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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후회는 받지 않겠습니다.

1화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화려한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황궁을 찾았던 날, 미로 같은 황궁에서 길을 잃어버린 난 레이몬드를 처음
만났다.
겨우 열 살이었던 내가 아버지를 찾아 헤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였다.
엉엉 울다 지쳐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내게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길을 잃은 거니? 울지 말고 내 손 잡고 일어나.”
고개를 들자 볼에 푸른 멍이 든 흑발 머리 남자애가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 남자애가 바로 레이몬드였다.
참 신기하게도 레이몬드의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난 거짓말처럼 울음이 뚝 멈췄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 넓은 황궁이 더는 무섭지 않게 느껴졌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레이몬드를 마음속 깊이 품은 것은.
마치 운명처럼 난 레이몬드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의 삐쩍 마른 몸과 볼에 든 멍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기만 했다.
그렇게 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날부터 난 시간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 황궁으로 가 같은 장소에서 레이몬드를 만났다.
당시 내 아버지는 행정궁에서 일하시던 백작으로 황궁에 갈 일이 잦으셨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던 난 혼자 있으면 외롭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지극히 아꼈으니까.
그렇게 미로 같던 황궁의 지리가 익숙해질 만큼 황궁을 드나들며 레이몬드를 만났던 난 유난히 하늘이
화창했던 날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날따라 그는 우리가 항상 보았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결국 그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황궁을 돌아다니던 난 아주 낡은 궁에 도착했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건물은 작았고 외벽에 스산한 이끼와
넝쿨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 서 있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천한 하녀의 피가 섞인 황자라니, 정말 수치스러워. 버러지 같은 너희 모자에게 이 작은 궁조차
사치라는 것을 아버지는 왜 모르시는 건지, 퉷.”
레이몬드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키를 가진 남자는 더러운 침을 뱉더 니 레이몬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찰싹-!
날카로운 타격음이 크게 울렸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러운 버러지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이 제국의 황자라는 게 수치다. 지금처럼 죽은 듯이 살아라.
황가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고.”
비수 같은 말을 내뱉은 남자를 향해 레이몬드는 얌전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순간 난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레이몬드를 괴롭히고 있는 흑발의 소년은 다름 아닌 에그리타 제국의 황태자 아스터 에그리타였으니까.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황태자의 초상화를 보며 배웠기에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없었다.
잠시 후 황태자가 궁을 떠났음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이몬드를 보며 난 숨을 죽였다.
그 모습이 어린 내 가슴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처 막지 못한 나의 울음이 새어나갔고 레이몬드는 나를 발견했다.
“울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를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볼에 푸른 멍이 새겨진 레이몬드는 담담히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난 와락 그의 품에 안겼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 품 안에서 펑펑 울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무슨 마음인 줄도 모르고.

* * *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16 살의 겨울이었다.


잡초들조차 얼어붙은 그날, 레이몬드는 내게 처음 보는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야, 나 무척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어. 매일 매일 그녀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그녀가 너무……
좋아.”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져 왔지만 난 레이몬드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는 그날 이후 내게 그녀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도 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그녀의 웃는 모습에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오랜 시간 그를 봐 왔지만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행복해할수록 난 너무도 슬퍼졌다.
그 이유가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나의 사랑을 깨달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차마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황궁의 무도회 날이었다.


따스한 봄날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던 그날, 난 레이몬드의 그녀를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금발과 녹빛 눈동자를 가진 시오스 후작가의 영애, 리제나 시오스.
리제나와 레이몬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처럼 잘 어울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들을 보며 난 그를 향한 사랑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도 완벽한 그들 틈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결심이 무색하게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제나 영애가 서왕국의 늙은 왕의 후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 술에 취해 나를 찾아온 레이몬드는 내 어깨에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내가 한심해.”
리제나가 서왕국으로 떠난 뒤 레이몬드는 웃음을 잃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그의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난 언젠간 그가 웃음을 찾기 바라며 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을 비웃듯 내가 18 살이 되던 해, 레이몬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파티장에서 실수로 황태자의 옷에 와인을 쏟았다는 이유였다.
그 사소한 일이 황태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커졌
이름뿐이나마 황위 계승권자인 레이몬드가 훗날 황위를 감히 바라볼 수 없도록 기를 꺾어놓으려던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신분이 너무 미천해 후궁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레이몬드의 어머니는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다.
황실은 장례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그의 궁으로 달려갔던 난 그날 처음으로 레이몬드의 눈물을 보았다.
아무리 맞고 무시당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도 울지 않았던 그가 어머니의 옷을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무너지는 그를 보며 가슴이 찢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만히 그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엘리야, 난 다시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을 거야.”
칠흑 같은 눈을 번뜩이며 말한 레이몬드는 정확히 1 년 뒤 반정을 일 으켰다.
이미 향락에 찌들어 정무는 뒷전인 황제와 능력 없는 황태자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아 사람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나서 레이몬드와 손을 잡았고 그렇게 부패에 찌들었던 황실은 레이몬드의 손에
무너졌다.
내전이라 할 것도 없었다. 허무할 정도로 반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는 황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정에 큰 공을 세운 아버지의 딸이었던 난 황후가 되었다.
“엘리야, 난 평생 어머니의 외로움을 보고 자랐어. 난 절대 폐황처럼 황궁을 여인들로 채우지 않을 거다.
사랑을 약속할 순 없겠지만, 다른 여자를 황궁에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결혼식 날, 그는 비록 내게 사랑을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 맹세해
주었다.
나는 그 약속으로 충분했다.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그를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우리의 앞날은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 * *

‘임신이 맞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의원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아이를 잃고 난 많은 슬픔을 감내해야 했었다. 하루하루 눈물을 흘리는 내게 그는 괜찮다고 말했었지만
알고 있었다.
그가 아이에 대해 기대했었다는 걸.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만큼은 내게 형식적인 관심이 아닌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황궁의가 더는 아이를 가지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한 뒤부터 그는 전보다 더욱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만큼 아이에 대한 그의 기대가 컸다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다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 할까.
이 소식을 어서 레이몬드에게 전해 주고 싶어.
“폐하, 그러다 넘어지시겠습니다. 조금 천천히 걸으시는 것이…….”
“괜찮다. 내 어서 폐하를 뵙고 싶구나.”
헬란의 걱정 어린 말도 뒤로 하며 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법마저 잊고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난 숨을 고르며 시종에게 입을 열려 했다.
집무실 안에서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리제나 영애가 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리제나?”
굳은 얼굴로 집무실의 문을 바라본 그때.
“모레 리제나 영애가 서왕국에서 돌아올 거니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
쐐기를 박는 듯한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2화

“황후 폐하, 폐하께 고할까요?”


얼음장처럼 굳어있는 내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난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지금은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아니네. 폐하께 내가 왔었다는 건 알리지 말게.”
“……예, 황후 폐하.”
난 그의 집무실 바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 * *

“모두 물러가렴.”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헬란이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연신 나의 눈치를 살피던 시녀들이 방을 나가고 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헬란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리제나의 이름을 들었듯 헬란도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곳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 전부가 들었을 것이다. 아마 내일이면 황궁에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첫사랑인 리제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말이다.
레이몬드와 리제나.
두 사람은 사교계에서 꽤 유명했으니까.
“헬란, 그대도 들었어? 내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 걸까?”
분명 똑똑히 들었지만 믿고 싶지 않아 묻자 헬란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폐하……. 송구합니다.”
헬란은 차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말할 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네 잘못이 아닌걸. 헬란,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예, 폐하.”
헬란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방 안에 나의 깊은 한숨만이 울려 퍼졌다.
“리제나가 갑자기 왜 돌아오는 거지…….”
리제나는 7 년 전 서왕국의 후궁이 되기 위해 제국을 떠났었다.
왕비도 아니고 후궁으로 들어간 이상 그녀는 왕이 죽을 때까지 서왕국의 왕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어떻게 제국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한때는 그녀가 돌아와 레이몬드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특히 지금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연히 레이몬드가 그녀의 소식을 듣는 것조차도 싫었다.
레이몬드는 이제 나의 남편이었으니까.
레이몬드가 리제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만약 그녀가 돌아와 그의 앞에 선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모레 리제나 영애가 서왕국에서 제국으로 돌아올 거야.’
그는 그 말을 하며 어떤 표정을,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리제나가 떠나고 레이몬드는 나와 결혼했지만, 지금껏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내게 최악의 남편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결혼식 날 약속한 것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나 말고 다른 여자는 절대 없을 것이라던 그 약속.
그는 황위에 오른 뒤, 많은 반발을 뒤로하고 제국의 결혼법을 일부일처제로 바꾸었다. 당연히 정부도
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게 했던 약속을 철저히 지켜주었다.
사랑, 그 감정 하나만을 빼고서.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서운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사랑을 줄 수 없다고 말했고 그것을 감수하고 그와 결혼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 생각했다.
때때로 외로움에 가슴이 아릿할 때가 있었지만, 그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다.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도 애정만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의 결혼은 행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리제나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레이몬드가 아직 리제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우린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흔들리고 말 테니까.
원치 않게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난다면 그 감정이 얼마나 애틋할까.
두 사람이 마주 선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완벽한 연인들을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윽.”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순간 아랫배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번쩍 차린 난 황급히 배에 손을 얹었다.
‘이미 한 번 유산하신 몸이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유의하시고
무리하게 움직이시는 것도 안 됩니다.’
의사가 말했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난 지금 혼자가 아니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잠시 널 생각하지 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이 납작한 배에서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레이몬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그러니 리제나가 돌아온다고 하여
마냥 불안해하고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진정하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폐하와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 벌써…… 알겠다.”
창밖을 보자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공작가에서 황성으로 급히 돌아왔을 때가 늦은 오후였으니
밤이 깊어질 만했다.
생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난 만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걸음을 서둘렀으나 식당에 이미 레이몬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내가 도착했음에도 다른 생각에 빠져 알아채지 못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부였지만 바쁜 생활에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 저녁만큼은 항상 함께했었다.
난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는 저녁을 기다렸으나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느낌이었다.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진 그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오늘은 유독 마음이 아렸다.
혹시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이 리제나일까 봐.
한 번이라도 그렇게 깊이 생각에 빠질 만큼 날 떠올려 본 적은 있을까.
시종들이 눈치를 살피던 그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늦어서 송구합니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꼭 검은 밤에 맹수를 마주한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괜찮소, 내가 일찍 온 것이니.”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며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테이블 위로 음식들을 빠르게 차려냈다.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던 레이몬드는 항상 그랬듯 궁인들에게 말했다.
“모두 물러가거라.”
궁인들이 모두 물러가고 문이 굳게 닫혔다.
레이몬드는 수려한 미간을 살짝 좁히며 느른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거친 손길로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냈다.
그는 피곤함이 묻어있는 손길로 턱 끝을 쓸며 나를 바라보다 앞에 있는 와인 잔을 들었다.
그의 유려한 손짓에 와인 잔 안의 붉은 액체가 빙글,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오늘 공작가에 다녀왔다고.”
그는 늘 그렇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잠시 그의 손짓에 시선을 뺏겼던 난 낮은 음성에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둘만 있을 땐 격식을 차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난 그에게 편하게 답했다.
“응.”
내가 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자 레이몬드는 건조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식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
형식적으로 나의 안부를 묻는 것. 이게 요즘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결혼 초기에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이를 유산하고 난 뒤 그와 나의 거리가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리라.
서운하긴 했지만 원망하진 않았다. 그 나름대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감내하는 방식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의 차가움이 배가 되어 느껴졌다.
시녀 한 명도 없이 궁 밖을 나갔는데 무슨 일인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걸까.
호위 기사들조차 물리고 오늘 내가 궁 밖으로 나간 이유는 은밀히 진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유산으로 이미 황궁을 시끄럽게 했었고, 황궁의는 내게 임신이 힘들 것이란 진단을 내렸었다.
해서 나는 가능성이 낮은 일에 황궁의를 불러 소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의 친정 방문이었지만 오늘 아버지는 저택에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며칠 전 황도를 떠나 영지 시찰을 나가셨다.
그리고…… 레이몬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내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공작도 없는 공작가에 왜 간 것인지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는 그 이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리제나였더라도 이렇게 무관심했을까.
못난 생각임을 알지만 잊고 있던 그녀의 이름을 들어서일까 오늘따라 쉬이 마음속에서 자꾸만 어깃장이
일었다.
난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없이 식사하는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해야 하는데.
황궁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어서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단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도, 나를 앞에 둔 지금도 그의 시선에 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살짝 흐려진 검은 눈동자와 좁혀진 미간.
오랜 시간 그를 봐 왔기에 그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무언가 깊은 고민에 몰두한 듯, 날카로워진 신경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리제나…….
지금 그녀의 일 말고 그가 이토록 예민해질 만한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왜 제국으로 돌아오는 걸까. 잠시 왔다가 서왕국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제국에서
머무는 걸까.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확실히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난 쓰라린 속에 입술을 깨물다 결국 상념에 빠진 그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레이.”
흐려졌던 검은 초점이 그제야 나를 향했다.
“왜?”
나 차가운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꺼내고 싶지 않던 이름을 말했다.
“……리제나 양이 제국으로 돌아온다고 들었어. 사실이야?”

3화

“그걸 네가 어떻게?”
내게 숨기려고 했는지, 그답지 않게 나를 바라보는 흑안이 살짝 흔들렸다.
“아까 집무실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어.”
“그랬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들은 게 맞아. 모레 리제나가 돌아올 거야.”
담담한 그의 목소리와 달리 난 손끝이 떨려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리제나 양은 서왕국의 후궁인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 거야? 잠시 방문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제국으로 돌아온다는 거야?”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답지 않게 꼬리를 무는 물음이 귀찮은 건지 아니면 캐묻는 것이 싫 은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추스른 그는 내게 말했다.
“이 주 전쯤인가. 서왕국의 왕이 지병으로 죽고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았어.”
“아…….”
그제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서왕국의 왕의 병환이 깊어 오늘내일하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이 선왕의 후궁전을 정리하는 일이었지. 그중 선왕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후궁은 특별히 출궁을 허락했다는군.”
서왕국의 후궁은 모시던 왕이 죽으면 수도원 같은 곳에 들어가 평생을 보낸다고 들었다. 그런데 출궁을
허락했다는 건…….
“그럼…… 리제나 양은 다시 영애의 신분이 되어 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거구나.”
“그래, 다시 리제나 시오스. 시오스 후작가의 영애로 불리겠지.”
느긋하게 말한 그는 와인을 들이켰다. 무감한 듯한 태도였지만 난 이미 평소와 다른 그의 눈빛을 이미
읽었다.
차라리 후궁의 신분으로 돌아왔더라면 레이몬드와는 절대 엮일 수 없었을 텐데.
괜스레 불안함이 들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꽉 그러쥔 그때, 나의 이름을 부르는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야.”
난 피해버렸던 그의 짙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응.”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야.”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일까. 순간 머릿속에 갖가지 불안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을 물릴 생각, 없어.”
……약속. 약속이라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어떡했을 건데?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리제나가 돌아온다고 변하는 건 없을 거다. 치정 싸움으로 황궁을 시끄럽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게
황후는 너뿐이야.”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지만 난 순간 그의 눈빛에 스친 어떠한 감정을 보고 말았기에.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난 그것을 못 본 척 애써 미소를 그렸다.
“……그래.”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이틀 뒤 그는 걱정하지 말라 했던 그 말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 * *

“폐하, 다른 드레스를 가지고 올까요?”


저녁에 있을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드레스를 고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벌의 드레스를 내와도 내가 반응이 없자 헬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
그때야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시녀들이 보였다.
리제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황궁에 퍼진 뒤 쭉 이런 상황이었다.
난 자주 생각에 빠져 멍해지고, 시녀들은 그런 날 안쓰럽다는 듯 보았다.
황후가 되어 시녀들에게 동정의 대상이 되다니.
이러다가는 내 아이까지 동정의 대상이 될 분위기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리제나가 돌아와 더욱 시끄러워질 사교계에 황후가 우울해한다는 소문까지 더하게 둘 순 없었다.
난 허리를 곧추세우며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좀 더 화려한 드레스를 가지고 오렴. 오랜만에 폐하와 동행하는 파티이니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예, 폐하.”
시녀들이 빠르게 드레스들을 치우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레이몬드와 동행도 동행이지만 오늘은 리제나의 귀환 파티였다.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이 무색하게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러 어느새 리제나가 돌아오는 날이 되어버렸다.
레이몬드는 내게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후작저에서 그녀의 귀환 파티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오스 후작은 리제나를 서왕국에 보내고 한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다.
딸을 늙은 왕의 후궁으로 보낸 일에 상심이 커 요양을 해야 할 정도라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오는 것이 시오스 후작에겐 큰 기쁨일 것이다.
딸을 위해 파티를 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곳에 레이몬드가 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i>‘레이, 레이가 그 파티에 가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아?’</i>


<i>‘황제로서는 갈 이유가 없지만 레이몬드라는 한 사람으로서는 가는 것이 맞으니까.’</i>
<i>‘황제가 아닌 레이몬드……?’</i>
<i>차라리 황제로서 간다고 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나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i>
<i>‘엘리야, 너도 알잖아. 리제나가 서왕국의 후궁으로 가게 된 건 나 때문이었어. 나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으니 이 정도의 예의는 차리는 게 맞겠지.’</i>

리제나가 서왕국으로 가게 된 것은 황태자의 명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왕국과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하지만 암암리에 사교계를 떠돌았던 뒷소문에서는 리제나가 황태자와의 국혼을 거절하고 레이몬드와
사귀어 서왕국으로 쫓겨난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사교계에 돌았던 소문은 조금 달랐었다.
당시 시오스 후작가는 영지에 큰 화재가 나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문을 위해 리제나가 먼저 서왕국과의 혼사에 대해 의사를 표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난 여태껏 서왕국의 후궁으로 간 것은 리제나의 선택이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레이몬드는 그녀가 떠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지만.

<i>‘엘리야. 그저 파티에 가서 인사를 하는 것뿐이야. 리제나는 나 때문에 많은 수모를 당했어. 그러니


최소한의 배려는 해 주고 싶어.’</i>

그는 이미 파티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가 파티의 감으로써 내게 따라 붙을 뒷말들을 생각했더라면 과연 그렇게 쉽게 갈 수 있었을까.
최소한의 배려.
그의 배려 속에 난 없었다.
그래서 난 오늘 그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했다.
그가 지켜주지 못할 나의 명예를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그래야 내 아이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리제나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유치하고 치졸한 마음일지 모르겠지만 레이몬드의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걸 말이다.
피식, 순간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리제나가 서왕국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아마 지금 레이몬드의 곁에 서 있는 것은 당연히 내가 아닌
리제나였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일로 그의 옆자리를 꿰찬 사람은 나인데.
그런 내가 그녀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니, 스스로가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이 들었다. 난 눈을 감고 느린 숨을 내뱉었다.
내가 힘들면 우리 아가도 힘들어.
이젠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었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난 미안함을 담아 배를 쓰다듬었다. 비록 아직은 너무도 작은 존재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보다…… 임신 소식을 레이몬드에게 언제 말해야 하는 걸까.
사실 지금 당장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지금은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리제나가 가득 차 있을 것 같아서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내 아이가 리제나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것은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좀 더 지나면 입덧을 시작할 테니 어떻게든
레이몬드도 알게 될 것이다.
리제나의 귀환 파티가 끝나고 나면 말해야겠어.
레이몬드도 돌아온 리제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면 그리움으로 가득한 머릿속도 조금은 비워질지도
모르니까.
홀로 가만히 생각하던 난 아기에게 미안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내 아이가 리제나보다 뒤로 밀린다는 걸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사실에 입 안이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리제나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폐하, 이 금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는 어떠하신가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던 그때, 새로운 드레스를 가지고 온 헬란이 물어왔다.
헬란이 가지고 온 드레스는 재작년 레이몬드가 내게 생일 선물로 보냈던 드레스였다.
제국 최고 살롱의 디자이너가 제작한 단 한 벌밖에 없는 드레스.
내게 의미가 큰 드레스였지만 생일이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 아이를 유산해 저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이 드레스를 내게 선물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매년 내 생일을 챙겨 주었지만, 그 선물들을 레이몬드가 직접 고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드레스는 생일뿐만 아니라 임신을 축하하는 의미기도 했다.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했던 그였으니 저 선물만큼은 그가 직접 고르지 않았을까.
난 섬세한 금실 장식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헬란에게 말했다.
“이걸로 입으마.”
“예, 폐하.”
시녀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나의 치장을 시작했다.
자꾸만 어두워지는 얼굴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난 부디 레이몬드가 이 드레스를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궁에 도착하셨습니다.”

4화

치장이 끝났을 무렵, 시녀의 말을 들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들이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해왔다.
“폐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오늘 드레스가 폐하와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네, 정말 빛이 나세요.”
“황제 폐하께서 보시면 분명 폐하의 아름다움에 놀라실 겁니다.”
오랜만에 화려한 치장을 해서인지 시녀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시녀들을 보자 나도 입가에 설핏 웃음이 서렸다.
“그래, 다들 수고했다. 너희들의 말대로 폐하께서 좋아하셨으면 좋겠구나.”
“폐하, 당연히 그러실 것입니다. 이 드레스는 폐하께서 선물하신 것이 아닙니까.”
헬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지만 난 옅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이만 나가자꾸나.”
새하얀 숄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황후궁의 중앙 계단을 내려가자 궁의 로비에 서 있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폐하.”
나의 부름에 레이몬드가 몸을 돌렸다.
황제를 상징하는 금박 선이 화려하게 들어간 검은 연미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보자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칠흑 같은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붉은 입술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난 순간 긴장된 숨을 삼켰다.
그가 이 드레스를 기억하고 있을 기대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심장이 빠르게 뛰던 그때, 무심한
낮은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후, 파티가 이미 시작했을 테니 서둘러 가는 것이 좋겠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내게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기대가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원래 레이몬드에게 바라는 것이 많지 않은 나였는데 바보처럼 왜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을까.
평소였다면 외면당해도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겠지만, 오늘은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리제나 때문에 불안해서일까, 나와 그의 작은 연결고리라도 찾고 싶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그를 바라보았지만, 검은 눈동자에선 시녀들이 예상했던 어떠한 반응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그랬듯 경멸도 아닌, 그렇다고 애정도 아닌 무감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 이번 한 번만은 알아봐 주지 그랬어.
그 익숙한 무심함에 난 처음으로 그를 향한 나의 감정 어딘가가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황후? 무슨 일 있소?”
아무런 말이 없이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자 레이몬드가 나를 한 번 더 불러왔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난 늘 그랬듯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그만 가시지요.”
난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그런 나를 잠시 응시하던 그는 곧 나와 함께 마차로 걸어갔다.

* * *

시오스 후작가의 저택은 어두워진 하늘 아래 온통 밝은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저 저택이 저리 환한 것은 7 년 전 리제나가 떠난 뒤 처음인 거 같았다.
하지만 오늘 저택의 빛이 돌아온 것을 알리듯 후작가의 저택은 가히 황궁의 연회장만큼이나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드십니다!”
파티장의 문을 지키는 하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레이몬드와 난 눈부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홀 안의 귀족들이 모두 몸을 낮추며 우리를 맞이했다. 홀을 가로질러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뒤,
레이몬드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라.”
황제의 명령에 귀족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난 화려한 조명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여자에게 시선을 뺏겼다.
리제나 시오스.
7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리제나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레이몬드를.
그 순간 레이몬드의 시선이 리제나를 향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을 보며 난 손을 꽉 그러쥐었다.
리제나와 레이몬드는 헤어지고 싶어 헤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한창 깊을 때 헤어지고 지금, 7 년 만에 다시 재회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까.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리제나를 응시하고 있는 레이몬드를 도저히 바라볼 수 없어 먼저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조명이 아른거리는 바닥을 보고 있던 그때,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옅은 하늘빛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저의 귀환 파티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제나의 여린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과거, 언제나 내게 친절을 베풀며 보여 주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차라리 리제나의 성격이라도 나빴다면 내 마음이 이리도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과거 내게 단 한 번도 무례를 범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나를 바라보며 7 년 전과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본인의 선택이라지만 가문을 위해 서왕국으로 떠났었다. 거기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곁에 설 수 없는 상태.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내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파티장의 귀족들마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리제나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말이다.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느꼈다.
수많은 귀족의 눈길이 우리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리제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 이 관계의 악역은 나일 것이다.
제국에서 레이몬드와 리제나의 애절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전 황태자가 요란하게 레이몬드를 짓밟을 때, 리제나는 그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버려진 황자를 구원해
준 아름다운 천사였다.
그 애절한 사랑의 한 구절을 각색해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다닐 정도로 레이몬드와 리제나의 사랑은
유명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이 현실에 마주하자 목구멍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리제나에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리제나 영애, 건강한 모습으로 제국으로 돌아와 다행이오.”
“예, 감사합니다. 폐하.”
“…….”
황제가 먼저 운을 떼었으니 이제 황후인 내가 리제나에게 덕담을 말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목이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를,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이 내 목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으니까.
순간 정적이 흐르고 리제나와 레이몬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레이몬드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황후?”
정신 차려야 해.
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예, 폐하.”
“괜찮소?”
내게서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옅은 걱정이 스쳤다.
난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그렸다.
“예, 괜찮습니다. 그리고 리제나 영애, 이렇게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네. 앞으로 과거의
일은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기 바라오.”
설령 그들에게 내가 악역일지언정,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몬드의 곁에 선 사람은 나였다.
그렇기에 레이몬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아직 유효한지 떠볼 수밖에 없었다.
리제나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녀는 나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는지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리제나가 감사를 표했다. 그녀를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리제나 영애, 그대의 모습을 보았으니 황후와 난 이만 돌아가겠소. 우리가 파티장에 오래 있으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 바뀌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떠난다는 말이 무색하게 리제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곧 붉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영애…… 다시 한번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언제나 내가 들었던 무심함이 담긴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낮은 울림에 순간 난 손을 꽉 그러쥐었다.
참자. 곧 돌아갈 수 있어. 황궁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이곳을 벗어날 생각만 하며 범람하는 서글픈 감정을 억눌렀다.
“황후, 이만 돌아가지.”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에 황급히 그의 손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리제나의 목소리가 레이몬드를 붙잡았다.
“폐하,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급함이 서린 목소리에 나의 시선이 리제나를 향했다.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의 표정은 처연하면서도 어딘지 간절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알 수 없는 간절함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리제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의 시선 또한 리제나를 향해
있었다.
레이몬드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난 그가 그녀를 외면하길 바랐다.
레이몬드의 손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지금 그의 손을 잡으면 당신은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
줄까.
하지만 나의 헛된 기대는 곧 깨지고 말았다.
“……말해 보라.”
리제나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나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난 멀어지는, 아래로 향하는 그의 손을 차마 잡지 못했다.
“폐하, 사실 전 홀몸으로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서러운 마음도 잊어버리고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는 긴장감이 서린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나처럼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반듯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말이냐.”
“폐하, 폐하께서 꼭 만나 주셔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떨리는 리제나의 목소리, 순간 본능적인 불길함이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순간, 파티장 한쪽의 문이 열리며 하인이 작은 아이를 안고 홀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5화

하인이 가까워질수록, 아니 하인이 안고 있는 아이가 점점 선명해질수록 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설마, 설마.
불안함에 떨리는 손끝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인이 안고 있는 여섯 살배기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레이몬드와 같은 색을 품고 있었으니까.
칠흑 같은 머리칼과 밤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
제국에 황족을 상징하는 흑발에 흑안이었다.
하인에게서 아이를 안아 든 리제나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동자로 레이몬드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폐하, 이 아이는……. 저와 폐하의 아이인 에드먼드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파티장이 크게 술렁였다.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웅성거림 속에서 난 리제나의 품에 안긴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제나와……레이몬드의 아이.
레이몬드와 같은 색을 가진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난 철퇴에 머리를 맞은 듯 넋을 놓고
말았다.
파티의 다음 날, 황제의 혼외 자식에 관한 이야기로 수도가 시끄러워졌다.
수많은 귀족이 모인 장소에서 보란 듯이 황제의 아들이라 말했기에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길도 없었다.
쏟아지는 신문들은 온통 황제의 혼외 자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드문드문 아이가 없는 황후에 관한 이야기와 비어있는 황태자위에 대한 말도 돌았다.
“폐하, 크로프트 공작님께서 응접실에 도착하셨습니다.”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던 난 헬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헬란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괜찮다며 옅은 미소라면 지었겠지만 난 지금…… 괜찮지 않았다.

<i>‘저와 폐하의 아이입니다.’</i>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난 아직도 리제나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 아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소란과 경악으로 가득 찼던 그 파티장을 어떻게 나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나도 충격을 받았다.
단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황후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레이몬드는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했다.
“응접실로 가자꾸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 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아버지.”
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일어난 아버지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분명 소식을 듣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황궁으로 오신 것일 거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후처를 들이지도 않고 혼자서 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워주셨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레이몬드와 결혼하겠다고 했었을 때도 아버지는 그리 기뻐하지 않으셨다.
반정에 공을 세우시고 공작위를 받았기에 불안한 레이몬드의 지지력과 공작가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내가 황후가 되어야 하는 걸 모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i>‘엘리야, 황권이 어떻든 귀족들이 무어라 떠들든 이 아비는 네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단다. 혹 이


결혼을 이 아비 때문에, 우리 가문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하지 말거라.’</i>
<i>‘전 레이몬드를 사랑해요. 아버지. ‘</i>
<i>행복한 미소를 짓는 내게 아버지는 슬픈 눈을 하며 말했었다.</i>
<i>‘한 사람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뤄진 관계는…… 결국은 지치기 마련이란다.’</i>

그땐 아버지의 걱정에도 어리석게도 난 마냥 행복했다. 레이몬드의 곁에 설 수 있을 거란 사실 하나만으로.


지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날은 아주 먼 훗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혼하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자랐을 때, 그때가 되면 나도
조금은 지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땐 자식들이 있을 테니 또 다른 행복이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시련은 어리석은 나를 비웃듯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소파에 마주 앉은 난 헬란에게 명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시녀들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무거운 고요함이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아버지도 나도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리제나가 데리고 온 아이.
아버지도 그 아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답을 쉽게 찾으실 수 없으실 것이다.
나 역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으니까.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아버지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던 내가 결국 먼저 입술을 뗐다.
“아버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게 해 드렸네요.”
진심으로 죄송했다.
고집을 피워 강행한 결혼인데 행복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이런 일까지 터졌으니 굳이 보지 않아도 아버지의 속이 얼마나 문드러질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지었다.
“황후 폐하께서 죄송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저 폐하께서 애쓰시는 만큼 주변의 상황이 폐하를 도와
주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말을 잠시 멈춘 아버지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해 폐하께선 어떤 반응이셨습니까?”
“……아직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어요.”
“그러셨군요…….”
아버지는 침음을 삼키셨다.
“일단은 폐하께서 어떻게 대응하실지가 중요합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어요.”
레이몬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었다.
아마 리제나와 아이에 관한 생각으로 그의 머릿속이 가득 차지 않았을까.
그런 그에게 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엉망으로 꼬여버린 상황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흐린 초점을 바로 하자 아버지의 어두운 표정이 보였다.
“엘리야.”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황후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난 그때도 지금도 그저 네 행복을 바랄 뿐이란다. 헌데 지금은 잘 모르겠구나. 이 황실에서 네가 행복할
수 있을지…….”
아버지는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후회가 든다. 너의 결혼을 막지 못한 것이.”
후회.
레이몬드를 사랑하고 언제나 그의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한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아이가 내 눈앞에 나타난 참담한 상황임에도 그는 나를 전혀 생각해 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는지 궁금하지, 아니 관심조차 없는 것이겠지.
그런 그에게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면 그가 기뻐하긴 할까.
이젠 아이를 향한 그의 마음에까지 의심이 든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에 난 시선을 아래로 내리떴다.
“죄송해요, 아버지. 저도 뭘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내 아이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난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엘리야, 이것 하나만 알아 두어라. 넌 내 딸이고, 네가 이 황실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언제든 내 곁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난 그의 말에 놀라 시선을 들었다.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말은 곧 황후의 자리를 버려도 된다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 전…….”
레이몬드의 곁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말끝을 흐렸지만, 아버지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리야, 나는 황제로서의 그분의 능력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위로서는 모르겠구나.”
“…….”
“너도 알다시피 폐하는 자신의 혈육들을 척살하고 황좌에 오르신 분이다.”
“아버지 그건…… 그 당시의 폐하께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으셨잖아요.”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난 너만큼이나 오래 폐하를 곁에서 봐 왔단다. 엘리
네가 보지 못한 잔인한 면모까지 전부 다 말이다.”
“…….”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폐하께서 그 아이를 황자로 받아들이시고, 먼 훗날 너와 그 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난 폐하께서 그 아이가 아닌 널 지켜 줄 것이란 확신이 없구나.”
“…….”
아니라고, 레이몬드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는 아이를 원했었다. ‘후계자’로서의 아이를.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던 리제나와 자신의 아이라면…… 당연히 그가 선택하는 것은 내가 아닐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그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내 아이가 밀려서는 안 됐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의 말처럼 내 아이와 그녀의 아이가 맞서는 상황이 생긴다면 레이몬드는…… 내 아이의
손을 잡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로 나오는 답에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폐하, 전 그저 언제나 폐하가 행복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나의 손등을 위로하듯 두드린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와 달리 서글프기만 한. 나와 똑같은 색을 지닌 아버지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난 처음으로
떠올려 보았다.
나를, 나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레이몬드를 떠나는 미래를.

* * *

아버지가 돌아가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늦은 오후, 헬렌이 다급한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황후궁으로 납시셨습니다.”
“뭐?”
평소라면 그가 절대 이 시간에 황후궁으로 올 일이 없었다.
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레이몬드가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할 얘기가 있어 왔소.”

6화

“……예, 폐하.”
헬란이 문을 닫고 나가고 방 안엔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그는 여느 때의 무심한 얼굴이 아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 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을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이렇게 감정을 못 숨기는 사람이었던가.
리제나가 돌아와서일까. 그간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을 자꾸만 보이는 그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왜인지 혼란스러웠던 마음들이 차분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앉으시지요, 폐하.”
먼저 자리를 청하자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소파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난 그를
바라보았다.
“차를 준비해도 마실 기분이 아닐 거 같네. 그렇지? 레이.”
옅은 미소를 짓자 레이몬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답지 않게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나랑 한가롭게 차나 마시자고 온 건 아닐 거잖아.”
순간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고요해진 눈빛으로 그는 입술을 열었다.
“그래, 맞아.”
“리제나가 데려온 아이가, 황족의 상징을 가진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
난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없던 일처럼 지나갈 수도 없고. 하지만 일단……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니 아이가 황족이 맞는지 신 전에 검사를 의뢰할 거야.”
황족이라면 그다음은 어쩔 건데?
차마 이 말이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가 나온 뒤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 지금은 정리해야 할 것도 생각할 것도 너무
많으니까.”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이번 일로 놀랐을 테니 원한다면 한동안 공작가에 가 있어도 좋아. 아니면 좀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남쪽 황실 별궁도 나쁘지 않겠지. 어느 쪽이든 좋으니 말 해봐.”
나를 배려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정말 나를 배려한다면 아이를 받아주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었으니까.
그는 지금 이미 나온 결론을 잠시 이곳을 떠나 못 본 척해 달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이젠 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거겠지.
난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
“별궁의 풍경을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지. 네가 좋아해서 나도 좋아한 것뿐이었어.”
싸늘한 말에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곧 미소를 그렸다.
“난 괜찮으니 신전의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 레이몬드.”

* * *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황후궁을 떠나고 3 일 정도 흘렀을 때였다.
급박한 얼굴로 달려온 헬란이 내게 소식을 전했다.
“황후 폐하! 신전에서 그 아이가 황실의 핏줄이 맞다는 확정문을 발표했습니다.”
더는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현실이 나와 레이몬드에게 닥친 것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구나.
그래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난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헬란에게 말했다.
“알겠으니 그만 나가 보렴.”
“네?”
헬란은 답지 않게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소식을 들은 내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크게 상처받을 줄 알았을 것이다.
당장 황제궁으로 달려가 화를 내기라도 할 줄 알았겠지.
하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었다.
“못 들었느냐, 그만 나가보라 했다. 몸이 피곤해 쉬고 싶구나.”
“하오나 폐하.”
“헬란, 너답지 않게 토를 다는구나.”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헬란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다. 내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저녁 만찬에 못 갈 듯하니 폐하의 시종에게 전하도록 하렴.”
“예, 알겠습니다. 폐하.”
헬란은 예를 올리고 방에서 물러갔다.
그 뒤, 고요한 방에서 난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신전의 확답이 나왔으니 이제 그 아이가 레이몬드의 아이라는 것이 온 제국에 퍼질 것이다.
황제의 사생아.
현재 레이몬드에겐 후계가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직계 황손들은 그의 피의 숙청으로 레이몬드를
제외하면 모두 죽어버렸다.
허니 그 아이는 제국의 모든 관심을 받을 것이다. 후계가 없다며 불안해하던 몇몇 귀족들은 드디어 황실의
후계가 생겼다며 축하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첫 자식이라며.
“첫 아이…….”
입안을 껄끄럽게 만드는 단어였다.
첫 아이, 축하.
그 모든 것들을 너에게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아가야.
난 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감정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난 아직 아이에게 좋은 것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내게 기적 같은, 너무도 축복인 아이이건만 지금
임신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위험했다.
유산 위험도 위험이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곳이 이
세계였으니까.
어미가 다른 황자 둘. 황권을 놓고 세력이 나누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비록 내가 황후라지만, 리제나의 친정 가문은 결코 무시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숙청을 돕는 과정에서 크로프트 공작가에 불만을 품게 된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붙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너를 지킬 수 있을까.
황위를 두고 일어나는 다툼은 언제나 피를 불렀다.
외가 가문의 권세로 따지자면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이자 황후인 내가 우세일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마음이 리제나의 아이에게 기울어진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하늘을 붉게 태우고 있는 노을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레이몬드와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만찬 룸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그와의 만찬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하루의 끝을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좋아 아픈 것도 숨기며 간 적도
있었다.
“레이, 넌 내가 아픈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지.”
황후궁으로 돌아와 곧바로 쓰러질 정도였지만 레이몬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마 오늘도 아무 생각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만찬에 가지 않는다는 전갈을 받아도 그저 알겠다, 한마디로 끝날 것이다.
혹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겠지.
참으로 익숙한 무심함에 그를 보지 않아도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피식, 자조 섞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의 무심함을 알면서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나의 탓이겠지.
붉은빛에 눈이 부셔 눈을 살포시 감자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너무 많은 신경을 쓴 탓이겠지.
난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지친 몸을 뉘었다.

* * *

황제가 기거하는 태양궁에 있는 만찬 룸.


항상 도착했던 시간보다 늦어 발걸음을 서둘렀던 레이몬드는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식탁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안을 둘러 보았으나 엘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후는 아직 안 온 것인가?”
비어있는 황후의 자리를 보던 레이몬드는 창밖을 보았다.
붉었던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리 늦을 사람이 아닌데.
그때 시종 하나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오늘 황후 폐하께서 만찬에 오지 못하신다는 전언을 전하는 것을 제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시종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감히 황제에게 헛걸음하게 하였으니 매질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시종을 내려 보던 레이몬드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이 멍청한 실수를 한 것은 명백했지만 오늘은 신전의 일로 온 황궁이 시끄러웠다.
충분히 피곤한 하루였기에 다른 소란을 보고 싶지 않았다.
“됐으니 모두 물러가.”
레이몬드의 차가운 음성에 시종들이 몸을 떠는 와중, 시종장이 한 걸음 레이몬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이곳에서 저녁을 드시겠습니까.”
시종장은 넓은 공간을 흘긋 둘러 보며 레이몬드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
“예, 폐하.”
시종장은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시종들은 빠르게 테이블 위로 음식들을 차렸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종장이 예를 갖추며 시종들을 데리고 만찬 룸을 나갔다.
적막이 내려앉은 곳에서 익숙하게 포크를 들던 레이몬드는 맞은편 황후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게 텅 비어있는 자리.
몸이 안 좋은 것인가.
문득 그는 시종에게 왜 황후가 만찬에 오지 않았는지를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그곳을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수프 한 스푼을 먹었을 뿐인데 그는 인상을 구기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는 것일까. 그가 제일 즐겨 먹는 콩 수프임이 분명했건만 오늘따라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인가.”
레이몬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손등으로 밝은 조명에 피곤해지는 눈을 가렸다.

<i>‘레이,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어?’</i>

눈을 감자 항상 들려왔던 엘리야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정적 속에 이명처럼 들려왔다.


레이몬드는 움찔하며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엘리야.”
그녀가 신경 쓰였다.

7화

요 며칠 계속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리제나가 데리고 온 아이, 에드먼드. 그리고 엘리야.
그날 파티장에서의 넋을 놓은 듯한 얼굴과 황후궁에서 보았던 그녀의 담담한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특히 황후궁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마치 무엇을 체념한 것 같아 더욱 마음에 걸렸다.
언제나 그를 볼 때면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하아.”
레이몬드는 텅 빈 맞은편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화가 난 걸까.
생각해 보니 엘리야가 한 번도 그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 온 긴 시간 동안 작은 언쟁조차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거기다 그는 엘리야에게 간다 해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이미 신전에서 황족임이 밝혀졌고, 사람들은 에드먼드가 그의 아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황족으로 밝혀진 에드먼드를 어찌할 것인가였다.
황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 거기다 사생아의 꼬리표까지 붙는다면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레이몬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i>‘폐하, 이미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부디 제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는 상처까지 주지 말아
주시옵소서.’</i>

시오스 후작은 그에게 무릎 꿇고 간청했다. 황자 시절 제 곁을 지킨 리제나를 잊지 말아 달라면서.


그런 후작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후작의 말대로 그는 쥐뿔도 없던, 버림받은 황자 시절 리제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버림받은 황자라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받던 그의 위신을 세워준 것이 리제나였으니까.
당시 리제나는 사교계의 꽃이었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그녀의 유명세 덕분에 자신을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달라졌고 그녀는 파티장에서 황태자가 나를 모욕할
때마다 나를 옹호해 주었었다.
그러다 보니 리제나가 황태자의 눈 밖에 났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가문을 위한 선택이었든 아니든 리제나가 서왕국으로 가게 된 것은 그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황태자의
입김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한데 리제나는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몰래 그의 아이까지 낳은 것이다.
그가 에드먼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에드먼드는 사생아가 될 것이고 리제나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은
불명예까지 떠안아야 했다.
그러니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이를 나의 아이라 밝혔던 것이겠지.
그들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모든 걸 머리로 이해했고 리제나와 아이에 대한 책임이 제게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상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지만, 그는 후작에게 에드먼드를 황자로 입적하겠다 바로 말하지
못했다.
황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순간 엘리야가 아이를 잃었던 날이 떠올랐기 때문에.

<i>‘아아,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레이 뭔가 잘못된 거야. 황궁의가 오진을 한 게 분명해!’<


/i>

홀쭉해진 배를 부여잡고 엘리야는 미친 사람처럼 외쳤었다.

<i>‘우리 아기가 왜, 왜…… 죽어…….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니라고 말해 줘, 제발…


….’</i>
<i>제발…….</i>
<i>엘리야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절박하게 매달렸다.</i>
<i>‘……엘리야.’</i>
<i>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를 보던 그녀의 얼굴이 마침내 절망으로 물들고 가슴이 찢기는 듯한 울음을
토해냈다.</i>
<i>‘아아아악! 아니야!’</i>

그녀가 제 앞에서 감정을 쏟아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엘리야는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냈고 난 그녀의 울음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까,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비통하다 못해 절규 같았던 그녀의 울음소리.
그녀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기에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리라는 말로 후작을 돌려보냈고 엘리야에게도 차마 에드먼드에 관해 말하지 못했다.
자신도 알았다.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해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틀의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오늘 신전은 그 아이가 제 자식이
맞다는 확답을 주었다.
그러니 이제 더는 시간을 벌 수도 아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 엘리야는.
엘리야는 항상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거절한 적이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가 부탁한다면 에드먼드를
받아 줄 것이다.
그래, 항상 그랬듯 그럴 것이다.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며 레이몬드는 식탁 위의 종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문을 열고 시종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입맛이 없구나. 식탁을 치워라. 좀 걸어야겠다.”
“네, 폐하.”
레이몬드는 비어있는 엘리야의 자리를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방문 밖에서 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헬란이 문을 열고 침대로 다가왔다.
“폐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어쩐지 어제 일찍부터 잤는데도 몸이 너무 무겁더라니.
헬란의 말처럼 현재 내 컨디션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행여 황궁의를 부를까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침대에서 내려갔다.
“괜찮다. 그보다 네 오늘 늦게 일어난 거 같은데, 지금 몇 시쯤이지?”
“정오가 다 되었습니다.”
“어제, 폐하께선 별다른 기별이 없었느냐?”
“……예, 폐하.”
역시 그랬구나.
만찬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혹시나 그가 나를 걱정하지 않을까 했지만, 정신 차리라는 듯 현실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난 창밖의 화창한 푸른 하늘을 보다 헬란에게 말했다.
“신전에선 온 확답이 이미 황궁에 전부 돌았겠지?”
“……예, 폐하.”
“그럼 더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겠구나.”
레이몬드도 결과가 나오면 내게 다시 이야기하자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 아이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레이몬드가 그 아이를 버릴 일은 없겠지.
그럼 내게 그 아이를 입양하라 할까.
머리가 지끈거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잠이 들고 싶었지만 알아야 했다.
레이몬드의 결정을.
그래야 나도 이 관계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으니까.
난 그리 멀지 않은 황제궁의 가만히 바라보다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를 뵈러 가야겠다.”
황후궁인 달의 궁과 황제의 궁인 태양궁은 긴 길로 연결이 되어있는 쌍둥이 같은 구조였다.
마차를 탈 수도 있었지만 심란한 마음에 좀 걷고 싶었다.
오늘 난 내 인생을 뒤바꿀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녹음이 푸르른 숲길은 고요했고, 햇살이 좋았다.
레이몬드와 가끔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적도 있었는데.
아이를 유산하기 전에는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함께 이 길을 걷곤 했었다.
밤길을 걷다 보면 어두워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걸릴 적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레이몬드는 항상
놓치지 않고 나를 붙잡아 주었다.

<I>‘넌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져.’</I>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도 모르는 같은 자리를 기억하고 있는 그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었다.


그의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나를 울고 웃게 했었으니까.
갑자기 과거의 일들이 왜 이리 떠오르는 것인지.
이상하게도 그가 있는 곳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과거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제 그 기억들은 미소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마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지금 레이몬드와 끝을 내러 가는 건가.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였다.
나는 이미 레이몬드의 답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입술로,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어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난 아마…….
난 가슴 속에서 넘실거리는 감정들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자 시녀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발이 아프신가요?”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내게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인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니다, 그저…… 이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져 그런다.”
“네?”
이해하지 못해 의문이 서린 시녀장의 얼굴을 보던 난 피식,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는 법이겠지.”
그래도 그를 향한 이 길이 정말 끝이길 바라진 않았다.
우리 사이에 한 가닥의 희망쯤은 남아있길 바랐다.
난 레이몬드가 있는, 황제의 궁, 태양궁으로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태양 궁의 집무실 앞.
“폐하께서 계시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것이…….”
난 집무실 앞에서 시종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시간은 레이몬드가 정무를 보는 시간이었다. 헌데
집무실에 없다니.
궁 밖을 나간 것도 아닐 텐데.
레이몬드는 정무를 볼 때는 절대로 집무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난 말끝을 흐리며 답을 하지 못하는 시종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폐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는 것이냐.”
시종은 나의 물음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황제를 모시는 시종이 황후인 내게 쉽게 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난 불현듯 떠올랐다.
리제나와 그녀의 아이.
태양궁의 시종들이 나의 눈치를 살필 일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여태까지 레이몬드와 난 대외적으론
사이가 좋은 부부였으니까.
시종들 역시 언제나 내게 거리낌없이 레이몬드의 모든 것을 고했다.
“폐하께서 지금 리제나 영애와 함께 있는 것이냐.”
나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시종의 두 눈이 커졌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굳은 얼굴로 시종에게 물었다.
“지금 폐하께서 어디 계시느냐, 이번에 너에게 묻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태양궁의 온실 화원에 계십니다. 황후 폐하.”
시종은 나의 경고를 알아들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허.”
태양궁의 온실 화원이라고?
그곳은 황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태양궁에 있다 하나 온실 화원은 내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리제나와 그녀의 아이와 함께 있다고.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서늘함에 손을 꽉 그러쥔 난 이내 화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8화
화원에 막 들어서자마자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동시에 아이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온실 화원의 입구. 난 너무도 완벽해 보이는 장면에 발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화창한 날씨 아래, 해맑은 웃음을 지은 아이와 그 아이를 안아 든 남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화목했다. 처음부터 그들이 진짜 가족이었던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던 서늘함을, 그 차가운 불안함을 애써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저들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 더는 실낱같은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폐하, 황제 폐하께 알리지…… 않으시옵니까.”
헬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화목한 가족 같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폐하의 답을 들은 듯하구나.”
“폐하…….”
이번엔 나의 말을 이해한 듯, 나를 부르는 헬란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의 사랑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래, 나와 결혼 할 때부터 사랑을 약속할 수 없다 말했다. 그의 마음이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결혼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한 번쯤은 바라봐주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서.
허나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는지.
레이몬드는 여전히 리제나를 사랑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리제나에게 말했지만 정작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나였던 걸까.
여전히 난 한걸음 뒤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으니까.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은 순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리제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것이 원래 너와 나의 자리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이게 맞는 거 같네.”
난 먼저 리제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난 바보처럼 참으로 늦게 깨닫고 말았다.
차라리 좀 더 빨리 레이몬드와 내게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의 품에 안겨 온기를 느껴보지도 않았더라면 나의 심장이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짧게나마 행복을 느꼈기에 이 끝이 너무 가슴 아팠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예, 폐하.”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을 본 헬란이 고개를 조아렸다. 화원을 나가는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난
결심했다.
이제는 과거에, 그의 뒤에 머물지 않겠노라고.
길고 길었던 짝사랑이 끝을 본 순간이었다.

* * *

“죄송해요. 여긴 황족들밖에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에드먼드가 떼를 써서 폐하를 곤란하게 만든 거


같아요.”
리제나는 에드먼드를 데리고 갑작스러운 알현을 요청했다.
누군가가 약속도 없이 정무 시간에 알현을 청한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앞세워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리제나를 차마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잠시 얼굴만 보고 돌려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에드먼드가 갑자기 화원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신기한 야생화를 본 에드먼드가 들어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나 결국 출입을 허락해 준 것이었다.
시선을 내리뜨리는 리제나에게 레이몬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아이가 그러는 것을 어찌하겠느냐. 그보다는 저러다가 또 넘어지겠군.”
레이몬드는 뛰어다니다 비틀거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럼 아까처럼 폐하께서 또 잡아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긋한 목소리에 레이몬드는 리제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제나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미소를 그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7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가 황제의 제복만 걸치고 있지 않았다면 마치 서로 사랑했던 그때로 돌아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레이몬드는 순간 리제나를 과거의 잔재로 치부한 자신에게 놀랐다.
막연히 아직까지도 리제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록 그녀와 함께할 수 없다 하여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리제나 하나뿐일 것이라 여겼다.
리제나는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따금 서왕국으로 떠난 그녀를 떠올린 적도 있었다.
한데 왜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았는데 내 심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일까.
후작가의 파티가 열린 그 날.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만 해도 기분이 묘했던 것 같은데 막상 돌아온 그녀를
마주한 순간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예전 같은 심장의 떨림도, 애타는 그리움도 없었다. 그저 얼굴을 알고 있던 과거의 사람을 마주한 듯
무감했다.
그녀는 7 년 전, 그가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녀를 본 순간…… 그가 신경 쓰였던 사람은 리제나가 아닌 엘리야였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레이몬드는 자신을 부르는 리제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리제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에 닿기 직전.
탁-!
차가운 마찰음이 아름다운 화원에 울려 퍼졌다.
“…….”
레이몬드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본능적이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가까워져 오는 리제나의 손을 쳐내고 말았다.
물론 황제의 몸에 아무나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맞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리제나였다.
이건 자신이 본능적으로 리제나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모르게 엘리야가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손길에 예민해진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미간을 좁히던 그는 주먹을 그러쥐며 리제나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그녀도 많이 놀랐을 테니까.
“……미안하다.”
놀란 듯 굳어있던 리제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습니다, 폐하.”
마치 방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스쳤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리제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화원을 뛰놀고 있는 에드먼드에게로 옮겼을 뿐.
레이몬드는 그저 즐겁다는 듯이 화원을 뛰어다니는 에드먼드를 보며 말했다.
“에드먼드를 황적에 입적할 것이다.”
리제나는 예상치 못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네가 에드먼드를 놓아야 한다. 난 에드먼드를 황후의 자식으로 입양할
것이니까.”
“네……?”
리제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레이몬드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제나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와 칠흑 같은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마주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예전의 한없이 행복했던 애정의 기류 같은 건 없었다.
리제나는 차가운 흑안을 바라보며 점점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레이몬드는 굳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드먼드를 황족으로 인정하는 길은 그 길뿐이다.”
제국의 결혼법은 엄격한 일부일처제였다.
에드먼드가 엘리야의 양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가 엘리야와 이혼하고 리제나와 재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택지는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결혼할 때 약속했었다.
사랑을 줄 순 없어도 그녀 말고 다른 황후는 들이지 않겠다고.
시오스 후작은 그에게 은근히 에드먼드를 황족으로 들이고 엘리야와 이혼하길 종용했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 의견에 리제나도 동의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와 엘리야 사이에 이혼이라는 선택지는 없다고.
리제나는 레이몬드를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네가 에드먼드를 포기할 수 없다면 나 역시 너에게 굳이 모자를 떼어 놓는 일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전 언제나 에드먼드의 행복을 바란답니다. 황족이 되지 못한다면 에드먼드는 평생
사생아로 살아야 하는데 그리 살게 할 수는 없지요.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리제나가 시선을 내리떴다.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그녀의 눈빛이 처연했으나 레이몬드는 이번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불편할 뿐이다.
“……그래, 그럼 난 일이 많아 이만 가 봐야겠군, 황후와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기별을 넣으마.”
“예, 폐하.”
레이몬드는 리제나와 에드먼드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으며 화원을 떠났다.
멀어지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이 마침내 사라지자 리제나의 눈빛에서 처연함이 사라졌다.
화려한 화원 속에 남은 그녀의 얼굴은 사람 같지 않은 차가움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 * *

황후궁으로 돌아온 난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침대에서 무너졌다.


기나긴 사랑의 끝.
참았던 모든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물에 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터져버린 울음을 쏟아냈다.
레이, 네가 원망스러워.
너무도 오랜 시간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차라리 그의 뒤에 있을 땐, 감히 행복을 바란 적이
없었기에 쉽게 체념할 수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
하지만 왜 하필 너는 내게 행복을 보여 주고는 잔인하게 앗아가 버린 걸까.

<i>‘사랑을 약속할 순 없어도 외롭진 않게 해 줄게.’</i>

아니, 레이 넌 그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어.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 외면했지만, 아이를 유산한 뒤 난 몹시도 외로웠다.
그가 날 예전처럼 대하지 않았으니까.
편한 친구 사이, 그게 우리를 이어주던 유일한 끈이었지만 레이몬드는 아이가 죽은 이후 그 끈마저 놓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미소 지었지만 난 하루하루가 공허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 말라갔다.
기적 같은 이 아기가 나를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난 그의 사랑에 끝없는 갈증을 느끼다 말라 죽었을
것이다.
끝이 되어서야 나의 어리석음을, 그의 잔인한 무심함을 깨달았다.
레이, 네가 너무도 미워.

9화

사랑을 약속할 수 없다 하여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하고 너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아니,


아니었다.
사랑이 아니라 해도 그는 내게 최선을 다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후회와 원망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렇게 길었던 사랑만큼이나 멍든 가슴을 난 꽉 부여잡으며 멈추지 않는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울고 또 울고, 얼마나 울었을까.
온몸의 물이 메말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였다. 난 축축하게 젖은 이불에서 고개를 들었다.
“벌써…… 저녁이 됐구나.”
얼마나 울었던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밝았던 하늘이 캄캄한 어둠으로 바뀌다니.
“아, 만찬!”
순간적으로 레이몬드와 함께 하는 만찬을 떠올리고 벌떡 일어났다 멈칫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네.
난 어지러운 머리에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이제, 내가 레이몬드와 만찬을 함께 할 일은 없다.
시녀장마저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내게 만찬 시간이 다 되었단 말이 없지 않은가.
이제 나만 몸에 밴 습관들을 버리면 된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그와 함께하며 익숙해진 모든 습관을 버릴 것이다.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다잡던 그때 욱신, 하고 아랫배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통증이 또 한 번 길게 아랫배를 울렸다.
“왜…… 갑자기, 설마.”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i>‘스트레스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i>

의사가 분명 그리 말했었는데……. 며칠 동안 아기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안 돼, 안 돼.”
난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나의 간절함과 달리 아랫배의 통증이 심해졌다.
난 다급히 탁상 위에 있는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종을 거세게 울리자 문이 벌컥 열리며 헬란이 황급히 들어왔다. 그녀는 배를 움켜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게로 뛰어왔다.
“폐하! 갑자기 이 무슨…… 당장 황궁의를 부르겠습니다!”
헬란이 다급히 소리친 그때, 난 헬란의 팔목을 세게 잡았다.
“황궁의는 안 돼!”
“네? 하오나 폐하! 지금 폐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사옵니다. 당장 의사를 불러야 합니다.”
“크로프트 공작가에 급보를 보내 공작가의 의사를 데려와.”
“네? 하오나, 그럼 시간이…….”
헬란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내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난 헬란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지금은 황궁의도 퇴근했을 시각이다. 공작가의 저택은 황궁과 멀지 않으니 더 빠를 것이……
윽!”
나의 다급함이 그녀에게 전해졌는지 헬란의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폐하 당장 공작가에 급보를 보내겠습니다.”
시녀 한 명이 헬란의 명령을 받고 뛰어가고 난 헬란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몸을 뉘었다.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보호하듯 감싸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시녀들이 눈치라도 챌까 싶어 그럴 수도 없었다.
“폐하, 식은땀이……! 어서 의사가 와야 할 터인데…….”
내 호흡까지 거칠어지자 헬란의 얼굴에 초조함이 물들었다.
그리고 나의 불안함도 커졌다.
제발, 제발 아가에게 아무런 일도 없기를.
두 번이나 잃을 순 없습니다, 신이시여.
난 속으로 주신, 루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런 나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님과 의사께서 오셨습니다.”
대답할 힘이 없는 나 대신 헬란이 외쳤다.
“어서 문을 열어드려라!”
문이 열리자 굳은 얼굴의 아버지가 내게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 심각한 얼굴의 의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황후 폐하! 갑자기 이 무슨…… 하르펜, 어서 폐하의 상태를 살피거라.”
“예, 각하.”
의사가 나의 몸을 살피려 한순간, 난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끌어모아 시녀장을 불렀다.
“헬란, 내 조용히 진료를 받고 싶으니 모두 물러가거라.”
“하오나…….”
헬란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황후를 최측근에서 보필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의무이니 아픈
지금 물러나는 것이 불안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할 수 없었다.
“명령이다.”
“……폐하.”
명령이라는 말에 헬란은 결국 시녀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문이 굳게 닫히는 것을 확인한 난 그제야 지친 숨을 헐떡였다.
“폐하, 황후 폐하. 갑자기 왜…… 황궁의를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난 다급히 말하는 아버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안돼요, 황궁의를 불러선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폐하의 상태가…….”
당장이라도 황궁의를 부를 듯한 아버지의 눈빛에 급히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모르셔야 합니다.”
“……!”
난 아랫배를 소중히 감싸 안으며 경악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전, 폐하를 떠날 것이니까요.”

* * *

같은 시각.
오늘도 어김없이 조금 늦게 만찬 룸으로 향하려던 레이몬드는 황후궁에서 보내온 전언에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날카로운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전언을 전한 시종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오늘도 만찬에 오지 못하신다고 전하셨습니다.”
“오늘도 말이냐.”
“예, 폐하.”
레이몬드의 날 선 분위기에 시종은 죄를 지은 것처럼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지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오지 않는다니.
결혼하고 엘리야는 한 번도 그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어제는 그녀의 마음이 안 좋을 것이라 이해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오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엘리야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레이몬드는 떨고 있는 시종이 아닌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후궁에서 온 다른 소식은 없는 것이냐.”
“예, 폐하 다른 소식은 따로 없었습니다.”
“황후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냐.”
레이몬드가 계속해서 묻자 시종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이때까지 황후 폐하에 대해 레이몬드가 이렇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느끼지 못하는 듯 조급한 눈빛으로 시종을 압박하고 있었다.
“딱히 들려온 소식은 없사오나…… 다만,”
“다만?”
“아까 오후에 황후 폐하께서 폐하를 찾아오셨다 만나지 않으시고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내 궁에 왔었다고? 언제 말이냐?”
“그것이…… 리제나 영애께서 와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랬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지만 시종장의 말을 들은 순간 레이몬드의 심장이 쿵, 크게 두근거렸다.
엘리야가 리제나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보았을까 불안함이 들었다.
내가…… 왜.
그가 불안함을 느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폐하, 식사를 방으로 준비하라 할까요?”
시종장이 그의 굳은 얼굴에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되었다.”
“하오나 폐하 오늘 점심도 거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러다 몸이라도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먹어도 체할 것 같구나.”
엘리야가 궁에 들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명치가 돌덩이로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그럼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방으로…….
레이몬드는 시종장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먼 곳에 금빛을 두른 태양궁과 꼭 닮은 은빛 궁이 있었다.
레이몬드는 은빛 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황후궁으로 갈 것이다.”
“예, 폐하.”
조급한 마음에 황후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막상 황후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레이몬드의 걸음은 느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레이몬드는 황후궁의 앞에 서 있는 마차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문장은…….”
다름 아닌 엘리야의 가문인 크로프트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왜 공작이.
“……공작이 와서 만찬에 오지 못한 것이었나.”
그러리라 생각하자 이상하게 불안했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태양궁으로 방향을 돌릴까요? 폐하.”
걸음을 멈추고 있는 레이몬드의 뜻을 잘못 알아차렸는지 시종장이 물어왔다.
“아니다. 내 온 김에 크로프트 공작도 보고 가야겠다.”
레이몬드는 아까와 달리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후궁으로 걸어갔다.
허나 그의 가벼운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십니다.”
궁에 들어서자마자 공작이 내려와 그의 방문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공작, 지금 내 앞을 막은 것인가.”
황제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큰 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즉결 처분으로 기사들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프트 공작은 그의 치세의 일등공신이자 엘리야의 아버지이기에 레이몬드는 나서려는 기사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빛은 서늘한 밤공기보다 차가웠다.
그 눈빛에 움츠러들 만도 했건만 공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황후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폐하, 부디 오늘은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황후가 아프다는데 내가 더욱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공작. 난 황후의 남편이네.”
“남편이라…….”
공작이 낮게 중얼거렸지만 레이몬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다.
비아냥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10 화
“공작. 내게 상당히 불만이 많은 듯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크로프트 공작은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니요, 폐하 착각이 아니옵니다.”
“……뭐라?”
“황후 폐하께서 지금 몸이 매우 아프십니다. 다름 아닌 폐하 때문에요.”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리제나 영애가 데리고 온 폐하의 아이, 이미 온 제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그
일에 아무렇지 않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그것은…….”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레이몬드는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리라 생각했나.
순간 그런 의문이 그의 가슴을 쳤다.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크로프트 공작은 입술을 열었다.
“폐하, 황후 폐하와 결혼하실 적에 제게 그리 말씀하셨지요, 엘리야를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고.”
공작의 말에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i>‘공작. 약속하지. 그대가 나를 위해 바친 충성을 엘리야의 행복으로 갚아주겠다고 말이야.’</i>

엘리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아는 공작이 결혼을 반대할까 봐 그의 입으로 직접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지켜 왔다고 생각했다.
엘리야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것과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별개라 생각했다. 행복이 반드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폐하께 묻고 싶습니다. 폐하께선 그때의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까.”
“…….”
그런데 지금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의도적으로 엘리야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마음이 이상했다.
어딘지 불편하고, 답답한 기분.
그래서 엘리야를 피했다.
그러니 그는 엘리야가 행복한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크로프트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야와 똑같아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레이몬드를 보며 공작은 짧은 한숨과 함께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부디 오늘은 돌아가 주십시오.”
“……황후가 차도를 보이면 바로 전갈을 넣게, 공작.”
“예. 폐하.”
레이몬드는 황후의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레이몬드가 황후궁을 나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때, 시녀가 공작에게 다가왔다.
“공작 각하, 황후 폐하께서 안정을 찾으셨다 합니다.”

* * *

“폐하, 아까보다 통증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그보다 아기는 괜찮은 건가요?”
“네, 아기님은 무사하십니다. 갑자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셔서 잠시 놀라신 것뿐입니다.”
의사의 말에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치료하는 내내 두려움으로 이가 덜덜 떨렸었다.
혹시라도, 혹여라도 아기가 잘못될 까 봐.
주신께 빌고 또 빌며 약을 먹고 치료를 받던 난 점차 나아지는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야. 아가야 이제 다시는 널 힘들게 하지 않을게.
아랫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속으로 다짐하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급히 들어왔다.
의사가 옆으로 물러나고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폐하, 몸은 어떠십니까. 이제 괜찮아지신 겁니까?”
“네, 아버지. 이제 좀 괜찮아요. 아기도 무사하고요.”
“정말…… 다행입니다.”
긴장이 풀리신 듯 긴 숨을 내쉰 아버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으셨다.
“헌데 아버지, 어딜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시녀의 말에 갑자기 방을 나갔던 아버지였다. 내 물음에 아버지는 잠시 멈칫하시더니 이내 입을 여셨다.
“……잠시 서신이 도착해서 나간 것입니다. 별일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한 아버지는 내가 아닌 의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헌데 이제 정말 안심해도 되는가, 하르펜.”
“네. 폐하와 아기님 지금은 모두 무사하십니다. 단 앞으로 몸 관리를 잘 해 주셔야 합니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주십시오.”
아버지는 하르펜의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르펜 그대는 잠시 나가 있게.”
“네. 공작님.”
하르펜이 방을 나가자 아버지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엔 걱정과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이를 가지셨단 말에 기뻐하실 틈도 없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거기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레이몬드를 떠나겠다 하였으니 아버지의 머릿속이 복잡하실 것이다.
아버지께 죄송해 시선을 내리뜨리자 무거운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 미안하다.”
미안하다니, 난 시선을 들어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가 왜 미안해하세요, 다 제가 선택한 일인걸요.”
“아니다. 그저 미안하구나. 에일린을 먼저 보내고 내 너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그리
다짐했건만…… 그러질 못했어.”
“아버지…….”
“폐하와 결혼한 뒤 그저 잘 살 거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내 너의 외로움을 느꼈음에도 못 본 척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있는 것이 너의 행복이라 여겼으니까.”
후회가 가득한 눈빛으로 아버지는 얼굴에 참담함이 가득했다. 그의 깊은 슬픔이 내게 전해졌다.
“허나 아니었구나. 너 혼자 이런 결정을 내리고 이리 아파하고 나서야 내가 알게 되었어. 미안하구나,
엘리야.”
난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에요, 비록 이렇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모든 것은 제 선택이었어요.”
결심이 선 난 숨을 고르고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전 이제 후회도 미련도 다 떨치고 그저 레이몬드를, 이 황궁을 떠나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잠시 흔들리던 아버지의 표정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래, 넌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폐하께서 절대 아이의 존재를 알지 못하시게 내가 모든 준비를 할
테니, 넌 그저 몸을 추스르는 데에만 신경 쓰거라.”
마치 어릴 적처럼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아버지가 내게 말을 이었다.
“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폐하께 이혼을 요청하는 공작가의 공식 서한을 보내마.”
공작가의 공식 서한.
내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나서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레이몬드와의 끝은 내가 직접 내고
싶었다.
긴 시간 그를 사랑한 것도, 이 결혼을 선택한 것도 모두 내가 한 것이었으니 그와의 끝도 내가 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뇨, 아버지.”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의연히 말했다.
“그건 제가 할게요. 제 손으로 놓아야 더는 미련도 가지지 않을 거 같아요.”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이젠 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겐 레이몬드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겼어요. 이번엔 반드시 제 아이를 지킬 거에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나의 굳은 결심이 전해졌는지 아버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나서지는 않으마. 허나 혹 폐하께서 쉽게 이혼해 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나설 것이다.”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난 제국의 두 개뿐인 공작가의 여식이었다.
하나는 이미 모든 힘을 잃고 이름만 남았을 뿐이니 사실상 제국의 공작가는 크로프트 공작가 하나라
보아도 만무했다.
거기다 반정 공신의 딸.
레이몬드 입장에선 나를 버리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의 배경이라는 것이 씁쓸하지만 이제 그에 슬프지는 않다.
그땐 아버지의 힘이 필요하겠지.
“네, 그리해 주세요. 아버지.”
“그래. 그럼 엘리야,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자거라. 하르펜 역시 내가 문제 생기지 않도록 말해
두마.”
“네, 감사해요. 아버지.”
“난 이만 가 보마. 밤이 깊었구나.”
“네. 배웅 못 해드려 죄송해요.”
“아니다. 폐하께 말씀드리고 나면 내게 서신 한 통 보내 다오.”
“네.”
아버지는 내 손등을 위로하듯 쓰다듬으시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아버지가 방을 나가시고 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한껏 두려움에 긴장했던 몸이 풀려서일까,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내일, 레이몬드에게 이야기를 해야……겠지.
난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밀려드는 수마에 눈을 감았다.

* * *

똑똑-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들어와.”
이미 일어나 있었기에 난 헬란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헬란은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폐하, 몸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다. 가벼운 몸살이었던 듯해. 걱정하지 말거라.”
“다행이옵니다. 폐하. 그럼 세안 준비를 해 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치장을 좀 해야겠구나. 내 바로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니까.”
폐하를 뵈러 간다는 말에 시녀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꼭 내게 뭔가를 숨기는 거처럼.
그것을 눈치챈 난 시녀장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니, 아니옵니다. 그저…… 몸도 안 좋으신데 괜히 무리하게 움직이셨다 또 아프실까 저어되어 그런
것입니다.”
“그래?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이겠지?”
“네.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시녀장은 항상 보았던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고 치부하며 난 세안을 시작했다.
“폐하, 이 사파이어 귀걸이로 할까요?”
세안을 마치고 치장을 받고 있던 난 시녀가 들어 보인 귀걸이를 보았다.
푸른 사파이어가 반짝이는 귀걸이는 그와 결혼할 때 황실에서 내게 보내준 패물 중 하나였다.
내가 꽤 아꼈던 것이기도 했다.
난 가만히 그것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귀걸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보석들은 거의 예물로 받았던 것들이었으니 이젠 다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다.
시녀들은 기본 치장 중 하나인 귀걸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한 듯했지만, 토를 달지 않고 나의
치장을 서둘렀다.
치장을 전부 끝내고 태양궁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시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11 화

“뭐?”
난 순간 놀라 되물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레이몬드가 황후궁을 찾아온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난 곧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어서 모시거라.”
시녀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는 레이몬드를 보며 난 예를 갖추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오, 황후.”
그는 항상 그랬듯 손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의 손을 못 본 척 혼자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다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폐하, 이 시간에 갑자기 황후궁엔 어쩐 일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순간 내민 손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난 것일까 생각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었다.
왜……?
그는 나를 한 번도 저런 눈길로 본 적이 없었다. 복잡한 감정을 느낄 만큼 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으니까.
레이몬드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감겼던 눈꺼풀을 아래로 다시 드러난 흑빛 눈에는 아까와 같은
혼란스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내 착각이었나, 싶은 순간 레이몬드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황후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주변을 비워라.”
궁인들이 모두 물러간 후, 레이몬드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그래?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먼저 말해.”
“……에드먼드의 일이야.”
에드먼드의 일이라.
역시 그답지 않은 행동을 끌어내는 이유는 리제나와 관련된 일뿐이겠지.
“그래. 신전의 답이 나오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었지. 레이, 네 결정은 뭐야?”
“너에겐 미안하지만……. 에드먼드가 황족임이 밝혀진 이상 그 아이를 계속 저리 둘 순 없어.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황족의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에 깊은 상처의 심연이 보였다.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황족.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겠느냐마는, 그가 받았던 모욕과 멸시를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에드먼드에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너의 결정은 뭔데.”
“난 에드먼드를 황족으로 인정하고 제국의 1 황자로 올릴 생각이야.”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슬프기보다 오히려 머리가 더욱 차분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고마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실 미련이 남으면 어쩌나 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미련 같은 건 남지 않을
거 같았다.
난 가만히 그를 보다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나의 웃음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레이몬드의 수려한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입술을 떼기 직전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 에드먼드를 1 황자로 봉하는 일은 네 뜻대로 해. 하지만 그전에 나를 위해 해 줄 일이 있어.”
“그래, 말해. 에드먼드의 일도 있으니 그게 뭐든 들어 줄게.”
뭐든 들어 준다라……. 부디 그래 줬으면 좋겠다. 그와의 마지막을 언쟁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다.
난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레이몬드의 칠흑 같은 눈을 보며 쓰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저 깊은 밤하늘 같은 눈이 나 하나만을 담기를 바랐는데. 그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혼하자.”
“……뭐?”
순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그의 동요에 난 왜인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이제 그만 널 떠나고 싶어. 그러니 레이, 우리 그만하자. 나와 이혼해 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처럼 굳어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내 검은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굳은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혼이라니, 차라리 에드먼드를 인정하기 싫다고 말해.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고.”
싸늘한 책망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이혼을 무기로 에드먼드의 황자 입적을 막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레이몬드와 이혼을 원한다는 것보다 그쪽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으니 저렇게 나오는 거겠지.
내가 먼저 이혼이란 말을 입에 담을 리 없다 믿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 같았다면 그의 차가운 눈빛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불안했겠지만, 지금 나의 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제는 지쳤다는 듯 그를 향해 박찬 뜀박질을 할 힘도 없다는 듯이.
“레이, 에드먼드는 너의 아들이야. 내가 부정한다 해도 결국 황자가 될 수밖에 없겠지. 그 문제로 네게
이혼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혼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실소하는 레이몬드를 향해 나는 덤덤히 말했다.
“애초에 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내가 널…… 사랑해서, 네 곁에 있고 싶어서였어.”
“지금 와서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에드먼드와는 별개로 황후는 너야. 다른 여자는 없을 거라는 말,
난 지킬 거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려는 그에게 소리치듯 외쳤다.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까!”
순간 레이몬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사랑? 너와 난 평범한 부부가 아니야. 황제와 황후라고. 고작 그딴 이유로 이혼하겠다고? 차라리
리제나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해!”
레이몬드도 되받아치듯 크게 소리쳤다. 그의 무심하던 얼굴에 서린 선명한 분노가 보였다.
고작, 고작이라…….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그에게는 지난 내 마음이 ‘고작’인 것뿐이었구나.
“레이. 넌 정말 우리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해?”
“…….”
레이몬드는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리제나 영애에게는 감사해. 우리의 이 부질없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줬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이 네게 갑작스럽겠지. 이해해. 하지만 이혼은 안 돼.”
“레이몬드, 난…….”
내 부름에 그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시종장!”
그의 날카로운 외침에 방 밖에 있던 시종장이 급히 들어왔다.
“지금 당장 기사단에게 황후궁의 호위를 명하라. 이 시각 이후로 황후궁에 드나드는 모든 이는 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고 황후의 출입 또한 내 허락 없이 절대 불가하다.”
“레이몬드!”
그는 일방적으로 말을 끝내고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내 팔을 뿌리치고는 벌컥, 세게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방문으로 헬란이 황급히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헬란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괜찮다.”
“황후궁의 출입을 제한하신다니…….”
헬란은 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레이몬드가 쉽게 이혼을 해 줄 것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나 혼자 레이몬드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헬란. 기사들이 오기 전에 네가 급히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네?”
나의 말에 헬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급히 작은 테이블로 가 짧은 서신 하나를 적어갔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크로프트 공작가, 아버지의 힘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난 봉투를 밀봉한 서신을 헬란에게 내밀었다.
“지금 바로 크로프트 공작가에 보내도록 해라.”
“예, 폐하.”
헬란이 나가고 난 부디 큰 소란 없이 일이 마무리되길 바라며 창밖, 태양궁으로 돌아가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태양궁의 집무실로 돌아온 레이몬드는 거친 손길로 예복 상단 단추를 풀었다.


하지만 단추를 풀었음에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는 분노가 차올랐다.

<i>‘우리 이혼하자.’</i>

엘리야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순간, 레이몬드는 들끓는 속에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쿵-!
무거운 타격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
시종장은 겁을 먹은 시종들을 빠르게 내보내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시종장의 말에 레이몬드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다른 시종들이었다면 감히 지금 레이몬드에게 다가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종장은 레이몬드가 황자 시절부터 그를 모셨던 사람이었기에 모든 것에서 예외였고 레이몬드
역시 시종장에겐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답답하구나.”
아무리 숨을 내쉬어도 속이 뜨거웠다.
대체 뭐가 이리 화가 나는 것일까.
엘리야가 나를 떠난다고 해서……?
그녀가 먼저 그를 떠날 것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화가 나는 것도
이상했다.
그는 그녀 때문에 이리 속이 뒤집힐 만큼의 감정이 없으니까.
그녀가 이혼을 말한 것에 화를 내기보단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 분명 이성적으로 그녀를 설득하고 달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i>‘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까!’</i>

그 시답잖은 사랑 타령을 듣는 순간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12 화

“사랑하지 않아 이혼이라니.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실소를 머금었지만, 여전히 그의 속은 뒤틀리고 뜨겁게 열이 올랐다.
레이몬드는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감정에 미간을 깊이 좁혔다.
“폐하, 심신을 가라앉히는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됐다. 그런다고 진정될 기분이 아냐.”
시종장은 무거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한데 정말 황후 폐하를 황후궁에 유폐하실 것입니까.”
“유폐? 그게 무슨…….”
레이몬드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 제 입으로 황후궁의 모든 출입을 제한하고 기사들을 보내 호위하라 했다.
말이 호위였을 뿐 황후를 황후궁에 유폐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폐하, 아무런 명분 없이 황후 폐하를 황후궁에 유폐하시면 귀족들은 물론이고 제국민들까지
시끄러워지실 겁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성적으로 시종장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리 엘리야를 묶어놓지 않으면…
… 당장이라도 이 궁을 떠날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선뜻 명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주춤거리던 그때, 집무실의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궁을 지키는 기사가 아뢸 것이 있다 합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기사가 들어와 그의 앞에 부복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황후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다름이 아니오라 뒷문으로 황후궁의 시녀장이 몰래 빠져나가려 해 검문을 하였더니 서신이 나와 가지고
왔습니다.”
“서신?”
레이몬드의 눈매가 일순 사나워졌다.
그는 시종장에게 가져오라 눈짓했다. 기사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은 시종장이 그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거칠게 봉투를 뜯은 레이몬드는 내용을 읽고는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서신은 엘리야가 크로프트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 도움이 무엇인지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혼.
엘리야는 자신과 이혼하기 위해 공작에게 도와달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치는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불쾌함과 답답함이 그의 목을 조였다.
북풍한설이 몰아칠 듯 차갑게 얼굴을 굳힌 레이몬드는 책상 한편에 놓인 초를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서신에 불을 붙였다. 불에 닿은 종이는 빠르게 재가 되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까지 불에 태운 그는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황후궁의 시녀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검문하거라. 그 어떠한 것도 허락 없이 황후궁을
빠져나가선 안 돼.”
“존명.”
기사가 나가고 그는 집무실에 있는 보좌관에게 명했다.
“재상에게 전해라. 이번 동방국으로 가는 사절단의 책임자를 크로프트 공작으로 정했다고. 바로 출발을
명하니 명일 내로 동방국으로 갈 채비를 마치라 해.”
“……예, 폐하.”
“시종장, 그대는 황후궁에 대한 소문이 궁 밖을 넘지 못하도록 아랫것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해.”
“명을 받듭니다.”
보좌관과 시종장도 집무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들끓는 속에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공작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다니.
홧김에 내뱉은 말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엘리야는 정말 그와 이혼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배신감이 온몸을 옥죄였다.
단 한 번도 그녀는 그의 시야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고 손만 뻗으면
언제나 닿았다.
그런 네가 어떻게 날 떠나.
레이몬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불안감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혼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에드먼드 때문이리라. 잠시 간의 균열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그는 짙은 눈빛으로 황후궁을 응시했다.

* * *

“황후 폐하, 따뜻한 차라도 한잔 내올까요?”


늦은 밤. 잠에 들지 못하는 내게 헬란이 물어왔다.
“아니. 난 괜찮아. 그만 가서 자.”
“황후 폐하께서 이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물러가겠습니까. 일단 주무시고 내일 폐하를 만나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자야 할 시간이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누워 봤자 심란한 마음에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보내려던 서신은 기사에게 뺏겨 레이몬드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황후궁을 지키는 기사들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이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순간 화가 나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본궁으로 돌아가 일을 하다 보면 그의 이성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늦은 밤이 되어서도 기사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잠시 행정궁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 돌아온 시녀의 말론 황후궁 관련 일에 대한 함구령까지 내려졌다 했다.
거기다 아버지를 동방국의 사절단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했다.
레이몬드는 아버지까지 저 멀리 다른 나라로 보내고 정말 나를 궁에 가둘 생각인 것이다.
만약 아버지께서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시고 이대로 동방국으로 가시면 어쩌지.
시간이 지날수록 임신 사실을 숨기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황후의 임신과 에드먼드의 황자 책봉.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에드먼드에게 줄을 대려는 귀족들로 파벌이 나뉠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려 시도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해졌다.
“황후 폐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신 게 아닌데 이러다 또 쓰러지실까
걱정됩니다.”
헬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쓰러지면 절대 안 돼.
내 몸이 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두려웠다.
“따뜻한 차를 좀 가져오너라.”
헬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난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이미 아버지에게 이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아이를 가진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날 두고 동방국으로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들을 접어 버렸다.
“다 잘 해결될 거야, 아가야.”
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와 함께할 행복할 미래를 그려 보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져 갔다.
난 부디 아버지가 늦지 않게 레이몬드를 찾아가길 바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 *

다음 날 아침, 황성의 본궁.


엘리야와의 일 때문에 밤을 새우다시피 한 레이몬드는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로 출근해 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보고 있음에도 머릿속은 온통 엘리야 생각뿐이었다.
“시종장.”
“예, 폐하.”
“황후는 어쩌고 있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나?”
“예, 큰 이상은 없으신 듯합니다. 아침 식사도 하셨고…… 평소처럼 황후궁의 정원도 거니셨다고
하였습니다.”
“뭐?”
시종장의 말을 들은 레이몬드의 눈썹이 치솟았다.
자신은 이혼하자 그 한마디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있는데 평소와 다름이 없다니.
레이몬드는 속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넌 나와의 이혼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인 건가.
빠각-
순간 손에 힘이 세게 들어갔는지 깃펜이 두 동강이 났다. 펜이 부러지며 날카로운 부분이 그의 손을
그었다.
“폐하, 피가! 당장 황궁의를 부르겠습…….”
“됐다.”
붉은 피가 책상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통각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꾹 누르던 그때, 집무실 밖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크로프트 공작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크로프트 공작?”
레이몬드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황후궁의 유폐 소식은 절대 궁 밖을 넘을 수 없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고작 하루 만에 그 사실이
새어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방국 사절단에 관한 일인가.
지금 크로프트 공작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지만 마땅한 핑계도 없었다.
레이몬드는 거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들라 하여라.”
문이 열리고 크로프트 공작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눈빛에 레이몬드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크로프트 공작이 사절단의 일로 온 것이 아니란 것을.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시오, 공작.”
“감사합니다. 폐하.”
예를 갖추고 일어난 공작은 다른 서두를 꺼내지도 않고 곧장 품에서 서신을 꺼내 황제에게 내밀었다.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려보는 레이몬드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랐다.
“이게 무엇이오, 공작.”
“크로프트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폐하께 황후 폐하와의 이혼을 청하옵니다.”
“…….”
역시 그의 직감이 맞았다.
맞아도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에 레이몬드는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하루 사이에 벌써 황후궁의 이야기가 공작의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고……. 황후와 미리 이야기를 주고
받았나 보군.”
“……황후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크로프트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날 막아섰었지. 아예 처음부터 작당한 모양이군.”
공작은 황후궁에서 그를 막아섰던 그 날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분위기가 사나워졌지만, 공작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내가 황후를 어디 지하 감옥에라도 집어넣었을까 이러는 건가?”
“폐하!”
크로프트 공작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지자 시종장이 움찔했다. 동시에 기립한 기사가 자연스럽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레이몬드는 기사에게 물러나라 손을 들었다.
“너희들은 모두 나가라.”
집무실의 시종들과 기사는 머뭇거리다 단호한 그의 눈빛에 조용히 나갔다.
문이 닫히고 레이몬드는 불안과 걱정으로 얼룩진 공작의 얼굴을 마주했다.
“공작. 내가 정말 그녀를 그리 대했으리라 생각하나.”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작은 고개를 숙이며 한발 물러났다. 딸에 대한 걱정으로 순간 이성을 잃은 그의 잘못이 맞았다.
“명일 동방국에 관한 명은 거두도록 하지. 또한, 이 서신도 못 본 거로 할 테니 물러가게.”
“송구하오나 폐하, 전 물러갈 수 없사옵니다.”

13 화

“공작!”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레이몬드의 노성이 집무실을 크게 울렸다.
“이미 결혼법에 따라 이혼을 신청할 사유가 충분합니다. 저희는 더 큰 소란 없이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상대와 합의되지 않은 정부나 사생아를 들일 경우, 한쪽의 귀책 사유를 인정해 이혼할 수 있다.]

레이몬드가 스스로 바꾼 제국의 결혼법이었다.


혼외 자식.
에드먼드를 걸고넘어진다면 그는 이혼을 피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바꾼 결혼법의 조항을 떠올리고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마치 제가 쳐놓은 덫에 스스로가 걸린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 입술이 열렸다.
“아니, 그렇지 않네.”
“……?”
“에드먼드를 황자로 입적시키지 않을 거니까.”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혼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리제나와 아이를 버린 것이었다.
엘리야를 붙잡기 위해서 말이다.
레이몬드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웠지만 태연을 가장했다.
크로프트 공작은 그런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보았다.
이혼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에드먼드를 버린다고까지 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제나의 아들이었으니까.
공작은 레이몬드를 딱딱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이 일은 단순히 에드먼드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눈을 뜬 공작은 보랏빛 눈동자엔 그를 향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공작의 눈빛에 레이몬드는 얼굴을 굳혔다.
그를 직시하는 보랏빛 눈동자에 엘리야가 덧씌워져 보이는 것 같았다.

<i>‘우린 처음부터 잘못됐어.’</i>

체념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떠오르자 그의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에드먼드 때문에 이혼을 말한 게 아니라 했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엘리야는 언제나 그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다른 이유랄 게 뭐가 있지. 나와 황후의 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작은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낮추었다. 그의 눈빛에 담겼던 책망을 분명히 읽은 레이몬드는 얼굴을
굳혔다.
“공작.”
“이혼은 순전히 황후 폐하의 뜻입니다. 저는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이상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나오는 이상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물러가시오.”
공작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집무실에서 레이몬드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하, 이혼이라……”
결심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 같던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담담히 모든 걸 체념한 듯 그에게
이혼을 말했던 엘리야의 얼굴도 선명했다.
황제와 황후의 이혼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황제에게 특별한 귀책 사유가 없다면 황후는 이혼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는 엘리야가 필요했다.
그녀가 황후로 있어야 반정 공신인 크로프트 공작가와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해 황권이 더욱 강력해질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혼하지 않겠다 버티면 오히려 반대급부가 일어날 것 같았다.
공작의 공작가의 모든 걸 걸고서라도 이혼을 시키겠단 결연한 얼굴이었으니까.
반정 공신에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공작가와 척을 지는 것은 황제인 그에게도 타격이 클 것이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공작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맞았다.
공작가와 척을 지고 황후와의 이혼으로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면 황권을 노리는 잔챙이들이 설칠 것이
분명하니까.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왜…… 망설이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킨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분명한 것이 있었다.
엘리야와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
레이몬드는 그렇게 들끓는 속을 쉬이 진정시키지 못하며 집무실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 * *

난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황후 폐하, 헬란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헬란이 내게로 다가왔다.
“알아봤니?”
식자재를 얻으러 나가는 시녀에게 본궁에 아버지가 들렸는지 알아보라 명했었다.
“네. 시녀 말로는 얼마 전에 크로프트 공작께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분위기는?”
헬란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그것이…… 크로프트 공작과 황제 폐하께서 언쟁을 크게 벌이셨다고 합니다. 노성이 문밖에서까지
들렸다고…….”
“그랬구나.”
아버지가 이혼을 말한 것이 분명했다.
나를 황후궁에 유폐하다시피까지 했으니 아버지의 청을 쉽사리 들어 줬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집무실 밖으로 큰 소리가 들릴 만큼 언쟁을 벌이다니.
소문을 언제까지고 막을 순 없을 것이다.
나를 유폐하고 아버지와 큰 언쟁을 벌였다는 소문이 황궁 담벼락을 넘으면 레이몬드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좋을 게 없다.
빨리 마무리를 해야 해.
“헬란.”
“네?”
“황후궁을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전하렴. 내가 폐하께 만찬을 함께 하자 한다고.”
순간 헬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먼저 레이몬드를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예, 바로 전하고 오겠습니다.”
헬란이 방을 나가고 난 본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이몬드.”
그를 보고 싶진 않았지만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와의 연을 끊는 확실한 방법.
난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잘 알았고 그가 가장 경멸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찬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만찬 룸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돌아온 헬란이 전하는 말에 난 결연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만찬 룸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해 있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를 바라보며 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예를 갖추었다.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시오, 황후.”
“예, 폐하.”
시종이 의자를 빼 주고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레이몬드의 눈빛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눈길 한번 마주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얼마나 집요한지 내 온몸이 그의 눈빛에 묶여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식탁 위로 음식들이 가득 채워졌다.
레이몬드의 와인 잔에 붉은 와인이 채워지고 그는 늘 그랬듯 궁인들에게 말했다.
“모두 물러가라.”
탁-
항상 들어왔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칠흑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와인 잔의 기둥을 매만지다 내게 입을 열었다.
“날 먼저 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랬지. 근데 생각이 바뀌었어.”
“다행이군, 생각이 바뀌었다니. 다시는 이혼이란 말은 꺼내지 마.”
그는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을 오해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난 유려하게 와인을 들이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식탁 위의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그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
마지막 만찬은 끝내고 얘기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을 거 같았다.
난 그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
나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이질 감을 느낀 듯 그의 표정에 균열이 생긴 그때, 난 입을 열었다.
“레이, 생각이 바뀌었다는 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내가 이곳에 온 건 너와 제대로 끝내기
위해서야.”
“하아…….”
탁-
레이몬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와인 잔을 테이블 위로 세게 내려놓았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야, 난 너와 이혼하지 않아.”
“……난 이미 모든 걸 정리했어. 레이,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나의 말을 들은 레이몬드는 순간 비소를 뱉었다.
“하, 싸우지 말자고? 너야말로 몇 번을 말하게 하는지 모르겠군. 우린 감정 따위가 변했다고 이혼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그는 짜증스러운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알아. 이건 내 탓이야.”
“뭐……?”
“어리석게도 널 황제가 아닌 레이몬드라는 한 남자로 생각했으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내가 애초에 이 결혼을 하겠다 한 것이 네가 황제라서가 아니라는 걸.”
“…….”
“너라서였어. 황제가 아닌 너라서.”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어라 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뀔 줄 알았어. 하지만 헛된
기대였을 뿐이었지.”
난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했다.
“난…….”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와의 사랑을 말하는 내게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레이, 부탁할게. 더 이상 외롭게 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날 놓아 줘.”

14 화

“하, 그깟 사랑이 뭐라고. 엘리야, 바보같이 굴지 마. 네가 황후가 되고 네가 낳은 아이가 황제가 되는


걸 생각해 보라고.”
그는 마치 기본적인 셈법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듯 나를 답답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깟 사랑.
그 사랑으로 하나로 난 너에게 모든 걸 희생했는데 너에게 그건 그저 그깟 사랑이었구나.
그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네겐 하찮을지 몰라도, 내겐 그게 전부였어.”
상처로 얼룩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레이몬드, 날 사랑한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어?”
“……뭐?”
“넌 날 사랑한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러니 부탁이야. 날 네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네가
선황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와 이혼해 줘.”
레이몬드의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가 순간 불꽃 같은 분노로 번뜩였다.
선황과 그의 어머니, 이 두 사람은 그의 역린이었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그의 깊은 상처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잔인하지만 그만큼 그도 나도 서로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처받은 듯한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던 그는 이내 탄식과도 같은 숨을 내뱉었다.
“내가…… 네게, 선황같은 사람이었다는 말이군.”
“…….”
시선을 내리뜨린 나를 응시하던 그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혼하자. 네 말대로 우린 처음부터 잘못됐어.”
레이몬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그리고 엘리야.”
고개를 들자 싸늘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널 사랑하는 일 따위 없을 거야.”
그는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지나쳐 그렇게, 만찬 룸을 나가 버렸다.
‘앞으로 널 사랑할 일 따위 없을 거야.’
그가 날 사랑할 일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더는 그에게 슬퍼할 무엇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게 있었나.
그래도 마지막까지 잔인한 그 덕분에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을 거 같았다.
“……끝이구나.”
오늘을 마지막으로 난 더는 그에게 상처를 받을 일도, 그로 인해 가슴 아플 일도 없는 것이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난 눈물을 빠르게 손으로 훔쳤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때 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헬란은 차마 괜찮냐고 묻지도 못하겠는지 말끝을 흐렸다. 화가 나 만찬장을 떠나는 레이몬드를 보았겠지.
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헬란을 보았다.
황후가 황궁을 떠나게 되면 황후를 모셨던 헬란의 자리가 애매해질 텐데…….
난 헬란의 자리를 아버지께 부탁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예, 황후 폐하.”

* * *

다음 날, 레이몬드는 신전에 나와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황궁 안에는 우리의 이혼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갑작스러운 황제와 황후의 이혼 소식에 황궁은
시끄러워졌다.
황후궁의 시녀들 역시 소식을 들었기에 아침, 나의 치장을 도우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헬란의
날카로운 꾸중에 내게 어떠한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다.
“황후 폐하, 오늘 오찬은 가볍게 준비할까 하는데 어떠하신지요?”
황궁의 소란이 보기 싫어 방 안에서 조용히 있던 난 헬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리하거라. 한데 헬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냐.”
그녀는 황후궁의 시녀장이었고 이혼에 대하여 내게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었다.
소식을 듣고 내게 바로 물어볼 줄 알았는데…….
분명 많이 놀랐을 텐데 헬란은 다른 날과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이혼 소식에 동요하는 다른 시녀들을 혼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황후궁의 시녀장, 그 자리는 황실에서 일하는 궁인 중에서 황제의 시종장 다음으로 높은 자리였다.
높은 자리이니만큼 누리는 것이 많았지만 만약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잘못되는 경우엔 그 화를 피할 수
없었다.
하여 어제저녁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헬란의 문제를 의논하였다.
헬란의 의사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해 주기로 결정했다
헬란은 나의 물음에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황후 폐하를 곁에서 모시며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주제넘은 말이지만……. 황후 폐하께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했습니다.”
“……뭐?”
난 순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헬란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여 송구합니다. 하오나 황후 폐하께선 항상 폐하의 뒷모습만 보고 계셨지
않사옵니까. 전 그런 황후 폐하의 모든 것을 봐 왔었기에 황후 폐하의 이번 결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를 보필하는 시녀장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그녀의 진심에 난 놀랐고 고마웠다. 황궁에서 윗전을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으니까.
“그리 말해 주어 고맙구나, 헬란. 고개를 들거라.”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한 헬란을 보며 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내 비록 황후궁을 떠나지만, 내가 떠난 뒤에도 네가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써 두마. 원한다면 황궁을
나가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헬란은 작위가 낮긴 하지만 귀족 출신이기에 원한다면 황궁을 나갈 수 있었다.
비록 시녀장의 직위는 사라지겠지만 작은 저택과 위로금을 두둑이 챙겨주면 헬란의 가문에서도 그녀를
반가이 맞아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말을 들은 헬란은 밝은 표정이 아닌 어두운 얼굴을 하였다.
둘 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인가.
“헬란?”
“저는…… 황후 폐하를 계속 모시고 싶습니다. 애초에 가문을 벗어나고자 시녀가 된 것이니까요.”
“아…….”
그녀의 자세한 사정은 들은 적이 없어 모르지만 지금 헬란의 무거운 표정을 보니 가문에 문제가 많은
듯했다.
헬란이 원한다면야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꺼릴 뿐.
헬란을 계속 내 곁에 둔다면 임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아이를 레이몬드의 아이로 키우지 않을 것이다. 황족의 피를 이었다는 것을 영원히 밝히지
않을 것이었다.
혹여라도 황위 다툼으로 내 아이가 목숨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제국을 떠나 아이를 낳고 아이의
신분을 바꿔 키울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그런 일.
그런 일에 헬란을 끼워 넣어도 되는 것일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쉽게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헬란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헬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황후 폐하, 저는 정말 갈 곳이 없사옵니다. 목숨을 다하여 황후 폐하의 사람으로 살 터이니 부디 저를
거둬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헬란의 간절함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난 일단은 헬란과 함께 공작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거라. 일단…… 나와 같이 황궁을 나가자꾸나.”
“감사합니다, 폐하.”
그제야 밝아진 얼굴로 헬란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황후 폐하, 황궁은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여태까지 제국에서 황후가 궁을 나가게 될 때는 폐위의 명령이 떨어지고 난 뒤이거나 신전의 답을 들은
뒤였다.
하지만 그 황후들은 자신이 먼저 황궁을 떠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었으니…… 황제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들과 난 처지가 달랐다. 난 준비해 둔 서신을 협탁 서랍에서 꺼내 들며 말했다.
“이 서신에 폐하께서 동의하신다면 내일 바로 황궁을 나갈 것이다.”
“내일 바로 말씀입니까? 그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헬란을 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을 것이다.”
“보석들과…… 황후 폐하의 물건 들도 전부 버리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것들도 다 폐하와 결혼하고 산 것들이니……. 아무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구나.”
조금의 미련도 없이 난 그와 관련된 것들은 전부 버리고 갈 것이다.
나의 확고한 의지를 느꼈는지 헬란은 조용히 서신을 받아들었다.
“황후 폐하, 지금 서신을 태양궁으로 보낼까요?”
“그러렴.”
“네, 황후 폐하.”
헬란은 빠르게 방을 나가고 난 황궁을 떠나기 전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 * *

[이혼 문제로 더 절차를 밟아야 할 일이 없다면 내일 황궁을 나가려 합니다.]

서신 속의 짧은 글을 확인한 레이몬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이혼하자, 말하였던 것이 어제였다.
그의 손으로 죽인 선황을 언급하는 그녀에게 몹시 화가 나 이른 아침 신전으로 서류를 충동적으로
보냈지만, 결코 진심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이런 서신을 보내오다니.
오랜 세월 그를 바라봐 주었던 엘리야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냉정한 결정이었다.
차라리 이 서신을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 하는 게 더 납득하기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서신 속의 필체는 틀림없는 엘리야의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차마 구길 수 없는 서신을 꽉 쥐다 던지듯 책상 위로 놓았다.

15 화

의자 헤드에 머리를 기댄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들끓는 감정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내일 궁을 나간다니. 그럼 이제 정말 끝이다.
끝이라는 그 한 단어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이 솟구쳤다. 대체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속의 열기가 머리까지 올라오는 것에 레이몬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손길로 상의 단추를
풀었다.
집무실의 조명 불빛을 가만히 보던 그는 어제 엘리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머릿속에선 어제 엘리야가 그를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i>‘날 네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네가 선황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와 이혼해


줘.’</i>

담담한 목소리와 이미 체념한 듯 자신을 바라보았던 엘리야의 보랏빛 눈동자.


그 눈빛에서는 이제 그를 향한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엘리야는 정말 그에게 끝을 말하고 있던 것이다.
“끝이라…….”
그런 게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그녀가 끝을 말한 이상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그녀를 잡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저 그동안 미안했다, 앞으로 행복하게 지내라. 이 말과 함께 그녀를 보내 주면 되는 것이었다.
비록 안 좋게 끝나긴 했지만, 엘리야는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켜 준 친구였으니까.
앞으로의 그녀의 행복을 빌어줘야 했다.
“그래, 이게 답이야.”
레이몬드는 복잡한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책상 위 놓여 있는
엘리야가 보내온 서신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신전으로 이혼 서류가 갔다는 것이 제국에 모두 알려졌으니 사실상 엘리야와 그는 이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전에 보낸 서류는 그저 의무적인 절차일 뿐이고 서류는 늦어도 이틀 안에 신전의 확인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엘리야와 그는 이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야가 궁에 머무는 것이 힘들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나가는 것에 대한 문제는 없었다. 그가
허락해 준다면 말이다.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분위기를 꼭 닮은 반듯한 필체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시종장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황후궁에 전하거라. 이미 다 끝난 일이니 모든 것은 황후의 뜻대로 하라고.”
“네, 폐하.”
시종장이 집무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서신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 * *

“황후 폐하, 폐하께오서 전언을 보내오셨습니다.”


점심 식사를 막 끝낸 그때, 헬란이 내게 레이몬드의 전언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무어라 하시더냐.”
“모든 것을 황후 폐하의 뜻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혹시나 출궁은 안 된다 하면 어쩌나 했는데 어제 내가 한 말이 정말 그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은 듯했다.
하긴 그것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그의 역린이었으니.
만약 다른 자가 그의 역린을 입에 담았더라면 그 목숨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어젯밤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짐승 같았던 그의 칠흑 같던 눈동자.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았다.
“황후 폐하, 바로 출궁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불쑥 들려오는 헬란의 목소리에 흐려지던 시선을 바로 했다. 헬란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현실감이
돌아왔다.
쓸데없는 미련으로 상념이 깊어질 뻔했구나. 난 레이몬드의 생각을 떨쳐버리며 헬란에게 말했다.
“아니, 황궁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꼭 들렀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단다.”
망토를 걸친 난 방을 나섰다.
기사들은 어제저녁 물러갔기에 황후궁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난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황궁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궁전으로.
“나 혼자 다녀올 테니,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황궁에 있는 궁전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버려진 건물의 문 앞에서 난 시녀들에게 명했다.
“예, 황후 폐하.”
이곳을 들릴 때마다 항상 나 혼자 들어갔었기 때문에 헬란은 불안해하지 않고 시녀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난 궁전의 낡은 문을 익숙하게 밀었다.
끼이익-
기름칠이 되지 않아 귀를 긁는 듯한 쇳소리가 울리는 문을 넘어서자 버려진 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조차 없는 궁전.
그마저도 궁전이라 하기엔 그저 작은 저택의 규모였지만 이곳은 드넓은 황궁에서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바로 레이몬드가 황자 시절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니까.
어린 시절, 이 궁전의 문기둥에 숨어 그가 황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그 뒤로 내가 그를 만나러 황궁에 올 때면 잡초가 무성한 숲속이 아닌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럴 때면 나를 위해 레이몬드의 어머니가 쿠키를 굽고 홍차를 타 주곤 했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 제국에 넘치는 흔하디흔한 색과 얼굴을 지니셨지만 난 죽을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저택을 보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에 난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았다.
“레이디…… 로아즈.”

<i>‘오늘은 영애가 좋아하는 달달한 홍차를 준비해 보았답니다.’</i>


<i>‘영애는 어쩜 이렇게 예쁘세요. 영애를 볼 때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니까요.’</i>

그녀는 나를 보면 항상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늘 내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었다.


황제와의 하룻밤으로 황자를 낳았지만 비천한 출신이란 이유로 황제가 그녀를 후궁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자의 모친이었지만 하녀의 신분 그대로였다.
내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러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둘만 있을 때라도 편히 나를 대할 수 있었건만 그녀는 항상 철저히 예의를 갖추었었다.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식인 레이몬드에게까지 예를 갖추었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의 주제를 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황제의 뒷배를 믿고 한참 높은 신분인 황태자를
모욕했다니.
말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죽음에 레이몬드도 나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황제는 레이디 로아즈를 자신의 오점으로 여겼고 황태자는 자라면서 검술과 학술에 점차 재능을
드러내는 레이몬드를 짓밟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레이몬드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한들 그의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당연히 황태자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레이디 로아즈의 처형은 재판조차 거치지 못하고 바로 진행 되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던 참담했던 그 날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황궁으로 와 이곳까지 달려왔던 나의 거친 숨소리와 어머니의 옷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레이몬드의 울음소리.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슬 픔이 잊히지 않아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하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니 레이몬드도 이제는 이곳을 찾지 않는 것이겠지.
레이디 로아즈가 죽은 뒤 선황제는 레이몬드에게 황궁의 다른 궁에서 머물라는 명과 함께 이 궁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선황이 먼저 강제적으로 닫아버리기도 했지만 레이몬드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론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가 황제가 되고 어머니의 실추된 명예를 복원시켰음에도 이 궁만은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
두었다.
이곳을 찾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나 역시 이곳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이 궁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하지만 난 기억하고 있었기에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난 황후로 황궁에 들어온 뒤 레이몬드 몰래 가끔 이곳에 들려 시간을 보내었다.
레이디 로아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꽃을 두고 또 로아즈와 레이몬드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나무도
관리하며 말이다.
난 늘 그랬듯 저택 앞에 황후궁의 화원에서만 피는 엘론드를 내려놓았다.
순수한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엘론드는 레이디 로아즈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일부러 매번 이
꽃을 가지고 왔었다.
난 잠시 그녀를 위하는 기도를 올리고 곧 저택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황폐하고 쓸쓸함만 남은 궁과는 다른 생명력이 가득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i>‘레이, 이 나무는 뭐야? 왜 레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i>


<i>‘이건 어머니가 내가 태어났을 때 내 건강을 빌며 심은 나무야. 이 나무가 아프면 나도 아플 거라고
어머니께서 항상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계시지.’</i>
<i>‘와……. 그럼 나도 앞으로 이 나무가 절대 아프지 않게 로아즈 님을 도와드려야겠다. 난 레이가 아픈
건 정말 싫으니까.’</i>

자랑스러운 듯 행복한 미소를 그리는 소년 시절의 레이몬드와 그의 곁에 서 있던 내가 환상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로를 보며 웃었던 어린 시절이 사라지자 차가운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두꺼운 나무에 손을 얹었다. 곧 손에서 환한 빛이 나며 나무에 생명력이 더해졌다.
식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는 나의 힘이었다.
죽은 식물을 살리고 자라게 할 수 있는 나의 힘은 정령술에 가까웠지만 계약한 정령으로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정령술과는 조금 달랐다.
어쨌든 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 힘을 숨겼다.
마법이나 정령술과 같은 이능력은 제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난 제국의
황후였고 공격력이 없는 능력이었기에 큰 도움이 될 게 없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죽었던 소중한 나무를 살리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내가 이 궁을 차마 버릴 수 없던 이유 중에 너도 있었어.”
이 나무가 죽으면 정말 레이몬드도 잘못될까 불안했으니까.
궁의 문이 닫히고 내가 이곳에 다시 찾아왔을 때만 해도 나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무는 생명력을 되찾아 하늘 높이 더 자라있었다.
거친 나뭇결을 쓰다듬은 난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이제 난 이곳에 오지 못하니까 아프면 안 돼. 널 돌봐줄 사람이 없어.”
레이몬드 때문에 다시 나무를 찾긴 했지만 아픈 나무를 돌보다 보니 어느새 나무 자체에 정이 들어버렸다.
“아프지 말렴.”
너도…… 레이몬드도.
비록 그를 원망하지만, 그가 불행하기를 바라진 않았으니까.
난 거친 결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쓰다듬고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 궁에서 시간을 보낸 난 쓸쓸한 저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고 궁을 떠났다.

16 화

이른 아침, 황후궁은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오늘 내가 황후궁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의 허락도 받았고 마지막으로 다녀와야 할 곳도 어제 다녀왔다.
그러니 이제 황후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리 빨리 궁을 나갈 줄은 몰랐는지 황후궁의 시녀들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난 떠날 사람은
빨리 떠나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떠나고 이 궁에 들어올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미 황궁에 다음 황후가 누가 될 것인지 벌써 말이 돌았을 것이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리제나 그녀겠지.
내가 그와 이혼했으니 황후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런데 굳이 에드먼드의 모친인 리제나를 두고
에드먼드만 황자로 궁에 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나가고 한 달쯤 흐르면 귀족들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황후를 어서 들이라 황제에게
간언을 올릴 테니까.
순간 리제나가 이 궁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떠오르자 짐을 정리하던 나의 손끝이 멈칫했다.
‘……이제 나완 상관없는 일이야.’
그녀가 황후가 되어 이 궁에서 어떤 삶을 살든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난 괜스레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접으며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마저 챙겼다.
그리고 내가 짐을 다 챙겼을 때, 헬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공작가의 마차가 황후궁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나도 다 되었으니 이만 떠나면 될 듯하구나.”
“그것이 전부이옵니까?”
헬란의 눈길이 작은 가방에 닿았다.
황후궁을 떠나는 황후치곤 상당히 약소한 아니, 거의 짐이 없다시피 했다. 공작가에서부터 가져온 것을
제외하고는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다.”
“알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그래.”
난 헬란에게 가방을 넘기고 챙이 넓은 노란빛 모자를 들었다. 결혼하기 전 내가 자주 쓰고 다녔던
모자였다.
난 모자를 쓰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황후를 상징하는 은자수가 들어가 있는 드레스가 아닌 평범한 귀족 아가씨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보였다.
순간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곧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영애 시절 레이몬드의 뒷모습만 보느라 해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하고 살아야지.
난 몇 년간 지냈던 방을 쓱 둘러보다 미련 없이 문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황후궁의 모든 궁인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계단에서 로비까지 양쪽을 줄지어 선 그들은
나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들의 배웅을 받자 좋은 황후까진 못 되겠지만 그래도 궁인들에게 나쁜 황후는 아니었던 거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난 천천히 궁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모두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에선 난 몸을 돌려 그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모두 정말 고생이 많았네. 내 그대들이 앞으로 황궁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폐하께 말씀드려 놓겠네.
그럼 모두 잘 지내게.”
“……예, 황후 폐하.”
궁인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은 난 미소를 그리며 황후궁을 나섰다.
나와 함께 떠나는 헬란이 공작가의 마차 문을 열어주려 하는 것을 보고 난 그녀를 불렀다.
“헬란. 문을 열지 않아도 된다.”
“네?”
내 말에 헬란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날씨도 좋으니 본궁을 벗어날 때까진 걸어가고 싶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난 반짝이는 햇살에 기분이 좋아 미소를 지었다.
황궁의 본궁인, 황제궁과 황후궁을 벗어나는 길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 좋은 햇살을 느끼며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헬란은 반쯤 열었던 마차 문을 닫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난 마부에게 내 뒤를 따라오라 말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황후궁에서 황궁을 나가려 하면 반드시 황제궁을 지나쳐야 했다.
황제궁이 마치 황후궁을 보호하듯이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그 길을 걸어가면 레이몬드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난 레이몬드의 일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레이몬드는 재상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오전 회의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레이몬드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다른 것에 일절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그가 갑자기 길목에 나타날 일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둘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햇살이 길 위에서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내가 머물렀던 황후궁, 달의 궁이 뒤로 멀어져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가까워지는 태양궁을 바라보던 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몬드…….”
나직이,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와 함께 했었다.
기나긴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매번 슬프기만 했을까.
그 시간 속엔 분명 행복한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끝은 이렇게도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구나.
쓸쓸한 서글픔이 들었다.
그를 사랑해 생기는 미련 때문이라기보다 그와 함께했던, 이때까지 모든 것이 쌓여있는 내 과거에 대한
서글픔이었다.
그를 빼놓고는 나의 과거를 말할 수 없었으니까.
“황후 폐하, 마차를 타시겠습니까.”
헬란이 옆으로 다가와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헬란의 시선이 힐끗 태양궁에 향했다가 나를 향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나의 얼굴에 맺힌 씁쓸한 감정을
읽은 듯했다.
“……아니, 괜찮다.”
내 발로 걸어 그가 머무는 궁을 떠나야 비로소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난 레이몬드가 있을 태양궁의 집무실 부근을 멀리서 잠시 바라보다 멈췄건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 * *

“이번 남쪽 영지 푸르칸에 풍년이 들어 곡물의 재배가 전년보다 더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주 쪽에서


황궁으로…… 폐하?”
태양궁의 집무실, 제국의 재상직을 맡은 벨룩스 후작은 아까부터 자꾸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황제가 된 레이몬드와 함께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지만,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혹시 황후 폐하 때문이신가.
후작은 자신의 부름조차 듣지 못하는 황제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와 황후의 이혼 소식은 이미 제국 전체에 모두 퍼져 소식을 모르는 귀족들이 없었다.
그러니 재상인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황후 폐하를 신경 쓰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
재상은 집중하지 못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사실 조금 놀랐다.
황제와 황후는 대외적으로는 사이가 좋긴 했지만, 속사정을 아는 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황제가 황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워낙에 황제와 리제나 영애의 사랑이 유명한 것도 한몫했다.
이혼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귀족들은 결국 리제나 영애가 돌아와 폐하께서 사랑을 선택하셨구나 했던 것이
귀족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폐하께서 이혼을 원하신 것이라 그리 생각했다.
한데 지금 폐하의 모습은…….
벨룩스 후작은 상념에 빠진 레이몬드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황제와 정확히 마주친 시선에 후작은 화들짝 놀라며 먼저 시선을 내렸다.
“어디까지 이야기하였었지?”
“아, 그것이 푸르칸 영지의 영주가 풍년으로 황실에 조공품을 올린다는 말씀을 올리던 중이었습니다.”
“푸르칸에 풍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내게 언제 하였지?”
후작을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후작은 위험한 맹수 같은 그의 눈빛에 움찔하다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방금, 하였습니다. 폐하.”
“방금?”
“네, 폐하.”
고개를 살짝 숙이는 후작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순간 시종장을 돌아 보았다. 시종장은 레이몬드를 보며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후작이 말했는데 내가 듣질 못했다니.
레이몬드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리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엘리야. 지금 넌 황궁을 나갔을까.
오늘 황후궁을 떠나겠다고 했었다.
그는 그리하라 하였고.
잡을 이유가 없었기에 놓은 것인데도 여전히 제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레이몬드는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서린 후작에게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군, 그만 물러가 보게.”
“……예, 폐하.”
황좌에 앉은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의를 중간에 파한 것은.
후작은 놀란 시선으로 레이몬드를 보다 곧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갔다.
시종장은 레이몬드의 불편한 심기를 읽고 자신을 제외한 시종들을 모두 집무실 밖으로 물렸다.
레이몬드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황후는…… 궁을 떠났나?”
“회의가 시작될 때쯤 궁을 나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될 때쯤이라면……”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레이몬드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창문 밖 작지만 선명한 엘리야의 뒷모습을 보았다.
평범한 귀족 영애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엘리야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익숙한 그녀였으니까.
“정말…… 떠나는군.”
쓸쓸함일까, 허탈함일까.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낮은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폐하,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종장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괜찮겠냐, 라…….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이제는 작은 점처럼 멀어져 버린 엘리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시종장에게 답했다.
시종장에게 하는 답이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난 괜찮을 것이다.
난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창문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17 화
황궁의 본궁을 벗어나 뒤따라온 공작가의 마차에 오르려던 엘리야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에 발걸음을
멈칫하였다.
맞은편의 여인 역시 나를 발견한 듯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내가 아닌 리제나였다.
리제나는 제 아들인 에드먼드의 손을 다시 잡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우아하게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던 난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일어나시게.”
난 리제나를 바라보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황족의 색을 타고난 레이몬드의…… 아이.
제 엄마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아이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검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었으니까.
“안녕.”
“안……녕하세요.”
아이는 어눌한 목소리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그에 미소를 지어주다 리제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제나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녀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태양궁의 정원에서 그녀를 보았을 땐 너무도 완벽히 레이몬드와 어울리는 모습에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난 떠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올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의 상황이 엉켜버리긴 했지만 그게 그녀와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난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술을 열었다.
“폐하를 만나러 가는 길인가?”
“……예, 황후 폐하께오선…….”
리제나의 시선이 나의 옷을 훑고 뒤에선 헬란과 공작가의 마차에 차례로 닿았다.
누가 보아도 궁을 나가는 모양새였다.
리제나는 차마 궁을 나가는 것이냐 물을 수 없는 건지 나를 가만히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난 궁을 나가는 길이네. 내가 폐하와 이혼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는지 리제나의 녹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하지만 곧 차분해진
눈빛으로 그녀는 내게 말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궁을 나가실 거라곤……. 아니, 황후 폐하께서 폐하의 곁을
떠나시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내가 떠나리라 생각지 못했단 말이겠지.
과거엔 몰랐다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과거에도 알았을지도.
난 정말 떠나는 것이냐 묻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피식,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편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하지 않는가.”
“네?”
난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끝을 내야 하는 때라는 걸 알았을 뿐이네. 리제나 영애, 부디 폐하와 행복하길
바라네.”
난 살짝 떨리는 리제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남은 미련은 그들의 행복을 빌어 주며 털어버린 난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가의 마차가 출발한 뒤.


한참을 그 뒷모습을 보던 리제나는 서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행복……이라.”
행복이란 두 단어가 왜 이리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인지.
리제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그때,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리제나는 에드먼드에게 시선을 내렸다. 일그러지던 표정을 펴고 미소를 지은 그녀는 에드먼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디, 아버지를 뵈러 가자꾸나.”
리제나는 잔상처럼 계속 남는 엘리야의 환한 미소를 머릿속에서 억지로 지워버리며 태양궁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익숙한 저택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황후 폐하, 내리시지요.”
크로프트 공작가에 도착 후, 먼저 마차에서 내린 헬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헬란의 손을 잡고 내리자 저택 앞에 나와 있는 아버지와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보였다.
난 아버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은 난 차갑게 식은 손에 올라가던
입꼬리를 멈추었다.
“아버지. 언제부터 나와계셨던 거예요.”
난 걱정스레 물었지만, 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얼마 되지 않았다. 네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데 내 너무 좋아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더구나. 잘 돌아왔다.
엘리야.”
아버지의 말을 듣자 정말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네가 원래 사용했던 방을 어제 다 정리해 놓았는데 혹 다른 방을 쓰고 싶다면 말하려무나.”
“아니에요, 원래 지냈던 방이 좋아요. 그리고 헬란에게도 저택의 방을 내주셨으면 해요.”
아버지의 시선이 내 뒤에 서 있는 헬란에게 잠시 향했다.
황궁을 나오기 전 이미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헬란과 함께 공작가로 온다고 전하였었다.
그에 아버지는 헬란의 가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하였다. 정말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
말이다.
아버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집사에게 준비시켜 놓았단다. 엘리야, 일단 방으로 올라가 쉬려무나. 내 곧 네 방으로 가도록
하마.”
“네, 그럼 나중에 뵈어요. 헬란 그대도 일단 방으로 가서 짐을 풀도록 해.”
“네, 황후 폐하.”
난 헬란에게 답을 듣곤 먼저 2 층 내 방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앞서가던 하녀장이 걸음을 멈추며 내
방문을 열어주었다.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 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바뀐 게 없네.”
내가 쓰던 물건들과 그 위치까지 하나도 바뀐 게 없는 방 안의 모습은 내가 황궁으로 떠나던 그 날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공작님께서 황후 폐하께서 쓰시던 모든 것들을 건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하녀장이 말했다.
레이몬드와 결혼한다고 들뜨기만 했던 터라 하나뿐인 딸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신경 쓰지
못했었다.
변함없는 방안을 둘러보자 그때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셨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새삼 나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애정에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황후 폐하,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응, 그럴게. 근데 헤리스.”
난 하녀장에게 모자를 넘겨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이제 황후 폐하라고 하지 말고 예전처럼 아가씨라고 불러줘.”
“하오나……. 그리해도 되는지…….”
헤리스는 망설임을 보였다. 황후궁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은 내 신분이 공식적으론 황후이기 때문이겠지.
신전에서 이혼을 확인하고 황제가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고 나야 다시 크로프트 엘리야 영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나의 집이고 또 헤리스는 나의 어머니의 하녀였던 사람이자 나를 키워준 유모였다.
그러니 공식적인 절차 같은 건 접어두고 싶었다.
“응, 괜찮아. 어차피 늦어도 내일이면 신전의 답이 나올 거야. 그러니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줘. 집으로
돌아왔는데 황후 폐하라고 불리고 싶진 않아.”
“……알겠습니다. 엘리야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편한 드레스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헤리스는 내 방과 연결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아이보리색의 원피스 형 드레스를 가지고 나왔다.
외출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
“엘리야, 들어가도 되겠니?”
“들어오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들어오자 하녀장은 자연스럽게 방에서 물러났다. 아버지와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난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자주 뵈러 들렸어야 했는데……. 폐하만 생각하느라 그러질 못했네요.”
“괜찮다. 그간 바쁘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젠 이렇게 돌아왔고 말이야.”
내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길에 미소를 지었다.
“네. 지난 일은 이제……. 잊을게요. 그보다 아버지 헬란의 일은 조사해 보셨나요?”
“그래, 아무래도 사람을 들이는 데 넌 이제 신중해야 하니까.”
“네, 그렇죠…….”
황제와의 이혼으로 이미 나에 대해 말이 많을 테니 불미스러운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난 큰 비밀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니까.
아버지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를 해 보니, 헬란의 본가는 사정이 별로 좋지 못하더구나. 포이드 남작은 도박에 미쳐 가산을
탕진했고, 남작 부인은 오래전에 죽었다고 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헬란은 한 번도 내게 가문의 일을 말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럼 헬란은 가문과 연을 끊은 상태인 건가요?”
“그래. 이미 포이드 남작과 인연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말대로 헬란이 돌아갈 곳은 없어
보이더구 나. 그녀가 혹 다른 뜻을 품고 너에게 거짓을 말한 것은 없었다.”
“그렇군요…….”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리라 생각은 했었다. 무릎을 꿇고 간절히 말하던 헬란의 눈빛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녀의 복잡한 상황에 안쓰러움이 들던 그때, 아버지가 나를 나직이 불렀다.
“엘리야.”
“네?”
“생각을 해 보았는데 말이다. 헬란을 네 곁에 두는 것이 난 좋을 거 같구나.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으니
크로프트 공작가가 그녀의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한다면 헬란도 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니.”
충성……. 그 말은 곧 내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충성을 말하는 것일
거다.
“아버지의 말씀은 헬란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죠?”
“그래. 너를 먼 왕국에 혼자 보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난 그녀가 이때까지 그랬듯 널 보필했으면
좋겠구나. 마음 같아서는 내가 함께 떠 나고 싶지만…….”
“괜찮아요. 아버지가 남으셔야 폐하도 제국도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나 때문에 레이몬드에게 개인적인 원망이 생겼다 해도 아버지는 황제의 최측근이었다.
반정으로 일으킨 황권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었으니 내가 레이몬드와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충신으로 남으실 것이다.

18 화

그리고 난 제국을 떠날 것이다.


처음엔 제국을 완전히 떠나는 것보다 시골 영지로 내려가는 것을 고려해 보았지만, 제국 안에 있는 이상
사람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긴 어려울 거 같았다.
거기다 평범한 귀족 가문이 아닌 황제와 황후의 이혼이었다. 관심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타지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물론 그 일이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아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타지에서의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란이 나를 보필해 준다면 편할 것이다. 나도 이미 그녀의 시중에 익숙해지기도 했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보단 헬란이 낫겠지.
결정을 내린 난 아버지에게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대신 위험한 일이니만큼 공작가에서 헬란의 후견을 자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리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보다 몸은 좀 어떠니? 그 뒤로 아픈 곳은 없었느냐?”
“네. 멀쩡해요.”
“그래도 좀 있다가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 보도록 하렴.”
“그럴게요, 떠나기 전에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최대한 빨리 떠나야겠지?”
아버지의 눈빛이 슬펐다.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떠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서두르는 것이 좋았다. 조금 있으면 점점 배가 불러올 테니까.
“……네. 아무래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폐하께서 제 안부를 물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게 맞겠지.”
아버지는 짧은 한숨을 내쉬다 말을 이었다.
“아이의 신분은 내가 미리 다 손을 써놓았다.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네 어머니에게 동생이 있었단다.
네가 어릴 적에 딱 한 번 본적이 있지.”
“……흐릿하지만 기억이 나는 거 같아요.”
어머니와 똑같은 금발을 가지고 있던 여자. 너무도 오래된 일이라 얼굴을 기억나지 않지만, 본 적이 있는
거 같았다.
“네 이모인 로잘린은 정략결혼이 싫어 가문과 크게 싸우고 오래전 룬트 왕국으로 떠났단다. 그 일로
백작가의 가계도에선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지. 얼마 전에 그분의 사망 소식을 들었단다.”
“아, 돌아가셨군요…….”
“슬픈 소식이었지. 한데 백작가의 가계도에서 지워진 덕에 사망했다는 사실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해서
아이의 신분을 속이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계도에서 지워진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숨겨진 아이 하나가 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아이를 공작가로 입적할 때도 그럴듯한 사연이 돼 줄 것이다.
공작이 오래전 죽은 공작부인의 동생이 낳은 아이를 마음으로 거두었다. 이리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로잘린…….
난 흐릿한 그녀를 잠시 마음으로 기리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그래. 그럼 난 룬트 왕국으로 떠나는 빠른 배편을 알아보마.”
“네.”
“빨라도 한 이삼일은 걸릴 테니 그때까진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쉬려무나.”
쉬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가 방을 나가고 난 침대에 걸터앉았다.
룬트 왕국.
나와 내 아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곳.
난 아랫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아가야, 이제 엄마랑 행복하게 살자.”
난 주신께 미래의 행복을 빌며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 없이 침대 누웠다.

* * *

해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 밤.


레이몬드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올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폐하,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레이몬드의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이 걱정스럽게 말해왔지만 레이몬드의 시선은 하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엘리야가 좋아했던 별이군.”
‘난 별이 좋아.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어 주니까. 가끔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바라보면 답을 주는 거 같거든.’
언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밤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그녀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오늘 그녀가 떠나서일까, 자꾸만 머릿속에 엘리야가 떠오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공허함이 느껴지는 걸까.
마음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이 그의 공허함을 더욱 차갑게만
든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반짝이는 별, 꼭 엘리야를 닮은 듯한 그 별을 보던 레이몬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 불이 꺼진 황후궁인 달의 궁이 보였다.
그저 발길이 가는 곳으로 산책을 걸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황후궁 근처였다.
궁전의 주인이 떠나서일까 스산하게만 느껴지는 커다란 궁을 보던 레이몬드는 이내 인상을 구겼다.
‘대체 내가 뭘 하는 거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공허한 기분에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나도 모르게 온 곳이 황후궁이라니.
이건 꼭 내가 엘리야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잖아.
“하.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레이몬드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엘리야를 그리워한다니.
마음을 편히 나눌 수 있는 친구였을 적은 모를까, 지금 우리의 사이는 친우로 지냈을 때 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이상한 관계 속에서 그는 엘리야를 점점 멀리했다.
그래, 그랬는데 그가 엘리야를 그리워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다.
아니……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미 그를 떠났으니까.
오랜 세월 같이 지내며 쌓인 정 때문에 잠시간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뿐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구멍이 난 듯 텅 빈 마음에 그리 되뇌었다. 불빛 하나 없는 황후궁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때, 시종 하나가 산책로를 급히 걸어와 시종장에게 다가왔다.
시종은 시종장에게 무어라 전언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시종장은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폐하.”
“무슨 일이냐.”
“방금 신전에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이혼을 확인했다는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휭-
순간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의 흑단 같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레이몬드는 짙은 검은 눈동자로
황후궁을 바라보다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일 공식적으로 이혼을 발표해야겠군.”
“폐하, 에드먼드 님의 궁전을 조금 더 있다 준비할까요?”
레이몬드는 황후궁에서 시선을 거두며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이 왜 이것을 물어 왔는지 알고 있었다.
내일 황후와 그의 이혼이 정식으로 발표되고 나면 황후의 자리는 공석.
그 자리에 리제나를 들인다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에드먼드의 입궁은 좀 더 뒤로 미뤄야 했다.
리제나와 에드먼드가 함께 황궁으로 입성하게 될 테니까.
아마 시종장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이 리제나가 차기 황후가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아이의 친모이니까.
레이몬드는 오늘 궁을 찾아왔던 리제나를 떠올렸다.
‘황후 폐하와 이혼을 하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이리 만든 거 같아 송구합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황후와 나의 문제였을 뿐.’
‘오는 길에 궁을 떠나시는 황후 폐하를 만났습니다. 폐하께오서……. 폐하와 저의 행복을 바라신다고…….
하시더군요.’
리제나는 미안하다는 듯 말하였지만 레이몬드는 이상하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녹빛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기묘한 위화감.
그는 저번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리제나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에드먼드에게 시선을 돌렸었다.
“행복을 빌어 주었다, 라…….”
어느새 리제나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녀가 전해 주었던 엘리야의 말만이 남았다.
다른 귀족들의 생각처럼 너도 내가 리제나를 황후로 들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그게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어차피 황후궁을 오래 비워놓을 순 없을 테고 리제나의 아이는 황자로 입적이 되어야 했다.
리제나가 황후가 되고 에드먼드가 황자가 되는 것이 가장 완벽한 결말인 것을 그도 알고 있다.
다 알고 있지만, 그는…… 그리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떤 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본능이 리제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예정대로 사파이어 궁을 준비하도록 하거라. 내일 황후와의 이혼을 발표하고 이틀 뒤 에드먼드를 황자로
입적시킬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카르텔을 부르거라.”
“예, 폐하.”
말을 마친 레이몬드는 달의 궁을 짙은 시선으로 한 번 더 바라보다 태양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황궁에서 황후와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크로프트 공작가는 우울하기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미리 언질을 주신 건진 몰라도 누구 하나 이혼 소식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난 아침
식사를 편안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룬트 왕국의 수도 에룬다의 대한 책을 읽고 있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폐…… 아니, 아가씨. 하르펜 님께서 오셨습니다.”
아직은 폐하라는 호칭이 입에 붙었는지 헬란은 황급히 말을 바꾸며 말했다. 그에 피식 웃은 난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헬란이 문을 열자 하르펜이 방으로 들어왔다. 난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는 헬란을 불렀다.
“헬란 그대도 옆에 있게.”
따로 불러 임신을 말할까 했지만 하르펜에게 진료를 받는 것을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 같아 그녀를
불렀다.
“네. 아가씨.”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던 헬란은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에 난 기다리고 있는 하르펜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르펜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 그때 황궁에서 진료를 본 후에 통증이 더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때 이후엔 없었네.”
“일단 진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19 화

그는 의료용 마도구를 꺼내어 나의 몸을 진찰했다. 곧 의료기구를 내린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도 아기님의 몸도 모두 안정적이십니다. 이 상태라면 장시간 배를 타셔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멀미약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기님이라니…….”
옆에 서 있던 헬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헬란의 충격받은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하르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리해 주게.”
“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르펜은 헬란과 내가 나눌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빠르게 방에서 물러갔다.
하르펜이 방을 나가고 난 충격으로 굳어있는 헬란을 나직이 불렀다.
“헬란.”
그녀의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가 나의 부름에 점차 진정하며 초점을 맞추었다.
“……네, 아가씨.”
“방금 들었겠지만…… 난 지금 임신을 한 상태야. 당연히 아이의 아버지는 폐하이시고.”
“헙!”
노련함으로 놀란 기색을 최대한 숨기려 했던 그녀는 레이몬드를 언급하는 순간 더는 안 되겠는지 경악의
숨을 삼키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헬란, 돌아갈 곳이 없으니 나를 계속 모시고 싶다고 했었지. 나 역시 그대가 계속 나를 보필해 주었으면
좋겠어. 임신한 채로 타국으로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타국으로 떠나신다니……. 아가씨, 설마 폐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으실 생각이신 겁니까?”
난 헬란의 떨리는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리고 이 아이와 함께 제국을 떠나 아이를 폐하의 자식이 아닌 그저
평범한 아이로 키울 것이다.”
난 단호하게 말한 뒤 짧은 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헬란, 그대도 알 것이야. 황궁의 황위 싸움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대도 알다시피 폐하는 자신의
손으로 모든 혈육을 베고 황좌에 앉으셨지.”
헬란은 반정의 이야기가 나오자 심각하게 얼굴이 굳었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말을 차분히 말을 이었다.
“폐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야. 폐하께서 그러지 않으셨다면 전 황태자가 먼저 폐하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의 참담함이 떠오른 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만큼 황실은 황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혈육도 죽일 수 있는 곳이네. 처음에 임신을 알았을 땐 폐하께
기쁜 마음으로 말씀드리려 했다지만…….”
“시오스 영애와 에드먼드 님 때문에 말씀을 못 하신 거군요…….”
“맞아. 그녀가 폐하의 혼외 자식을 데리고 왔을 때 내 마음은 바뀌었어. 내 아이를 황권 다툼에서
지켜야겠다고 말이야.”
“……아가씨, 정말 이대로 떠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몬드를 향한 나의 마음을 항상 옆에서 지켜봐 와서일까. 헬란은 어느새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난 이미 레이몬드에 대한 모든 마음을 정리했고 아이만을 생각할 것이다.
“괜찮아.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다. 하지만 헬란, 네가 이번 일에 함께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그대가 머물 저택과 위로금을 챙겨줄 수 있어.”
“아뇨, 아닙니다. 전 아가씨를 따라가겠습니다. 어차피…… 전 제국에 남아도 돌아갈 곳도 없으니까요.
아가씨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그리 말해 줘 정말 고마워. 만약 이 일로 내가 위험해지더라도 그대는 안전할 수 있도록 조처하지.”
난 말을 마치며 일어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헬란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그런 헬란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떠나기로 했으니 떠날 준비를 해야겠지. 준비를 위해 가야 할 곳이 있어.”

* * *

같은 시각 황성, 태양궁 황제의 집무실 앞.


한 마리의 매를 떠오르게 하는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잿빛 머리칼의 장신의 남자가 집무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카르텔 에오윈스.
황제의 비밀스러운 검이라 불리는 4 기사단의 단장.
기사단장임에도 황성에서 잘 볼 수 없는 남자였고 그가 황제를 알현하고 난 뒤면 꼭 귀족들이 무거운
죄명을 달고 숙청되었다.
그만큼 위험했지만,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은 별로 없는 남자였다.
한동안 조용했던 카르텔의 등장에 태양궁의 궁인들이 서로 조심스레 눈빛을 교환하던 그때, 시종장이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 4 기사단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 하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시선을 들었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카르텔이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예, 폐하.”
레이몬드는 카르텔을 바라보다 시립하고 있는 시종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예, 폐하.”
시종들이 집무실을 나가고 레이몬드가 피곤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느 때와 똑같은 창밖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뒤에 서 있는
카르텔에게 물었다.
“카르텔, 잘 쉬었나?”
“폐하의 은덕에 항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은덕이라.”
카르텔의 말에 레이몬드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카르텔에게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바위를 연상하게 만드는 묵직한 푸른 눈빛으로 카르텔은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텔을 알게 된 지도 벌써 10 년이었지만 저 진중하고 충성심 가득한 눈빛은 달라진 적이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은덕이란 소리를 듣기엔 좀 양심에 찔리는군. 내 충신 중 그대가 제일 험한 일을 하고
있지 않나.”
“단 한 번도 험한 일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폐하.”
“농이네. 그저 반군의 일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대에게 또 다른 일을 맡기려니 신경 쓰여 한
소리였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폐하.”
돌려 발하는 법을 모르는 카르텔답게 그는 레이몬드에게 곧장 물었다.
카르텔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에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레이몬드는 나른함이 사라진 흑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술을 열었다.
“은밀히 서왕국에 좀 다녀와야겠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 * *

“폐…… 아니, 제가 또……. 호호, 크로프트 영애.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실까요?”


제국 수도에서 유명한 의상 살롱 중 하나인 프레일라 의상실.
황후로 있을 적에도 이 의상실을 이용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인지 마담은 입버릇처럼 나오는 폐하라는
호칭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난 마담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필요한 것은 전부 산 거 같군.”
“한데 영애,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는 겁니까?”
마담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오늘 산 것은 두꺼운 로브 같은 여행용
의복이었으니까.
사교계 모든 소문은 살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었다.
오늘 내가 여행용 의복을 샀다는 것 역시 마담은 이미 퍼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날 소문이니 뒷말이라도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난 턱 끝을 살짝 당기며 씁쓸함을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머리를 잠시 식히고 올까 하네, 그대도 알다시피 난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슬픈 감정을 표하듯 한숨을 내쉬자 마담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오히려 머쓱한 얼굴을 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은 이런 이야기는 돌려 말하는 것을 예의라 여겼으니까.
물론 나 역시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혹시나 마담이 나의 여행에 괜한 살을 더 붙여 소문을 낼까 저어되었기 때문이다.
살롱의 마담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사교계 소문을 만들어 왔었으니까.
그럼 내 여행에 대한 소문이 더욱 빠르게 퍼질 것이고 자칫하면 레이몬드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리 대놓고 이혼 때문이라 말하였으니……. 마담도 자기 마음대로 살을 덧붙이긴 힘들
것이다.
그랬다가는 내가 나중에 마담에게 소문을 문제 삼을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는 일이니 좀 더 입조심을 하겠지.
나의 어두워진 얼굴에 마담은 이 자리를 빨리 정리하고 싶은지 의상북을 덮으며 말했다.
“크로프트 영애, 그럼 오늘 저녁까지 주문하신 물건들을 공작가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 주게. 그럼 잘 부탁하네.”
“네, 영애.”
난 마담의 인사를 받고 헬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실을 나갔다.
살롱에 앉아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 쏠리는 것을 느낀 난 모자 깃을 살짝 내려 시선을 차단한 채
살롱을 나갔다.
그리고 난 살롱을 나가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살롱 앞, 내 마차가 나갈 수 없게 마차 두 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야.
“아니 이게 무슨……. 정말이지 누군진 몰라도 참으로 매너가 없는 행동입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헬란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가온 마부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나와달라 계속 말했지만 무시하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무시라…….
“네 잘못이 아니니 괜찮다.”
난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를 막아선 마차 한 대를 보다 살롱을 같이 나온 마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담 역시 당혹스러운지 큰 갈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마담, 살롱에 이 두 마차의 주인들에게 마차를 좀 빼 달라 해 주시 게.”
“아, 네. 알겠습니다. 폐…… 아니 크로프트 영애.”
마담이 서둘러 살롱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영애 한 명이 살롱에서 나왔다.
그 영애는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체이스 후작가의 영애인, 클레앙 체이스.

20 화

화려한 붉은 머리칼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한 영애.


특히 그녀와는 내가 황후가 되기 전 파티장에서 한번 부딪힌 적이 있었기에 더욱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i>‘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는데 폐하의 곁에서 저리 설치다니, 자신이 황후라 착각이라도 하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의 뒷배로 폐하의 곁에 서는 주제에.’</i>

반정의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장에서 날 모욕하던 그녀였으니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레이몬드를 마음에 두고 있던 클레앙 영애의 일방적인 공격이었지만 어쨌든 조용한 성격인 내가
파티장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해 준 인물이었다.
클레앙 영애를 보기 좋게 누른 덕에 황후의 재목으론 너무 소심한 게 아니냔 말이 한 번에 사라졌었다.
그렇게 보면 나름대로 고마운 영애인 건가.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레이몬드과 내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충격을 받았는지 유학을 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하필 오늘 내 마차를 막은 영애가 클레앙 영애라니.
난 찌푸려지는 인상을 피려 애써 노력했다.
“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황후 폐하가 아니신가요.”
나를 발견한 클레앙 영애가 희극 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힌 그때 클레앙 영애는 막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짝 마주치며 붉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아차차……. 더는 황후 폐하가 아니시지요. 이혼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깜. 빡. 하고
말았습니다.”
전혀 깜빡한 거 같지 않은 미소를 그리며 말하는 클레앙 영애를 보며 난 얼굴을 굳혔다.
설마 일부러 내 마차를 막은 건가.
하긴, 내 마차를 보면 내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귀족가의 영애들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아닌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를 타고 다니지만, 난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를 그대로 타고 다녔으니까.
지금 마차에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음각으로 마차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다른 영애였다면 모를까 클레앙 영애라면…… 이건 두말할 필요 없이 일부러 이런 것일 거다.
하아.
난 나를 바라보는 클레앙 영애의 빈정거림 가득한 주홍빛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살롱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최대한 조용하게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걸어온 싸움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난 클레앙 영애를 마주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습니다. 워낙에 얼마 되지 않은 소식이니 헷갈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처럼 말이에요, 체이스 영애.”
지난날 파티장에서 내가 그녀에게 선을 넘지 말라 했던 경고를 떠올리라는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클레앙
영애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전 괜찮으니 이만 마차를 좀 물려주시겠습니까, 저희 마차가 움직일 수가 없어서요.”
하지만 곧 그녀는 마차를 바라보더니 슬쩍 미소짓고 말했다.
“어머, 네. 당장 마차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마차가 설마 공작가의 마차일까 싶었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영애.”
“아니, 뭐…….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아침에 불미스러운 이혼 소식이 발표되었는데 설마 영애께서
한가로이 살롱을 찾을 것이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긴말에 지치는지 작은 숨을 내쉰 클레앙 영애는 안쓰럽다는 듯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황궁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쫓겨나다니, 지금 감히 아가씨를 모욕……”
클레앙 영애의 언행을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헬란이 뒤에서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난 헬란의 손목을 잡으며 말렸다.
“그만하거라.”
헬란은 붉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난 예의상의 미소도 거두고 굳은 얼굴로 클레앙 영애를 쳐다보았다.
“영애 말씀이 상당히 무례하군요.”
“이런……. 제가 너무 솔직히 말했나 봅니다. 영애.”
촤락-
클레앙 영애는 부채를 피며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부채 아래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을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나와 소란을 피우려 하는구나.
이혼 소식 당일에 살롱 앞에서 소란을 피운 전 황후라…….
내 명예에 흠집 내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나 역시 세게 밀고 나갔겠지만, 오늘이 이혼 소식이 발표된 당일이라 소란을 피우기 난
감했다.
벌써 유리창 너머 살롱 안에서 귀부인들이 우리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관망하고 있었으니까.
이 발칙한 영애를 어떻게 눌러줘야 할까.
난 클레앙 영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클레앙 영애의 미소를 가려주고 있는 저 부채를 꽉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귀족의 품
위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조금은 미친 짓을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한순간 정적이 흐르던 우리 사이에 큰 소란이 일었다.
히이잉-!
가만히 잘 매여 있던 후작가 마차의 말이 갑자기 앞발을 들며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아가씨!”
놀란 헬란이 내 앞을 막은 그때, 말이 구정물에 말발굽을 구르자 클레앙 영애 쪽으로 구정물이 튀어
올랐다.
“꺄악!”
구정물을 뒤집어쓴 클레앙 영애가 질겁을 하며 부채를 던지고 발을 동동거리는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낯선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나 역시 갑자기 마차 사이로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의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는 모자까지 쓰고 있어 로브 안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누구지…….
평범한 여행객인 듯도 했지만, 난 남자의 등 뒤에 매여진 커다란 롱소드와 남자의 풍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남자를 좀 더 자세히 보려던 그때, 옆에 서 있던 클레앙 영애가 날 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당신 대체 감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클레앙 영애의 하녀가 황급히 다가와 온몸에 튄 구정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보았지만, 그 흔적까지 완벽히
지울 수 없었다.
거기다 이미 드레스는 구정물로 더러워진 상태,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상태에 이성을 잃었는지 클레앙 영애는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너 내가 감히 누군지 알고 이따위 짓을 해!! 내 너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찢어질 듯한 목소리에 난 순간 미간을 좁혔지만, 눈앞의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남자가 클레앙 영애에게 고개를 든 순간, 난 모자 안에서 번뜩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았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남자는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눈빛을 가려버렸다.
“저놈을 당장 잡아라!”
자신의 호위기사를 향해 클레앙 영애가 명령했다. 호위기사들이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호위기사의 손이 남자에게 닿은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계속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영애.”
“뭐?”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영애께 지은 죄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영애의 호위 기사에게
잡혀드릴 순 없을 거 같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남자는 호위기사의 손을 가볍게 떨쳐 버렸다.
“네놈이 감, 감히!”
당황한 호위기사가 남자를 향해 칼을 빼 들려는 듯 검집에 손을 뻗었으나 기사는 검을 뽑지 못했다.
남자가 기사의 팔을 잡고 그대로 엎어서 넘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등을 세게 부딪친 호위기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윽……!”
기사의 신음과 동시에 클레앙 영애와 그녀의 하녀가 놀라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난 다른 의미로 남자에게 놀랐다.
완벽한 체술.
검을 주로 사용하는 제국은 체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먼 동방국의 체술을 책으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체…… 누구지.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리라.
하지만 남자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태연히 손을 털었다.
“한 이틀은 아플 거요. 그리고 앞으로 칼을 뽑는 연습을 좀 더 하시오. 그래서야 뽑기도 전에 적의 칼에
죽겠소.”
짧은 말을 남긴 그는 더 볼일 없다는 듯 우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클레앙 영애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 서라! 서라니까!!”
하지만 남자는 이미 한참이나 멀어진 뒤였다.
클레앙 영애와는 다른 감정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영애를 달래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런……! 검을 뽑지도 않고 몸싸움을 하다니……. 아가씨, 위험한 자입니다. 분명 떠도는 더러운
용병이 분명합니다. 괜히 엮이면 후작님께서 경을 치실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단 아가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소문이 돌 수도 있습니다.
하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지만 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악을 지르던 클레앙 영애가 조용해졌다.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클레앙 영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붉은 얼굴로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며 난 입을 열었다.
“어머나, 영애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그러게 애초에 이곳에 마차를 정차하시지만 않으셨어도 이런
변고는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 애의 꼴이 딱 구정물에 빠진 생쥐 꼴 같군요.”
“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홍빛 눈을 번뜩이며 소리치는 영애를 보며 난 부채를 펼쳤다.
그녀가 내게 했듯 미소가 서린 입가를 살짝 감추며 안쓰럽다는 듯이 미간을 모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가 너무 솔직했군요. 미안합니다, 영애. 한데…… 마차를 좀 서둘러 옮겨주시겠습니까, 이거
원 냄새가 심하여…….”

21 화

말끝을 흐리며 영애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봐 주자 살롱 안 귀부인들의 시선이 클레앙 영애에게로
집중되었다.
사교계의 새로운 먹잇감이 자신이 된 것을 느꼈는지 클레앙 영애는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보다
자신의 마차로 올라탔다.
쾅! 영애가 탄 마차 문이 거세게 닫히자마자 마부가 황급히 말을 몰아 살롱 앞을 떠났다.
힐긋 살롱 안을 바라보자 귀부인들이 떠나는 클레앙 영애의 마차를 보며 무어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아마 오늘 살롱을 찾은 귀부인들은 이혼한 황후는 까맣게 잊고 구정물을 뒤집어쓴 클레앙 영애만을 기억할
듯했다.
“……클레앙 영애 덕에 내가 잊힐 듯하구나.”
헬란의 시선이 모여 있는 귀부인 들에게로 잠시 머물렀다 내게 향했다.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아가씨 이만 공작가로 돌아가시지요.”
“그래.”
한데 본의 아니게 날 도와주게 된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난 알 수 없는 강한 남자가 사라진 곳에 시선을 잠시 두다 마차에 올랐다.

* * *

-딸랑.
수도 광장의 위험한 뒷골목, 그중에서도 가장 용병들이 많이 드나드는 술집의 문이 열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술집의 주인인 빛바랜 갈색 머리칼을 가진 거구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아직 영업 시작 안 했습니다. 해가 지면 오세요.”
걸걸한 목소리로 말한 남자는 뒤이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걸레질을 멈췄다.
“나야, 빌리스.”
빌리스는 휙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짙은 갈색 로브 모자를 벗은 남자가 빌리스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눈매와 언뜻 금빛이 비치는 호박색 눈동자.
긴 여행으로 살이 빠졌는지 더 날카로워진 턱선과 까끌까끌한 수염에도 잘생김이 가려지지 않는 얼굴은
분명 빌리스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빌리스를 보며 남자는 입술을 움직였다.
“뭘 그리 보고만 있어. 7 년 만에 다시 보는 건데 포옹 한번 안 하는 건가?”
“이런 미친!”
걸레를 바닥에 던진 빌리스는 거친 욕설과 달리 울먹이는 눈빛으로 남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구의 빌리스를 가볍게 살짝 들어 올린 남자는 피식 웃으며 빌리스를 밀어냈다.
“남자끼리 포옹은 길면 안 돼. 몸에 소름이 돋거든.”
남자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빌리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소리쳤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제레미!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내가 왜 죽어. 미안한데 내 생명줄이 너보다는 길 거야.”
제레미는 빌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싶은데, 술이나 마시면서 회포나 풀자고.”
빌리스는 저만 걱정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시원한 맥주를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빌리스는 제레미의 맞은 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예 돌아온 거야? 이제 떠돌지 않는 거야?”
제레미는 턱 끝을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근데 어차피 이제 슬슬 가문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평생 떠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니잖아.”
빌리스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제레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들이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닐 수 없다는 것은.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긴 해도 뭐, 아직은 호랑이 같은 그분이 정정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한 십 년은 더 내
맘대로 살 수 있겠지.”
“그럼 십 년 뒤에나 돌아오지 갑자기 제국에 왜 돌아온 건데?”
“아……. 원래는 들릴 생각이 없었는데 지나가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
“이상한 소리?”

<i>‘황제의 첫사랑이 애를 데리고 돌아와서 이제 황후가 황궁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라던데!’</i>

시끄러운 술집의 소음 속에서 그의 귀속을 정확히 파고들었던 그 말.


“어,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들렸어. 뭐……. 생각지도 못하게 빨리 확인을 하게 되긴
했지만. 제국에 온 김에 한 며칠 머물까 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눈앞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꿈쩍 않는 네가 제국으로 돌아온 건지 궁금하네.”
빌리스의 말에 제레미의 미간이 좁아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꿈쩍 않는다니 나 그렇게 비인간적인 놈은 아니다.”
“그래, 뭐 그런 거로 치자. 근데 이상한 소리를 듣고 확인하고…… 그게 끝이야?”
제레미는 맥주잔에 낀 서리를 손 끝으로 쓸었다.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안에 스며들었다.
꼭 눈 내리던 그 날 밤의 싸늘함처럼.
아주 짧은 과거를 그리던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확인하고…… 끝이지. 어차피 그 사람은 기억하지도 못할 과거의 인연일 뿐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굳이 확인하러 왔다라……. 이거 정말 너답지 않은 일이네. 뭔지 물어봐도 안
말해 줄 거지?”
“어.”
제레미는 단호히 대답하며 맥주를 다시 들이켰다. 그러면서 스치듯 마주쳤던,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 * *

똑똑-
“들어와.”
살롱에 다녀와 몸을 씻고 편히 쉬려던 차였다.
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 누우려던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온 헬란은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것이…… 아가씨 앞으로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파티 초대장?”
나의 물음에 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내게 파티 초대장이 오다니……. 이상한 일인데.
이혼이 발표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아직 내가 공작가로 돌아온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공작저로 파티 초대장이 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게 맞니?”
난 혹시나 해서 헬란에게 다시 물었지만 헬란은 난감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아가씨 앞으로 온 초대장이 맞습니다.”
“대체 누가 내게…… 이리 주렴.”
오늘 살롱에서 나를 본 귀족이라 생각하더라도 지금 내가 파티장 같은 곳을 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일부러 나를 놀리려는 마음이 아니고서야……. 거기다 무슨 파티장이 되었든 내가 파티장에 간다면 모든
관심사는 내게 집중될 것이 뻔했다.
근데 초대장이라니.
난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혼 한 전 황후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낸 간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손을
뻗었다.
헬란은 망설이듯 손을 멈칫하다 내게 초대장을 건너 주었다.
초대장에 적힌 가문의 이름을 확인한 난 순간 얼굴을 굳혔다.

[시오스 후작가.]

리제나의 가문이었다.
왜, 내게 초대장을.
황궁을 나오던 날 마주쳤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난 잠시 그녀를 떠올리다 천천히 초대장을 뜯었다. 초대장을 열자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에드먼드 시오스의 6 번째 생일이자 시오스의 이름으로 마지막이 될 생일을 축하하는 작은 파티를 여니


엘리야 크로프트 영애께서 자리를 빛내어 에드먼드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오스 후작]

“허.”
에드먼드의 생일 파티라……. 이곳에 날 초대한다니.
“아가씨, 대체 무슨 파티의 초대장인가요?”
아무런 말 없이 초대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 내게 헬란이 물어왔다.
난 초대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에드먼드의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한다는구나.”
“네? 아니 어떻게 아가씨께 그런 초대장을 보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헬란은 정말 화가 나는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헬란의 반응이 정상적인 것이었다.
나와 레이몬드의 공식적인 이혼 사유는 에드먼드의 잘못은 아니지만, 에드먼드 때문이 맞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대외적으로는 황후인 내가 그의 사생아에게 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혼 소식이 발표된 당일에 내게 에드먼드 생일 초대장을 보내다니.
초대장을 받은 내가 화를 내며 초대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난 화가 나기보다 이걸 보낸 리제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이 초대장을 보낸 저의가 무엇일까.
그녀는 이미 내가 황궁을 떠나는 것을 보았고, 나와 그녀 사이에 악감정이랄 게 크게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나.
하지만 황궁을 나오던 날의 리제나를 떠올려봐도 나를 향한 적대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정말 순수하게 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 달라 이런 초대장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님 리제나
영애는 모르는 일인가.
후작이 내게 보낸 것이고 리제나 영애는 모른다, 차라리 이게 더 이해가 갔다.
후작의 입장이라면 그래, 내게 확실히 하고 싶어 이 초대장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시오스의 성으로는 마지막이 될 이 문구는 곧 아이가 시오스가 아닌 에그리타 제국의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될 것이란 뜻이었다.
이혼했다 하더라도 혹시 내가 다른 마음을 품었을까 초대장을 대신해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 에둘러
경고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몰랐을 까.”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의구심에 나직이 중얼거린 그때, 헬란이 말했다.
“아가씨, 초대에 응하실 겁니까?”
난 초대장을 접으며 헬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내게 좋을 게 없는 파티장이었으니까.
리제나와 나 그리고 에드먼드에 관한 말을 만들어내기에 딱 좋은 자리가 될 것이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오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헬란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말을 더했다. 난 헬란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폐하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혼한 이유가 돌아온 리제나와 아이 때문이란 말이 사교계에 가득한데 에드먼드 생일 파티에
참석하면 더욱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럼 나중에 리제나를 황후에 책봉할 때 좋지 못한 시선이 생길 수 있을 테니……. 아마 레이몬드는
구설수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런가요……”
난 못마땅한 눈빛으로 초대장을 보고 있는 헬란에게 답했다.

22 화

“내 앞으로 직접 온 초대장이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이름이 박힌 초대장을 무시하는 것은 그 가문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이 초대장은 처음부터 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작정하고 보낸 것일 거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이 초대장을 내게 보낸 것이 누구인지, 시오스 후작인지 아님 리제나 그녀도 함께인 것인지.
가보면 알 수 있겠지.
리제나 영애가 몰랐다면 날 보고 많이 놀랄 테니까.
난 파티 초대장을 헬란에게 건네며 말했다.
“집사에게 내일 후작가의 파티에 가겠다고 전하렴.”
“네, 아가씨.”
헬란이 방을 나가고 난 아까와 달리 복잡해진 머릿속에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 * *

“아가씨, 루비 귀걸이로 할까요? 아님 가넷 귀걸이로 할까요?”


하녀가 내게 붉은 보석이 반짝이는 두 개의 귀걸이를 보여 주며 물었다.
“루비로 할게.”
“네.”
곱슬거리는 웨이브를 넣어 풀어 내린 머리에는 루비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자 하녀는 들고 있던 가넷 귀걸이를 내려놓고 루비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걸어 주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치장이 끝났다.
하녀들의 치장을 돕고 있던 어린 하녀 한 명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진심인지 나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어린 하녀를 보며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런 순수한 눈빛은 오랜만이었으니까.
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품격에 맞게 항상 정해진 대로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달리 오늘은 결혼 전처럼 머리를 풀어
내렸다.
굵은 웨이브가 물결치는 은발과 색이 선명한 화장.
은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보랏빛 드레스는 나의 눈과 비슷한 색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 나다.”
“들어오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오시다 나를 보고 걸음을 멈칫하셨다. 그러다 곧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셨다.
“예쁘구나, 엘리야.”
“감사해요.”
“지금 출발할 거니?”
“네. 지금 가도…… 이른 시간은 아니니까요.”
“그래……. 내가 같이 갈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하필 오늘 일이 생겨서…… 미안하구나.”
관리하는 공작가의 영지에 일이 생겨 오늘 아버지는 나와 함께 후작가의 파티에 가실 수 없었다.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지, 쯧 혀를 차는 아버지에게 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돌아올 생각이에요.”
“그래, 그러렴. 어차피 넌 곧 떠날 사람이니 그들과 더 엮일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 배편을 예약해
놓았다.”
“떠나는 날이 언제…… 아, 아버지 저 일단은 가야 할 거 같아요. 다녀와서 이야기 나누어요.”
떠나는 배편을 잡으셨다는 말에 묻던 난 파티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바꾸며
클러치를 들었다.
“그래, 일단 다녀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마차까진 내가 데려다주마.”
“감사해요.”
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마차로 향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영애, 도착하였습니다.”
“그래.”
마차에서 내린 난 발을 내딛지 않고 잠시 가만히 서서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시오스 후작가의 파티
홀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와 함께 왔던 그 날과 같은 파티 홀.
파티 홀로 향하는 계단 위로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가던 나와 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제국을 떠나기 전 이곳을 다시 올 줄 몰랐는데.
막상 도착하자 복잡미묘해지는 마음에 걸음을 내딛는 것을 망설이던 난 짧은 숨을 내쉬며 상념을
떨쳐버렸다.
얼굴만 비추고 바로 공작가로 돌아가는 거야.
난 마음을 다잡고 은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파티장으로 향했다.
“엘리야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크게 파티장을 울리고 내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했다.
당혹과 놀람이 뒤섞인 시선들.
내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는 그런 눈빛들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황후로 살아오며 시선이 쏠리는 것에는 이골이 났기에 난 능숙하게 태연함을
가장하며 홀의 중앙, 주인공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로프트 영애.”
후작가의 식솔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후작이 제일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난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후작님.”
난 그와 인사를 나누며 리제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리제나는 그린 듯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로프트 영애.”
“……아닙니다. 시오스 영애.”
리제나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초대장을 보낸 것이 후작의 뜻만이 아니라는 것.
왜……?
당신은 대체 왜 나를 이곳에 부른 거지.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후작처럼 내가 제 아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까 걱정이 되어서……?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난 한 번도 그녀와 척을 진 적이 없었다.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서로의 인품을 모를 정도로 먼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에드먼드의 앞길을 막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마음에 이상함을 느끼던 그때, 손님의 도착을 알리는 하인의 목소리가 파티장을
크게 울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레이몬드가 왔다는 말에 나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당황하던 난 황제를 향한 예를 갖추었다.
“……모두 일어나라.”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당연하게도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에……”
칠흑 같은 짙은 시선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던 그때 리제나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폐하, 에드먼드를 위해 이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를 향해 있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리제나에게로 돌아갔다.
“……에드먼드가 후작가에서 너와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니 당연히 내가 와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와 보내는 마지막 생일?
난 레이몬드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리제나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리제나가 황후가 될 텐데 왜 이번이 어머니와 보내는 마지막 생일일까.
후작가에서 마지막을 뜻하는 것인가.
그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난 곧 이어지는 후작의 목소리에 생각을 접었다.
“폐하 이리 참석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은 레이몬드에게 인사를 올리고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에드먼드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이리 후작가를 찾아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파티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후작의 말에 곧 홀 안에 음악 소리가 가득 찼다.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귀족들은 파티를 즐기는 척 삼삼오오 모였지만 시선을 여전히 레이몬드와 나,
리제나를 향해 있었다
그만 이곳을 나가야겠어.
레이몬드가 이곳에 올 줄 알았더라면 내가 파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향후 황후가 될 리제나의 평판을 생각해 이곳에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리제나와 에드먼드를 향한 그의 마음이 이리 클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나의 오판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가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았다.
레이몬드까지 온 지금 난 파티장의 불청객이 되어버렸으니까.
난 리제나 영애에게 말했다.
“리제나 영애,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써 말인가요?”
“네, 전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요.”
순간 레이몬드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불편한 이 관계를 리제나 역시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떠나려던 그때, 리제나가 나의 팔을 붙잡아왔다.
“영애, 그래도 이렇게 벌써 돌아가시다뇨, 이리 돌아가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답니다. 저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에드먼드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는 거라 여겼는데…….”
리제나는 미안하단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정말 내게 미안해서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말은 분명 나의 평판을 깎아내릴 수 있는 말이었다.
레이몬드와 이혼을 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이 자리에 참석하였으면서 실은 속으로 불편함을 풀지 못해
파티장에 오자마자 떠나는 게 아니냔 소리였다.
난 순간 방금 말을 한 게 리제나 영애가 맞나 싶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듯 리제나 영애의 얼굴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난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좀 더 남아 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맛있는 음식들도 드시면서요.”
“……네, 영애.”
악의가 전혀 없다는 듯이 리제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난 내게 갑자기 적의를 보이는 이유가 뭘까.
리제나의 심리를 가늠하던 그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만 돌아갈 테니, 에드먼드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라.”
“폐하, 에드먼드와 좀 더 시간을 보내 주시고 가시지요. 벌써 돌아가시면 에드먼드가 서운해할
것입니다.”
리제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후작이 다가와 말했다.
“그리하시지요, 폐하. 에드먼드도 폐하께서 가시는 것이 싫은 듯합니다.”
“폐하……”
후작의 품에 안겨 있는 에드먼드가 레이몬드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23 화

“아버지가 보고 싶었나 봅니다.”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은 후작이 안고 있던 에드먼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레이몬드를 향해 작은 발을 내디뎠다. 작은 걸음으로 열심히 레이몬드의 앞에 선
에드먼드가 손을 그에게 손을 뻗었다.
“폐하.”
난 천천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레이몬드가 에드먼드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잡은 손에 내 속이 쓰려지던 그때, 에드먼드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서렸다.
“폐하, 어머니와 춤춰요.”
에드먼드가 크게 외쳤다.
음악 소리가 아주 잠깐 멈칫할 정도로 크게.
어눌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이의 말을 들은 모든 귀족은 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파티장에서 선남선녀가 춤을 추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지만 그 선남선녀가 레이몬드와 리제나라는 것.
그리고 둘 앞에 내가 있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다.
이혼한 전 부부와 남편의 첫사랑, 거기다 남편의 아이까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관계의 중심이었으니까.
귀족들의 흥미 가득한 시선이 우리를 향해 쏠려있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하던 그때 리제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디, 그럼 안돼. 폐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리제나는 에드먼드를 향해 말했다. 그에 에드먼드는 미소를 지우고 울상을 지었다.
“……엄마와 폐하가 춤추면 안 돼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무도회에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춤추는 거라고
에디는 엄마가 폐하랑 춤줬으면 좋겠어요.”
에드먼드는 천천히 울먹이는 목소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손을 잡더니 레이몬드의
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울망한 시선으로 리제나와 레이몬드를 번갈아 보았다.
난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난감함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차마 아이의 손을 뿌리칠 순 없는지 미간을 좁힐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싶어 몸을 돌리려던 순간 리제나가 나를 불렀다.
“크로프트 영애.”
“네?”
갑자기 나를 왜.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좋지 못한 예감이 스쳤다.
“영애께서…… 괜찮으시다면 에드먼드의 부탁을 들어줘도 될까요?”
그리고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리제나는 나를 이 상황에 아주 제대로 엮어버렸다.
굳이 이혼한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내가 아닌 레이몬드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맞았다. 한데 리제나는 마치 레이몬드가 나 때문에 자신과 춤을
추지 못한다는 듯 내게 물은 것이다.
이번에도 그녀의 부드러운 말엔 나를 향한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있었다.
난 바로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대체 이렇게 날 엮어 당신이 얻는 게 무엇이길래.
이미 황후의 자리도 에드먼드의 황자의 자리도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리제나가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가 알 필요는 없겠지.
난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녀가 나를 이 상황에 얽어놓는다 해도 내가 그 연을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더 이상 이들을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난 애타는 표정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는 리제나를 보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제 허락이 굳이 필요하시다니…… 답해 드리겠습니다. 폐하와 저는 이제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 모든 것은
리제나 영애의 뜻대로 하세요.”
난 그녀에게 답하며 아까부터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흑안과 나의 자안이 마주쳤다.
레이몬드의 흑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미묘한 비틀림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다 먼저 리제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몬드는 리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오스 영애, 그대에게 춤을 청하오.”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울리자 리제나는 한 떨기 만개한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영광입니다. 폐하.”
두 사람이 댄스 플로어로 올라가자 부드러운 왈츠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버려진 사람처럼 남은 나를 향한 귀족들의 동정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곳을 나갈 순 없었다. 그것은 저들을 피해 도망치는 꼴이 될 테니까.
아무리 제국을 떠날 거라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이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난 태연함을 가장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완벽한 한 쌍 같은 두 사람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아름다우신 영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미천한 제가 감히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샴페인 잔에 손을 뻗던 난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손을 멈칫했다.
대체 언제 내 앞으로 온 것일지 정체 모를 남자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난 남자의 낯선 백금색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은은한 햇살의 담은 듯한 백금발이 밝은 조명 아래
반짝였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순간 왜인지 모르겠지만 반짝이는 백금발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금빛이 비치는 호박색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난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남자는 얼마 전 의상실 앞에서 나를 도와준 그 신비한 남자였다.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해도 남자의 신비로운 보석 같은 눈동자는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다.
강렬했던 인상에 한 번쯤 누구일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한데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남자는 잘생긴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띠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아름다우신 영애, 부디 저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남자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저 남자는 누구예요?”
“어느 귀족 가문의 자제죠?”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면 아무도 모를 리가 없는데…… 처음 봅니다.”
수많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남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남자.
쉽게 잊히지는 않을 만한 남자임 에는 분명하지만, 그뿐이었다.
신분도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추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거절을 말하려던 순간 난 집요한 흑빛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지금 내게 벌어진 상황을 보고 있는 레이몬드의 시선.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내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게 내민 손을 본 레이몬드의 눈이 돌연 사나워졌다.
몹시도 심기가 거슬린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본 순간 난 다른 것은 전부 상관없어졌다.
난 정중하게 손을 내민 남자를 향해 충동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죠.”
난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검을 오래 잡은 손인지 남자의 손은 굳은살이 가득했다.
하지만 투박한 손의 감촉과는 달리 남자는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실까요, 아름다운 레이디.”
자칫 느끼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호박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해서인지 아니면
남자의 외모가 호감형이라 그런지 그저 담백하게 느껴졌다.
난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그를 따랐다.
그와 함께 댄스 플로어에 오르자 레이몬드와 리제나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거리도 아니었기에 난 그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일부러 레이몬드 쪽을 보지 않으며 남자에게 미소를 그리자 남자의 손이 나의 허리에 닿았다.
“제가 춤을 그다지 잘 추지 못해서 말입니다. 부족한 실력을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영애.”
눈을 찡긋하는 그의 장난스러움에 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춤 실력이 없는 분은 곤란한데요.”
“아예 못 추는 것은 아니…… 농담이셨군요.”
순간 당황하는 남자를 보며 웃자 남자는 내 농담을 알아차린 듯 굳었던 얼굴을 폈다.
당황스러운 그의 얼굴이 볼만했다.
난 즐거운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춤 실력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하니까요.”
귀족 영애로 태어났고, 황후로 지내면서 춤을 비롯한 귀족으로서의 소양은 완벽하게 터득했다.
나의 당당한 말에 놀란 듯 남자의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커지던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영애.”
왈츠 곡을 따라 부드럽게 우리의 몸이 움직였다. 춤을 못 춘다던 그의 말과 달리 남자는 나를 아주
능숙하게 리드하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끼며 난 남자의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당신은 누구일까.
의상실 앞에서 나타났을 때는, 저 먼 동방국에서 넘어온 용병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리 완벽하게 제국의 예법과 춤을 구사하는 것을 보니 절대 용병은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연습한다고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애초에 그의 외모도 동방국의 것은 아니지.
동방국에 가까운 외모는 오히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진 레이몬드가 아닐까.
상념의 끝에서 떠오르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의 모습을 떨쳐버리려고.
“딴생각에 빠지셨군요. 역시 제 춤 실력이 별로인가 봅니다.”
내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자신에게 집중해달라는 듯이.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난 남자의 수려한 얼굴을 가만히 보며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제가 궁금하신가요?”
“우연한 만남이 두 번이 되니 궁금할 수밖에요.”
“두 번이라니,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요.”

24 화

태연히 거짓을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저절로 피식, 웃음이 났다.


난 남자의 호박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남자는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듯 보였으니까.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인데 굳이 집요하게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와의 우연도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나요?”
왈츠 음악의 끝에서 남자가 내게 물어왔다.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굳이 들추는 악취미는 제게 없답니다.”
“숨긴 것이 아니라…… 알아봐 주길 바란 것인데.”
“네?”
막 음악이 끝나고 들려오는 귀족들의 박수 소리에 남자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
남자에게 되물었으나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미소를 그리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름다우신 분,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댄스 플로어를 내려오자 수많은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불편한 시선에 살갗이 따갑다 느끼던 그때, 남자가 나의 손을 놓았다.
그를 올려보자 호박색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인연이 또 한 번 닿게 된다면 그땐…… 부디 절 알아봐 주시길.”
“……?”
알아봐 달라고……?
이 남자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 이외에 또 다른 일이 있었던가.
그러나 남자는 내가 채 묻기도 전에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빠르고 큰 보폭으로 귀족들을 스쳐 지나간 남자는 귀족들이 그를 잡기도 전에 파티장을 나가 버렸다.
대체 뭘까.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리제나와 레이몬드에게로 다가갔다.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는 레이몬드의 시선. 나는 그를 무시하며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그만 돌아가겠다 말하려던 그때, 하인이 쟁반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쟁반엔 샴페인과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하인이 가까워진 순간.
“……!”
확 올라오는 음식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순간 떠오르는 하르펜의 말.

<i>‘슬슬 입덧이 시작되실 때이니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i>

하필 지금이라니.
난감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 거슬린 음식 냄새는 갈수록 더욱 역겹게 느껴져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당장 하인이 들고 있는 쟁반을 저리 치우라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난 손을 꽉 그러쥐며 구역질을 삼켰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선 절대 안 된다.
레이몬드가 바로 앞에 있었고 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여기서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가 의사라도 부른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인이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제나는 샴페인 잔을 들며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폐하, 목이 마르지 않으신가요?”
“……샴페인보다는 물이 먹고 싶은데 가져다줄 수 있나?”
레이몬드는 하인이 아닌 리제나에게 물었다.
리제나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심부름을 시키는 레이몬드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예, 폐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샴페인 잔을 도로 쟁반 위에 두고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레이몬드는 손을 휘저으며 하인을 물렸다.
하인이 멀어지고 레이몬드는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교묘하게 가리며 나의 앞에 섰다.
내게서 눈을 떼질 않더니 몸 상태가 이상해진 걸 눈치챈 듯했다.
고개를 들자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알아주길 바랐을 땐 관심도 없더니.
정작 모르길 바라는 지금 나를 걱정하는 그가 우스웠다.
그의 걱정에 오히려 거북함이 들어서일까,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우욱……!”
황급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바로 앞에 있는 그가 못들을 만큼의 소리는 아니었다.
“엘리야.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거야?”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피하고 싶었지만 한번 터진 구역질이 멈추질 않았다.
“우욱, 욱……! 읍.”
“갑자기 왜…….”
당황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영애, 괜찮나요?”
고개를 숙인 채라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귀부인 중 한 명인 듯했다.
“괜찮, 욱……!”
괜찮으니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었다. 시선을 끄는 건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귀부인은 날 도우려던 목적은 아닌지 오히려 바르작거리는 내 어깨를 더욱 꽉 잡았다.
“어머나, 속이 너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뭘 잘못 드셨나.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나를 이용해 황제의 눈에 띄려는 듯했다.
비틀거리지도 않는 나를 부축하려는 듯 귀부인이 몸을 밀착하자 지독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우욱!”
그 냄새는 나의 구역질을 더욱 자극했다.
“구역질이 안 멈추나 봅니다. 당장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겠어요!”
귀부인은 호들갑을 떨며 내 어깨를 더욱 꽉 잡았다.
일부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전 황후를 도와준 자신의 이야기가 사교계에 널리 퍼질
테니까.
하지만 난 오히려 그녀의 진한 향수 냄새가 진해져 속이 뒤집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난 강하게 귀부인의 손을 뿌리쳤다. 어찌나 매몰차게 움직였는지 레이몬드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잡혀 있었다간 의사가 도착할 테니까.
온 힘을 다해 구역질을 참아 낸 난 싸늘한 눈빛으로 부인을 보았다.
“부인, 저와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네?”
“전 부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부인께선 마치 저와 각별한 사이인 양 행동하여 물은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전 단지 영애의 구역질이 심해 보여 도와주려…….”
“제가 도움을 요청하였던가요?”
그녀 딴에는 자신이 민망해지는 상황을 모면하려 우스갯소리를 한 모양이었지만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뇨.”
“부인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이만 물러가 주시죠.”
그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불쾌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영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 귀부인이 도망치듯 멀어지자마자 리제나가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녀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귀부인을 의아한 눈으로 보곤 레이몬드와 나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겠지.
“폐하, 여기 물을 가져왔습니다.”
“…….”
리제나가 그를 불렀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끈질기게 나만을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의사를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아닙니다. 폐하. 전 괜찮습니다.”
그의 물음에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바로 답하고 말았다.
나답지 않게 여유가 없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레이몬드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그의 검은 시선이 나의 몸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의사를 부를까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띄웠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킬까 더욱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리제나에게 말했다.
“시오스 영애, 전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황자님의 생신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네, 영애.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리제나는 레이몬드와 나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보았기에 붙잡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있는 걸 알았지만, 난 끝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인 그를 무시하고 나갈 순 없었으니 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폐하,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의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난 곧장 몸을 돌려 파티장을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훅 나의 몸을 감쌌다. 그 바람 속에서 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파티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레이몬드가 나를 붙잡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파티장을 완전히 나오니 불안으로 터질 거 같던 심장이 한결 편안해졌다.
“헬란의 말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었어.”
레이몬드와 나, 그리고 리제나.
귀족들 앞에서 삼류 가십과도 같은 상황을 연출했던 것부터 갑자기 입덧을 한 일까지.
모두 곤욕스러운 일들뿐이었다.
애초에 왜 레이몬드가 이 자리 왜 오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것인지.
리제나를 향한 그의 사랑은 황제가 지녀야 할 품위나 평판 따위는 상관없을 만큼 깊을 텐데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해 봤자 어쩌겠어.”
거기다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파티장을 나왔으니 다 괜찮았다.
아이만 무사하다면 다른 건 아무런 상관없다. 사람들이 떠들 가십거리 따위 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공작가의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던 난 문득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떠올라 걸음을 멈칫했다.
“……근데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다른 것들은 전부 잊더라도 그 남자는 쉽게 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에 황제에게 버려진 비운의 여인으로 귀족들에게 낙인찍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은 그의 마지막 말.
‘부디 절 알아봐 주시길.’
그 말은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내 기억 속 그와의 첫 만남은 그가 아니라 부정했던 어제 살롱 앞의 만남이었다.
그의 착각인 걸까, 아니면 그는…… 내가 모르는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지닌 남자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엘리야.”
생각이 길어지던 그때, 낮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25 화

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어깨에 바짝 힘을 준 난 느리게 몸을 돌렸다.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폐하.”
파티장의 계단을 내려와 나를 부른 남자는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뛰어오기라도 한 걸까. 그의 호흡이 평소와는 달리 흐트러져 있었다.
예를 갖추자 머리 위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레이몬드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야, 너…….”
그는 굳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설마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혹 제 걱정이 되어 나오신 거라면 전 정말 괜찮습니다. 요 며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더니 고질병이 도진
것뿐입니다.”
태연한 얼굴로 말하자 레이몬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질병?”
“네. 원래 있었던 위장병이 재발해 공작가에서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신경이 예민해 위장이 자주 탈이 나곤 했었다. 이건 레이몬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
단말의 탄성을 내뱉은 그는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랬던 거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레이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 이만…….”
“기다려, 아직 물어볼 게 남았으니까.”
또 뭐가 남은 걸까.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슬슬 초조 해지기 시작했다.
“……말씀하십시오.”
차분한 내 대답에 갑자기 그는 짜증이 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예의를 차릴 거야. 이곳엔 너와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설령 보는 눈이 없다 하더라도 황제 폐하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법도이고 도리입니다. 저는 이제 황후가
아니니까요.”
난 예의를 갖추듯 고개를 숙였다.
“하. 그래, 네가 정 그러고 싶다면야,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줘야겠지.”
그가 싸늘히 말했다.
“크로프트 영애, 고개를 들라.”
그는 큰 보폭으로 거리를 단숨에 좁혀 내 바로 앞에 섰다.
“고개를 드시오, 영애. 명령이니.”
명령.
황제의 명령을 불복종하는 것은 중죄,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밤하늘에 동화된 듯한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몬드는 알 수 없는 열기를 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꼭 내게 화가 난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내게 화가 날 이유는 없었다.
내가 그에게 화를 낸다면 몰라도.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 우리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을 더 견디고 싶지 않은 난 먼저 이 불편한 정적을 끝내기로 했다.
“폐하,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순간 그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곧 분기를 감추지 못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혼하자 요구한 건 네 쪽인데 왜 네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이혼한 마당에 그러면 예전처럼 바보같이 친구 행세나 해 주기를 기대했던 건가.
난 참지 못하고 작은 조소를 흘렸다.
비웃음을 본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폐하, 저는 귀족 영애로서의 법도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를 편히 대할 수 없었다.
난 그와 친구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의 관계를 지탱하고 있던 내 사랑이 끝났으니 그와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그는 무표정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이렇게 선이 확실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네.”
“…….”
“아, 혹시 이게 너의 본 모습인 건가. 처음 보는 남자와는 아무렇지 않게 춤을 추면서…….”
“그 이상 말씀하시면, 그땐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다.”
선을 넘으려는 그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그제야 레이몬드도 자신의 말이 심했다는 걸 인정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제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실 테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남자는 누구지?”
몸을 반쯤 돌리던 난 레이몬드를 다시 마주 보았다.
“너와 춤췄던 그 남자, 말이야.”
하. 실소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폐하께 그리 중요한 일인가요?”
어이가 없어 묻자 레이몬드는 멈칫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는 듯 말이다.
인상을 구기던 그는 결국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체 왜 그 남자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꼭 질투라도 하는 거처럼.
질투라니, 레이몬드가 내게?
파티장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이성이 흐려진 건가.
찰나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겨 피식, 웃자 레이몬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그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난 굳은 얼굴의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든 제가 드릴 말씀은 없는 듯합니다. 전 그럼 이만.”
나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시선이 짙어졌지만 난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
마차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등 뒤에 그의 시선이 찌를 듯이 따라붙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날 붙잡지
않았다.
이랴-!
마부의 목소리가 울리고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그렇게 완전히 후작가를 벗어나고 나서야 난 굳은 몸을 풀었다.
그리고 바보처럼 떨렸던 심장에 가슴팍을 꾹 눌렀다.
질투라고 착각하고 흔들리다니.
“정신 차려.”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열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밤하늘을 무심코 바라보던 나는 레이몬드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빛에 이윽고 굳은 얼굴로 창문을
닫았다.

* * *

깊은 어둠이 내린 밤.
거대한 회색빛 저택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파티장에 다녀온 듯 연미복을 입고 있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앞섶은 귀족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단정하지 못했다.
마차도 타지 않고 저택의 로비까지 걸어온 남자는 마치 성처럼 커다란 저택을 보다 호박색 눈을 찡그렸다.
“여긴 아무리 봐도 정이 안 간단 말이지.”
제레미의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 속으로 퍼진 순간 굳게 닫혀있던 저택의 문이 열렸다.
외 알 안경을 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집사가 제레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공자님.”
“새벽인데 안자고 뭐 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까.”
“저택에 잘 머무르시지도 않는 공자님이신데 계시는 동안 만큼이라도 제가 잘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 말에 뼈가 있는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네, 착각이십니다.”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집사를 보며 피식 웃은 제레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용인들은 다 숙소로 돌아갔는지 저택의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해서인지 더욱 싸늘하게 느껴진다 생각하던 제레미는 저택 로비 중앙에 세워진 검은 동상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드로이트 공작가를 상징하는 흑범.
초대 황제는 자신을 도와 제국을 설립한 공신에게 자신의 피를 주며 말했었다.

[네 가문이 언제나 황실에 충성을 다한다면 너의 자손들은 황실의 충신으로서, 황족의 상징하는 색 하나를
타고날 수 있는 축복을 지니게 될 것이다.]

<i>‘똑바로 보아라! 이것이 바로 초대 황제 때부터 제국을 지켜 온 우리 가문의 상징이다! 한데 넌


우리의 가문의 색을 단 하나도 타고나지 못했어! 어쩌다 너 같은 게 태어난 것인지!’</i>

어린아이의 멱살을 잡고 검은 동상 앞에서 윽박지르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저 동상을 보자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 장면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레미는 피식,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그에게 차가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곳이 그의 집이기 때문이리라. 역겹게도.
돌아오고 싶지 않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족쇄 같은 집.
초대 황제 때부터 제국의 명맥을 지켜 온 드로이트 공작가.
저 동상이 꼭 그를 향해 너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라 외치는 거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차라리 새 황제가 들어섰던 날 드로이트 공작가도 함께 멸문해 버렸다면 이런 더러운 족쇄를 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흑 범의 동상을 보며 제레미는 입 꼬리를 비틀었다.
어제처럼 2 층 창문으로 들어올 걸 그랬어.
괜히 정문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며 2 층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목욕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제레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됐어, 내가 하면 돼. 집사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 알잖아. 난 시중을 받는 것보다 혼자 알아서 하는 게
익숙한 사람인 거.”
그만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때, 제레미는 묵직이 들려오는 음성에 걸음을 멈추었다.
“귀족으로, 이 드로이트 공작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천한 것들처럼 행동한다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리
떠드는 것이냐.”
역시 정문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제레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짙은 갈색 머리칼. 이젠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나이가 됐음에도 그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드로이트 공작을 향해 제레미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안 주무시는지 몰랐습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공작 각하.”
“닥쳐라! 도둑 새끼처럼 초대장을 훔쳐 파티장에 다녀온 주제에 어디 감히 내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냐!”
“…….”
“미쳐도 아주 제대로 미쳐버린 게야. 네 신분이라도 밝혀졌다면 그게 무슨 치욕인데!”
공작의 노성이 저택을 울렸다.

26 화

어릴 적이었다면 몸을 벌벌 떨었겠지만 이젠 이마저 익숙해질 만큼 세월이 많이 흘러 버렸다.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공작가의 명망에 더 받을 치욕이란 게 있을 리가요.”
제레미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초대장을 훔치다니요. 저는 제 앞으로 온 것을 가져갔을 뿐입니다. 이리 화를 내시니 서운합니다,
아버지.”
“네 이놈!”
아버지.
이 말은 공작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는 내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역겹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참 우습게도 그는 그 역겨운 아들이 유일한 후계자라 아직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란 말에 분노하는 공작의 얼굴을 보던 제레미는 짙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태어나고 아버지께서 철저히 숨기신 덕에, 제 정체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공작가의 상징을 물려받지 못한 놈을 어느 누가 드로이트 공자라고 여길까.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푹 주무시죠. 늘 정정하셔야 제가 그 자리에 올라갈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너! 네까짓 게 감히! 어디서!”
공작은 야차 같은 얼굴로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다 혈압이 오르는지 곧 몸을 비틀거렸다.
놀란 집사가 공작을 부축하는 것을 본 제레미는 차가운 얼굴로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거기 서지 못해!”
그는 공작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쾅, 자신의 방문을 세게 닫은 제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언제나 최악이네.”
공작과 마주한 지 채 몇 분이 되지도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자식과 부모의 사이가 이토록 지독한 악연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악연은 끊을 수조차 없었다.
자신이 드로이트를 버린다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를 공작이 포기할 리 없을 테니까.
이단이다, 쓸모없다며 온갖 폭언을 퍼부어도 드로이트의 대가 끊기는 것만은 절대 포기 못 할 것이다.
아마 제게서 나올 자식은 드로이트의 상징을 가졌을 거라 기대하며 짐승처럼 짝짓기라도 시키겠지.
짙은 한숨을 내쉰 제레미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검은 어둠이 보기 싫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새벽하늘을 밝혀 주는 만월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달을 담은 호박색 눈동자가 누군가를 떠올리듯 흐려졌다.
달빛을 엮어 만든 듯한 은발과 신비로운 자색 눈동자.
엘리야 크로프트.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그를 향해 묻던 그녀의 말간 얼굴 위로.
‘예뻐. 난 이렇게 예쁜 눈은 처음 봐. 꼭 보석 같은걸.’
어린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그대로 겹쳐졌다.
예상했었다.
그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저 그녀에겐 과거의 우연한 만남이었을 뿐일 테니까.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 생각했지만, 막상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를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서운했나……?
“모르겠네.”
무어라 딱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 그의 가슴 어딘가가 저릿했을 뿐이다.
제레미는 달빛이 잘 보이는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은 눈 내리던 그 날 밤처럼 그에게 은빛 온
기가 필요했으니까.
“이혼이라.”
당신은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평생 가슴 아플 일 없이 미소만 지으면서.
그가 오늘 관심도 없던 후작가의 파티에 들린 것은 엘리야, 그녀 때문이었다.
제레미는 어제 우연히 공작과 가신의 대화를 들었었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갔겠지만, 공작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에 걸음을 멈칫했다.
‘폐하께서 시오스 후작의 딸을 황후로 봉하는 것을 망설이는 듯하구나. 파티장에 크로프트 영애를 불러
굳이 소란을 만들려 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흠…….’
‘아무래도 시오스 후작 쪽에선 시오스 영애의 아들이 황자로 입적될 예정이고 황후가 스스로 자리에
물러났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시오스 후작의 딸이 황후가 돼야 모든 것이 잘 풀릴 텐데……. 시오스 후작에게 이 서신을 전하거라’
공작의 명령을 받고 집무실을 나오는 가신의 모습에 그는 황급히 몸을 숨겼고 그는 후작가의 파티 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왜, 라는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제국으로 돌아온 것은 그녀의 소식 때문이었으니까.
요요하게 빛나는 은빛 달을 바라보던 제레미는 파티장에서 엘리야의 쓸쓸한 모습을 떠올렸다.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보던 그녀의 자색 눈동자.
그리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황제.
알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시오스 영애까지 생각한다면 세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한
관계였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제레미의 씁쓸한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엘리야가 신경 쓰인다고 하여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그는 곧 다시 제국을 떠날 것이고 그녀는 이곳에 남을 게 아닌가.
애초에 그를 기억도 하지 못하는 엘리야였다.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해야겠지.”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등을 향해 집요하게 박혔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자칫하면 공작가에서 여태 숨겨온 그의 존재가 밝혀질 수도 있다.
그리되면 영원히 제국에 발이 묶이고 말리라.
제레미는 상념을 차단하려는 듯 하늘에서 은은히 빛나는 만월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 * *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태양궁 황제의 침소 창문으로 새하얀 비둘기가 창틀에 앉았다.


똑똑똑.
흰 비둘기가 부리로 창문을 세 번 두드리자 너른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던 레이몬드가 눈을 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레이몬드는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창문을 살짝 열자 흰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둘기를 향해 팔을 내밀자 잘 훈련된 비둘기는 그의 팔 위로 사뿐히 자리를 잡았다.
레이몬드는 비둘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비둘기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얇은 다리에 묶인 서신을 풀어낸 그는 비둘기를 방 한쪽에 마련된 새 장 안에 넣어주었다.
익숙하게 물을 마시고 쉬는 새를 두고 돌아선 그는 촛불을 켜고 돌돌 말려 있는 서신을 폈다.

[서왕국에서 리제나 영애가 아이를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후작가에서 몰래 서왕국으로 산파를 보내


아이를 낳고 아이를 서왕국의 궁궐에서 비밀리에 빼낸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아이를 황궁에서 빼돌린 다음


한동안 방치를 해 둔 것 같았습니다. 이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방치…….”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히다 서신을 불에 태웠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된 서신을 털어버리고 새하얀 종이
위로 짧은 명령을 적었다.

[후작가에서 아이를 거둔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아보아라.]

휴식을 취한 비둘기에 다시 서신을 묶은 레이몬드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차가운 새벽의 푸른 빛 속으로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 * *

후작가의 심란했던 파티장에서 공작가로 돌아온 난 정신적으로 피로 했는지 씻으면서 잠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난 룬트 왕국으로 떠나는 일을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려던 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손을 멈칫했다.
“시오스 후작이 근래 크고 작은 가문의 귀족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아무래도 리제나를 황후로 올리기 위해 초석을 까는 것이겠지. 하지만 폐하께선 아직 일언반구도
없으시니…….”
“시오스 후작의 동태를 주시할까요?”
“아니, 되었다. 이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예, 각하.”
“그보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동태는 어떠냐.”
드로이트란 이름에 문고리로 손을 뻗던 난 멈칫했다.
드로이트 공작……. 그는 전 황태자를 지지했던 귀족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귀족이었다.
드로이트 공작가는 제국의 초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유일한 귀족 가문이었으니까.
수많은 숙청을 감행했던 레이몬드가 드로이트 공작가를 살려 둔 이유도 그들이 초대 황제에게 인정받은
제국의 충신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로이트 공작이 교묘하게 전 황태자와 자신의 연결고리를 잘라버리기도 했었고.
어찌 됐든 드로이트 공작가는 찝찝함이 많은 곳이었지만 피의 숙청을 비껴갔다.
“큰 움직임은 없습니다. 여전히 공작은 저택에 칩거하고 있고, 공자도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항간에
드로이트 공자가 죽은 게 아니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죽진 않았을 것이다. 가문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있는 자이니 유일한 후계자를 아마 숨겨놓은 것일
테다. 계속 주시하거라. 지금은 조용하다 해도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르는 위험한 자이니.”
“명을 받듭니다.”
공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난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의 가신인 아르텔 경이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걸 음 뒤로 물러났다.
“아르텔 경.”
“……아가씨,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냈는가?”
“공작님의 은덕에 전 언제나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르텔 경이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은 그때, 집무실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 들어오너라.”
“들어가시죠, 아가씨.”
아르텔 경이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다음에 또 보지.”
난 아르텔 경에게 인사를 전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일어나셨다.
집무실 소파에 앉으신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너도 앉거라.”
“네.”
내가 자리에 앉자 집사가 테이블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허브티의 향기에 미소를 지으며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27 화

“어제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고 하녀장이 말하더구나. 어제 파티장에 폐하께서 오셨다지.”


“어떻게 아셨어요?”
“다른 일도 아니고 폐하의 일이니 소문이 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으시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네 마음이 편치 못했겠구나. 나라도 함께 갔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폐하와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요. 어제의 일은 이미 잊었어요.”
‘엘리야.’
아버지에게 말한 것과 달리 순간 어젯밤 그가 나를 불렀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애써 그의 목소리를 지우고 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내 더 걱정하지 않으마.”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아버지 어제 말씀하셨던 룬트 왕국 배편이 언제인가요?”
“근래 룬트 왕국까지 가는 해역의 치안이 좋지 않아서……. 알아보니 마침 큰 상단의 배가 그쪽으로
간다고 하더구나. 그들이 출발할 때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언제쯤인가요?”
“이틀 뒤다.”
“이틀 뒤요?”
아버지의 말에 난 새삼 놀라고 말았다.
빨리 떠나리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틀 뒤라니.
여유 있게 한 달 정도는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정이었다.
“빠르긴 하지만 그 배가 떠나고 나면 안전한 배를 찾기가 힘들 듯하구나. 어차피 배가 부르기 전에 떠나야
하니……. 좀 이르더라도 가는 것이 좋겠지.”
“…….”
아버지의 말이 맞았지만, 생각보다 빠른 이별에 난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룬트 왕국에서의 생활도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떠나고 혼자 남으실 아버지도 걱정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져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엘리야.”
“……네.”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넌 너와 네 아이만 생각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나와 아이.
타지에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고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 거야.
난 다짐하며 아랫배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런 나를 보던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엘리야, 이틀 뒤 떠날 준비를 하려무나.”
난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 * *

태양궁의 집무실 앞.
금발 머리칼을 반듯하게 넘긴 중년의 남자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폐하, 시오스 후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라 하여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시오스 후작은 긴장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게, 후작.”
후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으나 레이몬드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향해 있었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시오스 후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후작에 결국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시오스 후작은 눈이 마주치자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할 말이 있어 내게 알현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허면 말하시오. 내 그리 한가하지 않으니.”
레이몬드의 말에도 뜸을 들이던 시오스 후작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말했다.
“……폐하, 리제나를 황후로 책봉해 주십시오.”
후작의 말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후작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폐하. 황후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외람되오나, 그 자리에 저의 여식인 리제나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폐하의 유일한 후계자의 어미가 아닙니까.”
“…….”
“폐하께서 황자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후작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후작을 내려 보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입적한다는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황자라.”
조소가 섞인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후작은 움찔했다.
“황후가 궁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새 황후를 들이라 닦달이라니. 그대의 성급함에 다른 뜻이 담겼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후작을 향한 한마디, 한마디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스며 있었다.
그에 후작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지금은 평화로운 치세를 펼치고 있지만 레이몬드의 칼에 얼마나 많은 피가 스며들었었는지 후작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너무 성급하였던 것 같습니다. 폐하. 부디 저의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은 한발 물러났다.
어차피 오늘 확답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오늘은 황제에게 그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비치러 온 것뿐이다.
황실의 시종들이 그에 대한 말을 퍼뜨려주길 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을 세우실 줄이야.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운 황제의 반응에 후작은 조금 당황했지만, 목적은 이루었기에 빠르게 몸을
낮추었다.
“그만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대의 실수를 용서해 주는 관용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허니 더 이상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라.”
후작이 집무실을 나가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두던 레이몬드는 짜증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황후의 책봉.
그도 알고 있다.
황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순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 가장 적합한 사람은 리제나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황후궁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긁어내리는 거
같았으니까.
단순히 리제나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도 황후의 자리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황후인 것에 너무 익숙해져 그런 것이겠지.
레이몬드는 복잡한 감정의 결론을 그리 내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미 다 끝난 일이야.”
이미 그녀는 그를 정리하고 다른 남자까지 생겼어.
레이몬드는 어제 보았던 백금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수려한 외모와 엘리야를 향했던 짙은 눈빛.
그건 절대 엘리야를 가볍게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미소를 지었던 엘리야.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 속에서 훅 열기가 솟구쳤다. 머리까지 뜨거워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이지.
자신도 이해가 안 될 만큼 거센 분노였다.
답답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는 상의 단추를 거친 손길로 풀어버리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 건가.”
돌이켜 보면 엘리야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남자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래, 엘리야가 갑자기 달라져서 이러는 거야.”
항상 그를 바라봤던 엘리야를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당연하다 느꼈던 것이라고.
그래서 갑자기 멀어지는 그녀가 익숙지 않아 불편한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들끓는 감정을 눌렀다.
어제도 지금도, 단순히 그녀를 향한 익숙함 때문이라기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모른 척했다.
“덥구나, 창문을 모두 열어라.”
“네, 폐하.”
레이몬드는 쉬이 식지 않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 * *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아가씨.”


“음……. 괜찮아.”
난 로브를 벗으며 헬란에게 답했다.
오전부터 여행 물품들을 사러 돌아다니고 내가 타고 갈 배의 객실까지 확인하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빨리 움직인다고는 했지만 공작저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진 뒤였다.
내 로브를 받아든 헬란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래도 종일 돌아다니셨는데 의사를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정말 괜찮아. 어디가 안 좋았더라면 내가 바로 느꼈을 거야.”
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소파에 앉았다.
“아가씨, 따로 챙기실 물건은 없으신가요?”
“오늘 챙긴 것들만 가지고 갈 거야.”
헬란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떠나고 다시 돌아오시지 않는다 하였는데 짐이 너무 작지 않은가요?”
“아니, 가서 새로 장만해야지. 옷 같은 건 가져가 봐야 쓸모가 없을 거야. 여기랑 기후가 무척
다르니까.”
사계절이 뚜렷한 제국과 달리 룬트 왕국은 1 년 내내 기온이 낮은 추운 나라였다.
겨울옷은 가져갈 수 있겠지만 그럼 짐의 부피만 커질 테니 놔두고 가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되도록 룬트 왕국에서 제국 출신인 것을 들키지 않는 게 좋을 터였다.
혹시라도, 아주 만약의 가능성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찾으려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전 이만 저녁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래. 아, 헬란.”
난 막 방을 나가려는 헬란을 불렀다.
“네?”
“혹시…… 황실에서 에드먼드를 황자로 입적한다는 소식은 없었니?”
에드먼드의 파티에서 레이몬드와의 만난 뒤 일부러 황실과 관련된 소식을 피하려 일간 신문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생일 파티도 끝났고 그곳에 레이몬드가 직접 행차했었으니 시기상 그 지금쯤 바로 황자
입적을 발표하는 것이 맞았다.
……리제나의 황후 책봉에 관한 것도 함께.
하지만 헬란은 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 일간지엔 아무런 황실 소식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겠다. 나가보렴.”
그날 그리 직접 왔을 정도면 이미 마음을 정한 것이 아니었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떠나기 전에 리제나와 에드먼드가 황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될 거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아가야, 조용히 떠날 수 있어 다행이야.”
내가 상처받으면 아기도 상처를 받을 테니까.
난 미소를 지으며 배를 몇 번 쓰다듬다 룬트 왕국 글자 책을 펴들었다.

28 화

밤이 깊어지는 같은 시각.
시오스 후작가에선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에드먼드, 그만 자야 할 시간이란다.”
하녀들을 물린 리제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드먼드는 어머니의 말에 곧장 장난감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올라 갔다.
에드먼드는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고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에드먼드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바로 잠들기 전 리제나가 동화를 읽어줄 때였다.
기대감이 서린 흑안에 리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리제나는 동화책은 잠시 내려두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디, 오늘 예법 선생님의 말을 잘 안 들었다지?”
“음……. 너무 어려워서 그랬어요.”
혼내지 말라는 듯 에드먼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에디, 에디는 이제 예법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을 거란다. 어렵다고 선생님의 안 들으면 안
돼.”
“……알겠어요, 엄마.”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디, 오늘 예법 선생님의 말을 잘 안 들었다지?”
“음……. 너무 어려워서 그랬어요.”
혼내지 말라는 듯 에드먼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에디, 에디는 이제 예법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을 거란다. 어렵다고 선생님의 안 들으면 안
돼.”
“……알겠어요, 엄마.”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잠이 든 에드먼드의 모습이 보였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며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비록 아이의 눈과 머리카락 색은 칠흑 같은 검은 색이었지만 아이의 생김새는 누가 뭐라 해도 리제나의
아들이었다.
“다행이지, 네가 나를 닮아서.”
나직이 속삭이는 리제나의 얼굴엔 이제는 미소가 서려 있지 않았다.
그녀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는 누군가를 떠올리듯 싸늘한 빛을 띠었다.
“이미…… 죽었어.”
차가운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감정을 갈무리하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잠이 든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읊조렸다.
“……넌 내 아이야. 난 널 반드시 황제로 만들 거란다.”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다 볼에 입을 맞추고 그만 방을 나갔다.
“……여기서 뭐하니.”
에드먼드의 방을 나온 리제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리온 시오스.
한배를 타고 난 혈육임에도, 성격이 너무도 달라 불편한 동생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신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동생은 일찌감치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고
대륙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리제나는 못 마땅해했다.
리온은 리제나를 보며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하냐니, 조카 얼굴을 보러 들린 거지. 근데 잠이 든 거 같네.”
“네가 에디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관심이 있었다면 생일파티에는 참석하지 그랬니.”
“내가 그런 자리에 어떻게 가겠어. 예법도 모르는 내가 가봤자 시오스 가문의 이름만 더럽힐 뿐이지.
우아하고 고귀한 누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늘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비아냥이 담긴 말에 리제나는 미간을 좁혔다.
“너와 언쟁할 만큼 힘이 넘치지 않아. 돌아가. 에디는 이미 잠들었으니까.”
리제나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를 지나치려 했다.
리온이 꺼낸 말만 아니었다면.
“근데 누나, 사실 내가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야.”
말하라는 듯 눈을 추켜올리자 리온이 진지하게 물었다.
“에드먼드, 정말 폐하의 자식이야?”
“……뭐?”
“내가 하도 밖으로 나돌아 가문의 일을 잘 모르긴 하지만……. 내 기억으론 분명히 7 년 전 누나의 남자가
…… 윽!”
리온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리제나가 그의 멱살을 강하게 그러쥐었기 때문에.
리제나는 녹빛 눈을 번뜩이며 리온을 노려보았다.
“입 조심해. 지금 감히 누구를 모욕하려 드는 거지?”
리제나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내게 이러면 안 되지. 네가 같잖은 자유를 외치며 놀아나는 동안 난 가문을 위해
희생했어.”
“…….”
“다시 한번 더 나와 에드먼드를 모욕하려 든다면 혈육이라 해도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
리제나는 리온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난 누나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길 바랄 뿐이야. 누나가 무사하길 바란다고.”
“그럼 입 다물어. 너만 입 다물면 난 무사할 거니까”
리제나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리온을 보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리제나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리온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틀이란 시간은 정말 금방 흘러갔다.


아버지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도 못했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려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가씨. 짐은 정말 이것만 챙겨가실 건가요?”
몇 개 되지 않는 짐을 챙긴 헬란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옷가지 몇 개와 내가 좋아하는 책들, 부모님의 초상화와 가죽 신발 몇 켤레가 전부였다.
단출하다 못해 짐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난 더 가지고 갈 생각이 없었다.
“응. 그것만 가지고 갈 거야. 어차피 룬트 왕국은 이곳과 모든 게 다르니 가서 하나씩 사야지.”
“그래도 보석들이나 이런 건 가지고 가시는 게…….”
“보석이라면 이미 내가 두둑이 챙겼어.”
난 헬란에게 미리 챙겨 놓은 작은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그게 다인가요?”
안심하라고 보여준 주머니에 헬란은 되려 놀란 얼굴이었다.
“응. 이게 다인데. 이 정도면 작은 집을 살 수 있어.”
“작은 집이라니……. 아가씨 그곳에서 귀족의 신분으로 사시려는 게 아니신 건가요?”
“아…….”
난 그제야 헬란이 왜 이리 놀랐는지 이해했다. 귀족의 신분으로 살려면 이 작은 주머니의 든 돈으론 절대
불가능했다.
큰 저택을 사야 하고 저택에서 일할 사용인들도 구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난 그곳에서 최대한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귀족다운 생활을 영위하려면 분명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럼 만약의 경우지만 레이몬드가 혹시라도 나의 소식을 궁금해할 때 쉽게 추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룬트 왕국에 제국의 귀족이 없다는 보장이 없으니 눈에 띄는 삶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난 걱정이 가득한 헬란을 차분히 불렀다.
“헬란.”
“네. 아가씨.”
“난 그곳에서 평민으로, 조용히 살아갈 거야.”
“…….”
“알다시피 난 여행을 가는 게 아니잖아.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데 만약을 위해서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안 돼.”
“……전 괜찮지만 아가씨가 고생하실까 봐……. 걱정이 들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 아이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아이에게 보호자는 이제 나뿐이었다.
그러니 약한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짓자 헬란도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옆에서 열심히 도울게요.”
“고마워. 헬란.”
똑똑-
“이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셨습니다. 아가씨.”
하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난 로브를 입고 헬란과 함께 방을 나갔다.
몇 개 되지 않는 짐을 가지고 저택 로비로 내려가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
“엘리야.”
아버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임신한 딸을 타국으로 보내는 것이니 아버지의 마음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난 조금의 걱정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 일부러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 살게요. 편지도 자주 보내고요.”
희미한 미소를 그린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자주 연락하고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거라. 혹여라도 혼자 속을 끙끙 앓지도
말고.”
“네. 아버지도 항상 건강하세요.”
“내 걱정은 말거라.”
아버지는 내 손등을 두어 번 두드리곤 손을 놓았다.
큼, 목을 가다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지신 게 보이자 나의 눈가도
뜨거워졌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이렇게 멀리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황후가 되어 황궁에 살긴 했지만 언제든 보고자 하면 만날 수 있는 거리였다.
오늘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제국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테니까.
난 아버지의 품에 꼭 안기며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많이 사랑해요.”
“나도 그렇단다. 건강히 잘 지내야 한다.”
나를 꼭 안아 준 아버지는 이내 팔을 내렸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네.”
“건강히 지내세요. 아가씨.”
“언제나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아가씨.”
“고마워, 헬란. 집사.”
배웅해주는 유모와 집사에게 미소를 지은 난 헬란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 * *

“와, 이거 너무 맛있어요!”
초콜릿 쿠키를 든 에드먼드가 환하게 웃자 리제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단다. 알겠지?”
“네! 근데 어머니와 폐하는 안 드세요?”
“난 괜찮단다.”
리제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자 에드먼드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했다.
“폐하는요?”
“…….”
하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레이몬드는 에드먼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에드먼드는 대답 없는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을 보다가 기가 죽은 듯 리제나의 눈치를 보았다.
리제나는 괜찮다는 듯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나직이 말했다.
“폐하.”
꽤 컸던 리제나의 목소리에 레이몬드의 흐릿하던 흑안이 선명해졌다.

29 화

“왜 그러지?”
“에드먼드가 폐하께 쿠키를 드셔 보시라 말했답니다.”
리제나의 말에 레이몬드의 시선이 에드먼드를 향했다.
쿠키 부스러기가 입가에 묻은 아이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그렸다.
“난 괜찮으니 많이 먹거라.”
“네!”
아직 아이라 그런지 에드먼드는 그의 미소에 금방 기운을 차렸다.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쿠키를 먹는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엘리야와 나의 아이도 저렇게 사랑스러웠을까.
이제는 남자아이였을지, 여자아이였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성별이 무엇이든 엘리야을 닮았더라면
예뻤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태어나지도 못했던 아이를 갑자기 왜 그리는 거야.
거기다. 엘리야를 닮으면 좋았을 거 같다, 생각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헛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은 그는 에드먼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러면 또 이상한 생각이 들 것
같았으니까.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건만 이번엔 자꾸만 파티장에서 마주쳤던 엘리야가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보던 무감한 얼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던 모습과 딱딱하기까지 그지없던 보랏빛
눈동자.

<i>‘폐하께 드릴 말씀은 없는 듯합니다.’</i>

확실히 선을 긋던 그녀의 말까지 모든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엘리야가 누굴 만나든 이제 더는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잊으려 노력하는 것조차 그녀를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그를 응시하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면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폐하.”
엘리야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레이몬드는 리제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일이 많으시다면 저희는 이만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폐하.”
리제나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이니까.”
리제나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그는 리제나에게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저에게 말입니까?”
“그래.”
레이몬드는 해맑게 웃고 있는 에드먼드를 보다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장이 에드먼드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가자 리제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에드먼드까지 내보내신 걸 보니 중요한 이야기인가 봅니다.”
레이몬드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었다. 이미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그는 굳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리제나. 그날 파티장에 엘리야를 부른 건 누구의 결정이었지?”
레이몬드의 직설적인 물음에 리제나의 녹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제나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레이몬드를 마주 보았다.
과거의 다정했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싸늘한 검은 눈동자에 리제나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이미 결론을 내리신 듯한데 제게 굳이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폐하. 엘리야 영애를 부른 것이
저의 뜻이 아니었다, 말한다면 믿어 주실 건가요?”
“…….”
리제나의 담담한 말에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미 그는 엘리야를 파티장에 부른 것에 리제나가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시오스 후작의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리제나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파티장에서 은근히 엘리야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던 리제나의 행동을 돌이켜보면 몰랐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여 경고를 할 생각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 다시는 엘리야를 건들지 말라고 말이다.
레이몬드가 리제나에게 입을 열라던 순간, 서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변하셨습니다. 폐하.”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레이몬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예전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셨는데. 심지어 제가 거짓을 말했어도요.”
“…….”
“지금은 진실조차 믿어 주지 않으시니……. 7 년의 세월이 참으로 긴 것 같습니다.”
“지금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
리제나는 레이몬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러셨지요. 제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예, 맞습니다. 전 아직도 폐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리제나의 애처로운 고백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서왕국으로 떠났지만, 단 한 번도 폐하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에드먼드를 낳아 기를 정도로요.”
“…….”
“폐하의 자식이니 그랬습니다. 평생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폐하와의 유일한 연결 고리인
아이를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레이몬드를 바라보며 말하는 리제나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기적처럼 돌아오게 되었을 때……. 폐하께서 저를 반기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절 의심하고 추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나, 홀로 아이를 낳고 기른 제 마음을 조금쯤은 헤아려 주실 줄
알았어요.”
“…….”
“하지만 제 바람이고 착각이었을 뿐이었나 봅니다.”
긴말을 끝마친 리제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리제나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차마 하려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 과거와 그녀가 홀로 에드먼드를 지켜온 7 년의 세월에는 그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 추궁하려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 아니 엘리야는 이제 나와 이혼했으니 다시는 그녀를
나와 관련된 일에 부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도 어깨를 감싸 안아주지도 않았다.
상냥했지만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었다.
리제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날의 일은…….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앞으로 당연히 그럴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겠지만요.”
“……그게 무슨 말이지?”
“엘리야 영애께서 곧 여행을 떠나신다고 들었으니까요.”
리제나의 말에 순간 레이몬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리제나의 눈물을 보는 것이 불편해 고개를 돌렸던 그는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행을 간다고 했다고?”
“네, 폐하. 하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는데 크로프트 공작 영애께서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했었습니다.”
“……그렇군.”
다시금 상념으로 흐려지려는 그의 눈빛에 리제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 파티의 일은 송구합니다, 폐하. 아버지께서 벌이셨다고는 하나 저도 감정이 격해져 쓸데없는 말을
했으니까요.”
리제나는 붉어진 눈가를 숨기듯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 모습이 가여울 법도 한데 레이몬드의 심장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런 리제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했을 뿐이다.
“못할 말도 아니었으니 괜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에드먼드도 네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폐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제나가 응접실을 나가자 레이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리제나가 물러가고 혼자 남았음에도 어쩐지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레이몬드는 답답함에 목까지 채워진 단추를 거칠게 풀어냈다.

<i>‘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했습니다.’</i>

하지만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머릿속에선 리제나가 했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멀리 가는 걸까. 긴 여행이라면 대체 얼마나 있다 돌아오려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아.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어디로 여행을 가든, 얼마나 있다 돌아오든 이제는 그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무엇이
이토록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미쳤다고 하겠지만 지금 그는 할 수 있다면 엘리야를 찾아가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머무는 이 황궁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말이다.
부부의 연도 끊어진 마당에 정말 미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그런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거기다 엘리야는 이제 더는 그와 친구로도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아 보였다.

<i>‘폐하께서 절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 폐하의 행복을 바랄 뿐이니까요.’</i>

청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말을 꺼냈을 때, 그녀가 자신에게 그리 말했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언제나.

<i>‘전 황자 전하께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전하께서 행복하시면 저도 행복할 테니까요.’</i>

친구라 하기엔 과한 애정을 자신에게 쏟아부었었다.


“친구라…….”
레이몬드는 부부로 산 6 년의 세월 때문인지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를 낮게 중얼거렸다.
……난 정말 그녀와 친구로 지내고 싶은 건가.
불현듯 떠오른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하지 못하던 그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침소로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벌써?”
레이몬드는 시종장의 말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가 떠날 때만 해도 어스름해지던 하늘이 어느새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생각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알겠다.”
생각이 깊어져 봤자 알 수 없는 갈증만 커지기에 레이몬드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30 화

“엄마!”
한참 예법 수업을 받고 있던 에드먼드가 리제나를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왔다.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에드먼드. 이렇게 뛰면 안 된다고 예법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니?”
“……가르쳐 주셨어요.”
“그럼 다시 인사를 해 보렴.”
리제나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던 에드먼드는 눈치를 살피며 뻗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반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니, 오셨어요.”
아직은 어색한 예법에 리제나는 미간을 좁혔다.
“베르티 부인, 제가 신경 써서 가르쳐 달라 하지 않았던가요?”
리제나는 예법 선생인 베르티 자작 부인에게 고개를 들었다.
리제나의 날카로운 눈빛에 베르티 부인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영식께서 아직 나이가 어리시기도 하고……. 예법을 제대로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 정도면 꽤 잘하시는 축에……”
“난 꽤 잘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길 원합니다. 에드먼드는 곧 황자가 될 몸이에요. 일국의
황자가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리제나는 베르티 부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영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티 부인이 에드먼드를 가르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요.”
“네?”
베르티 부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분은 제게 필요 없습니다. 황자의 격에 맞는 새로운 분을 구할 테니 이만
나가주세요.”
배려 없는 축객령에 베르티 자작 부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지만 리제나는 싸늘히 무시했다.
베르티 자작 부인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려던 때, 리제나의 뒤에 기립해 있던 백발의
하녀가 다가왔다.
“부인,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하녀가 자작 부인의 팔을 잡았다. 팔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부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일을 하는 하녀라 해도 이렇게 강한 힘은 이상한 것이다.
거기다 순간 마주친 회색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자작 부인은 리제나를 힐긋 보았지만, 자신은 이미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리제나의 평판과 이때까지 봐 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은 태도였다.
“부인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혼란스럽던 그때 하녀가 낮게 말했다.
자작 부인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허튼소리를 했다간 죽는다.
“……네.”
얌전히 답한 자작 부인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앞에서 몸을 낮추고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에드먼드. 엄마를 보렴.”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드먼드가 시선을 들었다.
“에드먼드, 너는 곧 이 제국의 황자가 될 거야. 황궁에 살면서 장차 이 제국의 황제가 되겠지. 그러니
이제 이렇게 어리광을 부려선 안 돼. 저번에 그랬지?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네…….”
“그래, 폐하께선 누구보다 강인하고 멋있는 분이시니 앞으론 에드먼드도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렴.”
리제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뜻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말하면 적어도 그녀의 말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굳은 얼굴이 무서운 듯 움츠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착하구나.”
리제나는 몸을 일으키며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백색 머리칼의 하녀이자 그녀의 충실한 그림자인 릴라가 들어왔다.
릴라는 평범한 하녀가 아닌 서왕국에서 그녀가 거둔 암살자였다.
“릴라. 베르티 자작 부인의 배웅은 잘 했니?”
“네. 돈을 쥐여주며 경고했으니 허튼 소문을 퍼뜨리진 못할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보다 아가씨. 돌아오는 길에 집사께 들었는데 리오 도련님께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조용히
나가 집사께서도 이제야 알아차리신 듯합니다.”
“……떠났다고.”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리제나의 손이 멈칫했다.

<i>‘난 누나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진 않길 바라. 누나가 무사하길 바란다고.’</i>

리오가 했던 마지막 말이 이명처럼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아가씨 앞으로 이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하녀가 서신을 내밀었다.
리제나는 몸을 돌려 서신을 받았다.
반으로 접힌 편지지를 펼치자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너무 늦었지만 모든 걸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했어. 누나.]

편지를 잡은 리제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종이가 구겨지고 글자가 무너지려 하자 리제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리오 시오스.
그녀의 동생은 시오스 가문에 어울리지 않게 착해빠진 놈이었다.
“차라리 잘 된 거야.”
떠나버린 이상, 더러운 구정물에 발 담그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지.
리제나는 책상 위 작은 촛불로 다가갔다. 그녀는 허탈함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동생이
남긴 서신을 태웠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마지막 편지를 물끄러미 보던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시오스 후작이었다.
“무슨 공문이죠.”
리제나는 후작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에드먼드를 황자로 입적한다는구나!”
후작은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기세였다.
“그렇게 바라시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왜 그리 화를 내세요.”
후작과 달리 리제나는 예상했다는 듯 차분했다. 그에 후작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너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질 않으냐! 다른 귀족들까지 합세해 압력을 넣었건만 공문에
에드먼드의 이름이 다란 말이다!”
후작은 분통이 터지는 듯 언성을 높였다.
리제나는 릴라에게 에드먼드를 데리고 나가라 눈짓했다.
후작의 노성에 놀랐던 에드먼드가 릴라의 손을 잡고 나간 뒤, 리제나는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제가 그리될 거라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레이몬드가 자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듯했지만, 그녀에겐 언제나 한결같이 선을 그었으니까.
아마도 엘리야를 잊지 못하는 거겠지.
본인은 아직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듯했지만 말이다.
“그리 태평하게 말할 때더냐?! 네가 황후가 되어야 우리의 대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것 아니냐!”
“제가 황후가 되지 못한다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에드먼드가 황자로 들어간
이상 대업의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없어요.”
“하, 절반? 황제가 너 말고 다른 가문에서 황후를 들여 황자라도 낳으면 어쩌려고!”
시오스 후작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리제나는 큰 소리에 짜증이 일어 미간을 좁혔다.
뭐라 말해도 지금은 들리지 않을 거 같아 그녀는 후작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후작은 초조한지 왔다 갔다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애초부터 크로프트 영애가 이리 쉽게 물러난 것부터가 수상했어. 이러다 다시 황제에게
접근이라도 한다면…….”
“크로프트 영애는 황후의 자리를 포기한 게 맞아요. 모든 걸 버리고 떠났으니까요.”
“뭐?”
정신 사납던 후작의 걸음이 멈추었다.
“크로프트 영애가 제국을 떠났다는군요. 어디로 가는지 비밀에 부친 채로요.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었으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냐.”
후작의 녹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리제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리제나, 어떻게든 폐하의 마음을 잡아라. 반드시 황후가 되어야 해.”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녀의 행복을 바랐던 누군가와는 전혀 다른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역겨워.
리제나는 후작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와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버지는 에드먼드의 지지세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해 주세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하시는 대업을 위해서 말이죠.”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시오스 후작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지만, 리제나는 개의치 않고 방을 나갔다.

* * *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려 오면서 안개 낀 것 같은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과거로 돌아온 듯 지금은 폐궁이 되어 버린 황태자 궁 내의 파티장이 환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선 레이몬드.
레이몬드는 본능적으로 이 순간이 꿈이란 걸 느꼈다.
지독한 악몽.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모인 많은 사람이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i>‘전하, 27 번째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i>


<i>‘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출중하시니 제국의 앞날이 밝습니다.’</i>
<i>‘태자 저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저희 에그리타 제국은 명실상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i>

암요, 그렇고 말고요.


하하 호호 웃으며 간언을 올리는 자들의 얼굴은 탐욕으로 물들어있었다.
간신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황태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걸음이 낡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앞에서 멈추었다.

<i>‘심심해서 보내본 초대장이었는데 설마 진짜 올 줄이야. 정말 어이가 없군. 천것들은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한다니까. 안 그런가?’</i>

비웃음이 한껏 담긴 황태자의 목소리가 파티장을 울렸다.


귀족들은 황태자와 같은 비소를 지으며 낡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보았다.

<i>‘후궁도 되지 못해, 그렇다고 아버지의 환심을 산 코르티잔도 아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에 온


거지?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아라.’</i>

황태자가 여자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가 됐을 때.
참다못한 레이몬드가 황태자의 손목을 잡았다.

31 화

차라리 자신의 뺨을 후려친다면 기꺼이 맞겠지만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역겹게도 그와 똑같은 색인 황태 자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i>‘감히 내 손목을 잡은 것이냐.’</i>


<i>‘보는 눈이 많습니다, 황태자 전하.’</i>

황태자의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참았다.


지금의 그에겐 황태자에게 맞설 힘이 없었으니까.
그는 황태자의 손목을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i>‘부탁드립니다.’</i>

그의 머리 위로 잔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i>‘뭘 그만하란 말이지? 누가 보면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상대할 가치도 없는 천것에게
말이야.’</i>

고개를 숙인 레이몬드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그 순간 어머니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발 참으라고.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i>‘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가 주제를 모르고 나선 탓입니다.’</i>


<i>‘황가의 성을 받았다고 다 똑같지는 않지. 천한 태를 빌어 태어났으면 주제를 알란 말이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네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i>
<i>‘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i>

어머니는 보는 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머리를 바닥에 연신 찧으며 호소했다.


수많은 모욕을 받아봤지만, 이토록 분노가 치밀어 오른 적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황태자의 목을 자르고 싶었다.
분노에 멀어 잠시 정신이 흐려진 것이 문제였을까.
몸을 일으키던 어머니가 시종과 부딪히는 것을 막지 못했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황태자의 옷과 신발이 와인으로 얼룩져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황태자의 명이 떨어졌다.

<i>‘이 미친년이! 감히 누구의 옷을 더럽혀! 당장 끌고 가라!’</i>

기사들이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고 나갔다. 저지하고 싶었지만, 꿈속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i>‘당장 멈춰!’</i>

이성을 잃은 그는 황태자에게 소리쳤다.

<i>‘너도 같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래 좋다, 내가 지금 당장 죽여주마.’</i>

황태자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지며 검을 뽑았다. 그의 목을 벨 듯 팔을 높이 든 순간 은빛 머리칼이


눈앞에 나부꼈다.
황태자의 분노가 두려워 누구도 나서지 못했던 순간, 엘리야가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i>‘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하실지라도 황족을 즉결심판하실 순 없으십니다. 진정하십시오, 전하.’</i>

흉흉한 황태자의 기세에도 엘리야는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백작위를 가진 영애가 죽는 걸 가만히 둘 수는 없기에 황태자의 측근들이 말리고 황태자는 결국 검을
집어던졌다.
싫어,이다음은 보고 싶지 않아.
엘리야가 뒤를 돌아 그의 손을 잡는다. 수십 번은 꿨던 악몽.
레이몬드는 다음 장면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울부짖었지만, 꿈속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고 그는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를 위해 살았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었다.
텅 빈 궁전에서 레이몬드는 울부짖었다.

<i>‘레이…….’</i>

애처로운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흐느끼던 그는 엘리야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제 옆에 있어 주는 소중한 이 온기를 잃지 않겠다고.
가질 수 없다면 전부 뺏어서라도, 내 것을 지킬 것이다.
가슴이 터질 거 같던 순간 레이몬드는 눈을 번쩍 떴다.
“하, 하아…….”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고 온몸은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던 그는 휘장처럼 내려온 줄을 잡아당겼다.
곧 시종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물, 물을 가져와.”
“네.”
레이몬드의 상태를 본 시종장은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후우…….”
숨도 쉬지 않고 물 한 컵을 전부 마신 그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악몽은 오랜만이군.”
레이몬드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의 어둠이 보였다.
아침이 밝으려면 많이 남은 듯 별이 밝다.
한동안 꾸지 않았었는데.
오늘 일이 많아서였을까.
에드먼드의 황자 입적과 황후 자리에 대한 귀족들의 상소.
유난히 피곤한 하루긴 했다.
“수면제를 좀 올릴까요?”
시종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불면증이 심할 때 수면제를 먹긴 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그의 악몽을 잠재울 수 있는 건…….

<i>‘레이.’</i>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엘리야의 목소리를 떨치듯,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다. 그보다 좀 걸어야겠구나.”
산책을 나서기엔 상당히 늦은 밤이었지만 이대로는 머리가 복잡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갑갑한 가슴을 식히려 화원으로 나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따라 유독 별이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을 보며 화원을 걷던 레이몬드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별에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야가 좋아했던 별.”
언젠가 그녀가 별의 이름을 말해 주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하늘을 올려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 별을 좋아했던 이유는 기억났다.
항상 늘 같은 자리에 있어 좋다 했었지.
꼭 그녀를 닮은 거 같은 별이 오늘따라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엘리야에게 저 별이 늘 같은 자리에 머물렀듯, 돌이켜 보면 엘리야 역시 저 별처럼 항상 레이몬드의
눈길이 닿는 곳에 있었다.
언제나 그가 고개를 돌리면 엘리야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늘 그래 왔다.
엘리야와 그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
“어머니가 엘리야를 정말 좋아하셨었지…….”
과거의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문득 가슴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식에게까지 언제나 깍듯이 예의 차렸던, 술수라곤 조금도 몰랐던 순수하고 착한 분이셨다.
그렇기에 이 황궁에 더욱 어울리지 않았었다.
황궁이 아니라 평범한 남편을 만나 살았더라면 그리 비참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레이몬드는 잊고 지냈던 과거의 아픔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머니의 죽음에 분노하여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칼을 빼 들었었다.
그렇게 스스로 아비와 형제를 죽이고 황좌에 올랐다. 다시는 자신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권력을 손에 쥐었고, 어머니의 복수에도 성공했다.
한데 왜 지금 난 이토록 공허함을 느끼는 것일까.
“폐하. 바람이 차옵니다. 이제 산책을 마치시고 침소로 가시는 것이…….”
“어머니의 궁으로 갈 것이다.”
시종장의 걱정스러운 말을 끊어낸 레이몬드는 오랜 시간 들르지 않았던 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궁인 태양궁에서 한참을 걷고 걷다 보면 궁이라고 칭하기도 힘든 작은 저택이 하나가 나왔다.
저택을 향해 걸어가던 레이몬드는 과거의 기억과 다른 길가에 위화감을 느끼며 멈추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낡은 궁을 향하는 길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은 꾸준히 사람의 손이 닿은 듯 길이 깨끗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는 이 궁을 찾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죄책감 견딜 수 없는 상처들을 외면했다.
때문에, 그는 이 궁을 관리하란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일레드. 혹 내게 말없이 이 궁을 관리하고 있었느냐.”
일레드는 그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함께했던 시종장이었다. 궁을 관리한 게 그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시종장은 난감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것이…….”
“말해라.”
“제가 아니라 전 황후 폐하께서 궁을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뭐?”
레이몬드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엘리야가 언제부터…….
“황후로 입궁하시고 나서 바로 궁의 관리를 명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시종장의 말에 레이몬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자식인 그도 잊고 살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왜 네가.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있던 레이몬드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끼이익-
녹슨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너희들은 여기에 있거라.”
시종들을 모두 물린 레이몬드는 궁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궁은 과거의 기억과 변한
것이 없었다.
궁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저택과 꽃 한 송이 없는 정원.

<i>‘어머니, 어머니……!’</i>

꿈속에서 보았던 과거의 절규가 눈앞으로 그려졌다. 시신 대신 낡은 드레스를 끌어안은 그의 울부짖음이


선명히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곁에 가만히 서 있던 엘리야. 그녀도 그날 함께 있었다.
아니, 이 낡은 궁전에서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 속에 엘리야도 함께였다.
“정말…… 미치겠군.”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밖으로 나왔건만, 도착한 장소가 하필이면 그녀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쌓인
곳이라니.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그때, 차가운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바람결이 흩날린 초록색 잎이 그의 발 앞에
내려앉았다.
“이건…….”
황폐한 이곳에 이런 초록 잎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이 잎사귀가 무엇인지 기억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몸을 돌린 그는 저택 뒤편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무언가가 점차 가까워지자
레이몬드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눈앞의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32 화

“하…….”
싱그럽게 푸른 잎이 피어난 나무는 어머니가 심어준 그의 나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메말라 죽어 버렸던 그의 나무가 더 높이, 더 크게 자라 녹색 잎을 푸르게 빛내고
있었다.
“넌 대체…… 왜…….”
레이몬드는 죽었던 나무를 살린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엘리야. 어릴 적 죽었던 식물을 살리는 엘리야를 보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도 관심 없었던 이 나무를 살려낼 사람은 엘리야밖에 없었다.

<i>‘레이, 이 나무는 뭐야? 왜 레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i>


<i>‘이건 어머니가 내가 태어났을 때 내 건강을 빌면서 심으신 나무야. 이 나무가 아프면 나도 아플 수
있다고 어머니께서 항상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계시지.’</i>
<i>‘와……. 그럼 나도 앞으로 이 나무가 절대 아프지 않게 로아즈 님을 도와드려야겠다. 난 레이가 아픈
건 정말 싫으니까.’</i>

과거의 한 장면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흘리듯 했던, 그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것을 엘리야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i>‘네가 레이몬드라서,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남자라서 너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었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i>

상처받은 눈빛으로 담담히 사랑을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소리 내 말하지 않았을 뿐 모든 행동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끝끝내 고백하지 않은 것은 내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겠지.
그래,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했었다. 우리는 부부니까,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리해도 그녀는 언제나 그를 바라봐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 흐윽……!”
누군가 그의 가슴을 짓밟는 것처럼 목이 조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거친 숨결이 쏟아져 나왔지만, 심장이 조이는 통증은 가시질 않았다. 참고 외면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그를 덮쳐왔다.
그리워하지 않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그의 얼굴이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레이.’
그를 부르는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한데 고개를 돌려도 이제 그녀는 없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이라 착각했다. 멍청하게도 어리석게도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 역시 엘리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익숙함에 젖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녀를 외롭게 만들어버렸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깨달은 감정을 외면하려 애써보았지만 이젠 이미 잊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날 놓아줘.’
“……못 놓겠어, 엘리야…….”
주먹을 꽉 그러쥔 레이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절 욕하고 미워해도 좋으니 그녀를 붙잡을 것이다.
깊은 밤 황성의 문이 열렸다.
호위기사도 대동하지 않은 레이몬드는 공작가로 미친 듯이 말을 내달렸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수도 외곽에 자리 잡은 크로프트 공작성 앞에 도착했다.
새벽이 다가오는 깊은 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병들은 성문 앞에서 멈추는 말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히이잉-!
범상치 않은 흑마를 달랜 레이몬드는 로브 모자를 벗으며 경악한 얼굴의 병사에게 말했다.
“엘리야 크로프트 영애를 보러왔다고 전해라.”

* * *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공작성의 불이 밝았다. 경비병이 뛰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렸다.
단숨에 저택 앞까지 달려간 레이몬드는 로비에 나와 있는 공작을 보곤 말에서 내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크로프트 공작. 늦은 시간에 이리 찾아와 미안하오.”
레이몬드는 공작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으로는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횃불이 밝은 공작가는 환해졌지만, 그 어디에도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다.
내 명을 들었을 텐데 일부러 부르지 않은 것인가.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크로프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런 상황을 전에도 겪은 거 같았다.
황후궁에서 그의 출입을 막았던 그 날이 떠올랐다.

<i>‘엘리야를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지금 폐하께선 그때의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까.’</i>

공작이 했던 말도 다시금 떠올랐다.


그날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랬다. 공작을, 아니 그는 엘리야의 아버지를 볼 낯이 없는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늦었다 할지라도 엘리야를 붙잡아야 했다.
레이몬드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은 공작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 엘리야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레이몬드는 간절히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황제가 아닌 그저 한 남자로서의 부탁이었다.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공작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그간 황제에게 쌓인 실망과 원망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구하오나 폐하. 지금 엘리야를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공작. 부탁하오. 그녀를 만나야 하오. 내 너무 늦게 내 감정을 깨달았지만…….”
“……무슨 감정 말씀입니까.”
“엘리야가 곁에 있는 것이 너무 익숙해 바보처럼 떠나고 난 뒤에야 알아버렸지만……. 난 그녀를 사랑하오.
그녀가 없으면 안 될 만큼.”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에 한점의 거짓도 없었다.
그의 애타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던 공작은 탄식 같은 웃음을 흘렸다.
“……허.”
“공작?”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엘리야는 공작성에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떠났습니다. 엘리야는 제국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레이몬드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여행을 갈 것이란 얘기를 들었지. 그래, 벌써 떠났나 보군. 그럼 언제 돌아오지? 아니 어디로 갔지?”
단순히 여행을 간 것이겠지. 그럼 곧 돌아올 것이다. 레이몬드는 애써 드는 불길한 예감을 외면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를 비웃듯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폐하, 엘리야는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제국을 영원히 떠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엘리야가 제국을 완전히 떠났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 엘리야가 스스로 폐하를 영원히 보지 않겠다 떠난 것입니다.”
공작은 엘리야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쐐기를 박았다.
단호한 공작의 눈빛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어디로 떠났소?”
“모릅니다.”
“공작!”
이성을 잃은 레이몬드의 고성이 저택을 크게 울렸다. 순식간에 살벌해진 그의 기운에 사용인들이 두려움에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공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으로 말을 반복했다.
“폐하, 전 모릅니다. 부디 제 딸을 찾지 마십시오. 그것이 폐하를 위해서도 제 딸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내가 그녀를 찾지 않는 게 엘리야를 위한 길이라?”
“예, 폐하. 지금 엘리야를 찾으신다고 한들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엇을 해 준다니 그게 무……”
공작은 무례하게도 황제의 말을 끊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폐하의 사생아가 황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생아의 어미가 되어달라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그 명은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
이미 책봉된 황자를 내치는 것.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레이몬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공작은 차분히 말했다.
“황자로 책봉하지 않는다고 하여 에드먼드가 폐하의 핏줄이 아니게 됩니까. 이미 온 제국 사람들이
에드먼드가 누구의 아들인지 아는데요.”
“…….”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레이몬드를 보며 공작은 처음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아시겠지만, 황위 다툼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지요. 혹시라도 엘리야가 다시
폐하의 곁에서 훗날 아이라도 갖게 된다면, 전부 그 피바다 속에 내던져질 것입니다.”
공작은 싸늘한 눈빛으로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난…….”
스스로 피를 묻히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이몬드였다. 그 잔혹한 피바람에 엘리야가 선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폐하. 모두를 지키는 길은 폐하께서 마음을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허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공작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더는 어떠한 말도 듣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소.”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공작가를 나섰다.

33 화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늦은 밤 출항한 배는 힘차게 바다를 가르며 룬트 왕국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넓은 갑판 위엔 사람이 없었다.
객실은 넓었지만 심란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나온 난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하늘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가씨. 바닷바람이 차가운데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혹 감기라도 걸리실까 걱정됩니다.”
따라 나온 헬란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난 좀 더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난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 잠시 혼자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
망설이던 헬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잠자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곧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럴게.”
헬란이 들어가고 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깊이 들어 오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쯤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라 자신 있게 말했지만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멀리 제국을 떠나는 것도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사는 것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홀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렵기도 했다.
“해내야만 해. 강해져야만 하고.”
그래야 아이도 지킬 수 있다.
난 배 위로 손을 얹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고 두렵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버틸 힘이 났다.
아이만 무사히 잘 키울 수 있다면 귀족의 삶 따윈 백번이고 천 번이고 버릴 수 있었다.
“우리 행복하게 잘 살자. 아가야.”
나직이 속삭인 난 시원한 바람에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별자리도 보였다.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무는 별자리, 스텔라.
‘오늘도 네가 좋아하는 별이 보이네.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서 그런가, 가끔 저 별을 보면 엘리야 네가
생각나.’
순간 레이몬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들은 날 난 너무 행복해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넌 저 별을 보며 날 한 번이라도 떠올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저 별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을 텐데 레이몬드가 저를 한 번이라도
날 생각해 줄지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이제는 다 끝난 사랑이었다.
난 괜히 심란함을 불러일으키는 별에서 시선을 내렸다. 갑판을 둘러보던 그때 한 남자에게서 시선이 멈
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백금발. 꽤 잘생긴 남자의 옆얼굴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맞았어.”
나를 보고 놀란 듯 커지는 호박색 눈동자는 파티장에서 함께 춤을 췄던 그 남자가 맞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놀란 듯 굳어있던 남자는 내게로 걸어왔다.
“이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크로프트 영애.”
파티장에선 귀족가의 영식처럼 값비싼 턱시도를 입고 있더니 지금은 평민들이나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군요.”
“그야 당연히…… 제국에서 크로프트 영애를 모를 사람을 거의 없을 거 같습니다만.”
“저는 당신을 몰라서요.”
남자의 이름도 신분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난감한 상황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 전부였다.
“아, 그런 뜻이셨군요.”
잠시 커졌던 호박색 눈동자가 풀어졌다. 눈을 예쁘게 휜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레미라고 합니다. 영애.”
“제레미…….”
성이 없다는 건 평민이란 건데.
당연히 눈앞의 남자는 평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옷을 입고 있다 해도 습관적으로 남자의 몸에
밴 예법들이 있었다.
함께 춤을 줬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행동들은 평민이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는 폼이
아니다.
신분을 감추는 건가.
난 의중을 알 수 없는 호박색 눈을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았다.
“반가워요. 제레미.”
“룬트 왕국으로 여행을 가시는 건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난 그의 손을 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적당한 선을 그어야
했다.
“그렇군요. 룬트 왕국 작은 왕국이긴 하지만 치안도 좋고 타국인들에게 관대한 편이라 여행하시기 좋을
겁니다.”
다행히 제레미는 더 묻지 않고 미소를 그렸다.
“좋은 곳이군요.”
“네. 조용히 살기에 좋은 곳이죠. 영애. 혹시 저 별을 아시나요?”
갑자기 제레미가 하늘에서 빛나는 별 하나를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조금 전까지 내가 보던 별이었다.
“……스텔라, 별빛이라는 뜻을 가진 별이죠.”
“네. 제국에선 그렇게 불리지만 룬타 왕국에선 아기오디타라고 불립니다. 뜻은 신성한 별이라고 해요.
룬타 왕국에선 저 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런가요…….”
“그러니 영애도 소원을 빌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영애의 소원이 이루어질지 말입니다.”
마치 내가 오래 제국을 떠나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거처럼 말하는 그를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딱히 더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난간에 팔을 올렸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곁에 있을 뿐이었다.
놀랐던 마음도 잠시 그가 주는 고요함에 심란하던 마음이 점차 차분 해지는 거 같았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백금발을 물끄러미 보던 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별을 바라봤다.
“아기오디타……”
스텔라가 아닌 아기오디타. 새로운 이름이었다.
룬트 왕국에서 이뤄질 나의 새로운 시작처럼 말이다.
부디 그곳에서 아이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음속으로 나직이 소원을 빈 난 제레미와 함께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 * *

6 년 후.
따스한 햇볕이 마당에 가득한 꽃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꽃에 물을 주는 여자의 분홍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였다.
귀여운 작은 꽃봉오리부터 만개한 아름다운 꽃들까지.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이 즐비한 꽃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작은 아기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엘리, 좋은 아침.”
룬트 왕국 사람들 특유의 황색 피부를 가진 중년의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지. 이렇게 매번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마지가 들고 온 큰 바구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갓 구운 빵과 신선한
과일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이곳에 정착한 뒤 제일 먼저 사귀게 된 이웃인 마지. 그녀는 빵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매일 아침 내게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아휴, 내가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매일 오는데 그런 말 질리지도 않아?”
“매번 미안하고 감사해서 그렇죠.”
“뭐가 미안해. 이웃끼리 다 돕고 사는 거지 그리고 엘리도 우리 집에 예쁜 꽃도 공짜로 주고 다 죽어갔던
과일나무도 살려줬잖아.”
“그거야 제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치? 나도 이가 빵 몇 개 굽는 건 어려운 일도 아냐. 어차피 아침마다 굽는 건데.”
마지는 찡긋 웃으며 내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녀의 말에 결국 나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잘 먹을게요. 마지.”
“그래, 그래. 어머나, 이 레포리 나무, 결국 살아났네. 며칠 전에 꽃집 들어올 때만 해도 죽은
상태였잖아.”
“아아. 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엘리는 정말 식물 박사라니까. 어떻게 이렇게 막 죽은 꽃과 나무들을 살리는 거야?”
가게 한쪽에 있는 붉은 꽃을 피워 낸 나무를 보며 마지가 놀란 듯이 말했다.
“늘 그렇듯 정성과 사랑이죠, 하하.”
제겐 식물을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요.
라는 말을 했다간 동네에 소문은 물론 룬트 왕국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6 년 동안 이 능력을 활용하며 느낀 건 내가 가진 능력이 생각보다 엄청나단 것이었다.
단순히 죽었던 식물들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토양을 정화하고 또 비옥하게 바꾸는 능력까지 있었다.
땅의 상급 정령 술사와 비슷한 능력이었다. 물론 식물을 다루는 것까지 더해지면 내 능력은 상급
정령사보다도 강력했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를 보자 마지가 크게 웃었다.
“아휴, 그래. 꽃들도 예쁜 사람을 안다고 이렇게 예쁜 엘리가 사랑과 정성을 쏟는데 식물이 안 살아나고
배기겠어. 하하. 맞아, 맞아. 아, 근데 엘리.”
“네?”
“저번에 그 포투아 꽃 향수 말이야. 더 만들어줄 수 있을까? 우리 딸이 그 향이 좋았는지 자꾸만 졸라서
…….”
“물론이죠. 내일까지 만들어 드릴게요.”
“고마워. 가격이 얼마지?”
마지가 향수값을 주려는 듯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에요, 이웃끼리 돕고 사는 거라면서요.”
“아냐, 받아. 향수값이 얼마나 비싼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안 줘.”
“그럼 내일 크림 빵 몇 개만 가져다주세요. 값은 그걸로 받을게요.”
마지가 주머니를 열지 못하게 손을 꼭 잡아 원천봉쇄한 난 웃으며 그녀를 가게 밖으로 배웅했다.
“그럼 내일 봐요. 마지.”
“아니, 아휴……. 알았어. 그럼 내가 내일 크림빵 맛있게 구워올게.”
졌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은 마지는 곧 맞은 편의 빵 가게로 들어갔다.
난 하나둘 장사를 시작하는 상점들을 보며 오늘도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느꼈다.
이곳은 룬트 왕국의 수도 룬트라의 상점 거리였다.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 원래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려 했지만 그럼 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고민하다 결국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 난 일부러 룬트 왕국에서 사람이 제일 많은 수도로 왔다.
레이몬드도 내가 수도에 있단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제국을 떠난 지도 벌써 6 년이 흘렀다.
이젠 엘리야 크로프트란 이름보다
룬트 왕국 꽃집 주인 엘리란 이름이 더 익숙해졌다.
“엄마!”
거리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개를 돌린 난 환한 웃음을 지으며 품 안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안았다.

34 화

“칼라일!”
“엄마, 엄마 나 오는 길에 쿤 아저씨에게 이거 받았어요!”
품 안에서 고개를 든 칼라일은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게 장난감 비행기를 들어 보였다.
“와! 멋진 걸 받았네. 우리 아들 기분 좋겠다. 쿤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네! 감사하다고 인사했어요!”
칭찬해달라는 듯 기대 어린 눈빛은 심장이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난 칼라일의 짙은 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왕자님. 너무 잘했어요.”
“헤헤.”
“들어가서 어서 아침 먹자. 아침 먹고 학술원 가야지.”
룬트 왕국은 평민들도 글을 배우고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술원이 있었다.
5 살 때부터 들어갈 수 있는 학술원은 꽤 체계적인 배움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
학술원 이야기가 나오자 가기 싫은 듯 칼라일이 시선을 쓱 피했다.
“학술원 갔다가 오면 엄마랑 같이 꽃 언덕에 피크닉 나갈 건데 그래도 싫어?”
“아뇨! 안 싫어요!”
“그럼 얼른 아침 먹고 학술원 다녀오자. 알았지?”
“네!”
칼라일은 금방 밝아진 얼굴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기에 아이 스스로 먹을 수 있었다.
칼라일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난 칼라일과 함께 온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헬란, 수고했어. 요새 내가 계속 일찍 나가서 혼자 힘들지?”
요새 향수를 만드는 일에 재미가 들어 아침 일찍 가게로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칼라일을 깨워 옷을
입히는 일을 헬란이 하고 있었다.
“힘들긴요. 칼라일님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데요. 오늘도 제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서 스스로 옷도
입으셨어요.”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고 칭얼거리며 한참을 씨름하는 난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칼라일을 힐긋 본 헬란이 낮게 속삭였다.
“엘리 님이 있을 때만 어리광을 부리시는 거예요.”
“어머, 그렇구나.”
내게만 부리는 어리광이라니.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웃자 헬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 님은 정말 팔불출이세요.”
“내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걸 어떡해.”
“뭐…… 그건 그렇죠.”
토끼처럼 빵을 야금야금 베어먹고 있는 칼라일을 보며 헬란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 님이 막 태어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라시다니 시간이 정말 빨라요. 그렇죠?”
지독한 난산이라 칼라일을 잃을 뻔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이렇게 무사히 자란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응. 그러게. 칼라일을 낳았을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했는데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도
신기하고.”
“다 엘리 님의 능력이세요.”
헬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이렇게 평화롭기만 하면 좋을 텐데……. 아, 혹시 오늘 아침에 우편 배달부가 오진 않았어?”
“아뇨. 안 왔어요.”
헬란의 대답에 내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룬트 왕국으로 오게 된 뒤 아버지와 매우 조심스럽게 석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주 편지를 보내려 했었지만, 왕국에 정착하여 편지를 보내자마자 아버지가 레이몬드가 날 찾고 있다
전했다.
그렇게 빨리 나의 소식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단순히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떠난 것을 알고 찾으려 하고 있다 했었다.
이제 와 무슨 마음이 들어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기에 절대
들켜선 안 됐다.
그렇게 매번 다른 나라와 다른 지역을 거쳐 석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었는데, 육 개월 전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편지를 전하는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조금씩 불안이 쌓여가고 있었다.
“엄마, 다 먹었어.”
어느새 과일까지 다 먹은 칼라일이 내게로 왔다. 입가에는 빵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또래보다 의젓하
긴 하지만 아직 아기는 아이였다.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털어준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네!”
칼라일이 헬란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가고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괜찮으신 걸까…….”
아버지의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좀 알아봐야겠어.”
6 년 동안 절대 에그리타 제국의 소식은 피하고 있었지만, 소식 없는 아버지에 대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게 한쪽에 있는 망토를 든 난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 * *

에그리타 제국의 황실 황제의 집무실.


책상에 앉은 레이몬드는 먼 왕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소니아 왕국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잘못된 정보였던 듯합니다.]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짧은 문장이 적힌 서신을 꽉 그러쥐었다. 손에 선 핏줄이 터질 듯 선명했다. 대체 몇 번째
허탕인지 셀 수도 없다.
“전 대륙을 전부 뒤졌는데 왜 아직도 찾을 수가 없단 말이야.”
짓씹는 듯한 낮은 말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6 년 그는 아직도 엘리야를 찾고 있었다.
공작이 엘리야가 떠났다 했지만 그래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 그녀가 자신과 제국을 버리고 떠난 것이라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비웃듯 시간이 지나도 엘리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엘리야에 사교계가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잊혀갔다.
레이몬드만 빼고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녀가 잊히는 게 아니라 더욱 선명해졌다.
태양궁의 장미 정원 그녀가 가꾼 온실 화원, 신경이 예민한 그를 위해 그녀가 늘 준비해 줬던 허브차들.
그가 놓쳤던 엘리야의 배려들이 황성 곳곳에 스며있어 잊으려야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 그리움에 미쳐 전 대륙을 뒤지고 있었으나 매번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엘리야 때문에 그는 정말 이대로 제가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가끔 두려웠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새하얀 종에 답장을 써 내려갔다.
[무슨 방법을 써도 좋으니 찾아라.]
타국을 뒤지는 일이었기에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 한계였다.
이러다가는 엘리야를 찾기도 전에 그가 미쳐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봉투를 봉한 레이몬드는 서신을 시종에게 내밀었다. 시종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집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폐하, 재상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제국의 새로운 재상이 된 시오스 후작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게. 오늘도 같은 말을 하러 온 것이겠지.”
레이몬드가 귀찮다는 듯 말하자 시오스 후작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시오스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언제까지 크로프트 공작에 대한 처벌을 미루실 생각이십니까.”
“재상.”
“잘못된 선택으로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줬습니다. 그 피해를 막기 위해 제국민들의 세금은 더욱
가중됐고요. 횡령이 아닐까 의심까지 되는 와중에 이대로 공작을 가만히 두시면 안 됩니다.”
레이몬드는 피곤하다는 듯 깊이 미간을 좁혔다.
“매일 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지겹지도 않은가.”
“귀족들의 불만이 엄청납니다. 저라고 폐하께 감히 재촉을 드리고 싶겠습니까. 폐하, 공명정대함을
위해서라도 크로프트 공작을 처벌하십시오.”
시오스 후작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후작을 가만히 보며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크로프트 에이루스.
엘리야의 아버지이자 반정의 가장 큰 공신이기도 한 공작은 제국 외교부의 수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올해 초, 사막 왕국과의 무역을 트다 문제가 생겼다. 막대한 계약금을 받은 사막 왕국의 상단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단이었던 것이다.
이미 계약금을 지급한 뒤였기에 손해는 막대했고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내년의 재정이 부족해져 당장 평민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에게까지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재산을 내놓게 생긴 귀족들은 당연히 공작을 벌하라 난리였다. 공작 위를 뺏고 공작가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말이다.
나날이 귀족들이 시끄럽게 굴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상단과의 무역을 책임졌던 공작의 죄가 확실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뭔가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크로프트 공작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막대한 계약금을 빼돌렸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그건 더 믿을 수 없었다.
엘리야를 황후로 만들고 제국 최고의 실세가 되었을 당시에도 뇌물 한 번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재상. 재상은 지금 내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솔직히 모든 증거가 나온 지금 상황으로서는 크로프트 공작을 처벌하지 않으시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을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일국의 재상이 이렇게 소견이 좁아서야.”
“……예?”
“그대의 말은 틀렸네. 지금까지 나온 증거 중 아무것도 크로프트 공작이 이를 사주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없어. 그의 죄는 현재로서는 그 거래의 총책임자였다는 것이지.”
“그건……!”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을 책임졌던 두 명의 실무진들은 잠적했고 말이야.”
“…….”
“그들을 찾는 수배령을 내렸고, 공작은 외교부 수장직에서 해임하고 공작성 내에 감금했지. 이런데도
내가 가만히 있었다고?”
“……하오나.”
“난 절차에 따라 조사를 하고 있네. 그런데 일국의 재상이라는 자가 정확한 증거도 없이 공작을 벌하라
재촉하니……. 자네가 마치 공작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군.”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35 화

온몸을 옥죄는 듯한 날카로운 기운에 시오스 후작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가 공작에게 원한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 그저 폐하의 평판에 누를 끼칠까 걱정이 되어…
….”
시오스 후작은 간신히 입술을 떼고 말을 이었다.
“혈육을 죽이고 이 자리에 앉은 내게 더 나빠질 평판이랄게 있는가.”
“폐하……!”
“재상, 그대의 역할은 저들의 불만을 내게 전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그것들을 잠재우는 것이네.”
“…….”
“요즘 그대를 보면 그대가 모시는 이가 누구인지 의심이 드는군.”
매일 찾아와 허튼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더는 한계였다.
차갑게 경고하자 제대로 알아들은 듯 후작은 한걸음 물러났다.
“송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움직이실 때까지…… 귀족들을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몬드는 싸늘한 눈빛으로 후작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나가보게.”
“네. 폐하.”
재상이 나가고 레이몬드는 답답함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하 4 기사단 단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제국의 태양이신……”
“인사는 됐다. 알아보라 한 것은 어찌 되었지?”
레이몬드는 카르텔에게 본론부터 꺼냈다.
공식적으로 크로프트 공작의 일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점이 많아 따로 카르텔에게 알아보라
한 것이었다.
“최근 1 년간의 공작 가의 자금 출처를 전부 알아봤으나 비자금을 빼돌렸다거나 땅을 매입한 적도
없었습니다.”
“흐음.”
“그런데 알아보니 폐하의 말씀대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상단들을 통해 알아보니 잠적한 사람 중
한 명인 메타스 자작이 올해 초부터 갑자기 사막의 상단들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역시 뭔가 있군.”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번 일이 터졌을 때부터 많은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너무도 완벽하게 공작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 일련의 상황들이었다.
사막과의 무역과 관련된 모든 문서엔 공작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공작이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되는 문제들까지 말이다.
마치 공작이 어떤 구실로도 이 사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느낌이었다.
거기다 사건이 터지기도 전에 잠적한 보좌관들이라…….
마치 처음부터 공작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 같았다.
“그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공작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의 말에 카르텔의 무감한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카르텔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송구하오나 메타스 자작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뭐라?”
레이몬드가 눈썹을 매섭게 올렸다.
“아마 곧 공식적인 보고가 올라오겠지만 메타스 자작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서부 영지에서 최근 시신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지로 조사관들이 급히 내려와 시신을 수도로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메타스 자작의 시신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카르텔이 먼저 이 소식을 레이몬드에게 전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비공식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죽었다니.”
레이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정적 증인이 될 수 있는 자작이 죽어 버렸으니 이대로는 크로프트
공작이 죄를 덜기 힘들어졌다.
뭔가 점점 꼬여가는 상황에 레이몬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폐하, 그리고 한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메타스 자작의 가문이 한미하여 보좌관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는데 그때 지원을 해 준 것이 바르텐
백작가라고 합니다.”
“바르텐 백작가라면…… 시오스 후작 부인의 가문이군.”
“네. 확실한 연관 관계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만 조금 신경이 쓰여 말씀드립니다. 폐하. 어찌할까요?”
시오스 후작과 크로프트 공작.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알아보거라. 이번 일에 시오스 후작이 연관된 것이라면……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닐
테니까.”
“예, 폐하.”
“크로프트 공작은 어떠하냐. 혹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문제는 없느냐.”
현재 크로프트 공작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은 카르텔의 기사들이었다.
워낙 큰 손실을 일으킨 사기 사건이라 공작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감금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반정의 공신이기도 했으나 공작은 엘리야의 아버지였다.
공작과 엘리야는 다른 부녀지간보다 더 각별했었다. 허니 이 소식을 그녀가 듣는다면 그 걱정이 엄청날
것이다.
공작이 성에 감금되던 날, 처음으로 엘리야가 제국에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몸은 괜찮으신 듯합니다. 식사도 거르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다행이군. 혹시라도 이상이 있다면 바로 황궁의를 부르거라. 그리고 기사들에게 일러 공작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해라.”
대외적으론 죄인의 감금이었지만 레이몬드는 공작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야도 없는 마당에,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이는 자신밖에 없었다.
공작이 잘못되면 엘리야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 그와 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복잡해지는 상황 속 공작을 지킬 방도를 찾으려 고민했다.

* * *

룬트 왕국의 수도. 룬트라 상점 거리를 쭉 걸어오다 보면 커다란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 나왔다.


그리고 그 광장을 넘어가면 술집들이 즐비한 거리가 있었다.
낮에는 불이 밝혀지지 않는 그 거리로 들어선 난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쭉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리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허름한 술집의 문을 열었다.
오픈 전이라 문이 잠겨 있을 법도 했지만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거처럼 문은 쉽게 열렸다.
“저 왔어요. 제드.”
빈 테이블 하나에 앉아 엎드려 있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한 마리의 곰 같은 덩치와 무표정으로 있으면 상당히 험악해 보이는 이목구비를 가진 꽤나 위협적인
남자였다.
늦게까지 장사를 해 피곤한 모양인지 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하암……. 엘리……? 뭐지…… 오늘이 벌써 보름이 됐던가?”
제드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문 밖을 힐끔거렸다.
내가 보름에 한 번 만월이 뜨는 날에만 이곳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뇨. 오늘은 만나는 날 아니에요. 알아볼 게 있어서 들린 거예요.”
“알아볼…… 일? 엘리,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없길 바라고 있어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제드의 몽롱하던 갈색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사무실로 가자.”
붉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은 그가 가게 문을 잠갔다. 그리고 술병들이 진열된 커다란 벽장 앞에 섰다.
벽장 중앙에 있는 위스키를 돌리자 벽장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려났다.
상당히 인상적인 광경이지만 너무 많이 본 탓에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벽장 뒤로 숨겨졌던 문이 드러나고 난 익숙하게 그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밀하게 만들어진 지하길의 끝, 마나석으로 움직이는 마법진이 나왔다.
버튼 하나를 누르자 마법진에 불이 들어왔다. 난 망토의 모자를 얼굴을 가리듯 뒤집어썼다. 이윽고 난
제드와 함께 순간 이동했다.
“윽.”
“제드, 괜찮아?”
“이놈의 순간이동은 몇백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돼.”
속이 울렁거리는지 인상을 구기고 있던 제드는 사무실의 불을 켰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넓은 사무실은 허름한 술집과 달리 값비싼 원목 가구들과 가죽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면 룬트 왕국의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절경을 볼 수 있었다.
룬트라에서 황궁 다음으로 가장 높은 건물인 이곳은 바로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피닉스 상단의
본부였다.
피닉스 상단.
4 년 전에 신성처럼 나타난 이 상단은 단 몇 년 만에 전 대륙에 지부를 세울 만큼 엄청난 성장을 했다.
그런 피닉스 상단에는 특별하게도 2 명의 상단주가 있었다.
첫 번째 상단주가 바로 저기 책상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제드였고.
그의 동업자이자 피닉스 상단의 숨겨진 가면의 상단주는 바로 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작은 술집을, 나는 작은 꽃집을 운영 중이었을 뿐이었다.
딱히 인연이 닿을 만한 접점이 없었던 우리가 만난 건 그가 피습을 당한 밤이었다.
4 년 전 제드는 작은 술집을 운영하며 모은 정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정보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 술집 거리엔 정보 상인들이 꽤나 있었고 막 크기 시작하는 제드가 그들에게 위협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제드를 죽이려 했고 결국 피습을 당한 제드는 어두운 밤 길가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그날 내가 귀한 식물을 구하려 다른 영지에 들렸다 늦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린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드도 이렇게 살아있지 않겠지.
밤이 깊어 의원을 부를 수도 없었기에, 난 내 꽃집에 있던 지혈초를 가져와 그를 살렸다.
그때부터 제드와 내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큰 상단을 만들려 한 것은 아니었다.
칼라일의 미래를 위해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힘을 가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드와 손을 잡고 상단을 꾸렸다.
그저 룬트 왕국에서 적당한 규모의 상단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칼라일이 무엇을 하든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한데 예상과 달리 일이 술술 잘 풀렸다.
우리가 운이 좋았는지 각국을 돌아다니는 용병들이 술집에서 풀어놓는 정보들이 전부 알짜배기였다.
망해가는 영지가 갑자기 땅을 급경매로 내놓을 거란 정보부터 귀족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발굴되지 않은
광산이나 금맥이 흐르는 땅이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제드의 술집에서 흘러나왔다.

36 화

물론 그들의 말이 전부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에 한두 개 정도는 맞았다.


그렇게 헐값에 구매한 것이 룬트 왕국의 다이아 광산이었다.
룬트 왕국은 원래부터 대륙에서 가장 상급의 다이아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총 10 개의 광산 중 왕실 소유가 2 개였고 나머지는 귀족과 거대 상단 들의 것이었다.
한데 정말 운이 좋게도 룬트 왕국에서 가장 큰 상단이 상단주 후계 싸움으로 인해 분란이 일었었다.
궁지에 몰린 상단의 후계자는 상단이 소유하고 있던 광산을 비밀리에 처리하고 도망을 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수한 우린 상단의 모든 돈을 걸어 다이아 광산을 3 개를 그 후계자로부터 은밀히 구매했고,
그 광산을 기반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번 돈과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는 룬트 왕국의 모직 기술에 투자했다.
왕실에서 관심이 없었을 뿐 용병들 사이에선 이미 룬트 왕국의 모직이 좋다는 것이 유명했기에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고, 곧 피닉스 상단의 모직은 대륙 전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다른 상단에서 장인들을 뺏어가려 하고 기술을 베껴가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부동의 모직 판매 1 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4 년 만에 우린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거상이 된 것이었다.
“후……. 찬물 좀 마시니까 살겠네.”
제드는 긴 숨을 내쉬며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엘리. 무슨 일을 알아보려는 거야.”
창밖의 풍경를 보고 있던 난 몸을 돌렸다.
“……에그리타 제국의 소식을 알고 싶어.”
제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럴 만했다. 난 에그리타 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여태 입 밖에 내지도, 듣지도 않았다. 제드 또한 눈치껏
그 이야기를 내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제드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몰랐다. 단지 에그리타에서 넘어온 사람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거대 상단의 주인이 된 지금 에그리타의 전 황후에 대해 들어본 적이야 있겠지만 내가 그 황후란 건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룬트 왕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 아버지가 챙겨주신 팔찌 두 개는 머리 색과 눈 색을 바꾸는 마법 술식이 들어간 팔찌였다.
하나는 내가, 하나는 칼라일이 끼고 있었다.
룬트 왕국에 들어올 때부터 분홍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였으니 내게서 특별한 점을 못 찾았을 것이다.
제드는 스스로 금기어처럼 꺼내지 않던 에그리타의 소식을 묻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그리타 제국의 어떤 소식이 궁금해? 전반적인 소식? 아니면 특별히 알아보고 있는 게 있는 거야?”
“크로프트 공작가. 그 공작가와 관련된 소식을 알려줘.”
정확히 지목하자 제드의 얼굴이 움찔했다. 눈치가 빠른 그였으니 내가 아무런 관련도 없이 크로프를
지목했다 생각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제드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칼라일이 누구의 자식인지도 알게 되겠지.
여태까지 잘 숨겨온 칼라일의 존재가 타인에게 드러나게 되겠지만 제드라면 괜찮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게 낯선 타인이 아니었으니까.
난 그가 얼마나 신의가 깊은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복잡한 눈빛이던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는 책상 위로 흐트러진 서류들을 마구 뒤적였다. 그리고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크로프트 공작가라면 요새 시끄러워서 우리 쪽으로 들어온 정보가 많아. 이것들 전부다 공작가에 대한
정보들이야.”
요새 시끄럽다는 말에 난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는데…….
난 느릿하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을 읽을수록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불길한 예감은 왜 언제나 나를 비껴가질 않는 것인지.
난 종이를 꽉 그러쥐었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본 제드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엘리, 괜찮아?”
아버지의 상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군가 파놓은 더러운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제드에게 답하는 내 목소리에 떨림이 숨겨지지 않았다.

* * *

“엄마!!”
학술원 앞,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난 칼라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들자 학술원에서 뛰어나오는 칼라일이 보였다.
자기보다 키가 큰 형들을 훌쩍훌쩍 제치며 한달음에 달려온 칼라일이 내 품에 쏙 안겼다.
“그렇게 좋아?”
“네! 엄마가 데리러 와서 너무 좋아요!”
칼라일이 신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개구지게 웃었다.
한동안 꽃집이 바빠 칼라일의 하원을 헬란이 맡아 줬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은 난 손을 잡았다.
“오늘은 특별히 엄마가 칼라일이 먹고 싶어하는 간식들 다 사 줄게.”
“정말요?!”
칼라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정말.”
시장에 칼라일이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이 정말 많았다. 설탕에 조린 과일부터 아이스크림, 맛있게 구운
오리구이 꼬치까지.
달달한 맛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겐 천국 같은 곳인 거다.
물론 천국 같은 맛들을 전부 먹게 해 주지는 않았다.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꼬치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빵도 먹어도 돼요?”
헌데 오늘 특별히 허락해 준다니 칼라일은 믿기지 않는 듯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재차 물었다.
날 올려다보는 갈색 눈동자에는 기대가 한껏 서려 있었다.
내 자식이지만 너무 귀여운데.
칼라일에게 꼬리가 있다면 분명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겠지.
강아지 같은 눈빛에 순간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응. 다 먹어도 돼. 대신 배가 아플 만큼 많이는 안돼. 배부르면 그만 먹어야 해, 알았지?”
“네!”
환한 미소를 지은 칼라일은 기분이 너무 좋은지 알 수 없는 멜로디까지 흥얼거렸다.
그렇게 내 손을 꼭 잡고 칼라일은 신나게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그렇게 좋아?”
오리고기 꼬치를 순식간에 해치운 칼라일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내게 배시시 웃었다.
“네, 너무 좋아요.”
진심이 가득한 얼굴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칼라일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 난 다람쥐 같은 통통한
볼을 쓰다듬었다.
“엄마, 우리 내일도 모레도 시장 놀러 오면 안 돼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 칼라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무래도 어린 천사가 황홀한 시장의 맛에 단단히 취해버린 거 같았다.
칼라일이 좋다면야 얼마든지 매일매일 와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자고 바로 답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룬트 왕국을 떠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음…….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오자.”
“다음에……. 네.”
조금 실망한 듯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베어 물고는 금세 밝아졌다.
“칼라일 이제 그만 돌아갈까?”
나무로 만든 장난감을 구경하던 난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고개를 들었다.
룬트 왕국의 치안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밤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하진 않았다.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라일은 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장난감에서 고개를 돌린 칼라일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칼라일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난 순간 보이는 장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빠의 손을 잡은 아이가 인형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아빠, 나 저거 사 줘.”
“안 돼. 비슷한 거 얼마 전에 샀잖아. 엄마한테 혼나.”
“힝. 갖고 싶은데.”
칼라일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까. 서운해하는 남자아이를 아빠가 목말을 태워주며 달래고 있었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부자의 일상이었지만 난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칼라일이 그 남자 아이를 부러운 듯 보고 있었으니까.
칼라일이 조금씩 자라며 아빠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칼라일에게 가족은 엄마와 헬란이 전부였지만 학술원 아이들에겐 엄마와 아빠가 있었으니까.
학술원에 들어간 뒤 특히 궁금해했었다.
제 아빠는 어디 있는지 말이다.
차마 어린 칼라일에게 아빠가 죽었다는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 사정이 있어 멀리 떨어져 산다고만
둘러댔다.
칼라일이 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용사처럼 아빠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먼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뒤로 아빠에 대해 별달리 물은 적이 없어 괜찮아졌다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구나.
행복한 부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칼라일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칼라일, 내일 제드 아저씨 오라고 할까?”
칼라일은 신나게 몸으로 놀아주는 제드를 좋아했다.
어두워졌던 칼라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완전 좋아요!”
“그래. 엄마가 내일 제드 아저씨 초대할게.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고 벌써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칼라일을 번쩍 안아 든 난 일부러 더 씩씩하게 집으려 향했다.

* * *

“……나쁜 악당을 물리친 왕자님은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답니다. 그렇게 스스로 왕관을 쓰게 된
왕자님은 왕이 되어 백성들을 어진 마음으로 돌보고 오래오래 칭송받는 성군이 되었답니다.”
동화책을 덮은 난 반쯤 눈이 감긴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 왕자님은 왕이 돼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겠죠……?”
“물론이지.”
“그럼…… 나중에 아빠도 악당을 물리치면 우리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까요?”
“…….”
난 속삭이듯 작은 물음에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 일은 없을 테니까.
레이몬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한다 해도 결국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답해 주려던 난 완전히 눈이 감긴 칼라일을 보고 입술을 다물었다.

37 화

피곤할 만했지. 그렇게 시장을 뛰어다녔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라 해야 할지, 칼라일은 내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었다.
“엄마가 솔직하게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해.”
아빠의 존재를 멋대로 지워버린 것은 내 평생 칼라일에게 미안해야 할 부분이었다.
“대신 엄마가 더 많이 사랑해줄게.”
“으음…….”
손을 너무 꽉 잡았는지 칼라일이 조금 뒤척였다. 나는 손을 놓고 칼라일의 목 끝까지 이불을 올려주었다.
방 안의 밝은 마법등을 끄고 촛불 하나를 켠 난 침대 맡에 앉아 아이의 가슴을 토닥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든 듯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난 깊이 잠든 칼라일을 보며 참아 왔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버지…….”

[크로프트 공작은 현재 공작성에 구금되었고 이른 시일 내에 재판에 서게 될 듯합니다. 사막 무역 사기


사건에 대한 책임과 횡령에 대한 의심까지 받고 있으니 무죄를 밝히지 못하면 공작위 박탈은 물론 전
재산을 압수당한 뒤 노예가 되어 노역을 치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공작위를 잃는 것도 모자라 노예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충격은 물론이고 감히 이런 상황에 아버지를 빠뜨렸을 알 수 없는 적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서류들에 아버지가 연루된 사막 상단 사기 사건에 대해 꽤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들이 보란 듯이 차고 넘쳐 보였지만 난 안다.
아버지가 절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게다가 계약금 횡령은 더더욱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황후가 되고 난 뒤엔 사사로이 엮여서는 안 된다며 내게서 생일 선물도 받지 않으셨던 분이셨다.
차라리 공작가의 전 재산을 털어 사기를 당한 계약금을 메꾸셨으면 메꿨지, 빼돌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궁지에 몰린 듯 보였다.
심지어 황제의 명령으로 아버지는 공작성에 구금되었으니까.
“레이몬드…….”
그도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의심하고 있는 걸까.
“……아냐,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레이몬드는 알 것이다. 그는 나만큼이나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봐 왔었다.
단 한 번도 황제의 장인인 것을, 반정의 공신이 자신이라 내세운 적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가끔 그가 먼저 아버지가 과도하게 선을 긋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증거가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으니 레이몬드로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그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레이몬드의 사이에 쌓인 신뢰를 믿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도 언제까지 버틸 순 없을 것이다.
당장 내년 예산에 큰 구멍이 날 만큼 큰 손해가 발생했다.
세금을 더 내게 생긴 귀족들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라면 레이몬드도 아버지를 가만히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떡하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돌아가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이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 혼자였다면 이미 제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겠지만 지금 난 혼자가 아니었다.
내겐 칼라일이 있었다.
아버지만큼이나 소중한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
레이몬드가 날 찾고 있지 않았다면 잠시 나 혼자 제국에 다녀왔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날
아직까지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칼라일도 무조건 함께여야 했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아이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안 들킬 수 있을까.”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자식이 아니란 걸 숨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황자인게 밝혀진다면 절대 제국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황위 다툼도 피할 수 없다.
“칼라일…….”
제국엔 이미 1 황자가 있다. 나와 칼라일이 없는 시간 동안 1 황자는 굳건하게 자라 벌써 그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맹수처럼 내 아이를 노릴 것이다.
난 잠든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한 손에 다 차지도 않는 작은 손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손이 나보다 커지고 단단한 어른이 될 때까지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길 바랐는데.
아무리 망설여진다 해도 결국 답은 하나였다.
언제나 나를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를 외면할 순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바라는 일이 아닐지라도 난 돌아가야 했다.
“칼라일,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널 지킬 거야.”
아버지도 칼라일도 전부 내가 지킬 것이다.
더이상 레이몬드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바보 같은 내가 아니었다.
난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망설임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며 칼라일의 손을 꼭 잡았다.

* * *

다음 날 아침.
난 가게 문을 조금 늦게 열고 오랜만에 칼라일을 학술원에 직접 데려다주었다.
하지 않았던 아빠 이야기를 꺼낸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학술원 선생님께 그만두는 것에 대해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i>‘엄마 나중에 봐요!’</i>

오늘도 시장 구경을 가기로 약속 해서인지 다행히 칼라일은 시무룩한 기색 하나 없이 내게 볼 키스까지 해


주고 학술원으로 들어갔었다.
호시라도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질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었지.
가게로 돌아온 난 한참 정리를 하고 있는 헬란을 불렀다.
“헬란. 정리 안 해도 돼. 어차피 짐은 두고 갈 거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난 헬란이 일어나자마자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아버지의 상황을 듣고 수긍했다.
“아……. 하긴 이 많은 걸 다 들고 돌아갈 순 없으니…….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가꾸신 것들인데 버려야
한다니 너무 아깝네요. 특히 향을 추출하는 꽃들은…….”
헬란의 너무 아까운지 꽃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특히 가게 안쪽, 향을 추출하기 위해 내가 새로
배양해 키운 꽃들을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게, 본격적으로 다양한 향수를 만들어보려고 했었는데……. 당분간은 힘들 거 같네.”
향이 좋은 꽃들을 고르고 골라 씨앗을 배양하고 생명력을 넣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었다.
향을 추출해 몇 개의 향수를 만들어 팔아보았는데 반응이 좋아 제드와 본격적으로 향수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었다.
아쉽긴 했지만 아버지의 일이 다 해결될 때까진 향수 연구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다른 사람에게 관리를 부탁해야겠어.”
제국의 일이 정리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아, 제드에게 맡기시면 되겠네요.”
헬란은 이미 제드와 내 관계, 그리고 상단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응. 제드를 통해 적당한 사람을 찾을 생각이야. 그러니 가게는 정리 안 해도 돼.”
“네. 근데 엘리 님, 언제쯤 떠나실 거에요?”
“최대한 빨리. 며칠 안에 정리하고 떠날 거야. 아버지의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좋지 않아.”
“그렇군요.”
“많이 아쉽지?”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헬란의 눈길은 상점 거리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곳이었잖아요. 저도 저지만 엘리 님도 많이 아쉽지 않으세요?”
“그렇지.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곳이니까.”
어린아이 하나 데리고 가게 문을 연 이방인을 텃세 한번 부리지 않고 받아준 이웃들이었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과 애정을 받았기에 헤어지는 것이 슬펐지만 어차피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는
인연이었을 거다.
이별이 조금 빨라진 것뿐.
그래도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은 주고 갈 것이다.
“엘리 님. 가게는 괜찮다고 하시니 그럼 전 집으로 가서 물건들 좀 정리하고 있을게요.”
“응. 그래. 아, 나 오늘 칼라일 데리고 시장 구경 한 번 더 갈 거야.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어.”
“네. 그럴게요.”
헬란이 가게를 나가고 난 작은 정원과 가게를 둘러보았다.
하나하나 내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잠시 마음이 먹먹해지던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난 화려한 백금발의 남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레미. 어서 와요.”
룬트 왕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백금발의 알 수 없는 남자, 제레미.
난 그와 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꽤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진짜 신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도 나도 이 룬트 왕국에서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엘리, 잘 지냈어요?”
“나야 잘 지냈죠. 제레미야말로 다친 데는 없어요?”
그는 룬트 왕국에서 용병일을 하고 있었다.
주로 자잘한 일들을 맡았지만 가끔 이렇게 좀 큰일을 맡을 때면 보름에서 열흘 넘게 떠났다 돌아오곤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가 걱정돼 묻자 제레미의 웃던 얼굴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 조금 다치긴 했는데…….”
“다쳤어요?”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다가가자 제레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늘상 짓는 능청스러운 미소였다.
“근데 엘리 얼굴 보니까 싹 다 나은 거 같아요.”
“뭐야……. 정말 다친 줄 알고 놀랐잖아요.”
이런 농담을 처음 들었을 땐 얼굴이 빨개지고 당황하기 일쑤였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몇 년 동안 듣다 보니 오늘 날씨를 말하는 거처럼 별 감흥이 없었다.
제레미는 누구에게나 이런 농담을 잘 하는 남자였으니까.
그의 장난에 눈을 흘기며 물러나자 그가 고민하듯 턱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걱정하는 걸 보니 진짜 다칠 걸 그랬나 싶은데요.”

38 화

“제레미,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진짜 다친다니.
다른 일도 아니고 용병 일을 하는데 자칫했다간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정색하며 말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할게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뭔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제레미는 눈치가 빨랐다. 지금도 평소와 달랐던 내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묻는 것일 거다.
“아, 나 에그리타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기분이 좀 심란했는데 티가 났나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는데 어쩐지 제레미의 얼굴이 굳었다.
“……돌아가기로 했군요.”
“우리 아버지 소식, 알고 있죠?”
용병 일을 하니 당연히 제국의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대국이니만큼 그곳에서 큰일이 터지면 모든 왕국에 말이
돌았다.
에그리타 제국의 가장 큰 실세라 할 수 있던 크로프트 공작가가 망하게 생겼으니 당연히 용병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을 것이다.
제레미 역시 들은 모양인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난 제국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봐요, 그렇죠?”
“……엘리, 괜찮겠어요? 칼라일의 존재를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 가볍게 넘겨보려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그가 말한 가만 있지 않을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레미는 내 진짜 신분이 뭔지 알고 있기에 당연히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자식인 것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숨겨 볼 거예요. 그리고 만약 들킨다 해도……. 칼라일은 내 아들이에요. 모든 걸 걸어서라도
내가 지킬 거에요.”
똑바로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제레미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물론이죠. 칼라일은 엘리의 아들이에요. 흠……. 그럼 이제 이 꽃집은 정리하는 건가요?”
“……아뇨 아는 사람이 맡아 줄 거에요.”
“아우, 그럼 난 이젠 룬트라에 놀러 올 곳이 없어지는 거네요. 아쉬 워라. 여기 오는 게 내
낙이었는데.”
언제 진지했냐는 듯 제레미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음……. 제레미는 계속 룬트 왕국에 있을 거예요?”
그의 신분을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짐작하는 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귀족적인 몸짓이나 예법을 통해 신분이 높다는 걸 짐작하기도 했고, 우연히 그의
단검을 보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겉보기엔 보석 장식 하나 없는 단조로운 검이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에 새겨진 문장이 눈에 띄었었다.
흑표범.
에그리타 제국에서 흑표범을 가문의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은 딱 한군데뿐이었다.
가문의 단검을 아무나 가지고 있지는 못할 테니 방계도 아니겠지.
내 짐작이 맞다면……. 그도 이렇게 오래 떠돌 수는 없는 입장일 것이다
“왜요? 내가 제국으로 함께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능글맞던 제레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왠지 통쾌한 기분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제레미도 당황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
“아……. 설마 나 놀린 거예요?”
“놀린 건 아니에요. 그냥 혼자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요.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좋으니까.”
처음엔 숨기는 게 많아 보이는 그를 경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룬트 왕국에서 자리 잡을 때 그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그가 내 짐작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면 제국에서 그가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다.
“당신은 정말 어릴 때랑 변한 게 없어.”
“네?”
그가 무어라 말한 것 같았는데 너무 소리가 작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함께 가자고 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지금은 나 말고 엘리만 생각해요. 제국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외면할 순 없어요.”
물론 황후도 아니고, 오랜 시간 제국을 떠나 있었으니 아버지를 도울 간접적인 인맥도 없다.
하지만 내겐 그 어떠한 인맥보다 영향력이 있는 상단이 있었다.
돈이 곧 인맥이 되는 법.
난 내 힘을 아낌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엘리가 잘 해결할 거라고 믿어요. 엘리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제국에서 다시 만나면 모른 척하지
말아요.”
“제레미야 말로 모른 척 말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을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정말 그런 말을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익숙한 능글맞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제레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매일 하면 늘더라고요. 엘리도 나한테 매번 들으니까 이제 아무런 느낌 없잖아요. 나중에는 이런 말들이
그리워질걸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 그리울 것 같네요.”
피식 웃던 그때,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드였다.
제레미의 시선이 제드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치자 순간 제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드와 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헬란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제레미는 눈치가 빨랐기에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드에게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넸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제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하하하. 그 나무 한 그루 사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엘리, 손님이 왔으니 난 이만 가 볼게요.”
“그래요, 조심히 가요. 제레미.”
“다음번엔 제국에서 봐요.”
제국에서……?
그도 돌아온다는 말일까. 의미심장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제레미는 내 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가게를 나갔다.
가게 창밖으로 사라지는 제레미의 뒷모습을 보던 난 가게 문을 잠갔다.
잠시 휴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은 난 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내가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지금 자는 시간이잖아.”
밤 장사를 하는 제드였기에 그에게 한낮은 새벽과도 다름이 없었다.
제드는 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응. 근데 아무래도 네가 걱정돼서 영 잠이 안 오더라고.”
내가 그렇게 하얗게 질린 모습을 처음 보았을 테니 걱정할 만했다. 그리고 아마 내 진짜 신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겠지.
제드는 머리가 좋았기에 어쩌면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아냈을 수도 있다.
나를 보는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보니 알아차린 게 맞는 거 같았다.
“엘리.”
“응.”
“네가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응.”
“그거, 마법 장신구지?”
나도 모르게 팔찌를 만지며 움찔했다.
“우리 아버지가 마법사 밑에서 일하던 시종이었거든. 그래서 덕분에 마도구들을 종종 봤었지. 특히 네가
차고 있는 푸른 빛의 보석 같은 마나석이 박힌 마도구가 모습을 바꿔 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지.”
“이건…….”
그에게 내 신분을 더 이상 속일 마음은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구하기로 한 이상 제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제드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 망설임을 오해한 듯 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리. 난 널 동업자 이전에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네게 힘든 일이 있는 거라면 숨김없이
말해 줬으면 좋겠어.”
“…….”
“너, 크로프트 공작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제드는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를 가만히 보다 팔찌에 손을 얹었다.
말로 하는 것보단 보여주는 게 확실하겠지.
팔찌를 풀어내자 마법이 풀리며 머리 색과 눈 색이 바뀌었다.
핑크빛 머리가 은발로 갈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돌아오자 나를 보던 제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너, 너……. 그 모습은…….”
“엘리야 크로프트. 그게 내 본명이야.”
나직이 내 이름을 말해주자 제드는 히익 숨을 들이켜며 경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크로프트 공작과 관련이 있더라도 설마 공작의 딸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제드, 숨 쉬어.”
숨이 넘어갈 듯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저 덩치로 쓰러지면 감당이 안 되기에 등을 쳐 주자 꼭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스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황후라니, 말도 안 돼……. 그래, 어쩐지 네 말투나 예법이 범상치 않다 싶기는 했어. 그냥 사연 있는
귀족 영애가 아닐까 했는데…….”
“나 황후 아냐. 황제와 이혼한 지가 벌써 6 년이나 흘렀는걸.”
“그렇지만 황후였던 건 맞잖아! 내가 이렇게 높은 사람과…… 아니 잠깐만.”
제드는 갑자기 굳은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제드, 갑자기 왜 그래? 숨을 영 못 쉬겠어?”
“네가 황후 폐하였으면……. 설마, 설마…… 칼라일은…….”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내뱉었다.
“그래, 맞아. 칼라일은 황제 폐하의 아들이야.”
“이런 미친!”
너무 충격이 컸던 것인지 제드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칼라일이 황자라니 말도 안 돼! 저번에 칼라일의 머리를 쥐어박은 적도 있는데……. 내가 황자의 머리를
……! 황족의 몸에 손을 대면 벌을 받지 않아?”
그의 말대로 황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참수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 말해주면 제드가
기절할 것 같았다.
지금도 덩치에 맞지 않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어제의 나를 보는 듯했다.

39 화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칼라일은 황자가 아닌걸. 그리고 황자로 살게 할 마음도 없어.”
“하지만 너……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 아니야?”
그는 내가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응. 아버지가 위험한 상황이니 당연히 돌아가야지.”
“그럼 어떻게 칼라일을 숨기려고? 내가 지금 충격으로 좀 정신이 없긴 한데…….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거야? 칼라일을 여기 두고 가진 않을 거 아냐.”
“당연히 함께 가야지. 그래서 제드 네가 날 많이 도와줘야 해.”
“내가?”
“응. 그리고…… 결혼 증빙 서류가 필요해.”
“칼라일을 다른 남자의 아이인 척하겠다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하면…
…. 그 황제 폐하께서 괜찮으실까? 막 분노하시는 거 아냐? 결혼했던 사이잖아……”
제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사실 처음엔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칼라일을 이모의 아들로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룬트 왕국을 선택한 이유가 오래전 연이 끊긴 이모가 이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제국에 퍼진 나에 대한 소문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타국에 사는 이모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룬트 왕국에 와서 확인해 본 이모는 이미 사망 처리가 되어있었다.
돈을 주면 이방인이었던 이모의 사망 증빙 서류를 바꿀 수 있긴 했지만 굳이 이미 돌아가신 분을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내 자식인 칼라일을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칼라일이에게도 엄마라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할 테니까.
모두에게 못 할 짓이라 난 칼라일을 내 자식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레이몬드가 자기 자식이라 생각지 못하도록 칼라일의 나이를 한 살만 낮춰서 말이다.
제드의 말대로 레이몬드가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게 그였다.
내가 떠나지 않고 그에게 임신 사실을 말했다면 한결같이 무심했던 그가 달라졌을까.
리제나가 보고 흔들림을 보였던 레이몬드였다.
그는 내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을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내게 화를 낼 수 없어. 아니, 화를 낼 자격이 없어.”
내 단호한 눈빛에 제드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얼굴도 모르는 황제 폐하가 뭐가 문제겠어. 네겐 너랑 칼라일이 더 중요하지. 그럼…… 신분은
어떻게 된다고 치고 칼라일도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거지?”
“응.”
“그 팔찌는 마법 팔찌라는 거 알 만한 사람이 보면 다 티가 날 거야. 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신구로 바꿔야겠네.”
“그게 가능해? 폴리모프 마법은 술식이 워낙 정교해 작게 만들 수 없다고 들었는데…….”
“가능하게 할 만한 사람을 내가 알고 있지. 마탑에서 쫓겨난 괴짜 마법사 하나를 알고 있거든.
그놈이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작은 마도구를 만들어낼 거야.”
제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충격으로 정신이 없다던 그는 이내 나보다 더 치밀하게 계획들을 짜기 시작했다.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제드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언제 떠날 계획이야?”
“최대한 빨리. 늦어도 이틀 내로는 떠날 거야.”
“그렇게 빨리? 서둘러야겠네. 그럼 칼라일은 제국에서 너와 떨어져 지내는 건가?”
“응.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칼라일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야.”
최악의 경우에나 칼라일을 레이몬드와 관련 없는 내 자식으로 밝히는 것이지 할 수 있는 한 칼라일은
최대한 숨겨야 했다.
내게 자식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든 소란스러워질 테고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말들이 나올
테니까.
아버지의 일이 정리될 때까지 칼라일을 잠시 안전한 곳에 따로 두었다, 일이 정리되면 다시 떠나는 것이
가장 완벽했다.
“하긴……. 크로프트 공작가의 상황이 말이 아니니 그게 안전하긴 하겠다.”
“에그리타 지부장에게 연락해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거처를 하나 마련해달라고 해 줘.”
“알았어.”
“그리고 제드.”
“응?”
“이번에 제국에서 사기를 치고 달 아난 사막 상단에 대해 더 알아봐 줘. 상단은 물론이고 상단의 책임자가
제국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증거가 찾아야 했다.
피닉스 상단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단이었고 상단의 정보력은 거의 대륙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제드와 나 둘도 상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력이라 생각했기에 정보를 모으는 정보원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었다.
“뭐……. 그건 이미 알아보라 했어.”
“벌써?”
“크로프트 공작가를 언급할 때 네 표정, 쓰러질 것 같았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럴 리 없었겠지.”
“제드…….”
일을 같이하면서 꼼꼼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 줄 줄이야.
놀람과 감동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지 볼을 긁적였다.
“아니 뭐……. 그냥 어차피 하게 될 일 같아서 미리 한 것뿐이야.”
“그래도 정말 고마워.”
“내 목숨값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엘리, 넌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 아버님의 일…… 쉽지 않을
거야.”
“각오하고 있어.”
결연한 눈빛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할 일이 많을 거 같으니까. 너도 출발이 정해지면 내게 알려 줘.
에그리타 제국 지부에 때맞춰 항구에 사람을 보내라 할 테니까.”
“응.”
제드가 가게를 나가고 나도 할 일이 많아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난 가장 먼저 제국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망토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 * *

에그리타 제국 황제가 머무는 태양궁.


“폐하, 1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레이몬드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의 하늘을 보고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에드먼드가 인사를 하러 올 시간이었다.
“들여보내.”
달칵,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에드먼드가 들어왔다.
“아버지.”
예를 갖춰 인사한 에드먼드가 그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차를 내오거라.”
시종에게 명한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먼드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따뜻한 홍차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레이몬드는 반짝이는 눈빛을 한 에드먼드를 마주 보았다.
그와 똑같은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에 저를 향한 애정과 일종의 기대심이 가득했다.
자신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아, 레이몬드는 살짝
시선을 비낀 채로 말했다.
“샤일로 백작이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열심히 배우고 있는 거 같아
자랑스럽구나.”
“아니에요,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에요. 그리고 스승님께서 그러셨어요. 제가 이렇게 머리가
좋은 건 전부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요.”
에드먼드가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래.”
그런 에드먼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지만 레이몬드의 입가는 아까와 달리 딱딱하기만 했다.
6 년.
에드먼드를 황궁으로 데려와 곁에 둔 시간이 벌써 6 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아이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모두 그를 닮았다고, 똑똑하고 영특하다 칭찬했지만, 그는 가끔 에드먼드를 마주할 때면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정말 날 닮은 것인가, 하는 그런 묘한 느낌.
분명 자신과 똑같은 눈과 머리카락 색을 가지고 있는데 에드먼드는 자랄수록 낯선 느낌이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게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폐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도록 할게요.”
에드먼드가 짐짓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어린 황자의 다부진 다짐이 귀여운 듯 시종들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무리하진 말거라. 아프면 네 어머니가 걱정하니까.”
그저 기계적인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네, 아버지.”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는 에드먼드를 보던 레이몬드의 가슴에 죄책감이 스쳤다.
내가 부성이 없는 사람인 걸까.
돌이켜 보면 그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선황은 그를 자식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죽이지 못해 겨우 살려놓은 자식이 바로 레이몬드였다.
<i>‘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내가 명예가 더럽혀지진 않았을 텐데! 하룻밤의 실수가 이렇게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i>

시녀도 아닌 하녀와의 하룻밤으로 생긴 자식을 폐황은 늘 수치스러워 했다.

<i>‘끈질기게도 살아남는 것이 아주 저 기생충 같구나!’</i>

끝없는 모욕과 함께.


말을 하면 말을 했다는 이유로, 움직이면 움직였단 이유로. 아니 그저 숨을 쉰다는 그 자체로 수없이
폭언을 듣고 맞았었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배우지도 못하게 했었다.
덕분에 하녀들에게 귀동냥으로 스스로 글을 뗐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애정이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것이었고 아버지란 존재 자체가 그저 비참한 고통이었다.

<i>‘걱정하지 마. 레이는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야. 난 레이가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는 걸


믿어.’</i>

순간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엘리야의 말이 떠올랐다. 불러가는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짓던 그녀의 모습.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더라면……. 지금 에드먼드와 비슷한 나이였겠지.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와 떠나버린 그녀가 떠오르자 억지로라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에드먼드, 늦었으니 이만 가서 쉬어라.”
“네, 아버지도 일찍 주무세요.”
에드먼드는 방긋 웃고는 시종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모두 나가 있거라.”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레이몬드는 무너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40 화

<i>‘아이의 이름은 별의 뜻을 가진 게 좋지 않을까? 난 우리 아이가 항상 밝게 빛나는 웃음만 지었으면


좋겠거든.’</i>
<i>‘아이가 널 닮았으면 좋겠어.’</i>
<i>‘레이, 아들이 좋아, 아니면 딸이 좋아?’</i>
<i>‘레이, 이것 봐. 오늘 만든 아기 옷이야. 너무 귀엽지 않아?’</i>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아이를 잃기 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던 엘리야의


얼굴이 선명했다.
“……널 그렇게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갑작스럽게 죽은 아이에 그도 정신이 없었다.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행동은
어린아이처럼 서툴기만 했다.

그의 어설픈 위로에 엘리야의 상처가 더 깊어질까 물러난 것이 지금은 잘못된 것이란 걸 알았다.
과거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6 년 동안의 기억을 되짚어갈수록 엘리야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리야가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욕을 하고 때려도 좋으니 제발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진 않길 바랐다.
집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엘리야.”
답이 없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 레이몬드는 숨 막히는 그리움에 입술을 짓씹었다.

* * *
“엄마, 엄마 저기 보세요! 새가 다 같이 날아가고 있어요!”
칼라일의 목소리에 바다를 보며 상념에 감겨 있던 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들자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새의 무리가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한지 눈이 커진 칼라일이 외쳤다.
“우리처럼 가족들끼리 여행을 가는 건가 봐요!”
순수한 아이의 발상에 심각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난 차가운 바닷바람에 칼라일이 추울까 봐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게. 칼라일도 엄마랑 헬란이랑 여행가니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한껏 들뜬 칼라일의 얼굴이 한없이 밝았다.
당당히 돌아다니지 못하는 처지인 데다 상단 일 덕분에 바빠 가까운 곳조차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었다.
그래서일까. 에그리타 제국으로 여행을 간다는 말에 칼라일은 예상과 달리 매우 기뻐했다.
너무 기대된다며 웃으며 방을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진작 여행을 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릴 정도였다.
“칼라일, 우리 다음엔 저기 대륙 서쪽에 있는 사막 왕국에도 가 보자. 그곳은 여기보다 엄청 덥고 또
해가 지지 않는 곳도 있데.”
“우와! 꼭 가 보고 싶어요!”
“응. 꼭 가자.”
칼라일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눈이 다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칼라일 님, 아이스크림을 사 왔어요.”
잠시 아이스크림을 사러 배 안의 상점에 다녀온 헬란이 돌아왔다.
“엄마, 저기에서 다른 애들이랑 같이 먹어도 돼요?”
갑판 위에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일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쪼르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마도구를 이용해 금발과 보랏빛 눈동자가 된 칼라일은 튀지 않고 아이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칼라일이 더는 나를 돌아보지 않자 난 힘주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내일 아침이면 에그리타 제국에 도착할 것 같아요.”
“하아.”
에그리타 제국이 가까워질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버지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걱정은 되지만
그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칼라일이었다.
한동안 칼라일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이었다.
“엘리 님, 걱정하지 마세요. 칼라일 님은 의젓하시니까, 저랑 잘 있으실 거예요.”

<i>‘헬란이랑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 워요! 형들이 그랬어요, 엄마 없다고 울면 아기라고 칼라일은 이제


아기 아니잖아요!’</i>

한동안 같이 있지 못한다는 말에 칼라일은 씩씩하게 말했었지만 그래도 걱정되었다.


칼라일이 태어나고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헬란, 혹시라도 칼라일이 아프거 나 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바로 공작가로 데려
와.”
“네, 그럴게요.”
헬란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근데 전 사실 칼라일 님보다 엘리 님이 더 걱정이에요. 공작가의 상황도 그렇고……. 폐하께서 엘리
님을 계속 찾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원래는 공작가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공작가에 황제의 기사들이 깔려 있어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바로 저택으로 가면 기사들이 바로 내가 돌아왔다고 황제에게 알릴 거고 그럼 제국에도 소문이 날
것이다.
아버지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선 조용히 움직여야 했기에 당분간은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폐하께선 내가 제국을 떠난 줄 아시니 제국 밖을 살피고만 있으셔. 오히려 제국 안이 더 안전할
거야.”
“근데 폐하께선 왜 그리 엘리 님을 찾으시는 걸까요.”
레이몬드와 나의 결혼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헬란이었다. 레이몬드의 무심함을 곁에서 봤기에
나만큼이나 그의 이런 집착 같은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어차피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 한 번은 폐하를 만나야 하니까.”
재판이 열리면 내가 돌아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이다. 레이몬드와의 만남도 피할 수 없었다.
“……공작 각하의 누명을 벗기고 다시 제국을 떠날 수 있을까요?”
헬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아버지의 일을 해결한 뒤 칼라일과 다시 조용히 제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레이몬드가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 같았다.
내가 떠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 아직도 나를 찾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6 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말이다
레이몬드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최악의 경우 칼라일과 그의 만남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난 아이들과 웃으며 노는 칼라일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일단 지금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것만 생각할 거야. 그리고 만약 못 떠나게 된다 해도……. 지금과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난 엘리야 크로프트로 살 것이고 칼라일도 내 성을 따르게 될 것이다.
난 어느덧 해가 지면서 붉어져 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에그리타 제국으로 도착할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 * *

룬트 왕국에서 출발한 배가 에그리타 제국의 작은 항구에 정착했다.


수도와 멀지 않은 작은 영지인 소니아 영지였다. 이른 새벽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리고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다.
잠든 칼라일을 안은 난 헬란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엘리 님, 저 사람인 거 같아요.”
헬란이 손끝으로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적갈색 머리칼을 말끔하게 넘기고 외알 안경을 쓴 젊은 남자였다. 초상화 속의 그림과 똑 닮은 남자는
서신에 적어놓은 대로 푸른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래, 맞는 것 같네.”
로브를 모자까지 꾹 눌러쓴 나와 헬란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우리를 보고 멈칫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다
가왔다.
“……엘리 님, 맞으신가요?”
“맞네.”
칼라일을 고쳐 안은 난 그에게 얼굴을 보였다. 마법 팔찌를 착용하지 않고 있기에 내 원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피닉스 상단, 에그리타 제국 지부장 루몬트. 그는 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그리타 제국의 사람이었다.
제드에게 미리 연락을 받고 내가 누구인지 다 들었음에도 직접 보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엄청나게 긴장하였는지 차가운 밤바람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루몬트 맞는가?”
떨리는 눈동자로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묻자 루몬트가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리, 님.”
무의식적으로 황실에 대한 예를 갖추려 무릎을 굽히던 그가 엉거주춤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한적한 시간이긴 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꽤 있었고 더군다나 난 황후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곤 내게 묵례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이쪽은 헬란, 나의 보좌관이네.”
“아, 반갑습니다. 헬란 님.”
“반갑습니다. 루몬트 님.”
헬란과 루몬트가 서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루몬트는 어딘가 정신이 팔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에그리타 지부장이 우리 피닉스 상단 지부장 중에 나이는 제일 어린데 일은 제일 잘해. 수완도 좋고 머리
회전도 빨라서 믿을 만한 놈이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던 제드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똑똑하다더니……. 영 아닌 것 같은데.
난 여전히 망부석처럼 선 루몬트에게 입을 열었다.
“루몬트. 계속 이렇게 서 있어야 하나?”
“앗, 죄송합니다. 실제로 뵈니 제가 너무 놀라서……. 송구합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 루몬트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난 칼라일을 고쳐 안으며 헬란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루몬트가 마차에 오르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은 다 준비되었는가?”
“예. 남작 가문 한 곳이 몰락하면서 급히 내놓은 수도 외곽의 매물을 매입해 뒀습니다. 내부는 잘 꾸며
놓았으니 불편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좋은 곳을 잘 얻었군.”
가문이 망하면서 내놓는 저택은 부정을 탄다고 하여 내놓아도 팔리기는커녕 그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귀족들의 눈을 피하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그저 외곽이 아니라 몰락한 귀족의 저택을 구한 걸 보면 그리 멍청하진 않은 거 같기도…….
첫인상보다 조금쯤은 나아 보이는 것 같았다.
“한데,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요?”
루몬트가 내 품 안에서 잠든 칼라일을 힐끗 보며 물었다.

41 화

또 다른 상단주라는 것까진 다 얘기했지만 칼라일에 대해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모를 만했다.


“내 아이야.”
“아, 엘리 님의 아이셨…… 네?!”
고개를 끄덕이던 루몬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큰 목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는지 잠든 칼라일이 움찔할 정도였다.
“깜짝이야……. 루몬트 님, 아이도 있는데 목소리를 낮춰주십시오.”
헬란이 한마디를 하자 루몬트가 머쓱한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 말을 잘못 들어서요. 어제 너무 긴장해 잠을 좀 설쳤더니. 하하…….”
“잘못 들은 게 아니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맞네.”
루몬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히 보였다.
“그리 놀라지 말게. 황제 폐하의 아이가 아니니까.”
“……네?”
“폐하와 난 이혼했네. 그리고 난 룬트 왕국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 지. 그 사람과의 아이일 뿐 폐하와는
아무런 관련 없어. 허니 이상한 추측은 삼가시게.”
“아……. 네, 알겠습니다.”
내 말이 영 믿기지 않는 듯 루몬트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그리고 품 안에 안긴 칼라일을 힐긋힐긋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데려와서 칼라일을 숨기고 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몸을 틀어 칼라일을 보여주었다.
황족의 상징인 검은 색과는 정반대인 반짝이는 금발. 나와 똑 닮은 보랏빛 눈동자.
칼라일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출발하기 전 제드가 가져온 새로운 작은 마도구로 완벽히 바뀌어 있었다.
아주 작은 귀걸이로 만들어진 마도구라 다른 사람들은 칼라일이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카락 색도 너무 달랐고 체구도 또래보다 작은 칼라일이었다.
그제야 루몬트도 내 말을 믿었는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한 듯합니다.”
루몬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리며 우리에게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 * *

“으음, 엄마…….”
“응. 엄마 여기 있으니까, 안심하고 더 자. 칼라일.”
침대에 조심스럽게 칼라일을 내려놓은 난 이불을 덮어주고 깨지 않게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미간을 조금 좁히던 칼라일은 곧 빠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난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가자 짐을 정리하고 있던 헬란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시게요?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야. 헬란. 피곤할 테니까 짐은 나중에 하녀들에게 맡기고 좀 쉬어.”
“엘리 님도 좀 주무세요. 배에서 거의 못 주무셨잖아요.”
“난 괜찮아. 그보다 칼라일이 일어나면 좀 봐줘. 난 루몬트와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로브를 벗은 난 제드에게 새롭게 받은 마법 반지를 꼈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평범한 갈색으로 바뀌고 얼굴 생김새도 조금 달라졌다.
한동안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날 위해 제드가 좀더 신경 써서 만든 마도구였다. 이걸 급히 만드느라
마법사들을 엄청나게 쪼았다고 했었지.
로비로 내려가자 하녀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루몬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몬트.”
“……엘리 님?”
“맞네.”
바뀐 내 모습을 처음 본 그는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옷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음, 집무실로 가시죠.”
거기, 너 차를 가져오거라. 하녀 한 명에게 지시한 그는 나와 함께 1 층 집무실로 향했다.
“큼……. 집무실은 별로 사용하지 않으실 것 같아 크게 꾸미지 못했는데, 죄송합니다.”
말마따나 귀족가의 집무실이라고 하기엔 책상도 책장도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소파와 테이블이 처량해
보이긴 했지만, 딱히 오래 머물 곳도 아니라 상관없었다.
“괜찮네. 신경 쓰지 말게.”
먼저 자리에 앉자 루몬트도 맞은 편에 자리했다.
이윽고 들어온 하녀가 테이블 위로 차를 내려놓고 나가고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루몬트, 날 공작가에 하녀로 좀 넣어 주게.”
“켁! 네? 하녀요?”
막 차를 마시려던 그는 사례가 걸린 듯 잔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한동안은 쥐죽은 듯이 지내야 했지만, 막상 제국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걱정되어 마음이 불안했다.
재판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상황이 적힌 보고서에 그저 공작성에 구금되어 계신다는 것뿐이었다.
행여 아프신 건 아닌지 잘 버티고 계신 것인지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 그게……. 지금은 좀 쉽지 않습니다. 황실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요.”
루몬트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식자재나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들키시면 기사들이 황제 폐하께 바로 고할 겁니다.”
“지금 내게서 진짜 얼굴이 보이는가?”
루몬트는 바뀐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실눈을 뜨고 눈코입을 세세하게 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들키진 않을 거 같긴 한데……. 흠, 그럼 제가 일단 식재료가
들어가는 상단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고맙네. 최대한 서둘러 주게. 그리고 사건에 대해 더 알아낸 것은 없는가?”
“아, 지금 바로 보실 건가요? 좀 쉬시지 않고요?”
“보면서 쉬면 되네. 주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잠시 집무실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는 서류 한 뭉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일단 사라진 사막 상단에 대한 정보들과 사기 사건의 자세한 내막이 적혀 있습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그럼 전 내일 이른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루몬트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난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사막 상단이 제국에 들어온 시점부터 사라진 날까지의 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서류의 모든 내용을 외울 만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종이를 내려놓은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드에게서 받았던 보고서와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모든 증거가 짜맞춘 듯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고
사막 상단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의 밑에서 사막 상단과 직접 만나며 거래를 했던 메타스 자작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최악인 건 메타스 자작의 유서 또한 발견되었는데 그 유서엔 모든 일은 아버지가 시킨 것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메타스 자작…….”
난 낯선 이름을 입 안에 굴려 보았다.
아버지의 모든 보좌관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측근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함부로 내치는 성격이 아니셨기에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는 자들은 십 년이 흘러도 거의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모른다는 건 내가 제국을 떠난 뒤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단 뜻일 것이다.
몇 년 되지 않은 사람에게 4000 골드나 걸린 큰일을 왜 맡기셨을까.
여기 적힌 정보들에 따르면 아버지가 메타스 자작에게 사막 교역권을 거의 일임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메타스 자작이 올린 모든 서류에 아버지의 인장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특히 4000 골드라는 계약금을 일시에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서류에 말이다
이 서류 때문에 아버지가 의심을 크게 받은 듯했다.
계약금은 일시에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금액이 크면 더욱 돈을 나누어 주었다. 큰 무역 건일수록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10 년간 제국의 외무부의 수장으로 있으셨던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사원들에게 그런 서류에 인장을 찍은 적이 없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서류에 찍힌 인장을 마법으로 확인해 본 결과 위조된 흔적은 없었다. 하여 아버지의 말은 궁지에
몰려 뱉은 거짓으로 치부되었다.
“인장을 대체 어떻게 찍은 걸까.”
난 당연히 아버지가 서류에 인장을 찍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장을 훔친 걸까.
일단은 루몬트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뭔가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서류들에 적힌 정보들에 당사자인 아버지의 말이 담겨있진 않았으니까.
끼이익-
“엄마.”
또랑또랑한 칼라일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난 문으로 고개를 들었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엄마, 들어가도 돼요?”
“당연히 되지. 이리 와.”
칼라일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씨익 미소를 지은 칼라일이 뛰어왔다.
소파 위로 폴짝 올라온 칼라일이 품에 안겼다.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애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더 자지.”
“일찍 아닌데. 벌써 해가 엄청 높이 떴어요.”
칼라일의 말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류를 보고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흐른 건지 오후가 된 지
한참이었다.
“칼라일, 배 안 고프니?”
“배고파요. 엄마는 배 안 고파요?”
칼라일이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온 듯했다.
복잡한 일들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 난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도 배고파.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네! 어서 가요! 헬란이 식당에서 기다린댔어요!”
신이 난 듯 외치는 칼라일을 보며 미소를 지은 난 칼라일을 손을 꼭 잡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 *
깊은 밤이 찾아온 에그리타 제국의 황성.
경비대를 제외하곤 황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잠든 새벽 시간이었다.
본궁의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침실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42 화

“윽, 안……돼!”
비명 같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눈을 번쩍 뜬 레이몬드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놀란 시종이 황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다.”
“의원을 부를까요?”
레이몬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본 시종이 걱정스러운지 물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의원을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예, 폐하.”
시종은 망설이다 침실을 나갔다.
그는 협탁에 놓인 물을 단숨에 들이마신 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또 악몽이군.”
엘리야가 떠난 뒤 악몽의 주기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무력한 어린 자신.
꿈에서 깼음에도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이 지독한 어릴 적의 기억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옅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한 번씩 이렇게 꿈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이런 날은 다시 잠들어도 악몽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i>‘레이, 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자.’</i>

엘리야는 그가 악몽을 꿀 때마다 항상 곁을 지켜주었다.


방 안에 촛불들을 밝히고 그녀가 손을 잡아주면 이상하게도 더는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날은 신기하게도 다시 잠들어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곁엔 엘리야는 없었다.
“……넌 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이몬드는 만월이 뜬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리야가 떠난 뒤 그는 매일 매일 저 별을 바라보곤 했다. 엘리야도 어디에선가 저 별을 보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보고 싶어.”
수백 번은 반복한 말을 나직하게 내뱉은 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엘리야의 얼굴과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레이몬드는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동이 텄을 때.
조심스럽게 침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레이몬드는 시종의 말에 눈을 떴다.
“들어와.”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시종과 시종장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그럼 세안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됐다. 내가 하지.”
부드러운 천을 밀어낸 레이몬드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폐하, 요새 통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으시는 것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괜찮다.”
“이러다 몸이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시종장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닦은 천을 시종에게 건넨 레이몬드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몸이 안 좋다 하였는데…….”
이틀 전 보고를 하러 온 4 기사단의 기사가 그리 말했다. 크로프트 공작의 몸이 좋지 못하다고 말이다.
공작가의 의원이 진료를 보고 치료를 한다고 하여 황궁의를 보내진 않았지만, 갑자기 떠올랐다.
밤새 엘리야를 생각해서일까. 크로프트 공작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봐야겠어.
왜인지 공작을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았다.
“폐하, 옷 시중을 들겠습니다.”
황제의 의복을 가지고 온 시종에게 말했다.
“로브를 가져오거라. 잠시 황궁을 나갔다 와야겠다.”
“……예, 폐하.”
가벼운 옷에 짙은 색의 로브를 걸친 레이몬드는 공작의 상태를 직접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 황성을
나섰다.

* * *

어두운 밤하늘이 지나가고 푸른 여명이 밝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이었지만 상단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침이 완전히 밝기 전에 각 귀족의 저택으로 신선한 식재료를 전해야 배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크로프트 공작가로 향하는 식재료 마차엔 내가 앉아있었다.

<i>‘어떻게 자리를 마련하긴 했지만, 검문에서 막힐 수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신다면 일단


돌아오십시오.’</i>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나간 루몬트는 이른 아침 바로 방법을 찾아왔다.


며칠은 걸릴 것이라 예상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내게 루몬트는 허름한 옷을 내밀었다.

<i>‘상단에서 일하는 자가 입는 옷을 가져온 것입니다. 머리도 묶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최대한


평범하게.’</i>

섬세한 충고까지 덧붙여주면서 말이다.


“제드의 말이 맞았어.”
조금 덜떨어져 보였던 첫인상은 잊은 지 오래였다.
루몬트는 제드의 말대로 상당히 수완이 좋고 에그리타 제국 내에서도 발이 넓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큰 상단주라 해도 하루도 채 되지 않고서 날 공작가에 몰래 넣을 자리를
마련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공작가의 식재료를 넣는 상단은 피닉스 상단도 아니었으니까.
“멈춰라.”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크로프트 공작가에 도착한 것이었다.
“식재료를 배달하러 왔습니다.”
“검문할 것이니 기다려라.”
상인과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짐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긴장으로 손을 꽉 그러쥔 그때, 짐칸을 가린 작은 커튼을 기사가 들추었다.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기사의 시선이 마차 안에 앉아있는 나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아, 새로 들어온 상단의 일손입니다. 원래 일하던 그 붉은 머리의 아이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지 뭡니까.”
상인이 다가와 설명했지만, 기사의 시선은 날카롭게 나를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시선에 기분이 나쁘기보다 긴장감으로 등줄기에 땀이 찼다.
“그, 뭐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상인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기사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내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설마……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다. 그랬다면 상인도
경악했을 것이다.
그럼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난 지금 제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였다.
거기다 얼굴의 생김새까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나조차도 거울 볼 때마다 낯설 정도인데 한낱 기사가 날
알아볼 가능성은 희박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순간, 기사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 내 사촌 동생과 많이 닮아서 나도 모르게 실례했군. 이상 없어 보이니 들어가도 된다.”
“아, 하하……. 네, 감사합니다.”
상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커튼을 내렸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자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촌 동생과 닮았다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흘렀지만, 덕분에 긴장도 쉽게 풀렸다. 성문을 넘은 마차는 곧 저택 앞에서 멈췄다.
난 마차에서 내려 상인과 함께 식재료를 내려놓았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은 성문을 통과해서인지 별달리
제지하지 않았다.
“모두 신선하군. 이것들로 하겠네. 여기 값을 받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하녀장이 작은 주머니를 상인에게 건네고 있었다.
헤리스.
오랜만에 보는 헤리스의 얼굴이 많이 수척했다. 공작가의 상황이 최악이니 사용인들의 얼굴이 밝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안으로 식자재를 옮겨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순간 나를 향하는 헤리스의 눈빛에 고개를 숙인 난 상인과 함께 식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의 문을 연 난 순간 멈칫했다. 아침을 준비하는 귀족가의 주방이라기엔 너무도 휑하고 고요했기
때문에.
“채소들은 거기 놔두면 되네.”
지나가는 하인이 그리 말했다. 난 채소 상자를 내려놓으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방의 인원도 많이
줄어든 듯했다.
공작가가 망한다는 이야기에 아랫사람들에게까지 돈 것일까.
저택의 상황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리, 이쪽으로 와서 이것 좀 같이 옮겨.”
그때 주방 안쪽에서 상인이 나를 불렀다. 상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쪽 문으로 나가게나.”
상인은 내가 저택 안에서 일하는 하녀의 가족으로 알고 있었다, 출입이 통제된 공작가라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몰래 잠입한 것으로 말이다.
주방 하인들의 동태를 살핀 그가 내게 지금 나가라며 눈짓했다.
“너무 늦지 말고 빨리 와야 하네.”
식자재를 정리하고 떠나야 했기에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작은 문을 열고 주방을 나갔다.
누군가를 마주치면 어쩌나 극도로 불안해하며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랐지만 행한 저택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 몇 명이 저택을 도는 것을 빼곤 저택 사용인들의 절반이 나간 거 같았다.
공작의 침실 앞.
주변을 둘러본 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아버지, 저에요. 엘리야.”
커튼이 쳐진 방안에 아버지 홀로 계셨다.
침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흐릿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수척해진 얼굴과 마른 몸.
나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버지는 경계 서린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팔목에서 마법 팔찌를 찾는 듯했지만 난 마법 팔찌가 아닌 반지를 끼고 있었다.
“엘리야라고……?”
마법 반지로 모습을 바꾸었다곤 생각지 못한 아버지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난 곧장 반지를 뺐다. 갈색 머리칼이 은발로 바뀌고 갈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내가 진짜 엘리야라는 것을 알아본 아버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43 화

“정말 너였구나…….”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어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자 얼마나 살이 빠지신 건지 뼈대가 느껴질 정도였다. 사건이 터지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아버지가 돌연 손을 밀어냈다.
“엘리야,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돌아온 것이 알려지면 너까지 위험해질 것이야.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 떠나거라.”
그리움에 눈가가 붉어지던 것도 잠시. 아버지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안 돌아가요. 아버지가 이런 상황이신데 어느 자식이 외면할 수 있겠어요.”
“엘리야, 지금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문이 멸문할 수 있어. 게다가 칼라일은 어쩌려고!”
“칼라일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감싸고 눈을 맞춘 채 말했다.
“저희 가문, 제가 지킬 거예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라고요.”
“네가 무슨 수로…… 아니, 너 내게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거로구나.”
아버지에게 피닉스 상단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저 룬트 왕국에서 작은 꽃집을 하며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가늘어진 눈빛으로 나를 보던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 안 된다. 위험해. 이건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걱정 마세요. 절대 누구도 위험해지지 않아요. 제게 다 계획이 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니?”
“설명해 드리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지금은 아버지가 괜찮으신지 보러 온…….”
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고 말하던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순간 내
몸도 뻣뻣하게 굳었다.
반지를 뺀 상황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본다면 정체를 들킬 것이다. 만약 지금 들어온 사람이 기사라면…
….
“각하, 노크 소리에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하르펜.”
들어온 이는 방 안에 있는 낯선 이의 모습에 당황하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졌다.
“……아가씨?”
“하아……. 다행이다.”
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정말 다행히도 갑자기 들어온 사람은 기사가 아니었다. 공작가의 충성스러운 가신인 의사 하르펜이었다.
칼라일의 존재도 숨겨 준. 아버지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있는 그에게 난 미소를 그렸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가씨께서 어떻게 이곳에…… 아니, 정말 엘리야 아가씨가 맞는 것입니까?”
그는 믿기지 않는 거 같았다.
“응. 나 맞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듯 후, 숨을 내쉰 하르펜은 불안한 얼굴로 황급히 문을 닫았다.
“이곳에 몰래 들어오신 겁니까?”
“응. 아버지가 걱정돼서 왔어. 하지만 이제 돌아가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아서.”
“어떻게 황제 폐하의 기사들이 깔린 곳에 몰래 들어오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들키시면 어쩌려고요.”
“걱정하지 마.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까.”
난 보란 듯이 반지를 다시 꼈다. 눈앞에서 모습이 바뀌자 하르펜과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설마하니 이렇게 작은 반지가 마도구일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하긴 제드가 건네준 반지와 작은 귀걸이를 보았을 때 나도 딱 이런 반응이었지.
“아버지 저 이만 가 볼게요. 이렇게 몰래 또 오는 건 무리겠지만 편지를 보낼 방법이 있을지
찾아볼게요.”
오래 있기엔 너무 위험했다. 아버지가 무사하신 걸 눈으로 확인했으니 지금은 돌아가야 했다.
“엘리야, 내 걱정은 말고……. 제발 위험한 일은 하지 말거라.”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은 난 하르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하르펜, 아버지를 잘 부탁해.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아가씨.”
난 불안한 눈빛의 두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 말한 뒤 방을 나갔다.
복도에 사람들이 없어 주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진 않았다.
몰래 나왔던 작은 문으로 들어가자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초조한 상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니네. 어서 가지.”
말은 아니어도 엄청 불안했는지 나와 함께 주방을 나가자 하얗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나도 아버지를 뵌
덕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내 안일함을 지적하듯 저택 로비로 나온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앗, 죄송합니…….”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난 막 로비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상자를 주우려 한 순간, 목에서 차디찬 쇳날의 감촉이 느껴졌다.
“헉……!”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에 닿은 것이 잘 벼려진 검날이었던 것이다.
“감히 폐하께 몸을 부딪히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차가운 쇠의 감촉도, 기사의 서릿발같은 목소리도 아닌, 폐하라는 두
글자에.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는 무감한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몬드.
정말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말을 타고 온 듯 샹들리에 아래로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수려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6 년 만에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고개를 드는 것이냐, 정말 죽고 싶은 것이냐.”
칼끝이 목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제야 내가 레이몬드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빌려고 한 순간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잠깐. 칼을 치워라.”
“네? 하오나, 이자는…….”
레이몬드의 명령에 당황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민이 황제에게 몸을 부딪힌 것도 모자라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라 명해도 아무도 반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칼을 치우라니.
“너, 고개를 들어.”
내게 하는 명령이었다. 그의 짧은 명령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왜…….
무언가를 알아챈 것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고개를 들라 했다.”
돌처럼 굳은 내 머리 위로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난 움직이지 않는 목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무감했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거처럼.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안에 땀이 찼다.
“너, 다시 말을…….”
“폐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공작.”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가 울리고 곧 내 옆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인사는 됐으니 그만 일어나게.”
레이몬드의 몸은 이제 아버지에게로 완전히 틀어졌다.
“폐하, 저택에 갑자기 어쩐 일이신지요.”
“그대의 몸이 좋지 않다 하여 걱정이 되어 왔네. 헌데…….”
레이몬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고저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레이몬드의 집요한 시선이 내게서 완전히 거두어졌다.
“아니네. 그 여인은 놓아줘라. 공작, 자네는 올라가서 나와 얘기를 좀 하지.”
“네, 폐하.”
황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레이몬드와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도 멀어졌다.
“아이고, 황제 폐하라니……. 자네 괜찮은가?”
상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걸음 떼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비틀거렸다.
그를 다시 만날 거란 각오는 하고 돌아왔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더욱 차가워지고 싸늘해진 그의 분위기와 눈빛. 그리고 변한
것이 없는 수려한 얼굴.
뒤늦게 그의 모습들이 하나씩 다시 떠올랐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이건 그를 향한 사랑이나 설렘으로 뛰는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 불러일으킨 것은 아직 그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조바심과 어마어마한 불안감일
뿐이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상황이 극한으로 몰린 지금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움직여야 했으니까.
가장 눈에 띄는 황제인 그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요, 가시죠.”
혹시라도 그가 다시 내려오기 전에 난 서둘러 저택을 나갔다.

* * *

“공작, 살이 많이 빠졌군.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레이몬드는 수척해진 공작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공작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그런 말을 하실 처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야 그렇다 치고, 폐하께서는 어찌 안색이
그리 좋지 못하십니까. 근래에도 잠에 잘 들지 못하십니까.”
“……그대가 이런 상황인데 내가 두 발 뻗고 자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저 때문이시라고요.”
떠보는 듯한 공작의 말에 레이몬드가 되받아쳤다.
“엘리야 때문이라 하면, 어디 있는지 알려 주기라도 할 건가.”
역시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되시면…….
크로프트 공작은 한숨을 숨기며 차분히 말했다.
“폐하, 이미 끝난 인연입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고요.”

44 화

“…….”
레이몬드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스스로 그를 떠났으니까.
이 관계에서 미련하게도 손을 놓지 못한 것은 아마 자신뿐일 것이다.
그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에그리타 제국으로 돌아왔을 테니까.
“폐하, 이제 그만 엘리야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놓아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레이몬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차라리 제발 용서해달라 황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빌지언정 엘리야를 포기할 순 없었다.
엘리야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 이젠 내 모든 게 되어버렸거든.”
아니 처음부터 전부였을 것이다.

<i>‘이번에는 말이야. 널 졸졸 따라다니는 그 멍청한 은발 머리를 죽여볼까 해.’</i>

리제나가 떠났을 때도 황태자를 죽이고 싶단 생각은 못 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그의 모든 걸 바꾸어


놓았었다.
황족 중 그의 칼 아래 가장 잔인하게 죽은 것은 황태자였다.
그때는 그저 분노했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멍청하게 깨닫지 못하고.
“…….”
“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군. 지금은 그대의 상황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레이몬드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자 공작도 더는 그에 대해 더 생각지 않았다.
공작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귀족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들었습니다. 재판을 언제까지고 미루시면 안 됩니다, 폐하.”
공작은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 변함없는 태도에 레이몬드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지만, 공작의 이런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재판은 곧 열릴 거네. 그대의 말대로 더는 미루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허니 몸의 회복에 집중해. 지금은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관짝에 먼저 들어갈 기세군.”
“폐하께서야 말로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대체 가능한 폐하의 신하 중 하나일 뿐이지만,
폐하께서는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가 아니십니까.”
그는 눈 깜빡 한번 하지 않고 레이몬드를 향해 말했다.
“이 와중에도 잔소리하는 걸 보니 곧 털고 일어나겠군.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재판 일정이 잡히는 대로
알려 주겠네.”
“예, 폐하.”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변호사는 이미 내가 물색해 놨네. 혹시라도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 재판을 엎어버릴
것이니.”
레이몬드가 협박하듯 말하자 공작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푹 쉬시오.”
레이몬드는 예를 갖추려는 공작에게 되었다는 듯 손을 휘젓곤 집무실을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그에게로브를 걸쳐 주었다.
저택은 나온 그는 황궁으로 돌아가려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그리고 저택의 로비로 몸을 돌렸다.

<i>‘……죽을죄를 지었습니다.’</i>

그와 부딪쳤던 여자.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 평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이었고 얼굴 생김새도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했다.
처음엔 착각이라 여겼건만, 되짚어 볼수록 그 여자의 목소리가…….
레이몬드는 기립해 있는 4 기사단의 부단장을 불렀다.
“데이빗.”
“네, 폐하.”
“아까 나와 부딪혔던 그 여자 말이다. 저택에 자주 오는 상인인가?”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데이빗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였습니다.”
“오늘 처음?”
“네.”
데이빗은 정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여자에게 무언가 있을 거 같은 느낌.
처음 부딪혔을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빤히 보던 알 수 없는 눈빛과 엘리야를 닮은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지금쯤이면 타국에 있다 해도 크로프트 공작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았다면 엘리야의 성격상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리 없어.”
마법의 가능성을 떠올려 봤지만, 특별한 마법 장신구를 본 기억은 없었다. 더군다나 머리카락이나 눈 색
외에도 외모 자체가 달랐다.
다른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걸까.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데이빗, 그 여자에 대해 알아봐.”
“예, 폐하.”
레이몬드는 크로프트 공작저를 물끄러미 바라본 뒤 다시 말에 올랐다.

* * *

“엘리 님!”
저택으로 돌아오자 마중 나와 있는 헬란과 루몬트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걱정이 심했는지 날 보자마자 어둡던 안색에 화색이 확 돌았다.
“다녀왔어.”
“오, 신이시여.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루몬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아니었나 보네.”
출발할 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얼굴과 정반대의 모습에 피식 웃자 루몬트가
머쓱하게 자신의 볼을 긁었다.
“물론 철저하게 준비하긴 했었지만 만약의 경우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크로프트 공작저는 황제의 기사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는 곳이다. 그곳에 엘리야가 무사히 들어갔
다 빠져나온 것이 천운일 정도로.
“어제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하기도 했고…….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니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각하는 만나 뵈셨어요? 기사들의 경계는 삼엄하던가요?”
이것저것 묻던 헬란이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손은 왜 이렇게 또 차가우세요.”
“긴장해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많이 진정되긴 했지만 레이몬드를 만났던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색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다.
내 얼굴빛을 살핀 헬란의 이맛살이 주름졌다.
“……폐하를 만났어.”
“네?!”
“황제 폐하를요…….”
루몬트와 헬란이 크게 반응했다.
“설마, 지금 같이 오신 것은…….”
루몬트는 경악과 공포가 서린 눈빛으로 황급히 마차 쪽을 살폈다.
“루몬트 같이 왔을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인지 들켰다면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겠지.”
“아, 하긴……. 하하, 폐하께서 저리 누추한 마차를 타고 오실 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루몬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루몬트. 집무실로 먼저 가 있어. 옷 좀 갈아입고 내려갈 테니.”
“네. 엘리 님.”
루몬트가 집무실로 향하고 나도 헬란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도착한 난 허름한 옷을 벗고 청색빛이 도는 편안한 튜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젖은 천으로 간단하게 손과 얼굴을 닦자 은쟁반을 하녀에게 물린 헬란이 다가와 물었다.
“엘리 님, 괜찮으세요?”
헬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괜찮아. 다행히도 폐하께선 내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셨어. 그저 우연히 부딪혔을 뿐이야. 갑자기
그렇게 만날 줄 몰라 놀란 것뿐이지.”
“큰 문제가 없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응. 아버지도 많이 야위시긴 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계신 거 같았어.”
“각하께서 아가씨를 보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랬지. 아버지는 내게 당장 떠나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재판 날짜는 아직 안 나온 거죠?”
“응. 하지만 곧 나오겠지. 더 이상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하시기에는 일이 너무 커졌으니까.”
“모든 게 다 잘 되실 거에요. 전 엘리 님을 믿어요.”
헬란이 밝게 미소를 짓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고마워, 헬란. 근데 칼라일은?”
일어났더라면 분명 헬란과 함께 마중을 나왔을 텐데…….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아, 하긴 아직 이르지.”
거기다 어제 늦게 잠들어 칼라일이 일어나기엔 시간이 다소 빨랐다.
“헬란, 난 루몬트와 상의할 게 있으니까 그동안 칼라일을 봐 줘.”
“네, 걱정 마세요.”
난 헬란은 두고 방을 나갔다.
집무실에 들어서니 하루아침 사이에 새로 바뀐 소파와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책장과 고급 마호가니
책상까지 있었다.
“언제 이걸 다 들인 거야?”
“오늘 아침 엘리님이 잠시 저택을 떠나셨을 동안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이제 한결 집무실 같은 풍경이
되지 않았나요?”
오래 머물 것도 아니라 딱히 이렇게 꾸며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칭찬해 달라는 듯한 루몬트의 표정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훨씬 보기 좋군.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자 루몬트가 찻잎을 우린 티포트을 내 찻잔에 기울였다. 허브차인 듯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긴장을 푸시는 데 좋은 차입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어제 제가 드린 자료들은 전부 살펴보셨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보았지. 자세히 잘 정리되어 있더군.”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사막 상단이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더군. 간자들마냥 흔적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예, 고작 며칠 만에요. 게다가 기사들이 급습한 시각이 새벽이었는데,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으니…….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누군가 기사들이 언제 들이닥칠 것이라 말해준 것이겠군.”
“맞습니다. 기사단에 관한 정보를 알 만한 고위 귀족과 연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상단 자체의 규모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상단 규모?”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45 화

“약 1 년 전부터 이미 사막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규모의 상단이 고작 1 년 전에


세워졌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죠.”
“사람들은 그 뒷배가 크로프트 공작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고.”
루몬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는 계약금 일시 지급 서류에 공작 각하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까요.”
그건 나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마법적 검사까지 거쳤지만 위조의 흔적이 없는 진짜 아버지의
인장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런 일을 실수로라도 저지르실 리가 없는데. 정말 이상해.”
“그렇죠. 공작 각하께서야 원체 청렴하시기로 유명하신 분이니……. 설령 다른 의도를 가지고 벌이셨다
해도, 이렇게 증거를 남기실 정도로 허술하신 분도 아니고요.”
루몬트는 긴말에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증거가 마치 보란 듯이 널려 있는 점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상식 적으로 이런 규모의 사기를 치려면
철저한 증거 인멸이 우선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작정하고 벌이신 일이라면, 증거 따위는 남기시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모두가 그 증거를 들며 아버지의 실각을 주장하고 있다는 거겠지.”
“거기에 인장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검사 결과와 메타스 자작의 유서 때문에…….”
언론은 유서와 인장을 들먹이며 나날이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에 점차 귀족들은 물론이요 제국민들조차 공작에 대해 의심을 키워간 것이다.
“신문사들은 보통 귀족 가문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지.”
사건을 파고들수록, 점차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국의 귀족 중 한 명이 아버지를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루몬트. 아버지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를 가장 많이 낸 신문사를 알아봐. 후원금을 가장 많이 넣는 귀족
가문이 어디인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헌데 대체 인장을 어떻게 빼돌린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아버지는 항상 집무실 금고에 인장을
보관하셨는데 그걸 어떻게…….”
마법으로 인장을 확인했을 때 진짜라고 판명이 났으니 위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찍진 않았지만 빼돌렸든 어쨌든 진짜 인장이 사용되긴 한 것이다.
금고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금고였다. 아버지의 지문이 아니라면 절대 열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금고 안의
인장을 빼돌렸을 가능성은 적었다.
“……음. 그 서류가 올라갔던 날에 외교부에 출근했던 사람들을 알아볼까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면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사관들이 그날 일을 이미 조사했을 텐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겠나?”
“조사관들 앞에선 다들 몸을 사리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이미 공작 각하의 죄가 확실해 보이는
상황이었으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해도 말하기 쉽지 않았겠죠.”
루몬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럼 최대한 조심스럽게 알아보게.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상황이니 다들 몸을 사릴
것이야.”
자칫하단 공범으로 몰릴 수 있을 테니 함부로 입을 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아 그리고 조사하는 김에 갑자기 일을 그만두었거나, 장기 휴가를 내고 영지에 내려간 자가 없는지도
알아봐 줘.”
“그것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메타스 자작 빼곤 전부 아버지 밑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일 거야. 아버지는 자신의 사람을 함부로
내치시는 성격이 아니시니까.”
만약 아버지의 곁에 있는 누군가가 일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은 어떡하고 있을까.
“누군가 어쩔 수 없는 이유에 아버지의 인장에 손을 대게 된 것이라면……. 무언가 엄청난 대가를
받았겠지. 그리고 죄책감에 아버지의 곁을 떠났을 거야.”
“알겠습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엘리 님. 혹시 또 공작가에 잠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더 이상은 위험할 거 같아.”
기사들의 경계도 경계였지만 레이몬드와 마주친 이상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오늘은 운 좋게 넘어가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법 도구가 목소리까지는 바꿔주지 않으니까. 그도 그 때문에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 같았고.
자칫하단 내가 엘리야라는 것을 들킬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완벽한 증거를 찾기 전까진 그에게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들키면 어떻게든 행동의 제한이 생길 테니까.
“대신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냈으면 하는데……. 자네가 수고를 좀 해 줘야겠어.”
“서신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엘리 님을 직접 들여보내는 것보단 훨씬 안전하고 쉬운 길이니까요.”
루몬트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렸다.
“고맙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아, 한 가지 더 있네. 메타스 자작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게.”
메타스 자작.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번 사건의 핵심인 것 같았다.
“그가 어떻게 행정부에서 일하게 된 건지 궁금하군. 사막 상단이나 다른 귀족가와의 접점도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아.”
“메타스 자작이라면 사실 이미 알아보는 중입니다. 상단과 직접 만나 일을 처리한 인물이기도 했고 또
최근에 공작 각하가 모든 것을 시켰단 유서를 남긴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모든 걸 그자가 맡았다니 믿을 수 없군.”
아버지처럼 신중하신 분이 한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모두 맡길 리가 없었다.
“일단 수상한 점은 그의 죽음입니다. 도망을 친 루트를 샅샅이 알아보니 죽기 직전에 제국을 떠나는
배편을 구했더군요.”
“죽기 직전에?”
“예. 죽을 마음을 먹은 사람이 굳이 외국으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지는 않았겠죠.”
루몬트의 말에 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버지를 가리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는 자료를 봤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메타스 자작이 정말 자살을 했을까. 하고 말이다.
메타스 자작은 상단과 공범이었다.
일이 터지기 직전 상단처럼 잠적했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완벽하게 도망 다니고 있던 그가 갑자기
죄책감에 아버지의 이름을 적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도 나와 생각이 같은 듯하군.”
“메타스 자작의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 죽이고 그가 쓰지도 않은 유서를 남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일을 꾸민 배후가 누구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걸세.”
나는 이제 황후가 아니었다. 외척을 견제한다는 이유는 말이 되지 않았고, 공작가의 위상과는 별개로
아버지는 권력에 욕심이 없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실각시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작은 실마리 하나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메타스 자작 말입니다. 가문이 한미하여 자작이란 귀족 작위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돈이 없었는데
클레앙 아카데미를 다녔다고 합니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즘엔 수도에 작은 저택도 하나 매입했고요.”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군.”
“네. 그 누군가를 찾으면……. 어쩌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원자가 이번 일의 배후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귀족 신분은 물론이고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알게 되면 바로 내게 전해 주게.”
“네.”
“그럼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작은 손님이 엘리 님을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죠.”
루몬트가 문 쪽을 힐끗 보며 웃음을 지었다.
작은 손님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난 고개를 돌렸다.
“칼라일이니?”
빼꼼히 열리던 문이 멈칫했다. 몰래 보다가 들킨 것에 당황한 듯했다.
“…….”
“칼라일 괜찮아. 들어와도 돼.”
“엄마…….”
문이 스르륵 열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은 칼라일이 쪼르르 내게로 달려왔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라와 앉은 칼라일은 나를 한번, 눈앞의 루몬트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아, 루몬트는 처음 보는 건가.”
“처음 봤을 때 칼라일 님은 잠들어 계셨으니 절 처음 보실 겁니다.”
루몬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 어린 표정을 한 칼라일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라일 이쪽은 엄마랑 같이 일하는 아저씨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착한 미소에도 경계심이 풀리지 않는지 칼라일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니까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엄마가 그런 말 하는 아저씨는 조심하랬는데…….”
칼라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맛있는 거 준다고 이리오라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단단히
교육했던 것을 떠올린 것 같았다.
“아, 아니, 내 말뜻은 절대 그런 이상한 의도가 아니었는데…….”
루몬트가 당황했으나 칼라일은 이미 가자미눈을 한 채로 내게 찰싹
달라붙어 그를 흘겨보았다.
그에 난 웃음을 터뜨리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라일,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냐. 엄마랑 친한 사람이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제드 아저씨랑 제레미 아저씨처럼요?”
“아……. 응.”
갑자기 튀어나온 제레미의 이름에 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저씨 잘 부탁드려요.”
칼라일은 그제야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루몬트와 칼라일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칼라일이 한 말 때문인지 문득 제레미가 떠올랐다.

46 화

그러고 보니 제레미는…… 계속 그렇게 떠도는 걸까.


떠나기 전 그에게 같이 돌아가자 제안을 했었지만, 그는 내가 떠나는 날까지 꽃집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게 많아 한 번쯤은 그를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인연이 거기까지인 듯했다.
“아, 엘리 님. 칼라일 님과 광장이라도 다녀오심이 어떠십니까. 오늘 광장에 작은 악단이 와서 볼거리가
많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루몬트의 말에 칼라일의 눈이 빛 났다.
“엄마, 엄마. 나 악단 보고 싶어요.”
칼라일이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눈빛으로 날 볼 때면 절대 거절을 말할 수
없다는 걸 아무래도 아는 듯했다.
“그럼 같이 광장에 가 볼까?”
“네!!”
칼라일이 신이 났는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해 뒀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난 함박웃음을 짓는 칼라일을 따라 미소를 그렸다.

* * *

루몬트의 말대로 광장에 작은 음악단이 공연을 한창 하고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음악 소리와 뛰노는 광장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칼라일의 손을 꼭 잡고 아름다운 악기의 선율을 듣던 그때, 칼라일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 저건 뭐예요? 소리가 되게 예뻐요.”
난 칼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악기를 보았다.
“저건 하프라고 하는 거야.”
“되게 크고 멋있는 것 같아요. 저도 나중에 저거 배워 보고 싶어요. 다음에 배워도 돼요?”
“물론이지. 우리 칼라일은 분명 잘할 거야.”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자 칼라일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혔다. 그리고 다시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하프가 정말 마음에 드는 듯 칼라일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건
장난감을 제외하곤 처음이라 난 어린이용 하프를 제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배우고 싶은 걸 배우게 하는 건 나쁘지 않겠지.
근데 음악을 이렇게 좋아하는 건…… 레이몬드를 닮았네.
난 음악을 그렇게 즐기지 않았다. 오페라 공연도 음악단의 공연도 큰 흥미가 없었지만 레이몬드는 즐겨
들었었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가 우아한 왈츠곡은 물론 현악기 연주 곡을 특히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음악을 들을 때면 무감한 그의 얼굴이 느른하게 풀어지곤 했으니까.
어린아이답지 않게 눈길 한번 떼지 않고 집중하고 있는 칼라일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나를 더 많이 닮긴 했지만, 가끔 이렇게 레이몬드를 닮은 사소한 습 관이나 성격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
해지곤 했다.
지울 수 없는 그의 흔적 같아서.
“……!”
무심코 고개를 든 난 음악단 주변으로 다가온 한 여인을 보고 눈이 커졌다.
챙이 넓지 않은 베이지색 모자와 노란빛이 도는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귀족 여성.
모자 아래 금발이 반짝이는 여자는 바로 리제나였다.
그리고 시선을 느낀 듯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칼라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리제나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제야 난 지금 내 모습이 진짜가 아니란 걸 상기했다.
리제나는 그저 평민이 쳐다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못 알아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그녀에게서 칼라일을 숨기려 한 내가 싫기도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벌어질 일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 황궁을,
제국을 떠난 것이니까.
레이몬드 그리고 리제나.
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필 가장 불편한 사람들은 연속으로 만나다니.
오늘은 영 운수가 안 좋은 날인 듯했다.
“엄마 왜 그래요?”
손을 꽉 잡은 것 때문에 칼라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안. 엄마가 나도 모르게 힘을 줬네? 아팠어?”
“아프진 않았어요.”
“아무 일도 아니니까 계속 연주 봐도 돼.”
“네.”
칼라일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도 더 이상 리제나가 있는 쪽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저기 저분 시오스 영애 맞죠?”
“어머, 정말이네요. 마차가 서 있는걸 보니 볼일이 있으셨나 봐요.”
광장에 거의 평민들이긴 했으나 귀족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처에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들도 있었으니까.
간간이 있던 귀족 영애들이 리제나를 알아본 듯했다. 그리고 난 그들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며 멈칫했다.
왜 리제나를 시오스 영애라고 부르는 거지?
내가 떠나고 벌써 6 년이 지났다. 이미 황후 책봉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시오스 영애는 나이도 먹지 않나 봐요. 저렇게 늘 아름다운 걸 보면 말이에요.”
하지만 이윽고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듯 영애가 한 번 더 말했다.
시오스 영애.
리제나 에그리타가 아닌 시오스 리제나. 귀족에게 있어 성은 곧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니 귀족
영애들이 잘못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는 내가 떠나기 전과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윽고 영애들의 대화 내용이 더 들려왔다.
“그러게요. 저렇게 아름다운데 1 황자 전하 때문에 결혼할 수도 없고 말이에요. 왜 폐하께서는 리제나
영애와 결혼하지 않으시는 건지…….”
“아후, 말도 마세요. 황제 폐하께서 리제나 영애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겠다 이미 공식 선언을 하신 거나
마찬가지시잖아요. 결혼을 꺼내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리제나 영애만 불쌍하게
되었죠.”
“폐하께서도 참으로 매정하시지……. 어떻게 리제나 영애를 저리 두실까요. 타국에서 폐하의 자식을 목숨
걸고 낳은 여인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황후 폐하의 자리도 공석이잖아요.”
너무 떠들었다 생각한 건지, 한 영애는 잠시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영애, 말조심하세요. 폐하께서 전 황후 폐하의 이야기에 엄청 민감하시잖아요.”
“뭐, 제가 욕을 한 것도 아닌걸요. 근데 사실일까요? 황제 폐하께서 크로프트 영애를 못 잊어 리제나
영애를 황후에 올리지 않는다는 소문이요.”
순간 엘리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자신을 못 잊었다니. 떠나는 날까지만 해도 날 절대 사랑할 리 없다고 쐐기를 박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한데 날 못 잊었다니.
……말도 안 되는 가십이다.
“글쎄요. 황제 폐하와 크로프트 영애의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 그러실까요?
워낙 차가운 성미이시니 그저 곁을 주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겠죠. 어머, 시간이 너무 늦었네. 이만
가요.”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이 멀어지고 더 이상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난 복잡한 눈빛으로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와 리제나가 당연히 결혼했을 줄 알았다. 하여 일부러 그들의 소식은 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일을 알아보면서도 혹시라도 황후와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노심초사하면서 자료들을 살
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굳이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빠진 레이몬드와 리제나의 사랑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레이몬드도 리제나도 그리고 나도.
광장에 사랑의 아름다움을 담은 연주곡이 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사람들의 입가엔 모두 미소가 맴돌았지만 난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리제나 역시 굳게 입술을 다물고 알 수 없는 얼굴로 음악단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날 찾는 이유와 리제나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은 이유가 같은 걸까.
정말…… 나 때문에 리제나를 황후에 봉하지 않은 걸까.
아냐, 말도 안 되는 말에 흔들리다니 어리석어.
난 이윽고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잡생각을 떨치듯 말이다.
레이몬드가 어떤 마음이든 더 이상 나와 관계없는 일이야.
리제나와 그의 관계가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나와 레이몬드의 관계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우린 이미 끝난 사이이니까.
그렇게 난 음악단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리제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 *

룬트 왕국의 수도 외곽.
노을이 하늘을 집어삼킬 것처럼 불게 타오르고 있던 시간이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지만 술집이 늘어선 거리는 이제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술집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거리엔 용병들과 벌써 술에 취한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익숙한 눈빛으로 스쳐 지나간 짙은 갈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가 골목 안쪽 낡은 문을
열었다.
“아직 영업 전…….”
막 테이블 위에 얹어 두었던 의자를 내리던 거구의 붉은 머리 남자가 멈칫했다.
“제드, 나 맥주 한 잔만.”
로브를 벗어 아무 의자에 걸친 제레미가 바에 앉았다.
제드는 그런 제레미가 익숙하다는 듯 맥주 한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47 화

“테른 왕국으로 간 줄 알았더니. 용병 단장 말로는 네가 그 전장에 나가겠다고 먼저 말했다던데.”


제드는 맥주를 마시는 제레미에게 물었다. 잔을 내려놓은 제레미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려고 했지. 엘리도 이제 여기 없고 내가 더 이상 룬트 왕국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근데…… 막상
떠나려니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
엘리야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아서.
제레미는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제드는 제레미가 누구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야는 제드와 제레미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둘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제레미가 막 용병일을 시작하고 제드가 막 술집을 열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
제드와 엘리야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엘리야가 제드에게 함께 사업을 하자고 했을 때 제드를 믿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제레미였다.
그리고 피닉스 상단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쓸만한 정보들을 물어다 준 것도 사실 제레미였다.
용병단에서 들은 이야기 중 쓸 만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 놈들을 일부러 제드의 술집에 밀어 넣었었다.
그렇게 피닉스 상단은 다른 상단 보다 빠른 정보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드는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엘리야는 몰랐다.
제레미가 비밀에 부쳐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제드는 생각에 빠진 제레미를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정파라니까.
제레미가 엘리야를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제드가 아는 한 제레미는 누군가를 저런 따뜻한 눈빛으로 보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제레미는 엘리야에게 정말 헌신적이었다. 그것도 엘리야가
보지 못하는 뒤에서 말이다. 게다가 제가 한 일을 내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대체 얼마만큼 좋아해야 그게 가능한 거지.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제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드는 사실 언젠간 제레미와 엘리야가 잘되길 바랐었다. 하지만 엘리야의 정체를 알고 난 뒤로는
아니었다. 황제가 전 남편이라니.
그래서 차라리 테른 왕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잘되었다 생각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랬으니 엘리를 멀리하면 제레미도 잊겠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조금도 잊지 못한 듯했다.
제드는 괜히 자신이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얼음물을 들이켰다.
“엘리는 어때? 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이 와중에 그게 왜 궁금해. 제레미 있지 나 한때는 네가 엘리야와 잘 되길 바랐는데 이젠 아니야.
엘리야는……, 아니 설마 넌 처음부터 엘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면서 마음에 품은 거냐?”
생각해 보면 제레미가 엘리의 신분을 몰랐을 리 없다.
제레미의 정확한 신분은 몰라도 에그리타 제국의 사람이란 것과 귀족인 것은 제드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뭐가 중요해. 그리고 따지고 보면 황제보다 내가 먼저
만났어.”
아주 오래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만남이겠지만.
그리고 과거의 만남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그녀의 전남편이 황제라는 건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룬트 왕국에서 그녀의 곁에서 지낸 시간이 6 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를 향한 제레미의 마음은 옅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졌다.
과거엔 사랑보단 동경에 가까운 대상이었다면 이젠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뭐?”
“그냥 내게 그 사람의 신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단 그 말이었어.”
제드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을 했지만 제레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드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줘. 엘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크로프트 공작의 상황도 최악일 텐데 황제까지 그녀를 쫓고 있었다. 제국에서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
걱정되었다.
“잘 지내고 있어. 아직 황제에게 들키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백방으로 증거를 찾고
있다더라. 그러니까 걱정 말고…… 네 갈 길을 가는 게 어떠냐.”
“내가 말했잖아. 내 갈 길로 가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돌아왔다고.”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뭐 제국으로 가서 엘리를 두고 황제랑 맞붙기라도 할 거냐?”
“뭐……. 그럴까?”
제레미가 피식 웃자 제드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미친놈을 보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야. 황제가 엘리를 계속 찾고 있다며. 이혼한 지가 벌써 6 년인데 지치지도 않고 말이야.”
“…….”
“아직 마음이 남아있다는 거지. 황후 자리까지 아직 공석이라는데 그게 왜 그렇겠냐? 거기다 칼라일이…
… 있다고.”
제레미는 푸스스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다.”
“웃음이 나오냐? 남 얘기가 아니라고. 지금 네 얘기 하는 거야.”
입가에 웃음이 넘치는 제레미 때문에 제드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심각한 그의 얼굴에 제레미도 입꼬리를 내렸다.
“제드, 난 그냥 내가 엘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야. 뭔가를 욕심내기엔 내 처지가 너무 살벌해서
말이지.”
“아휴……. 언제 갈 거냐?”
제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제레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모레. 아침 첫배야. 너도 올 거지? 에그리타 제국으로.”
“아마도…… 들릴 것 같다.”
“그럼 제국에서 보자.”
제레미는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네 맥주가 제일 맛있더라.”
못마땅한 표정을 한 제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덧붙인 제레미는 곧 로브를 들고 가게를 나갔다.
“저놈을 어쩌면 좋냐.”
왠지 제국에서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지.
좋지 못한 예감은 거의 빗나가질 않았다. 제드는 부디 엘리도 제레미도 모두 무사하길 바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그리타 제국의 황성.


모든 행정이 처리되는 본궁.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제국의 정기회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높은 상석, 황좌에 앉은 레이몬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폐하, 더는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을 미루어선 아니됩니다. 제국에 끼친 손실이 이리도 큰데 언제까지 죄
인을 그리 둔단 말입니까.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한 귀족이 결연한 얼굴로 그에게 외쳤다. 물론 그 귀족 하나만이 결연함을 가장하며 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프트 공작의 처벌에 대해 벼르고 벼르던 귀족들은 오늘을 결전의 날로 잡은 듯했다.
하나같이 황제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귀족들을 무감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황좌의 바로 아래, 황제의 오른팔이라 칭해지는 재상 자리에는 시오스 후작이 앉아 있었다.
후작은 그에게 경고를 들은 뒤 더 이상 집무실로 매일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집무실뿐만 아니라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후작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불충을 저질렀다며 스스로 자숙하겠다며 한동안 저택에 칩거했다.
덕분에 귀족들과 제국민들은 차마 황제에게 향하지 못하는 분노를 크로프트 공작에 돌렸다.
공신이 아니라 황제의 눈과 귀를 막는 간신이었다고 말이다.
듣자 하니 그 분노에 이성을 잃은 평민들이 공작가의 성문 앞에 쓰레기를 던지고 하였다지.
그의 성정으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부 잡아들여 그 손목을 잘라버리라 명하고 싶었지만,
공작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지금 그러는 것은 공작의 명예를 더욱 실추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한자가 바로 시오스 후작이었다.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 없이 회의장을 바라보고 있는 후작의 얼굴을 훑었다.
그늘진 얼굴은 여전히 황제의 질타에 반성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더는 그 얼굴이 예전처럼 진실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경고 한 번에 저택에 칩거라.
그는 에드먼드를 생각해 시오스 후작을 그리 강하게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경고 한 번에 충격을 받을 만큼 시오스 후작이 심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일부러 크로프트 공작을 몰아가려 저택에 칩거한 것인가.
황제에겐 반성의 모습을 보이려는 동시에 귀족들의 분노는 더욱 자극하려 말이다.
시오스 후작을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심증은 크로프트 공작을 끌어내리려는 자가 시오스 후작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시오스 후작이 왜 크로프트 공작을 끌어내리려 한단 말인가.
아무리 고민해봐도 시오스 후작에겐 어떤 원한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작을 보던 그때 목을 긁는 꺼끌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귀족들뿐만 아니라 이번 일로 갑작스럽게 세금을 더 부담하게 된 제국민들의 분노도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두신다면 제국민들의 황실에 대한 실망이 클 것입니다.”
“황가가 아니라 나, 황제이겠지. 뭘 돌려 말하는가, 바르텐 백작.”
레이몬드는 붉은 머리칼의 젊은 백작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는 시오스 후작 부인의 어린 동생으로 누나를 등에 업고 배다른 형을 밀어내고 백작위를 받은 자였다.
시오스 후작 부인의 뒷배가 없었다면 백작위를 받을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이기도 했다.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보자 당당하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큼, 헛숨을 삼키며 시선을 낮추었다.
“전 그저 충심으로 폐하의 치세가 걱정되어…….”
“그대가 내 치세를 걱정한다면 바르텐 영지나 잘 관리하게. 이번에도 세금을 과하게 걷었다가 폭동이
일어날 뻔했다지. 그대가 일만 잘해도 내 앞날이 밝을 거 같아. 그렇지 않나?”

48 화

“그것은…….”
얼굴이 벌게진 바르텐 백작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폐하, 지금 중요한 사안은 바르텐 영지가 아니옵니다. 부디 공작의 재판을……”
시오스 후작의 곁에 선 레트랑 후작이 전쟁터에 나온 기사처럼 결연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걸 들어주는 것도 한계였다.
레이몬드는 레트랑 후작의 말을 잘랐다.
“재판은 3 일 뒤에 열도록 하지.”
“아니되…… 네?”
당연히 재판을 미룬다는 것인 줄 알고 소리치려던 귀족들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몇 달을 미루던 재판을 연다니 다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대들이 그렇게 바라는 재판을 열어주겠다고 했네. 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이번엔 재판을 열지 말라 말하고 싶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저희는 그저 폐하께서 이리 빨리 결단을 내려주실지 몰라…….”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날 겁박할 분위기던데 내 어느 장단에 놀아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요새
그대들을 보면 내가 너무 성군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레이몬드는 한쪽 입꼬리를 보란 듯이 비틀었다.
애초에 그는 성군이 될 수 없었다. 반정으로 아버지와 형제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로 새로 쓴 폭정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성격이 그다지 좋은 것 역시 아니었다. 그간 귀찮아서 웬만한 건 넘겼을 뿐이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귀족들을 모른 척 해 줄 마음도 없었다.
레이몬드의 기세가 살벌해지자 귀족들은 모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냈던 황제이지만 한번 결단을 내리면 얼마나 잔 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제국을 위하는 충심에 순간 눈이 멀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습니다. 귀족들을
다스리지 못한 저의 잘못이니 부디 절 벌하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오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귀족들이 줄지어 일어나며 후작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레이몬드는 후작을 따라 허리를 숙인 자들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봉에 선 시오스 후작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몇 년 사이 권력의 기울기가 많이 달라진 듯했다.
“그대들의 뜻대로 재판은 열릴 것이니 더는 공작에 대해 떠들지 말게.”
레이몬드가 이만 회의를 끝내버리려 하던 때 시오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하온데 폐하,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 때 크로프트 영애도 소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레이몬드가 멈칫했다.
레이몬드는 차디찬 눈빛으로 시오스 후작을 내려보았다. 눈빛에는 서서히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재상. 선을 넘지 말라 분명 경고했을 텐데.”
회의장을 울리는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지독히 낮았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의 목을 물기 직전 몸을 낮추는
것처럼.
장내의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차갑게 굳었다. 시오스 후작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지만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입니다. 재판장에서 공작이 벌을 받게 된다면 영애 또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벌을 피할 수…….”
“시오스 빌레인.”
시오스 후작의 풀 네임을 부르는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회의장을 울렸다.
“내가 자네를 그저 이름으로 부르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그날이 오면 재상이란 직위도 에드먼드란
방패도 더는 소용이 없을 테니까.”
나직한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그 속엔 후작의 목을 노리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경고를 알아들은 후작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은 겁을 먹고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저열한 속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로프트 영애는 이미 제국을 떠난 지 6 년이다.”
레이몬드는 스산하리만치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의 죄가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은 마당에 전 황후였던 그녀를 이 사건에 엮으려는 의도를 알 수가
없군. 크로프트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작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는 다시는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해 주지.”
선명한 살기에 귀족들은 숨을 들이켜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황제의 눈에 들까 두렵다는 듯이.
“재상은 3 일 뒤 재판을 준비하도록 하고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다.”
“예, 폐하.”

* * *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엄마!”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칼라일이 갑자기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잠시 휴식을 즐기며 책을 읽고 있던 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칼라일이 쑥 내미는 꽃을 보고 멈칫했다.
“정원에서 제일 예쁜 꽃으로 가져왔어요. 엄마를 닮은 꽃이에요!”
칼라일이 내민 보랏빛 꽃은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제비꽃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난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의 한 장면에 멈칫했다.
‘이 꽃, 널 닮은 거 같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 레이몬드가 이렇게 칼라일처럼 웃으며 내게 이 꽃을 준
적이 있었다.
날 닮았다고 말하면서.
돌이켜 보면 그때 우리 둘의 사이는 꽤 좋았었던 것 같다. 그는 황제가 아니었고 나도 그에 대한 짝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였으니까.
다른 상황들을 상관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널…….
“엄마?”
너무도 오래된 기억에 잠시 멍해져 있던 난 칼라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칼라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나간 기억은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난 미소를 지으며 꽃을 받았다.
“와, 너무 예쁜데? 고마워, 칼라일.”
난 꽃을 받아들고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헤헤 미소짓던 칼라일은 곧 다시 정원으로 뛰어갔다.
손안에 든 보랏빛 꽃 몇 송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난 손으로 꽃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자 살짝 풀이 죽었던 꽃잎이 다시 풍성하게 생명력을 드러냈다.
“자주 보았지만 정말 신기한 능력이에요.”
헬란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은 난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꽃을 감쌌다. 칼라일이 준 선물이니 오랫동안
예쁘게 간직하고 싶었다.
“칼라일 님이 적응을 잘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룬트 왕국을 그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하고 있어.”
칼라일은 정말 나보다 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특유의 귀여운 눈웃음으로 저택의 사용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말이다.
며칠 사이에 친해진 하녀들이 몇 명인지 밤에 칼라일의 옷을 정리하다 보면 사탕 껍질이 주머니에서 매번
나오고 있었다.
“이러다 나중에 저희가 칼라일 님께 의지하게 되는 날이 오겠는데요?”
왠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난 하녀와 함께 즐겁게 뛰어노는 칼라일을 보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하인 하나가 급히 내게로 다가왔다.
“엘리 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아무런 이름이 적히지 않은 새하얀 봉투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봉투를 받아든 난 곧장 서신을 꺼내 읽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신다는 것 같아. 그나저나 곧 재판이 열린다는구나.”
서신을 내려놓자 헬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결국, 열리는군요. 공작 각하께서도 많이 긴장되시겠습니다.”
“긴장보단 나에 대한 걱정뿐이시지.”
곧 있을 재판에서 혹시라도 내가 위험해질까 우려하는 내용이 서신에 한가득하였다.
“공작 각하께선 엘리 님의 능력을 모르시니까요. 그래도 이제 내일이면……. 다 잘 풀릴 거에요.”
“돈은 어떻게 해결되겠지만 아직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만한 증인이 나오지 않았어. 재판이 이렇게 일찍
잡힐 줄은 몰랐는데.”
증인은커녕 증거조차도 아직 찾지 못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에 무엇이라도 들고 가야 재판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인데.
“한데 엘리 님, 재판장은 누구인가요?”
“그건 몰라. 폐하께서 아직 결정을 못 하신 건지, 아니면 일부러 숨기시는 건지…….”
“공작 각하께 호의적인 사람이 됐으면 좋겠지만……. 지금 수도 귀족들의 분위기로 봐선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렵겠죠?”
헬란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거의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막역하다 할만한 친우가 있긴 했지만, 중앙귀족이 아니었다. 재판장을 맡기엔 권력이 약했고 친우를
재판관으로 세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순간 한 귀족이 떠올랐다.
중립적이면서도 중앙귀족들에 버금가는 명예를 가진 사람.
“도움을 주실 만한 분이 있나요?”

49 화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적어도 적은 아니실 분이 있긴 해. 하지만 그분은 아마 움직이지 않으실 거야.
영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겠다며 수도에서 내려가신 분이니까.”
“아…….”
헬란도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가망이 없다 여겼는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루몬트가 좀 알아낸 정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물어보시면 되겠어요.”
“응?”
헬란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마차에서 막 내리는 루몬트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상단 회의가 있어 좀 늦을 거라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것인가 했지만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게 아닌 거 같았다.
바람에 머리까지 헝클이며 뛰어온 루몬트가 내 앞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하인이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마신 그가 숨을 좀 고르자 난 걱정스레 물었다.
“루몬트, 무슨 일이 생겼나?”
“후우, 엘리 님.”
거친 숨을 내쉰 루몬트가 외쳤다.
“찾았습니다.”
찾았다는 막연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찾았다니 무엇을?”
루몬트는 의아함이 가득한 내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공작 각하의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증인 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제가 어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메타스 자작을 후원했던 자가 바로 바르텐 백작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었지.”
“파고들어 보니 사막 상단이 제국에 들어온 뒤 그 둘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주기적으로 가진 것을 알아
냈습니다. 그리고 그걸 증언해 줄 증인도 찾았고요. 제가 오늘 밤 그 증인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증인이라.”
“네. 제가 그자를 잘 구슬려 데려올 테니 아무런 걱정을 마시고…….”
“내가 직접 가겠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루몬트가 멈칫했다.
“직접은 너무 위험합니다.”
헬란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난 증인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음을 굳혔다.
“내가 직접 가야 해. 절대 놓치면 안 되니까.”
재판에 코앞이었기에 난 재판의 판도를 바꿔줄 증인이 꼭 필요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 루몬트.”

* * *

같은 시각, 황궁의 집무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레이몬드는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있는 후작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게. 파르앙 후작.”
“감사합니다. 폐하.”
몸을 일으킨 후작이 그를 보며 엽은 미소를 그렸다.
지나간 세월 탓에 회색 머리칼 사이로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였지만 선명한 푸른 눈동자만큼은 과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앉아서 얘기를 나누지.”
레이몬드는 후작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미리 준비해 둔 동방국의 차가 테이블 위로 놓였다.
“그대가 동방국의 차를 즐겨 마시던 게 기억나 준비했네.”
“뒷방으로 물러간 늙은이의 입맛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뒷방 늙은이라기엔 아직 그대를 존경하는 귀족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싶은데. 아직도 후작을 중앙으로
다시 불러들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허허. 다들 그저 하는 소리입니다. 전 그저 지금처럼 영지에서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 오래 영지에만 머물렀으니 이제 슬슬 지루할 때도 되었는데 안 그런가?”
“지루함 속의 평화가 시끄러움 속의 칼날보단 나은 듯합니다.”
후작은 수도로 돌아오란 레이몬드의 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대는 여전하군.”
과거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모습에 레이몬드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렇게 재판관은 맡아주어 고맙네. 그대 말고는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을 공명정대하게 맡아줄
만한 인물이 수도에는 없거든.”
“그렇습니까.”
“이렇게 선뜻 재판관을 맡아준다고 해서 솔직히 놀랐네. 그대가 거절하면 내 그대의 영지로 직접 찾아갈
준비까지 하고 있었어.”
파르앙 후작은 바로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관을 맡을 사람이었다.
크로프트 공작이 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재판관으로 파르앙 후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재 백작위 이상의 귀족 중에 가장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파르앙 후작뿐이었다.
또한, 파르앙 후작은 반정공신으로 그 영향력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
비록 반정 이후 모든 권력에서 물러나 중앙에 지지 세력이나 파벌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고고하고 청렴하다 평가되고 있었다.
귀족들에게도 제국민들에게도.
하여 파르앙 후작이 재판관이라면 귀족들도 반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적임자였지만, 후작에게 서신을 보낼 때까지도 그가 재판관을 맡아 줄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는 절대 권력 싸움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답은 레이몬드의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의외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자 후작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크로프트 공작에게 빚이 있지요.”
“빚?”
그의 푸른 눈동자가 세월을 더듬 듯 잠시 흐려졌다.
“반정 이후 귀찮다는 이유로 모든 일을 공작께 떠넘기다시피하고 영지로 도망을 쳐 버렸으니……. 한
번쯤은 정도 공작께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공작과 후작의 사이가 꽤 좋았었지.”
“그렇다 하여 재판에 사사로운 감정을 이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후작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믿음직스러워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대는 공정하게 재판에 임해 주기만 하면 돼.”
“……그나저나, 공작께선 좀 괜찮으십니까?”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잘 버티고 있네.”
“흐음, 엘리야 크로프트 영애는 혹 돌아오셨습니까? 소식을 들었을 법한데.”
찻잔을 들던 레이몬드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마시려던 차를 내려놓았다.
“아직…….”
순간 머릿속으로 한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엘리야와 지나치리만큼 목소리가 비슷했던 여자.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자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하군.”
“그렇군요.”
그때 문 박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4 기사단장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기다리라 해.”
레이몬드가 말하자마자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정무를 보시지요.”
“좀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재판이 끝나고 떠나기 전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그럼 그리하게. 황궁에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그대가 거절할 것 같아 작은 저택을
마련해놓았네. 수도에 있는 동안은 그곳에서 지내게.”
“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파르앙 후작이 나가고 카르텔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레이몬드는 집무실의 시종들을 전부 물렸다. 문이 굳게 닫혔다. 그는 책상에 자리 잡는 대신 책상 앞에
섰다.
허리를 책상에 가볍게 기대고 선 그는 부복하고 있는 카르텔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네. 폐하.”
“메타스 자작과 바르텐 백작을 엮을 수 있는 증인은 어떻게 되었느냐.”
“갑자기 하인이 자취를 감추어 찾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꼬리를 잡았으니 곧 어디 있는 것인지
정보가 올 것입니다.”
“재판이 바로 내일이다. 오늘까진 반드시 찾아내. 그리고 바르텐 백작과 시오스 후작의 만남은 없었나?”
메타스 자작과 바르텐 백작가가 이번 사기 사건을 함께 꾸민 것이라면 시오스 후작가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애당초 바르텐 백작은 이렇게 치밀한 일을 꾸밀 머리가 없었으니까.
“후작 부인과 바르텐 백작이 자주 만나기는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만남이라 무언가를 의심스러운
점을 찾기가 힘듭니다.”
“시오스 후작과 바르텐 백작이 따로 만난 적은 없느냐.”
“네. 지금으로선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작 부인과 바르텐 백작의 만남만으론 시오스 후작가를 엮기엔 부족했다.
그들은 남매였고 따로 은밀한 장소에서 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바르텐 백작이 후작 부인은 관계없다 하면 끝이었다.
레이몬드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카르텔.”
“네.”
“시오스 후작의 주변에 대해 더 깊게 파 보아라. 최근 들어 후작과 접점이 늘어난 귀족들은 전부 다 알아
와.”
레이몬드는 회의장에서 보았던 귀족들과 시오스 후작을 떠올렸다.
에드먼드가 황자가 된 후, 시오스 후작가의 가세는 커지다 못해 기세가 등등해진 지경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자의 외가이니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근래의 시오스 후작의 행보는 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가 크로프트 공작을 노리는 이유도 알아야 했다.
시오스 후작이 정말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리는 것이라면 엘리야도 그의 과녁 안에 있을 테니까.
만약 시오스 후작이 정말 엘리야까지 노린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폐하.”
카르텔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번에 찾아보라 명하셨던 여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50 화

알아보라 했던 여자라면 하나뿐이었다.


공작가에서 마주쳤던 느낌이 묘했던 그 여자.
“말해.”
“식품 상단 쪽에 알아봤지만, 그 여자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잠복하여 지켜봤지만, 그 여자가
상단에 나타난 적도 없었습니다. 상인은 그날 너무 놀라 바로 그만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여자의 신분도
정확하지가 않았고 이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고 상단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라…….
“목소리…….”
얼굴과 머리카락 색, 눈동자 등 무엇하나 엘리야와 닮은 게 없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엘리야를 닮아 있었다.
모습은 마법으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라든지 특유의 분위기까지 바꿀 수는 없다.
“설마…….”
크로프트 공작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엘리야가 돌아온 것이라면? 아버지가 괜찮은지 보기 위해 몰래
공작가에 잠입한 것이라면?
주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다. 공작이 위험에 처했는데 방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레이몬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치 눈앞에 엘리야가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거 같다는
희열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미칠 듯이 초조해졌다.
그녀를 놓칠까 봐. 어제의 그 스치듯 만난 것이 전부일까 봐.
“카르텔.”
“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여자를 찾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명을 받듭니다.”
레이몬드는 떨리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엘리야.

* * *

깊은 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각.
마차 한 대가 수도의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분 패를 확인하겠습니다.”
경비대가 마차의 작은 창문을 두드리자 곧 창이 열렸다.
진저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경비대에게 신분패를 내밀었다.
“피닉스 상단이네. 잠시 물건을 확인하러 나가는 걸세.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올 것이야.”
“아, 네. 알겠습니다.”
상단의 패를 확인한 경비대는 별다른 절차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의 창문이 닫히고 루몬트는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입니다. 늦은 시각이라고 괜히 검문이 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입니다.”
“하인은 안전한 곳에 있는 건가?”
난 지금 루몬트와 함께 증인이 되어줄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하인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상단의
호위기사들까지 붙여놓았으니 안전할 겁니다.”
“내일이 재판이니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출발하기 직전 재판이 바로 내일 열린다는 소식이 들어왔었다.
시간은 촉박해졌는데 하인이 증인이 되어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잘 될 것입니다. 바르텐 백작의 성정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밑의 사용인들이 충성심으로 바르텐
백작을 모시고 있진 않을 겁니다.”
바르텐 백작의 성미가 불같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사교계에서 유명하긴 했다.
거기다 바르텐 백작은 한 영지와 가문을 다스릴 만한 능력도 없었다.
하여 그가 메타스 자작과 연관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루몬트가 잘못 안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자의 등장이었으니까.
아버지를 노릴 만한 제국의 귀족들을 추려보았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사람은 드로이트 공작이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가이자 공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전 황태자를 지지했었고 레이몬드가 반정으로 황좌에 앉으며 권력을 잃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드로이트 공작가를 귀족 명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었으나 아버지가 막으셨다 들었다.
이미 많은 귀족들의 피를 본 상황에서 초대 황제부터 이어져 온 명문가인 드로이트 가문까지 숙청하면
귀족들의 반발심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여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드로이트 공작가는 허울뿐인 귀족 가문이 되었으니까.
그 당시 치욕을 견디지 못한 드로이트 공작이 황성 앞에서 차라리 목숨을 끊어달라 소란을 피운 것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공작은 쓰려져 하인들에게 옮겨졌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혈통을 중시하는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그런 치욕을 쉽게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생아 출신의 황제, 그런 황제 덕에 공작위를 받은 아버지.
자신보다 못하다 여겼던 아버지가 선의를 베풀 듯 목숨을 살려줬으니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깊을 것이다.
때문에, 그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르텐 백작이 나타난 것이다.
바르텐 백작은 이런 치밀한 일을 꾸밀 머리가 없는데.
그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바르텐 백작의 뒤라면…….
“시오스 후작.”
난 나직이 불편한 이름을 내뱉었다.
시오스 후작, 리제나, 에드먼드.
꼬리를 무는 연관 관계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아직 시오스 후작이 왜 아버지를 노리는 건지 이유를 찾진 못했지만 바르텐 백작이 나온 이상 그가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한 듯합니다.”
루몬트가 말했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렸다.
“조심하십시오.”
빛이 나는 마나석을 든 루몬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싸늘한 밤바람이 몸을 스쳤다.
산기슭에 있는 언덕 아래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듯 주변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길도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를 만큼 정말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오래전에 버려진 곳인데 이곳의 습도가 찻잎 말리기에 딱이라 동방국의 귀한 찻잎들을 말리는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워낙 으슥한 곳에 있어 저 밑에 사는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지요. 원래 창고로
쓰이는 곳이기도 하니 의심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오두막으로 다가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상단의 호위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인은 무사히 데려왔겠지?”
루몬트의 물음에 검은 천으로 하관을 가린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몬트가 나를 바라보고 난 그와 함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만이 켜진 오두막 안에서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년이 납작 엎드렸다.
“처음 뵙, 뵙겠습니다. 툰이라고 합니다.”
성이 없는 것을 보니 천민 출신인 듯했다. 많이 긴장한 듯 떨리는 어깨를 보던 난 기사들에게 나가 있으라
손짓했다.
기사들이 나가고 난 소년에게 다가갔다.
“일어나도 된단다. 만나서 반갑구나. 난 엘리야 크로프트다.”
천천히 고개만 든 소년이 망토 모자를 벗은 나를 보고 경악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한 17 살쯤 되었을까.
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루몬트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이 소년의 호감을 사야 했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재판의 판도를 바꿔줄 유일한 증인이었으니까.
내 미소에 두려움이 가셨는지 소년은 볼을 발그레 물들이더니 내 손을 잡았다.
“툰이라 하였지? 내 너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단다. 네가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너는 귀족가의
하인으로 살지 않아도 된단다.”
그의 투박한 손을 꼭 잡아주며 나직이 말하자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난 소년을 보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이야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툰은 바르텐 백작의 난폭한 성정에 이미 불만이 많았다. 죽기 직전까지 맞은 적도 있다 했다.
“바르텐 백작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툰은 애원하며 매달렸다.
“걱정하지 말렴. 널 절대 바르텐 백작에게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너에게 더 고마워. 네 증언이 내겐 큰 힘이 될 거 같거든.”
귀족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인지, 아이는 무척이나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재판이 끝나는 대로 피닉스 상단에 네가 일할 자리가 생길 거야. 숙식도 전부 제공할 거니 넌 이
자를 따르면 돼.”
툰의 시선이 루몬트를 향했다.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시선이었다.
“혹 상단에서 널 괴롭히는 자가 있거든 내게 바로 말하면 된다. 알겠지?”
눈을 찡긋하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아이는 눈망울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께서야말로 제 목숨을 구해 주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호의로 가득한 갈색 눈동자를 보며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뒤 일어났다.
재판 전에 나 또한 준비할 일이 많았기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재판 때 보자꾸나. 루몬트, 이만 가야겠다.”
“네. 가시지요.”
오두막을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툰을 마차에 태우고 길을 떠났다.
그것을 보던 나도 곧 루몬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 * *

“이곳으로 사라진 것이 맞느냐.”


깊은 밤 달빛조차 잘 닿지 않는 어두운 숲속. 말의 거친 투레질 소리가 울리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맞습니다. 분명 이쪽으로 들어선 것을 보았는데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당도했을 땐 이미 흔적이 사라진 뒤라……. 죄송합니다. 폐하.”
말에서 내린 기사가 레이몬드의 말 앞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지금 바르텐 백작과 메타스 자작을 엮을 수 있는 증인을 찾기 위해 직접 황궁을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기사는 다 잡은 증인을 놓친 것이다.
램프 위로 드러난 레이몬드의 얼굴은 산속의 밤공기보다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51 화

“……네 죄는 황궁으로 돌아가 물을 것이다. 카르텔, 흔적을 찾아.”


“예, 폐하.”
말에서 내린 카르텔이 두 갈래 길로 나뉜 길목 앞에서 램프를 들었다.
하인을 놓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말발굽이든 마차의 바퀴 자국이든 그 흔적이 남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곧 카르텔은 난감함에 미간을 좁혔다. 양 갈래로 나누어지는 두 개의 길에 다 마차의 바퀴와 말
발굽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혼돈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인이 향한 곳도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카르텔은 몸을 돌려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폐하. 양쪽 다 흔적이 남아있어 어느 쪽이라 단언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답이었다.
레이몬드는 한적한 숲을 둘러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듯 길가는 잡초가 무성했고 나무들도
관리된 흔적이 없었다.
이런 산기슭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라.
바르텐 백작이 먼저 눈치채고 죽이려 끌고 간 것인가.
죽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증인이었다.
미간을 깊이 좁히던 레이몬드는 어두운 두 갈래 길을 보다 입을 열었다.
“대열을 나눈다. 카르텔 넌 나와 함께 오른쪽으로 가고 너희들은 왼쪽으로 가라. 죽어선 안 되는 자이니
샅샅이 수색…….”
명령하던 레이몬드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미세하게 땅을 울리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카르텔과 다른 기사들도 들은 듯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개의 길 중 오른쪽에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카르텔에게 눈짓했다.
뜻을 알아들은 카르텔은 곧장 말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까워진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멈추어라.”
카르텔은 마부에게 검집을 들어 보이며 길을 막았다.
“왜, 왜 그러시는지요……?”
마부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카르텔의 모습에 어깨를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르텔이 마차를 검문하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마차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 누구십니까?”
적갈색 머리에 외알 안경을 쓴 젊은 남자는 마부에게 묻다 카르텔을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카르텔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남자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하려 하자 카르텔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기사다.”
카르텔은 남자에게 황궁 기사의 신분패를 살짝 내보였다. 그러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실 기사님이라니……. 아, 전 피닉스 상단을 운영하는 루몬트라고 합니다.”
루몬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한데 갑자기 마차는 왜…… 아, 혹시 마부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요?”
“이 근방으로 죄수가 도망쳐 쫓고 있는 중인데 마침 그대가 타고 있는 마차를 발견한 것이네. 상단주가…
… 이 늦은 시각에 이곳엔 왜 온 것인가?”
의심이 서린 카르텔의 질문에 루몬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대답했다.
“동방국에서 들어오는 찻잎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이 근방에 있습니다. 오늘 창고에 갑자기 좀도둑이
들었다 하여 급히 제가 확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고요.”
빠르게 말을 잇던 루몬트가 갑자기 손뼉을 탁 쳤다.
“아! 죄수라니, 설마 창고에 든 좀도둑이 그럼 죄수였을까요? 황실에서 직접 쫓는 정도라면 분명 흉악한
…….”
루몬트는 충격을 받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는 카르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듯한 매서운 눈빛이었다.
루몬트는 긴장된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곤 말했다.
“정말입니다. 저쪽으로 쭉 가보시면 저희 창고가 나옵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가서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황실의 명을 수행하는 기사님 앞에서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루몬트가 믿어달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정 의심되신다면 마차를 수색해 보시지요.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루몬트는 마차 문으로 손을 뻗었다. 카르텔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몬트가 떨리는 손으로 마차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됐다. 그만둬라.”
루몬트를 쭉 지켜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후각이 예민한 레이몬드는 아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루몬트가 나왔을 때부터 풍기던 동방국의 찻잎 냄새를.
씁쓸한 찻잎의 냄새가 꽤 지독하게 묻은 것으로 보아 찻잎이 가득한 곳에서 있다가 온 것이 분명했다.
하니 찻잎 창고에 들렀다 오는 길이란 루몬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덜덜 떨리는 손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감히 황제를 상대로 거짓을 고할 배포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지금 그의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하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예.”
카르텔은 레이몬드의 명령에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아도 되는 것입니까……?”
“가보게.”
“감사합니다. 그럼 꼭 죄수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카르텔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한 루몬트는 도망치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루몬트는 마차의 작은 창을 열고 마부에게 출발을 말했다.
“이랴-!”
마부가 끈을 크게 휘두르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곧 기사들을 지나 레이몬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마차의 작은 창이 닫히던 순간, 추가 레이몬드의 시선이 창 안을 무심히 훑었다.
마차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명령을 내리려던 레이몬드는 머릿속을 스친 기시감에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방금 분명히…… 누군가 있었어.
레이몬드는 무심코 스치듯 보았던 마차 안이 떠올랐다.
머리를 틀어 올린 갈색 머리칼의 여자. 지나가다 마주쳤을 법한 평범하디 평범한 얼굴과 인상.
그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해진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여자야.”
마차에 타고 있던 여자는 그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네? 폐하 그게 무슨…….”
카르텔이 레이몬드에게 다가왔지만 레이몬드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잡아야 한다.
그 생각만이 레이몬드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고삐를 휘어잡았다.
히이잉-!
갑자기 고삐를 잡아당기는 거친 손길에 흑마의 앞발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 빠르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폐하?!”
레이몬드의 뒤로 경악한 카르텔의 외침이 울렸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빠른 속도에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로브 모자까지 뒤로 젖혀졌다.
눈앞이 흐려질 만큼 시린 바람이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또다시 엘리야를 잡을 수 있는 단서를
눈앞에서 놓칠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의 품 안에 닿았던 그녀를 이미 한번 놓쳤다. 두 번은 안 됐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나서야 레이몬드는 숲길의 입구에 다다랐다. 말을 멈춘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마차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으득. 절로 잇새에 힘이 가해졌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휘젓고 다녔다.
혹시라도 엘리야가 마차에서 내려 수풀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하, 하아…….”
그렇게 한참을 광기에 젖은 사람처럼 주변을 헤집은 그는 날카로운 가시에 손을 베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손바닥에 길게 그어진 상처는 결코, 작지 않았으나 심장을 옥죄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젠장.”
레이몬드는 입술을 짓씹었다.
또다시 눈앞에서 놓쳤다.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찾아 헤맸던 6 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괴로웠다.
차라리 착각한 것이라 여기고 싶을 정도로.
“정말, 너였을까.”
확실히 확인하지 못했었지만, 그의 직감은 엘리야가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엘리야. 넌 나를 보았을 텐데.
그녀는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는 모습을 감춘 적 없었다. 그날도 오늘도.
엘리야는 그를 보고도 모른 척, 도망친 것이다.
그에게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말 하듯이.
“폐하!”
뒤를 따라온 기사들이 도착했다. 제일 먼저 말에서 내린 카르텔이 레이몬드에게 다가왔다.
카르텔은 피가 흐르는 레이몬드의 손을 보고 놀라며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지혈했다.
아릿한 감각이 퍼졌다. 레이몬드는 지혈하는 카르텔의 손을 떼어냈다.
스멀스멀 피가 새어 나왔지만 이런 감각이라도 있어야 덜 미칠 거 같았다.
“카르텔.”
“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제국의 모든 상단을 뒤져 그 남자를 찾아라.”
엘리야가 그를 외면한다 해도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6 년을 널 찾아 헤매지도 않았을 거야.
밤하늘보다 더 짙은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번뜩인 레이몬드가 피가 흐르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52 화

“휴……. 이제 완전히 벗어난 거 같습니다.”


마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쭉 빼 따라붙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루몬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차 벽에 등을 기댄 그는 아직도 손이 떨리는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가 얼마나 긴장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긴장감으로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설마 이곳에서 레이몬드를 마주칠 줄이야.
갑자기 멈추었던 마차와 카르텔의 목소리.
황후 시절, 카르텔을 자주 마주쳤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독히도 낮은 음성과 칼날 같은 눈빛은 쉬이 잊히지 않는 특징이었으니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난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마차 밖에 레이몬드 또한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의 예감은 맞았었다.

<i>‘됐다. 그만둬라.’</i>

마차의 문이 열리기 직전,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선명히 귀에 내리꽂혔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작가에서 마주쳤을 때 보다 훨씬 더 긴장됐다.
마차 아래의 빈 공간에 기어 들어가 숨을 예정이었지만, 기사들이 제대로 수색한다면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레이몬드에게 내 신분을 밝혀야 했을 테고, 그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날 찾고 있었다.
루몬트의 말에 따르면 공작가에서 마주친 날 이후 기사로 보이는 자가 상단을 기웃거렸다고 했었다.
당연히 그날 그와 부딪쳤던 날 찾은 것일 거다.
부딪혔을 뿐인 여자를 찾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게서 어떤 것이든 수상함을 느꼈으리라.
들켰다면 아마 바로 황궁으로 가야 했을 것이고 그럼 재판에 참석하는 것에도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그의 앞에 나서기엔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그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생각만으로 아찔한 상황에 난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 정말 살면서 이렇게 숨이 막혔던 순간은 처음이었습니다. 설마 제가 황제 폐하를 마주칠 줄이야…
….”
“처음부터 폐하가 있었던 걸 알았던 것 같군. 어떻게 짐작했지?”
카르텔은 자신이 황실 기사라고만 밝혔었다. 레이몬드 역시 밖으로 나왔으니만큼 모습을 가렸을 것이다.
“그 유명한 4 기사단의 단장이 아닙니까. 상단을 운영하려면 그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어야지요. 그분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것을 보고 황제 폐하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어두운 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을 텐데도 그사이에 그런 것들을 간파하다니, 아무래도 루몬트를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
“어후, 혹시라도 따라붙으실까 걱정했는데 다른 길로 방향을 틀길 잘한 거 같습니다.”
루몬트는 연신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대 덕분에 안전하게 빠져나온 듯해. 조금 전도 그렇고 하인을 그렇게 빨리 찾아낸 것도 그렇고.
제드의 말대로 정말 능력이 출중하군.”
진심으로 칭찬하자 부끄러운지 루몬트가 머쓱한 표정을 했다.
“아닙니다. 뭐 저는 그저 피닉스 상단의 탄탄한 정보력을 이용한 것뿐이지요. 그보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신 건 저희와 같은 이유였을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죄수가 아니라 하인의 뒤를 쫓은 걸 걸세.”
“저어, 엘리 님.”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루몬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루몬트, 편히 말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왜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는 공작 각하의 누명을 벗겨주려 하시는 거 같은데 꼭
이리 신분을 숨기시고 따로 움직이셔야 하나요?”
루몬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칼라일을 배제하고 본다면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황제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이득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내 뒤에는 칼라일이 있다. 그렇기에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저 폐하와 엮이지 않으려 그러는 것뿐이야. 이미 이혼한 사이고 혹시라도 내게 도움을 주셨다는 게
알려지면 폐하께도 내게도 별로 좋은 소문이 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요…….”
루몬트는 내가 말한 이유가 완전히 납득되진 않는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단호함을
느낀 듯 더 묻진 않았다.
마차는 어느새 성문을 넘어 수도로 돌아왔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을 넘어 새벽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난 저택으로 향하기 전 루몬트에게 말했다.
“날이 밝는 대로 헬란과 칼라일이 새로 머무를 저택을 알아봐 줬으면 해.”
“이곳 말고요?”
“아침이 되면 난 재판장으로 갈 거야. 그럼 제국에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부 알려질 테니…….
헬란과 칼라일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해.”
재판장에서 내가 소란을 일으키고 나면 사교계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신문사들도 따라붙을 테니 당분간은 칼라일을 더욱 숨겨야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의 흔적은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줘. 그리고 재판장에 늦지 않게 도착하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극적으로 등장해 드리겠습니다.”
우연히 레이몬드를 만나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건 벌써 잊은 것인지 루몬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정말 특이한 자야.
“내일 보지.”
싱거운 웃음으로 인사를 전한 난 그만 저택으로 몸을 돌렸다.
재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엘리야는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 저택으로 들어갔다.

* * *

엘리야가 툰을 성공적으로 회유한 그때, 시오스 후작가의 집무실에 촛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시오스 후작은 책상 앞에 부복하고 있는 기사를 보며 미간을 깊이 좁혔다.
“하인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것이냐?”
“네, 각하. 바르텐 백작이 매번 데리고 다니는 하인이라 메타스 자작과 가졌던 만남도 전부 본
하인입니다. 한데 그 하인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쾅-!
분노를 참지 못한 후작이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메타스 자작을 만날 땐 항상 조심 또 조심하라 일렀거늘! 그런데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고! 백작은
하인이 사라진 것을 아느냐?”
“모르십니다.”
“그 멍청한 놈은 항상 끼고 다니던 하인이 사라졌는데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예, 그러신 듯합니다.”
기사의 말에 후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나쁘면 감이라도 좋던가, 이건 뭐 쓸모가 없는 놈이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
후작이 혀를 차던 그때 집무실 한쪽 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후작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실로 만든 듯한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여자, 리제나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근데 이 상황에 뭐가 즐거워 웃는 것이냐. 리제나.”
후작은 못마땅한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내일이 공작의 재판이거늘, 내일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그놈을 누가 데려갔을는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후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리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울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아버지.”
“뭐?”
황당한 말에 후작이 순간 멍해졌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다는 듯 리제나는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인이 사라지기 전 수상한 자는 보지 못했느냐? 황실의 기사 같은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어떤 수상한
여자라던가.”
“여자? 폐하 말고 다른 짐작이 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후작은 황제가 하인을 데려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크로프트 공작의 팔다리는 이미 다 잘린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고 황제 말곤 그를 감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리제나는 달랐다.
크로프트 공작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레이몬드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엘리야 크로프트.
제국의 전 황후이자 6 년째 자취를 감춘 사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느 귀족들과 달리 그들 부녀 사이가 좋다는 건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해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이미 돌아왔음에도 밝히지 않는 걸 수도 있겠지.
기사는 리제나의 말에 미간을 좁히다 고개를 저었다.
“딱히 기사로 보이는 자들을 보진 못했습니다. 여자……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네가 그러니 그 하인을 놓친 것이겠지.”
“네……?”
차가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기사가 고개를 들었지만 리제나는 이미
후작에게로 몸을 돌린 뒤였다.
“아버지, 아무래도 내일 재판의 변수를 생각해 두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설령 그 하인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해도 우기면 그만이야. 모든 증거가 확실한
마당에 천것의 주장을 누가 믿겠느냐.”
리제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도 어리석은 것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점이 변한 게 없었다.
리제나는 처음부터 이번 일로 공작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계에서 멀어진 크로프트 공작과 황제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 여기는 듯했지만 레이몬드는 자기
사람을 그리 쉽게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일로 시오스 후작이 관련됐다는 의심만 샀을 것이다.
“아뇨. 아버지. 만약 내일 재판에서 억지를 쓴다면 우리를 믿고 따랐던 귀족들도 의구심을 품게 될
거에요.”
“…….”
“아버지는 이미 폐하께 신뢰를 잃으셨어요. 내일 재판에서 하인이 등장한다면 저흰 포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당할 거에요.”
53 화

리제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표정에 시오스 후작이 주춤거렸다.
리제나의 말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문득 그를 보던 황제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떠올렸다.

<i>‘선을 넘지 말게.’</i>

황제는 이때까지 그에게 딱히 어떠한 감정을 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눈빛이었다.
한 걸음만 더 선을 넘는다면 바로 목을 날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황제의 신뢰를 잃었다.
리제나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후작이 넓은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느냐.”
“방법을 찾아야죠. 내일 재판에서 불리해졌을 때 빠져나갈 방법을요.”
“방법이라…….”
후작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지만, 묘안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버지, 제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 묘안으로 내일 가문을 지키게 된다면, 앞으로의 저희 대업은 모두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실패할 걸 알면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결정권을 빼앗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그럼 내일 재판장에서 모든 걸 잃으실 겁니까.”
리제나가 차갑게 일갈했다.
“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전 에드먼드의 친모이니…… 폐하께서 목숨만은 살려주지 않겠습니까.”
리제나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시오스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후작과 똑 닮은 녹색 눈동자가 짙게 번뜩였다.
“폐하께서 여태 재판을 미루신 이유가 뭘까요? 아버지,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는 저희 편이 아닙니다. 이
재판은 저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거라고요.”
순간 말문이 막힌 후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정말 황제가 물밑에서 움직였다면. 그래서 내일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황제는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평화로운 치세를 펼치고 있지만, 황제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잔혹한 피를 뿌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하지만 당장 내일이 재판인 마당에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리제나의 의견을 들어볼 수밖에
없었다.
후작은 끙, 침음성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일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푹 주무세요. 아버지.”
원하는 것을 얻은 리제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곤 집무실을 나갔다.
탁-
집무실의 문을 닫은 순간 리제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엘리야…….”
리제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으나 잊히지도 않는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후련한 얼굴.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에 그녀의 속이 비틀릴 만큼 말이다.
엘리야를 다시 볼 일이 없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녀를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릴라.”
“네. 아가씨.”
집무실 앞에 시립해 있던 하녀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백발을 곱게 땋은 릴라는 하녀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내가 일전에 너에게 주었던 서신을 바르텐 백작에게 전해줘. 그리고 잘 알아듣게 네가 도와줘라.”
“예, 아가씨.”
릴라는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빠르게 저택을 나갔다.
“……내일 당신을 볼 수 있으려나.”
나직이 중얼거린 리제나는 비소를 머금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이 열리는 난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엘리 님. 드레스는 이걸로 입으시겠어요?”
내 치장을 돕고 있는 헬란이 드레스를 들어 보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드레스는 짙은 녹색으로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걸로 입을게. 오늘은 머리도 화장도 너무 화려하게 하지 마.”
“네.”
헬란은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를 땋아 올렸다.
화려한 금장 머리핀 대신 우아한 은장 머리핀으로 머리를 고정한 헬란이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와……. 너무 예쁘세요. 오랜만에 엘리 님의 얼굴을 다시 보는 거 같아요.”
“그러게……. 나도 오랜만에 날 보는 거 같아.”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같은 보랏빛 눈동자와 하얀 피부.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은 이목구비.
제국을 떠난 뒤 쭉 모습을 바꾼 채로 살아서일까. 원래의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예뻤나 싶기도 했다.
어쩐지 나르시시스트가 된 느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이 정도의 귀걸이가 좋겠죠?”
헬란은 진주 귀걸이를 들었다.
“응. 그걸로 할게. 그리고 목걸이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
화장도 연했고 드레스도 목까지 단추가 잠기는 스타일이었기에 목걸이는 하지 않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모든 치장을 마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격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적당히 무게감 있고 기품이 느껴 지는 모습에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바로 나가실 건가요?”
“응, 변호사를 미리 만나야 하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깊은숨을 후, 내쉬었다.
증인이 되어줄 하인도 찾았고 시끄러울 귀족들의 입을 단번에 다물게 할 특별한 선물도 준비되었다.
그런데도 막상 재판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긴장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 굳은 얼굴에 감도는 긴장을 느낀 듯 헬란이 차게 식은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될 거에요.”
“맞아. 그럴 거야. 헬란.”
“네.”
“어제도 말했지만, 저택을 옮기면 내가 한동안은 칼라일을 보러 가지 못할 거야. 그때까지 칼라일을 잘
부탁해.”
“네. 칼라일 님은 제가 살뜰히 모실게요.”
“고마워.”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 님. 마차가 당도했습니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헬란의 손을 놓은 난 드레스룸과 이어진 작은 문을 열었다.
침실에 곤히 잠든 칼라일이 누워 있었다.
침대맡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간 난 꿈을 꾸고 있는지 미소를 짓고 있는 칼라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
부디 모든 일이 잘 끝나 칼라일과 다시 제국을 떠날 수 있기를.
말로 전하지 못한 인사를 건넨 난 이윽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각.
에그리타 제국의 모든 관심사는 황성의 뷔부르크 궁전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서 세간을 시끄럽게 만든 크로프트 공작의 횡령 사건의 재판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뷔부르크 궁전.
초대 황제가 귀족들과 황족들의 재판을 열기 위해 지은 궁전인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귀족들의
무덤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 궁전의 문이 열린 적은 수없이 많았다.
엄중한 제국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여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뷔부르크 궁전에서 작위를 잃고 사형을 선고받은 귀족들은 있어도 무죄를 받은 귀족은 없었다.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늘 열리는 재판도 다를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반정의 공신으로 추앙받던 크로프트 공작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수군거리던 귀족들은 기사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피고, 크로프트 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재판장이 일순 조용해지고 시선이 아래로 집중되었다.
막 재판장으로 들어서는 크로프트 공작이 보였다.
몹시 초췌하고 죄인의 모양새를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크로프트 공작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
보였다.
단정한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른 걸음걸이로 재판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고 흔들림 없어, 순간 그가 죄인이 아니라 재판장으로 이곳을 찾은 거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크로프트 공작은 변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재판관이 앉을 상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귀족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서.
“어쩜 저리 뻔뻔한 것인지.”
공작의 분위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압도되었던 귀족 중 누군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크로프트 공작을 비난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공작의 기에 눌렸던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들은 더욱 소리를 높여 비난을 퍼부었다.
재판장이 광장의 시장보다 더욱 시끄러워지던 찰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정숙하십시오. 신성한 재판장입니다. 그리고 아직 크로프트 공작은 죄인이 아닙니다.”
공작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오스 후작이었다.
귀족들은 시선이 일순 시오스 후작에게 쏠렸다. 공작을 벌하라고 귀족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던 후작이
태도를 바꾸자 귀족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 패기만 넘치는 한 영식이 후작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 죄가 이미 명백…….”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나?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공작 각하는 죄인이 아니네. 그리고 감히 일국의
공작 각하께 존칭이 그게 무엇인가.”
후작은 영식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눈빛을 했다. 영식은 무어라 말을 더하려 했으나 그의 아비가 팔목을
꾹 잡으며 끌어앉힌 탓에 입술만 불만스럽게 달싹일 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후작이 공작을 옹호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는 걸 다들 눈치챈 듯했다.
어딘지 이상하게 돌아가는 판국에 귀족들이 눈을 도르륵 굴리던 때 기사가 재판장의 입장을 알렸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재판장님 드십니다.”

54 화
귀족들은 물론이요 크로프트 공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2 층 재판관이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재판관의 모습에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파르앙 후작……!”
황궁에서 열린 귀족 재판은 사실 황제의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
하여 황제가 직접 재판관을 맡는 것이 맞았지만, 황제가 직접 재판을 진행하는 일은 없었다.
황제가 죄인을 직접 심판하는 것은 존귀한 위엄에 흠집을 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여 황제의 명을 받은 대리인이 재판을 진행했고 거의 재상이 재판관을 맡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황제가 날짜만 공표했을 뿐 재상에게 재판관의 자리를 일임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누가 재판관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숙덕였고, 황제가 직접 재판을 진행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자가 재판장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누군가 작게 후작의 이름을 부르고 귀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파르앙 후작이 재판관이라니…… 영지에서 나오시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중앙으로 부를 거면 차라리 죽여 시체를 불러들이라 황제 폐하께 대놓고 말한 자가 아닙니까. 이렇게
수도에서 보게 될 줄이야…….”
“파르앙 후작과 크로프트 공작 둘 다 반정의 공신이지 않습니까. 친분으로 재판을…….”
“파르앙 후작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지.”
파르앙 후작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젊은 귀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파르앙 후작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귀족들은 대나무보다 더 올곧은 그의 정직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러운 장내 속에서 시오스 후작과 리제나만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재판관석에 선 파르앙 후작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전 오늘 폐하의 명을 받아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을 맡게 된 파르앙 제럴드입니다. 황제 폐하의 패를
지니고 막중한 임무를 맡은 만큼 주신께 우러러 한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을 내릴 것을 맹세합니다.”
순간 크로프트 공작과 파르앙 후작의 시선이 부딪혔다. 놀란 얼굴로 후작을 보던 공작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가벼운 묵례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진중한 분위기가 있었다.
소란스럽던 귀족들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지고 파르앙 후작이 자리에 앉았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엄숙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재판을 시작했다.
“그럼 크로프트 파이셀 공작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크로프트 공작은 사막 교역권과 관련하여 상단과
손을 잡고 국가의 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로 이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맞습니까, 공작.”
“……예, 맞습니다. 허나 전 상단과 손을 잡고 제국의 돈을 횡령한 적이 없습니다.”
공작의 죄를 부정하자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렴치한 인간!”
“제국의 손실이 얼마인데! 당장 모든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힐난의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보다 더 시끄럽게 바뀌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이성을 잃은 귀족들은 품위마저 잊어먹은 듯 공작을 향해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크로프트 공작이 혐의를 벗게 되어 자신들의 재산으로 4000 골드를 채우게 될까 봐 눈이 뒤집힌 것이었다.
그렇게 귀족들이 흥분해 가던 그때, 마차 한 대가 뷔부르크 궁전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귀족가의 문장은 없었지만 값비싼 상아로 만들어진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황성을 통과해 뷔부르크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마차가 도착한 순간 재판장으로 하인 하나가 급히 달려 들어갔다.
눈에 잘 띄는 붉은 셔츠를 입은 하인이 참관석으로 들어오자 공작의 변호사가 하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아수라장이 되는 장내를 도저히 참지 못한 파르앙 후작의 노성이 재판장을 크게 울렸다.
묵직한 목소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날카로워 조잡스러운 목소리들을 단번에 침묵하게 했다.
고요해진 재판장에 작은 숨을 내쉰 파르앙 후작은 크로프트 공작을 내려보았다.
“공작, 그대의 발언을 신뢰하기에는 조사단이 찾은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하군요. 이 모든 것에 반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대답은 크로프트 공작이 아닌 그의 변호사에게서 흘러나왔다.
공작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후작이 시선을 돌렸다.
이때까지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말하자 후작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랐다.
“증거가 있다, 이 말인가.”
“네.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증언해 줄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지금 어디 있는가.”
변호사는 대답 대신 재판장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파르앙 후작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하고 그 순간 재판장의 문이 열렸다.

* * *

재판장의 문이 열리고 난 짧은 심호흡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커다란 샹들리에의 빛이 반사되어 눈앞이 흐릿했었다.
하지만 걸음을 내디딜수록 재판장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2 층 넓은 참관석을 전부 매운 귀족들과 그 아래 피고인의 자리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굴욕적으로 귀족들의 시선을 내려 받는 그 모습을 보자 긴장감은 단번에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가 머리를
식혔다.
또각또각-
난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걸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는 내 구두 소리가 경악으로 굳은 재판장을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내가 이렇게 이곳에 나타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귀족들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이 절대 유쾌하진 않았지만,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시선들은 나쁘지 않았다.
곧 저 살짝 벌어진 입들을 턱이 나갈 만큼 벌어지게 만들어 줄 것이니까.
마침내 아버지의 곁에서 멈춘 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아버지에게 안심하시라고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파르앙 후작.
아버지의 재판관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파르앙 후작이었다.
하지만 절대 영지를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여 지금 그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놀라웠지만 반가움은 나중의 일이었다.
“……재판 중에 갑자기 들어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신분을 밝히시오.”
신분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의례적인 절차였다.
“송구합니다. 저는 엘리야 크로프트. 크로프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입니다. 그리고 공작 각하가
무죄임을 증명할 증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의 나직한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리자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귀족들이 움직였다.
정말 내가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증인이란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증인이라면 그 자인가.”
파르앙 후작은 나의 뒤를 따라 들어온 툰에게 시선을 두었다.
“예. 이 자가 바로 메타스 자작이 죽기 전 다른 귀족과의 은밀한 만남을 가진 것을 눈앞에서 본
이입니다.”
“증인은 앞으로 나오라.”
파르앙 후작의 명령에 난 옆으로 비켜섰다. 기세에 눌린 툰이 머뭇머뭇 중앙으로 서자 파르앙 후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증인은 이름과 신분을 밝히게.”
툰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바르텐 백작가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툰이라고 합니다.”
“네가 메타스 자작과 은밀히 만나는 귀족을 본 것이 맞느냐.”
후작의 엄중한 목소리에 안 그래도 떨리던 툰의 어깨가 더욱 심하게 움츠러들었다.
“다시 묻겠다. 네가 본 것이 진실이 맞느냐?”
“……네, 맞습니다.”
“이곳에서 거짓을 말했다간 네 목숨뿐만 아니라 네 가족까지 참수형에 처할 것이다.”
가족이란 말에 움찔하던 툰은 이윽고 결연한 얼굴을 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하면 말하거라. 메타스 자작과 은밀히 만났던 자가 누구냐.”
“바르텐 백작님입니다!”
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르텐 백작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귀족들은 혼란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툰이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이라 밝혔을 때부터 설마 설마 하고 있던 귀족들이 충격에 입을 쩍 벌렸다.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니 걱정 말라. 모든 것은 예정대로 될
것이다, 메타스 자작이 백작님께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툰은 자신의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상세한 내용을 덧붙였다.
갑작스럽게 판이 뒤바뀌자 귀족들은 툰의 발언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한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바르텐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인의 증언에 그의 얼굴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함이었다.
감히 아버지를 모함하고 크로프트 가문을 몰락시키려 한 자의 말로를 말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난 멈칫했다.
하인의 증인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바르텐 백작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백작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데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뭐지.
백작의 얼굴을 본 난 기시감을 느꼈다.
설전의 소리가 점점 커지자 파르앙 후작이 입을 열었다.
“엄숙한 재판장입니다. 모두 정숙하세요.”
파르앙 후작은 바르텐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르텐 백작은 밑으로 내려와 재판장에 서시오.”
“……예.”

55 화

예상과 달리 바르텐 백작은 별다른 반발도 없이 순순히 답하며 일어났다.


탐욕스럽게 짝이 없는 얼굴에 서린 긴장감에는 어울리지 않게 결연함까지 서려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내게 이로운 일이 아닐 거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겨나가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바르텐 백작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바르텐 백작. 지금 뭘 하는 겐가?”
파르앙 후작이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바르텐 백작은 그에 아예 몸을 납작 엎드리며 외쳤다.
“모든 것이 저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메타스 자작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하지만 결단코 메타스 자작이 그렇게 큰돈을 횡령하려 한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백작은 큰 목소리로 읍소했다.
“……백작. 지금 메타스 자작과 손을 잡고 크로프트 공작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것이……. 저는 결단코 공작 각하께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데 메타스 자작이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모든 죄를 저에게 덮어씌우겠다고 협박을 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텐 백작은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전부 메타스 자작이 꾸민 것이고 백작은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자작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것인가.”
“네. 맞습니다! 저, 저 하인에게 물어보십시오, 공작 각하께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자는 말을 제가 한
것인지 메타스 자작이 한 것인지 말입니다.”
바르텐 백작이 툰에게 홱 몸을 돌렸다.
“네가 말해 보아라.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먼저 메타스 자작에게 공작 각하를 음해하라 말한 적이
있더냐!”
바르텐 백작이 툰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파르앙 후작의 시선도 툰을 향했다.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백작과 메타스 자작의 대화에서 공작을 음해하라 말한 것이 누구냐.”
“그, 그것이……. 메타스 자작입니다…….”
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보십시오. 전 정말 메타스 자작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도운 것이었습니다.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바르텐 백작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 모습에 안쓰러움이라도 느낀 것인지 귀족들이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난 바르텐 백작에 일말의 동정도 들지 않았다.
메타스 자작의 협박을 받았다니. 비소가 절로 튀어나왔다.
메타스 자작은 바르텐 백작가의 후원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황궁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를 아버지 밑으로 집어넣은 게 바르텐 백작의 입김이었는데 협박이라니.
당장 바르텐 백작의 목에 칼이라도 대고 사실대로 말하라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증거가 부족했다.
내게 있는 증인은 아버지를 모함했다는 말을 우연히 들은 하인 하나가 전부였다.
메타스 자작과 바르텐 백작의 오랜 관계를 뒷받침해 줄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협박이라니…….”
“자칫하면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습니다.”
“바르 백작의 성미가 불같긴 해도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만한 사람은 아니지요.”
재판장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며 죄를 청하는 바르텐 백작의 모습에 귀족들이 쯧쯧 혀를 차며 동정의 말을
한마디씩 꺼냈다.
그리고 나도 마지막으로 들려온 말에 동의했다.
바르텐 백작은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만한 머리도 배포도 없다.
허니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 당신이겠지.
난 소란스러운 귀족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오스 후작에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녹안과 나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나를 본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며 순간 녹안 속에 숨은 짙은
적대감이 드러났다.
떠나기 전 나를 에드먼드의 파티장에 초대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니 더 깊어진 적대감이 느껴졌다.
대체 왜일까.
시오스 후작은 크로프트 가문을 노리고 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바르텐 백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고고한 척을 하는 시오스 후작의 얼굴을 보자니 속이
뒤틀렸으니까.
그렇게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난 한곳에서 멈칫했다.
참관석의 뒤편 기둥 옆에 로브를 모자까지 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보랏빛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거 같았다.
“설마…….”
제레미……?
내가 떠나는 날까지 꽃집에 오지 않은 그였다. 제국으로 함께 돌아가겠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
여겼는데.
사연이 많은 그였으니 나만큼이나 이곳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한데 그가 설마…… 이곳에 온 것일까.
아니, 제국으로 오더라도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지?
그때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내게로 오는 것처럼.
순간 살짝 흔들린 모자 속으로 호박색 눈동자를 본 것 같아 나의 눈이 커지던 그때,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흠, 백작의 죄를 좀 더 조사한 뒤 다시 재판을 열도록 하겠다. 기사들은 바르텐 백작을 데리고 가
조사단에 넘겨라.”
“재판장님 부디 폐하께 진실을 고해주십시오!”
기사들이 바르텐 백작을 끌고 재판장을 나갔다. 재판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귀 아픈 목소리에 난
남자에게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그 곳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백작이 끌려나가고 파르앙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재판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크로프트 공작.”
“예.”
“그대가 이번 사기 사건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증언과 바르텐 백작의 자백으로 결백함이
증명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선고를 기다렸다.
“하여, 이번 횡령 사건에 대한 공작의 모든 의혹에 대하여 무죄를 판결합니다.”
파르앙 후작의 엄중한 목소리가 재판장을 크게 울렸다.
설마 이렇게 무죄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귀족들은 멍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하인의 증언은 크로프트 공작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증명하게 충분했다.
거기다 당사자인 바르텐 백작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시인했었다.
반정의 공신이자 황제가 가장 아끼는 충신의 몰락을 보기 위해 모였던 귀족들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으나
무어라 반박하진 못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재판관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재판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파르앙 후작이 나를 향해 살짝 몸을 기울였다.
“무엇인가. 영애.”
“바르텐 백작이 죄를 인정하여 다행히도 공작 각하의 결백함이 증명되었지만……. 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사라진 4000 골드를 말하는 것인가.”
파르앙 후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 세웠다. 그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에 난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반정공신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제국을 위해 제가 그 돈을 대신
갚고자 합니다.”
나의 말의 여파는 상당했다.
파르앙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커지고 귀 기울고 있던 귀족들도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4000 골드.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영지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보통 2000 골드였다.
영지와 저택을 모두 팔아도 한 번에 마련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제국의 예산을 움직이는 황실 금고가 아니고선 이렇게 큰돈을 한 번에 융통할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미쳤다고들 생각하겠지.
난 믿지 못하겠단 눈빛을 보내는 귀족들을 둘러보곤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들어오게.”
나의 큰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그에 굳게 닫혀있던 재판장의 문이 열리고 루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커다란 자루를 든 하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하나, 둘, 셋, 넷……. 수십 개의 묵직한 자루들이 재판장 중앙으로 옮겨졌다.
골드가 든 묵직한 자루가 대리석 바닥에 툭툭 놓일 때마다 귀족들의 입도 점점 더 벌어졌다.
마침내 마지막 자루가 바닥에 놓인 순간, 난 경악하고 있는 귀족들의 바보 같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재판관님, 엘리야 크로프트의 이름으로 4000 골드를 제국에 기부하겠습니다.”
* * *

파격적인 돈 자루들과 함께 재판은 끝이 났다.


기사들이 들고 나가는 돈 자루들을 얼빠진 얼굴로 보던 귀족들은 나를 한 번씩 힐끗거리곤 재판장을
나갔다.
난 그제야 아버지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버지는 나를 빤히 응시하다 내뒤에 선 루몬트를 힐긋 보았다.
“내게 해 줄 말이 많을 거 같구나.”
“네. 저택으로 돌아가면 전부 말씀드릴게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아버지를 부축하려던 그때, 낮은 음성이 나를 불렀다.

56 화

“크로프트 영애.”
나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파르앙 후작이었다.
“파르앙 후작 각하.”
난 그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네. 저도 오늘 이렇게 후작 각하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후작은 멋쩍은 듯 웃음을 흘렸다.
“황제 폐하의 부탁도 있으셨고……. 제가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 빚이 있는지라.”
“그래도 쉬운 걸음이 아니셨음을 압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로프트 공작 각하의 재판만큼은 제가 맡고 싶었습니다.”
“조용히 살던 분을 괜히 귀찮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후작.”
아버지의 말에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이렇게 잠시 바깥바람을 쐬니 속도 시원해지고 좋았습니다. 덕분에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지 않았습니까.”
후작의 눈길이 슬쩍 돈 자루를 훑었다.
돈 자루를 무더기로 들고 와 이곳에 펼쳐 놓은 것은 귀족의 품위에 상당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겐 보란 듯이 당당했지만 파르앙 후작이 보니 조금 겸연쩍었다.
파르앙 후작은 아버지만큼이나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니.
난 머쓱함에 작은 헛기침을 뱉으며 말했다.
“큼, 제가 품위 없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듯이 오랜만에 속 시원한 광경을 보아 즐거웠습니다. 다들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볼 만하더군요.”
너털웃음을 짓던 후작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당당해지신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영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레이몬드의 한 걸음 뒤에 선 모습일 것이다.
“더는 누군가의 뒤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힘을 좀 길렀습니다.”
“잘됐군요. 힘이 있으시다면 앞으로도 쭉 크로프트 가문을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미소를 거둔 후작이 한걸음 아버지와 내게로 다가왔다.
“공작, 영애. 두 분 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이 일은 바르텐 백작의 소행이 아닐 것입니다. 그자는 이런
일을 꾸밀 만한 배포가 없지요. 분명…… 배후에 다른 이가 있을 겁니다.”
아버지와 나 모두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자는 크로프트 가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자가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들켰으니 어떻게든
목을 물려 덤빌 것입니다.”
시오스 후작가의 상징이 바로 사자였다.
파르앙 후작은 시오스 후작을 조심하라 말하고 있었다. 그 역시 바르텐 백작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걱정 마세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래요, 지금의 영애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 영애가 이리 번듯하게 자라 공작께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언제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냐는 듯 긴 눈을 반으로 접으며 허허,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 이만 폐하께 재판의 결과를 알려드리러 가겠습니다. 아마 폐하께서 재판의 이야기를 듣고 꽤
놀라실 거 같아 기대됩니다.”
레이몬드.
그가 곧 내 소식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자 긴장감이 들었다.
찾아오겠지.
그렇게도 오랜 시간 날 찾고 있었으니 내가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냈단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와 우연히 그를 두 번이나 마주하긴 했지만 진짜 내 모습을 그를 본 적은 없었다.
엘리야 크로프트로 그의 앞에 서면…….
더는 그를 모른 척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또 뵙지요.”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난 그에게 반가움과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후작 각하.”
“오늘 고마웠네.”
“별말씀을.”
후작은 아버지에게 살짝 묵례한 뒤, 재판장을 먼저 나섰다.
“엘리야. 우리도 이만 가자꾸나.”
“네. 아버지.”
난 아버지의 여윈 손을 꼭 잡고 재판장을 나섰다.

* * *

황제의 집무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시종장이 답했다.
뷔부르크 궁전을 보며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선을 내렸다. 재판도 중요했지만 사실 지금 그는
재판장에만 온전히 신경이 가 있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본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내려다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급히 말을 달리며 들어오는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상단을 못 찾은 건가.”
레이몬드의 낮은 목소리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어젯밤 여자를 놓치고 그는 황궁으로 돌아와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여자가 엘리야일 것 같단 직감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원하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고, 작은 것이라도 얻기 위해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하여 그는 참고 견디는 것을 꽤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인내심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다.
황제고 뭐고 전부 다 던져 버리고 당장이라도 직접 제국의 있는 모든 상단을 뒤지고 뒤져 그녀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레이몬드는 미쳐버릴 거 같았다.
만약 그녀를 찾지 못하면, 이미 그녀가 도망을 가버렸다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던 그녀가 다시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불안감을 크게 뛰었다.
“하아…….”
레이몬드는 긴 숨을 내쉬며 치솟는 불안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엘리야를 만나기도 전에 미친놈이 될 순 없다. 적어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진 정신을 꽉 잡아야
했다.
그녀의 마음을 외면했던 그 시간을 사과하고 그녀의 하나뿐인 혈육인 크로프트 공작도 지켜야 했다.
그는 끝내 증인을 찾지 못했었다. 만약……. 그 하인을 엘리야가 데리고 간 것이 맞다면 공작이
무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재판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가 최악으로 나온다면 레이몬드는 어떻게든 처벌의 집행 날짜를 미룰 생각이었다.
그사이 어떻게든 다른 증거를 찾을 것이다.
안된다면 심증 뿐으로라도 시오스 후작을 몰아붙여 크로프트 가문은 살릴 계획이었다.
“폐하, 파르앙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파르앙 후작이 왔다는 것은 재판이 끝났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잠시 생각을 접으며 곧장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파르앙 후작이 들어왔다. 예를 갖추려는 그에게 레이몬드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후작 인사는 됐으니 재판의 결과부터 말하게.”
“재판의 결과는 무죄입니다.”
“……무죄?”
무죄가 나올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 그 하인이 증인으로 나타나야만 가능했다.
“네. 오늘 재판장에 의외의 인물이 증인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하여 공작 각하의 결백함이
밝혀졌습니다 폐하.”
파르앙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의외의 인물……?”
그 말을 들은 레이몬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 누구냐 묻고 싶었지만 혹 파르앙 후작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그녀가 아닐까 두려워 입을
떼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살면서 이토록 불안에 떤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손을 꽉 그러쥔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엘리야 크로프트. 크로프트 영애가 돌아왔습니다, 폐하.”
쿵.
그의 심장이 탁 멈추는 거 같았다.
엘리야가 맞았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꼭꼭 숨어 도망치던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기쁨과 그리움, 불안함과 초조함. 온갖 감정들이 격랑의 파도처럼 그를 덮쳐 숨조차 쉽게 내쉴 수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시종이 다급히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시종들이 다가와 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엘리야가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지금 바로 공작가로 갈 것이다.”
레이몬드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달려나갔다.

* * *

“그러니까……. 네가 상단을 차렸단 말이냐.”


아버지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공작가로 돌아온 난 지난 6 년간 내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아버지에게 요약해 말씀드렸다.
어떻게 오늘 그 큰돈을 운용할 수 있었는지도 말했다.
“네. 제드라는 자와 함께 피닉스 상단을 차렸어요. 이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피닉스 상단이 몇 년 사이 엄청난 성장을 보여 주목하고 있었으니까. 한데 그 상단이
너의 것이었다니…….”
많이 놀라신 듯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으셨다.
“상단은 칼라일을 위해 만든 것이냐.”
“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아이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권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권력은 제가 먼저 버리고 떠났으니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돈이 필요했어요.”
그 누구도 감히 칼라일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버지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고생 많았다.”
아버지는 애틋하면서도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날 보며 손등을 두드리셨다.
6 년 동안 항상 칼라일의 보호자로서 염려를 받기보단 하는 쪽이었었다.
잘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순수한 염려와 위로를 받으니 새삼 어릴 적으로 돌아간 거 같았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살짝 내렸다.

57 화

“칼라일은 어디 있는 거니?”
“아……. 칼라일은 안전한 곳에 헬란과 함께 있어요. 아까 보셨던 루몬트란 자가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엘리야.”
“네?”
“난 네가 제국을 다시 떠났으면 좋겠구나. 물론 너에게 피닉스 상단이란 힘이 있다곤 하지만…….
이곳에서 권력 싸움이 휘말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도 원래는 재판이 끝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재판의 결과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 혼자 시오스 후작을 감당하긴 힘들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해하려 할 테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그러다 칼라일의 존재가 들키면 어쩌려고.”
“들킨다 해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두었어요. 아버지 당분간은 제 걱정하지 마시고 몸부터 회복하세요.”
깊은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창밖을 보다 내게 말했다.
“……엘리야, 폐하께서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으셨을 것이다.”
“아마…… 곧 오시겠죠.”
지금쯤이면 파르앙 후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폐하께서 지난 7 년간 널 계속 찾으셨다. 그분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아버지는 이내 입을 다무셨다. 그리고 이내 말을 이으셨다.
“엘리야, 난 네가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구나.”
“그럴게요.”
근심이 가득한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미소를 그린 순간 창밖으로 성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흑마를 탄 남자가 저택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몬드.”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들은 레이몬드가 온 것이었다.
함께 나오겠다는 아버지에게 걱정 말라 미소를 지어 보인 난 저택의 로비로 혼자 내려왔다.
그리고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저택 앞에서 레이몬드의 흑마가 멈추었다.
몹시 다급한 듯 말에서 내린 그는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불안한 표정으로 달려들어 온 그는 나를 보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나 역시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돌아올 때만 해도 그를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불안했던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를 두 번 만났었지만, 그땐 너무 놀라고 들킬까 두려워 심장이 끝없이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그를 제대로 마주하니 오히려 심장은 고요해졌다.
제대로 마주치니 그간 살이 빠지고 조금 수척해진 것도 같았지만, 안쓰러움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난 이윽고 무릎을 굽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고저 없는 내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이윽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구둣발이 보였다.
“……일어나.”
난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검은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준 적 없던 불안이 뒤섞인 그리움이 느껴졌다.
언제나 저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던 건 나였는데,
“엘리야…….”
그답지 않은 감정을 이해하기도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한 그는 와락 날 끌어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애틋함이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그는 매달리듯 날 안았지만, 나는 그저 격한 그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주 안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리고 있던 난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매달렸던 것과 달리 쉽게 밀려난 그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하지만 난 무감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불쾌합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싸늘한 나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엘리야…….”
“폐하.”
난 그의 말을 잘랐다. 레이몬드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엔 짙은 그리움과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을 마침내 만난 환희가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으나 그는 나를 마주한 이 순간이 너무도 가슴 벅찬 듯했다.
6 년이나 날 찾았으니 그럴 만도 한가.
대체 왜 그가 날 6 년이나 찾은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내가 몹시도 반가운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정말 집요하게 날 찾았었다.
그럴 이유가 딱히 없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선을 긋는 나와 달리 그는 나를 편하게 대했었다.
마치 우리가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었고 지금의 재회도 가슴 벅차지 않았다. 그저 이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우연히 마주쳤던 그땐 너무 놀라 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수려한 얼굴과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6 년 전보다 훨씬 더 깊어지고 멋있어진 거 같았다.
과거엔 그의 잘생긴 얼굴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고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모든 게 불편할
뿐이었다.
특히 그가 나를 보는 집요한 눈빛이 제일 불편했다.
그리움과 뒤범벅이 된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검은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의 열망이 너무도 강해 그의
시선에 몸이 묶이는 것만 같았다.
날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강렬한 눈빛에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6 년 동안 그가 나를 찾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했던 적도 있었지만, 부질없는 생각들이라 지워버렸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문제일 뿐일 테니까.
난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방금 재판이 끝나고 돌아온 참입니다. 무척 긴장한 터라 몸이 몹시도 피곤합니다. 하여 중요히 할 말이
있으신 게 아니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떠한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나의 뜻을 알아들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상처를 받은 듯 그의 수려한 얼굴에 균열이 일었으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마음은 고요할 뿐이었다.
가만히 나를 보는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무엇이 두려운지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거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저런 표정과 눈빛으로 레이몬드의 눈치를 살피며 하고 싶었던 말을 참아야 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듯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흔들리던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피곤하겠지. 얼굴을 봤으니 이만 돌아갈게. 그리고…… 내일 궁으로 와.”
궁으로 오란 말에 난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당분간은 제국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동안 레이몬드와
엮이고 싶진 않았다.
거절의 말을 전하려 하자 그가 선수를 쳤다.
“오늘 재판에서 증인을 네가 데려왔었다지.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야겠어. 그리고 공작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으니까 궁으로 와.”
마음은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렇지가 못했다.
특히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멈칫하던 난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전 몸이 피곤하여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짙은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그를 마주하는 것이 더는 불편했다. 차라리 모습을 바꾸고 그를 마주하는
것이 더 편할 거 같았다.
냉혹하리만치 무심한 그 시선이 내겐 더 익숙했으니.
난 그가 떠나기도 전에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예법상 황제가 떠나기도 전에 먼저 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게 더는 무리였다.
혹 그가 날 잡을까 긴장했지만 레이몬드는 날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내가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언제나 그의 뒷모습을 봤던 그때처럼.

* * *

엘리야가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뒷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6 년 동안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수백 번은 생각했었는데 그중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웠으니까.
아니 차라리 원망과 책망이 서린 싸늘함이었다면 용서를 빌고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보는 엘리야의 보랏빛 눈동자는 철저한 타인을 보는 무감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6 년 동안 그에 대한 모든 마음을 완벽히 정리한 것 같았다. 그리워하고 애달픈 쪽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하여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어떠한 말을 해봤자 외면당할 것이다.
어차피 지금도 외면당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매달린다면 무감한 보랏빛 눈동자에 나를 향한 경멸이 스밀지도.
싸늘한 외면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경멸과 혐오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거기까지 밀려나면 그가 그녀에게 어떤 집착을 보일지 스스로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성을 잃고 공작을 인질로 잡아서라도 널 내 곁에 두려 할지도.
미친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엘리야를 붙잡을 수 있다는 것에 심장이 순간 두근거렸다.
더불어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기분에 레이몬드의 얼굴 위로 자조 섞인 비소가 떠올랐다.

58 화

본궁, 집무실에 다다른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르앙 후작은 저택으로 돌아갔느냐.”
아까 급히 집무실을 박차고 나오느라 파르앙 후작을 신경 쓰지 못했었다.
그 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느새 해 질 녘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보고는 내일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종장에게 후작이 머무는
저택으로 작은 선물을 하나 보내라 할 참이었다.
하지만 시종장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아뇨. 집무실 안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었군.”
복잡한 감정에 얼룩졌을 표정을 차분히 가라앉힌 레이몬드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파르앙 후작이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올리려 했다.
“괜찮네. 앉으시게.”
레이몬드는 소파에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후작이 자리에 앉자 시종장이 레이몬드의 앞으로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그는 찻잔으로 손을 뻗는 대신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깐 내가…… 정신이 없어 못 볼 꼴을 보였어.”
“못 볼 꼴이라뇨, 폐하. 전 그저 이곳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온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파르앙 후작은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아무 일도 없었지. 내 쓸데없는 말을 했네.”
“네. 폐하. 그럼 이제 재판에 관련된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의 증언으로 공작 각하께선 무죄를 선고받으셨습니다. 하인의 말로는 바르텐 백작과
메타스 자작이 합심하여 공작에게 누명을 씌웠다 하였고 바르텐 백작도 일부를 인정했습니다.”
“일부?”
“네. 백작은 공작 각하를 음해한 것은 인정하나 그 모든 것은 메타스 자작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일개 자작이 백작을 협박하였다?”
“네. 일개 자작이 백작을 협박하였다는 말을 저도 참으로 믿기 어려웠으나 메타스 자작은 이미 죽은 데다
……. 하인 또한 바르텐 백작이 공작을 음해하겠다 말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레이몬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작의 무죄가 밝혀진 것은 만족스러웠지만 결국 공작을 음해한 주범이 메타스 자작이 된 것이 거슬렸다.
바르텐 백작이 메타스 자작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이 모든 것이 메타스 자작과 바르텐
백작의 짓이란 건 더 말이 안 됐다.
“바르텐 백작은 어땠었지? 순순히 죄를 인정했나?”
“네.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울부짖긴 했지만……. 죄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습니다. 마치
인정할 것을 각오하고 재판장에 온 사람 같았습니다.”
바르텐 백작은 인정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다. 차라리 온갖 악을 지르며 끝까지 죄를 부인하다
증거에 결국 끌려나갔다면…….
그래 그랬다면 정말 멍청한 놈이 어쩌다 큰일을 벌인 것인가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순히 인정하였다니 오히려 확실해졌다.
절대 바르텐 백작이 벌인 짓이 아니었다.
시오스 후작.
미리 낌새를 느끼고 바르텐 백작으로 꼬리를 잘라버린 건가.
이렇게 돼버리면 시오스 후작을 엮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미리 눈치를 채고 움직였다면 걸리지 않기 위해
관련 증거들을 모조리 없앴을 테니까.
“그리고 폐하. 재판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습니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란?”
“네. 크로프트 영애가 만든 작은 소란이었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엘리야가 언급되자 레이몬드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큰일은 아니옵고……. 크로프트 영애가 제국에 큰 금액을 기부하였습니다.”
“기부?”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무려 4000 골드를 재판장에 직접 들고 와 기부를 하였습니다. 그 큰돈이 재판장에 자루째 쌓이는
모습들이 어찌나 장관이던지……. 오랜만에 아주 진귀한 구경을 하였답니다.”
파르앙 후작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웃을 수가 없었다.
“4000 골드……?”
결코, 귀족가의 영애가 흔쾌히 기부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것도 한 번에 재판장에 돈까지 들고
와 기부를 하였다니.
크로프트 가문은 공신으로 명실상부 현 제국의 최고 가문이었지만 재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크로프트 공작이 검소하기도 했고 사사로이 재산을 부풀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영지가 있긴 했지만…… 그 영지를 판다 해도 4000 골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엘리야가 황후로서 황궁의 재산을 가지고 나간 것도 없었다.
그녀는 황궁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갔으니까. 입던 옷, 장신구, 신발까지도 말이다.
그런 그녀가 그 큰돈을 어떻게…….
레이몬드는 순간 어젯밤에 마주쳤던 젊은 상인이 떠올랐다.
제국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던 그 남자는 모습을 감춘 엘리야와 함께 있었다.
설마 그 상단과 관련이 있는 건가.
“크로프트 영애의 활약 덕에 귀족들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정말 볼 만했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정말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돈은 그럼 출납원으로 보냈나?”
“네. 출납원으로 곧장 보냈습니다. 그리고 영애 덕에 구멍이 났던 예산이 채워졌으니, 무죄라 한들
사라진 돈에 대해선 공작의 책임이 크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크로프트 영애가 그 돈을 기부했으니 귀족들의 시끄러운 입이 단번에 다물릴 것이다.
“일단 급한 불은 꺼졌군. 오늘 수고 많았네. 후작 이왕 수도로 온 김에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는가?”
파르앙 후작은 이미 무슨 부탁일지 짐작한 듯 말을 꺼냈다.
“바르텐 백작의 조사를 제가 맡았으면 하시는 겁니까.”
레이몬드는 파르앙 후작의 남다른 눈치에 피식 웃었다.
“맞네. 크로프트 공작을 조사한 조사관들을 영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조금만 깊이 조사했더라면 이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사단은 눈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증거들만은 챙겨 레이몬드에게 갖다 바쳤다.
애초에 조사관들을 꾸린 것이 재상이었다.
시오스 후작의 사람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그때는 시오스 후작이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린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라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조사관을 꾸리는 것은 재상의 소관이 아닙니까. 제가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시오스 후작이 이번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해도 시오스 가문은 바르텐 백작과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이네.”
“흐음, 그렇기는 하지요.”
“그리고 자네를 임시 1 등 서기관(재상부 내 주요 부서의 수장)으로 봉할 생각이야. 그럼 그대가 재상의
대리인으로 모든 일을 집행할 수 있겠지.”
파르앙 후작이라면 다들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바르텐 백작은 시오스 후작 부인의 친동생이었으니
조사에서 손을 떼게 할 명분도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까진 마무리하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서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창밖에는 어느새 붉은 기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파르앙 후작은 인사를 올리곤 집무실을 나갔다.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명했다.
“카르텔에게 상단 조사를 그만두고 복귀하라 전해라.”
“네 폐하.”
시종장도 집무실을 나가고 집무실엔 레이몬드 혼자만이 남았다.
적막하게 내려앉은 고요함 속에서 그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엘리야.”
그녀가 돌아왔지만, 그의 불안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무심함에 타들어 갈 듯한
갈증만이 더 심해졌다.
네가 떠나고 나서야 후회했다.
염치가 없어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는 답답함에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까이 있는데,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갈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끔찍했다.
무심함 뿐일지라도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하늘이 밤의 어둠으로 물든 그 시각.


공작가의 밀린 일들을 정리하고 있던 엘리야는 어두워진 창밖의 풍경에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밀린 일들이 산더미였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했다.
공작가의 일도 바빴지만, 상단에도 잠시 들려야 했으니까.
난 집사를 부르는 작은 줄을 잡아당겼다.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일단 여기 급한 서류들은 내가 사인했으니까 내일부터 바로 처리하도록 하게.”
“예, 아가씨.”
“또, 공작가의 묶였던 재산들도 늦어도 며칠 안에 다 풀릴 거니까 사용인들의 밀린 월급은 내가 아까 준
돈으로 먼저 해결해. 영지 일은…… 집사가 계속 맡아서 한 거야?”
“네. 보좌관님이 급하게 그만두시게 되면서 우선 급한 안건들만 제가 맡아 처리했습니다.”
사건이 터지며 공작가의 모든 재산은 동결되었었다. 하여 보좌관은 물론 저택의 사용인들 절반이 그만
두고 나갔었다.
다들 공작가가 망할 것으로 생각했을 테니 딱히 그들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충성스럽게 남아 있는 하녀장과 집사가 고마운 것이었다.
“그럼 일단 급한 것들은 아버지 말고 내게 알려. 당분간은 내가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공작가의 모든 일을
처리할 거니까.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집사.”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난 미리 준비해둔 작은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내 작은 성의야. 하나는 하녀장에게 전해줘.”
집사는 골드가 가득 든 주머니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십 년 치 봉급은 족히 넘는 금액이었으니 놀랄 만했다.

59 화

“아닙니다. 아가씨. 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큰 돈을, 제가 감히 어떻게…….”


“집사가 공작가에 보인 충성은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야. 허니 거절하지 말게. 그리고
앞으로도 쭉 공작가를 위해 애써주게.”
어서 받으러 주머니들을 살짝 밀자 난감한 얼굴을 하던 집사가 결국 주머니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집사 아버지는 저녁 드셨나?”
“네. 아까 침실로 저녁 식사를 올려보냈습니다.”
“하르펜은 진료를 마쳤고?”
“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다행이네. 난 잠시 나갔다 올 일이 있네. 아, 아버지뻘 알리지 마. 괜히 걱정하실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한데 아가씨.”
“말해.”
“저…… 밖의 황궁 기사들은 언제쯤 돌아가는 것인가요?”
“기사들?”
난 집사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어?”
“네. 공작가의 성문을 지키던 기사 님들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저택 밖에 몇 분이 남아계십니다.”
당연히 모두 돌아갔을 터라 생각 했던 기사들이 남아있다니.
이젠 공작가를 감시할 이유가…….
“설마.”
하나 떠오르는 이유에 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외출용 로브를 걸치고 저택을 나오자 집사가 말했던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 몇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난 그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는 것인가.”
“폐하께서 영애를 호위하라 명하셨습니다.”
설마 했던 이유가 역시 맞았다.
크로프트 공작가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듯 고위 귀족임에도 따로 사병을 두지 않았다.
하여 공작가에 기사단이 없었다.
호위라는 명목을 갖다 대기 좋은 이유가 되었겠지만, 당연히 호위의 목적이 아닐 것이다.
우직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기사를 보며 난 실소를 흘렸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지.”
“…….”
차마 아니라 말할 수 없었는지 기사들은 답이 없었다. 공작의 판결이 무죄로 떨어진 마당에 공작가를
감시할 이유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이유도 사라졌다.
헌데 내 호위라니 그들도 말이 안 되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혹시라도 내가 떠날까 봐 기사들을 남겨 감시를 붙인 게 틀림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거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위 따위 필요 없으니 따르지 말게.”
그리고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그들을 지나 마차를 타려 하자 기사 둘이 따라붙어 차갑게 말했다.
“하오나…….”
“폐하께 돌아가 전해. 다시 한번 더 이런 식으로 날 감시하려 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제국을 떠날
것이라고.”
기사들은 난감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마차로 향하자 기사들이 따르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따르지 말거라. 날 따라오면 지금 당장 제국을 떠날 것이다.”
기사들이 발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들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에그리타 제국 수도의 가장 큰 번화가라 할 수 있는 파르네오 거리.


그곳에서 가장 높은 건물 앞에서 난 마차를 멈추었다.
불사조의 문양을 간판으로 걸고 있는 이 건물은 바로 피닉스 상단의 에그리타 제국 지부였다.
해가 지는 시각이라 거리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난 사람들의 시선을 피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앗,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상단 영업은 마감되었습니다. 내일 찾아주시면 더 좋은 서비스로
모시도록…….”
“지부장을 만나러 왔네.”
상단의 안내원인 듯 분홍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올린 여자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다가가 상단의 고위직들만 가질 수 있는 은패를 보였다.
“이건……”
“지부장께 연락을 넣어주게. 엘리가 찾아왔다고.”
모자를 벗자 나를 본 여자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은색의 머리카락은 제국에서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크로프트 공작가의 상징으로 더욱 유명했다.
“앗. 네!”
그녀는 황급히 통신구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 마법진이 빛나며 루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르, 넌 퇴근해.”
루몬트는 멀뚱히 서서 나를 보고 있는 직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직원이 아쉬운 얼굴로 상단을 나가고 난 루몬트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상단 건물 제일 꼭대기에 있는 루몬트의 집무실은 피닉스 상단의 본부에 있는 제드의 집무실만큼이나
크기가 컸다.
그리고 호화스러웠다.
마치 고위 귀족의 집무실 같은 풍경이었다.
값비싼 마호가니 책상과 마법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샹들리에. 그 아래 깔린 카펫과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까지.
어쩐지 제드의 집무실보다 더 좋아 보여 이곳저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제가 예전부터 집무실에 대한 환 상이 있어서 신경 써서 꾸몄답니다. 좀 과한가요……? 하하.”
루몬트는 머쓱한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보기 좋아. 다른 곳도 아니고 에그리타 제국 지부인데 이 정도는 구색을 갖추어야겠지.”
본부는 아니고 지부긴 했지만, 피닉스 상단의 지부 중에서 압도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지부이기도
했다.
그러니 4000 골드란 큰 금액을 단 며칠 만에 준비할 수 있던 것이다.
멋쩍은 얼굴을 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은 난 먼저 소파에 앉았다.
“차 한잔 드릴까요?”
“괜찮아.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해.”
“네.”
루몬트는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헌데 이 시간에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신가요?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원래는 내일 오려고 했는데 내일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미리 말하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들렸네.”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바르텐 백작의 조사가 시작될 텐데 조사가 끝나기 전에 시오스 후작과 엮을 수 있는 작은 증거라도
찾아봐 줬으면 하네.”
재판은 끝났지만 아버지를 노린 진범은 잡지 못했다.
바르텐 백작이 모든 걸 메타스 자작에게 뒤집어씌웠기 때문이었다.
악어의 눈물 같은 더러운 눈물을 흘리며 납작 엎드려 빌던 바르텐 백작을 떠올랐다.
역겨운 모습에 속에서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때는 아버지의 무죄를 밝힌 것에 만족해야 했다.
재상인 시오스 후작을 함부로 엮었다간 아버지까지 위험해질 테니.
“흠……. 바르텐 백작이 그렇게 모든 죄를 덮어쓰고 가는 것을 보면 시오스 후작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루몬트는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바르텐 백작이 그리 나온 것도 무언가를 눈치챈 시오스 후작이 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바르텐 백작이었다면 절대 자기 죄를 인정 안 했을 테니까.”
아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결국 기사들에게 끌려나갔을 것이다.
“일단…… 시오스 후작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아봐. 몇 년간 그가 자주 만났던 귀족 가문 그리고 그가
요즘 준비하는 사업이라던가……. 뭐든 좋으니 전부 알아보게.”
시오스 후작이 대체 왜 아버지를 끌어내리려 했는지 그 이유부터 찾아야 할 거 같았다.
크로프트 공작가를 끌어내림으로 써 그가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네.”
고개를 끄덕이는 루몬트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어.”
“무엇입니까?”
“100 골드 정도 공작가로 보내주어야겠어. 공작가의 동결된 재산이 풀리는 동안 이곳저곳에 돈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내일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칼라일은……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잘 옮겼나?”
재판이 끝나고 루몬트가 칼라일의 거처를 옮겼다고 전했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곁에 있어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었다.
아직 떨어진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건만 밤이 되니 칼라일이 보고 싶고 걱정이 되었다.
내 불안을 느꼈는지 루몬트가 미소를 그렸다.
“네. 아주 안전한 곳에서 헬란 님과 잘 지내고 계시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내일 그곳에 들릴 것이니
헬란 님께 서신을 받아오겠습니다.”
“고마워. 당분간 칼라일을 잘 부탁하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라일 님과 헬란 님은 제가 책임지고 안전히 모실 테니까요.”
루몬트는 특유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처음 봤더라면 이런 모습에 그의 능력이 되레 못 미더워 보였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루몬트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겪어봐서 알고 있으니까. 싱거운 웃음을 흘린 난 그에게 물었다.
“오늘 상단에 별일 없었나?”
오늘 재판장에서 크게 일을 벌였으니 나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아마 내일 신문의 1 면은 모두 내가 차지 않을까.
발 빠른 신문사들이나 눈썰미가 좋은 귀족들은 루몬트가 피닉스 상단의 사람인 것을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그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재판장에 왔었으니까.
“신문사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재판이 열리는 중에 상단으로 황궁의 기사들이 찾아오긴
했었습니다.”
“황궁의 기사들?”
“네. 재판 중에 상단을 찾아온 것 이니 돈의 출처를 알기 위해 온 것은 아닐 테고, 어제의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레이몬드가 날 찾기 위해 제국의 상단들을 뒤진 거 같았다.
“상단은 괜찮나? 직원들이 많이 놀랐겠군.”
“뭐 크게 막 소란을 피운 거 같진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저를 찾았다고
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나 상단에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제 이름을 확인했지만 제가 재판장에 있다 하여 나중에 다시 들리겠단 말만 하고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타났으니 굳이 상단은 다시 뒤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군. 아마 내일부터 나와 피닉스 상단의 관계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타날 테니 저번에
일러둔 대로 말을 퍼뜨려 주게.”

60 화

피닉스 상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으니 피닉스 상단주인 제드와 작은 인연이 있다고 소문을
낼 생각이었다.
상단주라고 밝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너무 많은 관심을 끌 것 같아 당분간은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자칫하단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질 수도 있었으니까.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아.”
그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모레쯤 제드 님이 제국에 도착하니 한번 공개적으로 만나시는 자리를 만들면 딱 되지
않겠습니까.”
“제드가 온다고?”
올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라 놀랐다.
그러자 루몬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드 님이 엘리 님이 걱정되시는지 제국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틀 전에 출발하신다는 서신을 받았으니
모레쯤 도착하실 겁니다.”
제국에 도착하고 편지 한 통이 없어 살짝 서운함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온다니 놀라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듬직한 아군이 와주는 기분이었다.
제드를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그리던 난 문득 재판장에서 본 남자를 떠올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언뜻 보였던 호박색 눈동자.
제레미.
어쩌면 그곳에서 본 이가 제레미일지도 모른다.
잠시 그를 생각하던 난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루몬트.”
“네?”
“사람 하나를 좀 찾아 봐줘.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제레미란 이름을 가진 남자. 그가 지금
에그리타 제국에 있는지 알아봐 줘.”
그가 정말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그에게 받은 도움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나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숨기고 사는 남자였으니까.
“찾으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주게. 난 이만 가 봐야겠어.”
짧은 용건들만 말하였는데도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경비대들이 순찰을 할
시간이었으니 서둘러야 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난 루몬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빠른 걸음을 집무실을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뜬 난 아버지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치장을 시작했다.
머리를 예쁘게 땋아 핀으로 고정한 헤리스가 내게 보석함을 가지고 왔다.
“아가씨, 장신구는 좀 더 화려한 것으로 할까요?”
“드레스가 수수하니 그게 좋겠어.”
허리선을 강조하며 아래로 늘어지는 엠파이어라인의 짙은 보랏빛 드레스는 큰 레이스 장식이 없는 수수한
디자인이었다.
황궁으로 가는 차림이라기엔 조금 평범한 감이 있었지만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레이몬드를 만나기 때문에 신경 써서 꾸미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 레이몬드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눈이 있었다.
어제는 재판장으로 가는 길이라 최대한 장신구를 자제하고 갔지만 오늘은 아니다.
어제 큰돈으로 드러내긴 했지만 크로프트 공작가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욱 차림에
신경을 써야 했다.
한번 흔들렸던 귀족 가문은 대부분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아가씨, 치장이 다 되었습니다.”
굵은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를 채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치장이 끝났다.
난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보다 하녀들에게 은화을 하나씩 쥐여 주었다.
은화를 하나씩 받아든 하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의 한 달 월급이 1 실버였으니 놀랄 만했다.
하녀들은 이것을 받아도 되는 건지 불안한 눈빛으로 하녀장의 눈치를 살폈다.
난 하녀들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 그만 나가보렴.”
수고비치고는 상당히 많은 금액이지만, 일부러 준 것이었다.
모든 귀족가의 소문은 원래 아랫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나는 것.
어제 밀린 월급을 한 번에, 거기다 보너스까지 더해 지급했다. 이렇게 수고비까지 후하게 받았으니
하녀들은 말을 빠르게 옮길 것이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력에는 조금의 타격도 없다고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헤리스가 아무런 말을 않자 환하게 웃은 하녀들은 곧 방을 나갔다.
“헤리스. 집사에게도 말했지만, 사용인들을 더 뽑을 거야. 나간 사람들이 많아 일손이 부족하니까.
집사랑 같이 쓸만한 하녀들을 뽑아 줘.”
“네. 아가씨.”
“그리고…… 당분간은 하녀들의 입단속을 너무 철저히 하지 마.”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헤리스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곧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
난 챙이 넓은 연보랏빛 모자를 쓰고 방을 나갔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문을 열어주었다. 난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에그리타 제국의 본궁,
6 년 만에 다시 보는 커다란 황궁 은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장 큰 직사각형 모양의 새하얀 벽돌로 쌓아진 본채와 양옆으로 세워진 별채 궁전.
그 앞으로 넓은 정원과 중앙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본궁의 정원엔 여전히 레이몬드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붉은 장미꽃이 피어있었다.
장미가 피는 이맘때쯤이면 레이몬드와 정원을 거닐곤 했었다.

<i>‘레이, 장미가 정말 예쁘게 피었어. 그렇지 않아?’</i>


<i>‘……그렇네.’</i>

레이몬드는 늘 장미꽃이 피면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장미꽃을 좋아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미꽃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으로 정원을 채우며 평생 본궁에 발도 못 붙여보고 죽은 어머니를 기리는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난 항상 장미꽃이 필 때가 되면 새벽 일찍 정원을 미리 찾았었다.
그리고 장미가 더욱 예쁘고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썼었다.
장미가 예쁘게 피어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길 바라면서.
물론 그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장미 정원 속을 거니는 그와 나의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활짝 핀 장미꽃을 어두운 얼굴로 보는 그와 그런 그의 기분을 위로해 주려 애쓰는 나.
그리고 그는 그런 나에게 관심도 없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다면 장미 정원에 무리하게 힘을 쓰느라 식은땀을 흘리는 날 한번은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새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흐려지던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잠시 멈춰서 있던 난 이윽고 본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폐하. 엘리야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시종이 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시종장의 얼굴이 보였다.
옅은 미소를 그린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딱히 나쁜 기억은 없었기에 나도 작은 미소로 답했다.
집무실로 들어가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자리한 레이몬드가 보였다. 정확히 마주치는 흑빛 눈을 피하며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모두 나가 있어라.”
시종들을 전부 물린 그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은 내밀어봤자 거절당하겠지. 일어나, 엘리야.”
그의 앞의 말은 듣지 못한 듯이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건조한 내 얼굴을 짙은 눈으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앉아서 얘기해.”
그가 먼저 소파로 향하고 나도 뒤를 따랐다.
소파에 앉은 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소파 옆 협탁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았다.
이미 말라버린 꽃이 형체만 남은 상태로 꽃병에 꽂혀있었다.
그것이 원래 무슨 꽃이었는지 난 알았다.
그와 이혼 문제가 불거지기 전 황후궁에 피어있던 프리지아를 매번 꽃병에 넣어준 것이 바로 나였으니까.
말라 버린 꽃을 보는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의 고개가 꽃병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미 메마른 꽃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만졌다.
“말라 버린 꽃잎에 보존 마법을 거는 것. 황궁 마법사들의 실력으론 이게 최선이라더군. 엘리야 너라면
이 꽃을 살릴 수도 있겠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꽃을 살릴 수도 있었다.
언뜻 그의 눈빛에 기대심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난 형체만 남은 죽은 꽃을 살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죽은 꽃입니다. 억지로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는 건 꽃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편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땅으로 돌려보내 주시지요.”
메마른 꽃에서 시선을 거둔 순간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못 버려. 네가 준 거니까.”
짧고 굵은 그의 말에 태연을 가장했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준 것.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그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지만 이내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그에게 준 것들이 어디 저 꽃뿐이었을까.
내 세상이 레이몬드로만 가득 찼던 그 시간 동안 난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싶었으니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꽃을 남겨두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거북했다.
난 꽃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 전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조금 무례하다 싶을 만큼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61 화

갑자기 돌아와 그를 마주하게 되어서인지 아직 냉정하게 그를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짝사랑했으니 재회에 완전히 무감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여 그를 일부러 더욱 무시하고 있었다.
내 무례함에 화가 났다면 쫓아낼 것이고 그래 주면 이 답답한 공간을 나갈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는 잠시간 아무런 말 없이 미동 없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인지 파고드는 시선이 집요했다.
분명 그와 더 이상 친구로도 지낼 수 없다 선을 긋고 떠났는데 돌아오면 내가 달라질 줄 알았던 건가.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재판의 결과에 따른 앞으로의 일들을 상의하기 위해서야. 원래는 공작에게 직접
말해야 하지만…… 지금 공작의 상태가 안 좋으니까.”
“네. 그리고 당분간은 제가 아버지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 것이니 제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어제 재판으로 공작의 무죄가 밝혀졌으니 공작가의 동결된 재산들은 모두 내일 안으로 풀릴 거야.”
“내일 안으로요?”
동결된 재산을 푸는 시간이 삼사 일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나하나 서류들을 처리하고 승인받는 일련의 과정들이 꽤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래. 몇 개월이나 공작가의 자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문제가 많이 생겼을 테니 빨리 자금부터 돌려
놔야 귀족들이 섣부른 짓을 못 하겠지.”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한번 흔들린 귀족 가문이 다시 일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크로프트 공작가를 위해 그가 서류 절차를 빨리 진행하라 명을 내린 거 같았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오늘 황실에서 크로프트 공작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야. 억울하게 누명을 쓴 크로프트
공작이 위험한 순간에도 막중한 책임감에 도망가지 않고 재판을 받았다, 이렇게 말이야.”
“네?”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귀족의 재판이었습니다. 공식 발표를 하시면 크로프트 공작을 특별 취급한다는 좋지 못한 소문이
날 수도 있습니다.”
난 미간을 살짝 좁혔다.
황제의 모든 결정은 겉으로나마 공명정대해야 했다.
이미 아버지에 대한 재판을 미루면서 공정성에 관한 논란이 생겼었다.
한데 공식 발표까지 한다면……. 레이몬드의 평판에 좋을 게 없었다.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있자 레이몬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흠…….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난 순간 당황스러워 얼굴을 굳혔다.
걱정이라니.
“아닙니다. 전 그저…….”
“그저?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로만 생각해 본다면 황제의 공식 발표는 만류할 일이 아닐 텐데. 공작가의
무너진 위신을 세워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레이몬드의 말이 맞았다.
그의 평판이 어떻든 일국의 황제인 그가 공작가를 비호한다면 감히 누구도 공작가의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순간 당황한 나를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휘둘릴 뻔하다니.
난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전 그저 아버지라면 이리 답하셨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폐하를
곤란하게 만드는 충신이 아니시니까요.”
“공작이라면…… 그랬겠지. 그러니까 넌 지금 철저히 공작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란 건가?”
“네. 그게 아니면 제가 폐하의 앞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군.”
그는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웃음을 힘없이 흘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공작이라면 공식 발표를 거두라 했겠지만 난 공작의 뜻을 따르지 않을 거니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폐하.”
“이때까지 귀족의 재판에 대해 황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건 뷔부르크 궁전에서 무죄를 받은 자가
없어 그런 거야. 이번엔 확실한 무죄이니 귀족들도 별말 못 할 거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무죄라 한들…… 꼬투리를 잡힐 일이었다. 특히 황제인 그에게는.
그가 들을 수많은 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못해 망설여졌다.
물론 그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그저 충신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황제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내 말을 듣겠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식 발표에 네 얘기를 넣었으면 하는데…… 네가 싫다면 하지 않을 거야.”
“제 얘기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폐하.”
“재판장에서 4 천 골드를 기부했다고 들었어. 그래서 공식 발표에 그 얘기를 끼워 넣었으면 해. 공작가는
그런 누명을 쓰고 재판장에서는 모욕까지 당했지만 크로프트 영애는 오히려 큰 금액을 기부했다, 고
말이야.”
그의 말에 난 멈칫 고개를 돌려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이건 공작가의 평판 보다 나의 평판을 올리는 일에 가까웠다.
하여 방금 레이몬드가 말한 일은 이미 나도 계획하고 있던 일이었다.
상단을 통해 소문을 내려고 말이다. 제국에 소문이 쫙 퍼질 정도가 돼야 나의 평판이 올라가 귀족들도
나와 손을 잡으려 할 테니까.
난 오랫동안 제국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맥이 사실상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떠나기 전엔 황제와의 이혼과 리제나까지 엮여 이미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다.
내게 피닉스 상단의 자금줄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고위 귀족들을 크로프트 공작가의 우호 세력으로
만들긴 어려웠다.
거기다 시오스 후작까지 상대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황제가 공식적인 발표에 나를 언급해준다니……. 거기다 나를 마치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대단한
충신처럼 포장해서 말이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아버지뿐만 아니라 내 명예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우리 가문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특별 대우를 해 준 적은
없었다.
황후인 내게도 무심한 사람이었다. 충신인 아버지라고 하여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겐 나나 아버지는 언제나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크로프트 공작가가 크게 흔들리며 그도 위험을 느꼈겠지만, 누명에서 벗어난 마당에 이렇게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내게 바라는 다른 게 있는 걸까.
레이몬드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충신이고 그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언가를 아낌없이 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를 주면 두 개를 얻어 자신의 실리를 채웠다. 그 실리가 제국의 큰 도움이 되었고 말이다.
피닉스 상단인가.
재판 전날 밤 그가 만난 루몬트가 피닉스 상단의 사람이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재판장에서 4 천 골드를 들고 온 사람이 루몬트란 것도 들었을 것이다.
피닉스 상단과 내가 연관이 있다는 결론은 너무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나를 통해 피닉스 상단의 줄을 잡으려는 건가.
대륙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상단이니 황실과 직접적인 교류를 튼다면 레이몬드에게도 상단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내가 내어 줄 것이 상단이라면 그가 내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난 이윽고 무감정하게 시선을 내리떴다.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머리 위로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예의를 차릴 거야.”
“한낱 영애인 제가 폐하께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낱, 영애…….”
반듯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 전 이제 폐하와는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허니 폐하께서도 제게 거리를 두심이 맞습니다.”
이혼한 지 7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난 그와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친구처럼 남을 마음도 없었으니까.
“……난 너와의 인연을 놓은 적이 없는데.”
“……?”
그가 무어라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그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별말 아니었어. 네가 불편하다니 편하게 대하라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난 내 뜻대로 할 테니 너도
강요하진 마.”
“……제가 감히 어떻게 폐하께 강요를 할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재판 결과에 대한 공작가의 일들은 아까 말한 대로 처리될 거야. 혹시 급히 자금이
필요하다면 내가 줄 테니 말해.”
“아니요. 자금은 충분합니다.”
“피닉스 상단의 자금이 있어서인가…… 4 천 골드도 상단의 자금, 맞아?”
“네. 맞습니다.”
흠 그는 작은 숨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바르텐 백작의 하인을 가로챈 것도…… 피닉스 상단의 사람이었지. 그날 밤 함께 있던 남자의 이름이
루몬트였던가.”

62 화

“맞습니다. 피닉스 상단 에그리타 제국의 지부장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저를 도와준 사람이죠.”


“모습을 숨겼던 걸 부정하지 않는구나.”
“딱히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모습을 숨기고 움직였던 건 공작가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그런
것뿐이었습니다. 폐하와 마주쳤던 건……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요.”
“루몬트란 자와는 그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건가?”
“그럼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하나요?”
기분 나쁜 물음에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실언한 것 같군. 미안해.”
“……네.”
“그래. 그럼 바쁠 테니 이만 가 봐. 생각보다 오래 붙잡은 거 같네.”
“……더 물으실 게 없으신가요?”
난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그를 보았다.
당연히 피닉스 상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황제의 공권력을 이용해 내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대신 상단과의 교역을 트는 게 목표가…… 아니었나……?
그가 날 거쳐 피닉스 상단과의 연줄을 만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난 머리가 갑자기 멍해졌다.
피닉스 상단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까지 나서서 나와 아버지를 감싸려는 거지.
멍해진 머리는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지만 레이몬드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없어. 궁금한 건 다 물었어.”
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꾹 삼킨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지 않은 호의는 거북하고 불편할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와 더 함께 있으면 혼란스러움만 가중될 거 같았다. 어제도 오늘도 6 년 만에 만난 레이몬드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집무실을 나가려 몸을 돌린 그때 그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엘리야.”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리자 나를 올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깊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린 진범은 바르텐 백작이 아니야. 그러니 항상 몸조심해.”
“……걱정 마세요.”
익숙하지 않은 그의 걱정 어린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난 집무실을 빠르게 나갔다.

* * *

본궁을 나온 난 정신을 차리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레이몬드와의 대화가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몹시도


피로함이 들었다.
그답지 않았던 모습들 때문에.
그리고 그를 마주할수록 혼란스럽고 잊고 있던 감정의 파편들이 되살아나 나를 찌르는 거 같았다.
레이몬드를 완전히 잘라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은은히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마주하면 안 되는 거였나.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감정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때,
다그닥거리는 말발굽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본궁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난 마차를 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
황실의 문양이 그려진 황가의 마차.
현 에그리타 제국 황실에서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황실 마차를 탈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에드먼드 에그리타.
레이몬드와 리제나의 아들이자 제국의 1 황자.
마차 문이 열리고 앳된 소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밝은 햇빛 아래 검은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에드먼드가 맞았다.
설마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에드먼드를 보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에드먼드를 보면 칼라일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으니까.
에드먼드가 가까워지고 난 몸을 숙였다.
“제국의 빛이신 1 황자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라.”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미성이 들려왔다. 난 몸을 일으켜 황자와 마주 섰다.
“그대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버지를 만나고 가는 길인가?”
어린 티가 많이 났지만 제 딴엔 위엄있게 보이려는 듯 한껏 낮게 깐 목소리에 웃음이 살짝 나왔다.
그때 나를 빤히 보던 황자의 검은 눈이 커졌다.
“어…… 크로프트 공작이랑 머리 색이 같아.”
에드먼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그때 에드먼드의 나이는 겨우 5 살 남짓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나를 빤히 보는 에드먼드에게 엽은 미소를 그렸다.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제 아버님이랍니다. 황자 전하.”
“아, 그래서 이렇게 똑같구나! 근데 난 한 번도 크로프트 영애는 본 적이 없는데……. 왜 한 번도 내
생일 파티에 안 온 거야?”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황자의 생일 파티에 수도의 고위 귀족들이 전부 참석했을 테니 내가 오지
않았던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황자의 나이가 올해 12 살일 텐데……. 내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한 건가.
아직 어린아이이긴 했지만 황자의 나이치곤 그리 어리지 않았다.
황족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사교 모임에 등장하곤 했다.
하여 귀족 가문의 가십은 물론이고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 사고들도 빠르게 접했다.
정보를 놓치지 않아야 실수를 할 리 없었으니까.
가끔 늦게 데뷔하는 황족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황족들은 버려졌거나 황제의 관심 밖에 난 사고뭉치인
경우였다.
에드먼드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자였고.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시종이 곤란한 낯빛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에드먼드는 정말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거 같았다.
하긴, 들어서 좋은 이야기가 아니긴 했으니…….
순간 시종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종은 내가 혹시라도 에드먼드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할까 걱정되는지
불안하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 황후와 현 황자의 만남.
다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어도 내가 황제와 이혼한 결정적인 이유가 에드먼드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에드먼드를 싫어한다 생각하겠지.
그리 생각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다.
불안한 시종의 눈초리를 무시하며 에드먼드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몸이 안 좋아 오랜 시간 영지에 내려가 있었답니다. 하여 황자 전하의 생일
파티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랬군. 이젠 괜찮은 건가?”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럼 다음 달에 있을 내 생일 파티엔 꼭 와 줘. 기다리고 있겠네.”
“아…….”
예상치 못한 말에 나의 올라간 입꼬리가 움찔했다.
에드먼드의 갑작스러운 생일 파티 초대 때문이 아니었다.
생일이 다음 달일 줄이야.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공교롭게도 에드먼드와 칼라일의 생일이 같은 달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똑같은 달에 태어난 두 아이 중 누군가는 황궁에서 생일 파티를 열고 누군가는 소박하게 엄마와 보내야
했으니까.
에드먼드의 잘못이 아닌 것도 알고 칼라일을 황자로 만들지 않는 것도 내 선택이었지만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못 오는 것인가?”
내가 답이 없자 에드먼드가 되물었다.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검은 눈동자는 호의적이었다. 순진한 어린아이의 눈빛에 차마 못 간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 달이면 어차피…… 피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럴 리가요. 꼭 가겠습니다.”
“약속했으니 꼭 와야 해.”
에드먼드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나에게 웃었다.
“네.”
확답까지 들은 에드먼드가 시종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
황자의 생일 파티…….
“칼라일……”
칼라일을 황권 다툼에서 지키기 위해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지만 황족으로서 누려야 하는 것을 허락도
없이 빼앗은 거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칼라일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다.
난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아가씨.”
저택에 도착하자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하르펜이 로비에 서 있었다.
“하르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근심이 많아 보이는 표정에 얼굴을 굳히자 하르펜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각하께서 업무에 복귀하시겠다며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한동안은 쉬셔야 한다고 말씀을 올렸지만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십니다.”
아침 식사에서 은근하게 밀린 일들을 물으셨을 때 설마 했었는데 진짜 집무실로 출근하실 줄이야.
난 하르펜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못 말리는 일중독이셨다.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는 거야?”
“네. 계속 서류를 보고 계십니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아가씨께서 좀 말려주십시오.”
하르펜은 물론이고 집사와 하녀장도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걱정 마. 내가 해결할게.”
옅은 미소를 지은 난 집사에게 모자를 건네곤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아버지 저예요.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하르펜의 말대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황궁에 잘 다녀왔느냐.”
“네. 잘 다녀왔어요. 그보다 아버지 제가 아침에도 말씀드렸잖아요. 당분간은 제가 공작가의 일을
처리하겠다고요. 설마…… 절 못 믿으셔서 이렇게 나오신 건가요?”
난 서운한 척 눈꼬리를 내리뜨렸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가 당연히 잘할 것임을 알지만 밀린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 무리를 할까 싶어…
….”
“걱정 마세요. 무리하지 않고 잘할게요.”
난 책상으로 다가갔다.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자 포기의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내게 서류를 넘겼다.

63 화

“그래도 혹시라도 일이 막히거나 하면 내게 바로 말하거라.”


“당연하죠. 제 선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예요.”
나의 능청에 싱거운 웃음을 지은 아버지가 말했다.
“차 한잔하겠느냐.”
“좋아요.”
책상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소파로 향했다. 집사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기자 곧장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차를 가져와 줘.”
“네. 아가씨.”
난 아버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가지고 온 집사가 테이블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은은한 허브향이 코끝을 스친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선 오늘 널 왜 보자고 하신 것이냐.”
“아, 재판 결과에 따른 아버지의 향후 일처리를 저와 상의하시려 부르신 거였어요.”
“뭐라 하시더냐.”
“우선 공작가의 재산을 내일까지 풀어주신다고 하셨고, 공식적으로 아버지의 무죄를 황실에서 발표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폐하께서 직접 말이냐?”
아버지는 얼굴을 구기셨다.
“귀족들 사이에서 폐하의 여론이 좋지 못한데 공식 발표라니…….”
미간을 한껏 구긴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셨다.
당장 일어나 레이몬드를 말리러 갈 태세인 거 같아 난 서둘러 말했다.
“폐하께선 이미 마음을 정하신 상태였어요. 아시잖아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 번복하지 않으시는
거.”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레이몬드의 고집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항상 곁에서 봐 왔으니까.
“하아, 이미 결정하셨다면……. 어쩔 수 없겠구나. 그것 말고 다른 얘기는 없으셨니?”
“공식 발표 때 제가 제국에 돈을 기부한 일도 언급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되면 아마 바닥으로
떨어졌던 저희 공작가의 명예가 빠르게 회복될 거라고요.”
“그렇긴…… 하겠지.”
아버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공작가의 명예가 회복된다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황제에겐 이로울 것이 없어서인지 그다지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사실 저도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저희 가문이 폐하께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희생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은 아니시잖요.”
“……그렇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기신 걸까요.”
“……글쎄다. 심경의 변화라기보다 크로프트 공작가를 지키는 것이 폐하께도 이로운 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아버지는 시선을 내리뜨렸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크로프트 공작가는 황제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가문이니만큼 아버지가 건재해야 황권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여 그가 아버지의 재판을 미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지 않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본 그의 모습은…….
“물론 크로프트 공작가를 곁에 두는 게 이로운 일이긴 하겠지만…… 폐하답지 않았어요.”
“…….”
답이 없는 아버지에게 난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전 폐하께서 저희를 도와주는 대신 피닉스 상단에 대한 어떠한 거래를 원하실 줄 알았어요. 한데 제게
루몬트에 대해서만 물었을 뿐 상단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으셨어요.”
“…….”
“그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셨다는 건데 폐하는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잖아요.”
혈육들을 제 손으로 모두 죽이고 황좌에 오른 레이몬드는 귀족들의 숙청에 일말의 동정도 품지 않았다.
설령 반정에서 공을 세운 충신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가차 없이 잘라냈다.
원래 내가 알던 그였다면 무죄가 밝혀졌으니 빠른 시일 내에 공작의 업무에 복귀하고 절차에 따라 재산의
동결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 나서 공작가의 명예를 살리는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아야 했다.
그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냉정하고 냉혹하게 귀족들을 저울질했을 것이다.
그게 이때까지 그가 제국을 지배했던 방식이었다.
무감하고 냉혹했지만 그렇기에 무너졌던 황권을 다시 굳건히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제국민들에겐 좋은 황제였지만 충신과 주변 사람들에겐 냉혹하고 잔인하리만치 무감했기에 내가 그를
떠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서 칼라일을 지키려고.
그런 사람이 갑자기 조건 없이 날 감싸준다니 이걸 누가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
차리리 내게 루몬트 상단과 관련해 큰 이익을 내달라 했다면 마음 편히 거래를 하고 돌아왔을 텐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6 년이나 날 찾고 또 어제 보여줬던 진득한 눈빛. 오늘의 보여준 모습까지.
이건 마치…… 과거의 내가 그에게 매달릴 때 보였던 모습과 닮아있었다.
집요하게 그의 뒤를 보고 조건 없는 희생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스스로의 생각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i>‘내가 널 사랑할 리가 없잖아.’</i>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의 마음이 바뀌었을 리가…… 없다.
생각이 너무 깊어져 쓸모없는 망상을 했다.
“엘리야,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어요.”
아버지가 혹시나 내가 아직도 레이몬드를 사랑한다고 생각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며 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건 과거로 충분했으니까.
태연함을 가장하며 차를 마시자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한데 엘리야. 칼라일을 이렇게 계속 혼자 두어도 괜찮은 거니? 아직 어리잖니.”
“헬란이 함께 있어요. 그리고 내일 가 볼 생각이에요. 제가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돌볼 거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다시 떠났으면 좋겠구나.”
아버지는 칼라일의 존재가 드러나 게 될까 걱정스럽고 불안하신 듯했다.
“지금 떠나면 아버지가 위험해서 안 돼요. 그리고 칼라일은…… 제가 잘 지킬 거예요. 설령 칼라일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다 해도 아버지와 가문을 버리고 떠나진 않을 거예요.”
지금 떠나면 위태로운 공작가는 결국 시오스 후작에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거친 기침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켈록, 켈록.”
“아버지 이만 올라가서 쉬세요. 아직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돼요.”
기침 소리에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하자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무리하지 말고 힘든 일 있음 언제든 말하거라.”
“네. 나중에 방으로 들릴게요.”
아버지가 집무실을 나가고 난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생각할 것들이 끊이질 않아 피곤했다.
공작가의 상황과 시오스 후작, 레이몬드의 이상한 태도와 칼라일의 걱정까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레이몬드…….”
그의 확 바뀐 태도와 눈빛들이 마치 작은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찔렀다.
예민한 신경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
“누구야?”
“아가씨, 집사입니다.”
“들어와.”
소파에서 일어난 난 책상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책상 위로 연분홍빛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그것이…… 방금 시오스 후작가에서 아가씨의 앞으로 보낸 티파티 초대장입니다.”
“뭐?”
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시오스 후작가에서 온 초대장.
난 불편한 눈빛으로 봉투를 내려보았다.
티파티라면…… 시오스 후작이 보낸 것이 아닐 것이다.
시오스 후작 부인은 지금 동생의 일로 정신이 없을 테니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난 봉투를 뜯어 서신을 열었다.
그러자 리제나의 아름다운 외모를 닮은 빼어난 필체가 보였다.

[명일 시오스 후작가에서 봄을 맞은 티파티를 개최합니다. 크로프트 영애께서도 시간이 되신다면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랍니다.
<right>-시오스 리제나]</right>

특별할 것 없는 간결한 초대장이었다.


“아가씨, 참여하실 건가요?”
집사가 물었다.
“흠……. 글쎄.”
갑자기 날 초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리제나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가 제국에 돌아온 것이 반가워서 초대한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니
말이다.
가문 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리제나와 나의 사이에 반가움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대외적으로 볼 때 난 그녀의 자리를 빼앗아 황후가 되었던 사람이고 리제나는 나를 레이몬드와 이혼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 우린 반가움보단 껄끄러움이 더 어울렸다.
거기다 시오스 후작이 공작가를 노리고 있으니…….
근데 그녀는 이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바르텐 백작 뒤에 시오스 후작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나 리제나의 연관성까진 알 수 없었다.
시오스 후작과 리제나. 부녀 사이가 그렇게 애틋하진 않을 것이다.
시오스 후작이 자식들에게 살갑지 않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여 리제나의 동생은 아예
제국을 떠나 몇 년째 밖으로 나돌고 있었다.
그러니 모를 수도 있을 거 같지만…… 재판장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시오스 후작의 곁에 앉아있던 리제나는 바르텐 백작의 소란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재판장을 내려보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바르텐 백작이 일어났을 때 조금이라도 놀랐을 것이다.
아무리 가족의 정이 없는 가문이라 해도 자신의 삼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에도 미동이 없었다.
다 알고 있다면…… 날 티파티에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지.

64 화

톡톡-
갈지 말지 고민되는 선택에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티파티나 파티는 최소 3 일 전에 초대장을 보내는 게 예의였으니 갑작스러운 초대에 시간이 나지 않을 거
같다 하면 쉽게 거절할 순 있었다.
근데 그럼 꼭 내가 피하는 것 같잖아.
리제나가 불편하긴 했지만 무서운 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다 문득 집무실에 쌓인 신문들에 시선이 멈추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무죄에 대한 기사들이 실린 신문들이었다.
그들은 크로프트 공작에 대해서만 보도했을 뿐, 엄청난 돈을 기부한 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티파티…….”
시오스 후작가의 티파티에는 분명 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모일 것이다.
난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난 새하얀 편지지에 빠르게 답장을 적었다.

[초대 감사드립니다. 명일 후작가에서 뵙지요.]

답장을 봉투에 넣고 촛불에 붉은 왁스를 녹였다. 봉투 위로 붉은 인장을 찍은 난 서신을 집사에게 건넸다.


“지금 바로 시오스 후작가로 보내고 피닉스 상단에 사람을 보내줘. 내가 상단주를 좀 보자고 했다고.”
“네. 아가씨.”
서신을 받아든 집사가 빠르게 집무실을 나갔다.

* * *

해가 어스름히 지던 시각.
에그리타 제국 수도와 가까운 항구에 룬트 왕국에서 도착한 배가 정박했다.
우르르 내리는 많은 사람 중에 섞인 제드는 찌뿌둥한 몸에 기지개를 크게 켜며 입을 쩍 벌렸다.
“오늘은 일단 술이나 좀 마실까.”
어차피 곧 상단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으니까.
하품을 시원하게 내뿜은 제드는 느긋하게 배에서 내리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제드의 눈이 커졌다.
“뭐야,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제드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제레미에게 물었다. 노을 지는 햇빛 아래 반짝이는 백금발을 쓸어넘긴
제레미가 해사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왜 여기 있냐니. 제국으로 간다고 했었잖아.”
“아니 그거야 알고 있었지. 내 말은 내가 오늘 오는 걸 어떻게 알고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내가 떠날 때 언제 룬트 왕국에서 출발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기억 안 나?”
그날 제레미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술을 진탕 마셨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기는커녕 집까지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곱상하게 생긴 거랑 달리 술은 더럽게 센 제레미는 다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기억 안 나. 뭐 얘기했다 치고 그래서 일부러 마중 나온 거냐?”
“응. 너 에그리타 제국은 처음이잖아. 그래서 친구인 내가 이렇게 마중을 나온 거지.”
제레미가 씨익 미소를 짓자 제드는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내가 아주 술맛 좋은 곳을 알아.”
“그래? 그럼 가야지.”
제드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제레미의 곁으로 붙었다. 술에 죽고 술에 웃는 제드다운 모습에 피식 웃은
제레미는 그와 함께 항구를 벗어났다.
밤이 깊어진 수도의 술집은 난장 판과 다름없었다.
벌써 한판 붙은 용병들도 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한복판을 지나면 상대적으로 소란과는 조금 먼 구석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드와 제레미가 앉아 있었다.
제레미는 벌써 몇 병째 일지 모를 술병을 비우는 제드를 보다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깊어진 밤하늘엔 커다란 만월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을 보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 먹은 술병을 던지듯 바닥으로 떨군 제드는 은빛 달을 보고 있는 제레미를 보았다.
흐려진 호박색 눈동자는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거 같았다.
저놈이 저런 눈빛을 하게 만드는 건 한사람뿐이다.
“너 엘리 생각하고 있지?”
제드의 걸걸한 목소리에 제레미는 시선을 내렸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불가항력이라서 말야.”
“밸도 없는 놈. 여기까지 와서 엘리를 만나지도 못했지? 그러고선 이렇게 뒤에서 그리워하고 있냐.”
“그러게.”
제드는 실실 웃기만 하는 제레미를 보고 인상을 팍 구겼다.
“야. 불가항력일 정도로 포기가 안 되면 차라리 엉겨 붙기라도 해. 너 그렇게 배짱 없는 놈 아니잖아.”
부딪혀서 깨지면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아나, 제레미와 엘리가 잘될 수도.
제드는 술기운에 생각했다.
“그 사람 앞에선 그런 배짱 같은 거 없어.”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제드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본론을 언제 꺼낼 거냐.”
제드는 제레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마중 나온 게 아니란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제레미를 봐온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제레미는 나쁜 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중을 나오는
그런 섬세한 배려를 하는 놈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바람처럼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제드가 어서 말하라는 듯 턱짓을 하자 제레미의 호박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눈치 빠르긴, 너한테 따로 부탁할 게 있어서 미리 보자고 했어.”
“네 부탁이라면…… 당연히 엘리가 관계되어 있는 일이겠지. 뭔데.”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해 뒷조사를 해줘.”
“드로이트 공작가?”
제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름 들어본 거 같은데……. 아, 그 에그리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가 아닌가? 초대 황제 때부터
명맥이 이어져 온 명문가 맞지?”
“……맞아. 뭐 그것도 옛말이지만.”
제레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제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엘리만큼이나 비밀이 많은 놈이었다.
“흠. 갑자기 그 가문은 왜? 네 말대로 현 황제가 황좌에 앉은 이후 권력을 잃었잖아.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가문 아닌가?”
“맞아. 그런데 움직임이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말이야. 시오스 후작가와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해서 깊이
알아봐 줘. 엘리에겐…… 당분간 말하지 말고.”
제드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가까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오스 후작이 나온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루몬트에게 상황 보고를 받고 있었기에 이번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에 시오스 후작이 연루된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엘리에게 비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레미.”
“응.”
“내가 너와의 사이를 엘리에게 비밀로 해 준 건 엘리에게 어떠한 피해도 있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와의 세월이 오래되긴 했지만 엘리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동업자야.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난 엘리야.”
제드의 갈색 눈동자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술이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했으니까.
제레미는 그런 제드를 보며 당황하는 게 아니라 미소를 그렸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지. 제드 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갑자기 딴 얘기를 하는 제레미에게 성을 내려던 때 제레미가 말했다.
“내 성은 드로이트야.”
“……뭐?”
제드는 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 멍 청한 얼굴을 했다.
“드로이트 프로이스……. 그 사람이 나의 아버지고 내가 그의 아들이라고.”
신분이 귀족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까지 상상하진 못했었다.
엘리야가 전 황후 폐하였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실에 제드의 얼굴이 벙졌다.
대체 내 주위 사람들의 신분이 다 왜 이런 거야.
제레미는 별 감흥도 없는 얼굴로 제드의 벌어진 입을 닫아 주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제드는 제레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그럼 폴리모프 마법으로 지금 모습을 바꾼 거야?”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하여 많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공작가의 유명한 특징은 알고 있었다.
드로이트 공작가는 위대한 마검사였던 초대 황제의 축복을 받아 후손 들에게 황족의 상징인 검은 빛이
하나씩은 이어진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제레미의 모습은 백금발의 호박색 눈동자. 검은색이라 곤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제드를 향해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이게 진짜 내 모습 맞아. 내가 공작가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거든.”
“……넌 무슨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냐.”
“울면서 할 나이는 지났잖아. 그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제레미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정말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가가 관련 있는 거라면…… 심상치 않은 일일 테니까. 드로이트
때문에 엘리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그래. 정확한 증거를 찾고 말할 거야.”
“그렇지만…….”
제드는 갈등이 되는지 복잡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부탁할게, 제드. 이것도 결국 엘리를 위한 일이야.”
제레미는 흔들리는 그에게 미소마저 지우고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휴…… 알았다. 대신 네 상황이 심각해지면 엘리에게 알릴 거다.”
“……알았어.”
엘리를 위험하게 만들 놈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제드는 간절해 보이는 제레미의 뜻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은 더욱 깊어갔다.
65 화

다음 날.
이른 시간부터 집무실에 출근해 서류를 보고 있던 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가 넘었을 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집사입니다.”
“들어와.”
난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이제 티파티에 가셔야 할 시간이 다 되셨습니다.”
“뭐?”
집사의 말에 난 고개를 번쩍 들고 시계를 보았다.
“시간 정말 빠르네.”
마음 같아선 밀린 일들이나 처리하고 있고 싶었지만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간다는 답장까지 보내고 지금 와서 빠지면 티파티가 두려워 도망친 꼴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제나가 초대한 것인데 도망치는 꼴이 될 순 없다.
“마차는 이미 대기 중입니다.”
“알겠어. 이것만 마무리하고 일어날게.”
난 영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확인하고 공작가의 인장을 찍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사가 집무실 한편에
있던 전신거울을 가지고 왔다.
거울 앞에서 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하녀들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아침에 미리 치장을 하고 있어 하녀를 다시 부를 필요까진 없었다.
연보랏빛 새틴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굵게 말아 풀어 내린 난 평소보다 조금 앳돼 보였지만 봄의
티파티에는 딱 어울렸다.
아침 먹고 바로 집무실로 와 서류만 보고 있어서인지 특별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이만하면 됐어. 나가자.”
살짝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편 난 집사가 내미는 손가방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난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음에도 기분은 상쾌하지 못했다.
“이곳에 또 올 줄이야.”
후작가에 방문했던 기억 중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과거의 불쾌한 기억들이 떠올라 인상을 구기던 난 예전보다 커진 후작가 저택의 전경에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왔었던 에드먼드의 생일파티 때만 해도 큰 본채 하나에 별채 하나가 전부였다.
한데 그사이 본채 오른쪽으로 큰 별채 두 개가 더 생겨있었다.
귀족가의 저택들은 그 가문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권력이 높아지고 부가 커질수록 당연히 저택의 크기도 커지고 정원도 화려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원도 커진 거 같네.”
작은 분수대와 제비꽃이 피어 있던 정원은 화려한 작약으로 바뀌고 분수대도 커져 있었다.
거리가 꽤 있음에도 정원 중앙의 분수대가 보일 정도였다.
양동이에서 물을 붓는 천사의 조각상 역시 남다른 솜씨를 가진 조각가의 작품 같았다.
거기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용인들의 수는 얼핏 보아도 공작가의 배는 넘었다.
내가 제국에 머물 때만 해도 시오스 가문의 재력이 이렇게 크진 않았다.
재상이 되며 세력이 커졌다.
보고서엔 그리 한 줄로 적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해진 후작가의 전경을 보자 문득 한때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한 가문이 떠올랐다.
“드로이트 공작가.”
에그리타 제국의 건국 공신이자 가장 오래 권력을 잡았던 드로이트 공작가.
공작가의 위세가 제일 높았을 적엔 제국의 실질적인 황제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비록 모두 과거의 이야기긴 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남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지만 난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중요한 건 드로이트 공작가가 아니었으니까.
‘시오스 후작을 상대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내가 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너무 커져 있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던 그때 하녀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크로프트 영애. 아가씨께서 화원으로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알겠다.”
차가운 시선으로 전경을 훑은 난 이윽고 하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향했다.
큰 저택의 뒤편으로 돔으로 지어진 큰 온실 화원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아름다운 꽃이 필 듯한 온실 안의 온도가 따스했다.
따스한 온도 아래 어여쁜 튤립들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튤립들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에 들어서자 달큰한 향기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드럽게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똑바로 차린 난 큰 가제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길을 안내한 하녀가 물러가자 가제보 아래 펼쳐진 동그란 테이블과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마지막 손님인 듯 이미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오늘 티파티의 주최자인 리제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크로프트 영애.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금발을 우아하게 땋아 올리고 허리선이 강조되는 연분홍 엠파이어형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화원에 핀 튤립
한 송이처럼 아름다웠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답니다.”
“갑작스럽게 초대해 기분이 나쁘시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좋게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죠. 영애.”
리제나는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본 나는 멈칫했다.
그녀가 권한 자리는 자신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족가에서 열리는 티파티는 순수하게 수다를 떨고 즐기기 위해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다.
보통 티파티를 여는 가문들은 고위 귀족이었기에 사실상 친목을 빙자해 인맥을 쌓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자리 선정 하나하나에도 의도가 담겨 있었다.
주최자는 자신의 옆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앉힌다.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되는 사람 말이다.
나와 리제나의 관계는 당연히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레이몬드와 내가 이혼한 이유에 리제나가 있었으니까.
또한 난 그녀의 아랫사람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은 내가 공작가의 영애이니 리제나가 나를 배려해 가장 좋은 자리를 주었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허울 좋은 거짓말일 뿐이다.
보통 자신과 동급이거나 더 높은 귀족이 티파티에 참석할 땐 일부러 옆자리가 아닌 같은 테이블의 다른
자리를 주었으니까.
딱 정해놓은 룰은 아니었지만 티파티의 오랜 관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런다는 건 일부러 했다는 건데…….
난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막 소녀의 티를 벗은 듯한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어서 앉으시지요. 저희 모두 영애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난 앞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을 풀어 내린 앳된 영애의 눈동자를 본 순간 난 그녀가 누구일지
알아차렸다.
“비스테인 백작가의 영애인가 보군요.”
비스테인 백작가의 안주인은 시오스 후작의 동생이었다. 하여 눈앞의 영애는 리제나와 똑 닮은 녹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닮진 않았지만 언뜻 보면 리제나와 닮은 듯도 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도도하게 턱을 들며 나를 보았다.
“네, 맞습니다. 일면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일면식이 없긴 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나보다 많이 어렸다. 내가 황후였던 시절에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새침한 표정을 나를 보는 비스테인 영애에게서 오만함이 느껴졌다.
그 표정을 보니 리제나가 일부러 옆자리를 마련한 것이 맞는 거 같았다.
고작 저렇게 어린 영애도 이 자리의 의미를 알고 나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난 비스테인 영애를 보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6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난 일국의 황후였던 사람이다.
사교계의 가장 윗사람으로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했었다. 그런 내게 비스테인 영애는 손톱만큼의
위협도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제 딴엔 나름 나에게서 우위를 선점하려 발톱을 세운 거 같았지만 내 눈엔 그저 아기 고양이가 작은
발톱을 드러내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절 비웃은 건가요? 크로프트 영애 초면에 너무 예의가 없으신 거 같습니다.”
나의 웃음이 실소라는 건 느꼈는지 비스테인 영애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비스테인 백작 부인이 몇 번의 유산 끝에 겨우 얻은 딸이라 그리 애지중지했다더니 철부지로 컸군.
난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영애. 영애의 말대로 저희는 초면입니다. 초면에 가문과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인사말 한번 없이 제게
앉으라 말라 하는 것은 예의가 있는 건가요?”
난 입꼬리를 내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응시했다.
나의 정색에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전…… 그게…….”
“전 순간 영애께서 너무 편히 말씀하시길래 제가 영애의 아랫사람인 줄 알았지 뭡니까.”
나는 일부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비스테인 백작가와 크로프트 공작가가…… 비교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데 말입니다.”
변경백도 아닌 백작가 따위가 감히 공작가에 견줄 수 있을까.
난 무어라 반박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는 비스테인 영애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리제나가 말했다.

66 화

“송구합니다. 영애. 비스테인 영애가 나이가 어려 순간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합니다. 로제인,


어서 사과드려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분에 차 얼굴이 홍당무가 됐던 비스테인 영애가 눈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구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크로프트 영애.”
비스테인 영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못해서 하는 사과치곤 꽤 예의를 차린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선 몇 분이고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저 못난 성질머리를 고쳐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너무 나서지
않는 게 좋았다.
파티의 주최자는 어쨌든 리제나였고 난 막 제국으로 돌아온 잊혀졌던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비스테인 영애에게 벌을 주었다 괜한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영애.”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합니다. 영애.”
비스테인 영애가 아닌 리제나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비스테인 영애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퉁한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난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리제나를 보았다. 순수한 호의를 가득한 듯 보였지만 더 이상 그 호의를 믿기가
어려웠다.
역시 시오스 후작과 당신은 한마음인 걸까.
어차피 같은 맘이든 아니든 시오스 가문의 사람으로서 나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겠지.
반짝이는 녹안을 응시하던 난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아닙니다. 티파티에 오자마자 소란을 일으킨 거 같아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럼 이만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나와 리제나는 함께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마지막 손님이 맞았던 듯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와 디저트를 가져왔다.
달큰한 향이 가득 풍겨오는 홍차와 3 단 디저트 트레이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층층이 다양한 디저트들이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로 디저트가 모두 차려지자 리제나가 말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시어 후작가를 방문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 마련한 자리이니 모두 마음 편히 즐겨주세요.”
리제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같은 테이블에 있던 푸른 머리칼의 어린 영애가 큰 상자를 내밀었다.
“리제나 영애. 티파티에 초대해 주신 것이 감사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랍니다. 도자기 장인에게 만든
최상품의 티세트이니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나.”
리제나는 놀란 듯 입술을 동그랗게 버리다 미소를 지었다.
하녀가 대신 선물을 받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테이블의 영애들도 일어나 리제나에게로 다가왔다.
“영애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르테인 왕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모직이랍니다.”
“영애 이것은 저의 영지에서 나오는 가장 귀한 가죽이랍니다. 이걸로 신을 만드시면 정말 튼튼할
것이에요.”
티파티에 참석할 땐 원래 주최자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들고 오니 그리 유별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제나에게 진상되는 선물들은 상당히 유별나게 최고급뿐이었다.
후작가의 영애가 받기엔 상당히 과분한 선물들이었다.
그러니 저 선물들은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예비 황후이자 1 황자의 모친에게 바치는 선물인 것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재상의 딸이자 제국의 하나뿐인 황자의 어머니였으니까.
황후가 되진 못했지만 어차피 지금 황후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레이몬드가 황후를 간택하겠다고 한다면
리제나가 가장 1 순위가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설사 황후가 되지 못한다 하여도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의 유일한 황자였다.
레이몬드에게 갑자기 사생아가 생기지 않는 이상…… 다음 황제는 이미 에드먼드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에드먼드가 황제가 된다면 리제나의 신분이 언제까지고 후작 영애로 남진 않을 것이다.
허니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어떻게든 리제나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맞긴 맞았다.
리제나는 쌓인 선물들을 보곤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 그저 마음 편히 즐기려 준비한 자리인데 이렇게 귀한 선물들을 주시니 괜히 부담을 드린 게 아닐까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영애.”
“맞아요. 기쁜 마음으로 준비한 선물들이랍니다.”
영애들이 손사래를 치며 리제나에게 말했다.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들이 화원을 가득 메우던 그때 비스테인
영애가 입을 열었다.
“한데 저 작은 선물은 대체 무엇입니까?”
비스테인은 수북이 쌍인 선물 옆으로 덩그러니 놓인 직사각형의 상자를 가리켰다.
벨벳이나 비싼 천으로 덮이지 않은 상자는 귀족의 선물 치곤 상당히 볼품없어 보였다.
그것이 비스테인 영애의 눈에 거슬린 모양인지 눈썹이 매섭게 올라가 있었다.
“아…… 그것은 향수입니다.”
답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향수란 말에 관심이 생겨 고개를 돌리자 분홍 머리칼을 가진 영애가 눈에 들어왔다.
몰려드는 귀부인과 영애들에 아까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상당히 남다른 차림새였다.
싸구려 레이스 자수를 박은 튜닉 드레스와 낡은 가죽 신발.
흔한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티타임에 초대받은 귀족 영애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리제나가 여는 티파티였으니 아무나 올 수는 없었을 텐데.
가만히 그녀를 보던 난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한 귀부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샐린느…… 후작 부인.”
영애와 똑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졌던 샐린느 후작 부인.
황후의 자리에 막 올랐을 무렵 많은 것이 서툴렀던 나를 곁에서 도와주었던 귀부인이었다.
하지만 샐린느 후작 영애가 맞다면…… 왜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지.
샐린느 가문은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정말 샐린느 가문의 영애라면 저렇게 한미한 차림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혹시 내가 착각한 건가.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듯 곧 익숙한 성이 비스테인 영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샐린느 후작 영애. 저번 티파티에도 무슨 통증을 완화시키는 향수를 가져오지 않았던가요? 저번과 뭐
특별히 다른 향수라도 되는 건가요?”
“아, 이번 건 제가 여러 허브 꽃잎을 추출해 만든 향수라 심신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고 불면증에도 크게
효과가…….”
“영애.”
흥미로운 얘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난 갑자기 끊기는 말에 살짝 짜증이 났다.
샐린느 영애의 말을 끊은 건 다름 아닌 비스테인 영애였다. 그녀는 들으라는 듯 크게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영애께서 아카데미에 다니시며 괴짜 같은 평민들과 이상한 것을 만드신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
그녀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향수를 가지고 오시면 어쩝니까. 불면 증에 효과가 있는 향수라니 전 그런
향수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저건 제가 직접 만든 향수라 이번에 처음…….”
비스테인 영애는 인상을 찌푸리며 샐린느 영애의 말을 잘랐다.
“영애. 저희 비스테인 백작가의 상단이 제국에서 가장 큰 조향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어릴
적부터 향수의 대해 배워온 저입니다. 그런 제가 영애보다 아는 것이 없을까요.”
기분 나쁘다는 듯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은 비스테인 영애가 셀린느 영애를 향해 아예 고개를 돌렸다.
“영애. 선물이 어려우시면 그저 빈 손으로 오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물로 리제나 영애를 농락하지
마시고요. 샐린느 가문의 사정을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다들 이해한답니다.”
비스테인 영애는 샐린느 영애가 안쓰럽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모양새는 착하디착한 영애인 척하고 있었지만 비스테인 영애가 샐린느 영애를 비웃은 것이란 걸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백작가의 영애가 감히 후작가의 영애를 보란 듯이 짓밟았건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샐린드 후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난 굳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와 가장 절친했던 귀부인의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의 딸이 지금 내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샐린느 귀부인과 나의 사이를 몰랐던 자들보다 아는 자들이 더 많은 이 자리에서 말이다.
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리제나는 아무런 말 없이 시선을 내리뜨리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날 이곳에 초대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게 지금 제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감히 시오스 가문에 덤비지 말라. 아니면 감히 자신에게 덤비지 말라는 걸까.
어느 쪽이든 리제나는 순수한 호의를 가장한 아름다운 얼굴 아래 나에 대한 강한 적의를 숨기고 있다.
난 굳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스테인 영애.”
“네?”
간식을 맛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눈을 하고 있던 비스테인 영애가 나를 보았다.
“비스테인 영애께선 리제나 영애께 어떤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비스테인 영애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커졌다.
보통 최측근들은 따로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선물을 굳이 주고받지 않아도 될 만큼 친한 사이란
말이기도 했고 선물을 바치는 자들과 급이 다르단 걸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암묵적인 관습일 뿐이다.
“전……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티파티에 참석할 땐 약소한 선물이라도 가져오는 것이 예의인데 영애께선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셨다니. 비스테인 백작가의 사정이 안 좋은가 봅니다.”

67 화

난 눈썹을 모으며 동정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화르륵 또 얼굴이 붉어진 영애가 입을 열려 했지만
내가 먼저였다.
“하긴, 비스테인 백작가의 이름은 저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군요. 영애를 처음 봤을 때도 리제나
영애와 닮은 눈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치려는 비스테인 영애에게서 고개를 돌린 난 샐린느 영애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사정이 어려움에도 이렇게 선물을 가져오시다니 그 정성이 정말 남다른 듯합니다. 독특한 향수라는 것도
상당히 흥미가 가고요. 안 그렇습니까. 리제나 영애.”
나는 비스테인 영애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리제나를 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자 리제나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네요. 샐린느 영애. 이 향수는 꼭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영애.”
샐린느 영애는 지친 얼굴로 그만 시선을 낮추었다.
물 흐르듯 흘러 가버린 상황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비스테인 영애의 분노 서린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난 은근하게 바랐다. 비스테인 영애가 참지 못하고 내게 소리를 질러 주기를 말이다.
그럼 그 명분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 멍청한 것은 아닌지 비스테인 영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리제나를 힐긋 보곤 부채를 촤악 폈을 뿐이었다.
그리곤 분을 삭이려는 듯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물러나 아쉬울 정도였다.
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 영애 저 역시 작지만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난 리제나에게 작은 벨벳 보석상자를 내밀었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영애.”
상자를 받아든 그녀가 하녀에게 넘기려 할 때 내가 말했다.
“영애의 취향을 몰라 제 취향으로 고르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열어보시겠어요?”
모두에게 보여주려 준비한 선물인데 그렇게 넘겨버리면 안 되지.
상자를 넘기려던 리제나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녹안이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녹안 속에 숨겨진 감정이 일렁였다. 리제나는 곧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럴까요.”
리제나는 벨벳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이윽고 목걸이를 본 리제나의 녹안이 커졌다. 그녀는
감탄을 흘리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예쁘네요. 영애.”
“블루다이아몬드를 세공해 박은 목걸이랍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블루다이아몬드라고요?”
부채를 펴고 열을 식히고 있던 비스테인 영애가 놀라 소리쳤다.
그새 분노가 식은 건지 그녀는 리제나가 들고 있는 상자로 고개를 홱 돌렸다.
블루다이아몬드를 탐욕스런 눈빛으로 보던 비스테인 영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가늘어진 시선으로 나를
훑으며 말했다.
“근데 저거 진품 맞는 건가요? 채굴되는 다이아의 숫자 자체가 워낙 작아 돈이 있어도 아무나 살 수
없다고 하던데요.”
비스테인 영애가 철없는 살쾡이긴 했지만 지금의 의심은 나름 합당했다.
블루다이아는 룬트 왕국의 광산에서만 나오는 광물이었다. 다른 다이아와 달리 채굴되는 양이 아주 작기에
유통되는 보석의 가격도 어마어마했고 재력이 있다 해도 몇 년을 대기해야 겨우 구매할 수 있었다.
하여 평범한 다이아에 색을 입힌 가품도 많았다. 실제로 가품을 사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뭐 어쨌든 다이아긴 했으니까.
비스테인 영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진품이라 믿긴 힘든 눈치였다.
난 비스테인 영애를 보며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제가 어찌 선물을 가품으로 하겠습니까.”
“그럼 정말 진품이란 건가요?”
비스테인 영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그렸다.
“네. 원하신다면 룬트 왕국에서 받은 진품서를 보여드릴 수도 있답니다.”
진품서까지 나오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저게 진짜…….”
“네. 구하기 어려운 보석이지만…… 제가 피닉스 상단과 연이 깊어 조금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답니다.
오랜만에 제국으로 돌아와 처음 참석하는 티파티이니 초대해 주신 영애께 특별한 선물을 드리고
싶었답니다.”
비스테인 영애의 눈이 놀람을 넘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값도 값이지만 구하기가 워낙 어려우니 고위 귀족이라도 일평생 블루다이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 귀한 보석을 고작 티파티 선물로 가져왔으니 다들 경악스러울 거다.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블루다이아를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닉스 상단의 본점이 바로 룬트 왕국이었으니까.
그리고 피닉스 상단은 룬트 왕국의 다이아 광산 몇 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블루다이아 광산이었다.
하여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엄청나게 비싸게 팔 수 있는 보석을 선물로 주는 것이 좀 아깝다며 루몬트가 울상을 짓긴 했었지만
이만한 선물이 없었다.
공작가와 나의 재력을 드러내기엔.
“그러고 보니…… 크로프트 영애께서 제국에 4 천 골드를 기부하셨지 않았습니까.”
리제나가 앉은 곳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이름 모를 귀부인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이야기를 꺼냈다.
“맞네요. 그러고 보니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다고 들었어요.”
“저도 들었어요. 그렇게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다니…… 전 그 돈이 상상도 되지 않아요.”
그랬다. 4 천 골드에 대한 이야기가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란 나의 예상과 달리 재판 이후 신문들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크로프트 공작의 무죄에 대해서는 기사들이 나왔지만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부한 돈에 대해선 기사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로 치부하듯 말이다.
그리고 귀족들 역시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루몬트의 말론 하급 귀족들 사이에선 나에 대한 감탄이 줄을 이었지만 고위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했다.
누구도 루몬트 상단에 나와의 연관성을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건 마치 나에 대해 누가 함구령이라도 내린 모양새 같았다.
그래서 오늘 티파티에 귀족 여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보석인, 블루다이아를 들고 온 것이었다.
시오스 후작의 눈치가 보여 귀족들이 기부금에 대해 입을 다물었었다 해도 블루다이아를 직접 본 여자들의
소문을 막을 순 없을 테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제국 제일의 가문인 크로프트 공작가다워요.”
“큼.”
누군가 선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비스테인 영애가 경악으로 물들었던 표정을 새침하게 바꾸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작은 기침이 조용히 하란 신호임을 읽은 영애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조용해졌을 때, 리제나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크로프트 영애께서 제국을 위해 큰 힘을 써주었지요. 저도 그날 재판장에 있어 영애께서 큰
금액을 선뜻 기부하시는 걸 보았답니다. 너무 늦었지만 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영애께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이렇게 큰일을 해 주셨는데 폐하께서는 바쁘신 모양인지 공식적인 치하 말씀도 없으시고……. 영애께서
많이 서운하실 것 같습니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리제나의 목소리에 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리제나는 마치 레이몬드가 나의 공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
거기다 마치 그녀가 레이몬드의 심중을 다 알고 있는 거처럼 말했다.
사사로운 황제의 의중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레이몬드와 리제나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가깝다고 다들 느낀 듯 나를 보는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리제나와 레이몬드 그리고 나.
우리 셋의 관계는 제국에서 영원히 식지 않을 가십거리였다.
리제나가 황제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영애들은 물론이고 하녀들까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레이몬드를 두고 우리가 언쟁이라도 벌인다면 꽤 볼만한 광경이 펼쳐질 테니까.
은근히 그런 광경을 바라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리제나는 실제로 레이몬드의 의중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언쟁을 할 가치도 없었다.
보통 귀족이 큰 금액을 제국을 위해 기부하거나 재산을 바쳤을 경우에 황제가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여 리제나는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않는 레이몬드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레이몬드가 지금 내게 따로 인사 치레를 하지 않는 건 곧 황제의 이름으로 공식 발표를 하기 위함이었다.
비공식적인 말 한마디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황제의 이름을 건 선물이었다.
난 상처받은 눈빛이 아니라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리제나는 나의 눈빛에 위화감을 느낀 듯 녹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저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답니다. 이번 일을 작은 인사 치레로 넘기기엔 너무도 큰일이니
폐하께서 공식적인 발표로 공작가의 무죄와 저에 대한 치하를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황실에서 공식 발표를 한단 말입니까?”
나의 옆에 앉은 영애가 놀란 목소리로 물어왔다. 난 크게 흔들리는 녹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 답했다.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며칠 안으로 공식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쐐기를 박듯이.

68 화

리제나의 입가에 가면처럼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은 그녀가 이때까지 숨겨온
진짜 얼굴 같았다.
난 확신했다.
리제나는 나를 싫어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아래 숨겨진 적의는 살기를 띤 듯 강렬했다.
당신은 대체 왜 날 싫어하는 걸까.
아니, 대체 언제부터 날 싫어한 걸까.
돌이켜 보면 그녀가 제국에 돌아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졌다는 듯이 스스로 먼저 모든 걸 내려놓았는데 대체 왜.
나를 향해 눈을 번뜩이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폐하께서 영애를 챙기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큰 치하를 하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이리 크로프트 공작가를 신경 써 주시니 저로서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랍니다.”
난 짙은 미소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티파티의 분위기는 처음과 달리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들어올 때만 해도 나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건만 지금은 호의와 선망 어린 시선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주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바뀌고 티파티장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찻잔을 내리니 나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비스테인 영애가 보였다.
뭐 저리 쳐다본다 해도 내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이젠 좀 귀여워 보이려고도 했다.
피식 웃자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정말 쉽게 발끈하네.
그때 정원으로 들어온 하인이 급히 리제나에게 다가갔다. 다급해 보이는 하인의 얼굴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무슨 일이냐.”
“아가씨, 방금 황궁에서 전갈이 왔사온데 1 황자 전하께서 대련 도중 부상을 당하셨다 합니다.”
“뭐!?”
리제나는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상 온화하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두려움이 스쳤다.
“오늘 티파티는 이만 마무리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파티를 종료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속사포로 말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화원을 나갔다.
리제나 답지 않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에 다들 걱정스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 역시 걱정스러웠다.
우리 사이가 어떻든 나도 자식이 있는 엄마였으니까.
“에드먼드 황자께서 부상을 당하셨다니…….”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유일한 황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유일한 황자…….
그 말에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찮으실 겁니다. 허니 모두들 걱정 마세요. 폐하께서 에드먼드 황자 전하를 얼마나 아끼시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유능한 황궁의들이 몇 명이나 붙을 텐데 부상 따위는 금방 나으시겠죠.”
내게 하는 말인 듯 비스테인 영애는 나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리제나에겐 에드먼드가 있으니 황제의 특별한 치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 이건가.
너무도 속 보이는 말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목을 죄는 리제나를 상대하다 보니 비스테인 영애는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황제의 관심은 잠시 이용하는 것일 뿐 바라지도 바랄 일도 없을 것이다.
“전 일이 많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또 뵙지요.”
난 비스테인 영애에게 미소를 지어주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화원을 나갔다.

* * *

“폐하, 파르앙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었다.
“들라 해.”
시종들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레이몬드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막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파르앙 후작이 예를 갖추려 했지만 그가 먼저 말했다.
“인사는 됐으니 이쪽으로 와 앉지.”
레이몬드가 먼저 소파에 앉고 파르앙 후작도 오른편에 앉았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중요한 얘기를 할 것이니 급한 보고가 아니면 돌려보내도록.”
“네. 폐하.”
모두 물러가고 집무실에 그와 파르앙 후작만이 남았다. 레이몬드는 찻잔을 내려놓는 그에게 물었다.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바르텐 백작이 메타스 자작의 서신과 자작에게 보낸 돈 등, 스스로 증거를 내놓으니 조사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른 연결 고리는?”
“증거 중, 시오스 후작가와 엮을 만한 게 없습니다. 바르텐 백작의 집을 수색했음에도 나온 건
없었고요.”
“흠…….”
“아무래도 이쯤에서 바르텐 백작의 조사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깊이 좁혔다.
이대로 덮으면 시오스 후작의 꼬리도 잡지 못한다. 재상의 지위를 박탈할 명분이라도 찾아야 했다.
“조금 더 깊이 조사해 볼 순 없나.”
“바르텐 백작이 순종적으로 나오니 깊이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와 죄송하다는 듯 파르앙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고개 들어. 바르텐 백작이 재판장에서 순순히 죄를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모든
증거를 정리해 놨겠지. 따지고 보면 시오스 후작을 너무 믿었던 내 잘못이다.”
“헌데 시오스 후작이 갑자기 왜 크로프트 공작을 끌어내리려 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시오스
후작이 현 상황에 굳이 그럴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폐하께선 혹 아십니까?”
“아니. 나도 모른다. 그 이유가 바르텐 백작에게서 드러나길 바랐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지.”
크로프트 공작이 재상직을 노린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두 사람은 딱히 친분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짐작이 가는 건 리제나의 황후 책봉이지만…….
엘리야가 자신과 이혼하고 떠난 지가 6 년인데 아무런 관련도 없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린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파르앙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고민을 하듯 흐려졌다.
“흠……. 확실히 이상한 일이군요, 폐하. 어쩌면…… 말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오스 후작은 크로프트 공작을 노린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크로프트 공작이 아니다?”
“네. 크로프트 공작이 무너짐으로 인해 피해를 볼 또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레이몬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대의 말은, 그럼 시오스 후작이 노린 것이…… 나란 건가.”
크로프트 공작은 황제의 오른팔.
크로프트 공작이 무너지면 레이몬드의 황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시오스 후작이 나를 노린 것이라…….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금으로선 시오스 후작이 크로프트 공작을 노릴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아
가능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날 노리는 거라면 왜…….”
리제나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기엔 미친 짓이었다.
겨우 그런 복수를 하자고 황제를 노리는 놈이 어딨겠는가.
“황위 찬탈…….”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시오스 가문이 정말 그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유는 하나다.
황권을 빼앗는 것.
그의 슬하에 자식이라고는 에드먼드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기다리면 에드먼드가 황제가 되겠지만 시오스 후작은 그때까지 기다리기 싫을 수도 있다.
어린 에드먼드가 황제가 된다면 외할아버지이자 재상인 그가 많은 권력을 누리게 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크로프트 공작에게만 초점을 맞추었을 땐 보이지 않던 시오스 후작의 야심이 그에게로 초점을 맞추자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아무래도 독사를 곁에 둔 것 같았다.
“폐하.”
레이몬드는 파르앙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늘 여유로워 보였던 푸른 눈동자가 결연한 빛을 띠었다.
“제게 적당한 자리를 하나를 내주시겠습니까.”
레이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싶으면 죽이고 시체를 걸어 놓으라 말했던 파르앙 후작이 먼저 중앙으로 돌아오겠다
말한 것이었다.
“진심인가.”
“시오스 후작이 정말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것이라면……. 가만히 영지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파르앙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작은 한때 그의 왼팔이라 불렸던 자다. 크로프트 공작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충신이었다.
“원수부장이 안 그래도 말이 많았지. 바르텐 백작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원수부장으로 임명하겠다.”
“네. 폐하.”
파르앙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약식으로 예를 표한 후,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헌데 폐하. 제가 행정궁에 갔다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크로프트 공작 가에 대한 공식 발표를 하신다
명하신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내일 공식 발표가 있을 거야.”
“……특정 귀족을 옹호하시는 것은 상당히 평판에 좋지 않은 일임을 아실 텐데요.”
“특정 귀족이라고 하기엔 크로프트 공작가는 나의 오른팔이다. 날 위해서라도 크로프트 공작가가 건재함을
보여야 해.”
“그렇다 하더라도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건과 엘리야 영애를 언급하시는 일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
말끝을 흐리던 파르앙 후작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레이몬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혹 황후를 맞이하지 않으시는 것이 크로프트 영애를 다시 황후로 책봉하시기 위함입니까?”

69 화

“……내가 원한다고 하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황후가 되고 안 되고는 그녀의 선택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 크로프트 영애 때문일 줄이야.
과거 두 사람이 결혼할 때만 해도 무감했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짙은 감정이 너울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니 파르앙 후작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문득 재판장에서 본 엘리야 영애가 떠올랐다. 황제도 많이 변했지만 그녀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만난 크로프트 영애께선 제가 알던 황후 시절 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
레아몬드는 무감각한 얼굴로 자신을 보던 엘리야를 생각했다.
언제나 그에게 미소를 그렸던 엘리야는 더 이상 없다는 듯 그를 보는 눈빛에 싸늘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굴 탓할까,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자신인데.
“더 당당해지시고 활기차 보였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엘리야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달라진 모습이 다른 이들에겐 좋은 방향인 듯했다.
아무래도 엘리야의 달라진 모습에 가슴이 아픈 건 자신뿐인 것 같다.
넌 나를 떠나 더 좋은 사람이 된 건가.
레이몬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꼭 그녀의 빛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인 것 같았다.
“폐하께선 크로프트 영애의 변화가 달갑지 않으신 듯하군요.”
“……그럴 리가. 크로프트 영애는 원래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났네. 황후로 지내며 그 능력을 발휘할 일이
많지 않았던 것뿐이지. 지금이라도 능력이 빛을 발해 다행이라 생각하네.”
그의 마음이 어떨지라도 방금 한 말들은 진심이었다. 그 역시 엘리야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단지 그의 곁에서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크로프트 영애와 함께하신 세월이 참으로 오래되었군요.”
“어릴 적부터 함께였으니 부부로 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친……구로 지냈었지.”

<i>‘레이, 내게 넌 친구였던 적이 없었어. 난 널 항상 사랑했어.’</i>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친구…….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친구라는 핑계로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곁에 두었다.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니까.
그 말 하나면 엘리야는 고백을 삼켰고 그는 그녀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아도 됐다.
결국 친구라는 말은 엘리야를 잃을까 두려워 방패로 삼은 그의 이기심이었다.
레이몬드의 눈빛이 깊은 후회로 얼룩졌다.
후작은 먼 과거를 그리는 듯 표정이 흐려지는 레이몬드를 보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폐하. 이제 곧 제 나이가 50 이 다 되어 가지 않습니까. 이 나이까지 살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익숙함이더군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후작에 레이몬드는 눈썹을 끝을 올렸다. 파르앙 후작은 어딘지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영원히 모르고 살아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뒤늦게라도 깨닫는 자들이
있지요. 그래도 폐하께서는 후자에 속하시는 듯합니다.”
엘리야를 떠올리는 그의 눈빛에 짙은 그리움이 서렸다. 레이몬드는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뒤늦게 깨닫는 자들은 어떻게 되나.”
“글쎄요, 너무 늦어 버린 자들에게는 결국 후회만이 남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는 자들은……
가끔은 새로운 미래를 잡기도 하더군요.”
“그대가 보기에 나는 기회가 있어 보이나?”
레이몬드의 물음에 후작이 뜻 모를 미소를 그렸다.
“그것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폐하도 저도 아닌 크로프트 영애뿐이겠지요.”
“…….”
“부디 폐하께선 저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폐하, 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후작이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간 후, 레이몬드는 싱숭생숭한 기분에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내게 기회가 있을까.

<i>‘그게 아니면 제가 폐하의 앞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i>

자신은 황제, 그녀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


명확한 선을 긋던 그녀의 단호한 보랏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보고 싶었다.
스스로가 한심해 짙은 한숨을 내쉰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1 황자 저하께서 검술 연습 도중 부상을 입으셨다 합니다.”
시종장이 다급히 전하는 말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궁의들을 모두 불러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 * *

붉게 타오르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각.


눈에 잘 띄지 않는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수도를 벗어났다.
해가 지자마자 난 루몬트와 함께 칼라일에게 가는 중이었다.
일이 많아 내일쯤 가려고 했지만 오늘 티파티에서 들은 에드먼드의 부상 소식 때문에 괜히 불안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칼라일이 어디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심란해 창밖을 보던 그때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앗!”
순간 큰 돌부리를 넘는 듯 마차가 크게 튕겨 오르고 나와 루몬트도 엉덩이가 크게 들썩거렸다.
놀란 눈을 하자 루몬트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하하……. 이곳이 워낙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라 길이 험난, 윽…….”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던 루몬트는 퉁 튀어 오르는 마차에 혀를 콱 깨물었다.
“괜찮나?”
꽤 아파 보이는 그를 걱정스레 보자 루몬트가 어눌하게 답했다.
“괘찮……스니다. 제가 다음번엔 다른 길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괜히 눈에 띄는 길로 다니다 기자들 눈에 띈다면 그게 더 최악이니까.”
마차의 불편함 따위 칼라일을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닌데 이 정도쯤이야.
그리고 칼라일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통통 튀어 오르는 마차에 엉덩이를 찧어도 아픈 줄을 모르겠다.
“네. 그럼 기사들을 시켜 길을 정리하겠습니다. 윽. 이대론 제가 너무 힘드네요.”
막 머리를 마차에 부딪힌 루몬트가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앉은키가 크다 보니 아래위로 부딪히는 게 힘들긴 할 터였다.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짓는 모습에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큼.”
모을 가다듬는 척 웃음을 참은 그때,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후. 드디어 도착했나 봅니다.”
마차가 서자마자 문을 연 그는 마차에서 도망치듯 후다닥 내렸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나는 저택 앞에 마중을 나와 있는 칼라일을 보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칼라일!”
“엄마!”
쪼르르 달려온 칼라일이 품 안에 쏙 안겼다. 품 안에 퍼지는 온기에 그제야 불안으로 뛰던 나의 심장에
안도감이 들었다.
공작가의 일도 리제나도 레이몬드도 이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행복으로 가득 찼다.
작은 볼에 입을 맞춘 난 걱정되던 것들을 속사포로 물었다.
“칼라일, 잘 지냈어? 밥은 잘 먹었어?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엄마 많이 보고 싶었지?”
쏟아지는 나의 물음에 칼라일이 품 안에서 고개만 빼꼼히 들었다.
“음…… 밥 잘 먹었고, 아픈 곳도 없어요. ……엄마는 많이 보고 싶었어요.”
칼라일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답했다.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또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난 칼라일을 꽉 끌어안았다.
“잘했어. 그리고 엄마가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해. 엄마가 자주 올게.”
“헤헤.”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칼라일을 안고 일어난 난 저택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제드?”
내가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하지만 헬란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제드였다.
제드는 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다가왔다.
“뭘 그리 놀라. 루몬트가 나온다고 얘기 안 했어?”
“아……, 맞아. 했었어.”
그제야 루몬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리하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직접 들었음에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일이 많긴 많구나. 답지 않게 까먹는 걸 보니.”
“정신이 없긴 하지.”
“제드 아저씨한테 갈래요.”
나에게 안겨 있던 칼라일이 제드에게 손을 뻗었다.
“응? 엄마랑 방금 만났는데? 엄마 랑 더 안 있고?”
“제드 아저씨가 아까 막 높이 높이 올려 주고 그랬어. 나 그거 또 하고 싶어.”
칼라일은 어서 가고 싶다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 제드가 이미 칼라일의 마음을
쏙 빼앗은 것 같았다.
재회의 포옹을 한 지 10 분도 되지 않았건만 나를 잊은 칼라일에게 서운해 뾰로통한 얼굴을 하자 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겠어. 칼라일이 내가 더 좋다는데.”
제드는 자신을 찾는 칼라일이 기분 좋은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칼라일을 내게서 쏙 뺏어간 제드는 칼라일이 말한 높이 높이 놀이를 해 주었다.
신이 난 칼라일의 웃음소리가 밤 공기에 울려 퍼졌다.

70 화

“칼라일 님께서 어제부터 제드와 노느라 저도 잘 안 본다니까요? 이러다 나중에 저보다 제드를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칼라일 님이 제드와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어요.”
곁으로 다가온 헬란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나도 칼라일이 제드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드와 칼라일의 첫 만남을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발전이긴 했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칼라일은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 제드를 엄청 무서워했으니까.
제드를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래서 한동안 제드가 칼라일과 친해지려 온갖 짓을 다 했었다.
선물 공세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 탈을 쓰고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칼라일의 선택은 선물도 인형 탈도 아닌 바로 저렇게 몸으로 놀아 주는 것이었지.
제드와 한 번 격하게 뛰어논 뒤, 칼라일은 제드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아마 제드는 칼라일에게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아빠로서의 일부분을 채워 주고 있는 듯했다.
레이몬드가 곁에 있었다면…….
순간 제드의 위로 레이몬드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그와 칼라일이 함께 웃으며 노는 모습. 한때 내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i>‘내가 널 사랑할 일은 없을 거야.’</i>

싸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부질없는 생각이야.
난 레이몬드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차피 그는 아이에게도 다정한 아버지가 못 됐을 거야.
“더 높이 해 줘요!”
“읏차! 재밌지?!”
까르르-
제드와 칼라일은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아들을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칼라일이 내 품에서 안 떨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며 온 게 머쓱해질 정도로 칼라일은 제드와 재밌게
놀았다.
“그래도 당분간 제드가 있으니 칼라일이 심심하진 않겠다.”
“그러게요.”
헬란과 난 피식 웃으며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칼라일, 우리도 들어가자.”
곧 제드와 칼라일도 뒤따라 저택으로 들어왔다.
“으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 체력이 예전 같지 않네.”
칼라일과 한바탕 신나게 놀아 준 제드는 허리를 받치며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난 싱겁게 웃었다.
“그러게. 말까지 태워 주진 말지 그랬어.”
높이 높이 놀이도 모자랐는지 신나게 뛰어다닌 칼라일은 제드에게 말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그때쯤 제드가 이미 지쳐 보였지만 칼라일의 똘망똘망 눈빛 공격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칼라일이 재밌다잖아. 어떻게 안 줘.”
허리는 아프지만 기분은 좋은지 제드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이럴 때 보면 네가 나보다 칼라일한테 더 약하다니까. 그렇게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면 나중에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걸.”
“뭐, 내가 칼라일을 매일 보는 것도 아니고, 함께 있을 땐 해 달라는 건 해 주고 싶어. 그리고 칼라일이
너무 귀여워서 거절을 못 하겠어.”
“……그건 그렇지.”
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며 긍정했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칼라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볼 때면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난 내 무릎을 베고 잠든 칼라일을 내려다보았다.
신나게 놀아 완전히 곯아떨어진 칼라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찰떡같은 볼을 살짝 건드리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데 누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엘리. 돌아가는 상황들은 어때. 아까 낮에 루몬트 말을 잠시 들어보니 뭐 영 시원찮은 것 같던데.
신문사들이 조용하다며.”
난 제드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응. 아무도 나에 대한 기사를 안 내. 뭐, 근데 상관없어. 다른 방식으로 소문이 날 테니까.”
“블루다이아로 만드는 소문?”
“응.”
“루몬트가 네가 4 천 골드에 블루다이아까지 기부하다시피 한다고 울더라.”
제드는 루몬트의 울상을 떠올리는지 재밌다는 듯 킬킬거렸다.
“울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일 처리를 하러 다녀온다던 루몬트가 돌아왔다.
그가 소파에 앉자 난 잠든 칼라일을 조심스럽게 헬란에게 넘겨주었다.
헬란이 집무실을 나가고, 나는 루몬트에게 작게 웃어 주었다.
“걱정 마, 루몬트. 과시용은 이 정도면 됐으니 큰돈 나가는 일 이제 없을 거야.”
“큰돈은 무슨. 더 써도 돼. 어차피 네 상단이고. 피닉스 상단에 그 정도 지출은 아무런 타격도 없어.
알잖아.”
제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맞습니다. 그냥…… 블루다이아가 너무 영롱히 빛나 조금 아까웠을 뿐이랍니다. 하하하.”
루몬트는 아니라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블루다이아가 어지간히 아까운 듯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블루다이아의 가격은 천 골드였으니까.
“루몬트, 그래도 내가 블루다이아를 시오스 리제나 영애에게 넘긴 덕에 주문량이 더 늘어날 거야.”
리제나는 현 사교계의 수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 장신구, 신발까지 모든 것이 유행이 되는 것이다.
블루다이아야 원래 유명한 보석이기도 했지만 리제나가 선물 받았단 소문이 퍼지면 찾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돈 때문에 관심 없던 자들도 무리해서라도 사려고 몰릴 테고, 그럼 그 유명세를 이용해 블루다이아를 현
시가보다 더 높게 팔 수 있을 것이다.
한정된 수량만이 나오는 블루다이아를 먼저 얻으려면 웃돈을 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루몬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는지 짙은 미소를 그렸다.
“흠, 아무래도 본점에 연락해 블루다이아의 물량을 최대한 확보해야겠습니다. 웃돈을 역대 최고로 올려
보겠어요.”
돈을 벌 생각에 환희를 느끼는지, 루몬트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드보다 더한 장사치는 처음 보네.
난 그를 조금 신기한 눈으로 보았고 제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몬트, 내가 조사를 부탁한 일들은 어떻게 됐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내가 중요한 본론을 꺼내자 루몬트가 정신을 차렸다.
“아, 먼저 시오스 후작의 몇 년간의 동태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크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큼큼, 그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후작이 재상위를 받은 직후부터 가문의 세력이 크게 확장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좀 이상한 점은 없었어? 혹시 크로프트 공작가와 부딪힐 만한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비정상적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는 것 빼곤 크로프트 공작가와 엮일 만한 일은 일절 없었습니다.”
루몬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혹시…… 아버지가 아니라 나인 걸까.”
오늘 난 리제나의 살기 띤 적개심을 선명히 느꼈었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 아래 감춰진 적의는 시오스 후작보다 더 강렬했다.
그 선명한 감정을 마주하니 시오스 가문이 노린 것이 혹시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오스 가문이 널 노린다는 건 말이 안 돼. 넌 제국을 떠난 지 벌써 6 년이잖아. 널 노린 거였다면 널
찾아서 죽이려 했겠지. 왜 네가 없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무너뜨리려 했겠어.”
제드가 차분히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리제나가 날 싫어하는 것과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린 것은 시기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대체 왜일까요. 저도 조사를 하면서 정말 이해가 안 갔습니다. 시오스 후작가는
공작가와 문제가 있을 만한 일이 없었거든요.”
루몬트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흠, 짧은 침음을 내뱉은 제드가 말했다.
“공작 각하께선 뭐 짐작 가시는 일 없으시대?”
“……아버지께서도 거듭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시겠대. 시오스 후작과 어떤 친분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회의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거 말곤 따로 대화도 나누신 적 없으시댔어.”
아버지도 답답하신 듯 내게 말했었다.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고.
“얼굴을 잘 마주하지도 않았던 공작에게 무슨 원한이 그리 깊다고 그런 대사기극을 꾸몄을까요,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게.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짚고 있는 걸까.”
“네?”
루몬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내게 물었다.
“시오스 후작은 아버지와 엮인 일도 없을뿐더러, 거기다 아버지는 스스로 중앙에서 물러나시려 하고
있으니, 굳이 끌어내릴 이유가 없어.”
“아…… 그렇네요. 하긴, 원한 관 계가 아니라면 그렇게 해서 시오스 후작이 얻을 게 없죠.”
루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잠시 차분하게 생각했다.
사막 상단 사기 사건은 하루 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크로프트 공작만을 노리고 설계한 함정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것은 시오스 후작이 크로프트 공작가를 무너뜨림으로써 얻을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오스 후작이 미친놈도 아니고 그렇게 치밀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크로프트 공작가…….”
만약 시오스 후작의 목적이 처음부터 크로프트 공작가 아니었다면…….
크로프트 공작가가 무너짐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을 만한 사람이 누구지.
순간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엘리 님? 안색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셨어요. 어디 편찮으십니까?”
“엘리, 괜찮아?”
순간 스스로의 생각에 너무 놀라 얼굴이 창백해진 듯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두 남자에게 느리게 답했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완전 백지장인데. 갑자기 왜 그래?”
제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71 화

“너무 엄청난 가정이라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내가 떠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크로프트 공작이 무너진다면 그 누구보다 레이몬드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이다.
크로프트 가문은 레이몬드의 오른팔이었으니까.
레이몬드가 아버지의 재판을 주장하는 귀족들의 의견을 묵살하며 미뤘던 것도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레이몬드의 충신이 아니었다.
반정의 공신이자 레이몬드의 반정에 대의를 함께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잘려나가면 레이몬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개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다.
반정이 일어난 지 10 년이 넘긴 했지만 완전히 잔재를 없앤 것은 아니었다.
잔재를 모두 쓸어 버렸다면 제국에 남은 귀족들이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차악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내진 못해도 레이몬드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귀족들은 많을 것이다.
“말하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뭐…… 그런 생각이야?”
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나의 얼굴에서 심각함을 느낀 듯했다.
“응.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참수형이야.”
나의 서늘한 목소리에 제드의 얼굴도 굳었다.
“……반역이라도 생각한 거야?”
“반역이라니!”
루몬트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루몬트는 반역이란 단어를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한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시오스 가문이 정말 레이몬드를 노렸다면 그것은 반역이었다.
반역은 즉결 처분으로 머리가 잘림은 물론이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가장 큰 대역죄였다.
난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고 제드는 침묵의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의 얼굴이 나만큼이나 심각해졌다.
“……시오스 후작이 1 황자의 외할아버지 아니었던가?”
“맞아.”
“황제에게 1 황자 말고 다른 자식은…… 없잖아.”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아들인 걸 알고 있는 제드가 루몬트를 힐긋 보며 말했다.
“에드먼드 황자가 폐하의 유일한 자식이긴 하지만, 시오스 후작이 더 큰 권력을 원하는 거라면…… 상상
못 해 볼 일도 아니겠지.”
어린 황제를 세우면 그 권력을 재상이자 외할아버지인 시오스 후작이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레이몬드 역시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고 황제가 된 자였으니 패륜이라 에드먼드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시오스 후작이 노리는 게 레이몬드일까.
시오스 후작은 재상인 데다 황자의 외할아버지였다.
이미 황제 다음으로 큰 권력을 누리고 있는데 더 욕심을 내어 진흙탕에 발을 담그려 할까.
그리고 그 일을 리제나가 허락했을까.
레이몬드와 리제나.
두 사람을 생각하니 복잡한 머릿속이 더 엉망이 되었다.
레이몬드는 대체 왜 리제나를 황후로 만들지 않은 것이며 리제나는 왜 레이몬드와 사이가 멀어진 걸까.
정말 시오스 후작의 역심에 리제나도 동의를 한 걸까.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인데.
난 깊어지는 상념에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루몬트.”
“네.”
“시오스 후작이 재상으로 올라간 뒤 황제 폐하와 크게 부딪힌 사건이 많은지…… 그리고 혹시 선황의
가신이었던 귀족들과 접촉한 정황이 있는지도 알아봐.”
시오스 후작이 그런 엄청난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니길 바랐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 * *

“다행히도 황자 저하의 열이 내렸습니다, 폐하.”


에드먼드의 진찰을 마친 황궁의가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검술 수련 중 팔이 부러진 에드먼드는 열까지 크게 올라 몇 시간을 앓았다.
황궁의들이 모두 붙어 치료를 한 덕에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지만 꽤나 위험한 상황까지 갈 뻔했다.
“수고했다. 에드먼드의 몸이 나을 때까지 한시도 신경을 늦추지 말거라.”
“예, 폐하.”
황궁의들이 모두 방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침대 맡에 앉아 있는 리제나에게 다가갔다.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방에 있었다.
리제나는 통증과 열에 신음을 흘리는 에드먼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리제나.”
그의 부름에 리제나가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의 열이 내렸다니 이제 괜찮아질 거야. 뭐라도 좀 먹어. 아니면 물이라도. 그러다 쓰러져.”
리제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줄곧 에드먼드의 곁을 지켰다. 미동도 없이 같은 자세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며 말이다.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리제나가 비틀거렸고 레이몬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과 눈물 자국이 남은 붉은 눈가.
처연하고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레이몬드의 눈빛엔 큰 변화는 없었다.
리제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다 화가 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밀어냈다.
툭 건들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만큼 애처로운 분노를 참아 내면서.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런 리제나가 안쓰럽진 않았다.
왜 화가 난 걸까. 혹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그런 애정 어린 관심과 걱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에드먼드의 친모에 대한 예의와 약간의 동정, 그뿐이었다.
그는 리제나에게서 거리를 두듯 한걸음 물러났다.
“오늘은 걱정될 테니 에드먼드 곁에 있어도 돼. 궁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돌아가도록 해.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 쉬어.”
레이몬드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려 했다.
리제나가 그의 팔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잠시만요.”
레이몬드는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들었다.
리제나와 레이몬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제나는 그의 팔을 꽉 잡으며 입술을 열었다.
“폐하. 물을 것이 있습니다.”
“뭐지?”
“오늘, 후작가에서 티파티가 열리고 있었답니다. 그 자리에 크로프트 영애도 함께하고 있었고요.”
“크로프트 영애……?”
무감하던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 리제나는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네. 한데 그 자리에서 크로프트 영애가…… 폐하께서 공작의 무죄와 크로프트 영애의 기부금에 대한
치하를 공식 발표하시겠다고 하셨다군요. 정말이신가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쓱 위로 치솟았다.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와 잠시 관심이 기울었지만 그의 공식적인 정무에 관한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럴 거야.”
“아…….”
리제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걱정스러운 것처럼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레이몬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할 말이 있는 건가?”
“그저…… 조금 걱정이 되어서…….”
“걱정?”
“폐하. 크로프트 공작가의 무죄가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공작 각하께선 외교부의 수장이
아니셨습니까.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공작 각하와 영애를 옹호하시면 귀족들의 반응이 좋지 못할 겁니다. 오늘도 티파티에서
크로프트 영애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이 많았답니다.”
“…….”
“사건이 마무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값비싼 보석에, 드레스에……. 이런 상황에서 폐하께서
옹호하시면…… 더욱 여론이 나빠지지 않을까요?”
리제나는 황제도 크로프트 공작가도 모두 걱정된다는 눈빛이었다.
그 녹안을 물끄러미 보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귀족들이 아직도 크로프트 공작가를 안 좋게 보고 있다면 더욱 크게 크로프트 영애의 공에
대해 치하를 해야겠군.”
“……네?”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닌 듯 리제나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크로프트 공작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해도 이미 무죄로 확정이 났지. 거기다 크로프트 영애는 4 천
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제국에 기부했어.”
리제나를 보며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아직도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있다니. 일국의 황제로서 친히 나서 본을 보여 줘야 더 이상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나? 네 생각은 어때.”
레이몬드는 짙은 검은 눈동자로 리제나를 직시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의 속을 샅샅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지금 그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제나는 균열이 가려는 표정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그렸다.
“폐하의 말씀을 들으니……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만 늘어놓았나 봅니다.”
두손을 꼭 잡은 그녀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 크로프트 공작가를 옹호하신다면…… 당연히 모든 귀족도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레이몬드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그리다 그녀를 불렀다.
“리제나.”
“네?”
“오늘 일은 에드먼드도 아프고 하니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론 황제로서의 내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네가 내게 이런 말을 할 위치는 아니니까.”
덧붙이는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차디찼다.
그런 말을 할 위치.
황제의 정무에 관여할 수 있는 건 황후뿐이란 말이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레이몬드의 눈빛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리제나는 한걸음 물러나며 시선을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순간 선을 넘었습니다.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72 화

“괜찮아. 실수는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거니까. 반복하지만 않으면 돼. 그럼 오늘 많이 놀랐을 테니


좀 쉬어.”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제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에드먼드가 깨어나면 내게 기별을 넣어라.”
시종에게 명한 그는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레이몬드가 방을 나가고 고개를 든 리제나는 시종들에게 말했다.
“황자의 곁은 내가 지킬 거니 너희들은 물러가.”
“네.”
시종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방 안이 고요해지자 리제나의 온화하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 말을 할 위치라…… 틀린 말도 아니네.”
그녀는 레이몬드의 밑에서 일하는 자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다.
그저 에드먼드의 친모.
그녀가 가진 직함은 그것뿐이었다.
에드먼드가 아니라면 그녀는 황제를 만날 일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과거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서운하고 마음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레이몬드의 말처럼 애틋했던 감정도 이젠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다.
에드먼드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미 과거의 그녀는 없었다.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애절했다면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감정에 일을 그르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더욱 그녀에게 차가워지는 그를 보니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조금의 미련도 없을 테니까.”
그를 죽이는 것에.
리제나는 비틀린 미소를 머금으며 에드먼드에게 돌아갔다.
에드먼드의 다친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프지 말렴. 내 작은 황제 폐하.”

* * *

“폐하,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 식사는 침실로 올리라 할까요?”


본궁으로 돌아오자 시종장이 물었다. 에드먼드의 상태를 지키느라 레이몬드도 리제나처럼 식사를 걸렀다.
하지만 딱히 식욕이 드는 기분이 아니었다.
“생각 없으니 준비하지 말거라.”
“그럼 목욕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전부 나가거라.”
시종장은 레이몬드의 불편해 보이는 심기에 시녀들을 모두 물리며 침소를 나갔다.
“하아.”
정복의 두꺼운 재킷을 벗어 버린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복잡한 머릿속에 큰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자 황궁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횃불이 꺼지지 않는 에드먼드의 궁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리제나.”
레이몬드는 서늘한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레이몬드는 궁에서 그를 바라보던 리제나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시오스 후작이 역심을 품은 것이 맞다면 리제나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시오스 후작과 한 마음일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까 분명…….”
리제나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걱정하는 척 말했지만 속뜻은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럼 이번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린 일에도 리제나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레이몬드는 미간을 깊이 좁혔다.
한때 연인이었고 제 아이의 엄마인 그녀를 의심하는 것이 마음 편하진 않았으니까.
리제나는 언제나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었다.
그런 그녀의 순수한 얼굴 아래 역심이 숨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한 번씩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게 그를 향한 살기까진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시오스 후작이 정말 역심을 품은 게 밝혀진다면 시오스 가문은 멸문할 것이다.
아무리 에드먼드의 친모라 할지라도 리제나 역시 칼을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에드먼도.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무저갱의 암흑처럼 번뜩였다.
제 손으로 친혈육들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최악의 경우가 온다면…….
잊었던 혈향이 떠오르는 기분에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피바람은 피하고 싶다.
그 피바람에 엘리야가 위험해진다면 그가 얼마나 잔인해질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황궁을 감싸는 서늘한 바람에 레이몬드의 무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 * *

칼라일과 짧은 밤을 보내고 공작가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이른 새벽이었다.


뜨끈한 물에 피곤한 몸을 푼 난 잠시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과거의 꿈을 꾸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레이몬드와 웃으며 황궁의 거닐던 과거의 꿈이었다.
“몸이 너무 피곤했던 건가…….”
그런 쓸데없는 꿈을 다 꾸고 말이다.
“네?”
혼잣말을 들은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난 조금 남아 있던 꿈속의 상념을 떨쳐 버리며
하녀에게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네. 아가씨 오늘은 머리를 올릴까요? 아니면 풀어드릴까요?”
난 거울을 바라보았다.
연녹색의 레이스 없는 튜닉 드레스는 화려함보다는 우아함에 가까웠기에 머리를 올리는 게 더 어울릴 거
같았다.
“깔끔하게 올려 줘.”
“네.”
“메리. 시간이 늦어서 그러니 조금 서둘러 주렴.”
늦은 오전이 돼서야 일어나는 바람에 치장이 늦어졌다.
오늘 내가 잡은 약속은 상당히 중요하고 귀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에 늦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꿈에다 늦잠을 잘 줄 알았다면 잠이 들지 않았을 텐데.
나의 부탁에 하녀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하녀들은 진주 머리핀으로 올림머리를 고정하곤 뒤로 물러났다.
“치장이 끝났습니다. 아가씨.”
“수고했어.”
하녀들에게 작은 구릿빛 동전을 하나씩을 쥐여 준 난 핸드백을 들고 곧장 방을 나갔다.
내가 늦지 않으려 서둘러 준비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셀린느 후작가였다.
리제나의 티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셀린느 후작 영애.
셀린느 후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몹시 가세가 힘들어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영애와 내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셀린느 후작 부인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내가 황후였던 시절 가장 가까운 최측근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여 난 루몬트에게 알아보라 명하는 대신 직접 후작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티파티에서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셀린느 후작가에 방문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고 오래되지 않아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난 셀린느 후작가의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아니 귀족가의 저택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작은 2 층짜리 집이었다.
2 층집을 보던 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당황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집을 보던 난 마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곳이 정말 셀린느 후작가가 맞느냐?”
셀린느 후작가는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제국을 떠났다고 한들 고작 몇 년 만에 저택이 사라질 만큼 가세가 기울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은 마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들려왔다.
“크로프트 영애. 도착하셨군요!”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셀린느 영애였다. 집의 문을 열고 나온 그 녀는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셀린느 영애.”
“문지기가 없어 영애께서 오신 줄 미처 몰랐답니다. 저희 셀린느 후작 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그녀의 말에 난 더 의심할 수 없었다.
이 작은 2 층집은 정말 셀린느 후작가였다.
당황을 얼굴에서 지운 난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죠.”
“아닙니다. 방문하신다 하셨을 때 정말 기뻤답니다. 어머니께서 크로프트 영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거든요.”
“셀린느 후작 부인은 안에 계신가요?”
“네. 몸이 편찮으셔서 미처 마중을 나오시진 못했어요. 아!”
손뼉을 탁 마주친 영애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작가를 방문해 주신 손님이 너무 오랜만이라 제가 예의 없이 계속 서서 말하고 있었네요. 안으로
모실게요. 영애.”
난 미소를 지으며 셀린느 영애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밖에서 봤을 때 느꼈던 거처럼 고위 귀족이 살고 있다고 믿기 힘들 만큼 소박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서 그런지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포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룬트 왕국에서 편안하게 지낸 세월이 꽤 길어서인지 지금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저택보단 이런 작고
편안한 분위기의 집이 좋았다.
룬트 왕국에서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미소를 짓던 난 거실 소파에 앉은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르웰린 부인.”
르웰린 셀린느 후작 부인.
6 년 만에 만난 그녀가 거실에 서 있었다.
후작 부인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거동이 불편한 듯 하녀의 부축을 받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크로프트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뵈어요. 부인.”
몇 년 만에 만난 그녀가 반갑고 기뻤지만 후작가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 환하게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고생을 한 것인지 후작 부인의 얼굴이 과거보다 너무도 수척해져 있었고 매끈했던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
그녀의 늘어난 주름이 이때까지의 마음고생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락이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영애, 그런 말씀 마세요. 셀린느 후작가가 힘들어진 것과 영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허니 고개를
드세요.”
셀린느 후작 부인이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하자 후작 부인이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상냥한 미소는 과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내 손등을 두드렸다.

73 화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더 위로를 받는 것 같아 그녀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레이몬드와 안 좋게 이혼한 것이 아니니 내 측근들에겐 큰 피해가 없을 줄 알았다.
보통 황후가 폐위당하면 최측근들도 사교계에서 함께 무너지지만 난 폐위 당한 황후가 아니었고 지은 죄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 잘 지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고 바램이었던 듯싶었다.
아버지도 후작 부인도 모두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까.
“영애, 그런 얼굴을 하시면 제가 더 민망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즐거운 이야기만 나눠요.”
그래 늦었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내 사람들을 지킬 것이다.
셀린느 후작가도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된다.
난 후작 부인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네. 부인.”
“누추하지만 이곳에 앉으시겠어요? 집이 작아 응접실이 따로 없답니다.”
후작 부인이 거실 소파로 날 안내했다. 민망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하녀가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권위 의식 강한 귀족이었다면 제대로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아닌 평민들이나 앉을 법한 소파에 이런
대우는 모욕적이라 소리를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
귀족들은 품위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불안에 젖은 얼굴을 보니 귀족들에게 모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난 이미 품위와 예법은 답답해진 사람이었다.
“누추하긴요. 너무 좋은데요?”
난 웃으며 소파에 편히 앉았다.
“근데 이 쿠션 혹시 후작 부인께서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 네. 요즘 심심해서 자수와 뜨개질을 하고 있답니다.”
“어쩐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예전에부터 후작 부인의 자수 솜씨는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했잖아요.”
“그저 작은 취미 활동일 뿐이랍니다. 과찬이세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후작 부인과 영애도 자연스럽게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셀린느 후작 부인이 맞은 편에 앉고 그녀의 옆으로 셀린느 영애도 자리했다.
하녀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그때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전 잘 지냈답니다. 한데 몸이 많이 안 좋으신건가요?”
“한동안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심적으로 많이 안정됐고……. 조금씩 회복 중이니 걱정 마세요,
영애.”
“다행이에요.”
“그보다 룬트 왕국의 이야기를 해 주시겠어요? 멀리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어 영애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후작 부인은 안 좋은 이야기들은 하지 않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마 내가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면 도와주겠다고 나설까 봐 먼저 선을 긋는 거겠지.
아버지만큼이나 올곧은 성격임을 알고 있기에 난 조급하게 캐묻지 않았다.
룬트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했을까 한참 웃으며 즐거워하던 후작 부인이 갑자기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부인 괜찮으신가요?”
“전 괜찮…… 콜록!”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기침이 이어지자 안 되겠다 싶은지 옆에 있던 셀린느 영애가 하녀에게 눈짓했다.
“메리,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가. 어머니, 올라가서 약을 드셔야겠어요.”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올라가 쉬세요, 부인.”
기침을 하는 후작 부인이 내게 미안해 망설이는 것 같아 먼저 말했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 한 후작 부인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2 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계단을 완전히 오르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셀린느 영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약을 드시면 금방 괜찮아지신답니다.”
“……정말 회복되고 있으신 게 맞는 건가요? 혹 심각한 병이라면 제가 꼭 돕고 싶습니다. 영애.”
“원래 천식이 있으셨는데 후작가에 여러 일이 터지면서 건강이 좀 나빠지셨어요. 근데 지금은 정말
회복하고 계신 중이니 도움은 괜찮답니다, 영애.”
셀린느 영애는 부인과 똑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 도움을 거절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유명한 의사를 보내고 싶지만 당사자가 바라지 않는 도움은 거북함뿐인 걸 알기에 난
한발 물러났다.
“그럼 혹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후작 부인께 진 빚이 많아 꼭 갚고 싶답니다.”
“네. 영애.”
“그러고 보니…… 티파티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조금 늦은 인사이지만 만나서
반가워요. 영애. 후작 부인께 총명한 딸이 있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로프트 영애. 편하게 로잘린이라 불러 주세요.”
로잘린은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로잘린. 사실 내가 오늘 후작가를 방문한 이유는 로잘린 때문이었답니다.”
“저요?”
로잘린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신에 후작 부인을 만나러 오고 싶다고 적었으니 그럴 만했다.
“네. 로잘린에게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어 들렸답니다.”
“제안하고 싶은 일이요?”
“네. 영애께서 만드는 향수를 같이 만들어 팔아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제 향수를 판다고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 로잘린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녀에겐 갑작스럽겠지만 난 티파티 장에서부터 이야기를 들은 순간 생각했었다.
상당히 사업성이 있다고.
안 그래도 룬트 왕국에서 향수 연구를 포기하고 돌아와 아쉬웠는데 로잘린은 내게 굴러들어온 복이나
다름없었다.
귀족들은 거의 매일 하루에 몇 번씩 향수를 몸에 뿌렸다. 그만큼 향수는 귀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 같은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필수품에 몸에 좋은 효능이 더해진다.
아주 잠깐 상상해 보아도 엄청난 수요가 있을 거란 걸 예측 할 수 있었다.
아마 그 티파티에 루몬트나 제드가 앉아 있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로잘린을 영입하려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을 것이다.
난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미소를 그렸다.
“티파티 때 불면증에 효과가 있는 향수란 말을 듣고 사실 깜짝 놀랐답니다.”
“그건 그냥 실험 삼아 만들어 본 건데…….”
“저도 꽃과 약초에 관심이 많아 향수에 약효가 돈다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걸 영애께서 실현하셨다니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답니다.”
“전 그저 어머니께서 향수를 좋아하시는데 천식이 심하셔서…… 조금이나마 몸에 좋은 향수를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 만든 것일 뿐이랍니다. 그렇게 막 내다 팔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당황한 듯 로잘린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많이 놀란 듯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난 안심하라고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걱정 마세요. 영애. 전 오늘 제안을 드리고자 왔을 뿐입니다. 당장 대답을 해 달라 이런 것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사실 마음 같아선 당장 루몬트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 하여 도장부터 찍고 싶지만 그럼 로잘린은 도망 갈
것이다.
셀린느 후작 부인의 성격까지 닮았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녀를 기다려 주어야 했다.
“아…….”
“물론 영애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모든 준비는 제가 할 테니 금전 문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난 살짝 덧붙이며 부담 주지 않는 척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로잘린은 갑작스러운 제안이 아주 싫지는 않은 듯 당황스러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차를 마시는 그녀를 바라보던 난 잠시 고민했다.
후작가가 왜 이리 무너진 것인지 물어도 될지 말지 말이다.
후작 부인은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은 반응이었었다.
뭔가…… 후작가의 치부가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던 걸까.
“영애,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집요한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듯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난 영애의 앳된 얼굴을 보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후작 부인도 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로잘린에게 캐묻는 건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루몬트에게 따로 알아봐야겠어.
“영애가 너무 예뻐 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예쁘다니…… 크로프트 영애께서 훨씬 아름다우신걸요.”
로잘린은 부끄러운 듯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귀여운 모습에 웃던 난 어느새 훌쩍 지나간 시간을 보았다.
“칭찬 감사해요. 로잘린 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뭐든 말씀하세요.”
“혹시…… 제조하신 향수 남으신 게 있다면 하나만 받아갈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로잘린이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드릴 수 있죠. 어려운 부탁도 아닌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잘린은 일어나 1 층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향수병 여러 개를 들고 돌아왔다.
“여기 제가 만든 여러 향수예요. 이건 코를 시원하게 해 주고 이건 불면증에 좋고, 또 이건 근육통을
줄여 준답니다.”
“이렇게 많이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감사해요. 로잘린.”
난 향수병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영애. 약효가 도는 향은…… 제가 처음 만든 게 아니에요.”
로잘린은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에 가 보시면 동방국 물품 중에 약초를 넣어 태우는 향로라는 것이 있어요. 전
그걸 보고 향수를 만든 거랍니다.”
“향로라…… 처음 들어보네요.”
“그걸 보시면 제 향수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되실 거에요.”
“그건 아니에요. 영애의 향수는 향로와 관계없이 이미 특별하답니다. 누구도 향로를 보았다고 이렇게
향수로 발전시키진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스스로를 낮추진 마세요.”
로잘린의 푸른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게 습관이 된듯한 모습이 꼭 과거의 내 모습 같아 더 정이 갔다.
“……감사합니다. 영애.”
“전 사실만 말했을 뿐이랍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후작 부인께 인사를 대신 전해 주세요.
로잘린.”
난 그녀에게 짙은 미소를 보이곤 이내 후작저를 나섰다.

74 화

“여기 제국에서 제일 맛있는 닭고기 꼬치가 있습니다! 어서 맛보러 오세요!”


“아가씨, 이 목걸이가 최근에 시오스 영애가 한 목걸이랑 똑같이 만든 거예요. 구경 좀 해 보셔요.”
“따끈한 수프가 있습니다. 몸들 녹이고 가세요.”
상인들이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호객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활기차게 야시장을 울렸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온 뒤로 처음인 야시장이 신기했지만 오늘은 볼일이 있어 온 것이니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에 시간 내서 칼라일과 함께 야시장에 놀러 와야지.
엄마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칼라일이 떠올리던 난 동방국의 물건을 파는 곳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상인들의 호객을 적당히 잘 거절하며 지나친 동방국의 물품을 파는 한 상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넓은 가판대에 신기한 동방국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동방국의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난 마법 반지를 껴 평민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귀족이 와도 상관없는 곳이긴 했지만 제국의 은발 귀족은 크로프트 공작가가 유일해 너무 눈에 띄었다.
쓰고 있던 로브 모자를 벗은 난 상인에게 말했다.
“향로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서도 향로를 파나요?”
“물론 있죠. 이곳엔 동방국의 모든 물건이 있습니다. 향로는 여기, 바로 여기 있습죠.”
남자는 가판대에 널린 물건 중 도자기와 비슷하지만 무언가 다르게 생긴 물건을 내게 내밀었다.
백자에는 뚜껑이 있었고 바람이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한데 아가씨께선 향로를 어찌 아시고 찾으시는지요. 제국에서 유명한 물건은 아닌지라 아시는 분들이 몇
되지 않는 물건인데 말입니다.”
“아는 자에게 우연히 향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데 이 물건이…… 약초를 넣어 태우는 거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동방국에선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답니다. 평민들은 물론이고…… 황실에서도
사용하고 있지요.”
남자는 백자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 안에 약초를 넣으시고 뚜껑을 닫으면 이 구멍으로 향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상인은 약초를 넣는 시늉을 하며 내게 설명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향로는 생각했던 대로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었다.
향수를 따로 제작한다고 해도, 향로 자체만으로 귀족들에게 상당한 수요가 있을 것 같았다.
로잘린에게 향로 이야기를 듣고 자꾸 생각이나 한번 들러 본 것인데 오길 잘한 것 같다.
내일 제드와 함께 동방국의 향로를 수입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어.
“이 향로를 사고 싶은데 얼마인가요?”
“40 쿠퍼만 주십시오.”
난 상인에게 1 실버를 주었다.
“거스름돈은 되었어요.”
100 쿠퍼가 1 실버였다. 상인은 상당히 후한 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 내가 큰돈을 선뜻 내니 자신이 혹 신분을 착각했나 의심하는 눈치였다.
“향로가 매우 마음에 들어 그럽니다. 중요한 분께 선물을 드릴 거라…… 깨지지 않게 포장해 주세요.”
“네, 네. 물론입죠.”
내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듯 싱글벙글 웃으며 향로를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에 넣어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 든 난 꽤 묵직한 무게에 하인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잠깐 후회했다.
빨리 마차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던 그때.
“꺅!”
난 아이의 앳된 비명에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남자 앞에 쓰러진 작은 소녀가 보였다.
소녀의 옆으론 제비꽃과 바구니가 땅을 뒹굴고 있었다.
“어머, 저기 좀 봐.”
“무슨 일이래…….”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그때 남자가 크게 노성을 질렀다.
“이런! 너 때문에 내 옷이 더러워졌잖아!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게 얼마나 비싼 옷인지 알아?
네 몸뚱어리를 팔아도 사지 못하는 옷이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게 작은 소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멀리서 보아도 작은 체구는 이제 겨우 10 살 정도 된 아이가 같았다.
칼라일보다 겨우 네다섯 살 많은, 아직 어린아이.
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란이 벌어진 쪽으로 다가갔다.
“죄송하다면 다야? 더러운 년이 이딴 꽃이나 판다고 길을 막으니까 내가 피해를 보는 거잖아!”
남자의 위협적인 윽박지름에 소녀는 어깨를 더욱 웅크렸다.
“너 이거 책임져. 몸뚱이를 팔든 뭘 해서라도 이거 책임지…….”
“그만하시죠.”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내가 그 앞을 막아섰다.
“뭐야, 갑자기.”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남자가 주춤거렸다. 하지만 나를 훑어본 그는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하! 난 또 뭐라고, 이제 지금 감히 누구 앞을 막아. 평민 따위가 귀족 앞을 막아서다니 아주 죽고 싶어
환장했나!”
남자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울렸다. 절로 구겨지는 표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귀족…….”
난 남자의 차림새와 뒤에 서 있는 기사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를 훑었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것 치곤 남자의 옷은 그리 비싼 원단이 아니었다.
고위 귀족들은 줘도 안 입는 중상인들이 입는 원단과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다.
감히라는 말을 아무 데서나 남발하고 다니기엔 그리 높지 않은 귀족인 것이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던 시선을 낮추며 말했다.
“그 옷값 제가 변상해드릴 테니 더 이상 아이에게 위협을 가하시지 마시죠.”
마음 같아선 같잖지도 않은 위세를 부리는 남자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큰 소란은
벌리지 않는 게 좋았다.
남자를 혼내 주려면 내 신분을 밝혀야 하는데 그럼 평민으로 위장했던 것도 들통 날 것이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가 평민으로 위장하고 다니는 취미가 있다더라는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었다.
허니 돈으로 변상을 하고 아이만 구해 주고 조용히 물러날 계획이었다.
“네가? 이게 얼마인 줄 알고 너 같은 게 변상해 준다고 허세를 부려. 내 앞을 막아선 것도 모자라 변상?”
하!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차며 말했다.
“와, 요즘 천것들이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보네. 죽고 싶어 환장했나?!”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내 바람이었는지 남자는 예상을 뛰어넘는 무뢰한이었다.
어깨를 거칠게 미는 손길에 고개를 들자 흉흉한 기세로 내게 다가오는 남자와 기사들이 보였다.
아무리 평민과 귀족의 신분 차이가 있다 해도 죄를 짓지도 않은 평민에게 이런 위협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분을 밝혀야 하나.
난 짐승처럼 눈을 번뜩이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쓰레기 같은 놈은 처음부터 저 어린아이를 곱게 보내 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네 얼굴이 영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지만 뭐 몸뚱어리는 나쁘지 않은 거 같네. 겁대가리 상실한 너랑 저
어린 년이랑 둘 다 내가 오늘 신분 차이가 뭔지 아주 제대로 알려주마.”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반지를 빼려던 그 순간 남자의 손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운이 좋구나. 이 손이 여자에게 닿았으면 오늘 네 목이 날아갔을 텐데.”
서늘한 낮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짙은 갈색으로 머리 색이 변한 레이몬드가 서 있었다.
황제의 상징인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이 아니었지만 수려한 얼굴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법으로 머리 색과 눈 색만 바꾸었기에 난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내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마법으로 바뀐 내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고작 한 번뿐일 텐데 그는 아직도 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순간 레이몬드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아주 잠깐 나를 보던 그는 잡고 있던 남자의 팔목을 비틀었다.
뚜둑-
뼈가 어긋나는 기이한 소리가 울리고 남자의 비명이 이어졌다.
“으아악! 내 손목!!”
잔인하게 꺾인 손목을 다른 손으로 붙잡은 남자가 바닥을 굴렀다.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이 검을 빼 들려 했지만 레이몬드의 수하들이 더 빨랐다.
날카로운 검날이 어쭙잖은 기사들의 목에 닿았다. 검을 뽑지도 못한 기사들이 공포에 질린 눈을 굴렸다.
레이몬드는 바닥을 구르는 남자의 가슴팍을 지그시 밟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그 혀부터 잘라 줄까.”
고통스러운 듯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레이몬드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살, 살려 주십시오…….”
그저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레이몬드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신분 차이가 뭔지 제대로 알려준다 했었지. 나도 너에게 제국의 법도를 알려 주고 싶은데. 이 더러운 팔
하나를 자르면 함부로 손을 들면 안 된다는 걸 깨달으려나.”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의 눈빛은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당장 남자의 사지를 잘라 버릴 것처럼.
그 살기를 느낀 남자가 몸을 덜덜 떨었다.
레이몬드가 검집에서 검을 뽑으려 한순간 내가 그를 불렀다.
“레이. 그만둬.”
일순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남자를 밟은 채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75 화

“보는 눈이 많아. 부탁이니까 여기까지만 해.”


난 레이몬드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인파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곧 경비대가 올 것이고 그럼 일이 커질 것이다.
내일 신문 1 면을 장식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자 레이몬드는 순순히 남자에게서 발을 떼며 물러났다.
“검을 거둬라.”
레이몬드의 명령에 수하들이 기사들의 목을 노렸던 검을 거두었다.
“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꺾인 손목을 잡고 고개를 조아리곤 후다닥 기사들과 함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몬드는 그자들에게 관심도 없는 듯 도망치는 순간에도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잡고 있던 그의 팔을 놓았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놓는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
꼭 아쉬운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난 그를 이상하게 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어린 소녀는 많이 놀랐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낡은 옷은 충격을 받아 떨고 있는 아이의 체온을 감싸주지 못하고 있었다.
로브를 벗어 덮어 주려 한 그때, 펄럭이는 가벼운 바람과 함께 아이의 몸 위로 커다란 망토가 덮였다.
아이에게 망토를 덮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그는 놀란 눈빛의 내게 무심히 말했다.
“밤바람이 차가워. 벗지 말고 입고 있어.”
“감, 감사합니다.”
몸이 따스해지자 정신이 드는 듯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잘 씻지 못한 듯 누런 얼굴과 드문드문 묻은 먼지들이 보였다. 낡은 옷을 봤을 때부터 빈민가의 아이일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어린 얼굴에 묻은 고난의 흔적을 보니 더 마음이 아팠다.
칼라일을 낳고 키우다 보니 어린 아이들에게 전보다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바닥에 떨어진 제비꽃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
“앗, 손이 더러워지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더럽긴, 이렇게 예쁜 꽃인데 난 괜찮아. 그보다 이 꽃들 너무 예뻐서 내가 다 사고 싶은데 가격이
얼마니?”
“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흙에 나뒹굴어 더러워진 꽃을 산다고 하니 놀란 만도 했다.
“꽃이 너무 상했는데…….”
“너한테만 알려 주는 건데, 난 상한 꽃도 어여쁘게 살리는 능력이 있단다. 그러니 이 예쁜 꽃들을 내가
데려가 더 예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에게 허리를 기울여 속삭여 주자 순수한 눈동자가 신기한지 반짝였다.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난 주머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보다 레이몬드가 빨랐다.
그는 소녀에게 은화를 하나 내밀었다.
“여기 꽃값이다.”
“이건 너무 큰 돈이라, 제가 받을 수가…….”
“받아도 돼. 네 덕분에 내가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게 됐으니까.”
보고 싶은 사람……?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은 사람이 설마 나를 말하는 걸까, 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보았다.
레이몬드는 내가 아닌 소녀에게 피식 웃으며 손에 은화를 쥐여 주었다.
“받거라.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경비대를 찾아가 이것을 보여 주거라. 그럼 너에게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줄 것이다.”
레이몬드는 소녀에게 신분패를 내밀었다. 황족을 상징하는 금패였다.
소녀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엄청 귀한 것이라는 건 아는 눈치였다.
소녀는 레이몬드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잘 살면 그걸로 됐다. 테일. 아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거라.”
“네. 주군.”
그리고 내일 아침 경비대에게 도착할 때까지 네가 조용히 지켜보거
레이몬드는 수하에게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빈민가에 사는 아이니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품은 자가 돈과 신분패를 훔치는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의 수하와 소녀가 떠나고 레이몬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눈빛은 오랜만이네.”
소녀를 세심하게 챙기는 그의 모습이 놀라워 경계가 풀어진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런 상냥한 모습을 보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으니까.
그를 조금 멍하니 보고 있던 난 낮은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엘리.”
내게 한 걸음 다가온 그는 미간을 좁혔다.
“이런 모습으로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어떡해. 위험할 뻔했잖아. 다친 곳 없어?”
걱정이 서린 가늘어진 눈빛으로 얼굴을 살피던 그는 손을 뻗었다.
난 그를 피하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급한 상황에 잠시 그를 예전처럼 부르긴 했지만 이젠 모든 게 정리되었다.
그답지 않은 배려심에 놀랐던 것도 잠깐의 일일 뿐인 것이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내가 반듯한 인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더욱 깊이 좁혔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난 더 이곳에 있을 마음이 없었다.
난 향로가 든 상자를 고쳐 안으며 제비꽃 바구니를 들었다.
하지만 꽤 무거운 상자와 제비꽃 바구니를 동시에 들려니 힘에 버거웠다. 팔이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팔에 힘을 주며 태연하게 지나치려 했을 때, 휙 내 손에 있던 제비꽃
바구니가 그에게 강탈당했다.
“무슨…….”
“이거 내가 산 거야.”
그는 나를 보며 바구니를 흔들어 보였다.
“하.”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무어라 반박할 순 없었다.
소녀에게 은화를 건넨 건 내가 아니라 레이몬드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내게 사 준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먼저 사겠다고 했고 그다음에 그가 불쑥 돈을 내민
것이니까.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딱히 내게 사 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냥 상황이 그렇게 느껴졌을 뿐.
“……제비꽃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좋아해. 이 꽃 내게 소중한 사람을 닮았거든.”
난 순간 멈칫했다. 그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

<i>‘이 꽃 널 닮았어.’</i>

그 말을 기억하고 하는 말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난 그에게 ‘소중한’이란 단어가 붙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 흘리듯 했을 그 말을 그가 기억할 리도 없겠지.
“그러셨군요. 그럼 전 이만.”
묵례와 함께 떠나려 하자 그가 팔을 붙잡았다.
자꾸만 나를 막는 그의 행동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그가 바로 손을 뗐다.
“이대로 가려고?”
“제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가요?”
“내가 구해 줬잖아.”
그래서 뭐……?
난 조금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안 바뀌며 말을 이었다.
“큰일 날뻔한 상황에서 내가 목숨을 구해 준 거나 다름없는데 고맙단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목숨을 구해 줬다는 부분이 상당히 어이가 없었다.
조금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내 나름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분을 드러냈다면 그들이 나를 함부로 할 순 없었으니까.
그에게 그 부분을 반박하려 입을 열었지만 레이몬드가 더 빨랐다.
“내게 답례로 저걸 사.”
그가 어딘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꼬치를 팔고 있는 가판대가 보였다.
“……저걸 드시고 싶다고요?”
“그래.”
그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레이몬드가 저런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그와 오랜 시간을 알았지만 한 번도 길거리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적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이런 야시장에 나와본 적도 없다는 게 먼저긴 했지만.
꼬치를 보고 잠시 멍해졌던 그때 레이몬드가 내게서 성큼 다가왔다.
멀어지기도 전에 그는 향로가 든 상자를 가져갔다.
“제가 들 수 있습니다.”
“알아. 그리고 도와주는 거 아니니 착각마. 담보야. 보답할 때까지 도망 못 가게 하는 담보.”
어처구니가 없어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은 그는 먼저 상점으로 걸어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가 버리기도 이상해져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난 그를 따라갔다.
“달콤한 맛과 매콤한 맛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거로 드릴까요?”
“달콤한 맛 두 개.”
레이몬드는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가 이런 꼬치를 두 개나 먹을 만큼 좋아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의외라고 생각하던 때 레이몬드가 꼬치
한 개를 내게 내밀었다.
“자. 네 거야.”
“…….”
“생각보다 먹을 만해. 달콤한 거라 맵지도 않을 거고.”
설마 나 때문에 달콤한 맛으로 산 건가.
그는 나와 달리 매운 음식을 잘 먹었다. 그에 비해 난 매운 걸 아예 못 먹었다.
조금만 매워도 속이 뒤집히곤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걸 알았던가.
한 번도 내가 못 먹는 음식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길거리 음식이라 좀 불편한가…….”
내가 말이 없자 싫어한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꼬치를 뒤로 물리려 했다. 난 뺏듯 그의 손에서 꼬치를
가져왔다.
“안 불편해요.”
길거리 음식을 즐겨 먹진 않았지만 다른 귀족들처럼 더럽게 여기진 않았다.
룬트 왕국에 살 때 칼라일과 시장에 나갈 때면 항상 거리 음식을 사 먹곤 했으니까.
꼬치를 베어 물자 달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오히려 길거리 음식보다 갑자기 옛날로 돌아간 듯한 이 상황과 레이몬드가 훨씬 불편했다.
“5 쿠퍼입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레이몬드는 내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은화를 상인에게 건넸다.
“제가 내기로 했는데요.”
그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앞장섰다.
“생각이 바뀌었어. 이걸 보답으로 받기엔 너무 싸잖아. 다른 걸 사.”
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거지.
혼란스러워 멍하니 서 있자 레이몬드가 고개를 돌렸다.
“뭐해. 어서 오지 않고.”

76 화

어느새 과일 주스 상점 앞에서 선 그가 나를 불렀다.


“아, 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를 불러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난 과일 주스 값을 치르자마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난 과일 주스를 끝으로야 시장을 떠나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귀신같이 빠른 손놀림으로 나보다 먼저 계산을 마쳤고 그렇게 몇 군데의 음식 상점을 더
돌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는 내 말을 막으며 앞서 나갔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앞서 가 버리면 난 그를 따라가기 바빴다.
그렇게 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이건 직접 만든 건가?”
그리고 지금, 수제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 앞에 서 있었다.
“네. 전부 제가 직접 만든 것이랍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신구들이죠.”
레이몬드가 상인과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지만 난 내가 들고 있는은 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엔 꼭 늦지 않게 계산하고 돌아가야지.
아니, 이번에도 그가 먼저 계산한다면 그냥 향로를 그에게 버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건 시곗줄인가?”
“네. 맞습니다.”
“독특하군. 이건 얼마지?”
얼마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난 상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은화를 내밀었다.
“여기 이걸로 계산해 줘요.”
레이몬드가 날 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계산해드릴까요?”
나의 다급한 모습에 조금 당황한 상인이 레이몬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몬드가 아니라고 말할까 봐 난 곧장 대답했다.
“그걸로 계산하면 됩니다.”
한데 내가 재빠르게 답한 게 머쓱할 정도로 레이몬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돈을 꺼내려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나 혼자 유난을 떤 것 같아 민망함이 들던 때 시곗줄을 예쁘게 포장한 상인이 내게 건넸다.
시곗줄을 받은 난 레이몬드에게 몸을 반쯤 돌렸다.
“……여기, 도와주신 데에 대한 제 보답입니다.”
혹시나 이거 말고 다른 거, 라고 딴소리를 할까 봐 순간 불안했지만, 그는 그럴 맘이 없는 듯 별다른 말
없이 시곗줄을 받았다.
“감사히 받지.”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꼭 진심으로 시곗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그를 보는 내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난 그가 들고 있는 시곗줄을 보았다.
빨리 답례를 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곗줄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었다.
갈색빛의 가죽은 황제가 사용하기에 상당히 볼품없는 하급 가죽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몬드가 시곗줄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할 이유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단지…… 눈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모양이 조금 비슷했다.
오래전 내가 그에게 선물했던 시곗줄과.
가죽의 재질도 박음질도 내가 선물했던 시곗줄보다 훨씬 볼품없었지만 어딘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설마 그래서…….
난 시선을 들어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고요한 눈동자 속에 짙은 감정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과거엔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뒤 레이몬드는 줄곧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날 사랑할 일은 절대 없다고 했던 네가 왜 그런 눈빛으로 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에 그를 더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했다.
“답례를 드렸으니 이제 정말 가 보겠습니다.”
“마차까지 데려다줄 테니……”
“여기까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는 거북하고 불편합니다.”
그를 따라 돌아다니는 동안 레이몬드는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즐거웠는지 모르겠지만 난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길 바랐을 뿐이다.
그에겐 우리의 과거가 친한 친구일지 몰라도 내겐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레이몬드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난 그를 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그는 내게 향로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 향로뿐만 아니라 흙먼지가 묻은 제비꽃도 담겨 있었다.
“이 꽃들 살릴 수 있는 건 나보단 너일 테니까. 예쁘게 다시 피워 봐. 널 닮은 꽃이잖아.”
순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언젠가 흘리듯이 했던 말을 레이몬드가 기억하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
그럼 아까 그 말은 정말 내게 했던 말인 건가.
……도대체 왜.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말도 안 돼.
그와 다시 마주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재회를 하니 과거의 잔재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보내겠어.”
그의 달라진 모습에 의중을 가늠하느라 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더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불편합니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쭙잖은 다정함을 보이는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훑은 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 * *

다음 날.
푸른 여명이 하늘을 뒤덮은 이른 새벽 아침.
드로이트 공작가의 성문이 열렸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말을 탄 기사였다. 공작의 명을 받고 성을 빠져나온 그는 어디론가 말을 몰아
사라졌다.
그리고 기사가 사라지자 공작가의 성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다시 굳게 걸어 잠겼다.
잠이 덜 깬 문지기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아직 사용인이 출근하지 않은 공작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기사가 은밀히 공작의 침실을 나와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제레미는 기둥 뒤로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저택에서 그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레미는 굳게 문이 닫힌 공작의 침실로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대체 공작에게 무슨 명령을 받은 것이길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것일까.
힘을 잃은 가문이었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기사단도 와해된 지금, 몇 명 남은 기사들이 하는 일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헌데 저렇게 다급히 말을 달리다니.
이상한 일인 거다.
시오스 후작에게 가는 것일까.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6 년 전, 엘리야의 이혼 소식에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오스 후작은 크로프트 공작가를 무너뜨리려 했고 그런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은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은밀한 만남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제레미는 돌아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는 대신 새벽 밤을 틈타 조용히 저택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우연히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시오스 후작을 보았다.
누군가 방문하기엔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다.
거기다 시오스 후작은 후작가의 마차도 타지 않고 평민들이 탈법한 낡은 마차를 타고 왔었다.
모습을 가리듯 검은 로브를 걸친 채로.
시오스 후작은 제레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그는 로브의 그늘 밖으로
드러난 후작의 얼굴을 정확히 봤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드로이트 공작은 제레미를 보고 그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레미의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의 관계에 대해서.
만일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이 맞다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위험한 일일 거 같단 예감이 들었다.
특히 엘리야에게.
그날 이후 신경이 쓰여 따로 뒷조사를 해 보았지만 특별한 물증을 찾을 순 없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공개적으로 모습이 드러날 자리엔 아예 참석하지 않았고 두 가문이 사업적으로 엮인 것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두 사람의 일은 은밀히 진행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란 뜻이었다.
잠시 상념에 젖어있던 제레미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밖의 풍경을 힐긋 보곤 몸을 움직였다.
대리석 바닥에 구둣발이 부딪혀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의 집무실로 향한 그는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고요함 속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깐 울렸지만, 인기척을 느끼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는 곧장 책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로이트 현 공작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프로이스는 상당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족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와 거래를 하거나 일을 할 땐 꼭 상대의 약점이나
폐기하기로 한 서류들을 남겨 숨겨 두었다.
그의 비밀 금고에.
책장의 세 번째 칸 제일 왼쪽에 있는 책을 꺼내자 책장이 스르르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공작의 비밀 금고가 드러났다.

77 화

제레미는 어젯밤 미리 훔쳐놓은 금고 열쇠를 꺼냈다.


공작은 항상 금고 열쇠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열쇠를 훔치기 위해 맞은 주먹에 입술이 터졌지만, 덕분에 열쇠를 얻었으니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금고가 열리자 제레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금고 속에 있는 서류들을 서둘러 꺼냈다.
그리고 예상대로 드로이트 공작은 시오스 후작의 비리에 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
탈세는 물론이고 영지민들에게 불법적으로 거둔 세금, 그리고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원수부에서 빼돌린
돈까지 있었다.
이 자료들이 황제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시오스 후작은 변명도 해 보지 못하고 즉결 처분이 될 만큼 꽤
큰 죄목들이었다.
서류를 하나하나 넘기던 제레미의 손이 멈칫했다.
“……역시 관련이 있었군.”

[4 천 골드…… 드로이트 공작가……]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에 드로이트 공작도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시오스 후작과 손을 잡았다면 당연히 그 일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드로이트 공작은 시오스 후작과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확실했다.
사막 상단이 사기를 쳤다는 4 천 골드.
바로 그 돈이 현재 드로이트 공작가의 비밀 금고에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제레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류들을 더 살폈지만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금고에 들어있는 것은 4 천 골드와 시오스 후작이 비리에 대한 내용이 적힌 서류가 전부였다.
“……이 돈으로 뭘 하려는 거지.”
4 천 골드를 공작가의 금고에 넣어 두자고 빼돌린 것은 아닐 것이다.
크로프트 공작가를 무너뜨리게 함과 동시에 그 큰돈을 어딘가에 쓸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용인들이 출근을 시작한 듯했다.
제레미는 급히 서류들을 다시 금고에 넣었다. 한데 문을 닫으려는 순간 미처 보지 못했던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제레미의 손이 홀린 듯이 그 종이를 집었다.
“1 황자잖아……?”
종이엔 1 황자의 초상화와 리제나 시오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걸 왜…….”
딱히 약점이라 할만한 문서가 아니었다. 1 황자와 리제나를 볼모로 잡아 협박할 수도 없을 텐데.
왜 이런 걸 남겨 놓은 걸까.
종이를 보던 그가 뒷장을 보려 돌리려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레미는 황급히 종이를 다시 금고에 넣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결국, 그는 종이의 뒷장에 적힌 이름을 보지 못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래서 이 향수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또 향로도 동방국에서 수입해 오면 좋겠다는 얘기인 건가?”
내가 했던 말을 쭉 들은 제드가 말했다.
“응. 왜 별로인 거 같아?”
“흠…….”
난 약간 긴장된 얼굴로 제드를 보았다.
동업자이긴 했지만, 이때까지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것은 거의 제드의 역할이었다.
뭔가 심사를 받는 듯한 기분에 침을 꿀꺽 넘긴 그때 제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상당히 좋은 사업 같아. 귀족들이 향수를 즐겨 쓰는 거야 뭐 지나가던 똥개도 알 만큼 일상적인
일이니까.”
돌아온 답은 다행히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치?”
“거기다가 치료 효과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미친 듯이 팔려나가겠지. 그리고 이 향로로 집안에서 향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수요가 엄청날 거 같네.”
제드는 나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뜸 들인 거지.”
“응. 네가 갑자기 막 긴장하니까 놀리고 싶잖아. 마음이야 이미 향수를 내려놓을 때부터 와, 이건
대박이다 했지.”
제드는 재밌었다는 듯 킬킬거리며 경박하게 웃었다. 그를 흘겨본 난 루몬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몬트, 동방국에 있을 향로 장인들을 알아봐.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디자인을 좀 바꿔서 내놓으면 더
반 응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무역 건도 빨리 트는 게 좋겠어.”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이 향수는 언제부터 가능해?”
“그건…… 아마 며칠 걸릴 거 같아.”
르웰린이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알겠어. 그럼 준비되는 대로 말해 줘.”
“응.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만든 향수들만 보아도 호기심이 많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망설인 것일 뿐 로잘린이 나의 손을 잡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셀린느 후작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겐 내가 필요할 테니까.
“근데 엘리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공작가의 일도 정신이 없을 텐데……. 괜히 몸 상할까 걱정이다.”
“걱정 마. 이 정도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다 공작가를 위한 일이야.”
제드에게 미소를 지은 난 루몬트에게 물었다.
“루몬트, 내가 어제 부탁한 셀린느 후작가의 정보는?”
“아, 여기 있습니다.”
루몬트가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다야?”
“네. 그게 다입니다.”
명색이 후작가의 사건인데 종이 한 장이 다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서류를 읽어보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셀린느 후작의 죄목은 탈세였다.
정확히는 후작이 저지른 탈세가 아니었다.
가문의 집사가 2 년간 고액의 세금을 탈세했고 그게 발각되어 벌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가주로서 그 책임을 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귀족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셀린느 후작을 벌해달란 상소를 황제에게 올렸고 레이몬드는 후작의
작위를 파면하는 대신 수도와 가장 먼 북방의 수비대장으로 명했다.
말이 북방의 수비대장이지 그곳은 척박한 땅인 데다 맞닿은 경계령 근처에 사는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었기에 고위 귀족들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후작은 제대로 된 재판 한번 없이 스스로 떠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군.”
“네. 거의 뭐 일주일도 안 돼서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셀린느 후작은 북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도
후작급의 사건인데……. 이례적인 일이긴 했죠.”
“폐하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었나?”
“폐하께서도 셀린느 후작이 직접 떠나겠다고 하니 별말씀을 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래도 조사를 좀 더 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는 재상인 시오스 후작이 폐하께 많은 부분을 일임받아서 일처리를 하고 있었을 때라 그런
듯합니다.”
아무리 재상이라 할지라도 레이몬드는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했었다.
그런데 일임을 해 주었다니.
그의 완벽주의 가까운 성격을 알 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나?”
“아뇨. 딱히 큰일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한 6 년 전부터 갑자기 정무에서 손을 떼셨죠.”
“6 년이면…….”
제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제국을 떠난 것이 6 년 전이었다.
레이몬드가 정무에서 손을 뗀 시기와 내가 떠난 시기가 겹쳤다.
제드가 날 가만히 보자 루몬트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 님께서 폐하와 이혼하신 시기가…….”
“큰일이 없으셨던 거라면 그저 잠시 쉬고 싶으셨던 거겠지. 반정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셨으니까.”
난 루몬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레이몬드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나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루몬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서 항상 바쁘셨죠.”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난 화제를 돌렸다.
“시오스 후작과 황제 폐하의 관계에 대한 건 알아보고 있어?”
“네. 다방면으로 폐하와 시오스 후작에 관한 소문을 알아보고 있긴 합니다만, 공식적으론 크로프트 공작
사건 말곤 시오스 후작이 황제 폐하와 부딪힌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좀 더 깊이 알아봐.”
“네. 아, 엘리 님.”
“응.”
“저번에 찾아봐 달라 하셨던 한 남자분 말입니다.”
남자……?
순간 의아해하던 난 제레미를 찾아달라 했던 일을 떠올렸다.
재판장에서 우연히 그를 본 거 같아 루몬트에게 찾아달라 했었다.
“제국에 있어?”
“네. 제국에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루몬트는 망설이듯 턱을 긁적였다.
“그 남자가 드나드는 곳이 드로이트 공작가였습니다.”
“드로이트 공작가…….”
“컥.”
“제드?”
물을 잘못 삼킨 건지 제드는 빨개진 얼굴로 격한 기침을 뱉었다.
죽을 듯 기침을 내뱉던 그는 곧 진정이 되었는지 숨을 골랐다.
“하아…….”
“괜찮아?”
“어, 어. 괜찮아.”
“근데 뭐에 그렇게 놀라서 사레가 들렸어.”
“놀라긴. 그냥 갑자기 생뚱맞게 드로이트 공작가의 이름이 나오니까 그랬지.”
그는 큼, 목을 고르며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조금 이상했지만 원래 정상적인 범주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난 별다른 생각 없이 루몬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78 화

“그러니까 지금 그 남자가 제국에 있는 건 맞는 거지?”


“네. 제국에 머무르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드로이트 공작가에 머무는 것도 확실하고요.”
드로이트란 가문의 이름이 엄청 경악스럽진 않았다.
그가 드로이트 공작가의 영식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건 느낄 수 있었다.
시오스 후작가의 파티에서 그를 만났을 땐 귀족이란 걸 알아차렸고 룬트 왕국에서 가까워지며 그의 가문을
유추했었다.
하급 귀족이라 하기엔 무의식중에 나오는 그의 귀족적인 몸짓들이 지나치게 매끄럽고 우아했기에 난 그의
신분이 높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또한 고위 귀족 중 내가 만나지 못한 영식은 드로이트 공작가의 영식이 유일했기에 그의 가문을 유추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그가 정말 제국에 돌아왔다면 내가 무언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에게 받았던 도움들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드로이트 정도 되는 가문에서 숨기고 있는 자식이라면 그의 사정도 복잡하다는 소리였으니까.
“근데 엘리 님은 그 남자가 드로이트 공작가와 관련이 있으신 걸 알고 있으셨나요?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드로이트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엮이지 않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드로이트 공작가에 신경쓰고 있는 게 느껴졌는지 루몬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름만 남은 공작가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제국 사람이라면 꺼리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 드로이트 공작에 대해 좋게 생각하진 않았다.
탐욕스러운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레미를 몰랐다면 관심도 두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물론 황제에게 버림받은 가문을 도와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레미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한 번쯤은 드로이트란 이름을 못 본 척해서라도 돕고 싶다는 것이다.
염려가 가득한 루몬트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드로이트 공작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알아봐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힐긋 시계를 보자 벌써 정오가 훌쩍 넘어있었다.
“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 향수에 관한 건 결정되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네.”
“제드 나 가 볼게.”
“어? 어, 어…….”
제드는 왜인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답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이상하게 구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한 난 이내 루몬트의 집무실을 나갔다.

* * *

“아가씨!”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내게 급히 다가왔다.
순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걱정했지만 집사는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에 찬 듯 어딘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집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막 황제 폐하의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무죄를 축하하며 아가씨의 큰 기부금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입니다.”
“아…….”
며칠 내로 발표가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레이몬드가 말했던 공식발표 말이다.
그래서 아까 오는 길에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던 건가.
돌아오면서 광장을 지나칠 때, 거리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었다.
마차 창문을 열어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문이 수도 곳곳의 게시판에 붙었을 테니 아마 그래서 소란스러웠던 거 같았다.
“그리고 공식적인 발표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들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선물?”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집사가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리로 시선을 옮기자 로비 한가운데 한가득 쌓여있는 상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황실의 시종과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난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크로프트 영애.”
시종이 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이게 전부 폐하께서 보내신 하사품인가?”
“네. 폐하께서 영애의 큰 기부에 약소한 고마움을 전하신다며 남부의 최고급 가죽과 금괴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께서 영애께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내게?”
시종은 내게 작은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든 난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건 보석 목걸이였다.
중앙에 박힌 짙은 보랏빛 스피넬과 다이아몬드로 꽃 모양을 만든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은 제비꽃을 닮아
있었다.
제비꽃.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난 작은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나를 닮은 제비꽃, 소중한 사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무심한 모습과 너무 대조되는 지금 그의 모습들.
절대 날 사랑하지 않겠다던 말과 소중한 사람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설마 진짜 내게 다른 마음이라도 생긴 거야? 레이몬드.
닿지 않을 질문이 목을 간지럽혔다.
6 년 동안 나를 찾았던 이유가 뒤늦은 후회에 기인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복잡한 눈으로 목걸이를 보고 있자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엘리야.”
고개를 돌리자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보였다.
황제의 선물을 받고 아무런 감사의 말도 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난 굳었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시종에게 답했다.
“폐하께 과분한 선물 감사하다 전해 주시게. 곧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말이야.”
“네. 영애. 그럼 전 폐하의 뜻을 전하였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아버지는 황제의 시종을 저택 밖까지 배웅했다. 시종이 탄 마차가 떠나고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폐하의 선물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그냥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놀라서 그랬어요.”
난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하녀장에게 건넸다.
“방에 가져다 놓으렴.”
“네. 아가씨.”
“그나저나 폐하께서 이리 많은 선물을 보내신 걸 보니 아무래도 공작 가를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으신
듯하구나.”
난 쌓여있는 하사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마움에 보내는 선물 치곤 과분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넘치는 하사품은 황제가 공작가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과시용이었다.
하인과 하녀들이 전부 보았으니 수일 내로 황제가 내린 값비싼 하사품들에 대한 소문이 귀족가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이왕 레이몬드가 이렇게 판을 깔아주었으니 난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아버지,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겠어요.”
“파티?”
“네. 저도 돌아왔고 아버지의 무죄도 입증되었잖아요. 큰 파티를 열어 공작가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황제가 먼저 나서 공작가를 치하해주었으니 지금이 파티를 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다들 하사품이 궁금해서라도 공작가의 파티에 올 테니까.
아버지도 내 뜻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파티 준비는 제가 할게요. 그럼 전 이만 집무실로 가 볼게요.”
“그러려무나.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미소를 지은 난 집무실로 향했다.

* * *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황자 전하께선 좀 괜찮아지셨나요?”


시오스 후작가의 화원.
리제나는 비스테인 백작가의 영애이자 자신의 사촌 동생인 로제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걱정으로 잠까지 설쳤다는 로제인을 보며 의례적인 미소를 띄웠다.
“괜찮아. 에디의 회복력이 워낙 좋아 뼈도 빨리 붙을 거 같다고 황궁의들이 그러더라.”
“어머나 다행이에요. 역시 우리 황자 전하는 총명한 데다 몸까지 튼튼하신 게 여간 범상치 않다니까요.
나중에 분명 대륙에 이름을 떨칠 황제가 되실 거에요.”
“아직 황태자도 되지 않았는데 그런 말은 삼가렴.”
“에이,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아 황태자 책봉식을 치르지 못한 것뿐이지 에드먼드 황자 전하가 다음
황제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언니.”
현 황제에게 에드먼드 말고 자식은 없었다.
반정으로 남아있는 황족이 없었으니 다음 대의 황제는 이미 에드먼드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제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며 조용히 홍차를 들이켰다. 입이 가벼운 로제인과는 달리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로제인은 동경하는 리제나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 작은 입을 열심히 움직였다.
“언니는 너무 겸손해요. 장차 황태후가 되실 분인데 좀 더 떵떵거리고 다녀도 된다니까요.”
“로제인, 황태후라니. 너무 멀리 가는구나. 방금도 말했지만, 에디는 아직 일개 황자일 뿐이야. 괜한
구설에 오를 말은 하지 말렴.”
“뭐 어때요. 화원에는 언니랑 나 말고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다들 말은 않지만, 에드먼드 황자 전하가
황제가 될 거란 걸 알고 있는걸요.”
잔잔했던 리제나의 표정이 굳은 건 다음 순간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폐하께선 황후전을 채울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이제 와 크로프트 영애를 다시 황후에 올릴 생각도
아니라면…….”
“로제인.”
탁-
찻잔을 내려놓은 리제나가 로제인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로제인은 리제나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자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리제나가 크로프트 영애의 이야기엔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깜박하고 만 것이다.
로제인은 리제나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79 화

그녀에게 살가운 사촌 언니였지만 이따금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로제인은 등골이 서늘했다.
로제인은 양순히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폐하의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다간 목이 잘릴 수도 있단 걸 항상 유념하렴.”
“……네.”
기가 죽은 로제인이 한결 조용해지자 리제나는 화원을 고개를 돌렸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튤립들은 언뜻 황제의 정원에 핀 장미들과 닮아 있었다.

<i>‘에드먼드가 괜찮아졌으니 이만 후작저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괜한 소문이 생기기 전에


말이야.’</i>

에드먼드의 몸 상태가 안정을 찾자마자 황자의 궁으로 온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말이다.
이제 와 그의 무심함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단지 소문 따위에 관심도 없던 그가 갑자기 그런 것을 신경 쓰는 것이 거슬렸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엘리야 크로프트. 그 여자 때문이겠지.
소문이 나는 것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그녀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기라도 할까 싶어 두려운 것인
거다.
엘리야가 떠나고 레이몬드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야가 제국을 완전히 떠났다는 소식이 퍼지고 다시 레이몬드를 만났을 때 그의 공허한 눈빛은 세상을
잃은 자의 것처럼 보였으니까.
내가 떠나고도 그런 눈빛을 했었을까.
그때의 그를 마주했을 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항상 뒤에 있을 땐 바보같이 제 감정도 모르더니.”
리제나는 피식, 비틀린 미소를 띠었다.
“네? 뭐가 뒤에 있어요?”
“그냥 갑자기 자기감정도 몰랐던 어리석은 남자가 떠올라서.”
“네?”
“그리고 난 그 남자가 행복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엘리야는 무너지고 레이몬드는 후회로 점철된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리제나는 그들도 그녀와 같은 시궁창
속에 살길 바랐다.
로제인은 일순 사람 같지 않은 리제나의 표정에 어깨를 움찔했다.
“쓸데없는 소리였으니 잊으렴.”
언제 싸늘한 눈빛을 했냐는 듯 리제나는 해사한 미소를 그렸다.
그때 화원으로 백발을 가진 하녀가 빠르게 리제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폐하께서 크로프트 공작가를 옹호하는 공문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공작가에 상당한 하사품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하사품까지?”
로제인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그러나 그녀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랬구나.”
하지만 리제나는 공문만이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공작가를 감싸겠단 레이몬드의 의지가 꽤 강해 보였으니까.
한동안 시끌벅적하긴 하겠지만 어차피 곧 잠잠해질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하녀의 말에 리제나의 여유도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크로프트 공작가에서 크로프트 공작 영애의 귀환파티를 성대하게 연다고 합니다.”

* * *
“영애, 폐하께서 온실 화원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황궁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내게 다가왔다.
“온실 화원?”
오늘 황궁에 방문한 건 넘치는 하사품을 내려준 황제에게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의 달라진 모습과 의미심장한 태도에 마음이 복잡해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그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차마 하지 못했다.
그를 보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 미루고 미루다 하사품을 받고 3 일이나 지나서야 황궁에 방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집무실이 아닌 온실 화원이라니.
집무실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빠르게 돌아갈 생각을 했던 난 의아함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손목시계를 살짝 확인하자 딱 정오가 된 시각이 보였다.
설마 나와 함께 오찬이라도 하자는 건가.
“온실 화원에 가벼운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전 일찍 찾아뵌다 했을 때 갑자기 정오에 오라 시간을 바꿀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짧은 한숨을 내쉰 난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본궁의 온실 화원은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황후 시절 내가 관리하던 곳이었으니까.
둥근 돔 형태인 화원의 문을 열자 익숙한 자연의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귀족 여성들은 온실 화원을 주로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채웠지만 난 야생화와 희귀종인 나무들을 주로
심어 키웠다.
황궁에만 갇혀 살다 보니 바깥의 푸른 녹음을 화원에서라도 느껴보고 싶어 그랬다.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코끝으로 시원한 나무의 향이 느껴졌다.
내가 떠나고 6 년이나 흘렀음에도 온실 화원은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엔 달라지지 않은 화원의 모습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레이몬드가 신경 쓴 결과물이라 생각하니 목이 까 끌까끌해지고 익숙한 풍경이 마냥
기껍게 다가오지 않았다.
생기가 도는 야생화들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삼키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원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레이몬드가 서 있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자주색의 야생화의 꽃잎을 만지고 있던 그가 몸을 돌렸다.
그의 손끝에 닿았던 꽃을 보지 못한 척,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내가 일어나자 그는 주변을 물렸다.
시종들이 모두 나가고 그는 먼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달라진 그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나와 달리 레이몬드는 느긋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무감하면서도 여유가 감도는 수려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단지 나를 보는 눈빛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그의 깊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응시했다.
“앉아. 엘리야.”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에서 보자고 해서 많이 놀랐나?”
“놀랐다기보단……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큰 병에 담긴 과일 주스를 내 컵에 따라주었다.
“이 화원. 네가 좋아했던 곳이었지. 언젠가 네가 돌아오면 이곳에 초대하고 싶었어.”
“…….”
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이 없는 나를 보다 과거를 그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가 좋아했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걸 보면 기뻐할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군요.”
난 건조하게 답했다.
그는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굳은 얼굴에서 아주 작은 감정이라도 찾아보겠다는 듯 말이다.
예를 들면 기쁨, 그리움, 행복 같은 것을.
하지만 난 그저 묵묵히 그를 마주 보았을 뿐이다.
“저기 저 나무는 네가 특히 아꼈던 거고, 저 꽃은 향이 좋다 했었지.”
그는 내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거 같았다.
그 말투와 눈빛이 퍽 다정해, 마치 부부 사이로 돌아간 거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아니네.
번뜩 드는 현실감에 난 정신을 차렸다.
과거로 돌아간 것이라면 레이몬드가 날 보며 저런 다정함을 보일 리 없었으니까.
6 년이나 흘러서 그런지 순간적으로나마 과거의 우리가 다른 평범한 부부였던 것처럼 착각했다.
그의 어설픈 다정함에 얼음물을 맞은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에 설마 하는 의심에 점점 확신이 생겼다.
아직 레이몬드의 입으로 직접 듣진 못했지만.
딱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듯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토마토스튜와 구운 호밀빵, 어린 새싹으로 만든 샐러드와 과일 주스.
전부 내가 즐겨 먹던 음식들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게 노골적으로 티가 났다.
먹기도 전에 체할 거 같네.
물끄러미 음식들을 보던 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나직이 그를 부른 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이 온실 화원을 왜 좋아했는지 아시나요?”
나의 물음에 레이몬드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화원을 정성스레 가꾼 것은 알아도 내가 왜 이 화원을 가꾸기 시작했는지는 모를 테니까.
난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연히 모르시겠죠. 애초에 폐하께서 저에 대해 아시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실 테니까요.”
“…….”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것을 보던 난 커다란 온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제가 이곳을 좋아했던 이유는 이곳에 제게 유일한 쉼터였기 때문입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삭막한
황궁에서 이곳만큼은 숨통이 트였으니까요.”
“엘리야…….”
“폐하, 폐하께선 언제나 제게 무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 견고한 황실을 보여 주기 위해 황궁
법도는 더욱 엄격해졌죠.”
마음이 울렁이는 것만 같아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전 그렇게 철장 안에 갇힌 새처럼 이 황궁에서 살았습니다. 폐하의 뒷모습만 보면서요.”
레이몬드의 여유 가득하던 얼굴이 흔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흔들리는 그 모습을 보자 난 혼란스럽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습니다만……. 그건 전부 과거일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 이 화원이 숨 막히게 느껴지네요.”

80 화
레이몬드는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정적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찰나의 다정했던 분위기는 신기루였던 거처럼.
상처받은 것처럼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먼저 선을 그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제비꽃 목걸이를 받은 순간부터 그와 과거를 정리해야겠다 결심했다.
그 목걸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을 내게 선물한 그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괴로움으로 얼룩진 과거에 발목 잡혀 다시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난 먼저 입을 열어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제가 오늘 폐하를 뵙고자 한 것은 크로프트 공작가에 보내주신 귀한 하사품에 감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과분한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하자 레이몬드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크로프트 공작가는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이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
“아버지께서 폐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감사드린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로프트 공작가는
폐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그래. 공작의 빠른 쾌유를 빌지.”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대화가 의례적으로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리다 그를 향해 말했다.
“폐하. 전 이미 과거에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
느릿하게 화원을 둘러본 난 레이몬드를 정확히 내려보며 말했다.
“허니 폐하께서도 과거를 깨끗이 잊으실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레이몬드는 답하지 않았지만 부디 그가 현명한 답을 내리길 바랐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만큼은 내 의도가 그에게 제대로 전해진 듯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깐 그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난 미련 없이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 * *

파티가 열리기 하루 전날.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부지런히 파티장을 꾸미고 있었다.
바쁜 일정과 많은 일에 피곤할 만도 했지만 오랜만에 열리는 성대한 파티에 일하는 모두의 얼굴이 밝았다.
그렇게 공작가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던 그때 성문을 넘은 마차 한 대가 공작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귀족가의 마차라고 하기엔 상당히 오래된 마차였지만 마차에 그려진 문장은 분명 귀족 가문의 상징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분홍머리칼을 가진 영애가 내렸다.
집사는 영애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셀린느 영애, 크로프트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받는 귀한 대접에 로잘린은 머쓱한 미소를 그렸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셀린느 로잘린은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집사를 따라 공작가의 집무실로 향했다.
“로잘린, 어서 와요.”
난 집무실로 들어오는 셀린느 영애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로잘린 역시 빙그레 미소를 그리며 내게
다가왔다.
“크로프트 영애, 잘 지내셨나요.”
“전 잘 지냈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영애.”
난 그녀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먼저 앉으세요. 영애.”
로잘린이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어 내가 먼저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지 않고 맞은 편에 앉자
로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게 더 좋아서요.”
로잘린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홍차를 준비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건 수도에서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사 온
당근 케이크예요.”
테이블 위엔 미리 준비해둔 홍차와 당근 케이크가 있었다. 난 케이크를 잘라, 한 조각을 그녀의 앞접시로
덜어주었다.
내가 직접 해 주는 것이 당황스러운 듯 로잘린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로잘린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하녀들은 모두 물렸어요. 혹시 불편한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제겐 너무 황송하죠.”
로잘린이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눈이 왕방울처럼 로잘린을 보며 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니 귀여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앗, 제가 뭐 실수라도…….”
“아뇨, 아니에요. 로잘린이 너무 귀여워서요. 어릴 때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내게
동생이 있었다면 로잘린처럼 귀엽고 예뻤을 거 같아요.”
“과찬이세요. 영애.”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던 로잘린은 당근 케이크를 포크로 한입 떠먹었다.
맛이 나쁘지 않았는지 로잘린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한결 긴장이 풀린 모습에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갑자기 방문을 요청한 건 향수 사업에 대해 결론을 내렸기 때문인가요?”
오늘 이른 아침 후작저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셀린느 영애가 날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어 걱정하던 찰나에 딱 서신이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는데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가만히 그녀를 보자 로잘린이 후, 작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잘린은 두 손을 꼭 잡았다. 답을 하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같아 난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이내 결심한 듯 로잘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영애, 영애께서 제게 해 주신 제 안이 아직 유효하다면 함께 향수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난 로잘린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당연히 유효하답니다.”
“너무 늦게 와서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한 일이죠. 로잘린이 혹시나 안 한다고 할 까 봐 요 며칠 제가 얼마나
초조했는데요. 함께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로잘린.”
“제 능력을 이렇게 높이 평가해 주신 건 크로프트 영애께서 처음이에요. 그러니 실망하게 하지 않게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영애.”
로잘린은 결연한 눈빛으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건 내일 피닉스 상단의 루몬트란 자에게 들으면 될 거에요. 그자와
향수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면 되고…… 잠시만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낸 난 다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우리의 사업에 대한 계약서에요. 천천히 읽어보고 사인해 주면 돼요.”
로잘린은 차분하게 계약서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영애, 여기 수익 배분율이 조금 잘못된 거 같은데요?”
“음…… 아뇨. 그게 맞아요.”
향수 사업에 대한 이익금을 로잘린과 내가 8 대 2 로 배분받는다는 조항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제가 너무 많이 받는 거 아닌가요?”
사실 처음엔 수익금을 전부 로잘린에게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럼 부담스럽다고 로잘린이 도망갈 거 같아 나름의 배분을 한 것이었다.
“당연히 로잘린이 더 많이 받아야 해요. 약효가 있는 향수를 개발한 건 내가 아니라 로잘린이잖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향수 만드는 일은 로잘린이 맡아서 해 줘야 해요. 그러니 비율은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로잘린이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할까 봐 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음, 그래도…….”
“로잘린. 로잘린의 능력은 엄청난 능력이에요. 그러니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요.”
나를 보는 로잘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복받친 건지 갑자기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로잘린, 괜찮나요?”
나는 급히 로잘린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 네. 이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앞으로 내가 질리도록 많이 말해 줄게요. 로잘린이 얼마나 대단한지.”
잠시 호흡을 고른 그녀는 푸스스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로잘린은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난 빙그레 미소를 그리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로잘린.”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로잘린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어머니의 몸이 좋지 않아 집을 오래 비울 순 없거든요.”
“그래요. 아, 잠시만요. 계약의 선물로 준비한 게 있어요.”
“선물이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뜬 로잘린을 보며 난 작은 종을 흔들었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미리 준비한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
“헬라나 살롱에서 산 드레스에요. 계약하게 되면 선물을 하나 해 주고 싶어서 고민하다 드레스를 고르게
되었죠. 로잘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이 드레스는 내일 열리는 파티에서 로잘린이 입을 드레스가 없을 거 같아 산 것이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 초대장은 제국의 이름이 좀 있다 싶은 귀족들에겐 전부 뿌려졌다.
그렇기에 명망 높은 셀린느 후작가도 당연히 포함이었지만 초대장을 보내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성대하게 열리는 파티인 만큼 귀족들은 자신의 돈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올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현재 셀린느 후작가의 재정은 그런 화려한 드레스를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81 화

마음 같아선 로잘린이 편하게 파티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파티에 오지도 못할 만큼 돈이 없다고 또 무시를 당할 것이다.
파티 초대장을 받지 못한 가문은 수도에 발을 붙일 수도 없는 낮은 귀족들뿐이었으니.
그렇다고 유행이 지난 드레스를 입고 온 로잘린을 두고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꼴을 두 번 보고 싶진 않아
내가 먼저 드레스를 사 버린 것이다.
문제는 수도의 가장 비싼 살롱에서 드레스를 사는 거까진 좋았는데 이걸 로잘린에게 줄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름다운 드레스를 로잘린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어야 기분 나쁘지 않을지 계속 고민했었다.
무턱대고 사정이 어려울 테니 드레스를 보낸다 이렇게 할 수도 없었고 드레스를 선물하기엔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하여 오늘 방문한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
계약을 핑계로 그녀에게 선물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로잘린 이건 나와 계약을 해 준 것이 고마워 특별히 준비한 선물일 뿐 다른 뜻은 없어요.”
난 혹시나 그녀가 기분 나쁠까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로잘린은 잠깐 침묵하며 드레스 상자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계약의 선물이라 하긴 했지만, 로잘린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일 파티 때문에 드레스를 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파티에서 모욕을 당하지 말라고 주는 드레스는 아니었다.
파티장은 귀족들이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난 로잘린이 내일 파티에서 당당히 서길 바랬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음으로써 셀린느 후작가는 크로프트 공작가와 가까운 사이가 될 테니까.
그녀가 안 받으면 어쩌나 살짝 불안한 눈빛을 한 순간 로잘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영애. 내일 공작가의 파티 때 입은 모습을 보여 드릴게요.”
“기대할게요, 로잘린. 그럼 내일 봐요.”
난 로잘린을 배웅하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 * *

드로이트 공작가는 요새 답지 않은 활기참을 보이고 있었다.


굳게 닫혀 손님이라곤 맞이하지 않았던 성문이 종종 열리고 아무런 문장이 없는 마차에서 내린 하급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작을 만나고 돌아갔다.
누군지 쉽게 알 수 있게 가문의 마차나 타고 올 것이지.
제레미는 2 층 자신의 방에서 모든 방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하인들이나 탈법한 낡은 마차를 타고 온 귀족이 돌아가는 것을 보던 제레미는 삐죽 입꼬리를
올렸다.
“벌건 대낮에 방문하면서 가문을 들키는 건 또 두려운가 보네.”
황제에게 버려진 공작가였으니 혹시나 엮였다간 자칫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지 말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 위험부담을 지고서라도 드로이트 공작가에 줄을 대고 싶어 한다라.
그렇다는 건 드로이트 공작가에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아마 시오스 후작과 관련이 있을 테고.
제레미는 새하얀 종이 위에 방금 떠난 사람들의 얼굴을 빠르게 그렸다.
특징을 정확히 잡은 그림이었다.
가문의 마차를 타고 왔더라면 이런 수고를 덜었겠지만, 저들은 신분을 숨기고 왔으니 그가 직접 알아내야
했다.
지금 그린 초상화 말고도 다른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몇 장의 종이가 그의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대체로 젊은 영식들이었다.
그림 속의 얼굴들을 보던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오스 후작은 왜 갑자기 드로이트 공작가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보내는 걸까. 그리고 대체 저들은 어느
가문의 귀족들일까.
후작과 공작이 대체 무슨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아직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집무실에 다른 비밀이 더 숨겨져 있을 거 같았지만 그날 이후로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느낀 것인지 공작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그래야 엘리야가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드로이트 공작가가 그녀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에게 드로이트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돌연변이로 태어나게 할 거면 처음부터 드로이트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질 말지.
차라리 드로이트 공작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아였다면 스스로가 덜 역겨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에게 좀 더 당당히 다가갔을 텐데.
제드의 말처럼 엘리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그의 몸에 흐르는 피와 가문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그는 반정으로 무너진 공작가의 자식이었고 엘리야는 반정으로 공신이 된 공작가의 자식이었다.
제국의 단 두 개밖에 없는 공작가가 절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칼날을 겨누고 있는 셈이다.
제레미가 작은 한숨을 내쉰 그때 공작가의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레미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낡은 마차 한 대가 공작가 저택 앞에 멈추었다.
“저 마차는 어디서 단체로 빌리기라도 하는 건가.”
하나같이 똑같은 낡은 마차에 실소를 짓던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시오스 후작.”
검은 로브를 모자까지 뒤집어쓴 시오스 후작이 공작가의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걱정 말게. 크로프트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거니까.”
드로이트 공작의 불안한 눈빛이 시오스 후작의 확답에 안심으로 가라앉았다.
“그럼 곧 일을 치를 준비나 하고 있게나.”
시오스 후작은 더러운 탐욕으로 번뜩이는 공작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이 같기에 손을 잡았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난 이만 가 보지.”
드로이트 공작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함께 일어났다.
“조심해서 가게.”
후작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집무실 문 앞에 선 남자를 보고 나가려던 몸을 멈칫했다.
“왜 그러는가.”
문을 나가지 않고 선 후작의 뒤로 드로이트 공작이 물었다.
그때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울렸다.
“시오스 후작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제레미 드로이트. 드로이트 가문의 공자입니다.”
“공작의…… 아들이었군.”
시오스 후작은 눈앞의 장신의 남자를 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제레미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드로이트 가문의 상징인 짙은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 둘 중 어느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신 백금발과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공작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의도적으로 아들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덜떨어진 자식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나.
드로이트답지 않은 제레미를 보던 후작이 입을 열려 한 그때 공작이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네가 왜 여기에……!”
공작은 제레미에게 소리를 치려다 아직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시오스 후작을 보고 멈칫했다.
“아들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더니 돌아왔었군요. 공작.”
능구렁이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공작은 답지 않게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큼, 얼마 전에 돌아왔네.”
“이렇게 잘 자란 아들이 있었다니, 제레미라고 했던가.”
시오스 후작은 제레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대륙을 탐방하는 여행은 그만하고 아버지를 좀 모시게. 공작 각하께서도 나이가 지긋하신데
언제까지 아들을 감싸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저도 이제 정착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앞으로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후작
각하.”
제레미는 후작의 비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작은 묘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다 아들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공작에게 말했다.
“아들이 저리 번듯하니 부럽습니다. 공작.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 같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지요.”
피식, 웃은 후작이 저택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공작은 제레미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네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방금 네가 누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아느냐?! 내 쥐죽은 듯이
살라 했거늘!”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는지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레미는 당장 제 목을 조를 듯이 노려보는 공작을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방금 후작의 말 못 들었습니까.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제가 어떻게 쥐죽은 듯이 살고
있겠습니까. 이 위대한 드로이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데요.”
“뭐?! 누가 감히! 쓰레기 같은 이단아 주제에 후계자라니! 난 널 내 후계라 인정한 적 없어!”
공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레미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타격음이 복도를 크게 울릴 정도였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지만 제레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뺨을 쓰다듬었다.
“뭐 이것도 한두 번 맞아보는 게 아니라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공작은 한 대 더 때리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손을 휘두른 순간 탁, 제레미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굳은 공작이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너, 지금…… 감히…….”
“아버지 앞으로 이런 손찌검은 자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앙으로 복귀하시면 공작가로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질 텐데 말입니다.”

82 화

후작과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듣진 못했었지만, 중앙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란 말은 정확히 들었다.


제레미는 눈을 홉뜬 공작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공작가의 후계자는 접니다. 그러게 제가 그리 싫으셨음 어디서
창부라도 들여 사생아라도 만들지 그러셨습니까.”
반정 이후 그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죽었다. 원체 몸이 약했던 공작부인은 결국 그의 동생을 낳지 못했다.
그 뒤로 공작가는 무너졌기에 공작과 재혼을 할 귀족 영애도 당연히 없었다.
덕분에 이 역겨운 드로이트 공작가의 후계는 제레미 자신이 유일했다.
“이, 이!!”
공작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짙은 분노로 번들거렸다.
눈빛에는 살기가 넘실거렸지만 처음 당하는 그의 역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작의 손목에 힘을 주었던 제레미는 이내 손을 놓았다.
“허니 공작 각하. 중앙으로 복귀하시는 만큼 앞으론 품위를 지켜주시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남들
앞에서 아버지를 존경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곧 분노로 터질 거 같은 공작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은 제레미는 우아한 자태로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전 잠시 일이 있어 외출하고 오겠습니다.”
등 뒤로 들려오는 노성을 무시하며 제레미는 굳은 얼굴로 공작가를 나섰다.

* * *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이야기는 이걸로 마무리해야겠어.”


로잘린과 이야기를 나눈 난 곧장 피닉스 상단으로 왔다.
루몬트와 향수 사업의 초안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네. 셀린느 후작가에 모레 방문해 바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셀린느 영애는 내게 각별한 사람이니 무례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루몬트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난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집무실을 나가려던 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제드를 떠올렸다.
“아, 근데 제드는 어디 갔어? 안 보이네?”
분명 매일 상단에 출근하고 있다고 했었다.
저녁엔 칼라일이 있는 저택으로 퇴근하고 말이다.
“아, 제드님은 오늘 저녁 약속이 있으시다고 상단에 나오지 않으셨어요.”
“누구랑?”
난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제드가 이곳에서 약속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미간을 살짝 좁히던 루몬트도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도 거기까진 모릅니다. 뭐, 친구분을 만난다고 하셨어요.”
“제국에 친구가 있었구나…… 몰랐네.”
처음 듣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난 루몬트에게 물었다.
“혹시, 제드에게 요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
내 물음에 오히려 루몬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했다.
일전에 이상하게 내 눈을 못 마주치던 제드가 떠올라 물은 것이었다.
그 뒤로 저택에서 한 번 더 보긴 했는데 그날도 묘하게 날 피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루몬트는 아는 게 없어 보였다.
별일 아니겠지.
찝찝하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이내 생각을 접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가족 같은 제드였으니까.
“아냐,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어. 아, 그리고 루몬트.”
“네.”
“칼라일이 다닐 만한 기숙사 아카데미를 알아봐 줘.”
“네…… 네?”
고개를 끄덕이던 루몬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라일 님을…… 아카데미에 보내시려고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제국을 떠날 수 없을 거 같아서.”
시오스 후작이 역심을 품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 이후 계속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두고 제국을
떠날 수가 없을 거 같았다.
그렇다고 칼라일을 공작가로 들이기엔 레이몬드가 걸렸다.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듯했으니까.
거기다 정말 시오스 후작이 반역을 일으키려는 거라면 칼라일을 제국에 두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하여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것이다.
모든 일이 정리될 때까지 칼라일을 아예 제국 밖으로 빼돌리기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떨어져 지내시는 것도 힘드신 듯한데…….”
“칼라일이 무사만 하다면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냐. 그러니…… 보안이 철저하고 선생들이 뛰어난
아카데미를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엘리 님.”
루몬트의 배웅을 받으며 상단을 나오자 하늘엔 붉던 노을이 사라져 가며 남긴 보랏빛이 퍼져 있었다.
“공작가로 돌아갈 것이다.”
마부에게 명하고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난 눈에 띄는 한 남자의 뒷모습에 몸을 멈칫했다.
상단과 멀지 않은 곳 거리에 서 있는 남자였다.
짙은 푸른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는 바로 저 무는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 때문이었다.
제레미……?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마부에게 빠르게 말한 난 이끌리듯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점점 가까워지자 가는 콧소리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용병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니까. 우리 가문의 기사로 취직하면 용병으로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일 수 있어.”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전 용병으로 만족합니다. 영애.”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내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역시 제레미가 맞았어.
“만족하다니, 그런 더럽고 위험한 일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나. 내 그대에게 도움을 받아 보답하고
싶어 이러는 것이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제게 정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면 절 그냥 보내 주시는 것이 보답입니다. 영애.”
영애의 고집에 답하는 제레미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서려 있었다.
꽤 난감한 상황인 듯했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야……. 그대가 날 따르지 않으면 감히 귀족의 물건을 훔쳤다고 그대를
경비대에 고발할 것이네. 이래도 내 기사가 되지 않겠나?”
순간 들려오는 영애의 협박에 발 걸음을 멈칫했다.
포기할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제레미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름 모를 영애는 말도 안 되는 겁박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제레미가 신분이 낮은 용병이라 여기고 억지를 쓰는 거 같았다.
그의 바로 뒤에서 걸음을 멈춘 난 입술을 열었다.
“제레미.”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몸을 돌렸다.
마주친 제레미의 호박색 눈동자가 커졌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놀라는 쪽은 주로 나였는데.
처음으로 뒤바뀐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작은 웃음을 흘린 난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영애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갑작스레 끼어든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린 앳된 얼굴이
보였다.
흔한 갈색 머리칼에 녹빛 눈동자를 가진 영애는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듯 어려 보였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마차를 힐긋 보자 마차 문에 새겨진 귀족가의 문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장은 내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중앙 귀족은 아닌 거 같네.
고위 귀족이었다면 내가 바로 알았을 것이다.
“누구…… 신데 이렇게 갑자기 끼어드시는…… 건가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영애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내 차림새를 훑고는 흐려지던 말끝을
높였다.
내가 입고 있는 망토가 평민의 것처럼 보이진 않아 그런 것이겠지.
난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처음 뵙습니다. 영애 엘리야 크로프트입니다.”
“크로프트…….”
영애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레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분이 저의 친우라 외면할 수가 없었답니다.”
“친우……요?”
“네. 저와 인연이 깊으신 분이시죠. 제레미, 영애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난 영애와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대신 부러 제레미를 이야기에 끌어들였다.
눈앞의 이름 모를 영애만큼이나 굳어 있던 그가 나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답지 않게 딱딱하던 표정을 부드럽게 푼 그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게…… 제가 영애께서 떨어뜨린 물건을 우연히 줍게 되어 돌려드리려 쫓아왔는데 영애께서 제게…….”
“네! 맞습니다! 이분께서 제게 도움을 주셨어요.”
영애는 높은 목소리로 제레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다급함이 가득한 손짓으로 제레미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손가 방을 빼앗듯 가져갔다.
“하하, 저에게 정말 소중한 물건이 들은 가방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꾸벅 제레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했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 시간이 늦어 이만 가봐야 할 거 같네요. 크로프트 영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신사
분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빠르게 말을 내뱉은 영애는 우리의 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마차에 올랐다.
다급하게 문이 닫히더니 마차는 먼지를 휘날리며 빠르게 떠났다.
“이런.”
제레미는 내 앞으로 밀려오는 먼지를 손을 휘저으며 날려버렸다.
“정말 마지막까지 무례한 사람이네.”
눈살을 찡그린 그는 자신을 빤히 보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짜증이 서렸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언뜻 알 수 없는 이채가 호박색 눈동자를 스치는 것 같았다.
어색한 정적을 먼저 깨뜨린 건 나였다.
“제레미,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는데.”
“음, 이번엔 내가 도와준 거 맞죠?”
“네?”
“항상 제레미가 날 도와줬었잖아요. 근데 이번엔 내가 제레미를 난 감한 상황에서 구해준 거예요.
그렇죠?”
어서 긍정해달라고 그를 올려다보자 제레미의 굳어 있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83 화
“그러게요, 하마터면 저 영애에게 끌려갈 뻔했었는데 엘리가 딱 나타나 날 구해줬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는 정말 위험한 순간을 겪은 거처럼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그에겐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건만 모른 척 내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다.
난 그의 능청스러움에 결국 웃음이 나왔다.
“제레미는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원래 잘 안 변하는 법이죠.”
씨익, 입꼬리를 올린 그가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피닉스 상단에 볼일이 있어 들렸어요.”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그는 내 뒤로 있는 상단의 큰 건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
“네?”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판이 열리던 날, 재판장에 왔었죠?”
그의 영롱한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역시 그날 절 봤었군요. 뭐 하긴 제 잘생긴 얼굴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죠.”
그는 자신의 잘생김이 곤란하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었겠지만, 빛나는 외모 때문인지 그는 그저 짓궂어 보일
뿐이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제레미는 정말 잘생겼다.
빛나는 백금발과 보석 같은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부드러운 호감형의 얼굴.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시선을 받을 것이다.
룬트 왕국에서도 내 꽃집에 가끔 들리던 제레미에게 관심을 가지던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제레미가 눈에 띄는 외모긴 하죠. 방금 그 영애도 제레미에게 한눈에 반한 거 같던데요?”
내가 서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하자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설마하니 내가 정말 잘생겼다고 할 줄 몰랐나 보다.
뭐, 딱히 거짓말도 아닌걸.
가끔 사람 같지 않게 수려한 레이몬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를 빤히 보자 제레미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시면 제가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답지 않게 수줍음으로 물든 볼을 보니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음……. 진짜니까요. 나 꽤 심미안 높은 사람이에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요. 제레미는 정말
잘생겼어요.”
한 걸음 다가가며 말하자 제레미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당황했던 건지 그는 발이 꼬일 정도였다.
비틀거리는 그의 팔을 잡아준 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장난쳤다는 걸 눈치챈 제레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놀리신 거군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제레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귀여워서
그랬어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아직 당혹스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그는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는 붉어진 볼을 가리며 나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 놀렸나.
생각보다 그가 더 창피해하는 거 같아 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요. 그날 이후 소식이 없길래 제레미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정이 된 듯 제레미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럴까 했었는데…… 역시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의아함이 들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요. 재판도 잘 마무리되고 요새 들리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평판도 좋던데요?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에요.”
“네, 뭐……. 아직 완전히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요. 그럼 제레미는 이제 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건가요?”
“아마도요. ……왠지 더는 제국을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는 피식 웃었다. 가벼운 웃음 속에서 어두운 씁쓸함이 느껴졌다.
드로이트 공작가.
그가 제국을 떠나 용병 생활을 하며 떠돈 것은 아마 공작가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공작가가 고립되기 전부터 드로이트 공작의 아들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항간에선 드로이트 공자가 죽은 것이 아니냔 소문까지 돌았었다.
결국, 공자가 덜떨어져 공작이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황후 시절 우연히 드로이트 공작과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공작이 눈에 차지 않는 아들을 혹독히 학대했었다는 이야기를.
아마 제레미는 제국을 떠났던 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피해 도망을 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국으로 돌아온다는 건…… 공작의 밑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거다.
“엘리, 괜찮나요?”
그에 대한 상념이 깊어져 표정이 굳은 것 같았다.
제레미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 그보다 제레미, 내일 바쁜가요?”
“내일요?”
“네. 시간 괜찮으면 내일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에 오시겠어요? 내일 공작가에서 저의 귀환을 기념하는
파티가 크게 열리거든요.”
“…….”
갑작스러운 제안에 제레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 가문에 초대장이 갔지만 드로이트에 보내지 않았다.
반정으로 무너진 공작과 반정으로 세워진 공작가.
두 개의 가문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 내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고 있잖아요.”
서로 대놓고 티 낸 적은 없었지만 지난 6 년간 서로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여긴 룬트 왕국이 아니라 에그리타 제국이에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에그리타 제국에선 룬트 왕국에서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요. 하지만 제레미가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것도 알죠.”
순간 나를 보는 그의 눈이 크게 떨렸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그는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늘 능청스러운 여유가 보였던 제레미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초대에 바로 좋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
단지 우리 둘만 생각하기엔 엮인 가문의 관계가 최악이었으니까.
“강요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언제든 와도 좋으니 내 뒤에 딸린 크로프트란 성을 불편하게 여기진 말아요.
난 여전히 제레미의 친구 엘리니까요.”
말이 없는 그에게 싱긋 웃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던 하늘이 어느새 까맣게 바뀐 것이었다.
“난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레미.”
“……조심히 가요, 엘리.”
그는 초대의 답을 결국 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 * *

한동안 어둡게 가라앉았던 크로프트 공작가가 근래 들어 활기차게 들썩이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오늘 성대한 파티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가문이 사라질 뻔했던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였기에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었다.
하인들과 하녀들은 파티장을 완벽히 꾸미기 위해 막바지 작업에 들어 갔고 주방은 파티 음식을 만드는
것에 몰두했다.
그렇게 낮이 훌쩍 지나가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커다란 샹들리에가 파티장의 홀을 밝혔다.
“아가씨. 다 되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난 하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은발이 어깨를 넘어 가슴을 넘실거렸고 오랜만에 진하게 한 화장에 이목구비가
선명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반짝이는 보석들이 촘촘히 박힌 붉은 드레스가 아래로 풍성하게 퍼졌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드레스의 반짝임이 화려하게 빛났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장담컨대 오늘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 바로 아가씨이실 거에요!”
하녀들은 신이 난 얼굴로 연신 찬양 섞인 감탄을 말했다.
평소였다면 과한 사탕발림이라 여겼겠지만, 오늘은 내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하녀들의 말대로 파티장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거 같았다.
난 거울에 비친 붉은 드레스를 보았다.
오늘 한 치장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루몬트가 드레스를 보는 안목도 남다를 줄이야.
화려하게 빛나는 이 드레스는 다름 아닌 루몬트가 보내 준 것이었다.
파티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선물을 보낸다고 했을 땐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목걸이나 팔찌 같은 장신구일 줄 알았으니까.
설마 드레스 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드레스 상자를 받았을 땐 이걸 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포장을 풀고 드레스를 확인한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옷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신인 디자이너라고 했었는데.
이 디자이너를 본격적으로 키워보라 말해야겠다.
피닉스 상단이 아직 손 뻗지 않은 곳이 살롱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거울을 보던 난 마지막으로 화려한 블루다이아 목걸이를 걸쳤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84 화

“아가씨, 집사입니다.”
문을 열어주라 하녀에게 눈짓하자 하녀가 곧장 문을 열어주었다.
집사는 내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파티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성문을 열었고 공작 각하께선 파티장에 이미 내려가 있으십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스름해진 하늘과 공작가로 들어서는 마차의 행렬이 보였다.
이제 파티장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모두 수고했어.”
특별한 날이니만큼 하녀들에게 금화 하나씩을 쥐여 준 난 파티장으로 향했다.
“크로프트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렌타 백작 부인도 잘 지내셨나요.”
난 몇 번째인지도 모를 손님을 맞이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아렌타 백작 부부가 지나가고 난 뒤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크로프트 영애,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렇게 화려한 블루다이아 목걸이는 처음 봅니다.”
“어머나, 파티장이 정말 화려하네요. 이렇게 큰 파티는 오랜만인 거 같아요.”
“샹들리에가 정말 아름다워요.”
나와 파티장에 대한 찬사부터.
“사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영애를 찾아뵙고 싶었는데 갑자기 방문 서신을 보내면 예의가 아닐 거 같아서
망설였답니다.”
“저도 서신이라도 보내고 싶었는데 크로프트 영애께서 일이 많으실 거 같아 망설이고 또 망설였답니다.”
재판 전부터 공작가를 몹시도 걱정했었다는 민망한 아부에 난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상대했다.
서로 의무적으로 나누는 인사치레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내뱉은
감탄사는 거짓이 아니란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장인이 만든 샹들리에와 파티장 내부에 그려진 고대 신들의 명화들.
파티장 곳곳에 놓여있는 장식품들 역시 하나 같이 입이 벌어질 값비싼 장인의 물건들이었다.
귀족이라 하여도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거기다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까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으니 다들 뻣뻣한 목이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나와 인사를 나눈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파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버지를 힐끔 보았다.
다행히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핼쑥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의 실세다운 위엄과 기품을 완전히 되찾으신 듯했다.
“셀린느 후작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심되어 미소를 그리던 난 문지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잘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티장을 둘러보며 내게 다가왔다.
“와……. 영애! 전 순간 제가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제에 온 게 아닌가 착각했어요.”
1 년에 한 번 황실에서 열리는 건 국제 파티.
제국에서 열리는 파티 중 가장 화려한 파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비슷한 거 같기도.
파티 홀만 좀 더 컸더라면 건국제와 비견할 만했다.
“어서 와요. 로잘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잘린은 내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드레스 감사해요. 영애. 그리고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고마워요. 로잘린.”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요. 저기 벽화에 그려진 여신보다 아름다우세요.”
고대 신들이 그려진 여신은 미의 여신이었다.
미의 여신보다 아름답다니.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날 보는 로잘린의 눈동자가 너무도 순수해 웃음이 나왔다.
“로잘린도 여신보다 예뻐요.”
로잘린의 볼이 살짝 붉어지던 그때 도착한 귀족을 알리는 문지기의 목소리가 울렸다.
“……1 황자 전하와 시오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일순 홀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1 황자……?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자 리제나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1 황자가 보였다.
1 황자가 이곳엔 왜.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움찔할 만큼 당황스러웠지만, 얼굴을 굳히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난 굳으려는 표정을 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리제나의 손을 잡고 있는 1 황자, 에드먼드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별이신 1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먼저 예의를 갖추자 황자의 등장에 놀란 귀족들도 하나둘 인사를 올렸다.
“모두 일어나게.”
앳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고개를 들자 리제나가 내게 미소를 그렸다.
“이렇게 성대한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황자 전하와 같이 오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놀라게 해드린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무리 황족이라 할지라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갑작스레 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거기다 오늘 파티는 다름 아닌 나의 귀환파티였다.
사교계의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이유가 리제나와 지금은 1 황자가 된 에드먼드 때문이라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레이몬드와 이혼한 이유에 에드먼드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이몬드를 향한 짝사랑에 지쳤을 뿐더러 무엇보다 칼라일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과 상관없이 소문은 이미 황자의 문제로 레이몬드와 내가 이혼했다고 나 있으니, 1 황자가
나의 귀환파티에 오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일인 것이다.
리제나는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린 그때 황자가 내게 말했다.
“아, 어머니 탓이 아니네. 오늘 어머니께서 파티에 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크로프트 공작이 보고 싶어
내가 따라가고 싶다 조른 거니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황자는 나를 똘망한 검은 눈동자로 올려보았다. 격식을 한껏 갖춘 말투와 달리 뭐라 할까, 다듬어지지
않은 눈빛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1 황자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지만 이제 겨우 12 살인 황자가 크로프트 공작가에 깊은 악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악의적인 뜻이 있다면 그건 리제나겠지.
난 황자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황자 전하께서 와 주신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상처를 입으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전하.”
“아. 난 괜찮네. 황궁의들과 아버지께서 살뜰히 보살펴 주어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아.”
“다행입니다.”
황자는 별 뜻 없이 해맑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말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화려한 파티장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말이다.
황제의 극진한 보살핌.
그 한마디가 귀족들의 관심사를 단번에 돌린 것이다.
황제가 황자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난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황자와 함께 파티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는 리제나와 황자가 온 뒤 그들을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판도를 바꾸려고 일부러 황자를 데리고 온 것이겠지.
난 그녀가 일부러 황자를 데려왔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지 의외인 것은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를 망치자고 황자를 귀족들의 가십거리에 내몰았단 것이다.
황제와 이혼한 황후와 1 황자.
나와 에드먼드는 사교계의 가십에서 멀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다.
허니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았다.
리제나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텐데.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문지기의 떨리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1 황자의 등장에 황제까지 등장하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미소를 그리고 있던 리제나도 나도 순간 얼굴이 굳었다.
설마 레이몬드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에게 분명 과거를 정리하자 말했는데.
난 당황스러웠지만, 파티의 주인으로서 미소를 그리며 레이몬드에게로 다가가 제일 먼저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레이몬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잡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황제가 공작가를 위해 큰 하사품도 내리고 직접 파티장까지 방문을 해 준 것이다.
내가 이 손을 잡는 것이 예의였다.
잠시 망설이던 난 이윽고 그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버지!”
내가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일어남과 동시에 황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에게 고정되었던 그의 시선이 비스듬히 돌아갔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황자를 본 레이몬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치는 대신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마치 이곳에 네가 왜 있냐는 눈빛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황자를 생각했다면 이곳에 오게 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귀족들은 호시탐탐 황실의 가십을 노리고 있었고 황제의 전 부인과 황자의 만남은 그들이 가장 즐거워 할
간식거리였으니까.
리제나는 굶주린 들개들이 가득한 곳에 황자를 먹잇감으로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드먼드. 네가 왜 여기에…….”
레이몬드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리제나를 보았다.
그와 리제나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그들이 어떤 눈빛을 주고받는지 보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 전 그냥 오랜만에 크로프트 공작을 보고 싶어서…….”
황자는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에 겁을 먹은 듯 작게 말했다.
밝았던 황자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레이몬드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면 어른들도 서릿발 같은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어린 황자는
더 무서울 것이다.
점점 움츠러드는 황자의 어깨를 더 볼 수 없어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85 화

나직이 그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이자 그제야 리제나를 빤히 보고 있던 그가 시선을 돌렸다.


감정을 다스리듯 눈을 감았다 뜬 그는 황자에게 시선을 내렸다.
“아직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레이몬드는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가득 느껴지는 손길은 아니었지만 상냥한 손길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칼라일의 얼굴이 떠오르며 기분이 묘해졌다.
황자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앞으로도 다치지 않게 조심할 거예요. 제가 다치면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다고
어머니께서 그러셨으니까요.”
레이몬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는 그런 다정한 말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았다.
“폐하께서 파티에 오실 줄 알았더라면 함께 왔을 텐데 아쉽습니다.”
리제나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헌데 요 며칠 일이 많으셔서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는데 이렇게 파티까지 오셔도 되는지…… 혹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이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마치 나는 보이지 않는 거처럼 황자의 손을 잡고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의 말은 꼭 아내가 남편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진 게 아니었나.
레이몬드를 응시하는 리제나의 녹안에는 애정이 서려 있었다.
문득 레이몬드가 리제나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단지 시오스 후작의 역심을 의심하게 되어서인지 리제나가 레이몬드를 걱정하는 마음이 과연 진심일지
의심이 들었다.
또한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의 저의를 전혀 모르는 것일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게 보였다.
그들에게서 빠지려 한걸음 뒤로 물러나려 한 순간, 레이몬드가 말했다.
“시종들이 쓸데없는 말을 전했군. 내 몸은 시오스 영애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대는 황자에게 더 신경
쓰는 게 좋겠군.”
레이몬드는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싸늘함이 느껴졌다.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리제나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선을 그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당황스러운 듯 리제나의 올라간 입꼬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내 리제나는 매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황자를 이리 신경 써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도 폐하만큼 부족함 없는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리제나는 레이몬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순간에 레이몬드를 황자를 지극히 아끼는 아버지로 둔갑시켰다.
레이몬드가 리제나를 무감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다면, 나도 다른 귀족들처럼
레이몬드의 지극한 부성에 놀라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레이몬드가 리제나에게 한 말은, 황자를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 아니라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임을.
나도 단번에 느낀 걸 똑똑한 리제나가 그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리제나는 다 알면서 일부러 레이몬드의 말뜻을 바꾼 것이다.
그녀가 불리해지지 않도록.
“……그래.”
레이몬드는 리제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지만 무어라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그런 뜻이 아니라 말할 수도 없을 테니까.
내가 떠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리제나와 레이몬드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은 거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때 아버지가 다가왔다.
“황자 전하께서 저를 보기 위해 이리 공작가로 직접 행차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공작가는 처음 오는 것인데 정말 화려하고 크군. 꼭 황궁 같은 느낌이야.”
순수한 눈빛으로 파티장을 보며 감탄한 황자는 아버지에게 말을 이었다.
“다들 공작이 다신 황궁에 오지 못할 것이라 해서 정말 걱정했는데 이렇게 무죄를 받아 기뻐. 난 처음부터
공작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단 걸 믿고 있었어. 공작을 모함한 나쁜 사람들은 분명 큰 벌을 받을 거야.”
황자는 맑게 웃었지만, 어른들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나와 아버지의 얼굴에도 일순 당황이 스쳤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리제나의 부드러운 가면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크로프트 공작가를 위험에 빠뜨린 건 다름 아닌 시오스 후작가였으니, 황자가 말한 큰 벌을 받을 사람은
바로 시오스 후작과 리제나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저리 말하니 그녀도 순간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듯했다.
그때,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 듯 아버지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가문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폐하, 친히 방문해 주셔 감사드립니다. 미리 말씀해 주셨더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송구합니다.”
“내가 갑작스럽게 온 것이니 그대가 송구할 이유는 없지.”
레이몬드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리제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 크로프트 영애라는데 내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나. 크로프트 영애, 제국으로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티장을 잔잔하게 울렸다. 나를 보는 눈빛에 담긴 다정함을 보자 목에 뭐가 걸리는
불편함이 들었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난 그의 시선을 피하듯 시선을 내리뜨리며 말했다.
“엘리야, 더 이상 올 손님이 없는 듯하니 파티를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아버지의 말에 난 파티장의 활짝 열린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 그는 결국 오지 않는 걸까.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레이몬드가 와있으니 오히려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제레미와 레이몬드가 파티장에서 갑작스레 마주쳤다면…….
상상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엘리야, 기다리는 손님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뇨. 아니에요.”
몸을 돌리자 레이몬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었다.
난 그의 눈빛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아버지와 함께 중앙 홀로 걸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모이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제 딸의 귀환을 환영해주기 위해 참석해 주신 모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버지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로프트 공작가에서 오랜만에 열리는 파티이니만큼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샴페인 잔을 높이 들자 음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듣기 좋은 은은한 음악이 파티장을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기다렸다는 듯 황제와 황자에게로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무감각한 얼굴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던 레이몬드는 중간중간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집요한 눈빛이 내 몸을 옭아매는 거 같았다.
수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그의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꼭 이 넓은 공간에 둘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함을 넘어 거북했다.
“난 폐하께 가 보마.”
때마침 아버지가 내게로 몸을 돌리며 레이몬드가 시야에서 가려졌다.
막혔던 숨이 터지는 듯 한결 편해졌다.
“네.”
아버지가 레이몬드에게로 향하고 난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곳으로 향했다.
가벼운 핑거푸드와 디저트가 모여 있는 테이블에 귀족 영애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로잘린도 있었다.
이미 대화가 한창인 듯 그들에게 가까워지자 희미하던 영애들의 말들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중 비스테인 영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고작 며칠 전까지 낡은 드레스를 입고 계시던 셀린느 영애께서 이리 화려
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다니……. 아! 제가 모르는 사이 후작가에 큰 경사라도 생긴 걸까요? 후작 각하께서
큰 공이라도 세우셨다던가…….”
비스테인 영애가 말끝을 흐리자 옆에서 노랑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 아버지가 행정관이시지 않습니까. 북방과 관련된 소식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민족들의 약탈이 심해져 힘들다는 투정 가득한 보고서가 북방에서 들려온 소식의 전부입니다.”
“북방 수비대장께서 투정이라니…….”
“수비대장께서 그러시면 밑에 기사들이 얼마나 힘이 빠질까요…….”
대놓고 셀린느 후작을 모욕하는 말들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분노를 참는 듯한 로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행태를 주시하던 난 얼굴을 굳히며 걸음을 빨리했다.
내가 막 그들의 뒤에서 멈추었을 때 비스테인 영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럼 혹시 셀린느 영애께 드디어 좋은 영식이 생긴 것일까요? 셀린느 후작 각하께서 북방으로
떠나시고 약혼자에게 파혼까지 당하셨었는데…… 좋은 분이 생겼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86 화

“전…….”
로잘린의 말을 막은 비스테인 영애가 말을 이었다.
“셀린느 영애께 이렇게 비싼 드레스를 선물해줄 수 있는 영식이라면 분명 한미한 가문은 아닐 테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영애. 근데…… 제가 미처 셀린느 후작가의 약혼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혹 어느 가문의
영식인가요?”
“저도 들은 게 없는데……. 설마하니 제대로 교제를 하지도 않으시며 이런 큰 선물을 받으신 건
아니시겠죠?”
“설마요, 정식적인 교제도 없이 물질은 받는 건 하찮은 코르티잔들이나 하는 짓이 아닙니까.”
“모르지요. 셀린느 후작가의 사정이 급하니…… 코르티잔이라도 감지덕지했을지요.”
영애들은 역겨운 말을 내뱉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오가나 봅니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신나게 로잘린을 모욕하고 있던 영애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큼, 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영애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내주는 그들을 지나쳐 로잘린의 앞에 섰다.
그녀는 모욕적인 언사에 상처를 받은 듯 창백한 낯빛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물러나면 모든 모욕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개 숙이지 말아요.
시선을 낮추는 로잘린에게 낮게 속삭인 난 그녀의 곁에 섰다.
그리고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는 영애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훑었다.
“왜 다들 말씀을 멈추시나요?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 같아 저도 함께하고 싶어 온 것인데
말입니다.”
난 비스테인 영애의 곁에 선 노란 드레스의 영애에게 물었다.
“멜타인 백작 영애였던가요? 방금 하신 이야기가 무슨 말이기에 다들 웃음이 터지신 것인지 제게도 말씀
해 주시겠어요?”
“…….”
하지만 그녀는 내 눈치를 살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그런 영애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다 나를 도전적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셀린느 후작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로잘린에 대한 이야기라……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네요. 알려주시겠어요?”
비스테인 영애는 못마땅한 눈으로 로잘린을 훑으며 내게 말했다.
“후작가의 사정이 변변치 않은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데,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나타나시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혹시나 귀족 영애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행동을 하고 다니시는 게
아닌지 저어되어 작은 충고를 드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귀족 영애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행동이라…….”
난 말끝을 흐리며 실소했다.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구겨졌다.
난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로잘린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로잘린. 이 드레스, 제가 선물해 준 것이라고 영애들께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내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하니 내가 드레스를 선물로 줬다고는 다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말을 하려 했는데 비스테인 영애께서 제게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로잘린은 시선을 낮추지 않고 똑바로 비스테인 영애를 쳐다보았다.
비스테인 영애에게 주눅 들지 말라는 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된 거 같았다.
난 비스테인 영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당사자인 로잘린에게 답을 듣지도 않고 마음대로 귀족 영애의 품위에 대해 논했다는 거군요.
비스테인 영애, 맞나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묻자, 당당하던 비스테인 영애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답을 듣지 않은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비스테인 영애의 표정이 돌연 바뀌었다.
비스테인 영애는 도움을 청하듯 주변을 영애들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듯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셀린느 영애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며 모욕을 주는 게, 비스테인 영애께서 말한 귀족 영애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인가요?”
“…….”
비스테인 영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셀린느 후작가는 유서 깊고 명망 있는 가문입니다. 작위를 받은 지 몇십 년 되지도 않은 백작가가 모욕할
수 없을 만큼 말이죠.”
비스테인 백작가는 백작 작위를 받은 지 오십 년이 겨우 넘은 반면, 셀린느 후작가는 이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좋지 않다지만, 변경백도 아닌 백작가 따위에게 이따위 모욕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허니 영애께서 셀린느 영애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파티장에서 쫓겨나시게
될 겁니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까요.”
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영애들을 둘러싼 분위기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비스테인 영애의 녹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오늘 이 파티엔 황제와 황자까지 참석했다. 이런 파티장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다면 사교계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 로잘린을 깔보고 모욕주는 것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비스테인 영애, 그녀였으니까.
비스테인 영애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그러쥔 손도 보였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약간의 경고만 줄 생각이었지만 비스테인 영애가 선을 넘어
버렸다.
로잘린을 감히 코르티잔에 비유하다니.
난 차디찬 눈빛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응시했다.
“사과하지 않으시겠다면 지금 바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영애.”
비스테인 영애는 분노로 얼룩진 눈으로 로잘린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호되게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릴 듯했다.
비스테인 영애를 끌어내려 시종들에게 손을 들려 한 찰나 여인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로제인.”
몸을 살짝 돌리자 빠르게 걸어오는 리제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얼굴을 굳혔을 때부터 파티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것은 알고 있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또각또각, 리제나의 구둣발 소리가 비스테인 영애의 앞에서 멈추었다.
“로제인, 셀린느 후작 영애께 어서 사과드리렴.”
리제나가 옆으로 물러서자 비스테인 영애가 로잘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셀린느 영애.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절 용서해 주세요.”
분에 차 몸을 떨었던 방금까지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비스테인 영애는 로잘린에게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딱히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사과에 로잘린은 나를 힐긋 보았다.
여기서 사과를 받지 않으면 로잘린의 평판에 좋을 게 없기에 난 사과를 받으라 눈빛을 주었다.
“네, 비스테인 영애. 다음부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로잘린의 말에 대한 답은 비스테인 영애가 아닌 리제나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가 로제인을 잘 단속하겠습니다. 로제인,
넌 한동안 저택에서 자숙하는 게 좋겠구나. 이만 돌아가렴.”
“네.”
비스테인 영애는 상처를 받은 듯 눈가가 붉어졌지만, 화를 내지도 분에 찬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곤 어두운 얼굴로 순순히 몸을 돌려 파티장을 나갔다.
나의 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뒷모습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가 묘해졌지만 리제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영애들에게 말했다.
“영애들께서도 앞으로 말씀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될
테니까요.”
“네. 시오스 영애.”
영애들은 반성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렇게 리제나는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거처럼 모든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내가 해야 했을 역할들을 전부 그녀가 빼앗은 것이었다.
상당히 어이가 없는 행태였지만 아무도 그녀의 행동에 반발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리제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스테인 영애야 그렇다 쳐도 나를 경계하던 영애들까지 단숨에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묘해졌다.
현 사교계의 권력을 리제나가 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제대로 확인사살을 당하니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리제나의 자리를 흔드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더 단단하게 자신의 성을 쌓아 올린 거 같았다.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리제나는 진중한 얼굴로 내게 입을 열었다.
“크로프트 영애.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그 누구도 셀린느 영애는 물론 크로프트
영애에게도 무례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귀족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마치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듯한 말에 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87 화

“괜찮습니다. 누구나 우매한 실수 한 번쯤은 하고 사는 것이니까요. 부디 이번 일로 비스테인 영애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하다간 큰 화를 피하기 어려우니까요.”
리제나는 마치 자신이 황후인 거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그녀는 황후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누리는 권력의 밑바탕은 리제나가 유력한 황후로 꼽히기에 형성된 것이었다.
허니 그녀의 성을 쉽게 무너뜨릴 순 없겠지만,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리제나는 황후의 자리에 가까울지언정, 황후는 아니었으니까.
난 리제나의 아름다운 녹안을 직시했다. 호랑이 행세를 하는 여우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듯
리제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녹안을 스쳤지만, 순간의 번뜩임은 나만 본 듯했다.
“네. 로제인에게 영애의 말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날이니만큼 즐거운 이야기만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늦었지만 제국으로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영애.”
“고맙습니다.”
“헌데 셀린느 영애와 벌써 이렇게 친해지신 줄 몰랐습니다. 그날 제 티파티에서 처음 마주하셨을 텐데
벌써 선물이 오갈 정도라니 놀랐답니다. 보아하니 마담 마리의 의상실 드레스 같은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역시 드레스가 남달라 보였습니다. 마담 마리의 드레스는 예약조차 어려운 곳인데, 셀린느 영애께서
참으로 큰 선물을 받았군요.”
리제나는 로잘린을 보며 눈을 예쁘게 휘었다.
“아, 네. 크로프트 영애께서 과분한 선물을 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러시겠어요, 크로프트 영애께서 후작가의 힘든 상황을 알고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예.”
리제나는 갑자기 로잘린이 안쓰럽다는 듯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셀린느 후작 부인의 몸 상태도 좋지 않다 들었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게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작은 기부 행사라도 열어볼 테니까요.”
로잘린을 위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후작가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후작가의 힘든 재정을 말하며 로잘린이 값비싼 드레스를 입을 주제가 아니라고 은근히 돌려 말했고, 원치
않는 기부까지 들먹였다.
애초에 귀족들은 절대 기부금을 받지 않았다.
아무리 재정적으로 힘들어져도 대놓고 적선을 바라는 것은 귀족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귀족들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치욕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를 반증하듯 리제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웃음을 흘리는 귀족들이 보였다.
리제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가증스러운 눈빛으로 로잘린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
로잘린은 차마 순진무구해 보이는 표정의 리제나에게 무어라 할 순 없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난 수치심으로 붉어진 로잘린의 얼굴을 보고, 로잘린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리제나의 손을 떼어냈다.
리제나의 시선이 그 손끝을 스쳤다.
“시오스 영애의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을 듯합니다. 셀린느 영애께서는 피닉스 상단과 함께 본격적인 향수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거든요.”
“향수라면…… 치료 효과가 있다는 그 특이한 향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특이한’에서 말끝을 늘인 리제나는 미안하다는 듯 로잘린을 힐긋 보았다.
특이한 향수라 돌려 말했지만 결국 일전에 비스테인 영애가 말한 것과 뜻이 같았다.
치료 효능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것이다.
난 그녀에게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네. 일전에 로잘린의 향수를 알게 되고 너무 신기해 심신안정에 좋은 향수를 만들어달라 부탁했었답니다.
받아서 사용해 보니 무척 좋아 저와 친분이 있는 피닉스 상단주에게 보이게 되었는데…….”
말끝을 흐린 난 주눅 든 로잘린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상단주가 향수를 써 보자마자 너무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답니다. 그리고 어찌나 간곡하게 제게
로잘린을 소개해달라고 매달렸는지……”
힐긋 상황을 살핀 나는 민망한 척을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정말 난감할 지경이었어요. 어쨌든 그렇게 피닉스 상단과 연이 닿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곧장 곳곳에서 반응이 터졌다.
“피닉스 상단주가 매달렸다니…….”
“피닉스 상단이면 대륙에서 유명한 상단이 아닙니까. 그런 상단의 주인이 매달린 것이라면 정말 뛰어난
향수인가 봅니다.”
“치유 효능이 있는 향수라니……. 정말 새롭군요. 거기다 피닉스 상단과 손을 잡았다면…….”
놀란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앞으로 로잘린이 벌어들일 엄청난 돈을 셈하며 군침이 떨어지는 눈빛을
했다.
우리의 앞에 선 리제나는 귀족들의 말이 많아질수록 올라갔던 입꼬리가 일직선으로 굳어갔다.
“셀린느 영애가 만드는 향수에 좋은 효능들까지 있으니, 피닉스 상단을 통해 유통되면 곧 온 대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것이라 상단주가 장담을 하더군요.”
쐐기를 박듯 덧붙이자 리제나의 친절을 가장했던 눈빛이 사라졌다.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서늘한 녹안을 만족스럽게 보던 그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효능이 있는 향수라…… 어떤 효능이 있다는 거지?”
황제의 등장에 주변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홀 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이 상황에 끼어드는 그가 당황스러웠지만 난 자연스럽게 레이몬드를 바라보며 설명을 이었다.
“……불면증과 심신안정, 두통, 가벼운 질병에 도움이 되는 효능입니다.”
“신기하군. 이때까지 그런 향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셀린느 영애.”
레이몬드는 로잘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듯 어깨를 움찔한 로잘린은 황급히 시선을 낮추었다.
“네. 폐하.”
“내 그대의 향수를 한번 써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네?”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잘린뿐만 아니라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모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황제였다.
그가 쓰는 모든 물건은 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이었기에, 작은 손수건 하나조차도 아무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진다니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레이몬드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불면증이 재발해 꽤나 고생하고 있다 보니 효능이 있단 말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말이야. 날 위해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아…… 그게, 아직 제 향수를 제대로 써보신 분은 어머니와 크로프트 영애밖에 없어서….”
“크로프트 영애가 써봤다면 효과를 알고 있겠군.”
로잘린이 크게 대답하고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순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불면증이 재발했다는 그의 말 때문에.
레이몬드에게 불면증은 상당히 오래된 고질병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동안 불면증이 극심해졌었다. 그와 결혼하고 한두 달은 잠을 자지 못하는 그와
함께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인가 레이몬드의 불면증이 사라졌었다. 가끔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날 때도
있었지만, 그의 손을 꽉 잡아주면 금방 진정이 되었었다.
불면증이 다시 재발했다니…….
과거처럼 그의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의 불면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심할 땐 일주일 내내 잠을 한숨도 못 잘 때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다시 심해진 건 아니겠지.
그의 행복을 빌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프거나 불행하길 바란 적도 없었기에 신경이 쓰였다.
로잘린과 마주 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여 난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뿐이었다 하더라도 그를 걱정했던 걸 들키고 싶진 않았으니까.
헌데 레이몬드가 나를 불렀다.
“크로프트 영애. 괜찮았나?”
“네?”
뭐가 괜찮냐는 거지?
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의아하게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잠시 멍해졌던 사이에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고 간 듯했다.
당황스럽던 때 옆에 있던 로잘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제 향수가 효과가 있었는지 물으셨어요.”
놓쳤던 대화의 흐름을 파악한 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아, 답이 늦어 송구합니다. 셀린느 영애의 향수는 효과가 확실히 있습니다.”
물론 황궁의들도 고치지 못했던 레이몬드의 불면증에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딱히 효능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닐 거다.
아마 내가 셀린느 후작 영애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것을 눈치채고 도와주는 것이겠지.
난 레이몬드를 불편한 시선으로 보았다.
돌아왔을 적만 해도 크로프트 공작가를 일으키기 위해 레이몬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 역시
크로프트 공작가를 이용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나를 도와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이용이 아닌 거 같아 불편했다.

88 화

하지만 그렇다고 선을 긋기엔 황제란 권력의 파급효과는 너무도 컸다.


일국의 황제가 쓰는 향수라는 게 알려지면 그 어떤 광고보다 빠르게 로잘린의 향수가 알려질 것이다.
출시하기도 전에 예약을 거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되리란 것도 자명했고.
“크로프트 영애가 그리 말하니 더 믿음이 가는군. 셀린느 영애, 내게도 하나 만들어 주게. 내 값은
제대로 치러줄 테니.”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께 값을 받겠습니까. 받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폐하.”
“그러고 보니……. 셀린느 후작이 북방으로 떠난 지가 꽤 오래되었군. 후작이 어찌 지내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혼잣말하듯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황제의 마음이 셀린느 후작가에 기우는 것을 확실히 들은 귀족들은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그리고 로잘린도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송합니다.”
“내 그동안 충신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었지. 앞으론 그대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어.”
쐐기를 박는 듯한 레이몬드의 말에 이제 로잘린을 낮춰 보는 귀족들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뒤로 물러나 있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누군가의 얼굴엔 환희가, 누군가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치던 그때, 아름다운 왈츠 선율이 파티장을 울렸다.
미묘해졌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지고, 댄스곡에 맞춰 파트너에게 춤을 신청하는 귀족 남성들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파트너와 손을 맞잡은 귀족들이 댄스 플로어로 향하고, 남은 귀부인들과 귀족들은 레이몬드를 힐긋거렸다.
정확히는 레이몬드와 나 그리고 리제나, 우리 세 사람을.
내가 없었다면 당연히 레이몬드와 춤을 출 사람은 리제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은근하게 나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에게 춤 신청을 할지 궁금해하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리제나가 아닌 내게 손을 내밀어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정 관계가 다시 불탈 수 있길
바라는 눈치였다.
원래 남의 집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니.
기대심과 흥미가 뒤섞인 눈빛들을 받고 있자 마치 과거 시오스 후작가의 파티날로 돌아온 거 같았다.
그때의 상황에서 달라진 것이라곤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줬던 제레미가 없는 것뿐이었다.
과거 파티장에서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던 제레미가 떠올라 싱거운 웃음을 머금은 그때 갈색 구두코가
시야에 들어왔다.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곧이어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영애, 제가 감히 춤을 신청해도 될까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와 나른함이 느껴지는 느긋한 말투.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레미.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반가움이, 하지만 곧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게 너무도 제레미다웠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그에게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레이몬드가 있었으니까.
헌데 당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레미의 손이 향하는 곳을 보고 더욱 경악했다.
제레미가 함께 해달라 정중히 손을 내민 사람은 리제나였기 때문에.
리제나에게 왜…….
지금 그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한데 리제나에게 춤 신청이라니.
그가 대체 왜 리제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레이몬드였다.
레이몬드가 제레미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찰나의 상상만으로도 벌써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황제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이곳에 끼어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제레미의 옆얼굴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내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리제나에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는 리제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제레미의 손을 당황스럽게 보던 리제나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누구시죠?”
갑작스레 나타난 백금발의 잘생긴 남자.
리제나의 상냥하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차가웠다.
그럴 만했다. 리제나는 제레미를 알지 못하니, 신분도 알 수 없는 남자가 춤을 청하는 것이 불쾌할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도 갑작스럽게 끼어든 제레미에게 불쾌함을 느낀 듯 눈썹을 매섭게 올렸다.
“춤을 신청하기 전에 신분을 밝히는 것이 먼저일 듯하군.”
레이몬드는 제레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었다.
적대감에 가까운 그의 눈빛에 난 빠르게 불안해졌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와 황제의 만남은 절대 좋은 만남이 아니었으니까.
난 두 사람을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신분을 밝히라는 레이몬드의 말에 제레미는 리제나에게 내민 손을 거두었다.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그는 레이몬드에게 몸을 돌렸다.
“……낯이 익은데. 우리 본 적이 있었던가?”
레이몬드는 가는 눈으로 제레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에 난 흠칫했다.
레이몬드는 제레미가 누군지 몰랐다. 6 년 전 시오스 후작가의 파티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난 것이
전부였는데…… 설마 그때 본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난 제레미가 그의 앞에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게 될 때까진 레이몬드가 제레미에 대해 아예 모르길 바랐다.
제레미가 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이상 언제까지고 신분을 숨길 순 없겠지만, 그가 적어도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완전히 증명 할 수 있을 때 레이몬드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드로이트 공작가를 경멸하다 못해 멸문시켜버릴 기회만 보고 있었으니까.
에그리타 제국의 적통성을 가진 황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기에, 초대 황제와 유일하게 이어진 가문인
드로이트 가문만은 살아남았었다.
드로이트마저 사라져 버리면 에그리타 제국의 근간과 이어지는 끈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하나로 살아남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드로이트의 방패막이 되어주리라곤 아무도 장담하지
않았다.
죽은 황태자를 지지한 드로이트 공작과 황태자의 경멸을 받았던 레이몬드.
대외적인 일들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거란 건 어린아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가 제레미의 신분을 들으면 분명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어떤 명분이라도 붙여 제레미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
그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부른 것인데 오히려 내가 제레미를 위험에 빠뜨린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내가 아는 자라 둘러댈까.
나중에 그의 신분이 밝혀져 내가 난감해진다 해도 지금은 제레미가 레이몬드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드로이트란 이름만 밝히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결정을 내린 내가 입을 열었지만, 제레미가 좀 더 빨랐다.
“그는…….”
“아, 송구합니다. 제가 시오스 영애를 보자 너무 반가워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돼. 지금은 아니야. 제레미.
간절하게 그에게 눈빛을 보낸 순간 제레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레이몬드 앞에 서서 예를 갖추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폐하. 전 드로이트 공작가의, 제레미 드로이트입니다.”
“…….”
제레미의 말이 끝난 순간 주변이 찬물을 끼얹어진 듯 조용해졌다.
드로이트란 이름이 나온 순간 뻣뺏하게 굳어버렸던 난 숨을 크게 들이키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혔다.
“네가 드로이트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의심이 서린 말이었다.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
드로이트 가문의 상징인 짙은 갈색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 역시 처음엔 제레미가 드로이트 공자일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었으니까.
“네. 폐하. 비록 드로이트 가문의 상징을 타고나진 못했으나 전 드로이트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맞습니다.”
제레미는 고개를 숙이며 묵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레이몬드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모두들 숨조차 쉽게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큰 사달이 벌어질 거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내가 나서려던 그때 제레미를 보던 레이몬드의 검은 눈에 알
수 없는 이채가 스쳤다.
잠시 커진 눈으로 제레미를 보던 그는 갑자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검은 눈빛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의 번뜩임에 난 그에게 다 가가려 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날 저렇게 보는 거지.
아주 잠깐 나를 보던 그는 곧 제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로이트 공자라…….”
“네. 폐하.”
“그러고 보니 드로이트 공작에게 자식이 하나 있긴 했었지.”
“폐하의 은덕에 하루하루 감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은덕? 하. 드로이트 가문이 내 은덕을 받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소리다.”
레이몬드는 대놓고 비소를 머금었다.
“전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멸문당함이 마땅했던 저희 가문을 살려주신 것이 바로 폐하가
아니십니까. 허니 제가 이렇게 살아남은 건 폐하의 은덕입니다.”

89 화
제레미는 차분히 답했다.
“은덕이라…… 그래. 그리 생각해 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거 같군. 드로이트를 생각하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거든.”
이윽고 레이몬드는 비웃음마저 사라진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헌데 내가 살려준 건 드로이트의 목숨뿐인데, 지금 보니 조용히 목숨 줄만 연명하는 자로 보이진
않는구나.”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먹잇감의 목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의 선명한 살기에 귀족들은 황급히 시선을 낮추었다.
행여라도 이 상황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파티장의 공기에 음악단의 연주마저 멈출 정도였다.
그리고 나 역시 심상치 않은 레이몬드의 분위기에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내가 초대한 것이라 말을 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황후였더라면 상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레이몬드의 분노를 막아보려 노력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명분이
없었다.
일개 귀족 영애가 황제의 앞을 막아서면 즉결 처분이다.
난 불안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레미를 보았다.
레이몬드가 기사들을 부를까 봐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하지만 좋은 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선 안 되겠지. 일어나게, 드로이트 공자.”
난 놀란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레이몬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레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피식, 알 수 없는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숨 막힐 듯한 살기를 내뿜던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지.
다른 가문도 아닌 드로이트 공작이었기에 그가 쉽게 분노를 잠재운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음악이 멈추었군. 파티의 분위기를 망쳐 미안하네. 크로프트 영애.”
레이몬드가 내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난 음악단에 다시 연주를 시작하라 눈짓했다. 파티장에 다시 부드러운 왈츠곡이 울려 퍼지고,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긴장감으로 한껏 조여들었던 귀족들의 얼굴도 퍼졌다.
난 어느새 일어난 제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몬드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을 그가 걱정되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지 않을까, 염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지만 제레미는 내 걱정과 달리 괜찮아 보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 담담했다. 고개를 든 제레미는 순간 눈이 마주친 나에게
미소를 보였다.
미소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에 걱정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난 그에게 눈을 흘겼다.
황제의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정체를 이렇게 밝히다니.
분명 내가 하지 말라 간청하는 것을 보았으면서 말이다.
“한데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가 왜 시오스 영애에게 춤 신청을 한 거지? 두 사람 아는 사이였나?”
레이몬드의 물음에 우리의 짧은 시선 교환은 끝이 났다.
“그럴 리가요, 폐하. 전 오늘 드로이트 공자를 처음 봅니다.”
리제나가 즉각 답했다. 온화한 가면도 벗어던진 굳은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난 드로이트 공작가이니 엮이는 것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근데 제레미는 대체 왜 리제나에게 다가간 것이지.
리제나가 드로이트 공자의 춤 신청을 받아줄 리 만무하다는 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제 아버지와 시오스 후작의 교류가 잦아져, 저도 시오스 영애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제레미는 리제나를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주끼리 가깝게 지내고 계시니 장차 가문을 이끌 사람들도 안면을 터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가깝게 지낸다고……?
예상치 못한 조합에 놀라 내 표정이 굳었고 레이몬드의 눈썹 끝이 사납게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리제나는 흡사 충격을 받은 거처럼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아버지께서 드로이트 공작가와 무슨 연이 있단…….”
제레미는 리제나의 말을 끊으며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며칠 전 드로이트 공작가를 방문하시고 떨어뜨리신 회중시계랍니다. 영애.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길래 중요한 물건인 듯하여 오늘 챙겨왔답니다.”
영애께 전해드리려고요.
제레미가 친절을 베푼다는 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회중시계.
그 확실한 증거에 리제나는 제레미의 말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만났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든, 몰랐든 말이다.
특유의 상냥한 분위기마저 사라진 리제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제레미가 내민 회중시계를 받아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만…… 일단 아버지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해라……. 저와 함께 춤을 추시며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전 영애와 친해지고 싶거든요.”
리제나는 냉랭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런 눈빛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리제나는 제레미의 도발에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침묵을 지키며 그를 보던 그녀는 이윽고 짙은 미소를
그렸다.
“공자께서 이렇게 간청하시니 한 번쯤은 나쁘지 않겠죠.”
레이몬드가 지켜보고 있기에 끝까지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리제나는 무슨 생각인지 제레미의 청을
받아들였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제레미와 리제나가 정말 함께 춤을 추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를 스치며 미소를 지은 제레미는 리제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영광입니다. 영애.”
이윽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왈츠 곡이 울려 퍼지는 댄스 플로어엔 많은 커플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제레미와 리제나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부드러운 리드에 리제나가 턴을 하고 제레미의 손을 잡았다.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춤만 추던 상황을 먼저 깨뜨린 건 리제나였다.
그녀는 제레미를 올려보며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병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니신 것치곤 상당히 춤을 잘 추시는군요.”
리제나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제레미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그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순진함을 가장한 리제나를 보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가 오해를 한 것이 아니군요.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감춘 저의 과거에 대해 이리 아는 것이
많으신 걸 보니 말입니다.”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의 비밀스러운 만남.
처음 듣는 척, 모른 척했지만 리제나는 전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에서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는 그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정말 몰랐다면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을 가진 그의 과거를 굳이 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그를 본 시오스 후작이 자신의 과거를 캐 본 것이겠지.
“시오스 가문의 정보력이 참으로 뛰어난가 봅니다. 후작과 제가 만난 지 겨우 하루 남짓 되었건만 이렇게
저의 과거를 알아내셨다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리제나는 제레미를 보며 피식, 싱겁게 웃었다.
“그렇게 뛰어난 시오스 가문의 정보력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어디 영식의 과거뿐일까요. 내일
당장이라도 제국의 귀족 명부에서 드로이트란 이름을 없애 버릴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답니다.”
“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무섭습니다. 영애.”
제레미는 리제나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무섭다는 말과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호박색 눈은 여유롭다 못해 장난기마저 스며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모양새였다.
“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공자.”
리제나는 섬뜩하게 녹안을 번뜩였다.
선명하게 닿아오는 진득한 살기에 제레미의 능글맞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리제나는 예쁘게 눈을 휘었다.
“물론, 그런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아야겠죠. 공자께서 절 먼저 건들지 않는다면 그런 무서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건드렸다니, 누가 들으면 꼭 제가 시오스 영애에게 적대심이 있다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아니었나요? 절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았는데요.”
“곤란하게 하다뇨, 서운합니다. 영애. 전 정말 시오스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 다가간 것이랍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초대받은 적도 없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었겠습니까.”
제레미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거처럼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말했다.
“영애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크로프트 공작가는 제게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이런 곳에 몰래
숨어든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니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시오스 리제나 영애.”
풀네임을 부르는 제레미의 목소리는 퍽 애달프기까지 했다.
조금만 어리숙했더라면 그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제나는 어리숙하기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비소를 머금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90 화

순간 그를 밀쳐낸 힘은 통증이 느껴질 만큼 강했다.


“공자, 무슨 이유로 내게 접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더 날 자극한다면 그땐…… 소리 소문도
없이 당신의 목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리제나는 행복에 겨운 듯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살벌한 경고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더 무서운 여자네.
용병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목을 날리겠다고 말하는 여자는
난생처음이었다.
언젠가 산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독초를 닮은 여자다.
그는 피식, 싱겁게 웃으며 답했다.
“명심하죠. 영애.”
서로를 향한 가짜 미소가 짙어지던 그때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리제나는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크로프트 영애. 정말 죄송합니다.”
멍청한 영애 하나가 바보처럼 엘리야에게 부딪힌 듯했다. 그 덕에 엘리야의 드레스의 하단이 젖은 것이
보였다.
일부러는 아닌 듯 사색이 된 얼굴로 사과를 하는 영애가 보였다.
바보 같은 영애의 얼굴이 어떻든 리제나는 그 작은 소란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엘리야의 붉은 드레스 위로 번진 더러운 얼룩이 꽤나 마음에 들었으니까.
더렵혀진 드레스처럼 고고한 네 인생도 진창이 되면 좋으련만.
뭐, 곧 그리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위험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리던 리제나는 제레미를 보고 순간 올라가던 입꼬리를 멈추었다.
왜, 이런 눈빛이지.
시종일관 속을 알 수 없는 능글맞은 눈빛을 하고 있더니, 지금은 집요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제나는 제레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을 보고 눈썹을 세웠다.
……엘리야 크로프트.
능청스러움이 사라진 눈빛으로 그가 보고 있던 사람은 바로 엘리야였다.
엘리야 크로프트와 제레미 드로이트.
두 사람에겐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레미의 눈빛은 엘리야를 모르는 눈빛 같지 않았다.
뭘까.
리제나의 녹안에 흥미로운 이채가 스친 그때 제레미가 시선을 내렸다.
“크로프트 영애가 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그렇게 눈을 못 떼시는 걸 보니.”
“오늘 파티장에 참석한 남자들 중 크로프트 영애가 마음에 차지 않는 남자는 없을 거 같은데요.”
제레미는 전혀 당황하지 않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리제나는 그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을 틀어 올린
엘리야는 그녀가 보아도 아름다웠으니까.
그리고 그런 엘리야를 힐긋거리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
리제나는 제레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의 능청스러운 얼굴에선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순 없었다.
그렇게 제레미는 춤이 다 끝날 때까지 엘리야가 있는 쪽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함께 해 영광이었습니다. 시오스 영애.”
제레미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예의를 차리는 유려한 모습과 다정한 호박색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왔지만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경고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녀의 편이 될 거 같지도 않은 남자.
그를 보던 리제나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저도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매끄럽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은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리제나는 제레미가 허리를 채 다 들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어찌나 냉랭하게 떠나는지 제레미의 얼굴에 찬바람이 스칠 정도였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춤을 췄던 건 그의 망상인 것처럼 리제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차가움에 당황한 주변의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제레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겁게 웃었을 뿐이다.
어차피 그도 그녀도 다정한 척,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리제나가 조금도 그와 더 있기 싫다는 듯 빠르게 떠날 만큼 그 역시 그녀와 닿았던 모든 곳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
위험한 여자이긴 했지만, 그 이유 하나뿐이라기엔 그는 리제나가 격렬하게 싫었다.
완벽한 가면 아래 속내를 숨긴 리제나는 짜증 날만큼 그와 비슷했으니까.
동족 혐오인가.
자조 섞인 웃음을 머금은 그는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며 댄스 플로어를 떠났다.

* * *

“머리 정리는 이 정도면 될 거 같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 난 멈추지 않는 하녀들의 손을 물렸다.
“드레스가 너무 예뻤는데 아쉬워요. 그 영애 아가씨가 질투 나서 일부러 샴페인을 쏟은 게 분명해요.”
분하다는 듯 말하는 하녀는 앳된 얼굴을 가진 셀라였다.
그녀는 공작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하녀였다. 하여 미숙한 점이 많았지만, 그 미숙함이
나름 귀여워 전속 하녀로 들인 아이였다.
셀라의 거침없는 말에 하녀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난 내 눈치를 살피는 하녀들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영애는 정말 실수로 잔을 떨어뜨린 거였어. 그러니 그렇게 분해하지 말렴.”
일부러 내게 샴페인을 쏟았더라면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드레스가 젖은 건 정말 불의의 사고였다.
애초에 영애에게 먼저 부딪힌 것도 나였으니까.
이게 다 레이몬드 때문이었지.
리제나와 제레미가 춤을 추러 떠나고 레이몬드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그가 내게 다가왔었다.

<i>‘드로이트 공자. 6 년 전 시오스 후작가에서 너와 춤췄던 그 남자더군.’</i>


그는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난 제레미를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놀라 뒷걸음질 쳤고, 결국 다가오던 영애와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드레스 자락이 젖어 들었지만 너무 놀라 움직일 생각도 못했었다.
설마 레이몬드가 제레미를 기억할 줄 상상도 못 했으니까.
6 년 전 짧은 만남이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기억할 만큼 제레미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놀란 나를 집요한 눈빛으로 보던 레이몬드를 떠올리자 난감해졌다.
아직 파티장에 있겠지.
제레미와의 관계를 알아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으니 아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상관이냐고 선을 그어버리기엔 크로프트와 드로이트란 가문의 무게가 무거웠다.
사적인 모든 것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황제로서 자신의 오른팔인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가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와 엮인 건 거슬리는 문제였으니까.
거기다 오늘 제레미의 등장은 아마 레이몬드의 신경을 긁어놓았을 것이다.
갑작스레 파티장에 등장한 제레미와, 제레미를 기억하는 레이몬드까지. 전부 내 예상을 벗어난
일들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차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시기가 좀 앞당겨지긴 했지만…… 레이몬드에게 제레미가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말해야 할
듯했다.
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수고했어.”
젖어버린 붉은 드레스를 아쉬운 눈빛으로 보는 하녀들에게 미소를 지은 난 서둘러 방을 나갔다.
본 저택을 나와 파티가 열리는 별 관으로 향하던 난 별관에서 나오는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제레미.”
나를 등지고 빠르게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가 몸을 돌렸다.
제레미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누군가 우리를 볼까 염려하는 거 같았다.
“걱정 마요. 아무도 없으니까.”
그제야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그는 파티장에서
소란을 벌인 게 미안한 듯했다.
그의 신분을 모르고 초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황제의 앞으로 끼어들라 한 적은 없었으니까.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난 파티의 주최자로 소란을 벌인 것에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다.
대신 걱정이 되었지.
난 그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레미, 무모했어요. 아까 폐하께서 그냥 넘어가시지 않았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에 난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제레미가 용병 일을 하며 위험한 일을 맡는 걸 종종 보았었다. 가끔은 좀 무모하다 싶은 일을 맡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걱정하면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 말라 했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었다.
그래서 나중엔 능청스럽게 자신만만해 하는 그를 믿고 웃으며 기다렸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 그가 보인 무모함은 이때까지와의 위험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레이몬드는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제레미가 베어 버릴 수 있는 몬스터와 적이 아니었다.
그는 일국의 황제였다. 귀족 하나 죽이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드로이트의 목숨줄은 이미
레이몬드가 쥐고 있었다.
“걱정했군요.”

91 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난 화가 나 되물었다. 그가 잘못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었는데 제레미는 뭐가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제레미,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난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가 이 상황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아 정색하자 그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해요. 엘리의 걱정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좋…… 아니, 음. 앞으로 걱정 안
끼칠게요.”
뭐라 다른 말을 하려 한 거 같은데.
제레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게 농담 같진 않았다.
“근데 대체 왜 그렇게 등장한 거에요? 혹시 제시간에 왔었는데 폐하를 보고 들어오지 못했던 건가요?”
“그럴 리가요. 황제 폐하를 피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극적인 등장을 하진 않았겠죠.”
제레미의 말이 맞았다. 황제를 피하고 싶었다면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신분을 밝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몰래 들어온 거예요. 난 당당히 가문을 밝히고 들어오라 초대장을 준 거였어요.”
“날 생각해 주는 엘리의 마음 잘 알아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엘리가 준 초대장을 가지고 당당히
들어가겠어요. 난 드로이트에요.”
드로이트의 이름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
“드로이트란 이름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가 엘리의 곁에 붙을 순 없죠.”
내가 그를 염려하는 만큼 그도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내 도움을 받아도 되잖아.
룬트 왕국에서 수없이 도움을 줬으면서.
난 그가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를 먼저 배려하는 그의 마음이 과거의
나를 닮은 거 같아서.
“그럼 차라리 오지 말죠. 아니, 왔어도 돌아갔어야죠. 왜 위험하게 폐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음……. 그게, 사실은 오늘 파티에 온 건 시오스 영애 때문이었어요. 엘리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시오스 영애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이 파티장뿐이더라고요.”
“시오스 영애……에게 왜 접근해야 했죠?”
“시오스 후작 때문에요. 파티장에서도 말했지만, 후작이 내 아버지를 만나러 공작가에 왔어요. 두 분이
뭘 하시려는 거 같은데…… 왠지 그게 위험한 일 같아서요.”
“…….”
“그래서 시오스 영애에게 후작의 시계를 주며 조용히 경고하려 한 것이었는데 폐하께서 오신 거죠. 그리고
어찌 보니…… 신분을 밝히게 돼 버렸네요.”
하하, 나도 내가 왜 그런 충동적인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똑똑한 제레미가 어쩌다 보니 신분을 밝히게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돌아가길 기다렸다가 리제나에게 접근해도 됐을 텐데.
그의 말이 납득되지 않아 미간을 좁히자,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시오스 후작과 닮은 영애가 황제 폐하 앞에서 고상을 떠는 걸 보니 순간 속이 뒤틀렸달까요,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나서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저답지 않은 짓을 해 버렸죠.”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후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충동적이었나.
뭔가 찝찝하긴 했지만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진 않았다.
설마, 날 도와주려 그런 건…… 가.
제레미가 나선 덕분에 파티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었다.
사교계를 이끄는 여왕 행세를 하던 리제나는 한순간에 드로이트 공작과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생겼다.
거기에 나와 레이몬드와의 삼각관계에 관한 관심까지도 사라졌다.
분명 그 덕분에 리제나를 단번에 밀어내긴 했었지만……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그와 친구이기는 하나 목숨을 걸 만큼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 아니겠지.
난 너무 멀리 간 상상이라 여기며 생각을 접었다.
애초에 파티장에 온 것도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고 했었으니까.
그의 시선은 리제나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레미는 후회스러운 기억을 떨치듯 머리를 흔들고는 한결 시원해진 얼굴로 말했다.
“본의 아니게 엘리에게 걱정을 끼친 것도, 소란을 피운 것도 미안해요. 엘리 말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오스 후작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버렸나 봐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뭐…… 결과적으로 내게 나쁜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죠.”
“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한데……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났다고 한 일, 내게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
제레미가 걱정되어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뭐가 궁금한가요?”
“시오스 후작이 공작을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만남이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야 시오스 후작이 속내를 더 확실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 번 만난 게 아니에요.”
제레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공작가를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손을 잡았다 생각하는 건 억측이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는 평범한 공작가가 아니었다.
현 황제에게 가장 큰 원한이 있는 가문이자 황제에게 버려진 가문이었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드로이트란 이름을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황제 때문이었다.
죽은 황태자를 지지했던 드로이트 공작. 그가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그의 존재가 반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여 그 어느 가문도 드로이트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데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 것이다. 재상이자 황자의 외척인 그가 말이다.
드로이트를 가장 멀리해야 할 그가 안부를 묻자고 공작가를 방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드로이트 공작가에 갑자기 황제의 명이 떨어진 것도 없었다.
재상으로서도, 황가의 외척으로서도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애초에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났다는 소문조차 없었지.
비밀스럽게 만났다는 건 나눠야 할 이야기의 사안이 가볍지 않다는 뜻.
시오스 후작은 정말 반역을 도모하려는 건가.
난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만약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반역을 도모하는 거라면 제레미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레미를 믿지만, 반역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드로이트 공작과 뜻을 함께 하게 된다면…… 우린…….
“엘리.”
“……네.”
“난 친구를 배신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분명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요. 아직 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말하지 못할 뿐, 엘리에게 숨길 생각은 결단코 없어요.”
내 의심을 느꼈던 건가.
그의 나직한 말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빛이 흔들렸지만 나를 보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늘 능청스러운 얼굴로 속을 숨기는 그였다. 어쩌면 아직도 그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있었다.
옅은 미소를 그린 난 말했다.
“미안해요. 순간 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네요. 난 제레미를 믿어요.”
“믿는다는 그 말, 왠지 듣기 좋네요.”
제레미의 눈빛에 장난기가 스몄다.
“드로이트 공자.”
금세 또 장난이냐고 내가 입술을 열려 하던 찰나, 갑자기 서늘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익숙한 목소리에 난 표정을 굳혔다.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바람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듯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곁에서 발이 멈추었을 때, 제레미와 난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
내 앞에서 멈춘 남자는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밤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 눈동자가 제레미를 응시했다.
“춤이 끝나자마자 급히 나가기에 바쁜 일이 있는 것인가 했는데.”
레이몬드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바쁜 일이 이거였나 보군.”
나와 제레미를 번갈아 보는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언뜻 비틀린 실소가 들린 것도 같았다.

<i>‘드로이트 공자. 6 년 전 시오스 후작가에서 너와 춤췄던 그 남자더군.’</i>

레이몬드는 제레미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거까지 보았으니 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잖아.
내가 그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는 거다.
하지만 당당히 제레미와 친구라 말하려던 나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제레미의 말이 더 빨랐기 때문에.
“크로프트 영애께 사과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과?”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레이몬드의 눈썹이 위로 올랐다.
“초대받지도 못한 제가 파티장에 마음대로 들어와 소란을 피웠지 않습니까. 그 무례함을 용서해달라
염치없는 사과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초대받지 못했다라…….”
레이몬드는 느른하게 말끝을 늘렸다. 언뜻 보기엔 그저 무료해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레이몬드를 잘 아는 난 달랐다.
레이몬드는 지금 몹시 심기가 뒤틀린 상태였다.

92 화

그의 입가엔 미소가 서려 있었지만 눈빛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으니까.


지금 와서 제레미를 벌하진 않겠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살짝 불안해지던 찰나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네. 전 초대받지 못했던 손님입니다. 멋대로 들어와 파티장에서 소란을 피운 것에 다시 사과드립니다.”
제레미는 딱딱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가 나와 제레미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그는 혹시라도 내가 황제에게 곤란해질까
선을 긋는 거 같았다.
제레미는 미련 없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대를 기억해 두지.”
순간 레이몬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선명한 적의가 드러난 매서운 눈빛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시선을 낮출 법하건만 제레미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 레이몬드의 기운이 더 사나워지고 흉흉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싼 순간, 제레미가 물러났다.
시선을 낮춘 그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무겁게 답한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제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시야가 가로막혔다.
고개를 들자 내 앞을 막아선 레이몬드가 보였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 참이지?”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신가요.”
나는 일부러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드로이트 공자, 정말 몰래 온 건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었다.
스치는 감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했다.
“아뇨. 제가 초대했어요.”
“역시, 6 년 전 그 남자가 맞았군.”
“네. 맞아요. 6 년 전부터 우연히 연이 닿아 지금까지 좋은 친우로 지내고 있어요.”
“하, 친우라.”
그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다른 가문도 아닌 드로이트다. 엘리야. 애초에 저자가 너에게 접근한 저의가 무엇일 줄 알고 친우로
지낸단 말이지?”
“제레미는 드로이트지만, 드로이트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에요.”
“외양이 다르다고 속까지 다를까. 드로이트에서 어쩌다 그런 돌연변이가 나왔는지 몰라도 그자는 뼛속까지
썩은 폐황의 충신 드로이트다!”
그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드로이트의 상징인 흑빛이 없는 제레미.
돌연변이란 말이 거슬렸지만 레이몬드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드로이트는 폐황이 된 선황과 가장 가까웠던 충신이었기에 드로이트란 이름만 들어도 지독한 과거가
떠오를 것이다.
제레미가 제국에서 자리 잡는 것을 돕겠다고 생각했을 때, 레이몬드를 한 번에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폐하. 저 역시 드로이트 공작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폐황의 폭정에 드로이트 공작 역시
함께였으니까요.”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들릴 수 있도록 차분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정말 다른 사람입니다. 애초에 그는 드로이트 공작에게 사랑받고 자라지도 못한…….”
“듣기 싫다.”
레이몬드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
“내 앞에서 그자를 옹호하지 마.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다시는 드로이트와 엮이지 마. 너에게 도움 될
거 없는 자이니.”
“명령이십니까.”
“명령이라……. 하면 들을 건가.”
“명령이시라면…… 미리 벌을 받겠습니다. 불복하게 될 테니까요.”
“하.”
단말의 조소를 내뱉은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럼 이건 어때. 네가 그 자식을 가까이하면 난 드로이트란 성을 가진 자들의 목을 벨 것이다.”
“폐하!”
끔찍한 말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허니 그자와 더 이상 엮이지 마.”
레이몬드의 검은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제레미를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진심인 것이다. 난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폐하라고 하신들, 한낱 귀족 영애의 사적인 부분까지 통제하실 수는 없습니다.”
“난 지금 황제로서 크로프트 영애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엘리야 널 걱정하는 거다. 드로이트는 너무
위험해.”
“걱정이라면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황제의 충신으로서 드로이트를 경계하라 하시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사사로이 제게 관심을 두시는 것은 불편할 뿐입니다. 정 드로이트 공자와 제가 언짢으시면
외면하시면 될 일입니다.”
“내가 널 어떻게 외면해. 난 널……!”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말을 멈추었다.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괴로운
얼굴이었다.
난 그런 레이몬드를 무감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왜 못 하시나요. 폐하께서 가장 잘하시는 게 절 외면하는 거 아니었나요?”
난 실소를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무례함을 저질렀음에도 레이몬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딱히 듣고 싶지 않았다.
난 이미 일전에 그에게 선을 그었다.
그가 어떤 답을 내렸든 이제 나완 상관없는 것이다.
말이 없는 그에게 내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합당한 이유 없이 드로이트 공자를 죽이신다면 전 더 이상 폐하의 충신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허니 부디 현명한 결정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내게 협박을 하는 거냐.”
검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부탁일 뿐입니다.”
“부탁…….”
“그럼 전 이만 파티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폐하.”
난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자리를 떠났다.

* * *

레이몬드는 멀어지는 엘리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야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간신히 시선을 거둔 그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i>‘왜 못하시나요. 폐하께서 가장 잘하시는 게 절 외면하시는 거 아니었나요?’</i>

“하.”
누구를 향한 분노일지 모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엘리야를 외면하고 살았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관심과 방임으로 그녀를 내버려 뒀다. 마음의
상처가 곪고 곪을 때까지.
그래서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어쭙잖은 변명을 내뱉기엔 상처가 얼마나 깊을지 감히 가능 할 수도 없었으니까.
“……너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아니 용서받을 수 있을까.
과거를 돌이켜 볼수록 남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후회뿐이었다.
누군가를 홀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애달프고 힘들다는 걸 몰랐었다.
이 괴로운 짝사랑을 엘리야는 몇 년이나 혼자 견딘 것이다.
그는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었다.
“……네가 정 날 떠나길 원한다면…….”
놓아 주어야겠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는 말이었지만 레이몬드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삶을 사는 듯했고 그런 그녀에게 매달리는 건 발목을 붙잡는 쓰레기 짓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레이몬드는 드로이트 공자를 떠올렸다.
도저히 드로이트라곤 상상할 수 없는 외양을 가진 남자.
굳이 따지자면 흑표범이 아니라 사자 같은 모습이었지.
드로이트는 초대황제와 함께 에그리타 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신의 경지에 오른 마검사였던 황제의 피를 머금어, 황족의 상징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황가의 상징를 받음으로써 드로이트는 가장 빛나는 명예를 얻고, 황실은 배신하지 않을 가신을 아래 두는
계약이었다.
그리고 그 계약은 오랜 세월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폐황의 치세까지만 해도 드로이트는 완벽한 황실의 개였으니까.
레이몬드가 황좌에 앉지만 않았다면 드로이트와 황실의 관계는 굳건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반정으로 모든 게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 드로이트 공자가 돌연변이라…….
마치 황가와 드로이트의 계약이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황족의 상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이 공자를 필사적으로 숨긴 이유가 이것이겠지.
드로이트에게 황가의 상징은 절대 놓칠 수 없는 명예였다. 아니 지금은 그들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그 지시
바로 그 명예 때문에 그가 드로이트 가문을 살려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따위 명예는 황제인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드로이트 공작가를 폐황과 엮은 사건 하나쯤을 만들어 멸문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건…….

<i>‘폐하께서 합당한 이유 없이 드로이트 공자를 죽이신다면 전 더 이상 폐하의 충신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i>

드로이트 공자를 감싸는 그녀의 눈빛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기다 엘리야를 보았던 드로이트 공자의 눈빛.
엘리야를 모르는 척했었지만 그의 시선은 엘리야에게 닿아 있었다.
그 호박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절대 친구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거보다 더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것이다.
허니 내가 그를 죽이면 넌 날 다시 보지 않겠지.
감정이 선명히 드러났던 호박색 눈동자를 떠올리면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93 화

파티장에서 조용히 물러난 것도 엘리야 때문이었다.


당당히 드로이트란 신분을 밝혔을 때 당장 그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엘리야의 눈빛 때문에 참았다.
엘리야가 혹시라도 그가 잘못될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6 년…….”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그가 알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엘리야는 심성이 착했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했다.
단순한 인연으로 드로이트 공자를 친우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질투가 난다 해도 엘리야의 사적인 관계를 막을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그렇다고 드로이트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깊이 좁혔다.
그가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라 해도 그는 드로이트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거기다 드로이트 공작은 시오스 후작과 접촉을 하였지.
제레미가 리제나에게 건냈던 회중시계. 그 회중시계에 새겨진 금빛 여우의 문양은 분명 시오스 가문의
것이었다.
시오스 후작이 역심을 품은 게 아니냐 의심받고 있는 지금, 드로이트 공자는 엘리야에게 너무도 위험했다.
자신처럼 스스로 아비를 베어버린다면 모를까, 그 혈연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정말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는 물론 이고 충신인 크로프트 공작가도 적의
칼끝에 서게 될 것이다.
엘리야에게 평생 해 준 게 없는데, 목숨까지 위험하게 할 순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히 정리되고 난 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놈의 선택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겠군.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기사들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

* * *
햇살 좋은 정오의 시간.
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 앞 정원을 뛰어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칼라일!”
큰 소리로 부르자 강아지와 함께 뛰놀던 칼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에 칼라일이 신이 나 달려와 안겼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며
미소 지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가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요.”
칼라일은 품 안에 더욱 파고들었다. 늦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들렸었는데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오지
못했었다.
파티를 준비하느라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아침부터 바로 온 것이지만,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던 것이 힘들었는지 칼라일이 어리광을
부렸다.
품 안에서 얼굴을 비비는 칼라일을 꼭 안고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행복하게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나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칼라일을 꼭 안아준 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칼라일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았다.
마도구로 눈동자 색을 바꾸어 진짜 눈동자 색은 아니었지만 나와 똑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예뻤다.
“칼라일, 오늘 칼라일을 만나러 온 깜짝 손님이 있어.”
“깜짝 손님이요?”
칼라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은 난 마차로 몸을
돌렸다.
“아버지.”
내가 나직이 부르자 마차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마차에서 내렸다.
한껏 긴장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칼라일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 그리고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름만 알려줬을 뿐 아버지가 칼라일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그리움과 그 이상의 감정이 얼룩진 눈빛으로 칼라일을 응시했다.
“엄마랑 똑같은 색이다…….”
자신을 빤히 보는 아버지를 같이 마주 보던 칼라일이 나직이 말했다.
나와 똑같은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가 신기한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이 벅차 마음이 울컥하던 난 칼라일의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엄마의 아빠면…… 할아버지! 맞죠?”
칼라일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감정을 추스른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 이분이 바로 칼라일의 할아 버지야. 엄마가 몇 번 말해 준 적 있었지? 칼라일에게 아주 멋진
할아버지가 있다고 말이야.”
칼라일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몇 번 해 준 적이 있어서인지 아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전 칼라일이에요.”
칼라일이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아버지는 단말의 탄성을 뱉었다.
항상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손자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에 가슴이 벅찬 듯했다.
왈칵 울음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지만 차마 칼라일 앞에서 울 수는 없었는지 아버지는 큼, 목을
가다듬었다.
후, 짧은 숨을 내쉰 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칼라일과 눈을 마주한 아버지가 칼라일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칼라일, 이 할아버지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단다.”
“저도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엄마가 할아버지 이야기 많이 해 줬었어요. 칼라일한텐 아주 아주 멋진
할아버지가 있다고요!”
“허허.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가 더 멋있게 꾸미고 올 것을. 이 할아버지 보고 실망했을까
걱정이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너무 멋있어요! 엄마랑 눈도 똑같고 머리도 똑같고 너무 좋아요. 칼라일은.”
칼라일이 배시시 웃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웃음이 만개했다.
“어쩜 이렇게 똘똘하고 이쁠까.”
아버지는 칼라일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울음이 터지고 칼라일이 어색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끊이지 않는 대화에 이러다 밖에서 시간을 다 보낼 거 같아 내가 말했다.
“아버지, 칼라일. 저택으로 들어가서 더 이야기 나눠요.”
“그래, 그래.”
내가 자연스럽게 칼라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칼라일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런, 칼라일이 내가 더 좋은 듯하구나. 하하.”
아버지는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칼라일을 보며 답지 않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칼라일?”
“오늘은 할아버지랑 놀래요!”
칼라일은 내 부름에 해맑게 말했다.
칼라일은 정말 몇 분 사이에 아버지에게 마음을 쏙 빼앗긴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버지와 저택으로
향했다.
묘하게 서운해 잠깐 멈칫하던 난 이윽고 웃음 지으며 아버지와 칼라일의 뒤를 따랐다.

* * *

“늦었지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작님.”


아버지와 신나게 논 칼라일이 하녀의 손을 잡고 목욕하러 떠나고, 남은 이들은 응접실에 모였다.
칼라일 덕분에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헬란이 먼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헬란, 오랜만이구나. 엘리와 칼라일을 보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오히려 절 받아주신 엘리 님께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그럼 이쪽이…….”
헬란에게 미소를 지은 아버지는 제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에 한껏 긴장한 듯 그는 말이 없었다.
원래 윗사람들을 좀 어려워했는데 거기다 내 아버지라고 하니 더욱 긴장한 거 같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하자 제드의 큰 덩치가 움찔했다.
“네. 맞아요. 이쪽이 바로 저와 함께 상단을 운영하는 피닉스 상단주 제드예요.”
굳어버린 그 대신 내가 나서 소개를 해 주자 아버지가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네.”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제드는 큰 어깨를 쭈그리며 두 손으로 잡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로프트 공작님.”
“엘리야가 그러더군, 자네가 친오빠 같은 사람이라고. 허니 그리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네. 편하게
대하게.”
허리까지 숙이는 제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네. 공작님.”
아버지의 온화한 미소와 칭찬에 긴장이 풀렸는지 제드가 씨익 웃었다.
야생의 곰과 그런 곰을 길들이는 조련사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한데 어제 파티는 어떻게 되었나요? 성공적이었나요?”
헬란이 물어왔다.
“응. 특별한 손님이 와 준 덕분에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어.”
“특별한 손님이요? 누구인가요?”
“드로이트의 공작가의 공자.”
큼.
차를 마시던 제드가 사레가 걸렸는지 크게 목을 가다듬었다.
잠깐 그를 보던 난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가 파티에 왔었단 말인가요?”
“헬란도 아는 사람이야. 제레미, 그가 드로이트 가문의 후계자거든.”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인지 헬란이 입을 쩍 벌렸다. 헬란은 6 년간 제레미를 봐왔으니 더욱 놀랐을 것이다.
상상도 못했겠지.
나도 드로이트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단검을 보지 않았더라면 제레미가 드로이트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제레미는 금발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엘리 님은 알고 계셨나요?”
“응. 난 짐작은 하고 있었어.”
“제레미는 괜찮았나요? 파티장이 소란스러웠을 거 같은데…….”
“그랬지. 제레미의 등장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다른 소란까지 만들었으니까.”
“근데도 파티가 성공적이셨다고요?”
“본의 아니게 그 소란이 내게 도움이 돼 버렸거든.”
제레미가 던진 작은 회중시계의 파급력이 엄청났다.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
두 가문에 대한 뜨거운 가십거리는 어떠한 사건으로도 덮을 수가 없었다.

94 화

거기다 시오스 가문의 위상까지 흔들어버렸다.


황제와 적대관계인 드로이트 공작가와 대체 왜 만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이야기를 견딜 수가 없었는지 결국 리제나는 내가 파티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에드먼드와 함께 도망가듯 파티장을 떠났었다.
그리고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드로이트 공자의 등장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백금발과 호박색 눈동자. 초대 황제의 축복을 찾아볼 수 없는 외양은 귀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덕분에 오늘 오후 신문들은 신이 났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성대한 파티부터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한 신문에선 대놓고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도약과 시오스 후작의 몰락이란 자극적인 내용까지 냈을
정도였다.
물론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작은 신문사였지만.
어쨌든 제레미가 던진 작은 회중시계 덕분에 판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후작에게 줄을 대던 귀족들도 당연히 우왕좌왕하게 될 테고 한동안은 후작도 몸을 사릴 것이다.
“루몬트 말로는 살롱에서도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대체 왜 만난 것인지에 대해 말이 많다고
하던데……. 이번 기회에 시오스 후작이 위험한 생각을 접으려나?”
제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아마 곧 후작가에서 후원하는 신문사를 통해 기사를 내겠지. 드로이트와
연관이 없다는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일 텐데.”
“그렇다고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정말 무슨 일을 꾸미는지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으니까.
폐하께서도 증거도 없이 시오스 후작을 벌하실 순 없어.”
제레미가 직접적인 증거를 던진 것도 아니니 시오스 후작은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 했다.
아버지를 모함하고 드로이트와 손을 잡았다면 분명 반역의 뜻을 품은 게 최근은 아닐 것이다.
“루몬트가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폐황의 가신들이었던 귀족들이 몇 년 사이 조금씩 수도로 올라왔다고
했어.”
제드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했지. 아마 그들도 드로이트 공작처럼 아주 비밀스럽게
만났을 게 분명해. 일단 지금은 뭐라도 증거를 찾아야 해.”
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말거라. 명성에 흠집이 갈 수 있다 해도 1 황자의 존재가 있는 한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1 황자, 에드먼드가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으니까.
“네. 조심할게요. 근데 폐하께서는 이 일을 전혀 모르시는 걸까요? 혹시 아버지께 따로 말씀하신 건
없나요?”
레이몬드 역시 근래 시오스 후작을 달리 보게 된 것 같았다.
똑똑한 그이니 어쩌면 시오스 후작의 역심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나와는 지금 그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레이몬드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니 혹시 내가 모르게 두 분이 주고받은 게 있지 않을까 물은 것이었다.
“아직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만 눈치를 채셨을 거라 본다. 때를 보아 말씀을 드릴 예정이다.”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한 건 조심해서 말씀해 주세요. 폐하께서 드로이트에 대한 경멸감이 크시니 자칫
하면 증거가 나오기도 전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다.”
무거운 주제에 심각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때 아버지가 말했다.
“한데 칼라일을 정말 아카데미로 보낼 생각이니?”
제국을 떠나지 않겠다 결정을 내린 뒤 아버지에게 칼라일을 아카데미에 보내야겠다고 말했었다.
그땐 별말 없으셨지만 막상 칼라일을 만나니 마음이 안 좋으신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제일 안전한 길인 거 같아요.”
“차라리 칼라일을…… 아니다.”
아버지는 미간을 깊이 좁히며 말을 멈추셨다.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일지 짐작이 갔다.
아카데미에 보내지 말고 칼라일을 공작가로 들이자는 것이겠지.
그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레이몬드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의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다.
그러다 레이몬드가 칼라일이 자신의 아들이란 의심이라도 하게 된다면 ….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땐 황좌를 두고 피를 튀기는 세력 다툼이 시작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저도 칼라일을 보내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제국을 떠나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예요.”
“아카데미는 어디로 알아보고 있니?”
“고민해봤는데 룬트 왕국이 좋을 것 같아요. 칼라일에게 익숙한 곳이니까요. 또 원래 다니던 학술원이랑
연결되는 아카데미가 있어서 그쪽으로 입학을 알아볼 거예요.”
“그래.”
어두운 얼굴로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온 그때, 칼라일의 목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
어느새 목욕을 마친 칼라일이 쪼르르 뛰어와 아버지에게 안겼다. 칼라일의 등장에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저 다 씻었어요, 빨리 퍼즐 맞추러 가요!”
아까 다 못 맞춘 퍼즐을 어서 맞추고 싶은지 칼라일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또한 싫지 않은지 웃으며 칼라일을 안고 놀이방으로 향했고, 난 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드, 룬트 왕국 아카데미에 제일 빠른 입학 날짜를 알아봐 줘.”

* * *

“감히 이따위 기사를 쓰다니!!”


노성을 지른 시오스 후작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쾅, 울리는 소리에 책상 옆에 서 있던 리제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몰락 직전이었던 크로프트 공작가의 화려한 재 비상과 시오스 후작가의 어리석은 선택. 시오스 후작은
드로이트 공작을 대체 왜 만난 것인가.]

리제나는 책상 위로 펼쳐진 신문들을 훑었다.


그중 가장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질 낮은 종이로 만들어진 걸 보니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작은 신문사인 게 분명했다.
이번 기회에 사람들에게 눈도장이나 찍어볼까 하고 일부러 더 자극적인 기사를 쓴 것일 거다.
“어리석은 선택이라니! 내가 마치 무슨 짓이라도 한 거 같지 않으냐! 감히 후작가를 모함하려 들다니!”
시오스 후작은 도저히 분을 삼킬 수가 없는지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리제나는 그런 후작을 싸늘한 눈빛으로 보았다.
“누구를 탓하세요. 아버지의 탓인걸요. 신문사는 그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뿐이에요.”
“뭐?!”
후작이 리제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형형한 눈빛이 위협적이었건만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늘 말씀드렸어요. 드로이트 공작과의 만남을 항상 조심하라고. 헌데 가문의 문장이 박힌 물건을
공작가에 두고 오시다니. 아이들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하신 거예요.”
“내가 회중시계가 흘렀는지 안 흘렀는지까지 어찌 안단 말이냐! 애초에 그걸 보란 듯이 너에게 건넨
드로이트 공자가 미친놈인 게지!”
“네. 드로이트 공자가 그런 위험한 놈이란 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역시 아버지의 실책이라고요!”
항상 고저 없던 리제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엘리야가 돌아온 뒤 모든 일이 하나씩 어긋나고 있었다.
멍청한 아버지의 실책도, 너무도 달라져 버린 엘리야의 거침없는 모습도 모든 것이 리제나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 탓이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리제나에게 놀란 시오스 후작이 움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내가 실수를 하였다 한들 아비에게 이리 언성을 높이다니 이게 무슨 법도 없는……”
“지금 제게 예법을 말씀하실 때입니까. 그날 파티장에 폐하께서도 계셨습니다. 분명 의심을 하시고 계실
거라고요.”
시오스 후작의 말을 자른 리제나가 스산하게 말했다.
후작은 리제나의 번뜩이는 녹안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요즘 들어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긴 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인 적은 없었다.
거기다 은근히 그를 무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당황한 시오스 후작의 얼굴을 보던 리제나는 들끓는 화를 억누르려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시오스 후작이 욕심에 비해 능력은 없고 아둔한 사람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큰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식을 스스럼없이 체스판의 말로 움직였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땐 체벌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아비였으니 리제나는 후작에게 아버지에 대한 큰 애정 같은 건 없었다.
서 왕국의 후궁으로 가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가족애마저 완전히 떨쳐 버렸다.
지금 그녀에게 시오스 후작은 그저 대외적으로 필요한 후작가의 가주이자 그녀의 방패막이 되어줄
체스판의 나이트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후작이 한때 그녀를 이용했던 것처럼.
시오스 후작의 칠칠맞지 못한 실수 때문에 파티장에서 그녀가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아버지고 뭐고 당장
작위를 몰수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가 필요했다.
게다가 아버지인 만큼 지금 당장 내치기엔 보기 좋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저 회중시계만큼은 눈에 거슬려 견딜 수가 없네.
리제나는 회중시계를 들어 벽으로 세게 던져버렸다.

95 화

-챙그랑!
회중시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너, 너……!”
시오스 후작은 리제나의 행동에 경악한 듯 입을 벌리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후작에게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 폐하께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할지 그것만 고민하세요.”
리제나는 분노에 파르르 떨리는 후작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대의에 대한 전권을 제게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허니 다른 건 생각지 마세요. 또 한 번 이렇게
멋대로 움직이시면 그땐 대의를 망치는 아버지부터 치워버릴 겁니다.”
시오스 후작의 녹안이 분노와 경악으로 홉뜨였다. 자식에게 배신당한 눈빛이 꽤나 볼만했다.
<i>‘네 사랑 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아! 너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우리 가문을 생각해라. 네가
서왕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불명예를 씌워 널 가문에서 내칠 것이다.’</i>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이용했던 후작이었다.


리제나는 그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었다.
“감히!”
하극상을 참지 못한 후작이 리제나의 뺨을 후려치려는 듯 손을 높이 든 순간 릴라가 후작의 손목을 잡았다.
“릴라, 아버지를 방으로 모시렴. 많이 피곤하신 듯하구나.”
“네. 아가씨.”
“이익, 이거 놓아……!”
“소란을 피우시면 저도 아버지를 더 이상 지켜드릴 수가 없답니다.”
어리석긴 해도 눈치는 빠른 사람이었다. 후작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안 듯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멈췄다.
자신의 실책이 분명한 상황이었으니까.
마지막 자존심인지 릴라의 손을 뿌리친 후작은 스스로 집무실을 나갔다.
쾅-!
집무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매서웠다.
후작의 책상에 자리 잡은 리제나는 릴라에게 가장 자극적인 제목을 뽑은 신문을 던졌다.
“이곳에 돈을 보내렴.”
“이곳에 말입니까?”
충직한 가신답지 않게 릴라가 되물었다.
시오스 후작가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기사를 낸 신문사에 돈을 보내란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리라.
“그래. 아마 오늘 이 신문이 가장 많이 팔렸을 거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문구에 더욱 이끌리는 법이다.
아마 내일도 시오스 후작가를 어떻게 깎아내렸을까, 궁금해하며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사보겠지.
거기다 악평을 서슴지 않았기에 이 신문사에서 나오는 후작가의 정보를 더욱 믿을 것이다.
“내일 조간신문에 준비해 둔 내용을 싣게 하렴.”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의 만남은 반정 전 가문 간의 정리되지 않은 광산 관련 계약서가 있어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이미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드로이트 공작가가 영지를 몰수당하기 전 시오스 가문의 영지와 밀접하게 닿아 있었으니까.
“돈은 신문사가 원하는 대로 주렴. 그리고 드로이트 공작과는 당분간 모든 걸 차단하렴.”
“네.”
그녀는 이미 이번 반정에서 드로이트를 버리겠다 마음먹었다.
레이몬드는 똑똑한 남자였다.
허니 시오스 후작 아무리 변명한다 한들 이미 의심이 깊어졌을 것이다.
드로이트에서 꼬리를 잘라야 해.
뱀 같은 드로이트 공작은 시오스 후작가의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드로이트를 버리기로 결정한 이상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명을 받은 릴라가 막 몸을 돌리려던 그때 한 신문의 1 면이 리제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죽은 듯이 살던 드로이트 공자가 모습을 드러내다.]

리제나는 파티장에서 만난 드로이트 공자를 떠올렸다.


드로이트 공작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지.
아마 드로이트 가문을 없애는데 가장 큰 복병이 될 것이다.
공자를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파티장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엘리야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드로이트 공자.
그러고 보면 파티장에 몰래 들어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긴 했다.
정문에서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크로프트 공작가는 뒷문도 따로 없었다.
어쩌면 파티 초대장을 받았다거나…….
정말 둘은 모르는 사이일까.
그녀의 의심은 언제나 빗나간 적이 없었다.
리제나는 릴라를 불러세웠다.
“잠깐.”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지난 6 년간 크로프트 영애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철처히 알아봐. 그리고 뒤를 좀 밟아서 혹시
드로이트 공자와 따로 만나는지는 알아보렴.”
둘이 만약 아는 사이라면, 어쩌면 크로프트와 드로이트 둘을 함께 묶어 없애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 * *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났다.


칼라일과 하루의 시간을 보내고 현실로 돌아온 난 루몬트와 함께 온실 화원을 방문했다.
온실 화원은 본격적인 향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각종 허브초와 약초를 키우는 곳이었다.
평평한 부지에 유리로 만든 커다란 돔 천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온실 화원을 만드는 시간이 고작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테스트 정도나 가능할 소규모일 줄 알았는데
…….
그리고 생각보다 큰 화원의 규모에 놀랐다.
“생각보다 크군.”
루몬트는 유리문을 열며 말했다.
“크게 지어야 나중에 물량이 모자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들어가시죠.”
화원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머리가 아찔한 만큼 향이 가득했지만 불쾌하고 머리 아픈 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차분해지는 그런 향들이었다.
난 허브 꽃들이 핀 곳으로 향했다.
“셀린느 영애도 왔다고 했었지?”
“네. 이미 몇 번이나 오셨다 가셨습니다. 새로 보는 꽃들이 있다고 신나 하시며 몇 개를 가지고
가셨지요.”
루몬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꽃들을 크게 둘러보자 로잘린이 신나 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고작 보름 만에 이 많은 허브초들을 어떻게 구한 것인지, 에그리타 제국에선 나지 않는 꽃들까지 있었다.
화원을 천천히 거닐며 루몬트에게 물었다.
“향수가 나온다는 소식에 살롱의 반응들은 어때?”
“아직 정식으로 출시된 것도 없는데 반응이 아주 폭발적입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직접 사용해 보고 싶다
했던 말씀 덕분인 거 같습니다.”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니까요.
루몬트가 신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레이몬드의 말 한마디가 몇백 골드를 쏟아붓는 광고보다 효과가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였으니까.
순간 그날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가 떠올랐다.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그의 말을 자른 내게 차마 말하지 못했었지만 강렬한 눈빛 아래 깔린 감정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해도 언제나 레이몬드는 집착 서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었다.
거기다 갑자기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정했던 행동들.
결정타는 그가 보낸 제비꽃 목걸이였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는 아마…….
난 이어지는 결론에 얼굴을 구겼다.
이제 와 그의 마음 같은 건 기쁘지도 그렇다고 통쾌하지도 않았다.
겨우 빠져나온 늪에 다시 발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난 칼라일과 행복하게, 그는 리제나와 에드먼드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서로에게 좋았을 텐데.
“엘리님?”
구겨진 얼굴을 본 루몬트가 의아한지 날 불렀다.
상념을 접은 난 루몬트에게 말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야.”
황제가 사용하는 것이라는데 허영심 많은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따로 광고를 더 하지 말고 예약제로만 향수를 파는 게 좋겠어. 폐하의 말씀 덕에 자연스럽게 향수의
가치가 올랐으니까. 그걸 극대화하는 게 좋겠지.”
사고 싶어도 바로 사지 못하고 기다리게 할수록 더욱 애가 탈 테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조간신문 보셨습니까?”
“응, 봤어.”
“시오스 후작에 대한 여론이 단번에 바뀌었던데요.”
파티 직후만 해도 황가를 배신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1 황자를 믿고 선을 넘었다는 둥 비판 여론이
들끓었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신문들의 내용이 바뀌었다.
특히 시오스 후작가가 드로이트와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냔 가장 악의적인 기사를 썼던 신문사에서 가장
우호적인 기사를 냈다.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자세한 내용까지 실으며 말이다.
아마 시오스 후작가에서 돈을 받은 것이겠지.
후원하는 신문사들이 있으니 당연히 우호적인 기사들이 금방 쏟아질 거라 예상했다.
그중 악의적인 기사를 낸 신문사를 고를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론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강력한 비판에 신뢰를 얻은 신문사가 변명해 주니 더 신빙성이 생겼다.
“10 년 전 공동명의로 계약한 광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다고 하더군요. 알아보니 이미 5 년 전에
폐광산이 된 곳이던데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계약서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1 황자의 외척인 시오스 후작이 다른 뜻이 있다는 것보단
폐광산이 된 곳을 처리하려 드로이트 공작을 만났다는 게 더 믿음이 가겠지.”
“뭐…… 그건 그렇죠. 그래도 이번 일로 시오스 후작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귀족들이 꽤 되는 듯합니다.
살롱은 물론이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시오스 후작의 평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니까요.”
“시오스 후작에게서 돌아서는 귀족들을 크로프트 공작가로 모아야 해. 등을 돌리는 귀족 중 괜찮은
가문들을 추려줘.”
“네. 알겠습니다. 근데 엘리 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루몬트의 말을 기다렸으나 어쩐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드로이트 공자 말입니다. 저번에 제게 찾으라 하셨던 그 남자 맞나요?”
“맞아.”
“역시 그랬군요. 그럼 드로이트 공자를 파티에 초대하신 것도…….”
“내가 한 거지.”
“시오스 후작가를 곤란하게 만들려 한 엘리 님의 큰 그림이었군요.”
루몬트는 제레미의 등장부터 시오스 후작의 일까지 내가 준비한 일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96 화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레미가 리제나를 곤란하게 만든 건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어.”
“아니시라고요?”
“그래. 애초에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다는 것도 몰랐어.”
“그럼 드로이트 공자 덕분에 저희가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은 것이로군요. 듣자 하니 폐하께서 드로이트
공자를 죽일 듯 보셨다는데……. 그분도 참 대단하고 이상한 분이십니다.”
루몬트도 제레미의 독단적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이라 설명하긴 했지만 누구든 이상하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맹수 앞에 스스로 목을 들이민 모양새였으니까.
“이상한…… 사람은 아냐.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것이지. 그보다 드로이트 공자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은 어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워낙에 혜성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남다른 외양에 대해
말들이 많을 뿐입니다.”
“그렇군. 루몬트, 혹시나 드로이트 공자를 악의적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막아 줬으면 해.”
“도움도 받았으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겠죠.”
루몬트가 씨익 미소를 그렸다.
“크로프트 공작가에 대한 말들은 어때?”
“아주 좋은 편입니다. 특히 숨겨진 재력에 대해서요. 셀린느 후작가와 사업을 크게 벌이는 걸 보고 다들
관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귀족들은 이제 걱정 없으실 듯하니……. 평민 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쐐기를
박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루몬트의 말이 맞았다.
제국민들을 위해서라면 기부 같은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흠…….”
“고아원 기부는 어떠십니까?”
“고아원……?”
“네. 요새 고아원으로 들어가는 기부금이 많이 줄어 운영이 어렵다는 말이 많습니다.”
가장 눈에 띄고 도움이 되는 기부는 제국의 고아원들에 기부를 하는 것일 거다.
문제는 고아원에 기부를 하기 위해선 신전을 통하는 것이 관례란 것이었다.
빛의 신, 루멘의 신전.
제국의 국교이자 태초의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깊은 종교였다.
역사가 깊은 만큼 지금은 비리투성이였고.
“고아원에 기부를 하는 대신 신전을 통하지 않고 각 고아원으로 직접 기부금과 물품을 보내는 게 좋겠어.”
청렴결백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는 신관들은 이제 고대 서적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신전으로 기부금을 보내면 필시 고아원으로 돈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직접 보내면 신전에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신전에 돈을 보내진 않을 거야. 신전에서 빼돌릴 게 분명하니까.”
현 주신의 신전의 대주교와 대신관이 어떤 사람들인지 황후 시절 충분히 겪어보았기에 더더욱 믿지 않았다.
루몬트 역시 신전의 부패를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긴 얘기에 잠시 머리를 식히려 꽃을 둘러보던 난 눈에 띄는 은빛 봉오리에 난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벨루스잖아.”
“하하, 네. 벨루스입니다. 사막의 절벽 아래 달빛을 받으며 크는 아주 귀한 꽃이죠.”
“이걸 어떻게…….”
벨루스는 사막에서도 구하기 쉬운 꽃이 아니었다.
절벽 아래에서 피기 때문에 채취도 쉽지 않았고 그 수가 많지도 않아 돈이 많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하하, 제가 고생 꽤나 했습니다. 향수로 쓸 꽃들을 좀 알아보니 이 벨루스의 향이 대륙 최고로 정평이
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래저래 인맥을 좀 써서 이렇게 딱 온실 화원으로 가지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루몬트가 기세등등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평소라면 그의 자화자찬을 가볍게 웃어넘겼겠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정말 대단해. 벨루스를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루몬트의 말대로 벨루스의 향은 대륙 최고인지라 꽃 자체만으로도 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탄하자 루몬트는 부끄러운지 턱을 긁적였다.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고……. 수량도 많이 가져온 건 아니라서요. 이게 절벽에서
자라는 거라 어떻게 모종은 얻었는데 온실에서 꽃을 피울지도 의문이고…….”
“피울 거야. 걱정 마.”
난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지 루몬트가 고개를 슥 돌렸을 때 난 벨루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봉오리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힘을 썼다.
아름답게 피어나렴.
은은한 빛이 봉오리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루몬트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 보지 못했다.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줬으니 벨루스는 곧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루몬트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봉오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벨루스의 꽃이 피면 로잘린에게 벨루스 향수를 먼저 만들라고 해 줘.”
“벨루스 향수부터 시판하시려는 건가요?”
“맞아. 우리 향수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프리미엄 향수가 될 거야. 첫 번째 향수로 벨루스만 한 게
없겠지.”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오스 후작과 관련해서 들어온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벨루스를 보며 미소짓던 내 입꼬리가 굳었다.
“뭔데?”
“시오스 후작이 마법사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마법사?”
드로이트 공작과 관련된 은밀한 정보이거나 병력를 모으는 그런 위험한 말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난
미간을 좁혔다.
마법사들이 병력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공격 계열의 마법사들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몇백 년 전부터 높은 서클의 마법사들이 나오지 않았고, 하여 지금 마법사들은 주로 마도구 개발 등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주로 하고 있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말하는 거야?”
“아뇨, 저도 그쪽이 아닐까 싶어 조금 알아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당하게 마탑을 드나드시고
계셨다고 했으니까요.”
“어떤 계열의 마법사를 만나는지도 모르고?”
“주로 물의 마법에 능통한 자들을 만났습니다.”
“물……?”
물 관련 마법은 제일 공격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군사 목적은 아니란 건데.
“일단 계속 주시하면서 알아봐. 드로이트 공작도 함께.”
“네.”
물의 마법사라…….
뭔가 일이 벌어질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난 굳은 얼굴로 루몬트와 화원을 나왔다.

* * *

황제의 집무실.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날로부터 이틀 후, 시오스 후작이 알현을 요청했다.
“드로이트 공작과의 만남은 단순한 계약서의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이 올린 계약서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에 저희가 광산을 파는데 그 광산이 오래 전 드로이트와 공동명의로 계약된
것이라……. 그걸 정리하기 위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절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오스 후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흐음…….”
후작의 변명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어제오늘 신문 기사에 쓰인 내용과 같았다.
상세하게 설명된 기사 내용은 딱히 꼬투리를 잡을 만한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만남을 증명하는 회중시계 말고는 후작과 공작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신문들을 보았기에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미 후작을 의심하고 있기에 그의 말들이 진실로 와닿지
않았다.
“폐하.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은 절대 진실이 아닙니다. 저는 1 황자 전하의 외할아비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폐하께 다른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재상이 내게 역심을 품었을 리 없겠지.”
순간 시오스 후작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후작은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외쳤다.
“……역심이라니요! 제 목숨을 걸고 그런 마음을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 함부로 걸면 안 되지 않겠나. 사람 일이란 게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인데 말이야.”
레이몬드는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말 속에 날카로운 뼈가 있었다.
“저의 목숨은 이미 폐하의 것이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신다면 절 이 자리에서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후작이 머리를 깊이 숙이며 결연히 말했다.
어찌나 비장한 목소리인지 마치 이곳이 전쟁터의 한복판 같았다.
이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비소를 머금은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재상, 그대를 믿는다. 허니 이만 고개를 들어.”
시오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후작과 레이몬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후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에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시선을 내렸다.
“다시 한번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하나 관용을 베푸는 것은 딱 한 번뿐이란 걸 명심해.”
“네.”
“이만 나가봐.”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오스 후작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집무실을 나갔다.
시종들과 호위기사까지 모두 내보낸 레이몬드는 후작이 증거라며 올린 계약서를 불에 태워버렸다.
조악한 변명을 하는 시오스 후작을 이리 불태우지 못해 아쉬움이 들던 그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셀린느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대답과 함께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로 들어온 셀린느 영애가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이쪽으로 앉지.”
레이몬드는 집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그가 상석에 자리하고 오른쪽에 셀린느 영애가 앉았다.
셀린느 영애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껏 긴장한 얼굴로 정면만 보고 있었다.
긴장이 역력한 모습에 레이몬드가 차를 들이켜곤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많이 놀랐겠지. 심각한 일로 부른 것이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예, 폐하.”
로잘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엘리야가 아끼는 영애이기에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건만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았다.
“본론을 빨리 끝내주는 게 도움이 되겠군.”
레이몬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97 화

“내가 오늘 영애를 부른 건 셀린느 후작 때문이다.”


“네? 아버지가 무슨 잘못이라도…….”
로잘린의 얼굴이 급격히 안 좋아져 레이몬드는 손을 휘저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 후작은 넘칠 만큼 북방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으니까.”
“하면…… 저를 왜 부르신 건가요?”
“북방에서 공을 많이 세운 셀린느 후작의 공훈을 인정하고 이제 그만 수도로 불러들인단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신단 말씀이신가요?”
로잘린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북방으로 쫓겨난 귀족이 다시 돌아오는 방법은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것뿐이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북방으로 한 번 좌천되면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로잘린 역시 그걸 알기에 포기하고 살아왔었다. 한데 돌아온다니 이게 꿈은 아닐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오늘 명을 내렸으니 늦어도 일주일 안에 돌아올 것이다.”
아아- 탄성을 내뱉은 로잘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영애, 그러지 않아도 돼. 이만 일어나 앉아.”
고개를 든 로잘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셀린느 후작가.
반정공신까지는 아니어도 대대로 군수부에서 활약한 명문가였다.
셀린느 후작은 그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타고난 장군이라 입바른 소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는 자였다.
자기의 자리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히 해내는 기사였지.
비록 탈세 혐의는 확실했지만, 후작이 직접 한 일은 아니었다.
후작가의 집사가 저지른 일이었다. 후작을 모르는 자들은 어떻게 몰랐겠냐며 한통속이라 떠들어 댔지만
후작을 아는 자들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좀 더 개입해서 일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엔 시오스 후작을 믿고 있었다.
재상직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크게 문제를 일으킨 적 또한 없었다.
재상에게 적당한 선에서 처리하라 했고 당시 시오스 후작은 비난 여론이 들끓는 것과 달리 크로프트
공작처럼 대놓고 저격하지도 않았었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란 명령을 따라 셀린느 후작의 월급을 1 년 동안 압류하는 것으로 마무하자고
했었다.
하여 레이몬드도 시오스 후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비난이 들끓는 여론은 잠시간의 해프닝이라 여겼었다.
어차피 그가 있는 한 셀린느 후작가가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변수는 셀린느 후작이었다.
처벌을 내리기 직전 셀린느 후작이 그를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을 북방으로 보내 달라고.
가주로서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돌아가라 했지만 셀린느 후작은 완강했었다.
비록 자신의 아랫사람이 저지른 죄였지만 우직한 성정인 그는 가주로서의 책임감에 죄악감이 드는 듯했다.
북방이 아니라면 후작위를 내놓겠다는 말에 결국 레이몬드가 한발 물러났었다.
몇 년만 그곳에서 고생하면 스스로 죄책감을 떨치리라 생각하고 보낸 것이었다.
대외적으론 후작이 죄를 지어 북방으로 떠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진실은 이것이었다.
의외로 셀린느 후작이 북방에서 이민족을 너무 잘 처리해 불러들일 계획이 잠시 미뤄지긴 했지만, 그는
셀린느 후작을 버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파티장에서 셀린느 영애를 만났을 때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한번 그 사건을 살펴보니 그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정확히는 시오스 후작이 과연 이 사건과 무관할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시오스 후작을 셀린느 후작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단 것만 다를 뿐 크로프트 공작의 사건이 벌어졌던
사건과 상당히 유사했다.
아랫사람의 자금 횡령과 사건이 터지자마자 들끓었던 비난 여론.
아마 관련이 있겠지.
지금의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다.
셀린느 후작은 스스로 북방으로 떠나겠다고 말한 것도 어쩌면 그의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그땐 그의 진심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는 직감이 왔다.
“셀린느 영애.”
“네. 폐하.”
“혹 후작이 북방으로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당부한 말 같은 건 없었나?”
“……아뇨,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을 남기셨어요.”
“그랬군.”
과거가 떠오르는지 셀린느 영애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렀다.
황급히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던 레이몬드는 문득 그녀가 입고 있는, 귀족 영애의 드레스치고 낡은
소매를 보고 눈썹이 꿈틀했다.
순간 파티장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값비싼 드레스를 입었다고 모욕을 당했었지.
셀린느 후작가의 재정이 그렇게까지 어려워졌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황제라 할지라도 큰 사건이 아닌 이상, 귀족들의 사사로운 재정난까지 다 알지는 못했다.
셀린느 후작 부인이 그에게 상소라도 올렸다면 바로 조처를 했겠지만 후작이 떠나고 후작가는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귀족가의 가십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이런 부분까지 놓치게 할 줄이야.
아무리 최측근이 아니었다 해도 제국의 충성스러운 기사였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거기다 셀린느 후작 부인은 엘리야와 각별한 사이였으니…….
레이몬드는 씁쓸한 마음으로 낡은 드레스를 보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후작은 북방에서 도적들을 소탕하며 경계령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다. 세운 공에 대한 마땅한 치하를
받는 것이니 내게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뒤에 시립해 있는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장은 하얀 봉투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이건 그동안 내가 후작가를 신경 쓰지 못한 사과의 표시다.”
“사과의 표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아니, 과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 또한 후작가가 그동안 한 고생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지.”
“하오나…….”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영애.”
이대로라면 안 받을 것 같은 분위기에 레이몬드는 조금 강하게 얘기했다.
그 말에 움찔한 로잘린이 봉투를 들었다.
“그럼 거절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그래, 내 저택 내부까지 다 꾸며 놓으라 말해 두었으니 바로 짐만 옮기면 될 것이다.”
“네? 저택이요? 설마 이게…….”
눈이 동그래진 로잘린이 새하얀 봉투를 내려보았다.
조금 식은 차를 여유롭게 들이켠 레이몬드가 태연히 답했다.
“수도 비첸 거리에 있는 저택이다. 황가의 소유였던 것의 명의를 셀린느 후작에게로 돌려놓았으니
대대손손 잘 사용해 주면 좋겠군.”
“황실의 저택이라니. 폐하 이것은 너무…….”
화들짝 놀란 로잘린이 봉투를 다시 내려놓으려 하자 레이몬드가 말했다.
“거절은 예의가 아니지. 그래도 정 부담스럽다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와 근래 가까이 지낸다 들었어.”
“아, 네. 영애께서 감사하게도 제게 신경을 많이 써 주고 계십니다.”
“……크로프트 영애가 힘들어하면 외롭지 않게 그녀를 옆에서 잘 보필해 줬으면 한다.”
황후 시절 그녀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원래 황제가 황후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는 게 맞긴 했지만 그는 그저 무관심했다.
역대 황제들은 종종 황후가 주최하는 티파티에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엘리야의 최측근들에게도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귀부인들이 여는 파티장에도 그녀의 손을 잡고 참석한 적이 없었다.
엘리야가 그에게 먼저 청한 적이 없다 해도 충분히 그가 먼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는데도.
그는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앉혀만 놓은 것이었다.
괴롭힘보다 방관이 더 잔인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
뒤늦은 후회라는 걸 알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하나씩 갚고 싶었다.
용서는 받지 못할지라도 그녀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부탁은 제게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제게 다른 일이라도…….”
“그대에겐 작은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 내겐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부탁하지.”
“……예, 폐하.”
로잘린은 누군가를 그리는 듯 짙어져 가는 검은 눈동자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 * *

해가 지고 달이 막 뜬 시각. 드로이트 공작가의 성문이 열렸다.


저택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레미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인영에 걸음을 멈추었다.
“공작 각하.”
제레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파티장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오늘은 파티가 끝난 지 이틀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자신에 공작의 분노가 얼마나 치달았을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로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온 공작은 손을 크게 휘둘렀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퍽-!
손바닥도 아닌 주먹으로 후려친 덕에 제레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입 안의 여린 살이 터진 듯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쓰레기만도 못한 놈! 그따위로 태어났으면 가문을 위해 바짝 엎드리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황제 앞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
공작은 제레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제레미는 그제야 공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검은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거 의외입니다. 그보다도 시오스 후작의 일로 더 열이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입 닥치지 못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통이 조여옴에도 제레미에게서는 괴로움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드로이트 공자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귀족들 앞에 드러냈고, 후작 주제에
감히 공작가를 무시하는 시오스에게 경고를 줬지요.”
“뭐라?”
제레미의 대답이 어이없다는 듯 순간 드로이트 공작에 손에 힘이 빠졌다.
제레미는 공작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공작의 몸이 비틀거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주먹으로 한 대 맞아줬으면 할 만큼은 한 것이니까.
구겨진 재킷 자락을 탁탁 턴 그는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쏟아지는 기사들을 못 보셨습니까. 하나 같이 드로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왜 좋은 일이 아닙니까. 유령이나 다름없던 공작가를 수면 위로 올려 놓았는데요. 반정 이후 드로이트
공작가가 이렇게 관심을 받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 드로이트 공작가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 뭐가 좋다는 것이냐!”
“반정이 있었던지도 10 년이 넘었습니다. 정통성이 부족한 황제와 그런 황제가 급진적으로 추진했던
개혁들에 귀족들의 불만이 한둘이겠습니까. 드로이트의 역사는 사생아 황제보다 더 정통성이 있습니다.
그런 드로이트가 당당히 나타났다면 귀족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팔다리가 다 잘린
드로이트로 살 겁니까.”
크로프트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제레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흔들리는 공작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더욱 냉철한 얼굴을 가장 했다.
“숨죽이고 살랬다고 납작 엎드리고만 있다면 드로이트의 영광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제레미는 비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98 화

“……그래서 지금 네 말은 드로이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파티장에서 그 소란을 피웠다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감히 후작 따위가 공작가를 제 아랫사람인 것처럼 이용해 먹고 파티장의 주인처럼 고개를
쳐드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꿍꿍이냐.”
드로이트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럴 만했다. 제레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가문에 대한 관심이나 따위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저도 드로이트입니다. 각하께서 저를 아무리 무시하신다 한들, 제가 다음 대의 드로이트가 될 거라는 걸
잊어본 적은 없죠.”
“…….”
제레미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제 파티장에 폐하가 오실 줄은 몰랐지만, 제 존재를 드러낸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 황제가 어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어! 10 년이나 흘렀다 해도! 단칼에 제 아비의
목을 베었던 자다. 미친 폭군인 그가 정통성의 눈치를 볼지 안 볼지 어떻게 확신해!”
“10 년 전과 지금은 다릅니다. 황제 폐하께서 드로이트를 멸문시킬 수 있는 명분이 있었던 것은 10 년 전
반정 때뿐입니다. 폐황에게 질려 버린 제국민들은 반정을 지지했지만 제국이 안정된 지금은 아닙니다.
무고한 피를 흘리는 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기에.”
공작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황제는 쉬이 드로이트 가문을 없애지 못할 겁니다.”
“…….”
공작은 확신이 가득한 제레미의 호박색 눈을 응시했다.
그가 제레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상징을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제레미는 드로이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면서 가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가문을 나가 용병으로 떠돌아다녔고 가문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치 지금은 누구보다도 드로이트 같은 말을 하고 있다니.
“그렇다 해도 황제의 신경을 긁는 것은 좋지 않다. 더더욱이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 지금은…….”
제레미의 번뜩이는 눈동자에 홀리듯 저도 모르게 말을 잇던 공작은 멈칫했다.
아직 이런 말을 제레미에게 하기에 눈앞의 놈을 완벽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이미 공작의 말을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공작과 후작이 위험한 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역심을 이루기 위해 지금 당장 꾸미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뿐이었다.
판을 흔들어 놓아야 해.
공작은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니 지금 공작이 후작을 의심할 수 있는 씨앗을 심어야 했다.
그들의 꾸미는 일이 서로의 불신으로 깨지도록.
제레미는 완벽하게 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드로이트 가문을 위한 큰일을 정말 시오스 후작과 함께하실 겁니까?”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어찌 됐든 자중해라. 시오스 후작에게도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소란을……”
“시오스 후작이 계속 각하의 손을 잡을 것 같습니까?”
“……무슨 말이냐.”
“시오스 후작은 믿을 사람이 못 됩니다. 파티가 벌어지고 수많은 관심이 드로이트로 집중되었어도
후작가에서 서신 하나라도 도착한 게 있었습니까?”
“…….”
공작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제레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드로이트로 돌아오지 않은 이틀 동안 시오스 후작가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와 정말 함께할 생각이었다면 일이 터지자마자 각하께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함께
논의했을 겁니다.”
“지금 공작가에 사람을 보냈다간 황제의 시선에 들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게 당연……”
“이때까지 공개적으로 만나셨습니까. 두 분만 아시는 비밀스러운 루트가 없다고 말씀하시진 않겠죠.”
제레미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놓은 건 시오스 후작의 회중시계가 전부였다.
두 사람이 이때까지 어떻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지속해 왔는지는 그조차도 아무것도 몰랐다.
시오스 후작에 대한 뒷조사를 조금만 해 봐도 그가 믿을 수 없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오스 후작은 애초에 드로이트의 손을 오래 잡고 있을 생각이 아닐 것이다.
아무런 말이 없던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말이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오스 후작은 각 신문을 통해 드로이트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을 밝히기에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후작은 공작 각하를 이용하고 버릴 것입니다.”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꼴로 허세를 부리는구나.”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인지, 아니면 적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는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드로이트 공작가만 무사하다면요.”
“…….”
“허니 시오스 후작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제레미는 쐐기를 박듯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공작은 이번만큼은 제레미를 붙잡지 않았다.
늘 방관자 같았던 제레미의 달라진 태도가 몹시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제레미의 후작에 대한 의심은 그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애초에 그도 시오스 후작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다만 끈 떨어진 연 신세에서 잡을 수 있는 손이 그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뿐.
아니면 저놈이 다른 뜻이 있어 날 흔드는 건가.
드로이트 공작은 계단을 오르는 아들의 뒷모습을 집요히 응시했다.

* * *

이른 아침.
엘리야는 집무실로 출근하여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건강이 회복된 아버지는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업무에 복귀하셨다. 하지만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는
하르펜의 말에 한동안은 내가 업무 분담을 하기로 했다.
“보좌관을 빨리 구해야겠구나. 언제까지 널 이렇게 고생시킬 순 없으니.”
한참 서류를 정리하고 있자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보좌관은 구해야겠지만 고생은 아니에요. 나름 재밌어요. 제가 의외로 재정 관리에 소질이 있거든요.”
황후 시절에도 내무부의 재정을 탄탄하게 관리했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정난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영지 역시 지금은 안정을 찾았다.
“너야, 무엇이든 잘하지. 어릴 때부터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칭찬하는 아버지 때문에 부끄러워졌다.
꼭 내가 칼라일에게 뭐든 잘했다며 박수를 쳐 줄 때의 눈빛이었다.
이제 박수받을 나이는 아닌데.
머쓱함에 큼, 목을 가다듬은 난 정리한 서류를 들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여기 이번에 영지에서 거둔 세금을 정리한 거예요. 한동안 상황이 안 좋아 영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잖아요. 해서 이번엔 절반만 거두라 했어요. 당분간은 영지민들이 안정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 잘했다. 오늘 저녁에 칼라일에게 간다고 하였지?”
오늘 저녁에 칼라일과 함께 야시장을 구경하러 갈 생각이었다.
“네. 곧 칼라일을 아카데미로 보내야 하니 한동안은 함께 지내려 해요. 낮엔 공작가로 올게요.”
“내가 다시 일하고 있으니 걱정은 말고 칼라일과 시간을 보내렴.”
“네.”
아버지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린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집사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신전에서 아가씨께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신전이라니. 난 미간을 좁혔다.
“신전에서?”
“네.”
집사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건넨 나이프로 뜯어 서신을 열어보자 오늘 오찬을 함께 하고 싶단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니?”
“대신관께서 저와 함께 오찬을 함께 하자고 하네요.”
“대신관이?”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좁히셨다.
“제가 어제 상단을 통해 고아원에 기부금을 보냈거든요.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고아원들은 전부 신전 아래 소속되어 있었다.
기부금을 자기들에게 보내지 않아 단단히 골이 났겠지. 오찬에 불러 내게 무슨 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이런 골난 행동을 보일 것 같아 망설이긴 했었다. 신전의 행패가 무서워라기보다는 상대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흠…….”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 역시 대신관의 초대장이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신전을 싫어하는 만큼 대신관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황제와 황후를 싫어했던 것이지만.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빛의 신 루멘을 주신으로 한 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있었다.
대륙이 처음 만들어질 때 빛의 신 루멘이 축복을 내렸다고 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였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만큼 영향력도 상당히 강했다.
황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언제나 정통성이 명확한 황위 계승자들을 지지했었다.
그러니 반정으로 황좌에 앉은 레이몬드를 못마땅해하는 건 당연했다.
황제의 즉위식 땐 대놓고 축언을 할 신관을 보내지 않아 말이 많았었다.
신전에선 레이몬드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신전에 정통성을 확립해 달라 도움을 요청하길 바라고 벌인
일이었지만 레이몬드는 그리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이미 신관들이 신성력을 점차 잃게 되면서 신전의 영향력은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대신관 빼고는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없었으니까.
단지 주신을 모신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에 신전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모욕한 신전에 분노한 레이몬드는 매년 황실이 신전으로 내던 기부금을 반절로 줄여버렸다.
결국 재정난에 휩싸인 신전이 레이몬드에게 백기를 들었지만 황실과 신전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어린아이들도 알 정도였다.
당연히 황후였던 나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때야 여론을 의식해서 대놓고 나까지 나서지는 못했지만, 난 더 이상 황후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신전의 평판이 더욱 나빠졌다지.
내게 행패를 부린다면 그 배로 돌려줄 것이다.
“가야겠어요. 신전에 갔다가 전 바로 칼라일에게 갈게요.”
모든 게 내가 더 유리한 상황에서 이 만남을 무서워 피할 이유는 없었다.
황후 시절엔 참았어야 했던 말들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굳이 가야겠니?”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걱정 마세요. 과거와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대신관에게 내가 꼭 돌려줘야 할 빚이 있기도 했다.
난 걱정하지 말라며 아버지에게 미소를 그렸다.

99 화

엘리야가 신전으로 출발하였을 때, 크로프트 공작가에 손님이 방문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공작, 일어나게.”
“안 그래도 폐하를 뵈러 가려 했는데 때마침 방문해 주셨군요.”
“그대와 내가 생각이 통했나 보군.”
레이몬드는 피식, 가볍게 웃었다.
“헌데 어쩐 일로 공작가에 방문해 주셨습니까?”
“내일부터 그대가 업무에 복귀한다고 하여 몸이 정말 나은 것인지 확인하러 왔네. 혹 무리하는 거라면
아예 강제 요양을 보내버리려고 말이야.”
레이몬드의 농담에 공작이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공작을 보며 레이몬드가 말을 이었다.
“이건 농담이고, 그대와 중요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장난기가 사라진 레이몬드의 얼굴에 공작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마 시오스 후작의 일일 것이다. 공작은 그리 짐작했다.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아, 잠깐.”
공작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헌데 공작, 엘리야가 보이지 않는군. 엘리야와도 관계된 일이니 같이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아……. 그것이.”
공작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는 순간 불안해졌다.
혹시 그녀가 말도 없이 다시 떠난 것일까 봐.
그의 손끝이 차가워지던 때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엘리야는 방금 신전으로 갔습니다.”
“신전?”
떠난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도 잠시 레이몬드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엘리야가 고아원에 기부금을 크게 낸 일로 대신관께서 오찬을 함께 하자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래서 대신관과 오찬을 하러 갔다고?”
“예.”
공작의 차분한 대답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신관.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엘리야를 불렀다니.
자신과의 기 싸움에서 패한 뒤 그는 엘리야에게 그에 대한 화풀이를 은근히 하곤 했다.
주기적으로 엘리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걸고넘어진 게 바로 대신관이었다.
주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그렇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며 엘리야에게 기도를 강요한 적도 있었다.
그가 신전에 경고하여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사사건건 엘리야를 물고 늘어졌었다.
거기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망발을 지껄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신관과 오찬을 하러 갔다니.
시오스 후작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지만 신전으로 갔다는 말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대신관이 또 헛소리라도 지껄인다.
엘리야가 또다시 상처를 받는 것은 절대 볼 수 없었다.
“공작, 내일 황궁에서 보지.”
레이몬드은 공작의 답을 듣지도 않고 거칠게 몸을 돌려 저택을 떠났다.

* * *

열 개의 커다란 건물이 세워진 신전은 겉보기에는 작은 황궁이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대신관이 머무는 신전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을 끝없이 지나 중앙 신전에 도착하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신관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로프트 영애.”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대신관 바로 아래에 있는 고위 신관.
“신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신관께서 만찬룸에서 먼저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관은 곧장 나를 만찬 장소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고 룸 안으로 들어선 난 순간 보이는 광경에 걸음을
멈칫했다.
룸 안쪽의 긴 테이블엔 대신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양쪽으로 신관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역시, 대신관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인지.
어찌 보면 한결같은 모습이 신관다운 모습이다.
속으로 비소를 머금은 난 당당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 대신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대신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로프트 영애, 어서 오세요.”
정수리가 반들반들한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갑작스럽게 초대장을 보내시어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대신관님의 모습을 보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이렇게 영애의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요새 크로프트 공작가에 관한 일로 제국이
시끄러웠다 보니……. 주신께서 공작가에 노하신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대신관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비난했다.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그가 얼마큼 음흉한 인간이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난 대신관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저 역시 신전에 대한 걱정이 컸답니다. 나날이 신전을 향한 비판이 끊이질 않으니 저야말로
주신의 영광이 신전을 떠난 것이 아닐까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모른 답니다.”
대신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예전처럼 내가 양순히 그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
난 매끄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이러다 혹시라도 주신께서 신관님들을 영원히 떠나버릴까 봐서요.”
대신관의 마침내 굳어지고, 젊은 신관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크로프트 영애! 지금 무슨 무례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무례한 말씀이라니요. 전 단지 신전의 상황이 걱정되어 드린 말씀이랍니다. 대신관께서도 주신의 뜻이
공작가를 떠났을까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대신관님께서도 무례하신 건가요?”
“그건…….”
신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만하시게. 영애의 우려를 그리 곡해하면 쓰겠나.”
대신관이 말하자 억울하다는 듯 얼굴이 붉어진 신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대신관은 나를 향해 미소를
그렸다.
“6 년의 세월이 역시 짧지가 않습니다. 영애께서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대신관님께서는 그대로 이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헌데 오늘 오찬이 대신관님과 조용히 하는
오찬이 아니었나……보군요.”
둘러보니 만찬 룸엔 나를 물어뜯을 준비를 단단히 했을 신관들이 열 명이나 더 있었다.
거기다 내 자리는 그들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대신관은 오찬의 음식 대신 나를 씹어먹고 싶어 부른 것 같았다.
“아, 고아원에 큰 기부를 한 크로프트 영애와 식사한다고 하니 다른 신관들도 같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지 뭡니까. 미리 말씀을 못 드린 것은 죄송하지만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러셨군요.”
귀족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오찬 자리를 마련하는 건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10 명의 객을 더 초대하다니. 예법을 모르는 평민도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기부금에 눈이 먼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대신관은 대놓고 치졸함을 보이고
있었다.
대신관을 상대할 생각에 나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었다.
헌데 이런 어린애들 장난 같은 행동을 상대해야 한다니.
전의가 상실될 정도였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자리로 향하려던 그때, 만찬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대신관.”
이 목소리는…….
점점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탁-
내 옆에서 발이 멈춘 순간,
“언제부터 그대들의 목이 그렇게 뻣뻣했는지 궁금하군. 오랜만에 봐서 내 얼굴을 잊기라도 했나 보지?”
레이몬드의 서늘한 음성이 룸 안을 울렸다.
그제야 멍청하게 굳어 있던 대신관과 신관들이 우르르 일어나 묵례를 했다.
“황제 폐하.”
신을 모시는 자들이기에 황제를 향한 예는 약소하게 갖추는 것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당황스러움에 그를 돌아봤지만 레이몬드는 대신관만을 응시했다.
“대신관, 오랜만에 보는군.”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데 폐하께서 갑자기 신전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마치 내가 못 올 곳에 왔다는 듯한 물음이군. 주신께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면 언제든 올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레이몬드의 물음에 대신관은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물론입니다. 신분의 고하 없이 언제든 주신을 뵐 수 있는 곳이 바로 신전이지요. 단지 기도실도 아닌
이곳으로 오신 것에 놀라 물은 것뿐이었습니다.”
“아, 기도실로 갔더니 그대가 오찬을 들러 갔다 하기에. 내 오랜만에 대신관과 오찬이라도 해 볼까 들린
건데 이미 객이 있더군.”
레이몬드는 날 힐끗 보았다.
스치듯 마주쳤던 검은 눈동자는 화가 난 듯 딱딱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예, 크로프트 영애께서 고아원에 큰 기부금을 보내 주시어 감사의 뜻을 담아 오찬을 함께 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오찬을 이렇게 말인가.”
레이몬드는 자리를 채운 신관들을 쓱 둘러보았다. 신관들은 당황하며 그의 매서운 시선을 피했다.
“내 살면서 이렇게 특이한 오찬은 처음 보는군. 대신관.”
“……저희는 그저…….”
“이것은 마치 죄를 지은 자를 심문하는 장소 같지 않은가.”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폐하. 심문이라뇨.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아, 그래, 그들은 신관이지.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하도 보지 못하여 내 가끔 이렇게 신관인지 그저
신전을 운영하는 자들인지 헷갈리곤 하는군.”
레이몬드는 비소를 숨기지 않았다.
순간 대신관의 얼굴이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붉어졌다.
레이몬드의 시선을 피하는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차마 반박할 말이 없는 듯했다. 당장 신성력을 보여줄 수도 없었으니까.
레이몬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대신관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신관. 아무래도 오늘 오찬은 처음부터 잘못된 듯한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예. 제가 오찬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듯합니다. 송구합니다.”
대신관은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대신관을 응시하던 그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프트 영애, 이만 돌아가지.”
분노가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던 그가 먼저 만찬장을 떠났다.
내가 무슨 말을 해 보기도 전에 시작되지도 않은 오찬이 끝나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들에 잠시 멍해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뒤따라 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 거야.”
내가 신전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소리쳤다. 몹시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왜 내게 화를…….
오히려 내가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갑자기 상황에 끼어든 건 레이몬드였으니까.
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라뇨, 전 대신관님의 초대를 받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신관의 초대에 왜 응했냐는 말이야!”
레이몬드는 짜증 가득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거기다 괴로운 듯 얼굴까지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도 내가 나빠야 하는 상황인데 왜 그가 이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의 과민 반응을 이해할 수 없기에 자연히 내 대답도 부드럽게 나가지만은 않았다.
“그냥 신관도 아닌 대신관입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이상 초대에 응하는 것이 예의인 것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예의? 네가 유산했을 때 사람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던 놈들에게 예의?”
짐승이 포효하듯 눈을 번뜩이던 레이몬드가 주춤했다. 꺼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100 화

하지만 그 순간 알았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지를.
그는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그러는 듯했다.
신전에서 내게 저질렀던 일 중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 바로 내가 유산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i>‘황후 폐하께서는 신앙심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그러니 신께서 아이를 허하지 않으시는 것이겠지요.’
</i>
<i>‘아이를 잃다니, 그것이야말로 불민한 믿음에 대해 신께서 내린 벌이 아니겠습니까.’</i>

에둘러 말했을 뿐 내 믿음이 부족하여 아이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대신관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저를 모욕함이었음을 알았었지.
하여 오늘 온 것이었다. 대신관이 헛소리라도 지껄이면 배로 돌려주려고 말이다.
근데 그때의 일을 그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신전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는 내가 대신관에게 모욕을 받을까 걱정하여 온
듯했다.
하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충분히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또한 지금에 와서야 저러는 것이 어이가 없기도 했다.
“폐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의외입니다.”
“뭐?”
“마치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들려서요.”
난 그가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유산한 당일을 제외하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업무를 보았고 사람들을 만났으며, 슬퍼하는 내게 무슨 말을
했었더라.

<i>‘아이는 다시 가지면 되니 너무 상심하지 마.’</i>

그에게는 다시 낳으면 그뿐인 아이였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칼라일을 낳은 후에도 첫째 아이에 대해 잊어본 적이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태명을 부를 때면 마치 대답하 듯 전해져 온 그 태동.
그를 잊지 못해 칼라일의 태동을 느낄 무렵엔 얼마나 울었었는지.
더 이상 그와 과거에 관련된 일로 화를 내고도, 싸우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이 이야기만은 달랐다.
그는 그 아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난 분노를 숨기지 않은 목소리로 굳어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 아이를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했던 건, 폐하가 아니셨나요?”
얼굴을 찡그린 그가 되물었다.
“뭐? 없는 취급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이가 죽고 폐하께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또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보셨죠.”
“……그건.”
“슬퍼하는 제게 해 주신 말이라곤 다른 아이를 가지면 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말을 할수록 그때의 무참함이 떠올라 감정이 격해졌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그를 바라보는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간 눌러두었던 감정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제게 위로조차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죽은 아이를 그리워한 적이나
있으십니까? 폐하께선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없으십니다!”
난 복받치는 울음을 억누르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당황으로 굳어 있었다.
그와 시선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엘리야.”
그에게서는 마치 목이 졸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잊은 적…… 없었다. 그 아이는 내게도 첫 아이였으니까.”
“…….”
그는 한 손으로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느리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하지만 나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네가 너무 괴로워하는 걸 나도
보기 힘들었고, 아니, 그렇더라도 널, 너를 그렇게 혼자 둬서는 안 됐었는데…….”
그의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에서는 지난날 내가 느꼈던 까마득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이제 와서,”
하지만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해 봤자 뭐가 달라질까.
적선하듯 던져지는 위로의 말일지언정, 그게 필요했던 건 지금의 내가 아닌 그때의 나였는데.
격한 감정이 가라앉고 한결 차분해진 난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신들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때의 괴로움을 제 가슴속에 묻어두었듯, 폐하께서도
제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계시거든…….”
고해성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문제라면 더더욱.
“그걸 제 앞에 드러내지 말아 주세요. 제 상처를 헤집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내 서릿발 같은 차가움에 놀란 것일까.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알아. 너무 늦었다는 거.”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제 일에 관여치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선을 넘는 그에게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몰랐다.
첫 아이, 떠올리기조차 죄스러운 그 역린을 멋대로 건드린 그의 잘못이었다.
“……앞으로 조심하지.”
레이몬드는 내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상처받은 얼굴로.
어느새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칼라일과 야시장에 놀러 가기로 한 약속 시각이 다 되고 있었기에 어차피 이만 가 봐야 했다.
“그럼 전 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순순히 물러나는 태도가 그답지 않았지만 내겐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칼라일의 존재 때문이라도, 내게 향한 관심의 고리를 조금이라도 끊어 두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는 시선을 내리뜨고 서 있는 그를 싸늘히 지나쳤다.

* * *

“미안하다.”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마차가 시야에서 흐려질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사과였다.

<i>‘이제 와 이런 말을 하신들 무엇이 달라질까요.’</i>

레이몬드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에 얼룩지는 아픔을 봤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따듯한 말 한마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가 그렇게 가고, 네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나 또한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었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비겁한 후회가 마음에 속에 겹겹이 쌓였다.
죽은 아이와 엘리야의 상처.
엘리야의 끝나지 않을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그의 귀를 맴돌았다.
유산 소식이 알려진 뒤, 그는 뒷수습을 하느라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었다.
아이가 죽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신의 분노니 어쩌니 하는 망언을 퍼붓는 신전.
거기에 황실의 후계를 위해서이니 일부일처제에 예외를 둬서라도 후궁을 들이란 귀족들의 상소가
빗발쳤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상처가 치유될 수만 있다면 수백 번 수천 번 무릎을 꿇고 빌 수 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가 없다.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에 스민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변명 따위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그 정도로 비겁한 쓰레기가 될 수는 없었다.
아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그녀에게 처음 꺼내서일까.
엘리야의 상처만큼이나 아이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힘들게 가진 첫아이였다.
엘리야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을 때. 그때의 기분은 정말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벅찼고, 또 한편으론 두려웠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그였기에 아이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할까 봐.
임신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불안해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사산된 아이라 부정 탄다는 이유로 마지막 길을 제대로
배웅조차 하지 못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레이몬드의 괴로운 한숨이 퍼졌다.
그리고 그때 기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지금 출발하셔야 할 듯합니다.”
기사의 조심스러운 말에 레이몬드는 간신히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 왔다.
그는 오늘 밤 드로이트 공자를 비밀리에 만나기로 했었다.
드로이트 공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카르텔에게 비밀스럽게 만날 자리를
마련하라 명했었다.
괴로운 감정을 익숙하게 가슴에 묻은 후 그는 말에 올라섰다.
“지금 출발한다.”
수도 외곽으로 말을 달려 나온 레이몬드는 막 야시장이 열린 소란스러운 마을의 광장을 지나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르텔이 서 있는 곳에서 말을 멈추었다.
“폐하.”
카르텔이 다가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카르텔의 뒤편의 폐허 같은 술집을 보며 물었다.
“드로이트 공자는 안에 있는 것이냐.”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그를 지나 술집 문을 열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래전 끊긴 듯 귀를 긁는 소리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들려오는 낮은 음성이 레이몬드의 귀를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촛불 몇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어렴풋한 불빛 사이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화려한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항상 웃는 듯한 호감형의 얼굴.
저 서글서글한 미소를 엘리야에게도 늘 보여줬겠지.
두 사람의 사이는 그가 아는 것보다 친밀할 것이다.
엘리야는 드로이트 공자를 보호했고 드로이트 공자는 엘리야를 보호했었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자 속이 뜨거워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때, 드로이트 공자가 유려한 몸짓으로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레이몬드는 제레미를 향해 다가갔다.
“이 장소를 정한 게 너였다지.”
레이몬드는 허름하다 못해 곧 무너질 듯한 술집을 둘러 보았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하오나 이곳이 제일 안전합니다. 제 친구 놈이 오래전 버리고
떠난 술집이라 근처에 오는 사람 자체가 없죠.”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도 제레미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는 모습은 파티 날 그의 앞에 신분을 밝히던 때와 비슷했다.
드로이트 공작마저도 그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땐 두려워했건만, 제레미는 여러모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자였다.
“사람이 아니라 유령도 오지 않을 법한 곳이군.”
머쓱한 듯 하하, 웃은 제레미는 언제 부서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나무 의자를 툭툭 쳤다.
“그래도 생각보다 튼튼하니 앉으셔도 부서지진 않을 겁니다.”
제레미가 앉으라는 듯 의자를 레이몬드의 앞으로 두었다.
낡은 의자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우던 그는 뒤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라.”
“하오나 폐하, 호위도 없이 혼자서 계시는 것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레이몬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기사들이 빠르게 물러갔다. 술집 안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제레미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것에 어쭙잖은 거짓을 말한다면 넌 오늘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예, 폐하.”
제레미는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며 마주 앉았다.

101 화

밤하늘 아래 야시장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 반지로 모습을 바꾼 난 편안한 튜닉 드레스를 입고 칼라일과 함께 서커스단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 엄마, 저거 봐요! 꽃이 비둘기로 변했어요!!”
서커스단의 화려한 손놀림 아래 장미꽃이 새하얀 새가 되어 날아가자 칼라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칼라일은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게! 너무 신기하다!”
맞장구를 쳐 준 순간, 수십 개의 장미꽃이 하늘에 뿌려짐과 동시에 새하얀 새들로 변했다.
“와아-!”
퍼드득, 힘차게 비상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도 함께 터졌다.
하얀 새들이 밤하늘을 나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진심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멋있다.”
자유롭게 날던 새들이 주인의 휘파람 소리에 새장으로 들어가고 서커스단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귀여운 새 인형이 단돈 10 쿠퍼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주 잡은 칼라일의 작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반짝이는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갖고 싶은 거구나.
“칼라일, 인형 사 줄까?”
기다렸다는 듯 칼라일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칼라일이 너무 사랑스러워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칼라일을 꽉 안고 다람쥐 같은 볼에 뽀뽀를 마구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은 난 인형을 들고 있는
서커스 단원에게 손을 들었다.
“여기, 하나 살게요.”
값을 치르고 인형을 칼라일에게 건네주자 칼라일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꽉 끌어안으려 한 순간, 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
우리가 서커스를 보는 동안 잠시 먹을 걸 사러 갔던 제드가 돌아온 것이었다.
“제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던 칼라일은 손을 놓고 쌩하니 제드에게 달려갔다.
“……칼라일.”
이렇게 단번에 버려지다니.
황당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라일은 어느새 제드에게 안겨 아이스크림을 받아먹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도 잠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묻히며 먹는 칼라일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맛있지?”
“맛있어요!”
“아저씨가 특별히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맛으로 사 왔어. 맛있으면 어서 볼에 뽀뽀 한번 해 줘.”
칼라일이 제드의 볼에 뽀뽀를 하자 제드의 걸걸하게 웃었다.
“칼라일, 어떻게 엄마한텐 안 해 주고 제드 아저씨한테만 해 줄 수 있어? 엄마 너무 서운해.”
시무룩한 척 눈꼬리를 내리자 칼라일이 눈을 크게 뜨며 내게 손을 뻗었다.
“엄마도 해 줄게요. 난 엄마가 제일 좋아.”
칼라일이 품에 안겨 와 내 볼에 쪽 입을 맞췄다.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쁜 거야.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꽉 끌어안자 칼라일이 버둥거렸다.
“엄마, 숨 막혀요.”
“미안.”
포옹이 격했는지 칼라일이 외쳤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내려 주자 제드가 다가왔다.
“오, 이제 춤추는가 보네.”
제드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서커스 공연단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사람들이 보였다.
즐거운 음악 소리가 울리고 오랜만에 열린 야시장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점점 춤을 추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어린아이들도 그에 맞춰 뛰어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때, 칼라일이 말했다.
“엄마, 엄마 나도 저기서 같이 놀아도 돼요?”
칼라일이 손끝으로 아이들이 모인 곳을 가리켰다.
“음…….”
“엄마, 조금만 놀다 올게요. 가고 싶어요.”
내가 망설이자 칼라일이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매달렸다.
“엘리, 우리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으면 되니까 잠깐은 괜찮지 않겠어?”
칼라일의 눈빛 공격에 이미 한 명이 넘어갔다. 그리고 나 역시 이미 넘어간 지 오래다.
“조금만 놀다가 와야 해. 알았지? 멀리 가도 안 되고.”
아이의 어깨를 잡고 당부하자 칼라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네!”
어서 달려나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칼라일이 발을 동동거렸다.
“조심해서 다녀와.”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칼라일이 뛰어나갔다.
아이들은 칼라일을 신나게 맞이해 주며 금세 어울려 놀았다. 칼라일의 얼굴에 즐거운 웃음이 가득해지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칼라일을 보낼 날이 딱 열흘 남았네.”
제드의 말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움찔했다.
“……그러게.”
열흘 뒤면 칼라일은 룬트 왕국의 아카데미로 떠날 예정이었다. 지금 이 입학 시즌은 아니었지만 돈을 좀
써서 중간에 입학할 수 있게 했다.
칼라일이 다니던 학술원과 연결이 된 곳이었으니 계속 룬트 왕국에 살았더라면 자연스럽게 그곳을 다녔을
것이다.
허니 아예 생뚱맞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칼라일을 보내려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심란한 얼굴을 보았는지 제드가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 칼라일은 잘 적응할 거야. 애가 성격도 활달하고 적극적이잖아. 금방 적응해서 친구들도 잔뜩
사귈걸? 또 헬란도 함께 가잖아.”
“그냥……. 내가 칼라일을 고생시키는 거 같아서.”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 한 결정이지만, 그게 오히려 아이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흠……. 엘리.”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말을 이었다.
“넌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칼라일을 위해 이곳에서의 네 삶도 포기하고 지난 6 년간
열심히 살았잖아. 네가 정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칼라일을 황자로 키웠겠지.”
“…….”
“넌 충분히 좋은 엄마니까, 그런 자책감은 가지지 마.”
진심이 가득한 위로에 감동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는 머쓱한지 턱을 긁적였다.
“……제드, 고마워.”
“아니, 뭐 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
펑! 펑! 펑!
갑자기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제드의 목소리가 묻혔다. 고개를 돌리자 서커스단에서 쏘아 올린 폭죽이
화려한 불꽃으로 터지고 있었다.
불꽃을 구경하려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아이들이 놀던 곳에도 사람들이 뒤섞였다.
“칼라일을 데려와야겠어.”
뒤섞이는 사람의 수가 순식간에 너무 많아지고 있어 난 서둘러 아이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몰려든 인파를 뚫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만. 비켜 주세요, 잠시만요.”
밀리는 사람들과 어깨가 이리저리 부딪혔다. 제드가 뒤에서 사람들을 밀어내 봤지만 쉽지가 않았다.
“윽,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들 몰린 거야. 젠장. 엘리, 칼라일 보여?”
“아니, 아직.”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제드가 거칠게 움직였다. 제드의 큰 덩치에 부딪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물러나자 그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이 있던 곳에 도착한 순간.
난 아무리 둘러봐도 칼라일이 보이지 않아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라일이 안 보여…….”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칼라일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가 나를
덮쳤다.
칼라일을 잃어버린 거면……. 누군가 납치라도 한 거라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에 숨이 턱턱 막혔다.
“칼라일! 칼라일!”
미친 듯이 이름을 외쳐보아도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엘리, 일단 진정해.”
제드가 나를 붙잡았다. 강한 힘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멀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래. 바로 왔으니까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일단 혹시 모르니 난 경비대에 들를게. 상단에 연락해서
기사들을 불러야겠어.”
제드가 움직이려 하던 그때, 한 소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칼라일이면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작은 애 맞죠?”
열세네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손으로 칼라일의 키를 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맞아. 어디로 갔는지 아니?”
다급히 묻자 소년이 시장 쪽을 가리켰다.
“굴러간 인형을 찾으러 저쪽으로 갔어요.”
“알려줘서 고마워!”
소년에게 급히 답한 제드와 난 서둘러 시장으로 달려갔다.

* * *

“폐하,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인사를 올리는 제레미를 흘끗 바라본 그는 답을 하지 않고 말에 올라타 출발했다.

<i>‘전 드로이트란 성을 경멸합니다. 하여 제가 드로이트의 마지막이 되려 합니다. 폐하께서 절


믿어주신다면 드로이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국이 안정을 찾는 날 떠나겠습니다.’</i>
<i>‘내가 널 어떻게 믿지?’</i>
<i>‘크로프트 영애와 제 사이를 아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이미 제 마음도 짐작하셨겠지요.
크로프트 영애가 폐하의 충신인 이상 저 역시 폐하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i>
황제를 배신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엘리야를 배신할 수 없기에 황제를 배신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드로이트 공자는 그에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그 진실이 엘리야와 연관될수록 그의 속이 뜨거워졌다. 무언가가 속을 갉아먹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더욱 화가 나는 건 지금으로선 드로이트 공자가 필요했다.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한 증거를 잡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짜증 나는군.”
시원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가슴이 답답했다.
“폐하, 바로 환궁하시겠습니까?”
그때 카르텔이 물어왔다.
술집을 벗어난 그들은 지금 한창 야시장이 열리는 마을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의 괴로운 상황과 달리 즐거운 야시장의 분위기를 보던 레이몬드는 문득 야시장에서 엘리야와 우연히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와 함께했던 그때가 떠오르자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거 같았다.
물끄러미 야시장을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말에서 내렸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조금 둘러 보고 올 테니.”
야시장은 낮 못지않게 활기찼다. 광장에선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은 시장
양쪽으로 늘어진 가판대에서 여러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엘리야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그리며 느릿하게 시장을 걷던 그때, 레이몬드의 다리에 무언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그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102 화

엘리야……?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떠올랐다.
보랏빛 눈동자가 크로프트 가문의 특징적인 내력이기는 하나, 아이의 머리는 곱슬곱슬한 금발이었다.
방계 혈족이 많은 가문이니 어쩌면 그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야가 떠오르는 것은 눈동자 색이 지나치게 비슷해서 그런 것뿐이리라.
그때, 아이의 작은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아저씨, 혹시 많이 아파요?”
아이는 말이 없는 레이몬드를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5-6 살쯤 되었을까, 어린아이가 진지하게 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너야말로 다친 곳은 없느냐?”
꽤나 세게 머리를 부딪쳤었다. 혹 시나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엄마가 항상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했는데 이 인형을 줍느라 아저씨를 못 봤어요.”
아이는 흙이 잔뜩 묻은 인형을 그에게 들어 보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의가 바르구나.”
고개를 든 아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가 그랬어요. 착한 아이는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안다고요! 전 착한 아이니까 엄마 말을
잘 들을 거예요!”
“그래? 어머니가 아주 현명하시구나.”
“당연하죠!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걸요!”
아이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었다.
“근데 네 어머니는 어디 있지?”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나 다른 보호자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어……?”
레이몬드는 그의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설마 엄마를 잃어버린 건가.”
낮게 말하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가 멀리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제가 멀리 와 버렸어요.”
아이는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낯선 상황에 겁을 먹은 듯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자 레이몬드도 당황스러워졌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주춤거리던 그는 일단 몸을 낮추었다. 아이와 시선을 맞춘 그는 작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음, 네 이름이 뭐지?”
“흡, 흐읍. 칼, 라일이요.”
훌쩍이는 아이의 눈가가 붉었다. 엘리야를 닮은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자 레이몬드의 마음 또한
불편해졌다.
마치 제가 엘리야를 울리기라도 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큼, 목을 가다듬은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칼라일, 내가 엄마를 꼭 찾아줄 테니 울지마라. 그때까지 네 옆에 있을 테니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그 말을 하려 했지만 레이몬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갑자기 품 안으로 안겨든 칼라일 때문에.
칼라일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몬드는 순간 몸이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
아이를 처음 안은 것도 아니었는데. 에드먼드가 어릴 적 몇 번 안아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달랐다.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가 이상하게 심장을 울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알 수 없는 심장의 울림에 레이몬드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혼란이 겹친 그때, 칼라일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흐, 흐아아앙!”
많이 무서웠던 것인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칼라일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한 번도 아이를 토닥여본 적 없었기에 참으로 서툰 손길이었다.
“……괜찮다. 울지 마라.”
“흐아앙! 엄마……!”
나직이 달래보자 칼라일이 엄마를 찾으며 그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황하다 이윽고 거북함에 아이를 밀어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아이들에게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레이몬드는 칼라일이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라일이 우는 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칼라일이 울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처음 보는 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몹시도 당혹스러웠지만, 그는 칼라일을 달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작은 등을 토닥였을까. 어느 정도 진정했는지, 칼라일이 고개를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온기에 묘한 아쉬움이 들던 때. 칼라일이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닦았다.
“흡, 감사합니다. 아저씨. 엄마 올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세요. 엄마 금방 저 찾으러 올 거예요.”
칼라일은 이제 울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말도 잘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니 문득 아이의 신분이 궁금해졌다.
잘 관리된 아이의 외모와 한눈에 봐도 비싼 옷을 보면 평민의 아이는 아닌 거 같았다.
귀족가의 아이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호위기사 하나 없이 야시장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를 빤히 보고 있자 또 엘리야가 떠올랐다. 처음엔 보라색 눈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면 볼수록 엘리야를 닮은 것 같았다.
왜 자꾸 엘리야가 떠오르는 거야.
아무래도 그의 머릿속이 엘리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게 급선무였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칼라일, 어머니의 이름과 외양을 말해 주면 내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마.”
“아, 엄마 이름은 엘……”
“칼라일!! 엄마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칼라일이 이름을 말하려 한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 건지 갈라져 있는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칼라일!”
그 느낌에 쐐기를 박듯 다시 한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아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엄마!”
누군가를 발견한 듯 칼라일은 곧장 달려나갔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굳어 있던 레이몬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라일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서.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엄마의 품에 안기는 칼라일과 아이를 꽉 끌어안는 여자.
마침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몬드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엘리야.”
네가 왜 여기에…….
갈색 머리칼의 평범한 얼굴.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그녀였지만 레이몬드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흐아앙! 엄마!”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그리고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엘리야의 것이었다.
“……엄마?”
레이몬드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멀리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만 보였다.
‘저 아이가.’
엘리야의 아이란 말인가.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엘리야의 곁으로 다가온 한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남자의 화려한 백금발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밝았다.
비틀거리는 엘리야의 팔을 부축하고 자연스럽게 칼라일을 안는 그는.
제레미 드로이트, 드로이트 공자였다.
칼라일이 익숙하게 제레미의 품에 안기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제레미의 백금발과 칼라일의 금발이 시야에서 묘하게 어우러졌다.
“…….”
레이몬드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제레미에게서.
한 손으로 칼라일을 안고 한 손으로 엘리야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모습은…….
엘리야의 남편이자 저 아이, 칼라일의 아빠 같았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한 그들을 보자 누군가 그의 머리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 속에서도 그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그들의 완벽함 속에 그가 불순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는 멍청히 다가가지도 외면하지도 못했다.
그사이, 제레미가 엘리야의 어깨를 단단히 고쳐잡았다. 그리고 마치 엘리야에게서 그를 차단하듯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결국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 * *

“엘리, 이제 좀 괜찮아요?”
시장에서 멀어져 광장으로 나오자 제레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네, 이제 좀 괜찮아요. 칼라일은 제가 안을게요.”
칼라일을 찾자 온몸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엘리, 내가 안을게요. 지금 손 떨리고 있어요.”
제레미의 말에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자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아…….”
“여기도 다친 것 같은데.”
그의 조심스러운 손끝이 내 볼을 스쳤다. 그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보니 미친 듯이 시장을 뛰어다니다
어딘가에 긁힌 듯했다.
“아프지는 않은데.”
어색하게 웃자 제레미는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칼라일을 갑자기 잃어버려서 제드랑 같이 찾고 있었는데…… 아, 제드는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아,
그러고 보니 제드를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엘리, 엘리. 진정 좀 해요. 이제 괜찮아요. 칼라일 여기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자 제레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한결 차분해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난 손을 놓으며 그에게 칼라일을 달라 손을 뻗었다.
“내가 안을게요.”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잠시 날 걱정스레 보던 제레미는 이내 조심스럽게 칼라일을 넘겨주었다.
따뜻한 아이의 온기를 느끼자 그제야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심장에 퍼졌다.
“으음……. 엄마…….”
시장을 벗어나는 새 울다 지쳤는지 깜박 잠이 들었던 칼라일이 내 품에서 깨어났다.
칼라일을 꼭 끌어안았던 난 한껏 내 볼을 아이의 볼에 비볐다.
“칼라일 앞으론 절대 이렇게 혼자 어디 가 버리면 안 돼, 알았지?”
“네. 아, 엄마 근데…… 아저씨 있었는데.”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칼라일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칼라일의 온기를 느끼던 난 멈칫하며 얼굴을 뗐다.
“아저씨?”
“엄마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던 아저씨요. 아까 거기에 있었어요.”

103 화

누군가 칼라일을 돌봐주고 있었던 건가.


“그 아저씨한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해야 하는데…….”
칼라일이 시장 쪽을 보며 말했다.
감사 인사를 못 하고 온 게 마음에 걸리는 듯 칼라일이 끙, 작은 신음을 흘렸다.
“칼라일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제레미가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에서 만났다는 거 같은데…….”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미 시장을 벗어나 다시 돌아가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인상착의라도 물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때 제레미가 말했다.
“평민들의 인상착의는 다 비슷해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제레미의 말이 맞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시장 쪽을 보고 있는 칼라일을 고쳐 안았다.
“칼라일, 그 아저씨는 칼라일이 엄마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셨을 거야. 감사하다는 인사는…… 엄마가
대신 전해줄 테니까 걱정 마.”
난 칼라일이 괜한 마음을 쓰지 않도록 달랬다.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칼라일은 시장 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 아저씨란 사람이 잘 해 줬던 것일까.
낯을 가리는 아이인데도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칼라일의 기억에 남은 듯했다.
“네, 엄마.”
잠시 그곳을 보던 칼라일이 이윽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많이 놀랐을 칼라일의 등을 토닥이던 그때, 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
시장 반대편을 찾아보겠다고 갔던 제드가 돌아온 것이었다. 제드는 내 품에 안긴 칼라일을 보고 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찾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어디 있었던 거야?”
이제 보니 제드도 크게 놀랐던 듯 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장 안에 있었어. 제드, 괜찮아?”
“나는 괜찮지. 다친 데는 없고?”
“응. 괜찮아. 칼라일도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그래. 그래.”
천만다행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이제야 내 옆에 서 있던 제레미를 본
듯했다.
난 제드에게 제레미를 소개했다.
“아, 제드 이쪽은 나와 친한 제레미 드로이트.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야.”
제드는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칼라일 때문에 그러나.
하지만 일전의 파티 사건으로 제드에게도 말했다. 드로이트 공자와 룬트 왕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다고.
루몬트가 있는 자리에서 제레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렇게 놀랄 만한 이유는 없을 텐데.
과하게 당황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상해 입을 열려던 찰나,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닉스 상단주 제드 맞지? 용병 일을 할 때 그대의 이름을 자주 들었었지.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제레미는 제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제드는 움찔하며 제레미의 손을 잡았다.
“피닉스 상단주 제드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드로이트 공자님.”
“사적인 자리니 편하게 말해도 돼. 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 네.”
제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용병들은 물론 사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제드 답지 않은 어색한 모습이었다.
난 제드와 제레미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제드만 살짝 이상할 뿐 제레미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했지만 특별한 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걸까. 피식, 가볍게 웃은 제레미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 시간이 늦었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제레미 아저씨, 벌써 가는 거예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칼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음, 오늘은 아저씨가 일이 있어서 가야 할 거 같아. 미안해.”
“그럼 우리 언제 또 봐요? 아저씨랑 놀고 싶어요.”
오랜만에 만난 제레미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칼라일이 보챘다.
칼라일을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짓던 그가 내게 말했다.
“엘리, 저 칼라일 보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곧장 대답하던 난 아차 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근데……. 칼라일이 조금 있으면 제국을 떠나서…….”
“떠나요?”
“네. 룬트 왕국에 있는 아카데미에 다니기로 했거든요.”
아, 제레미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내일은 일이 있으니 모레 놀러 갈게요. 엘리에게도 전할 말이 있으니까요.”
“네. 사람을 보내 저택 위치를 알려드릴게요.”
“고마워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요. 제드, 다음에 또 보지.”
“……네, 조심히 가십시오. 공자님.”
“칼라일, 모레 보자.”
“모레 꼭 보는 거예요? 우리 약속해요.”
“그래. 약속하자.”
칼라일과 손가락으로 약속한 제레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눈인사를 전한 그가 정말 먼저 떠났다.
“제드, 왜 그렇게 어색하게 굴어?”
“아니 어색한 게 아니라 갑자기 여기서 드로이트 공자를 만날 줄은 몰라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칼라일 때문에 한바탕 놀라서 내가 지금 정신이 영 없어. 넌 안 그래?”
“……나도 그렇지.”
칼라일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일은 처음 겪었기에 긴장이 풀린 지금 피곤함이 밀려오긴 했다.
“드로이트 공자고 뭐고 지금은 돌아가서 쉬고 싶다. 엘리, 우리 이만 돌아가자.”
정말 칼라일 때문에 놀라 그랬던 것인지 그가 내쉬는 한숨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다른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어 난 생각을 접었다.
“응.”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불안감에 칼라일을 꽉 안은 난 제드와 함께 야시장을 떠났다.

* * *

에그리타 제국의 황성 태양궁.


환궁한 레이몬드는 침실이 아닌 집무실로 향했다. 잠을 자기엔 지금 그의 머릿속이 터질 거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
엘리야에게 아이가 있을 수 있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그의 입 안을 껄끄럽게 맴돌았다.
칼라일과 엘리야 그리고 제레미.
이 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도 그는 한참이나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게 정말 진짜인지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졌던 아이, 그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가 안겼던 여자. 아이의 금발과
닮은 백금발을 가진 남자.
레이몬드는 자신이 보았던 아주 짧은 순간의 장면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사실은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을까.
그가 미쳐버려 허상을 본 게 아니었을까.
수십 번 반복되는 장면을 부정해 보려 했지만,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서 있는 시장 한복판이 꿈이 아니란 것을.
그가 본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야에게 아이가 있다.
그가 모르는 아이가 있다.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면, 게다가 그 아이가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인다면 그의 아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여 이성이 돌아온 처음엔 칼라일이 그의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칼라일의 모습을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황족의 특징적인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에그리타 제국의 황족의 피는 강했다.
황제의 피를 이은 아이들은 거의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동시에 타고났다.
간혹 그중 하나만을 타고나거나 색이 옅은 아이가 있을지언정 칼라일처럼 아예 흔적이 없는 아이는 없었다.
엘리야가 모습을 바꿨듯 마도구로 칼라일의 모습을 바꾼 게 아닐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에게 인형을 들어
보이던 칼라일의 손은 깨끗했다.
모습을 바꾸는 마도구는 그 술식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마력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아 크기가 컸다.
팔찌나 발찌, 하다못해 반지로 만든다 해도 커다란 마나석이 박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이 마도구로 바뀐 거라기엔 커다란 장신구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은 곧 칼라일의 모습은 마법으로 바뀐 게 아니란 것이다.
정말 보랏빛 눈동자에 금발 머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자식은 아니란 뜻이 되는 것이다.
그의 아이가 아니라면…….
제레미의 품 안에 안기던 칼라일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 순간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용암 같은 뜨거운 것이 그의 심장을 녹이고 이성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분노에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그는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아직 그가 본 것이라곤 정확한 진실이 없는 한 장면일 뿐이다.
그러니 뭐가 진실인지 알아보면 될 일인 것이다.
“카르텔.”
레이몬드는 카르텔에게 몸을 돌렸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르텔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에 함께 있었다.
“예, 폐하.”
“드로이트 공자가 룬트 왕국에 있었다 하였지?”
“예.”
“룬트 왕국에서 드로이트 공자와 크로프트 영애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와. 특히 크로프트 영애가 룬트
왕국에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함께 살았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
“알겠습니다.”
명을 받고 움직이려는 순간, 레이몬드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또 하나. 피닉스 상단이나 드로이트 공자가 수도에 비밀스럽게 마련한 저택이 있는지 그것도
알아보아라.”
크로프트 공작가엔 아이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었다.
또한 엘리야 역시 아이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부러 아이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아이를 위해 마련한 저택이 분명 있을 것이다.
“카르텔,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마라.”
“명을 받듭니다.”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레이몬드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 * *

“어서 와요, 제레미.”


이틀 후, 제레미는 칼라일과 약속한 대로 저택에 방문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온 그를 서둘러 맞이하러 나온 난 그의 양손 가득한 선물에 멈칫했다.

104 화

장난감 가게를 털어오기라도 한 건지 양손 가득 장난감이 삐죽 튀어나온 봉투가 들려있었다.


내 놀란 시선을 느낀 듯 제레미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하하.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하나 둘 담다 보니 이렇게 늘어나 버렸네요. 좀…… 많죠?”
“칼라일은 엄청 좋아할 것 같네요.”
눈치를 보는 그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인에게 손짓하자 하인이 그가 가져온 선물들을 받아들었다.
“근데 제가 너무 일찍 오긴 했나 봐요. 엘리뿐이네요.”
하인에게 선물을 전부 넘긴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침 먹을 때가 막 지난 이른 시간이었다.
칼라일도 아직 자고 있었고, 제드 역시 어제 새벽 늦게 들어와 한참 꿈나라였다.
“제드는 어제 일이 좀 있었어서 늦게 일어날 거고 헬란은 칼라일 곁에 있어요.”
원래는 내가 있었지만 그가 왔다는 소식에 내려온 것이었다.
오후쯤 돼서야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빠른 방문이긴 했다.
“이렇게 일찍 온 건……. 나한테 전할 말 때문인가요?”
그날 헤어지기 전, 그는 내게 해 줄 말이 있다 했었다.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마 이른 시간에 온 것은 나와 조용히
대화를 하기 위해서일 거다.
예상이 맞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리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집무실로 모실게요. 이쪽으로 와요.”

* * *

“룬트 왕국의 홍차군요.”


하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그가 말했다.
“네. 룬트 왕국이 종종 그리워서 이렇게 차로 기분을 내고 있어요. 혹시 입맛에 안 맞는 거면 다른 차로
바꿔드릴게요.”
“아니에요. 저도 이 차 좋아해요.”
제레미는 빙긋 미소를 그리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엘리.”
“네.”
“폐하를 만났어요.”
미소를 짓고 있던 난 멈칫했다. 그가 할 중요한 이야기가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에 관한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레이몬드의 등장에 입꼬리가 굳었다.
제레미를 건드리지 말라,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었는데.
“……폐하께서 혹시 무슨……”
걱정스레 묻자 제레미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저의 정확한 의중을 알고 싶어 하셨죠. 제가 제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맞는지요.”
“그랬군요. 위험한 일이 없었다니 다행이에요. 폐하께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확실히
증명했나요?”
혹시라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제레미를 죽이려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었는데 레이몬드의 생각이
바뀐 듯했다.
“네……. 뭐, 제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란 걸 증명했죠.”
제레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믿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로요.”
레이몬드가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한 감정이 워낙 안 좋기에 단번에 레이몬드의 믿음을 얻는 것은 힘들 것이라
여겼는데 일이 잘 풀린 듯했다.
그 이유가 살짝 궁금했지만 왠지 그의 사적인 영역일 거 같아 묻지 않았다.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에요. 폐하께선 현 상황의 어디까지 알고 계시던가요?”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음모가
역심에 가까울 것이란 것도요.”
레이몬드 역시 시오스 후작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하긴 적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만큼은 타고난 사람이었으니.
시오스 후작의 행동이 비틀리기 시작한 이상 눈치를 못 챘을 리 없었을 거다.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지.
아버지가 업무에 복귀하시긴 했지만 몸이 크게 상하셨던 만큼 시오스 후작의 일로 무리하시지 않게 내가
도와야 했다.
하지만 막상 레이몬드의 얼굴을 마주 볼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불편했다.
신전에서의 일이 있고 이제 겨우 이틀이 흘렀으니까.
아직 그에게 감정에 북받쳐 소리쳤던 감정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 역시 그날의 일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룰 순 없어.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
하루빨리 증거를 잡아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처리해야 했다.
내일은 레이몬드를 만나러 가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난 제레미를 보았다.
“그럼 앞으로 제레미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건가요?”
“공작과 후작의 사이부터 흔들어 놓을 겁니다. 이미 제가 회중시계를 드러낸 통에 드로이트 공작은 확실히
의심을 품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틈을 파고들어 확실한 반역의 증거를 잡을 계획입니다.”
“파고들만 한 무언가가 나왔나요?”
“아직은 모두 작은 실마리들뿐이라서요. 조금만 더 알아보고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혹시 시오스
후작과 관련해 뭐 알게 된 것은 없나요?”
“음, 시오스 후작이 물의 마법사들과 접촉하고 다닌다는 건 들었는데 그걸로 짐작할 만한 건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근래에 저택에서 칩거하고 있거든요.”
세간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는 걸 알아서인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물의 마법사……. 일단 한동안 시오스 후작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테니 이 기회에 공작 각하를 더욱
흔들어 볼게요. 정보를 알게 되면 상단 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근데 제레미.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이번 일이 다 밝혀지면 드로이트 공작은…….”
난 차마 대놓고 할 수 없는 말에 말끝을 흐렸다.
제레미는 적극적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면 그의 아버지는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반역을 꾸몄으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드로이트 공작가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제레미와 드로이트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를 죽인 레이몬드 역시 복수의 끝에선 무거운 얼굴을 하였으니까.
“음, 엘리가 예전에 그랬죠, 난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
“난 정말 내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권력에 눈멀어 스스로 괴물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러니 난 내가 생각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에요. 공작은 공작의 길을 가는 것이고요.”
제레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가 씁쓸해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때, 집무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시선을 들자 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칼라일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의 시선에 고개를 돌린 제레미가 칼라일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라일!”
어서 오라는 듯 제레미가 두 팔을 벌리자 칼라일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폴짝 제레미에게 안긴 칼라일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제레미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어. 칼라일.”
두 사람의 상봉을 보던 난 집무실로 들어오는 헬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게 다가온 헬란이 제레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네, 헬란. 잘 지냈나?”
“저야 항상 잘 지냈죠. 칼라일 님은 제레미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세수도 안 하고 뛰어가셨어요.”
헬란의 말에 칼라일을 보니 부스스한 머리와 잠옷이 보였다.
“칼라일 아무리 급해도 세수하고 옷은 갈아입어야지. 어서 헬란이랑 옷 갈아입고 와.”
내가 짐짓 엄하게 말하자 칼라일의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제레미 아저씨랑 놀고 싶은데…….”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제레미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안 된다고 엄하게 말하려 한 그때, 제레미가
칼라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아저씨랑 씻기 놀이하러 갈까?”
“씻기 놀이요?”
“아저씨가 100 을 셀 동안 칼라일이 세수하고 또 100 을 셀 동안 옷을 갈아입으면 선물을 하나씩 줄게.
어때?”
“좋아요! 어서 가요!”
신난 칼라일이 외쳤다.
제레미에게 홀랑 넘어간 칼라일이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내게 눈을 찡긋한 제레미가 칼라일을 데리고 나간 뒤, 난 헬란과 웃음을 터뜨렸다.

* * *

엘리야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던 때, 저택으로 가까워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숲 속에 위치한 작은 저택.
저택의 앞마당이 보이는 숲 속에서 말을 멈춘 레이몬드는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i>‘룬트 왕국에서 엘리라는 가명으로 꽃집을 하셨다고 합니다. 남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착하고 예쁜
아가씨라고 시장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i>
<i>‘홀로…… 키웠다고?’</i>
<i>‘네. 남편은 없다고 했답니다. 단지…… 드로이트 공자가 꽃집에 자주 드나들고 친하게 지내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닌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i>
<i>‘아이와도 상당히 친밀하게 지냈다고 하였고요.’</i>
<i>‘저택을 알아보니 피닉스 상단의 지부장이 최근 조용히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파산한 귀족의 저택이라……. 아마 이곳이 아이를 숨긴 곳인 듯합니다.’</i>

카르텔의 보고를 들은 뒤, 레이몬드는 바로 황궁을 나왔다.


저택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지금 그 저택의 앞에 있었다.
칼라일을 우연히 만난, 야시장이 열렸던 마을이 이곳에 멀지 않았다.
허니 이 저택이 맞을 것이다.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은 그의 두 눈과 두 귀로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였다.
칼라일이 정말 엘리야의 아이가 맞는지, 누구의 자식인지.
카르텔의 보고를 들을수록 심장만 더 터질 것 같았으니까.
만약 칼라일이 제레미의 아이라면……. 엘리야는 그와 이혼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제레미를 만난 것이다.
그녀가 제국을 떠난 것은 어쩌면 제레미와 함께 조용히 살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된 건.
과연 그 파티장이 처음이었을까.
생각하고 파고들수록 그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너희는 여기 있어라.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도록.”
기사들에게 명한 레이몬드는 말에서 내렸다.
빠른 걸음으로 저택에 다다른 순간, 저택의 문이 열리며 칼라일이 뛰어나왔다.

105 화

“우와! 나비다!”
칼라일은 노랑나비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작은 꽃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비에게 손을 뻗었다.
잡힐 듯 말 듯한 나비와 함께 꺄르르 즐거운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뒤로 걱정이 밴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라일,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
칼라일을 빤히 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택을 막 나오는 제레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가 왜 그곳에서 나오는 거야.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그를 향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엘리야가 나타났다.
저택을 나오는 그녀의 팔에는 음식을 담은 듯한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곧 마당까지 나온 그녀는 천을 펼쳐 그 위에 바구니를 놓고, 제레미와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띠고서.
그 모습에 못 박힌 듯 발걸음을 멈춘 레이몬드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레미와 칼라일의 즐거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찔러왔다.
“잡았다!”
“꺄악! 엄마 잡혔어요, 구해 줘요!”
칼라일이 높은 웃음을 터뜨리며 엘리야에게 손을 뻗고 엘리야가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구해 주는 듯한 시늉으로 칼라일을 품에 안자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울렸다.
“자, 이제 샌드위치 먹고 더 노는 거야? 아직 아침도 안 먹었잖아.”
“네!”
칼라일과 제레미가 엘리야가 깔아 놓은 천 위로 앉았다.
제레미가 샌드위치를 들어 칼라일에게 먼저 먹였다. 엘리야가 주스를 따르고 세 사람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게…….”
말끝이 떨려 와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익숙하게 서로를 대하는 행동들이 그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인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지금 눈앞의 보이는 장면은 그런 그를 비웃듯 행복한 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엘리야가 임신했을 때……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레 꿈꾸곤 했던 그런 모습.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광경을 찢어버리고 싶은 흉포한 마음도 잠시, 생경한 엘리야의 미소가 눈앞에
박히며 그의 가슴이 지끈거렸다.
난 대체 뭘 바라고 이곳에 온 거지.
엘리야에게 직접 묻고 답을 듣고 싶었지만 차마 저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한 그들에게 그는 불청객이었으니까.
그가 지금 나선다면 엘리야의 저 행복한 미소도 깨질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무저갱에 빠진 듯한 무력감으로 멈추어 서 있던 그때.
칼라일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닦으려 제레미가 손수건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잘못 본 것일까 싶어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제레미는 숲 속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환영을 본 것은 아닐까 느리게 눈을 깜박여 보았지만, 저택과 멀지 않은 숲 속,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황제가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한참을 그를 향했음에도, 황제는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엘리야와 칼라일이 있었다.
황제가 칼라과 엘리야를 보고 있다.
그 사실에 제레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제레미는 순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대체 황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으니까.
엘리야에게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도 혼란스럽던 그때, 황제가 몸을 움직였다.
칼라일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저택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느렸던 걸음이 이내 빨라지고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황제는 정말 그대로 떠난 듯했다.
저택까지 와서 칼라일을 봐 놓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이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난 거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온 거라면, 칼라일을 보았다면…….
문득, 현재의 칼라일에게 황족의 상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엘리야가 마도구로 모습을 바꾼 덕에 칼라일은 흑발에 흑안이 아닌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였다.
칼라일을 보았다 한들 에그리타 황족의 상징이 하나도 없었으니 자신의 아이일 것이란 의심도 하지 못한
건가.
거기다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쩌면…….
“제레미는 안 먹어요?”
“아…….”
생각에 잠겨 제레미가 움직이질 않자 엘리야가 의아하게 물었다.
“제레미, 제레미도 먹어요.”
칼라일이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제레미?”
무언가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느낀 듯 엘리야가 걱정스레 또 한 번 그를 부르자 제레미는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돌아갔다 해도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몰랐다.
이곳을 들켜버린 이상, 당장이라도 다시 찾아와 칼라일을 데려갈 수도 있는 일이다.
엘리야에게 말해야 했다.

* * *

샌드위치를 채 다 먹기도 전, 우리는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제레미가 굳은 들어가자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엘리.”
“제레미, 무슨 일 있어요?”
제레미는 창문 너머를 다시 한번 확인하듯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왔다 가셨어요.”
“네?”
누가 왔다 갔다고……?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되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방금까지 근처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멀지 않은 숲이 보였다.
레이몬드가 저곳에 있었다면…… 우리를 전부 보았을 것이다.
나와 칼라일을.
“엘리와 칼라일을 보고 계셨어요. 아무래도 칼라일을 들킨 거 같아요.”
쿵.
사람이 너무 놀라면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고 했던가.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으며 머리가 아찔했다.
레이몬드가 이곳에 왔다니.
거기다 칼라일을 보았다니.
대체 어떻게…….
칼라일의 존재를 아는 듯한 낌새가 전혀 없었던 그였다.
우연히, 수도 외곽 그것도 숲 속 한가운데 있는 저택을 발견한 것은 아닐 거다.
어떻게 안 건지는 몰라도 칼라일의 존재를 알게 된 그가 뒷조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칼라일은 수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었는데 대체 언제 어떻게 보게 된 걸까.
“대체 어떻게 칼라일을…….”
“설마 그날…….”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제레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엘리, 내가 폐하를 만났다고 했잖아요. 그날이 바로 칼라일을 잠깐 잃어버렸던 그날이에요. 그리고 제가
폐하를 만났던 장소가 야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날 우연히 엘리를 만날 수 있었죠.
제레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레미와 내가 우연히 만날 만큼 가까웠다면 레이몬드도 충분히 야시장에 있었을 수 있었다.
칼라일은 수도 내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 그날이 가장 유력했다.
“그럼…… 정말 그날…….”
난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일에 칼라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칼라일.”
어른들의 심각한 분위기가 이해가 안 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던 칼라일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네.”
“그날 널 도와주었다는 아저씨 말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니?”
“네! 눈동자가 검은색이었어요. 또 머리색도 검은색이었어요. 그 아저씨 좋은 아저씨였는데…….”
칼라일의 중얼거림에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순간 어지러워 몸이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엘리!”
제레미의 걱정스러운 외침에 정신을 차리자 내가 손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레이몬드와 칼라일이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만 더 있으면 아카데미로 떠날 아이였는데 갑작스럽게 일이 꼬여 버리니 혼란스러웠다.
“엘리,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안 돼요.”
제레미의 충고에 흐려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맞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랐다고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난 마음을 가라앉히며 제레미에게 물었다.
“제레미, 폐하를…… 정말 본 게 맞나요? 착각했을 리는……?”
“미안해요. 착각이 아니에요.”
그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정말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왜, 코앞에서 발길을 돌린 거지.
레이몬드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칼라일의 존재를 우연히 알고 숨겨 놓은 저택까지 알아냈다면 내게
진실을 따져 묻기 위해 온 것이었을 거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을 믿는 사람이니까.
칼라일이 정말 내 자식인지, 왜 숨겼는지 따지려 했겠지.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칼라일 내 아이란 걸 알았다면 제일 먼저 의심했을 것이다.
칼라일이 자신의 아이가 아닐까 하고.
“이상한 일이네요. 왜 칼라일을 보기만 하고 돌아가신 걸까요.”
레이몬드의 의중이 짐작되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길래 묻지도 않고 돌아간 거지.
설마 자신의 아이란 어떤 증거라도 찾은 걸까.
만약 칼라일이 자신의 아이라 확신했다면 당장이라도 내게서 칼라일을 데려갈 수도 있었다.
칼라일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2 황자가 되고, 권력다툼이 시작된다면…….
“안 돼.”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냐,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증거가 있을 리 없잖아.
나는 어리둥절한 칼라일을 꼭 껴안으며 불안에 떨고 있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서류상으로도 깔끔히 정리했고, 룬트 왕국 수도에 자리 잡은 건 칼라일을 낳은 다음이었다.
칼라일을 받아준 의사 역시 대륙을 떠도는 자였으니 단시간에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 대체 왜…….
내가 초조함을 느끼던 그때, 제레미가 말했다.
“폐하께서 오해를 하신 게 아닐까요.”
“오해요?”
“네. 지금 칼라일은 마도구로 모습이 바뀌어 있지 않습니까.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황족의 상징은
하나도 없죠. 거기다 칼라일의 마도구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으니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칼라일의 마도구는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귀걸이였다.
가까이서 보아도 귀 주변을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보일 만큼 상당히 작았다.
마도구도 에그리타 제국의 상징도 보이지 않는 아이.
레이몬드는 칼라일이 자신의 아이라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사태에 대비해 칼라일의 모습을
바꾼 것이 바로 나였다.
레이몬드가 칼라일의 존재를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자식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조용히 물러가실 분이 아니세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실
거예요.”
“네. 아마 저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네? 제레미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칼라일과 제가 함께 있는 걸 보셨을 테니……. 칼라일을 두고 저와 엘리의 사이를 오해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아…….”
그제야 그가 말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를 숨겨놓은 저택에서 칼라일과 함께 노는 제레미를 보았다면…… 나라도 오해했을 것이다.
칼라일의 아버지가 제레미라고.
거기다 우연의 일치로 지금 칼라일의 금발은 제레미의 백금발과 비슷한 색이었다.
일부러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제레미가 끼어버린 듯했다.
안 그래도 레이몬드가 제레미에게 날을 세우고 있을 텐데.
본의 아니게 그를 끌어들인 것 같아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제레미. 폐하께서 혹시라도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절 이용해요.”

106 화

예상치 못한 말에 멈칫했다.
“……제레미를 이용하라고요?”
“네. 누군가를 칼라일의 아버지로 꾸며내는 것보다는 제가 더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이미 제가
칼라일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셨으니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의 의심을 피할 가장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6 년 전부터 그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걸 레이몬드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레이몬드가 과연 제레미를 가만히 둘까.
우리의 문제에 그를 이렇게까지 끌어들이는 건 해서는 안 될 짓 같았다.
난감함에 말끝을 흐리던 그때, 제레미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엘리, 지금은 다른 건 생각지 말고 오로지 칼라일만 생각해요.”
“……내일 폐하를 빼야겠어요.”
제레미의 제안과 별개로, 레이몬드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칠 필요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막 지나자마자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크로프트 영애.”
마차에서 내리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시종장이 내게 다가왔다.
“시종장.”
시종장이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주춤했지만, 곧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몬드가 날 기다리고 있다.
별말도 아닌데 오늘은 손끝이 떨릴 만큼 긴장되었다.
그와 칼라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떨어서도 안 되고 조금의 빈틈을 보여서도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자식이란 걸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게 내가 지난 6 년간 이곳을 떠나 있던 이유니까.
이제 와 아이를 황권 다툼이라는 피 말리는 싸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가지.”
뜨거운 숨을 내쉰 난 결연한 얼굴로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울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난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심장을 감추며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자 언제 책상을 벗어났는지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더욱 짙었다. 그 눈빛에 스치는 강렬한 감정들은 내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의심을 품은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눈빛의 그를 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예, 폐하. 한데 그 전에 먼저 주변을 전부 물려주시겠습니까.”
“…….”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인지 짐작한 것일까. 레이몬드가 일순 멈칫했다.
그는 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모두 나가 있거라.”
시종들과 기사들이 전부 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어제 나를 본 모양이군.”
그는 내가 어제 알현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부터 직감한 듯했다.
내가 꺼낼 이야기가 무엇일지.
하긴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황궁으로 서신을 보냈었다.
신전에서 그에게 냉정히 선을 그었던 내가 먼저 독대를 요청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예. 어제 폐하께서 제 사적인 장소에 다녀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장소…… 그 저택이 네 것이 아니라 부정하지 않는구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저택도 폐하께서 보신 아이도 제 아이가 맞으니까요.”
순간 레이몬드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 아이가 정말 너의 아이라고.”
내 말을 믿기 싫다는 듯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듯 말했다.
그런 그에게 난 쐐기를 박았다.
“네. 칼라일은 제 아이가 맞습니다. 그리고 칼라일은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
“혹시라도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확실히 말씀드리고자 오늘 독대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칼라일은 저의
아이일 뿐, 폐하와는 상관없는 아이입니다.”
“너의 아이일 뿐? 아이의 아비는 어디 가고 너의 아이일 뿐이야. 왜, 내가 드로이트 공자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서 내 앞에서 그를 감싸는 건가?”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는 정말 제레미를 칼라일의 아버지라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i>‘절 이용해요.’</i>

순간 제레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제레미의 말대로 한다면 분명 일이 쉬워지겠지. 하지만 내가 편해지자고 그를 방패막이로 내세울 마음은
없었다.
“……드로이트 공자는 제 아이의 친부가 아닙니다.”
“하, 아니라고?”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 아이의 친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내리깔며 준비된 말을 내뱉었다.
이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서류 등은 만약을 위해 룬트 왕국을 떠나기 전 완벽하게 꾸며놓은 상태였다.
“……그렇게까지 드로이트 공자를 감싸고 싶은 모양이지?”
하지만 그는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혼 직후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룬트 왕국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 시지요. 저택의 위치를 알아내셨듯 말입니다.”
“…….”
“드로이트 공자는 그저 룬트 왕국에서 계속 교류했던 탓에 아이가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믿는 것인지, 의심하는 것인지 의중을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느리게 움직였다.
“내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의 말에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어 간신히 그 동요를 숨겼다.
“차라리 드로이트 공자와의 아이라 했다면…… 아니, 이제는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와 이혼하자마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건가?”
그의 분노는 갈 길을 잃고 배회하다 마침내 나를 향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제가 대답할 이유가 없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이혼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예.”
“네가 그렇게나 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람인 줄 몰랐군. 아, 그래서 그 친부가 죽었으니 깔끔히
잊어버리고 드로이트 공자를 옆에 두는 건가 보지?”
“……폐하!”
선을 넘는 그의 발언에 나는 경고 하듯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레이몬드가 움찔했다. 이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방금 한 말은…… 하아, 내가…….”
그는 피곤함에 젖은 한숨을 내쉬며 거친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하셔서 실수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이상의 제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아무리 폐하라
하실지라도 월권이심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엘리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아이는 폐하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의 음성이 쐐기를 박듯 집무실을 울린 순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던 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인지 거뭇한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마른 입술은 할 말을 잃고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는 얼굴을, 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칼라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 어린아이를 살벌한 황위 다툼의 한복판에 던질 순 없었다.
황권과는 상관없이, 평생 목숨을 위협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길 바랐다.
형제의 피를 보고 올라가는 황제의 삶이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 단 한 톨의 의심의 여지도 주지 않아야 했다.
“폐하.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세간이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제는 제 아이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달라, 는 말인가?”
“예. 부탁드립니다.”
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하.”
일련의 상황에 이성을 찾기 어려운 듯 머리 위로 비소인지 조소인지 모를 단말의 웃음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할 이야기가 끝났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그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몹시 괴로워 보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난 말이 없는 그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 * *

시오스 후작가의 화원.


새로 심은 꽃들에 물을 주고 있던 리제나는 온실 화원을 들어오는 하녀를 보고 손을 멈추었다.
백발을 곱게 틀어 올린 릴라가 리제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이니?”
화원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방해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릴라가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일 거다.
릴라는 표정 없는 얼굴을 들었다.
“아가씨. 드로이트 공자와 크로프트 영애에 대해 알아보던 중 예상치 못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것?”
꽃을 보고 있던 리제나가 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크로프트 영애에게 아이가 있었습니다.”
“……뭐? 아이?”
“네. 크로프트 영애는 룬트 왕국에서 혼자 꽃집을 운영하며 아이를 키웠다고 합니다. 또한 지금은 수도
외곽의 한 저택에 그 아이를 숨기고 있습니다.”
아이를 숨기고 있다라…….
숨겨야 할 아이라는 건가.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서릿발처럼 굳은 얼굴로 릴라에게 물었다.
“아이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느냐.”
“아이의 나이는 5 살에서 6 살로 보이고 외양은…… 좀 더 정확히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5 살에서 6 살 사이.
엘리야가 제국을 떠난 것이 6 년 전이었다.
만약 아이의 나이가 6 살이라면…… 레이몬드의 아이일 가능성이 컸다.
1 황자가 아닌 또 다른 황자의 등장.
차기 황제로 견고했던 에드먼드의 자리가 흔들릴 것이다.
리제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의 다 왔는데.
고지가 눈앞인데.
엘리야 크로프트, 그녀가 또다시 그녀의 판을 흔들려 하고 있었다.
리제나는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릴라에게 물었다.
“아이의 외양은 왜 더 알아보아야 하느냐. 황족의 상징이 없는 것이냐?”
“멀리서나마 보았을 때는, 흑발에 흑안이 아닌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라 합니다.”

107 화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리제나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네. 알아본 자의 말로는 그러했습니다.”
“흑발에 흑안이 아니라…….”
“……황제의 자식이 아닌 게 아닐까요?”
릴라가 깊은 고민에 빠진 리제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상해.”
아이의 겉모습만 본다면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 안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뭔가 꺼림칙함이 들었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니라치면 엘리야가 룬트 왕국으로 떠나고 바로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말이 된다.
엘리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지만 그녀는 엘리야의 성격을 알았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안다.
어쩌면 그녀가 레이몬드보다 더 엘리야의 짝사랑을 잘 알 것이다.
평생 레이몬드의 뒷모습만 보던 엘리야가 이혼하자마자 다른 남자를 만났다라…….
믿기 힘든 소리였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정말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닌 걸까.
리제나는 엘리야가 떠났던 6 년 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지.”
그때는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엘리야가 스스로 사라져 준다는 것이 기꺼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니 레이몬드를 그렇게 사랑한 것치고 엘리야는 너무 쉽게 물러났었다.
아무리 에드먼드의 등장이 충격적이었다 해도, 그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른 것은 그녀답지 않았다.
거기다 이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듯 바로 제국을 떠났다.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은 이유라면 조용한 시골 영지로 내려갔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제국에서 먼 타국으로 떠났다라.
제국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의심도 깊어졌다.
리제나의 녹안이 위험한 빛을 띠었다.
“릴라.”
“네. 아가씨.”
“우선 그 아이가 엘리야의 친아들이 맞는지부터 확인해 보렴.”
“네.”
릴라가 나가고 리제나는 딱딱한 얼굴로 다시 죽은 꽃을 잘라냈다.

* * *

“더 알아보았으나 서류상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카르텔의 보고에 레이몬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엘리야가 다녀간 지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그의 머릿속엔 온통 엘리야와 칼라일 뿐이었다.
식사를 해도 하는 거 같지 않았고 잠을 자도 잔 거 같지 않은, 마치 살아 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i>‘제 아이는 폐하와는 관련이 없습니다.’</i>

쐐기를 박던 그녀의 말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과 눈빛.
거짓말 같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친부가 드로이트 공자든 아니든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으니까.
하여 카르텔을 불러 더 깊이 알아보라 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없는지.
그녀가 룬트 왕국으로부터 온 것을 스스로 밝혔기에 추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니,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정보가 나타나는 것이 6 년간 그녀의 흔적을 찾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서류들은 그가 보기에도 허점이 없었다.
서류에는 엘리야는 엘리라는 가명으로 앨빈이라는 남자와 혼인신고가 되어 있었고, 칼라일은 그들의
자식으로 올라와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진실 같았다.
레이몬드의 침묵이 길어지던 때, 카르텔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폐하. 제일 정확한 방법은…… 신전에 의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념에 빠져 흐려졌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신전은 안 된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가장 간단하고 정확한 방법임은 확실하지만, 그러려면 그 아이가 대신관 앞에 서야 했다.
그리되면 칼라일의 존재가 전 제국에 알려지고 엘리야의 부탁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자식이 아니라 판정되어도 신전에 의뢰한 일 자체만으로도 후폭풍은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곤욕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엘리야의 아들이었으니까.
아이의 외양을 보아도, 조사를 해 봐도 그의 아이가 아님이 확실한데 제가 편하자고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에 대한 조사는 이 정도면 됐으니 그만하도록 해라.”
더 이상 파보아도 더 나올 것도 없을 것이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이번에 다시 룬트 왕국에 조사를 하던 도중……. 저희처럼 크로프트 영애의 행적과 아이에 대해 알아보고
다닌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뭐? 확실한 것이냐.”
레이몬드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예, 분명합니다.”
레이몬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가 보낸 사람인지는 모르는 거겠지?”
“송구하오나 아직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카르텔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곧바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시오스 후작.
엘리야의 뒷조사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지금으로서는 그가 가장 유력했다.
뒷조사를 한다는 건 무언가 약점이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일 테니까.
아이에 대해 알아봤다 했으니 엘리야에게 자식이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 아이가 행여나 제 아이일까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피해를 보게 될 사람이니까.
허니 정말 시오스 후작이라면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카르텔,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혹 신문사 등의 움직임을 주시해라. 혹시나 이 일이 퍼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네. 폐하.”
카르텔이 물러가고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몸을 돌린 그는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엘리야.”
분명 그의 눈으로 확인했고 그녀의 말로 들었고 카르텔이 조사까지 했건만, 이상하게 아이에 대한 심란한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거기다 그가 아닌 누군가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어떤 의도를 품고 아이를 찾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악의를 품고 있다면 칼라일이 위협을 받거나
존재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온다면…….”
아이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면, 그녀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한 방패막은 그일 것이다.
시선을 들자 짧은 상념 사이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말을 준비해라. 조용히 다녀올 곳이 있다.”

* * *

동화책 한 권을 다 읽고 칼라일을 침대에 눕히려던 참이었다.


“엄마, 아카데미에 가면 이제 엄마 자주 못 보는 거예요?”
칼라일의 질문에 난 멈칫했다.
칼라일은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묻고 있었다.
칼라일도 자신이 아카데미 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엔 친구들을 다시 본다고 마냥 좋아했지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날수록 가기 싫은 듯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음……. 한동안은 잘 못 볼 것 같아. 대신 엄마가 편지 자주 보낼게. 그리고 엄마가 일 다 끝나면 금방
칼라일 곁으로 갈게.”
“그럼 몇 밤 자면 엄마 와요? 열 밤만 세면 돼요?”
순수한 눈빛으로 묻는 칼라일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음, 열 밤보단 많이 걸릴 거 같아. 미안해.”
“……”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대신 헬란이 항상 칼라일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제드 아저씨도 칼라일을 자주 보러 간다고 했어.
헬란이랑 제드랑 잘 지내고 있으면 엄마도 금방 갈게.”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인 듯 끙, 소리를 냈다.
너무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레이몬드가 너무 빨리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그다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것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신전에라도 데려가자고 한다면…… 만천하에 칼라일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허니 레이몬드가 거기까지 가기 전에, 다른 자들이 더 알아내기 전에 어서 아이를 밖으로 빼돌려야 했다.
“……약속해요, 금방 온다고.”
칼라일이 이불 속에서 손을 빼꼼 내밀었다. 작은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약속할게. 금방 간다고.”
약속하고 손까지 꼭 잡아주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어두워졌던 칼라일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칼라일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준 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칼라일, 엄마가 많이 사랑해. 잘 자.”
“나도 사랑해요. 잘 자요. 엄마.”
마지막으로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난 침대 맡에서 일어났다.
촛불 하나만 켜두고 방에서 나갔다.
“엘리 님. 칼라일 님은 잠드셨나요?”
방을 나오자 헬란이 막 들어오려던 참인지 서 있었다.
“응. 내가 재웠어. 그러니 헬란도 좀 쉬어.”
“요 며칠 엘리 님 덕분에 푹 쉬었어요. 이젠 너무 쉬어서 지루할 지경이에요.”
“그럼 같이 와인 한잔할래?”
레이몬드를 만나고 온 뒤 불안하기도 하고 심란해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하여 오늘은 와인을 좀 마시고 자 볼까 했다.
“좋아요.”
헬란과 함께 2 층 계단을 내려가려던 난 급히 올라오는 제드를 보고 멈칫했다.
나를 발견한 제드가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제드, 무슨 일 있어?”
“엘리, 지금 폐하께서 오셨어.”
“…….”
“폐하께서 갑자기 이 시간엔 왜…….”
헬란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밤늦은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굳이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다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 어디 계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셔.”
“응접실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해 줘.”
제드에게 당부한 난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 * *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의 인사를 들은 그가 몸을 돌렸다.
“일어나.”
몸을 바로 한 난 그를 마주 보았다.
앉아서 편히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 대신 본론을 꺼냈다.
“이 시간에 이곳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폐하.”
짧게 나를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얼굴에 사뭇 긴장이 스쳤다.
칼라일에 관한 이이야기인 걸까.
심상치 않은 그의 분위기에 나도 얼굴이 굳어가던 그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칼라일의 존재를 다른 쪽에서 알아차린 것 같다.”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108 화
나는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쥐었다.
“다른 쪽이라면…….”
시오스 후작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갑자기 돌아온 내 뒤를 캐고 다닐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빨리 내 과거를, 칼라일의 존재까지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레이몬드에겐 일부러 모든 정보를 흘렸지만 시오스 후작 쪽에는 아니었으니까.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칼라일이 황실의 핏줄인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면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갈 것이다.
리제나는 황후가 아니고, 에드먼드가 황태자 책봉도 받지 못했으니 황후였던 내게서 난 아이가 황자로
밝혀지면 정통성에서 밀리게 되니까.
칼라일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너도 나처럼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겠지.”
그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네가 숨 겼다는 것 자체에서 의심을 하겠지.”
“……그렇겠지요.”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한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긴장감에 난 의아한 눈빛을 했다.
도와준다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나섰다가는 오히려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레이몬드는 나를 보던 시선을 내리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언가 더 심각한 일이 있는 걸까. 나까지 불안해지려던 그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황궁으로 돌아와, 엘리야.”
뭐……?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던 나는 곧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방금 뭐라 하셨죠?”
“황궁,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했다.”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정확히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라니. 다시 황후가 되라니.
칼라일을 데려가겠다거나, 신전의 검사를 의뢰하겠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의 결연한 표정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입술이 벌어지며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다.
“폐하, 미치셨습니까?”
감히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되는 무례한 언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저히 이 말 말곤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해. 다시 황후로 돌아와.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린 서로에게 필요해.”
레이몬드는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한 듯 당황하지 않으며 답했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지금 미친 게 자신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뇨,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게 황후로 돌아오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데. 내가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이혼을 요구했는데.
아니, 다른 일을 자처하고서라도 지금 내게는 칼라일이 있었다.
그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미친 게 아닌 이상.
나는 그에게 선을 긋듯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폐하, 제겐 아이가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버리고 다시
황후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를 버리라 말한 적 없다. 네 아이는 내 양자로 입적할 거니까.”
칼라일을 양자로 입적하겠다니.
근래 그의 업무가 과중했던 건지, 아니면 불면증에 제대로 된 판단이 안 서는 건지.
레이몬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갈수록 이상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대체 무슨……. 폐하의 핏줄도 아닌 아이를 황자로 입적하시겠다니요.”
“사례가 없지 않다. 황위 계승권에서 제외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를 불렀다.
“……폐하.”
“엘리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들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존재는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거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전에 아이에게 손을 쓰려고
하겠지.”
“……지금 그래서 폐하께서 방패막이라도 되어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비록 내 아이가 아니라 하나 그들은 분명히 의심할 거다. 그런 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은…… 황궁이지.”
“…….”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모든 계획이 완벽히 짜여진 듯했다.
물론 사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면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황자로 키우지 않기 위해 도망친 것인데 칼라일을 황자로 만들자니.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엘리야, 아이를 생각해. 비록 황위 계승권은 없을지라도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어.”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이다.
그를 빤히 보던 난 문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보았다. 제대로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흐트러진
모습들이 잔뜩 보였다.
벗지도 않은 로브와 흐트러진 머리칼, 로브 끝자락에 묻은 흙먼지.
그는 내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황궁에서 여기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거 같았다.
그 모습과 짙은 눈빛을 보던 난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게 미련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식도 아닌 아이까지 품으려 하는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와 네 아이가 위험에 빠지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수는 없어.”
그의 눈빛이 애절했다.
검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감정은 이제는 집착인지 미련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야.”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보던 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뇨. 폐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소리치듯 이름을 부른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칼라일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건 나야. 드로이트 따위가 아니라고.”
“왜 갑자기 드로이트 공자에 대해……. 아니, 오히려 제겐 그쪽이 더 나아 보입니다.”
굳은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뭐?”
“제게 황후로서의 삶은 괴로운 기억뿐이니까요. 폐하께 이혼을 청했던 이유가 단지 에드먼드 때문이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줬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아신다면, 폐하께서 감히 제게 황후로 돌아오라 말씀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그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칼라일이 이렇게 된 이유 그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낳아온 아이로 황궁의 후계 서열을 뒤흔들었고 내게 단 한 번도 내 아이를 지켜줄 거란
확신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 선심 쓰듯 저런 제안을 하다니…….
“아이의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엘리야, 난…….”
“폐하, 선을 넘지 말아 주십시오.”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것인지까지는 알고 싶은 마음도 여력도 없었다.
지친 얼굴을 숨기지 않자 멈칫하던 그가 물러났다.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 괜찮아?”
그가 떠나고 제드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한 거야? 네 언성이 높아지던데…….”
제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니었어.”
어쩌면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럼 왜 오신 건데?”
이건 레이몬드와 나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누군가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해.”
제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시오스 후작 쪽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배후가 누구인지부터 확실히 알아야겠어. 그리고 칼라일을
아케데미로 보내는 것도 조금 미뤄야겠어.”
어디까지 정보가 샜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칼라일이 다닐 아카데미도 안전하단 보장이 이제 없는 것이다.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빨리 알아볼게.”

* * *

레이몬드가 다녀간 뒤 딱 삼 일째 되는 날.
크로프트 공작가가 아닌 칼라일이 머무는 저택으로 시오스 후작가의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message>[크로프트 영애, 시간이 되신다면 오후에 영애와 후작가에서 담소를 나누고


싶습니다.</message>
<message><right>-리제나 시오스]</right></message>

“……리제나.”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난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내뱉었다.
가만히 서신을 보고 있자 헬란이 내게 물어왔다.
“엘리 님, 가실 건가요?”
“가야지. 친히 이곳까지 서신을 보냈으니 말이야.”
헬란의 곁에선 제드가 덧붙였다.
여기로 서신을 보냈다는 건 이곳의 위치와 이 저택에 누구를 숨기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내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오스 후작 쪽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뒷조사를 한 게 자신들이라 바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대화를 하자라…….
칼라일이 황자인지 확신이 없으니 날 불러 떠보려는 것인가.
“대체 일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시오스 후작가에서는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서신을 보내죠.”
“숨기고 있는 게 드러나면 불리해지는 건 우리니까. 당당하겠지.”
칼라일은 내 약점이었고 그 약점을 잡은 게 리제나였으니.
이 만남을 피할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히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러 가는 건 아니었다. 내게 약점이 있듯 그녀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분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헬란의 어깨를 달래듯 두드린 난 그들에게 말했다.
“시오스 후작가에 다녀올게. 그동안 칼라일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 줘.”
레이몬드가 다녀간 이후로 저택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혹시 모를 기습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상단의 기사들이 철통으로 지키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칼라일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불안해 당부하자
걱정 말라는 듯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말고 다녀와.”
“응.”
난 서신에 대한 답 대신 직접 서신을 들고 곧장 저택을 나섰다.

109 화

시오스 후작가.
저택 앞,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서신에 답장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바로 방문했음에도 후작가의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열렸다.
“크로프트 영애.”
허리를 깊이 숙이는 하녀의 머리가 백발이었다. 고개를 든 하녀의 얼굴을 본 난 멈칫했다.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얼굴과 차가운 눈빛.
한눈에 봐도 평범한 하녀는 아니었다.
“아가씨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하녀를 따라 걸어가자 일전 티파티가 열렸던 온실 화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코 안 가득 진한 꽃향기가 들어왔다.
머리가 아찔할 만큼 강한 향기였다.
숨을 삼키며 화원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익숙한 가제보 아래 마련된 티 테이블이 보였다.
역시 내가 올 것을 예상한 듯, 둘만을 위한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
나를 발견한 리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프트 영애, 어서 오세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시오스 영애. 답신 대신 직접 방문한 것이 갑작스러워 놀라진 않으셨을까 염려되네요.”
“아닙니다.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앉으세요. 영애.”
그녀가 자리를 권했다.
맞은 편에 앉자 리제나도 자리에 앉았다.
“왠지 영애께서 바로 와 주실 것 같아 미리 차를 준비해 두었는데 홍차……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미소를 지은 리제나가 직접 찻주전자를 들었다.
화원에 우리 둘 말고 시중을 드는 하녀가 한 명도 없었다.
일부러 그녀가 사람들을 물린 듯했다.
홍차를 따른 찻잔을 내 앞에 놓아 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룬트 왕국에서 유명한 홍차랍니다. 영애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니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찻잔에서 익숙한 향이 났다.
룬트 왕국의 홍차라, 정말 나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듯했다.
모든 걸 알고 있다.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들이켰다.
“맛있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 써야지요. 제가 영애께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영애께선 모르실 겁니다.”
“영애께서 제게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줄 근래에나 알게 되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난 리제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영애, 저를 부른 이유가 제 아이 때문입니까.”
빙빙 돌리며 그녀와 불편한 티 타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바로 본론을 꺼내라 말하자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영애께서 이렇게 바로 물어주시니 저도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네. 영애께서 숨긴 아이 때문입니다.”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이의 외양은 익히 들었습니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황족의 상징이 하나도 없다 하더군요. 허나
아이의 외양은 마도구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의 외양을 아실 정도로 뒷조사를 하셨는데 아이가 차고 있는 마도구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못
들으셨나 봅니다.”
싸늘한 목소리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애께서 그리 빨리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걸 믿기가
힘들더군요. 영애께서 폐하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순간 어느새 말아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리제나는 그녀와 레이몬드가 연인이었던 시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과거를 언급하는 것 같았다.
리제나는 그때의 나를 그리듯 안쓰러운 표정을 했다.
그러나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과는 달리 녹안에는 묘한 번뜩임이 스쳤다.
하지만 그 시절을 비웃든 말든 이젠 전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깊이 사랑했고 그만큼 폐하께 모든 걸 희생하였지요. 하여 그 사랑을 끝냈을 때 조금의 미련도
없었습니다. 리제나 영애와 폐하의 행복을 빌어줬을 만큼요. 안타깝게도 두 분이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말이죠.”
내 덤덤한 말투에 리제나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그녀는 동요를 감추듯 시선을 낮추며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폐하께 아무런 미련도 없고 그 아이도 폐하의 아이가 아니다라…….”
찻잔에서 손을 뗀 그녀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리제나는 시선을 들었다.
상냥한 가면을 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애, 허면 왜 이리 급히 제게 오셨습니까. 답신도 하지 않고 바로 오실 만큼 다급했다는 것은 무엇을
들킬까 두려우신 게 아닙니까.”
“두렵지요. 세간의 눈을 피해 조용히 잘 키우려 했던 아이를 찾아내 협박이나 다름없는 서신을 보내오니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오스 영애께
경고하기 위함이지요.”
“제게 경고를 하신다고요?”
리제나는 어이가 없는지 순간 실소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을 만할 것이다. 지금 분명한 약점을 손에 쥔 건 내가 아니라 리제나였으니까.
하지만 내겐 그녀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난 비소를 머금은 그녀를 차분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영애, 영애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의 황후는 공석입니다.”
“지금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뜬금없는 이야기라 느꼈는지 리제나가 미간을 좁혔다.
“얼마 전, 폐하께서 제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이몬드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서신을 받은 순간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황후의 자리만큼, 리제나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카드는 없을 테니까.
“……!”
나의 예상대로 리제나의 녹안이 크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커진 그녀의 당혹스러운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제게 아이가 있는 걸 아십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하셨지요. 제
아이를 황자로 입적하고 말이지요.”
리제나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만약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영애, 1 황자께서 과연 무탈히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을까요.”
에드먼드는 아직 황태자가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차기 황태자로 유력한 것은 현시점에서 에드먼드 말고는 황제의 후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황후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칼라일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황후가 된 내가 새로운 적자를 낳는다면 황후를 어머니로 두지 않은
에드먼드의 자리는 위태롭게 흔들릴 것이다.
아무리 1 황자라 하여도 그는 황후의 적자가 아니었으니까.
단번에 정통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내 경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리제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이 없는 그녀를 보다가 여유롭게 홍차를 들이켰다. 리제나의 굳은 얼굴 때문일까, 처음 마셨을 때보다
홍차가 부드럽게 입 안을 감쌌다.
난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시오스 영애, 비록 폐하께서 제게 과분한 제안을 하셨지만 사실 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아이를 황자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탁-
찻잔이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시오스 영애께서 계속 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지요.”
그리고 침묵을 지키던 리제나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아이를 건들면 황후의 자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제게 협박을 하러 오셨군요.”
나를 직시하던 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를 불러들여 협박하려 했을 텐데, 도리어 반대의 상황이 됐으니 그녀의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후의 자리만큼은 리제나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이제 그 자리는 그녀의 역린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애, 부디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일이 많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리제나가 내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답이 없었지만 그녀가 날 잡을 이유도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화원을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리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난 걸음을 멈추며 몸을 반쯤 돌렸다.
“무엇이죠?”
“룬트 왕국에서 행복하셨나요?”
왜 이런 걸 묻지.
리제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녹안에는 적의나 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내가
행복했는지 궁금한 듯했다.
잠시 그녀를 보던 난 느릿하게 답했다.
“행복했습니다.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요.”
“……그랬군요.”
왜인지 리제나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그럼 이만.”
녹안이 상념에 빠지듯 흐려지는 것을 보던 난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 * *

엘리야가 화원을 나가고 리제나는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홍차의 달콤함이 어쩐지 쓰게 느껴져 그녀는 바닥에 그대로 뱉어버렸다.

<i>‘행복했습니다.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i>

그리 말하는 엘리야의 보랏빛 눈동자에 언뜻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스치는 것 같았다.


“행복이라…….”
난 네가 행복한 게 싫은데.
레이몬드도, 황후의 자리도, 그리고 아이까지.
그녀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턱턱 가지는 엘리야가 싫다.
진심으로 엘리야가 행복해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가 제국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이곳으로 돌아와 가문이 무너지고 레이몬드가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한데 어쩐지 그녀가 돌아오고 무력감 속에 빠지는 건 자신 같았다.

<i>‘폐하께서 제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i>

엘리야가 떠나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니 레이몬드가 결국 정말 미친 선택을 한 듯했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마당에 엘리야를 황후로 받아들인다니.
제 자식이라 판정 난 에드먼드가 있음에도 자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던 그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
황후, 결국 이 자리가 내 목을 조일 줄이야.
“아가씨.”
리제나는 어느새 다가온 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프트 영애는 잘 배웅해 드렸니?”
“네. 잘 돌아가셨습니다.”
“수고했다. 릴라.”
“네.”
“드로이트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아무래도 둘 다 죽여야 내가 편해질 듯하구나.”
리제나는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짙은 미소는 어딘가 부서진 듯 위태로웠다.
“예, 바로 서신을 보냈겠습니다.”

110 화

엘리야가 막 시오스 후작가를 떠난 그 시각, 크로프트 공작이 황궁을 찾았다.


시종장은 정정한 모습으로 집무실 앞에서 선 크로프트 공작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폐하, 크로프트 공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여보내.”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공작은 오랜만에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이렇게 정정한 모습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좋군. 일어나게, 공작.”
집무실 책상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몬드가 소파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공작이 뒤를 따랐다.
“앉게.”
상석에 앉은 레이몬드가 자리를 권했다.
공작이 앉자 시종장이 다가와 차를 내려놓았다.
“복귀하자마자 밀린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던데,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간 밀린 일들이 많으니까요. 폐하, 어제 외교부에서 올린 동방국 교역에 대한 서류는
오늘까지 승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작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워낙 큰 사건이 있었던 탓에 외교부를 다시 정비하는 시간이 꽤 걸리리라 생각했었지만 크로프트 공작은
보란 듯이 빠르게 안정을 잡아갔다.
물론 그 덕에 아랫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꼬투리 잡히지 않을 완벽한 모습이었다.
레이몬드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하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게. 그나저나, 한창 바쁠 텐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폐하께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로프트 공작의 얼굴이 진지했다.
그에 웃음을 지운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장이 시종들과 함께 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말하게.”
“시오스 후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이몬드의 눈썹 끝이 움찔했다.
당연히 엘리야의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녀에게 찾아가 황궁으로 돌아오라는 제안을 한 게 크로프트 공작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시오스 후작에 관해서라니.
크로프트 공작의 심각한 눈빛에 레이몬드도 잠시 엘리야의 생각을 접었다.
시오스 후작 역시 엘리야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시오스 후작의 역심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예. 역시 폐하께서도 눈치를 채고 계셨군요.”
“굳이 자네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드로이트 공작과 엮이기까지 하니,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더군.”
“폐하,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시오스 후작이 지금이야 몸을 낮추고 있다지만 그 뜻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하여 파르앙 후작을 재상 밑으로 넣은 것이다. 지금 황궁에 시오스 후작의 사람이
너무 많아. 일단 후작의 팔다리부터 자르고 군부를 재정비할 것이다.”
“셀린느 후작으로 말입니까.”
“그래. 셀린느 후작이 돌아오는 대로 부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이다. 북방에서 세운 공이 큰 데다 지금
재상은 자숙 중이니 반대할 세력도 없을 것이다.”
엘리야의 일로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오스 후작의 일에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천히 시오스 후작의 팔다리를 자르고 종국엔 그 목을 날릴 것이다.
반역의 뜻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삼 대를 멸할 만큼의 중죄였으니까.
“그럼 전 당분간은 외교부의 안정에 집중하겠습니다. 이곳에도 시오스 후작의 사람이 많으니……. 거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필요하거나 쳐내야 할 일이 있으면 파르앙 후작과 상의해서 바로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내게 할 말이 이게 다인가?”
공작이 일어나려 하자 레이몬드가 물었다.
“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다입니다.”
“엘리야에게 아무것도 못 들었나?”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한 것과 내가 그녀의 아이를 알고 있다는 사실.
크로프트 공작이 칼라일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텐데.
크로프트 공작은 멈칫하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
“아이도 아이고…… 내가 엘리야에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하셨다지요.”
“다 들었군.”
“네. 전해 듣긴 했습니다.”
“헌데 왜 아무런 말이 없지?”
크로프트 공작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폐하 정말 제 의견이 궁금하십니까?”
“……그대의 눈빛을 보니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쪽인지 알 것 같군.”
올곧은 보랏빛 눈동자에 자신을 향한 비난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과거 이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을 때와
별다를 게 없는 눈빛이었다.
“예. 전 폐하의 충신이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엘리야와 폐하의 관계는 반대입니다.”
“그게 엘리야의 아이를 위한 길이라 하여도?”
“엘리야가 그러더군요. 폐하께서 아이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겠다 하였다고 말입니다.”
“그 아이를 황자로 입적하면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 역시 황후가 된다면
감히 칼라일을 두고 함부로 모욕할 자는 없을 것이다.”
“폐하의 말씀이 틀리진 않습니다. 허나 전 제 소중한 딸이 아이 때문에 원치 않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을 겁니다.”
“공작, 나는 엘리야를 사랑하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크로프트 공작은 잠시 말없이 레이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며 레이몬드가 입술을 열려 하던 때 공작이 말했다.
“……제가 들을 말은 아닌 듯하군요. 엘리야에게는 그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건…….”
레이몬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아직 과거의 일들을 사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수십 번 미안하다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었다.
제 앞에서 차갑게 얼굴을 굳히는 그녀가 도망갈까 붙잡기에만 다급했으니까.
“……아니, 하지 못했네.”
“폐하, 주제넘는 말이오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
“엘리야에게 폐하의 진심을 보여 주십시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명심하지.”
레이몬드가 왜 차마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6 년간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엘리야를 찾아다녔는지 가까이서 봐 온 것이 바로 공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둘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는 엘리야가 레이몬드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길 바랐다.
그 사과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해 줄 것이다.
끝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크로프트 공작이 나가고, 레이몬드의 무거운 숨결만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 * *

“엄마, 저기 기사 아저씨들은 언제까지 집을 지키는 거예요?”


칼라일이 창밖을 보다 내게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기사들이 벌써 사흘째 저택을 둘러싸고 있으니
칼라일도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나쁜 사람들이 쫓아오는 거예요?”
칼라일이 걱정되는 듯 끙, 소리와 함께 이맛살을 구겼다.
난 이마의 주름을 반듯하게 펴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쁜 일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기사 아저씨들은…… 저번에 할아버지 봤었지?”
“네.”
“엄마랑 칼라일이랑 이렇게 둘이서 지내는 게 너무너무 걱정된다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라고 보내
주신 거야.”
“음…… 네에.”
칼라일은 눈을 도르륵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 말을 완전히 믿진 않는 듯했다.
나이보다 의젓해서인지 칼라일은 위험한 일에 대한 감을 어린아이답지 않게 잘 느꼈다.
이런 점은 레이몬드를 닮은 건가.
“칼라일, 엄마가 준비한 선물이 있어.”
“선물이요?”
선물이란 말에 창밖을 힐끔거리던 칼라일이 고개를 홱 돌렸다. 동그래진 눈에 기대심이 가득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난 등 뒤에 숨겨 놓았던 작은 상자를 칼라일에게 내밀었다.
“짠! 새로운 퍼즐이야!”
“우와! 이거 동방국이죠?”
루몬트에게 특별히 부탁해 만든 동방국 풍경으로 만든 퍼즐이었다.
풍경화로 만들어진 퍼즐을 좋아하는 칼라일을 위해 만든 딱 하나밖에 없는 퍼즐이었다.
칼라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바닥에 나무 조각들을 퍼뜨린 칼라일은 금세 조각을 맞추는 것에 빠져들었다.
“칼라일 퍼즐 잘 맞추고 있어. 엄마는 잠시 루몬트 아저씨 만나고 올게.”
“네!”
완전히 빠진 듯 칼라일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밝아진 모습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며칠째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헬란에게 눈짓한 난 칼라일을 맡기고 방을 나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자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몬트와 제드가 고개를 돌렸다.
“거처를 어디로 옮길지 정했어?”
난 그들의 맞은 편에 앉으며 물었다.
리제나에게 경고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위치가 발각된 이상 이 저택은 안전하지 않았다.
허니 최대한 빨리 옮겨야 했다.
“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루몬트가 턱을 긁적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여기만큼 조용하진 못해도 최대한 빨리 옮기는 게 중요해. 그러니 적당한 곳이 있다면 바로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 보겠습니다.”
“시오스 후작이 물의 마법사들을 왜 만나고 다니는 건지는 아직 나온 게 없는 거지?”
“네. 시오스 후작이 요즘 아예 저택에서 움직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방문한 후작가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다 얼핏 본 저택의 창문에는 모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시오스 후작이 분명 저택에 있었을 터인데 내다보는 듯한 기색도 없었지.
시오스 후작이 생각보다 더 몸을 바짝 낮춘 듯했다.
이래서야…… 증거를 잡기가 어려운데.
리제나가 칼라일을 알게 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시오스 후작가를 쳐야 했다.
그래야 후환이 없을 테니까.
“일단 드로이트 공작가 쪽을 주시해 봐. 직접 움직이지 못하니 드로이트 공작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직접 드로이트 공자를 만나면 좋겠지만……. 지금은 움직이기 쉬운 상황이 아니니까.”
저택을 옮기기 전까진 칼라일을 혼자 두는 것이 불안했고 거기다 리제나가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는
마당에 제레미를 불러들일 수도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쪽을 더 주시해보겠습니다. 그럼 전 상단 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아, 같이 나가자. 나도 들릴 데가 있거든.”
제드가 루몬트와 함께 일어났다.
“어디 가게?”
“응? 아 그…… 여기 와서 술맛 좋은 데를 발견했거든. 거기 주인장이랑 내가 좀 친해져서……. 잠깐
들렸다가 금방 올 거야.”
하하, 웃은 제드가 루몬트의 어깨를 감싸며 집무실을 나갔다.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다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두 사람을 배웅해준 내가 다시 칼라일의 방으로 향하고 제드는 루몬트와 함께 저택을 떠났다.

* * *

“어서 오세요.”
수도의 허름한 술집.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용병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술에 취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용병들을 지나 가게 구석 자리로 향한 제드는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제레미.”
그는 먼저 도착해 있는 제레미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111 화

“엘리랑 칼라일은? 별일 없어?”


제레미는 제드가 앉자마자 물었다.
“넌 내 안부는 안 궁금하지?”
“안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너야 잘 지냈겠지.”
제레미의 시큰둥한 대답에 피식 웃은 제드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 제드를 보며 제레미는 초조한지 다시 한번 답을 재촉했다.
“제드, 황제가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 아냐.”
황제가 저택에 온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 바로 제레미였다.
엘리야가 자신의 문제니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지만 며칠 내내 그의 신경은 온통
그쪽을 향해 있었다.
제드는 불안을 숨기지 못한 제레미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괜찮을 리가 없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지금 문제는 시오스 후작 쪽이야.”
“시오스 후작?”
갑자기 튀어나오는 시오스 후작의 이야기에 제레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시오스 후작 쪽에서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챘어.”
“뭐? 그쪽에서 어떻게…… 시오스 후작인 게 확실해?”
“확실해. 시오스 영애가 우리가 머무는 저택으로 서신을 보냈으니까.”
제드의 말에 제레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황제가 칼라일의 존재를 안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상황인데 시오스 쪽에서까지 알았다니.
시오스 리제나.
겉모습은 한없이 상냥한 여자였지만 그 속에 매서운 독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가차 없이 베어 버릴 날카로움을 가진 사람.
그런 그녀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았다면…….
칼라일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 여자…… 위험한 여자야. 칼라일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엘리도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래서 지금 거처를 옮기려고 알아보는 중이야. 시오스 영애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경고는 해 두었다니 그동안 빨리 움직여야겠지.”
“경고…….”
리제나의 번뜩이던 녹안을 기억하는 제레미는 찝찝함이 들었다.
“1 황자와 관련된 경고라고 했어. 그쪽에서도 1 황자가 위험해질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1 황자가 관련됐다면 쉽게 움직이지는 못하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숨죽이고 있진 않을 거야.”
“알아. 하지만 당장 시오스 후작을 치기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제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드로이트 공작 쪽은 어때?”
“조용해. 드나들던 귀족들의 발길도 완전히 끊겼고. 그리고 아직 날 완전히 믿는 거 같지 않아.”
중요한 정보를 알려면 드로이트 공작이 그를 믿어야 했다.
하지만 의심 많은 공작은 아직 그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흠, 하긴 드로이트 공작이 그렇게 쉽게 널 믿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 지금은 일단 거처를 옮기는
것에 집중해야지. 아, 엘리한테 서신을 좀 보내 줘.”
“서신?”
“어. 엘리가 널 만나서 직접 공작가의 동태를 알아보고 싶어 했거든. 루몬트한테 시키긴 했지만 네가
서신을 보내주면 더 안심이 될 테니까.”
“그래. 알았……”
그러겠다, 말하던 제레미는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용병 생활을 오래 했기에 적의 움직임이나 시선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레미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야, 너 방금 뭐라 했냐!”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비가 붙은 용병이 둘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듯 날 선 분위기였다.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붙은 용병들의 기운을 착각한 것일까.
그럼에도 무언가 썩 개운치 않은 기분에 제레미는 미간을 좁혔다.
“제레미, 왜 그래?”
갑자기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제레미를 보고 제드가 물었다.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던 제레미는 아무것도 찾지 못해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별거 아냐. 내가 뭘 좀 착각했어. 엘리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해 볼게.”
“그래.”
이상한 시선을 느끼지 못한 제드는 다시 술잔을 들었지만 제레미는 석연찮은 기분에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깊은 밤이 지나고 하늘에 푸른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각, 낡은 마차 한 대가 수도 광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광장에 울리는 마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불편할 만도 했건만 리제나의 꼿꼿한 자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i>‘드로이트 공자가 크로프트 영애에게 서신을 보낼 것입니다.’</i>

어젯밤 릴라가 직접 물고 온 정보였다.


역시 릴라를 보내길 잘했지.
드로이트 공자에게 사람을 붙여 놓았으나 번번히 반죽음 상태가 되어 돌아왔었다.
어찌나 감이 예민한지 보내는 정보원마다 그에게 잡혔다.
마지막으로 잡아서 돌려보낸 첩자에게는 작은 서신까지 딸려 보냈다.
한 번만 더 보내면 그땐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릴라가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훈련 받고 커온 암살자, 릴라.
그녀의 유능한 수족은 이번에도 성공적인 정보를 물고 왔다.
리제나는 릴라에게 제레미의 서신을 주며 명했었다.

<i>‘필체를 똑같이 베낀 사람을 구해 오렴.’</i>

어떻게 함정을 파야 하나 고민했는데 묘안이 떠올랐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릴라의 목소리에 리제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리제나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리자꾸나.”
리제나의 마차가 도착한 곳은 오래전 버려진 숲속의 창고 같은 곳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무성히 자란 잡초가 밟혔다.
창고에 먼저 도착해 있는 주인을 모시는 기사가 리제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릴라가 창고 문을 열고 리제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와 넝쿨이 쌓인 창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고의 뚫린 창 너머를 보고 있던 남자가 리제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리제나와 남자의 검은 눈이 마주쳤다.
“드로이트 공작 각하.”
리제나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시궁창 같은 창고와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미소였다.
드로이트 공작은 리제나의 미소에 인상을 구겼다.
“시오스 후작이 보낸 서신이었는데 왜 시오스 영애가 내 앞에 있는 것인가.”
만나자는 서신을 보낸 것은 분명 시오스 후작의 이름으로 도착했었다.
그런데 시오스 영애라니.
이젠 직접 나오지도 않을 만큼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드로이트 공작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든 그때 리제나가 말했다.
“송구합니다, 공작 각하. 그 서신은 제 아버지가 아닌 제가 보낸 것입니다.”
“……영애께서?”
“네. 아버지는 당분간 모든 일에서 손을 떼시고 칩거하실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일은 저와 의논하시면
됩니다.”
“흠…….”
드로이트 공작은 못마땅한 신음을 흘렸다.
리제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비소를 삼켰다.
드로이트에 남은 거라곤 저택 하나와 허울 좋은 작위뿐이었다.
버리려 한 패에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거늘.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드로이트 공작이 우스웠다.
마음 같아선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엘리야를 없애기엔 드로이트 공작만 한 사람이 또 없었다.
리제나는 공작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아버지께서 직접 움직이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크흠.”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을 처리하는게 급선무이기도 하고요.”
“시급한 일? 그게 뭐지?”
“크로프트 영애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습니다.”
시큰둥하던 드로이트 공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크로프트 영애에게 아이라니, 설마…… 황제의 아이인가?”
전 황후였던 여자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다.
이 말을 듣는 모두가 아이의 아버지로 제일 먼저 떠올릴 사람은 황제일 것이다.
“네.”
아직 황제의 아이란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드로이트 공작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했다.
리제나의 단호한 대답에 공작은 헛숨을 삼켰다.
“황제에게 1 황자 말고 또 다른 후계가 있다니…….”
이것은 그의 대의에 예상치 못한 가장 큰 복병이다.
“거기다 폐하께선 크로프트 영애를 다시 황후로 복권시키려 합니다.”
“뭐!?”
“크로프트 영애가 황후가 되고 그 아이가 새로운 황자가 된다면 저희의 계획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리제나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애초에 엄청난 피를 보고 황위를 찬탈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의 후계는 에드먼드가 유일했으니 황제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뒤
황태자가 된 에드먼드를 황위에 올리려 했었다.
폭군 황제를 몰아내고 말이다.
허나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부터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크로프트 공작은 다시 재기에 성공했고 시오스 후작은 칩거, 숨죽여 살던 파르앙
흐작이 재상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엘리야가 황후가 되고, 적통 황자가 나타나면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이대로 무너지면 드로이트 공작가는 물론이고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리제나는 초조함과 불안으로 물든 드로이트 공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허니 그들이 황궁으로 입성하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다니, 어떻게 말인가.”
“죽여야지요.”
리제나의 낮은 음성이 창고 안을 서늘히 울렸다.

112 화

드로이트 공작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위험하게 번뜩이는 그녀의 녹안을 분명히 보았다.
“지금 크로프트 영애와 황자를 죽이자는 건가? 미친 생각이군.”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였다.
귀족의 살인 사건은 황실에서 직접 조사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일반 귀족 영애도 아니고 무려 전
황후였던 영애였다.
조사원들이 파고들 터인데 그들의 눈을 피하며 완벽하게 일을 꾸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가만히 손 놓고 황후와 새로운 황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그렇다고 크로프트 공작가로 쳐들어가 영애를 죽이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크로프트 공녀와 아이는 지금 공작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적이 드문 저택에서 아이를 숨기고 있지요.
제가 그 저택의 위치를 압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 해도 저택을 대놓고 습격하는 것은 미친 짓이네.”
“누가 습격을 한다 했습니까.”
리제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공작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리제나의 태도엔 여유가 넘쳤다.
새로운 황자가 나타나면 제일 불안할 사람은 리제나였다.
1 황자의 어미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헌데 리제나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크로프트 영애를 죽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하니 제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공작 각하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습니까. 저에게 모든 계획이
있습니다. 공작께선 그저 저를 믿고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리제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은은한 빛이 비치는 그녀의 미소는 홀릴 듯 매혹적이었지만 드로이트 공작은 순간 제레미의 말이 떠올랐다.

<i>‘시오스 후작을 믿지 마십시오.’</i>

일이 벌어지고 이때까지 연락 한 번이 없었다.


후작도 아닌 고작 영애 따위가 와서 자신을 믿고 따르라 말한다라…….
드로이트 공작의 검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리제나는 그의 눈빛에서 의심을 읽었다.
그녀는 변함없는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저를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공작님을 믿지 않으니까요.”
태연한 그녀의 말에 공작이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리제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것, 그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각하. 새로운 황자가 나타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드로이트 공작가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요?”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
“드로이트 공작가는 결국 제국에서 완전히 잊힐 겁니다.”
드로이트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순간 리제나가 손을 내밀었다.
“허니 제 손을 잡으십시오. 각하.”
일그러지는 공작의 얼굴을 보며 리제나는 짙은 미소를 그렸다.

* * *

이틀 뒤.
이른 아침 피닉스 상단의 지부로 갔던 제드는 늦은 오전쯤 돌아왔다.
“루몬트가 적당한 저택을 찾았대. 늦어도 삼 일 뒤쯤엔 그곳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제드가 내게 말했다.
“다행이다. 시오스 후작 쪽에 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지?”
“없어. 후작도 여전히 칩거 중이고……. 후작가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고 했어.”
“시오스 영애가 혹시 따로 움직인 흔적은?”
“흠……. 후작가를 통할 수 있는 모든 문을 주시하고 있지만, 특별한 흔적은 없었어.”
시오스 후작가의 저택은 거대했다.
보통 그런 규모의 귀족 저택엔 위급 상황 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알아보기는 쉽지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드로이트 공작에 대한 소식은?”
“뭐, 그쪽도 특별히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댔어. 음…… 그, 드로이트 공자한테선 아무런 말 없어? 뭐
서신이라던가…….”
“없었어.”
내가 고개를 젓자 제드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드로이트 공자도 바쁠 거야. 거기다 공작의 눈이 있는데 서신을 보내는 게 쉽진 않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보다 이제 술은 다 깬 거야?”
이틀이나 지났지만 그에게서 났던 술 냄새를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제 하루 술병이 나서 누워 있었을 정도였다.
제드는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다 시선을 돌렸다.
“근데 칼라일이 안 보이네? 낮잠 자는 건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그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하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전서구?”
갑작스레 도착했다는 전서구에 난 얼굴을 굳혔다. 하인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은 난 봉투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름이 없네…….”
리제나가 보낸 것인가 했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때 제드가 말했다.
“드로이트 공자가 아닐까? 일단 어서 열어봐.”
그의 눈짓에 난 봉투를 뜯었다. 종이를 펼치자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엘리, 드로이트 공작이 칼라일의 존재를 눈치채고 노리고 있어요. 비밀리에 용병들을 모으고 있으니
당장 저택을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드로이트 공작이라니. 서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급히 준비해 둔 은신처가 있으니 일단 그곳으로 오늘 밤 떠나요. 드로이트 공작이 저택을 주시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요. 은신처로 가 있을 테니 그곳에서 만나요.]

“왜 그래? 무슨 서신이길래 그래?”


내 얼굴이 심각해지자 제드가 물었다.
“……드로이트 공자가 보낸 서신이야.”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공작 쪽에 무슨 문제라도 있대?”
난 대답 대신 제드에게 서신을 건네 주었다. 서신의 내용을 다 읽은 제드도 찝찝한 얼굴을 했다.
“드로이트 공작이 우리를 노리고 있대.”
“뭐?! 젠장, 왜 드로이트 공작이…… 설마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이용한 건가. 아니, 그것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드로이트 공작이 움직이기 전에 제레미가 말한 저택으로 가야 했다.
“제레미가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대. 그곳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이게 저택의 위치인가 보다.”
제드가 서신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종이를 뒤로 돌려보자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과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그럼 이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려던 난 멈칫했다.
드로이트 공작이 일을 꾸민다는 것에 순간 정신이 없었지만 막상 가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서신이 진짜일까.”
난 서신을 다시 살펴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드로이트 공자가 보낸 거잖아.”
“하지만 제레미가 갑자기 서신을 보내온 게 이상해서……. 이런 일이라면 직접 찾아왔을 텐데.”
“아냐. 드로이트 공자의 서신이 맞을 거야. 내가……”
“내가?”
제드가 무얼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드로이트 공자의 서신이 확실해 보인다는 거지. 너는 드로이트 공자의
필체를 알지 않아?”
“제레미의 필체는…… 맞아.”
“그럼 확실한 거지. 엘리, 어서 움직이자 여기 있는 건 위험해.”
저택을 지키는 호위기사가 있지만, 그쪽에서 보낼 이들이 몇 명일지도 모르니 위험했다.
그렇다고 숨겨진 은신처인 이곳에 경비대를 부를 수도 없었고.
하지만…….
서신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자 제드가 말했다.
“엘리, 드로이트 공자가 너에게 가짜 서신을 보낼 리가 없잖아. 드로이트 공자를 믿자.”
제드가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터질 것 같던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앞에서 멈춘 말에서 내린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루몬트?”
“엘리 님, 제드 님!”
우리의 앞으로 달려온 루몬트가 숨을 몰아쉬었다.
“루몬트,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루몬트가 다급히 답했다.
“정보원이 드로이트 공작에 대한 심상치 않은 정보를 보냈습니다!”
“심상치 않은 정보?”
제드가 나를 힐긋 보곤 루몬트에게 물었다.
루몬트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드로이트 공작이 이틀 전 용병들을 비밀리에 모았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능한 놈들로만요.
거기다 습격을 준비한다는 말까지 흘렸다고 합니다.”
“용병과 습격이라면…….”
제레미가 서신에 적어 보낸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역시! 이 서신이 진짜였던 거야!”
제드가 외쳤다.
“서신이요?”
루몬트가 무슨 말이냐는 듯 우리를 번갈아 보았지만, 지금은 이 서신이 제레미가 보낸 게 맞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제드 마차와 호위기사 몇 명을 추려줘. 난 바로 짐을 쌀게.”
“알았어. 나도 준비할게.”
“아니 갑자기 마차랑 짐이라니…… 제가 모르는 무슨 준비라도…….”
난 어리둥절한 루몬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루몬트, 드로이트 공작이 이곳을 습격할 거야. 어서 칼라일과 함께 이곳을 떠나야 해.”

* * *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에그리타 제국의 황성의 지붕이 아름답게 빛났다.


눈부신 붉은 빛이 창을 치고 들어오는 그때, 레이몬드는 카르텔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드로이트 공작의 낌새가 이상하다?”
“네. 폐하.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가 은밀히 뒷세계의 용병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밤 한
저택으로 그들을 모두 불러모았다고 했습니다.”
카르텔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몬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이틀 전 드로이트 공자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었다.
공작의 명을 받아 갑작스레 서부로 떠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찝찝함이 남으니 공작을 주시하라고 말이다.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있기도 했기에 그는 카르텔에게 직접 감시를 명했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놓칠 수도 있었으니까.
“저택이라…….”
뒷세계의 용병들이라면 반역을 도모하기 위한 사병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체계적인 싸움에 능한 자들이 아니라 더러운 일에 능한 자들이니까.
불법적인 거래나 암살 같은 것들.
저택에 용병들을 모아 무얼 하려는 거지.
“폐하, 그리고 제의를 받았던 용병 하나를 잡아 알아낸 저택의 위치입니다.”
카르텔이 책상 위로 저택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내려놓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위치를 본 레이몬드가 얼굴을 구겼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엑스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표시가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저택이 있을 거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외진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용병들을 불러 모을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갑자기 서부로 떠난 드로이트 공자와 불러모은 용병, 외진 저택.
“……함정?”
그리 생각한 순간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며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다.
엘리야와 칼라일.
그의 머릿속으로 두사람이 떠올랐다.
레이몬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르텔 지금 당장 정예기사들을 준비시켜라. 이곳으로 갈 것이다.”
“존명.”
어느새 해가 졌다. 퍼렇게 굳은 얼굴로 검을 잡은 그는 다급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113 화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은 많이 흔들렸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준비를 마치니 어느새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산속을 달리는 것이 위험했기에 마차의 속도도 어쩔 수 없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칼라일이 넘어질까 꽉 끌어안자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엄마, 우리 언제 도착해요?”
칼라일은 들썩이는 마차가 힘든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야.”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제드가 나타났다.
“도착했어?”
제드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아직 근데 더 이상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어. 아무래도 이곳에서부턴 말을 타고 가야 할
거 같아.”
도착한 게 아니라 길이 끊긴 듯했다.
“알았어.”
난 제드에게 칼라일을 넘기고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우거진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드, 이 길이 맞는 거지?”
난 우리가 향해야 하는 어두컴컴한 숲길을 보았다.
“지도상으론…… 맞아.”
어둠이 찾아와서일까. 산속의 길이 유난히도 섬찟하게 느껴졌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저 길을 가면 안 될 것처럼 말이다.
제드 역시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우리 둘은 잠시 침묵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분명 제레미가 준비해놓은 은신처인데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은 걸까.
계속 가도 되는 걸까.
왜인지 모를 망설임이 들었다.
그때 우리의 곁으로 기사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저택에 도착해야 합니다. 산속이라 늑대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기사의 말이 맞았다. 저택으로 가든 다시 돌아가든, 움직여야 했다.
산속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위험했으니까.
“……드로이트 공자가 준비한 은신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오히려 이런 산속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여기 저택이 있다고 생각조차 못 할 것 같다.”
망설이는 기색을 느낀 것인지 제드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주춤하던 난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레미가 준비한 은신처이니까.
난 그를 믿었다.
몸을 돌려 곧장 말에 올라탔다.
제드에게서 칼라일을 받아 앞에 앉히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 로브 안으로 아이를 숨겼다.
“출발한다.”
호위기사들이 나를 감싸듯 대열을 맞춘 뒤, 우린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우거진 숲속의 길이 끊기며 2 층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인 듯합니다.”
기사가 외치고 우리는 저택 근처에서 말을 멈추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호위기사들이 주변을 살피고 제드도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엘리, 칼라일부터 주고 내려.”
그가 손을 뻗었다.
“칼라일, 이제 다 왔어.”
“…….”
잠들었나.
로브 안 속에 있는 칼라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로브 안을 들여다 보자 잔뜩 굳어있는 아이가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
로브를 뒤로 젖히자 칼라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엄마. 우리 다 온 거예요?”
“응.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난 놀란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안도감이 드는지 경직된 칼라일의 몸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빨리 자고 싶어요.”
“들어가서 엄마랑 같이 코, 자자.”
“네.”
“칼라일, 아저씨한테 와.”
칼라일이 제드에게 안기고 나 또한 뒤따라서 말에서 내렸다.
그때, 주변을 살핀 기사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상단주님. 저택이 뭔가 좀…… 이상합니다.”
“뭐?”
“이상하다고?”
기사의 말에 난 저택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아 마법 램프로 시야를 밝혔다.
그러자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저택이 제대로 보였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듯 저택의 외벽엔 넝쿨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고 창문들은 드문드문 깨져
있었다.
기사의 말대로 이상하리만치 음산한 분위기였다.
“……뭐야.”
제드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도저히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곳처럼 보이지 않는 저택의 풍경에 점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순간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제레미는 어디 있는 거지.”
아무리 저택을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서신에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했었다.
이렇게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우리가 왔음을 모를 리 없다. 제레미라면 벌써 나와 우리를 맞이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어디에도 제레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소름 끼치는 불안감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엘리, 뭔가…… 잘못된 거 같다.”
한껏 긴장된 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이 맞다.
여긴 제레미가 찾은 은신처가 아니다.
불길한 예감은 더 이상 예감이 아니었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황급히 칼라일을 안고 제드에게 말한 그때.
“여길 벗어나야……”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인영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열을 갖춰라!”
호위기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고 기사들이 우리를 감쌌지만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온
수풀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우리를 빙 둘러싼 검은 복면의 암살자들.
이곳은 우리를 위한 함정이었다.
“젠장.”
제레미가 보낸 서신이 아니었던 거다.
칼라일을 꽉 끌어안은 순간,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챙, 챙-!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히 울렸다. 그리고 하나둘 쓰러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엄마……!”
그때, 지척에 있던 상단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그리고 또 하나가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는 암살자들의 수는 어림짐작해도 스무 명이 넘어 보였지만 상단의
기사는 겨우 다섯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이라 했던 서신의 내용을 따랐기 때문이다.
상단의 호위기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스무 명이 넘는 암살자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단 한 명의 기사만이 남았을 때.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내 뒤로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칼을 버려라!”
내 목에 닿는 차가운 검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를 본 제드와 기사가 이를 악물더니 검을 바닥에
던졌다.
암살자의 복면 아래로 또렷한 비소가 보였다.
복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지만 번뜩이는 눈빛과 검을 잡은 자세를 보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이냐.”
“안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움직이지 않자 암살자가 검날의 방향을 바꾸었다.
품에 안긴 칼라일을 향해.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여기서 애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곱게 들어가시란 말입니다. 영애.”
눈앞의 검을 당장 이 자의 심장에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때, 나를 부여잡고 있는 칼라일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듯 분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난 천천히 뒤로 한 걸음씩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결국 저택 안으로 들어서게 된 순간 암살자가 검을 거두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 특별히 각하께서 저승길 동지를 함께 넣어주라 하셨으니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저택 안으로 제드와 기사를 던지듯 밀어 넣은 암살자가 저택의 문을 쾅 닫았다.
“엄마…….”
“괜찮아. 칼라일, 괜찮아.”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꼭 안은 순간, 창밖으로 불길이 넘실거렸다.
“안돼…….”
불길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름이라도 미리 부어둔 건지, 불길이 빠르게 저택을 집어삼키면서
실내에는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다.
“켈록, 켈록!”
난 황급히 옷소매를 찢었다. 그 천에 허리춤에 있던 물병을 부은 후 칼라일의 코와 입을 막았다.
“칼라일 절대 입에서 떼면 안 돼. 알았지?”
아이는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칼라일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주변을 살폈다.
연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출구를 찾아야 했다. 아님 여기서 개죽음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던 그때 난 연기 사이로 금이 간 창문을 발견했다.
“제드! 저기! 저 창문을 부숴!”
다급히 외치며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키자 문을 온몸으로 들이받고 있던 제드와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금이 간 창문으로 다가간 두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구 없이 맨주먹으로 창을 부수기는 쉽지 않았다.
검마저 뺏겼기에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일부러 치워 두기라도 한 듯 저택 안에는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없었다.
“조심해!!”
그 순간, 불길에 휩싸인 천장의 구조물이 떨어졌다.
“흐억!”
제드는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가 맞고 쓰러졌다.
불타오르는 구조물이 창문 앞을 막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젠장!!”
“……안돼.”
유일한 희망이었던 출구가 막혀버렸다.
이렇게 있다간 다 죽는다. 칼라일이 죽는다.
그 사실에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택의 문을 향해 달려간 난 손잡이를 부여잡고 문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불길이 붙기 시작한 문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지만 고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칼라일만은 살려야 했으니까.
“위험해!!”
그때, 제드가 나를 뒤에서 안아 굴렀다. 고개를 들자 완전히 화마에 휩싸인 문이 보였다.
한발만 늦었더라면 난 불길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놔. 놓으라고!”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엘리…….”
제드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칼라일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켈록, 엄마……! 켈록!”
“칼라일!!”
기침하던 아이의 몸이 축 늘어지지는 것을 본 난 아이에게 달려갔다. 가까스로 넘어지는 아이를 받았지만
칼라일은 의식이 없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분도 버티지 못할 수 있었다.
난 불길에 휩싸인 주변을 둘러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구조물을 치우고 내 몸을 던진다면 깰 수 있지 않을까.
난 살아남을 수 없겠지만 칼라일은, 적어도 칼라일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대로 내 아이를 또 잃을 순 없어.
하지만 한걸음 떼기도 전에 시야가 흔들렸다. 끊임없이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질식 증상이 온 것이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칼라일을 꽉 끌어 안았다.
“안, 돼…….”
칼라일만이라도 제발…….
신이시여 제발, 제발 아이라도 살려 주세요.
살아생전 가장 간절하게 주신을 찾으며 난 결국 의식을 잃었다.

114 화

숲을 달리는 말발굽의 소리가 거칠었다


가장 선두에서 달리는 레이몬드는 뒤의 기사들이 따라붙기 힘들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칼날 같았지만 그는 미친 듯이 숨을 죄어오는 불안감에 다른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터질 거 같은 불길함.
엘리야.
그의 머릿속엔 제발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신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길에 휩싸인 저택을 본 레이몬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런 증거도 확신도 없었지만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곳에 엘리야가 있다고.
그는 더욱 미친 듯 말허리를 박찼다.
“히이잉!”
저택에 가까워지자 불길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었다. 레이몬드는 고삐를 놓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한 바퀴 몸을 굴렀지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저택 안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카르텔이 그를 붙잡았다.
“카르텔!!”
레이몬드가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카르텔은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 불길이 너무 큽니다!!”
화마가 덮친 저택은 이미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 저택에 들어갔다간 다시는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카르텔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온몸으로 레이몬드를 막았다.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살핀 기사들이 외친 순간 카르텔은 더 이상 레이몬드를 막을 수 없었다.
강한 힘으로 카르텔을 뿌리친 레이몬드는 불길에 휩싸인 문을 발로 찼다.
어느새 대부분이 타들어 간 문짝은 강한 발길질 몇 번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폐하!”
저택 안은 이미 연기로 가득 차 눈을 제대로 뜨는 것도 어려웠다.
“켈록, 켈록!”
검은 연기에 거친 기침이 터졌다. 기침을 할수록 딸려 오는 연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단검으로
망토 자락을 잘랐다.
물주머니를 꺼내 천을 적셔 입을 막은 그는 연기를 뚫고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불에 타들어 가는 저택의 잔재들 사이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발견했다.
“엘리야!”
잔재들을 단번에 넘은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엘리야, 엘리야!”
그녀의 얼굴을 들어 볼을 두드렸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아니야.”
레이몬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맥을 확인했다.
그러자 아주 미약하지만 아직 뛰고 있는 맥이 느껴졌다.
기적처럼 아직 살아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명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녀를 안으려던 순간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마치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듯 온몸을 웅크리고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설마…….’
제발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들치자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가 보였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엘리야에게 안긴 칼라일. 숨을 들이킨 레이몬드는 다급히 칼라일의 여린 손목을
잡아 맥을 확인했다.
하지만 엘리야와 달리 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화마 속에서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엘리야의 품 안에서 칼라일을 빼냈다.
그의 손안에 느껴지는 작은 무게와 축 늘어지는 아이의 몸에 손끝이 떨렸다.
레이몬드는 입을 가렸던 천을 뗐다. 그리고 천을 반으로 찢어 물주머니의 남은 모든 물을 쏟아부었다.
“쿨럭! 크윽…….”
연기가 밀려들었지만, 그보다는 엘리야와 칼라일이 더 급했다.
물에 젖은 천을 엘리야와 칼라일의 얼굴 위로 덮은 그는 물기 젖은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쓸어내렷다.
조금이라도 체온이 내려가길 간절히 바라며.
그리고 일단 그 모든 것보다 빨리 이곳을 나가야 했다.
조심스럽게 엘리야의 위로 칼라일을 엎드린 상태로 놓았다. 그는 두 사람을 한 번에 안아 들었다.
그사이 불길은 더욱 거침없이 저택을 잡아먹고 있었다. 몸을 돌리자 마자 천장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혹시라도 엘리야와 칼라일에게 그 불길이 닿을까 레이몬드는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퍽-!
불길에 휩싸인 알 수 없는 덩어리가 그의 어깨를 정확히 강타했다.
“윽!”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뜨거움과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절대 작은 상처는 아니리라.
입술이 짓이겨지도록 꽉 깨문 그는 엘리야와 칼라일이 흔들리지 않게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 저택으로 들어선 카르텔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출입구 쪽의 불길을 간신히 잡은 카르텔과 기사들이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레이몬드의 부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켈록, 폐하, 큽,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나머지 부상자들을 밖으로 옮겨라.”
저택 안에는 엘리야와 칼라일 말고도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뒤에 있던 기사들이 부상자들에게로
향하고, 카르텔은 레이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지만 카르텔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처음 보는 레이몬드의 두려움에 젖은 눈빛 때문이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두 사람을 안아 든 레이몬드가 말했다.
“내가 한다.”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안은 채 뛰어나갔다.

* * *

황궁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미친 듯이 달려 황궁에 도착한 그는 황궁의들을 전부


불렀다.

<i>‘목숨을 걸고 크로프트 영애와 아이를 살려라.’</i>

그는 황궁의들에게 서슬 퍼런 명령을 내렸다. 살벌한 분위기에 황궁의들은 긴장하며 엘리야와 칼라일을


살피고 있었다.
큰 침대 덕분인지 유달리 작아 보이는 아이를 보며 레이몬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칼라일은 황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었다.
미약한 맥박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 미친 듯이 달렸던 그였다.
레이몬드는 황궁의 진찰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아이는 어떻지?”
칼라일을 살피고 있던 황궁의 중 한명이 그에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큰 내상은 없는 듯합니다.”
“허면 왜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냐.”
“연기를 많이 마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허나 큰 열상이나 내상은 없어 치료를 하면
호전될 것입니다. 누군가 불길 속에서 아이를 잘 감싼 듯합니다.”
순간 불길 속에서 칼라일을 끌어안고 있었던 엘리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으로 아이를 안고 있던 그녀의 모습.
아이의 몸에 열상 하나 없는 것은 엘리야가 자신의 몸을 희생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심장이 저릿해 숨을 삼킨 그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의식은 차릴 수 있는 것이냐.”
“네. 치료를 하면 의식이 돌아올 것입니다.”
“치료에 최선을 다해라.”
“네. 폐하.”
여전히 의식이 없는 칼라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엘리야에게 가기 위해 방을 나갔다.
엘리야는 이 방이 아닌 그의 침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시종이 침실 문을 열어주었지만 레이몬드는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i>‘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i>

칼라일의 방으로 가기 전 황궁의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엘리야가 혹시 그사이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두려움이 들었다. 아직도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했으니까.
만약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최악의 상상을 멈춘 그는 경직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침대에 엘리야가 누워있었고, 세 명의 황궁의들이 붙어 정신없이 진료하고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황궁의들의 얼굴이 엘리야의 상태를 말해
주는 거 같았다.
그때, 황제를 발견한 황궁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상태는.”
황궁의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데다 열상이 심합니다. 등은 물론이고 손과 다리에도 화상이 심하여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거기다 열기로 인한 내상까지 있는 듯 보입니다.”
“깨어날 수 있는…… 것이냐.”
그는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황궁의의 얼굴에 참담함이 스쳤다.
확답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레이몬드는 알고 있었다.
거의 회생할 가능성이 없을 때 하는 말이었다.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황제에게 차마 하지 못해 돌려 말하는 것이다.
엘리야의 상태는 그만큼 위독하단 뜻이었다.
그는 열에 들뜬 신음을 내뱉는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고통에 찬 신음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올
때마다 심장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았다.
내가,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엘리야가 저리된 것이 전부 그의 탓 같았다.
아니, 그의 탓이 맞을 것이다.
그가 결국 엘리야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엘리야와 아이가 위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레이몬드는 뼈가 도드라지도록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황궁의들이 다시 치료를 시작하고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프트 공작가에 서신을 보내. 엘리야가 이곳에 있다고.”
엘리야와 칼라일을 황궁으로 데려왔을 땐 정신이 너무 없어 미처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젠 공작을 불러야 했다.

레이몬드가 불안에 젖은 눈으로 엘리야를 보고 있던 그때, 칼라일이 있는 방에서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갑자기 왜이리 열이 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군, 아까까진 분명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황궁의들은 갑자기 열이 오르는 칼라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작은 대화를 나눈 황궁의들이 칼라일의 몸을 다시 살폈다
분명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윽……!”
뜨거운 열이 버거운 것인지 칼라일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마도구로 아이의 상태를 다시 체크한 황궁의가 미간을 좁혔다.
“이건 내상으로 일어나는 열이 아닌데…….”
혹시나 해 다시 검사했지만 아이의 속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무언가 다른 것이 아이의 속을 흔들고 있는 듯했다.
“흠…….”
그리고 그때 팟,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이의 귓볼에서 무언가 부서진 가루가 흘러내렸다.
“아니…….”
“머리색이……!”
황궁의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이의 머리색이 바뀌었기 때문에.
드문드문 검은 재가 묻어있기는 했지만, 아이의 머리칼은 분명히 금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칠흑 같은 검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이것은 황족의 상징이다.
황궁의들은 경악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젊은 황궁의들이 어쩔 줄 모르던 그때 중년의 황궁의가 시종에게 몸을 돌렸다.
“당장 폐하를 모셔오게.”

115 화

“무슨 일이냐.”
시종의 급한 부름에 방으로 온 레이몬드가 물었다.
혹시 칼라일의 상태까지 안 좋아진 것일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칼라일을 둘러싸고 있던 황궁의 하나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에 가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어딘지 이상하게 경직된 황궁의의 얼굴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이의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
“그것이, 상태가 아니라…….”
황궁의가 난감함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똑바로 말해라.”
레이몬드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그제야 황궁의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머리색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아이의 머리색이 바뀌었다니.
이상한 소리였다. 갑자기 여기서 마도구가 왜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칼라일의 몸에 마도구가 없는 것을 이미 자신이 직접 확인했었다.
헌데 이게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얼굴을 구긴 그때, 또 다른 황궁의가 그에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폐하. 아이의 머리색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뭐라고?”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검은색은 황족의 상징이다. 그런데 칼라일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니.

<i>‘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i>

분명 몇 번이고 그에게 그리 말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 외치는 이성과는 달리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폐하.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황궁의가 옆으로 비켜셨다. 레이몬드의 흔들리는 눈빛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작은 입술과 오뚝한 코, 그리고 엘리야를 닮은 눈매를 지나 마침내 아이의 머리칼을 본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금발이어야 할 칼라일의 머리칼이 검은색이었다.
그와 똑같은, 황족의 상징인 검은 빛.
레이몬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그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모든 것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칼라일에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칼라일의 볼에 닿고 그 온기가 손안에 전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순간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아이의 머리색이 그와 같은, 검은색이라는 것을.
“어떻게…… 분명 마도구가…….”
“귓바퀴 안쪽에 아주 작은 귀걸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이 마도구였던 거 같습니다.”
황궁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손을 그러쥔 그때, 시종장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 크로프트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데려와.”
“네.”
시종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제국의…….”
“인사는 됐다.”
크로프트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소식을 듣고 바로 온 듯 공작의 옷매무새가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다 안색도 창백했다.
엘리야와 아이가 습격을 당했다 들었을 테니,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살피기에는 레이몬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폐하. 아이는 괜찮은 것입니까? 엘리야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엘리야를 봐야 할……”
“공작.”
레이몬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숨도 쉬지 않고 다급히 묻던 공작은 심상치 않은 레이몬드의 분위기에 말을 멈추었다.
몹시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검은 눈동자 속엔 알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것입니까.”
“아이를 보게.”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누운 칼라일을 본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눈을 감고 있는 칼라일의 머리칼이 흑발이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잠시 모두 나가 있어라.”
레이몬드는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레이몬드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칼라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공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설명해 봐라.”
“…….”
“엘리야는 분명 내 아이가 아니라 했었다.”
“…….”
“헌데 지금 저 아이의 머리색이 왜 검은색이지? 왜 마도구로 아이의 머리색을 바꾼 것이냔 말이다.”
“…….”
“공작! 말을 하란 말이다!”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결국 그의 목소리가 터지듯 흘러나왔다.
공작은 거세게 흔들리는 레이몬드의 눈빛을 보며 황망한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숨기려 애를 쓰고 또 썼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듯했다.
칼라일의 마도구가 깨진 이상 더는 황족의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작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예, 폐하의 핏줄이 맞습니다.”
“하.”
단말의 숨을 내뱉은 레이몬드의 몸이 비틀거렸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세게 후려친 듯 눈앞이 아찔했다.
엘리야에게 아이가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아이가 아닐까 의심했었지만 깊이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단호히 그의 아이가 아니라 말했으니까.
그런데 내 아이라니.
그에게서 아이의 존재를 숨기고 강하게 부정했던 엘리야의 지난 모습들이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속인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공작 또한 자신에게서 엘리야와 아이를 숨겼다.
지난 6 년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엘리야를 찾는지 봐 왔으면서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레이몬드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배신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작,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크로프트 공작은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걸 아는 자가 감히 내게 아이의 존재를 숨겨?!”
레이몬드의 성난 음성이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감히 황제의 자식을 빼돌린 일이다.
발각되면 목숨을 건지기 힘든 죄라는 것은 누구보다 크로프트 공작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딸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 또한 목숨을 걸어서라도 엘리야와 칼라일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공작은 머리를 숙이며 간청했다.
“폐하, 모든 것은 제가 꾸민 일입니다. 허니 제발 엘리야와 칼라일만은 살려주십시오. 엘리야는…… 그저
제 말을 따랐을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공작을 보며 무참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 잘못이라는 공작의 말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어떻게 이일을 크로프트 공작 혼자 결정한 일일 수 있겠는가.
그에게 당당히, 더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칼라일이 제 아이가 아니라 말한 것은 다름아닌 엘리야인데.
엘리야는 아이를 가지고 그를 떠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와 이혼을 하기 전 임신 사실을 안 것이냐.”
“……예.”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아이를 가지고 그를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당시의 그녀가 어떠한 상황들로 인해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짐작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간 치솟는 배신감을 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렇게 이혼을 서둘렀군. 내게 임신을 들키지 않으려 말이야.”
갑자기 제국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것도 이젠 전부 이해가 갔다.
그에게 칼라일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레이몬드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이만 나가거라.”
지금 공작을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정말 이성을 잃을 거 같았다.
“폐하 부디……”
“듣고 싶지 않다. 나가.”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크로프트 공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인사를 올렸다. 그의 시선에 의식이 없는 칼라일이 걸렸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했다.
아이를 걱정스레 보던 공작이 나가고 레이몬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호흡을 해 봤지만 머리가 터질 듯한 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고 나와 이혼을 하다니.
차라리 이혼을 한 뒤, 룬트 왕국에서 칼라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토록 배신감이 들진 않았을
것이다.
넌 내가 그토록 싫었던 건가.
“흐으…….”
널뛰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그때, 미약한 신음이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아이의 얼굴이 힘들어 보였다. 심장이 철렁한 그가 다급히 외쳤다.
“시종장!”
“네, 폐하.”
황급히 들어온 시종장이 머리를 숙였다.
“황궁의들을 다시 들여보내.”
“네.”
궁의들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레이몬드가 말했다.
“아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칼라일은 어디가 아픈 것인지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빠르게 아이를 살피던 황궁의들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리고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마법이 강제적으로 깨지며 몸 안에 반작용이 일어난 듯합니다. 큰 내상은 아니니 약을
지어 바로 올리겠습니다.”
“서둘러라.”
네, 황궁의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신음을 흘리는 칼라일에게 다시 다가섰다.
그와 똑같은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핏줄.
이 작은 아이가 그의 자식이란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제 아들이란 걸 알게 되다니.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있다 말할 수 있을까.
그 위험 속에서도 지켜내지 못했는데.
차마 아이를 쓰다듬지 못한 손을 허공에서 멈춘 그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크로프트 공작은 돌아갔느냐.”
“아직…… 밖에 서 계십니다.”
“……크로프트 공작을 내 침실로 안내해 주어라.”
그를 속인 공작에게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지만 엘리야를 못 만나게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궁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오늘 일을 밖으로 옮기는 자들은 직위를 상관치 않고 목을
벨 것이다.”
레이몬드는 황궁의들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듯 황궁의들이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시종장이 나가고 레이몬드는 침대 곁에 앉았다.
칼라일이 깨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116 화

콰르릉-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면서 메마른 하늘에 천둥이 울렸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을 읽고 있던 리제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모여드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질 듯 했다.
“……비가 오면 불이 꺼질 텐데.”
그녀의 고운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려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제 방을 방문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들어와.”
릴라가 들어오는 모습에 리제나는 책을 덮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니?”
일이 잘 끝나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라 그녀가 릴라를 현장으로 보냈었다.
완벽한 계획이었으니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로이트 공자의 서신을 가장해 엘리야와 칼라일을 준비된 저택으로 유인하고 그곳에서 산 채로 불태워
버리는 것.
재만 남은 저택에선 엘리야와 칼라일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증거도.
릴라는 만족스러운 답을 기다리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가씨, 일이 틀어졌습니다.”
움찔.
미소를 그리려던 리제나의 입꼬리가 멈칫했다.
“일이 틀어졌다니? 아직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크로프트 영애와 아이를 저택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것까지는 계획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갑자기 페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폐하께서……?”
“네. 불타고 있는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 직접 크로프트 영애와 칼라일을 구하셨습니다.”
“불길에 뛰어들었다라…….”
그가 엘리야를 구하기 위해 직접 불길에 뛰어들었단다.
리제나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품겠다고 말하더니 이젠 목숨까지 불사른다라…….
참으로 대단한 사랑이었다.
그가 그렇게 온몸을 던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을 적에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던 레이몬드였다.
그랬더라면 제가 서왕국으로 떠났을 때 그렇게 저를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를 향한 미련 같은 건 없다, 생각했는데 쓰린 속을 보니 버리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었나 보다.
하지만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다.
리제나는 웃음기를 지우며 릴라에게 말했다.
“허면 크로프트 영애와 아이는 폐하께서 직접 데리고 간 것이냐.”
“네. 황궁으로 가셨습니다.”
“네가 보기에 그 둘이 살아남을 것 같더냐?”
잠시 고민하던 릴라가 말했다.
“연기를 많이 마시긴 했으나…… 죽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일이 틀어졌다 해도 둘이 죽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리제나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직접 개입했다면 벌써 4 기사단장이 용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목숨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죽을 뻔했으니 레이몬드는 배후를 끝까지 찾을 것이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겠지.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릴라, 모든 증거는 드로이트 공작에게 몰아넣었겠지?”
“네, 용병들은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만을 보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서신을 대필한 자 역시 이미
죽여 없앴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됐을 경우를 대비해 드로이트 공작에게 증거와 정황을 돌려놓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가 예상한 상황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레이몬드가 그 외진 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뜻이다.
용병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암살자들은 드로이트밖에 모르긴 하지만……”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황제가 직접 칼을 뽑은 지금, 드로이트 공작이 그녀에 대한 의리를 지킬 리가
없었다.
아니, 분명 배신할 것이다.
거기다 어쩌면 이미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가를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 드로이트 공작이 죽어 나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됐다.
무리해서라도 그녀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레이몬드의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던 그녀는 절망의 숨을 내뱉었다.
“릴라, 드로이트 공작은 오늘 밤 자살할 것이다.”
“네?”
릴라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는지 답지 않게 당황하여 되물었다. 하지만 곧 리제나의 번뜩이는 녹안을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예.”
리제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두 번째 서랍을 연 그녀는 안에 있는 드로이트 공작의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릴라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렴.”
리제나는 릴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충실한 심복.
리제나는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단검을 릴라에게 건넸다.
“명하십시오.”
“드로이트 공작의 필체가 담긴 서신이다. 대필로 유서를 만들어. 그리고 공작이 절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게 해라.”
황궁의 기사들이 드로이트 공작가를 찾기 전에 공작이 죽어야 한다.
그래야 시오스 후작가가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존명.”
번쩍.
또 한 번 내려꽂히는 번개의 불빛에 리제나의 굳은 얼굴 위로 번쩍였다.

* * *

희뿌연 연기 속에서 넘실대는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온몸이 뜨겁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그리고 난 자꾸만 멀어지는 칼라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라일, 안돼. 이리와! 제발, 제발 칼라일!’
분명 그리 외치고 싶은데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게서 멀어지는 아이는 점점 불길에 가까워졌다.
당장 달려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심장이 터질 거 같고 온몸이 달궈진 듯 뜨거웠다.
제발, 제발, 제발.
악을 지르듯 간절하게 빈 순간, 칼라일이 고개를 돌렸다.
‘엄마?’
날 발견한 아이가 다가오려는 듯 발걸음을 돌렸다.
안도감에 몸에 힘이 풀리던 바로 그 순간, 용암 같은 화마가 아이를 덮쳤다.
“안돼!”
난 소리를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헉, 하윽……!”
거친 숨을 몰아쉰 난 혼몽한 정신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영애, 정신이 드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어라 말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더워. 여긴 어디지.
알 수 없는 목소리들. 흐릿한 시야에 고풍스러운 천장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했지만 선명하지 않은 의식 때문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몸이 타들어 갈 듯한 열기와 칼라일만이 생각났다.
칼라일은 어디 있는 거지.
난 내게 무어라 말을 하는 자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열이 너무 심합니다.”
“내상이 너무 심해. 약을 좀 더 써야겠다.”
대화를 나누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나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곧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아가씨, 약을 드셔야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꽉 잡고 말했다.
하르펜……?
나를 아가씨라 부르는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하는 말이 정확히 들려왔다.
온 힘을 다해 약을 삼킨 난 최선을 다해 입술을 움직였다.
“……칼……라…….”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기가 지독히도 힘들었다. 내장을 갉아 먹는 듯한 열기가 고통스러웠다.
“영애께서 무어라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아가씨, 다시 말씀해보십시오.”
하르펜에 내 입술 위로 귀를 가져 다 댔다.
“칼…… 윽, 라일…….”
죽을힘을 다해 칼라일의 이름을 말한 난 열에 들뜬 숨을 토해냈다.
“칼라일 님은 지금……”
“칼라일은 괜찮다.”
하르펜이 무어라 답하던 그때 낮은 음성이 끼어들었다.
“폐하.”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칼라일은 방금 의식을 차렸다. 큰 화상도 내상도 없어 안정을 취하면 금방 회복될 거야. 지금은 공작과
함께 있으니 걱정 마라.”
칼라일이 무사하다는 말에 쿵쾅대던 심장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여전히 온몸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지만, 아이가 괜찮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반이 줄어드는 거 같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데.
칼라일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손을 한 번 들었다가 떨어뜨리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네 몸의 회복이 우선이야.”
내 마음을 어떻게 안 것인지 레이몬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며 끙, 힘을 주자 레이몬드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 내 몸을 침대로 지긋이 누른 그가 시선을 맞췄다.
집요한 검은 눈동자는 언뜻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분노와 상처가 얼룩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요동치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엘리야. 지금 넌 화상도 심하고 내상도 심해. 이렇게 네가 의식을 차린 게 기적일 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야.”
“…….”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회복에만 집중해. 칼라일을 위해서라도.”
난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칼라일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아픔은 처음이었으니까.
지금은 참아야겠지.
“좀 더 자.”
그가 말했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니 칼라일과 나를 구해 준 것이 그인 것 같았다.
허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하윽…….”
하지만 입술을 벌려도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었다.
그런 나를 보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괴로운 듯 구겨졌다.
아픈 건 나인데 표정은 그가 더 아픈 거 같았다.
“고……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 * *

“의식을 또 잃은 건가.”
엘리야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몸이 축 늘어지자 레이몬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약 기운에 다시 잠든 것입니다.”
대답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가에서 급히 불려 온 하르펜이었다.
어릴 적부터 엘리야를 돌본 만큼 그녀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급히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이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이제 고비는 넘긴 건가?”
“네. 다행히도 약이 잘 들어 고비는 넘기신 듯합니다. 앞으로 치료를 꾸준히 하시면 회복되실 겁니다.”
황궁의의 말에 레이몬드는 그제야 딱딱히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잠든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식을 차렸단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을 때만 해도 칼라일에 대해 묻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내게서 아이를 빼돌릴 수 있냐고.
아무리 내가 싫었어도 아버지인 내게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엘리야를 마주하자 그런 말들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붉은 얼굴과 흐린 눈빛, 더운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으니까.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 우습게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저릿하기만 했다.
그를 속이고 배신한 그녀가 미웠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의식이 돌아오면 알려라.”
지금은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다.
방을 나간 레이몬드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칼라일이 있는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117 화

시종장이 문을 열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았다.

<i>‘으아앙- 싫어, 무서워, 엄마 불러 줘요. 아저씨 싫어요.’</i>

의식을 차리고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칼라일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연한 만남은 이미 아이의 머릿속에 지워진 듯 칼라일은 겁에 질려 울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달래보려 손을 뻗자 몸을 피하며 떨기까지 했었다.
마치 그가 해코지할까 무섭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레이몬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공작을 부르고 나서야 칼라일은 진정되었다.
외할아버지의 품에서 안정을 찾은 아이는 절대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
황궁의는 큰 사건에 놀란 데다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였지만 그를 완강히 거부하던 칼라일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와 똑같은 검은 눈동자로 그를 경계하던 모습.
레이몬드는 같은 일이 일어날까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종이 나왔다.
그와 부딪힐 뻔한 시종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고 그 뒤로 방 안이 보였다.
“폐하. 죽을죄를……!”
“됐으니 물러가라.”
레이몬드는 시종에게 손을 휘저었다.
열린 문 사이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칼라일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종이 물러가고 레이몬드는 발소리를 죽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가까이 가자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역시, 잠들었군.”
칼라일은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에 심장이 아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붉어진 눈가를 쓰다듬은 그는 기묘한 감정에 손을 거두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칼라일을 보던 그는 맞은 편에 선 크로프트 공작에게 시선을 들었다.
“공작. 엘리야는 고비를 넘겼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직 그대와 엘리야가 저지른 이 천인공노할 일에 화가 풀린 것이 아니다. 칼라일을 생각해 참고 있을
뿐이야.”
“……어찌 모르겠습니까. 폐하께서 무슨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 말도 지금은 듣기 싫군.”
레이몬드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답답한 숨을 내쉰 그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고 있는 공작에게 말했다.
“당분간 칼라일 곁에 있어라. 그대마저 없으면 아이가 충격을 받을 테니까.”
“……예.”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잠든 칼라일을 짙은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 * *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밀려드는 피곤함에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하아…….”
눈을 감은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통은 한결 나아졌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영 정리되지 않았다.
칼라일이 그의 자식이란 사실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철저히 단속한다고 해도 황궁의 수많은 눈과 입을 피할 순 없었다.
결국 칼라일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이고 제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흑발과 흑안.
부정할 수 없는 황족의 상징.
그렇게 되면 엘리야는 더는 칼라일을 데리고 그에게서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칼라일은 제국의 제 2 황자가 될 것이다.
귀족들은 차기 황태자가 누가 될 것인지를 두고 줄다리기를 시작할 것이다.
1 황자 에드먼드와 2 황자 칼라일.
칼라일이 없었을 땐 당연히 그의 후계는 에드먼드였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려 했었다.
하지만 전 황후의 적자인 칼라일이 나타난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에드먼드의 외가인 시오스 후작은 그를 배신하였으니까.
하지만 쉽진 않겠지.
지난 6 년간 시오스 후작의 세력이 많이 커져 있었다. 그리고 1 황자란 직위 또한 가볍지 않았다.
거기다 에드먼드는 그간 여러 대외 활동을 통해 인자하고 유순한 성품으로 제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바로 2 황자를 앞으로 내세우면 반발이 클 것이다.
“시오스 후작…….”
에드먼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하루빨리 처리해야 칼라일의 앞길에 잡음이 없을 것이다.
콰르릉-!
순간 창밖을 울리는 커다란 천둥 소리에 눈을 떴다.
천둥이 치고 곧이어 번개가 내리쳤다. 이윽고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창가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던 그가 시종장에게 몸을 돌렸다.
“카르텔은 아직 오지 않았나?”
카르텔은 그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암살자들을 잡으러 갔다.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종장이 답했다.
날이 밝기 전에 그들을 황궁으로 잡아 와야 했다.
칼라일의 존재가 밖으로 퍼져 나가기 전에 용병들에게서 시오스 후작에 대한 증거를 잡아야 했으니까.
용병들과 접촉한 것은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였지만 그는 이번 일의 배후에 시오스 후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시오스 후작이 꾸민 일이리라.
칼라일의 존재를 가장 위협이 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허니 반드시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지던 때, 시종 하나가 빠르게 시종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시종장은 곧장 레이몬드에게 그를 전했다.
“폐하, 4 기사단 단장께서 죄인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합니다.”
레이몬드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죄수들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내가 직접 심문할 것이다.”

* * *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듯 폭우는 새벽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른 새벽, 수도의 성문을 통과한 한 남자가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땅을 박차는 말발굽의 소리가 다급했다.
그렇게 커다란 저택 앞에서 멈춰 선 말이 세찬 울음을 소리를 내자,
“공자님께서 어찌……”
저택을 나온 집사가 제레미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공작의 명령을 받고 서부로 떠난 공자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돌아와 놀란 것이었다.
“……공자님.”
제레미는 집사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무시하며 저택 안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께선 어딨지?”
“아직 깨어나지 않으셔……”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레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공작의 침실을 향해.

<i>‘습격이 있었습니다. 드로이트 공자께서 보낸 서신이라 철석같이 믿고 저택으로 갔다가…… 그만…


….’</i>
<i>‘엘리 님과 칼라일 님은 지금 부상을 입고 황궁에 계시다 들었습니다.’</i>

아무래도 이상했었다.
제드를 만나고 돌아온 뒤 공작은 갑자기 그를 믿어보겠다며 서부로 가 귀족 한 명을 만나고 돌아오라 했다.
그 귀족이 앞으로의 대의를 실행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사람이라 했다.
갑자기 서부로 가라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처음엔 공작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믿어도 되는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서부에 정말 엄청난 반역의 증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해 버렸다.
혹시나 싶어 황제에게 서신을 넘기고 떠났지만 서부로 갈수록 무언가 찝찝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의심 많은 공작이 대의에 큰 역할을 할 주요 인물을 그에게 이렇게 쉽게 소개해 준다는 게 아무리 생각
해도 미심쩍었다.
공작의 성격이라며 그가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곁에 두고 자신이 진짜 믿을 만한지 아닌지 수십 번은
확인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서부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의 찝찝함은 제 뒤를 은밀히 쫓아오는 이를 잡았을 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자는 그가 심문하기도 전에 자결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자가 누구의 사람인지 짐작했다.
최근 그에게 계속 사람을 붙였던 자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시오스 리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여자.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가 결국 일을 꾸민 것이리라.
제레미는 그 길로 수도로 말머리를 돌렸다.
미친 듯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말을 달려 저택에 도착했지만 이미 엘리야는 없었다.
저택을 정리하고 있던 루몬트가 그에게 전한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뒤인 처참한 소식이었다.
드로이트 공작을 통해 자신을 서부로 향하게 한 사이, 리제나가 그의 서신임을 가장해 엘리야를 유인하고
결국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기적적으로 황제가 그들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엘리야와 칼라일이 얼마나 다쳤는지,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은지는 루몬트도 알지 못한다 했다.
함께 갔던 기사들은 거의 전멸이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사는 제드와 함께 의식 불명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루몬트의 절망적인 표정에 그의 심장이 철렁했었다.
당장 황궁으로 달려가 엘리야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번 일은 절대 드로이트 공작 혼자 꾸민 일이 아닐 것이다.
실제 일을 꾸민 사람은 시오스 리제나일 것이고 드로이트 공작은 더러운 일을 대신 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살기로 번뜩였던 리제나의 녹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제레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공작가로 말을
달렸다.
“아아악! 공작님!!”
최대한 빨리 달렸지만 제레미는 결국 늦고 말았다.
활짝 열린 침실의 문.
그리고 그 안에는 목을 매단 드로이트 공작의 몸이 줄 끊긴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118 화

비명을 지른 집사가 달려가 공작의 다리를 잡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제레미는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드로이트 공작을 제 아버지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엘리야가 황제에게 모든 증거를 바치면 드로이트 공작이 죽을 수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지어 온 죄에 대한 값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제레미는 모든 감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흔들리는 공작의 시선도 울부짖는 집사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레미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정신을 차린 그는 굳은 얼굴로 공작을 향해 다가갔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 공작의 목을 조이는 줄을 끊어냈다.
지푸라기처럼 떨어지는 공작의 몸을 받아 든 제레미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걸음을 옮겨 침대 위에 공작을
내려놓은 그는 눈을 감은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눈을 홉뜨며 소리를 지를 것 같았지만 공작의 감긴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큽, 공자님……. 공작 각하께서 남기신 유서인 듯합니다…….”
집사가 그에게로 정갈한 하얀 봉투를 가지고 와 내밀었다.

[아버지를 제 손으로 베고 황좌를 찬탈한 패륜 황제는 들으라. 하늘이 분노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황제여, 내 선황제 폐하의 복수로 네 적자를 죽이니 네놈은 절대 적통의 황자를 얻지 못할 것이다.]

황후의 자식인 칼라일을 죽이는 것으로 선황의 복수를 하고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제레미는 시선을 들어 공작을 보았다. 목에 선명히 남은 줄 자국이 보였다.
“자살이라…….”
제레미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은 절대 자살을 할 자가 아니었으니까.
천한 배를 타고난 황제에게 밀려 뒷방 늙은이가 된 것이 억울했다면 이미 오래전 혀를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대의를 이루겠다며 눈을 빛내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인데 자살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공작은 옷자락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목이 조일 때 발버둥을 쳤다면 목에 저렇게 상흔이 일직선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자살로 위장된 타살.
당신의 끝이 이리 비참할 줄이야.
고작 이렇게 이용당하고 죽으려고 한평생을 드로이트란 이름에 집착하고 목숨 바치며 살았던 건가.
정말이지 부질없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누구를 향한 것일지 모를 분노가 그의 속에서 들끓었다.
마지막까지 그를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린 아버지를 향한 분노인지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인지, 그것도
아니면 늦어버린 자신에게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겨우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악에 받쳐 살아 온 것입니까.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드로이트 공작은 말이 없었다.
늘 그렇듯 또 그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흐흑, 공작 각하.”
어느새 방 안에 하인과 하녀들이 가득했다.
드로이트 가문을 위해 살아 온 자들의 곡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제레미는 침대 곁에서 한걸음 물러나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우였다.
“집사, 집안의 모든 커튼과 깃발을 검은색으로 바꾸어라.”
“허흐흑…… 예, 공자님.”
제레미는 끝없는 슬픔에 젖은 방을 나갔다.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고 공작의 집무실로 간 그는 비밀 금고를 열었다.
“젠장!”
제레미는 텅 빈 금고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시오스 후작과 연관된 증거들이 있어야 할 금고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히 횡령과 탈세와 관련된 자료들이 있었는데.
적어도 시오스 후작의 작위를 박탈할 수 있을 정도의 죄목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니.
제레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이렇게 가만히 분노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레미는 공작 책상의 서랍들을 뒤졌다.
뭐라도, 시오스 후작에 관한 작은 무엇이라도 얻기 위해서 미친 듯이 뒤지던 그때, 마지막 서랍의
안쪽에서 작은 장부 하나를 발견했다.
장부를 펼치자 이때까지 드로이트 공작에게 돈을 대준 사람들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적혀있었다.
‘……이거라도.’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삭이며 제레미는 장부를 챙 겼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공작저 위, 가문의 깃발이 꽂혀 있던 곳에는 검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제레미는 이윽고 황궁으로 말을 출발했다.

* * *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레이몬드는 지하 감옥에서 나왔다.


지독한 피 냄새에 몸을 씻어내고 집무실로 가자 카르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카르텔이 아닌 시종장에게 먼저 물었다.
“엘리야의 상태에 대해 보고 온 게 있느냐.”
“네. 이제 열도 많이 떨어지셨다고 조금 전 시종이 보고를 하고 갔습니다. 의식도 오늘 중으로 차릴
것이라 얘기하였습니다.”
오랜만에 피를 봐서인지 짙어졌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다행이라 고개를 끄덕인 그는 살짝 망설이다 물었다.
“……아이는?”
“……그, 아이님 역시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은 공작 각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레이몬드의 자식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황자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시종장이 어설픈 호칭을 가져다 댔다.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신전에 검사를 의뢰하시는 것이……. 궁인들의 입단속은 철제히 하고 있으나 그분을 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종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궁인들의 입단속도 한계가 있을 터이니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나기 전에 하루빨리 황족의 혈통을 인정하고
황자로 봉하자는 것일 거다.
“신전의 검사는 필요 없다. 내 아이가 맞으니.”
신전의 검사는 의례적인 것이다.
엘리야의 자식인 칼라일을 굳이 신전으로 데려가 신관들 앞에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궁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내일 안으로…… 결정을 내릴 것이니.”
그가 안 이상 칼라일을 황자로 입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엘리야의 동의 없이 그의 마음대로 아이를 황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야가 의식을 차리는 대로 내게 알려라.”
시종장을 내보낸 그는 카르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르텔.”
“송구합니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카르텔이 고개를 숙였다.
눈썹 끝을 올린 레이몬드가 입을 열었다.
“시오스 후작에 대한 증거를 잡지 못한 게 네 잘못은 아니다.”
밤새 잡아 온 암살자들을 고문하고 심문했지만 그들은 오로지 드로이트 공작과 그 수하의 이름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허나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를 살리지 못한 저의 실책이 큽니다.”
시오스 후작과 연관되어 있을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는 카르텔이 도착한 당시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제가 더 빨리 당도했더라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보다는 드로이트 공작의 신변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드로이트 공작을 잡아 심문한다면 시오스 후작에 대한 무언가가 나올 것이다.
수하가 죽고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공작은 입을 열 것이다.
그는 의리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예.”
카르텔이 막 몸을 돌린 순간,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급히 들어온 시종장이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고했다.
“폐하, 드로이트 공작이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뭐라?”
그는 제 귀를 의심하며 시종을 바라보았다.
“지금 드로이트 공자가 폐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한발 늦은 건가. 그는 잇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드로이트 공작가 레이몬드에게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라.”
제레미가 무겁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자마자 레이몬드가 물었다.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 하였느냐.”
“네. 목을…… 매신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목을 맸다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흐렸다가 제레미에게 물었다.
“자살인 것이냐, 아니면 자살로 보이게 만든 것이냐.”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드로이트 공작이 목을 맸다.
그는 그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갑자기 자살을 할 만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자살로 보이게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공작께선 절대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러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제레미 역시 레이몬드와 생각이 같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가문의 재건을 꿈꾸며 숨을 죽였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 없다.
꾸몄던 일이 실패로 끝났다면 어떻게든 그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시오스 후작을 물고 늘어졌으면 늘어졌지.
“증거는?”
레이몬드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송구하오나 증거를 찾진 못했습니다. 공작님껜 방어흔으로 보이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고 침실 내부도
깨끗했습니다.”
제레미는 작은 상흔 하나 없이 멀끔했던 공작의 몸을 떠올리며 말했다.
잠든 상태에서 죽인 것일 것이다.
방어흔은 물론 침실 내부에는 몸싸움을 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비록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이후 호위기사도 고용하지 못했지만, 사용인들이 야간 정찰을 도는 공작가에
흔적도 없이 들어와 공작을 완벽히 죽이고 떠나다니.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상당히 능숙한 암살자의 소행일 것이다.
아마 그 증거를 잡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
드로이트 공작을 잡아 와 심문할 계획이었던 레이몬드는 틀어진 일에 머리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엘리야가 저렇게 됐는데 이렇게 쉽게…….”
드로이트 공작이 죽어버리다니.
열에 들떠 힘겨운 숨을 내쉬던 엘리야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선명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이 일을 꾸민 게 분명한 시오스 가문이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뼈가 도드라지도록 강하게 말아쥔 손은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시선을 낮추고 있던 제레미는 레이몬드의 낮은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의 상태가 많이 심각한 것입니까?”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분노의 늪에서 잠시 빠져나온 레이몬드가 제레미를 보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아비의 죽음을 알릴 때와는 달리 초조함과 불안으로 흐려져 있었다.
그런 제레미를 보며 레이몬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제레미는 알고 있었을까.
칼라일이 내 자식이란 걸.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좋은 상태는 아니다.”
시선을 떨구는 제레미의 얼굴이 절망적이었다. 죄책감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던 그를 보던 레이몬드가
물었다.
“아이의 소식은 안 궁금한가?”
제레미가 번쩍 시선을 들었다.
“설마 칼라일의 상태도 안 좋은 것입니까?”
심장이 철렁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얼굴 같았다.
그러고 보면 시장에서도 그 저택에서도 칼라일은 제레미를 무척 잘 따랐었다.
마치 제레미가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네가 차라리 몰랐으면.
“……칼라일은 무사하다. 단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
“……예?”
“아이의 귓바퀴 안쪽에서 무언가가 깨져 버리더군.”
“……!”
말뜻을 알아들은 제레미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칼라일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지.”
그런 그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가슴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119 화

역시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칼라일이 그의 자식이라는 것을.


엘리야가 그에겐 말한 것이다.
친부인 제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이자에겐 숨기지 않은 것이다.
레이몬드는 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올라오는 짙은 패배감에 실소를 삼켰다.
레이몬드는 언제나 눈앞의 이 남자에게 패배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보다 이자를 더 믿었다는 것도 칼라일이 자신이 아닌 이자를 아비처럼 따르는 것도 전부 속이
쓰라렸다.
그럼에도 그는 할 수 있는 게, 돌이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께서는 아이를 지키…….”
“입 다물어라.”
레이몬드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네가, 감히 입을 열 문제가 아니다. 칼라일에 대한 어떠한 것도 너에겐 권리가 없어.”
제 것을 지키려는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에 제레미는 말을 멈추었다.
레이몬드의 말이 맞았다.
그에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엘리야와 그는 그저 친구일 뿐이니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제레미는 들끓는 속을 감추며 시선을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내리까는 눈빛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았지만 레이몬드는 더 이상 제레미가 엘리야를 입에 담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는 것이지.”
그리고 시오스 후작을 엮을 증거가 없어졌다는 것.
지금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카르텔을 바로 드로이트 공작가에 보냈어야 했었다.
뒤늦은 후회가 순간 들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건 레이몬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제대로된 증거나 증언 없이 일국의 공작을 잡아들여 심문하는 것은 위법이었으니까.
첩보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애초에 그 첩보에 나온 정보도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를 가리켰을 뿐 드로이트 공작 자신도 아니었다.
하여 용병들을 먼저 심문한 것이었다.
공작을 끌고 올 수 있을 만한 확실한 증언을 받기 위해서.
시오스 쪽에서 그렇게 빨리 움직인 것을 보면 불타던 저택 근처에 시오스의 감시자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드로이트 공작을 죽여버릴 위험한 결정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짜증을 숨기지 못하며 얼굴을 거친 손길로 쓸어내렸다.
후, 차분한 숨을 내쉬며 그는 엉망인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시오스 후작이란 머리를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꼬리인 드로이트 공작이 잘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 하더라도 좀 더 조사를 한다면 무언가 시오스 후작에 대한 작은 증거라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고 칼라일이 황자임이 드러났다.
모든 것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암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고 그에 대한 모든 죄는 지금으로서는 드로이트 공작이
뒤집어쓸 것이다.
귀족들은 칼라일의 황자 책봉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테니 증거도 증언도 없는 시오스의 이름은 거론되지도
않고 사건은 종결될 것이다.
“무언가…… 말이 나올 만한 게 필요한데…….”
시간을 끌기 위한 방도를 생각하던 그때 고민의 중얼거림을 들은 제레미가 시선을 들었다.
“폐하……, 일단 이 장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장부?”
레이몬드는 그가 내미는 장부를 받았다.
장부를 펼쳐보자 그동안 드로이트 공작가로 돈을 보내온 귀족 가문들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적혀있었다.
장부를 살펴보던 레이몬드가 물었다.
“다른 증거는 없나?”
“……금고에 다른 자료들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레미는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 약속했었다. 그가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의 음모에 대한 증거를 잡겠다고 말이다.
헌데 지금은 두 마리 토끼를 전부 놓친 꼴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야와 칼라일의 목숨은 겨우 겨우 구해냈지만, 그뿐인 것이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히며 장부를 덮었다. 이것으로 시오스 후작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한 증거였다.
그저 시오스 후작이 큰돈을 공작에게 주었다는 내용일 뿐이었으니까.
이 돈이 불법적인 자금인지 이 돈으로 어떤 불법적인 일을 했는지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흠.”
레이몬드는 고민했다.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이 곧 다 퍼질 것이다.
이번만큼은 시오스 후작이 무언가를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공자. 그대를 이 시간부로 드로이트 공작가의 가주로 명한다.”
멈칫하던 엄숙한 얼굴로 제레미가 황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듭니다.”
“난 오늘 드로이트 전 공작이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것이다.”
“……황족 시해라 하시면…….”
제레미가 차마 묻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황족이라 함은 칼라일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히겠단 말에 칼라일과 엘리야가 염려스러웠지만 선을 넘을 수 없었다.
레이몬드 역시 제레미가 무엇을 말하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허나 드로이트 공작의 죽음이 밝혀질 지금 칼라일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다.
그의 죄를 물어야 했으니까.
“배후가 따로 있다 해도 실행에 옮긴 것은 드로이트 전 공작이니 그 죄가 막중하다. 참수형에 처하는 중
죄인 만큼 공작이 이미 죽었다 하여도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
“……네.”
“지금 이 시간부로 전 드로이트 공작의 신분을 노예로 강등한다. 내 마지막 아량으로 장례는 허락하니
공작은 죄인의 장례를 조용히 치르도록 하여라.”
신분이 강등되었으니 드로이트 프로이스는 드로이트 공작가의 가계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가문의 공동묘지에 안치될 수도 없었다.
평생 드로이트로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자에게 가장 잔인한 벌이 될 것이다.
제레미는 순간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내 차분히 마음을 다잡았다.
시오스와 함께 황족을 시해하겠단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그에겐 이미 예정된 처벌이었다.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경건히 예를 갖춘 제레미는 이윽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 * *

“으윽……”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깊고 깊은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듯 의식을 차린 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흐린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며 화려한 천장의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궁…….”
잠깐이나마 의식을 차렸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가씨, 정신이 드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하르펜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하르펜이 맞았네.”
의식이 돌아왔던 그때 하르펜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하르펜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네. 접니다. 폐하의 명령으로 아가씨의 치료를 돕기 위해 공작가에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지금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몸이 좀 무겁긴 한데……. 크게 아픈 곳은 없어.”
“다행입니…… 아가씨,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칼라일을 봐야겠어.”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칼라일이었다.
몸을 살짝 일으키자 하르펜이 황급히 어깨를 다시 눌렀다.
“하르펜, 칼라일을 봐야 한다니까.”
레이몬드가 칼라일이 무사하다고 했지만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가씨. 내상이 심각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셨을 뿐 아직 회복되신 게 아니기 때문에
돌아다니시는 건 무리입니다.”
하르펜이 엄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럼 칼라일을 이리로 데려와 줘. 침대에 기대앉아 칼라일이 괜찮은지 보기만 할게.”
“아가씨…….”
“칼라일도 내가 안 보여서 불안해 하고 있을 거야.”
아버지가 있다 해도 낯선 환경에 아이가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르펜이 말이 없어 난 또 한 번 재촉했다.
“잠깐만 보고 치료받을게. 절대 무리하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말라 미소까지 지었지만 하르펜은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의 안색을 보던 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르펜…… 칼라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게…….”
하르펜이 난감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분명 괜찮다고, 크게 다친 곳이 없다 하였는데.
만약 그게 날 안정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면.
칼라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심장이 철렁하는 불안감에 하르펜의 팔을 다급히 잡았다.
“칼라일 지금 어딨어?”
“아가씨 그게…….”
“엘리야.”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칼라일, 칼라일은 지금 어딨어요? 지금 보러 가야겠어요.”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를 잡은 하르펜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를 내려가려던
순간, 아버지가 내 앞에 섰다.
“진정하거라. 칼라일은 무사하단다.”
아버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아버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아이를 못 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는 참담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곧 시선을 떨구시며 말했다.
“칼라일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모습이 드러나다니.
칼라일의 진짜 모습이라면…… 설마…….
숨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에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아버지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칼라일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아…….”
목숨 걸고 숨겼던 진실이었다.
황자로, 황궁에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는데…….
레이몬드가 다 알았다니.
충격에 순간 강한 어지러움이 들었다.
“엘리야!”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아버지가 황급히 나를 부축하고 하르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어지러우신 겁니까?”
“……난 괜찮아, 칼라일을, 아니…… 그러니까 난…….”
정신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칼라일을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종과 하녀들의 목소리가 울리고
“엄마!”
칼라일의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120 화

“칼라일!!”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어지러움도 아픔도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내 애틋한 외침에 아버지가 옆으로 비켜주셨다. 그러자 내 앞으로 달려온 칼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흑발과 검은 눈동자.
내가 그토록 숨겨왔던 아이의 진짜 색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칼라일의 존재가 정말 밝혀진 것이다.
“아…….”
순간 멈칫하자 내게 달려오던 칼라일도 주춤거렸다.
“엄마……?”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그에 정신이 번쩍 든 난 미소를 그리며 두 팔을 벌렸다.
“칼라일, 엄마한테 와.”
“엄마…… 괜찮아요?”
“당연하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은 칼라일이 품 안에 안겼다.
화상을 입은 살결이 화끈거렸지만 칼라일이 무사한 것을 보니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칼라일을 꼭 끌어안은 난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아프지 마요…….”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듯 칼라일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나았어. 엄마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칼라일, 엄마 봐봐.”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칼라일이 머리를 들었다.
“다친 곳은 없어? 아픈 곳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혹시나 싶어 마음이 불안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의사 아저씨들이 아프지 않게 잘 치료해줬어요, 그러니까 엄마도 아프지 마요.”
칼라일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껴안았다.
평소와 달리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보니 많이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안 아플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네.”
칼라일을 꼭 안고 안도감을 느끼던 때 내 앞으로 구둣발이 멈춰 섰다.
매끈한 검은 가죽 구두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시선을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이몬드.
난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칼라일과 똑같은 흑안이 칼라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감정을 억누르듯 깊이 잠겨 있는 눈빛에 본능적으로 칼라일을 더욱 끌어안았다.
마치 그로부터 칼라일을 보호하려는 듯 나도 모르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칼라일의 친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야 아차, 하며 힘을 풀었지만 그는 이미 나의 적대감을 느낀 듯 시선을 들었다.
흑안에 짧은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는 나를 번뜩이는 눈빛으로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할 말이 있다. 너도 내게 할 말이 있겠지.”
난 칼라일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칼라일, 할아버지랑 잠시만 놀고 있을래? 엄마…… 잠깐 할 일이 있어.”
“……저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예요?”
칼라일이 내게 나직이 속삭였다. 레이몬드가 무서운 것인지 칼라일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 좋은……분이시니까.”
안심하라고 칼라일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난 아이의 손을 아버지에게 넘겼다.
“할아버지랑 산책가자꾸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한 아버지가 칼라일을 번쩍 안았다.
“다녀올게요, 엄마.”
“응.”
난 칼라일이 방을 나갈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칼라일이 나가고 시종장이 의사들과 궁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아이의 등장으로 잠깐이나마 밝아졌던 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난 레이몬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줄곧 나를 보고 있었던 듯, 그와 시선이 곧바로 마주쳤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보다시피 칼라일은 멀쩡하니 네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해.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 내가 먼저 말했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다 아시게 되었다는 것을요.”
침착하게 말을 꺼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차분함이 그의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인지 레이몬드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래, 아이를 치료하던 도중 귓바퀴 안쪽에서 뭔가가 깨지더군. 그 뒤의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칼라일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지만, 그는 내게 해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엘리야. 넌 내게 분명히 말했었다. 칼라일이 나의 아이가 아니라고.”
“…….”
“네 입으로 설명해 보아라. 왜 그 아이가 흑발에 흑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폐하의 자식이 맞습니다.”
“대체 왜!”
그의 격분한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격앙된 감정이 넘실거리는 그의 눈빛 속엔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대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아이를 가졌다고! 내게 말을 했어야…….”
다그치는 그의 모습에 잠시나마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나의 이성이 끊어져 버렸다.
“내가 어떻게 말해.”
떨리는 내 음성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난 손을 그러쥐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리제나가 돌아왔던 그때의 감정과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자 이성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다.
“네 옛 연인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어. 그리고 넌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에드먼드를 1 황자로 삼겠다
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칼라일을 가졌다고 말해?”
그는 쏘아붙이는 내 말을 곧바로 되받아쳤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에드먼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분명히 말했었어. 난 너에게 선택권을 줬어.”
“하, 선택권?”
그때의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듯 선명했다.
그런데 선택권이라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레이몬드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이미 모든 결정을 나와 상의도 없이 내려놓고 내게 통보했잖아. 그런데 선택권이라고? 그 상황에서 내가
에드먼드를 거부하면 어떻게 됐을까?”
“…….”
“후계도 낳지 못하는 황후가 질투에 눈이 멀었다 손가락질했겠지. 날 선택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놓고
협박한 것밖에 되지 않아.”
“난 널…….”
“결혼 생활 내내 난 네 뒷모습만 바라봤어. 그런 내가 어떻게 널 믿어? 네가 에드먼드의 손을 잡는다면
내 아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말을 멈추었다.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 홀로 아이를 낳겠다 결심했던 그 순간이.
격앙된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본 레이몬드가 손을 뻗었다.
“엘리야…….”
난 그의 손을 피했다.
“난 칼라일을 지켜야 했어. 두 번 다시 내 아이를 잃을 순 없었어.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때의 레이몬드는 절대 칼라일을 지켜줄 리 없었으니까.
허니 들킬 미래를 안다 해도 황궁에서 칼라일을 낳진 않을 것이다.
황궁에 남았다면 칼라일은 무사히 태어나는 것조차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달싹이던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그사이 난 무거운 숨을 삼키며 솟구치는 감정을 정리했다.
칼라일의 존재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내가 황제의 아이를 빼돌렸다는 것이 곧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굳은 듯 선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의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절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이를 지키기 일이었음도 잘 알고 있었다.
나직한 나의 목소리에 잠시 흐려졌던 그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내가 널 정말 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가 무슨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까발려진 이상, 무엇이 중요할까.
이 상황에서 그의 마음까지 살필 만큼 나는 여유롭지 않았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빨리 알아야 나도 앞으로 칼라일을 어떻게 지킬지 결정할 수 있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폐하.”
시간을 끌 수 없어 단호히 말했다. 눈빛이 흔들리던 그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난 너도 공작도 벌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칼라일의 존재를 더 숨길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칼라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네게 시간을 주고 싶지만……. 갑자기 모든 일이 터져 힘들 것 같아. 하여
오늘 칼라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힐 것이다.”
“네? 이렇게 바로…….”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던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오늘 새벽 공작이 목을 맨 것이 발견됐다. 유서에 너와 칼라일을 죽이려 했던 것을 실토하더군.”
드로이트 공작이 자살을 하다니.
제레미가 보낸 서신이 가짜였으니 드로이트 공작이 연관이 있을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이번 일은 드로이트 공작 혼자 꾸민 일이 아닐 것이다.
내게 칼라일의 존재를 알고 있다 서신을 보낸 것은 리제나였으니까.
“칼라일과 저를 죽이려 한 건 드로이트 공작만이 아닙니다.”
“나 역시 시오스 후작을 의심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는 당연하게도 시오스 후작이었다. 리제나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가 아는 리제나는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닐 테니까.
그가 리제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젠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리제나는 선을 넘었고 감히 칼라일을 죽이려 한 그녀를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시오스 후작이 벌인 게 아닙니다.”
“뭐? 그럼 누가……”
“시오스 리제나. 그녀가 벌인 일입니다.”

121 화

내 말을 들은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리제나라고.”
그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았다.
“일이 벌어지기 전 시오스 영애가 제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칼라일이 머물고 있던 저택으로요. 그녀는
칼라일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폐하의 아이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
아직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연히 불안했을 것입니다. 칼라일이 폐하의 아이가 맞다면 유일한 후계자인 에드먼드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니까요.”
칼라일의 존재가 가장 위협적일 사람은 리제나라는 것만큼은 그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리제나에 대한 그의 관점이 완전히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의심은 하게 되겠지.
레이몬드의 굳은 표정에서는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리제나의 적개심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나 역시 꽤 놀랐었으니까.
내가 알던, 과거의 리제나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귀족 영애였으니까.
그리고 레이몬드는 그런 리제나를 나보다 더 가까이에서 봐 왔다.
그런 그녀가, 제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어디 쉬울까.
그런데 그때 짧은 침묵을 깨뜨리는 레이몬드의 비틀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감히…….”
레이몬드는 주먹을 쥐었다. 도드라지는 뼈마디에서 그의 성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분노하고 있는 건 리제나일까.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더 이상 후작만을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언가를 잡아낸 듯했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를 번뜩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서신은 무슨 내용이었지?”
“단지 저와 함께 차 한잔 마시자는 게 전부였습니다.”
리제나가 내게 서신을 보내오긴 했지만 그건 그저 함께 차를 마시자는 내용일 뿐이었다.
“칼라일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후작저로 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지켜본 다른 사람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그는 시오스 후작가를 잡을 증거를 찾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것만으론…….”
그는 돌아가는 상황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 역시 고민이 많아졌다.
어설프게 리제나를 잡아 와 봤자 금방 풀려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일단 그녀를 조사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고민에 대한 답을 찾던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증거가 없다면 찾아야겠지. 리제나가 아이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하니 무리해서라도 시오스
후작가를 용의 선상에 올려야겠다.”
레이몬드는 당장이라도 시오스 후작가에 기사들을 보낼 기세였다.
“안 됩니다. 그 사실 만으론 무리입니다.”
나의 단호한 대답에 레이몬드가 차갑게 대꾸했다.
“나도 무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너에게 보낸 서신과 너의 증언으로 몰아붙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폐하.”
나직이 그를 한 번 더 부르자 레이몬드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심증으로 폐하께서 시오스 후작가를 쥐잡듯 뒤지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시오스 후작가는 평범한 귀족 가문이 아니었다.
시오스 후작은 재상이었고 리제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1 황자의 친모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지금 시오스 후작가가 흔들리고 있다 하나 이때까지 쌓아온 세력이 있었다.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귀족들이야 반발하더라도 찍어누르면 그만이다.”
레이몬드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망설임의 기색이 없었다.
그래, 어쩌면 그의 생각대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불씨이긴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을 헤집을 수 있다면 큰 불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제나를 잡아들이고 싶은 건 내가 더 간절했다.
감히 칼라일을 죽이려 했으니까. 직접 그녀의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를 만큼 속 깊은 곳에 분통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움직이기에 위험했고, 성공한다 해도 우리가 잃을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문제다.
“……실패할 위험이 있습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모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승리를 확신할 때, 그때
움직일 것입니다.”
반정으로 이미 많은 피를 본 그였다.
이제 겨우 평온해진 귀족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못했다.
황실과 귀족과의 신경전이 심해지면 결국 그 피해는 힘없는 제국민들이 입게 될 것이다.
황위를 찬탈했단 폭군이란 오명이 있다 해도 그는 폭정을 일삼는 황제는 아니다.
“정말…… 짜증 나는군.”
거친 숨을 내쉰 그는 답답한 듯 목 끝까지 잠긴 예복의 윗단추를 풀었다.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듯했지만 방금 전처럼 난폭하진 않았다.
“지금 이렇게, 허술하게 시오스 후작가를 칠 순 없습니다.”
리제나가 내게 칼라일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리제나는 직접적으로 칼라일을
위협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 드로이트 공작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어버렸으니…….
“폐하, 드로이트 공작에게서 발견된 다른 건 없나요? 공작의 시신에서 무언가 나왔다거나……. 아니면
공작이 시오스 가문과 관련된 어떤 것이라도 남겨 놓은 것은 없었습니까?”
아주 작은 연결 고리라도 찾아 귀족들이 먼저 시오스 후작가를 의심하게 만들어야 했다.
과연 이번 일을 드로이트 공작가 혼자 꾸민 게 맞느냐 하고 말이다.
그래야 레이몬드가 시오스 후작가를 치더라도 아무런 반발이 없을 것이다.
“드로이트 공자가 암살에 대한 어떠한 상흔도 찾지 못했다고 했었다. 작은 장부를 가져오긴 했지만…….”
난 그의 말에 멈칫했다. 이윽고 놀란 눈으로 말을 끊으며 물었다.
“드로이트 공자라니……. 공작의 죽음을 발견한 게 폐하의 기사가 아닙니까?”
놀라서 되묻자 레이몬드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아니다. 드로이트 공자가 직접 발견했다.”
“아…….”
제레미가 공작의 죽음을 직접 발견했다니.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공작과 제레미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작은 제레미의 친부였다.
자살로 위장 당한 채, 이용당해 죽은 아버지를 발견한 그의 심정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레이몬드의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엘리야.”
제레미의 걱정을 멈추며 시선을 들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레이몬드가 보였다.
짜증이 서린 손길로 얼굴을 쓸어 내리는 그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이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감정을 다스리듯이.
한결 무감해진 얼굴로 그는 다시 나를 보았다.
“지금 중요한 건 드로이트 공자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난 잠시 제레미는 뒤로 밀어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가 하다 말았던 말을 떠올렸다.
“장부가 있다 하셨나요?”
“드로이트 공작에게 이때까지 돈을 보낸 귀족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적혀있는 장부다. 장부에 시오스
후작의 이름이 있다. 네 얘기를 듣기 전까진 이것을 이용하려 했었지.”
“시오스 후작이 지속적으로 큰돈을 보냈으니 공작과의 연관성에 대해 말이 돌겠군요.”
“그래, 귀족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의 은밀한 거래에 대한 의심을
품을 것이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시오스 후작의 위세가 흔들리고 있으니 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 장부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때 자연스럽게 레이몬드가 그들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시오스 후작가를 조사하면 될 것이다.
“공작의 죽음에 대해 오늘 발표하실 건가요?”
“이미 공작저에 검은 깃발이 꽂혔으니 미룰 수 없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답지 않게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다.
그가 무엇을 말할지 짐작이 됐다.
공작의 죽음과 그가 지은 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려는 것이다.
즉, 칼라일의 존재를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칼라일을 세상에 드러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늦출수록
좋을 게 없을 것이다.
황실의 공식 발표가 아닌 다른 자에 의해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혼돈 속에서 아이에 대한
말들이 이리저리 떠돌 테니까.
마음의 준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더이상 리제나는 물론 그 누구도 칼라일의 손톱 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내게 중요했다.
떨리는 손끝을 말아쥔 난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오늘 칼라일과 함께 저를 황후로 책봉한다, 발표해 주십시오.”

* * *

[엘리야 크로프트 공녀를 황후로, 그녀의 아들인 칼라일을 제 2 황자로 책봉한다.]

책상 위에 황제의 칙서가 놓여있었다.


이것을 재상부로 전달해야 했다.
“……폐하. 재상부로 보낼까요?”
칙서를 가만히 내려보기만하는 황제에게 행정 보좌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른 오전부터 행정부는 물론 재상부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드로이트 공작의 죽음과 죄인 프로이스 드로이트의 신분 강등, 그리고 드로이트 공자의의 작위
계승.
시오스 후작과 관련된 드로이트 공작의 장부까지.
아직 점심시간이 채 되지도 않았건만 제국은 아침부터 몰아치는 엄청난 소식에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무슨 명을 내리는 것인지 황제가 또 행정관을 부른 것이다.
행정관은 칙서의 내용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황제의 얼굴에 저 칙서의 내용 역시 엄청날 것이란 걸 예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벌어진 일들도 혼이 나갈 만큼 정신이 없었는데…….
더 큰일은 아니겠지.
행정관은 부디 별일 아니길 바랐다.
그때, 레이몬드가 칙서를 돌돌 말아 행정관에게 칙서를 내밀었다.
“재상부에 전해라. 오늘 중으로 황후와 황자에 대한 책봉을 발표하라고.”
“네…… 네?”
황후와 황자라니.
엄청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든 행정관은 차디찬 검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리 놀랐다 해도 목숨보다 중한 건 없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폐하.”
황급히 시선을 낮춘 행정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가고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해가 창창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든 그는 엘리야와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널 황후로 책봉하라고……?’

122 화

‘예. 칼라일이 황자로 밝혀지는 이상 제가 황후가 되어야 그 아이를 제대로 지킬 수 있으니까요.’


엘리야는 결연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공작 영애의 신분으로는 시오스 후작가에 맞서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황후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의 눈빛엔 시오스 후작가를 무너뜨리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시오스에 맞선다라…….’
그는 엘리야에게 이미 황후로 돌아와 달라 말했었다.
단순히 황후의 자리가 아닌, 그의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하지만 지금 엘리야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중얼거림에 단호하던 그녀의 표정이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가 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시오스 후작가를 무너뜨리고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뜻은
제게 없습니다. 하여 폐하께서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시오스 후작가가 무너지고 칼라일의 입지가 확실해진다면 절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보내
주십시오.’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을 놓아달라.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감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다른 마음은 조금이라도 없는 것이냐.
매달리듯 묻는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칼라일이 다른 남자의 아이여도 상관없다, 그런 미친 소리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야는 그에게 단호히 선을 긋고 있었다.
칼라일이 그의 자식임이 밝혀졌음에도 그녀의 미래에 그를 두지 않겠다 말하고 있었다.
황후의 자리에만 오를 뿐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시오스 후작가란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그의 손을 잡는 것뿐.
‘내가 널 떠나보낼 수 없다면?’
‘……황후의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칼라일은 생각지 않는 거냐.’
칼라일을 생각한다면 그녀는 황후가 되어야 했다.
황후의 적자라는 것은 칼라일에게 아주 큰 힘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기에 엘리야도 다시 황후가 되겠다
말한 것이고.
비겁한 물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엘리야를 잡고 싶었다.
못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야는 메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감히 제 앞에서 칼라일을 이용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그럴 자격이 없으십니다.’
차디찬 말에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허니 폐하께서 선택하십시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물러나겠습니다.’
엘리야는 칼자루를 그에게 쥐여주듯 말했지만 지금 우리의 관계에서 칼자루를 들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엘리야였다.
그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으니까.
‘……황후의 책봉을 발표하겠다.’
이미 정해진 답을 내놓은 그는,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방을 나왔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 뒤로 그는 곧장 집무실로 돌아와 드로이트 공작가의 일을 처리하고 황후와 황자의 책봉에 대한
칙서까지 내렸다.
이제 곧 제국에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지고 엘리야는 황후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아…….”
레이몬드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멀지 않은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칼라일의 존재를 속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만 해도 분노와 배신감에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어떻게 아이를 빼돌릴 수 있냐.
날 배신하였으니 나 또한 더 이상 너를 배려하지 않을 것이다.
모진 말들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그녀의 쏟아냈던 과거의 말들을 듣는 순간 그는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리제나가 에드먼드를 데리고 돌아왔던 그때, 그는 엘리야를 배려하지 않았던 게 맞았으니까.
당시에 후계가 없다는 이유로 귀족들은 늘 그에게 후궁을 들이라 닦달했었고, 엘리야까지 괴롭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엘리야는 유산 이후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았으니, 차라리 에드먼드를 들이면 조용해지리라
생각했었다.
안일하고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녀도 이런 결정을 이해하고 따라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이혼을 말했을 때 질투에 내뱉는 투정이라 여겼고, 미친놈처럼 그녀를 황후궁에
가둬버리기까지 했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배려한 적 없는 그에게 어떻게 아이를 가졌다 말할 수 있었을까.
복받친 감정을 쏟아내고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제게는 그녀를 탓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시종장.”
“네. 폐하.”
“황후궁을 깨끗이 치우고 믿을 만한 궁인들을 뽑거라.”
그녀가 떠나고 불이 꺼져있던 궁에 마침내 불이 밝혀지고 엘리야가 돌아온다.
물론 끝이 정해진 짧은 시간이겠지만.
‘시오스 후작가가 무너지고 칼라일의 입지가 확실해진다면 절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보내
주십시오.’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끝이 정해진 길이라도 엘리야와 함께 걷는 것.
그에겐 이미 그녀가 전부였다.
“네.”
“그리고 2 황자의 궁은 동쪽 레굴루스 궁전으로 준비하거라.”
이어지는 황제의 명령에 시종장은 멈칫했다.
황후궁전과 가까운 레굴러스 궁전은 대대로 황태자궁으로 쓰이던 궁전이었다.
그 궁전이 2 황자에게 간다면 많은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특히 차기 황태자가 1 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황제의 어심에 대해서 말이 나올 것이다.
시종장은 황궁에 큰 바람이 불 것임을 예상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 * *

레이몬드가 돌아가고 난 밀려드는 피곤함에 거의 쓰러지듯 잠이 들었었다.


“흠…….”
익숙한 천장을 보던 난 은은한 붉은 빛에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이렇게 됐는지,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하늘 아래 황후궁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황제의 궁전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은빛의 궁전.
익숙한 궁전의 높은 꼭대기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저 빛나는 감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레이몬드에게 황후로 책봉해 달라 말한 것이 바로 나였으니까.
이제 와서 그 선택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시오스 리제나 그녀를 무너뜨리는 것 말고도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황후가 되어야 했다.
상념이 깊어지던 때, 하르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일어나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침대 곁으로 다가온 그가 보였다.
“나 얼마나 잔 거야?”
“한 다섯 시간 정도 주무셨습니다.”
그의 답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하르펜이 내 등 뒤로 베개를 받쳐주었다.
“내가 잠들고 칼라일이 오진 않았어?”
하르펜이 답을 하려던 그때, 방문이 살짝 열렸다. 문틈 사이로 칼라일의 검은 머리칼이 빼꼼히 보였다.
“칼라일. 들어오렴.”
조심스레 안을 살피던 아이가 내 부름에 문을 활짝 열었다. 도도도 뛰어온 칼라일은 폴짝 침대 위로
올라왔다.
“엄마!!”
칼라일이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괜찮아요? 계속 자고 있어서…… 또 많이 아픈 걸까 봐 걱정했어요…….”
칼라일의 목소리에서 불안이 묻어났다.
역시나 내가 쓰러지듯 잠든 뒤 몇 번쯤은 방을 들락날락한 모양이다.
“아냐, 엄마 이제 다 나았어.”
등을 토닥여주며 칼라일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칼라일이 품에서 나와 마주
앉았다.
“할아버지랑 뭐 하고 놀았어?”
“궁전을 구경 다녔어요! 이렇게 큰 건물은 처음 봐서 너무 신기했어요! 기사들도 보고…… 또 신기한
조각상도 보고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칼라일은 자신이 본 걸 손가락 하나씩 접어가며 내게 설명했다.
꽤나 신나는 경험이었는지 칼라일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낯선 환경에 겁을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칼라일은 이번에도 잘 적응하는 듯해 다행이었다.
애틋한 마음에 칼라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아이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 속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레이몬드와 똑 닮아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칼라일이 갓난아기일 때를 빼고는 항상 머리카락과 눈 색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칼라일의 진짜 모습에 조금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항상 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레이몬드를 닮은 거 같네.
묘한 기분을 숨기며 칼라일의 비단실 같은 머리칼을 쓰다듬던 난 침대 옆으로 다가온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몸은 어떻니?”
“괜찮아요.”
약을 먹고 죽은 듯이 자서인지 아침에 정신을 차렸을 때보다 한결 몸이 가벼웠다.
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하르펜에게 눈짓했다. 사람들을 물려 달라는 뜻을 알아들은 하르펜이 궁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굳게 닫히자 아버지가 먼저 입술을 떼셨다.
“……널 황후로 책봉하겠다고 황제 폐하께서 공표를 하셨다.”
“벌써…… 하셨군요.”
하긴 5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으니 그동안 레이몬드가 모든 것들을 정리해 발표했을 것이다.
“네가…… 돌아가겠다, 한 것이겠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들이 무거웠다. 내가 칼라일이 황자로 살지 않길 바랐듯 아버지도 내가
황후로 살지 않길 바라셨을 것이다.
“아버지엔 항상 죄송해요.”
우직한 신하인 아버지가 칼라일의 존재를 숨기며 레이몬드를 배신한 것은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 아버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주셨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황궁으로 돌아오게 되어 더욱 미안함이 컸다.
“네가 왜 미안하니. 그런 말 말아라. 칼라일을 위해서 했어야 할 당연한 선택이었잖니. 그리고 지금은 그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기도 하고. 어쩌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는 짐작이 갔다. 해서 나는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폐하께는 확실히 말씀드렸어요. 시오스 후작가를 완전히 처리하고, 칼라일의 입지가 확실해지고 나면 전
황궁에서 떠나겠다고요.”
단호한 내 목소리에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시더냐.”
“네. 받아들이셨어요.”
“앞으로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과거와 달리 외롭지 않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란다.”
아버지는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그에 화답하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황후는 황제 폐하의 부인이라고 배웠는데……. 엄마가 그럼…… 황제 폐하랑 결혼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칼라일의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은 궁금증과 불안이 뒤섞인 눈빛으로 내게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황제 폐하면……. 그 무서운 아저씨 맞죠? 엄마, 그 아저씨랑 정말 결혼하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을 어린 칼라일에게 설명하려니 쉽지 않았다.
아이가 최대한 놀라지 않게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은데…….
적절한 말들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던 난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칼라일, 엄마가 예전에 아버지가 아주 먼 곳에서 중요한 일을 하시느라 우리랑 함께 못 있는 거라고
했었던 거 기억나니?”
“네! 기억나요.”
“만약에…… 아버지가 우리랑 함께 살면 어떨 것 같아?”
“음……. 좋아요. 아빠랑 엄마랑 다 같이 살고 싶어요. 근데 엄마가 황제 아저씨랑 결혼하면 아빠랑 같이
못사는 거 아니에요?”
칼라일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난 그런 칼라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칼라일……. 황제 폐하가 바로 칼라일의 아빠야.”

123 화

“폐하가 제 아빠라고요……?”
칼라일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어려도 황제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는 알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제 아빠라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칼라일이 또래보다 의젓하다 해도 어른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아빠로 받아들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차근차근히 한 단계씩 나아가야 함이 맞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먼저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칼라일에게도 사실을 말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으면 더 충격적일 테니까.
혼란으로 가득한 칼라일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황제 폐하께서 바로 칼라일의 아빠야.”
“…….”
칼라일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칼라일의 버릇이었다.
“칼라일, 하고 싶은 말 안 참아도 돼. 엄마한테는 다 말해도 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칼라일이 시선을 들었다.
칼라일은 날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엄마……. 난 아빠…… 없어도 돼요.”
“……응?”
아빠에 대해 더 깊이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난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스러워졌다.
아빠가 없어도 된다니.
칼라일이 말은 안 해도 아빠란 존재에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룬트 왕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젠간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냐 물었던 아이인데.
갑자기 왜.
칼라일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엄마, 전 폐하가 무서워요. 그냥 아빠 말고 엄마랑 둘이서 살고 싶어요.”
칼라일은 다른 말은 듣기 싫다는 듯 내 품에 안겼다. 내가 깨어나지 못했던 시간에 레이몬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칼라일, 아빠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폐하는 무서운 분이 아니야.”
“…….”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 보았지만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야시장에서 레이몬드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만 해도 레이몬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칼라일에겐 이미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엄마, 우리 집에 가면 안 돼요?”
고개를 든 칼라일은 귀가 쳐진 강아지같이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정말 반기지 않는 듯한 기색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싫다는 것은 절대 강요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의 반응은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여기가 이제 칼라일이라 엄마가 살 집이야. 되게 넓고 커서 칼라일도 금방 좋아질 거야.”
아이의 볼을 감싸고 일부러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해 보았지만, 칼라일은 입술을 다시 꾹 다물어버렸다.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에서 불만이 가득 느껴졌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아버지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지금은 내버려 두라는 듯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셨다.
시무룩한 칼라일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버지가 맞았다.
지금 당장 받아들이라 강요하면 칼라일의 거부 반응만 커질 것이다.
볼을 감쌌던 손을 내리며 칼라일을 안았다. 품 안에 안겨든 칼라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자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칼라일이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궁 안을 구경하느라 신나게 뛰어다녔으니 꽤나 지쳤을 것이다.”
아버지는 잠든 칼라일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 혹시 폐하와 칼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딱히 무슨 일이 있진 않았단다. 아마……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겠니. 칼라일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네.”
왠지 레이몬드를 향한 거부 반응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지만 난 괜찮을 것이라
불안함을 애써 지워버렸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면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겠지.
난 칼라일을 옆으로 눕혔다. 조심스레 베게 위로 칼라일의 머리를 눕히고 말랑한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직 한없이 어린아이인데.
앞으로 칼라일이 걸어가야 할 험난한 길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 주려고 아버지의 존재까지 지워버렸던 건데.
미안해. 칼라일.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정말 미안했다. 나는 결국 아이를 피바람으로부터 지키지도 못했고, 아이에게서
아버지란 존재까지 멋대로 뺏어간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엘리야, 네 잘못이 아니다.”
내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넌 최선을 다했어. 괜히 자책 말아라. 모든 죄는 끔찍한 일을 벌인 그자들에게 있을 뿐이야. 우린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꾸나.”
아버지의 위로에 난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앞으로 내겐 죄책감에 슬퍼할 여유 따윈 없으니까.
“아버지, 폐하께서 드로이트 전 공작의 죽음에 대해서도 발표하신 거죠?”
“그래. 전 공작의 죽음과 암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까지 전부 공개하셨다.”
“아마 내일쯤 공작저에서 발견된 비밀 장부가 기사에 날 거예요. 거기엔 시오스 후작이 이름이 있어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소문이 퍼질 때 아버지께서도 힘을 써 주세요.”
“알겠다. 귀족들의 움직임은 내가 주시하고 있을 테니 넌 회복에 집중하려무나. 칼라일을…… 지키려면
네가 잘 버텨야 할 것이다.”
“네. 알고 있어요.”
암살 사건에 대한 빌미로 시오스 후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시오스 후작가의 위세가 흔들린다곤 하지만 지금까지 에드먼드를 앞세워 불려온 세력이 만만찮았다.
그런 1 황자를 꺾고 칼라일을 황태자로 올리기는 절대 쉽지 않으리라.
쉽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칼라일을 지키기 위한 길은 그 길뿐이었다.
황제의 핏줄이란 것이 밝혀진 순간부터 황위 다툼은 피할 수 없으니까.
거기다 시오스 후작가는 역심을 품고 있으니 물러나는 것은 우리에게 죽음뿐인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칼라일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을 테지.
난 절대 칼라일을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다.
리제나가 선포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서 칼라일을 지킬 것이다.
난 굳게 결심하며 잠든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 *

드로이트 공작가.
공작성의 뒤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 공작인 드로이트 프로이스의 장례였다.
공작이었던 자의 장례라고 하기엔 상당히 초라한 장례식이었지만,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인에게는 분에
넘쳤다.
화장이 끝나고 거둔 뼛가루를 너른 숲에 뿌리라 명한 제레미는 하늘 위로 사라지는 검은 연기를 보다 성
안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찾아온 공작의 죽음과 새로운 공작의 등극.
충격에 빠진 사용인들을 타이르고 장례를 치르다 보니 어느새 밤이 어둑해져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무실 책상에 앉은 제레미는 복잡한 눈빛으로 전 공작의 물건들을 훑었다.
아직 공작성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딱히 슬픈 것은 아님에도 무거운 마음은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좋은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정말 단 한 순간도 그의 마음을 편히 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라앉는 기분에 마냥 빠져 있기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였다.
시오스 리제나와 시오스 후작가.
아버지를 비참하게 죽이고 엘리야를 죽이려 한 그녀의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다.
“그러려면 시오스 후작가를 잡을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제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의 비밀 금고를 다시금 열었다.
여전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있었던 시오스 후작가의 비리들.
그것들은 정말 암살자가 가지고 간 것일까.
“……금고를 정말 발견했을까?”
암살자가 단번에 발견하기엔 금고는 붙박이 책장 뒤에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암살자라 하여도 책장 뒤에 금고가 있을 것이라 단박에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심 많은 아버지의 성격상 시오스 후작에게 금고의 위치를 드러냈을 리도 없다.
금고가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고 찾으려 했다면 집무실이 흐트러졌을 텐데.
이른 아침 그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은 깨끗했었다.
“암살자가 가지고 간 게 아니라면…….”
제레미의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
“들어와.”
“공자…… 아니 공작 각하. 송구합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집사였다.
“괜찮아. 나도 이 자라기 낯선데 집사도 적응이 안 되겠지. ……재는 다 뿌린 것이냐.”
“……예. 숲에 모두 뿌렸습니다. 선대 공작님을 이렇게 보내드리는 것이 너무도 죄스럽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집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인이다. 더 이상 그를 그리 불러선 안 돼. 내가 넘어가 주는 것도 이번 한
번뿐이야.”
누구보다 아버지에게, 드로이트 공작가에 충성을 바쳤던 자라는 것을 알기에 이 정도 경고로 멈췄다.
제레미의 싸늘한 눈빛에 집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난 집사를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공작가가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
줘.”
“네. 헌데 저 금고는…….”
집사는 제레미의 뒤로 열린 금고를 바라보았다.
“집사도 알고 있었잖아. 아버지의 비밀 금고.”
집사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집사에겐 당연히 이 금고의 위치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여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레미의 예상이 맞는 듯 집사의 얼굴엔 큰 동요가 없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집사. 아버지가 최근에 이 금고 안에 물건들을 옮긴 적이 있나?”
“……그것까진 제가 알지 못합니다. 송구합니다.”
집사는 모른다 답했지만 제레미는 분명 보았다.
답을 하기 전 집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멈칫했던 순간의 행동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제레미는 확신이 생겼다.
금고 안의 증거들은 암살자가 가져간 것이 아니다.
“그래. 알겠어. 오늘은 피곤할 테니 그만 돌아가서 쉬어.”
“네.”
집사가 나가고 제레미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살자가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금고의 문을 닫고 책장을 바로 한 그가 집무실을 나간 그때, 하인 하나와 마주쳤다.
“공작 각하.”
“무슨 일이냐?”
“그것이, 오늘 전 공작 각하의 침실을 치우다가…….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124 화

하인은 제레미에게 작은 나무 조각을 내밀었다. 작은 나무 조각엔 ‘페일린 르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분패?”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니 신분패인 듯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래된 신분패였다. 요샌 나무 조각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으니까.
마도구가 발명되기 시작한 뒤론 나무패를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어림잡아도 이백 년 전쯤의 시기였다.
오래된 물건이란 걸 증명하듯 나무패에 새겨진 이름이 상당히 흐릿했다.
“이게 무엇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공작님의 물건은 아닌 듯하여……. 공작님께 가져왔습니다.”
페일린 르아. 페일린 르아…….
“……여자 이름 같은데.”
이맛살을 찌푸리던 제레미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침실의 청소를 담당했던 이가 누구지?”
“……전 공작님께선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싫어하셔서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그럼 이건 이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냐?”
“네. 오늘 처음 발견했습니다.”
여태까지 없었던 이상한 물건이라면……. 어쩌면 이건 원래 그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암살자가 흘리고 간
물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직감은 암살자의 것이 확실하다 말하고 있었다.
“넌 오늘 이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목이 온전치 못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제레미의 서늘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던 하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제레미는 낡은 신분패를 재킷 안 주머니에 넣고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저택엔 조간신문이 도착했다.
크로프트 공작 영애가 황후의 자리로 돌아온 것과 새로운 황자의 존재.
그리고 그들을 시해하려 한 전 드로이트 공작의 죽음.
하루만에 터진 엄청난 사건들에 신문사들은 신이 난 상태였다. 신문 메인을 무엇으로 장식할 것인가
고민을 하기까지 했었다.
시오스 후작가의 하인은 수북히 쌓인 신문들을 들었다.
그때, 신문 하나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앗.”
하인이 신문을 주우려 손을 뻗었지만 다른 사람이 이미 신문을 주워 들었다.
백발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표정 없는 하녀 릴라.
시오스 영애의 심복이었다.
신문 앞면을 읽은 릴라의 무감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내가 영애께 가져다드리겠다.”
릴라는 하인의 답을 듣지도 않고 아침 식사가 한창인 식당으로 급히 향했다.
그리고 그때, 식당에서는 시오스 후작의 노성이 한창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후라니! 결국 이렇게 되었어. 그리 당당하게 모든 걸 맡기라 하더니 꼴좋구나, 꼴좋아. 네가 말한
결과가 결국 이것인 것이냐.”
엘리야 크로프트 공녀를 황후로 책봉한다는 공식적인 황실의 발표가 난 어제 오후부터 시오스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황후의 적자가 될 2 황자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 황제에게 다른 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내게
말했어야지!”
그는 콧김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죽이려면 깔끔히 죽이던가! 결국 드로이트 공작도 죽고, 존재도 몰랐던 황자가 새로이 나타나고 말았어!
대체 이 일을 어쩔 셈인 것이냐!”
처음엔 황후를 그리곤 새로운 황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시오스 후작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지만 리제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뻗치는지 시오스 후작이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리제나의 수프 그릇이 흔들릴 정도였다.
“네가 입이 있으면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 보거라!”
후작의 노성이 식당을 갈랐다.
리제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이래서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야의 황후 책봉과 황제의 적자인 2 황자의 등장.
이 문제에 리제나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사람은 제국에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가 두 사람을 구해 황궁으로 갔다고 했을 때부터 무언가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그녀가 예상한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이가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니길 바랐는데.
그것만큼은 제발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신은 매정하게도 늘 그렇듯 그녀를 외면했다.
보란 듯이 황자임이 밝혀졌으니까.
엘리야의 아이를 2 황자로 책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의 절망감과 패배감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아이까지 전부 다 가졌으니까.
널 정말 죽여버리고 싶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황제의 마음을 잡으라 그리 일렀거늘 결국 이 사단을 만들다니!”
시오스 후작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도저히 고민도 상념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리제나는 시오스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녹안을 응시하던 리제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모든 게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리제나는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면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던 후작은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다 멈칫했다.
줄곧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리제나가 갑자기 양순히 고개를 숙이니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제가 일을 그르친 것에 아버지의 분노가 크신 것을 압니다. 모두의 저의 실책입니다.”
리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후작은 리제나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근래에 들어 리제나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아비인 그를 무시하곤 했었으니까.
아랫사람 대하듯 그에게 명령까지 했던 리제나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몸을 낮추다니. 얼굴이 터질 듯 끓어올랐던 분노가 허탈하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무릎까지 꿇은 마당에 어찌한단 말인가.
리제나가 자신을 무시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괘씸하긴 했지만 버릴 순 없는
카드였다.
리제나는 1 황자의 친모였으니까.
그녀가 있어야 1 황자를 제 입맛대로 구슬릴 수 있었다.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리제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후작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큼, 네 잘못을 알고 있다니 내 더는 긴말 하지 않겠다. 이번 일이 진정 될 때까지 넌 에드먼드에게만
신경 쓰도록 해라. 그리고 사교계에 괜한 말이 나돌지 않도록 잘 처신해.”
그녀의 사죄가 퍽 마음에 드는 듯 후작의 목소리가 오만했다.
“예.”
이 정도면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 숙인 리제나가 비소를 머금으며 몸을 일으킨 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
답지 않게 다급한 릴라의 모습에 리제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일이냐?”
릴라는 리제나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전 드로이트 공작, 프로이스 드로이트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보낸 시오스 후작. 과연 그는 정말 드로이트


공작가와 아무런 연이 없는 것인가.]

기사를 다 읽은 리제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신문이 구겨지도록 꽉 잡은 그녀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릴라, 오늘 나온 조간신문을 전부 가져오렴.”

* * *
황궁의 소식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던 어제가 지나고 늘 똑같이 새로운 태양이 밝았다.
하지만 오늘부로 난 엘리야 크로프트 공작 영애가 아닌 엘리야 에그리타, 제국의 황후가 되었고 칼라일
또한 에그리타의 2 황자로 책봉되었다.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신분은 이미 황후와 황자로 격상되었다.
아침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아버지는 내 진료를 위해 칼라일과 함께 잠시 산책을 나간 상태였다.
“난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어때?”
진찰을 마친 하르펜에게 먼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보단 좋아지셨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 절대 무리하시는 건 안 됩니다. 황자전하
와도 당분간은 조금 떨어져 지내시는 게 좋습니다. 황자 전하를 보시다 보면 무리를 하게 되시니까요.”
“그건……. 쉽지가 않을 것 같네.”
하르펜이 무얼 말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칼라일을 곁에서 떼어낼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가 아빠라는 것과 앞으로 황궁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듯 칼라일은
기분이 계속 어두웠다.
제 딴엔 내가 걱정할까 봐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거 같았지만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황자 전하께선 여전히 폐하를 어려워하시나요?”
하르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직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차자 좋아지리라 생각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어제 잠시 레이몬드가 들렸을 때 칼라일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기 때문에.
‘몸은 좀 어떻지?’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칼라일도 함께 있었군.’
나를 보던 그가 칼라일에게 시선을 내렸다. 난 칼라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칼라일, 아버지께 인사드려야지.’
‘…….’
칼라일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칼라일.’
레이몬드는 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지만 칼라일은 그를 외면해
버렸다.
내 품에 얼굴을 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호한 칼라일의 거부 반응에 일순 방 안의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을 정도였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던 레이몬드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손을 거두었었다.
‘아직 폐하가 낯설어 그런 듯합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지만 레이몬드가 돌아갈 때까지 칼라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었다.
칼라일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고민이 많아지던 때 시종이 방문을 알렸다.
“황후 폐하, 시종장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방으로 들어온 시종장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직 황후궁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어제부로 공식적인 지위는 황후로 올라간 상태였다.
“시종장, 무슨 일인가?”
“폐하께옵서 황후궁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가. 예상보다 빨리 끝났군.”
“어제 폐하께옵서 바로 궁을 준비하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궁인들도 전부 새로 뽑았습니다. 몸 상태가
나아지시면 거취를 옮기시는 게……”
“아니, 바로 옮기겠네.”
시종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몸도 안 좋으신데……. 충분한 회복 후 날짜를 잡으라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되었다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까지고 폐하의 침실을 차지하고 있을 순 없지.”
이곳은 레이몬드의 침실이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이몬드는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 침대를
공유할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지금도 손님 방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일국의 황제를 계속 그리 둘
수는 없다.
거기다 황제가 황후가 각방을 쓴다는 소문이 나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폐하께 말씀드리게. 오늘 중으로 황후궁으로 가겠다고. 아, 그리고 혹 시녀장도 이미 뽑은 것인가?”
“아니요. 시녀들만 추렸을 뿐 시녀장은 황후 폐하께서 직접 정하게 하시라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시녀장은 사가에서 내가 데리고 들어올 것이니 시녀들에게 미리 언질을 넣어놓게.”
헬란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 폐하께서 칼라일의 궁전도 정하셨나?”
“네. 황후궁과 가까운 레굴루스 궁전을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며칠 아프더니 청력까지 이상해진 걸까.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레굴루스 궁전?”

125 화

“예, 황후 폐하. 레굴루스 궁전을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레굴루스 궁전이라니. 그곳은 대대로 황태자들이 머무는 궁전이었다.
그런데 칼라일에게 그 궁전을 준다니.
난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몬드와 아직 칼라일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리제나의 배신과 시오스 후작의 역심 때문에 마음을 완전히 돌린 건가.
그가 대대로 황태자가 쓰던 궁전을 칼라일에게 준다는 것은 차기 황태자를 칼라일로 점찍은 것이라 대놓고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나쁠 건 없었다.
황태자를 결정짓는 것은 황제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칼라일에게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지지 세력을
모으는 것이 한결 수월할 테니까.
그래, 거절할 이유는 없어.
난 시종장에게 말했다.
“알겠다. 황자의 궁인들은 내가 선별할 것이니 따로 뽑지 말거라.”
“예. 그럼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인사를 올린 시종장이 물러가고 하르펜도 약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난 옆에 서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오늘 나온 조간신문을 전부 가져오렴.”
“네.”
방을 나갔던 시녀가 한 뭉치의 신문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신문들을 하나씩
살폈다.
대부분 나와 칼라일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칼라일에 대한 기사도 많았지만 나에 대한 기사가 좀 더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역사상 황제와 이혼을 했다 재혼을 하는 황후는 내가 처음일 테니까.
그것도 적통의 황자를 데리고 황궁으로 복귀하였으니.
지난 6 년 동안 나의 생활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혹시 레이몬드와 이혼한 뒤 아이를 몰래 낳아 키웠다는 사실에 대해 악의적으로 파고드는 기사가 있나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그런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레이몬드가 미리 손을 써둔 듯했다.
충분히 말이 나올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문에 기사 한 줄이 없다는 것은 윗선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니까.
“흠…….”
다른 신문들을 전부 한쪽으로 치워 버린 난 장부의 내용을 공개한 신문을 들었다.
장부의 내용으로 시오스 후작을 교묘히 겨냥한 기사는 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의심을 품게끔 했다.
“이 정도면 귀족들에게서 충분히 말이 나오겠어.”
내일이면 이 내용과 관련된 더 많은 기사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럼 시오스 후작의 반대 세력에 있던 귀족들부터 시작하여 시오스 후작가도 조사하라며 들고 일어나겠지.
조사를 시작한다면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야 했다. 설령 증거를 잡지 못한다 해도 시오스 후작가를
정계에서 밀어낼 구실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엄마!”
생각을 이어가던 때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문을 내리자 산책을 다녀온 칼라일과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칼라일은 달려와 침대에 폴짝 뛰어올랐다.
“칼라일, 잘 다녀왔어?”
“네! 엄마, 여기 선물이요.”
등 뒤로 손을 왜 숨기고 있나 했더니, 칼라일이 불쑥 내게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고마워, 칼라일.”
환한 미소를 그리며 장미를 받아 든 난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칼라일, 엄마랑 같이 앞으로 지낼 집으로 가 볼래?”
“집이요?”
“응. 여기 만큼 크고 예쁜 궁전이 칼라일의 새로운 집이 될 거야.”
칼라일에게 레굴루스 궁전을 구경시켜주고 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황후궁에 도착한 난 칼라일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내가 부탁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공작가로 돌아가셨기에 지금은 칼라일과 나 둘뿐이었다.
“우와, 여기가 엄마 궁전이에요?”
“응. 여기가 앞으로 엄마가 지낼 궁전이야. 마음에 드니?”
“네! 너무 예쁘고 좋아요.”
칼라일이 아름다운 은빛 궁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칼라일을 보며 미소를 그리던 난
이윽고 아이의 손을 잡고 궁전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로비로 들어서자 세로로 줄지어 선 시종과 시녀들이 허리를 숙였다.
“황후 폐하와 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미 준비가 다 끝마쳤다는 시종장의 말대로 황후궁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던 레굴루스 궁전과 달리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고개를 들거라.”
나직이 말한 난 오랜만에 돌아온 궁전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줄이야. 황후궁을 떠났던 그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전은 내가 떠날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떠나 있던 6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모든 것이 익숙했다.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 거야.
달라지지 않은 것은 궁전일 뿐. 나의 마음도 상황도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황후 폐하, 쉬실 수 있도록 침실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묘한 기분을 느끼던 때 시녀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이 무거웠다.
조금 돌아다녔을 뿐인데 밀려드는 피곤함이 컸다.
“그래. 칼라일, 가자.”
난 조금 쉬기 위해 칼라일과 함께 침실로 향했다.

* * *

“황후 폐하께서 황후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합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산책을 하고 있던 레이몬드는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몸 상태는 괜찮더냐.”
“네. 잘 회복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오늘 아침에도 그가 직접 엘리야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칼라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 칼라일이 그를 거부했던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으니까.
의식을 차렸을 때도 그를 무서워하긴 했지만 그때는 많이 놀란 상태였으니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좀 진정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를 단번에 아버지라 받아들이진 못해도 적어도 그렇게 싫어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데 칼라일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리 그를 격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야시장에서 완전한 타인으로 만났을 때가 오히려 더 아이에게 호감을 샀던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칼라일과 가까워질 수 있을지 답을 몰라 답답했다.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는 법 같은 건 배워 본 적이 없으니.
“하아.”
공작도 엘리야도 칼라일이 낯설어 그런 것이라 말하긴 했지만 정말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문득 행복한 부자 같던 칼라일과 제레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외면하는 칼라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부스럭.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그때, 수풀 속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다른 시종들은 듣지 못한 듯했지만
예민한 그의 청각에 정확히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그리고 또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모두 기척을 느낀 듯 소리가 들리는 수풀 속으로 고개를 돌렸
기척을 느낀 기사가 검을 빼 들던 순간 레이몬드는 수풀 속에서 쑤욱 올라오는 검은 머리칼을 보았다.
“멈춰라!”
“아…….”
수풀 속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칼라일이었다.
칼라일은 눈앞의 위협적인 기세의 기사를 보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기사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부복했다.
“2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
기사는 물론이고 시녀와 시종들도 칼라일에게 허리를 숙였다.
“칼라일.”
레이몬드는 놀라서 굳어버린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아이에게 손을 뻗은 순간, 칼라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레이몬드와 시선이 마주친 칼라일의 검은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칼라일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의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들었지만 일단 그는 손을 내렸다.
다가가지 않겠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어 칼라일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날 야시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다친 곳은 없느냐.”
부드럽게 묻자 흠칫하던 칼라일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천천히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다친 곳은 없어요.”
“다행이구나.”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칼라일은 그런 레이몬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무서운 얼굴로 명령을 하는 레이몬드가 무서웠다.
그래서 한 번도 자세히 레이몬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꾸 무언가 떠오르려 했다.
이윽고 칼라일은 레이몬드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야시장에서 본 아저씨.”
칼라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레이몬드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칼라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엄마를 잃어버려 무서워하던 자신을 상냥하게 달래주던 아저씨의 따뜻한 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저씨가 황제 폐하이자 아빠…….
아직 어린 칼라일에겐 너무도 혼란스러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칼라일은 레이몬드가 조금은 덜 무서워졌다.
제가 일어났을 때처럼 무서운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날 감사했습니다, 아저씨. 아니, 황제 폐하…… 아, 아니 아빠……라고 해야 하는 거죠……?”
칼라일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끙, 신음을 흘렸다.
열심히 작은 머리를 굴리는 듯 한껏 인상을 찡그리는 칼라일의 모습이 귀여워 레이몬드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던 그는 칼라일에게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천천히, 해도 된단다. 지금은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렴. 아저씨가 편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된다.”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에 순간 칼라일의 경계심도 조금은 허물어졌다.
잔뜩 굳어있던 얼굴을 풀며 어색하게 답했다.
“네. 폐하.”
여전히 불편해 보였지만, 외면하고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이대로 조금씩 시간을 가진다면 칼라일도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들었다.
자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해 오는 칼라일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간질거림이 목을 넘어 머리께까지 올라가는 거 같았다. 이상한 기분에 그는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칼라일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딱 보아도 황후궁에서 몰래 빠져나온 모양새였으니까.
아마 엘리야가 찾고 있을 것이다.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위험하니 함께……”
“칼라일!!”
그리고 그때 다급한 엘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26 화

“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난 시녀들의 걱정스런 외침도 무시하며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번쩍 손을 들고 흔들어 보이는 칼라일이 보였다.
한달음에 아이의 앞으로 달려간 난 와락 칼라일을 끌어안았다.
“윽. 엄마……! 숨 막혀요.”
분명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자고 일어났는데 칼라일이 옆에 없어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녀들마저 칼라일이 어디로 간지 모른다고 했을 때는 눈앞이 아찔할 만큼 두려웠었다.
혹시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혼자 황궁을 나가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또 누군가 아이를 납치라도 한 게 아닐까.
온갖 최악의 상상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졌었다.
칼라일을 찾았다는 사실에 겨우 안도감이 돌아온 난 꽉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아이의 두 팔을 잡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누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라고 했어. 엄마가 뭐라고 했었어?”
“……어디 가지 말고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걱정한 만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근데 왜 혼자 나왔어. 나가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을 했어야지. 시녀들 눈까지 피해서 몰래 이렇게
돌아다니면……”
그때, 내 어깨를 잡는 손이 느껴졌다.
“엘리야.”
뒤에서 말리듯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난 어깨를 움찔했다.
고개를 돌리자 레이몬드가 어느새 옆에 다가온 것이 보였다.
“보는 눈이 많아. 그리고 칼라일도…… 놀란 듯하니 이번은 넘어가 주는 게 어때.”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뒤로 시종들과 시녀 그리고 기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정신없이 급히 달려오느라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는지도 몰랐다.
난 다시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칼라일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게 보였다.
그리고 신발에 잔뜩 묻은 진흙과 이곳저곳 많이 헤맨 것인지 바짓단이 다 더러워진 것이 보였다.
“잘못했어요……. 심심해서 화원만 구경하려고 나온 건데……. 너무 멀리 나와 버렸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엄마…….”
칼라일이 울먹이며 말했다.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칼라일의 가득 차오른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울지 마. 엄마도 화내서 미안해. 앞으론 절대 혼자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엄마가 자거나 아무리 바빠
보여도 꼭 엄마한테 말하고 시녀나 시종, 다른 사람들이랑 함께 움직여야 해. 알겠지?”
“훌쩍, 네. 약속할게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칼라일이 먼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약속했으니까 이제 꼭 지켜야 해.”
칼라일은 올망한 눈망울로 나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금세 마음이 저릿해졌다.
나는 칼라일의 볼을 쓰다듬어 주곤 머리칼에 묻은 풀잎을 떼어냈다.
“엄마랑 돌아가자.”
내가 미소를 짓자 칼라일도 훌쩍 임을 멈추었다. 그렇게 칼라일을 안아 들던 때, 갑자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몸을 비틀거렸다.
“읏…….”
“엘리야!”
“황후 폐하!”
레이몬드의 놀란 목소리와 시녀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엄마?”
“……응, 아냐 아무것도.”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진 칼라일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몬드도 칼라일의 보곤 굳혔던 얼굴을 피며 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칼라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에 나도 칼라일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넌 무리일 것 같으니 내가 안고 가지.”
“그래도…… 어찌 폐하께서. 차라리 다른 시녀를 시키겠습니다.”
“됐다. 내가 안고 가마. 칼라일 오늘만 엄마를 위해 참아주렴, 그럴 수 있지?”
“……네.”
칼라일이 싫다고 답할까 불안해하던 난 의외로 양순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기 싫다며 눈길조차 피했던 아이였으니까.
물론 지금도 레이몬드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칼라일의 표정엔 불편함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내가 오기 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상황을 보면 수풀을 헤매고 있던 칼라일을 레이몬드가 먼저 발견한 거 같았다.
“그럼 이만 가자. 금방 추워지겠어.”
조금 달라진 칼라일과 레이몬드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때 레이몬드가 말했다.
“황후를 부축해라.”
짧은 명령을 시녀에게 내린 그는 칼라일을 고쳐 안고 먼저 걸어 나갔다.
위화감이 없는 그 뒷모습을 보던 난 이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뒤를 따랐다.

* * *

황후궁으로 돌아온 난 시녀에게 칼라일을 씻겨오라 보내고 레이몬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쓴 약을 마시고 약병을 하르펜에게 넘기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살짝 미간을 좁힌 표정에서 나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황후로서의 책임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에 나를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이 황후궁에서 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받는 게 상당히 어색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해 주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헌데 칼라일과 혹 다른 일이 있으셨나요? 칼라일이…… 폐하를 거부하는 게 조금 덜해진 거 같아서요.”
그와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편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리자 수려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짙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곤 입술을 열었다.
“칼라일이 야시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나란 걸 알아차렸어. 이미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더군.”
“아…….”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해 나도 그날의 기억은 잊어버린 줄 알았었다.
그때의 기억은 칼라일에게 좋은 기억이었으니, 레이몬드에게 경계를 조금 푼 것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아직은 날 불편해하고 있어. 아버지라고 부를 날이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칼라일의 거부가 그에겐 꽤 상처인 것 같았다.
“……아이를 지키려 한 선택이었지만, 폐하와 칼라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은 제 탓이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잘못은 아니지. 따지고 보면 모든 시작은 나였으니까. 널 원망하지 않아.”
그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떼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너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가 의식을 차렸을 때 분에 찼던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담담해진 검은 눈동자 속엔 오히려 나를 향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진심 어린 사과였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당황한 난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네.”
그와 마주한 시선이 불편해졌다.
우리 둘 사이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왔지만 나의 목표는 시오스 후작가였을 뿐이니까.
그와 다시 시작할 마음은 내게 없었다.
레이몬드의 집요한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난 말을 꺼냈다.
“시오스 후작가에 대한 신문 기사들이 나왔던데……. 곧 귀족 회의가 열릴까요?”
“아마도, 어차피 정기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어. 칼라일의 일도 있고 하니 정기 회의를 앞당겨서 열
생각이야. 행정궁에서도 이미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니……. 회의장에서 시오스 후작을 조사하란 말이
먼저 나올 거 같아.”
“다행이네요. 시간이 지체될수록 저희에겐 좋을 게 없으니 빨리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근데…… 음, 우리 결혼식은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
갑자기 결혼식 얘기라니. 의아해 그를 바라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집요히 바라보던 그가 오히려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안 그래도 결혼식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는데, 결혼식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뭐?”
“여러 일들이 있기도 했고……. 재혼하는 입장이니까요. 차라리 결혼식에 들어갈 비용을 빈민가에 베풀고
식 대신 황궁에서 연회를 여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네가 괜찮다면.”
결혼식은 신부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그런 로망을 찾을 처지도 아니었고 레이몬드와 그런 로망을
꿈꿀 사이도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결혼은 계약에 가까운 결혼이니까요.”
무덤덤하게 말하자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낮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혼식은 네 말대로 연회로 대체할게. 오늘 이래저래 일이 많이 피곤할 테니 이만 쉬어.”
“……예, 폐하.”
레이몬드는 표정을 숨기듯 나를 보지 않고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피곤해.”
그의 말대로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너무 많았다. 긴 하루의 끝과 돌아온 황후궁에서의 첫 밤이니까.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칼라일이 방문을 연 것이었다.
“엄마, 같이 자도 돼요?”
레굴루스 궁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황후궁에 칼라일이 지낼 방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너른 방이 어색해 찾아온 거 같았다.
피식, 웃은 난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이리 와.”
쪼르르 달려온 칼라일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이불을 파고들어 온 칼라일은 내 허리를 감으며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엄마, 우리 이제 정말 계속 황궁에서 사는 거예요?”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는 칼라일의 표정은 아직 예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특히 칼라일은 더더욱,
황궁으로 돌아온 이상, 칼라일의 에그리타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했으니까.
“응. 이제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해. 이곳에서 엄마랑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보자. 그럼 분명 칼라일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야.”
칼라일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좋은 추억이 많이 쌓이길 바랐다.
에그리타 황궁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길 말이다.
“……네.”
시무룩하게 답하는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춘 난 칼라일과 함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좋은 꿈 꾸렴.”

* * *

이틀 뒤.
리제나는 오늘도 조간신문을 전부 거둬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새에 눈에 띄게 늘어난 시오스 후작가의 기사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기사의 내용들은 비슷했다.
공개된 드로이트 공작가의 장부와 시오스 후작가가 이번 암살 사건을 같이 주도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1 황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2 황자를 시해하려 한 것이 아니냔 말들이 무수히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신문의 헤드라인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굴루스 궁전을 하사받은 2 황자.


1 황자는 황태자의 자리에서 이렇게 밀려나는 것인가.]

“레굴루스 궁전이라니! 황자로 책봉된 지 채 일주일도 안 된 황자에게 황태자궁을 주다니! 폐하께서 미친


것이 아니냐!”
그녀와 같은 기사를 본 시오스 후작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지 신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신문을 보는 리제나의 녹안도 서늘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대대로 황태자들이 머무르는 레굴루스 궁전.
그 궁전이 가진 의미를 모르고 2 황자에게 하사했을 리 없었다.
허니 레이몬드는 이미 차기 황태자를 누구로 할지 마음먹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엘리야에게 있으니 2 황자를 더 애정할 것이란 건 이미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대놓고
에드먼드와 차별을 둘 줄은 몰랐다.
6 년간 제국의 유일한 황자로 키워져 온 아이를 두고서 말이다.
아무리 황후의 적자라 하여도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1 황자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뼈가 도드라지도록 손을 꽉 그러쥐던 그녀는 간신히 분노를 삭이며 말했다.
“아버지, 지금 문제는……. 황태자 궁이 아닙니다.”

127 화

“차기 황태자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이냐!”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린 시오스 후작은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무참히 구겼다.
이 사단을 만든 것이 바로 리제나였으니까.
2 황자에게 황태자의 궁이 넘어가다니.
후작은 리제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레굴루스 궁전보다 더 문제인 건 시오스 후작가예요.”
리제나는 씩씩거리는 후작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드로이트 공작가에서 장부가 나왔고 시오스 후작가와 죄인을 엮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심지어 1
황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2 황자를 암살하려 한 게 아니냐는 기사까지 나왔죠.”
“뭐, 틀린 말도 아니지. 네 어리석은 판단으로 어설프게 2 황자를 죽이려 했다가 드로이트 공작도 죽었고
이젠 황태자 궁까지 뺏겨 버렸지 않느냐? 신문들이 저리 떠드는 것도 전부 네 덕분인 게야.”
시오스 후작은 비소를 숨기지 않으며 비아냥거렸다.
“…….”
모든 실책을 자신의 탓이라 몰고 있는 시오스 후작이 어이없었지만 리제나는 참았다.
암살 사건 만큼은 그녀의 실책이 맞았으니까.
“어리석은 어미의 실수로 황태자 궁까지 뺏긴 에드먼드에게 미안하지도 않으냐.”
에드먼드까지 언급하자 리제나의 녹안이 번뜩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후작과 싸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손을 그러쥐며 분노를 삭인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콧방귀를 끼고 있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네. 지금 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들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여론이라면 폐하께서 암살 사건을 다시 조사하라 명하실 겁니다.”
“폐하께서? 그러실 마음이 있으셨다면 벌써 조사를 명하셨겠지. 애초에 드로이트 그 자가 죽으면서
증거를 남긴 것도 아니니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아무런 명분 없이 후작가를 조사할 순 없지.”
시오스 후작은 황제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리제나는 아니었다.
장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신문이 늘어나고 있었고 사교계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황제 역시 이쪽을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장부를 공개한 게 레이몬드일지도 모른다.
불타는 저택에서 엘리야를 구한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곳에 갈 수 있었다는 건 일이 터지기 전부터 드로이트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귀족 회의가 열리고 귀족들이 폐하께 건의를 한다면 증거가 없어도 조사를 명할 수 있습니다.”
“귀족 회의가 열리려면 한 달이나 넘게 남았다. 한 달 정도면 이 소란도 어느 정도 사그라질 거다.”
“귀족 회의가 앞당겨질 수도 있어요.”
시오스 후작은 헛소리 말라는 듯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럴 거였음 벌써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겠지. 쓸데없는 데 집중하지 말고 넌 사교계 쪽이나 주시해라.
황후가 세력을 넓히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는 리제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일한 태도에 리제나가 미간을 좁히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인사를 올리곤 후작의 책상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각하, 귀족 회의에 관해 황실에서 내려온 공문입니다.”

* * *

귀족 회의가 열린다는 공문이 내려간 그 시각 난 루몬트를 만나고 있었다.


“부상이 심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이셔도 되시는 건지 걱정스럽습니다. 엘…… 아니 황후
폐하.”
루몬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호칭을 바로 잡았다.
“괜찮아. 이틀 동안 푹 쉬며 치료를 잘 받아서 많이 좋아졌으니까.”
거처를 옮기던 날 무리하게 움직여 열이 올랐었지만 이틀 동안 침대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절대
안정을 취했었다.
하르펜이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쉬기만 해서인지 오늘은 열도 없었고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아, 이건 화상 상처에 좋은 연고입니다. 물론 황궁의들이 최고급 약을
쓰겠지만……. 이것도 꽤 쓸모가 있으실 겁니다. 화상이 잦은 사막 왕국의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고이니까요.”
루몬트가 테이블 위로 동그란 통을 올려놓았다.
“고마워.”
난 곁에 서 있는 헬란에게 눈짓했다.
헬란은 어제부로 황후궁의 시녀장으로 복직했다.
헬란이 연고를 챙기고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루몬트에게 물었다.
“제드의 상태는 어때?”
“아주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내상이 좀 있어서 걱정했는데 회복력이 거의 뭐 몬스터급이시더라고요.”
하하, 루몬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제드의 강철 체력을 알기에 피식 웃은 난 루몬트에게 본론을 꺼냈다.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사교계의 정황을 듣기 위해서야. 나와 2 황자에 대한 사교계의 소문은 어때?”
“지금으로서는 크게 나쁜 말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황자 전하의 존재가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아직은 다들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인 듯합니다.”
“레굴루스 궁전에 대한 말은?”
“거기에 대해선…… 조금 말이 있습니다.”
루몬트가 조심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께서 섣부른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냔 말이 나오는 거겠지.”
칼라일이 황자가 된 지 채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데다 아직 귀족들은 칼라일을 본 적도 없었다.
황태자의 자리에 적합한지 그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1 황자의 능력은 6 년간 어느 정도 증명되었으니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는 2 황자에게 덜컥 황태자의 궁을
하사한 황제의 선택을 못마땅해하는 귀족들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네. 그런 말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조금 나오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어적인 대응을 하기엔
조금 섣부른 감이 있습니다.”
“그렇지. 어차피 공식적으로 황자가 귀족들 앞에 서게 되면 가라앉을 소문이니……. 지금은 크게 나서지
말고 소문을 계속 주시하기만 해. 혹시라도 악의적인 말들이 나돌기 시작하면 바로 내게 보고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오스 후작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여론이 안 좋습니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시오스 후작가가 암살 사건에 관련이 있을 거란
이야기가 퍼지고 있는 데다 그 여파로 시오스 후작가의 사람이라 할 수 있던 몇몇 고위 귀족들까지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귀족 회의가 열리기 전에 시오스 후작을 더 고립시켜야 해. 귀족들 사이에 후작과 드로이트 가문에 대한
자잘한 소문들을 더 풀도록 해.”
“시오스 후작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걱정 마십시오.”
자신만만한 루몬트를 보며 피식 웃은 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긴 이야기에 잠시 숨을 돌리던 그때 시녀 하나가 헬란에게 다가왔다.
곧 헬란이 다가와 말했다.
“황후 폐하, 1 황자 전하께서 오시고 있다 합니다.”
“……뭐?”
난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곧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내가 황후궁에 들어왔다는 것을 이미 1 황자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황후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1 황자를 마주하는 것이 마음이 좋지 못할 뿐이었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루몬트가 인사를 하고 빠르게 응접실을 나가고 나도 1 황자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란, 칼라일을 깨워서 준비시켜.”

* * *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1 황자, 에드먼드는 유려하게 예를 갖추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황자의 모습이었다.
어릴 적부터 차기 황제로 교육받았을 터였으니 당연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은 불편했다.
난 에드먼드의 앞길을 막을 사람이니까.
좋지 못한 마음을 감추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자, 어서 와요.”
고개를 든 에드먼드가 내게 말했다.
“황후 폐하, 말씀을 편히 해 주십시오. 황자인 저에게 존대하시다니요.”
“그래. 그럼 편히 말하마.”
“네. 이리 갑자기 찾아와 민폐가 된 것은 아닌지 송구합니다.”
“민폐라니, 내가 먼저 황자를 불렀어야 했는데 내 몸이 좋지 않아 신경을 쓰지 못했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법도에 맞는 일인걸요. 저…… 근데 2 황자는 잠시
어디 간 것인가요?”
에드먼드가 칼라일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 칼라일이 아직 어려 낮잠이 들었다가 지금 막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단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곧 내려올 거야. 날이 좋아 화원에 티 테이블을 준비하라 해놓았는데 괜찮니?”
“좋습니다. 황후 폐하.”
난 에드먼드와 함께 화원으로 향했다.
내가 황후궁에 돌아온 지는 겨우 이틀째였지만 황후궁의 화원은 옛날과 같이 흐드러지게 핀 꽃들로
가득했다.
원래라면 새로운 주인을 맞기 위해 전 주인이 관리한 꽃들은 전부 거두는 것이 맞았지만 레이몬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가 내가 떠난 뒤에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 궁전을 유지하라 명한 것이었다.
다시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뭐 결국 그의 뜻대로 된 것인가.
서로가 원하는 게 있어 합의한 결혼. 계약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이곳에 돌아오게 된 건 아니었다.
난 과거와 달리 황후궁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감한 눈빛으로 꽃들을 둘러본 난 차를 따르고 물러가는 시녀에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황자가 레몬 홍차를 좋아한다고 들어 준비하였단다. 마셔보렴.”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에드먼드가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맛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구나.”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에드먼드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다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황후 폐하. 이제 몸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많이 좋아졌단다. 꾸준히 치료만 잘 받는다면 잘 회복할 것이라 하더구나.”
“정말 다행입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다 들어 많이 걱정했었거든요.”
“……그랬구나.”
좋지 못한 일.
그 일을 꾸민 것이 다름아닌 에드먼드의 모친 리제나다.
난 묘해지는 기분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황후가 되고 동생이 생겨 많이 놀랐을 텐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줄 줄은 몰랐단다.”

128 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바로 꺼낼 줄은 몰랐는지 에드먼드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군더더기 없는 의젓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고 있지만 많이 긴장했으리란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어머니를 제치고 황후에 자리에 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니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여 당황스러울지라도 직접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에드먼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찾아온 것인지 알아야 했으니까.
“사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황후궁을 조금도 손대시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은 황궁 시녀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으니까요.”
에드먼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의젓함에 당황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랬구나.”
“네. 황후 폐하가 아버지가 기다리셨던 전 황후 폐하라는 걸 듣게 되어 놀라긴 했지만 금방 이해가 갔어요.
덕분에 동생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죠.”
에드먼드는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긴장감과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지만 에드먼드는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에드먼드의 얼굴에서 경계심이나 적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익숙지 않은 이 자리가 불편한 듯했다.
차라리 에드먼드가 나를 대놓고 싫어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까.
리제나를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지만 눈앞의 황자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난 칼리안을 위해 기꺼이, 내 모든 힘을 다해 에드먼드의 자리를 뺏을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도 그의 외가의 모는 것도 무너지게 만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에드먼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꾹 누르는 듯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황자가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황자, 난 황자에게 그리 좋은 어머니는 못 될 것이다.”
1 황자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황궁의 권력다툼이나 세력 양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해도 황후인 나와 자신의 어머니인 리제나가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 것이다.
알량한 상냥함을 가장하고 에드먼드를 대할 수도 있었지만 거짓된 감정으로까지 에드먼드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에드먼드에게 모진 결정을 많이 해야 했으니까.
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듯 에드먼드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윽고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렸다.
“괜찮아요. 황궁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요. 제게 소홀하다 하셔도 황후 폐하가 나쁜 분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이답지 않은 말이었다.
아이로 취급하기엔 황자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 하지만 적어도 일반 귀족가에서 자랐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 황궁의 각박함을 짐작할 수 있기에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모순적이겠지만 시오스 후작가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에드먼드의 목숨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에드먼드는 죄가 없었으니까.
나중에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만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해해주어 고맙구나. 나도 너에게 최악의 어머니는 되지 않도록 노력하마.”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조금 멍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던 에드먼드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 음, 네…….”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에드먼드가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딱히 어떤 답을 원해 한 말은 아니었기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때 티테이블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시녀의 손을 잡은 칼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셔츠와 바지를 깔끔히 차려입은 칼라일은
나를 보고 웃으며 달려오려다 멈칫했다.
에드먼드를 발견한 것이었다.
칼라일에게 에드먼드의 존재에 대해 말해 주긴 했었다.
칼라일에게 형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레이몬드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라 너무 혼란스러울까 자세히 설명해 주진 못했다.
애초에 어린 칼라일에게 이복형이란 존재를 이해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했으니까.
칼라일은 에드먼드의 존재를 경계하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서버렸다.
“저 아이가…….”
에드먼드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리고 난 굳은 듯 서 있는 칼라일에게 손을 뻗었다.
“칼라일, 이리 오렴.”
머뭇거리던 칼라일은 이내 시녀의 손을 놓고 내게로 다가왔다. 미리 마련해 놓은 내 옆자리에 칼라일을
앉혔다.
에드먼드와 칼라일은 서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탐색하듯 말이다.
난 한껏 긴장한 칼라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칼라일, 인사하렴. 엄마가 저번에 말한 칼라일의 형이야.”
움찔하던 칼라일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전 칼라일이에요.”
칼라일은 에드먼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법에 전혀 맞지 않는 칼라일의 인사가 당황스러운 듯 에드먼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라일이 황궁 밖에서 오래 지내 아직 예법을 배우지 못했단다. 내일부터 수업을 시작하니 오늘은
이해해주겠니?”
“아, 네. 칼라일 만나서 반가워. 난 에드먼드야. 음…….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멈칫하던 것도 잠시 에드먼드는 상냥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난 에드먼드의 눈빛에 스친 선명한 경계심을 놓치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한 2 황자. 거기다 황후의 적자인 동생이 마냥 달갑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가 확실했던 황태자의 자리를 두고 2 황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하지만 찰나의 순간으로 스친 적대감을 칼라일은 보진 못했다.
칼라일은 다정한 에드먼드가 마음에 드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긴장감이 풀린 칼라일은 에드먼드를 향해 몸을 내밀며 물었다.
“형, 형은 어디에 살아요? 여기서 많이 먼데 살아요?”
“음……. 그렇게 멀지는 않아.”
“그럼 놀러 가도 돼요?”
칼라일은 눈을 반짝이며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친한 형 집에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만난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학술원에 다닐 때도 또래 친구들보다 형들을 더 좋아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거부감 없이 에드먼드를 좋아할
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에드먼드 역시 칼라일의 적극적인 태도에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사교계에서 또래를 만나도 서로 탐색하고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피곤한 대화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하게 같이 놀고 싶다 눈을 반짝이니 황자로 살아온 에드먼드에겐 익숙지 않은 상황일
거다.
당황을 넘어 난감해 보이는 에드먼드의 얼굴에 난 테이블을 넘어갈 듯 몸을 내민 칼라일을 똑바로 앉혔다.
“칼라일, 갑자기 그럼 안 돼.”
“안 돼요? 왜요? 형인데…….”
칼라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를 순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저는 형이 생겨서 좋은데…….”
“칼라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들떠있던 칼라일이 눈을 도르를 굴리다 차분해졌다.
“전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칼라일이…… 가끔은 궁에 놀러와도 괜찮아요.”
에드먼드는 예의상의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 스민 떨떠름함이 내겐 보였다.
진심으로 칼라일과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사이인데
칼라일과 친해져 에드먼드가 얻을 이익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두 아이가 친해지길 바라진 않았다.
애초에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될 두 아이였다. 사이가 좋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그저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원수지간만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죽은 황태자와 레이몬드처럼은 안 되기를 말이다.
“그래. 다음에…… 시간이 되면 그리하자꾸나.”
예의상의 답을 하자 칼라일이 신이 나 답했다.
“네!”
“칼라일, 쿠키 좋아해? 이거 사과 파이인데 지금 사과가 제일 맛있을 때라 파이도 맛있을 거야.
먹어봐.”
에드먼드는 자연스럽게 칼라일에게 화제를 돌리고 곧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두 아이의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난 씁쓸함을 숨기며 미소를 그렸다.

* * *

다음날.
이른 오전, 본궁으로 귀족들의 마차가 연이어 도착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귀족들은 다들 심각한 얼굴로 궁전으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귀족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이었다.
예정보다 빨리 열리게 된 회의인 만큼 지금 제국을 둘러싼 사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도 에그리타 제국을 한바탕 뒤흔드는 역대급의 사건들이었다.
회의장에 도착한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들을 나눴다.
“오늘 2 황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황태자궁을 내리셨으니 어쩌면 황태자로 바로 책봉하시겠다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건 너무 섣부른 결정입니다. 2 황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황태자의 재목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요.”
“허나 황후 폐하의 적자가 아닙니까. 1 황자보다 정통성을 가진 분이십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직은 이른 이야기겠지요.”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묵직한 음성에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재상직을 대리하고 있는 파르앙 후작이 서 있었다.
파르앙 후작은 한참 열기를 띠고 이야기를 나누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폐하께서 회의를 여시는 것은 황태자 책봉 때문은 아니니 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르앙 후작은 허허, 인자한 웃음을 지었지만 2 황자에 대해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귀족들을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파르앙 후작.”
“크로프트 공작님.”
크로프트 공작까지 도착하자 2 황자에 대해 말하던 귀족들은 머쓱한 기침을 하며 말을 멈추었다.
크로프트 공작은 파르앙 후작과 함께 상석의 오른쪽에 섰다.
“공작, 들으셨습니까. 오늘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도 회의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네,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귀족들이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드로이트 공작가.
지금 그곳은 황실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황족을 시해하려다 죽은 전 공작인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드로이트 공작가의 돌연변이라 소문났던 공자.
그 공자가 공작이 되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이 아직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에 더욱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회의장 안으로 백금발의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짙은 남색 코트를 걸친 제레미는 평소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달리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레미의 멀끔한 모습에 귀족들은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돌연변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기품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제레미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품평하는 귀족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한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제레미는 엘리야와 많이 닮은 은발 머리 남자 앞에서 멈춰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로프트 공작 각하.”
제레미는 크로프트 공작에게 다가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주변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로이트와 크로프트는 절대 이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129 화

크로프트 공작은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제레미를 보았다.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 상당히 잘생긴 얼굴.
공작은 이자가 적이 아니라는 것은 엘리야에게 얼핏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공작가의 장부를 내놓은 것도 이자라 하였지.
공손한 태도로 서 있는 제레미를 보던 크로프트 공작은 입꼬리를 유려하게 올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드로이트 공작님.”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귀족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드로이트 전 공작이 황후와 황자를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크로프트 공작과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언뜻 기대하는
눈빛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제레미는 인사를 끝으로 깔끔하게 물러나 크로프트 공작 맞은 편에 섰을
뿐이었다.
큼, 귀족들이 아쉬움이 가득한 숨을 삼키던 그때, 회의장으로 시오스 후작이 들어섰다.
드로이트 전 공작과의 일로 저택에서 자숙을 한 이후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몇몇 귀족들이 시오스 후작을 보며 대놓고 탐탁지 않음을 드러냈다.
드로이트 전 공작의 장부로, 시오스 후작을 둘러싼 말이 많은 탓이었다.
시오스 후작은 그런 귀족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잘 보이려 아부를 하던 놈들 주제에.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눈빛을 한 귀족들을 똑똑히 기억해둔 후작은 자신의 자리로 가다 멈칫했다.
제레미를 보았기 때문에.
드로이트 전 공작의 장부를 공개한 게 제레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후작은 제레미를 보며 녹안을 살벌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제레미는 시오스 후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입꼬리마저 올라가자 시오스 후작의 속이 뒤틀리며 분노가 치솟았다.
가문의 수치나 다름없는 돌연변이 주제에 감히 나를 농락하려 들어.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당장 저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곳은
황실의 회의장이었다.
긴 숨을 내쉬며 분노를 다스린 후작은 제레미를 싸늘히 무시하며 자신의 자리에 섰다.
그렇게 회의장에 중앙 귀족들이 모두 모이고 이윽고 시종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황제가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모든 귀족이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긴 융단을 빠르게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간 레이몬드는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라.”
귀족들이 굽혔던 무릎을 편 뒤에, 레이몬드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레이몬드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백금발에서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
제레미 드로이트.
오늘 회의에 참석하라 공문을 보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제레미를 볼 때마다 가라앉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짙어진 눈빛으로 제레미를 내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굳은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곧 회의장에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기회의 날짜가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 날짜를 앞당긴 것은 근래에 제국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레이몬드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많은 일들 중 가장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던 드로이트 프로이스의 황족 암살 사건을
정리하려 한다.”
그의 낮은 음성이 회의장을 엄숙하게 울렸다.
말을 멈춘 레이몬드는 잠시 아무런 말을 않고 귀족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눈치를 보던 귀족 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정리를 하신다는 것은 사건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일까요?”
레이몬드는 고개를 든 서부 국경 변경백, 스멜타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뜻이 맞다.”
“……하오나 폐하. 암살 사건에 대한 말들이 많사옵니다. 이대로 사건을 마무리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사료 되옵니다.”
스멜타 백작은 말을 하며 시오스 후작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스멜타 백작의 말이 맞다는 듯 귀족들이 하나둘 맞장구를 쳤다.
“스멜타 백작님의 의견에 동의를 표합니다. 폐하.”
주청을 올리는 귀족들을 묘한 눈빛으로 보던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껏 좁아진 미간이 후작의 불편한 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후작을 보며 비소를 머금은 레이몬드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 사건에 대하여 말들이 나온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죄인이 생전 작성한 장부 때문에 시오스
후작과 죄인을 엮는 유언비어가 제국에 퍼지고 있다지.”
사안의 심각성과 달리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나도는 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상석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시오스 후작이 입을 열기 직전 레이몬드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난 시오스 후작이 죄인과 연관 있다 생각지 않는다. 황족 시해는 삼대까지 멸할 수 있는 중죄이지.
그런데 일국의 재상이자 1 황자의 외척인 그가 황실을 향해 칼을 겨누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레이몬드는 비틀린 미소를 머금으며 시오스 후작을 내려보았다.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시오스 후작을 옹호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시오스 후작은 억측에 분통이 터진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저는 절대 이번 암살 사건에 연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도 하나 없지 않습니까?”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하여도 이때까지 죄인에게 꾸준히 거금을 보냈다는 장부가 나왔지 않습니까!”
누군가 시오스 후작에게 반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시오스 후작은 그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황제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제가 감히 어떻게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 저는 너무도 억울할
따름입니다.”
시오스 후작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이 역겨워 실소가 터질 뻔할 때 파르앙 후작이 묵직한 목 소리로 그를 불렀다.
“폐하.”
“말하시오. 파르앙 후작.”
“현 상황에 대한 저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시오스 후작에게 암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해도 장부가 공개된 지금으로선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사료됩니다.”
파르앙 후작의 말에 레이몬드는 고민을 하듯 손끝으로 금빛 손잡이를 두드렸다.
“……하여?”
“귀족들의 의심을 잠재우고 시오스 후작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재조사를 하심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파르앙 후작이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순간 시오스 후작이 크게 소리쳤다.
“파르앙 후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재조사라니! 전 결단코 이번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조사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은 죄가 없으시니 조사를 한다 해도 나올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조사 결과가 깨끗하다면 더 이상
귀족들도 후작 각하에 대해 의심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떳떳하시다면 조사를 받지 못할 이유도 없다
생각됩니다만…….”
파르앙 후작은 가늘어진 눈빛으로 시오스 후작을 훑었다.
마치 그의 속을 샅샅이 훑는 듯한 시선에 시오스 후작이 주춤했지만 다시 소리를 쳤다.
“조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겐 모욕입니다! 허니 전 절대…….”
“시오스 후작 그만하게.”
레이몬드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 폐하…….”
“파르앙 후작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대가 정말 결백하다면 조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폐하, 전!”
“시오스 후작, 난 그대를 믿어. 허나 지금 이대로 사건을 덮는다면 오히려 그대의 명예가 실추될
분위기군.”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보라는 듯 좌중을 훑었다.
파르앙 후작의 침착한 말 때문인지 회의장의 귀족들이 시오스 후작을 바라보는 눈빛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의심으로 점철된 귀족들의 선명한 눈빛.
떠도는 말들을 우습게 여겼던 후작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그에게서 돌아선 귀족들이 이미 많은 듯했다.
시오스 후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를 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난 일국의 재상이자 1 황자의 외척인 그대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둘 순 없다 생각하는데……
시오스 후작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회의장에 후작의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비릿한 피가 터진 입술을 핥은 후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사를 받겠습니다. 폐하.”

* * *

나른해지는 정오.
황궁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황후궁전의 손님 방에선 한참 칼라일의 예절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라일을 가르치는 선생은 수도의 유명한 예절 선생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을 초빙할 수도 있었지만 큰 단점이 있었다.
유명한 선생인 만큼 사교계의 인맥이 넓다는 것.
칼라일에 대한 말들을 여기저기 옮길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부탁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
선생을 초빙했다.
“걱정과 달리 실력이 좋은 분인 듯합니다.”
헬란이 칼라일을 가르치고 있는 뷔스테인 남작 부인을 힐긋 보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게.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뷔스테인 남작 부인은 젊은 시절 황궁에서 시녀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르쳐본 경력이 없다 하여 조금 걱정했었는데 차분히 칼라일을 잘 가르치는 것을 보니
걱정을 덜어도 될 듯 했다.
수업을 받고 있는 칼라일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던 난 다가오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렴.”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난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응접실로 향했다.

* * *

“황후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세요. 아버지.”
“네.”
아버지가 자리에 앉은 뒤 헬란이 응접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난 곧장 아버지에게 물었다.
“시오스 후작의 재조사가 결정되었나요?”

130 화
“네. 오늘 회의에서 재조사가 결정되었습니다. 귀족들이 이미 시오스 후작에 대한 의심이 깊어진
상황이라 후작도 어쩔 도리가 없었죠. 그리고 폐하께서 상황을 잘 몰아가셨습니다.”
“다행이에요.”
“오늘 바로 시오스 후작가로 파르앙 후작이 직접 뽑은 조사원들이 파견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조사원들이 증거를 잡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진 않았다.
이미 드로이트 전 공작은 죽은 데다 저택은 불타 없어졌으니까.
허니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정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리제나 그녀를 잡아야겠지.
이번만큼은 순순히 정당한 방법만으로 그녀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이었고 청렴결백한 아버지에게 더러운 일을 해달라 할 생각은 없었다.
속마음을 숨기며 찻잔을 들었다.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황자 저하께선 오늘부터 수업을 시작하셨겠군요.”
“네. 뷔르텐 남작 부인이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거 같아요. 칼라일을 차분히 잘 가르치고 있어요.”
“오, 연회에서 황자 저하의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저도 그래요.”
아버지와 난 칼라일을 떠올리며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난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열었다.
“칼라일과 관련해 아버지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무엇인가요?”
“이번에 폐하와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 않기로 한 건 아버지도 들어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지요. 결혼식을 치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빈민 구휼에 쓰신다고 하셨다지요.”
“네 그래서 제가 고민을 해봤는데 단순한 빈민 구휼이 아니라 칼라일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황자 저하를 위한 일이요?”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을 하셨다. 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2 황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을 세우려 해요.”
칼라일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바로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이었다.
제국민들에겐 이미 1 황자, 에드먼드가 있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랑을 받은 1 황자를 밀어내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어중간한 봉사나 기부 같은 것은 이미 1 황자가 수도 없이 했던 일들이었다.
허니 더 크고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제국에 없었던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 같은.
놀란 듯 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민… 학술원…… 말씀이십니까?”
“네. 제국에 평민들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술원이 없었잖아요. 2 황자의 이름을 내건
학술원이 생긴다면 평민들에게 칼라일의 지지도가 올라갈 거에요.”
제국에 아카데미가 있긴 하지만 그곳은 평민들이 들어가기엔 학비가 너무 비싼 곳이었다.
배움을 갈망하는 평민들은 참고 넘쳤으니 체계적인 학술원을 세운다면 평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민을 하듯 미간을 좁히셨다.
“흠…… 과거 한 황제께서 평민 학술원을 만드시려다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학술원을 만들지
못했었지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쉬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요.”
과거 평민 학술원을 만들려 했던 황제가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에그리타 제국 8 대 황제였던 호세이스 황제.
그는 평민들의 교육을 깊이 생각한 어진 황제였지만 힘은 없었다.
황후의 소생인 적통 황자였지만 황태자 시절 외척 가문이 몰락했고 황제 즉위 후에도 당시 재상이었던
드로이트 공작에게 의지하며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허니 당연히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이몬드는 귀족들을 누를 수 있는 권력을 잡고 있었고 제국의 주요 가문들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폐하와 아버지께서 힘써주시면 큰 무리 없이 학술원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지금 시오스 후작이
흔들려 중앙 귀족들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잖아요. 지금이라면 자신들끼리 의견을 모으는 것도 힘들
거에요.”
시오스 후작에게 붙어야 할지 크로프트 공작에게 붙어야 할지 한참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파르앙 후작과 먼저 학술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폐하껜 제가 말씀드릴게요.”
“평민 학술원…… 어려운 길이긴 하겠지만 황자 저하께도 평민들에게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거
같군요.”
그냥 좋은 일도 아닌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제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1 황자의 자리를 밀어냄과 동시에 평민들에게 교육기회를 주게 되니까.
훗날 칼라일이 황제가 되었을 때 학술원의 인재들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칼라일을 보고 가지 않으시고요?”
“오늘 파르앙 후작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하여 이만 일어나야 할 듯합니다. 모레쯤 칼라일을 보러
들리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나 역시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하려 했기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지만 배웅해 드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저녁 약속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파르앙 후작이었으니까.
황후궁을 떠나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를 배웅한 난 수업이 끝났을 칼라일에게로 향했다.

* * *

회의가 끝나고 레이몬드는 제레미를 집무실로 불렀다.


혹시나 드로이트 공작가에서 시오스 후작에 관한 어떠한 장부가 발견된 게 있을까 하여.
“송구하오나 아직 다른 장부나 서류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의 물음에 고개를 숙였다.
전 공작이 옮긴 금고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집사를 회유하고 협박까지 해보았지만 집사는 모른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모른다 말하는 집사의 눈빛에 거짓이 없어 보였다.
하여 아직까지 그 금고를 찾진 못했다. 하지만 공작가 저택 어딘가에 있는 것은 분명하니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렇군.”
레이몬드가 아쉬운 숨을 내쉰 그때 제레미는 가지고 온 명패를 꺼냈다.
“대신 죄인을 죽인 암살자와 관련된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제레미는 원목 책상 위로 나무패를 올려놓았다.
“이건…… 명패인데.”
오래된 나무패에 페일린 르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과거의 명패였다.
명패를 살피는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히며 제레미를 보았다.
“이것이 증거라고?”
“공작의 침실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암살이 있기 전에는 없었던 물건입니다. 공작가와도 전혀 연관 없는
이름에 조사를 좀 해 보니 그 명패의 나무는 에그리타 제국에선 나지 않는 미노아 나무라 하였습니다.”
“미노아 나무라면…….”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좁아졌다.
주로 온도가 낮은 서쪽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그리고 서쪽 대륙엔 두 개의 왕국이 있었다.
서왕국과 소니아 왕국.
“나무 명패가 활발히 만들어지던 시절 미노아 나무로 명패를 주로 만든 곳은 소니아 왕국이 아니라
서왕국이라 합니다. 거기다 나무 명패를 만들었던 장인에게 가져가 보니 명패에 이름을 새긴 방식 역시
서왕국의 것이라 하였습니다.”
제레미가 설명을 덧붙였다.
“서왕국…….”
둘 중 하나의 왕국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서왕국, 그리고 리제나.
서왕국을 떠올리자마자 자연스럽게 리제나 시오스 그녀가 떠올랐다.
리제나는 서왕국에서 6 년을 보냈다.
그리고 드로이트 프로이스를 죽였다고 의심되는 가문도 바로 시오스 후작가였다.
‘시오스 리제나 그녀가 벌인 일입니다.’
엘리야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리제나가 엘리야와 칼라일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도 리제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여 과거 조사를 명했고, 그녀가 서왕국에서 에드먼드를 낳아 기른 과정이 조금 수상하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 뒤 엘리야와의 이혼으로 모든 신경이 엘리야를 향해 더 이상의 조사를 그만두었었다.
리제나는 서왕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엘리야와 칼라일을 죽이려 하고 그것을 드로이트 프로이스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도 정말 너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게 아닐까.
이젠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리제나.”
레이몬드의 서늘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대체 어디까지 악해진 걸까.
아님 처음부터 이게 진짜 모습이었던 걸까.
과거의 그녀가 잠시 떠올랐지만 이윽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젠 다 부질없는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리제나는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고 그는 적을 베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역시 폐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명패가 서왕국과 관련이 있고 그 배후엔 시오스 리제나가
있을 것이라고요.”
제레미는 상념에 빠진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흐려졌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고 레이몬드는 나무 패를 꽉 그러쥐었다.
“이것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아직 공작가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제레미보단 카르텔을 시켜 명패의 주인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 공작가에서 다른 장부를 찾게 되면 바로 황궁으로 알려라.”
“그리하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명패를 책상 한편에 놓고 제레미에게 이만 나가보라 말하려 했다.
제레미가 먼저 입술을 열지 않았다면.
“폐하. 황후 폐하를 뵙고 가도 되겠습니까?”
“……뭐라?”
레이몬드는 순간 굳어지는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엘리야와 제레미.
두 사람이 엮이는 문제는 언제나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으니까.
제레미는 서릿발 같은 레이몬드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사건 이후 황후 폐하와 황자 저하를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무사하시다는 것은 알지만…… 직접 뵙고
안부를 여쭙고 싶습니다. 허나 제가 아무런 말씀을 드리지 않고 황후 폐하를 찾아뵈면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실 듯해…… 허락을 구하려 합니다.”
황후를 찾아가는 일을 굳이 허락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황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엘리야를 바라보고 있는지.
엘리야는 이제 황후였다.
그녀와 이루어지는 것을 꿈꾼 것은 아니지만, 이젠 정말 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레미는 혹여라도 자신 때문에 그녀가 황제 앞에서 곤란해지지 않길 바랐다.
하여 이렇게 그가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와 마주한 시선 속에서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순종적인 태도였지만 이상하게 레이몬드는 그에게 진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엘리야와 칼라일 곁엔 얼씬도 하지 말라 경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그는 허울뿐인 남편일 뿐이었으니까.
엘리야와 그는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였다.
레이몬드는 짙은 패배감을 숨기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녀가도 된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제레미는 이윽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떠나고 깊은숨을 들이쉰 레이몬드는 쓰라린 속을 진정시켰다.
“……하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시 뜬 그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제레미와 엘리야를 떨치며 정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급한 서류들을 처리하던 그는 창가에서 늘어지는 그림자에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아직 함께 있을까.”
엘리야와 제레미,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을 칼라일까지 떠올리자 속이 쓰라림을 넘어 뒤틀렸다.
질투에 눈이 멀었다 할지라도 그는 지금 엘리야를 보아야 했다.
더는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레이몬드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종장에게 명했다.
“황후궁으로 갈 것이다.”

131 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레미가 황후궁을 찾았었다.


어딘가 자유롭고 나른한 특유의 차림새가 아닌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완벽한 고위 귀족의 모습으로.
남부럽지 않은 멀끔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가문에서 벗어나려 떠돌았으니까.
드로이트 전 공작의 비참한 죽음으로 물려받은 공작위는 그에게 족쇄와 다름없을 것이었다.
하여 난 그에게 어설픈 위로 대신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레미는 늘 그랬던 것과 같이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고 곧 달려드는 칼라일과 놀아 주느라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지고 제레미는 칼라일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자 전하, 아프지 마시고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제레미, 어디 가? 우리 또 오래 못 보는 거야?”
칼라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룬트 왕국에서 살던 시절, 제레미가 멀리 용병 일을 갈 때면 하곤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뇨. 어디 가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 자주 놀러 오면 되잖아.”
칼라일이 뭐가 문제냐는 듯 말간 얼굴로 말하자 제레미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제레미 아저씨에서 공작으로, 칼라일에서 황자 전하로.
갑자기 바뀐 신분은 어떻게 이해한 듯했지만 제레미와 예전처럼 편하게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칼라일, 제레미는 이제 공작님이 되어서 할 일이 아주 많아. 그래서 예전만큼 칼라일을 자주 보러 오지
못할 거야.”
“아……. 그렇구나. 제레미도 아프지 마. 내가 다음에 공작가로 놀러 갈게!”
아쉬운 한숨을 내쉬던 칼라일은 곧 제레미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황자 전하.”
부드러운 미소를 화답한 제레미가 낮추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황후 폐하,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불러 주십시오.”
“그대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난 옅은 미소를 그리며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칼라일, 이만 들어갈까?”
제레미가 가는 것이 많이 아쉬운지 떠나는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칼라일의 손을 꼭 잡고 말한 그때,
마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레미가 떠난 방향과는 반대 방향 쪽이었다. 황제의 궁전이 있는 곳.
다소 빠른 속도로 달려온 마차는 이윽고 우리의 앞에서 멈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니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당연히 레이몬드였기에 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옆에 선 칼라일이 어색한 몸짓으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그런 칼라일의 모습을 본 레이몬드의 작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리고 곧 그의 손이 보였다.
“일어나시오, 황후.”
이곳엔 보는 눈이 많았기에 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예절 수업을 시작했나 보군.”
“네. 오늘부터 시작했습니다.”
레이몬드는 시선을 낮추어 칼라일을 보았다. 화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칼라일은 레이몬드의 시선에 움찔했지만 이전처럼 내 뒤로 숨거나 피하진 않았다.
“칼라일, 선생님은 마음에 드느냐?”
그는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물었다.
“네……. 좋아요.”
하지만 난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레이몬드와 상의 없이 결정한 예절 선생이었다. 황자의 선생으론 사실 부족함이 많았기에 혹시나 그가
선생을 바꾸라고 할까 난 화제를 돌렸다.
“폐하, 기별도 없이 어쩐 일로 황후궁에 걸음을 하셨나요?”
레이몬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왔다.
그는 나를 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꼭 누군가를 찾는 듯.
이윽고 내게 말했다.
“저녁 식사는 이미 하였을 테니, 나와 좀 걷겠나?”
그의 제안에 난 잠시 망설였다.
황제가 황후에게 산책을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우리 사이에 불편한
일이었다.
난 그에게 황후인 척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나 또한 그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네. 그러지요. 폐하.”

* * *

레이몬드를 불편해하는 칼라일은 시녀와 함께 궁으로 들여보낸 뒤, 난 레이몬드와 함께 황후궁의 화원을


걷고 있었다.
시녀와 시종들은 멀찍이 우리를 따르고 그와 함께 걷는 길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난 학술원에 관한 이야기를 언제 꺼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대로는 불편함만 길어질 뿐이야.
아무 말을 않는 그에게 먼저 말을 꺼내려던 그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다시 너와 함께 이곳을 걷고 있으니 꼭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군.”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난 걸음을 멈추었다.
“…….”
여기까지 그와 함께 걸어왔음에도 과거의 추억 따위를 떠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감한 나와 달리 그는 그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나면 항상 이곳을 함께 걸었었는데, 기억나?”
그의 시선이 이내 내게서 멈추었다.
그가 무슨 시도를 하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변한 것이 없는 황후궁도, 우리가 자주 걸었던 이 화원도.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건 우리를 둘러싼 풍경일 뿐 난 그때와 달랐다.
“기억납니다만,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온기 없는 목소리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닌 듯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지.”
피식, 싱거운 웃음 속에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난 외면했다.
그와 굳이 화원을 걷겠다 한 것은 추억을 되새기자고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난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에게 하려던 말을 꺼냈다.
“폐하, 칼라일과 관련된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칼라일과 관련된 일?”
레이몬드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제국에 2 황자의 이름으로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
아버지가 그랬듯 학술원에 대해 처음 들은 레이몬드의 표정에도 난감함이 스쳤다.
가볍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칼라일은 평민들에게 낯선 존재입니다. 1 황자가 그간 다진 입지가 탄탄하니까요.
허니 제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 다 생각했습니다.”
칼라일의 이름으로 학술원을 세우고, 능력 있는 평민들을 교육시킨다면 장기적으로 칼라일의 지지 세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흠…….”
“폐하께서…… 저와 생각이 같으시다면, 앞으로 칼라일이 걸어갈 길을 위해서라도 학술원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난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황태자궁인 레굴루스 궁전을 칼라일에게 하사하긴 했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칼라일을 황태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공표하진 않았다.
시오스 후작이란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다 해도 황태자는 다른 문제였다.
어쨌든 레이몬드는 이때까지 1 황자를 황태자로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아직 그 마음이 남아 있을 수도.
레이몬드는 마지막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듯 잠시 말을 않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깊었다.
난 길어지는 침묵에 먼저 말을 꺼냈다.
“……혹 제가 착각을 한 것이라면 송구합니다.”
차기 황권에 대한 일은 아주 작은 언사라도 위험해질 수 있기에 난 한 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레이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칼라일은 황후의 적자이니까. 시오스 후작의 피를 황좌에 앉힐 순 없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네?”
“칼라일이 황태자가 되면 네가 황궁을 떠나는 건 그만큼 더 어려워질 거라 생각하는데.”
“칼라일이 황태자가 됐을 때는 이미 시오스 후작이 처리되고 탄탄한 세력이 갖춰진 상태일 겁니다. 허니
제가 떠난다 해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몬드의 눈빛이 짙어졌다.
“내가 오늘 왜 기별도 없이 널 찾아왔는지 아느냐.”
“……갑자기 그게 무슨.”
“드로이트 공작이 널 보러 간다 한 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 못난 놈이라 욕해도 할 말 없어.
하지만 엘리야, 난 널 도저히 놓아줄 수가 없다.”
“……폐하.”
“내가 너에게 빌고 또 빌어도 안 될까. 정말 꼭 나를 떠나야 하는 것이냐.”
레이몬드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전 이미 폐하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폐하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고요.”
“…….”
“폐하께선 늘 이러십니다. 과거도 현재도 언제나 폐하의 감정이 더 중요하시지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
“정말 아닌가요? 제겐 그저 내가 널 사랑하니 제 감정이 어떻든 기회를 달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만.”
과거도 지금도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그에게 진심으로 화가 나 싸늘히 일갈했다.
검은 눈동자가 상처로 얼룩져 가는 것을 보며 난 똑바로 말했다.
“엘리야…….”
“허니 다시는 이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또 한 번 제게 폐하의 감정을 강요하신다면 그때가 언제라도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겠습니다.”
“…….”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굳은 듯 서 있는 그에게 인사를 올리지도 않고 난 몸을 돌렸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선 그가 느껴졌지만 난 뒤돌아보지 않고 홀로 화원을 걸어 나갔다.

* * *

엘리야가 떠난 뒤에도 레이몬드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어스름한 하늘에 밤이 찾아오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지고 나서야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
레이몬드는 스스로를 향해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i>‘과거도 현재도 폐하의 감정이 더 중요하시지요.’</i>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정말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곳을 함께 걷고 있다는 것에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혼자 행복해하고 있었으니까.
멍청하게도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감정보다 내 감정을 중요시한 것이 맞을지도.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다가가고 용서를 빌면 끝내는 나를 받아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그리고 지금도 어리석은 기대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결에 씁쓸한 한숨을 내쉰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엘리야가 좋아하는 별이 늘 떠 있었으니까.
“폐하……. 이만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황후가 인사도 없이 매몰차게 황제를 두고 떠나는 것을 궁인들이 전부 보았었다.
그리고 황제는 황후가 떠난 뒤에도 자리를 뜰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 황후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밤이 깊어지고 언제까지 황제를 이리 둘 순 없기에 망설이던 시종장이 말한 것이었다.
“돌아가지.”
레이몬드는 쓸쓸한 발걸음으로 화원을 떠났다.

132 화

이틀 뒤.
황후궁으로 피닉스 상단에서 몇몇 서류들이 도착했다.
봉투를 열어 서류들의 내용을 확인한 난 곧장 파르앙 후작을 만나기 위해 행정궁을 찾았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요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후작은 집무실을 둘러보며 허허,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집무실 책상 양쪽에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재상직을 대리하는 데다 요새 많은 일들이 터져 일이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의 과해진 업무량에 나도 한몫했기에 머쓱한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대의 노고에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네.”
“10 년 넘게 놀았으니 그만큼 일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일이니 황후 폐하께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후작은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내가 소파에 앉자 그는 차를 들겠냐며 손을 들어 시종을 부르려 했다.
그에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흔든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기별도 없이 와서 놀랐겠지만 시오스 후작에 대한 조사가 어찌 될지 신경이 쓰여 이리 찾아오게 되었네.
조사단들은 다 복귀하였나?”
“네. 시오스 후작 저택의 재정 장부와 각종 문서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암살 사건에 대한 증거라 할 만한 것들이 있던가?”
“……아니요. 없었습니다. 하여 다른 쪽으로 조사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쉬운 말이었지만 크게 상심하진 않았다.
후작가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드로이트 프로이스, 그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처음부터 계획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후작가에 중요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난 고개를 숙이는 후작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대가 송구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시오스 후작이 그만큼 철저하다는 뜻이겠지. 단지 조사 방향을
틀려면 시간을 끌기 위한 명목이 필요할 걸세.”
“……네. 알고 있습니다.”
시오스 후작은 제 저택에서 나온 게 없으니 자신의 결백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이미 조사단이 시오스 후작가의 저택을 쥐잡듯이 뒤졌다는 기사가 조간신문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귀족들 역시 시오스 후작의 주장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를 파르앙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이겠지.
피곤함에 젖은 파르앙 후작의 안색이 어두워지던 때 난 집무실에 시립해 있던 헬란에게 눈짓했다.
헬란은 내가 챙긴 봉투들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파르앙 후작의 눈빛이 의아함을 물들었다.
“이것들이 무엇인가요? 황후 폐하.”
“시오스 후작의 비리들일세.”
“……네?”
“큰 죄들은 아니고 사소한 탈세와 영지에서 벌인 불법적인 노예 거래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지.”
“이걸 어떻게……. 설마, 조사가 들어가기 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놀란 표정의 파르앙 후작에게 나는 차분히 말했다.
“아버지의 재판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었지. 하여 이번엔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네.”
귀족 회의가 열리기 전 루몬트에게 준비하라 이른 것이었다.
이미 시오스 후작가의 뒤를 캐고 있었기에 이런 자잘한 자료들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태까지 굳이 이걸 쓰지 않은 것은 이 자료들만으로는 시오스 후작가에 내려질 처벌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라면 시간을 버는 덴 충분하겠지?”
처벌이 약할지라 하더라도 죄는 죄였으니 시오스 후작이 억울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들에 시오스 후작이 조사를 받는 동안 난 따로 움직일 것이다.
이번만큼은 시오스 후작가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네, 이것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파르앙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절 수업이 끝난 칼라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쁜 사람 시간을 계속 뺏을 순 없으니 난 이만 일어나보겠네. 그럼 조금만 더 힘내주게.”
“알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황후 폐하.”
* * *

엘리야가 파르앙 후작을 만나고 있던 그 시각.


예절 수업이 끝난 칼라일은 선생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황자 전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부인.”
다른 것보다도 황궁과 귀족 예법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했기에 수업은 매일 진행됐고, 그에 따라
칼라일도 어느새 겉으로나마는 흠이 잡히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뷔르텐 남작 부인은 처음에 칼라일이 평민들처럼 자랐다는 말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자유롭게 자란 아이가 딱딱한 귀족 예법을 금방 익히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칼라일은 뷔르텐 남작 부인의 걱정과 달리 배움의 속도가 남달랐다.
하루하루 남다르게 나아지는 칼라일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그린 뷔르텐 남작 부인은 인사를 하곤 궁을
떠났다.
남작 부인이 떠나고 칼라일은 자신의 전속 시녀가 된 페일린에게 몸을 돌렸다.
“페일린, 엄…… 아니. 어머니는 어디 가신 거야?”
“잠시 일이 있으셔서 행정궁에 가셨답니다. 황자 하께서 수업이 끝나시면 퍼즐을 가져다 주라고 하셨어요.
크로프트 공작가에서 아주 큰 퍼즐을 보내주셨거든요.”
하늘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페일린은 칼라일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음…….”
칼라일은 퍼즐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뭔가 방에 있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페일린 오늘은 나 퍼즐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어.”
“다른 거요?”
“응. 우리 황후궁 뒤에 있는 분수대 화원에 놀러 가자.”
황후궁 뒤쪽으로 분수대가 있는 화원이 있었다. 이리저리 화려한 꽃들로 모양을 내놓은 궁전의 화원과
달리 들판 같은 화원은 꼭 룬트 왕국에서 엄마와 자주 갔던 언덕 같아서 칼라일은 그곳을 보자마자 마음을
뺏겼다.
“아, 음……. 전하, 나중에 황후 폐하께서 오시면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페일린은 난감한 기색을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분수대 화원은 황후궁과 멀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황후궁 내부에 있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호위 기사단이 배정되지도 않았고 황후 폐하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졌다.
되도록 황후궁을 벗어나지 않는데 좋은데.
“페일린이랑 지금 가고 싶어! 여기만 있으려니 너무 심심해서 그래.”
칼라일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꼭 강아지의 귀가 쳐지는 거 같은 모습에 페일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황자 전하를 잘 보필하라 하셨지, 황후궁을 벗어나면 안 된다 하신 적은 없으시니까…….
게다가 황궁 안에서 누가 감히 황자에게 해꼬지를 할 수 있을까.
“그럼 조금만 놀다 돌아오시는 거예요?”
“응! 그럴게!”
칼라일은 페일린에게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그 반짝이는 눈망울 결국 넘어간 페일린은 칼라일의 손을 잡고 분수대가 있는 화원으로 향했다.
페일린의 손을 잡고 화원에 도착한 칼라일은 예쁜 노란 들꽃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
칼라일의 외침에 놀란 에드먼드가 고개를 돌렸고 페일린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황자 전하, 뛰시면 안 됩…….”
하지만 페일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놓은 칼라일은 에드먼드에게로 뛰어갔다.
한달음에 에드먼드의 앞에 선 칼라일은 당황으로 굳은 에드먼드에게 밝은 인사를 건넸다.
“형님, 보고 싶었어요!”
에드먼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칼라일을 내려다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갑자기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거기다 보고 싶었다니.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에드먼드에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여기기엔 그를 보는 칼라일의 빛나는 눈동자가 진심이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에드먼드가 굳어있던 그때, 서둘러 칼라일의 곁으로 다가온 페일린이 1 황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별이신 1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페일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에드먼드는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칼라일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칼라일, 잘 지냈니?”
“네! 전 잘 지냈어요! 형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칼라일이 해맑은 물음에 에드먼드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겨우 이틀 남짓이긴 했지만, 그동안 에드먼드는 잘 지내지 못했다.
칼라일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 바로 신문 1 면엔 황제 폐하의 조사단이 시오스 후작가를 덮쳤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무려 황족 시해의 혐의로 말이다.
죽은 드로이트 전 공작과 시오스 후작가가 공모를 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에드먼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좋은 모습만을 보여준 할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명령으로 시녀들이 이때까지 조간신문을 일부러 숨겼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동안 계속 말이 나왔음에도 에드먼드가 몰랐던 것은 시녀들이 시오스 후작가의 기사들이 없는 신문만을
그에게 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조사가 들어가게 되고 나선 더 이상 시오스 후작가를 거론하지 않는 신문이 없었기에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으셨다면 왜 자신에게 숨겼던 것일까.
에드먼드는 그동안의 신문을 모두 가져오라 명했고, 할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움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 오늘은 수업까지 취소하고 산책을 나온 것이다.
“형님?”
얼굴이 굳어가는 에드먼드를 칼라일이 한 번 더 불렀다.
“어디 아프신가요?”
순수한 칼라일의 검은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정말 널 죽이려 하셨던 걸까.
순진한 아이를 보며 에드먼드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아냐. 괜찮아.”
“어디 아프신 건가 걱정했어요! 형님, 형님 안 바쁘시면 저랑 같이 놀아요!”
칼라일이 에드먼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에드먼드는 손을 움찔했다.
그것을 본 페일린이 흡, 당혹스러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주변을 거니는 궁인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1 황자와 2 황자의 사이를 주시하는 눈빛이었다.
익숙하지만 언제나 불쾌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에드먼드는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작은 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뿌리칠 순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2 황자를 죽이려 했다 의심받는 상황에 그까지 칼라일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더욱
말이 많아질 것이다.
에드먼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칼라일에게 말했다.
“칼라일, 내 궁으로 가서 함께 놀지 않을래?”
“좋아요!”

* * *

황궁으로 시오스 후작가의 마차가 들어서자 후작가의 마차를 본 궁인들은 눈빛을 나누며 수군거렸다.
황족 시해 사건과 관련해 시오스 후작가에 조사원들이 파견된 것이 바로 어제였기 때문이었다.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시오스 후작.
그 연관성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당당히 황궁으로 시오스 가문의 마차가 들어서니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수군거림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후작가의 마차는 빠르게 황궁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1 황자의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133 화

마차에서 내린 리제나가 익숙하게 궁전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기별 없이 방문했지만 리제나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모라고는 하나 신분은 후작 영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가 어느 정도로 황궁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비로 들어서자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져 리제나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피하는 궁인들.
황궁의 안팎이 조사를 받는 시오스 후작가의 이야기로 떠들썩하긴 했지만 1 황자의 궁인들은 전부 리제나가
손수 추린 사람들이었다.
시오스 후작가의 가신들이나 다름 없는 자들이었으니 위태로운 상황이라 하여 등 돌릴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시녀장이 그녀의 앞으로 섰다.
“시오스 영애.”
시녀장이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레베카. 1 황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그것이……. 지금 궁에 2 황자님이 와 계십니다.”
“……뭐?”
방금 뭘 들은 것일까.
리제나는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2 황자 저하께서…….”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난감한 얼굴로 말하던 레베카는 리제나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지금 이 상황에 다른 이도 아닌 엘리야의 자식이 이곳에 와 있다니.
엘리야와 칼라일만 생각하면 내장이 다 뒤틀리는 거 같았다.
레이몬드, 그리고 황후의 자리.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엘리야가 가져갔다.
그런데 저로도 모잘라 에드먼드의 것을 그녀의 아들에게 빼앗길 판이다.
어떻게 그녀의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전하의…… 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계십니다.”
리제 나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에드먼드의 방으로 향했다.
벌컥.
시녀의 손을 빌리지 않고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간 리제나는 방 안의 풍경에 실소를 머금었다.
보란 듯이 에드먼드와 마주 앉아 쿠키를 먹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듯 어린아이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리제나가 칼라일을 직접 마주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칼라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
에드먼드와 똑같은 색이었지만 묘하게 레이몬드의 얼굴이 칼라일의 얼굴에 덧씌워 보였다.
레이몬드의 자식이란 것을 증명하듯.
에드먼드와는 다른 그 차이에 리제나의 녹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널 깔끔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녀의 살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칼라일이 움찔하며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
에드먼드가 벌떡 일어나 리제나에게로 다가왔다.
리제나는 언제 서슬 퍼런 눈빛을 보였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황자. 잘 지내셨나요?”
“전…… 잘 지냈습니다.”
에드먼드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멈칫함을 놓치지 않았다.
시오스 후작가에 조사단이 파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잘 지냈을까.
후작가의 상황이 시끄러움에도 이리 황자궁을 찾은 것은 소식을 들은 에드먼드가 상처받았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볼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마세요. 나도 후작 각하께서도 결백하답니다.”
“……네.”
에드먼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헌데 손님이 와 계셨군요.”
리제나의 시선이 칼라일을 향하자 에드먼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황족 시해 미수 사건.
시오스 후작가가 의심받고 있는 죄목이 바로 칼라일을 죽이려 한 죄였으니까.
“……2 황자입니다. 어머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미소를 그린 리제나는 에드먼드를 지나쳐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두 번째 별이신 2 황자 저하를 뵙니다.”
칼라일은 리제나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엄마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시오.”
“황자 전하를 이리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전 시오스 후작가의 리제나 시오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칼라일은 예법 수업에서 배운 대로 차분히 답했다. 몸을 일으킨 리제나는 칼라일을 내려다보았다.
미소를 그리고 있는 입꼬리와 달리 차디찬 눈빛. 리제나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리제나가 무서워 어깨를 움츠렸다.
“우연히 칼라일을 만나게 되어 함께 차를 마시자 제가 초대하였어요.”
그런 기색을 알아챈 건지, 에드먼드가 다가와 리제나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민가에서 자라 황궁이 낯설고 적응하기 힘드실 텐데, 그런 동생을 살뜰히 챙기시니 참으로
대견합니다. 황자.”
리제나는 교묘하게 칼라일을 내리깎고 에드먼드를 칭찬하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칼라일은 무시한 채 에드먼드의 일상을 물었다.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칼라일을 힐끗거렸다.
아무래도 겁을 먹은 것처럼 아까와는 달리 불편한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아무래도 칼라일을 황후후 궁으로 돌려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에드먼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황자의 방문을 여는 것은 상당한 무례였다.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어머니기에 가능했었지만 시녀가 함부로 이런 짓을 벌였다간 벌을 받을 것이었다.
무례함에 호통을 치려 고개를 돌린 리제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 * *

“어머니!”
칼라일이 달려오는 모습에 난 두 팔을 벌리며 아이를 맞이했다.
“칼라일.”
칼라일을 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칼라일을 찾았었다.
그런 내게 들려온 소식은 칼라일이 1 황자의 궁으로 갔다는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에드먼드가 칼라일을 해코지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에드먼드와 둘이 있어 좋을 것도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난 곧장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황자 궁 앞에 세워진 시오스 후작가의 마차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해 예법조차 생각지 않고 방까지
뛰어 들어왔다.
칼라일의 곁에 리제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칼라일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선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고 먼저 시선을 낮춘 사람은 당연히 리제나였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리제나는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난 그런 그녀를 잠깐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를 본 순간 불길에 속에서 쓰러졌던 잔혹한 기억이 떠올랐다.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싶다.
아니, 더한 고통을. 눈앞에서 자식이 죽을까 전전긍긍, 억장이 무너져 내리던 심정을 똑같이 되갚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을 참기 위해 침묵이 길어지자 에드먼드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황후 폐하…….”
무거운 침묵 속에 나의 싸늘함을 느낀 듯했다.
칼라일도 느낀 것인지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저 머리채를 휘어잡고 죽여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거 같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칼라일의 앞에서 그런 추한 복수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일어나게, 시오스 영애.”
“어머니께서 저를 보러오셨다가 우연히 칼라일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리제나와 내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에드먼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리제나를 마주한 지금, 에드먼드에게 도저히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난 에드먼드를 보지 않으며 리제나에게 말했다.
“시오스 후작가가 조사를 받고 있는데 이리 황궁을 찾으시다니 영애는 자숙이란 말을 모르는 건가?”
형식상의 예의도 차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눈썹을 꿈틀하던 리제나는 이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오스 후작가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한 의례적인 조사입니다. 황후 폐하. 지은 죄가 없는데 자숙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미 된 마음으로써 작은 소란에 1 황자가 많이 놀랐을까 걱정되어 이리
황궁을 찾을 수밖에…….”
“1 황자 전하.”
“……네?”
단호한 나의 목소리에 호선을 그리던 리제나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난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1 황자가 아니고 1 황자 전하네. 그리고 내가 황후로 책봉된 지 수일이 흘렀네. 황후의 자리가 공석일
때야 모를까 지금 내 앞에서 어미란 말을 운운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모르는가.”
친모가 리제나라 한들 이젠 내가 황후였다. 그리고 리제나는 후궁의 작위도 없었다. 허니 황궁의 법도 상
에드먼드가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것은 나였다.
“…….”
리제나의 굳은 얼굴을 보며 난 싸늘히 말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하였는가.”
“……그럴 리가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황후 폐하.”
번뜩이는 녹안의 시선을 내리깐 리제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야. 에드먼드, 난 이만 가 볼테니 시오스 영애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무나.”
“……예, 황후 폐하.”
마지막까지 리제나에게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은 나는 칼라일의 손을 잡고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 * *

며칠 뒤, 해가 어스름하게 진 시각.
황궁을 나온 황실 마차가 수도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빠르게 말을 달린 마차는 피닉스 상단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황후 폐하, 내리시지요.”
마차에서 먼저 내린 헬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헬란의 손을 잡고 내리자 상단 앞에 마중을 나와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중 활화산의 용암만큼이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드!”
사고 이후 처음 보는 그였다.
무사한 모습이 너무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자 제드가 몸을 낮추었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어서 일어나.”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약하게 잡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리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후 폐하.”
깍듯이 예를 갖추는 모습이 어색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가족을 보는 듯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
“제드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저야 뭐 워낙 죽을 고비를 잘 넘기는 불사신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싱거운 농담에 피식 웃자 루몬트가 다가왔다.
“황후 폐하,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를 더 나누시지요.”
오늘 내가 황궁을 조용히 나온 것은 루몬트의 서신 때문이었다.
시오스 후작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는 서신.
미소를 짓던 난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며 답했다.
“그러지.”
난 제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상단 건물로 들어갔다.

134 화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피닉스 상단의 내부는 조용했다.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을 전부 퇴근시켰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1 층을 지나 마법진에 오른 난 최상층에 있는 지부장 집무실에 도착했다.
익숙한 루몬트의 집무실 풍경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황후 폐하.”
내가 상석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제드와 루몬트가 앉았다.
헬란은 루몬트 대신 차를 우려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내 뒤에 시립했다.
“황자 전하께선 잘 지내고 계십니까?”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제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칼라일이 무사하다는 말은 루몬트에게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을 많이 했겠지.
나 역시 이렇게 제드를 보기 전까지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잘 지내고 있어. 오늘 같이 오려고 했는데 예법 선생님의 수업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함께 오지 못했지.”
“예법 수업이라니, 황자 전하께서 잘 적응하고 계십니까?”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칼라일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제드가 웃음 지었다.
“나도 걱정했는데 칼라일이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어.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 선생님께 칭찬까지
받았다니까?”
“이제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적응을 잘 하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제드는 한결 걱정을 덜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칼라일이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 그전에 더욱 일을 완벽히
처리해야겠지.”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난 제드에게 물었다.
“증거를 찾았다고?”
제드 또한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네. 그것에 대해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안 좋은 소식부터 들을게.”
“암살 사건의 증거를 어떻게든 만들어보려 용병들의 뒤까지 파 보았지만, 도저히 시오스 후작 영애와 엮을
만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흐음…….”
“철저하게 드로이트 전 공작의 손을 빌려 움직였고 그 수상하다 했던 하녀 역시 사건이 준비되는 동안은
저택에서 붙어살다시피 했답니다.”
“……그 하녀가 저택을 나가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도 없단 얘기구나.”
“네. 아무래도 황족 시해 사건으로 시오스 후작가를 벌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드는 참담하다는 듯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증거를 조작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지푸라기는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을 제드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허니 그렇게 뒤졌음에도 결과가 이렇다는 것은 분하게도 리제나가 완벽히 일을 처리했다는 뜻이었다.
난 무릎 위의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칼라일을 죽이려 한 리제나의 죄를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기 때문에.
애초에 암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지 못할 수도 있다 예상한 일이었다.
내가 일어났을 때가 이미 모든 사건이 정리된 후였으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분통함이 들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시오스 후작가를 당장 멸문시킬 수는 없다 해도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칼라일의 앞길에 조금의 방해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하여 난 증거를 만들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다른 쪽으로 준비를 하라 일렀었다.
“그럼 좋은 소식은 다른 증거는 잡았다는 건가?”
내가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시오스 후작가는 계속해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크로프트 공작가가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최근엔 크로프트 공작이 다시금 외교부로 복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나의 황후 책봉과 칼라일의 황자 책봉.
레이몬드는 대놓고 칼라일에게 레굴루스 궁전까지 하사했다.
그렇다 보니 제국의 권력 흐름은 자연스럽게 시오스 후작가를 떠나 크로프트 공작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혼돈의 상황 속에서 시오스 후작가의 가신들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 6 년간 시오스 후작가의 재산은 재상직의 봉급만으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 있었다.
허니 그 뒤편엔 어마어마한 비리가 숨어있을 거란 것도 당연지사였다.
“비리를 폭로할 자는 물론,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증거가 손에 들어왔습니다.”
참담하던 방금까지와 달리 제드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것을 잡은 듯한 눈빛에 난 눈썹을 꿈틀했다.
“그게 뭐지.”
제드는 루몬트에게 눈길을 주자 루몬트는 내게 서류 몇 장과 서신 봉투 여러 개를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든 난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루몬트가 내민 자료들은 다름 아닌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사막 상단 사건에 관련된 증거 자료였기
때문에.
사막 상단의 초기 자본을 투자한 시오스 후작의 어음 내역과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신들.
그리고 시오스 후작 부인의 동생 바르텐 백작의 버려진 영지에 비밀스럽게 만들어놓은 금고의 위치까지
전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이건 시오스 후작에게 줄을 대던 자들이라 하여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었다.
아니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이건 죄를 입증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들이었다.
이걸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드로이트 프로이스, 그자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자는 이미 죽었으니…….
난 한 사람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드로이트 공작이 보내준 거야, 그렇지?”
“네. 맞습니다. 이틀 전, 드로이트 공작 각하께서 저희 상단을 방문해 직접 전해주신 증거
자료들입니다.”
“아…….”
설마 했던 짐작이 맞았다.
하지만 대체 왜 이것을 내게.
이 정도의 큰 증거를 발견했다면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 맞았다.
제레미는 루몬트와 제드처럼 나의 심복이 아니었으니까.

<i>‘드로이트 공작가는 여태까지 황제의 충신으로 살아왔었죠. 하지만 전 이번엔 황제 폐하가 아닌 황후


폐하의 사람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어차피 전 이단아니 이 정도의 객기는 부려도 되지 않겠습니까.’</i>

황후궁에서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웃으며 하는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제레미…….’
당신에게 진 빚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제나 이렇게 궁지에 몰린 나를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또 미안했다.
언젠간 꼭 이 빚을 갚겠다 다짐하며 난 다시 증거 자료를 내려보았다.
이것들이라면 시오스 후작 작위 박탈은 물론이고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산 송장으로 만들 순 있었다.
“내 폐하께 직접 이 모든 것을 전할 것이다.”

* * *

엘리야가 증거를 손에 쥐게 된 그때, 레이몬드는 황후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칼라일의 일로 엘리야에게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후궁이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레이몬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그 때문에 시종장이 의아하게 물었지만 레이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엘리야에게 싸늘히 거절당한 뒤 엘리야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다음 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미안해 서신과 함께 그녀가 좋아하는 선물을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었다.
물론 그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i>‘또 한번 제게 폐하의 감정을 강요하신다면 그때가 언제라도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겠습니다.’<
/i>

그 말에 한점의 거짓도 없는 것을 알기에 망설여졌다.


아니 두려웠다.
또 엘리야가 그의 곁을 떠날까 봐.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일 것이다.
돌아갈까.
오늘 그가 엘리야에게 전할 말은 칼라일의 호위기사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종장을 통해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이곳까지 온 것은 엘리야와 칼라일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게 낫겠군.”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지금 가는 것은 엘리야의 말대로 또 그의 감정만 생각하는 것이겠지.
“이만 돌아간다.”
레이몬드가 몸을 돌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일린, 나 저기서 놀래!”
고개를 돌리자 막 궁전을 나오는 칼라일과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황후궁 앞, 화원으로 달려나가던 칼라일은 레이몬드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섰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 레이몬드와 칼라일이 서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때, 시녀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시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칼라일과 마주친 지금 그냥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칼라일은 레이몬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훅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배움을 습득하는 속도가 남다른 것인지 며칠 만에 예를 차리는 몸짓이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고개를 들거라.”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와 칼라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
자신과 똑 닮은 흑안.
하지만 왜인지 칼라일은 레이몬드의 눈빛이 무서웠다.
저를 볼 때면 엄마와는 달리 어딘가 딱딱한 눈빛이었으니까.
무서워.
엄마가 곁에 없어서인지 더 레이몬드가 불편해졌다. 시선을 내리뜨리려던 그때, 온도 없던 레이몬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큰 손이 칼라일의 머리 위로 닿았다.
“예법을 배우는 속도가 아주 빠르구나. 힘들지는 않더냐.”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부드러워 칼라일은 시선을 내리지 않고 가만히 레이몬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방금까지 당장이라도 저를 피할 듯하던 아이의 분위기가 풀어지자 레이몬드의 기분이 묘해졌다.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 칼라일이 낯설고 손바닥에 닿는 비단실 같은 머리칼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칼라일을 쓰다듬던 레이몬드는 위화감을 느끼며 손을 거두었다.
“헌데 칼라일. 어머니는 어디 가고 혼자 나온 것이냐.”
“아, 어머니는 황궁 밖에 볼일을 보러 가셨어요. 그래서 오늘은 혼자 저녁을 먹었어요.”
“……황궁 밖?”
레이몬드의 눈썹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게 황후가 황궁 밖으로 나간다는 언질을 미리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는 시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황후가 공작가에 간 것이냐?”
“그것이…….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혔다.
시녀가 말하는 품새를 보아하니 공작가를 간 것은 아닌 듯했다.
하긴 공작가를 가는 것이라면 칼라일을 두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어딜 간 거지.
레이몬드는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때 칼라일과 시선이 마주쳤다.
미간을 좁힌 그의 얼굴이 무서운지 칼라일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 한 레이몬드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혼자 놀려고 나온 것이냐?”
“네……. 심심해서요.”
엄마도 없고 퍼즐도 계속 가지고 노니 재미가 없었다.
칼라일은 넓은 화원을 둘러보았다. 꽃을 꺾어서 꽃반지를 만들까.
엄마에게 선물해야겠다 생각하던 그때 낮은 음성이 칼라일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럼 내가 놀아줄까?”

135 화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레이몬드는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아이랑 노는 법도 모르는 그가 칼라일과 놀아주겠다니.
대체 어떻게?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되물었지만 이미 칼라일은 그 말은 들은 뒤였다.
깜박, 깜박.
칼라일은 잠깐 멍하니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칼라일도 그만큼이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투명하게 보이는 칼라일의 눈빛에 레이몬드는 더 머쓱해졌다.
큼, 목을 가다듬은 그는 칼라일에게 말하려 했다. 칼라일이 먼저 입술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뭐하고 놀아요……?”
칼라일은 조심스럽게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사실 엄마도 없는 지금 레이몬드와 이렇게 있는 게 너무
불편했지만 예법 선생님께 배웠다.
황제 폐하 앞에선 각별히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아버지라 하여도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이다.
마음 같아선 싫다 얘기하고 시녀의 등 뒤로 숨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예법에 어긋날 것이다.
하여 용기를 내서 물은 것이었다.
농담이었다고, 시녀와 함께 재밌게 놀라 말하려던 레이몬드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법은 몰랐다.
애초에 그가 어렸을 적에도 아버지와 함께 놀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에게 아버지란……. 폭력의 기억만을 남겨 준 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칼라일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칼라일에게 실망을 줄 순 없었다.
무얼 하고 놀아주어야 하지.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그때 그의 머릿속의 누군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i>‘아들이라 그런지 활동력이 장난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요샌 시간 날 때마다 목검으로 함께 검술


놀이를 해 주고 있지요.’</i>

언제 들었는지도, 누구에게도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말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아들과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칼라일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함께 기사 놀이를 하는 것은 어떠냐.”
“……기사 놀이요? 으음……. 좋아요.”
칼라일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에 레이몬드는 순간 멈칫했다.
칼라일이 그와 함께 놀겠다고 손을 잡아 오다니. 그가 먼저 말해놓고도 정말 좋다고 할 줄은 몰랐다.
분명히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왜인지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고 목이 간질거리는 묘한 기분이 든다.
숨을 크게 들이쉰 레이몬드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시종장, 연무장으로 어린아이가 쓸 만한 목검을 가져오거라.”
“네. 폐하.”
레이몬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러나 부드럽게 칼라일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황후궁에서 황제의 연무장까진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칼라일은 처음 보는 연무장에 눈을 크게 떴다.
너른 공터에 둥그런 줄이 쳐진 연습장이 있었고 한쪽엔 검집에 꽂힌 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와……!”
칼라일이 검들이 놓인 곳을 보며 탄성을 내뱉자 레이몬드는 칼라일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느냐?”
가끔 제레미의 진검을 구경하긴 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검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칼라일은 눈을 반짝이며 매끈하게 빠진 검을 가리켰다.
“저거! 저게 마음에 들어요!”
칼라일이 꼽은 검은 그중 가장 값비싼 검이었다. 황실 가보로 내려오는, 무려 드워프가 직접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에그리타 제국의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검이다.
레이몬드는 한눈에 가장 귀한 검을 알아보는 칼라일이 왠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는 눈이 뛰어나구나. 아주 좋은 검이란다.”
“……저도 나중에 크면 저런 검을 가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어차피 언젠간 너의 검이 될 것이다.”
“정말요?”
칼라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레이몬드는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저 검을 다루기 위해선 검술을 아주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목검으로 만족하자꾸나.”
레이몬드는 진검 옆에 놓인 목검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용 목검을 가지고 온 시종장이 레이몬드에게 건넸다.
“칼라일, 목검을 잡아본 적 있느냐?”
“……아뇨.”
룬트 왕국에서 동네 형들과 검술 놀이는 자주 해 봤지만 그건 고작해야 적당히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서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목검은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면서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목검을 내려놓고 자세를 낮추었다.
“목검은 여기 이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단다.”
그리고 직접 아이의 손을 이끌며 칼라일에게 목검을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칼라일은 가르쳐 주는 대로
야무지게 목검을 쥐었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건가.
이제 막 검을 쥔 아이에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레이몬드는 검을 잡는 품새가 생각보다 좋은 칼라일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한번 휘둘러 보아라.”
칼라일은 작은 목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 제가 검을 휘두르고 있어요!”
목검이 마음에 드는 듯 칼라일의 얼굴이 밝았다.
“그럼 이제 어디 한번 덤벼 보거라.”
레이몬드는 한 손으로 가볍게 목검을 잡으며 말했다. 밝게 웃던 칼라일은 망설이듯 멈칫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먼저 달려드는 것이 쉽지 않은 듯했다. 레이몬드는 장난치듯 가볍게 칼라일의 검을 툭
쳤다.
“나는 끄떡없으니 해 보거라. 한 번이라도 내 몸을 맞추면 내 너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마.”
“정말요?”
주춤거리던 칼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원이란 말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래. 약속하마.”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간 그때, 머뭇거리기만 하던 칼라일이 땅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탁- 탁- 탁!
칼라일이 열심히 목검을 내리치고 레이몬드가 그를 받아주는 소리가 연무장을 경쾌하게 울렸다.
처음 몇 번은 어설프게 내려치던 아이는 손쉽게, 그것도 한 손으로 막아내는 레이몬드에게 약이 오른
것인지 점점 이를 악물고 덤비기 시작했다.
“하압!”
어느새 칼라일은 목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껏 미간을 좁힌 칼라일은 어디서 보고 배운 것인지 기합 소리까지 내며 그에게 검을 내려쳤다.
제 딴에는 심기일전한 한방이었던 했지만 레이몬드에겐 그저 가벼운 깃털이 스치는 정도였다.
‘흐음.’
져줘야겠지.
나름대로 눈빛을 세우며 제 빈틈을 파고들려 애쓰는 칼라일이 귀여우면서도 기특했다.
다리 한쪽 정도는 내어주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 짓던 그때 칼라일이 또 한 번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내려쳤다.
이번엔 맞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을 돌린 순간, 칼라일이 발을 헛디뎠다.
“……!”
놀란 칼라일이 검을 든 채로 하필 레이몬드의 검과 부딪히고 말았다.
검의 방향을 돌리느라 힘 조절을 하지 못한 레이몬드의 검에 칼라일의 검이 튕겨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동으로 칼라일이 구르듯 넘어지고 레이몬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칼라일!”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레이몬드는 검을 던지고 넘어진 칼라일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윽…….”
“다친 것이냐? 어디가, 어디가 아픈지 말해 보거라.”
넘어진 칼라일을 조심스럽게 일으키자 어딘가 아픈 듯 칼라일이 신음을 흘렸다.
“발목이……. 흐윽, 아파요…….”
칼라일은 통증이 심한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칼라일을 안아 든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시종장에게 외쳤다.
“황궁의를 불러!”
다급히 외친 그는 칼라일의 미약한 신음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황후궁전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달려온 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도착한 레이몬드는 곧장 칼라 일을 침대 눕혔었다.
“폐하!”
그리고 바로 도착한 황궁의에게 서슬 퍼렇게 명령했다.
“황자가 다쳤으니 어서 살펴 보아라.”
황궁의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겁에 질린 표정의 칼리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폐하, 황자 전하께서는 왼쪽 발목을 삐끗하신 것일 뿐 큰 이상은 없으십니다.”
칼라일의 진찰을 마친 황궁의가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정말 그뿐이란 말이냐? 다른 곳은 멀쩡한 게 맞느냐? 거의 한 바퀴를 굴렀었다. 더 살펴보거라.”
“……이미 세 번이나 살폈습니다. 폐하.”
황궁의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칼라일의 상태를 처음 말했을 때도 레이몬드는 믿지 않고 다시 살피라 말했었다.
황제가 이렇게 어찌할 줄 몰라하는 것을 본 것은 황후 폐하의 부상 이후로 처음이라 황궁의는 혹시 놓친
것이 있나 싶어 면밀히 칼라일을 살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이상 살필 곳도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칼라일은 왼쪽 발목을 삔 것일 뿐이었다.
그것도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하루 정도 안정을 취하면 나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저 이제 안 아파요.”
그를 보다 못한 칼라일이 말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인 황궁의를 지나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침대 헤드와 쿠션에 기대어 앉은 칼라일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그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정말 이제 괜찮은 것이냐?”
“네. 정말…… 괜찮아요.”
칼라일은 자신을 보는 걱정 가득한 레이몬드의 표정이 낯선지 느릿하게 답했다.
차갑다 느꼈던 레이몬드의 검은 눈빛이 지금은 꼭 엄마를 닮아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플 때면 어쩔 줄 몰라했던 엄마와 말이다.
“다행이다. 크게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레이몬드는 낮게 중얼거리며 붕대로 감긴 얇은 발목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 칼라일은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에 눈을 도르륵 굴렸다.
칼라일의 기분이 이상해진 그때 시종장이 레이몬드에게 다가왔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도착하셨다 합니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난 황후궁에 선 황제의 호위기사를 보게 되었다.


“폐하께서 와 계신 모양이구나.”
어차피 그를 찾아가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마침 잘되었다 생각하며 난 로비로 들어섰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황자 전하의……”
시녀가 채 말이 끝나기 전 난 중앙 계단을 내려오는 황궁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자네가…… 왜?”
136 화

계단을 내려온 황궁의가 예를 갖추려 했지만 난 손을 휘저었다.


“인사는 되었다. 그대가 왜 황후궁에 있는 것이냐? 혹 황자가 아픈 것이냐?”
“크게 다치신 것은 아니옵고 발목을 조금 접질리셨습니다. 하여 방금 치료를 하고 내려오는 길이옵니다.”
“발목을? 갑자기 왜?”
“그것이…… 황제 폐하와 함께 노시다 그리되셨다고…… 하였습니다.”
레이몬드와 칼라일이 같이 놀았다고……?
내가 방금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칼라일이 다쳤다는 게 중요했다.
“알겠다. 그만 가 보거라.”
황궁의를 보낸 뒤 나는 시녀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칼라일과 함께 있는 것이냐?”
“예, 황후 폐하.”
답을 들은 난 곧장 칼라일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문을 연 채로 서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니다.”
시종장의 인사를 받은 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일어서는 레이몬드를 지나쳐 침대에
기대앉은 칼라일에게로 다가갔다.
“칼라일.”
“엄마!”
가까이 다가가자 왼쪽 발목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황궁의의 말대로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칼라일, 발목은 어때? 많이 아프니?”
“아뇨, 괜찮아요. 하루만 쉬면 나을 거라고 했어요.”
칼라일이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더 밝게 말하는 것이었다.
미소를 지은 난 칼라일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레이몬드에게 몸을 돌렸다.
“황제 폐하를 뵙니다.”
조금 늦은 인사였지만 약소하게 예를 갖추고 일어난 난 그를 보곤 움찔했다.
그답지 않게 다소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기 때문에.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사과였다.
“미안해. 내가 칼라일을 다치게 했어.”
그 말에 나는 칼라일을 힐끗 보았다. 눈이 마주친 칼라일은 사실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도 레이몬드가 칼라일을 다치게 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뭐 어쩌다 보니 일어난 사고였겠지.
“폐하,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이제 칼라일이 잠들 시간이라서요.”
어느새 황궁 밖의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전 괜찮은데…….”
아직 자기 싫은지 칼라일이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피력했지만 난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일찍 자자. 잘 자고 일어나야 발목도 빨리 낫지. 그래야 나중에 더 놀 수 있고. 그렇지?”
“……네.”
시무룩하게 답하는 칼라일의 볼에 굿나잇 키스를 해 준 난 레이몬드와 함께 방을 나갔다.
그리고 내 방이 아닌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응접실에 도착한 난 여전히 얼굴 빛이 좋지 않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폐하. 너희들은 모두 나가 있거라.”
궁인들이 모두 나갔음에도 레이몬드는 좀처럼 앉지를 않았다.
“폐하?”
“엘리야, 칼라일 일은 정말…… 미안해.”
그는 또 한번 내게 사과했다.
많이 놀란 건가.
내 생각보다 칼라일이 다친 것에 충격을 많이 받은 듯했다.
창백한 얼굴이 꼭 과거의 내 모습 같았다.
칼라일이 갓난아기였던 시절, 아직은 모든 게 서툴렀던 내 실수로 아이가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 그 상황을 겪었던 난 딱 지금 레이몬드처럼 어쩔 줄 몰라 했었다.
그 역시 자신의 실수로 아이가 다친 것은 처음이라 그런 것이겠지.
난 그를 진정시키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일부러 칼라일을 다치게 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함께……
놀아주시다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고였겠죠.”
“그래도…….”
“아이들은 원래 자주 다칩니다. 뛰어놀다 보면 발목을 접질리는 정도가 아니라 부러지는 경우도
허다하죠.”
기어 다닐 때도 위험했지만 걷기 시작한 이후론 정말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자주 다쳤었다.
“이 정도는 사실 상처 축에도 못 낍니다. 하루만 쉬면 괜찮아진다고 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칼라일이 자라면서 많이 다쳤었나?”
“걷기 시작하면서 넘어지고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렇군. 함께 있었다면…….”
말끝을 흐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이윽고 선명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엘리야.”
“네?”
“칼리일과는 별개로 며칠 전 너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던 일은 미안하다. 앞으론 더욱 조심하마.”
그의 눈빛이 여전히 짙었지만 거북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의 자리로 돌아온 결정에 그가 어설픈 착각을 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긴 했지만, 그날 이후 그가 사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고 중요한 일이 더 많아 거의 잊은 상태였다.
“……앞으로 조심해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보다 폐하께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니
앉으시겠습니까?”
난 재차 자리를 권했다.
진지한 표정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느낀 듯 레이몬드가 소파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황궁을 나간…… 일과 관련 있는 건가?”
“네. 맞습니다.”
“안 좋은 일인 건가?”
“……시오스 후작가에 관한 일입니다. 정확히는 시오스 후작가가 저지른 중죄에 대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난 레이몬드에게 증거 자료가 든 서류 봉투를 건넸다. 굳은 얼굴로 봉투를 받아 든 그는 자료들을 꺼냈다.
“……이건…….”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레이몬드의 미간이 깊이 좁아졌다.
마지막 장까지 읽은 그가 시선을 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난 그에게 말했다.
“제 사람들이 금고의 돈을 가지러 이미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늦어도 모레까지 수도로 그 금고 전체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금고가 있는 영지 역시 시오스 후작가가 불법적으로 사들인 땅이라는 증거 자료를
획득했습니다.”
허니 크로프트 공작가에 누명을 씌우고 국가의 돈을 횡령한 죄를 밝힐 증거가 완벽했다.
“그것이라면 시오스 후작가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아무런 말 없이 집요하게 나를 보던 그가 마침내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파르앙 후작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또 한 번
시오스 후작가를 놓아줄 순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바로 움직여 주십시오. 이 정도의 증거라면 고위 귀족이라 하여도 즉결 재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하지. 당장 내일 시오스 후작을 잡아들일 것이다. 헌데…… 그전에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난 레이몬드의 서늘한 눈빛에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이 증거, 드로이트 공작이 찾은 것이냐?”
그의 검은 눈동자에 위험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이 증거의 출처에 대해 제레미를 의심할 것이란 건 예상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상세한 증거라면, 이 일을 함께 꾸민 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이 정도의 큰 증거를 찾는다면 황제에게 가져와야 함이 옳았다.
드로이트 전 공작이 죄를 지어 죽은 상황이니만큼 새로운 공작이 된 제레미가 황제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으니까.
허니 그가 의심하더라도 끝까지 출처를 밝힐 수 없었다.
난 손을 살짝 그러쥐며 답했다.
“아뇨.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이 있을 적부터 쭉 제가 은밀히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증거들이 발견된 것이고요”
“……엘리야, 네가 찾은 것이라고.”
“네. 정확히는 피닉스 상단의 정보력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그의 깊은 시선이 내 속을 샅샅이 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함을
가장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숨통을 조이는 듯한 침묵이 스쳐 지나가고 이내 서서히 레이몬드의 눈빛이 바뀌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네 말을 믿을 거다.”
“……예, 폐하.”
레이몬드는 더 이상 날 의심하듯 보지 않았다.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묻어주는 것이었다.
언쟁이 오고 갈 수도 있다. 각오했던 것 치곤 그가 너무 쉽게 물러나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제레미를
지켰으니 된 것이다.
레이몬드는 서류를 꽉 쥐며 말했다.
“내일 바로 시오스 후작을 잡아 오라 기사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증거가 확실하니 재판은 빠르게 잡힐
것이다. 이 정도면 시오스 후작가의 작위는 물론 후작가의 대부분의 재산을 압류하고 수도에서 가장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진다면 시오스 후작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날은 시신이 되어서겠지.
“문제는…… 리제나군.”
레이몬드가 흠, 침음을 내쉬며 미간을 깊이 좁혔다.
모든 증거는 시오스 후작을 가리키고 있었지 리제나는 연관이 없었다.
후작가의 모든 작위와 재산은 몰수하겠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죄인도 아닌 리제나까지 유배를 보낼 순
없었다.
그녀는 1 황자의 친모이기도 했으니까.
만약 유배 얘기가 나온다면 1 황자도 가만있진 않을 것이다.
그리되면 리제나를 향한 동정 여론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새로운 황후와 황자가 책봉되자마자 황제가 1 황자를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나돈다면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제나를 그냥 둘 순 없다.
앞으로 또 어떤 짓을 꾸밀지 알 수 없으니까.
하여 고민한 결과 답은 하나였다.
“폐하, 시오스 후작이 유배를 간다 해도 시오스 영애는 1 황자의 친모이니만큼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말은 리제나를 이번 일에서 배제하자는 것이냐.”
“네. 어차피 무리하게 끼워 넣어도 황실 여론에 득 될 것이 없습니다. 허니 폐하께서 먼저 나서 시오스
영애의 명예를 지켜주십시오. 후작위가 사라진 만큼 작은 작위 하나를 내려주셔도 좋고요.”
“……작위를 내려줘라?”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한 그를 보며 난 입술을 움직였다.
“대신 다른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다른 것?”
“시오스 영애의 명예를 지켜줌과 동시에 칼라일을 황태자로 봉해 주십시오.”
후작가라는 배경을 잃고 에드먼드만 남은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꿈꿀 수 없도록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을
앞당겨야 했다.

137 화

“황태자…….”
레이몬드는 미간을 깊이 좁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알아차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칼라일을 황태자로 책봉한다면 리제나가 이곳에 남아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겠군.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었으니 쓸데없는 잡음도 없을 거고 시오스 후작이 무너질 테니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에
반대하는 자들도 없을 테지.”
“네. 맞습니다. 폐하께서 칼라일을 황태자로 만들겠단 확고한 뜻이 정말 있으시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칼라일이 황태자가 되면 리제나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이내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칼라일을 황태자로 만들겠단 뜻엔 변함이 없다. 내가 너와 결혼했을 때부터 다음 황제는 당연히 우리의
자식이라 생각했으니까.”
“…….”
순간 우리의 첫 번째 아이가 생각났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당연히 황태자가 되었을 아이는 어쩌면……
그 아이가 아니었을까.
떠오르는 슬픈 기억에 심장이 아릿했지만, 이윽고 생각을 떨쳤다. 지금은 칼라일만을 생각해야 하니까.
하지만 얼굴빛이 어두워진 것을 본 듯 레이몬드가 말을 돌렸다.
“……이 문제는 그럼 내가 정리할게. 그보다…… 밤이 깊었으니 난 이만 돌아가지.”
“네. 폐하.”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않아도 돼. 늦었으니 이만 쉬어.”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폐하.”
“그래.”
응접실의 문에 다다른 레이몬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엘리야.”
“네?”
“칼라일에게 오늘 미안했다고 꼭 전해 줘.”
“……알겠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윽고 응접실을 떠났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시오스 후작가의 정문 앞으로 검은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들이 도착했다.
성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기사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두려운 얼굴로 모두 하던 일을
멈추었다.
기사들이 막 저택의 문을 통과하던 그때, 리제나가 굳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나 있었던 그녀는 일련의 소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 귀족가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황제의 기사들.
이것은 결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이다.
암살의 증거를 찾은 건가.
완벽하게 모든 증거를 없앴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제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이 정도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가벼운 죄목은 절대 아닐 테니까.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기사들이 로비를 들이닥쳤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은 황제의 수족이라 불리는 4 기사단.
그리고 맨 앞에 선 자는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4 기사단의 단장 카르텔이었다.
대체 저자가 가지고 온 죄목이 무엇이지.
리제나가 입술을 열려던 그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소란에 눈을 뜬 듯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시오스 후작과 후작 부인이 다급히
내려오고 있었다.
로비에 선 시오스 후작은 카르텔을 보고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무장까지 하고 들이닥친 기사들의 기세가 당장 칼을 빼어들 듯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당당히 말하려 했지만 시오스 후작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카르텔은 한자리에 모인 시오스 후작가의 일원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품에서 황제 폐하의 칙서를 꺼내
들었다.
“시오스 후작을 국고 횡령과 사기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카르텔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시오스 후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의 녹안이 크게 흔들리고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국고 횡령과 사기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죽은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함께 사막 상단을 만들고 그 상단을 이용해 국고 4000 골드를 빼돌렸다는 모든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대가 빼돌린 금고가 수도로 이송되고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곧 열릴 재판에서
하도록.”
카르텔은 시오스 후작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후작의 양팔을 잡아챘다.
“꺄악!”
심약한 시오스 후작 부인이 비명을 지르고,
“아니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소!! 고위 귀족을 이렇게 무작정 끌고 가려 하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시오스 후작이 억울하다는 듯 한껏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다급한 후작의 목소리에 후작가의 기사들이 로비로 들어오자, 카르텔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검을 빼 드는 놈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내 직접 목을 벨 것이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후작가의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후작가의 기사들이 머뭇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리제나가 입술을
열었다.
“아무도 막아서지 마라.”
“리제나!”
리제나의 명령에 시오스 후작이 야차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리제나는 그런 그에게 낮게 말했다.
“……가문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행패를 부려봤자 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리제나의 싸늘한 외면에 후작은 너도 함께한 짓이 아니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폭로하면 정말 다
개죽음인 것이다.
300 년이 넘게 이어진 가문의 명맥을 그 손으로 끊을 순 없었다.
“아아악!!”
하지만 분통함을 참을 수 없는 후작은 괴성을 질렀다.
“끌고 가.”
카르텔의 명령이 떨어지고 결국 시오스 후작은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시오스 영애. 폐하께서 영애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늦지 않게 황궁으로 오십시오.”
리제나에게 마지막 말은 전한 카르텔이 저택을 나갔다.
“아…….”
후작이 끌려가고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후작 부인이 쓰러졌지만 리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오스 후작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릿발처럼 굳은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마님께서…….”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라.”
차갑게 명한 리제나는 그러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뼈가 튀어나올 듯 도드라지고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녀에게 이런 아픔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이 지금 와서 밝혀질 줄이야.
암살 사건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은 게 아닐까 생각했던 그녀에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모든 증거가 나온 상태라 말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렇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은 즉결 심판으로 열릴 것이고 처벌을 피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 바닥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 사건이 터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대비해놓은 것도 없었다.
제레미 드로이트.
그 망할 이단아의 짓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죽여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뒤늦은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설프게 나섰다간 후작뿐만 아니라 그녀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황궁에 다녀올 테니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누구도 들이지 마라.”
“네. 아가씨.”
리제나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 * *

“황제 폐하. 시오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리제나를 기다리고 있던 레이몬드는 창밖을 보다 몸을 돌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예를 갖추었고 레이몬드는 시종들을 전부 내보냈다.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지만 레이몬드는 리제나에게 따로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레이몬드의 입술이 열렸다.
“할 말은 없나?”
“……아버지께서 죄를 지었다, 들었습니다. 감히 제가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
“넌 그 죄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느냐.”
“……알았다면 제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폐하.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버지를 막았을 것입니다. 허나
지금은 이미 늦어버렸지요. 폐하를 뵐 낯이 없습니다. 감히 용서를 빌지도 못하겠습니다.”
리제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리제나가 참담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것을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리제나가 칼라일과 엘리야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시오스 후작과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레이몬드는 처량함을 가장한 리제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엇이 널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기에 짧은 의문이 들었지만 리제나를 향한 증오가 이젠 더 컸다.
“그래……. 네가 알았다면 말렸겠지. 너를 추궁하려 부른 것은 아니니 고개를 들어라.”
리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썹을 꿈틀했다.
“내 너를 부른 이유는 시오스 후작에 대한 처벌과는 별개로 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다.”
“……네?”
가련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리제나가 순간 흔들림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이 와중에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이몬드가 그녀의 명예를 지켜준다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으니까.
“넌 시오스 후작가의 영애이기도 하지만 1 황자의 친모이기도 하지. 하여 난 특별히 이번 일에서 널
배제하기로 했다.”
“그게 무슨…….”
“바닥으로 떨어질 시오스 후작가 대신 네게 새로운 성과 자작의 작위를 내리는 것으로 후작의 죄에
연좌제를 짊어지게 하지 않고 1 황자의 친모로서 예우하려 한다.”
“…….”
리제나는 순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의 이런 결정에 감복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갑자기 그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에드먼드에게 한 톨의 애정도 주지 않았던 그가 명백한 증거를 잡아챈 지금 갑자기 1 황자를 생각해 친모에
대해 예우를 하겠다니 누가 선뜻 믿을 수 있겠는가.
대체 무슨 저의로 내게…….
리제나의 등골이 서늘해지던 그때 레이몬드의 붉은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이 모든 것을 약속하는 대신 너에게 조건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2 황자의 황태자 책봉이다.”
나직하고 차가운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동시에 흔들리던 표정을 간신히 유지하던 리제나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138 화

“……지금 황태자 책봉이라 하셨습니까?”


리제나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황망히 되물었다.
레이몬드는 평정을 잃은 녹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칼라일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다.”
하.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리제나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황태자라니. 그의 아들이, 1 황자가 버젓이
있는데 황태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지 말라,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레이몬드와 싸워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은 리제나는 떨리는 손을 그러쥐며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2 황자는 아직 황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슬하에 1 황자도
있지 않습니까. 황태자 책봉을 이리 빨리 하시면…… 말들이 많을 것입니다.”
레이몬드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이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래서 너에게 작위를 주겠다는 것이다. 시오스 후작이 꾸민 일에 네가 엮이면 에드먼드에게 좋을 게
없다. 그리고 황태자 책봉에 1 황자의 친모가 먼저 나서 축하 인사를 전한다면 쓸데없는 말들도 금방
가라앉겠지.”
“……지금 폐하께선 제게 작위를 내리는 대신 2 황자의 황태자 책봉에 축사를 보내고 제 손으로 1 황자를
뒤로 밀어내라 이 말씀이십니까?”
“맞다.”
레이몬드는 점점 굳어가는 리제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감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단호한 그의 한마디에 가느다랗던 그녀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
속에서 솟구치는 열기에 당장이라도 레이몬드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손으로 에드먼드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밀어내라니.
엘리야의 자식에게 축사를 보내라니.
정말이지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리제나는 더 이상 서글픈 표정을 꾸며 낼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선명한 실소를 머금은 그녀는 레이몬드의 검은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폐하. 무려 7 년입니다. 에드먼드가 이 제국의 1 황자로서 책무를 다한 시간이요!
헌데 어쩜 이렇게까지 비정하실 수 있습니까!?”
“비정하다?”
“네! 비정하고, 무정하고, 잔인하십니다. 에드먼드가 여태까지 무엇 하나 잘못을 저지른 적이라도
있습니까?”
리제나의 입꼬리가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어린 나이에 어미와 떨어져 이 황궁에서 홀로 자랐음에도 언제나 폐하께 누가 될까 싫은 소리 고집 한번
피우지 않고 황자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이렇게 내치십니까!?”
리제나의 큰 목소리가 집무실을 크게 울렸다.
단 한 번도 레이몬드 앞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본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에드먼드가 물려받을 황좌.
그것 하나만을 보고 에드먼드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였다. 황후가 되지 못해도, 레이몬드의 냉대
아닌 냉대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다른 사람도 아닌 엘리야의 자식에 황태자 자리를 넘겨줄 순 없지 않겠는가.
레이몬드는 울분에 가득 찬 리제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게 너의 진짜 모습인 건가.
무참하게 무너진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평소에 느꼈던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네 아들인 것이, 시오스 후작의 손자인 것이 죄다.”
레이몬드는 차갑게 일갈했다.
냉정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황족의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 해도 외가가 무너지고 지지하던 세력이 무너지면 권력을 잡을 수 없다.
시오스 후작이 역심을 품지 않고 리제나가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그도 이렇게 빠르게 칼라일을 전면에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에드먼드가 그간 모자람을 보인 것도 아니었기에, 차기 황태자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었겠지.
그러니 에드먼드의 앞길을 망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입술을 꽉 깨문 그녀를 보며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라. 에드먼드의 앞길을 막은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시오스 후작가다.”
“……제가 그러지 못하겠다면요. 작위를 거절하고 2 황자 전하의 황태자 책봉을 앞장서서 막겠다면 절
죽이실 겁니까.”
“그럴 리가.”
레이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롭게 답했다. 책상에 허리를 기댄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2 황자의 황태자 책봉 때문에 1 황자의 친모를 죽인다면 얼마나 많은 말이 나오겠느냐. 거기다 오히려 1
황자에 대한 동정여론이 더욱 커질 뿐이겠지. 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황태자 책봉은 뒤로 미뤄……”
“너의 명예부터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싸늘한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리제나의 말을 잘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감하기만 했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섬뜩하게 달라지자 말을 잇던 리제나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하며 멈칫했다.
“…….”
“후작의 지은 죄가 이리도 명백하니 너 하나 끼워 넣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그렇게 널 평민으로 강등하고
유배를 보낸 시오스 후작을 죽여 버린다면 에드먼드에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폐하.”
“외가 가문이 처절하게 무너진 황자들의 말로가 어땠는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리제나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뒤를 받쳐줄 외가의 권력이 없는 황자의 말로.
그 끝은 죽음이거나 이름뿐인 황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참함의 연속일 뿐이었다.
“……협박이십니까.”
“너와 에드먼드. 두 사람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내 마지막 호의라고 해 두지. 에드먼드는 죄가
없으니까.”
리제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지금 레이몬드는 진심이었다.
그녀를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목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부친과 형제들을 도륙하고 황좌에 앉은 사람이었으니 애정 없는 자식을 베는 것을 망설일 리 없겠지.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배려를 해 주는 듯한 그 말에 리제나는 순간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라니.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고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을 지르고 집무실의 있는 물건들을 그에게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은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이었다.
분통함과 치욕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제나는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 습니다.”
바들바들 떠는 리제나의 모습이 안쓰러울 법도 했지만 그의 얼굴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라.”
더없이 차가운 레이몬드의 축객령이 집무실을 울리고 리제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어떻게 복도를 걸어 나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가씨!”
궁전을 나온 순간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리제나는 몸을 크게 비틀거렸다.
놀란 하인이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리제나는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칼라일이 황태자가 된다니.
아버지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가문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엘리야의 자식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 뿐이었다.
“하하…….”
널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제국으로 돌아왔던 그때, 엘리야가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왔던 그 순간 죽여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2 황자는 태어나지도 못했겠지.
사무치는 후회에 가슴이 짓이겨졌다.
그리고 그때 절망적인 그녀를 비웃는 듯한 고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시오스 영애.”
하인의 손을 떨쳐낸 리제나는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엘리야를 향해 몸을 돌렸다.

* * *

“…….”
리제나의 앞에 선 난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이제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건가.
창백하게 질린 낯빛과 살기로 점철된 녹안을 보니 레이몬드에게 황태자 책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듯
했다.
시오스 후작이 무너지고 황태자 자리까지 날아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수많은 궁인들이 지나치는 황궁 앞에서 리제나는 인사도 없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무례함을 참지 못한 헬란이 소리쳤다.
“시오스 영애, 황후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하지만 리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독기가 단단히 오른 그녀의 모습에 난 비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됐다. 지금 시오스 영애의 심정이 얼마나 참혹하겠느냐.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이리 멀쩡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일이다.”
헬란을 뒤로 물린 난 리제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디차게 식은 손이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가문이 무너지고 7 년을 기다리기만 했던 황태자 자리까지 뺏겼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허나 그렇다 하여 내 분노가 풀리진 않는다.
멀리서 보기엔 한없이 걱정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후작가의 소식 들었네. 그러게 내 경고했잖나. 우리를, 칼라일을 건들지 말라고.”
작은 속삭임을 정확히 알아들은 리제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난…… 내 아들을 지키려 했을 뿐이야.”
울분에 찬 리제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손을 뿌리치려는 듯 힘이 느껴졌다.
난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번뜩이는 녹안을 직시했다.
“아니. 넌 네 아들을 스스로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욕심 따위
부리지 않았다면 난 절대 칼라일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을 테고 애초에 제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망친 건 너와 네 가문이다. 날 부른 것도 칼라일의 존재를 밝힌 것도 전부 네가 한
선택이다. 허니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네 멍청함을 원망해.”
“!”
“너만 아니었다면 네 아들은 이미 황태자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리제나만 아니었다면 칼라일이 황태자가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탁-!
난 거세게 흔들리는 녹안을 응시하며 그녀의 손을 던지듯 놓아버렸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텅 비어가는 리제나의 눈이 보였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은 그녀이니까.
그녀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시오스 영애의 몸이 좋지 못한 듯하니 어서 후작가로 모시거라.”
무너지듯 주저앉은 리제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던 난 이윽고 싸늘히 그녀를 지나쳐 궁전으로 향했다.

139 화

시오스 후작의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황궁으로 끌려온 지 하루 만에 재판이 열렸고 재판장은
파르앙 후작이 맡았다.
모든 증거들이 확실했고 그가 빼돌린 4 천 골드가 담긴 금고가 그대로 마법진을 통해 재판장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금고를 지키던 자들 모두 시오스 후작이 시킨 일이라 자백을 하였고 후작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돈을 빼돌린 횡령죄와 국가를 상대로 벌인 거대한 사기극.
거기에 크로프트 공작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극악무도한 짓까지 모든 게 밝혀졌고 시오스 후작은
어느 누구의 옹호도 받을 수 없었다.
“마이어스 시오스. 그대가 벌인 일련의 죄들은 참으로 참혹하여 그 어떠한 선처도 해 줄 수 없다. 하여
지금 이 시각부터 시오스의 성과 작위를 박탈하고 서부의 가장 끝에 위치한 광산에서 100 년간의 강제
노역을 선고한다.”
형벌을 선고하는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가라앉은 재판장을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 된 마이어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악!!!”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마이어스는 악에 받친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를 안쓰럽게 보지
않았다.
“죄인을 체포해 끌고 가라.”
시끄러운 소리에 미간을 좁힌 파르앙 후작이 무겁게 명하자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마이어스의 양팔을
잡았다.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죽고 싶은 것이냐!! 난 이 나라의 재상이고 1 황자의 외조부이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날 체포한단 말이냐!!”
마이어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기사들의 손을 뿌리쳤다.
하루아침에 재상에서 노예가 되었는데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라.
이성을 잃은 마이어스가 씩씩거리며 눈알을 번득이는 그때, 그때 파르앙 후작의 노성이 재판장을 울렸다.
“마이어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는가! 더 소란을 피운다면 좋지 못한 꼴로 끌려나가게 될 걸세!”
“나는 이대로는 못 간다!! 1 황자 전하를 불러라!! 황자 전하께서 나를 구해 주실 것이다! 황자 전하께서
나를 이리 버리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파르앙 후작은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마이어스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곧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기사들은 무력으로 마이어스를 제압했다.
몸을 바닥에 강제로 눕혀 양 손목에 포승줄을 묶은 그들은 개를 끌고 가 발버둥 치는 마이어스를 끌고
재판장을 나갔다.
한때는 제국의 가장 실세라 불렸던 시오스 후작의 말로에 귀족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놔!! 놓으란 말이다!!!”
죄인이 막 재판장에서 끌려 나왔을 때, 재판장 밖엔 에드먼드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참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기사들에게 끌려 나오는 외조부의 모습을 본 에드먼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모든 죄가 명확하단 신문 기사를 보았을 때도 사실이 아닐 거라,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 안 것일 거라
부정하고 또 부정했었다.
언제나 인자하고 상냥했던 그의 외조부가 이런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을 리 없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했던 어머니의 말처럼 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에드먼드는 외조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때, 에드먼드를 발견한 마이어스가 다급히 외쳤다.
“황자 전하!! 에드먼드!! 날 구해 다오!! 에드먼……”
“조용히 하시오!”
그를 향해 외치는 외조부의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도 낯설어 에드먼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멀어지는 에드먼드를 본 마이어스의 녹안이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
“에드먼드!! 네가 누구 덕에 황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
“그만하시지요, 아버지.”
소름 돋는 마이어스의 눈빛에 에드먼드의 몸이 굳은 순간, 에드먼드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충격으로 잠시 넋이 나갔던 에드먼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을 가로막아선 뒷모습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리제나가 에드먼드에게 몸을 돌렸을 때 이미 외조부는 기사들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황자…….”
리제나는 몸을 잘게 떨고 있는 에드먼드를 꽉 끌어안았다.
재판장에 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 일렀거늘.
이런 장면을 보게 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부아가 치미는 속을 진정시키려 긴 숨을 내쉰 리제나는 천천히 에드먼드를 안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에드먼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를 보는 검은 눈동자가 가엾게 떨리고 있었다.
내 너에게 꼭 황좌를 안겨 주려 하였는데.
쓰리다 못해 누군가 속을 다 긁어 내리는 듯 아팠다.
“어머니, 대체 이게 무슨……”
“황자, 내 말 잘 들으세요.”
리제나의 낮은 음성에 에드먼드가 입술을 다물었다. 심각함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얼굴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네.”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황자를 상처 주고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미 역시 당분간은
황자를 자주 보러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명심하세요.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허니 묵묵히 참고 버텨야 합니다. 아시겠죠?”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달라지는 눈빛을 보며 멈칫했다.
끌려가던 외조부도 살벌한 빛을 띠는 어머니의 눈빛도 에드먼드는 모든 게 낯설었다.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라 했던 어머니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황궁으로 보낼 때 했던 거짓말처럼.
황궁으로 가서 황자가 되면 행복한 일만 있을 것이라고 그리 말했지만 에드먼드는 황자가 된 뒤로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 늘 자신을 남 보듯 바라보는 아버지.
거기에 언제나 남들의 시선과 지켜야 할 규율들에 숨이 막혔었다.
그런데 이젠 외조부까지 잃었다.
더 불안한 것은 꼭 어머니도 잃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고 하기엔 에드먼드는 리제나에게 너무나 착한 아들이었다.
에드먼드는 목구멍을 넘어 나오려는 말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겁니다. 어미를 믿고, 궁전으로 돌아가 있으세요.”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볼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에드먼드는 그녀의 낯선 미소를 보다 느릿하게 답했다.
“……어머니도 항상 몸조심하세요.”
에드먼드는 부디 리제나가 무사하길 바라며 궁전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오스 전 후작의 재판이 막 진행되고 있던 그 시각.


수많은 귀족들이 재판장에 갔지만 제레미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증거를 발견한 것이 그이니만큼 마이어스 시오스 그자와 리제나가 비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저녁 발견한 새로운 그림 하나 때문에 신경이 쓰여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걸 왜……”
제레미는 책상 위에 놓은 그림 한 장을 미간을 좁힌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공작이 옮긴 비밀 금고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공작 성의 방을 몇 개 정리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대로 남겨 놓았던 공작 부인의 서재도 정리하라
명했었다.
그 전에 어머니의 유품 몇 개는 빼놓고 싶어 서재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금고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금고 안에 숨겨진 다른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이 어제 하인에게 발견되어 그 안에 있던 이 그림이 그의 앞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림은 다름 아닌 1 황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본 적이 있었다.
공작가로 돌아와 처음 아버지의 금고를 털었을 때 이 그림을 보았었다.
1 황자의 초상화와 리제나 시오스의 이름이 적힌 그림.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 황급히 떠나느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다시 그의 손으로 들어온 그림엔
상당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그림 뒤에 적힌 또 다른 이름.
“……테이른 에그리타.”
이 이름은 다름 아닌 현 황제의 이복형이자 반정으로 죽은 전 황태자의 이름이었다.
죽은 황태자의 이름이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1 황자의 그림 뒷면에 적혀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이상하고 찝찝하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아버지는 죽은 황태자의 이름을 이들과 함께 적어놓은 것이지.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머릿속을 스친 한 가지 가정은 있었다.
단지 그것이 너무도 말도 안 되고 엄청난 일이라 감히 두 번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오늘 다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이름을 이렇게 이름은 남긴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1 황자와 죽은 황태자가 관련이 있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1 황자의 출생과 관련 있는 것일 게 자명했으니까.
“하아…….”
이건 역모와는 또 다른 엄청난 문제였다.
만약 정말, 진짜……그런 것이라면……. 단순히 리제나 한 명이 죽어 나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삼대를 멸한다고 해결될 일일까. 현 황제가 이전 황태자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때까지 이런 일이 벌어진 적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섣부르게 그가 나서서 조사하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엘리야에게 전하기엔 자칫하다가 엘리야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그림 한 장과 이름뿐이었으니.
이걸 황제에게 들고 가는 것도 도박이었다.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냐에 따라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제레미는 목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결국 나온 답은 하나였다.
도박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황제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
목을 바로 한 그는 종이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온 그는 집사에게 명했다.
“황궁으로 갈 것이다. 마차를 준비해.”

140 화

“이 시각 이후로 에그리타 제국의 재상은 그대이네. 허니 시국이 빨리 안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게.”
“예, 황제 폐하.”
시오스 전 후작의 재판이 끝나고 파르앙 후작은 재판 결과를 알리기 위해 황제를 찾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파르앙 후작을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
재상 대리를 맡았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재상,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 준비는 차질 없겠지?”
“네. 이미 공식 발표는 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정대로 내일 2 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한다는 사실을
공표할 것입니다.”
“한동안은 귀족들이 꽤나 시끄러울 것이다. 잘 마무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일이 많을 테니 이만 물러가 보게.”
파르앙 후작이 인사를 올리고 막 집무실을 나간 그때 시종이 급히 들어왔다.
“폐하. 드로이트 공작이 급히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드로이트 공작이?”
레이몬드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드로이트 공작과의 마지막 만남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시오스 후작의 대한 증거를 엘리야에게 보낸 것이 드로이트 공작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상세한 증거는 시오스 후작과 함께 일을 벌인 드로이트 전 공작 정도는 되어야 모을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알면서도 엘리야에게 모른 척 눈을 감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날 찾아왔다라.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리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내가 눈치챌 거란 것을 알면서도 엘리야에게 증거를 넘겼을 테니 말이다.
“어찌할까요?”
“데려와.”
“네.”
시종이 집무실을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드로이트 공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레이몬드는 몸을 일으키는 제레미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갑자기 어쩐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전에 주변을 물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폐하.”
제레미가 무거운 목소리로 청했다.
심상치 않은 제레미의 얼굴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이내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장이 모든 궁인들을 데리고 나가고 레이몬드의 입술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의 숨겨진 금고에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역모에 관한 증거인가?”
“……아뇨. 그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중요한 사안이라 폐하께 가지고 왔습니다.”
“다른 의미?”
레이몬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묻자 제레미는 답 대신 가져온 것을 책상 가져온 통을 올려놓았다.
나무로 만든 동그랗고 긴 통은 보통 화가들이 그림을 넣을 때 많이 쓰는 것이었다.
레이몬드는 통의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그림을 꺼냈다.
“이건…….”
레이몬드는 그림에 그려진 인물을 보곤 눈썹을 꿈틀했다.
다름 아닌 에드먼드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좀 더 어린 시절의 얼굴이긴 했지만 에드먼드가 확실했다.
1 황자의 초상화를 왜.
시오스 전 후작과 반역을 꾸미며 장차 황제로 만들 1 황자이니 의미를 두고 초상화를 간직이라도 한 건가.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어처구니없다 여기며 제레미에게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지?”
“……뒷면을 보십시오, 폐하.”
“뒷면?”
제레미의 말에 종이를 뒤로 넘긴 레이몬드는 그곳에 적힌 이름을 보곤 얼굴을 굳혔다.
에그리타 테이른.
익숙한 그 이름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목을 벤 이복형이었으니까.
레이몬드는 날 선 눈빛으로 이름을 뚫어져라 보다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이 이름이 왜 적혀 있는 것이지?”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허나…… 그 이름이 적힌 그림을 아버지가 숨겨 놓은 금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레미는 매우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아무런 의미 없이 그 이름을 1 황자 전하의 초상화 뒤에 새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 황자와 죽은 황태자.
그 두 사람을 엮는 지금 이 순간 레이몬드가 얼마만큼 분노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장 칼을 뽑아 에드먼드를 도륙 낼지도 모른다.
레이몬드가 죽은 황태자를 얼마나 혐오하고 경멸했는지는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 없이 제레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감한 듯한 표정 속 번뜩이는 눈빛은 제레미의
숨통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살벌한 침묵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숨소리만 울리던 그때, 레이몬드가 그림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1 황자의 출생에 죽은 황태자가 관련이 있다. 이 말을 하는 건가?”
이미 죽어버린 황태자였다.
그런 놈과 이후에 태어난 1 황자가 관련이 있다 한다면 딱 하나뿐 아니겠는가.
1 황자의 출생.
느긋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위험함을 제레미는 느꼈다.
하지만 각오하고 온 것이기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네. 합당한 의심이 들어 폐하께 이리 가져온 것입니다.”
제레미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답하자 레이몬드의 기운이 단번에 흉포해졌다.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지금 네가 의심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제국의
1 황자이다.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족 모독으로 네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어.”
“제 목을 베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허나 폐하. 제 아버지는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것을 남겨 놓을 사람이 아닙니다. 숨겨진 진실이 있다면 밝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레이몬드의 살기가 짙었다.
이렇게까지 짙은 살기를 받는 것은 제레미도 처음이었다. 압도적인 기운에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은
그는 숨을 죽였다.
“…….”
레이몬드는 그림을 다시 내려보았다. 정확히는 죽은 황태자의 이름을.
레이몬드도 안다.
죽은 드로이트 전 공작이 절대 허투루 이런 것을 남겨 놓지 않았을 거란 것을.
아마 이 그림은 시오스 전 후작의 비리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배신했을 때를 대비해 약점을 잡아
놓은 것인 거다. 그렇다면 이 그림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
리제나는 서왕국에서 아이를 낳았고 신전의 검사는 황족이란 것을 확인할 뿐이다. 누구의 아이인지까지는
밝힐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네놈이 1 황자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하아.”
긴 숨을 내쉰 레이몬드는 처벌을 기다리듯 고개를 숙인 제레미에게 시선을 들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또 있느냐.”
“아무도 모릅니다.”
레이몬드는 서늘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넌 오늘 내게 이 그림을 전한 적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 머릿속에서도 모든 것을 지워라.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것도 그것을 아는 것도 오로지 나뿐이다.”
역모만큼이나 엄청난 일이었고 사상 가장 큰 황실의 치욕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허니 그 누구의 개입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제레미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애초에 그의 역할은 이것을 전해 주는 것이었으니 이젠 끝난 것이다.
“물러가라.”
제레미가 집무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답답한 속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잊고 지냈던 죽은 황태자.
그가 실로 오랜만에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았던 놈이었다.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었을 때에도 그 분노가 다 풀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 염원하던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황족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더는 엮일 일이 없다 여겼다.
그런데 1 황자라니.
죽어서까지 그를 괴롭히는 참으로 질긴 악연이 아닌가.
레이몬드는 창밖 먼 지붕만 보이는 1 황자 궁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리제나가 에드먼드를 그의 아이라 데리고 왔을 때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서왕국으로
떠나기 직전 함께 밤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리제나와 2 년 넘게 교제를 했었지만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왕국행이 결정되었을 때, 리제나가 그에게 울며 매달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날밤을 보내고 싶다고.
그는 옳은 일이 아니라 거절했었지만 그녀를 위로하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셨었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은 뒤였다.
그날 밤의 일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당연히 그의 아이일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애초에 감히 황제의 핏줄을 속일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초상화가 그의 손에 들어온 지금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날 밤도 리제나도 1 황자도.
1 황자가 그의 자식이 된 지 벌써 7 년.
하지만 그는 1 황자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작은 책임감으로 아이를 보고 있을 뿐 칼라일 볼 때마다
느끼는 묘한 감정을 에드먼드에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야속하다 욕할지라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말이다.
“……내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혈연에 대한 알 수 없는 이끌림 같은 것 믿지 않는 그였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민하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이성적이지 않은 잡념들에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책상 위의 종을 울렸다.
소리를 들은 시종장이 곧장 집무실로 들어왔다.
“시종장, 카르텔을 불러와라.”
“네. 폐하.”
잡념을 멈출 방법은 하나였다.
진실을 알아내는 것.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로 초상화를 접어 책상 서랍 안으로 넣었다.
* * *

시오스 가문의 몰락과 2 황자의 황태자 책봉으로 연일 시끄러웠던 나날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황궁 연회의
날이 밝았다.
몇 년 만에 황성에서 열리는 가장 큰 연회로 오늘은 다시 돌아온 황후와 황태자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과 황성에서 열리는 파티의 이야기로 수도의 광장이 한참 시끄럽던 그때, 황후궁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라일의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지?”
난 연회장을 살피고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헬란에게 물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선 방금 치장을 다 마치셨습니다.”
“벌써?”
“어찌나 얌전히 계시는지 시녀들이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었어요.”
연미복을 차려입고 치장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이 투정을 부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잘했다니
의외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지금 꽤나 부루퉁한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칼라일을 먼저 봐야겠다.”
난 치장을 시작하기 전 칼라일을 보려 계단을 올랐다.

141 화

방으로 들어온 난 칼라일이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칼라일은?”
“황태자 전하께선 드레스룸에서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계십니다.”
시녀가 답을 하자마자 드레스룸의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먼저 나오는 시녀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미복을 차려입은 칼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난 칼라일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감탄을 내뱉었다.
연미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본 것이기도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를 위해 특별하게 맞춰진 연미복 재킷에는 금빛 자수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고 프릴이 달린
넥타이는 황가의 상징인 흑요석 브로치로 고정되어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칼라일의 모습에 순간 심장이 아릿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방 안에 많은 시녀들이 서 있었다.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던 그때, 칼라일이 양옆에 선 시녀들 사이로 살짝은 수줍은 듯,
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로 내게로 걸어왔다.
141
“어머니.”
황가의 예법을 익히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적어도 겉보기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유려하게 예를 갖추는 칼라일을 본 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오늘 너무 멋지구나.”
“음, 감사합니다.”
칼라일은 멈칫하다 미소를 그렸다.
아직 황태자란 호칭이 익숙지 않아서란 걸 안다.
하지만 앞으론 그 호칭과 자리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난 일부러 칼라일 앞에선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어리광을 한참 더 부려도 될 나이인데. 칼라일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거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볼을 가볍게 쓰다듬자 칼라일이 배시시 웃다 물어왔다.
“어머니, 오늘 파티에 형님도 오시나요?”
1 황자의 얘기에 손끝이 멈칫했다.
난 말랑한 볼에서 손을 거두며 답했다.
“……물론 온단다.”
황후와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공식적인 황실 행사였다.
당연히 1 황자도 참석해야 함이 맞지만 며칠 고민을 하긴 했었다.
시오스 전 후작이 모든 것을 잃고 광산의 노예로 떠나게 되고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후작 부인은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 들었다.
리제나가 1 황자의 친모로서 자작의 작위를 받긴 했지만 영지나 별다른 재산을 하사받지는 못했다.
황성에 생활을 영위할 저택과 사용인들을 받은 게 전부였다.
1 황자의 친모이니만큼 품위 유지비 등이 나오기는 하겠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이 이제 허울뿐인 작위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외가가 회생의 가능성도 없이 처참하게 무너졌으니 1 황자의 입지도 순식간에 좁아진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거기다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으로 쐐기가 박혔지.
그 모든 것을 내가 준비하고 실행했지만 죄 없는 1 황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하여 1 황자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론은 불러야 한다는 쪽이었다.
분명 1 황자를 무시하는 말들이 나올 테지만 그렇다고 1 황자를 궁에 두면 더욱 여론이 안 좋아질 것이다.
황실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며 더욱 무시할 테니까.
그러니 비록 불편한 자리일지라도 얼굴을 비추는 게 좋았다.
그 아이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으니까.
리제나를 변방으로 쫓아버리고 난 뒤엔 1 황자가 황자로서 조용히 잘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외가와 어미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순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은 그랬다.
“오시는군요! 아…… 근데 형님은 이제 괜찮아졌을까요?”
정계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고 이해하진 못하지만 칼라일도 에드먼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죄를 지어 멀리 떠나게 되었고 어머니와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정도를 말이다.
걱정 가득한 칼라일의 눈빛에 난 조금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파티장에 1 황자가 오긴 오지만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다가가진 말렴.”
“왜요?”
“……황태자. 지금 1 황자는 많은 일을 겪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허니 당분간은 멀리서 지켜봐야
해.”
“제가 위로해 주면 안 돼요? 형이잖아요.”
칼라일의 순수한 눈빛에 난 곤란해졌다.
칼라일은 형을 위로하고픈 것일 거다.
어른들의 깊은 속사정까진 몰랐으니까.
하지만 에드먼드는 아니지.
칼라일의 위로가 에드먼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다음에……, 1 황자가 괜찮아지면 그때 그러자꾸나.”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씁쓸함을 감추며 칼라일의 넥타이를 바로 해 준 난 그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정오가 훌쩍 넘었기에 나 또한 늦지 않으려면 치장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준비하시러 가는 건가요?”
“그래. 그동안 옷이 구겨지면 안 되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네.”
칼라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있으라 하면 시무룩해지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황실에 점점 익숙해지는 아이를 복잡한 눈빛으로 보던 난 방을 나갔다.
결혼식을 하지 않았기에 오늘 파티는 황후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첫 번째 공식 석상이었다.
사실 처음이라 하기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지만 과거의 결혼 생활이 좋게 끝나진 못했기에 다들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오늘은 칼라일을 처음으로 선뵈는 자리이기도 하니, 나는 치장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기에 치장이 다 끝났을 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거울을 가져와.”
머리치장을 마친 헬란이 시녀에게 명하고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흠…….”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황후 폐하.”
뒤에서 시녀의 감탄 섞인 말이 들려왔다.
제가 모시는 주인을 찬양하는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빛이 난다
할 만큼 화려했다.
황후의 예복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부터가 남달랐으니까.
보름 동안 제국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모두 달라붙어 만든 하나뿐인 드레스였다.
하얀 원단에 크리스털과 금빛 실을 촘촘히 수놓고 허리 아래로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는 신성한 느낌까지
났다.
그런 드레스에 맞춰 은은하게 화장을 한 난 대신 은빛 머리칼에 향유를 발라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머리를 땋아서 틀어 올린 난 얼핏 결혼식을 치르는 신부 같았다.
어차피 결혼식 대신 여는 파티였으니 상관없겠지.
그리고 이 정도의 화려함이라면 황태자와 돌아온 세기의 황후쯤으로 보이기에 딱 적당하지 않을까.
거울 속의 나를 보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지은 난 다가온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헬란은 보석함을 들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예.”
헬란이 상기된 얼굴로 함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블랙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귀걸이.
황실의 상징을 담은 아름다운 보석이었고 황가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보물.
바로 초대 황제가 황후에게 선물한 황가의 보물이었다.
황가의 보물이자 황후의 상징이라 불리는 보석이었지만 이것을 황제에게 받았던 황후는 몇 명 되지 못했다.
초대 황제가 초대 황후에게 이 보석을 선물할 때 영원한 사랑을 맹세 했기에 보석이 가진 뜻도 ‘영원하고
진실된 사랑’이란 뜻이었다.
하여 역사 속의 수많은 황제들 중 진심으로 황후를 사랑했던 황제만이 이 보석을 황후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결혼에선 그에게 이것을 선물받지 못했었다.
내가 그에게 이걸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과거 그와 결혼하기 전 언젠가는 블랙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한 적도 있었다.
헛된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난 블랙 다이아몬드를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때까진 그와 다시 결혼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을 보니 왜인지 그와 다시 결혼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기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가 나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무감함에 가까운 감정 속에 씁쓸함이 느껴졌을 뿐이다.
사랑 없는 결혼이란 이런 건가.
그와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전날 밤 너무 설레어 밤잠을 설쳤었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지금 딱 나와 같은 기분이었겠지.
식은 눈빛으로 블랙 다이아몬드를 내려보던 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귀걸이를 하고 목걸이를 걸고 마지막으로 반지를 끼웠다.
거울 속엔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완벽한 황후가 서 있었다.
7 년 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였다.
표정 없는 얼굴로 목에 닿는 차가운 블랙 다이아몬드를 손끝으로 쓸던 그때,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나가자꾸나.”
해가 졌으니 파티의 시작이었다.
상념을 떨쳐낸 난 어딘가 개운치 만은 않은 마음으로 방을 나갔다.

* * *

“우와…….”
로비에 도착하자 미리 내려와 있던 칼라일과 레이몬드가 보였다.
그리고 칼라일은 날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예뻐요……!”
칼라일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게 말했다.
항상 엄마가 최고로 예쁘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진심 어린 표정은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의 칭찬보다 칼라일의 칭찬이 가장 기분 좋았다.
“고마워. 황태자도 오늘 너무 멋있단다.”
환하게 웃는 칼라일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 난 시선을 들어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본 난 의아함에 눈썹을 꿈틀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멍했다. 초점은 살짝 흐린 듯했다.
그러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당황한 듯한 그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흠, 오늘 정말 아름답소. 황후.”
“감사합니다. 폐하.”
그의 시선이 귓불을 훑고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고 나올 줄 몰랐는데. 역시 잘 어울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가 선물한 것이니 하지 않을 거라 여긴 듯했다.
하지만 난 블랙 다이아몬드를 그의 선물이라 여겨 착용한 것이 아니었다.
“황후 책봉 뒤 폐하와 함께 나가는 첫 공식 석상입니다. 시끄러운 정세이니만큼 화목한 황실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황후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황후의 적자인 황태자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기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황후에 대한 단단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연히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직한 나의 말에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을 느낀 듯 레이몬드의 입가에 퍼지던 옅은 미소가
사그라지었다.
그를 외면하듯 난 칼라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만 파티장으로 향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느릿하게 답한 레이몬드는 시선을 거두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아 오는 손길. 장갑 낀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체온이 전해
져왔다.
간절하게 매달리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이상해지는 기분에 나는 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며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142 화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가 파티장을 울리고 큰 문이 활짝 열렸다.
레이몬드와 함께 첫발을 내딛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샹들리에였다.
황성에서 가장 큰 파티홀인 사파이어 홀의 샹들리에답게 장식된 수많은 보석들이 천장으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2 층 계단 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6 년 만에 돌아온 황궁에서의 파티.
긴장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레이몬드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홀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며 예를 표했다.
그들의 사이를 지나 중앙에서 멈춰 선 난 레이몬드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위엄있는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모두 일어나라.”
귀족들이 몸을 일으키고 모든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선망과 탐색, 그리고 욕망. 수많은 감정들이 점철된 시선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유쾌하진 않은, 숨통을 조여오는 눈빛들이었다.
표정을 갈무리하던 그때 내 손을 꼭 잡아 오는 힘이 느껴졌다.
당연히 레이몬드는 아니었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자 잔뜩 긴장한 칼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선 것도, 샅샅이 탐색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을 한 번에 받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으니 무섭고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해.
난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주는 대신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응원을 해 주듯이.
칼라일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괜찮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자 굳어있던 아이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렇게 칼라일이 안정을 찾은 때 레이몬드가 말을 이었다.
“오늘 파티는 모두가 알다시피 황후와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레이몬드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니 오늘은 황후가 파티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이 좋겠소.”
“예, 폐하.”
난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뜻깊은 자리에 축하를 하기 위해 모여준 것에 참으로 고맙네. 이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마침내 이렇게 황실이 안정을 찾게 되어 참으로 기쁘네. ……파티를 즐겨주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파티장엔 은은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난 레이몬드와 함께 상석으로 향했다.
황금빛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하나둘 인사를 올리기 위해 다가왔다.
그중 제일 먼저 인사를 올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책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크로프트 공작.”
난 환하게 화답했다. 헬란이 아버지의 선물을 따로 챙기고 귀족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새롭게 재상이 된 파르앙 후작부터 돌아온 셀린느 후작까지. 나와 칼라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선물들을
바쳤다.
그렇게 한참 인사를 받던 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편한 미소를 지었다.
연미복을 깔끔히 차려입은 제레미가 우리의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드로이트 공작!”
그를 보고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차분하던 칼라일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칼라일이 밝은 웃음을 짓던 그때, 줄곧 조용히 있던 레이몬드가 입술을 열었다.
“드로이트 공작. 아직 공작가의 일이 소란스러울 텐데 이리 참석해 주어 고맙군.”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어쩐지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힐긋 옆을 보자 무감한 표정 속에서 스민
불쾌함이 엿보였다.
레이몬드가 제레미를 싫어했다.
둘을 떨어뜨려 놓는 게 좋겠어.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난 레이몬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인사는 이쯤 받았으니 칼라일을 귀족 영식들이 있는 곳으로 귀족 영식들에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귀족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칼라일은 친한 귀족 또래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기회에 먼저 다가가 친분을 쌓는 것이 좋다.
칼라일이 다 자랐을 무렵엔 그들이 작위와 가문을 물려받을 가주가 될 테니까.
나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몬드의 눈썹 끝이 조금 올라갔다.
“……황후는 안 가시오?”
“전 귀부인들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돌아온 이상, 사교계 쪽의 평판이나 소문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나도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
레이몬드는 제레미를 힐끗 보고는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나와 제레미 둘을 남겨 놓고 간다는 것이 몹시 불만인 듯했다.
“폐하, 황태자를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 불만을 내가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있는 이상 제레미와 인사를 나누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시오스 가문을 무너뜨린 증거가 제레미에게서 나왔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라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 이리 오거라.”
“예, 폐하.”
손을 마주 잡은 레이몬드와 칼라일이 자리를 떠나고, 난 제레미를 보았다.
“드로이트 공작, 오랜만이오.”
“황후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난 잘 지냈네. 그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진작에 전해야 했는데…….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미처
그대를 찾지 못했어. 미안하네.”
제레미는 오랜만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제게 서신을 보내주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피닉스 상단을 통해 선물도 받았으니 그것
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내가 직접 전하진 못했지. 드로이트 공작 그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잘 지내시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보다……. 오늘 1 황자도
파티에 참석하였군요.”
제레미의 말에 난 에드먼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석하지 않으면 더 많은 말이 나왔을 걸세.”
에드먼드는 상석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경직된 얼굴과 그와 거리를 두고 있는 귀족들.
따돌림을 예상했었지만 그렇다 하여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직접 보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자숙을 명받은 리제나까지 파티에 오지 못했으니 이 넓은 파티장이 더욱 힘들 것이다.
“어른들의 일이 어떻든……. 1 황자까지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마음은 없어. 최소한 황자로서의 삶은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네.”
주변을 의식해 속삭이듯 말하자 왜인지 제레미의 얼굴빛이 좋지 못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고 곤란해 보이기도 했다.
“드로이트 공작?”
의아함에 그를 부르자 제레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1 황자 전하의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좋진 못해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 모든 일이 안정 되길 바라고 있을 뿐이네.”
“……저도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기를 바랍니다.”
제자리?
이상한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린 제레미는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인사를 하곤 물러갔다.
왜 저러지.
어딘지 어색한 그의 뒷모습을 보던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귀부인들이 아닌 1 황자에게로 향했다.
“에드먼드.”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먼 곳을 보고 있던 1 황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에드먼드뿐만 아니라 주변에 선 귀족들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1 황자의 외조부가 크로프트 공작가를 모함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허니 크로프트 공작가 출신인 내가 1 황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악질적인 소문에 힘을 실어줄 마음은 없었다.
“황후 폐하.”
내가 에드먼드의 앞에 서자 멈칫하던 에드먼드는 곧장 약소한 예를 갖추었다.
그 순간 귀족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보란 듯이 난 한 걸음 다가가며 에드먼드의 손을 잡았다.
“에드먼드,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이렇게 파티에 와 주어 진심으로 고맙구나.”
고개를 든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에드먼드 역시 귀족들과 생각이 같았던 모양이다.
하긴 세간에서 그리 시끄럽게 시오스 가문의 죄목을 떠들어댔으니 눈치 빠른 에드먼드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테지.
에드먼드에게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만든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모든 것을 포용할 순 없었다.
그만큼 착하지도 리제나의 모든 죄를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으니까.
난 굳어있는 에드먼드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에 정신이 돌아온 듯 경직되어 있던 에드먼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덧씌워졌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축하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평소 저를 많이 챙겨주시는데 아프다 하여 이런
자리를 빠질 순 없지요.”
“황자가 그리 말해주니 내 앞으로도 더욱 신경 써야겠구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감사하다니, 에드먼드. 너의 뒤엔 언제나 나와 황제 폐하께서 있다는 것을 잊지 말렴.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황후궁으로 오거라.”
나는 일부러 귀족들이 정확히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지금 한 말은 선을 넘지 말라 귀족들에게 하는 경고였으니까.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내 너에게 최악의 어미는 되지 않겠다, 했던 말. 그 말은 지킬 것이다.”
에드먼드의 손을 놓기 전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에드먼드를 뒤로하며 몸을 돌린 난 연신 눈을 빛내고 있는 귀부인들에게 다가갔다.
“황후 폐하.”
삼삼오오 모여있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들을 둘러본 난 작위가 가장 높은 파르앙 후작 부인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었다.
“파르앙 후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파르앙 후작이 수도로 올라온 지 한참 되었지만 후작 부인은 어떤 사교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었다.
하여 파르앙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십 년 만이었다.
“황후 폐하. 진즉 인사를 올렸어야 했는데 제가 몸이 성치 않아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후작 부인의 오랜 지병은 유명했다.
파르앙 후작이 권력을 다 포기하고 시골 영지로 내려갔던 이유 중에 하나에 후작 부인의 지병도
있었으니까.
“아니네. 몸이 좋지 않은데도 이렇게 와 준 것이 더 고마운 일 아니겠나. 오히려 내가 그대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어. 내 황궁의에게 일러 통풍에 좋은 약을 보내라 하겠네.”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치자마자 귀부인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지금 하고 계신 장신구가 그 유명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맞는 것이지요?”

143 화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맞네. 폐하께서 오늘 내게 선물하신 것이지.”
“와…….”
“블랙 다이아몬드라니. 그림 속에서만 보았지 이렇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귀부인들은 눈을 크게 떴고 아직 어린 영애들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눈을 반짝였다.
“블랙 다이아몬드가 제 주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황후 폐하.”
백작 부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가문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 큰 백작
가문은 아닌 듯했다.
그녀에게 의례적인 미소로 화답한 난 변경백의 부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입술을 열려던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나 아끼시는데 어쩜 그런 소문이 돈 것인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고개를 돌리자 틀어 올린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그리고 심술 궂게 주름진 얼굴과 익숙한 녹안이 눈에
띄었다.
비스테인 백작 부인이구나.
리제나의 곁에서 내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비스테인 영애의 모친이자 시오스 전 후작의 동생인
여자였다.
시오스 후작의 죄가 크다 하나 삼 대를 멸하는 형벌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동생은 무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할 줄이야.
황후와 황태자의 첫 번째 공식 석상이니만큼 수도의 모든 귀족들에게 파티 초대장이 돌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가 있다면 시오스 가문이 무너진 지금 파티에 오진 않았을 텐데.
난 시오스 전 후작과 리제나를 떠올리게 하는 비스테인 백작 부인의 녹안을 보며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평정을 가장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녀의 녹안에 번뜩이는 적의가 선명했다.
목숨 걸고 내게 복수라도 하러 온 것은……. 당연히 아닐 테고.
그럴 만한 용기도 담력도 없는 사람일 테니까.
소문이란 단어를 꺼낸 걸 보니 무언가 들은 것이 있는 듯했다.
“소문이라니……. 무슨 말이 돌았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누군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꺼냈다.
얼핏 보면 헛소리 말라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의도적으로 물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좁아진 미간과 달리 몸은 비스테인 백작 부인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그것이, 저도 그저 소문으로 들은 것이라……. 황후 폐하께서 노하실까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비스테인 백작 부인은 내 눈치라도 보듯 어깨를 좁히며 시선을 낮추었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 무어라 퍼붓기라도 한 태도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그 소문이란 것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대체 무엇이기에 황후가 역정을 낸다는 걸까.
그리고 역정을 낸다는 것은 황후에게 좋지 못한 소문일 게 분명할 테니 어느 누가 흥미를 가지지 않을까.
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비스테인 백작 부인.”
“예, 황후 폐하.”
“내 화내지 않을 테니 그대가 들은 소문이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황후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편히 말하겠습니다.”
백작 부인은 기다렸다는 입꼬리에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황궁에서 황후 폐하와 폐하께서 합방을 일부러 미루고 있다는 황망한 소문이 돈다고 하지
뭡니까.”
별거 아닐 것이라 가볍게 듣던 난 순간 손을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황후가 되었지만 난 그와 진짜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리제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은 계약
결혼에 가까운 것이었을 뿐이다.
허니 당연히 합방은 없었다.
어차피 황후와 황제가 늘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아니었기에 합방 날짜를 암묵적으로 미루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합방 날짜를 일부러 잡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최측근들뿐일 텐데.
난 재빨리 당황스러움을 숨겼다. 그때 귀부인들이 하나둘 말을 꺼냈다.
“음, 당연히 합방을 치르신 줄 알았습니다만…….”
“큼, 황실의 일이라곤 하나 부부간의 사생활이 아닙니까. 그리고 확실치도 않은 근거 없는 소문인
듯합니다.”
“맞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황후로 책봉된 지가 언제인데요. 애초에 과거 이미 부부 사이였던 두 분이
아닙니까.”
모두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소문이 진짜냐는 듯이.
내 앞에서야 내 편을 들고 있지만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않는다면 뒤로 소문을 더욱 부풀릴 것이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이상하다며.
난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합방 날짜를 아직 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네.”
“네?”
놀란 듯 귀부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내가 황후가 되기 직전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했었지 않나.”
나는 일부러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 그 부상을 치료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네. 아직도 치료 중이고……. 하여 폐하께서 일부러 합방
날짜를 미루고 계시네.”
차분히 말하자 놀랐던 귀부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 그랬었지요. 근래 너무 많은 일이 터져 황후 폐하의 부상을 잊고 말았습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이리 무리하시다 혹 또 상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뀐 귀부인들이 염려 가득한 눈빛을 했다.
“많이 좋아졌으니 괜찮네.”
“다행입니다. 황후 폐하의 부상을 걱정하여 폐하께서 합방 날짜를 일부러 미룬 것인데 이렇게 이상한
소문이나 만들다니 참으로 할 짓 없는 사람들이 많나 봅니다.”
누군가 비웃음을 흘리며 비스테인 백작 부인을 흘겨보았다.
그에 비스테인 백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는……! 그저 들은 이야기를 한 것일 뿐입니다.”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황실의 보물까지 선물하셨는데 아무리 들은 이야기라 하여도 걸러
말해야겠단 생각은 하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무례했습니다.”
“전……,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아니네. 그대에게 말하라 한 것은 나이니 신경 쓰지 말게나,”
자애로운 미소를 그리자 귀부인들의 더욱 비스테인 백작 부인을 차갑게 비웃었다.
“……황후 폐하. 전 몸이 안 좋아 이만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사그라지지 않는 귀부인들의 싸늘한 태도를 견디지 못하겠는지 비스테인 백작 부인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황후 폐하의 몸이 괜찮아지셨으니 곧 합방 날짜가 잡히겠군요. 황태자 저하께서도 계시지만 저는 황후
폐하를 닮은 황녀 전하께서 태어나신다면 참으로 예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거기다 딸이 태어나면 가족의 분위기가 더욱 화목해지지요.”
다복하고 화목한 황실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 귀부인들은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나를 닮은 예쁜 딸.
그들은 나와 레이몬드의 사이가 좋다고 믿고 있으니 기분 좋으라 한 말이겠지만 내 속은 더욱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합방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말이 나오기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고 미룰 순 없을 것이다.
보여주기식이라도 필요하겠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의 말을 웃어넘기며 샴페인 잔을 든 그때, 파티장에 왈츠곡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자들이 자신의 파트너를 찾아와 춤을 청했다.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하나둘 떠나자 한결 편안해졌다.
억지웃음을 더 이상 짓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야 좀 편해 보이십니다. 황후 폐하.”
파르앙 후작 부인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녀는 깊은 눈동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후작 부인은 내가 어릴 적부터 봐 온 분이었기에 딱히 숨길 마음도 없었다.
“조용해지니 한결 편하군. 다들 어쩜 그리도 속사포로 말들을 하는지. 숨은 언제 쉬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네. 왈츠 곡이 끝날 때까진 쉬어야겠어,”
가볍게 웃은 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이런, 황후 폐하 그러지 못하실 듯합니다.”
후작 부인은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뒤를 보라는 듯한 그녀의 눈짓에 몸을 돌리자, 내 앞으로 다가온 레이몬드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수려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황후, 첫 춤을 나와 함께 해 주시겠소.”
춤이라니.
이건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귀족들의 시선 때문만이 아니라 칼라일도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입니다. 폐하.”
난 흐리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 * *

“황후 폐하께서 하고 계신 걸 보셨나요? 설마 했는데 정말 블랙 다이아몬드가 맞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과거랑은 확실히 달라요. 지금은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눈을 못
떼십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황후 폐하를 보는 눈빛부터가 다르십니다.”
“그러니 1 황자가 있음에도 그리 빠르게 2 황자를 황태자로 만든 것이겠지요.”
“뭐 어찌 됐든, 황실의 안정이 제국의 안정이니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댄스 플로어에서 황제와 황후가 다정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구석진 벽에 기댄 제레미가 서 있었다.
완벽한 한 쌍처럼 춤을 추는 황제와 황후를 보던 제레미는 씁쓸함을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샴페인을 들이키려던 그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
그의 시선 끝에 선 사람을 다름 아닌 1 황자였다.
황후가 나선 덕에 처음보다는 주변의 분위기가 유해졌지만, 여전히 1 황자의 곁엔 사람들이 없었다.
군중 속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모습이 이상하게 그의 과거를 자극했다.
어린 시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1 황자를 보고 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최선을 다하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아마도 곧 닥칠, 1 황자의 말로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손으로 출생의 판도라 상자를 황제에게 바친 죄책감 때문일까.
황제가 1 황자에 대한 의심을 하게 한 것이 바로 그였다.
1 황자에게 어떠한 억하심정도 없지만 어찌 됐든 그의 손으로 전한 그림으로 1 황자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그 결말은 아마……. 비참하겠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괜히 무거워지는 마음에 1 황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샴페인을 들이켰지만 입 안은 어쩐지 떫기만 했다.
왈츠곡이 절정에 다다랐다. 제레미는 다시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황제와 함께 하는 모습에 씁쓸해하던
아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엘리야에게도 1 황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거겠지.
너무도 큰 사안인 데다 1 황자에 대한 엘리야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엘리야는 1 황자를 리제나와는 별개로 생각하는 듯했다.
리제나가 엘리야와 칼라일을 모두 죽여버리려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결정이었다.
뭐 그녀의 성품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가.
엘리야라면……. 1 황자의 목숨은 구제해 줄 것이다.
황제에게 판도라 상자를 전한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1 황자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긴 바라지 않았다.
제레미가 결정을 내린 그때, 왈츠 곡이 끝났다.
엘리야는 황제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에서 내려왔다.
그녀에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은 기회가 없을 듯했다.
그가 가까이만 가도 경계하듯 저를 바라보는 황제 때문에라도.
그리고 보여주기식이라 하여도 다정한 한 쌍의 부부를 계속 보는 것은 그에게 고역이었다.
제레미는 내일 다시 황궁을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파티장을 조용히 떠났다.

144 화

오랜만에 열린 황성의 파티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파티가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한 나였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나 피곤함이 몰려왔다.
옷을 갈아입은 난 칼라일의 방으로 향하다가 막 칼라일의 방에서 나오는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파티에 칼라일은 휴게실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하여 레이몬드가 칼라일을 안고 돌아온 것이었다.
“칼라일은…… 다시 잠들었나요?”
돌아오는 길에 잠에서 잠시 깨어났었는데.
“깊이 잠들었소. 깨우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군.”
그렇다니 굳이 방에 들리지 않아도 될 듯했다. 칼라일의 방문에서 시선을 거둔 때 레이몬드가 말했다.
“황후, 오늘 피곤했을 테니 푹 쉬시오. 난 이만 돌아가겠소.”
그는 곧장 돌아가려는 듯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난 멈칫하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계단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반듯한 미간을
좁혔다.
자정이 훌쩍 넘은 새벽 밤.
황후궁에 황태자를 데려다 준 황제가 굳이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기에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그와 난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었으니 돌아감이 맞지만 파티장에서 들었던 말이 신경을 자극했다.
황제와 황후가 합방을 미루고 있는 게 아니냐 했던 의심.
그 말을 퍼뜨린 것은 황제와 황후궁의 궁인들일 것이다.
함부로 말을 흘리지 못하게 경고를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계속 이렇게 거리를 둔다면 결국 말이 나올
것이다.
리제나와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만을 생각하느라 남들의 시선은 놓쳐 버린 내 실수였다.
레이몬드와 나의 속사정이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관계는 완벽해야 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난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그를 불렀다.
“폐하.”
나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주무시지요.”
순간 레이몬드의 눈이 커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눈빛에 풍랑이 일었다.
설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진심이냐.”
설마 했는데 그는 정말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큼, 목을 가다듬은 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인들을 힐끗 보았다.
내 눈치를 읽은 그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궁인들을 훑은 그가 방금과는 달라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궁인들을 의식해 말한 것이란 걸 눈치챈 듯했다.
조금 씁쓸해 보이던 그는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는 게 좋겠군.”
“그럼 제 방으로 가시지요. 폐하.”
은근히 따라붙는 궁인들의 눈길을 뒤로하며, 난 레이몬드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 * *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래.”
침실을 정리해준 시녀들이 방을 나가고 침실엔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궁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내가 그를 불러들였건만 왜 이리 불편하지.
따지고 보면 그와 침실을 함께 쓰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잠옷 위로 걸친 숄을 여민 그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 궁인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데.”
고개를 돌리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오늘 파티에서 폐하와 저의 합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합방을 피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사실 진작에 신경 썼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른 일이 많아 안일하게 생각했던 제 잘못이죠.”
“……그 말은 진짜 합방 날짜를 잡자는 거야?”
“칼라일이 황태자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진……. 폐하와 저의 사이가 돈독해 보여야 합니다. 허니
사이좋은 부부답게 종종 합방을 해야겠지요.”
“…….”
난 그가 오해하지 않게 바로 덧붙였다.
“물론 합방 날짜를 잡자는 것이지 정말 폐하와 동침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벽한 부부인 척을
하자는 것뿐이니까요.”
“……그래, 알겠어. 다른 뜻이 있다 오해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작은 한숨을 내쉰 레이몬드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옷을 벗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난 한발 뒤로
물러났다.
“뭐 하시는 겁니까, 방금 제게 오해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쳤냐는 듯 소리치자 단추를 풀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내일 아침까지 연미복을 입고 있으란 건가? 옷을 갈아입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일 텐데.”
“…….”
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와 달리 아직 벗지 않은 연미복이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엔 시녀들이 준비해놓은 레이몬드의 잠옷이 있었다.
이런.
명백한 나의 과민반응이었다.
왜 그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까먹었지.
너무 피곤해서인지 둘만 침실에 남았을 때부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민망한 얼굴을 들킬까 난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말했다.
“……드레스룸에서 갈아입으세요.”
“알겠다.”
다행히도 레이몬드는 별다른 말 없이 잠옷을 들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이 닫혔을 때 난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느끼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하아.”
궁인들의 시선 따위 상관 말고 돌려보낼 것을.
불편한 기분에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황제가 돌아가면 내일 온 궁에 황제와 황후가 부부
싸움을 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황제가 황후에게 새벽에 쫓겨났다고 말이다.
잠들어 버리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겠지.
“……내가 소파에 자야겠지.”
그를 싫어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래도 일국의 황제를 소파에 재우는 것은 모양새가 너무 좋지 못할 테니
말이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은 처음이지만 넓고 푹신하니…… 하룻밤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때, 드레스룸의 문이 열리며 잠옷으로 갈아입은 레이몬드가 걸어 나왔다.
“아직도 그렇게 서 있네. 설마 내일 아침까지 이렇게 같이 서 있자는 건 아니겠지?”
미묘한 기분에 긴장한 나와 달리 레이몬드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피식, 흘리는 웃음엔 장난기까지 서려 있었다. 농담을 할 만큼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하고 편한 듯했다.
하긴 편한 게 당연할지도.
내가 너무 쓸데없이 긴장한 것이다. 파티 시작 때부터 긴장했던 것이 덜 풀린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와 시시덕대며 농담을 주고받을 마음은 없었다.
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담백하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자.”
“네…… 폐하?”
그에게 침대에서 자라 말하려던 난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대로 향한 레이몬드는 베개를 들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소파에 큰 몸을 뉘었다.
넓고 긴 소파이긴 했지만 그의 큰 키를 다 받쳐줄 순 없었다.
소파 밖으로 빠져나온 긴 두 다리를 황망히 보던 난 그에게 다가갔다.
“폐하,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레이몬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몸을 옆으로 돌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침대에서 자면 넌 어디서 자려고? 설마 나보고 널 소파에 재우란 거야?”
“……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주무시는 것이 더 불편합니다.”
“나도 그래. 네가 소파에서 자면 마음이 불편해서 잠 못 자.”
그는 일어나지 않을 듯 고집스러운 눈빛을 했다.
“폐하…….”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니 그럼 둘 다 침대에서 잘까?”
그의 물음에 난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었다.
같이 자다니.
그와 한 침대를 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를 배려하여 침대를 내어주려 했지만 정 싫다면 그만인 것이다.
난 표정을 갈무리하며 소파에서 걸음을 물렸다.
“아뇨. 폐하께서 소파가 이리 편하시다니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허면 잘 주무십시오.”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등 뒤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 못 들은 척 침대로 향했다. 밝은 등을 전부 끄고 큰 촛불 하나만 남겼다.
소파 밖으로 나온 두 다리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말자.
내 배려를 거절한 것은 그였다.
같은 방에 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생각을 떨친 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긴 밤이 되지 않을까 했던 걱정과는 달리, 밀려드는 피곤함에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 * *

방 안이 고요해지고 엘리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었을 때, 레이몬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잘 자네.”
속삭임에 가까운 그의 낮은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얼굴로 긴장을 할 때는 언제고 엘리야는 거의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많이 피곤했구나 싶으면서도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꼬박 밤을 새울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인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녀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엘리야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감정의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한 공간에 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었다.
혹 실수를 하진 않을까.
그로 인해 그녀가 불편함을 느끼진 않을까.
그리고 막을 수 없이 그녀를 향해 뛰는 심장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등을 묻으며 기대앉은 그는 긴 숨을 내쉬며 목을 뒤로 젖혔다.
그는 잠든 엘리야의 숨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지금은 엘리야 말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긴 밤이겠군.”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보았다.
하늘 위로 뜬 만월의 은빛마저 엘리야를 떠올리게 해,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렇게 은빛 달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엘리야의 옅은 숨소리와 함께 긴 밤을 지새웠다.

145 화

“으음…….”
노곤함에 몸을 뒤척이던 난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침실에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가 한참 전에 뜬 듯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있어야 할 레이몬드는 방 안 어디에도 온데간데 없었다.
“……돌아간 건가.”
날 깨우지도 않고?
잠깐 멍하니 멈춰 서 있던 난 침대로 다가가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곧 방문이 열리며 헬란이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헬란, 폐하께선……. 돌아가신 건가?”
“네. 황태자 전하와 아침을 드시고 태양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칼라일과 아침을 드셨다고? 지금이 몇 시지?”
“정오가 다 되었습니다.”
헬란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자다니.
황후로 살면서 한 번도 늦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어젠 레이몬드까지 함께 있었는데.
긴장했던 것과 달리 너무 숙면을 취한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레이몬드가 모두 보았겠지.
당황한 얼굴을 본 헬란이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어제의 파티로 황후 폐하의 심신이 피곤하실 거라며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도 깨우지 그랬니.”
“송구합니다.”
레이몬드가 칼라일과 아침을 먹고 갈 동안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는 게 좀 민망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 별수 없는 것이지.
머리를 쓸어넘긴 난 씻고 치장을 했다.
어제와 달리 수수하게 치장을 끝낸 난 보석함에 놓인 블랙 다이아몬드에 시선이 멈추었다.
“블랙 다이아몬드를 착용하시겠습니까?”
내 시선을 오해한 시녀가 물어왔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귀한 것이니 보물함에 잘 넣어두렴.”
귀족들에게 내보이기 위해 착용한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 지금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네.”
심플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한 한 난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모습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이미 시간은 정오가 훌쩍 넘어있었다.
“헬란, 칼라일의 수업은 시작했나?”
“네. 아까 시작하셨습니다.”
“그럼 수업이 끝나면 간식을 챙겨 주라 시녀에게 말해 놓으렴. 난 아버지를 뵈러 다녀와야 할 거
같으니까.”
오늘 아버지를 뵙고 칼라일의 스승을 직접 알아볼 생각이었다.
여태까진 예법 수업만 받고 있었지만, 칼라일이 황태자 자리에 오른 지 이제 수일이 흘렀으니 제대로 된
스승을 찾아야 했다.
제왕학과 외교술 등 배울 것이 산더미였으니까.
“예, 황후 폐하.”
헬란의 대답을 들으며 화장대에서 일어나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드로이트 공작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드로이트 공작이?”
제레미가 갑자기 왜.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제레미가 아무런 용건도 없이 방문을 청할 리는 없었다.
“응접실로 모시거라.”
외출용 망토를 가져온 시녀를 물린 난 응접실로 향했다.

* * *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게.”
난 미소를 지으며 제레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와 앉지.”
“예, 황후 폐하.”
제레미는 맞은 편에 앉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듯했다.
“그대가 갑자기 찾아온 일이면 가벼운 사안은 아닐 것 같아 미리 시녀들을 내보냈네.”
“……배려 감사합니다.”
제레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서려 있었지만 눈빛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가 전하려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난 찻잔을 드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이리 갑자기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1 황자 전하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1 황자?”
에드먼드가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제레미는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1 황자의……. 일이라니. 혹 리제나가 무슨 일이라도 꾸미려는 건가?”
칼라일이 황태자가 되었으니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일을 꾸미기엔 가진 게 없을 텐데.
그녀가 아무리 분하다 해도 우리가 주시하고 있을 걸 뻔히 아는 지금 이 시기에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란 거지.
난 제레미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제레미는 곤란한 낯빛으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드로이트 공작?”
그를 부르자 제레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1 황자 전하의 출생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습니다.”
“……출생이 석연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무래도 1 황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핏줄이 아닌 듯합니다.”
뭐라고……?
난 순간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멍청하게 굳어 버린 난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수초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1 황자가 레이몬드의 자식이 아니라니.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드로이트 공작. 그대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인가.”
제레미에게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말이었다.
제레미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은 아버지의 비밀 금고에서 1 황자의 초상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초상화 뒷면엔 죽은 전 황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론…….”
난 말끝을 흐렸다.
그것만으로 이런 엄청난 가정을 세우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려 했지만 죽은 드로이트 전 공작의 비밀
금고에서 나왔다는 것이 걸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1 황자에게 죽은 황태자의 이름을 적어놓진 않았을 것이다.
그자라면 분명 그것이 1 황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에 적어놨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황태자와 1 황자의 연관이라면 하나뿐이겠지.
출생의 비밀.
난 시린 긴장감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 초상화를 가져왔나?”
“그것은 이미 황제 폐하께 바쳤습니다.”
“뭐?!”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제레미가 움찔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는 건가?”
“……네. 너무도 큰일이었기에 차마 황후 폐하께 먼저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레이몬드가 이를 알고 있다니.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아버지로 짐작되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전
황태자였다.
황태자라면 꿈에서도 이를 가는 사람이었기에 레이몬드가 이 사실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무어라 하셨나?”
“직접 알아보시겠다 하였습니다. 제게 함구령을 내리셨고요.”
함구령을 내렸는데 내게 말하는 것은 황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가 나와 각별한 사이라 할지라도 황명을 어겨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게 말했다는 것을 레이몬드가 알게 된다면……. 제레미를 죽인다 해도 난 말릴 수 없었다.
“……헌데 왜 내게 말하는 것인가.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아신다면 그대는 죽은 목숨이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리제나 시오스뿐만 아니라 1 황자 전하께서도…… 살아남지 못하실 테니까요.”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말 1 황자가 죽은 황태자의 아들이라면……. 레이몬드에게 한 줄기 자비조차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가진 죽은 황태자에 대한 감정의 골은 사라지지 않을 상처처럼 깊고 깊었다.
허니 죽은 황태자의 피가 흐르는 1 황자를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 황자가 무슨 죄가 있을까.
정말 이 끔찍한 일이 사실이라면 1 황자 역시 레이몬드 만큼이나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라 믿었던 사람이 친부가 아니고, 반정으로 죽은 황태자가 친부라 밝혀진다면 1 황자는 모든 걸
잃는 것이다.
그 까마득한 절망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하아…….”
갑작스럽고 엄청난 이야기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애초에 죽은 황태자라니.
리제나, 그녀가 정말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벌였을까.
이성적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 알려줘서 고맙네.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너무 혼란스러워 제레미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제레미가 조용히 응접실을 나가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제나와 죽은 황태자.
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시오스 리제나, 그녀는 사교계의 꽃이라 불릴 만큼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레이몬드와 사귈 당시에도 리제나가 아깝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죽은 황태자와 리제나의 사이가 어땠더라.
죽은 황태자의 방탕한 사생활은 사교계에서 유명했다.
귀족 영애, 미망인,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 귀부인까지.
그 망나니 같은 놈은 자신의 눈에 띄는 여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리제나와 접점이 있었던가.
난 흐릿한 과거의 기억에 미간을 좁혔다.
죽은 황태자가 레이몬드를 자극하려 리제나에게 몇 번 시비를 건 적은 있었지만 둘의 사이에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적은……
응접실을 빙글빙글 돌던 난 순간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에 걸음을 멈추었다.

<i>‘술집에서 황태자 저하께서 시오스 가문의 영식을 때렸다는 이야기 들으셨습니까?’</i>


<i>‘시오스 가문의 영식이 겁도 없이 황태자 전하께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하던데요.’</i>
<i>‘황태자 전하께서 이번엔 시오스 영애를 건드리기라도 하신 것인지, 쯧.’</i>

아주 오래전 들은 이야기였다. 레이몬드와 리제나가 사귀기 전쯤에 있었던.


그땐 죽은 황태자가 워낙 망나니인 데다 방탕한 사생활을 즐겼기에 리제나에게 집적거렸다 끝난
해프닝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만약 사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 있었던 거라면.
그 사건 이후 리제나의 동생은 사교계에서 모습을 감추었지.
사라지기 직전 죽은 황태자와 다툼을 벌였다라…….
어쩌면 리온 시오스, 그자가 리제나와 죽은 황태자와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자를 찾아야 해.”
에드먼드를 낳은 서왕국과 리제나의 동생.
두 가지 실마리에 대한 답을 찾아야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내린 난 서둘러 응접실을 나갔다.

146 화

엘리야가 피닉스 상단으로 간 그 시각.


레이몬드는 카르텔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시오스 자작이 아이를 몰래 낳을 수 있었던 건 서왕국의 선왕이 지병으로 쓰러지고 후궁들이 사원으로
기도를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시오스 자작 역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사원으로 기도를 드리러 갔고
그곳에 약 4 달 정도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은 듯합니다.”
카르텔은 길게 이어지는 말에 숨을 한 번 골랐다.
“허나 그 사원은 이미 불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오스 후작이 외진 시골에 아이를 숨겨
키웠는데, 그곳에서 아이를 돌본 사람은 전부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관련자들이 전부 죽었다…….”
“네. 사실 비밀리에 낳은 아이이니 관련자들의 입막음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나…….
유모에게까지 손을 댔다는 게 수상합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에드먼드를 측근에서 보살핀 유모를 죽인 것은 이상한 일이다.
서왕국의 왕실에 아이의 존재를 들킨 것도 아니고 제국으로 돌아와 아이의 존재를 밝히는 것인데 유모를
굳이 왜.
같이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무언가 숨겨야 할 게 있는 게 아니고선 이렇게 많은 자를 죽일 이유가 없겠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갔다.
그렇게 많은 피를 보면서 숨겨야 할 진실이라.
일단 더 이상 서왕국에서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렇다면 제국에 남은 자들에게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인데.
리제나와 시오스 전 후작이 입을 열 리는 당연히 없었다.
두 사람이 한통속으로 일을 꾸민 것일 테니까.
시오스 전 후작 부인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그녀는 현재 몸져 누워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들었다.
미간을 좁히던 그때 카르텔이 입을 열었다.
“폐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번에 제게 알아보라 하신 명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명패는 서왕국의 것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예전부터 서왕국의 왕실 하녀들이 쓰던 명패라 합니다.”
“서왕국의 왕실…….”
제레미가 준 명패는 서왕국의 것이 맞았다. 거기다 왕실이라면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자는 하나뿐이다.
리제나.
헌데 이 명패는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것도 하녀의 것을.
그녀와 이 명패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때 카르텔이 답을 하듯 말했다.
“그리고 시오스 자작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시오스 자작이 제국으로 돌아올 당시 왕실에서 일하던 하녀
하나를 데리고 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하녀의 성이 명패의 성과 일치하나?”
“아니요. 전혀 달랐습니다만……. 그 하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있습니다.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왕실에서 데려온 하녀. 드로이트 공작가에 떨어진 명패, 그리고 리제나.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것이 분명했다.
이 명패가 리제나가 데려온 하녀의 것이 맞다면, 드로이트 전 공작을 죽인 것은 리제나가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명패가 리제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체 얼만큼의 악행을 저지른 것이지.
그의 아버지의 역심만으로도 이미 죽을죄건만 그녀는 엘리야와 칼라일을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1 황자의 출생까지.
“폐하. 만약 명패가 하녀와 연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드로이트 전 공작의 암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하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었다.
죄를 물어 리제나를 깔끔하게 사형시킬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암살 사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정말 죽은 황태자의 자식이 맞는지 알아야 했다.
심증은 이미 확신에 가까웠지만, 이번 일만큼은 리제나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리제나와 그녀의 아들 에드먼드를 죽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테니까.
에드먼드가 죽은 황태자의 아들이 맞다면 절대 살려둘 순 없다. 저를 농락한 리제나는 더더욱.
“그것보다 1 황자에 대한 사실 확인이 더 중요하다. 그 하녀가 1 황자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 깊이 알아보거라. 그리고 제국 내에서…….”
레이몬드는 말끝을 흐렸다.
제국 내에서 1 황자의 출생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오스 전 후작을 잡아 와 고문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다고 입을 열까.
사실이라면 리제나는 물론이고 시오스 전 후작도 곱게 죽진 못한다.
그런 일을 방계에 알렸을 리는……. 동생이 있었어.
“동생.”
“예?”
레이몬드는 문득 잊고 있던 한 존재가 생각났다.
바로 리제나의 동생. 리온 시오스.
오래전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시오스 가문에서 리제나가 워낙 유명하여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미했던 남동생.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리온 시오스.
그의 직감이 동생이 무언가 알고 있다 외쳤다.
“카르텔.”
“네. 폐하.”
“시오스 가문의 장자 리온 시오스가 지금 어딨는지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카르텔이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가려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냐.”
카르텔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모두 나가 있었기에,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한참 심각한 이야기에 얼굴을 굳히고 있던 레이몬드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가 왔다고?”
“네. 혼자 오셨습니다.”
칼라일이 그를 보기 위해 직접 찾아오다니.
칼라일이 그를 먼저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카르텔과 시종장이 움찔할 정도였다.
레이몬드는 시종장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나를 갑자기 왜…….”
카르텔은 처음 보는 레이몬드의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에 눈썹을 꿈틀했다.
“……폐하, 우선 황태자 전하를 안으로 모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카르텔의 말에 레이몬드의 정신이 돌아왔다.
카르텔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칼라일이 밖에 서 있는 시간만 늘어나는 것이다.
“어서 데려와.”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카르텔이 집무실을 나가고 칼라일이 바로 들어왔다.
“예는 갖추지 않아도 된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이 입술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그는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며 아이와 시선을 맞추자 칼라일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폐하.”
“괜찮으니 고개 들렴.”
그와 똑같은 검은 눈동자가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칼라일은 어색한지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지만, 예전처럼 겁을 먹진 않았다.
그의 생각인 걸까.
어쩐지 어제부터 칼라일이 그를 보는 눈빛이 묘하게 달라진 거 같았다.
어색해하긴 하지만 불편해하는 것 같진 않달까.
착각일지 모르지만, 얼핏 그에 대한 옅은 호감까지 느껴졌다.
함께 목검으로 놀다 칼라일이 발목을 다쳤었다. 그 이후로 칼라일이 그를 더 싫어하게 된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일부러 다치게 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맞으며 점점 아버지란 존재를 혐오하게
되었으니까.
절대 같은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이몬드는 칼라일을 다치게 했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폐하, 바쁘신가요?”
“……아니. 괜찮다.”
상념에 잠기던 레이몬드는 맑은 목소리에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헌데 황태자, 어머니는 함께 오지 않으신 것이냐.”
“네. 어머니는 잠시 외출하셨어요. 그래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음…….”
칼라일은 씩씩하게 말하다 갑자기 끝을 흐렸다.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레이몬드의 눈치를 살폈다.
무서워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 부끄러워 보였다.
할 말이 있는 게 확실하지만 그걸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듯 말이다.
혹시 심심해서 온 것인가.
심심해서 내게?
심심하다 하여 그에게 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분명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니.
레이몬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물었다.
“황태자, 오늘 주방장이 황태자가 좋아하는 쿠키를 구웠던데 이곳에서 함께 먹고 가겠느냐?”
“네, 좋아요!”
묻자마자 칼라일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했다.
씨익 웃는 얼굴을 보니 말도 안 되는 그의 가정이 맞은 듯했다.
칼라일이 심심해서 그를 먼저 찾다니.
그와 엘리야의 하나뿐인 아들이 말이다.
레이몬드는 이유가 무엇이든 칼라일이 그를 먼저 찾았다는 것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큼.”
레이몬드는 익숙지 않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목을 가다듬었다.
“시종장. 쿠키와 주스를 휴게실로 가져와라.”
“예, 폐하.”
칼라일의 손을 잡고 선 레이몬드가 집무실을 나가고, 그를 흐뭇한 눈빛으로 보던 시종장도 서둘러
주방장에게 시종을 보냈다.

* * *
<i>‘시오스 리온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고 리제나의 하녀에 대해 알아봐.’</i>
<i>‘하녀라면…… 그 백발의 하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i>

범상치 않아 보였던 리제나의 하녀.


피닉스 상단으로 가면서 난 리온 시오스 말고 하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한 하녀의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리제나의 곁에 머문 시간이 짧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경계의 선을 두는
그녀가 그 하녀는 늘 곁에 두고 있었으니까.
수족처럼 부리는 자라면…….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i>‘맞아. 하녀의 출신이 어딘지, 리제나의 곁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든 것에 대해 알아봐.’</i>

하여 난 루몬트에게 하녀에 대해서도 샅샅이 알아보라 명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오니 벌써 오후 시간이 다 가고 해가 지고 있었다.
“황후 폐하, 행정궁으로 가시겠습니까?”
황궁에 마차가 들어서자 헬란이 물어왔다.
원래 오늘 아버지와 칼라일에 스승에 대해 상의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니. 황후궁으로 가자꾸나. 칼라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녁까지 함께 먹지 않으면 서운해할 테니 난 곧장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선 폐하를 만나러 태양궁으로 가셨습니다.”

147 화

“태양궁에 갔다니……. 폐하께서 황태자를 부른 것이냐?”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폐하를 뵙고 싶다며 태양궁으로 가셨습니다.”
“황태자가?”
칼라일이 먼저 갔다니.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인 듯했다.
시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으니까.

<i>‘폐하는…… 많이 바쁘죠?’</i>
<i>‘어머니, 폐하는 언제 쉬어요?’</i>
<i>‘폐하는 그럼 이곳엔 바빠서 못 오는 거예요?’</i>

문득 칼라일이 드문드문 물어왔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나.”
레이몬드와 놀다 발목을 삐끗했던 그 날 이후 갑자기 저런 질문들을 내게 하곤 했었다.
그 전엔 레이몬드에 대해 한마디 물은 적도 없었다.
그날 같이 놀면서 레이몬드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 건가.
하지만 내게 대놓고 레이몬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 칼라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뜻밖의 소식에 잠시 황후궁 앞에서 멈춰 서있던 난 몸을 돌렸다.
“태양궁으로 갈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 칼라일을 데리러 가기 위해 일단 태양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i>‘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선 만찬룸에서 저녁을 드시고 계십니다.’</i>

시종을 따라 난 만찬룸으로 향했다.


익숙한 만찬룸의 문 앞에서 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이몬드와 끝을 냈던 곳.
새삼 떠오르는 기억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시종이 막 입술을 열려던 그때, 만찬룸의 문이 열리며 주방 하인이 빈 트레이를 들고 나왔다.
음식을 놓고 나오는 길인 듯했다.
하인이 물러가고 시종이 다시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
그때 열린 만찬룸의 문틈 사이로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했어요. 아버지는 왜 엄마랑 나랑 같이 살 수 없는 건지…….”
난 손을 들어 시종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듯 손을 흔들자 궁인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문 앞에서 물러갔다.
난 열린 문틈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칼라일의 속마음을 듣기 위해.
“엄마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해서 우리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했지만…….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어요.”
덤덤한 칼라일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다른 형들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몇 달에 한 번씩이라도 집에 왔는데……. 전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건…….”
“그리고 엄마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슬퍼했어요. 그래서……. 기다려도 아버지가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 궁금했어요. 아버지가 엄마랑 내가 싫어서 떠난 건지…….”
또래보다 의젓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칼라일을 위한 선택이라고는 했지만, 아이의 동의를 받은 적은 없다.
내가 칼라일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긴 게 아닐까.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지는 기분이다.
“그럴 리가. 절대, 절대 아니란다. 내가 가지 못했던 건……”
다급한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씁쓸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만나러 가지 못했던 건 내가 네 엄마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었단다. 아주 큰 잘못을 해서 가지
못했어.”
“잘못이요?”
“……그래. 그러니 절대 엄마와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지 말거라. 전부 내 잘못이니까.”
“음, 그럼 이젠 엄마랑 화해한 거예요?”
레이몬드의 대답은 한 템포 늦게 흘러나왔다.
“……글쎄. 네 엄마가 날 용서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란다. 그리고 나는 네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때까지 기다릴 거고.”
“음……. 어려워요.”
어른들의 사정까지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끙, 칼라일이 고민 가득한 신음을 흘리는 것이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굳은 듯 서 있던 난 입술을 깨문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칼라일.”
“엄마?!”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서일까. 칼라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난 예쁘게 웃는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밥 먹던 중이었잖니. 어서 가서 앉으렴.”
“엄마도 같이 먹어요.”
근래 일부러 엄하게 대하다 예전처럼 풀어진 모습을 보여서인지 칼라일도 편하게 말했다.
“아직……. 저녁 전이라면 함께 먹는 게 어때?”
레이몬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답지 않게 긴장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거절을 말할까 두려운 눈빛이었다.
그와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이니 칼라일을 데리고 돌아가야겠단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들었던 대화에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의 헤어짐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덤덤히 말하던 그 때문에.
칼라일이 눈높이에 맞춰 고백하던 그 말이, 다른 어떤 사과보다 더 진심으로 내게 느껴졌다.
조르듯 내 팔을 잡아당기는 칼라일을 보며 난 못 이기는 척 입술을 열었다.
“그래. 같이 먹자.”
음식까지 마련된 마당에 칼라일을 데리고 가는 것도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레이몬드의 맞은 편에 앉았다.
시종이 빠르게 내 앞으로 접시들을 올려놓았다.
칼라일의 입맛에 맞춘 듯 온통 칼라일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엄마, 이거 맛있어요.”
오리고기를 좋아하는 칼라일이 훈제 오리고기가 올라간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칼라일이 맛있다니 얼른 먹어봐야겠네.”
시선을 들다 마주친 레이몬드의 시선을 피하며 난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가장했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시작하고 나와 레이몬드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우리의 곁에서 연신 재잘거리는 칼라일 덕분에 겉보기엔 화목한, 첫 가족 식사가 이어졌다.

* * *

켈록- 켈록-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마님…….”
흐느낌이 섞인 여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윽고 흐느끼던 중년의 여인이 시선을 돌려 창가에 선
여자를 불렀다.
“자작님, 마님의 상태가…….”
여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끝을 흐렸다.
가만히 서서 창밖의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던 리제나는 여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중년의 여인은 시오스 후작가의 하녀장이자 어릴 적 그녀의 유모였던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는 시오스 전 후작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리제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힐렌. 의사를 불러와.”
“……흐읍, 예.”
힐렌이 급히 방을 나가고 리제나는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피가 섞인 기침을 연거푸 토해내며 힘없이 축 늘어진 어머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원래도 몸이 좋지 않았었다. 거기에 가문이 무너지고 아버지가 그리 되며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의사를 불러오라 했지만 리제나는 어머니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제나…….”
느리게 눈을 깜박인 어머니가 그녀를 불렀다. 리제나는 참담함을 숨기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침대 맡에 앉은 그녀는 마른 손을 꼭 붙잡으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집이 강한 아버지에게 늘 주눅이 들어 그녀에게 다정하지도 아버지의 횡포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주지도 못한 어머니였지만 큰 원망은 없었다.
그래도 어릴 적엔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은 좋은 기억들이 있었으니까.
어머니 역시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았겠지.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의식이 흐릿한 어머니에게 나직이 말하자 시선이 그녀에게로 내려왔다.
“리제나, 리제나…….”
갈라지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애타게 그녀를 부르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유언을 남기려는 것일까.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어머니에게 리제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리,제나……. 아버지께선……. 아직, 쿨럭, 소식이 없는 거니……?”
헐떡이는 숨소리와 뒤섞인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어리석게도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와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 시오스 후작가는 무너지고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곧 숨을 거둘 듯한 어머니에게 굳이 잔인한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께선 곧 수도로 돌아오실 거에요. 황제 폐하께서 다시 부르셨으니까요. 허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에요. 어머니.”
그녀의 거짓말에 어머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역시 후작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어.”
환희에 찬 얼굴로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곧 어머니는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울컥 피를 쏟아냈다.
붉은 선혈에 놀라기엔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며 매일 같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진득한 덩어리가 커질수록 리제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직감했다.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주자 축 늘어지는 어머니의 손이 보였다.
“……잠이 오는구나. 눈을 떴을 땐 리온이 돌아, 와 있으면……. 좋겠어…….”
느릿하게 말을 잇던 어머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깊은 수마에 빠져들고 리제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피 묻은 천을 꽉 그러쥐었다.
무너진 가문과 허울뿐인 자작이란 작위 하나.
그리고 그녀에게 적선하듯 떨어진 낡은 이 층짜리 저택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오늘따라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1 황자의 모친으로, 제국에서 제일 가는 권력가의 영애로 살았던 그녀의 삶이 이렇게 한순간에 비참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촛불 하나 켜진 방 안에서 리제나는 짙은 비소를 흘렸다.
“……엘리야.”
전부 그녀 때문이다.
엘리야가 돌아오고 난 뒤 모든 게 엉켜버리고 만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을 엘리야가
뺏어갔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내게…….”
이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졌다 말하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내 탓이라니.
아니, 절대 내 탓이 아니다.
애초에 레이몬드의 곁에 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맴돌기만 했던 엘리야였다.
그녀가 떠나게 되지만 않았어도 엘리야가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그녀의 자리를 뺏은 건 엘리야였다.
내 자리를, 내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인데.
왜 이번에도 모든 것을 잃은 건 자신이란 말인가.
아니, 이젠 그녀의 자식마저 모든 걸 잃었다.
엘리야의 자식이 보란 듯이 에드먼드의 자리를 빼앗았다.
“하하.”
미친 사람처럼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모든 걸 잃었다고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순 없다.
에드먼드의 자리를 뺏은 것만큼은 죽어서도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황태자의 자리를 다시 뺏어 올 수 없다면 엘리야의 아들도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리제나의 눈빛이 살기를 머금은 순간 방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방 안으로 의사가 들어오자 표정을 갈무리한 리제나는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머니의 고통이라도 덜어주게.”
“예, 자작님.”
의사에게 명한 그녀는 그만 방에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물에 씻으며 뒤에선 릴라에게 명했다.
“릴라, 일전에 말한 것을 구해오렴.”
“네.”
“그리고……. 리온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릴라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리제나는 은 대야 속, 피가 번지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48 화

“황태자, 그리 뛰다간 넘어진다. 걸어가거라.”


“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난 레이몬드와 칼라일과 함께 화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원래는 저녁을 먹고 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칼라일이 화원을 구경 가고 싶다 하여 어쩌다 보니 지금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레이몬드와 나 사이에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지만 앞서 걷고 있는 칼라일은 마냥 해맑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칼라일의 웃음소리 덕에 그래도 함께 걷는 길이 아주 불편하진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앞서가는 칼라일을 보던 난 옆에 선 레이몬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화원에 들어선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칼라일이 하는 묻는 것에 대답할 뿐 그는 내게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걷고 있지만 보이지 않은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얼마 전 그와 화원을 걸었을 때만 해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을 상기시키며 다가오려 애쓰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제 침실을 함께 쓸 때도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먼저 소파에서 잠을 청하겠다고 하였지.
그리고…….
문득 그가 일어나 돌아갔는지도 모르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자는 모습을 다 보았겠지.
한 번도 그에게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자고 있었던 것이니만큼, 그게 황실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긴 했다.
창피하기도 했고.
“앗.”
상념에 너무 깊이 빠졌던 탓일까, 난 앞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버렸다.
발이 삐끗하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순간, 팔을 잡는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황후, 괜찮소?”
나를 잡아 일으킨 사람은 당연히 옆에 있던 레이몬드였다.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의아한 얼굴이 보였다.
멀쩡히 잘 걷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돌부리를 피하지 못한 것이니 이상할 것이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그것도 그의 생각을 하다 넘어질 뻔하다니.
물론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창피했다.
낯부끄러움에 시선을 내리뜨리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낸 난 앞서 걸으려 했다.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시선을 들자 그가 평온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오늘따라 황후의 생각이 깊어 보이는 것이…… 영 안심이 되지 않아서.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소.”
“……전.”
“그저 걱정일 뿐이오. 다른 뜻은 없소.”
내가 입을 열자마자 그가 덧붙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꾸 그에게 빈틈을 보이는 것 같아 신경 쓰이는 나와 달리 그의 눈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여기서 그의 손을 거부하면 뭔가 내가 더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근데 의식하고 있는 게 정말 아닐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답은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이 맞다, 였다.
식당에서도 화원을 걸을 때도 겉으론 칼라일을 신경 쓰는 척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레이몬드의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i>‘……그래. 그러니 절대 엄마와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지 말거라. 전부 내 잘못이니까.’</i>

칼라일에게 담담히 자신의 잘못이라 말했던 그때부터 말이다.


그 말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지.
담담한 목소리 속에 스민 씁쓸함은 언제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흔들어
버렸다.
사과를 하는 것마저 자신의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것이라 그리 여겼는데…….
“황후?”
또 그에 대한 상념으로 멍해져 버렸다.
낮은 음성이 정신을 차린 난 그의 손을 잡았다. 움찔,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정말 손을 잡을지 몰랐단 기색이었다.
그리고 놀란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반사적으로 잡은 손이었다. 내가 잡고도 순간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을 만큼.
하지만 이미 잡은 손을…… 놓는 건 궁인들도 바라보는 마당에 이상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난 무덤덤한 얼굴로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잡으라 하시기에……. 불편하시다면 놓겠습……”
“아니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어머니, 여기 제비꽃이 있어요!”
우리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감돌던 그때, 신난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곧장 칼라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 조심하거라. 손을 다칠라.”
꽃을 꺾으려는 듯 손을 뻗는 칼라일에게 말하며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칼라일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신경은 그와 마주 잡은 손에 향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그에게 자꾸만 기우는 신경에 애써 답을 만들어 냈지만,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투박한 손의 감촉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었다.
묘해지는 기분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난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함께 칼라일에게 향했다.

* * *

5 일 뒤.
시오스 가문으로 시끄러웠던 신문들도 잠잠해지고 1 황자에 대해 시끄러웠던 황궁도 많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오늘, 난 오랜만에 셀린느 후작 영애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파티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이렇게 둘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셀린느 후작 부인의 몸은 요즘 어떤가? 영애.”
“황후 폐하의 은덕으로 많이 쾌차하셨습니다. 요즘은 밖으로 산책도 나가시고 가벼운 모임에도 참석하고
계신답니다.”
셀린느 후작 영애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후작 부인의 몸이 많이 좋아졌다니 정말 다행이군, 그러고 보니 요즘 셀린느 후작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리고 있어. 그대도 아는가?”
“네? 아버지가 무슨 잘못이라도……”
순간 후작 영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셀린느 후작이 유배를 갔던 전적이 있어서인지 작은 소식에도 민감한 것 같았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을 보던 난 손을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아니, 아니야. 잘못이 아니라 셀린느 후작께서 군사권을 맡은 이후로 기사들의 군기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며 칭송을 하는 것이네.”
“아……. 그런 이야기였군요.”
“셀린느 후작의 청렴결백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가 있겠나. 일전에
폐하께서도 셀린느 후작의 우직함에 대해 칭찬을 하였지.”
“폐하께서 말이신가요?”
“그래. 그러셨네.”
거짓말이 아니었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혼자 찾아갔던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레이몬드에 대한 내 감정이 아니라 칼라일 때문이었다.
그날 그의 말도 의외긴 했지만 내 눈치를 보느라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해, 그간 칼라일이 내색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기에 고민 끝에 칼라일과 레이몬드가 함께 할 시간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 식사에 나까지 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i>‘어머니가 싫으면…… 저도 싫어요.’</i>

칼라일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잠깐 지난 일을 생각하던 난 한결 편안해진 후작 영애를 보았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저희 가문을 살펴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충직한 신하에게 잘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리 고맙다면 후작도 영애도 제국을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주게.”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반쯤 농담 섞인 말에 진심을 다해 고개를 주억거리는 후작 영애를 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루몬트가 향수 사업이 호황이라며 기뻐하고 있던데 혹 힘든 일은 없는가? 루몬트가 너무 그대를 몰아
붙인다거나 말이야.”
셀린느 후작 영애의 향수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사용해보고 싶다 한 뒤로 주문이 밀려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판되고 효과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며 더욱 주문이 물밀 듯이 쏟아지고 있다 했다.
에그리타 제국은 물론이고 타국에서까지 말이다.
그렇다 보니 셀린느 후작 영애 혼자서는 당연히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을 붙여 본격적으로 향수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했었다.
루몬트가 무리하게 셀린느 영애를 몰아붙이지 않았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과하게 반짝이던 눈빛이 떠올라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려드는 주문에 제가 힘들까 더 배려 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향수를 제조하고 있죠.”
“그렇군. 혹 힘든 일이 있으면 언 제는 내게 말하게. 그대가 즐겁게 일하길 바라지, 무리하는 것을
원하진 않으니까.”
“네.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영애는 눈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난 입꼬리를 내리며 본론을 꺼냈다.
“요즘 사교계는 어떤가? 내 직접 귀부인들을 만나야 하는데 아직 시간이 나질 않아 자리를 마련하지 못
하고 있지.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지 궁금하군.”
오늘 셀린느 영애를 부른 이유는 그녀와 담소를 나누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사교계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향수 사업이 잘되며 자연히 사교계에서 후작 영애의 지위도 상승했다.
그 덕에 수많은 고위 귀족의 파티에 초대되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
“다들 황태자 전하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았습니다. 일전의 황실 파티에서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신 것을
보고 제국의 미래가 밝은 거 같다며 칭찬을 하였지요. 아, 그리고 다들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궁금해하는 것?”
“네. 아직 황태자 전하의 스승이 정해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하여 언제 정해질지 그리고 누가 맡을지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1 황자전하의 스승과 비교를…… 아, 제가 말실수를…….”
자연스럽게 1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던 영애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1 황자를 거론하는 것이 신경 쓰일 것이다.
내가 옹호를 해주긴 했지만 어쨌든 시오스 가문이 노린 것은 황후인 내 가문이었으니까.
이런 눈치를 보는 건 당연했다.
“괜찮다. 1 황자의 스승이 훌륭한 자이긴 하지. 당연히 비교하는 말들이 나올 것이다.”
1 황자의 스승인 마르텐 백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학자였다.
제국 아카데미의 교장을 지냈던 자였으니까.
칼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1 황자는 유일무이한 황제의 후계였으니 그 스승이 대단한 자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눈치를 보고 몸을 사리느라 1 황자에 대해 입을 다물겠지만 칼라일이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1 황자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황태자가 바뀌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여 칼라일의 스승을 정하는 것은 더욱 중요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의 스승은 아직 정하지 못하신 건가요?”
영애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음으로 내정한 사람은 있네. 하지만 아직 그쪽의 답을 받지 못했지.”
“아, 이미 마음에 둔 분이 있으셨군요. 당연히 감복해하며 황태자 전하의 스승을 맡지 않겠습니까.”
“음……. 그랬으면 좋겠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사라 말이지.”
“네?”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영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제국으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네.”
의미심장한 말에 더욱 아리송해지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영애가 귀여워 웃은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시녀가 헬란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고 헬란이 곧 내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찾으시던 분이 제국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149 화

헬란의 말을 들은 난 셀린느 영애에게 미안한 얼굴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듯 영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바쁘신 일이 생기신 것 같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대를 이리 불러 놓고 대접을 이리 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과분한 대접을 받았는걸요.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영애가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난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조심히 돌아가게.”
셀린느 후작 영애가 응접실을 나가고 난 곧장 헬란에게 말했다.
“나갈 채비를 하거라.”
“예, 황후 폐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수수한 외출용 망토를 걸치고 호위기사 두 명에 시녀도 헬란만 동행하도록 했다.
황후의 수행 인원치고는 너무도 단출한 모양새였다.
“헬란, 다른 마차를 가져와.”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난 황궁의 화려한 마차도 물렸다.
곧 마부 한 명이 회색빛 마차를 끌고 왔다.
“황후 폐하. 헌데 이 마차는 궁인들이 외출할 때 타는 마차이온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헬란은 이런 마차에 날 태우는 것이 송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자는……. 권력가들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 자야. 내 위치를 알려주는 모양새로 찾아가 봤자
좋게 보지 않을 거다.”
괜찮다고 헬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은 난 마차에 올라탔다.
헬란이 맞은 편에 앉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헌데 황후 폐하. 그자가 황태자 전하의 스승을 맡겠다고 할까요?”
헬란은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나도 이렇게 그에게로 가고 있지만 그자가 칼라일의 스승이 되어줄 것이란 확신은 없었다.
“……글쎄. 최선은 다해 보겠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구나.”
황태자의 스승.
학문을 배운 귀족이라면 모두가 하고 싶어 줄을 서는 자리였다.
훗날 황제가 된다면 스승이었던 귀족은 대부분 높은 행정직의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까.
권력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자 황제의 스승이었다는 명예까지 가질 수 있었다.
허니 누가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자는 예외일 것이다.
레이커 브라시에.
브라시에 남작가의 영식인 그는 신분상으로도 그리 높은 귀족은 아니었다.
브라시에 가문은 특출난 게 없는 수많은 남작 가문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황태자의 스승으로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5 년 전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큰 사건
때문이었다.
시험 답안지 갈취 사건.
아카데미에서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 뛰어난 몇몇 학생은 아카데미의 주선하에 졸업 전 현자의 탑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치른다.
그 시험으로 현자의 탑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험에 통과한 자들은 현자의 탑의 인정을 받은
배지를 수여 받았다.
그 배지는 당연히 출세길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여 그 시험은 상당히 중요한 시험인 것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수석이었던 레이커는 당연히 그 시험을 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험 결과가 나왔을 때부터 모든 게 뒤틀렸다.
모두가 시험에 합격했을 것이라 예상한 레이커가 떨어졌고 모두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후작 가문의
영식이 시험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험에 붙은 학생은 당시 시오스 후작과 가까운 사이였던 브라이튼
후작가의 영식이었다.
강한 권력가의 영식이었기에 다들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레이커는 결과에 의심을 품고 항의했지만 애초에 시험 답안지를 바꿔치기한 것이 아카데미의
교수진이었으니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커의 억울함은 완전히 묵살되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귀족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성을 버리고 아카데미도 떠났다.
모두 레이커가 그렇게 포기하고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2 년 뒤 현자의 탑, 가장 어려운 시험인 탑의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탑의 시험은 현자의 탑에 현자로 이름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100 층의 탑을 올라가며 층마다 현자들이 내놓은 시험을 풀어야 했다.
시험 자체도 어려웠지만 100 층이나 되는 탑을 제한된 시간 안에 쉬지 않고 끝까지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 탑의 시험은 존재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쉽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도 현자의 탑의 긴 역사 속 단 4 명뿐이었다.
백 년 만에 시험에 통과한 레이커의 등장에 대륙이 들썩였고 그는 현자가 되었다.
답안지를 훔쳤던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
비록 자신의 억울한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진 못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배지보다 더 큰 것을,
더 높은 자리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그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커의 이름이 대륙에서 유명해질수록
배지를 빼앗은 후작 영식의 자리는 좁아졌다.
결국 후작 영식은 스스로 배지를 반납했고 정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하였으니 복수까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레이커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에그리타 제국은 그에게 높은 귀족 작위와 비옥한 영토 등을
제안하며 포섭하려 했지만 레이커는 완강히 거부했다.
썩어 빠진 에그리타 제국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며.
레이몬드의 친필 서신도 거절한 전적이 있는 자였으니…….
아마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칼라일이 스승을 정하기 위해 수많은 학자를 살폈지만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난 1 황자의 스승보다 더 유명하고 실력 있는 스승을 구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제국 내에 1 황자의 스승을 뛰어넘는 학자가 아직 없었다.
하여 머릿속을 맴돌던 레이커를 결국 스승으로 점찍은 것이다.
그가 비록 에그리타 제국을 버린 사람이었지만 대륙에 이름을 떨칠 만큼 유명했고 그가 새롭게 정립하는
제왕학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유명세를 떠나 능력마저 뛰어나니 어떻게 탐이 나지 않을까.
레이커라면 분명 칼라일을 성군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를 설득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거였다.
스스로 제국의 귀족 작위를 버린 자이니 권력으로 밀어붙여 봤자 반감이 더해질 것이다.
에그리타 제국의 권력이라면 혐오스러울 테니까.
“그래도 드로이트 공작과 친분이 있으시니 조금은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헬란의 목소리에 상념을 멈추었다.
내 안색이 어두워 보였는지, 헬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드로이트 공작과 친분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에 움직일 자가 아니다. 아마 오늘은……. 드로이트
공작에게 화를 내겠지.”
내가 레이커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제레미 덕분이었다.
대륙 곳곳에 두문불출하는 레이커를 찾기 위해 제드에게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 했었다.
그런데 제드가 내게 가져온 소식은 매우 뜻밖의 것이었다.

<i>‘그분이 드로이트 공작과 인연이 깊다고 합니다.’</i>

그길로 제레미에게 서신을 보냈었다.


제레미는 정말로 레이커와 친분이 있었다. 용병 시절 레이커의 호위를 맡은 적이 있다 답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둘은 친분을 쌓았고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고 내게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그 덕분에 레이커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소문난 레이커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이런 만남을 추진한 친구를 좋게 보진 않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제레미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스승을 정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했으니까.
“……염치 없네.”
중요하긴 했지만 그건 내 사정이었다.
늘 내 사정이 중요해 제레미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리고 아직 내가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적은 없었다.
어쩐지 그에겐 갚지 못할 빚만 늘어가는 기분이다.
“네?”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헬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덜컹
마차가 멈추고 곧 마부가 문을 열었다.
“황후 폐하, 도착했습니다.”
헬란이 먼저 내리고 내가 뒤따라 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제레미가 보였다.
제레미가 내게로 다가왔다. 하얀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 오랜만에 편안한 차림을 한 그는 내게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게.”
몸을 일으킨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는 길이 험했을 텐데 장소를 이런 곳으로 잡아 송구합니다.”
“아니네. 오랜만에 좋은 공기를 쐬니 험한 줄도 몰랐어.”
레이커를 만나기 위해 온 곳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산속이었다.
정비되지 않은 산길이 험하긴 했지만 레이커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엉덩이가 아프다 느끼지도 못했다.
“헌데 그자는 어디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통 나무들뿐이었다.
“여기서 조금 걸어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부턴 마차가 들어갈 수 없거든요.”
“그렇군.”
“그리고 황후 폐하께 무례한 부탁을 하나 드려야 할 듯합니다.”
“무례한 부탁?”
“레이커가 있는 오두막엔 황후 폐하와 저 둘만 갔으면 합니다.”
“안 됩니다.”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헬란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이렇게 수행원들을 데리고 가시면 레이커가 별로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일국의 황후 폐하이십니다. 아무리 중요한 자라 하여도 어찌 황후 폐하께서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호위를 물린단 말입니까.”
헬란은 완강했고 제레미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제레미도 헬란도 모두 이해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겐 황태자의 스승이 더 중요했다.
“헬란, 넌 기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하오나…….”
“걱정 말거라. 제레미의 검술은 황궁 기사들에게 뒤지지 않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헬란은 내 단호한 눈빛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가 물러나고 제레미가 다가왔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후 폐하.”
“잘 부탁하네.”
옅은 미소를 그리며 손을 잡은 난 그를 따라 산길을 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때쯤, 눈앞이 탁 트이듯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회색빛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레이커!”

150 화

제레미가 반가운 듯 소리치자 집 앞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는 멈춰선 나를 두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포옹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레미의 일방적인 포옹이었다.
레이커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으니까.
“제레미, 저분은 설마…….”
레이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눈치챈 듯했다.
딱히 변장하지 않았으니 알아보는 것에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가 제국에서 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인상을 찡그린 레이커가 제레미를 거칠게 밀어냈다.
“돌아가라.”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난 제레미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레이커, 일단 내 말을 좀 들어……”
“들을 말 없어. 돌아가. 그리고 너도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레이커는 단호하다 못해 살벌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어떠한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이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는데.
작은 한숨을 내쉰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레이커에게 말했다.
“이곳은 에그리타 제국의 땅이네. 허니 그대가 황후인 내게 돌아가라 말라 할 수는 없지.”
“……그럼 제가 떠나겠습니다.”
“아래에 내 기사들이 있네. 그대가 날 무시하고 떠난다면 황족 모독죄로 체포하라 할 것이야.”
레이커는 걸음을 멈추었다.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불쾌함이 가득했다.
경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난 그를 마주 보며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억지를 부려 미안하네. 허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쩔 수가
없군.”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아신다면 물러나 주시지요.”
“미안하네. 그러진 못하겠어. 이러지 않으면 그대가 나를 만나주지도 않을 거 아닌가.”
“제게는 황후 폐하를 만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레이커.”
불손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제레미가 말리듯 불렀지만 레이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듯 나를 당당한 시선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국에 대한 적개심이 큰 듯했다.
“……도움을 청하는 자를 외면하는 것은 현자의 도리가 아니라 들었네만. 그대는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으려 하는군.”
“…….”
흉흉한 기세를 풍기던 레이커가 멈칫했다.
“그대도 보다시피 난 황후의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니네. 그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간곡한 청이 있어
찾아온 것이지. 허나 그대가 그리 싫다 하니…… 내 이만 돌아가겠네.”
씁쓸한 얼굴을 감추지 않으며 몸을 돌린 순간, 레이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십시오.”
“멈추라 함은……?”
“무슨 도움을 청하시는 것인지…… 들어만 보겠습니다.”
제국은 혐오해도 현자의 도리까지 저버릴 순 없는 모양이다. 레이커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넌 밖에서 있어라.”
“알았다. 난 장작이나 패 놓을게.”
레이커는 제레미를 살벌하게 일별하고는 오두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오두막 안은 작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레이커는 나무 식탁을 가리켰다. 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직접 만든 것인가?”
“……네, 뭐 그렇다고 하여 어디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더럽지 않게 매일 닦고 있고요.”
“더럽다니, 그렇다고 생각은 하지도 않았네. 그저 너무나 단면이 깔끔해 신기하게 물었을 뿐이야. 솜씨가
장인 수준 같군.”
전문 목수가 다듬은 거처럼 모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감탄 하자 레이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이상한 사람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찻잔을 놓았다.
“물이 전부입니다.”
“고맙네.”
레이커가는 맞은 편에 앉자마자 내게 본론을 꺼내라 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 황태자 전하의 스승이 되어달란 말씀이십니까.”
“눈치챘군.”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간곡한 청이 있다고요.”
레이커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성을 버렸다 하여 제국의 정세도 모르고 살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지요.”
“그대는 당연히 거절을 말하겠지.”
“네. 전 황태자 전하의 스승이 될 생각 없습니다. 꼭 에그리타 제국의 황태자 전하이시기 때문은
아닙니다. 전 권력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뜻을 굽힐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를 보던 난 흐음, 작은 침음을 내뱉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네. 하지만 도무지 그대 같은 인재를 포기할 수가 없어 이리 찾아왔네.”
“황후 폐하. 전…….”
“권력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네. 허나 그대도 알겠지. 권력은 강력한 힘을 지닌 만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가난하지만 똑똑한 제자들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아네. 그대와 닮은 제자들이지.
그 제자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고 키우고 싶지 않은가?”
“…….”
“산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말단 관직으로 생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운 인재들일세. 능력으로 공평하게
만들어지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나. 신분과 재력에 관계없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 말이네.”
레이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내가 원하는 세상 또한 그러하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장차 황제가 될 어린 황태자가 그런 이상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할 선생이 필요하고.”
그가 제국을 환멸한다고 하여 학자로서 꿈꾸는 세상마저 사라진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제자를 키우지도 않았을 테니까.
레이커는 혼란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싫다고 말하기엔 내 제안이 너무나 달콤했을 것이다.
단호하던 그의 얼굴에 갈등이 깃든 것을 보던 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네. 오늘은 그저 그대에게 제안을 하러 온 것일 뿐이니까. 한동안 제국에서
머문다고 들었네. 결정이 나면 드로이트 공작을 통해 내게 서신을 보내 주게.”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레이커는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눈빛으로 나직이 답했다.

* * *

“사실 이번 일은…… 성공하실 줄 몰랐습니다.”


레이커의 오두막을 나와 제레미와 함께 산길을 내려가고 있던 때, 그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제레미가 머쓱한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레이커는 권력에 대한 혐오증이 정말 심한 사람이거든요. 예전에도 다른 왕국에서 귀족들과 부딪힌 적이
많았습니다. 하여 반신반의했는데 레이커의 마음도 결국 돌리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레미의 진심 어린 감탄이 덧붙여졌다.
“아직 성공한 건 아니네. 레이커의 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거의 성공이나 다름없습니다. 레이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분명 승낙할 것입니다.
승낙한다에 제 전 재산을 걸지요.”
제레미가 장난스럽게 웃자 생각할 것이 많이 복잡하던 머리에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하군.”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안 되면 제가 레이커를 묶어서라도 황궁에 던져 놓겠습니다.”
그의 농담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여유로워져서일까.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산속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편하게 산을 걷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아.”
“……그간 일이 너무 많으셨죠. 황후 폐하. 그러고 보니 저도 이런 여유는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한 번에 많은 일이 몰아닥쳤으니까. 공작가는 안정을 찾았나?”
“예. 옛사람들은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드로이트를 이끌 인재들로 채웠습니다.”
“그대는 잘할 걸세.”
안부를 주고받으며, 경치를 감상하며 그렇게 느리게 걷던 난 고개를 돌리다 제레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딘가 고민이 있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뜨리고 있었다.
“제레미, 무슨 일 있나?”
내 물음에 그가 시선을 들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게.”
“그것이…….”
제레미 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그가 조심스러워할 만한 문제라면…… 하나뿐인가.
진지해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물을지 짐작이 갔다.
“1 황자에 관한 이야기인가.”
“……네.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진실을 밝혀져야 함이 맞지만 아직 어린 1 황자의 삶을 제가 망쳐
버린 거 같아서요.”
무거운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죄책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1 황자에 대해 생각하면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지고 보면 죄 없는 아이였으니까.
제레미의 성격도 칼같이 냉정하진 못했으니 신경 쓰일 것이다.
“……나도 마음이 좋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묻어둘 수도 없는 진실이지. 대신 신중히 움직일
생각이네.”
“…….”
“정말 1 황자가……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잡을 때까진 절대 1 황자를 내치지 않을 것이야.”
“증거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오스 가문에 아들이 하나 있었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시오스 자작에 비해 딱히 특출난 게 없었던 영식이 있었지요.
설마…… 그자가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그자가 사라진 시점이 죽은 황태자와 크게 언쟁을 벌인 뒤였지. 분명 리제나와 황태자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걸세.”
“……그자를 빨리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무거운 이야기는 잠시 잊지. 그보다 그대에게 늘 고마운 일뿐이군.”
“예? 그게 무슨……”
“룬트 왕국으로 떠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대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지 못햇을
거야. 정말 고마워. 제레미.”
고맙다는 말론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꼭 직접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나직이 말하자 제레미의 호박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뭐……. 아니라고 겸손은 못 떨겠군요, 제가 좀 많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드리긴 했으니까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능청스러움에 웃음이 터뜨리던 그때, 미끄러운 흙에 발이 미끄러졌다.
“앗!”
발이 쭉 미끄러지며 뒤로 몸이 넘어가려 했다. 넘어질 게 분명한 상황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허리를
받치는 손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제레미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
호박색 눈동자 속에 금가루를 뿌린 듯 금빛이 섞여 있는 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에 당황하던 그때 제레미의 입꼬리가 매끄럽기 호선을 그렸다.
“이번에도 제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황후 폐하.”
그는 내 몸을 똑바로 세워주었다.
당황이 가시자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던 자세가 떠올랐다.
황후의 체면을 떠나 상당히 민망한 자세였다.
하필 넘어져도 그렇게 넘어지려 하다니…….
부끄러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큼, 목을 가다듬었다.
“……고맙네.”
“길이 미끄러우니 손은 잡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마음 같아선 쥐구멍으로 숨고 싶지만 그의 말대로 땅이 미끄러웠다.
난 애써 그를 보지 않으며 손을 잡았다.
그렇게 산길을 다시 내려가다 창피함이 가라앉았을 무렵, 그에게 말했다.
“혹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 보게. 내 그대의 청이라면 거절하지 않아.”
“…….”
웃음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굳으며 걸음도 멈추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그저 어떻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난 갑작스레 멈추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 기분이 나쁜 것인가 했지만 그렇다기보단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제레미?”
의아함에 그를 부르자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글쎄요. 간절히 원했던 것이 있었으나……. 이젠 제 손을 떠나 버려 말입니다. 딱히 원하는 게
없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간절히 원했던 것이 뭐였을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슬픔이 스치는 그의 눈빛에 캐물을 순 없었다.
“그럼 다른 것이라도…….”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도…… 황태자 전하도 무사하시고
저도 안정을 잡고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보답은 부담일 뿐이다.
난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물러났다.
“알겠네. 음, 해가 지려 하는군. 서두르는 게 좋겠어.”
“예, 황후 폐하.”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이 어딘지 서글퍼 보였지만 그가 이유를 말해 줄 것 같지 않아 난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제레미와 난 해가 지기 전 산길을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151 화

“황후 폐하,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헬란이 황급히 다가왔다.
초조한 얼굴로 이것저것 묻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난 괜찮아, 헬란.”
미소를 짓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헬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어스름해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곧 해가 질 것 같네. 밤이 되면 산길이 위험하니 서두르는 게 좋겠어.”
“네. 아, 그전에 전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궁에서 통신이 왔는데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야시장을 보러 황궁을 나오셨다 합니다.”
저번 외출에선 깜박했던 통신구를 오늘은 챙겨 나왔었다.
황궁과 연결된 통신구는 오로지 황궁 내에 있는 사람만이 일방적으로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야시장?”
갑자기 야시장이라니.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자 제레미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여름이 다가오는 축제 겸 사흘 동안 야시장이 크게 열린다 했었지요.”
“그랬군.”
그러고 보니 곧 여름이긴 했다.
4 계절이 뚜렷한 제국은 계절이 바 뀔 때마다 축제 겸 야시장을 크게 열곤 했었다.
벌써 여름이 다가왔다니.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고 보니 점점 날이 따뜻해지고 있긴 했지.
“황후 폐하, 황궁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님 야사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야시장으로 가자꾸나.”
헬란에게 말하고 제레미에게 인사를 전하려던 난 보이지 않는 그의 마차에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공작의 마차나 말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설마 걸어가려는 건가?”
“그러기엔 이 산이 좀 높습니다. 전 오늘 레이커의 오두막에서 자고 갈 것입니다.”
“……괜찮겠나?”
순간 떠오른 레이커의 흉흉했던 눈빛에 멈칫했다.
나 때문에 레이커의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함부로 사람을 데려왔으니 제레미에게도 적잖이 화가 났을 텐데.
걱정스레 보자 제레미가 괜찮다는 듯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정 안 되면 마구간에서라도 자면 되니까요. 그리고 레이커 그놈이 불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긴 해도 친우를 밖에서 재울 놈은 아닙니다.”
“그대가 그렇다면……. 내 걱정 않고 가겠네.”
“네. 밤이 깊어갑니다. 조심이 돌아가십시오. 황후 폐하.”
배웅하는 그에게 미소를 지은 난 헬란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 * *

산속을 나와 수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두워진 뒤였다.


밤이 시작되자 야시장의 화려한 불빛이 광장을 밝혔다. 축제처럼 열리는 야시장인 만큼 노점상들도 많았고
공연단도 한두 팀이 아니었다.
마차를 정차소에 세우고 망토의 모자까지 뒤집어 쓴 난 헬란과 함께 광장으로 들어섰다.
“폐하께서도 변장을 하고 나오셨을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황족의 상징인 흑발과 흑안을 드러냈을 리 없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찾기가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헬란이 많은 인파에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먼 곳에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보였다.
흔해 빠진 갈색 머리칼이었지만 수려한 외모의 남자.
당연히 레이몬드였다.
“……폐하께서 저기 계시는군요.”
헬란도 한 번에 발견한 듯 레이몬드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노점상들이 있는 곳에 있었다.
헬란과 함께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광장의 거리 음악단을 지나 그들에게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난 가까워질수록 잘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점점 발걸음을 늦추었다.
“황후 폐하?”
느려지던 걸음이 완전히 멈추자 헬란이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잠시…….”
난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선 레이몬드와 칼라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판대에 놓여있는 인형들을 구경하며 웃음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칼라일은 레이몬드에게 무어라 말했고 레이몬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인형 하나가 칼라일의 품 안에 안겨지고 칼라일의 신난 얼굴이 보였다.
그런 칼라일을 레이몬드가 안고 마주 웃는 모습은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닮았었던가.
아주 가끔 칼라일에게서 레이몬드의 모습이 비치긴 했었지만 지금처럼 닮아 보인 적은 없었다.
웃는 모습까지 비슷한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사이좋은 아버지와 아들 같았다.
언젠가 오래전 내가 꿈꾸었던 그런 모습처럼 말이다.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많이 가까워진 듯합니다.”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헬란이 말했다.
“……그렇구나.”
낮아진 목소리에 헬란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
난 입술을 달싹였지만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칼라일과 레이몬드가 가까워지길 바랐었다. 그러라고 시간을 마련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좋지도 않았다.
다행이라 느끼면서도 왜인지 다정한 레이몬드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불편해졌다.
꽁꽁 얼어 있던 호수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처럼 자꾸만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이 떠올랐다.
“황후 폐하…….”
헬란이 걱정스러운 듯 나를 불렀다.
복잡한 마음에 굳은 듯 서 있던 발걸음을 뗀 순간, 레이몬드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주변을 둘러보다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내려가고 놀란 듯 커지는 눈이 보였다.
난 언제 망설였냐는 듯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황, 엘리야.”
레이몬드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듯 이름을 불렀다.
나도 예를 갖추는 대신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올렸다.
“이곳엔 어떻게 왔소?”
“시녀에게 미리 말을 해 놓았습니다. 혹시 칼라일이 어디를 가면 제게 통신을 넣으라고요.”
“그랬군.”
“엄마! 저 곰 인형 선물 받았어요.”
레이몬드에게 안겨있던 칼라일이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곰 인형을 자랑하듯 내게 보였다.
시장의 물건들이 그렇듯 그다지 좋은 재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몹시 마음에 드는 듯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 예쁘구나. 이렇게 예쁜 곰 인형을 선물 받았으니 당연히 감사 인사는 드렸겠지?”
“네!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칼라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빠란 단어. 웃음 짓던 내 입가가 살짝 흔들렸다.
레이몬드가 아빠인 게 뭐가 이상해. 당연한 사실인데.
레이몬드가 아빠, 내가 엄마.
이건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왜…….’
그건 아마도 이때까지 칼라일이 아빠라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칼라일은 레이몬드를 늘 폐하라고 불렀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선을 긋고 있었던 듯했다.
당황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야.
내 반응이 이상한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 칼라일을 보고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던 그때, 레이몬드가
말했다.
“야시장에 오기 전에 내가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어. 아무래도 여기서 원래 호칭을 부르면…… 이목을
끄니까. 그렇다고 마땅한 다른 호칭도 없었고.”
내 당황스러움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칼라일에 대해선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제 눈치 안 보셔도 됩니다.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
덤덤하게 답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나를 보던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 다녀온 것인지 물어도 되나?”
“아, 오늘 칼라일의 스승이 되었으면 하는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스승이라면…… 저번에 말한 그 자?”
“네.”
이틀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레이커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워낙 두문불출 한 자라 만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찾았나 보군. 제국에 있던가?”
“예, 드로이트 공작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드로이트 공작?”
“공작이 레이커의 친우라 하여……. 공작의 도움으로 레이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레이몬드가 제레미를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말하지 말까 고민했었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되면 더 기분이 나쁠 것 같아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인연 줄 한번 더럽게 길군.”
“네?”
레이몬드의 입술이 비틀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정확히 듣진 못했다.
“아무것도 아냐. 만날 수 있었다니 다행이야. 그보다, 한다고 하던가?”
“아직 확답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다니, 대단해.”
그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레이커가 얼마나 에그리타 제국을 싫어하는지 레이몬드도 잘 알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의 친서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자니까.
“……아직 확답은 없었습니다. 거절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자가 생각해보겠다 한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일이야. 제국의 어느 누구도 그를 설득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레이커가 허락한다면 정말 좋겠군. 칼라일뿐만 아니라 제국에도 큰 도움이 될 자이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걸 보니 몹시 기쁜 듯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그의 눈빛에 겸연쩍어진 난 화제를 돌렸다.
“그리되면 좋겠습니다. 그보다 칼라일, 계속 그렇게 안겨 있으면 안 된단다. 이제 안겨서 다닐 나이는
지났지 않니.”
“그치만…… 발이 아픈데…….”
“난 괜찮다.”
“안됩니다. 스스로 걸을 수 있으니 걷게 해야지요.”
레이몬드가 시무룩해하는 칼라일을 감싸듯 말했지만 난 단호하게 잘랐다.
칼라일은 정말 발이 아픈 게 아니니까.
아이의 얼굴만 봐도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칼라일은 레이몬드가 많이 편해져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니 어리광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습관이 되면 황태자의 행실에 대해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칼라일, 어서 내려와.”
“……네.”
칼라일의 입이 툭 튀어나왔지만, 얌전히 내려왔다.
삐진 듯 시선을 다른 데에 주던 칼라일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칼라일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엄마, 아빠, 저도 저거 해 주세요!”
칼라일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오른손은 엄마와 왼손은 아빠와 잡은 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중간에 선 아이의 손을 잡고 한 번씩 하늘로 띄우듯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는 그네를 타듯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마다 꺄르르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저걸 레이몬드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호흡을 맞춰가며 아이의 팔을 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함께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레이몬드와 내가 다정이란 단어와 엮이다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닌가.
“엄마! 어서 해 주세요!”
“어?”
단란한 가족을 보던 난 손을 잡는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내 당황스러움과 달리 칼라일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레이몬드의 손을 잡은 칼라일이 내 손을 잡고 웃었다. 시선을 들자 칼라일에게 끌려온 듯 레이몬드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아, 그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해 주는 게 어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놓으려던 그때, 레이몬드가 말했다.
“……네?”
“……어릴 때가 아니면 언제 할 수 있겠어. 칼라일에게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칼라일만 생각하자는 눈빛이었다.
칼라일만……. 칼라일을 위해서라면 그의 말대로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요.”
다른 건 생각지 않기로 하고 칼라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걸었다.
“셋에 하면 되겠지?”
“좋아요.”
하나, 둘, 셋.
그가 나직하게 숫자를 말하고 셋에 칼라일 몸이 붕 떠올랐다.
“너무 재밌어요!”
칼라일이 행복한 듯 웃음을 터뜨리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레이몬드 역시 칼라일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그리며 그와 얼굴을 마주한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순간 묘한 감정의 파문이 느껴졌다.
칼라일…… 때문에 웃는 것뿐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게 미묘해지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난 처음 보는 레이몬드의 행복한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152 화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동방국.
밤새 폭우가 쏟아지고 푸른 여명이 밝아왔지만 여전히 하늘에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부슬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한 남자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동방국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남자의 외모는 동방국의 것이 아니었다.
금발에 녹안.
비에 머리칼과 옷이 전부 젖었지만 남자는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그의 다급한 걸음에 폭우에 땅이 패인 곳에서 물이 튀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젠장.”
하지만 남자는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으로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때문에.
입술을 깨문 남자는 몸을 돌렸지만 언제 따라붙은 것인지 그의 뒤에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무장한 남자들의 수는 5 명이 넘었다.
그의 손에 든 것이라곤 그림이 담긴 통이 전부였다. 이것으로 검을 쥔 자들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검술에 재능이 없다.
해가 뜨지 않은 거리에 그를 도와줄 사람들도 없었다.
밤새 쏟아지는 폭우에 전부 문을 꽁꽁 걸어 잠갔으니까.
“도망칠 곳은 없다. 리온 시오스, 괜한 싸움으로 다치지 말고 조용히 우리를 따르도록.”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중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이렇게 위협적으로 쫓아오는데 당신이라면 따라가겠어? 날 어디로 데려가는지,
아니 대체 왜 날 찾지? 이미 우리 가문은 망해서 남은 것도 없을 텐데. 나 같은 놈 찾아봤자 뭐에 쓸
데가 있다고?”
리온은 눈만 내놓은 검은 복면의 남자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에그리타 제국과 동방국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에그리타 제국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었으니까.
거기다 요 며칠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에그리타 제국의 새로운 황후와 황태자. 그리고 실세였던 시오스 후작가의 몰락.
연속적으로 벌어진 제국의 사건들은 대륙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였다.
하여 리온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의 가문이 몰락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고 어머니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는 말로였다.
그가 곁에 있었다 하여 달라질 결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누가 날 찾는 거야?”
시오스 가문이 무너지긴 했지만 황제가 혈족을 전부 죽이라 명하진 않았다.
1 황자를 봐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시오스 가문의 유령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찾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위험한 진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없어.
가족 중에서도 아버지와 리제나, 그리고 자신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아버지와 리제나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왜 자신을 찾는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때, 리온을 보던 남자는 갑자기 복면을 벗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리온의 눈이 커졌다.
복면 아래 드러난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4 기사단장.”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였지만 제국의 귀족이라면 그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최측근이었으니까.
그만큼 유명했기에 카르텔의 초상화를 당연히 본 적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리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4 기사단장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를 찾고 있는 사람이 황제라는 것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대를 찾으신다. 황명에 따르도록.”
황명.
카르텔의 낮은 음성에 리온의 심장이 철렁했다.
황제가 그를 찾는 이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
리온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도망칠 곳은 없다. 반항한다면 사지 멀쩡히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카르텔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도망칠 생각 없습니다.”
리온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비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것인가.
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통을 바닥으로 던졌다. 항복을 표하듯 두 손을 내미는 리온에게 기사들이 다가가
손목을 묶었다.
두 손목을 묶은 구속구를 체념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리온은 무거운 바닥을 굴러가는 통을 보다 카르텔을
따랐다.
마침내 모든 게 정리될 순간이 다가온 듯했다.

* * *

“이렇게 황궁에서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하군.”


난 맞은 편에 앉은 레이커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커의 오두막에 다녀온 뒤 그가 답을 보내온 것은 정확히 3 일이 흐른 뒤였다.
길게는 한 달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3 일 만에 답이 온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저도 제가 이렇게 제국의 황성에 앉아있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레이커는 화려한 황후궁의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며 불편한 낯빛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의 불편함 속에 불쾌함은 없어 보였다.
제국에 대한 원망이 깊은 자였으니 그 마음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썩 나쁘진 않습니다. 앞으로 이 화려한 황궁에서 잘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레이커의 솔직한 말에 가볍게 웃었다.
“그대는 잘 살아남을 걸세. 생존력이 약해 보이진 않거든.”
농담이 기분 나쁘진 않은 듯 레이커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의 수업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난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그럼…… 모레부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모레부터? 그대의 일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딱히 고정적으로 하고 있던 일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제국으로 오라 편지를 보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자들을 제국으로 받아주시겠단 약속은 지켜주시는 것이겠죠?”
“물론이네. 이미 폐하께 말씀드려 놓았네. 아마 곧 행정궁에 자리를 마련해 주실 걸세.”
칼라일의 스승을 하겠다는 확답을 받자마자 레이몬드에게 레이커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말했다.
레이몬드는 인재을 등용하는 것에 신분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솔직히 말하면 매우 좋아했다.
지금 귀족들의 부패가 심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썩은 물을 정화시킬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바로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네. 그러니 그대도 황태자를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해주게.”
“예. 저도 황태자 전하께 충성을 바치겠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곧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데…… 폐하와 함께 만찬을 함께 하겠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아직 그 정도로 황궁이 적응되진 않아 이번엔 힘들 것 같습니다.”
레이커는 넥타이를 살짝 끌어 내리며 답했다. 입고 있는 예복이 어지간히 답답한 듯 어서 집으로 가고
싶단 얼굴이었다.
레이몬드에게 레이커를 소개해주고 싶어 아쉽긴 했지만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은 많았다.
그가 적응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다음에 함께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모레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인사를 한 레이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도 응접실을 함께 나갔다.
레이커가 마차를 타고 떠나고 헬란이 다가왔다.
“뜻을 이루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황후 폐하.”
“고마워. 레이커 경이 거절하면 어쩌나 맘을 졸였는데 이제 한결 편하게 잠들 수 있겠구나.”
내 미소에 헬란도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헌데 칼라일은 아직 태양궁에서 돌아오지 않았니?”
“네. 황태자 저하께선 아직 폐하와 함께 계십니다.”
레이몬드와 칼라일이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야시장에서 함께 한 기점으로 어색함이 확 줄어들었다.
칼라일이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레이몬드를 찾아갈 만큼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황제가 황태자를 각별히 아낀다는 소문이 궁에 퍼지고 있었으니까.
황제의 애정은 칼라일의 황태자 자리를 더욱 단단히 해 줄 것이다.
“태양궁으로 가시겠습니까?”
헬란의 물음에 난 멈칫했다.
야시장 이후 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싫어 어색해진 게 아니었다.
자꾸만 그와 함께했던 과거에 대해 그리고 달라진 지금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에 그가 떠올랐다.
예전처럼 그의 눈빛과 말들을 싸늘하게 무시하는 게 어려워졌다.
남은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하긴 그렇게 오래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완전히 정리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우리에겐 칼라일도 있었으니까.
꼭꼭 잠겨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자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하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의 응어리도 응어리지만 모든 게 어려워지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쉰 난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다. 만찬 시간이 되면 가자꾸나. 잠시 쉬어야겠다.”
난 멀지 않은 태양궁에 잠시 시선을 두다 궁 안으로 몸을 돌렸다.

* * *

“체크 메이트! 이번엔 제가 이겼어요!”


체스판의 킹을 밀어낸 칼라일이 환호했다.
며칠 전 퍼즐을 지루해하는 칼라일에게 레이몬드가 직접 체스를 가르쳐주었었다.
똑똑한 칼라일은 룰을 빠르게 익혔고 그 뒤로 시간만 나면 레이몬드와 함께 체스를 두기 위해 태양궁으로
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이몬드를 한 번이라도 이겨 보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레이몬드는 그저 칼라일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 칼라일의 승부욕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여 체스를 하며 한 번도 칼라일을 봐주지 않았다.
그게 칼라일이 체스를 빠르게 배우는 방법이라고도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체스가 끝나면 항상 칼라일의 얼굴이 불퉁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레이몬드는 항상 곁에
있던 시종장에 물었다.

<i>‘나만 황태자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나?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어.’</i>


<i>‘그것이…….’</i>
<i>‘체스를 둘 때 내가 혹 너무 엄하게 하나?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면 말해보게.’</i>
<i>‘……폐하, 너무 진심으로 체스를 두셨습니다.’</i>
<i>‘뭐?’</i>
<i>‘황태자 전하께선 이제 체스를 배우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번도 봐주지 않으시니……. 매번 지기만
하면 황태자 전하의 사기가 꺾이시지 않겠습니까.’</i>
<i>‘아…….’</i>

레이몬드는 그때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던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누군가에게 져 준 적도, 애초에 져 줘야 할 이유도 없었던 그였다.
허니 모를 수밖에 없던 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여 드디어 오늘은 일부러 칼라일에게 많은 수를 내주었다.
뻔히 보이는 약점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꽤 힘들긴 했지만 체스판에서 레이몬드의 말을 없앨 때마다 신나
하는 칼라일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 내가 이 수를 보지 못했군. 황태자 실력이 정말 엄청 늘었구나. 패배를 인정하마.”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능청을 떨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다음번엔 아버지가 이기실 거에요.”
칼라일은 겸손한 척했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를 숨기지 못했다. 그런 아이가 귀여워 피식 웃은
레이몬드는 어느새 해가 지는 하늘에 시간을 확인했다.
만찬 시간이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구나. 체스는 그만하고 만찬장으로 가자꾸나.”
“네!”
홀가분한 얼굴로 일어나는 칼라일과 휴게실을 나가려던 그때 막 시종이 들어왔다.
“폐하, 4 기사단장께서 리온 시오스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153 화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장 문이 열렸다. 먼저 도착해 있던 난 만찬장에 들어오는 칼라일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어머니를 뵙니다.”
“인사는 되었으니 어서 앉으렴.”
칼라일의 예법은 이제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 고개를 들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 칼라일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은 난 그대로 닫히는 문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폐하께서는 오시지 않은 것이냐?”
“아버지는 일이 있으셔서 오늘 저녁을 함께하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일?”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미간을 좁혔다.
얼마나 바쁜 일이기에 우리와 함께 하는 저녁을 거르는 거지.
지금 레이몬드에게 나와 칼라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내 자만이 아니라 그는 정말 칼라일과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안 좋은 일이라도 터진 걸까.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거나…….
걱정되는 마음에 시종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로 오시지 못한 것이냐?”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생기셔서 오시지 못하셨습니다.”
“서류?”
“응? 아닌데, 어떤 사람이 왔다고 했어요.”
시종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칼라일이 천진하게 말했다. 순간 시종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지금 내게 진실을 말한 쪽은 시종이 아니라 칼라일인 듯했다.
무슨 일이길래, 황후인 내게 숨기는 것일까.
레이몬드의 명령이니 숨기는 것이겠지만, 찜찜한 기분에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황태자, 어떤 사람이 왔는지 혹시 보았느냐?”
“음, 누군지는 못 보았고 이름은 들었어요. 리온 시오스라고 했어요.”
“……뭐?”
순간 너무 놀라 입이 벌어졌다.
리온 시오스라니.
레이몬드가 그를 찾아냈단 말인가.
“어머니?”
순간 굳어 버린 얼굴에 칼라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가 놀랄까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행여나 레이몬드가 리온을 죽여버리면 어쩌지.
불안했다. 만약 리온이 무언가를 말해 레이몬드가 이성을 잃어버린다면…….
리온 시오스는 절대 죽으면 안 됐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황태자,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여기 헬란이 함께 있을 것이니 괜찮겠지?”
“……네, 괜찮아요.”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지금은 아이를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미안해. 내일은 아버지와도 꼭 함께 먹자꾸나.”
칼라일의 볼에 입을 맞춘 난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한 걸음으로 만찬장을 나갔다.

* * *

그 시각, 레이몬드는 리온 시오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이리 묶여 있는 탓에 폐하께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저의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리온은 의자에 꽁꽁 묶인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0 년은 훌쩍 넘었군.”
“자유를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리온은 답답한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오신 것입니까? 아버님의 일
때문입니까?”
카르텔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떠오른 것이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영원한 진실은 없다 해도 그것만큼은 밝혀지지 않길 바랐다.
리제나는 물론이고 아무런 죄도 없는 그의 조카까지 죽임을 당할 테니까.
“갑작스레 널 이리 끌고 와 당황했겠지. 내 마음이 급하여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리온은 고개를 조아렸다.
“……전 괜찮습니다. 다만 왜 저를 이리 찾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레이몬드는 먹잇감을 앞둔 맹수처럼 그는 리온을 중간에 두고 넓게 돌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너를 찾은 이유는 너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다.”
“……무엇입니까.”
“네가 나에게 한점의 거짓도 없는 답을 준다면 내 너의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허나……. 네가 거짓을
말한다면.”
리온의 정면에서 걸음을 멈춘 레이몬드가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널 죽일 것이다.”
리제나와 똑 닮은 녹안을 직시하며 레이몬드는 붉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허니 진실만을 말하거라. 1 황자의 친부가 누구냐.”
“그게 무슨……. 1 황자 전하의 친부는 당연히 폐하가 아니십니까.”
리온은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의 턱을 놓은 레이몬드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드로이트 공작가에서 한가지 서신이 발견되었다. 공작이 죽기 직전 자필로 남긴 유서로, 시오스 전
후작가가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지. 바로 죽은 황태자의 핏줄인 1 황자를 내 자식이라 속여
황자의 자리에 앉혔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리온에게 거짓을 말했다.
드로이트 프로이스가 남긴 것이라곤 1 황자의 초상화, 그 뒤편에 황태자의 이름을 적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리온의 입을 열게 만들기엔 부족했기에 레이몬드는 그를 떠보는 것이었다.
그는 리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이라도 있는지 보기 위해.
리온은 숨을 죽이며 눈에 힘을 줬다.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신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몰락을 들었을 때부터 어쩌면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밝힐 순 없다.
이대로는 모두 개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의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지만 어린 그의 조카만은 살리고
싶었다.
아주 잠깐 당황한 듯 흔들리던 리온은 이윽고 얼굴을 굳혔다.
“……죄인이 남긴 서신 하나로 제게 이러시니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황족을 시해하려다 죽었다 들었습니다.
그런 자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폐하.”
“그 황족 시해 사건에 리제나 시오스, 네 누나가 개입되어 있었지. 허니 신빙성 있는 얘기가
아니겠느냐.”
순간 리온은 얼굴을 구겼다.
설마 했는데 그런 짓까지 꾸몄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닿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뱉은 리온은 위험하게 빛나는 황제의 검은 눈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황제가 눈치를 챈 이상 끝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한시라도 더 빨리 인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온은 황제가 1 황자를 살려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아니, 황제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1 황자를 죽일 것이다.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조카는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는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인데. 이렇게 죽기엔 너무도 어렸다.
“침묵은 긍정이란 뜻인가? 1 황자의 친부가 죽은 황태자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냐.”
레이몬드가 낮게 물은 순간 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폐하,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리온의 답에 레이몬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가 살벌한 명령을 내뱉으려던 순간 문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 * *

레이몬드가 있을 만한 곳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은밀히 잡아 온 사람을 심문하는 장소는 태양궁 지하에 있었으니까.
당황하며 말리는 시종들을 제친 난 지하실에 도착했다. 지하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황후 폐하.”
“폐하를 뵈어야겠다.”
“그것이……. 지금은 때가 좋지 못하십니다.”
“내 여기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왔겠느냐. 어서 문을 열어라.”
난감한 기색을 보이던 시종장은 내 기세에 곧 물러났다.
“엘리야?”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놀란 기색의 레이몬드와 카르텔이 몸을 돌렸다.
“기별도 없이 이리 갑자기 찾아와 송구합니다, 폐하.”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레이몬드가 인상를 조금 찌푸렸다.
“황후가 이곳에 어찌……. 하아, 그대도 다 알고 있었군.”
1 황자에 관한 의심을 나도 알고 있다는 걸 짐작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온 시오스가 왔다지요.”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다 비켜섰다. 그러자 레이몬드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몸이 묶인 채 앉아있는 남자는 리제나와 똑같은 금발에 녹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리제나와 생김새도 비슷했다.
리온 시오스의 얼굴을 자주 본 적이 없어 그의 얼굴이 흐릿했지만 그가 리제나의 동생이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다행히도 그의 얼굴이나 몸은 크게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순간 리온의 녹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물러나 있으시오.”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리온과 마주하던 시선을 돌렸다.
“이자가 입을 열었나요?”
“황후.”
“폐하, 이번 일만큼은 저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죽은 황태자를 폐하께서 얼마나 증오하시는지 누구보다
제가 잘 아니까요.”
단호하던 그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허니 저도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레이몬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졌다는 듯 그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직 입을 열지 않았소.”
난 리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죽은 황태자와 시오스 자작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냐?”
“……절 이 자리에서 죽이신다 한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온은 입술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란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인정하면 리제나는 물론이고 1 황자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데 아무리 가문을 떠났다 해도 어떻게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을까.
“네가 이렇게 나오니 나도 내가 뱉은 말을 지킬 수밖에 없겠구나. 카르텔.”
레이몬드의 낮은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내가 오기 전부터 입씨름을 꽤나 한 듯 리온을 보는 레이몬드의 눈빛에 분노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절 정말 죽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때 리온이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못할 것도 없지.”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확실한 증좌도 없이 절 죽이실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가문이 망했다 한들 저 또한 귀족입니다.”
“네가 가문의 이름을 버린 지 십수 년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널 죽인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레이몬드의 선명한 살기에 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몬드의 분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도 느낀 것일
거다.
“검을 가져와라. 내 친히 네 목을…….”
“폐하.”
막 명령을 하는 그를 붙잡듯 불렀다.
“황후, 물러나시오.”
“폐하.”
난 타이르듯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리온의 결연한 얼굴을 보았을 때, 고문을 한다고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폐하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대화?”
이 상황에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며 간청하자 그의 한숨이 머리 위로 퍼졌다.
“……카르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게 지켜라.”
“명을 받듭니다.”
“황후, 나오시오.”
레이몬드는 카르텔에게 차갑게 명령을 남기곤 먼저 감옥을 나갔다.
묘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는 리온을 스치듯 본 난 레이몬드의 뒤를 따랐다.

154 화

레이몬드는 집무실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침실로 들어가자 레이몬드가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화가 많이 난 듯 이마를 쓸어 올리는 그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러기를 잠시, 끓어오르던 열을 추슬렀는지 줄곧 등을 보이던 그가 내게로 몸을 돌렸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네. 그전에 먼저 폐하의 앞을 막아섰던 것은 송구합니다.”
“……난 리온 시오스, 그자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고문도 불사할 생각이야.”
“폐하, 그것은……”
“엘리야, 내가 제정신이기를 바라지 마. 내가 그놈의 자식을 내 아이로 키웠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지금
미쳐 버리기 직전이니까.”
레이몬드는 억눌린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저도 진실을 빨리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폐하, 아무리 가문을 떠났다 한들 가족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어떻게 쉽게 입을 열겠습니까.”
“…….”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방 안에 흘렀다.
레이몬드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가 지금 어떤 인내심으로 참아내고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막아야 했다.
“그를 궁지로 몰아가신다면 스스로 자결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유일한 증인마저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폐하.”
“엘리야, 너는 내가 지금 무슨 심정인지 이해 못 해.”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보였다. 행여 유일한 증인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당장에라도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는
게 더 끔찍한 거였다.
“아뇨, 폐하. 누구보다 잘 알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폐하, 진실을 알아내셔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리온 시오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오스 후작가가 제국의 가장 실세가 되었을 때도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리온은 돈이나
권력을 좇는 자는 아니다.
거기다 아까 마주한 그는 자신의 목숨에도 초연해 보였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몬드를 진정시켜야 했다.
“폐하.”
나직이 부르자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마른 입술로 대답했다.
“……알겠다.”
마침내 흘러나온 그의 대답에 손끝에 긴장으로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탁 풀렸다.
“……일단 지금은 시간을 버는 게 중요할 듯합니다. 그자에게 우리에게 다른 증거가 없다는 초조함을 들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내가 너무 흐트러졌군.”
“다른 일도 아닌 죽은 황태자의 일이 아닙니까. 폐하의 이성이 흐트러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위로하듯 말을 건네자 레이몬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묘한 눈빛이 내게 향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지금 레이몬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엘리야.”
“오늘은 더 이상 리온을 만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직접 리온을 상대하시는 것보다
카르텔을 통해 다른 증인을 찾았다는 말을 흘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말을 돌리려는 내 의도를 알아챈 듯 그는 약간의 씁쓸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쪽이 초조해지도록 말이군.”
“네. 그리되면 그자가 뭐라도 입을 열 것입니다.”
“…….”
머리를 굴리고 굴려 얻은 답이었다.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들켜선 안 됐으니까.
이게 최선이 맞을 텐데, 왜 말이 없지.
난 대화를 잘 이어나가다 갑자기 조용해진 레이몬드를 의아하게 보았다.
“폐하, 혹 다른 대안이 있으시다면…….”
“아니. 네 말이 맞아. 그냥 새삼……. 아니다.”
레이몬드는 나를 빤히 보다가 갑자기 시선을 먼저 피했다. 그리고 내게서 먼저 한걸음 물러났다.
“…….”
늘 다가왔던 그가 먼저 멀어지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상하다니, 이상할 거 없어.
묘해지는 기분에 스스로를 단속하 듯 마음을 다잡았다.
큼, 목을 가다듬은 레이몬드는 다시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혹 그 전에 리온의 입을 열 만한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
줘.”
“그러겠습니다.”
“근데 칼라일은 어쩌고 온 거야?”
“아, 칼라일은 헬란과 함께 있습니다.”
“그렇군.”
“그보다 오늘은 수면약을 좀 드시고 주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종장에게 약을 가져오라 하시지요.”
“……엘리야.”
“네?”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오해해. 꼭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거 같거든.”
그의 눈빛은 내게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대화에 거북함과 불쾌함부터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황후로 있는 동안은 황후로서의 소임을 다 할 뿐입니다.”
정말 그뿐인가.
순간 머릿속에 그는 듣지 못할 스스로에 대한 물음이 울렸다.
“그래, 알아. 그래도 네 이런 행동에 기대를 해 버리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이만 칼라일에게 가 봐.
시간이 늦었으니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피식, 싱겁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쓸쓸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오늘 따라 마음에 걸렸지만 난 결국 몸을 돌렸다.

* * *

엘리야가 레이몬드와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각.


칼라일은 얼마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 조금 더 드시지요.”
헬란이 절반이나 남긴 음식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칼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먹으니까……. 맛이 없어. 그만 먹을래.”
“그럼 디저트를 준비해오라 하겠습니다.”
“그건 궁으로 돌아가서 먹을래. 동화책 읽으면서 먹고 싶어.”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칼라일은 텅 빈 엄마와 아빠의 자리를 아쉬운 눈빛으로 보다가 그만 만창장을 나갔다.
늘 저녁 식사가 끝나면 엄마, 아빠와 함께 산책을 했었다.
사실 산책을 함께 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칼라일에겐 그 일상이 꽤 익숙해져 버렸다.
혼자 걷는 길이 외로워 칼라일의 얼굴이 밤하늘처럼 어두워졌다.
“오늘 디저트는 황태자 전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딸기 케이크로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딸기 케이크란 말에 칼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네.”
“음, 밤에 케이크를 먹으면 어머니께서 혼내지 않을까?”
칼라일의 저녁 디저트는 늘 가벼운 과일이었다. 쿠키나 케이크 같은 단 것은 이가 상한다고 어머니가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황후 폐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헬란의 말에 칼라일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딸기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기쁜지 혼자 걸어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칼라일은 곧 다가오는 한 사람에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멈추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니다.”
칼라일과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1 황자였다.
칼라일은 오랜만에 보는 형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에드먼드에게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머니가 번번이 허락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형님! 보고 싶었어요!”
하여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칼라일은 너무나 반가웠다.
물론 칼라일만 말이다.
헬란도, 에드먼드도, 우연히 마주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제국의 돌아가는 정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칼라일은 그저 형이 좋을 뿐이지만 에드먼드는 아니었다.
자신의 것이라 믿었던 황태자의 자리도 자신의 외가도 칼라일이 황궁으로 들어온 뒤 모두 사라졌으니까.
버려진 황자의 신세.
칼라일이 황태자가 되고 난 뒤 에드먼드의 신세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에드먼드는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칼라일이 오늘따라 너무 미웠다.
“……황태자 전하, 이제 제게 존대를 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도 예법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신 겁니까.”
그래서일까. 말투가 뾰족하게 나가고 말았다.
차가운 에드먼드의 목소리에 칼라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그게 난……. 반가워서…….”
“전 폐하를 뵈러 가던 길입니다. 제게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드먼드는 싸늘하게 칼라일의 말을 잘랐다. 순간 상처를 받은 듯 칼라일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보자 에드먼드의 마음이 무거웠다.
칼라일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안다. 그래도 지금 에드먼드는 칼라일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칼라일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순간, 칼라일이 에드먼드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아니 1 황자, 지금 간다고 해도 폐하를 볼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폐하는 리온이란 자를 만나고 있어. 그래서 바빠.”
“전하!”
리온의 이름을 말하는 칼라일에 순간 당황한 헬란이 황급히 황태자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리온의 이름을 말한 뒤였다.
헬란은 빠르게 1 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1 황자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는 듯 의아한 얼굴일 뿐이다.
“리온? 그자가 누구길래 지금 이 시간에…….”
단지 늦은 시간에 황제를 만나는 것을 이해 못 하겠단 듯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아무래도 1 황자는 오래전 시오스 가문을 떠난 리온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헬란이 속으로 안도한 그때. 에드먼드는 거슬리는 이 이름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온…….”
에드먼드는 놀란 표정으로 이름을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얼굴을 구기던 1 황자는 미련 없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칼라일은 떠나는 1 황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형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전하,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궁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칼라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번엔 딸기 케이크로도 밝아질 것 같지 않았다.
칼라일은 축 처진 발걸음으로 궁으로 향했다.

155 화

리온 시오스가 황궁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이틀째 되는 날.


에드먼드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를 보내기 위해 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 전하, 릴라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시오스 가문의 사건이 벌어진 뒤 어머니는 황궁에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시는 거란 걸 에드먼드도 잘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처참하게 몰락하고 어머니는 겨우 살아남으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비난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하여 자신을 보러왔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날까 일부러 거리를 두고 계신 것일 거다.
그 마음을 알기에 에드먼드도 보고 싶다는 투정 대신 안부를 묻는 편지만 이틀에 한 번씩 주고받고 있었다.
편지를 가져오는 사람은 어머니의 하녀인 릴라였다.
에드먼드는 릴라를 어릴 적부터 보아 왔기에 그녀를 신임하고 있었다.
하여 오늘 릴라에게 이틀 전 들은 소식을 전해 줄 생각이었다.
칼라일에게 우연히 리온의 이름을 들었던 그날, 에드먼드는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떠올려냈다.
어릴 적 스치듯 들어 기억이 흐릿했지만 리온이란 이름은 분명 어머니의 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의
이름이었다.
삼촌은 오래전 가문을 떠나 제국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했었다.
죽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니 그냥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잊으라, 어머니가 말했었다.
그런데 삼촌이 왜 제국에 돌아온 것일까.
그것도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니. 어쩌면 아버지께서 삼촌을 통해 외가를 도와주시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여하튼 곧 삼촌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수년 만에 돌아온 삼촌에 대한 소식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가 지나도록 삼촌에 대한 소식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삼촌이 아버지를 만난 적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에드먼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궁인들을 통해 조금 알아보았다.
그 결과 아버지는 그날 누군가를 만났지만 집무실이 아닌 지하 감옥에서 독대했다는 것이었다.
에드먼드는 왠지 그 누군가가 자신의 삼촌일 것 같다는 직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 소식을 어머니께 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제국의 별이신 1 황자 전하를 뵙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릴라가 에드먼드에게 예를 갖추었다. 궁인들이 자연스럽게 방을 나가고 안엔 릴라와
에드먼드 둘만이 남았다.
“일어나, 릴라.”
“황자 전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난 잘 지내고 있어. 어머니는? 할머니의 병세는 어떠셔?”
릴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큰마님께서는,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뭐?”
에드먼드는 충격적인 소식에 눈을 부릅떴다.
“돌아가셨다고?! 왜 내게 말을 안 했어……?”
“자작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드먼드가 울먹이자 릴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 전하, 자작님께선 아무에게도 소식을 알리지 않고 장례도 조용히 치르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오스란 이름과 엮이지 않는 것이 전하를 위하는 길입니다.”
“날 위한 길…….”
아주 어릴 적부터 늘 어머니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모든 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에드먼드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하는 자신을 위한 길은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었으니까.
에드먼드는 충격과 슬픔을 익숙하게 억누르며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어머니께 전해드려. 그리고 릴라, 네가 따로 어머니께 전할 말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전하.”
“이틀 전에 아버지께서 리온이란 자를 독대하셨어.”
“……네?”
무감하던 릴라의 표정이 흔들렸다. 놀란 빛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시나 리온은 자신의 삼촌이 맞는
듯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지하 감옥에 갇혀있는 거 같아.”
“……확실한 정보입니까?”
“확실해. 리온이란 이름을 황태자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니까.”
릴라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작님께 전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릴라가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에드먼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궁을 나온 마차는 작은 2 층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내린


릴라는 걸음을 서둘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누적된 피로에 죽은 듯 자고 있던 리제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야.”
이틀간은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말라 했었다.
리제나의 잠긴 목소리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자작님, 저입니다.”
릴라의 목소리에 리제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릴라의 성격상 정말 다급한 일이 아니면
그녀의 명령을 어길 리 없었으니까.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릴라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혹 황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오늘은 릴라가 황궁을 가는 날이었다. 급한 일이라면 에드먼드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리온 시오스에 관한 일입니다.”
“……뭐?”
리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리온을 찾은 것이냐.”
“그것이…… 제가 찾은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리온 시오스를 데리고 있습니다. 자작님.”
“뭐? 그게 무슨 말이냐.”
“황자 전하께서 황태자에게 폐하께서 리온이란 자를 만나고 있다 들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하
감옥에 리온 도련님께서 갇혀있는 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하 감옥……?”
그곳은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리제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혼란스러워 미간을 좁혔다.
레이몬드가 리온을 만났고 리온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니.
“황궁을 나오는 길에 궁인들에 몇 가지 말을 물었사온데 그 누구도 리온 도련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비밀리에 도련님을 잡아와 가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왜.
리제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일로 가문의 일원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은 것이었다면 대놓고
그녀부터 쳤을 것이다.
그리고 리온을 잡아 와 공식적으로 벌해야 했다.
그런데 비밀리에 움직이다니.
이미 오래전 가문을 떠난 이였다.
시오스 가문에 대해서는 알아도 리온이란 아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별로 없을 만큼 눈에 띄지
않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리온을 굳이 이 시점에 잡아 오다니.
“……황자가 잘못 안 것은 아니냐?”
“황태자 전하에게 직접 들었다 하니, 잘못된 정보는 아닌 듯합니다.”
“폐하께서 갑자기 대체 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것이 관련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보름 전쯤 드로이트 공작이 폐하를 독대하였고 곧장 4
기사단장이 폐하를 찾았다 들었습니다.”
“그가 나섰나 보군.”
레이몬드는 카르텔을 가장 신임했고 모든 비밀스러운 임무는 카르텔이 도맡아 했다. 그의 검이라 불리는
자였으니까.
“드로이트 공작이 다녀간 후에 카르텔을 불렀다…….”
만약 드로이트 공작에게 무언가를 듣고 카르텔에게 리온을 찾으라 명한 것이라면.
리제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드로이트 공작이 리온에 대해 레이몬드에게 전할 말이 무엇이 있지.
아니, 리온이 아니라 시오스 가문에 대한 정보가 드로이트 공작가에 더 남아 있는 것이라면.
시오스 가문을 한 번에 몰락시킨 증거들은 드로이트 전 공작이 모아 놓은 것들이었다.
시오스 가문에 대한 약점을 모았던 드로이트 전 공작.
그가 무언가를 더 남겨 놓은 것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 뭐가 더…… 설마.
“……아니야.”
순간 매우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등줄기를 스치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 간사한 늙은이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건가.
죽은 황태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자였다. 어쩌면 전 공작은 죽은 황태자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오스 가문의 비리가 전부 밝혀진 지금 남은 비밀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전 공작이 가문에 에드먼드와 죽은 황태자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남겨 놓은 것이라면.
그게 드로이트 공작에 의해 레이몬드에게 들어간 것이라면.
레이몬드가 리온을 찾은 이유가…… 설명되었다.
레이몬드가 즉위한 뒤 리온은 제국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 죽은 황태자와 리제나가 은밀히 만남을
가졌던 그 시절엔 시오스 후작가에 있었다.
레이몬드는 리온에게 에드먼드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밝히기 위해 잡아 온 것이 분명했다.
“하아…….”
리온이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에드먼드가 죽어가는 환상이 스쳤다.
심장이 철렁이다 못해 멈추는 듯 한 충격에 가슴에 손을 얹으며 격한 숨을 내쉬었다.
“자작님, 괜찮으십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자 릴라가 리제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 하아…….”
“자작님.”
에드먼드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레이몬드는 에드먼드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일어날 기회 같은 것도 없는 것이다.
이대로 모두 죽고 레이몬드와 엘리야, 그들만이 이 세상에 남아 완벽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던가.
불안감에 심장이 터질 듯 뛰던 리제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이성이 돌아왔다.
두려움과 불안감은 지독한 분노와 복수심에 빠르게 잠식되었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너희들은 절대 행복해선 안 된다.
내 모든 것을 빼앗아 앉은 자리에서 행복을 누려선 안 된다.
리제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방을 나가 저택의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급하게 정리하고 나오느라 거의 모든 것들을 버렸지만 가문의 오래된 가보들은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중, 아주 오래된 위험한 물건이 있었다.
“자작님. 무엇을 찾으시는지 제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찾겠습니다.”
리제나를 따라 지하실로 온 릴라는 먼지 가득한 곳을 헤집으며 미친 듯이 무언가를 찾는 리제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리제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찾았다.”
짐들을 뒤져 낡고 헤진 갈색 나무 상자를 찾은 리제나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검은 크리스털 병이 있었다.
“릴라.”
작은 크리스털 병을 꺼낸 리제나가 릴라에게 몸을 돌렸다.
“네. 자작님.”
“마지막으로 네가 날 위해 해 줄 일이 있어.”
독이 든 크리스털 병을 손에 꼭 쥔 리제나는 위험한 미소를 띠었다.

156 화

리온 시오스가 궁에 잡혀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초조한 마음에 난 레이몬드를 먼저 찾았다.


“황후.”
평소답지 않게 굳은 내 얼굴에 궁인들이 눈치껏 빠르게 집무실을 나간 뒤, 난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폐하, 리온이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쉽게 입을 열지 않는군.”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를 무자비하게 고문하진 않았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잠도 못 들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다른 증인을 찾았다는 말 까지 흘리기까지 했는데도 아직 입을 열지 않다니.
“다른 증인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초조한 기색도 없다 합니까?”
“없다더군.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흘 내리 굶고 자지도 못한 채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요조차 없었다니. 정말 리제나와 에드먼드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걸까. 아니면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이기에 그런 걸까.
“그놈이 이렇게까지 버틸 줄이야……. 더는 고상하게 기다려 줄 수 없을 거 같아.”
레이몬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고문을 강행할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리온의 입을 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놈이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리제나를 잡아 와서라도 진실을 말하게 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1 황자가 죽은 황태자의 자식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설마 그렇게까지 엄청난 짓을 벌였을까, 생각했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리제나라면 그리했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죽이면서까지 에드먼드를 황제로 만들려 했던 과거의 반역 도모 역시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의 자식이 아니라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레이몬드가 에드먼드의 친부가 아니었으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리온은 폐하의 뜻대로 하시고 전 혹시 모르니 서왕국 쪽을 다시 한번 뒤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황자의 일로 너에게 짐을 지워 미안해.”
“……이건 단순한 1 황자의 일이 아니니까요. 괜찮습니다. 폐하께서야말로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폐하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유념하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인 그때, 문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레이몬드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칼라일이?”
“검술 수업이 끝나고 온 듯합니다.”
난 시계를 확인하고 그에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칼라일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방금까지 안색이 어둡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칼라일과 가까워진 그는 아이를 맞이하는 데 더 이상의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렴, 황태자. 나는 보이지 않는 거니?”
익숙하게 레이몬드에게 다가가 안기는 칼라일을 보며 난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어머니도 보여요.”
그리 말하면서도 칼라일은 레이몬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운함도 들었지만 아빠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칼라일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먼저 나왔다.
한참 심각한 문제에 골머리가 아프던 차에 칼라일은 우리에게 작은 휴식 같은 행복이었다.
레이몬드는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검술 수업은 재밌었느냐.”
“음, 오늘은 횡으로 베기를 배웠어요. 어렵긴 했지만 재밌었어요. 어서 검술을 배워서 아버지를 이길
거에요!”
“흠,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내 더 노력을 해야겠구나.”
“아, 너무 노력하진 마세요……. 스승님이 아버지를 이기려면 20 년은 더 나이를 먹어야 가능하다고
한걸요. 그러니까 조금만 노력해 주시면 안 돼요?”
레이몬드의 농담에 자신감이 넘치던 칼라일은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레이몬드가 정말 노력해 격차가 더 벌어질까 진심으로 걱정되는 모양새였다.
진지하게 부탁하는 칼라일의 모습에 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리고 레이몬드 역시 그런 칼라일이 귀여운 듯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황태자가 이리 부탁하니 내 그럼 조금만 노력하도록 하마.”
“네!”
칼라일이 씩씩하게 답한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전했다.
“폐하, 1 황자 전하의 시녀장이 전할 말이 있다며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들여보내.”
곧 1 황자 궁의 시녀장이 집무실로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이냐.”
“폐하. 황자 전하께서 오늘 저녁을 함께하고 싶으시다며 허락을 구하셨습니다.”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1 황자의 전언에 나도 레이몬드도 얼굴이 굳었다.
“불가하다 전해라.”
레이몬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싸늘한 답이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그를 탓할 순 없었다.
그는 지금 1 황자가 죽은 황태자의 자식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 1 황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폐하, 1 황자 전하께서 용기 내어 청하신 것입니다. 외가의 일이 있으시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부디 1 황자 전하를 살펴주십시오.”
황자의 시녀장은 애원하듯 고개를 조아렸지만 레이몬드의 눈빛에 작은 동정도 스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그때. 칼라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먹으면 안 되나요?”
“황태자.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란다.”
“그치만…… 전 형님이랑 저녁 같이 먹고 싶어요! 다 같이요! 원래 가족들은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거잖아요.”
칼라일은 레이몬드와 나를 번갈아 보며 간절한 눈빛을 했다.
칼라일은 어른들의 사정은 몰랐으니 보고 싶은 형이랑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칼라일은 에드먼드를 유별나게 잘 따랐으니까.
레이몬드와 난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칼라일에게 속사정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한다 해도 아직 어린 칼라일은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 같이 먹어요. 저도 부탁할게요.”
칼라일이 우리의 손을 잡으며 한 번 더 간절히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자 차마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이몬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곤란한 눈빛으로 칼라일을 내려보던 레이몬드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1 황자에게 저녁 만찬에 참석하라 하거라.”

* * *

“황자 전하, 폐하께서 만찬에 참석하라 전하셨습니다.”


허락을 구하러 태양궁에 다녀온 시녀장이 밝은 얼굴로 돌아와 에드먼드에게 말을 전했다.
“……그래. 알겠어.”
아버지의 애정을 늘 그리워했던 에드먼드였다.
그러니 오랜만에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에드먼드는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허락을 구하라 했을 때만 해도 긴장하던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다.
시녀장은 어쩐지 안색이 어두운 에드먼드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황자 전하. 혹 어디 몸이 편찮으신가요?”
“……아, 아니. 괜찮아.”
“황자 전하께서 오랜만의 폐하와의 식사에 긴장이 되셔서 그런 듯합니다.”
에드먼드의 곁에 있던 릴라가 시녀장에게 말했다. 순간 하녀가 대화에 끼어든 것에 시녀장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무어라 말을 하진 못했다.
릴라의 신분은 낮아도 리제나의 수족이 다름없는 하녀라는 걸 1 황자궁 궁인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불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녀장은 싸늘한 눈빛으로 릴라를 무시하며 황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시다니 그럼 전 만찬에 가지고 가실 디저트가 다 준비되었는지 확인하러 가 보겠습니다.”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 가지고 와.”
“네, 알겠습니다.”
시녀장이 나가고 에드먼드는 불안한 눈빛으로 곁에 선 릴라를 힐긋 바라보았다.
릴라는 이틀 전 어머니의 명령을 받고 그를 찾아왔다.

<i>‘황자 전하, 자작님께서 이것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음식에 넣으라
명하셨습니다.’</i>
<i>‘……이게 뭐지?’</i>
<i>‘황자 전하의 미래를 지켜줄 유일한 방법입니다.’</i>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릴라는 에드먼드에게 작은 크리스털 병을 내밀었다. 병 안에 무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에드먼드는 그것을 받자마자 독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i>‘……지금 내게 아버지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독살하란 말을 하는 것이냐?’</i>

에드먼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릴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릴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에드먼드에게 리제나의
말을 전했다.
<i>‘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법도 배우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본인은 물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습니다.’</i>
<i>‘그게 무슨, 난 못해. 난 절대 이런 일을……!’</i>
<i>‘황자 전하께서 하지 못하신다면 자작님께선 죽습니다.’</i>
<i>‘뭐……?’</i>
<i>‘폐하께서 살아계신다면 자작님은 죽습니다. 전하.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실
작정이십니까.’</i>

고개를 저으며 손을 떠는 에드먼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죽는다니. 에드먼드는 두려워졌다.
황궁의 외톨이가 되어 버린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사라진다면…….
에드먼드는 너무 두려워졌다. 어머니가 죽는다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온몸이 떨렸다.

<i>‘……이걸 넣으면, 정말 어머니께서 무사하시게 되는 거야……?’</i>


<i>‘물론입니다. 자작님도 그리고 황자 전하께서도 무사하실 겁니다.’</i>

릴라는 바들바들 떠는 에드먼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여주었다.


에드먼드는 그 미소가 너무나 무서워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때는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저 크리스털 병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57 화

그리고 오늘 에드먼드는 기회를 잡았다.


“황자 전하. 명하셨던 디저트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이틀 전을 회상하던 에드먼드는 시녀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장이 사과 타르트가 든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타르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녀장이 에드먼드를 보았다.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합니다. 이대로 준비하면 될까요?”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잠시 나가 있어.”
“예, 전하.”
시녀장이 나간 뒤, 에드먼드는 황태자가 제일 좋아한다는 디저트인 사과 타르트를 보며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크리스털 병을 꺼냈다.
이틀 동안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에드먼드가 계속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먼드는 복잡한 눈빛으로 크리스털 병을 내려다보다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병뚜껑을 열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릴라가 시선을 들어 에드먼드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에드먼드가 독을 뿌리는지 안 뿌리는지 확인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하라 하셨겠지.
직접 보라고 명하셨을 거다. 어머니는 철두철미한 분이셨으니까.
에드먼드는 릴라의 집요한 시선에 화답하듯 사과 타르트 위로 크리스털 병의 액체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어느 곳 하나 액체가 스미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 병이 완전히 비고 나서야 에드먼드는 손을 내렸다.
“이 정도면…… 되겠지?”
에드먼드는 떨리는 손으로 크리스털 병을 꽉 그러쥐며 릴라를 돌아보았다. 릴라는 에드먼드를 온도 없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들킨 걸까.
에드먼드는 사람 같지 않는 차가운 눈빛에 순간 손끝이 떨렸다.
사실 에드먼드가 사과 타르트 위로 뿌린 것은 독이 아니었다.
독을 처음 건네받았을 땐 두려움에 정신이 팔려 아버지와 칼라일에게 독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시간이 흐르자 점차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현실감이 들었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이려 하다니.
감히 상상해서도, 실행해서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었다.
하여 에드먼드는 릴라의 눈을 피해 어느 새벽, 병 안의 독을 전부 버리고 그곳에 물을 채웠다.
어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거 같았지만 그렇다 하여 아버지와 동생을 죽일 순
없었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어머니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이라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게 맞는
것이다.
그러니 에드먼드는 절대 아버지와 동생을 죽일 수 없었다.
에드먼드는 말이 없는 릴라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눈치챈 것일까 불안해지던 순간, 릴라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잘하셨습니다. 황자 전하.”
릴라는 에드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빈 크리스털 병을 건네받은 릴라는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전하. 그럼 전 자작님께 소식을 전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릴라가 방을 나가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홀가분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i>‘황자 전하께서 하지 못하신다면 자작님께선 죽습니다.’</i>

“…….”
릴라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 그는 어머니를 배신한 걸지도 모른다.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걸까.
리제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도 독을 뿌릴 순
없었다.
“황자 전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시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디저트를 챙겨 와.”
“네.”
에드먼드는 윤기 나는 사과 타르트를 물끄러미 보다 먼저 방을 나갔다.
에드먼드가 만찬 장소로 먼저 떠나고 시녀장은 사과 타르트 쟁반을 들었다. 뚜껑을 조심스럽게 덮고 막
방을 나가려던 그때, 방 안으로 릴라가 들어왔다.
“시녀장님, 그것은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손을 내미는 릴라에게 시녀장이 얼굴을 구겼다.
“이것은 만찬 장소로 가져갈 디저트다. 일개 하녀인 네가 가져갈 음식이 아니다.”
“하오나 방금 황자 전하께서 궁은 나가시기 직전 저에게 디저트를 가져오라 명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셨다고?”
“네. 아시다시피 황자 전하께선 지금 심신이 불안하시고 오랜만에 폐 하를 뵙는 것이라 긴장하고 계십니다.
하여 제가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릴라의 매끄러운 말에 시녀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릴라는 황자가 어릴 때부터 봐온 하녀였고 지금 궁에 리제나를 대신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릴라는 이틀간 에드먼드의 곁을 계속 지켰다.
시녀장은 당연히 릴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릴라에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조심히 들고 가게.”
“네. 시녀장님.”
시녀장이 기분 나쁜 듯 먼저 방을 나간 뒤, 릴라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확인하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윤기나는 사과 타르트 위로 투명한 액체를 뿌렸다.

* * *
“1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에드먼드가 들어왔다. 칼라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쁘게 그를 불렀다.
“형님!”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뵙니다.”
에드먼드는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에 에드먼드에게 당장 달려갈 듯 일어난 칼라일은 주춤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일전에 마주쳤을 때 에드먼드가 차갑게 대했다더니.
그 때문인 듯했다.
헬란에게 두 사람이 만났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에드먼드에게 먼저 미소를 그렸다.
“에드먼드, 어서 자리에 앉으렴.”
“네. 황후 폐하.”
에드먼드는 상석인 레이몬드의 왼쪽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 앉은 아이의 얼굴은 살피자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에드먼드는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 든 아이였다. 황태자로 키워졌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차라리 정계의 상황 같은 것 몰랐다면 충격이 덜했을 텐데.
황태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무너진 외가.
황자로서의 허울뿐인 신분 외에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동안 에드먼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날 보면 더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황태자의 자리도 외가를 무너뜨린 것도 내가 관련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버지.”
에드먼드는 레이몬드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레이몬드의 눈빛이 에드먼드를 향한 순간 난 긴장감에 어깨가
움찔했다.
레이몬드는 지금 에드먼드를 죽은 황태자의 자식으로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성을 잃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래.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이냐?”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레이몬드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결 긴장이 풀린 그때 에드먼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그동안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다. 내가 너를 더 챙기지 못한 것이 미안한 일이지. 신경 쓰지 말거라.”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나요?”
에드먼드는 칼라일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다정함이 느껴지는 미소는 일전에 헬란에게 들었던 싸늘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황제와 황후가 있으니 감정을 숨기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칼라일은 형이 자신에게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전…… 아니, 난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형.”
칼라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같이 가면을 쓴 듯 감정을 죽이고 있는 만찬장에서 칼라일의 웃음만큼은 이질적이게도 진짜였다.
칼라일의 맑은 웃음소리에 순간 에드먼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칼라일이 싫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가까웠다.
에드먼드가 칼라일에게 죄책감을 느낄 일이 무엇이 있다고.
곧 사라지는 위화감에 잘못 본 것으로 치부하며 난 식사를 내오라 시종에게 눈짓했다.
곧 테이블 위로 화려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저녁의 이야기를 이끈 사람은 칼라일과 에드먼드였다.
레이몬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가끔 예의상의 대답만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식사 내내 에드먼드에게 말을 걸었고, 에드먼드는 칼라일에게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칼라일에게 에드먼드를 그만 괴롭히라 말렸겠지만 오늘은 내버려 두었다.
칼라일이 말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여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에게 말이라도 건다면……. 그 뒤의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칼라일의 목소리만 가득했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시종이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다.
“폐하, 황후 폐하. 이것은 1 황자 전하께서 직접 준비한 디저트입니다.”
은쟁반을 내려놓으며 시종이 말했다.
뚜껑을 열자 달콤해 보이는 사과 타르트가 보였다.
“이것을 에드먼드 네가 준비했다고?”
이건 칼라일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묻자 에드먼드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예,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신다 들어, 사과 타르트를 준비해왔습니다.”
“어머나, 그걸 어찌 알고. 칼라일 어서 고맙단 인사를 하려무나.”
“고마워. 형.”
에드먼드가 자신을 챙겨준 것이 너무 좋은지 칼라일이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저번에 싸늘하게 칼라일을 대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인건가.
에드먼드의 심성이 리제나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고마워 미소를 지은 난 사과 타르트 한
조각을 덜어 칼라일의 접시 위로 놓아주었다.
칼라일은 기다렸다는 듯 포크로 크게 타르트를 조각냈다. 그리고 한 입 가득 타르트를 먹었다.
오물오물 타르트를 씹어 먹은 칼라일이 꿀떡 삼키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 맛있어요! 어머니도 얼른 먹…….”
“황태자?”
신나게 말을 잇던 칼라일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윽……!”
“칼라일, 왜 그러니?”
고개를 숙인 칼라일이 신음을 흘렸다.
쨍그랑- 칼라일의 손에서 떨어진 포크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 어머니…….”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며 등이 서늘해진 그때, 고개를 든 칼라일이 핏물을 토했다.
“칼라일!!”
경악스러운 얼굴로 칼라일을 부른 난 앞으로 쓰러지는 아이를 황급히 안았다.
“이게 무슨, 칼라일!”
레이몬드가 의자를 박차고 내 곁으로 달려왔지만,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품 안에서 쓰러지는 칼라일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크, 쿨럭!”
칼라일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걸쭉하고 뜨거운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명한 감각에 심장이 멈추는 거 같았다.
“칼라일, 칼라일!”
“……아파, 요…….”
칼라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의, 의식을 잃으면 안 돼. 안돼, 칼라일 제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칼라일의 몸이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아. 아…… 안돼!! 칼라일!”
“황궁의를 불러라! 당장!!”
레이몬드의 다급한 외침이 이명처럼 귓가를 울렸다.
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칼라일을 꽉 끌어안은 채 미친 사람처럼 칼라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158 화

“황후, 황후! ……엘리야!”


칼라일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난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레이몬드의 심각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정신 차리라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정신 차려.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어서 데려가야 해.”
레이몬드의 말이 맞았다. 이럴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칼라일을 치료받게 해야 했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난 가쁜 숨을 내쉬는 칼라일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태자를 어서 침상으로 데려가고 황궁의들을 그곳으로 불러라.”
손을 덜덜 떠는 나 대신 레이몬드가 시종에게 명했다.
내게서 칼라일을 안아 든 시종이 서둘러 만찬 장소를 나가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몸에 힘을 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칼라일이 쓰러진 지금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안 됐다.
그렇게 만찬장을 나가려던 순간, 난 돌처럼 서 있는 에드먼드가 보였다.
에드먼드가 가져온 사과 타르트
그것을 먹고 피를 토한 칼라일.
너무도 명백한 독살의 정황이었다.
“정말 네가…….”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니.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내 목소리를 들은 에드먼드가 시선을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에드먼드는 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전…….”
무어라 입술을 달싹인 그때, 레이몬드가 내 어깨를 잡았다.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 어서 칼라일에게 가 봐.”
에드먼드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싶었지만, 지금 내게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응.”
난 결국 그 둘을 남겨두고 먼저 만찬장을 나갔다.

* * *

엘리야가 만찬장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에드먼드에게 몸을 돌렸다.


충격과 두려움에 물든 에드먼드의 얼굴이 보였다.
사과 타르트에 독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리고 사과 타르트는 황자가 직접 준비한 디저트였다.
에드먼드가 칼라일을 죽이려 하다니.
원수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에드먼드가 자신의 자식을 죽이려 했다.
레이몬드는 당장 에드먼드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온 힘을 다해 참으며 이성적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 타르트를 황궁으로 들여온 자를 끌고 와라.”
에드먼드 혼자서 저지른 일일 리가 없으니까.
“네.”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찬장으로 기사들이 백발의 여자 하나를 데려왔다.
황궁 시녀 복장이 아니었다.
“릴라……!”
백발의 여자를 본 에드먼드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에드먼드는 여자가 누군지 아는 듯했다.
황궁의 사람이 아니지만 에드먼드가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시오스 자작의 사람이구나.”
서늘한 음성이 울리자 에드먼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네 친모의 사람이 맞느냐.”
에드먼드는 레이몬드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목이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처음
느껴본 것이다.
에드먼드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맞습니다.”
“시오스 자작의 사람이 가져온 독이 든 디저트……. 1 황자, 넌 이 일에 변명할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황태자를 독살 시도하려 한 것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냐.”
“……예.”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한 눈빛이었지만, 에드먼드는 곧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릴라가 끌려 들어온 순간 에드먼드는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릴라는 그가 가짜 독을 뿌린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일을 완벽히 하기 위해 릴라도 독을 넣기로 했을지도.
에드먼드는 결국 이번에도 어머니의 계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일이라 한다면 어머니가 끌려올 것이다. 그리고 절대 무사하지 못하시겠지.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에드먼드를 보던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1 황자와 이 여자를 감옥에 가두고 지금 당장 시오스 자작을 잡아 와라. 죄목은 황태자의 독살시도다.”
레이몬드의 명에 에드먼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머니는 모르시는 일입니다!”
“그건 추후 밝혀질 일이다. 끌고 가.”
“예, 폐하.”
“……폐하! 아버지!”
에드먼드가 끌려가며 소리쳤지만, 레이몬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만찬장에 남은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피가 흩뿌려진 바닥을 응시했다.
칼라일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
죽어버린 것처럼 축 늘어지던 아이의 모습에 레이몬드의 손끝이 떨려왔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칼라일이 죽는다면…… 그는 멀쩡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칼라일을 죽이려 한 리제나를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핏자국을 깨끗이 치워라.”
떨리는 손끝을 세게 말아쥔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만찬장을 나갔다.

* * *

황제의 침소.
“황태자의 상태는 어떠냐. 대체 무슨 독을 먹은 것이지?”
황궁의 모든 황궁의들이 황제의 침소로 불려왔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사과 타르트를 살피고 칼라일을
진찰했다.
그 와중에도 칼라일은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의식을 찾지 못한 아이가 피를 토해낼 때마다 심장이 철렁였다.
그대로 숨이 끊어질까 봐.
“왜 말이 없느냐!”
황궁의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아는 일반 적인 독이 아니라 여러 가지 독을 혼합해서 만든 듯합니다.”
“해독할 방법은 있는 거겠지?”
“그것이……. 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독약을 만들 수 있사온데……. 지금으로서는 해독약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해독약을 만들 수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의 가느다랗던 이성이 끊어졌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황태자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것이냐?!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황태자가
죽으면 너희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날카로운 내 목소리가 침소를 크게 울렸다.
황궁의들이 어깨를 움찔했지만, 체통 같은 건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칼라일이 이대로 죽어 버리면……. 난, 난…….
두려움에 혼이 나갈 것 같던 그때. 덜덜 떨리는 손을 누군가 잡아 왔다.
“황후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내 손을 꼭 잡은 주름진 손이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따스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참고 있던 감정이 올라왔다.
울음이 왈칵 터질 것만 같아 숨을 크게 들이켰다.
“황후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셔야 황태자 전하도 사십니다. 마음을 굳건히 먹으십시오. 아직 황태자
전하는 살아계십니다.”
아버지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묵직한 목소리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칼라일도 무사할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해.
마음을 다잡은 난 후, 숨을 내쉬곤 손을 놓았다. 아버지가 옆으로 물러나고 황궁의에게 다가갔다.
“……독을 알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 수도 없는 것이냐?”
“그것은 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을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그사이 최대한
빨리 독이 무엇인지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르거라.”
난 침대로 다가갔다. 의식은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신음은 끊이지 않고 파랗게 질린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 헬란이 내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피닉스 상단주가 응접실에 도착하였답니다.”
제드는 음지에서 일했던 세월이 길어 알려지지 않은 독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칼라일이 독을 먹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제드를 불러오라 사람을 보냈었다.
“아버지, 잠시 다녀올 테니 칼라일을 부탁드려요.”
“걱정 말거라.”
난 제드를 만나기 위해 방을 나갔다.

* * *

엘리야가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거친 문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오는 레이몬드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칼라일을 보곤 그대로 멈춰 섰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미동 없는 몸.
거기다 아직 치우지 못했는지 하얀 침대 시트 위 아이가 토한 핏자국이 선명했다.
참혹한 모습에 레이몬드는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거 같았다. 다시는 밝게 웃는 칼라일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그의 세상이 무너지려 했다.
차라리 자신이 독을 먹었더라면.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통할 뿐이었다.
“황태자의 상태는 어떠하냐.”
얼음장처럼 굳은 얼굴과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
당장 누군가를 베어버릴 듯 살벌한 분위기에 황궁의 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독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해 일단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 약을 드시지 못하고 자꾸 뱉어내셔서 지금 다른 방법을…….”
황궁의의 말대로 무언가를 넘기지 못하는 듯 약이 칼라일의 입에서 그대로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침대에 앉아 칼라일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칼라일을 그의 품 안에 기대게 한 그는
황궁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을 이리 내라.”
“네? 어찌하시려고……. 설마 입으로 먹이시려는 겁니까.”
“그래.”
“안 됩니다. 폐하.”
황궁의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계속 피를 토했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의 입 안에 독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접촉을 하시면 그 독이 그대로
폐하께 옮겨갈 수 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황궁의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상관없다.”
“폐하, 황궁의의 말을 따르시는 것이…….”
가만히 지켜보던 크로프트 공작이 다가와 만류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칼라일의 독을 그가 대신 가져갈 수 있다면, 그래서 칼라일이 나을 수만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황태자가 버틸 만큼 시간이 넉넉한 것이냐.”
황궁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다.”
레이몬드는 황궁의에 손에 들린 약을 빼앗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약을 입에 머금은 그는 칼라일의 입
안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그렇게 몇 번을 입에서 입으로 약을 먹였다. 그의 노력이 통한 것인지 칼라일은 조금씩 그가 주는 약을
받아넘겼다.
“……이 정도면 되나?”
“……네. 어느 정도 먹으셨으니 약효가 돌 것입니다. 그보다 폐하, 몸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혹시…….”
“괜찮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낯빛이었지만 처음보단 숨소리가 편해져 있었다.
하지만 해독이 된 건 아니니 해독약이 있어야 했다.
고작 며칠이겠지.
몸을 일으키던 레이몬드는 순간 확 올라오는 어지러움에 멈칫했다.

159 화

“폐하?”
속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윽고 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왔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는 것을 완벽히 막진 못했다.
“폐하!”
그를 본 크로프트 공작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다.
레이몬드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하며 꺼낸 천으로 손과 입을 닦아냈다.
“독에 중독이……! 어서 치료를…….”
결국 황제도 독에 중독돼버린 것이다.
레이몬드는 사색이 된 황궁의들을 향해 태연히 명령했다.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부터 가져와.”
칼라일에게 약을 먹일 때부터 중독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명령에 정신을 차린 황궁의들이 황급히 약을 가져왔다. 약을 단숨에 들이켠 그는 돌아서 공작을
향해 말했다.
“내가 중독된 것은 황후에게 알리지 말거라.”
“하오나…… 폐하.”
“……어차피 해독제를 먹으면 해결될 일이다. 이건 명령이야.”
명령이란 말에 공작은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너희들도 입조심 하거라.”
황궁의들에게 경고를 한 순간, 문이 열리며 엘리야가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피가 묻은 천을 주머니 안으로 숨겼다.

* * *

“칼라일……!”
곧장 칼라일에게 달려간 난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사이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될까 불안해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칼라일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숨결이 편해져 보이기까지 했다.
“칼라일의 상태가 호전된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을 드셔서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으신
겁니다.”
“……그렇군.”
황궁의의 대답에 잠시나마 희망을 느꼈던 기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남은 사과 타르트 조각을 제드에게 가져다주었지만 무색무취의 것이라 알아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했다.
이제 이 독의 해독제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폐하, 독을 먹인 게 정말 1 황자의 짓입니까?”
“1 황자는 제가 했다 했지만 디저트를 가지고 들어온 자는 리제나의 하녀인 릴라란 여자였다.”
“릴라요?”
“아는 자인가?”
“……리제나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자입니다.”
평범한 하녀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면……. 독을 탄 것 역시 그녀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다고 하더군. 독을 탄 것 역시 그자의 짓인 것 같았다. 심문하려 하자마자 자살을 기도해 지금
묶어놓은 상태이지.”
“리제나를 추포하란 명은 내리셨습니까?”
“하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명을 내렸다. 아마 곧…… 도착할 것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카르텔이 들어왔다.
“폐하, 시오스 자작을 잡아 왔습니다.”
칼라일의 입술에 묻은 붉은 선혈을 닦아준 난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오마.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한다. 칼라일.”
독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왔으니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할 것이다.
난 피가 묻은 손수건을 꽉 그러쥐고 레이몬드와 함께 방을 나갔다.
지하 감옥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건만 마음이 초조해서인지 가는 길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조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전부 내려온 난 감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 무릎 꿇은 리제나와 쓰러져 있는 리온이 보였다.
미동 없는 리온을 보고 있던 리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폐하께서 이리 멀쩡하신 걸 보니 독은 황태자만 먹은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에 간신히 이성을 지키고 있는 듯했던 레이몬드가 결국 노성을 터뜨렸다.
“네가 감히!”
레이몬드는 성큼성큼 다가가 리제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숨통이 조이는지 리제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갔다.
몸을 비틀었지만, 손발이 묶인 채라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워하는 리제나를
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사지를 하나씩 잘라버린다 한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에 비할까.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가 달려가지 않았다면 제가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죽일 수 없었다.
“폐하.”
난 레이몬드의 팔을 살짝 잡았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 뒤, 곧 레이몬드는 리제나를 던지듯 놓아주었다.
“켁, 켁……!”
그 반동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던 리제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큭, 흐으……! 크큭.”
거친 기침을 뱉으며 목을 가다듬던 리제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더러운 바닥을 구르며 웃는 그녀는 정신을 놓아버린 거 같았다.
“이런다고 황태자가 살아날까?”
리제나는 웃음을 멈추고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의 가식은 집어치우기로 한 듯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경멸로 비틀어졌다.
“그간 잘도 숨겼군.”
“숨겨? 뭘 숨겼다는 거지? 난 늘 내 것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내걸 빼앗기기만
하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네 것? 대체 네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이냐.”
“황후의 자리! 내 아들의 황태자 자리! 애초에 전부 내 것이었다고!!”
리제나의 번들거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
“애초에 네 것이 아닌 것을 네 것이라 말하는 그 억지가 가상하군.”
레이몬드는 차갑게 답했다.
리제나는 무리하게 칼라일을 독살하려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리고 있던 미래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후작가가 무너졌다 해도 리제나의 성격상 이렇게 빠르게 포기하는 것은 이상했다.
자신이 절대 뒤집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리고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내 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황태자 자리라고.”
에드먼드의 혈통.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의 자식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단코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다.
지하 감옥으로 오며 독살의 이유를 짐작했고 리제나가 리온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음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 또한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선수를 치려 했다는 것을.
리제나의 입꼬리가 일순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입이 찢어질 듯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에드먼드는 더러운 네놈의 자식이 아니야.”
리제나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고 감옥 안의 기사들은 숨을 삼켰다.
1 황자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도 엄청나고 끔찍한 진실이었으니까.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을 받자 레이몬드는 충격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리제나는 굳어 버린 그를 농락하듯 붉은 입술을 빠르게 움직였다.
“천한 배를 빌어 나온 패륜아의 자식이 아니라 선황 폐하의 적장자인 선 황태자 전하의 아들이지. 너 따위
패륜아와는 정통성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레이몬드를 일부러 더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충격에서 벗어난 듯 레이몬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황제의 핏줄을 속인 것도 모자라 황태자를 독살하려 하다니, 네가 사지가 찢겨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검은 안광에서 살기가 튀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이미 눈빛으로 리제나를 갈기갈기 찢었으리라.
그의 살기에 기사들이 움찔할 정도였지만 리제나는 잠깐 움츠러들었을 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얌전히 혼자 갈 순 없지. 황가의 진정한 적통인 내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 위한 마지막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어?”
리제나는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내 아들이 약을 제대로 타지도 못했어. 어리석지, 어리석어.”
난 그녀의 말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에드먼드가 떠올랐다.
자기 자식에게 남을 죽이라 명하다니.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다 한들 어떻게 그런 짓을.
“그리 소중한 네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면서 넌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이냐.”
“이래도 죽을 목숨 저래도 죽을 모순이었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복수라도 하고 죽어야지. 비참한 황자로
살아갈 바엔, 에드먼드도 지금 죽는 게 나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에드먼드를 지키기 위해 칼라일을 독살하려 한 것이었다면 한줄기의 이성으로나마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을 복수에 이용하려 하는 리제나를 도저히 내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괴기한 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한때는 동경하고 부러워한 적도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토록 추하게 망가져 버리니 그녀에겐 분노조차 아까웠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엘리야 크로프트. 네가 이곳에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네가 칼라일을 가지지만
않았어도! 에드먼드는 지금쯤 황태자의 자리에 앉았을 거라고!!”
리제나는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바닥을 기며 머리를 들이미는 리제나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난 걸음을 물렸다.
얼굴을 구긴 그가 입술을 열려 한 그때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한 자는 다름 아닌 리온 시오스였다.
의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어느새 리온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온의 녹안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선명했다.
“한때는 누나에게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아버지와 똑같은, 아니, 아버지보다 더
추악하게 변해버렸어.”
리온의 목소리엔 허탈함이 가득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난 몰라. 누나와 아버지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던 권력에 대해 난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아.”
리온이 창백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게 살면 안 된다는 거. 어떻게 자기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어. 어떻게
에드먼드에게 독을 먹이라 사주해!”
리온의 거친 음성이 지하실을 크게 울렸다.
그에게 이런 힘이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센 분노였다.
리제나를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보던 리온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 황후 폐하. 그 독의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제가 압니다.”

160 화

“해독제가 있다고?”
난 놀란 얼굴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리온!!”
그때 리제나가 눈을 홉뜨며 리온에게 달려들려 했다.
“막아라.”
레이몬드의 명령에 기사가 리제나를 제압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거짓을 말한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경고에 리온은 고개를 조아렸다.
“있습니다. 애초에 해독제와 같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당장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리는 대신 폐하께 청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내게 거래를 하자는 것이냐? 네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싶은가 보지.”
레이몬드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신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목숨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폐하……. 1 황자 전하의 목숨만은 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잠시 레이몬드의 표정이 굳었다.
“……나보고 지금 전 황태자의 핏줄을 살려달란 말이냐.”
“폐하,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평생 폐하가 아버지라 믿으며 커온 아이입니다.”
리온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청했다.
“이번 독살 사건 역시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평생을 이용당했는데 마지막까지 어른들의 싸움에
희생당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제발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네가 그런다고 에드먼드의 목숨을 살려줄 것 같아!? 이 멍청한 것아!”
기사의 손을 깨물어 잠시 틈을 번 리제나가 리온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린 이미 다…… 읍!”
곧 입이 다시 틀어막힌 리제나는 아예 바닥으로 몸이 눌렸다.
레이몬드는 그런 리제나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그리고 곧 리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속하지. 1 황자의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
레이몬드의 말에 리제나의 버둥거림이 멎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리온은 레이몬드가 결정을 번복할까 황급히 말했다.
“해독제와 독약을 항상 같이 보관했었으니 분명 해독제도 저택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은빛 테두리가 둘린
나무 상자 안에 담긴 분홍색 크리스털 병, 그것이 바로 해독제입니다.”
“지금 당장…….”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칼라일을 살릴 해독제였다. 내가 직접 가지러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텔, 황후를 모셔라.”
“네. 폐하.”

* * *

엘리야가 지하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리제나를 포박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리제나는 기사들이 놓아주자마자 레이몬드에게 악을 질렀다.
“그따위 자비 바라지도 않아! 어디까지 더 비참하게 만들 거야! 어서 죽여! 죽이고 싶잖아? 나도
에드먼드도 죽이고 싶어서 미칠 거 같잖아!”
리제나는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버릴……! 놔, 놓으라고! 아아아악!”
기사들이 바로 붙잡기는 했지만, 추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는 모습에서 과거 그가 기억하던
리제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광기에 찬 리제나의 녹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장 날 죽여-!”
그녀의 사지를 잘라 들판에 던져 주고 싶은 마음은 차고 넘쳤지만 더러운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은 한 번
이면 족했다.
“넌 재판에 설 것이다.”
“하, 재판?”
“네가 지은 죄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에 대한 판결을 받겠지. 넌 죽어서도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초라하게 기억될 거다.”
레이몬드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자비를 베풀어 에드먼드를 살릴 것이다. 나와 내 아들, 그리고 엘리야의 이름이 칭송받을 수
있도록.”
나직이 이어지는 레이몬드의 말에 리제나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작은 흠집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는 것은 복수의 완전한 실패였으니까.
발악하는 뒤로하며, 레이몬드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 그리고 이건 네가 알아야 할 거 같아서. 네 아들은 끝까지 너를 감싸더군. 너 같은 것도 어미라고
말이야.”
리제나의 발악이 멈추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리제나의 얼굴이 어떨지 레이몬드는 짐작이 갔다.
그리고 이내 비명과도 같은 울음이 레이몬드의 등 뒤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레이몬드는 속에서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
독이 내장을 갉아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토기를 온 힘을 다해 참으며 그는 비참함만이 얼룩진 지하 감옥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 * *

리제나의 저택은 수도 외곽에 있었다.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리제나의 최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기사들은 문을 열고 저택을 완전히 점거했다.
“황후 폐하, 드시지요.”
멈칫하던 난 다급한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은빛 테두리가 둘린 나무 상자라 하였다. 집 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거라.”
나의 명령에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거침없이 집 안을 헤집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곧 방 안을 나오는 기사들이 하나같이 물건을 찾지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초조함에 속이 타들어 가던 난 기사들에게 잡혀있는 하녀에게 다가갔
무너진 시오스 가문에 유일하게 남은 하녀인 듯했다.
새로 구했다고 하기엔 상당히 나이가 많았으니까.
카르텔에 눈짓하자 그가 검을 뽑았다. 하녀의 목에 칼을 대자 하녀가 히이익, 소리를 내며 기겁했다.
“황, 황후 폐하……!”
“내가 묻는 것에 잘 대답한다면 네 목숨은 무사할 것이다.”
“네, 네.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저택에 중요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장소가 어디냐?”
“네?”
“시오스 가문에서 가지고 나온 귀중품을 보관한 장소 말이다. 모두 버리고 왔다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하녀가 곧장 입을 열었다.
“서재에 지하로 향하는 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하에 귀중한 물건들을 모두 모아놓았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어라. 그럼 살려주마.”
“네, 네!”
카르텔이 하녀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하녀의 걸음을 따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으로 들어온 하녀는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카르텔이 나서기도 전에 난 문을 열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뒤를 따르는 다급한 기사들의 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난 해독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칼라일이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림과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들이 가득한 지하실을 뒤지고 또 뒤졌다.
“황후 폐하, 저희가…….”
기사들이 무어라 말하는 것도 무시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파헤치던 난 순간 작은 나무 상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설마.
재빨리 상자를 들자 은빛 테두리가 둘린 것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곳에 담긴 분홍색 크리스털 병이 보였다.

<i>‘은빛 테두리가 둘린 나무 상자 안에 담긴 분홍색 크리스털 병, 그것이 바로 해독제입니다.’</i>

리온의 말 그대로였다.
“찾았어.”
작은 분홍색 크리스털 병에 담긴 액체.
해독제가 분명했다.
이제 칼라일을 살릴 수 있어.
난 환희에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해독제를 챙겼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명했다.
“해독제를 찾았다.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난 단숨에 침실까지 달려갔다.


“칼라일.”
직접 말을 몰고 와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칼라일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해독제를 찾았음에도 혹시나 이미 칼라일이 죽어 버린 게 아닐까,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상들이 나를 괴롭혔다.
“……황태자의 상태는 어떠한 것이냐?”
“독을 늦추는 약이 생각보다 잘 들어 아직은 괜찮습니다.”
황궁의가 빠르게 답했다. 그리고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 그게 해독제인가?”
“네, 폐하.”
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크리스털 병을 황궁의에게 건넸다.
병을 받아든 황궁의가 순간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후 폐하. 이게 전부입니까?”
“그게 전부네. 왜 그러나? 혹시……. 더 많은 양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이…….”
황궁의가 난감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모자란 건가.
겨우겨우 찾아 왔건만 해독제의 양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이 철렁한 그때, 레이몬드가 황궁의에게 물었다.
“황태자에게 쓰기에 부족한 것이냐?”
“아뇨,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된 것이지, 다른 문제가 뭐가 있단 말이냐. 어서 먹이거라.”
모자라지 않다는 말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칼라일의 손을 꼭 잡으며 시선을 내렸다.
이제 칼라일이 살 수 있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폐하.”
하여 난 황궁의가 어떤 얼굴로 레이몬드를 보았는지, 아버지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인 것도 보지
못했다.
해독제가 칼라일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작은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난 숨을 죽였다.
해독제가 제발 효과가 있길 빌고 또 빌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던 칼라일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거친 숨결도 점차 진정되었다.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황궁의가 몸을 기울여 칼라일의 상태를 살폈다. 난 숨을 죽이며 황궁의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인가?”
황궁의가 진찰을 마치자마자 물었다.
해독제가 잘 들은 것일까.
불안감에 심장 거세게 떨리는 순간, 황궁의가 굳어있던 얼굴을 풀며 말했다.
“예. 다행히도 효과가 있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아아…….”
가슴에 벅차오르는 안도감에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칼라일, 미안해,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난 칼라일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난 칼라일을 꼭 끌어안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161 화

“깨우지 말거라.”
칼라일을 꼭 끌어안고 울던 엘리야는 그대로 칼라일과 함께 잠이 들었다.
레이몬드는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다 황궁의에게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의 상태는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이냐?”
“네. 독이 빠르게 해독되고 있습니다. 당분간 몸의 기운을 되살리는 약을 꾸준히 드신다면 후유증도
없으실 겁니다.”
“다행이군.”
한결 안심한 얼굴로 숨을 내쉬던 그때,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왔다.
“욱!”
레이몬드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돌렸다.
“폐하!!”
황궁의들이 놀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핏덩어리를 뱉은 레이몬드는 손등으로 입술을 대충 닦으며 황급히
말했다.
“목소리 낮추거라.”
엘리야가 혹시라도 깨어났을까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엘리야는 칼라일과 깊이 잠들어 버린 듯했다.
“폐하, 이건 숨기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아까 해독제를 나눠……”
레이몬드의 곁으로 다가온 크로프트 공작이 참담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
여기서 소란을 피웠다간 엘리야가 깨어날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붙잡는 크로프트 공작과 황궁의들을 뒤로 하고 먼저 침실을 나갔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응접실로 향한 레이몬드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참았던 피를 토해냈다.
“큽.”
“폐하!”
“……소란피우지 말고 독이 퍼지는 걸 늦추는 약을 다시 가져와.”
레이몬드의 명령에 황궁의는 황급히 약을 가져왔다. 단숨에 약을 들이켜자 들끓던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약을 먹으면 그래도 좀 괜찮군.”
레이몬드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결에 섞인 비릿한 피 향이 진했다.
그 모습을 보던 크로프트 공작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독제를 드셔야 했습니다.”
공작은 죄책감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와 황태자.
둘이 위험에 처한다면 당연히 황제를 먼저 살려야 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크로프트 공작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해독제의 양이 한 명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칼라일이 아닌 레이몬드를 살려야 한다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황제의 충신이 아닌 칼라일의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자신이 없었다.
칼라일을 외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대의 잘못은 없다. 설령 그대가 그 해독제를 나보고 먹으라 했다 한들, 내가 마셨을 리가 없지 않나.”
레이몬드는 죄악감으로 얼룩진 크로프트 공작의 얼굴을 보곤 낮게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감히…….”
“그만하게. 공작,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리고 죽을 생각도 없어.”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그는 황궁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 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직접적으로 많은 양의 독을 드신 것은 아니라……. 퍼지는 속도는 더욱 늦출 수 있사오나 아무리 길다
해도 석 달을 넘기실 수는 없사옵니다.”
황궁의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석 달……. 그 안에 독의 성분을 분석해서 해독제를 만들어라.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이제 너희들에게
달린 것이다.”
“폐하…….”
황궁의들이 어깨를 바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궁의들이 물러가고 레이몬드는 굳은 듯 서 있는 크로프트 공작을 보았다.
“공작, 황후에게 절대 말하지 말게.”
“하오나……, 숨기신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숨길 것이다. 설령 내가 죽는 순간이 온다 해도……. 내가 죽은 이유가 칼라일이 먹은 독 때문이란
사실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사고사는 무엇이든 독 때문으로 마지막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다.
칼라일을 살리기 위해 독이 퍼져 죽었다는 것을 엘리야가 알게 된다면 그를 아무리 미워한들 그녀의
성격상 한평생 죄책감에 괴로워할 테니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준 적도 없는데 마지막 순간마저 그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뒤 엘리야가 죄책감 없이 편히 살길 바랐다.
“폐하…….”
“허니 공작, 황후에게 알리지 마라.”
“명령이십니까?”
“그래.”
공작은 레이몬드의 단호한 검은 눈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대도 이만 돌아가 쉬게. 나도 쉬고 싶군.”
“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작이 응접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피가 묻은 손바닥을 꽉 그러쥐었다.
“……살 수 있을까.”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낮은 음성이 고요한 공기를 속으로 흩어졌다.

* * *

칼라일이 의식을 차린 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리제나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 레이몬드는 리제나가 벌인 짓을 모두 밝혔다.
그녀가 황태자의 독살을 시도했다는 것과 1 황자가 그의 자식이 아니란 것까지 전부 공표했다.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쏟아지는 신문들은 어느 기사를 메인으로 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왕좌왕했다.
황태자에 대한 독살 시도도 1 황자의 출생의 비밀도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황태자는 목숨을 건졌지만 1 황자, 아니 에드먼드는 황자의 신분이 박탈되었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던 그날 밤, 난 에드먼드를 찾아갔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에드먼드가 받았을 엄청난 충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보호하려 했던 그 아이가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에드먼드는 감옥에서 나와 밀실에 유폐되어 있었다.
감옥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레이몬드가 에드먼드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단 뜻이었다.
충격에 제정신이 아닐 것이라 걱정했던 것 달리 에드먼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에드먼드는 그 나이대의 소년답지 않은 눈빛으로 서 있었다.

<i>‘늘 아버…… 아니, 폐하의 애정을 바랐었는데 애초에……. 제가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네요.


‘</i>
<i>‘에드먼드, 이 일은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i>
<i>‘제 존재 자체가……. 죄가 되어버린 거 같아요. 왜 하필 제 친부는 그런 사람일까요. 차라리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면…….’</i>

황제의 원수인 죽은 황태자.


레이몬드의 자식이라 철석같이 믿고 자란 자신이 아버지 원수의 자식이라니 얼마나 절망적일까.
난 에드먼드의 기분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뿐이었다.

<i>‘……네가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아. 그 모든 일에 네 잘못은 없다는 것, 앞으로


살아가며 그것만은 잊지 말렴.’</i>
<i>‘……폐하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시기로 하셨군요.’</i>
<i>‘넌 지은 죄가 없으니까.’</i>
<i>‘제 곁엔 아무도 없는데…… 살아남아봤자 뭐가 기쁠까요…….’</i>

쭉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드먼드는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마주친 검은 눈동자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i>‘……네 어머니는 네가 살아남기를 바라셨다. 에드먼드, 그러니 살아가야 한다.’</i>


<i>‘어머니…….’</i>
에드먼드의 검은 눈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거짓말이었지만 이 거짓말만이 에드먼드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먼드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 했을 만큼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으니까.

<i>‘모든 일이 정리되면……. 널 외국으로 보내주마.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것이다.’</i>
<i>‘……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나요? 한순간이었다 한들 전 칼라일을 죽이려 마음먹었던 적이
있었는걸요.’</i>

에드먼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라고 에드먼드가 에드먼드를 보는 게 편해서 이럴까.
에드먼드에게 애정이 있어 돕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7 년 전, 리제나가 처음 에드먼드를 데리고 왔을 때. 난 에드먼드의 존재 자체를 증오까지 했었다.
내 아이의 자리를 빼앗은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밉다 하여 죄 없는 아이를 죽일 순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모의 허황된 욕심에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희생당한 에드먼드가 불쌍했다.
내게 칼라일이 있어서인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에드먼드가 신경이 쓰였다.

<i>‘네가 했던 선택들은……. 네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러니 황태자의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말거라.’</i>

에드먼드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에드먼드 역시 내 호의가 마냥 달갑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니었다면 리제나가 그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겠지.
그 혼란스러움을 이해하기에 난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i>‘그럼 이만 가 보마.’</i>

괜찮은 것도 확인하였고 해야 할 말도 다 하였다.


그만 돌아가려 몸을 돌린 순간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i>‘어머니께선……. 용서받으실 수는 없는 거겠죠…….’</i>


<i>‘……그것만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겠구나.’</i>

등 뒤로 들려오는 억눌린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난 그렇게 밀실을 나왔었다.


“어머니, 어머니.”
“응?”
에드먼드와의 만남을 돌이키던 난 칼라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 저 이거 다 먹었어요.”
칼라일은 어느새 약을 다 먹은 듯 은잔이 깨끗이 비어 있었다.
해독제의 효능이 뛰어났던 것인지 칼라일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잘했다.”
쓴 약을 단숨에 들이켠 것을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준 난 칼라일을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나중에 일어났을 때 내가 없을 수도 있단다. 혼자 있을 수 있겠지?”
“물론이죠.”
칼라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칼라일은 아직 1 황자의 소식에 대해 듣지 못했다.
1 황자가 더 이상 자신의 형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 충격을 받겠지.
곁을 내준 이에게는 마음이 여린 아이기에, 나는 함구령을 내렸었다.
칼라일은 그저 자신이 뭘 잘못 먹었고 그 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약을 먹어 잠이 오는 듯 칼라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가슴을 토닥여 주던 난 칼라일의 눈이 완전히 감기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으로 가자꾸나.”

162 화

“피고 리제나 시오스에 대해 판결한다. 황실의 혈통을 속인 죄, 그 죄를 덮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황태자 저하까지 독살하려 하였다. 인정하는가?”
“아니, 에드먼드야말로 이 황실의 적통 후계자지. 패륜아를 황제로 모시니 진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가
보군.”
재판장인 파르앙 후작을 올려다보며 리제나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파르앙 후작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선 황태자는 엄연한 죄인이다. 감히 폐하를 패륜아라 칭하다니,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렸구나.”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감히 1 황자의 친모인 나를, 이렇게 재판장에 세우다니 너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리제나는 소리를 지르며 포박된 손으로 탁자 위의 물건들을 쓸어버렸다.
그녀의 난동에 기사들이 리제나의 팔을 잡았다.
“놔! 놔라!!!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리제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재판장에 앉은 나를 정확히 쳐다보았다.
“다 너 때문이야! 널 죽였어야 했어! 7 년 전에 널 죽이지 못한 것이 유일한 내 잘못이다!!”
그녀는 광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는 말은 전해 들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짐승처럼 악을 지르는 그녀는 결국 기사들에게 무자비하게 제압됐다.
한때는 제국의 권력에 정점에 섰던 여자였다. 그녀의 비참한 말로에 재판장에 모여든 귀족들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난 그녀의 무너지는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와 칼라일을 죽이려 했던 그녀의 참담한 말로를 똑똑히 보고 싶었다.
이게 결국 너의 진짜 모습이었던 거겠지.
어리석은 것.
난 머리가 테이블 위로 처박히는 리제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리제나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았으니까.
그녀가 저리 추악해진 것을 이해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리제나는 자신의 저지른 죗값을 받는 것뿐이었다.
“리제나 시오스.”
그때,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죄인의 마지막 발언은 생략한다. 피고가 저지른 죄들은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어떠한 선처도
불가능함이 자명한 상황.”
파르앙 후작은 긴말에 숨을 고르곤 마지막 판결을 내렸다.
“지금 이 순간부로 리제나 시오스의 작위와 신분을 박탈하고 참수형에 처한다.”
“닥쳐! 에드먼드가 황제가 되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파르앙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제나가 소리를 질렀다.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긴 파르앙 후작이 기사들에서 명했다.
“죄인을 끌고 가라.”
“에드먼드, 에드먼드를 데려와! 에드먼드! 나를 구해다오! 에드먼드!!”
리제나는 재판장에서 끌려나가는 마지막까지 에드먼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 모습을 에드먼드가 보지 않아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추한 모습이었다.
“참수형이라니.”
“결국 이리 되는군요.”
“저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찌 살아남는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저렇게 악독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보다 그럼 그분은……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죽은 황태자의 자식인데 살아남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리제나가 떠나고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난 에드먼드의 이야기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는 새로운 성을 하사받게 될 거다. 어미의 죄와는 관계없으니까.”
나의 말에 귀족들이 하나 같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새로운 성을 하사받는다는 것은 에드먼드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황태자의 자식을 황제가 살려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겠지.
“이만 가자꾸나.”
다른 말을 더 기대하는 눈빛들이었지만 이 정도면 알아서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잠시 리제나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던 난 홀가분한 얼굴로 그만 재판장을 떠났다.

* * *

“폐하,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여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난 안으로 들어갔다.
시선을 들어 늘 레이몬드가 앉아 있던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야.”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은 레이몬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곁엔 황궁의가 서 있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폐하, 어디 아프신 겁니까?”
황궁의에겐 빈 은잔이 들려있었다.
미약하게 쓴 향이 나는 것을 보니 약을 먹은 듯했다.
“몸이 좀 피곤해서 체력을 보충하는 약을 먹었어.”
레이몬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내게 말했다.
“그만 물러가라.”
황궁의가 인사를 올리곤 집무실을 나갔다.
“엘리야, 앉아.”
그는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순간 마주친 그의 얼굴빛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원래도 흰 피부이긴 했지만 이렇게 혈색이 없진 않았던 거 같은데.
창백한 낯빛을 살피던 난 문득 레이몬드를 이틀 만에 보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칼라일의 곁에서 칼라일을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어 생각지 못했는데, 이틀 동안 레이몬드는 우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칼라일과 내가 자신의 침실에서 머무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칼라일이 걱정돼서라도 얼굴을 보러 왔을 텐데, 왜 오지 않았지.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얗게 질린 얼굴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폐하, 정말 괜찮은 것입니까?”
“괜찮아.”
“허면 왜 이틀 동안 침실을 찾지 않으신 겁니까? 혹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무 일도 없어. 그간 리제나와 에드먼드와 관련해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았어. 그리고……. 내가 침실로
가서 자면 네가 불편할 거니까. 일부러 찾지 않은 거야.”
“…….”
“아예 가지 않은 건 아냐. 새벽엔 잠시 들러 칼라일을 보고 갔어. ……몰래 가서 미안해.”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레이몬드의 얼굴에선 그 외의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건가.
평소보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엘리야, 난 정말 괜찮아. 괜한 걱정하지 마.”
내 의심을 느낀 것인지 레이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나도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하긴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을까.
칼라일도 원만히 회복하고 있었고 리제나의 재판도 끝났으니 큰 걱정거리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잠을 제때 자지 못해 그런 것일 거다.
묘하게 찝찝한 기분을 애써 털어 내며 난 그만 자리에 앉았다.
“황궁의의 말론 칼라일의 회복이 빠르다던데 정말 괜찮아?”
“예.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행이네. 리제나의 재판을 보고 오는 길인가?”
“네.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은 아니더군요. 형은 내일 이른 아침 집행된다고 들었습니다.”
“지은 죄가 한두 개가 아니니 미룰 것도 없지. 지금 당장 처형한다. 해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그보다…….
날 찾아온 건 에드먼드 때문이겠지?”
레이몬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맞습니다.”
“에드먼드를 만났었다지.”
에드먼드의 밀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황제의 수족들이었으니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딱히 몰래 만나러 간 것도 아니었으니까.
“에드먼드에게 내가 생각하던 이상을 베푸려는 모양이군. 그렇지?”
“……에드먼드는 희생양일 뿐이었으니까요. 굳이 아이한테까지 칼을 들이밀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은 황태자의 아이야.”
레이몬드가 에드먼드를 살려주었다 하여 에드먼드의 삶을 평탄하게 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에게 죽은 황태자는 죽였어도 잊을 수 없는 원수였으니까.
하지만 에드먼드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해서 레이몬드의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거다.
“폐하, 폐하께선 이미 복수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가는 지금 굳이 에드먼드의 삶을
망가뜨리며 새로운 복수의 씨앗을 심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레이몬드는 긴 침음을 흘렸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잠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먼드를 외국으로 내보낼 건가?”
“네. 그리할 생각입니다. 그것과 관련해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리온 시오스를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리온 시오스까지…….”
“어찌 됐든 해독제를 찾아준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같이 간다면 에드먼드도 헛된 꿈을 꾸지 않고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먼드를 홀로 보내는 것보다 리온과 함께 보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리온이라면 에드먼드를 잘 키울 거 같았다.
그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리온은 헛된 꿈에 목을 매는 자는 아니었다.
“리온 시오스에게는 자결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다. 오늘 밤, 독을 내릴 것이다.”
레이몬드는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 독을…… 네가 전하고 시신 또한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난 너에게 독을 준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겠다.”
그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내 선택에 달렸다는 말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준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엘리야. 칼라일의 몸이 좋아졌으니…… 이만 황후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때?”
“……네?”
예상치 못한 축객령에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멈칫했다.
황후궁으로 돌아가라니.
“……보다시피 내가 좀 피곤해서. 침실에서 편히 쉬어야 할 거 같아.”
그가 쉬어야 한다는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침실로 와서 편히 자라 말하려고 했었다.
난 괜찮으니 말이다.
그와 함께 있어도 상관없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었다.
당연하게도 함께 있는단 생각을 한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에도 놀랐고, 레이몬드의 말에도 놀랐다.
황성에 들어온 뒤로 늘 축객령을 내렸던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난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몬드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스로가 어이없지만 황후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서운함이 들었다.
칼라일과 레이몬드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이후로 난 레이몬드에 대한 감정을 정의하기 힘들었다.
내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또 나를 향한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게 점점 선명히 보였으니까.
칼라일이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도 난 그에게 의지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성을 찾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을 것이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내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선을 그으니 기분이 이상할 수밖에.
말도 안 되는 감정에 구구절절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합리화한 난 스멀스멀 몸을 휘감는 감정을 떨쳐버렸다.
그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혼란스러운 마음은 하루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
나는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끌어올리며 답했다.
“오늘 칼라일과 함께 황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폐하.”
“……그래. 고마워.”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늘따라 내게 더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내 착각일까.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나를 보지도 않고 답하는 레이몬드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별 것 아니겠지. 피곤한 것일 뿐이라 했으니까.
난 생각을 그만두며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163 화

그날 밤.
황후궁에서 칼라일을 재운 난 검은 로브를 걸치고 헬란만을 대동한 채 궁전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자 안에 앉아 있던 에드먼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에드먼드를 비밀리에 마차에 태우라 명한 것은 바로 나였다. 오늘 밤 에드먼드는 황궁을 떠나야 했으니까.
난 의아한 얼굴을 하는 에드먼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내 마차가 출발하자 에드먼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후 폐하……. 절 어디로 데려가시는 건가요?”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외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돕겠다고. 오늘 떠나야 한단다.”
“이렇게 바로…… 말인가요? 어머니를 뵙지도 못했는데…….”
리제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듯했다.
리제나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었든 에드먼드에겐 어머니였으니, 에드먼드의 그리움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리제나는 보지 않는 것이 에드먼드에게 더 좋을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기억이 그런 추악한 모습일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가야 한단다.”
“……네.”
나의 단호함에 에드먼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차는 황성을 벗어나 빠르게 달렸다.
“황후 폐하, 도착하였습니다.”
마부와 함께 밖에 있던 헬란이 문을 열며 말했다.
내가 먼저 내리고 에드먼드가 뒤따라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 숲속 한가운데 서 있는 카르텔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금빛 머리칼이 스치듯 보였다.
“카르텔.”
“황후 폐하를 빕니다.”
“일어나게. 데리고 왔는가?”
“네. 황후 폐하.”
카르텔은 답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리온 시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그의 녹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에드먼드……!”
“누구…….”
순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에드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에드먼드, 이자는 너의 숙부인 리온 시오스이다.”
“……네?”
에드먼드의 눈이 휘둥그레진 채 다시 리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
리온은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지하 감옥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던 눈빛이 에드먼드를 보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삼촌이라니…….”
에드먼드 역시 리온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리온과 에드먼드는 서로를 복잡한 감정이 서린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나눌 대화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두 사람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할 말이 많겠지만 회포는 차차 풀도록 하지. 리온 시오스.”
“네, 황후 폐하.”
“그대는 오늘 밤 독을 먹고 자결했다.”
“…….”
리온의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난 헬란에게 눈짓했다. 헬란은 미리 준비한 신분패를 꺼내 리온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앞으로 네가 살아가게 될 이름이다. 잊지 말거라. 리온 시오스는 오늘 죽은 것이란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리온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난 에드먼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난 에드먼드의 손을 살짝 잡았다.
“에드먼드.”
“……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네 삼촌과 함께 외국으로 보내주는 것. 너 역시 앞으론
에그리타의 성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네 어머니 역시 네 마음속에 묻고 살아야 할 것이다.”
“……네.”
“그리고 다시는 ……제국으로 돌아와선 안 된다. 너도 제국을 잊고, 제국에서도 널 잊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
먼 훗날 레이몬드와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에드먼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제국으로 돌아온다면 피바람이
불 것이다.
어찌 됐든 에드먼드는 황실의 핏줄이었으니까.
에드먼드는 똑똑한 아이었으니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던 에드먼드는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래.”
난 에드먼드의 손을 놓았다.
“아침이 밝기 전에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게.”
카르텔이 말 두 필을 끌고 와 리온과 에드먼드에게 고삐를 건넸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한 리온과 에드먼드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이곳을 떠났다.
“국경을 떠나는 것을 확인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리온도, 에드먼드도 멍청한 자들이 아니니까.”
이곳을 떠나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에드먼드를 죽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니 앞으로의 일들은 내 소관이 아닌 것이다.
난 후련함을 느끼며 그만 마차로 몸을 돌렸다.
“황궁으로 돌아가자꾸나.”

* * *

“황후 폐하, 리제나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합니다.”


“……그래.”
헬란이 전하는 소식에 난 보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
화창한 푸른 하늘이 후련한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거 같았다.
이제 정말 끝이군.
홀가분함과 조금의 씁쓸함이 들었지만 더는 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리제나 시오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평화로운 황궁의 전경을 보던 중, 황후궁 앞에서 멈추는 마차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레이몬드.”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어제 황후궁으로 돌아가라 선을 그은 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그가 왔다는 것에 묘해지는 기분과 함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려 했다.
마치 그가 온 것이 기분 좋은 것처럼 말이다.
‘……미쳤구나.’
큼큼.
난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로비로 내려가자 막 궁전 안으로 들어온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폐하.”
“황후. 황태자가 걱정되어 보러왔소. 황태자는 지금 깨어있소?”
“네. 깨어 있습니다. 방으로 가시지요.”
“아. 일이 바쁠 테니 굳이 나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되오. 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거니 난 신경 쓰지
마시오.”
함께 가자는 식으로 옆에 서자 레이몬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언뜻 들으면 나를 배려하는 듯한 말 같았지만 곱씹어 보면 내 동행을 바라지 않는 듯한 말이었다.
어제 황후궁으로 그만 돌아가 달라 했던 축객령과 비슷하게 들렸다.
아니 똑같았다.
뭐지.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무 문제도,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이다.
이 상황에 굳이 내가 그를 따라 칼라일을 보러 가는 게 이상해 보일 것이다.
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예. 일을 보던 중에 나온 거라,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싸늘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치는 그에 순간 내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멈칫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레이몬드는 이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궁인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칼라일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가만히 서서 보던 난 그만 시선을 내렸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헬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몬드 때문에 내 심기가 불편해졌다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상처받진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바뀐 레이몬드의 태도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다.”
“집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폐하께서 황태자와 편히 시간을 보내실 수 있게 잠시 궁을 나갔다 오자꾸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레이몬드는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거 같았다.
그러니 오늘은 자리를 피해줄 생각이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도 있었으니까.
잠시 외출을 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차를 준비해. 피닉스 상단으로 갈 것이다.”

* * *

제드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찾아왔기에 상단 앞에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황실 마차를 본 상단의 직원이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숙였다.
“상단주님께 지금 바로 알리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알리지 않고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황후가 된 뒤로 제드와 편하게 만난 적이 없었다.
홀가분한 날이니만큼 오늘은 그와 편하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것이다.
직원에게 고개를 저은 난 헬란과 함께 상단으로 들어갔다.
곧장 상단주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마법진을 타고 올라갔다.
마법진에서 내린 난 막 사무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제레미?”
“황후 폐하.”
상단주의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레미였다. 날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는 곧
예를 갖추었다.
그 목소리에 사무실 안에서 제드도 나왔다.
“황후 폐하를 빕니다.”
“둘 다 일어나.”
제레미와 제드가 일어나고 난 두 사람을 의아한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
“사람이 왜 같이 있어?”
내 눈빛을 본 제레미가 말했다.
“아, 광산의 일로 피닉스 상단에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현 재정 상황으로는
광산들을 다시 운영하기에 조금 무리가 있어 말입니다.”
“아……. 사업상의 일로 왔었구나.”
하긴 내 일로 두 사람이 몇 번 얼굴을 맞댄 적이 있을 테니 만나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황후 폐하…… 헌데 괜찮으신 겁니까?”
제레미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칼라일의 음독 사건부터 리제나의 죽음까지.
그간 벌어진 많은 일들에 대한 걱정인 듯했다.
“난 괜찮아. 칼라일도 이제 많이 회복했고. 그대도 들었다시피 오늘 리제나의 처형도 집행되었으니 더
이상 내가 걱정할 일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던 난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이 떠올라 말을 멈추었다.
정말 걱정할 일이 없는 건가.
급작스럽게 변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황후 폐하?”
말끝을 흐리는 나를 제레미가 불렀다.

164 화
염려 섞인 눈빛에 난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모든 게 괜찮다는 말이었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평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제가……
일이 있어 이만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군. 만나서 반가웠네. 공작.”
“저도 반가웠습니다. 곧 황후궁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래. 기다리지.”
제레미가 마법진을 타고 사라지고 난 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오늘은 격식 없이 그대를 찾아오고 싶었어. 바쁜가?”
“아닙니다. 드시지요.”
제드가 싱긋 웃으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의 소파에 앉자 그가 차를 내왔다. 달달한 향이 나는 과일 차를 한 모금 들이자 제드가 입을 열었다.
“헌데 어떤 일로 직접 상단을 찾으셨습니까? 아직 황궁은 정신없지 않나요?”
“황제 폐하께서 잘 단도리하신 덕에 괜찮아. 오늘 찾아온 건 귀족들의 동태를 알고 싶어서야.”
“그런 것이라면 저를 황궁으로 부르시지요. 아직 황태자 전하의 곁을 지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부르려고 했었다.
하지만 레이몬드 때문에 일부러 나온 것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내가 있는 걸 더 불편해하니까.”
“네?”
무슨 말이냐는 듯 제드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별말 아니었어. 귀족들의 상황은 어때?”
“황태자 전하의 독살도 독살이지만 아무래도 1 황…… 아니 에드먼드에 대한 여파가 크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딱히 에드먼드에 대한 처우에 안 좋은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에드먼드를 살린 폐하의 결정에
대해 감탄하고 있죠.”
“다행이군.”
“네. 아무래도 시오스 가문이 몰락하고 드로이트 공작도 바뀌면서 전 황태자의 세력이 거의 소멸된
듯합니다.”
“그럼 지금이 평민 학술원을 세울 적기겠군.”
“지금이라면 반대하는 자들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친황제파 세력만이 남았으니까요.”
“학술원의 부지는 준비되었다 하였지?”
“네. 황실의 인가만 떨어지면 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정신없는 지금 학술원을 추진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난 제드와 학술원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학술원의 교사들부터 입학 조건 그리고 학비 문제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창가에 붉은 그림자가 지자 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었군.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제드와 함께 일어나던 난 멈칫하며 물었다.
“제드, 혹시 황궁에서 들려오는 소식 중에 폐하에 관한 소식은 없어?”
피닉스 상단의 정보력은 상단 중에서도 최고였다.
당연히 에그리타 제국에도 피닉스 상단의 첩자가 있었다.
“폐하에 관한 소식이라면……. 아까 말씀드렸듯 이번에 에드먼드를 살려준 일에 대해…….”
“아니, 그거 말고. 혹시 다른 일이 있다던가, 아니면 무슨 문제가 생기셨다던가…….”
“아뇨.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드는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되려 내게 물어왔다.
레이몬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뒷조사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알게 되겠지.
“……아니야. 그냥 요즘 좀 예민해진 것 같아. 배웅은 안 해줘도 돼. 이만 가 볼게. 쉬어.”
“예. 황후 폐하.”
상단을 나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난 시녀에게 물었다.
“폐하는?”
“두 시간 전에 바쁜 일이 있으시다며 태양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녁을 함께하자는 말씀은 없으셨니?”
칼라일의 상태가 호전되어 이제 가벼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칼라일의 상태를 보았다면 레이몬드라면 저녁을 함께하자 말했을 텐데.
하지만 시녀의 답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아뇨.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망토 끈을 풀고 있던 난 손을 멈칫했다.
대체 뭐지.
이상한 느낌이 자꾸만 날 건드렸다.
“알겠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시녀가 물러가고 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레이몬드가 있는 태양궁이 보였다.
그곳을 복잡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난 헬란을 불렀다.
“헬란.”
“네.”
“……태양궁의 시녀들을 통해 근 래의 소식에 대해 좀 알아보거라.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게 아닌지
신경 쓰이는구나.”
“……네, 황후 폐하.”

* * *

깊은 밤.
태양궁의 침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윽…….”
내장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잠에서 깬 그는 황급히 줄을 잡아당겼
“폐, 폐하!”
“약을 가져와라…….”
시종장은 급히 침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황궁의와 함께 들어왔다.
황궁의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레이몬드에게 급히 약을 먹였다.
약을 전부 들이켠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에 늘어졌다.
그가 흘린 식은땀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몸을 일으키며 참담한 얼굴을 한 시종장에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예.”
시종장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낮추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레이몬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약으로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점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약을 찾으시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거 같은데.”
“……그런 듯합니다.”
이제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뜻은 독이 몸에 빠르게 퍼지고 있단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수개월도 버티지 못할지도.
“해독제를 만드는 약초가 있다 했던 곳에선 답이 왔나?”
황궁의는 불철주야 독에 매달려 결국 독의 성분을 알아냈다. 하지만 독의 성분을 알아낸 황궁의는 더
절망적인 사실을 마주했다.
독을 해독시키는 약초는 10 년에 한 번씩밖에 열리지 않는 신성한 꽃인 아기오디타가 주성분이었다.
대륙 남쪽에 위치한 작은 신성국에서 자라는 아기오디타는 제국의 황제라 해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10 년에 한 번 꽃이 피는 데다 그 개체 수마저 적고 온도 차에 치명적이라 제대로 피는 꽃 자체가
드물었다.
거기다 수명도 짧아 핀다고 해도 삼 일 이상을 살아있지 못했다.
“그것이……. 최근에 핀 꽃들은 전부 죽어 수도의 신전에 남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전에서 혹시
다른 신전에 살아남은 꽃이 있는지 더 알아보겠다 하였습니다.”
레이몬드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그러쥐었다.
아기오디타는 신성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꽃이었다.
그런 꽃을 시골의 신전에서 관리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수도의 신전에 없다면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차마 말할 순 없었겠지.
“알겠다, 그만 물러가 보아라.”
황궁의는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올리곤 침실을 나갔다.
황궁의가 나가고 레이몬드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몸이 점점 무겁고 마음같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힘들어 보이는 황제를 보고 있던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폐하께 사실을 알리는 것이…….”
“황후가 알아선 안 된다. 그리고 애초에 황후가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있겠느냐.”
“…….”
레이몬드의 단호한 말에 시종장은 입을 다물었다.
“혹 황후가 뭔가 알아챈 듯하면 바로 내게 말하거라.”
“……예. 폐하.”
“쉬고 싶구나. 물러가.”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리곤 침실을 나갔다.
익숙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밖으로 황후궁이 보였다.
“보고…….”
채 말이 끝맺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그녀가 더욱 그리웠다.
조금이라도 더 엘리야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이제 겨우 함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그녀가 그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떠나야 한다니.
“……벌을 받는 건가.”
그녀를 상처 준 것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가 정리하지 못한 리제나의 독에 결국 중독된 것이니까.
레이몬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황궁의는 아마 해독제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젠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칼라일이 황태자이긴 하지만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물론 엘리야는 칼라일을 잘 키우겠지만 그가 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황권은 약해질 것이다.
허니 그가 죽은 뒤에도 무리 없이 엘리야가 대신 섭정할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아야 했다.
시오스 가문이 몰락하고 리제나까지 죽었으니 크로프트 공작을 필두로 황제파 귀족들을 결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겠지.
그는 한참을 황후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앞으로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 * *

이틀 뒤.
“태양궁의 시녀들에게 동향을 알아봤습니다만……. 아직까지 크게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흠.”
“늘 그렇듯 시종장님께서 폐하의 수발을 들고 계시고, 폐하께서도 집무를 보고 있으시다 하였습니다.”
헬란의 보고에 난 미간을 좁혔다.
“……폐하께서 누구를 특별히 찾으셨다거나 그런 일도 없었나?”
“네. 항상 보고를 올리는 재상 각하와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폐하를 뵐 뿐 다른 분을 부르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난 미심쩍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냐.”
“황후 폐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이틀 동안 저녁 만찬도 바쁘다며 피하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왔다니.
한동안은 계속 나를 피할 줄 알았는데 일이 다 해결된 걸까.
왠지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몬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165 화

“황후.”
“폐하를 뵙니다.”
인사를 올리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 푸석한 그의 얼굴에 눈썹을 꿈틀했다.
그의 혈색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폐하, 몸이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 감기가 들었소.”
“감기……요?”
“리제나의 일을 다 처리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의 피로가 밀려오더군. 아무래도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오.”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며칠 전부터 내게 선을 긋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편안한
태도였다.
그는 농담으로 화제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황궁의가 황태자의 건강이 거의 회복되었다고 하더군.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고 하여 함께 산책이라도
할까 해서 왔소. 시간이 되오?”
“……네. 됩니다.”
“그럼 오랜만에 칼라일과 함께 셋이서 걷지.”
“그러지요.”
난 그의 옅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란이 칼라일을 불러 온 뒤, 우리는 함께 황궁의 정원으로 나왔다.
칼라일은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어 가볍게 걷는 것도 가능해졌다.
칼라일은 나와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중간에서 걸었다.
“칼라일, 힘들면 바로 말하거라.”
“네. 근데 하나도 안 힘들어요. 막 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칼라일은 하나도 안 아프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배시시 웃는 칼라일이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방 안에서 생활을 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 지루해서 몸이 베베 꼬일 것이다.
아마 외출금지령을 풀어달라는 거겠지.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아직 다 낫진 않았으니 좀 더 외출을 자제하자꾸나.”
난 칼라일의 바람을 모른 척 말을 돌렸다.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황궁의가 완치가 되었단 말을 할 때까진 어쩔 수 없었다.
맹독에 죽을 뻔한 것이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의 휴유증도 남으면 안 됐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푹 숙이는 칼라일을 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다 낫고 나면 내가 선물을 주마.”
“선물이요?”
칼라일이 그를 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황태자가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 몸이 다 낫는다면 황태자가 갖고 싶어 했던 조랑말을 선물해
주마.”
“우와!”
칼라일은 벌써 조랑말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조랑말이래요! 저 어머니 말 잘 듣고 약도 잘 먹을게요!”
방금까지 우울했던 표정이 싹 사라진 칼라일은 내게 약속하듯 다짐했다.
좋아죽는 칼라일의 얼굴을 보니 나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그래.”
방방 뛰는 칼라일에게 웃으며 답하던 난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쿨럭. 큽.”
칼라일의 손을 놓은 레이몬드는 무거운 기침을 뱉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다는 말이 진짜인 것 같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버지, 아파요?”
나와 칼라일의 물음에 목을 가다듬은 레이몬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괜찮소.”
그는 시선을 내려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칼라일에게도 말했다.
“황태자,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괜찮다는 말에 비해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던가.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듯 레이몬드는 시선을 들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
“앗, 어머니, 저기 제비꽃이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때, 갑자기 칼라일이 외쳤다. 내 손을 놓은 칼라일은 제비꽃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으앗.”
하지만 오랜만에 외출이어서인지 칼라일은 손을 놓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칼라일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난 손을 뻗었지만 레이몬드가 더 빨랐다.
“아…….”
하지만 곧 벌어진 상황에 놀라 난 움직임이 멈추었다.
레이몬드가 칼라일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정확히는 칼라일을 잡았지만 힘없이 칼라일의 어깨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레이몬드 덕에 칼라일이 바닥에 심하게 넘어지진 않았다. 칼라일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보았지만 난 레이몬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을 놓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폐하.”
내 작은 부름에 레이몬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윽고 시선을 든 그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좀 쉬어야 할 거 같군.”
“……감기가 심하신가 봅니다.”
“그런 거 같아. 칼라일.”
“네.”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먼저 돌아가야 할 거 같구나. 미안하다.”
“괜찮아요. 다 나으면 저랑 같이 놀아요, 아버지.”
“……그래. 그러자꾸나.”
칼라일을 눈에 담듯 물끄러미 보던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가 보겠소.”
“……저녁에 궁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괜찮소. 며칠 쉬면 나을 감기니 칼라일을 신경 쓰시오.”
레이몬드가 떠나고 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머니?”
굳은 내 얼굴에 칼라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칼라일, 이만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칼라일이 아쉬워했지만 난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마음 편히 산책할 수 없었다.
난 칼라일을 손을 잡고 서둘러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 * *

“황후 폐하를 뵙니다.”


황후궁으로 돌아온 난 곧장 황궁의를 불렀다.
“일어나시게.”
“네. 황후 폐하.”
난 찻잔을 들며 황궁의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지.”
“……네. 감기가 심하게 걸리셨습니다.”
“감기라……. 내 폐하께서 감기에 걸린 것은 처음 보는군. 혹한의 날씨에 검술 대련을 하셔도 아프지
않으셨던 분이 겨울이 다 지난 지금에서 감기라…….”
말끝을 흐리자 황궁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긴장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혹 폐하께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요. 최근 일이 많아 무리하셔서 감기에 걸리신 것뿐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황후
폐하.”
황궁의는 바로 답했지만 난 순간 그의 떨리는 손끝을 보았다.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난 찻잔을 내려놓았다.
레이몬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그렇군. 알겠으니 이만 물러가 보게.”
“네. 황후 폐하.”
황궁의는 안도하듯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황궁의가 물러가고 난 헬란에게 물었다.
“……헬란, 네 생각은 어떻느냐.”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는 모양새 같았습니다.”
역시 헬란도 나와 똑같이 느낀 듯했다.
난 침음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레이몬드가 무언가 이상함을 처음 느꼈던 것은 리제나의 재판이 끝난 뒤, 그의 집무실에 갔을 때였다.
그날 그가 내게 처음으로 축객령을 내렸었지.
그리고 그날 레이몬드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다.
꼭 어딘가 아픈 것처럼.
그땐 스쳐 지나가는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그 뒤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나에게 선을 그었다.
거기다 피곤함이니 걱정 말라던 말과 달리 그의 안색은 그날보다 더 안 좋아져 있었다.
“폐하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 같구나.”
그리고 그 이상이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헬란은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디가 안 좋길래 굳이 내게 숨기는 것이지.
설마 고칠 수 없는 병이기라도 한 건가.
최악의 상상에 난 손을 꽉 그러쥐었다.
“헬란.”
“네.”
“황궁의가 폐하께 올리는 약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라. 그리고 혹 황궁의가 태양궁으로 급히 간다면 시간이
언제이든 내게 바로 알리거라.”
“예. 황후 폐하.”
헬란이 나가고 난 초조함에 입술이 말라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순간 떨고 있는 손을 보곤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레이몬드…….”
그가 아픈 모습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불안함을 떨치듯 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 *

이튿날.
레이몬드의 일로 신경이 곤두선 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직 황궁의가 올리는 약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한 것이지?”
치장을 마친 시녀들이 물러가자마자 난 헬란에게 물었다.
“……네. 아직 약재 쓰레기들까지 황궁의께서 직접 버리고 계셔서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인들이 하는 일인데 직접 한다니……. 더 수상하구나.”
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잠을 설쳐서 머리가 좀 아플 뿐이야. 아버지에게 사람은 보냈니?”
“네. 아까 보냈으니 공작 각하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레이몬드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면 아버지도 알아야 했다.
하여 이른 아침 행정궁에 사람을 보내라 한 상태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녀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렴.”
난 자리에서 일어나 헬란과 함께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버지. 인사는 되었으니 편히 앉으세요.”
응접실에 들어온 난 예를 갖추려는 아버지에게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는 맞은 편에 앉았다.
난 평소보다 몹시 수척한 아버지의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 얼굴 빛이 안좋으신데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아, 요며칠 잠을 설쳐 그런 것일 뿐입니다.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마저도 근심이 서려 있었다.
“걱정 안 할 수가 없잖아요. 혹시 아픈 것이라면 숨기지 말고 제게 말씀해 주세요.”
레이몬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인지 순간 말이 차갑게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지고 난 멈칫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폐하께서도 몸이 안 좋은데 아버지까지 아프신 걸까 봐 신경이 예민해졌어요.”
“…….”
난 순간의 어색한 침묵에 아버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의 얼굴에 당황이 서린 것이 보였다.
왜 당황하시지.
“……그러셨군요.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드셨다.
그에 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방금 내 말에서 아버지가 당황할 만한 것은 없었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다시 내려 놓으실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던 난 입을 열었다.
“아버지, 폐하의 병세에 대해 뭔가 아시는 건가요?”
“…….”
아버지는 침묵하셨다.
아까처럼 당황하진 않으셨지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드셨다.
“……폐하께서 심한 감기에 걸리셨다, 알고 있습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것 같으니 제가 이러겠죠. 대체 왜 제게 숨기는 건가요? 아버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황후 폐하, 전…….”
순간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에 참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심각한 병에 걸리신 건가요?”
아버지가 무거운 침음을 내뱉은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헬란이 들어왔다.
중요한 얘기를 나눌 것이니 시급한 일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급하게 들어왔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일 확률이 높았다.
“황후 폐하, 황궁의가 사색이 되어 태양궁으로 급히 들었다고 합니다.”

166 화

<i>‘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황후 폐하. 하오나…… 지금 태양궁으로 가신다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i>

아버지의 말에 곧장 응접실을 나와 태양궁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뛰는 듯한 모양새로


태양궁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같지 않은 내 모습에 궁인들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난 그들을 거침없이 지나치며 레이몬드의
침실로 향했다.
“황후 폐하를 빕니다.”
침실 앞에 다다르자 시종장이 다가왔다.
난 시종장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앞을 막아섰다.
“……황후 폐하, 송구하오나 폐하께선 오수에 드셔 뵐 수 없사옵니다.”
“폐하께서 이 시간에 오수에 드셨다?”
실소를 머금자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레이몬드는 불면증이 심해 밤에는 물론이고 낮잠도 자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황후로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내게 고하는 것일까.
“잠에서 깨어나시면 폐하께 황후 폐하께서 오셨다 아뢰겠습니다.”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한 번 더 말했다.
“폐하를 뵐 것이다.”
“황후 폐하…….”
“감히 내 앞을 막는 것이냐.”
싸늘히 말하자 시종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비켜서지 않았다.
기사들을 불러 시종장을 끌어낼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황후궁이 아니었고 시종장은 레이몬드의 오랜
충신이었다.
레이몬드의 명으로 나를 막는 것이겠지.
겁박한다 하여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자이니까.
난 고개를 숙인 시종장을 보며 다시 말했다.
“내게 폐하의 일을 숨기는 것이 진정 폐하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
시종장은 답하지 못했다.
“내가 난동을 피운 것이네. 그대는 날 최선을 다해 막았고 내가 멋대로 들어간 것이다.”
난 그를 지나쳤고 시종장은 이번엔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난 벌컥 침실의 문을 열었다.
“……폐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난 다리가 굳어버렸다.
바닥을 적신 붉은 피와 고통스러운 듯 기침을 토해내는 레이몬드.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된 것이다.
고개를 든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경악스러운 듯 커졌다.
“엘리야 네가, 쿨럭, 왜…….”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주변의 상황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입가에 묻은 붉은 피만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내게 한걸음 내디딘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커다란 몸이 무너지듯 아래로 쓰러졌다. 그 모든 장면이 현실감 없이 느리게 움직였다.
“폐하!”
시종장이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레이몬드가 의식을 완전히 잃고 나서야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폐하, 폐하!”
“어서, 침대로 옮겨야 합니다.”
시종장의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가 울리고 황궁의가 빠르게 말했다.
시종들이 레이몬드를 들어 침대 위로 올렸다.
황궁의는 레이몬드를 서둘러 살폈다.
마치 그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듯 경동맥부터 짚었다.
그의 손짓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죽은 것일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냥 주저앉고 싶을 만큼.
마침내 그의 침대 곁에 선 난 레이몬드를 내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입술에 묻은 피, 상의를 적신 붉은 선혈들이 어지럽게 시야를 메웠다.
“……폐하께선…….”
괜찮은 것이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는 꼭 죽은 것 같았으니까.
“하아…….”
그때 황궁의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참담한 얼굴과 절망적인 탄식이었다.
설마…….
“왜 그러는 것이냐. 폐하의 상태가 많이 위중한 것이냐?!”
“그것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간 당장 네 목을 칠 것이다.”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하자 황궁의가 어깨를 떨곤 황급히 답했다.
“황후 폐하……. 폐하께선 이미 온몸이 중독되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실 듯합니다. 지금까지는 어찌
버텨오셨으나, 지금은…… 의식을 되찾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황궁의가 내뱉은 모든 말이 충격적이었지만 그중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에 난 눈을 크게 떴다.
“……중독되었다고……?”
황궁의의 떨리는 눈동자로 시종장을 힐끔거렸다.
난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서 중독되었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병에 걸린 것이 아닌 것이냐?!”
시종장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독에 중독되신 것이 맞사옵니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독을 드시다니. 대체 언제 독을 드셨단 말이냐, 누가 감히 폐하께 독을……!”
말을 잇던 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이렇게 격렬하게 피를 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칼라일이 독을 먹었을 때와 똑같아.
“설마 칼라일과 같은……, 아니다. 폐하께선 그날 디저트를 먹지 않으셨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중독이 되었단 말이냐?!”
믿기지 않아 다그치자 시종장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는 것을 망설였다.
“시종장, 전부 말하거라.”
“……황태자 전하께서 중독되셨을 때, 약을 넘기질 못하셨습니다. 그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하여……
폐하께오서 직접 입으로 약을 먹이셨습니다.”
“……뭐?”
“그 과정에서 황태자 전하의 입 안에 남아있던 독이 폐하께 넘어간 것이옵니다.”
레이몬드가 독에 중독된 이유가 칼라일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폐하께서 중독되신 것을 언제 알았느냐.”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해독제를 먹으면 낫는 것이니 황후 폐하께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해독제가 하나뿐이라……. 지금 이 상태에 이르신 것입니다.”
칼라일을 살리려다 독에 중독되었고, 칼라일을 살리기 위해 해독제도 포기했다니.
그 와중에 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칼라일만을 신경쓰느라고.
이 지경이 되도록 말이다.
누군가 목을 꽉 조르는 거 같았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왜, 왜 내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폐하께서 저 지경이 되기 전에 내게 말했어야지!”
난 시종장에게 소리쳤다.
시종장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지금은 이성적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눈가를 파르르 떨던 시종장은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서 죄책감을 느끼실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시종장이 괴로운 목소리로 바닥에 엎드렸다.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송구합니다. 모든 것은 폐하를 잘 보필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죽여주십시오.”
황궁의들도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황제가 곧 죽는다.
죽을 때까지 의식을 차릴 수 없다 했으니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통한 침묵이 내려앉은 침실에서 순간 몸의 온도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레이몬드가 이대로 죽는다니.
이건 아니잖아.
손끝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어지럽고 몸이 떨려 비틀거리자 헬란이 황급히 팔을 잡아 왔다.
“황후 폐하.”
헬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따뜻한 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 차려야……해.
레이몬드가 이리되었다 하여 내가 넋을 놓고 있어선 안 됐다.
아니, 그의 상태가 위독하기에 내가 더욱 강해져야 했다.
레이몬드의 상태가 알려지면 황권을 향해 들개들이 달려들 테니까.
“헤링턴.”
난 황궁의의 이름을 불렀다.
“……예, 황후 폐하.”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확실히 알아야겠다. 폐하께서 살아나실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이냐.”
“……해독제를 드시지 않는 이상 깨어나실 수 없으십니다.”
그때 칼라일이 먹은 독은 하나의 독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섞어 만든 것이라 했었다.
하여 독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이 힘들다 하였었다.
“끝내…… 독의 성분을 결국 알아내지 못한 것인가…….”
독의 성분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해독제를 만들 수가 없다.
혹시나 했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기분에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황궁의의 답이 들려왔다.
“독의 성분은 알아냈습니다.”
“알아냈다고? 그런데 왜 해독제를 아직 만들지 못한 것이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다그치자 황궁의가 면목 없다는 듯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선 신성국의 신성한 꽃인 아기오디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전엔 지금 꽃이 핀
아기오디타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황궁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난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심장이 떨렸다.
“……아기오디타.”
확실히 그 꽃은 구하고자 한다고 구할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10 년에 한 번, 혹한의 겨울에 피었다 사흘 만에 지는 신성한 꽃이었다.
거기다 온도가 조금만 따듯해져도 시들어버렸다.
구하기도, 활짝 핀 꽃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시든 꽃이든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는 무언가 남아있기만 한다면…….
황궁의에게 빠르게 물었다.
“혹시 신성국에 꽃이 피지 않은 봉오리 채이거나 시들어버린 아기오디타는 남아있다고 하더냐.”

167 화

“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궁의가 고개를 들었다.
황궁의는 내 물음이 이해되지 않는 듯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아기오디타의 꽃봉오리나 시든 꽃이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그것까진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해독제에 필요한 것은 만개한 아기오디타의 꽃이라……. 생명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후 폐하.”
황궁의는 내가 봉오리나 죽은 꽃으로 약을 만들 수 있다 착각한다 생각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황궁의는 내 능력을 모르니 당연히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꽃봉오리나 죽은 상태라도 꽃이 남아있기만 한다면 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내겐 식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꽃이 피어난다면 해독제를 만들어 레이몬드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숨겨 왔던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레이몬드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헤링턴, 지금 당장 신성국에 급보를 넣어 봉오리나 죽은 꽃이 남아있는지 알아보거라.”
“……예?”
“그 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당장 움직여. 명령이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던 황궁의는 명령이란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내 능력을 일일이 설명해 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꽃을 구해 오면 알아서 알게 될 일이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황궁의 하나가 급히 나갔다.
남아있는 황궁의에게 물었다.
“해독제가 만들어질 때까지 폐하를 버티게 해야 한다. 방법이 있겠느냐.”
“……지금으로선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같은 약을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오나 생각보다
독이 너무 빠르게 퍼지어……. 저도 장담은 못 합니다.”
난 레이몬드를 보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거라.”
“예.”
레이몬드에게 다가가 약을 먹이는 황궁의를 보던 난 시종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의 상태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궁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폐하는……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허니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하거라.”
“……예, 황후 폐하.”
“그리고 크로프트 공작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나가고 황궁의도 진통제만을 남겨두고 침실을 나갔다.
그렇게 침실에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난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레이몬드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기 오디타는 신성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시들었다 하여 바로 소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니 아기오디타가 도착하기만 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레이몬드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를 떠날 준비를 하던 나였지만 미래에 레이몬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보다 빨리 죽을 거란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그런데 이렇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있다니.
이대로 죽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었다.

<i>‘황태자 전하를 위해 해독제를 포기하셨고 지금 이 상태에 이르신 것입니다.’</i>

시종장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해독제를 가지고 왔을 때 레이몬드는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한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했을 때 황궁의가 이상하게 망설이던 모습이 이젠 이해가 갔다.
“왜…….”
어서 칼라일에게 해독제를 먹이라 말하던 그때의 레이몬드 얼굴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바로 중독된 것을 알았다면 그 순간에도 고통이 있었을 텐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칼라일을 살린 것이다.
난 눈가가 뜨거워져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칼라일을 아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내가 그를 떠났던 이유 중 하나는 극한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가 칼라일을 살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지금도 은연중에는 그의 진심을 향한 불신이 남아있었다.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 의심이 우습게도 그는 칼라일을 위해 저를 희생한 것이다.
거기다 그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내가 죄책감을 가질까 봐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미련해.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었다고…….”
언제부터 내 생각을 그렇게 했다고.
그의 미련함에 화가 났고 속이 쓰라렸다.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으윽……!”
고통스러운 듯 레이몬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i>‘폐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면 진통제를 먹이셔야 합니다.’</i>

독이 퍼질 대로 퍼져 통증이 몹시 심할 것이라 했었다.


난 서둘러 병뚜껑을 열곤 그의 입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토해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레이몬드는 무리 없이 약을 삼켰다.
“하윽!”
약을 먹이고 긴장된 얼굴로 그를 보던 난 격한 신음에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레이몬드…….”
마음속의 내 간절함이 그에게 닿기라도 한 걸까. 괴로운 듯 몸을 비틀던 그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털썩 그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져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통증이 사라져 힘이 빠진
것이었다.
거칠었던 호흡이 많이 나아진 그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쉰 난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식은땀에 젖은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레이…… 버텨야 해.”
이대로 죽어선 안 돼.
이대로 날 떠나면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살아.”
언제까지고 내가 용서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었으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
달칵-
“황후 폐하.”
“신성국에 급보를 보냈느냐?”
난 손수건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막 방으로 들어온 황궁의를 돌아보았다.
“네. 마법진을 통해 급보라고 보내니 바로 답변이 왔습니다. 다행히도 시든 꽃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시든 꽃이니 마법진을 통해 보내도 상관없겠지?”
“네, 이미 죽은 꽃이니까요. 내일 바로 보내준다고 하였습니다. 하오나 정말 죽은 꽃으로 폐하를 살릴
방도를 아시는 것입니까……?”
황궁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차피 내일이면 직접 보게 될 테니. 그대는 해독제가 완성될 때까지 폐하께서 숨을
거두시지 않도록 최선만 다하면 된다.”
황궁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약을 준비해오겠습니다.”
황궁의가 나가고 다시 레이몬드를 향해 다가가려던 난 시종장의 말에 멈추었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아버지.”
침실로 들어온 아버지는 침대에 누운 레이몬드를 보고 걸음을 주춤했다.
“폐하께선…….”
일그러지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최악을 상상하신 듯했다.
지금 레이몬드의 모습은 죽었다 하여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폐하께선 약을 먹고 깊이 잠드신 것입니다.”
“아…….”
아버지는 참았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돌리셨다.
“……전부 들으셨습니까?”
“아버지. 아무리 폐하의 명령이 있었다 한들 제게 숨겨선 안 되셨어요.”
아버지는 지쳐 보이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셨다. 한숨을 깊이 내쉰 아버지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
서렸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황후 폐하께서 평생 죄책감에 살아가시게 되실까 봐
그랬습니다. 참으로 불민한 결정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레이몬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아버지도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레이몬드를 향한 충심도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와 나,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며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우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를 탓하려 한 말은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리되셨는데 어떻게 제 잘못이 없을까요.”
“…….”
“그날 칼라일을 위해 약을 들이켜실 때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칼라일이 살기를 바랐으니까요. 폐하께서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전…….”
무너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폐하께선 죽지 않아요. 내일이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네? 해독제를 만들지 못한다 들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폐하를 살릴 수 있어요. 아버지.”
“그게 무슨……. 해독제의 주성분인 꽃을 구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아기오디타의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내일 시든 아기오디타가 황궁에 도착할 거에요. 그리고 제가 그 꽃을 살릴 거에요.”
“죽은 꽃을 어떻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버지에게 웃어 보였다.
“백번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면 알게 되실 거에요. 그러니 아버지 폐하는 제게 맡기시고 오늘
하루 황후궁에서 칼라일을 봐 주세요.”
아버지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윽고 내 말을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오늘 폐하의 곁을 지키실 겁니까?”
“네. 내일 해독제를 드실 때까지는요.”
레이몬드가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아야 안심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황태자 전하께 가보겠습니다.”
의식이 없는 레이몬드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아버지는 곧 침실을 나갔다.
그렇게 다시금 침실에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내일이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줘. 레이.”
아기 오디타가 오는 게 확실해 졌으니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다.
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레이몬드의 창백한 손을 마주 잡았다.

* * *

“황후 폐하, 황후 폐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그새 잠들었던 건가.
“아…….”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높이 떠 있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아버지.”
나를 깨운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칼라일은 어제 잘 잤나요?”
“네. 막 수업에 들어가시는 걸 보고 온 참입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 건가요?”
아버지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했다. 어젯밤 레이몬드는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피를 토하곤 했다.
그래도 약이 효과가 나쁘지는 않은지 약을 먹이면 잠시간은 진정이 되었다.
“네, 하지만……. 오래 버티시지는 못할 거예요.”
“오늘 아기 오디타가 오면 폐하를 살릴 수 있다 하였지요?”
“네. 바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어요.”
나의 단언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아마 아직도 내 확답이 의심스럽겠지.
난 시종장에게 물었다.
“신성국에선 아직 꽃이 도착하지 않았느냐?”
“아직 연락이 없었습니다.”
시종장이 막 대답한 그때, 침실의 문이 열리며 시종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 막 신성국에서 꽃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168 화

“황후 폐하, 오늘 아침 신성국에서 도착한 꽃입니다.”


황궁의는 품 안의 비단을 내게 보였다.
신성국의 문장이 새겨진 하얀 비단에 곱게 쌓여있는 꽃은 아기오디타가 맞았다.
비록 시들어 화려한 빛이 사라졌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운 백색을 띠고 있었다.
“여기 위에 놓게.”
헬란이 넓은 은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황궁의가 조심스럽게 은쟁반 위로 꽃을 놓자 헬란이 내게로 그것을 내밀었다.
헬란은 이미 내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차분한 표정이었다.
내 손이 꽃을 향해 뻗어지자 침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황궁의와 시종장이 모두 내가 무엇을 할지 궁금하고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살릴 수 있겠지.
꽃에 손을 뻗기 직전 순간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이 꽃을 살리지 못하면 레이몬드가 죽는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럴 리 없는 가정이 떠오르며 긴장감이
들었다.
“황후 폐하.”
내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본 듯 헬란이 나를 나직이 불렀다.
헬란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보자 잠시나마 들었던 불안감이 빠르게 잠식되었다.
난 숨을 크게 들이키고 시든 꽃에 손을 댔다.
살아나렴,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 순간 내 손끝 아래에서 생동감이 느껴졌다.
축 늘어져 있던 꽃잎들이 풍성하게 올라오고 메말랐던 줄기가 탄탄해졌다.
“헉! 어떻게……!”
“설마 정령술……?”
놀람을 숨기지 못한 시종장과 황궁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마침내 완전히 살아난 꽃에서 난 손을 뗐다.
완전히 살아난 아기오디타는 은쟁반 위에서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아.”
밝게 빛나는 꽃을 보자 깊은 안도감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멍한 얼굴의 사람들이 보였다.
눈앞에서 꽃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니 놀란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건 정령술도, 마법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를 일일이 설명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헤링턴. 이젠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겠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던 황궁의가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보았다.
“네? 아, 네.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해독제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헤링턴은 꽃을 가져가 미리 준비해 온 약재기로 바로 해독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기오디타의 원액만 넣으면 바로 완성되도록 약을 만들어 놓았기에 해독제는 금방 완성되었다.
“다 되었습니다.”
해독약을 만든 헤링턴이 떨리는 손으로 내게 약병을 전했다.
크리스털 병을 받아든 난 곧장 레이몬드에게 향했다.
언뜻 보면 죽은 사람처럼 숨결이 미약하고 힘이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의미했기에 난 서둘러 그의 입술 사이에 약을 흘려 넣었다.
몇 방울 흘러내리긴 했지만 레이몬드는 약을 삼켜냈다.
빈 약병을 헬란에게 넘기고 침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은 당연히 죽은 듯이 누워있는 레이몬드를 향해 있었다.
일어나, 레이.
마음속으로 그를 간절히 부르며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혹시라도 해독약이 통하지 않을 만큼 몸이 망가져 버렸을까 불안함이 들었다.
“……일어나야 해.”
내 간절한 속삭임이 그에게 들린 걸까.
미동도 없었던 레이몬드의 눈꺼풀이 움찔 움직였다.
“폐하, 폐하! 제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 움직임을 본 황궁의가 몸을 숙여 레이몬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으윽…….”
그의 창백하던 입술이 벌어지며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폐하, 제 말이 들리시면 손가락을 움직여 보십시오.”
순간 아마도 나는 숨을 멈췄을 거다.
레이몬드의 오른손가락이 황궁의에게 답하듯 꿈틀거렸다.
“됐어…….”
참았던 숨을 내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헬란이 빠르게 날 부축하고 황궁의는 레이몬드의 눈동자를 살피는 등 분주했다.
진찰을 마친 그는 확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선 이제 무사하신 것이냐?”
“예, 황후 폐하. 해독제가 아주 잘 듣고 있습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진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헬란의 손을 꼭 잡으며 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확답을 듣자 그제야 안심이 되어 울컥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그를 돌보며 들었던 수십 가지의 불안감들이 한꺼번에 내려가고 안도감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길게 숨을 내쉰 난 천천히 눈을 떴다.
“헤링턴, 고생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가 아니었다면 해독약을 만들 수조차 없었을 것 입니다.”
“아니. 오늘 해독약을 만든 건 자네이다. 허니 내가 그대에게 보인 것은 머릿속에서 지우거라.
알겠느냐.”
황궁의와 시선을 마주한 난 확고하게 말했다.
내 능력을 본 사람은 어차피 황궁의와 시종장, 아버지가 전부였다.
굳이 숨겨야 하는 이유도 없는 힘이지만 그렇다고 굳이 알려야 할 이유도 없는 힘이었다.
사실 향수를 만들 땐 단순히 꽃을 피우는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이 힘이 새삼 가볍지 않게 느껴졌다.
충분히 악용될 수 있으니까.
“그대들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오늘 본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궁의와 시종장은 이윽고 시선을 낮추었다.
“그럼 전 폐하께서 기운을 차릴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황궁의가 침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란가 시종장도 물러갔다.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는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난 가만히 서 계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직도 조금 멍한 눈빛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셨다.
“황후 폐하께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왜 제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릴 적엔 이 능력이 오히려 무서웠어요. 그리고 크면서는 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어요.”
과거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레이몬드였다.
스스로 이 능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룬트 왕국으로 넘어가서였다.
과거의 나를 누구보다 제일 잘 알기에 수긍하시는지 아버지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이셨다.
“그랬군요. 황후 폐하께 더 일찍 말했을 것을 후회가 듭니다. 저의 어리석음 때문에 폐하께서 고생하신
것 같아 말이지요.”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와 어두워지는 얼굴에 난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셨잖아요. 오히려…… 폐하께서 제게 숨기려 하신걸요. 그러니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이제 폐하께서도 무사하시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제 폐하는 황궁의와 저에게 맡기고 좀 쉬십시오.”
아버지는 내 역할이 다 끝났다고 여기시는 듯했다.
딱히 이상한 생각도 아니었다.
레이몬드와 내가 평범한 부부 사이가 아니란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으니까.
그러니 레이몬드가 살아난 지금 굳이 내가 진짜 아내처럼 황제의 곁을 지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의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내가 할 도리는 다한 거였다.
하지만 돌아가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그가 걱정되었다.
“……아니에요. 제가 있을게요. 공무가 바쁘실 테니 아버지께서는 돌아가 보세요.”
아버지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흠칫 놀라셨다.
“……황후 폐하. 혹 폐하를 향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으셨습니까?”
정말이지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설마하니 아버지가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던 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게 아니라…….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 어제오늘의 폐하께서는 마치…… 과거의 그때와 같아 보였습니다.”
역시 아버지의 눈을 속일 순 없는 건가.
난 싱거운 웃음을 작게 흘렸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폐하와는 이제 다 끝났다고 아무 미련도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폐하의 진심을 보게 되니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 폐하와 함께 살아가는 것도……
모르겠어요. 아버지 저도 제가 무얼 원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셨다.
“엘리야.”
“……네.”
“난 네가 황후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이혼한다 했을 때도 조금의 반대도 하지 않았었다. 내게 중요한
건 너의 행복이었고 폐하께선…… 널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아버지…….”
“하지만 지금은 폐하께서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셨다고 생각되는구나.”
“……그런가요.”
“네가 떠나 있는 동안 폐하께선 널 잊지 못하시고 끝없이 그리워하셨지. 한때는 그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
잊힐 감정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잠시의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칼라일을 위해 독에 중독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널 생각하시는 걸 보니 폐하의
마음이 쉽게 변할 것 같진 않더구나. 진심이신 것 같다.”
아버지의 말에 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레이몬드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칼라일에게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과거의 무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레이몬드의 곁에 남길 바라시는 걸까.
입술을 달싹인 그때 아버지가 옅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모든 선택은 황후 폐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늘 바라는 것은 황후 폐하의 행복이니까요.”
아버지의 다정한 말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화답하듯 미소를 짓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헬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칼라일이?”
난 자연스럽게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칼라일은 아직 이 상황을 몰랐기에 지금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헬란, 황태자를 응접실로 데려가렴. 아버지 잠시 폐하를 부탁드려요.”
“다녀오십시오.”
난 침실을 나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169 화

잠시 칼라일을 보고 레이몬드에게 돌아가려 했었지만 난 결국 한밤중이 될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칼라일에게 지금 레이몬드를 만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칼라일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시무룩해진 칼라일을 달래주기 위해 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저녁까지 챙겨 먹이고 잠드는 것까지 보고 나니 한밤중이 된 것이다.
칼라일이 잠들자마자 곧장 태양궁으로 온 난 레이몬드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막 진찰을 마친 듯 물러나는 황궁의가 보였다.
“헤링턴, 폐하께선 어떠신가?”
“며칠은 경과를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폐하의 몸이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며칠
정도 휴식을 취하시면 일상생활을 하시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으실 듯합니다.”
레이몬드의 기초체력이 남달라서일까, 칼라일과 달리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다.
“다행이군. 수고했네.”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궁의가 나가고 헬란이 내게 물어왔다.
“오늘도 이곳에서 밤을 보내시는 것입니까, 황후 폐하.”
“……오늘 밤까진 폐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 좋겠구나. 이만 물러가 보아라.”
불편한 잠자리를 걱정하는 듯한 헬란과 시종들을 모두 물린 난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의식이 없었지만 좋아지고 있다는 황궁의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얼굴에는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난 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난 나직이 이름을 불러보았다.
“레이…….”
내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우리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우리에게 행복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평생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쩌면 내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답을 찾지 못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던 그 순간, 낮은 신음이 울렸다.
“윽…….”
“레이?”
그가 흘린 신음이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가 싶어 난 황급히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그의 얼굴에 놀라 황궁의를 부르려던 그때,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엘리…….”
시선을 내리자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
그가 눈을 뜬 것이었다.
난 순간 너무 놀라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벌써 의식을 차리다니.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 해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런데 다시 보니 조금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지만 초점 없는 눈빛이 흐렸다.
약 기운에 잠시 의식이 돌아온 건가.
난 사람을 부르려던 것을 멈추며 그를 내려보았다.
“……더 자야 해. 그래야 나아.”
속삭이듯 말하며 그가 다시 잠들 수 있게 이불을 가슴께로 올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입술을 열었다. 처음엔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난 그의 입술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엘리…….”
내 이름이 들려왔다.
흐리게 눈을 뜬 그는 지금 날 찾고 있는 것이었다.
“보고……싶어…….”
나직하고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구쳤다.
흐린 의식 속에서도 날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그가 쓰러졌으니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 침착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를 잃을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흑, 레이…….”
난 그에게로 무너지듯 몸을 숙였다.
너른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난 참아왔던 울컥 함을 쏟아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애써 외면했던 불안감과 고통 속에서도 나를 그리워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마음
아팠다.
레이몬드에게 안겨서 울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가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엘리…….”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 등 위로 큰 손이 느껴졌다. 마치 달래듯 그의 손이 내 등을 토닥였다.
“다신 내 앞에서 쓰러지지 마. 정말 다시는…….”
그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든 난 레이몬드와 시선을 마주쳤다.
흐린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선명히 돌아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대답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결이 들려왔다.
약 기운에 잠시 정신을 차렸던 그가 다시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스르륵, 등 위에 있던 그의 손이 침대로 떨어지자 내 이성도 돌아왔다.
황후의 품위 따윈 던져 버리고 볼썽사납게 그의 품에 안겨 울어 버리다니.
아니, 내가 먼저 그의 품에 안겨들다니.
전자보다 후자가 더 놀라운 일이다.
“하아…….”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난 몸을 바로 한 뒤 잠든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평온한 얼굴에 심장에 따스한 온기가 퍼지는 거 같았다.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널 떠날 수 있을까.”
리제나가 죽었고 황태자의 자리는 안정되었다.
레이몬드의 목숨이 위험하긴 했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허니 모든 게 자리 잡은 지금 예정대로라면 난 그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
내가 정말 그를 떠나고 싶은 것인지.
황궁으로 돌아왔던 처음엔 레이몬드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를 받아주면 과거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니 과거와 현재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의 상황도, 나를 향한 레이몬드의 감정도 말이다.
과거의 외로움이 너무도 두려워 그를 강박적으로 밀어냈지만 더 이상 그를 향한 마음을 부정하고 떠나는
건 나 자신을 속이는 꼴이 되지 않을까.
내가 한 걸음만 다가간다면, 어쩌면 우린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물음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덮었다.
그리고 그 물음들이 도달하는 답은 하나였다.
‘떠나고 싶지 않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난 흠칫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를 함께하는 것인지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터져버린 감정에 휩쓸린 것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결국 레이몬드의 곁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 * *

“으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레이몬드는 의식 너머로 들려오는 맑은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깜박, 깜박.
정신을 차리려는 듯 그는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꿈인가.”
천장을 보던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그대로 시선을 멈추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엘리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은빛 머리칼이 볼을 살짝 가리고 은실 같은 속눈썹이 감긴 눈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꼭 별빛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꿈이 아닌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엘리야의 울음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죽기 전 한 번만 그녀를 보게 해달라 빌었던 것 같다.
신께서 죽어가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그렇게 가만히 엘리야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기엔 너무나
현실감이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뜰 때만 해도 푸른 여명이 짙었던 하늘에 해가 뜨고 있었고, 엘리야의 숨소리는 꿈이 아니라는 듯
생동감이 있다.
“……이상하군.”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그의 몸이 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기 직전 엘리야의 얼굴을 보았었어.
그는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럼 엘리야가 곁에 있는 지금이 정말 현실이란 건가.
“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죽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쓰러진 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설마 의식을 잃었던 동안 엘리야가 날 간호하느라 이런 쪽잠을 자고 있는 건가.
레이몬드가 미간을 살짝 좁힌 그때 잠들어 있던 엘리야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잠에서 깨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순간 엘리야가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든 그녀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엘리야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레이!”

* * *

“엘리야…….”
난 눈을 뜨자 보이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니. 난 황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속이 안 좋다거나, 고통이 느껴진다거나, 그런 건 없어?”
속사포로 물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는 꼭 나의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를 눈동자에 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답을 기다리지 못한 내가 먼저 말했다.
“레이, 너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린 거야. 뭐라도 말을 해 봐. 황궁의를 부를까?”
의식이 잠깐 돌아왔던 그날 이후 3 일 내내 레이몬드는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난 그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낮에는 칼라일과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밤에는 레이몬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걸려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사흘이나 지났군. 엘리, 네가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해.”
레이몬드는 내게 사과를 먼저 말했다.
사흘 만에 깨어난 지금 자신의 안위보다 날 먼저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척한 얼굴이 안쓰러우면서도 속상해 난 얼굴을 구겼다.
“됐어. 미안하단 말 들으려고 곁에 있었던 거 아니야. 이렇게 살아났으니까 됐어.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정말 널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살아난 거라고?”
레이몬드는 순간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해독약을 먹어 그는 자신이 아직 중독된 상태인 줄 아는 듯했다.
“내가 해독약을 만들었어.”
레이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설마 내가 해독약을 먹고 깨어난 거야?”
“그래, 맞아. 레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넌 내 능력을 알고 있었잖아. 해독약의 주재료인 꽃을 내가
살릴 수 있는데 왜 말하지 않은 거야?”

170 화

레이몬드는 내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대체 왜 내게 숨긴 것인지.
해독약을 먹었다는 것에 놀란 얼굴이던 그는 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말하겠어. 네 능력을 알고는 있었지만 신성력이 깃든 꽃까지 살릴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고……. 내가 네게 목숨을 구걸할 처지도 아니었으니까.”
“……뭐?”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데 혹시라도 실패하면……. 네가 죄책감을 느낄 게 뻔하잖아.”
“죄책감이라니 그게 무슨…….”
“칼라일을 살리려 독을 먹은 거나 해독약을 만들지 못한다면 넌 네 잘못이라 생각했겠지.”
“…….”
틀린 말이 아니라 아무 말도 못하자 레이몬드가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걸 다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말하겠어. 여태껏 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죄책감만 남겨두고 갈 순 없잖아. 애초에 리제나의 일도 내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고.”
“그게 무슨 바보 같은……”
“그러게. 바보 같고 미련한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차마 너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줄 순 없었어.”
그는 진심인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후회도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울컥해 난 소리쳤다.
“네가 끝까지 숨겼다 한들, 네가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괜찮아!? 네가 죽으면……. 그게 어떤 이유든
내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엘리야.”
울먹이며 소리치자 레이몬드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그런데 이윽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난 지금 진심으로 화났다고.”
“미안, 미안. 근데 네가 지금 날 걱정하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나, 정말 너한테 미쳤나 봐.
너밖에 생각이 안 나.”
죽음의 목전까지 갔던 영향일까. 레이몬드는 거침이 없었다.
내가 자신에게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정말 행복하단 눈빛이었다.
바보같이 좋아하는 얼굴에 순간 어이가 없어 울컥했던 감정이 빠르게 식을 정도였다.
어이없는 실소를 흘리는데도 미소 짓고 있던 그의 눈빛이 살짝 짙어졌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고백하듯 뱉는 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날 찾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거 알아? 이제 정말 죽겠구나 싶었을 때 말야,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널 볼 수 없다는 게
더 두려웠어.”
“레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건 온통 너와의 기억뿐이더라. 내 삶에 네가 유일한 빛이었다는 걸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어. 상처를 줘서 정말 미안해. 엘리야.”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진심과 사과에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늘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과거의 내 상처까지 위로받는 듯한 느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런. 엘리, 울지 마.”
참지 못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자 레이몬드가 당황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볼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멈칫했다.
“아, 미안.”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듯 조심스럽게 사과하며 그는 손을 거두려 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볼을 묻었다.
“……엘리?”
내 행동에 레이몬드는 손끝이 뻣뻣해질 만큼 굳어버렸다.
난 그의 따스한 손의 온기를 느끼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너도 내 삶의 빛이었는걸. 비록 늘 뒷모습만 봐야 했지만…….”
“…….”
“늦게라도 내게 다가와 줘서, 진심을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러니 앞으론 늘 이렇게 함께하자. 내가 널
다시는 떠나지 않게 꽉 붙잡아줘.”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그는 멍하니 입술을 벌린 채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 아니라면 뭐겠어. 뭐, 네가 싫다면 그만……”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괜히 쑥스러워져 손에서 볼을 뗀 순간, 그가 도망가지 말라는 듯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싫을 리가 없잖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그는 벅찬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을 확인이라도 하듯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마에서 눈썹을 지나 코끝까지 천천히 손끝으로 훑은 그는 두 손으로 볼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엘리……. 정말 내 곁에 있어 주는 거지? 날 용서해 주는 거지?”
“……응. 그러니 너도 다신 날 힘들게 하지 마.”
“다시는 어리석은 짓 하지 않을게. 맹세해. 너도 맹세해 줘.”
“뭐?”
순간 당황하여 그를 보았지만 그는 진심이라는 듯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다신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해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맹세해. 다신 널 떠나지 않겠다고.”
나직한 속삭임이 울린 순간 그의 눈동자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렇게 처음 보는 환한 미소를 그린 레이몬드는 내 얼굴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난 눈을 감았고 우리의 입술이 겹쳐졌다.
약간은 푸석한 감촉이 내 입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하아…….”
그간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듯 레이몬드는 깊고 짙게 내 입술에 키스했다.
쏟아지는 그의 감정을 받아내듯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애타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 * *

일주일 뒤.
“우와, 진짜 크다!”
칼라일은 높게 뻗은 나무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난 입을 쩍 벌린 칼라일이 귀여워 미소 짓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큰 나무를 바라보았다.
온 가족이 함께 찾은, 큰 나무가 있는 이곳은 바로 레이몬드의 어머니의 생가였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이곳을 떠올린 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나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라 여기며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고 난 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이었다.
하여 몸이 완전히 회복된 레이몬드와 함께 친어머니가 머물던 곳을 찾은 것이었다.
내가 떠나고 이 나무가 죽었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우려와 달리 싱그럽게 꽃을 피운 나무는 생명력이 넘쳐 보였다.
커다란 나무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던 칼라일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정말 이게 아버지의 나무에요?”
“그래. 이건 네 친할머니께서 내 건강을 빌며 심으신 나무야. 그리고 이 나무를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엔……. 네 어머니가 나무를 살려주었었지. 허니 이 나무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나무란다.”
“와, 그럼 엄청 소중한 나무인 거네요. 아버지의 형제 같은 그런 나무잖아요!”
“형제라……. 그렇구나. 내 쌍둥이나 다름없는 나무구나. 그러니 앞으론 칼라일도 이 나무를 잘 가꾸어
주렴.”
“물론이죠! 앞으론 제가 이 나무를 보살필 거에요!”
칼라일이 씩씩하게 말하자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가끔 칼라일이 물도 주고 예쁘게 꽃을 피우라고 말도 해주면 나무가 아주 기뻐할 것 같구나.”
“아! 물 떠와서 제가 물 줄래요!”
칼라일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갑자기 물이 필요하다며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눈치 빠른 헬란이 황태자의 뒤를 따르고 난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잊었을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잊었었지. 하지만 네가 떠나고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가 홀로 서 있는 이 나무를 보았어. 네가
살려놓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리면서 그 순간 너를 향한 내 감정을 깨달았었어.”
레이몬드는 나무에 손을 살짝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이 나무를 내가 지극정성으로 돌봤어. 네가 살려놓은 이 나무가 죽어버리면 너도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거든.”
“…….”
“결국 이 나무가 내 소원을 이뤄 줬어. 지금 이렇게 네가 내 곁에 있잖아.”
나무에서 손을 떼며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장난기가 서린 미소에 피식 웃은 그때, 어디선가 물주머니를 구한 듯 칼라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칼라일, 천천히 오렴.”
“헉, 하아……. 어머니, 이 물, 줘도 될까요? 사람이 먹는 맑은 물이라고 했어요!”
칼라일은 꼭 뜻깊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난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의 대답에 칼라일은 아주 조심스럽게 나무에 물을 주었다.
물주머니의 마지막 물방울까지 쏟아낸 칼라일은 밝게 웃으며 나무에 손을 얹었다.
“나무야, 항상 건강해야 해.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
나무에게 약속한 칼라일은 갑자기 나와 레이몬드를 번갈아 보며 우리를 불렀다.
“어머니, 아버지.”
“응?”
“그래.”
칼라일의 부름에 나와 레이몬드가 답했다.
그러자 칼라일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쭉 같이 여기로 놀러와요!”
오랜만에 셋이서 함께 있으니 너무 기쁜 듯 칼라일은 행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레이몬드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더 이상 서로를 피하지도, 곤란해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서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렸던 만큼 서투르고 솔직하지 못했던, 그로 인해 슬프고 괴로웠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난 웃으며 칼라일에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 쭉 이렇게 함께 이곳에 놀러 오자꾸나.”
“이렇게 손을 잡고 말이지.”
그는 은근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을 덧붙였다. 깍지를 끼는 그를 힐끗 바라보자 레이몬드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거부할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는,
“저도, 저도 손잡을래요!”
우리의 중간으로 파고드는 칼라일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웃음이 터지고 내 웃음에 레이몬드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헤헤, 너무 좋아요.”
마지막으로 칼라일의 즐거운 미소까지.
화창하고 기분 좋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에 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에필로그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황실의 사건들이 모두 지나가고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봄이 지나고 어느덧 초여름이 다가오면서 이른 시각부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황후궁의 정원을 울리고 궁전의 침실에도 햇빛이 스며들었다.
너른 침대에 누워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눈을 뜬 것은 바로 레이몬드였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그는 고개를 돌려 제 팔을 베고 누운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녀는 새근새근, 작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햇살이 서린 은발을 조심스럽게 만진 레이몬드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녀와 합궁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녀와 함께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믿기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꿈이 아닐까, 가끔 그런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그는 그녀의 은발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특유의 달큰한 엘리야의 향기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잘 익은 과일 같은 달콤한 체향.
엘리야의 체향은 언제나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레이몬드는 그렇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순간, 곤히 잠들어있던 엘리야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레이몬드는 손을 주춤하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언제 보아도 신비로운 엘리야의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좋은 아침이야, 엘리.”
레이몬드는 익숙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쪽-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는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좋은 아침, 레이. 흠…….”
엘리야는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아직 남아있는 몽롱함을 즐겼다.
그리곤 그에게 다가갔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이불이 스르륵 내려가며 그녀의 어깨가 드러났다.
얇은 슬립 하나만을 걸쳤기에 그녀의 몸이 과감히 드러났다.
매끈한 목과 동그란 어깨, 굴곡진 쇄골.
맑을 정도로 흰 피부 곳곳엔 어젯밤, 그가 남겨 놓은 붉은 흔적들이 화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자국들은 레이몬드에게 묘한 만족감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녀가 완벽히 그의 사람이노라고 표시를 한 듯해서.
“엘리, 사랑해.”
자신에게 파고드는 엘리야를 꽉 끌어안은 레이몬드는 어깨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엘리야는 다정한 속삭임을 들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요즘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과거의 레이몬드를 생각해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젯밤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 번은 했을 거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 흘렀다고 이렇게 절절하게 고백을 해 오다니.
넘치는 그의 사랑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읏, 레이몬드……!”
그런데 그 넘치는 사랑이 이른 아침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려 했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점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날개뼈를 쓰다듬고 허리를 뭉근하게 매만졌다.
“하아, 엘리…….”
귓가에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몸을 밀착한 그는 입술을 여린 목덜미로 내렸다.
어젯밤 그가 남겨 놓은 붉은 자국 위로 입술을 내린 그가 보드라운 살결을 빨아당기려 한 순간, 그의 몸이
훅 뒤로 밀려났다.
“안 돼.”
엘리야는 단호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왜 안 돼?”
레이몬드는 한쪽 눈썹을 쓰윽 올리며 뻔뻔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안되냐니. 엘리야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안 되는 이유를 황궁 법도에 따라 수십 가지는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정말 납득이 안 된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허리를 다시금 팔로 휘감았다.
“레이!”
“조금만. 빨리 끝낼게.”
묘하게 노골적인 말에 엘리야의 볼이 붉어졌다.
날이 갈수록 능구렁이가 돼가는 레이몬드와 달리 엘리야는 아직 그런 그가 쉬이 적응되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 대놓고 그녀를 원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이렇게 성욕이 강한 사람이었던가.
그의 진해진 눈빛과 은근한 손길에 순간 넘어갈 뻔했던 엘리야는 정신을 차리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안 됩니다. 폐하. 오늘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니 늦게 일어나면 안 돼요.”
존댓말.
엘리야가 존댓말을 쓴다는 건 이 이상 선을 넘으면 화를 낸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황제는 황후가 예의를 깍듯이 차릴 때를 제일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행사.
엘리야의 말에 그제야 레이몬드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떠올렸다.
바로 칼라일의 이름을 딴 평민 학술원의 시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러니 아쉽긴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늦은 오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없을 듯했다.
“……그렇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레이몬드는 엘리야에게서 미련 가득한 손을 거두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아 이불 밖으로 나가자 탄탄한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레이몬드는 가운을 걸치며 침대 옆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궁인들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폐하. 황후 폐하.”
“난 곧장 연무장으로 갈 테니 황후의 치장을 돕거라.”
늘 그랬듯 레이몬드는 옷을 갈아 입고 연무장으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발걸음이 미적지근했다.
그대로 나가려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갔다.
쪽-
그리곤 아쉬움을 달래듯 막 침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허리를 감싸며 입술을 맞추었다.
궁인들은 황급히 시선을 낮추었고 갑작스러운 키스에 눈이 동그래진 엘리야의 볼이 붉어졌다.
“귀여워.”
그녀의 볼을 쓰다듬은 그는 정신을 차린 듯 샐쭉해지는 그녀의 눈을 보며 큼,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황후.”
레이몬드는 엘리야가 화를 낼까 피하듯,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 * *

“황태자, 많이 긴장되니?”
평민 학술원의 시공식으로 가는 마차 안.
엘리야는 마차가 달릴수록 점점 얼굴이 굳어가는 칼라일의 모습에 다정하게 물었다.
초조한 듯 무릎 위 손을 그러쥐고 있던 칼라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아주 중요한 행사라고 하셨잖아요. 혹시라도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걱정돼요.”
황태자의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칼라일은 예전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어리지만 자신의 자리의 무게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부담을 가지는 모습이 한편으론 안쓰러웠지만 황제가 될 사람이니 마냥 달래 줄 순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제국민들에게 선을 뵈는 첫 자리였으니 조금은 달래주어도 되겠지.
처음인 만큼 한껏 긴장했을 테니 말이다.
엘리야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려던 순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칼라일, 걱정 말거라. 아버지가 있는데 뭐가 긴장되니, 아버지만 믿으렴. 모든 게 다 잘 끝나도록
아버지가 도와주마.”
레이몬드는 칼라일에게 자신만 믿으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레이몬드의 다감한 말에 한껏 긴장돼 있던 칼라일이 얼굴이 풀어졌다.
칼라일은 레이몬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아버지가 최고예요.”
레이몬드는 칼라일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속삭이듯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나도 칼라일이 최고란다.”
칼라일이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은 레이몬드는 엘리야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엘리, 왜 그래?”
그런데 어쩐지 엘리야의 표정이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냐. 그냥 좀 멀미가 나서.”
엘리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마 둘 사이가 질투 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와 칼라일이 가까워질수록 이따금 엘리야가 묘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칼라일. 아버지가 최고라고 해서 어머니가 서운한 것 같구나.”
“네? 앗, 어머니, 서운하셨어요?”
칼라일이 엘리야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엘리야도 속마음을 들켜 얼굴에 부끄러움이 번졌다.
“아니, 아니야.”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칼라일은 이미 다 안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도 최고예요! 제가 얼마나 어머니를 좋아하는데요!”
왠지 어린아이가 다 큰 어른을 달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가 쿡,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을 만든 그를 노려보자 레이몬드가 큼, 목을 가다듬으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고 있다니까.
엘리야는 칼라일이 보이지 않게 레이몬드의 발을 뾰족한 구두코로 지그시 밟아줬다.
“윽.”
고통스러웠는지 레이몬드의 신음이 들렸지만 엘리야는 못 들은 척 칼라일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황태자를 많이 사랑한단다.”
“저도 사랑해요.”
고개를 숙인 레이몬드의 신음과 화목한 엘리야와 칼라일의 웃음이 상반되게 가득 찬 마차가 학술원의
부지에 도착했다.

* * *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납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우렁찬 기사의 목소리가 울리자 학술원 준공 행사를 보기 위해 몰렸던 평민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모두 일어나라.”
확성 마법이 걸린 레이몬드의 큰 저음이 넓은 공간을 울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제국민들은 황가의 일원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분이 바로 황태자 전하이시군.”
“참으로 영민하게 생기셨습니다.”
“저 흑단 같은 머리칼과 흑요석 같이 빛나는 눈을 좀 보십시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우십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를 보니 사랑스러운 황녀께서도 태어나셨으면 좋겠네요.”
“아,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황후 폐하께서도 돌아오셨으니 곧 새로운 황족이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소문에 의하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금슬이 그렇게 좋대요.”
“지금도 보세요,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보는 눈빛에서 꿀이 떨어지잖아요.”
“하하, 맞네요. 어여쁜 황녀님이 태어나시면 좋으련만…….”
제국민들은 황실 식구들을 보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레이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제국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학술원의 준공이 시작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황실은 평민들이 배움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황태자의 이름을 딴 학술원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장차 황태자가 나의 뜻을 이어 황제가
되어서도 평민들의 배움과 평안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마.”
레이몬드는 긴말에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세워질 학술원에서 그대들의 배움을 넓히고 그를 제국을 위해 이롭게 전파하도록 하라.”
레이몬드는 말이 끝나자 평민들이 크게 환호를 질렀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제국민들의 함성이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공터를 가득 메웠다.
새로운 제국의 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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