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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빛 속으로 2 권

티카티카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2 권

지은이/ 티카티카

발행인/ 박성인

책임편집/ 편집부

펴낸 곳/ (주) 삼양씨앤씨 - 피오렛

주소/ 서울시 강북구 도봉로 173, 5 층

대표전화/ 02-980-2116

블로그/ blog.naver.com/dan_gul

신고번호/ 제 2017-000030 호 신고일자/ 2017 년 12 월 19 일

등록번호/ 831-88-01041 등록일자/ 2017 년 12 월 20 일

ISBN 979-11-6546-180-5 (05810)

(주) 삼양씨앤씨 - 피오렛의 서면 허락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목차

Chapter 4. 별장 휴가

Chapter 5. 하지 연회

Chapter 6. 여름 소나기와 수도 모험

외전 3. 루미나스

Chapter 4. 별장 휴가

“황녀님, 황녀님. 일어나세요!”

“……으음…….”

커튼을 착, 걷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햇빛이 내 눈꺼풀 사이로 내려앉았다.

으, 벌써 아침인가? 아직 더 자고 싶은데…….
내가 침대 안에서 꾸물거리자, 유모가 단호하게 나를 재촉했다.

“얼른 일어나세요!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요.”

중요한 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그 단어를 곱씹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맞아,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지.’

내가 반쯤 몸을 일으키자 유모는 이제야 일어났냐는 듯 땀을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휴, 우리 잠꾸러기 황녀님. 나이를 먹어도 아직 어리시다니까요.”

“좋은 아침…….”

말은 그렇게 해도 유모의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유모는
말했다.

“열네 번째 생신, 축하드려요.”

졸린 눈을 비비던 나는 그녀의 말에 생긋 웃음 지었다.

“고마워, 유모.”

그래. 오늘은 나의 열네 번째 생일이었다.

* * *

열네 살이 되어도 졸린 건 졸린 거다. 하품을 찢어져라 하던 나는 시녀들이 가져다준 세숫물로


세수를 마치고,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전하.”

“오늘은 최고의 날이 될 거예요.”

“고마워, 다들.”

시녀들이 나에게 건네는 인사를 일일이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벌써 내가 14


살이라니.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말해 준 대로 최고의 날이 될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자 이제 반쯤 어른이 된 꼬마 아가씨가 생긋 웃음 짓고 있었다. 14 살이 된 나는 키도


훌쩍 자라서 이제 성인의 어깨까지 닿을 정도는 되었다. 가을 하늘을 담은 것 같은 푸른색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마치 은 실타래 같았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우리 제국에서는 18 살을 성인으로 치니, 이제


겨우 4 년 남은 셈이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게 바로 어제 같았는데 말이야.’

내가 치장을 마치고 곱씹어 생각하고 있는데, 시녀장이 옆에서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응접실에서 황녀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이 아침부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더라면 더 빨리 준비했을 텐데. 아마 두 분께서는


내 생일을 빨리 축하해 주고 싶어서 아침부터 오신 모양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옷도 화려하고 장신구도 주렁주렁 늘어뜨렸다 싶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께


가려고 그랬구나.

어쨌거나 부모님께 생일 축하를 받을 생각에 들떴던 나는 얼른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곤 시녀들이


열어 주기도 전에 침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실책이었다.

“꺅!”

문을 열자마자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상자가 쓰러져 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깜짝 놀란 시녀들의 비명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그 수많은 상자들은 나를 깔아뭉개기에 충분해 보였다.

“루!”

다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루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나의 소중한


정령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루가 나서서 내 앞에 빛의 보호막을 쳐 주었다. 상자들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나를 향해 루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으응…….”

루가 내 옆에서 바쁘게 파닥파닥 돌면서 내 안위를 걱정했다. 다행히 상자는 거의 다 가벼운


종류였기 때문에 루가 없었더라도 크게 다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십년감수했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였다. 나는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시녀들, 특히 시녀장은 사색이 되어


나를 향해 재빨리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전하?”

“어디 다치신 곳은…….”

시녀들은 꼭 자기가 다칠 뻔한 것처럼 눈물마저 머금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난 괜찮아. 그런데 이건 다 뭐야, 대체?”

무슨 상자들을 문 앞에 쌓아 둔단 말인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황실에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가?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상자들이 굳이 문 앞에 쌓여 있어야 했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침실과 연결된 작은 방의 모든 구석구석, 꽉꽉 상자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말이다.
상자들은 제각각 모두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장지에, 예쁜 리본이나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나는
떨떠름할 뿐이었다. 이곳은 보통 내가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상자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나 모르는 사이에 이 방이 황실 물류 창고라도 된 듯한


모양새였다.

이 거대한 상자 더미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하게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시녀장이 무척이나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전하께 배달된 선물이옵니다. 옥체가 상하지 않으셨다니 정말 다행이어요.”

“……이게 다 내 선물이라고?”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작년보다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많아진 것 같은데?”

“모두 황녀님의 명성이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까닭이지요.”

옆에 있던 유모가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었다. 아마 내가 이름을 날리는 게 그녀로서는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주위에 있는 상자들을 살펴보자, 상자는 크기도 색도 무게도 모두 다양했다. 시험 삼아 하나 열어


봤더니 그 안에는 귀하디귀한 블루 다이아몬드로 만든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벨벳 위에서 오색찬란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는 그 귀걸이는 틀림없는 최상품이었다.

‘…….’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다른 상자에도 이런 물건들이 가득 차 있으리라. 벨벳 상자의 매끄러운


감촉을 손으로 느끼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자.”

“……예, 전하.”

내 말에 시녀장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상자를 이렇게 위험하게 쌓아 놓은 시종은 제가 찾아내어 엄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혹여라도 황녀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다치셨다면…….”

“아냐, 됐어. 어차피 다치지도 않았는걸.”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괜찮다니까.”

시녀장은 당장이라도 그 시종을 잡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내


황녀궁에 일부러 나를 다치게 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을 리도 없는 데다가…….

뭣보다 내가 멀쩡하지 않은가?


“시녀장 말대로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데, 괜히 벌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생긋 웃었다. 그 모습에 시녀장은 약간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성은이 하해와도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큼, 지금은 일단 이 선물 더미를 뚫고 어떻게 응접실까지 가느냐를 생각해 보자고.”

“예, 전하!”

시녀장은 환하게 웃었다. 항상 딱딱한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도 자기 휘하의 시녀를


벌하기에는 안타까웠으리라. 아닌 척해도 우리 시녀장은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방 안에 쌓여 있는 선물 더미는 마치 거대한 산 같았다. 그것도 폭설이 내린 거대한 산 말이다.


나는 그 산속을 뚫고 가야 하는 여행자가 된 심정이었다.

‘이걸 어떻게 다 뚫고 가지?’

한숨이 나올 때였다.

“저어, 여기 황녀 전하의 선물을 추가로 가져왔…… 꺄악!!”

복도에서 문이 열리더니 시녀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때를 잘못 맞춰도 한참 잘못


맞춰 버렸다. 당연한 수순처럼 상자가 무너지고 시녀는 선물 더미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루를 향해 부탁했다.

“……루, 가서 저 시녀 좀 구해 줘.”

“네, 다녀올게요!”

내 말을 들은 루는 냉큼 대답했다. 흘긋 보니, 복도에는 새로운 시녀가 가져온 선물이 한 수레 더


넘쳐 흐르고 있었다.

* * *

겨우겨우 선물의 산을 뚫고 황녀궁의 응접실로 가니, 그 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연하게 차를


들고 계셨다. 아침부터 진이 완전히 빠져 버린 나는 지친 목소리로 두 분께 아침 인사를 올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생일 축하한단다. 아이샤.”

“생일 축하한다. 유난히 지쳐 보이는구나.”

아버지의 말에 나는 손짓, 발짓으로 내 고난을 설명해 보이려 애썼다. 내 몸보다도 상자 더미가


높이 쌓여 있었던 그 일을 말이다.

“그러니까, 대체 그 선물들은 다 뭔가요?”

그에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각국에서 네게 환심 한 조각이라도 사보겠다는 사람들이 보내온 선물들이지. 마음에 안 들면


창고에 넣어 놔도 괜찮단다.”

“아이샤, 이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쁘단다. 네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뜻이잖니.”

아버지의 말에 이어,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위치를 걱정했던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전 세계에서 환영받는 사람이 된 것이 굉장히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7 살, 이시스 오라버니를 구하기 위해 빛의 정령의 능력을 발휘한 나는


이후 빛의 신전에서 성녀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몇십 년 만에 빛의 신전에서 내리는 ‘성녀’의 칭호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지사. 거기다가


그 주인공이 이 제국에 단 하나뿐인 황녀님이라니.

결국, 나는 사람들에게 ‘엘미르의 고귀한 성녀’, ‘성스러운 황녀님’, ‘정령의 가호를 받는


분’ 등등 다양한 칭호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다 좋다. 약간의 대가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있음으로 인해 엘미르 제국의
국격이 한층 더 올라갔으니 말이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엘미르 제국의 황녀로 14 년을 살아오다 보니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선물들은 너무 과하다고…….’

이런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보렴, 아이샤.”

“네?”

“설마 내 선물을 받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나에게 아직 선물을 주시지 않았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버지는 하나의 지도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혹시 보물 지도라도 되나?’

하지만 지도를 천천히 바라본 결과, 그것은 평범한 대륙 지도였다.

‘……설마 생일 선물이 지도는 아닐 테고.’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태연하게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그곳은 리오텐 공국에
소속된 섬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광산은 리오텐 공국의 금줄 중 하나로, 막대한 부를 생산해 내는 곳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 아버지를 올려다보는데…….


아버지는 상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선물.”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섬이 제 거라고요? 하지만 이 섬은 리오텐 공국의…….”

“그래, 리오텐 공국의 섬이었지. 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버지는 당황하고 있는 나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대신들이 리오텐 공국과 외교 회의를 했었지.

아버지는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시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렴. 그 녀석이 외교 특사로서 함께한 덕분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마치 자기가 등장할 때를 기다린 것처럼


응접실의 문이 똑똑 울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이시스 오라버니가 척척 걸어 들어왔다. 그야말로
시기적절한 등장이었다.

“오라버니!”

내가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반가워서 그를 부르자 그는 활짝 웃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샤.”

올해로 22 살. 성인식도 치르고 이제 완전히 청년의 태를 물씬 풍기는 오라버니는 그야말로 눈이


부실 듯 빛나고 있었다. 참고로, 성인식을 치른 이후 오라버니는 나의 어머니를 정식으로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드러운 분위기인데도 특유의 진지함과 박력이 있는 데다가, 문무에 뛰어나고 매우 잘생긴


오라버니는 각국에서 끊임없이 청혼을 받고 있었다.

아직은 황제로서의 배움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오라버니는 모든 청혼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정복을 차려입고 온 그는 과연, 사교계 뭇 여성들의 심장을 떨리게 하고 잠 못 들게 할


만큼 충분히 멋졌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그를 연모하는 사람이 십수 명이니,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죄 많은 미모.’

아무튼 오라버니가 약혼자가 아직 없어 나와 놀아 줄 시간이 많다는 건 솔직히 조금 기쁜 일이었다.


오라버니는 늘 그렇듯이 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열네 번째 생일 축하한단다.”

“감사드려요. 오라버니. 그런데…….”

나는 고마우면서도 얼떨떨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리오텐 공국의 다이아몬드 섬은 어떻게 얻어 내신 건가요?”


그러자 오라버니는 싱긋 웃었다.

“다 수가 있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마음에 들다 못해 차고 넘치는 선물이다.

14 살 생일 선물이 다이아몬드 섬이라니, 다음 생일 선물은 대체 뭐가 될지 두려울 정도니까


말이다. 나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흠흠, 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자기 선물 자랑도 좋지만…….”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내 선물은 아직 안 들어 봤잖니?”

“아, 맞다!”

나는 손뼉을 쳤다. 어머니가 과연 나에게 무엇을 주셨을지 궁금했다. 나는 어머니의 옆자리에


쪼르르 다가가 앉아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나를 쓰다듬었다. 그에 나는 조금 볼을


부풀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아직도 나를 어린애 취급한다. 정말, 다들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오죽하면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황궁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을 정도일까?

내가 가장 불만인 점은 그것이었다. 귀중한 후계자인 오라버니도 자유롭게 궁 밖을 드나드는데,


나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일까? 어머니는 나에게 선물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내 선물은, ‘여행’이란다.”

“……여행, 이요?”

나는 너무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제국 남부에 별장을 하나 마련해 두었단다. 기후가 따뜻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지. 분위기도
느긋하고 여유롭단다.”

“…….”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니까 말이다.

“분명 재미있을 거란다.”

“여, 여행이요?”

“그래, 설마 내키지 않는 거니?”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나는 너무 들뜬 나머지 어머니를 안고 방방 뛰었다.

“여행이라니, 어머니 최고!”

어머니는 기쁘다는 듯이 호호 웃으며 나를 토닥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시스 오라버니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내 선물도 최고라고 해 줘!”

“흠흠. 여행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구나. 다음 선물은 아예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네


이름으로 된 나라를 선물해 줄까?”

무슨 소리람. 나는 아버지의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사양할게요.”

하지만 다음 순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린애처럼 앞다투어 말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사이좋게 폭 끌어안아 주고 생긋 웃었다.

“다들 최고예요. 선물 감사해요!”

가족들은 그제야 만족한 것 같았다. 나를 토닥거려 주는 손길 속에서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여행이라니.’

들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거다. 들뜰 수밖에 없었다.

내 어깨에 앉아 있었던 루는 내 신난 마음에 감응한 것처럼 우리 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고,


심지어는 콧노래마저 부르고 있었다. 그 애가 뿌리는 금빛의 빛가루가 우리 사이로 떨어졌다.

그 금빛 가루는 마치 내 앞날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여행이다!’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었다.

* * *

그날 저녁은 당연하다는 듯, 황궁의 가장 큰 연회홀에서 내 생일 연회가 열렸다.

내가 크고 나서 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부터, 나는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말렸기


때문에 내 연회는 3 일 정도 열리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어째 아버지는 ‘양보다 질’ 쪽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으신 모양이었다.

덕분에 연회홀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보석들과 금이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홀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였던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그 화려한 연회홀에 어울리도록 나는 아주 공들여 꾸몄다.

눈 색과 어울리는 연하늘색 드레스는 아랫단으로 내려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형식이었고, 그


끝단에는 금실로 짠 섬세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머리는 곱게 올려 묶은 뒤 블루 다이아몬드로 된
티아라를 머리 전체에 두른 나는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내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에스코트를 맡은 오라버니가 있었다. 오라버니는 내 드레스에


맞추어 푸른 다이아 보석 핀으로 포인트를 준 검은 연회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단언하건대 오늘 연회의 모든 어린 영애들의 마음은 이시스 오라버니가 훔쳤을 것이다.

“황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나라의 별, 고귀하신 성녀님. 생신 축하드려요!”

하루 종일 어디를 가든지 생일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귀에서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말이 계속


윙윙거릴 정도였다고 하면 그 양이 짐작될까?

‘웃자, 웃어.’

나는 평소처럼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오늘 내가 연회에서 해야 하는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결국


긴장감을 숨기지 못한 나는 오라버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무도 없는 테라스로 나왔다.

내 사정을 눈치채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 준 덕분에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무도회장의 들뜬


분위기는 나와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 밤하늘 위로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쏟아질 것처럼 넓게 펼쳐진 은하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루.”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루를 향해 살짝 말을 걸었다.

“오늘도 나, 잘해 낼 수 있을까?”

내 손바닥만 한 이 깜찍한 정령은 내 어깨에 그 작은 고개를 폭 기대왔다.

“물론이죠! 매년 잘하고 계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가 성녀라는 이름을 얻은 대신 치르게 된 대가, 그리고 내가


연회장에서 해야 할 일.

두 가지는 서로 맞닿아 있었다. 신전에서는 내가 속세에 머무르는 것을 승인했지만, 그 대신


하나의 계약을 요구했다.

성녀라는 이름을 가진 대신, 나는 내 생일마다 제국의 병자들을 치료함으로써 루미나스 님의


권능을 증명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궁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지만…… 나이가 더 들면
신관들과 함께 순례 여행 같은 것을 떠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성녀 같은 거창한 이름을 원하지도 않았고, 다른 제국민의 이목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나는 신전의 요구를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한 뒤에, 결국은 그 일을 받아들였다. 비록 내가 신관이 아니더라도, 정령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렇다면 정령왕인 루미나스 님께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에 대한


감사로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제국민들에게 조금의 선행이라도 더 많이 베푸는 것이, 황녀로서 태어난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나의 행운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었다.

그것이 아픔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 제국민이라면 더더욱.

그러자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장 고귀한, 어린 황녀님께서 성녀의 힘으로 병자를
치료한다.’라는 이야기가 전 대륙에 퍼지게 된 것은.

8 살 생일부터 시작된 이 일은 매년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명성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내가


올해 생일 선물 상자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정령의 힘이 강해지면서 치유의 힘이 점점 강력해진 데다가, 내가 가진 후광까지


더해지니 각국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중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절박한 이들을 찾아 틈틈이 치료를 해 주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그 선물 상자도 그렇고, 전 대륙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나는 푸념과도 같이 중얼거렸다. 알리사였던 과거에도 이 정도로 심한 주목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다니.

“괜찮아요, 주인님.”

루는 그런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이라면 분명히 잘해 내실 거예요.”

나는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들은 너무나도 순수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른다. 거짓 하나 없는 루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생긋 웃었다. 루의 마음이 고마웠던 탓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기지개를 펴는데 뒤에서 테라스의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뒤에는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공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입 모양으로만 말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살짝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적당한 길이로 잘린 붉은 머리카락과, 상반되는 깊은 푸른색


눈동자. 몇 년 사이에 키가 훌쩍 커 버린 벨트모어의 공자님, 비온이었다.

그는 날 보고 가볍게 묵례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이샤 황녀님.”

“감사해요. 비온 공자.”

나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올해 19 살이 되는 그는 오라버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황실 근위대의 부단장이었다. 황궁에서


마주칠 일이 잦았던 탓에 우리 둘은 꽤나 친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7 살 때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비온에게 빌렸던 붉은색 마력석은 아직도 내 보석함에 잠들어 있었다.
못 돌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그대로 가지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사양하려고 했다. 마력석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는 꿋꿋이 나에게


그 마력석을 주겠다고 말했다. 뭐라고 했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단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던가?

‘황녀님께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그렇게 말하며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마력석이 하나 더 있었다. 너무 어릴 때 받아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것은 내 1 살 생일 때 전생의 친구 아르센에게 받았던 마력석이었다.

아직까지는 쓸 일이 없었던 덕분에 나는 푸른색, 붉은색 마력석을 하나씩 보석함에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다. 두 개는 마치 한 쌍 같았다. 안에서 마력이 일렁거리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는지, 비온 공자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황녀님.”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요.”

나는 그에게 사과하며 예를 차렸다. 그러자 비온 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의식이 얼마 남지 않아 다른 분들께서 슬슬 황녀님을 찾으시는 것


같더군요.”

“앗…….”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나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테라스의 난간에서 나왔다.

“같이 가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유리문을 여니, 분리되어 있던 테라스와는 다르게 더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달콤한 향수 냄새와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 그리고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으로 가득한 연회홀이었다.

비온 공자의 말대로 슬슬 행사는 내 차례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족들은 나를 기쁜 낯으로 맞았다.

“아이샤!”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들은 절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의 옥좌와 그 옆에 나열된


황족들의 화려한 의자들.

나는 그중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황족들의 자리는 단상이 높았기 때문에 그곳에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홀 안에서 무얼 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었고 누군가는 칵테일을 홀짝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유혹하고 다른


누군가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두가 하나하나 유서 깊은 귀족들이었고 나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백성들이었다.

새삼 아버지의 위치가 실감이 나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리고 나 또한,


황녀로서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전 생에서 알리사로서 그랬듯이 말이다. 그때의 나는 이런 생일 연회 때 훨씬 떨고 긴장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지 못하고 항상 의연한 척했어야 했지.

지금은 달랐다. 아이샤인 나는 훨씬 마음이 개운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는 가족들이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서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에게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자 그들은 나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내왔다.

마음이 따뜻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드디어 대신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으로 위대한 엘미르 제국의 단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황녀님의 신성한 의식이
거행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뒤로는 시녀장이 허리를 뻣뻣하게 세운 채 나를 따랐고, 내 어깨에는


루가 긴장을 풀라는 듯 톡톡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에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나에게 치료받기 위해 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맨 처음


환자는 허리를 다쳐 거의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중급 정령 ‘리미에’의 이름을 불렀다.


“리미에, 나와 주렴.”

그러자 공중에서 환한 빛과 함께 인형처럼 작고 아름다운 숙녀가 소환되었다. 내 키의 반쯤 될 것


같은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한 이후, 장내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 저게 바로 정령…….”

“정말로 아름다워요…….”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나는 리미에를 소환하고도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서 있었다. 7 살


때와는 다르게, 나는 훨씬 마력과 정령력이 늘어난 상태였다.

그것은 매일 같이 루를 소환해서 대화하고 마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 덕분일지 모른다. 혹은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내 마력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고.

덕분에 내 치유력은 해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리미에를 향해 부탁했다.

“저 환자를 치료해 줄래?”

마력이 늘어난 나는 이전 이시스 오라버니를 치유할 때처럼 나의 생명력까지 끌어서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내 부탁을 들은 리미에는 나를 대신해 환자에게 포르르 날아갔다.

그러곤 따뜻하고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 동안 나는


리미에를 향해 계속 마력을 보냈다.

허리 쪽에 집중적으로 이어지던 빛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환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여진다. 움직여져!!”

그는 떨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랫동안 하반신을 쓰지 못한 기간이 길어서인지 그는 금세


일어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서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사고 이후부터 계속 기어 다니기만 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내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아이샤 황녀님!”

“고귀하신 성녀님!”

그리고 나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나의 부탁을 이룬 리미에는 내 곁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 곁을 빙글빙글 돌면서 빛가루를 뿌렸다.

“고마워, 리미에.”

나는 그런 리미에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나의 치료를 받은 환자는 떨리는 고개를 조아리며 나에게


연거푸 감사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환호성이 다시 이어졌다.
“성녀님 만세!!!”

나는 볼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었지만, 들을 때마다 나에게 너무나 과한


칭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환자들은 앞의 기적을 본 탓에 두 눈을 엄청나게 반짝거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리미에를 향해 부탁했다. 다음 환자는 화상을 깊게 입은 자였다.

* * *

결국 그날 모든 환자들에게 치료술을 펼친 나는 이튿날 근육통 비슷한 것에 시달리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령력과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통증도 며칠 요양하고 나면 금방 지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도 연회가 있긴 했지만 어제 일로 피곤한 내가 굳이 연회에 참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늦은 오전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선물해 준 ‘다이아몬드 섬’과 어머니가 선물해 준 ‘별장’
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시녀를 불러 지도를 두 장 갖고 오도록 했다. 하나는 리오텐 공국의 지도였고,


하나는 우리 제국의 남부 지도였다.

나는 먼저 다이아몬드 섬을 살펴보았다. 오라버니에게 말을 들으니, 리오텐 공국은 우리에게


군사적 동맹을 맺기 위해 회담을 요구해 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다이아몬드 섬을 접수하게 된 거고.

섬을 바치면서까지 그들이 우리와 군사적 동맹을 맺고 싶어 한 이유가 있었다. 리오텐은 우리


제국의 북동쪽에 붙어 있는 영토와 동쪽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국이었다.

문화나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나라로,


엘미르 황실의 피가 흐르는 리오텐 대공이 제국에서 독립한 지가 약 백 년 정도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나라의 지지 기반도, 군사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은 우리 제국의 영원한 라이벌, 이덴베르 제국이 북쪽 국경에 얼마간 닿아 있었고 말이다.

아마 리오텐 공국에서는 우리 제국과 군사적 동맹을 맺음으로써 차차 발전을 꾀하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어차피 리오텐 공국의 뿌리도 엘미르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니, 큰 거부감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휴…….’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대륙의 정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예민해지곤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덴베르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여행을 권유하시는 것은.

‘아마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하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나는 리오텐 공국의 지도 위에 남부의 지도를 올려놓았다. 황족용 지도는 아주 세밀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형의 곳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제국의 남부는 날씨가 따뜻한 데다가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볼 수 있고, 여름을 맞아 휴양을 온
귀족들을 중심으로 사교계가 열리곤 했다. 여행 가기에는 딱이었다.

나는 그 지도를 손으로 덧그려 보면서 잠깐 여행에 대한 기대에 빠졌다.

‘체르 영지라고 했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협곡과 폭포, 넓은 시골 장원이 있는 별장이라고 했다. 절로 기대가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출발일은 바로 다음 주. 아름다운 장미가 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잘 다녀와야 해! 아이샤, 돌아와서 만나자!”

나는 나에게 손을 흔드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올게요! 선물도 사 올게요!”

나는 편안한 여행용 옷을 입고,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화려한 마차 안에 탔다. 수도에서부터


남부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3 일,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일부러 황성 숲에 있는


공간이동 게이트를 열어 주셨다.

숲의 한구석에는 게이트장으로 쓰이는 큰 건물이 서 있었는데, 마차 몇 대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공간이동 게이트를 보는 것은 나로서도 처음이라, 창문을 살짝 열고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흰 대리석 위에 새겨진 마법진과 그 옆에서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 엘미르 제국이 기사 쪽을


더욱 쳐 주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에 대한 지원이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나와 오라버니가 독살당할 뻔했을 때 대신관이 부재함으로 아버지께서는 이동 수단의


중요성을 깨달으셨고, 이동 마법진 마법에 엄청난 투자를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남부로 가는 게이트도 뚫려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나 쓸 수는 없지만 말이다.


마차는 게이트 위에 올라서서 몇 분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기묘한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바뀐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황궁에


존재하는 세련된 게이트장과 다르게 남부의 게이트장은 약간 시골스러운 멋이 있었다.

게다가 풍경뿐만이 아니라, 공기마저도 달랐다.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남부의 공기가


더웠던 것이다. 내가 신기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우리 일행의 마차를 본 마법사들이 앞다투어
나와 환영했다.

호위 기사가 나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잠깐 문을 열었다. 내가 멀쩡하단 것을 확인한 그들은


안전에 주의를 기하며 게이트장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남부의 시골길이었다. 여기로부터 우리는 다시 3 시간 정도 마차로 길을 가야 한다.


수도보다는 확실히 길이 덜 닦여 있었기 때문에 마차는 가끔씩 울퉁불퉁한 바닥에 약간 흔들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 또한 여행의 재미일 것이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서 거의 여행을 해 보지 못했던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저 멀리에서 보이는 청록색 밀밭도, 햇빛 아래 활짝 피어난 들꽃들도, 그리고 넓은 들판과 푸른
하늘까지. 완벽하게 멋진 풍경이었다.

“루, 멋지지 않아?”

“최고예요!”

나와 루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보며 잔뜩 난리를 쳤다.

“이곳…… 무척 마음에 들어요. 따뜻하고, 빛이 넘치고…….”

루는 두 뺨에 손을 대고 몽롱한 듯 중얼거렸다. 아마 루가 빛의 정령이기 때문인지, 햇빛이 강한


남부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있다가 가면 좋겠어요!”

나는 배시시 웃는 루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강아지의 것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무척 기분 좋았다. 얼마 동안이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도 루처럼 따뜻한 햇빛에
반쯤 취한 나머지, 아마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퍼뜩 떴으니까 말이다. 마차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황녀님!”

나를 따라온 유모가 내 마차의 문을 열어 나를 확인했다.

“주무시고 계셨나요?”

“아, 아냐. 이제 일어났어.”

내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유모가 싱긋 웃었다.

“이제 도착했어요. 자, 내려 보세요.”

그 말을 듣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잠이 모두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호위 기사의


도움을 받아 한달음에 마차에서 내려왔다. 품위 넘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들떴기
때문이다.

“……우와…….”

나는 별장의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하고 말았다.

넓디넓은 장원 속에 그림처럼 세워진 희고 푸른 별장. 벌써부터 흰 장미가 피어 있는 정원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건물 전체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였고, 뒤에는 작은 숲을 끼고 있었다.

“우와, 우와…….”

매일 같이 호화로운 황궁을 보고 자란 나지만,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데다가, 늘 보던 황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황녀님, 저길 보셔요. 신기하시죠?”

유모가 2 층 방에 달린 테라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테라스는 황궁의 것과는 다르게 무척 넓었고, 구슬로 된 주렴이 양옆에 달려 있었다. 넓은


바닥에는 흰색의 의자 두어 쌍과 테이블, 벌레를 쫓는 향초가 사기그릇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관상용 관목들이 화분 속에 담겨 있었고, 테라스 밖으로 손을 내밀면 1 층에서부터 자란


이름 모를 나무의 잎사귀를 직접 만질 수 있을 듯했다.

“저기에서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하는 거랍니다.”

테라스가 저렇게 넓은 이유는 이 체르 영지의 기후와 관련 있는 듯했다. 대륙 제일의 산맥인 파렐


산맥이 바람을 막아 주고, 지리적으로 남쪽이라 테라스에 계속 나와 있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항상 기후가
온화하기 때문이리라.

“멋지다.”

“마음에 드세요?”

“응!”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루도 그렇지?”

루는 대답 대신 활짝 웃으며 공중을 날아 보였다. 어머니를 대신해 나의 안위를 맡은 시녀장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본래 남부의 백작 부인 출신으로, 이 여행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이만 들어가실까요?”

별장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의 사람들이 모두 줄을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 전하.”

책임자로 보이는 집사가 다가와서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귀하신 황녀 전하의 별장을 책임지고 맡게 되어서 무척 영광입니다.”

집사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고용인들의 뒤따른 인사말이 합창처럼


울렸다.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이샤 드 엘미르, 이 제국의 첫 번째 황녀이다.”

고용인들은 모두 나를 보게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인 것만 같았다. 아마 남부에서도 내가


유명하기 때문이겠지. 그들을 쭉 둘러본 나는, 이내 싱긋 웃었다.

“여기 있는 동안 잘 부탁할게.”

나의 스스럼없는 말투에 사람들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권위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딱딱한 태도는 수도에 버려 두고 온 지 오래다.

이 여행에서 나는 고민이나 걱정거리는 모두 내려놓고 별장 생활을 만끽하고 싶었다.

집사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나를 내 방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대리석 계단을 걸어서
2 층으로 올라가니, 흰색의 방문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가 있었다.
그중 중앙, 유일하게 파란색으로 칠해진 방문.

그곳이 바로 나의 방이라고 했다. 금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시녀가 조심스럽게 열어 주었다.


그러자 한눈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방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아까 보았던 것처럼 유리문 너머 테라스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아치형으로 설계된 창문가의
기둥은 완연한 남부식이었다. 나는 천천히 테라스 너머로 향했다.

바람결에 내 손으로 감겨 오는 주렴을 헤치고 초록빛 테라스 위에 섰다. 한 곳에는 금속으로


장식된 빈 새장이 있었다. 언제 새가 살았을지 모르는 그 새장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택의 정원, 그 너머의 평야,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협곡이 보였다.

“어떠신가요?”

유모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 손을 잡히는 이름 모를 테라스의 나무를 만져 보았다. 그


나무는 오렌지색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상큼한 향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유모.”

“네, 황녀님.”

나는 생긋 웃었다.

온화한 기후, 따스한 햇볕, 상쾌한 공기.

“나 여기가 무척 마음에 들어.”

금방 이곳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그날 나는 별장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녀궁도 내 소유이긴 했지만, 내


것이라기보단 황궁의 일부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완전한 내 것인 이 별장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별장은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 먼지 하나 없었다. 동시에 나는 별장의 사람들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주방장, 하녀장, 정원사, 집사, 제빵사…… 대표하는 사람들만 만난 건데도 꽤 힘에 부칠


정도였다. 넓은 별장에는 그에 알맞게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셨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원래 이 별장은 남부의


대부호가 쓰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매물이 나왔던 것을 외가에서 산 후, 어머니와 함께 내 생일 선물로 재건축했다는 것이다.

원래도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재건축을 통해서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사는 보안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나의 방과 저택 전체에는 보호 마법과 보안 마법이 걸려


있어서 허락받지 않은 자가 침입했을 시에는 당장에 알림이 울린다고 말이다.

그에 나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법사가 고급 인력이다 보니, 여기에 들어갈 비용이 대강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랑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나를 위해 정말 정성을 다해서 준비해 주셨구나.’

나는 뭉클해지고 말았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는 식사 시간이었다. 주방장과 요리사들이 이곳에


처음 온 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첫 번째 만찬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남부의 음식은 조금 맵고 간이 센 감이 있었지만, 어찌나 주방장의 실력이 좋은지 나는 배가


엄청나게 부를 정도로 먹어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게 나에게 딱 맞추어진 것처럼 편안했다.

‘별장 최고다…….’

나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생각했다. 가족들이 곁에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지금은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있는데 시녀장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식사는 즐겁게 드셨나요?”

“응! 정말 최고였어!”

“후후, 주방장이 기뻐하겠군요.”

내가 요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자 시녀장은 살짝 웃고는 자신이 찾아온 본론을 이야기했다.

“다름이 아니라, 황녀님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해 있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오전에는 이


근처를 돌아보시고, 저녁에는 사교 모임에 참석해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초대장?”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초대장이 벌써 날아왔다고? 내가 오늘 왔는데?”

“그럼요, 전하. 전하께서 오신다는 소문은 이미 쫙 퍼져 있었으니까요. 이곳이 황녀 전하를 위한


별장으로 재건축되고 있을 때부터 다들 알았을걸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먼저 초대장을
보내왔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은쟁반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편지가 다발로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 그녀는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연분홍색의 봉투에, 진한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는 초대장이었다. 희미하게 장미 향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레터 나이프로 그것을 개봉해 보니 옆에서 시녀장이 첨언했다.

“블라임 후작가에서 보내온 초대장이랍니다. 남부에서 가장 세력이 큰 사람 중 한 명으로, 항상


이렇게 장미가 필 때쯤 무도회를 여는 걸로 유명해요.”

“블라임 후작가?”
나는 그 이름을 곰곰이 곱씹다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평소 귀족들과의 교류가 그다지
없었던 나지만 나도 블라임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남부 일대를 꽉 잡고 있는 부호였으니까
말이다.

옆에서 시녀장이 말을 덧붙였다.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에는 항상 유명한 사람들이 모이지요. 게다가 블라임가에는 전하 또래의


후작 영애가 계시답니다.”

“들어 본 적이 있어. 이름이, 로즈라고 했던가…….”

“네, 로즈 블라임 님이시지요.”

나는 천천히 생각했다.

그녀의 나이가 아마 13 살. 나보다 한 살 어려서 아직 데뷔탕트를 아직 치르지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블라임 후작가의 명성이 대단한 만큼 사람들이 지나가는 이야기로 몇 번 언급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마 성격도 좋다고 했고, 내 또래라니까…….’

어쩐지 호기심이 생겼다. 다른 초대장을 여러 개 더 뒤져 보았지만, 블라임 후작가처럼 대단한


곳에서 온 초대장은 그다지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 데뷔탕트는 언제쯤 열릴까?’

편지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 내 나이가 14 살. 보통 이때쯤에 데뷔탕트를 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아직 말이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돌아가면 한번 여쭤봐야겠다. 생일도 지났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나는 생각의 마무리를 지었다.

“좋아, 정했어.”

“네, 전하.”

시녀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블라임 후작가로부터 온 초대장을 손에 꼭 쥐었다.

“이곳으로 갈래. 블라임가의 저택으로. 아, 그리고 시녀장이 말한 것처럼 내일 오전에 이 근처도


둘러보고 싶어.”

“네, 그러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일정까지는 시간이 모두 비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셔요.”

시녀장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바로 시녀들을 불러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아직 여독이 빠지지 않은 나를 위해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 주었다.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넉넉한 잠옷과 함께 말이다. 시녀장도 마차 여행을 한 나를 배려해 주기 위해 일찍 자리를 떠났다.

그에 나는 방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쉬었다. 하지만 여행을 했다곤 하나, 마차를 몇 시간 가만히


앉아서 탄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 시간의 반절 정도는 졸았고 말이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기에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결국 일어났다.


‘뭘 하지?’

고민하던 나는 루와 함께 테라스로 나가 보기로 했다. 구슬 주렴을 걷고 들어가자 수도의 것보다


따뜻한 밤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하늘에 걸린 반쪽짜리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새로운 곳에 온


설렘일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멀리에 보이는 산맥도, 정원의 모습도, 이 테라스의 경치도. 모든 것이 가슴을 들뜨게 했다.

게다가…….

‘로즈 블라임이라고 했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황궁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던데다가, 놀이 친구도 딱히


없었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아주 적었다.

있어 봐야 황궁에서 대연회가 열릴 때 정도? 하지만 황궁에서 대연회가 열리는 기회는 일 년에 몇


번, 손꼽을 정도였다. 그랬더니 이 나이가 되도록 친구 하나 없이 커 버린 것이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만남이란 무척 각별한 것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나 어머니, 아버지가
워낙 나를 사랑해 주시기도 하고, 황녀로서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꽤 바빠서 하루가 금방 가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한계가 있다. 친구 한 명 없는 삶은 싫은걸.

‘아, 아닌가?’

나는 문득 떠올렸다.

‘나도 있었지, 친구.’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루는 나와 같이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루를 내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렸다.

“루.”

“왜 그러세요, 주인님?”

루는 늘 그렇듯이 나를 향해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루의 뺨에 내 뺨을 비볐다.

“너는 항상 내 친구지?”

빛의 정령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정령들은


나의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 아마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기 시절을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중에서 루는 더더욱 특별했다. 내가 처음으로 소환한 나의 정령.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는


루가 무척이나 소중했다. 내 질문에 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저는 언제나 주인님의 친구랍니다.”

나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내가 행복하게 웃자 루는 내 뺨에 살짝 뽀뽀를 해 주었다. 달빛을


받은 루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인님을 만나게 되어서 저는 정말 기뻐요.”

“그래?”

“네.”

루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속삭였다.

“주인님은 제 첫 번째 계약자세요. 단 한 번도 불린 적 없이 정령계에 속해 있던 저에게,


처음으로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너무너무 기뻤답니다.”

“루…….”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저를 필요로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그게 주인님이어서 저는


행복해요.”

루의 애정이 나의 마음속 깊은 속까지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나도 루를 만나서 너무너무 좋아.”

나는 루를 향해 뽀뽀를 되돌려 주었다. 그러곤 우리 둘은 오랫동안 같이 달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꽃향기가 묻어 있는 달콤한 바람이었다.

그날, 나는 자면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새로운 곳에 와서 잠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절벽에 혼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내 등은 푹신한 잔디가 받쳐 주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꽃잎이 흩날리고, 나에게로 불어왔다.

‘……여긴 어디지?’

나는 멍하니 윗몸을 일으켰다. 절벽 위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희고 붉은 꽃들의 촉감은 아주 생생했고, 코끝에 닿는 꽃향기도 꿈의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있는 주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사위는 이제 막 동이 터서 아침 이슬이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저 멀리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지?’

뒤를 돌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인


남성으로 보였다.

‘대체 누구…….’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절벽 위는 아주 조용했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곤 나와 그밖에 없는 것처럼. 오직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갑작스레 하늘에서 황금색 새가 날아왔다.

‘아.’

서 있던 남자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치켜든 손 위로, 마치 당연하다는 듯 황금색


커다란 새가 내려앉았다. 길게 내려온 깃털은 금으로 뽑아낸 것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새는 주인에게 애정을 표현하듯 고개를 숙여 부리를 비볐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남자를 살폈다.


그는 발끝까지 끌리는 고풍스러운 흰옷에, 황금색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색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더없이 고귀해


보이는 옆얼굴. 그것은 마치 밤하늘에 선명하게 떠오른 초승달 같았다.

그리고 마주한 그의 금빛 눈은……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

다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고 말았다.

“……헉, 헉.”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막 튼 아침이었다.

‘……무슨 꿈이지?’

마치 계시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협탁에 있는 물을 마셨지만 금방


진정되지는 않았다.

‘……하아…….’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동안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루가 작은 손수건을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루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처럼 이렇게 나와 함께 잠에 들곤 했다. 그 애가 자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조금씩 안정이 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불을 덮고 다시 잠을 청하려 해도 방금 꾸었던 꿈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를 깨우러 사람이 올 때까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내 방에


온 유모는 내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반색했다.

“어머, 황녀님. 벌써 일어나 계셨나요?”

“으응…….”

유모는 푸근하게 웃었다.

“오늘 일정에 기대를 아주 많이 하셨나 보지요?”

“……아.”

맞다, 그랬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는 협곡을, 저녁에는 블라임 후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를 가기로 했었다.
“응, 기대가 돼.”

내가 이렇게 답하자 유모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얼른 준비할까요? 옷도 갈아입고, 맛있는 아침도 먹으러 가요.”

“응!”

내가 침대에서 나오자, 잠에서 깬 루도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주인님!”

“왜 그래, 루?”

루의 기분은 평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나는 의아해져서 물어보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하지만…….”

루는 생글생글 웃었다.

“어쩐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예감?”

“네! 저는 알 수 있어요.”

루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루의 금색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꿈에서 본 것과 아주 비슷한 색으로 느껴져서, 나는 순간 묘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 * *

옷을 갈아입은 후, 나는 아침을 한껏 만끽했다. 저민 닭고기를 올린 싱싱한 샐러드와 올리브빵,


꿀, 버터, 생햄, 오믈렛, 당근 수프, 과일과 주스 등 갖은 요리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모든 게 더 맛있었지만, 특히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일이 특히 맛있었다. 이곳에서 재배한


과일을 바로 먹기 때문일지 모른다. 남부의 과일 농사는 유명하니까.

휴양지에 오니까 입맛도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안으로 퍼져 나가는 맛을 한껏


즐겼다.

식사를 만족스럽게 한 이후에는 나갈 준비를 했다. 남부의 햇살 아래에서 더욱 시원해 보이는


푸른색 스트라이프 드레스를 입고, 푸른색 주머니를 허리에 매달았다. 수도에 있을 때보다 더 얇은
옷감은 이곳의 기후와 매우 잘 어울렸다.

‘조금 더운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무척 좋네요!”

이 날씨에 면역이 없는 나와는 다르게, 루는 이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앞에는 우리 일행을 위한 마차가 준비되었다. 호위 기사 여러 명과 시녀 두어 명, 그리고


집사와 시녀장으로 구성된 인원이었다. 같이 마차에 올라탄 시녀장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오늘은 안트렐 평원을 돌아서, 협곡을 본 뒤에 점심 식사를 가지고 오후 중으로 돌아갈


예정이랍니다.”

“응, 알겠어.”

“너무 멀리 가지는 않을 거예요.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시녀장은 마차 너머의 마부에게 준비 신호를 내렸다. 말들이 투레질하며 달릴 준비를


하는 것이 진동으로 느껴졌다.

“오늘 갈 협곡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대륙에서도 험준하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았죠. 마차로는 갈 수 있는 길이 머릿고개까지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장관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도 절벽을 보았는데.”

“네?”

내 중얼거림에 시녀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구불진 시골길을 계속해서


지나갔다. 안트렐 평원 너머로 한껏 펼쳐진 포도밭이 보였다. 사람들이 열심히 밭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했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내 별장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느긋하고 온화한 분위기다.

바람이 불면 평원의 풀들이 같은 방향으로 누웠다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오전인데도 햇빛이


꽤나 따가웠다.

시녀장은 내가 창문에 너무 가까이 붙지 않도록 자리를 살짝 옮겨 주었지만, 루는 오히려 좋다며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졸았다.

얼마쯤 길을 지났을까. 흥을 주체하지 못한 마부가 유행가를 몇 곡쯤 부르고 끝냈을 무렵일까.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멀리 있던 산맥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것이 보였다. 마부석에서


내린 마부가 창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시녀장이 창문을 열자, 마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여기가 바로 카스카 협곡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파렐 산맥에서 뻗어 나온 줄기 중


하나이지요.”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호위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곳곳을
돌아보았다.

“……와아.”

절로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고개를 한껏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절벽, 그 위로 희미하게 끝봉우리가 보였다. 그


웅장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무척이나 역사적인 장소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 협곡이
이렇게 유명한 것인지 이해가 갔다. 시녀장이 옆에서 첨언했다.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요. 이따가 구경을 가시지요.”

“응!”

나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척 들떠 있자 시녀장은 물론이고 호위 기사도 흐뭇한 것


같았다. 나는 발 닿는 대로 협곡의 머릿고개를 탐험했다. 사람의 발이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인지 협곡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저곳 탐험하던 와중, 나는 묘하게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 멀리, 깎아지른듯한 절벽 위에 보라색 꽃들이 피어 있는 군락이 보였다.


멍하니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저 꽃은…….’

꿈속에서 본 꽃 같았다. 색이 무척 독특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분명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갑자기 멈추어 서자, 시녀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

보라색 꽃은 나를 유혹하듯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빤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네, 전하.”

“저 절벽 위로 올라가 봐도 돼?”

“네?!”

그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경악한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저 절벽


위에 신경을 빼앗긴 채였다.

저 꽃, 저 절벽.

‘꿈에서 본 풍경 같아.’
내 감이 외치고 있었다. 내 꿈에 나왔던 풍경이 바로 저기라고.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가 저곳으로 간다면…….

‘꿈속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황금색 눈동자, 그 눈동자를 혹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시녀장의 기겁한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안 됩니다, 황녀 전하!!”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절벽에 올라가시겠다니, 너무 위험하세요! 길이 얼마나 험한지 보셨잖아요.”

시녀장은 엄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위 기사를 비롯해 모두가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하고 말았다.

‘정령의 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리미에는 나를 공중으로 띄워 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보고 싶은 거지?’

나는 문득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봐도 지금의 나는 좀 이상했다. 게다가 다른


안전한 곳이면 또 모를까, 모두에게 걱정을 끼쳐 가면서 올라야 할 이유가 있나?

그때, 시녀장이 나에게 말했다.

“황녀 전하, 혹시 황녀 전하께서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황후 폐하나 황제 폐하, 혹은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 저도 전하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괴로울 것이에요.”

시녀장의 말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다. 만일에 내가 올라가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나를


걱정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알겠어.”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녀장은 안심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황녀 전하.”

“……응?”

“저곳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답니다.”

남부 출신의 백작 부인이었다던 시녀장은 이 근처의 전설에 해박한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저곳은 대륙에서 가장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인지 아무도 모르게 신비로운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해요. 인간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그들을 위한 예의라나요.”

“신비로운 존재?”

꿈속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더없이 아름답던 모습은 분명 내가 본 것들


중에 가장 신비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으으…….’

큰일났다. 시녀장은 나를 만류하기 위해서 한 말이겠지만, 그녀의 말 때문에 더욱더 가고 싶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흘긋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저곳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시녀장은 내가 조용히 있자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루한테 부탁해서 절벽 위에 뭐가 있는지 조사해 봐야지.’

직접 올라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나는 협곡 위를 올려다보았다.

* * *

시녀장의 추천대로 폭포와 절벽을 둘러보고 나들이를 마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오후 일찍 별장에


돌아왔다. 남부의 권세가인 블라임 후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이다 보니, 시녀들이 나를 꾸미는 손길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시녀들의 수다를 들었다.

“블라임 후작가에 도착하시면 아주 많은 또래 영애분들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블라임 후작


각하는 이 근처의 사교계를 꽉 잡고 계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래?”

“네, 게다가 그분의 외동딸이신 로즈 블라임 영애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랍니다. 이전에 그곳에서


일했던 친구에게 들었는데, 후작가의 분들은 모두 너그러우신 분이라고 했어요.”

내 머리를 땋고 있던 시녀가 첨언했다.

“전하께서는 남부 쪽에 오시는 게 처음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지방에 사는 영애나 영식들은


친척들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수도의 사교계에 자주 온답니다. 세련된 문물을 접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인물을 사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요.”

“처음이라고 해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곳의 누구라도 황녀 전하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실


거예요. 수도에서 오시기도 하셨지만, 무엇보다 아이샤 황녀님이시니까요!”

“과연 그럴까?”

나는 끄응, 신음성을 내었다. 사실 나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데뷔탕트가 아직인 나로서는


본격적인 무도회에는 얼굴만 비추고, 나와 비슷한 또래들끼리 모여서 어울리게 될 것이었다. 주최자 측인
블라임 영애도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고 말이다.

하지만 또래를 만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시녀는 열변을 토했다.

“물론이지요! 다들 수도는 어떤지, 황궁은 어떤지 앞다투어 물어볼걸요. 누구라도 황녀님과


친분을 맺고 싶어 하실 게 틀림없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머리 손질을 끝마쳤다. 아무리 내가 유명하다지만, 모두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할 거라는 시녀들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대가 되었다. 무도회에서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했다.
시녀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그녀가 동경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멋진 능력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은 내 어깨 위에 올라앉은 루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는 오늘도 내 옆을 지켜 주고


있었다.

“그러니 황녀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빛나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리에나, 너무 잡담이 많구나.”

“앗, 죄송해요. 시녀장님, 전하.”

“아냐. 나는 재밌었어.”

그녀들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시녀는 루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루를 연회에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무 많은 주목이 쏠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미안, 루.’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곧 나의 치장이 모두 끝났다. 라일락색


드레스에 화려한 보석 핀으로 머리를 땋아 올린 모양새였다.

목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고, 팔찌도 세트였다. 이 라일락색 드레스는 아버지가
직접 선물해 주신 것으로, 수도 사교계의 최신 유행이기도 했다. 옆에서 시녀들이 나에게 외쳤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다들.”

나는 거울을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 * *
마차는 아침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마차는 금방 출발했다. 황혼이
어스름하게 지고 있는 시골길은 조금 어두웠지만, 마차 앞에 매단 등불 덕분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게다가 후작가로 가는 길은 제법 잘 닦여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꽃등으로 꾸며진 길을


가니, 어느새 블라임 후작가였다.

“조심하십시오.”

호위 기사의 손을 잡고 내린 나는 후작가의 저택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무척 넓은걸?’

그야말로 대저택이었다. 약간 오래된 양식으로 지어진 후작가의 저택은 풍광이 무척 좋았고,


근처의 넓은 정원에는 지금까지 도착한 다른 귀족들의 마차가 잘 정렬되어 있었다.

‘루가 봤으면 좋아했으려나?’

루가 이 모습을 보면 무척 즐거워했을 것 같아서, 나는 그 애를 데려오지 않은 게 못내 미안했다.

시녀장이 내 뒤를 따르고, 나는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서 홀 안에 들어가기


전 잠깐 심호흡을 했다. 시녀장이 옆에서 초대장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받아 들자, 시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아이샤 드 엘미르, 엘미르의 고귀한 별이 드십니다!”

그 순간,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홀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확 커졌다. 나를 보자마자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속닥였던 것이다.

‘……황녀님께서 남부에 별장을 마련하셨다는 게 정말이었군요…….’

‘어쩜,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세요…….’

‘저는 태어나서 황녀님을 처음 뵈어요…….’

갖은 속삭임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더욱 당당하게 허리를 세웠을 뿐이다.

“황녀 전하!”

그런 내 앞에 한 부부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부부의 얼굴은 무척


유쾌해 보였다. 여자아이는 피어오르는 장미 꽃잎처럼 아름다운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나보다 한두 살쯤 어려 보였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인지 어머니의 뒤에 꼭 붙어 있었다.

“엘미르의 고귀한 별에게 무한한 영광을! 황녀 전하께서 정말로 와 주시다니 감읍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블레임 후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이어요. 블레임 후작 부인이랍니다.”

‘아.’

그들의 정체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인 블라임 후작 일가였던 모양이었다. 초대장에 답장을 보냈던
탓에 그들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되돌렸다.
“즐거운 무도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예의를 차려서 대답하자, 옆에서 시녀장이 말을 받았다.

“황녀 전하께서 남부에 처음 방문하시는 것이니만큼, 후작 각하와 부인께서 이곳에 익숙해지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깊은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후작 부인이 호호, 웃었다.

“물론이에요. 마침 저에게 황녀님 또래의 딸이 한 명 있답니다.”

후작부인의 초록색 눈동자는 나에 대한 호감과 호의를 담뿍 담고 있었다. 그 눈이 수도에 있는


나의 오라버니를 생각나게 해서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후작 부인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의 딸을 살짝 두드렸다.

“자, 로즈. 인사를 해야지?”

우물쭈물하던 그 아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앞으로 나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로즈…… 블라임이에요.”

너무 긴장을 한 모양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탓에 얼굴과
머리색이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더니 후작 부인이 웃었다.

“어머나, 제 딸이 이렇게 낯을 가리는 아이가 아닌데. 황녀님을 만나 너무 기쁜 모양이에요.


호호호.”

“저를요?”

그 사실에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부인은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원래 황녀님을 무척 뵙고 싶어 했거든요.”

그러자 그녀가 얼른 어머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부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래, 그래. 더 이상은 말하지 않으마.”

후작은 기꺼운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하, 다른 어린 영애와 영식들은 응접실에 모여서 함께 놀고 있답니다. 전하만 괜찮으시다면


로즈, 네가 모시는 게 어떻겠니?”

블라임 영애가 깜짝 놀란 듯 안절부절못했다.

“제…… 제가요?”

“그래. 로즈, 가서 전하께 다른 친구들도 소개시켜 드리렴.”

후작 부인이 말을 거들었다. 블라임 영애는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그에 내가 대답했다.

“친구들을 소개해 주신다면 무척 기쁠 거예요.”

“……!!”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 커졌다.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 그렇게 할게요.”

“전하께서 모쪼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 로즈.”

어머니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블라임 영애와 함께 응접실로 향하게


되었다.

무도회 홀을 지나서 대응접실로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복도 두어 개를 건너면 금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어서, 나는 어쩐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뭐라도 먼저 말을 건네야 하나?’

블라임 영애는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결국


내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블라임 영애……?”

“……꺅!”

콰당! 내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넘어지고 말았다.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소리가 꽤나 컸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브, 블라임 영애?! 괜찮으세요?”

그래도 재빨리 달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라임 영애가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내 손을 잡지는 않고, 자리에 주저앉아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영애?”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어색해서 손을 거두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내 손을


잡았다.

“하, 화, 황녀 전하!”

“……네, 네?”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기겁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 그, 그게……!”

영애는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실제로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진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한 건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 어쩌면 남 앞에서 넘어진 게 부끄러운 걸지도 몰라.’


가능성이 있었다. 블라임 영애는 수줍음이 많은 소녀로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외쳤다.

“마,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나는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영애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너무 큰 소리라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블라임 영애는 황급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화, 황녀 전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초대장을 보내야겠다 싶었어요. 답신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에 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혹시 초대장을 쓰신 게……?”

“저, 저예요!”

그녀는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나에게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그녀의 모습에 떨떠름해하면서도 나는 말을 이었다.

“……블라임 영애가 손수 초대장을 쓰셨을 줄이야, 저야말로 영광…….”

“저, 전하!”

그녀는 절박한 얼굴로 나에게 외쳤다.

“부디……!”

“……부디?”

“로즈라고 불러 주세요!”

“아…… 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로즈의 열띤 눈동자에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허락한


데다가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행동하다니. 예의를 중시하는 고위 귀족 자제의 행동으로는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은 어마어마한 듯 보였다.

‘……그러니까 대체 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나와는 달리, 로즈의 연초록색 눈동자는 매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 더 말을 걸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대체 뭐가 이렇게 시끄럽죠?”

문이 열린 곳에는 나른해 보이는 얼굴의 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내 또래쯤 되었을까? 매끄러운


청은발에 남색 눈동자를 한, 눈에 확 들어오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자 로즈가 반색해서 외쳤다.


“클로에!”

“어머, 로즈.”

그녀는 나와 로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반쯤은 놀란 기색이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서 인사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에게 영광을, 엘미르 황녀 전하가 맞으시지요?”

그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내 손을 잡고 일어난 로즈는 내 옆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만개한 장미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황녀 전하, 여기는 제 친구인 클로에 디몬트 공작 영애랍니다. 클로에. 영광스럽게도 엘미르
황녀님이 우리 저택에 방문해 주셨어.”

“만나서 반가워요. 디몬트 공녀.”

나에게 공녀를 소개해 준 로즈는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후작 부인의 말대로, 평소에는 낯을 잘


가리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디몬트 공녀는 로즈에게 가볍게 타박했다.

“로즈, 기쁜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소란스러우면 안의 사람들이 놀랄 거야.”

“앗…… 미안. 너무 들떴나 봐.”

로즈는 부끄러운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나를 향해 말했다.

“들어가요, 전하. 안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답니다.”

“좋아요.”

로즈의 말대로, 응접실 안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무도회 홀만큼은 아니어도 굉장히 넓은
것으로 보아 응접실은 평소에도 이렇게 많은 영애와 영식들이 모여서 노는 곳인 모양이었다.

문 앞에는 이름을 부르는 시종이 없어, 우리 세 명은 조용하게 들어갔다. 몇몇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장내가 워낙 혼잡했던 덕분에 금방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공기가 조금 답답했다. 나는 로즈를 향해 말했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과연 남부의 권세가라는 블라임 후작가의 저택다웠다.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이야. 내 말에 로즈가 답했다.

“네, 보통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거나, 15 살 이하의 자제분들이 이곳에 모이거든요.”

로즈는 이제야 조금 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내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관현악이 흐르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간식과 가벼운 끼닛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디몬트 공녀가 우리에게 잠깐 양해를 구했다.

“자리를 잠깐 비웠던 거라, 얼른 인사하고 다시 돌아올게요.”

그녀가 떠나고, 나와 로즈는 연회장을 구경했다. 로즈는 뭐든지 나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했다. 그러던 나는 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응접실의 중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이 탄성이 일기도 했다.
뭔갈 보여 주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어쩐지 그 기운이 매우 익숙했다.

‘……이건 분명히……?’

나는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익숙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 기운은 왜인지 우리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운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가 로즈의 이름을 불렀다.

“로즈!”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방금까지 응접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 자신만만해 보이는 청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눈동자와 비슷한 보라색
머리카락.

그녀는 턱을 거만하게 올리고는 로즈를 향해 말을 걸었다. 주위의 몇몇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지요?”

나는 그녀의 말에 로즈의 얼굴을 살폈다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시종일관 웃고 있었던 로즈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기 때문이다.

“……애슐리.”

하지만 일부러 인사했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즈는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인사를


되돌렸다. 애슐리라는 영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반가워요. 정령술 수업 이후로 처음이잖아요. 그렇죠?”

‘……정령술 수업?’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그래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구나.’

천천히 눈앞의 애슐리를 살펴보니 그녀에게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강하지는 않은 것


같았고, 속성은…… 물인 것 같았다.

‘물의 정령사였어.’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세상에 몇 없는 같은 정령사라는 사실에 친근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령술 수업이라니, 로즈도 그걸 들었다는 건가?’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로즈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게…… 하나의 유행 같은 거랍니다. 혹시나 자기에게도 정령술의 재능이 있을까 찾아보는


영애들이 많아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궁에만 있어 소문에 그렇게 빠르지 못한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정령술이라니…… 어째서요?”

정령술은 배우기도 어렵고 선생님도 거의 없다. 배우기 위해서라면 노력은 물론, 많은 재화가
소비될 것이었다.

“세상에, 그걸 모르시나요?!”

그러나 로즈가 대답하기도 전, 애슐리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야 당연히, 아이샤 황녀님 때문이지요!”

“……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때문이라고? 내가 뭘 했길래?’

애슐리는 내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이샤 황녀님은 거의 모든 영애들의 동경이니까요. 그분의 정령술과 치유술은 또 어떻고요.


모두가 그분을 닮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해요!”

‘……나를 닮고 싶어 해?’

내 옆에서는 로즈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로즈가 나에게 주었던 넘치는 호의의 뜻을 이해했다.

‘동경이라니.’

나는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물론이다. 전생에서도 황녀로 살아


보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주목과 동경을 받아 본 적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의
호감을 이렇게 이끌어 낼 정도로 내가 유명했다니.

당황하기도 잠시, 애슐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로즈는 정령술에 재능이 없었지만요.”

“…….”

그 말에 로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에 반해 애슐리의 얼굴은 승기를 잡은 듯


빛나고 있었다.

“너무 안타까워요. 그렇게 정령을 소환하고 싶어 하셨는데도…….”

하지만 누가 봐도 애슐리가 로즈를 약 올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운 좋게 저는 물의 정령을 소환하게 되었지만, 로즈 영애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파요.”

애슐리의 말이 길어질수록 로즈의 얼굴은 더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호호호, 웃던 애슐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로즈와 여기 계신 영애를 위해서, 제가 정령을 보여 드릴까요? 아마 태어나서 처음 보실


거예요.”

“아…….”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녀는 재빠르게 정령을 소환했다.


“나이아스, 나와 주렴.”

그러자 공중에는 새파란 드레스를 입은 한 정령이 등장했다. 그녀는 소환되자마자 한 바퀴 핑


돌더니 인사를 해 보였다.

“이 아이는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라고 해요.”

옆에서 로즈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으로서는 소환할 수 없었던 정령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더 분한 듯했다.

“호호호.”

하지만 나는 나이아스보다 애슐리에게 주목했다. 지금 고개만 돌려도 바로 보이는 것이 자연에서


돌아다니는 정령들이다. 나에게는 숨 쉬듯이 당연한 풍경이었으므로 정령을 보는 게 전혀 신기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호호.”

뻐기듯이 정령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에 비해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마도 아직
정령을 오래 소환할 실력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정령을 돌려보내야 할 테지.

‘……응?’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원래 정령들은 밝고 솔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소환한 정령만큼은 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얼굴이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정령을 처음 본 사람은 잘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나는 달랐다.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정령을 보며


속으로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나이아스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던 찰나. 부채질을 하면서 애써 태연한 척해 보이던


애슐리는 결국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렴.”

“네, 주인님.”

‘……아.’

나는 아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정령이 왜 그런지 더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내가 분명 그녀의 정령에 무척이나 감탄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까보다도 미소가
더욱 환해졌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정령을 한계까지 소환했으니 아마 그녀가
무척이나 어지러울 것이라는 것에 내 다이아몬드 섬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감탄할 뿐이었다.

“대단하세요. 저는 정말로 정령을 처음 봐요!”

“정령들은 모두 저렇게 예쁜 모양이죠?”

“저 들었어요! 영애께서는 무려 황녀 전하와도 친분이 있으시다면서요?!”


그런데 그중에 간과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내가 저 영애랑 친분이 있다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나는 저 애슐리라는 영애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는데, 친분이 있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는가. 하지만 애슐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황녀 전하께서 저에게 직접 정령술에 대해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답니다.”

“와아……!”

주위의 탄성이 울렸고, 애슐리는 그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로즈가 정말이냐는 듯 크게 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과찬이에요. 과찬.”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그녀가 문득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실컷 자랑을 하고 나니 이제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가요?”

나는 나를 가리키는 손길을 보면서도 얌전히 서 있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이상, 로즈가 나를


소개해 주길 기다렸던 것이다.

애슐리가 나를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사교 활동을 하는 편도


아닌 데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고, 오늘은 내 옆에 루도 없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같은 정령사로서 정령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설픈 실력은 그렇다 쳐도, 가만있던 로즈에게
시비를 건 것도 그렇고 정령을 가지고 으스대는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이분은…….”

로즈가 나를 설명하려 할 때였다. 상황 파악을 아직 못한 애슐리가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뭐,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술 수업을 모르시는 걸 보아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오신


분이신가 보네요.”

“…….”

나는 입을 가만히 다물었다. 헉, 로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골에서 올라왔다라…….”

나는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애슐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요? 처음 뵙는 분인데…….”

‘……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인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보고 있다


보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게다가 눈치도 없다.

그녀가 지금 득의양양한 것도 이해는 갔다. 어린 나이에 정령을 소환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중에 중급이나 상급 정령을 소환하면 그 능력만으로 작위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아까도 사람들에게 주목을 잔뜩 받고 있었으니, 지금은 세상에 자기가 가장 잘난 줄 알겠지. 나는
질책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괜히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분은 엘미르의 단 하나뿐인 별, 이 제국의 황녀님이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디몬트 공녀가 서
있었다. 로즈가 눈에 띄게 반색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에!”

“……네?”

하지만 애슐리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가 나와 로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 엘미르 황녀 전하시라고요?”

그런 영애를 향해 디몬트 공녀가 말했다.

“네, 모르셨나요?”

“……그게…….”

“정말 이상하네요. 애슐리 영애께선 황녀 전하와 친분이 있는 게 아니셨나요?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는데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얄미웠다. 애슐리의 얼굴이 화다닥 붉어졌다.

“아, 아니. 그게…….”

“제 말이 틀렸나요?”

애슐리는 아무런 말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방금까지 자기 입으로 나와 친분이 있다고 말했으니


부정할 수도 없겠지.

“저는, 그게…….”

한참 말을 더듬던 그녀는 갑자기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는 갑자기 다른 할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는 꽁무니를 빼 버리고 말았다. 나는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클로에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 * *
우리 셋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발코니로 나갔다. 조용한 발코니에는 마침 딱 우리를 위한
것처럼 나무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은 후에야 로즈는 나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방금 본 애슐리의 풀네임은 애슐리 롤랑. 롤랑 후작가의 차녀라고 했다. 보아 하니 같은 작위에


나이대도 비슷한 로즈에게 경쟁 의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클로에 디몬트는 사교계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마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도 그녀가 황실 연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어서이리라.

또, 디몬트 영지가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그녀는 외가를 방문하기 위해 가끔씩 이렇게


남부로 놀러 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영지에 계셔요. 저는 오랜만에 로즈의 초대를 받아 놀러 온 거고요.”

디몬트 공녀는 로즈와 오래된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로즈 블라임. 블라임 후작가의 피어나는
장미꽃. 그녀는 지금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얄밉기는 하지만…… 제가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요.”

듣기로 그녀와 애슐리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학했다고 했다. 정령사가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스승이 겹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슨 신의 장난인지, 정령을 소환하기 간절하게 염원했던 로즈와는 다르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건 설렁설렁 수업을 듣던 애슐리였다.

원래 애슐리는 조금 수수하고 조용한 영애였지만, 정령을 소환하고 난 이후부터 완전히 변해


버리고 말았다.

주위에서도 그녀에게 정령의 재능이 있으니 계속 띄워주다 못해, 아이샤 황녀 전하처럼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정령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헛바람을 넣다 보니 결국 저렇게 오만해졌다나.

“……친구였는데.”

로즈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어쨌든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게 확실히 큰 메리트라, 애슐리는
또래 모임에서 요즘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은 대충 알겠어요.”

로즈는 우물쭈물하다가 나에게 말했다.

“……황녀 전하가 부러워요.”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혹시 몰라 저도 전하처럼 정령술에 재능이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결과는 영 꽝이었고요. 이대로 그냥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 게 제 운명일지도
몰라요.”

“평범한 게 싫은가요?”

내 말에 로즈는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이에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발끝으로 발코니의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황녀님처럼 되고 싶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평범함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덴베르의 황녀로서 죽고, 엘미르 제국의 1 황녀로 다시 태어난 나.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있는
정령들을 볼 수 있었고 어린 나이에 정령사가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녀라는 명칭까지 달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비관할 필요는 없어요.”

“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여기에 오기 전에, 저택의 시녀들에게 블라임 후작가의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들었어요.”

“……!”

“연고도 없는 시녀들에게 그런 평판이 흘러들어 갔을 정도라면 정말 로즈가 좋은 사람이란


이야기겠죠.”

로즈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정령이나 검술 같은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워서 남들이 부러워하기도 쉽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결코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닐 거예요.”

“…….”

“로즈 영애가 저를 따뜻하게 환영해줘서 저는 기뻤어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따뜻함이야말로 로즈 영애의 특별함과 대단함일 거예요. 내세울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어울리지도 않게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자니 쑥스러웠다. 나는 조금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나를 동경한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 놀랐고, 부끄러웠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에 그렇게 호감을 가져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즈가 나처럼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정령술에 재능이 없으면 어떤가?
로즈에게는 로즈만의 멋짐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로즈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영애가 좋아졌거든요. 굳이 정령사가 아니더라도요.”

“화, 황녀님……!”

나는 이렇게 된 거, 아예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영애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녀와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녀와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말이다.

아, 물론…….

옆에서 부채가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명백하게 관심을 요구하는 소리였다. 나와 로즈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디몬트 공녀는 ‘나도 여기 있어요.’라는 듯이 깃털 부채를 천천히 부쳤다.

“저도 그에 끼워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찡긋했다. 물론 그녀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디몬트 공녀님도 환영이에요.”

“클로에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클로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까 애슐리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멋짐을
보았다. 이 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무척 좋을 것이다. 나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럼, 둘 다 앞으로 나를 황녀님 대신 아이샤라고 불러 줘. 그리고 이왕 친구가 된 김에 다들


말도 편하게 놓는 게 어때?”

두 사람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나중에 내 별장에도 놀러 오는 거야!”

나는 활짝 웃었다.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온 무도회에서 두 명의 친구를 사귀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앞으로의 여름 휴가가 무척이나 즐거워질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돌아가는 동안 나는 시녀장에게 끝도 없이 자랑했다.

“친구를 두 명이나 사귀었어! 게다가 둘 다 무척 좋은 애들 같아.”


“다행입니다. 황녀 전하.”

무뚝뚝한 시녀장의 얼굴에도 따스한 웃음이 감돌았다.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돌아온 그녀는 손수 내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고, 나에게 잠옷을 입혀 주었다.

나는 잠옷이 입혀지는 동안에도 쉼 없이 떠들었다. 이번 수다의 대상은 저택에 남아 있었던


유모였다. 유모는 내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잘 되셨어요! 게다가 이번에 그분들을 초대하셨다고요?”

“응! 같이 티타임을 갖기로 했어!”

헤어지기 전에 나는 그 둘에게 티타임 초대장을 보내기로 했었다. 볕이 좋은 남부에서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하는 오후의 티타임은 환상적일 것이다.

내가 또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시녀장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이야기도 좋지만 이만 주무셔야지요.”

“하지만 더 얘기하고 싶은데. 아직 피곤하지도 않다고.”

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모처럼 이렇게 들떴는데, 이 기분을 그대로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자아, 황녀님.”

그런 나를 달래듯이 유모가 말했다.

“이제 잠자리에 드셔야죠. 그래야 키도 쑥쑥 크고, 얼른 어른이 될 수 있답니다.”

유모는 내가 열네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이 취급이었다. 하지만 둘은 이제 슬슬 나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둘 다 내일 봐.”

“안녕히 주무세요. 황녀님.”

“좋은 꿈 꾸시길 바라요.”

둘은 불을 끄고 갔기 때문에 내 드넓은 방은 금방 어둠에 잠겼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흰 레이스 커튼과 주렴 사이로 발코니에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루.”

그러자 동그란 빛과 함께 루가 소환되었다.

“주인님!”

루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그 아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뺨을 비볐다.

“잘 지내고 있었어?”

“네, 주인님께서는 잘 다녀오셨나요?”


나는 씩 웃었다. 유모도 시녀장도 갔지만, 아직도 나에겐 수다를 떨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지만.

내 첫 번째 친구이자, 너무너무 소중한 나의 정령. 루.

“있잖아, 루.”

나는 소근소근 속삭였다.

“오늘 무도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는데 말이야…….”

나는 루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하게 떠들어댔다. 눈을 감으면 블라임 후작가의


정경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로즈와 클로에의 얼굴도. 그리고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도 말이다.

“……또래 친구가 생겨서 너무 기뻐…….”

나는 반쯤 웅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만 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친구를 찾아다녀 볼


걸 그랬다.

“……으음…….”

눈이 서서히 감겨 오는 것이 느낄 수 있었다. 곁에서 얘기를 듣던 루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소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는 잠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루. 얘기하다가 잠들어 버리다니…….’

하지만 원래 이 시간이면 꼬박꼬박 잠드는 데다가, 오늘은 이곳저곳 다니느라 피곤했기에 더 졸린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수마의 유혹에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아.’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로 깨달았다.

‘그 절벽이다.’

바람이 불어서 풀잎이 한 방향으로 밀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꽃잎이 춤추듯 나에게로 날아왔다.

‘또 이 꿈인가?’

나는 푹신한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누워 있었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꾸는 꿈이다 보니


익숙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동이 다 트지 않아서 조금 어두웠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을 내디뎌


보았다.

‘오늘도 그 사람이 있을까?’

지난번 꿈에서 보았던 그 사람. 그는 인간 같지 않게 아름다운 데다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걸어나갈 때였다.

“……!!”

그러다가 순간, 발을 삐끗한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옆으로 쓰러질뻔했다.

‘위, 위험했다.’

나는 떨리는 가슴 위로 손을 꼭 부여잡았다. 앞이 어두운 데다가, 길이 넓지 않아 자칫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떨어지는 꿈은 키가 큰다는 징조라던데. 그럼 내가 키가 크려고 이런 꿈을 꾸는 걸까?’

가슴이 좀 진정되고 나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에도 그 백금발은 하얗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저 밤하늘에 뜬 달처럼 말이다.

나는 홀린 듯이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절벽 위라서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당신은…….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려고 했다.

‘……어라?’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당황하던 나는 더욱 크게 입을 열고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하지만 이번에도 말이 나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 사람. 꼭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진 소리만 계속해서 날 뿐이었다. 초조해졌다. 이대로 저 사람이


영원히 고개를 돌려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있는 힘껏,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몇 번이나 부르고 또


불렀다. 아마 목소리가 나왔더라면 내 목은 이미 쉬어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한참 후에
기적처럼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

‘됐다!’

나는 환희했다. 그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꿈에서 금방 깨 버리고 말 것 같다는 예감.

‘안 돼.’

겨우 목소리를 냈는데. 이제서야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애태우고 있었다. 목 안이 간지러웠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말이 튀어나올 것처럼 말이다.

―……스……!

그때, 나는 무언가를 외쳤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다. 그러자 저 멀리 있던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는 달리,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안도감이 서서히 피어났다.

됐다, 그를 불렀다. 세상이 지워지듯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나는 눈물이 나올 만큼 기뻤다.

다시 만났다. 그것만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무너졌고, 나는 꿈에서 깼다.

“…….”

소리 없이 눈을 뜬 나는 한참 동안 꿈의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느새 동이 터 세상은 밝아져


있었다. 창밖 멀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꿈속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나는 마음속에서 단단한 결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카스카 협곡에 다시 찾아가 봐야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침대에선 루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 * *

“……이샤, 아이샤!”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내 앞에는 녹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로즈가 서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맞아, 불러도 못 듣고.”

그 옆에서 클로에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블라임 후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이틀째 참석한
상태였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이 살짝 웃어 보였다. 오늘도 무도회는 화려했다.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었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나에게는 파트너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춤을 추지 않아도 이렇게 새로


사귄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방금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느라 잠깐 멍하게
있었지만 말이다.

‘흠…….’
나는 중앙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는 조금 덜해도 중앙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애슐리가 뽐내는 듯한 얼굴로 또 자신의 정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령의 힘을 보여 주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나왔다.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게 요즘


사교계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 봤자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심드렁하게 주스를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동그란 얼굴이 무척 앳돼 보이는 영애였다.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척 긴장되는 듯 그녀는 양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만나 뵈어서 반가워요.”

내가 인사를 되돌리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제, 제 이름은 마고 테즈랍니다. 테즈 가의 막내여요. 황녀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렇게 전하를 직접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내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재빨리 다른 영애가 나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저, 저도 제 이름을 소개해도 괜찮을까요?”

“저도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다들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니 응접실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황녀님을 뵙다니 가문의 영광이에요.”

나를 뵈어서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디 제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틈에서 아까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던 테즈 영애가 나에게 필사적으로 말했다.

“……황녀님의 정령을 한번 뵐 수 있을까요?”

그러자 나와 그 영애에게 온통 시선이 쏠렸다. 테즈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일부러 말할 정도면 내 정령이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정령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닌 듯했다. 모여 있는 사람도, 그리고


내 옆에 있던 로즈의 눈도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음…….’

한번쯤 보여 주는 것도 괜찮겠지? 정령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은 싫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정령에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루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개할게요. 루.”

내 말에 동그란 빛무리가 허공에 생성되더니, 루가 소환되었다. 루는 빛무리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소환되자, 루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

그러자 팔랑거리는 치맛단에서 금빛 가루가 떨어졌다. 루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와아……!!!”

처음에 말을 걸었던 테즈 영애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 정령에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로즈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너무 귀여워요!”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거의 비명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주위에 몰린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는 제 소중한 친구예요.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루?”

“네!”

루가 방긋 웃자 주위의 반응은 더욱 거세졌다.

“황녀 전하는 7 살 때부터 중급 정령을 소환하셨다고 하셨지요?”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하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는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리고 내 생각엔, 그 노력이 빛을 발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대단하세요! 정말…….”

사람들은 앞다투어 나에게 부럽다는 둥, 멋지다는 둥의 말을 쏟아 내었다.

“운이 좋았어요. 정령술은 배우기 어려우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황녀 전하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고…….”

그런데 그때였다. 중앙에 있던 나와 애슐리의 눈이 마주친 것은.

“…….”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인지, 애슐리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는 주위의 양해를 구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뒤에는 그녀의 추종자처럼 보이는 다른 이들을 이끈
채였다.
내 앞에 선 애슐리는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숨기려는 듯,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에,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애슐리 롤랑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어제도 뵈었지요?”

내 뼈있는 인사에 그녀는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이 딱 봐도


느껴졌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큰 무례를 범하고 말았어요.”

“…….”

“그, 그래도 고귀하신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지요? 제가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셔요.”

그녀가 살살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말했다.

‘……하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사과를 하러 왔으니 크게 화를 낼 생각도 없다. 로즈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얄밉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요. 롤랑 영애.”

내 말에 애슐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눈에 띄게 기뻐하던 그녀가 큼,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 혹시 저기에 가서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의 눈은 야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중앙에는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다른 영애와


영식들이 많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싶긴 하지만, 차마 먼저 다가가기 힘들어서 내 주위만 뱅글뱅글
맴돌고 있는 사람들.

그녀는 그 사람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 저곳으로 간다면 그들과 친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굳이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여기에 일행이 있어서요.”

내가 가리킨 로즈와 클로에의 얼굴을 보자 애슐리는 당황한 듯했다. 주위의 시선이 그녀와
나에게로 달라붙었다.

“그…… 저기…….”

그녀가 다시 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침내 답을 찾아낸 듯,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 같은 정령사로서 고견을 나누고 싶은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저와 황녀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잖아요? 그 희귀하다는 정령 소환사니까요……. 그러니…
….”

그녀의 눈동자가 클로에와 로즈를 훑고 지나갔다.

“저와 함께 가요.”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가만히 듣고 있자 하니, 정말 가관이었다. 클로에가


옆에서 가볍게 한숨 소리를 내는 것이 보였다. 고작해야 후작 영애에게 무시당한 공녀는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공녀의 한숨 소리에 움츠러들면서도 애슐리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대단한 자부심인 모양이었다.

클로에가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그전에 선수를 쳤다.

“롤랑 영애.”

내가 가만히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대답했다.

“……네, 네?”

그래도 분위기를 드디어 읽은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미 일행이 있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구시는군요. 어제부터 계속, 상당히 무례하세요.”

“그…… 그게.”

“이들은 제 친구예요. 정령에 대한 영애의 자부심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는 정령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되돌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거침없는 내 말에 주위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어떠한 심한 말을 한다고 해도 나는 이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다. 사람들은 항상 나의 편을


들어 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먼저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 친구를 모욕한 그녀에게 한마디라도 해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 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영애. 제 친구를 무시하는 행위는 저를 무시하는 행위와 똑같습니다.”

“저, 전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그렇지 않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말을 끊고, 그녀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옥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황족 모독죄로 말이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급히 자리를 떴다. 뒤에 남은 로즈와 클로에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는 표정이었다.

“잘했어.”

“응, 최고였어!”

클로에가 말했다. 로즈는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롤랑 영애가 너무 무례했어요.”

“맞아요, 맞아.”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뒤로 비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애슐리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애슐리가 조금 불쌍하기는 했지만, 자업자득이란 그녀를 위한 말일 것이다.

* * *

별장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 아니야.”

사교계란 이래서 불편하다. 원하지도 않는 주목을 받거나 다른 사람과 불화가 생기기 쉽다.
친구들을 사귄 건 좋았지만, 역시 마냥 유쾌한 장소만은 아니었다.

내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자 시녀장은 내가 피곤해서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황녀님, 많이 피곤하시죠? 돌아가는 대로 얼른 주무셔요.”

“응…….”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나를 다독거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밖 너머로는 산맥과 협곡이 달빛에 비쳐 어른어른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새벽, 나는 저곳으로 향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상한


꿈을 꿀 바에는 차라리 내 눈으로 직접 절벽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꿈에서 자꾸만 등장하는 그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집에 돌아와 치장을 모두 물리고, 잠옷 하나만 입은 나는 어제와는 다르게 시녀들을 빨리 내보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려면 얼른 자둬야 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눕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시녀장이 카스카 협곡에 대해 했던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리고 있었다.
‘저곳은 대륙에서 가장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인지 아무도 모르게 신비로운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해요. 인간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신비로운 존재들을 위한 예의라나요.’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바로 ‘신비로운 존재’인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깜빡 잠이 들어 있었다.

“……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지금부터 출발하면 아마 동이 틀 때쯤에는


협곡에 닿을 수 있겠지.

오늘은 설핏 잠이 든 탓인지, 아니면 협곡에 직접 가 보기로 마음을 먹은 탓인지 그 사람의 꿈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꾸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꿈속의 그 모습이 내 안에서 점점 선명해져 오는 것
같았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직접 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루를 바라보았다.

‘루는 잠깐 두고 가자.’

잘 자고 있는 것을 방해하기 싫었다. 어차피 날아가는 것은 리미에가 도와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소리 죽여 겉옷을 걸쳐 입었다. 다행히 바깥 공기는 꽤 따뜻해서 감기에 걸릴 일은 없어


보였다. 밖으로 이어진 테라스의 문은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거침없이 문을 열고 나온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오랜만에 리미에를 소환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리미에는 내가 이 오밤중에 자신을 소환한 게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부탁했다.

“리미에, 나를 날게 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요. 주인님.”

“다행이다. 저기 카스카 협곡이란 곳에 가고 싶어. 날 태워 줘.”

“카스카 협곡이요?”

리미에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거기까지 가는 데 내 힘이 모자를까?”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부탁할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리미에는 주저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을 잡자 나는 점점 허공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와아.’

리미에가 가는 길에는 희미한 빛가루가 떨어져서 새벽이지만 대충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갔던 길들이 내 발아래에 펼쳐졌다. 그것은 무척 생경한 기분이었다. 포도밭을 지나고, 평야를
지나고, 지난번처럼 쭉쭉 길을 가다 보니…….

나는 드디어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미에는 나를 절벽 위의 한 가운데에 놓아주었다.

“고마워, 리미에.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다음에 또 뵈어요.”

그녀가 정령계로 돌아가고 난 이후,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동이 틀


것처럼 하늘은 희고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지평선 너머로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

나는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해 절벽 위를 살폈다.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움츠렸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뻔했기 때문이다. 절벽 위는 가파르고 땅이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무척 주의해야 했다.

바람에 꽃잎들이 휘날리고, 마침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꿈속과 똑같아.’

나는 떨리는 발자국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보았다. 이 세계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푹신한 잔디와 피어 있는 갖가지 꽃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인지
소동물조차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았다.

점점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세상은 흰빛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이곳이 카스카 협곡의 절벽 위.’

그리고 이곳저곳을 헤매던 나는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생각마저 모두 정지한 듯했다. 꿈속에서 본 것과 동일한 남자가 절벽


끝자락에 서 있었다. 무척이나 위태로운 광경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남자의 존재감 때문일까.
나는 그에게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는 꿈속처럼 아름다운 금색의 새가 올라타 있었다. 그의


고풍스러운 옷자락은 불어오는 미풍에 흩날리고 있었고, 더없이 비현실적인 그의 얼굴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꿈속과는 다르게 입이 저절로 떨어졌다.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신비로운 존재’일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런 절벽 위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평범한
존재일 리 없으니까.

“……당신은…….”
내가 재차 질문하는데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 금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새벽은 지나고, 해는 어느새 모두 떠올라 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붉은색, 분홍색,


연주황색, 보라색, 그 갖은 색들이 섞인 하늘과 아름다운 절벽의 풍경, 그리고 그의 존재 덕분에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볼을 꼬집어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답이 없었다.


결국 조급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그를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꿈에서 당신을 보았었는데…….”

그리고 그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당신은 어째서 내 꿈에 나왔던 건가요? 그리고 어째서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당신이 친숙한 걸까요?

두 개 다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나를 부른 거죠? 이 협곡에. 아닌가요?”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점점 더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이


있는데도 너무나 먼 것 같았다.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당신을 본 것 같은 기분이…….”

환상처럼 시야가 불균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서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해가 떠올라도 아직 물안개가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헛발을 제대로
디디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내 몸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하필이면 길이 좁았기 때문에 나는 헛발을 짚은 그대로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리고 말았다. 절벽의 바위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아!’

순식간에 시야가 멀어졌다. 풍요롭던 절벽 위가 멀어지고 내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렀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강한 풍압, 그리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거센 충격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입술을 떨었다.

‘안 돼!!’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절대, 절대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떼어 낼 것처럼 강한 풍압에서 애써 입을 열려고 노력했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루, 혹은 리미에의 이름을 불러서…… 나를 위로 끌어 올려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태론 도저히 소환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얼굴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온몸으로 불안감이 퍼져 나갔다.

‘……부딪힌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그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뜨자, 저 절벽 위에서 황금색 날개가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 새는 무척이나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전신은 황금색이었고, 온 날개를 쭉 뻗는다면


거의 성인 남성의 크기에 필적할 듯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빨랐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나를 향해 재빠르게 하강하더니 나를 등 뒤에 태워


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새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새가 아니야.’

그래, 이것은 새가 아니었다. 새의 형상을 한 그것은 유연하게 절벽 아래를 한 바퀴 돌더니 위로


급상승했다.

그런데도 내가 타고 있는 등 부분은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내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흩어지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 위로 올라왔다. 그의 등 뒤에서 내린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히도 절벽 위는 폭신한 잔디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다칠 일이 없었다.

떨고 있던 나는 내 앞에 문득 그림자가 진 것을 보았다. ‘그’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다친 곳은 없나?”

처음으로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둥지둥하던 나는 잠시 뒤 내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가,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인간 같지 않은 외모였다. 나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의


정체를.

가슴속에 환희가 가득차는 것 같았다. 방금 나를 구해 준 새의 정체는 빛의 상급 정령, ‘루디온’


이었다. 그의 등에 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감각은 내가 항상 루나 리미에를 대할 때 느끼던
감각과 동일했으니까 말이다.

그래, 아마 나의 예상이 맞다면 이 남자는…….


“당신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남자는 묵묵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령사이시죠?”

그는 정령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 무뚝뚝한 사람에게 있어 무응답이 긍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리가 떨리는 것도 잊고 얼른 일어섰다.

“맞지요. 정령사?”

“…….”

“저 태어나서 같은 빛의 정령사는 처음 보았어요!”

아버지에게 듣기로 정령사는 너무 희귀해서 제국에서조차 그들이 몇 명인지 제대로 파악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정령사들은 다루는 원소마다 계열이 나뉘기 때문에, 같은 계열의 정령사를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심지어 그가 그 어렵다는 상급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라니!

‘이제야 알겠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친근하게 느꼈던 이유도, 그에게서 빛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가 정령사라는 것을 알게 되니 아까보다 훨씬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저기, 정령사님께서는 항상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

“……혹시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천천히 일어나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을 열었다.

“늦지 않도록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앗.”

그러고 보니 벌써 동이 튼 지 오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유모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마음이 급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저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의문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물어봤자 그가 또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은 뻔했다. 나는


그처럼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밝았다. 아침 해가 뜬 지 꽤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이다.

‘큰일났다. 늦을지도 모르겠어…….’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나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루디온을 빌려주지. 그는 굉장히 빠르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내준 의외의 호의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잠깐 고민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이어도 어쩐지 이 남자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가는 길에 리미에로 갈아타도 되고.

“……가, 감사합니다.”

물음에 계속 대답하지 않길래 그에게 내가 귀찮은 존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부러 정령을
빌려주기까지 하다니. 그에게 내가 마냥 훼방꾼은 아니었던 걸까?

리미에에게 부탁해서 지금부터 간다면 유모에게 들킬 가능성이 풍부했지만, 아까 본대로 루디온과


함께라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과 태도와는 다르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아까도 나를 구해 줬고,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저어, 정령사님.”

“뭐지?”

“저, 저는 저쪽 체르 영지에서 살고 있어요. 어, 저녁에는 블라임 후작가에 무도회에 참석하고요.


후작가에서는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있거든요. 혹시 어디인지 아시려나…….”

“…….”

“만약에 내려오실 일이 있다면…….”

나는 내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아이샤를 찾아 주세요. 그게 제 이름이에요.”

그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아이샤.”

그에게서 나온 내 이름은 어쩐지 특별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만 실례할게요.”

루디온의 등에 올라타서 그의 목덜미를 단단히 잡았다. 주인이 아닌데도 루디온은 나를 배려해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루디온이 날개를 펼치고,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를 때였다. 정령사는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멀어지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외쳤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좀 더 강하게 말했다.


“다시 뵙고 싶어요!”

약간의 침묵 후, 그가 대답했다.

“그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기뻤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루디온이 날개를 펄럭였고, 나는 점점 절벽에서 멀어져서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테라스에 서서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었어.”

“별말씀을.”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까 왔던 것처럼


창공을 넘어 훨훨 날아갔다.

아마 그가 있는 절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겠지.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그 뒤, 창문을 넘어 딱 내 방 안으로 들어가니 문이 열리며 유모가 들어왔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내가 무엇에 찔린 것처럼 찔끔하고 있는데, 유모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황녀님, 벌써 일어나계셨나요?”

“응? 아, 응.”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조금 전에 일어나서 정원 산책을 했어. 시골 공기가 너무 좋더라고.”

“어머, 그러셨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침 일찍 혼자 나가시면 안 돼요.”

“으응, 알겠어.”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내 옷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정원에 보라색 꽃도 있었던가요? 색이 참 선명하네요.”

“……응?”

나는 내 흰 잠옷에 묻은 꽃잎들을 그제야 발견했다. 땅에 떨어졌을 때 묻었던 모양이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꽃잎 한 장을 떼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절벽 위의 그 보라색 꽃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가만히 그걸 들여다보고 있자, 유모가 나를 재촉했다.

“황녀님! 일찍 일어나신 건 좋지만 얼른 세수하셔야죠. 그리고 아침도 드시고, 또 옷도 입으시고


…….”
“알겠어, 알겠어. 유모.”

나는 그 꽃잎을 침대 옆의 탁상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잠에서 깬 루가 두 눈을 비비며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좋은 아침이에요, 주인님!”

“좋은 아침. 루.”

루는 내가 간밤에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나는 루와 함께 유모를 향해 얼른


걸어갔다.

‘꿈이 아니었어.’

나는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었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사람과의 만남.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그곳에 서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녀님!”

유모가 나를 또 불렀다. 그녀가 두 번째로 재촉하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 * *

“정령사라.”

아이샤가 떠나가고 난 뒤에,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인간 앞에 나서지 않은 지가 몇백


년. 거기에 빛의 신전에서는 그의 모습을 조각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
추리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맞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한 바람일 것이다. 그녀는 고작 인간일 뿐이고, 그녀로서는 이번이 그와
만나는 첫 만남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샤를 데려다주고 온 루디온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앞에


내려선 루디온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왕이시여.”

루디온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루미나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그녀와 접촉하실 생각이십니까?”

루미나스는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황금색 눈이 눈꺼풀에 가려지는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일몰을 맞아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글쎄.”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었다. 루미나스는 천천히 아이샤의 목소리를 회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기대와 불안이 서려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뵙고 싶어요!’

그녀는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어느새 루미나스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내려갈 준비를 해야겠군.”

루디온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날씨가 무척 좋았다. 어딘가를 놀러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유모의 말대로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무척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시녀들에게 명랑하게 인사했다.

“안녕! 다들 좋은 아침이야.”

내가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자 시녀들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녀 중 한 명이 나에게 물어왔다.

“황녀 전하, 무슨 기분 좋으신 일이 있으셨나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음, 글쎄…….”

같은 정령사를 만나서 그렇다,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오늘 내가 산맥에 다녀온 것은 비밀이니까


말이다. 대신 나는 생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 친구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으니까!”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늘 나는 체르 영지의 시내에 내려가서 클로에, 로즈와 함께 상가를


돌아다니기로 한 참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같이 별장에서 티파티를 가지고, 마지막에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에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그 말에 시녀들이 활짝 웃었다.

“아, 네. 들었어요. 지금 주방장이 오후의 티파티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답니다.”

“디몬트 공녀님과 블라임 후작 영애가 방문하신다기에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저희들도 열심히


준비할게요!”

“어떻게 친해지시게 되신 건가요?”


“다들 고마워. 친구들은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장에서 친해졌어. 둘 다 정말 좋은 애들이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 말에 대답해 주었다. 식당에 가니 나를 위한 식사가 바로 준비되었다.


오늘도 아주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나자 주방장이 나와서 나에게 말했다.

“황녀 전하! 오늘 친우분들께서 놀러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척 유쾌해 보였다.

“이 우드 주방장, 심혈을 기울여 티파티를 위한 디저트를 만들겠습니다. 손님들이 다름 아닌 황녀


전하의 친우분들이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응, 잘 부탁해!”

기합이 들어간 건 시녀들과 주방장뿐만이 아니라, 시녀장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친구분과 함께 나들이를 가기로 하셨지요?”

웃으며 그녀가 나에게 내민 옷들이 수십 벌이었다. 대체 이 옷들은 다 언제 다 가지고 온 건지,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수십 벌의 옷을 한 번씩 대 보고, 입어 보고, 최종적으로 어울리는 옷을 입고 머리를


빗은 후에 또 머리 모양을 만들고…… 시녀들은 내가 연회장에 갈 때만큼이나 힘이 들어간 듯했다.

마치 모두, ‘우리 황녀님께 친구가 생겼어!’ 하고 기뻐하는 분위기였달까?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기 때문에 나는 녹초가 되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난 뒤에 마차에 올라타, 체르 영지의 시내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시내에서 다 같이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오전의 햇살이 마차 창문 사이로 쏟아졌다. 기분 좋은 오전이었다. 별장에서 시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몇십 분이 지나자 나는 금방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광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번쩍거리는 두 대의 마차. 한


곳에는 블라임 후작가의 장미꽃이, 한 곳에는 디몬트 공작가의 흰 수선화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이샤!”

광장 앞의 분수대 앞에서 두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반쯤 흔들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곳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로즈! 클로에!”

“어서 와, 딱 맞춰 왔네?”

“기다리고 있었어!”

로즈와 클로에, 그리고 내가 데려온 호위 기사들과 시녀들 때문에 분수대 앞은 금방 북적해졌다.


나는 잔뜩 기대감을 갖고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뭘 할 거야?”

체르 영지가 처음인 나와는 다르게 둘은 몇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둘이 나를


안내해 주기로 한 것이다. 내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클로에가 잠깐 웃었다.

“어머,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맞아, 맞아!”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로즈와 클로에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았다.

“쇼핑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연극 구경이라거나.”

“관광 명소도 보러 가자!”

마치 짜 맞춘 듯한 둘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둘은 악동 같은 미소를 씨익 지으며,


내 손을 하나씩 잡았다.

“자, 가자!”

“상가의 하루 매출을 팍팍 올려 주자구!”

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이른 오전이라 광장에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해도,


대부분의 상가는 일찍 문을 연 상태였다. 그 둘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수도에서도 유명하다는 시내의
리본 가게였다.

우리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자마자 점원들의 태도에는 바짝 긴장이 들어갔다. 그런 점원들을 향해


클로에의 수석 시녀가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자, 우리는 곧바로 넓은 방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귀빈실이랄까. 그 안에는 푹신한 소파와 간단한 먹을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 있자, 복도에서부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시녀가 말하기를 그녀가 바로 이 상점의 주인이라고 했다. 거칠어진 숨을 애써 고르며 그녀는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 저, 그러니까…….”

그녀는 조금 헤매더니 점원들을 시켜 리본 꾸러미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이제야 진정이 된 듯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저희 라밍드 리본점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아름답고 질 좋은 리본을 판매하는 것이


저희의 자부심이랍니다. 제나, 리본을 보여 드리렴.”

“네, 넷.”

우리의 눈앞에서 리본의 향연이 펼쳐졌다. 클로에는 물론이고, 로즈의 눈도 반짝반짝해졌다. 나는


꽤 괜찮은 리본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저것과 저것, 저것 포장해 줘.”

“나는 저거랑 저거, 저거!”

둘은 신이 나서 이런저런 리본을 가리켜댔다. 그러곤 나에게도 물었다.

“아이샤는? 마음에 드는 거 없어?”

클로에의 말에 점원이 헉,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


아이샤’라는 이름에 ‘귀하신 분’이라면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즉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뺨에 손가락을 대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거랑 저거, 그리고 저거.”

나는 흰색 리본과 푸른색 레이스 리본, 그리고 연초록색 공단 리본을 골랐다. 점원들은 앞다투어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리본 가게에서의 쇼핑은 어마어마했다. 우리 셋 다 들떠서 리본을 엄청 많이 사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줘도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클로에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다른 가게도 가 볼까?”

“…….”

나는 반쯤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로즈는 두 손을 꽉 쥐고 신난 듯 외쳤다.

“가자!”

그렇게 우리는 모든 가게를 하나씩 탐방하게 되었다.

* * *

결국 나는 모자부터 신발까지, 새것으로 하나씩 다 맞추었다. 시내의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의 4


층을 전세 내서 점심을 즐기고, 식후에는 연극도 한 편 보았다.

관광 명소라는 시내의 무지개 다리까지 가 보고 나서야 클로에와 로즈는 이제야 조금 놀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대단해.’

내가 남모르게 감탄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클로에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곳을 가 볼까?”


“아직도 남아 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 정말 가 볼 곳은 다 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오전부터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자 로즈가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당연하지. 아직 가장 중요한 곳이 남아 있잖아?”

“그, 그게 어딘데?”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로즈와 클로에가 서로 마주 보더니 씩 웃었다.

“오후의 티파티!”

“같이 별장에서 놀기로 했잖아?”

“아……!”

나는 반색했다. 드디어, 이제 별장으로 돌아가는구나! 나갈 때와 다르게 돌아올 때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내 마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별장으로 향한 클로에와 로즈는 별장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감탄했다.

“와…….”

“엄청 예쁘다!”

그에 나는 으쓱해지고 말았다. 희고 푸른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별장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웠고, 뒤에는 초록빛 숲이 우거져 있어서 여름의 생기도 가득했다.

“보안 마법도 제대로 걸려 있어. 혹시라도 모르니까 말이야.”

“멋지다!”

둘은 감탄을 연발했다. 로즈는 입술을 내밀었다.

“나도 이런 별장을 하나 가지고 싶다. 수도에 하나쯤 두고 놀러 다니면 좋을 텐데.”

그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 대신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잖아. 맞다, 아이샤. 너도 언제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게 어때?


수도에 올라가서도 다시 셋이 만나자.”

“와, 좋아!!”

우리는 마차에서 내리면서도 끊임없이 대화했다.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별장의 집사와 시녀들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흐뭇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디몬트 공녀님, 그리고 블라임 후작 영애.”

“환영합니다.”

시녀들이 줄지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 속에는 주방장도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귀하신 분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디저트를 만들었습니다! 부디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에 나는 생긋 웃었다.

“다들 기대해도 좋을 거야.”

이미 점심을 한가득 먹고 온 뒤였지만, 원래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 아니겠는가. 우리는


앞다투어 내 방으로 올라갔다. 2 층의 가장 넓고 시원한 방. 푸른 방문을 열자 방과 함께 테라스가 보였다.

“여기서 같이 차를 마시자!”

나는 손수 그들을 이끌었다. 흰 레이스 커튼을 걷어서 테라스의 의자에 먼저 앉자 바람결에 숲의


싱그러운 향기가 풍겨 왔다.

“숲이 참 아름답다.”

클로에가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치? 숲지기가 매일 아침 열심히 가꿔 주고 있거든.”

“멋져…….”

옆에서 로즈가 따라 앉으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시녀장과 유모가 직접 와서 테라스에


차를 가져왔다. 트롤리 위에는 갖은 디저트와 함께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두 분, 별장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답니다.”

“클로에, 로즈. 소개할게. 이쪽은 내 유모와 시녀장이야.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어.”

“만나서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유모는 내가 친구를 사귄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일부러 시녀장을 따라와 테이블 셋팅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나무로 짜인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디저트들이 놓였다.

신선한 레몬으로 만든 마들렌, 견과류와 나무 열매로 장식한 쉬폰 케이크, 수제 과일잼과


종류별로 만든 타르트. 달콤한 쿠키와 남부의 생과일까지. 테이블은 가득가득 채워졌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는 것처럼 종류가 그야말로 다양하기 짝이 없었다.

눈으로 보아도 너무 예쁜 디저트들에 우리 세 명의 비명이 이어졌다.

“너무 예쁘다!”

평소에도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나지만, 이렇게 주방장의 혼신의 힘을 다한 디저트를 보고


있노라니 감상이 또 색달랐다.

나는 얼른 타르트 한 조각을 접시에 집어 들었다.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클로에와 로즈도 하나씩


들었다. 내가 든 것은 레몬 머랭 파이었다. 남부에서 직접 재배된 레몬으로 만든 파이의 맛은 그야말로…
….

“최고야……!”

나는 감격에 못 이겨서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
“…….”

클로에, 로즈 둘 다 너무 맛있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께하는 차도 어찌나 잘


우러졌는지 향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아.’

디저트를 한 입 먹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혹시 루를 불러도 될까? 루도 디저트를 무척 좋아하거든.”

“루라면 그 정령……?”

“무, 물론이지!”

둘의 반응에 나는 루를 얼른 소환해냈다. 공중에 하얀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루는 오늘도 허공에서 빙글 돌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 우리들의 테이블을 보고 이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말았다.

“으, 으아……!”

루는 눈앞에 가득 펼쳐진 디저트의 향연에 두 손을 양 뺨에 가져다 대었다.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었다.

“루, 같이 먹자.”

나는 루를 향해 쿠키를 건넸다. 그 애의 거의 몸만한 쿠키에 루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저, 저도 먹어도 되나요?”

“당연하지. 다 같이 즐기자.”

나는 생긋 웃었다.

“오늘은 내 친구들끼리 함께하는 티파티니까!”

내 말에 루는 사양하지 않고 얼른 쿠키를 덥석 물었다. 로즈는 루를 보고 황홀해진 듯했다.

“저어, 정령님. 이것도 한번 드셔 보세요.”

그러면서 로즈는 조심스럽게 케이크 위의 예쁜 딸기를 건넸다. 그러자 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으, 응!”

루는 로즈와 그녀가 건넨 딸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행복하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러곤 딸기를


껴안고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로즈는 행복으로 반쯤 쓰러져 있었다.

“너무 귀여워…….”

내가 보기에도 내 루가 정말 귀엽기는 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로즈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가 나를 보고선 앗, 하고 말았다.

“아, 미안해. 괜히 푸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 마음 이해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로즈와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애슐리 롤랑. 포도색 머리카락과 청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얼굴. 내가 생각에 잠겨


잠깐 입을 다물고 있자,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래, 아이샤?”

“응? 아…… 그게 아니라…….”

나는 말할까 말까, 하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애슐리 롤랑 말이야.”

“아…….”

내 말에 두 사람은 알겠다는 듯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지난번에 그 영애가 너무하긴 했지.”

“그래도 나는 아이샤가 앙갚음해 줘서 속이 시원했어.”

나는 턱을 괴었다.

“오늘 가면 또 있으려나?”

“아마 그럴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듣기로는 롤랑 후작 부인이 애슐리의 훈육을 굉장히 엄하게 시킨다나 봐. 아직 애슐리가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어도 사교계의 예절을 알아야 한다며 매일 같이 연회 자리에 보내곤 한다고 들었어.
뭐, 인맥을 만드려는 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나, 후작 부인이 오늘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정말?”

나는 으으, 신음성을 내고 말았다.


“원래도 그렇게 기세가 등등했는데, 후작 부인이 오시면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애슐리는 자기가 가장 최고로 관심을 받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싶어 하고, 남이 더 주목을 받으면 씩씩거리고.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클로에가 말을 받았다.

“그래도 애슐리는 속으로 후회하고 있을 거야. 자기도 괜한 소리를 한 걸 알고 있을걸?”

“맞아.”

로즈가 케이크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애슐리와는 더 엮이고 싶지 않아. 정령을 소환하고 나니 너무 달라져 버리고 말았어.”

“그래, 그래. 다른 얘기를 하자.”

우리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산 옷에 관해서라든가, 혹은 디저트에 관해서라든가 말이다.

“그래도 말이야.”

이야기를 하던 도중, 로즈가 운을 띄웠다.

“나는 이번 무도회가 열려서 무척 기뻐.”

그녀는 손을 꼬물거렸다.

“이번 기회로 아이샤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로즈의 얼굴은 꾸밈없이 순수했다. 나를 만나서 정말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클로에가 설핏 웃었다.

“나중에 꼭 우리 집으로도 놀러와 줘야 해. 알겠지?”

“당연한 소리.”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황녀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스스럼 없는 태도가 좋았다.


로즈와 클로에와 마찬가지로 나도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해서 무척이나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오늘 저녁, 내가 무슨 광경을 보게 될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였다. 다만 그저


마음속 한구석에서, ‘이름 모를 신비로운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저녁에는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고요. 후작가에서는 매일밤 연회를 열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했으니까, 어쩌면 그를 연회에서 한 번쯤은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령사는 보통 귀족인 경우가 많았다. 정령을 다룰 수 있다면 나라에서 작위를 주어 붙잡아 두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상급 정령이라면 더더욱 그가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귀족이 아니라도 괜찮아.’

만약 그가 온다면 내 손님이라고 해서 연회장에 들여보내 달라고 해야지. 저녁 무도회에 대한


기대가 뭉게뭉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 * *

티파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아주 배불리 먹은 우리들은 다음으로 무도회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다들 아까 상가에서 산 새로운 옷이 있어서 그걸로 갈아입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은 우리는


드레스룸에서 새로 산 모자나 리본을 대어 보면서 놀았다.

“이 모자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저 파란 목걸이는 어때?”

그러자 시녀들도 덩달아 들떠서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추천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꾸미는데 한참
동안 시간을 들이고 말았다.

결과는 눈부셨다. 아름답게 꾸민 우리는 마치 풍성하게 묶어 낸 꽃다발 같았다. 그러고 나서


블라임 후작가로 향할 때까지, 우리는 시종일관 떠들어 댔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다. 후작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에 가는데, 평소보다


분위기가 약간 달랐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무슨 일이지?”

로즈에게 묻자, 로즈는 자기도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글쎄, 중요한 사람이라도 방문한 게 아닐까?”

중요한 사람? 그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조금씩 뛰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서 ‘그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쩌면,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가 보자, 얘들아!”

“앗, 아이샤. 같이 가!”

나는 사람들이 겹겹이 몰린 중앙으로 발을 빨리했다. 그 사람일까?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본 것은 어느 한 사람이었다.

“……아.”

하지만 그 뒷모습은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긴


백금발을 늘어뜨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사람의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그쪽에서 먼저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어머, 이게 누구시람. 제국의 하나뿐인 별, 엘미르 황녀 전하 아니신가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친한 척을 해 왔다. 보라색 눈과 연보라색 머리카락.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딸과 무척이나 얼굴 생김새가 무척 비슷했던 탓에 나는 그녀의 정체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롤랑 후작 부인이신가요?”
“어머, 어머머.”

그녀는 내가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한 듯했다.

“맞아요. 제가 바로 디아나 롤랑이랍니다. 호호호…….”

나라는 맛 좋은 먹잇감이 있기 때문인지, 그녀는 내 옆의 로즈나 클로에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여기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딸이 잘하고 있나 볼 겸, 황녀 전하께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저도 오게 되었답니다. 남부의 날씨는 잘 맞으시나요?”

“네, 즐거운 휴가를 만끽하고 있답니다.”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노골적으로 나만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는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어린 귀족가의 자제들이 모이는 응접실. 어른들이 들어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건만, 나에게 인사를 하겠답시고 그 규칙을 깬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 시큰둥한 태도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참, 제 딸이 저기 있네요. 얘, 애슐리, 애슐리!”

부름을 듣자 근처에 있던 애슐리가 허겁지겁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허둥지둥하는 게 눈으로 보였다.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가 나에게 웃어 보였다. 억지웃음인 것이
역력했다.

“애슐리, 황녀 전하와는 이미 많이 친해졌겠지? 그야 너는 황녀 전하와 같은 정령사 아니니.”

후작 부인은 짐짓 다정한 듯 애슐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보았다. 애슐리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을.

애슐리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나와 다툰게 바로 어제 일이다. 아무리 얼굴이


뻔뻔하더래도 우리 둘이 친해졌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늘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제 그녀가 나에게서 밉보였기 때문이리라.


자존심 강한 애슐리라면 내가 분명 싫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절박하게 바라보았다.

“……네, 그렇죠. 황녀 전하?”

애슐리는 처음으로 나의 도움을 구하는 듯했다.

“……아, 네.”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도 더 뻔뻔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본


후작 부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 좋아 보이던 얼굴이 굳자 그 뒤에는 차가운 본 얼굴이 드러났다. 애슐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과 함께 말이다. 무언가 잘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은 들었다.

“……롤랑 영애께서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답니다. 그렇지, 로즈?”


예감이 좋지 않았기에, 나는 시선을 피하며 로즈에게 동의를 구해 보았다.

“응? 아, 물론이지.”

하지만 나와 로즈의 친근한 모습이 후작 부인에게 있어서는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이제 그녀는


애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애슐리. 나와 잠깐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그 말을 듣자마자 애슐리의 얼굴은 더욱더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예, 어머니.”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나는 당황해서 후작 부인을 향해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웃어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애슐리가 황녀 전하의 편의를 제대로 돌보아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제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말이죠…….”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제 편의라면 여기 있는 로즈와 클로에가 돌보아 주었답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후작 부인은 노골적으로 나만 보고 있었다. 이 무도회의 주최자인 후작의 딸, 로즈는 물론이고


디몬트 공작가의 금지옥엽인 클로에를 무시하고 말이다. 나한테만 말을 거는 행위가 너무나 속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말에도 후작 부인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얼굴이 굳어졌을 뿐이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자, 애슐리.”

“……예, 어머니.”

둘은 홀을 나섰다. 아마도 정원 쪽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남겨진 우리 셋은 속닥거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렇지?”

로즈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만 입을 열었다.

“조금 걱정인걸, 아무리 얄미운 상대라지만…… 친구였고.”

“…….”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로즈의 눈에도 애슐리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그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새하얗게 질리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왠지 그녀가 조금 가엽게 여겨졌던
것이다.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잠깐 다녀올까?”

“후작 부인께?”

“응, 내가 가면 그래도 좀 말릴 수 있겠지.”

애슐리가 나에게 잘해 줬다고 말해야지. 그녀와 내가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고작 ‘나와


친해지지 못했다’ 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가 혼나게 된다면 내 마음이 불편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조심하고.”

둘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정원 밖으로 향했다.

‘너무 혼내지 말라고 전해 주자.’

정원을 건너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블라임 후작가는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어 두었을뿐더러,
색등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아주 밝았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거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후작 부인과 애슐리를 찾고 있을 때였다.

짝!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후작
부인의 화난 목소리도.

“대체 너는 어떻게 돼먹은 애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나무 뒤로 숨고 말았다. 그 둘은 정원에 설치해 놓은 조각상 뒤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명은 쓰러져 있었다. 뺨을 감싸 안은 채로 말이다. 쓰러져 있는 쪽은 애슐리.
서 있는 쪽은 후작 부인.

부인이 애슐리를 때린 것이 명확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나는 가슴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렸어?!’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후작 부인이 딸의 훈육을 엄격하게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까지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좀 세게 혼내고만 말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놀라움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후작 부인은 화가 나서 계속 그녀를 꾸짖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니! 아이샤 황녀 전하와 친해져서 황실에 끈을 이어 두라고. 정령사라는 점을


이용하면 분명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

“어떻게 너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니? 난 널 죽을힘을 다해 교육시켰다. 이제야 정령을 소환하게


되어서 그나마 제 밥값이라도 하려나 했더니…… 가문의 수치구나!”

“……어머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정령에 그렇게 집착하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구나.’

지금까지 그저 오만하고 못된 영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애슐리는 절박하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아, 앞으로는 잘할게요.”

“앞으로? 이미 황녀 전하는 그 블라임 영애와 디몬트 공녀님이랑 친해진 것 같던데, 네가 과연 할


수 있겠어?”

애슐리는 온몸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손이 닳도록 싹싹 비는 그녀를 향해 후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참 너 같은 걸 왜 낳은 건지 후회가 든다. 배 아파 낳았더니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야…….”

“…….”

나는 눈을 떨었다. 생판 남인 내가 들어도 그녀의 말이 너무 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직접 듣고 있는 당사자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너무해.’

후작 부인은 세상이 다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영애를 향해 쏘아붙였다.

“남은 무도회 기간 동안이라도 어떻게든 아이샤 황녀 전하와 친해지도록 하렴. 옆에서 어떻게 하면
더 상급 정령을 부를 수 있는지 그 방법도 좀 묻고. 황녀 전하께서는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천재시니까
말이다.”

“……예, 어머니.”

후작 부인은 손가락을 들어 영애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알겠어?! 제대로 못 하면 또 밥은 없을 줄 알아라. 너에게는 정령밖에 남은 게 없다고!”

“……네, 네.”

후작 부인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녀를 꾸짖다가 자리를 떠났다. 남은 애슐리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잠시 뒤에, 나는 그녀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제대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떨며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보았다.

―알리사, 너는 황후인 나에게서 태어난 적통 황녀다.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단 하나의


실수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나를 엄격하게 교육했던 전생의 황후.

전생에는 나 말고도 많은 황녀와 황자가 있었다. 그러나 적통 황녀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야 했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무도회에서 긴장을 한 바람에 처음으로 춤을 삐끗했던 때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황후는 나를 그녀의 궁으로 불렀다.

그녀는 긴장하고 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부채로 내 턱 끝을 들어 올리고…….

찰싹!

나의 뺨을 후려쳤다.

―쓸모가 없구나.

그녀도 롤랑 후작 부인과 마찬가지였다. 자식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꼴도 보기 싫으니 어디로 가 버리거라.

크게 상처 입은 나는 황궁의 정원에 숨어 혼자 몰래 울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님이


너무 좋았다. 관심 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애슐리.’

나는 영애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혼자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보였다.

그때였다. 내가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밟은 것은.

“……누구야!?”

그 실수에 아차 하는 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운 애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어떡하지?’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나와!!”

그녀는 눈물을 박박 닦고,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녀


목소리에 담긴 울음기는 숨겨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수풀 뒤에서 나오고 말았다. 내가 걸어 나오자
애슐리는 경악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조각상과 함께 붙어 있는 분수대에서는 물이 퐁퐁 솟아서 떨어지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그


소리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는 말문이 막혀 서로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

애슐리는 떨고 있었다.

“아이샤 황녀 전하…….”
그녀는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였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언급하는 소리까지 들은 참이다.

나를 보고 싶었을 리 없다. 그 짐작대로 애슐리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괜찮나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 주머니 속에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분수대에서 물에


손수건을 적신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뺨에 대면 나아질 거예요.”

롤랑 후작 부인은 영애가 쓰러질 정도로 강하게 내리쳤다. 뺨이 부어 있으니, 조금이라도 열을


식히는 것이 그녀를 위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저를 동정하시는 건가요?”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거둬 주세요.”

그녀의 보라색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고,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짐짓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그녀였으나, 다음 순간 그녀는 아차 한 듯했다.

“…….”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황녀 전하께선 절대 이해하시지 못할 거예요.”

“……영애.”

“저와 어머니가 우스우시겠지요. 정령에 집착하고, 어떻게든 남에게 잘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애슐리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정령이 전부였어요. 드디어
저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 준 셈이었으니까.”
“…….”

“이게 저의 최선이었다고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방금 보신 건 부디 모두 잊어 주셔요.”

거칠게 눈물을 훔쳐 낸 그녀는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내가 내민 손수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남은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가 무도회장에 돌아간다면 분명히 부은 뺨을 들킬 것이다. 안 그래도 애슐리는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었는데, 맞아서 부은 뺨까지 들킨다면 그녀가 쌓았던 작은 명성도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수건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애슐리.’

나는 내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손수건은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황녀인데다 타고난 정령사인 내가, 애슐리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애슐리가 그토록 자신이 정령사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도, 그리고 정령을 기력이
다할 때까지 소환했던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어 했던 이유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녀도 절박했던 것이리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원을 걸었다. 애슐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덴베르의 황녀로서의 경험으로 말이다.

정원은 고요로 가득했다. 떠들썩한 무도회장과는 정반대였다. 반딧불이가 허공을 밝히고, 노란색
등불은 발아래를 비춰 주었다.

‘……어머니, 아버지. 이시스 오라버니.’

마음이 복잡하다 못해 엉킨 실타래 같았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달려가 안기고


지금의 이 기분을 설명하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그들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곳에 없었다.

‘……내일이라도 돌아갈까?’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기분이 이렇게 가라앉아서는 남은 사교 시즌도 제대로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별장에서의 생활은 무척 즐거웠지만 한 번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하니 그들이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아, 하지만…….’

나는 고개 숙인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아직 그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정말로 와 줄까? 반신반의하는 기분이었지만, 마음속으론 그가 와 주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보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같은 정령사로서의 의견도 나눌 수 있을 거고, 절벽이 어떤 장소인 건지도 궁금하고…… 내


꿈에서 왜 그를 봤는지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랬다. 그 사람이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어쩐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만난 건 한 번뿐인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터덜터덜 걷다가 이내 멈추어 서고 말았다. 내 앞에 누군가가 있었던 탓이다.

“……아.”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앞을 제대로 안 보고 걷고 있던 건 내 잘못이니,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어라……?”

환한 금빛 등이 그의 뒤에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내가 또 꿈을 꾸나?”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눈앞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광이 져 있었지만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허리까지 타고 내려오는 백금발, 밤하늘의 보름달보다 더욱 빛나는 금빛 눈동자까지.

꿈을 꾸는 거라면 깨야 한다. 서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고개를 세게 흔들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잠이 깨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모습은 너무나 실재적이어서


도저히 꿈의 것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잠깐,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나는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입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또, 만난 건가요?”

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적어도 그가 내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데에 희망을 느낀 나는 재빨리 물었다.
“어, 어쩐 일로……?”

그는 워낙 인간 같지가 않아서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꿈만 같았다. 그가 왜 이곳에


방문한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향해 그가 대답했다.

“네가 이곳 무도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를 만나러?”

마치 마법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풀려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조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꿈이라고 생각하다니.’

아마 그는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요.”

나는 나도 모르게 활짝 웃고 말았다. 그런 나를 그는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앗.’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고작 두 번의 만남일 뿐인데 어째서 그의 존재에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건 나답지 않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내 어깨에 앉아 있던 루가 그를 향해 인사한 것은.

“왕을 뵙습니다.”

루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루?”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왕이라니?”

하지만 그는 당연한 듯이 그 인사를 받고 있었다.

“빛의 하급 정령이로군.”
루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이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황금색 빛가루가 그 애의 몸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샤, 아이샤! 아이샤 황녀 전하!”

그 목소리는 바로 로즈의 것이었다.

“로즈?”

나는 몸을 반쯤 돌렸다. 내 목소리를 들은 로즈는 나에게로 빠르게 뛰어왔다. 그녀는 헉헉대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샤! 찾고 있었잖아.”

“어, 그게…….”

당황스러웠다. 로즈에게 이 남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탓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루가 말한 것도 무척 신경 쓰였다.

‘왕이라고?’

루가 왕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세상에서 단 한 존재밖에 없었다.

‘……설마.’

로즈가 가까이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계속 안 와서 걱정했잖아.”

“응? 혼자라니……?”

여기에는 이 정체 모를 남자도 있지 않은가.

“얼른 다시 돌아가자.”

“자, 잠깐.”

로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를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나 저 사람과 할 이야기가 있어.”

“저 사람?”

로즈는 초록색 눈을 깜빡였다.

“누굴 말하는 거야?”

‘…….’
나는 그녀의 눈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로즈의 눈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일부러 남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다음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투명한 초록색 눈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비치지 않았다.

“……!”

나는 반사적으로 로즈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아이샤?”

로즈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남자가 여전히 서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 눈에만 보이는 존재, 그리고 루가 왕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라면…….

역시 단 하나밖에 없었다.

“괜찮아?”

로즈가 걱정스럽게 묻기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 그러니까…….”

천천히 말을 골랐다. 여기서는 신중해져야 할 때였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바깥 공기를 쐬고 들어갈게.”

마음을 먹으니 말이 술술 나왔다.

“아까부터 홀의 공기가 좀 답답했거든. 내 걱정은 마. 루도 있고, 조금만 있다가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로즈가 안심할 수 있도록 환하게 웃었다. 가족들의 틈에서 단련한 미소로,
어머니나 아버지의 걱정을 막을 때도 아주 효과적이기도 했다.

“저, 정말 괜찮겠어?”

로즈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지.”

“……알겠어.”

그러자 그녀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얼른 돌아와야 해? 클로에랑 같이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이따 봐!”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로즈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녀가


충분히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뒤를 돌았다.

그는 로즈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내 예상에


따르자면, 그가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빛의 정령인 루가 왕이라고 부르는 존재. 일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만 보이는


존재.

그것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당신은, 정령왕님이시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 그와 나밖에 없는 조용한 정원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싸르르 울리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후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정확히는…….”

그는 가만히 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빛의 정령들의 왕.”

“……루미나스 님.”

나는 목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백금발과 금안을 가진 루와 그는 꽤


비슷한 모습이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루는 소녀의 외양을 가졌고, 그는 성인 남성스러운 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차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만난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루미나스, 전설이나 신전의 기도에서나 듣던 이름의 주인공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될 줄이야.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범상찮은 존재라고는 생각했으나, 그의 정체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당연했다. 정령왕을 만난 것은 그만큼 믿기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와, 왕을 뵙습니다.”

나는 루가 하던 것처럼 공손히 인사했다. 그는 빛의 정령왕. 이 제국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이다. 나로서는 얼굴도 들지 못할 존재일 수밖에.

황녀로 태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 이외에는 이리도 깊이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건만, 거부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당연히 이랬어야 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정령사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리라. 이제야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친근하게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빛의 정령왕. 빛의 정령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내 곁에 있었으니만큼 그 기운이


친숙한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가 상급 정령을 다룬다는 이유로 그를 정령사로
오해했으니…….

나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여,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내가 그를 정령사로 착각했던 것도 그에게는 별일이 아닌


듯했다. 그에 조금 용기를 낸 나는 그를 향해 감히 여쭈었다.

“……정령왕님. 어쩐 일로 이 속세에 방문하셨습니까?”

그가 내려올 정도라면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예?”

“너를 만나러 왔다고.”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랬다. 분명 그랬긴 했지만…… 그가 정령사라고 생각했을 때와


정령왕임을 알게 된 지금의 간격은 어마어마했다.

“……저를 만나러?”

내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네, 네?”

아까부터 자꾸 바보 같아지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나의 머리께까지


올라가더니, 나의 볼 옆에서 멈추었다. 볼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거리. 떨어져 있지만 그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달빛을 닮은 금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운이 불안정하군.”

“……기운?”

“네 정령도 평소보다 가라앉은 상태이지 않은가.”

나는 놀라서 루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 부근에 떠 있던 루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루, 루?”

내가 얼떨떨해하고 있자 정령왕님이 말했다.

“네 감정에 그가 반응한 것이다.”

“앗…….”

보통 소환된 정령들은 자신과 이어져 있는 계약자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루 또한 나의


슬픔에 전염당한 것이리라. 나는 재빨리 행복한 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친구인 루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는 슬픈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마음속에서부터 슬픈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나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빛의정령왕이라는 존재이다. 그런 그에게 나의 하잘것없는 고민을 말해도 괜찮은 걸까.

“괜찮다. 무슨 일이라도 말해 보도록.”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말해 왔다. 그에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고 말았다.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나는 내 전생 이야기는 빼고, 그저 어느 영애가 어머니에게 맞아 쓰러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영애와 친하지 않은데도 그녀가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정령왕인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이야기를 모두 끝낼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군.”

그 묵묵한 태도에 나는 어쩐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를 어째서 그렇게 걱정하는 것이지?”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단순한 동정? 과거의 내가 투영되어 보였기에? 아니면……?

‘……황녀 전하께선 절대 이해하시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그 말이 내 가슴 깊이 박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사교계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자, 그녀의 행동들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녀가 소환했던 나이아스가 어째서 슬픈 얼굴이었는지도.

앞서 정령왕님께서 말했다시피, 소환자의 기운에 따라 정령은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특히 하급 정령일수록 주인이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심해졌다.

아마 애슐리는 마음속으론 남몰래 항상 슬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기운에 영향을 받아


나이아스는 그렇게 슬픈 얼굴이었겠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어쩐지 가슴이 아려왔다. 게다가 정령들은 나의 친구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될 수 있다면 그 누구에게 소환되었건, 슬퍼하는 정령은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이것을 정령왕님께
말하자,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신기한 존재군.”

“……?”

“보통 인간들은 그렇게까지 정령을 걱정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한 번,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가요.”

밤하늘의 달보다도 아름다운 금안.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 빛의 정령왕, 루미나스.

내가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소환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루의 말대로라면 나로서는 아마 죽는 날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다니. 정령사로서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꿈만 같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하겠지. 로즈도 걱정하고 있을 테고, 슬슬 별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아쉬움이 크게 남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를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정령왕님을 만나 뵐 수 있어서, 생에 가장 큰 영광이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기운이 조금 안정되었군.”

“……아.”

“어째서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원의 노란색 등불이 아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정령왕님께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

“그래서 기운이 났어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대답했다.

“내 덕분이라는 건가.”

그가 낮게 읊조렸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그는 루를 향해 손짓했다. 루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정령왕님의 손에 올라탄 루는 아까보다 덜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 휘하의 정령들은 모두 나의 아이들이지.”

“…….”
“알고 있나? 이 대륙에서 빛의 정령사는 너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대륙에서요?”

정령사가 희귀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유일한 빛의 정령사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천천히 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황제의 모습 말이다.

“정령들의 걱정만 하지 말고, 너도 네 자신을 잘 보살피거라.”

‘…….’

나는 조금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위로처럼 들렸다.

‘슬퍼하지 마라.’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전하고 싶은 말이 그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지난번과 같은 헤어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그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나로서도 굉장히 모험이었다. 위대한 존재인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마디의 말을 해
주었다.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나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고 말았다.

“그,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등을 돌렸다. 연회홀로 걸으면서 고개를 자꾸 돌리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참았다. 만약 그가 사라지고 없는 걸 본다면 어쩐지 안타까울 것 같아서였다.

인연이 닿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번 닿은 이상, 우리의 인연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 * *

정령왕님를 만나고 돌아가자 클로에와 로즈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또다시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내 얼굴을 면밀하게 살피던 클로에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멍해?”

“……으응?”

나는 그녀가 건네준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양 뺨은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몽롱했다. 정령왕님를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들떠버린 것이다.

평생토록 소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령왕을 만났다. 그것도 단둘이서만의 만남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만의 비밀처럼 느껴졌다.

정령사로서 정령왕을 단 일 분 일 초라도 만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영광인 일이었다. 비록 내가


그를 직접 소환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시 꼭 만나고 싶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로즈와 클로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한가 봐.”

“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서 그럴 수도 있어.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잖아.”

“맞아, 이만 들어가는 게 어때? 아까 애슐리도 먼저 가던데.”

나는 그 말을 듣고 퍼뜩 내가 처음 정원에 갔던 이유를 생각해 냈다.

“……애슐리가 떠났다고?”

“응, 시녀들이 와서 전하더라고. 이젠 아예 겉돌기로 마음먹었나 봐.”

로즈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부은 뺨을 다른 영애들에게 보여 줄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애슐리에게도 사정이 있을지 몰라.”

“그래?”

로즈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 * *

하루하루가 지나고, 사교 시즌도 점점 막을 내리고 있었다. 생일을 맞아서 놀러온 나도 돌아갈


날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 주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 말에 클로에와 로즈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동안 그 둘과 즐겁게 놀았기


때문에 추억이 많이 쌓였다.

‘쌓여도, 엄청 쌓였지.’

나는 로즈와 클로에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곳 상가들의 매상은


우리가 책임지고 올려 줬을 것이다. 덕분에 가족들에게 줄 기념품이 잔뜩 생겼다.

지금 나는 오랜만에 혼자 앉아 별장의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후텁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차가운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는 기분은 아주 각별했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를 정리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머릿속에서 로즈와 클로에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령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 로즈 블라임.


처음에는 나를 단순히 동경하기만 했던 그녀였지만 계속해서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클로에 디몬트. 수도에 올라가면 나는 로즈와 함께 디몬트가에 놀러 가기로 단단히 약속한
상태였다.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그녀는 무척이나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외경심이 드는 존재. 모든 빛의


정령들의 왕이자, 우리 제국에서 신으로까지 추앙 받고 있는 존재.

루미나스.

그를 만난 것은 마치 꿈만 같았다. 그의 현실 같지 않은 외모도 한몫했고 말이다.

‘언제쯤 또 볼 수 있을까?’

그가 다시 만나자곤 했지만, 언제 볼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와 정원에서 만난 뒤로


다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연락할 수단은 없었다. 그저 매일 같이 블라임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며 기다리고 기다릴 뿐. 나는 나도 모르게 테이블 위를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주인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내 테이블에서 같이 티푸드를 먹고 있던 루가 물었다.

“아.”

나는 그에 마치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하고 말았다. 망설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실은, 정령왕님을 다시 한 번 뵙고 싶어서.”

나는 푸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조금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루에게 말한들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루의 볼에 붙어 있는 쿠키 조각을 떼어 내 주었다. 루는 나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루를 보고 있노라니 한 명이 더 생각났다.

‘애슐리 롤랑.’

그 뒤로도 애슐리는 계속해서 무도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고 말이라도 걸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서 나를 피할 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밉보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여기까지 와서도 응접실의 구석에서 주스를 홀짝이다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을 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쩐지
애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

아이스티를 마시던 나는 결심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블라임 후작가에 들리는 날이다. 오늘,
애슐리를 찾아가서 그날 있었던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지.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랄 뿐이었다.

* * *

로즈와 클로에는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제 다시 수도로 올라간다니, 엄청 보고 싶을 거야.”

“맞아. 꼭 편지해야 해?”

“또 놀러온다니까? 그게 아니라도, 조만간 클로에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

우리 셋은 테라스에 나가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날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알겠지? 조금 못 본다고 날 잊어버리기 없기야.”

“당연하지!”

로즈가 팔을 붕붕 휘둘렀다.

“아이샤가 있어서 정말 재밌었어. 다음에도 또 놀러 나가자!”

“그래!”

그러던 와중이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테라스 너머 정원에서 애슐리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벌써 집에 돌아가는 건가?’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그녀에게 할 말이 남아 있는데, 이대로 놓친다면 곤란했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나 잠깐만 정원에 나갔다 올게!”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리벙벙해하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는 재빠르게 정원으로 향했다.

“걱정 마, 얼른 돌아올 테니까!”

정원의 불빛이 밝아서 다행이었다. 눈에 튀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향해서 빠르게 걷다 보니, 나는


결국 애슐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떠나려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정원에 설치된 흰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애슐리!”

빠르게 걷느라 약간 호흡이 거칠어진 나는 숨 가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에 그녀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화, 황녀 전하?!”

그녀가 엉거주춤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나는 손으로 제지했다.

“그대로 앉아 있어요.”

나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갔다.

“……여긴 어쩐 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표정은 무척 좋지 않았다. 지난번 이후로 그녀가 나를 피해


다니던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내 물음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냥, 바람을 쐬고 있었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바람을 쐬는 것이라면 테라스에서도 충분할 것이다. 굳이 무도회장을 피해서


이곳으로 온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며칠 동안 그녀를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그녀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녀를


추켜세워 주던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그녀는 혼자서, 구석에
서있었다.

“나도 앉아도 될까요?”

그녀는 망설였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조금 옆으로 비켜 주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애슐리였다.

“……지난번에는 주제넘게 행동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감히 황녀 전하께 그런 말을 하다니.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요.”

“괜찮아요.”

내 대답에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괜히 욕심을 부린 탓이지요.”

“어떤 욕심이요?”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번 시즌에서 최고가 되었어야 하는데.”

“…….”

“남들이 동경할 정도로, 빛났어야 하는데…….”

어느새 그녀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황녀 전하가 부러워요. 저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남들에겐 비웃음거리만 됐을 뿐…….”

“영애.”

“다른 사람들과 블라임 영애에게는 운 좋게 정령을 소환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잠에 들 때까지. 혹시라도 나에게 재능이 있을까 봐.”

그녀는 고해성사하듯 말을 잇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에게 쓸모가 없다고 하셨으니까, 한 번이라도 제 몫을 해내고 싶었어요.


그런 제가 정령을 소환하고 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안타까워지고 말았다. 애슐리는 내 과거의 파편과 같았다. 아직 버리지 못한 내 그림자 중


한 부분 말이다. 한 번이라도 어머니에게 따뜻하게 안겨 보고 싶어서 발버둥 쳤던 나처럼, 애슐리도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내가.

달빛이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새삼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 작고 여린


어깨는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녀도 그저 13 살, 어린 나이에 불과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요.”

하지만 마땅한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말에 그녀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야 해요.”

나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울고


있는 그녀를 지켜봐 주기로 했다.

“영애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나의 말에 애슐리가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지기에 나는 얼른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말은 영애가 나보다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에요.”

“…….”

“영애는 내가 될 수 없어요. 되고 싶어 할 필요도 없어요.”

그 누구라도 남을 부러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전생의 나도 형제자매들을 부러워하곤


했었다.

어느 누구는 머리가 똑똑하다는 이유로. 어느 누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면, 돌아봐 주지 않을까 해서. 완벽해지면, 칭찬받지 않을까
해서.

“영애가 괜한 욕심을 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정말 영애가 진심으로 바라던 것이었나요?”

애슐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저는…….”

“……영애의 정령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째서인지 그 아이가 무척 슬퍼 보인다고.”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왜인지 알겠어요. 그 아이는 영애의 슬픔을 대신 나타내고 있었던 거군요.”

내 말에 애슐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리라.

“그 슬픈 얼굴이, 영애의 본심이었어요.”

“…….”

애슐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고 나서야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무척이나 서글픈 느낌이었다.

“……그건, 전, 몰랐어요. 정령이, 제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을 줄은.”

“…….”

“그치만, 다, 알고 있었던 거군요…….”

“…….”

“……이해해, 주고, 있던 거였어요…….”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봐 줄 뿐이었다.


* * *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녀는 눈물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그녀는 한결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 모두 정말 죄송해요. 게다가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기까지 하고, 황녀


전하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어요.”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는 게, 아무래도 펑펑 울고 나서야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까 풀죽어 있던 모습보다는 훨씬 더 ‘그녀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에게도 나중에 꼭 사과하러 갈게요.”

애슐리는 아름다운 보라색 머리카락과 어딜 보아도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밉살스러운 성격이고, 눈치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다.

로즈와의 관계도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해요.”

내 말을 듣자, 우물쭈물하던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 확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나는 그녀의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 * *

애슐리는 눈을 조금 식히고 난 뒤, 마차를 타고 자신의 집에 돌아갔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정원을 걸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이 정원을 걷고 있다 보면 어쩐지 그를 또


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정원의 어둠 속,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였다.

“……정령왕님.”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가 무척 만나고 싶었다. 그건 그가 빛의
정령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은 항상 내가 어려울 때에도, 기쁠 때에도 같이 있어 주었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항상 루에게 달려가 말하곤 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오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영애의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래.”

“일이 잘된 것 같아요. 적어도 앞으로 나이아스가 덜 슬퍼할 수 있겠지요.”

그 말을 하며, 나는 정령왕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꽤나 신기한 인간이군.”

지난번에도 들은 말이었다. 그는 나의 어떤 면이 그렇게 신기하다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인간이면서도 정령들을 그렇게 아끼는 것은 항상 그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인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그럴지도 몰라요. 정령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제 곁에 항상 있어 주었으니까요.”

“…….”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정령들이 저에게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에요.”

“…….”

“힘들 때, 슬플 때. 그리고 기쁠 때, 행복할 때……. 늘 같은 감정을 나누었어요.”

“…….”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저를 잘 이해하고, 제 마음을 알아차려 주는 건 정령들일지도 몰라요.”

내 말에 정령왕님은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대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조금


부끄러워졌다.

‘……괜한 말을 한 걸까.’

어쨌거나 나는 인간인데, 정령들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말하는 내가 조금 웃겨


보였을지도 모른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재밌군.”
“…….”

“너에게 있는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그리고…….”

“…….”

“약한 면도, 강한 면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아.”

“아니면…….”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너라는 존재가 특별한 것인가?”

두근, 그 말에 갑작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뭐지?’

심장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정령왕님은 계속 말했다.

“정령왕들에게 친구란 없고,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령들을 가리켜 친구라고 당당히
말하는 너에게…….”

“…….”

“호기심이 든다.”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너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란 뭐지?”

그의 질문에 나는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소중한 존재?”

“그래.”

“그건…….”

나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같이 있고, 고난과 역경을 나누고…….”

로즈와 클로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황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설령 떨어져 있더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

“…….”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정령왕님과는 마지막이겠네요.”

조금 쓸쓸하다. 이게 마지막 만남이라니.

“하지만…… 만나 뵐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어요.”

그런 나의 말에 그는 의미 모를 소리를 했다.

“글쎄.”

“……?”

“과연 마지막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크게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심장의 이상은 일단 제쳐 두고, 나는 그의 말에 주목했다. 그의 말은 마치…… 다음에


우리가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정원의 초록빛이 아른거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예전에, 정령왕님을 뵌 적이 있는 것만 같아요.”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아주 예전에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운명을 믿는 내가 아니지만 어쩌면 아주 옛날에, 이 만남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만 같다는…… 그런 알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 * *

정령왕님을 만나고, 나는 그날 꿈꾸는 듯이 멍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시녀장과 유모는


그게 내가 단순히 휴가의 끝이 아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말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제 나의 휴가가 모두 끝나고 말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제 로즈와 클로에에게 작별 인사도 마쳤고, 애슐리와의 일도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정말 돌아갈


때였다.

이미 짐을 거의 다 싸 두었지만 혹시 놓친 것이 없나 샅샅이 살피느라 저택은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나는 저택을 돌보아 주었던 시종들과 주방장, 정원사, 호위 기사, 집사 등에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들 정말 고마웠어. 다음에도 또 보자.”

“황녀 전하!”

집사는 무척 감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들로서도 황녀 전하을 모실 수 있어서 정말 큰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다음에도 또 방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녀 전하!”

시종들과 집사의 말에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다시 꼭 이곳에 돌아올게.”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환히 펴지는 것이 보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정원을 한번


돌았다. 넓은 별장에는 여름의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정원사가 나를 위해서 매일 같이 열심히
장미를 가꾸어 준 덕분이다.

정원은 생각보다 넓었기 때문에 돌아보는 데에만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이었으므로
나는 이곳의 풍경을 꼭꼭 눈 안에 새겨 넣었다.

희고 푸른 아름다운 별장의 풍경도, 차를 마시던 테라스의 추억도, 활짝 피어난 여름 장미도,


친구들과의 일도…….

‘그리고 정령왕님을 만난 것도.’

절대 모두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주신 소중한 별장에서 지낸 나날들은 매우 즐거웠지만,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진정한 집은 수도의 황궁에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별장 앞으로 돌아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이 반색했다.

“황녀 전하, 짐은 모두 실었답니다. 이제 마차에 올라타시면 되셔요.”

“그래? 그럼 바로 출발하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나의 마차에 올라탔다. 아쉽지만 이제 휴가는 진짜로 작별이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분명히 날 반겨 주겠지?’

그들을 위해 사 온 선물들도 한가득이니, 선물을 보고 다들 뭐라고 말할지 너무 궁금했다.

……그렇게 즐거운 생각을 하며 마차의 문을 연 나였으나―.

다음 순간, 나는 쩍 굳고 말았다.

“……?”
멍청하게 보이리라는 것은 알지만,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백만 개쯤 떠올렸다, 지웠다, 다시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현실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실 파악을 할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인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보는군.”

“…….”

나는 손을 덜덜 떨었다.

“저, 정령왕님?”

목소리도 뒤집히고 말았다. 당황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고귀한 곳에, 아, 아니. 고귀한 분이, 이 누추한 곳에…….”

“그다지 누추하진 않던데. 황녀인 네가 쓰는 마차가 아니던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반박하고 말았다.

“어, 어쩐 일로 여기에 계시는 건지…….”

정령왕님께서는 일견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내 마차 한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고풍스러운 복장과 화려한 금색 허리띠도, 이 세계의 존재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도 여전했다.

당장이라도 저 멀고 먼 절벽 위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내 전용 마차 안이 아니라 말이다. 당황스러움에 내가 말을 못 잇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말했었지.”

“……네?”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이야.”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도 되어 보고 싶군.”

위대한 존재, 정령왕인 그가 되어 보고 싶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숨이 막힐 듯하게 아름다운 그의 두 금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네 친구가.”

“……네?”

그의 말이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화법은 너무 딱딱했다.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정령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말의 내용이었다. 나는 한참을 더
생각하고 나서야 그 말을 뒤늦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구라고요?!”
내가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자,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그에 화들짝 놀란 나는 마차 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남들 눈에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


몰라 지레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시녀장이 닫힌 문을 똑똑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면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출발을 늦출까요?”

“아, 아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

“다행이군요. 그럼 마차를 출발시키겠습니다.”

“마차? 응? 어? 어…… 그, 그래.”

“네, 황녀 전하.”

시녀장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차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진동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경악한 상태였다. 이제 마차가 출발한 이상, 그를 거절할 방법도 없다. 아니,
애초에 위대한 정령왕인 그를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큰 키 때문에
내 전용인 마차는 오늘따라 무척 좁아 보였다. 그가 느긋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앉지 그러나.”

“……아니, 그게, 저…….”

나는 피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수도까지 가는 길 동안, 정령왕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게 사실일까.


이게 만약 꿈이라면, 어서 깨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올라타 있던
루는 완전히 신난 상태였다.

“와! 왕님!”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달려가 폴짝 안기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는는 한 손으로 루를 감싸 안았다.

“루.”

“네, 왕님!”

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령왕님은 그의 감정에 전염된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가슴이 두근,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아, 또 시작이다. 또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다니. 아무래도 황궁에 돌아가면 건강검진을 진지하게


받아 봐야겠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그는 눈길을 나에게로 돌렸다.

“앉지.”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대신 그와는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령왕님께서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령사와 정령 사이의 우정은 고대로부터 꽤 있었던 일이지.”

“저와 루처럼요?”

그가 루를 바라보았다. 루는 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처럼.”

“……하아.”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고민하다, 결심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정령왕님. 정령왕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

“……저도 최선을 다해서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기합을 잔뜩 넣어 선언했다. 감히 고귀한 정령왕님께서 나와 친구를 해


주신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평생의, 아니, 제국의 영광으로 삼아도 모자를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담, 앞으로 루미나스라고 부르도록.”

“제, 제가요? 감히?”

하지만 결심은 결심이고, 행동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경악하는 나를 향해 그가 재촉했다.

“그래. 불러 보도록.”

“어, 어.”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그러니까…….”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루미나스 님.”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찔한 미소였다.

* * *

별장에서 게이트로 가는 길은 몇 시간 정도 되었다. 그동안 나는 루미나스 님과 함께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것은 루미나스 님이 인간들에게 꽤 관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소중한 존재도 모른다고 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는 영원을 산다는 정령왕이다. 그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나도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이왕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를 더 알아 가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치고는 열심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와 있는 게 즐거워졌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질문했다.

“저어, 그런데…… 앞으로도 저를 이렇게 따라다니실 건가요?”

나로서는 꽤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내가 행동해야 하는 게 달라질


테니 말이었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되나? 친구가 되겠다고 말했지 않은가.”

음,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인간 세상의 상식을 잘 모른다는 것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신분 모를 남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인다면…….

‘황궁이 뒤집어지겠지.’

다들 경악하다 못해 쓰러질지도 몰랐다. 특히 내 오라버니가. 불안한 상상에 나는 조금 떨고


말았다. 아니, 신분을 밝힌다고 해도 문제다. 루미나스 님이 인간의 뒤를 따라다닌다고 하면 전 대륙이
들썩거리겠지.

그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만 나는 결국 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 받고 있는 관심과


주목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여기서 더 늘어난다면……!

나는 그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친구라고 해서 항상 붙어 있는 건 아닌걸요. 누구에게나 사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생활?”

“으음, 네.”

“흠, 그런가?”

그는 조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인간은 복잡하군.”

“…….”

그렇다기보단 정령이 너무 단순한 걸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가 나를 향해


질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지?”

“네?”

“너와 함께 있으려면 말이다.”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다시 붉어지려는 것을 무던히 막아야 했다.

‘아니, 저건 그냥 친구로서의 질문일 뿐이야.’


헛기침을 하던 나는 대답했다.

“가끔씩 놀러오는 정도라면 좋지 않을까요? 아, 그리고 신분도 확실하면 더 좋고요. 어쨌거나


저는 황녀니까요.”

“……알겠다.”

그는 이해한 듯했다.

“그럼 인간 세상의 신분을 만들어서 오지.”

“……?”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그가 말하는 인간 세상의 신분이 무엇일까? 상상해 보던 나는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냥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뭐…… 어쨌든 신님이시니까. 알아서 잘하시겠지.’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가 신분을 만들어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게이트로 가는 길은 착실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하지만 남부 게이트를 타고, 수도의 게이트로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트의 마법사들과 시종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다가온 호위 기사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들은 나는 얼굴을 환하게 펴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오셨다고?”

“예, 황녀 전하을 마중하기 위해서 여기 바로 앞에…….”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수도의 게이트는 황궁에서 약간 떨어진 숲에 세워져 있다.


오라버니도 바쁠 텐데 일부러 일정을 맞춰서 날 마중 나와 준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서 가서 만나 뵈어야겠다!”

나는 창문을 닫고는 바쁘게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루가 내 어깨에 날아와 앉았다. 그런


나를 보는 사람, 아니 정령이 한 명 있었다.

“매우 들뜬 것 같군.”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그게 그러니까…….”

나는 그를 향해 설명했다.

“제 오라버니가 절 마중 나오셨다고 해요. 얼른 가 보려고요.”


그의 금안이 의문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네 소중한 사람인가?”

나는 그 질문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요.”

쑥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저에게 있어서 누구와도 대신할 수 없는 무척, 무척이나 소중한 분이랍니다.”

“……흠.”

“저,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 앞에는 말에 탄 이시스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

몇 주 만에 만난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멀리서부터 부르며 달려갔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말에서 훌쩍 내려왔다.

“아이샤!!”

누가 보면 몇 년쯤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달려가자 그는


익숙한 듯이 날 폭 끌어안아 주었다. 더 이상 내가 애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오라버니를
만나서 기뻤던 나는 그저 헤헤 웃고 말았다.

“잘 있었어?”

“네! 오라버니는 어떠셨나요?”

“나도 물론 잘 지냈지. 남부가 잘 맞았나 보구나. 안색이 훨씬 나아졌어.”

“굉장히 멋진 곳이었어요. 오라버니도 언제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하, 언젠가 시간을 낼 테니 꼭 같이 가자.”

오라버니의 눈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나는 두 손을 꼬옥 쥐었다.

“오라버니랑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선물도 잔뜩 샀어요.”

“그래? 어떤 건지 궁금하구나.”

“기뻐하셨으면 좋겠어요!”

오래간만에 나를 만나서 오라버니도 굉장히 들뜬 모양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같이 마차를 타고 황궁까지 갈까?”

그렇게 말하며 오라버니는 시종을 시켜 말을 들여보내게 했다.

‘어, 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은 마차 안에 루미나스 님이 계시는데.’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오라버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얼른 가자, 어머니와 아버지도 널 기다리고 계셔.”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어라, 하면서도 끌려가고 말았다.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괜찮겠지? 어차피 루미나스 님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오라버니가 마차에 오르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다음 순간, 그는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응?’

그에 내가 마차 안을 살펴보았다. 마차 안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루미나스 님이 계시긴 해도


그분은 어차피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아이샤?”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버니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오라버니의 동작 하나하나가 기름칠 덜 된 철문처럼 끼걱이는 건.

“……아이샤……?”

“……?”

“이 신사분은 누구시니? 나로서는 처음 뵙는 것 같구나.”

“네?”

루미나스 님은 황태자인 이시스 오라버니 앞에서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신분을


모르는 이시스 오라버니라면 충분히 건방지게 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에게 그 모습이
지금 보일 리가 없는데?

‘설마, 실체를 뒤집어쓰신 건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소환된 정령은 일반 사람이라도 볼 수가 있었다. 소환자의 마력이 정령을


이 세계로 실체화시키는 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령왕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자연을 관장하는 그들은
굳이 소환되지 않아도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다.

“그, 그게…….”
나는 루미나스를 보았다가, 이시스 오라버니를 보았다가, 그것을 반복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이시스 오라버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대답은 이 신사분께 들으마.”

“……어…….”

그에 나는 재빨리 루미나스 앞을 막아서고 말았다. 이분이 누구신가, 무려 엘미르 제국을


지켜주시는 빛의 신이다. 하지만 그 정체를 모르는 오라버니로서는 실례를 저지르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이분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고개를 까닥했다. 그 모습이 터지기 전의 폭탄 같았다. 나는 속으로 고뇌했다.

‘이분은 제국을 수호하시는 빛의 신, 루미나스 님이시랍니다! 앞으로 잘 지내 주세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루…….”

“……루?”

내가 말을 더듬자 오라버니가 되물었다.

“루, 룬 님이세요.”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어쩌다 보니 같이 마차를 타게 되었답니다. 나쁜 분은 아니세요.”

“아이샤…….”

오라버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서, 설마 들키는 건 아니겠지?’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검사인 오라버니의 감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눈치채지 못하길!’

설명하기 너무 곤란하단 말이다. 마침내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 설마…….”

“네? 네?”

나는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오라버니의 얼굴이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별장에서 저 사람을 만나 한눈에 반했다든가. 그래서 수도까지 함께 가고 있었다던가
……!”

“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차례였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이게 대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오라버니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게 분명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사, 사, 무, 무슨 말씀을!”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감히 신, 아니 정령왕에게 한갓 인간이 연모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루미나스.”

루미나스 님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뭐?”

오라버니의 얼굴은 해괴해졌다. 그의 눈길은 마치 미친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제 오라버니는


루미나스 님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아악, 오라버니는 지금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다고요! 게다가 루미나스 님도 그렇게 말하면 믿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속으로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내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루미나스 님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루미나스라고? 지금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오라버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붙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루미나스 님은 자기가 루미나스 신이라고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아, 어떡하지.’

상황이 점점 망해가는 게 느껴졌다. 이걸 어떻게 변명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루미나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의 신도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았다. 그 말에 오라버니는 눈을 깜빡였다.


“즉, 빛의 신관이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루미나스는 나와 오라버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무척 흥미로운 듯했다.

‘신분을 만든다는 게 그런 의미였던 걸까?’

나는 멍하니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그는 빛의 신이니 가장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 세상의


신분이란 신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미나스를 훑고 있던 오라버니는 짧게 이야기했다.

“기운을 보아서 평사제는 아니겠군.”

평사제가 무어랍니까. 저쪽은 무려 그 신전의 주인이시랍니다. 애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오라버니가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아이샤, 저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네? 아, 그, 그러니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여기 오다가 신전에 들리시는 길이라고 해서 태워드리기로 했어요…….”

“다른 마차도 있잖아.”

“하지만 제가 초대한 손님이고…… 또 같은 빛의 신을 모시는 분이니까요. 귀, 귀하게 대접해


드려야죠. 하하하…….”

나는 둘의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웃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영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오라버니의 화살의 방향은 다른 곳, 즉 루미나스 님을 향해 돌려졌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이곳에 앉아 있을 생각인가?”

“그렇다면?”

“다른 마차로 가.”

오라버니는 내 옆에 풀썩 앉았다.

“마차를 하나 비워 줄 테니 편히 혼자 가도록.”

“그건 싫군.”

루미나스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둘을 살폈다. 황태자인 오라버니에게 반말을 하는 신관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오라버니가 그것을 지적할까 봐 무척이나 떨리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미나스


님에게 감히, ‘오라버니에게 존댓말을 써 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루미나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성녀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야.”

성녀님이라니.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의 앞에서 성녀라고 직접 불리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나와 루미나스를 번갈아 바라보던 이시스 오라버니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다시 험상궂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대거리를 하는 대신,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수도의 빛의 신전으로 최대한 빨리 가다오.”

“예, 전하!”

마부는 한 치의 토도 달지 않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신전이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이시스 오라버니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아이샤가 그대를 바래다주기로 했다니, 신전으로 먼저 출발하지. 손님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은 명백하게 불만이 서려 있었다. 나는 루를


쓰다듬으면서 둘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마차 안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해 죽겠어…….’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마차는 드디어 신전 앞에서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이시스 오라버니는
루미나스 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내리라는 것이겠지.

‘……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미치겠다. 오라버니야 제국의 황태자니까 신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정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무려 루미나스 님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미나스 님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그는 오라버니를 지적하는 대신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또 보지.”

“아, 네. 룬…… 님.”

나는 오라버니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나에게 인사를 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서


유유히 내렸다. 누구의 에스코트도 받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나의 호위 기사가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정말로 신전 안으로 사라졌다.

‘……또 만날 수 있겠지?’

내가 그의 뒷모습이 점이 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탁. 오라버니가 문을 닫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 의아해지고 말았다.

“오라버니?”

“아이샤.”

그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잠깐 말을 고르던 그가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는 괜한 오해를 해서 미안하단다.”


“……네에.”

“하지만 아이샤, 아무리 같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마차에 타는 건


조금 위험한 것 같구나. 황녀인 너를 노리는 사람일 수도 있잖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라버니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만약에 나도 그가 루미나스 님이 아니라


정말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면 같은 마차에 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걱정할 만도 하니,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그제야 그는 걱정이 가득하던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곤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 특히 남자들은 더 멀리하고.”

“아하하. 오라버니도 참.”

“나는 진심이란다. 그리고 아까 그 신관은 어쩐지 심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이던데. 그런 사람을


길에서 갑자기 만나는 건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오라버니는 이미 그를 아주 수상한 사람으로 낙점해 둔 모양이었다. 나는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루미나스 님을 변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분은 좋은 분이셨어요. 여기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그리고 오라버니가 오해한 것처럼, 내가 감히 그에게 마음을 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렴,


루미나스는 고귀한 신이자, 정령왕이 아닌가. 오라버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정말요.”

“그래도 혹시 위험할 수 있으니, 앞으로 그와 가까워지지 않겠다고 빛의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렴.”

나는 빤히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빛의 신에 대한 것을 빛의 신에게 맹세하라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어요.”

“어째서? ……역시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가는 내내 우리는 투닥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빙긋 웃었다. 꽤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라버니와 이렇게 떠들고 있으니, 수도로 돌아온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황궁에 도착한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두 분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


품에 뛰어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러자 두 분은 모두 나를 폭 안아 주셨다.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씩 했다.

“보고 싶었단다, 아이샤.”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던지 별장까지 가려던 걸 겨우 참았단다.”

“다시는 멀리 보내지 말아야겠어요. 그렇죠?”

“내 생각도 같네.”

두 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쩐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무려 14 년 동안 나를 과보호하신


분들이다. 나는 그 둘의 품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좋았다. 여행도 좋지만, 역시 집이 최고다. 부모님의 포근한 품에 안긴 나는 생긋 웃었다.

“아, 그리고!”

따뜻한 품에서 떨어지긴 싫었지만, 말해야 할 것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거기에서 친구도 사귀었어요!”

내가 들떠서 외치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친구라고?”

“누구니?”

“나중에 한 명씩 천천히 소개시켜 드릴게요. 어머니가 주신 별장은 정말 최고였어요. 너무 예쁘고,


멋지고…… 그 안의 사람들도 얼마나 친절하고 좋았는데요.”

내 말에 어머니가 다행이라는 듯이 살짝 웃었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구나.”

“네, 그리고!”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제가 선물도 사 왔어요!”

“선물?”

내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보면 깜짝 놀라실걸요? 모두 제가 어머니, 아버지랑 오라버니를 생각하면서 사 온 거예요.”

나에게는 기본적으로 품위 유지비가 주어진다. 그 돈을 모두 탈탈 털어서 사 온 것이니까, 다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윽고 시종들이 이 방으로 가득가득 선물을 안고 왔다. 그 수를 말하자면…… 음, 세는 게 더 입


아플 숫자였다는 것만 말하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선물들에 가족들은 얼굴이 반쯤 질려 가고 있었다. 그 종류만 해도 먹을 것,


입을 것, 진귀한 것, 희귀한 것…… 무척이나 다양했다. 오라버니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이샤,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너무 많지 않니?”

“음,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후후. 선물을 이만큼 많이 사 올 거라곤 다들 예상하지 못했겠지?’

이건 내 생일날에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가족들을 위한 작은 복수였다. 나는 생긋 웃었다.

Chapter 5. 하지 연회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몇 주째. 시간은 흘러 여름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펜으로 종이를 톡, 톡 두드렸다.

봄의 제전, 여름의 하지, 가을의 수확제, 겨울의 신년제. 이것들이 엘미르 제국의 4 대 행사이다.
이제는 ‘하지 연회’가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는 1 년에서 가장 해가 오랫동안 떠 있는 날로, 우리 제국이 빛의 신을 추종하는 만큼 제국


사람들이 아주 신성하게 생각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번 하지에도 황궁에서 뱃놀이와 하늘에 등불을 띄우는 큰 의식이 있을 예정이었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서 하지에 대한 기획을 검토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신관 초청’에 관련한 서류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듣기로는 얼마 전 빛의


신전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다음 대 대신관, 어쩌면 교황이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신관이 나왔다고 했다던가. 그 말에


황궁에서는 원래 계획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취소하고, 그 김에 그 신관을 포함하여 빛의 신관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전체적인 행사는 어머니가, 신관들의 대접은 내가 맡기로 했다.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는 아주 열심히 일할 예정이었다.

‘조금 나른하다.’

나는 살짝 하품을 했다. 지나가던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차를 더 가져다드릴까요?”

“응, 그래 주면 고맙지.”

테이블 위에서 같이 서류를 보는 것 같던 루가 어느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무척 행복해


보이는 그 얼굴에 문득 루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나도 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잠깐 펜을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내 방에 이어져 있는 테라스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내 방은 3 층이다. 설마 벽을 타고 테라스에 사람이 내려왔을 리는 없고.

‘새라도 들어왔나?’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본 나였지만, 다음 순간 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조금 기뻐지고 말았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푸른 황궁의 숲을 배경으로 그가 서 있었다. 빛의 정령왕인 그와 푸른 숲의 정경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루미나스 님, 바로 그였다. 나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옆의 시녀들에게 신경이


미쳤다. 마침 시녀가 나에게 새로운 찻잔을 가져와 차를 내려 준 참이었다.

“드세요. 황녀 전하.”

“아, 고마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

“네, 황녀 전하.”

내 말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네?”

시녀장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내 말이 무척 뜬금없었으리라.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나는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어, 그게.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다들 자리를 좀 비워 주겠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안 와도 괜찮아.”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얼떨떨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들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순순히 방 밖으로 나가 주었다. 이윽고 방에 나밖에 남지


않자, 나는 곧장 테라스로 얼른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숲의 상쾌한 향기와 더불어 눈부신 여름의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루미나스 님.”

몇 주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가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가?”

“네?”

그에 내가 되묻자, 그가 친절히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에게는 사생활이 있다고 했었으니, 몇주에 한 번 정도로 찾아오는 건 괜찮냐는 뜻이다.”

“아…….”

나는 그의 말에 놀라기도 하고,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루미나스 님이 조금 그리웠던


탓이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가 전처럼 불쑥불쑥 나타나지 않은 게 나를 신경 써서 배려해 준
것이었을 줄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네, 괜찮아요.”

사실은 좀 더 자주 찾아와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그렇군.”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잔잔하게 웃었다. 순간, 다시 한 번 심장이 뛰었다.

‘……건강검진에선 이상이 없다고 나왔는데.’

내가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까지 모두 뛰어와서 어디


아픈 곳이 없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그리고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이상 하나 뜨지
않았다.

‘내가 정령사라서, 그의 기운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새삼 그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햇살처럼 눈부신 금안. 그리고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모습까지. 눈부신 여름숲을 배경으로 한 그는 정말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정령이었다. 그렇게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방문하신 건가요?”

“별일은 없다.”

그는 비스듬하게 창문가에 기대었다.

“인간 세상에서 신분을 만드는 것도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지.”

“아, 맞다. 역시 신관이 되실 건가요?”

“그래.”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번 하지 연회에서 만나 뵐 수도 있겠네요. 하지를 맞이해서 황궁에 신관분들을


초대하거든요.”

“들었다.”

“아, 그러면 이것도 아시겠네요. 이번에 빛의 신전에서 차기 대신관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


나왔다고 들썩거리고 있…….”
말을 잇던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말았다. 잠깐, 어라……?

‘차기 대신관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오는 일이, 과연 흔한 일일까……? 게다가 그 신관이
아주 최근에 나왔다고 하던데.’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거의 신성력이 교황감이라고 하던데…… 그, 그분과 제가 같이 이번 행사를 주관하게


되어서요.”

“그렇군.”

“……그래서…….”

나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루미나스 님께서는 신관이 되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저어.”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루미나스 님이…… 그 신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하지만 신은―여기서 신은 빛의 신이겠지― 나에게 잔인했다.


루미나스 님은 미소를 지었다. 한여름의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그렇다만.”

“…….”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루미나스 님이 그 신관이라고? 게다가 내가 루미나스 님과 행사를 주관?’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나는 쓰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안 될 게 있나?”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보고서도 루미나스 님은 태연했다. 오히려 나에게 되묻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의 더할 나위 없는 태평한 모습을 보자,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별문제가 없나?’

물론 반쯤 이해는 된다. ‘그’ 루미나스 님이 평사제로 들어간다고? 남한테 존댓말을 해야 하고,


독한 수련을 견뎌야 하는?

‘절대 안 어울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미나스 님은 말 그대로 남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아버지인 황제 폐하를 매일 같이 보고 산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나스 님에게 종종
압도당하곤 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잘된 일이야.’

결국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루미나스 님이 신전에서 차기 대신관급이라면 적어도 그에게 감히


함부로 구는 사람은 없겠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차기 대신관의 자격을 얻게 되신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저 빛의 능력을 조금 보여 줬더니 아이들이 펄쩍 뛰더군. 굳이 대신관이 될 생각은 없지만,


필사적으로 부탁하길래 그러기로 했다.”

“‘아이들’이요?”

“신관들 말이다.”

“……우와.”

나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신관들을 아이라고 부르다니. 그중에는 팔순을 넘어가는


신관들도 있는데 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억겁의 시간을 산 그로서는 모든 인간들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순인 신관이 아이로 보인다면 난 뭘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빛의 능력을 조금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가 차기 대신관감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절절하게 와 닿은 때가 없었다. 그가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

그제야 나는 내가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방 안을 가리켰다.

“부, 부디 들어오셔요.”

그가 매끄러운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왜인지 그가 들어오자마자 방 안이 한층 더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다행인 것은 아까 시녀가 내 앞에 새로운 찻잔을 놓고 간 덕분에 그에게 대접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괜찮으시면 드시겠어요? 대접이 초라해서 죄송합니다, 루미나스 님.”

“상관없다.”

그가 내 앞에 앉았다.

“와아, 왕님!”

테이블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던 루가 어느새 일어나 루미나스 님께 찰싹 붙었다. 그런 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루미나스 님은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맛이 좋군.”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 차를 탄 시녀에게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호로록 쉬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뵈어서 무척 기뻐요.”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런데 그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뭐지?”

나는 마차에서의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그 마차에서. 어째서 실체를 쓰고 계셨던 건가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실례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만…….”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또 나왔다. 그 ‘호기심’ 말이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떤 호기심이요?”

“그때 네가, ‘오라버니’라는 존재는 무척 소중하다고 했었지.”

“네…….”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게 소중한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

나는 입을 확 다물고 말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당황스러움에 목소리가 갈라진 채였다.

“그, 그, 그러셨군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차를 마시려고 했지만, 내 몫의 차는 이미 다 비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애꿎은 찻잔만 들었다가 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루미나스 님은 나와는 다르게 무척 태연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 생활은 어떠신가요? 불편하신 점은 없나요?”

“없다.”

“어, 신전도 하지 연회 준비로 바쁘지 않던가요? 이곳은 연회 준비 때문에 무척 바쁘거든요.”

일 얘기를 하니 조금 침착해질 수 있었다. 나는 하지 연회에 대해서 설명했다. 등불을 올리고,


뱃놀이를 하고, 연회를 열고…….

그 얘기를 들자 루미나스 님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즐겁겠군.”
“그, 그렇지요?”

그의 웃음을 본 것이 좋아 나는 헤헤, 웃었다. 그 뒤로도 나와 루미나스 님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에 대한 얘기는 물론이고, 절벽에 대한 이야기 등을 말이다.

루미나스 님은 카스카 협곡에 있는 절벽에 가끔 가곤 한다고 했다. 대륙에서 가장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깨끗하고, 편안하다나? 그런데 나는 거기서 뜻밖의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제가 꾸었던 꿈이 루미나스 님께서 만드신 게 아니라고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담 그 꿈은 무엇이었지? 나를 보던 그는 슬쩍 말했다.

“어쩌면 네 기운과 내 기운이 반응해서 예지몽 비슷한 것을 꾸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있나요?”

“글쎄, 그렇게 따지자면 네가 맨눈으로 정령을 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도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인 그라면 내가 모든 정령을 보는 것에 대한 비밀도


모두 풀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얘기가 있긴 한데.”

“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앞으로 쭉 빼었다. 정령왕인 그가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면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이야기인가요?”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몸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짧은


침묵 후에, 그의 입이 열렸다.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그의 말에 나는 순간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다. 바쁘신 일이라도 있나? 그런데 그 말과 동시에,


방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아이샤 옆에 있지 않고 왜 바깥에 나와 있는 거지?”

오라버니의 목소리다. 나는 순간 뜨끔하고 말았다. 그에 대답하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샤 황녀 전하께서는 혼자 있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네, 그래서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소일거리를 하면서요.”


“뭐?”

오라버니의 목소리에는 큰 당황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것은 아니온 듯싶은데…….”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보며 루미나스 님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지?”

“아, 그, 그게…….”

오늘 그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정령왕인 그는 현신하지 않을 때에도 하급 정령들과


다르게 반투명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몇 번 보니까 알겠다. 현신하지 않은 그는 지금처럼 정령의 기운을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또 그와 함께 오라버니를 맞이하기에는 내 간이 너무 작았다.

“……죄송합니다.”

“별로.”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티타임은 즐거웠다.”

그의 말과 동시에 똑똑,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샤, 들어가도 괜찮을까?”

“그럼, 이만 나는 가지.”

“아, 네. 조, 조심히 가세요.”

나는 그를 배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대답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루미나스 님은 테라스의 문을 직접 열고 햇빛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상념을 깨우듯, 다시 한 번 문이 두드려졌다.

“아이샤?”

퍼뜩 정신을 깬 나는 외쳤다.

“아, 네. 네! 들어오셔요.”

그러자 문이 열렸다. 그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시스 오라버니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이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어쩐 일로 혼자 있겠다고…….”

“아, 별거 아니에요. 오라버니. 잠깐 하지 연회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서요.”


나는 황급히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의아해서 그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는데…….

다음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 바로


루미나스 님이 앉았던 자리에 빈 찻잔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찻잔은 다른 사람이 쓴 흔적이
역력했다.

“……아이샤.”

“……네?”

“여기 누가 왔다 갔니?”

나는 침묵하고 말았다.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티푸드를 먹고 있던 루의 모습이었다.

“……루와 같이 티타임을 하고 있었어요.”

쿠키를 반쯤 입에 물었던 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어쨌거나 루도 티타임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결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가끔 이렇게 루와 티타임을 할 때가 있어요. 그치?”

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와 함께?”

“네, 네! 루는 좋은 티타임 친구니까요!”

나는 억지로 환하게 웃었다.

‘……들키진 않았겠지?’

내가 속으로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였다. 오라버니의 표정이 풀어졌다.

“뭐야, 그런 거였구나. 깜짝 놀랐다. 네가 혼자 있는 일은 드무니까.”

“오라버니도 참, 제가 따로 만날 사람이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말하고 나니 슬프다. 그래, 나 친구 별로 없다…….

억지로 웃던 나는 얼른 화제 전환을 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어쩐 일이세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놀러왔단다.”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도 놀 친구가 없는 걸까…….’

내 안쓰러운 얼굴을 본 것인지, 이시스 오라버니는 얼른 말을 이었다.

“요, 요즘 네가 하지 연회다 뭐다 해서 바쁘잖니. 그래서 얼굴 본 지도 까마득한 것 같아 이렇게


내가 직접 온 거야.”

“네, 그러시군요…….”

내가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이자 그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어릴 적의 아이샤는 오라버니밖에 모르는 동생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오라버니를 전혀 찾지


않아서 너무 슬프구나.”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항상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잖니.”

“그건 오라버니였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내 궁에 방문하는 것은 오라버니 쪽이었다.


물론 그런 오라버니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내 유년기는 오라버니와 어머니, 아버지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 시녀장과 유모, 그리고 내 궁의


시녀 시종들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 그때, 오라버니가 제안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니? 나랑 정원 산책이라도 할래?”

“네? 오라버니도 바쁘지 않으세요? 듣기로 할 일이 많으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너와 산책할 시간 정도는 있지.”

나는 약간 고민했다. 아까 루미나스 님이 방문한 덕분에 하지 연회에 대한 일이 아직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고민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았다. 잠깐 산책을 하는 것
정도로 일이 엄청나게 쌓이지는 않는다.

“네, 그렇게 해요.”

내 말에 오라버니가 씩 웃었다. 여름의 해바라기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바야흐로 황궁의 정원에는 연꽃이 한창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나온 지도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깝게도 말이다. 오라버니가 말했다.
“날씨가 참 좋지?”

“네, 오라버니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도 보게 되네요.”

“나야말로 너와 오랜만에 산책을 하니까 기분이 좋구나.”

오라버니는 불어오는 여름의 바람을 만끽하듯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정원을 얼마쯤 걸었을까,
오라버니가 잠깐 발을 멈추었다.

“내가 하나 알려 줄 게 있단다.”

“네?”

“이번 하지 연회에서 놀라운 일이 있을 거거든.”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게 뭔데요?”

“글쎄, 그건 아직 비밀이지.”

“치사해요.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조르듯이 오라버니를 바라보자 오라버니는 갈등하는 듯했다.

“네? 말씀해 주세요. 궁금한걸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체에…….”

“기대하고 있으렴.”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분명 네가 좋아할 거란다.”

물론 그럴 것이다. 가족들이 나에게 나쁜 일, 싫은 일을 만들어 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결국


오라버니를 따라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알겠어요.”

우리 둘은 다시 황궁 정원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빛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즐거운 산책을 마치고 궁 안으로 돌아왔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 뒤의 나날들이었다.

그날 이후 종종, 루미나스 님이 나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를 남들이 있는


곳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밖에 내보내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 소문을 직접적으로 듣게 된 것은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불려 간 자리에서였다.
하지 연회가 몇 주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꽤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시지?”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그냥 식사나 같이 하시려는 걸까?”

내 말에 시녀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가족들이 워낙 다 바쁘기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과 만나게 된 게 기쁘기도 하고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옷을 차려 입고 만찬장으로 갔을 때였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이미 먼저 도착한 다음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제가 늦었네요. 다들 좋은 점심이에요.”

내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인사를 하자, 세 사람이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지?’

그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들이 차례로 한마디씩 던졌다.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맙구나.”

“고마워, 아이샤.”

“……네? 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와야죠.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점심인데요.”

그러자 그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감동한 듯했다. 뭔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얌전히 냅킨을 들었다. 전채는 샐러드와 차가운 수프였다. 그런데 내가 스푼을 들려고 할 때,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아이샤.”

“네, 어머니?”

“음, 그게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눈빛 교환을 하더니,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니?”

“네? 아니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차가운 수프를 한 입 떠먹어 보았다. 감자 수프의 풍미가 무척 좋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다들 안 드세요?”

그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온 것은.

“안다. 아이샤.”

“……네?”

오라버니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얼굴이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짐작한 것이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무슨 때요?”

14 살 때? 아니면 소녀 때? 어떤 때를 말하는 걸까? 내가 의아해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이샤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어,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이 어머니는 다 이해한단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아이샤.”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세 명의 얼굴에는 다들 아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 아이샤가 이렇게 자라 버리다니.”

“자그마했을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아이샤…….”

“……다들 대체 왜 그러세요?”

나는 내가 오기 전에 그들이 먼저 뭔가 먹고 있지 않았는가 확인했다. 뭐 이상한 거라도 먹어서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이나 오라버니나 나를 과보호해서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애써 손을 슬쩍 떨어뜨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들이 조금 진정한


다음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물론, 내가 이 황궁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어떠한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만약 루미나스 님을 만난 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그걸 들켰을 리는 없었다. 자연체의 정령을 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거라는 자신을 모두 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천천히, 선고하듯이 말했다.

“그야, 네가 요즘 사춘기인 것 같아서 말이다.”

“…….”

나는 순간 이미 들이켰던 물을 다시 뿜을 뻔했다. 그만큼 어머니의 말이 황당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는 물론, 아버지까지 나를 아주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이샤, 나는 네 마음을 이해한단다. 사춘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야.”

“맞다. 네 나이쯤 되면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고 말고.”

“사랑하는 나의 딸. 앞으로 무슨 일이든 어려운 일이나 모르는 게 있다면 상담해 주렴.”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여기에선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억울하게 외쳤다.

“다들 왜 제가 사춘기일 거라고 단정 짓는 건데요?”

그랬다. 내가 사춘기라고 생각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던가? 딱히 예민해진 적도 없고,


평소랑 다른 행동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러자 가족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고선 서로 눈빛을 나누면서 말하기를…….

“그게…….”

“자꾸 혼자 있고 싶고…….”

“싱숭생숭하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고…….”

“사춘기가 그런 거 아니겠니?”

‘……아.’

그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요즘의 생활에 대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루미나스 님을 만난답시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다. 물론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난 것은 덤이다.
……그런데 그게 사춘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었을 줄이야. 안 그래도 시녀들이 내가
요즘 혼자 있는 것에 묘하게 납득하는 것 같더라니…….

내가 침묵하고 있자 가족들은 나의 심기가 상한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다들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아이샤. 혹시 사춘기 얘기를 꺼내서 화가 난 거니?”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우리가 섬세하지 못했어.”

“……아니…….”

가족들이 나를 무슨 떨어지면 바로 깨지는 크리스털 잔처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족들은 나를 달랬다.

“아이샤, 앞서 말했지만 사춘기는 당연한 과정이란다.”

“그래,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더 있다간 가족들이 울지 말라면서 달래 줄 기세였다.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나는 한숨을 포옥


쉬고는 말했다.

“저는 사춘기가 아. 니. 에. 요.”

그러자 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라버니가 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이 술
취했다고 말하는 것 봤니?’라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아니, 진짠데.’

그에 나는 조금 발끈하고 말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래, 믿어. 아이샤…….”

“아, 정말…….”

나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진짜라니까요.”

“그래, 그래.”

가족들의 대답은 영 시원치 않았다. 나는 침묵했다. 나를 사춘기로 믿는 가족들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사춘기가 올 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어머니?”

내가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웃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였다.

“후후후…….”

“……?”

어머니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나도,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몫의 수프 그릇을 흘긋 바라보았다. 감자 수프가 차가운 음식이어서 다행이다. 따뜻한


수프가 다 식었으면 아까웠을 테니까 말이다. 어머니가 한참 웃고 난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

눈물까지 닦으며 어머니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렇지 않나요, 폐하?”

아버지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머니의 눈에는 부드러운 웃음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아이샤도 벌써 14 살이고, 이제 반쯤은 성인이라고 해도 괜찮겠구나.”

“사춘기도 오고.”

“사춘기는 아니라니까요.”

내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어머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을 더 웃었다.

“그래, 그래.”

어머니의 말에 뾰루퉁해지는 건, 정말 내가 사춘기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이어지는 오라버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샤.”

“네?”

“내가 조만간 멋진 일이 있을 거라고 했지?”

“어머, 이시스. 벌써 말한 거니?”

“아니요, 어머니.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어머니와 이시스 오라버니,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내가 묻자, 세 사람은 비밀을 교환하듯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알려 주세요!”

내 말에 아버지가 씩 웃었다. 장난을 꾸미는 듯한 즐거운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가


선언했다.

“이번 하지 연회 때에, 네 데뷔탕트를 열기로 했단다.”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네?”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데뷔탕트. 말이다.”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이미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모양이었다.

“제, 데뷔탕트요?”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되짚어 보았다.

‘나의 데뷔탕트?’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됐잖니. 보통 14 살 즈음에 데뷔탕트를 여는 게 보편적이니까.”

“그, 그렇긴 한데.”

나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말았다.

“데뷔탕트라니…….”

데뷔탕트에 대한 기대,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섞였다.

‘나도 드디어 데뷔탕트를 여는구나.’

멀게만 느껴졌던 그 단어가 갑자기 확 와 닿는 느낌이었다. 데뷔탕트를 열게 되면 사교계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은 물론, 이제 반쯤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얼른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데뷔탕트를 하지 연회에서 연다고요?”

하지 연회에서 데뷔탕트를 여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내 의문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래, 이번에 네가 하지 연회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으니 그날 데뷔탕트를 치르면 더 빛날 거라고


생각했단다. 아이샤, 네 생각은 어떠니?”

“부담스럽다면 다른 날로 미뤄도 된단다.”

“저는…….”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하지 연회라면 여름의 가장 큰 연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몰려와 나를 축하해 줄 것이다.

주목받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생애 단 한 번뿐인 데뷔탕트라고 하니까 그것마저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너무 기뻐요!”

나는 환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하지 연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다면


최고일 것 같아요!”

내 말에 세 사람은 안심한 듯했다.

“다행이구나,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했단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깜짝 선물이었네요.”

“내가 멋진 일이 생길 거라고 했지?”

오라버니가 말했다. 깜빡 잊었다는 것처럼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리고 그 데뷔탕트에서 차기 대신관감이라는 신관이 축복을 해 주기로 했단다.”

“……네?”

나는 그 순간, 굳고 말았다. 빛의 신전을 국교로 두고 있는 우리 제국에서는 중요한 자리에 서는


사람을 빛의 신관이 축복하는 의식이 있었다.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신관의 직위도 높아진다.

황녀인 나라면 당연히 대신관에게 축복을 받는 게 맞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굳은 게 당황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달래듯이 말했다.

“원래는 대신관이 축복을 내려 주기로 했지만, 그가 정중하게 거절하더구나. 이미 일선을 벗어난


자기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새로운 신관이 축복을 내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고, 모습도 보기 좋지
않겠냐며 말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미 대신관에 필적할 만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결코 축복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거란다.”

“그, 그야…….”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그 신관의 정체가 바로 ‘루미나스’ 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주춤하고 말았다.

그 말은 루미나스 님이 직접 내 데뷔탕트 날에 축복을 내려 준다는 뜻이 되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닐까.’

세상에 정령왕에게서 직접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와…….’

두 손을 모아 살며시 댄 가슴에서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울리고 있었다. 정령사인 나에게


정령왕이 직접 내리는 축복만큼 영광인 것은 없었다,

“정말 기대되어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런데 내가 웃는 걸 보던 가족들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에 나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역시, 데뷔탕트는 조용히 치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네? 왜요?”

오라버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야, 이 제국 귀족들이 너를 보고 모두 반해 버리면 곤란하잖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 말을 듣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생각만으로도 걱정이 되는군.”

“그러게요. 이시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나는 눈을 반쯤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줬다 무르긴 없기예요. 아시죠?”

“…….”

“…….”

나의 강렬한 눈빛에, 세 사람은 헛기침을 했다.

“그, 그렇지.”

“큼. 큼.”

“우리는 단지 아이샤 네가 점점 커가는 게 서운해서 그렇단다.”

어머니가 그 말을 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우리 아이샤, 언제 이만큼 컸을까.”

나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커도 저는 어머니,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영원한 아이샤인걸요.”

어머니의 손길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따뜻했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따스함이었다.

“데뷔탕트라니.”

“아이샤도 동의했으니, 준비할 게 많겠구나.”

“드레스나 연회의 준비도 빠뜨릴 수 없겠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샤에 대해서라면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걸요.”

“어머, 어머니의 직감을 무시하지 말렴.”


그런데 그 평안함도 잠시, 금방 가족들은 투닥거리고 말았다. 저마다 자기가 제일 나를 많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 어이없는 다툼에 나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때, 내 어깨에 타고 있던 루가 나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저도 주인님을 무척 잘 아는걸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나를 아껴 주는 소중한 존재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따뜻해지고 있었다.

“물론, 알지.”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루가 헤헤 웃어 보였다.

‘데뷔탕트라.’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하지 연회까지는 이제 몇 주 남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정령왕님께 직접 받는 축복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

그런데 가족들은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저마다 제일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총책임자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눈을 뜨고 세 사람의 다툼에 끼어들었다.

“제 의견도 빼놓지는 마세요. 당사자라구요!”

“그래, 그래. 물론이지.”

“그래서 말인데, 아이샤는 어떻게 생각하니?”

음식이 식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 *

그날부터 시작된 데뷔탕트 준비는 예상했던 대로 무척, 아주 무척 바빴다. 연회는 하지로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컨셉은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드레스부터 보석, 액세서리, 그 외의 기타 준비도 해야 했고 특별히 예법을 다듬는 둥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가족들은 ‘네가 곧 사교계의 법이다’라며 굳이 예법을 다듬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이왕 여는 데뷔탕트에서 남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게다가
데뷔탕트까지 앞으로 남은 시일이 빠듯한 감이 있었다. 사람들도 무척 바빴고,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드레스를 대어 보고 있었다.

“황녀 전하,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유모가 자신 있게 꺼내 놓은 드레스는 흰 바탕에 연초록 레이스가 군데군데 달려 있는 여름용 파티
드레스였다. 가벼우면서도 발랄하고, 사교계의 최신 유행을 따른 디자인이라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드레스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이거, 이것도 잘 어울릴 것 같으신데요.”

그런 유모에게 반박하듯, 시녀장이 내놓은 드레스는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잔뜩 부풀린


밑단은 고전적이면서도, 화사하고 귀여운 느낌이었다. 시녀장은 열변을 토했다.

“데튀탕트라면 역시 소녀들의 꿈인 분홍색 드레스이지요. 이건 전통 아니겠어요? 이걸 입으신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상상이 안 될 정도인걸요.”

“어머, 하지만 시녀장. 이 연초록색 드레스를 보세요. 보기만 해도 아이샤 황녀 전하의 깜찍함이
배가 되는 것 같지 않나요? 마치 여름의 요정처럼요. 정말 사랑스럽고 황녀 전하께 잘 어울리는
옷이에요.”

둘의 말다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드레스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그 중간에 낀 황실 수석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였고 말이다.

게다가 그 둘 중에 하나를 정한다고 해서 완전히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토너먼트처럼 드레스


후보군을 하나하나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세상에 드레스가 이렇게 많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투닥대던 두 사람이 나에게 고개를 돌린 것은.

“황녀 전하!”

“어, 응?”

딴생각하던 게 들켰나?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하지만 둘은 전혀 웃지 않은 채 나에게 두 개의


드레스를 들이대었다.

“황녀 전하의 의견은 어떠세요?”

“이거? 아니면 저거?”

“내 의견?”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내 의견은…….”

입을 잠시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연초록 드레스이냐, 분홍색 드레스이냐. 둘 다


아름답기 때문에 쉽게 못 고르겠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굳이 내 의견을 묻는다면 말이지.

“……잠깐만 쉬면 안 될까?”

정말로 녹초다. 아까부터 몇 시간 내내 드레스만 잡고 있었더니 지쳐서 죽을 것만 같다. 내가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본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너무 지나쳤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그럼 조금만 쉴까요.”

“그래도 역시 이 연초록 드레스가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찌릿, 시녀장과 유모의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취향이 명백하게 갈리다 보니 나에 관한 일이라면 종종 이렇게 다투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옹다옹하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시원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 고마워. 레나.”

“그리고…….”

그녀가 은쟁반 하나를 가져왔다. 나는 매우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게 뭐야?”

다투고 있던 시녀장은 이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 그것은…….”

그녀는 싸움도 멈추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유모가 냉큼 그 대답을 가로채고 말았다.

“편지입니다.”

찌릿, 시녀장이 유모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모는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편지라니, 누구에게서 온?”

가볍게 물은 질문이었다. 별 중요한 사람에게서 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함은 이미 제쳐둔 채였다.

“로즈 블라임 후작 영애와 클로에 디몬트 공작 영애의 편지입니다.”

“뭐?!”

그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른 그것들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은쟁반 위에는 두


개의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여기 편지칼 좀!”

나는 레나가 건네는 칼로 재빨리 편지를 개봉해 보았다. 우선은 로즈의 편지부터였다. 진분홍색
편지에는 로즈다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인사말이 몇 줄 적혀 있었고, 바로 본론으로 이어졌다.

―아이샤!

내 이름을 부르는 로즈의 목소리가 편지를 넘어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편지를 읽고 있었다.
―네가 데뷔탕트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 축하해!!

―하지만, 그런 소식은 당연히 먼저 알려 줬어야지! 신문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아차, 내 실수다. 그러고 보니 준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이게 다 친구 없던 시절이 너무 길어서야. 미안, 로즈.’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계속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번에 클로에 집에 묵으면서, 네 데뷔탕트에도 참여하기로 했어. 친구로서 당연한 일이지!

“정말?!”

나는 읽다 말고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시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클로에도 아마 편지할 거라고 생각해. 휴, 나도 얼른 데뷔탕트를 열고 싶다.

―하여간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몸 건강하게 잘 있어야 해!

―너의 로즈가.

편지를 읽은 것뿐인데도 로즈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로즈가 내 데뷔탕트에 온다니. 하긴, 나라도 로즈가 데뷔탕트를 연다면


당연히 참석할 테지만 말이다.

이번에 나는 클로에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고급스러운 은색에 은방울꽃이 그려져 있는, 차분한
느낌의 편지지였다. 역시나 클로에다운 매끄럽고 우아한 필체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엘미르의 단 하나뿐인 별, 사랑하는 나의 아이샤에게.

―아이샤, 잘 지내고 있어? 나는 무도회가 끝난 뒤에 블라임 후작님의 저택에서 며칠 더 머무르다


이제 수도에 올라왔어.

나는 그것을 읽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편지에서부터 두 사람의 개성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신문에서 보고 네가 데뷔탕트를 연다는 걸 알았어. 무척이나 축하해. 떨릴 걸 알지만 아이샤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나보다 한 살 많은 클로에는 이미 작년에 데뷔탕트를 치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어른스럽게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 로즈와 함께 네 데뷔탕트에 참석하려고 해.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때 만날 수 있겠지.

―다시 만날 때까지 네가 무탈하기를 빌고 있을게.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야.

―너의 클로에가.

나는 두 사람의 편지를 모두 읽고 테이블 위에 소중히 올려놓았다.

“너무 기쁘다. 그치, 루?”


내 기분에 감응한 것인지 루도 기뻐서 공중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클로에와 로즈가 온다면 데뷔탕트가 더 멋져질 것이다. 분명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잠깐 그 편지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역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애슐리 롤랑 영애 말이다.

‘애슐리는 이 연회에 오려나?’

롤랑 영지는 남부에서도 구석, 나쁘게 말하면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늦을 가능성이 있었다.

‘온다면 좋을 텐데. 애슐리도 로즈와 화해하고 싶어 했었고…….’

어릴 때는 사이가 좋았다던 두 사람이다. 이번 기회로 서로 화해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게 있었다. 빛의 신전의 의도 말이다.

* * *

대신관을 포함하여, 빛의 신전의 신관들은 이번 하지 연회를 통해서 룬, 그러니까 루미나스 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차기 교황감으로도 언급되고 있는 루미나스 님을 성녀라 불리는 나와 함께 세워 놓는다면


선전용으로 아주 딱 좋겠지. 그 김에 교세가 더 확장된다면 더 좋을 테고 말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신전의 축복을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제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잃지 않는 거야.’

나는 어깨를 곧게 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

‘가족, 정령들, 그리고 친구들…….’

신전에서 선전을 원한다면 기꺼이 어울려 주겠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넘어가는 일이다. 성녀로서의 나의 입지가 올라가면 제국에 도움이 되고, 결국 황족인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

‘잘하자,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분명히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루미나스 님이 내 편이니까!’

정확히 내 편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얼굴을 본 정이 있는데 설마 나를


무시하시겠는가?

‘음…….’
정령에게 정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원한 차를 모두 마셨을
때였다.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자마자, 나를 향해 쏟아지는 두 목소리가 있었다.

“황녀 전하, 충분히 휴식은 취하셨나요?”

“자아, 다시 드레스를 보실까요?”

“…….”

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이 두 명의 악마, 시녀장과 유모를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댔다.

‘……하아.’

지금은 신전 이전에, 두 사람 앞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판이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시 일해야 할 때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황제궁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데뷔탕트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나? 그래서 나는 시간에 맞춰 황제궁으로 향했다.

데뷔탕트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직 드레스를 최종적으로 고르지 못한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물으러 다니고 있으니 곧 내 드레스가 결정될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구나.’

맑은 하늘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아침 이슬 덕분에 황궁 정원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총총, 대리석 바닥을 걸었다.

‘그런데 데뷔탕트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한다는 게 뭐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굳이 나를 부를만한


일이라는 게 잘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문득 내 시선을 붙잡은 게 있었다. 황궁의 넓은 공터 앞에 못 보던 마차가 하나 서


있었다. 온통 순백색으로 칠해진 그 마차는 고풍스러웠고, 머리 부근에 태양 모양의 황금색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그 마차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저건?’

나는 입을 조금 벌리고 말았다. 내가 갑자기 멈추어 서니 시녀들도 따라서 조용히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황녀 전하?”

“어, 어…… 아냐. 아무것도.”

시녀장이 나에게 물어오기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이미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 상태였다.

황금색 태양의 장식물, 그리고 순백색의 마차. 그것은 빛의 신전에서 이용하는 마차였다.
‘신전에서 사람이 온 걸까? 그럼 혹시…….’

저절로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뒤에서 시녀들의 의아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혹시, 그 사람들 중에서 루미나스 님이 계시진 않을까? 그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다.

빠르게 걸어서 황제궁의 앞에 도달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 곳은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쓰곤


하는 대영접실이었다. 황금과 귀한 대리석으로 치장한 대영접실의 문이 열리고, 나는 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깜빡하느라 반응이 늦었다.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선 인영이 있었다.


후광 때문에 자세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오, 황녀 전하.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

그는 내가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라 바로 빛의 신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자, 대신관이었다.

이제 일흔이 가까워진 나이의 그는 인자한 웃음을 띠며 나를 반겼다.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그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존재를 기대하고 있었던 탓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대신관님.”

“나날이 더 성장하고 계시군요. 늙은이로서는 무척 마음이 기껍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신관은 껄껄 웃었다. 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했다.

‘대신관님이었구나. 루미나스 님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 앞의 기둥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두꺼운 기둥이 그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흰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목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빈틈없이 채운 신관복은 그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마치 그 옷을 입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비록 그의 본 신분에 비하면 그 옷이 초라하고,


단추는 상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단추였다지만…….

“……아…….”

나는 계속해서 말을 잃고 있었다. 그가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제국의 황녀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 태도가 어울리게 만드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이 찰랑거리면서 흔들렸다. 이


세상의 것과 같지 않은 아름다운 금안도, 그 외모도 여전했다.
“……루…….”

내가 얼떨결에 그의 이름을 부를 뻔하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에 나는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입으로 삼켰다.

내가 한참 동안 그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내 상념을 깨부수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나는 끼거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돌렸다. 황제인 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겨우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선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루미나스 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마법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이번에 새롭게 신관이 되신 분이라고 한단다. 지금 대신관님과 함께 막 도착한 참이었어.


때를 아주 잘 맞췄구나.”

“……아, 네.”

“나도 있단다. 아이샤.”

불쑥,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평소보다 약간 불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질문하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어쩐 일로 이곳에……?”

“나도 데뷔탕트 준비를 돕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샤.”

그렇게 말하며 오라버니는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제야 제정신을 좀 차렸다. 대신관님도, 루미나스 님도 이번 하지 연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황궁에 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하지 연회의 책임자이자, 데뷔탕트의 당사자로서
연회 준비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명료해진 머리에 나는 가장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아차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

남들 앞이기 때문에 일부러 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에 두 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딸을 참 잘 키웠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달까?

한쪽에 서 있던 대신관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자리가 만들어져서 매우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의 데뷔탕트가 열린다는 것도 들었는데


겹경사가 따로 없군요.”
“대신관, 그대가 축복을 다른 이에게 미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 무척 놀랐지.”

그 말에 아버지가 화답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그대의 차기 대신관 후보라고 했을 때는 납득했다네. 게다가 실제로 직접


보니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걸 한눈에 알겠군. 이름이…… 룬이라고 했던가?”

룬. 성은 없다. 신관들은 모두 신에게 귀의한 자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일원이라는 증거인 성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관이 되기 전의 과거를 묻는 것 또한 실례였다. 신관이 된 순간 속세의 과거 또한


모두 버리기로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심지어는 오라버니마저도 루미나스 님에게
흥미가 무척 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질문했다.

“원래 귀족은 아니었는가?”

가족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루미나스 님에게서 태생적으로 배어 나오는 고귀함 같은
것은 도무지 감추려야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것도 한몫하겠지. 그런데 그때, 대신관님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인자하고 온화한 평소의 대신관님답지 않았다.

‘뭐지?’

“그,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

그가 얼른 루미나스 님의 앞에 나섰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루미나스 님의 모양 좋은 입술이 열렸다.

“아니었다.”

“…….”

“…….”

그리고 그 대답에, 우리 가족들은 물론 대신관님마저도 쩍하고 굳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대영접실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나간 줄 알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루미나스 님의 말을 되짚었다.

“……아니었다. 라고?”

아버지는 그 말을 못 들어서 되물으신 게 절대 아니셨다. 이 거리에서 말을 못 알아들을 리도


없으니까. 다만 의자의 손 받침대에 올려둔 아버지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감히 제국의 만인지상이라고 불리우는 황제에게 눈앞에서 반말을 한 것이다. 아무리 루미나스 님이


차기 대신관 후보라곤 하나, 현재 대신관님께서도 아버지께 존댓말을 하고 계셨다.

다시 말해 방금의 행동은 무례해도 어마어마하게 무례한데다가, 당장 처벌을 받아도 마땅하단


뜻이다.

대신관님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이제야 대신관님이 왜 초조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처럼, 루미나스 님이 아무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신전에서는 그게 정상참작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차피 그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은 대신관님밖에 없었을 테고, 차기 대신관 후보라는 직함도
있으니 대신관님께서는 루미나스 님의 행동을 너그러이 넘기셨겠지. 하지만…….

‘루미나스 님…….’

나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께까지 반말을 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어쨌든 지금은 평사제으로


위장하고 계신 상태인데…….’

물론 이해는 한다. 황제보다 신이 높으리란 건 어린애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나만 해도, 감히 루미나스 님께 존댓말을 듣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서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하지만 문제는 사정을 모르는 우리 가족들이었다.

‘아아…….’

피눈물이 날 것 같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루미나스 님을 이제 숫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이 제국을 이끄는 태양과 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일진대 감히 그대가 어느


안전이라고 반말을 지껄이는가?”

오라버니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대영접실의 점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루미나스 님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에게 귀의한 신관에게 있어서, 신 이외의 인간들은 모두 평등한 존재일 뿐. 그렇지 않은가?”

“…….”

루미나스 님은 대답을 요구하듯 대신관님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도 더욱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대신관님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고 있었다.

그분 또한 아무리 그래도 루미나스 님이 이러한 대형 사고(?)를 칠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론상으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할 장소가 틀렸다.

황제 폐하인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마치, 당신이 길거리의 평민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아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미 이곳의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막아야 한다.’

막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날지 모른다. 나는 재빨리 뛰쳐나갔다.

“아, 하, 하, 하. 정말 교리에 충실하신 신관님이시군요.”


내가 아버지와 루미나스 님의 중간에 서로를 가로막듯 서자, 아버지의 열렸던 입이 닫혔다.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루미나스 님도 마찬가지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어머니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도 기분이 좋지 않으셨던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 뭐라도 말해야 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서, 성녀로서.”

“……성녀로서?”

이거다. 나는 재빠르게 주문을 외우듯 좔좔 읊어 댔다.

“서, 성녀로서 이분과 함께 신전의 교리에 대한 깊고도 심후한 토론을 한 번 나누어 보고


싶어지는걸요!”

“아, 아이샤?”

“이렇게 날씨도 맑고, 루미나스 님께서도 지켜보시는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목소리가


높아져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대신관님! 저는 성녀로서 아주 잠! 깐!
만! 이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고 오겠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갈게요!”

“아니, 잠깐……!”

오라버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모두 무시한 채 재빨리 루미나스 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그를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튄 것이다.

* * *

다행히 루미나스 님은 순순히 나를 따라와 주었다. 시녀장이 보았으면 ‘황녀 전하께선 뛰시면 안
됩니다!’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화를 피하고, 루미나스 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까!

“……헉, 헉. 헉.”

단순히 가까운 기도실에 들어왔을 뿐인데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인해서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빛의 신을 믿는 우리 제국의 특성상, 황궁에도 작은 기도실이 몇 개쯤은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제단에 꽃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바로 빛의 신인
루미나스 님과 함께 들어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루미나스 님은 아주 태연하게 기도실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는 이렇게 생겼군.”

그 목소리는 태평하기 그지없었을 뿐이다. 나는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루미나스 님을


이끌고 이곳까지 오기는 했다. 아버지의 화도 일단은 피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떡하지? 루미나스 님에게 무턱대고 존댓말을 써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그가 꽤 자비로운 정령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과 이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언어는 정신을 지배한다. 누군가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정령왕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흥미롭군.”

이런 상황에서도 루미나스 님은 제단에 헌정해 놓은 꽃을 바라보면서 느긋한 소리나 할 뿐이었다.

“흥미로우신가요…….”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흥미롭다고?’

뭔가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은 듯했다. 루미나스 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그에게


우회적으로 존댓말을 부탁할 수 있는 방법이 말이다.

나는 아까보다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갈라지기에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큼, 큼. 루, 루미나스 님?”

“왜 그러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헌화의 꽃잎을 살짝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가


만지니까 꽃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꺾여져 조금 시들시들했었는데…….

‘……말하지 말까?’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새삼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와 닿았다. 그에게 인간 세상의 규칙을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하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적응해야 해! 왜냐면……!’

입을 열었다.

“루미나스 님께서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시다고 하셨지요?”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어떻게 보면 당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랬지.”
“그, 그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답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나온 듯했다. 루미나스 님은 쉽게 대답했다.

“인간들, 특히 너에게 흥미를 느껴서였지.”

“바로 그거예요!”

나는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루, 루미나스 님께서는 인간들의 규칙을 배우실 필요가 있으세요!”

내 말에 루미나스 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가


의문을 가지기 전에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아무리 인간과 저에게 흥미를 가지셨다고 해도 만약 지금처럼 어, 인간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저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말하다 보니 나도 설득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외쳤다.

“왜냐하면, 정말 인간 틈에서, 인간과, 인간처럼 함께 섞이지 않으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영영


배울 수 없을 테니까요!”

“…….”

내 말에 그는 잠깐 정지했다. 잠깐의 침묵이 좁은 기도실을 지배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런가?”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모습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를 들어서…… 방금 존댓말도 그래요. 인간은 신분을 중요시하게 여기니까 꼭 높은


사람들에게는 존댓말을 써 줘야 해요.”

“……흠.”

“어, 어차피 존댓말을 하실 분도 얼마 없으실 것 아니신가요. 신전에서는 모든 분께 반말을


쓰셨죠……?”

그냥 한번 예측해 본 것이었는데,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그랬지. 어차피 다 나의 아이들이니.”

‘대신관님.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아무리 루미나스 님이 신성력이 많다곤 했으나 분명히 구설수에 올랐을 행동일 것이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관이 매일같이 반말만 하고 다녔다면 말이다. 중간에 낀 대신관님만
힘드셨겠지.

그런 대신관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평소 때의 저에게는 말을 놓으셔도 괜찮으니 오라버니와 아버지, 어머니 이 딱 세 분들께는


존댓말을, 공적인 자리에서 저와 룬님이 상호 존댓말을 하는 걸로 해요. 루미나스 님. 앞서 말했듯,
인간의 규칙을 배우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고 그 규칙을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랍니다!”

이제 나는 두 손을 꼭 모아쥐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통할까?’

제발, 제발 통했으면 좋겠는데. 루미나스 님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정적이


흘렀을까,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세!’

나는 환해진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루미나스 님이 말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저, 정말요?”

“그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더 배우고 싶으니까.”

나는 승리의 기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그, 그러면 앞으로는 아버지나 어머니, 오라버니에게 존댓말을 써 주실 거죠?”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루미나스 님!”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네?”

“인간의 규칙을 따르기로 했지 않은가. 그러니 너도 내 가명인 ‘룬’이라고 나를 불러야지.”

“아…… 그러네요. 맞아요.”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은근히 허술하면서도 뭔가 고지식한 듯한 그의 사고방식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룬 님은 작은 기도실에서 조심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

* * *

밖으로 나와 대영접실로 나가니 대신관님을 포함하여 가족들은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대신 대신관님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걸 보아서
변명을 아주 열심히 하신 모양이시다.

‘수고하셨어요. 대신관님.’

나는 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니?”

“그래. 네가 갑자기 나가기에 무척 당황했단다.”

“음, 어. 말씀드린 대로…….”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렸다.

“성녀와 신관으로서의 이야기를 했답니다. 루미나스 님의 은총과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어……그런


것들에 대해서요.”

“그래……?”

가족들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반쯤은 납득한 듯했다. 일단 성녀인 내가 신관인 룬 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 성녀라는 위치는 정말 유용하구나.’

나는 헛기침을 했다. 루미나스, 아니, 룬 님도 설득을 했다. 이제는 실전에 들어가 볼 차례다.
그런 눈빛을 가득가득 눈에 담으며 나는 룬 님을 돌아보았다.

“그렇지요? 무척 유용한 대화였지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인지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아주 느릿하게 보였을 정도다.

“그렇습니다.”

“……!!”

완벽한 예법에, 완벽한 존댓말이었다. 룬 님의 모양은 그야말로 예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나는 아까 흘리지 않은 기쁨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올 것 같아서 간신히


가슴께를 부여잡고 감정을 진정시켰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신관이 엄청나게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에게 존댓말을 가르치신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그의 얼굴을 애써 피하며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룬 님이 제대로 예의를


갖추자 아버지는 기분이 많이 나아지신 모양이었다.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룬 님을 향해 물었으니까
말이다.

“그대가 대신관에 필적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젊어 보이는 나이인데 아주


대단하군.”

“감사드립니다.”

룬 님은 길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 하나하나에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둘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속으로 완전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무엇보다 그대가 황녀의 축복을 맡은 장본인이니까 말이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룬 님이 내 말에 설득당했다. 내 말을 들어준 것이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대영접실 안을 휙 둘러보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대신관님은 이제


아예 감격한 표정이었고, 이시스 오라버니도…….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시스 오라버니만큼은 아직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계속해서 하지


연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사람들의 앞에서 축복을 내리는 것과 연회에서 신관들과 함께 참석하는 것 등.

반쯤 이미 알고 있었던 사항이었지만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해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나와 오라버니는 대신관님과 룬 님을 배웅하게 되었다.

궁을 나오자 파란 하늘의 눈부신 햇살이 우리들을 향해 내리쬐었다. 아침이슬은 모두 마르고,


대신 꽃들이 저마다 꽃잎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눈치를 살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오라버니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비해 룬 님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시스 오라버니를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얼마쯤 길을 갔을까,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오라버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대와 내가 만난 적이 있었지?”

룬 님에게 말을 건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가시가 돋친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결코


룬 님께 즐거운 이야기를 할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차기 대신관 후보일 줄은 몰랐군. 오늘 그대를 보고 적잖이 놀랐어.”

“그러셨군요.”

룬 님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라버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존대는 없어도 되네. 그대에겐 도무지 존대가 어울리지 않는군.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는
것만으로 괜찮다.”

오라버니의 싸늘한 얼굴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싸움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룬 님은 여전히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거절도 않는군.”
둘은 서로를 탐색하듯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라버니가 싸움을 걸고 룬 님이
적당히 그에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는 이 제국의 손꼽히는 무술가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내가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하게 걷고 있는데, 대신관님이 슬쩍 다가왔다.

“저어, 황녀 전하.”

“……네?”

그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대화를 하셨기에 저분이 존댓말을 쓰시게 된 것입니까?”

“어…….”

그 과정을 말하자면 참으로 길어질 것이다. 나는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성녀…… 로서 침착하게 설득을 하였더니 저분께서도 받아들여 주셨답니다.”

“오오! 과연, 아이샤 님이십니다!!”

대신관은 정말로 감탄한 듯했다. 나는 기도실의 일을 생각하며, 대신관의 눈을 피해 저 멀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얘기하다 보니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어째서 룬 님께 대신관님이 공대를 하시는 건가요? 위치로 보자면 룬 님께서는 평신관이


아니신가요?”

“허허, 그야 물론 룬 님께서는 아직 대신관 후보에 불과하시죠. 하지만…….”

그는 푸근하게 웃었다.

“그분이 가진 신성력은 정말로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일선에 있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지요.


그런 그분께 어떻게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 보면 대신관인 그에게 있어서 룬 님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도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충분히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정말로 성직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의 눈에는 질시의 빛이라곤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저는 저분이 만들어갈 새로운 신전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아무렴, 교황이 될 수도 있다는
언급까지 있는 분이시니까요.”

교황이란 대신관과는 다르다. 대신관이 단순히 빛의 신전에서의 가장 우두머리라면, 교황은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신관들의 수장인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중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가 있겠다. 물론 그만큼 희귀한 자리였기


때문에, 교황이 된 자는 역사에서도 손을 꼽을 만큼 적었다.

“……정말 룬 님이 교황이 되실 수 있을까요?”

나의 질문에 대신관님은 껄껄 웃었다.

“허허, 앞일은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맞다. 나는 대신관님의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지. 웃던


대신관님이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황녀 전하를 오랜만에 뵙게 되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랜만에 대신관님을 뵈어서 저도 마음이 매우 흡족했답니다.”

“7 살 때 이후로 종종 뵙긴 했지만, 이렇게 길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니까요.”

“허허, 그렇습니다.”

그는 어딘가 아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자라셨군요.”

마치 우리 외할아버지 같은 말투다.

“하지 연회에 황녀 전하이 여시는 데뷔탕트도 성공적으로 잘 치르시기를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전에서 나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는 것에 이견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신관님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드려요. 열심히 할게요.”

나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룬 님을.”

그의 말에 나는 새삼 룬 님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긴 백금발이 조금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네. 그것도 열심히 할게요.”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늦게 들었다.

“……이샤, 아이샤.”

“아, 네?”

오라버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만 손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벌써 헤어질 시간이다. 대신관님과 룬 님은 앞서 타고 왔던 신전용 흰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인사했다.
“다시 뵈어요.”

내 미소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뵙겠습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에게, 축복을.”

그리고 마차는 출발했다. 왠지 그 뒤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었지만, 오라버니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라버니를 따라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면서 오라버니는 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저 신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하하.”

아무래도 룬 님은 오라버니에게 엄청나게 밉보여 버린 모양이었다. 음, 왜일까. 첫인상이 나빠서?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저렇게 딱딱해서 네 데뷔탕트를 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이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샤!”

오라버니의 얼굴은 진지했다.

“네. 오라버니?”

내가 눈을 깜빡이자, 이내 오라버니의 얼굴은 씩, 웃음으로 변했다.

“하지만 걱정 말렴. 이 오라버니가 네 데뷔탕트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 줄 테니까!”

오라버니는 데뷔탕트에 정말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계신듯했다.

“네, 네.”

그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역시 내 가족들은 너무 나를 생각해 줘서 탈이다. 나는 오라버니와


다시 걸으며 가볍게 물었다.

“그나저나, 황태자 업무는 어떻게 되어 가고 계신가요? 설마 제 데뷔탕트 일 때문에 더 바빠지신


건 아니겠죠?”

“하하, 그럴 리가.”

이시스 오라버니는 빙긋 웃었다.

“염려할 필요 없단다.”

문득, 나는 오라버니의 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눈을 깜빡였다. 내 앞에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등만 보였다.

“…….”
무언가 내 감이 이상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접한 존재가 정령이라면,
아마 사람 중에서는 단연 ‘이시스 오라버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오라버니는 나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고, 나도 그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오라버니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감정에 민감했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오라버니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염려할 필요는 없나요?”

내 목소리에 오라버니가 반쯤 뒤를 돌았다.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조금


가까이 오더니,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래,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가 웃었다.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그 웃음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바람이 불어서 나와 오라버니의
머리카락을 다시 흐트러뜨렸다. 여름치고는 싸늘한 바람이었다.

* * *

당연하지만, 연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들어가다 보니 그 위를 어떻게 통솔하느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 데뷔탕트 연회이기도 했지만, 나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하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1 년에


있는 가장 큰 연회 중 하나이다 보니 할 일은 넘쳐 났다. 어머니를 도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러 뛰어다니다
보면 하루는 숨 가쁘게 흘러갔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바쁘다 보니 내가 아직도 데뷔탕트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지 못했다는 것.

시녀장도 유모도 어서 골라 달라고 성화였는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꼭 드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올라온 서류를 보고 있던 나는 잠시간 생각에 빠져서 펜을 내려놓았다.

토너먼트식으로 올라온 드레스의 최종 후보는 총 세 개. 디자이너가 꼽은 우아한 연보라색


드레스와 시녀장이 꾸준히 밀었던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 그리고 유모가 좋아하던 발랄한 연초록색
드레스였다.

모두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일이 없는 아름다운 드레스였지만 나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망설이고 있으면 디자이너가 실망하려나…….’

하지만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데뷔탕트 무대인데, 이왕이면 꼭 마음에 드는 걸 고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도 의견을 여쭤볼까?’


어머니라면 분명히 날 위해서 꼼꼼하게 드레스를 봐주실 것이다. 게다가 마침 하지 연회에 대한
서류를 전달 드리기도 해야 하던 참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직접 황후궁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궁 밖을


나서니, 햇살이 꽤 따가웠다.

여름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루가 따뜻한 기운에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궁은 평소보다 무척 바빠 보였다. 연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와 시녀들은 금방 어머니의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 말로는 마침 어머니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했다. 들어가기 전,


시녀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렴.”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오후예요. 어머니.”

“아이샤, 어서 들어오렴.”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 안에는 홍차의 향이 퍼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티푸드와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티타임을 가지고 계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기 전, 못 박힌 듯 자리에 서고 말았다. 어머니의 방에 새로운 것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방 중앙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흰 드레스였다. 관리를 잘한 것인지, 그 옷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색을 뽐내고 있었다.

‘예쁘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네크라인은 시원하게 파여 있었지만, 그 위를 촘촘한 레이스가 덮고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종 모양의 소맷단과 풍성한 아랫단, 그리고 공단 리본과 레이스까지.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내가 그에 눈을 못 떼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어머니가 작은 탄성을 내었다.

“아, 저게 궁금한 모양이구나.”

어머니는 작게 웃으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옷걸이에 다가가서 그 옷을 자신에게 대어


보았다.

아쉽게도 그 드레스는 어머니가 입기에는 작아 보였다. 딱 내 나이쯤에 입으면 알맞을 법한


옷이었달까? 그래도 아름답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름답지 않니?”

“네, 정말 예뻐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 데뷔탕트에 입었던 드레스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어머니의 데뷔탕트에서요?”

“그래, 나도 14 살 때 데뷔탕트를 치렀지.”

나는 그 드레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몇십 년이 지난 드레스라는 이야기인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깨끗했다. 얼마나 보관에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머니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 드레스를 쓰다듬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지만, 아이샤 네가 데뷔탕트를 치르는 걸 보고 문득 생각났지 뭐니.”

그 얼굴에는 내가 몰랐던 추억들이 가득한 듯했다. 나는 어머니께 가까이 다가갔다.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 날이 어땠는지.”

“어머, 과연 재미있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환하게 웃었다.

“듣고 싶은걸요.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러자 어머니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딘가 소녀 같은 미소였다. 어머니는 나를 테이블에


이끌고 찻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그러곤 자장가를 부르듯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건 내 14 살 여름의 일이었단다. 북부의 영지는 추운 날이 많아서 전통적으로


여름에 데뷔탕트를 여는 게 관례였지. 그래야 손님도 많고 날씨도 맑으니까.”

“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내 데뷔탕트 며칠 전부터 장마가 시작된 거야. 원래 북부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장마 때문에 데뷔탕트가 완전히 엉망이 될 것 같아 나는 며칠
내내 울상이었단다.”

“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기다려왔던 날에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면 나라도 무척이나


서운하리라.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했다.

“거기에 더해, 내 데뷔탕트 파트너를 맡아 주기로 했던 사촌 오라버니가 말을 타고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지. 당연히 오라버니는 당일에 불참하게 됐고, 파트너도 없을 내 데뷔탕트가
너무 슬퍼서 나는 몰래 복도에 나가서 울고 있었어.”

왠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14 살의 어머니. 서럽게 울고 있었을 그


모습이.

“그런데 그때였어.”

“그때?”

“어느 귀공자를 만났던 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울고 있던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

“비 때문에 손님들도 없지, 파트너는 다쳐서 불참했지. 완전히 데뷔탕트를 망친 것 같다, 라는 내


말에 그 귀공자는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단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지.”

어머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비를 그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파트너는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

“그 말에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데,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손을 내미는 거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어.”

어머니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완전히 망친 줄 알았던 그 날은 생애 최고의 날이 되었단다.”

“……그때부터셨나요?”

나는 어머니에게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아버지에게 반하셨던 날이?”

어머니는 눈을 찡긋했다.

“그건 아니란다. 그때 이미 그분께서는 황태자셨고, 절대 넘볼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긴 했지만, 한여름의 꿈이라고만 느꼈지.”

“…….”

운명은 정말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만남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만나


결혼하기까지 아주 많은 일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예감이 들었지.”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울고 있었다곤 해도, 처음 보는 영애를 위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주셨던 그분의


다정함만큼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란 예감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는 어느새 이미 모두 식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멋져요.”

어머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깝기도 하구나. 저렇게 예쁜 옷인데, 이제 추억 속으로만 사라져야 한다는 일이…


…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일이 없겠지.”

“……!”
그 말을 듣자, 나는 어머니를 찾아온 이유를 불현듯 떠올렸다. 그리고 벼락같은 아이디어가
반짝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어머니.”

“어머,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어머니의 데뷔탕트 드레스를 제가 빌려도 괜찮을까요?”

“……?!”

어머니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드레스들을 보여 드리고 어머니의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어머니의 드레스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고, 제 데뷔탕트를 치르고 싶어요. 어머니가 다시 그날을 떠올릴 수


있게요.”

“하, 하지만 아이샤.”

“네? 부탁이에요.”

나는 어머니에게 졸랐다. 어머니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데뷔탕트는 온전히 너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지. 디자이너들이 멋진 옷을 지어줄 텐데 굳이 저


오래된 옷을 입을 필요가 있겠니? 나를 위한다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저는 저 옷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아이샤…….”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옷이니까요. 그리고 전혀 오래된 티도 안 나는걸요.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하게 옷을 아껴 오셨는지 알겠어요. 저도 아주 조심해서 입을게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약간 얼굴을 붉히셨다. 내심으론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 그렇다면 그 옷을 네가 가지렴.”

“네? 그, 그냥 빌리기만 하는 거여도 기쁜걸요.”

“어차피 나에겐 이제 너무 작아져 버렸단다.”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 옷에 새로운 추억을 덧입혀 주렴. 이제 이 옷은 네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드레스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소중하게 그 옷을 받아들였다.

“……후후.”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쑥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딸.”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너무 커 버리면 안 된단다. 언제라도 너를 껴안아 줄 수 있게 말이다.”

“어머니가 안아 주지 못할 정도로 커 버리면…… 그때는 제가 어머니를 안아 드릴게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어머니에게 폭 안겼다. 이제 나는 거의 어머니의 어깨까지 오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드레스, 아니, 이제 나의 드레스가 되어 버린 그 옷을 품에 꼭 안은 채 말이다.

* * *

하루하루 데뷔탕트와 하지 연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레스를 정한 뒤에는 디자이너가 알아서


보석을 박고, 여러 군데 수선을 해 주었다. 덕분에 원래도 무척 아름다웠던 드레스가 더욱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그 이외에도 숨 가쁘게 연회의 준비를 맡아서 해 왔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바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하지 연회 날이었다.

아참, 나는 하지 연회의 주관을 맡았기 때문에 데뷔탕트 파트너가 따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이 연회를 주관하는 빛의 신전 쪽의 룬 님이 나의 파트너랄까?

그에 어머니는 미안해하셨고, 평소 나의 파트너를 맡아 주던 오라버니는 아쉬워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무려 오늘 나는 룬 님에게 축복을 받는 것이다. 나로서는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무척 맑았다. 세상의 만물들이 내 데뷔탕트를 축하해 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오늘이 하지라서 날이 맑은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얼른 깨끗하게 씻고, 예쁘게 단장하던 나는 유모가 가져온 보석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저녁에 이걸 끼는 거야?”

“네, 황녀 전하.”

유모는 활짝 웃었다. 내 앞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팔찌가 있었다. 어찌나 눈부신지 이 방 자체에 광채가 번쩍번쩍했다.

‘무서워서 목을 들 수는 있을까.’

옆에 있던 시녀장이 기쁜 듯이 이야기했다.

“황녀 전하가 물려받으신 리오텐 공국의 다이아몬드 섬에서 나온 가장 질 좋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물건이랍니다.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세상에…….”

그렇다곤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그런데 아직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혀를 내두르며 살짝


그것을 들어 보는데,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던 것이다. 그에 내가 어리둥절해 할 찰나였다. 시녀장이 부연
설명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이 보석들에 경량화 마법을 거셨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요.”

“…….”

보석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경량화 마법까지 걸려 있다니. 이것만 가지고도
수도의 저택 몇 채는 기본으로 사겠다.

“휴, 그래.”

드레스와 보석을 보니 행사가 코앞인 게 느껴져 긴장이 되었다. 나는 보석들을 살짝 걸쳐 보았다.


푸른 다이아몬드에서는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전에는 뱃놀이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굳이 나가지 않았다. 악단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황궁 호수에 배를 띄우고 색색의 등을 띄우는 뱃놀이는 아마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관들을 맞이하기도 해야 했고, 데뷔탕트 준비도 해야 했다.

신전의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영접실에서 신관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했다. 이 의식은 내가


황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 아이샤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편의를 돌보겠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룬 님도 있었다. 나는 룬 님을 특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연회의


주관을 맡기로 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내가 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현재


빛의 신전과 황실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전에 그렇게 신관들을 대접하며 점심 식사를 마친 이후에, 오후에는 정신없이 꾸미는 데


집중했다. 데뷔탕트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보석 세트를 온몸에 장식하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데뷔탕트 드레스를 차려입은


나는 천군만마가 와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지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창문 바깥의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황후 아이리스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하지를 기념하는 뱃놀이에 다녀온 참이었다. 하늘이 맑은 것은 하짓날이기 때문이겠지만,
지난날들보다도 왠지 오늘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호수도, 숲의 정경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를 어린 아가씨를 축복하듯이 말이다. 황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이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너무 긴장하고 있지는 않으려나? 자신이 14 살 때 치렀던


데뷔탕트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때는 참 긴장되고 설레었었지.’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후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샤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아이였다.

너무 마음이 착한 아이라 때로는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이리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어머니의 드레스를 빌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던 아이샤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나갔다.

“황후 폐하.”

그때, 옆에 있던 시녀장이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슬슬 연회장으로 향하셔야 할 때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보구나.”

겨울이라면 벌써 해가 져도 한참 전에 졌을 때일 텐데, 여름이고 하짓날이다 보니 해가 아직 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가늠하기가 조금 힘들었던 것이다.

바라보던 하늘에서 눈을 떼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방 밖으로 나섰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나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어머, 폐하!”

그 앞에 자신의 남편이자, 이 제국의 지고한 황제인 티리온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같이 가지.”

그렇게 말하며 티리온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남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한 황제이지만, 티리온은
가족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황후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소중한 반려자이기도 했다.

“오신다고 미리 말씀을 하셨다면 앞서 나갔을 텐데…….”

황후가 말을 잇지 못하자, 티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오랜만에 그대를 기다려 보고 싶었다네.”

그 말에 황후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나이를 먹었어도 그의 그런 말들에 설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이 바로 티리온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후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 폐하.”
두 사람은 같이 걸어서 황궁에 있는 대연회홀에 도착했다. 둘이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인사를 해 보였다. 비단이 깔린 길을 걸어서 가장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 옛 생각이 났다.

루셀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로 태어나, 제국의 황후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직도 그녀를 향해서 쏟아지는 주목과 관심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앉게 되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자신의 가족들 덕분일 것이다.

아이샤, 이시스, 그리고…….

“왜 그러지?”

“……아.”

티리온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이리스는 자신이 티리온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리스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행복해서요.”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황제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보였다.

“…….”

그는 따뜻하게 미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티리온이 힘주어 아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가 무척이나 따뜻해서, 언제나 그랬듯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참으로 의지가 되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시스가 들어왔다. 아이리스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물론, 그때에도 티리온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이시스는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하지 연회의 주관자 중 한 명이자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사람이 등장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님과 빛의 신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시종이 목청을 높여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연회의 주역인 아이샤에 대해 다들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천천히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뒤로는 아름다운 소녀가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옷과


반짝거리는 보석들은 그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살짝 올려 묶은 은발과 푸른 눈동자에 담긴 당당함까지. 마치 여름의 싱그러움과 활기참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공식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아이샤의 어깨에는 늘 그렇듯이 루가 타고 있었는데,
연회에 들뜬 것인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의 딸인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한 무리의 신관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리고 있던 귀족들 쪽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무리 속의 한 신관 때문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백금발을 아무런 치장 없이 늘어뜨리고, 흰 신관복을 목 끝까지 차려입은 그는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었을 뿐이만, 그 자체로 마치 빛이 나는 듯했다.

신관 룬이었다. 황후는 순수하게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몇 번을 보았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


눈부신 미모였다. 아이샤와 룬, 그 둘은 이 연회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머.’

그런데 황후는 다음 순간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 말았다. 신관들을 이끌며 상석으로 다가오는


아이샤의 모습이 옆에 있는 룬과 묘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아이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환한 웃음도,
단순히 이 자리가 기뻐서만은 아닌 듯했다.

‘……흠.’

아이리스가 고개를 살짝 갸웃갸웃할 때였다. 티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리스.”

“네?”

아이리스는 눈을 깜빡이며 티리온을 돌아보았다. 티리온이 속삭였다.

“저 옷…….”

아이리스는 그러고 보니 아이샤의 데뷔탕트 드레스에 대해서 티리온에게 설명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기억하시나요?”

무려, 수십 년 전의 일인 것이다. 아이리스가 놀라서 입을 가리자, 그 말에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

아이샤가 입고 있는 옷은 예전 아이리스가 데뷔탕트 때에 입었던 옷이었다. 물론 약간의 수정을


가미해서 조금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지만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티리온은 아이리스처럼 그 또한
과거를 되짚는 듯한 얼굴이었다.

“울고 있었던 그 영애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


그 말에 아이리스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말았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다정함은
여전했다. 행복감에 절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이리스 드 엘미르.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제국의 황후라거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있고, 그녀를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껴 주는 남편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마음이 기꺼워지는 것이다. 아이리스가 티리온에게 설명했다.

“……아이샤의 부탁이었어요. 저 옷에 새로운 추억을 덧입히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랬군.”

티리온이 슬쩍 웃었다. 이제 아이샤와 신관들은 그들의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 * *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신관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함께 입장하면서 신관들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길고 흰 그 옷들은 성스러운 느낌을 배가 되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룬 님의 모습은 아주 특출 난 것이었다. 마치 그 옷이 룬 님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달까.

“안녕하세요. 신관 여러분.”

나는 그들을 향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민망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왠지 말이 없었다.

다만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모두 긴장한 탓일까? 열심히 꾸민 모습을 남들에게 처음


보이는 것이었는데, 다들 아무런 말이 없으니 괜히 머쓱해졌다.

‘너무 화려해서인가?’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신관들은 보통 액세서리 하나도 걸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볍게
납득한 나는 그들을 이끌었다.

“자, 연회장으로 같이 가요.”

그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얼마나 말을 잘 들어 주었는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을 정도다.

이윽고 연회장의 문 앞에 도착해서 나는 심호흡을 잠깐 했다. 이 앞에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와 수도 없이 많은 귀족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늘, 나는 데뷔탕트를 치른다. 떨리지는 않았다. 왜일까?

지난번의 생에서 나는 데뷔탕트는 물론이고, 연회 혹은 무도회 때만 되면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었다. 뭐라도 마시거나 먹으려고 하면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스트레스와 긴장이 어마어마했었다. 맞췄던 드레스가 스트레스 때문에 당일이 되자


헐렁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때에는 그렇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정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전생의 황후와 황제에게 누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보 같지.’

실은 내 데뷔탕트 따위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달랐다. 나는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이번 생의 가족들은 ‘네가 법이고 사교계의


예절이다’라며 나에게 긴장 따위 전혀 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만에 하나 실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기죽지 말라고 했던가? 아예 그걸 새로운 예절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여간 과보호지만, 그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미소를 띤 채로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시종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님과 빛의 신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눈부신 연회장 안으로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연회장은 은색과 푸른색, 숲의 청록색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샹들리에는 반짝이고
있었고, 비단으로 깔린 바닥은 매끄러웠다.

내가 입은 흰 드레스와 푸른 다이아몬드와도 무척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내가 이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신관을 소개하는 것도,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도 나였으니까.

사실 말하자면, 데뷔탕트는 큰 의식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데뷔탕트는 자신이 사교계에 나올


나이가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에 불과하니까. 첫 춤을 추고, 축복을 받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다른
귀족들에게 선보이는 게 끝이다.

하지만 짧아도 전통 있는 의식인 데다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인 만큼 귀족


영애들에게는 무척이나 큰 의미가 되었다.

내가 입장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멎었다. 간간이 ‘헉’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그것은 내 뒤의 룬 님을 보고 내지른 탄성이 아니었을까? 그분의 미모는 인간을 초월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중앙으로 다가가자, 손을 맞잡고


계시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옆의 상석에서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에게 풀어진
얼굴로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엘미르의 별. 아이샤 드 엘미르가 제국의 태양과 달, 그리고 작은 태양에게 인사 올립니다.”

“그래, 앞으로 오거라.”

아버지의 묵직한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일반 귀족들에게 허락된 거리를 넘어서, 같은 황족에게만


허락된 거리로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다가갔다. 속삭임이 들릴 가까운 거리에서 아버지가 속삭였다.

“긴장되니?”

나는 미소했다.
“아니요.”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오늘 데뷔탕트를 여는 네 앞날을 축복하마. 앞으로도 건강하길 빌겠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내가 가볍게 인사하며 뒤로 물러서자, 아버지는 연회장을 향해 외쳤다.

“나 티리온 드 엘미르는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도 없이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오늘은 무척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다. 우리 제국의 전통적인 기념일인 하지를 축하하는 날인


동시에, 짐의 여식인 황녀의 데뷔탕트 날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선언한다. 이 기쁜 날을 맞아 수도의 백성들에게 금화을 나누어 주고, 오늘


연회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신관들의 축복을 선사하겠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말을 미리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라고 있는 걸 보자,


어머니는 살짝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신전에서 일부러 신관들을 초대한 것도, 나의 데뷔탕트를 축하함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물론 신전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이윽고 아버지가 연설의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하지 연회의 시작을 알린다!”

“와아아아!!”

그 말과 함께 곳곳에서 샴페인이 터졌다.

펑!

그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황금색의 샴페인 줄기가 높이 튀어 올랐다. 풍요로운 광경이었다. 나는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 아이샤.”

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나와 룬 님을 이끌었다.

“데뷔탕트를 기념해서, 룬 신관의 축복을 받도록 하자.”

“……!!”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룬 님께 축복을 받는 이 영광스러운 순간이 말이다. 나는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리 약속된 절차였기 때문에, 룬 님은 순순히 내
앞에 다가왔다.
“…….”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룬 님은 나에게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룬 님의 손에는


따뜻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룬 님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빛의 힘이겠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야.’

나는 어딘가 멍한 기분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룬 님, 아니,


루미나스 님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현실을 되찾아 주려는 것처럼, 룬 님은 살짝 손을 내 이마 위로 올렸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빛의 힘은 따뜻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룬 님이 입을 열었다.

“아이샤 드 엘미르, 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별.”

“…….”

“그대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마음 깊이 빌겠습니다.”

짧은 축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렇게 말한 룬 님은 내 이마에 작은 성호를 그려


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이마로부터 내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내 얼굴은 빨개졌을지도 모른다.

‘꿈만 같아.’

내가 그렇게 계속 멍하니 있자,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이로써 의식은 끝이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룬 님께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별것 아닙니다.”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인지 그는 나에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던


것이 그에게 아직도 유효한 듯했다.

“이제 다음은…….”

어머니가 말했다.

“첫 춤의 차례구나.”

아, 나는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축복 다음에 이어지는 첫 춤. 사교계에 데뷔하면서 추는 첫


춤인 만큼 아무래도 큰 의미가 있는 춤이었다.

‘어머니는 데뷔탕트 때 아버지와 추셨다고 했지.’


파트너가 없는 나는 아마도 오라버니와 추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쪽이 아쉬웠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룬 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 님께, 첫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은 무척이나 실례겠지.’

어쨌든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첫 춤이 특별하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오라버니께 첫 춤을 부탁하자.’

오라버니는 항상 기꺼이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둘의 호흡은 아주 척척


맞아서, 춤을 출 때면 항상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곤 했다.

‘모두 앞에서 멋진 춤을 선보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아쉬움을 버리려던 찰나였다. 나와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섰다.

“그런데 말이다. 아이샤. 그리고 룬 신관님.”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 춤은 파트너와 추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아, 물론이죠.”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는 오늘 파트너가 없는걸요. 연회를 주관하기 때문에 일부러 파트너를 찾지 않은 걸


어마마마도 아시잖아요.”

어머니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

“파트너가 없는 대신 같이 연회의 주관을 맡은 룬 신관님과 첫 춤을 추는 건 어떨까?”

“……네?”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네?”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경악하고 있는 오라버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어머니는 가볍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오라버니와 함께 춤을 추는 건 어쩐지 쓸쓸하잖니. 어머니로서 네가 파트너가


없는 것이 미안했던 참이었단다. 룬 신관님께서 부디 제안을 받아 주신다면,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게
어떨까?”
나는 어머니의 제안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말에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

생각보다도 강한 반발이었다.

“항상 아이샤와 춤을 추는 건 제 역할이었다고요. 게다가 데뷔탕트의 첫 춤이라면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이시스.”

그런 오라버니를 향해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얼굴에서 단호함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고 하면 착각일까?

“첫 춤인 만큼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게 의미가 있지 않겠니? 아이샤도 데뷔탕트를 치렀고,


언제까지나 가족들과 춤을 출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자꾸나.”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단호함에 깨갱, 하고 말았다. 나는 룬 님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키가


훌쩍 큰 그이기 때문에 그와 나의 눈높이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룬 님과 춤을?

‘아니, 가능할 리가 없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룬 님과 춤이라니, 가능하고 자시고 간에 떨려서 내가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룬 님의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룬 님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어머!”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시다면, 부디.”

룬 님은 거리낌 없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손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고운


손이기도 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괜, 찮을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행복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나와 룬 님이 연회장의 중간, 춤을 추는 곳으로 향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신관복을 입은 룬 님과 드레스를 입은 나의 조합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악단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한 댄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

다행히도 그 곡은 내가 아주 잘 아는 곡이었다. 우리 제국의 전통적인 음악이기도 했기에 굉장히


많이 연습하고 추어 본 곡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일은 없는 듯싶었다.

그런데 문득 나는 룬 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얼른 소곤거렸다.

“그런데 룬 님, 춤은 출 줄 아시나요?”

룬 님은 기묘한 표정이었다. 마치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들은 표정이었달까?

“정령들에게 있어서 춤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정령들도 연회를 무척 좋아하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루가 공중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 애의 치맛단에서 환한 빛가루가 떨어졌다. 이윽고 금방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열심히 춤을 배워서 다행이다.’

나는 데뷔탕트를 위해 혹시 몰라 다시 춤 연습을 했던 것을 마음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룬 님과


처음 추는 춤에서 결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 룬 님의 춤이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선율에 맞추어 나는 한 발 내디뎠고, 그것은 룬 님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 자그마한


탄성 소리가 들렸다. 빙글, 한 번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손을 마주 잡는다.

턴을 할 때 오라버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둥에 기대선 오라버니는 어딘가 불퉁한 얼굴이었다.


룬 님께 첫 춤을 빼앗겨서 서운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선율에 맞춰서 다시 한 번 돌았다. 룬 님과 시선이 마주치고, 떨어졌다. 그는 달빛처럼 아름다운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선율 때문인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돌았다. 치맛자락이 핑그르르 원을 그리며 활짝 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꽃잎


같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몽롱했다. 아니, 내가 돌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너무나도 뛰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따뜻했다. 룬 님과 춤을 추고 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세게 돌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룬 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처럼 무뚝뚝한 그의 표정에서는 딱히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래, 나는 행복했다. 행복감에 가슴이 너무나 쿵쿵 뛸 정도로 말이다. 시간이 가지 않기를


이렇게 강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곡이라는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춤에도 마지막 스텝은 있기 때문에 결국 나와 룬 님의
춤은 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조급해졌지만,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나와 룬 님은


제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왜 눈물이 날 것 같았을까? 하지만 내가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위에서


엄청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세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얼른 웃어 보였다. 눈가가 조금 그렁해졌지만, 땀이라고 대충 속여


버리면 된다.

“다들 감사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몰려든 사람들 중 반쯤은 룬 님의 미모에 맛이 가 버린 듯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룬 님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는 일은 무척이나 피곤했다.

‘어휴.’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룬 님께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룬 님은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을 배우기 위해서인지 무뚝뚝한 와중에도 간간이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모습이 왠지 보기 싫었다고 하면, 나의 기분 탓일까? 잠깐 숨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나를


향해 달라붙는 사람들을 갈랐다.

“쉬고 싶어요.”

그 말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내 표정이 단호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복도에 나와서 기둥에 몸을 묻었다. 사람들과 떨어지니 조금 나았다. 조용히 숨을 내쉬고, 뱉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싶었다. 턴을 하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던 룬 님의 모습을.


그 황금색 눈빛을 기억하고 싶었다.

기억하고 기억해서, 이날의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정령왕님과 춤을 춘 것은 정령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너무나 행복하다.

“…….”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음 한구석이 조금 아팠던 것은. 그때였다. 저 복도 멀리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그곳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게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건 오라버니의 목소리인데?’

아까 연회장에 있었던 오라버니가 언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라버니를 향해 다가가려고 했다.


만약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고, 그 내용을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리오텐 공국의 상황이 많이 어지러운 모양이군.”

그 말에 대답하는 어느 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규모 접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래, 이덴베르 제국이 점점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침통한 이야기입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 뒤로도 그들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숨죽인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리오텐 공국이 우리 제국과 군사 협정을 맺은 것은 알고 있었다. 상황이 어지럽다는 것도. 그


협상의 대가로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다이아몬드 섬을 얻어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리오텐 공국이 어지러웠던 이유가 이덴베르의 군 확장 때문인지는 몰랐다.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덴베르의 정세에는 별 변화가 없다. 그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외부인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을 확장하고 있다면, 그 답은 누구라도 알 수가 있으리라.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덴베르의 황제는, 라키아스는, 대륙 정벌이라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리오텐 공국을 노리고 있다면 우리 엘미르 제국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리오텐 공국의 국경을 넘으면 바로 우리 제국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한참 충격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뚜벅뚜벅, 오라버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이야기를 모두 들어 버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였다.

“아이샤.”

오라버니가 나를 가만히 부른 것은.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거기 있지? 숨소리를 듣고 알았어.”

“…….”
역시나 오라버니는 대단했다. 숨소리만으로 나를 추측하다니 말이다. 아마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는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별수 없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
마주한 오라버니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오라버니.”

“……어딜 가던 참이었니?”

“잠깐 숨을 돌리려고 복도에 나와 있었어요.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데뷔탕트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 다 도와주셔서 저는 할 것도 딱히 없었는걸요.”

“그렇지 않아. 어머니께 네가 데뷔탕트의 준비는 물론, 연회 준비까지 많이 도왔다고 들었단다.”

“……황녀로서 당연한 일인걸요.”

“수고가 많았다.”

오라버니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사교계에 나서는 것, 피곤하지 않니? 네가 많이 지쳤을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이렇게 큰 무대는


처음이잖니.”

“괜찮아요.”

오라버니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계속해서


말을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화제는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만으로도 즐거웠을


우리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비로소 오라버니는 본론을 말했다.

“이야기, 모두 들었니?”

나는 오라버니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

내 대답에, 오라버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척이나 침통해 보였다.

“미안하다. 데뷔탕트 날에 안 좋은 소식을 듣게 해서.”

“…….”

나는 나의 흰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데뷔탕트 정말로 축하한다. 많이 자랐구나, 어릴 때는 그렇게 작았는데.”

“오라버니도 어린 시절은 있으셨을 거 아니에요.”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랬지.”

오라버니도 잠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가 기억나는구나.”

그때, 우리 둘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웠던 동산에서, 내가 나의 비밀을


말했던 그날. 꿈이라면 간절히 깨지 않기를 빌었던 날이었었다. 오라버니는 말을 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

“계속해서 너를 숨겨 놓고 싶구나.”

“…….”

“남부의 별장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네가 환하게 웃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그게 세상의 전부일 것만 같은데.”

그의 말은 안타까웠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입을 열었다.

“리오텐의 현재 상황은 정확히 어떤가요?”

“……계속 이덴베르의 도발을 받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께서는 군사 협정에 따라 리오텐에


기사들을 파병하는 것을 생각하고 계셔.”

“…….”

“우리 제국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어쨌든 이덴베르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

“근시일 내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오라버니의 씁쓸한 감정에 동화되어서, 내 기분마저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나는 속삭였다.

“오라버니가 출정하실 필요는 없는 거지요?”

이시스 오라버니는 말이 없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오라버니!”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하나뿐인 후계자이잖아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요?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한참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조급하게 그를 향해 애원했다.

“네? 제발, 약속해 주세요.”

얼마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 말에 나는 가슴속에 안도감이 확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 줄 것이다.
오라버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상황이 그렇게 나빠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였던 라키아스는 선대 황제에게 황위를 물려받아 1 년


전 황제로 등극했다. 그가 얼마만큼의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엘미르 제국에게 있어
위험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오라버니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네. 믿어요.”

오라버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의 얼굴은 매우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최고의 날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

“말했잖니. 네 데뷔탕트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 주겠다고.”

“……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게 했으니…….”

그제야 나는 오라버니가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 어깨를 잡고서, 내 데뷔탕트 날이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했었지.

“…….”

나는 문득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하는 오라버니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오늘은 제 최고의 날이에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나는 오라버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나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 상황을 몰랐더라면 결코 최고의 날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해 주신 오라버니께 감사해요.”

“……아이샤?”

오라버니는 의아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목표가 생겼어요.”

“……목표?”

“네, 새로운 목표.”

절박한 만큼, 마음속에서 그 목표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직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날 당당하게 말씀드릴게요.”

“…….”

오라버니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약속드릴게요.”

“……그래?”

“오히려, 걱정해야 할 쪽은 저인걸요.”

나는 힐난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에서 저를 숨기기만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면 제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나는 내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이전에도 말했었죠. 저는 가족들을 지키고 싶다고.”

“…….”

“그러니까, 오늘은 제 최고의 날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

그제야 오라버니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너를 믿는다.”

그 속삭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복도로 이어진 황궁 정원을 바라보았다.


하지이지만 어느새 밤이 깊어져서 검푸른 하늘에는 노란 달이 떠 있었다.

“이만 들어갈래?”

“아니요. 저는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게요.”

“……그래.”

오라버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얼른 와야 한다.”

“……네, 금방 들어갈게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가 들어가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았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전생의 기억, 그리고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섞여서 아주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달은 환해서, 어두운 가슴속에 그나마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룬 님. 거기에 계시죠?”

“…….”

풀벌레 소리만 찌륵찌륵 울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정령의 기운이 무척이나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실체화를 푼 채로 복도에 서 있었다. 나와 오라버니의 대화도 모두
들었으리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룬 님.”

그는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연회장은 너무 번거롭더군. 사람도 많아.”

“…….”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령들은 모두 연회를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주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 행세를 하려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너는.”

“…….”

그의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무슨 이유라도 있나?”


그는 어떠한 이유로 나의 결심을 짐작한 듯했다. 그것은 어쩌면 정령왕으로서 정령사에게 갖는
예감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예요.”

“…….”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요. 아주아주 오래전의…….”

나는 눈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 제 마음속에서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이제 그 일이 송곳처럼 저와 제 가족을 찔러 오고 있거든요.”

“…….”

“그렇기 때문에, 저는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덴베르 제국을 향한 나의 결심이었다. 룬 님은 흘러가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게 바로 네 마음에 어둠이 있는 이유인가?”

“……네.”

나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 일을 모두 해결하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만큼 저에게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이 말을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

나는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혹시 그가 나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떡할까?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저!”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여, 열심히 노력할게요. 매일같이 공부도 하고, 정령술도 갈고 닦을게요.”

“…….”

“그, 그러니까……!”

나는 눈을 꼬옥 감고 외쳤다.
“언젠가는 루미나스 님을 꼭 소환하고 싶어요!”

말해 버렸다. 나는 내가 한 말에 스스로가 놀라 입을 헙, 다물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낱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루의 말에 따르자면 이제껏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란 단 한 명도 없었고,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훨씬 노력하면.”

“…….”

룬 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듯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가능, 할까요?”

그가 아무 말도 없자 나는 자신감이 확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글쎄.”

룬 님의 어조는 늘 그렇듯이 무심했다. 나는 낙망하고 말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을까?’

이덴베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새롭게 생긴 목표란 바로 루미나스 님을 소환하는 일이었다.

‘……역시 너무 건방진 말이었던 게 분명해.’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목표에


불과하다지만 감히 정령왕님의 앞에서 그런 선언을 한 자신이 부끄럽게만 느껴졌고, 눈물마저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내 머리 위로 손이 턱, 내려앉은 것은.

“……?”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손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래.”

“……룬, 님.”

“열심히 해 보도록.”

그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이 세상을 비추어 온통 환한 지금, 이 세상에는 오직 나와


그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젠가는 꼭.’

그를 소환해 내고 마리라. 그래서 그의 옆에 당당히 서리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그건 그렇고.”

“……네, 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찾고 있던데.”

룬 님은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앗.”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너무 오랫동안 복도에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나는 연회장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얼른 옷을 가다듬었다. 그런 나를 룬 님은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지 않으시나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룬 님은 검푸른 정원을 등지고 서 있었다. 달빛이 그를 비추자, 그는 마치


그 빛 사이로 투명하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나는 이곳에 있다 가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 님께서도 생각할 일이 있으실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회장 안에 기쁜 손님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로즈! 클로에!”

그리고 심지어 그 곁에는…….

“화, 황녀 전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슐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셋의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 보였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직 로즈와 애슐리는 화해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셋이서 마주쳤으니


어색할 수밖에.

나는 당황해서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를 향해 클로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금색의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는 무척이나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샤, 오랜만이야. 데뷔탕트 축하해. 아까 춤도 무척 멋지던걸.”

“봤어? 고마워…….”

쑥스럽게 웃는데, 로즈와 애슐리는 아직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둘의 눈치를


살폈다.

“로즈, 연회에 와 줘서 고마워. 롤랑 영애도 오래간만에 뵈어서 기뻐요.”


내 인사에 둘은 그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아이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기뻐요.”

어색한 인사 뒤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발을 동동거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애슐리였다.

“……저어, 로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에 로즈는 눈을 깜빡거렸다. 망설이던 애슐리는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 지난번에…… 정령에 관련해서 무례한 말을 했던 것, 죄송해요.”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떨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했다.


그 말에 로즈의 눈은 커지고 말았다. 로즈 또한 애슐리에게서 먼저 사과를 받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리라. 애슐리는 말을 계속 이었다.

“이제 와서 사과해 봤자 늦었겠지만……. 그래도 정말 미안하다는 것만큼은 전하고 싶었어요.”

애슐리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로즈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약간 생각하는 것 같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렇게 사과를 하게 되신 이유는 뭔가요?”

“……황녀 전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때의 제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다는 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슐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걸 특권처럼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게 오히려 저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

“이제 정말 그런 짓은 안 해요. 무엇보다 더 이상 정령 소환에만 집착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흠.”

이야기를 다 들은 로즈는 잠깐동안 침묵에 빠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아이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아…….”

나에게로 질문이 와서 잠깐 당황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나에게도, 너에게도 사과하고 싶다고 했었어.”

“그랬구나.”

이내 로즈가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사과 받아들일게요.”

“……!”

“아이샤에게도 사과했다고 하고, 아이샤가 용서했다면 나도 못 할 건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면서 로즈는 씩 웃었다. 나는 얼굴에 웃음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좋아, 그럼 다들 화해한 건가요?”

“네, 네…….”

“그럼, 나도 로즈와 같이 롤랑 영애의 친구가 될래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네?”

내 갑작스러운 선언에 애슐리는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번 애슐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녀와도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로즈와도 화해했다고 하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잘 지내봐요. 참, 롤랑 영애. 내가 말을 놓아도 될까요?”

“아, 부, 부디…….”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친구였던 과거가 있으니까 분명 다시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다 같이 뭐라도 좀 먹자. 저쪽에 황궁 파티셰가 심혈을 기울인 디저트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내가 들떠서 외치자,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클로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찬성이야. 안 그래도 배가 좀 고팠거든.”

“난 시원한 걸 좀 마시고 싶다.”

“그, 그럴까요.”

우리 넷은 이내 연회장을 이리저리 탐방하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사람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디저트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색색의 과일 무스, 맛을 짐작할 수도 없이 화려한 케이크와 식사 대용으로도 먹을 수 있는 담백한


빵, 주스와 칵테일,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과일들과 크래커…….

다 말하려면 입이 아프다. 황실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한 요리를 먹으며 우리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간간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받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와중에 우리 넷은
다 같이 말을 놓기로 했고.

그러자 좀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 내가 새로운 디저트를 찾기 위해 잠깐


친구들의 곁을 벗어났을 때였다.

나는 눈에 익은 얼굴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비온 공자!”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그에 대조되는 청안. 고급스러운 감청색 정복을 입고 있는 그는 분명,


이시스 오라버니의 오래된 친구인 비온 공자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그를 본 게 매우 기뻐서 활짝 웃고 말았다.

“굉장히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고 계셨나요?”

올해로 열아홉인 그는 황궁의 근위대에 들어가 있었다. 마검사라는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받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황궁의 근위 부단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이시스 오라버니가 알려 주었다.

무척 고무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온 공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설마 내가 누구인지 그사이에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더 가까이


가려는 찰나,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그는 마치 잠깐 고장나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가 나에게 인사를 되돌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 이시스 오라버니가 간간이 소식을 들려주셨어요.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무척 기쁘네요.”

그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그러고 나서 비온 공자는 약간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는지.


이윽고 결심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아.”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비온 공자에게 칭찬을 들은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괜히 멋쩍어지고


말았다.

“그, 그런가요.”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했는데, 주변 사람들 눈에는 또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헤헤 웃었다.

“감사합니다. 비온 공자도 오늘 굉장히 멋있으셔요.”

무뚝뚝한 그답지 않게 그는 어쩐지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 년에 있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하지 연회이기 때문에, 그도 들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런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나를 찾으러 온 것은 클로에였다.

“무슨 일이야?”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계를 가리켰다. 어느새 시간은 밤을 지나서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참.”

나는 깨달았다.

“등불 올리는 걸 봐야지!”

하지 연회에서 등불을 올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사였다. 밤하늘을 발갛게 수놓는 등불을 올려, 늘
만물을 비추어 주는 빛의 신을 향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지금, 황궁의 공터에서는 등불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이끌고 얼른 테라스 쪽으로 갔다. 널찍한 테라스의 한쪽에는 오라버니와 아버지, 어머니도 와
계셨다.

‘역시 하지 연회에는 이걸 봐야 해.’

이때만큼은 황족이든, 수도의 일반인이든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소원을 빈다. 풍요를 빌고,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빌고, 마음속의 꿈을 빌고…….

공터에서 준비를 하던 시종들이 하나둘씩 등불을 띄워 보내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몽롱한


표정이 되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붉은 등의 고운 빛깔이 하늘에 가득했다.

“……예쁘다.”

그렇게 하염없이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이 테라스에 룬 님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신관들의 무리에 섞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나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 너머로 붉은 등불이 떠오르고 있었다. 해가 떨어진 하늘은


등불이 밝게 빛나는 만큼 어두웠다. 주위는 온통 조용하고, 다만 사람들의 감탄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문득 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보였다. 코가 시큰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소원이.’

나는 중얼거렸다.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인 나와


너무나도 고귀한 당신.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세요.’

나의 소원이 흘러가는 하늘 위로 붉은빛이 수놓아졌다. 그것은 붉고, 아름답고, 무척 애달픈


빛깔이었다.

* * *
한참 동안 내가 못 박힌 듯 서서 소원을 빌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이샤!”

“……응?”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로즈의 목소리에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즈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달까? 로즈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상에, 무슨 소원을 그렇게 열심히 빌었어?”

“응? 어, 나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즈는 나에게 뛰어들었다. 그러곤 나를 반짝이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나한테만 말해 주라! 평생 동안 비밀로 간직할 테니까!”

로즈가 나의 팔을 꼭 잡았다. 나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게…….”

“로즈에게 말해 줄 거라면, 나한테도 말해 줘.”

이번에는 클로에였다. 그녀가 다른 쪽의 팔을 잡았던 것이다.

“응? 말해 줘!”

둘이 나를 잡고 애원하길래, 나는 점점 더 곤란해지고 말았다.

“등불에 빈 소원은 비밀인걸! 다들 알잖아.”

“그런 게 어딨어. 우리 사이에는 비밀 없음이야!”

로즈가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때, 이 다툼에 애슐리도 참전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 아이샤가 말해 주면 나도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려 줄게.”

“난 안 궁금해!”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어 외쳤다. 하지만 다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조잘조잘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이건 로즈의 소원이다.

“으음, 나는 가문의 일이 다 잘 풀리고, 번성하라고.”

이건 클로에의 소원.
애슐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그러다가 부끄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더 멋진 내가 되고 싶다고, 빌었어.”

나는 뒷걸음질쳤다. 다들 소원을 말하니까 나도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절대 말 못 해.’

말을 하느니 차라리 접싯물에 코를 박겠다. 그런 단호한 의지를 가지며 나는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친구들은 짓궂었다.

“얼른 말해 줘!”

“나, 나는 말하기가 조금…….”

그렇게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등 뒤에 무엇이 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테라스에 있던


테이블이었다. 아까 내가 여기에 주스를 올려놨었는데.

나는 친구들의 독촉에 목이 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명 내가 가져온 것이 이거였지.’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주스는 잔 끝까지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만큼 목이 탔던 것이다.

‘……응?’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쩐지…… 맛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다.

‘설마 상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황궁에서 내놓는 주스가 설마 상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미 다 삼켜 버린 상태였고


말이다. 맛은 조금 시큼한 것 같기도 했고, 달달하면서도 묘하게 향이 깊었다.

왠지 다 마시고 나니 목구멍에서 불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라?’

이런 맛에 대한 묘사를, 어디선가 분명 본 것 같은데.

‘이거 설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기억은 처참하게 끊겨 버리고 말았다.

* * *
갑자기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이샤?”

“무슨 일이야?”

하지만 아이샤는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뿐이다.

“……설마?”

클로에의 낯빛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8 년 전, 황궁이 뒤집혔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 이시스와 황녀 아이샤의 독살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둘 다 죽을 뻔했지만
겨우겨우 목숨을 건졌었다.

“아, 아이샤!”

클로에는 새하얀 얼굴로 아이샤의 어깨를 잡았다. 클로에의 태도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인지 애슐리와 로즈 또한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샤의 주변이 시끄러워지니, 바로 달려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이시스 드 엘미르,


아이샤의 오라버니였다.

“무슨 일이냐!”

그는 벼락같이 외치며 한달음에 아이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아이샤가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청소년기의 트라우마가 말이다.

지금 아이샤가 축 늘어진 모습을 보자,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서, 설마.’

또 그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겠지. 이시스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독을……!!’

아이샤는 다행히 그때처럼 피를 흘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경을 서서히 마비시켜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도 있으니까.

한달음에 아이샤의 곁에 달려온 이시스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날이라면 암살자가 들어오기에도 쉬웠을 텐데…….

‘……내가 안일했어.’

이시스의 눈이 푸른 열기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신관! 이리로!”

이시스는 거친 목소리로 신관을 불렀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신관들이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느려 빠지기는!’

그 반응에 이시스가 머리끝까지 돌아 버리기 직전. 갑자기 아이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이샤의 얼굴은 독을 마셨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딘가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기는 했다.

“……아이샤?”

열병을 일으키는 종류인가? 이시스가 아이샤를 다급하게 살폈다. 이상한 것은 하나가 더 있었다.
고개를 든 얼굴에서,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아이샤. 어디 아프니?”

이시스가 거의 울 듯이 묻자, 그제야 아이샤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황당해지고 말았다.

“어어어어어어어…….”

“……?”

“……?!”

말끝이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이시스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아이샤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아이샤?”

“오오라버니이……?”

이시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샤가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오라버니의


양 뺨에 손을 착 대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잘생긴 오오라버니아니에요오오오.”

“…….”

“…….”

주변은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풀려서 맛이 간 눈, 꼬부라진 저 목소리와 붉어진 얼굴까지.

“……세상에.”

옆에 있던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을 마시고 취했나 보군요.”

“술이네요.”

“술인가 봐.”

그러자 아이샤가 갑자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아냐! 나 안 취해써!! 안 취했다고!!”

“…….”

“…….”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박하기 그지없었다. 취한 사람이 자기가 취했다고 말하는 것 보았는가?
아무리 봐도 단단히 취한 아이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클로에는 아까 아이샤가 마셨던 주스 잔을 면밀하게 바라보았다. 포도 주스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 포도주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스라고 착각하고 술을 잘못 가져온 모양이에요. 단숨에 취하다니, 하필이면 독한 걸 마셨나


봅니다.”

“아니면 아이샤가 주량이 약한 걸 수도.”

“……후우.”

이시스는 이게 안도의 한숨인지, 곤란함의 한숨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데뷔탕트 날에 술을


주스로 착각해서 취해 버리다니.

“…….”

그나마 독이 아니어서 무척 다행이긴 한데…….

“무슨 일이 있니?”

“아이샤, 이시스.”

방금의 소란 때문에 황후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시스는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아이샤가 황후와 황제의 품에 폭 안겨 버린 것은.

“아버지, 어머니!”

당연한 결과로, 둘 다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샤?”

“무슨 일 있었니, 아이샤?”

하지만 은근히 두 사람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아이샤가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애교를 부린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딱히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도 요즘 아이샤가 사춘기(?)가 온 탓에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본 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말이다.

“헤헤헤.”

아이샤는 다 풀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두 분 다 너무 사랑해여! 최고!”

그러면서 두 사람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데, 누구라도 꼭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황제와 황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그래, 우리 딸.”

“사랑한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동생 사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 이시스 드 엘미르였다.

“저도 끼워 주세요!”

그는 간절한 얼굴로 아이샤와 황제, 황후의 앞에 섰다. 하지만 아이샤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아이샤, 오라버니도 최고라고 말해 주렴!”

“시른데.”

하지만 아이샤는 이시스를 놀릴 뿐이었다. 아이리스가 웃음 지었다.

“호호, 역시 엄마랑 아빠가 최고지? 아이샤.”

“치사하세요!”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급변한 그


분위기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말이에여.”

아이샤는 검지를 치켜들고 설교하듯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너므 무모한걸…… 알겠어여? 어쩌구저쩌구…….”

그 뒤는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 취한 사람의 말이 얼마나 또렷하고


논리적이겠냐만 말이다. 이시스가 당황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물었다.

“아이샤에게 무슨 원망이라도 샀느냐?”

“그, 글쎄요?”

이시스는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아까 복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이샤.’

아이샤는 생각보다도 그 이야기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흔히 술을 마시고 하는 이야기가


본심이라고들 얘기하지 않던가. 이시스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아이샤가 이시스를 향해 얼굴을 들이대었다.

“알게써요?”

“으, 응?”

아이샤의 푸른 눈동자는 그야말로 창공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약간 풀리긴 했지만, 이


제국의 단 하나뿐인 별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앞으로는, 저한테 숨기는 거 없기에여…….”

이시스는 곤란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그래, 라고 대답하면 아이샤에게 위험한 것들을 계속 알려


줘야 하는 처지가 되고. 아니, 라고 대답한다면 아이샤를 실망시키는 것이 된다.

어느 쪽으로도 이시스에게는 힘든 선택이었다. 물론 거짓말을 해서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아이샤는 지금 취한 상태였으니까, 나중에 기억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시스는 결코, 아이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 어떠한 상황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이시스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이샤,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

“네에?”

아이샤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조르듯이 말했다.

“약속해여, 약속!”

그렇게 말하며 아이샤가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

이시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조르고 있는 아이샤. 얼른 자신과 약속을 해 달라고


든 새끼손가락, 그리고 반짝반짝한 눈빛까지.

“……약, 속.”

이시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아이샤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말았다. 결국


동생 바보는 동생을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앗!”

이시스는 그러고 나서 스스로가 한 짓에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샤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약속! 약속해써여!”

“……큭.”

져버렸다. 이시스의 눈에는 온통 낭패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린 걸 어떻게
하겠는가. 이시스는 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로서 약속과 맹세를 소중히 하라고 어릴 적부터
줄곧 교육받아 왔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정중했고, 마치 예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투를 그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룬이었다. 아까 신관을 데려오라고 난리 쳤던 것 때문에 이제야 그가 온 듯했다. 이시스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고 말았다.

그는 룬이라는 이 신관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아이샤의 마차에 뻔뻔하게
올라타 있지 않나, 아이샤에게 말을 걸지 않나, 아이샤를 바라보지 않나, 아이샤의 곁에 서 있지 않나…
….

감히 자신이 아까워서 아주 신중히 말을 걸고, 조심히 바라보는 아이샤에게 말이다! 이 정도면


팔불출도 병이었다.

하지만 이시스는 진지했다. 누가 보면―특히 그의 친우인 비온이 봤더라면― 매우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았겠지만, 이시스는 그만큼 자신의 동생을 아꼈던 것이다.
게다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이샤의 눈동자가 룬의 뒤를 조금씩 쫓기 시작했다는 것을.

‘절대 마음에 안 들어.’

딱 봐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그런 데에 비해서 아직 아이샤는 열네 살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니,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해도 아이샤가 상처받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됐다. 상관할 필요 없네.”

그렇게 말하며 이시스는 슬쩍 아이샤를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시스에게는 안타깝게도,


아이샤는 이미 룬을 목격하고 말아 버린 뒤였다.

“아아아아아앗!”

그때, 아이샤가 갑자기 룬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아무리 그녀가 술에 취했다곤 해도, 아이샤가 이렇게 놀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이야?”

로즈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로즈는 흘금흘금 이 잘생긴 신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이샤에게는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아이샤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이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잘생긴 사람이다.”

“…….”

“…….”

주위는 아까보다도 더 강하고, 차가운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황제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게 하는 게 좋겠군.”

황후는 이제야 아이샤가 음주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이 설명을
해 준 덕분이었다.

“술을 마셨다고, 맙소사. 아이샤.”

“실수로 마신 거니까요. 어쨌거나 지금은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샤를 황녀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그녀가 일찍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등불을 올리는 행사도 끝났고 연회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기 시러…….”

사람들은 어찌할지 모르고 난감해했다. 그런데 그때, 룬이 잠자코 다가왔다.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깨게 하는 마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력으로 뭔가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룬은 아무런 설명 없이, 밝게 빛나는 손으로 아이샤의 이마를 덮었다. 한 손에 덮이는


어린 이마는 이내 룬의 밝은 빛을 흡수했다. 다른 사람들은 신성력이라고 부르지만, 본질은 루미나스의
고유의 힘인 ‘빛의 힘’이었다.

그러자 아이샤의 숨소리가 갑작스레 규칙적으로 변했다.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자나?”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샤의 모습은 마치 천사와도 같았다. 룬이 덧붙였다.

“숙취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황후가 놀라서 말했다.

“어머, 신성력으로 숙취까지 없앨 수가 있나요?”

그 말에 룬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저는 가능합니다.”

“…….”

주위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예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룬이라는 이 신관은 어지간히 자신의
신성력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정체를 안다면 당연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 그러시군요.”

“예.”

룬은 잠든 황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14 살이 된 어린 황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룬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룬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처음으로 겪는 감정이 싹터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꿈을, 황녀 전하.”

아이샤는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헉.”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 눈가로 내려앉았다.

‘벌써 아침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테라스에서 등불을 보고 친구들과 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내가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한참 동안 이상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 전하. 저입니다.”

“아, 좋은 아침이야.”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왜일까? 시녀장의 눈빛이 살짝 평소와는 다른 것은?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어제 데뷔탕트 때문에 너무 피곤했나 봐. 언제 어떻게 내 방까지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리도 없는데 기억이 끊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녀장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다. 그녀는 마치 ‘그럴 만도 하지요.’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큼, 황녀 전하. 그것보다.”

“응?”

“황태자님께서 황녀 전하을 뵙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아침을 같이 드시자며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저, 정말?!”

그 말에 나는 허둥지둥 일어서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와 계시다는데 계속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늘은 큰 연회의 이튿날이니까 아마 오라버니도 일정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식사를 함께하자고 온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침대에서 내려오던 찰나, 나는 이상한 부분을 하나 더 발견하고 말았다. 하여간 오늘


아침은 이상한 일들투성이다.

“응?”

놀랍도록 몸과 머리가 개운했던 것이다. 마치 치유 마법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시녀장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음…… 아니야.”

나는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세수를 하고, 빗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잠옷에서 실내용 옷으로 갈아입으니 오라버니를 맞을 준비가 끝났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안에 오라버니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름 숲의 정경이


오늘도 푸르렀다. 방 안에 있는 정령들은 특히나 오늘 더 신난 듯했다. 아마 즐거운 연회의 이튿날이라서
그럴지 모른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어쩐 일로……?”

내가 그에게 묻자, 그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좀 괜찮으니?”

아하, 그는 데뷔탕트에서 무리를 한 내가 걱정돼서 일찍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더욱더 활기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 잠을 푹 잤는지 엄청나게 개운해요! 이상하죠? 어제 그렇게 춤을 추고 무척 바쁘게


돌아다녔는데도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라버니는 중얼거렸다.

“……그 신관, 돌팔이는 아닌 모양이군. 적어도 실력은 있는 놈이야.”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오라버니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내가 앉자, 오라버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게 말이다.”

내가 어째서 어제의 일을 기억 못 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들은 나의 얼굴은


하얘졌다, 붉어졌다, 다시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제가 술을 마시고…… 그런 짓을 했다고요?”

“……그래.”

맙, 소사…….

나는 당장이라도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단다. 다만 앞으로 주스는 잘 가려 마시는 거로 하자. 아니,


앞으로는 무조건 물만 마시렴.”

“……네.”

나는 거의 반쯤 울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 주었지만…… 데뷔탕트 날의


마지막이 음주로 끝나다니.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주정이나 부리고…….
내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한참 괴로워하고 있자, 오라버니가 당황해서 나를 위로했다.

“괜찮다니까. 아이샤.”

“…….”

나는 한숨만 크게 쉴 뿐이었다. 어쨌거나 더 수치스러워하려고 해도 기억이 다 끊겨 버려서 할


수가 없었다. 다들 이래서 술을 마시는 걸까?

‘하…….’

오라버니가 우중충한 나를 보며 내가 기분 좋아질 만한 일을 제안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게,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가는 게 어떻겠니?”

“……네.”

우리 둘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를 걷던 오라버니가 문득,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네?”

설마 아직도 말할 게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새파래진 얼굴로 오라버니의 말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들었다.

“룬 신관이 너에게 신성력을 써 주었단다. 몸 상태가 괜찮다면 다행이구나.”

“…….”

그리고 나는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고개가 끼기긱 돌려졌다.

“……룬, 신관님 앞에서요?”

정령왕님 앞에서도 주정을 부렸단 말인가…….

‘……하하하.’

더 이상은 뇌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인생,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식당은 그쪽이 아니라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내
궁인데도 말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라버니는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 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내 회색빛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오라버니가 말했다.

“아이샤.”

“……네?”
“사실 어제 너와 약속한 게 있단다.”

약속이라니?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은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이덴베르의 일도, 다른 일도 숨겨서 미안하단다. 그게 너에게 그렇게 걱정을 끼치게 할 줄


몰랐구나.”

오라버니의 얼굴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어제 너에게 앞으로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꼭 너와


상의하도록 하마. 네 의견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하니까.”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나에게
비밀이 없다면 나도 좋았다.

“네, 오라버니.”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술에 취해 딱 하나라도 좋은 일을 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하지만 그건 그렇고, 다음부터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 괜히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내가 와 있는 곳은 황궁 정원의 깊은 곳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 빛의


정령술을 연습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루와 리미에를 소환했다.

“루, 리미에.”

그러자 밝은 빛덩이와 함께 루와 리미에가 공중에서 튀어나왔다. 소환된 둘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활짝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해 보이는 루, 그 애의 치맛자락에서는 금색 빛가루가 바스스 떨어졌다.

“오랜만에 뵈어요. 주인님.”

옷자락을 살짝 들어서 인사해 보이는 리미에. 작은 숙녀인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둘 다 좋은 아침이야.”

나는 마주 그들에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감정을 공유하는 내 정령들은 나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깊은 마음 안까지 읽은 듯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루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갸웃갸웃하는 얼굴은 꽉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리미에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꺼풀 아래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둘 다 너무나 소중한 내


정령들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루. 리미에. 나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내 나이는 14 살. 중급 정령을 7 살에 소환한 것만으로도 천재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하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정령왕을 소환해 제국 최고의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일단 단기적인 목표는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거야.”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이야기했다. 다행인 것은, 내가 7 년 동안 자라면서 충분히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머지않아 상급 정령은 충분히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뒷말을 삼켰다.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생긋 웃었다. 내 감정에 반응하듯 정령들도 살풋 웃었다.

“자, 그러니까 연습하자! 정령력을 더 늘릴 수 있도록.”

정령력을 늘리는 방법은 꽤 단순하고 쉬웠다. 일단 최대한 정령을 많이 소환해서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 첫 번째였다.

평소에도 항상 루를 소환하는 버릇을 들여 놓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힘들더라도 리미에와 함께


루를 소환해야겠다. 그렇게 하면 친화력이 훨씬 더 늘어나리라.

“그리고 한번 정령 마법을 연습해 볼까?”

지금까지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한 일들은 거의 모두 간단했다. 나를 날게 해 달라거나, 빛의


힘으로 치유를 해 달라는 것.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강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것이 남을 공격하기 위한 기술이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서…….”

빛을 가지고 화살을 날린다던가, 혹은 빛을 일시에 강하게 터뜨려서 눈을 잠시 멀게 한다거나.

나는 내가 생각한 것들을 루와 리미에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루가 강렬한 빛을


뿜어 보이고, 리미에가 화살을 쏘아 보였다. 둘 다 꽤 효과적이었다. 특히, 리미에가 쏘아 보인 빛의
화살은 저 멀리 나무에 꽂혔다.

“잘했어, 둘 다!”
나는 생각보다도 능숙한 두 사람의 모습에 신이 나 외치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정령들과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이곳은 황실 정원 안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었다. 내 황녀궁과 가까었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길이 복잡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입니다. 황녀 전하.”

그 사람은 나를 위협할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드러난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비온 공자?”

“또 뵙는군요.”

나무가 가득한 이 정원에서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 튀었다. 어떻게 보면 푸른 잎과 어우러져


마치 꽃잎 같기도 했다. 그만큼 곱고 아름다운 색이다.

낯선 이가 비온이란 걸 안 나는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황궁 근위대니까 이곳을 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마 지금은 교대로 있는 휴식시간인 모양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황궁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연회도 되돌아볼 겸.”

그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음주 사건 때문이었다.

“……제가 어제 혹시 무슨 실수를 하지는 않았던가요?”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자, 비온 공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시스 님께 조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면밀하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닌 척해도 비온 공자는 은근히 거짓말에 능숙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음.’

그의 푸른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거짓말을 해서 동요하는 얼굴도 아닌 듯 보였고.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물게 그가 나를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보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나는 잠시 소외되었던 나의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정령들을 쓰다듬었다.

“정령술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실력을 더 늘리기 위해서요.”


“그렇습니까…….”

그는 무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시스 님도 걱정하실 테고…….”

“…….”

“황녀 전하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너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감사해요.”

그래도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최선은 다해 보고 싶어요.”

비온 공자는 오라버니와 다르게 늘 무뚝뚝한 편이라, 말을 하기 어색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가


나를 신경 쓰는 걸 알게 되자, 기분은 꽤 좋았다.

오라버니의 친구인 만큼, 나도 그와 사이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온 공자도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응원할게요. 비온 공자의 곁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내 말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얼마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황녀 전하의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방해가 아닌걸요. 하지만 바쁘실 테니 구태여 잡지는 않겠답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떠나기 전, 비온 공자에게 한마디를 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나신다면, 종종 또 찾아와 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비온 공자는 물러갔다. 즐거운 만남이었기에 나는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계속해서 정령술 훈련에 매진했다.

장소는 거의 황궁 정원의 깊은 곳, 혹은 내 황녀궁의 뒤에 있는 동산이 되었다. 선생도 없고,


다른 동료도 없기 때문에 훈련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내가 짊어져야 할 몫.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령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힘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리 힘들어도 더욱더 힘을 낼 수 있었고 말이다.

내가 정령술 수업에 매진하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고맙게도 나의 일정을 많이 비워 주셨다.


소문이 어디에서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시녀장이나 유모는 물론, 다른 시녀들까지도.

“황녀 전하! 꼭 상급 정령을 소환하실 수 있도록 기원할게요!”

그렇게 기합이 들어가서 외치는데, 나도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어머니, 아버지도


부러 나를 찾아와 힘을 내라며 따뜻하게 격려하고 가시곤 했다.

“휴.”

정령들과 훈련을 하다가 힘에 부칠 때면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다만…….

역시 그래도 하루쯤은 휴식이 필요한 법이다. 어느 날, 유독 몸이 축축 처지고 왠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방 안에 리미에와 루를 불러두고 쉬고 있을 무렵. 그에 맞춰서 룬 님이 방문한 것은 정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Chapter 6. 여름 소나기와 수도 모험

나는 팔랑팔랑 고서를 넘기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테라스 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게 아닌가. 놀랄 법한 이야기였지만, 이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야, 누가
찾아왔는지 뻔하니까 말이다.

나는 익숙하게 시녀들을 물렸다. 이번에는 정령술에 정신 집중을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사춘기라는 내 소문이 아직도 안 가신 건지, 아니면 정령술 훈련을 하는 나를 응원하고 싶었던 건지.
시녀들은 순순히 나갔다.

오늘도 날씨가 무척 맑았기 때문에 테라스에 선 룬 님의 얼굴은 아주 똑똑히 보였다.

“룬 님!”

내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하지 연회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잘 지내셨나요? 신전 일은 어떠신가요?”

내 속사포 같은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 지냈고, 신전은 별다른 일이 없다.”

“그러시구나.”
나는 싱긋 웃었다. 들뜨지 않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그다웠다. 나는 그가 열고 들어온 테라스의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숲.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황궁의 모습…….

평소라면 정겹게만 느껴졌을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리 고루하게만 느껴졌을까?

‘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룬 님.”

“왜 그러지?”

“혹시…….”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이다.

“오늘 저랑 같이 안 나가실래요?”

* * *

나는 한창 훈련과 공부에 지쳐 있던 참이었다.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지루하기만 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라면 수도에 나가는 짧은 외출을 허락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모험이 하고 싶었다.

남부의 별장에 있었을 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는 하도 바쁘게
지낸 데다가 자유가 없어져서 다시 휴가가 절실해졌던 것이다.

‘네?’

내 말에 룬 님은 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보는 것도 좋겠지. 새로운 경험은 항상 도움이 되는 법이니.’

그 말에 내 표정은 환해지고 말았다. 사실 룬 님과 함께라면 호위 기사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변장을 하면 내가 황녀라는 사실도 다들 몰라볼 테고 말이다.

나는 시녀장에게 내가 훈련으로 정원에 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자


시녀장은 평소의 내 행동 때문에 납득한 듯했다.

그러고 나선 변장의 시간이었다. 크고 깊은 모자와 함께, 내 옷장에서 가장 수수한 옷을 골랐다.


룬 님이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황궁에서 탈출하는 것은 쉬웠다.

바로 그 루디온을 사용해서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던 것이다. 매우 높게 올라갔기 때문에, 아마


황궁의 근위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굉장해요!”
나는 이 비행만으로도 벌써 오늘치의 짜릿함을 모두 즐긴 기분이었다. 루디온을 타고 우리가
날아간 곳은 수도의 골목이었다. 황금새를 숨기고 골목에 내려앉자, 수도의 왁자지껄한 웅성거림이 확
다가왔다.

“……와아.”

나는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누구의 호위도 받지 않고 나와 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자주 맛볼 수 없었던 해방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골목에서 나와서 수도의 길거리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그 문제를 알아차렸다.

“허…….”

“허억…….”

“어머나!”

“……!!”

“…….”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홀린 듯이 룬 님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중의 몇은 룬 님을


바라보느라 꼼짝 못 하고 서 있었고, 몇은 들고 있는 물건을 떨어뜨렸으며, 나머지 몇은 지나가는 척을
하다가 다시 룬 님을 보러 슬금슬금 돌아왔다.

제일 위험했던 것은 멍한 눈으로 룬 님에게 다가왔던 사람이다. (우리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룬 님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룬 님께서는 너무 눈에 튀세요.”

내 말에 룬 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그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

그런가? 나는 상점가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숨기려고 일부러 가장 수수한 옷을


입고 나왔지만 옷은 당연하게도 최고급품인 비단이었고, 금실로 자수가 놓아져 있었다.

하급 귀족이나 평민들로서는 절대 구할 수 없을 법한 새하얀 모자도 그랬다. 누가 어떻게 보아도


귀족가의 곱게 자란 금지옥엽이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마침 눈앞에는 좋은 가게가 보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새 옷을 한 벌씩 장만해 볼까요?”

우리 둘은 눈앞에 보인 양판점에 들렸다.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양판점의 옷들은 그다지 고급은 아니었다. 물론 이건 내 기준이었고, 보통 부유한 상인들이 입을 만한
옷은 되어 보였다.

여윳돈을 아주 넉넉하게 들고 왔던 덕분에 나는 그 양판점의 옷을 모두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물론, 그 옷을 다 살 이유도 없고 짊어지고 갈 용기도 없었다.

‘딱 이 정도가 좋겠지.’

나는 싱긋 웃었다. 부유한 상인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 섞이기도 좋을 것이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로브를 하나 골라서 계산대의 근처로 갔다. 그런데 룬 님의 죄 많은 미모는 벌써 다른
사람을 홀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저…….”

“…….”

“어, 어떤 옷을 추천해 드릴까요?”

그래도 점원은 직업 정신을 투철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서 꾹
누르면 빨간 물이 나올 것 같았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휴.’

이럴 때는 내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그나마 나는 룬 님의 외모에 아주 조금, 조금이나마 면역이


있으니까.

“남성용 로브 하나 주세요. 키가 크니 좀 긴 게 필요하겠네요.”

나는 룬 님의 신관복을 바라보았다. 흰 신관복을 모두 가리려면 꽤 긴 옷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사람들이 룬 님을 그렇게 바라보던 것은 룬 님이 신관이어서라는 이유도 있던 것 같다.

제국의 신앙이 빛의 신인 만큼, 빛의 신관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운수가 좋다는 미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뭐가 됐든, 너무 눈에 띄는 분이셔.’

점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네준 검은색 로브를 룬 님이 걸치고 나니, 훨씬 룬 님의 후광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에 맞춰서 나도 아이보리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시야가 조금 가려지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은 했다. 아까처럼 괜히 사람들이


들러붙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지요?”

“그, 그게…….”

점원은 한참 동안 옷의 가격을 헤매었다. 그건 룬 님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였을지 모른다.


룬 님께서는 단순한 눈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심장은 타들어 가고 있으리라.

“……2 실버입니다.”
“여기 있어요.”

나는 금화 한 개를 건넸다. 그러자 점원의 표정이 아연해지고 말았다.

“……저, 손님. 이건 1 골드인데요.”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지세요. 대신, 오늘 우리 둘이 이 가게에 들렸던 것은 비밀로 해 주시고요.”

이미 광장에서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잔뜩 끌어 버린 우리지만, 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입막음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점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원래 가격의 50 배나 해당하는 돈을 줬으니 그럴 만도 한가?


그녀가 상점 밖을 나가는 우리에게 허리를 팍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은 룬 님의 뒷모습에 집중된 채였다. 나는 룬 님의 죄 많은 미모에 다시 한 번


탄복하고 말았다. 그래도 로브를 쓰고 얼굴을 가리니 아까처럼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안도도 잠시, 이번에는 나에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룬 님.”

점심을 먹지 않아서 꼬르륵거리는 배가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웃어


보이고 말았다.

“배가 고파요.”

그에 룬 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았다.

“그런가.”

“……네.”

“무언가 먹으러 가지.”

“……그럴까요?”

소소한 대화 뒤에, 우리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역시 수도이기 때문인지, 높고 넓은 음식점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곧바로 그곳으로 올라갔다. 1 층, 2 층, 3 층……. 그리고 곧장 4 층으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계단참에 서서 위층을 지키고 있던 웨이터가 우리를 막아섰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4 층은 신원이 확실한 귀족분들만 가려 받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우리는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적절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돈이 많은 외국의 여행객이에요. 안 될까요?”

“그게…….”

그는 좀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책에서 보아 두어 알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다시 꺼냈다.

“팁이에요.”

가져온 돈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그에게 금화 한 개를 건네주자, 아까


점원처럼 웨이터의 눈도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자, 자, 잠시만요.”

그러더니 그가 금화를 깨물어 보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불쾌해질 뻔했다. 의심받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엄연히 엘미르의 국화와 국기가 새겨진 정통 엘미르 1 골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황금 동전 위에 그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웨이터의 태도는


정반대로 변하고 말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우리는 이제 방해 없이 유유히 4 층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4 층은 무척 널찍한 데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했다.

“사람들이 무척 작게 보이네요.”

“그렇군.”

하지만 룬 님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또다시 그가 정령왕임을 기억해 냈다. 공중으로


언제나 날아오를 수 있는 그로서는 높은 건물이 신기하지도 않으리라. 기다리고 있자, 웨이터가 헐레벌떡
메뉴판을 들고 왔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메뉴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메인은 생선과 육류로 나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룬 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나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룬 님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정령들이 아무것도 안


먹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우리 집 루는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것이다.

내 말에 룬 님은 쉽게 대답해 주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아니면 먹지 않는다.”

“헤에…….”

완전히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 저와 함께 식사를 하실 건가요?”

그의 황금색 눈길이 메뉴판에 닿았다. 잠깐 그것을 보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그 말이 무척 기뻤다. 역시 이렇게 나왔는데 혼자만 식사를 하면 쓸쓸했을 것이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메인은 육류로 하지. 나머지는 아무거나 상관없다.”

“물고기를 싫어하시는가요?”

그에게도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까? 내가 묻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물이 싫은 거다.”

“……?”

무언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 딱히 물과 빛이 상성이 나쁜 건 아닌데 말이다. 둘 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설마 물의 정령왕님과 사이가 안 좋다거나.’

에이, 그럴 리는 없겠지? 그가 육류를 시켰으므로 나는 생선 종류를 시켜보았다. 최고급 어종를


잡아 올렸다는 흰살생선은 부드러운 화이트 크림이 올려져서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

룬 님이 시킨 육류는 호쾌할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려져, 통후추가 잔뜩 뿌려진 쇠고기였다. 룬


님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다.

맛은 그럭저럭, 항상 황실의 최고급 요리에만 익숙해졌던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다. 하지만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나는 꽤 잘 먹었다.

의외였던 것은 룬 님도 음식을 남기는 일 없이 모두 잘 드셨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요리란 어떤


의미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식사를 모두 마친 우리는 계산을 하러 점원을 불렀다. 그런데 식사 가격을 모두 합해도 1 골드가


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다시 지갑을 열었다.

“남은 건 팁으로 가지세요.”

그렇게 말하니, 나를 담당했던 웨이터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면서 좋아했다. 아버지의


백성이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향한 곳은 근처의 서점이었다.

수도의 서점은 꽤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정령술에


관련된 책이 없나 열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굳이 정령에 관련해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럽지만


나를 기사로 낸 신문 정도였다. 그래도 서점은 굉장히 크고, 넓고, 번쩍번쩍했기 때문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신간을 뒤적여 보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게 없나 기웃거리다 보니 시간은 금방금방 갔다. 룬


님은 그런 나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덕분에 놓칠 걱정은 없었으니, 다행이다.

“다른 곳으로 갈까요?”


내가 말하자 룬 님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룬 님은 수도 근처를 아주 열심히
탐방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주 열을 올린 거지만 말이다.

극장의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새로 올라온다는 연극의 포스터를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하고, 꽃집에


가서 새로 나왔다는 품종의 꽃을 보기도 했다.

그 외에는 수도의 분수대에 가서 동전을 던지…… 려다가 말았던 일이 있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금화를 분수대에 던지면 사람들이 달려들 거라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계속해서 우리는 함께 돌아다녔다. 먹는 게 남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언뜻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룬 님과 아주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연인들이 자주 온다는 핑크빛 가게에는 그야말로 혀가 녹아 버릴 것 같은 달달한 컵케이크를 팔고


있었다. 나는 설탕을 잔뜩 넣어서 달아 죽을 것 같은 컵케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친구들이랑도 함께 와 보고 싶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다 같이 모여서 수도 탐방을 하기로 했었다. 재밌는 가게를 발견한다면


다음에 친구들과도 또 와 볼 생각이었다.

또, 시간이 되면 클로에가 자신의 저택에 놀러 오라고 했었다. 아직 하지 연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도 클로에도 바빴으니까 초대장은 오지 않았지만…… 조만간 오겠지.

얼마쯤 컵케이크를 먹고 있었을까, 나는 문득 룬 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룬 님은 은근히 배려심이 있었다.

나와 이렇게 어울려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챈 듯했다.

“왜 그러지?”

“네?”

‘……아.’

그제야 나는 내가 그를 너무 빤히 바라보았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 혹시 룬 님께서는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으신가 해서요. 제가 하루 종일 끌고 다닌


것만 같다는 생각에…….”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내가 가고 싶은 곳만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다.”

“정말요?”

“그래.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도록.”

“아…… 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괜히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정말 내가 룬 님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달콤하던 컵케이크의 맛이 갑자기 너무나도 쓰게


느껴졌다.

‘…….’

그런데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음일까. 나를 흘긋 바라보던 룬 님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정말 어디에 가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너와 같이 간다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이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점점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지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어디에 가고 싶지?”

“아, 그…….”

나는 허둥지둥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어디인지도 잘 모르면서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다시 보니 그곳은 수도의 특산물을 많이 파는 상점 거리였다. 예전부터 한번쯤은 들려 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수도를 아주 샅샅이,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다.

춤과 정령술로 단련한 내 체력도 지쳐 가고 있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으면 시녀장도 의아해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잡화점에 들렸다가 쓸데없는 물건을 여러 개 구경했다. 이상한 물건들에 깔깔


웃기도 하고, 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오늘의 수도 모험이 비로소 끝났다. 나는 오늘 룬 님과 돌아다녔던 곳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 보았다.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면, 꽤 잘 다닌 거 맞겠지?

조금 아쉽기는 했다. 오늘의 모험은 정말 재미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겠지.


나는 이 제국의 1 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이니.

그렇게 다짐하며 상점의 처마 밑을 나섰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이마로 빗물이 톡,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

나는 곤란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우산도 없고, 비가 내리고 있으니 시녀장이 나를 찾으러


정원으로 올 게 분명했다. 루디온을 타고 가면 눈깜짝할 새 황궁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단 일 분 일 초라도 이 시간을 더 끌고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룬 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과 아름다운 옆모습이 보였다.

“…….”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의 심술처럼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여름 소나기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우산이 있는 사람은 여유롭게 우산을 펼쳐 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재빠르게 뛰거나 혹은


나와 룬 님처럼 상점의 처마에 들러붙은 상태였다. 나는 처마 밖으로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비가 내리네요.”

톡, 톡.

여름비가 내 흰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우산도 없는데.”

소나기여서인지, 비가 제법 거셌다. 내가 비가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룬


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치게 해 줄까?”

“……네?”

“이 여름비.”

그가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처럼 아름다운 두 금안. 그리고 그 눈 너머로


느껴지는 형용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나는 문득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그제야 그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이 세계에 둘도 없는 지고한 존재라는 사실을 현기증 나도록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일까? 어쩌면 가족들의 말대로 그냥 내가 사춘기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정령왕, 그리고 나는…… 황녀이지.’

남들 앞에서는 고귀한 신분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존재밖에 없는 정령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금 슬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우는 대신, 힘껏 웃어
보였다.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잡화점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갔다. 물건 하나에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 없다고


실랑이는 가게 주인에게 억지로 돈을 안겨 준 뒤, 나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저 왔어요!”

그는 늘 그랬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그것이 호기심이 생긴 한 인간을 관찰하는 것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천으로 만들어진 우산을 펼쳐 들었다.

“황궁까지 같이 걸어가요.”

그는 키가 높았으므로, 내가 손을 아주 높이 들어야 했다. 황궁까지 이렇게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황궁 앞에서 나를 발견한 근위대들이 얼마나 깜짝 놀랄지, 혹은 정원 내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시녀장이 얼마나 당황할지, 이 옷은 또 뭐냐고 유모가 캐물을지. 걱정되고 또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키가 닿지 않아서 끙끙대면서 팔을 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가까이 붙어 있는 이 시간이.


그때, 그가 우산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잡아챘다.

“내가 들지.”

“…….”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네, 룬 님.”

빗물이 톡톡 우산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우리들을 위한 소나타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여름의, 너무나도 소중한 모험 이야기였다.

외전 3. 루미나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어느 하급 정령이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한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그게 거짓인가, 진실인가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거짓말이라곤 할 줄 몰랐으니까.

놀라운 이야기긴 했지만 구태여 그 인간을 찾아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인간이라도, 어차피 백 년도 되지 않아 죽을 테니.

삶이란 지루함의 영원한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죽지 못한 채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정령왕들은 그 이야기에 꽤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정령들의 원소는 물, 불,


바람, 땅, 그리고 빛과 어둠으로 나뉜다. 그들이 그 인간에 대해서 토론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인간이 꽤 재미있는 탐구거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아주 잠깐의 여흥일지라도 그 인간에게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 것은.

* * *

인간은 아주 작고, 또 작았다. 보통 이것을 아기라고 부르던가.

인간이란 종족에 관심이 없어서 꽤 오랜 시간 까먹고 있었던 단어였다.

‘정말 작군.’

그렇게 생각하며 그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잘 자고 있는 것 같던 아기가 눈을 떴다.


그러면서 그 아기가 바라본 것은 공중에 떠 있는 자연의 정령들이었다.

그 모습에 호기심이 더욱 생긴 것은 물론이었다. 지금까지의 정령의 역사에서, 자연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했던가? 적어도 그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아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 아기는 푸른 하늘같이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입을


열어 말했다.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이었군.

그러자 그 아기가 나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것들로도 모자라, 심지어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겁을 먹은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낯선 이를 보아


무서운 걸까? 어렴풋하게, 아기들은 경계가 심하다는 지식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래. 그랬지.

‘쉿.’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나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아기였지만, 어쩐지 이 아기라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있는 아이군.’

내가 입을 다시 열자, 그 아기의 곁에 있던 정령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 인사했다.


개중에는 나의 아이인 빛의 하급 정령도 있었다.

‘왕을 뵙습니다.’

아기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아기를 조금 더 관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는 이미 내 존재가 벅찬 듯했다. 몸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너무 이르게 찾아온 모양이군.’


‘자아.’

‘오늘 일은 잊어도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의 힘으로 주술을 걸었다. 어차피 어린 아기이니 성인이 되어서는 기억을 못


할 게 틀림없지만, 혹시나 몰라서 행한 조치였다.

아기는 잠을 자기 싫다는 것처럼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용은 없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짧은 첫 만남의 끝이었다.

* * *

나는 그 뒤로도 아기를 관찰했다. 아기는 엘미르 제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황녀라고 했다. 인간


중에서는 가장 고귀한 축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왜였을까? 이따금 아기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무척 슬픈 얼굴을 했다. 그럴


때면 근처에 있는 정령들도 그녀의 기운에 감응해서 시무룩해지곤 했다.

얼마나 그녀의 정령 친화력이 깊은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나는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저렇게 깊은 슬픔을 느낄 일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때때로, 어른이 되면 그녀가 얼마만큼 대단한 정령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녀에 대한 내 호기심은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어차피 그녀는 수억의 인간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그 아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아기가 아니었다.


어린 숙녀처럼 보이는 그 아이는 눈을 반짝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색의 눈동자는 아기였을 때보다 더욱 푸르러졌고, 정령과 계약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령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처의 영지에 있던 별장이 새로 건축되었다는 소식을 하급 정령들로부터 들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이 제국의 황녀라는 것도.

어째서 이곳까지 올라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이 새벽에 온 것으로 보아 몰래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인간들은 정말로 빠르게 자라는군.’

그리고, 빠르게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래간만의 호의를 베풀어


절벽에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아 주고, 루디온을 빌려주었다.

관심이 끊겼다곤 하지만, 흥미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나러 절벽 밑으로 내려가 속세에 어울리곤 했다. 이것은 분명히
변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발휘한 변덕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나는 인간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실체를 뒤집어쓰고, 신관인척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황제라는 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기도 했고, 사람들의 감정과 부딪치며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신기하고, 흥미롭고, 알 수 없는 인간.

아이샤 드 엘미르와 춤을 추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이샤라는 인간은 정말 신기한


이였다. 절벽 위에 있던 자신을 어떻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꾸었던 꿈도 이유를 모르겠다.

아주 어렸던 시절,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무언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세월에 풍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신기한 이유는 단지
정령을 볼 수 있거나 하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의 한 부분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인간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인 줄로 알았는데 말이다.

인간 틈에서 인간과 섞이지 않는 이상 결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던가? 그 아이를 따라 인간답게 행동해 보기 시작하니 나에게도 감정이란 것이 천천히 깃들기 시작했다.
정말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처음에는 희미하던 탐구심, 호기심을 넘어 기쁨, 우스움, 불쾌함, 즐거움, 그리고…….

행복까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요.”

밤하늘 너머,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아이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들의 파편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 제 마음속에서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 있어요.”

아이샤는 자조하듯 말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 안에


어둠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더욱더 호기심을 가졌던 걸지도 모른다. 빛은
어둠이 존재할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샤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저.”

그녀는 무척이나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 열심히 노력할게요. 매일같이 공부도 하고, 정령술도 갈고닦을게요.”

“…….”

“그, 그러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루미나스 님을 꼭 소환하고 싶어요!”

그녀의 결심이, 내 안에서 마치 동그란 파문처럼 물결쳤다. 그래서 변덕이지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도 정말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변해 가고 있었다. ‘루미나스다움’ 에 대한 정의까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복도를 떠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정원은 고요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신기한 인간.’

왠지 그녀를 볼 때면, 맞춰져 있던 조각 하나가 맞추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마치


완전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태어나길 완벽하게 태어난 내가 이 이상 더 완전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녀와 닿으면 다른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어쩌면 이것을 인간들은 즐거움, 혹은 행복이라고 정의 내릴 것이다.


아직 잘 와닿지는 않지만 말이다.

감정이란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감정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질리지도 않고 계속계속 더 알아


가고 싶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와 함께 수도에 나가기도 했다. 뚝뚝


떨어지는 여름비는 마치 물의 정령왕의 심술 같았다.

그녀에게 향해 여름비를 멈추어 줄까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신 우산을


사 들고 와 함께 걸어가자고 말했다.

평소 재수 없다고만 느꼈던 비가 처음으로 조금은 즐거워졌다.

‘아.’

그렇다. 이미 그녀는 그의 삶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기분이 싫지


않다고 한다면,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름날의 모험이 무척이나
즐거웠다는 것이다.

아이샤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도 그녀와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이야기다. 아직은, 그녀가 나를 소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진정한 자격은


그녀가 나를 정령왕으로서 온전히 소환할 때에 성립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라스에 내려앉았다.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아이샤는 오늘도


고대어를 읽고, 정령술 훈련을 하느라 지쳤던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그는 아주 처음, 이곳에서 만났었다.

그때는 정말로 작은 아기였지만 말이다. 그 아기가 자신을 이렇게 뒤흔들 줄 알았다면, 자신은
과연 순순히 그녀를 만나러 왔었을까?

지금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을


뿐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때였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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