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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 완결 || 야식먹는중 作
#Prologue
수인 아카데미.
“신입생 명단.”
“-문제가 있습니다.”
“제법 큰 문제입니다.”
“…….”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수석 - 벤디 레피]
“예.”
새침데기처럼 앙다문 입술하며, 총명한 눈동자와 느슨한 눈매가 묘하게 잘 어우러진 생김새였다.
사, 사.
[특이사항 - 사슴]
#<1 화>
털썩.
‘이런.’
“뭐야…….”
페트리온 중앙 호숫가. 이곳에 모여 나의 모험기를 듣던 아이가 주르륵,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훔쳤다.
“어떻게 되긴. 평화를 지켜 냈으니 너희가 호숫가 탐방도 하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하는 거 아니겠니?”
“쉬잇.”
갑작스러운 몸종의 등장에, 미간을 모은 내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몸종은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외쳤다.
“그 소식, 들었나?”
“……말이 돼?”
“말 안 돼! 그냥 헛소문 아니야?”
육식 수인.
“벤디!”
“뭐라고 말 좀 해 봐!”
“사실이야.”
부모님은 이 아름다운 땅을 다스리는 레피 가문의 가주였다. 대대로 이어진 마법사의 혈통 덕분에 귀족이
된 사례였다.
‘벤디, 이리 오렴.’
숙부는 대뜸 혼서 한 장을 내밀었다.
사자 수인이고, 더 자세한 사안은 나중에 알려 주마. 일방적으로 통보한 그는 무심한 음성으로 설명을
이었다.
“벤디이!”
잠깐 말을 멈춘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괜찮…….”
‘사자 수인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지 않아.”
“벤디, 뭐라고?”
“괜찮지 않아.”
“벤디…….”
“도망치고 싶어…….”
“…….”
섣불리 위로조차 못 한 아이들이 덩달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나긴 정적이
지나갔다.
“도망가.”
“……뭐?”
도망.
짧은 단어가 뭐라고 가슴 한편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 작은 파문은 곧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2 화>
‘도망…….’
두근, 두근.
“안 돼.”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벤디, 내가 도와줄게.”
“…….”
“꼭이야.”
바로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 간의 경계.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두 종족은 철저하게 분리된 상태였다.
수인이 짐승보다 사람에 가까운 존재라 해도. 수인 간의 섭식을 엄금하는 법이 있다고 해도.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람.’
‘할 수 있을까…….’
“…….”
족쇄와도 다름없는 발찌. 내 마력으로는 숙부의 마력이 담긴 이 구속구를 깨뜨릴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오두막에서 물러나던 내가 기겁하며 멈칫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지나는 구름이
마치 사자의 머리통처럼 보였기에.
“윽.”
파직, 파지직.
구속구에서 불꽃이 튈 때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극통이 밀려들었다.
“흐으…….”
‘성공…… 했다고?’
이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뭐, 뭐야.”
“당연하지. 우리 집 사슴 농장이잖아!”
“……진짜 사슴 맞아?”
천진하게 설명하던 모니는 대뜸 낯빛을 굳히며 안장을 넘겼다. 꼬마가 짓기에 퍽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얘를 타고?”
‘멀리…….’
숙부의 눈이 닿을 수 없는 곳.
이곳 사슴 영역, 페트리온에서 가장 먼 곳.
‘그런 곳이라면…….’
“도망갈 곳은 정했어?”
“어디로든 가야지.”
“……벤디.”
“죽지 마.”
“죽긴 내가 왜 죽어.”
“……응.”
“대장의, 흡, 명령이야.”
“명령을 어길 순 없지.”
나는 모니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고마웠어, 모니.”
“안녕.”
“악!”
불안한 시작이었다.
“해피, 그쪽이 아니래도.”
푸르릉.
‘여기가 아카데미라고?’
성이 아니라?
결과 통지서]
그것도 모자라…….
[수험번호 129]
[합격 – 수석]
벌벌 떨면서 치른 입학시험에 정말 합격한 것도 모자라, 수석이라니.
‘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어떡하지.’
“악!”
한 걸음, 두 걸음.
‘뭐야.’
“벤디 레피 님, 맞습니까?”
‘……육식 수인.’
올 게 왔구나.
‘벤디, 새겨듣거라.’
“일단.”
“……예?”
“후.”
사슴.
도대체 뭐 하는 사슴일까.
밀란느 학장이 추측 속에서 헤엄치는 사이, 똑똑, 누군가 학장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학장님, 아이작입니다.”
“벤디 레피 님과 함께 왔습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익히 아는 비서가 들어오고, 뒤따라 풍채 좋은 갈색 사슴이 들어섰다.
푸르릉.
“벤디 님은 이쪽.”
“돌아보게.”
“……네?”
“그대로 한 바퀴 돌아보도록.”
“제자리에서 뛰어 보게.”
폴짝.
“양팔을 들어 보게.”
만세.
“웃어 보게나.”
대체 뭘 원하시는 걸까.
“자네, 정말…….”
“정말 사슴이군.”
그뿐인가.
‘안 돼, 절대 안 돼.’
“일단 앉게.”
“-벤디 학도.”
“말씀하세요, 학장님.”
“…….”
“즉, 재학생과 교직원 전부가 육식 수인으로 이루어진 곳이야. 초식 수인을 만나 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대다수고.”
초식 수인의 몸으로는 위험하다 못해 목숨의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는 곳. 벤디는 그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행위를 하고 있단 의미였다.
“이곳에 자네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소리일세.”
“그래서 말인데.”
“학장님.”
“……그 말씀은.”
“자네가 초식 수인인 이상 반드시 문제에 휘말릴 걸세. 굳이 그런 위험 부담을 떠안고 싶지는 않군.”
“위험 부담.”
“…….”
“아까운 목숨을 잃을 바에야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하지만…….’
교복 지급!
일인 기숙사!
전액 장학금!
“어쩔 수 없네요.”
그녀의 빠른 수긍에, 의아해진 밀란느 학장이 벤디의 낯빛을 살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이리 쉽게 수긍한다고?’
“아, 학장님.”
“……벤디 학도?”
“저희 사슴 일족은 불의를 목격하면 바로바로 신고하는 습성이 있어서요. 어디 보자, 교육부 위치가…
….”
‘이런 빌어먹을.’
#<4 화>
“해피, 이만 가자.”
흡, 흡.
숨넘어가도록 해피의 안장을 당겨 봤자 제자리에서 발만 질질 끄는 꼴이었다.
“벤디 학도.”
“입학을…….”
“정말요?”
“대신.”
“……?”
“얼굴.”
“얼굴…… 이요?”
“그래, 그 얼굴.”
쾅!
“벤디 레피…….”
언제나 얌전한 얼굴로 웬스턴의 의견을 따랐기에,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가 직접 제작한 구속구. 어린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발찌를 끊고 달아났다.
‘제 주제에 어떻게…….’
“제길!”
‘조력자.’
조력자, 조력자라…….
“가주님, 들어가겠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세 달의 말미를 준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혼담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를 기피한다면, 혼담을
파기하겠다는 연통입니다.”
“…….”
“성질 급한 사자 새끼들이!”
혼인 지참금은 30 억 실링.
‘빌어먹을.’
반드시.
보통 이런 경우엔 꼭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던데.
‘아 참, 바꿨지.’
여우 수인으로의 둔갑.
‘얼굴을요? 왜요?’
‘자네 얼굴엔 문제가 몹시 많지.’
남의 얼굴더러 문제라니.
‘할게요, 여우 수인.’
결정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리고 학장님 나름의 배려인 건지, 족제비 등 비교적 순한 육식 수인이 모인 X 클래스로 입학이
결정됐다.
“…….”
“벤디 학도?”
아차.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정면을 바라봤다.
“딱 봐도 여우네.”
속삭임에 은근한 실망이 묻어났다. 확실히 흔하디흔한 여우 수인은 흥미를 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 돼, 떨지 않기로 했잖아.’
‘떨지 말자.’
튀지 않게, 의연하게.
“반가워요, 저는-”
“-별로 맛이 없습니다.”
공포 앞에서는 위대한 레피 가문의 적통 후계도 말실수를 하는 법이었다.
들었어? 맛없단다.
“얘.”
“나는 라일라야.”
“…….”
“너 수석이라며?”
몹시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다.
#<5 화>
제발 말 걸지 말아 줄래.
육식 수인은 코가 좋구나.
“군고구마……?”
“있잖아, 그거 알아?”
“……?”
‘조용히 지내게.’
“수석, 왜 말이 없냐니까?”
“입 다물어.”
‘빨리 좀 끝나라.’
‘규모도 크지.’
‘학생회장이고 뭐고.’
그래, 몇 년만 잘 버티고.
“X 클래스의,”
“벤디 레피.”
뭐?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상을 올려다보자, 사회자 또한 혼란스러운 얼굴로 결과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거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도리도리, 으쓱.
도리도리, 으쓱.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저희도 몰라요.
“선출 결과가…….”
‘……어째서?’
풀썩.
“…….”
이 또한 언제 받은 건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가져본 직책이라곤 페트리온 모험대 1 소대 행동대장에 불과한 내게는 너무나 무거운 단어였다.
‘왜 나야?’
“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제대로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베갯잇에 얼굴 자국이 날 정도의 눈물만
흘렸을 뿐.
후.
“아아.”
“사, 사슴 여러분.”
아, 망했어요.
#<6 화>
흘끔, 흘끔.
“벤디 님?”
“네, 말씀하세요.”
“아뇨,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지?’
“하…….”
“……레넌.”
“레넌, 그만 웃거라.”
“…….”
“아-”
“사, 사슴 여러분.”
“아니…….”
비장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남자의 다음 대사가 이어졌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가슴 부근을 짚으며.
‘저런…….’
나, 사슴, 사슴.
“안타깝지만 안 되네.”
“학장님!”
“사퇴하는 건요?”
“벤디 학도.”
그럴 만도 하지. 찝찝하게 입맛을 다신 밀란느 학장은 여전히 소파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잡아끌었다.
“너무 걱정하진 말게. 이 미친놈이, 아니, 이 학도가 당분간 벤디 학도의 호위를 맡을 걸세.”
“호위요?”
그와 마주 서게 된 벤디는 일순 숨을 멈추었다.
최악의 첫인상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사슴 여러분을 연기한 육식 수인은 미모 하나로 나라를 뒤흔들
만큼 아름다웠기에.
“자, 인사 나누게.”
‘백호 수인이라고?’
으.
더욱이 레넌은 청순한 겉모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형용할 수 없는 껄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학장님이랑 약간 닮은 느낌인데?’
“손주놈일세.”
“……반가워요.”
‘감시?’
일개 여우에게 학생회장이란 권한이 넘어간 게 걱정일 순 있지만, 감시까지 붙이는 건 지나친 감이 있는데.
떨떠름한 밀란느 학장의 표정을 미루어, 벤디 레피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뭐…….’
‘-이게 여우라고?’
‘왜 이렇게 빤히 쳐다봐?’
‘이 백호가 무슨 수로 알아내겠어.’
“반가워요.”
쿵, 쿵, 쿵.
“앞으로 잘 부탁드,”
“그거같이 생겼네.”
곧 내내 다물려 있던 레넌의 입술이 열렸다.
“사슴.”
#<7 화>
[학생회장 벤디 레피]
‘사, 사슴 여러분.’
백호 수인과.
단둘이.
으.
그리하여 생긴 법이,
‘아마도?’
‘그럼 육식 수인은?’
‘어, 글쎄……?’
‘엄마는 아는 게 뭐야?’
‘야.’
‘그러고 보니…….’
“회장.”
“벤디 회장.”
“네?”
아무리 그래도 하대라니. 밀란느 학장님의 손자라면, 맹수네 동네에서는 최소 귀한 도련님일 게 분명한데.
“여쭙고 싶은 게, 아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내가 학생회장으로 뽑힌 거야?”
“아직도 몰랐어?”
드디어 본론이구나.
“뭐?”
“내 역할은 호위까지만.”
그럼 왜 물어보라고 하는데.
“회장.”
“말씀하세요, 아니 말해 봐.”
“알잖아, 그거.”
“알다니, 뭐를?”
“……?”
“혀로 입술 쓰는 거.”
“아.”
“해피, 어디 있니?”
마구간의 주인인 말들을 밀어내고, 명당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저 근육질 사슴을 보라.
‘어떻게 그걸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이론만은 빠삭할 정도로 꿰고 있으니, 마법으로 구현하는 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구현하지 못한 내가 이상한 거니까.
‘지금.’
“악!”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아.”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차분해진 나는 마구간의 지푸라기 수를 헤아렸다. 가로로 흘러내린 눈물이
지푸라기를 짙게 물들였다.
사실은 무서워요.
조금 많이.
‘저딴 정체 모를 여우 수인이.’
‘숨만 붙여 둔다면…….’
마침 보는 눈도 없는 한적한 장소.
#<8 화>
‘한낱 여우가?’
“……할 육식 수인들.”
“……망할 육식 수인들.”
‘뭐라고?’
“장풍!”
‘……장풍?’
“이, 이 무슨!”
‘나무가.’
나무가…….
분명히 마력을 사용하는 건 못 느꼈는데. 망연자실한 암갈색 눈동자가 벤디가 사라진 방향에 길이길이
머물렀다.
어디 보자…….
‘말 거는 것쯤이야.’
“…….”
‘……뭐지?’
“군고구마.”
‘설마, 순 허풍이겠지.’
최근 아카데미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이 생각난 탓이었다. 학생회장이 교목도 가볍게 으스러뜨리는 악력을
가졌다는 소문이.
‘혀로 입술 쓰는 거.’
갑자기 유혹은 왜 해.
“…….”
경고다.
결국 어제와 같이, 벚나무 아래에 홀로 남겨진 벤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등 뒤로 낙엽 떨어지는 배경이
어울릴 정도의 고독함이었다.
“안녕, 늑대.”
“또 쓸데없는 거나 읽고.”
“너보다는 쓸 데 있을걸.”
늑대 수인, 원 리오나드.
“딱히.”
“왜?”
“……레넌 에던트.”
“너야말로 무슨 속셈이지?”
“뭐가?”
“시치미 떼지 말고.”
“조기 졸업?”
“그리고 하나 더.”
“…….”
“사실이냐니까.”
“……아마도.”
웃겨서.
#<9 화>
대체 왜 날 학생회장으로 뽑은 거야.
으.
바로 뒤편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벤디가 암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누구?”
“네?”
무슨 실력?
‘이건 분명…….’
‘주의하는 편이 좋을 걸세. 자리가 자리인 만큼, 쓸데없이 접근하는 학도들이 늘어날 테니.’
드디어 때가 왔군.
‘왜 이럴 때만 안 보여?’
손을 들거나 발을 내밀려는 자세를 취해야 신속한 공격이 가능한데, 벤디는 서적을 품에 안은 채 주춤대며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설마…….’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
“그 책은 뭐지?”
벤디의 낯빛이 새파랗게 바뀌었다. 사슴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 서적을 지켜야만 했다.
‘책을 감춘다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발견한 야닉은 기민하게 서적을 살폈다. 홀로 몰래 연마하는 무공 서적이나, 학생회
관련 기밀일지도 몰랐다.
“저 책을 뺏어!”
“아, 안 돼!”
큰일이다.
“맞다는데 그만 좀 확인,”
“절대 안 돼!”
“이거 놔!”
“제길!”
“레넌.”
“기?”
미친놈이 미친 짓을 벌인 건가.
“저 책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장관인데.”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레넌은 밀란느 학장이 벤디의 호위를 명령하며 덧붙인 말을 떠올렸다.
‘……약간이지만 겁을 줘도 좋다.’
“원.”
“거절하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해.”
“나는 검사라서 원거리는 불가능하잖아.”
“이거 놓으라니까!”
“컥!”
순간이었다.
털썩, 벤디의 팔을 당기던 하이에나 수인이 쓰러지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주춤거린 야닉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벤디의 조력자를
찾는 것이었다.
“죽고 싶어?”
“일단 쉿.”
전에 느낀 적 없는 패배감이 휘몰아쳤다.
“빌어먹을.”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포식자들이 벤디 레피에게 투표한 건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듯했다. 자신의
실력 따위로는 범접할 수 없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
“네?”
‘그 나무가 박살 났다고?’
맙소사.
그거 아니야.
“이거 놓지.”
“이건…….”
#<10 화>
“원, 왜 그래?”
“잘못된 문장인데?”
“확실히.”
첫 번째,
새끼 때부터 기르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알고 싶지 않아.”
뭐가 됐든 듣는 육식 수인을 떨떠름하게끔 만드는 문장이었다.
그곳에는 드러누운 자세로 가십지를 읽고 있는 레넌이 자리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저조한 건지 뭔지,
늘어진 자세가 유독 한량 같았다.
“레넌 님, 아니 레넌.”
“네?”
“……배고프지 않아?”
“회장.”
“그 전에.”
여우.
두 번째,
빛바랜 물빛 눈동자가 벤디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 머물렀다. 속셈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레넌이 입매를
비틀었다.
마치 술에 전 듯 몽롱한 기분.
‘이상해.’
‘나를 보고 있지 않아.’
초점이 없었다.
“레넌?”
“아!”
정신을 차렸을 땐 초점 없는 물빛 눈동자가 코앞이었다.
“레넌, 왜 그래?”
‘이건…….’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
부드러운 은발이 목을 간질였고, 입술이 그 언저리를 가볍게 지분거렸다. 탐색에 가까운 행위였다.
‘어째서?’
‘수, 숨겨야…….’
퍽!
숨어야 한다.
“하…….”
색소 옅은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이제 익숙하기보단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왜…….’
왜 레넌은 이성을 잃고 본능에 잠식된 듯한, 그런 기이한 태도를 보인 건지.
아니다.
‘그렇다면.’
짤랑, 손목에서 흔들리는 마도구 팔찌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뭔데 그거.”
“일단 앉거라.”
어제, 그러니까 학생회장이 자신을 군고구마로 길들이려 시도한 그때부터 기억이 없었다.
“번거롭습니다.”
제아무리 학장이라 해도, 늑대 영역을 다스리는 가문의 직계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
학장이 저자세로 나온 이상, 대놓고 거절하기도 뭐했던 원이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불편한 정적이
지나갔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달달달, 달달달.
문제는 종족이었다.
‘늑대라니.’
육식 수인 중에서도 상급 중의 상급.
가능할 리가 없었다.
‘걔 또라이야.’
“들어오세요.”
“…….”
손님용 탁상에는 다과로 고구마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고, 벽에는 ‘환영합니다.’ 따위의 발랄한 문구가
걸려 있었다.
정작 파티를 준비한 학생회장은 집무 책상이 아닌, 창고에서 몸의 반쪽만 드러내곤 경계하는 상태.
“……하.”
어이가 없어진 원은 흑발을 이마가 보이게끔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진짜 늑대잖아.’
새까만 머리카락과 화려한 금안도 모자라, 입질 한 방이면 사슴 따위는 관으로 입장해야 할 송곳니까지.
일단 처음 마주하게 된 늑대는,
‘……뭐가 이래.’
과할 정도로 예뻤다.
서류에 고정되어 반쯤 내리깐 금안은 황금 같았고, 굳게 닫힌 붉은 입술은 수인을 홀리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런 걸 상대하라고.’
이쯤이야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권한들이 주어지는 만큼, 아카데미 재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멋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자리였다.
‘뭐…….’
“첫 번째는 예산 관리부터.”
“놀라운데요.”
“뭐가요?”
“질문이란 걸 할 줄은.”
사람을 뭐로 보고 있었으면.
“그쪽을 뽑지 않으면,”
“……네?”
#<12 화>
이용하기 위해서.
원래 피라미들의 손속이 더 잔인한 법이니까. 살벌한 언사와 달리 서류를 정리하는 원의 행동은 한없이
무심했다.
“여기는 그런 곳입니다.”
그리고…….
“떠났나?”
이 완벽한 교정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 그를 언급하자 뒤편에서 비서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모습이지?”
“그 근육질 사슴 말인가.”
그놈이 그럼 그렇지.
“좋은 날씨군.”
이곳은 사람이 거리를 끊임없이 채우는 대도시였다. 어딜 가나 생동감이 가득하고 인파로 붐볐다.
흠칫, 흠칫.
아카데미 일대를 완전히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슴 수인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디아트는 육식
수인의 도시니까.
“음…….”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길에서 지나치는 육식 수인조차 무서운데. 학생회장의 권한을 노리고 달려들 육식 수인들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죽고 싶지 않아.
벽에 기대어 앉은 나와 해피는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부지런히 향할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어디로든 가야 하긴 하니까.
‘그 전에…….’
첫 번째 상점.
두 번째 상점.
“없소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아 글쎄, 없대도!”
열다섯 번째 상점 문을 쾅 닫고 나온 내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실례합니다…….”
“초식 영역 신문?”
“그딴 걸 누가 취급하는감.”
“아!”
노주인장의 탄성이 발길을 붙들었다.
사슴 영역.
“거-”
등 뒤로 냉큼 신문을 숨긴 그가 히죽 웃었다.
“이익…….”
“…….”
그곳에는 내 초상화가 박혀 있었다. 찾으면 고액의 사례금을 지급한다는 문구와 함께.
‘설마.’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귀족의 직계인 내 얼굴을 이렇게 방방곡곡 공개하는 건, 숙부가 작정하고 나를 찾고 있다는
의미였다.
‘없어.’
기둥에 동여맨 안장은 그대로인 걸 보아, 그 근육 빵빵한 사슴이 탈출을 감행한 듯했다.
#<13 화>
오로지, 나 혼자.
삐이- 이명마저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찾아야 돼.’
푸르릉, 푸르릉.
“해피!”
빽 소리 지른 내가 양손으로 노란 공을 잡아챘다.
‘……물컹?’
이게 뭐람.
‘으.’
다른 건 몰라도 육식 동물의 새끼임은 분명했다.
고양이 같기도 하고, 사자의 새끼치고는 작고. 내가 모르는 종류의 육식 동물일 확률도 존재했다.
육식 동물이 나를 만지다니.
톡, 도리도리. 톡, 도리도리.
“둘 다 그만하라니까.”
“그만해. 둘 다 그만 좀……!”
“아…….”
‘웃기지도 않지.’
“…….”
“해피.”
“……가자.”
이내 마음을 다잡은 내가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돌아가자.”
아카데미로.
“무슨…….”
“……레넌.”
‘조기 졸업?’
“다 포기하려고?”
‘포기…….’
숙부에게 붙잡혀 육식 수인과 결혼해도 죽고, 여기서도 자칫하면 육식 수인에게 사냥당해 죽는다.
“……포기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잠깐 급한 볼일 좀 보고 온 거야.”
“육식 사슴?”
“해피는 초식이야.”
“저게?”
“초식 사슴이야.”
단호히 부정했지만…….
“……아마도.”
“머리가 개운하구나.”
창가에 선 밀란느 학장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근심거리가 사라진, 오랜만에 홀가분한 아침이었다.
“저…… 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사실에 들뜬 나머지, 자퇴서를 받기는커녕 두근대는 심장을 붙잡고 학장실을 서성거린 게 전부.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내가 그랬다고……?”
#<14 화>
“…….”
몸을 돌린 원은 멀리, 아주 먼 곳을 주시했다.
재미 들인 건지 뭔지.
‘문제는…….’
또다시 옮겨진 시선이 이번에는 위를 향했다.
학장실 창문에 달라붙은 밀란느 학장이 눈을 홉뜬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마저 모든 걸
꿰뚫을 기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리오나드 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무슨.’
“나와.”
골이 난 상대가 예고 없이 문을 잡아당겼다.
“아!”
나타났다.
“우두머리.”
나는 원의 이 눈빛을 알고 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또라이를 보는 눈빛. 내가 레넌을 대할 때의 눈이었다.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요.”
“…….”
“당신처럼.”
그를 위한 길을 알려 줄 이는 당장 눈앞의 원 리오나드뿐이었다.
“도와주세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힘을 기르기로.
반드시.
“도망가지 않았군요.”
“…….”
“그럴 줄 알았는데.”
“정말요? 감사합,”
“그런데.”
“……?”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줄 수 있는 게 있긴 합니까?”
잠시 후, 그는 대뜸 손을 펼쳐 내밀었다.
“손.”
“…….”
“…….”
“보나 마나 혼자 쓸고 닦고 했겠죠.”
“우선.”
“본인의 편을 만드세요.”
“학생회 모집…….”
#<15 화>
원을 따라 썰렁한 학생회실을 둘러본 나는 경계 어린 눈길로 곁눈질했다.
“굳이?”
그는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 님, 그럼 혹시 학생회에 들 생각은,”
“나를?”
“…….”
“감히?”
S 클래스.
원과 레넌이 속한 이곳은 귀한 가문의 자제가 대부분인, 수인 아카데미의 최상위 클래스였다.
“레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해했어요.”
“사자는 왜요?”
원은 설명할 만한 말을 고른 듯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인성이 없는 수준이죠.”
“…….”
“웃기는군.”
“방금 뭐라고요?”
“아닙니다.”
야닉 펠, 야닉 펠.
‘네?’
“아, 야닉 펠!”
“그자는 안 됩니다.”
문을 등진 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음.”
나와, 쾅. 나오라고, 쾅.
‘저게 정말.’
안나 스웰든.
[S 클래스]
위축될쏘냐.
‘있다.’
이 망할 하이에나가, 누가 너 보러 왔대?
S 클래스 학생들이 보내는 눈빛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상대를 배척하는 적의에 가까웠지.
‘모르겠다.’
“부회장, 안나 스웰든.”
“맞나요?”
부학생회장, 안나 스웰든.
원이 알려 준바, 안나는 벤디처럼 타 학년 수석이기에 원치 않게 학생회장 후보에 오른 사례였다.
고로 어느 알력 다툼에도 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용무가 뭐죠?”
“학생회 관련 일을 왜 저랑?”
“그리고.”
“……글쎄요.”
레펠튼이 뭐람?
“그 도전, 받아들이겠다.”
#<16 화>
“…….”
‘우습구나.’
최근 학생회장이 야닉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돌지만, S 클래스 학생들만큼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회장은 전혀 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로 학장이 저 레넌 에던트를 호위로 붙이지
않았나.
“좋아요, 대신.”
“특히 예산 부문 말이죠.”
“바라던 바다!”
너어는…….
입 다물어…….
“하하하!”
제발…….
덜컹, 학생회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레펠튼.’
레펠튼, 레펠튼.
“행사? 무슨 행사인데?”
“사냥 대회.”
저놈의 입, 저 뚫린 입.
“승산이 아주 없진 않을지도.”
호수를 닮은 물색 눈동자가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독특한 규칙이라니?”
본인이 속한 종족의 동물을 말하는 건가. 대강 추측한 벤디는 레넌을 쳐다보며 답을 재촉했다.
“동물이 뭘 뜻하는데?”
하지만 여우 수인이라고 꼭 여우일 필요는 없어. 덧붙인 레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동물이라고?’
“원 님은 참가하시나요?”
“흥미 없습니다.”
“레넌은?”
“곰 일족.”
“곰.”
그렇군.
호랑이나 사자에 비해 과소평가된 감이 있지만, 실제론 후려치기 한 방으로 생물을 무생물로 만든다는,
바로 그 곰.
‘의외인데.’
“까꿍.”
“눈 뜨고 기절했네.”
며칠 사이 눈 밑이 퀭하게 변했다.
“뭐야, 너도 참가하게?”
두 번째 문제는…….
어흥!
크르릉.
“악!”
바로 함께 참가할 동물이 없는 것.
‘해피는 절대 안 돼.’
마구간에서 말을 훔칠 수도 없고.
“너……!”
“……?”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도망갈 거라 생각한 노란 짐승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기에.
‘이게 아닌데.’
도리어 움츠러든 내가 접근하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아무리 콩알만 한 송곳니라도 송곳니는 송곳니였다.
아니, 제가 먼저 쳐 놓고 왜 경악한담.
“……잡았다.”
이게 이렇게 쉽게 잡힐 일인가.
“알아서 하겠지.”
“…….”
“왜지?”
“……들어오세요.”
#<17 화>
‘동감하는 바야.’
“…….”
못마땅하게 턱을 괸 원을 한 번.
실실거리는 레넌을 한 번.
‘분위기가…….’
‘수상해.’
“넘겨요.”
두서없는 말이지만, 주체가 뭔지 단번에 알아들은 벤디는 모른 척 중얼거렸다.
“뭘 넘기라는…….”
“회장.”
“미안하지만…….”
“원.”
“틀렸어.”
“그럼 누군데.”
“노랑이 이스단이래.”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불가합니다.”
그러니까 왜.
“이봐요, 학생!”
그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려는 찰나, 번개처럼 가방에서 튀어나온 짐승이 교직원의 입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그럼 이만.”
‘……어쩔 수 없긴 해.’
‘그렇다면…….’
레펠튼의 날이 밝았다.
“…….”
안나 스웰든과의 승부 때문일까.
흘끔.
흘끔, 흘끔.
그들의 시선은 벤디가 아닌, 정확히는 그녀가 대동한 동물에 고정되어 있으니까.
“너는…….”
#<18 화>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회장은…….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한편, 단상 위.
‘정신머리 없는 녀석.’
학생들이 준비를 마쳤음을 확인한 학장은 지팡이를 쿵 내려찍었다. 엄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어째서?’
바로 나였다.
“왜 저러는 건데?”
애써 두려움을 삼킨 내가 괜히 한 마디 덧붙였다.
“회장, 활도 다룰 줄 알았어?”
빤한 시선이 관찰하듯 내가 든 활에 머물렀다.
“약간은.”
“…….”
“꼭 나를 처리해야겠어?”
“시작됐네.”
쐐애액-
“무, 무슨…….”
대체 왜.
다만…….
‘어째서?’
“그런 건 너무 매정,”
“…….”
“그건…….”
‘달라.’
나와 레넌은 달랐다.
해피를 나름 친구이자 동료로 여기는 나와 달리, 레넌에게 동물은 말 그대로 거느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너무 달라.’
안일했다.
“우승 기준은…….”
의문스럽기 짝이 없던 우승 기준이, 육식 수인의 시선에서 생각하면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아……!”
“회장은.”
“쉽게 다치네.”
#<19 화>
“이건,”
쿵, 쿵.
묵직한 걸음으로 늑대 앞에 선 암갈색 곰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안나 스웰든.’
“뭘 것 같아?”
짹짹, 짹짹짹.
그렇다.
짹짹, 짹짹짹.
지저귀는 새들 아래에 덩그러니 선 나와 해피가 시선을 교환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외로운 도토리
신세였다.
‘관심이 없을 수밖에.’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레넌은 나를 돕지 않을 테니까.
애당초 내 호위를 맡는 것도 학장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 중요한 순간엔 방관자의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로, 레넌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거나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자리를 비우곤 했다.
캥, 끼이익!
“해피, 우리,”
무어라 입을 떼려는데, 끼약, 기겁한 해피가 날뛰어 댔다. 대뜸 튀어나온 족제비가 엉덩이를 덥석 깨문
탓이었다.
“뭐야?”
“멈춰, 해피!”
“진정하래도!”
“해피, 안 돼!”
휘청거린 해피의 몸이 내리막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레펠튼 숲 깊은 길목.
‘쓰레기 같은 수작을.’
‘아니, 차라리…….’
‘이래서야…….’
“거기, 누구지?”
“얼씨구, 곰이 전투 불능이구만?”
“……야닉 펠.”
‘상황이 안 좋아.’
“학생회장에게……?”
“헛소문이면 이 야닉이 가만히 있겠냐? 모르나 본데, 회장은 기합만으로 나무를…… 아니, 됐다.”
‘지금.’
“어딜.”
“안 돼!”
“세미!”
부스럭, 부스럭.
‘왜 하필.’
“…….”
“나오세요.”
“나와.”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야닉.
‘뭔지는 몰라도…….’
나름 추측하던 나는 휙 소리 나게 곰을 돌아봤다.
‘잠깐, 곰을 지킨다고?’
‘왜?’
부웅, 검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슬아슬한 장면을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멈춰!”
“왜 막는 건데?”
“그 곰은, 내.”
“내?”
“내 먹이야.”
#<20 화>
“그런데 회장.”
“응?”
“……나야말로 곤란해.”
“어?”
“그, 그런데?”
“지금 그 말은 나를 학생회에…….”
“……려요.”
“네?”
“그게 무슨,”
“무슨 속셈이죠?”
“……웃기는 소리.”
“상태 안 좋은 거 안 보여요?”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는다.
그게 레넌이 주장한 육식 수인의 법칙이지만, 안나가 곰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세미!’
“……같잖은 동정 필요 없어요.”
“제 도움은 싫은 거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그냥 말해 본 건데 정곡이라도 찔린 표정이라니.
“…….”
“비켜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 무게를 혼자 든다고?’
저 괴수 같은 곰을……?
푸, 푸르릉…….
안나의 진득한 눈길을 느낀 해피마저 뚝딱거리며 수레를 끌었다.
‘해피라고…….’
천천히 이동한 시선이 수레에 엎어진 곰에게 닿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세미…….’
기어 다닐 때부터 내내 함께였다.
“학생회장.”
“네?”
육식 수인, 육식 수인.
“…….”
“……아요.”
“뭐라고요?”
‘어쩌면…….’
“이 곰을 사냥하면 우승…….”
곰을 유심히 살피는 벤디의 행동이, 세미를 사살하고 우승을 차지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회장?”
“회장, 위!”
“무슨……!”
“혹여 회장이 기권할 수도 있으니, 세미를 확실히 사살해서 회장을 우승시킬 심산인가 보군요. 우리가
함께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사살이라니…….”
‘목표는 나무 위.’
“……괴력 곰돌이.”
“다시 말해 봐요.”
팍, 파팍.
“해피, 피해!”
‘이걸 어떻게…….’
“흐읍!”
“해피를 부탁할게요.”
‘빨리 돌아가자.’
식은땀을 훔치며 휙 몸을 트는 순간 검은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쫓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나를…….’
“……경고하는데.”
“더 이상 쫓지 않을 테니 곱게 가세요.”
“…….”
“제발.”
‘아카데미 재학생?’
레펠튼 참가자들은 방어용 로브를 걸쳐야 하니, 따라서 이 남자는 참가자가 아니란 의미였다.
약간 부스스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어딘지 무료한 붉은 눈동자. 숨 막힐 정도로 신비롭고 기묘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누구지?’
“-아.”
“실수.”
정말 실수일까. 측은한 눈으로 바닥의 학생을 살폈지만, 기절했는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뭘…… 하는 거람?’
“타이를 잃어버려서.”
백호나 늑대.
“확인할 게 있어서.”
‘세상에.’
“만져 봐.”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전부 가렸다. 눈앞의 몸뚱이를 계속 보고 있으면 정말로 생각이
불순해질 것만 같았다.
“시간 끌지 말고 아무 데나 만져 보라고.”
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건지.
한 걸음, 두 걸음.
“너.”
“……왜, 왜?”
“누구를?”
자리를 뜨려던 그는 멈칫하더니 발밑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기절한 상태인 학생을 무심코 밟아 버린
탓이었다.
“…….”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푸르른 수풀을 멍하니 바라봤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난 탓에.
‘저 육식 수인…….’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다.
“으윽…….”
“너는…….”
“누구세요.”
“컥!”
‘아직도 뜨겁네.’
#<22 화>
그러나 이스단 가문에서는 아주 간혹 동물형이 성수가 아니라 새끼 짐승인 사자 수인이 태어나곤 했다.
다행히 도중에 성수로 변하는 경우도 있으나, 평생 동물형이 새끼 짐승인 채로 살아간 선례도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나.
날 때부터 가문의 걱정거리임은 물론, 헤일린이 동물형으로 변하기를 기피하자 귀족들은 은근히 무시하고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아직은…….’
레펠튼 숲 입구.
쿵, 쿵. 천막 앞에 사체가 쌓여 층을 이뤘다.
“보여?”
“아직.”
학생회장과 안나 스웰든.
“저기 온다!”
“…….”
그곳의 모든 이는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흠…….”
후우.
사냥이란 주제에 미루어,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부분이기에 기입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아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사냥의 의미가…….”
“그럼.”
진땀 흘리는 교직원을 마주한 벤디는 검지로 곰을 가리켰다. 담담하려 했으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건…….”
“제가 살던 여우 영역에서는 꼭 죽이는 것만이 사냥은 아니에요. 식량이 동나지 않는 이상, 포획한
사냥감은 상처 없이 방생하죠.”
“……세미는 수컷이에요.”
“아.”
“기준이.”
꼬깃꼬깃한 참가 안내서가
“명확하지.”
교직원의 코앞에
“않은 만큼.”
척 디밀어졌다.
그……. 반박할 것처럼 입만 움찔거리던 교직원이 휙, 구조의 눈길을 보냈다. 아카데미 내 최고 권력자의
의견이 필요했다.
‘난감하구나.’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하지만…….’
‘굳이 저 아이를?’
“불허하,”
“…….”
“노랑 노랑.”
숨 막히는 정적도 잠시. 단순한 장난질 같았으나, 아니 장난질이 분명했으나 어쨌든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면 남은 한 사람은.
“나도.”
“도, 동의한다.”
야닉 펠이었다.
저 싸움질밖에 모르는 바보가 진지하게 남의 편을 들다니. 학생들의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
‘왜?’
#<23 화>
‘저놈의 자식이.’
“그 곰의 제출을.”
“……허가하네.”
이로써…….
‘우승이야.’
“해피.”
푸르릉!
“…….”
꿀꺽.
“축하의 말을.”
축하의 말을…….
‘축하…… 라고?’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도저히 저 장면을 앞두고 축사를 늘어놓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안나 스웰든의 곰, 세미를 데려간 의료용 천막에 동물을 치료하는 담당 의원은 없었다. 당연하다시피
모든 게 수인을 위한 것들뿐.
“뭐야, 왜 저래?”
“벌써 끝난 건가?”
“하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에서까지 살생을 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력해진 동물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강함이 증명되는 걸까요.”
여러 아카데미에서 사냥 대회를 주최하고 있기에 반박할 만도 한데, 의외로 학생들은 조용히 벤디의
연설을 경청했다.
말뜻을 이해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비소를 머금었다. 대단한 걸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 크게 와닿는 건
없기에.
“…….”
‘죽지 말고 기다려.’
흔한 일이다.
“……고마워.”
“곰을 살려서 안나 스웰든을 회유하고, 우승까지 차지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지.”
“단!”
“이 야닉 펠에게!”
“감히!”
“빗자루질 따위를!”
“그게 그 말 아니냐?!”
“아니, 아주 달라.”
“나오라고, 이 여우 같은 자식아!”
“……진짜 죽인다!”
“…….”
“레넌 에던트.”
“쌔근쌔근.”
대답하기 싫으면 차라리 입을 닫지. 진저리 친 원은 가십지로 레넌의 얼굴을 내려치듯 덮었다. 부디
영면에 들기를.
“그리고 학생회장.”
“네?”
#<24 화>
정당하지 않은 우승이었다.
레펠튼 규칙의 모호성을 이용한 기지도 그렇고. 겉으로 보기엔 만만할진 몰라도 의외로 속내엔 무언가가,
……무언가가 있을 리 없었다.
“나와, 학생회장!”
“노크해도 답이 없기에.”
이 목소리는.
안나 스웰든이었다.
‘……왜?’
“학생회장.”
“네?”
다름 아닌 벤디의 표정 때문에.
‘저건…….’
‘그래, 당장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
여기에 온 선택이 희대의 실수는 아닐까. 찰나의 후회를 삼킨 안나가 벤디의 집무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장부 관리가…….”
“외부인? 외부이인?”
빗자루를 검처럼 휘두르는 중인 야닉, 소파에 늘어져 가십지나 읽으며 키득거리는 레넌까지.
심지어…….
“…….”
‘벌써 시간이…….’
‘또?’
“넌 어미는 따로 없니?”
어슬렁거리는 암사자 무리를 상상한 내가 눈가를 비볐다. 상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됐다, 됐어.”
아주 웃긴 짐승이었다.
‘나도 굳이 닿고 싶진 않거든.’
“가자.”
“또 구석에서 궁상떠네.”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냐?”
“약점?”
“……있을 리가 없긴 한데.”
밀란느 학장은 마침 보이는 헤일린 이스단에게 마물 퇴치를 명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약점은 무슨. 차라리 걷기조차 귀찮아진 헤일린 이스단이 학생회장에게 자신을 업고 다니라 협박한 게 더
신빙성 있었다.
목을 노려 숨통을 끊는다.
‘뭘 보는 거지?’
#<25 화>
“악!”
‘진짜 쉽게 다치네.’
레넌은 무심코 벤디의 무릎 부근을 응시했다. 상처에서 배어난 피가 하얀 양말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처음 해 보는 호위 놀이가 꽤나 재밌어서?
야닉 펠이 이상했다.
뽀독뽀독, 뽀독뽀독.
“야닉 펠이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음.
‘마력…… 측정일?’
마력.
[마력 측정은 클래스별로 진행되며,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클래스에는 특별한 포상이 주어진다.]
‘그럼 체험 학습 장소는…….’
“왜요.”
“뭐를 말이죠?”
“……알고 계시면서.”
꼭 말을 해도.
못 들은 척 시치미 뗀 나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폈다. 분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
“사슴 영역.”
눈을 크게 뜬 나는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페트리온.”
“왜 저러냐 진짜.”
[마력 측정 관련 안내문]
마력 측정일은 내게 새로운 걱정을 안겨 줬다.
그러니.
바로…….
“저기,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어?”
“여기는 내가 늘 앉던 자리라서.”
“아…… 미안.”
따로 지정석이랄 게 없는 학생 식당에서.
그리고 또,
대화를 나누던 두 학생의 시선이 때마침 지나가는 X 클래스 학생에게 머물렀다.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학생이 미심쩍게 말했다.
‘그러니까…….’
마력 측정이 힘의 지표나 다름없는 만큼, 타 클래스 학생들의 무시나 업신여김이 뒤따르는 점이었다.
더 큰 걱정거리는,
“벌써 마력 측정일이야?”
“그래, 오늘 코스 요리라더라.”
‘얘 봐라?’
장학금.
#<26 화>
‘설마.’
‘이대로는…… 곤란해.’
‘없어.’
“이게…….”
이게 다 뭐람.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내가 손을 흔들었다.
“늑대, 아니 원 님!”
‘어?’
떨어진다.
“…….”
시간이 지나도 상상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조차 뜨지 못하는 와중, 귓가로 익숙한
저음이 파고들었다.
원의 목소리였다.
“질식시킬 셈입니까?”
“……!”
“설마 나를 죽이려고…….”
“그럼 왜……?”
“그거?”
“그 노란 거.”
노란 거라니.
그러니까 왜.
이 모든 정황을 조합하면…….
“이제 혼자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차, 이유.
“이거요.”
“아뇨,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학생회장 직인으로 초청장을 발송해야 합니다. 고위급 인사와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기회이니
제대로 하세요.”
그런데 사회에서 마주쳐야 할 상급자들 앞에서, 심지어 거물들이 관전하는 공개석상에서 마력 측정 꼴등을
차지하니까 X 클래스 취급이 그 모양일 수밖에.
그러니 X 클래스 학생들도 의욕 자체를 상실하는 수순이고.
“교내 상점 갈 사람?”
저게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와.’
‘젠장할.’
‘이건 반칙 아냐?’
학생회장의 입에서 나올 말을 얌전히 경청할 것인가. 아니면 헤일린 이스단의 머리 위를 넘어서 밖으로
나갈 것인가.
“꼴등,”
“꼴등?”
“바로 작년, 우리 앞 등수를 차지한 E 클래스와 비교해도 평균점이 200 점이나 뒤처지죠.”
뭐 어쩌라고.
대단한 꼴등이라고 치켜세워 주는 거야 뭐야.
“-변수가 되자?”
바로 그거야.
“그럼.”
“논지가 뭔데?”
“꼴등을 벗어나려면.”
“마력을 높여야지요.”
#<27 화>
“그래서.”
애애앵-
‘너무해.’
적어도 한 명은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왔네.”
“이렇게 예쁜 내가 기다리는데.”
비웃음과 함께 아무도 훈련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던, 그러한 원의 추측이 정답의 과녁을 쏘았다.
“시작하자.”
“혼자서라도 하게?”
“그?”
“신경 쓰여?”
눈치를 살핀 나는 별거 아닌 양 몸을 쭉쭉 풀며 말했다.
엄지가 접히고,
“…….”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김샌 듯 한순간에 분위기가 풀어진 레넌은 어깨를 으쓱였다.
“찾는 사람?”
“기세만 보면 아마 원수 아닐까.”
“나? 나는…….”
“왜?”
“그런 게 있어.”
“…….”
“가십지.”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누구고?”
“나.”
“그런데 회장.”
“응?”
으.
따라서 검사는 검술 훈련에 매진하면 될 일이고, 마법사인 벤디는 마법 소환에 매진하면 될 일이었다.
‘이상하군.’
“회장, 혹시 지병 같은 게 있어?”
“집에 가자고?”
“아니, 지병.”
“어디서?”
“저세상.”
훈련 첫날.
“안 그래, 신시아?”
행운의 자리라는, 앉아서 공부하면 수석이 된다는 도서관 명당 앞에 선 D 클래스 학생들이 투덜거렸다.
‘누구 거냐?’
‘확실해?’
‘저 멀리 치워 버려.’
‘바닥에 둘까?’
자리를 뺏다시피 한 그들이 낄낄거리며 돌아서는 순간, 스윽,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어둠의 손이 짐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뭐야, 누구야?’
‘야!’
#<28 화>
‘학생회장, 너 미쳤냐?’
‘뭐라는 거야?’
‘그리고 거기는 X 클래스 학생들 자리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임자인 규칙 몰라? 저기 자리 많아.’
‘저게 진짜!’
‘이게 다 무슨 소란입니까.’
정숙해야 할 곳에서. 그때 깐깐하기로 소문난 도서관 사서가 벤디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호오.’
‘호오.’
도서관 사서의 의미심장한 눈길이 D 클래스 학생들을 향하자, 벤디를 노려보던 그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제길!’
허둥지둥 짐을 챙긴 D 클래스 학생들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도서관 사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러모로
좋을 게 없었다.
‘……어? 짐이 그대로네?’
“적당히 하지.”
“아니, 너희 말이야.”
이어지는 불평을 신시아가 냉정히 끊어 냈다. 떠들던 학생들은 퍽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신시아?”
“무슨…….”
“만에 하나.”
“…….”
답하지 않은 신시아는 기숙사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막 걸음을 떼려던 그녀는 비스듬히 돌아서서 말했다.
“가능하든 말든.”
“…….”
“정말이지 훌륭하군요.”
“도대체.”
퍽,
“이게.”
쿵,
“왜 안 되는 건지.”
“회장, 마법사든 체술가든 원리는 똑같아요. 마력을 한곳에 모으는 거라고요, 이 주먹에.”
“크헝!”
퍽,
“크허헝!”
쿵,
“크르르!”
저게…… 저거가…….
‘어?’
강의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족제비 수인이었다. 덧붙여 지독할 정도로 말수도, 표정도 없는.
“너는…….”
“신시아 폴릿.”
“왜 여기에…….”
“네가 불렀잖아.”
“아니, 그러니까.”
어쩌다 훈련에 참가할 마음이 생긴 건지. 당황한 탓에 완성형 문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같이 가.”
퍽, 쿵, 쾅.
“후.”
그녀가 누구인가.
벤디가 오기 전까진 X 클래스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평정을
잃지 않는 이였다.
그런 신시아 폴릿이.
“가자, 신시아.”
아카데미 깃발을 지팡이처럼 짚은 벤디가 부들부들 걸음을 뗐다. 밀란느 학장이 보면 거품을 물
광경이었다.
“세미가 누군데.”
“그 고릴라 같은 곰돌이.”
“빌어먹을…….”
“보면 모르겠냐.”
“대체 왜……?”
그러나 날 때부터 우수한 가문과 좋은 혈통,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타 클래스 학생들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
“……라일라?”
“왜 그래?”
‘학생회장에겐…… 뭔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요.’
그런 약골이.
명령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졸업하면 하이에나 영역으로 돌아가니. 수장의 자제인
야닉에게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만일 야닉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족제비에게 밀렸다며 자신들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할지도 몰랐다.
너, 너, 그리고 거기 뒤의 너.
‘온다.’
무언가 오고 있다.
“붙지 마.”
“그건 안 돼.”
“왜 이래?”
“뭔가 오고 있어.”
“뭐?”
“학생회장!”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어처구니없이 반박한 라일라는 곧 벤디와 신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목뒤를 매만졌다.
“……줘.”
“잘 안 들려. 뭐라고?”
“우리도 참가할게.”
“나도!”
“예에? 아아악!”
레넌 에던트의 검에 썰리고,
크허헝!
연무장에 퍽쿵쾅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수인 아카데미에 노란색 좀비 무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져
나갈 무렵.
“해피, 자?”
푸르릉.
드디어 마력 측정일.
훈련의 성과.
“…….”
“오늘은 일찍 자야 돼서 이만 가 볼게.”
‘장학금.’
그건 다른 클래스메이트들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력은 죽도록 노력해도 타고난 이들이나 뛰어난 스승 아래서 기초부터 닦은 이들을 뛰어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그러나 일단은 나도 사람인지라 혹시나, 근소한 차이로라도 등수가 바뀌지 않을까. 싶은 바람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번 해 보자고.
“가자, 노랑아!”
“……?”
“노랑아?”
복도 진열장 아래,
“노랑아?”
복도를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얼쩡거리던 내가 소스라쳤다. 하마터면 뒤편에 선 신시아와 부딪힐
뻔했기에.
“안 가니?”
“아니, 출발해야지.”
“그게…….”
중앙에 너른 대리석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관중석이 단상을 둥글게 에워싼 형태였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의자에 착석한 안나는 만족스레 다리를 꼬았다. 학생회장과 학생회 임원에게만
제공되는 좌석이었다.
권력은 한번 맛보면 잊지 못한다더니……. 읊조린 안나가 배부른 맹수처럼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듣는 귀가 많아요.”
“아니, 내 자리는?”
그런 그를 안나가 달갑지 않은 눈으로 훑어 내렸다. 야닉이 레펠튼에서 세미를 죽이려 한 이후부터 묘하게
적대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움찔, 일순 야닉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내가 세뇌하듯 은근하게 속삭였다.
비밀.
요원.
마탑 장로 중 한 명, 스카론.
고로 부정행위나 허튼수작을 부리다가는 곧바로 들통나기 십상.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결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나는…….’
팔걸이에 올려 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실상 마력 측정이 아닌,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턱 들고, 허리 세우고.”
속삭임에 가까운 안나의 면밀한 지시가 이어졌다.
“누가 사슴이야?!”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에요?”
“…….”
“저 영감은 매번 나를 먼저 시키네.”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모래시계가……!”
저 늑대가 차기 차기 마탑주라더니.
“회장?”
‘저 광경…….’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회장,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우일까.
안나의 질문에 답하며 다시 자리에 착석할 즈음, 스스로 움직인 검은 기운이 마법진을 향해 쏘아졌다.
콰앙!
“역시!”
“봤냐? 이 야닉 펠의 실력을!”
“다녀올게요.”
넌 왜 자꾸 아닌 척 야닉한테 전의를 불태우는데.
안타깝게도 이 생각은 안나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순식간에 단상으로 올라간 그녀가 야닉과 똑같이 쾅,
마법진에 발차기를 날렸기에.
“다음은 에밋 스톤 학생.”
“시에라 모어 학생.”
“다음은.”
‘……어?’
저 남자는 분명.
“저!”
“또 왜요?”
“수상한……!”
“수상한?”
수상한 육식 수인.
“너무 예쁜 게 수상하네요.”
“그럴 수 있죠.”
‘설마하니…….’
사자 수인이었을 줄은.
저게 무슨 소리람.
그렇군.
“네.”
“왜 그래요?”
쾅!
섬광처럼 날아간 헤일린 이스단의 주먹이 마법진과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시야는 물론 돔 건물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단상을 부수지 말란 스카론 장로의 말을 지킨 셈이긴 한데. 말 그대로 단상만 멀쩡히 남겨 둔 꼴이나
다름없었다.
“…….”
‘뭐라는 거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별거 아니었어요.”
“…….”
표정을 가다듬은 나는 헤일린 이스단의 입술 모양을 떠올렸다.
짜증 나게.
“회장.”
“네?”
“만졌어요.”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한 말을 미처 듣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뭐라고요?”
“……갑자기 그 말은 왜 나와요?”
“되도록 예쁜 걸 조심해요.”
대체 뭐라는 거야, 이 곰탱이는.
“너!”
내내 보이지 않던 노란 짐승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어디 가나요?”
“클래스메이트들이랑 있으려고요.”
“이 명당을 두고?”
족제비, 파이팅.
“어땠어?”
“딱히.”
“이젠 벌레 취급이니?”
만난 이래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홀튼 리 학생.”
“에버릿 머드 학생.”
순차대로 마력 측정이 진행되었으나 눈에 띄게 주목할 만한 결과는 없었다. 간간이 들리는 비웃음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최소한 E 클래스보다는 평균점이 높아야 할 텐데. 겸여히 결과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벤디 레피 학생.”
#<32 화>
“학생회장 차례군.”
“벌써?”
“훈련 결과는?”
‘다시.’
‘합!’
퐁.
‘다시.’
‘하압!’
퐁.
“훈련 결과는…….”
“고구마.”
“보나 마나겠군.”
“과연 그럴까.”
‘아니, 너무 자신만만하잖아.’
“저건 제법 위력이…….”
“합!”
퐁.
“합!”
퐁.
“합!”
퐁, 퐁. 퐁.
“……저럴 줄 알았다.”
“역시.”
“합!”
……퐁!
“너무 힘이 들어갔소.”
“반드시 마법을 소환할 필요는 없네. 그냥 가볍게 건드리는 느낌으로 마법진을 쳐 보시오.”
“건드리는……?”
‘손을 갖다 대라고?’
‘이렇게?’
흘끔.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그의 새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인내심이 바닥을 향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
“저게 장풍이냐?”
덩달아 심각해진 벤디가 시선을 맞추는데, 쩌적, 등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음을 뒤늦게 인지한 벤디가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한
모래시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쩌적, 쩌저적.
도망가야 해.
‘어?’
‘안 돼.’
“무슨…… 학생회장!”
“어, 어떻게…….”
“어때.”
“이번에는 좀 호위 같았어?”
놀라서인지, 안도해서인지.
“노, 노랑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랑이는?”
“여기가 어디라고…….”
이걸 발로 밀어낼 수도 없고.
원은 빛이 맴도는 오른손을 가볍게 털었다. 소환하기 직전이었던 방어계 마법이 공중에서 소멸했다.
“…….”
#<33 화>
대체 벤디 레피에게 뭐가 있기에.
‘그보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급히 단상으로 올라선 밀란느 학장은 주변을 정리하며 우선 벤디를 내려보냈다. 뒤이어 모래시계의 잔해를
수습할 교직원들이 단상 위로 모여들었다.
일편, 학생회장석으로 돌아간 벤디는 잘게 몸을 떨었다. 아직 폭발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회장, 다친 곳은?”
“왜…….”
“네?”
“왜 폭발한 건가요?”
“그…….”
우선은 마력 측정 결과.
학장과 기나긴 대화를 끝마친 스카론 장로가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평가를 시작했다. 학장은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연신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제발.’
드디어 결과구나.
“다음은.”
X 클래스, X 클래스.
X. X.
“E 클래스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X 클래스는…….”
“측정 불가입니다.”
‘아니, 아니.’
방금 뭐라고?
“…….”
“S 클래스랑 동일 선상이라니…….”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여전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대화를 뚫고 하이에나 수인, 라일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방금 나한테 소리 질렀냐?”
신시아 폴릿.
“…….”
미지수로 인한 측정 불가.
‘설마.’
‘어쩌면 학생회장은…….’
‘이 모든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어쨌든 일등이네.”
일등.
지금껏 바라는 것마저 사치였던 숫자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당장 입 밖으로 내기조차 생소한
단어니까.
“학생회장! 이게 다 네 덕분,”
“왜…….”
“왜 하필…….”
“회장, 잘 안 들려!”
“왜 일등이야?”
#<34 화>
“뭐?”
“……?”
“저게 뭔…….”
“뭐야, 왜 저래?”
그냥 화병인 모양이었다.
“일…… 등인 거?”
그러나.
“이런 법이…….”
“왜 일등이냐고…….”
“왜……!”
“자퇴할까…….”
의식이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데, 사박사박,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느덧 가까워진 금색 드레스 자락을 발견한 벤디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부채를 든 웬
귀부인이 자리한 상태였다.
‘아!’
“희한한 광경이구나.”
“이런.”
‘이 짐승…….’
“너…….”
신체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과, 몸집이 자란-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기에.
“너!”
아직은 들키면 안 돼.
아직은.
벌써 정체가 드러나, 저 겁보 학생회장이 자신을 설설 피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진짜 사자야?”
멍청이.
갑자기 고귀해 보이는 새끼 짐승을 바라보던 벤디는 문득 해사한 금발을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
‘음……?’
아무래도 헤일린 이스단의 권속인 건 확실한 듯한데. 왜 집요하다시피 내 배낭에 붙어 다니는 걸까.
“이건……?”
“그렇습니다.”
“제 말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마탑 고위 장로입니다.”
“알지요. 아는데…….”
“…….”
스카론 장로가 마탑의 고위 장로를 일임하고 있는 만큼, 마력을 읽고 느끼는 부분에서는 밀란느 학장보다
한 수 위였다.
“그 학생은…… 그 아이는!”
사슴이라고, 사슴.
#<35 화>
“후…….”
“부르셨습니까.”
밀란느 학장은 궐련을 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창문 너머, 사슴 영역이 있을 방향에
머물렀다.
“사슴 영역에 레피란 성을 가진 자 모두를 조사해 오게. 벤디 레피의 정체는 뭔지, 왜 수인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는지 낱낱이. 잘만 하면 아카데미에서 쫓아낼 만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
“초식 수인 영역에서 그렇게 상세한 정보를 얻는 건 한계가,”
“조사해 오게.”
“……예.”
“무탈하셨습니까.”
“뭐…….”
“큼, 그보다.”
“그래, 사슴 영역이지.”
원 님의 목숨을 구한 이름 모를 수인을.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데다, 어느 종족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수인을 찾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
“그리고…….”
“스카론.”
“말씀하십시오.”
“나도 알아.”
“그것이…….”
“후.”
제아무리 잘 숨어 봤자 도망자 신세에 불과하거늘. 분명히 가져간 자금도, 체력도 바닥을 보이고 있을
터였다.
“말하라.”
“도둑이 들었다?”
“예, 사슴 한 마리를 도둑맞았는데……. 워낙 다루기 어려워, 농장주가 시장에 내놓을 예정인
사슴이었다고 합니다.”
“흠.”
‘이 증상은.’
“벤디 학생은…….”
말을 망설이는 의관 때문에 원과 레넌이 시선을 교환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36 화>
그렇다 함은…….
잠자코 있던 노란 짐승은 둥근 앞발로 벤디의 눈꺼풀을 강제로 개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를?”
원은 벤디의 머리맡에 오도카니 앉은 노란 짐승을 눈짓했다.
“저 노란 거.”
“아, 안 돼.”
“학생회장.”
“쉬고 싶은 게 아니라!”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이 방법은 안 되겠어.’
다음 날.
그럼 정말 어디 하나 부러뜨리기라도 하면…….
그저 유일하게 외출이 가능한 장소가 페트리온 시가지였을 뿐이고, 저택이 답답했을 뿐인데.
아무리 여우 수인으로 외관을 바꾸고 학생들 사이에 숨는다 해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만한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했다.
‘저게 다 뭐람.’
“그래요?”
어쩐지 은은한 광기마저 맴도는 눈빛이라, 저도 모르게 움찔한 안나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모두에겐 미안하지만…….’
일정 수정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신문을 통해 내 얼굴이 방방곡곡 알려진 이상, 사슴 수인 자체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페트리온이 대체 어디 붙어 있는 곳인데?”
“내 말이, 들어 본 적도 없구만.”
“야, 말조심해!”
“아차.”
‘그러고 보니…….’
‘이거다.’
어차피 온전한 일등도 아니니, 저들을 잘 구슬려 X 클래스 자체가 체험 학습 참석 거부를 하면…….
“저기.”
“웬 구황작물?”
군고구마.
“……고서적?”
“솔직히.”
“너무 기대된다.”
“사자는?”
“도박판에 있겠지.”
“이미 아침인데?”
“출발일인 걸 잊었다거나.”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었다.
“목적이 있으니까.”
“무슨 목적?”
“알 바 없잖아.”
“흠…….”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린 레넌이 마차 벽에 옆머리를 묻었다.
제어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훈련 당시, 벤디가 가진 방대한 마력을 그가 읽을 수조차
없었지 않나.
당장 벤디나 헤일린 이스단에게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는 원은 미묘하게 경직된 자세로 창밖을 바라봤다.
#<37 화>
‘너…… 육식 동물이야?’
“…….”
“그거 알아?”
“진짠데.”
“원한이라도 있어?”
“무슨 말이지?”
“네가 계속 찾고 있는 대상한테.”
굳이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원은 무시를 택했다.
저 늑대가 찾고 있는 존재라.
조금 불쌍하네.
끼이익-
슉, 슈슉.
본인 딴엔 그림자처럼 행동하려는 모양인데, 도리어 오감이 예민한 S 클래스 학생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꼴.
“의도가…… 뭐지?”
‘……역시 잘 선택했어.’
불안요소밖에 없는 페트리온행.
이는 걱정했던 거에 비해서는 해 볼 만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제 정체를 알아볼 만한 이들은 물론, 일반 사슴 수인들과도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게끔 일정을
짰고.
‘애초에…….’
“학생회장.”
“응?”
“떨어져.”
“알겠어.”
“대답만 하지 말고 떨어져.”
‘앞으로 나흘.’
‘죽을 뻔했네.’
이스단 가문의 사자인 사실을 직시한 후부터 은근히 거리를 두기에 피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페트리온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흐음, 조금 약해 보이는데…….”
“그러게.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 아냐?”
“사자는 맞아.”
꿈틀, 헤일린의 미간이 작게 경련했다. 지금껏 동물형이 빌어먹을 새끼 사자인 그로서는 꽤나 뼈아픈
발언이었다.
“사슴 주제에.”
사슴 주제에. 사슴 주제에.
분기탱천한 그들은 둥글게 모여 웅성웅성 떠들어 댔다. 곧 한마음 한뜻이 된 아이들이 맹렬하게 외쳤다.
“가짜 사자 주제에!”
“모니 양, 잠깐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아…….”
“싫어!”
“대장, 왜 그래?”
“고얀 놈의 부하야!”
“내가 왜?”
“……!”
#<38 화>
뒤끝이 다분히 느껴지는, 냉랭한 반응을 맞닥뜨린 모니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
“다들 도망쳐!”
“잠깐……!”
“당장 치우시오!”
분노한 남자가 난데없는 방해꾼을 무섭게 노려봤다.
‘사자 수인.’
‘하필이면…….’
벤디 때문에 사자 일족의 귀족과 갈등을 빚는 중에, 신분도 모호한 또 다른 사자 일족과 마찰을 빚기도
곤란하고.
“5 소대 행동대장.”
“무슨……!”
“브로치 받은 값은 해야지.”
……가 뭐더라.
‘돈 많은 아카데미인 게 이럴 때 좋다니까.’
‘……물컹?’
‘설마.’
설마, 설마.
“너!”
당황한 나와 달리, 뻔뻔하게 하품한 노란 짐승이 옷가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덕분에 여벌로 챙겨온
교복이 엉망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거리를 둘 생각이었는데.’
밀림의 왕. 그러니까 사자인 사실도 모자라 이스단 가문의 권속인 건 정말이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몸이 반으로…….’
‘몸이…….’
‘하지만…….’
떨쳐 내야 돼.
하지만…….
아냐, 떨쳐 내야 돼.
하지만…….
“저리 가.”
“앞으로는 그만 따라다녀.”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질긴 시선이 머무는 게 느껴졌다.
‘절대 안 돼.’
“진짜…….”
“이번만이야, 알겠어?”
‘어?’
‘얘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데.
“서.”
“……?”
“정도가 있어야지.”
“노랑아!”
“이건 압수.”
‘대체…….’
“잘도.”
“그냥?”
“이게 그냥 입 닫고 있는 거로 보여?”
“그럼?”
“그 성격에 오래 참긴 했네.”
“학,”
“호위니까?”
#<39 화>
주인 하나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고양잇과들을 지켜보던 갯과, 원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둘 다 나가.”
“내 방에서.”
“그 방이 그 방 아닌가?”
‘저, 저…….’
저 미친 학생회장이.
“레넌, 잘하는데?”
“진짜네?”
“다시 말해 봐.”
전시관 일정이 어쩌다가 고구마밭으로 바뀌었을까 싶다가도, 저런 눈부신 얼굴로 고구마를 캐니 여기가
바로 전시관이요, 조각상이었다.
하물며 반대편에서는…….
“뭐 어떻게 하는 거라고?”
‘우리가.’
‘왜.’
‘여기에.’
대체 학생회장을 막지 않고 뭐 했냐.
호미를 깔짝이기 시작한 S 클래스 학생들을 곁눈질한 벤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센 반발을
각오했으나 입 꾹 닫고 따라 주어 다행이었다.
‘조금 미안하네.’
입맛을 다시던 벤디는 돌연 우뚝 굳었다. 저 멀리, 수풀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탓이었다.
‘저 콩알만 한 머리통은…….’
‘설마.’
어느덧 고구마 수확에 열중한 학생들에게서 슬그머니 거리를 벌린 벤디는 수풀 쪽으로 이동했다.
“얘들아, 흑, 큰일 났어!”
“왜 그래?”
‘저 사고뭉치들이.’
모니가 잡혀가다니.
“뭐어?!”
“모니가 잡혀갔다고?”
‘숙부.’
‘이게 뭐라고…….’
‘세상에!’
‘레피 저택은…….’
‘쓸모없는 것.’
‘모니…….’
두려움과 자괴감에 집어삼켜질 뻔한 벤디는 으득, 입술을 피 나게 깨물었다. 혀끝을 적시는 비릿한 피
맛과 함께 모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죽지 마.’
“…….”
아무리 밤이라도 페트리온을 돌아다니려면 육식 수인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나았다. 애초에 외형을 바꿔
주는 마도구의 마력이 다했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네.’
“악!”
#<40 화>
‘보인다.’
“어디쯤이었더라…….”
‘이 숲에는 말이야, 무시무시한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단다. 궁금하지 않니? 막 모험심이 들썩들썩
샘솟지?’
……찾았다.
‘모니.’
‘마법진은…….’
제법 꼼꼼하게 벽을 살핀 원이 손을 거둬들였다.
제 몸을 건사할 능력이 충분한 마법사일수록 경비가 허술한 건 영역 공통인 모양이었다. 성정이 오만한
마법사일수록 특히.
‘그러고 보니…….’
웬스턴 레피.
‘성이 같군.’
“…….”
“여기는…….”
‘여기도.’
없다.
죄수들이야 선대 레피 가문의 가주가 지은 페트리온 수용소에 있다 쳐도, 모니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모니를 추궁해 내 거처를 알아내야 하는 만큼, 굳이 저택과 멀리 떨어진 수용소에 가뒀을 리는 없고.
‘이상해…….’
‘어째…….’
미동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탁, 데구르르.
‘잠든 건가?’
“죽……!”
‘……죽은 건 아니겠지?’
맙소사.
“모니!”
감옥을 열고 들어간 내가 쓰러진 모니를 안아 들었다.
“모니, 모니!”
“으응, 더 잘래…….”
그냥 잠든 거였구나.
“누구…… 앗!”
“벤디!”
“조용히 해, 이 바보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잘 시간이잖아.”
하긴, 잘 시간이긴 해.
어딜 봐도 부자연스럽잖아.
채 인지하기도 전에 짜악,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급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아버지!”
기겁한 모니가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죄송합니다.”
사죄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작은 농장주가 귀족인 숙부의 추궁을 견디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수척한 모니 아버지의 얼굴이 그를
증명했다.
“……거짓말.”
로브 속에 손을 넣은 나는 미리 써 온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41 화>
“이게 뭔데?”
“모니에게, 벤디가.”
“고얀 놈한테?”
“응,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지 않았고, 계속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고 말해. 실제로 네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쓸게.”
“응.”
“괜찮아, 육식 수인의 영역은 숙부도 함부로 뒤지지 못할 테니 꽤 시간이 걸릴 거야. 그리고…… 방도가
있어.”
짐짓 입을 다문 나는 마력 측정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되면…….’
“벤디…….”
“모니, 괜찮아.”
“미쳤어?!”
“…….”
대장은 부하의 충언을 새겨들을 것. 모험대 수칙을 상기하며 눈을 맞추던 우리는 곧 약속이라도 한 듯
움찔 굳었다.
뚜벅, 뚜벅.
감옥 안은 고요했다.
텅 빈 철창 여러 곳을 살핀 원은 손끝으로 먼지 쌓인 벽을 살짝 쓸었다.
“…….”
“꽤 독한 수면 향을 뿌렸는데.”
무위는커녕 무력조차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깨어 있는 건지. 타인이 의도적으로 깨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있었군.”
흔적 없이 다녀갈 생각이었는데.
“누구였지?”
“그……!”
“아버지.”
“뭐, 됐어.”
‘누구였지?’
‘얼굴이 잘 안 보이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 저…….’
저 늑대가 왜 여기 있는 건데.
여기 있는 걸 늑대에게 들킨다면.
제발 이 어둠이 감춰 주기를.
숨 쉬는 것마저 잊은 벤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깥까지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어 댔다.
저벅, 저벅.
“나와.”
‘혹시 몰라.’
떠보기 위해 던져 본 말일지도.
미친 늑대였다.
“…….”
스윽, 홱. 스윽, 홱.
“서,”
“…….”
“잠깐,”
‘너 육식 동물이야?’
먼지 묵은 퀴퀴한 냄새.
내내 찾던 기억 속 그곳. 바로 이곳이었다.
#<42 화>
한밤중의 추격전.
‘죄송합니다, 원 님.’
‘시야가…….’
‘하필.’
“옳지!”
어느 영역에나 있는 밀렵꾼이었다.
“어어어?”
“힉!”
“이놈 이거 힘 좀 봐라.”
“잡았다!”
‘죽어 주십시오.’
또 지긋지긋한 배신이었다.
“얼마 전에 선대 가주가 밀림에서 암살을 당했어. 안 그래도 페트리온 자체 경비가 삼엄해질 텐데,
이놈을 어디 두나?”
“하지만…….”
‘상처가…….’
끔벅, 끔벅.
“너 육식 동물이야?”
‘초식 수인.’
“배고프지 않아?”
원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 여자아이를 빤히 응시했다.
“나를 잡아먹어.”
‘잡아먹으라고?’
거의 죽여 달란 말과 다름없지 않나.
“나올래?”
“아.”
‘그걸 이제 안다고?’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애초에 원은 문을 열어 줘도 나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당장 움직일 처지도 안 되고, 나가 봤자 이런 상태로는 금세 추격자들에게 잡힐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감옥 안이 안전할 지경.
“…….”
‘무슨 짓을!’
“깼어?”
여자아이는 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작은 손은 상처에 푸른 액체를 부지런히 바르느라 바빴다.
“아빠가 준 영약이야.”
“마시는 것도 좋아.”
뒤에 덧붙인 말만 아니었다면.
스윽, 스윽.
환자는 물. 물이 간절했다.
‘물.’
“이제야 말을 좀 알아듣는구나.”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풀떼기와 고구마만 가져오던 소녀가 어제부터 스테이크 비슷한 걸 챙겨 오기 시작한
사실이었다.
사정을 대강 짐작한 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발찌에서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도구인가.’
“…….”
이건 동정일까.
대체로 일족마다 특유의 이목구비가 두드러지는 육식 수인과 달리, 초식 수인은 외양만으로는 종족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엄마…….”
‘물어보라니까.’
갑자기 어깻죽지를 드러낸 소녀는 제 어깨를 물어보라고 요구했다. 잡아먹히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딱 한 번만.’
‘……나쁜 늑대.’
‘……?’
‘이거 놔.’
상처가 벌어진 시늉을 하자, 소녀는 불신 어린 눈빛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늑대를 쓰다듬었다.
“밥 먹자.”
#<44 화>
‘이건…….’
“되도록 멀리 가야 돼.”
‘털은 좀 놓지.’
삐이이-
밤하늘 아래, 매 한 마리가 탐색하듯 공중을 돌고 있었다. 배신한 측근이 부리는 매였다.
‘질기긴.’
‘이 이상은…….’
“……?”
“……??”
온갖 물음표가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너,”
얼어붙은 소녀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늑대라 여긴 이가 사람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언젠가 누군가 그랬다. 늑대는 한 가지에 각인되면 죽을 때까지 얽매이는 집요하고 이상한 족속이라고.
황금색 눈동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마치 수풀 사이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죽지 말고 기다려.”
언제부터 사람이었지?
“어떻게.”
“어떻게…….”
“벤디 레피.”
“……숙부님.”
“그냥 잠깐 산책을…….”
“아직 가주 승계가 끝나지 않았다.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너는 이곳을 마음대로 나설 수 없다고.”
“…….”
“가주가 바뀌는 시점에 너마저 사라지면, 마치 내가 가주가 되기 위해 네 부모를 처리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쯧, 꼴 보기 싫은 눈빛하고는.”
가벼운 공격 마법을 구상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뇌를 찢는 듯한 고통이
소녀를 덮쳤다.
“아아악!”
그러니 못 견딘 아이가 밤중에 밀림에 뛰어들 수밖에. 중년 남자의 입장에서 소녀의 행동은 도주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그리고 소녀가 의식을 차렸을 땐, 마법의 여파로 며칠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후였다.
“……하.”
#<45 화>
‘……말이 돼?’
“……!”
“읍!”
‘무슨!’
“…….”
‘……갔나?’
“누구……!”
“대체…….”
‘그 백호.’
날이 완전히 밝았다.
‘레피 저택…….’
‘됐어.’
“노랑아?”
잠깐.
노란 짐승이 이렇게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건, 간밤에 레넌이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틀림없어.’
‘확인해야 돼.’
“뭐야!”
“학생회장?”
분명 방에 없어야 한다.
‘방에…… 있잖아?’
‘잘못 짚었나?’
아냐, 잠든 연기 중일 수도 있어.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백호로 변해서 달렸으면 나보다 먼저 도착했을 확률도 있으니까.
“…….”
“회장, 이게 무슨 소란이에요?”
“회장, 왜?”
“…….”
문제는 바로 네 몸뚱이였다.
“그렇군요.”
“……?”
‘여행 불참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뭘 변태처럼 훑어?”
#<46 화>
“누가 변태……!”
“새벽에.”
“방에 없던데.”
‘설마.’
“나는 계속 방에 있었는데?”
‘아파!’
“이제는 맞고 다니네.”
“누구야?”
‘저건…….’
“잠깐!”
‘그 괴한이…….’
저 사자일 수도 있다고?
다른 무엇보다 일단은…….
‘저 도둑놈의 사자.’
내 교복 타이 돌려 내.
“그건,”
“학생회는 한 명 더 있을 텐데.”
야닉 펠이었다.
“이거 타고 가게?”
“으응, 근데 사자는?”
“거기 있잖아.”
아, 얘도 사자였지.
“그러니까 거기 있잖아.”
레넌의 질문에, 자연스레 아침의 살색 광경을 떠올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머뭇거리는 내 반응을
빤히 살핀 레넌이 툭 말했다.
“덮치려고?”
“그래, 덮…….”
네가?
“……네?”
“……?”
‘이 호랑이가?’
백은발과 물색 눈동자, 심지어 동물형이 백호인 걸 감안하면 겉모습만큼은 누구보다 성스럽긴 한데.
“꽤.”
“찾았지.”
뭐가 됐든 나는 저런 원을 몰랐다.
“노랑아, 왜 그래?”
‘찾는 사람…….’
불현듯 지금까지 원이 초식 수인과 관련된 무언가를 볼 때마다 과민하게 반응한 사실이 떠올랐다.
‘대체 왜?’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두근거릴 정도의 두통이
일었다.
나도.
나도 궁금해.
‘그렇게 되면 잘 회유해서…….’
“약속했거든.”
“잡아먹기로.”
내가 언제.
#<47 화>
부학생회장석에 앉은 안나는 학생들이 제출한 체험 학습 평가서를 하나하나 넘겼다.
“그럭저럭.”
여행 일정을 고구마밭으로 수정하면 어쩌냐며 멱살을 잡을 땐 언제고, 평가서를 정리하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훈련해야 돼, 훈련…….”
‘특히…….’
원 리오나드.
‘약속했거든, 잡아먹기로.’
‘과거에 만난 적이 있었나?’
“이거 놔요.”
“어딜 가려고!”
“악!”
“회장, 잘 들어요.”
들을게, 잘 들을게.
너무해.
너무 무서운 발언 아닌가.
“…….”
“회장이 훌륭한 겁보에 구색을 못 갖추고 머릿속을 이해하기 힘들지언정, 그래도 학생회장다워지긴 했죠.
지금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나, 그런데요.”
“말해 봐요.”
“……고요.”
“뭐라고요?”
“타 아카데미에서요? 왜요?”
“단.”
“왜, 왜요?”
“잠깐.”
그런 말을 크게 하면 누군가가 온단 말이야.
“이 몸을 포함한 세 명이라고!”
“모레까지예요.”
학생회장 벤디 레피까지 두 명.
그리고…….
“아니, 상식적으로!”
#<48 화>
기어코 저걸 사용하시겠다.
후우-
안나의 긴 숨이 암묵적 동의임을 눈치챈 벤디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맞췄다.
마스코트 한 마리.
그리고 비밀 요원.
결국 도합 셋의 학생회였다.
‘제대로 썼나?’
‘……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체가 닿거나 만지려 들지만 않으면 얌전하긴 하다는 정도일까.
“너도 계속 여기 있게?”
“학장이 붙어 있으라네.”
“……원수라고?”
‘그리고 어릴 때부터라니.’
‘내 어린 시절은…….’
“……뭐?”
너는 여기 있잖아.
“특훈을 생각해요.”
‘밀러 워든.’
내 뒤에 선 레넌에게.
“저 자식이,”
‘안 돼.’
시의적절하게 꽈악, 발을 짓밟은 안나의 조치 덕분에 야닉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괴력에 차마 아프다는
비명조차 못 지른 거겠지만.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
벨헬름 학생회 임원들이 웃음을 자아냈다. 물론 감탄을 가장한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맙소사.’
이번에는 야닉이 아닌 괴력 곰돌이가 폭주할 낌새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찰나에,
“워.”
조용히 있던 신시아가 묘한 소리를 냈다. 마치 날뛰는 짐승을 진정시키듯 단호한 손짓을 취하며.
‘얼른 끝내 버리자.’
특히 벨헬름 학생회 측에서 교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데, 그게 또 따져 묻기는 애매한 수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영광입니다.”
곧바로 수락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지 반색한 밀러 워든이 활짝 웃었다.
“그럼 어서,”
“그런데.”
“……?”
“아, 지병이.”
#<49 화>
“하.”
밀러 워든의 얼굴에 내내 걸려 있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발광 직전인 야닉의 입을 틀어막은 안나가 긍정하듯 끄덕였고, 부들대는 야닉의 다리를 포박한 신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작년 학생회에 비해 수준 낮긴 하지.
“더 볼 것도 없는 떨거지들이군.”
“…….”
“돌아가지.”
밀러 워든은 학생회실 문 앞에서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떨거지.
“야닉 펠!”
퍽!
다 끝났다.
“회장!”
벤디였다.
“이 무슨……!”
“회장,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밀러 워든을 일으켜 줄 순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벤디가 떡하니 학생회실 입구를 가로막았기에.
누구신지.
‘방금…….’
“미안합니다.”
‘벤디, 새겨듣거라.’
‘하지만…….’
“일단 앉으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 새끼 짐승.
“우선은.”
“…….”
밉살맞은 표범.
“그리고 현재 학생회장은 저예요. 어떻게 생각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 이
자리에 앉은 거고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 정도 거리감이 딱 좋아요.”
“약초?”
“네. 게다가 뛰어난 마력을 가진 자가 채약하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구하기가 까다롭죠.”
그럼 뭐 어떡하라고.
“거기가 어딘데요?”
“……그게.”
“…….”
“그.”
“그?”
“뭐요?”
#<50 화>
“최소 원 리오나드 님이나 아까의 레넌 에던트 님 정도는 되어야 채약이 가능한 약초라고요!”
안 들려, 어쩌라고.
숙부의 추격을 피하는 것도, 학생회장 역할을 해내는 것도, 이곳 수인 아카데미를 온전히 졸업하는 것도
중요했다.
‘어쩌면…….’
시험해 볼 만할지도.
“손자며느리분에게 선물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자존심상 밀란느 학장님께 절대 말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의 관계가…….”
“……구해 드리면.”
“네?”
기척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약골이 무슨.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벤디는 예외로 쳐도 될
듯했다.
“그럼 약속 하나 해요.”
“약속?”
“그러죠.”
“…….”
“저 말고 우리 임원들에게요.”
“약초나 구해 오고 말씀하시죠.”
“잠깐.”
아 왜, 왜 또, 또 뭐. 결국 짜증이 치민 그가 홱 뒤돌았다.
안 쓰면 여기서 못 나가.
서대륙의 수인 아카데미.
그런데.
후후, 후후후.
“네, 부탁드릴게요.”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호?”
‘하나…….’
아무래도 아직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듯하니, 약초로 제 마력을 가늠해 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벤디 학도.”
“말씀하세요.”
“익숙한 일이에요.”
“단.”
“……?”
“레넌은 두고 가게나.”
지금껏 알게 모르게 레넌의 도움을 받아 온 걸 모르지 않았다. 밀란느 학장의 말은 곧 스스로의 힘으로
약초를 채약하라는 의미.
만일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나쁠 건 없었다. 아카데미 밖에서의 일은 학장의 책임이 아니니까.
“나오너라.”
“레넌.”
“그런데.”
“뭐!”
“이상한 부분이라니?”
“……그래?”
다행히 다른 사안이군.
‘마력이라…….’
“어허, 시끄럽다!”
“비슷하긴 해.”
“뭐라?”
#<51 화>
기숙사로 돌아온 원은 투명한 구슬에 마력을 주입했다. 마탑과 곧바로 통신이 연결되는 마도구였다.
지직, 지지직.
“페트리온에 대한 조사는?”
[그것이…… 죄송합니다.]
특이점?
“말해.”
가주의 친인척, 저택에 방문한 지인, 혹은 저택 고용인 및 그들의 가족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어 둘수록 좋았다.
[웬스턴 레피 이전의 가주에게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가주인 웬스턴 레피는 그 외동딸의
숙부쯤 되는 인물이죠.]
[당시 오라버니라고 언급한 자는 남자 혈육이 아니라, 사촌지간인 웬스턴 레피의 아들일 가능성도
보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찾았다.
“그게 특이점인가?”
[그건 아니고…….]
“……이미 죽었나?”
그 외동딸이라는 자가.
“……?”
“이 야닉이 따라가겠다!”
“회장.”
“왜?”
“우린…… 동료잖아.”
“제가 가겠어요.”
“아니, 내가 간다!”
“…….”
어차피 학장님 소유의 설산이라 위험한 동물이나 마물도 없다고 하고, 설산 안내인이 길을 안내할 거라고
하니.
여우 수인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 시간제한이 있는 이상,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인원수는 적을수록
좋았다.
‘다 됐다.’
“안 돼.”
내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바로 지금이었다.
“앉아!”
“…….”
이겼다.
“타세요.”
“네?”
우리의 활극을 구경 중이던 밀러 워든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조금 그렇지?
암.
하긴.
“회장.”
“……레넌?”
겹친 팔에 턱을 묻은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딱히 없는데.”
“그래?”
“귀.”
“……귀?”
“잘 다녀와.”
‘늑대를 조심해.’
‘설마…….’
#<52 화>
“저기.”
“…….”
“이봐요.”
“…….”
“벤디 레피 회장!”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뭐가요?”
“그…… 옆에 말입니다.”
옆이 괜찮냐는 건 대체 무슨 질문이람.
“얘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저도 방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보호색이야 뭐야.
경악한 내가 황급히 창밖을 내다봤지만, 아카데미에서 멀어진 마차는 설산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는 원의 눈앞에 허허, 난처하게 웃는 스카론 장로가 아른거렸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달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밀란느 학장이 있는 이상 어렵겠지만, 만약 학장도 가담한 거라면 학적부 조작 정도야 충분히 가능한 일.
‘사, 사슴 여러분.’
확신을 가져야 움직이는 성정임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당장 학생회장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학생회장은?”
“조금 전에 갔어.”
‘학생회장이 진짜 그 아이라면.’
과음해도 술 냄새 한번 풍긴 적 없는 인물이.
단정한 흑발은 제멋대로 솟구친 상태에, 교복 재킷 또한 어디에 뒀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 거 없어.”
요즘 그거 때문에 바빴잖아.
“궁금한 게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뭔데?”
“집사와 고양이겠지.”
‘그러고 보니…….’
런드버그 설산.
쏴아아-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일 줄 알고 기다렸으나,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 앞을 딱 막고 섰다.
‘아니, 아니!’
그뿐인가.
‘저거 진짜 동물 맞아?’
“감사합니다.”
“그렇지?”
덜컹덜컹.
“어디 가면 안 된다?”
‘큰일 날 뻔했네.’
그냥 머리 색이 바뀐 정도인데.
‘뭐 어때.’
못 알아보고 입질 안 하는 게 어디야.
누구세요.
#<53 화>
‘……난감하네.’
조금 정이 들 것 같아.
새끼는 금방 자란다던데.
“짠.”
“잘 거야.”
“…….”
휙.
완전히 잠들었다.
‘아.’
풀어도 다시 묶을 줄 몰랐다.
교복 타이도 매번 대충 묶다가 잃어버리는데, 한 손으로 반대편 팔목에 리본을 묶는 게 가능할 리가.
‘역시.’
초식 수인.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굶주린 승냥이 떼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돌아왔을 때, 벤디는 이미 무사히 돌아온 후였다.
아주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맞은 듯 작은 볼이 살짝 부은 상태였다.
그에게 같지도 않은 애칭을 붙이고, 배낭에 넣고, 주둥이에 음식을 꽂고, 명령이나 해 대는. 아무튼 그런
위인이 맞고 다니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사슴 수인인가.’
페트리온에 사는 사슴 수인들과 아예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짜고, 묘하게 지리에 밝은 부분까지.
게다가.
헤일린의 무감한 시선이 벤디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당초 이 생김새가 사슴이 아닌 게 더 말이 안
됐다.
‘사슴은 좀 곤란한데.’
‘어쨌든…….’
초식 수인.
그리고 방대한 마력.
“……?”
아, 맞다. 리본.
‘신종 고문 수준인데.’
분명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건 자신인데. 헤일린은 어쩐지 학생회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크헝-
캬옹.
전방에서 설쳐 대는 육식 동물 두 마리였다.
“네…….”
이건 뭐 맹수 탐험대도 아니고.
“바로 저기입니다.”
“어디라고요?”
“저기입니다.”
“어디요?”
“저기- 저-기입니다.”
“리울 약초는 강한 마력이 요구되기에 채약 자체는 까다롭지만, 서식지는 온도가 낮고 비교적 채약하기
쉬운 장소에 존재한다.”
쉬운?
#<54 화>
심지어 내려가라고?
‘게다가…….’
“문제가 있어요.”
알려 줄 수 없는.
전해지는 마력이 끊기는 순간 약초가 시들어 버린다고 하니, 그를 방지할 마력이 담긴 마도구였다.
‘좋아.’
결심을 다지며 발을 내딛던 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뭐 해?”
“또 말 안 듣지.”
어딜.
“어이쿠, 예예.”
“…….”
이깟 절벽.
“…….”
너무 무서워요.
“으…….”
“어엉.”
‘조금만 더.’
“악!”
크허헝-
크헝.
‘거의 다 왔어.’
“응?”
“응.”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흐릿한 동공으로 알아들은 척하자, 노란 짐승이 세상에 다시없을 무지렁이를 보는 눈빛을 보냈다.
“…….”
앞으로 한 걸음.
“아!”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손이 미끄러졌다.
“아이고오오옥!”
크헝!
크릉, 크르릉.
“…….”
‘이 냄새…….’
너무 구려.
신비로운 외관과 달리 절로 미간이 구겨질 만큼 구린 냄새였다.
심지어 어디서 맡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리안, 이건 너무 위험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킁킁, 호기심이 이는지 약초에 코를 가져간 노란 짐승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코를 찌르는 약초 냄새가
거북한 듯했다.
‘으음.’
바위 절벽을 내려오느라 잊고 있던 걱정이 떠올랐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채약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좋아.’
‘제발.’
리울 약초는 뿌리가 바닥에서 나오는 순간, 채약자의 마력이 조건에 미치지 못하면 시들어 버린다.
‘못 보겠어.’
“됐!”
‘시들지 않았어.’
‘리안, 이건 너무 위험해.’
‘그건…….’
‘…….’
‘……엄마.’
‘오, 아빠 냄새란다.’
쿨럭.
‘피……?’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아카데미로 출발해.’
‘그냥 새끼 사자라며!’
‘다행이다.’
이건 약하다.
‘저 표범.’
밖으로 던져 버릴까.
‘설산의 추위 때문인가?’
하지만 설산에서도 제법 멀어졌고, 마차 내부는 찬 기운이 없었다.
흘끔, 흘끔.
‘……왜?’
“……음.”
‘괜찮은 건가.’
“눈을 뽑아 줄까.”
하하, 하하하.
‘저건 틀림없이…….’
“각혈을…… 했다고요.”
‘대체 뭐야?’
“…….”
“학생회장!”
“회장!”
저 둘둘 만 이불은 아마도…….
#<56 화>
“노랑이 이스단.”
글렀다.
“내려놔, 그 이불.”
“왜?”
“나도 갖고 싶으니까.”
“생각해 보고.”
넘겨줄 리가.
‘게다가…….’
“알아서 할 테니 너나 잘해.”
“세 분 다 일단 진정,”
“시끄러워…….”
“…….”
쌍코피.
“늑대.”
“알고 있어.”
“무슨…….”
짙은 한숨을 내뱉은 헤일린은 곧 실성한 듯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코밑을 닦은 소매에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아연한 눈으로 이불을 바라봤지만, 사건의 원흉인 이불에게선 잠꼬대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아마도 리울 약초와 제 마력에 무언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언제.
“사실이에요.”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아무튼.”
“어, 그거는…….”
약초가 든 보관함을 가리킨 밀러 워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실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의외군.’
“……?”
그제야 제가 짐승의 앞발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을 인지한 찰나, 노란 짐승의 앞발이 밀러 워든의 얼굴을
강타했다.
“컥!”
“레넌!”
#<57 화>
“회장.”
“왜요?”
“그런데요?”
“내년에 뵙죠.”
‘이 고생을 또 하라고?’
‘너무해.’
“교육부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벨헬름 아카데미 학생회 측에서 친선 도모 보고서 제출을 끝마쳤다고
합니다.”
“벌써 말인가?”
“……결과는?”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벤디 님의 행적을 조사한 자료입니다. 대강의 실마리는 잡았으나, 자세한 사안까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되었네.”
“예?”
“조사는 이제 그만두게나.”
“…….”
“저 아이가 초식 수인이든 다른 무엇이든 결국은 내 학생일세. 학생은 날개를 펼치려 하는데, 나서서 그
날개를 부러뜨리려는 교육자가 될 순 없지.”
“……밀란느 학장님.”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필요 없대도.”
“흥미로우실 텐데.”
“어허.”
그가 막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잠깐.”
“딱 한 장만 확인하겠네.”
서류는 한 장이 전부였다.
[무탈하셨습니까.]
“스카론.”
[하문하십시오.]
“…….”
전신거울 속에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 비교적 큰 체격의 남자가 자리했다.
왜.
“스카론, 내가…….”
[예,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흔해 빠진 얼굴이었던가.”
[소, 송구합니다.]
“됐어.”
실상 그리 흔한 얼굴이 아닌 정도는 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 사항은?”
“혼담?”
[예, 혼담이오. 아마 육식 수인과의 혼담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 치지직, 거, 치직, 라고……,]
“아.”
푸르릉!
“아악!”
푸르릉!
“아야, 아프대도!”
서러움에 지푸라기를 뜯던 벤디가 구석에서 쪼그라들었다. 해피의 완벽한 졸개로 전락한 말들이 벤디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인부들이 천장을 고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마구간이 부서지는 일 따위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쫓겨날 순 없으니까. 초식 동물이 가득한 마구간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안심되는 곳이 없었다.
#<58 화>
‘내 마력을 뭐?’
답답해진 벤디가 팡, 지푸라기를 내려치자 해피를 비롯한 말들의 매서운 눈길이 박혔다.
‘…….’
‘……봉인?’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부모님이 아홉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설마.’
“악!”
‘서, 성공…….’
해냈다.
해피!
푸르릉!
히히힝!
“아니, 네 명과 한 마리다.”
“세 명만으로는 어려워요.”
“아니, 네 명과 한 마리라니까.”
‘내가…….’
마법 소환에 성공했다.
“…….”
너무 좋아.
레넌이었다.
‘늑대를 조심해.’
“레넌.”
“왜?”
“그래? 다행이네.”
그럼 네가 말한 늑대는 무엇을 지칭하는 거였는데. 벤디의 눈동자에 뚜렷한 의심이 서렸다.
“…….”
이어서 원의 시선이 집무 책상에 앉은 벤디에게 머물렀다. 담담한 얼굴에선 뚜렷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
“뭔데 그래?”
“이것들이 왜 다 호들갑이야?”
“……뭐?”
횡재다.
“학생회장!”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학생회 입회를.”
“참고로 1 호는 이 몸이다.”
“…….”
마법 물약 제조 강의가 있는 날.
‘무조건…….’
어떻게든 이곳 수인 아카데미에서 버텨야만 한다.
“찾았어?”
노란 짐승의 행방을 떠올릴 즈음, 웬 여학생 무리가 나를 가리키며 뛰어왔다. 우르르, 과장하면 부연
먼지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머릿수였다.
내 배낭은 왜?
고작 몇 초 사이의 일.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소란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저게 무슨……?’
다 같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나.
‘아니면 보물찾기?’
‘지각이야.’
“구관은 찾아봤어?”
‘그 시기가 대체 뭐야?’
“미르 열매 가루 한 스푼.”
한 스푼.
“벌꿀 두 스푼.”
두 스푼.
마력을 흘려라.
몸 안의 마력을 흘려보낸다.
얼굴에 검둥이가 묻은 나를 가리킨 교수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폭발하던 내 자신감도
자취를 감췄다.
“…….”
“요즘 유행하는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장난으로 섭취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물론.”
‘혹시?’
왠지 감이 온 나는 홱 소리 나게 신시아를 돌아봤다.
“맞아.”
아직 아무 질문도 안 했는데.
대부분 마음을 터놓고 표현하기 어려운 입장인지라, 억눌러 온 감정을 이 시기를 틈타 표출한다는데.
“어…….”
다만 묘약을 받는 남자가 대체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안 받아 주면?”
“그 세 명?”
“맞아, 그 세 명이 압도적이지.”
“레넌은 왜?”
으.
“원 님은?”
으.
“헤일린 이스단은?”
으.
얼굴을 잔뜩 꾸긴 내가 팔짱 꼈다.
“대체 누가 그래?”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
창틀에 기대어 앉아, 책상에 엎드려, 손등으로 이마를 짚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우수에 젖어 있었다.
공통점은 대부분 남학생들이었다.
“부익부 빈익빈.”
“야, 라일라!”
쾅, 라일라의 주먹에 부서지는 책상을 본 나는 조용히 강의실을 나섰다. 모르긴 몰라도, 다들 이 시기에
진심인 건 알겠다.
#<60 화>
소매를 걷어붙인 학생들이 교정을 점령했다.
“반드시 잡는다!”
교정을 지나친 나는 학생회실로 이어진 복도를 걷다가 돌연 멈춰 섰다. 학생회실 앞에 뭔가가 있었다.
“서.”
“제정신입니까?”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무슨?”
“…….”
하필 그 문장이 머리를 강타한 나는 발끝에 시선을 뒀다. 더 보고 있다가는 내 정신과 이성이 흐트러질 게
분명했다.
“……?”
‘내가 언제?’
“저쪽이다!”
“나중에 얘기하죠.”
“코앞에서 놓치다니!”
‘게다가…….’
입을 가로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저 비싼 걸 도주에…….’
학생회 자금.
‘회장, 이거 아마 다음 권도 있을 텐데.’
창고에 남아 있을 숨은 금서 찾기.
학생회는 아카데미의 일꾼이라더니. 진짜 일꾼처럼 창고를 뒤적이던 나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시선을 뒀다.
‘인형은 아닌 것 같은데?’
세상에나.
“인형 놀이.”
“…….”
진짜 짜증 난다.
콕.
“나가 주세요.”
“에던트 님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학생회실은 찾아봤어?”
“여기에 레넌 에,”
읍!
여기에 모두가 찾는 백호랑이가 있다. 그렇게 외치려는 동시에 뒤에서 나온 커다란 손이 입을 가로막았다.
“아무도 없는데?”
“…….”
갔다.
“마셔 봤어?”
그 사자를 가장 처음 보고 말았구나.
너무 가까워.
똑같았다.
‘……역시.’
너구나.
#<61 화>
“…….”
“선물.”
‘말하려면 벌써 말했겠지.’
“선물에 대한 보답.”
“……사랑의 묘약?”
특히 너는 꼭.
“뭘 만들고 싶었는데?”
“……식욕 감퇴 약.”
램프를 들거나, 양손에 불 속성이나 빛 속성 마법을 소환시킨 학생들 덕분에. 간간이 고난도 마법인
번개도 보였다.
아래에서 맥 빠진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깐깐한 사감도 오늘만은 통제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제 자야겠다.’
“헤일……!”
떠올린 건 새끼 사자인데 왜 사자 수인이 나타난담.
“하…….”
왜 하필 여기 숨어서 쉬는 건데.
원이나 레넌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헤일린 이스단은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날것의 느낌이 있으니까.
살짝 찢어진 눈과 예쁘장한 얼굴이 주는 느낌과는 별개였다.
“더 푹 쉬면 좋겠어.”
그런 나를 별종 보듯 훑은 그가 머리에 붙은 풀을 대강 털었다.
“아예 벗어 줘?”
“……네?”
모함이었다.
빨리 안 가나, 짜증 나는 사자.
기숙사에 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부는 적막한데 창밖은 떠들썩한, 오묘한 조용함이었다.
“왜 이곳에 왔는데?”
“응?”
“뭐, 비슷해.”
한쪽 눈썹을 든 그가 내 말을 싹둑 끊어 버렸다.
물론 앞뒤를 전부 생략해서.
“어느 일족?”
“……너구리 일족.”
이제 나갈 때도 되지 않았나, 저 진상.
“그런데 너.”
“왜?”
‘안 돼.’
“이제 가.”
“갑자기?”
“가!”
휙.
“이익!”
휙.
“나가, 빨리!”
“갑자기 왜 이래?”
그런 발상을 하는 네가 더 이상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할 즈음, 부지불식간에 몸이 뒤흔들렸다.
‘얘…….’
지금 눈이 맛이 갔어.
“뭐? 어디?”
“어디야?”
“무슨……!”
“놓치면 안 돼!”
“왜, 왜?”
“죽을까 봐 조마조마하니까.”
황급히 기숙사 창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단단히 친 나는 스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62 화>
‘크…….’
‘큰일 날 뻔했네.’
‘안 되겠어.’
반드시 성공한다.
‘그 삼 인방.’
“사랑의 묘약?”
“뭐, 비슷해.”
이번에는 실패해서는 안 돼.
“헉!”
이 망할 하이에나.
눈으로 열심히 욕을 하는데, 라일라와 신시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심지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왜 그래?”
‘오…….’
퍼엉, 비커에서 쏘아진 복숭앗빛 액체가 위로 솟구쳤다.
사슴 살려.
‘육식 수인이랑?’
“입 닫아, 야닉 펠.”
곧바로 원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늑대도 있었구나.’
신시아도 있었나?
“…….”
“어떻게 하면 좋겠냐니……”
“안 됩니다.”
“그건 안 돼.”
원과 레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
“가두…….”
노랑이도 있었구나.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알겠어요?”
끄덕끄덕.
“…….”
“회장, 이제 풀게요.”
“……안나, 눈 뜰까요?”
“네, 지금 바로.”
셋, 둘, 하나.
정말로 꽃이 피는구나.
“허, 참.”
안나가 얼른 대답했다.
“으음…….”
‘모를 일이군.’
벤디가 초식 수인이기에 본능적인 끌림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본인 자체의 능력인 건지.
“가자꾸나.”
“……네.”
“좋아해요, 학장님.”
“오냐.”
원과 레넌, 노란 짐승은 도란도란 학생회실을 나서는 학장과 벤디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63 화>
다행스럽게도 밀란느 학장에게 사랑에 빠진 벤디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단지 밀란느 학장의
무릎 위에서 사랑만 속삭일 뿐.
“그래서.”
나직이 읊조린 밀란느 학장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레넌이 서 있었다.
“에구구.”
“뭔데?”
애초에 의미가 없기도 했다. 밀란느 학장은 레넌에게 감시에 대한 보고를 들은 기억이 손을 꼽다시피
하니까.
그럼에도 원이 남아 있는 건 마탑주 자리를 완전히 승계받기 전, 외부의 귀찮은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레넌은…….
‘어렵구나.’
적자생존.
가장 강한 자가 가주 자리를 차지한다.
암묵적인 법칙에 따라, 에던트 가문의 가주는 늘 형제자매 중에 제일 뛰어난 자가 차지해 왔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소.’
지금까지는 레넌이 밀란느 학장의 울타리 안에 있었으나, 제멋대로 넘나들기 시작한 이상 이제 울타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거.”
“딱히 엮인 적 없지 않나?”
“웃기는 소리. 조기 졸업, 조기 졸업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요즘은 아주 신나게 아카데미를 쏘다닌 걸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그리고.”
“뭐를?”
마치 남의 것을 입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지 않았나.
새침한 얼굴에 짜증이 번지는 것도 마음에 드나, 지금처럼 눈꼬리가 울상인 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넌이 벤디를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음 한편이 불안해진 밀란느 학장은 조용히 물었다.
이…… 이…….
“레너어어어언!”
“레너어어어언!”
‘골이 울려…….’
“이스단 가문에서 혼담이 오가는 모양인데, 헤일린 학생이 도통 가문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더구나. 직접
수족을 보내도 감감무소식이라더군.”
“그럼 뭔데 그래?”
“썩을 놈.”
#<64 화>
하아.
후.
으르릉.
‘진짜…….’
나는 천천히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책상 아래 가지런히 둔 다리가 달달 떨렸다.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왜?
어째서 날고 기는 사자 영역의 이스단 가문이, 작디작은 사슴 영역의 가문에 혼서를 보낸단 말인가.
흘긋.
‘진짜 어떡하지?’
헤일린 이스단을 피해 여기로 도망 와서, 헤일린 이스단 앞에서 나 먹잇감이요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단
의미였다.
‘약혼자가 있었나.’
아예 남 일처럼 대답했었으니까.
‘아니, 아냐.’
숙부 또한 모든 걸 알게 된다.
‘사자 먹이 급행열차.’
쾅, 양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내가 중얼거렸다.
“아, 안 돼.”
“학생회장.”
“마법 개발 동아리?”
반응이 왜 이래.
“왜요?”
설명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않나. 휙, 안나를 돌아보자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연했다.
“마법에 지나치게 몰두한 학생들이 모인 동아리죠. 평범한 마법 동아리와는 결이 달라요. 강의는 뒷전일
정도로 마법에 광적인 자들이라.”
“……실험체?”
자연스레 그녀의 눈길이 원에게 닿았다. 원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미간을 딱딱하게 굳혔다.
통칭 마개동.
알이 큰 안경과 덥수룩한 곱슬머리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남자란 정도만 겨우 판별이
가능했다.
“워, 원 리오나드!”
“그럼 아직 그쪽이……?”
“힉! 무, 무슨!”
“거기서 얘기해.”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그게…….”
“마개동.”
“마개동?”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예에, 비슷합니다.”
“무슨 일인가요?”
현재는 폐지된 구관 기숙사 앞에는 거대한 천막이 하나 있는데, 지나갈 때마다 종종 궁금증을 느끼곤 했다.
[마법 개발 동아리]
‘과연 있을까.’
“이 호랑이 자식이!”
“학생회장?”
“와 주셨군요!”
“힉!”
‘저 사람이 부장인가?’
어두침침한 천막 가운데 덩그러니 누운 사람이 보였다.
“제물?”
“제물이라니요, 저희 부장입니다!”
“의식을 못 찾고 있을 뿐이라고요!”
“왜 의식을 못 찾고 있는 건데?”
“어…….”
“……이것 때문입니다.”
“대체 뭘 만든 겁니까?”
‘저게 뭔데 그래.’
덩달아 혼나는 기분이 된 내가 움츠리자, 안나가 뒤에서 등을 꼬집어 비틀었다.
“차원 이동, 착시, 환상, 정신계 마법. 꺼림칙한 종류의 마법은 다 걸어 놨군.”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실은…….”
언제 내 뒤에 섰는지 모를 원이 대신 대답했다.
“안경으로 마법 훈련을요?”
몸이 다치지 않는다니.
‘어? 이거.’
가상공간 같은 건 함부로 개발하면 안 되지 않나. 얼핏 알기로는 마탑의 허가가 필요한 걸로 아는…….
“…….”
데…….
‘세상에.’
“…….”
“다들 진정해요.”
물론 원의 기에 눌린 나도 반쯤은 우는 상태였다.
“깨우는 방법은요?”
“아직은 가상공간에 들어가서 직접 데리고 나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
왜 나야.
“맞습니다.”
“그, 그건…….”
“부장만 있으면 저희도 통과할 수 있는 미궁이니 간단하실 겁니다. 특히 이렇게 든든한 분들도 함께 와
주시고.”
내 뒤에 괴수들이 있긴 해.
뒤편에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던 부원은 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잘게 떨었다.
‘마법 훈련이라.’
“그걸 위해 만든 마도구니까요!”
조금 무섭다, 이 마법 광신도들.
“딱 여섯 명이네.”
빠졌어, 분명 뭔가 빠뜨렸는데.
새끼 사자.
‘이거…….’
“노랑아?”
‘얘 지금.’
삐졌다.
#<66 화>
“억!”
그럴 줄 알았어, 저 성질머리.
크르릉!
‘이렇게 되면 전부 일곱인데.’
마법 훈련, 그것도 훈련 중에 다쳐도 신체에는 문제가 없는. 이 괜찮은 기회를 무섭다는 이유로 날려
버릴 순 없었다.
문제는 아무도 빠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건데. 고민을 거듭할 즈음, 책을 덮은 신시아가 손을 들었다.
“내가 빠질게.”
“신시아 네가?”
나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마개동 부원들을 훑었다. 싸한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그들이 곧장 항변했다.
“신시아, 그럼 부탁 좀 할게.”
“금서 다음 권.”
“다른 사람들은요?”
“노랑이는 어떡하죠?”
“……그럼 해 볼게요.”
검은 구름이 떠다니는 잿빛 하늘 아래, 군데군데 이끼가 낀 거대한 진녹색 건물이 위용을 자랑했다.
크허헝, 크헝.
이마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으며, 거대한 발은 뭇 초식 동물들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떡하지.’
나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컹, 크르릉.
까르르.
“날개, 날개가…….”
“레넌.”
“왜?”
“회장.”
“응.”
“내 송곳니가 없어졌어.”
“……그러네.”
생각은 죄가 없잖아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미궁 입구를 향해 휙 몸을 틀던 내가 몸을 굳혔다.
“가 보자.”
‘……어?’
잠깐.
“야닉은?”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말아 줘.
“빗자루.”
나는 통탄하며 눈을 감았다.
그냥 여기서 살까.
#<67 화>
“…….”
괜히 데려왔다.
마지막 관문을 깨면 가상공간에 들어온 사람 모두가 현실로 돌아가니, 마음 같아선 빗자루를 잠깐 어디에
세워 두고 싶지만…….
첫 번째 관문.
“기다렸다.”
안쪽에서 메아리치듯 장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틀림없었다.
“옷을 입을 줄 모르겠지.”
“특이하네.”
저것 봐, 화났잖아.
“네놈들같이 이상한 녀석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설득력 있는 외침이었다.
“죽여 주마!”
문지기의 양 주먹이 주홍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가볍게 앞으로 나선 레넌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의미지?”
“어딜 도망치려고!”
문지기가 곧장 추격하려 했으나 즉시 괴력 곰돌이가 막아섰다.
‘아, 가상공간이었지.’
“다 방법이 있어.”
똑, 똑.
“회장.”
‘……이게 두 번째 관문이라고?’
‘너무하잖아.’
한쪽 팔로 나를 안아 든 레넌은 원을 향해 말했다.
“먼저 가.”
‘……어?’
“자, 잠깐.”
“아.”
둘 다 사양이었다.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콰앙! 거대한 개가 일으킨 먼지바람이 원의 몸을 삼켰다.
그럴 수가.
‘죽지 말고 기다려.’
그건 대체 뭐였을까.
세 번째 관문 입구는 짙은 녹색 문이었다.
“회장, 이가 허전해.”
아, 그리고 갈색 빗자루까지.
“……열게.”
“문지기는 어디 있지?”
“회장.”
“왜?”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윽, 스르륵.
왜 현기증이 나는 걸까.
지금껏 목각 인형을 상대로 마력 훈련을 해 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난이도가 높아지기 있나.
채 마력을 시험해 보기도 전에 생을 마감할 것만 같았다.
“취향도 지독하군.”
“무슨 말이야?”
“아.”
황소 인간, 머리 셋 달린 개, 거대한 뱀.
#<68 화>
‘그럼 다음 문지기도…….’
반인반마? 날개 달린 말?
“레넌, 왜 그래?”
“-나는 뱀이 개보다 더 싫어.”
“당연히 기다릴,”
“회장?”
“…….”
이 도움에만 기댄다면 레넌이 없어지는 순간, 스스로의 힘만으론 제자리를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원이나 레넌, 또는 안나가 오기까지 망연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등에 이미 땀이 흥건할 정도로 두렵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지 않을까.
“뱀이 슬슬 배가 고픈 모양이니까.”
“레넌.”
“왜?”
문고리를 잡은 나는 그를 돌아봤다.
“이상하네, 방금 좀 두근거렸어.”
“어느 부분에서.”
“글쎄.”
저 요망한 호랑이.
그냥 반인반마 같은, 초식 동물이 섞인 괴물은 안 되는 걸까. 결심이 무색하게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말이 씨가 되는 건데.’
째려본 나는 문고리를 힘차게 당겼다. 노란 짐승은 기다렸단 듯 레넌을 버리고 문틈 사이로 쌩 날아갔다.
“응?”
“유혹이라는 거 사실 거짓말이야.”
“……뭐?”
가상공간의 네 번째 관문.
‘뭘 망설이고 있는 거람.’
“…….”
“가자, 노랑아.”
으.
‘왜 나만.’
그냥 첫 번째 관문을 맡을걸.
‘문지기인가?’
‘마개동 부장?’
“부장, 정신 차려요.”
“으으음…….”
“누구……?”
“……학생회장?”
“아…….”
“들은 바로는 혼자 이곳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마지막 관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들어서자마자 문지기가 튀어나온 다른 관문과 달리, 이곳 문지기는 부장을 깨울 때까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왔다.
‘세상에.’
“머리 부분, 즉 앞쪽은 독수리이고, 몸통과 뒷다리는 사자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 날개도 독수리의
날개예요.”
말 안 해도 보여.
알고 싶지 않아.
“정교하게 잘 만들었지요?”
역시 싫다, 이 육식 수인.
‘먹잇감이라니.’
“이 빗자루는 뭔가요?”
“……야닉 펠이요.”
작게 탄식한 부장은 무릎을 굽혀 빗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뒤이어 손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부실 정도의 푸른빛이 잦아들 즈음, 야닉, 아니 빗자루가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휴.”
“…….”
“그리핀은 공중전이니까요.”
#<69 화>
“살려 줘!”
“으…….”
“노랑아, 피해!”
팔에 힘이 빠질 것 같아.
“…….”
“…….”
‘마력을…….’
펑!
‘됐……!’
‘……을 리가 없지.’
쐐애액-
이러다간 잡히겠어.
“이걸 사용해요!”
“고맙,”
다는 말은 취소.
두렵다.
‘……해 보는 수밖에.’
맞은편으로 날아간 나는 막대 과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력이 응집될수록 바삭거리는 맛있는
소리가 났다.
‘지금.’
콰앙!
“아악!”
쿠웅!
“윽…….”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사색이 되었다. 눈앞에 넝마가 된 노란 짐승과 부러진 빗자루가
있었기에.
“노랑아, 야닉!”
‘대체 왜……!’
“아…….”
……설마 아직도.
“안 돼!”
‘……괴로워하고 있잖아?’
“왜 그러는,”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아무리 마력을 모으고 수식을 그려도 완성 직전에 와해됐다. 여실한 경험
부족이었다.
‘제발.’
“……?”
죽지…… 않았네?
‘날고 있다고?’
혹시 그리핀에게 잡힌 건가.
“…….”
거대한 수사자였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얼마든지요.”
“물론이죠.”
“네, 맞아요.”
“예외는요?”
“그런 건 없어요. 행여나 동물형으로 들어오더라도 가상공간을 나설 때까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끔
설계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70 화>
“……음.”
“모습이 변할 일은 없다면서요.”
부장은 제자리를 돌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이 발생한 오류를 용납할 수 없는 기색이었다.
“……진화?”
“돌려줘요.”
나의 작은 노랑이.
슬프게도 낯선 수사자의 정체를 파헤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저놈의 독수리사자…….’
진짜 질기다.
“노랑아.”
내 부름에 수사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맹수 특유의 동공이 나른하면서도 요요하게 빛났다.
‘노랑이는 무슨.’
“……?”
‘절대 못 해.’
거듭된 훈련에도 근육이 잘 안 붙고, 이상할 정도로 약한 자. 그 흐물흐물한 인물이 마지막 관문이라니.
염려하던 안나는 뒤늦게 노란 짐승을 떠올렸다.
크웡웡.
‘빌어먹을 학생회장.’
‘저 피는…….’
다만 벤디와 함께일 때만큼은 묘하게 풀어진 분위기라, 이질적인 존재들이란 사실을 미처 잊고 있었다.
“늦었네, 늑대.”
크웡, 컹.
끼이익, 문이 열리며 드러난 건 광활한 바위산과 여기저기 부서진 바위, 둥지 안에 있는 부장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너무 빨라! 떨어질 것 같, 악!”
쾅, 콰쾅!
있는 힘을 다해 마법을 소환 중인 벤디였다.
공기주머니 소환이 전부였던 학생회장이 마법 소환에 성공하다니. 경이로운 발전을 바라보던 레넌이
중얼거렸다.
크웡…….
“……막대 과자 같은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원이 곧장 맞받아쳤다.
“…….”
저건 누군가.
두 사람과 한 마리의 머릿속에 불가능한 생각이 떠올랐다.
끼에엑!
벤디와 수사자의 합공이 그리핀을 바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요.”
“……려요.”
“회장, 정신 차리세요.”
또렷이 알아들은 벤디가 헉, 숨을 들이켜며 벌떡 일어났다. 검은 로브를 코까지 눌러쓴 웬 수상한 자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이래서야…….’
#<71 화>
“회장.”
“네?”
“그만 훔쳐보세요.”
“…….”
“다 보입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소오니.”
“내 소오니가 도아와어.”
노란 짐승.
‘설마하니…….’
“노랑이, 노랑이는요?”
그곳에 늘어져 누워 있는 건,
‘……다행이다.’
‘배낭이 찢어지겠지.’
“정신이 들어?”
괜찮나?
날개 잃은 짐승은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저 멀리,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직시한 노란 짐승은 이윽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분에 못
이겨 발버둥 치는 모양새였다.
‘왜 이래?’
이게 아닌가.
우뚝.
‘상처를,’
‘찔렀군.’
“아, 안 돼!”
“제발 그것만은……!”
“레, 레넌.”
“이거면 되겠어?”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 속에 우뚝 솟은 모양새라, 이것도 좀. 마치 광신도들이 받드는 신 비슷한 구도가
연출됐다.
“회장,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애초에 이 사안은 내 권한을 벗어나 있었다. 마법사들의 관리자와도 같은 마탑의 뜻을 거스른 거니까.
“그렇긴 한데…….”
자랑이다.
팔짱 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상공간은 원의 말마따나 위험성이 다분했다. 애초에 가상공간에 들어간 이유부터 부장을 구하러 간
거였으니.
원이나 레넌 수준의 실력자에겐 필요도 없고, 그 이하인 사람들이 사용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글쎄 원 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저분은 너무 무서워요.”
나도 쟤가 무서워.
그 후로도 부장은 소곤소곤 계속해서 나를 회유했다. 웬만한 회유 수단은 다 나왔을 즈음, 마음을
뒤흔드는 제안이 귓가를 울렸다.
솔깃.
“…….”
15%.
안나는 학생회 공금의 일부는 자유롭게 꺼내어 쓰고, 나중에 채우면 된다고 했지만…….
“…….”
“……30%.”
“……알겠어요.”
“안 됩니다.”
“그래서.”
감흥 없던 그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또 그 위험에 뛰어들겠다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제발 조용히 해, 이 도움 안 되는 마법사들.
“원 님께서는 위험성을 이유로 폐기를 말씀하셨는데, 몇 가지만 개선되면 마탑에서도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개선점?”
“네.”
“억울합니다!”
진짜 저 도움 안 되는 마법사들.
안나에게 신호를 보내자,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쿵, 가볍게 발로 바닥을 굴렀다. 푹 꺼진 바닥을
확인한 부원들이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72 화>
“들어나 보죠.”
“맞아요, 그래서인데.”
“둘째, 문지기를 쓰러뜨리지 못하더라도 도전자가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설계할 것.”
아암, 동의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동아리 강제 해체라니요!”
“안 됩니다, 학생회장!”
“그런가…… 본데?”
“만일 마도구를 개선하게 될 시에는, 주에 한 번씩 학생회에서 엄밀히 검토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검토할
학생회 임원은 앞으로 마법부 대표를 맡을,”
“맡을…….”
“메이지 로튼.”
비록 가상공간에 갇히긴 했으나, 홀로 세 번째 관문까지 돌파한 마법사라면 마법부 대표에 앉기에 부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음…….”
시선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주시하는 맹수의 황금색
안광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어디 보통 얼굴이어야지.’
“정말요?”
“대신.”
“……?”
“-다 들었습니다.”
“뭐를……?”
딸꾹.
나지막이 속삭인 원이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웠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휜 미소는 더없이 예뻤고, 더없이
악마 같았다.
“……좋아요.”
“흠, 잘 모르겠는데요.”
꽥 발작하는 야닉을 외면한 나는 마개동 부장, 메이지 로튼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다가가다가 멈췄다.
나도 돈에 넘어갔을 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지 답해 드려야지요.”
박쥐.
“회장을 부축해!”
“들 것, 당장 들 것을 가져와!”
나른한 오후에 취한 몇몇 학생들은 꾸벅꾸벅 고개를 기울였고, 몇몇은 한층 푸르러진 창밖을 구경했다.
‘그래도…….’
특히 접촉.
#<73 화>
턱을 괸 헤일린은 원을 돌아봤다.
가상공간에서 성수로 변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뭘 만져?’
“…….”
마법 개발 동아리.
따라서 학생들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집단일지언정, 마법부 교수들 입장에서는 몹시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그들만 있으면 마법부 실적이 쭉쭉 올라, 검술부 교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음침한 천막을 집어치우고 멀쩡한 동아리실을 꾸린 것도 모자라, 어제부터는 강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었다.
“리리 교수.”
“…….”
“리리 교수!”
“아, 뭐야.”
우직하고 협동심이 짙은 검사에 비해, 마법사는 마개동 부원처럼 개인 활동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학생회장이란 위치에 있는 벤디 레피가 뛰어난 실력자라면, 어쩌면 마법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엥?”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후볐다.
“그래.”
‘합!’
퐁.
‘하압!’
포퐁.
“아니, 진짜 그 실력으로 어떻게 입학했지? 밀란느 학장님과 연줄이라도 있나? 레넌 에던트처럼 모셔야
하는 거 아니야?”
초보.
그럴 리가.
일편, 한창 강의에 열중하던 벤디가 부르르 진동했다. 이어진 책상을 통해 진동을 그대로 전달받은
신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래?”
“거기, 학생회장.”
“네, 교수님.”
보이는 대로 예쁘장한 여우 수인인 것 말고는 큰 특징이 없는데. 특히 비실비실한 외관은 강함과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74 화>
“제가요?”
“리리 교수님.”
“그래그래.”
역시나.
“네.”
‘하여간 호들갑이라니까.’
“학생들아, 이리 오세요.”
살짝 손을 든 신시아가 말했다.
“실전 마법 연습.”
“자, 집중.”
펑!
콰쾅!
“저건 또 뭐냐?”
“누가 그걸 물었냐고.”
적응하기 진짜 힘들다.
학생회장의 기행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볼 때마다 새로운 수준이었다.
‘이론보다는 경험이라더니.’
쿠구궁.
물건이 나왔다.
노동으로 때우렴.
“리리 교수님.”
“어어, 말해.”
“엥?”
“……?”
그럼 왜 따라오라고 부른 걸까.
‘어쨌든 변상은 안 해도 되나 봐.’
“그건 취소 불가.”
“네? 왜요?”
중장년분들이 누군데.
무슨 확인?
“어떻게 됐나?”
“그, 그걸 부쉈다고?”
“……!”
“그런 적 없……!”
“됐다, 이제 다 됐어.”
“저기,”
“아뇨, 잠깐만,”
‘이 귀한 걸…….’
“네, 벤디 레피입니다.”
“네에, 벤디 레피입니다.”
[혼자 뭐 합니까.]
덜컹.
“무슨 일이에요?”
#<75 화>
아카데미 대항전.
“알아요.”
[다칠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리울 약초였다.
‘오오, 뭐든 말해 보렴!’
‘리울 약초?’
‘그 왜 있잖소, 이 아이가 얼마 전에 학장님의 설산에 가서 가져온 약초.’
‘원하는 만큼 구해 주다마다!’
‘허?’
두 가지를 조건으로 출전을 결정했으나, 사실 일 초마다 후회와 오열을 반복하는 중이기도 했다.
‘다만…….’
“……네?”
“…….”
[가상공간에서도 무모했죠. 저나 백호가 올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요.]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책상 아래 둔 손을 말아 쥔 나는 책망 어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
[…….]
“그건…….”
[이유가 있습니까?]
너희 육식 수인들한테 죽을까 봐.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군.]
‘분명히 뭔가 있긴 있는데.’
원과 나 사이에.
“호옥시.”
“만에 하나.”
[…….]
“그럴 일은 정말 없겠지만.”
묻는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회장.]
“네?”
도리도리.
도리도리.
도리도리.
[…….]
“…….”
[혹시 바보입니까?]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움찔거리는 입꼬리. 사실상 무표정에 가깝지만, 추측이 맞으면 이건 분명 토라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삑.
‘저 늑대 지금…….’
삐진 거야?
시험 기간이 도래했다.
“벤디 레피요.”
“네? 갑자기요?”
“그게 아니면 저 호화로운 분들은 왜 여기 계시는 건데.”
이쯤이면 나도 궁금했다.
“마법 연습에 도움을 받으려고 불렀어? 지금 리리 교수님 눈앞이 아찔하니까 빨리 설명해 봐.”
“아뇨, 그냥 레넌은…….”
“예쁨 담당.”
“노란색 담당.”
“그렇답니다.”
“당장 쫓아낼게요.”
듣도 보도 못한 필수 요소였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76 화>
“학생회장아.”
“네.”
“그 지팡이 계속 사용하려고?”
“……안 되나요?”
“또.”
“또.”
이미 내 마음은 슬퍼졌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음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덩달아 의욕 없이 끄덕여 준 리리 교수님이 부언했다.
“자, 우리는 당분간 이 과녁이 부수어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마법을 소환하는 데에 집중한다.”
“열심히 할게요.”
“그건 왜요?”
이기고 싶은 사람이라.
백금발에 붉은 눈동자.
“네.”
“이기고 싶은 사람?”
“그보다는 혼내 주고 싶은 사람으로.”
“헤일린 이스단이요.”
“저기, 학생회장아.”
“네.”
“꼭 마법 배워야겠어?”
“……왜요?”
이 막말 판다가 진짜.
“어서 오게.”
“그래서, 할 말은.”
사람으로 변한 헤일린은 창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접객용 좌석으로 걸어갈 일말의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학장.”
“…….”
“님.”
‘그래, 아주 바쁘셨겠지.’
“누구 혼담?”
“외동인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뭘 말이냐?’
‘왜?’
‘그냥.’
‘레넌.’
‘왜?’
‘뭐가?’
‘당장 아니라고 대답하거라.’
‘…….’
‘……?’
와.
어쩐지.
‘허허, 내 참…….’
벤디가 입학할 당시 육식 수인들의 식욕에만 치중한 나머지, 성애를 느낄 가능성을 놓치고 말았다.
“-헤일린 학도.”
“할 말 있으면 빨리하지.”
“…….”
“있을 리가.”
“…….”
표정을 굳힌 밀란느 학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약한 사슴의 주변에 아무래도 풍랑이 불어올 모양이었다.
#<77 화>
깜박, 깜박.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붉은 하늘이 보였다.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이 확 들었다.
“……?”
“제가요?”
“어떻게 된 게 마력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 연습을 하지? 적당히 스스로 조절해야지, 무서운 학생일세.”
“레넌과 노랑이는요?”
바삭.
“그런데 왜…….”
“……왜요?”
“…….”
쏴아아-
‘아, 시험 기간이었지.’
‘그냥 기숙사까지…….’
“……!”
‘설마.’
‘제발, 제발.’
찔린다.
가까워지는 은색 검날을 마주한 내가 질끈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찔리고 남을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노리던 어깨 부근을 만져 봐도
고통은커녕 상처조차 없었다.
“흐…….”
‘헤일린 이스단.’
“조심해야지.”
“…….”
“안 돼, 얘는 겁만 줘도 심정지가 오거든.”
맞는 말이었다.
“히, 히익!”
곧장 도망치려는 괴한의 뒷덜미를 잡아챈 헤일린이 쾅,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손가락만 움찔움찔
떨리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기절한 듯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바라만 보던 나는 아차 정신을 차리며 교목에 등을 붙였다. 헤일린의
살벌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는 상태였기에.
“뭔데 이건.”
무서워.
“권한?”
“포기는 했겠지.”
해야 할 일이 남은 나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는 자?”
“얼굴만.”
‘어떻게 하려고요?’
‘아.’
“어디 봐,”
“뭐를?”
“손.”
“아파.”
“…….”
이미 찢어졌거든.
#<78 화>
아프겠다.
“……?”
“여기도 다쳤어.”
“……뭐?”
“…….”
“아닌가?”
위험해, 이 진상.
“또 순간 이동하지 말고.”
교목 하나를 중간에 두고 빙글빙글 돌기를 한참. 이래서는 끝이 없겠다 싶었던 내가 단호히 말했다.
“따라오지 마.”
“따라가고 싶으면?”
그럼 따라와야겠지.
“자꾸 따라오면.”
“…….”
똑, 똑.
‘……진짜.’
“더 만져 줘.”
제발 맥락 좀.
결국 나는 꽈악, 온 힘을 다해 교복 타이를 조이고 말았다. 사자의 짧은 비명이 교정에 울려 퍼졌다.
사슴 영역, 페트리온.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명한 대로요. 오늘부로 이 농장은 마탑의 관리하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허가받지 않은 이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소.”
“또한 농장은 원래 주인이 그대로 관리하기로 한바, 관리자 및 그의 가족은 마탑의 보호 아래에 둘
예정이오.”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자 가문에서 제시한 3 개월의 기한이 다 되어 가서 조급한 와중에, 마탑까지 나타나서 방해하는 실정.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를 흘끔거린 모니는 살그머니 스카론의 옷자락을 당겼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지?”
“할아버지는 육식 수인이죠?”
“그래, 늑대 수인이란다.”
“늑대! 엄청 멋지다!”
“무섭진 않니?”
“전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게다가 지원한 자리가 일개 학생회 임원인 사실도 모자라, 그마저도 벤디에게 거절당해 입회 희망자 2
호에서 그쳤다.
‘고귀한 차기 마탑주가…….’
어디 그뿐인가.
“할아버지?”
“흠…….”
여태껏 원은 수많은 혼담을 걷어차는 걸 넘어, 이성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 님, 오늘에야말로 혼인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어쨌든 원에게 벤디 레피의 존재가 무거워진 이상, 앞으로 벤디 또한 스카론이 모실 대상임은 자명했다.
“역시.”
“이게 뭐지?”
“…….”
더더욱 심정이 복잡해진 스카론이 배지를 꾹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지위는 6 소대 행동대장인
모양이었다.
“흠…….”
“이걸 보거라.”
“예?”
웬스턴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지나치게 잔잔했다. 이미 분노를 토하는 단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가주님…….”
웬스턴의 손에 있는 궐련이 홀로 타들어 갔다.
“…….”
“어쩌면 마탑이 나타난 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벤디 레피가 마탑과 관련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79 화>
“징계위원회를 열까요?”
“……알잖아요, 저 담 작은 거.”
도리도리.
도리도리.
“좋은 결론이네요.”
“네?”
“……멀쩡한데요?”
“아니에요, 이걸 봐요.”
꼴깍.
“봤어요?”
“아, 음.”
‘저 성질머리에 설마…….’
‘친근감이라도 생겼나?’
착한 생각.
“방금 다 봤어.”
“……뭐를?”
“모함이야.”
“더 볼래?”
“응.”
딸꾹.
‘아직도 저기압이네.’
‘……냉각 마법?’
마법 지팡이로 냉각 마법을 흩뿌린 메이지 로튼이 문 뒤에서 살며시 나타났다. 이 날씨에도 검은 로브를
두른 모습이었다.
“아, 그건,”
“저희 마개동 부원들이 말하길…… 소심한 부원들에게 가해지는 출전 압박을 대신하기 위해 참가하신다고
…….”
‘아니, 그거 아니야.’
“아카데미 대항전?”
“마법부 대표라고?”
“회장, 그런 얘기 한 적 없지 않나요?”
앗.
“…….”
원과의 통신 이후로 사용해 보긴 처음. 손을 뻗지 못한 채 망설이자, 안나의 타박이 날아와 꽂혔다.
“학장님, 웬일이세요?”
[이번에…….]
“네, 맞아요.”
그러시구나.
“귀찮아, 그런 거.”
“제안이요?”
“왜요?”
“하이에나와 악어 수인들이 시비가 붙어서요. 단체로 치고받은 탓에 학장님께서 연회를 아예 없애
버리셨으니까.”
“네.”
[뭐지?]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제대로 준비할게요.”
“…….”
‘하계 방학…….’
#<80 화>
“아아아아악!”
“또 올라올 사람?”
저걸 어떻게 이겨.
분명히 얄팍한 목검을 휘두르는데, 어째서 대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
“와,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
‘뭐지?’
“……치워.”
“음?”
바로 단상 위에 오도카니 앉은 새끼 사자 때문에.
종합부 총괄 교수, 밀리엄 교수는 파리한 낯빛인 학생들을 안쓰럽게 살폈다. 무리도 아니었다.
‘있겠냐고.’
“…….”
‘하지만…….’
“여기 이름 옆에 서명 꾹, 한번 부탁해요.”
꾹.
보고서에 사자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음……?”
“복수 전공 신청서입니다.”
“잠깐. 체술은 몸에 마력을 모아 육탄전을 벌여야 하네. 대표로 나가게 되면 마법 사용은 불가,”
체술의 기초만 안다면, 원은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웬만한 실력자는 거뜬히 넘길 수준이 아닐까.
“목숨은 하나.”
그랬지.
“아무도 없나?”
그냥 제 할 일 하기 바쁜 자.
“아아.”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 생텀 교수가 뒷짐을 졌다. 박수를 왜 보내나 싶었지만, 딱히 안 보낼 이유도
없었다.
“그럼 마법부 대표로 나서 준 학생회장을 위하여, 박수.”
너는 또 뭘 쑥스러워하고 있는 건데.
생텀 교수의 못 미더운 눈길이 벤디의 정수리에 꽂혔다. 대항전 단상에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기권 패 할까
걱정되는 체격이었다.
#<81 화>
“학생회장아, 이거.”
“이게 뭔데요?”
“네가 마법부 교수님들한테 부탁한 거.”
“아……!”
“감사합니다. 다른 교수님들께도,”
관심 꺼, 이 육식 동물들아.
“왜…… 쫓아오십니까?”
두두두.
두두두두.
자박자박, 저벅저벅.
자박자박. 저벅저벅.
‘이상하네.’
“물론,”
“물론?”
“안 돼.”
“…….”
반쯤 몸을 튼 벤디가 뒤를 돌아봤다.
“……지야.”
“뭐?”
“레넌 너도 마찬가지라고.”
비밀이 많은 건.
레넌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웃음이 자리 잡았다. 때때로 위화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위험한 미소였다.
“…….”
레넌이 있었기에 권한을 노리는 무리도 접근하지 못했고, 이제야 둘만 남아도 대화가 가능할 만큼
경계하지 않게 되었는데.
“아쉬워 보이네?”
이내 벤디는 뒤로 물러나며 레넌과 거리를 벌렸다. 스르륵, 그의 손가락 사이로 주홍색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약간.”
그놈의 군고구마.
‘아.’
큰일인데.
‘이걸 열어 말아.’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상자를 열지 못하게끔 손을 옭아맸다. 달칵, 달칵, 불안한 손끝이 상자 고정 장치를
배회했다.
으.
‘오늘.’
‘…….’
‘…….’
‘리울 약초.’
#<82 화>
“…….”
시야에 들어온 건 바닥에 떨어진 푸른 상자, 작은 손에 꽉 틀어쥔 리울 약초. 그리고…… 발치에 쓰러져
있는 벤디였다.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비껴가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바닥에는 밀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진 상태.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 있어야 할 송곳니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슴 수인으로 변한 모습.
다시 봐도 낯선 외양이었다.
금방 죽을 것처럼 생겨서는.
또 저 약초.
왜일까.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거슬렀다. 제 몸에 대한 단서이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내려다보던 헤일린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벤디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봉인?’
“흐…….”
‘삼키질 못하네.’
“엄마…….”
‘성공…… 인가?’
마냥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어릴 적 내가 방대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다, 숙부를 의식한 부모님이 마력을 봉인한 게.
‘숙부 때문에…….’
‘더는…….’
휘둘리지 않아.
‘창문이 왜?’
‘얘가 왜 여기 있어?’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그럴 리가, 늘 잘 잠그는데.
그러나 확신하자니 어젯밤의 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당장 어디에서 쓰러졌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니까.
‘조금 자랐나?’
갸르릉.
‘나 참.’
아카데미 대항전 3 일 전.
“뭐? 그럼?”
“주최 측에서?”
“그래.”
“난들 알아.”
평범한 마법사가 체술부 대표로 나온다고 하면 코웃음 치겠지만, 원 리오나드는 얘기가 다르니까.
“……그놈은 또 왜?”
“난들 알겠냐고.”
“피차 마찬가지야.”
“헤일린 이스단.”
“…….”
“못 들은 척하지 마.”
“그게 가장 이상해.”
“벤디 레피.”
“네놈은 대체 알아 온 게 뭐야?”
앞으로 3 일.
퉁, 데구르르.
“…….”
“……저기, 학생회장아.”
“네?”
“위를 좀 봐 주라.”
깜박깜박.
저 경우 없는 늑대.
“원 리오나드요.”
뚝.
‘내가 싫어졌나?’
코에 입 좀 맞추는 게 뭐라고.
“노란색 담당은.”
침울해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벤디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가출했어요.”
“그런다고 돌아올까요……?”
마력 조절에 실패하여 과녁을 부수고 날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현재는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만 닳은
상태였다.
‘오, 이건 제법…….’
학생회 마차에 오르려고 난동 피우는 야닉을 뒤로한 안나, 신시아, 그리고 메이지까지 마차에 탔다.
“하아.”
우울했다.
그렇게 죽어라 따라다닐 때는 떼어 내기 바빴는데, 대항전 장소로 떠날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다.
배낭에 비라도 맞는 날엔 성질을 부리는 데다, 조금만 수틀려도 냥냥거리며 으름장을 놓고.
‘……음.’
‘알 수가 있어야지.’
“신시아.”
그래, 독서 중요하지.
“안나.”
“바빠요.”
고민 상담을 포기한 와중, 옆쪽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고대하는 메이지 로튼이었다.
“……메이지.”
“노랑이요.”
“…….”
“이런.”
“어머나…….”
#<84 화>
대항전 장소는 일곱 아카데미 학생 전원을 수용할 정도로 넓은 대회장이었다.
와아아아아-
우뚝.
“악……!”
코를 움켜 쥔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몸을 돌려 나를 마주한 원이 말했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그건…….”
‘타이는 왜.’
‘단추는 또 왜.’
“무슨…….”
“황송, 아니 송구합니다…….”
“이거.”
그는 돌연 제 복부를 가리켰다.
“……?”
‘이걸 내가 치료했다고?’
턱.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내 송곳니 자국이니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기분이었다.
“…….”
태연히 말한 원은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잠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아.’
“이만 가 볼게요.”
좀 평화로울 순 없는 걸까.
“도와줄까요.”
“네, 도와주세요.”
움찔.
“앞으로는.”
“……?”
기리온 아카데미의 학생은 대부분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인 이들로 이루어진 반면, 리 아카데미는 학자 및
기술을 다루는 학생이 다수였다.
상극 중의 상극.
‘제길, 뭐 이리 늦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칸은 괜히 엉덩이를 들썩였다.
온다.
‘내 자리가…….’
‘사라지고 싶다.’
“…….”
‘이게…….’
하.
만반의 준비를 해 온 스스로가 한심해진 칸이 헛웃음 쳤다. 말 그대로 소문난 사냥터에 사냥감이 없는
꼴이었다.
그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조금만 힘줘도 군청색 교복이 터질 듯한 근육질
몸을 갖고 있었다.
꽤나 호남이었으나 벤디의 시선에서는 진화한 괴력 곰돌이에 불과했다.
“입 닫아, 칸 팰드로.”
벤디의 입에서.
“…….”
왠지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목소리인데.
뭐야 이거.
#<85 화>
“뭐?”
‘왜 이래, 나.’
‘감히 무슨 자신감으로…….’
“…….”
“계속해.”
칸 팰드로는 학생회장석을 관심 있게 주시 중인 학장들과 관중들을 둘러봤다.
“네가?”
“이……!”
“자신감이 대단한걸.”
“네 얘기네.”
“감히 누가 누굴 지켜봐.”
“…….”
“뱀 주제에.”
그곳에서 벤디는 피식, 피식,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그 슬픈 실소가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학생회장들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 밉상 늑대…….’
아주 고오오맙다.
“저게 그 학생회장이라고?”
“그래, 대마법사 로돈도의 초상화를 생각해 봐. 그녀도 겉모습은 피골이 상접한 수준이었다고.”
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벤디의 무위 수준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심지어 벤디가 굉장히 강하다는
전제하에.
“글쎄, 이상하군.”
똑같이 느낀 원이 받아쳤다.
마법부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이름 정도야 알려질 순 있지만, 지금의 관심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좌석 여러 개를 침대 삼아 누워 있던 헤일린이 중얼거렸다.
“누구 하나 반쯤 죽여 놨나?”
그 막대 과자로.
“예, 그게…….”
“빨리 말하지.”
“바, 발 닦개!”
“발 닦개?”
“누가?”
“소문의 근원지는?”
“거기 하이에나.”
“…….”
“너 방금 움찔했어.”
덜컥,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한 야닉은 이내 휙 뒤돌며 외쳤다.
“왜, 뭐! 사실이잖아!”
누가 봐도 제 발 저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방만한 호위!”
척, 뒤이어 원,
“배낭 지킴이!”
“내 말이 틀렸냐? 어?”
“1 호는 나야.”
현실 순응은 빠를수록 좋은 법.
“비상용 빗자루겠지.”
“닥쳐라, 발 닦개 2 호!”
그런 세 사람을 비롯한 야닉에게 관중들의 시선이 모였다. 발 닦개란 모욕을 듣고도 부정을 안 함으로써
소문을 온몸으로 증명한 셈이었다.
“연설이라는데?”
‘방금 뭐라고?’
‘연…… 설?’
‘연설이라고?’
삐거덕, 삐거덕.
저 긴장 어린 발걸음은 분명.
“연설에서 뭔가 할 건가 본데?”
“아아-”
“반갑습니다, 사,”
“…….”
“사슴 여러분.”
아, 제발.
학생회장들이 모인 단상.
‘또…….’
‘나, 큰일 났구나.’
까치발을 들며 손을 뻗은 벤디였다.
‘거만한…….’
더군다나 직전 연설에서 뜬금없이 사슴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그들을 깔보는 조롱의 의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깔끔히 포기한 벤디 때문에, 서로 뽑으려 설치기도 애매해진 학생회장들이 상자와 가까운 순서대로 구슬을
집어 들었다.
‘웬일이람.’
그리고…….
‘이건……?’
부전승!
‘부전승이라니.’
‘지금 이를 악문다고?’
‘부전승을 한 상황에서?’
새삼 오싹해진 학생회장들이 벤디를 돌아봤다. 벤디는 대진표 따위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구석에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대회장을 뒤흔들었다.
‘이게 다…….’
“……네에, 뭐.”
“잘도.”
“…….”
화가 난다.
“하…….”
그리고…….
사실 저 사자가 제일 모를 인물이었다.
‘내 건데.’
이젠 모르겠다.
앞날이 아득해진 벤디가 그냥 눈을 감았다.
와아아아-
“거기, 학생회장.”
“아까의 건방진,”
경고의 말을 남기려던 헤덴은 일순 주춤했다. 벤디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굉장히 불편한 기운 때문에.
“…….”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원과 여전히 쪼그려 앉아 딴짓하는 레넌, 그리고 헤일린의 태평한 하품이 이어졌다.
‘하긴.’
벤디가 친절히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 주자, 그제야 아차 이성을 되찾은 헤덴이 입을 달싹였다.
아, 또다.
“…….”
먼저 앞장서라는 의미구나.
“가자.”
진짜 대항전의 시작이었다.
#<87 화>
“……그런데 저건 대체 뭐야?”
짙은 의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막대 과자 같은데?”
막대 과자의 정체에 대한 토론이 불거진 가운데, 대뜸 S 클래스 방향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안나 스웰든의 목소리였다.
“이 멍청한 하이에나가!”
‘다들…….’
내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
“…….”
“레넌.”
“왜?”
“……일어나.”
“예.”
“네.”
“……준비가 안 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람.
“상관없습니다.”
“저기.”
“잠깐.”
“그게 효율적이야.”
“그게 무슨…….”
“저 오만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
“아니, 나.”
“내가.”
“내가 갈 거라고.”
“아니, 나라니까.”
“내가.”
“가위바위보.”
“…….”
“사이좋게.”
가위바위보의 승자, 헤일린 이스단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아갔다. 더없이 예쁜 웃음과 뚜둑, 어깨
근육 푸는 섬뜩한 소리가 부조화를 이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어.”
‘결승에서는 정말…….’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나만…….
“…….”
‘이대로라면 결승전은…….’
필패.
“하지만 학생회장…….”
“나도 안다, 아무도 우리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겠지. 그런 괴물이 셋이나 있는데. 결승전은 아마 그들의
놀이터가 될 거다.”
“…….”
“질 땐 지더라도, 내가…….”
칸 팰드로는 머릿속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여우 수인 하나를 그렸다.
“반드시 한 명은 꺾는다.”
#<88 화>
큰일이다.
‘어떡하지.’
“회장.”
레넌이었다.
“응?”
“세 번째 경기에서 승자는 결정 나. 체술부의 어떤 늑대가 미끄러지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칸 팰드로.
그렇다면.
“…….”
‘남 탓이나 하는 꼴이라니.’
“나는…….”
“기권,”
“기권?”
‘야닉…….’
야닉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습관적으로 긴 장발을 쓸어 넘겼다. 오늘만큼은 저 장발이 빗자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자, 야닉.”
“좋지!”
“응원 와 줘서 고마워.”
“……?”
“솔직히 말도 안 되게 강하지.”
빗자루 같은 게…….
와아아아아아아-!
“정정하지, 발 닦개 1 호로.”
삐익- 휘익-
검을 놓친 상대의 패배.
“말이 많아.”
“레넌, 그만해!”
우뚝.
“히익…….”
“…….”
“놀랐어?”
드디어 내 차례.
“…….”
“어떻게든 받아 줄 테니까.”
#<89 화>
내게는 딱 알맞은 배낭을 헤일린이 들고 있으니 그렇게 앙증맞아 보일 수가. 어깨에 멘 배낭끈이 팽팽했다.
“내 건데, 이거.”
과연 이게 학생이 맞나.
“잊었어.”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럼 대항전 마지막 경기, 기리온 아카데미와 수인 아카데미의 마법부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펑!
신호탄 소리와 함께 너른 대회장이 환호로 들썩였다. 승패를 떠나 우리가 선보일 대련을 기대하는
함성이었다.
* * *
쾅, 펑!
쿠구궁-
“콜록, 콜록.”
쿵, 다다다.
펑, 다다다.
참으로 애매했다.
쾅, 다다다다.
쿠궁, 다다다다.
벤디는 사력을 다해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어찌나 잽싼지, 곰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치열하고 재빨랐다.
독이 바짝 오른 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펑, 데굴데굴.
“미꾸라지 같은!”
콰쾅, 다다다다.
“서라!”
“저거…… 강한 거 맞아?”
“대련에서?”
“……음.”
바닥을 구르는 몸놀림은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 마법은 또 귀신같이 피하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피, 피해!”
‘누가 사슴이에요.’
첫째, 초장에는 도망 다니며 최대한 상대방의 마력을 소진시켜라. 물론 날아오는 마법을 피하는 건
본인의 몫.
둘째, 어느 정도 소진시켰다 싶으면 무작정 마법을 쏴라. 앞서 마력을 많이 사용한 상대가 버티지 못할
때까지.
“제길, 한 번에 끝내 주겠다!”
‘저렇게 큰 건…….’
그사이, 마법을 완성한 칸이 눈을 홉떴다. 불꽃이 만들어 낸 회오리에 그의 적발이 엉망으로 솟구쳤다.
‘온다.’
‘설마.’
‘아, 안 돼!’
“아직 아닌가?”
기권.
“아직 아니야.”
“얼굴이 너무 가깝네.”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칸 또한 자세를 갖췄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유가 사라진 표정이었다.
“…….”
“…….”
와아아아아-!
“…….”
“이봐, 왜 그래?”
“……누군데, 저거?”
“누구냐니…….”
너희 학생회장이잖아.
#<90 화>
대체 마력 측정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나도 몰라.”
헤일린 이스단을 배낭에 넣어 다니는 벤디와 생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서서히 상식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다.
쿠궁, 데굴데굴.
콰쾅, 다다다다.
‘큰일인데.’
저 하찮은 뒷모습이 학생회장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펑! 콰광!
“학생회장!”
‘무슨…….’
‘으.’
사기를 저하시켰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벤디가 광분한 그들을 외면했다. 혈기 왕성한 육식 수인들의 포효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허억, 헉.”
“제길!”
벤디의 모든 거동이 초보라고 제 감각이 부르짖고 있는데, 소환하는 마법은 하수가 아닌 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방심했군.’
“…….”
‘앞으로 한 번.’
‘어떡하죠?’
‘너무해.’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이었다.
‘엄마는 바람 마법사야?’
휘오오오-
흡사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지팡이가…….’
쿠르릉-
“……!”
앞선 수많은 대련에서 튕겨 나온 마법에 맞은 데다, 칸과 벤디가 마법을 소환하며 일으킨 진동을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뭐야?”
“피해!”
째깍, 째깍.
째깍.
콰아앙!
“쿨럭, 쿨럭.”
판상이 무너지는 순간, 때마침 마법을 소환하고 있던 학생회장이 판상을 처리한 것이었다.
‘그럼…….’
“학생회장은?”
대회장 사이로 옅은 바람이 불어 들며, 단상을 뒤덮은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
헤일린 이스단.
여기가 대련을 위한 단상, 그리고 관중이 지켜보는 장소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기 있다!’
“저…… 미친…….”
“하.”
세 사람은 벤디가 단상에 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마법 방어용 로브를 착용하지만, 로브가 보호하는
범위는 육체 단단한 육식 수인이란 기준에 한정되어 있음을.
“…….”
치직, 치지직.
“수인 아카데미.”
“…….”
“……실격.”
#<91 화>
실격.
“……뭐? 실격?”
“터무니없는!”
“판상이 무너지는 정도는 주최 측에서 대응할 수 있었고, 결국은 출전자들의 의지로 일어난 일이기에…
….”
“주최 측에서 대응했을 거란 보장이 있어? 한발 늦었으면 우리가 판상에 깔리게 생겼는데!”
“잡아.”
“자, 잡아!”
“저 두 마리 잡아!”
“다리부터 붙들어!”
“조용.”
“품위를 지키게.”
“자.”
* * *
“……깨어나려는 것 같은데요?”
“어머.”
깜박.
깜박, 깜박.
“…….”
‘그렇다는 건…….’
나는 휙 소리 나게 안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됐어요? 결과.”
“음, 그게 말이지요…….”
“실격 확정.”
‘그 결과가…….’
“그런가요.”
“두 번은 안 돼요.”
“……?”
“혼나.”
두 육식 수인에게 압박당하는 중인 내가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메이지를 바라봤다.
“회장.”
“안나, 야닉은요?”
“저기, 그 전에…….”
“그…….”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
싸늘하다.
“인사하러 나간 거 아니에요?”
“무슨 문제요.”
“문밖에…….”
* * *
“학생회…… 아이고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위험인물이 서 있었다. 기리온 아카데미의 칸 팰드로였다.
“대화…… 잠시 가능한가?”
‘뭐야?’
“이건…….”
“나도 내가 이길 것 같았어.”
뿌득, 순간 칸에게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마에 혈관이 돋아났다가 사라진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
악담이었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세.”
#<92 화>
드르륵.
“벤디 학도.”
“네, 말씀하세요.”
“굳이 자네가 나서서 마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위험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네. 그곳에는 판상 정도야
원거리에서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이가 많았으니까.”
“허나.”
“……?”
“잘했다.”
흠칫.
“밀란느 학장님…….”
“학장님, 조금 전에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요?”
“그리고 벤디 학도 자네도.”
“들어주시려고요?”
“음…….”
“시세온 말인가?”
“네, 정확히는.”
잠시간 뜸 들인 나는 곧 또박또박 말했다.
“이스단 가문이라…….”
“호오.”
“그럼……?”
작은 손지갑이었다.
물론 속이 텅 빈.
* * *
그중에서도 원과 레넌, 헤일린 그리고 야닉이 탑승한 마차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어이, 발 닦개들!”
여유만 생겼다 하면 학생회장에게 날아들던 칸의 불줄기, 그리고 마법 경로를 바꾸던 학생회장의 모습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그거면 웬만한 치명상은 막아 낼 텐데, 뭐 걱정이라고 네놈들이 단상에
난입하는데!”
성가시네, 저거.
‘밖에 꽂아 버릴까.’
그러한 고민을 꿈에도 모르는 야닉은 발로 마차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신줏단지.
놀랍게도 너무 맞는 말이었다.
“…….”
이상하지 않나.
그러니 알 수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원의 금안이 가늘어지고,
‘나만 아는 게 아니었네.’
‘눈치만 빨라서는.’
냉각 마법을 걸어 준 메이지가 마개동 부실로 떠나고, 끄적끄적, 벽보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던
벤디는 문득 너른 학생회실을 응시했다.
적막하다.
소파에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킥킥대며 가십지를 읽는 백호가 없었고, 세상 고고한 외모와 태도로 선반을
뽀독뽀독 닦는 늑대가 없었다.
양손에 턱을 괸 벤디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형형하게 쳐다보던 세 사람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대항전에서 뒤를 좀 맡긴 일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
꿀꺽.
“이게 뭐죠?”
“부탁할게요, 그럼.”
‘이걸 붙이라고?’
* * *
지난 삼 일.
“할 말이라도?”
“아뇨, 그저…….”
“안 가.”
“정말요?”
“그래, 다시는.”
더 이상 그 가련한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난 수행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기쁩니다.”
후. 잠깐 뒤로 기댄 원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 확실치는 않지만, 혼담 가문이 이스단 가문, 치직, 이라고, 치지직.]
‘말도 안 되는.’
그나마 다행인 건 벤디와 헤일린 이스단은 서로가 혼담 상대임을 모르는 눈치인 점이었다.
그 작자가 육식 수인과의 혼담을 추진했고, 벤디 레피가 아카데미로 도망 왔다. 그렇게 가정하면 앞뒤가
어느 정도 맞았다.
‘혼담?’
막연히 벤디가 기억을 되찾기를 기다리기에는 주변에 거슬리는 게 너무 많았다. 더욱이 원의 인내심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
“누구지?”
“아, 그게…….”
“학생회장입니다.”
“…….”
“…….”
“찾아온 이유는?”
“…….”
“데리러 왔어요.”
흘끔.
‘……순순히 따라오네?’
‘지금…….’
#<94 화>
저놈 왜 저러냐.
글쎄요…….
“밖은 더운걸.”
‘살벌하구먼.’
실상 저게 레넌의 원래 모습이었다.
밀란느가 가주에 의해 신전에 보내진 레넌을 마주쳤을 때, 레넌은 이미 에던트 가문에 물들대로 물든
후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레넌에게 드리워진 에던트 가문의 그림자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들어오게.”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벤디가 눈부터 내밀었다. 학장실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곧 소파에 닿았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아주 잘 왔다.”
제발 좀 데려가라, 저 놈팡이.
‘또…….’
휘둘리는 느낌.
과한 감정이었다.
‘내가 졸업을 허가할 때까지는 네 멋대로 에던트 가문에 돌아갈 수 없다, 약조하거라.’
“……레넌?”
‘강하게 나가라.’
‘어떻게 그래요.’
“……!”
두 사람은 뒤늦게 자신들이 후려치듯 주먹을 휘둘렀단 사실을 깨달았다. 스르륵, 그들은 모른 척 주먹을
풀며 뒷짐 졌다.
“무슨…….”
“데리러 왔다니까.”
뭔데 짜릿하지.
“학생회실, 안 가?”
레넌의 시선이 제 손목을 붙든 손과 긴장 어린 벤디의 표정을 오갔다. 사슴치고는 제법 용기 낸 육식
수인과의 접촉이었다.
“…….”
레넌에게서 허한 숨이 흘러나왔다.
손목에 닿은 온기를 한 번.
말간 얼굴을 한 번.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회장.”
“왜?”
“……왜?”
“짜릿할 것 같아서.”
으.
하지만 혹여 안 간다고 변덕을 부릴까, 레넌의 교복 타이를 단단히 붙든 벤디는 학장과 비서에게 꾸벅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 살펴 가거라.”
“먹이는 고구마일까요.”
“일리 있는 추측이군.”
* * *
늦은 오후.
천천히 움직인 붉은 눈동자가 학생회실이 있는 건물에 닿았다. 동시에 밤새 도박장을 전전해도 사라지지
않던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
‘어디 외간 짐승한테…….’
성에 차지 않는 기분.
“뭐? 어디?”
‘뭐야?’
‘무슨…….’
얼굴을 표현하는 큰 동그라미 한 개와 다리와 꼬리는 그리다가 만 수준. 삐뚤빼뚤 그린, 형편없는
초상화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94 화 삽화
[노랑이를 찾습니다.]
학생회장 직인이 찍힌 노란 짐승 수배지였다.
#<95 화>
수치스럽다.
그리고 진짜 못생겼다.
그게 첫 감상이었다.
‘어딜 봐서 이게 나야.’
그리고…….
“…….”
클래스메이트인 라일라였다.
“저, 저 아닙니다!”
다 들린다.
심지어 저 음침한 작당에 동조한 몇몇 학생들이 슬그머니 마개동 무리에 끼어들었다.
“…….”
“그냥, 알아 두시라고.”
“노랑이, 또 잡을 사람.”
“…….”
* * *
적막한 학생회실.
맥이 탁 풀린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지친다.
“…….”
다리를 달랑거리며 창문으로 스민 석양을 보고 있자니, 문득 헤일린 이스단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고구마 밭?’
너무 멋이 없는데.
“언제 왔어?”
“아까. 네가 불렀잖아.”
천천히 눈을 뜬 그가 쯧 혀를 찼다.
“무슨 냄새?”
“……나 아니야.”
“너 아닌 걸로 해, 그보다.”
“왜?”
“…….”
“-앞발로.”
“그래, 좋아.”
“…….”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아.”
“아무튼.”
“……고마워.”
그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올려 봤다.
“뭐가?”
“고마우면.”
“쓰다듬어 줘.”
개야 뭐야.
‘무서운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자, 손끝에 머리칼이 닿았다. 생각 이상으로 부드러운 금발이 손끝에서
갈라졌다.
“짧아.”
나한테는 그게 최선이야.
“아, 맞다.”
매번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집게 핀?’
‘그때의 일은…….’
#<96 화>
더욱이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는 가주가 부인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다소곳해지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틀었다. 통신구가 울리고 있었다.
[음, 그게 말이네…….]
[그건 아니고.]
“음?”
약간 맛이 간 사슴 하나가 갈 테니까.
* * *
“외출증은 끊었어?”
“…….”
“……레넌.”
“왜?”
‘웃기지 마.’
“…….”
“불만이라도?”
“없어요.”
“그럼 왜 쳐다보는데요.”
“…….”
돌아온 노랑이였다.
‘이게 뭐람.’
오른쪽에는 백호가 누워 있고, 책상 중간에는 새끼 사자가 늘어져 있으며, 왼쪽에는 오만한 늑대가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
노랑이가 미주알고주알 말을 전하는 게 가능한 존재도 아닌데, 도대체 헤일린 이스단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러나 확단하자니…….
아무리 봐도 헤일린 이스단이 아니라 일개 노랑이였다. 애초에 새끼 짐승은 수인일 수 없기도 하고.
“뭐 해?”
“무슨 짓입니까.”
“그, 그냥…….”
얄미워서 한번 찔러 본 건데.
* * *
푸르릉!
여우 수인일 때는 해피가 묘하게 더 사나워져서, 이렇게 마법이 풀렸을 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데리러 가지 말 걸 그랬나.’
“……?”
‘……어?’
우뚝.
‘웬스턴…… 레피?’
“무슨 대원?”
일순 원은 말을 뚝 끊었다.
푸르릉, 푸르릉.
‘이건…….’
푸르릉.
“……?”
“원 님.”
“아아, 그렇군요.”
“일단은.”
이상할 정도로 미련이 남는 마구간을 뒤로한 그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 봤다. 캄캄한 밤하늘에 만월이
걸려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물론 세월이 거듭될수록 인간에 가까워져 보름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나, 원처럼 순혈에
가까운 자는 예외였다.
스카론과 헤어진 원은 뻑적지근한 어깨를 풀었다. 억지로 인간형을 유지하려니 마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아악, 원의 몸에서 빛이 일며 이윽고 보통 크기보다 배나 큰 늑대가 드러났다.
* * *
헉, 헉.
‘그 늑대…….’
진짜 뭐야.
‘웬스턴.’
부끄러워서.
무서워서.
어째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마개가 머릿속 어딘가를 꽉 틀어막고 빠지지 않는 것처럼.
“……!”
‘……육식 동물.’
본능적으로 달아나기 위해 발이 움직였다. 그토록 연습하고 연습한 마법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서워.’
“아!”
바쁜 시간을 보내며 무뎌진 진실. 나는 이곳의 유일한 초식 수인이란 사실이 온몸에 새겨졌다.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던 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터벅, 터벅.
‘늑…… 대?’
참고 있던 숨을 탁 터뜨린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왜…….’
“흐…….”
‘너 육식 동물이야?’
‘나를 잡아먹어.’
전부 내가 뱉은 말이었다.
뒤이어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년이 아른거렸다. 어두운 숲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색
눈동자도.
‘죽지 말고 기다려.’
기억났다.
“너…….”
“그때 그…….”
툭, 투둑.
“…….”
흠칫.
“말했잖아.”
#<98 화>
……또 이런 얼굴.
‘어쩌자고…….’
‘나를 잡아먹어.’
으.
으으.
제발.
“이-”
“……이?”
원은 대뜸 앙다문 이를 드러냈다.
“그…….”
“그래 보입니다.”
“그래서요?”
“…….”
“그때 했던 말은 전부 취소할게요.”
“취소하세요.”
“……!”
“굽힌 적 없,”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흘긋 나를 올려 본 원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잡아먹으러.”
“……!”
‘구해 주지 말걸.’
바야흐로 암흑이었다.
* * *
학생회 회의실.
‘머리 아파.’
“후…….”
우선 원이 나를 찾아다닌 이유.
“식욕.”
“…….”
“네?”
“물론이죠.”
이미 준비야 끝났지.
학생의 본분은 자고로 교복. 결코 드레스 따위의 연회복을 준비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분장이요?”
“괜찮아요, 회장.”
소박맞는 나를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메이지가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 든 나는 큰 감흥 없이 읽어 내렸다.
보통 밤에 개최되지.
‘안 돼.’
“연회는 필수 참석인가요?”
“…….”
“제 마음은 이미 연회장이에요.”
* * *
‘문제는…….’
그뿐인가.
내 죄요, 내 불찰이었다.
‘저거다.’
까마득한 선반 위, 가면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질질질, 삼단 사다리를 끌고 온 내가 그 위로 올라섰다.
‘조금만 더.’
탁.
“잡았……!”
쿠당탕, 쨍그랑!
“아으…….”
‘가면은?’
‘가면이…….’
#<99 화>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세상이 커다래진 걸까.
작아진 거구나.
딸꾹.
‘나 지금…….’
‘어떡해.’
“내가 찾아볼게.”
“네, 내일 뵙겠습니다.”
가지 마, 괴력 곰돌이.
외치던 나는 돌연 입을 텁 가로막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왜?’
* * *
“회장?”
‘너무 비싼 거라 그런가……?’
끼이익.
“…….”
‘기회는 한 번.’
‘지금이다.’
아예 다른 동물로 변해 버리다니.
노란색 담당도 며칠 가출했다고 난리가 났는데, 또 비슷한 걸 잃어버리면 벤디의 반응은 뻔했다.
‘음.’
“가자.”
……어디로?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벤디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너무 약한 거 아닌가.’
* * *
S 클래스 남자 기숙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짜증 날까.
물끄러미 레넌을 살피던 그는 이내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거슬릴 예정인
게 저 작자였다.
“잠깐.”
붉은 눈이 짙어지는 걸 발견한 레넌은 잽싸게 방 안으로 달아났다. 찰칵, 방문을 걸어 잠그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왜…….’
‘왜 그딴 걸 빼앗고 싶은 거지?’
* * *
저녁 늦어서야 정신을 차린 벤디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어떻게 된 거더라.
‘가자.’
‘여긴 어디야?’
‘설마.’
‘어떡하지?’
정상급 자제의 기숙사는 격이 다르구나. 소담하고 깨끗한 제 기숙사를 초라해지게 만드는 규모였다.
아니면 두 가지 전부.
“일어났네?”
“…….”
꼴깍, 벤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고작 물 마시는 행위가 뭐라고 저렇게 아찔할 일인가 싶었다.
‘안 돼.’
‘좋아.’
일단 나인 걸 알리는 거야.
‘다람쥐는 보통 네 발로 뛰지 않나.’
나, 학생회장.
교복 타이를 매는 시늉.
네 호위 대상.
검을 척 뽑아 드는 시늉.
“…….”
‘회장 거 맞네.’
“됐어?”
‘되긴 뭐가 돼?’
‘그러고 보니 저 백호…….’
페트리온 숙소에서도 상의를 탈의한 채 자고 있었지.
‘착한 생각.’
그때의 경험을 미루어, 침착하게 레넌에게서 등 돌린 벤디가 코를 붙잡았다. 코에서 피 분수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안나, 나는…….’
방탕한 사슴인가 봐.
* * *
‘이래서야…….’
어떻게 나인 걸 알리지.
‘저거다.’
글자.
글자를 짚어서 의사를 표현하는 거야.
‘……!’
깜짝 놀란 내가 발이 엉키며 엎어졌다.
‘온다.’
대충 걸친 가운 때문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었다.
[레넌 님.]
“아, 이거?”
‘하지 마.’
“내 주인 건데 대신 맡아 주는 중.”
[주인이라니요?]
[감히 누가 레넌 님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있어, 예쁜 사슴.”
그게 누군데.
이곳에 사슴이라고는 나와 해피밖에 없지 않나. 그리고 해피는 예쁨과 거리가 멀었다.
……예쁜?
내 이럴 줄 알았다.
찰싹, 찰싹. 레넌의 손톱을 내리치며 응징하는 가운데, 통신구 속 남자가 말을 이었다.
“맞아, 내년으로.”
“그런 건 아니고.”
[준비는 끝났습니다.]
“아니.”
“목을 치러 가는 건 나 혼자야.”
[레넌 님!]
[레넌 님…….]
“시무룩하네, 얼굴이.”
* * *
더군다나 약효가 풀리는 시간과 장소도 문제였다. 만약 밤이면 영락없는 사슴 수인의 모습일 테니까.
‘아니면 원에게……?’
‘너는 잠이 와?’
이 화상아.
제일 큰 문제는 자꾸만 레넌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저 버릇없는 가운. 심신을 어지럽히고 번뇌를
유발하는 사악한 가운이었다.
‘저거부터 처리하자.’
‘더는 못 해.’
* * *
하계 방학을 앞두고 아카데미의 모든 강의가 막을 내렸다.
“…….”
‘꿈인가.’
무심코 뒷머리에 손을 넣으며 끌어안던 그가 다시금 경직됐다. 꿈이라기에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 다람쥐.’
부스럭.
“나와, 레넌 에던트.”
일순 레넌의 이마에 드물게 핏줄이 섰다. 간밤에 자신을 덮친 가짜 다람쥐와 이렇게 헤어질 순 없었다.
쾅쾅쾅!
방긋 웃은 그는 살살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꿈이야, 더 자.”
동시에 콰직!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방문이 박살 났다.
#<101 화>
“…….”
심장이 바닥에 쿵 곤두박질치는 느낌. 소심한 사슴이 왜 놀라기만 하면 기절하는지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
현실이었다.
노란 돌이 된 헤일린에 이어 검은 돌이 되고 말았다.
“……?”
“간밤에 덮칠 줄은 몰랐어.”
“…….”
“이제 나 책임져야겠다.”
‘……회장이라고?’
‘돌아왔구나.’
‘나 지금…….’
일단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전부 다 설명할게.”
‘이게 아닌데.’
‘저 또라이……!’
“실수지?”
“…….”
“실수라고 말해.”
“다시 돌아갔네.”
“하.”
곧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포기한 헤일린이 레넌을 응시했다. 뭐가 됐든 저 고양이를 죽여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찾아낸 건 나야.”
“못할 것도 없지.”
다람쥐가 없었다.
“…….”
* * *
“찾았어요?”
“기숙사도.”
‘연회는 필수 참석인가요?’
‘……절대 안 돼.’
‘대항전 덕분에 평판이 좋아진 만큼, 학생회장 자리를 공고히 할 절호의 기회인데!’
방학을 맞으면 그때의 감흥도 흐릿해질 테니, 전교생이 모이는 하계 연회만큼 본인 위치를 각인시키기
좋은 곳이 없었다.
“부회장.”
신시아는 거친 숨을 내뱉는 안나를 불렀다. 마침 밀란느 학장이 그들이 선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회장의 의상이라.’
“추측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
“네?”
“…….”
* * *
야닉 펠에게.
혹시?
말을 말자.
“콩만 한 게 어디 눈을 부라려?”
움찔.
“……!”
천잰가.
#<102 화>
‘세상에.’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야닉을 올려 봤다.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릿빛 얼굴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어.’
“하얀 고양이.”
“……!”
“노란 고양이.”
“……!”
“재수 없는 개.”
“……!”
전부 정답이었다.
“야수 같은 곰?”
신시아도 아니라고.
‘왜 나만 빼고 말해.’
“창고.”
“…….”
“너…… 설마 학생회장이냐?”
“의무동으로 가자고?”
이쯤이면 진짜 천재 아닌가.
‘다른 건 다 한 번에 맞춰 놓고 왜 나만 창고야.’
* * *
때는 작년.
개발 목적은 도청.
‘그 박쥐들.’
정말 온갖 걸 다 만들었구나.
‘아차, 연회.’
‘갈 수 있다면 가야지.’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자리인데, 이대로 불참해서 빈자리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특히 안나가 고대했던
만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
하지만…….
‘큰일이네.’
경악한 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야닉은 의관의 어깨를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난 이제…….
괴력 곰돌이한테…….
“하하하!”
죽었다.
* * *
‘진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뿐인가.
밀란느 학장은 단상을 내려가며 안나를 곁눈질했다. 학생회장은 대체 어디로 갔냐는 눈빛.
“…….”
긴 정적 후.
“뭐야, 학생회장은?”
“불참이야?”
“음…… 학생회장?”
“가라, 학생회장!”
“학생회장이라는데?”
“뭐?”
“어디, 어디?”
“윽!”
‘놓치면 다친다.’
“야 이놈아!”
“큭! 뭐야!”
“학생회장이라니까!”
“뭐라고요? 이게?”
야닉의 외침에 안나가 당황한 사이, 벤디는 그녀의 이마를 디딤돌 삼아 단상에 착지했다.
찍찍.
“…….”
‘우린 언제쯤,’
‘제대로 된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 * *
한 마디를 수십 마디로 끝낸 안나가 스웰든 가문 마차에 오를 즈음, 반대편에서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
‘드디어…….’
사자 영역으로 향할 시간이구나.
도도도.
타박타박.
저벅저벅.
“후…….”
타박타박.
저벅저벅.
결국 완전히 멈춰 선 내가 예고 없이 홱 뒤돌았다.
#<103 화>
누가 봐도 며칠 떠날 준비를 마친 행색이었다.
“저건 뭐야?”
“그러니까 뭘 넣은 건데?”
“멀미약.”
모를 수밖에. 밀란느 학장님과 나, 그리고 이스단 가문의 실권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따라오지 마, 경고했어.”
‘저 맹수들이 진짜.’
멈춰 선 나는 길게 심호흡했다.
‘또 나 혼자만 숨차지.’
“…….”
괜히 모자만 불쌍했다.
“싫어요…….”
가장 먼저 노란 짐승.
“어딜.”
가문에서 일방적으로 혼담을 진행한 거라면, 헤일린 이스단은 아직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
“통과.”
“너는 안 돼.”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니야.”
“내가 언제,”
“책임져야지.”
“…….”
“나는 방학 때 딱히 갈 곳이 없는데.”
“……그래서?”
“따라가면 안 돼?”
수심 하나 없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일순 움찔했다.
“……통과.”
“저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마탑에 안 가 봐도 돼요?”
“원래 자주 안 갑니다.”
‘궁금한 게 많지만…….’
“나를 두고 가려고?”
끄덕끄덕.
“진짜 두고 가시겠다?”
끄덕끄덕.
“기억나요?”
경직된 내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다 기억난다고.”
“그거 말고.”
그럼 뭔데.
“계약?”
‘…….’
‘오…….’
“대가를 아직 받지 못한 것 같은데.”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밉살맞은 속셈이 그득했다.
“데려가면.”
“…….”
“하는 거 봐서요.”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 * *
벤디는 창문으로 아카데미 건물을 바라봤다. 청량한 하늘 아래, 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건물이 멀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혼담을…….”
‘혼담 거절이라.’
약혼자인지 버러지인지.
캬옹.
멀미는커녕 상쾌할 지경인 헤일린이 콧바람을 들이켰다. 꿉꿉한 여름 바람 냄새가 봄바람처럼 향긋했다.
기고만장한 노란 짐승의 뒷모습을 본 원과 레넌은 끝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104 화>
어쩔 수 없었다.
자장, 자장.
그곳에는 레넌이 늘어진 노란 짐승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할 말 있어?”
“밥이라도 먹여 둬.”
“…….”
기분이 좋아 너그러워진 건지, 아니면 멀미에 시달리는 노랑이가 불쌍한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사자 영역, 시세온.
‘여기가…….’
사자의 본거지.
‘더는 못 보겠다.’
‘……모르겠다.’
* * *
후문 앞에 덩그러니 선 나는 뒤를 돌아봤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덜 흔들리려나?’
‘……이게 후문이라고.’
‘설마.’
이제야 물밀듯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군인…… 인가?’
“…….”
“…….”
“앗!”
이곳이 이스단 가문이긴 하지만, 신분도 불분명한 남자에게 다짜고짜 노란 짐승을 넘길 순 없었다.
“아……!”
“……!”
“하…….”
“다친 곳은.”
도리도리.
“……뭐 하는데요.”
“회장 아닌데.”
“…….”
“누구게.”
“죽일까.”
원이 레넌의 머리채를 잡은 와중, 탁탁, 별관에서 검은 정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빠르게 뛰어나왔다.
“실례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사라 이스단.
‘드디어.’
* * *
“감히……!”
“예? 사라 님의……?”
“너.”
“예?”
대체 왜…….
“…….”
#<105 화>
벤디 일행이 별관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신경 쓰인다.
“오는 동안 마차 멀미를 심하게 해서요. 곧 깨어날 텐데, 그때까지만 제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와장창!
“에구머니!”
쨍그랑!
“죄, 죄송합니다!”
쿠당탕!
“어이쿠!”
“……?”
벤디는 입을 한계까지 벌린 고용인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헛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일행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내놔요.”
“이리 줘.”
“내놔요.”
“이리 줘.”
“뭐?”
“무슨…….”
“…….”
‘……에서도 같이 잤는데.’
‘……같이 잤는데.’
대체 언제.
* * *
‘좀 괜찮아졌나?’
“…….”
나는 거울 표면을 살짝 쓸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사라진 송곳니. 그리고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올라갔던 눈매가 제자리를 찾았다.
* * *
곧장 낯익은 가구와 소품들이 시야를 채웠다. 어딘지 공기마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마지막 기억은 흔들리는 벤디의 얼굴과 흔들리는 세상, 흔들리는 정신…… 우욱, 재차 멀미를 할 뻔한
헤일린이 생각을 멈췄다.
“일어났어?”
‘밀색…….’
아니, 밀색이라고?
뒤늦게 고개를 번쩍 치켜든 헤일린이 멍하니 벤디를 올려 봤다. 세 번째 보게 되는 원래 모습이었다.
‘나도 가.’
“괜찮겠어?”
“가자.”
“회장, 왜 그래?”
“잠깐.”
“…….”
서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보게 됐는지 모르는 그들이 미간을 구겼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사라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라 님?’
‘저자가 왜 여기에…….’
“……?”
“……??”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 동시에 일행의 걸음이 멈췄다. 별관에 자리한 사라 이스단의
집무실 앞이었다.
사실 홀로 이곳에 왔다면 두려움에 떨기 바빴을 텐데, 이들이 따라와 줬기에 그리 무섭지 않았다.
말을 고르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인 벤디는 후드를 슬쩍 들추어 얼굴만 드러냈다. 이내 열없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다녀올게.”
* * *
“사라 님, 비아입니다.”
“올해 학생회장이군.”
“음?”
그녀의 반응에 벤디는 확신했다. 레피 가문과 혼담이 오간 사자 영역의 귀족가가 이스단 가문이 맞았음을.
“…….”
#<106 화>
‘그 능구렁이 학장이…….’
‘모르고 있었군.’
무시하면 그만이었던 평소와 달리, 집요할 정도로 날아오던 이스단 가문의 전서.
‘…….’
‘어느 일족?’
‘……너구리 일족.’
‘밥이라도 먹여 둬.’
마지막으로…….
‘있을 리가.’
‘있을 리가.’
‘있을 리,’
‘있을,’
미친놈이 네가 뭔데 그걸 거절해.
“갑자기 왜 몸을 떨고 그래.”
바로 나였다.
* * *
‘노랑이라.’
“허.”
“화병이요?”
“파혼, 으븝.”
“파혼을, 읍.”
“파, 으븝.”
말하지 마. 내가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다며.
“경위라.”
“아리엘과 말이야.”
쿵.
벤디는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을 느꼈다. 뜻밖의 장소에서 제 어머니의 이름이 튀어나왔기에.
“무슨…….”
“그런 헤일린을 데리고 다짜고짜 이스단 가문에 들이닥친 게 그대의 어머니, 아리엘이었단다. 납치한
집단이 추적을 피해 잠시 몸을 숨긴 곳이 페트리온의 밀림이었다더군.”
“요구라 함은…….”
“자신의 딸이 성인이 되는 해에 혼담을 제안해 달라고 하더구나.”
“……네?”
“…….”
‘가문 내 권력 싸움인가.’
레피 가문에서 혼담을 수락했을 때 예상은 했지만, 제법 아까운 인물을 잃은 씁쓸함이 잠시간 찾아들었다.
시간이야 조금 걸렸겠지만, 결국 헤일린을 납치한 집단은 이스단 가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기연.
‘나 지쳤어, 잠자코 업지 않으면 벤디에게 이를 거야. 고구마 인형에 주스를 쏟은 범인은 아빠였다고.’
‘…….’
굳이 새끼 사자 꼴로 붙어 있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겠지.
‘어쩐다.’
“습, 앉아.”
냥냥 금지, 장난 금지.
감금당한 자식을 마주한 사라 이스단이 적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다른 건 몰라도 혼담 파기를 격하게
반대하는 것만은 알겠다.
“…….”
“아름다운 남편은 건실하진 않겠지만 바람 날 걱정이 없고. 애당초 혼인이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던
녀석이니까.”
“그 말씀은…….”
‘……만일.’
혼담이 오간 사자 가문이 이스단 가문이고, 약혼자는 헤일린 이스단. 그리고 그 혼담을 주도한 게 숙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는 걸 알았다면.
“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이유는?”
“그리고 저는…….”
먹이사슬 꼭대기에 자리한 그녀는 표정 변화나 작은 움직임마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말마따나 초원에서
군림하는 사자의 표본이었다.
작은 황소 사슴쯤이려나.
억겁 같은 고요가 지나갔다.
“그, 그 돈은 제가 반드시,”
“레피 가문에 제안한 혼담을 파기하고, 선금은 그대의 숙부에게 청구할 셈이다.”
“……!”
“이는 추후 가주가 되면 그대가 짊어질 돈이 되겠지. 혼담은 표면적으로만 파기할 테니, 가주가 되고
나서 다시 대화하는 건 어떤가.”
제 아들의 감정을 미루어 보나, 아리엘의 의미심장한 말을 미루어 보나. 당장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궁금한 거라도?”
“15 억 실링.”
“…….”
* * *
눌러쓴 후드 사이로 발이 한 쌍밖에 보이지 않자, 누군가의 부재를 깨달은 벤디가 물었다.
“레넌은요?”
살짝 멈칫한 원이 대답했다.
“그보다, 혼담은?”
“일어나세요.”
“방으로 가서 취하세요.”
“지금 취해야만 돼요.”
이걸 들어서 방에 던질 수도 없고.
“혼담은요.”
“……파혼이에요, 아마도.”
아마도 파혼.
“목적을 이룬 거 아닌가?”
‘15 억 실링이면…….’
고구마가 몇 개야.
“원 님.”
“말해요.”
“혼담은 파기됐는데요.”
“그런데요.”
“원 님, 저요…….”
“왜 이럽니까, 대체?”
사라 이스단의 목소리가 벤디의 귓가에 길이길이 메아리쳤다.
‘15 억 실링.’
‘15 억.’
저요…….
#<108 화>
배낭은 열어 주고 가.
착, 사라 이스단은 한참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그녀는 낯빛은 물론이며 목까지 붉어진
모습이었다.
“그냥 찢고 나오너라.”
그럴 바에 이러고 있고 말지.
쌩하니 무시하는 헤일린 덕분에, 자리를 옮긴 그녀가 칭칭 묶이다시피 한 배낭을 열어 줬다.
반대편으로 걸어가 걸터앉는 헤일린을 본 사라 이스단은 입맛을 다셨다. 새끼 사자일 때와 다르게 귀여운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자, 이제 말해라.”
“뭐를.”
“저 사슴과 함께 있으면.”
“……?”
침묵은 곧 긍정.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가문으로 돌아간다잖아.”
“안 돼, 걔 그러면 기절해.”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한 헤일린이 짐짓 인상을 굳혔다. 잠시간 고민에 사로잡힌 그가 해답을 내렸다.
또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 본 헤일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사슴을 따라간 다음에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그건 괜찮아.”
“어째서?”
사라 이스단의 성격을 미루어, 앞으로 사슴에게 들어오는 혼담 같은 성가신 건 그녀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어딜 가는 거지?”
“사슴 혼내러.”
* * *
원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자입니다. 초식 영역은 직접 조사를 다니더니, 육식 영역은 수족만 보내며 저택에
몸을 숨기고 있더군요.]
[거절했다고요?]
[반란이라니요.]
[벤디이?]
[벤디는 우리 1 소대 대장인데?]
“뭐야 이건.”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황한 스카론이 뒤에서 애타게 말했으나, 떡하니 통신구를 차지한 어린아이가 외쳤다.
“5 소대 대장?”
“……사자?”
[얘야, 이제 그만,]
[어허, 총대장!]
[총대장, 이제 그만 비켜 주시죠.]
“방금 뭐라고?”
[예비 남편?]
“다시.”
[예쁜 예비 남편?]
“더 길게 말해 봐.”
[벤디의 예쁜 예비 남편?]
* * *
‘이상하지 않나?’
어머니가 어릴 적 헤일린 이스단을 구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담을 제안했다는
게. 그리고 큰 선금을 건넨 혼담을 유예해 주는 것까지.
‘알 게 뭐예요.’
“레넌, 있어?”
“……레넌?”
“레넌, 있어?”
“고양이는 물 싫어하는데.”
풍덩!
#<109 화>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는 소리가 고꾸라질 정도로 놀랄 일인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건 마물 같은 사슴에, 밀란느 학장에게 사랑에 빠지질 않나, 다람쥐로 변하지를 않나.
“거기 얕아.”
‘왜 여기 있는 거야?’
“……다 들었어?”
“뭐.”
“그…….”
“…….”
“아니면 나 버린 거?”
‘내 가방.’
“……!”
‘스스로…… 나갈 수 있는데.’
똑, 똑.
“꼭.”
“그건…….”
“-아니, 나빠.”
“……왜?”
“왜 내가 너랑 파혼을 해야 되는데.”
“…….”
‘만져 줘.’
“그런 적 없어.”
“뻔뻔한 빚쟁이.”
‘그러고 보니…….’
목적만 이루면 필요가 없어지는 관계. 하물며 누구와 혼담이 오가든 자신은 옆에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전부 제 것 같지 않은 감정이었다.
“…….”
쿵, 쿵.
주홍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헤일린의 속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경계가 무방비하게 풀어지는 생경한 느낌.
“……헤일린?”
‘아.’
‘환장했네.’
* * *
‘뭔가 있어.’
아카데미로 출발 전.
“……보셨어요?”
“예…….”
‘하는 수 없지.’
‘걔가 그쪽 방면으로 뛰어난 거라서 빗자루까진 무리고. 작은 사물을 몇 초 띄우는 정도는 너도 연습하면
돼.’
“……?”
“숨기고 있는 걸 말해요.”
느릿하게 움직인 금안이 묶인 제 손목과 침대, 얽힌 다리, 어깨를 내리누르는 벤디의 왼손을 오갔다.
“지금 이거.”
원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원 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든지.”
“평안한 시간 보내시길.”
끼이익, 탁.
‘평안한 시간?’
흐트러진 셔츠에서 올라간 눈길이 툭 불거진 목울대, 살짝 상기된 귀와 헝클어진 흑발. 그리고 두 팔목을
속박한 타이에 닿았다.
“…….”
‘지금…….’
“왜, 계속 안 하고.”
“…….”
“원하는 게 뭔데요.”
“……!”
“협박을 할 거면.”
다다다.
허술한 자객이 도망치듯 방을 벗어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원은 이내 무너지듯 침대에 엎드렸다.
‘-위험했다.’
“……큰일 날 뻔했네.”
‘백호 영역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 * *
[왜 그리 울상인가?]
“학장님, 레넌은.”
‘목을 치러 가는 건 나 혼자야.’
“레넌은…….”
“거기에서 죽을 셈이에요.”
“…….”
‘왜…….’
“……밀란느 학장님.”
[오냐.]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벤디 학도라면…….’
‘내년으로 졸업 유보.’
“알려 주,”
[단.]
“……?”
[위험할 수도 있어.]
백호 영역은 백호를 거느린 채 전투에 임하는 경우도 대다수. 백호를 보자마자 쓰레기통에라도 몸을 숨길
벤디의 미래가 눈에 훤했다.
“네, 맞아요.”
‘너무해요.’
“해 볼게요.”
* * *
‘이대로는…….’
‘만일.’
‘누가 이럴 줄 알았나.’
#<111 화>
‘이상한데.’
‘이건…….’
‘신문 조각?’
‘설마.’
당했다.
‘정신 차리라고.’
“윽!”
내 사슴이 사라졌다.
* * *
“……!”
“내가 막았으니까.”
특히 아카데미에서 온 여우 수인.
“부인.”
“사슴?”
캬옹?
“내 며늘아기……!”
‘며늘아기라니.’
* * *
동물형인 사슴으로 변하여, 바깥과 연결된 숲으로 뛰어들다가 경비에게 잡혔을 때만 해도 어쩌나 싶었는데.
‘이건 뭐지?’
‘안나는 어디지?’
“악!”
“저예요.”
“……아, 안나?”
“사교 모임 중이었어요.”
“…….”
“이 대목에서 뺨은 왜 붉히는데요.”
“그럴게요.”
“그런데 뭘 타고 이동하나요?”
“네?”
“저.”
“……?”
“저라고요.”
쿵, 쿵.
“그러니까 지금…….”
‘차라리…….’
* * *
백호 영역으로 연결되는 숲.
‘……아.’
‘찾았다.’
‘마력을 흘리라고.’
‘이곳을 지나면…….’
레넌이 있다.
* * *
풀썩.
‘여긴 어디야?’
‘정원……?’
그리고 곧장 선명한 빛을 발하는 짐승의 안광과 마주쳤다. 달빛 아래, 어렴풋이 드러난 짐승의 형체는
백호였다.
‘음.’
‘기절하면 안 돼.’
“차, 착하지.”
얌전히. 바르르 떨리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간 내가 노란 짐승 다루듯 타일렀다.
“쉿.”
“침입자다!”
“수풀 쪽이야!”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헉!’
“흐…….”
아파.
“침입자?”
박자 느린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
“비켜.”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목 언저리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후드를 파고든 검날이 여린 살을 스치며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고개 들어.”
#<112 화>
처음 듣는 날 선 음성에 몸이 절로 떨렸다.
‘자칫하면…….’
베인다.
“…….”
“레,”
“움직이지 마라!”
“악!”
‘죽는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레넌 님,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찰나,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길 막지 말고 비켜.”
“레넌, 있잖아…….”
불안한 마음에 괜히 꼼지락거리는 와중, 그가 내 뒷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뒤이어 속삭임에 가까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 * *
‘여기는…….’
백호 영역 특유의 문양이나 장식품이 진열된 내부를 끝까지 둘러볼 순 없었다. 시야를 레넌이
가로막았기에.
교복이 아닌, 휘장을 매단 백색 정복 차림이 그의 지위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하…….”
“…….”
“돌아가.”
“…….”
“더는 말 안 해, 돌아가.”
“……싫어.”
“아……!”
“왜 그래.”
“어디 봐.”
“그냥 단순 긁힌 상처야.”
겁보 사슴이 이렇게 되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화가 치미는 한편 비틀린 만족감이 일었다.
‘미친 새끼.’
“의관을 불러올게.”
탁, 문이 완전히 닫혔다.
홀로 남겨진 벤디는 잽싸게 문으로 달려가 귀를 찰싹 붙였다. 밖에서 레넌이 기사들에게 무어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쉭, 쉭.
[레넌은 만난 게냐?]
“네, 그런데…….”
예쁜 또라이가 무서운 또라이로 변모한 상태. 벤디가 머리에 뿔 난 시늉을 하자, 밀란느 학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어떡하죠?”
[별수 있나.]
[…….]
“역시.”
“아, 안 돼…….”
‘왜 이곳에 초식 수인이……?’
심지어 소중한 것 다루듯 하는 레넌의 태도라니. 전장에서 도륙하는 모습만 보아 온 의관에게는 지나치게
낯선 행동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별거 아니야.”
“말해.”
탁, 벤디가 그의 손을 쳐 냈다.
#<113 화>
의관은 벤디의 원망 가득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는 주인인 레넌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었다.
‘구속구.’
“…….”
밀란느 학장이 종용했을지언정, 초식 수인의 몸으로 백호 영역에 오기까지는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기껏 와서 들은 말이라곤 추궁과 돌아가란 소리가 전부였다.
끓는 화를 애써 누른 그가 허리 숙여 벤디를 올려 봤다.
“아무것도 묻지 말까.”
“……?”
‘어느새!’
* * *
‘그 비싼 걸.’
그래도 아까처럼 화내지 않고, 적당히 맞춰 주는 게 어디인가 싶었던 벤디가 게슴츠레 측방을 곁눈질했다.
“그건…… 별일이지…….”
“있잖아, 레넌.”
“…….”
일순 멈칫한 레넌은 이내 여상한 미소를 걸었다.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물색 눈동자가 반으로 접혔다.
“그 말도 학장이 시켰어?”
아니라고, 내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안.”
* * *
이른 아침, 백호 영역 어귀에 진입한 원이 갈림길에 섰다.
“답답하면 네가 결정하든가.”
벤디가 레넌의 저택이라면 비교적 안전하겠지만, 에던트 가문에서는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내 거는.’
“네 건 없어.”
“…….”
* * *
‘……언제 잠든 거지?’
‘이게 뭐야.’
“레넌?”
“당신은…….”
얼굴에 긴 자상을 가진 남자. 벤디가 다람쥐로 당했을 당시, 레넌과 통신을 나눈 중년 남자였다.
“백호 영역에 유람 왔다가 휩쓸린 귀족 영애,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시죠.”
그럼 레넌은.
“레넌은 어디 있어요?”
“바알 님, 큰일 났습니다!”
‘그 정도의 실력자입니까?’
레넌의 충고가 있었음에도, 벤디의 허술한 행동거지에 방심해 버린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비켜 주세요.”
#<114 화>
“……비켜요.”
두 번째겠지.
“그건…….”
“옆에 있을 순 있잖아요.”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
학생다운 소박한 바람과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바알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 보내 주세요.”
“…….”
‘학장의 끄나풀.’
‘어쩌면.’
에던트 가문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잠든 벤디의 옆을 지키던 제 주인이 스쳤다. 마치 유일하게 남은 미련인
것처럼.
“약조하십시오.”
“갑자기 무슨…….”
‘어째서…….’
왜 몸에서 빛을 뿜는 건데.
* * *
“고양이가 쓸모 있을 때가 다 있고.”
‘이 똥개 새끼가.’
피가 들끓기도 잠시, 이곳에 벤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오히려 원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에던트 가주의 정규군이 레넌 측 사병들에게 투항한 상태. 레넌의 모습은 물론 벤디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원과 헤일린은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이들에게 벤디의 존재를 묻자니 설명하기가 굉장히 모호했다.
“미친놈 아니야?”
“바, 바알 님?”
“…….”
* * *
“……?”
저 멀리, 하얀 머리카락의 백호 수인과 웬 꼬질꼬질한 생물이 뒤쫓아 오고 있었다.
“뭔가 쫓아와요.”
‘이 똥개 때문에.’
‘이 고양이 때문에.’
‘아직도.’
탁탁, 추격자들이 지척까지 다가온 동시에 발돋움한 백호가 높이 뛰어올랐다. 그들을 위에서 내려 보게
된 벤디가 막대 과자를 아래로 겨누었다.
‘어?’
하얀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
“무슨……!”
“제정신이에요?”
“제정신이에요.”
기죽은 채로도 또박또박 대꾸한 벤디가 옆을 가리켰다.
‘호랑이 아저씨?’
한편, 노란 짐승은 드디어 재회한 벤디의 발목에 꼬리를 휘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명이 주는
기분을 다 느껴 봤다.
이를 갈던 헤일린은 일순 멈칫했다.
‘야비한 똥개가.’
속이 뒤집힌 헤일린이 콩알만 한 발톱을 드러냈다. 원의 곱상한 얼굴에 줄을 그려 주겠다고 결심하는 찰나,
벤디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씻…… 뭐?
* * *
본관 대회의장.
‘갈비뼈도 나갔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레넌 님, 피하십시오!”
쐐애액-
#<115 화>
곧바로 몸을 비낀 레넌이 화살을 쳐 냈다.
순간이었다.
‘곧 죽을 놈의 힘이…….’
‘제정신이 아니다.’
“…….”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역대 가주들은 전대 가주의 만행을 낱낱이 알린 후, 광장의 사형대에서 목을 쳤다.
챙강, 레넌이 가주의 검을 뒤로 던졌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에던트 가주가 갈라진 음성으로 외쳤다.
멀리서 원형으로 진을 친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쐐액- 무수한 화살이 레넌을 향해 쏟아졌다.
“제길!”
“레넌 님을 보호하라!”
사병들이 달려들어 활을 쳐 냈지만 머릿수가 부족했다. 푸욱, 채 막지 못한 화살이 레넌의 팔뚝에 박혔다.
“레넌 님!”
“힉!”
“뭘 하느냐, 쏴! 쏘란 말이다!”
“크아악!”
‘……그러고 보니.’
“레넌 님, 피하십시오!”
예감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 쿠궁, 갑자기 무너질 것처럼 건물이 진동했다. 레넌마저 휘청거릴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천장이 무너진다!”
이윽고 천장에 사람 여럿이 드나들 정도의 둥근 구멍이 생겨났다. 심지어 잔해는 구멍이 뚫리는 동시에
공중에서 소멸했다.
‘설마…….’
‘늦어.’
“…….”
꼴에 정체는 감추고 싶은지 코와 입은 두건으로 가리고, 손에는 막대 과자, 갈색 배낭에 더러운 생물을
넣은 괴한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펑, 펑!
“큭!”
“아악!”
“컥!”
“레넌 너…….”
“레넌, 상처가,”
“죽으려고 환장했어?”
“말해 두는데.”
“…….”
“전부 내 선택이야.”
다가간 원은 레넌만이 확인할 수 있도록 후드를 살짝 들췄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레넌은 한결 긴장을
풀었다.
“천장을 뚫은 건 너였나.”
“바알 님!”
이미 판은 기울어졌다.
으.
그러나 열심히 끄덕이는 벤디와 험악하지만 따스한 눈빛의 바알 때문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장르만 우정 청춘물이었다.
“레넌.”
“너…….”
“…….”
‘꼭 내가 싫어하는 피클 먹일 때만 멋진 말 하는 거 다 알아.’
‘좀 먹으렴, 좀.’
‘엄마 미워.’
“…….”
“나랑 같이 돌아가자.”
“왜 우는데.”
“나는 원래 남이 울면 울어.”
“아.”
‘파기됐군.’
“힉…… 사, 살려…….”
레넌은 공포로 인해 거품까지 무는 에던트 가주를 응시했다. 과거 그토록 제 어머니와 저를 괴롭힌 존재의
끝이 참으로 초라했다.
“…….”
베지 않았다.
“레넌 님……?”
어째서 살려 두냐는 뜻.
“……?”
“……??”
“회장.”
“……왜?”
“이제 진짜 나 책임져야겠다.”
#<116 화>
다음 날, 백호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기사가 육식 수인 영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게 1 면 기사라고?”
폴릿 가문.
“……쿨럭.”
로튼 가문.
“어머나.”
펠 가문.
“그 말도 안 되는 오보?”
“엥?”
[진실을 알리기에 앞서, 이 기사는 백호 영역과 어떠한 거래도 없음을 올리비아 기자의 명예를 걸고
밝힌다……(중략)……목숨 걸고 백호 영역에 잠입한 올리비아 기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새로운 가주로 등극한 레넌 에던트가 위기를 맞았을 때, 구원자는 운명처럼 천장을 뚫고 강림했다.
어떤 이는 눈곱도 떼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막대 과자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매서운 돌풍이 몰아쳤으며, 전대 에던트 가주의 정예군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중략)……취재를 거부하던 구원자는 천장을 뚫은 건 본인이 아니며, 따라서 배상 의무는
없다고 짧게 일축했다.]
막대 과자와 배낭 속 수호신.
‘학생회장은…….’
* * *
여럿이 협의도 없이 각자 파고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존재했다. 포식자 세 마리가 먹이 하나를
두고 싸우는 동안, 틈을 발견한 먹이가 달아나는 결과처럼.
“아니.”
“머리 싸맬 게 뭐가 있는데.”
“의견을 절충해서.”
“반만 죽이자.”
“숨만 붙여 두면 되잖아.”
“…….”
“처리하지, 내가.”
“들어갈게.”
벤디의 목소리.
‘허…….’
‘……하.’
지금만 해도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문제는 본인은 딱히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점이었다.
왜 이렇게 찝찝할까,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기분. 닫히는 문을 응시하던 그는 별안간 낯빛을 굳혔다.
‘나중에 잘 씻겨 줄게.’
“…….”
“갑자기?”
“씻겨 주러 가는 거라고.”
“……뭐?”
“윽.”
“레넌 님,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가주는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바쁘니까 비키,”
새끼 짐승이든 뭐든. 벤디가 헤일린 이스단의 몸을 주물럭댈 것만 생각해도 질투로 머리에 피가 몰렸다.
“다리 놓으세요.”
“비켜.”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으쌰.”
‘음?’
‘조금 무거워졌나?’
“손.”
앞발.
“발.”
뒷발.
“꼬리.”
‘꼬리는 좀.’
“얘가 왜 이래?”
참방참방, 바둥바둥.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벤디의 손을 밀어내던 노란 짐승은 돌연 쩍 굳었다. 씨름하던 벤디가 무의식중에
그에게 마력을 흘려 버렸기에.
‘어디?’
‘쪼끔…… 사실 쪼끔 두 번 많이…….’
‘얘가 왜 눈치를 보고 있어. 엄마가 말했지? 모든 생명의 일부는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러니
사람이든 짐승이든 마력을 흘린 정도로 아프진 않으니 걱정…… 아니, 잠깐. 벤디야, 그거 얼른 이리
내.’
‘……너 그거구나?’
#<117 화>
‘어쩐지. 밀림에서 처리한 육식 수인 놈들이 이상할 정도로 짐승을 싸고돈다 싶더니…… 납치당하는
중이었구나? 너.’
캬옹, 덜미를 잡힌 헤일린이 앞발을 파바박 휘저었다. 짧은 팔다리는 애꿎은 허공만 강타할 뿐이었다.
‘엄마 미워.’
“…….”
“노랑아?”
‘혹시…….’
이걸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슴이 제 정체를 알아야만 가능했다. 무작정 붙어 있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이게 뭐라고 덜컥 겁이 났다.
“그만 씻을까?”
‘어차피…….’
“너……!”
“원 님?”
깜짝 놀란 벤디가 원을 올려 봤다.
“나머지는 제가 하죠.”
“네? 왜요?”
“예? 원 님께서요?”
“…….”
“저 원래 남 씻기는 거 좋아합니다.”
“……!”
후다닥, 달아나는 노란 짐승을 발로 제압한 원이 셔츠 소매를 걷었다. 건장한 전완근을 마주한 헤일린의
낯빛이 하얘졌다.
‘놔, 이 똥개 새끼!’
* * *
충분한 시간을 주었음에도 상대자가 나타나지 않은 관계로, 혼담을 파기하겠다는 내용의 전서였다.
덧붙여 선금으로 내민 15 억 실링을 청구하는 청구서까지.
‘이스단…… 가문……?’
초식 수인을 원하는 특이 취향을 숨기고자 익명으로 혼담을 제안한 거라 여겼는데. 그 귀족가가 이스단
가문인 건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어째서…….’
아리엘 레피.
“죽어서까지……!”
“가주님…….”
“…….”
“한시라도 빨리 벤디 레피를 찾아서 이스단 가문에 넘기는 수밖에. 벤디 레피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어디였지?”
“기린 영역입니다.”
오랜 숨바꼭질을 끝낼 때였다.
* * *
“너, 모자 안 써?”
긴 손가락이 척, 모자 안 쓴 학생,
척, 타이 없는 학생을 가리켰다.
“하이에나가 미쳐 날뛰는구먼.”
“학생 지도 대표요…….”
“난 교수다, 이 녀석아!”
“…….”
헤벌쭉 올라가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금방 씰룩씰룩 올라갔다.
‘하긴.’
“큼.”
“죄송해요.”
“누, 누구?”
“버텨야죠.”
“…….”
벤디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밀란느 학장은 분위기를 환기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편지요?”
“자리를 비운 동안 내가 맡고 있었지.”
‘편지?’
……알고 있다.
#<118 화>
‘벤디 학도, 일단은 가만히 있거라. 굳이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낸 건 자네가 동요하기를 원하는 걸 수도
있으니.’
“학생회장아.”
“예, 리리 교수님.”
“…….”
‘뭐.’
정말 아름다운 동료애였다.
“아야.”
“마물 토벌은 레펠튼 때와 동일하게 동물을 동반하는 게 원칙이지. 이동에 유용한 말을 데려와도 좋고,
전투에 필요한 강한 동물을 데려와도 무방하다.”
‘왜 또 동물이야.’
“그러니까, 또 꼴등 할 순 없지.”
아카데미로 돌아온 게 꽤나 즐거운지, 노랑이의 앞발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물리지를 않나, 원에게
자신도 씻겨 달라며 놀리다가 결국 머리채를 잡혔다.
“…….”
“오늘부터 특훈이다!”
‘왜 이래.’
“…….”
‘리리 교수님.’
“학생회장…….”
“한번!”
“…….”
“물어보기는 할게.”
* * *
아카데미 내부, 집무실에 자리한 원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후.”
“꺼지라고 해.”
“그렇답니다.”
“누구였지?”
“학생회장이요.”
“뭐?”
“학생회,”
네가 그랬잖아요.
이미 문 앞은 텅 빈 상태.
“…….”
“…….”
“아니, 그거 뇌물이야.”
“예?”
“청탁하러 온 거라고.”
“그게요?”
“아…….”
저번에는 차기 마탑주가 똥개로 보여서 안경을 맞췄는데, 이제는 환청이 들리고. 구황작물을 청탁 뇌물로
받아들이는 제 주인의 사고도 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퇴사할까.
* * *
“그런가요.”
역시 늑대에게 가야 하나.
“동물 한 마리요.”
“동물이요?”
“……?”
“잠깐만요, 제가 잘못 알고 있나?”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빠르게 서류뭉치를 뒤적이던 손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함께 들어간 동물이 수인이거나, 수인이 들어가서 동물로 모습을 변형한 이외에,”
“…….”
착각.
‘노랑이는 뭔데.’
‘회장.’
‘네?’
‘만졌어요.’
‘정도가 있어야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영물이 마차 멀미에 시달리지를 않나, 펜으로 엉덩이를 찔렀을 땐 희롱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지를 않나.
“…….”
그리고 설산에 리울 약초를 채약하러 간 당시. 정신을 잃기 직전, 아른거리는 시야로 보인 건 아마도…….
‘노랑이가 아니라…….’
금발.
‘……설마.’
“혼자서 뭐 하는데요.”
깜짝.
“제가요?”
“꺼졌잖아요.”
아.
결국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으르릉.
‘아직…….’
“도망갈까요.”
그가 답할 새도 없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
* * *
늑대 영역, 마탑.
“흠…….”
이공간을 지나온 탓에, 어질어질한 정신을 다잡은 벤디가 모자를 눌러쓰며 꾸벅 인사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장로들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레넌이나 헤일린 같은 거물만 보아오다가 마주한
학생다운 학생이 제법 신선했다.
그들의 손끝은 벤디를 향하고 있었다. 딱히 고민도 거치지 않은 스카론은 태연스레 답했다.
“아아.”
“그렇군요.”
“오오.”
“그렇군요.”
“예에에에에?!”
* * *
“이 정도면 괜찮으신지요.”
마도구 관리인이 벤디에게 네모난 상자를 안겨 줬다. X 클래스 학생 전원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초소형
통신 마도구였다.
“원 님.”
“왜요.”
“그냥 달라?”
끄덕.
“갈수록 뻔뻔해지네.”
“마탑에는 차고 넘친다면서요…….”
“그러시든지.”
“정말요?”
벤디가 제 공간에 와 있다는 사실이 없는 온정도 생기게 만들었다. 상자를 안고 슬금슬금 경계하는 모습이
다시 뺏고 싶게끔 만들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묘한 거 아닌가.’
“이만 돌아가죠.”
“일어나세요.”
“페트리온에는…….”
원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배신해도 됩니다.”
자신은 벤디가 몇 번이나 배신해도 몇 번이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입장. 입매를 끌어 올린 원이 순순히
말했다.
“이미 그쪽한테.”
“…….”
“각인했으니까.”
* * *
‘그 늑대…….’
그렇지 않고서야 초식 수인인 벤디가 갑자기 각인이란 단어를 들먹일 이유가 없으니까.
“…….”
#<120 화>
틱, 틱.
집게 핀을 채 잡기도 전에 앞발 사이로 미끄러졌다. 뭉뚝한 앞발로 세밀한 작업이 가능할 리 없었다.
틱, 틱.
틱.
또다시 지독한 패배감을 맛본 헤일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집게 핀만큼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존재가
없었다.
‘내가…….’
‘딱히 없는데.’
그때까지 야닉과 각인의 정의에 대해 숙덕거리던 벤디는 제 발치에 다가온 노란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
도도도, 조금 당황한 노란 짐승은 고개가 돌아간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그러기 무섭게 휙, 벤디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먹었겠냐고.
‘빼 줘, 이거.’
앞발로 슬그머니 배낭을 내밀자, 벤디가 배낭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뒤이어 집게 핀을 빼 주긴커녕 제
등에 둘러메는 게 아닌가.
달칵. 마침 안나가 학생회실에 들어오며, 얼빠져 있던 헤일린을 문으로 쳤다. 튕겨 나가는 노란 짐승을
발견한 벤디의 눈이 커다래졌다.
“노랑…….”
“회장, 어디 가요?”
“…….”
아니라니까.
지금껏 제가 벤디를 밀어내면 밀어냈지, 이런 냉대는 처음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 레넌이 소파에서 뒹굴었다. 연적의 불행은 행복이요, 삶의 낙이었다.
‘따라오면 다시는…….’
‘따라오면…….’
‘대체 왜…….’
* * *
“오셨습니까, 부장.”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 있으셔요?”
“그건 아닐 거예요.”
“공교롭게도 우리 마개동 부실에 다녀간 이후부터 관계가 망가진 거라…… 혹 연관이 있을까 걱정이네요.”
“뭐라고요?”
괜찮지 않았다.
“……신입.”
“예, 예!”
“…….”
* * *
마물 토벌을 하루 앞둔 날, 학장실.
“짚이는 곳이라.”
“그 편지, 방학 중에 왔지.”
“어찌 안 게냐?”
“나는 이게 편해.”
“그래.”
“음.”
“댁이 가르쳤잖아.”
“무얼 말이냐.”
‘아무리 내 손주라지만…….’
“뭐, 뭣이?”
“과거에 이미 했을걸.”
“허…….”
“뭣이?”
“허어…….”
“절대 못 하는 게 대체 뭔데 그러,”
소파에 흐트러진 결 좋은 은발과 헐벗은 몸, 붕대를 감아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가련함과 청순한 얼굴까지.
‘저 영악한 놈이…….’
그건 바로 미인계였다.
#<121 화>
“들어오게.”
찰칵, 문을 열고 들어서던 벤디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헐벗은 채 드러누운 레넌을 발견한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탁, 제 코를 꼬집은 벤디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통하는구먼.’
“실례합니다…….”
“여기 앉게.”
학장이 온 얼굴 근육을 사용하여 진실을 알리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벤디는 신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몽롱한 표정의 벤디를 살핀 밀란느 학장은 이마를 짚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시각적 효과에 약한
모양이었다.
“……벤디 학도.”
“말씀하세요.”
“당연하죠.”
· 학생회장 – 벤디 레피
· 부학생회장 – 안나 스웰든
· 마법부 대표 – 메이지 로튼
· 학생 지도 대표 – 야닉 펠
“어째서……?”
“마물 토벌은 실전이지. 교수들도 있지만, 유사시에는 학생회의 역할도 크니 위기의식을 갖고 임하게.”
“명심할게요.”
“이제 나가 보,”
‘발칙한…….’
‘붕대를 묶으라고?’
‘안 되겠어.’
‘왜 더 위험해진 것 같지?’
‘……아.’
‘여긴가?’
‘아니, 아닌데…….’
‘여기다.’
‘더 이상은 안 돼.’
쿠당탕!
눈을 가린 붕대를 끌어 내린 그는 제 몸을 내려 봤다.
‘하마터면…….’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 * *
‘또다.’
‘또 나타났다.’
“어째…….”
“지난번보다 더 커진 것 같지 않냐?”
지난 며칠, 그는 지옥 속을 오갔다.
‘힉.’
“얘기 좀 해.”
흠칫.
“잠깐이면 돼.”
다다다, 저벅저벅.
“얘기 좀 하자고.”
다다다, 저벅저벅.
거대한 해피를 중간에 두고 빙글빙글 돌기를 한참. 짜증이 치민 해피가 푸르릉! 지나가는 벤디에게 거센
콧김을 뿜었다.
“헉!”
깜짝 놀란 동시에 헤일린이 벤디의 앞을 막아섰다.
“…….”
“잠깐이면 된다니까.”
“싫어.”
“……!”
“무슨,”
당황한 그가 팔을 뻗어 등을 받쳤다.
“잘못했어.”
“…….”
“뭐가 됐든.”
그럼에도 눈물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꾹 다문 벤디의 입술에는 피가 몰렸다.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한 그가 나오는 대로 뱉었다.
‘저게 지금…….’
“무슨 소란이지?”
“알 거 없잖아.”
원은 흑색 장갑을 손에 끼며 성의 없이 답했다.
“학생회장 죽는 거 아니냐?”
“도둑고양이 새끼가…….”
“잡아 죽여야겠네.”
“야닉 펠, 막아요!”
“허허…….”
말세로구나.
#<122 화>
“비켜.”
“놔.”
저 미친 노랑이 놈이.
“…….”
“회장!”
“학생회장!”
“자리로 돌아가.”
“안 가면 절교할 거야.”
‘……먹히네.’
초식 맹수로 전락한 세 사람을 목도한 학생들이 파르르 턱을 떨었다.
“전부 보았습니다…….”
* * *
S 클래스 토벌 구역.
“키에엑!”
“끼긱!”
“뭘 하면 애가 그런 식으로 울어.”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던 벤디의 얼굴만 생각해도 기분이 더러웠다. 저로 인해서면 몰라도, 남에 의해
그따위로 우는 건 사양이었다.
“키에엑!”
쾅!
“그냥 죽어.”
무릎 꿇고 부탁했어야 했나.
“…….”
“…….”
‘꽃…….’
원과 레넌, 헤일린은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야닉의 주장이 묘하게 맞는 말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돌게 만들었다.
초식 수인, 그러니까 피식자인 벤디가 포식자인 그들에게 마음을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빗자루부터 썰고 얘기하지.”
“나쁘지 않네.”
“죽어.”
“끄아아아악!”
깜짝이야.
인상 쓰며 귀에 꽂은 초소형 통신구를 떼어 낸 안나가 반대편을 돌아봤다. X 클래스 토벌 구역, 벤디가
있는 방향이었다.
* * *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아…….”
“이 마수랑 같이.”
“어째서?”
함께한 시간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르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단 것까지.
그러나 헤일린 이스단의 성격을 생각하면 약간은 이해가 됐다. 나 같아도 말을 못 할 것 같으니까.
귀마개를 질색하던 노랑이, 엉덩이를 찔리던 노랑이, 목욕하던 노랑이, 야닉을 싫어하던 노랑이.
‘미쳤어.’
“있잖아, 신시아.”
“말해.”
“……아니야.”
“싱겁긴.”
내가 사슴인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이런 기분을 느낄까.
[아아아아악!]
“무슨 일이야?”
“……뭐?”
교수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 주의점, 산란기 마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서식하는 해당
마물의 동족이 죄다 몰려오기에.
“위치는?”
[남서쪽!]
“먼저 갈게.”
[피해, 에버릿!]
[으아아악!]
‘이대로는…….’
늦어.
“악!”
[라일라, 뒤!]
[젠장!]
[아아악, 내 다리!]
“……해피.”
올라타라는 의사 표시.
“해피!”
“가자.”
* * *
S 클래스 토벌 구역.
야닉을 처리한 원과 레넌, 헤일린의 걸음이 당연하다시피 한쪽을 향했다. 벤디가 있을 곳이었다.
펑!
퍼버벙!
#<123 화>
“저게 무슨…….”
[보입니다.]
[봤어요.]
지긋지긋한 3 인칭이 통신구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얼얼한 귀를 매만진 S 클래스 학생들이 답했다.
[북동쪽 거북이도요.]
‘큰일은 아니기를.’
* * *
남서쪽 호숫가.
“키에에엑!”
“홀튼, 조심해!”
부상자 여럿과 통신을 듣고 모인 X 클래스 학생들, 뒤섞인 E 클래스 학생 몇몇, 끊임없이 몰려드는 크고
작은 마물들까지.
“힉……!”
“신시아!”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어떤 미친놈이 일부러 산란기 마물을 끄집어내고 내뺐어! 에버릿 말로는 E 클래스 녀석
같았다고,”
“피해.”
“흐…….”
“제기랄……!”
라일라는 늘어진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나 다가오는 마물까지 처리하며 부상자를 부축하기엔 힘에
부쳤다.
“야, 정신 차려!”
“모, 못 해, 안 돼…….”
“위를 봐!”
“라일라-!”
‘누가 좀…….’
‘제발!’
‘죽는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기 무섭게,
퍼엉!
쿵!
콰광!
폭발로 인해 불거진 자욱한 연기가 걷히며, 학생들의 시야에 들어온 건 사슴의 탈을 뒤집어쓴 흉악한
마물이었다.
‘제길.’
‘또 저런 마물이…….’
“……회장!”
“학생회장!”
몰려드는 마물과 수많은 부상자, 흙먼지와 뒤섞인 피 냄새, 무기가 마찰하는 소리.
도망치고 싶다.
“알겠어!”
“신시아는 라일라의 엄호를 부탁할게.”
“회장, 너는 어쩌려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가자, 해피.”
푸르릉.
“지원은 아직이냐고!”
콰과광!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수많은 마물이 바람에 휩쓸렸다. 손쉽게 뚫린 퇴로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학생들이
외쳤다.
“회장?”
“학생회장!”
아수라장인 장소가 조금이나마 정리되며, 방황하던 학생들이 약간이나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디의 존재 하나만으로.
쐐애액- 쾅!
“키이익!”
콰광!
“케엑!”
학생회장과 사슴 마물이 지나간 자리마다 퇴로가 뚫리며, 부상자를 옮길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여태껏…….’
‘아, 우리는…….’
‘학생회장이,’
‘필요하다.’
무한한 믿음이 피어오른 동시에 풀썩, 벤디가 종잇장처럼 해피의 등에서 떨어졌다.
“…….”
간헐적으로 무능하다고.
* * *
“허억, 헉…….”
벤디에게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알릭스, 뒤!”
“으아악!”
벤디는 힘이 풀리려는 손을 반대편 손으로 붙잡았다. 막연한 불안이 발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딘데.]
낮은 목소리가 소란과 비명을 뚫고 귀에 꽂혔다.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
‘헤일린 이스단.’
초소형 통신구 너머에서 같은 클래스 학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다시금 익숙한 저음이 이어졌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 가.]
[조금만 기다려.]
두근…….
통신을 끝마친 벤디가 해피의 등에서 내려섰다. 이어서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라일라를 돌아봤다.
“키에엑!”
“자칫하면 뒈질걸?”
“……알고 있어.”
“같이 뒈지자.”
“라일라…….”
꼭 그렇게 송곳니를 다 드러내는 웃음을 보여야 할까, 벤디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나도 엄호할게.”
“…….”
“신호할게.”
“키이익!”
“지금.”
“가라, 학생회장!”
‘보인다.’
콰아아앙-!
‘됐나?’
‘명중이다.’
늦었다.
“학생회장!”
“피해!”
#<124 화>
풍덩!
차가운 물이 벤디의 온몸을 감쌌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된 거더라.’
‘노랑이…….’
네가 왜 여기에 있을까.
째깍, 째깍.
‘아, 역시…….’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의식을 잃어 가는 벤디를 당겼다. 이어서 삼키듯 입술을 맞대었다.
‘…….’
반대로 헤일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물의 줄기에 뚫린 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새어 나가고
있었다.
‘안 돼.’
‘그리고 지금도.’
마물의 줄기가 쏘아져 오고, 그 앞을 노란 짐승이 가로막은 직전의 상황을 떠올린 벤디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 마음대로…….’
‘상처가…….’
당장 길이 보이지 않았다.
풍덩, 풍덩!
레넌과 야닉이었다.
‘끄르륵.’
일단 호수에 뛰어들고 본 야닉이 뽀글뽀글 거품을 뱉어 냈다. 수영은 쥐약인 걸 깜박한 실정이었다.
‘구해 줘, 레넌 에던트!’
‘……레넌.’
가물가물한 시야에 호수를 닮은 은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 * *
“끄아아악!”
“흐으, 흐…….”
“그러니 알고 있는 걸 말해.”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지고, 모두가 그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방향을 거슬러 내려가던
남자.
E 클래스의 빈 글레어.
“학생회장은.”
[무사해요.]
‘서, 설마…….’
행여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그에 맞춰 사고하고 있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원이 마법을 소환했다.
“히이익!”
“아니, 넌 마물 토벌 중에 해를 입은 거로 처리되겠지.”
“제가, 제가 그랬습니다!”
“뭐를.”
“이유는?”
“하, 학생회장이…….”
“꼴 보기 싫어서…….”
뒤는 안 들어도 뻔했다.
산란기 마물을 풀고, 닥쳐온 상황에 겁먹은 벤디가 내빼는 상황을 바랐겠지. 학생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벤디는 징계를 받게 될 테고.
“…….”
“흐아악!”
“두 번은 없어.”
흠칫.
원의 몸이 드물게 경직됐다.
“……언제?”
‘왜 하필 이런 때.’
정체는 바로 모니였다.
“……미안하군.”
“말해.”
[그 점이 이상합니다.]
웬스턴 레피는 괜찮은 마법사일지언정, 마탑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날 능력까지는 못 되었다.
통로.
* * *
끙.
‘어떻게 된 거지?’
잠깐.
상처는 없다.
“…….”
“……?”
‘꼬리가…….’
묶였다.
#<125 화>
꼭 묶어도 꼬리여야만 했을까.
‘위험해.’
다른 건 다 내어 줘도 이것만은 안 된다.
두근, 두근.
“왜 네가 굳이 나한테 접근했는지.”
“……!”
헤일린 이스단이 아닌, 노랑이에 대한 말이었네. 노란 짐승은 몇 초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 성격에 무언가에 얽매인다면, 그건 성체로 변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
“이유는 접촉과 마력 중 하나.”
‘저기? 아빠도 못 들어가는 엄마의 비밀 서고. 엄마의 비밀이 잔뜩 있는데, 벤디만 살짝 보여 줄까?’
‘……없어.’
‘그럼 살짝 안 볼래.’
“넌 내가 귀중하지?”
뜨끔.
“……?”
“나, 네 몸 별로 안 좋아해.”
‘더 만져 줘.’
“이제 만져 주지 않을 거야.”
쿵.
하필 복부의 상처와 마취약 때문에, 당장 사람으로 변하지 못하고 있는 헤일린이 팡, 팡, 앞발로 침대를
내리쳤다.
“지금껏 날 속인 데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파국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그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나팔을 건넸다.
두 사람은 천사들과 나팔을 뿌뿌 부느라 벤디의 날카로운 눈길이 자신들에게 향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
왜 우리까지.
“아니, 회장.”
“잠깐만요.”
당황한 그들이 손을 뻗었지만, 찰싹, 찰싹, 손이 연타로 내쳐졌다. 으르렁거리지만 않았지 기세가 해피
못지않게 사나웠다.
“꼬리부터 썰지.”
* * *
아무튼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만큼, 아카데미 측은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가을 끝자락에
있을 축제를 앞당겼다.
“…….”
심기가 불편하다.
정확히는 발 닦개 삼 인방 한정으로.
‘안나, 문 잠가 버려요.’
‘재밌어라.’
“어쨌든 학생회도 축제 천막을 설치해야 돼요. 천막을 어떤 주제로 운영할지도 정해야 하고요.”
“의견.”
“신약이라…….”
‘밀란느, 좋아해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이견 있는 분?”
“또.”
“…….”
“이견 있는 분?”
새하얗게 질린 학생회 일동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 * *
축제 이틀 전, 마개동 부실.
‘아직…….’
“……어?”
“…….”
“저기, 야닉.”
벤디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야닉을 돌아봤다. 그는 벤디가 아닌, 비커 속 물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공들인 근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얇은 팔다리, 잘 입지도 않던 교복 카디건과 모자, 단정한 차림새.
“…….”
#<126 화>
몸이 뒤바뀌었다.
‘날뛰는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체구도 작고, 얼굴은 어딘지 멍하고. 새초롬한 표정은 그냥 센 척하는 동네 사슴에 불과했다.
‘역시 멋지다니까.’
“과연, 어서 가자고.”
“몸이 바뀐 걸 알리자고?”
‘이 야닉 펠의 아름다운 몸은…….’
“왜?”
안색을 파리하게 물들인 벤디는 수긍하며 몸을 일으켰다. 야닉의 의견치곤 설득력이 있었다.
“꼭 필요하냐, 그 배낭?”
“후딱 가져와.”
“……아!”
“다녀온다, 회장.”
‘야닉…….’
내가 언제 문을 발로 차고 다녔어.
* * *
“레넌.”
‘……레넌?’
레넌 에던트가 아니라?
‘꼴이 왜 저래.’
‘무슨 실험 중인가?’
“회장?”
“언제 돌아오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
‘야닉처럼.’
“긴밀한?”
“그래, 긴밀한!”
여상히 웃고 있던 레넌의 미소에 금이 갔다.
벤디처럼 몸을 반만 내민 야닉을 마주한 레넌은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우람한 팔뚝을 하고선
꼼지락거리는 꼴도 화를 돋우는 데 한몫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없애고 싶지.
“회, 회장이다!”
“어디.”
“학생회장은.”
“없어요.”
……없어요?
“…….”
‘어떡하지.’
정신이 아득해진 벤디는 구릿빛 피부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이 상황에서 야닉이라면 뭐라고 말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소멸시키고 싶을까.
그런 분노와는 별개로, 각인한 늑대의 본능이 부르짖고 있었다. 야닉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화르륵.
“뭐?”
곧바로 뒤돈 원이 쿵, 벽에 돌진했다.
“윽.”
“사,”
“벤디는.”
딸꾹.
“모, 몰라.”
“…….”
“하…….”
‘……빨리 와, 야닉.’
나 너무 무서워.
* * *
“…….”
‘야닉 펠…….’
‘어쩐지.’
‘왜 나한테…….’
“떨어지지 그래.”
“떨어지세요.”
“떨어져.”
“회장, 이리 와.”
정신이 반쯤 빠진 벤디가 자연스레 가려고 하자, 소스라친 야닉이 벤디의 전완근을 붙들었다.
‘그렇지 참.’
‘사람이 울 수도 있지.’
속닥속닥.
“어딜!”
“아!”
벤디의 발차기에 방어조차 못 한 레넌이 정강이를 그러쥐었다. 고통과 짜릿함이 동시에 덮쳐 왔다.
“무슨!”
찰싹, 찰싹. 연타로 머리통을 갈긴 야닉은 뒤이어 헤일린의 복부에 박치기를 날렸다.
“윽!”
“어이, 너희 셋. 경고하는데!”
쿵.
‘……야닉 펠?’
“…….”
‘설마.’
“으아악!”
맞는다.
‘아하.’
야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야닉 펠.’
‘이 하이에나 새끼…….’
‘돌아오면 보자.’
* * *
아카데미 교정은 이틀 후에 있을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억!”
“조심.”
“원 리오나드, 고맙,”
“…….”
“잘 관리해.”
‘뭘 보고 있는 거지.’
* * *
“자주 있는 일입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왜 이래요?”
“학장실에는.”
“……?”
“제가 가야 돼요.”
“뭐요?”
“…….”
‘그래서…….’
“난 또 뭐라고.”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괜히 숨겼나 봐.
“뭘 숨고 그래요, 괜찮아요.”
“…….”
* * *
학장실.
“미친 게냐?”
“죄송해요.”
“자네 몸은 어디 있지?”
“상관없겠느냐?”
#<128 화>
“학장님, 이건…….”
“마물 토벌에서 산란기 마물을 건드린 학생 말이네. 그 학생을 추궁하는 도중에 알아낸 정보일세.”
‘벤디 레피……?’
“…….”
“누구,”
“웬스턴 레피.”
백호 영역의 반란과 마물 토벌에 정신이 빠진 사이, 웬스턴 레피의 그림자가 어느덧 훌쩍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숙부…….’
[데리러 가마.]
‘혹시.’
* * *
“거긴 끝났어?”
“뭔 헛소리야?”
“이 악독한 미친 괴력 곰탱이……!”
“입 닫아요, 3 인칭 변태.”
그때였다.
“메이지?”
추측과 달리, 이윽고 후드 속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구나.”
“…….”
“벤디 레피.”
* * *
같은 시각, 학장실.
“벤디 학도?”
“회장!”
소중한 전완근.
‘약효가…….’
끝났다.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이건 또 뭐야.”
[데리러 가마.]
“데리러 온다고? 누가 데리러 오는데?”
“아, 이거 그건가?”
“찾아…… 왔다고……?”
“제길!”
그와 동시에 원과 레넌, 노란 짐승이 학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밀란느 학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
“야닉 펠, 왜 이래요?”
“으…….”
‘어떻게 된 거지?’
제가 선 곳은 학장실이 아닌 교정 한복판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야닉 펠, 괜찮아요?”
철렁.
“숙부…….”
‘숙부?’
‘어떻게 여기까지…….’
‘방문증.’
“…….”
“돌아가자꾸나.”
“숙부, 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보다시피 나는 더 잃을 게 없지.”
“송곳니가…… 없는데?”
“어, 진짜네?”
“……초식 수인?”
“회장!”
화아악-
“이 빛은 뭐야?”
“윽, 눈부셔!”
#<129 화>
팔찌가 끊어졌다.
“…….”
‘설마…….’
초식 수인으로 변하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던 레넌과 헤일린의 모습이 벤디의 눈앞을 스쳤다.
‘모든 게…….’
끝났다.
와중에도 이런 상태로 육식 수인들 사이에 무방비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 전신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역시.’
더군다나 회장이라 불리는 벤디를 미루어 보아, 초식 수인이 자신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알면 반감을
불러일으킬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다시피.”
사슴 수인.
“네가 혼담에 응하지 않으면 레피 가문의 근간이 흔들린다. 네 부모가 사랑해 마지않던 가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지.”
“…….”
“또한 페트리온을 레피 가문의 핏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다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까마득한 어린 날.
‘우리 딸이 다 듣지 않나.’
‘하지만…….’
‘있잖아, 엄마.’
남편을 충분하게 수확한 벤디가 돌연 레피 부부를 돌아봤다.
‘영역민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혼인을 결심했지. 엄마는 우리 벤디도 그런 가주로 성장하기를,’
‘엄마, 그게 다야?’
‘다야.’
‘아리엘…… 진짜 그게 다라고?’
페트리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제 부모로 인해, 벤디는 이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쉽게 무너지곤 했다.
“……!”
헤일린 이스단보다 껄끄러운 이름을 들은 학생들이 낯빛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녀가 제안한 혼사를
거절하고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는.”
“혼인 따위 하지 않아요.”
“…….”
“건방진!”
부모나 자식이나. 특히 아리엘 레피를 빼닮은 올곧은 눈동자가 볼 때마다 속을 역겹게 만들었다.
‘막대 과자가…….’
없다.
“회장!”
“……!”
“그딴 걸로 뭘 어찌하겠다고.”
콰아앙!
휘오오-
‘대체…….’
“컥!”
“끄윽, 헉…….”
쓰러뜨렸다.
주춤.
‘……아.’
한발 늦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벤디는 여우 수인이 아닌, 사슴 모습으로 학생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
짙은 정적 속,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안나…….’
미간을 굳힌 신시아.
‘나는…….’
이방인이었다.
#<130 화>
당연한 반응이었다.
예상했다, 예상했는데…….
‘하지만…….’
자박.
“…….”
* * *
저벅. X 클래스 기숙사 주변에 다다른 원은 아직 불이 켜진 창문을 올려 봤다. 벤디의 기숙사 방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나.’
‘뭐…….’
낮게 웃은 원이 손에 조그마한 둥근 빛을 소환했다.
한 개, 두 개.
‘……원이구나.’
“…….”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 * *
[X 클래스]
괜히 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허…….”
“이 새끼가!”
그나마 가깝게 지낸 클래스메이트들의 반응이 이 정도면, 다른 학생들의 반감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가 대뜸 물었다.
“신시아, 넌 알고 있었어?”
“아니.”
“아무렇지 않을 리가.”
쿵.
“학장님께서 벤디 님을 찾으십니다.”
올 게 왔다. 또 다른 난관을 맞이한 나는 낯빛을 희게 물들였다.
* * *
위조한 방문증으로 출입한 것도 모자라, 아카데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점은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더불어.”
“항의서라 하심은…….”
“우선은 자네가 초식 수인임을 감추고 신분을 조작한 데에, 학장의 용인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욱신.
벤디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간 기다린 밀란느 학장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보답이요……?”
“벤디 학도.”
“네, 학장님.”
“……!”
“……학장님.”
“오냐.”
“학장님, 저는…….”
“학장과 학생의 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귀족으로서 말하네. 지금이 자네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세.”
“…….”
“당장 떠나게.”
* * *
“…….”
“아닙니까?”
“학장님 편입니다.”
“사회생활 잘하는구먼.”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기억나는가?”
#<131 화>
“……분명히.”
“벗자.”
“뭐?”
오…….
원과 헤일린이 턱을 매만졌다.
특히 밝히는 사슴에게는 안성맞춤인 수법. 그러나 레넌을 제외한 두 사람에게는 상당한 수치심이
요구되기에 일단 그 의견은 보류됐다.
“꺼져.”
“잠깐.”
* * *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잊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때려 주고 싶던 밉상.
‘앞으로 허락 없이 만지지 마.’
‘고서적.’
‘이 모든 걸…….’
[학생회장 벤디 레피]
저녁 늦은 시각.
“넌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니까.”
푸르릉!
겨우 도착한 후문.
푸르릉, 푸르릉!
“가려고?”
리리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벤디 러피야.”
탁, 내 앞에 선 그가 씨익 웃었다.
“……뭔데요?”
“리리 교수님.”
“그래.”
한 걸음.
‘새, 새슴 얘래분.’
‘라일라, 따라 하지 마.’
두 걸음.
잠깐 멈춘 나는 뒤를 돌아봤다.
모두 안녕.
* * *
밀란느 학장은 축제 기간을 이용하여 용의주도하게 벤디의 행적을 감췄다.
리리 교수의 입단속 및 기숙사 사감의 협조도 구한바, 벤디는 기숙사에 틀어박힌 것으로 조작됐다.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신시아, 어디 가?”
“학생회실.”
“……가려고?”
“그럼 안 가니?”
“놀랐어.”
“…….”
“어떻게 그걸 숨겼지?”
‘……그러네?’
“솔직히…….”
웅성웅성.
* * *
‘벤디 레피…….’
“하…….”
“끝내준다…….”
“시끄러워요.”
“저는 그저.”
“그저…….”
“저희 마개동에서 학생회장의 사슴에게 추적 마도구를 붙였었거든요. 아카데미 내에서만 추적할 수 있는데
…….”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부터 아카데미 내에서 그 사슴의 신호가 잡히지 않아요!”
#<132 화>
무려 사슴 영역의 레피 가문으로부터.
‘제법이구먼.’
아무리 노인이라도 밀란느 학장은 왕년의 실력자. 따라가기가 힘에 부친 비서가 억울하게 토로했다.
“웬스턴 레피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 추악한 삼 인방이 벤디 학도의 부재를 알아서는 안 되네.”
추악한……?
“동의합니다.”
콰앙!
폭발했다.
“…….”
“저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는데.
“안타까운 일이군요.”
“……죽였나?”
“숨소리가 들립니다.”
살려는 뒀다는 뜻.
‘뻔뻔한……!’
“하, 학장님!”
경악한 비서가 무례를 무릅쓰고 학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
아무리 정체를 들켰다고 해도, 사슴은 일주일 가까이 기숙사에 틀어박혀 궁상떨 성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
사슴 영역, 페트리온.
‘저놈…….’
눈이 돌았다.
* * *
‘전 안 해요.’
이래봬도 레펠튼에서 벤디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 자의로 학생회에 남은 세미가 한마디 했다.
크웡웡, 크웡.
크헝.
‘영웅은…….’
나타났다, 벤디 레피 광인.
‘보아하니 이놈…….’
아직 회장이 사라진 걸 모르고 있다.
“이 야닉 펠은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마에 나 비밀 있다고 써 놓은 꼴.
……돌아오기만을?
그 능구렁이 학장에게…….
‘당했다.’
야닉은 무해한 미소는 사라지고, 더없이 유해해 보이는 레넌의 얼굴을 바라봤다.
‘회장…….’
아무래도 이 야닉 펠이 실수한 것 같다.
* * *
‘가여워라…….’
“으하하하하!”
차인 놈이다.
‘한계다.’
“…….”
* * *
권력을 잡으려는 몇몇 때문에 학생들 사이로 피로감이 만연한 와중, 매달 초에 있는 정례 연설이 개최됐다.
중앙 광장.
쿵, 쿵.
“흠흠.”
“하,”
학생 여러분.
“하,”
“하아아…….”
“…….”
기묘한 행동거지에 가려서 그렇지, 사실상 사슴 여러분을 제외하면 모자람이 없었지 않나.
‘무엇보다…….’
“조용히 해, 데릭.”
‘아, 그거다.’
신기한 일이었다.
‘곧 겨울인가.’
“…….”
입안이 썼다.
“아기씨.”
“아유, 이게 뭐가 힘들다고.”
‘아기씨…….’
* * *
‘없애지 않았군.’
자연스레 제가 머물렀던 감옥을 돌아본 원의 낯빛이 변했다. 철창 너머, 웅크리고 누운 벤디가 보였기에.
“무슨……!”
“…….”
‘이딴 감옥에서…….’
* * *
깊은 밤, 저택을 점검하던 집사는 잠들지 못한 채 복도를 서성이는 수리 할멈을 발견했다.
“수리 님, 왜 그러십니까?”
“에구머니, 벤디 님!”
“꺄아악!”
“의관을 불러오세요.”
“대체 누구…….”
“의관부터.”
“비키시오.”
수상한 불청객.
“힉!”
“아이고!”
‘종족 특성인가.’
“가주의 예비 남편.”
“잠깐,”
“그건 또 어떤,”
“금수 같은 놈, 썩 물렀거라!”
깡, 깡!
깡, 까강!
* * *
‘어떻게 된 거지…….’
“좀 어떻수? 열은 다 떨어졌는데.”
“과로라네요, 과로.”
“아니, 그거 말고.”
“아아, 간밤에 난리가 났었지. 어제 웬 남자가 쓰러진 아기씨를 데리고 들이닥쳤지 뭐요.”
“……누가?”
육식 수인이라니.
“어떤…… 육식 수인이었는데?”
아카데미 교복.
“……그리고?”
“수리 할멈…….”
“우린 참수형이야.”
* * *
“열은.”
“왜 왔어요?”
원은 답지 않게 날이 뾰족 선 벤디를 내려 봤다.
“십 년 만에 되찾은 제 자리예요.”
“너무하네.”
“…….”
“나한테도 십 년은 긴 시간이었는데.”
“생각해 봐요.”
“그게 무슨…….”
“……!”
“잡아먹히기로 한 거.”
쿵, 쿵.
‘문은…….’
열어 주고 가야지.
* * *
“…….”
“너……!”
쾅!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천 번도 그를 난도질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벤디를 마주한 웬스턴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언제나 시선을 내리기 바빴지,
저런 눈을 한 벤디를 그는 몰랐다.
“모든 영역민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예요. 권력과 재물을 탐하여 가주 부부를 살해한 추한 자의 말로를.”
‘……이상하지.’
‘저게 뭐람.’
“아기씨.”
“일꾼이…… 없지.”
“그렇죠. 저 정도 건장한 청년은 삼 인분은 하고도 남지요!”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주춤.
“어허!”
“그리고 원 님이 저를 왜 기다리는데요.”
“보고 싶으니까.”
“잡아먹는 거, 오늘 해도 돼요?”
공중에 떠오른 벤디는 팡, 코피를 분수처럼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아기씨!”
* * *
수인 아카데미 학장실.
“미친놈…….”
“거기는 또 왜.”
“미친놈…….”
“미친놈…….”
* * *
‘대략 스물.’
“요망한…….”
“따라와!”
“이쪽으로 와.”
“자, 이제 말해 보시지.”
“뭐를?”
“나 같은 부군을 두고 떠난 게 말이 안 되잖아.”
부군……?
“웃기지 마, 이 사칭범.”
“……?”
“거짓말.”
“그, 그렇지…….”
‘이 죄 많은 사슴이.’
꼬르륵. 벌어진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환각을 본 모니가 기겁하며 레넌을 흔들었다.
#<135 화>
* * *
“나도 너 별론데.”
“알 게 뭐야.”
“저게 뭐야?”
“버, 범죄자라니……?”
“이노오옴!”
“너, 혼나 볼래?”
“…….”
* * *
‘왜 쫓아오는데요?’
‘떨어지기 싫어서.’
‘…….’
‘불만 있어요?’
‘없습니다…….’
벤디가 헐렁한 차림새에 반응하는 걸 학습한 원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흑발도 이마를 전부 덮게끔
청초하고 수수한 모습으로 나다녔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아.’
참다못한 벤디가,
‘각인의 뜻은 알고?’
‘비슷한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어떻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뻔뻔하게…….’
‘벌써 도착했나?’
“가주님!”
“무슨 일이에요?”
“생명을 갉아먹는 마력을 사용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죄수 몇몇이 탈출한 거고요.”
“예!”
* * *
비슷한 시각.
“무, 무슨 일이지?”
“잠깐.”
“네놈은 뭐냐!”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아.’
“페트리온 모험대!”
빠밤.
“퉤, 이건 뭔…….”
“너희는 이제 돌아가.”
“시, 싫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 이렇게?”
“지금, 방출해.”
“재능 있네.”
“그럼 너는?”
“발 닦개 노릇 하러 가야지.”
“쟤 방금 발 닦개라고 했지?”
* * *
수용소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부서진 감옥은 얼마 안 되지만, 탈출한 몇몇 죄수들과 병사들이 뒤엉켜 소동을 일으켰다.
정찰병이 올라가는 탑.
‘저거다.’
시야를 방해하는 연기를 헤친 벤디가 앞으로 나아갔다. 탁탁탁, 계단을 올라가는 발에 속도가 더해졌다.
“무기를 버려.”
‘데릭 레피.’
“사, 살려,”
“히이익! 가, 가주님!”
“……버릴게.”
‘리리 스승님이 설명한다, 잘 들어. 지팡이를 사용하면 위력은 커지지만, 손으로 직접 마법을 소환하는
것보단 명중률이 떨어져.’
“……아니.”
“뭐?”
‘……웃었어?’
쐐애액-
“아아아아악!”
‘레넌……?’
“네가 왜 여기에,”
“…….”
“네가 살린 목숨이니까.”
#<136 화>
방금 전 레넌의 말은 누가 들어도…….
“아……!”
“레넌, 괜찮,”
“구속구를 가져와!”
‘하지만…….’
‘어쩔 수 없나.’
“……!”
“한 번만 더 말없이 사라지면.”
될 리가 없잖아.
“저, 저거 육식 수인 아니야?”
“가주님을 보호하라!”
“그냥 지인.”
뺨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젓는 벤디의 반응에, 더 수상하게 여긴 병사들이 레넌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여기 온 목적?”
“혼인하자.”
“…….”
“가주님.”
진짜…….
또라이…….
* * *
“몰골이 왜 이래.”
“조용히 해, 안 들리니까.”
대단한 게 또 나타났다.
교복 아니면 제복에 가까운 정복만 입던 꽉 막힌 늑대가. 가벼운 셔츠 차림에 흑발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레넌의 가슴팍.
“알았으면 다시 마차 타고 꺼져.”
원의 가슴팍.
“나 침실에 가서 쉴 거야.”
“……이건 또 뭐야.”
은발의 아름다운 미남자. 힘 잘 쓰게 생긴 육식 수인 하나 더 늘어났다.
“이보게, 아는 자인가?”
“초면입니다.”
분명 레피 저택의 실세다.
“자네는 뭔가.”
“가주의 부군 될 사람입니다.”
“노오옴!”
깡!
“다시 말해 보게.”
“부군,”
깡, 깡!
누가 봐도 지팡이 형벌 유경험자였다.
‘저 똥개 새끼가 예비 남편이었네.’
깡, 까강!
* * *
한편, 근육 아카데미.
“흠흠.”
“왜?”
“아니, 뭐…….”
“……없으니까 적적해서.”
“그걸 이제 알았냐.”
“…….”
“들어 볼래?”
* * *
‘그러고 보니…….’
* * *
‘탈 것 멀미는…….’
그때부터 생긴 거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낯선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느릿하게 이동한 시선이 어둑한 공간을 오갔다.
시커먼 철창 속에 수많은 동물이 뒤섞여 자리했다. 밀렵꾼들이 잡아 온 동물을 보관하는 장소인 듯했다.
‘아차, 배낭.’
주섬주섬. 배낭을 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와중, 지긋한 시선이 옆얼굴에서 느껴졌다.
#<137 화>
‘잘 있어라.’
흡, 흡.
“…….”
‘검을 잡는 손.’
‘수인이었나.’
“……벤디?”
“어이, 네 차례다.”
‘조금 더 있어 볼까.’
* * *
관객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어두컴컴한 상태. 빼곡한 인파를 둘러본 레넌이 원을 향해 말했다.
“나는 발톱.”
“똥개.”
“입 닫아.”
‘이 영악한 똥개가.’
‘이 약은 고양이가.’
두두두두.
“배낭 멘 새끼 사자입니다!”
‘으.’
최악이다.
“1 실링.”
“넉넉하게 3 실링.”
“인심 좀 썼어.”
‘목소리가 귀에 익은데.’
“5 천 실링!”
“7 천 실링!”
* * *
크르릉!
‘그놈이 벌인 일인가?’
찾았다.
‘또 어딜 만지려고.’
“노랑아!”
와락.
“위험하게 왜 이런 곳에 있어.”
이중인격도 아니고.
노랑이를 어화둥둥 하는 벤디와 헤일린을 박대하는 벤디. 거의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꼴이었다.
‘밀렵꾼인가.’
“……벤디?”
“시에나…….”
휙, 휙.
“시에나.”
“얘기는 무슨.”
“……?”
“너 혼자 해, 그딴 거.”
벤디의 목소리가 이렇게 저음이었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던 남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당신은…….”
‘혹시 조금 전의 그 새끼 사자…….’
그가 혼란에 잠긴 사이, 헤일린은 남자의 손에 잡힌 벤디의 손목을 조심조심 빼냈다. 뒤이어 남자의 손을
쓰레기 치우듯 내팽개쳤다.
“먼저 가, 시에나.”
“뭐? 하지만…….”
“누군데.”
깜짝.
“소꿉친구야.”
“단지 그뿐?”
“……그럼?”
“아니잖아.”
“그냥, 첫사랑.”
“어릴 때 내가 좋아했었어.”
쿵.
“거절당했지만…….”
‘얘를 거절했다고?’
얘를 어떻게 차.
얘를 어떻게 거부하지?
얘를 대체 어떻게…….
“좋아한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아.”
#<138 화>
“아아악!”
“놓치지 마, 붙잡으라고!”
“……!”
밤중에 얼핏 기다란 밀색 머리카락을 본 원은 고민 없이 창문 밑으로 뛰어들었다. 만에 하나 벤디라면
반드시 받아야만 했다.
터억.
“…….”
“……감사합니다.”
‘뭐야 이건.’
‘저 초식 수인…….’
나만큼 예쁘다.
“신세를 졌습니다.”
‘이놈이다.’
* * *
“어디 가?”
“웬 놈들이냐!”
“비켜.”
“알아서 뭐 하려고?”
“궁금하니까.”
“딱히 별거 아니야.”
“싫어.”
“대체 이유 같은 게 뭐가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한데.”
멈칫.
저택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공간.
‘녹, 색…….’
……책장 뒤.
지익, 직.
“흡!”
이 문…….
‘마력이 걸려 있잖아.’
오묘한 마력의 흐름이 몸을 통해 전해져 왔다.
[암호]
“암호라니?”
[아리엘 레피]
[리안 레피]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아리엘…… 정말 이러기야?’
……알겠다.
[고구마]
[엄마는 사실 걱정이야]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
그렇게 들어간 공간에는 어머니가 모은 여유 자금과 일기, 그리고 가문과 관련한 수많은 정보가 있었다.
“…….”
내가 선택하는 길…….
“입 닫을게.”
“아주 옛날 옛적에.”
“……?”
“대륙 전역을 떠돌던 그는 잠시간 페트리온의 밀림에 정착했고, 그때 우리 어머니 가문의 핏줄을 이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지.”
“……그게 끝?”
“설마…….”
“…….”
“그는 어머니 가문 특유의 마력에 비밀이 있음을 알았지만, 이스단 가문에 알리지 않았어. 자신을 내친
가문에 득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나는…….”
“알겠어.”
“왜 그렇게 보는데.”
“감상이…… 그게 다야?”
“그럼.”
“…….”
딸꾹.
“그게 무슨 뜻,”
“……!”
두근, 두근.
“좋아해.”
#<139 화>
쿵, 쿵.
“말 잘 들을게.”
“시키는 것도 다 하고.”
“…….”
“……좋아해.”
“듣고 있어?”
죽었나.
“헉!”
“…….”
“이놈들은 뭐야!”
“경매를 망친 놈들이냐?”
“쥐새끼 같은!”
“좋아,”
“조용히 할까?”
“알았어.”
두근…….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밀렵꾼들은 이게 뭐라고 심장이 뛰었다.
“뭐라고?”
‘이게 뭐람.’
벤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딴 걸로 잘도,”
콰아앙!
* * *
같은 시각, 경매장 밖.
콰아앙!
감흥 없이 올려 보던 원의 두 눈이 확장됐다.
“……!”
원의 마법이었다.
‘눅눅하니까…….’
“다친 곳은.”
“없…….”
‘잡아먹는 거, 오늘 해도 돼요?’
오, 맙소사.
“넘어지는 게 취미야?”
‘혼인하자, 가주님.’
오, 세상에.
궁지에 몰린 사슴과도 같은 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한 삼 인방이 망설일 때, 그들을 지나친 남자가 벤디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공공의 적.
“소꿉친구.”
“……?”
“저놈이 벤디를.”
“……??”
그게…… 가능해?
그게…….
“정혼자라는데.”
“누구.”
“내 가주님의.”
누구의 정혼자?
“노란 새끼가.”
꿈이 아닌 모양.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어.”
“기다려 봐.”
“오랜만이야, 시에나.”
“벤디…….”
“역시 그냥 베자.”
“기다려.”
“이제 한 마디 했어.”
“벤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못 한 말은 영원히 못 하는 편이 낫지.”
쿵.
“……!”
“그건…….”
“됐어, 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시에나!”
치정 싸움을 끝낸 시에나가 세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퇴장하는
모습조차 청초했다.
바로 미인과 고구마였다.
“…….”
* * *
“그런데?”
“네 녀석!”
주르륵, 야닉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안나는요?”
“늦으려나 보네요.”
“큽…….”
#<140 화>
“할멈…… 나 목욕부터…….”
이제야 깨달았다.
밀림에 둘러싸여 타 영역의 간섭이 어렵고, 풍요로운 농작물로 인해 영역민들의 삶이 대체로 안정적인 곳.
헤일린 또한 지옥의 문지기, 수리 할멈의 지팡이 신고식을 치러야 할 텐데. 그 중요한 과정이 생략됐다.
“…….”
직접 두들겨 주는 수밖에.
* * *
“미관상으로.”
‘고구마 먹을래?’
드르륵.
저 일꾼 세 명을 어떡하면 좋을까.
“하…….”
‘혼인하자, 가주님.’
‘좋아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답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생각에 잠긴 사이,
“벤디 님!”
“무슨 일이에요?”
“지인이요?”
“예?”
“……예?”
“아니에요, 일단 나가 봐요.”
‘누구지?’
“……안나.”
수리 할멈에게서 옮겨진 안나의 시선이 벤디에게 닿았다.
“…….”
“영원히 안 볼 생각이었어요?”
“아니에요.”
“그건…….”
“미안해요.”
“…….”
“데리러 왔어요.”
“……?”
“안 와요?”
“괴력 곰돌이.”
“……제일 친한 친구.”
눈을 조금 크게 뜬 안나는 이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들어와요.”
“마음대로 해요.”
“……흠.”
“뭐가요?”
딸꾹.
숨을 멈춘 벤디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
“명색이 제일 친한 친구 아니었나.”
“그게…….”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끄덕끄덕.
끄덕끄덕.
끄덕끄덕.
“허…….”
“그래서.”
이쯤이면 그냥 넷이서 사이좋게 손잡고 식장에 들어가야 하는 수준 아닌가. 막연히 생각한 안나가 입술을
여닫았다.
“솔직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그것도 답이 안 나와요.”
“…….”
“그럼……?”
“덮쳐 봐요.”
“…….”
“뭐라도 결론 나지 않겠어요?”
#<141 화>
“덮…….”
“……덮.”
“아니에요.”
“네, 네. 보수 사슴 씨.”
“뭐가 됐든 빨리 해결 봐요.”
“지, 지금요?”
“…….”
새도 잠든 시각.
“안나…….”
무심한 괴력 곰돌이.
살금, 살금.
‘덮쳐 봐요.’
‘뭐라도 결론 나지 않겠어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
“……회장?”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얼어 있던 그는 챙강, 던지듯 단검을 치웠다. 꿈이든 현실이든 벤디의
목에 또다시 상처를 낼 순 없었다.
“하…….”
‘진짜가 맞나.’
잠결에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탓에, 조금은 몽롱한 그가 벤디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닿은
보들보들한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아니, 꿈이 아니다.’
“……여기서 뭐 해?”
흐트러진 가운이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다시피 한 모양새. 그 아래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였다.
“뭐 하는 건데?”
“지금부터 덮칠 거야.”
“……뭐?”
얼빠진 그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회장, 잠깐,”
“안 돼?”
“아니, 돼. 그런데…….”
“확인할 게 있어서.”
‘무슨 확인?’
‘감사합니다.’
다음은…….
“할 수 있겠어?”
“……?”
“그다음 과정.”
부드러운 은발이 뺨을 간질이자, 벤디는 발끝이 꼿꼿하게 섰다. 훤히 드러난 그의 갈라진 상체가 정신을
혼미하게끔 만들었다.
“다음 과정은,”
“내가 할까.”
헉.
“…….”
“나, 나중에.”
쾅!
“…….”
“……아.”
잠은 다 잤다.
* * *
“회장?”
“저야 모르죠.”
“수인은 원래 반은 짐승이에요.”
“그 의미가 아니라.”
“네, 네. 짐승 사슴 씨.”
* * *
문제는 벤디였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었던가.
“뭐.”
끼이익.
#<142 화>
‘설마…….’
살금, 살금.
두리번거리기도 잠시, 벤디의 눈길이 카펫에 닿았다. 그곳에는 웬 거대한 늑대가 엎드려 누운 상태였다.
“……!”
육식 동물.
‘왜 늑대가 이런 곳에…….’
‘원이구나.’
‘뭐야…….’
쿵, 쿵.
설마 아프기라도 한가.
그런 생각에 다다른 벤디가 주춤거리며 복부를 어루만졌다. 이어서 조용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원 님, 혹시 아파요?”
‘그냥 깊이 잠든 건가?’
‘죽지 말고 기다려.’
‘각인의 뜻은 알고?’
“지금.”
“……!”
“언제부터 깨어 있,”
“…….”
“하…….”
“…….”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 근육 때문에 숨 막힌다고.
어둠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벤디에게마저 전해질
정도였다.
“…….”
‘어쩌면 나는…….’
“덮치러…….”
“베개는 뭐고.”
“그런데 안 그러려고요.”
아무래도 이렇게 해서 결론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니, 제발 덮쳐,”
왜 하필 오늘.
왜.
왜…….
* * *
“거기 3 호, 이리 와 보게.”
“내가 한 거 아닌데.”
그도 그럴 게 범인은 요 며칠 넋이 빠진 일꾼 1 호와 2 호의 짓이 분명했기에.
“부수는 거.”
“귀여운 거?”
뭔가 있다, 일꾼 1 호와 2 호에게.
“웬일이야?”
“…….”
“너지.”
뜨끔.
“……덮.”
“덮?”
“덮치려고 했어.”
“덮…….”
“왜.”
“혹시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뭐를.”
“그건…….”
“네 감정을?”
숨을 고른 그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조급해 보이네.”
“…….”
“책임감이…….”
죽고 싶을 때 유일한 온기가 되어 준 원.
‘이제 진짜 나 책임져야겠다.’
이유야 뭐가 됐든 늘 저를 위해 몸을 던진 헤일린.
“책임감이 없을 수가 없잖아.”
“…….”
“무슨…….”
“덮친다며, 해 봐.”
“…….”
#<143 화>
붉은 눈동자 속에 벤디가 가득 들어찼다. 예고 없이 입술을 깨물린 헤일린은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피……!’
“……!”
휙, 벤디의 몸을 번쩍 든 그가 제 무릎 위에 얹었다.
“흐…….”
“-그만.”
“……왜.”
왜긴 왜야, 숨 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어디 가.”
가는 발목을 붙든 그가 잘근 깨물었다.
“더 해도 되는데.”
“안 돼!”
“있잖아.”
‘아, 그래서…….’
유례없는 짙은 접촉.
화아악-
‘설마……!’
“…….”
‘그럼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잠깐.’
* * *
병가 마지막 날.
손님방에서 교복을 차려입은 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페트리온을 떠나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으.
[감히 이 야닉 펠에게……!]
[비켜요.]
“정원으로요? 언제요?”
* * *
“안나, 어디 가는 건데요?”
이윽고 정원 한복판에 다다른 안나는 하늘을 올려 봤다. 벤디도 덩달아 고개를 꺾었다.
“……?”
파파파-
파파파파-
“사슴……?”
“돼지 같은데.”
“날개를 봐, 박쥐겠지.”
“그냥 괴물 아닌가.”
파파파-
“저게 무슨…….”
“이건…….”
[나 실은 너 꽤 좋아했어. 물론 학생회장으로서.]
툭, 투둑.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종잇조각을 진하게 물들였다. 벤디는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편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당장 돌아와서 헤일린 이스단과 약혼부터 파혼하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서술하시오. -라일라]
[올 때 사슴 영역 고서적. –신시아]
[제왕의 귀환, 그리고 대륙 제패의 서막 –야닉 펠]
“…….”
‘난…….’
사소한 모든 게 그리웠다.
‘나는…….’
내가 선택하는 길…….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원과 레넌, 헤일린, 그리고 안나가 들어왔다. 아카데미를 떠난 자신을
따라 여기까지 찾아온 이들이었다.
“반드시 돌아갈게.”
* * *
안나와 삼 인방이 페트리온을 떠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겨울과 함께 동계 방학이 찾아온 시점.
가주로서 정복을 차려입은 레넌의 모습에 뿌듯하기도 잠시, 최측근 바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 끝이 잘게 경련했다.
“예쁜 사슴이.”
“당장 실행할까요?”
“아니, 안 돼. 그럼 나를 평생 원망하겠지.”
“상관있어.”
이 고집불통 고양이가. 바알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백호 영역에 메아리쳤다.
늑대 영역, 마탑.
“후.”
“하아.”
“저…… 마탑주님.”
“말 걸지 마세요, 머리 깨기 전에.”
“함구하겠습니다.”
“그거라 하심은?”
“사슴병.”
“예?”
“아니, 상사병.”
“뭐를.”
“…….”
“얼굴보단 몸을 좋아하던데.”
“아카데미에서 벗고 돌아다니라고?”
“못 할 건 뭐지?”
“……부인.”
“왜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 * *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거기!”
“이놈아, 난 교수라니까!”
‘그리고…….’
그는 최근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기고 다니는데, 가닥가닥 자연스레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선을 앗아 갔다.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고귀한 외양이었다.
“누구?”
“모를 수가 없지.”
“내 말이…….”
“글쎄……. 교내 알력 다툼 같은 거 아닐까?”
“땡.”
돌연 그들의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신입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 돌린 곳에는 레넌이 서 있었다.
두근…….
“그래서…….”
* * *
페트리온, 레피 저택.
“그건 기분 탓이고요.”
너무해.
따라서 아카데미 생활과 가문 업무를 병행하려면 완전한 가주가 되어야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었다.
“뭔데?”
“그 왜, 매달 오는 거 있잖수.”
“……고구마 밭?”
“어쩌시려고요?”
“그런 것 같아…….”
“아기씨.”
“응?”
“마음을 얻으려면 주변인부터 공략하는 게 정석. 이 할멈은 그들의 지략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흠…….”
“그건 뭐야?”
“엄마가…….”
“……음.”
해피가 떠나간 후부터 평안한 나날을 보내던 말들은 갑자기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아…….
#<145 화>
“이 야닉 펠을 학생회장으로 뽑으면!”
“싫어.”
이제는 아카데미에 눌러앉아 버티는 레넌을 응시하던 밀란느 학장이 콧등을 부르르 떨었다. 저렇게
궁상떠는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어째서?”
‘그러고 보니…….’
벤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레넌처럼 조용히 아카데미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나. 신중하게 사냥
시기를 기다리는 맹수와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벤디 학도가…….’
“서쪽 담장?”
갑자기 무슨 헛소리인지.
“방금 그 말은…….”
“…….”
“안 가느냐?”
“미친놈…….”
* * *
아카데미 인근에 다다른 벤디는 들어가지 않은 채 괜히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해피, 기억나?”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여기였었지.’
일 년 전과 동일한 장소, 똑같은 대사.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도, 레넌과의 관계도 현저히 달랐다.
“잠깐 급한 볼일 좀 보고 온 거야.”
“있잖아, 레넌.”
“왜?”
“임시 가주 말고 진짜 가주.”
“그럼 이건 알아?”
“뭐를……?”
“다시 만난 건 내가 처음이야.”
앞뒤가 생략된 말.
“도와줄까.”
아직 성장기라 그런 건지 뭔지.
“보고 싶었어.”
쿵, 쿵.
페트리온에 머무는 내내 얌전하던 벤디의 심장이 또다시 불규칙적으로 뛰어댔다. 변함없이 이곳 맹수들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
“나도 보고 싶긴 했지…….”
결국 여유롭게 포장한 그의 가면이 무너지는 순간, 벤디가 재빨리 그의 입술을 손으로 덮었다.
“……불가항력이야.”
“그럼 나도.”
“불가항력이야.”
드러난 벤디의 목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먹이를 탐하듯 지분거렸다.
“흐, 잠깐…….”
“회장!”
“……해피.”
눈치를 살핀 벤디가 팔꿈치로 해피의 몸을 쿡 찔렀다. 마구간에 신세를 지고 싶으면 뭐라도 하라는
의미였다.
“후……. 이리 와 보게.”
깜짝 놀란 벤디가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수인 아카데미는 대륙의 모든 인재를 수용하는 곳이니까. 지금까지 그 모든 인재에 초식 수인은 예외였던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밀란느 학장님…….”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이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던 만큼, 아마 시작부터 가로막힐 게다.”
“얼마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하지만…….”
“…….”
밀란느 학장은 저도 모르게 벤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멋쩍게 손을 물렸다. 탁, 그 손을 붙잡은 벤디가
슬그머니 제 머리에 얹었다.
‘요망한 사슴 같으니라고.’
“그런가요.”
“……네?”
뭐가 입학했다고요?
#<146 화>
“어느 일족인데요? 진짜 초식 수인이에요?”
“……?”
까딱.
“네?”
“지금 어디 가는 게지?”
“그렇단 말이지.”
‘늠름하게……?’
고민도 잠시, 벤디는 배낭에서 중요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페트리온 특산품인 고구마 맛 막대 과자였다.
막대 과자를 움켜쥔 벤디를 본 밀란느 학장이 짧게 침음했다.
보통 무기를 든 모습을 늠름하다고 표현하긴 하는데. 또라이 사슴의 무기는 늠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장님, 대체 이게 무슨…….”
‘마력이 느껴지는데?’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손 흔드는 학장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벤디와 해피의 발밑이 뒤흔들렸다.
* * *
“아아.”
공간 이동 마법, 속칭 텔레포트.
호명에 따라 원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화악-
왜 갑자기 시비인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맞아, 야닉 펠 말고 누가 하겠어?”
순순히 야닉에게 장단 맞추는 것마저 수상했다. 심지어 야닉마저 경계하며 레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저게…… 뭐람?”
‘설마…….’
학생회장이 이곳에.
“글쎄…….”
화아악-
“…….”
째깍.
붉은 리본과 교복, 흩날리는 밀색 머리카락과 손에 쥔 막대 과자.
째깍.
“받아!”
‘닿지 않는다.’
“저 왔어요.”
이제는 이런 사슴의 기행이 놀랍지도 않았다. 언제나 갑자기 나타나서 어이없을 정도로 그를 뒤흔들어
놓았으니까.
“……조금 늦었나?”
“아니.”
“십 년도 기다렸는데 이 정도야.”
도도도.
도도도, 도도도도!
‘이 미친 똥개가.’
“윽!”
크르릉-
“회장, 너 이 자식!”
야닉이 머리채를 풀고 단상을 향해 두두두 달려오고 있었기에. 사색이 된 벤디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주, 죽을 거야.’
“왜 이제 오냐고! 왜!”
“미안해…….”
빌어먹을, 저 이상한 장면이 뭐라고 슬프지. 그들은 피로 촉촉이 젖은 눈 앞머리를 당기며 한 마디씩
외쳤다.
“두모오오오옥!”
그리고…….
벤디 레피가 돌아왔다.
흘긋. 교단에 선 교수는 강의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뒤를 곁눈질했다. 덩달아 흘끔, 학생들의 눈길도
뒤편을 향했다.
‘학생회장이었다니.’
‘십 년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야.’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엮이게 된 걸까.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궁금해서 밥맛도 뚝 떨어진 지경이었다.
“흠…….”
“그게 무슨 소린데?”
“아니, 왜?”
통제가 어려운 발 닦개들이 순순히 학생회에 협조할뿐더러, 대부분의 행사가 착실하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게다가 학생회 일원을 다양하게 구성함으로써 타 일족을 배척하는 등 불필요한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
“물론 이번 선거는 그렇진 않겠죠, 다들 깨달은 바가 있으니까. 하지만 저 혼자만으론 설득이 어려워서.”
“…….”
갖고 싶다.
발 닦개 삼 인방의 눈동자에 떠오른 선명한 열망을 읽은 안나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러시든지요.”
* * *
“그게 어딘가?”
“당장 가 보세.”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눈만 빼꼼 내민 벤디는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사슴인 사실까지 드러난 이상 또 자신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단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입후보하지 않은 건데.’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
‘말도 안 돼.’
* * *
“뭐 해?”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노란 짐승의 꼬리가 쭈뼛 섰다.
운다.
“고작…….”
노란 짐승이 아쉬움을 삼키기 무섭게 벤디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잔디를 짙게 물들였다.
진짜 운다.
“노랑이 너.”
“……?”
“흑.”
“노랑아.”
#<148 화>
누가 누구를 먹여 살려?
‘지금부터…….’
‘아니지.’
하마터면 실수할 뻔한 노란 짐승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노랑이 레피이자 헤일린 레피였다.
“…….”
“……노랑아?”
‘망가지는 건 아니겠지.’
“설명해.”
울컥, 재차 복받치는 설움을 삼킨 벤디가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쏴아아-
“그 말.”
“청혼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청혼.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는데, 느지막이 그 단어가 무겁게 다가온 벤디는 잘게 동공을 떨었다.
“자, 잠시만.”
“늦었어, 번복 못 해.”
“…….”
‘아.’
웃었다.
따끔.
‘……?’
“거기까지.”
“저놈.”
“안 쫓겨났어요.”
“……?”
아닌데, 쫓겨났는데.
“소박맞고 쫓겨났어.”
“웃기네.”
검을 회수한 레넌이 입꼬리를 비틀며 되물었다.
사라 이스단은 하자 있는 적통에게 자리를 계승하면 계승했지, 방계에게 가문을 물려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가 그럴 리 없다고.”
“잠깐, 그만해.”
“저기.”
“잠깐.”
“헛소리.”
“그만하라고……!”
휙, 팍, 탁.
이게 바로 예물 반지다.
‘저……!’
“그럼.”
아니, 네가 거기서 흔들리면 어떡하는데. 그 반응을 발견한 헤일린의 동공도 덩달아 진동했다.
“그, 그건.”
“저녁에 이 무슨 소란입니까?”
‘이 목소리는.’
“사, 사감님…….”
“……흠.”
“네?”
“……네?”
“네, 맞아요.”
“죄송합니다, 당장 내보낼게요.”
“수칙에는 없더라도 주의해 주세요. 원만한 단체 생활에는 배려가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벤디 레피 학생.”
“네?”
또 왜.
“…….”
‘다행이야…….’
‘……베개보다 편한데?’
“실은 말이야.”
“…….”
“학생회장.”
‘기꺼이.’
“무슨…….”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기도 잠시, 순서를 빼앗겨 버린 백호가 뒤따라 촉, 벤디의 입술에 주둥이를
가져갔다.
#<149 화>
“……!”
‘아차, 반지.’
화들짝 놀란 노란 짐승은 얼른 제 앞발을 확인했다. 한평생 귀하게 보관해야 할 잡초는 다행히 무사했다.
백호와 늑대의 시선이 제 연약한 예물 반지에 닿은 걸 눈치챈 노란 짐승이 도도도, 부리나케 도주했다.
“진짜…….”
방심할 수가 없어.
“굳이 안 봐도 다 들리던데.”
“아냐, 쟤 사슴이야.”
책임감과 별개로, 원이나 레넌, 헤일린과 지금보다 더한 감정이나 육체적 교감을 가진다는 게 아직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어리네.”
“어려.”
“애다, 애야.”
전부 나이도 비슷비슷하면서.
‘모르겠다.’
언젠가 그 따끔거리는 감정의 정체도 알게 되고, 어쩌면 저들의 말대로 정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만 좀 해, 그만 좀.”
* * *
“……뭐?”
어딘지 대화가 원활하지 않고 엇갈렸다.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던 신입생들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초상화? 무슨 초상화?”
“고구마 초상화래.”
“……뭐?”
“아아.”
“그래, 다리 아프다고!”
“아악!”
올해도 부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한 안나를 마주한 야닉은 분하다는 듯 제 이마를 팍 쳤다.
‘간발의 차는 무슨.’
야닉 펠의 선거 결과는 0 표.
감격해서 발표를 잇지 못하는 야닉을 한심하게 응시한 안나가 결과지와 확성 마도구를 빼앗았다.
드물게 비속어를 내뱉은 신시아는 축축한 눈가 주변을 결과지로 부채질했다. 눈에 고인 건 눈물이 아니라
피였다.
“X 클래스의 벤디 레피입니다.”
“축하해요, 두목님.”
찬란한 꽃잎이 학생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사실상 뻔히 예상한 결과. 놀라지도 않은 학생들이 단상으로 걸어가는 벤디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회장.”
“……?”
“나 가주 안 할 테니까.”
“야 이 미친놈아!”
“밀란느 학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저 미친 고양이.’
‘죽인다.’
단상이 반파되기 3 초 전의 일이었다.
* * *
삐거덕, 삐거덕.
‘……후.’
“아아.”
“반갑습니다.”
“사,”
“학생 여러분.”
학생회장이다.
* * *
“우리 벤디 안 그렇게 생겨서는 공부 잘하잖아. 엄마는 나중에 벤디가 아카데미도 가고, 친구도 많이
사귀면 좋겠어.”
“응, 그럴게.”
“밥이잖아.”
“맞는 말이네.”
수긍한 아리엘은 게시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벤디와 같은 밀색 눈동자가 끄트머리에 자리한 빛바랜
전단지에 머물렀다.
‘흠…… 아카데미라…….’
“엄마, 방금 뭐 한 거야?”
“응.”
벤디는 조금 수줍어하며 발꿈치로 땅을 팠다.
“무슨 냄새?”
“고구마 냄새.”
수인 아카데미 完
#<Epilogue 1 화>
앞으로 또 다른 일 년을 꾸려 갈 장소.
‘흠, 조금 허전한데.’
“안 왔어요.”
‘귀엽다.’
이건 진짜 미쳤다.
흘긋.
“가세요.”
“사슴은.”
“기숙사에 있을걸요.”
흘끔.
“안 팔아요.”
“벤디는.”
“여기 없어요.”
힐긋.
‘……괜찮겠지.’
* * *
다만…….
>> 에필 1 화 삽화 2 번
‘어떤 놈이야.’
‘반드시 색출하겠어.’
“안나, 왜 그래요?”
“회장, 아주 깐깐하게 면접에 임하세요. 특히 그 도둑놈들, 아니, 삼 인방의 미인계에 넘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 알겠어요?”
따라서 부득이하게 면접까지 시행하게 된 상황. 학생회실 복도에는 지원자들이 와글와글 모여든 상태였다.
“올해부터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금서나 고서적은 제공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서기에 지원하겠어요?”
지긋지긋한 독서광.
“이게 뭔데요?”
“두목, 어서.”
“노랑이?”
“헤일린 이스단?”
“역시!”
“왜 댁까지 놀라요?”
그야 나도 이제 알았으니까…….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 바쁜 액자를 바라보던 안나가 벤디를 돌아봤다. 이런 무구하고 새침한 얼굴을
하고서는.
“잘못된 걸까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붙어서 감시하려고.”
“게시판?”
어리둥절하게 게시판을 돌아본 레넌은 고구마 초상화를 확인하자마자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내 초상화는 어디 가고 저딴 게 붙어 있어.”
“합격.”
하고 싶은 말이라.
“합격.”
“……?”
“내, 내가 언제.”
“그런 거 나 말고 하지 마.”
“…….”
“알았어?”
공중에 대롱대롱 떠오른 벤디가 얼결에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이상한데.’
“회장.”
“네?”
“……사슴 수인인데요?”
#<Epilogue 2 화>
“아…… 면접 망친 것 같아.”
“초상,”
안나의 괴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내일이 없으며, 벤디의 초상화를 충분히 탐낼 만하고, 그런
같잖은 고구마 초상화를 그릴 만한 인물.
두들기고 보려던 원과 레넌, 헤일린은 끓어오르는 주먹을 애써 눌렀다. 사라진 초상화의 안위가 먼저였다.
“어디 숨겼어.”
“1 초 준다.”
“입 닫아.”
“쉿.”
“……?”
확, 헤일린이 귀를 막고,
“웅웅?”
“네.”
짝, 짝, 짜악.
“합격.”
내 이상형 점수 만점…….
* * *
늘 반듯한 옷차림으로 다니던 원은 갑자기 흑발을 내리고, 카디건을 입는 등 헐렁한 차림새로 나타났다.
‘이게 다 뭐야.’
‘그 꽃이 그 꽃이 아니겠지.’
‘학장님이 말한 사슴 수인 신입생이…….’
설마하니 시에나였다니.
“하…….”
이대로도 괜찮을까.
‘그렇지 참.’
창틀에 올라선 그는 벤디의 눈높이에 맞춰 수그려 앉았다. 살짝 찢어진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살벌했다.
“그럼 어떡해.”
“짜증 나, 너.”
“나도 너 짜증 나.”
“…….”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노랑아.”
“왜.”
“육식 수인 중에서.”
“……?”
“네가 제일 좋은 것 같아.”
‘그래, 좋아.’
‘…….’
‘육식 동물 중에 제일 좋아.’
언젠가, 노랑이가 육식 동물 중에 가장 좋다며 퉁명스레 외치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회장, 안 와요?”
“먼저 간다.”
“두목, 빨리 오세요.”
“…….”
“같이 가.”
“잘한다, 근육 바보.”
“머리부터 따 버려.”
페트리온에서 도망치기 전만 해도 안개처럼 흐릿한 내일이 끔찍할 만큼 두려웠는데. 저들과 함께인 지금은
다가올 미래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움찔.
‘아직도 이걸 찾고 있어?’
미안해, 시에나…….
* * *
사라 이스단을 비롯한 백호 영역의 바알 장군, 그리고 스카론 장로와 그를 따라온 페트리온 모험대 대장
모니까지.
‘꼬마, 너는 누구냐.’
“미친놈들…….”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 ㅎㅁ * 쉼터 ** 1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