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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화랑을 들렀다가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타르치온은 돌아갔나 보네.'
손님이 머무리기엔 늦은 시간이다. 아마도 타르치온은 돌아갔을 테고 출입구에
마차가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판단이 맞는 듯했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 나는 미묘한 공기를 접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무슨 일 있니?»
나를 바라보는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치를 보고 있다. 바단 하녀뿐만이
아니라 하인들도, 심지어 집사도.
나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아가, 왔니?»
환하게 반겨 주는 모친을 본 순간 더욱더 알 수 있었다. 우아하게 휘어진 눈꼬리
아래 숨겨진 어색함이 눈에 보듯 뻔히 보였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쭉 이어져 왔던, 익숙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다녀갔나요?»
«…아가.»
백작 부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
«이 어미가 확실하게 내쫓았단다.»
이번에는 확실히 진실로 짓는 미소였다.
«…화나셨겠어요.»
«아니. 아니다. 내 네가 염려할까 봐 숨기려 한 것이지 화가 난 것은 아니란다.»
«그래도요. 쉽게 나가려 하던가요?»
«나가지 않으면 어쩔 거니?»
잠시 망설이던 모친은 꺼낸 이상 시원하게 토로할 생각이신지 말을 아끼지 않았다.
«말똥도 아끼지 않고 퍼부으라했지.»
나는 끄덕였다. 나이스입니다.
역시 모친답다고 할지. 말똥 세례를 받은 인간은 당연하겠지만 전남편, 아니 고라니
놈이었다. 나날이 쫓아내는 솜씨가 신의 수 준으로 발전하는 분이셨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솔직히 처음에는 공작에게 거름을 뿌렸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도 완벽하게 적응했다.
«세살에, 어머니.»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로막았다.
«적당히 뿌리지 그러셨어요.»
나는 진지하게 응수했다. 정말로 아픈 사람을 염려하듯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서.
«말똥에 적응하면 어떡해요.»
똥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인데, 여기에 적응해 버리면 정말 큰일이다.
물론 인간은 진화와 발전의 동물이므로, 또 무슨 망언과 함께 불굴의
로맨티시스트처럼 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찾아와 보렴.
어느 영화의 명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세상에는 똥보다 똥다운, 똥보다 더러운 것도 있음을 깨닫게 해 줄 테니까.
«염려 말거라. 이 어미가 이번에야말로 이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게 쫓아냈으니. 날
믿으렴.»
«에이, 어머니 말은 당연히 믿죠.»
나는 짐짓 눈을 휘며 애교를 부리듯 모친의 손을 꼬옥 잡았다. 모친은 내 얼굴을
보더니 함께 웃었는데, 그제야 진정으로 안심한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걱정했던
쪽은 어머니였나 보다.
«오늘 갤러리를 다녀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재밌었니?»
«네? 네. 흥미로웠어요. 그림도 좋았고. 그나저나… 타르치온 씨가 오늘 저택에 왔었을
건데.»
«어머, 타르치온 씨가 뭐니. 얘는 어릴 때는 그리 가까이 지내 놓고서.»
어머니가 가볍게 타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타르치온도 네 얘길 하더구나.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널 보았다고.»
«네. 일정이 있어서 함께 돌아가진 못했지만요.»
«그러니?»
«네. 근데 어머니, 혹시 타르치온이 있을 때랑 그…»
«그놈이 방문한 시간이랑 겹쳤느냐는 말이라면 그렇진 않았단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집안의 수치를 보여 줄 일은 없었으니.»
이미 요센 내에서는 자자한 일이라 타르치론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직접 보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 다행이었다.
«불쾌한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하자꾸나. 갤러리에서 그림이 좋았다고?»
«네. 아주 좋았어요.»
나는 화제를 옮기는 모친에게 순순히 맞춰주었다. 나도 그놈 얘길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같았으니까.
갤러리에서 몹시 흥미롭게 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꼭 사고 싶은 그림도 생겼고요.»
그러다 문득 깊게 남아 있을 것 같던 그림이 지워지고, 그 자리를 사람의 얼굴이
대신했다.
갤러리에서 보았던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이어 줄줄이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그림 구경보다 사람 구경이 더 인상 깊었던 날이지?
«조금 피로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그러렴.»
푹 쉬거라. 그리 말하며 모친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올라가려는데 모침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아 참. 레아, 레아! 내 정신 좀 봐. 깜빡할 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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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손에 붙잡혀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 네게 도착한 선물이 있단다.»
선물? 그녀나 부친이 준비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이혼 후 요센 영지에 살게 된 뒤로 부모님은 수많은 것을 선물하고 선물헤 주려
했으므로. 내 방엔 각종 진귀한 것이 그득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니라면 줄 사람이
없을 텐데.
«수도에서 온 거란다.»
«수도요? 설마…»
«아니, 아니. 그 작자가 가져온 건 아니란다. 얘는. 설마 공작이 준 걸 네게 주겠니?»
모친이 장난스럽게 나를 타박했다. 하기야, 그렇지.
그저 수도라기에 자연스럽게 고라니 놈이 떠올랐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수도라는 호칭에 공작과 공작가가 생각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빙의 후 내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불쾌하네. 내가 파블로프의 개?
…그놈을 개 모형으로 만들어 한 대 걷어차면 모를까.
걷어차니 마니 하는 소리가 나온 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놈이 정말 커다란
개라도 되는 양 날 졸졸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부탁해 기사단이 내려 오기 전까지 내내.

«부인, 내 소심하게 이리 다가가지만…»


«내 주먹은 소심하지 않은데 맞아 볼래요?»

누가 네 부인이에요?
이혼하면 남이지.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하나 모르겠다. 국방부 최고 대신씩이나 하신
똑똑한 양반께서.
«이건 황실에서 온 것이더구나.»
«황실이요?»
요센 영지에서는 수신인이 타레이아라 적혀 있거나 특히 공작저에서 온 물건은 절대
받지 않는다.
밀수품보다 더욱 엄격하게 관리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수도에서 날아온 물건도 받지 않았다. 자연히 남은 것은
황실뿐이었다.
'이번에도 황제 폐하이신가?'
말했듯이 가끔 황제가 내게 서신을 보내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비록 그게 흥미 위주의 변덕이라 해도.
그 잘생긴 황제 아저씨 덕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니, 받아 들이자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편지를 들어 이러저리 살펴보았다.
음? 잠시만. 그런데 이거…
«어머니. 이거, 평소 받는 서신이랑 다른 문양인데요?»
나는 이상하다는 듯 편지를 뒤집어 보았다. 밀랍으로 찍힌 인장이 보였다. 밀랍으로
찍힌 인장이 보였다. 봉투 겉면에 새겨진 것과 같은 문양이다.
«어머나, 이건 황태자 전하의 문양이구나. 어쩐 일이시라니.»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지 않니.»
오랜만?
«황태자 전하와는 아카데미 동기였으니 말이야.»
«아… 음. 그렇죠.»
내가 아닌 이 몸의 주인 타레이아의 이야기였다. 사실 이 몸의 주인 타레이아는
황태자와 아카데미 동기였다. 모친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가끔은 거길 보내지 않았어야 했나 싶기도 하구나. 내가 거기서 그 때려 버릴
작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에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황태자 말고도 놀랍게도 전남편 놈도 같은 동기였지.
타레이아는 그곳에서 전남편에게 첫눈에 반했고.
여기서 아카데미란 의무적으로 1 년 정도 다니는 교육 기관을 말했다. 소규모
사교계란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내가 빙의하기도 훨씬 오래전, 적어도 7, 8 년 전의 이야기인지라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아는 정도였다.
«이젠 저도 지나간 일이려니 하는걸요. 어머니랑 잘 살고 있잖아요. 행복하게.»
«…그래.»
«일단 들어가 볼게요.»
모친이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그렇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오르며 흘끔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의 서신을 보고도 크게 반응이 없으시네.
모친의 얼굴에 별 미심쩍은 기색이 없던 거로 보아서는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거나 내가 모르는 타레이아와 황태자 간의 관계가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는 천천히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연히 떠오른 건 이혼 재판에서의
모습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황제 옆에서 놀라거나 황당해했다. 그러다 끝내는 흥미롭게
보던 얼굴. 사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지.
물론 황태자와는 그곳에서 초면은 아니었다. 공작부인으로서도 활동했던 탓에
커다란 자리에서 몇 본 적 있었으니까.

«오랜만이군, 공작. 공작부인도.»


«그이는 바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염려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 그때도 인사말 정도가 다였지 긴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빙의한 지도 한참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이에 황태자와의 접점은
거의 없다 볼 수 있었다.
이제 와 친분을 다지기엔 수상 했고 다분히 어색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서신이라니?
'거기다 왜 이렇게 두툼해?'
서신이라 하더니, 보통의 편지가 주는 감각과는 달랐다.
중간만 두툼한 것이, 이거 편지 말고도 뭔가 더 들어있는 듯한데?
조그만 칼로 밀랍을 떼고 봉투를 열자 아니나 다를까 서신 외에도 자그마한 것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땡그랑!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이게 뭐지?'
동전처럼 납작한 모양이었지만 동전보다 훨씬 두꺼웠다. 거기다 은인지 은색으로
반짝거린다. 납작한 부분에 촘촘한 구멍이 나 있는 걸 보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거 마치 스피커나 이어폰처럼 생겼잖아? 똑같은 건 아니고, 소리가 출력되는
부분이 비슷하단 애기다.
게다가 옆 부분에는 조그만 루비가 달려 있었는데, 붉고 반짝 거리는 것이 팔면 꽤
값어치가 나갈 법한 보석이었다.
«…뭘 하자는 거지.»
나는 함께 있던 서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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