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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 *
2화
* * *
“모두 물러가렴.”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헬란이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연신 나의 눈치를 살피던 시녀들이 방을 나가고 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헬란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리제나의 이름을 들었듯 헬란도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곳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 전부가 들었을 것이다. 아마 내일이면 황궁에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첫사랑인 리제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말이다.
레이몬드와 리제나.
두 사람은 사교계에서 꽤 유명했으니까.
“헬란, 그대도 들었어? 내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 걸까?”
분명 똑똑히 들었지만 믿고 싶지 않아 묻자 헬란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폐하……. 송구합니다.”
헬란은 차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말할 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네 잘못이 아닌걸. 헬란,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예, 폐하.”
헬란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방 안에 나의 깊은 한숨만이 울려 퍼졌다.
“리제나가 갑자기 왜 돌아오는 거지…….”
리제나는 7 년 전 서왕국의 후궁이 되기 위해 제국을 떠났었다.
왕비도 아니고 후궁으로 들어간 이상 그녀는 왕이 죽을 때까지 서왕국의 왕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어떻게 제국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한때는 그녀가 돌아와 레이몬드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특히 지금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연히 레이몬드가 그녀의 소식을 듣는 것조차도 싫었다.
레이몬드는 이제 나의 남편이었으니까.
레이몬드가 리제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만약 그녀가 돌아와 그의 앞에 선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모레 리제나 영애가 서왕국에서 제국으로 돌아올 거야.’
그는 그 말을 하며 어떤 표정을,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리제나가 떠나고 레이몬드는 나와 결혼했지만, 지금껏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내게 최악의 남편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결혼식 날 약속한 것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나 말고 다른 여자는 절대 없을 것이라던 그 약속.
그는 황위에 오른 뒤, 많은 반발을 뒤로하고 제국의 결혼법을 일부일처제로 바꾸었다. 당연히 정부도
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게 했던 약속을 철저히 지켜주었다.
사랑, 그 감정 하나만을 빼고서.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서운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사랑을 줄 수 없다고 말했고 그것을 감수하고 그와 결혼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 생각했다.
때때로 외로움에 가슴이 아릿할 때가 있었지만, 그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다.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도 애정만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의 결혼은 행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리제나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레이몬드가 아직 리제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우린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흔들리고 말 테니까.
원치 않게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난다면 그 감정이 얼마나 애틋할까.
두 사람이 마주 선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완벽한 연인들을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윽.”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순간 아랫배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번쩍 차린 난 황급히 배에 손을 얹었다.
‘이미 한 번 유산하신 몸이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유의하시고
무리하게 움직이시는 것도 안 됩니다.’
의사가 말했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난 지금 혼자가 아니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잠시 널 생각하지 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이 납작한 배에서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레이몬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그러니 리제나가 돌아온다고 하여
마냥 불안해하고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진정하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폐하와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 벌써…… 알겠다.”
창밖을 보자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공작가에서 황성으로 급히 돌아왔을 때가 늦은 오후였으니
밤이 깊어질 만했다.
생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난 만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3화
“그걸 네가 어떻게?”
내게 숨기려고 했는지, 그답지 않게 나를 바라보는 흑안이 살짝 흔들렸다.
“아까 집무실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어.”
“그랬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들은 게 맞아. 모레 리제나가 돌아올 거야.”
담담한 그의 목소리와 달리 난 손끝이 떨려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리제나 양은 서왕국의 후궁인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 거야? 잠시 방문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제국으로 돌아온다는 거야?”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답지 않게 꼬리를 무는 물음이 귀찮은 건지 아니면 캐묻는 것이 싫 은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추스른 그는 내게 말했다.
“이 주 전쯤인가. 서왕국의 왕이 지병으로 죽고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았어.”
“아…….”
그제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서왕국의 왕의 병환이 깊어 오늘내일하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이 선왕의 후궁전을 정리하는 일이었지. 그중 선왕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후궁은 특별히 출궁을 허락했다는군.”
서왕국의 후궁은 모시던 왕이 죽으면 수도원 같은 곳에 들어가 평생을 보낸다고 들었다. 그런데 출궁을
허락했다는 건…….
“그럼…… 리제나 양은 다시 영애의 신분이 되어 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거구나.”
“그래, 다시 리제나 시오스. 시오스 후작가의 영애로 불리겠지.”
느긋하게 말한 그는 와인을 들이켰다. 무감한 듯한 태도였지만 난 이미 평소와 다른 그의 눈빛을 이미
읽었다.
차라리 후궁의 신분으로 돌아왔더라면 레이몬드와는 절대 엮일 수 없었을 텐데.
괜스레 불안함이 들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꽉 그러쥔 그때, 나의 이름을 부르는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야.”
난 피해버렸던 그의 짙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응.”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야.”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일까. 순간 머릿속에 갖가지 불안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을 물릴 생각, 없어.”
……약속. 약속이라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어떡했을 건데?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리제나가 돌아온다고 변하는 건 없을 거다. 치정 싸움으로 황궁을 시끄럽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게
황후는 너뿐이야.”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지만 난 순간 그의 눈빛에 스친 어떠한 감정을 보고 말았기에.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난 그것을 못 본 척 애써 미소를 그렸다.
“……그래.”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이틀 뒤 그는 걱정하지 말라 했던 그 말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 * *
4화
* * *
5화
* * *
아버지가 돌아가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늦은 오후, 헬렌이 다급한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황후궁으로 납시셨습니다.”
“뭐?”
평소라면 그가 절대 이 시간에 황후궁으로 올 일이 없었다.
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레이몬드가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할 얘기가 있어 왔소.”
6화
“……예, 폐하.”
헬란이 문을 닫고 나가고 방 안엔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그는 여느 때의 무심한 얼굴이 아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 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을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이렇게 감정을 못 숨기는 사람이었던가.
리제나가 돌아와서일까. 그간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을 자꾸만 보이는 그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왜인지 혼란스러웠던 마음들이 차분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앉으시지요, 폐하.”
먼저 자리를 청하자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소파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난 그를
바라보았다.
“차를 준비해도 마실 기분이 아닐 거 같네. 그렇지? 레이.”
옅은 미소를 짓자 레이몬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답지 않게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나랑 한가롭게 차나 마시자고 온 건 아닐 거잖아.”
순간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고요해진 눈빛으로 그는 입술을 열었다.
“그래, 맞아.”
“리제나가 데려온 아이가, 황족의 상징을 가진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
난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없던 일처럼 지나갈 수도 없고. 하지만 일단……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니 아이가 황족이 맞는지 신 전에 검사를 의뢰할 거야.”
황족이라면 그다음은 어쩔 건데?
차마 이 말이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가 나온 뒤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 지금은 정리해야 할 것도 생각할 것도 너무
많으니까.”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이번 일로 놀랐을 테니 원한다면 한동안 공작가에 가 있어도 좋아. 아니면 좀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남쪽 황실 별궁도 나쁘지 않겠지. 어느 쪽이든 좋으니 말 해봐.”
나를 배려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정말 나를 배려한다면 아이를 받아주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었으니까.
그는 지금 이미 나온 결론을 잠시 이곳을 떠나 못 본 척해 달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이젠 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거겠지.
난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
“별궁의 풍경을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지. 네가 좋아해서 나도 좋아한 것뿐이었어.”
싸늘한 말에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곧 미소를 그렸다.
“난 괜찮으니 신전의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 레이몬드.”
* * *
* * *
7화
요 며칠 계속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리제나가 데리고 온 아이, 에드먼드. 그리고 엘리야.
그날 파티장에서의 넋을 놓은 듯한 얼굴과 황후궁에서 보았던 그녀의 담담한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특히 황후궁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마치 무엇을 체념한 것 같아 더욱 마음에 걸렸다.
언제나 그를 볼 때면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하아.”
레이몬드는 텅 빈 맞은편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화가 난 걸까.
생각해 보니 엘리야가 한 번도 그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 온 긴 시간 동안 작은 언쟁조차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거기다 그는 엘리야에게 간다 해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이미 신전에서 황족임이 밝혀졌고, 사람들은 에드먼드가 그의 아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황족으로 밝혀진 에드먼드를 어찌할 것인가였다.
황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 거기다 사생아의 꼬리표까지 붙는다면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레이몬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i>‘폐하, 이미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부디 제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는 상처까지 주지 말아
주시옵소서.’</i>
* * *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방문 밖에서 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헬란이 문을 열고 침대로 다가왔다.
“폐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어쩐지 어제 일찍부터 잤는데도 몸이 너무 무겁더라니.
헬란의 말처럼 현재 내 컨디션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행여 황궁의를 부를까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침대에서 내려갔다.
“괜찮다. 그보다 네 오늘 늦게 일어난 거 같은데, 지금 몇 시쯤이지?”
“정오가 다 되었습니다.”
“어제, 폐하께선 별다른 기별이 없었느냐?”
“……예, 폐하.”
역시 그랬구나.
만찬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혹시나 그가 나를 걱정하지 않을까 했지만, 정신 차리라는 듯 현실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난 창밖의 화창한 푸른 하늘을 보다 헬란에게 말했다.
“신전에선 온 확답이 이미 황궁에 전부 돌았겠지?”
“……예, 폐하.”
“그럼 더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겠구나.”
레이몬드도 결과가 나오면 내게 다시 이야기하자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 아이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레이몬드가 그 아이를 버릴 일은 없겠지.
그럼 내게 그 아이를 입양하라 할까.
머리가 지끈거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잠이 들고 싶었지만 알아야 했다.
레이몬드의 결정을.
그래야 나도 이 관계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으니까.
난 그리 멀지 않은 황제궁의 가만히 바라보다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를 뵈러 가야겠다.”
황후궁인 달의 궁과 황제의 궁인 태양궁은 긴 길로 연결이 되어있는 쌍둥이 같은 구조였다.
마차를 탈 수도 있었지만 심란한 마음에 좀 걷고 싶었다.
오늘 난 내 인생을 뒤바꿀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녹음이 푸르른 숲길은 고요했고, 햇살이 좋았다.
레이몬드와 가끔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적도 있었는데.
아이를 유산하기 전에는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함께 이 길을 걷곤 했었다.
밤길을 걷다 보면 어두워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걸릴 적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레이몬드는 항상
놓치지 않고 나를 붙잡아 주었다.
* * *
태양 궁의 집무실 앞.
“폐하께서 계시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것이…….”
난 집무실 앞에서 시종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시간은 레이몬드가 정무를 보는 시간이었다. 헌데
집무실에 없다니.
궁 밖을 나간 것도 아닐 텐데.
레이몬드는 정무를 볼 때는 절대로 집무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난 말끝을 흐리며 답을 하지 못하는 시종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폐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는 것이냐.”
시종은 나의 물음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황제를 모시는 시종이 황후인 내게 쉽게 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난 불현듯 떠올랐다.
리제나와 그녀의 아이.
태양궁의 시종들이 나의 눈치를 살필 일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여태까지 레이몬드와 난 대외적으론
사이가 좋은 부부였으니까.
시종들 역시 언제나 내게 거리낌없이 레이몬드의 모든 것을 고했다.
“폐하께서 지금 리제나 영애와 함께 있는 것이냐.”
나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시종의 두 눈이 커졌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굳은 얼굴로 시종에게 물었다.
“지금 폐하께서 어디 계시느냐, 이번에 너에게 묻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태양궁의 온실 화원에 계십니다. 황후 폐하.”
시종은 나의 경고를 알아들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허.”
태양궁의 온실 화원이라고?
그곳은 황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태양궁에 있다 하나 온실 화원은 내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리제나와 그녀의 아이와 함께 있다고.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서늘함에 손을 꽉 그러쥔 난 이내 화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8화
화원에 막 들어서자마자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동시에 아이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온실 화원의 입구. 난 너무도 완벽해 보이는 장면에 발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화창한 날씨 아래, 해맑은 웃음을 지은 아이와 그 아이를 안아 든 남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화목했다. 처음부터 그들이 진짜 가족이었던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던 서늘함을, 그 차가운 불안함을 애써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저들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 더는 실낱같은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폐하, 황제 폐하께 알리지…… 않으시옵니까.”
헬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화목한 가족 같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폐하의 답을 들은 듯하구나.”
“폐하…….”
이번엔 나의 말을 이해한 듯, 나를 부르는 헬란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의 사랑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래, 나와 결혼 할 때부터 사랑을 약속할 수 없다 말했다. 그의 마음이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결혼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한 번쯤은 바라봐주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서.
허나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는지.
레이몬드는 여전히 리제나를 사랑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리제나에게 말했지만 정작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나였던 걸까.
여전히 난 한걸음 뒤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으니까.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은 순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리제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것이 원래 너와 나의 자리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이게 맞는 거 같네.”
난 먼저 리제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난 바보처럼 참으로 늦게 깨닫고 말았다.
차라리 좀 더 빨리 레이몬드와 내게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의 품에 안겨 온기를 느껴보지도 않았더라면 나의 심장이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짧게나마 행복을 느꼈기에 이 끝이 너무 가슴 아팠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예, 폐하.”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을 본 헬란이 고개를 조아렸다. 화원을 나가는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난
결심했다.
이제는 과거에, 그의 뒤에 머물지 않겠노라고.
길고 길었던 짝사랑이 끝을 본 순간이었다.
* * *
* * *
9화
* * *
같은 시각.
오늘도 어김없이 조금 늦게 만찬 룸으로 향하려던 레이몬드는 황후궁에서 보내온 전언에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날카로운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전언을 전한 시종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오늘도 만찬에 오지 못하신다고 전하셨습니다.”
“오늘도 말이냐.”
“예, 폐하.”
레이몬드의 날 선 분위기에 시종은 죄를 지은 것처럼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지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오지 않는다니.
결혼하고 엘리야는 한 번도 그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어제는 그녀의 마음이 안 좋을 것이라 이해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오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엘리야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레이몬드는 떨고 있는 시종이 아닌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후궁에서 온 다른 소식은 없는 것이냐.”
“예, 폐하 다른 소식은 따로 없었습니다.”
“황후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냐.”
레이몬드가 계속해서 묻자 시종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이때까지 황후 폐하에 대해 레이몬드가 이렇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느끼지 못하는 듯 조급한 눈빛으로 시종을 압박하고 있었다.
“딱히 들려온 소식은 없사오나…… 다만,”
“다만?”
“아까 오후에 황후 폐하께서 폐하를 찾아오셨다 만나지 않으시고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내 궁에 왔었다고? 언제 말이냐?”
“그것이…… 리제나 영애께서 와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랬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지만 시종장의 말을 들은 순간 레이몬드의 심장이 쿵, 크게 두근거렸다.
엘리야가 리제나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보았을까 불안함이 들었다.
내가…… 왜.
그가 불안함을 느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폐하, 식사를 방으로 준비하라 할까요?”
시종장이 그의 굳은 얼굴에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되었다.”
“하오나 폐하 오늘 점심도 거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러다 몸이라도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먹어도 체할 것 같구나.”
엘리야가 궁에 들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명치가 돌덩이로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그럼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방으로…….
레이몬드는 시종장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먼 곳에 금빛을 두른 태양궁과 꼭 닮은 은빛 궁이 있었다.
레이몬드는 은빛 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황후궁으로 갈 것이다.”
“예, 폐하.”
조급한 마음에 황후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막상 황후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레이몬드의 걸음은 느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레이몬드는 황후궁의 앞에 서 있는 마차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문장은…….”
다름 아닌 엘리야의 가문인 크로프트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왜 공작이.
“……공작이 와서 만찬에 오지 못한 것이었나.”
그러리라 생각하자 이상하게 불안했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태양궁으로 방향을 돌릴까요? 폐하.”
걸음을 멈추고 있는 레이몬드의 뜻을 잘못 알아차렸는지 시종장이 물어왔다.
“아니다. 내 온 김에 크로프트 공작도 보고 가야겠다.”
레이몬드는 아까와 달리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후궁으로 걸어갔다.
허나 그의 가벼운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십니다.”
궁에 들어서자마자 공작이 내려와 그의 방문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공작, 지금 내 앞을 막은 것인가.”
황제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큰 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즉결 처분으로 기사들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프트 공작은 그의 치세의 일등공신이자 엘리야의 아버지이기에 레이몬드는 나서려는 기사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빛은 서늘한 밤공기보다 차가웠다.
그 눈빛에 움츠러들 만도 했건만 공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황후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폐하, 부디 오늘은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황후가 아프다는데 내가 더욱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공작. 난 황후의 남편이네.”
“남편이라…….”
공작이 낮게 중얼거렸지만 레이몬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다.
비아냥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10 화
“공작. 내게 상당히 불만이 많은 듯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크로프트 공작은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니요, 폐하 착각이 아니옵니다.”
“……뭐라?”
“황후 폐하께서 지금 몸이 매우 아프십니다. 다름 아닌 폐하 때문에요.”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리제나 영애가 데리고 온 폐하의 아이, 이미 온 제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그
일에 아무렇지 않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그것은…….”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레이몬드는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리라 생각했나.
순간 그런 의문이 그의 가슴을 쳤다.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크로프트 공작은 입술을 열었다.
“폐하, 황후 폐하와 결혼하실 적에 제게 그리 말씀하셨지요, 엘리야를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고.”
공작의 말에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 * *
똑똑-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들어와.”
이미 일어나 있었기에 난 헬란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헬란은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폐하, 몸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다. 가벼운 몸살이었던 듯해. 걱정하지 말거라.”
“다행이옵니다. 폐하. 그럼 세안 준비를 해 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치장을 좀 해야겠구나. 내 바로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니까.”
폐하를 뵈러 간다는 말에 시녀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꼭 내게 뭔가를 숨기는 거처럼.
그것을 눈치챈 난 시녀장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니, 아니옵니다. 그저…… 몸도 안 좋으신데 괜히 무리하게 움직이셨다 또 아프실까 저어되어 그런
것입니다.”
“그래?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이겠지?”
“네.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시녀장은 항상 보았던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고 치부하며 난 세안을 시작했다.
“폐하, 이 사파이어 귀걸이로 할까요?”
세안을 마치고 치장을 받고 있던 난 시녀가 들어 보인 귀걸이를 보았다.
푸른 사파이어가 반짝이는 귀걸이는 그와 결혼할 때 황실에서 내게 보내준 패물 중 하나였다.
내가 꽤 아꼈던 것이기도 했다.
난 가만히 그것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귀걸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보석들은 거의 예물로 받았던 것들이었으니 이젠 다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다.
시녀들은 기본 치장 중 하나인 귀걸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한 듯했지만, 토를 달지 않고 나의
치장을 서둘렀다.
치장을 전부 끝내고 태양궁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시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11 화
“뭐?”
난 순간 놀라 되물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레이몬드가 황후궁을 찾아온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난 곧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어서 모시거라.”
시녀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는 레이몬드를 보며 난 예를 갖추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오, 황후.”
그는 항상 그랬듯 손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의 손을 못 본 척 혼자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다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폐하, 이 시간에 갑자기 황후궁엔 어쩐 일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순간 내민 손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난 것일까 생각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었다.
왜……?
그는 나를 한 번도 저런 눈길로 본 적이 없었다. 복잡한 감정을 느낄 만큼 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으니까.
레이몬드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감겼던 눈꺼풀을 아래로 다시 드러난 흑빛 눈에는 아까와 같은
혼란스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내 착각이었나, 싶은 순간 레이몬드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황후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주변을 비워라.”
궁인들이 모두 물러간 후, 레이몬드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그래?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먼저 말해.”
“……에드먼드의 일이야.”
에드먼드의 일이라.
역시 그답지 않은 행동을 끌어내는 이유는 리제나와 관련된 일뿐이겠지.
“그래. 신전의 답이 나오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었지. 레이, 네 결정은 뭐야?”
“너에겐 미안하지만……. 에드먼드가 황족임이 밝혀진 이상 그 아이를 계속 저리 둘 순 없어.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황족의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에 깊은 상처의 심연이 보였다.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황족.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겠느냐마는, 그가 받았던 모욕과 멸시를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에드먼드에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너의 결정은 뭔데.”
“난 에드먼드를 황족으로 인정하고 제국의 1 황자로 올릴 생각이야.”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슬프기보다 오히려 머리가 더욱 차분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고마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실 미련이 남으면 어쩌나 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미련 같은 건 남지 않을
거 같았다.
난 가만히 그를 보다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나의 웃음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레이몬드의 수려한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입술을 떼기 직전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 에드먼드를 1 황자로 봉하는 일은 네 뜻대로 해. 하지만 그전에 나를 위해 해 줄 일이 있어.”
“그래, 말해. 에드먼드의 일도 있으니 그게 뭐든 들어 줄게.”
뭐든 들어 준다라……. 부디 그래 줬으면 좋겠다. 그와의 마지막을 언쟁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다.
난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레이몬드의 칠흑 같은 눈을 보며 쓰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저 깊은 밤하늘 같은 눈이 나 하나만을 담기를 바랐는데. 그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혼하자.”
“……뭐?”
순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그의 동요에 난 왜인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이제 그만 널 떠나고 싶어. 그러니 레이, 우리 그만하자. 나와 이혼해 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처럼 굳어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내 검은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굳은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혼이라니, 차라리 에드먼드를 인정하기 싫다고 말해.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고.”
싸늘한 책망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이혼을 무기로 에드먼드의 황자 입적을 막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레이몬드와 이혼을 원한다는 것보다 그쪽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으니 저렇게 나오는 거겠지.
내가 먼저 이혼이란 말을 입에 담을 리 없다 믿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 같았다면 그의 차가운 눈빛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불안했겠지만, 지금 나의 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제는 지쳤다는 듯 그를 향해 박찬 뜀박질을 할 힘도 없다는 듯이.
“레이, 에드먼드는 너의 아들이야. 내가 부정한다 해도 결국 황자가 될 수밖에 없겠지. 그 문제로 네게
이혼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혼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실소하는 레이몬드를 향해 나는 덤덤히 말했다.
“애초에 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내가 널…… 사랑해서, 네 곁에 있고 싶어서였어.”
“지금 와서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에드먼드와는 별개로 황후는 너야. 다른 여자는 없을 거라는 말,
난 지킬 거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려는 그에게 소리치듯 외쳤다.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까!”
순간 레이몬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사랑? 너와 난 평범한 부부가 아니야. 황제와 황후라고. 고작 그딴 이유로 이혼하겠다고? 차라리
리제나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해!”
레이몬드도 되받아치듯 크게 소리쳤다. 그의 무심하던 얼굴에 서린 선명한 분노가 보였다.
고작, 고작이라…….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그에게는 지난 내 마음이 ‘고작’인 것뿐이었구나.
“레이. 넌 정말 우리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해?”
“…….”
레이몬드는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리제나 영애에게는 감사해. 우리의 이 부질없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줬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이 네게 갑작스럽겠지. 이해해. 하지만 이혼은 안 돼.”
“레이몬드, 난…….”
내 부름에 그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시종장!”
그의 날카로운 외침에 방 밖에 있던 시종장이 급히 들어왔다.
“지금 당장 기사단에게 황후궁의 호위를 명하라. 이 시각 이후로 황후궁에 드나드는 모든 이는 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고 황후의 출입 또한 내 허락 없이 절대 불가하다.”
“레이몬드!”
그는 일방적으로 말을 끝내고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내 팔을 뿌리치고는 벌컥, 세게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방문으로 헬란이 황급히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헬란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괜찮다.”
“황후궁의 출입을 제한하신다니…….”
헬란은 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레이몬드가 쉽게 이혼을 해 줄 것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나 혼자 레이몬드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헬란. 기사들이 오기 전에 네가 급히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네?”
나의 말에 헬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급히 작은 테이블로 가 짧은 서신 하나를 적어갔다.
* * *
<i>‘우리 이혼하자.’</i>
12 화
* * *
* * *
13 화
“공작!”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레이몬드의 노성이 집무실을 크게 울렸다.
“이미 결혼법에 따라 이혼을 신청할 사유가 충분합니다. 저희는 더 큰 소란 없이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상대와 합의되지 않은 정부나 사생아를 들일 경우, 한쪽의 귀책 사유를 인정해 이혼할 수 있다.]
체념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떠오르자 그의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에드먼드 때문에 이혼을 말한 게 아니라 했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엘리야는 언제나 그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다른 이유랄 게 뭐가 있지. 나와 황후의 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작은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낮추었다. 그의 눈빛에 담겼던 책망을 분명히 읽은 레이몬드는 얼굴을
굳혔다.
“공작.”
“이혼은 순전히 황후 폐하의 뜻입니다. 저는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이상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나오는 이상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물러가시오.”
공작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집무실에서 레이몬드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하, 이혼이라……”
결심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 같던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담담히 모든 걸 체념한 듯 그에게
이혼을 말했던 엘리야의 얼굴도 선명했다.
황제와 황후의 이혼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황제에게 특별한 귀책 사유가 없다면 황후는 이혼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리고 레이몬드에게는 엘리야가 필요했다.
그녀가 황후로 있어야 반정 공신인 크로프트 공작가와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해 황권이 더욱 강력해질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혼하지 않겠다 버티면 오히려 반대급부가 일어날 것 같았다.
공작의 공작가의 모든 걸 걸고서라도 이혼을 시키겠단 결연한 얼굴이었으니까.
반정 공신에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공작가와 척을 지는 것은 황제인 그에게도 타격이 클 것이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공작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맞았다.
공작가와 척을 지고 황후와의 이혼으로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면 황권을 노리는 잔챙이들이 설칠 것이
분명하니까.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왜…… 망설이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킨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분명한 것이 있었다.
엘리야와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
레이몬드는 그렇게 들끓는 속을 쉬이 진정시키지 못하며 집무실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 * *
14 화
* * *
* * *
15 화
* * *
16 화
* * *
17 화
황궁의 본궁을 벗어나 뒤따라온 공작가의 마차에 오르려던 엘리야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에 발걸음을
멈칫하였다.
맞은편의 여인 역시 나를 발견한 듯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내가 아닌 리제나였다.
리제나는 제 아들인 에드먼드의 손을 다시 잡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우아하게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던 난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일어나시게.”
난 리제나를 바라보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황족의 색을 타고난 레이몬드의…… 아이.
제 엄마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아이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검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었으니까.
“안녕.”
“안……녕하세요.”
아이는 어눌한 목소리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그에 미소를 지어주다 리제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제나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녀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태양궁의 정원에서 그녀를 보았을 땐 너무도 완벽히 레이몬드와 어울리는 모습에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난 떠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올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의 상황이 엉켜버리긴 했지만 그게 그녀와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난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술을 열었다.
“폐하를 만나러 가는 길인가?”
“……예, 황후 폐하께오선…….”
리제나의 시선이 나의 옷을 훑고 뒤에선 헬란과 공작가의 마차에 차례로 닿았다.
누가 보아도 궁을 나가는 모양새였다.
리제나는 차마 궁을 나가는 것이냐 물을 수 없는 건지 나를 가만히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난 궁을 나가는 길이네. 내가 폐하와 이혼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는지 리제나의 녹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하지만 곧 차분해진
눈빛으로 그녀는 내게 말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궁을 나가실 거라곤……. 아니, 황후 폐하께서 폐하의 곁을
떠나시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내가 떠나리라 생각지 못했단 말이겠지.
과거엔 몰랐다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과거에도 알았을지도.
난 정말 떠나는 것이냐 묻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피식,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편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하지 않는가.”
“네?”
난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끝을 내야 하는 때라는 걸 알았을 뿐이네. 리제나 영애, 부디 폐하와 행복하길
바라네.”
난 살짝 떨리는 리제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남은 미련은 그들의 행복을 빌어 주며 털어버린 난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 * *
18 화
* * *
* * *
19 화
* * *
* * *
20 화
<i>‘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는데 폐하의 곁에서 저리 설치다니, 자신이 황후라 착각이라도 하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의 뒷배로 폐하의 곁에 서는 주제에.’</i>
21 화
말끝을 흐리며 영애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봐 주자 살롱 안 귀부인들의 시선이 클레앙 영애에게로
집중되었다.
사교계의 새로운 먹잇감이 자신이 된 것을 느꼈는지 클레앙 영애는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보다
자신의 마차로 올라탔다.
쾅! 영애가 탄 마차 문이 거세게 닫히자마자 마부가 황급히 말을 몰아 살롱 앞을 떠났다.
힐긋 살롱 안을 바라보자 귀부인들이 떠나는 클레앙 영애의 마차를 보며 무어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아마 오늘 살롱을 찾은 귀부인들은 이혼한 황후는 까맣게 잊고 구정물을 뒤집어쓴 클레앙 영애만을 기억할
듯했다.
“……클레앙 영애 덕에 내가 잊힐 듯하구나.”
헬란의 시선이 모여 있는 귀부인 들에게로 잠시 머물렀다 내게 향했다.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아가씨 이만 공작가로 돌아가시지요.”
“그래.”
한데 본의 아니게 날 도와주게 된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난 알 수 없는 강한 남자가 사라진 곳에 시선을 잠시 두다 마차에 올랐다.
* * *
-딸랑.
수도 광장의 위험한 뒷골목, 그중에서도 가장 용병들이 많이 드나드는 술집의 문이 열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술집의 주인인 빛바랜 갈색 머리칼을 가진 거구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아직 영업 시작 안 했습니다. 해가 지면 오세요.”
걸걸한 목소리로 말한 남자는 뒤이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걸레질을 멈췄다.
“나야, 빌리스.”
빌리스는 휙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짙은 갈색 로브 모자를 벗은 남자가 빌리스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눈매와 언뜻 금빛이 비치는 호박색 눈동자.
긴 여행으로 살이 빠졌는지 더 날카로워진 턱선과 까끌까끌한 수염에도 잘생김이 가려지지 않는 얼굴은
분명 빌리스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빌리스를 보며 남자는 입술을 움직였다.
“뭘 그리 보고만 있어. 7 년 만에 다시 보는 건데 포옹 한번 안 하는 건가?”
“이런 미친!”
걸레를 바닥에 던진 빌리스는 거친 욕설과 달리 울먹이는 눈빛으로 남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구의 빌리스를 가볍게 살짝 들어 올린 남자는 피식 웃으며 빌리스를 밀어냈다.
“남자끼리 포옹은 길면 안 돼. 몸에 소름이 돋거든.”
남자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빌리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소리쳤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제레미!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내가 왜 죽어. 미안한데 내 생명줄이 너보다는 길 거야.”
제레미는 빌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싶은데, 술이나 마시면서 회포나 풀자고.”
빌리스는 저만 걱정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시원한 맥주를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빌리스는 제레미의 맞은 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예 돌아온 거야? 이제 떠돌지 않는 거야?”
제레미는 턱 끝을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근데 어차피 이제 슬슬 가문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평생 떠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니잖아.”
빌리스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제레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들이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닐 수 없다는 것은.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긴 해도 뭐, 아직은 호랑이 같은 그분이 정정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한 십 년은 더 내
맘대로 살 수 있겠지.”
“그럼 십 년 뒤에나 돌아오지 갑자기 제국에 왜 돌아온 건데?”
“아……. 원래는 들릴 생각이 없었는데 지나가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
“이상한 소리?”
* * *
똑똑-
“들어와.”
살롱에 다녀와 몸을 씻고 편히 쉬려던 차였다.
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 누우려던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온 헬란은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것이…… 아가씨 앞으로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파티 초대장?”
나의 물음에 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내게 파티 초대장이 오다니……. 이상한 일인데.
이혼이 발표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아직 내가 공작가로 돌아온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공작저로 파티 초대장이 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게 맞니?”
난 혹시나 해서 헬란에게 다시 물었지만 헬란은 난감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아가씨 앞으로 온 초대장이 맞습니다.”
“대체 누가 내게…… 이리 주렴.”
오늘 살롱에서 나를 본 귀족이라 생각하더라도 지금 내가 파티장 같은 곳을 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일부러 나를 놀리려는 마음이 아니고서야……. 거기다 무슨 파티장이 되었든 내가 파티장에 간다면 모든
관심사는 내게 집중될 것이 뻔했다.
근데 초대장이라니.
난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혼 한 전 황후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낸 간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손을
뻗었다.
헬란은 망설이듯 손을 멈칫하다 내게 초대장을 건너 주었다.
초대장에 적힌 가문의 이름을 확인한 난 순간 얼굴을 굳혔다.
[시오스 후작가.]
리제나의 가문이었다.
왜, 내게 초대장을.
황궁을 나오던 날 마주쳤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난 잠시 그녀를 떠올리다 천천히 초대장을 뜯었다. 초대장을 열자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허.”
에드먼드의 생일 파티라……. 이곳에 날 초대한다니.
“아가씨, 대체 무슨 파티의 초대장인가요?”
아무런 말 없이 초대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 내게 헬란이 물어왔다.
난 초대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에드먼드의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한다는구나.”
“네? 아니 어떻게 아가씨께 그런 초대장을 보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헬란은 정말 화가 나는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헬란의 반응이 정상적인 것이었다.
나와 레이몬드의 공식적인 이혼 사유는 에드먼드의 잘못은 아니지만, 에드먼드 때문이 맞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대외적으로는 황후인 내가 그의 사생아에게 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혼 소식이 발표된 당일에 내게 에드먼드 생일 초대장을 보내다니.
초대장을 받은 내가 화를 내며 초대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난 화가 나기보다 이걸 보낸 리제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이 초대장을 보낸 저의가 무엇일까.
그녀는 이미 내가 황궁을 떠나는 것을 보았고, 나와 그녀 사이에 악감정이랄 게 크게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나.
하지만 황궁을 나오던 날의 리제나를 떠올려봐도 나를 향한 적대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정말 순수하게 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 달라 이런 초대장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님 리제나
영애는 모르는 일인가.
후작이 내게 보낸 것이고 리제나 영애는 모른다, 차라리 이게 더 이해가 갔다.
후작의 입장이라면 그래, 내게 확실히 하고 싶어 이 초대장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시오스의 성으로는 마지막이 될 이 문구는 곧 아이가 시오스가 아닌 에그리타 제국의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될 것이란 뜻이었다.
이혼했다 하더라도 혹시 내가 다른 마음을 품었을까 초대장을 대신해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 에둘러
경고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몰랐을 까.”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의구심에 나직이 중얼거린 그때, 헬란이 말했다.
“아가씨, 초대에 응하실 겁니까?”
난 초대장을 접으며 헬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내게 좋을 게 없는 파티장이었으니까.
리제나와 나 그리고 에드먼드에 관한 말을 만들어내기에 딱 좋은 자리가 될 것이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오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헬란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말을 더했다. 난 헬란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폐하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혼한 이유가 돌아온 리제나와 아이 때문이란 말이 사교계에 가득한데 에드먼드 생일 파티에
참석하면 더욱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럼 나중에 리제나를 황후에 책봉할 때 좋지 못한 시선이 생길 수 있을 테니……. 아마 레이몬드는
구설수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런가요……”
난 못마땅한 눈빛으로 초대장을 보고 있는 헬란에게 답했다.
22 화
* * *
23 화
24 화
하필 지금이라니.
난감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 거슬린 음식 냄새는 갈수록 더욱 역겹게 느껴져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당장 하인이 들고 있는 쟁반을 저리 치우라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난 손을 꽉 그러쥐며 구역질을 삼켰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선 절대 안 된다.
레이몬드가 바로 앞에 있었고 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여기서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가 의사라도 부른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인이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제나는 샴페인 잔을 들며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폐하, 목이 마르지 않으신가요?”
“……샴페인보다는 물이 먹고 싶은데 가져다줄 수 있나?”
레이몬드는 하인이 아닌 리제나에게 물었다.
리제나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심부름을 시키는 레이몬드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예, 폐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샴페인 잔을 도로 쟁반 위에 두고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레이몬드는 손을 휘저으며 하인을 물렸다.
하인이 멀어지고 레이몬드는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교묘하게 가리며 나의 앞에 섰다.
내게서 눈을 떼질 않더니 몸 상태가 이상해진 걸 눈치챈 듯했다.
고개를 들자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알아주길 바랐을 땐 관심도 없더니.
정작 모르길 바라는 지금 나를 걱정하는 그가 우스웠다.
그의 걱정에 오히려 거북함이 들어서일까,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우욱……!”
황급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바로 앞에 있는 그가 못들을 만큼의 소리는 아니었다.
“엘리야.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거야?”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피하고 싶었지만 한번 터진 구역질이 멈추질 않았다.
“우욱, 욱……! 읍.”
“갑자기 왜…….”
당황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영애, 괜찮나요?”
고개를 숙인 채라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귀부인 중 한 명인 듯했다.
“괜찮, 욱……!”
괜찮으니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었다. 시선을 끄는 건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귀부인은 날 도우려던 목적은 아닌지 오히려 바르작거리는 내 어깨를 더욱 꽉 잡았다.
“어머나, 속이 너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뭘 잘못 드셨나.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나를 이용해 황제의 눈에 띄려는 듯했다.
비틀거리지도 않는 나를 부축하려는 듯 귀부인이 몸을 밀착하자 지독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우욱!”
그 냄새는 나의 구역질을 더욱 자극했다.
“구역질이 안 멈추나 봅니다. 당장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겠어요!”
귀부인은 호들갑을 떨며 내 어깨를 더욱 꽉 잡았다.
일부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전 황후를 도와준 자신의 이야기가 사교계에 널리 퍼질
테니까.
하지만 난 오히려 그녀의 진한 향수 냄새가 진해져 속이 뒤집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난 강하게 귀부인의 손을 뿌리쳤다. 어찌나 매몰차게 움직였는지 레이몬드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잡혀 있었다간 의사가 도착할 테니까.
온 힘을 다해 구역질을 참아 낸 난 싸늘한 눈빛으로 부인을 보았다.
“부인, 저와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네?”
“전 부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부인께선 마치 저와 각별한 사이인 양 행동하여 물은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전 단지 영애의 구역질이 심해 보여 도와주려…….”
“제가 도움을 요청하였던가요?”
그녀 딴에는 자신이 민망해지는 상황을 모면하려 우스갯소리를 한 모양이었지만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뇨.”
“부인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이만 물러가 주시죠.”
그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불쾌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영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 귀부인이 도망치듯 멀어지자마자 리제나가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녀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귀부인을 의아한 눈으로 보곤 레이몬드와 나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겠지.
“폐하, 여기 물을 가져왔습니다.”
“…….”
리제나가 그를 불렀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끈질기게 나만을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의사를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아닙니다. 폐하. 전 괜찮습니다.”
그의 물음에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바로 답하고 말았다.
나답지 않게 여유가 없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레이몬드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그의 검은 시선이 나의 몸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의사를 부를까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띄웠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킬까 더욱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리제나에게 말했다.
“시오스 영애, 전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황자님의 생신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네, 영애.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리제나는 레이몬드와 나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보았기에 붙잡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있는 걸 알았지만, 난 끝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인 그를 무시하고 나갈 순 없었으니 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폐하,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의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난 곧장 몸을 돌려 파티장을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훅 나의 몸을 감쌌다. 그 바람 속에서 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파티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레이몬드가 나를 붙잡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파티장을 완전히 나오니 불안으로 터질 거 같던 심장이 한결 편안해졌다.
“헬란의 말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었어.”
레이몬드와 나, 그리고 리제나.
귀족들 앞에서 삼류 가십과도 같은 상황을 연출했던 것부터 갑자기 입덧을 한 일까지.
모두 곤욕스러운 일들뿐이었다.
애초에 왜 레이몬드가 이 자리 왜 오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것인지.
리제나를 향한 그의 사랑은 황제가 지녀야 할 품위나 평판 따위는 상관없을 만큼 깊을 텐데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해 봤자 어쩌겠어.”
거기다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파티장을 나왔으니 다 괜찮았다.
아이만 무사하다면 다른 건 아무런 상관없다. 사람들이 떠들 가십거리 따위 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공작가의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던 난 문득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떠올라 걸음을 멈칫했다.
“……근데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다른 것들은 전부 잊더라도 그 남자는 쉽게 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에 황제에게 버려진 비운의 여인으로 귀족들에게 낙인찍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은 그의 마지막 말.
‘부디 절 알아봐 주시길.’
그 말은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내 기억 속 그와의 첫 만남은 그가 아니라 부정했던 어제 살롱 앞의 만남이었다.
그의 착각인 걸까, 아니면 그는…… 내가 모르는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지닌 남자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엘리야.”
생각이 길어지던 그때, 낮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25 화
* * *
깊은 어둠이 내린 밤.
거대한 회색빛 저택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파티장에 다녀온 듯 연미복을 입고 있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앞섶은 귀족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단정하지 못했다.
마차도 타지 않고 저택의 로비까지 걸어온 남자는 마치 성처럼 커다란 저택을 보다 호박색 눈을 찡그렸다.
“여긴 아무리 봐도 정이 안 간단 말이지.”
제레미의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 속으로 퍼진 순간 굳게 닫혀있던 저택의 문이 열렸다.
외 알 안경을 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집사가 제레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공자님.”
“새벽인데 안자고 뭐 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까.”
“저택에 잘 머무르시지도 않는 공자님이신데 계시는 동안 만큼이라도 제가 잘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 말에 뼈가 있는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네, 착각이십니다.”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집사를 보며 피식 웃은 제레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용인들은 다 숙소로 돌아갔는지 저택의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해서인지 더욱 싸늘하게 느껴진다 생각하던 제레미는 저택 로비 중앙에 세워진 검은 동상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드로이트 공작가를 상징하는 흑범.
초대 황제는 자신을 도와 제국을 설립한 공신에게 자신의 피를 주며 말했었다.
[네 가문이 언제나 황실에 충성을 다한다면 너의 자손들은 황실의 충신으로서, 황족의 상징하는 색 하나를
타고날 수 있는 축복을 지니게 될 것이다.]
26 화
* * *
“방치…….”
레이몬드는 미간을 좁히다 서신을 불에 태웠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된 서신을 털어버리고 새하얀 종이
위로 짧은 명령을 적었다.
* * *
27 화
* * *
태양궁의 집무실 앞.
금발 머리칼을 반듯하게 넘긴 중년의 남자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폐하, 시오스 후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라 하여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시오스 후작은 긴장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게, 후작.”
후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으나 레이몬드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향해 있었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시오스 후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후작에 결국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시오스 후작은 눈이 마주치자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할 말이 있어 내게 알현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허면 말하시오. 내 그리 한가하지 않으니.”
레이몬드의 말에도 뜸을 들이던 시오스 후작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말했다.
“……폐하, 리제나를 황후로 책봉해 주십시오.”
후작의 말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후작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폐하. 황후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외람되오나, 그 자리에 저의 여식인 리제나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폐하의 유일한 후계자의 어미가 아닙니까.”
“…….”
“폐하께서 황자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후작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후작을 내려 보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입적한다는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황자라.”
조소가 섞인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후작은 움찔했다.
“황후가 궁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새 황후를 들이라 닦달이라니. 그대의 성급함에 다른 뜻이 담겼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후작을 향한 한마디, 한마디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스며 있었다.
그에 후작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지금은 평화로운 치세를 펼치고 있지만 레이몬드의 칼에 얼마나 많은 피가 스며들었었는지 후작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너무 성급하였던 것 같습니다. 폐하. 부디 저의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은 한발 물러났다.
어차피 오늘 확답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오늘은 황제에게 그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비치러 온 것뿐이다.
황실의 시종들이 그에 대한 말을 퍼뜨려주길 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을 세우실 줄이야.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운 황제의 반응에 후작은 조금 당황했지만, 목적은 이루었기에 빠르게 몸을
낮추었다.
“그만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대의 실수를 용서해 주는 관용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허니 더 이상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라.”
후작이 집무실을 나가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두던 레이몬드는 짜증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황후의 책봉.
그도 알고 있다.
황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순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 가장 적합한 사람은 리제나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황후궁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긁어내리는 거
같았으니까.
단순히 리제나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도 황후의 자리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황후인 것에 너무 익숙해져 그런 것이겠지.
레이몬드는 복잡한 감정의 결론을 그리 내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미 다 끝난 일이야.”
이미 그녀는 그를 정리하고 다른 남자까지 생겼어.
레이몬드는 어제 보았던 백금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수려한 외모와 엘리야를 향했던 짙은 눈빛.
그건 절대 엘리야를 가볍게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미소를 지었던 엘리야.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 속에서 훅 열기가 솟구쳤다. 머리까지 뜨거워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이지.
자신도 이해가 안 될 만큼 거센 분노였다.
답답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는 상의 단추를 거친 손길로 풀어버리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 건가.”
돌이켜 보면 엘리야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남자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래, 엘리야가 갑자기 달라져서 이러는 거야.”
항상 그를 바라봤던 엘리야를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당연하다 느꼈던 것이라고.
그래서 갑자기 멀어지는 그녀가 익숙지 않아 불편한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들끓는 감정을 눌렀다.
어제도 지금도, 단순히 그녀를 향한 익숙함 때문이라기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모른 척했다.
“덥구나, 창문을 모두 열어라.”
“네, 폐하.”
레이몬드는 쉬이 식지 않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 * *
28 화
밤이 깊어지는 같은 시각.
시오스 후작가에선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에드먼드, 그만 자야 할 시간이란다.”
하녀들을 물린 리제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드먼드는 어머니의 말에 곧장 장난감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올라 갔다.
에드먼드는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고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에드먼드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바로 잠들기 전 리제나가 동화를 읽어줄 때였다.
기대감이 서린 흑안에 리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리제나는 동화책은 잠시 내려두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디, 오늘 예법 선생님의 말을 잘 안 들었다지?”
“음……. 너무 어려워서 그랬어요.”
혼내지 말라는 듯 에드먼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에디, 에디는 이제 예법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을 거란다. 어렵다고 선생님의 안 들으면 안
돼.”
“……알겠어요, 엄마.”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에디, 오늘 예법 선생님의 말을 잘 안 들었다지?”
“음……. 너무 어려워서 그랬어요.”
혼내지 말라는 듯 에드먼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에디, 에디는 이제 예법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을 거란다. 어렵다고 선생님의 안 들으면 안
돼.”
“……알겠어요, 엄마.”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잠이 든 에드먼드의 모습이 보였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며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비록 아이의 눈과 머리카락 색은 칠흑 같은 검은 색이었지만 아이의 생김새는 누가 뭐라 해도 리제나의
아들이었다.
“다행이지, 네가 나를 닮아서.”
나직이 속삭이는 리제나의 얼굴엔 이제는 미소가 서려 있지 않았다.
그녀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는 누군가를 떠올리듯 싸늘한 빛을 띠었다.
“이미…… 죽었어.”
차가운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감정을 갈무리하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잠이 든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읊조렸다.
“……넌 내 아이야. 난 널 반드시 황제로 만들 거란다.”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다 볼에 입을 맞추고 그만 방을 나갔다.
“……여기서 뭐하니.”
에드먼드의 방을 나온 리제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리온 시오스.
한배를 타고 난 혈육임에도, 성격이 너무도 달라 불편한 동생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신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동생은 일찌감치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고
대륙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리제나는 못 마땅해했다.
리온은 리제나를 보며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하냐니, 조카 얼굴을 보러 들린 거지. 근데 잠이 든 거 같네.”
“네가 에디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관심이 있었다면 생일파티에는 참석하지 그랬니.”
“내가 그런 자리에 어떻게 가겠어. 예법도 모르는 내가 가봤자 시오스 가문의 이름만 더럽힐 뿐이지.
우아하고 고귀한 누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늘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비아냥이 담긴 말에 리제나는 미간을 좁혔다.
“너와 언쟁할 만큼 힘이 넘치지 않아. 돌아가. 에디는 이미 잠들었으니까.”
리제나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를 지나치려 했다.
리온이 꺼낸 말만 아니었다면.
“근데 누나, 사실 내가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야.”
말하라는 듯 눈을 추켜올리자 리온이 진지하게 물었다.
“에드먼드, 정말 폐하의 자식이야?”
“……뭐?”
“내가 하도 밖으로 나돌아 가문의 일을 잘 모르긴 하지만……. 내 기억으론 분명히 7 년 전 누나의 남자가
…… 윽!”
리온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리제나가 그의 멱살을 강하게 그러쥐었기 때문에.
리제나는 녹빛 눈을 번뜩이며 리온을 노려보았다.
“입 조심해. 지금 감히 누구를 모욕하려 드는 거지?”
리제나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내게 이러면 안 되지. 네가 같잖은 자유를 외치며 놀아나는 동안 난 가문을 위해
희생했어.”
“…….”
“다시 한번 더 나와 에드먼드를 모욕하려 든다면 혈육이라 해도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
리제나는 리온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난 누나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길 바랄 뿐이야. 누나가 무사하길 바란다고.”
“그럼 입 다물어. 너만 입 다물면 난 무사할 거니까”
리제나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리온을 보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리제나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리온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 *
“와, 이거 너무 맛있어요!”
초콜릿 쿠키를 든 에드먼드가 환하게 웃자 리제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단다. 알겠지?”
“네! 근데 어머니와 폐하는 안 드세요?”
“난 괜찮단다.”
리제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자 에드먼드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했다.
“폐하는요?”
“…….”
하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레이몬드는 에드먼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에드먼드는 대답 없는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을 보다가 기가 죽은 듯 리제나의 눈치를 보았다.
리제나는 괜찮다는 듯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나직이 말했다.
“폐하.”
꽤 컸던 리제나의 목소리에 레이몬드의 흐릿하던 흑안이 선명해졌다.
29 화
“왜 그러지?”
“에드먼드가 폐하께 쿠키를 드셔 보시라 말했답니다.”
리제나의 말에 레이몬드의 시선이 에드먼드를 향했다.
쿠키 부스러기가 입가에 묻은 아이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그렸다.
“난 괜찮으니 많이 먹거라.”
“네!”
아직 아이라 그런지 에드먼드는 그의 미소에 금방 기운을 차렸다.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쿠키를 먹는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엘리야와 나의 아이도 저렇게 사랑스러웠을까.
이제는 남자아이였을지, 여자아이였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성별이 무엇이든 엘리야을 닮았더라면
예뻤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태어나지도 못했던 아이를 갑자기 왜 그리는 거야.
거기다. 엘리야를 닮으면 좋았을 거 같다, 생각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헛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은 그는 에드먼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러면 또 이상한 생각이 들 것
같았으니까.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건만 이번엔 자꾸만 파티장에서 마주쳤던 엘리야가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보던 무감한 얼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던 모습과 딱딱하기까지 그지없던 보랏빛
눈동자.
30 화
“엄마!”
한참 예법 수업을 받고 있던 에드먼드가 리제나를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왔다.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에드먼드. 이렇게 뛰면 안 된다고 예법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니?”
“……가르쳐 주셨어요.”
“그럼 다시 인사를 해 보렴.”
리제나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던 에드먼드는 눈치를 살피며 뻗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반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니, 오셨어요.”
아직은 어색한 예법에 리제나는 미간을 좁혔다.
“베르티 부인, 제가 신경 써서 가르쳐 달라 하지 않았던가요?”
리제나는 예법 선생인 베르티 자작 부인에게 고개를 들었다.
리제나의 날카로운 눈빛에 베르티 부인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영식께서 아직 나이가 어리시기도 하고……. 예법을 제대로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 정도면 꽤 잘하시는 축에……”
“난 꽤 잘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길 원합니다. 에드먼드는 곧 황자가 될 몸이에요. 일국의
황자가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리제나는 베르티 부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영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티 부인이 에드먼드를 가르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요.”
“네?”
베르티 부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분은 제게 필요 없습니다. 황자의 격에 맞는 새로운 분을 구할 테니 이만
나가주세요.”
배려 없는 축객령에 베르티 자작 부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지만 리제나는 싸늘히 무시했다.
베르티 자작 부인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려던 때, 리제나의 뒤에 기립해 있던 백발의
하녀가 다가왔다.
“부인,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하녀가 자작 부인의 팔을 잡았다. 팔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부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일을 하는 하녀라 해도 이렇게 강한 힘은 이상한 것이다.
거기다 순간 마주친 회색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자작 부인은 리제나를 힐긋 보았지만, 자신은 이미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리제나의 평판과 이때까지 봐 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은 태도였다.
“부인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혼란스럽던 그때 하녀가 낮게 말했다.
자작 부인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허튼소리를 했다간 죽는다.
“……네.”
얌전히 답한 자작 부인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앞에서 몸을 낮추고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에드먼드. 엄마를 보렴.”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드먼드가 시선을 들었다.
“에드먼드, 너는 곧 이 제국의 황자가 될 거야. 황궁에 살면서 장차 이 제국의 황제가 되겠지. 그러니
이제 이렇게 어리광을 부려선 안 돼. 저번에 그랬지?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네…….”
“그래, 폐하께선 누구보다 강인하고 멋있는 분이시니 앞으론 에드먼드도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렴.”
리제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뜻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말하면 적어도 그녀의 말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굳은 얼굴이 무서운 듯 움츠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착하구나.”
리제나는 몸을 일으키며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백색 머리칼의 하녀이자 그녀의 충실한 그림자인 릴라가 들어왔다.
릴라는 평범한 하녀가 아닌 서왕국에서 그녀가 거둔 암살자였다.
“릴라. 베르티 자작 부인의 배웅은 잘 했니?”
“네. 돈을 쥐여주며 경고했으니 허튼 소문을 퍼뜨리진 못할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보다 아가씨. 돌아오는 길에 집사께 들었는데 리오 도련님께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조용히
나가 집사께서도 이제야 알아차리신 듯합니다.”
“……떠났다고.”
에드먼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리제나의 손이 멈칫했다.
* * *
31 화
<i>‘부탁드립니다.’</i>
<i>‘당장 멈춰!’</i>
<i>‘레이…….’</i>
<i>‘레이.’</i>
<i>‘어머니, 어머니……!’</i>
“하…….”
싱그럽게 푸른 잎이 피어난 나무는 어머니가 심어준 그의 나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메말라 죽어 버렸던 그의 나무가 더 높이, 더 크게 자라 녹색 잎을 푸르게 빛내고
있었다.
“넌 대체…… 왜…….”
레이몬드는 죽었던 나무를 살린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엘리야. 어릴 적 죽었던 식물을 살리는 엘리야를 보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도 관심 없었던 이 나무를 살려낼 사람은 엘리야밖에 없었다.
* * *
33 화
* * *
6 년 후.
따스한 햇볕이 마당에 가득한 꽃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꽃에 물을 주는 여자의 분홍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였다.
귀여운 작은 꽃봉오리부터 만개한 아름다운 꽃들까지.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이 즐비한 꽃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작은 아기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엘리, 좋은 아침.”
룬트 왕국 사람들 특유의 황색 피부를 가진 중년의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지. 이렇게 매번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마지가 들고 온 큰 바구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갓 구운 빵과 신선한
과일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이곳에 정착한 뒤 제일 먼저 사귀게 된 이웃인 마지. 그녀는 빵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매일 아침 내게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아휴, 내가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매일 오는데 그런 말 질리지도 않아?”
“매번 미안하고 감사해서 그렇죠.”
“뭐가 미안해. 이웃끼리 다 돕고 사는 거지 그리고 엘리도 우리 집에 예쁜 꽃도 공짜로 주고 다 죽어갔던
과일나무도 살려줬잖아.”
“그거야 제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치? 나도 이가 빵 몇 개 굽는 건 어려운 일도 아냐. 어차피 아침마다 굽는 건데.”
마지는 찡긋 웃으며 내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녀의 말에 결국 나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잘 먹을게요. 마지.”
“그래, 그래. 어머나, 이 레포리 나무, 결국 살아났네. 며칠 전에 꽃집 들어올 때만 해도 죽은
상태였잖아.”
“아아. 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엘리는 정말 식물 박사라니까. 어떻게 이렇게 막 죽은 꽃과 나무들을 살리는 거야?”
가게 한쪽에 있는 붉은 꽃을 피워 낸 나무를 보며 마지가 놀란 듯이 말했다.
“늘 그렇듯 정성과 사랑이죠, 하하.”
제겐 식물을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요.
라는 말을 했다간 동네에 소문은 물론 룬트 왕국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6 년 동안 이 능력을 활용하며 느낀 건 내가 가진 능력이 생각보다 엄청나단 것이었다.
단순히 죽었던 식물들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토양을 정화하고 또 비옥하게 바꾸는 능력까지 있었다.
땅의 상급 정령 술사와 비슷한 능력이었다. 물론 식물을 다루는 것까지 더해지면 내 능력은 상급
정령사보다도 강력했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를 보자 마지가 크게 웃었다.
“아휴, 그래. 꽃들도 예쁜 사람을 안다고 이렇게 예쁜 엘리가 사랑과 정성을 쏟는데 식물이 안 살아나고
배기겠어. 하하. 맞아, 맞아. 아, 근데 엘리.”
“네?”
“저번에 그 포투아 꽃 향수 말이야. 더 만들어줄 수 있을까? 우리 딸이 그 향이 좋았는지 자꾸만 졸라서
…….”
“물론이죠. 내일까지 만들어 드릴게요.”
“고마워. 가격이 얼마지?”
마지가 향수값을 주려는 듯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에요, 이웃끼리 돕고 사는 거라면서요.”
“아냐, 받아. 향수값이 얼마나 비싼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안 줘.”
“그럼 내일 크림 빵 몇 개만 가져다주세요. 값은 그걸로 받을게요.”
마지가 주머니를 열지 못하게 손을 꼭 잡아 원천봉쇄한 난 웃으며 그녀를 가게 밖으로 배웅했다.
“그럼 내일 봐요. 마지.”
“아니, 아휴……. 알았어. 그럼 내가 내일 크림빵 맛있게 구워올게.”
졌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은 마지는 곧 맞은 편의 빵 가게로 들어갔다.
난 하나둘 장사를 시작하는 상점들을 보며 오늘도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느꼈다.
이곳은 룬트 왕국의 수도 룬트라의 상점 거리였다.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 원래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려 했지만 그럼 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고민하다 결국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 난 일부러 룬트 왕국에서 사람이 제일 많은 수도로 왔다.
레이몬드도 내가 수도에 있단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제국을 떠난 지도 벌써 6 년이 흘렀다.
이젠 엘리야 크로프트란 이름보다
룬트 왕국 꽃집 주인 엘리란 이름이 더 익숙해졌다.
“엄마!”
거리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개를 돌린 난 환한 웃음을 지으며 품 안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안았다.
34 화
“칼라일!”
“엄마, 엄마 나 오는 길에 쿤 아저씨에게 이거 받았어요!”
품 안에서 고개를 든 칼라일은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게 장난감 비행기를 들어 보였다.
“와! 멋진 걸 받았네. 우리 아들 기분 좋겠다. 쿤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네! 감사하다고 인사했어요!”
칭찬해달라는 듯 기대 어린 눈빛은 심장이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난 칼라일의 짙은 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왕자님. 너무 잘했어요.”
“헤헤.”
“들어가서 어서 아침 먹자. 아침 먹고 학술원 가야지.”
룬트 왕국은 평민들도 글을 배우고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술원이 있었다.
5 살 때부터 들어갈 수 있는 학술원은 꽤 체계적인 배움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
학술원 이야기가 나오자 가기 싫은 듯 칼라일이 시선을 쓱 피했다.
“학술원 갔다가 오면 엄마랑 같이 꽃 언덕에 피크닉 나갈 건데 그래도 싫어?”
“아뇨! 안 싫어요!”
“그럼 얼른 아침 먹고 학술원 다녀오자. 알았지?”
“네!”
칼라일은 금방 밝아진 얼굴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기에 아이 스스로 먹을 수 있었다.
칼라일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난 칼라일과 함께 온 헬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헬란, 수고했어. 요새 내가 계속 일찍 나가서 혼자 힘들지?”
요새 향수를 만드는 일에 재미가 들어 아침 일찍 가게로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칼라일을 깨워 옷을
입히는 일을 헬란이 하고 있었다.
“힘들긴요. 칼라일님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데요. 오늘도 제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서 스스로 옷도
입으셨어요.”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고 칭얼거리며 한참을 씨름하는 난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칼라일을 힐긋 본 헬란이 낮게 속삭였다.
“엘리 님이 있을 때만 어리광을 부리시는 거예요.”
“어머, 그렇구나.”
내게만 부리는 어리광이라니.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웃자 헬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 님은 정말 팔불출이세요.”
“내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걸 어떡해.”
“뭐…… 그건 그렇죠.”
토끼처럼 빵을 야금야금 베어먹고 있는 칼라일을 보며 헬란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 님이 막 태어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라시다니 시간이 정말 빨라요. 그렇죠?”
지독한 난산이라 칼라일을 잃을 뻔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이렇게 무사히 자란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응. 그러게. 칼라일을 낳았을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했는데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도
신기하고.”
“다 엘리 님의 능력이세요.”
헬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이렇게 평화롭기만 하면 좋을 텐데……. 아, 혹시 오늘 아침에 우편 배달부가 오진 않았어?”
“아뇨. 안 왔어요.”
헬란의 대답에 내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룬트 왕국으로 오게 된 뒤 아버지와 매우 조심스럽게 석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주 편지를 보내려 했었지만, 왕국에 정착하여 편지를 보내자마자 아버지가 레이몬드가 날 찾고 있다
전했다.
그렇게 빨리 나의 소식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단순히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떠난 것을 알고 찾으려 하고 있다 했었다.
이제 와 무슨 마음이 들어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기에 절대
들켜선 안 됐다.
그렇게 매번 다른 나라와 다른 지역을 거쳐 석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었는데, 육 개월 전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편지를 전하는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조금씩 불안이 쌓여가고 있었다.
“엄마, 다 먹었어.”
어느새 과일까지 다 먹은 칼라일이 내게로 왔다. 입가에는 빵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또래보다 의젓하
긴 하지만 아직 아기는 아이였다.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털어준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네!”
칼라일이 헬란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가고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괜찮으신 걸까…….”
아버지의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좀 알아봐야겠어.”
6 년 동안 절대 에그리타 제국의 소식은 피하고 있었지만, 소식 없는 아버지에 대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게 한쪽에 있는 망토를 든 난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 * *
35 화
* * *
36 화
* * *
“엄마!!”
학술원 앞,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난 칼라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들자 학술원에서 뛰어나오는 칼라일이 보였다.
자기보다 키가 큰 형들을 훌쩍훌쩍 제치며 한달음에 달려온 칼라일이 내 품에 쏙 안겼다.
“그렇게 좋아?”
“네! 엄마가 데리러 와서 너무 좋아요!”
칼라일이 신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개구지게 웃었다.
한동안 꽃집이 바빠 칼라일의 하원을 헬란이 맡아 줬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은 난 손을 잡았다.
“오늘은 특별히 엄마가 칼라일이 먹고 싶어하는 간식들 다 사 줄게.”
“정말요?!”
칼라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정말.”
시장에 칼라일이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이 정말 많았다. 설탕에 조린 과일부터 아이스크림, 맛있게 구운
오리구이 꼬치까지.
달달한 맛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겐 천국 같은 곳인 거다.
물론 천국 같은 맛들을 전부 먹게 해 주지는 않았다.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꼬치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빵도 먹어도 돼요?”
헌데 오늘 특별히 허락해 준다니 칼라일은 믿기지 않는 듯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재차 물었다.
날 올려다보는 갈색 눈동자에는 기대가 한껏 서려 있었다.
내 자식이지만 너무 귀여운데.
칼라일에게 꼬리가 있다면 분명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겠지.
강아지 같은 눈빛에 순간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응. 다 먹어도 돼. 대신 배가 아플 만큼 많이는 안돼. 배부르면 그만 먹어야 해, 알았지?”
“네!”
환한 미소를 지은 칼라일은 기분이 너무 좋은지 알 수 없는 멜로디까지 흥얼거렸다.
그렇게 내 손을 꼭 잡고 칼라일은 신나게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그렇게 좋아?”
오리고기 꼬치를 순식간에 해치운 칼라일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내게 배시시 웃었다.
“네, 너무 좋아요.”
진심이 가득한 얼굴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칼라일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 난 다람쥐 같은 통통한
볼을 쓰다듬었다.
“엄마, 우리 내일도 모레도 시장 놀러 오면 안 돼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 칼라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무래도 어린 천사가 황홀한 시장의 맛에 단단히 취해버린 거 같았다.
칼라일이 좋다면야 얼마든지 매일매일 와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자고 바로 답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룬트 왕국을 떠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음…….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오자.”
“다음에……. 네.”
조금 실망한 듯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베어 물고는 금세 밝아졌다.
“칼라일 이제 그만 돌아갈까?”
나무로 만든 장난감을 구경하던 난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고개를 들었다.
룬트 왕국의 치안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밤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하진 않았다.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라일은 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장난감에서 고개를 돌린 칼라일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칼라일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난 순간 보이는 장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빠의 손을 잡은 아이가 인형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아빠, 나 저거 사 줘.”
“안 돼. 비슷한 거 얼마 전에 샀잖아. 엄마한테 혼나.”
“힝. 갖고 싶은데.”
칼라일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까. 서운해하는 남자아이를 아빠가 목말을 태워주며 달래고 있었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부자의 일상이었지만 난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칼라일이 그 남자 아이를 부러운 듯 보고 있었으니까.
칼라일이 조금씩 자라며 아빠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칼라일에게 가족은 엄마와 헬란이 전부였지만 학술원 아이들에겐 엄마와 아빠가 있었으니까.
학술원에 들어간 뒤 특히 궁금해했었다.
제 아빠는 어디 있는지 말이다.
차마 어린 칼라일에게 아빠가 죽었다는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 사정이 있어 멀리 떨어져 산다고만
둘러댔다.
칼라일이 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용사처럼 아빠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먼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뒤로 아빠에 대해 별달리 물은 적이 없어 괜찮아졌다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구나.
행복한 부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칼라일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칼라일, 내일 제드 아저씨 오라고 할까?”
칼라일은 신나게 몸으로 놀아주는 제드를 좋아했다.
어두워졌던 칼라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완전 좋아요!”
“그래. 엄마가 내일 제드 아저씨 초대할게.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고 벌써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칼라일을 번쩍 안아 든 난 일부러 더 씩씩하게 집으려 향했다.
* * *
“……나쁜 악당을 물리친 왕자님은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답니다. 그렇게 스스로 왕관을 쓰게 된
왕자님은 왕이 되어 백성들을 어진 마음으로 돌보고 오래오래 칭송받는 성군이 되었답니다.”
동화책을 덮은 난 반쯤 눈이 감긴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 왕자님은 왕이 돼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겠죠……?”
“물론이지.”
“그럼…… 나중에 아빠도 악당을 물리치면 우리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까요?”
“…….”
난 속삭이듯 작은 물음에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 일은 없을 테니까.
레이몬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한다 해도 결국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답해 주려던 난 완전히 눈이 감긴 칼라일을 보고 입술을 다물었다.
37 화
* * *
다음 날 아침.
난 가게 문을 조금 늦게 열고 오랜만에 칼라일을 학술원에 직접 데려다주었다.
하지 않았던 아빠 이야기를 꺼낸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학술원 선생님께 그만두는 것에 대해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38 화
“제레미,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진짜 다친다니.
다른 일도 아니고 용병 일을 하는데 자칫했다간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정색하며 말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할게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뭔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제레미는 눈치가 빨랐다. 지금도 평소와 달랐던 내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묻는 것일 거다.
“아, 나 에그리타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기분이 좀 심란했는데 티가 났나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는데 어쩐지 제레미의 얼굴이 굳었다.
“……돌아가기로 했군요.”
“우리 아버지 소식, 알고 있죠?”
용병 일을 하니 당연히 제국의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대국이니만큼 그곳에서 큰일이 터지면 모든 왕국에 말이
돌았다.
에그리타 제국의 가장 큰 실세라 할 수 있던 크로프트 공작가가 망하게 생겼으니 당연히 용병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을 것이다.
제레미 역시 들은 모양인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난 제국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봐요, 그렇죠?”
“……엘리, 괜찮겠어요? 칼라일의 존재를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 가볍게 넘겨보려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그가 말한 가만 있지 않을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레미는 내 진짜 신분이 뭔지 알고 있기에 당연히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자식인 것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숨겨 볼 거예요. 그리고 만약 들킨다 해도……. 칼라일은 내 아들이에요. 모든 걸 걸어서라도
내가 지킬 거에요.”
똑바로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제레미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물론이죠. 칼라일은 엘리의 아들이에요. 흠……. 그럼 이제 이 꽃집은 정리하는 건가요?”
“……아뇨 아는 사람이 맡아 줄 거에요.”
“아우, 그럼 난 이젠 룬트라에 놀러 올 곳이 없어지는 거네요. 아쉬 워라. 여기 오는 게 내
낙이었는데.”
언제 진지했냐는 듯 제레미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음……. 제레미는 계속 룬트 왕국에 있을 거예요?”
그의 신분을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짐작하는 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귀족적인 몸짓이나 예법을 통해 신분이 높다는 걸 짐작하기도 했고, 우연히 그의
단검을 보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겉보기엔 보석 장식 하나 없는 단조로운 검이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에 새겨진 문장이 눈에 띄었었다.
흑표범.
에그리타 제국에서 흑표범을 가문의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은 딱 한군데뿐이었다.
가문의 단검을 아무나 가지고 있지는 못할 테니 방계도 아니겠지.
내 짐작이 맞다면……. 그도 이렇게 오래 떠돌 수는 없는 입장일 것이다
“왜요? 내가 제국으로 함께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능글맞던 제레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왠지 통쾌한 기분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제레미도 당황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
“아……. 설마 나 놀린 거예요?”
“놀린 건 아니에요. 그냥 혼자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요.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좋으니까.”
처음엔 숨기는 게 많아 보이는 그를 경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룬트 왕국에서 자리 잡을 때 그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그가 내 짐작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면 제국에서 그가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다.
“당신은 정말 어릴 때랑 변한 게 없어.”
“네?”
그가 무어라 말한 것 같았는데 너무 소리가 작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함께 가자고 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지금은 나 말고 엘리만 생각해요. 제국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외면할 순 없어요.”
물론 황후도 아니고, 오랜 시간 제국을 떠나 있었으니 아버지를 도울 간접적인 인맥도 없다.
하지만 내겐 그 어떠한 인맥보다 영향력이 있는 상단이 있었다.
돈이 곧 인맥이 되는 법.
난 내 힘을 아낌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엘리가 잘 해결할 거라고 믿어요. 엘리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제국에서 다시 만나면 모른 척하지
말아요.”
“제레미야 말로 모른 척 말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을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정말 그런 말을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익숙한 능글맞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제레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매일 하면 늘더라고요. 엘리도 나한테 매번 들으니까 이제 아무런 느낌 없잖아요. 나중에는 이런 말들이
그리워질걸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 그리울 것 같네요.”
피식 웃던 그때,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드였다.
제레미의 시선이 제드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치자 순간 제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드와 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헬란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제레미는 눈치가 빨랐기에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드에게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넸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제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하하하. 그 나무 한 그루 사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엘리, 손님이 왔으니 난 이만 가 볼게요.”
“그래요, 조심히 가요. 제레미.”
“다음번엔 제국에서 봐요.”
제국에서……?
그도 돌아온다는 말일까. 의미심장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제레미는 내 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가게를 나갔다.
가게 창밖으로 사라지는 제레미의 뒷모습을 보던 난 가게 문을 잠갔다.
잠시 휴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은 난 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내가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지금 자는 시간이잖아.”
밤 장사를 하는 제드였기에 그에게 한낮은 새벽과도 다름이 없었다.
제드는 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응. 근데 아무래도 네가 걱정돼서 영 잠이 안 오더라고.”
내가 그렇게 하얗게 질린 모습을 처음 보았을 테니 걱정할 만했다. 그리고 아마 내 진짜 신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겠지.
제드는 머리가 좋았기에 어쩌면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아냈을 수도 있다.
나를 보는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보니 알아차린 게 맞는 거 같았다.
“엘리.”
“응.”
“네가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응.”
“그거, 마법 장신구지?”
나도 모르게 팔찌를 만지며 움찔했다.
“우리 아버지가 마법사 밑에서 일하던 시종이었거든. 그래서 덕분에 마도구들을 종종 봤었지. 특히 네가
차고 있는 푸른 빛의 보석 같은 마나석이 박힌 마도구가 모습을 바꿔 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지.”
“이건…….”
그에게 내 신분을 더 이상 속일 마음은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구하기로 한 이상 제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제드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 망설임을 오해한 듯 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리. 난 널 동업자 이전에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네게 힘든 일이 있는 거라면 숨김없이
말해 줬으면 좋겠어.”
“…….”
“너, 크로프트 공작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제드는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를 가만히 보다 팔찌에 손을 얹었다.
말로 하는 것보단 보여주는 게 확실하겠지.
팔찌를 풀어내자 마법이 풀리며 머리 색과 눈 색이 바뀌었다.
핑크빛 머리가 은발로 갈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돌아오자 나를 보던 제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너, 너……. 그 모습은…….”
“엘리야 크로프트. 그게 내 본명이야.”
나직이 내 이름을 말해주자 제드는 히익 숨을 들이켜며 경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크로프트 공작과 관련이 있더라도 설마 공작의 딸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제드, 숨 쉬어.”
숨이 넘어갈 듯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저 덩치로 쓰러지면 감당이 안 되기에 등을 쳐 주자 꼭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스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황후라니, 말도 안 돼……. 그래, 어쩐지 네 말투나 예법이 범상치 않다 싶기는 했어. 그냥 사연 있는
귀족 영애가 아닐까 했는데…….”
“나 황후 아냐. 황제와 이혼한 지가 벌써 6 년이나 흘렀는걸.”
“그렇지만 황후였던 건 맞잖아! 내가 이렇게 높은 사람과…… 아니 잠깐만.”
제드는 갑자기 굳은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제드, 갑자기 왜 그래? 숨을 영 못 쉬겠어?”
“네가 황후 폐하였으면……. 설마, 설마…… 칼라일은…….”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내뱉었다.
“그래, 맞아. 칼라일은 황제 폐하의 아들이야.”
“이런 미친!”
너무 충격이 컸던 것인지 제드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칼라일이 황자라니 말도 안 돼! 저번에 칼라일의 머리를 쥐어박은 적도 있는데……. 내가 황자의 머리를
……! 황족의 몸에 손을 대면 벌을 받지 않아?”
그의 말대로 황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참수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 말해주면 제드가
기절할 것 같았다.
지금도 덩치에 맞지 않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어제의 나를 보는 듯했다.
39 화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칼라일은 황자가 아닌걸. 그리고 황자로 살게 할 마음도 없어.”
“하지만 너……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 아니야?”
그는 내가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응. 아버지가 위험한 상황이니 당연히 돌아가야지.”
“그럼 어떻게 칼라일을 숨기려고? 내가 지금 충격으로 좀 정신이 없긴 한데…….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거야? 칼라일을 여기 두고 가진 않을 거 아냐.”
“당연히 함께 가야지. 그래서 제드 네가 날 많이 도와줘야 해.”
“내가?”
“응. 그리고…… 결혼 증빙 서류가 필요해.”
“칼라일을 다른 남자의 아이인 척하겠다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하면…
…. 그 황제 폐하께서 괜찮으실까? 막 분노하시는 거 아냐? 결혼했던 사이잖아……”
제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사실 처음엔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칼라일을 이모의 아들로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룬트 왕국을 선택한 이유가 오래전 연이 끊긴 이모가 이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제국에 퍼진 나에 대한 소문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타국에 사는 이모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룬트 왕국에 와서 확인해 본 이모는 이미 사망 처리가 되어있었다.
돈을 주면 이방인이었던 이모의 사망 증빙 서류를 바꿀 수 있긴 했지만 굳이 이미 돌아가신 분을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내 자식인 칼라일을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칼라일이에게도 엄마라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할 테니까.
모두에게 못 할 짓이라 난 칼라일을 내 자식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레이몬드가 자기 자식이라 생각지 못하도록 칼라일의 나이를 한 살만 낮춰서 말이다.
제드의 말대로 레이몬드가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게 그였다.
내가 떠나지 않고 그에게 임신 사실을 말했다면 한결같이 무심했던 그가 달라졌을까.
리제나가 보고 흔들림을 보였던 레이몬드였다.
그는 내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을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내게 화를 낼 수 없어. 아니, 화를 낼 자격이 없어.”
내 단호한 눈빛에 제드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얼굴도 모르는 황제 폐하가 뭐가 문제겠어. 네겐 너랑 칼라일이 더 중요하지. 그럼…… 신분은
어떻게 된다고 치고 칼라일도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거지?”
“응.”
“그 팔찌는 마법 팔찌라는 거 알 만한 사람이 보면 다 티가 날 거야. 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신구로 바꿔야겠네.”
“그게 가능해? 폴리모프 마법은 술식이 워낙 정교해 작게 만들 수 없다고 들었는데…….”
“가능하게 할 만한 사람을 내가 알고 있지. 마탑에서 쫓겨난 괴짜 마법사 하나를 알고 있거든.
그놈이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작은 마도구를 만들어낼 거야.”
제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충격으로 정신이 없다던 그는 이내 나보다 더 치밀하게 계획들을 짜기 시작했다.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제드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언제 떠날 계획이야?”
“최대한 빨리. 늦어도 이틀 내로는 떠날 거야.”
“그렇게 빨리? 서둘러야겠네. 그럼 칼라일은 제국에서 너와 떨어져 지내는 건가?”
“응.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칼라일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야.”
최악의 경우에나 칼라일을 레이몬드와 관련 없는 내 자식으로 밝히는 것이지 할 수 있는 한 칼라일은
최대한 숨겨야 했다.
내게 자식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든 소란스러워질 테고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말들이 나올
테니까.
아버지의 일이 정리될 때까지 칼라일을 잠시 안전한 곳에 따로 두었다, 일이 정리되면 다시 떠나는 것이
가장 완벽했다.
“하긴……. 크로프트 공작가의 상황이 말이 아니니 그게 안전하긴 하겠다.”
“에그리타 지부장에게 연락해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거처를 하나 마련해달라고 해 줘.”
“알았어.”
“그리고 제드.”
“응?”
“이번에 제국에서 사기를 치고 달 아난 사막 상단에 대해 더 알아봐 줘. 상단은 물론이고 상단의 책임자가
제국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증거가 찾아야 했다.
피닉스 상단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단이었고 상단의 정보력은 거의 대륙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제드와 나 둘도 상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력이라 생각했기에 정보를 모으는 정보원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었다.
“뭐……. 그건 이미 알아보라 했어.”
“벌써?”
“크로프트 공작가를 언급할 때 네 표정, 쓰러질 것 같았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럴 리 없었겠지.”
“제드…….”
일을 같이하면서 꼼꼼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 줄 줄이야.
놀람과 감동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지 볼을 긁적였다.
“아니 뭐……. 그냥 어차피 하게 될 일 같아서 미리 한 것뿐이야.”
“그래도 정말 고마워.”
“내 목숨값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엘리, 넌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 아버님의 일…… 쉽지 않을
거야.”
“각오하고 있어.”
결연한 눈빛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할 일이 많을 거 같으니까. 너도 출발이 정해지면 내게 알려 줘.
에그리타 제국 지부에 때맞춰 항구에 사람을 보내라 할 테니까.”
“응.”
제드가 가게를 나가고 나도 할 일이 많아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난 가장 먼저 제국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망토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 * *
40 화
그의 어설픈 위로에 엘리야의 상처가 더 깊어질까 물러난 것이 지금은 잘못된 것이란 걸 알았다.
과거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6 년 동안의 기억을 되짚어갈수록 엘리야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리야가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욕을 하고 때려도 좋으니 제발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진 않길 바랐다.
집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엘리야.”
답이 없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 레이몬드는 숨 막히는 그리움에 입술을 짓씹었다.
* * *
“엄마, 엄마 저기 보세요! 새가 다 같이 날아가고 있어요!”
칼라일의 목소리에 바다를 보며 상념에 감겨 있던 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들자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새의 무리가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한지 눈이 커진 칼라일이 외쳤다.
“우리처럼 가족들끼리 여행을 가는 건가 봐요!”
순수한 아이의 발상에 심각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난 차가운 바닷바람에 칼라일이 추울까 봐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게. 칼라일도 엄마랑 헬란이랑 여행가니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한껏 들뜬 칼라일의 얼굴이 한없이 밝았다.
당당히 돌아다니지 못하는 처지인 데다 상단 일 덕분에 바빠 가까운 곳조차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었다.
그래서일까. 에그리타 제국으로 여행을 간다는 말에 칼라일은 예상과 달리 매우 기뻐했다.
너무 기대된다며 웃으며 방을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진작 여행을 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릴 정도였다.
“칼라일, 우리 다음엔 저기 대륙 서쪽에 있는 사막 왕국에도 가 보자. 그곳은 여기보다 엄청 덥고 또
해가 지지 않는 곳도 있데.”
“우와! 꼭 가 보고 싶어요!”
“응. 꼭 가자.”
칼라일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눈이 다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칼라일 님, 아이스크림을 사 왔어요.”
잠시 아이스크림을 사러 배 안의 상점에 다녀온 헬란이 돌아왔다.
“엄마, 저기에서 다른 애들이랑 같이 먹어도 돼요?”
갑판 위에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일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쪼르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마도구를 이용해 금발과 보랏빛 눈동자가 된 칼라일은 튀지 않고 아이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칼라일이 더는 나를 돌아보지 않자 난 힘주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내일 아침이면 에그리타 제국에 도착할 것 같아요.”
“하아.”
에그리타 제국이 가까워질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버지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걱정은 되지만
그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칼라일이었다.
한동안 칼라일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이었다.
“엘리 님, 걱정하지 마세요. 칼라일 님은 의젓하시니까, 저랑 잘 있으실 거예요.”
* * *
41 화
* * *
“으음, 엄마…….”
“응. 엄마 여기 있으니까, 안심하고 더 자. 칼라일.”
침대에 조심스럽게 칼라일을 내려놓은 난 이불을 덮어주고 깨지 않게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미간을 조금 좁히던 칼라일은 곧 빠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난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가자 짐을 정리하고 있던 헬란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시게요?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야. 헬란. 피곤할 테니까 짐은 나중에 하녀들에게 맡기고 좀 쉬어.”
“엘리 님도 좀 주무세요. 배에서 거의 못 주무셨잖아요.”
“난 괜찮아. 그보다 칼라일이 일어나면 좀 봐줘. 난 루몬트와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로브를 벗은 난 제드에게 새롭게 받은 마법 반지를 꼈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평범한 갈색으로 바뀌고 얼굴 생김새도 조금 달라졌다.
한동안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날 위해 제드가 좀더 신경 써서 만든 마도구였다. 이걸 급히 만드느라
마법사들을 엄청나게 쪼았다고 했었지.
로비로 내려가자 하녀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루몬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몬트.”
“……엘리 님?”
“맞네.”
바뀐 내 모습을 처음 본 그는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옷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음, 집무실로 가시죠.”
거기, 너 차를 가져오거라. 하녀 한 명에게 지시한 그는 나와 함께 1 층 집무실로 향했다.
“큼……. 집무실은 별로 사용하지 않으실 것 같아 크게 꾸미지 못했는데, 죄송합니다.”
말마따나 귀족가의 집무실이라고 하기엔 책상도 책장도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소파와 테이블이 처량해
보이긴 했지만, 딱히 오래 머물 곳도 아니라 상관없었다.
“괜찮네. 신경 쓰지 말게.”
먼저 자리에 앉자 루몬트도 맞은 편에 자리했다.
이윽고 들어온 하녀가 테이블 위로 차를 내려놓고 나가고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루몬트, 날 공작가에 하녀로 좀 넣어 주게.”
“켁! 네? 하녀요?”
막 차를 마시려던 그는 사례가 걸린 듯 잔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한동안은 쥐죽은 듯이 지내야 했지만, 막상 제국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걱정되어 마음이 불안했다.
재판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상황이 적힌 보고서에 그저 공작성에 구금되어 계신다는 것뿐이었다.
행여 아프신 건 아닌지 잘 버티고 계신 것인지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 그게……. 지금은 좀 쉽지 않습니다. 황실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요.”
루몬트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식자재나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들키시면 기사들이 황제 폐하께 바로 고할 겁니다.”
“지금 내게서 진짜 얼굴이 보이는가?”
루몬트는 바뀐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실눈을 뜨고 눈코입을 세세하게 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들키진 않을 거 같긴 한데……. 흠, 그럼 제가 일단 식재료가
들어가는 상단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고맙네. 최대한 서둘러 주게. 그리고 사건에 대해 더 알아낸 것은 없는가?”
“아, 지금 바로 보실 건가요? 좀 쉬시지 않고요?”
“보면서 쉬면 되네. 주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잠시 집무실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는 서류 한 뭉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일단 사라진 사막 상단에 대한 정보들과 사기 사건의 자세한 내막이 적혀 있습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그럼 전 내일 이른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루몬트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난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사막 상단이 제국에 들어온 시점부터 사라진 날까지의 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서류의 모든 내용을 외울 만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종이를 내려놓은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드에게서 받았던 보고서와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모든 증거가 짜맞춘 듯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고
사막 상단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의 밑에서 사막 상단과 직접 만나며 거래를 했던 메타스 자작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최악인 건 메타스 자작의 유서 또한 발견되었는데 그 유서엔 모든 일은 아버지가 시킨 것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메타스 자작…….”
난 낯선 이름을 입 안에 굴려 보았다.
아버지의 모든 보좌관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측근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함부로 내치는 성격이 아니셨기에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는 자들은 십 년이 흘러도 거의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모른다는 건 내가 제국을 떠난 뒤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단 뜻일 것이다.
몇 년 되지 않은 사람에게 4000 골드나 걸린 큰일을 왜 맡기셨을까.
여기 적힌 정보들에 따르면 아버지가 메타스 자작에게 사막 교역권을 거의 일임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메타스 자작이 올린 모든 서류에 아버지의 인장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특히 4000 골드라는 계약금을 일시에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서류에 말이다
이 서류 때문에 아버지가 의심을 크게 받은 듯했다.
계약금은 일시에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금액이 크면 더욱 돈을 나누어 주었다. 큰 무역 건일수록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10 년간 제국의 외무부의 수장으로 있으셨던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사원들에게 그런 서류에 인장을 찍은 적이 없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서류에 찍힌 인장을 마법으로 확인해 본 결과 위조된 흔적은 없었다. 하여 아버지의 말은 궁지에
몰려 뱉은 거짓으로 치부되었다.
“인장을 대체 어떻게 찍은 걸까.”
난 당연히 아버지가 서류에 인장을 찍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장을 훔친 걸까.
일단은 루몬트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뭔가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서류들에 적힌 정보들에 당사자인 아버지의 말이 담겨있진 않았으니까.
끼이익-
“엄마.”
또랑또랑한 칼라일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난 문으로 고개를 들었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엄마, 들어가도 돼요?”
“당연히 되지. 이리 와.”
칼라일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씨익 미소를 지은 칼라일이 뛰어왔다.
소파 위로 폴짝 올라온 칼라일이 품에 안겼다.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애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더 자지.”
“일찍 아닌데. 벌써 해가 엄청 높이 떴어요.”
칼라일의 말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류를 보고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흐른 건지 오후가 된 지
한참이었다.
“칼라일, 배 안 고프니?”
“배고파요. 엄마는 배 안 고파요?”
칼라일이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온 듯했다.
복잡한 일들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 난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도 배고파.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네! 어서 가요! 헬란이 식당에서 기다린댔어요!”
신이 난 듯 외치는 칼라일을 보며 미소를 지은 난 칼라일을 손을 꼭 잡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 *
깊은 밤이 찾아온 에그리타 제국의 황성.
경비대를 제외하곤 황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잠든 새벽 시간이었다.
본궁의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침실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42 화
“윽, 안……돼!”
비명 같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눈을 번쩍 뜬 레이몬드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놀란 시종이 황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다.”
“의원을 부를까요?”
레이몬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본 시종이 걱정스러운지 물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의원을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예, 폐하.”
시종은 망설이다 침실을 나갔다.
그는 협탁에 놓인 물을 단숨에 들이마신 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또 악몽이군.”
엘리야가 떠난 뒤 악몽의 주기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무력한 어린 자신.
꿈에서 깼음에도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이 지독한 어릴 적의 기억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옅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한 번씩 이렇게 꿈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이런 날은 다시 잠들어도 악몽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 * *
43 화
“정말 너였구나…….”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어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자 얼마나 살이 빠지신 건지 뼈대가 느껴질 정도였다. 사건이 터지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아버지가 돌연 손을 밀어냈다.
“엘리야,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돌아온 것이 알려지면 너까지 위험해질 것이야.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 떠나거라.”
그리움에 눈가가 붉어지던 것도 잠시. 아버지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안 돌아가요. 아버지가 이런 상황이신데 어느 자식이 외면할 수 있겠어요.”
“엘리야, 지금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문이 멸문할 수 있어. 게다가 칼라일은 어쩌려고!”
“칼라일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감싸고 눈을 맞춘 채 말했다.
“저희 가문, 제가 지킬 거예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라고요.”
“네가 무슨 수로…… 아니, 너 내게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거로구나.”
아버지에게 피닉스 상단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저 룬트 왕국에서 작은 꽃집을 하며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가늘어진 눈빛으로 나를 보던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 안 된다. 위험해. 이건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걱정 마세요. 절대 누구도 위험해지지 않아요. 제게 다 계획이 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니?”
“설명해 드리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지금은 아버지가 괜찮으신지 보러 온…….”
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고 말하던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순간 내
몸도 뻣뻣하게 굳었다.
반지를 뺀 상황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본다면 정체를 들킬 것이다. 만약 지금 들어온 사람이 기사라면…
….
“각하, 노크 소리에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하르펜.”
들어온 이는 방 안에 있는 낯선 이의 모습에 당황하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졌다.
“……아가씨?”
“하아……. 다행이다.”
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정말 다행히도 갑자기 들어온 사람은 기사가 아니었다. 공작가의 충성스러운 가신인 의사 하르펜이었다.
칼라일의 존재도 숨겨 준. 아버지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있는 그에게 난 미소를 그렸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가씨께서 어떻게 이곳에…… 아니, 정말 엘리야 아가씨가 맞는 것입니까?”
그는 믿기지 않는 거 같았다.
“응. 나 맞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듯 후, 숨을 내쉰 하르펜은 불안한 얼굴로 황급히 문을 닫았다.
“이곳에 몰래 들어오신 겁니까?”
“응. 아버지가 걱정돼서 왔어. 하지만 이제 돌아가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아서.”
“어떻게 황제 폐하의 기사들이 깔린 곳에 몰래 들어오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들키시면 어쩌려고요.”
“걱정하지 마.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까.”
난 보란 듯이 반지를 다시 꼈다. 눈앞에서 모습이 바뀌자 하르펜과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설마하니 이렇게 작은 반지가 마도구일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하긴 제드가 건네준 반지와 작은 귀걸이를 보았을 때 나도 딱 이런 반응이었지.
“아버지 저 이만 가 볼게요. 이렇게 몰래 또 오는 건 무리겠지만 편지를 보낼 방법이 있을지
찾아볼게요.”
오래 있기엔 너무 위험했다. 아버지가 무사하신 걸 눈으로 확인했으니 지금은 돌아가야 했다.
“엘리야, 내 걱정은 말고……. 제발 위험한 일은 하지 말거라.”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은 난 하르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하르펜, 아버지를 잘 부탁해.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아가씨.”
난 불안한 눈빛의 두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 말한 뒤 방을 나갔다.
복도에 사람들이 없어 주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진 않았다.
몰래 나왔던 작은 문으로 들어가자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초조한 상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니네. 어서 가지.”
말은 아니어도 엄청 불안했는지 나와 함께 주방을 나가자 하얗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나도 아버지를 뵌
덕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내 안일함을 지적하듯 저택 로비로 나온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앗, 죄송합니…….”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난 막 로비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상자를 주우려 한 순간, 목에서 차디찬 쇳날의 감촉이 느껴졌다.
“헉……!”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에 닿은 것이 잘 벼려진 검날이었던 것이다.
“감히 폐하께 몸을 부딪히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차가운 쇠의 감촉도, 기사의 서릿발같은 목소리도 아닌, 폐하라는 두
글자에.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는 무감한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몬드.
정말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말을 타고 온 듯 샹들리에 아래로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수려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6 년 만에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고개를 드는 것이냐, 정말 죽고 싶은 것이냐.”
칼끝이 목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제야 내가 레이몬드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빌려고 한 순간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잠깐. 칼을 치워라.”
“네? 하오나, 이자는…….”
레이몬드의 명령에 당황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민이 황제에게 몸을 부딪힌 것도 모자라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라 명해도 아무도 반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칼을 치우라니.
“너, 고개를 들어.”
내게 하는 명령이었다. 그의 짧은 명령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왜…….
무언가를 알아챈 것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고개를 들라 했다.”
돌처럼 굳은 내 머리 위로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난 움직이지 않는 목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무감했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거처럼.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안에 땀이 찼다.
“너, 다시 말을…….”
“폐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공작.”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가 울리고 곧 내 옆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인사는 됐으니 그만 일어나게.”
레이몬드의 몸은 이제 아버지에게로 완전히 틀어졌다.
“폐하, 저택에 갑자기 어쩐 일이신지요.”
“그대의 몸이 좋지 않다 하여 걱정이 되어 왔네. 헌데…….”
레이몬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고저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레이몬드의 집요한 시선이 내게서 완전히 거두어졌다.
“아니네. 그 여인은 놓아줘라. 공작, 자네는 올라가서 나와 얘기를 좀 하지.”
“네, 폐하.”
황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레이몬드와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도 멀어졌다.
“아이고, 황제 폐하라니……. 자네 괜찮은가?”
상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걸음 떼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비틀거렸다.
그를 다시 만날 거란 각오는 하고 돌아왔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더욱 차가워지고 싸늘해진 그의 분위기와 눈빛. 그리고 변한
것이 없는 수려한 얼굴.
뒤늦게 그의 모습들이 하나씩 다시 떠올랐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이건 그를 향한 사랑이나 설렘으로 뛰는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 불러일으킨 것은 아직 그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조바심과 어마어마한 불안감일
뿐이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상황이 극한으로 몰린 지금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움직여야 했으니까.
가장 눈에 띄는 황제인 그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요, 가시죠.”
혹시라도 그가 다시 내려오기 전에 난 서둘러 저택을 나갔다.
* * *
44 화
“…….”
레이몬드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스스로 그를 떠났으니까.
이 관계에서 미련하게도 손을 놓지 못한 것은 아마 자신뿐일 것이다.
그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에그리타 제국으로 돌아왔을 테니까.
“폐하, 이제 그만 엘리야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놓아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레이몬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차라리 제발 용서해달라 황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빌지언정 엘리야를 포기할 순 없었다.
엘리야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 이젠 내 모든 게 되어버렸거든.”
아니 처음부터 전부였을 것이다.
<i>‘……죽을죄를 지었습니다.’</i>
그와 부딪쳤던 여자.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 평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이었고 얼굴 생김새도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했다.
처음엔 착각이라 여겼건만, 되짚어 볼수록 그 여자의 목소리가…….
레이몬드는 기립해 있는 4 기사단의 부단장을 불렀다.
“데이빗.”
“네, 폐하.”
“아까 나와 부딪혔던 그 여자 말이다. 저택에 자주 오는 상인인가?”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데이빗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였습니다.”
“오늘 처음?”
“네.”
데이빗은 정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여자에게 무언가 있을 거 같은 느낌.
처음 부딪혔을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빤히 보던 알 수 없는 눈빛과 엘리야를 닮은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지금쯤이면 타국에 있다 해도 크로프트 공작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았다면 엘리야의 성격상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리 없어.”
마법의 가능성을 떠올려 봤지만, 특별한 마법 장신구를 본 기억은 없었다. 더군다나 머리카락이나 눈 색
외에도 외모 자체가 달랐다.
다른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걸까.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데이빗, 그 여자에 대해 알아봐.”
“예, 폐하.”
레이몬드는 크로프트 공작저를 물끄러미 바라본 뒤 다시 말에 올랐다.
* * *
“엘리 님!”
저택으로 돌아오자 마중 나와 있는 헬란과 루몬트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걱정이 심했는지 날 보자마자 어둡던 안색에 화색이 확 돌았다.
“다녀왔어.”
“오, 신이시여.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루몬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아니었나 보네.”
출발할 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얼굴과 정반대의 모습에 피식 웃자 루몬트가
머쓱하게 자신의 볼을 긁었다.
“물론 철저하게 준비하긴 했었지만 만약의 경우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크로프트 공작저는 황제의 기사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는 곳이다. 그곳에 엘리야가 무사히 들어갔
다 빠져나온 것이 천운일 정도로.
“어제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하기도 했고…….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니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각하는 만나 뵈셨어요? 기사들의 경계는 삼엄하던가요?”
이것저것 묻던 헬란이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손은 왜 이렇게 또 차가우세요.”
“긴장해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많이 진정되긴 했지만 레이몬드를 만났던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색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다.
내 얼굴빛을 살핀 헬란의 이맛살이 주름졌다.
“……폐하를 만났어.”
“네?!”
“황제 폐하를요…….”
루몬트와 헬란이 크게 반응했다.
“설마, 지금 같이 오신 것은…….”
루몬트는 경악과 공포가 서린 눈빛으로 황급히 마차 쪽을 살폈다.
“루몬트 같이 왔을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인지 들켰다면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겠지.”
“아, 하긴……. 하하, 폐하께서 저리 누추한 마차를 타고 오실 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루몬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루몬트. 집무실로 먼저 가 있어. 옷 좀 갈아입고 내려갈 테니.”
“네. 엘리 님.”
루몬트가 집무실로 향하고 나도 헬란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도착한 난 허름한 옷을 벗고 청색빛이 도는 편안한 튜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젖은 천으로 간단하게 손과 얼굴을 닦자 은쟁반을 하녀에게 물린 헬란이 다가와 물었다.
“엘리 님, 괜찮으세요?”
헬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괜찮아. 다행히도 폐하께선 내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셨어. 그저 우연히 부딪혔을 뿐이야. 갑자기
그렇게 만날 줄 몰라 놀란 것뿐이지.”
“큰 문제가 없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응. 아버지도 많이 야위시긴 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계신 거 같았어.”
“각하께서 아가씨를 보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랬지. 아버지는 내게 당장 떠나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재판 날짜는 아직 안 나온 거죠?”
“응. 하지만 곧 나오겠지. 더 이상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하시기에는 일이 너무 커졌으니까.”
“모든 게 다 잘 되실 거에요. 전 엘리 님을 믿어요.”
헬란이 밝게 미소를 짓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고마워, 헬란. 근데 칼라일은?”
일어났더라면 분명 헬란과 함께 마중을 나왔을 텐데…….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아, 하긴 아직 이르지.”
거기다 어제 늦게 잠들어 칼라일이 일어나기엔 시간이 다소 빨랐다.
“헬란, 난 루몬트와 상의할 게 있으니까 그동안 칼라일을 봐 줘.”
“네, 걱정 마세요.”
난 헬란은 두고 방을 나갔다.
집무실에 들어서니 하루아침 사이에 새로 바뀐 소파와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책장과 고급 마호가니
책상까지 있었다.
“언제 이걸 다 들인 거야?”
“오늘 아침 엘리님이 잠시 저택을 떠나셨을 동안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이제 한결 집무실 같은 풍경이
되지 않았나요?”
오래 머물 것도 아니라 딱히 이렇게 꾸며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칭찬해 달라는 듯한 루몬트의 표정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훨씬 보기 좋군.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자 루몬트가 찻잎을 우린 티포트을 내 찻잔에 기울였다. 허브차인 듯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긴장을 푸시는 데 좋은 차입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어제 제가 드린 자료들은 전부 살펴보셨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보았지. 자세히 잘 정리되어 있더군.”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사막 상단이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더군. 간자들마냥 흔적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예, 고작 며칠 만에요. 게다가 기사들이 급습한 시각이 새벽이었는데,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으니…….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누군가 기사들이 언제 들이닥칠 것이라 말해준 것이겠군.”
“맞습니다. 기사단에 관한 정보를 알 만한 고위 귀족과 연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상단 자체의 규모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상단 규모?”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45 화
46 화
* * *
* * *
룬트 왕국의 수도 외곽.
노을이 하늘을 집어삼킬 것처럼 불게 타오르고 있던 시간이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지만 술집이 늘어선 거리는 이제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술집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거리엔 용병들과 벌써 술에 취한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익숙한 눈빛으로 스쳐 지나간 짙은 갈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가 골목 안쪽 낡은 문을
열었다.
“아직 영업 전…….”
막 테이블 위에 얹어 두었던 의자를 내리던 거구의 붉은 머리 남자가 멈칫했다.
“제드, 나 맥주 한 잔만.”
로브를 벗어 아무 의자에 걸친 제레미가 바에 앉았다.
제드는 그런 제레미가 익숙하다는 듯 맥주 한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47 화
* * *
48 화
“그것은…….”
얼굴이 벌게진 바르텐 백작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폐하, 지금 중요한 사안은 바르텐 영지가 아니옵니다. 부디 공작의 재판을……”
시오스 후작의 곁에 선 레트랑 후작이 전쟁터에 나온 기사처럼 결연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걸 들어주는 것도 한계였다.
레이몬드는 레트랑 후작의 말을 잘랐다.
“재판은 3 일 뒤에 열도록 하지.”
“아니되…… 네?”
당연히 재판을 미룬다는 것인 줄 알고 소리치려던 귀족들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몇 달을 미루던 재판을 연다니 다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대들이 그렇게 바라는 재판을 열어주겠다고 했네. 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이번엔 재판을 열지 말라 말하고 싶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저희는 그저 폐하께서 이리 빨리 결단을 내려주실지 몰라…….”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날 겁박할 분위기던데 내 어느 장단에 놀아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요새
그대들을 보면 내가 너무 성군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레이몬드는 한쪽 입꼬리를 보란 듯이 비틀었다.
애초에 그는 성군이 될 수 없었다. 반정으로 아버지와 형제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로 새로 쓴 폭정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성격이 그다지 좋은 것 역시 아니었다. 그간 귀찮아서 웬만한 건 넘겼을 뿐이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귀족들을 모른 척 해 줄 마음도 없었다.
레이몬드의 기세가 살벌해지자 귀족들은 모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냈던 황제이지만 한번 결단을 내리면 얼마나 잔 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제국을 위하는 충심에 순간 눈이 멀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습니다. 귀족들을
다스리지 못한 저의 잘못이니 부디 절 벌하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오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귀족들이 줄지어 일어나며 후작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레이몬드는 후작을 따라 허리를 숙인 자들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봉에 선 시오스 후작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몇 년 사이 권력의 기울기가 많이 달라진 듯했다.
“그대들의 뜻대로 재판은 열릴 것이니 더는 공작에 대해 떠들지 말게.”
레이몬드가 이만 회의를 끝내버리려 하던 때 시오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하온데 폐하,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 때 크로프트 영애도 소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레이몬드가 멈칫했다.
레이몬드는 차디찬 눈빛으로 시오스 후작을 내려보았다. 눈빛에는 서서히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재상. 선을 넘지 말라 분명 경고했을 텐데.”
회의장을 울리는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지독히 낮았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의 목을 물기 직전 몸을 낮추는
것처럼.
장내의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차갑게 굳었다. 시오스 후작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지만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입니다. 재판장에서 공작이 벌을 받게 된다면 영애 또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벌을 피할 수…….”
“시오스 빌레인.”
시오스 후작의 풀 네임을 부르는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회의장을 울렸다.
“내가 자네를 그저 이름으로 부르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그날이 오면 재상이란 직위도 에드먼드란
방패도 더는 소용이 없을 테니까.”
나직한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그 속엔 후작의 목을 노리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경고를 알아들은 후작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은 겁을 먹고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저열한 속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로프트 영애는 이미 제국을 떠난 지 6 년이다.”
레이몬드는 스산하리만치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의 죄가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은 마당에 전 황후였던 그녀를 이 사건에 엮으려는 의도를 알 수가
없군. 크로프트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작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는 다시는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해 주지.”
선명한 살기에 귀족들은 숨을 들이켜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황제의 눈에 들까 두렵다는 듯이.
“재상은 3 일 뒤 재판을 준비하도록 하고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다.”
“예, 폐하.”
* * *
49 화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적어도 적은 아니실 분이 있긴 해. 하지만 그분은 아마 움직이지 않으실 거야.
영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겠다며 수도에서 내려가신 분이니까.”
“아…….”
헬란도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가망이 없다 여겼는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루몬트가 좀 알아낸 정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물어보시면 되겠어요.”
“응?”
헬란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마차에서 막 내리는 루몬트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상단 회의가 있어 좀 늦을 거라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것인가 했지만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게 아닌 거 같았다.
바람에 머리까지 헝클이며 뛰어온 루몬트가 내 앞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하인이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마신 그가 숨을 좀 고르자 난 걱정스레 물었다.
“루몬트, 무슨 일이 생겼나?”
“후우, 엘리 님.”
거친 숨을 내쉰 루몬트가 외쳤다.
“찾았습니다.”
찾았다는 막연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찾았다니 무엇을?”
루몬트는 의아함이 가득한 내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공작 각하의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증인 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제가 어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메타스 자작을 후원했던 자가 바로 바르텐 백작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었지.”
“파고들어 보니 사막 상단이 제국에 들어온 뒤 그 둘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주기적으로 가진 것을 알아
냈습니다. 그리고 그걸 증언해 줄 증인도 찾았고요. 제가 오늘 밤 그 증인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증인이라.”
“네. 제가 그자를 잘 구슬려 데려올 테니 아무런 걱정을 마시고…….”
“내가 직접 가겠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루몬트가 멈칫했다.
“직접은 너무 위험합니다.”
헬란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난 증인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음을 굳혔다.
“내가 직접 가야 해. 절대 놓치면 안 되니까.”
재판에 코앞이었기에 난 재판의 판도를 바꿔줄 증인이 꼭 필요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 루몬트.”
* * *
50 화
* * *
깊은 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각.
마차 한 대가 수도의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분 패를 확인하겠습니다.”
경비대가 마차의 작은 창문을 두드리자 곧 창이 열렸다.
진저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경비대에게 신분패를 내밀었다.
“피닉스 상단이네. 잠시 물건을 확인하러 나가는 걸세.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올 것이야.”
“아, 네. 알겠습니다.”
상단의 패를 확인한 경비대는 별다른 절차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의 창문이 닫히고 루몬트는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입니다. 늦은 시각이라고 괜히 검문이 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입니다.”
“하인은 안전한 곳에 있는 건가?”
난 지금 루몬트와 함께 증인이 되어줄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하인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상단의
호위기사들까지 붙여놓았으니 안전할 겁니다.”
“내일이 재판이니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출발하기 직전 재판이 바로 내일 열린다는 소식이 들어왔었다.
시간은 촉박해졌는데 하인이 증인이 되어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잘 될 것입니다. 바르텐 백작의 성정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밑의 사용인들이 충성심으로 바르텐
백작을 모시고 있진 않을 겁니다.”
바르텐 백작의 성미가 불같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사교계에서 유명하긴 했다.
거기다 바르텐 백작은 한 영지와 가문을 다스릴 만한 능력도 없었다.
하여 그가 메타스 자작과 연관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루몬트가 잘못 안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자의 등장이었으니까.
아버지를 노릴 만한 제국의 귀족들을 추려보았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사람은 드로이트 공작이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가이자 공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전 황태자를 지지했었고 레이몬드가 반정으로 황좌에 앉으며 권력을 잃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드로이트 공작가를 귀족 명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었으나 아버지가 막으셨다 들었다.
이미 많은 귀족들의 피를 본 상황에서 초대 황제부터 이어져 온 명문가인 드로이트 가문까지 숙청하면
귀족들의 반발심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여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드로이트 공작가는 허울뿐인 귀족 가문이 되었으니까.
그 당시 치욕을 견디지 못한 드로이트 공작이 황성 앞에서 차라리 목숨을 끊어달라 소란을 피운 것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공작은 쓰려져 하인들에게 옮겨졌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혈통을 중시하는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그런 치욕을 쉽게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생아 출신의 황제, 그런 황제 덕에 공작위를 받은 아버지.
자신보다 못하다 여겼던 아버지가 선의를 베풀 듯 목숨을 살려줬으니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깊을 것이다.
때문에, 그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르텐 백작이 나타난 것이다.
바르텐 백작은 이런 치밀한 일을 꾸밀 머리가 없는데.
그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바르텐 백작의 뒤라면…….
“시오스 후작.”
난 나직이 불편한 이름을 내뱉었다.
시오스 후작, 리제나, 에드먼드.
꼬리를 무는 연관 관계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아직 시오스 후작이 왜 아버지를 노리는 건지 이유를 찾진 못했지만 바르텐 백작이 나온 이상 그가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한 듯합니다.”
루몬트가 말했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렸다.
“조심하십시오.”
빛이 나는 마나석을 든 루몬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싸늘한 밤바람이 몸을 스쳤다.
산기슭에 있는 언덕 아래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듯 주변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길도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를 만큼 정말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오래전에 버려진 곳인데 이곳의 습도가 찻잎 말리기에 딱이라 동방국의 귀한 찻잎들을 말리는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워낙 으슥한 곳에 있어 저 밑에 사는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지요. 원래 창고로
쓰이는 곳이기도 하니 의심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오두막으로 다가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상단의 호위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인은 무사히 데려왔겠지?”
루몬트의 물음에 검은 천으로 하관을 가린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몬트가 나를 바라보고 난 그와 함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만이 켜진 오두막 안에서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년이 납작 엎드렸다.
“처음 뵙, 뵙겠습니다. 툰이라고 합니다.”
성이 없는 것을 보니 천민 출신인 듯했다. 많이 긴장한 듯 떨리는 어깨를 보던 난 기사들에게 나가 있으라
손짓했다.
기사들이 나가고 난 소년에게 다가갔다.
“일어나도 된단다. 만나서 반갑구나. 난 엘리야 크로프트다.”
천천히 고개만 든 소년이 망토 모자를 벗은 나를 보고 경악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한 17 살쯤 되었을까.
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루몬트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이 소년의 호감을 사야 했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재판의 판도를 바꿔줄 유일한 증인이었으니까.
내 미소에 두려움이 가셨는지 소년은 볼을 발그레 물들이더니 내 손을 잡았다.
“툰이라 하였지? 내 너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단다. 네가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너는 귀족가의
하인으로 살지 않아도 된단다.”
그의 투박한 손을 꼭 잡아주며 나직이 말하자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난 소년을 보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이야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툰은 바르텐 백작의 난폭한 성정에 이미 불만이 많았다. 죽기 직전까지 맞은 적도 있다 했다.
“바르텐 백작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툰은 애원하며 매달렸다.
“걱정하지 말렴. 널 절대 바르텐 백작에게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너에게 더 고마워. 네 증언이 내겐 큰 힘이 될 거 같거든.”
귀족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인지, 아이는 무척이나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재판이 끝나는 대로 피닉스 상단에 네가 일할 자리가 생길 거야. 숙식도 전부 제공할 거니 넌 이
자를 따르면 돼.”
툰의 시선이 루몬트를 향했다.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시선이었다.
“혹 상단에서 널 괴롭히는 자가 있거든 내게 바로 말하면 된다. 알겠지?”
눈을 찡긋하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아이는 눈망울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께서야말로 제 목숨을 구해 주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호의로 가득한 갈색 눈동자를 보며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뒤 일어났다.
재판 전에 나 또한 준비할 일이 많았기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재판 때 보자꾸나. 루몬트, 이만 가야겠다.”
“네. 가시지요.”
오두막을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툰을 마차에 태우고 길을 떠났다.
그것을 보던 나도 곧 루몬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 * *
51 화
52 화
<i>‘됐다. 그만둬라.’</i>
* * *
엘리야가 툰을 성공적으로 회유한 그때, 시오스 후작가의 집무실에 촛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시오스 후작은 책상 앞에 부복하고 있는 기사를 보며 미간을 깊이 좁혔다.
“하인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것이냐?”
“네, 각하. 바르텐 백작이 매번 데리고 다니는 하인이라 메타스 자작과 가졌던 만남도 전부 본
하인입니다. 한데 그 하인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쾅-!
분노를 참지 못한 후작이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메타스 자작을 만날 땐 항상 조심 또 조심하라 일렀거늘! 그런데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고! 백작은
하인이 사라진 것을 아느냐?”
“모르십니다.”
“그 멍청한 놈은 항상 끼고 다니던 하인이 사라졌는데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예, 그러신 듯합니다.”
기사의 말에 후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나쁘면 감이라도 좋던가, 이건 뭐 쓸모가 없는 놈이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
후작이 혀를 차던 그때 집무실 한쪽 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후작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실로 만든 듯한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여자, 리제나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근데 이 상황에 뭐가 즐거워 웃는 것이냐. 리제나.”
후작은 못마땅한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내일이 공작의 재판이거늘, 내일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그놈을 누가 데려갔을는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후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리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울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아버지.”
“뭐?”
황당한 말에 후작이 순간 멍해졌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다는 듯 리제나는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인이 사라지기 전 수상한 자는 보지 못했느냐? 황실의 기사 같은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어떤 수상한
여자라던가.”
“여자? 폐하 말고 다른 짐작이 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후작은 황제가 하인을 데려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크로프트 공작의 팔다리는 이미 다 잘린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고 황제 말곤 그를 감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리제나는 달랐다.
크로프트 공작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레이몬드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엘리야 크로프트.
제국의 전 황후이자 6 년째 자취를 감춘 사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느 귀족들과 달리 그들 부녀 사이가 좋다는 건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해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이미 돌아왔음에도 밝히지 않는 걸 수도 있겠지.
기사는 리제나의 말에 미간을 좁히다 고개를 저었다.
“딱히 기사로 보이는 자들을 보진 못했습니다. 여자……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네가 그러니 그 하인을 놓친 것이겠지.”
“네……?”
차가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기사가 고개를 들었지만 리제나는 이미
후작에게로 몸을 돌린 뒤였다.
“아버지, 아무래도 내일 재판의 변수를 생각해 두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설령 그 하인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해도 우기면 그만이야. 모든 증거가 확실한
마당에 천것의 주장을 누가 믿겠느냐.”
리제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도 어리석은 것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점이 변한 게 없었다.
리제나는 처음부터 이번 일로 공작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계에서 멀어진 크로프트 공작과 황제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 여기는 듯했지만 레이몬드는 자기
사람을 그리 쉽게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일로 시오스 후작이 관련됐다는 의심만 샀을 것이다.
“아뇨. 아버지. 만약 내일 재판에서 억지를 쓴다면 우리를 믿고 따랐던 귀족들도 의구심을 품게 될
거에요.”
“…….”
“아버지는 이미 폐하께 신뢰를 잃으셨어요. 내일 재판에서 하인이 등장한다면 저흰 포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당할 거에요.”
53 화
<i>‘선을 넘지 말게.’</i>
* * *
* * *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각.
에그리타 제국의 모든 관심사는 황성의 뷔부르크 궁전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서 세간을 시끄럽게 만든 크로프트 공작의 횡령 사건의 재판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뷔부르크 궁전.
초대 황제가 귀족들과 황족들의 재판을 열기 위해 지은 궁전인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귀족들의
무덤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 궁전의 문이 열린 적은 수없이 많았다.
엄중한 제국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여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뷔부르크 궁전에서 작위를 잃고 사형을 선고받은 귀족들은 있어도 무죄를 받은 귀족은 없었다.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늘 열리는 재판도 다를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반정의 공신으로 추앙받던 크로프트 공작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수군거리던 귀족들은 기사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피고, 크로프트 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재판장이 일순 조용해지고 시선이 아래로 집중되었다.
막 재판장으로 들어서는 크로프트 공작이 보였다.
몹시 초췌하고 죄인의 모양새를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크로프트 공작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
보였다.
단정한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른 걸음걸이로 재판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고 흔들림 없어, 순간 그가 죄인이 아니라 재판장으로 이곳을 찾은 거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크로프트 공작은 변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재판관이 앉을 상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귀족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서.
“어쩜 저리 뻔뻔한 것인지.”
공작의 분위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압도되었던 귀족 중 누군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크로프트 공작을 비난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공작의 기에 눌렸던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들은 더욱 소리를 높여 비난을 퍼부었다.
재판장이 광장의 시장보다 더욱 시끄러워지던 찰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정숙하십시오. 신성한 재판장입니다. 그리고 아직 크로프트 공작은 죄인이 아닙니다.”
공작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오스 후작이었다.
귀족들은 시선이 일순 시오스 후작에게 쏠렸다. 공작을 벌하라고 귀족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던 후작이
태도를 바꾸자 귀족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 패기만 넘치는 한 영식이 후작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 죄가 이미 명백…….”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나?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공작 각하는 죄인이 아니네. 그리고 감히 일국의
공작 각하께 존칭이 그게 무엇인가.”
후작은 영식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눈빛을 했다. 영식은 무어라 말을 더하려 했으나 그의 아비가 팔목을
꾹 잡으며 끌어앉힌 탓에 입술만 불만스럽게 달싹일 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후작이 공작을 옹호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는 걸 다들 눈치챈 듯했다.
어딘지 이상하게 돌아가는 판국에 귀족들이 눈을 도르륵 굴리던 때 기사가 재판장의 입장을 알렸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재판장님 드십니다.”
54 화
귀족들은 물론이요 크로프트 공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2 층 재판관이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재판관의 모습에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파르앙 후작……!”
황궁에서 열린 귀족 재판은 사실 황제의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
하여 황제가 직접 재판관을 맡는 것이 맞았지만, 황제가 직접 재판을 진행하는 일은 없었다.
황제가 죄인을 직접 심판하는 것은 존귀한 위엄에 흠집을 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여 황제의 명을 받은 대리인이 재판을 진행했고 거의 재상이 재판관을 맡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황제가 날짜만 공표했을 뿐 재상에게 재판관의 자리를 일임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누가 재판관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숙덕였고, 황제가 직접 재판을 진행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자가 재판장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누군가 작게 후작의 이름을 부르고 귀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파르앙 후작이 재판관이라니…… 영지에서 나오시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중앙으로 부를 거면 차라리 죽여 시체를 불러들이라 황제 폐하께 대놓고 말한 자가 아닙니까. 이렇게
수도에서 보게 될 줄이야…….”
“파르앙 후작과 크로프트 공작 둘 다 반정의 공신이지 않습니까. 친분으로 재판을…….”
“파르앙 후작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지.”
파르앙 후작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젊은 귀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파르앙 후작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귀족들은 대나무보다 더 올곧은 그의 정직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러운 장내 속에서 시오스 후작과 리제나만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재판관석에 선 파르앙 후작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전 오늘 폐하의 명을 받아 크로프트 공작의 재판을 맡게 된 파르앙 제럴드입니다. 황제 폐하의 패를
지니고 막중한 임무를 맡은 만큼 주신께 우러러 한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을 내릴 것을 맹세합니다.”
순간 크로프트 공작과 파르앙 후작의 시선이 부딪혔다. 놀란 얼굴로 후작을 보던 공작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가벼운 묵례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진중한 분위기가 있었다.
소란스럽던 귀족들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지고 파르앙 후작이 자리에 앉았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엄숙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재판을 시작했다.
“그럼 크로프트 파이셀 공작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크로프트 공작은 사막 교역권과 관련하여 상단과
손을 잡고 국가의 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로 이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맞습니까, 공작.”
“……예, 맞습니다. 허나 전 상단과 손을 잡고 제국의 돈을 횡령한 적이 없습니다.”
공작의 죄를 부정하자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렴치한 인간!”
“제국의 손실이 얼마인데! 당장 모든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힐난의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보다 더 시끄럽게 바뀌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이성을 잃은 귀족들은 품위마저 잊어먹은 듯 공작을 향해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크로프트 공작이 혐의를 벗게 되어 자신들의 재산으로 4000 골드를 채우게 될까 봐 눈이 뒤집힌 것이었다.
그렇게 귀족들이 흥분해 가던 그때, 마차 한 대가 뷔부르크 궁전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귀족가의 문장은 없었지만 값비싼 상아로 만들어진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황성을 통과해 뷔부르크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마차가 도착한 순간 재판장으로 하인 하나가 급히 달려 들어갔다.
눈에 잘 띄는 붉은 셔츠를 입은 하인이 참관석으로 들어오자 공작의 변호사가 하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아수라장이 되는 장내를 도저히 참지 못한 파르앙 후작의 노성이 재판장을 크게 울렸다.
묵직한 목소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날카로워 조잡스러운 목소리들을 단번에 침묵하게 했다.
고요해진 재판장에 작은 숨을 내쉰 파르앙 후작은 크로프트 공작을 내려보았다.
“공작, 그대의 발언을 신뢰하기에는 조사단이 찾은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하군요. 이 모든 것에 반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대답은 크로프트 공작이 아닌 그의 변호사에게서 흘러나왔다.
공작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후작이 시선을 돌렸다.
이때까지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말하자 후작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랐다.
“증거가 있다, 이 말인가.”
“네.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증언해 줄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지금 어디 있는가.”
변호사는 대답 대신 재판장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파르앙 후작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하고 그 순간 재판장의 문이 열렸다.
* * *
55 화
56 화
“크로프트 영애.”
나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파르앙 후작이었다.
“파르앙 후작 각하.”
난 그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네. 저도 오늘 이렇게 후작 각하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후작은 멋쩍은 듯 웃음을 흘렸다.
“황제 폐하의 부탁도 있으셨고……. 제가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 빚이 있는지라.”
“그래도 쉬운 걸음이 아니셨음을 압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로프트 공작 각하의 재판만큼은 제가 맡고 싶었습니다.”
“조용히 살던 분을 괜히 귀찮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후작.”
아버지의 말에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이렇게 잠시 바깥바람을 쐬니 속도 시원해지고 좋았습니다. 덕분에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지 않았습니까.”
후작의 눈길이 슬쩍 돈 자루를 훑었다.
돈 자루를 무더기로 들고 와 이곳에 펼쳐 놓은 것은 귀족의 품위에 상당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겐 보란 듯이 당당했지만 파르앙 후작이 보니 조금 겸연쩍었다.
파르앙 후작은 아버지만큼이나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니.
난 머쓱함에 작은 헛기침을 뱉으며 말했다.
“큼, 제가 품위 없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듯이 오랜만에 속 시원한 광경을 보아 즐거웠습니다. 다들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볼 만하더군요.”
너털웃음을 짓던 후작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당당해지신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영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레이몬드의 한 걸음 뒤에 선 모습일 것이다.
“더는 누군가의 뒤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힘을 좀 길렀습니다.”
“잘됐군요. 힘이 있으시다면 앞으로도 쭉 크로프트 가문을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미소를 거둔 후작이 한걸음 아버지와 내게로 다가왔다.
“공작, 영애. 두 분 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이 일은 바르텐 백작의 소행이 아닐 것입니다. 그자는 이런
일을 꾸밀 만한 배포가 없지요. 분명…… 배후에 다른 이가 있을 겁니다.”
아버지와 나 모두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자는 크로프트 가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자가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들켰으니 어떻게든
목을 물려 덤빌 것입니다.”
시오스 후작가의 상징이 바로 사자였다.
파르앙 후작은 시오스 후작을 조심하라 말하고 있었다. 그 역시 바르텐 백작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걱정 마세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래요, 지금의 영애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 영애가 이리 번듯하게 자라 공작께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파르앙 후작은 언제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냐는 듯 긴 눈을 반으로 접으며 허허,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 이만 폐하께 재판의 결과를 알려드리러 가겠습니다. 아마 폐하께서 재판의 이야기를 듣고 꽤
놀라실 거 같아 기대됩니다.”
레이몬드.
그가 곧 내 소식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자 긴장감이 들었다.
찾아오겠지.
그렇게도 오랜 시간 날 찾고 있었으니 내가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냈단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와 우연히 그를 두 번이나 마주하긴 했지만 진짜 내 모습을 그를 본 적은 없었다.
엘리야 크로프트로 그의 앞에 서면…….
더는 그를 모른 척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또 뵙지요.”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난 그에게 반가움과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후작 각하.”
“오늘 고마웠네.”
“별말씀을.”
후작은 아버지에게 살짝 묵례한 뒤, 재판장을 먼저 나섰다.
“엘리야. 우리도 이만 가자꾸나.”
“네. 아버지.”
난 아버지의 여윈 손을 꼭 잡고 재판장을 나섰다.
* * *
황제의 집무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시종장이 답했다.
뷔부르크 궁전을 보며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선을 내렸다. 재판도 중요했지만 사실 지금 그는
재판장에만 온전히 신경이 가 있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본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내려다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급히 말을 달리며 들어오는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상단을 못 찾은 건가.”
레이몬드의 낮은 목소리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어젯밤 여자를 놓치고 그는 황궁으로 돌아와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여자가 엘리야일 것 같단 직감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원하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고, 작은 것이라도 얻기 위해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하여 그는 참고 견디는 것을 꽤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인내심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다.
황제고 뭐고 전부 다 던져 버리고 당장이라도 직접 제국의 있는 모든 상단을 뒤지고 뒤져 그녀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레이몬드는 미쳐버릴 거 같았다.
만약 그녀를 찾지 못하면, 이미 그녀가 도망을 가버렸다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던 그녀가 다시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불안감을 크게 뛰었다.
“하아…….”
레이몬드는 긴 숨을 내쉬며 치솟는 불안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엘리야를 만나기도 전에 미친놈이 될 순 없다. 적어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진 정신을 꽉 잡아야
했다.
그녀의 마음을 외면했던 그 시간을 사과하고 그녀의 하나뿐인 혈육인 크로프트 공작도 지켜야 했다.
그는 끝내 증인을 찾지 못했었다. 만약……. 그 하인을 엘리야가 데리고 간 것이 맞다면 공작이
무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재판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가 최악으로 나온다면 레이몬드는 어떻게든 처벌의 집행 날짜를 미룰 생각이었다.
그사이 어떻게든 다른 증거를 찾을 것이다.
안된다면 심증 뿐으로라도 시오스 후작을 몰아붙여 크로프트 가문은 살릴 계획이었다.
“폐하, 파르앙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파르앙 후작이 왔다는 것은 재판이 끝났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잠시 생각을 접으며 곧장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파르앙 후작이 들어왔다. 예를 갖추려는 그에게 레이몬드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후작 인사는 됐으니 재판의 결과부터 말하게.”
“재판의 결과는 무죄입니다.”
“……무죄?”
무죄가 나올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르텐 백작가의 하인, 그 하인이 증인으로 나타나야만 가능했다.
“네. 오늘 재판장에 의외의 인물이 증인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하여 공작 각하의 결백함이
밝혀졌습니다 폐하.”
파르앙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의외의 인물……?”
그 말을 들은 레이몬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 누구냐 묻고 싶었지만 혹 파르앙 후작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그녀가 아닐까 두려워 입을
떼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살면서 이토록 불안에 떤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손을 꽉 그러쥔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엘리야 크로프트. 크로프트 영애가 돌아왔습니다, 폐하.”
쿵.
그의 심장이 탁 멈추는 거 같았다.
엘리야가 맞았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꼭꼭 숨어 도망치던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기쁨과 그리움, 불안함과 초조함. 온갖 감정들이 격랑의 파도처럼 그를 덮쳐 숨조차 쉽게 내쉴 수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시종이 다급히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시종들이 다가와 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엘리야가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지금 바로 공작가로 갈 것이다.”
레이몬드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달려나갔다.
* * *
57 화
“칼라일은 어디 있는 거니?”
“아……. 칼라일은 안전한 곳에 헬란과 함께 있어요. 아까 보셨던 루몬트란 자가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엘리야.”
“네?”
“난 네가 제국을 다시 떠났으면 좋겠구나. 물론 너에게 피닉스 상단이란 힘이 있다곤 하지만…….
이곳에서 권력 싸움이 휘말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도 원래는 재판이 끝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재판의 결과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 혼자 시오스 후작을 감당하긴 힘들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해하려 할 테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그러다 칼라일의 존재가 들키면 어쩌려고.”
“들킨다 해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두었어요. 아버지 당분간은 제 걱정하지 마시고 몸부터 회복하세요.”
깊은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창밖을 보다 내게 말했다.
“……엘리야, 폐하께서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으셨을 것이다.”
“아마…… 곧 오시겠죠.”
지금쯤이면 파르앙 후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폐하께서 지난 7 년간 널 계속 찾으셨다. 그분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아버지는 이내 입을 다무셨다. 그리고 이내 말을 이으셨다.
“엘리야, 난 네가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구나.”
“그럴게요.”
근심이 가득한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미소를 그린 순간 창밖으로 성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흑마를 탄 남자가 저택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몬드.”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들은 레이몬드가 온 것이었다.
함께 나오겠다는 아버지에게 걱정 말라 미소를 지어 보인 난 저택의 로비로 혼자 내려왔다.
그리고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저택 앞에서 레이몬드의 흑마가 멈추었다.
몹시 다급한 듯 말에서 내린 그는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불안한 표정으로 달려들어 온 그는 나를 보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나 역시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돌아올 때만 해도 그를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불안했던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를 두 번 만났었지만, 그땐 너무 놀라고 들킬까 두려워 심장이 끝없이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그를 제대로 마주하니 오히려 심장은 고요해졌다.
제대로 마주치니 그간 살이 빠지고 조금 수척해진 것도 같았지만, 안쓰러움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난 이윽고 무릎을 굽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고저 없는 내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이윽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구둣발이 보였다.
“……일어나.”
난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검은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준 적 없던 불안이 뒤섞인 그리움이 느껴졌다.
언제나 저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던 건 나였는데,
“엘리야…….”
그답지 않은 감정을 이해하기도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한 그는 와락 날 끌어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애틋함이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그는 매달리듯 날 안았지만, 나는 그저 격한 그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주 안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리고 있던 난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매달렸던 것과 달리 쉽게 밀려난 그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하지만 난 무감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불쾌합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싸늘한 나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엘리야…….”
“폐하.”
난 그의 말을 잘랐다. 레이몬드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엔 짙은 그리움과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을 마침내 만난 환희가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으나 그는 나를 마주한 이 순간이 너무도 가슴 벅찬 듯했다.
6 년이나 날 찾았으니 그럴 만도 한가.
대체 왜 그가 날 6 년이나 찾은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내가 몹시도 반가운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정말 집요하게 날 찾았었다.
그럴 이유가 딱히 없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선을 긋는 나와 달리 그는 나를 편하게 대했었다.
마치 우리가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었고 지금의 재회도 가슴 벅차지 않았다. 그저 이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우연히 마주쳤던 그땐 너무 놀라 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수려한 얼굴과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6 년 전보다 훨씬 더 깊어지고 멋있어진 거 같았다.
과거엔 그의 잘생긴 얼굴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고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모든 게 불편할
뿐이었다.
특히 그가 나를 보는 집요한 눈빛이 제일 불편했다.
그리움과 뒤범벅이 된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검은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의 열망이 너무도 강해 그의
시선에 몸이 묶이는 것만 같았다.
날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강렬한 눈빛에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6 년 동안 그가 나를 찾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했던 적도 있었지만, 부질없는 생각들이라 지워버렸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문제일 뿐일 테니까.
난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방금 재판이 끝나고 돌아온 참입니다. 무척 긴장한 터라 몸이 몹시도 피곤합니다. 하여 중요히 할 말이
있으신 게 아니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떠한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나의 뜻을 알아들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상처를 받은 듯 그의 수려한 얼굴에 균열이 일었으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마음은 고요할 뿐이었다.
가만히 나를 보는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무엇이 두려운지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거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저런 표정과 눈빛으로 레이몬드의 눈치를 살피며 하고 싶었던 말을 참아야 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듯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흔들리던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피곤하겠지. 얼굴을 봤으니 이만 돌아갈게. 그리고…… 내일 궁으로 와.”
궁으로 오란 말에 난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당분간은 제국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동안 레이몬드와
엮이고 싶진 않았다.
거절의 말을 전하려 하자 그가 선수를 쳤다.
“오늘 재판에서 증인을 네가 데려왔었다지.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야겠어. 그리고 공작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으니까 궁으로 와.”
마음은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렇지가 못했다.
특히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멈칫하던 난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전 몸이 피곤하여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짙은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그를 마주하는 것이 더는 불편했다. 차라리 모습을 바꾸고 그를 마주하는
것이 더 편할 거 같았다.
냉혹하리만치 무심한 그 시선이 내겐 더 익숙했으니.
난 그가 떠나기도 전에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예법상 황제가 떠나기도 전에 먼저 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게 더는 무리였다.
혹 그가 날 잡을까 긴장했지만 레이몬드는 날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내가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언제나 그의 뒷모습을 봤던 그때처럼.
* * *
58 화
* * *
59 화
60 화
피닉스 상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으니 피닉스 상단주인 제드와 작은 인연이 있다고 소문을
낼 생각이었다.
상단주라고 밝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너무 많은 관심을 끌 것 같아 당분간은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자칫하단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질 수도 있었으니까.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아.”
그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모레쯤 제드 님이 제국에 도착하니 한번 공개적으로 만나시는 자리를 만들면 딱 되지
않겠습니까.”
“제드가 온다고?”
올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라 놀랐다.
그러자 루몬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드 님이 엘리 님이 걱정되시는지 제국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틀 전에 출발하신다는 서신을 받았으니
모레쯤 도착하실 겁니다.”
제국에 도착하고 편지 한 통이 없어 살짝 서운함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온다니 놀라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듬직한 아군이 와주는 기분이었다.
제드를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그리던 난 문득 재판장에서 본 남자를 떠올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언뜻 보였던 호박색 눈동자.
제레미.
어쩌면 그곳에서 본 이가 제레미일지도 모른다.
잠시 그를 생각하던 난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루몬트.”
“네?”
“사람 하나를 좀 찾아 봐줘.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제레미란 이름을 가진 남자. 그가 지금
에그리타 제국에 있는지 알아봐 줘.”
그가 정말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그에게 받은 도움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나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숨기고 사는 남자였으니까.
“찾으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주게. 난 이만 가 봐야겠어.”
짧은 용건들만 말하였는데도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경비대들이 순찰을 할
시간이었으니 서둘러야 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난 루몬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빠른 걸음을 집무실을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뜬 난 아버지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치장을 시작했다.
머리를 예쁘게 땋아 핀으로 고정한 헤리스가 내게 보석함을 가지고 왔다.
“아가씨, 장신구는 좀 더 화려한 것으로 할까요?”
“드레스가 수수하니 그게 좋겠어.”
허리선을 강조하며 아래로 늘어지는 엠파이어라인의 짙은 보랏빛 드레스는 큰 레이스 장식이 없는 수수한
디자인이었다.
황궁으로 가는 차림이라기엔 조금 평범한 감이 있었지만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레이몬드를 만나기 때문에 신경 써서 꾸미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 레이몬드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눈이 있었다.
어제는 재판장으로 가는 길이라 최대한 장신구를 자제하고 갔지만 오늘은 아니다.
어제 큰돈으로 드러내긴 했지만 크로프트 공작가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욱 차림에
신경을 써야 했다.
한번 흔들렸던 귀족 가문은 대부분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아가씨, 치장이 다 되었습니다.”
굵은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를 채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치장이 끝났다.
난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보다 하녀들에게 은화을 하나씩 쥐여 주었다.
은화를 하나씩 받아든 하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의 한 달 월급이 1 실버였으니 놀랄 만했다.
하녀들은 이것을 받아도 되는 건지 불안한 눈빛으로 하녀장의 눈치를 살폈다.
난 하녀들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 그만 나가보렴.”
수고비치고는 상당히 많은 금액이지만, 일부러 준 것이었다.
모든 귀족가의 소문은 원래 아랫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나는 것.
어제 밀린 월급을 한 번에, 거기다 보너스까지 더해 지급했다. 이렇게 수고비까지 후하게 받았으니
하녀들은 말을 빠르게 옮길 것이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력에는 조금의 타격도 없다고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헤리스가 아무런 말을 않자 환하게 웃은 하녀들은 곧 방을 나갔다.
“헤리스. 집사에게도 말했지만, 사용인들을 더 뽑을 거야. 나간 사람들이 많아 일손이 부족하니까.
집사랑 같이 쓸만한 하녀들을 뽑아 줘.”
“네. 아가씨.”
“그리고…… 당분간은 하녀들의 입단속을 너무 철저히 하지 마.”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헤리스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곧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
난 챙이 넓은 연보랏빛 모자를 쓰고 방을 나갔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문을 열어주었다. 난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에그리타 제국의 본궁,
6 년 만에 다시 보는 커다란 황궁 은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장 큰 직사각형 모양의 새하얀 벽돌로 쌓아진 본채와 양옆으로 세워진 별채 궁전.
그 앞으로 넓은 정원과 중앙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본궁의 정원엔 여전히 레이몬드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붉은 장미꽃이 피어있었다.
장미가 피는 이맘때쯤이면 레이몬드와 정원을 거닐곤 했었다.
* * *
61 화
62 화
* * *
* * *
“아가씨.”
저택에 도착하자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하르펜이 로비에 서 있었다.
“하르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근심이 많아 보이는 표정에 얼굴을 굳히자 하르펜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각하께서 업무에 복귀하시겠다며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한동안은 쉬셔야 한다고 말씀을 올렸지만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십니다.”
아침 식사에서 은근하게 밀린 일들을 물으셨을 때 설마 했었는데 진짜 집무실로 출근하실 줄이야.
난 하르펜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못 말리는 일중독이셨다.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는 거야?”
“네. 계속 서류를 보고 계십니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아가씨께서 좀 말려주십시오.”
하르펜은 물론이고 집사와 하녀장도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걱정 마. 내가 해결할게.”
옅은 미소를 지은 난 집사에게 모자를 건네곤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아버지 저예요.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하르펜의 말대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황궁에 잘 다녀왔느냐.”
“네. 잘 다녀왔어요. 그보다 아버지 제가 아침에도 말씀드렸잖아요. 당분간은 제가 공작가의 일을
처리하겠다고요. 설마…… 절 못 믿으셔서 이렇게 나오신 건가요?”
난 서운한 척 눈꼬리를 내리뜨렸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가 당연히 잘할 것임을 알지만 밀린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 무리를 할까 싶어…
….”
“걱정 마세요. 무리하지 않고 잘할게요.”
난 책상으로 다가갔다.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자 포기의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내게 서류를 넘겼다.
63 화
[명일 시오스 후작가에서 봄을 맞은 티파티를 개최합니다. 크로프트 영애께서도 시간이 되신다면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랍니다.
<right>-시오스 리제나]</right>
64 화
톡톡-
갈지 말지 고민되는 선택에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티파티나 파티는 최소 3 일 전에 초대장을 보내는 게 예의였으니 갑작스러운 초대에 시간이 나지 않을 거
같다 하면 쉽게 거절할 순 있었다.
근데 그럼 꼭 내가 피하는 것 같잖아.
리제나가 불편하긴 했지만 무서운 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다 문득 집무실에 쌓인 신문들에 시선이 멈추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무죄에 대한 기사들이 실린 신문들이었다.
그들은 크로프트 공작에 대해서만 보도했을 뿐, 엄청난 돈을 기부한 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티파티…….”
시오스 후작가의 티파티에는 분명 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모일 것이다.
난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난 새하얀 편지지에 빠르게 답장을 적었다.
* * *
해가 어스름히 지던 시각.
에그리타 제국 수도와 가까운 항구에 룬트 왕국에서 도착한 배가 정박했다.
우르르 내리는 많은 사람 중에 섞인 제드는 찌뿌둥한 몸에 기지개를 크게 켜며 입을 쩍 벌렸다.
“오늘은 일단 술이나 좀 마실까.”
어차피 곧 상단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으니까.
하품을 시원하게 내뿜은 제드는 느긋하게 배에서 내리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제드의 눈이 커졌다.
“뭐야,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제드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제레미에게 물었다. 노을 지는 햇빛 아래 반짝이는 백금발을 쓸어넘긴
제레미가 해사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왜 여기 있냐니. 제국으로 간다고 했었잖아.”
“아니 그거야 알고 있었지. 내 말은 내가 오늘 오는 걸 어떻게 알고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내가 떠날 때 언제 룬트 왕국에서 출발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기억 안 나?”
그날 제레미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술을 진탕 마셨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기는커녕 집까지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곱상하게 생긴 거랑 달리 술은 더럽게 센 제레미는 다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기억 안 나. 뭐 얘기했다 치고 그래서 일부러 마중 나온 거냐?”
“응. 너 에그리타 제국은 처음이잖아. 그래서 친구인 내가 이렇게 마중을 나온 거지.”
제레미가 씨익 미소를 짓자 제드는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내가 아주 술맛 좋은 곳을 알아.”
“그래? 그럼 가야지.”
제드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제레미의 곁으로 붙었다. 술에 죽고 술에 웃는 제드다운 모습에 피식 웃은
제레미는 그와 함께 항구를 벗어났다.
밤이 깊어진 수도의 술집은 난장 판과 다름없었다.
벌써 한판 붙은 용병들도 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한복판을 지나면 상대적으로 소란과는 조금 먼 구석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드와 제레미가 앉아 있었다.
제레미는 벌써 몇 병째 일지 모를 술병을 비우는 제드를 보다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깊어진 밤하늘엔 커다란 만월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을 보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 먹은 술병을 던지듯 바닥으로 떨군 제드는 은빛 달을 보고 있는 제레미를 보았다.
흐려진 호박색 눈동자는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거 같았다.
저놈이 저런 눈빛을 하게 만드는 건 한사람뿐이다.
“너 엘리 생각하고 있지?”
제드의 걸걸한 목소리에 제레미는 시선을 내렸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불가항력이라서 말야.”
“밸도 없는 놈. 여기까지 와서 엘리를 만나지도 못했지? 그러고선 이렇게 뒤에서 그리워하고 있냐.”
“그러게.”
제드는 실실 웃기만 하는 제레미를 보고 인상을 팍 구겼다.
“야. 불가항력일 정도로 포기가 안 되면 차라리 엉겨 붙기라도 해. 너 그렇게 배짱 없는 놈 아니잖아.”
부딪혀서 깨지면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아나, 제레미와 엘리가 잘될 수도.
제드는 술기운에 생각했다.
“그 사람 앞에선 그런 배짱 같은 거 없어.”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제드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본론을 언제 꺼낼 거냐.”
제드는 제레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마중 나온 게 아니란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제레미를 봐온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제레미는 나쁜 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중을 나오는
그런 섬세한 배려를 하는 놈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바람처럼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제드가 어서 말하라는 듯 턱짓을 하자 제레미의 호박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눈치 빠르긴, 너한테 따로 부탁할 게 있어서 미리 보자고 했어.”
“네 부탁이라면…… 당연히 엘리가 관계되어 있는 일이겠지. 뭔데.”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해 뒷조사를 해줘.”
“드로이트 공작가?”
제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름 들어본 거 같은데……. 아, 그 에그리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가 아닌가? 초대 황제 때부터
명맥이 이어져 온 명문가 맞지?”
“……맞아. 뭐 그것도 옛말이지만.”
제레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제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엘리만큼이나 비밀이 많은 놈이었다.
“흠. 갑자기 그 가문은 왜? 네 말대로 현 황제가 황좌에 앉은 이후 권력을 잃었잖아.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가문 아닌가?”
“맞아. 그런데 움직임이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말이야. 시오스 후작가와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해서 깊이
알아봐 줘. 엘리에겐…… 당분간 말하지 말고.”
제드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가까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오스 후작이 나온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루몬트에게 상황 보고를 받고 있었기에 이번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에 시오스 후작이 연루된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엘리에게 비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레미.”
“응.”
“내가 너와의 사이를 엘리에게 비밀로 해 준 건 엘리에게 어떠한 피해도 있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와의 세월이 오래되긴 했지만 엘리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동업자야.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난 엘리야.”
제드의 갈색 눈동자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술이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했으니까.
제레미는 그런 제드를 보며 당황하는 게 아니라 미소를 그렸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지. 제드 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갑자기 딴 얘기를 하는 제레미에게 성을 내려던 때 제레미가 말했다.
“내 성은 드로이트야.”
“……뭐?”
제드는 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 멍 청한 얼굴을 했다.
“드로이트 프로이스……. 그 사람이 나의 아버지고 내가 그의 아들이라고.”
신분이 귀족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까지 상상하진 못했었다.
엘리야가 전 황후 폐하였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실에 제드의 얼굴이 벙졌다.
대체 내 주위 사람들의 신분이 다 왜 이런 거야.
제레미는 별 감흥도 없는 얼굴로 제드의 벌어진 입을 닫아 주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제드는 제레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그럼 폴리모프 마법으로 지금 모습을 바꾼 거야?”
드로이트 공작가에 대하여 많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공작가의 유명한 특징은 알고 있었다.
드로이트 공작가는 위대한 마검사였던 초대 황제의 축복을 받아 후손 들에게 황족의 상징인 검은 빛이
하나씩은 이어진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제레미의 모습은 백금발의 호박색 눈동자. 검은색이라 곤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제드를 향해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이게 진짜 내 모습 맞아. 내가 공작가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거든.”
“……넌 무슨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냐.”
“울면서 할 나이는 지났잖아. 그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제레미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정말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가가 관련 있는 거라면…… 심상치 않은 일일 테니까. 드로이트
때문에 엘리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그래. 정확한 증거를 찾고 말할 거야.”
“그렇지만…….”
제드는 갈등이 되는지 복잡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부탁할게, 제드. 이것도 결국 엘리를 위한 일이야.”
제레미는 흔들리는 그에게 미소마저 지우고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휴…… 알았다. 대신 네 상황이 심각해지면 엘리에게 알릴 거다.”
“……알았어.”
엘리를 위험하게 만들 놈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제드는 간절해 보이는 제레미의 뜻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은 더욱 깊어갔다.
65 화
다음 날.
이른 시간부터 집무실에 출근해 서류를 보고 있던 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가 넘었을 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집사입니다.”
“들어와.”
난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이제 티파티에 가셔야 할 시간이 다 되셨습니다.”
“뭐?”
집사의 말에 난 고개를 번쩍 들고 시계를 보았다.
“시간 정말 빠르네.”
마음 같아선 밀린 일들이나 처리하고 있고 싶었지만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간다는 답장까지 보내고 지금 와서 빠지면 티파티가 두려워 도망친 꼴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제나가 초대한 것인데 도망치는 꼴이 될 순 없다.
“마차는 이미 대기 중입니다.”
“알겠어. 이것만 마무리하고 일어날게.”
난 영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확인하고 공작가의 인장을 찍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사가 집무실 한편에
있던 전신거울을 가지고 왔다.
거울 앞에서 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하녀들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아침에 미리 치장을 하고 있어 하녀를 다시 부를 필요까진 없었다.
연보랏빛 새틴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굵게 말아 풀어 내린 난 평소보다 조금 앳돼 보였지만 봄의
티파티에는 딱 어울렸다.
아침 먹고 바로 집무실로 와 서류만 보고 있어서인지 특별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이만하면 됐어. 나가자.”
살짝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편 난 집사가 내미는 손가방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난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음에도 기분은 상쾌하지 못했다.
“이곳에 또 올 줄이야.”
후작가에 방문했던 기억 중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과거의 불쾌한 기억들이 떠올라 인상을 구기던 난 예전보다 커진 후작가 저택의 전경에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왔었던 에드먼드의 생일파티 때만 해도 큰 본채 하나에 별채 하나가 전부였다.
한데 그사이 본채 오른쪽으로 큰 별채 두 개가 더 생겨있었다.
귀족가의 저택들은 그 가문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권력이 높아지고 부가 커질수록 당연히 저택의 크기도 커지고 정원도 화려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원도 커진 거 같네.”
작은 분수대와 제비꽃이 피어 있던 정원은 화려한 작약으로 바뀌고 분수대도 커져 있었다.
거리가 꽤 있음에도 정원 중앙의 분수대가 보일 정도였다.
양동이에서 물을 붓는 천사의 조각상 역시 남다른 솜씨를 가진 조각가의 작품 같았다.
거기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용인들의 수는 얼핏 보아도 공작가의 배는 넘었다.
내가 제국에 머물 때만 해도 시오스 가문의 재력이 이렇게 크진 않았다.
재상이 되며 세력이 커졌다.
보고서엔 그리 한 줄로 적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해진 후작가의 전경을 보자 문득 한때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한 가문이 떠올랐다.
“드로이트 공작가.”
에그리타 제국의 건국 공신이자 가장 오래 권력을 잡았던 드로이트 공작가.
공작가의 위세가 제일 높았을 적엔 제국의 실질적인 황제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비록 모두 과거의 이야기긴 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남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지만 난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중요한 건 드로이트 공작가가 아니었으니까.
‘시오스 후작을 상대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내가 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너무 커져 있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던 그때 하녀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크로프트 영애. 아가씨께서 화원으로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알겠다.”
차가운 시선으로 전경을 훑은 난 이윽고 하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향했다.
큰 저택의 뒤편으로 돔으로 지어진 큰 온실 화원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아름다운 꽃이 필 듯한 온실 안의 온도가 따스했다.
따스한 온도 아래 어여쁜 튤립들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튤립들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에 들어서자 달큰한 향기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드럽게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똑바로 차린 난 큰 가제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길을 안내한 하녀가 물러가자 가제보 아래 펼쳐진 동그란 테이블과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마지막 손님인 듯 이미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오늘 티파티의 주최자인 리제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크로프트 영애.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금발을 우아하게 땋아 올리고 허리선이 강조되는 연분홍 엠파이어형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화원에 핀 튤립
한 송이처럼 아름다웠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답니다.”
“갑작스럽게 초대해 기분이 나쁘시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좋게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죠. 영애.”
리제나는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본 나는 멈칫했다.
그녀가 권한 자리는 자신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족가에서 열리는 티파티는 순수하게 수다를 떨고 즐기기 위해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다.
보통 티파티를 여는 가문들은 고위 귀족이었기에 사실상 친목을 빙자해 인맥을 쌓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자리 선정 하나하나에도 의도가 담겨 있었다.
주최자는 자신의 옆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앉힌다.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되는 사람 말이다.
나와 리제나의 관계는 당연히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레이몬드와 내가 이혼한 이유에 리제나가 있었으니까.
또한 난 그녀의 아랫사람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은 내가 공작가의 영애이니 리제나가 나를 배려해 가장 좋은 자리를 주었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허울 좋은 거짓말일 뿐이다.
보통 자신과 동급이거나 더 높은 귀족이 티파티에 참석할 땐 일부러 옆자리가 아닌 같은 테이블의 다른
자리를 주었으니까.
딱 정해놓은 룰은 아니었지만 티파티의 오랜 관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런다는 건 일부러 했다는 건데…….
난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막 소녀의 티를 벗은 듯한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어서 앉으시지요. 저희 모두 영애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난 앞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을 풀어 내린 앳된 영애의 눈동자를 본 순간 난 그녀가 누구일지
알아차렸다.
“비스테인 백작가의 영애인가 보군요.”
비스테인 백작가의 안주인은 시오스 후작의 동생이었다. 하여 눈앞의 영애는 리제나와 똑 닮은 녹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닮진 않았지만 언뜻 보면 리제나와 닮은 듯도 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도도하게 턱을 들며 나를 보았다.
“네, 맞습니다. 일면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일면식이 없긴 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나보다 많이 어렸다. 내가 황후였던 시절에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새침한 표정을 나를 보는 비스테인 영애에게서 오만함이 느껴졌다.
그 표정을 보니 리제나가 일부러 옆자리를 마련한 것이 맞는 거 같았다.
고작 저렇게 어린 영애도 이 자리의 의미를 알고 나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난 비스테인 영애를 보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6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난 일국의 황후였던 사람이다.
사교계의 가장 윗사람으로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했었다. 그런 내게 비스테인 영애는 손톱만큼의
위협도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제 딴엔 나름 나에게서 우위를 선점하려 발톱을 세운 거 같았지만 내 눈엔 그저 아기 고양이가 작은
발톱을 드러내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절 비웃은 건가요? 크로프트 영애 초면에 너무 예의가 없으신 거 같습니다.”
나의 웃음이 실소라는 건 느꼈는지 비스테인 영애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비스테인 백작 부인이 몇 번의 유산 끝에 겨우 얻은 딸이라 그리 애지중지했다더니 철부지로 컸군.
난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영애. 영애의 말대로 저희는 초면입니다. 초면에 가문과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인사말 한번 없이 제게
앉으라 말라 하는 것은 예의가 있는 건가요?”
난 입꼬리를 내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응시했다.
나의 정색에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전…… 그게…….”
“전 순간 영애께서 너무 편히 말씀하시길래 제가 영애의 아랫사람인 줄 알았지 뭡니까.”
나는 일부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비스테인 백작가와 크로프트 공작가가…… 비교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데 말입니다.”
변경백도 아닌 백작가 따위가 감히 공작가에 견줄 수 있을까.
난 무어라 반박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는 비스테인 영애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리제나가 말했다.
66 화
67 화
난 눈썹을 모으며 동정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화르륵 또 얼굴이 붉어진 영애가 입을 열려 했지만
내가 먼저였다.
“하긴, 비스테인 백작가의 이름은 저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군요. 영애를 처음 봤을 때도 리제나
영애와 닮은 눈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치려는 비스테인 영애에게서 고개를 돌린 난 샐린느 영애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사정이 어려움에도 이렇게 선물을 가져오시다니 그 정성이 정말 남다른 듯합니다. 독특한 향수라는 것도
상당히 흥미가 가고요. 안 그렇습니까. 리제나 영애.”
나는 비스테인 영애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리제나를 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자 리제나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네요. 샐린느 영애. 이 향수는 꼭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영애.”
샐린느 영애는 지친 얼굴로 그만 시선을 낮추었다.
물 흐르듯 흘러 가버린 상황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비스테인 영애의 분노 서린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난 은근하게 바랐다. 비스테인 영애가 참지 못하고 내게 소리를 질러 주기를 말이다.
그럼 그 명분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 멍청한 것은 아닌지 비스테인 영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리제나를 힐긋 보곤 부채를 촤악 폈을 뿐이었다.
그리곤 분을 삭이려는 듯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물러나 아쉬울 정도였다.
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제나 영애 저 역시 작지만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난 리제나에게 작은 벨벳 보석상자를 내밀었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영애.”
상자를 받아든 그녀가 하녀에게 넘기려 할 때 내가 말했다.
“영애의 취향을 몰라 제 취향으로 고르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열어보시겠어요?”
모두에게 보여주려 준비한 선물인데 그렇게 넘겨버리면 안 되지.
상자를 넘기려던 리제나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녹안이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녹안 속에 숨겨진 감정이 일렁였다. 리제나는 곧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럴까요.”
리제나는 벨벳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이윽고 목걸이를 본 리제나의 녹안이 커졌다. 그녀는
감탄을 흘리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예쁘네요. 영애.”
“블루다이아몬드를 세공해 박은 목걸이랍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블루다이아몬드라고요?”
부채를 펴고 열을 식히고 있던 비스테인 영애가 놀라 소리쳤다.
그새 분노가 식은 건지 그녀는 리제나가 들고 있는 상자로 고개를 홱 돌렸다.
블루다이아몬드를 탐욕스런 눈빛으로 보던 비스테인 영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가늘어진 시선으로 나를
훑으며 말했다.
“근데 저거 진품 맞는 건가요? 채굴되는 다이아의 숫자 자체가 워낙 작아 돈이 있어도 아무나 살 수
없다고 하던데요.”
비스테인 영애가 철없는 살쾡이긴 했지만 지금의 의심은 나름 합당했다.
블루다이아는 룬트 왕국의 광산에서만 나오는 광물이었다. 다른 다이아와 달리 채굴되는 양이 아주 작기에
유통되는 보석의 가격도 어마어마했고 재력이 있다 해도 몇 년을 대기해야 겨우 구매할 수 있었다.
하여 평범한 다이아에 색을 입힌 가품도 많았다. 실제로 가품을 사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뭐 어쨌든 다이아긴 했으니까.
비스테인 영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진품이라 믿긴 힘든 눈치였다.
난 비스테인 영애를 보며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제가 어찌 선물을 가품으로 하겠습니까.”
“그럼 정말 진품이란 건가요?”
비스테인 영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그렸다.
“네. 원하신다면 룬트 왕국에서 받은 진품서를 보여드릴 수도 있답니다.”
진품서까지 나오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저게 진짜…….”
“네. 구하기 어려운 보석이지만…… 제가 피닉스 상단과 연이 깊어 조금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답니다.
오랜만에 제국으로 돌아와 처음 참석하는 티파티이니 초대해 주신 영애께 특별한 선물을 드리고
싶었답니다.”
비스테인 영애의 눈이 놀람을 넘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값도 값이지만 구하기가 워낙 어려우니 고위 귀족이라도 일평생 블루다이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 귀한 보석을 고작 티파티 선물로 가져왔으니 다들 경악스러울 거다.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블루다이아를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닉스 상단의 본점이 바로 룬트 왕국이었으니까.
그리고 피닉스 상단은 룬트 왕국의 다이아 광산 몇 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블루다이아 광산이었다.
하여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엄청나게 비싸게 팔 수 있는 보석을 선물로 주는 것이 좀 아깝다며 루몬트가 울상을 짓긴 했었지만
이만한 선물이 없었다.
공작가와 나의 재력을 드러내기엔.
“그러고 보니…… 크로프트 영애께서 제국에 4 천 골드를 기부하셨지 않았습니까.”
리제나가 앉은 곳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이름 모를 귀부인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이야기를 꺼냈다.
“맞네요. 그러고 보니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다고 들었어요.”
“저도 들었어요. 그렇게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다니…… 전 그 돈이 상상도 되지 않아요.”
그랬다. 4 천 골드에 대한 이야기가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란 나의 예상과 달리 재판 이후 신문들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크로프트 공작의 무죄에 대해서는 기사들이 나왔지만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부한 돈에 대해선 기사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로 치부하듯 말이다.
그리고 귀족들 역시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루몬트의 말론 하급 귀족들 사이에선 나에 대한 감탄이 줄을 이었지만 고위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했다.
누구도 루몬트 상단에 나와의 연관성을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건 마치 나에 대해 누가 함구령이라도 내린 모양새 같았다.
그래서 오늘 티파티에 귀족 여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보석인, 블루다이아를 들고 온 것이었다.
시오스 후작의 눈치가 보여 귀족들이 기부금에 대해 입을 다물었었다 해도 블루다이아를 직접 본 여자들의
소문을 막을 순 없을 테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제국 제일의 가문인 크로프트 공작가다워요.”
“큼.”
누군가 선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비스테인 영애가 경악으로 물들었던 표정을 새침하게 바꾸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작은 기침이 조용히 하란 신호임을 읽은 영애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조용해졌을 때, 리제나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크로프트 영애께서 제국을 위해 큰 힘을 써주었지요. 저도 그날 재판장에 있어 영애께서 큰
금액을 선뜻 기부하시는 걸 보았답니다. 너무 늦었지만 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영애께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이렇게 큰일을 해 주셨는데 폐하께서는 바쁘신 모양인지 공식적인 치하 말씀도 없으시고……. 영애께서
많이 서운하실 것 같습니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리제나의 목소리에 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리제나는 마치 레이몬드가 나의 공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
거기다 마치 그녀가 레이몬드의 심중을 다 알고 있는 거처럼 말했다.
사사로운 황제의 의중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레이몬드와 리제나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가깝다고 다들 느낀 듯 나를 보는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리제나와 레이몬드 그리고 나.
우리 셋의 관계는 제국에서 영원히 식지 않을 가십거리였다.
리제나가 황제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영애들은 물론이고 하녀들까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레이몬드를 두고 우리가 언쟁이라도 벌인다면 꽤 볼만한 광경이 펼쳐질 테니까.
은근히 그런 광경을 바라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리제나는 실제로 레이몬드의 의중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언쟁을 할 가치도 없었다.
보통 귀족이 큰 금액을 제국을 위해 기부하거나 재산을 바쳤을 경우에 황제가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여 리제나는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않는 레이몬드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레이몬드가 지금 내게 따로 인사 치레를 하지 않는 건 곧 황제의 이름으로 공식 발표를 하기 위함이었다.
비공식적인 말 한마디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황제의 이름을 건 선물이었다.
난 상처받은 눈빛이 아니라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리제나는 나의 눈빛에 위화감을 느낀 듯 녹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저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답니다. 이번 일을 작은 인사 치레로 넘기기엔 너무도 큰일이니
폐하께서 공식적인 발표로 공작가의 무죄와 저에 대한 치하를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황실에서 공식 발표를 한단 말입니까?”
나의 옆에 앉은 영애가 놀란 목소리로 물어왔다. 난 크게 흔들리는 녹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 답했다.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며칠 안으로 공식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쐐기를 박듯이.
68 화
리제나의 입가에 가면처럼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은 그녀가 이때까지 숨겨온
진짜 얼굴 같았다.
난 확신했다.
리제나는 나를 싫어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아래 숨겨진 적의는 살기를 띤 듯 강렬했다.
당신은 대체 왜 날 싫어하는 걸까.
아니, 대체 언제부터 날 싫어한 걸까.
돌이켜 보면 그녀가 제국에 돌아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졌다는 듯이 스스로 먼저 모든 걸 내려놓았는데 대체 왜.
나를 향해 눈을 번뜩이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폐하께서 영애를 챙기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큰 치하를 하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이리 크로프트 공작가를 신경 써 주시니 저로서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랍니다.”
난 짙은 미소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티파티의 분위기는 처음과 달리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들어올 때만 해도 나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건만 지금은 호의와 선망 어린 시선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주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바뀌고 티파티장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찻잔을 내리니 나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비스테인 영애가 보였다.
뭐 저리 쳐다본다 해도 내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이젠 좀 귀여워 보이려고도 했다.
피식 웃자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정말 쉽게 발끈하네.
그때 정원으로 들어온 하인이 급히 리제나에게 다가갔다. 다급해 보이는 하인의 얼굴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무슨 일이냐.”
“아가씨, 방금 황궁에서 전갈이 왔사온데 1 황자 전하께서 대련 도중 부상을 당하셨다 합니다.”
“뭐!?”
리제나는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상 온화하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두려움이 스쳤다.
“오늘 티파티는 이만 마무리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파티를 종료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속사포로 말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화원을 나갔다.
리제나 답지 않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에 다들 걱정스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 역시 걱정스러웠다.
우리 사이가 어떻든 나도 자식이 있는 엄마였으니까.
“에드먼드 황자께서 부상을 당하셨다니…….”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유일한 황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유일한 황자…….
그 말에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찮으실 겁니다. 허니 모두들 걱정 마세요. 폐하께서 에드먼드 황자 전하를 얼마나 아끼시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유능한 황궁의들이 몇 명이나 붙을 텐데 부상 따위는 금방 나으시겠죠.”
내게 하는 말인 듯 비스테인 영애는 나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리제나에겐 에드먼드가 있으니 황제의 특별한 치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 이건가.
너무도 속 보이는 말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목을 죄는 리제나를 상대하다 보니 비스테인 영애는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황제의 관심은 잠시 이용하는 것일 뿐 바라지도 바랄 일도 없을 것이다.
“전 일이 많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또 뵙지요.”
난 비스테인 영애에게 미소를 지어주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화원을 나갔다.
* * *
69 화
* * *
70 화
“칼라일 님께서 어제부터 제드와 노느라 저도 잘 안 본다니까요? 이러다 나중에 저보다 제드를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칼라일 님이 제드와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어요.”
곁으로 다가온 헬란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나도 칼라일이 제드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드와 칼라일의 첫 만남을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발전이긴 했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칼라일은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 제드를 엄청 무서워했으니까.
제드를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래서 한동안 제드가 칼라일과 친해지려 온갖 짓을 다 했었다.
선물 공세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 탈을 쓰고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칼라일의 선택은 선물도 인형 탈도 아닌 바로 저렇게 몸으로 놀아 주는 것이었지.
제드와 한 번 격하게 뛰어논 뒤, 칼라일은 제드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아마 제드는 칼라일에게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아빠로서의 일부분을 채워 주고 있는 듯했다.
레이몬드가 곁에 있었다면…….
순간 제드의 위로 레이몬드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그와 칼라일이 함께 웃으며 노는 모습. 한때 내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71 화
* * *
72 화
* * *
* * *
73 화
74 화
75 화
<i>‘이 꽃 널 닮았어.’</i>
그 말을 기억하고 하는 말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난 그에게 ‘소중한’이란 단어가 붙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 흘리듯 했을 그 말을 그가 기억할 리도 없겠지.
“그러셨군요. 그럼 전 이만.”
묵례와 함께 떠나려 하자 그가 팔을 붙잡았다.
자꾸만 나를 막는 그의 행동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그가 바로 손을 뗐다.
“이대로 가려고?”
“제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가요?”
“내가 구해 줬잖아.”
그래서 뭐……?
난 조금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안 바뀌며 말을 이었다.
“큰일 날뻔한 상황에서 내가 목숨을 구해 준 거나 다름없는데 고맙단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목숨을 구해 줬다는 부분이 상당히 어이가 없었다.
조금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내 나름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분을 드러냈다면 그들이 나를 함부로 할 순 없었으니까.
그에게 그 부분을 반박하려 입을 열었지만 레이몬드가 더 빨랐다.
“내게 답례로 저걸 사.”
그가 어딘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꼬치를 팔고 있는 가판대가 보였다.
“……저걸 드시고 싶다고요?”
“그래.”
그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레이몬드가 저런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그와 오랜 시간을 알았지만 한 번도 길거리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적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이런 야시장에 나와본 적도 없다는 게 먼저긴 했지만.
꼬치를 보고 잠시 멍해졌던 그때 레이몬드가 내게서 성큼 다가왔다.
멀어지기도 전에 그는 향로가 든 상자를 가져갔다.
“제가 들 수 있습니다.”
“알아. 그리고 도와주는 거 아니니 착각마. 담보야. 보답할 때까지 도망 못 가게 하는 담보.”
어처구니가 없어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은 그는 먼저 상점으로 걸어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가 버리기도 이상해져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난 그를 따라갔다.
“달콤한 맛과 매콤한 맛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거로 드릴까요?”
“달콤한 맛 두 개.”
레이몬드는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가 이런 꼬치를 두 개나 먹을 만큼 좋아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의외라고 생각하던 때 레이몬드가 꼬치
한 개를 내게 내밀었다.
“자. 네 거야.”
“…….”
“생각보다 먹을 만해. 달콤한 거라 맵지도 않을 거고.”
설마 나 때문에 달콤한 맛으로 산 건가.
그는 나와 달리 매운 음식을 잘 먹었다. 그에 비해 난 매운 걸 아예 못 먹었다.
조금만 매워도 속이 뒤집히곤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걸 알았던가.
한 번도 내가 못 먹는 음식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길거리 음식이라 좀 불편한가…….”
내가 말이 없자 싫어한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꼬치를 뒤로 물리려 했다. 난 뺏듯 그의 손에서 꼬치를
가져왔다.
“안 불편해요.”
길거리 음식을 즐겨 먹진 않았지만 다른 귀족들처럼 더럽게 여기진 않았다.
룬트 왕국에 살 때 칼라일과 시장에 나갈 때면 항상 거리 음식을 사 먹곤 했으니까.
꼬치를 베어 물자 달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오히려 길거리 음식보다 갑자기 옛날로 돌아간 듯한 이 상황과 레이몬드가 훨씬 불편했다.
“5 쿠퍼입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레이몬드는 내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은화를 상인에게 건넸다.
“제가 내기로 했는데요.”
그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앞장섰다.
“생각이 바뀌었어. 이걸 보답으로 받기엔 너무 싸잖아. 다른 걸 사.”
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거지.
혼란스러워 멍하니 서 있자 레이몬드가 고개를 돌렸다.
“뭐해. 어서 오지 않고.”
76 화
* * *
다음 날.
푸른 여명이 하늘을 뒤덮은 이른 새벽 아침.
드로이트 공작가의 성문이 열렸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말을 탄 기사였다. 공작의 명을 받고 성을 빠져나온 그는 어디론가 말을 몰아
사라졌다.
그리고 기사가 사라지자 공작가의 성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다시 굳게 걸어 잠겼다.
잠이 덜 깬 문지기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아직 사용인이 출근하지 않은 공작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기사가 은밀히 공작의 침실을 나와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제레미는 기둥 뒤로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저택에서 그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레미는 굳게 문이 닫힌 공작의 침실로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대체 공작에게 무슨 명령을 받은 것이길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것일까.
힘을 잃은 가문이었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기사단도 와해된 지금, 몇 명 남은 기사들이 하는 일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헌데 저렇게 다급히 말을 달리다니.
이상한 일인 거다.
시오스 후작에게 가는 것일까.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6 년 전, 엘리야의 이혼 소식에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오스 후작은 크로프트 공작가를 무너뜨리려 했고 그런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은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은밀한 만남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제레미는 돌아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는 대신 새벽 밤을 틈타 조용히 저택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우연히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시오스 후작을 보았다.
누군가 방문하기엔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다.
거기다 시오스 후작은 후작가의 마차도 타지 않고 평민들이 탈법한 낡은 마차를 타고 왔었다.
모습을 가리듯 검은 로브를 걸친 채로.
시오스 후작은 제레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그는 로브의 그늘 밖으로
드러난 후작의 얼굴을 정확히 봤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드로이트 공작은 제레미를 보고 그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레미의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로이트 공작과 시오스 후작의 관계에 대해서.
만일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이 맞다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위험한 일일 거 같단 예감이 들었다.
특히 엘리야에게.
그날 이후 신경이 쓰여 따로 뒷조사를 해 보았지만 특별한 물증을 찾을 순 없었다.
드로이트 공작은 공개적으로 모습이 드러날 자리엔 아예 참석하지 않았고 두 가문이 사업적으로 엮인 것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두 사람의 일은 은밀히 진행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란 뜻이었다.
잠시 상념에 젖어있던 제레미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밖의 풍경을 힐긋 보곤 몸을 움직였다.
대리석 바닥에 구둣발이 부딪혀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의 집무실로 향한 그는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고요함 속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깐 울렸지만, 인기척을 느끼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는 곧장 책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로이트 현 공작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프로이스는 상당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족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와 거래를 하거나 일을 할 땐 꼭 상대의 약점이나
폐기하기로 한 서류들을 남겨 숨겨 두었다.
그의 비밀 금고에.
책장의 세 번째 칸 제일 왼쪽에 있는 책을 꺼내자 책장이 스르르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공작의 비밀 금고가 드러났다.
77 화
* * *
“그래서 이 향수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또 향로도 동방국에서 수입해 오면 좋겠다는 얘기인 건가?”
내가 했던 말을 쭉 들은 제드가 말했다.
“응. 왜 별로인 거 같아?”
“흠…….”
난 약간 긴장된 얼굴로 제드를 보았다.
동업자이긴 했지만, 이때까지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것은 거의 제드의 역할이었다.
뭔가 심사를 받는 듯한 기분에 침을 꿀꺽 넘긴 그때 제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상당히 좋은 사업 같아. 귀족들이 향수를 즐겨 쓰는 거야 뭐 지나가던 똥개도 알 만큼 일상적인
일이니까.”
돌아온 답은 다행히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치?”
“거기다가 치료 효과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미친 듯이 팔려나가겠지. 그리고 이 향로로 집안에서 향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수요가 엄청날 거 같네.”
제드는 나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뜸 들인 거지.”
“응. 네가 갑자기 막 긴장하니까 놀리고 싶잖아. 마음이야 이미 향수를 내려놓을 때부터 와, 이건
대박이다 했지.”
제드는 재밌었다는 듯 킬킬거리며 경박하게 웃었다. 그를 흘겨본 난 루몬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몬트, 동방국에 있을 향로 장인들을 알아봐.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디자인을 좀 바꿔서 내놓으면 더
반 응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무역 건도 빨리 트는 게 좋겠어.”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이 향수는 언제부터 가능해?”
“그건…… 아마 며칠 걸릴 거 같아.”
르웰린이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알겠어. 그럼 준비되는 대로 말해 줘.”
“응.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만든 향수들만 보아도 호기심이 많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망설인 것일 뿐 로잘린이 나의 손을 잡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셀린느 후작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겐 내가 필요할 테니까.
“근데 엘리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공작가의 일도 정신이 없을 텐데……. 괜히 몸 상할까 걱정이다.”
“걱정 마. 이 정도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다 공작가를 위한 일이야.”
제드에게 미소를 지은 난 루몬트에게 물었다.
“루몬트, 내가 어제 부탁한 셀린느 후작가의 정보는?”
“아, 여기 있습니다.”
루몬트가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다야?”
“네. 그게 다입니다.”
명색이 후작가의 사건인데 종이 한 장이 다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서류를 읽어보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셀린느 후작의 죄목은 탈세였다.
정확히는 후작이 저지른 탈세가 아니었다.
가문의 집사가 2 년간 고액의 세금을 탈세했고 그게 발각되어 벌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가주로서 그 책임을 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귀족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셀린느 후작을 벌해달란 상소를 황제에게 올렸고 레이몬드는 후작의
작위를 파면하는 대신 수도와 가장 먼 북방의 수비대장으로 명했다.
말이 북방의 수비대장이지 그곳은 척박한 땅인 데다 맞닿은 경계령 근처에 사는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었기에 고위 귀족들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후작은 제대로 된 재판 한번 없이 스스로 떠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군.”
“네. 거의 뭐 일주일도 안 돼서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셀린느 후작은 북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도
후작급의 사건인데……. 이례적인 일이긴 했죠.”
“폐하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었나?”
“폐하께서도 셀린느 후작이 직접 떠나겠다고 하니 별말씀을 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래도 조사를 좀 더 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는 재상인 시오스 후작이 폐하께 많은 부분을 일임받아서 일처리를 하고 있었을 때라 그런
듯합니다.”
아무리 재상이라 할지라도 레이몬드는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했었다.
그런데 일임을 해 주었다니.
그의 완벽주의 가까운 성격을 알 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나?”
“아뇨. 딱히 큰일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한 6 년 전부터 갑자기 정무에서 손을 떼셨죠.”
“6 년이면…….”
제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제국을 떠난 것이 6 년 전이었다.
레이몬드가 정무에서 손을 뗀 시기와 내가 떠난 시기가 겹쳤다.
제드가 날 가만히 보자 루몬트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 님께서 폐하와 이혼하신 시기가…….”
“큰일이 없으셨던 거라면 그저 잠시 쉬고 싶으셨던 거겠지. 반정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셨으니까.”
난 루몬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레이몬드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나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루몬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서 항상 바쁘셨죠.”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난 화제를 돌렸다.
“시오스 후작과 황제 폐하의 관계에 대한 건 알아보고 있어?”
“네. 다방면으로 폐하와 시오스 후작에 관한 소문을 알아보고 있긴 합니다만, 공식적으론 크로프트 공작
사건 말곤 시오스 후작이 황제 폐하와 부딪힌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좀 더 깊이 알아봐.”
“네. 아, 엘리 님.”
“응.”
“저번에 찾아봐 달라 하셨던 한 남자분 말입니다.”
남자……?
순간 의아해하던 난 제레미를 찾아달라 했던 일을 떠올렸다.
재판장에서 우연히 그를 본 거 같아 루몬트에게 찾아달라 했었다.
“제국에 있어?”
“네. 제국에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루몬트는 망설이듯 턱을 긁적였다.
“그 남자가 드나드는 곳이 드로이트 공작가였습니다.”
“드로이트 공작가…….”
“컥.”
“제드?”
물을 잘못 삼킨 건지 제드는 빨개진 얼굴로 격한 기침을 뱉었다.
죽을 듯 기침을 내뱉던 그는 곧 진정이 되었는지 숨을 골랐다.
“하아…….”
“괜찮아?”
“어, 어. 괜찮아.”
“근데 뭐에 그렇게 놀라서 사레가 들렸어.”
“놀라긴. 그냥 갑자기 생뚱맞게 드로이트 공작가의 이름이 나오니까 그랬지.”
그는 큼, 목을 고르며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조금 이상했지만 원래 정상적인 범주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난 별다른 생각 없이 루몬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78 화
* * *
“아가씨!”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내게 급히 다가왔다.
순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걱정했지만 집사는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에 찬 듯 어딘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집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막 황제 폐하의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무죄를 축하하며 아가씨의 큰 기부금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입니다.”
“아…….”
며칠 내로 발표가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레이몬드가 말했던 공식발표 말이다.
그래서 아까 오는 길에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던 건가.
돌아오면서 광장을 지나칠 때, 거리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었다.
마차 창문을 열어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문이 수도 곳곳의 게시판에 붙었을 테니 아마 그래서 소란스러웠던 거 같았다.
“그리고 공식적인 발표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들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선물?”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집사가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리로 시선을 옮기자 로비 한가운데 한가득 쌓여있는 상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황실의 시종과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난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크로프트 영애.”
시종이 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이게 전부 폐하께서 보내신 하사품인가?”
“네. 폐하께서 영애의 큰 기부에 약소한 고마움을 전하신다며 남부의 최고급 가죽과 금괴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께서 영애께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내게?”
시종은 내게 작은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든 난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건 보석 목걸이였다.
중앙에 박힌 짙은 보랏빛 스피넬과 다이아몬드로 꽃 모양을 만든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은 제비꽃을 닮아
있었다.
제비꽃.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난 작은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나를 닮은 제비꽃, 소중한 사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무심한 모습과 너무 대조되는 지금 그의 모습들.
절대 날 사랑하지 않겠다던 말과 소중한 사람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설마 진짜 내게 다른 마음이라도 생긴 거야? 레이몬드.
닿지 않을 질문이 목을 간지럽혔다.
6 년 동안 나를 찾았던 이유가 뒤늦은 후회에 기인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복잡한 눈으로 목걸이를 보고 있자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엘리야.”
고개를 돌리자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보였다.
황제의 선물을 받고 아무런 감사의 말도 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난 굳었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시종에게 답했다.
“폐하께 과분한 선물 감사하다 전해 주시게. 곧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말이야.”
“네. 영애. 그럼 전 폐하의 뜻을 전하였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아버지는 황제의 시종을 저택 밖까지 배웅했다. 시종이 탄 마차가 떠나고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폐하의 선물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그냥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놀라서 그랬어요.”
난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하녀장에게 건넸다.
“방에 가져다 놓으렴.”
“네. 아가씨.”
“그나저나 폐하께서 이리 많은 선물을 보내신 걸 보니 아무래도 공작 가를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으신
듯하구나.”
난 쌓여있는 하사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마움에 보내는 선물 치곤 과분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넘치는 하사품은 황제가 공작가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과시용이었다.
하인과 하녀들이 전부 보았으니 수일 내로 황제가 내린 값비싼 하사품들에 대한 소문이 귀족가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이왕 레이몬드가 이렇게 판을 깔아주었으니 난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아버지,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겠어요.”
“파티?”
“네. 저도 돌아왔고 아버지의 무죄도 입증되었잖아요. 큰 파티를 열어 공작가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황제가 먼저 나서 공작가를 치하해주었으니 지금이 파티를 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다들 하사품이 궁금해서라도 공작가의 파티에 올 테니까.
아버지도 내 뜻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파티 준비는 제가 할게요. 그럼 전 이만 집무실로 가 볼게요.”
“그러려무나.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미소를 지은 난 집무실로 향했다.
* * *
* * *
“영애, 폐하께서 온실 화원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황궁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내게 다가왔다.
“온실 화원?”
오늘 황궁에 방문한 건 넘치는 하사품을 내려준 황제에게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의 달라진 모습과 의미심장한 태도에 마음이 복잡해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그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차마 하지 못했다.
그를 보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 미루고 미루다 하사품을 받고 3 일이나 지나서야 황궁에 방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집무실이 아닌 온실 화원이라니.
집무실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빠르게 돌아갈 생각을 했던 난 의아함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손목시계를 살짝 확인하자 딱 정오가 된 시각이 보였다.
설마 나와 함께 오찬이라도 하자는 건가.
“온실 화원에 가벼운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전 일찍 찾아뵌다 했을 때 갑자기 정오에 오라 시간을 바꿀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짧은 한숨을 내쉰 난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본궁의 온실 화원은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황후 시절 내가 관리하던 곳이었으니까.
둥근 돔 형태인 화원의 문을 열자 익숙한 자연의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귀족 여성들은 온실 화원을 주로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채웠지만 난 야생화와 희귀종인 나무들을 주로
심어 키웠다.
황궁에만 갇혀 살다 보니 바깥의 푸른 녹음을 화원에서라도 느껴보고 싶어 그랬다.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코끝으로 시원한 나무의 향이 느껴졌다.
내가 떠나고 6 년이나 흘렀음에도 온실 화원은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엔 달라지지 않은 화원의 모습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레이몬드가 신경 쓴 결과물이라 생각하니 목이 까 끌까끌해지고 익숙한 풍경이 마냥
기껍게 다가오지 않았다.
생기가 도는 야생화들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삼키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원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레이몬드가 서 있었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자주색의 야생화의 꽃잎을 만지고 있던 그가 몸을 돌렸다.
그의 손끝에 닿았던 꽃을 보지 못한 척,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내가 일어나자 그는 주변을 물렸다.
시종들이 모두 나가고 그는 먼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달라진 그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나와 달리 레이몬드는 느긋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무감하면서도 여유가 감도는 수려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단지 나를 보는 눈빛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그의 깊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응시했다.
“앉아. 엘리야.”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에서 보자고 해서 많이 놀랐나?”
“놀랐다기보단……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큰 병에 담긴 과일 주스를 내 컵에 따라주었다.
“이 화원. 네가 좋아했던 곳이었지. 언젠가 네가 돌아오면 이곳에 초대하고 싶었어.”
“…….”
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이 없는 나를 보다 과거를 그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가 좋아했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걸 보면 기뻐할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군요.”
난 건조하게 답했다.
그는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굳은 얼굴에서 아주 작은 감정이라도 찾아보겠다는 듯 말이다.
예를 들면 기쁨, 그리움, 행복 같은 것을.
하지만 난 그저 묵묵히 그를 마주 보았을 뿐이다.
“저기 저 나무는 네가 특히 아꼈던 거고, 저 꽃은 향이 좋다 했었지.”
그는 내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거 같았다.
그 말투와 눈빛이 퍽 다정해, 마치 부부 사이로 돌아간 거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아니네.
번뜩 드는 현실감에 난 정신을 차렸다.
과거로 돌아간 것이라면 레이몬드가 날 보며 저런 다정함을 보일 리 없었으니까.
6 년이나 흘러서 그런지 순간적으로나마 과거의 우리가 다른 평범한 부부였던 것처럼 착각했다.
그의 어설픈 다정함에 얼음물을 맞은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에 설마 하는 의심에 점점 확신이 생겼다.
아직 레이몬드의 입으로 직접 듣진 못했지만.
딱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듯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토마토스튜와 구운 호밀빵, 어린 새싹으로 만든 샐러드와 과일 주스.
전부 내가 즐겨 먹던 음식들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게 노골적으로 티가 났다.
먹기도 전에 체할 거 같네.
물끄러미 음식들을 보던 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
나직이 그를 부른 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이 온실 화원을 왜 좋아했는지 아시나요?”
나의 물음에 레이몬드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화원을 정성스레 가꾼 것은 알아도 내가 왜 이 화원을 가꾸기 시작했는지는 모를 테니까.
난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연히 모르시겠죠. 애초에 폐하께서 저에 대해 아시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실 테니까요.”
“…….”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것을 보던 난 커다란 온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제가 이곳을 좋아했던 이유는 이곳에 제게 유일한 쉼터였기 때문입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삭막한
황궁에서 이곳만큼은 숨통이 트였으니까요.”
“엘리야…….”
“폐하, 폐하께선 언제나 제게 무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 견고한 황실을 보여 주기 위해 황궁
법도는 더욱 엄격해졌죠.”
마음이 울렁이는 것만 같아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전 그렇게 철장 안에 갇힌 새처럼 이 황궁에서 살았습니다. 폐하의 뒷모습만 보면서요.”
레이몬드의 여유 가득하던 얼굴이 흔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흔들리는 그 모습을 보자 난 혼란스럽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습니다만……. 그건 전부 과거일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 이 화원이 숨 막히게 느껴지네요.”
80 화
레이몬드는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정적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찰나의 다정했던 분위기는 신기루였던 거처럼.
상처받은 것처럼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먼저 선을 그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제비꽃 목걸이를 받은 순간부터 그와 과거를 정리해야겠다 결심했다.
그 목걸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을 내게 선물한 그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괴로움으로 얼룩진 과거에 발목 잡혀 다시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난 먼저 입을 열어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제가 오늘 폐하를 뵙고자 한 것은 크로프트 공작가에 보내주신 귀한 하사품에 감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과분한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하자 레이몬드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크로프트 공작가는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이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
“아버지께서 폐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감사드린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로프트 공작가는
폐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그래. 공작의 빠른 쾌유를 빌지.”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대화가 의례적으로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리다 그를 향해 말했다.
“폐하. 전 이미 과거에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
느릿하게 화원을 둘러본 난 레이몬드를 정확히 내려보며 말했다.
“허니 폐하께서도 과거를 깨끗이 잊으실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레이몬드는 답하지 않았지만 부디 그가 현명한 답을 내리길 바랐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만큼은 내 의도가 그에게 제대로 전해진 듯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깐 그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난 미련 없이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 * *
81 화
* * *
* * *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걱정 말게. 크로프트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거니까.”
드로이트 공작의 불안한 눈빛이 시오스 후작의 확답에 안심으로 가라앉았다.
“그럼 곧 일을 치를 준비나 하고 있게나.”
시오스 후작은 더러운 탐욕으로 번뜩이는 공작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이 같기에 손을 잡았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난 이만 가 보지.”
드로이트 공작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함께 일어났다.
“조심해서 가게.”
후작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집무실 문 앞에 선 남자를 보고 나가려던 몸을 멈칫했다.
“왜 그러는가.”
문을 나가지 않고 선 후작의 뒤로 드로이트 공작이 물었다.
그때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울렸다.
“시오스 후작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제레미 드로이트. 드로이트 가문의 공자입니다.”
“공작의…… 아들이었군.”
시오스 후작은 눈앞의 장신의 남자를 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제레미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드로이트 가문의 상징인 짙은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 둘 중 어느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신 백금발과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공작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의도적으로 아들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덜떨어진 자식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나.
드로이트답지 않은 제레미를 보던 후작이 입을 열려 한 그때 공작이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네가 왜 여기에……!”
공작은 제레미에게 소리를 치려다 아직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시오스 후작을 보고 멈칫했다.
“아들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더니 돌아왔었군요. 공작.”
능구렁이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공작은 답지 않게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큼, 얼마 전에 돌아왔네.”
“이렇게 잘 자란 아들이 있었다니, 제레미라고 했던가.”
시오스 후작은 제레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대륙을 탐방하는 여행은 그만하고 아버지를 좀 모시게. 공작 각하께서도 나이가 지긋하신데
언제까지 아들을 감싸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저도 이제 정착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앞으로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후작
각하.”
제레미는 후작의 비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작은 묘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다 아들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공작에게 말했다.
“아들이 저리 번듯하니 부럽습니다. 공작.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 같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지요.”
피식, 웃은 후작이 저택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공작은 제레미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네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방금 네가 누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아느냐?! 내 쥐죽은 듯이
살라 했거늘!”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는지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레미는 당장 제 목을 조를 듯이 노려보는 공작을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방금 후작의 말 못 들었습니까.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제가 어떻게 쥐죽은 듯이 살고
있겠습니까. 이 위대한 드로이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데요.”
“뭐?! 누가 감히! 쓰레기 같은 이단아 주제에 후계자라니! 난 널 내 후계라 인정한 적 없어!”
공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레미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타격음이 복도를 크게 울릴 정도였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지만 제레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뺨을 쓰다듬었다.
“뭐 이것도 한두 번 맞아보는 게 아니라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공작은 한 대 더 때리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손을 휘두른 순간 탁, 제레미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굳은 공작이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너, 지금…… 감히…….”
“아버지 앞으로 이런 손찌검은 자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앙으로 복귀하시면 공작가로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질 텐데 말입니다.”
82 화
* * *
83 화
“그러게요, 하마터면 저 영애에게 끌려갈 뻔했었는데 엘리가 딱 나타나 날 구해줬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는 정말 위험한 순간을 겪은 거처럼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그에겐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건만 모른 척 내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다.
난 그의 능청스러움에 결국 웃음이 나왔다.
“제레미는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원래 잘 안 변하는 법이죠.”
씨익, 입꼬리를 올린 그가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피닉스 상단에 볼일이 있어 들렸어요.”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그는 내 뒤로 있는 상단의 큰 건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
“네?”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판이 열리던 날, 재판장에 왔었죠?”
그의 영롱한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역시 그날 절 봤었군요. 뭐 하긴 제 잘생긴 얼굴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죠.”
그는 자신의 잘생김이 곤란하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었겠지만, 빛나는 외모 때문인지 그는 그저 짓궂어 보일
뿐이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제레미는 정말 잘생겼다.
빛나는 백금발과 보석 같은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부드러운 호감형의 얼굴.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시선을 받을 것이다.
룬트 왕국에서도 내 꽃집에 가끔 들리던 제레미에게 관심을 가지던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제레미가 눈에 띄는 외모긴 하죠. 방금 그 영애도 제레미에게 한눈에 반한 거 같던데요?”
내가 서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하자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설마하니 내가 정말 잘생겼다고 할 줄 몰랐나 보다.
뭐, 딱히 거짓말도 아닌걸.
가끔 사람 같지 않게 수려한 레이몬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를 빤히 보자 제레미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시면 제가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답지 않게 수줍음으로 물든 볼을 보니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음……. 진짜니까요. 나 꽤 심미안 높은 사람이에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요. 제레미는 정말
잘생겼어요.”
한 걸음 다가가며 말하자 제레미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당황했던 건지 그는 발이 꼬일 정도였다.
비틀거리는 그의 팔을 잡아준 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장난쳤다는 걸 눈치챈 제레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놀리신 거군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제레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귀여워서
그랬어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아직 당혹스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그는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는 붉어진 볼을 가리며 나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 놀렸나.
생각보다 그가 더 창피해하는 거 같아 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요. 그날 이후 소식이 없길래 제레미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정이 된 듯 제레미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럴까 했었는데…… 역시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의아함이 들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요. 재판도 잘 마무리되고 요새 들리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평판도 좋던데요?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에요.”
“네, 뭐……. 아직 완전히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요. 그럼 제레미는 이제 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건가요?”
“아마도요. ……왠지 더는 제국을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는 피식 웃었다. 가벼운 웃음 속에서 어두운 씁쓸함이 느껴졌다.
드로이트 공작가.
그가 제국을 떠나 용병 생활을 하며 떠돈 것은 아마 공작가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공작가가 고립되기 전부터 드로이트 공작의 아들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항간에선 드로이트 공자가 죽은 것이 아니냔 소문까지 돌았었다.
결국, 공자가 덜떨어져 공작이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황후 시절 우연히 드로이트 공작과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공작이 눈에 차지 않는 아들을 혹독히 학대했었다는 이야기를.
아마 제레미는 제국을 떠났던 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피해 도망을 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국으로 돌아온다는 건…… 공작의 밑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거다.
“엘리, 괜찮나요?”
그에 대한 상념이 깊어져 표정이 굳은 것 같았다.
제레미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 그보다 제레미, 내일 바쁜가요?”
“내일요?”
“네. 시간 괜찮으면 내일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에 오시겠어요? 내일 공작가에서 저의 귀환을 기념하는
파티가 크게 열리거든요.”
“…….”
갑작스러운 제안에 제레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 가문에 초대장이 갔지만 드로이트에 보내지 않았다.
반정으로 무너진 공작과 반정으로 세워진 공작가.
두 개의 가문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 내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고 있잖아요.”
서로 대놓고 티 낸 적은 없었지만 지난 6 년간 서로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여긴 룬트 왕국이 아니라 에그리타 제국이에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에그리타 제국에선 룬트 왕국에서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요. 하지만 제레미가 드로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것도 알죠.”
순간 나를 보는 그의 눈이 크게 떨렸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그는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늘 능청스러운 여유가 보였던 제레미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초대에 바로 좋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
단지 우리 둘만 생각하기엔 엮인 가문의 관계가 최악이었으니까.
“강요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언제든 와도 좋으니 내 뒤에 딸린 크로프트란 성을 불편하게 여기진 말아요.
난 여전히 제레미의 친구 엘리니까요.”
말이 없는 그에게 싱긋 웃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던 하늘이 어느새 까맣게 바뀐 것이었다.
“난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레미.”
“……조심히 가요, 엘리.”
그는 초대의 답을 결국 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 * *
84 화
“아가씨, 집사입니다.”
문을 열어주라 하녀에게 눈짓하자 하녀가 곧장 문을 열어주었다.
집사는 내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파티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성문을 열었고 공작 각하께선 파티장에 이미 내려가 있으십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스름해진 하늘과 공작가로 들어서는 마차의 행렬이 보였다.
이제 파티장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모두 수고했어.”
특별한 날이니만큼 하녀들에게 금화 하나씩을 쥐여 준 난 파티장으로 향했다.
“크로프트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렌타 백작 부인도 잘 지내셨나요.”
난 몇 번째인지도 모를 손님을 맞이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아렌타 백작 부부가 지나가고 난 뒤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크로프트 영애,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렇게 화려한 블루다이아 목걸이는 처음 봅니다.”
“어머나, 파티장이 정말 화려하네요. 이렇게 큰 파티는 오랜만인 거 같아요.”
“샹들리에가 정말 아름다워요.”
나와 파티장에 대한 찬사부터.
“사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영애를 찾아뵙고 싶었는데 갑자기 방문 서신을 보내면 예의가 아닐 거 같아서
망설였답니다.”
“저도 서신이라도 보내고 싶었는데 크로프트 영애께서 일이 많으실 거 같아 망설이고 또 망설였답니다.”
재판 전부터 공작가를 몹시도 걱정했었다는 민망한 아부에 난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상대했다.
서로 의무적으로 나누는 인사치레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내뱉은
감탄사는 거짓이 아니란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장인이 만든 샹들리에와 파티장 내부에 그려진 고대 신들의 명화들.
파티장 곳곳에 놓여있는 장식품들 역시 하나 같이 입이 벌어질 값비싼 장인의 물건들이었다.
귀족이라 하여도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거기다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까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으니 다들 뻣뻣한 목이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나와 인사를 나눈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파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버지를 힐끔 보았다.
다행히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핼쑥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의 실세다운 위엄과 기품을 완전히 되찾으신 듯했다.
“셀린느 후작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심되어 미소를 그리던 난 문지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잘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티장을 둘러보며 내게 다가왔다.
“와……. 영애! 전 순간 제가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제에 온 게 아닌가 착각했어요.”
1 년에 한 번 황실에서 열리는 건 국제 파티.
제국에서 열리는 파티 중 가장 화려한 파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비슷한 거 같기도.
파티 홀만 좀 더 컸더라면 건국제와 비견할 만했다.
“어서 와요. 로잘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잘린은 내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드레스 감사해요. 영애. 그리고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고마워요. 로잘린.”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요. 저기 벽화에 그려진 여신보다 아름다우세요.”
고대 신들이 그려진 여신은 미의 여신이었다.
미의 여신보다 아름답다니.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날 보는 로잘린의 눈동자가 너무도 순수해 웃음이 나왔다.
“로잘린도 여신보다 예뻐요.”
로잘린의 볼이 살짝 붉어지던 그때 도착한 귀족을 알리는 문지기의 목소리가 울렸다.
“……1 황자 전하와 시오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일순 홀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1 황자……?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자 리제나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1 황자가 보였다.
1 황자가 이곳엔 왜.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움찔할 만큼 당황스러웠지만, 얼굴을 굳히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난 굳으려는 표정을 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리제나의 손을 잡고 있는 1 황자, 에드먼드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별이신 1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먼저 예의를 갖추자 황자의 등장에 놀란 귀족들도 하나둘 인사를 올렸다.
“모두 일어나게.”
앳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고개를 들자 리제나가 내게 미소를 그렸다.
“이렇게 성대한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황자 전하와 같이 오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놀라게 해드린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무리 황족이라 할지라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갑작스레 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거기다 오늘 파티는 다름 아닌 나의 귀환파티였다.
사교계의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이유가 리제나와 지금은 1 황자가 된 에드먼드 때문이라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레이몬드와 이혼한 이유에 에드먼드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이몬드를 향한 짝사랑에 지쳤을 뿐더러 무엇보다 칼라일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과 상관없이 소문은 이미 황자의 문제로 레이몬드와 내가 이혼했다고 나 있으니, 1 황자가
나의 귀환파티에 오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일인 것이다.
리제나는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린 그때 황자가 내게 말했다.
“아, 어머니 탓이 아니네. 오늘 어머니께서 파티에 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크로프트 공작이 보고 싶어
내가 따라가고 싶다 조른 거니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황자는 나를 똘망한 검은 눈동자로 올려보았다. 격식을 한껏 갖춘 말투와 달리 뭐라 할까, 다듬어지지
않은 눈빛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1 황자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지만 이제 겨우 12 살인 황자가 크로프트 공작가에 깊은 악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악의적인 뜻이 있다면 그건 리제나겠지.
난 황자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황자 전하께서 와 주신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상처를 입으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전하.”
“아. 난 괜찮네. 황궁의들과 아버지께서 살뜰히 보살펴 주어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아.”
“다행입니다.”
황자는 별 뜻 없이 해맑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말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했다.
크로프트 공작가의 화려한 파티장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말이다.
황제의 극진한 보살핌.
그 한마디가 귀족들의 관심사를 단번에 돌린 것이다.
황제가 황자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난 리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황자와 함께 파티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는 리제나와 황자가 온 뒤 그들을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판도를 바꾸려고 일부러 황자를 데리고 온 것이겠지.
난 그녀가 일부러 황자를 데려왔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지 의외인 것은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를 망치자고 황자를 귀족들의 가십거리에 내몰았단 것이다.
황제와 이혼한 황후와 1 황자.
나와 에드먼드는 사교계의 가십에서 멀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다.
허니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았다.
리제나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텐데.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문지기의 떨리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1 황자의 등장에 황제까지 등장하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미소를 그리고 있던 리제나도 나도 순간 얼굴이 굳었다.
설마 레이몬드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에게 분명 과거를 정리하자 말했는데.
난 당황스러웠지만, 파티의 주인으로서 미소를 그리며 레이몬드에게로 다가가 제일 먼저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레이몬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잡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황제가 공작가를 위해 큰 하사품도 내리고 직접 파티장까지 방문을 해 준 것이다.
내가 이 손을 잡는 것이 예의였다.
잠시 망설이던 난 이윽고 그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버지!”
내가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일어남과 동시에 황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에게 고정되었던 그의 시선이 비스듬히 돌아갔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황자를 본 레이몬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치는 대신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마치 이곳에 네가 왜 있냐는 눈빛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황자를 생각했다면 이곳에 오게 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귀족들은 호시탐탐 황실의 가십을 노리고 있었고 황제의 전 부인과 황자의 만남은 그들이 가장 즐거워 할
간식거리였으니까.
리제나는 굶주린 들개들이 가득한 곳에 황자를 먹잇감으로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드먼드. 네가 왜 여기에…….”
레이몬드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리제나를 보았다.
그와 리제나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그들이 어떤 눈빛을 주고받는지 보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 전 그냥 오랜만에 크로프트 공작을 보고 싶어서…….”
황자는 레이몬드의 굳은 얼굴에 겁을 먹은 듯 작게 말했다.
밝았던 황자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레이몬드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면 어른들도 서릿발 같은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어린 황자는
더 무서울 것이다.
점점 움츠러드는 황자의 어깨를 더 볼 수 없어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85 화
86 화
“전…….”
로잘린의 말을 막은 비스테인 영애가 말을 이었다.
“셀린느 영애께 이렇게 비싼 드레스를 선물해줄 수 있는 영식이라면 분명 한미한 가문은 아닐 테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영애. 근데…… 제가 미처 셀린느 후작가의 약혼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혹 어느 가문의
영식인가요?”
“저도 들은 게 없는데……. 설마하니 제대로 교제를 하지도 않으시며 이런 큰 선물을 받으신 건
아니시겠죠?”
“설마요, 정식적인 교제도 없이 물질은 받는 건 하찮은 코르티잔들이나 하는 짓이 아닙니까.”
“모르지요. 셀린느 후작가의 사정이 급하니…… 코르티잔이라도 감지덕지했을지요.”
영애들은 역겨운 말을 내뱉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오가나 봅니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신나게 로잘린을 모욕하고 있던 영애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큼, 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영애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내주는 그들을 지나쳐 로잘린의 앞에 섰다.
그녀는 모욕적인 언사에 상처를 받은 듯 창백한 낯빛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물러나면 모든 모욕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개 숙이지 말아요.
시선을 낮추는 로잘린에게 낮게 속삭인 난 그녀의 곁에 섰다.
그리고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는 영애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훑었다.
“왜 다들 말씀을 멈추시나요?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 같아 저도 함께하고 싶어 온 것인데
말입니다.”
난 비스테인 영애의 곁에 선 노란 드레스의 영애에게 물었다.
“멜타인 백작 영애였던가요? 방금 하신 이야기가 무슨 말이기에 다들 웃음이 터지신 것인지 제게도 말씀
해 주시겠어요?”
“…….”
하지만 그녀는 내 눈치를 살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비스테인 영애는 그런 영애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다 나를 도전적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셀린느 후작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로잘린에 대한 이야기라……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네요. 알려주시겠어요?”
비스테인 영애는 못마땅한 눈으로 로잘린을 훑으며 내게 말했다.
“후작가의 사정이 변변치 않은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데,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나타나시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혹시나 귀족 영애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행동을 하고 다니시는 게
아닌지 저어되어 작은 충고를 드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귀족 영애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행동이라…….”
난 말끝을 흐리며 실소했다.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비스테인 영애의 얼굴이 구겨졌다.
난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로잘린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로잘린. 이 드레스, 제가 선물해 준 것이라고 영애들께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내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하니 내가 드레스를 선물로 줬다고는 다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말을 하려 했는데 비스테인 영애께서 제게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로잘린은 시선을 낮추지 않고 똑바로 비스테인 영애를 쳐다보았다.
비스테인 영애에게 주눅 들지 말라는 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된 거 같았다.
난 비스테인 영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당사자인 로잘린에게 답을 듣지도 않고 마음대로 귀족 영애의 품위에 대해 논했다는 거군요.
비스테인 영애, 맞나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묻자, 당당하던 비스테인 영애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답을 듣지 않은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비스테인 영애의 표정이 돌연 바뀌었다.
비스테인 영애는 도움을 청하듯 주변을 영애들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듯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셀린느 영애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며 모욕을 주는 게, 비스테인 영애께서 말한 귀족 영애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인가요?”
“…….”
비스테인 영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셀린느 후작가는 유서 깊고 명망 있는 가문입니다. 작위를 받은 지 몇십 년 되지도 않은 백작가가 모욕할
수 없을 만큼 말이죠.”
비스테인 백작가는 백작 작위를 받은 지 오십 년이 겨우 넘은 반면, 셀린느 후작가는 이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좋지 않다지만, 변경백도 아닌 백작가 따위에게 이따위 모욕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허니 영애께서 셀린느 영애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파티장에서 쫓겨나시게
될 겁니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까요.”
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영애들을 둘러싼 분위기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비스테인 영애의 녹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오늘 이 파티엔 황제와 황자까지 참석했다. 이런 파티장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다면 사교계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 로잘린을 깔보고 모욕주는 것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비스테인 영애, 그녀였으니까.
비스테인 영애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그러쥔 손도 보였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약간의 경고만 줄 생각이었지만 비스테인 영애가 선을 넘어
버렸다.
로잘린을 감히 코르티잔에 비유하다니.
난 차디찬 눈빛으로 비스테인 영애를 응시했다.
“사과하지 않으시겠다면 지금 바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영애.”
비스테인 영애는 분노로 얼룩진 눈으로 로잘린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호되게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릴 듯했다.
비스테인 영애를 끌어내려 시종들에게 손을 들려 한 찰나 여인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로제인.”
몸을 살짝 돌리자 빠르게 걸어오는 리제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얼굴을 굳혔을 때부터 파티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것은 알고 있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또각또각, 리제나의 구둣발 소리가 비스테인 영애의 앞에서 멈추었다.
“로제인, 셀린느 후작 영애께 어서 사과드리렴.”
리제나가 옆으로 물러서자 비스테인 영애가 로잘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셀린느 영애.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절 용서해 주세요.”
분에 차 몸을 떨었던 방금까지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비스테인 영애는 로잘린에게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딱히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사과에 로잘린은 나를 힐긋 보았다.
여기서 사과를 받지 않으면 로잘린의 평판에 좋을 게 없기에 난 사과를 받으라 눈빛을 주었다.
“네, 비스테인 영애. 다음부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로잘린의 말에 대한 답은 비스테인 영애가 아닌 리제나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가 로제인을 잘 단속하겠습니다. 로제인,
넌 한동안 저택에서 자숙하는 게 좋겠구나. 이만 돌아가렴.”
“네.”
비스테인 영애는 상처를 받은 듯 눈가가 붉어졌지만, 화를 내지도 분에 찬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곤 어두운 얼굴로 순순히 몸을 돌려 파티장을 나갔다.
나의 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뒷모습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가 묘해졌지만 리제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영애들에게 말했다.
“영애들께서도 앞으로 말씀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될
테니까요.”
“네. 시오스 영애.”
영애들은 반성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렇게 리제나는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거처럼 모든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내가 해야 했을 역할들을 전부 그녀가 빼앗은 것이었다.
상당히 어이가 없는 행태였지만 아무도 그녀의 행동에 반발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리제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스테인 영애야 그렇다 쳐도 나를 경계하던 영애들까지 단숨에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묘해졌다.
현 사교계의 권력을 리제나가 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제대로 확인사살을 당하니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리제나의 자리를 흔드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더 단단하게 자신의 성을 쌓아 올린 거 같았다.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리제나는 진중한 얼굴로 내게 입을 열었다.
“크로프트 영애.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그 누구도 셀린느 영애는 물론 크로프트
영애에게도 무례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귀족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마치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듯한 말에 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87 화
88 화
89 화
제레미는 차분히 답했다.
“은덕이라…… 그래. 그리 생각해 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거 같군. 드로이트를 생각하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거든.”
이윽고 레이몬드는 비웃음마저 사라진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헌데 내가 살려준 건 드로이트의 목숨뿐인데, 지금 보니 조용히 목숨 줄만 연명하는 자로 보이진
않는구나.”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먹잇감의 목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의 선명한 살기에 귀족들은 황급히 시선을 낮추었다.
행여라도 이 상황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파티장의 공기에 음악단의 연주마저 멈출 정도였다.
그리고 나 역시 심상치 않은 레이몬드의 분위기에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내가 초대한 것이라 말을 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황후였더라면 상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레이몬드의 분노를 막아보려 노력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명분이
없었다.
일개 귀족 영애가 황제의 앞을 막아서면 즉결 처분이다.
난 불안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레미를 보았다.
레이몬드가 기사들을 부를까 봐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하지만 좋은 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선 안 되겠지. 일어나게, 드로이트 공자.”
난 놀란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레이몬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레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피식, 알 수 없는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숨 막힐 듯한 살기를 내뿜던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지.
다른 가문도 아닌 드로이트 공작이었기에 그가 쉽게 분노를 잠재운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음악이 멈추었군. 파티의 분위기를 망쳐 미안하네. 크로프트 영애.”
레이몬드가 내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난 음악단에 다시 연주를 시작하라 눈짓했다. 파티장에 다시 부드러운 왈츠곡이 울려 퍼지고,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긴장감으로 한껏 조여들었던 귀족들의 얼굴도 퍼졌다.
난 어느새 일어난 제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몬드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을 그가 걱정되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지 않을까, 염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지만 제레미는 내 걱정과 달리 괜찮아 보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 담담했다. 고개를 든 제레미는 순간 눈이 마주친 나에게
미소를 보였다.
미소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에 걱정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난 그에게 눈을 흘겼다.
황제의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정체를 이렇게 밝히다니.
분명 내가 하지 말라 간청하는 것을 보았으면서 말이다.
“한데 드로이트 공작가의 공자가 왜 시오스 영애에게 춤 신청을 한 거지? 두 사람 아는 사이였나?”
레이몬드의 물음에 우리의 짧은 시선 교환은 끝이 났다.
“그럴 리가요, 폐하. 전 오늘 드로이트 공자를 처음 봅니다.”
리제나가 즉각 답했다. 온화한 가면도 벗어던진 굳은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난 드로이트 공작가이니 엮이는 것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근데 제레미는 대체 왜 리제나에게 다가간 것이지.
리제나가 드로이트 공자의 춤 신청을 받아줄 리 만무하다는 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제 아버지와 시오스 후작의 교류가 잦아져, 저도 시오스 영애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제레미는 리제나를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주끼리 가깝게 지내고 계시니 장차 가문을 이끌 사람들도 안면을 터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이 가깝게 지낸다고……?
예상치 못한 조합에 놀라 내 표정이 굳었고 레이몬드의 눈썹 끝이 사납게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리제나는 흡사 충격을 받은 거처럼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아버지께서 드로이트 공작가와 무슨 연이 있단…….”
제레미는 리제나의 말을 끊으며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며칠 전 드로이트 공작가를 방문하시고 떨어뜨리신 회중시계랍니다. 영애.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길래 중요한 물건인 듯하여 오늘 챙겨왔답니다.”
영애께 전해드리려고요.
제레미가 친절을 베푼다는 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회중시계.
그 확실한 증거에 리제나는 제레미의 말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만났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든, 몰랐든 말이다.
특유의 상냥한 분위기마저 사라진 리제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제레미가 내민 회중시계를 받아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만…… 일단 아버지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해라……. 저와 함께 춤을 추시며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전 영애와 친해지고 싶거든요.”
리제나는 냉랭한 눈빛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런 눈빛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리제나는 제레미의 도발에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침묵을 지키며 그를 보던 그녀는 이윽고 짙은 미소를
그렸다.
“공자께서 이렇게 간청하시니 한 번쯤은 나쁘지 않겠죠.”
레이몬드가 지켜보고 있기에 끝까지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리제나는 무슨 생각인지 제레미의 청을
받아들였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제레미와 리제나가 정말 함께 춤을 추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를 스치며 미소를 지은 제레미는 리제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영광입니다. 영애.”
이윽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왈츠 곡이 울려 퍼지는 댄스 플로어엔 많은 커플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제레미와 리제나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부드러운 리드에 리제나가 턴을 하고 제레미의 손을 잡았다.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춤만 추던 상황을 먼저 깨뜨린 건 리제나였다.
그녀는 제레미를 올려보며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병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니신 것치곤 상당히 춤을 잘 추시는군요.”
리제나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제레미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그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순진함을 가장한 리제나를 보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가 오해를 한 것이 아니군요.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감춘 저의 과거에 대해 이리 아는 것이
많으신 걸 보니 말입니다.”
시오스 후작과 드로이트 공작의 비밀스러운 만남.
처음 듣는 척, 모른 척했지만 리제나는 전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에서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는 그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정말 몰랐다면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을 가진 그의 과거를 굳이 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그를 본 시오스 후작이 자신의 과거를 캐 본 것이겠지.
“시오스 가문의 정보력이 참으로 뛰어난가 봅니다. 후작과 제가 만난 지 겨우 하루 남짓 되었건만 이렇게
저의 과거를 알아내셨다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리제나는 제레미를 보며 피식, 싱겁게 웃었다.
“그렇게 뛰어난 시오스 가문의 정보력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어디 영식의 과거뿐일까요. 내일
당장이라도 제국의 귀족 명부에서 드로이트란 이름을 없애 버릴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답니다.”
“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무섭습니다. 영애.”
제레미는 리제나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무섭다는 말과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호박색 눈은 여유롭다 못해 장난기마저 스며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모양새였다.
“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공자.”
리제나는 섬뜩하게 녹안을 번뜩였다.
선명하게 닿아오는 진득한 살기에 제레미의 능글맞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리제나는 예쁘게 눈을 휘었다.
“물론, 그런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아야겠죠. 공자께서 절 먼저 건들지 않는다면 그런 무서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건드렸다니, 누가 들으면 꼭 제가 시오스 영애에게 적대심이 있다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아니었나요? 절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았는데요.”
“곤란하게 하다뇨, 서운합니다. 영애. 전 정말 시오스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 다가간 것이랍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초대받은 적도 없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었겠습니까.”
제레미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거처럼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말했다.
“영애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크로프트 공작가는 제게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이런 곳에 몰래
숨어든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니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시오스 리제나 영애.”
풀네임을 부르는 제레미의 목소리는 퍽 애달프기까지 했다.
조금만 어리숙했더라면 그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제나는 어리숙하기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비소를 머금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90 화
* * *
91 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난 화가 나 되물었다. 그가 잘못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었는데 제레미는 뭐가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제레미,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난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가 이 상황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아 정색하자 그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해요. 엘리의 걱정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좋…… 아니, 음. 앞으로 걱정 안
끼칠게요.”
뭐라 다른 말을 하려 한 거 같은데.
제레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게 농담 같진 않았다.
“근데 대체 왜 그렇게 등장한 거에요? 혹시 제시간에 왔었는데 폐하를 보고 들어오지 못했던 건가요?”
“그럴 리가요. 황제 폐하를 피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극적인 등장을 하진 않았겠죠.”
제레미의 말이 맞았다. 황제를 피하고 싶었다면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신분을 밝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몰래 들어온 거예요. 난 당당히 가문을 밝히고 들어오라 초대장을 준 거였어요.”
“날 생각해 주는 엘리의 마음 잘 알아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엘리가 준 초대장을 가지고 당당히
들어가겠어요. 난 드로이트에요.”
드로이트의 이름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
“드로이트란 이름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가 엘리의 곁에 붙을 순 없죠.”
내가 그를 염려하는 만큼 그도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내 도움을 받아도 되잖아.
룬트 왕국에서 수없이 도움을 줬으면서.
난 그가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를 먼저 배려하는 그의 마음이 과거의
나를 닮은 거 같아서.
“그럼 차라리 오지 말죠. 아니, 왔어도 돌아갔어야죠. 왜 위험하게 폐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음……. 그게, 사실은 오늘 파티에 온 건 시오스 영애 때문이었어요. 엘리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시오스 영애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이 파티장뿐이더라고요.”
“시오스 영애……에게 왜 접근해야 했죠?”
“시오스 후작 때문에요. 파티장에서도 말했지만, 후작이 내 아버지를 만나러 공작가에 왔어요. 두 분이
뭘 하시려는 거 같은데…… 왠지 그게 위험한 일 같아서요.”
“…….”
“그래서 시오스 영애에게 후작의 시계를 주며 조용히 경고하려 한 것이었는데 폐하께서 오신 거죠. 그리고
어찌 보니…… 신분을 밝히게 돼 버렸네요.”
하하, 나도 내가 왜 그런 충동적인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똑똑한 제레미가 어쩌다 보니 신분을 밝히게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돌아가길 기다렸다가 리제나에게 접근해도 됐을 텐데.
그의 말이 납득되지 않아 미간을 좁히자,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시오스 후작과 닮은 영애가 황제 폐하 앞에서 고상을 떠는 걸 보니 순간 속이 뒤틀렸달까요,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나서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저답지 않은 짓을 해 버렸죠.”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후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충동적이었나.
뭔가 찝찝하긴 했지만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진 않았다.
설마, 날 도와주려 그런 건…… 가.
제레미가 나선 덕분에 파티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었다.
사교계를 이끄는 여왕 행세를 하던 리제나는 한순간에 드로이트 공작과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생겼다.
거기에 나와 레이몬드와의 삼각관계에 관한 관심까지도 사라졌다.
분명 그 덕분에 리제나를 단번에 밀어내긴 했었지만……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그와 친구이기는 하나 목숨을 걸 만큼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 아니겠지.
난 너무 멀리 간 상상이라 여기며 생각을 접었다.
애초에 파티장에 온 것도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고 했었으니까.
그의 시선은 리제나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레미는 후회스러운 기억을 떨치듯 머리를 흔들고는 한결 시원해진 얼굴로 말했다.
“본의 아니게 엘리에게 걱정을 끼친 것도, 소란을 피운 것도 미안해요. 엘리 말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오스 후작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버렸나 봐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뭐…… 결과적으로 내게 나쁜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죠.”
“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한데……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났다고 한 일, 내게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
제레미가 걱정되어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뭐가 궁금한가요?”
“시오스 후작이 공작을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만남이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야 시오스 후작이 속내를 더 확실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 번 만난 게 아니에요.”
제레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공작가를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손을 잡았다 생각하는 건 억측이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드로이트
공작가는 평범한 공작가가 아니었다.
현 황제에게 가장 큰 원한이 있는 가문이자 황제에게 버려진 가문이었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드로이트란 이름을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황제 때문이었다.
죽은 황태자를 지지했던 드로이트 공작. 그가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그의 존재가 반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여 그 어느 가문도 드로이트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데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 것이다. 재상이자 황자의 외척인 그가 말이다.
드로이트를 가장 멀리해야 할 그가 안부를 묻자고 공작가를 방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드로이트 공작가에 갑자기 황제의 명이 떨어진 것도 없었다.
재상으로서도, 황가의 외척으로서도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애초에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났다는 소문조차 없었지.
비밀스럽게 만났다는 건 나눠야 할 이야기의 사안이 가볍지 않다는 뜻.
시오스 후작은 정말 반역을 도모하려는 건가.
난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만약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과 반역을 도모하는 거라면 제레미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레미를 믿지만, 반역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드로이트 공작과 뜻을 함께 하게 된다면…… 우린…….
“엘리.”
“……네.”
“난 친구를 배신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분명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요. 아직 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말하지 못할 뿐, 엘리에게 숨길 생각은 결단코 없어요.”
내 의심을 느꼈던 건가.
그의 나직한 말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빛이 흔들렸지만 나를 보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늘 능청스러운 얼굴로 속을 숨기는 그였다. 어쩌면 아직도 그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있었다.
옅은 미소를 그린 난 말했다.
“미안해요. 순간 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네요. 난 제레미를 믿어요.”
“믿는다는 그 말, 왠지 듣기 좋네요.”
제레미의 눈빛에 장난기가 스몄다.
“드로이트 공자.”
금세 또 장난이냐고 내가 입술을 열려 하던 찰나, 갑자기 서늘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익숙한 목소리에 난 표정을 굳혔다.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바람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듯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곁에서 발이 멈추었을 때, 제레미와 난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
내 앞에서 멈춘 남자는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밤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 눈동자가 제레미를 응시했다.
“춤이 끝나자마자 급히 나가기에 바쁜 일이 있는 것인가 했는데.”
레이몬드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바쁜 일이 이거였나 보군.”
나와 제레미를 번갈아 보는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언뜻 비틀린 실소가 들린 것도 같았다.
92 화
* * *
“하.”
누구를 향한 분노일지 모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엘리야를 외면하고 살았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관심과 방임으로 그녀를 내버려 뒀다. 마음의
상처가 곪고 곪을 때까지.
그래서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어쭙잖은 변명을 내뱉기엔 상처가 얼마나 깊을지 감히 가능 할 수도 없었으니까.
“……너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아니 용서받을 수 있을까.
과거를 돌이켜 볼수록 남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후회뿐이었다.
누군가를 홀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애달프고 힘들다는 걸 몰랐었다.
이 괴로운 짝사랑을 엘리야는 몇 년이나 혼자 견딘 것이다.
그는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었다.
“……네가 정 날 떠나길 원한다면…….”
놓아 주어야겠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는 말이었지만 레이몬드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삶을 사는 듯했고 그런 그녀에게 매달리는 건 발목을 붙잡는 쓰레기 짓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레이몬드는 드로이트 공자를 떠올렸다.
도저히 드로이트라곤 상상할 수 없는 외양을 가진 남자.
굳이 따지자면 흑표범이 아니라 사자 같은 모습이었지.
드로이트는 초대황제와 함께 에그리타 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신의 경지에 오른 마검사였던 황제의 피를 머금어, 황족의 상징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황가의 상징를 받음으로써 드로이트는 가장 빛나는 명예를 얻고, 황실은 배신하지 않을 가신을 아래 두는
계약이었다.
그리고 그 계약은 오랜 세월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폐황의 치세까지만 해도 드로이트는 완벽한 황실의 개였으니까.
레이몬드가 황좌에 앉지만 않았다면 드로이트와 황실의 관계는 굳건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반정으로 모든 게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 드로이트 공자가 돌연변이라…….
마치 황가와 드로이트의 계약이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황족의 상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드로이트 공작이 공자를 필사적으로 숨긴 이유가 이것이겠지.
드로이트에게 황가의 상징은 절대 놓칠 수 없는 명예였다. 아니 지금은 그들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그 지시
바로 그 명예 때문에 그가 드로이트 가문을 살려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따위 명예는 황제인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드로이트 공작가를 폐황과 엮은 사건 하나쯤을 만들어 멸문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건…….
93 화
* * *
햇살 좋은 정오의 시간.
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 앞 정원을 뛰어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칼라일!”
큰 소리로 부르자 강아지와 함께 뛰놀던 칼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에 칼라일이 신이 나 달려와 안겼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며
미소 지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가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요.”
칼라일은 품 안에 더욱 파고들었다. 늦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들렸었는데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오지
못했었다.
파티를 준비하느라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아침부터 바로 온 것이지만,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던 것이 힘들었는지 칼라일이 어리광을
부렸다.
품 안에서 얼굴을 비비는 칼라일을 꼭 안고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행복하게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나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칼라일을 꼭 안아준 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칼라일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았다.
마도구로 눈동자 색을 바꾸어 진짜 눈동자 색은 아니었지만 나와 똑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예뻤다.
“칼라일, 오늘 칼라일을 만나러 온 깜짝 손님이 있어.”
“깜짝 손님이요?”
칼라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은 난 마차로 몸을
돌렸다.
“아버지.”
내가 나직이 부르자 마차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마차에서 내렸다.
한껏 긴장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칼라일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 그리고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름만 알려줬을 뿐 아버지가 칼라일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그리움과 그 이상의 감정이 얼룩진 눈빛으로 칼라일을 응시했다.
“엄마랑 똑같은 색이다…….”
자신을 빤히 보는 아버지를 같이 마주 보던 칼라일이 나직이 말했다.
나와 똑같은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가 신기한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이 벅차 마음이 울컥하던 난 칼라일의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엄마의 아빠면…… 할아버지! 맞죠?”
칼라일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감정을 추스른 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 이분이 바로 칼라일의 할아 버지야. 엄마가 몇 번 말해 준 적 있었지? 칼라일에게 아주 멋진
할아버지가 있다고 말이야.”
칼라일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몇 번 해 준 적이 있어서인지 아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전 칼라일이에요.”
칼라일이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아버지는 단말의 탄성을 뱉었다.
항상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손자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에 가슴이 벅찬 듯했다.
왈칵 울음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지만 차마 칼라일 앞에서 울 수는 없었는지 아버지는 큼, 목을
가다듬었다.
후, 짧은 숨을 내쉰 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칼라일과 눈을 마주한 아버지가 칼라일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칼라일, 이 할아버지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단다.”
“저도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엄마가 할아버지 이야기 많이 해 줬었어요. 칼라일한텐 아주 아주 멋진
할아버지가 있다고요!”
“허허.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가 더 멋있게 꾸미고 올 것을. 이 할아버지 보고 실망했을까
걱정이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너무 멋있어요! 엄마랑 눈도 똑같고 머리도 똑같고 너무 좋아요. 칼라일은.”
칼라일이 배시시 웃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웃음이 만개했다.
“어쩜 이렇게 똘똘하고 이쁠까.”
아버지는 칼라일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울음이 터지고 칼라일이 어색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끊이지 않는 대화에 이러다 밖에서 시간을 다 보낼 거 같아 내가 말했다.
“아버지, 칼라일. 저택으로 들어가서 더 이야기 나눠요.”
“그래, 그래.”
내가 자연스럽게 칼라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칼라일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런, 칼라일이 내가 더 좋은 듯하구나. 하하.”
아버지는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칼라일을 보며 답지 않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칼라일?”
“오늘은 할아버지랑 놀래요!”
칼라일은 내 부름에 해맑게 말했다.
칼라일은 정말 몇 분 사이에 아버지에게 마음을 쏙 빼앗긴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버지와 저택으로
향했다.
묘하게 서운해 잠깐 멈칫하던 난 이윽고 웃음 지으며 아버지와 칼라일의 뒤를 따랐다.
* * *
94 화
* * *
[몰락 직전이었던 크로프트 공작가의 화려한 재 비상과 시오스 후작가의 어리석은 선택. 시오스 후작은
드로이트 공작을 대체 왜 만난 것인가.]
95 화
-챙그랑!
회중시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너, 너……!”
시오스 후작은 리제나의 행동에 경악한 듯 입을 벌리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후작에게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 폐하께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할지 그것만 고민하세요.”
리제나는 분노에 파르르 떨리는 후작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대의에 대한 전권을 제게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허니 다른 건 생각지 마세요. 또 한 번 이렇게
멋대로 움직이시면 그땐 대의를 망치는 아버지부터 치워버릴 겁니다.”
시오스 후작의 녹안이 분노와 경악으로 홉뜨였다. 자식에게 배신당한 눈빛이 꽤나 볼만했다.
<i>‘네 사랑 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아! 너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우리 가문을 생각해라. 네가
서왕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불명예를 씌워 널 가문에서 내칠 것이다.’</i>
* * *
96 화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레미가 리제나를 곤란하게 만든 건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어.”
“아니시라고요?”
“그래. 애초에 시오스 후작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다는 것도 몰랐어.”
“그럼 드로이트 공자 덕분에 저희가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은 것이로군요. 듣자 하니 폐하께서 드로이트
공자를 죽일 듯 보셨다는데……. 그분도 참 대단하고 이상한 분이십니다.”
루몬트도 제레미의 독단적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이라 설명하긴 했지만 누구든 이상하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맹수 앞에 스스로 목을 들이민 모양새였으니까.
“이상한…… 사람은 아냐.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것이지. 그보다 드로이트 공자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은 어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워낙에 혜성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남다른 외양에 대해
말들이 많을 뿐입니다.”
“그렇군. 루몬트, 혹시나 드로이트 공자를 악의적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막아 줬으면 해.”
“도움도 받았으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겠죠.”
루몬트가 씨익 미소를 그렸다.
“크로프트 공작가에 대한 말들은 어때?”
“아주 좋은 편입니다. 특히 숨겨진 재력에 대해서요. 셀린느 후작가와 사업을 크게 벌이는 걸 보고 다들
관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귀족들은 이제 걱정 없으실 듯하니……. 평민 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쐐기를
박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루몬트의 말이 맞았다.
제국민들을 위해서라면 기부 같은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흠…….”
“고아원 기부는 어떠십니까?”
“고아원……?”
“네. 요새 고아원으로 들어가는 기부금이 많이 줄어 운영이 어렵다는 말이 많습니다.”
가장 눈에 띄고 도움이 되는 기부는 제국의 고아원들에 기부를 하는 것일 거다.
문제는 고아원에 기부를 하기 위해선 신전을 통하는 것이 관례란 것이었다.
빛의 신, 루멘의 신전.
제국의 국교이자 태초의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깊은 종교였다.
역사가 깊은 만큼 지금은 비리투성이였고.
“고아원에 기부를 하는 대신 신전을 통하지 않고 각 고아원으로 직접 기부금과 물품을 보내는 게 좋겠어.”
청렴결백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는 신관들은 이제 고대 서적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신전으로 기부금을 보내면 필시 고아원으로 돈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직접 보내면 신전에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신전에 돈을 보내진 않을 거야. 신전에서 빼돌릴 게 분명하니까.”
현 주신의 신전의 대주교와 대신관이 어떤 사람들인지 황후 시절 충분히 겪어보았기에 더더욱 믿지 않았다.
루몬트 역시 신전의 부패를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긴 얘기에 잠시 머리를 식히려 꽃을 둘러보던 난 눈에 띄는 은빛 봉오리에 난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벨루스잖아.”
“하하, 네. 벨루스입니다. 사막의 절벽 아래 달빛을 받으며 크는 아주 귀한 꽃이죠.”
“이걸 어떻게…….”
벨루스는 사막에서도 구하기 쉬운 꽃이 아니었다.
절벽 아래에서 피기 때문에 채취도 쉽지 않았고 그 수가 많지도 않아 돈이 많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하하, 제가 고생 꽤나 했습니다. 향수로 쓸 꽃들을 좀 알아보니 이 벨루스의 향이 대륙 최고로 정평이
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래저래 인맥을 좀 써서 이렇게 딱 온실 화원으로 가지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루몬트가 기세등등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평소라면 그의 자화자찬을 가볍게 웃어넘겼겠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정말 대단해. 벨루스를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루몬트의 말대로 벨루스의 향은 대륙 최고인지라 꽃 자체만으로도 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탄하자 루몬트는 부끄러운지 턱을 긁적였다.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고……. 수량도 많이 가져온 건 아니라서요. 이게 절벽에서
자라는 거라 어떻게 모종은 얻었는데 온실에서 꽃을 피울지도 의문이고…….”
“피울 거야. 걱정 마.”
난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지 루몬트가 고개를 슥 돌렸을 때 난 벨루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봉오리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힘을 썼다.
아름답게 피어나렴.
은은한 빛이 봉오리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루몬트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 보지 못했다.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줬으니 벨루스는 곧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루몬트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봉오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벨루스의 꽃이 피면 로잘린에게 벨루스 향수를 먼저 만들라고 해 줘.”
“벨루스 향수부터 시판하시려는 건가요?”
“맞아. 우리 향수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프리미엄 향수가 될 거야. 첫 번째 향수로 벨루스만 한 게
없겠지.”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오스 후작과 관련해서 들어온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벨루스를 보며 미소짓던 내 입꼬리가 굳었다.
“뭔데?”
“시오스 후작이 마법사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마법사?”
드로이트 공작과 관련된 은밀한 정보이거나 병력를 모으는 그런 위험한 말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난
미간을 좁혔다.
마법사들이 병력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공격 계열의 마법사들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몇백 년 전부터 높은 서클의 마법사들이 나오지 않았고, 하여 지금 마법사들은 주로 마도구 개발 등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주로 하고 있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말하는 거야?”
“아뇨, 저도 그쪽이 아닐까 싶어 조금 알아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당하게 마탑을 드나드시고
계셨다고 했으니까요.”
“어떤 계열의 마법사를 만나는지도 모르고?”
“주로 물의 마법에 능통한 자들을 만났습니다.”
“물……?”
물 관련 마법은 제일 공격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군사 목적은 아니란 건데.
“일단 계속 주시하면서 알아봐. 드로이트 공작도 함께.”
“네.”
물의 마법사라…….
뭔가 일이 벌어질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난 굳은 얼굴로 루몬트와 화원을 나왔다.
* * *
황제의 집무실.
크로프트 공작가의 파티날로부터 이틀 후, 시오스 후작이 알현을 요청했다.
“드로이트 공작과의 만남은 단순한 계약서의 문제였다?”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이 올린 계약서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에 저희가 광산을 파는데 그 광산이 오래 전 드로이트와 공동명의로 계약된
것이라……. 그걸 정리하기 위해 드로이트 공작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절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오스 후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흐음…….”
후작의 변명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어제오늘 신문 기사에 쓰인 내용과 같았다.
상세하게 설명된 기사 내용은 딱히 꼬투리를 잡을 만한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만남을 증명하는 회중시계 말고는 후작과 공작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신문들을 보았기에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미 후작을 의심하고 있기에 그의 말들이 진실로 와닿지
않았다.
“폐하.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은 절대 진실이 아닙니다. 저는 1 황자 전하의 외할아비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폐하께 다른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재상이 내게 역심을 품었을 리 없겠지.”
순간 시오스 후작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후작은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레이몬드에게 외쳤다.
“……역심이라니요! 제 목숨을 걸고 그런 마음을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 함부로 걸면 안 되지 않겠나. 사람 일이란 게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인데 말이야.”
레이몬드는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말 속에 날카로운 뼈가 있었다.
“저의 목숨은 이미 폐하의 것이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신다면 절 이 자리에서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후작이 머리를 깊이 숙이며 결연히 말했다.
어찌나 비장한 목소리인지 마치 이곳이 전쟁터의 한복판 같았다.
이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비소를 머금은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재상, 그대를 믿는다. 허니 이만 고개를 들어.”
시오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후작과 레이몬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후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에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시선을 내렸다.
“다시 한번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하나 관용을 베푸는 것은 딱 한 번뿐이란 걸 명심해.”
“네.”
“이만 나가봐.”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오스 후작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집무실을 나갔다.
시종들과 호위기사까지 모두 내보낸 레이몬드는 후작이 증거라며 올린 계약서를 불에 태워버렸다.
조악한 변명을 하는 시오스 후작을 이리 불태우지 못해 아쉬움이 들던 그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셀린느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대답과 함께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로 들어온 셀린느 영애가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이쪽으로 앉지.”
레이몬드는 집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그가 상석에 자리하고 오른쪽에 셀린느 영애가 앉았다.
셀린느 영애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껏 긴장한 얼굴로 정면만 보고 있었다.
긴장이 역력한 모습에 레이몬드가 차를 들이켜곤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많이 놀랐겠지. 심각한 일로 부른 것이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예, 폐하.”
로잘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엘리야가 아끼는 영애이기에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건만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았다.
“본론을 빨리 끝내주는 게 도움이 되겠군.”
레이몬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97 화
* * *
98 화
* * *
이른 아침.
엘리야는 집무실로 출근하여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건강이 회복된 아버지는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업무에 복귀하셨다. 하지만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는
하르펜의 말에 한동안은 내가 업무 분담을 하기로 했다.
“보좌관을 빨리 구해야겠구나. 언제까지 널 이렇게 고생시킬 순 없으니.”
한참 서류를 정리하고 있자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보좌관은 구해야겠지만 고생은 아니에요. 나름 재밌어요. 제가 의외로 재정 관리에 소질이 있거든요.”
황후 시절에도 내무부의 재정을 탄탄하게 관리했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크로프트 공작가의
재정난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영지 역시 지금은 안정을 찾았다.
“너야, 무엇이든 잘하지. 어릴 때부터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칭찬하는 아버지 때문에 부끄러워졌다.
꼭 내가 칼라일에게 뭐든 잘했다며 박수를 쳐 줄 때의 눈빛이었다.
이제 박수받을 나이는 아닌데.
머쓱함에 큼, 목을 가다듬은 난 정리한 서류를 들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여기 이번에 영지에서 거둔 세금을 정리한 거예요. 한동안 상황이 안 좋아 영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잖아요. 해서 이번엔 절반만 거두라 했어요. 당분간은 영지민들이 안정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 잘했다. 오늘 저녁에 칼라일에게 간다고 하였지?”
오늘 저녁에 칼라일과 함께 야시장을 구경하러 갈 생각이었다.
“네. 곧 칼라일을 아카데미로 보내야 하니 한동안은 함께 지내려 해요. 낮엔 공작가로 올게요.”
“내가 다시 일하고 있으니 걱정은 말고 칼라일과 시간을 보내렴.”
“네.”
아버지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린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집사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신전에서 아가씨께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신전이라니. 난 미간을 좁혔다.
“신전에서?”
“네.”
집사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건넨 나이프로 뜯어 서신을 열어보자 오늘 오찬을 함께 하고 싶단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니?”
“대신관께서 저와 함께 오찬을 함께 하자고 하네요.”
“대신관이?”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좁히셨다.
“제가 어제 상단을 통해 고아원에 기부금을 보냈거든요.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고아원들은 전부 신전 아래 소속되어 있었다.
기부금을 자기들에게 보내지 않아 단단히 골이 났겠지. 오찬에 불러 내게 무슨 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이런 골난 행동을 보일 것 같아 망설이긴 했었다. 신전의 행패가 무서워라기보다는 상대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흠…….”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 역시 대신관의 초대장이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신전을 싫어하는 만큼 대신관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황제와 황후를 싫어했던 것이지만.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빛의 신 루멘을 주신으로 한 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있었다.
대륙이 처음 만들어질 때 빛의 신 루멘이 축복을 내렸다고 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였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만큼 영향력도 상당히 강했다.
황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언제나 정통성이 명확한 황위 계승자들을 지지했었다.
그러니 반정으로 황좌에 앉은 레이몬드를 못마땅해하는 건 당연했다.
황제의 즉위식 땐 대놓고 축언을 할 신관을 보내지 않아 말이 많았었다.
신전에선 레이몬드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신전에 정통성을 확립해 달라 도움을 요청하길 바라고 벌인
일이었지만 레이몬드는 그리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이미 신관들이 신성력을 점차 잃게 되면서 신전의 영향력은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대신관 빼고는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없었으니까.
단지 주신을 모신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에 신전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모욕한 신전에 분노한 레이몬드는 매년 황실이 신전으로 내던 기부금을 반절로 줄여버렸다.
결국 재정난에 휩싸인 신전이 레이몬드에게 백기를 들었지만 황실과 신전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어린아이들도 알 정도였다.
당연히 황후였던 나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때야 여론을 의식해서 대놓고 나까지 나서지는 못했지만, 난 더 이상 황후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신전의 평판이 더욱 나빠졌다지.
내게 행패를 부린다면 그 배로 돌려줄 것이다.
“가야겠어요. 신전에 갔다가 전 바로 칼라일에게 갈게요.”
모든 게 내가 더 유리한 상황에서 이 만남을 무서워 피할 이유는 없었다.
황후 시절엔 참았어야 했던 말들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굳이 가야겠니?”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걱정 마세요. 과거와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대신관에게 내가 꼭 돌려줘야 할 빚이 있기도 했다.
난 걱정하지 말라며 아버지에게 미소를 그렸다.
99 화
* * *
100 화
하지만 그 순간 알았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지를.
그는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그러는 듯했다.
신전에서 내게 저질렀던 일 중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 바로 내가 유산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i>‘황후 폐하께서는 신앙심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그러니 신께서 아이를 허하지 않으시는 것이겠지요.’
</i>
<i>‘아이를 잃다니, 그것이야말로 불민한 믿음에 대해 신께서 내린 벌이 아니겠습니까.’</i>
* * *
“미안하다.”
레이몬드는 엘리야의 마차가 시야에서 흐려질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사과였다.
101 화
* * *
102 화
엘리야……?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떠올랐다.
보랏빛 눈동자가 크로프트 가문의 특징적인 내력이기는 하나, 아이의 머리는 곱슬곱슬한 금발이었다.
방계 혈족이 많은 가문이니 어쩌면 그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야가 떠오르는 것은 눈동자 색이 지나치게 비슷해서 그런 것뿐이리라.
그때, 아이의 작은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아저씨, 혹시 많이 아파요?”
아이는 말이 없는 레이몬드를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5-6 살쯤 되었을까, 어린아이가 진지하게 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이몬드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너야말로 다친 곳은 없느냐?”
꽤나 세게 머리를 부딪쳤었다. 혹 시나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엄마가 항상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했는데 이 인형을 줍느라 아저씨를 못 봤어요.”
아이는 흙이 잔뜩 묻은 인형을 그에게 들어 보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의가 바르구나.”
고개를 든 아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가 그랬어요. 착한 아이는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안다고요! 전 착한 아이니까 엄마 말을
잘 들을 거예요!”
“그래? 어머니가 아주 현명하시구나.”
“당연하죠!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걸요!”
아이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었다.
“근데 네 어머니는 어디 있지?”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나 다른 보호자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어……?”
레이몬드는 그의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설마 엄마를 잃어버린 건가.”
낮게 말하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가 멀리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제가 멀리 와 버렸어요.”
아이는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낯선 상황에 겁을 먹은 듯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자 레이몬드도 당황스러워졌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주춤거리던 그는 일단 몸을 낮추었다. 아이와 시선을 맞춘 그는 작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음, 네 이름이 뭐지?”
“흡, 흐읍. 칼, 라일이요.”
훌쩍이는 아이의 눈가가 붉었다. 엘리야를 닮은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자 레이몬드의 마음 또한
불편해졌다.
마치 제가 엘리야를 울리기라도 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큼, 목을 가다듬은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칼라일, 내가 엄마를 꼭 찾아줄 테니 울지마라. 그때까지 네 옆에 있을 테니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그 말을 하려 했지만 레이몬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갑자기 품 안으로 안겨든 칼라일 때문에.
칼라일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몬드는 순간 몸이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
아이를 처음 안은 것도 아니었는데. 에드먼드가 어릴 적 몇 번 안아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달랐다.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가 이상하게 심장을 울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알 수 없는 심장의 울림에 레이몬드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혼란이 겹친 그때, 칼라일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흐, 흐아아앙!”
많이 무서웠던 것인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칼라일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한 번도 아이를 토닥여본 적 없었기에 참으로 서툰 손길이었다.
“……괜찮다. 울지 마라.”
“흐아앙! 엄마……!”
나직이 달래보자 칼라일이 엄마를 찾으며 그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황하다 이윽고 거북함에 아이를 밀어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아이들에게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레이몬드는 칼라일이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라일이 우는 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칼라일이 울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처음 보는 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몹시도 당혹스러웠지만, 그는 칼라일을 달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작은 등을 토닥였을까. 어느 정도 진정했는지, 칼라일이 고개를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온기에 묘한 아쉬움이 들던 때. 칼라일이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닦았다.
“흡, 감사합니다. 아저씨. 엄마 올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세요. 엄마 금방 저 찾으러 올 거예요.”
칼라일은 이제 울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말도 잘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니 문득 아이의 신분이 궁금해졌다.
잘 관리된 아이의 외모와 한눈에 봐도 비싼 옷을 보면 평민의 아이는 아닌 거 같았다.
귀족가의 아이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호위기사 하나 없이 야시장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를 빤히 보고 있자 또 엘리야가 떠올랐다. 처음엔 보라색 눈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면 볼수록 엘리야를 닮은 것 같았다.
왜 자꾸 엘리야가 떠오르는 거야.
아무래도 그의 머릿속이 엘리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게 급선무였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칼라일, 어머니의 이름과 외양을 말해 주면 내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마.”
“아, 엄마 이름은 엘……”
“칼라일!! 엄마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칼라일이 이름을 말하려 한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 건지 갈라져 있는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칼라일!”
그 느낌에 쐐기를 박듯 다시 한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아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엄마!”
누군가를 발견한 듯 칼라일은 곧장 달려나갔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굳어 있던 레이몬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라일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서.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엄마의 품에 안기는 칼라일과 아이를 꽉 끌어안는 여자.
마침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몬드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엘리야.”
네가 왜 여기에…….
갈색 머리칼의 평범한 얼굴.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그녀였지만 레이몬드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흐아앙! 엄마!”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그리고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엘리야의 것이었다.
“……엄마?”
레이몬드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멀리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만 보였다.
‘저 아이가.’
엘리야의 아이란 말인가.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엘리야의 곁으로 다가온 한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남자의 화려한 백금발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밝았다.
비틀거리는 엘리야의 팔을 부축하고 자연스럽게 칼라일을 안는 그는.
제레미 드로이트, 드로이트 공자였다.
칼라일이 익숙하게 제레미의 품에 안기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제레미의 백금발과 칼라일의 금발이 시야에서 묘하게 어우러졌다.
“…….”
레이몬드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제레미에게서.
한 손으로 칼라일을 안고 한 손으로 엘리야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모습은…….
엘리야의 남편이자 저 아이, 칼라일의 아빠 같았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한 그들을 보자 누군가 그의 머리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 속에서도 그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그들의 완벽함 속에 그가 불순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는 멍청히 다가가지도 외면하지도 못했다.
그사이, 제레미가 엘리야의 어깨를 단단히 고쳐잡았다. 그리고 마치 엘리야에게서 그를 차단하듯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결국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 * *
“엘리, 이제 좀 괜찮아요?”
시장에서 멀어져 광장으로 나오자 제레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네, 이제 좀 괜찮아요. 칼라일은 제가 안을게요.”
칼라일을 찾자 온몸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엘리, 내가 안을게요. 지금 손 떨리고 있어요.”
제레미의 말에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자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아…….”
“여기도 다친 것 같은데.”
그의 조심스러운 손끝이 내 볼을 스쳤다. 그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보니 미친 듯이 시장을 뛰어다니다
어딘가에 긁힌 듯했다.
“아프지는 않은데.”
어색하게 웃자 제레미는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칼라일을 갑자기 잃어버려서 제드랑 같이 찾고 있었는데…… 아, 제드는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아,
그러고 보니 제드를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엘리, 엘리. 진정 좀 해요. 이제 괜찮아요. 칼라일 여기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자 제레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한결 차분해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난 손을 놓으며 그에게 칼라일을 달라 손을 뻗었다.
“내가 안을게요.”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잠시 날 걱정스레 보던 제레미는 이내 조심스럽게 칼라일을 넘겨주었다.
따뜻한 아이의 온기를 느끼자 그제야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심장에 퍼졌다.
“으음……. 엄마…….”
시장을 벗어나는 새 울다 지쳤는지 깜박 잠이 들었던 칼라일이 내 품에서 깨어났다.
칼라일을 꼭 끌어안았던 난 한껏 내 볼을 아이의 볼에 비볐다.
“칼라일 앞으론 절대 이렇게 혼자 어디 가 버리면 안 돼, 알았지?”
“네. 아, 엄마 근데…… 아저씨 있었는데.”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칼라일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칼라일의 온기를 느끼던 난 멈칫하며 얼굴을 뗐다.
“아저씨?”
“엄마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던 아저씨요. 아까 거기에 있었어요.”
1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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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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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룬트 왕국에서 엘리라는 가명으로 꽃집을 하셨다고 합니다. 남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착하고 예쁜
아가씨라고 시장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i>
<i>‘홀로…… 키웠다고?’</i>
<i>‘네. 남편은 없다고 했답니다. 단지…… 드로이트 공자가 꽃집에 자주 드나들고 친하게 지내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닌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i>
<i>‘아이와도 상당히 친밀하게 지냈다고 하였고요.’</i>
<i>‘저택을 알아보니 피닉스 상단의 지부장이 최근 조용히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파산한 귀족의 저택이라……. 아마 이곳이 아이를 숨긴 곳인 듯합니다.’</i>
105 화
“우와! 나비다!”
칼라일은 노랑나비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작은 꽃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비에게 손을 뻗었다.
잡힐 듯 말 듯한 나비와 함께 꺄르르 즐거운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뒤로 걱정이 밴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라일,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
칼라일을 빤히 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택을 막 나오는 제레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가 왜 그곳에서 나오는 거야.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그를 향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엘리야가 나타났다.
저택을 나오는 그녀의 팔에는 음식을 담은 듯한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곧 마당까지 나온 그녀는 천을 펼쳐 그 위에 바구니를 놓고, 제레미와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띠고서.
그 모습에 못 박힌 듯 발걸음을 멈춘 레이몬드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레미와 칼라일의 즐거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찔러왔다.
“잡았다!”
“꺄악! 엄마 잡혔어요, 구해 줘요!”
칼라일이 높은 웃음을 터뜨리며 엘리야에게 손을 뻗고 엘리야가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구해 주는 듯한 시늉으로 칼라일을 품에 안자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울렸다.
“자, 이제 샌드위치 먹고 더 노는 거야? 아직 아침도 안 먹었잖아.”
“네!”
칼라일과 제레미가 엘리야가 깔아 놓은 천 위로 앉았다.
제레미가 샌드위치를 들어 칼라일에게 먼저 먹였다. 엘리야가 주스를 따르고 세 사람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게…….”
말끝이 떨려 와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익숙하게 서로를 대하는 행동들이 그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인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지금 눈앞의 보이는 장면은 그런 그를 비웃듯 행복한 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엘리야가 임신했을 때……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레 꿈꾸곤 했던 그런 모습.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광경을 찢어버리고 싶은 흉포한 마음도 잠시, 생경한 엘리야의 미소가 눈앞에
박히며 그의 가슴이 지끈거렸다.
난 대체 뭘 바라고 이곳에 온 거지.
엘리야에게 직접 묻고 답을 듣고 싶었지만 차마 저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한 그들에게 그는 불청객이었으니까.
그가 지금 나선다면 엘리야의 저 행복한 미소도 깨질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무저갱에 빠진 듯한 무력감으로 멈추어 서 있던 그때.
칼라일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닦으려 제레미가 손수건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잘못 본 것일까 싶어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제레미는 숲 속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환영을 본 것은 아닐까 느리게 눈을 깜박여 보았지만, 저택과 멀지 않은 숲 속,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황제가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한참을 그를 향했음에도, 황제는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엘리야와 칼라일이 있었다.
황제가 칼라과 엘리야를 보고 있다.
그 사실에 제레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제레미는 순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대체 황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으니까.
엘리야에게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도 혼란스럽던 그때, 황제가 몸을 움직였다.
칼라일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저택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느렸던 걸음이 이내 빨라지고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황제는 정말 그대로 떠난 듯했다.
저택까지 와서 칼라일을 봐 놓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이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난 거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온 거라면, 칼라일을 보았다면…….
문득, 현재의 칼라일에게 황족의 상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엘리야가 마도구로 모습을 바꾼 덕에 칼라일은 흑발에 흑안이 아닌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였다.
칼라일을 보았다 한들 에그리타 황족의 상징이 하나도 없었으니 자신의 아이일 것이란 의심도 하지 못한
건가.
거기다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쩌면…….
“제레미는 안 먹어요?”
“아…….”
생각에 잠겨 제레미가 움직이질 않자 엘리야가 의아하게 물었다.
“제레미, 제레미도 먹어요.”
칼라일이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제레미?”
무언가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느낀 듯 엘리야가 걱정스레 또 한 번 그를 부르자 제레미는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돌아갔다 해도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몰랐다.
이곳을 들켜버린 이상, 당장이라도 다시 찾아와 칼라일을 데려갈 수도 있는 일이다.
엘리야에게 말해야 했다.
* * *
106 화
예상치 못한 말에 멈칫했다.
“……제레미를 이용하라고요?”
“네. 누군가를 칼라일의 아버지로 꾸며내는 것보다는 제가 더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이미 제가
칼라일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셨으니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제레미는 레이몬드의 의심을 피할 가장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6 년 전부터 그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걸 레이몬드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레이몬드가 과연 제레미를 가만히 둘까.
우리의 문제에 그를 이렇게까지 끌어들이는 건 해서는 안 될 짓 같았다.
난감함에 말끝을 흐리던 그때, 제레미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엘리, 지금은 다른 건 생각지 말고 오로지 칼라일만 생각해요.”
“……내일 폐하를 빼야겠어요.”
제레미의 제안과 별개로, 레이몬드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칠 필요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막 지나자마자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크로프트 영애.”
마차에서 내리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시종장이 내게 다가왔다.
“시종장.”
시종장이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주춤했지만, 곧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몬드가 날 기다리고 있다.
별말도 아닌데 오늘은 손끝이 떨릴 만큼 긴장되었다.
그와 칼라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떨어서도 안 되고 조금의 빈틈을 보여서도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칼라일이 레이몬드의 자식이란 걸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게 내가 지난 6 년간 이곳을 떠나 있던 이유니까.
이제 와 아이를 황권 다툼이라는 피 말리는 싸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가지.”
뜨거운 숨을 내쉰 난 결연한 얼굴로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폐하, 크로프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울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난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심장을 감추며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자 언제 책상을 벗어났는지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더욱 짙었다. 그 눈빛에 스치는 강렬한 감정들은 내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의심을 품은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눈빛의 그를 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예, 폐하. 한데 그 전에 먼저 주변을 전부 물려주시겠습니까.”
“…….”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인지 짐작한 것일까. 레이몬드가 일순 멈칫했다.
그는 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모두 나가 있거라.”
시종들과 기사들이 전부 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어제 나를 본 모양이군.”
그는 내가 어제 알현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부터 직감한 듯했다.
내가 꺼낼 이야기가 무엇일지.
하긴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황궁으로 서신을 보냈었다.
신전에서 그에게 냉정히 선을 그었던 내가 먼저 독대를 요청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예. 어제 폐하께서 제 사적인 장소에 다녀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장소…… 그 저택이 네 것이 아니라 부정하지 않는구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저택도 폐하께서 보신 아이도 제 아이가 맞으니까요.”
순간 레이몬드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 아이가 정말 너의 아이라고.”
내 말을 믿기 싫다는 듯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듯 말했다.
그런 그에게 난 쐐기를 박았다.
“네. 칼라일은 제 아이가 맞습니다. 그리고 칼라일은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
“혹시라도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확실히 말씀드리고자 오늘 독대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칼라일은 저의
아이일 뿐, 폐하와는 상관없는 아이입니다.”
“너의 아이일 뿐? 아이의 아비는 어디 가고 너의 아이일 뿐이야. 왜, 내가 드로이트 공자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서 내 앞에서 그를 감싸는 건가?”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는 정말 제레미를 칼라일의 아버지라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i>‘절 이용해요.’</i>
순간 제레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제레미의 말대로 한다면 분명 일이 쉬워지겠지. 하지만 내가 편해지자고 그를 방패막이로 내세울 마음은
없었다.
“……드로이트 공자는 제 아이의 친부가 아닙니다.”
“하, 아니라고?”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 아이의 친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내리깔며 준비된 말을 내뱉었다.
이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서류 등은 만약을 위해 룬트 왕국을 떠나기 전 완벽하게 꾸며놓은 상태였다.
“……그렇게까지 드로이트 공자를 감싸고 싶은 모양이지?”
하지만 그는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혼 직후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룬트 왕국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 시지요. 저택의 위치를 알아내셨듯 말입니다.”
“…….”
“드로이트 공자는 그저 룬트 왕국에서 계속 교류했던 탓에 아이가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믿는 것인지, 의심하는 것인지 의중을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느리게 움직였다.
“내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의 말에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어 간신히 그 동요를 숨겼다.
“차라리 드로이트 공자와의 아이라 했다면…… 아니, 이제는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와 이혼하자마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건가?”
그의 분노는 갈 길을 잃고 배회하다 마침내 나를 향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제가 대답할 이유가 없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이혼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예.”
“네가 그렇게나 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람인 줄 몰랐군. 아, 그래서 그 친부가 죽었으니 깔끔히
잊어버리고 드로이트 공자를 옆에 두는 건가 보지?”
“……폐하!”
선을 넘는 그의 발언에 나는 경고 하듯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레이몬드가 움찔했다. 이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방금 한 말은…… 하아, 내가…….”
그는 피곤함에 젖은 한숨을 내쉬며 거친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하셔서 실수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이상의 제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아무리 폐하라
하실지라도 월권이심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엘리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아이는 폐하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의 음성이 쐐기를 박듯 집무실을 울린 순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던 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인지 거뭇한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마른 입술은 할 말을 잃고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는 얼굴을, 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칼라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 어린아이를 살벌한 황위 다툼의 한복판에 던질 순 없었다.
황권과는 상관없이, 평생 목숨을 위협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길 바랐다.
형제의 피를 보고 올라가는 황제의 삶이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 단 한 톨의 의심의 여지도 주지 않아야 했다.
“폐하. 칼라일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세간이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제는 제 아이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달라, 는 말인가?”
“예. 부탁드립니다.”
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하.”
일련의 상황에 이성을 찾기 어려운 듯 머리 위로 비소인지 조소인지 모를 단말의 웃음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할 이야기가 끝났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그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몹시 괴로워 보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난 말이 없는 그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 * *
107 화
* * *
* * *
* * *
108 화
나는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쥐었다.
“다른 쪽이라면…….”
시오스 후작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는 크로프트 공작가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갑자기 돌아온 내 뒤를 캐고 다닐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빨리 내 과거를, 칼라일의 존재까지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레이몬드에겐 일부러 모든 정보를 흘렸지만 시오스 후작 쪽에는 아니었으니까.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칼라일이 황실의 핏줄인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면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갈 것이다.
리제나는 황후가 아니고, 에드먼드가 황태자 책봉도 받지 못했으니 황후였던 내게서 난 아이가 황자로
밝혀지면 정통성에서 밀리게 되니까.
칼라일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너도 나처럼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겠지.”
그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네가 숨 겼다는 것 자체에서 의심을 하겠지.”
“……그렇겠지요.”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한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긴장감에 난 의아한 눈빛을 했다.
도와준다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나섰다가는 오히려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레이몬드는 나를 보던 시선을 내리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언가 더 심각한 일이 있는 걸까. 나까지 불안해지려던 그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황궁으로 돌아와, 엘리야.”
뭐……?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던 나는 곧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방금 뭐라 하셨죠?”
“황궁,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했다.”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레이몬드의 낮은 음성이 정확히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라니. 다시 황후가 되라니.
칼라일을 데려가겠다거나, 신전의 검사를 의뢰하겠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의 결연한 표정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입술이 벌어지며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다.
“폐하, 미치셨습니까?”
감히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되는 무례한 언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저히 이 말 말곤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해. 다시 황후로 돌아와.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린 서로에게 필요해.”
레이몬드는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한 듯 당황하지 않으며 답했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지금 미친 게 자신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뇨,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게 황후로 돌아오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데. 내가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이혼을 요구했는데.
아니, 다른 일을 자처하고서라도 지금 내게는 칼라일이 있었다.
그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미친 게 아닌 이상.
나는 그에게 선을 긋듯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폐하, 제겐 아이가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버리고 다시
황후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를 버리라 말한 적 없다. 네 아이는 내 양자로 입적할 거니까.”
칼라일을 양자로 입적하겠다니.
근래 그의 업무가 과중했던 건지, 아니면 불면증에 제대로 된 판단이 안 서는 건지.
레이몬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갈수록 이상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대체 무슨……. 폐하의 핏줄도 아닌 아이를 황자로 입적하시겠다니요.”
“사례가 없지 않다. 황위 계승권에서 제외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를 불렀다.
“……폐하.”
“엘리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들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존재는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거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전에 아이에게 손을 쓰려고
하겠지.”
“……지금 그래서 폐하께서 방패막이라도 되어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비록 내 아이가 아니라 하나 그들은 분명히 의심할 거다. 그런 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은…… 황궁이지.”
“…….”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모든 계획이 완벽히 짜여진 듯했다.
물론 사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면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황자로 키우지 않기 위해 도망친 것인데 칼라일을 황자로 만들자니.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엘리야, 아이를 생각해. 비록 황위 계승권은 없을지라도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어.”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이다.
그를 빤히 보던 난 문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보았다. 제대로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흐트러진
모습들이 잔뜩 보였다.
벗지도 않은 로브와 흐트러진 머리칼, 로브 끝자락에 묻은 흙먼지.
그는 내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황궁에서 여기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거 같았다.
그 모습과 짙은 눈빛을 보던 난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게 미련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식도 아닌 아이까지 품으려 하는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와 네 아이가 위험에 빠지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수는 없어.”
그의 눈빛이 애절했다.
검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감정은 이제는 집착인지 미련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야.”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보던 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뇨. 폐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소리치듯 이름을 부른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칼라일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건 나야. 드로이트 따위가 아니라고.”
“왜 갑자기 드로이트 공자에 대해……. 아니, 오히려 제겐 그쪽이 더 나아 보입니다.”
굳은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뭐?”
“제게 황후로서의 삶은 괴로운 기억뿐이니까요. 폐하께 이혼을 청했던 이유가 단지 에드먼드 때문이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줬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아신다면, 폐하께서 감히 제게 황후로 돌아오라 말씀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그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칼라일이 이렇게 된 이유 그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낳아온 아이로 황궁의 후계 서열을 뒤흔들었고 내게 단 한 번도 내 아이를 지켜줄 거란
확신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 선심 쓰듯 저런 제안을 하다니…….
“아이의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엘리야, 난…….”
“폐하, 선을 넘지 말아 주십시오.”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것인지까지는 알고 싶은 마음도 여력도 없었다.
지친 얼굴을 숨기지 않자 멈칫하던 그가 물러났다.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 괜찮아?”
그가 떠나고 제드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한 거야? 네 언성이 높아지던데…….”
제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니었어.”
어쩌면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럼 왜 오신 건데?”
이건 레이몬드와 나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누군가가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해.”
제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시오스 후작 쪽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배후가 누구인지부터 확실히 알아야겠어. 그리고 칼라일을
아케데미로 보내는 것도 조금 미뤄야겠어.”
어디까지 정보가 샜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칼라일이 다닐 아카데미도 안전하단 보장이 이제 없는 것이다.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빨리 알아볼게.”
* * *
레이몬드가 다녀간 뒤 딱 삼 일째 되는 날.
크로프트 공작가가 아닌 칼라일이 머무는 저택으로 시오스 후작가의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리제나.”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난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내뱉었다.
가만히 서신을 보고 있자 헬란이 내게 물어왔다.
“엘리 님, 가실 건가요?”
“가야지. 친히 이곳까지 서신을 보냈으니 말이야.”
헬란의 곁에선 제드가 덧붙였다.
여기로 서신을 보냈다는 건 이곳의 위치와 이 저택에 누구를 숨기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내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오스 후작 쪽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뒷조사를 한 게 자신들이라 바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대화를 하자라…….
칼라일이 황자인지 확신이 없으니 날 불러 떠보려는 것인가.
“대체 일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시오스 후작가에서는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서신을 보내죠.”
“숨기고 있는 게 드러나면 불리해지는 건 우리니까. 당당하겠지.”
칼라일은 내 약점이었고 그 약점을 잡은 게 리제나였으니.
이 만남을 피할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히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러 가는 건 아니었다. 내게 약점이 있듯 그녀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분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헬란의 어깨를 달래듯 두드린 난 그들에게 말했다.
“시오스 후작가에 다녀올게. 그동안 칼라일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 줘.”
레이몬드가 다녀간 이후로 저택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혹시 모를 기습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상단의 기사들이 철통으로 지키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칼라일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불안해 당부하자
걱정 말라는 듯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말고 다녀와.”
“응.”
난 서신에 대한 답 대신 직접 서신을 들고 곧장 저택을 나섰다.
109 화
시오스 후작가.
저택 앞,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서신에 답장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바로 방문했음에도 후작가의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열렸다.
“크로프트 영애.”
허리를 깊이 숙이는 하녀의 머리가 백발이었다. 고개를 든 하녀의 얼굴을 본 난 멈칫했다.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얼굴과 차가운 눈빛.
한눈에 봐도 평범한 하녀는 아니었다.
“아가씨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하녀를 따라 걸어가자 일전 티파티가 열렸던 온실 화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코 안 가득 진한 꽃향기가 들어왔다.
머리가 아찔할 만큼 강한 향기였다.
숨을 삼키며 화원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익숙한 가제보 아래 마련된 티 테이블이 보였다.
역시 내가 올 것을 예상한 듯, 둘만을 위한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
나를 발견한 리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프트 영애, 어서 오세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시오스 영애. 답신 대신 직접 방문한 것이 갑작스러워 놀라진 않으셨을까 염려되네요.”
“아닙니다.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앉으세요. 영애.”
그녀가 자리를 권했다.
맞은 편에 앉자 리제나도 자리에 앉았다.
“왠지 영애께서 바로 와 주실 것 같아 미리 차를 준비해 두었는데 홍차……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미소를 지은 리제나가 직접 찻주전자를 들었다.
화원에 우리 둘 말고 시중을 드는 하녀가 한 명도 없었다.
일부러 그녀가 사람들을 물린 듯했다.
홍차를 따른 찻잔을 내 앞에 놓아 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룬트 왕국에서 유명한 홍차랍니다. 영애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니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찻잔에서 익숙한 향이 났다.
룬트 왕국의 홍차라, 정말 나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듯했다.
모든 걸 알고 있다.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들이켰다.
“맛있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 써야지요. 제가 영애께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영애께선 모르실 겁니다.”
“영애께서 제게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줄 근래에나 알게 되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난 리제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영애, 저를 부른 이유가 제 아이 때문입니까.”
빙빙 돌리며 그녀와 불편한 티 타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바로 본론을 꺼내라 말하자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영애께서 이렇게 바로 물어주시니 저도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네. 영애께서 숨긴 아이 때문입니다.”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이의 외양은 익히 들었습니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황족의 상징이 하나도 없다 하더군요. 허나
아이의 외양은 마도구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의 외양을 아실 정도로 뒷조사를 하셨는데 아이가 차고 있는 마도구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못
들으셨나 봅니다.”
싸늘한 목소리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애께서 그리 빨리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걸 믿기가
힘들더군요. 영애께서 폐하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순간 어느새 말아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리제나는 그녀와 레이몬드가 연인이었던 시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과거를 언급하는 것 같았다.
리제나는 그때의 나를 그리듯 안쓰러운 표정을 했다.
그러나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과는 달리 녹안에는 묘한 번뜩임이 스쳤다.
하지만 그 시절을 비웃든 말든 이젠 전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깊이 사랑했고 그만큼 폐하께 모든 걸 희생하였지요. 하여 그 사랑을 끝냈을 때 조금의 미련도
없었습니다. 리제나 영애와 폐하의 행복을 빌어줬을 만큼요. 안타깝게도 두 분이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말이죠.”
내 덤덤한 말투에 리제나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그녀는 동요를 감추듯 시선을 낮추며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폐하께 아무런 미련도 없고 그 아이도 폐하의 아이가 아니다라…….”
찻잔에서 손을 뗀 그녀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리제나는 시선을 들었다.
상냥한 가면을 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애, 허면 왜 이리 급히 제게 오셨습니까. 답신도 하지 않고 바로 오실 만큼 다급했다는 것은 무엇을
들킬까 두려우신 게 아닙니까.”
“두렵지요. 세간의 눈을 피해 조용히 잘 키우려 했던 아이를 찾아내 협박이나 다름없는 서신을 보내오니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오스 영애께
경고하기 위함이지요.”
“제게 경고를 하신다고요?”
리제나는 어이가 없는지 순간 실소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을 만할 것이다. 지금 분명한 약점을 손에 쥔 건 내가 아니라 리제나였으니까.
하지만 내겐 그녀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난 비소를 머금은 그녀를 차분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영애, 영애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의 황후는 공석입니다.”
“지금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뜬금없는 이야기라 느꼈는지 리제나가 미간을 좁혔다.
“얼마 전, 폐하께서 제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이몬드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서신을 받은 순간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황후의 자리만큼, 리제나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카드는 없을 테니까.
“……!”
나의 예상대로 리제나의 녹안이 크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커진 그녀의 당혹스러운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제게 아이가 있는 걸 아십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황후의 자리로 돌아오라 하셨지요. 제
아이를 황자로 입적하고 말이지요.”
리제나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만약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영애, 1 황자께서 과연 무탈히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을까요.”
에드먼드는 아직 황태자가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차기 황태자로 유력한 것은 현시점에서 에드먼드 말고는 황제의 후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황후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칼라일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황후가 된 내가 새로운 적자를 낳는다면 황후를 어머니로 두지 않은
에드먼드의 자리는 위태롭게 흔들릴 것이다.
아무리 1 황자라 하여도 그는 황후의 적자가 아니었으니까.
단번에 정통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내 경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리제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이 없는 그녀를 보다가 여유롭게 홍차를 들이켰다. 리제나의 굳은 얼굴 때문일까, 처음 마셨을 때보다
홍차가 부드럽게 입 안을 감쌌다.
난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시오스 영애, 비록 폐하께서 제게 과분한 제안을 하셨지만 사실 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아이를 황자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탁-
찻잔이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시오스 영애께서 계속 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지요.”
그리고 침묵을 지키던 리제나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아이를 건들면 황후의 자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제게 협박을 하러 오셨군요.”
나를 직시하던 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를 불러들여 협박하려 했을 텐데, 도리어 반대의 상황이 됐으니 그녀의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후의 자리만큼은 리제나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이제 그 자리는 그녀의 역린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애, 부디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일이 많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리제나가 내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답이 없었지만 그녀가 날 잡을 이유도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화원을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리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난 걸음을 멈추며 몸을 반쯤 돌렸다.
“무엇이죠?”
“룬트 왕국에서 행복하셨나요?”
왜 이런 걸 묻지.
리제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녹안에는 적의나 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내가
행복했는지 궁금한 듯했다.
잠시 그녀를 보던 난 느릿하게 답했다.
“행복했습니다.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요.”
“……그랬군요.”
왜인지 리제나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그럼 이만.”
녹안이 상념에 빠지듯 흐려지는 것을 보던 난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 * *
110 화
* * *
* * *
“어서 오세요.”
수도의 허름한 술집.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용병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술에 취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용병들을 지나 가게 구석 자리로 향한 제드는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제레미.”
그는 먼저 도착해 있는 제레미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111 화
* * *
깊은 밤이 지나고 하늘에 푸른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각, 낡은 마차 한 대가 수도 광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광장에 울리는 마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불편할 만도 했건만 리제나의 꼿꼿한 자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112 화
드로이트 공작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위험하게 번뜩이는 그녀의 녹안을 분명히 보았다.
“지금 크로프트 영애와 황자를 죽이자는 건가? 미친 생각이군.”
크로프트 공작가의 영애였다.
귀족의 살인 사건은 황실에서 직접 조사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일반 귀족 영애도 아니고 무려 전
황후였던 영애였다.
조사원들이 파고들 터인데 그들의 눈을 피하며 완벽하게 일을 꾸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가만히 손 놓고 황후와 새로운 황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그렇다고 크로프트 공작가로 쳐들어가 영애를 죽이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크로프트 공녀와 아이는 지금 공작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적이 드문 저택에서 아이를 숨기고 있지요.
제가 그 저택의 위치를 압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 해도 저택을 대놓고 습격하는 것은 미친 짓이네.”
“누가 습격을 한다 했습니까.”
리제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공작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리제나의 태도엔 여유가 넘쳤다.
새로운 황자가 나타나면 제일 불안할 사람은 리제나였다.
1 황자의 어미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헌데 리제나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크로프트 영애를 죽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하니 제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공작 각하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습니까. 저에게 모든 계획이
있습니다. 공작께선 그저 저를 믿고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리제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은은한 빛이 비치는 그녀의 미소는 홀릴 듯 매혹적이었지만 드로이트 공작은 순간 제레미의 말이 떠올랐다.
* * *
이틀 뒤.
이른 아침 피닉스 상단의 지부로 갔던 제드는 늦은 오전쯤 돌아왔다.
“루몬트가 적당한 저택을 찾았대. 늦어도 삼 일 뒤쯤엔 그곳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제드가 내게 말했다.
“다행이다. 시오스 후작 쪽에 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지?”
“없어. 후작도 여전히 칩거 중이고……. 후작가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고 했어.”
“시오스 영애가 혹시 따로 움직인 흔적은?”
“흠……. 후작가를 통할 수 있는 모든 문을 주시하고 있지만, 특별한 흔적은 없었어.”
시오스 후작가의 저택은 거대했다.
보통 그런 규모의 귀족 저택엔 위급 상황 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알아보기는 쉽지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드로이트 공작에 대한 소식은?”
“뭐, 그쪽도 특별히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댔어. 음…… 그, 드로이트 공자한테선 아무런 말 없어? 뭐
서신이라던가…….”
“없었어.”
내가 고개를 젓자 제드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드로이트 공자도 바쁠 거야. 거기다 공작의 눈이 있는데 서신을 보내는 게 쉽진 않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보다 이제 술은 다 깬 거야?”
이틀이나 지났지만 그에게서 났던 술 냄새를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제 하루 술병이 나서 누워 있었을 정도였다.
제드는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다 시선을 돌렸다.
“근데 칼라일이 안 보이네? 낮잠 자는 건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그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하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전서구?”
갑작스레 도착했다는 전서구에 난 얼굴을 굳혔다. 하인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은 난 봉투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름이 없네…….”
리제나가 보낸 것인가 했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때 제드가 말했다.
“드로이트 공자가 아닐까? 일단 어서 열어봐.”
그의 눈짓에 난 봉투를 뜯었다. 종이를 펼치자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엘리, 드로이트 공작이 칼라일의 존재를 눈치채고 노리고 있어요. 비밀리에 용병들을 모으고 있으니
당장 저택을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급히 준비해 둔 은신처가 있으니 일단 그곳으로 오늘 밤 떠나요. 드로이트 공작이 저택을 주시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요. 은신처로 가 있을 테니 그곳에서 만나요.]
* * *
113 화
114 화
* * *
<i>‘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i>
115 화
“무슨 일이냐.”
시종의 급한 부름에 방으로 온 레이몬드가 물었다.
혹시 칼라일의 상태까지 안 좋아진 것일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칼라일을 둘러싸고 있던 황궁의 하나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에 가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어딘지 이상하게 경직된 황궁의의 얼굴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이의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
“그것이, 상태가 아니라…….”
황궁의가 난감함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똑바로 말해라.”
레이몬드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그제야 황궁의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머리색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아이의 머리색이 바뀌었다니.
이상한 소리였다. 갑자기 여기서 마도구가 왜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칼라일의 몸에 마도구가 없는 것을 이미 자신이 직접 확인했었다.
헌데 이게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얼굴을 구긴 그때, 또 다른 황궁의가 그에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폐하. 아이의 머리색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뭐라고?”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검은색은 황족의 상징이다. 그런데 칼라일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니.
116 화
콰르릉-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면서 메마른 하늘에 천둥이 울렸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을 읽고 있던 리제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모여드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질 듯 했다.
“……비가 오면 불이 꺼질 텐데.”
그녀의 고운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려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제 방을 방문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들어와.”
릴라가 들어오는 모습에 리제나는 책을 덮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니?”
일이 잘 끝나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라 그녀가 릴라를 현장으로 보냈었다.
완벽한 계획이었으니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로이트 공자의 서신을 가장해 엘리야와 칼라일을 준비된 저택으로 유인하고 그곳에서 산 채로 불태워
버리는 것.
재만 남은 저택에선 엘리야와 칼라일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증거도.
릴라는 만족스러운 답을 기다리는 리제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가씨, 일이 틀어졌습니다.”
움찔.
미소를 그리려던 리제나의 입꼬리가 멈칫했다.
“일이 틀어졌다니? 아직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크로프트 영애와 아이를 저택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것까지는 계획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갑자기 페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폐하께서……?”
“네. 불타고 있는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 직접 크로프트 영애와 칼라일을 구하셨습니다.”
“불길에 뛰어들었다라…….”
그가 엘리야를 구하기 위해 직접 불길에 뛰어들었단다.
리제나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품겠다고 말하더니 이젠 목숨까지 불사른다라…….
참으로 대단한 사랑이었다.
그가 그렇게 온몸을 던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을 적에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던 레이몬드였다.
그랬더라면 제가 서왕국으로 떠났을 때 그렇게 저를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를 향한 미련 같은 건 없다, 생각했는데 쓰린 속을 보니 버리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었나 보다.
하지만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다.
리제나는 웃음기를 지우며 릴라에게 말했다.
“허면 크로프트 영애와 아이는 폐하께서 직접 데리고 간 것이냐.”
“네. 황궁으로 가셨습니다.”
“네가 보기에 그 둘이 살아남을 것 같더냐?”
잠시 고민하던 릴라가 말했다.
“연기를 많이 마시긴 했으나…… 죽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일이 틀어졌다 해도 둘이 죽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리제나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직접 개입했다면 벌써 4 기사단장이 용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목숨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죽을 뻔했으니 레이몬드는 배후를 끝까지 찾을 것이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겠지.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릴라, 모든 증거는 드로이트 공작에게 몰아넣었겠지?”
“네, 용병들은 드로이트 공작의 수하만을 보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서신을 대필한 자 역시 이미
죽여 없앴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됐을 경우를 대비해 드로이트 공작에게 증거와 정황을 돌려놓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가 예상한 상황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레이몬드가 그 외진 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뜻이다.
용병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암살자들은 드로이트밖에 모르긴 하지만……”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황제가 직접 칼을 뽑은 지금, 드로이트 공작이 그녀에 대한 의리를 지킬 리가
없었다.
아니, 분명 배신할 것이다.
거기다 어쩌면 이미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가를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 드로이트 공작이 죽어 나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됐다.
무리해서라도 그녀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레이몬드의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던 그녀는 절망의 숨을 내뱉었다.
“릴라, 드로이트 공작은 오늘 밤 자살할 것이다.”
“네?”
릴라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는지 답지 않게 당황하여 되물었다. 하지만 곧 리제나의 번뜩이는 녹안을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예.”
리제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두 번째 서랍을 연 그녀는 안에 있는 드로이트 공작의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릴라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렴.”
리제나는 릴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충실한 심복.
리제나는 시오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단검을 릴라에게 건넸다.
“명하십시오.”
“드로이트 공작의 필체가 담긴 서신이다. 대필로 유서를 만들어. 그리고 공작이 절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게 해라.”
황궁의 기사들이 드로이트 공작가를 찾기 전에 공작이 죽어야 한다.
그래야 시오스 후작가가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존명.”
번쩍.
또 한 번 내려꽂히는 번개의 불빛에 리제나의 굳은 얼굴 위로 번쩍였다.
* * *
* * *
“의식을 또 잃은 건가.”
엘리야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몸이 축 늘어지자 레이몬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약 기운에 다시 잠든 것입니다.”
대답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가에서 급히 불려 온 하르펜이었다.
어릴 적부터 엘리야를 돌본 만큼 그녀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급히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이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이제 고비는 넘긴 건가?”
“네. 다행히도 약이 잘 들어 고비는 넘기신 듯합니다. 앞으로 치료를 꾸준히 하시면 회복되실 겁니다.”
황궁의의 말에 레이몬드는 그제야 딱딱히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잠든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식을 차렸단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을 때만 해도 칼라일에 대해 묻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내게서 아이를 빼돌릴 수 있냐고.
아무리 내가 싫었어도 아버지인 내게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엘리야를 마주하자 그런 말들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붉은 얼굴과 흐린 눈빛, 더운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으니까.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 우습게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저릿하기만 했다.
그를 속이고 배신한 그녀가 미웠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의식이 돌아오면 알려라.”
지금은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다.
방을 나간 레이몬드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칼라일이 있는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117 화
시종장이 문을 열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았다.
* * *
* * *
아무래도 이상했었다.
제드를 만나고 돌아온 뒤 공작은 갑자기 그를 믿어보겠다며 서부로 가 귀족 한 명을 만나고 돌아오라 했다.
그 귀족이 앞으로의 대의를 실행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사람이라 했다.
갑자기 서부로 가라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처음엔 공작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믿어도 되는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서부에 정말 엄청난 반역의 증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해 버렸다.
혹시나 싶어 황제에게 서신을 넘기고 떠났지만 서부로 갈수록 무언가 찝찝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의심 많은 공작이 대의에 큰 역할을 할 주요 인물을 그에게 이렇게 쉽게 소개해 준다는 게 아무리 생각
해도 미심쩍었다.
공작의 성격이라며 그가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곁에 두고 자신이 진짜 믿을 만한지 아닌지 수십 번은
확인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서부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의 찝찝함은 제 뒤를 은밀히 쫓아오는 이를 잡았을 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자는 그가 심문하기도 전에 자결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자가 누구의 사람인지 짐작했다.
최근 그에게 계속 사람을 붙였던 자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시오스 리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여자.
칼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가 결국 일을 꾸민 것이리라.
제레미는 그 길로 수도로 말머리를 돌렸다.
미친 듯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말을 달려 저택에 도착했지만 이미 엘리야는 없었다.
저택을 정리하고 있던 루몬트가 그에게 전한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뒤인 처참한 소식이었다.
드로이트 공작을 통해 자신을 서부로 향하게 한 사이, 리제나가 그의 서신임을 가장해 엘리야를 유인하고
결국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기적적으로 황제가 그들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엘리야와 칼라일이 얼마나 다쳤는지,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은지는 루몬트도 알지 못한다 했다.
함께 갔던 기사들은 거의 전멸이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사는 제드와 함께 의식 불명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루몬트의 절망적인 표정에 그의 심장이 철렁했었다.
당장 황궁으로 달려가 엘리야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번 일은 절대 드로이트 공작 혼자 꾸민 일이 아닐 것이다.
실제 일을 꾸민 사람은 시오스 리제나일 것이고 드로이트 공작은 더러운 일을 대신 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살기로 번뜩였던 리제나의 녹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제레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공작가로 말을
달렸다.
“아아악! 공작님!!”
최대한 빨리 달렸지만 제레미는 결국 늦고 말았다.
활짝 열린 침실의 문.
그리고 그 안에는 목을 매단 드로이트 공작의 몸이 줄 끊긴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118 화
* * *
119 화
* * *
“으윽……”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깊고 깊은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듯 의식을 차린 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흐린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며 화려한 천장의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궁…….”
잠깐이나마 의식을 차렸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가씨, 정신이 드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하르펜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하르펜이 맞았네.”
의식이 돌아왔던 그때 하르펜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하르펜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네. 접니다. 폐하의 명령으로 아가씨의 치료를 돕기 위해 공작가에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지금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몸이 좀 무겁긴 한데……. 크게 아픈 곳은 없어.”
“다행입니…… 아가씨,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칼라일을 봐야겠어.”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칼라일이었다.
몸을 살짝 일으키자 하르펜이 황급히 어깨를 다시 눌렀다.
“하르펜, 칼라일을 봐야 한다니까.”
레이몬드가 칼라일이 무사하다고 했지만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가씨. 내상이 심각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셨을 뿐 아직 회복되신 게 아니기 때문에
돌아다니시는 건 무리입니다.”
하르펜이 엄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럼 칼라일을 이리로 데려와 줘. 침대에 기대앉아 칼라일이 괜찮은지 보기만 할게.”
“아가씨…….”
“칼라일도 내가 안 보여서 불안해 하고 있을 거야.”
아버지가 있다 해도 낯선 환경에 아이가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르펜이 말이 없어 난 또 한 번 재촉했다.
“잠깐만 보고 치료받을게. 절대 무리하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말라 미소까지 지었지만 하르펜은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의 안색을 보던 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르펜…… 칼라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게…….”
하르펜이 난감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분명 괜찮다고, 크게 다친 곳이 없다 하였는데.
만약 그게 날 안정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면.
칼라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심장이 철렁하는 불안감에 하르펜의 팔을 다급히 잡았다.
“칼라일 지금 어딨어?”
“아가씨 그게…….”
“엘리야.”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칼라일, 칼라일은 지금 어딨어요? 지금 보러 가야겠어요.”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를 잡은 하르펜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를 내려가려던
순간, 아버지가 내 앞에 섰다.
“진정하거라. 칼라일은 무사하단다.”
아버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아버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아이를 못 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는 참담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곧 시선을 떨구시며 말했다.
“칼라일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모습이 드러나다니.
칼라일의 진짜 모습이라면…… 설마…….
숨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에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아버지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칼라일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아…….”
목숨 걸고 숨겼던 진실이었다.
황자로, 황궁에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는데…….
레이몬드가 다 알았다니.
충격에 순간 강한 어지러움이 들었다.
“엘리야!”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아버지가 황급히 나를 부축하고 하르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어지러우신 겁니까?”
“……난 괜찮아, 칼라일을, 아니…… 그러니까 난…….”
정신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칼라일을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종과 하녀들의 목소리가 울리고
“엄마!”
칼라일의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120 화
“칼라일!!”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어지러움도 아픔도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내 애틋한 외침에 아버지가 옆으로 비켜주셨다. 그러자 내 앞으로 달려온 칼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흑발과 검은 눈동자.
내가 그토록 숨겨왔던 아이의 진짜 색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칼라일의 존재가 정말 밝혀진 것이다.
“아…….”
순간 멈칫하자 내게 달려오던 칼라일도 주춤거렸다.
“엄마……?”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그에 정신이 번쩍 든 난 미소를 그리며 두 팔을 벌렸다.
“칼라일, 엄마한테 와.”
“엄마…… 괜찮아요?”
“당연하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은 칼라일이 품 안에 안겼다.
화상을 입은 살결이 화끈거렸지만 칼라일이 무사한 것을 보니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칼라일을 꼭 끌어안은 난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아프지 마요…….”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듯 칼라일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나았어. 엄마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칼라일, 엄마 봐봐.”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칼라일이 머리를 들었다.
“다친 곳은 없어? 아픈 곳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혹시나 싶어 마음이 불안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의사 아저씨들이 아프지 않게 잘 치료해줬어요, 그러니까 엄마도 아프지 마요.”
칼라일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껴안았다.
평소와 달리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보니 많이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안 아플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네.”
칼라일을 꼭 안고 안도감을 느끼던 때 내 앞으로 구둣발이 멈춰 섰다.
매끈한 검은 가죽 구두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시선을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이몬드.
난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칼라일과 똑같은 흑안이 칼라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감정을 억누르듯 깊이 잠겨 있는 눈빛에 본능적으로 칼라일을 더욱 끌어안았다.
마치 그로부터 칼라일을 보호하려는 듯 나도 모르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칼라일의 친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야 아차, 하며 힘을 풀었지만 그는 이미 나의 적대감을 느낀 듯 시선을 들었다.
흑안에 짧은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는 나를 번뜩이는 눈빛으로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할 말이 있다. 너도 내게 할 말이 있겠지.”
난 칼라일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칼라일, 할아버지랑 잠시만 놀고 있을래? 엄마…… 잠깐 할 일이 있어.”
“……저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예요?”
칼라일이 내게 나직이 속삭였다. 레이몬드가 무서운 것인지 칼라일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 좋은……분이시니까.”
안심하라고 칼라일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난 아이의 손을 아버지에게 넘겼다.
“할아버지랑 산책가자꾸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한 아버지가 칼라일을 번쩍 안았다.
“다녀올게요, 엄마.”
“응.”
난 칼라일이 방을 나갈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칼라일이 나가고 시종장이 의사들과 궁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아이의 등장으로 잠깐이나마 밝아졌던 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난 레이몬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줄곧 나를 보고 있었던 듯, 그와 시선이 곧바로 마주쳤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보다시피 칼라일은 멀쩡하니 네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해.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 내가 먼저 말했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다 아시게 되었다는 것을요.”
침착하게 말을 꺼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차분함이 그의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인지 레이몬드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래, 아이를 치료하던 도중 귓바퀴 안쪽에서 뭔가가 깨지더군. 그 뒤의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칼라일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지만, 그는 내게 해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엘리야. 넌 내게 분명히 말했었다. 칼라일이 나의 아이가 아니라고.”
“…….”
“네 입으로 설명해 보아라. 왜 그 아이가 흑발에 흑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폐하의 자식이 맞습니다.”
“대체 왜!”
그의 격분한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격앙된 감정이 넘실거리는 그의 눈빛 속엔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대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아이를 가졌다고! 내게 말을 했어야…….”
다그치는 그의 모습에 잠시나마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나의 이성이 끊어져 버렸다.
“내가 어떻게 말해.”
떨리는 내 음성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난 손을 그러쥐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리제나가 돌아왔던 그때의 감정과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자 이성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다.
“네 옛 연인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어. 그리고 넌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에드먼드를 1 황자로 삼겠다
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칼라일을 가졌다고 말해?”
그는 쏘아붙이는 내 말을 곧바로 되받아쳤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에드먼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분명히 말했었어. 난 너에게 선택권을 줬어.”
“하, 선택권?”
그때의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듯 선명했다.
그런데 선택권이라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레이몬드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이미 모든 결정을 나와 상의도 없이 내려놓고 내게 통보했잖아. 그런데 선택권이라고? 그 상황에서 내가
에드먼드를 거부하면 어떻게 됐을까?”
“…….”
“후계도 낳지 못하는 황후가 질투에 눈이 멀었다 손가락질했겠지. 날 선택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놓고
협박한 것밖에 되지 않아.”
“난 널…….”
“결혼 생활 내내 난 네 뒷모습만 바라봤어. 그런 내가 어떻게 널 믿어? 네가 에드먼드의 손을 잡는다면
내 아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말을 멈추었다.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칼라일을 지키기 위해 홀로 아이를 낳겠다 결심했던 그 순간이.
격앙된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본 레이몬드가 손을 뻗었다.
“엘리야…….”
난 그의 손을 피했다.
“난 칼라일을 지켜야 했어. 두 번 다시 내 아이를 잃을 순 없었어.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때의 레이몬드는 절대 칼라일을 지켜줄 리 없었으니까.
허니 들킬 미래를 안다 해도 황궁에서 칼라일을 낳진 않을 것이다.
황궁에 남았다면 칼라일은 무사히 태어나는 것조차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달싹이던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그사이 난 무거운 숨을 삼키며 솟구치는 감정을 정리했다.
칼라일의 존재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내가 황제의 아이를 빼돌렸다는 것이 곧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굳은 듯 선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의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절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이를 지키기 일이었음도 잘 알고 있었다.
나직한 나의 목소리에 잠시 흐려졌던 그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내가 널 정말 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가 무슨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까발려진 이상, 무엇이 중요할까.
이 상황에서 그의 마음까지 살필 만큼 나는 여유롭지 않았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빨리 알아야 나도 앞으로 칼라일을 어떻게 지킬지 결정할 수 있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폐하.”
시간을 끌 수 없어 단호히 말했다. 눈빛이 흔들리던 그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난 너도 공작도 벌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칼라일의 존재를 더 숨길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칼라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네게 시간을 주고 싶지만……. 갑자기 모든 일이 터져 힘들 것 같아. 하여
오늘 칼라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힐 것이다.”
“네? 이렇게 바로…….”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드로이트 공작이 죽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던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오늘 새벽 공작이 목을 맨 것이 발견됐다. 유서에 너와 칼라일을 죽이려 했던 것을 실토하더군.”
드로이트 공작이 자살을 하다니.
제레미가 보낸 서신이 가짜였으니 드로이트 공작이 연관이 있을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이번 일은 드로이트 공작 혼자 꾸민 일이 아닐 것이다.
내게 칼라일의 존재를 알고 있다 서신을 보낸 것은 리제나였으니까.
“칼라일과 저를 죽이려 한 건 드로이트 공작만이 아닙니다.”
“나 역시 시오스 후작을 의심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는 당연하게도 시오스 후작이었다. 리제나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가 아는 리제나는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닐 테니까.
그가 리제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젠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리제나는 선을 넘었고 감히 칼라일을 죽이려 한 그녀를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시오스 후작이 벌인 게 아닙니다.”
“뭐? 그럼 누가……”
“시오스 리제나. 그녀가 벌인 일입니다.”
121 화
* * *
122 화
* * *
123 화
“폐하가 제 아빠라고요……?”
칼라일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어려도 황제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는 알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제 아빠라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칼라일이 또래보다 의젓하다 해도 어른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아빠로 받아들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차근차근히 한 단계씩 나아가야 함이 맞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먼저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칼라일에게도 사실을 말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으면 더 충격적일 테니까.
혼란으로 가득한 칼라일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황제 폐하께서 바로 칼라일의 아빠야.”
“…….”
칼라일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칼라일의 버릇이었다.
“칼라일, 하고 싶은 말 안 참아도 돼. 엄마한테는 다 말해도 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칼라일이 시선을 들었다.
칼라일은 날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엄마……. 난 아빠…… 없어도 돼요.”
“……응?”
아빠에 대해 더 깊이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난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스러워졌다.
아빠가 없어도 된다니.
칼라일이 말은 안 해도 아빠란 존재에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룬트 왕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젠간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냐 물었던 아이인데.
갑자기 왜.
칼라일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엄마, 전 폐하가 무서워요. 그냥 아빠 말고 엄마랑 둘이서 살고 싶어요.”
칼라일은 다른 말은 듣기 싫다는 듯 내 품에 안겼다. 내가 깨어나지 못했던 시간에 레이몬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칼라일, 아빠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폐하는 무서운 분이 아니야.”
“…….”
칼라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 보았지만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야시장에서 레이몬드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만 해도 레이몬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칼라일에겐 이미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엄마, 우리 집에 가면 안 돼요?”
고개를 든 칼라일은 귀가 쳐진 강아지같이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정말 반기지 않는 듯한 기색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싫다는 것은 절대 강요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의 반응은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여기가 이제 칼라일이라 엄마가 살 집이야. 되게 넓고 커서 칼라일도 금방 좋아질 거야.”
아이의 볼을 감싸고 일부러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해 보았지만, 칼라일은 입술을 다시 꾹 다물어버렸다.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에서 불만이 가득 느껴졌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아버지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지금은 내버려 두라는 듯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셨다.
시무룩한 칼라일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버지가 맞았다.
지금 당장 받아들이라 강요하면 칼라일의 거부 반응만 커질 것이다.
볼을 감쌌던 손을 내리며 칼라일을 안았다. 품 안에 안겨든 칼라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자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칼라일이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궁 안을 구경하느라 신나게 뛰어다녔으니 꽤나 지쳤을 것이다.”
아버지는 잠든 칼라일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 혹시 폐하와 칼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딱히 무슨 일이 있진 않았단다. 아마……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겠니. 칼라일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네.”
왠지 레이몬드를 향한 거부 반응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지만 난 괜찮을 것이라
불안함을 애써 지워버렸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면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겠지.
난 칼라일을 옆으로 눕혔다. 조심스레 베게 위로 칼라일의 머리를 눕히고 말랑한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직 한없이 어린아이인데.
앞으로 칼라일이 걸어가야 할 험난한 길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 주려고 아버지의 존재까지 지워버렸던 건데.
미안해. 칼라일.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정말 미안했다. 나는 결국 아이를 피바람으로부터 지키지도 못했고, 아이에게서
아버지란 존재까지 멋대로 뺏어간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엘리야, 네 잘못이 아니다.”
내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넌 최선을 다했어. 괜히 자책 말아라. 모든 죄는 끔찍한 일을 벌인 그자들에게 있을 뿐이야. 우린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꾸나.”
아버지의 위로에 난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앞으로 내겐 죄책감에 슬퍼할 여유 따윈 없으니까.
“아버지, 폐하께서 드로이트 전 공작의 죽음에 대해서도 발표하신 거죠?”
“그래. 전 공작의 죽음과 암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까지 전부 공개하셨다.”
“아마 내일쯤 공작저에서 발견된 비밀 장부가 기사에 날 거예요. 거기엔 시오스 후작이 이름이 있어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소문이 퍼질 때 아버지께서도 힘을 써 주세요.”
“알겠다. 귀족들의 움직임은 내가 주시하고 있을 테니 넌 회복에 집중하려무나. 칼라일을…… 지키려면
네가 잘 버텨야 할 것이다.”
“네. 알고 있어요.”
암살 사건에 대한 빌미로 시오스 후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시오스 후작가의 위세가 흔들린다곤 하지만 지금까지 에드먼드를 앞세워 불려온 세력이 만만찮았다.
그런 1 황자를 꺾고 칼라일을 황태자로 올리기는 절대 쉽지 않으리라.
쉽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칼라일을 지키기 위한 길은 그 길뿐이었다.
황제의 핏줄이란 것이 밝혀진 순간부터 황위 다툼은 피할 수 없으니까.
거기다 시오스 후작가는 역심을 품고 있으니 물러나는 것은 우리에게 죽음뿐인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칼라일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을 테지.
난 절대 칼라일을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다.
리제나가 선포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서 칼라일을 지킬 것이다.
난 굳게 결심하며 잠든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 *
드로이트 공작가.
공작성의 뒤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 공작인 드로이트 프로이스의 장례였다.
공작이었던 자의 장례라고 하기엔 상당히 초라한 장례식이었지만,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인에게는 분에
넘쳤다.
화장이 끝나고 거둔 뼛가루를 너른 숲에 뿌리라 명한 제레미는 하늘 위로 사라지는 검은 연기를 보다 성
안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찾아온 공작의 죽음과 새로운 공작의 등극.
충격에 빠진 사용인들을 타이르고 장례를 치르다 보니 어느새 밤이 어둑해져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무실 책상에 앉은 제레미는 복잡한 눈빛으로 전 공작의 물건들을 훑었다.
아직 공작성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딱히 슬픈 것은 아님에도 무거운 마음은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좋은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정말 단 한 순간도 그의 마음을 편히 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라앉는 기분에 마냥 빠져 있기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였다.
시오스 리제나와 시오스 후작가.
아버지를 비참하게 죽이고 엘리야를 죽이려 한 그녀의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다.
“그러려면 시오스 후작가를 잡을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제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의 비밀 금고를 다시금 열었다.
여전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있었던 시오스 후작가의 비리들.
그것들은 정말 암살자가 가지고 간 것일까.
“……금고를 정말 발견했을까?”
암살자가 단번에 발견하기엔 금고는 붙박이 책장 뒤에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암살자라 하여도 책장 뒤에 금고가 있을 것이라 단박에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심 많은 아버지의 성격상 시오스 후작에게 금고의 위치를 드러냈을 리도 없다.
금고가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고 찾으려 했다면 집무실이 흐트러졌을 텐데.
이른 아침 그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은 깨끗했었다.
“암살자가 가지고 간 게 아니라면…….”
제레미의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
“들어와.”
“공자…… 아니 공작 각하. 송구합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집사였다.
“괜찮아. 나도 이 자라기 낯선데 집사도 적응이 안 되겠지. ……재는 다 뿌린 것이냐.”
“……예. 숲에 모두 뿌렸습니다. 선대 공작님을 이렇게 보내드리는 것이 너무도 죄스럽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집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인이다. 더 이상 그를 그리 불러선 안 돼. 내가 넘어가 주는 것도 이번 한
번뿐이야.”
누구보다 아버지에게, 드로이트 공작가에 충성을 바쳤던 자라는 것을 알기에 이 정도 경고로 멈췄다.
제레미의 싸늘한 눈빛에 집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난 집사를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공작가가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
줘.”
“네. 헌데 저 금고는…….”
집사는 제레미의 뒤로 열린 금고를 바라보았다.
“집사도 알고 있었잖아. 아버지의 비밀 금고.”
집사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집사에겐 당연히 이 금고의 위치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여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레미의 예상이 맞는 듯 집사의 얼굴엔 큰 동요가 없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집사. 아버지가 최근에 이 금고 안에 물건들을 옮긴 적이 있나?”
“……그것까진 제가 알지 못합니다. 송구합니다.”
집사는 모른다 답했지만 제레미는 분명 보았다.
답을 하기 전 집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멈칫했던 순간의 행동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제레미는 확신이 생겼다.
금고 안의 증거들은 암살자가 가져간 것이 아니다.
“그래. 알겠어. 오늘은 피곤할 테니 그만 돌아가서 쉬어.”
“네.”
집사가 나가고 제레미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살자가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금고의 문을 닫고 책장을 바로 한 그가 집무실을 나간 그때, 하인 하나와 마주쳤다.
“공작 각하.”
“무슨 일이냐?”
“그것이, 오늘 전 공작 각하의 침실을 치우다가…….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124 화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저택엔 조간신문이 도착했다.
크로프트 공작 영애가 황후의 자리로 돌아온 것과 새로운 황자의 존재.
그리고 그들을 시해하려 한 전 드로이트 공작의 죽음.
하루만에 터진 엄청난 사건들에 신문사들은 신이 난 상태였다. 신문 메인을 무엇으로 장식할 것인가
고민을 하기까지 했었다.
시오스 후작가의 하인은 수북히 쌓인 신문들을 들었다.
그때, 신문 하나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앗.”
하인이 신문을 주우려 손을 뻗었지만 다른 사람이 이미 신문을 주워 들었다.
백발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표정 없는 하녀 릴라.
시오스 영애의 심복이었다.
신문 앞면을 읽은 릴라의 무감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내가 영애께 가져다드리겠다.”
릴라는 하인의 답을 듣지도 않고 아침 식사가 한창인 식당으로 급히 향했다.
그리고 그때, 식당에서는 시오스 후작의 노성이 한창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후라니! 결국 이렇게 되었어. 그리 당당하게 모든 걸 맡기라 하더니 꼴좋구나, 꼴좋아. 네가 말한
결과가 결국 이것인 것이냐.”
엘리야 크로프트 공녀를 황후로 책봉한다는 공식적인 황실의 발표가 난 어제 오후부터 시오스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황후의 적자가 될 2 황자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 황제에게 다른 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내게
말했어야지!”
그는 콧김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죽이려면 깔끔히 죽이던가! 결국 드로이트 공작도 죽고, 존재도 몰랐던 황자가 새로이 나타나고 말았어!
대체 이 일을 어쩔 셈인 것이냐!”
처음엔 황후를 그리곤 새로운 황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시오스 후작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지만 리제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뻗치는지 시오스 후작이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리제나의 수프 그릇이 흔들릴 정도였다.
“네가 입이 있으면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 보거라!”
후작의 노성이 식당을 갈랐다.
리제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이래서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야의 황후 책봉과 황제의 적자인 2 황자의 등장.
이 문제에 리제나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사람은 제국에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가 두 사람을 구해 황궁으로 갔다고 했을 때부터 무언가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그녀가 예상한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이가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니길 바랐는데.
그것만큼은 제발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신은 매정하게도 늘 그렇듯 그녀를 외면했다.
보란 듯이 황자임이 밝혀졌으니까.
엘리야의 아이를 2 황자로 책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의 절망감과 패배감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아이까지 전부 다 가졌으니까.
널 정말 죽여버리고 싶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황제의 마음을 잡으라 그리 일렀거늘 결국 이 사단을 만들다니!”
시오스 후작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도저히 고민도 상념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리제나는 시오스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녹안을 응시하던 리제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모든 게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리제나는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면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던 후작은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다 멈칫했다.
줄곧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리제나가 갑자기 양순히 고개를 숙이니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제가 일을 그르친 것에 아버지의 분노가 크신 것을 압니다. 모두의 저의 실책입니다.”
리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후작은 리제나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근래에 들어 리제나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아비인 그를 무시하곤 했었으니까.
아랫사람 대하듯 그에게 명령까지 했던 리제나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몸을 낮추다니. 얼굴이 터질 듯 끓어올랐던 분노가 허탈하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무릎까지 꿇은 마당에 어찌한단 말인가.
리제나가 자신을 무시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괘씸하긴 했지만 버릴 순 없는
카드였다.
리제나는 1 황자의 친모였으니까.
그녀가 있어야 1 황자를 제 입맛대로 구슬릴 수 있었다.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리제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후작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큼, 네 잘못을 알고 있다니 내 더는 긴말 하지 않겠다. 이번 일이 진정 될 때까지 넌 에드먼드에게만
신경 쓰도록 해라. 그리고 사교계에 괜한 말이 나돌지 않도록 잘 처신해.”
그녀의 사죄가 퍽 마음에 드는 듯 후작의 목소리가 오만했다.
“예.”
이 정도면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 숙인 리제나가 비소를 머금으며 몸을 일으킨 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
답지 않게 다급한 릴라의 모습에 리제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일이냐?”
릴라는 리제나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 * *
황궁의 소식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던 어제가 지나고 늘 똑같이 새로운 태양이 밝았다.
하지만 오늘부로 난 엘리야 크로프트 공작 영애가 아닌 엘리야 에그리타, 제국의 황후가 되었고 칼라일
또한 에그리타의 2 황자로 책봉되었다.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신분은 이미 황후와 황자로 격상되었다.
아침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아버지는 내 진료를 위해 칼라일과 함께 잠시 산책을 나간 상태였다.
“난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어때?”
진찰을 마친 하르펜에게 먼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보단 좋아지셨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 절대 무리하시는 건 안 됩니다. 황자전하
와도 당분간은 조금 떨어져 지내시는 게 좋습니다. 황자 전하를 보시다 보면 무리를 하게 되시니까요.”
“그건……. 쉽지가 않을 것 같네.”
하르펜이 무얼 말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칼라일을 곁에서 떼어낼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가 아빠라는 것과 앞으로 황궁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듯 칼라일은
기분이 계속 어두웠다.
제 딴엔 내가 걱정할까 봐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거 같았지만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황자 전하께선 여전히 폐하를 어려워하시나요?”
하르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직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차자 좋아지리라 생각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어제 잠시 레이몬드가 들렸을 때 칼라일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기 때문에.
‘몸은 좀 어떻지?’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칼라일도 함께 있었군.’
나를 보던 그가 칼라일에게 시선을 내렸다. 난 칼라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칼라일, 아버지께 인사드려야지.’
‘…….’
칼라일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칼라일.’
레이몬드는 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지만 칼라일은 그를 외면해
버렸다.
내 품에 얼굴을 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호한 칼라일의 거부 반응에 일순 방 안의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을 정도였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던 레이몬드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손을 거두었었다.
‘아직 폐하가 낯설어 그런 듯합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지만 레이몬드가 돌아갈 때까지 칼라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었다.
칼라일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고민이 많아지던 때 시종이 방문을 알렸다.
“황후 폐하, 시종장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방으로 들어온 시종장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직 황후궁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어제부로 공식적인 지위는 황후로 올라간 상태였다.
“시종장, 무슨 일인가?”
“폐하께옵서 황후궁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가. 예상보다 빨리 끝났군.”
“어제 폐하께옵서 바로 궁을 준비하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궁인들도 전부 새로 뽑았습니다. 몸 상태가
나아지시면 거취를 옮기시는 게……”
“아니, 바로 옮기겠네.”
시종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몸도 안 좋으신데……. 충분한 회복 후 날짜를 잡으라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되었다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까지고 폐하의 침실을 차지하고 있을 순 없지.”
이곳은 레이몬드의 침실이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이몬드는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 침대를
공유할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지금도 손님 방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일국의 황제를 계속 그리 둘
수는 없다.
거기다 황제가 황후가 각방을 쓴다는 소문이 나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폐하께 말씀드리게. 오늘 중으로 황후궁으로 가겠다고. 아, 그리고 혹 시녀장도 이미 뽑은 것인가?”
“아니요. 시녀들만 추렸을 뿐 시녀장은 황후 폐하께서 직접 정하게 하시라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시녀장은 사가에서 내가 데리고 들어올 것이니 시녀들에게 미리 언질을 넣어놓게.”
헬란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 폐하께서 칼라일의 궁전도 정하셨나?”
“네. 황후궁과 가까운 레굴루스 궁전을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며칠 아프더니 청력까지 이상해진 걸까.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레굴루스 궁전?”
125 화
* * *
126 화
“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난 시녀들의 걱정스런 외침도 무시하며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번쩍 손을 들고 흔들어 보이는 칼라일이 보였다.
한달음에 아이의 앞으로 달려간 난 와락 칼라일을 끌어안았다.
“윽. 엄마……! 숨 막혀요.”
분명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자고 일어났는데 칼라일이 옆에 없어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녀들마저 칼라일이 어디로 간지 모른다고 했을 때는 눈앞이 아찔할 만큼 두려웠었다.
혹시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혼자 황궁을 나가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또 누군가 아이를 납치라도 한 게 아닐까.
온갖 최악의 상상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졌었다.
칼라일을 찾았다는 사실에 겨우 안도감이 돌아온 난 꽉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아이의 두 팔을 잡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누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라고 했어. 엄마가 뭐라고 했었어?”
“……어디 가지 말고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걱정한 만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근데 왜 혼자 나왔어. 나가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을 했어야지. 시녀들 눈까지 피해서 몰래 이렇게
돌아다니면……”
그때, 내 어깨를 잡는 손이 느껴졌다.
“엘리야.”
뒤에서 말리듯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난 어깨를 움찔했다.
고개를 돌리자 레이몬드가 어느새 옆에 다가온 것이 보였다.
“보는 눈이 많아. 그리고 칼라일도…… 놀란 듯하니 이번은 넘어가 주는 게 어때.”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뒤로 시종들과 시녀 그리고 기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정신없이 급히 달려오느라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는지도 몰랐다.
난 다시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칼라일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게 보였다.
그리고 신발에 잔뜩 묻은 진흙과 이곳저곳 많이 헤맨 것인지 바짓단이 다 더러워진 것이 보였다.
“잘못했어요……. 심심해서 화원만 구경하려고 나온 건데……. 너무 멀리 나와 버렸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엄마…….”
칼라일이 울먹이며 말했다.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칼라일의 가득 차오른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울지 마. 엄마도 화내서 미안해. 앞으론 절대 혼자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엄마가 자거나 아무리 바빠
보여도 꼭 엄마한테 말하고 시녀나 시종, 다른 사람들이랑 함께 움직여야 해. 알겠지?”
“훌쩍, 네. 약속할게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칼라일이 먼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약속했으니까 이제 꼭 지켜야 해.”
칼라일은 올망한 눈망울로 나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금세 마음이 저릿해졌다.
나는 칼라일의 볼을 쓰다듬어 주곤 머리칼에 묻은 풀잎을 떼어냈다.
“엄마랑 돌아가자.”
내가 미소를 짓자 칼라일도 훌쩍 임을 멈추었다. 그렇게 칼라일을 안아 들던 때, 갑자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몸을 비틀거렸다.
“읏…….”
“엘리야!”
“황후 폐하!”
레이몬드의 놀란 목소리와 시녀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엄마?”
“……응, 아냐 아무것도.”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진 칼라일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몬드도 칼라일의 보곤 굳혔던 얼굴을 피며 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칼라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에 나도 칼라일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넌 무리일 것 같으니 내가 안고 가지.”
“그래도…… 어찌 폐하께서. 차라리 다른 시녀를 시키겠습니다.”
“됐다. 내가 안고 가마. 칼라일 오늘만 엄마를 위해 참아주렴, 그럴 수 있지?”
“……네.”
칼라일이 싫다고 답할까 불안해하던 난 의외로 양순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기 싫다며 눈길조차 피했던 아이였으니까.
물론 지금도 레이몬드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칼라일의 표정엔 불편함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내가 오기 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상황을 보면 수풀을 헤매고 있던 칼라일을 레이몬드가 먼저 발견한 거 같았다.
“그럼 이만 가자. 금방 추워지겠어.”
조금 달라진 칼라일과 레이몬드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때 레이몬드가 말했다.
“황후를 부축해라.”
짧은 명령을 시녀에게 내린 그는 칼라일을 고쳐 안고 먼저 걸어 나갔다.
위화감이 없는 그 뒷모습을 보던 난 이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뒤를 따랐다.
* * *
황후궁으로 돌아온 난 시녀에게 칼라일을 씻겨오라 보내고 레이몬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쓴 약을 마시고 약병을 하르펜에게 넘기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살짝 미간을 좁힌 표정에서 나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황후로서의 책임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에 나를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이 황후궁에서 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받는 게 상당히 어색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해 주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헌데 칼라일과 혹 다른 일이 있으셨나요? 칼라일이…… 폐하를 거부하는 게 조금 덜해진 거 같아서요.”
그와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편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리자 수려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짙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곤 입술을 열었다.
“칼라일이 야시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나란 걸 알아차렸어. 이미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더군.”
“아…….”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해 나도 그날의 기억은 잊어버린 줄 알았었다.
그때의 기억은 칼라일에게 좋은 기억이었으니, 레이몬드에게 경계를 조금 푼 것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아직은 날 불편해하고 있어. 아버지라고 부를 날이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칼라일의 거부가 그에겐 꽤 상처인 것 같았다.
“……아이를 지키려 한 선택이었지만, 폐하와 칼라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은 제 탓이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잘못은 아니지. 따지고 보면 모든 시작은 나였으니까. 널 원망하지 않아.”
그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떼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너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가 의식을 차렸을 때 분에 찼던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담담해진 검은 눈동자 속엔 오히려 나를 향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진심 어린 사과였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당황한 난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네.”
그와 마주한 시선이 불편해졌다.
우리 둘 사이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왔지만 나의 목표는 시오스 후작가였을 뿐이니까.
그와 다시 시작할 마음은 내게 없었다.
레이몬드의 집요한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난 말을 꺼냈다.
“시오스 후작가에 대한 신문 기사들이 나왔던데……. 곧 귀족 회의가 열릴까요?”
“아마도, 어차피 정기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어. 칼라일의 일도 있고 하니 정기 회의를 앞당겨서 열
생각이야. 행정궁에서도 이미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니……. 회의장에서 시오스 후작을 조사하란 말이
먼저 나올 거 같아.”
“다행이네요. 시간이 지체될수록 저희에겐 좋을 게 없으니 빨리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근데…… 음, 우리 결혼식은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
갑자기 결혼식 얘기라니. 의아해 그를 바라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집요히 바라보던 그가 오히려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안 그래도 결혼식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는데, 결혼식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뭐?”
“여러 일들이 있기도 했고……. 재혼하는 입장이니까요. 차라리 결혼식에 들어갈 비용을 빈민가에 베풀고
식 대신 황궁에서 연회를 여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네가 괜찮다면.”
결혼식은 신부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그런 로망을 찾을 처지도 아니었고 레이몬드와 그런 로망을
꿈꿀 사이도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결혼은 계약에 가까운 결혼이니까요.”
무덤덤하게 말하자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낮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혼식은 네 말대로 연회로 대체할게. 오늘 이래저래 일이 많이 피곤할 테니 이만 쉬어.”
“……예, 폐하.”
레이몬드는 표정을 숨기듯 나를 보지 않고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피곤해.”
그의 말대로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너무 많았다. 긴 하루의 끝과 돌아온 황후궁에서의 첫 밤이니까.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칼라일이 방문을 연 것이었다.
“엄마, 같이 자도 돼요?”
레굴루스 궁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황후궁에 칼라일이 지낼 방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너른 방이 어색해 찾아온 거 같았다.
피식, 웃은 난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이리 와.”
쪼르르 달려온 칼라일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이불을 파고들어 온 칼라일은 내 허리를 감으며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엄마, 우리 이제 정말 계속 황궁에서 사는 거예요?”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는 칼라일의 표정은 아직 예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특히 칼라일은 더더욱,
황궁으로 돌아온 이상, 칼라일의 에그리타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했으니까.
“응. 이제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해. 이곳에서 엄마랑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보자. 그럼 분명 칼라일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야.”
칼라일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좋은 추억이 많이 쌓이길 바랐다.
에그리타 황궁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길 말이다.
“……네.”
시무룩하게 답하는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춘 난 칼라일과 함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좋은 꿈 꾸렴.”
* * *
이틀 뒤.
리제나는 오늘도 조간신문을 전부 거둬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새에 눈에 띄게 늘어난 시오스 후작가의 기사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기사의 내용들은 비슷했다.
공개된 드로이트 공작가의 장부와 시오스 후작가가 이번 암살 사건을 같이 주도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1 황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2 황자를 시해하려 한 것이 아니냔 말들이 무수히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신문의 헤드라인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27 화
* * *
* * *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1 황자, 에드먼드는 유려하게 예를 갖추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황자의 모습이었다.
어릴 적부터 차기 황제로 교육받았을 터였으니 당연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은 불편했다.
난 에드먼드의 앞길을 막을 사람이니까.
좋지 못한 마음을 감추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자, 어서 와요.”
고개를 든 에드먼드가 내게 말했다.
“황후 폐하, 말씀을 편히 해 주십시오. 황자인 저에게 존대하시다니요.”
“그래. 그럼 편히 말하마.”
“네. 이리 갑자기 찾아와 민폐가 된 것은 아닌지 송구합니다.”
“민폐라니, 내가 먼저 황자를 불렀어야 했는데 내 몸이 좋지 않아 신경을 쓰지 못했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법도에 맞는 일인걸요. 저…… 근데 2 황자는 잠시
어디 간 것인가요?”
에드먼드가 칼라일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 칼라일이 아직 어려 낮잠이 들었다가 지금 막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단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곧 내려올 거야. 날이 좋아 화원에 티 테이블을 준비하라 해놓았는데 괜찮니?”
“좋습니다. 황후 폐하.”
난 에드먼드와 함께 화원으로 향했다.
내가 황후궁에 돌아온 지는 겨우 이틀째였지만 황후궁의 화원은 옛날과 같이 흐드러지게 핀 꽃들로
가득했다.
원래라면 새로운 주인을 맞기 위해 전 주인이 관리한 꽃들은 전부 거두는 것이 맞았지만 레이몬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가 내가 떠난 뒤에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 궁전을 유지하라 명한 것이었다.
다시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뭐 결국 그의 뜻대로 된 것인가.
서로가 원하는 게 있어 합의한 결혼. 계약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이곳에 돌아오게 된 건 아니었다.
난 과거와 달리 황후궁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감한 눈빛으로 꽃들을 둘러본 난 차를 따르고 물러가는 시녀에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황자가 레몬 홍차를 좋아한다고 들어 준비하였단다. 마셔보렴.”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에드먼드가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맛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구나.”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에드먼드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다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황후 폐하. 이제 몸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많이 좋아졌단다. 꾸준히 치료만 잘 받는다면 잘 회복할 것이라 하더구나.”
“정말 다행입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다 들어 많이 걱정했었거든요.”
“……그랬구나.”
좋지 못한 일.
그 일을 꾸민 것이 다름아닌 에드먼드의 모친 리제나다.
난 묘해지는 기분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황후가 되고 동생이 생겨 많이 놀랐을 텐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줄 줄은 몰랐단다.”
128 화
* * *
다음날.
이른 오전, 본궁으로 귀족들의 마차가 연이어 도착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귀족들은 다들 심각한 얼굴로 궁전으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귀족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이었다.
예정보다 빨리 열리게 된 회의인 만큼 지금 제국을 둘러싼 사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도 에그리타 제국을 한바탕 뒤흔드는 역대급의 사건들이었다.
회의장에 도착한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들을 나눴다.
“오늘 2 황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황태자궁을 내리셨으니 어쩌면 황태자로 바로 책봉하시겠다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건 너무 섣부른 결정입니다. 2 황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황태자의 재목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요.”
“허나 황후 폐하의 적자가 아닙니까. 1 황자보다 정통성을 가진 분이십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직은 이른 이야기겠지요.”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묵직한 음성에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재상직을 대리하고 있는 파르앙 후작이 서 있었다.
파르앙 후작은 한참 열기를 띠고 이야기를 나누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폐하께서 회의를 여시는 것은 황태자 책봉 때문은 아니니 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르앙 후작은 허허, 인자한 웃음을 지었지만 2 황자에 대해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귀족들을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파르앙 후작.”
“크로프트 공작님.”
크로프트 공작까지 도착하자 2 황자에 대해 말하던 귀족들은 머쓱한 기침을 하며 말을 멈추었다.
크로프트 공작은 파르앙 후작과 함께 상석의 오른쪽에 섰다.
“공작, 들으셨습니까. 오늘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도 회의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네,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귀족들이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드로이트 공작가.
지금 그곳은 황실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황족을 시해하려다 죽은 전 공작인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드로이트 공작가의 돌연변이라 소문났던 공자.
그 공자가 공작이 되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이 아직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에 더욱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회의장 안으로 백금발의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짙은 남색 코트를 걸친 제레미는 평소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달리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레미의 멀끔한 모습에 귀족들은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드로이트 공작가의 돌연변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기품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제레미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품평하는 귀족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한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제레미는 엘리야와 많이 닮은 은발 머리 남자 앞에서 멈춰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로프트 공작 각하.”
제레미는 크로프트 공작에게 다가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주변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로이트와 크로프트는 절대 이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129 화
크로프트 공작은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제레미를 보았다. 백금발에 호박색 눈동자. 상당히 잘생긴 얼굴.
공작은 이자가 적이 아니라는 것은 엘리야에게 얼핏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공작가의 장부를 내놓은 것도 이자라 하였지.
공손한 태도로 서 있는 제레미를 보던 크로프트 공작은 입꼬리를 유려하게 올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드로이트 공작님.”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귀족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드로이트 전 공작이 황후와 황자를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크로프트 공작과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언뜻 기대하는
눈빛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제레미는 인사를 끝으로 깔끔하게 물러나 크로프트 공작 맞은 편에 섰을
뿐이었다.
큼, 귀족들이 아쉬움이 가득한 숨을 삼키던 그때, 회의장으로 시오스 후작이 들어섰다.
드로이트 전 공작과의 일로 저택에서 자숙을 한 이후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몇몇 귀족들이 시오스 후작을 보며 대놓고 탐탁지 않음을 드러냈다.
드로이트 전 공작의 장부로, 시오스 후작을 둘러싼 말이 많은 탓이었다.
시오스 후작은 그런 귀족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잘 보이려 아부를 하던 놈들 주제에.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눈빛을 한 귀족들을 똑똑히 기억해둔 후작은 자신의 자리로 가다 멈칫했다.
제레미를 보았기 때문에.
드로이트 전 공작의 장부를 공개한 게 제레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후작은 제레미를 보며 녹안을 살벌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제레미는 시오스 후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입꼬리마저 올라가자 시오스 후작의 속이 뒤틀리며 분노가 치솟았다.
가문의 수치나 다름없는 돌연변이 주제에 감히 나를 농락하려 들어.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당장 저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곳은
황실의 회의장이었다.
긴 숨을 내쉬며 분노를 다스린 후작은 제레미를 싸늘히 무시하며 자신의 자리에 섰다.
그렇게 회의장에 중앙 귀족들이 모두 모이고 이윽고 시종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황제가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모든 귀족이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긴 융단을 빠르게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간 레이몬드는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라.”
귀족들이 굽혔던 무릎을 편 뒤에, 레이몬드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레이몬드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백금발에서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새로운 드로이트 공작.
제레미 드로이트.
오늘 회의에 참석하라 공문을 보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제레미를 볼 때마다 가라앉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짙어진 눈빛으로 제레미를 내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굳은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곧 회의장에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기회의 날짜가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 날짜를 앞당긴 것은 근래에 제국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레이몬드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많은 일들 중 가장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던 드로이트 프로이스의 황족 암살 사건을
정리하려 한다.”
그의 낮은 음성이 회의장을 엄숙하게 울렸다.
말을 멈춘 레이몬드는 잠시 아무런 말을 않고 귀족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눈치를 보던 귀족 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정리를 하신다는 것은 사건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일까요?”
레이몬드는 고개를 든 서부 국경 변경백, 스멜타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뜻이 맞다.”
“……하오나 폐하. 암살 사건에 대한 말들이 많사옵니다. 이대로 사건을 마무리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사료 되옵니다.”
스멜타 백작은 말을 하며 시오스 후작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스멜타 백작의 말이 맞다는 듯 귀족들이 하나둘 맞장구를 쳤다.
“스멜타 백작님의 의견에 동의를 표합니다. 폐하.”
주청을 올리는 귀족들을 묘한 눈빛으로 보던 레이몬드는 시오스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껏 좁아진 미간이 후작의 불편한 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후작을 보며 비소를 머금은 레이몬드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 사건에 대하여 말들이 나온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죄인이 생전 작성한 장부 때문에 시오스
후작과 죄인을 엮는 유언비어가 제국에 퍼지고 있다지.”
사안의 심각성과 달리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나도는 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상석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시오스 후작이 입을 열기 직전 레이몬드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난 시오스 후작이 죄인과 연관 있다 생각지 않는다. 황족 시해는 삼대까지 멸할 수 있는 중죄이지.
그런데 일국의 재상이자 1 황자의 외척인 그가 황실을 향해 칼을 겨누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레이몬드는 비틀린 미소를 머금으며 시오스 후작을 내려보았다.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시오스 후작을 옹호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시오스 후작은 억측에 분통이 터진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저는 절대 이번 암살 사건에 연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도 하나 없지 않습니까?”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하여도 이때까지 죄인에게 꾸준히 거금을 보냈다는 장부가 나왔지 않습니까!”
누군가 시오스 후작에게 반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시오스 후작은 그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황제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제가 감히 어떻게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 저는 너무도 억울할
따름입니다.”
시오스 후작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이 역겨워 실소가 터질 뻔할 때 파르앙 후작이 묵직한 목 소리로 그를 불렀다.
“폐하.”
“말하시오. 파르앙 후작.”
“현 상황에 대한 저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시오스 후작에게 암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해도 장부가 공개된 지금으로선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사료됩니다.”
파르앙 후작의 말에 레이몬드는 고민을 하듯 손끝으로 금빛 손잡이를 두드렸다.
“……하여?”
“귀족들의 의심을 잠재우고 시오스 후작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재조사를 하심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파르앙 후작이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순간 시오스 후작이 크게 소리쳤다.
“파르앙 후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재조사라니! 전 결단코 이번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조사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은 죄가 없으시니 조사를 한다 해도 나올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조사 결과가 깨끗하다면 더 이상
귀족들도 후작 각하에 대해 의심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떳떳하시다면 조사를 받지 못할 이유도 없다
생각됩니다만…….”
파르앙 후작은 가늘어진 눈빛으로 시오스 후작을 훑었다.
마치 그의 속을 샅샅이 훑는 듯한 시선에 시오스 후작이 주춤했지만 다시 소리를 쳤다.
“조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겐 모욕입니다! 허니 전 절대…….”
“시오스 후작 그만하게.”
레이몬드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 폐하…….”
“파르앙 후작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대가 정말 결백하다면 조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폐하, 전!”
“시오스 후작, 난 그대를 믿어. 허나 지금 이대로 사건을 덮는다면 오히려 그대의 명예가 실추될
분위기군.”
레이몬드는 후작에게 보라는 듯 좌중을 훑었다.
파르앙 후작의 침착한 말 때문인지 회의장의 귀족들이 시오스 후작을 바라보는 눈빛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의심으로 점철된 귀족들의 선명한 눈빛.
떠도는 말들을 우습게 여겼던 후작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그에게서 돌아선 귀족들이 이미 많은 듯했다.
시오스 후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를 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난 일국의 재상이자 1 황자의 외척인 그대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둘 순 없다 생각하는데……
시오스 후작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회의장에 후작의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비릿한 피가 터진 입술을 핥은 후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사를 받겠습니다. 폐하.”
* * *
나른해지는 정오.
황궁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황후궁전의 손님 방에선 한참 칼라일의 예절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라일을 가르치는 선생은 수도의 유명한 예절 선생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을 초빙할 수도 있었지만 큰 단점이 있었다.
유명한 선생인 만큼 사교계의 인맥이 넓다는 것.
칼라일에 대한 말들을 여기저기 옮길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부탁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
선생을 초빙했다.
“걱정과 달리 실력이 좋은 분인 듯합니다.”
헬란이 칼라일을 가르치고 있는 뷔스테인 남작 부인을 힐긋 보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게.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뷔스테인 남작 부인은 젊은 시절 황궁에서 시녀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르쳐본 경력이 없다 하여 조금 걱정했었는데 차분히 칼라일을 잘 가르치는 것을 보니
걱정을 덜어도 될 듯 했다.
수업을 받고 있는 칼라일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던 난 다가오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렴.”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난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응접실로 향했다.
* * *
130 화
“네. 오늘 회의에서 재조사가 결정되었습니다. 귀족들이 이미 시오스 후작에 대한 의심이 깊어진
상황이라 후작도 어쩔 도리가 없었죠. 그리고 폐하께서 상황을 잘 몰아가셨습니다.”
“다행이에요.”
“오늘 바로 시오스 후작가로 파르앙 후작이 직접 뽑은 조사원들이 파견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조사원들이 증거를 잡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진 않았다.
이미 드로이트 전 공작은 죽은 데다 저택은 불타 없어졌으니까.
허니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정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리제나 그녀를 잡아야겠지.
이번만큼은 순순히 정당한 방법만으로 그녀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이었고 청렴결백한 아버지에게 더러운 일을 해달라 할 생각은 없었다.
속마음을 숨기며 찻잔을 들었다.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황자 저하께선 오늘부터 수업을 시작하셨겠군요.”
“네. 뷔르텐 남작 부인이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거 같아요. 칼라일을 차분히 잘 가르치고 있어요.”
“오, 연회에서 황자 저하의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저도 그래요.”
아버지와 난 칼라일을 떠올리며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난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열었다.
“칼라일과 관련해 아버지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무엇인가요?”
“이번에 폐하와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 않기로 한 건 아버지도 들어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지요. 결혼식을 치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빈민 구휼에 쓰신다고 하셨다지요.”
“네 그래서 제가 고민을 해봤는데 단순한 빈민 구휼이 아니라 칼라일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황자 저하를 위한 일이요?”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을 하셨다. 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2 황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을 세우려 해요.”
칼라일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바로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이었다.
제국민들에겐 이미 1 황자, 에드먼드가 있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랑을 받은 1 황자를 밀어내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어중간한 봉사나 기부 같은 것은 이미 1 황자가 수도 없이 했던 일들이었다.
허니 더 크고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제국에 없었던 평민들을 위한 학술원 같은.
놀란 듯 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민… 학술원…… 말씀이십니까?”
“네. 제국에 평민들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술원이 없었잖아요. 2 황자의 이름을 내건
학술원이 생긴다면 평민들에게 칼라일의 지지도가 올라갈 거에요.”
제국에 아카데미가 있긴 하지만 그곳은 평민들이 들어가기엔 학비가 너무 비싼 곳이었다.
배움을 갈망하는 평민들은 참고 넘쳤으니 체계적인 학술원을 세운다면 평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민을 하듯 미간을 좁히셨다.
“흠…… 과거 한 황제께서 평민 학술원을 만드시려다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학술원을 만들지
못했었지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쉬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요.”
과거 평민 학술원을 만들려 했던 황제가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에그리타 제국 8 대 황제였던 호세이스 황제.
그는 평민들의 교육을 깊이 생각한 어진 황제였지만 힘은 없었다.
황후의 소생인 적통 황자였지만 황태자 시절 외척 가문이 몰락했고 황제 즉위 후에도 당시 재상이었던
드로이트 공작에게 의지하며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허니 당연히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이몬드는 귀족들을 누를 수 있는 권력을 잡고 있었고 제국의 주요 가문들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폐하와 아버지께서 힘써주시면 큰 무리 없이 학술원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지금 시오스 후작이
흔들려 중앙 귀족들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잖아요. 지금이라면 자신들끼리 의견을 모으는 것도 힘들
거에요.”
시오스 후작에게 붙어야 할지 크로프트 공작에게 붙어야 할지 한참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파르앙 후작과 먼저 학술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폐하껜 제가 말씀드릴게요.”
“평민 학술원…… 어려운 길이긴 하겠지만 황자 저하께도 평민들에게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거
같군요.”
그냥 좋은 일도 아닌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제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1 황자의 자리를 밀어냄과 동시에 평민들에게 교육기회를 주게 되니까.
훗날 칼라일이 황제가 되었을 때 학술원의 인재들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칼라일을 보고 가지 않으시고요?”
“오늘 파르앙 후작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하여 이만 일어나야 할 듯합니다. 모레쯤 칼라일을 보러
들리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나 역시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하려 했기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지만 배웅해 드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저녁 약속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파르앙 후작이었으니까.
황후궁을 떠나는 크로프트 공작가의 마차를 배웅한 난 수업이 끝났을 칼라일에게로 향했다.
* * *
131 화
* * *
* * *
132 화
이틀 뒤.
황후궁으로 피닉스 상단에서 몇몇 서류들이 도착했다.
봉투를 열어 서류들의 내용을 확인한 난 곧장 파르앙 후작을 만나기 위해 행정궁을 찾았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요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후작은 집무실을 둘러보며 허허,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집무실 책상 양쪽에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재상직을 대리하는 데다 요새 많은 일들이 터져 일이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의 과해진 업무량에 나도 한몫했기에 머쓱한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대의 노고에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네.”
“10 년 넘게 놀았으니 그만큼 일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일이니 황후 폐하께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후작은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내가 소파에 앉자 그는 차를 들겠냐며 손을 들어 시종을 부르려 했다.
그에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흔든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기별도 없이 와서 놀랐겠지만 시오스 후작에 대한 조사가 어찌 될지 신경이 쓰여 이리 찾아오게 되었네.
조사단들은 다 복귀하였나?”
“네. 시오스 후작 저택의 재정 장부와 각종 문서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암살 사건에 대한 증거라 할 만한 것들이 있던가?”
“……아니요. 없었습니다. 하여 다른 쪽으로 조사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쉬운 말이었지만 크게 상심하진 않았다.
후작가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드로이트 프로이스, 그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처음부터 계획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후작가에 중요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난 고개를 숙이는 후작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대가 송구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시오스 후작이 그만큼 철저하다는 뜻이겠지. 단지 조사 방향을
틀려면 시간을 끌기 위한 명목이 필요할 걸세.”
“……네. 알고 있습니다.”
시오스 후작은 제 저택에서 나온 게 없으니 자신의 결백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이미 조사단이 시오스 후작가의 저택을 쥐잡듯이 뒤졌다는 기사가 조간신문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귀족들 역시 시오스 후작의 주장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를 파르앙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이겠지.
피곤함에 젖은 파르앙 후작의 안색이 어두워지던 때 난 집무실에 시립해 있던 헬란에게 눈짓했다.
헬란은 내가 챙긴 봉투들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파르앙 후작의 눈빛이 의아함을 물들었다.
“이것들이 무엇인가요? 황후 폐하.”
“시오스 후작의 비리들일세.”
“……네?”
“큰 죄들은 아니고 사소한 탈세와 영지에서 벌인 불법적인 노예 거래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지.”
“이걸 어떻게……. 설마, 조사가 들어가기 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놀란 표정의 파르앙 후작에게 나는 차분히 말했다.
“아버지의 재판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었지. 하여 이번엔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네.”
귀족 회의가 열리기 전 루몬트에게 준비하라 이른 것이었다.
이미 시오스 후작가의 뒤를 캐고 있었기에 이런 자잘한 자료들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태까지 굳이 이걸 쓰지 않은 것은 이 자료들만으로는 시오스 후작가에 내려질 처벌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라면 시간을 버는 덴 충분하겠지?”
처벌이 약할지라 하더라도 죄는 죄였으니 시오스 후작이 억울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들에 시오스 후작이 조사를 받는 동안 난 따로 움직일 것이다.
이번만큼은 시오스 후작가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네, 이것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파르앙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절 수업이 끝난 칼라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쁜 사람 시간을 계속 뺏을 순 없으니 난 이만 일어나보겠네. 그럼 조금만 더 힘내주게.”
“알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황후 폐하.”
* * *
* * *
황궁으로 시오스 후작가의 마차가 들어서자 후작가의 마차를 본 궁인들은 눈빛을 나누며 수군거렸다.
황족 시해 사건과 관련해 시오스 후작가에 조사원들이 파견된 것이 바로 어제였기 때문이었다.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시오스 후작.
그 연관성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당당히 황궁으로 시오스 가문의 마차가 들어서니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수군거림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후작가의 마차는 빠르게 황궁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1 황자의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133 화
* * *
“어머니!”
칼라일이 달려오는 모습에 난 두 팔을 벌리며 아이를 맞이했다.
“칼라일.”
칼라일을 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칼라일을 찾았었다.
그런 내게 들려온 소식은 칼라일이 1 황자의 궁으로 갔다는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에드먼드가 칼라일을 해코지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에드먼드와 둘이 있어 좋을 것도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난 곧장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황자 궁 앞에 세워진 시오스 후작가의 마차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해 예법조차 생각지 않고 방까지
뛰어 들어왔다.
칼라일의 곁에 리제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칼라일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선 리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고 먼저 시선을 낮춘 사람은 당연히 리제나였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리제나는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난 그런 그녀를 잠깐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를 본 순간 불길에 속에서 쓰러졌던 잔혹한 기억이 떠올랐다.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싶다.
아니, 더한 고통을. 눈앞에서 자식이 죽을까 전전긍긍, 억장이 무너져 내리던 심정을 똑같이 되갚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을 참기 위해 침묵이 길어지자 에드먼드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황후 폐하…….”
무거운 침묵 속에 나의 싸늘함을 느낀 듯했다.
칼라일도 느낀 것인지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저 머리채를 휘어잡고 죽여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거 같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칼라일의 앞에서 그런 추한 복수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일어나게, 시오스 영애.”
“어머니께서 저를 보러오셨다가 우연히 칼라일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리제나와 내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에드먼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리제나를 마주한 지금, 에드먼드에게 도저히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난 에드먼드를 보지 않으며 리제나에게 말했다.
“시오스 후작가가 조사를 받고 있는데 이리 황궁을 찾으시다니 영애는 자숙이란 말을 모르는 건가?”
형식상의 예의도 차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눈썹을 꿈틀하던 리제나는 이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오스 후작가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한 의례적인 조사입니다. 황후 폐하. 지은 죄가 없는데 자숙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미 된 마음으로써 작은 소란에 1 황자가 많이 놀랐을까 걱정되어 이리
황궁을 찾을 수밖에…….”
“1 황자 전하.”
“……네?”
단호한 나의 목소리에 호선을 그리던 리제나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난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1 황자가 아니고 1 황자 전하네. 그리고 내가 황후로 책봉된 지 수일이 흘렀네. 황후의 자리가 공석일
때야 모를까 지금 내 앞에서 어미란 말을 운운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모르는가.”
친모가 리제나라 한들 이젠 내가 황후였다. 그리고 리제나는 후궁의 작위도 없었다. 허니 황궁의 법도 상
에드먼드가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것은 나였다.
“…….”
리제나의 굳은 얼굴을 보며 난 싸늘히 말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하였는가.”
“……그럴 리가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황후 폐하.”
번뜩이는 녹안의 시선을 내리깐 리제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야. 에드먼드, 난 이만 가 볼테니 시오스 영애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무나.”
“……예, 황후 폐하.”
마지막까지 리제나에게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은 나는 칼라일의 손을 잡고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 * *
며칠 뒤, 해가 어스름하게 진 시각.
황궁을 나온 황실 마차가 수도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빠르게 말을 달린 마차는 피닉스 상단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황후 폐하, 내리시지요.”
마차에서 먼저 내린 헬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헬란의 손을 잡고 내리자 상단 앞에 마중을 나와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중 활화산의 용암만큼이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드!”
사고 이후 처음 보는 그였다.
무사한 모습이 너무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자 제드가 몸을 낮추었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니다.”
“어서 일어나.”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약하게 잡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리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후 폐하.”
깍듯이 예를 갖추는 모습이 어색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가족을 보는 듯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
“제드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저야 뭐 워낙 죽을 고비를 잘 넘기는 불사신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싱거운 농담에 피식 웃자 루몬트가 다가왔다.
“황후 폐하,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를 더 나누시지요.”
오늘 내가 황궁을 조용히 나온 것은 루몬트의 서신 때문이었다.
시오스 후작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는 서신.
미소를 짓던 난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며 답했다.
“그러지.”
난 제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상단 건물로 들어갔다.
134 화
황후궁에서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웃으며 하는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제레미…….’
당신에게 진 빚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제나 이렇게 궁지에 몰린 나를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또 미안했다.
언젠간 꼭 이 빚을 갚겠다 다짐하며 난 다시 증거 자료를 내려보았다.
이것들이라면 시오스 후작 작위 박탈은 물론이고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산 송장으로 만들 순 있었다.
“내 폐하께 직접 이 모든 것을 전할 것이다.”
* * *
<i>‘또 한번 제게 폐하의 감정을 강요하신다면 그때가 언제라도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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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화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레이몬드는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아이랑 노는 법도 모르는 그가 칼라일과 놀아주겠다니.
대체 어떻게?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되물었지만 이미 칼라일은 그 말은 들은 뒤였다.
깜박, 깜박.
칼라일은 잠깐 멍하니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칼라일도 그만큼이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투명하게 보이는 칼라일의 눈빛에 레이몬드는 더 머쓱해졌다.
큼, 목을 가다듬은 그는 칼라일에게 말하려 했다. 칼라일이 먼저 입술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뭐하고 놀아요……?”
칼라일은 조심스럽게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사실 엄마도 없는 지금 레이몬드와 이렇게 있는 게 너무
불편했지만 예법 선생님께 배웠다.
황제 폐하 앞에선 각별히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아버지라 하여도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이다.
마음 같아선 싫다 얘기하고 시녀의 등 뒤로 숨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예법에 어긋날 것이다.
하여 용기를 내서 물은 것이었다.
농담이었다고, 시녀와 함께 재밌게 놀라 말하려던 레이몬드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법은 몰랐다.
애초에 그가 어렸을 적에도 아버지와 함께 놀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에게 아버지란……. 폭력의 기억만을 남겨 준 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칼라일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칼라일에게 실망을 줄 순 없었다.
무얼 하고 놀아주어야 하지.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그때 그의 머릿속의 누군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 *
137 화
“황태자…….”
레이몬드는 미간을 깊이 좁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알아차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칼라일을 황태자로 책봉한다면 리제나가 이곳에 남아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겠군.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었으니 쓸데없는 잡음도 없을 거고 시오스 후작이 무너질 테니 칼라일의 황태자 책봉에
반대하는 자들도 없을 테지.”
“네. 맞습니다. 폐하께서 칼라일을 황태자로 만들겠단 확고한 뜻이 정말 있으시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칼라일이 황태자가 되면 리제나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이내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칼라일을 황태자로 만들겠단 뜻엔 변함이 없다. 내가 너와 결혼했을 때부터 다음 황제는 당연히 우리의
자식이라 생각했으니까.”
“…….”
순간 우리의 첫 번째 아이가 생각났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당연히 황태자가 되었을 아이는 어쩌면……
그 아이가 아니었을까.
떠오르는 슬픈 기억에 심장이 아릿했지만, 이윽고 생각을 떨쳤다. 지금은 칼라일만을 생각해야 하니까.
하지만 얼굴빛이 어두워진 것을 본 듯 레이몬드가 말을 돌렸다.
“……이 문제는 그럼 내가 정리할게. 그보다…… 밤이 깊었으니 난 이만 돌아가지.”
“네. 폐하.”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않아도 돼. 늦었으니 이만 쉬어.”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폐하.”
“그래.”
응접실의 문에 다다른 레이몬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엘리야.”
“네?”
“칼라일에게 오늘 미안했다고 꼭 전해 줘.”
“……알겠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윽고 응접실을 떠났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시오스 후작가의 정문 앞으로 검은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들이 도착했다.
성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기사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두려운 얼굴로 모두 하던 일을
멈추었다.
기사들이 막 저택의 문을 통과하던 그때, 리제나가 굳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나 있었던 그녀는 일련의 소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 귀족가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황제의 기사들.
이것은 결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이다.
암살의 증거를 찾은 건가.
완벽하게 모든 증거를 없앴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제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이 정도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가벼운 죄목은 절대 아닐 테니까.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기사들이 로비를 들이닥쳤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은 황제의 수족이라 불리는 4 기사단.
그리고 맨 앞에 선 자는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4 기사단의 단장 카르텔이었다.
대체 저자가 가지고 온 죄목이 무엇이지.
리제나가 입술을 열려던 그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소란에 눈을 뜬 듯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시오스 후작과 후작 부인이 다급히
내려오고 있었다.
로비에 선 시오스 후작은 카르텔을 보고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무장까지 하고 들이닥친 기사들의 기세가 당장 칼을 빼어들 듯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당당히 말하려 했지만 시오스 후작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카르텔은 한자리에 모인 시오스 후작가의 일원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품에서 황제 폐하의 칙서를 꺼내
들었다.
“시오스 후작을 국고 횡령과 사기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카르텔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시오스 후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의 녹안이 크게 흔들리고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국고 횡령과 사기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죽은 드로이트 프로이스와 함께 사막 상단을 만들고 그 상단을 이용해 국고 4000 골드를 빼돌렸다는 모든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대가 빼돌린 금고가 수도로 이송되고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곧 열릴 재판에서
하도록.”
카르텔은 시오스 후작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후작의 양팔을 잡아챘다.
“꺄악!”
심약한 시오스 후작 부인이 비명을 지르고,
“아니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소!! 고위 귀족을 이렇게 무작정 끌고 가려 하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시오스 후작이 억울하다는 듯 한껏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다급한 후작의 목소리에 후작가의 기사들이 로비로 들어오자, 카르텔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검을 빼 드는 놈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내 직접 목을 벨 것이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후작가의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후작가의 기사들이 머뭇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리제나가 입술을
열었다.
“아무도 막아서지 마라.”
“리제나!”
리제나의 명령에 시오스 후작이 야차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리제나는 그런 그에게 낮게 말했다.
“……가문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행패를 부려봤자 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리제나의 싸늘한 외면에 후작은 너도 함께한 짓이 아니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폭로하면 정말 다
개죽음인 것이다.
300 년이 넘게 이어진 가문의 명맥을 그 손으로 끊을 순 없었다.
“아아악!!”
하지만 분통함을 참을 수 없는 후작은 괴성을 질렀다.
“끌고 가.”
카르텔의 명령이 떨어지고 결국 시오스 후작은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시오스 영애. 폐하께서 영애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늦지 않게 황궁으로 오십시오.”
리제나에게 마지막 말은 전한 카르텔이 저택을 나갔다.
“아…….”
후작이 끌려가고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후작 부인이 쓰러졌지만 리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오스 후작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릿발처럼 굳은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마님께서…….”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라.”
차갑게 명한 리제나는 그러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뼈가 튀어나올 듯 도드라지고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녀에게 이런 아픔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크로프트 공작가의 사건이 지금 와서 밝혀질 줄이야.
암살 사건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은 게 아닐까 생각했던 그녀에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모든 증거가 나온 상태라 말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렇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은 즉결 심판으로 열릴 것이고 처벌을 피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 바닥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 사건이 터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대비해놓은 것도 없었다.
제레미 드로이트.
그 망할 이단아의 짓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죽여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뒤늦은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설프게 나섰다간 후작뿐만 아니라 그녀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황궁에 다녀올 테니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누구도 들이지 마라.”
“네. 아가씨.”
리제나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 * *
138 화
* * *
“…….”
리제나의 앞에 선 난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이제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건가.
창백하게 질린 낯빛과 살기로 점철된 녹안을 보니 레이몬드에게 황태자 책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듯
했다.
시오스 후작이 무너지고 황태자 자리까지 날아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수많은 궁인들이 지나치는 황궁 앞에서 리제나는 인사도 없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무례함을 참지 못한 헬란이 소리쳤다.
“시오스 영애, 황후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하지만 리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독기가 단단히 오른 그녀의 모습에 난 비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됐다. 지금 시오스 영애의 심정이 얼마나 참혹하겠느냐.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이리 멀쩡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일이다.”
헬란을 뒤로 물린 난 리제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디차게 식은 손이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가문이 무너지고 7 년을 기다리기만 했던 황태자 자리까지 뺏겼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허나 그렇다 하여 내 분노가 풀리진 않는다.
멀리서 보기엔 한없이 걱정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후작가의 소식 들었네. 그러게 내 경고했잖나. 우리를, 칼라일을 건들지 말라고.”
작은 속삭임을 정확히 알아들은 리제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난…… 내 아들을 지키려 했을 뿐이야.”
울분에 찬 리제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손을 뿌리치려는 듯 힘이 느껴졌다.
난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번뜩이는 녹안을 직시했다.
“아니. 넌 네 아들을 스스로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욕심 따위
부리지 않았다면 난 절대 칼라일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을 테고 애초에 제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망친 건 너와 네 가문이다. 날 부른 것도 칼라일의 존재를 밝힌 것도 전부 네가 한
선택이다. 허니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네 멍청함을 원망해.”
“!”
“너만 아니었다면 네 아들은 이미 황태자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리제나만 아니었다면 칼라일이 황태자가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탁-!
난 거세게 흔들리는 녹안을 응시하며 그녀의 손을 던지듯 놓아버렸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텅 비어가는 리제나의 눈이 보였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은 그녀이니까.
그녀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시오스 영애의 몸이 좋지 못한 듯하니 어서 후작가로 모시거라.”
무너지듯 주저앉은 리제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던 난 이윽고 싸늘히 그녀를 지나쳐 궁전으로 향했다.
139 화
시오스 후작의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황궁으로 끌려온 지 하루 만에 재판이 열렸고 재판장은
파르앙 후작이 맡았다.
모든 증거들이 확실했고 그가 빼돌린 4 천 골드가 담긴 금고가 그대로 마법진을 통해 재판장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금고를 지키던 자들 모두 시오스 후작이 시킨 일이라 자백을 하였고 후작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돈을 빼돌린 횡령죄와 국가를 상대로 벌인 거대한 사기극.
거기에 크로프트 공작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극악무도한 짓까지 모든 게 밝혀졌고 시오스 후작은
어느 누구의 옹호도 받을 수 없었다.
“마이어스 시오스. 그대가 벌인 일련의 죄들은 참으로 참혹하여 그 어떠한 선처도 해 줄 수 없다. 하여
지금 이 시각부터 시오스의 성과 작위를 박탈하고 서부의 가장 끝에 위치한 광산에서 100 년간의 강제
노역을 선고한다.”
형벌을 선고하는 파르앙 후작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가라앉은 재판장을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 된 마이어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악!!!”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마이어스는 악에 받친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를 안쓰럽게 보지
않았다.
“죄인을 체포해 끌고 가라.”
시끄러운 소리에 미간을 좁힌 파르앙 후작이 무겁게 명하자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마이어스의 양팔을
잡았다.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죽고 싶은 것이냐!! 난 이 나라의 재상이고 1 황자의 외조부이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날 체포한단 말이냐!!”
마이어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기사들의 손을 뿌리쳤다.
하루아침에 재상에서 노예가 되었는데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라.
이성을 잃은 마이어스가 씩씩거리며 눈알을 번득이는 그때, 그때 파르앙 후작의 노성이 재판장을 울렸다.
“마이어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는가! 더 소란을 피운다면 좋지 못한 꼴로 끌려나가게 될 걸세!”
“나는 이대로는 못 간다!! 1 황자 전하를 불러라!! 황자 전하께서 나를 구해 주실 것이다! 황자 전하께서
나를 이리 버리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파르앙 후작은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마이어스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곧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기사들은 무력으로 마이어스를 제압했다.
몸을 바닥에 강제로 눕혀 양 손목에 포승줄을 묶은 그들은 개를 끌고 가 발버둥 치는 마이어스를 끌고
재판장을 나갔다.
한때는 제국의 가장 실세라 불렸던 시오스 후작의 말로에 귀족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놔!! 놓으란 말이다!!!”
죄인이 막 재판장에서 끌려 나왔을 때, 재판장 밖엔 에드먼드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참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기사들에게 끌려 나오는 외조부의 모습을 본 에드먼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모든 죄가 명확하단 신문 기사를 보았을 때도 사실이 아닐 거라,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 안 것일 거라
부정하고 또 부정했었다.
언제나 인자하고 상냥했던 그의 외조부가 이런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을 리 없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했던 어머니의 말처럼 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에드먼드는 외조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때, 에드먼드를 발견한 마이어스가 다급히 외쳤다.
“황자 전하!! 에드먼드!! 날 구해 다오!! 에드먼……”
“조용히 하시오!”
그를 향해 외치는 외조부의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도 낯설어 에드먼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멀어지는 에드먼드를 본 마이어스의 녹안이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
“에드먼드!! 네가 누구 덕에 황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
“그만하시지요, 아버지.”
소름 돋는 마이어스의 눈빛에 에드먼드의 몸이 굳은 순간, 에드먼드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충격으로 잠시 넋이 나갔던 에드먼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을 가로막아선 뒷모습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리제나가 에드먼드에게 몸을 돌렸을 때 이미 외조부는 기사들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황자…….”
리제나는 몸을 잘게 떨고 있는 에드먼드를 꽉 끌어안았다.
재판장에 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 일렀거늘.
이런 장면을 보게 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부아가 치미는 속을 진정시키려 긴 숨을 내쉰 리제나는 천천히 에드먼드를 안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에드먼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를 보는 검은 눈동자가 가엾게 떨리고 있었다.
내 너에게 꼭 황좌를 안겨 주려 하였는데.
쓰리다 못해 누군가 속을 다 긁어 내리는 듯 아팠다.
“어머니, 대체 이게 무슨……”
“황자, 내 말 잘 들으세요.”
리제나의 낮은 음성에 에드먼드가 입술을 다물었다. 심각함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얼굴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네.”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황자를 상처 주고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미 역시 당분간은
황자를 자주 보러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명심하세요.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허니 묵묵히 참고 버텨야 합니다. 아시겠죠?”
에드먼드는 리제나의 달라지는 눈빛을 보며 멈칫했다.
끌려가던 외조부도 살벌한 빛을 띠는 어머니의 눈빛도 에드먼드는 모든 게 낯설었다.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라 했던 어머니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황궁으로 보낼 때 했던 거짓말처럼.
황궁으로 가서 황자가 되면 행복한 일만 있을 것이라고 그리 말했지만 에드먼드는 황자가 된 뒤로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 늘 자신을 남 보듯 바라보는 아버지.
거기에 언제나 남들의 시선과 지켜야 할 규율들에 숨이 막혔었다.
그런데 이젠 외조부까지 잃었다.
더 불안한 것은 꼭 어머니도 잃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고 하기엔 에드먼드는 리제나에게 너무나 착한 아들이었다.
에드먼드는 목구멍을 넘어 나오려는 말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겁니다. 어미를 믿고, 궁전으로 돌아가 있으세요.”
리제나는 에드먼드의 볼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에드먼드는 그녀의 낯선 미소를 보다 느릿하게 답했다.
“……어머니도 항상 몸조심하세요.”
에드먼드는 부디 리제나가 무사하길 바라며 궁전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140 화
시오스 가문의 몰락과 2 황자의 황태자 책봉으로 연일 시끄러웠던 나날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황궁 연회의
날이 밝았다.
몇 년 만에 황성에서 열리는 가장 큰 연회로 오늘은 다시 돌아온 황후와 황태자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과 황성에서 열리는 파티의 이야기로 수도의 광장이 한참 시끄럽던 그때, 황후궁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라일의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지?”
난 연회장을 살피고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헬란에게 물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선 방금 치장을 다 마치셨습니다.”
“벌써?”
“어찌나 얌전히 계시는지 시녀들이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었어요.”
연미복을 차려입고 치장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이 투정을 부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잘했다니
의외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지금 꽤나 부루퉁한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칼라일을 먼저 봐야겠다.”
난 치장을 시작하기 전 칼라일을 보려 계단을 올랐다.
141 화
* * *
“우와…….”
로비에 도착하자 미리 내려와 있던 칼라일과 레이몬드가 보였다.
그리고 칼라일은 날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예뻐요……!”
칼라일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게 말했다.
항상 엄마가 최고로 예쁘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진심 어린 표정은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의 칭찬보다 칼라일의 칭찬이 가장 기분 좋았다.
“고마워. 황태자도 오늘 너무 멋있단다.”
환하게 웃는 칼라일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 난 시선을 들어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본 난 의아함에 눈썹을 꿈틀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멍했다. 초점은 살짝 흐린 듯했다.
그러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당황한 듯한 그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흠, 오늘 정말 아름답소. 황후.”
“감사합니다. 폐하.”
그의 시선이 귓불을 훑고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고 나올 줄 몰랐는데. 역시 잘 어울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가 선물한 것이니 하지 않을 거라 여긴 듯했다.
하지만 난 블랙 다이아몬드를 그의 선물이라 여겨 착용한 것이 아니었다.
“황후 책봉 뒤 폐하와 함께 나가는 첫 공식 석상입니다. 시끄러운 정세이니만큼 화목한 황실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황후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황후의 적자인 황태자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기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황후에 대한 단단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연히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직한 나의 말에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을 느낀 듯 레이몬드의 입가에 퍼지던 옅은 미소가
사그라지었다.
그를 외면하듯 난 칼라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만 파티장으로 향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느릿하게 답한 레이몬드는 시선을 거두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아 오는 손길. 장갑 낀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체온이 전해
져왔다.
간절하게 매달리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이상해지는 기분에 나는 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며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142 화
143 화
* * *
144 화
* * *
* * *
145 화
“으음…….”
노곤함에 몸을 뒤척이던 난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침실에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가 한참 전에 뜬 듯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있어야 할 레이몬드는 방 안 어디에도 온데간데 없었다.
“……돌아간 건가.”
날 깨우지도 않고?
잠깐 멍하니 멈춰 서 있던 난 침대로 다가가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곧 방문이 열리며 헬란이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헬란, 폐하께선……. 돌아가신 건가?”
“네. 황태자 전하와 아침을 드시고 태양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칼라일과 아침을 드셨다고? 지금이 몇 시지?”
“정오가 다 되었습니다.”
헬란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자다니.
황후로 살면서 한 번도 늦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어젠 레이몬드까지 함께 있었는데.
긴장했던 것과 달리 너무 숙면을 취한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레이몬드가 모두 보았겠지.
당황한 얼굴을 본 헬란이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어제의 파티로 황후 폐하의 심신이 피곤하실 거라며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도 깨우지 그랬니.”
“송구합니다.”
레이몬드가 칼라일과 아침을 먹고 갈 동안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는 게 좀 민망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 별수 없는 것이지.
머리를 쓸어넘긴 난 씻고 치장을 했다.
어제와 달리 수수하게 치장을 끝낸 난 보석함에 놓인 블랙 다이아몬드에 시선이 멈추었다.
“블랙 다이아몬드를 착용하시겠습니까?”
내 시선을 오해한 시녀가 물어왔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귀한 것이니 보물함에 잘 넣어두렴.”
귀족들에게 내보이기 위해 착용한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 지금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네.”
심플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한 한 난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모습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이미 시간은 정오가 훌쩍 넘어있었다.
“헬란, 칼라일의 수업은 시작했나?”
“네. 아까 시작하셨습니다.”
“그럼 수업이 끝나면 간식을 챙겨 주라 시녀에게 말해 놓으렴. 난 아버지를 뵈러 다녀와야 할 거
같으니까.”
오늘 아버지를 뵙고 칼라일의 스승을 직접 알아볼 생각이었다.
여태까진 예법 수업만 받고 있었지만, 칼라일이 황태자 자리에 오른 지 이제 수일이 흘렀으니 제대로 된
스승을 찾아야 했다.
제왕학과 외교술 등 배울 것이 산더미였으니까.
“예, 황후 폐하.”
헬란의 대답을 들으며 화장대에서 일어나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드로이트 공작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드로이트 공작이?”
제레미가 갑자기 왜.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제레미가 아무런 용건도 없이 방문을 청할 리는 없었다.
“응접실로 모시거라.”
외출용 망토를 가져온 시녀를 물린 난 응접실로 향했다.
* * *
146 화
* * *
<i>‘시오스 리온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고 리제나의 하녀에 대해 알아봐.’</i>
<i>‘하녀라면…… 그 백발의 하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i>
147 화
<i>‘폐하는…… 많이 바쁘죠?’</i>
<i>‘어머니, 폐하는 언제 쉬어요?’</i>
<i>‘폐하는 그럼 이곳엔 바빠서 못 오는 거예요?’</i>
* * *
* * *
켈록- 켈록-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마님…….”
흐느낌이 섞인 여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윽고 흐느끼던 중년의 여인이 시선을 돌려 창가에 선
여자를 불렀다.
“자작님, 마님의 상태가…….”
여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끝을 흐렸다.
가만히 서서 창밖의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던 리제나는 여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중년의 여인은 시오스 후작가의 하녀장이자 어릴 적 그녀의 유모였던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는 시오스 전 후작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리제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힐렌. 의사를 불러와.”
“……흐읍, 예.”
힐렌이 급히 방을 나가고 리제나는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피가 섞인 기침을 연거푸 토해내며 힘없이 축 늘어진 어머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원래도 몸이 좋지 않았었다. 거기에 가문이 무너지고 아버지가 그리 되며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의사를 불러오라 했지만 리제나는 어머니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제나…….”
느리게 눈을 깜박인 어머니가 그녀를 불렀다. 리제나는 참담함을 숨기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침대 맡에 앉은 그녀는 마른 손을 꼭 붙잡으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집이 강한 아버지에게 늘 주눅이 들어 그녀에게 다정하지도 아버지의 횡포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주지도 못한 어머니였지만 큰 원망은 없었다.
그래도 어릴 적엔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은 좋은 기억들이 있었으니까.
어머니 역시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았겠지.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의식이 흐릿한 어머니에게 나직이 말하자 시선이 그녀에게로 내려왔다.
“리제나, 리제나…….”
갈라지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애타게 그녀를 부르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유언을 남기려는 것일까.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어머니에게 리제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리,제나……. 아버지께선……. 아직, 쿨럭, 소식이 없는 거니……?”
헐떡이는 숨소리와 뒤섞인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어리석게도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와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 시오스 후작가는 무너지고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곧 숨을 거둘 듯한 어머니에게 굳이 잔인한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께선 곧 수도로 돌아오실 거에요. 황제 폐하께서 다시 부르셨으니까요. 허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에요. 어머니.”
그녀의 거짓말에 어머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역시 후작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어.”
환희에 찬 얼굴로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곧 어머니는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울컥 피를 쏟아냈다.
붉은 선혈에 놀라기엔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며 매일 같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진득한 덩어리가 커질수록 리제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직감했다.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주자 축 늘어지는 어머니의 손이 보였다.
“……잠이 오는구나. 눈을 떴을 땐 리온이 돌아, 와 있으면……. 좋겠어…….”
느릿하게 말을 잇던 어머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깊은 수마에 빠져들고 리제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피 묻은 천을 꽉 그러쥐었다.
무너진 가문과 허울뿐인 자작이란 작위 하나.
그리고 그녀에게 적선하듯 떨어진 낡은 이 층짜리 저택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오늘따라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1 황자의 모친으로, 제국에서 제일 가는 권력가의 영애로 살았던 그녀의 삶이 이렇게 한순간에 비참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촛불 하나 켜진 방 안에서 리제나는 짙은 비소를 흘렸다.
“……엘리야.”
전부 그녀 때문이다.
엘리야가 돌아오고 난 뒤 모든 게 엉켜버리고 만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을 엘리야가
뺏어갔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내게…….”
이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졌다 말하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내 탓이라니.
아니, 절대 내 탓이 아니다.
애초에 레이몬드의 곁에 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맴돌기만 했던 엘리야였다.
그녀가 떠나게 되지만 않았어도 엘리야가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그녀의 자리를 뺏은 건 엘리야였다.
내 자리를, 내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인데.
왜 이번에도 모든 것을 잃은 건 자신이란 말인가.
아니, 이젠 그녀의 자식마저 모든 걸 잃었다.
엘리야의 자식이 보란 듯이 에드먼드의 자리를 빼앗았다.
“하하.”
미친 사람처럼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모든 걸 잃었다고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순 없다.
에드먼드의 자리를 뺏은 것만큼은 죽어서도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황태자의 자리를 다시 뺏어 올 수 없다면 엘리야의 아들도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리제나의 눈빛이 살기를 머금은 순간 방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방 안으로 의사가 들어오자 표정을 갈무리한 리제나는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머니의 고통이라도 덜어주게.”
“예, 자작님.”
의사에게 명한 그녀는 그만 방에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물에 씻으며 뒤에선 릴라에게 명했다.
“릴라, 일전에 말한 것을 구해오렴.”
“네.”
“그리고……. 리온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릴라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리제나는 은 대야 속, 피가 번지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48 화
* * *
5 일 뒤.
시오스 가문으로 시끄러웠던 신문들도 잠잠해지고 1 황자에 대해 시끄러웠던 황궁도 많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오늘, 난 오랜만에 셀린느 후작 영애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파티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이렇게 둘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셀린느 후작 부인의 몸은 요즘 어떤가? 영애.”
“황후 폐하의 은덕으로 많이 쾌차하셨습니다. 요즘은 밖으로 산책도 나가시고 가벼운 모임에도 참석하고
계신답니다.”
셀린느 후작 영애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후작 부인의 몸이 많이 좋아졌다니 정말 다행이군, 그러고 보니 요즘 셀린느 후작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리고 있어. 그대도 아는가?”
“네? 아버지가 무슨 잘못이라도……”
순간 후작 영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셀린느 후작이 유배를 갔던 전적이 있어서인지 작은 소식에도 민감한 것 같았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을 보던 난 손을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아니, 아니야. 잘못이 아니라 셀린느 후작께서 군사권을 맡은 이후로 기사들의 군기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며 칭송을 하는 것이네.”
“아……. 그런 이야기였군요.”
“셀린느 후작의 청렴결백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가 있겠나. 일전에
폐하께서도 셀린느 후작의 우직함에 대해 칭찬을 하였지.”
“폐하께서 말이신가요?”
“그래. 그러셨네.”
거짓말이 아니었다.
칼라일이 레이몬드를 혼자 찾아갔던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레이몬드에 대한 내 감정이 아니라 칼라일 때문이었다.
그날 그의 말도 의외긴 했지만 내 눈치를 보느라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해, 그간 칼라일이 내색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기에 고민 끝에 칼라일과 레이몬드가 함께 할 시간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 식사에 나까지 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149 화
150 화
* * *
151 화
* * *
152 화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동방국.
밤새 폭우가 쏟아지고 푸른 여명이 밝아왔지만 여전히 하늘에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부슬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한 남자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동방국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남자의 외모는 동방국의 것이 아니었다.
금발에 녹안.
비에 머리칼과 옷이 전부 젖었지만 남자는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그의 다급한 걸음에 폭우에 땅이 패인 곳에서 물이 튀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젠장.”
하지만 남자는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으로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때문에.
입술을 깨문 남자는 몸을 돌렸지만 언제 따라붙은 것인지 그의 뒤에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무장한 남자들의 수는 5 명이 넘었다.
그의 손에 든 것이라곤 그림이 담긴 통이 전부였다. 이것으로 검을 쥔 자들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검술에 재능이 없다.
해가 뜨지 않은 거리에 그를 도와줄 사람들도 없었다.
밤새 쏟아지는 폭우에 전부 문을 꽁꽁 걸어 잠갔으니까.
“도망칠 곳은 없다. 리온 시오스, 괜한 싸움으로 다치지 말고 조용히 우리를 따르도록.”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중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이렇게 위협적으로 쫓아오는데 당신이라면 따라가겠어? 날 어디로 데려가는지,
아니 대체 왜 날 찾지? 이미 우리 가문은 망해서 남은 것도 없을 텐데. 나 같은 놈 찾아봤자 뭐에 쓸
데가 있다고?”
리온은 눈만 내놓은 검은 복면의 남자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에그리타 제국과 동방국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에그리타 제국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그리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었으니까.
거기다 요 며칠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에그리타 제국의 새로운 황후와 황태자. 그리고 실세였던 시오스 후작가의 몰락.
연속적으로 벌어진 제국의 사건들은 대륙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였다.
하여 리온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의 가문이 몰락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고 어머니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는 말로였다.
그가 곁에 있었다 하여 달라질 결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누가 날 찾는 거야?”
시오스 가문이 무너지긴 했지만 황제가 혈족을 전부 죽이라 명하진 않았다.
1 황자를 봐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시오스 가문의 유령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찾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위험한 진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없어.
가족 중에서도 아버지와 리제나, 그리고 자신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아버지와 리제나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왜 자신을 찾는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때, 리온을 보던 남자는 갑자기 복면을 벗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리온의 눈이 커졌다.
복면 아래 드러난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4 기사단장.”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였지만 제국의 귀족이라면 그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최측근이었으니까.
그만큼 유명했기에 카르텔의 초상화를 당연히 본 적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리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4 기사단장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를 찾고 있는 사람이 황제라는 것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대를 찾으신다. 황명에 따르도록.”
황명.
카르텔의 낮은 음성에 리온의 심장이 철렁했다.
황제가 그를 찾는 이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
리온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도망칠 곳은 없다. 반항한다면 사지 멀쩡히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카르텔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도망칠 생각 없습니다.”
리온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비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것인가.
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통을 바닥으로 던졌다. 항복을 표하듯 두 손을 내미는 리온에게 기사들이 다가가
손목을 묶었다.
두 손목을 묶은 구속구를 체념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리온은 무거운 바닥을 굴러가는 통을 보다 카르텔을
따랐다.
마침내 모든 게 정리될 순간이 다가온 듯했다.
* * *
* * *
15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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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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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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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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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황자 전하, 자작님께서 이것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음식에 넣으라
명하셨습니다.’</i>
<i>‘……이게 뭐지?’</i>
<i>‘황자 전하의 미래를 지켜줄 유일한 방법입니다.’</i>
에드먼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릴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릴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에드먼드에게 리제나의
말을 전했다.
<i>‘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법도 배우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본인은 물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습니다.’</i>
<i>‘그게 무슨, 난 못해. 난 절대 이런 일을……!’</i>
<i>‘황자 전하께서 하지 못하신다면 자작님께선 죽습니다.’</i>
<i>‘뭐……?’</i>
<i>‘폐하께서 살아계신다면 자작님은 죽습니다. 전하.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실
작정이십니까.’</i>
157 화
“…….”
릴라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 그는 어머니를 배신한 걸지도 모른다.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걸까.
리제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도 독을 뿌릴 순
없었다.
“황자 전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시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디저트를 챙겨 와.”
“네.”
에드먼드는 윤기 나는 사과 타르트를 물끄러미 보다 먼저 방을 나갔다.
에드먼드가 만찬 장소로 먼저 떠나고 시녀장은 사과 타르트 쟁반을 들었다. 뚜껑을 조심스럽게 덮고 막
방을 나가려던 그때, 방 안으로 릴라가 들어왔다.
“시녀장님, 그것은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손을 내미는 릴라에게 시녀장이 얼굴을 구겼다.
“이것은 만찬 장소로 가져갈 디저트다. 일개 하녀인 네가 가져갈 음식이 아니다.”
“하오나 방금 황자 전하께서 궁은 나가시기 직전 저에게 디저트를 가져오라 명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셨다고?”
“네. 아시다시피 황자 전하께선 지금 심신이 불안하시고 오랜만에 폐 하를 뵙는 것이라 긴장하고 계십니다.
하여 제가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릴라의 매끄러운 말에 시녀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릴라는 황자가 어릴 때부터 봐온 하녀였고 지금 궁에 리제나를 대신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릴라는 이틀간 에드먼드의 곁을 계속 지켰다.
시녀장은 당연히 릴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릴라에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조심히 들고 가게.”
“네. 시녀장님.”
시녀장이 기분 나쁜 듯 먼저 방을 나간 뒤, 릴라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확인하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윤기나는 사과 타르트 위로 투명한 액체를 뿌렸다.
* * *
“1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에드먼드가 들어왔다. 칼라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쁘게 그를 불렀다.
“형님!”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뵙니다.”
에드먼드는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에 에드먼드에게 당장 달려갈 듯 일어난 칼라일은 주춤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일전에 마주쳤을 때 에드먼드가 차갑게 대했다더니.
그 때문인 듯했다.
헬란에게 두 사람이 만났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에드먼드에게 먼저 미소를 그렸다.
“에드먼드, 어서 자리에 앉으렴.”
“네. 황후 폐하.”
에드먼드는 상석인 레이몬드의 왼쪽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 앉은 아이의 얼굴은 살피자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에드먼드는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 든 아이였다. 황태자로 키워졌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차라리 정계의 상황 같은 것 몰랐다면 충격이 덜했을 텐데.
황태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무너진 외가.
황자로서의 허울뿐인 신분 외에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동안 에드먼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날 보면 더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황태자의 자리도 외가를 무너뜨린 것도 내가 관련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버지.”
에드먼드는 레이몬드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레이몬드의 눈빛이 에드먼드를 향한 순간 난 긴장감에 어깨가
움찔했다.
레이몬드는 지금 에드먼드를 죽은 황태자의 자식으로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성을 잃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래.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이냐?”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레이몬드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결 긴장이 풀린 그때 에드먼드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그동안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다. 내가 너를 더 챙기지 못한 것이 미안한 일이지. 신경 쓰지 말거라.”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나요?”
에드먼드는 칼라일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다정함이 느껴지는 미소는 일전에 헬란에게 들었던 싸늘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황제와 황후가 있으니 감정을 숨기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칼라일은 형이 자신에게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전…… 아니, 난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형.”
칼라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같이 가면을 쓴 듯 감정을 죽이고 있는 만찬장에서 칼라일의 웃음만큼은 이질적이게도 진짜였다.
칼라일의 맑은 웃음소리에 순간 에드먼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칼라일이 싫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가까웠다.
에드먼드가 칼라일에게 죄책감을 느낄 일이 무엇이 있다고.
곧 사라지는 위화감에 잘못 본 것으로 치부하며 난 식사를 내오라 시종에게 눈짓했다.
곧 테이블 위로 화려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저녁의 이야기를 이끈 사람은 칼라일과 에드먼드였다.
레이몬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가끔 예의상의 대답만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식사 내내 에드먼드에게 말을 걸었고, 에드먼드는 칼라일에게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칼라일에게 에드먼드를 그만 괴롭히라 말렸겠지만 오늘은 내버려 두었다.
칼라일이 말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여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에게 말이라도 건다면……. 그 뒤의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칼라일의 목소리만 가득했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시종이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다.
“폐하, 황후 폐하. 이것은 1 황자 전하께서 직접 준비한 디저트입니다.”
은쟁반을 내려놓으며 시종이 말했다.
뚜껑을 열자 달콤해 보이는 사과 타르트가 보였다.
“이것을 에드먼드 네가 준비했다고?”
이건 칼라일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묻자 에드먼드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예,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신다 들어, 사과 타르트를 준비해왔습니다.”
“어머나, 그걸 어찌 알고. 칼라일 어서 고맙단 인사를 하려무나.”
“고마워. 형.”
에드먼드가 자신을 챙겨준 것이 너무 좋은지 칼라일이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저번에 싸늘하게 칼라일을 대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인건가.
에드먼드의 심성이 리제나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고마워 미소를 지은 난 사과 타르트 한
조각을 덜어 칼라일의 접시 위로 놓아주었다.
칼라일은 기다렸다는 듯 포크로 크게 타르트를 조각냈다. 그리고 한 입 가득 타르트를 먹었다.
오물오물 타르트를 씹어 먹은 칼라일이 꿀떡 삼키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 맛있어요! 어머니도 얼른 먹…….”
“황태자?”
신나게 말을 잇던 칼라일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윽……!”
“칼라일, 왜 그러니?”
고개를 숙인 칼라일이 신음을 흘렸다.
쨍그랑- 칼라일의 손에서 떨어진 포크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 어머니…….”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며 등이 서늘해진 그때, 고개를 든 칼라일이 핏물을 토했다.
“칼라일!!”
경악스러운 얼굴로 칼라일을 부른 난 앞으로 쓰러지는 아이를 황급히 안았다.
“이게 무슨, 칼라일!”
레이몬드가 의자를 박차고 내 곁으로 달려왔지만,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품 안에서 쓰러지는 칼라일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크, 쿨럭!”
칼라일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걸쭉하고 뜨거운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명한 감각에 심장이 멈추는 거 같았다.
“칼라일, 칼라일!”
“……아파, 요…….”
칼라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의, 의식을 잃으면 안 돼. 안돼, 칼라일 제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칼라일의 몸이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아. 아…… 안돼!! 칼라일!”
“황궁의를 불러라! 당장!!”
레이몬드의 다급한 외침이 이명처럼 귓가를 울렸다.
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칼라일을 꽉 끌어안은 채 미친 사람처럼 칼라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158 화
* * *
* * *
황제의 침소.
“황태자의 상태는 어떠냐. 대체 무슨 독을 먹은 것이지?”
황궁의 모든 황궁의들이 황제의 침소로 불려왔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사과 타르트를 살피고 칼라일을
진찰했다.
그 와중에도 칼라일은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의식을 찾지 못한 아이가 피를 토해낼 때마다 심장이 철렁였다.
그대로 숨이 끊어질까 봐.
“왜 말이 없느냐!”
황궁의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아는 일반 적인 독이 아니라 여러 가지 독을 혼합해서 만든 듯합니다.”
“해독할 방법은 있는 거겠지?”
“그것이……. 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독약을 만들 수 있사온데……. 지금으로서는 해독약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해독약을 만들 수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의 가느다랗던 이성이 끊어졌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황태자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것이냐?!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황태자가
죽으면 너희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날카로운 내 목소리가 침소를 크게 울렸다.
황궁의들이 어깨를 움찔했지만, 체통 같은 건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칼라일이 이대로 죽어 버리면……. 난, 난…….
두려움에 혼이 나갈 것 같던 그때. 덜덜 떨리는 손을 누군가 잡아 왔다.
“황후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내 손을 꼭 잡은 주름진 손이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따스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참고 있던 감정이 올라왔다.
울음이 왈칵 터질 것만 같아 숨을 크게 들이켰다.
“황후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셔야 황태자 전하도 사십니다. 마음을 굳건히 먹으십시오. 아직 황태자
전하는 살아계십니다.”
아버지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묵직한 목소리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칼라일도 무사할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해.
마음을 다잡은 난 후, 숨을 내쉬곤 손을 놓았다. 아버지가 옆으로 물러나고 황궁의에게 다가갔다.
“……독을 알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 수도 없는 것이냐?”
“그것은 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을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그사이 최대한
빨리 독이 무엇인지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르거라.”
난 침대로 다가갔다. 의식은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신음은 끊이지 않고 파랗게 질린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 헬란이 내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피닉스 상단주가 응접실에 도착하였답니다.”
제드는 음지에서 일했던 세월이 길어 알려지지 않은 독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칼라일이 독을 먹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제드를 불러오라 사람을 보냈었다.
“아버지, 잠시 다녀올 테니 칼라일을 부탁드려요.”
“걱정 말거라.”
난 제드를 만나기 위해 방을 나갔다.
* * *
159 화
“폐하?”
속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윽고 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왔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는 것을 완벽히 막진 못했다.
“폐하!”
그를 본 크로프트 공작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다.
레이몬드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하며 꺼낸 천으로 손과 입을 닦아냈다.
“독에 중독이……! 어서 치료를…….”
결국 황제도 독에 중독돼버린 것이다.
레이몬드는 사색이 된 황궁의들을 향해 태연히 명령했다.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부터 가져와.”
칼라일에게 약을 먹일 때부터 중독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명령에 정신을 차린 황궁의들이 황급히 약을 가져왔다. 약을 단숨에 들이켠 그는 돌아서 공작을
향해 말했다.
“내가 중독된 것은 황후에게 알리지 말거라.”
“하오나…… 폐하.”
“……어차피 해독제를 먹으면 해결될 일이다. 이건 명령이야.”
명령이란 말에 공작은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너희들도 입조심 하거라.”
황궁의들에게 경고를 한 순간, 문이 열리며 엘리야가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피가 묻은 천을 주머니 안으로 숨겼다.
* * *
“칼라일……!”
곧장 칼라일에게 달려간 난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사이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될까 불안해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칼라일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숨결이 편해져 보이기까지 했다.
“칼라일의 상태가 호전된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약을 드셔서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으신
겁니다.”
“……그렇군.”
황궁의의 대답에 잠시나마 희망을 느꼈던 기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남은 사과 타르트 조각을 제드에게 가져다주었지만 무색무취의 것이라 알아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했다.
이제 이 독의 해독제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폐하, 독을 먹인 게 정말 1 황자의 짓입니까?”
“1 황자는 제가 했다 했지만 디저트를 가지고 들어온 자는 리제나의 하녀인 릴라란 여자였다.”
“릴라요?”
“아는 자인가?”
“……리제나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자입니다.”
평범한 하녀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면……. 독을 탄 것 역시 그녀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다고 하더군. 독을 탄 것 역시 그자의 짓인 것 같았다. 심문하려 하자마자 자살을 기도해 지금
묶어놓은 상태이지.”
“리제나를 추포하란 명은 내리셨습니까?”
“하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명을 내렸다. 아마 곧…… 도착할 것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카르텔이 들어왔다.
“폐하, 시오스 자작을 잡아 왔습니다.”
칼라일의 입술에 묻은 붉은 선혈을 닦아준 난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오마.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한다. 칼라일.”
독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왔으니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할 것이다.
난 피가 묻은 손수건을 꽉 그러쥐고 레이몬드와 함께 방을 나갔다.
지하 감옥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건만 마음이 초조해서인지 가는 길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조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전부 내려온 난 감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 무릎 꿇은 리제나와 쓰러져 있는 리온이 보였다.
미동 없는 리온을 보고 있던 리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폐하께서 이리 멀쩡하신 걸 보니 독은 황태자만 먹은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에 간신히 이성을 지키고 있는 듯했던 레이몬드가 결국 노성을 터뜨렸다.
“네가 감히!”
레이몬드는 성큼성큼 다가가 리제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숨통이 조이는지 리제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갔다.
몸을 비틀었지만, 손발이 묶인 채라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워하는 리제나를
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사지를 하나씩 잘라버린다 한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에 비할까.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가 달려가지 않았다면 제가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죽일 수 없었다.
“폐하.”
난 레이몬드의 팔을 살짝 잡았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 뒤, 곧 레이몬드는 리제나를 던지듯 놓아주었다.
“켁, 켁……!”
그 반동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던 리제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큭, 흐으……! 크큭.”
거친 기침을 뱉으며 목을 가다듬던 리제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더러운 바닥을 구르며 웃는 그녀는 정신을 놓아버린 거 같았다.
“이런다고 황태자가 살아날까?”
리제나는 웃음을 멈추고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의 가식은 집어치우기로 한 듯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경멸로 비틀어졌다.
“그간 잘도 숨겼군.”
“숨겨? 뭘 숨겼다는 거지? 난 늘 내 것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내걸 빼앗기기만
하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네 것? 대체 네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이냐.”
“황후의 자리! 내 아들의 황태자 자리! 애초에 전부 내 것이었다고!!”
리제나의 번들거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
“애초에 네 것이 아닌 것을 네 것이라 말하는 그 억지가 가상하군.”
레이몬드는 차갑게 답했다.
리제나는 무리하게 칼라일을 독살하려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리고 있던 미래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후작가가 무너졌다 해도 리제나의 성격상 이렇게 빠르게 포기하는 것은 이상했다.
자신이 절대 뒤집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리고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내 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황태자 자리라고.”
에드먼드의 혈통.
에드먼드가 레이몬드의 자식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단코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다.
지하 감옥으로 오며 독살의 이유를 짐작했고 리제나가 리온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음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 또한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선수를 치려 했다는 것을.
리제나의 입꼬리가 일순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입이 찢어질 듯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에드먼드는 더러운 네놈의 자식이 아니야.”
리제나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고 감옥 안의 기사들은 숨을 삼켰다.
1 황자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도 엄청나고 끔찍한 진실이었으니까.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을 받자 레이몬드는 충격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리제나는 굳어 버린 그를 농락하듯 붉은 입술을 빠르게 움직였다.
“천한 배를 빌어 나온 패륜아의 자식이 아니라 선황 폐하의 적장자인 선 황태자 전하의 아들이지. 너 따위
패륜아와는 정통성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레이몬드를 일부러 더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충격에서 벗어난 듯 레이몬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황제의 핏줄을 속인 것도 모자라 황태자를 독살하려 하다니, 네가 사지가 찢겨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검은 안광에서 살기가 튀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이미 눈빛으로 리제나를 갈기갈기 찢었으리라.
그의 살기에 기사들이 움찔할 정도였지만 리제나는 잠깐 움츠러들었을 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얌전히 혼자 갈 순 없지. 황가의 진정한 적통인 내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 위한 마지막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어?”
리제나는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내 아들이 약을 제대로 타지도 못했어. 어리석지, 어리석어.”
난 그녀의 말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에드먼드가 떠올랐다.
자기 자식에게 남을 죽이라 명하다니.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다 한들 어떻게 그런 짓을.
“그리 소중한 네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면서 넌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이냐.”
“이래도 죽을 목숨 저래도 죽을 모순이었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복수라도 하고 죽어야지. 비참한 황자로
살아갈 바엔, 에드먼드도 지금 죽는 게 나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에드먼드를 지키기 위해 칼라일을 독살하려 한 것이었다면 한줄기의 이성으로나마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을 복수에 이용하려 하는 리제나를 도저히 내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괴기한 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한때는 동경하고 부러워한 적도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토록 추하게 망가져 버리니 그녀에겐 분노조차 아까웠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엘리야 크로프트. 네가 이곳에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네가 칼라일을 가지지만
않았어도! 에드먼드는 지금쯤 황태자의 자리에 앉았을 거라고!!”
리제나는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바닥을 기며 머리를 들이미는 리제나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난 걸음을 물렸다.
얼굴을 구긴 그가 입술을 열려 한 그때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한 자는 다름 아닌 리온 시오스였다.
의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어느새 리온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온의 녹안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선명했다.
“한때는 누나에게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아버지와 똑같은, 아니, 아버지보다 더
추악하게 변해버렸어.”
리온의 목소리엔 허탈함이 가득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난 몰라. 누나와 아버지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던 권력에 대해 난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아.”
리온이 창백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게 살면 안 된다는 거. 어떻게 자기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어. 어떻게
에드먼드에게 독을 먹이라 사주해!”
리온의 거친 음성이 지하실을 크게 울렸다.
그에게 이런 힘이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센 분노였다.
리제나를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보던 리온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 황후 폐하. 그 독의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제가 압니다.”
160 화
“해독제가 있다고?”
난 놀란 얼굴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리온!!”
그때 리제나가 눈을 홉뜨며 리온에게 달려들려 했다.
“막아라.”
레이몬드의 명령에 기사가 리제나를 제압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거짓을 말한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경고에 리온은 고개를 조아렸다.
“있습니다. 애초에 해독제와 같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당장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리는 대신 폐하께 청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내게 거래를 하자는 것이냐? 네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싶은가 보지.”
레이몬드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신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목숨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폐하……. 1 황자 전하의 목숨만은 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잠시 레이몬드의 표정이 굳었다.
“……나보고 지금 전 황태자의 핏줄을 살려달란 말이냐.”
“폐하,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평생 폐하가 아버지라 믿으며 커온 아이입니다.”
리온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청했다.
“이번 독살 사건 역시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평생을 이용당했는데 마지막까지 어른들의 싸움에
희생당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제발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네가 그런다고 에드먼드의 목숨을 살려줄 것 같아!? 이 멍청한 것아!”
기사의 손을 깨물어 잠시 틈을 번 리제나가 리온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린 이미 다…… 읍!”
곧 입이 다시 틀어막힌 리제나는 아예 바닥으로 몸이 눌렸다.
레이몬드는 그런 리제나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그리고 곧 리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속하지. 1 황자의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
레이몬드의 말에 리제나의 버둥거림이 멎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리온은 레이몬드가 결정을 번복할까 황급히 말했다.
“해독제와 독약을 항상 같이 보관했었으니 분명 해독제도 저택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은빛 테두리가 둘린
나무 상자 안에 담긴 분홍색 크리스털 병, 그것이 바로 해독제입니다.”
“지금 당장…….”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칼라일을 살릴 해독제였다. 내가 직접 가지러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텔, 황후를 모셔라.”
“네. 폐하.”
* * *
* * *
리온의 말 그대로였다.
“찾았어.”
작은 분홍색 크리스털 병에 담긴 액체.
해독제가 분명했다.
이제 칼라일을 살릴 수 있어.
난 환희에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해독제를 챙겼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명했다.
“해독제를 찾았다.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 * *
161 화
“깨우지 말거라.”
칼라일을 꼭 끌어안고 울던 엘리야는 그대로 칼라일과 함께 잠이 들었다.
레이몬드는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다 황궁의에게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의 상태는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이냐?”
“네. 독이 빠르게 해독되고 있습니다. 당분간 몸의 기운을 되살리는 약을 꾸준히 드신다면 후유증도
없으실 겁니다.”
“다행이군.”
한결 안심한 얼굴로 숨을 내쉬던 그때,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왔다.
“욱!”
레이몬드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돌렸다.
“폐하!!”
황궁의들이 놀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핏덩어리를 뱉은 레이몬드는 손등으로 입술을 대충 닦으며 황급히
말했다.
“목소리 낮추거라.”
엘리야가 혹시라도 깨어났을까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엘리야는 칼라일과 깊이 잠들어 버린 듯했다.
“폐하, 이건 숨기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아까 해독제를 나눠……”
레이몬드의 곁으로 다가온 크로프트 공작이 참담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
여기서 소란을 피웠다간 엘리야가 깨어날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붙잡는 크로프트 공작과 황궁의들을 뒤로 하고 먼저 침실을 나갔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응접실로 향한 레이몬드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참았던 피를 토해냈다.
“큽.”
“폐하!”
“……소란피우지 말고 독이 퍼지는 걸 늦추는 약을 다시 가져와.”
레이몬드의 명령에 황궁의는 황급히 약을 가져왔다. 단숨에 약을 들이켜자 들끓던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약을 먹으면 그래도 좀 괜찮군.”
레이몬드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결에 섞인 비릿한 피 향이 진했다.
그 모습을 보던 크로프트 공작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독제를 드셔야 했습니다.”
공작은 죄책감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와 황태자.
둘이 위험에 처한다면 당연히 황제를 먼저 살려야 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크로프트 공작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해독제의 양이 한 명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칼라일이 아닌 레이몬드를 살려야 한다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황제의 충신이 아닌 칼라일의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자신이 없었다.
칼라일을 외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대의 잘못은 없다. 설령 그대가 그 해독제를 나보고 먹으라 했다 한들, 내가 마셨을 리가 없지 않나.”
레이몬드는 죄악감으로 얼룩진 크로프트 공작의 얼굴을 보곤 낮게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감히…….”
“그만하게. 공작,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리고 죽을 생각도 없어.”
레이몬드의 검은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그는 황궁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 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직접적으로 많은 양의 독을 드신 것은 아니라……. 퍼지는 속도는 더욱 늦출 수 있사오나 아무리 길다
해도 석 달을 넘기실 수는 없사옵니다.”
황궁의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석 달……. 그 안에 독의 성분을 분석해서 해독제를 만들어라.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이제 너희들에게
달린 것이다.”
“폐하…….”
황궁의들이 어깨를 바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궁의들이 물러가고 레이몬드는 굳은 듯 서 있는 크로프트 공작을 보았다.
“공작, 황후에게 절대 말하지 말게.”
“하오나……, 숨기신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숨길 것이다. 설령 내가 죽는 순간이 온다 해도……. 내가 죽은 이유가 칼라일이 먹은 독 때문이란
사실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사고사는 무엇이든 독 때문으로 마지막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다.
칼라일을 살리기 위해 독이 퍼져 죽었다는 것을 엘리야가 알게 된다면 그를 아무리 미워한들 그녀의
성격상 한평생 죄책감에 괴로워할 테니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준 적도 없는데 마지막 순간마저 그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뒤 엘리야가 죄책감 없이 편히 살길 바랐다.
“폐하…….”
“허니 공작, 황후에게 알리지 마라.”
“명령이십니까?”
“그래.”
공작은 레이몬드의 단호한 검은 눈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대도 이만 돌아가 쉬게. 나도 쉬고 싶군.”
“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작이 응접실을 나가고 레이몬드는 피가 묻은 손바닥을 꽉 그러쥐었다.
“……살 수 있을까.”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낮은 음성이 고요한 공기를 속으로 흩어졌다.
* * *
<i>‘그럼 이만 가 보마.’</i>
162 화
* * *
163 화
그날 밤.
황후궁에서 칼라일을 재운 난 검은 로브를 걸치고 헬란만을 대동한 채 궁전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자 안에 앉아 있던 에드먼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에드먼드를 비밀리에 마차에 태우라 명한 것은 바로 나였다. 오늘 밤 에드먼드는 황궁을 떠나야 했으니까.
난 의아한 얼굴을 하는 에드먼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내 마차가 출발하자 에드먼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후 폐하……. 절 어디로 데려가시는 건가요?”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외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돕겠다고. 오늘 떠나야 한단다.”
“이렇게 바로…… 말인가요? 어머니를 뵙지도 못했는데…….”
리제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듯했다.
리제나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었든 에드먼드에겐 어머니였으니, 에드먼드의 그리움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리제나는 보지 않는 것이 에드먼드에게 더 좋을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기억이 그런 추악한 모습일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가야 한단다.”
“……네.”
나의 단호함에 에드먼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차는 황성을 벗어나 빠르게 달렸다.
“황후 폐하, 도착하였습니다.”
마부와 함께 밖에 있던 헬란이 문을 열며 말했다.
내가 먼저 내리고 에드먼드가 뒤따라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 숲속 한가운데 서 있는 카르텔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금빛 머리칼이 스치듯 보였다.
“카르텔.”
“황후 폐하를 빕니다.”
“일어나게. 데리고 왔는가?”
“네. 황후 폐하.”
카르텔은 답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리온 시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그의 녹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에드먼드……!”
“누구…….”
순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에드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에드먼드, 이자는 너의 숙부인 리온 시오스이다.”
“……네?”
에드먼드의 눈이 휘둥그레진 채 다시 리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
리온은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지하 감옥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던 눈빛이 에드먼드를 보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삼촌이라니…….”
에드먼드 역시 리온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리온과 에드먼드는 서로를 복잡한 감정이 서린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나눌 대화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두 사람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할 말이 많겠지만 회포는 차차 풀도록 하지. 리온 시오스.”
“네, 황후 폐하.”
“그대는 오늘 밤 독을 먹고 자결했다.”
“…….”
리온의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난 헬란에게 눈짓했다. 헬란은 미리 준비한 신분패를 꺼내 리온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앞으로 네가 살아가게 될 이름이다. 잊지 말거라. 리온 시오스는 오늘 죽은 것이란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리온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난 에드먼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난 에드먼드의 손을 살짝 잡았다.
“에드먼드.”
“……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네 삼촌과 함께 외국으로 보내주는 것. 너 역시 앞으론
에그리타의 성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네 어머니 역시 네 마음속에 묻고 살아야 할 것이다.”
“……네.”
“그리고 다시는 ……제국으로 돌아와선 안 된다. 너도 제국을 잊고, 제국에서도 널 잊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
먼 훗날 레이몬드와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에드먼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제국으로 돌아온다면 피바람이
불 것이다.
어찌 됐든 에드먼드는 황실의 핏줄이었으니까.
에드먼드는 똑똑한 아이었으니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던 에드먼드는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래.”
난 에드먼드의 손을 놓았다.
“아침이 밝기 전에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게.”
카르텔이 말 두 필을 끌고 와 리온과 에드먼드에게 고삐를 건넸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한 리온과 에드먼드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이곳을 떠났다.
“국경을 떠나는 것을 확인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리온도, 에드먼드도 멍청한 자들이 아니니까.”
이곳을 떠나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에드먼드를 죽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니 앞으로의 일들은 내 소관이 아닌 것이다.
난 후련함을 느끼며 그만 마차로 몸을 돌렸다.
“황궁으로 돌아가자꾸나.”
* * *
* * *
164 화
염려 섞인 눈빛에 난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모든 게 괜찮다는 말이었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평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제가……
일이 있어 이만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군. 만나서 반가웠네. 공작.”
“저도 반가웠습니다. 곧 황후궁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래. 기다리지.”
제레미가 마법진을 타고 사라지고 난 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오늘은 격식 없이 그대를 찾아오고 싶었어. 바쁜가?”
“아닙니다. 드시지요.”
제드가 싱긋 웃으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의 소파에 앉자 그가 차를 내왔다. 달달한 향이 나는 과일 차를 한 모금 들이자 제드가 입을 열었다.
“헌데 어떤 일로 직접 상단을 찾으셨습니까? 아직 황궁은 정신없지 않나요?”
“황제 폐하께서 잘 단도리하신 덕에 괜찮아. 오늘 찾아온 건 귀족들의 동태를 알고 싶어서야.”
“그런 것이라면 저를 황궁으로 부르시지요. 아직 황태자 전하의 곁을 지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부르려고 했었다.
하지만 레이몬드 때문에 일부러 나온 것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내가 있는 걸 더 불편해하니까.”
“네?”
무슨 말이냐는 듯 제드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별말 아니었어. 귀족들의 상황은 어때?”
“황태자 전하의 독살도 독살이지만 아무래도 1 황…… 아니 에드먼드에 대한 여파가 크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딱히 에드먼드에 대한 처우에 안 좋은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에드먼드를 살린 폐하의 결정에
대해 감탄하고 있죠.”
“다행이군.”
“네. 아무래도 시오스 가문이 몰락하고 드로이트 공작도 바뀌면서 전 황태자의 세력이 거의 소멸된
듯합니다.”
“그럼 지금이 평민 학술원을 세울 적기겠군.”
“지금이라면 반대하는 자들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친황제파 세력만이 남았으니까요.”
“학술원의 부지는 준비되었다 하였지?”
“네. 황실의 인가만 떨어지면 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정신없는 지금 학술원을 추진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난 제드와 학술원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학술원의 교사들부터 입학 조건 그리고 학비 문제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창가에 붉은 그림자가 지자 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었군.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제드와 함께 일어나던 난 멈칫하며 물었다.
“제드, 혹시 황궁에서 들려오는 소식 중에 폐하에 관한 소식은 없어?”
피닉스 상단의 정보력은 상단 중에서도 최고였다.
당연히 에그리타 제국에도 피닉스 상단의 첩자가 있었다.
“폐하에 관한 소식이라면……. 아까 말씀드렸듯 이번에 에드먼드를 살려준 일에 대해…….”
“아니, 그거 말고. 혹시 다른 일이 있다던가, 아니면 무슨 문제가 생기셨다던가…….”
“아뇨.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드는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되려 내게 물어왔다.
레이몬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뒷조사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알게 되겠지.
“……아니야. 그냥 요즘 좀 예민해진 것 같아. 배웅은 안 해줘도 돼. 이만 가 볼게. 쉬어.”
“예. 황후 폐하.”
상단을 나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난 시녀에게 물었다.
“폐하는?”
“두 시간 전에 바쁜 일이 있으시다며 태양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녁을 함께하자는 말씀은 없으셨니?”
칼라일의 상태가 호전되어 이제 가벼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칼라일의 상태를 보았다면 레이몬드라면 저녁을 함께하자 말했을 텐데.
하지만 시녀의 답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아뇨.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망토 끈을 풀고 있던 난 손을 멈칫했다.
대체 뭐지.
이상한 느낌이 자꾸만 날 건드렸다.
“알겠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시녀가 물러가고 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레이몬드가 있는 태양궁이 보였다.
그곳을 복잡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난 헬란을 불렀다.
“헬란.”
“네.”
“……태양궁의 시녀들을 통해 근 래의 소식에 대해 좀 알아보거라.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게 아닌지
신경 쓰이는구나.”
“……네, 황후 폐하.”
* * *
깊은 밤.
태양궁의 침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윽…….”
내장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잠에서 깬 그는 황급히 줄을 잡아당겼
“폐, 폐하!”
“약을 가져와라…….”
시종장은 급히 침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황궁의와 함께 들어왔다.
황궁의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레이몬드에게 급히 약을 먹였다.
약을 전부 들이켠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에 늘어졌다.
그가 흘린 식은땀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몸을 일으키며 참담한 얼굴을 한 시종장에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예.”
시종장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낮추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레이몬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약으로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점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약을 찾으시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거 같은데.”
“……그런 듯합니다.”
이제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뜻은 독이 몸에 빠르게 퍼지고 있단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수개월도 버티지 못할지도.
“해독제를 만드는 약초가 있다 했던 곳에선 답이 왔나?”
황궁의는 불철주야 독에 매달려 결국 독의 성분을 알아냈다. 하지만 독의 성분을 알아낸 황궁의는 더
절망적인 사실을 마주했다.
독을 해독시키는 약초는 10 년에 한 번씩밖에 열리지 않는 신성한 꽃인 아기오디타가 주성분이었다.
대륙 남쪽에 위치한 작은 신성국에서 자라는 아기오디타는 제국의 황제라 해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10 년에 한 번 꽃이 피는 데다 그 개체 수마저 적고 온도 차에 치명적이라 제대로 피는 꽃 자체가
드물었다.
거기다 수명도 짧아 핀다고 해도 삼 일 이상을 살아있지 못했다.
“그것이……. 최근에 핀 꽃들은 전부 죽어 수도의 신전에 남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전에서 혹시
다른 신전에 살아남은 꽃이 있는지 더 알아보겠다 하였습니다.”
레이몬드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그러쥐었다.
아기오디타는 신성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꽃이었다.
그런 꽃을 시골의 신전에서 관리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수도의 신전에 없다면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차마 말할 순 없었겠지.
“알겠다, 그만 물러가 보아라.”
황궁의는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올리곤 침실을 나갔다.
황궁의가 나가고 레이몬드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몸이 점점 무겁고 마음같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힘들어 보이는 황제를 보고 있던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폐하께 사실을 알리는 것이…….”
“황후가 알아선 안 된다. 그리고 애초에 황후가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있겠느냐.”
“…….”
레이몬드의 단호한 말에 시종장은 입을 다물었다.
“혹 황후가 뭔가 알아챈 듯하면 바로 내게 말하거라.”
“……예. 폐하.”
“쉬고 싶구나. 물러가.”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리곤 침실을 나갔다.
익숙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밖으로 황후궁이 보였다.
“보고…….”
채 말이 끝맺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그녀가 더욱 그리웠다.
조금이라도 더 엘리야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이제 겨우 함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그녀가 그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떠나야 한다니.
“……벌을 받는 건가.”
그녀를 상처 준 것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가 정리하지 못한 리제나의 독에 결국 중독된 것이니까.
레이몬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황궁의는 아마 해독제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젠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칼라일이 황태자이긴 하지만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물론 엘리야는 칼라일을 잘 키우겠지만 그가 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황권은 약해질 것이다.
허니 그가 죽은 뒤에도 무리 없이 엘리야가 대신 섭정할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아야 했다.
시오스 가문이 몰락하고 리제나까지 죽었으니 크로프트 공작을 필두로 황제파 귀족들을 결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겠지.
그는 한참을 황후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앞으로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 * *
이틀 뒤.
“태양궁의 시녀들에게 동향을 알아봤습니다만……. 아직까지 크게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흠.”
“늘 그렇듯 시종장님께서 폐하의 수발을 들고 계시고, 폐하께서도 집무를 보고 있으시다 하였습니다.”
헬란의 보고에 난 미간을 좁혔다.
“……폐하께서 누구를 특별히 찾으셨다거나 그런 일도 없었나?”
“네. 항상 보고를 올리는 재상 각하와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폐하를 뵐 뿐 다른 분을 부르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난 미심쩍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냐.”
“황후 폐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이틀 동안 저녁 만찬도 바쁘다며 피하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왔다니.
한동안은 계속 나를 피할 줄 알았는데 일이 다 해결된 걸까.
왠지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몬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165 화
“황후.”
“폐하를 뵙니다.”
인사를 올리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 푸석한 그의 얼굴에 눈썹을 꿈틀했다.
그의 혈색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폐하, 몸이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 감기가 들었소.”
“감기……요?”
“리제나의 일을 다 처리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의 피로가 밀려오더군. 아무래도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오.”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며칠 전부터 내게 선을 긋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편안한
태도였다.
그는 농담으로 화제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황궁의가 황태자의 건강이 거의 회복되었다고 하더군.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고 하여 함께 산책이라도
할까 해서 왔소. 시간이 되오?”
“……네. 됩니다.”
“그럼 오랜만에 칼라일과 함께 셋이서 걷지.”
“그러지요.”
난 그의 옅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란이 칼라일을 불러 온 뒤, 우리는 함께 황궁의 정원으로 나왔다.
칼라일은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어 가볍게 걷는 것도 가능해졌다.
칼라일은 나와 레이몬드의 손을 잡고 중간에서 걸었다.
“칼라일, 힘들면 바로 말하거라.”
“네. 근데 하나도 안 힘들어요. 막 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칼라일은 하나도 안 아프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배시시 웃는 칼라일이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방 안에서 생활을 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 지루해서 몸이 베베 꼬일 것이다.
아마 외출금지령을 풀어달라는 거겠지.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아직 다 낫진 않았으니 좀 더 외출을 자제하자꾸나.”
난 칼라일의 바람을 모른 척 말을 돌렸다.
칼라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황궁의가 완치가 되었단 말을 할 때까진 어쩔 수 없었다.
맹독에 죽을 뻔한 것이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의 휴유증도 남으면 안 됐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푹 숙이는 칼라일을 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다 낫고 나면 내가 선물을 주마.”
“선물이요?”
칼라일이 그를 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황태자가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 몸이 다 낫는다면 황태자가 갖고 싶어 했던 조랑말을 선물해
주마.”
“우와!”
칼라일은 벌써 조랑말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조랑말이래요! 저 어머니 말 잘 듣고 약도 잘 먹을게요!”
방금까지 우울했던 표정이 싹 사라진 칼라일은 내게 약속하듯 다짐했다.
좋아죽는 칼라일의 얼굴을 보니 나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그래.”
방방 뛰는 칼라일에게 웃으며 답하던 난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쿨럭. 큽.”
칼라일의 손을 놓은 레이몬드는 무거운 기침을 뱉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다는 말이 진짜인 것 같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버지, 아파요?”
나와 칼라일의 물음에 목을 가다듬은 레이몬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괜찮소.”
그는 시선을 내려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칼라일에게도 말했다.
“황태자,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괜찮다는 말에 비해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던가.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듯 레이몬드는 시선을 들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
“앗, 어머니, 저기 제비꽃이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때, 갑자기 칼라일이 외쳤다. 내 손을 놓은 칼라일은 제비꽃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으앗.”
하지만 오랜만에 외출이어서인지 칼라일은 손을 놓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칼라일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난 손을 뻗었지만 레이몬드가 더 빨랐다.
“아…….”
하지만 곧 벌어진 상황에 놀라 난 움직임이 멈추었다.
레이몬드가 칼라일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정확히는 칼라일을 잡았지만 힘없이 칼라일의 어깨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레이몬드 덕에 칼라일이 바닥에 심하게 넘어지진 않았다. 칼라일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보았지만 난 레이몬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칼라일을 놓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폐하.”
내 작은 부름에 레이몬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윽고 시선을 든 그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좀 쉬어야 할 거 같군.”
“……감기가 심하신가 봅니다.”
“그런 거 같아. 칼라일.”
“네.”
레이몬드는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먼저 돌아가야 할 거 같구나. 미안하다.”
“괜찮아요. 다 나으면 저랑 같이 놀아요, 아버지.”
“……그래. 그러자꾸나.”
칼라일을 눈에 담듯 물끄러미 보던 레이몬드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가 보겠소.”
“……저녁에 궁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괜찮소. 며칠 쉬면 나을 감기니 칼라일을 신경 쓰시오.”
레이몬드가 떠나고 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머니?”
굳은 내 얼굴에 칼라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칼라일, 이만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칼라일이 아쉬워했지만 난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마음 편히 산책할 수 없었다.
난 칼라일을 손을 잡고 서둘러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 * *
* * *
이튿날.
레이몬드의 일로 신경이 곤두선 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직 황궁의가 올리는 약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한 것이지?”
치장을 마친 시녀들이 물러가자마자 난 헬란에게 물었다.
“……네. 아직 약재 쓰레기들까지 황궁의께서 직접 버리고 계셔서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인들이 하는 일인데 직접 한다니……. 더 수상하구나.”
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잠을 설쳐서 머리가 좀 아플 뿐이야. 아버지에게 사람은 보냈니?”
“네. 아까 보냈으니 공작 각하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레이몬드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면 아버지도 알아야 했다.
하여 이른 아침 행정궁에 사람을 보내라 한 상태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녀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크로프트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렴.”
난 자리에서 일어나 헬란과 함께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버지. 인사는 되었으니 편히 앉으세요.”
응접실에 들어온 난 예를 갖추려는 아버지에게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는 맞은 편에 앉았다.
난 평소보다 몹시 수척한 아버지의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 얼굴 빛이 안좋으신데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아, 요며칠 잠을 설쳐 그런 것일 뿐입니다.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마저도 근심이 서려 있었다.
“걱정 안 할 수가 없잖아요. 혹시 아픈 것이라면 숨기지 말고 제게 말씀해 주세요.”
레이몬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인지 순간 말이 차갑게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지고 난 멈칫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폐하께서도 몸이 안 좋은데 아버지까지 아프신 걸까 봐 신경이 예민해졌어요.”
“…….”
난 순간의 어색한 침묵에 아버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의 얼굴에 당황이 서린 것이 보였다.
왜 당황하시지.
“……그러셨군요.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드셨다.
그에 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방금 내 말에서 아버지가 당황할 만한 것은 없었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다시 내려 놓으실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던 난 입을 열었다.
“아버지, 폐하의 병세에 대해 뭔가 아시는 건가요?”
“…….”
아버지는 침묵하셨다.
아까처럼 당황하진 않으셨지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드셨다.
“……폐하께서 심한 감기에 걸리셨다, 알고 있습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것 같으니 제가 이러겠죠. 대체 왜 제게 숨기는 건가요? 아버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황후 폐하, 전…….”
순간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에 참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심각한 병에 걸리신 건가요?”
아버지가 무거운 침음을 내뱉은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헬란이 들어왔다.
중요한 얘기를 나눌 것이니 시급한 일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급하게 들어왔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일 확률이 높았다.
“황후 폐하, 황궁의가 사색이 되어 태양궁으로 급히 들었다고 합니다.”
166 화
167 화
“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궁의가 고개를 들었다.
황궁의는 내 물음이 이해되지 않는 듯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아기오디타의 꽃봉오리나 시든 꽃이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그것까진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해독제에 필요한 것은 만개한 아기오디타의 꽃이라……. 생명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후 폐하.”
황궁의는 내가 봉오리나 죽은 꽃으로 약을 만들 수 있다 착각한다 생각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황궁의는 내 능력을 모르니 당연히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꽃봉오리나 죽은 상태라도 꽃이 남아있기만 한다면 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내겐 식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꽃이 피어난다면 해독제를 만들어 레이몬드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숨겨 왔던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레이몬드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헤링턴, 지금 당장 신성국에 급보를 넣어 봉오리나 죽은 꽃이 남아있는지 알아보거라.”
“……예?”
“그 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당장 움직여. 명령이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던 황궁의는 명령이란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내 능력을 일일이 설명해 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꽃을 구해 오면 알아서 알게 될 일이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황궁의 하나가 급히 나갔다.
남아있는 황궁의에게 물었다.
“해독제가 만들어질 때까지 폐하를 버티게 해야 한다. 방법이 있겠느냐.”
“……지금으로선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같은 약을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오나 생각보다
독이 너무 빠르게 퍼지어……. 저도 장담은 못 합니다.”
난 레이몬드를 보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거라.”
“예.”
레이몬드에게 다가가 약을 먹이는 황궁의를 보던 난 시종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의 상태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궁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폐하는……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허니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하거라.”
“……예, 황후 폐하.”
“그리고 크로프트 공작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나가고 황궁의도 진통제만을 남겨두고 침실을 나갔다.
그렇게 침실에 레이몬드와 나 둘만이 남았다.
난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레이몬드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기 오디타는 신성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시들었다 하여 바로 소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니 아기오디타가 도착하기만 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레이몬드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를 떠날 준비를 하던 나였지만 미래에 레이몬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보다 빨리 죽을 거란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그런데 이렇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있다니.
이대로 죽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었다.
* * *
168 화
169 화
* * *
“으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레이몬드는 의식 너머로 들려오는 맑은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깜박, 깜박.
정신을 차리려는 듯 그는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꿈인가.”
천장을 보던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그대로 시선을 멈추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엘리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은빛 머리칼이 볼을 살짝 가리고 은실 같은 속눈썹이 감긴 눈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꼭 별빛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꿈이 아닌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엘리야의 울음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죽기 전 한 번만 그녀를 보게 해달라 빌었던 것 같다.
신께서 죽어가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그렇게 가만히 엘리야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몬드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기엔 너무나
현실감이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뜰 때만 해도 푸른 여명이 짙었던 하늘에 해가 뜨고 있었고, 엘리야의 숨소리는 꿈이 아니라는 듯
생동감이 있다.
“……이상하군.”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그의 몸이 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기 직전 엘리야의 얼굴을 보았었어.
그는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럼 엘리야가 곁에 있는 지금이 정말 현실이란 건가.
“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죽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쓰러진 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설마 의식을 잃었던 동안 엘리야가 날 간호하느라 이런 쪽잠을 자고 있는 건가.
레이몬드가 미간을 살짝 좁힌 그때 잠들어 있던 엘리야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잠에서 깨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순간 엘리야가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든 그녀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엘리야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레이!”
* * *
“엘리야…….”
난 눈을 뜨자 보이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니. 난 황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속이 안 좋다거나, 고통이 느껴진다거나, 그런 건 없어?”
속사포로 물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는 꼭 나의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를 눈동자에 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답을 기다리지 못한 내가 먼저 말했다.
“레이, 너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린 거야. 뭐라도 말을 해 봐. 황궁의를 부를까?”
의식이 잠깐 돌아왔던 그날 이후 3 일 내내 레이몬드는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난 그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낮에는 칼라일과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밤에는 레이몬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걸려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사흘이나 지났군. 엘리, 네가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해.”
레이몬드는 내게 사과를 먼저 말했다.
사흘 만에 깨어난 지금 자신의 안위보다 날 먼저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척한 얼굴이 안쓰러우면서도 속상해 난 얼굴을 구겼다.
“됐어. 미안하단 말 들으려고 곁에 있었던 거 아니야. 이렇게 살아났으니까 됐어.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정말 널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살아난 거라고?”
레이몬드는 순간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해독약을 먹어 그는 자신이 아직 중독된 상태인 줄 아는 듯했다.
“내가 해독약을 만들었어.”
레이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설마 내가 해독약을 먹고 깨어난 거야?”
“그래, 맞아. 레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넌 내 능력을 알고 있었잖아. 해독약의 주재료인 꽃을 내가
살릴 수 있는데 왜 말하지 않은 거야?”
170 화
* * *
일주일 뒤.
“우와, 진짜 크다!”
칼라일은 높게 뻗은 나무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난 입을 쩍 벌린 칼라일이 귀여워 미소 짓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큰 나무를 바라보았다.
온 가족이 함께 찾은, 큰 나무가 있는 이곳은 바로 레이몬드의 어머니의 생가였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이곳을 떠올린 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나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라 여기며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고 난 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이었다.
하여 몸이 완전히 회복된 레이몬드와 함께 친어머니가 머물던 곳을 찾은 것이었다.
내가 떠나고 이 나무가 죽었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우려와 달리 싱그럽게 꽃을 피운 나무는 생명력이 넘쳐 보였다.
커다란 나무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던 칼라일은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정말 이게 아버지의 나무에요?”
“그래. 이건 네 친할머니께서 내 건강을 빌며 심으신 나무야. 그리고 이 나무를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엔……. 네 어머니가 나무를 살려주었었지. 허니 이 나무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나무란다.”
“와, 그럼 엄청 소중한 나무인 거네요. 아버지의 형제 같은 그런 나무잖아요!”
“형제라……. 그렇구나. 내 쌍둥이나 다름없는 나무구나. 그러니 앞으론 칼라일도 이 나무를 잘 가꾸어
주렴.”
“물론이죠! 앞으론 제가 이 나무를 보살필 거에요!”
칼라일이 씩씩하게 말하자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가끔 칼라일이 물도 주고 예쁘게 꽃을 피우라고 말도 해주면 나무가 아주 기뻐할 것 같구나.”
“아! 물 떠와서 제가 물 줄래요!”
칼라일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갑자기 물이 필요하다며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눈치 빠른 헬란이 황태자의 뒤를 따르고 난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잊었을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잊었었지. 하지만 네가 떠나고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가 홀로 서 있는 이 나무를 보았어. 네가
살려놓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리면서 그 순간 너를 향한 내 감정을 깨달았었어.”
레이몬드는 나무에 손을 살짝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이 나무를 내가 지극정성으로 돌봤어. 네가 살려놓은 이 나무가 죽어버리면 너도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거든.”
“…….”
“결국 이 나무가 내 소원을 이뤄 줬어. 지금 이렇게 네가 내 곁에 있잖아.”
나무에서 손을 떼며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장난기가 서린 미소에 피식 웃은 그때, 어디선가 물주머니를 구한 듯 칼라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칼라일, 천천히 오렴.”
“헉, 하아……. 어머니, 이 물, 줘도 될까요? 사람이 먹는 맑은 물이라고 했어요!”
칼라일은 꼭 뜻깊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난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의 대답에 칼라일은 아주 조심스럽게 나무에 물을 주었다.
물주머니의 마지막 물방울까지 쏟아낸 칼라일은 밝게 웃으며 나무에 손을 얹었다.
“나무야, 항상 건강해야 해.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
나무에게 약속한 칼라일은 갑자기 나와 레이몬드를 번갈아 보며 우리를 불렀다.
“어머니, 아버지.”
“응?”
“그래.”
칼라일의 부름에 나와 레이몬드가 답했다.
그러자 칼라일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쭉 같이 여기로 놀러와요!”
오랜만에 셋이서 함께 있으니 너무 기쁜 듯 칼라일은 행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레이몬드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더 이상 서로를 피하지도, 곤란해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서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렸던 만큼 서투르고 솔직하지 못했던, 그로 인해 슬프고 괴로웠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난 웃으며 칼라일에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 쭉 이렇게 함께 이곳에 놀러 오자꾸나.”
“이렇게 손을 잡고 말이지.”
그는 은근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을 덧붙였다. 깍지를 끼는 그를 힐끗 바라보자 레이몬드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거부할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는,
“저도, 저도 손잡을래요!”
우리의 중간으로 파고드는 칼라일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웃음이 터지고 내 웃음에 레이몬드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헤헤, 너무 좋아요.”
마지막으로 칼라일의 즐거운 미소까지.
화창하고 기분 좋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에 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에필로그
* * *
“황태자, 많이 긴장되니?”
평민 학술원의 시공식으로 가는 마차 안.
엘리야는 마차가 달릴수록 점점 얼굴이 굳어가는 칼라일의 모습에 다정하게 물었다.
초조한 듯 무릎 위 손을 그러쥐고 있던 칼라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아주 중요한 행사라고 하셨잖아요. 혹시라도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걱정돼요.”
황태자의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칼라일은 예전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어리지만 자신의 자리의 무게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부담을 가지는 모습이 한편으론 안쓰러웠지만 황제가 될 사람이니 마냥 달래 줄 순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제국민들에게 선을 뵈는 첫 자리였으니 조금은 달래주어도 되겠지.
처음인 만큼 한껏 긴장했을 테니 말이다.
엘리야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려던 순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레이몬드가 말했다.
“칼라일, 걱정 말거라. 아버지가 있는데 뭐가 긴장되니, 아버지만 믿으렴. 모든 게 다 잘 끝나도록
아버지가 도와주마.”
레이몬드는 칼라일에게 자신만 믿으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레이몬드의 다감한 말에 한껏 긴장돼 있던 칼라일이 얼굴이 풀어졌다.
칼라일은 레이몬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아버지가 최고예요.”
레이몬드는 칼라일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속삭이듯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나도 칼라일이 최고란다.”
칼라일이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은 레이몬드는 엘리야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엘리, 왜 그래?”
그런데 어쩐지 엘리야의 표정이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냐. 그냥 좀 멀미가 나서.”
엘리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마 둘 사이가 질투 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와 칼라일이 가까워질수록 이따금 엘리야가 묘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칼라일. 아버지가 최고라고 해서 어머니가 서운한 것 같구나.”
“네? 앗, 어머니, 서운하셨어요?”
칼라일이 엘리야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엘리야도 속마음을 들켜 얼굴에 부끄러움이 번졌다.
“아니, 아니야.”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칼라일은 이미 다 안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도 최고예요! 제가 얼마나 어머니를 좋아하는데요!”
왠지 어린아이가 다 큰 어른을 달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가 쿡,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을 만든 그를 노려보자 레이몬드가 큼, 목을 가다듬으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고 있다니까.
엘리야는 칼라일이 보이지 않게 레이몬드의 발을 뾰족한 구두코로 지그시 밟아줬다.
“윽.”
고통스러웠는지 레이몬드의 신음이 들렸지만 엘리야는 못 들은 척 칼라일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황태자를 많이 사랑한단다.”
“저도 사랑해요.”
고개를 숙인 레이몬드의 신음과 화목한 엘리야와 칼라일의 웃음이 상반되게 가득 찬 마차가 학술원의
부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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