 이렇듯 온전하게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울컥, 왠지 모르게 복받친 벤디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책임감이 없을 수가 없잖아.”

헤일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셋 중 단 한 명도 벤디에게 책임감 따위의 감정은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나사 풀린 백호 정도야 어떤 감정이든 전부 제 거라며 주장할 확률이 있긴 하지만.

“누가 너한테 그런 거 바랐어? 난 네 책임감 같은 거 필요 없어.”

“…….”

“그런 이유로 선택할 거면.”

헤일린에게서 여전히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성체로 변하기만 하면 책임질 필요 따위 없는 거 아닌가.”

“무슨…….”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벤디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나쁘게 말하지 마.”

아랑곳 않은 헤일린이 몸을 조금 숙여 벤디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윽고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덮친다며, 해 봐.”

“…….”

“확인해 보라고. 그게 가장 필요한 건 지금 나,”

헤일린은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콱, 벤디가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버렸기에.

#<143 화>
붉은 눈동자 속에 벤디가 가득 들어찼다. 예고 없이 입술을 깨물린 헤일린은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충동적으로 입술을 콱 물어 버린 벤디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밀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허공을 오갔다.

천년의 용기도 사라진 벤디가 스르르, 슬그머니 입술을 떼어 냈다.

‘피……!’

깨문 아랫입술에 피가 나는 걸 발견한 순간, 그가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

눈을 동그랗게 뜬 벤디와 헤일린의 시선이 부딪쳤다.

뻣뻣하게 굳은 벤디는 고장 난 것처럼 허공에서 손을 파닥거렸다.

대범하게 입술 박치기를 한 것에 비해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동.

헤일린은 입술을 맞댄 상태에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서투름이 마음에 들었다.

휙, 벤디의 몸을 번쩍 든 그가 제 무릎 위에 얹었다.

뒤이어 고개를 옆으로 비튼 헤일린이 벤디의 턱을 엄지로 눌렀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깊숙이 파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릿한 피 맛이 섞임과 동시에 잡아먹히듯 입술이 삼켜졌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벤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눈을 반쯤 내리뜬 그는 긴장 어린 벤디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는 게 꽤나 보기 좋았다.

“흐…….”

호흡이 서투른 벤디가 빠져나가기 위해 바르작거리자, 헤일린이 달래듯 등을 살살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맞댄 입술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벤디의 뒷머리 사이사이로 마디 굵은 손이 파고들며 상체가 바짝 밀착됐다.

숨이 모조리 삼켜졌다. 머릿속마저 부옇게 변한 벤디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만.”

자연스레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눈매가 조금 붉어진 헤일린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긴 왜야, 숨 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위기감을 느낀 벤디는 엉금엉금 기며 소파 끝으로 도망갔다.

“어디 가.”

가는 발목을 붙든 그가 잘근 깨물었다.

“더 해도 되는데.”

“안 돼!”

손등으로 입을 가린 벤디가 그의 뺨을 발로 밀어냈다.

“마, 말 잘 듣기로 약속했잖아.”

움찔한 헤일린은 곧 뾰로통한 얼굴로 얌전해졌다.

눈이 반쯤 돈 사자를 겨우 진정시킨 벤디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있잖아.”

한참 만에 벤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물형 말이야. 성체로…… 변했을까?”

그와 동시에 헤일린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아, 그래서…….’

냅다 입술 박치기를 해 온 건가. 그제야 벤디의 의도를 깨달은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허망함도 잠시, 꿀꺽, 목울대를 울렁인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유례없는 짙은 접촉.

주먹을 쥐었다 편 헤일린은 천천히 몸속 마력을 운용했다.

왜일까. 그토록 성체를 갈망했는데, 조금 더 벤디의 노랑이로 지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라니.

화아악-

벤디의 집무실에 눈이 부실 정도의 새하얀 빛이 퍼져 나갔다.

이내 점점 빛이 흩어지며, 빛 사이로 노란 꼬리가 드러났다.

‘설마……!’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벤디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자리에 남은 건,

“…….”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노랑이 이스단이었다. 굳이 변한 점을 꼽자면 조금 더 펑퍼짐해진 정도.


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본 노란 짐승은 쯧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입 좀 맞췄다고 작은 노랑이가 큰 노랑이로 변하면 그게 더 허무하지 않을까.

그래도 허탈함은 어쩔 수 없는 노란 짐승이 툴툴거리며 퍼질러 앉았다.

그 모습에 푸스스 웃음이 난 벤디는 노란 짐승의 앞발을 죽 잡아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아직까지는 노랑이와 헤일린이 별개의 존재로 느껴졌다.

노란 털을 부스스하게 헝클어뜨린 벤디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노란 짐승이 벤디를 올려 봤다.

“책임감으로 선택할 사안이 아니지.”

벤디는 특유의 맑은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할게.”

만족하며 끄덕이던 노란 짐승은 돌연 흠칫했다.

만일 신중하게 고민한 후에 선택한 답이 자신이 아니면.

원이나 레넌이 오히려 책임감으로 밀어붙여 벤디를 흔들어 놓는다면.

‘잠깐.’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노란 짐승이 앞발로 벤디의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알았다니까, 조급하지 않을게.”

이미 열차는 떠나간 후였다.

* * *

병가 마지막 날.

손님방에서 교복을 차려입은 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페트리온을 떠나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치직, 마침 책상에 올려 둔 통신구가 울렸다.

마력을 주입하자, 학생회장석에 앉은 야닉이 나타났다.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


머리카락을 높이 묶은 것도 모자라, 어디서 안경까지 주워 쓴 그가 암갈색 눈을 번쩍 빛냈다.

[비밀 곰돌이, 잠복은 제대로 하고 있나?]

으.

역할극에 장단 맞출 생각이 일 할도 없는 안나가 딱 잘라 말했다.

“비밀 요원이겠죠. 촐싹거리지 말고 할 말이나 빨리해요.”

[감히 이 야닉 펠에게……!]

[비켜요.]

퍽, 날뛰려는 야닉을 밀친 신시아가 통신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나, 회장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요.]

“정원으로요? 언제요?”

신시아의 뒤에 선 메이지가 음침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지금 바로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부 물거품이 될 거랍니다.]

“아니, 그런 걸 이렇게 갑자기 말하면……!”

빌어먹을 학생회. 하여튼 회장과 자신이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았다.

벌컥, 다급해진 안나가 방을 박차고 나갔다.

* * *

벤디의 손목을 잡은 안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거의 딸려 가다시피 하는 중인 벤디가 의아하게 물었다.

“안나, 어디 가는 건데요?”

“일단 와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니까.”

자연스레 두 사람의 뒤로 발 닦개 삼 인방이 졸졸 따라붙었다.

이윽고 정원 한복판에 다다른 안나는 하늘을 올려 봤다. 벤디도 덩달아 고개를 꺾었다.

“……?”

겨울이 가까운 청량한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안나의 시선은 하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라, 따로 더 묻기도 뭐 한 벤디 또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묘한 침묵 속, 벤디는 제 팔목을 붙든 안나의 손을 슬금슬금 떼어 냈다. 뒤이어 슬쩍 손을 맞잡았다.

일련의 과정을 어이없이 내려 본 안나가 바람 샌 소리를 냈다.

“그 수줍은 표정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타박하면서도 맞잡은 손을 떨쳐 내진 않았다.

손을 잡은 채 얼마나 하늘을 올려 봤을까.

파파파-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파파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혹시나 생길 위험에 대비한 원과 레넌, 헤일린이 벤디 쪽으로 다가섰다.

곧 파란 하늘에 나타난 동물 모형 발견한 벤디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사슴……?”

레넌은 동물 모형을 바라보며 입만 움직였다.

“돼지 같은데.”

팔짱을 낀 원이 고개를 저었다.

“날개를 봐, 박쥐겠지.”

대놓고 표정을 구긴 헤일린이 중얼거렸다.

“그냥 괴물 아닌가.”

파파파-

뭐가 됐든 흉측한 동물 모형이 그들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날갯짓을 멈춘 동물 모형이 돌연 입을 웩 벌리자, 조그마한 종이 수십 장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눈이 내리는 듯한 광경을 올려다보던 벤디는 제 콧등에 내려앉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어쩐지 사슴처럼 생겼더라, 얼굴부터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어……?”

무심코 내용을 읽은 벤디가 손에 잡힌 다른 종이를 확인했다.

[사, 사슴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종이를 쥔 벤디의 손이 옅게 떨렸다.

“이건…….”

휙, 팔을 뻗은 벤디는 공중에서 다른 종잇조각을 낚아챘다.

[뭐 대단한 거라고 도망까지 가냐? 너 그러다가 유급당한다. 얼른 돌아와라.]

수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였다.

[제발 빨리 와 줘! 야닉 펠 때문에 전교생 몸이 듬직해지는 중이라고!]

[교내에서 고구마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 실은 너 꽤 좋아했어. 물론 학생회장으로서.]

하얗게 흩날리는 종이를 잡는 벤디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차기 마탑주랑 무슨 관계인지는 알려 주고 가야지.]

[이제 와 말하지만 대항전 때 구해 줘서 고마워.]

[회장, 너 없으니까 축제가 별로 재미없더라…….]

[나도 사실 육식 수인과 초식 수인의 혼혈인데, 덕분에 말할 용기가 생겼어.]

[솔직히 말해 봐, 레넌 에던트랑 뭐 있지?]

[야! 적어도 언제 어디로 가는지 우리 X 클래스에게는 말했어야지!]

툭, 투둑.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종잇조각을 진하게 물들였다. 벤디는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편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당장 돌아와서 헤일린 이스단과 약혼부터 파혼하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서술하시오. -라일라]

[보고 싶구나, 내 제자 벤디 러피야. -사랑스러운 리리 교수님]

[두목,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메이지 및 마개동 일동]

[올 때 사슴 영역 고서적. –신시아]
[제왕의 귀환, 그리고 대륙 제패의 서막 –야닉 펠]

벤디의 손에 종잇조각이 가득 넘쳐흘렀다.

[벤디 학도, 내 자네의 소중함을 몰랐네……. 손지갑을 가득 채워 줄 테니 빨리 돌아오게……. -밀란느


에던트]

마지막으로 확인한 밀란느 학장의 절절한 편지에, 벤디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원과 레넌, 헤일린의 사이에도 종잇조각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발 닦개들은 뭐 하냐? 데리러 간 주제에 감감무소식이고. 무능한 너희는 회장의 발을 닦을 자격이


없다.]

편지를 확인한 세 사람이 미간을 꾸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죽여 버린다. 익명성을 이용하여 겁을 상실한 내용이었다.

“…….”

벤디는 말없이 편지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 내렸다.

‘난…….’

죽기보다 싫었던 학생회장이 되어 학생회실 문을 열고, 늘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안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클래스메이트들과 의미 없이 주고받는 수다, 몰아치는 시험과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학생회 업무.

왁자지껄한 학생 식당 소음과 말도 안 되게 넓은 교정, 학장실에서 매의 눈으로 학생들을 주시하는 밀란느


학장님.

사소한 모든 게 그리웠다.

아카데미를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 한편을 지배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 생활에 스며들고 싶었다.

입술을 말아 문 벤디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가주로서 자리를 잡아 가는 와중에 저택을 비울 수도 없고, 숙부의 일도 처리해야만 하니까.

숙부가 손 놓고 있던 페트리온의 어지러운 상황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벤디는 문득 비밀 서고에서 본 어머니의 문구를 떠올렸다.

‘네가 선택하는 길을 언제나 응원하며.’

내가 선택하는 길…….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원과 레넌, 헤일린, 그리고 안나가 들어왔다. 아카데미를 떠난 자신을
따라 여기까지 찾아온 이들이었다.

시선을 내리깐 벤디는 품 안 가득한 편지를 바라봤다.

‘아무도 너한테 당장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았어.’

이내 고개를 든 벤디가 그들을 똑바로 마주 봤다.

지금 당장 자신이 돌려줄 수 있는 답변. 그건…….

“아카데미에서 기다려 줘.”

벤디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반드시 돌아갈게.”

* * *

학생회장의 빈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컸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학생 하나가 사라진다고 아카데미가 뒤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애당초 그 한 사람 없이도 명성을 유지하던 아카데미였으니까.

학기가 끝난 후 동계 방학을 맞이하고, 성대한 졸업식과 근육을 단련하는 피로연이 끝나고.

그리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도 벤디는 돌아오지 않았다.


#<144 화>

제대로 된 가주부터 되겠노라 선언한 벤디 앞에서 더 이상 아집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안나와 삼 인방이 페트리온을 떠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겨울과 함께 동계 방학이 찾아온 시점.

백호 영역, 에던트 저택.

가주로서 정복을 차려입은 레넌의 모습에 뿌듯하기도 잠시, 최측근 바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넌 님…… 졸업을 또 미루시겠다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소리 끝이 잘게 경련했다.

“가문 업무를 아카데미에서 처리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집무 책상에 엎드린 레넌은 아픈 고양이처럼 골골거렸다.

“아카데미에서 기다려 달라잖아.”

“누가 감히 레넌 님께 그런 명령을 한단 말입니까! 당장 목을 치,”

“예쁜 사슴이.”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한 바알은 부들부들 몸만 떨었다.

용감하고 예쁜 사슴은 레넌에게 불경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생명의 은인이자 레넌이 홀딱 빠진 사슴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이는 에던트 가문에 존재하지 않았다.

“레넌 님, 차라리 예쁜 사슴을 백호 영역으로 데리고 오는 건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서 납치도 생각해 봤는데.”

“당장 실행할까요?”

“아니, 안 돼. 그럼 나를 평생 원망하겠지.”

책상에 턱을 묻은 레넌이 물색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내가 원하는 건 마음이라서.”

“아니, 그래도 졸업과는 상관없지 않습,”

“상관있어.”
이 고집불통 고양이가. 바알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백호 영역에 메아리쳤다.

늑대 영역, 마탑.

차기 마탑주를 고집하던 원이 드디어 마탑주 자리를 정식으로 계승했다.

장로들의 오랜 기다림 끝에 일어난 경사스러운 일.

그러나 성대한 연회를 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당사자인 원이 죽상을 하고 회의석에 앉아 있었기에. 기분이 저조한 걸 넘어 삶의 의지를 잃은


수준이었다.

“후.”

원의 한숨에 덩달아 장로들의 어깨가 내려가고,

“하아.”

뒤이은 한숨에 회의장 바닥이 꺼졌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원의 얼굴이 푸석푸석한 수준. 용기 낸 장로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마탑주님.”

“말 걸지 마세요, 머리 깨기 전에.”

“함구하겠습니다.”

스르륵, 용기가 사라진 장로가 손을 내렸다.

“이보게, 스카론 장로.”

눈치를 살핀 장로들이 스카론 장로에게 귓속말했다.

“혹시 탑주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요……?”

힐긋. 대수롭지 않게 원을 곁눈질한 스카론 장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심경의 문제니 내버려 두십시오, 그겁니다.”

“그거라 하심은?”

“사슴병.”

“예?”

“아니, 상사병.”

사자 영역, 이스단 저택.


사라 이스단의 집무실, 그곳에는 엄중한 가족회의가 개최됐다.

평소 손도 안 대는 럼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사라 이스단이 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 뒀다.

“해명하거라, 노랑이 이스단.”

“뭐를.”

“그 얼굴을 갖고 내 며늘아기 하나 유혹 못 한 이유.”

“…….”

“내가 그러라고 네 녀석 얼굴을 그리 빚은 줄 아느냐?”

사슴을 못 보아 시들시들해진 헤일린은 소파에 늘어져 중얼거렸다.

“얼굴보단 몸을 좋아하던데.”

“그럼 몸이라도 썼어야지!”

“아카데미에서 벗고 돌아다니라고?”

“못 할 건 뭐지?”

묵묵히 두 사람의 설전을 듣던 이스단 가주가 말문을 뗐다.

“……부인.”

“왜요?”

“모름지기 외양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건 아니,”

“무슨 헛소리예요? 내가 당신 얼굴 하나 보고 결혼했는데.”

“그럼 먼저 청혼한 것도 내 얼굴 때문에……?”

“그걸 이제 알았어요?”

뜻밖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스단 가주가 입을 텁 가로막았다.

이스단 가주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각 영역에 벤디가 없는 시린 겨울이 내려앉았다.

* * *

어느덧 두꺼운 겉옷이 필요 없는 계절이 찾아왔다.

방학 동안 적적했던 아카데미도 신입생들이 입학하며 활기를 되찾았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아, 이거? 학생회장 입후보자 홍보 책자라면서 나눠 주던데?”


그리고 학기 초, 한 해 중 가장 큰 행사인 학생회장 선거 기간이 도래했다.

북적이고 설레는 분위기인 교정 한가운데.

“거기!”

야닉 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교복 똑바로 입어!”

“이놈아, 난 교수라니까!”

어김없이 옷차림을 지적받은 교수가 일침을 가했다.

“더군다나 자네는 지금 학생회도 아닐 텐데!”

벤디의 임기가 끝나며,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해당 학생회도 해산된 실정.

허를 찌르는 지적과 동시에 별안간 왈칵, 야닉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끝끝내 이번 학기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야닉 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전우가.

크흡. 야닉이 대뜸 눈물을 삼키자, 도리어 당황한 교수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내, 내가 교복을 입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 울지 말게.”

“멍청한, 이건 눈물이 아니라 피다!”

“그러니까 왜 피눈물을 쏟고 그러나.”

두 사람의 씨름을 지켜보던 신입생들이 수군거렸다.

“저 선배가 웬만하면 피하라는 그 근육 변태지?”

“맞아, 이번에 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한다더라.”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저럴까…….”

신입생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수인 아카데미 요주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우선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깜찍한 새끼 사자를 절대 귀여워하면 안 될 것.

새끼 사자의 정체는 망나니라고 알려진 이스단 가문의 차기 후계로,

‘뭐야, 새끼 사자가 왜 아카데미에 돌아다녀?’

뭣도 모르고 덜미를 잡았다가 뒷발차기에 강냉이가 털린 신입생의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그리고…….’

마침 그들의 눈앞에 원 리오나드가 지나갔다.


올해를 기점으로 마탑주에 자리매김한 존재.

“리오나드 님, 어째서 학생회장 선거에 불참하시는 겁니까?”

“귀찮게 하지 마세요, 머리 깨기 전에.”

주변에 늘 추종자 같은 이들이 줄줄이 따라다니기에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말을 잃은 신입생들은 원의 동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는 최근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기고 다니는데, 가닥가닥 자연스레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선을 앗아 갔다.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고귀한 외양이었다.

홀린 듯 쳐다보고 있던 신입생들은 자연스레 또 다른 이를 떠올렸다.

마지막 요주의 인물, 백호 영역의 에던트 가주.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을 가진 존재를 상기한 그들이 의아하게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런데 저 정도 인물들이 왜 졸업을 안 하고 버티는 거래?”

“나도 궁금해서 아는 선배한테 물어봤거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던데?”

“누구?”

“잘은 모르는데, 그 왜…… 너희 마법 개발 동아리라고 들어 봤냐?”

통칭 마개동, 검은 로브를 턱 끝까지 덮어쓰고 다니는 은둔 마법사들.

심지어 수인을 잡아 생체 실험을 일삼는단 음습한 소문이 따르는 무리였다.

“모를 수가 없지.”

“그 괴짜들이 두목으로 추앙하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는 거래.”

“두목? 요즘도 그런 호칭을 써?”

“내 말이…….”

산적 같은 생김새를 가진 무시무시한 실력자일까.

막연히 상상한 신입생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튼 그분들이 두목이란 사람을 기다리는 거라고? 왜?”

“글쎄……. 교내 알력 다툼 같은 거 아닐까?”

“땡.”

돌연 그들의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신입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 돌린 곳에는 레넌이 서 있었다.

“정신 빠져서 그래.”

은발 아래, 보석 같은 물색 눈동자가 화사하게 휘어졌다.


“두목님한테.”

두근…….

낯빛을 붉게 물들인 신입생들은 벌렁벌렁 설치는 심장을 꾹 눌렀다.

설치지 마, 우리한테 정신 빠진 거 아니니까.

멀어지는 레넌의 뒷모습을 몽롱하게 바라보던 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서…….”

두목은 대체 누구인 거냐고.

의문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 * *

페트리온, 레피 저택.

거울 앞에 자리한 두목은 교복 타이를 단정히 매만졌다.

“우리 아기씨가 언제 이리 다 컸을꼬, 듬직하기도 하지.”

거울 속, 벤디의 뒤에 비친 수리 할멈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벤디는 조금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머리 위에 손을 가져갔다.

“키도 약간 큰 것 같지 않아? 교복이 좀 짧아진 것 같은데.”

“그건 기분 탓이고요.”

너무해.

몰래 수리 할멈을 흘긴 벤디는 다시 타이를 정돈했다.

수리 할멈은 벤디의 밀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으며 물었다.

“학기가 이미 시작됐는데, 이리 늦게 가면 불이익은 없수?”

“어쩔 수 없지, 이제 겨우 임시 가주에서 정식 가주가 되었잖아.”

수인 아카데미는 정식 가주만이 업무를 위한 외출이 허가되는 곳.

따라서 아카데미 생활과 가문 업무를 병행하려면 완전한 가주가 되어야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씨, 이거.”

빗을 내려 둔 수리 할멈은 벤디에게 금색 봉투 세 장을 내밀었다.

“뭔데?”
“그 왜, 매달 오는 거 있잖수.”

에던트 가문과 이스단 가문, 그리고 마탑으로부터 온 혼서였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고구마 밭 땅문서도 첨부되어 있구먼.”

“……고구마 밭?”

두근, 벤디는 저절로 반응하는 가슴께를 짚었다.

수리 할멈은 어쩔 줄 모르는 벤디를 빤히 응시했다.

일꾼 삼 인방이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은 했으나, 설마하니 그런 어마어마한 신분이었다니.

심지어 수리 할멈 같은 일개 고용인에게 하대받으며 고구마 모종을 심고, 저택 소일거리를 한 게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 점에서 이미 수리 할멈에게는 합격.

더군다나 저택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누가 부군이 될 것인지를 주제로 내기 판마저 벌어진 실정이었다.

입맛을 다신 그녀가 벤디에게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질문과 동시에 벤디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입술만 달싹이는 반응을 지켜보던 수리 할멈이 고개를 저었다.

“결정 못 할 만도 하지요. 여자의 마음이란 참 갈대지요?”

“그런 것 같아…….”

“아기씨.”

“응?”

“사슴 영역은 중혼이 가능하다우.”

세 사람에 대한 은근한 옹호가 섞인 말에, 일순 벤디의 밀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요즘 사치품이 부쩍 늘어난 것 같은데.’

휙. 벤디가 예고 없이 돌아보자, 수리 할멈은 황금 지팡이를 빠르게 숨겼다.

“……할멈. 돈 챙겼지, 그 맹수들한테.”

“마음을 얻으려면 주변인부터 공략하는 게 정석. 이 할멈은 그들의 지략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정말, 나중에 어쩌려고!”

수리 할멈은 벤디의 추궁을 피해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빨간 모자는 안 챙기시나? 교복 모자 아니우?”


저걸 다시 뺏을 수도 없고.

게슴츠레 노려보던 벤디가 체념 어린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응, 작년 임시 학생회장이 거치적거린다고 자율 착용으로 바꿔 버렸대.”

“흠…….”

약간 허전한 밀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수리 할멈이 방을 나섰다.

금세 돌아온 그녀는 붉은 리본을 흔들어 보였다.

“그건 뭐야?”

“아리엘 님께서 젊은 시절에 사용하신 리본이지요.”

“엄마가…….”

수리 할멈은 능숙한 손길로 벤디의 긴 머리카락을 반 묶음 했다. 이어서 높이 고정하여 붉은 리본으로


장식했다.

“친구분들께 미리 알리고 가진 않으시게요?”

“……음.”

고민하듯 눈을 데굴 굴린 벤디가 대답했다.

“응,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아 참, 해피도 데리고 갈 거야. 여기보다 그곳의 마구간을


좋아하거든.”

“에구머니, 마물을 어찌 아카데미에 데려간대요?”

“할멈, 해피는 사슴이야.”

같은 시각, 아카데미 마구간.

해피가 떠나간 후부터 평안한 나날을 보내던 말들은 갑자기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천재지변을 예감하는 동물적 본능. 소름 끼칠 정도의 불안이 밀려든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재앙 같은 초식 괴물을 떠올린 말들이 웅성거렸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아…….
#<145 화>

오전부터 아카데미 교정은 학생회장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다.

“이 야닉 펠을 학생회장으로 뽑으면!”

쫘악, 교복 셔츠를 찢어발기는 기호 17 번, 야닉의 행위 예술이 이어졌다.

“나태하고 추한 네놈들의 몸뚱이를 책임지고 옹골지게 만들어 주마!”

완벽한 역삼각형 몸에 하마터면 홀릴 뻔한 학생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학장실 창가에서 시끌벅적한 교정을 내다보던 밀란느 학장이 뒤돌았다.

레넌은 소파에 드러누운 자세로 가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가십지를 읽으며 까르르 노닥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상을 팍 구긴 꼴이었다.

‘저 놈팡이도 좋은 시절은 다 갔구먼.’

고소를 삼킨 밀란느 학장이 레넌을 타박했다.

“내 몇 번을 말하느냐, 빌빌대지 말고 졸업을 하래도.”

“싫어.”

졸업, 졸업 꾀꼬리처럼 노래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카데미에 눌러앉아 버티는 레넌을 응시하던 밀란느 학장이 콧등을 부르르 떨었다. 저렇게
궁상떠는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데, 차라리 직접 가서 벤디 학도를 데리고 오너라.”

“몇 번을 말해, 기다리기로 했다고.”

“허! 네놈이 언제부터 고분고분 남의 말을 들었다고!”

뒤척인 레넌은 엎드린 채 뚱한 얼굴로 턱을 괬다.

“이번에는 안 들으면 진짜 화낼 거라서.”

“어째서?”

“아직 사슴에게는 가문이 먼저거든. 똥개와 노랑이 이스단이 괜히 얌전히 있는 거 같아?”

원과 헤일린의 동향을 되짚은 밀란느 학장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벤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레넌처럼 조용히 아카데미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나. 신중하게 사냥
시기를 기다리는 맹수와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하나같이 사슴의 의사를 거스를까 전전긍긍하는 꼴이구먼.’

밀란느 학장은 품속에 있는 전서를 만지작거렸다.

아카데미로 들어갈 수 있는 방문증을 부탁하는, 벤디가 학장에게 보내온 연통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녀는 탐탁지 않은 심정으로 레넌을 살폈다.

‘벤디 학도가…….’

손자며느리로서는 환영이지만, 또 적극 추진하자니 저 백호의 짝이 될 벤디의 인생이 불쌍했다.

‘그렇다고 원 학도나 헤일린 학도에게 빼앗기는 것도 아쉬운 건 매한가지인데.’

고민을 거듭한 밀란느 학장은 한참 만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기다리는 거, 서쪽 담장에서 해 보는 건 어떠냐.”

“서쪽 담장?”

갑자기 무슨 헛소리인지.

노망나셨나, 서류에서 시선을 뗀 레넌은 밀란느 학장을 훑어 내렸다.

별생각 없이 그녀의 말을 곱씹던 그가 일순 경직됐다. 무감하던 물색 눈동자가 점점 이채를 띠었다.

“방금 그 말은…….”

벌떡 상체를 일으킨 레넌은 설마 싶은 표정으로 밀란느 학장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도 손자며느리로 못 데려오면.”

그녀는 궐련을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그 반반한 얼굴을 뭉개 버릴 줄 알거라.”

“…….”

“안 가느냐?”

쨍그랑! 레넌은 한 박자 늦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남겨진 밀란느 학장은 박살 난 창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친놈…….”

창문은 왜 뚫고 나가냐고. 여전히 문은 장식이었다.

* * *
아카데미 인근에 다다른 벤디는 들어가지 않은 채 괜히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바람에서 아카데미 특유의 풀 냄새가 묻어났다.

추억에 잠긴 벤디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해피, 기억나?”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푸르릉, 해피는 콧노래를 부르며 흔쾌히 대답했다.

거지 사슴이 드디어 부하들이 기다릴 제 보금자리로 데려다줄 낌새인데, 장단 못 맞출 것도 없었다.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들어가야 했을 때, 이렇게 계속 주변만 빙빙 헤맸잖아.”

무단 외출인 탓에 후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착한 그나마 낮은 담장.

당시의 그 담장 앞에 도착한 벤디가 벽을 짚었다.

‘……여기였었지.’

동시에 머리 위에서 그때와 같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단 외출은 즐거웠나?”

흠칫, 벽을 짚은 손을 떼어 낸 벤디가 고개를 위로 꺾었다.

곧바로 담장에 걸터앉은 레넌과 시선이 마주쳤다.

물색 눈동자를 닮은 하늘을 등진 그가 말을 이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 나는 회장이 있어야 하거든.”

벤디는 여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가만히 올려 봤다.

일 년 전과 동일한 장소, 똑같은 대사.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도, 레넌과의 관계도 현저히 달랐다.

새삼스러운 감회를 삼킨 벤디는 뒷짐 지며 똑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잠깐 급한 볼일 좀 보고 온 거야.”

발꿈치로 괜스레 땅을 파던 벤디가 말문을 뗐다.

“있잖아, 레넌.”

“왜?”

“나도 가주가 됐어, 너처럼.”

지난 몇 달, 벤디는 눈 붙이는 시간도 줄여 가며 업무에 임했다.

그 노력을 모르지 않는 레넌이 눈을 둥글게 휘었다.


“알아.”

“임시 가주 말고 진짜 가주.”

“그것도 알아, 그러니 돌아올 수 있었겠지.”

싱거운 반응에, 자랑한 보람이 없어진 벤디가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비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낸 레넌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이건 알아?”

“뭐를……?”

그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는 벤디를 보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오래전, 과거에 똥개나 노랑이 이스단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시 만난 건 내가 처음이야.”

앞뒤가 생략된 말.

벤디가 알 듯 말 듯 한 말을 아리송하게 곱씹을 때, 레넌이 먼저 손을 뻗었다.

“도와줄까.”

머뭇거린 벤디는 곧 제게 뻗어진 커다란 손을 잡았다.

휙, 순식간에 당겨 올린 그가 벤디를 제 품에 앉히며 덧붙였다.

“그런데 이번에 쟤는 진짜 못 올려.”

레넌의 눈길이 날을 거듭할수록 무럭무럭 자라는 해피를 향했다.

수긍하던 벤디는 코앞에 있는 레넌을 보자마자 숨을 멈췄다.

아직 성장기라 그런 건지 뭔지.

마냥 예쁘기만 하던 얼굴이 몇 달 만에 선이 선명해지고, 특유의 서늘함도 더해진 상태.

닿은 몸이 불편할 정도로 단단하다고 생각하는 와중, 레넌의 저음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

쿵, 쿵.

페트리온에 머무는 내내 얌전하던 벤디의 심장이 또다시 불규칙적으로 뛰어댔다. 변함없이 이곳 맹수들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우리 꽤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

“너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차마 눈도 못 마주친 벤디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보고 싶긴 했지…….”

레넌은 본 적 없는 붉은 리본을 맨 벤디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못 본 사이 조금 갸름해진 얼굴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도, 말할 때마다 열심히 움직이는 입술도. 여전히


정신 빠질 정도로 예뻤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결국 여유롭게 포장한 그의 가면이 무너지는 순간, 벤디가 재빨리 그의 입술을 손으로 덮었다.

“교내에서 이러면 안 돼.”

누가 과거 학생회장 아니랄까 봐, 지극히 모범적인 답변이었다.

“회장은 밤중에 두 번이나 내 침대에 숨어든 주제에.”

“……불가항력이야.”

찔리는 게 많은 벤디는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레넌은 제 얼굴을 가린 작은 손바닥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럼 나도.”

아래로 깔린 물색 눈동자가 더없이 야살스러웠다.

“불가항력이야.”

드러난 벤디의 목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먹이를 탐하듯 지분거렸다.

“흐, 잠깐…….”

길을 내듯 입술이 두 번, 세 번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콕,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에 닿는 동시에 벤디는 그만 온몸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주르륵, 자극에 못 이긴 벤디가 담장에서 무너져 내리자,

“회장!”

당황한 레넌이 떨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벤디와 해피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해피.”

혹시 맹수들은 이런 거 어디서 따로 배워 오는 걸까?

벤디의 소곤거림을 들은 해피는 푸르릉! 거세게 콧김을 뿜었다.

나름 초식 동물인 해피가 알 길이 없었다.


* * *

밀란느 학장은 과장해서 학장실 문짝만 한 해피를 보며 치를 떨었다.

“저 거대한 걸 아카데미 마구간에 또 맡기겠다고?”

눈치를 살핀 벤디가 팔꿈치로 해피의 몸을 쿡 찔렀다. 마구간에 신세를 지고 싶으면 뭐라도 하라는
의미였다.

푸르릉, 해피는 최대한 온순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살랑였다.

흉포한 모습에 위협을 느낀 학장이 눈을 치켜떴다.

“이런 식의 지독한 협박이라니.”

염치없는 사슴 둘을 번갈아 째려본 밀란느 학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몇 달 만에 재회한 벤디는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교복과 똑같은 얼굴색을 하고선 해피의 등에 실려 오는 모습이라니.

벌써 왁자지껄 개판인 아카데미의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후……. 이리 와 보게.”

눈치를 살핀 벤디는 창가에 선 밀란느 학장의 곁에 나란히 섰다.

봄을 맞아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 교정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 담겼다.

“자네가 정체를 들키고 떠난 후에 많은 생각을 해 봤네.”

익숙한 풍경을 내려다보던 밀란느 학장이 말문을 뗐다.

“알다시피 초식 영역에 있는 수인 아카데미 시험장은 양 영역 한 군데뿐이지.”

벤디는 묵묵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참이야.”

“새로운 시도라 하심은…….”

“이제부터 초식 영역에 시험장 개수를 늘리고, 홍보 또한 적극적으로 할 셈이네.”

깜짝 놀란 벤디가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직전의 발언은 수인 아카데미에 초식 수인을 받아들이는 데에 힘쓰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수인 아카데미는 대륙의 모든 인재를 수용하는 곳이니까. 지금까지 그 모든 인재에 초식 수인은 예외였던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밀란느 학장님…….”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이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던 만큼, 아마 시작부터 가로막힐 게다.”

밀란느 학장은 고개를 돌려 벤디와 시선을 맞췄다.

“어쩌면 자네가 원치 않게 구설수에 오르내릴지도 모르지. 괜찮겠나?”

주먹을 쥐었다 편 벤디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너무 비장하지 말게, 이건 학장인 내 일이니.”

“하지만…….”

“벤디 학도, 자네도 내 학생이네.”

“…….”

“학생에게 무언가를 짊어지게 만들지는 않을 걸세.”

밀란느 학장은 저도 모르게 벤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멋쩍게 손을 물렸다. 탁, 그 손을 붙잡은 벤디가
슬그머니 제 머리에 얹었다.

‘요망한 사슴 같으니라고.’

이러니 그 맛 간 괴물들이 정신을 못 차리지. 웃음을 삼킨 학장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참고로 신입생 중에 이미 초식 수인 한 명이 입학한 상태이지.”

“그런가요.”

덩달아 담담하게 답하던 벤디가 홱 소리 나게 그녀를 올려 봤다.

“……네?”

뭐가 입학했다고요?

#<146 화>
“어느 일족인데요? 진짜 초식 수인이에요?”

동질감과 호기심에 몸이 단 벤디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점점 다가오는 벤디의 얼굴을 밀어낸 밀란느 학장은 시계를 확인했다.

“자네와 같은 사슴 일족이고, 시간상 소개는 나중에 해 주겠네. 그리고 이제 와 말하기엔 늦었지만…….”

“……?”

“벤디 학도, 돌아와 주어 기쁘네.”

솔직하게 말한 밀란느 학장은 천천히 뒷짐 졌다.

까딱.

검지를 가볍게 움직이자 슉, 벤디는 은밀하게 그녀의 손에 손지갑을 건넸다.

가주가 되어도 빈털터리인 벤디의 손지갑을 채워 주는 경건한 의식.

수줍게 뺨을 물들인 벤디는 한껏 빵빵해진 지갑을 배낭에 챙겼다.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세, 미안하지만 내가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저벅저벅, 학장실 구석으로 서둘러 걸어가던 밀란느 학장은 별안간 멈춰 섰다.

“벤디 학도, 잠깐만 기다리게.”

“네?”

“지금 어디 가는 게지?”

“우선 해피부터 마구간에 데려가려고요. 음, 그리고 기숙사 입실 수속부터 밟아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은 있다는 말이군. 돌아온 사실은 아직 다른 학도들에게 알리지 않은 건가?”

“네, 그렇긴 한데…….”

질문의 의도를 파악치 못한 벤디가 어리둥절하게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밀란느 학장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말려 올라갔다.

“교복 제대로 정돈하고, 차림새를 좀 늠름하게 해 보게.”

그녀는 분주한 손길로 벤디의 교복 타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늠름하게……?’

뜬금없는 주문을 받은 벤디가 난감하게 턱을 긁적였다.

고민도 잠시, 벤디는 배낭에서 중요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페트리온 특산품인 고구마 맛 막대 과자였다.
막대 과자를 움켜쥔 벤디를 본 밀란느 학장이 짧게 침음했다.

보통 무기를 든 모습을 늠름하다고 표현하긴 하는데. 또라이 사슴의 무기는 늠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르겠다 싶은 밀란느 학장이 다짜고짜 벤디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네, 일단 이리 와서 서 보게나.”

바닥에 그려진 웬 마법진 위에 서게 된 벤디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학장을 응시했다.

“학장님, 대체 이게 무슨…….”

푸르릉, 해피 또한 당연하게 벤디의 곁에 섰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밀란느 학장은 재차 시계를 확인했다.

마법부 교수들과 약속한 시각.

이윽고 갑작스레 마법진에서 빛이 일며 벤디와 해피를 감쌌다.

‘마력이 느껴지는데?’

덜컥 겁을 집어먹은 벤디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학장님, 설명이라도 해 주셔야죠!”

“몇 초 후면 알게 될 걸세, 모두가 즐거울 게야.”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손 흔드는 학장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벤디와 해피의 발밑이 뒤흔들렸다.

* * *

둥근 돔 형식의 아카데미 대연무장에 전교생이 모여들었다.

각 클래스 별로 학생들이 앉은 것을 확인한 마법부 교수들이 중앙 단상에 올라섰다.

마법부 총괄, 생텀 교수는 단상 자체에 확성 마법을 걸었다.

“아아.”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넓은 대연무장에 속속들이 퍼져나갔다.

“재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지금부터 신입생들을 위한 마법 시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생텀 교수는 단상에 미리 그려 둔 커다란 마법진을 가리켰다.

“오늘 시연할 마법은 공간 이동 마법입니다. 다른 장소에 있는 존재를 이 마법진 위에 소환하는 종류죠.”

공간 이동 마법, 속칭 텔레포트.

사전에 미리 마법진을 준비해야 하며, 교수 여럿이 달라붙어야 하는 고난도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연을 도울 학생 대표는 S 클래스의 원 리오나드 학생입니다.”

호명에 따라 원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뒤이어 간단한 설명을 마친 교수들은 마법진을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 잡았다.

화악-

그들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마력이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마법진에 필요한 마력이 충족되면, 학장실에 있을 밀란느 학장을 소환하는 수식이었다.

일편, S 클래스 대열.

마법 시연에는 관심도 없는 레넌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노란색 담당은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고구마나 심어.”

왜 갑자기 시비인지.

으르릉, 노란 짐승의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싶을까.

하얀 고양이의 헛소리야 일상이지만, 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 묘하게 거슬렸다.

유난히 얼굴에 생글생글 꽃이 핀 것도,

“이번 해 학생회장은 벤디 레피의 의지를 이은 이 야닉 펠이다!”

“맞아, 야닉 펠 말고 누가 하겠어?”

순순히 야닉에게 장단 맞추는 것마저 수상했다. 심지어 야닉마저 경계하며 레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어이, 발 닦개. 너 왜 갑자기 맞는 말을 하고 그러냐……?”

“생각해 봐, 위대한 야닉 펠이 학생회장이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 그렇지! 이제야 이 몸의 진가를 알아보는군!”

잘한다, 잘한다. 레넌의 호응과 박수에 따라 야닉이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사이, 마법진을 완성한 생텀 교수가 원에게 손짓했다.

“이제 공간 이동 마법 시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리오나드 학생.”

신호를 받은 원이 마지막으로 방대한 마력을 마법진에 불어넣었다.

일순 시야를 앗아갈 정도의 빛이 퍼져 나가며, 거뭇한 인영이 마법진 위에 소환됐다.

빛이 차차 멎어 들고, 눈을 가린 팔을 치운 전교생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법진 위에 덩그러니 소환된 건 밀란느 학장이 아니라…….

“저게…… 뭐람?”

신입생들의 낯빛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마법 시연이 잘못된 것 같은데?”

“맙소사…… 저렇게 생긴 생물은 처음 봐…….”

“수식이 잘못돼서 마물을 끌어들인 거 아니야?”

경악을 숨기지 못한 신입생들이 웅성웅성 떠들어 댔다.

반면 다른 의미로 경악한 재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눈을 휘둥그레 뜬 노란 짐승이 앞발로 입을 가로막았고, 레넌은 마시던 주스를 풋 뿜고 말았다.

이승의 존재 같지 않은 저 우람한 마물은 틀림없이…….

“야, 저거 회장이 데리고 다니던 마물 아니냐?”

“몸집이 그때보다 더 크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에 저렇게 생긴 게 두 마리일 순 없다고.”

해피라는 앙증맞은 이름을 가진 학생회장의 괴물 사슴이 분명했다.

‘설마…….’

학생회장이 이곳에.

휙, 휙. 같은 생각에 다다른 재학생들이 맞춘 것처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는 해피를 소환한 원과


마법부 교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문을 모르는 신입생들도 덩달아 주변을 살폈다.

“다, 다들 누구를 찾는 건데?”

“글쎄…….”

어느 누구도 벤디를 찾지 못하고 있을 즈음,

화아악-

마법진에서 또다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시공간을 넘어오는 도중, 해피의 몸부림에 밀린 벤디가 한발 늦게 소환됐다.

“…….”

대연무장에 자리한 모든 이가 공중에 덜렁 나타난 벤디를 멍하니 바라봤다.

째깍.
붉은 리본과 교복, 흩날리는 밀색 머리카락과 손에 쥔 막대 과자.

째깍.

묘하게 비현실적인 장면이 모두의 눈에 느리게만 보였다.

개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안나가 버럭 외쳤다.

“받아!”

얼빠진 채 서 있던 원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으며 달렸다.

‘닿지 않는다.’

판단을 바꾼 그가 그대로 바닥에 몸을 날렸다.

아래로 추락한 벤디는 간발의 차로 원의 몸을 깔개 삼아 풀썩 엎어졌다.

대연무장에 심오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모른 채 소환된 벤디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더듬더듬, 손바닥에 웬 딱딱하면서도 굴곡진 게 닿았다. 뒤늦게 원의 가슴팍을 짚고 있음을 깨달은


벤디가 슬그머니 손을 떼어 냈다.

왜 밉상이 제 밑에 깔려 있는 걸까. 시야에 가득 들어찬 원 때문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적당한 인사말을 찾지 못한 벤디는 도르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저 왔어요.”

단상에 걸린 확성 마법으로 인해, 조용한 공간에 벤디의 목소리가 퍼졌다.

금안을 크게 뜬 원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벤디를 올려 봤다.

‘얼마가 걸리든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게 바로 어제인데.’

이제는 이런 사슴의 기행이 놀랍지도 않았다. 언제나 갑자기 나타나서 어이없을 정도로 그를 뒤흔들어
놓았으니까.

입꼬리만 비튼 채 반응 없는 원을 조심스레 살핀 벤디가 멋쩍게 종알거렸다.

“……조금 늦었나?”

몇 달간 앓은 사슴병이 깨끗하게 나은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장갑 낀 손으로 벤디의 뺨을 짚은 원이 무감한 음성으로 답했다.

“십 년도 기다렸는데 이 정도야.”

한 손에 잡히는 얼굴을 당긴 그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더는 기다리게 하지 마.”

실시간으로 시청 중인 교수들을 비롯한 학생들이 입을 쩍 벌렸다.

저게 지금 우리가 아는 오만한 마탑주가 맞나.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혼인을 약속한 사이인가?’

십 년을 왜 기다렸는데, 뽀뽀는 또 왜 하는데. 제발 우리도 같이 좀 알자.

도도도.

대연무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확성 마법을 통해 기묘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도도, 도도도도!

달리기에 박차를 가한 노란 짐승이 빠악, 원의 입에 뒷발차기를 날렸다.

‘이 미친 똥개가.’

어느 안전이라고 입술을 비벼.

죽인다. 눈이 돈 노란 짐승이 현란한 공중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윽!”

곤욕을 치른 원이 막아 내기 무섭게 휘리릭, 날아든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비껴 나가 바닥에 꽂혔다.

이성이 끊어진 레넌은 천천히 검을 회수하며 다시 원에게 겨눴다.

“누구 거에 더러운 주둥이를 갖다 대는 건데.”

헛웃음을 흘린 원이 입술에 배어난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누구 거긴, 내 거지.”

“주제를 모르는 입부터 썰어야겠네.”

크르릉-

죽인다. 레넌과 노란 짐승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원의 입술이 벤디에게 닿는 그 순간만 떠올려도 가슴 어귀가 욱신거렸다.

우당탕, 단상에 난입한 레넌과 노란 짐승, 원의 삼파전이 불거졌다.

말릴 생각도 못 한 교수들은 손에 땀까지 쥐어 가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한편, 벤디는 육식 수인들의 세력 싸움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나 연약한 사슴의 수난 시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회장, 너 이 자식!”
야닉이 머리채를 풀고 단상을 향해 두두두 달려오고 있었기에. 사색이 된 벤디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주, 죽을 거야.’

질끈 눈을 감는 동시에 그가 벤디에게 답삭 안겨들었다. 이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제 오냐고! 왜!”

야닉은 뜨거운 눈물 콧물을 쏟으며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근육에 갇힌 채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덩달아 슬퍼진 벤디가 눈물을 펑 터뜨렸다.

“미안해…….”

“닥쳐라, 사과는 대륙 제패에 실패했을 때나 하는 거니까!”

“그래도 내가 미안해……. 내가 겁쟁이라 도망가서…….”

벤디와 야닉이 엉엉 땅을 기며 바닥을 두드렸다.

“제길, 회장, 뚝 그쳐! 제왕은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고!”

“이건 눈물이 아니라 피야…….”

한순간에 피바다가 된 단상을 멀거니 바라보던 재학생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빌어먹을, 저 이상한 장면이 뭐라고 슬프지. 그들은 피로 촉촉이 젖은 눈 앞머리를 당기며 한 마디씩
외쳤다.

“보고 싶었다, 학생회장!”

“사슴 여러분들한테는 인사 안 하냐?”

“제발 평범하게 좀 나타나라고!”

“두모오오오옥!”

학생회장 선거 일주일 전, 전 학생회장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그리고…….

벌컥, 아카데미 마구간 문이 우렁차게 열렸다.

위풍당당하게 입장한 해피는 조금 전, 대연무장에서 보았던 거지 사슴의 환영회를 상기하며 가슴을 쫙


폈다.

아름다운 내가 돌아왔다, 충직한 부하들아.

한가로이 식사하던 말들이 후드득, 입에 있던 건초를 떨어뜨렸다. 재앙의 강림이었다.


#<147 화>

벤디 레피가 돌아왔다.

이는 신입생들에게는 누구세요, 그리고 재학생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반가움이란 감흥을 선사했다.

바로 다음 날, S 클래스 강의실은 조용하면서도 오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렇게 세 가지 수식을 조합하면…….”

흘긋. 교단에 선 교수는 강의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뒤를 곁눈질했다. 덩달아 흘끔, 학생들의 눈길도
뒤편을 향했다.

수많은 시선 끝에는 원과 레넌, 헤일린이 있었다.

평소처럼 곧은 자세로 필기를 이어 가는 원, 턱을 괸 채 무료하게 펜을 돌리는 레넌. 그리고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낮잠을 청하는 헤일린.

각양각색으로 비현실적인 외모는 고사하더라도, 졸업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쯤 상상한 적이 있었다, 저들을 감당할 만한 상대는 누구일지. 그런데 그게…….

‘학생회장이었다니.’

세 사람을 번갈아 살핀 교수와 학생들은 대연무장에서 목도한 일을 상기했다.

‘십 년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야.’

‘누구 거에 더러운 주둥이를 갖다 대는 건데.’

공개 청혼 및 치정 싸움. 그도 모자라 학생회장과 부둥켜안고 우는 야닉을 집어던진 후, 서럽게 우는


학생회장 곁에 모여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각자 벤디와 붙여 두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엮이게 된 걸까.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궁금해서 밥맛도 뚝 떨어진 지경이었다.
“흠…….”

촤악, 지도를 펼쳐 대륙 제패 계획을 짜던 야닉은 기묘한 공기가 흐르는 강의실을 둘러봤다.

이내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를 꿰뚫어 본 그가 쾅!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찍었다.

“멍청한 것들, 제왕이 걷는 길에 필요한 건 오로지 충신과 영광뿐! 꽃은 필요 없다!”

“맞아요, 꽃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봐요.”

늘 제 말에 반박부터 하던 안나의 갑작스러운 동조에, 도리어 당황한 야닉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이, 괴력 곰탱이. 이제 와서 알랑거려 봤자 네 녀석한테 줄 꿀단지는 없어.”

“글쎄 지금 제왕이고 꿀단지고 다 소용없다고요.”

“그게 무슨 소린데?”

“벤디 레피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청천벽력 같은 안나의 말에, 가장 먼저 반발한 건 교수였다.

“아니, 왜?”

교수들은 벤디가 학생회장이 아닌 올해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 기특한 학생 덕분에 작년이 얼마나 평탄했나.

통제가 어려운 발 닦개들이 순순히 학생회에 협조할뿐더러, 대부분의 행사가 착실하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게다가 학생회 일원을 다양하게 구성함으로써 타 일족을 배척하는 등 불필요한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교수들은 벤디가 학생회장이 되기만을 고대 중인 실정이었다.

“대체 벤디 학생이 왜…….”

교재도 떨어뜨린 채 울먹이는 교수를 뒤로한 야닉이 코웃음을 쳤다.

“바보 아니냐? 어차피 제왕은 수석이라서 자동으로 입후보한다고.”

“댁이 말하는 그 제왕은 작년 2 학기 성적이 없어요.”

“…….”

“그러니 스스로 지원하지 않는 이상 입후보가 안 되죠.”

쿵, 야닉의 세상이 무너졌다.

대륙 지도를 움켜쥔 그는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이 야닉 펠의 으리으리한 미래 계획이……. 대륙 제패의 첫걸음이…….

“왜 안 하겠다는 건데? 왜, 대체 왜…….”


영혼 빠진 채 중얼거리는 야닉을 바라보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작년에는 강제로 학생회장이 된 거였으니까요, 무능한 벤디 레피를 이용하기 위해.”

찔끔, 찔리는 구석이 있는 학생 몇몇이 몸을 움츠렸다.

“회장은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안나, 그 사슴을 무능하게 여기는 자는 이제 이 자리에 없을걸요?”

“대항전에서 칸 팰드로도 이긴 자를 어떻게 무능하게 여기겠어.”

내심 벤디가 학생회장이길 바랐는지, 투덜거리는 학생들의 반응을 둘러본 안나가 부언했다.

“물론 이번 선거는 그렇진 않겠죠, 다들 깨달은 바가 있으니까. 하지만 저 혼자만으론 설득이 어려워서.”

안나의 시선이 뒤에 자리한 원과 레넌, 헤일린에게 향했다.

세 사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는 벤디가 학생회장이 아닌 편이 좋으니까.

타 아카데미와 교류 따위를 하다가 꽃사슴 정혼자 같은 게 또 꼬이는 건 사양이었다.

비협조적인 태도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안나는 품을 뒤적였다.

이윽고 고이 접은 종이를 꺼낸 그녀는 세 사람이 볼 수 있게끔 펼쳐 보였다.

“…….”

내용물을 똑똑히 본 원과 레넌, 헤일린의 몸이 맞춘 것처럼 움찔 경련했다.

“벤디 레피의 어릴 적 초상화.”

입매를 비튼 안나는 안경 아래 자리한 녹색 눈을 번쩍 빛냈다.

“레피 가문 인장이 찍힌 원본입니다.”

레피 저택에 머무른 당시, 우연히 발견하고는 벤디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었다.

호기심이 인 교수와 학생들이 기웃거리며 초상화를 확인했다.

고구마 상자 위에 오도카니 앉은, 볼이 통통한 어린 벤디.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학생들이 초상화 앞에서 두런두런 떠들었다.

“학생회장한테도 이런 귀여운 시절이 다 있었네.”

“뭐야, 거의 똑같이 자랐잖아.”

“고구마 상자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 건데?”

“어디 보자, 남…… 편 상자?”

갖고 싶다.
발 닦개 삼 인방의 눈동자에 떠오른 선명한 열망을 읽은 안나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다들 다른 어중이떠중이가 학생회장이 되는 건 바라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초상화를 높이 들어 올린 그녀는 한쪽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공표했다.

“벤디 레피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에게 이 초상화를 양도하죠.”

강의 중인 것도 잊은 채,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던 교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교수들도 참가할 수 있나?”

초상화도 초상화지만, 반드시 벤디가 학생회장 선거에 지원해야 한다.

간절한 소망이 담긴 눈빛을 맞닥뜨린 안나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그러시든지요.”

이로써 전교생 및 교수들에게 벤디 레피의 현상 수배가 떨어졌다.

현상금 없음, 포상은 사슴의 어릴 적 초상화(다섯 살 추정)였다.

* * *

“이를 어째…… 꼭 입후보시켜야 하는데…….”

“생텀 교수님, 저 리리 교수가 벤디 러피의 마지막 행적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어딘가?”

“마구간 주변 텃밭에서 고구마 모종을 심고 있었다고 하네요.”

“당장 가 보세.”

교수들이 체통도 잊은 채 마구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자, 부스럭, 수풀 사이에서 밀색 머리통이 솟아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눈만 빼꼼 내민 벤디는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날이 저물 때까지 학생들도 모자라 교수들과 격렬한 술래잡기를 벌이는 중인데.

‘나를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시키겠다고?’

벤디는 복잡한 심정으로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주섬주섬 떼어 냈다.

내심 학생회장을 일임하고 싶으면서도, 그 막중한 책임을 또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불안이 밀려들었다.

사슴인 사실까지 드러난 이상 또 자신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단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입후보하지 않은 건데.’

막상 저렇게 나오니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찰나, 벤디가 다시 수풀에 쏙 숨어들었다.

“대체 어디로 증발했지?”

“진짜 숨는 거 하나는 잘한다니까.”

탁탁, 수풀 가까이까지 접근한 벤디 추격대가 잠깐 멈춰서 한숨 돌렸다.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헤일린 이스단이 학생회장한테 파혼당한 것 때문에 가문에서 내쫓겼다는 소문.”

‘……?!’

자칫 소리를 낼 뻔한 벤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세한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학생들이 대화를 이어 갔다.

“그게 가능해? 유일한 후계자 아니었어?”

“흠…… 후계는 방계도 할 수 있잖아. 성체가 되지 못한 게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실제로 동계 방학 동안


갈 곳이 없어서 아카데미에 신세졌다더라.”

“그 정도면 땡전 한 푼 없이 쫓겨난 수준인데? 하긴, 사라 이스단은 혈족도 내칠 위인이긴 해.”

수다 떨던 그들은 다시 의지를 불태우며 벤디를 찾아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의도치 않게 대화를 엿듣게 된 벤디가 부스럭, 수풀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헤일린 이스단이……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레피 가문을 정리하며 가주로 자리 잡는 기간 동안 사달이 터진 모양이었다.

‘말도 안 돼.’

제게 파혼을 당하면서 성체가 될 희망까지 사라진 탓에, 결국 사라 이스단에게 내쳐진 걸까.

석양을 등진 벤디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 * *

늦은 저녁, X 클래스 여자 기숙사.

노란 밤손님이 어둠을 틈타 엉금엉금 벽을 기어올랐다. 벤디가 지장을 찍어야 할 학생회장 선거 입후보


신청서를 입에 문 상태였다.

“뭐 해?”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노란 짐승의 꼬리가 쭈뼛 섰다.

바로 뒤에는 벤디가 서 있었다.

잠입 현장을 발각당한 노란 짐승이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벤디가 따지듯 쏘아붙였다.

“지금 태평하게 새끼 사자 모습으로 있을 때야?”

난데없이 혼나게 된 노란 짐승이 코웃음을 쳤다.

두 눈 뜨고 다른 놈들한테 초상화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으르릉, 반항적으로 올려 보는 동시에 그렁그렁한 밀색 눈동자를 발견한 그가 앞발로 입을 틀어막았다.

운다.

이유는 몰라도 울기 직전인 벤디를 마주한 노란 짐승이 넙죽 엎드렸다.

그는 아직도 사슴이 울면 심장이 철렁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불길한 예상대로 벤디에게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작…….”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벤디가 노란 짐승의 입에 있던 신청서를 팽 내팽개쳤다.

지장 찍어야 하는데…… 내 사슴 초상화…….

노란 짐승이 아쉬움을 삼키기 무섭게 벤디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잔디를 짙게 물들였다.

“고작 이렇게 지내려고 나한테 성체가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한 거냐고.”

진짜 운다.

대경실색한 노란 짐승은 앞발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슴의 저 무서운 눈물부터 그치게 만들어야 했다.

“노랑이 너.”

“……?”

“동계 방학 동안 아카데미에 신세 진 게 정말이야?”

그 일을 사슴이 어떻게 아는 걸까. 고개를 갸웃한 노란 짐승이 어리둥절하게 끄덕였다.

‘나와의 파혼 때문에 가문에서 의절당한 게 사실이구나.’

확신한 벤디가 잔디에 엎드려 흐느꼈다.

오갈 곳도 없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노란 짐승의 표정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내 일만 돌아보느라고…… 노랑이 네 삶이 망가진 것도 모르고…….”


마치 세상을 등진 이에게 말하는 듯한 대사였다.

‘멀쩡한 내 삶이 갑자기 왜 망가지는데.’

벤디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노란 짐승은,

“흑.”

움찔, 일단 열심히 앞발을 비비며 사죄했다.

“노랑아.”

퉁퉁 부르튼 눈을 문지른 벤디는 이내 결의 어린 표정으로 긴 잡초를 하나 뽑았다.

“이스단 가문에서 쫓겨난 건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그것을 동그랗게 엮은 벤디가 노란 짐승의 솜뭉치 같은 앞발에 끼워 넣었다.

“내가 너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은 돼.”

#<148 화>

황송함에 하마터면 혼절할 뻔한 노란 짐승이 앞발로 주둥이를 막았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려?

청혼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발언을 곱씹은 그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 사슴이 순순히 청혼 같은 걸 할 리가 없는데. 황홀한 착각에서 벗어난 노란 짐승은 냉정히 생각했다.

‘이스단 가문에서 쫓겨난 건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동계 방학 때 아카데미에 머문 것 때문인지. 정확한 앞뒤 사정이야 몰라도, 벤디는 헤일린이 이스단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믿는 듯했다.
‘쓰지도 못할 예쁜 얼굴 달고 다니면 뭐 하니, 그냥 잘라 버리렴.’

작년 겨울, 사라 이스단은 사슴 없이 돌아올 생각도 말라며 헤일린을 아카데미로 내쫓았다.

헤일린은 엄동설한에 자비 없이 아들을 발로 차던 그녀를 떠올렸다.

이 시대의 진정한 부모이자 의도치 않게 신의 한 수를 펼친 존재.

사라 이스단을 향해 찬사를 쏟아부은 노란 짐승이 눈을 감았다.

지난 혼담처럼 굴러들어 온 사슴을 발로 차는 죄악을 또 저지를 순 없는 일.

‘지금부터…….’

자신은 가문에서 내쫓기고 이스단이란 성도 잃은 방랑 노랑이이자 일개 헤일린이었다.

‘아니지.’

하마터면 실수할 뻔한 노란 짐승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노랑이 레피이자 헤일린 레피였다.

“…….”

뭉클, 벤디를 등진 그는 앞발에 딱 맞는 청혼 반지를 빤히 내려 봤다.

이윽고 두 발로 선 노란 짐승이 짠, 잡초 반지를 낀 앞발을 허공에 뻗었다.

“……노랑아?”

벤디는 퍽 기뻐 보이는 노란색 뒷모습을 살폈다.

가문에서 버림받은 처지인 주제에 개선장군 같은 당당한 기세.

누가 곱게 자란 도련님 아니랄까 봐, 가문에서 쫓겨난 이후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지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이없이 바라보는 벤디와 눈이 마주치고, 조속하게 사람으로 변하려던 노란 짐승이 주춤했다.

‘망가지는 건 아니겠지.’

걱정 가득한 시선이 연약한 잡초 반지에 머물렀다.

조심조심 꼬물거리며 마력을 운용하자, 어둠을 밝힐 정도의 빛과 함께 헤일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손가락에 걸린 예물의 무사를 확인한 그는 주저앉은 벤디를 따라 몸을 굽혔다.

“무슨 뜻인데, 방금 그거.”

붉은 눈동자가 벤디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쫓았다.

“설명해.”
울컥, 재차 복받치는 설움을 삼킨 벤디가 시선을 내렸다.

“내가 혼담을 파기한 탓에 이스단 가문에서 쫓겨났다며.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

“그래서?”

“심지어 너는 성격도 더럽고, 주먹도 나쁜 데다 행실도 별로잖아.”

숨겨 온 벤디의 진심이 헤일린을 삼 연타로 조곤조곤 후려갈겼다.

“웬만해서는 다른 곳에서 받아 주지도 않을 텐데……. 어쨌든 내가 너를 성체로 만들어 줄 수 있기도 하고


…….”

이스단이란 후광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레피 가문에서 거두어들이겠단 의미.

쏴아아-

아직은 차가운 밤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정적을 깨고 낮게 깔린 헤일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말.”

잡초 반지가 끊어지지 않게 조심히 움직인 그가 벤디의 손을 끌어왔다.

손등에 입술을 맞댄 그가 시선만 들어 벤디를 응시했다.

“청혼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낸 헤일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청혼.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는데, 느지막이 그 단어가 무겁게 다가온 벤디는 잘게 동공을 떨었다.

“자, 잠시만.”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 하자 헤일린의 엄지가 손등을 꾹 눌렀다.

“늦었어, 번복 못 해.”

“…….”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잃을 게 없는 처지라.”

무심코 헤일린을 마주한 벤디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

웃었다.

휘어진 눈꺼풀에 붉은 눈동자가 사라지는 웃음은 처음이었다.

“평생 순종하면서 살게.”


하나도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특유의 날 선 인상이 그 웃음에 삼켜졌다.

따끔.

벤디는 돌연 뻐근하게 술렁이는 심장 부근을 문질렀다.

‘……?’

마치 고구마를 급히 먹다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처음 겪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갑작스레 피어난 이름 모를 감정은 정의를 내리기 전에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왠지 입안이 바짝 마른 벤디가 괜히 입술을 축였다.

곧 헤일린의 손이 쉽게 부서지는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벤디의 뺨을 짚었다.

다가오는 예쁜 얼굴에 홀린 벤디는 꼼지락거리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눈을 꾹 감으며 조그마한 입술을 슬그머니 내미는 순간,

“거기까지.”

잔디에 앉은 두 사람의 위로 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듣자 듣자 하니까 고양이가 개소리를 하네.”

푹, 둘 사이로 검을 꽂아 넣은 레넌이 벤디를 번쩍 들어 허리에 꼈다.

대롱대롱 매달린 벤디가 당혹스럽게 말했다.

“레넌? 언제부터 있었,”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벤디의 몸이 재차 공중으로 달랑 떠올랐다.

“무슨 중요한 대화를 하나 했더니.”

벤디를 빼앗아 들어 레넌에게서 떼어 놓은 원은 무섭게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

탁, 벤디를 제 뒤에 감춘 그가 턱 끝으로 헤일린을 가리켰다.

“안 쫓겨났어요.”

“……?”

아닌데, 쫓겨났는데.

상황 파악이 안 된 벤디가 휙 소리 나게 헤일린을 돌아봤다.

추궁 어린 눈빛을 마주한 헤일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소박맞고 쫓겨났어.”

“웃기네.”
검을 회수한 레넌이 입꼬리를 비틀며 되물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도 절연당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대치 중인 세 사람을 번갈아 둘러본 벤디가 부언했다.

“하지만 듣기로는 쫓겨나서 동계 방학 동안 아카데미에 머물렀다고…….”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원은 대신 답하며 검은 장갑을 꼈다.

사라 이스단은 하자 있는 적통에게 자리를 계승하면 계승했지, 방계에게 가문을 물려줄 위인이 아니었다.

시치미 떼는 발칙한 노랑이를 마주한 원과 레넌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말해, 동계 방학 동안 왜 아카데미에 머물렀는지.”

“그때를 기점으로 가문에서 내쫓겼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그럴 리 없다고.”

둥글게 모여 선 세 사람 사이로 위험한 공기가 생성됐다.

외줄 타기를 하는 듯 위태로운 분위기를 감지한 벤디가 주위로 다가갔다.

“잠깐, 그만해.”

말리기 위해 기웃거리며 주변을 돌았으나,

“저기.”

“똑바로 답해, 노랑이 이스단.”

“잠깐.”

“노랑이 레피라고 불러.”

“헛소리.”

“이스단 가문에 직접 물어보든지.”

그들보다 한참 낮은 층에서 숨 쉬는 벤디에게 관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경험을 돌이켜 머리부터 디밀었지만, 한층 단단해진 팔뚝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만하라고……!”

오기가 생긴 벤디가 퍽! 온 힘을 다해 세 사람을 밀쳤다.

곧바로 퉁 튕겨 나간 벤디를 발견한 세 사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휙, 팍, 탁.

순식간에 뻗어진 팔 세 개가 뒤로 넘어가는 몸을 붙들었다.


몸이 반쯤 기운 벤디는 오로지 제게만 머문 세 쌍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사이, 헤일린은 추궁을 피하기 위해 얼른 동물형으로 변하며 벤디의 다리 뒤에 숨었다.

이게 바로 예물 반지다.

잡초를 두른 둥근 앞발이 원과 레넌을 우롱하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

저게 어떻게 가문에서 버려진 가여운 떠돌이의 태도냐고.

사막에서 물 한 잔 없이 고구마를 먹은 느낌인 원과 레넌이 뿌득 소리 나게 턱을 악물었다.

사슴의 눈에 들기 위해 가주가 되고 마탑주가 되며 갈고닦았는데.

오히려 하자가 있어야 동정표를 얻게 되는 기가 찬 결과였다.

“그럼.”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은 레넌이 서늘하게 물었다.

“나도 가문에서 내쳐지면 레피 가문에서 받아 주는 건가?”

흠칫, 순간적으로 벤디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니, 네가 거기서 흔들리면 어떡하는데. 그 반응을 발견한 헤일린의 동공도 덩달아 진동했다.

마음 여린 사슴에게 청혼받을 수 있는 핵심 조건을 눈치챈 원과 레넌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여기서 제일 불쌍한 놈이 최후의 승자다.

“측은해지면 된다, 이건가.”

“그, 그건.”

원의 추궁에 벤디가 주춤거릴 즈음,

“저녁에 이 무슨 소란입니까?”

등 뒤에서 깐깐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차마 뒤돌아보지도 못한 벤디가 목석처럼 굳었다. 여자 기숙사를 관리하는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였다.

“벤디 레피 학생, 지금 시간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사, 사감님…….”

융통성이라곤 일 할도 없기로 소문난 X 클래스 여자 기숙사 사감.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온 사감을 마주한 벤디는 등 뒤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늦은 시간대에, 아무리 기숙사 정원이라 해도 남학생들을 끌어들인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최소 벌점이나 징계, 최악의 경우에는 기숙사 강제 퇴실이었다.

주춤거리는 벤디를 날카롭게 훑은 사감은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었다. 노란 짐승이 입에 물고 있던


종이였다.

“……흠.”

사감이 안경을 추켜올리자, 제 발 저린 벤디가 떠듬떠듬 변명했다.

“사감님, 이건 불건전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나 보군요.”

학생회장 입후보 신청서를 뒤집어 가며 살핀 사감이 중얼거렸다.

“네?”

“선거 운동 연습의 일환인가요?”

“……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당황한 벤디가 휙 뒤를 돌아봤다.

제 곁에 있던 원과 레넌, 헤일린은 온데간데없이…… 거대한 백호와 늑대가 웅크려 앉아 있었다.

저 흉포한 몰골 좀 봐. 뻐끔뻐끔 입을 여닫던 벤디는 황급히 고개를 주억였다.

“네, 맞아요.”

주먹을 움켜쥔 벤디가 결연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았다.

“휴, 흉포한 육식 동물을 다스리는 사슴 퍼포먼스를 계획하고 있었어요.”

“열정은 좋지만, 기숙사 정원에 저런 대형 동물을 들이는 건 안 됩니다. 다른 학생들의 휴식을


방해하니까요.”

“죄송합니다, 당장 내보낼게요.”

“수칙에는 없더라도 주의해 주세요. 원만한 단체 생활에는 배려가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고도 훈계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기숙사로 들어가세요.”

“바로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벤디 레피 학생.”

“네?”

또 왜.

위기를 넘긴 후 안도의 숨을 내쉬던 벤디가 다시 바짝 긴장했다.


탁, 얼어붙은 벤디의 어깨를 짚은 사감이 은근하게 말했다.

“학생회장이 되면 올해 있을 기숙사 대항전도 잘 부탁합니다.”

“…….”

“아주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특히 X 클래스 여자 기숙사는 아직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어서.”

조금 겸연쩍게 안경을 매만진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멀어졌다.

‘다행이야…….’

스르륵, 긴장이 풀린 벤디가 흐물흐물 잔디에 주저앉았다. 힘 빠진 몸을 백호와 늑대의 푹신한 털이


감쌌다.

뒤이어 푸하, 두 맹수 사이에 숨어 있던 노란 짐승이 튀어나왔다.

육식 동물에게 놀라 달아날 기력도 없는 벤디가 기대어 늘어졌다.

‘……베개보다 편한데?’

집채만 한 맹수들의 품을 아늑하게 느끼는 날이 오다니,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별이 걸린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 보던 벤디는 한참 만에 말문을 뗐다.

“실은 말이야.”

세 맹수의 눈길이 오물거리는 벤디의 입술에 집중됐다.

망설이듯 달싹이던 입술에서 곧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내 의지로 해 보고 싶어.”

“…….”

“학생회장.”

딱히 놀라지 않은 원과 레넌, 헤일린은 벤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무수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선출 결과, 학생회장, X 클래스의 벤디 레피.’

시작은 텅 빈 학생회실에서 홀로 사부작거리며 지내던 벤디의 모습이었다.

‘학생회장, 레펠튼의 규칙을 어떻게 바꿀 심산인지 묻고 싶은데요.’


그러나 그 빈자리를 안나와 신시아 등 하나둘 채워 가고, 가상 공간에서 그리핀을 무찌르고.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그런 선택은 못 했을 거다. 내년에 다시 제대로 붙지.’

대항전에서 칸 팰드로를 우승 직전까지 몰아붙인 사실도 모자라,

‘레피 가문의 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리였어.’

종국에는 가주란 자리를 거머쥐기까지.

그들은 언젠가부터 턱없이 약한 존재가 나아가는 모습을 자연스레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 순간순간을 다시 한번 함께하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기꺼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렇게 답하려던 원은 늦게야 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사실을 인지했다.

촉, 늑대의 주둥이가 벤디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기도 잠시, 순서를 빼앗겨 버린 백호가 뒤따라 촉, 벤디의 입술에 주둥이를
가져갔다.

#<149 화>

“……!”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벤디가 양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상황을 맞닥뜨린 노란 짐승의 털이 바짝 섰다.


찰싹, 찰싹, 분기탱천한 노란 짐승이 앞발로 백호와 늑대의 뺨을 갈겼다.

‘아차, 반지.’

화들짝 놀란 노란 짐승은 얼른 제 앞발을 확인했다. 한평생 귀하게 보관해야 할 잡초는 다행히 무사했다.

일단 저 청혼의 증표부터 조진다.

백호와 늑대의 시선이 제 연약한 예물 반지에 닿은 걸 눈치챈 노란 짐승이 도도도, 부리나케 도주했다.

우다다, 세 마리 육식 동물이 꼬리를 흩날리며 빠르게 멀어졌다.

벤디는 한밤에 벌어진 추격전을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진짜…….”

방심할 수가 없어.

요물 같은 맹수들, 중얼거리며 잔디에 털썩 드러누운 벤디는 별안간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각자 기숙사 방 창가에 기대어 선 X 클래스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쳤기에.

“……다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굳이 안 봐도 다 들리던데.”

창가에서 턱을 괸 신시아가 대표로 답변했다.

“지금 태평하게 새끼 사자 모습으로 있을 때야, 부터였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들었다는 의미. 부끄러움에 벤디의 낯빛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신시아의 건너편 방에서 구경하고 있던 라일라가 말했다.

“뭐야, 파혼했다더니. 결국 헤일린 이스단이었냐?”

“그럼 레넌 에던트랑 원 리오나드랑은 무슨 관계인데?”

“딱히 상관있어? 어차피 회장은 여우 수인이라서 여러 번 혼인이 가능하잖아.”

“아냐, 쟤 사슴이야.”

“아, 그렇지 참. 사슴 영역은 가능한가?”

고개를 내민 학생들이 두런두런 토론을 이어 갔다.

“사슴아, 인생 선배가 조언하는데.”

X 클래스 여학생 중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 충고했다.

“청혼부터 지르고 보면 안 돼, 쪼그만 게. 앞으로 마음이 수십 번도 뒤바뀔걸?”

“나도 알 건 다 알아. 난……!”


뭐라도 반박해 보려던 벤디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청혼이니, 중혼이니. 사실 말이야 쉽지, 여전히 자신에겐 아득한 과제처럼 느껴졌다.

책임감과 별개로, 원이나 레넌, 헤일린과 지금보다 더한 감정이나 육체적 교감을 가진다는 게 아직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아까 전, 헤일린에게 느낀 낯선 감정을 곱씹은 벤디는 혼잣말하듯 종알댔다.

“……아직 이대로가 좋은 것 같아.”

“어리네.”

“어려.”

“애다, 애야.”

창틀에 팔을 걸친 여학생들이 놀리듯 시시덕거렸다.

전부 나이도 비슷비슷하면서.

그런 그들을 얄밉게 흘기던 벤디는 이내 덩달아 헛웃음을 흘렸다.

‘모르겠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언젠가 그 따끔거리는 감정의 정체도 알게 되고, 어쩌면 저들의 말대로 정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래서 회장, 혼인식은 언제 초대할 건데?”

“연회 음식도 죄다 고구마인 거 아니야? 고구마 스튜, 고구마 꼬치.”

“그만 좀 해, 그만 좀.”

남학생들은 낄 수 없는 여학생들의 대화는 기숙사 사감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 * *

개학 이래, 내내 교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학생회장 선거일이 다가왔다.

신입생들은 수많은 후보 목록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기호 18 번 말이야, 대연무장에 나타난 그 초식 수인 맞지?”

“아, 마탑주와 입 맞췄던. 연인인가?”

“나는 헤일린 이스단의 약혼자라고 들었는데?”

“……뭐?”
어딘지 대화가 원활하지 않고 엇갈렸다.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던 신입생들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결국 출마했네, 선배들이 18 번을 입후보시키려고 난리였잖아. 왜 그런 거래?”

“초상화인지 뭔지가 상품이었다는데.”

“초상화? 무슨 초상화?”

“고구마 초상화래.”

“……뭐?”

의견을 나눌수록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사이, 개표를 끝마친 사회자가 단상으로 올라섰다.

“아아.”

확성 마도구를 점검한 그는 발랄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가 고대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개표 측 학생들이 전한바,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고


하는데요.”

쨍한 햇빛 아래에 도열한 학생들은 자비 없이 일갈했다.

“매년 하는 진부한 대사 재미없다!”

“치열하기는 무슨, 질질 끌지 말고 발표나 해!”

“그래, 다리 아프다고!”

입을 삐죽인 사회자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서운하니까 십 분 후에 발표하겠습니다. 땡볕이나 양껏 맛보세요.”

“뭐라는 거야, 이 거북이 같은 놈이!”

답답함을 못 이긴 야닉이 쿵쾅거리며 단상에 난입했다.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내려가세,”

“지금부터 이 야닉 펠이 사회자다, 비켜!”

“아악!”

삽시간에 확성 마도구와 대본을 뺏어 들고, 사회자를 집어던진 그가 꽥 외쳤다.

“어디 보자, 부학생회장! S 클래스의 괴력 곰탱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신입생들이 수군거렸다.

“괴력 곰탱이가 누군데?”

“설마 이름은 아니겠지.”


빌어먹을 야닉 펠. 뿌득, 이를 악문 안나가 단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올해도 부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한 안나를 마주한 야닉은 분하다는 듯 제 이마를 팍 쳤다.

“쯧, 간발의 차로 졌군.”

개표 측 학생들은 기가 찬 얼굴로 팔짱을 꼈다.

‘간발의 차는 무슨.’

야닉 펠의 선거 결과는 0 표.

이는 본인조차 스스로를 투표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올해 학생회장을 발표한다!”

아쉬움을 삼킨 야닉이 펄럭, 대본을 넘겼다.

“선출 결과, 학생회장…….”

결과지를 먼저 확인한 야닉은 대뜸 주먹을 입에 물었다.

흑, 커흐흡. 확성 마도구를 통해 가느다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감격해서 발표를 잇지 못하는 야닉을 한심하게 응시한 안나가 결과지와 확성 마도구를 빼앗았다.

“선출 결과, 학생회…… 장…….”

찌잉, 왠지 울컥한 안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휙 틀었다.

안나마저 발표를 잇지 못하자, 학생들에게 등 떠밀린 신시아가 하는 수 없이 단상에 올라갔다.

결과지와 확성 마도구를 대신 받아 든 그녀가 곧장 말했다.

“선출 결과 학생회장…… 젠장.”

드물게 비속어를 내뱉은 신시아는 축축한 눈가 주변을 결과지로 부채질했다. 눈에 고인 건 눈물이 아니라
피였다.

마지막 발표만 앞두고 도통 진행되지 않는 상황.

결국 메이지까지 검은 로브를 벗으며 단상에 올라갔다.

전 학생회의 반응을 미루어 보면 결과지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선출 결과, 학생회장.”

확성 마도구를 든 메이지는 마력을 운용하여 손에 연분홍색 꽃잎을 만들어 냈다.

“X 클래스의 벤디 레피입니다.”

동시에 벤디의 머리 위로 메이지가 만든 분홍색 꽃잎이 휘날렸다.

“축하해요, 두목님.”
찬란한 꽃잎이 학생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사실상 뻔히 예상한 결과. 놀라지도 않은 학생들이 단상으로 걸어가는 벤디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야, 회장. 이번 대항전은 실격 말고 우승해라.”

“기숙사 대항전 종목도 기대한다!”

“나 이번에는 학생회 지원할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기계처럼 뚜벅뚜벅 걷는 중인 벤디는 그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번째라도 긴장되는 건


긴장되는 거였다.

벤디까지 단상에 올라가자, 의외로 메이지는 능숙하게 대본을 보며 사회를 진행했다.

“다음은 에던트 가주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저벅저벅, 백호 영역의 새로운 통치자로서 단상에 오른 레넌이 확성 마도구를 잡았다.

메이지에게 받은 구구절절한 축사 대본을 야닉의 입에 꽂은 그가 입을 열었다.

“회장.”

“……?”

갑작스러운 부름에, 레넌을 향해 고개 돌린 벤디가 눈을 깜박였다.

“나 가주 안 할 테니까.”

물색 눈동자가 청량하게 휘어졌다.

“나한테도 청혼해 줘.”

저 화상이 기어코 이런 자리에서까지.

또르르, 벤디의 한쪽 코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동시에,

“야 이 미친놈아!”

뽀글뽀글, 밀란느 학장이 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갔다.

“기껏 차지한 가주직을 버, 버리…….”

“밀란느 학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난장판인 단상과 교수석을 바라보던 S 클래스 학생들은 주춤주춤 한 걸음씩 물러났다.

검은 돌과 노란색 담당의 분위기가 과히 심상치 않았으니까.

‘저 미친 고양이.’

‘죽인다.’
단상이 반파되기 3 초 전의 일이었다.

* * *

겨우 자리에 복귀한 사회자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말했다.

“다음은 새로운 학생회장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아래에서 대기하던 벤디는 반파된 단상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삐거덕, 삐거덕.

학생들은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마치 장난감 병정 같은


걸음걸이였다.

코피 난 코를 천으로 틀어막은, 저런 우스꽝스러운 행태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다니. 일 년 동안 저


음흉한 사슴에게 세뇌라도 당한 게 틀림없었다.

‘……후.’

겨우 단상에 도착한 벤디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쓸었다. 형형색색 눈동자를 가진 육식


수인들 앞에 서는 건 여전히 어렵고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엄지를 척 치켜들거나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학생들


덕분에.

일 년 전, 봄. 그때만 해도 자의로 이 자리에 서는 건 꿈도 못 꾸었는데.

목울대를 울렁인 벤디가 확성 마도구에 입을 가져갔다.

“아아.”

목소리 끝이 긴장으로 가늘게 떨렸다.

눈을 감았다 뜬 벤디는 스스로 암시를 걸었다.

내가 누군가, 바로 페트리온을 다스리는 레피 가문의 가주.

이런 간단한 연설 하나 못 하는 건 사슴 일족의 망신이요, 나아가 초식 수인 전체를 욕보이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반갑습니다.”

벤디 레피. 나는 긍지 높은 사슴 수인이다, 나는 긍지 높은,

“사,”

움찔, 재학생들의 몸이 맞춘 것처럼 경련했다.

오랜만에 그 전설의 명대사를 듣는 건가.


사슴이 될 마음의 준비를 마친 그들을 내려 보던 벤디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시작부터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을 다스린 벤디는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벤디 레피. 나는 긍지 높은 수인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다, 나는 긍지 높은 수인 아카데미의,

“학생 여러분.”

학생회장이다.

* * *

페트리온 시가지 구석, 아리엘은 인적 드문 곳에 있는 낡은 게시판 앞에 섰다.

관리되지 않는 여러 홍보물 중, 눈에 띄는 전단지를 살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벤디야, 그거 알아? 이 게시판에는 매해 한 번씩 똑같은 전단지가 붙는 거?”

고구마 껍질을 까는 행위에 열중하는 어린 벤디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사리손으로 조물조물 야무지게 까는 모습을 내려 보던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우리 벤디 안 그렇게 생겨서는 공부 잘하잖아. 엄마는 나중에 벤디가 아카데미도 가고, 친구도 많이
사귀면 좋겠어.”

“응, 그럴게.”

“고구마 좀 그만 보고. 걔가 밥 먹여 주니?”

“밥이잖아.”

“맞는 말이네.”

수긍한 아리엘은 게시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벤디와 같은 밀색 눈동자가 끄트머리에 자리한 빛바랜
전단지에 머물렀다.

‘흠…… 아카데미라…….’

이스단 가문과의 혼담처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보루는 많은 편이 좋지 않을까.

톡, 벤디의 머리에 손을 얹은 그녀는 천천히 마력을 운용했다.

차후 벤디가 무의식중에라도 이 장소를 기억하게끔 만드는 정신계 마법이었다.

“엄마, 방금 뭐 한 거야?”

“그냥, 우리 벤디의 미래를 빌어 봤어. 아 참, 수리 할멈이 그러던데, 너 시에나에게 청혼했다며?”

“응.”
벤디는 조금 수줍어하며 발꿈치로 땅을 팠다.

“시에나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거든.”

“무슨 냄새?”

“고구마 냄새.”

“이제 고구마뿐만 아니라 고구마 냄새와도 혼인하는 거니?”

두 사람은 고구마를 반 나눠 먹으며 게시판에서 멀어졌다.

팔랑,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전단지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졌다.

[수인 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요강]

수인 아카데미 完

#<Epilogue 1 화>

새로운 학생회 모집을 앞둔 수인 아카데미 학생회실.

쿵, 묵직한 짐을 내려 둔 안나는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을 둘러봤다.

앞으로 또 다른 일 년을 꾸려 갈 장소.

무료하기만 하던 아카데미 생활이 벤디가 나타나고 난 후부터는 기대까지 되는 실정이었다.

벤디를 학생회장으로 뽑은 학생 대부분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노을 진 학생회실을 오가던 안나의 눈길이 텅 빈 게시판에 닿았다.

‘흠, 조금 허전한데.’

부스럭, 그녀는 짐 상자에서 꺼내 든 종이를 게시판 위에 반듯하게 붙였다.

벤디가 자의로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함으로써, 결국 안나의 소유가 된 고구마(상자 위 어린 벤디)


초상화였다.

뒤이어 짐을 풀고 있을 때, 학생회실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벙벙한 쥐색 카디건을 대충 걸친 레넌이었다.


“회장은?”

“안 왔어요.”

노골적으로 실망하며 나가려던 그는 게시판 앞에서 돌연 멈칫했다.

‘귀엽다.’

이건 진짜 미쳤다.

남편 상자 위에 앉은 벤디의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 레넌이 게시판 앞을 서성였다.

흘긋.

그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의미를 눈치챈 안나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양도하지 않을 거니까 포기하세요.”

“이렇게 예쁜 얼굴로 애원하는데?”

“가세요.”

그렁그렁 미련스레 쳐다보던 레넌이 나가고, 다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은 원이었다.

“사슴은.”

“기숙사에 있을걸요.”

어김없이 게시판 앞에서 발이 붙들린 원은 초상화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와 처음 만난 어릴 적


벤디보다는 조금 더 어린 모습이었다.

흘끔.

원이 제게 보내는 금전적 눈길의 의미를 파악한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안 팔아요.”

“얼마를 부르든 구입하죠.”

“구경조차 못 하도록 숨겨 버리기 전에 조용히 가세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원이 조용히 학생회실을 나서고, 노란 불청객이 턱, 창가에 올라섰다.

“벤디는.”

“여기 없어요.”

그대로 등 돌려 나가려던 헤일린이 게시판을 보자마자 굳었다.

힐긋.

은근히 제 눈치를 살피는 그를 마주한 안나가 팔짱을 꼈다.

“노파심에 말씀 드리는데, 훔쳐 가면 영원히 학생회실 출입 금지입니다.”


“대놓고 가져가면?”

“회장의 갈색 배낭을 찢어 버리겠어요.”

도리어 협박당한 헤일린이 쯧 혀를 차며 다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발 닦개들을 쫓아 보낸 후, 늦은 저녁까지 짐을 정리한 안나는 학생회실을 나서다 말고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게시판에 덩그러니 붙은 초상화에 머물렀다.

‘……괜찮겠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탁, 문이 닫히며 학생회실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다음 날이 되어도 고구마 초상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다만…….

>> 에필 1 화 삽화 2 번

쓰레기 같은 고구마 초상화로 바꿔치기 되었을 뿐.

고구마가 마치 안나를 우롱하듯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게시판에서 떼어 낸 초상화를 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떤 놈이야.’

절도 사건이다. 범인은 분명 발 닦개 삼 인방 중 하나.

‘반드시 색출하겠어.’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주체 못 한 안나는 씩씩거리며 책상을 쾅 내리찍었다.

앞뒤 사정을 모른 채, 옆에 나란히 앉아 면접 준비를 하던 벤디가 깜짝 어깨를 떨었다.

“안나, 왜 그래요?”

“회장, 아주 깐깐하게 면접에 임하세요. 특히 그 도둑놈들, 아니, 삼 인방의 미인계에 넘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 알겠어요?”

“당연하죠, 객관적이고 보수적으로 점수를 책정할 거예요.”


“네, 보수 사슴 씨.”

입을 삐죽 내민 벤디가 학생회 지원 서류를 탁탁 정리했다.

학생회 입회 희망자 0 명이란 신기록을 세운 최초의 학생회장.

그런 과거의 명성이 무색하게, 올해는 감당키 힘들 정도로 학생회 임원 지원자가 쏟아졌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면접까지 시행하게 된 상황. 학생회실 복도에는 지원자들이 와글와글 모여든 상태였다.

첫 번째 지원자는 신시아 폴릿.

작년 서기 경험자라는 경력을 가진 유력한 임원 후보였다.

나란히 자리한 벤디와 안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신시아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성적 우수, 품행 단정, 성실한 출석률 및 높은 업무 효율.

음음, 보수 사슴 벤디는 객관성을 잃은 채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내 친구는 당연히 합격, 으븝.”

벤디의 입을 텁 막은 안나가 은근하게 물었다.

“올해부터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금서나 고서적은 제공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서기에 지원하겠어요?”

잠깐 침묵을 고수한 신시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본 후 다시 지원하러 오겠습니다.”

지긋지긋한 독서광.

도망치듯 쌩 나서는 신시아의 뒷모습에 벤디와 안나의 시선이 박혔다.

두 번째 지원자는 메이지 로튼.

마개동 부장으로, 작년 마법부 대표를 일임한 경력자였다.

“뇌물이랍니다. 두목을 위해 준비했지요.”

메이지는 파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액자를 내밀었다.

면접 시작 전에 뇌물부터 당당히 내미는 꼴이라니. 액자를 받아 든 벤디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마개동에서 개발한 신형 마도구인데, 마력을 불어넣으면 현재 호감을 가진 상대가 액자에 그려지지요.”

흠칫, 사뭇 긴장한 벤디는 목구멍이 깔깔해졌다.

아카데미 최대 화제, 발 닦개 삼 인방 중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것만큼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안나와 메이지가 고개를 디밀었다.


“내뺄 생각 말고 해 봐요.”

“두목, 어서.”

두 사람의 채근에 못 이긴 벤디가 마력을 주입하자, 사각사각, 액자에 잘 아는 존재가 그려졌다.

얼굴을 확인한 세 사람은 맞춘 것처럼 기함했다.

“노랑이?”

“헤일린 이스단?”

“역시!”

놀라던 안나와 메이지는 기가 찬 눈길로 벤디를 응시했다.

“왜 댁까지 놀라요?”

“두목이 놀라면 어떡하나요?”

그야 나도 이제 알았으니까…….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벤디가 동공을 떠는 찰나, 주춤, 액자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이윽고 액자에 다른 그림이 떠올랐다. 레넌 에던트였다.

뒤이어 그의 얼굴이 지워지며 원 리오나드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 바쁜 액자를 바라보던 안나가 벤디를 돌아봤다. 이런 무구하고 새침한 얼굴을
하고서는.

“의외로 머릿속이 문란하네요.”

딱히 부정하지 않은 벤디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잘못된 걸까요?”

“아니, 굉장히 합리적이네요.”

벤디의 어깨를 짚은 메이지가 호호 웃었다.

신형 마도구 실험에 성공해서 신난 메이지가 떠나가고, 다음 지원자는 야닉 펠이었다.

아카데미를 근육으로 물들인 유력한 탈락 후보.

경직된 채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든 야닉을 주시하던 안나가 말문을 뗐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 야닉 펠! 방년 20 세! 별명 밤하늘을 가르는 하이에나! 꿈은 대륙 제패!”

무대 공포증이 도진 야닉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무 말이나 늘어놨다.

그 심정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벤디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학생 지도 대표에 지원하셨네요. 지원 동기는 뭔가요?”

“그, 그건 제가 빗자루이기 때문입니다!”

면접을 순조롭게 망친 야닉이 복도로 나섰다.

“이 야닉 펠은 합격할 것 같은데, 넌 어떠냐?”

바깥에서 그의 쩌렁쩌렁한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휙, 야닉의 지원서를 뒤로 던진 안나가 입을 열었다.

“다음 지원자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레넌이 지원자 의자에 착석했다.

안나는 있지도 않은 호위라는 명목으로 지원한 서류를 검토하며 질문했다.

“호위로 지원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붙어서 감시하려고.”

서늘한 물색 눈동자가 벤디를 훑어 내렸다.

“눈만 떼면 자꾸 다른 남자랑 불순한 짓을 저질러서.”

풋, 벤디가 마시던 물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쏘아졌다.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게 된 레넌이 젖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차라리 벗으라고 하지 그랬어.”

셔츠까지 젖은 그가 교복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눈 호강 점수 만점……. 점수를 기록한 안나는 곧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레넌 에던트 지원자, 게시판에 대해서 할 말은 없어요?”

“게시판?”

어리둥절하게 게시판을 돌아본 레넌은 고구마 초상화를 확인하자마자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내 초상화는 어디 가고 저딴 게 붙어 있어.”

반발하는 용의자 1 이 자리를 뜨고, 다음으로 원 리오나드가 들어섰다.

누가 완벽주의자 아니랄까 봐, 등장과 함께 마탑 조수들이 학생회실에 각종 최고급 청소 도구를 설치했다.

미화 부문에 지원한 지원서와 그의 화려한 경력 사항을 살핀 안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합격.”

다시 말하지만 원이 이런 정신 나간 선택을 하는 이유야 알 바 없었다.

“안나, 깐깐하게 검토하라면서요.”


“합격, 으븝.”

합격 기계가 된 안나의 입을 틀어막은 벤디가 원을 몰아붙였다.

“합격은 보류입니다. 나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라.

잠시간 허공에 머물렀던 황금색 눈동자가 벤디를 향했다.

“언제쯤 나 좋아해 줄 건데요.”

화르르, 순식간에 벤디의 얼굴이 불탄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지, 지금도, 추, 충분히, 좋…….”

어쩔 줄 모르는 벤디를 지켜보던 안나는 “순정 점수 만점…….” 기록하며 선언했다.

“합격.”

최초 합격자는 나가다 말고 게시판을 응시했다.

가짜 고구마 초상화를 발견한 그가 휙, 의심 가득한 눈길로 안나를 돌아봤다.

“설마 초상화를 팔아치운 건 아니겠지.”

“원 리오나드 지원자, 일단 나가 주세요.”

용의자 2 가 학생회실을 나서고, 다음 순서인 헤일린이 지원자 의자에 늘어졌다.

학생회 마스코트 부문 지원자. 그는 삐딱한 눈길로 벤디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벤디가 어색하게 웃자, 헤일린이 곧장 말문을 뗐다.

“웃음이 나오나 보네.”

“……?”

“약혼자 앞에서 다른 놈들이랑 입술을 비벼 놓고.”

갑작스레 더워진 벤디가 손부채질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내, 내가 언제.”

성미에 못 이겨 나가려던 헤일린은 다시 휙 뒤돌았다.

면접자 좌석으로 다가간 그는 벤디를 무 뽑듯 쑥 들어 올렸다.

“그런 거 나 말고 하지 마.”

“…….”

“알았어?”
공중에 대롱대롱 떠오른 벤디가 얼결에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박력 점수 만점……. 다만 마스코트로서의 깜찍함은 세미보다 부족, 기록한 안나는 고심에 사로잡혔다.

‘이상한데.’

용의자 3 은 훔치면 훔쳤지, 정성스레 다른 초상화로 바꿔치기할 성미가 못 됐다.

이는 용의자 1 이나 2 도 사실상 마찬가지.

헤일린까지 면접장을 나서고, 초상화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내 초상화의 행방은 어디인가.

범인을 추론하며 지원자 서류를 뒤적이던 안나는 짐짓 미간을 구겼다.

“회장.”

“네?”

“다음 지원자 인적 사항 봤어요?”

“아직요. 왜, 문제라도 있어요?”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안경알을 잡은 채 연거푸 확인한 안나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사슴 수인인데요?”

#<Epilogue 2 화>

“아…… 면접 망친 것 같아.”

“그러니까, 생각보다 정상적인 면접이었어. 교훈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지원자들로 시끌벅적한 학생회실 복도. 원과 레넌, 헤일린은 면접을 잘 본 데에 비해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도 그럴 게 꼬마 벤디 초상화가 감쪽같이 자애로운 고구마로 탈바꿈했기에.

범인은 틀림없이 셋 중에 있었다.

그 외에 안나 스웰든의 괴력에 짜부라질 각오까지 하고 초상화를 바꿔치기할 간 큰 인간은 없으니까.

누구일까. 의심 가득한 세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오갔다.

“초상,”

세 명이 동시에 입술을 떼려는 순간,

“내가 충고 하나 하지. 자고로 면접을 잘 보려면 말이야,”

으스대는 야닉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휙, 삼 인방의 눈이 번개처럼 야닉에게 꽂혔다.

안나의 괴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내일이 없으며, 벤디의 초상화를 충분히 탐낼 만하고, 그런
같잖은 고구마 초상화를 그릴 만한 인물.

야닉 펠, 미처 간과하고 있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이 야닉 펠이 딱!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눈빛으로 괴력 곰탱이를 제압하고!”

면접 무용담을 늘어놓는 야닉의 위로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들기고 보려던 원과 레넌, 헤일린은 끓어오르는 주먹을 애써 눌렀다. 사라진 초상화의 안위가 먼저였다.

“어디 숨겼어.”

“가지고 오기만 하면 목숨은 죽여 줄게.”

“1 초 준다.”

세 사람의 난데없는 위협에, 영문을 모르는 야닉이 분개하며 외쳤다.

“감히 나를 겁박하다니!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삼 인방이 선득하게 눈을 빛냈다.

“어떻게 맛보여 줄 건데.”

흡, 복식 호흡을 한 야닉은 꽥 소리 질렀다.

“회장, 살려 줘! 발 닦개들이 합격자를 질투한 나머지 이 야닉 펠을 없애려고, 으읍!”

나름 벤디 앞에서는 내숭을 떠는 중인 세 사람이 빠르게 야닉의 입을 봉했다. 뒤이어 그를 부드럽게


어르고 달랬다.

“입 닫아.”

“쉿.”

“초상화만 가져오면 조용히 죽기만 하고 끝날 일이니까.”


넷이서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기묘할 만큼 고요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들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핏줄 비치는 흰 피부와 부드럽게 흘러내린 상아색 머리카락, 알맞게 맞춰 입은 아카데미 교복.

뚜벅뚜벅, 시에나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육식 수인과 결이 다른 초식 수인 특유의 외양. 그의 자취가 남은 자리만 공기가 다를 지경이었다.

“……?”

어째서 꽃사슴 정혼자가 학생회실 복도에 있는 걸까.

원과 레넌, 헤일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수백 개 떠올랐다. 그도 모자라 시시각각 여러 색깔로 낯빛이


변했다.

벤디와 같은 꽃사슴이라고 말하기조차 싫은 레넌이 중얼거렸다.

“왜 저 고구마 수인이 여기에 있는 건데?”

“고구마 수인? 저 자식 본체가 고구마냐?”

혼잣말을 들은 야닉은 편견 없이 감탄했다.

“과연, 기개가 심상치 않다 했어.”

눈앞이 노래지는 노란 세상을 경험하던 삼 인방은 시에나가 학생회실 앞에 서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꽃사슴 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쾅! 원과 레넌, 헤일린은 문을 부술 기세로 면접장에 난입했다.

깜짝 놀란 벤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텁, 다급하게 달려든 레넌이 벤디의 눈부터 가리고,

확, 헤일린이 귀를 막고,

쏙, 원이 대답조차 못 하게끔 입에 고구마를 꽂아 넣었다.

숨을 쉬어야 하는 코 빼고 얼굴의 모든 구멍이 가로막힌 벤디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웅웅?”

단어가 되지 못한 울림이 고구마에 막혀 사라졌다.

한편, 시야가 훤히 뚫린 안나는 넋 나간 채 학생회실 문을 바라봤다.

흩날리는 상아색 머리카락과 긴장했는지 발그레 열이 오른 뺨.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대단한 생명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벤디처럼 육식 수인과 퍽 다른 생김새의 지원자를 마주한 안나가 지원서를 내려 봤다.

“……시에나 애리슨 지원자?”

“네.”

짝, 짝, 짜악.

안나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합격.”

내 이상형 점수 만점…….

* * *

수인 아카데미는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바로 남학생들이 지나칠 정도로 외양을 가꾸기 시작한 것. 그 변화의 시초는 발 닦개 삼 인방이었다.

늘 반듯한 옷차림으로 다니던 원은 갑자기 흑발을 내리고, 카디건을 입는 등 헐렁한 차림새로 나타났다.

단정한 외모와 상반되는 날 티 나는 분위기, 최고였다.

반대로 헐렁하게 다니던 레넌은 재킷까지 제대로 갖춰 입기 시작했다.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구속된 서늘한 느낌, 최고였다.

교복 셔츠에 타이가 최대치였던 헤일린은 베스트라도 주워 입는 기행을 선보였다.

단단한 몸이 니트 베스트에 감춰진 아슬아슬한 느낌, 최고였다.

게다가 떠오르는 샛별, 청순가련 사슴 시에나까지.

여학생들은 기숙사에 귀가하자마자 아카데미에 출석하고 싶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이게 다 뭐야.’

학생회실에 쌓이다시피 한 여학생들의 기획서를 살핀 벤디가 골머리를 썩였다.

꽃 피는 봄을 맞이하여 아카데미 대표 교화를 뽑는 대회를 개최하자니.

‘그 꽃이 그 꽃이 아니겠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모르지 않는 벤디가 이마를 짚었다.

‘학장님이 말한 사슴 수인 신입생이…….’

설마하니 시에나였다니.

그의 등장 이후부터 학생들은 물론 원과 레넌, 헤일린까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벤디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기본이요, 오죽하면 X 클래스까지 따라와서 강의를 듣는 지경.

노란 짐승은 아예 배낭에 살림을 차린 수준이었다.

“하…….”

이대로도 괜찮을까.

근심 걱정에 파묻힌 벤디가 시름시름 집무 책상에 엎드렸다.

“회장, 안 나오고 뭐 해요?”

그때 안나의 재촉이 들려왔다.

“학장님께서 오늘 학생회 회식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이미 채비를 끝마친 학생회 임원들이 복도에서 벤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참.’

비실비실 일어난 벤디가 갈색 배낭을 메는 와중, 턱, 헤일린이 예고 없이 창문을 통해 나타났다.

창틀에 올라선 그는 벤디의 눈높이에 맞춰 수그려 앉았다. 살짝 찢어진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살벌했다.

“저 고구마 수인을 진짜 학생회에 집어넣겠다고?”

“그럼 어떡해.”

삐딱한 그의 말투에, 허리에 손을 얹은 벤디가 대답했다.

“시에나도 수인 아카데미 학생인 만큼 학생회에 들 권리가 있어. 이미 안나가 입회시키기도 했고.”

안나는 시에나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볼 때마다 느닷없이 엄지를 치켜올리곤 했다.

더군다나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의 융화를 시도 중인 밀란느 학장이 친히 부탁까지 한 상황이었다.

헤일린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짜증 나, 너.”

“나도 너 짜증 나.”

한마디도 지지 않은 벤디가 대꾸했다.

더 이상 일개 방랑 노랑이한테 겁먹을 벤디 레피가 아니었다.

며칠 내내 까칠하게 구는 헤일린을 쌩하니 등지고 가려던 벤디는 문득 학생회실 벽에 걸린 액자를


돌아봤다. 메이지에게 면접 뇌물로 받은 마도구였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현재 호감을 가진 상대가 액자에 그려지지요.’


액자에 세 명이나 그려진 결과가 자연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

눈을 내리깐 벤디는 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직진밖에 모르는 세 사람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들의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닌 만큼, 벤디 또한 답변에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늘 제가 먼저 찾아 나서게 만든 존재는 아직 한 명.

이것만큼은 마도구가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가슴을 따끔거리게 만든 감정의 정체는 아마도…….

다시 빙글 몸을 돌린 벤디가 헤일린의 앞에 척 섰다.

“노랑아.”

비뚤어질 예정인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툭 대답했다.

“왜.”

한참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인 벤디는 곧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소곤거렸다.

“육식 수인 중에서.”

“……?”

“네가 제일 좋은 것 같아.”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헤일린의 시선이 삐거덕거리며 벤디를 향했다.

뒷짐 진 벤디는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덧붙였다.

“그냥, 지금은 그렇다고.”

헤일린은 창틀에 수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노란 돌이 되고 말았다.

너무 놀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래, 좋아.’

‘…….’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아.’
언젠가, 노랑이가 육식 동물 중에 가장 좋다며 퉁명스레 외치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이건 사슴의 탈을 쓴 여우가 분명했다.

톡. 벤디가 검지로 무릎을 밀자, 저항 없이 뒤로 넘어간 그의 몸이 창밖으로 떨어졌다.

“회장, 안 와요?”

“먼저 간다.”

“두목, 빨리 오세요.”

안나와 신시아, 메이지가 차례대로 벤디를 채근했다.

“…….”

수풀에 파묻힌 채 반응이 없는 헤일린을 내려 보던 벤디가 활짝 웃으며 따라나섰다.

“같이 가.”

벤디의 머리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왔다. 새로 시작될 아카데미 생활을 축복하듯 비추,

“어이, 고구마 수인, 다 들었다. 네놈이 제왕의 지고지순한 사랑 고백을 걷어찼다며?”

축복하듯 비추긴 무슨. 실연당한 남의 슬픈 과거는 왜 갑자기 들추는데.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주마!”

“잘한다, 근육 바보.”

“머리부터 따 버려.”

우당탕탕, 야닉과 시에나, 원과 레넌이 뒤섞여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새삼 그 소란조차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벤디는 가만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페트리온에서 도망치기 전만 해도 안개처럼 흐릿한 내일이 끔찍할 만큼 두려웠는데. 저들과 함께인 지금은
다가올 미래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엄마는 나중에 벤디가 아카데미도 가고, 친구도 많이 사귀면 좋겠어.’

엄마. 나 아카데미에 입학도 하고, 친구도 잔뜩 생겼어.

벤디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순간, 야닉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왕의 초상화를 훔친 것도 고구마 수인 네 녀석이지?”

움찔.

정색하며 그들을 등진 벤디는 손에 배어난 땀을 교복 치마에 비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이 고이 접어 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이걸 찾고 있어?’

학생회실 게시판에 떡하니 붙은 제 어린 시절 초상화가 어찌나 부끄럽던지. 안나에게는 미안하지만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양심상 대용품으로 걸어 둔 고구마 초상화를 그토록 혐오할 줄은 몰랐지만.

“초상화를 훔치다니요,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헛소리! 그 구질구질한 고구마로 바꿔치기했을 때부터 알아봤다고!”

미안해, 시에나…….

진실은 그렇게 까마득한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 * *

어느 봄날, 수인 아카데미 학장실.

그곳에는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거물들이 모인 상태였다.

사라 이스단을 비롯한 백호 영역의 바알 장군, 그리고 스카론 장로와 그를 따라온 페트리온 모험대 대장
모니까지.

대륙 전쟁이 터진 게 아닌 이상 모으려고 작정해도 모으기 힘든 조합이었다.

밀란느 학장은 그 사이에 뜬금없이 끼어 있는 모니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꼬마, 너는 누구냐.’

‘어허, 대장이라고 부르시게.’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기묘한 조합을 둘러본 밀란느 학장은 느지막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바쁘신 분들께서 연통도 없이 아카데미에는 무슨 일입니까?”

그와 동시에 거물들의 입이 움찔거렸다.

레넌 에던트가, 헤일린 이스단이, 원 리오나드가,

“가문에서 내쫓아 달랍니다.”

쨍그랑, 밀란느 학장의 손에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미친놈들…….”

새로운 수난 시대의 막이 열렸다.


<수인 아카데미> 진짜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 ㅎㅁ * 쉼터 ** 1412 ***

>>아직 외전은 연재하고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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