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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빛나는 한 사람──

성실하고, 긍지높으며, 부드럽고.


그 미소는 마치 아침 햇살과 같이 부드럽게 반짝이며.
선을 사랑하고, 정의를 믿으며, 상냥한 당신.
싸움을 싫어하지만, 일단 검을 들면 누구보다 강하며.
밝게 빛나는 검은, 이 세계의 모든 사악한 것들을 물리친다.

──동화의 왕자님.

현실에 왕자님은 없다.


찾아도 의미는 없다.
현실은 더 냉정하고, 혹독한 곳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들으며 자라왔다.


부모에게, 스승에게.
혹은 세계 그 자체에게.

봐, 이리도 냉정하고, 이리도 혹독한.


세상을 뒤덮고 있는 색깔은 검정색. 아무리 노력해도 고작 회
색.
왕자님도, 백마도, 없다.
동 화
눈부신 꿈과 환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왕자님은 분명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그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동화 같은 일은, 세상 어딘가에 분명 있다고.

응, 그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당신
빛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당신
운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때론 떨어져서, 때론 맞닿아서. 언젠가 가까이 기대어.


세상의 검은색을 가르면서.
푸른빛과 은빛을 몸에 걸치고,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검
을 손에 쥔 채.

──그대여, 여기로 와주길.


Fate/Prototype
창은의 프래그먼트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물건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떠한 기적이라고 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것들로 한정된다.
말세에 다시금 구제를.

성도의 재현.
왕국의 수리.
파도의 저편에서 일곱개의 목이, 열개의 왕관이 나타난다.
죄가 깊은 것.
그대의 이름은 적대자.
그 개략은 탐욕.
그 축복은 모독이 되어 휘몰아친다.

널리 기적을 초석삼아.
이에 역설적으로, 잃어버린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려한다.

◀━▶

성배전쟁.
그것은, 마술사들의 소원을 건 살인전이다.
천사의 계제를 받은 일곱 명의 마술사와 일곱 기의 서번트.
일찍이, "비명의 죽음"을 맞은 영령들은 서번트라는 영혼의
그릇을 얻어 현세에 소환,
마스터인 마술사와 함께 한 곳에 모여 사람의 상식을 초월한,
강렬한 싸움을 벌여 마지막 한명이 될 때까지 서로를 죽인다.
마술사, 서번트. 함께 소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때는 1999 년.
밀레니엄
구기 천년기의 끝자락.
약속된 극동의 땅──이 도쿄에서 최신의 성배전쟁이 시작
된다.

그래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서번트, 한 기.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저 사람.
백은의 갑옷을 입은 저 사람.
최하위, 7 계위 천사의 마스터인 나를 만나,
이 성배전쟁을 함께 싸우리라고 다짐해주는 1 계위 서번트.
나를 지키겠다는 기사.
세이버.

그 때의 나에겐 너무나 크게 보였어, 당신.


나도 모르게, 나는 8 년 전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옆을 바라보
고있어.
8 년 전. 그때 당신은 언니의 옆을 지켰고, 분명 내가 알지 못
하는 곳에서 싸워왔겠지.
그런데 난 많은 걸 몰랐어.

당신에 대한 것도.
아버지에 관한 것도.
성배전쟁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도.
언니가 뭘 하고 있었는지도.

언니──.
마나카 언니.

누구보다 빛나던 사람.


당신과 함께, 8 년전 성배전쟁을 앞질러 간 사람.
당시의 난 아직 어려서,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것도 많지만,
분명 기억해.

예를 들면, 그래.
나는 언니를, 계속──

◀━ ▶

닫힌 커튼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


창문 바로 앞의 나뭇가지에 있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며 시간
을 알리고 있다.
아침 기운. 밤의 어둠과 냉기는 거짓말처럼 어딘가로 사라져,
잠들기 전까지 "내일"이었던 것이 "오늘"이라는 모습으로 찾
아왔다.

「으─」
아직은 다소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부드러운 침대 속에서
사죠 아야카는 멍하니 눈을 떴다.
햇살. 작은 새들의 지저귐.
(이제 아침이야)

자신의 체온으로 적당히 포근해진 침대의 느낌에 기분이 좋


아진다.
이런 온기를 느끼며 빈둥거리는걸 좋아하는 부류다.

(자명종, 아직 울리지 않았네)

약간 기대를 하며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머리맡에 둔


디지털 시계를 손에 쥐었다.
담요에서 나온 오른손에 음산한 공기가 닿았다. 이 감각도 좋
아하는 부류다.
그래도 추운건 춥다. 시계를 바로 담요 속에 집어 넣었다.
연도와 날짜, 요일까지 표시하는 꽤 고급시계다. 작년 생일선
물로 받은 것.
더 귀여운걸 갖고 싶었지만, 아버지한테 불평할 마음은 없었
고 벌써 일년 이상을 쓰고 있다.

【1991】
평소 의식하지 않는 연도를 흘끗 보고 시각을 확인했다.

【AM 6:14】

오전 6 시 14 분.
또래 여자아이라면, 분명 대부분은 두번째 잠에 빠질 시간.
그러나 아야카의 생활습관은 일반적인 여자 초등학생들과는
조금 달라서
디지털 표시에 다소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딱이네」

중얼거리며, 알람 스위치를 껐다.


자명종이 울리도록 설정한 시각은 오전 6 시 15 분.
그래서 딱이다. 더 이상은 침대 속에 있을 순 없다.

느릿느릿 담요 속에서 나와, 스멀스멀 잠옷을 벗는다.


역시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갑다. 추워.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의자 위에 깔끔히 접어 둔 옷을 손에 들
고,
벗을 때보다는 다소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혼자서 갈아입을 수 있게 된건 언제부터였을까.


적어도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혼자 갈아입을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옷을 갈아입혀진 기억은 떠오
르지 않는다.
아버지가 해주었는지, 엄마가 해주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아버지는 아니겠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확신만은 있었다.

「좋아」

옷을 다 갈아입고, 옷장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의 앞에 섰다.


제대로 갈아입었다. 괜찮아.
밝은 빨간색의 상의는 아야카가 좋아하는 옷이다. 녹색의 단
추가 상당히 귀엽다고 생각한다.
벽걸이 시계를 확인하면서 빗으로 빠르게 머리를 빗는다.
머리는 그다지 긴편은 아니니까 금방 끝난다.
괜찮아.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해야지. 그래도 빠듯해서 마음이
급해진다.

(요리도 한다면 더 일찍 일어나야 해)

혼자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만.
요리는 아직 하지 않는다. 아버지한테 맡기고 있다.
집안 일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는 아버지 혼자서 하고 있다.
가끔 가정부가 오는 날도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방이 많은
사죠 저택은 결국 아버지가 관리한다.
아야카가 집안 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버지의 지시가 있어야
만 한다.

「아버지, 이제 일어나셔야죠?」

어젯밤도 늦게까지 깨어있었을 아버지.


분명 오늘도 아침 식사 준비를 혼자 하겠지만, 아야카가 그걸
도와드릴 일이 거의 없다.
겨우 상을 차릴 준비를 돕는 정도.
아침에는 아야카는 밖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 정해진 일과.

즉──흑마술의 훈련. 공부와 실천.


복도의 공기는 방의 공기보다 훨씬 차갑다. 내뱉는 호흡이 하
얗다.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세면장으로 간다.
아야카를 위해 아버지가 만들어 준 발판을 두고
그 위에 올라서서 공기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아침 특유의 하늘거리는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졸음의 흔적은 사라지고 의식이 밝아왔다.


자신의 수건으로 얼굴을 빡빡 닦고, 응,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다.
거울을 보면 앞머리가 많이 젖어버려서 핀을 꽂아야겠다고
새삼 생각한다.
거울 속의 자신은 화난 듯한 얼굴이다.

「이상한 얼굴 하지마, 아야카」


다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제서야 깨달은 한 가지.

「어라?」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아?


근처 어딘가 다른 집의 아침일까.
베이컨과 계란 냄새라면 사죠 저택의 아침 식단으로서 이상
하지 않지만,
이 냄새는 베이컨 냄새라는 느낌도 들지만, 다른 요리의 냄새
인 것 같기도 하다.
요리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도 안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뭘까,라는 생각을 일단 미뤄두고, 복도를 쭉 걸어간다.


끝까지 걸어가서 돈다.
아야카는 가든으로 향했다.
세면장에서 나와 복도를 계속 걸었던 곳에 있는 문을 열고 밖
으로 나왔다.
다시 복도를 걸어가서 그 끝의 유리문을 열어 겨우 도착한다.
아야카의 집은 크네,라고 반 친구가 말한 적도 있다.
그래도 계속 지내왔던 집이라 그렇게 느낀 적은 별로 없지만,
가든에 올 때에는 새삼 느끼게 된다.

크다고 할까. 넓다고 할까. 그래도 싫지는 않다.


걷는 거리가 길다고 느끼더라도.
일상에 대한 마음의 무게를 느껴도.
여기에 오는 것 자체는 싫지 않다.
──마당도, 정원도 아닌.

Garden
──가든.
우거진 푸른 나무들. 꽃. 수십가지의 식물. 거기다 몇 마리의
비둘기.
아야카의 모습을 보고는 몇 마리가 주변으로 몰려온다.
일반적인 집의 마당보단 식물이 많다고 생각하고,
정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과장된다는 생각에 역시,
가든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오래 전에 「왜 가든이라고 부르는거야?」라고 물어본 적이 있


지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래서 아야카는 마음대
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를 가든이라고 이름 붙인건 아버지가 아니라고.
분명, 엄마가 지은 이름일 것이라고.

정확히 분류한다면, 분명 온실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벽과 천장은 지금도 아침 햇살을 충분히 받
아들이고 있다.
산성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니까,라며 아버지가 훌륭하시
다고
가정방문 때 학교 선생님이 말했지만, 정말 그런 이유에서 인
지는 모른다.
애당초 가든을 만든 사람이 아버지인지 아닌지 조차.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이 아니라 좋은 아침이에요.


바싹 다가온 비둘기를 무시하고, 유리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만든 전용 장소에서 말을 건다.
직사광선을 맞으면 안되는 약병과 책이 쌓여있는 곳.
아버지의 연구실 같은 곳이며 아야카의 아침 공부를 하는 곳.
하지만──

「어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만다.


항상 이시간에 아버지는 여기에 있었는데.
오전 6 시 반부터 7 시 반, 아침 식전 1 시간 동안 아버지한테
흑마술을 배운다.
이게 아야카의 아침 일과.
인데, 여기엔 아무도 없다.

「아버지」

여기에 있지 않을 뿐, 가든의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몰라 불러


본다. 1 초, 2 초, 기다린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대신 주변의 비둘기 몇 마리가 울어댄다.

「너희들 말구」

생각해보자. 오늘은 아버지가 흑마술 공부를 가르쳐주지 않


는 날, 이던가?
그래도 일과이다. 지금까지 일과가 바뀐 적은 없다.
매일 숙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강의와 아침 훈련은 기본적
으로 항상 있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침이라는건 결코 있을 수 없다.
미리 말하셨던 걸 잊어버리고 혼난 적은 적어도 없다.
그래서 혹시 어젯밤에 오늘 아침에 대해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뭐였더라……」

──지금부터.

「시작된다, 였나」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참가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사죠 가(家)의 비원을 위하여.


──아니, 그건 우리 마술사의 대원을 위해 필요하다.

「비둘기한테는 말 걸지 말라고 전에도 말했잖아, 아야카」

낯익은 목소리.
곧바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되돌아 본다.

「아버지」

「제물에게는 소리를 내지도, 말을 걸지도 말라고.


우리는 결코 희생물에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동조하면 흑마술사를 혼란케하고 주저하게 만든다고 내가
그렇게 너에게 말을 했거늘」

「……네」

고개를 숙인채 아야카는 끄덕였다.


분명, 몇번이나 말씀하셨던걸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의식하
지 않으려했다.
그랬는데, 그만 주위의 비둘기에게 말을 걸고야 말았다.
지금도 이렇게나 따르는 비둘기들.
가든으로 들어섰을 땐 몇마리였던게 벌써 열마리 가까이 모
여있다.

「비둘기와 사람은 대화할 수도 없고, 말을 나누지도 않아.


원래는 동조할 상대는 아니지만, 어린 너라면 당장이라도
느끼게 될테지」

「……」

「이건 다 널 위해서야. 아야카」

몇번이나 하셨던 말씀.


매일 아침마다 하셨던 말씀을 또 하시게했다.
아아캬 자신도,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해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렇게 따르면, 도저히──
아버지에게 반항할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흑마술과 제물은 불가분의 관계야.


제물의 고통은 곧 흑마술이 얻는 힘의 근원이지」
이것도, 몇번이나 하셨던 말씀이다.
매일 아침 들었던 것. 잘 잊어먹는 아야카라도 이건 역시 잊
지 않았다.

「열심히, 할게요」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숙인 얼굴을 드는건 무리였지만.


샌들
숙인 고개의 시선엔 실외화의 앞을 쪼고있는 흰 비둘기가 보
였다.

「아니다. 오늘 아침은 상관없어. 이제 식당에 가있으렴」

「네」

──어라?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몰랐다.
매일 아침, 식사시간 전까지는 절대 가든 밖으로 보내주신 적
이 없는데.
이제야 아야카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이쪽을 보고 계시지 않았다.
시선은 안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계신건지, 한
순간, 알 수 없었다.
다이닝
아마, 식당 쪽──

「아침 식사시간이야. 오늘 아침은, 마나카에게 가보렴」

혼자 걸어온 복도를 둘이서 돌아온다.


왜, 라고 아야카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이니까, 응, 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은 「네」다, 라고 혼내시는 말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을 뿐, 왜,라는 의문만이 큰 소용돌이가 되어 아
야카의 머리 속에 퍼지고 있었다.

「……」

가만히, 앞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올려다보며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말해주시는 걸까.
말해주시지 않는 걸까.
그다지, 마술과 관계없는 일에는 말을 아끼시는 분이라는 인
상이 아버지에게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에 관해서 물어봐도 특별히 알려주신 적이
없다.
가든의 유래에 대해서도.
그럴 땐 역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도──
「마나카가 말이지」

아버지는 드물게도 입을 열었다.


이쪽을 돌아보지는 않은채.

「아침식사를. 미안하지만 네가 상대해주렴」


「언니?」

「나보단 네가 더 낫겠지」

「?」

아버지의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아야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침식사 시간에는 항상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아야카, 가
족의 3 명이 하기에 식당에 언니가 있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
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빠르다. 아마 이제서야 오전 6 시 반을 막
지났겠지.

「언니, 배가 고파서 그러려나」

말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언니──
아야카보다 6 살 위인 언니, 사죠 마나카.
언니의 존재는, 아야카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식사 시간을 당겨달라고 싶어한다던가, 그런 "보통의 아
이"나 할 말을 언니가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가슴 속에 있
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요리를 하고 싶어해」

「요리?」

몇 번인가, 언니가 요리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너무 바빠 시간이 없을 때이지, 스스
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말은 언니가 스스로 하고 싶어한다고
말하신 것 같았다.

「언니가 말했어?」

「그래」

「그렇구나」

순순히, 아야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러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언니가 그렇게 말
한 이상 분명.
안벽한 요리를 해낼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왜나하면──

◀━ ▶

언니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귀엽고, 아니 예쁘고. 뭐든지 잘하는 사람.

「아 야카, 접시 가져다 줄래? 토스트도?」

「응, 언니」

「아, 그게 아니라, 베이컨하고 계란후라이를 올려야 하니까,


작은 걸로.
있잖니, 네가 전에 깨뜨린 적이 있던거.
그리고말이야, 토스트는 두꺼운게 아니라 얇게 잘려진거」

「앗, 으, 응──」

봐, 지금도 그렇잖아.
부엌에서도 척척. 하지만, 굉장히 우아하게.
아버지 대신 언니가 부엌에 섰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리, 필요하니까 준비한다는 느낌이었다. 효율적
으로, 솜씨는 좋게.

이런 식으로 지금처럼──마치 요리사처럼 시원하게 하는


느낌도 없었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느낌도 아니었
다.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전에도 대단했지만, 뭐랄까.
같은 대단하다는 말이지만 의미는 다르다고 해야할지.

성실? 그런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식단의 수도, 봐. 보기만해도 다르다는걸 알 수 있다.
예전엔 베이컨 에그에 토스트에, 샐러드에, 우유.
지금은 베이컨 에그에 토스트에, 샐러드에 우유에, 키드니 파
이에, 대구의 토막과 포테이토를 튀긴 것에, 치즈랑 햄, 포리
지랑 스콘에, 홍차, 거기다가 디저트에는 복숭아를 자른 것과
플럼.
전부 못 먹을 만큼, 잔뜩!
이 모든 것을 재빠르게, 정확히 언니는 만들고 있다.
부엌 칼을 쥔 새하얀 손 끝조차, 보기만해도 탄식이 나온다.
나와 나이는 6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이 사람은 아름다운 걸까.
초등학교에도 예쁜 아이는 있지만, 허나 다르다, 언니와는
──

「고마워, 아야카. 후후, 왜그래 멍하니」

「아무것도 아냐」

언니가 아름다워서, 라고 어째선지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예쁜, 마나카 언니.


부엌은 성의 넓은 홀의 일부이고, 언니는, 그곳에서 뱅글뱅글
춤을 추는 공주 같았다.
잔뜩, 잔뜩 요리를 하니, 어째선지 기뻐 보여. 즐거워 보여.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살아있을 적 어머니
는 이런 느낌이었을거야,하고 생각한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에, 반짝반짝. 언니, 정말 아름답다.


지금까지도 그랬었지만, 어째서일까.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아름답고, 눈부시고.

「영국 사람들은 대구를 좋아한다고 책에 적혀있더라」

영국 사람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름답다.
웃는 얼굴이 무엇보다 아름답고, 어떤 그림책이나 인형의 공
주님보다 예쁘다.
이렇게 기뻐하는 언니의 얼굴을 보는건, 얼마 만이었을까.
뭐든지 잘하는 사람. 언니.

공부도, 흑마술도, 뭐든지 잘하고, 산수 연습도, 흑마술의 훈


련도 이도저도 못하는 나와는 달리, 정말. 뭐든지 잘한다.

뭐든지, 그래.
비둘기도.
고양이도.
나처럼 꼼짝 못하진 않는다.

뭐든 잘하는 언니는, 「해내서 기뻐」라거나, 「해봐서 즐거


워」라는건, 아마, 없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나보다.
봐, 언니, 이렇게나 즐거워 하는걸. 웃고 있잖아. 아름다워
──

「저기. 맛 좀 봐줄래, 아야카」

「으, 응. 괜찮아?」

「괜찮아, 자, 아─앙 해보렴」

들은대로, 입을 열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쥔, 튀긴 생


선 한조각을 넙죽.
기름으로 만든 요리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때?」

「맛있어……」

정말, 맛있다.
기름으로 만든 요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바삭하고 부드러워, 전혀 기름진 느낌이 없다. 맛있어.

「샤워크림의 주문이 먹힌거 같네. 좋아, 아야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주문?」

「요리를 맛있게 하는, 비밀주문. 마술보다 대단한거야」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계시던 아버지가 사레가 들려 기


침을 하시는게 들렸다.
언니나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아
버지가 말하셨다.
아마, 아버지는 깜짝 놀랐을거라고 생각한다. 언니의 말에.

마술. 주문.
나도 알고있다.
그럴 것이, 마술이란건, 정말 있는거니까.
우리의──

「그러니까, 마술보다 대단한건, 그……」

「뭐?」

「아버지가 말하길. 마술보다 대단한건, 하나 밖에 없다고」


「그렇네. 그래서, 그걸 썼어」

언니.
당연한건데도, 무슨 말을 하는걸까.
그런 표정이었다.
반짝반짝. 아침의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벚꽃잎과 같은 색을 지닌 입술에서 들려오는 소리.
마치, 정말로, 그건──

「사랑의 마법을 말이야」

진짜 마법 같아.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

「후후. 아야카에게는, 아직, 모르겠지. 사랑의 마법이라는 걸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언니는,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마치, 내 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마술사가 사용하는 어떤 신비 보다 대단한거란다」

「──자, 먹어봐」

아침햇살의 반짝임을 등진 채, 소녀는 말했다.


테이블
동쪽 창가에 서서, 여러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가리키며,
집 밖에서 아직도 지저귀는 새보다도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어딘가, 조심스러운 표정도 지으며.

가련한 소녀였다.
햇살에 비쳐질 것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
옅고, 맑은 색의 눈동자.
비취색의 드레스는, 그녀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반짝임으로 활짝 핀 꽃 한송이.

그래. 그는 소녀의 모습을 마음 속에서 형용한다.


예를 들어, 숙녀를 대하는데 능숙하고 전아한 기사라면,
즉흥적으로 소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대접받은 수많은 요리에 감사를 표하는 시 하나를 노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는 숙녀를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았
다.
그렇기에, 단지 소녀를 바라본 채.
「고마워」

짧게 대답했다.
감사의 뜻을 담아서.

「저기……」수줍어 하면서, 소녀는 미소를 짓고는

「입맛에 맞았을까나, 생각나는대로 만들어봤어. 너무 많이


만들었나 싶기도 하지만」

「아니. 너무 과분할 정도야」

「무리하지 않아도 돼. 먹고 싶은 만큼만 먹어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진다.
소녀의 시선이, 그의 모습에서 식탁으로 슬쩍 옮겨졌다. 찰나
의 순간이었다.

「먹어주었으면……」

햇살을 뒤집어쓴 채 춤을 추는 착한 요정이 있다면 이런 것일


까 할 정도의 명량함. 화려하게 만개하고, 아침 이슬에 촉촉
히 젖은 커다란 꽃.
그것의 반짝임이, 어두워졌다.
요정은 숨고, 만개한 꽃은 시간을 되돌려 꽃송이를 닫아버렸
다.
시선이 흔들렸다. 소녀의 표정은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식탁에 차려진 요리의 산을 앞에 두고, 이제서야 똑바로 정신
을 차렸다.
분명, 평범한 사람의 한끼 식사량으로는 너무나도 많다.

계란 요리. 베이컨 에그, 스크럼블 에그, 포치 에그.


각각 6 인분 정도일까.
참고로 포치 에그는 토스트에 끼워져있다. 이것도 6 인분.
샐러드. 초록색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이것도 6 인분 정도.
고기 요리. 흰색의 고기용 버섯과 함께 구운 소시지, 이것도
6 인분.

또한, 소의 내장과 고기에 버섯을 재료로 한 키드니 파이가


통째로 하나.
아마, 잘 구워졌겠지.6 등분했지만 처음에 1 인분이라고, 말했
었다.
포리지
우유를 탄 보리죽도 6 인분.
대구 토막과 포테이토를 기름에 튀긴 것은 고봉으로.
복숭아를 썬 것에 건포도를 곁들인 디저트도 나름대로.
식후를 위해 준비한 스콘과 크림도 상당한 양이 케이크 스탠
드에 놓여있다.

대부분 그에겐 낯선 음식들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소녀가 알려주었던 것들 중 이름과 형태가 딱
맞는 것들만 해도.

「양은 문제가 없어」

「그래도──」

「식사는 모름지기 전장에 임하는 기사에게 활력이 되는거야.


많은게 문제가 되선 안된다구」

그러면서 그는 미소를 띄웠다.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표정이지만, 사실 이 정도의 양이 무
리란 얘기는 아니다.
방금 말한 것도 일종의 사실이다.
막상 전장에 임하는 기사는 큰 활력을 필요로 한다.
고기도, 고구마도, 술도 있는 대로 다 먹어 치우는걸 보여주
는 대담 정도는
갖고 있어야 기사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진 않다.

물론, 어떤 일에도 예외는 있고 한계도 있다.


순간 뇌리에 떠오른 원탁의 기사단도,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한
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아무튼 적어도 자신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거짓말은 아냐」

긍지와 검에 걸고.
결코 거짓을 입어 올리진 않는다.

「네가 한 것들, 모두 줘. 마나카」

사죠 마나카──
그것이, 소녀의 이름이었다.

아침 식사를 시작하고 잠시 후.
말했던 대로 요리를 입에 넣고, 대략 절반정도가 사라질 쯤에
서야
소녀의 표정은 밝아지고 있었다.
맛있네,라고 그가 말할 때마다 소녀는 순간순간 밝아졌다.
요정과 꽃의 분위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소녀도, 그 자신도.
「그래서 말이지」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소녀가 말한다.


꽃이 말을 한다면, 이런 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말할만 한 목소리였다.
아발론
그 요정향에 사는 소녀들은 이런 목소리일까, 라고 할 정도
로.

「생선 튀김의 샤워크림은 자신있었어.


기름에 튀긴 건 정말 싫어하는 아야카가 맛있다고 말해줬
으니까.
이건 정말, 이라고」

「응, 그건 정말 맛있었어」

「후후, 마음에 들어서 기뻐」소녀는 정말 기쁜 듯, 눈을 가늘게


뜨곤,

「오늘 아침은 말이야, 현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9 세기부터 20 세기 사이의 영국식 아침식사를 해봤어.
역시 고향의 음식 맛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응, 맛있었어」

「정말?」

「응」

「정말? 정말?」
예스, 마이 레이디
「그래, 나의 주인이여. 네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그러자,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행이야──」

고개를 비스듬히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그도 이에 응하여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굳이 말하자면──영국이라는 말에 대해 그는 친근감을 느
끼진 않았지만,
소녀의 마음은 전해졌다. 충분해.
정말 맛있었다. 그가 아는 요리와는 노력, 공정부터 다르다.

아마, 긴 세월에 의한 문화의 단절도 있었을 것이고,


이국으로부터의 뒤섞임도 있었을 것이다.
입에 넣었던 요리에서는 그러한 시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 곳의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써준
것은 고맙다고 생각한다.

소녀가 순수한 웃음을 짓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떠올리며 이러한 행
동을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순수한 무언가를 받았다.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긴장감 같은 것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나이에 어울리는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소녀에게, 그
저 미소만을 지었다.
라고──

「저기, 세이버」
「왜?」

굳은 표정을 지은채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세이버
그는 소녀를 바라본다.

「나, 오늘 아침에 알아낸게 한가지 있어.


아니, 분명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거겠지만」

응, 이라면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요점은 말이야, 요리랑 같은거라는거야」

뭐가, 라고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분홍빛의 입술


에서.
조용히, 일체 기분을 변화시키지 않고, 당연스럽게.
예를 들어, 잔을 돌리면 내용물이 넘치게 될 것처럼.

「──성배전쟁의 방식」

◀━ ▶

성배전쟁이란 것은, 투쟁이다.


우리에게 있어, 투쟁과 같은 것은 결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
다.
본래, 세대를 뛰어넘는 부단히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신명을 마치는 것이야 말로 마술사 본래의 길.
연구나 가문을 지키는 과정에서, 개인 혹은 사회와 충돌이 발
생하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투쟁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일은 통상적으론 없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성배전쟁이다.

참으로 단순명료하고 분명한 이치다.


성배가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은 단 한가지.

이에 관해,성배전쟁에 참가하는 마술사──『마스터』는 7 명


6 명을 배제시켜야만 한다.

투쟁은,피할 수 없는 목적이라고 각오한다.

(오래된 한 권의 노트에서 발췌)

◀━ ▶

「요리랑 성배전쟁은 분명히 같은거란걸 알았어」

소녀의 말은 이어진다.
명량하게──
큰 봉오리를 가진 꽃의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로,한점의 흐림
없이.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면, 필요하지 않도록 머리를 쓰면 돼.


푹 끓인요리를 보글보글 계속 끓이는건 시간이 걸리지만,
압력냄비를 사용하면 간단히 끝나잖아?
전동믹서도, 전자렌지도 마찬가지야」

히, 라고 하면서 검지를 세우곤.


표정은 마치, 어린 아이가 뭔가 생각에 빠진듯한것 같은.
아니. 그런가. 눈 앞에 어린 소녀로서는 틀림없이 좋은 생각
이 떠올랐어
, 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찰나의 순간에 그는 이해했다.


소녀의 티 없는 순진함을.
소녀의 순수를.
오늘 아침의 요리와 선배전쟁은,그녀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것.

그것은, 부족한 경험 에서 오는 어린 만능감,


성배전쟁이라고 하는 과혹의 투쟁을 이해하고 천진난만함을
드러내는걸까.
아니면, 압도적인 천부의 재능이 그렇게 말하게 하는걸까.

아마도 후자.
이 젊음이 마스터로 선택받은 이상.

「그리고, 역시 미리 말해두는데, 목적을 위해서 사전에 준비


를 해두는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말이 이어진다.
그의 시선을 받아 들이면서.

「서번트는 모두 강하니까. 역시, 마스터를 노리는게 제일 효


율이 좋고.
다시 생각하면, 마스터 본인을 노리는 것보다도,
그보다 더 약한 약점이 그 사람에게 있다면, 그걸 노리는게
제일 효율이 좋아」

말은 이어진다.
약점──일반적인 마술사라면, 가계 그 자체. 가족. 자녀.

「그러니까, 자녀의 납치 혹은 살해?」

그가 침묵을 유지한 것은, 소녀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였다.

이젠 입을 열 수 밖에 없다.
마스터
하지만 그건, 자신이, 주인인 마술사에게 전략,
전술적 의견을 얘기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마나카」

참을 수 없을 뿐이다.
소녀가, 가리지 않고 자랑하며 순응하는 모습에
성배전쟁에. 살인에.
6 인 6 기를 모두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은 없
어,
라고 이미 생각하는 것을.

그것은, 성배전쟁을 이기고 살아남으려하는 마술사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지금 시작된 것은 목숨을 건 투쟁이나 다
름없다.
자신이 소원을 위해서, 마술사도, 영령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승리를 바랄 것이다.
그래도──

「싸움에서 도망치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해」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식탁에서 조금 떨어진 창문 근처에 서
서, 그는 말을 이었다.
기사도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아마, 먼 현대의 소녀에 이해를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
다.

「아마, 넌 벌써 그걸 가지고 있을거야」

강제적인 말로는 안된다.


마스터
왜냐하면,그의 주인은 다름아닌, 이 소녀니까.

「다만, 관계없는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건 안돼.


그것이 어린 사람. 힘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돼」

눈 밑에 있는 순진함에 조용히 말한다.


분명, 어린 아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기 위해.
적어도, 이 가련한 소녀가 피투성이인, 어긋난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야, 세이버」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침 이슬에 젖은 꽃이 시원하게 부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며, 변함없는 미소가 그곳엔 있었고, 충고
의 말을 전하는 그의 의사를 가로 막았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그래, 당신이 다칠 필요는 없어.
서번트와의 전투에서, 1 계위인 당신이 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싸우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말하면서, 소녀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비취색 드레스 위의 가슴에.
버튼
가느다란 손 끝이, 천천히 단추을 풀고──

「난 그런거 견딜 수가 없어. 그리고 말이야」

드레스 안의 가슴이 드러난다.


눈처럼 흰 피부와, 그곳에 새겨진 검은 문양이 드러났다.
치천사, 일곱 날개의 령주.

「이거, 쓰고싶지 않아. 절대로」

짧은 말.
여기에 담긴 의미를 그는 간신히 느꼈다.
서번트들이 본격적으로 부딪치는 전투가 진행된다면
이 령주에 담긴 방대한 마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국면이
뒤따른다는 것도,
분명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이 소녀는 피하려하고 있어?
어째서──라고 눈길로 묻자, 소녀는 점점 표정을 바꾼다.

──뺨을, 살짝 붉게 물들이면서, 애달프게.


──사랑을, 고백하는 숙녀처럼.

「이건, 당신과의 나의 관계니까」

──하나의 령주라도 닳게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이것만이, 당신과 나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관계니까.

그렇게, 소녀는 속삭였다──

◀━ ▶

령주.
천사의 계제
그것은,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말살하는 궁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열쇠.

성배전쟁에서는 강력한 무기가 7 명의 마술사에게 주어진다.


일곱 종류 일곱 기의 영령.
천사의 계제를 얻은 마술사 한 명당 한 종류 한 기.
우리는 이것을 『서번트』라고 부른다.

마술의 신비를 뛰어넘은 것.


사람이 꿈꾸는 최강의 환상.
마을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으며, 그들은 현대병기에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본래는 마술사 정도의 신비사용자가 사역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역사의 어딘가에 이름을 남기고, 전설을 만든 영웅들의
현신. 성배의 방대한 마력에 의해 소환 및 현계가 가능한 최
강의 존재.

영령은 막강하며, 이질적인 존재다.


대부분은 사람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사
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마술사의 몸에 새겨지는 것이 바로 령주.


마술을 뛰어넘는 존재이며, 영령을 지배할 수 있게 하고, 성
배의 힘 못지 않다.
합쳐서 3 획.
즉 영령에게 세번의 강제 내지는 강화를 이끌 수 있다. 이것
없이 성배전쟁은 성립할 수 없다.

(오래된 한 권의 노트에서 발췌)

◀━ ▶

「효율이라고, 네가 말했어」

재차 그가 말했다.
기억은 정확했다.
어제, 소녀와 그녀의 아버지인 마술사에게 들었던 현시점에

예상한 다른 마스터의 정보는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마술의 명문가, 레이로우칸 가문.


마스터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현 당주에겐 딸이 있는데 이
소녀는 비슷한 또래이다. 면식도 있다.
저쪽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친구같다,고 소
녀는 확실히 말했다.

기억정보를 정리하고, 신중히, 그는 할 말을 골랐다.


사람으로서 올바른 길을.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마스터의 아이를 노릴거라고, 네가 말했어


친구를 네 손으로 공격하는 것 따위, 너에게 시키고 싶지 않
아」

「상냥하네, 세이버」

「마나카」

「그래도,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야. 하지만 넌 똑똑해,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분명, 성배를 얻어 소원을 이룰 수
있을거야」

「응」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는 또 그에게 미소를 보인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전해지지 않았다.
닿지 않았다.
충고하려는 말은 들었을 텐데, 대화가 성립하질 않는다. 어째
서?
가슴 속의 조바심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결론을 서둘러 말했다. 결정적인 한마디를.
즉──

「사람을 죽인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마나카」

「어째서?」

목소리, 말.
그건 커다란 충격과 함께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전쟁터에서 휘둘러진, 강철로 만들어진 큰 망치로 일격,
하늘을 찢고 땅을 꿰뚫는, 난폭한 용의 발톱과 송곳니.
그것들조차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된, 그것은 말과 표정이라
는 칼이었다.
소녀 사진이 그걸 칼이라고 느끼지 않고 있는게, 깊이, 그의
가슴 사이를 뚫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방금, 이 소녀는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식사에 대해, 여동생
에 대해.
그렇다면 아직 가망은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낸다 말을.
아직이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아침시간을 함께 보낸 네 가족. 아버지와 여동생.


그건 같은거야. 분명 리쿠도레이카의 마스터에게도──」

「왜 그런말을 하는거야?」

──미소.

「당신에게 성배를 주기로, 결정했어」

──반짝이는 눈동자.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줄게. 당신이 브리튼을 구원할 수 있


도록」

──아름다움과 함께.

「그러기 위해선」
──반짝임에 활짝 피어난 꽃, 한송이.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할게」

──단지.

──소녀는, 눈부시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뿐.

빛이───
불이 꺼져 있을텐데도 이따금 눈부신 빛이 쏟아진다.
벽돌과 비슷한 콘크리트 소재로 만들어진 바닥이 저절로 깎
여져 나간다.

조금 늦게 울리는 새된 금속음.
동시에 바람,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흉악한 충
격이 주위에 휘몰아치고, 깊이 뿌리박힌 나무들이 꺾여 날아
간다.
초록 잎이 날아오른다. 나무껍질 파편이 사방에 튄다. 가로등
이 깨진다.

어두운 빌딩가의 한 모퉁이.


그 광경을 목격하는 자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우연히 지나간다더라도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이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JP 이케부쿠로 역에서 약간 떨어진 초고급 빌딩 아래.


깊은 밤 도시의 어둠 속에서, 이런 일이, 눈동자에 비치든 그
렇지 않든───
시각정보를 일반인의 뇌로는 정확히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초고속으로 교차하며 칼날을 맞부딪치는 사람 그림자가 둘
있는 듯 하다.
눈으로 봤다고 해서 누가 믿겠는가.
이것을 어떻게.

「과연 제 1 위 서번트」

목소리가, 울린다.
한쪽 그림자가 우뚝 다리를 멈췄다.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키를 충분히 뛰어넘을 길이의 거대한 금속덩어리를,
가뿐하게, 한 손으로 거머쥐고───

「글레이브(剛劍)에요.
그러면서 빠르고, 정확하고, 빈틈이 조금도 없죠.」
랜 서
창잡이가 말했다.
너무나 길고, 너무나 거대하다.
그렇다, 그것은 '창'이다.
끝 부분이 칼날처럼 폭이 넓은 형태인 금속덩어리는,
이 20 세기 현재에는 서적이나 영상과 같은 기록,
혹은 박물관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력 이전부터 대략 근대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의 투쟁
에 있어
중요한 무구로 위치해 왔고,
많은 용사들이 목숨을 맡기고 목숨을 빼앗아 온 무기다.
손잡이가 긴 칼. 전장의 꽃. 그게 바로 '창'.

「꽤나...」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케부쿠로 최대의 초고층 빌딩인 선샤인 60 옆에서.
바로 지금도 이따금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가는 수도 고속도로
의 고가도로 위에서.
철갑옷을 몸에 두른 여자가 그렇게도 길고 거대한 '창'을 손
에.

「꽤나, 이름 있는 용사였을 것 같군요.」

───그렇다, 중얼거리며 웃음짓고 있으리라곤.

◈ ◈

과연 그렇군, 창인가.
이 정도로 훌륭한 창을 보게 될 줄이야.
영령 7 기가 모여 치뤄지는 성배전쟁이 어떠한 것인가
서번트에게는 필요한 전제지식이 성배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마술사들의 마력 충돌, 서번트 끼리의 거대한 힘의 충돌,
영웅담에 나오는 기적과 절기(絶技)의 구현.
그것은 물리법칙조차 비틀어버리는 경탄의 경지,
세계에 있어 일종의 유린이자 신화의 재연(再演)이기도 하
다. 라고 했나.

눈앞의 여자는 거대한 창을 가뿐하게 한 손으로 거머쥐고 빙


글 회전시키고 있다.
종이로 되어있진 않나 착각할만한 모습이나, 큰 방패로 오인
할 정도로 거대한 칼날로 되어있는 창끝의 중량은 이미 몸으
로 확인한 바 있다.

무거운 창이다. 인지를 넘어서 있다.


아마도 100 킬로그램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손잡이 부분까지 강철로 된 대형창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 지나치게 거대하고 무거운 창은 물리를 넘어선
것일테지.
실로 창의 영령이 가질만한 무기라 할 만하다.

「과연」

마음 속의 감탄을───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싣는다.


백은색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갑주를 두른 모습으로.
그는───세이버는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당기며 자신의
'검'끝을 뒤쪽으로 내린다.
특기인 준.비.자.세.의 한 가지.
현대에 있어 이미 과거의 무기일 '검'을, 그는 이렇게 양손으
로 '준비해'보인다.

싸우기 위해.
칼날을 맞대기 위해.
눈 앞에 버티고 선 창을 든 적을 상대하기 위해.
약 240 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초고층 빌딩 아래.
완만한 계단이 몇 개 겹쳐져 실로 발디디기 힘든,
어떻게 보기엔 중간 규모의 공원 같아 보이는 가짜 벽돌 만들
어진 광장 한가운데서.
계단 몇 개 위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적과 대치한
다.
긴 머리칼은 전장에선 방해만 되기 마련인데, 자신감과 실력
의 표출인 듯하다.

여자 창잡이.
수행시절 친구 중에서 여자 창병이 한 명있었지만 전혀 싸우
는 방식이 다르다.
갑옷 차림도 그의 실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없다.
브리튼이 아닌 이국의 영령이란 뜻이다.

「당신의 창도 대단한걸. 제 4 위 서번트. 랜서.」

「어머, 들켜버렸군요.」

「나랑 달리 당신 무기는 알기가 쉬워.」


「그렇네요. 그쪽 무기는 아쉽게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고 말이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그렇다, 그의 검은 분명 보이지 않는다.
불가시의 검.
주위에 집적되어 봉쇄된 바람,
공기가 빛의 굴절에 의해 검의 본래 모습을 덮어 감추고 있
다.
그렇기에 창잡이 영령───
랜서가 보기엔 완전 투명하고 불명료한 무기를 든 전사를 상
대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상대하기가 힘들어요. 보이지 않는 무기란 건.」

「항복은 언제든지 받겠다.


기사는 본래 숙녀에게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 법이다.」
「상냥하셔라.」

여자는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대하면───」

여자가 움직인다. 아니, 전사가 움직인다.


성별에 차이 따윈 이 곳에서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없다. 상대는 영령이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시간이 지나도 역사의 틈새에 이름이
새겨진 전설
그 자체의 현신에 대해 그런 것은 털끝만큼의 의미도 없다.
단지 있는 것은, 이렇게 현계에 의한 경이로운 맹위,
물리법칙에 대한 도전, 압도적일 만큼의 파괴!

보거라.
초고속으로 접근하는 랜서의 매끄러운 손끝에 금속덩어리,
거대한 창의 모습이 있는지를.
조금 전까지 가뿐이 손바닥에서 놀리고 있던 초중량의 창은
지금은 모습을 지우고 있다.
세이버와 똑같이 바람의 마.력.을 쓴 것인지, 뭔가의 마술을
쓴 것인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전설의 효과에 의한 것인지.

전부 아니다. 단지 그것은 빨랐기 때문이다. 빠르다. 빠르다.


단지, 빠르다, 랜서의 손끝과 손바닥에 이끌려 회전하고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보다도 가볍게 다루어져
불가시의 영역까지 속도가 올라갔을 뿐이다.

「곤란해요.」

목소리와 동시에 공격이 가해진다.


체감적으로는 거의 동시에 다섯 번의 공격.
극한을 더욱 뛰어넘는 고속 회전하는 거대한 창이, 다섯 번,
덮쳐든다.
직후, 다섯 번의 금속음. 랜서가 가한 5 연발의 창격을,
세이버는 바로 정면에서 자신의 검으로 받아냈다.

절대적 불가시인 도신이, 초고속에 의해 만들어진 불가시의


5 연격을 튕겨낸다.
초고속과 초중량에 대한 즉각대응.
연사된 총탄을 막아내는 것과 같이 물리법칙에 반하는 것이
지만,
그것이 영령, 성배를 바라고 싸우는 서번트라는 자다.

고속으로 맞부딪히는 강철의 칼날과 칼날.


쇼크 웨이브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주위에 충격파가 발생한다.
가짜 벽돌이 깨진다.
겨우 살아남아 있던 가로등이 차례차례 파괴 되어간다.

「훌륭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웃음의 잔재가 있다.


대답하지 않고 세이버는 뒤로 물러선다.
직후, 그가 서 있던 장소를 5 연격이 덮치고,
콘크리트로 만든 단단한 바닥에 깊은 손톱자국을 남긴다.

손톱. 그렇다. 손톱이다. 가장 빠른, 랜서가 휘두르는 창은 하


나의 '손'으로 변해있다. 그녀의 매끄러운 체구의 배후에는
거대한 불가시의 '손'이 있고,
그 손끝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강철로 된 갈고리처럼, 창은의
검사를 덮치고 있다

───만약 이 장소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그런 착각을 느


끼게 되겠지.
단속적인 '손'은 덤벼든다. 단속적인 5 연발 창격.
세이버는 그것을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검으로 막아내며 전
체적으로는 후퇴해 간다.
회피. 방어. 어느 것이나 완벽. 충격파 따위는 단순한 여파,
피할 것도 없다.

허나, 공격의 수가 없다. 손잡이가 긴 무기에 의한 일격의 공


격거리[리치]는 길고, 게다가 이 초고속 연속공격이 오면 공
격거리에 뒤지는 검으로는 반격이 힘들다.
하지만. 합계 일곱 번의 5 연격을 회피한 직후.

「──────윽!」

세이버는 공격으로 돌렸다.


동시 5 연발은 경이로운 기술이라곤 하나 지나치게 단조롭다.
몹시 미.적.지.근.하다.
우선 아슬아슬하게 불가시의 '손'을 빠져나가,
그대로 백은갑옷을 감싼 몸을 옆으로 회전하면서 일섬.

가로 일직선으로 베어넘긴다.
바람을 두른 검, 그 칼날은, 아까처럼 양손으로 든 것이 아닌
한 손으로 쳐올렸다.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며 굽힌 자세로 한 손으로 날리는 일격.

앙손일 때보다도 훨씬 길.어.진. 공격거리는,


거대한 창의 공격범위를 지키고 있던 랜서의 갸냘픈 몸에 도
달한다!
마력으로 엮어졌을 그 갑옷의 가슴 부위를 관통하는 찰나.

불꽃이 일었다.
세이버의 시계를 불꽃이 뒤덮는다.
아랑곳없이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넣는다. 칼날을 앞으로
내민다.
적의 심장부를 꿰뚫기위해 검 끝을 밀어넣는다.

허나 손에 받는 느낌이 얕다.
확인하니 랜서의 모습은 멀찍이 떨어져있다.
칼날을 휘두른다고 닿는 거리가 아니다. 다시금 간격을 좁힐
필요가 있는 거리.

「...만만치 않으시군요」
이제서야 랜서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정도 쯤이야. 그렇게 계속 그쪽이 단조로운 공격만 해준


덕이지.」

「어머, 또 들켜버린 건가요. 상냥한 사람.


이쪽의 심장을 노린 것은, 일격으로 끝내줄 자비의 표출인
가요?」
「그럴리가」

다시금 불가시의 검을 거머쥔다.


거리를 좁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직 세이버는 실력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창을 든 여자도 마찬가지겠지.
단지 거대하고 초중량의 창을 다룬다고 해서 영령이란 이름
에 충족될 리가 없으니까.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이를테면───

「상냥한 사람. 상냥한 서번트. 그렇게 상냥하면, 저는」

이런 식으로.
어디선가 꺼낸, 너무나도 마술에 쓰임 직한 작은 병이라든가.
「곤란해요.」

작은 병에 차 있는 붉은 색을 띈 액체를, 랜서는 단숨에 들이


킨다.
고요히. 시선을 이쪽으로 향한 채로.

토시마구 이케부쿠로,
선샤인 60 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늘어 선 복합빌딩 중
한 채.
아무도 없을 옥상.
이미 심야라 하기보단 새벽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는 시각.
여러 상업시설이 한 층에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빌딩은 각각
모든 층에 아무도 없고, 옥상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소녀 한 명의 모습이 있다.


일종의───기이한 광경, 이라고 불러야하겠지.
그곳에 있어선 안 될 것이 당연한 듯이 존재하고 있다,
는 차원에선 조금 전 창잡이의 모습과 같을 것이나, 수반하는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

조금 전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산산조각내는 공격적


인 기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뭐라고 표현해야할 것인가.
적어도 이 순간의 세이버에겐 비유할 말이 찾아지지 않는다.
지정된 장소인 '이곳'에 도달하여, 소녀의 웃음 가득한 얼굴
을 마주보고.

「마나카」
짧게,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사죠우 마나카.
서번트로서의 그의 주인. 마술사.
함께 성배를 얻기 위해 성배전쟁에 도전하는 유일무이한 마
스터.
캠프 시트
마나카는 옥상 한 모퉁이에 펼쳐진 돗자리위에 다소곳이 앉

이쪽이 오는 것을 기다린 것 같다.
마나카의 옆에는 큰 바구니와 휴대용 보온 포트.

「약속 시간에 딱맞네. 굉장해, 세이버」

보온 보트에서 김이 오르는 홍차를 컵에 따르면서.

「마침 나도 준비가 끝났어. 자, 앉아.」

눈부신, 만면의 웃음을 띄고 그렇게 이쪽으로 말을 걸어온다.


마치 휴일 하루를 마음껏 놀아보자고 정하고
큰 공원에 데이트하러 온 그 또래의 소녀인 듯이.
아니. 마나카에게 있어선 그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돗자리를 펼치고 이렇게 뜨거운 음료를 건네면서.

「당신을 밖에 데리고 나와서 위험한 꼴을 당하게 하다니, 절


대로 반대였지만」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웃음 지으며.

「그래도.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아버렸으


니, 무서워.」

「무섭다니?」

「그게, 몇 번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니까.」


「...그건 곤란하네」

거짓없는 감상을 말한다.


밤의 추위에 떨리는 몸은 아니지만, 뜨거운 홍차는 기분이 좋
다.

한 입 머금어 목구멍을 적시며


마스터
내 주인의 너무나 무모한 발언을 어떻게 말릴까에 대해 조용
히 생각한다.
금방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련하고도 사랑스런 주인에게 이쪽의 말이 반드시 닿는다
고는 할 수 없는 것을 전날, 몸소 알게 된 참이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가 아직이었지, 하고,


마나카는 옆에 있는 바구니를 열어 준비했던 식사를 펼쳐놓
는다.
다양한 재료를 끼운 빵과 밥을 둥글게 뭉쳐 소금 간을 한 것
에───

「샌드위치랑 주먹밥, 어느 쪽이 좋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쪽도 입에 댄 적이 없다.


현대에 생긴 요리일테지. 고향에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샌드위치 백작이라고 알아?


브리튼의, 미래의...아니, 지금에서 보면 과거지만, 그쪽 귀
족이 만들었다고 하네.
게임
백작님이 놀이를 즐기기 위해 식사시간이 아까워서 고안해
냈다나, 괴짜지.」

웃음 지으며 마나카는 빵을 살짝 내밀고.


게임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전쟁중에 어울리는 식사란 거야.」

「과연」

건네진 음식을 덥석 문다. 맛있다.


알맞게 앞뒤로 구운 토스트에 속재료를 끼운 것이었다.
로스트치킨과 치즈를 양상추와 토마토라는 생야채에 끼워,
그것을 다시 토스트에 끼운 형태.
즙이 풍부한 신선한 토마토가 고기와 치즈에 아주 잘맞는다
고 한다.
실제로도 그렇게 느껴진다.
일찍이 그가 살던 시절에는 생야채는 극히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력 1991 년의 이 도시에선 누구든 먹을 수 있는 것
이라고 한다.

「...맛있어?」

「응.」

먹으면서 끄덕인다.
백작의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지만,
빵에 속재료를 끼워 먹는다는 습관 자체는 옛날 로마부터 있
었고,
브리튼에도 전해졌던 것이니.
세이버는 솔직하게 끄덕여 보인다.
이런 식으로 먹는 빵은 예전부터───

「좋아해.」

예전부터 좋아했다.
거짓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왕인 것과 동시에 스스로를 당당히 기사라 자부하는 세
이버는
좀처럼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단지 사실을 말한다.

「바...방금 그건...」

마나카가, 허둥지둥하고 있다?

「응.」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물고 마나카를 본다.

「좀, 자의식과잉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마나카의 뺨이 빨갛다.
이정도가 좋다고,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조금 전, 오늘 밤의 '작전'을 부군에게 고할 때와 같
은 냉혹한 태도는
그 나이 소녀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정도가 좋다. 가련한 뺨에, 건강한 붉은 기가 비치며,
밝은 꽃이나 반짝이는 요정인 편이 아무래도 더 어울린다.

「비겁해, 세이버.」

그렇게 말하고 삐친 듯이 뺨을 부풀리며.


마나카는 입술을 삐죽거린다.

───사랑스러운 소녀. 그렇다, 마음 속에서 세이버는 생각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배전쟁의 가혹함에 몸을 던지는 위험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금 현재, 이 순간도 그렇다.
성배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마술
전쟁.
신비를 다루는 마술사들이 벌이는 전투,
강대한 물리법칙조차 종속하는 영령이 벌이는 전투가.

그럴텐데도 이렇게 태평하게 혼자서 밖에 나오겠다라니.


이런 행동은 너무나 위험하다.
무엇보다, 서번트인 자신을 지나치게 과.보.호.한다.

마나카는 끝까지 세이버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반대했다.


전날 성배전쟁에 대한 전략·전술성의 필요,
서번트는 여러 가지 행동의 기간이 되는 전투력이라 설명하
는 부군에게
여태껏 한 번도 굽히지 않았던 마나카는,
세이버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을 거절하고 완고하게 이렇
게 말했다.

「내가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게.」


그걸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반적인 마술사라면 반나절도 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나카는 특별했다.

「맞아.」

「좋은 생각이 났어 세이버!」

그렇게 말하며 웃던 마나카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늘밤의 초계(哨戒)를 제안한 것이다.

즉 심야 도시에서의 적 마스터 및 서번트에 대한 초계활동.


마나카와 세이버로 각각 다른 행동을 하며 정보수집을 실행
하고,
새벽에 이 장소에서 만난다는 작전이었다.
물론 그는 반대했다. 하지만 마나카는 들어주지 않았다.

「아까 서번트 1 기와 만났어. 아마도───」

샌드위치를 삼키고 짧게 보고한다.


조금 전의 전투, 성배전쟁의 첫 전투에 대해서.
서번트 계위 제 4 위, 랜서와의 만남.
몇 번 맞부딪치고 난 뒤, 랜서는 뭔가를 복용한 직후에 어이
없이 퇴각했다.
꺼내들었던 작은 병이 보구인지 아닌지는 불명.

「후웅」

마나카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끄덕일뿐.


자신과 떨어져 마스터가 단독행동을 해선 안 된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너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것이다,라고
세이버는 부드럽게 마나카를 달랬으나, 그녀는 태연하게
───

「후후, 걱정해 주는구나.」

「당연하지.」

「걱정도 많아요, 세이버. 아니, 상냥한 건가.


하지만 안심해. 누가 내 가까이 다가오면 바로 알 수 있는
걸.」

별것 아냐,하고 작게 말하고 웃어보인다.


확실히 이 건축물에 마술로 펼쳐진 결계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는 마술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지만
서번트는 마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마력을 느끼
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에는 결계가 있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완성시킬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일곱 장의 날개를 가진 제 1 위 마술사에 걸맞게 강력한 결계
다.
일반인이나 평범한 마술사라면 옥상은 커녕 2 층으로 올라가
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하는 서번트는 하나하나가 강력한 영령.


현대 마술사의 결계가 어디까지 통용될지.
무엇보다 결계의 존재는 '거기에 마술사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과 같다.

사실 랜서가 모습을 보인 것도 마나카가


랜서
이 빌딩에 펼친 결계의 존재를 여자의 마스터인 마술사가 감
지했기 때문이겠지.

「아니, 위험해. 이를테면...그래, 어새신 서번트라면」

「어새신이라면 괜찮아. 아까 전에, 해결했으니까」

「응」

해결했다고?

「처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적이 아니야.」

「적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니?」

「어떻게든 했어.」

시원스레───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꽃과 같이 반짝이는 표정으로 말한다.
순간 세이버는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는다.

영령인 서번트를 마술사 혼자서?


오늘밤 서번트 특유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성배가 주는 전제지식은,
그렇다, 세이버의 두뇌에 있는 서번트전에 대한 상식조차 그
렇게 말하고 있다.
랜서를 상대했을 때 랜서 이외의 영령의 존재는 감지되지 않
았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기척을 스스로의 의사로 지울 수 있는 능력인


'기척차단'스킬을 가진 어새신이라면 몰래 접근하는 것도 가
능하다.
그 자신도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허나, 서번트와 1 대 1 로 마주쳐 마술사가 무사하다니.


선뜻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긴 안전해. 주위 3km 이내에는 마술사도 서번트도 없어.」

마나카의 눈동자와 말에, 거짓을 느낄 수 없다.


맑은 눈이었다.
맑은 목소리였다.
그 웃는 얼굴엔 사랑스러움과, 가련함과, 그리고.

「있지 세이버」
일종의 열기 같은 게 있어서───
「나 혼자서 서번트를 1 기, 어떻게든 했으니까」

빛나는 요정과 같았다.


밝은 꽃과 같았다.
하지만, 요정도, 꽃도,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거였던가.
거리가. 가깝다.
정신이 드니 세이버의 바로 앞에는 소녀의 발그레하게 물든
뺨이 있었다.

「상을 줘───」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마나카는 그렇게 말한다.


조용히. 시선을 이쪽으로 향한 채로.

「비, 비, 비겁해. 비겁해. 이런...」


작은 목소리로, 마나카가 우물우물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다.
반응을 봐선 '상'으로 그것이 문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깨에 손을 얹고 다가오는 마나카에게,
키 스
세이버가 취한 행동은 입맞춤이었다.
키스.
살짝, 이마에.

「저기, 나도, 갑자기 입술이랑 입술은, 그게, 빠를지도 모른다


고는 생각했어,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마라니, 아니 기뻐. 닿아줘서 기뻐.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저기」
부끄러워하고, 기뻐하고. 새빨개져서 허둥지둥하는 소녀.
작은 숙녀의 자태로 이보다 사랑스러운 모습은 없겠지.
그것은 정말로 그 나이에 맞는 행동으로 보였으니까.

───이 아이는, 순수한 것이겠지.


───그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어느 색깔을 떠올린다.
그것은 흰색이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무구한 흰색. 더럽혀지지 않
은 흰색───

혹은.
세상 모든 것을 빈틈없이 칠하는, 절대적인 흰색일까.
「있지, 그거 알아? 그 소문」

「알아 알아, 그거잖아, 메리(メアリーさん)의」

「응 그거. 메리」

「학원에서도 똑같은 이야기 들었어. 다른 학교에서도 소문이


퍼졌다고」

「도쿄지. 응, 메리 소문이 퍼진 건 도쿄뿐이래」

「그렇구나」

「실제 이야기라는데, 도쿄에서 일어난 일이래」

「TV 에 나오지 않았을 뿐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소문. 도쿄 한정. 메리. 메리?
사죠우 아야카에겐 잘 모르는 이야기다.
급식인 코페빵을 양손으로 잡고 덥석 베어 먹으며
책상을 나란히 맞붙인 같은 반 여자애 둘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는다.

오늘 메뉴는 코페빵과 색이 진한 스튜, 그리고 생야채 샐러


드.
항상 똑같은 코페빵. 항상 똑같은 맛.
사실 튀긴 빵이 좋지만 매일 나오는 게 아니라서 딱히 그걸
불만으로 여기진 않는다.

단지, 아, 약간 아쉽다, 하고 생각할 뿐.


하지만은 오늘은 마멀레이드가 같이 나와서 약간 기쁘다.
플라스틱제 작은 용기를 탁 하고 갈라서 내용물을 짜내어 조
금씩 빵에 발라서 먹는다.
마가린보다는 마멀레이드가 좋았다. 단 건 싫어하지 않는다.

한 입. 빵을 베어 문다.
달고 쌉싸래한 마멀레이드 덕에 평소와는 맛이 다르다.
싫지 않다. 좋아하는 부류.

「이름 들었어?」

「이름?」
「메리의 이름. 아니, 메리라고 할까, 소문의 이름말이야」

「이름이라니?」

「항상 오후 11 시에 말을 걸어온다고 하네」

「응」

「그리고 반드시 상대는 죽는대」

「응」

「그래서 오후 11 시에 다가오는 죽음의 메리,라고 해」

오후 11 시.
죽음의 메리.
뒤숭숭한 이야기가 들린 것 같다.
(뭘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항상 점심시간에 떠드는 두 사람.

곧 잘 TV 를 보는 듯한 애와,
역 옆에 있는 입시학원에 일주일에 세 번이나 다닌다는 애.
학교 밖에서 방과 후에 놀거나 한 일은 없으니 뭐가 됐든 정
확히 어떤지 잘 모른다.

딱히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소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엔 익숙해서 덥석, 하고 한 번 더 빵
을 입에 물면서,
잘 씹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금부터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까?
처음엔 마멀레이드를 신중하게 용기에서 짜내는 데 집중하
느라 제대로 듣지 않았다.

오후 11 시의 죽음의 메리.
이어지는 말을 제대로 의식해서 들어본다.
먼저 묻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해봤자 TV 도 그다지 보지 않고
학원에 다니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순정만화 잡지를 한 달에 한 권 사 보는 정도인 자
신으로선,
또래 여자 초등학생의 잡담에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겠다고
평소에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다.
그래서, 입은 식사하는 데만 쓰고. 우물우물.
그저, 귀만 귀울여 정보를 얻어낸다.

(응-)

그것은, 소문이었다.
어른에게 살며시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 소녀.

(여자 아이)

그것은, 밤이었다.
늦은 밤 길거리에서 소녀는 모습을 나타내고.

(밤?)

그것은, 죽음이었다.

이름대로 반드시 죽음을 불러오고.

(...죽어? 죽이는 거야?)

역시 뒤숭숭한 이야기였다. 소문이었다.


친구의 친구이거나 친구의 친구의 아버지거나,
친구의 친구의 아버지의 직장 사람이, 라거나.
그런 직접 보고 알 게 된 것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막연히, 하지만 보고 온 것처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
상한 이야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작년 2 학기 즈음에 교실에서 유행했던 사.람. 얼.
굴.을. 한. 개.라거나.
그거랑 같은 이야기. 애들끼리 소곤거리는 뒷얘기.
학교 괴담. 학교의 7 대 불가사의, 같은 것.

그거랑 같은 얘기지 않을까하고 아야카는 멍하니 생각한다.


계단의 수가 많거나 적거나, 과학준비실 인체모형이 혼자서
걷는다거나,
음악실의 음악가 초상화가 눈동자를 움직인다거나,
화장실에 있는 여자 아이라거나, 그런 것들.
학교와 관계 없는 것이라면 입이 찢어진 여자, 보라색이 된
거울,
귀에서 나온 하얀 실, 빨간 종이와 파란 종이, 그리고───

(콧쿠리상, 이었나)

위저 보드를 본뜬 듯한 50 음이 쓰여진 종이 위에 5 엔 동전을


올려,
강령술 흉내를 내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올해 봄 아야카도 같이 하자며 점심 시간에 불렀을 때는 설마
이 아이들도 마술사 집안인가하고 눈을 크게 떴지만, 별것 아
닌, 대단치도 않은, 그냥 놀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던가,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것, 무서운 것, 그런 걸 제각기 묻고.
마술 반응은 발동하지 않고, 그저 손가락을 올린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5 엔 동전을 당겼을 뿐.
그러고보니 그때 같이 하자던 사람은 이 두 사람이었다.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두 사람.
정말로 겁.이. 많.은. 두 사람.

「다 죽는 거구나...」

「그렇다니까. 만난 사람은 전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대.」

「완전 무섭다」

저 봐, 무섭다고 말했지.

「거울을 본 사람도 죽는다나 봐. 만진 사람도 죽는다고 했나」

「엣, 그런 거야?」

「그래. 그래서 경찰도 많이 죽었다는데」

「무서워...」

기분 나쁘다곤 생각한다.
소문의 내용은 확실히 정말 뒤숭숭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늦은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성인 남성에게 말을 걸어,
외국인 '메리'가 호텔로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 소녀 메리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거울에는
영어로

Welcome to the world of death


'죽음의 세계에 어서오세요!

라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쓰여진 문장 하나 뿐.


느낌표 옆에는 같은 빨간색으로 키스 마크.
남성은 침대 위에 죽어 있다.
원인은 불명. 상처도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죽어 있다.

뉴스에도 나왔다고 한다.


소녀에게 노려지는 것은 성인 남자 뿐이라 여자는 한 명도 없
었고,
학원에 다니는 애의 말로는 옆 동네 친구의 아버지도 그렇게
죽었다고한다.

(전혀 학교 괴담 같지가 않아)

학교 괴담이라기 보단 어른들의 괴담.


심야의 거리를 걸어서 귀가하는 아버지들의 괴담.
사람을 얼굴을 한 개에 비교해 보면 현실감 있는 이야기라고
는 생각한다.
하지만 작년과 똑같이 전혀 무섭지는 않다.
기분 나쁘긴 하지만 애초에 '메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무서움을 실감나게 하는 것은 없었다.

아야카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신비에까지 승화된 이야기라면 관여할 여지는 있겠지만.
애들 사이에 돌아다닐 정도의 소문이라면 한참 부족하다.
적어도 아버지는 인면견의 신비가 실재한다고는 말하지 않
았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랑은 상관없으니까)

병에 든 우유를 마시며 조용히 생각한다.


집에 있는 일이 잦고,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
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혹시 그 '메리'가 초등학생 여자 애들 사이에 떠도는
신비 비슷한 소문이 아니라, 실재하는 살인자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무섭지 않다. 작년과 똑같이.

반 애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아버지는, 마술사니까.
───진짜 신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니까.

괴담 따위.
진짜 환.상.종.은 그렇다 쳐도, 소문 따위에 지지 않는다.
'응'
작게 중얼거리고.
아야카는 다시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상상의 짐승.
오랜 전설 안에서만 나오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환상종'이라고 부른다.

이미 알려진 생물에 비견되지 않는, 신비 그 자체가 형태를


갖게 된 이 존재는 마수, 환수, 신수 단계로 구분된다.
마수 정도의 존재라면 마술사가 사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체의 일부를 마술예장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환수 이상의 존재는 전부 불가능하다.
일단 현대에 직접 볼 기회도 없다.

서번트는 그 상.식.을 간단히 파괴한다.

그들은 마술의 신비를 뛰어넘는다.


그들은 하나의 꿈꾸는 환상을 복종시킨다.
즉, 그들은 때론 환상 이상의 존재조차 사역할 수 있다.

성배전쟁에 있어 우리는 서번트를 통해 전설의 신비를 행사


한다.
그렇기에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비닉하라.
은폐하라.
신비의 누설은 마술사의 금령(禁令)이기도 하다.

성배전쟁은 어둠 속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방과 후───
집에 도착할 즘엔 이미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해가 이렇게 빨리 지는 건 분명 계절 탓이다.
토하는 숨결이 아침과 똑같이 하얗게 되는 것이 좋은 증거.
또렷이 눈에 보인다.

조금 춥다.
아야카는 양손에 '하아'하고 입김을 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갑을 들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그럼'
문 앞에서 멈춰 선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나름대로 큰 집으로 보인다.
가까운 곳에 사는 반 친구는 '저택'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에는 역시 와닿는 게 없지만 크기로는 다른 집보단 약간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들.어.갈. 수. 없.는. 방. 이외는 거의 알고 있는 탓인지
저택이란 요란한 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큰, 우리 집.
양관(洋館),이라고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이 말했었다.
문 너머에는 서양건축식 현관과 앞뜰의 나무들이 보인다.
문. 잠겨있진 않지만 그냥 밀어서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결계를 쳐뒀다고 아버지가 말했고, 이유도 들어서 알고 있다.


뭔가 대규모 '마술 의식'에 참가한다고 했나. 초등학교에 가
는 자체는 상관없다,
너는 그렇게 해라고 말은 했지만,
밖에 나갈 때와 안으로 들어올 때는 주의하라고 단단히 일렀
다.

일러준 대로 수순을 밟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몇 마디 말을 꺼낸다.
그리고 문손잡이 근처에 있는 쇠장식에 일려준 대로 손가락
으로 형태를 그린다.
아직 정교하게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마력을 넣어서. 그렇다,
정교하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몇 초 걸리지 않는 간단한 일도 5 분 이상이나 걸려버
렸다.

「어제보다 빨리 됐으려나」
중얼거리면서 문을 민다.
마치 하나의 벽처럼 꿈쩍도 안 하던 문이 스르륵 열린다.
다음은 이제 평범한 집과 똑같다.
문을 빠져나가서 제대로 닫고.

「다녀왔습니다」

작게, 중얼거린다.
이 시간에는 아버지도 언니도 거실에는 없고 대체로 들어갈
수 없는 방,
아야카가 들어가선 안 되는 방 어딘가에 뭔가를 하는 게 대부
분이라서,
말을 걸어도 얼굴을 보이는 일이 없으니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은. 말해 둔다.


날마다하는 습관.
자신이 돌아왔을 때는, 다녀왔습니다.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는, 어서와.

「어서와」

아무도 없으니까 오늘도 스스로 말해 둔다.


안뜰을 지나서 현관문을 열고───
「?」

무슨 냄새가 나네?
자연히 며칠 전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혹시, 하고 마
음이 조급해진다.
밀가루 굽는 구수한 이 냄새는,

어제도 맡아본 것이니 그거라면 분명 주방에 가면 만날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


그렇다, 오늘 아침은 일.과.도 혼자서, 식사도 혼자였다.
란도셀을 든 채로 현관홀을 빠져나가 복도를 걸어 주방으로.
그리고 그곳에는───

「어머, 어서와. 아야카」

아름다운 목소리.
아름다운 얼굴.
저녁인데도. 이제 어두운데도, 반짝반짝 눈부시게.
언니인 마나카가 에이프런을 두른 모습으로 웃음 짓고 있었
다.

「언니, 뭐 만들어?」

「후후. 뭘 거 같아?」

「케이크? 좋은 냄새 같아서」

「아깝네, 그래도 반 정도는 맞아.」

그렇게 말하며 웃음 짓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마나카 언니.
며칠 전 아침에 본 것과 똑같이
성에 사는 공주님 같은 에이프런 차림으로 오늘도 빙글빙글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예전 아버지가 보여줬던 어머니가 좋아했던 만화 영화


같다.
노래하며 춤추는 공주님.
아름다운 사람.
마치 그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아.
내 눈은 눈이 아니라 분명, 영화를 찍는 카메라 같은 거고.
언니를 찍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멍하게 있게 된다.

「왜 그러니?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도 벌어져 있잖


아, 아야카」
「아」
하얀 손끝, 닿을 수 있을까 말까한 거리에 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직전.

「언니가 예뻐서. 공주님 같아」

「그러니?」

「응」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브리튼의 공주님처럼 보여?」

「브리튼?」

「후후. 아무것도 아냐. 정말 그렇게 보이면 기분 좋지만」

며칠 전 아침과 똑같이 언니는 웃어 보인다.


반짝반짝하다.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다.

이미 저녁이고 아침 햇살 같은 건 없고 저녁 해도 지고 있는
데.
에이프런 차림으로 즐겁게 요리하면서 주방을 빙글빙글. 반
짝반짝.
하지만 부지런히 손은 움직이고 있고, 척척 효율 좋게, 솜씨
좋게.
케이크가 반 정도 정답이라면, 나머지 반은 뭘까?

물어보려던 참에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 깨닫는다.


아직 란도셀을 등에 매고 있는데다 손도 씻지 않았다.
허둥지둥 욕실로 가서 자기가 쓰는 받침대를 놓고 차가운 물
로 손을 씻고,
양치질도 한다. 란도셀은 복도에 뒀다.
다시금 주방에───

「언니. 저기 있지」

거들어도 되냐고 물을까 말까 잠깐 망설인다.


아까는 주저 없이 들어갔던 주방 입구에 멈춰 서서.
뭐든 해내는 언니랑은 달리 나는 뭐든───마술도, 공부도,
가사일 거들기도───
보통이나 그보다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내가 거드는 것보다도 언니 혼자서 하는 쪽이 낫을지
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물쭈물.
그러고 있으려니 언니가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한 마디.

「하는 거 거들어 줄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쪽을 보지 않는 언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
만.
분명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아까랑 똑같은 표정을 지어줬을 거다.
긴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언니의 웃는 얼굴을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니,
그날 아침 전까지는 생각도 못해봤다.

나는「응」하고 크게 끄덕인다.

「그럼, 그쪽 선반에 있는 병을 꺼내줄래?」

「어, 저기...」
「베이킹 파우더말이야」

「앗, 응. 여기 있어 언니」

「그거랑 냉장고에서 달걀도 꺼내줘. 두 개, 큰 걸로 골라 주


렴」

「으, 응」

「후후. 깨트리지 않게 조심해. 그리고 그쪽 테이블 위를 대충


정리해줘」

혹시.
아니, 혹시나가 아니라 아마 맞을 거다.
접시를 꺼내는 것뿐 아니라 언니의 요리를 거드는 일 자체가
오늘 이것이 처음이다.
혼자서 오븐에 손대지 말라고 아버지가 말했지만 언니랑 같
이 있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계속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나───
처음으로 언니를 거들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괜히 긴장이 된다.
왜냐면 언니에겐 분명 도움 따윈 필요 없을 테니까.

「어, 있지, 달걀, 며, 몇 개라고 했더라...」

「두 개야. 괜찮아, 만약 깨트려도 달걀은 아직 많이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으, 응」

「다른 것도 여분으로 많이 준비해 놨어」

「으응」

「후후. 목소리 떨리고 있잖아. 아야카는 달걀 나르는 걸 잘 못


해?」
「으, 으응」

어물어물거리고 있다.
나, 엄청 어물어물거리고 있다.
하지만 마나카 언니는 슬쩍 쳐다봤을 뿐 딱히 화내지는 않았
다.
얼굴은 역시 볼 수 없었지만 웃는 소리는 들려왔다.

「자, 달걀」
「고마워. 제대로 가져왔구나, 잘했어」

「으, 으응」

달걀 두 개 날라 온 정도로 이렇다니, 약간 스스로가 한심해


졌다.
자연히 고개가 숙여진다.

「다른 건...」

「달걀이라 하니, 맞아, 아야카. 너 달걀프라이는 좋아해?」

「어, 으, 응」
Sunny side up Turnover
「서니 사이드 업? 턴오버?」

「서니가 좋아...」

순간적으로 입에서 나왔다.


거짓말이───

아니. 딱히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이 아닌걸. 턴오버
원래 좋아하는 건 양면 굽기쪽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나 마나카 언니가 만들어 주는 건 단면굽기라서, 딱히


그걸 싫어하진 않으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야.
둘 다 좋아하니까.
단지 어느 쪽을 좋아하냐고 굳이 물었을 때의 이야기다.

「이번엔 턴오버로 만들어 줄게.


영국에선 턴오버로 할 때가 많다나 봐.
요전에도 만들었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못해서. 시험작으
로」

「으, 응」

「시험 삼아 먹어봐」

「응」

「후후. 맛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다시 언니는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반짝반짝하고 가든에 피어나는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 꽃
과 같이.
환상종인 요정이 아니라, 그림책 속에 나올 것 같은 귀엽고
고상한 요정 같다.
그리고 역시, 성에 사는 공주님 같아.

「후후」

어라?
언니가 그 날 아침과 똑같지만, 약간 다른 느낌이다.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기울여 언니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
봤다.
그러자 언니는 「응?」하고 시선을 돌린다.

「왜 그러니?」

「아, 저, 저기」
허둥지둥하고 만다.
들켜버린 것도, 허둥지둥.
멍하니 있다가 거드는 일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에도, 허둥
지둥.
뭐 좋은 일 있었어? 하고 묻기까지 몇 초나 걸렸다.

「어머, 그렇게 보였어?」

「응」

「그렇게 특별히 좋은 일은 아닌데」

음~, 하고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면서,


그런 동작 하나도, 아름답고, 근사하다.

「친근하게 굴어오는 재밌는 동물이 있어서말이야」


「동물?」

「응. 동물」

그렇게 말하고 언니는 웃음 짓는다.


내 쪽으로 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하게 차가운, 이상한 느낌이 등을


타고 내려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걸 떨어트려버렸다.
달걀이, 몇 갠가 깨졌다.

서번트.
현계한 영령들.

세이버
검의 영령

버서커
광(狂)의 영령

아처
궁(弓)의 영령

랜서
창의 영령

라이더
기(騎)의 영령

캐스터
술(術)의 영령

어새신]
영(影)의 영령

성배에 의해 일곱 계제로 나뉜 최강의 환상들.

그들은 너무나도 강대하다.


앞서 기술했듯이.
강철을 가르고 대지를 부수며 하늘조차 꿰뚫는다.

마력에 의해 일시적인 육체를 구성한 그들은, 엄밀히 말해 생


물이 아니다.
인간과 아주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어도 인간은 아니다.
생물을,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강인함과 파괴력을 품고,
그들은 전설 그대로 현계 한다.

허나 그들도 아직 만능의 존재는 아니다.

마력에 의해 존재를 구성하고, 같은 마력을 통해 가동하는 그


들은,
마스터인 마술사로부터의 마력공급에 의해서야 현계를 허락
받는다.
정확하겐 인간인 마술사 정도가 주는 미량의 마력만이 그들
의 활동의 근원은 아니나,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틀림없다.

마력 없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즉 마스터 없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단지, 예외적으로───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오후 11 시.
도쿄도 신주쿠구, 서 신주쿠에 위치한 초고층 빌딩가의 한편.
신도심 지구로 알려진 콘크리트 길가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장소였다.

신주쿠 중앙공원, 신주쿠구 유수의 대형녹지의 하나.


점심때쯤엔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비지니스맨들이 한 때의
휴식을 위해
나무 그늘에서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 시각에는 보통 인기척이 거의 없다.

이곳에 완전히 사람이 없을 때는 좀처럼 없다.


밤에는 나무들이 이루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밤기운을 견디고 잠자는 홈리스들이 있다.
얼마 없는 사람 기척의 정체가 그들이다.

하지만 그때 그 장소에는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홈리스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유는 여기서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은 사라졌다.
대신 단 하나의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늘씬한 실루엣이었다.
밤이 가져오는 어둠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낭창낭창하고 매끈한 여자의 몸이었다.


후드
머리 부분에는 두꺼운 두건를 쓰고 있지만,
입고 있는 검은 옷은 몸에 딱맞게 들러붙어 균형 잡힌 갈색
몸을 뚜렷이 드러냈다.

나이는 10 대 후반정도.
언뜻 보면 젊음에 찬 팽팽한 몸에만 주목할 수 있으나,
칼로 먹고 사는 사람 눈으로 본다면 의도적일 정도로 여성스
러운 육체가
전투를 위해 단련되어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겠을 것이다.

여자는 전사였다.
정확하게는 어둠 속에서 목숨을 빼앗는 일에 적합한 자였다.
달빛이 여자의 얼굴을 비춘다.
해골이 붙어있었다.
귀에서 턱, 목선은 아름답지만,
눈가와 코를 덮은 상징적인 해골 가면 때문에 정확한 얼굴은
파악할 수 없다.

여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심야의 신주쿠 중앙공원, 온타리오 호수로 흘러내려가는
폭포의 이름으로 불리는 장려한 분수 앞으로 걸가
여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후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목소리가 울린다.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말이다.
여자 앞에 소녀.
바로 앞까지 아무도 없었을 텐데.
확실히 아.무.도. 없.었.을. 공간에 소녀는 모습을 나타냈다.

소리도, 기척도 일절 없이.


마치 시간의 심장을 멈추고 공간의 육체를 갈라 전.이.한 것
마냥.

「그래서 어땠니? 당신,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잖아」


「네」

「뭔가, 할 말은 있어?」

「아뇨, 없습니다」

「말해 봐」

「모든 것은 제 무력함, 제 무능함. 드릴 말이 없습니다」

소녀에게, 여자는 머리를 들지 않고 말을 올린다.


달빛을 머리 위로, 분수를 등 뒤로 한 소녀의 모습을 쳐다보
는 일도 없다.
그럴 자격이 자신에겐 없다고 충분히 이해한 모습이었다.
절대적인 주인에게 여자는 모든 것을 바쳤다.
내민 목은, 언제라도, 당신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사의 표
시였다.

「이제, 제 목을 이곳에서 베어 바치겠습니다」

「응~?」

「마나카 님」
「괜찮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캐스터가 만든 '진지'는 강력하지. 마스터가 있는 곳까지 가
는 건」

소녀는 엷게 웃으며

「당신에겐 역부족이구나.
당신, 예쁘게 생겼지만, 정면돌파는 좀 어려운가 봐. 그것보
다」

소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을 잇는다.


엷은 웃음이 완벽한 웃음으로 바뀐다.
이유는 추측할 수 있고, 이해하는 것은 여자에겐 쉬운 일이었
다.
그것보다, 하고 말하기 시작한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세이버
그에 대한 화제였으니까.
그녀의 평온, 기쁨, 즐거움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바로 그만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여자는 이미 확인했
다.

질투는 하지 않는다.
여자는 단지,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으로,
이 하늘의 음성도 이러랴싶은 울림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 자
신에게 과한 명예니까.
「...맞아. 스콘을 만들었어.
이번엔 잘 구워진 것 같지만, 그는 잔뜩 먹어주면서 맛에 대
한 감상은 적어.
맛있어, 좋아해, 그것밖에 없어. 기쁘긴 하지만, 기쁘긴 하
지만, 그건」

뺨을 부풀리는 모습의 귀여움은 여성형 요정[진]조차 당해낼


수 없다.

원패턴
「변화가 없다는 건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무슨 말을 해도 나는 기쁘지만」

「네」

「나랑 그는, 이제부터 쭉 같이 있게 되겠지?」

「네」

「그러면, 변화는 영원히 질리지 않기 위한 향신료가 될 거라


고 생각해」

분명히 자신도 그럴 거라고 여자는 조용히 생각한다.


입을 열면 이렇게 마음이 흘러넘친다.
소녀는 거리낌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자신은 입술을 닫고 있다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는 변한 게 없다.
상대가 누구든, 이를테면 인형이 상대라도 상관없는 행위.
그저,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을 뿐.
그래도───

「그건 그렇고 당신, 마력은 충분해?」

문득, 소녀가 묻는다.


여자는 입술을 연다.
하지만 말로 꺼내지 않고 묵묵히 손에 있던 것을 내민다.

립스틱이었다.
이미 전부 다 써버린 진.홍.색. 립.스.틱.

마력 없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즉 마스터 없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단지, 예외적으로───

인간의 영혼.
이것을 '섭취'하는 것으로 마력을 보충하는 게 가능한 것이
다.

마술사는 인륜에 구애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영혼의 '섭취'는 반드시 금지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나칠 경우엔 신비의 누설을 초래할 것이다.

명심하라.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괜찮나 보네, 후후」

립스틱을 건네받고.
소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받드는 여자에게 웃어 보인다.

「잘했어, 스스로 먹이를 챙겨먹을 줄 아는구나」


잘했어잘했어, 하며 덧없을 만큼 하얀 손끝으로 부드럽게 여
자를 쓰.다.듬.는.다.
머리카락을. 머리를.

여자의 몸이 흔들린다. 아니, 떨리고 있다.


한기가 아니다.
두려움이 아니다.
기쁨, 즐거움, 닿았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그렇게 만들었다.

손톱은 말할 것도 없이 피부나 체액,


숨결조차도 '죽음'으로 이루어진 내 몸에,
이미 보.구.라고도 불리는 이 전신에, 이렇게 간단히 닿다니.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는 모습조차
없는 소녀.

사죠우 마나카란 이름으로 태어난, 만물을 따르게 하는 기적


그 자체.
만약 운명이란 것이 세상에 있다면,
아득한 과거에 죽은 자신이 이렇게 일시적으로 존재를 얻은
곳에서
이 사람을 만난 것이야말로, 그것이다.

여자는 확신하고 있다.


빛나는 소녀.
홀로, 절대의 어둠을 약속한 밤을 가르고 떠오르는 달빛과 같
이.

내 주인, 내 모든 것, 처음으로 얻을 수 있었던 의.지.할. 상대.


여자는 떨린다.
마스터
단 한 명의 주인으로 스스로 결정한, 소녀의 손끝에 닿으며.

「잘했어, 잘했어」

───이렇게, 쓰다듬어지는 것만으로도.

「훌륭해 당신」

───흥분된다. 전신이, 뜨거워진다.

「훌륭하고, 예뻐. 게다가 귀엽잖아」

───전날. 이케부쿠루에서 만났던 밤부터, 쭉.

「당신에겐 기대하겠어」

───자신은, 이 반짝임을 섬기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해 봐. 어새신」

소녀는 웃는다.
별빛과 달빛을 쬐며.
반짝임, 눈부심, 그 자체로─

───똑, 똑, 똑.
───기울어진 물뿌리개에서 물방울 몇이 떨어져 내린다.

손에 있던 무게가 쑥 빠져나간다.
초목이 울창하게 들어선 가든의 근원이 되는 토지에 물이 스
며든다.
사죠우 아야카는 손 주변과 지면을 바라보며 작게 숨을 토한
다.
하얀 숨결. 이미 해는 중천에 떴는데도 공기는 차가웠다.
옆쪽 유리벽에서 내리쬐는 햇빛도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오늘은 조금 시간이 느리다.
오늘도, 느리다.

「공부……」

마술 공부. 해 두는 게 좋을까.
그래, 어렴풋이 생각한다.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해야 하는 것은 몇 개 정도 있는데, 전부 공부다.

마술 공부, 학교 공부.
전부 다 필요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평소부터 말씀하셨고,
아야카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술사 집안이니 마술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
현대의 인간이니 학교 공부를 하는 것도 당연.
어느 쪽도 필요. 어느 쪽도 당연.
이를테면 선생님이 안 계시더라도.

「……」

힐끔, 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발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성대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
울음소리를 조심스럽게 목구멍에서 꾸륵꾸륵 울리며 이쪽의
모습을 엿보고 있다.
모습. 엿본다. 정말로?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비둘기들은 내 동작과 말에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안 돼.」
작게 중얼거린다.

「먹이, 아까 줬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몇몇 울음소리와 움직임.


난 몰라, 받은 적 없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목을 갸웃
거리면서.
후우, 하고 아야카는 숨을 토한다.
다짐을 깨고 말을 걸었는데도 돌아오는 반응이 이러면 왠지
어처구니가 없다.
역시 말을 걸지 말 걸 그랬다.

「어휴.」

비둘기가 아닌 자신에게 한숨을 쉬고.


한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진 물뿌리개를 조심스럽
게 양손으로 감싼다.

그런 실패는 두 번 다시 안 한다.
어제, 가든에 무성한 푸른 나무들과 꽃에 물을 주면서
속이 점점 가벼워지는 물뿌리개를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있다

무게 밸런스가 변하는 걸 깨닫지 못하고 깜빡 손을 놓아버렸
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요령이 좋은 편은 아니다───라기 보단, 설마 싶을 때는 예
감이 적중한다.

분명 나는 손재주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제는 정말 부주의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실패하지 않을 거다.
손재주가 있든 없든,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한다.

항상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다.


실패는 성장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렴.
몇 번이나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몇 번이나 네, 하고 끄덕였는
지.
방심하지 않는다. 양손으로 물뿌리개를 감싸며 마지막 한 방
울까지 물을 주고.

「응.」

끄덕이고 물 뜨는 곳으로 돌아간다.


물 주는 일이 끝났다고 착각한 비둘기들이 다가오는 것을 일
부러 무시하면서.
호스를 물뿌리개 입구에 걸치고 수도꼭지를 비튼다.
흐르는 물이 수도관을 달리는 소리와 물뿌리개 속으로 들어
가는 소리가 울린다.

거기에 비둘기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겹쳐진다.


방음이 제대로 되어있는 모양인지 바깥 소리는 들리지 않는
다.
집 앞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 같은 것도.
마치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진짜 숲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멍하니 생각한다.


숲에는 물 뜨는 시설도 수도꼭지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오늘도, 없는 걸까.」

중얼거리는 목소리.
물뿌리개에 채워져 가는 물 소리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작
게.

「아버지.」
아침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도 마찬가지다.

「언니.」

어제 아침 식사에서도 언니인 마나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


다.
오늘도 그렇다.

「중요한 의식이 뭘까.」

이 도쿄에서 집행되는 대규모 마술의식.


그것은 마술사의 대원(大願)을 이끈다고 한다.
사죠우 가문뿐만이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
든 마술사들이 바라고,
원하고, 손을 뻗어왔던 크나큰 소망.

그.것.에 닿기 위해, 의식은 완수되어야만 한다.


그저께 한밤중에 잠이 덜 깬 눈으로 꾸벅거리는 아야카에게
아버지는 진지한 음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혼.잣.말.을 섞어가면서.

중요한 의식.
아버지도, 언니도, 그것에 참가하고 있다.
나도 뭔가 돕는 편이 좋을까? 하고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
었다.
너는 의식과 상관없지만 당분간 학교는 쉬어라.
그렇게 말하고───

「쉬는 거, 언제까지지……」

어제, 오늘.
이틀 연속으로 초등학교를 쉬고 있다.
줄곧, 집 안에서.
절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지시받았으니까.
왜냐고 이유를 물으니, 상정된 것보다 전.황.이 혼돈스럽다,

일탈한 참가자가 있다, 어새신을 경계해야 한다,


레이로우칸이 이미 냄새를 맡았다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아버지는 중얼거릴 뿐,
제대로 아야카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끼긴 했지만 응, 하고 아야카는 순순히 따랐다.

학교를 쉬는 일은 딱히 처음은 아니다.


열이 나서 드러누웠을 때 결석한 적도 있고,
아침 일과가 길어져서, 라기 보단 아야카 자신의 요령이 좋지
않아서
길어져버린 탓에 학교에 가지 못했던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에게 연락을 했으니


이번에도 분명 똑같이 연락을 했을 거다.
일과가 길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술에 관한 것은 빼놓고.
어떤 식으로 연락을 하는 건지 약간 흥미가 생겼다.

진짜 발열이나 감기로 쉬었을 때는 반 친구가 푸딩을 들고 찾


아오거나
몇 사람이 같이 모여서 병문안 온 적도 있었지만,
마술 공부를 위해 쉬었을 때는 아무도 안 온다.
그런데도 다음 날 교실에 가 보면 반 친구들은 「몸은 괜찮
아?」하고 물어봐 준다.
열이나 감기로 쉬었을 때랑 똑같이.
혹시 어떤 마술을 행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된 일일까?
잘 알 수 없다. 물어보려고 해도 아버지가 없다.
아침 일과 시간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아침 식사는 냉장고에 준비해 놓은 것을,
점심과 저녁은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으라는
메모가
식당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어제랑 완전히 똑같다.


레토르트 식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냉장 그라탕은 좀 좋다.
그래도 연달아 먹는 건 좀 싫다.

「점심, 먹고 나서」

발밑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혼잣말을 한다.

「뭐 하지? TV 나 볼까……」

날마다 교육채널에서 하는 인형극 방송을 보는 게 재밌고 즐


겁다.
하지만 반 친구들과 못 만나는 건 약간 쓸쓸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와 언니와 만나지 못 하는 것도.
학교를 쉬는 것도 아버지나 언니가
어떤 이유로 멀리 가는 것도 지금까지 없었던 일은 아니다.
특히 아버지는 업.무.로 며칠이고 집을 비우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것이 거듭되는 일은 잘 없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평소에는 일과 뒤에 하는 가든 물 주기도, 이런 식으로 점심
시간 다 될 때까지 시간을 들여도 혼나지 않는다. 혼자니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성배전쟁.」

물뿌리개에서 흘러넘친 물을 막으면서 멍하니 중얼거린다.


성배전쟁. 그것은 그저께 밤, 아버지의 혼잣말에서 나온 단
어.

중요한 의식.
마술사의 대원.
성배전쟁.
자세한 것은 모르고,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금쯤 아야카에게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몇 가지───

이를테면, 언니.
마나카 언니.
예전부터 훨씬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를테면, 부친.
아버지.
언니가 바뀐 것과는 달리 조금 무.서.워.졌다.

아버지의 혼잣말 같은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성배전쟁.
그것은 서로 죽고 죽이는 행위.

마스터가 된 마술사는 항상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마술의 비오를 구사하여 서번트를 활용해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

성배전쟁에 패.배.하.는. 조건은 두 가지.


생명을 잃은 경우.
서번트를 잃은 경우.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서번트를 잃으면 성배를 얻


을 권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서번트를 잃었다 해도 방심해선 안 된다.
곧바로 성당교회에서 파견된 '감독자'에게 보호받지 않으면
다른 마스터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뒤따른다.

자신의 생명을 지켜라.


자신의 가족을 지켜라.
연면(連綿)하게 계속되는 마도를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

공.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라.


마술의 정수(精髓)에 가까운 공방이라면 서번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방어가 된다.

한편,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가장하는 수도 있다.


외부와의 교류를 취하고 있는 마술사가 돌연 공방에 틀어박
힌다면 성배전쟁에 도전하는 마스터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성배전쟁도 중반에 접어든다면.


마스터끼리 서로의 본질을 파악했을 가능성도 있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의식하라.


그리고 혈육을 지켜라.
아들과 딸.
마술 연구를 이어 받고, 마술회로를 이어 받으며,
자신의 가계(家系)를 이을 자를 지켜라.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미끼를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도쿄도 세이부, 오
쿠타마산속.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들 틈 사이로,
누구의 눈에도 닿을 일 없는 사투가 펼쳐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잿빛 하늘을 떠도는 새의 눈동자에는 그 광경


이 비치고 있다.
백은과 푸른색 갑옷을 두른 기사가 홀로,
계속해서 닥쳐오는 죽음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때때로 칼을
휘둘러 막는 모습을.
산 경사면에 선 기사───세이버는, 날아오는 죽음의 무리
를 영.격.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모든 곳을 관통할 듯 다가오는 무수한 강철.

그것은 화살이다.
그가 손에 쥔 불가시의 검처럼 현대에선 거의 사용되는 일이
없는 무기.
적대하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인간이 다루는 도구의
하나.
활의 현을 팽팽히 당기고, 시위에 메긴 화살을 놓아,
원거리에 있는 목표를 꿰어, 죽인다.

그것이 한 호흡에 스무 발 정도.


평범한 기술이 아니었다.
즉, 이 공격을 행하고 있는 상대는 일반인이 아니라
세이버와 같은 인지를 뛰어넘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신비의 궁극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번트가 불러일으키는 생리법칙조차 깨트리며 행사하는 경
탄이 나오는 절기(絶技).
쏜 화살은 말도 안 되는 속도와 위력을 동반하며 오쿠타마산
속을 깎.아.내.고. 있다.

굵은 나무줄기에 원형으로 구멍이 뚫린다.


땅이 바수어 진다.
축축한 바위가 가루가 된다.
그것들이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 약 스무 발.
강철로 된 화살촉에서 반사되는 희미한 빛,
희미한 바람 소리만을 의지하여 세이버는 죽음의 화살을 모
조리 상대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뛰면서 몸을 돌려 피하고,


회피하기 힘든 것은 불가시의 검으로 가르고, 그래도 남은 화
살은 갑옷으로 튕겨낸다.
갑옷에 맞추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력으로 짜인 백은의 갑주,
특히 두꺼운 부분이라면 나무들을 조각내고
대지를 파헤치는 죽음의 화살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
예민한 그의 시각을 통해서도 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출된 화살의 방향으로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쉽지만


아무래도 사수는 산속을 고속으로 이동하며 이쪽으로 사격
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한 뭉치의 화살이 발사될 때마다 덮쳐오는 화살의 방향이 달
라지고 있다.

「……트리스탄 경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위일까.」


몇 번째 사격을 막아내고, 짧게 숨을 토한다.
일찍이 원탁에 모였던 기사 중 한 명. 그 이름과 모습을 어렴
풋 떠올린다.
무수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던 그. 기.사.는 당연한 듯이
활에도 뛰어났고,
그 중에서도 사냥터에서 선보였던 '필중(必中)의 활'은
문자 그대로 절기에 다름없었다.
이렇게 다수의 화살을 한 번에 쏘는 재주를 상대하고 있노라

어느 쪽의 활이 뛰어난지 알고 싶어진다.

함께 전.쟁.터.를 내달렸던 기사로서 순수한 호기심이 솟아나


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고를 분산시킬 때가 아니다.
뇌리의 한편, 그보다 더 적은 여분의 생각을 살며시 만류한
다.
싸움에 있어선 싸움만을 의식한다.
하나의 전투기계가 되어, 오직 전장을 승리를 가져온다.
그게 자신이다.
그게 검을 뽑는다는 것이다.

조금 전 마나카의 말.

정확하게 세이버는 기억하고 있다.

산속으로 발을 딛기 직전.
자신의 마스터인 소녀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표정이 어두워
진다.
보옥과 같은 투명한 창은의 눈동자가 젖고, 아름다운 얼굴에
슬픈 기색이 비치며.
당초의 「당신이 다치지 않도록」이란 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깊게, 소녀는 한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이버가 신경 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래야 마땅하다.


서번트야말로 마스터의 검으로서 목숨이 오가는 장소로 향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주군을 위해 전장을 내달리는 기사처럼.
그리고, 이번에 소녀가 한 말.

유인해 줬으면 해───

그래, 명령은 확실히 수락했다. 유인해 보이겠다.


설령 몇 백, 몇 천───억의 화살이 쏟아진다해도, 끝까지
버텨낼 뿐이다.

검을 쥔다. 한쪽 손.
다가오는 적을 양단하기 위함이 아닌,
날아오는 화살을 떨어트리기 위해 휘두르는 검이라면,
한쪽 손, 오른손으로 검을 쥐는 것이 알맞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왼손은 자유롭게 놔둬야하겠지.

산속 경사면의 어느 장소에 머물러 사격을 계속 맞받아친다.


수 초를 두고 덮쳐오는 강철 화살의 무리.
위태롭지 않게 피하고, 튕겨낸다.
몸이 회피와 방어에 익숙해졌을 즈음, 갑자기 화살이 멎었다.
몇 초가 흘렀는데도 다음 화살이 오지 않는다.
상대가 현재 거리에서 끝장내는 것을 포기했을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서번트 특유의 기척은 지금도 산속에 농후하게 떠돌고 있다.
방심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한 채 기다린다.
그러자───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갑자기 검은 비구름이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의───
화살의 성난 물결이다.
죽음의 분류(奔流)다.
강철의 호우다.

「재미있군.」

불가시의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고.


세이버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소녀 한 명이 보인다.
사랑스럽다고도,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련. 그런 단어가 어울린다.


그 아이는 산속을 걷고 있다.
홀로.
특별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비를 발견하면, 손가락에 얹어 미소 짓고.

「……♪」

콧노래를 부른다.
소풍 온 일.반.인.일까.
이런 추운, 숨결이 하얗게 변하는 계절에?
외견은 마술사를 상대로는 어떤 판단기준도 되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소녀라는 사실이 '내(私)' 마음 어딘가를 욱신거리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녀의 표정, 콧노래의 음률.
평온하고, 아름답고.

너무나 순진무구하다고 느껴진다.


저 정도로 가련함을 체현하고 있는 아이가, 살.육.전.의 참가
자라는 것인가.
성배전쟁, 이라고는───

「찾았다.」

보고 있었다.
소녀는, 확실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설마하는 생각이 조금씩 뇌리에 떠오른다.

설마, 마스터인가. 저 아이가?


설마, 그 거리에서 원견(遠見)마술을 간파했다?
설마, 이쪽을 찾고 있었다고?

「당신이 아처의 마스터구나. 고마워.」

말은 입술의 움직임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아이는 마스터다, 그건 확실하다.
즉각 철수해야 한다.
이 거리를 눈치 챌 정도로 솜씨가 좋다면 거처를 탐지하는 것
또한 손쉬울 것이다.

허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입술도. 다리도. 눈 깜박임조차도 할 수 없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왜
어째서, 라는 물음은 너무 어리석은 것인가───

「고마워.」

벚꽃색 입술에서 다시금, 흘러나오는 말.

고마워.

어째서, 소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가?


이쪽으로 말을 걸고 있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허나, 하는 말의 뜻을 짐작할 수 없다.

고마워.

무엇에 대해?

「나랑 그에게 소풍 올 기회를 준 건, 기쁘지만.」

그───
서번트를 말하는 것인가.
소풍.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치만……」

소녀의 표정이 흐려진다.


가련한 용모가 일전하여 슬픔으로 채색된다.

「그를, 위험에 빠지게 했어.」

눈동자 깊은 곳에───

「어.떻.게. 책.임.질. 거.야.?」

뭔가가 보이고───

「아야카. 여기 있었구나.」

시각은 오후 2 시를 지났을 즈음.


어물어물, 스스로도 요령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어제 점심과 저녁과 똑같은 냉장식품인 그라탕 통을 따고,
내열 그릇에 붓고, 오븐 기능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전자레인지를 세 번째로 노려보고 있을 때.
키친
주방에 아버지가 모습을 보였다.
시계(視界)에 비치는 아버지를 보고, 굳어버린다.

집에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아니면 모르는 새에 밖에서 돌아온 건가.
그러면 언니도? 그리고 들어가선 안 되는 방에 있을 누.군.
가.도───

「마나카는 없다. 나도 바로 나갈 거다.」

「그렇구나……」

그러면 그라탕은 두 개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야카는 끄덕인다.

「공부는 하고 있느냐?」

아버지의 말. 어느 공부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학교 공부. 마술 공부?
하고 있어, 라고 분명치 않은 대답을 한다.
전자는 하고 있다. 후자는,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왜냐면 매일 아침 일과에 아버지가 오지 않으니까.
혼자서는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는 것밖에 못한다.

(들킬까?)

말에 들어있는 거짓말을 지적 당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데.

「그렇군.」

짧게 끄덕였을 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치곤 많이 늦구나.」

「응.」

「제대로 챙겨먹으란 메모를 남겼을텐데.」

「죄송해요. 먹는 걸 잊고 있어서……」

여기서도 거짓말을 한다.


사실은 아버지나 언니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냉장 레토르트를 돌려서 먹어도 하나도 맛있지 않으
니까.
좀 더 자라서 좀 더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요리도 할 수 있
게 되면,
혼자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될까.

「너는 식탁 쪽을 준비하거라.」

「어?」

「대답은 네,다. 아야카.」

「네, 네.」

지시하는대로 혼자서 식당으로 들어가서.


젖은 행주로 식탁을 훔치고, 식기장에서 포크를 꺼낸다.
잘 몰라서 일단 두 사람 분으로.
우유를 따를 컵도 두 사람 분을 꺼내둔다.
조금 있으려니 주방에서 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자레인
지 소리.
아버지는 접시에 얹은 그라탕을 두 개 들고 왔다.

(아, 둘이서 먹는구나.)

아버지랑 자기랑. 둘이서 레토르트 그라탕을 먹는다.


둘이서 먹으면, 맛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어제 점심이랑 저녁과 똑같이 냉동식품. 데운 레토르트의 맛
이 난다.

「언니는?」

한 입 먹고 한 입 마시면서.
작은 목소리로 슬쩍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식당은 여전히 조
용하다.
시선을 그라탕에서 올려보니 아버지는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면 하지 않을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아버지는 이쪽을
보고 있다.

「아버지?」

뭘까.
이버지의 이런 얼굴, 본 적이 없다.
눈동자 깊은 곳에 뭔가가, 어떤 다른 사람이 있는 듯한 꺼림
칙한 느낌.

표정. 얼굴. 눈매.


등줄기가 오.싹.해져 버린다.
며칠 전, 언니가 웃는 모습을 봤을 때에 느꼈던 것과 많이 비
슷하다.
지독하게 차가운 느낌. 섬뜩.

「아야카는……」

아버지는 뭔가를 말하려다 한 번 입을 다물고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봉착해 있다.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해 거론해선 안 되고, 안쪽 방에도 절대
가까이가지 않도록.」

「응.」

안쪽 방───역시, 누군가가 있는 거다.


아야카는 다소 납득을 하면서 끄덕인다.
들어가선 안 되는 방 중 하나,
안쪽 방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알게 됐
으니까.

제일 처음엔 몰랐지만 며칠 전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복


도를 지나갈 때,
사람 그림자를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와도 언니와도 다른 몸집의 그림자.
도둑 같지는 않았다. 그런 나쁜 부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배전쟁이랑 관계있는 사람인가. 손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누구?
어째서 안쪽 방에 있는 거야?
아버지와 언니는 그 사람과 만나고 있는 거야?

말하고 싶었다. 묻고 싶어. 하지만, 말할 수 없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아직도, 본 적 없는 표정의 자취가 남아있
었으니까.
무.서.워.서. 물을 수가 없다───

「언니는 잘있을까?」

문득 입에서 튀어나온 말.
자연히 흘러나온 말이 아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꺼낸 말.
아버지의 얼굴에 붙어있는 무언가를 떼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라탕에 시선을 돌리는 척하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살핀다.
표정. 눈 깊은 곳의 느낌. 실패, 이상한 느낌 그대로다.

「그렇……군. 아니, 아니아니, 마나카에겐 문제 같은 건 없다.


이 대원을 달성하기 위한 의식에 관해선 문제되는 것 하나
눈에 띄지 않으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그렇구나.」

「문제 따위는……」

뭔가를 말하려다 만 것 같은───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아야카를 상대로는.

「문제? 문제 따윈, 없다. 지나치게 순조로울 정도다.


성당교회가 의문을 느낄 정도로 전부 순조롭고말고. 나한
테도 그렇지.
어째서, 저것은 뭐든 해내는 것인가. 천성의 재능이 있는 것
은 알고 있다,
저것은 필시 마술에게 사랑받고 있어. 어째서냐. 언제, 어떻
게 터득한 거냐.
내가 가르치지 않은, 사죠우 가계에는 존재하지 않은 비의
까지 하나하나. 저것은, 쉽게 우리의 것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버지의 혼잣말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뭔가를 중얼중얼하는 아버지
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불쾌했으니까.
아버지에 대해선, 좋아한다.
정말 좋다.
아버지도 분명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생각한다.
지금도 아버지를 좋아한다.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을 뿐.

그뿐.
응, 그뿐이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혼잣말을 그만두고 여느 때의 아버지로 돌아오는 것을.

어제 먹은 것과 똑같을텐데, 왠지, 맛이 나지 않는 그라탕.


질겅질겅하고 고무 같은 그라탕.
그것을 다 먹었을 즈음.
겨우 아버지는 여느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요하고, 진지하고, 나한텐 조금 엄한 아버지.

「치우는 거 내가 할게. 아버지는 일을……」


「아니. 나중이라도 괜찮다.」

아버지는 여느 때의 얼굴로.
고요한 목소리로.

「가든으로 가자. 아야카, 너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뭘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뭔데? 하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식당을 나갔다.

같이 복도를 걷는다.
어라. 어라?
이런 식으로 아버지랑 손을 잡는 건 엄청 드문 일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초등학교에 올라간 이후론 기억에 없다.

집의 복도를 쭉 걸어간 곳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건물을 잇는 복도를 걸어 막다른 곳에 있는 유리문을 열면 이
제 도착.
가든.
오전 시간 대부분을 보낸 우리 정원.
유리벽과 천장에 둘러싸인 푸른 나무들과 꽃의 장소.
매일 아침의 일과를 하는, 내 공부 장소.

「이곳의 술식은 누구도 깨트리지 못 한다. 만일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도망쳐라.」

「만일에 하나?」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해도 위기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

잘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하는 말과 똑같이 아버지의 표정을 잘 모르겠다.


날씨는 흐리지만 아직 밝아서 유리 천장에서 내려온 빛을 등

아버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

「너한텐 말하지 않았다만 이곳은 전부 엄마가 만들었단다.」

「그렇,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게 아니겠구나,


하고.

「그래. 널. 위.해.서.」

「뭐……?」

고개짓, 나는 끄덕이고 만다.


여긴───
가든은, 마술 공부를 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사죠우 가의 마술을 위해서.
그러니까, 당연히, 그것은 가문을 잇기 위한 사람의, 언니를
위한 것이고.

「언니,는……?」

「마나카는 여기가 필요하지 않을테지. 그건 분명 엄마도 알


고 있었을 거다.」

엄마도?
알고 있다니, 무엇을?

「그러니까 아야카.」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이건 네 거다.」

약간 강하게. 아버지가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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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을 위한……」

그렇게───

몇 가지 말을, 아버지는 나에게 알렸다.

가든에 대한 것.
엄마에 대한 것.
그리고, 나.에. 대.한. 것.
응, 하고 나는 몇 번이고 끄덕였지만, 하는 말의 뜻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알게 됐어.
아버지는, 조금 무서워진 아버지는, 그래도───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분명, 조금만 있으면.
중요한 의식이 끝나면 꼭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다고.

「쏜 화살이 되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지.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당겨서, 놔버리면, 뒤로 돌아올 리
가 있겠냐.」
아처
궁병는 고한다.

지금도 계속 흐느껴 우는 주인를 향해.

「■■■■■■■■───!!」
광전사[버서커]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울부짖는다.
요새와 같이 견고한 마술 정원 한가운데서.

「다정한 사람. 성실한 사람. 백은색의 갑옷을 입은 당신.


설령 내 창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당신은 변하지 않겠죠.」
랜서
창병는 중얼거린다.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몸을 애태우며.

「나의 주인.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


어새신
암살자은 속삭인다.
오늘 밤도, 죽음의 무도를 되풀이 하면서.

「하하! 도망쳐라! 달려! 뛰어! 열심히 발버둥 쳐 봐라.


아우성 쳐. 부르짖어! 어차피 네놈들 세 명(三騎)모조리, 내
빛에 불타 사라질 운명이다!」

왕.은 드높이 외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배에 앉아, 태양과 같은 작열로 지상을 태
우면서.

화살은 놓여났다.
동전은 이미 던져졌다.

대성배.
원망기는 무자비하게 가동을 계속하고 있다.
수많은 비극을 회전시키면서.

───약속된 때는 가깝다.
───성배전쟁은, 격렬함을 더하며, 도쿄의 밤을 짓밟고 있다.

그것은, 기억.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채 언니는 나가려고 하고


있다.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분명 어젯밤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
았을 거라고
사죠우 아야카는 멍하니 생각한다.
언니와 아버지가 참가하고 있다는 의.식.에는 너무도 비밀이
많아서,
어린 아야카에게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자신은 언니와는 다르니까.


특별한 언니.
아름다운 언니.

언니───사죠우 마나카.
이렇게 복도를 통해 현관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그
렇다. 뭔가가 다르다.
창문에서 내리쬐는 아침 햇살은 반짝반짝하는 반짝임을 언
니의 전신에 흩뿌린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나 요정, 그 이상으로 고귀한 무.
언.가.라도 되는 듯이.
초등학교로 올라가기 전 아버지가 몇 번정도 읽어준 적도 있
었던 그림책 속에서도,
이렇게나 눈부신 사람은 없었고,
혼자서 몇 번이나 봤던 외국에서 만든 만화 영화 속에서도 없
었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르다.


평범,이라든지.
범인(凡人),이라든지.
그런 단어가 자신에겐 맞다고 아야카는 생각한다.
마침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갓 배웠던 단어. 평범.
하얀 분필로 칠판에 쓰여진 문자를 보고, 선생님의 입을 통해
설명을 듣고───
이미 알고 있었을 단어일텐데, 아아,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선생님의 손으로 쓰여진 두 글자는, 분명 자신을 가리키는 것
일 거라고.

───뭐든지 익혀버리는 언니.


───흑마술 하나만 봐도, 익히는 데에 따라갈 수 없는 자
신.

자신과 같은 여덟 살 무렵에 언니는 적어도 두 종류의 마술을


완벽히 익혔다고 한다.
눈을 빛내며 그 이야기를 들은 아야카는,
까딱 「나도 할 수 있을지도.」 하고 입을 잘못 놀린 적이 있다.
작년인가, 좀 더 전인가.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고, 그
건 특별한 것이니까,
너는 사죠우의 흑마술에 통달하는 것만 생각하렴, 하고 말했
다.

처음엔 어쩌면 자신은 배우는 게 늦된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곧 주눅이 들고, 슬퍼지고, 한심해지고, 잠
이 오지 않고,
시간의 감각도 잃고 말아서, 아침 일과에 나가는 시간을 20
분 이상이나 늦어버렸다.

말 그대로 언니는 그.저. 특별하고───


동시에 자신은 지극히 보통이고 평범한, 마술사 집안의 자녀
에 지나지 않았다.
한 계통의 마술을 익힌다는 것을 말로 하면 간단하다.
실제로는 피에 새겨진 가계의 마술회로를 제대로 이어받고,
일생을 거쳐 배우며, 연구를 해도 한 계통을 통달할까말까다.

그것이 보통이다. 그것이, 평범한 마술사의 삶.

───되고 싶다고 생각해도.


───언니 같이는, 나에겐.

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어쩔 도리가 없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쪽이 어떻게 된 거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도 생각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언니, 빛나는 사람.


반짝반짝 햇살을 받으며, 빙글빙글 춤추며 복도를 나아가는
사죠우 마나카라는 눈부심 그 자체를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되고 싶다, 멋진 여자가 되고 싶다, 라니.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없다.

「마나카, 언니……」

빠끔, 이름을 부른다.


이제 현관의 커다란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을 빠져나가버리면 언니는 당분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
는다고 한다.

조금전 단 둘이서 아침을 먹을 때 선뜻 그렇게 말하길래


그때는 「그렇구나.」말고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현관문을 앞
에 두고,
아아, 이제 곧 정말로 자신은 혼.자.가 되어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 말이, 작지만 미끄러져 나왔다.

「언니, 가는 거야……?」
「후후. 왜 그래?」

빙글, 언니가 돌아본다.


사죠우 가의 거대한 목제 현관문을 등뒤로 하면서.
그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고 기묘함이 가득한
원더랜드

이형의 세계로 길떠나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보인다.


고개를 기울이고, 언니는 말했다.
은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 목소리.

「이제 아야카는 초등학생이었지. 그런데도 혼자서는 쓸쓸하


니?」

「……쓸쓸하지 않아.」
「거짓말 하면 싫어.」

「쓸쓸해.」

한층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고개를 숙인다.

「후후, 착하다, 착해. 응, 거짓말은 안 되지.」

거짓말을 해버린 걸까?


하지만 분명 쓸쓸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진
심.
쓸쓸하다. 넓은 집에서 혼자 있는 건 쓸쓸하다.
특별히 언니가 집에 있어도 같이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
고,
이 마술 의식───성배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식사 시간조차 제때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였던 것 같
다.

그런데도, 쓸쓸하다고 생각한다.


집 어딘가에 누군가가, 언니가 있다, 아버지가 있다.
거기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있는 것과,
정말로 아무도 없어서 혼자 있는 것은 역시 다르게 느껴진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언니를 올려다 본 채로 아야카는 다물어 버린다.
혼자서는 쓸쓸해도 여기에 있어달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애초에 허락받지 못한다. 중요한 의식을 위해 나가는 언니를
붙잡는 일은.

「잘. 따.라.주.는. 건 기뻐, 아야카. 옳지, 옳지.」


언니의 손이 뻗어와 아야카의 머리를 만진다.

「잘했어, 잘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쓰다듬어 준다.


이런 식으로 해 주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선지,
언니의 손짓에 익숙한 분위기를 느끼고 갑자기 고개를 들어
버리고 만다.
어째서일까?

「그래도, 안 돼. 나는 이제 갈게. 대성배로. 그. 사.람.을 위해


서.」

언니는 웃음을 띄우고───

「너도 알게 될 날이 올까.」

───반짝반짝, 빛나며.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누군가를 그린다는


것.」

───역시나, 공주님 같아.

「사랑한다는 것.」

───그렇게 말하는 언니는,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아름


다워서.

「그 순간, 세계는 시작되고,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


해.」

누군가를 그리는 것. 사랑.

분명 그것은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도 눈부신 언니의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창을 넘어 비쳐오는 태양보다도 더 세차게 빛나고 있다.
아아, 굉장해. 아야카는 압도당하고 만다.
단순한 말과 웃음이 가져오는 반짝임에 꼼짝 못하고,
뭔가를 생각해내는 것도 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 그리는 것.
그것은 단어로는 알고 있어도, 실감한 적은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운명의 상대란 건 말이지」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정말로 있는 거야. 아야카.」

───눈을. 돌려버리고 만다.

「뭐든지……목숨까지 내놓아도 상관없는, 그렇게 느껴지는 상


대가.」

───언니의 반짝임에 견뎌내지 못하고.

「있어. 나한테는, 이제 있어.」

반짝반짝, 빛을 두르고 언니는 그렇게 고한다.


평소라면 반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회색 안개가


가슴 속에 소용돌이 치는 것은 어째서일까.
눈을 돌리고 만 것은, 어째서.
이렇게나 반짝이는 언니의 모든 것이 너무나 눈부시니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감지한 것일까?


아야카에겐 알 수 없다.
이렇게나 빛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어째서, 불.안.을. 감.지.
하.고. 있.는. 걸.까..
목숨. 바친다. 그렇다, 이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언니.」

───고개를 숙이고, 말을 흘린다.

「죽지는, 않겠지?」

───시선을 밑으로 향한채로.

「돌아오는 거겠지? 집으로, 돌아와 주는 거지?」

───언니를 향해, 청하듯이, 부탁하듯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우물쭈물 말을 올린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로 고개를 들지 않
고,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그래서, 아야카는 깨닫지 못한다.


다음 말을.
정확하게는 사죠우 마나카가 대답을 하는 아주 잠깐,
불과 한순간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방금 전까지도 보였을 터인 편.린.이, 그 순간에는 명확한 형.


태.를 동반하여,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아니. 안 만나는 게 너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름다운 울림, 소리. 목소리.

「그래도, 응. 그렇지.」

───신비를 입은 듯한 목소리.

「그렇게 잘 따라준다면」

───다정하게, 감싸안아주는 듯이 닿는, 언니의 말.

「마음이 바뀌면, 너도 사.용.해. 줄게.」

그렇게 고하는 언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렇게 말한 언니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사죠우 아야카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이날, 이 아침, 이때에는.


깨.닫.지. 못.했.다.

성배전쟁.
그 종막에 대해서.

일곱 기의 영령의 목숨을 지피는 것으로 성배는 기동한다.


그 구조상, 한 명의 마술사만이 승자가 되며,
다른 형태의 승패는 본래 있을 수 없다.

허나, 승패를 무시한다면 다른 종막을 맞이하는 것도 가능하


다.
즉, 모든 마스터가 패퇴하거나 혹은 성배전쟁의 참가권 파기
를 선택했을 경우다.
삼라만상의 근원을 추구하는 우리들 마술사가, 그 막대한 호
기(好機)인 성배전쟁에 있어 기권을 자청할 가능성은 극히
적으나, 여기서는 가능성만을 서술한다.

패퇴───
대부분의 경우는 마술사의 절명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항목에 기재한대로다.

권리의 파기.
이것은 성당교회에서 파견된 감독관에게 선언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별도의 항목에 기재한대로다.

패퇴나 권리의 파기에 의한 결과.


만일에 하나, 마스터의 수가 제로가 되었을 경우.

이것은 '승자 없음'이라는 종막을 맞는다.


우리의 대원은 달성되는 일 없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된다.

허나───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그것은, 기억.

그 사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던, 사죠우 아야카의 8 년 전


기억.

마지막───?

아니, 틀리다.
그건 단지 일시적인 이별.
진짜 마.지.막은 그 후에 찾아왔으니까.
지금으로썬 단편적으로 밖에 생각해낼 수 없는, 생각해내고
싶지도 않은 기억 중 하나.

중요한 마술 의식. 8 년 전의 전쟁.


마술협회와 성당교회가 손을 잡고 벌였던, 최초의 성배전쟁.
내 기억은 애매하고, 특히, 그렇다, 그 마지막은 조각조각 났
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것도.


잠에 빠져들고, 꿈을 꿨기 때문이다.
아아, 꿈 같은 건, 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소한 내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무자비한 히프노스(Hypnos)는, 기억의 편린을 이렇게 강제
적으로 보여주러 온다.

제일 처음은 8 년 전 이른 아침의 기억.


그 사람
언니(姉さん)와 나의 이별.
마지막은 8 년 전 종언의 기억.
진정한 마나카 언니(姉ちゃん)와 나의 이별의 순간.

───어둡고 어두운 도쿄의 지하 깊은 곳.

입체마법진.
대.성.배에 흔들거리는 까만 무언가.
죽 늘어선 제물.
차례로 떨어져가는, 무수한 소녀들.
평범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이 소비되어가는 생명. 생명.
생명.

누군가가 웃는 목소리.
누군가가───
아마, 그래, 그건, 아버지가 웃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
다..

「다들 사이좋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아캬는 특별하


지.」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 바로 떨어져서, 재료가 되거라.」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평범한 사람에겐 그 정도밖에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다.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 싫어, 그만해, 아버지.


「이 평범한 것, 평범한 것, 평범한 것…….!」

그만.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를 고른 내가 잘못이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 소리 지르는 거야.


아버지.
놔 줘. 아파. 싫어. 싫어.
나도, 떨어지는 거야? 저쪽으로?

그리고 내 의식은 절망과 함께 빙글 암전한다.


빙글───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깨달은 것은, 얼굴에 뭔가가 튄 것을 느낀 뒤였으니까.
그렇다, 나는, 감았던 눈꺼풀을 열고.

그리고, 봤다.
보고 말았다.
언니가, 나를 감싸듯이───
지켜려는 듯이 버티고 선 모습을.

「언니.」

나는, 그때 그렇게 말했었나.


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얼굴에 튄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말았으니까.

피───

얼굴에 묻어 있는 것은 언니의 피였다.


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언니.
아름다운 사람. 누구보다 빛났던, 공주님 같던 당신.
그 가슴께에서 뭔가가 분출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검은 날개 무늬째로 가슴을 관통한, 황금의


칼날.

등뒤에서 누.군.가.의 검으로 관통당한, 마나카 언니.


즉, 내 얼굴에 튄 것은, 아아───

언니의───
닫힌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창문 바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시간을 고하는 작은 새
들의 목소리.
아침의 기척. 밤의 어둠과 차가움은 거짓말 같이 어딘가로 사
라지고, 자기 직전까지는 ‘내일’이었던 날이, 「오늘」의 형태를
띠고 다가온다.

「……으응.」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부드러운 침대에서 사죠우 아야카


는 눈을 뜬다.
일어나자 최악의 기분이었다.
왜냐면 지독한 꿈을 꿔버렸으니까.
내용은 단편적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8 년 전의 그.때.의 기억이 꿈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알만하
다.

(아침이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침대맡에 놓아둔 디지털 시계에


손을 뻗는다.
이불에서 나온 오른손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이 감각은 좋아하는 부류다.


그렇다, 자신의 체온이 배인 침대 감촉의 포근함도, 아침 햇
살도,
작은 새의 지저귐도 똑같이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도 추운 건 춥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다시 자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어떻게든 참는다.
디지털 시계를 눈앞에 가져온다.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보냈다면 안경 같은 게 없어도 상관없
을테지만,
요 8 년 사이 나름대로 눈이 나빠져버려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근
시니까.

[1999]

여느 때와 같이 서력표시 쪽을 흘낏 시선을 주면서, 시각을


확인.
[AM 5 : 59]

오전 5 시 59 분.
이를테면 부활동 아침 훈련이라도 있는 동급생이라면 희한
할 것도 없는 시간.

「딱 맞췄네.」
중얼거리면서 알람기능의 스위치를 끈다.
알람을 설정한 시각은 오전 6 시 정각.

그러니까, 딱 맞다.
빨리 침대에서 나가야 한다.

꾸물꾸물 이불 속에서 기어나가서 꾸물꾸물 잠옷를 벗는다.


어젯밤, 자기 전에 준비해놓은 교복을 입고, 책상 위에 둔 안
경을 끼고,
장농에 붙어있는 전신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머리카락이 그다지 긴 편이 아니라서 금세 끝난다.
괜찮아. 적어도 아침 식사 시간에 영향은 없어.

내뱉은 숨결이 희다.


복도의 공기는, 방 안보다도 훨씬 얼어붙어있다.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가서 찬 공기가 더 신경쓰이지 않을 정
도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는다.
물론 젖지 않게 핀으로 앞머리를 고정한 상태다.

「햐.」

차갑다. 놀라서 소리가 나와버린다.


스스로는 확실히 깼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 같은 졸음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
다.

의식이 확실해졌다.
자기 것인 수건으로 얼굴을 물기를 닦고
머리를 고정했던 핀을 빼고 안경을 다시 쓴다───
문득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받침대.

「……나중에 버려야겠네.」

중얼거리면서 거울을 본다.


당연히 자신의 모습이 그곳에 비치고 있었다.
앞머리가 젖거나 하지 않는, 16 세의 자기자신.
그. 사.람.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평범한 얼굴.」
말이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안경을 쓴 여자 애. 어디에도 있을 거 같은, 눈에 띄지 않는 애
가 그곳에 있었다.
유일하게 그 사람과 닮았을지도 모르는,
빛을 받아 반짝일 투명한 눈동자도, 안경 렌즈에 겹쳐 매력적
으로는 비치지 않는다.

그렇다, 아야카는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좋아하는 분류라고 칠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거울 너머 자기자신을 앞에 두고, 왜 이렇게 경계심에 찬 눈
초리인지.
성격이 배어나와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격. 즉, 음침하고, 겁많고, 시야가 좁고, 그러면서.

「……앗. 이런, 시간, 시간.」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황급히 복도를 걸어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그대로 빠


져나가 주방으로.
요리는 당번제라도 상관없다고 그.는 말했지만,
한번 맡겨봤더니 믿을 수 없는 양을 만들어서 버려서, 가능하
면 자신이 만들고 싶다.

그가 많이 먹는 건 별로 상관없지만,
이쪽도 당연히 같은 양을 먹으리라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어제 붙인 반창고가 감긴 손끝으로 냉장고에서 야채를 몇 개
꺼내서,
식칼을 쥐고, 먼저 토마토 부터. 통통 썰기 시작한다.

야채를 써는 것만은 어릴 때와 비교해서 능숙해진 거 같다.


써는 방법 하나로 식감도 변하고 맛에도
직결한다는 걸 깨달은 것은 초등학생이 되고부터였다.
그런 것을 딱히 뿌듯해하지 않는다.
조.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야채 뿐인데도, 그걸 깨닫는
것에 시간이 걸렸다.

「잘잤어? 아야카. 오늘도 빨랐나 보네.」

갑자기, 목소리───
이제와서 놀라고 싶지 않은데도, 왓, 하고 목소리가 나와버린
다. 놀랐다.
시선을 향하니 그곳에, 그.의 모습이 있었다.

───빛의 가감으로 파랗게 보이는, 창은의 눈동자를 한 그.


───나의 서.번.트..

「놀라게 하지 좀 마, 세이버.」
「미안해, 아야카.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집중하고
있길래.」

「야채 썰고 있었던 것 뿐이거든요.」


「응. 역시 넌 식칼 놀림이 능숙하구나.」

그렇게 말하고 웃는다.


여느 때의, 그의 웃는 얼굴이었다.

뭐든 나는 받아들여 줄게, 라고 하는 듯한 다정한 웃는 얼굴.


창문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마치 그를 축복하는 듯이 감싸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착각이 틀림없다.
설마 마력을 방출하고 있는 것도 아닐테고, 그림책 속의 왕자
님도 아닌데.

「……보통입니다.」

어떻게든 평정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려고 작게 말한다.


눈 앞의 요리 만드는 것에 진중한다. 서둘러서 끝내버리자.
척척 아침식사를 만들어 간다.
생야채 샐러드에 달걀프라이. 그리고 토스트.
그가 '고기는 없어?'라고 하길래 준비뒀던 소시지를 굽는다.

고기. 고기───
고기, 생물의 육체로 느껴지는 것은 안 된다. 서툴다. 피도 그
렇다. 그래서 소시지다.
육체로 느껴지지 않고, 피도 없는, 기성품.
이런 식의 가공식품이 아니면 육류는 다룰 수 없다.
흑마술사 실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왼쪽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가 좋은 증거다.
아야카는 한심하다곤 생각하면서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고 생각한다.

「맛있겠는걸.」

「잘라서, 구운 것뿐인걸요.」

「단순한 행위일수록 기량이란 게 반영되는 거야. 검도, 식칼


도.」

「……」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식당으로 나르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순식간에 먼저 앞질러 해버렸다.
아야카는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과 컵을 들고 온 정도고, 다른
것은 전부 다 그가 했다.

「……고마워.」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해 둔다.
대답을 듣지 않고 테이블로 와서, 잘 먹겠습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아야카 옆에 그가 시원스런 목소리로 '잘 먹
겠습니다.'라 말하고.

아침 식사가 시작된다.
우선 토마토를 한입 입에 넣고 나서 달걀프라이를───
아아. 또다. 의식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야카는 속으로 한숨을 쉰다.

항상하던 버릇대로 또 단면굽기로 해버렸다.

「미안. 물어볼 걸 그랬네.」

뭘? 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최우수 서번트일 터인 그는,
아야카가 말로 하지 않는 것까지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마스터와 마력적인 연결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닌, 그저 그는
감이 좋다.
금방 무언가를 헤아리는 것이다.
지금도 절대로, 무엇에 사과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고 있다.

「달걀프라이, 난 어떻게 굽든 다 좋아.


너 좋을대로해도 상관없어.」
「응……」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시선을 그에게 향하지 않고, 아야카는 끄덕인다.

(좋아하는구나.)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그의 감으로 눈치채이지 않게, 조용히.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양면굽기지만,


아니, 그랬지만, 지금은 이미 정말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쭉 언니가 좋아했던 서니 사이드업을 해왔으니까.


애초에 어릴적에 턴 오버가 좋았던 것은
완벽했던 언니를 향한 작은 반항심으로 호불호를 가렸던 것
일지도 모른다.
문득───
자기도 모르게, 아야카는 창문을 바라 봤다.
8 년 전, 빙글빙글 춤추는 듯, 그 사람이 아침 햇살을 받았던
장소.

「……저기, 세이버.」

「왜?」
「당신, 언니의 서번트였지? 8 년 전 성배전쟁에서.」

「그렇지. 마나카는 내 마스터였어.」

「어떤 마스터였어? 언니는.」

순수한 호기심.
아마, 그런 거라고 아야카는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 말 없이 식사를 계속하는 것이 싫었다든가,
성배전쟁에 대한 정보는 조금이라도 많이 들어두는 편이 좋
을 거라든가,
몇 개의 이유는 떠오른다.

하지만, 제일 적합한 이유는 호기심인 것 같다.


갑자기 신경 쓰였으니까. 그대로 말했다.

「마나카는, 응, 우수한 마술사였어.」


그는 웃으며

「아주 우수했어. 난 마술엔 그다지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1 류 이상의 솜씨를 지녔다는 건 알 것 같았어.」

「?」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만다.

「아아. 지난번의, 맨 처음 성배전쟁 일은 기억이 애매해. 전


에도 말했지?」
「아……으, 응.」

8 년 전에도 그는 성배전쟁에 참가했었다.


제 1 위의 검의 영령.
언니인 사죠우 마나카의 서번트로서 싸우고,
6 기의 영령들을 모조리 꺾고 성배를 손에 쥐었다했나.
하지만 그 직전에 계.약.을 파.기.당해───

「후유증, 이겠지. 이번 회에 소환 되고나서의 기억은 괜찮


아?」

「응. 기억에 흔들림이 있는 건 8 년 전에 대한 것뿐이니까 걱


정하지 않아도 돼.」

그가 끄덕여 보인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사람. 아니, 영령.
최하위인 제 7 위·권천사의 마스터인 자신의 곁에서,
이 성배전쟁을 함께 싸우리라 맹세했던, 제 1 위의 서번트.
웃는 모습은 마치 그림에 그려진 영웅처럼 잘생겼다.
그리고 발랄한 정기가 넘치는───

(어라?)

여느 때의 그의 얼굴.
그럴 것인데, 지금, 아주 한순간.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미안해 보이는, 거북한듯 한 묘한 표
정이었다.
확실히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세이버?」

「아야카. 나도 질문해도 될까?」


「어, 으, 응.」

「언니인. 사죠우 마나카에 대해 너는 어.떻.게. 느.껴.졌.


어.?」

언니──────
마나카 언니.

누구보다 빛나던 사람.


당신과 함께 8 년 전 성배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

그 시절 나는 아직 어렸고, 지금와선 기억나지 않은 일도 많


지만, 그래도,
확실히 기억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그래.
나는, 언니를 계속──────

「언니 말이야?」

나는───

「나는……」

계속───

「……응. 언니는, 좋아했어.


마술도 공부도 뭐든 잘하고, 그리고, 예쁘고.」

「언니의 머리카락은 있지, 햇빛이 비쳐서 반짝반짝 빛났어.


그게, 엄청 예쁘고, 멋져서」
거짓말이 아니야───

「같이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같이 있었을 땐, 항상


잘해줬고」

거짓말이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로.

무엇이든 능숙하게 잘하는 언니(姉さん), 아니, 우리 언니(姉


ちゃん).
아름다운 사람. 마나카 언니.
아버지랑 같이, 분.명.,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줬던 사람.
평범하고, 뭐든 잘 못하는 나에게.

「좋아했어.」

한 번 더, 말하고.
나는 웃어 보인다.
어색한 얼굴로 보이지 않았기를 빌면서.

기우. 그렇게 바란다.

그래, 필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노트에 쓰여진 모든 항목에 의미 따위 없다.
두. 번.째. 성.배.전.쟁.이 열릴 일은 없으니까.
어느 한 사람이 반드시 근원으로 도달한다.
그걸로 끝이다.

허나. 만일에 하나.

지난 날, 감독자가 입밖으로 내고 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한


다면?

(낡은 노트 한 권에서 발췌)

그리고───
그리고, 소녀는 가든에 이른다.
아침 햇살을 한가득 끌어들인 유리로 만든 천장과 벽.
빛 속에서, 발치에 무리 지어오는 비둘기떼를 바라보며, 자신
의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의 존재를 의식하며, 한 마리를 살짝
안아든다.

소녀는 과거를 떠올린다.


지금으로썬 이미 생각나는 것이 많지 않은, 8 년 전의 기억을.

언니의 기억.
아버지의 기억.
몇 가지를 소녀는 생각한다.
단편적으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일.
기억에 없는, 어머니의 일.

「……아야카.」

귀에 익숙한 청년의 목소리가 울린다.


가든의 출입구 유리문 바로 근처에서, 그의 모습이 있었다.
휘황한 햇빛 때문에,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어도, 그의 표정
이 소녀에겐 잘 보인다.
분명, 웃고 있다. 지금도.

안아 올린 비둘기를, 살짝 내려 놓고.
창은의 눈동자를 한 그를 향해, 소녀는 똑바로 끄덕인다.

「응. 갈게.」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1999 년. 다시금 이 도쿄에서 행해지는 제 2 의 성배전
쟁으로.

(제 1 부 'Little Lady'·끝)
(제 2 부 'Best Friend'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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