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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빛 속으로 2권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2권
티카티카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2 권
지은이/ 티카티카
발행인/ 박성인
책임편집/ 편집부
대표전화/ 02-980-2116
블로그/ blog.naver.com/dan_gul
목차
Chapter 4. 별장 휴가
Chapter 5. 하지 연회
Chapter 6. 여름 소나기와 수도 모험
외전 3. 루미나스
Chapter 4. 별장 휴가
“……으음…….”
으, 벌써 아침인가? 아직 더 자고 싶은데…….
내가 침대 안에서 꾸물거리자, 유모가 단호하게 나를 재촉했다.
“좋은 아침…….”
말은 그렇게 해도 유모의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유모는
말했다.
“고마워, 유모.”
* * *
“고마워, 다들.”
내가 치장을 마치고 곱씹어 생각하고 있는데, 시녀장이 옆에서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응접실에서 황녀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이 아침부터?”
“꺅!”
“루!”
“괜찮으세요, 주인님?”
“……으응…….”
‘십년감수했네…….’
“괜찮으신가요, 전하?”
“……이게 다 내 선물이라고?”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
“……예, 전하.”
“하지만…….”
“괜찮다니까.”
“예, 전하!”
‘그나저나.’
한숨이 나올 때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루를 향해 부탁했다.
“……루, 가서 저 시녀 좀 구해 줘.”
“네, 다녀올게요!”
* * *
그래, 다 좋다. 약간의 대가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있음으로 인해 엘미르 제국의
국격이 한층 더 올라갔으니 말이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엘미르 제국의 황녀로 14 년을 살아오다 보니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태연하게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그곳은 리오텐 공국에
소속된 섬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선물.”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죄 많은 미모.’
“열네 번째 생일 축하한단다.”
“내 선물은 아직 안 들어 봤잖니?”
“아, 맞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일까? 어머니는 나에게 선물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내 선물은, ‘여행’이란다.”
“……여행, 이요?”
“제국 남부에 별장을 하나 마련해 두었단다. 기후가 따뜻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지. 분위기도
느긋하고 여유롭단다.”
“…….”
“여, 여행이요?”
“사양할게요.”
‘여행이라니.’
‘여행이다!’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었다.
* * *
덕분에 연회홀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보석들과 금이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홀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였던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그 화려한 연회홀에 어울리도록 나는 아주 공들여 꾸몄다.
“황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웃자, 웃어.’
“……루.”
“오늘도 나, 잘해 낼 수 있을까?”
“그렇긴 한데…….”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궁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지만…… 나이가 더 들면
신관들과 함께 순례 여행 같은 것을 떠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성녀 같은 거창한 이름을 원하지도 않았고, 다른 제국민의 이목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나는 신전의 요구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장 고귀한, 어린 황녀님께서 성녀의 힘으로 병자를
치료한다.’라는 이야기가 전 대륙에 퍼지게 된 것은.
“괜찮아요, 주인님.”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는 날 보고 가볍게 묵례했다.
“감사해요. 비온 공자.”
그때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비온에게 빌렸던 붉은색 마력석은 아직도 내 보석함에 잠들어 있었다.
못 돌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그대로 가지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황녀님.”
“앗…….”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나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테라스의 난간에서 나왔다.
“같이 가요.”
“물론입니다.”
“아이샤!”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요?”
마음이 따뜻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드디어 대신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으로 위대한 엘미르 제국의 단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황녀님의 신성한 의식이
거행되겠습니다.”
“오, 저게 바로 정령…….”
“정말로 아름다워요…….”
“……움직여진다. 움직여져!!”
“아이샤 황녀님!”
“고귀하신 성녀님!”
“고마워, 리미에.”
그의 말에 환호성이 다시 이어졌다.
“성녀님 만세!!!”
* * *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선물해 준 ‘다이아몬드 섬’과 어머니가 선물해 준 ‘별장’
이 떠올랐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나라의 지지 기반도, 군사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은 우리 제국의 영원한 라이벌, 이덴베르 제국이 북쪽 국경에 얼마간 닿아 있었고 말이다.
‘휴…….’
“최고예요!”
“황녀님!”
“주무시고 계셨나요?”
“……우와…….”
“우와, 우와…….”
“멋지다.”
“마음에 드세요?”
“응!”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루도 그렇지?”
“이만 들어가실까요?”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여기 있는 동안 잘 부탁할게.”
집사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나를 내 방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대리석 계단을 걸어서
2 층으로 올라가니, 흰색의 방문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가 있었다.
그중 중앙, 유일하게 파란색으로 칠해진 방문.
아까 보았던 것처럼 유리문 너머 테라스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아치형으로 설계된 창문가의
기둥은 완연한 남부식이었다. 나는 천천히 테라스 너머로 향했다.
“어떠신가요?”
“유모.”
“네, 황녀님.”
나는 생긋 웃었다.
* * *
그래서 그런지 완전한 내 것인 이 별장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별장은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 먼지 하나 없었다. 동시에 나는 별장의 사람들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별장 최고다…….’
“응! 정말 최고였어!”
“초대장?”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은쟁반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편지가 다발로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 그녀는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블라임 후작가?”
나는 그 이름을 곰곰이 곱씹다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평소 귀족들과의 교류가 그다지
없었던 나지만 나도 블라임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남부 일대를 꽉 잡고 있는 부호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생각했다.
“좋아, 정했어.”
“네, 전하.”
저 멀리에 보이는 산맥도, 정원의 모습도, 이 테라스의 경치도. 모든 것이 가슴을 들뜨게 했다.
게다가…….
그런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만남이란 무척 각별한 것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나 어머니, 아버지가
워낙 나를 사랑해 주시기도 하고, 황녀로서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꽤 바빠서 하루가 금방 가긴 한다.
‘아, 아닌가?’
나는 문득 떠올렸다.
“루.”
“왜 그러세요, 주인님?”
“너는 항상 내 친구지?”
“그래?”
“네.”
루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속삭였다.
“루…….”
‘……여긴 어디지?’
‘누, 누구지?’
‘대체 누구…….’
‘아.’
‘……!!!’
“……헉, 헉.”
‘……무슨 꿈이지?’
‘……하아…….’
“으응…….”
“……아.”
맞다, 그랬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는 협곡을, 저녁에는 블라임 후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를 가기로 했었다.
“응, 기대가 돼.”
“응!”
“주인님!”
“왜 그래, 루?”
“아뇨! 하지만…….”
루는 생글생글 웃었다.
“예감?”
“네! 저는 알 수 있어요.”
* * *
‘조금 더운 것 같기도.’
“응, 알겠어.”
“그렇구나…….”
“네?”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호위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곳곳을
돌아보았다.
“……와아.”
“응!”
‘……어라?’
‘저 꽃은…….’
“어…….”
“나 말이야…….”
“네, 전하.”
“저 절벽 위로 올라가 봐도 돼?”
“네?!”
저 꽃, 저 절벽.
‘꿈에서 본 풍경 같아.’
내 감이 외치고 있었다. 내 꿈에 나왔던 풍경이 바로 저기라고.
“안 됩니다, 황녀 전하!!”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알겠어.”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녀장은 안심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황녀 전하.”
“……응?”
남부 출신의 백작 부인이었다던 시녀장은 이 근처의 전설에 해박한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신비로운 존재?”
‘으으…….’
* * *
“그래?”
“과연 그럴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대가 되었다. 무도회에서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했다.
시녀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아냐. 나는 재밌었어.”
‘미안, 루.’
목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고, 팔찌도 세트였다. 이 라일락색 드레스는 아버지가
직접 선물해 주신 것으로, 수도 사교계의 최신 유행이기도 했다. 옆에서 시녀들이 나에게 외쳤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다들.”
나는 거울을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 * *
마차는 아침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마차는 금방 출발했다. 황혼이
어스름하게 지고 있는 시골길은 조금 어두웠지만, 마차 앞에 매단 등불 덕분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생각보다 무척 넓은걸?’
“황녀 전하!”
‘아.’
그들의 정체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인 블라임 후작 일가였던 모양이었다. 초대장에 답장을 보냈던
탓에 그들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되돌렸다.
“즐거운 무도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긴장을 한 모양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탓에 얼굴과
머리색이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더니 후작 부인이 웃었다.
“저를요?”
“제…… 제가요?”
“……!!”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 커졌다.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블라임 영애……?”
“……꺅!”
그래도 재빨리 달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라임 영애가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애?”
“하, 화, 황녀 전하!”
“……네, 네?”
“그, 그, 그게……!”
‘……내가 뭘 잘못했나?’
그에 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저, 저예요!”
“저, 전하!”
“부디……!”
“……부디?”
“로즈라고 불러 주세요!”
“아…… 네.”
‘……그러니까 대체 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나와는 달리, 로즈의 연초록색 눈동자는 매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 더 말을 걸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어머, 로즈.”
그녀는 나와 로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반쯤은 놀란 기색이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서 인사했다.
“황녀 전하, 여기는 제 친구인 클로에 디몬트 공작 영애랍니다. 클로에. 영광스럽게도 엘미르
황녀님이 우리 저택에 방문해 주셨어.”
“좋아요.”
로즈의 말대로, 응접실 안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무도회 홀만큼은 아니어도 굉장히 넓은
것으로 보아 응접실은 평소에도 이렇게 많은 영애와 영식들이 모여서 노는 곳인 모양이었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로즈는 이제야 조금 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내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관현악이 흐르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간식과 가벼운 끼닛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디몬트 공녀가 우리에게 잠깐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떠나고, 나와 로즈는 연회장을 구경했다. 로즈는 뭐든지 나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했다. 그러던 나는 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응접실의 중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이 탄성이 일기도 했다.
뭔갈 보여 주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어쩐지 그 기운이 매우 익숙했다.
‘……이건 분명히……?’
“로즈!”
그녀는 턱을 거만하게 올리고는 로즈를 향해 말을 걸었다. 주위의 몇몇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지요?”
“……애슐리.”
‘……정령술 수업?’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의 정령사였어.’
“정령술이라니…… 어째서요?”
정령술은 배우기도 어렵고 선생님도 거의 없다. 배우기 위해서라면 노력은 물론, 많은 재화가
소비될 것이었다.
“세상에, 그걸 모르시나요?!”
“……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때문이라고? 내가 뭘 했길래?’
‘……나를 닮고 싶어 해?’
내 옆에서는 로즈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로즈가 나에게 주었던 넘치는 호의의 뜻을 이해했다.
‘동경이라니.’
“…….”
“아…….”
옆에서 로즈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으로서는 소환할 수 없었던 정령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더 분한 듯했다.
“호호호.”
“……호호.”
뻐기듯이 정령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에 비해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마도 아직
정령을 오래 소환할 실력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정령을 돌려보내야 할 테지.
‘……응?’
“이제 그만 돌아가렴.”
“네, 주인님.”
‘……아.’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정령을 한계까지 소환했으니 아마 그녀가
무척이나 어지러울 것이라는 것에 내 다이아몬드 섬을 걸 수도 있다.
“와아……!”
“과찬이에요. 과찬.”
하지만 같은 정령사로서 정령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설픈 실력은 그렇다 쳐도, 가만있던 로즈에게
시비를 건 것도 그렇고 정령을 가지고 으스대는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이분은…….”
“…….”
“……시골에서 올라왔다라…….”
“아닌가요? 처음 뵙는 분인데…….”
‘……휴.’
차분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디몬트 공녀가 서
있었다. 로즈가 눈에 띄게 반색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에!”
“……네?”
“……네?”
“네, 모르셨나요?”
“……그게…….”
“제 말이 틀렸나요?”
“저는, 그게…….”
* * *
우리 셋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발코니로 나갔다. 조용한 발코니에는 마침 딱 우리를 위한
것처럼 나무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은 후에야 로즈는 나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디몬트 공녀는 로즈와 오래된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로즈 블라임. 블라임 후작가의 피어나는
장미꽃. 그녀는 지금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신의 장난인지, 정령을 소환하기 간절하게 염원했던 로즈와는 다르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건 설렁설렁 수업을 듣던 애슐리였다.
주위에서도 그녀에게 정령의 재능이 있으니 계속 띄워주다 못해, 아이샤 황녀 전하처럼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정령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헛바람을 넣다 보니 결국 저렇게 오만해졌다나.
“……친구였는데.”
로즈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어쨌든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게 확실히 큰 메리트라, 애슐리는
또래 모임에서 요즘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정은 대충 알겠어요.”
“평범한 게 싫은가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평범함이라.’
이덴베르의 황녀로서 죽고, 엘미르 제국의 1 황녀로 다시 태어난 나.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있는
정령들을 볼 수 있었고 어린 나이에 정령사가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녀라는 명칭까지 달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
“……!”
“…….”
“화, 황녀님……!”
아, 물론…….
옆에서 부채가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명백하게 관심을 요구하는 소리였다. 나와 로즈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클로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까 애슐리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멋짐을
보았다. 이 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무척 좋을 것이다. 나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 * *
무뚝뚝한 시녀장의 얼굴에도 따스한 웃음이 감돌았다.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돌아온 그녀는 손수 내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고, 나에게 잠옷을 입혀 주었다.
“자아, 황녀님.”
“알겠어. 둘 다 내일 봐.”
“루.”
“주인님!”
“잘 지내고 있었어?”
“있잖아, 루.”
나는 소근소근 속삭였다.
“……으음…….”
* * *
‘……아.’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로 깨달았다.
‘그 절벽이다.’
바람이 불어서 풀잎이 한 방향으로 밀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꽃잎이 춤추듯 나에게로 날아왔다.
‘또 이 꿈인가?’
“……!!”
‘위, 위험했다.’
―당신은…….
‘……어라?’
―당신은, 누구인가요?
“……누구……!”
‘됐다!’
‘안 돼.’
―……스……!
됐다, 그를 불렀다. 세상이 지워지듯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나는 눈물이 나올 만큼 기뻤다.
“…….”
* * *
“……이샤, 아이샤!”
그 옆에서 클로에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블라임 후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이틀째 참석한
상태였다.
‘흠…….’
나는 중앙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는 조금 덜해도 중앙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애슐리가 뽐내는 듯한 얼굴로 또 자신의 정령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도요!”
“와아……!!!”
“너무 귀여워요!”
“네!”
“대단하세요! 정말…….”
“…….”
“…….”
‘……하아.’
“……그래요. 롤랑 영애.”
그녀는 그 사람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 저곳으로 간다면 그들과 친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리킨 로즈와 클로에의 얼굴을 보자 애슐리는 당황한 듯했다. 주위의 시선이 그녀와
나에게로 달라붙었다.
“그…… 저기…….”
“저와 함께 가요.”
“롤랑 영애.”
“……네, 네?”
그래도 분위기를 드디어 읽은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미 일행이 있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구시는군요. 어제부터 계속, 상당히 무례하세요.”
“그…… 그게.”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저, 전하…….”
“잘했어.”
“응, 최고였어!”
“맞아요, 맞아.”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뒤로 비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애슐리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애슐리가 조금 불쌍하기는 했지만, 자업자득이란 그녀를 위한 말일 것이다.
* * *
별장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사교계란 이래서 불편하다. 원하지도 않는 주목을 받거나 다른 사람과 불화가 생기기 쉽다.
친구들을 사귄 건 좋았지만, 역시 마냥 유쾌한 장소만은 아니었다.
“응…….”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꿈에서 자꾸만 등장하는 그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아.”
‘루는 잠깐 두고 가자.’
“안녕하세요, 주인님.”
“리미에, 나를 날게 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요. 주인님.”
“카스카 협곡이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와아.’
“다음에 또 뵈어요.”
‘……아…….’
‘꿈속과 똑같아.’
‘…….’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은…….”
내가 재차 질문하는데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 금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당신은 어째서 내 꿈에 나왔던 건가요? 그리고 어째서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당신이 친숙한 걸까요?
두 개 다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환상처럼 시야가 불균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서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해가 떠올라도 아직 물안개가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헛발을 제대로
디디고 말았다.
‘……아!’
‘안 돼!!’
‘……안 돼!’
‘……부딪힌다!’
‘……새가 아니야.’
“……당신은…….”
“……다친 곳은 없나?”
“가, 감사합니다.”
“정령사이시죠?”
“맞지요. 정령사?”
“…….”
거기에 더해 정령사들은 다루는 원소마다 계열이 나뉘기 때문에, 같은 계열의 정령사를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이제야 알겠어.’
“…….”
“……앗.”
“……가, 감사합니다.”
물음에 계속 대답하지 않길래 그에게 내가 귀찮은 존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부러 정령을
빌려주기까지 하다니. 그에게 내가 마냥 훼방꾼은 아니었던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저어, 정령사님.”
“뭐지?”
“…….”
나는 내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아이샤.”
“그러면 이만 실례할게요.”
루디온이 날개를 펼치고,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를 때였다. 정령사는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멀어지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외쳤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약간의 침묵 후, 그가 대답했다.
“그래.”
“별말씀을.”
“황녀님, 벌써 일어나계셨나요?”
“응? 아, 응.”
“으응, 알겠어.”
“……응?”
“…….”
‘꿈이 아니었어.’
‘……또 만날 수 있을까?’
“황녀님!”
* * *
“정령사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한 바람일 것이다. 그녀는 고작 인간일 뿐이고, 그녀로서는 이번이 그와
만나는 첫 만남일 테니까 말이다.
“……왕이시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뵙고 싶어요!’
* * *
“안녕! 다들 좋은 아침이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음, 글쎄…….”
그 말에 시녀들이 활짝 웃었다.
그는 무척 유쾌해 보였다.
“응, 잘 부탁해!”
“아이샤!”
“로즈! 클로에!”
“어서 와, 딱 맞춰 왔네?”
“기다리고 있었어!”
“맞아, 맞아!”
“……?”
“쇼핑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연극 구경이라거나.”
“자, 가자!”
흔히 말하는 귀빈실이랄까. 그 안에는 푹신한 소파와 간단한 먹을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 있자, 복도에서부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네, 넷.”
나는 흰색 리본과 푸른색 레이스 리본, 그리고 연초록색 공단 리본을 골랐다. 점원들은 앞다투어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
“가자!”
* * *
‘……대단해.’
“그, 그게 어딘데?”
“오후의 티파티!”
“아……!”
“와…….”
“엄청 예쁘다!”
“멋지다!”
그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와, 좋아!!”
우리는 마차에서 내리면서도 끊임없이 대화했다.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별장의 집사와 시녀들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흐뭇하다는 표정이었다.
“환영합니다.”
시녀들이 줄지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 속에는 주방장도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같이 차를 마시자!”
“숲이 참 아름답다.”
“멋져…….”
“만나서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너무 예쁘다!”
“최고야……!”
“…….”
“…….”
‘아.’
“루라면 그 정령……?”
“무, 물론이지!”
“안녕하세요, 주인님!”
“으, 으아……!”
“루, 같이 먹자.”
“당연하지. 다 같이 즐기자.”
나는 생긋 웃었다.
“으, 응!”
“너무 귀여워…….”
“그 마음 이해해.”
“왜 그래, 아이샤?”
“애슐리 롤랑 말이야.”
“아…….”
나는 턱을 괴었다.
“오늘 가면 또 있으려나?”
“아마 그럴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정말?”
“맞아.”
“그래도 말이야.”
그녀는 손을 꼬물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클로에가 설핏 웃었다.
“당연한 소리.”
정령사는 보통 귀족인 경우가 많았다. 정령을 다룰 수 있다면 나라에서 작위를 주어 붙잡아 두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상급 정령이라면 더더욱 그가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 파란 목걸이는 어때?”
그러자 시녀들도 덩달아 들떠서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추천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꾸미는데 한참
동안 시간을 들이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가 보자, 얘들아!”
“……아.”
“롤랑 후작 부인이신가요?”
“어머, 어머머.”
게다가 여기는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어린 귀족가의 자제들이 모이는 응접실. 어른들이 들어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건만, 나에게 인사를 하겠답시고 그 규칙을 깬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 네.”
“응? 아, 물론이지.”
“……예, 어머니.”
“…….”
하지만 내 말에도 후작 부인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얼굴이 굳어졌을 뿐이다.
“……예, 어머니.”
“그렇지?”
“…….”
“내가 잠깐 다녀올까?”
“후작 부인께?”
“다녀와, 조심하고.”
정원을 건너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블라임 후작가는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어 두었을뿐더러,
색등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아주 밝았다.
짝!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후작
부인의 화난 목소리도.
‘……때렸어?!’
“……어머니…….”
“…….”
‘……너무해.’
“남은 무도회 기간 동안이라도 어떻게든 아이샤 황녀 전하와 친해지도록 하렴. 옆에서 어떻게 하면
더 상급 정령을 부를 수 있는지 그 방법도 좀 묻고. 황녀 전하께서는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천재시니까
말이다.”
“……예, 어머니.”
“……네, 네.”
전생에는 나 말고도 많은 황녀와 황자가 있었다. 그러나 적통 황녀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야 했으니까.
찰싹!
나의 뺨을 후려쳤다.
―쓸모가 없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
‘……애슐리.’
“……누구야!?”
‘어떡하지?’
“나와!!”
“…….”
애슐리는 떨고 있었다.
“아이샤 황녀 전하…….”
그녀는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였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언급하는 소리까지 들은 참이다.
“…….”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괜찮나요?”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거둬 주세요.”
“하지만…….”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영애.”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정령이 전부였어요. 드디어
저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 준 셈이었으니까.”
“…….”
“이게 저의 최선이었다고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방금 보신 건 부디 모두 잊어 주셔요.”
‘……애슐리.’
마음이 복잡했다. 애슐리가 그토록 자신이 정령사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도, 그리고 정령을 기력이
다할 때까지 소환했던 것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원을 걸었다. 애슐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덴베르의 황녀로서의 경험으로 말이다.
정원은 고요로 가득했다. 떠들썩한 무도회장과는 정반대였다. 반딧불이가 허공을 밝히고, 노란색
등불은 발아래를 비춰 주었다.
‘……내일이라도 돌아갈까?’
‘아, 하지만…….’
나는 고개 숙인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보고 싶다.’
“……아.”
“……어라……?”
“……내가 또 꿈을 꾸나?”
‘……잠에서 깨야 하는데.’
“……당신은…….”
“……또, 만난 건가요?”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를 만나러?”
“……기뻐요.”
‘……앗.’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왕을 뵙습니다.”
“……루?”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왕이라니?”
“빛의 하급 정령이로군.”
루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이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황금색 빛가루가 그 애의 몸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
“아이샤! 찾고 있었잖아.”
“어, 그게…….”
‘왕이라고?’
‘……설마.’
“응? 혼자라니……?”
“얼른 다시 돌아가자.”
“자, 잠깐.”
“저 사람?”
‘…….’
나는 그녀의 눈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로즈의 눈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일부러 남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다음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투명한 초록색 눈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비치지 않았다.
“……!”
“……아이샤?”
역시 단 하나밖에 없었다.
“괜찮아?”
“아니, 나. 그러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로즈가 안심할 수 있도록 환하게 웃었다. 가족들의 틈에서 단련한 미소로,
어머니나 아버지의 걱정을 막을 때도 아주 효과적이기도 했다.
“저,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지.”
“……알겠어.”
“응, 이따 봐!”
“당신은…….”
“당신은, 정령왕님이시지요?”
“그래.”
“……!!!”
“정확히는…….”
“……루미나스 님.”
“와, 왕을 뵙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그가 내려올 정도라면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예?”
“……저를 만나러?”
“네, 네?”
“기운이 불안정하군.”
“……기운?”
“루, 루?”
“앗…….”
“무슨 일이 있었지?”
“그렇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런가요.”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하겠지. 로즈도 걱정하고 있을 테고, 슬슬 별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기운이 조금 안정되었군.”
“……아.”
“어째서지?”
“…….”
“내 덕분이라는 건가.”
“…….”
“알고 있나? 이 대륙에서 빛의 정령사는 너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대륙에서요?”
‘…….’
‘슬퍼하지 마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고 말았다.
* * *
“괜찮아?”
“괜찮아.”
“……으응?”
“……애슐리가 떠났다고?”
“그래?”
* * *
‘쌓여도, 엄청 쌓였지.’
그리고 클로에 디몬트. 수도에 올라가면 나는 로즈와 함께 디몬트가에 놀러 가기로 단단히 약속한
상태였다.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그녀는 무척이나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루미나스.
‘언제쯤 또 볼 수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루를 보고 있노라니 한 명이 더 생각났다.
‘애슐리 롤랑.’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을 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쩐지
애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
아이스티를 마시던 나는 결심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블라임 후작가에 들리는 날이다. 오늘,
애슐리를 찾아가서 그날 있었던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지.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랄 뿐이었다.
* * *
“당연하지!”
로즈가 팔을 붕붕 휘둘렀다.
“그래!”
“애슐리!”
“화, 황녀 전하?!”
“그대로 앉아 있어요.”
“……여긴 어쩐 일로.”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괜찮아요.”
“어떤 욕심이요?”
“…….”
“영애.”
“다른 사람들과 블라임 영애에게는 운 좋게 정령을 소환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잠에 들 때까지. 혹시라도 나에게 재능이 있을까 봐.”
“…….”
그렇게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면, 돌아봐 주지 않을까 해서. 완벽해지면, 칭찬받지 않을까
해서.
“영애가 괜한 욕심을 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정말 영애가 진심으로 바라던 것이었나요?”
“저, 저는…….”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
“…….”
“…….”
“응원해요.”
“……감사합니다.”
* * *
“……아.”
“……정령왕님.”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가 무척 만나고 싶었다. 그건 그가 빛의
정령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은 항상 내가 어려울 때에도, 기쁠 때에도 같이 있어 주었다.
“그래.”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
“…….”
‘……괜한 말을 한 걸까.’
“재밌군.”
“…….”
“…….”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아.”
“아니면…….”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뭐지?’
“정령왕들에게 친구란 없고,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령들을 가리켜 친구라고 당당히
말하는 너에게…….”
“…….”
“호기심이 든다.”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소중한 존재?”
“그래.”
“그건…….”
나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런 나의 말에 그는 의미 모를 소리를 했다.
“글쎄.”
“……?”
그러던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 * *
“황녀 전하!”
정원은 생각보다 넓었기 때문에 돌아보는 데에만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이었으므로
나는 이곳의 풍경을 꼭꼭 눈 안에 새겨 넣었다.
“그래? 그럼 바로 출발하자.”
다음 순간, 나는 쩍 굳고 말았다.
“……?”
멍청하게 보이리라는 것은 알지만,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백만 개쯤 떠올렸다, 지웠다, 다시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현실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보는군.”
“…….”
나는 손을 덜덜 떨었다.
“저, 정령왕님?”
“어제 말했었지.”
“……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도 되어 보고 싶군.”
“네 친구가.”
“……네?”
“친구라고요?!”
내가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자,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네, 황녀 전하.”
시녀장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차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진동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경악한 상태였다. 이제 마차가 출발한 이상, 그를 거절할 방법도 없다. 아니,
애초에 위대한 정령왕인 그를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큰 키 때문에
내 전용인 마차는 오늘따라 무척 좁아 보였다. 그가 느긋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앉지 그러나.”
“와! 왕님!”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달려가 폴짝 안기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는는 한 손으로 루를 감싸 안았다.
“루.”
“네, 왕님!”
“…….”
“앉지.”
“저와 루처럼요?”
그가 루를 바라보았다. 루는 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처럼.”
“……하아.”
“……?”
“그래. 불러 보도록.”
“어, 어.”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그러니까…….”
“……루미나스 님.”
* * *
‘황궁이 뒤집어지겠지.’
나는 그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사생활?”
“으음, 네.”
“흠, 그런가?”
그는 조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인간은 복잡하군.”
“…….”
“네?”
“……알겠다.”
그는 이해한 듯했다.
“……?”
* * *
하지만 남부 게이트를 타고, 수도의 게이트로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트의 마법사들과 시종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가 오셨다고?”
“어서 가서 만나 뵈어야겠다!”
“매우 들뜬 것 같군.”
“아, 그게 그러니까…….”
나는 그를 향해 설명했다.
“그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요.”
“……흠.”
“저,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오라버니!!”
“아이샤!!”
“잘 있었어?”
“그래? 어떤 건지 궁금하구나.”
“기뻐하셨으면 좋겠어요!”
‘어, 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응?’
“……아이샤?”
“네?”
“……아이샤……?”
“……?”
“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령왕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자연을 관장하는 그들은
굳이 소환되지 않아도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다.
“그, 그게…….”
나는 루미나스를 보았다가, 이시스 오라버니를 보았다가, 그것을 반복했다.
“……어…….”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루…….”
“……루?”
“루, 룬 님이세요.”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이샤…….”
“아이샤, 설마…….”
“네? 네?”
“네에?!”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사, 사, 무, 무슨 말씀을!”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루미나스.”
“……뭐?”
‘아, 어떡하지.’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네? 아, 그, 그러니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오라버니는 내 옆에 풀썩 앉았다.
“마차를 하나 비워 줄 테니 편히 혼자 가도록.”
“그건 싫군.”
“예, 전하!”
‘불편해 죽겠어…….’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마차는 드디어 신전 앞에서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이시스 오라버니는
루미나스 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내리라는 것이겠지.
‘……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미치겠다. 오라버니야 제국의 황태자니까 신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정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무려 루미나스 님인 것이다.
“다음에 또 보지.”
‘……또 만날 수 있겠지?’
“오라버니?”
“아이샤.”
“……정말이지?”
“정말요.”
“그건 싫어요.”
“아니라니까요.”
“어머니, 아버지!”
“내 생각도 같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친구라고?”
“누구니?”
“네, 그리고!”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선물?”
내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그런가요?”
Chapter 5. 하지 연회
봄의 제전, 여름의 하지, 가을의 수확제, 겨울의 신년제. 이것들이 엘미르 제국의 4 대 행사이다.
이제는 ‘하지 연회’가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고 말이다.
전체적인 행사는 어머니가, 신관들의 대접은 내가 맡기로 했다.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는 아주 열심히 일할 예정이었다.
‘조금 나른하다.’
“응, 그래 주면 고맙지.”
‘나도 쉬고 싶다!’
‘새라도 들어왔나?’
“드세요. 황녀 전하.”
“아, 고마워.”
“모두.”
“네, 황녀 전하.”
내 말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네?”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이 정도는 괜찮은가?”
“네?”
“아…….”
“네, 괜찮아요.”
“그렇군.”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햇살처럼 눈부신 금안. 그리고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모습까지. 눈부신 여름숲을 배경으로 한 그는 정말로 아름다워 보였다.
“별일은 없다.”
“그래.”
“들었다.”
‘차기 대신관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오는 일이, 과연 흔한 일일까……? 게다가 그 신관이
아주 최근에 나왔다고 하던데.’
“그렇군.”
“……그래서…….”
나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랬지.”
“……저어.”
“그렇다만.”
“…….”
“……그, 그럴 수가.”
“안 될 게 있나?”
‘절대 안 어울려.’
“‘아이들’이요?”
“신관들 말이다.”
“……우와.”
“들어가도 될까.”
“부, 부디 들어오셔요.”
“상관없다.”
그가 내 앞에 앉았다.
“와아, 왕님!”
“맛이 좋군.”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 차를 탄 시녀에게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호로록 쉬었다.
“뭐지?”
“호기심이 생겨서.”
“어떤 호기심이요?”
“네…….”
“…….”
“그, 그, 그러셨군요.”
“없다.”
“즐겁겠군.”
“그, 그렇지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
“그런 일도 있나요?”
“네?”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만 가 봐야겠지?”
“아, 그, 그게…….”
“……죄송합니다.”
“별로.”
“그럼, 이만 나는 가지.”
“아이샤?”
퍼뜩 정신을 깬 나는 외쳤다.
“아, 네. 네! 들어오셔요.”
“……아이샤.”
“……네?”
“여기 누가 왔다 갔니?”
“루와 함께?”
‘……들키진 않았겠지?’
“놀러왔단다.”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 그러시군요…….”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항상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잖니.”
“그건 오라버니였죠.”
* * *
오라버니는 불어오는 여름의 바람을 만끽하듯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정원을 얼마쯤 걸었을까,
오라버니가 잠깐 발을 멈추었다.
“내가 하나 알려 줄 게 있단다.”
“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게 뭔데요?”
“글쎄, 그건 아직 비밀이지.”
“체에…….”
“기대하고 있으렴.”
“알겠어요.”
“무슨 일이시지?”
‘……뭐지?’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맙구나.”
“고마워, 아이샤.”
“……네? 네.”
“아이샤.”
“네, 어머니?”
“음, 그게 말이다.”
“네? 아니요?”
“……그런데 다들 안 드세요?”
“안다. 아이샤.”
“……네?”
오라버니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얼굴이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짐작한 것이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무슨 때요?”
“이 어머니는 다 이해한단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자그마했을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아이샤…….”
“……다들 대체 왜 그러세요?”
“네, 말씀하세요.”
“…….”
“그게…….”
“자꾸 혼자 있고 싶고…….”
“사춘기가 그런 거 아니겠니?”
‘……아.’
“……아니…….”
“그래,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그래.”
오라버니가 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이 술
취했다고 말하는 것 봤니?’라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아니, 진짠데.’
그에 나는 조금 발끈하고 말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아, 정말…….”
“진짜라니까요.”
“그래, 그래.”
“……어머니?”
“후후후…….”
“……?”
어머니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나도,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춘기도 오고.”
“사춘기는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네?”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알려 주세요!”
“……네?”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데뷔탕트. 말이다.”
“제, 데뷔탕트요?”
‘나의 데뷔탕트?’
“데뷔탕트라니…….”
“저는…….”
나는 환하게 웃었다.
“……네?”
“그는 이미 대신관에 필적할 만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결코 축복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거란다.”
“그, 그야…….”
‘……너무 과한 거 아닐까.’
‘와…….’
“정말 기대되어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런데 내가 웃는 걸 보던 가족들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에 나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네? 왜요?”
나는 눈을 반쯤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
“…….”
“그, 그렇지.”
“큼. 큼.”
나는 배시시 웃었다.
“데뷔탕트라니.”
“물론, 알지.”
‘데뷔탕트라.’
‘그리고…….’
“…….”
* * *
그날부터 시작된 데뷔탕트 준비는 예상했던 대로 무척, 아주 무척 바빴다. 연회는 하지로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컨셉은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 하지만 시녀장. 이 연초록색 드레스를 보세요. 보기만 해도 아이샤 황녀 전하의 깜찍함이
배가 되는 것 같지 않나요? 마치 여름의 요정처럼요. 정말 사랑스럽고 황녀 전하께 잘 어울리는
옷이에요.”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세상에 드레스가 이렇게 많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투닥대던 두 사람이 나에게 고개를 돌린 것은.
“황녀 전하!”
“어, 응?”
“내 의견?”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내 의견은…….”
“……잠깐만 쉬면 안 될까?”
찌릿, 시녀장과 유모의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취향이 명백하게 갈리다 보니 나에 관한 일이라면 종종 이렇게 다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뭐야?”
“아, 그것은…….”
그녀는 싸움도 멈추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유모가 냉큼 그 대답을 가로채고 말았다.
“편지입니다.”
“뭐?!”
나는 레나가 건네는 칼로 재빨리 편지를 개봉해 보았다. 우선은 로즈의 편지부터였다. 진분홍색
편지에는 로즈다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인사말이 몇 줄 적혀 있었고, 바로 본론으로 이어졌다.
―아이샤!
아차, 내 실수다. 그러고 보니 준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정말?!”
―너의 로즈가.
이번에 나는 클로에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고급스러운 은색에 은방울꽃이 그려져 있는, 차분한
느낌의 편지지였다. 역시나 클로에다운 매끄럽고 우아한 필체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너의 클로에가.
‘그런데…….’
‘으음…….’
롤랑 영지는 남부에서도 구석, 나쁘게 말하면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늦을 가능성이 있었다.
* * *
신전에서 선전을 원한다면 기꺼이 어울려 주겠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넘어가는 일이다. 성녀로서의 나의 입지가 올라가면 제국에 도움이 되고, 결국 황족인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
‘잘하자,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루미나스 님이 내 편이니까!’
‘음…….’
정령에게 정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원한 차를 모두 마셨을
때였다.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자마자, 나를 향해 쏟아지는 두 목소리가 있었다.
“…….”
‘……하아.’
* * *
‘……저건?’
황금색 태양의 장식물, 그리고 순백색의 마차. 그것은 빛의 신전에서 이용하는 마차였다.
‘신전에서 사람이 온 걸까? 그럼 혹시…….’
하지만, 아니었다.
“……아.”
그렇게 생각한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 앞의 기둥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두꺼운 기둥이 그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
“……아…….”
“아이샤!”
“……아, 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쩐 일로 이곳에……?”
‘아, 그렇구나.’
그 말에 아버지가 화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심지어는 오라버니마저도 루미나스 님에게
흥미가 무척 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질문했다.
가족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루미나스 님에게서 태생적으로 배어 나오는 고귀함 같은
것은 도무지 감추려야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지?’
‘어째서?’
“아니었다.”
“…….”
“…….”
“……아니었다. 라고?”
어차피 그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은 대신관님밖에 없었을 테고, 차기 대신관 후보라는 직함도
있으니 대신관님께서는 루미나스 님의 행동을 너그러이 넘기셨겠지. 하지만…….
‘루미나스 님…….’
‘아아…….’
“신에게 귀의한 신관에게 있어서, 신 이외의 인간들은 모두 평등한 존재일 뿐. 그렇지 않은가?”
“…….”
‘아아악!!!!’
‘막아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서, 성녀로서.”
“……성녀로서?”
“아, 아이샤?”
“아니, 잠깐……!”
다시 말해, 튄 것이다.
* * *
다행히 루미나스 님은 순순히 나를 따라와 주었다. 시녀장이 보았으면 ‘황녀 전하께선 뛰시면 안
됩니다!’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헉, 헉. 헉.”
단순히 가까운 기도실에 들어왔을 뿐인데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인해서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흥미롭군.”
“흥미로우신가요…….”
‘……흥미롭다고?’
“왜 그러지?”
‘……말하지 말까?’
‘적응해야 해! 왜냐면……!’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 그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바로 그거예요!”
나는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아무리 인간과 저에게 흥미를 가지셨다고 해도 만약 지금처럼 어, 인간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저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그런가?”
“……흠.”
아무리 루미나스 님이 신성력이 많다곤 했으나 분명히 구설수에 올랐을 행동일 것이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관이 매일같이 반말만 하고 다녔다면 말이다. 중간에 낀 대신관님만
힘드셨겠지.
‘통할까?’
‘……만세!’
“저, 정말요?”
“그러도록 하지.”
“그게 아니다.”
“네?”
* * *
다행히 아버지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대신 대신관님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걸 보아서
변명을 아주 열심히 하신 모양이시다.
‘수고하셨어요. 대신관님.’
나는 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니?”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렸다.
“그래……?”
나는 헛기침을 했다. 루미나스, 아니, 룬 님도 설득을 했다. 이제는 실전에 들어가 볼 차례다.
그런 눈빛을 가득가득 눈에 담으며 나는 룬 님을 돌아보았다.
“그렇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어?’
‘어째서지?’
“그러셨군요.”
“존대는 없어도 되네. 그대에겐 도무지 존대가 어울리지 않는군.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는
것만으로 괜찮다.”
“……거절도 않는군.”
둘은 서로를 탐색하듯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라버니가 싸움을 걸고 룬 님이
적당히 그에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저어, 황녀 전하.”
“……네?”
“어…….”
“그런데…….”
그는 푸근하게 웃었다.
“……아.”
하지만 그의 나이가 충분히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정말로 성직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의 눈에는 질시의 빛이라곤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저는 저분이 만들어갈 새로운 신전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아무렴, 교황이 될 수도 있다는
언급까지 있는 분이시니까요.”
“허허, 그렇습니다.”
“많이 자라셨군요.”
마치 우리 외할아버지 같은 말투다.
“네…….”
나는 생긋 웃었다.
“……이샤, 아이샤.”
“아, 네?”
오라버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뵙겠습니다.”
“……하하.”
“아이샤!”
“네. 오라버니?”
“네, 네.”
“하하, 그럴 리가.”
“염려할 필요 없단다.”
“…….”
무언가 내 감이 이상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접한 존재가 정령이라면,
아마 사람 중에서는 단연 ‘이시스 오라버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 *
“들어오렴.”
“아이샤, 어서 들어오렴.”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 안에는 홍차의 향이 퍼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티푸드와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티타임을 가지고 계신 모양이었다.
‘예쁘다.’
“아름답지 않니?”
“네, 정말 예뻐요.”
“어머니의 데뷔탕트에서요?”
“네.”
“아…….”
“그런데 그때였어.”
“그때?”
“…….”
“……!”
“……그때부터셨나요?”
어머니는 눈을 찡긋했다.
“…….”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너무 멋져요.”
어머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
그 말을 듣자, 나는 어머니를 찾아온 이유를 불현듯 떠올렸다. 그리고 벼락같은 아이디어가
반짝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머, 무슨 일이니?”
“……?!”
“네? 부탁이에요.”
“아이샤…….”
“……후후.”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쑥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딸.”
* * *
그 이외에도 숨 가쁘게 연회의 준비를 맡아서 해 왔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바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하지 연회 날이었다.
“네, 황녀 전하.”
유모는 활짝 웃었다. 내 앞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팔찌가 있었다. 어찌나 눈부신지 이 방 자체에 광채가 번쩍번쩍했다.
‘무서워서 목을 들 수는 있을까.’
옆에 있던 시녀장이 기쁜 듯이 이야기했다.
“…….”
보석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경량화 마법까지 걸려 있다니. 이것만 가지고도
수도의 저택 몇 채는 기본으로 사겠다.
“휴, 그래.”
“성녀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 * *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후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샤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아이였다.
그렇게 묻던 아이샤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나갔다.
“황후 폐하.”
바라보던 하늘에서 눈을 떼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방 밖으로 나섰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 폐하!”
“같이 가지.”
그렇게 말하며 티리온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남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한 황제이지만, 티리온은
가족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황후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소중한 반려자이기도 했다.
“네, 폐하.”
두 사람은 같이 걸어서 황궁에 있는 대연회홀에 도착했다. 둘이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인사를 해 보였다. 비단이 깔린 길을 걸어서 가장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 옛 생각이 났다.
아직도 그녀를 향해서 쏟아지는 주목과 관심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앉게 되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자신의 가족들 덕분일 것이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행복해서요.”
“…….”
그는 따뜻하게 미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시스가 들어왔다. 아이리스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물론, 그때에도 티리온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이시스는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어머.’
‘……흠.’
“아이리스.”
“네?”
“저 옷…….”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지.”
“…….”
아이리스 드 엘미르.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제국의 황후라거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있고, 그녀를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껴 주는 남편이 있다.
“그랬군.”
티리온이 슬쩍 웃었다. 이제 아이샤와 신관들은 그들의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 * *
“안녕하세요. 신관 여러분.”
‘너무 화려해서인가?’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신관들은 보통 액세서리 하나도 걸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볍게
납득한 나는 그들을 이끌었다.
‘바보 같지.’
“긴장되니?”
나는 미소했다.
“아니요.”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
‘……어머니, 아버지.’
“와아아아!!”
펑!
“자, 아이샤.”
“……!!”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야.’
‘……빛의 힘은 따뜻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룬 님이 입을 열었다.
“…….”
‘꿈만 같아.’
“가, 감사합니다.”
“별것 아닙니다.”
“이제 다음은…….”
어머니가 말했다.
“첫 춤의 차례구나.”
“네?”
“아, 물론이죠.”
어머니는 빙긋 미소 지었다.
“……?”
“……네?”
“……네?”
“안 됩니다!”
“……?”
생각보다도 강한 반발이었다.
“이시스.”
“그건 그렇지만…….”
룬 님과 춤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
“어머!”
“괜찮으시다면, 부디.”
“……괜, 찮을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행복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나와 룬 님이 연회장의 중간, 춤을 추는 곳으로 향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
“그런데 룬 님, 춤은 출 줄 아시나요?”
“……아.”
‘룬 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하세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다들 감사해요.”
‘어휴.’
“쉬고 싶어요.”
“…….”
“…….”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침통한 이야기입니다.”
이덴베르의 정세에는 별 변화가 없다. 그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외부인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을 확장하고 있다면, 그 답은 누구라도 알 수가 있으리라.
그들이 리오텐 공국을 노리고 있다면 우리 엘미르 제국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리오텐 공국의 국경을 넘으면 바로 우리 제국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떡하지?’
“아이샤.”
“…….”
역시나 오라버니는 대단했다. 숨소리만으로 나를 추측하다니 말이다. 아마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는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별수 없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
마주한 오라버니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오라버니.”
“……어딜 가던 참이었니?”
“수고가 많았다.”
“괜찮아요.”
“이야기, 모두 들었니?”
“……네.”
“…….”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랬지.”
“……그때가 기억나는구나.”
“할 수만 있다면…….”
“…….”
“계속해서 너를 숨겨 놓고 싶구나.”
“…….”
“…….”
“…….”
“……오라버니가.”
나는 속삭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오라버니!”
“……네. 믿어요.”
“미안하다.”
“……?”
“……?”
“……아.”
“…….”
“……하지만.”
“정말이에요.”
“……아이샤?”
“목표가 생겼어요.”
“……목표?”
“…….”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
“……그래?”
나는 힐난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내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
“너를 믿는다.”
“이만 들어갈래?”
“……그래.”
“얼른 와야 한다.”
“……네, 금방 들어갈게요.”
“룬 님. 거기에 계시죠?”
“…….”
“룬 님.”
“…….”
“너는.”
“…….”
“…….”
나는 눈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네.”
나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요.”
“……저.”
“저…….”
“저!”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그, 그러니까……!”
나는 눈을 꼬옥 감고 외쳤다.
“언젠가는 루미나스 님을 꼭 소환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훨씬 노력하면.”
“…….”
“……가능, 할까요?”
“글쎄.”
“……?”
“그래.”
“……룬, 님.”
“열심히 해 보도록.”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네, 네?”
“……앗.”
“……같이 가지 않으시나요?”
“로즈! 클로에!”
“화, 황녀 전하.”
‘아, 맞다.’
“봤어? 고마워…….”
“……황녀 전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때의 제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다는 걸.”
“…….”
“……흠.”
“아이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아…….”
“그랬구나.”
이내 로즈가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사과 받아들일게요.”
“……!”
“네, 네…….”
“네, ……네?”
“아, 부, 부디…….”
“그, 그럴까요.”
올해로 열아홉인 그는 황궁의 근위대에 들어가 있었다. 마검사라는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받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황궁의 근위 부단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이시스 오라버니가 알려 주었다.
“……비온 공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황녀 전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예.”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아.”
“그, 그런가요.”
“아이샤!”
나를 찾으러 온 것은 클로에였다.
“무슨 일이야?”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계를 가리켰다. 어느새 시간은 밤을 지나서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참.”
나는 깨달았다.
하지 연회에서 등불을 올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사였다. 밤하늘을 발갛게 수놓는 등불을 올려, 늘
만물을 비추어 주는 빛의 신을 향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때만큼은 황족이든, 수도의 일반인이든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소원을 빈다. 풍요를 빌고,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빌고, 마음속의 꿈을 빌고…….
“……예쁘다.”
‘소원이.’
* * *
한참 동안 내가 못 박힌 듯 서서 소원을 빌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이샤!”
“……응?”
“응? 어, 나는…….”
“그, 그게…….”
“응? 말해 줘!”
로즈가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때, 이 다툼에 애슐리도 참전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난 안 궁금해!”
이건 로즈의 소원이다.
이건 클로에의 소원.
애슐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절대 말 못 해.’
“얼른 말해 줘!”
‘……응?’
‘설마 상한 건 아니겠지?’
‘……어라?’
‘이거 설마.’
* * *
갑자기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이샤?”
“무슨 일이야?”
“……설마?”
“아, 아이샤!”
클로에는 새하얀 얼굴로 아이샤의 어깨를 잡았다. 클로에의 태도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인지 애슐리와 로즈 또한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서, 설마.’
‘독을……!!’
‘……내가 안일했어.’
“신관! 이리로!”
이시스는 거친 목소리로 신관을 불렀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신관들이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느려 빠지기는!’
그 반응에 이시스가 머리끝까지 돌아 버리기 직전. 갑자기 아이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이샤의 얼굴은 독을 마셨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딘가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기는 했다.
“……아이샤?”
열병을 일으키는 종류인가? 이시스가 아이샤를 다급하게 살폈다. 이상한 것은 하나가 더 있었다.
고개를 든 얼굴에서,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어어어어어어어…….”
“……?”
“……?!”
“……아이샤?”
“오오라버니이……?”
“…….”
“…….”
“……세상에.”
“술이네요.”
“술인가 봐.”
“…….”
“…….”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박하기 그지없었다. 취한 사람이 자기가 취했다고 말하는 것 보았는가?
아무리 봐도 단단히 취한 아이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클로에는 아까 아이샤가 마셨던 주스 잔을 면밀하게 바라보았다. 포도 주스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 포도주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
“무슨 일이 있니?”
“아이샤, 이시스.”
방금의 소란 때문에 황후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시스는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아이샤가 황후와 황제의 품에 폭 안겨 버린 것은.
“아버지, 어머니!”
“아이샤?”
하지만 은근히 두 사람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아이샤가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애교를 부린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딱히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도 요즘 아이샤가 사춘기(?)가 온 탓에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본 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말이다.
“헤헤헤.”
“두 분 다 너무 사랑해여! 최고!”
“그래그래, 우리 딸.”
“사랑한단다.”
“저도 끼워 주세요!”
그는 간절한 얼굴로 아이샤와 황제, 황후의 앞에 섰다. 하지만 아이샤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시른데.”
“치사하세요!”
“하지만 말이에여.”
“그, 글쎄요?”
‘아이샤.’
“알게써요?”
“으, 응?”
“네에?”
“약속해여, 약속!”
‘…….’
“……약, 속.”
“……앗!”
“약속! 약속해써여!”
“……큭.”
져버렸다. 이시스의 눈에는 온통 낭패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린 걸 어떻게
하겠는가. 이시스는 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로서 약속과 맹세를 소중히 하라고 어릴 적부터
줄곧 교육받아 왔었다.
그는 룬이라는 이 신관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아이샤의 마차에 뻔뻔하게
올라타 있지 않나, 아이샤에게 말을 걸지 않나, 아이샤를 바라보지 않나, 아이샤의 곁에 서 있지 않나…
….
“아아아아아앗!”
“무, 무슨 일이야?”
로즈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로즈는 흘금흘금 이 잘생긴 신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이샤에게는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잘생긴 사람이다.”
“…….”
“…….”
주위는 아까보다도 더 강하고, 차가운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황제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게 하는 게 좋겠군.”
황후는 이제야 아이샤가 음주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이 설명을
해 준 덕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이샤를 황녀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그녀가 일찍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등불을 올리는 행사도 끝났고 연회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기 시러…….”
“그게 뭐지?”
“……자나?”
“숙취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룬은 대답했다.
“…….”
주위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예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룬이라는 이 신관은 어지간히 자신의
신성력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정체를 안다면 당연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 그러시군요.”
“예.”
* * *
“헉.”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 눈가로 내려앉았다.
‘벌써 아침이야?’
‘이상하다……?’
“아,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입니다.”
“응?”
“저, 정말?!”
“응?”
“음…… 아니야.”
나는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세수를 하고, 빗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잠옷에서 실내용 옷으로 갈아입으니 오라버니를 맞을 준비가 끝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몸은 좀 괜찮으니?”
“네?”
“그게 말이다.”
“……그래.”
맙, 소사…….
“……네.”
“괜찮다니까. 아이샤.”
“…….”
‘하…….’
“……네.”
“그러고 보니.”
“네?”
“…….”
‘……하하하.’
‘인생,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식당은 그쪽이 아니라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내
궁인데도 말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라버니는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 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내 회색빛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오라버니가 말했다.
“아이샤.”
“……네?”
“사실 어제 너와 약속한 게 있단다.”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나에게
비밀이 없다면 나도 좋았다.
“네, 오라버니.”
* * *
“루, 리미에.”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옷자락을 살짝 들어서 인사해 보이는 리미에. 작은 숙녀인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둘 다 좋은 아침이야.”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뒷말을 삼켰다.
“…….”
정령력을 늘리는 방법은 꽤 단순하고 쉬웠다. 일단 최대한 정령을 많이 소환해서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 첫 번째였다.
“예를 들어서…….”
“잘했어, 둘 다!”
나는 생각보다도 능숙한 두 사람의 모습에 신이 나 외치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정령들과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저입니다. 황녀 전하.”
“비온 공자?”
“또 뵙는군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아…….”
“…….”
“……감사해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휴.”
Chapter 6. 여름 소나기와 수도 모험
나는 팔랑팔랑 고서를 넘기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테라스 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게 아닌가. 놀랄 법한 이야기였지만, 이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야, 누가
찾아왔는지 뻔하니까 말이다.
“룬 님!”
“오랜만이군.”
“그러시구나.”
나는 싱긋 웃었다. 들뜨지 않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그다웠다. 나는 그가 열고 들어온 테라스의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숲.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황궁의 모습…….
‘휴.’
“룬 님.”
“왜 그러지?”
“혹시…….”
“오늘 저랑 같이 안 나가실래요?”
* * *
남부의 별장에 있었을 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는 하도 바쁘게
지낸 데다가 자유가 없어져서 다시 휴가가 절실해졌던 것이다.
‘네?’
“굉장해요!”
나는 이 비행만으로도 벌써 오늘치의 짜릿함을 모두 즐긴 기분이었다. 루디온을 타고 우리가
날아간 곳은 수도의 골목이었다. 황금새를 숨기고 골목에 내려앉자, 수도의 왁자지껄한 웅성거림이 확
다가왔다.
“……와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골목에서 나와서 수도의 길거리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그 문제를 알아차렸다.
“허…….”
“허억…….”
“어머나!”
“……!!”
“…….”
“룬 님께서는 너무 눈에 튀세요.”
내 말에 룬 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
‘……그러네.’
“그러면…….”
‘딱 이 정도가 좋겠지.’
“저, 저…….”
“…….”
그래도 점원은 직업 정신을 투철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서 꾹
누르면 빨간 물이 나올 것 같았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휴.’
제국의 신앙이 빛의 신인 만큼, 빛의 신관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운수가 좋다는 미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얼마지요?”
“그, 그게…….”
“……2 실버입니다.”
“여기 있어요.”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룬 님.”
“배가 고파요.”
“그런가.”
“……네.”
“……그럴까요?”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우리는 음…….”
“그게…….”
“팁이에요.”
“자, 자, 잠시만요.”
“사람들이 무척 작게 보이네요.”
“그렇군.”
내 말에 룬 님은 쉽게 대답해 주었다.
“헤에…….”
“물고기를 싫어하시는가요?”
“물이 싫은 거다.”
“……?”
그 외에는 수도의 분수대에 가서 동전을 던지…… 려다가 말았던 일이 있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금화를 분수대에 던지면 사람들이 달려들 거라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왜 그러지?”
“네?”
‘……아.’
“딱히 없다.”
“정말요?”
“그래.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도록.”
“아…… 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괜히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
“……그런가요?”
“그래.”
“너와 같이 간다면.”
‘…….’
“아, 그…….”
“그래.”
“어…….”
“…….”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의 심술처럼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여름 소나기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네요.”
톡, 톡.
“우산도 없는데.”
“그치게 해 줄까?”
“……네?”
“이 여름비.”
“아니요.”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왔어요!”
“황궁까지 같이 걸어가요.”
“내가 들지.”
“…….”
“네, 룬 님.”
외전 3. 루미나스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그게 거짓인가, 진실인가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거짓말이라곤 할 줄 몰랐으니까.
놀라운 이야기긴 했지만 구태여 그 인간을 찾아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인간이라도, 어차피 백 년도 되지 않아 죽을 테니.
삶이란 지루함의 영원한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죽지 못한 채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 * *
‘정말 작군.’
그래. 그랬지.
‘쉿.’
‘재미있는 아이군.’
‘왕을 뵙습니다.’
* * *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나러 절벽 밑으로 내려가 속세에 어울리곤 했다. 이것은 분명히
변덕이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세월에 풍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신기한 이유는 단지
정령을 볼 수 있거나 하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행복까지.
“……저.”
“…….”
“그, 그러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결심이, 내 안에서 마치 동그란 파문처럼 물결쳤다. 그래서 변덕이지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도 정말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변해 가고 있었다. ‘루미나스다움’ 에 대한 정의까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신기한 인간.’
‘아.’
아이샤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도 그녀와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작은 아기였지만 말이다. 그 아기가 자신을 이렇게 뒤흔들 줄 알았다면, 자신은
과연 순순히 그녀를 만나러 왔었을까?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