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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apter 1. 누이가 도망쳤다

누이가 도망쳤다.

오밤중에, 금품을 몇 개 훔쳐서. 그것도 제 결혼식을 몇 시간 앞두고서 말이다.

여기까지는 으레 ‘야반도주한 영애’로서 몇 번 입방아에 오르다 말겠지만 문제는 누나가 결혼했어야 할 상대가
차기 황제, 그러니까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는 점이다.

현재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르네 피어스의 누이 되는 이부터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델라이드 피어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로 손꼽히는 여인이었다.

허리 아래로 굽이치는 금빛 머리칼과 길게 뻗어 눈 그늘을 아른거리게 만드는 백색의 속눈썹.

그 안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고, 붉고 통통한 입술, 조각같이 뻗은 콧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몸의 굴곡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거세게 흔들어 놓곤 했다.

좋은 집안에, 타고난 외모까지 더해지니 모두들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만큼 피어스 가문에서는 그녀의
신랑감을 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귀족은 물론 이웃나라 왕족과 황실 친인척까지, 수많은 후보자들이 물망에 올랐다.

너무 많은 이들이 몰리다 보니, 아델라이드는 몇 해가 지나도록 남편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 될 자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불타올랐다.

그 많은 쟁쟁한 후보자를 물리치고 과연 누가 될까.

결과적으로는, 모두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면서도 그들을 납득하게 할 만한 이였다.

그는 다름 아닌 아르카이츠.

헬리오스 제국의 제 2 황태자 되시는 분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빼어난 여인과, 제국에서 가장 영광된 사내의 결혼식이라니.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 될 거라며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하는 거 있지, 누이.”


르네 피어스는 무릎을 굽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누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하나뿐인 누이의 결혼식이니 조금 서운하면서도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르네는 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티끌만큼도 알지 못했다.

“아델 누나?”

“아, 응. 르네. 뭐라고?”

“으응, 별말은 안 했어. 그냥 모두들 누나의 결혼식을 기대한다고.”

타성에 젖은 듯한 누이의 모습에 르네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누이는 사실 굉장히 활발한 이였기에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의 누이라면.

“하, 르네.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아델라이드 피어스야. 세상 모든 남자는 다 내 발아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와아, 역시 누이야!”

“황태자라니. 솔직히 나 정도면 황제를 씹어 먹고도 남지, 안 그래?”

“누, 누이, 그런 발언은 좀….”

“뭐 어때서? 오호호호!”

누이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매사에 당찼으며, 과할 정도로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반응일 줄 알았건만.

“글쎄, 난 잘 모르겠네. 난 그 사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든. 초상화 한 번 본 게 다야.”

“그치만, 되게 잘생겼던데? 강인하게 생긴 걸 보면 누이를 잘 지켜 줄 거야.”

“…흐음, 글쎄.”

르네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아델라이드의 모습에, 결국 르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이. 요즘 좀 이상해. 맨 처음엔 아르카이츠 전하와 혼인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했잖아.”

“내가?”

아 물론, 기쁘다기보다는 왜 하필 제 2 황태자야. 황제여도 시원찮을 판에.

…하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하지 않았던가.

“누이의 평생소원이 그거 아니었어? 황실에 들어가는 거. 근데 어쩐지 요즘 며칠간 너무 우울해 보여서 걱정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요 며칠 르네가 알던 평소의 누이가 아니었다.

아델라이드 피어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화려한 것을 사랑하고, 주목받는 것을 그 누구보다 원하는 이 아니었던가.

사내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고,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 조종하길 좋아하는.

누군가는 아델라이드를 ‘독가시가 있는 장미’ 혹은 ‘사내들을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는 여인’, ‘제국의


사랑스러운 악녀’라 부를 만큼 그녀의 악명은 높았다.

그런 아델라이드가 맨 처음 황태자와 혼인을 한다 했을 때 보였던 반응은, 원하던 장난감을 얻어 기뻐하던 아이


같았다.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역시, 그 자리는 내 자리였지! 나 말고 누가 그를 가져!’ 쾌재를 부리다가 그 옆에서


축하한다며 박수를 쳐 주던 르네의 뺨을 잡고 뽀뽀까지 해 줬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왜 이렇게 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단 말인가.

며칠 만에 영 다른 사람이 된 양 지금은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아델 누나. 나 좀 봐 봐.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결혼하고 싶지 않아.”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달리 마음에 품은 이가 따로 있어?”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 하, 이런 우라질.”


쯧,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아델라이드의 모습에 르네는 한껏 당황하여,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얼른
재차 물었다.

“우, 우라질?”

“시발!”

“시, 시발이라니, 누나!”

“뭐 어때! X 된 걸 어쩌라고!”

“누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육성으로는 욕 한번 안 하던 누이의 입에서 상스런 말까지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았다.

그 뒤로 튀어나온 누이의 말은 르네를 경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딴 삶은 아델라이드나 원하는 거지! 난 원래 아델라이드가 아니란 말이야! 황태자랑 결혼하면 분명 사랑 없는


결혼이 될 거야. 난 투명인간처럼 무시당할 게 뻔하다고!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치만 누이, 며칠 전만 해도 누이는 황태자가 마음에 든다면서.”

“그때는 그랬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네가 뭘 알아,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복잡하고 심란할지 아냔
말이야! 아이, 시바 진짜! 아, 돌아 버리겠네 정말! 아 개빡쳐, 진짜! 왜 하필 여기냐고. 아, 왜 하필
여기냐고오!”

“누, 누이!”

“시바, 다 꺼져 진짜! 아악! 이쁜이들이 많으면 뭐 해, 존잘남이 많으면 뭣하냐고! 왜 하필이면, 아후, 속
터져!”

알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다 이내 르네에게 꺼지라며 발광을 해 대던 아델라이드였다.

그때의 성질머리만큼은 원래의 누이와 비슷하여 아델라이드가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별생각 없이 넘겼더랬다.

한데 그런 누이가, 제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야반도주를 하고 만 것이다.

아델라이드의 침실이 텅 비어 있다는 것과 집안의 패물 몇 가지가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말 한 필이


사라진 것까지 알게 된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

안 그래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기에 그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초로의 부부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마에는 물수건을 올린 채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종들은 그 옆에서 팔과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며 피가 원활히 돌도록 했고, 르네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떻게든 두 분을 위로하려 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그냥 결혼식이 아니잖니, 이건 반역이나 다름없다… 우린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태자 되시는 분과의 결혼식이었다.

그저 가문의 망신에서 끝날 게 아니라 어쩌면 가문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

“우린 이제 목이 잘려 죽을 거다! 아이고!”

르네는 곧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져 조용히 제 목을 만지작댔다.

“일단 시종들을 풀어 누이를 찾도록 했어요.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랑 아버지 둘 다
기운 차리세요. 어떻게든 결혼식을 늦춰야죠. 아직 시간은 남아 있잖아요.”

“채 몇 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울부짖던 공작의 손을 공작 부인이 조용히 잡았다.

“여보. 르네 말대로 아직 시간은 남아 있잖아요.”

“부인,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신부 자체가 없는데 시간을 벌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공작 부인은 조용히 르네를 바라봤다.

그러자 공작 역시 부인과 르네를 몇 번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지그시 르네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이 마치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바라보는 이들 같았다.

르네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섰으며, 몸에 오한이 들었다.

“왜, 왜들 그러세요?”

“방법이 아주 없진 않구나.”

“우리가 살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야.”

#2.
현재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르네 피어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올해로써 20 살이 되는 그는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로, 황제의 충신인 피어스 공작과 온화한 피어스 부인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 이였다.

조금의 참고사항이라 함은, 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제국의 영식들에 비해 조금 성장이 더디다는 거였다.

어렸을 적 잔병치레가 잦아서 그런 걸까.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목울대는 잘 보이지도 않는 편이었으며, 그의 턱은 수염 한 터럭 없이 희고


매끈했다.

체모 자체가 옅어 아델라이드는 ‘넌 겨드랑이나 다리 제모 같은 거 안 해서 좋겠다. 어째 사내가 나보다 털이 더


없어? 부러워, 아이, 짜증 나. 제모하기 귀찮아!’라며 종종 성질을 내곤 했다.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골격 자체가 얇았다.

그렇다고 제국에서 규정하는 남성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영애들은 호리호리한 르네 피어스를 꽃 같은 사내라 칭했다.

비단 꽃 같은 건 그의 분위기나 체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르네는 아름답고, 예쁘단 말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아델라이드를 똑 닮아 백금발의 머리칼과 백색 속눈썹은 꼭 눈송이가 소복하게 올라온 모양새였다.

흰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녹안은 생기를 주었고, 흰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은 꼭 체리같이 도톰했다.

여자로 태어났다면 아델라이드만큼의,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더 아름다웠을 거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아델라이드 역시 그에 대해선 인정하는 바였다.

“어쩜, 아델라이드와 똑 닮았어!”

“아델이 키가 큰 편이라 다행이지, 멀리서 보면 구분도 못 할 거다.”

어렸을 적 르네는 누이의 인형이 되어 종종 여장을 한 채로 돌아다녔다. 아델라이드의 악취미였다.

그래서 르네의 오랜 절친 중에는 어릴 적 르네를 여자로 오해하여 흠모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르네를 흠모하는 이들은 성별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았다.

제국에선 동성을 사랑하는 일이 흔한 일이었고,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르네에게 구혼서를 보내는
영식도 많았다.

물론, 후사를 잇기 위해선 무조건 여인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하지만 르네는 성인식을 치른 이후에도 좀체 결혼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 역시 르네의 혼인보다는 아델라이드의 혼인에 더 열을 올렸다.

태생부터 몸이 많이 허약했던 르네는 외향적인 아델라이드와는 정반대로 극도로 내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라 해 봤자 후작가의 장남 알빈뿐이랄까.

그마저도 그들이 찾아오지 않는 한은 집에서 뒹굴대며 책을 읽거나 정원에 나가 산책하는 걸 즐기는 게 다인


르네였다.

해서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소문을 몰고 다니는 데 반해 르네는 사교계에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워낙에 잔병치레가 잦은 너니까. 둘러대는 건 어렵지 않단다, 르네.”

“아델라이드를 찾을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렴.”

공작 부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베일까지 얹은 르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르네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르네! 부디, 누이 연기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알았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보렴, 가발까지 쓰니 정말 아델이랑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야. 응?”

공작 부부는 어떻게든 르네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거울 속 신부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을 본 르네가 아주 새하얗게 질려 말했다.

“그치만요, 첫날밤이 되면 분명 들킬 거예요. 황태자를 농락했다며 참수는 물론 무덤까지 파헤쳐질 수 있을


정도라고요…!”

걸리면 사망이다.

무조건 처형에, 시체는 들짐승 밥이 될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이인 척 황태자와 결혼을 하라니.

이 무슨 큰일 날 소리인가.

미친 짓이 분명하다!

누이가 도망친 것에 큰 충격을 받으신 부모님이 돌아 버리신 게 분명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말거라, 르네.”

피어스 공작은 르네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내게 다 계획이 있단다, 르네.


아버지의 자신만만한 말에 르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아버지는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아르카이츠 전하는 이성에게는 관심이 없으시단다. 오로지 동성에게만. 응, 알겠니?”

…그게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아버지?

르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예…?”

파랗게 질리다 못해 난생처음으로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르네는 입을 꾹 다물어 겨우 욕을 삼키곤 되물었다.

“도, 동성이라뇨? 그게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제국에서는 동성연애에 대해 꽤나 관대한 편이지만, 적어도 자신은 해당 사항이 아니라 생각했다.

한데 황태자가 동성애라니?

애초에 아버지는 알고 계셨음에도 누이와의 혼인을 추진했던 건가?

그래서 누이는 그런 사랑 없는 결혼이니, 투명인간 신세라니 등의 말을 했던 건가?

여러 생각들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피어스 공작은 개의치 않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르네 네가 아델의 행세만 제대로 한다면 이보다 더 완벽하게 속여 넘길 수는 없을 거다!”

황태자는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

황제가 원했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결혼이었다.

“그치만, 후사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합방을 할 수도 있잖아요!”

“배탈이 났다거나, 갑자기 쓰러졌다거나, 이유는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지.”

피어스 공작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말했다.

이 무슨 콩가루 결혼이란 말인가.

르네는 할 말이 사라졌다. 누이가 왜 도망쳤는지 알 것도 같아졌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화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누이를 황태자와 결혼시키려 한 거예요? 대체 왜―.”

“…황제께서 그리 원하셨다. 어차피 아델라이드도 권력에 더 흥미를 보였지 않느냐. 지금이야 대관절 무슨 이유로
도망을 친 건지 모르겠다만. 자 자, 시간이 다 되었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은 우리부터
살아야지.”

창밖으로 황궁의 마차가 도착한 것이 보였다.

피어스 공작은 르네의 등을 떠밀듯 두드리며 제 아들의 말을 잘라 먹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으나 르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방문은 열렸고, 그 앞으로는 수많은 시종들이 르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그에게 침묵을 호소하는 눈빛이었다.

이들의 목숨까지 모두 르네의 손에 달린 거였다.

“아, 그리고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말거라. 네가 목소리가 굵지 않아 다행이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니. 자,


우리 아들 힘내거라! 아차차, 이제부턴 아델라이드라 불러야겠지.”

저 아래층에서 황실의 칙령을 받으라는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앞에 황실 근위대가 황금빛 갑옷을 입은 채로 열을 지어 서 있었다.

“황태자비 될 자, 아델라이드 피어스는 앞으로 나와 황제의 칙령을 받으시오!”

보좌관의 말에 르네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 채로 앞으로 나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리자 하얗고 고운 그의 손 위에 자줏빛 벨벳 방석이 올려졌다.

보좌관은 황제의 칙령을 한 번 읊은 뒤 예법에 따라 방석 위에 칙령서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황제가 내린 칙령을 받든 르네는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과 시녀들이 마차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호위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황금빛 마차 안에 올라타던 르네가 뒤를 돌았다.

부모님과 유모, 집사, 시종들이 모두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르네는 눈을 꼭 감았다.

누이의 구두를 신어 옥죄는 발과 있는 대로 코르셋을 조여 숨쉬기조차 편치 않은 제 상황보다, 지금 누이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누이가 돌아오면 물어볼 것이 참 많았다.

그런 알 수 없는 말들은 다 무엇이며.

누이는 이렇게 될 걸 알고 도망친 건지.

한편으로는 누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제아무리 악명 높은 아델라이드라 할지라도, 르네에게만큼은 다정한 누이였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남매지간이었으니까.

그 모든 혼란을 뒤로하고 르네는 일단 목숨부터 연명하기로 다짐했다.

#3.

결혼식은 교황청에서 이뤄졌다.

세기의 결혼식인 만큼 수많은 귀족들과 이웃 왕족들이 참석했다.

황태자비가 탄 황금 마차가 교황청 앞에 도착하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향했다.

달칵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베일을 쓴 황태자비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장내가 웅성댔다. 베일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가 돋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수줍게 내리깐 눈은 겸손했고, 황제의 칙령을 들고 오는 몸가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히 차기 황후의 재목이 될 여인이라, 모두들 입을 모아 칭찬했다.

역시 아델라이드야.

역시 황태자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이지.

* * *

르네는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에 차마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하객석에는 그의 오랜 친우들도 참석해 있었다.

혹여나 그들에게 들키진 않을까, 눈을 마주치면 날 알아보지 않을까, 르네는 최대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걸었다.

‘이런 미친! 우라질!’

그새 아델라이드에게 배운 상스런 말까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내향적이고, 사람에 큰 관심이 없어 그 성질을 들키지 않은 것뿐.

사실 르네는 아델라이드도 인정한 성질머리의 소유자였다.

‘진짜 돌아 버리겠네.’

품위를 잃지 않고자 최대한 욕설은 자제하는 편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붉은 카펫의 버진 로드를 걷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실시간으로 인생이 망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관중들을 지나 단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단상 위 교황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같이 거대한 인영은 또각, 또각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틀었다.

르네는 저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몇 달 전 피어스 가문으로 온 거대한 초상화 하나가 떠올랐다.

헬리오스 제국의 제 2 황태자 아르카이츠.

소수 부족인 아르콘족 추장의 딸 페트라와 황제 사이에서 난 혼혈이라는 것 말고는 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는다.

그저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는 전쟁광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무색하게 초상화 속의 사내는 매우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르콘 부족 특유의 구릿빛 피부 대신 제국민의 흰 피부를 가진 그는 혼혈다운 이국적인 외모를 가져 매우


신비로워 보였다.

칠흑처럼 검은 남색의 머리칼, 황금 사자를 닮아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 곡선과 직선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강렬한 이목구비까지.

“뭐야, 통 얼굴을 안 드러내길래 추남인 줄 알았더니, 이리 미형이란 말이야? 세상에, 그동안 숨긴 얼굴이
아깝군. 혼혈이라더니 정말 이국적으로 생겼네. 르네! 이리 와 봐. 네 매형 될 사내야. 어때. 꽤 잘생겼지?
초상화대로만 생긴 거면 참 행복할 텐데! 아하하하!”

왜 그때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르네는 그때의 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누이. 그 초상화 다 거짓부렁이야. 젠장….’

아, 물론 귀족들이 초상화에 약간의 보정을 곁들이는 건 굉장히 보편적인 행위였다.


아델라이드 역시 초상화에서는 성질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순하게 그려졌고, 르네 역시 초상화에서는
건장한 청년처럼 그려졌다.

한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말이지. 이건 아니지.

그 초상화랑 전혀 다른 사람이잖아!

르네가 마주한 황금색 눈동자는 초상화 속의 금안보다 훨씬 더 요요히 빛났다.

어쩌면 황실 화가는 장님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초상화 속의 사내는 강함과 유함이 공존하는, 청년의 모습을 한 사내였는데.

실제로 마주한 이는 바위 그 자체였다.

너무 크고, 너무 우락부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상화와 가장 다른 것은….

‘저게 어딜 봐서 결혼할 아내를 맞이하는 자의 눈이냐고…!’

르네는 절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의 눈빛을 피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게 들킬까 불안에 떠는 어린아이인 양 쿵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저 눈빛은 아무리 봐도 호감을 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호기심의 눈빛도 아닌, 그야말로 맹수의 눈빛.

잡히면 무조건 먹힐 게 분명한 허기진 눈빛.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질 눈빛은 아니었다.

르네는 본능적으로 본인이 제 발로 맹수의 굴에 들어온 것을 직감했다.

그는 초식동물 중의 초식동물이었기에 적어도 맹수를 알아보는 감만은 탁월했다.

본능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저에게 있어 위협이 될 만한 이는 기가 막히게 아는 르네였다.

‘나 못 해. 나 못 할 거 같아. 누이, 진짜 미안한데… 제발 돌아와 주면 안 되는 거야…? 저 눈빛에, 저


덩치를 내가 무슨 수로 속여!’

속이기는 개뿔이 속여지겠나.

분명 들켰을 거다.

지금 당장 들키지 않아도, 저 무시무시한 이의 앞에 무방비하게 내던져진다면 그냥 자진해서 시인할지도 몰랐다.

이 순간만큼은 누이고, 가문의 생명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대로 베일을 벗어 던진 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황태자가 천천히 손을 뻗어 르네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위로 들어 올렸다.

르네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저를 빤히 쳐다보는 아르카이츠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왜 이리 잔뜩 겁을 먹었습니까, 아델라이드.”

르네의 떨림을 감지한 듯, 그가 느른하게 웃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마저 완벽한 포식자의 음성이었다.

아주 낮게 깔리는 저음의 목소리는 마치 짐승이 그르렁대는 듯했다.

르네는 애써 태연한 척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한번 하찮다는 듯 쳐다봤다.

이내 교황의 지시에 따라 부부 서약을 나눴다. 초를 나눠 들고 마음에도 없는 선서를 한 뒤 서약을 맺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성배를 들곤 기도문을 읊는 도중, 아르카이츠가 또다시 르네에게 속삭였다.

“초상화는 영 별로라 참 걱정 많이 했는데, 실물로 보니 꽤나 취향입니다.”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평소 누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났던 르네에게 아델라이드를 모욕하는 말은 저를 모욕하는 말과도 같았다.

저게 감히 우리 누나한테!

괜한 반항심이 들어 눈을 치켜뜨고 그를 쳐다보자, 아르카이츠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 눈빛 마음에 드네, 확 꺾어 버리고 싶게.”

적어도 억지로 합방하는 일은 없겠는데? 기대가 되는군. 그 눈빛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뀌게 될 때가.

능글맞다 못해 저질스럽기까지 한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젠장, X 됐다…!’

* * *

르네는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제 앞 화장대에는 조금 전 피어스 공작이 시종을 시켜 몰래 보낸 자그마한 약병이 놓여 있었다.


혹시 몰라 수면제를 줄 테니, 합방이니 뭐니 그런 일이 생기면 알아서 어떻게든 황태자를 잠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남색을 하니 첫날밤이고 합방이고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아버지!

르네는 당장이라도 울고 싶어져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눈시울이 뜨겁다. 정말 울고 싶었다.

“후….”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몸의 곡선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슈미즈 차림은 조금만 몸을 더듬으면 여인이 아닌 사내의 몸이라는 게 들킬 게
분명했다.

가발을 뒤집어쓴 긴 머리칼은 무겁고 더웠으며, 아까 전 본 그 우람한 팔뚝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기라도 한다면
덜렁 들려 올라갈 게 뻔했다.

르네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방의 정중앙,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캐노피 침상은 다양한 체위로 엉키기 편하도록 넓은 크기를 자랑했다.

다른 한쪽엔 술과 음식이 놓인 기다란 테이블이.

다른 한쪽엔 제가 앉아 있는 화려한 화장대가.

이 넓은 방에 가구라고는 이 세 개밖에 없었다.

후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있는 방 안.

르네는 후,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테이블로 갔다.

약병 뚜껑을 열어 준비된 두 개의 주석 잔 중 하나에 조르륵 흘려보냈다.

화장대 서랍 안에 약병을 넣곤 머리칼을 빗질하는 척 매무새를 다듬고 있을 때쯤, 문이 벌컥 열렸다.

#4.

상의는 탈의한 채 얇은 바지와 긴 남청색의 로브만 걸친 아르카이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르네는 나직하게 욕을 읊조렸다.

젠장, 망했다. 망했어. 이제 진짜 들킬 일만 남았어….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나 보군. 황태자비는 부끄러움이 많아 황실 시녀들에게 제 몸 보여 주는 게 부끄러워
옷도 혼자 갈아입고, 합방 치장도 혼자 했다지. 소문으로 익히 들어 온 아델라이드 피어스는 부끄러움 따윈 없을
줄 알았는데.”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괜히 긴 가발 끄트머리를 만지작대며 시선을 어디다 둘 줄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눈을 둘 곳이 없어서야, 이 망할 황태자야.

도대체 왜 옷을 안 입고 다니는 거야.

왜 옷을 입다 마냔 말이야!

게다가 왜 그렇게 우락부락하냔 말이야!

르네는 당장이라도 울고 싶어졌다.

“남자 몸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야 누이는 그렇겠다만, 르네는 제 몸 외의 다른 사내 몸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르네는 극내향인이었다. 아무리 소꿉친구들이 있다 한들, 그는 친구들과 등목 한 번 해 본 적 없는 샌님이었다.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싫어하는 집돌이 중의 집돌이기에 햇볕에 타기는커녕, 여자보다도 희고 고왔다.

모든 여자들의 부러움을 사는 아델라이드마저도 어쩜 사내 피부가 우유처럼 희고 곱냐며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런 르네에게 있어 아르카이츠는 살면서 처음 보는 인간 군상이었다.

두꺼운 삼각근부터 두 갈래로 쩍 벌어진 거대한 대흉근, 그 아래 자리 잡은 여러 갈래 난 단단한 복근은 조금


보기 거북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도저히 같은 성별의 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르네와 아르카이츠의 몸은 확연히 달랐다.

르네는 대답 대신 홱 고개를 돌렸다.

웬만해선 말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기도 했고, 딱히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모습을 그저 내외하는 것쯤으로 치부한 듯, 아르카이츠가 픽 웃으며 성큼성큼 르네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이 르네의 턱을 움켜잡았다.

억지로 들어 올려진 가녀린 턱이 아주 잠깐 떨렸다.

절 내려다보는 아르카이츠의 눈빛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르네는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또 어쩐지 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건 그저 자신이 남자이고, 누이 행세를 하는 걸 들켰다가 처형당할까 두려워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 근원이 뭔지 몰랐던 르네는 그저 생존에 대한 욕망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순식간에 몸이 덜렁 들려 그대로 침상 위에 던져졌다.

악 소리를 내기도 전 제 가랑이 사이를 무릎으로 누르며 들어오려는 아르카이츠의 저돌적인 행동에 르네가
기겁했다.

이미 슈미즈 치마는 무릎까지 올라가 흰 다리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며, 아르카이츠의 한 손은 르네의 발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쇄골 부근의 단추를 뜯듯 잡아당기고 있었다.

“자, 잠깐!”

투둑, 툭, 소리와 함께 콩알 단추가 뜯어졌다. 덕분에 움푹 파인 쇄골 부근이 훤히 드러났다.

그대로 목덜미에 입을 대는 아르카이츠였다.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

조금만 더 아래로 잡아당겼다간 가슴팍이 그대로 드러날 거다.

이러다간 진짜 들키고 만다.

진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넌 정말 처세술이 없어도 너무 없어.”

융통성과 처세술에 약한 르네에게 누이가 항상 말하던 소리가 언뜻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악착같은 생명 부지 염원은 없던 처세술도 만들게 했다.

제 목 부근을 지분대던 아르카이츠의 머리통을 잡은 르네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우리 이렇게 급할 필요는 없잖아요. 밤은 길고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날이 있는데. 재미 본다더니 의무부터


이행하려는 착실한 황태자였습니까?”

“뭐?”

“저, 적어도 당신만 흥분할 게 아니라 나도 같이 흥분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르네의 인생 중 이렇게나 메소드 연기를 펼칠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목소리가 가는 것이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르네였는데, 지금은 제 목소리가 미성인 것이 그렇게나 감사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제 누이처럼 교태 부리는 말투를 사용했다.

제 말투며 목소리며 영 적응할 수가 없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다행히, 르네의 말이 통했는지 아니면 교태가 통한 건지, 아르카이츠는 잠시 몸을 바로 세웠다.

“흐음. 그래서 부인은 내가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아래부터 빨아 줘?”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양 발목을 잡아 다리를 벌리려 했다.

르네는 얼른 치맛자락을 다리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버둥대며 그를 밀어냈다.

필터링이라고는 없는 그의 말에 르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적어도 그 말이 뭘 의미하는 건지는 아는 나이였다.

물론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었다.

경험이 전무한 르네였기에 그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내의 벗은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한계점에


다다랐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가 어디까지나 내숭 떠는 것쯤으로 여기는 듯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런 건 됐고요, 대화부터 천천히. 급한 건 없다니까요. 분위기는 무작정 붙어먹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요!”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온 르네가 얼른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주석잔을 가져왔다.

양 뺨은 벌개져선 애써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잔을 건넸다.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바라보며 오른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위로 올렸다.

“원래 그렇게 목소리가 허스키한가?”

르네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침이 꿀떡 넘어갔다.

아, 너무 말이 많았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고 잔을 쥔 손에 땀이 물씬 배어 나왔다.

그러나 표정은 누구보다 도도했다.

“불만인가요?”

“아니. 섹시하네. 마음에 들고. 딱 듣기 좋습니다.”

앵앵대는 목소리는 질색이거든.

아르카이츠가 씩 웃으며 말하자 르네 역시 따라 미소 지으며 그에게 잔을 건넸다.


르네가 건넨 잔을 대번에 들이켠 아르카이츠가 다시 르네의 팔을 잡아당기곤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야! …가 아니고, 저기요…!”

저도 모르게 숨겨 놨던 성질머리가 불쑥 고개를 들고 말았다.

뒤늦게 입술을 한번 깨물곤 ‘저기요!’라고 고쳐 말하는 르네를 보며 아르카이츠가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난 분위기 말고 무작정 붙어먹고 싶어서 말이야.”

아니 진짜. 동성애자라며,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다며!

르네는 이제 믿을 구석이라곤 빨리 약효가 들어 제 위에 올라탄 이 무도한 사내가 곯아떨어지는 것뿐이었다.

제발, 제발 빨리 좀 쳐 자!

“너 진짜 희다. 자국 나면 볼만하겠는데.”

제국의 황태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는 예법이나 매너 같은 게 없는 인간이었다.

문득 르네는 제 2 황태자인 아르카이츠가 제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떠올렸다.

황태자라 그 누구도 그를 우습게 여기진 않으나, 그가 혼혈인 것, 즉 모친 쪽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지.

지금은 사라진 소수 민족인 아르콘족.

전사들의 부족이라는 원시 부족에서 온 추장의 딸. 두 번째 황후 페트라.

모두들 둘째 황태자는 첫째 황태자와는 달리 야만적인 면이 있다고들 했는데, 그 야만적인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르네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누이가 있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큰일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도망친 누이가 현명한 선택이었고, 지금 자신이 누이 대신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 그건 또 아닌가? 지금 아주 죽을 맛인 걸 보면.

그래. 애초에 사실대로 말하고 처벌을 받는 편이….

아악, 그럼 처형이나 몰락 말고 뭐가 더 있냔 말이야!

뭘 선택하든 하나같이 최악의 수였기에 어쩔 수 없이 르네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아르카이츠를 잠재워 보자


다짐했다.

유감스럽게도 르네의 다짐은 그의 가느다란 팔다리만큼 아주 맥없이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르네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후숙된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는 어떻게든 아르카이츠를 저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저지당하는 것은 본인이었다.


“뭐, 뭐 하는!”

아르카이츠는 아까 전 자신이 빨아 옅게 난 자국을 엄지로 쓸어 올리더니, 다시 한번 그 자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손이 매우 빠른 사내라는 것쯤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빨리 좀 기절해, 제발 빨리!

#5.

르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을까.

아르카이츠의 거대한 손이 르네의 허벅다리에 자국을 남기려던 즈음.

가녀린 그의 몸 위로 거대한 바위가 스러졌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거대한 몸집에 르네는 억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조금 시간이 지나도 잠잠한 아르카이츠를 보니 약효가 꽤 있는 것 같았다.

르네는 안도의 숨을 내쉬곤 낑낑대며 아르카이츠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는 맞은편 화장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했다.

슈미즈는 너덜너덜해졌고, 가발은 이리저리 헝클어진 걸로도 모자라 반쯤 머리통에서 벗겨져 있었다.

“진짜 못 해 먹겠네.”

누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빨리 잡혀서 돌아왔으면 했다.

이렇게는 제 명에 못 살 것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쳐낸 르네가 잠시 널브러진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이내 그를 발로 한번 슬쩍 밀고선 영차, 다시 그를 뒤집었다.

“아, 뭔가 흔적을 남겨 놔야 하는데….”

* * *

아르카이츠는 몽롱한 정신 사이로 옷을 갈아입는 황태자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지, 아니면 경계심이 많은 건지. 시녀들은 모두 물린 채 저 혼자 옷을 갈아입는 귀족의
모습은 꽤 이질적이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경계심이 많아야 하겠지. 제가 숨기는 게 있는데.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낸 아르카이츠는 슬그머니 팔을 괸 채로 자세를 고쳐 조금 더 노골적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너덜너덜한 슈미즈를 벗어 낸 황태자비의 몸에는 이곳저곳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건 어젯밤 아르카이츠가 그의 목덜미에 지분댄 것도, 그의 허벅다리를 거세게 움켜잡은 것도 모두 포함해서였다.

여전히 몽롱한 것이 그저 잠에 취한 건지, 혹은 원활한 원자 회임을 위해 최음제를 먹은 것 때문인지, 또 혹은


어젯밤 황태자비가 맹랑하게 몰래 먹인 수면제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르카이츠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더 감았다 떴다.

속옷까지 모두 탈의한 황태자비의 뒷모습이 희다.

저와는 다르게 선이 유려하고, 부드럽다.

어젯밤 만진 살결은 또 어찌나 부드럽던지. 마치 푸딩을 만지는 것 같았다.

희고 매끈하고 말랑한 것들.

예전부터 그런 것들을 만지면 그대로 뭉개고 싶어 했던 아르카이츠였다.

한데, 숨기는 게 있는 인간치고는 너무 둔한 것 아닌가.

여전히 제가 쳐다보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열심히 옷을 갈아입고 있는 르네였다.

심심했던지, 골려 주고자 슬쩍 헛기침 소리를 내자 르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가 얼른 옷가지로 제 앞면을 가린 채 슬그머니 뒤돌아봤다.

“이, 일어났어요?”

“우리 어젯밤에 한 거 맞습니까?”

“술이 좀 취해서 그런가. 기억도 안 나나 보네요.”

도도한 표정으로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아르카이츠는 다시 한번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르네는 그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것을 보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기억 안 나는데. 지금 그대의 반응을 보면 안 한 것 같은데?”

“하!”
“근데 이걸 보면 또, 그렇게 격하게 보냈나 싶기도 하고.”

아르카이츠는 시트를 잡아당겼다. 그 위에는 핏자국 몇 개와 함께 하얗게 말라붙은 자국들이 나 있었다.

르네는 어쩔 줄 모르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려댔고,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는 듯 하,


실소를 했다.

그냥 물렁하고 순한 푸딩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맹랑한 면이 있다.

“이건 누가 낸 자국입니까.”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든 아르카이츠가, 흰 자국들이 나 있는 부분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는지….”

“내 건가? 아니면, 부인 거?”

“무, 뭐라는 건지.”

이번엔 핏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르네는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건 부인 겁니까? 흐음, 너무 격했나? 기억에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네.”

“참 너무하시네요. 첫날밤을 기억 못 한다며 상대한테 어젯밤 일을 묻다니요.”

아르카이츠가 풉,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넓은 방 안에 메아리가 쳐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장난입니다, 장난. 근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지, 최음제 때문인지. 한데 꼭
수면제라도 먹은 양 푹 잠만 잔 기분이 들어서요.”

내가 부인을 쓸쓸하게 놔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걸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르네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러자 르네의 어깨가 크게 움찔댔다.

“오, 옷 입고 있는데요.”

“뭐 어떻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부인은 부끄러움이 많아 시녀들도 물리는 것 같은데. 남편인 내가


도와줘야지 어쩌겠어.”

르네의 얼굴이 또 한 번 창백해졌다.

얘는 이런 표정이 잘 어울린다니까.

묘하게 사람을 괴롭히고 싶게 만드는 이였다.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허리에 양손을 턱, 올리자 르네가 히익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들킬 게 분명해! 난 이제 죽는다! 하는 얼굴로 달달 떠는 모습을 보면, 대체 무슨 배짱으로 누이 행세를 대신한


건지 저 머릿속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정말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정말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르카이츠는 일단 르네에게 장단 맞춰 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그편이 더 재미있지 않겠나.

“아뇨. 저 혼자 입을게요.”

아르카이츠가 한 발짝 다가오면 르네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나며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 봤자 아르카이츠 손바닥 안이었다.

“여기 자국이 났네.”

일부러 르네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무슨 목이 이렇게 가는지. 같은 사내 맞나?

한 손에 쥐고 이대로 힘을 주면 그대로 똑, 하고 쉽게 부러질 것 같았다.

손이 닿자 마치 물감이라도 번지듯 아르카이츠가 잡은 곳부터 르네의 피부가 붉어졌다.

귓불까지 빨개지는 걸 보면 아파서 벌게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그게 머, 뭐, 뭔.”

이제는 아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당황한 르네였다.

르네는 제 허벅다리를 꾹 누르는 묵직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쳐다봤다가, 매우 당황하고 심지어는 겁에
질린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아니, 어제 잘만 해 놓고 왜 그리 놀라십니까.”

아르카이츠는 꾹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르네를 보던 그는 이 이상 놀렸다간 정말 울음을 터트리며 자진 시인할 거 같아 그만하기로


했다.

그는 르네의 허리를 쓰다듬던 손을 뗀 뒤 싱긋 웃으며 그 옆에 놓인 로브 자락을 가져갔다.

알몸에 로브만 걸친 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사과 하나를 들곤 그대로 문을 열고 방을 나가 버렸다.

방에 혼자 남겨진 르네는 발발 떨며 얼이 빠진 채로 멀어지는 아르카이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훌쩍대며


얼른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뭐, 뭐 저딴 걸 달고 있어….”

어젯밤 혼자 고군분투하며 이런저런 흔적을 만들던 르네였다. 그간에 쌓인 서러움이 닭똥 같은 눈물로 뚝뚝


떨어졌다.

대체 아르카이츠 황태자는 어떤 또라이인 건가.

야만적이고 저질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자.

“누이, 미안하지만 빨리 돌아와…. 나 얼른 집에 가고 싶어….”

르네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황궁은 마치 파리지옥 같다는 걸, 르네는 미처 알지 못했다.

* * *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아르카이츠는 예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매일 아침, 일정 시각이 되면 황태자들은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올려야 했다.

황제의 거처가 있는 중앙의 본궁으로 가는 길, 그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제 1 황태자 파비안과 맞닥뜨렸다.

“초야를 치른 새신랑이 신부는 어디에 두고 혼자 오는 거냐, 아르카!”

해맑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파비안의 모습에 아르카이츠 역시 웃으며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 아델라이드 피어스를 아내로 맞이한 소감은 어떠하냐.”

“소감이랄 게 있나.”

“이런 무심한 사내가 또 있을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황태자비를 대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하다간 예쁨받지 못할 거야.

아르카이츠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파비안이 놀려 댔다.

#6.

첫 번째 황후에게서 태어난 제국의 제 1 황태자 파비안 헬리오스.


아르카이츠와는 연년생으로, 둘은 깍듯이 예를 차리기보다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다.

배다른 형제이기는 하나, 또 제국의 후계권을 놓고 싸우는 황태자이기는 하나.

아르카이츠와 파비안의 사이는 보통의 형제와 같았다.

그건 아마 파비안이 권위적이지 않고 유독 낙천적인 성격이고, 아르카이츠가 유독 무심한 성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제국의 후계권이 확실하게 정해져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도 있을 거다.

황제는 제국 헬리오스를 제 두 아들에게 정확히 반으로 갈라 주기로 했다.

그 결정에 이변은 없을 거라 대못을 박아 뒀다.

대신이나 귀족들도 황제의 선언에 수긍하는 듯했다.

두 황태자 모두 기량이 뛰어났고, 또 두 황태자 모두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기에.

후계권을 둘러싸고 피 터지게 싸워 봤자 저들에게 득 될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지금은 평화를 추구할 때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형도 빨리 황태자비를 들여야지.”

“하하, 너는 결혼했다 이거지? 그래서 어때. 네 오메가를 만나는 느낌이. 정말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나?”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헬리오스 제국의 알파 황족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감정이었다.

헬리오스의 황족인 알파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딱 하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오메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첫눈에 보자마자 각인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베타들의 언어로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이론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알지만, 알파들은 제 친부모에게조차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기본적인 예의, 도리, 의리. 그 정도뿐.

하여 각인하지 못한 알파들은 후손을 본다 해도 부성애라든지 모성애라든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알파들은 ‘각인한’ 상대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매우 궁금해했다.

“직접 느끼지 않는 이상, 지금은 말로 해도 못 알아들을걸.”

“허, 운명의 오메가를 만나게 되면 정말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가 있나 보군? 어째 한층 더 건방진 느낌이구나,


아르카이츠!”

파비안이 장난스레 아르카이츠의 머리를 제 옆구리에 끼고 죄었다.


서로 투덕대며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형제는 얼른 몸을 바로 한 뒤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되었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요 몇 년간 황제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제는 거동까지 불편해져 아르카이츠의 결혼식 때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으나 부드럽고 선한 인상만은 여전했다.

“아르카이츠. 결혼식을 무사히 올렸다지.”

“예, 아버지.”

“한데 황태자비는 어쩌고 혼자 왔느냐?”

“같이 찾아뵐까 했는데, 너무 긴장한 거 같아서요. 황궁 생활에 익숙해지면 곧 데려오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황제는 껄껄 웃으며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리하거라. 내 손주까지는 보고 가야 할 텐데 말이야.”

“저한테만 이러시지 말고, 형한테도 뭐라 하세요, 아버지.”

아르카이츠의 말에 옆에 있던 파비안이 괜히 머리채 잡힌 표정을 하며 아르카이츠를 툭 쳤다.

“파비안도 빨리 오메가를 찾아야지. 물론 맨 처음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거다. 아르카이츠, 너도 맨 처음엔


아델라이드 황태자비와의 결혼을 꺼려했었지 않느냐.”

“…예, 그렇죠. 뭐.”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헬리오스의 피를 타고난 이상 받아들여야 할 숙명인 것을.”

제국 헬리오스에는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

황족이나 황족의 가장 가까운 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제국의 비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던 예언. 혹은 저주.

[헬리오스의 피가 흐르는 자, 오메가가 아니면 대를 이을 수 없다.]

세상에는 아주 극소수의 알파와 더 극소수의 오메가가 존재했다.

이들은 제국의 황족들로, 황제가 되는 이들은 언제나 알파였다.

알파로 태어나는 이는 완벽한 포식자로서 성장한다.

완벽한 최상위 계층으로서 헬리오스를 가장 번영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자신의 짝인 오메가를 찾지 못하면 대를
이을 수 없었다.
“운명의 짝을 만나는 건 노력한다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알파와 오메가뿐이어서는 안 되지.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도, 서로에게 각인을 하지 못하면 그건 짝이 아니야.”

서로에게 각인할 운명의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

평생의 유일한 짝, 영혼의 동반자나 다름없으니까.

왕년을 떠올리는 듯 감상에 젖은 황제의 눈빛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르카이츠가 피식 웃었다.

입 밖으로는 절대 꺼내지 않을 말이지만, 이 기막힌 상황에 대해 자문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제 신부는 아직 본인이 오메가란 자각이 없던데요?

르네 피어스는 그 나이를 먹도록 아직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Chapter 2. 사내인 오메가

극소수로 태어나는 알파 황족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오메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알파의 출생과 오메가의 출생 비율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알파는 계속해서 태어나는데, 그들과 짝을 이룰 오메가들이 정말 극히 드물게 태어나거나, 혹은 그 대에서는 아예


태어나지 않기도 했다.

그 결과, 오메가의 수가 적어 자신의 짝을 일평생 찾지 못하는 알파가 생겨났다.

그런 알파들은 베타와 혼인하여 대를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메가에게서 태어난 알파와는 달리 베타에게서 태어난 알파들은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확실히 덜 뛰어나고, 확실히 덜 영특했다.

그러다 보니 황실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합을 가장 중요시 여겼고, 또 그러다 보니 황실에서는 알파들에게


자신들의 오메가를 찾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다.

아르카이츠가 자신의 오메가를 발견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아 꽤 억울하고, 또 기가 막히며,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메가로서의 자각도 없는 자가 제 알파를 알아보기나 할까.

한눈에 보는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르네는 자신의 오메가다.


르네만이 자신의 씨를 품을 수 있고, 르네만이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황실에서는 그걸 ‘각인’이라고 불렀다.

워낙에 흔한 일이 아니었고, 또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의 짝임을 알아보는 것은 제 3 자의 개입이나 입증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거였다.

아르카이츠는 르네에게 각인을 한 상태인데, 정작 각인된 당사자 르네 피어스는 본인이 오메가라는 자각조차
없다는 것.

저와 결혼한 신부가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닌 르네 피어스라는 건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물론 아직 저를 제외한 모든 황궁의 사람들은 아르카이츠의 오메가가 아델라이드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르카이츠는 왜 피어스 공작이 저를 비롯해 황제를 속이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자신이 르네를 눈감아 주는 것과 같은 이유일 거다.

어린 아르카이츠는 어느 날 심하게 앓게 되었다.

헬리오스의 피를 물려받은 알파들은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심한 열병을 앓는다 했다.

그날 열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이 아파 오는 와중에도 아르카이츠는 고통보다는 기쁨이 먼저였다.

“아르카이츠, 열이 펄펄 끓는구나. 두려울 것 없다. 알파들이 겪는 일이야. 이건 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자, 아르카이츠. 말해 보렴. 네 운명의 상대는 누구냐.”

“…피어스….”

“피어스? 피어스 가문이라면, 아아! 그래. 그 집의 장녀 아델라이드로구나! 이 기쁜 소식을 당장 피어스


공작에게―.”

하지만 곧 그 기쁨은 착잡함으로 변했다.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제가 각인한 상대는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닌 르네 피어스였으니까.

“아니에요, 아버지…. 나중에. 나중에 제가 직접 말하고 싶어요. 당분간은 비밀로 해 주세요. 네? 그리하고
싶습니다.”

아르카이츠는 끙끙 앓는 와중에도 황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황제는 왜 그런가 의아해했으나 연신 부탁한다는 아들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거라. 급할 건 없다, 아르카이츠. 그 아이는 네 오메가니까.”

유구한 헬리오스의 역사에서, 오메가가 사내였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기록된 역사에서는 그래 왔다.

대대손손 황실의 충신이었던 피어스 가문이 오메가와 알파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며, 또 헬리오스의 역사에서
오메가가 사내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또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내인 오메가는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를뿐더러, 만일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발칵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7.

아르카이츠 역시 사내인 오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무리 황궁의 도서관 자료를 뒤적대도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문헌은 존재하지 않았다.

딱 한 군데, 오로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오로지 황제만이 읽을 수 있는, 헬리오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책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아직 아르카이츠는 황태자의 신분.

적어도 그가 즉위하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지금 이렇게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는 르네를 가만히 모른 척 눈감아 주고 있어야 했다.

물론 혹시라도 자신이 누이가 아닌 것이 들킬까 발발 떨어 대는 르네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나 초야 때 창백하게 질려선 사시나무 떨듯 전전긍긍하는 르네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르카이츠는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겼다.

그 옆에 선 파비안은 제 형제가 저런 미소도 지을 줄 아는구나, 의외인 듯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참, 아버지. 피어스 공작을 황궁으로 초대했습니다.”

제 아내도 아버지를 반가워할 것 같고, 폐하께서도 오랜만에 친우이자 충신이었던 자를 만나면 기운이 나시지
않을까 해서요.
아르카이츠의 말에 황제 역시 제안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1 년 전, 피어스 공작은 돌연 은퇴 선언을 했다.

대대로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그의 은퇴 선언에 많은 이들이 놀라긴 했으나 그동안의 수고와 그리 젊지만은 않은
공작의 나이에 수긍하는 눈치이기는 했다.

그동안은 황제를 보필했으니, 이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나.

늦은 나이에 막내아들을 얻었으니 애틋할 만도 하다 싶어 황제는 순순히 피어스 공작을 사가로 돌려보냈었다.

“아아, 그래. 오랜만에 친우로서 만날 수 있겠구먼. 하면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 꼴을 보여 줘서는 안


되겠구나.”

병마와 싸우느라 늘 가벼운 옷차림과 퀭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였다.

그는 오랜만에 제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기운이 솟는 듯 밝은 모습을 보였다.

아르카이츠는 오랜만에 기운을 차린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좋다며 생긋 웃었다.

* * *

그 시각, 피어스 공작은 다 죽어 가는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시도 자리에 앉아 있질 못한 채 연신 방 안을 서성이길 반복했다.

입 안은 가시가 돋친 양 계속 ‘씁’ 같은 요상한 소리를 내고, 엉덩이는 자꾸만 들썩이니 지나가는 개가 봐도


불안해 보일 정도였다.

피어스 공작은 왕년에 황궁에서 ‘철면의 사내’라 불릴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던 이였다.

그런 그를 이렇게 무력하게 만든 이는 아델라이드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로는 아르카이츠 황태자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장신의 사내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장인어른! 갑작스런 접견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피어스 공작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카이츠는 아주 반갑다는 듯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선 악수를 청했다.

공작은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악수를 하는 그 힘이 얼마나 좋던지, 공작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제 손과 어깨에 몸이 휘청댈 정도였다.

어쩐지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 같아 슬그머니 왼손으로 오른 어깨를 주물렀다. 동시에 눈은 얼른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거 참 이상하네, 원래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이런 호탕한 성정이었던가…?’

피어스 공작이 마지막으로 황태자를 본 것은 21 년 전.

당시 6 살이던 황태자는 어린애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심한 이였다.

무심할 뿐 아니라 잔혹하기까지 하던 아이였다.

‘하긴, 세월이 흐른 만큼 그 성격도 바뀌었겠지. 다행히 좋은 쪽으로 자라신 것 같군.’

일단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르네가 들키지 않은 것도 같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공작이 아주 나직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화는 별거 없었다. 간단한 안부와, 영양가 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저 장인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황실에 부른 것뿐인 걸까.

사실 제 1 황자 파비안이었다면 그럴법한데, 상대는 제 2 황자 아르카이츠였다.

공작은 적어도 그의 몸에 아르콘 부족의 피가 흐르는 이상, 마냥 해맑은 이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아르콘 부족이 어떤 이들인가.

전사의 부족이라고는 불리지만 살상과 약탈에 특화된 민족 아니었던가?

인간임을 거부하는 듯한 장대한 기골과 탄탄한 육체, 남녀 가릴 것 없이 전투에 능한 이들.

그들의 힘이 커질까 두려워 선대 황제들은 갖은 방법으로 그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변경 밖으로 쫓아내고, 멸시하고, 차별해도. 어떻게든 악착같은 방법으로 살아남던 이들.

그런 이들을 이끄는 추장의 단 하나뿐인 딸이 아르카이츠의 어미였다.

페트라 황후가 살아 있을 적엔 황궁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했다.

패악이나 사치가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를 가까이서 보필하던 모든 이들은 그녀가 신분을 막론하고 자신들과
무언가가 확연히 다름을 본능적으로 느껴 왔다.

피어스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그는 페트라와 황제의 혼인을 반대했던 대신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지혜롭고 총명했으나, 그 눈동자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아우라는 사람을 압도하고, 더 나아가 두렵게 만들었다.

그건 권력자가 지니는 카리스마와는 결이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인두겁을 쓴 또 다른 존재처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고, 그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피어스 공작은 맨 처음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알현하였을 때 페트라 황후에게서 받은 느낌을
똑같이 느꼈다.

그건 아르카이츠가 단순히 알파여서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와 제 1 황태자도 알파였으나 그런 기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드는 감정은 그저 경외뿐이지, 이유 모를 혐오와 두려움은 아니었던 거다.

아무튼, 아르카이츠 황태자는 위험하다.

지금은 아닌 척 얌전 떨지만, 그는 위험한 사내다. 이빨을 숨기고 있는 호랑이인 거다.

그런 자의 곁에 르네를 오랜 시간 둬선 안 될 일이었다.

지금이야 가문이 몰락할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했을 뿐.

어떻게 해야 제 막내아들을 무사히 이곳에서 빼낼 수 있을까.

“무엇을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장인어른?”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면, 제가 이리 황태자 전하의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저는 이만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일어나던 피어스 공작이었다.

“오랜만에 황궁에 오셨는데, 황태자비도 만나고 가셔야죠.”

“아, 예에.”

괜히 르네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려던 찰나였다.

“많이 걱정되시겠지요.”

“예에….”

대충 흘려들으며 대답하던 피어스 공작은,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아르카이츠는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기댄 채, 왼손으로 제 턱을 그러쥐곤 큭큭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피어스 경은 참으로 표정을 숨기질 못합니다.”

“…….”

“그리 아드님이 걱정되시는 분이, 어찌 대신 누이 행세를 하라 시키신 겁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황족을 속이시려는 분이 이리 배포가 적아 어쩌시려고요.

아르카이츠의 말에 피어스 공작의 손이 아주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몸의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오금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걸렸다. 들킨 거다. 이젠 죽는 건가.


피어스 공작은 마치 돌덩이가 된 양 그 자리에서 굳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한 일은 곧장 아르카이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것 말곤 그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부, 부디. 부디 죄를, 부, 부디 용서를….”

머릿속이 하얗게 안개가 낀 양 아득해졌다.

그는 희끗대는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공작의 어깨를 아르카이츠가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장인, 어찌하여 제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저, 전하. 그, 그것이… 혹, 혹여, 그, 그 아이를 죽이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제 아내는 제 정체가 탄로 난 것도 모른 채 아주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장인.”

아르카이츠의 손에 붙들려 있는 공작의 어깨가 달달 떨렸다.

이리 간도 작은 양반이, 어찌 그런 큰 거짓말을 쳤을꼬.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던지라 아르카이츠는 얼른 다시 공작을 소파에 앉혔다.

공작은 곧 처형당할 죄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이미 그는 자신이 죽을 거라 확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 전보다는 수월히 말을 뱉기 시작했다.

#8.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실을 능멸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탄로 난 마당에 제가


무엇을 변명하겠습니까.”

“그래요. 장인께서 무엇을 변명하겠습니까. 딱히 변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에?”

“제가 오늘 장인을 이곳에 부른 건 르네를 이곳에 보낸 것에 대한 죄를 추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면…?”
피어스 공작은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다시 한번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완벽한 미소 뒤로 음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계속, 그렇게 속이십시오. 황궁과 귀족들을.”

르네가 황태자비로 계속 있을 수 있도록.

그제야 공작은 사실 자신들이 차악이라 믿었던 선택지가 진짜 최악의 수였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 * *

훌쩍 눈물을 훔치던 최악의 초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날 이후부터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찾지 않았다.

일이 바쁜 건지, 같이 식사를 하거나 부담스러운 티타임도 없었다.

덕분에 르네는 황태자비가 지내는 남쪽 궁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아르카이츠 말고도 속여야 할 사람은 무수히 많았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황태자비 궁에 저택의 시녀들을 보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듯했다.

그래도 그나마 제 사정을 알고 있는 시녀들이 황궁에서 같이 지내기에 조금이나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누이는 찾았대? 응?”

피어스 저택에 다녀온 시녀에게 르네가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물었다.

시녀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르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얼른 소매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르네에게 건넸다.

“주인어르신께서 건네신 편지입니다.”

르네는 얼른 편지를 뜯어 읽어 내려갔다.

단락이 바뀔 때마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충 부모 자식 간에 으레 주고받을 만한 구구절절한 안부 인사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아직 누이를 찾지 못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등.

하등 쓸모없는 말들이었다.

르네는 자포자기하여 의자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머리에 가발을 씌운 채 돌돌 말아 올리던 시녀가 얼른 그를 따라 허리를 굽혀야 했다.

“난 망했어. 이제 속이는 것도 무리야.”

후, 한숨을 내쉬던 르네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잠깐만, 지금 나, 굉장한 수를 떠올린 것 같단 말이지.”

르네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단 결혼식은 무사히 넘겼잖아. 우리 가문에서 할 일은 다 끝난 거라고.”

“무슨 말씀이셔요, 르네 님?”

“너 오늘 피어스 저택으로 간다 했지?”

“네.”

르네는 시녀에게 이리 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시녀가 다가가자 르네는 그녀에게 귓속말로 뭐라 전하기 시작했다.

글로 남겼다가 혹여라도 유출되면 큰일 나니, 어쩔 수 없이 말로 전하는 수밖에.

가만히 르네의 계획을 듣던 시녀는 ‘오!’ 하며 눈이 똥그래져선 르네를 바라봤다.

“어때, 나름 계획적이지 않아?”

“네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르네 님!”

“아버지한테 가서 전해. 알았지? 이제 결혼식도 치렀으니, 황태자비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죽음’을


준비하겠다고.”

어차피 누이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누이는 이미 집에서 훔쳐 간 패물 몇 개로 평화롭고 안락한 새 삶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거짓 황태자비 행세를 하는 것은 결국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

분명 언젠가는 꼬투리가 잡힐 거다.

따라서 거짓 죽음을 만든 후 누이의 장례식을 치르면, 그때 자신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내 몸 내가 지키는 수밖에 없어. 누이는 안 돌아올 거야. 더 이상 내가 여기서 황태자비 행세를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이제부터 르네는 원인 모를 병을 앓아 시름시름 앓는 연기를 할 거다.

황태자비가 죽어 나가도 그저 비극으로만 여기지, 그 누구도 의심을 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사실 헬리오스 황실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황후와 황태자비는 수없이 많았다.


선대 황후들만 해도 봐라. 첫 번째 황후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두 번째 황후는 아르카이츠를 낳고 병세가
짙어져 죽었다지 않나.

최악을 면하기 위해서는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했다.

“꼭 아버지에게 전해 드려.”

얼른 가서 아버지에게 이 번뜩이는 계획을 전해 달라며 르네가 시녀의 등을 두들겼다.

해야 할 게 정해지니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이거요, 르네 님.”

시녀는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르네의 손에 약병을 쥐여 줬다.

그건 짐승같이 날뛰는 아르카이츠를 잠재울 수면제가 아니었다.

“이제 곧 앓으실 시기잖아요. 이맘때쯤이면.”

“아, 맞다. 그러네.”

이맘때쯤이면 꼭 심하게 앓는 르네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던 르네에게는 여러 가지 약병들이 따라다녔다.

성인이 되고서도 좀체 낫지 않는 병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르네를 아프게 만들었다.

의사도 고개를 젓게 만드는 원인불명의 고통.

마치 화마에 삼켜지는 듯한 아픔.

어린 르네는 그때마다 아프다며 엉엉 울어 댔다.

그 모습이 가여워 성질 고약한 누이조차도 르네가 앓을 때면 말없이 곁에서 손을 잡아 주거나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곤 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좀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시기가 다가오면 르네는 조금 예민해지고, 또 감성적이
되며, 많이 나약해진다.

이젠 몸과 마음마저 편치 않은 곳에서 앓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풀이 죽은 듯한 르네의 모습에 시녀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르네의 손을 토닥이는 수밖에 없었다.

르네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낙천적인 건 르네의 유일한 장기였으니까.

괜찮아. 아픈 거야 약 먹으면 참을 수 있고, 게다가 이제 곧 나는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잖아!

하루빨리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고 얼른 본가로 돌아가 마음 편히 놀고먹으며 여생을 보내야지.


하루빨리 이상한 또라이 남편과, 이 쓸데없이 화려하고 황량한 황궁을 벗어나는 거야!

여태까지 잘 버텨 왔고, 이제 곧 이런 개고생도 끝이다.

그리 생각했건만.

* * *

“…으음. …으응.”

르네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절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 짓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 사내는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자신의 남편, 아르카이츠였다.

르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곧, 슬그머니 덮고 있던 이불을 들쳐 올렸다.

“허, 허억.”

슈미즈도, 여인의 가슴을 흉내 내기 위해 항상 착용하던 브래지어도 없었다.

근육이라고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근육만 있는 뽀얗고 말랑한 자신의 가슴팍이 보였다.

그 아래 아주 조금 단단해졌다고 자랑했던, 복근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절대 들켜서는 안 될 것이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분홍빛이 도는, 정중앙에 위치한 그것 말이다.

누가 볼세라 후딱 다시 이불을 덮은 르네가 달달 떨어 대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눈을 뜨니 알몸의 상태로, 그것도 여장도 하지 않은 원래 그의 모습으로, 황태자의 곁에 누워 있단


말인가.

“뭘 그렇게 놀랍니까, 여보.”

게다가 왜 황태자는 모든 것이 밝혀진 이 상황에서도 이리 태연한 얼굴로 ‘여보’라 부르며 제게 말을 건단


말인가?

르네는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얼른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제 술을 마셨던가?

아니다, 르네는 황궁에 들어온 뒤부터 철저히 금주를 이행하고 있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리 머리를 헤집어도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었는데.

“으응, 더 해 줘. 더!”

아니, 없었어야 했다.

“아으, 좋아, 아아. 거기….”

차라리 술을 마시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르카이츠, 물어 줘. 물어 줘어….”

황태자에게 매달리고, 보채고, 심지어는 직접 위에 올라타기까지 하던 이는 다름 아닌 르네 본인이었다.

거기까지 기억해 낸 르네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를지, 아니면 패닉으로 인해 구토가 나오는 걸 막으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냥 지금 혀를 콱 깨물고 죽어 버릴까.

#9.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는 며칠 전 본인이 생각해 낸 아주 똘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하야 <황태자비의 안타깝고도 비극적이며 갑작스런 죽음> 계획.

어떻게 해야 누이의 죽음을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의심받지 않게끔 꾸며낼 수 있을지, 한참 머리를 굴려
댔다.

“대충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척할까?”

아, 절대 안 된다. 자칫하다간 정치적인 이유로 다시 우리 가문이 엮일지도 몰라.


“그럼, 호수에 빠져 죽은 척할까?”

아니, 그것도 이상하지. 그럼 물에 익사한 시체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하냔 말이야.

그러자 르네의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카이츠 가문의 시녀가 은밀하게 말했다.

“도련님, 익사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어…? 아, 아냐. 너 방금 되게 무서운 표정 지었어. 됐어. 익사는 건너뛸래. 누이 닮은 여자 시체를 대체


어디서 구해.”

“대충 꾸미기만 하면 그만이지요. 도련님이나 각하께서 시신 확인하시며 아델라이드 님이 맞다, 확언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나, 나보고 시체를 보라고? 싫어! 기각, 이 건은 기각이야! 다른 방법 찾아보면 되지 뭐…!”

이후에도 온갖 선택지들을 하나둘 뱉어 보는 르네였지만, 이렇다 할 묘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일단 첫 번째로 죽은 시체를 구해 와야 했는데, 르네는 그 시체를 공수하라 명령을 내릴 만큼 독한 성격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아후, 머리 아파. 난 진짜 이런 계략이니, 모략이니 하는 거랑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내가 대체 어쩌다가….


애나. 부모님께서는 달리 말씀 없으셨어? 응? 내 계획을 도와주신다든지, 아니면 말리신다든지,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하신다든지 그런 거 말이야.”

보기만 해도 깃털처럼 보드라울 것 같은 얇은 백금발을 마구 헤집으며 르네가 묻자, 시녀 애나는 매우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말씀 안 드렸어? 내 말 안 전한 거야?”

“아뇨, 르네 님. 그럴 리가요.”

“야아,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황태자비 전하.”

“…그래서, 부모님 반응은 어떠신데?”

“그게요, 전하…. 그러니까, 그것이….”

르네의 질문에 시녀 애나는 차마 쉬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기대하고, 의지하는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는 르네인데.

‘아무 말도 안 하셨다.’고 말하면 르네의 저 사슴 같은 눈망울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질 게 분명했다.

우리 도련님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지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


르네의 눈물은 보는 사람마저 마음 저미게 했기 때문에, 아델라이드조차도 제 동생 눈에서는 눈물 나는 꼴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어쩌다 아델라이드 앞에서 르네가 울기라도 할 때면 어찌나 그리 안절부절못하는지.

그만큼 르네의 눈물은 피어스 가문의 모든 이들에게 있어 최고의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르네가 울보가 아니기에 더 그 효력이 강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야…. 왜 대답을 안 하고 그래, 애나. 부모님이 뭐라시는데? 너무 위험한 방법이래? 응? 설마, 아무런
말도 없으신 건 아니었지? 응? 말 좀 해 보라니까아. 나 무섭게 왜 그래….”

분홍빛 장미를 머금고 있던 르네의 흰 피부가 이내 푸르뎅뎅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나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해?

에이, 설마. 부모님께서 날 이렇게 방치하실 리가 없지!

뭐라도 말 좀 해 보라니까, 애나. 나 놀리는 거지!

르네는 자꾸만 불안해지는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애써 장난치듯 웃으며 애나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이,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 보라니깐.”

그러자 한참을 침묵하던 애나가 이내 생긋 웃으며.

“헤헤, 많이 놀라셨죠? 여, 역시 우리 도련님은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아니, 황태자비 전하는. 호호. 당연히
각하께서도 걱정하지 말라 하셨어요! 물론,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 바로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그래도
피어스 각하께서 언제까지고 이곳에 유일한 아드님을 방치하시진 않으시겠죠! 아델라이드 님께서 사라지신 뒤로,
유일한 후계자이시잖아요.”

“그치? 그래,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거잖아.”

“그럼요! 각하께서도 백방으로 알아보시는 중이시랍니다.”

그제야 르네는 안심이 되었다는 듯 후,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짓궂게 놀리기나 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르네의 입꼬리는 샐쭉 올라가 있었는데, 그런 도련님의, 아니, 황태자비 전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애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졌다.

‘죄송해요, 도련님…. 죄송합니다, 피어스 각하! 죄송합니다!’

애나는 자신이 감히 피어스의 주인님들께 거짓을 고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차마 르네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순 없었다.

사실 피어스 공작 부부는 애나에게 이렇게 전해라 명령했었다.


“애나. 르네한테 가서 꼭, 이리 전해야 한다. 당분간은 계속 거기 있으라고. 정체를 들키지 말라고. 들키게
되더라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르카이츠 전하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예에…? 하, 하지만 각하. 그런 말씀은….”

“르네에게 반드시 이리 전해야 해. 우린 그 애를 그곳에서 빼줄 수 없다. 알겠느냐?”

“…그렇게 전하란 말씀이십니까, 각하?”

“그래. 르네가 그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애나.”

“어찌하여 그러시는지, 연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각하? 만일 르네 님께서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면….”

“받아들이지 못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렇게 말하는 피어스 공작 부부의 얼굴도 못지않게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애나는 자신이 비록 시녀일 뿐이라 할지라도, 피어스 가문에 뭔가 아주 커다란 일이 닥쳐 올 것이란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제 입에서 튀어나올 희망적인 말만 기다리고 있을 르네를 보니, 너무나도 안쓰럽고 가여웠던 것이다.

도련님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상황에 놓였겠는가.

게다가 저 사슴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찰 모습을 상상하니….

아주 조금이라도, 그러니까 르네가 이 황궁 생활에 아주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 아니, 황태자비 전하.”

“그래. 뭐든 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치? 너무 서둘렀다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부모님
말대로 최대한 신중히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네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아, 그럼 아버지한테 이 말만 전해 줄래? 일단 시신을 찾는 것보다는, 약초를 찾아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으니.


황궁의 주치의 말고도 내 따로 약초꾼을 의사라 둘러대 곁에 두겠다고. 가문에서 한번 찾아봐 달라고.”

“네, 그리하겠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애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하자, 르네는 그제야 씩 미소를 지으며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시녀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겨진 르네는 바깥이나 그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잠시 옷 안에 넣어 뒀던 두툼한 수건들을 꺼내 놨다.

여인의 볼륨감을 위해서는 이 더운 여름날에도 브래지어 안에 도톰한 손수건들을 마구잡이로 넣어야만 했다.
테이블 위에 꼬깃해진 손수건들이 널브러졌다.

그제야 르네는 조금 살겠다는 듯 후련한 얼굴로 옷 안에 가득 찬 땀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했다.

“하아… 아무리 신중해야 한다지만, 나 이런 거 더는 못 하겠는데…. 더워서 여름은 또 어떻게 버텨….”

이제 곧 한여름이 다가올 텐데, 그때도 이렇게 속옷에 손수건 가득 채워 입고 다닐 생각을 하니….

더위를 잘 타는 르네로서는 거의 지옥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안 그래도 한 달에 며칠간은 꼭 앓는 르네인데, 여름만 되면 더위를 먹는 건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아무튼 간, 혹시라도 평소처럼 픽픽 쓰러져 실려 갔다 사내인 것을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르네는 이번 여름만큼은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히, 건강히 넘겨야만 했다.

* * *

한편,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델라이드는 현재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로 작은 항구 도시에 숨어들었다.

혹시 몰라 며칠 동안은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간간이 항구 마을에 제국의 헌병단이 지나가거나 그럴 때면 이유 불문하고 얼른 골목길 안으로 숨어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흔하다는 적색의 머리칼로 염색한 뒤, 빛나는 미모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 주근깨도 가득하게 그려
넣었다.

그렇다 하여 거지꼴로 돌아다녔다가, 웬 거지가 유람선 일등석을 타느냐 의심이라도 받을까 싶어 그녀는 나름
‘시골에서 올라온 부잣집 아가씨’ 행세를 하고 다녔다.

집안에서 나름 돈 될 만한 것들을 몇 개 챙겨 왔으니, 금전적인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완벽한 시골 아가씨 역할을 위해 늙수그레한 유모를 사들여 데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적발에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아 내리고.

노출이나 장신구가 포인트였던 평소의 화려한 차림새와는 전혀 다른, 어딘가 촌스럽기도 한 소박한 옷차림이지만
결코 값싼 원단은 아닌.

게다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긴 해도 구김살 하나 없는 아리따운 외모까지.

아델라이드는 예명 ‘로잘린’이라는 이름으로 무리 없이 제국에서 출항하는 유람선 티켓을 샀다.

#10.
“한데, 아가씨는 대체 어느 댁 아가씨이시기에 이렇게까지 다른 이 행세를 하시는 것입니까? 귀하신 분인 것
같은데, 어찌….”

“그건 할멈이 알아서 뭐 하려고?”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 나도 좀 예민했던 것 같네. 자네 말대로 나는 원래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이긴 한데, 사정이 있어서


도망쳐 나왔어. 자네는 유람선 탑승 때까지만 일해 주면 돼. 잔금은 헤어질 때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아델라이드는 슬그머니 유모를 떠봤다.

“한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가? 자네가 봐도 내가 막, 너무 고귀해 보이고 그러는가? 이 고귀함 같은 거


숨길 수 없을 것 같고, 막 그래?”

“예? 아, 네에, 뭐. 그렇지요. 돈도 많으시고….”

“아휴, 하필이면 빙의를 해도 꼭 이런 애한테 빙의를 하냐…. 이 꼴이 뭐야, 대체….”

하필이면 세계관 최고 미녀한테 빙의해 버릴 게 대체 뭐냔 말이야.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이 가슴을 퍽퍽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요?”

“할멈은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가 왜 가출을 선택했는지…. 꼼짝 없이 그 인간과 결혼하게 생겼는데, 안


도망치고 배기냔 말이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말에, 유모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아델라이드의 손을 꼭 잡아 왔다.

“사랑의 도피를 떠나시는군요!”

“어? 뭐… 사랑의 도피까지는 아니고….”

“정략결혼에 반대하여, 도망치시는 것이고요!”

“그래. 그거야. 대충 비슷한 거지.”

“아이고, 사랑 없는 결혼이라니이…. 잘 선택하셨어요. 자고로 혼인은 사랑하는 이와 올려야 후회 없이


행복하답니다. 해서, 부군께서는…?”

“부군은 아직 없고, 이제부터 찾아다니려고.”

혹여나 유모가 저를 떠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녀가 피어스 가문의 아델라이드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싶었다.

‘한데 참 이상하지. 지금쯤이면 피어스 가문에서 날 찾으려 온통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저 혼자 살겠다고 야반도주한 마당에 ‘왜 날 안 찾는 거지?’ 의문을 갖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만.

지금쯤 분명 온 제국을 들쑤시고도 모자랄 판에 가문이며, 황궁이며 너무나도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분명 좋아라 해야 할 일이지만, 너무 조용하니까 또 불안하잖아.’

그 흔한 공작가의 영애가 도주했다는 소문이나, 예비 황태자비가 사라졌다는 소문조차 없이 너무나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물론 가문이나 황궁에서 아예 반역자라 낙인찍고 쥐 잡듯 온통 뒤지다 결국에 잡히는 엔딩보다는 낫겠지만.

묘하게 잘 풀리는 상황에 꼭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고 나온 것처럼 어딘가 찝찝하고 구린 느낌이 든달까.

“할멈, 할멈은 소문이나 가십거리에 대해 좀 아는가?”

“예? 제가 마담은 아닌지라 많은 정보를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저잣거리 나가면 들려오는 이야기들 정도는 알고
있지요?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별건 아니고, 그냥 요즘 뭐 큰일 같은 건 없나?”

“큰일이요?”

“뭐 유명한 가문의 여식이 사라졌다든가…. 아, 물론 나 말하는 거 아니야.”

“유명한 가문의 여식이요…? 글쎄요. 누가 실종되었다거나 가출했다는 소문은 없는걸요. 그리 유명한 가문이라면
소문이 안 나려야 안날 수가 없… 헙, 절대 아가씨의 가문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고요!”

“뭔 소린지 알아들었으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뭐… 황궁에서는 별일 없나?”

“황궁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제 2 황태자 전하께서 혼인을 올리셨다지요! 이것 참 국가적 경사지요?”

“혼인을 해? 제 2 황태자가? 누구랑, 그 피어스 가문의 아델라이드 아가씨랑?”

“아이, 그럼요. 피어스 영애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응? 아델라이드 피어스랑, 제 2 황태자가 혼인을 올렸다고?”

“네.”

“진짜 아델라이드 피어스 맞아? 황태자비 말이야.”

“네에, 맞다니까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아델라이드 피어스랑 황태자가 혼인을 올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여기 있는데.


어찌 아델라이드 피어스와 제 2 황태자가 혼인을 올리느냔 말이다.

알고 보니 이 장르, SF 장르였던 건가?

그냥 단순한 빙의가 아니었던가?

아니, 이 시대에 인간 복제가 가능한가? 인간 복제가 이렇게나 쉬웠던 일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아델라이드는 이내 뭔가 깨달은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이런 미친.”

“아가씨, 무섭게 왜 그러셔요.”

“이런 미친, 미친! 세상에,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니라…!”

“예에?”

아델라이드는 기함을 하며 소리치려다, 앞의 유모를 힐긋 바라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엄청나고도 미친 사실을 알게 되어 소문이라도 내면 어쩐단 말인가.

몇 년을 함께 산 이도 아니고, 단순히 며칠만 유모 행세하라 고용한 이였기에 더더욱 비밀 따위 알릴 수 없었다.

“…세상에, 아델라이드 피어스 영애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제 2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되겠어. 안 그래? 오호호호,
둘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그렇죠? 참, 혹시 아가씨께서는 사교 파티에서 피어스 영애를 만난 적 있으십니까?”

“그럼, 당연히 있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데!”

“아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시던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결혼식 때 정말 천상에서 내려오신 것
같은 미모였다고 합니다.”

“그, 그렇겠지. 자, 이제 그만 나가 보도록 해.”

아델라이드는 아직 이것저것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유모를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내보낸 뒤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엄청나게 일이 커진 듯한 이 상황에, 물론 그 원흉이 본인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피가 섞였을 테니 당연히 여장을 해도 어울리겠지….”

르네가 여장을 할 거란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세상에 아무리 죽기 싫어도 그렇지, 어찌 사내애를 여장까지 시켜 결혼을 시키느냔 말이야…!

아델라이드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기 시작했다.

“아주 불구덩이로 뛰어들었구나, 르네야…! 아, 진짜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아르카이츠가 얼마나 미친놈인 줄


알고. 아휴, 아휴, 속 터져!”

그냥 모른 척, 마저 도주하면 될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아델라이드는 르네가 황궁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차마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아, 버그 먹어 가지고 뭐로 가든 다 사약 엔딩이란 말이야! 안 돼, 내 새끼가 그 불구덩이에서 고통받는 모습은


절대, 절대로 볼 수 없단 말이야아!”

이 세계가 어떤 세계관인 줄 알고!

이곳은 무려 알파인 아르카이츠가 자신의 진짜 오메가를 찾는 비엘 게임!

그러나 게임 설정에 이상이 생긴 건지, 아니면 버그를 먹은 건지.

그 어떤 오메가 후보들도 게임의 악역으로 나오는 ‘미카엘’에게 빈번이 지고 말아 악수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어떤 수를 골라도 사약 엔딩이라는.

악평 자자한 비엘 게임이란 말이다!

비엘 세계관에, 사랑이라고는 없는 결혼으로 평생을 외롭게 살다가, 아르카이츠가 다른 수들과 놀아나는 것만


봐야 하는 비운의 황후이자 악녀 아델라이드에 빙의한 것도 서러운데.

애정을 담아 디자인한 캐릭터, 즉 어찌 보면 ‘내 새꾸’가 이 버그 먹은 미친 비엘 게임의 수 후보자로 오르다니.

혹 떼려다 혹 두 개 붙인 격이 이런 걸까?

아델라이드는 ‘아니, 아니다. 비엘 세계에서 내가 끼어 봤자 좋은 꼴 못 보지.’ 하며 다시 모른 척하려다가도.

“누이. 난 누이가 행복하면 뭐든 좋아. 그러니까… 누이가 원하는 대로 해.”

“르네.”

“난 모른 척할 거야. 아니, 난 모르는 거야. 부모님은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게.”

“너 진짜로….”

“난 이전 누이의 모습이 더 좋아. 당당하고, 어디서든 자신감 넘치는. 지금의 누이는 너무 풀이 죽었잖아.”

아델라이드의 도주를 모른 척 눈감아 주겠다 말하던 하나뿐인 남동생 르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에이 씨, 모르겠다….”

아델라이드, 아니, 아델라이드에 빙의된 ‘희재’는 짐짓 햄릿이라도 된 양 아주 깊은 고뇌에 빠졌다.

모른 척하고 내가 사느냐, ‘내 새꾸’ 살리려 나도 불구덩이로 뛰어드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11.

하늘도 무심하시지.

르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연신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며, 르네는 정말 불구덩이에 뛰어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비단 브래지어 안에 가득 채운 손수건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니, 여인들은 이 켜켜이 쌓인 드레스 자락을 이 무더위 속에서도 어찌 견딘단 말이야?

엉덩이에 땀이라도 찰 것 같은 느낌에 르네는 연신 몸을 달싹였다.

피부가 약해서 조금만 땀을 많이 흘려도 살이 짓무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르네에게, 이런 통풍 안 되는


드레스들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더운 건 둘째 치고, 찝찝하다.

‘더워 죽겠는데 왜 뜨거운 차를 마시고 난리야.’

이맘때쯤 원래 르네였다면, 통풍 잘되는 얇디얇은 리넨 반바지와 너풀대는 헐렁한 포에트 셔츠만 입고 침대에서
뒹굴대며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을 갈아 만든 빙수를 먹으며 유유자적하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봐라.

이 더운 날 이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으니, 르네는 본인이 불속으로 뛰어든 불나방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모든 원흉은 다름 아닌 아르카이츠였다.

무사히 첫날밤을 넘긴 뒤, 며칠간은 무심해 보이던 아르카이츠였다.

역시, 동성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여자인 누이에게는 관심도 없다 이건가?

감히 제 누이를 독수공방하게 만들 생각이었나 싶어 괘씸하다가도, 또 그 괘씸한 덕에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으니


조금 고맙기도 했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황태자비궁에 처박혀 있던 르네를 반쯤 끄집어내다시피 불러내 다짜고짜


티타임을 갖는 게 아닌가.

그의 피에 흐르는 아르콘 부족의 피 때문인가. 이렇게나 더운 날에도 아르카이츠는 유독 뜨겁게 끓인 차를 몇


번이고 내오라 시켰다.

르네는 보기만 해도 더워 죽겠다는 듯 슬그머니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앞에 두고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왜 부른 거야.’

속으로는 또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르카이츠는 티타임을 명목으로 제 아내를 본궁까지 오게 했으면서, 막상 마주하자 별다른 인사도,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안 마주치고 조용히 저 혼자 여유를 즐기듯 차나 마시고 있었다.

하, 더워. 쟤는 더위도 안 타는 건가. 이렇게나 더운 날에 온통 긴 팔이나 입고 있고.

르네는 저도 모르게 제 앞에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은 채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시고 있는 아르카이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책과 어울리지 않는 사내가 있을까.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르네에게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하셨다.

물론 그 말은 누이의 얼굴만 보고 달려들던 사내들이 그 고약한 성격에 호되게 나가떨어지는 꼴을 보며 더더욱


가슴 깊이 새겨 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카이츠와 책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무식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정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반쯤 가슴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셔츠를 풀어 헤친 아르카이츠를


보니, 이렇게 샌님처럼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는 태양 아래서 끈적한 땀을 흘리며….

‘아, 내가 무슨 생각을.’

르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모르게 아르카이츠의 저 빵 두 개 얹은 듯 불룩 튀어나온 흉통을 바라보다 별 희한한 상상까지 했다.

이 상황에 갑자기 왜 그런 상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 뙤약볕 아래서 육체미를 뽐내는 야수 같은
….

‘아 왜 이래, 나 진짜.’

아무래도 저 반쯤 풀어 헤쳐진 포에트 셔츠 아래 보이는 두툼한 빵, 아니, 가슴팍이 문제인 것 같아 르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분명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아르카이츠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만일 르네가 진짜 아델라이드였다면 아마 요사스런 눈웃음을 짓거나, 혹은 유혹하듯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뻔뻔스럽게 ‘뭘 봐요?’ 하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르네는 제 누이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순둥이였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누이처럼 요사스런 미소도, 유혹적인 눈 깜빡임도, 뻔뻔한 시비조차 거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누가 봐도
몰래 훔쳐보다 걸린 이처럼 어깨를 움찔대며 후다닥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고수, 중수, 하수 중에 하수가 하는 어설픈 시치미 떼기에 르네는 본인이 한심스러워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자책했다.

이렇게 어설프게 굴어서야, 아무리 봐도 아델라이드 같지 않다며 의심을 사면 어쩐단 말인가.

그때 한참을 말도 안 걸고 조용히 책만 읽고 있던 아르카이츠가 지그시 르네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부인, 얼굴이 매우 붉게 달아올라 있는데.”

그의 말에 르네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덥석 미끼를 물고 말았다.

“여, 여름이라서.”

“아, 나는 또 야한 생각하는 줄 알았지.”

“…….”

“첫날밤 생각하나? 야한 건 그때밖에 못 했잖아. 아. 욕구불만인가. 그래서 그렇게 빨개?”

“내가 언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려던 르네는 부들부들 몸만 떨다 이내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자칫 저도 모르게 고성을 내다 사내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면 어쩐단 말인가.

“방금 되게 섹시한데. 다시 한번 화내 봐.”

“…….”

르네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내가 참자, 참아야 해, 참아야 하느니라.’ 머릿속으로 몇 번 다짐했다.

그 뒤 슬그머니 찻잔을 들어 올려 호록, 그 안의 쓰디쓴 차를 마셨다.

기껏 한다는 말이 저런 음담패설이라니! 아무리 봐도 이건 사기 결혼이 아닐까 싶다.

‘나 이 정도면, 이혼 신청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저런 변태라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었다.

아무리 르네가 잔병치레가 잦고 낯을 많이 가려 사교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귀가 있는 한 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소식은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지 않나.

‘소문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과묵하고, 진중한 사내?’

하! 당장이라도 코웃음 치고 싶었다.

‘지랄 말라지!’
영애들이 르네를 꽃 같은 사내라 추앙했다면, 반대의 경우라 추앙하는 경우도 있었다.

꽃 같은 사내의 반대 경우라면 말 같은 사내였다. 말 중에서도 명마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명마가 아니라 색마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거다.

암, 모르고말고. 다른 이들 앞에서는 온통 무게를 잡아 대면서, 르네 앞에서만 부인, 부인 하며 온갖 음담패설을


담아 대니 말이다.

‘습관성 희롱이야, 뭐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러면서, 꼭 단둘이 있을 때만…!’

“뭐야. 다시 한번 화내 보라니까. 섹시하다고, 그 모습. 욕을 해도 좋고, 눈을 흘겨봐도 좋으니. 뭐라도 좀


반응을 보여 봐요, 부인.”

“…제가 어찌 황태자 전하께 욕을 하고 눈을 흘긴단 말입니까.”

“같잖은 내숭 그만 떨고.”

“…이봐요!”

“서방, 낭군, 여보, 자기, 달링, 허니. 부를 게 이렇게나 많은데 ‘이봐요’라니. 이 역시 사람 마음 갖고


노는 방법 중 하나요, 아델라이드?”

킥킥 웃음을 참으며 묻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르네는 딱 한 번만, 저 나불대는 그의 주둥이를 콱, 갈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평생 실행에 옮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상상 속에서만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해 보는 르네였다.

‘참자. 참아. 집으로 돌아갈 날만 생각해서 어떻게든 참자!’

르네는 아델라이드보다 훨씬 더 인내심이 많았으니, 이 정도는 문제없이 참을 수 있다 생각했다.

아무리 황태자가 자신을 쿡쿡 찔러 대며 반응을 기대하는 듯해 보여도 곧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재미없어할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르네가 생각한 바로는 그러했다.

“부인, 그래서 날 계속 ‘이봐요’라 부를 생각입니까?”

존중하듯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는 잘만 반말 찍찍 해 대며 갈구다가 회심의 한 방으로 약 올리듯


존댓말을 사용하는 아르카이츠였다.

르네는 제가 입고 있던 드레스를 꽉 그러쥐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미소 지을 때 르네 특유의 아래로 축 처지는 눈꼬리와 도톰해지는 눈 아래 지방에, 눈이 꼭 완벽한 호선을 그리는


초승달 같은 모양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눈웃음이었으나, 속으로는 어마무시한 욕설을 마치 주술 외듯 굴려 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르네의 미소를 보며, 아르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두툼한 가슴팍 위에 제 손을 턱 얹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르네는 갑자기 멀쩡한 이가 멍한 얼굴로 제 심장 부근을 움켜쥐자 내심 ‘아파 뒈지셨으면 좋겠다. 그럼 난


자동으로 이혼인 거잖아?’ 같은 악마도 울고 갈 냉혹한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천성이 선하고 유순하도록 설정된 사슴 눈망울 탓에 아르카이츠의 눈에는 그저 저를 걱정해 주는


모습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12.

물론 르네 역시 걱정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었다.

갑자기 황태자가 죽어 버리면 자동 이혼이라 편하긴 하더라도, 그 이후 과부가 된 황태자비로서 무슨 책임을 져야


할지 불분명한 상황이었으니까.

그저 황태자는 동성에만 관심 있는 이답게 아델라이드에게는 관심을 꺼 주고.

쓸쓸히 황궁에 있던 아델라이드는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으로 운명을 달리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이 정도의 시나리오가 르네의 머릿속에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디 편찮으시다면 주치의를….”

르네는 이걸 빌미로 슬그머니 이 어색한 티타임을 벗어나려 했다.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손목을 턱 붙잡고는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아주 잠깐 붙들렸을 뿐인데 르네는 마치 강한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양 맥없이


딸려가고 말았다.

“으악! …꺄악…!”

깜짝 놀라 괴성이 튀어나오려다가도, 악착같이 가냘픈 목소리를 내며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아 씨, 왜 사람을 갑자기 잡아당기고 지랄이야.

누가 아델라이드 동생 아니랄까 봐 슬슬 성질머리가 올라오려는 순간.

르네는 제 손 아래 자리 잡은 아주 딱딱한 빵 두 개를 발견했다.

아니, 빵 아니고 가슴.

아르카이츠의 크고 단단한 가슴 말이다.


그제야 르네는 자신이 엎어진 곳이 다름 아닌 제 남편의 품속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얼른 몸을 일으켜 떨어지려 했지만, 아르카이츠는 실실 웃으며 르네를 놔주기는커녕 더 세게 그를 껴안는 것


아니겠나.

“이것 좀 놓으세요. 사,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부인. 덥습니까? 땀을 흘리는 것 같은데. 냄새나요.”

“…저 냄새나요?!”

“네. 냄새납니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수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르카이츠에 르네는 다시 한번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Chapter 3. 페로몬

아르카이츠는 제 품에 안긴 채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은 르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평소엔 희멀건해서, 마치 흰 마시멜로처럼 말랑한 사내가, 조금만 툭툭 건들면 금세 토마토처럼 볼을 부풀리며


열을 올린다.

그 모습이 어째 복어 같기도 하여, 마치 돌고래가 제 유흥을 위해 복어를 가지고 공놀이하는 양,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마음을 가지고 공놀이 중이었다.

르네가 더위에 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그게 심했다.

여름이 코앞이라지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조금 덥다에서 그칠 만한 것을, 르네는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손부채질을 하는 것 아니겠나.

물론 그게 문제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더위에 약한 사내가 치렁치렁한 옷을 몇 겹을 껴입고, 거기에 가발도 쓰고.

또 나름 볼륨감도 채우겠답시고 브래지어 안에 손수건까지 풍성하게 넣었으니 더위를 안 타려야 안 탈 수가 없겠지.

아직도 제가 남자인 것을 들키지 않았다 생각하여 악착같이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는 르네를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에게는 그저 저 모습이 하찮고 귀여울 뿐이었다.

‘…한데 아까부터 이 향은 대체 뭐지?’

진짜 문제는 아까 전부터 어디선가 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향이었다.

아르카이츠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아르콘 부족들은 대대로 체취가 연해 아무리 땀을 흘려도 냄새가 나지 않는
특이 체질이었기에 향수를 뿌릴 일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였던 페트라 황후도 독한 향수를 싫어해서, 향수를 뿌린 귀족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아르카이츠 역시 선대 황후처럼 향수 뿌린 이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르네 역시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들었다.

아델라이드는 향수병 모으는 게 취미라 매일 방물장수가 찾아가 이것저것 팔아 댄다지만, 르네는 향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독하다고 싫어했다.

하여 아르카이츠는 르네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제 누이 행세를 한다지만 르네는 향수를 뿌릴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피부가 약해 독한 향수를 뿌렸다가 온몸에 발진이 날지도 모를 일이지.

하여 아르카이츠는 일부러 황태자비 궁전 안의 향수를 죄다 긁어모아 버린 뒤, 방물장수를 들일 때에도 향수는


제외하고 들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지금 둘밖에 없는 이 방 안에 향수를 뿌린 이는 없었다.

또 이 방 안엔 화병조차 없으니, 향이 날 만한 것은 뜨거운 물에 우린 찻잎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만 아르카이츠의 코를 간질이는 것은 찻잎의 향이 아니었다.

아주 어렴풋이 맡아지는 이 정체불명의 향기는 꼭 사탕처럼 다디단 향을 내뿜다가도, 마치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듯,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기묘한 향이었다.

이 울렁거림은 단순히 뭔가가 역해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이 아니었다.

꼭 술을 진탕 마셨을 때, 혹은 아편을 했을 때의 그 기분 좋은 울렁거림.

반쯤 뭔가에 취한 듯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몸이 구름 위로 붕 뜬 것처럼 어딘가 묘하게 들뜬 기분을 들게


하는.

무엇보다 자꾸만 아래쪽이 뻐근해지게 만드는 것이….

누가 여기다 최음향이라도 푼 것인가 싶어 아르카이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르네와 눈이 마주쳤는데.

“부인, 얼굴이 매우 붉게 달아올라 있는데.”

그 역시 이 정체 모를 향을 맡은 걸까.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어 아르카이츠는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뭔가 자꾸만 몸이 달아오르는 듯하고,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그런 느낌 말이다.


르네처럼 허여멀겋고 투명한 피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세 티가 나고 말았다.

“여, 여름이라서.”

말까지 더듬는 걸 보면, 분명 르네 역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아닌 척하지만 묘하게 달뜬 숨소리가 아르카이츠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혹 누군가 차에 약이라도 탄 건가 싶어 또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아 봤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나는 향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르네가 더운지 가슴팍의 레이스를 펄럭이며 손부채질을 했다. 아까보다 훨씬 다디단 향이 훅 끼쳤다.

그 순간 아르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아주 야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그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짓거리를 다 한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리 혈기왕성할 나이고, 또 앞에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두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야만적인 상상을 할 만큼 제가 욕구불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또 야한 생각하는 줄 알았지.”

툭 던진 말은 사실 자신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저만 이런 건가, 나만 이렇게 쓰레기였나 싶어 중얼거린 말에 르네가 덥석 걸려들고 말았다.

르네의 커다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제 생각을 정확히 꿰뚫렸다는 양.

“…….”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에 아르카이츠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씩 올라갔다.

아, 그러니까 나만 아주 안달 난 건 아니라는 소리군.

묘하게 희열을 느낀 그였다.

어쩌면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건 많이 자존심 상하지


않나.

그래서 저도 모르게 들떠 장난을 치고 말았다.

“첫날밤 생각하나? 야한 건 그때밖에 못 했잖아. 아. 욕구불만인가. 그래서 그렇게 빨개?”

“내가 언제!”

또 타격감은 왜 이리 좋은지.

바들바들 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르네였다.


물론 아르카이츠는 첫날밤의 기억이 없었다. 르네가 수면제를 먹여 재웠으니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 저 혼자 태연하게 첫날밤을 치렀네 마네 거짓말하는 르네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골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직 초야는 치르지도 않았는데, 공식적으로는 치러진 셈이니. 아르카이츠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공식적인 일정이 잡히지 않는 한 합방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방금 되게 섹시한데. 다시 한번 화내 봐.”

“…….”

“…제가 어찌 황태자 전하께 욕을 하고 눈을 흘긴단 말입니까.”

“같잖은 내숭 그만 떨고.”

“…이봐요!”

“서방, 낭군, 여보, 자기, 달링, 허니. 부를 게 이렇게나 많은데 ‘이봐요’라니. 이 역시 사람 마음 갖고


노는 방법 중 하나요, 아델라이드?”

#13.

저 도톰한 입술에서는 대체 언제쯤 제 이름이 불려 볼까.

아르카이츠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르네는 제 정체를 들킬까 매일 바들바들 떠는 맹수 앞 토끼일 뿐이고.

또 언제든 도망칠 궁리만 해 대는 저 작은 머리통에 과연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싶었다.

왜 하필이면 내 오메가가 르네 너여서. 이렇게 여럿 피곤하게 하는 걸까.

왜 하필 나는 널 봐 버리고 말아서.

“아르카이츠, 알파는 일생에 단 한 번, 운명의 오메가를 만난단다. 그 오메가를 놓쳐서는 안 돼. 놓친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을 만큼,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지.”

“그래서 어머니도 부족에서 나오신 건가요? 일생에 단 한 번인 운명의 오메가를 만나서요?”

“…그래, 아르카이츠. 난 그 사람을 놓칠 수 없었단다. 하나 방금 전의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이 어미


앞에서도, 아비 앞에서도, 모두에게 말이다.”

“네, 어머니.”

어머니는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을 불가항력이라 설명했다.

어렸을 적엔 그 말이 진심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르네를 본 순간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나 빠르고 크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부터 아르카이츠는 르네만을 기다렸다.

자신의 오메가는 르네뿐이라 확신하며, 어떻게든 그를 손에 넣기 위해.

어떻게든 그 곁에 있기 위해.

그는 이미 진즉에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런 아르카이츠도 실제 자신의 오메가를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황궁에도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신화적, 전설적 존재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알파가 있다 한들, 자신의 운명적인 오메가를 만난 적이 없어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르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세상 모든 서적을 모아 놓은 황궁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에 대한


서적들은 다 뒤져 봤지만, 이렇다 할 정보는 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에게 페로몬을 느낀다는 점은 알고 있었어도, 이 페로몬이 이렇게나 다디단 향을
내뿜는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르네가 손부채질을 하는 순간, 이마에 맺혀 있던 작은 땀방울이 주룩, 턱을 타고 내려오는 순간.

그리고 투명한 녹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아르카이츠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제야 본능적으로 자꾸만 제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 최음향과도 같은 것을 르네가 내뿜고 있다는 것을.

이게 바로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어디 편찮으시다면 주치의를….”

르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가 주치의를 불러올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드레스를 너풀거리며 일어나자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강한 페로몬이 아르카이츠의 안면을 강타했다.

차라리 르네가 방을 나가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아르카이츠의 손은 이미 통제 불능이 되어


멋대로 르네의 손목을 낚아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로도 모자라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는 제 품에 르네를 폭 껴안고 말았다.

몸과 정신의 불통이라니.

아르카이츠는 순간 자신이 굉장히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의 품 안에는 페로몬을 폴폴


풍기면서 붉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르네가 있었다.

가까워지니 체향이 더더욱 진해졌다.

페로몬의 효과는 상당했다.

난생처음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껴 본 아르카이츠는 태연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머리 안쪽이 핑핑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뜨거운 수증기가 얼굴에 닿는 것처럼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물론 얼굴만 달아오르면 다행이지, 왜 아래쪽도 같이 달아오르는 건가.

어떻게든 제 분신이 발광하지 않도록 머릿속에서는 녹음의 초원과 푸르른 하늘, 맑은 개울 등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손목을 뿌리치려는 듯 낑낑대며 움직이는 르네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젠 거의 마비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페로몬 향이 풍겨 왔다.

이대로 있다간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제 신부를 강제로 탐하기라도 할까, 스스로를 불신하게 된 아르카이츠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이것 좀 놓으세요. 사,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부인. 덥습니까? 땀을 흘리는 것 같은데. 냄새나요.”

사실 아르카이츠는 본인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냄새나요?!”

“네. 냄새납니다.”

그 향은 정말 지독했다.

너무 지독할 정도로 달아서, 아르카이츠는 수천 송이의 꽃에 파묻혀 행복한 상태로 질식해 죽어 가는 듯한 몽롱한
느낌에 취해 있었다.

그 상태로 그저 생각나는 대로 헛소리를 지껄인 것뿐이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제 몸의 냄새를 킁킁 맡던 르네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곧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카이츠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분명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에게도 마찰음이 들렸을 것이다.


“그렇게나 수치 주고 싶으신 이유가 제가 싫어서라면,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 한들, 그쪽 성벽은 제 알 바 아니고, 저도 그냥 정략혼으로 억지로 한 결혼이거든요? 이런 식의 희롱을
들을 만큼 제 가치가 낮은 존재도 아닐뿐더러, 불쾌합니다. 저한테서 악취 같은 거 나지 않는다고요!”

르네는 반쯤 가성을 포기한 상태로 버럭 화를 내고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활짝 문이 열리자 시종들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방 안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했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삐죽 돋을 만큼 센


마찰음과,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씩씩대며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가 버린 황태자비를 보며 아무래도 부부싸움이
단단히 났구나 예상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분명 극도로 분노한 상태일 것이라
생각해 다들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아르카이츠는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쭈뼛대고 있던 시종들은 그런 아르카이츠의 상태가 이상하다 여긴 건지, 황태자의 보좌관에게 얼른 들어가
확인하라는 듯 저들끼리 수신호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보좌관 나리!

아니,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들어가서 뭘 어쩌란 말인가!

일단은 위로든 뭐든 하셔야죠! 황태자 전하께서 상태가 영 이상하시지 말입니다.

그래, 이상한 것만은 분명하긴 하다만… 만약 불똥이 나한테로 튀면?

일단 들어가시라니깐요!

시종들이 억지로 보좌관의 등을 방 안으로 떠밀었다.

꾸역꾸역 밀려들어 온 보좌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슬그머니 아르카이츠 곁으로 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저 멀리서 봐도 이상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저, 황태자 전하…?”

“…….”

“괜찮으십니까?”

“…….”

“…전하? 아르카이츠 전하? 아르카이츠 님!”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아르카이츠가 천천히 보좌관을 쳐다봤다.

그 얼굴을 확인한 보좌관이 저도 모르게 히엑, 기함하는 듯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역시 그 마찰음은 황태자비가 따귀를 때린 것이었어!


확신한 보좌관은 벌겋게 부어오른 아르카이츠의 왼쪽 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얼음주머니를 대령하라 하겠사옵니다.”

“…얼음주머니? 얼음주머니를 왜. 아니, 그보다 르― 황태자비는 어디 가고 자네만 있나.”

“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아까 전 방을 나가셨는데요.”

“언제?”

“조금 되었습니다.”

“…허.”

“전하, 괜찮으십니까? 역시 정신적인 충격이 크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태어나 처음 여인에게 따귀를 맞아 충격이 컸던 모양일까.

아르카이츠는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 보좌관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황태자비의 손이 매운가. 순간 기억 상실 뭐, 이런 건가?

생각한 보좌관은 잠시 안절부절못하다 이내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들겼다.

그 왼쪽 뺨이요. 부어오른 왼쪽 뺨….

그제야 아르카이츠는 부어오른 제 뺨을 눈치챈 듯, 얼른 제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보좌관에게 물었다.

“나 뺨 맞았나?”

“예?”

“황태자비한테 나 뺨 맞은 거냐고.”

“…예에….”

“왜?”

“네? 저희가 그걸 어찌 안단 말입니까, 전하.”

#14.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당연히 제가 모시는 주군께서 뺨을 맞으시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습니다만, 부부 사이의 일인지라 제가


끼어들기에는….”

“아니. 이 방에서 나는 냄새 말이야. 후각이 마비될 것같이 강한 단내, 안 느껴지나? 아무렇지도 않은가?”

“단내요?”

보좌관은 코를 벌렁대며 주변의 냄새를 맡아 보려 했지만, 아주 살짝 느껴지는 묘하게 기분 좋아지는 향기 말고는


….

글쎄다. 후각이 마비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조금 좋은 향이 나기는 하는데, 글쎄요. 별 차이 못 느끼겠습니다.”

“재밌군.”

“예?”

“재밌다고.”

그냥 못 들은 척, 못 본 척할 걸 그랬나.

황태자의 기행에 보좌관은 혹여나 자존심 강한 전하께서 어떻게든 태연한 척하시는 건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최대한 둥글게 넘어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 * *

참 재밌는 상황이었다. 페로몬에 취해서 맞은 줄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라니.

오메가가 내뿜는 페로몬이라는 거, 생각보다 아주 강력했다.

적어도 태어나 처음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껴 본 아르카이츠로서는 뺨을 때려도 기분이 좋을 만큼 정말 강력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한데 르네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자각도 없는 듯하고, 자신이 내뿜는 그 미치도록 단 페로몬 역시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제국 내에 오메가가 극히 드물다지만, 그래도 피어스 공작이나 되는 이가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도 모를 리


없고.

만일 제 아들이 오메가라는 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아르카이츠는 적어도 자신이 배워 온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지식에서, 르네는 꽤나 예외인 점이 아주 많다


확신했다.
제국 역사상 사내가 오메가였던 적이 없어서 예외인 부분이야 많겠다만.

‘잠깐 그럼 페로몬이 나왔다는 건, 르네가 지금 히트 싸이클이라는 건가?’

근데도 저렇게 자각 없어 뵈는 것은, 르네는 진짜 자신이 오메가라는 자각이 없는 것은 물론 피어스 가문의 그


누구도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르카이츠는 여전히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황궁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덕분에 뒤따르던 보좌관과 시종들 역시 그 뒤에 일렬로 멈춰서 그의 눈치만 봤다.

아까 전 황태자비에게 뺨을 맞은 이후부터 줄곧 침묵한 채 무서운 얼굴로 어딘가로 향하던 황태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침을 꼴깍 삼켰다.

아르카이츠는 무심하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제 보좌관을 불렀다.

“벤자민.”

“예, 황태자 전하.”

보좌관이 후다닥 그 옆으로 와 고개를 숙이고 경청하려는 자세를 하자, 아르카이츠가 물었다.

“나 왜 맞았나?”

“…예…?”

“황태자비가 이유 없이 내 뺨을 갈기진 않았을 거 아니야.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아직도 부어올라 있는데. 대체


나 왜 맞은 건가?”

“…….”

보좌관이 대답하지 못하자, 아르카이츠는 뒤돌아 시종들에게 물었다.

적어도 누구 하난 이유를 알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금 르네를 찾아가 나 왜 맞았느냐 물어봤자 또 따지러 온 줄 알고 미운털이 박힐 게 분명하니, 조금이나마


미움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내가 왜 뺨을 맞았는지 아는 자가 있는가? 소리가 매우 컸을 텐데. 아는 사람 없나?”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저희의 불찰이옵니다!”

그러자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르카이츠는 곤란한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정말 몰라서 물은 것뿐인데 아마 그의 위압감 때문인 걸까.

어째 하나같이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떨며 ‘황태자비가 뺨을 갈기는 동안 구경만 했다,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아르카이츠가 엄포를 놓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죄를 물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가 맞은 이유를 기억하지 못해서다. 내 잘못도 모른 채 사과할 순 없잖아.”

“전하, 정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진짜 기억 안 난다니까.”

완전히 페로몬에 취한 상태였던 아르카이츠는 제가 왜 맞은 줄도, 무슨 말을 했기에 그리 르네가 화를 낸 건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이게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모른 척한 것이 아니구나, 깨달은 보좌관이 잠시 고민하다 슬쩍 아르카이츠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것이 말입니다, 전하. 저희도 확실하진 않지만… 전하께서 황태자비 전하께… 냄새가 난다 하셨던 것 같은
….”

그제야 아르카이츠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미움받았겠군.”

“…조금은…. 그, 그치만 실수였다 사과하시면 받아 주실 법도 한데요!”

“그걸 지금 위로라 하는가, 벤자민.”

“…죄송합니다, 전하.”

“정식으로 사과는 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아르카이츠가 성큼성큼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좌관과 시종들 역시 일제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결국 보다 못한 보좌관이 슬며시 아르카이츠에게 말했다.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계신 곳은 이쪽 길이 아닙니다만….”

“알아.”

“여, 여긴 황제 폐하가 계신 곳 아닙니까?”

“맞아.”

“예? 하나, 사과하러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보좌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대체 황태자비에게 사과하러 가는 것과 병석에 누워 있는 황제를 찾아가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지.

그러나 아르카이츠는 친절히 설명해 주는 대신 언제나처럼 픽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 *

르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있는 힘껏 발을 쿵쿵대며 제 처소로 돌아왔다.

그 뒤를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오는 황궁의 시녀들은 대체 무슨 일인지, 어찌하여 황태자의 뺨을 때린 것이냐며


물어 댔다.

하지만 르네는 애나를 제외한 황궁의 시녀들을 죄다 물린 뒤 한참을 저 혼자 씩씩댔다.

애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르네의 손등을 토닥였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화가 나셨어요?”

“…애나. 나한테서 무슨 이상한 냄새 나?”

“네? 냄새요?”

“응. 빨리. 땀 냄새 심해?”

르네는 친히 제 가슴팍의 옷을 펄럭이면서까지 애나에게 체취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애나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슬그머니 코를 킁킁대며 르네에게서 무언가 냄새가 나는가 유심히 맡기 시작했다.

킁킁, 킁킁킁.

후각이 좋은 애나였지만 딱히 악취라든지, 쿰쿰한 땀 냄새라든지, 또 시큼한 냄새라든지 그런 것보다는.

“땀 냄새는 안 나고, 되게 좋은 향이 나는데요?”

“악취 안 나?”

“네. 전혀요. 왜 그러세요?”

“아 씨, 그 인간은 왜 나보고 냄새난다고 해서….”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그제야 애나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르네 님한테 냄새가 난대요?”

“그래. 엄청 독한 냄새 난다고 했다니까? 아무리 봐도 이거 일부러 나 수치 주려고 한 말 맞지? …아닌가? 혹시


애나, 나 냄새나는데 안 난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나 불쌍해서 그런 말 해 주는 거 아니지?”

르네는 그렇게 말하며 얼른 다시 한번 제 팔뚝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르네가 이렇게까지 체취에 대해 예민한 것은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르네는,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곤 했다.

단순한 감기라고는 하는데, 감기라기엔 그냥 열만 펄펄 끓듯이 났고 하루 이틀 정도 앓은 뒤엔 말끔히 나았기


때문에 르네 역시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다.

한데 5 살 무렵이었던가.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이상한 냄새?”

“응. 그래서 너랑 안 놀래.”

“……”

“얘들아. 우리 르네는 껴 주지 말자.”

“그래그래! 쟤한테서 이상한 냄새 난다니까? 너 안 씻어?”

“얼레리꼴레리, 르네는 안 씻는대요! 안 씻는대요, 안 씻는대요!”

“고약한 냄새야! 너 옆에 있으면 기분 이상해져서, 싫어. 너 저리 가.”

어릴 때부터 낯을 가리긴 했어도, 이 사건 전에는 곧잘 무리에 어울리던 르네였다.

태생이 사랑스럽게 생긴 외모인지라, 가만히 있어도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르네한테서 냄새가 난다 말하더니, 이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며 소위 말하는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15.

상위 귀족가의 자제들은 르네를 놀리기 시작했고, 르네는 냄새난다는 말에 충격받은 뒤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작은 몸을 씻겨 달라 부탁하곤 했다.

워낙에 어린 시절이라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게 나진 않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아델라이드의 말에 따르면.
“냄새가 나긴 무슨 냄새가 나? 뽀얀 아기 궁둥이 냄새만 나는구만! 뭘 안 껴 줘? 보잘것없는 너희들이랑 우리
르네가 놀겠냐? 우리가 먼저 너네 따돌리는 거야!”

아델라이드가 곧장 와서 사내아이 코를 때리며 소리치는 바람에 일단락되었다고 했다.

물론 고작 어린 시절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 때문에 르네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사춘기가 찾아올수록 르네의 이 ‘체취’에 대한 예민함은 점점 심해졌다.

“르네. 너 향수 뿌렸니?”

“왜, 누이? …나 혹시 냄새나?”

“…절대 악취는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둬.”

“나 씻으러 가야겠다.”

“야! 다들 향수 뿌리고 난리 나는데 너는 향수 안 뿌려도 좋은 향 나는 게 뭐가 그리 질색이라는 거야!”

가끔은 이게 대체 무슨 향이지? 누가 이렇게 좋은 향수를 가진 거야? 하며 아델라이드가 코를 킁킁대면 어김없이


르네한테서 나는 향이었다.

“그냥 몸에서 냄새나는 게 싫을 뿐이야!”

“냄새 아니라니까! 향기라고, 향기! 나 참, 쟤는 저 축복받은 체취를 왜 저렇게 싫어하는지 몰라.”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이 되면, 보통은 꿉꿉하고 시큼한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독한 향수를


마구잡이로 뿌려 댔다.

그게 오히려 더 역한 냄새를 풍기고 마는 극악의 계절인데도 르네는 땀을 흘리면 오히려 향기가 짙어지기 일쑤였다.

아델라이드는 그런 제 동생이 부러울 뿐이었다만. 정작 르네는 여름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을 끼얹었다.

여름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르네는 꼭 여름마다 걸렸다.

“누이가 내 입장이 아니라 그래. 변태들이 얼마나 꼬이는지 알아? 다들 이상한 소리나 해 대고…. 저번에 어떤
미친놈은 내 몸에서 나는 체취로 향수를 만들겠답시고 공격하려 했다니까!”

“그런 향수 나오면 나도 좀 사고 싶다, 얘.”

“누이!”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르네는 이 이상한 체질을 고치기 위해 탕약도 먹어 보고, 별짓을 다 해 봤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향기는 점점 더 독해져서 어쩔 땐 마치 꽃들 사이에 파묻혀 질식할 정도로 심한 향기가


난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었다.

르네의 유일한 친구 헉슬리와 알빈, 루소 형제의 평가였다.

“뭐, 좋게 생각해. 영애들은 네가 그래서 더 꽃 같은 사내라잖냐.”

“부럽다. 꽃 같은 사내라 불려도 보고.”

“맞아. 보통 땀 흘리면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너한테선 오히려 상큼한 냄새가 나니 좋은 것
아니겠냐, 상큼아.”

“상큼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하지만 르네는 꽃 같은 사내라든지, 상큼이라든지, 달콤이라든지, 흰둥이라든지, 아무튼 그런 수식어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르네가 바라는 남성상은 딱 하나였다.

누가 봐도 테스토스테론 풍기는 그런 사내.

그러니까,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햇빛 아래에서 육체미 뽐내며 노릇하게 구워진 피부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것들만 보면 부러워 미치겠단 말이다.

“피어스 영식은 정말 너무 꽃같이 아름다운 사내예요.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지켜 주고 싶달까…. 이런 게


모성본능 자극한다는 걸까요?”

“어머. 맞아요. 뭔가 믿음직스럽다기보다는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죠!”

“보기만 해도 흐뭇하죠?”

“맞아요. 꼭 아들을 낳으면 이런 감정이지 않을까 싶어요. 오호호!”

“맞아요! 어쩜 그리 향기도 좋으신지. 향수 같은 건 따로 쓰지 않으신다던데. 어쩔 땐 꽃향기가 나는 것도 같고,


또 어쩔 땐 아기 분유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그래서 곁에 있기만 해도 기분이 묘해진다니까요.”


영애들 앞에서 좀 믿음직스러운 사내가 되고 싶은데, 이상하게 영애들은 르네를 아주 귀여운 막내 남동생 혹은
미래에 태어날 아들이 곱게 자란 취급을 해 대곤 했다.

다들 르네를 좋아라 하지만, 그 좋아함이 이성적인 좋아함보다는 애완견을 예뻐하는 것과 같은 결이었다.

아마 그런 취급에는 자신의 이 향기 폴폴 나는 특이체질도 한몫한다 생각하는 르네였다.

그래서 르네는 누군가 제 체취를 맡고 말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려 했다.

이 이상한 체질 때문에 가끔씩 변태들이 들러붙는 경우도 있었거니와.

르네가 말한 대로 일전에 미친 향수 조향사 놈이 르네의 체취를 채취하여 향수를 만들겠다며 공격하려던 사건이
있던 이후부터 르네는 완전히 집돌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상태에서 오늘 낮에 있었던 아르카이츠의 발언은 르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렇게 참을 수 없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독한 냄새’라 칭하는 것은 더욱이 순하디순한 르네를
단번에 앙칼지게 만들었다.

“정말 냄새 안 나요, 전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진짜? 진짜 냄새 안 나? 나는 냄새가 난다는데도 자각을 못 해서…. 진짜 안 나는 것 맞지?”

르네는 몇 번이고 다시 한번 맡아 보라며 애나에게 제 팔을 들이밀었다.

사실 애나는 ‘꽃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아기 궁둥이처럼 뽀송한 분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요.’ 대답하고


싶었지만 꽃향기, 혹은 분 냄새 등은 르네에게 있어 금기어나 마찬가지였기에 이번에도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정말 아무런 냄새도 안 나요. 여름이라서 땀 냄새가 아주 살짝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땀 냄새 나?! 그러니까, 막 이상한 향기 말고. 보통의 사람들한테서 나는 땀 냄새 말이야.”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에 애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자, 방금 전까지 죽상이었던 르네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아, 드디어 나한테서도 보통의 땀 냄새가 나는구나!

“아니, 사람이 땀 좀 흘릴 수 있지. 저는 뭐 땀 냄새도 안 나나. 뭐 그런 걸로 냄새가 난다고 뭐라 하고


그러냐.”

“그러게요.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하셨네요.”

“이럴 땐 그런 말을 들은 게 누이가 아닌 나라서 다행이기도 해. 일부러 우리 누이 수치 주려고 한 말일 거야.


그 인간 습관성 희롱이라니까. 분명 우리 누이 질리게 만들어서 떠나게 만들 생각인 거지.”

그래.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

르네는 저 혼자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 그렇게나 저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르카이츠 아니었던가.

당장이라도 잡아먹겠다는 양, 그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눈빛을 한 아르카이츠는 어쩌면 정략혼을 어떻게든 파하기
위해 누이에게 이런 식으로 일명 ‘꼽 주기’를 하는 것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누이 성격에 가만히 앉아 참기만 할 사람은 아니니, 만일 황태자비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면, 이 제국에서
결국 욕을 먹는 것은 누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감히 황태자를 차 버린 기고만장한 아델라이드.

현모양처가 불가능한 아델라이드.

귀족들이 수군댈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

애초에 아르카이츠는 이혼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그래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성질을 살살 긁고 있는 것이
분명한 거다.

암, 그렇고말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모든 행동들에 개연성이 없지 않나.

사내를 좋아한다던 놈이 첫날밤에 그렇게 저돌적이게 굴어?

입만 열면 희롱에, 게다가 뭐, 사람을 코앞에 두고 냄새가 난다고?

아무리 봐도 누이를 질리게 만든 뒤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심산이 분명했다.

절대 그렇게는 두고 못 보지.

황태자비가 황궁을 나가는 건, 제 발로 이곳을 박차는 것이 아닌, 아주 비극적인 사고로, 황태자의 무심함에
외로이 죽어 나가는 것뿐일 거다.

피어스 가문이 동정을 받으면 받았지, 절대로 손가락질당하지는 못하도록.

손가락질당하는 것은 오로지 저 심술궂은 황태자뿐일 거다.

“두고 보자, 내가 못 할 줄 알고.”

이상한 부분에서 이를 가는 르네였다.

그리고 그런 황태자비를 불안한 눈빛과 거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애나였다.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아, 어째 르네 님이 자꾸만 각성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 못 하겠어, 집에 돌아갈래, 우리 그냥 사실대로 말하자.’ 하며 앓는 소리 내는 르네보단 묘하게 어떻게든


이 미친 연극을 이어 나갈 의지를 보여 주는 르네가 훨 낫지 않나 생각했다.
#16.

일단은 르네가 투지를 불태우는 동안 옆에서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기로 한 애나였다.

피어스 공작 내외도 그걸 바라는 것 같으니.

어쩌겠나.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르네는 계속해서 아르카이츠 전용이 되어야 하는 것을.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르네는 덥다며 훌렁 치마를 들어 올리고, 브래지어 안의 손수건들을 죄다 빼놓은 상태였기에 허겁지겁 치마를
내리고 손수건들을 다시 꾸역꾸역 가슴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밖에 나가 본 애나가 화들짝 놀라 얼른 방으로 들어와선 르네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예요!”

“뭐? 아니 왜! 설마 따귀 때린 거 따지러 온 건가?”

내심 불안한 르네였다.

사실 살면서 사람 때려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인지라 아직도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전하, 가발…!”

애나가 작게 속삭이듯 소리치며 머리통을 가리켰다.

르네는 얼른 거울을 보며 가발이 비뚤어지진 않았는지 매무새를 점검하고 난 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가성 낼


준비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준비 완료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아르카이츠의 얼굴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르네는 그 모습에 아까 전 따귀를 날리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조금 창백하게 질린 채로 꼿꼿이 허리를 세워
긴장한 듯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새침하게 물은 르네는 슬쩍 눈을 흘기며 제 남편을 쳐다봤다.

의자에 앉아 있어 시야가 낮아 그런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르카이츠가 어찌나 거대한지….

꼭 거대한 성벽이 앞에 드리운 듯한 느낌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먼저 때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누이의 자존심과도 연관되는 일.


피어스 가문의 아델라이드는 저에게 수치 준 이에게 복수를 하면 했지 절대 먼저 허리 굽히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근데 뺨이 좀 많이 부었네. 내가 이렇게까지 세게 때렸었나…? 나 생각보다 손아귀 힘이 좀 있긴 한가 봐…!’

붉은색 손자국이 여전히 그의 왼쪽 뺨에 나 있었다.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부기가 빠지지 않은 모습에 르네는 제 힘이 꽤나 셌구나, 나름 뿌듯해하면서도, 또


온 황궁에 황태자비가 황태자의 뺨을 때리다 못해 갈겼다는 소문이 날까 이제 와서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많이 아프겠지…? 쌤통이긴 한데 설마 이걸로 트집을 잡는다거나, 나한테 뭔가 불이익이 온다거나… 그렇진
않겠지? 근데 표정이 뭐 저렇게 위협적이야. 설마, 보복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저 두툼한 손으로 따귀
맞으면 내 목 돌아갈지도 모르겠는데…?’

그 순간 뒷짐을 지고 있던 아르카이츠가 손을 휙 공중에 들어 올렸다.

르네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꼭 감았다.

한데 왼쪽 뺨에 불에 데는 듯한 고통이 들지 않는다.

어째 소리도 조용한 것이….

아니면 너무 세게 맞아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가? 혹시 나 기절한 건가?

아델라이드 닮은 성질머리에 그렇지 못한 유리 멘탈을 가진 르네가 슬쩍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아주 탐스러워 보이는 새빨간 사과였다.

이게 뭐야? 하며 곧장 위를 올려다보자, 그 사과를 들고 있는 아르카이츠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사과를 받아 줘요, 부인.”

“…엥?”

뭐야, 저게?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당황한 것은 르네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서 있는 보좌관이며, 시종들이며, 하물며 르네 옆에 있던 애나까지 모두들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들이 지금 맞게 들은 건가, 제 귀를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이거, 놀리려는 건가? 아니면 진짜 사과를 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저 사과를 들이민 거고? 설마 이거
고급 유머니 뭐니 이런 건 아니겠지…?’

르네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아르카이츠와 사과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아르카이츠는 제가 무슨 백설공주의 거울마녀라도 된 양, 생긋 웃으며 독사과를 권하듯 다시 한번 르네


앞에 사과를 들이밀었다.

받으라는 건가? 이걸 받으면, 나는 지금 아르카이츠의 사과를 받은 건가, 아니면 먹는 사과를 받는 건가?


혼란 속에 빠진 르네는 엉겁결에 그가 건넨 붉은 사과를 받아 들었다.

“사과 받아들였으니 그럼 우리 화해한 겁니다, 부인?”

“…….”

뭐지, 이 또라이는?

르네는 아주 이상한 것을 쳐다보듯 인상을 구길 대로 구기며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

“자, 사과 받아 줬으니까 우리 화해한 거다?”

“…우응…? 그게 그렇게 되는 고야?”

“당연하지. 자, 이제 손 이리 내. 다시 잡게.”

“…웅.”

분명 어디선가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주 어린 시절의 누군가라는 것 말고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르네는 그저 데자뷰일 뿐이라 치부했다.

지금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것보단, 이 황당하고 얼어붙은 상황을 어찌 헤쳐 나갈지가 우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과 받아 주었으니 화해한 것이라며 미소 짓는 아르카이츠의 입꼬리에 분명한 꿍꿍이가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식동물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예민한 탐지력 같은 것.

그러니까 적어도 저 멀리서 맹수가 몸을 숨긴 채 저를 호시탐탐 사냥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르네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거 뭔가 함정 같다. 사과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 생각이 들자 르네는 엉겁결에 받아 든 사과를 냅다 집어 던졌다.

사과가 공중에 붕 뜨는 순간 모두의 표정이 하나같이 ‘황태자비께서 사과를 거절하셨다! 심지어 사과를 집어
던지셨다! 우린 다 죽었다!’ 같은 얼굴을 했으나….

사과는 공중에 붕 뜬 뒤 매우 안정적으로 아르카이츠의 손에 떨어졌다.

르네의 얼굴 반만 한 커다란 사과를 작은 꼬마 사과쯤 보이도록 큰 손으로 한 번에 받아 든 아르카이츠는, 조용히


사과를 내려다보다 이내 씩 미소 지었다.

“부인이 냅다 뺨을 갈긴 것에 대한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사과할 마음도 없는데 멋대로 사과를 받아 주겠다며, 아그작, 사과를 씹어 먹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르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허….”

아무래도 이 인간, 제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이렇게 치사하고 유치하게 사람 괴롭혀서, 어떻게든 제 발로 뛰쳐나가 본인은 무결하게 이혼당한 남편인 척하려는
거지?

네 계획대로 쉽게 나가떨어져 주지 않을 거다.

우리가 이혼하는 건, 내 누이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거지, 네 등쌀에 밀려 나가는 건 절대 아니니까!

내 누이는 절대로 이런 식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다!

“사과를 할 마음은 없었는데, 알아서 받아 주시니 수고를 덜어 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

“정 없게 전하라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 부인.”

“아닙니다, 전하. 제가 어찌 전하의 이름을 막 부를 수 있습니까.”

“아델라이드.”

“네, 전하.”

“아델라이드. 내 이름 모릅니까?”

“알기야 알죠. 굳이 입에 담을 필요 있을까요? 이름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걸요.”

“생각보다 뒤끝이 있네. 냄새가 난다는 게 사실 그런 말이 아니라―.”

“생각보다 변명을 하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전하.”

르네의 내성적이고 유순함은 사실, 아델라이드가 평소에 대신 지랄맞게 굴어 르네가 지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을.

르네는 20 년 만에 처음으로 제 본성격을 마주하게 되었다.

빨리 꺼져, 가성으로 말하기 힘들단 말이야.

르네는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최대한 제 누이가 짓던 가식적이고 아름다운 미소를 따라 지으며 생글생글,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이번엔 아르카이츠가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르네를 쳐다보다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친해지면 그땐 이름을 불러 주는 걸로.”


“생각이야 해 볼게요. 한데, 용건이 더 남으셨을까요.”

사과하러 온 것뿐이면 받아 주었으니 냉큼 꺼지라는 가시를 숨긴 채 방긋방긋 미소 짓는 르네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르네 머리 위에서 노는 아르카이츠였다.

그는 그저 단순히 사과를 전달하기 위해 온 배달꾼이 아니었다.

“용건이야 이제부터 본론이지.”

그의 대답에 르네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아니 이제부터 본론이면, 지금까지는 서론이었단 말이야? 대체 뭘 더 하려고? 또 무슨 또라이 짓을 하려고?

르네는 아주 질린 듯한 얼굴로 제 남편을 쳐다봤다. 어째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오늘부터 합방을 할 예정이니, 본궁으로 들어오세요, 부인.”

#17.

“…….”

“해서 지금부터 짐을 옮기는 동안, 아까 전의 오해도 풀고자 데이트를 신청하는 바인데.”

“…….”

“별 대답 없는 걸 보니 동의하는 듯싶으니, 다들 시작하게.”

“아, 아니. 잠, 잠깐,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침묵은 곧 동의 아니겠소.”

“아니, 손은 왜…!”

“갑시다, 부인.”

뻔뻔스러운 아르카이츠는 무어라 부정하기도 전에 얼른 의자에 앉아 있던 르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구두가 아파 드레스 자락 안에서 신발을 벗은 상태였던 르네는, 그대로 그의 어깨에 덜렁 들려졌다.

“내 신발!”

“챙겼어, 이미. 발이 아프면 내가 계속 안고 가지.”

아르카이츠는 실실 웃는 얼굴로, 한 손에는 주인 잃은 구두를, 반대쪽 어깨 위에는 르네를 둘러업은 채 그대로


방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애나아아아!”

아르카이츠가 뒤돌자 창백하게 질린 르네가 절규하며 시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애나는 그저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살짝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방을 나가자 보좌관은 잠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뒤따라온 시종들에게 황태자비의 짐을


모조리 본궁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애나는 슬그머니 보좌관 옆으로 가 물었다.

“정말 황태자 전하랑, 황태자비 전하랑 합방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하더군요.”

“…계속요?”

“아무래도 그럴 듯싶습니다만.”

“…낮에도, 밤에도요?”

“예? 합방이라는 게 낮에도 밤에도 같은 방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애나는 멋쩍은 듯 괜히 머리를 꼬아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아 시발 망했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 * *

“나 코 고는데.”

“상관없어.”

“이도 막 가는데.”

“상관없어.”

“막, 뒤척이다가 때릴지도 모를걸요?”

“상관없어.”

“…에잇, 나 몽유병 있다고요!”

“모든 건 다 사랑으로 인내할 수 있는 법이지.”

“허, 언제부터 사랑했다고 인내를 한대? 일단 나 좀 내려 달라니까!”


“발 아파서 신발 벗은 주제에, 걸을 수나 있겠어?”

“…갑자기 위해 주는 척은….”

르네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기가 막혀 바람 빠지는 소리를 줄곧 내기 시작했다.

허, 참, 하, 허허!

하지만 그러든 말든 아르카이츠는 르네를 어깨에 턱 얹고는 여전히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까 전부터 내려 달라 버둥대던 르네의 말도 무시한 채 걸어가는 행동에, 창피함은 오롯이 르네의 몫이었다.

무슨 말 안 듣는 어린애 덜렁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려 달라 소리를 치고 사정을 해 봐도 그는 꿈쩍 않았다.

결국 르네는 야외 정원 벤치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의 어깨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르네는 곧장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난 합방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이미 짐들 옮기고 있을 텐데.”

“그럼 다시 되돌려놓으라 해요. 아니, 합방이라는 건 공식적인 날짜 외에는 안 하는 거라면서,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서로 사생활은 지켜 줘야 할 것 아니에요!”

르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카이츠와의 합방을 피할 생각이었다.

아니, 피해야만 했다.

만일 그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다면….

그나마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가발이며 브래지어며 벗어 던져 얻는 아주 조금의 자유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만일 첫날밤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면?

수면제를 먹이든, 진탕 취하게 만들든, 그런 것도 한두 번 통할 뿐.

어찌 매번 요리조리 피할 수 있을까.

아무튼 아르카이츠와 합방을 하게 되는 날에는 르네의 목은 물론 피어스 가문이 몰락하는 날이라 봐도 무방했다.

“부부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 부부는 한마음,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나와 부인 사이가
하루빨리 돈독해져야 원자도 생기고, 제국의 백성들도 굳건해진 황태자 부부의 모습에 안심할 것 아닌가.”

“…아뇨. 싫어요. 전 벌써부터 합방하고 싶지 않은데요.”

합방하게 되면 잘 때도 브래지어를 차고 그 안에 솜이든 수건이든 뭐든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덥고 불편해서 어찌 자라는 거야.

게다가 가발도 쓰고 자야 한다.

그야말로 끔찍 그 자체.

게다가 르네는 잘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야지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여 ‘합방’이라는 말은 그저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르네 머리 위에서 노는 것이 아르카이츠였다.

“참 이상하군. 이전과 말이 영 다르잖아, 아델라이드.”

“…예?”

“진짜 아델라이드 맞나?”

“…….”

“내가 알던 그 아델라이드와는 전혀 다른데. 일전에 우리가 나눴던 대화, 잊은 건가?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텐데.”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한껏 당황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합방을 피하려다 되레 더 들킬 위험에 놓이고 말았다.

누이가 황태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다는 거지?

그저 초상화만 보고 만남 없이 곧장 식을 올린 것 아니었나?

“아델라이드. 우리가 일전에 나눴던 계약은 잊은 거요?”

“계약….”

“그래. 계약. 당신이 가족들까지 속여 가면서 한 계약 말이야. 난 그때의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그 계약에
서명한 건데. 어째 그때의 당신과는 영 다른 게, 꼭 아델라이드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렇게 말한 아르카이츠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르네를 쳐다봤다.

르네는 한껏 당황한 얼굴을 겨우 숨기곤, 누이의 그 콧대 높은 모습을 어찌어찌 기억해 내 따라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언제나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부채를 촥, 펴며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이 세상에 나 말고 또 누가 감히 아델라이드인 척할 수 있단 말이죠? 물론, 그 계약이라는 거 기억하고


있어요.”

이 정도면 르네 수준에서는 아주 최상급의 연기였다.

살면서 또 이런 대단한 연기를 하게 될 날이 올까.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뻔뻔한 모습과는 달리 르네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뒤죽박죽, 아수라장이었다.
‘아 씨, 망했다. 망했어! 누이가 대체 언제 이 또라이를 만나서, 또 언제 계약을 한 거야? 대체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지? 뭐지? 황태자를 상대로 사채라도 끌어 쓴 건가? 그게 아니면 대체 무슨 계약이냐고! 누이,
도망치기 전에 한 짓은 말해 주고 갔어야 할 것 아냐!’

아르카이츠는 부채를 살랑거리는 르네를 바라보며 픽 웃음을 지었다.

또 단내가 점점 진해지는 걸 보면 당황하여 땀이라도 흘리는 걸까.

당황스럽겠지. 갑자기 비밀스런 계약을 들이미니.

무슨 계약인지 아주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

또 제가 아델라이드가 아닌 것을 들킬까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

레이스 부채 너머 르네의 얼굴이 곧바로 상상됐다.

조금 더 놀려 먹을까, 아니면 지레 겁먹고 애먼 짓 하지 않게 여기서 그칠까.

마음 같아서는 전자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초식동물 중의 초식동물 르네였다.

더 몰아붙였다간 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대롱대롱 달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르카이츠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약을 잊은 게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그 계약에 합방이 있는 건 당신이 제안한 일이잖아.”

“내, 내가?”

“그래. 당신이 말했잖아. 원자를 낳아 주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조건을 걸지 않았나. 그때 그 말을 돌려주자면.
‘나는 세 번 이상 하는 놈이랑만 합방한다.’라고.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다니까.”

“…….”

오, 신이시여. 누이가 정녕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부채질을 하는 르네의 손이 빨라졌다.

“기억하는 거 맞지?”

“아, 물론이죠. 그랬죠. 원자를 낳아 준다고… 세, 세 번 이상 하는 놈이랑만 합방한다고. …근데, 그때와


지금과는 경우가 조금 다른 게. 지금 제 몸이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라 당장 합방은 좀 무리일 듯해요.”

“몸이 좋지 않아?”

“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어쩐지 물도 안 맞는 느낌이 들고… 잠자리도 뒤숭숭하고. 겨우 지금
침실에 적응했는데 또 잠자리가 바뀌면 더 예민해질 것 같은데요? 제가 잠버릇이 험한 만큼 잠자리에 예민하기도
하여.”

“그래서. 지금 합방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18.

“전하께서도 건강한 원자를 낳길 바라시는 것 아닌가요?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제 몸이 우선 건강해야겠죠.”

“이미 짐 다 옮겼을 텐데.”

“그러니까 누가 상의도 없이 명령하래요.”

“일을 두 번 하는 게 효율적이진 않지. 어차피 합방은 하게 되어 있고, 그저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것뿐이잖아?”

“…그렇긴 한데. 난 아직 좀 더 마음의 준비가….”

“당신답지 않게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래. 그럼 몸이 좀 나아질 때까지 잠자리는 갖지 않는 걸로 하지.”

“…….”

“어차피 합방하면 한 침대 쓸 거, 이제부터라도 붙어 자는 연습을 해 보는 게 어떻겠어.”

“…….”

“나쁠 거 없잖아. 몸 부대끼고 자는 거.”

“난 더위를….”

“어차피 부부 사이에, 알몸으로 자도 상관없어. 나도 알몸으로 자는 편이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 물론 서로 알몸을 보이면 흥분이야 되겠지만.”

“…….”

“당신이 싫다면 억지로 잠자리를 갖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당연한 소리를 일일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은
무슨, 날 무도한 이인 양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야 그렇게 입만 열면 희롱을 해 대는데.”

“희롱이 아니라, 진짜로 섹시해서 섹시하다는 건데. 딱히 없는 말 한 것도 아니잖아?”

“…….”

“문제없는 거지, 그럼?”

“하아….”

결국 르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려 봤자 원하는 바를 얻진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뭘 하든 합방은 피할 수 없어졌고.

계약이 정확히 뭔지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할 때였다.

르네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할 일은 이제 하나뿐이다.

빠른 시일 내에,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누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저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것.

“르네. 잘 기억해 둬.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절대 굴복해서가 아니야. 그건 달려들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지. 알아들었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굴복하기 위해 무릎 꿇지 말란 말이야.”

아무튼 지금 아르카이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결코 굴복함이 아니다.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인 거다.

원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지.

그 말은 같은 맹수에 해당되는 종족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모른 채, 감히 초식동물 중의 초식동물 르네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말았다.

“근데, 왜 갑자기 합방을 추진한 거예요?”

르네는 억울한 마음에 이유라도 알자 싶어 슬그머니 물었다.

원래 황궁 법도에 따르면 합방은 저들 원할 때 아무 때나 하는 그런 쉬운 게 아니었다.

적어도 원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천문학자들과 주술사, 연금술사들을 모두 모아 가장 성스러운 날을 꼽아 그날에


합방을 치른다고 하지 않았나.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와 그의 비는 단순히 서로만의 욕구를 위해 합방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가진 권력과 명예만큼이나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우며, 또 신성시되어야만 했다.

“황궁 법도가 이렇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였냐고요.”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묻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최대한 많이 해서 최대한 빨리, 원자를 만들고 싶다고.”

“…….”

“알다시피 지금 황제께서는 많이 유약해지신 상태니, 나와 파비안이 자리를 승계한다 하더라도 제국은 흔들릴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동안 원자가 태어난다면, 이건 나라의 경사일뿐더러 아직 황실의 건재함을 보여 주는
것이니 정치적으로도 아이는 꼭 필요하지 않겠나.”
“…….”

르네는 괜히 물어봤다고 후회했다.

아, 그러니까 이 사내는 정치적인 이유로 누이와 혼인하고, 또 정치적인 이유로 아이를 원하기에 잠자리를 갖는
거였군.

고위 귀족이라면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요구 사항이었지만 르네는 어쩐지 더더욱
아르카이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어쩌냐, 난 남자라서 애도 못 갖는데. 빨리 죽은 척 위장이나 해야겠네. 이러다 진짜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아.’

그런 르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 아르카이츠가 씩 미소를 지었다.

르네는 어째 제 마음이 읽힌 듯하여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묘하게 기분 나쁘다니까. 꼭 내 머릿속을 헤집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황태자였다.

기분 나쁘고 묘한 인간이니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르네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 * *

아르카이츠가 이런 갑작스런 합방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르네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제 신부는 오메가라는 자각도 없는 듯하고, 또 페로몬을 내뿜는다는 자각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조절하는
방법도 모르는 듯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메가라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겪는다는 발정기, 즉 히트 사이클을 르네에게선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

하나는 피어스 가문에서 르네의 히트 사이클을 르네 본인조차 모르도록 숨겨 오며 몰래 몰래 약을 먹여 왔거나.

혹은 피어스 가문조차 르네가 오메가라는 것을 몰라, 이렇다 할 억제제도 먹지 않아 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경우.

아르카이츠는 아마 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리 가족들이 함구를 했다 해도 본인의 몸에 대해 이렇게나 모를 수 있을까 싶지만.


만일 르네가 열성 오메가라면 이 모든 의문의 해답이 생기는 것이다.

열성 오메가는 기존의 오메가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들었다.

아르카이츠는 전혀 자각 없는 제 아내에게 다가올 큰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마냥 모른 척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판단했다.

아직 제대로 된 히트 사이클을 겪어 본 적 없이, 그저 약이든 뭐든 어영부영 넘어간 열성 오메가가 아주 늦은


히트 사이클을 맞게 된다면….

르네같이 겁 많고 눈물 많은 이는 분명 경기를 일으킬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무리 아르카이츠가 이성을 유지하려 애쓴다 한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페로몬을 마구잡이로 내뿜는
르네를 눈앞에 두고 과연 참을 수 있을까.

르네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미약한 페로몬에 취해 따귀 맞은 줄도 모르던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오메가의, 그것도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을 그저 단순히 정신력으로 참아 내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어쩌면 르네의 페로몬만큼이나 자신의 성욕도 매우 위험천만할 수 있었다.

이제야 자기 객관화가 정확히 되는 아르카이츠였다.

하여 그는 병석에 누워 있는 헬리오스 제국의 황제를 찾아갔다.

아마 제 아버지만이 열성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제국 유일의 인물일 테니까.

침소에 들어가자 황제는 곧장 제 아들을 반겼다.

아마도 페트라 황후의 기일이 다가오는 만큼, 아르카이츠를 보면서 그는 제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릴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르카이츠는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뒤 곧장 아버지에게 물었다.

“열성 오메가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글쎄, 오메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는 바가 잘 없구나. 그저 히트 사이클이 온다는 것과, 페로몬을 내뿜으며


알파들을 유혹한다는 것 말고는.”

“황궁의 자료들은 마치 일부러 그 내용을 숨긴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자료를
지운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절 속이려 하지 마십시오. 페트라 황후가 제 어머니이십니다. 정녕 제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갑자기 찾아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정말 제 입 밖에 내야 합니까. 아버지가 숨기시려는 것,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요. 그냥 단순히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잖습니까.”

그저 단순히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아르콘 추장의 딸과 억지로 혼인한 것도, 또 서로 한눈에 반한 사이도 아니었다.

황제에게는 두 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나는 즉위를 위해 정략혼을 한 사일러스 공작 가문의 외동딸 에밀리 사일러스.

그로부터 몇 년 뒤 혼인한 아르콘 추장의 딸 페트라 아르콘.

제국은 일부일처제였다.

황제에게 두 명의 황후가 있었던 것은 에밀리 사일러스가 제 아들을 낳자마자 자살하여 공석이 생기고 말았고.

에밀리 황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황제가 곧장 페트라를 두 번째 황후로 앉혔기 때문이었다.

페트라 황후가 즉위한 바로 그해에 아르카이츠가 태어났다.

하여 이 셋의 이야기는 사실 불문율이기도 하나, 사실상 제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치정극이기도 했다.

#19.

제국의 귀족들은 아마 그것이 에밀리 황후가 진짜 오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페트라 황후가 황제의 진짜 오메가였으며, 둘은 운명의 장난으로 뒤늦게 서로를 각인한 것이었다고.

이를 견디지 못한 에밀리 황후가 분을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르카이츠는 진실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 황궁의 모든 이들을 속인다 하더라도 아르카이츠는 속이지 못할 거다.

오메가에게는 숨길 수 없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니까.

특히나 아르카이츠같이 우성 중의 우성 오메가.

그러니까, 제 어머니와 같이 아르콘 부족에서 대대로 가장 강한 알파의 힘을 이어받은 아르카이츠의 본능적인


직감을 속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속일 수 있대도, 전 속이지 못합니다, 아버지.”

“…….”

“그럼 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제 아내. 열성 오메가입니다. 게다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무어라?”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니라, 르네 피어스가 지금 여장한 채 이곳에 있는 겁니다. 남자 오메가에 대한 선례가


없었기에 피어스 가문 자체에서 함구한 건지, 아니면 가문에서도 르네의 체질을 모르는 건지. 그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요.”

“…그것이, 사실이더냐.”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고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자, 이제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실 차례입니다. 열성


오메가에 대한 정보, 알려 주십시오, 아버지. 이 제국의 알파와 오메가 역사에서, 열성 오메가는
아버지뿐이셨죠.”

그랬다. 오메가는 황제였다.

이 제국의 유구한 알파 황제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오메가 황제.

그것도 열성 오메가.

에밀리 황후는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그저 베타였을 뿐.

황제는 너무나 늦게 자신의 알파를 맞이하고 말았다.

정치적 이유로 아르콘 부족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온몸의 피가 빨려나가는 듯한 강렬한 느낌과 함께.

가장 강한 알파, 페트라 황후를 만난 거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모두가 몰라야만 했다.

헬리오스의 황제는 대대로 알파만 즉위가 가능했으니.

모든 이들이 황제 역시 당연히 알파일 것이라 생각했다.

황제는 열성오메가라 그런지, 오메가의 특징들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해서 자신의 진짜 체질을 악착같이 숨겨 왔다.

적어도 제가 죽을 때까지 그 모든 비밀을 안고 죽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페트라의 피를 물려받은 우성 알파인 아르카이츠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던 일일까.

황제는 자포자기하듯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아들에게 물었다.

“…페트라가 말해 주었더냐.”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하셨을 뿐이고요. 제가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것이 딱히 흠집이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니 말해 주십시오.”
하여 황제는 아르카이츠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제는 르네가 겪게 될 열성 오메가의 체질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제 아들에게 평생을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치부를 이런 식으로 들키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필이면 제 아들의 신부가 또 저와 같은 사내인 열성 오메가일 줄이야.

“…아르카이츠. 파비안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아니요. 저만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파비안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그래. 고맙다. 나는 파비안이 이 사실을 몰랐으면 한다. 어쩌면, 평생을 몰랐으면 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 파비안을―.”

황제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파비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하여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황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오메가는 임신을 시킬 수 없다.

출산의 능력만 있을 뿐, 그 씨를 뿌리지 못한다.

하여 에밀리 황후와의 잠자리를 거절해 왔고, 어쩌다 합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들 그저 형식적인 잠자리만


가질 뿐이었다.

한데 에밀리 황후가 회임을 한 것이다.

태어난 아이는 알파였다.

기묘하게도, 알파였던 것이다.

“폐하, 폐하와 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틀림없는 알파, 장차 이 제국을 호령할 알파 아이입니다.”

“수고했소, 황후. 정말… 고맙소. 고맙구려.”

고맙다는 황제의 말에, 에밀리 황후는 그저 눈물 가득 찬 눈동자를 들어 보여 씁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저 아이가 누구의 씨인지는 모르나, 품기로 했다.

오메가의 번식 능력은 오로지 출산뿐.


그 안에 다른 누군가를 임신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나, 알파 아들을 얻었다.

황제는 자신이 모두를 속인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여, 파비안의 친부를 찾아내어 황후와 함께 죄를 묻기보다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황후의 불륜도, 자신의 비밀도 모두 한곳에 파묻기로.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파비안이 태어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르콘 부족과의 영토 문제로 협약을 체결하고자 사막 지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황후는 이제 막 아이를 낳은 몸 아니오. 조금 더 쉬시오.”

“하지만 그 지독한 사막을 혼자 가시다니요. 차라리 가지 마십시오, 폐하.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듭니다. 가지
마십시오. 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르콘 부족과의 협약은 피할 수 없는 일. 내 하루빨리 다녀올 테니 황후는 걱정 말고


푹 쉬고 있으세요.”

에밀리 황후가 느꼈던 그 불안한 기운이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남편이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여자의 직감 같은 것이었을까.

그곳에서 황제는 아주 운명적으로 페트라와 만나게 된다.

그건 단순히 첫눈에 반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파와 오메가, 그 필연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아주 강렬한 운명의 끌림이었다.

원래 일주일간의 방문이었던 황제의 일정은 한 달로 길어졌다.

황제는 난생처음 억제제를 먹지 않았고, 그들이 페트라 아르콘의 자택에서 몇 시간을 함께했다는 소식은 사막의
바람을 타고 에밀리 황후의 귀까지 들어갔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에밀리 황후의 애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차가운 눈빛.

황제는 모든 것을 눈감아 주는 대신, 자신의 알파를 찾아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려 했다.

알파 아이를 낳으면 평생 이 황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오만이었던 걸까.

황제와 페트라가 함께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황후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황제는 파비안을 내치지 않았다.


페트라 황후 역시 파비안을 제 아들처럼 아꼈다.

어쩌면 에밀리 황후에 대한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하여 이 모든 사건들은 황제와 페트라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

결국 아르카이츠가 이 모든 사실을 알아 버렸다.

“아버지. 형님을 끌어내릴 생각 따위 없습니다. 이 커다란 제국을 독식할 생각도 없고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제 아내가 부디 겁먹지 않는 것뿐이니까요.”

아르카이츠의 말에 그제야 황제는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르카이츠는 이걸 빌미로 파비안의 출신을 문제 삼거나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그에겐 권력욕보다는 르네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아르카이츠는 제 아버지에게서 열성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었다.

그는 진실을 말해 준 것에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정중히 예를 갖춘 후 방을 나갔다.

남겨진 황제는 긴장했던 몸을 축 늘어뜨리듯 한숨을 내쉬며 침대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일단 제 비밀이 들킨 건 차치하고.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닌 르네 피어스가 아르카이츠가 각인한 오메가란 말인가.

남자 오메가는 아주 극히 드문데, 거기다 열성이기까지 하다니.

황제는 이를 대체 어찌해야 하나 싶어 고민이 깊었다.

무엇보다 피어스 공작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숨긴 것인지.

‘그는 내 치부를 알고 있는 이이기도 하지 않나.’

그래서 숨긴 걸까.

제 아들이 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어쩌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르니까.

#20.

열성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늦게 오는 만큼 내뿜는 페로몬의 강력함은 배가된다고 한다.


물론 이건 오메가마다 달라서 쉽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르네처럼 가만히 있어도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열성 오메가라면….

어쩌면 평범한 열성 오메가로 치부할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황제의 말이었다.

보통의 열성들은 페로몬이 옅거나 거의 없으니까.

“아니면 네가 각인한 상대라 유독 더 짙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지. 나 역시 열성이라 페로몬이랄 것이 거의


없었는데도, 페트라는 한눈에 알아봤다 하더구나.”

아직 헬리오스 내에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극히 부족했다.

황족들은 대대로 알파로 태어났으며, 알파는 오메가와 베타 상관없이 모두 임신시킬 수 있으니까.

하여 선례를 찾아봐도 알파 황제가 오메가 황후를 맞이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제 짝을 찾지 못한 채 베타와 혼인하니까.

“오메가는 아주 드문 존재야. 하여, 선대 황제들도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사내인 오메가에
대해서는 더더욱 전무하다 봐야 할 거다. …하지만 아르콘 부족이라면 다를 거다. 그들은 뭔가 알고 있을 거야.
페트라는 나보다 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만큼. 아마 아르콘 부족은 대대로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계승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결국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갑작스런 히트 사이클이든, 훗날 임신하게 될 경우든 대비하기 위해서는 필히


사막의 아르콘 부족을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했다.

일단 아르콘 부족이 있는 사막은, 불의 언덕이라 불릴 만큼 악명 높았다.

물론 더위에 강한 아르콘 부족의 피를 물려받은 만큼 그런 걸로 고민하는 것은 아니었다.

‘르네를 데리고 가야 하나. 가는 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여기 두고 갔다가 히트 사이클이라도


오게 된다면?’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황궁의 알파들을 짐승처럼 날뛰게 할 것이 분명했다.

이 황궁에 알파는 아르카이츠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황족들은 대부분 알파로 태어난다.

그들 모두 극히 소수의 오메가를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아르카이츠만큼이나 르네의 히트 사이클은 물론 페로몬에


대해 무방비할 것이다.

그건 마치 동물의 영역과도 같아서, 본능적으로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과 페로몬을 눈치챈다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누구 하나 르네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이가 없었다.

이게 운인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작용한 결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르카이츠는 르네를 두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

열성 오메가였던 황제 역시 그래서 악착같이 매일 억제제를 먹어 왔다지.

르네에게 그런 수고를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억제제는 결국 오메가에게 있어 부메랑처럼 부작용을 초래한다 했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없는 동안 르네의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아르카이츠는 잘생긴 얼굴을 단번에 일그러트렸다.

아니지, 절대 안 될 일이다. 르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 만일의 일에 대비해야만 한다.

하지만 또 그렇다 하여 르네를 데리고 불의 언덕에 갈 생각을 하면….

아무리 봐도 르네는 가다가 픽픽 쓰러지거나, 혹은 반쯤 초주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집에서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는 언제나 적정 온도를 유지해야만 하니까.

너무 뜨거우면 축 잎사귀가 늘어질 테고, 너무 추우면 또 금방 얼어 죽을 거다.

‘데려가야 하는데. 어떻게 데려가지. 일단 절대 안 간다고 할 게 분명한데.’

따라오라 하여 순순히 따라올 르네가 아니었다.

제 누이인 척 여장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르네 성격을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르카이츠였다.

오랜 시간 그를 관찰해 온 결과, 물론 아델라이드의 제보도 있었지만, 르네는 절대로 집 밖으로 100 보 이상


나가지 않는 인간이었다.

본인은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니 뭐니 생각하지만 사실 태생이 귀찮은 것투성이인 게으름뱅이에 집돌이인 것이다.

그런 르네가 제 발로 어딘가 멀리 떠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

하지만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라도 아르콘 부족에 데려가야 한다.

르네도 이제 슬슬 제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나.

어느 날 갑자기 덥석 임신해 버리기라도 하면, 르네는 분명 졸도할 게 분명했다.

적어도 사내가 임신이 가능하다는 말은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일단 아르카이츠의 목적은 하나.

르네가 언제 히트 사이클이 와도 바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도록 제 곁에 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합방이 우선이었다.

황태자비가 지내고 있는 궁과 황태자가 지내고 있는 본궁은 거리가 꽤 멀어 사달이 난 후에 가 봤자 이미 늦었을


거다.

물론 상의 없이 르네의 짐을 모조리 빼 제 방으로 가져오는 과정은 조금 배려 없었지만.

르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합리화했다.

르네 역시 더 이상 거부해 봤자 의심만 살 것 같다 생각한 건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큰 문제 없이 아르카이츠와 르네의 합방은 이뤄졌다.

단.

“여기는 넘지 마요. 여긴 내 공간. 이쪽은 전하의 공간.”

르네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잊고 있었다.

흰 마시멜로처럼 말랑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쥐면 잡히고 피면 펴지는. 그런 줄 알았는데, 누가 아델라이드 동생 아니랄까 봐.

은근 고집도, 성질도 있다.

“넘어오면 전 바로 제 처소로 돌아갈 거예요. 알았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침대 위에 금을 그을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들로?”

아르카이츠는 아주 하찮은 것을 바라보듯, 황당하다는 얼굴로 침대 정확히 한가운데에 탑처럼 쌓인 베개들을 툭


쳤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베개들이 그대로 우르르 무너졌다.

“아, 왜 무너뜨리고 그래요! 어떻게 쌓은 건데!”

“이 정도로 무너지면, 자다가 살짝만 움직여도 무너지겠는데.”

“…….”

르네는 방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선을 만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황태자비의 장신구들이었다.

그는 기다란 진주목걸이를 비롯해 각종 보석들이 박힌 목걸이를 풀어 다시 한번 정 가운데에 선을 만들었다.

아르카이츠는 정확히 침대의 반을 가르는 르네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아니. 그렇게 나랑 한 침대 쓰기 싫으면 왜 혼인한 거야. 계약이랑 다르잖아.”

“…일단은, 당분간은, 마음의 준비를 끝낼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잖아요?”

“이딴 허접스러운 것들로 마음의 준비를 끝낼 수 있긴 한가?”

아르카이츠가 목걸이들을 들어 올리려 하자 르네가 얼른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건들지 마요! 영역 침범.”

“영역? 부부 사이에 영역을 따지나.”

“전 좀 그래요. 마냥 쉬운 이가 아니라서요.”

“지금도 쉽지는 않은데.”

“그 아델라이드 피어스인데, 감당하실 수 없으신가요? 설마 그 정도로 성욕에 지배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글쎄, 오히려 그쪽이 더 잠자리에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이런 거 없어도 그냥 잘 수 있는 거 아닌가.”

“아, 선 넘지 말라니까요! 뭐, 뭐 하는!”

아르카이츠의 목에 살짝 핏대가 세워졌다.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어쩐지 저를 이렇게나 거부하는 르네의 모습에 살짝 심술이 나고 말았달까.

아르카이츠는 장신구들을 한 번에 걷어치운 뒤 곧장 르네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침대에 풀썩 뉘었다.

어느새 아르카이츠 아래 깔린 르네는 한껏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려 했지만, 그는 놔줄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더 강하게


르네의 손목을 잡아 왔다.

“아파, 이거 놔요!”

“아니. 그냥 잠만 같이 자자니까 무슨 사람을 닿는 것조차 싫은 병균 취급을 해 댈까, 우리 부인께서는. 사람


상처받게.”

“전혀 상처받지 않은 거 다 알거든?”

“이젠 말도 놓네.”

“너, 너도 말 놓잖아! 빨리 놔, 뭐 이렇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야?”

“원래 권력 쥔 놈들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야.”

“허…! 난 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아? 피어스 공작 가문에서 당신이 이렇게 난폭하게 구는 줄 알면―!”

“그럼 가서 말해. 침대 위에 넘어오지 말라고 담을 쌓는 아내의 손목을 잡는 남편이 너무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


이혼하고 싶다고. 잘도 그 말 들어 주겠다. 응? 황태자비의 덕목이 뭐겠어. 좋은 원자를 낳아, 제국의 후사를
잇는 것 아닌가?”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르네의 허리에 다른 한 손을 올렸다.

그의 두툼한 손이 가는 허리에 닿자 르네는 한껏 긴장한 듯 숨을 들이켰다.

#21.

“당신은 나한테 원자를 낳아 주기로 약속했고, 그걸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야, 부인. 혼인을 올린 이상 당신은
황태자비이자 내 하나뿐인 아내이니까.”

“…이제 그만 손을 놓아….”

“좀 익숙해져 봐. 유치하게 선이니 담이니 만들어 대는 것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어루만지는 편이 그 ‘마음의
준비’에 더 도움되지 않겠나?”

“…….”

그렇게 말한 아르카이츠가 르네 허리 쪽에 손을 집어넣곤 제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덕분에 르네의 허리가 반쯤 들려 그의 아랫배 쪽에 딱 달라붙었다.

당황한 르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옷을 갖춰 입어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누가 봐도 그렇고 그런 자세였다.

“마음의 준비가 이렇게 길어서야 초야는 대체 어떻게 치렀을까. 난 취해서 기억도 안 나는데. 사실은 초야를 안
했는데 한 척하는 건 아니지, 부인?”

“그, 그럴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얼마큼의 기한을 주면 돼?”

아르카이츠는 마치 엄청난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르네는 그가 내려준 동아줄이 썩지는 않았는지, 반쯤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그런 걸 볼 여유도 없이 덥석 잡고


말았다.

기한을 준다니까 당연히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

마음 같아서는 몇 개월 치 지르고 싶었지만,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거사를 치를 기세였다.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픽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 줄게.”

“엥?”

“일주일 안에 마음 준비 끝내.”

“아니, 이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본 건데!”

“나름의 배려를 해 줘서 일주일인 건데요, 부인?”

“저는 한 달을 원했는데, 일주일이라면서요! 이렇게 제멋대로 굴 거면 뭣 하러 의사를 물어보는 건지…!”

“그럼 진짜로 내 마음대로 해 볼까, 한번.”

“…일주일로 협상하죠.”

아, 동아줄인 줄 알고 덥석 잡았더니 이게 올가미였구나.

르네는 속으로 뭐 저런 무도한 인간이 다 있나, 생각하다가 아, 그렇지, 원래부터 무도한 인간이었으니 자신이
눈뜨고 코 베인 격으로 당한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말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라도 번 것이 어딘가.

르네는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같이 막막함과 동시에, 그래도 일주일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볼 생각이었다.

‘그놈의 합방, 그놈의 잠자리. 욕구불만이야, 뭐야. 음란마귀에 씌기라도 한 건가 왜 자꾸 그런 쪽으로만


들이대는 건지 모르겠네. 역시, 야만족이라고도 불리는 아르콘 부족의 피가 흘러서 그런 게 분명해.’

페트라 황후가 즉위한 이후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국 내에서 아르콘 부족은 야만족 취급을
받았다.

제국 귀족들 눈에는, 중요 부위만 가린 듯한 차림새와 문신을 새긴 몸, 토속적인 장신구를 하고 의식을 치르며


극악의 사막에서 살아가는 부족이 마냥 고귀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전갈을 먹는다, 사냥해서 생고기를 그대로 뜯어먹는다, 식량난에 시달리면 식인을 행한다 등의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문과 억측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페트라 황후는 딱히 소문을 정정할 생각도, 자신들의 고귀함을 증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거친 행동들, 이를테면 맨손으로 사냥감을 죽인다든지 하는 행동을 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 여인의 아들이니 행동에 거침이 없는 건 당연한 걸까.

‘그러고 보니, 아르콘 원주민들은 번식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고 그랬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그런 번식… 아니, 그렇고 그런 행위에 집착하는 건가…?’

사막에서 살아가는 부족인 만큼 번식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고는 어렴풋이 들었지만….

아르카이츠는 태어나서 사막에서 살아 본 적도 없지 않나.

그런 인간이 단순히 부족의 인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번식을 택하는 것은 아닐 거고.


태생이 고귀한 이라면 그런 쾌락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되잖아?

르네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쾌락적인 것에 중독되어 본 적이 없었다.

사춘기 시절 사내라면 모두 겪어 보는 그 흔한 몽정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

르네에게는 더욱이 이해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탐미적인 것이야 예술과 낭만을 즐길 줄 아는 귀족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지.

하지만 쾌락적인 것은 지양해야 한다 배워 오지 않았나.

그 고귀한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은, 누이 아델라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난 아무것도 몰라요’였다.

진짜로 르네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아는 그 작은 온실이 세상의 전부라 믿는.

정말 온실 속 화초였다.

“근데요.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르네는 한참을 생각하다 다시 침대 위에 베개로 담을 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은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베개 담을 계속해서 쌓을 예정이었다.

아르카이츠는 그 꼴을 바라보더니 픽 웃으며 답했다.

“물어보세요, 부인.”

“그 부인이라는 말 좀….”

“그럼, 여보?”

“…아니, 남자 좋아한다면서요.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동성에만 관심 있다고. 양성이었나요? 소문에


듣기로는 여자 몸에는 관심도 없다던데… 왜 자꾸만…!”

말하다보니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분명 아버지는 아르카이츠가 동성에만 관심 있다 하지 않았나.

자신이 사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은 이상, 알고 보니 누이가 남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아닌 이상, 아르카이츠는
아델라이드에게 일절 관심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부인 말대로 난 여자한테는 관심 없어. 여자 몸에는 더더욱 관심 없고. 남자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래. 난
남자를 좋아해.”

“그럼 단순히 후계자를 위해서만이라면 이렇게까지 굴 이유가…!”

“한데 이상하지. 당신은 좀 다르네.”


“…….”

“뭘까. 난 여자한테 관심이 간 적이 없는데.”

“…….”

“알고 보니 남자인 건가, 아델라이드?”

“무, 무슨 그런 농담을.”

르네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아니,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말한 게 아닌데. 왜 또 그쪽으로 몰아가는 건가.

그런 르네의 모습을 아르카이츠는 그저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자꾸 이기지도 못할 말싸움을 걸려는 걸까, 내 사랑스러운 오메가는.

본인이 거짓말에 소질이 하나도 없다는 걸 르네는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당황하여 또 땀을 흘리는 건지, 르네의 몸에서 단 향이 또다시 폴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싫다는 사람 덮칠 만큼 무도한 이는 아니니 걱정 마.”

“…그나마 다행이네요.”

르네는 마지막 베개를 들어 담을 완성했다.

“그럼 전 이만 잘게요. 웬만해서는 이 담을 건들지 않는 걸로.”

“한데 부인이 아까 전에 본인 입으로 잠을 험하게 잔다 하지 않았나. 당신이 무너뜨리면? 그땐 넘어가도 된다는


걸로 간주하면 되는 건가?”

“아뇨!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몸을 꽁꽁 묶어서라도 무너뜨릴 일 없으니 그런 생각일랑 마세요.”

르네가 열을 올리며 말하자 또다시 페로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는 순간 아찔해지는 정신에 얼른 이성을 다잡았다.

아무래도 저 페로몬이라도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든, 아니면 자신이 페로몬 향을 맡지 못하도록 뭔가 약을
먹든 해야 할 것 같다.

분명 르네를 골리고자 하는 장난인데 어째 저도 위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르네와 달리 아르카이츠는 몸을 일으켜 로브를 걸쳤다.

그 모습을 본 르네가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 모으며 불안한 듯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뭐 하려고요?”

“잠깐 알아볼 것이 생겨서. 도서관에 좀 가려고. 왜. 가지 말까? 혼자 있기 무서워?”


“아뇨! 어서 가요. 얼른. 빨리 가서 알아봐야죠, 그게 뭐든 간에. 탐구적인 모습 아주 보기 좋네요. 얼른
가요.”

방을 나가겠다는 말에 르네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에 아르카이츠는 어째 반쯤 쫓겨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계속해서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르네 옆에 있어 봤자 저만 고역일 테니, 어쩔 수 없지. 꺼지는 수밖에.

아르카이츠가 방을 나서자마자 르네는 그제야 한숨 놨다는 듯 하아, 긴 숨을 토해 내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갑자기 도서관은 왜 가는 거람. 물론 꺼져 줘서 참 고맙기야 한데.’

그러다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린 르네가 슬쩍 자신의 팔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음. 역시 아무 냄새도 안 나.

“아휴, 이게 뭐야, 대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니 옷을 벗을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르네는 슬쩍 자신의 슬립을 들추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일주일 안에 나는 여길 탈출할 계획을 세워야만 해.”

두 번째 합방마저 첫 번째와 같이 무사히 넘길 자신이 없었다.

#22.

아르카이츠는 생각보다 더 밝히는 인간이었고, 더 저돌적인 인간이었으며, 르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여자를


좋아하는 위험한 놈이었다.

빨리 죽음을 위장하여 장례식까지 무사히 치르고, 얼른 피어스 저택으로 돌아가 여생을 평생 놀고먹으며 살고
싶었다.

“아, 오늘 하루 정말 피곤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꽤나 다이내믹한 하루를 보내지 않았나.

딱히 한 건 없는데 녹초가 되어 버린 르네는 침대에 마치 바닷속 미역이 흐물거리듯 잔뜩 쪼그라들며 드러누웠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 이렇게나 데미지가 클 줄이야.

살면서 가장 큰 고민이라고는 디저트를 푸딩으로 먹을까 아니면 마카롱으로 먹을까. 이 정도뿐이었던 르네에게
지금의 고민은 너무나도 커서 마치 거대한 산에 이정표 없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즉, 그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오히려 점점 더 순응해 버리는 쪽이랄까.

방향을 잃으면 잃은 대로 그냥 일단 위로 올라가 보자, 하고 등반하다 결국 조난되어 버리고 마는 조난자처럼.

르네는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성을 내고,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 나약한 몸이 그새 앓기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감기처럼 열병을 앓아 대니, 아마 평소와 같을 거라고.

그래도 예방 차원에서 감기약을 꾸준히 먹었으니 이번에도 잠깐 앓고 말 것이다.

르네는 아주 잠깐 눈만 붙이려고 했다.

워낙에 잠귀가 밝으니 아르카이츠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금방 잠에서 깰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하루빨리 아버지한테 연락을 받아서… 약이든 뭐든, 잠깐이라도 죽음을 위장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자
….’

그새 긴장 좀 풀렸다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쏟아지는 졸음에 저항 없이 당한 르네는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주일 동안의 계획을 짜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다.

그게 망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두고 떠올렸어야 하는데.

르네의 실수라면 그거였다.

너무 쉽게 방심하고 만 것.

그저 잠깐 눈만 붙이는 거였는데.

분명 아주 잠깐 잠들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어찌하여 아르카이츠가 곁에 있는 건가.

그것도 상체를 훤히 드러낸 채 제 몸을 단단히 껴안은 채로.

“깼어?”

“으응…?”

르네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절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 짓는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분명 차곡차곡 쌓아올렸던 베개 담벼락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흩어진 것은 베개뿐만이 아니었다. 빼꼼 고개를 드니 베개 주변에 옷자락들이 흩뿌려지듯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르네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이었다.

뭐가 이렇게 몸이 편해.

뭐가 이렇게 몸이 가벼워.

뭐가 이렇게 몸이….

르네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이불을 들어 올렸다.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입고 있어야 할 옷가지들이 죄다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거다.

“허, 허억.”

르네는 뇌가 정지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나 왜 알몸이야?

슈미즈도, 여인의 가슴을 흉내 내기 위해 항상 착용하던 브래지어도 없다.

근육이라고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만 있는 뽀얗고 말랑한 가슴팍이 보였다.

그 아래 아주 조금 단단해졌다고 자랑했던, 복근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절대 들켜서는 안 될 것이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분홍빛이 도는 정중앙에 위치한 그것 말이다.

누가 볼세라 후딱 다시 이불을 덮은 르네가 달달 떨어 대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눈을 뜨니 알몸의 상태로, 그것도 여장도 하지 않은 원래 모습으로, 황태자의 곁에 누워 있단 말인가.

“뭘 그렇게 놀랍니까, 여보.”

여보? 갑자기 왜 친한 척인가. 분명 어젯밤만 해도 당신, 아델라이드, 부인 이렇게 세 가지뿐이었는데.

그 모든 징검다리는 죄 건너뛰고 왜 여보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르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지금 아르카이츠는 저를 아주 놀려먹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뭘 그렇게 놀라고 앉아 있어. 네가 사내새끼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안 들킬 줄 알았나? 하는 듯이 바라보는


저 눈빛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르네는 자신이 X 됐음을 직감했다.

물론 그 직감은 눈을 떴을 때 해방감을 느꼈을 때부터 진즉에 찾아왔었지만.


이젠 진짜 둘러댈 거짓말도,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뭡, 니까, 아니 왜 내가… 그러니까 이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도 없는 입장.

르네는 묻기보다 설명해야 하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남자인 이유는.

말을 더듬는 르네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 가장 창백했다.

그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믿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었으니….

“으응, 더 해 줘. 더! 아으, 좋아, 아아. 거기….”

차라리 술을 마시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황태자에게 매달리고, 보채고, 심지어는 직접 위에 올라타기까지 하던 이는 다름 아닌 르네 본인이었다.

거기까지 기억해 낸 르네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를지, 아니면 패닉으로 인해 구토가 나오는 걸 막으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르카이츠, 물어 줘. 물어 줘어….”

르네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뭘 또 그렇게 비명까지 지르고. 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흐아아아악!”

르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르네의 비명 소리에 아르카이츠는 태연하게 네가 먼저 시작했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실을 말해 줬다.

르네 역시 자신이 시작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르네의 비명 소리에 바깥에 있던 시녀들은 물론 경비병들 역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에 들어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말씀해 주십시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전하!”

무슨 일 있는 것이냐 묻는 이들의 목소리에 르네는 한층 더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지금 이 모습 들킨다면 그야말로….

어차피 X 된 것은 똑같긴 하다만.

르네는 대체 어찌하면 좋냐는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 순간 왜 그를 쳐다본 건지는 르네도 모르겠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르네는, 제 정체를 숨겨야만 하던 존재에게 정체를 들킨 주제에 그에게 정체를 숨겨 달라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것이었다.

곧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르네는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미 아르카이츠한테 들키고 말았는데 다른 이들에게 숨겨서 무엇 하나.

그냥 빨리 끌려가고, 처형당하든 추방당하든 아무튼 간 이 모든 악몽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초연한 마음이었다.

그 순간 르네 위로 커다란 이불이 휙 덮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포근한 솜이불 아래 르네는 숨을 죽였다.

아르카이츠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듯하더니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경비병들에게 명했다.

“문제없으니 다들 나가.”

“아… 하지만 분명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전하.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방 안을 수색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낯선 사내의 음성이 아니야.”

“예?”

“뭐, 낯선 감각을 맞이한 이의 음성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설명이 필요한가?”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런 줄 알면 얼른 문 닫고 나가. 황태자비가 부끄러워하잖아.”

“예!”
르네는 솜이불 아래 몸을 숨긴 채 꾸물꾸물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올 뿐이었다.

능글맞은 아르카이츠의 목소리와 당황한 듯한 경비병들과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르네는 여전히 ‘시발, X 됐다…!’만 속으로 되뇌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아르카이츠한테 들켰는데 X 된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아르카이츠가 사용인들을 내보내는 그 짧은 순간 르네는 이미 처형대 위에 올라가 있는 저와 부모님, 제 가문의


사람들의 모습까지 떠올렸다.

망나니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물어본다면 아마 르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가 진짜 속이려고 한 건 아니고요, 저도 진짜 하기 싫었거든요? 근데, 근데 죽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인데 이렇게 죽게 되어 버려서 저도 정말 억울하거든요. 저 정말, 죽고 싶지 않아서 여장한 것뿐이거든요
…!”

방문이 닫히고 아르카이츠가 이불을 걷자마자 르네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빠르게 말했다.

#23.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상황인가.

르네는 지금 그냥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다.

언제나 고귀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피어스 공작 가문의 온실 속 화초, 르네 피어스.

그는 아마 자신이 살면서 알몸의 상태로 이렇게 바닥에 납작 기듯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지금 혀를 콱 깨물고 죽어 버릴까 생각하는 르네였다.

어차피 죽음은 못 면하겠지만.

그래도 ‘여장을 즐겨 하며 남자를 좋아해 제 정체를 숨기고 누이인 척 황태자와 밤을 보낸 미치광이 변태 르네


피어스’로 낙인찍히는 것보다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해명할 건 해명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누이가 도, 도망을… 아니, 실종이 되어, 급하게 제가…. 결코 황태자 전하를 속이려 들려던 것은… 물론
속이려는 건 맞지만…! 아무튼 농간을 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진짜예요, 진짜라니까요, 믿어 주세요, 황태자 전하!”


르네는 억울하다는 듯, 커다란 눈망울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죽는 건 둘째 치고, 변태로 몰려 죽는 거랑, 가문의 몰락으로 인한 비극적으로 죽는 거랑은 굉장한 차이가 있지


않나.

“르네.”

“…….”

“르네 피어스.”

“…네.”

“어젯밤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건가?”

“…무, 물론 조금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나긴 하는데?”

“그것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그 경위가 잘 기억이…. 근데 제가 일부러 덮친 것은 아니고요. 진짜 눈떠


보니까….”

“일부러 덮친 게 아니면, 우발적으로 덮쳤다 이건가?”

납작 엎드린 르네의 뒤통수로 떨어지는 목소리가 굉장히 낮았다.

화가 난 걸까.

아, 물론 그 누구라도 제 아내가 남자였다는 걸 알게 되면 화가 나겠지.

이건 명백한 사기 결혼이며, 더 나아가 황족 모독이었으니까.

아르카이츠는 그 어떠한 폭력적인 행위라든지, 독설이라든지, 협박이라든지, 혹은 다가올 르네의 처분에 대해


위협적인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르네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르네에게는 잡아먹기 직전의 소동물을 가지고 노는 맹수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계획적으로 그를 덮칠 리는 없으니 당연히 우발적이기야 우발적이겠지.

르네의 기억 속에서 먼저 위에 올라탄 것도, 아르카이츠에게 애끓는 소리를 내며 애원한 것도 모두 틀림없는


본인이었으니까.

“…….”

“대답해 봐, 르네.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그대 처우가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대답하라는 건가.

르네는 자신이 그 우발적인 덮침을 한 것에 대한 경위를 기억하지 못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신은 졸려서 잠이 들었을 뿐이다.

그저 잠만 잤을 뿐인데, 눈떠 보니 이 사달이 난 것을 대체 어찌 설명하란 말인가.

모른다고.

나도 이 상황을 알지 못한다고.

애초에 이전의 모든 상황들도 내 뜻이 아니었다고…!

억울함과 서러움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어리둥절했고, 충격적이었으며, 수치스러웠고, 또 동시에 두려웠다.

살면서 나쁜 짓 한 번 안 해 봤다.

누굴 속인 것도 이번이 처음, 그것도 부모님이 시켜서 한 것뿐 아닌가?

“…해.”

알몸 상태로 납작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푹 숙인 르네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르네의 등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척추 뼈가 도드라지는 건 물론, 둥글게 등을 말자 뒤쪽 갈비뼈까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물론 몸이 가늘고 원체 말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새삼 뼈만 앙상한 르네의 몸을 보니 아르카이츠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혹여나 르네가 저렇게 앙상한 것이 마음 고생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가. 눈치를 봐서 못 먹었나.

저 겁쟁이 성격에 남 속이는 와중에 식욕이 왕성할 리는 없다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마른 것 아닌가. 저러니까
맨날 골골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울…해.”

“뭐라고?”

“…억울하다고요.”

“…뭐?”

“억울해, 억울하다고, 억울하다고오오! 흐어어엉…!”

결국 르네를 울리고 말았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지금 이 모양 이 꼬라지냐고오… 흐어어엉, 허어어어


…!”
“잠깐, 일단 소리 좀 죽이고.”

“그래, 차라리 빨리 죽여! 죽이라고! 이딴 수치스러운 꼴로 살아가느니 확 혀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게 낫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착실히 이불을 끌어 모아 자신의 몸을 가리며 엉엉 우는 르네였다.

“일단 진정하고. 아무리 봐도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뭐, 뭐라고요!”

“죽을 놈이라면 진즉에 깨물고 죽었겠지.”

그렇다. 르네는 또 사실 막상 혀 깨물고 죽을 만큼의 근성도 없는 사내였다.

간파당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커다란 눈을 끔뻑이는 르네는 마저 주섬주섬 이불을 둘러 어느새 제 몸을 꾸물꾸물
감싸기 시작했다.

“…….”

“안 죽일 테니까 일단 진정하라고.”

그러자 눈물 찔끔 흐르던 르네의 눈이 커지며 되물었다.

“…진짜요?”

“당연하지. 내가 왜 당신을 죽여? 하나뿐인 내 부인을.”

“…놀리는 거죠?”

“아닌데.”

아르카이츠는 그런 하찮은 모습마저 귀엽다는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아무래도 각인이라는 것이 꽤나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나 맹목적인 애정을 퍼붓게 된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세상에서 하찮고 나약한 것들을 제일 경멸하다시피 했던 아르카이츠는 하필이면 이 제국에서 제일 하찮고 나약하다
할 수 있는 사내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진짜 아니라고요? 진짜 안 죽일 거예요?”

“방금 전에 말했잖아. 내 하나뿐인 부인을 왜 죽이냐고, 내가.”

“…그야 나는….”

“가짜 신부라서?”

“…….”

“약속하지. 절대 너 안 죽여.”

“…….”
르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이츠는 픽 웃음을 흘리며 바닥에 이불과 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르네를 번쩍 안아들었다.

“앞으로 살 좀 찌워야겠다, 르네.”

“…에…?”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애는 가질 수 있겠어?”

“…….”

르네는 아르카이츠가 드디어 돌아 버린 건가, 혹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현실을 부정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지금 사내라는 것이 단단히 들통 나 버렸는데, 애를 갖긴 뭘 갖느냔 말이다.

‘뭐야. 이 새끼, 혹시 나 남자인거 아직 모르는 건가? 아닌데. 모를 리가 없는데. 근데 웬 애를 가진다는 말을


하고 그래…?’

어디 머리를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가 싶어 르네는 눈만 끔뻑였다.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보며 피식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일단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이지 않는다니 르네는 한동안 계속해서 납작 엎드릴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죽지 않는 것이 우선 아닌가.

물론, 그래서 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하긴 하다만.

단순한 르네에게 있어선 일단 ‘아르카이츠가 진실을 알고도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얌전히 아르카이츠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침대에 누운 르네는 한 박자 늦게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어쩐지 온몸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듯이 온통 아프고, 또 묘하게 아래쪽이 뻐근한 느낌이 드는 것.

당장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비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어제….”

“기억 안 나? 아까는 다 기억하는 것처럼 굴더니.”

“…….”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

“우리 어제 했어.”
“하, 하긴 뭘 했다는….”

“마냥 샌님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탁월하던데.”

“…뭐, 뭐가 탁월하다는… 하 씨.”

결국 입에서 비속어를 뱉어 낸 르네였다.

하필이면 자신의 첫 경험을 이딴 놈한테 줘 버릴 게 뭔가.

르네는 적어도 동성에는 관심이 없다 생각했다.

저에게 손을 내미는 수많은 영식들의 손길과 추파에도 별로 끌리지 않는 걸로 보아 자신은 아무래도 여인을 사랑할
몸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좀 서운한데. 어젠 그렇게 좋다, 좋다 했으면서. 꼭 최악의 상황 맞닥뜨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사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르네는 사실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

#24.

둘이 어제 그렇고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물론이고.

마냥 샌님인 줄만 알았던 자신이 마치 음란 마귀가 빙의라도 한 양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는 것도.

또, 무지막지하게 기분이 좋았다는 것조차도.

“왜 자꾸 기억 못하는 척할까, 르네. 모른 척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내 입에서 꼭 한 번


더 말이 나와서 확실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 그런 건가?”

정곡을 찌르는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 질러 내듯 말했다.

“내가 어쩌다 당신이랑 잤는지 말이 안 되니까, 이, 인정할 수가 없다는 거죠!”

“왜 말이 안 돼? 네가 먼저 유혹했으면서.”

“이봐요, 내가 언제 유혹을, 유, 유혹을….”

르네는 차마 ‘내가 언제 유혹을 했다고!’ 하면서 시침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분명히, 아르카이츠에게 유혹적인 말을 내뱉는 본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신이시여, 맙소사 내가 대체 왜….”

르네는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그저 가문의 건사를 위해 총대 메고 여장한 것 가지고 이렇게나 큰 벌을 받을 일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어찌 이리 야속할 수 있는지.

르네는 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듯 절망하듯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정을 하는군.”

“내가 대체 왜…. 내가 대체 왜 저런 호색한을 유혹을…. 당신이 나 뭐 먹인 거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어?


나처럼 순진한 애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어 따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 없이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아르카이츠를 유혹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건 필시 아르카이츠의 농간질이었다.

분명 미약을 탄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숙맥 중의 숙맥, 샌님 중의 샌님, 르네 자신이 그리 적극적으로


굴 리가 없지 않나.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야.

그래, 그건 내가 아니었어!

확신에 차서 말하는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카이츠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뭐… 뭐라는 거예요?”

“어차피 지금 말해 줘 봤자 절대 인정도, 이해도 못 할 거 같으니까.”

“…….”

그는 마치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불안해지게 만드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카이츠와 해사한 미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 르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x 됐음’을 직감했다.

뭔진 모르겠는데, 분명 그 뭔가가 뭔지 알아야겠는데, 근데 절대 알고 싶지 않은 느낌.

알아서는 안 될 거 같은 느낌 말이다.
그걸 알게 되면, 절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먹이사슬 최하층이 위기를 감지하듯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르네는 회피형 인간이었기에 일단은 회피하기로 했다.

지금 말해 줘 봤자 인정도, 이해도 못 할 거라 말하는 그를 보며 인정도 이해도 할 수 있으니 냉큼 진실을 말해


달라 요구하기보다는 일단은 흐린 눈으로 모든 것을 대하기로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진실을 알기 두려웠다.

뭐든 간에 아르카이츠의 입에서 나올 말이 온실 속 화초 르네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일단 옷부터 입지 그래? 아니면 이것 또한 유혹하는 건가? 그런 거면 모른 척 넘어가 주고.”

세상이 두 쪽 난 듯 허탈한 르네와는 달리 그저 이 상황이 재밌기만 한 아르카이츠의 능글맞은 말에 르네는


후다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물론.

“…거기 떨어진 속옷 좀 줘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차마 알몸으로 주울 용기가 안 나 아르카이츠한테 옷을 받아야만 했지만.

겨우 옷가지를 챙겨 입은 르네는 마지막으로 화장대에 앉아 가발을 뒤집어썼다.

일단 아르카이츠한테 정체를 들키긴 했어도, 아직 황궁 전체에 들킨 건 아니지 않나.

슬그머니 거울 너머 아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피던 르네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여미며 물었다.

“근데… 진짜 말 안 해 줄 거예요?”

“어차피 지금 들을 생각도 없잖아. 말해 주면 또 길길이 날뛰면서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부정하겠지.”

“…….”

“그러니 네가 직접 다 기억해 내. 어차피 점점 더 떠오를 테니까. 술을 마신 것도, 졸음이나 약에 취한 것도


아닌 네 스스로 한 짓이니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

“그러니, 다 기억하고도 그 경위가 궁금하다면. 그때 나는 말해 줄 생각이야. 네가 한 짓을 깔끔하게 인정하면,


그때 말해 줄 거라고.”

“아니 왜 굳이 그렇게….”

“아까 전에 말했잖아. 어차피 지금은 인정도 이해도 안 하고 날 무도한 이로 매도할 텐데. 그럼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상처받지 않겠어요, 부인?”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한 뒤 아주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준비를 마치고 내려와, 르네.”


아델라이드가 아닌 르네를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못해 어딘가 신이 나기까지 한 말투로 말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르네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아르카이츠가 나간 자리만 멀뚱멀뚱 쳐다보다, 이내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X 발… 망했네….”

Chapter 4. 역사상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피어스 공작 가문은 여타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달리, 묘하게 후광이 비친다는 소문이 있다.

아마도 그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 아델라이드와 제국에서 가장 꽃 같은 사내 르네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 외에도 피어스 공작 가문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가족이었기에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해서 누군가는 후광은 물론이거니와 어쩐지 피어스 저택 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인다고도 하는데.

“이상하네요, 후작 각하. 피어스 저택이 어째 우중충해 보이지 않습니까? 장마 기간도 아닌데, 어째 여기만
흐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요.”

시종의 말에 알빈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피어스 저택에 정말로 뭔가 우중충한 먹구름이 낀 듯한 느낌이다.

“뭐, 저쪽에만 먹구름이 몰렸나 보지.”

“에이, 그래도 언제나 후광과 무지개가 떠 있기로 유명한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니까 이상해서요.”

“넌 이상할 것도 많구나. 오히려 지금쯤 피어스 가문은 경사가 나지 않았겠느냐. 아델라이드 누님께서
황태자비가 되셨으니, 내 결혼식에 참여 못 해 미안할 뿐이지.”

“그래도 이렇게 귀국하시자마자 바로 찾아뵈니, 피어스 각하께서도 후작님을 반기실 겁니다.”

“그나저나 르네 이놈은 편지 답장을 왜 이렇게 안 하는지.”

피어스 저택에 도착하면 르네의 방에 찾아가 그동안 이 형님의 편지에 답장 한번 안 한 괘씸한 녀석을 흠씬
괴롭혀 주겠다, 생각해 보는 후작이었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그저 흐뭇한 듯 연신 픽픽 웃음을 흘렸다.

꼭 동생 괴롭힐 생각에 들뜬 심술궂은 형의 모습이다.

시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평소에는 이렇게 짓궂은 분이 아니신데, 피어스 가문의 막내 도련님을 대할 때는 꼭 장난꾸러기 골목대장 같은
느낌이다.

알빈 후작은 꽤 긴 출장을 마치고 이국에서 막 귀국한 참이었다.

르네와는 동갑이지만, 이른 나이에 페르나서스 후작 가문을 이어받게 된 인재였다.

페르나서스 후작가는 학문적 소양이 깊은 가문이었다.

선대 후작들은 황궁에 들어가 황제나 황태자들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돌아가신 알빈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1 황태자와 2 황태자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다.

하지만 알빈은 선대 후작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는 학문보다는 오히려 사업적인 면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하여 그는 페르나서스 후작 가문 역사상 처음으로, 사업 준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걸까.

사업적 수완은 좋았고, 무려 3 개월에 걸친 출장 끝에 그는 아주 먼 나라의 고급 물품들을 독점적으로 수입해 올


수 있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마차에 내렸다.

이 소식을 가장 처음 르네에게 들려주었을 때, 르네가 보일 반응이 기대됐다.

르네라면 분명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해 줄 테니까.

#25.

“세상에, 진짜로? 진짜 네가 바다 건너 반대편 세상의 왕과 왕자를 직접 만났다는 거야? 그럼, 진짜 그


물건들이 네 회사를 통해서만 들어오는 거고? 완전 축하해! 잘될 줄 알았어. 정말 대단해, 알빈!”

알빈의 상상 속 르네라면 박수를 짝짝 쳐 주며 장하다, 대견하다, 하며 저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형님


노릇하려는 양 등을 토닥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 르네를 또 골려 먹어야지 생각했다.

알빈은 저를 마중 나온 피어스 공작에게 인사했다.


“피어스 각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어, 그래. 알빈 왔느냐….”

“각하?”

“으응… 왜 왔느냐…?”

한데 언제나 온화하고, 항상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공작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반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넋이 나가 있는 건 물론이고,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주던 공작 부인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오늘 찾아뵙겠다는 전언을 미리 드렸는데, 혹 받지 못하신 것입니까?”

“아아, 맞다. 그랬지. 네가 온다는 전언 받았다. 받았지…. 부인은 지금 침실에 있다. 몸이 좋지가 않아서
말이야. 앓아누운 거지…. 앓아누운 거야…. 에휴….”

“각하?”

“하이고오…. 들어오게… 들어와….”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아니면 꼭 이제 막 상을 치른 사람처럼 곡소리를 내는 피어스 공작의 모습에 알빈은


그제야 뭔가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쯤이면 르네가 자신이 저택에 도착한 사실을 알았을 텐데.

평소의 르네라면 저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오며 안기다시피 달려들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그제야 알빈은 피어스 저택의 내부를 빙 둘러봤다.

이상했다. 원래 여기가 이렇게 우중충하고,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도는 곳이었던가.

아까 전 그의 시종이 말했던 것처럼 피어스 저택은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한데 지금은 사용인들도 죽을상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피어스 공작 역시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하고, 심지어


건강하던 공작 부인마저 앓아누웠다니.

“한데, 르네는 어딨습니까, 각하?”

무엇보다 르네가 보이지 않는다.

알빈의 질문에 피어스 공작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마치 흙과도 같이 거무튀튀해진 피부와 미간 사이 깊게 자리 잡은 주름까지.

아무래도 자신이 출장을 떠난 몇 달 동안 피어스 공작 가문에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각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따로 보고받은 소식 중 걱정이 될 만한 것들은 하나 없었다.


공식적으로 아델라이드 피어스는 황태자비가 되었고, 피어스 가문의 영광은 앞으로 더더욱 빛날 예정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국 내에서도 피어스 가문이 앞으로 황태자비, 조금 있으면 황후가 될 이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쥘지 말이 많던데.

어째 지금 이들을 보면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은 승리자의 얼굴보다는, 우환이 닥칠 대로 닥쳐 앓아누운 듯한


환자의 모습이 더 어울렸다.

근데 진짜 르네는 왜 안 내려오는 거야? 나한테 뭐 서운한 일이라도 있나?

알빈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어스 공작을 쳐다봤다.

알빈의 입에서 르네의 이름이 나오자 피어스 공작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르네도 아픈 겁니까?”

“어어, 그러하네. 미안한데 특별한 용건 없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겠나? 병이라도 옮을까 걱정되어
말일세.”

“예? 하지만, 르네도 공작 부인도 모두 제게 가족 같으신 분들인데. 이럴 때일수록 제가 직접 찾아뵈어야죠.


아직 황태자비 전하도 찾아뵙지 못하고, 또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스러운데.”

“뭐어? 황태자비를 만나기는 무슨! 한창 신혼일 텐데 가서 무엇 하나. 하하. 너무 걱정 말아. 아델라이드가


언제 그런 걸로 서운해하던가? 게다가 모두들 네가 옮을까 더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야. 지금 나만 무사한데,
나도 묘하게 목이 아파 오는 것이. 아무래도 자네 역시 빨리 돌아가게.”

“한데 이렇게 쉽게 전염될 거였다면 이미 옮지 않았을까요?”

“아, 일단 돌아가라니까 그러네.”

“각하! 어, 어어, 정말 가라는 것입니까?”

“그래. 내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연락 주겠네. 일단 황태자비는 찾아가지 말고, 알겠나? 아무튼 간, 여기까지
와 줬는데 미안하구나, 알빈.”

미안하다는 말과는 달리 문을 닫아 버리는 행동이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졸지에 문전박대당하고 만 알빈 페르나서스와 그의 시종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위험한 전염병인가 봅니다, 후작 각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르네 얼굴은 좀 보고 가려고 했는데….”

“외부 접근도 막고, 또 소문이 퍼지지도 않는 걸 보면, 피어스 공작께서는 이 사실을 덮고 싶으신가 봅니다.”

“아무래도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면 골치 아파지니까.”

“걱정이네요, 르네 도련님은 가뜩이나 몸도 약하신데.”


“…그러니까 말이야.”

언제나 생글생글, 대형견같이 순하고 포근한 미소만 짓고 다니던 알빈의 이마에 보기 드물게 주름이 깊게 파였다.

시종은 그런 주인의 눈치를 힐긋 쳐다봤다.

르네 관련된 일이면 저렇게 한순간에 심각해지니, 누가 봐도 알빈은 르네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였다.

“…선물도 사 왔는데.”

알빈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마차 뒤에 실린 커다란 짐짝을 흘깃 쳐다봤다.

저 안에 든 모든 것들이 사실 르네를 위한 선물이었다.

알빈은 종종 출장을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한 아름 선물을 들고는 찾아왔다.

말로는 존경하는 피어스 공작 각하, 공작 부인을 생각해서 산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뚜껑을 열고 보면 죄 르네가
좋아하는 것들만 들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냥 이럴 거면 르네를 위해 샀다고 말하지 그러니, 알빈.”

“에이, 누님도 참. 제가 어찌 르네만 생각하고 샀겠습니까. 피어스 가문은 제 가문과도 같은 곳입니다.”

“왜. 장인 장모님이라도 모시려고?”

“아, 누이 진짜.”

“이거 봐라, 어쩜 르네 좋아하는 것만 긁어모았네. 야. 그냥 고백을 해.”

“…티 나?”

티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알빈이 르네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아, 딱 한 명 있었다. 르네 본인만 몰랐다.

눈치 더럽게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눈치가 진짜 더럽게 없었다.

얼마나 눈치가 없냐면….

“그렇게 디저트가 맛있어?”

“응. 완전 달콤하고 꾸덕하고…. 제국에서는 먹기 힘든 맛이라 그런가? 더 맛있는 거 같아. 아, 맨날 이런


거만 먹고 살고 싶은데.”
“나랑 같이 살면 맨날 이런 거 먹게 해 줄게.”

“…꼭 같이 살아야지만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냥 차라리 제국에 디저트 사업을 해 보는 건 어때? 이건 나만 먹기


아까운 맛이야!”

“아니, 내 말은….”

“나도 사업이나 해 볼까? 난 몸 쓰는 데도 재능 없고, 그렇다고 참모 할 만큼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으니까. 근데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난 나중에 디저트 상점 주인이 딱 맞을 거 같아. 그때 되면 네가 좀 도와줘라. 응?”

“…….”

“아, 야아. 친구 좋은 게 뭐냐!”

“알았어….”

이렇다거나….

또 언젠가는 한번 이런 일이 있었다.

“르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 응. 그래.”

“너 나랑 같이 살래?”

“헐, 알빈 나 안 그래도 부탁하려 그랬는데.”

“…진짜?”

“페르나서스 저택에 빈방 많지? 몇 달만 내줘라. 내가 누이가 아끼는 향수병을 깨트려서…. 그거 구하기도


어렵거든…. 누이가 눈에 띄면 죽여 버린대…. 어찌 그리 공작 영애가 무서운 말을 입에 담는 건지…. 에휴. 아
참, 그리고 잘 아는 방물장수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누이가 똑같은 거 구해 놓으래….”

“으, 응. 그래.”

“고마워, 역시 너뿐이야!”

“하아….”

뭐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조금 진지하게 마음을 고백하고자 하면 눈치 없이 구는 르네의 모습에 허탈하다가도, 또 묘하게 우습기도 또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하다 결국 조금 더 기다리자, 체념하게 되는 단계를 반복했다.

아무튼, 그래도 알빈은 자신이 르네의 유일한 친구라 자부했으며, 르네 곁에 있는 것은 결국 마지막엔 자신일
것이다 생각해 왔다.

“무슨 병에 걸렸기에, 저렇게까지 거리를 두려는 거지?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마른 애가
더 야윌까 봐 걱정이네.”

아무튼 이미 알빈의 머릿속에는 르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르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이미 그의 상상 속 르네는 마지막 잎새와도 같은 상태였다.

#26.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으며, 입술이 부르튼 가련한 모습으로 저에게 유언을 남기는 르네의 모습을 떠올리니….

알빈은 걱정이 되어 도저히 피어스 저택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하지 않나.

아픈 애한테 문병 온 사람이라도 있어야 힘을 좀 내지 않을까.

“아유, 후작 각하, 피어스 공작께서 일단 걱정 말고 돌아가라 하셨잖아요. 르네 도련님이야 워낙 자주


앓으시니까 어쩌면 도련님께서도 그런 약한 모습 보여 주고 싶지 않으실지도 모르죠.”

“그게 그렇게 되나?”

“예에. 일단 돌아가고 나중에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리러 가실 때 슬쩍 물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가족이잖아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던 알빈은 시종이 말리는 탓에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의 말대로 빠른 시일 내에 황태자비를 찾아가 인사를 드릴 참이었으니.

그래. 그때 한번 르네의 상태에 대해 슬쩍 물어보자 생각했다.

아델라이드라면 지금 르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거다.

그 누구보다 제 남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누이였으니까.

아델라이드를 만나 르네의 상태도 물어볼 겸, 근황도 물어볼 겸.

피어스 저택에서 홀대를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알빈은 일단 반은 형식적인 이유로, 또 반은 사적인 이유로


황태자비를 접견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분명 자신은 황태자비 아델라이드를 만나러 온 것인데 말이다.


“…….”

“…아니….”

“알빈…!”

“아, 아니,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르네?”

“알빈! 진짜 보고 싶었어!”

저를 보자마자 울상을 하더니, 곧장 안겨드는 르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알빈이었다.

아니, 왜 네가 거기서 나와?

네가 왜 거기서 아델라이드인 양 여장을 하고 나오냔 말이야.

* * *

르네는 좀 게으르긴 해도 나름의 인생 계획을 세워 둔 착실한 청년이었다.

그의 게으름은 사실 유복한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르네는 알빈처럼 매사에 열심히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며 살지는 않더라도 주어진 걸 베풀며 살아갈 예정이었다.

아무튼 나름의 인생 계획도 짜 놓았으나 어째 스무 살 이후부터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다.

무엇보다 르네의 인생 계획에 자신의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기가 막히고 황당하고, 어이없게 보내는 건 전혀
없었다.

또한 그 상대가 제국의 제 2 황태자 아르카이츠일 거라는 건 더더욱!

하필이면 내 첫 경험을 그런 또라이한테, 그런 또라이한테 내가 대체 왜….

르네는 죽고 싶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다른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사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르네 본인의


탓이었다.

아니, 기억을 되짚는 것조차 두려워 르네는 애써 그때의 일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또 없던 일인 척 굴려 했지만.

‘내가 대체 그때 왜 그랬던 거지? 내가 뭔가에 씐 게 아니고서야….’

그날의 르네는 원래 알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르카이츠가 도서관에 갔던 그날 밤.

르네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째 점점 더 더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원래 더위도 잘 타는 편이고, 또 이제 한여름이 다가오는 터였지만.

“이상하네. 이렇게까지 더운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것은 르네의 몸에서는 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통 더우면 몸의 체온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땀을 흘려보내는 것 아닌가.

르네는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제 몸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좀… 이상한데….”

뭐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함이었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고.

“아픈… 건가…?”

살에 무언가 닿으면 쓰라릴 만큼 예민해짐과 동시에.

르네의 입에서 아주 낯선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아… 응?”

제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아주 애끓는 소리에, 본인이 내고도 놀라 입을 틀어막은 르네였다.

한데 그게 댐을 허무는 작업이었던 걸까.

그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온 걸 기점으로 르네의 몸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라는 것은 일단 말하기도 남사스러웠다.

한마디로 르네는 자신이 꼭 발정이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은 뜨겁고, 간지럽고, 누군가 자신을 채워 주길 바라는 욕구에, 저도 모르게 몸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하다.

진짜 왜 이러는 거지? 내 몸이 왜 이러는 거야?

머리와 몸이 전혀 맞지 않았다.

머리로는 옷을 벗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손은 슬립은 물론 제 몸을 옥죄고 있는 보정 속옷까지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안 돼, 진짜 안 되는데….
그때쯤 아르카이츠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기 시작해 어느새 알몸이 된 르네와 딱 마주쳤다.

거기서 르네의 기억이 한 번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아르카이츠의 품이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미친 건가?

당장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여전히 손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아르카이츠의 등을 더 강하게 제 쪽으로 껴안고, 잡아당기며 아예 스스로 그의 품속을 파고들기까지 했다.

마치 온몸이 불타는 듯한 강한 열감과 동시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쾌락을 느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하다가도 또 정수리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양 아주 강렬한 감각.

아주 높은 곳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르네의 기억이 또 끊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가 바로 비명을 질렀던 그날 아침이었다.

기억이 끊겼을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르네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 얼른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으악! 그만, 그만 생각해!”

하지만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날 밤을 수십 수백 번은 반복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르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기며 화장대에 머리를 쿵, 박았다.

다시 그날 밤을 떠올리니,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가장 충격적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 씨… 그 와중에 진짜 기분이 좋긴 좋았다는 거야…!’

르네는 살면서 그런 감각이 있을 것이라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르네는 그날 자신이 몇 번이고 아르카이츠에게 이것저것 요구했는지 떠올렸다.

여기를 어떻게 해 줘라, 저기를 저렇게 해 줘라….

‘원래 그렇게 기분 좋은 건가…?’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렇게 열이 오르고, 몸이 간질대며 온 감각이 예민해져 있던 그날 밤 아르카이츠에게 안긴


이후로는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건가?’

아르카이츠 말로는 최음약 따위 몰래 먹일 만큼 발정 난 짐승은 아니라 말했다.

그날 기억을 떠올려 봐도 아르카이츠 역시 당황한 티가 나긴 했다.


‘그래. 아르카이츠는 분명 날 보고 당황하긴 했지…. 사내라서 당황한 거였을까? 아, 뭐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잠깐, 생각해 보면 그는 꼭….’

그만 생각하자, 다짐할 땐 언제고 또다시 그날 밤을 떠올리는 르네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기억이 끊기기 전.

아르카이츠는 알몸의 르네를 보자마자 기겁을 한다거나, 혹은 화를 내기는커녕.

“르네, 너 설마 지금….”

이미 아델라이드가 아닌 르네임을 알고 있었던 양 대하지 않았던가.

“아르카이츠, 나 몸이… 이상해요…. 나, 여기가 막….”

르네는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이제 그만 생각해.

이건 없었던 일로 치자. 이건 없었던 일로 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가면서까지 르네는 애써 그날 밤 일을 잊기로 했다.

다행히 그날 이후부터 아르카이츠는 밤마다 도서관으로 나갔다.

황태자비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리는 아르카이츠의 행동을 르네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둘 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평소의 아르카이츠였다면 약점 삼아 놀리거나, 혹은 르네의 정체를 빌미로 무언가 협박을 하든가.

아무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르카이츠의 정신은 다른 것에 팔린 듯했다.

기뻐해야 하는 게 분명한데.

르네는 어째 이 커다란 침대에 혼자 잠들 때마다 묘하게 기쁨 외의 다른 감정이 든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

가령 지금처럼 말이다.
#27.

“…아니, 갑자기 왜 거리를 두고 그래…?”

이전에는 잘만 들이댔으면서.

아주 질릴 만큼, 아주 학을 뗄 만큼 막 스스럼없이 굴고, 변태 같은 말로 사람 당황시키고 그랬으면서.

왜 그날 이후부터 거리를 두고 그래?

왜 내외하는 거냔 말이야.

“꼭 내가 르네인 걸 알고 나서부터는….”

물론 아쉽진 않다. 오히려 그런 음담패설 듣지 않아서 기쁘다.

기쁠 게 분명한데. 묘하게 찝찝한 거다.

마치 아델라이드가 아닌 르네에게는 거리를 두겠다는 양 아주 달리 행동하는 아르카이츠가.

“…아, 뭐. 나는 편하다 이거야. 이 큰 침대 나 혼자 쓰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흥.”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르네는 괜히 자신이 결코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침상을 혼자 데굴데굴 구르다가 이내 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산 분출 직전처럼 새빨개지더니,
이내 또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문득 제 꼴을 자각하고선 투덜거렸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씨, 진짜. 오늘도 진짜 안 오는 건가? 다른 방에 가서 자는 거야, 아니면


그냥 도서관에서 자는 거야…. 둘 다 같은 건가…? 아무튼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네….”

그렇게 투덜거리던 르네는 괜히 이불을 발로 팡팡 차거나 나직이 아르카이츠 험담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베개를 꼭
껴안고 잠에 들었다.

* * *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밤.

붉은 달이 검은 하늘에 선득하니 빛났다.

수많은 병사들이 일제히 어디론가 열을 맞춰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횃불로 길을 밝히던 이들은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여깁니다, 이쪽입니다!’ 하며 횃불을 흔들어 댔다.

그러자 제 1 황태자 파비안이 인파를 가르며 맨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옆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함께 있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두 눈동자는 이미 오래전 눈의 기능을 상실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신기하게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파비안 옆에서 걸어갔다.

이윽고 맨 앞쪽에 도달한 파비안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당황과 두려움에 온몸을 잔뜩 웅크린 웬 사내를
마주하게 됐다.

그는 알몸 상태로 무방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체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아주 순수한 눈빛이었다.

파비안은 잠시 알몸의 사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제가 걸치고 있던 두꺼운 망토를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


줬다.

“이름이 무엇이냐.”

부드러운 음성으로 파비안이 물었다.

알몸의 사내는 그런 게 대체 무엇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가만히 눈만 끔뻑였다.

그러자 파비안 옆의 주술사가 말을 얹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세계에서 온 자입니다. 제국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요.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할 것입니다.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술을 통해 불러들인 이세계의 생물체이니까요.”

그의 말에 파비안은 다리를 굽혀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의 사내와 시선을 맞췄다.

틀림없이 저와 같은 눈, 코, 입 그리고 팔과 다리까지, 인간의 모습과 똑같은데 이게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니.

“신기하군. 꼭 인간처럼 생겼는데.”

“인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곧 동이 터 올 겁니다.”

주술사의 말에 파비안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내의 시선이 곧장 파비안을 따라갔다.

꼭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제 어미를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것과도 비슷했다.

“눈에 띄지 않게 망토에 가려서 데리고 오거라.”

“예, 전하.”

그렇게 말한 파비안이 이만 뒤돌아 가려 했다.

그때 사내가 그대로 손을 뻗어 파비안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이놈! 감히 누구 바짓단을 잡아당기느냐!”

병사 하나가 사내의 손을 발로 걷어찼다.

사내는 억, 소리를 내며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듯 넘어졌다.

몸에 어찌나 힘이 없는지, 제 손목을 꼭 쥐고선 엎어진 채로 그대로 몸을 웅크리는 것이, 꼭 이런 식으로 맞는


것에 이골이 난 듯한 자의 자세였다.

제국의 황태자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은 큰 불경죄나 다름없었다.

감히 함부로 손을 대려는 자는 원래 죽음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사내의 건방짐을 꾸짖기 위해 발로 걷어찼던 병사가 다시 한번 발을 들어 올려 콱 밟으려 할 때쯤이었다.

“그만.”

파비안의 말에 병사가 발길질하려던 것을 멈추곤 고개를 조아리며 당황하여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엄청난 분노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지금 ‘저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르는가.”

“예…?”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못한 건지, 멍청한 얼굴로 ‘예?’ 하며 묻는 병사의 모습에 그의 상관이 얼른 그의


뒤통수를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 역시 파비안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분의 정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감히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저지르는 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무지한 놈의 충성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상관의 말에 파비안은 조용히 병사를 흘기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네. 하나 다음번엔 같은 실수 따위 없어야 할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파비안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어디 모자란 건가?

누가 발로 차서 넘어졌으면 일어나든지, 항의를 하든지.

아무리 말귀를 못 알아먹어도 화 정도는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데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것이 꼭 반편이가 소환된 건가, 걱정도 됐다.

어쩐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파비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홱 돌아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저앉아 있던 사내가 주섬주섬 망토를 둘러메더니 곧 파비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파비안은 그 모습을 아주 마뜩잖은 눈으로 흘기다, 슬그머니 주술사에게 물었다.

가면을 쓰고 온몸을 망토로 가린 채 몸을 수그리고 있는 주술사는 제국에서 금지된 흑마법 주술을 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파비안은 소환을 위해 수많은 주술사를 찾아다녔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능력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때 스스로 그를 찾아온 주술사였다.

“소환술을 할 수 있는 이를 찾고 계신다고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

“가면을 벗어라. 얼굴조차 가린 널 무엇을 믿고 내가 일을 맡기지?”

“가면 뒤의 얼굴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추악한 얼굴일 뿐입니다. 저는 제 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신원을 숨기는 것은 금지된 주술을 행하는 주술사들에게 생명입니다. 저는 그저 돈을 받고, 원하는
것을 소환해 드리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얼굴을 가려 신원조차 불확실한 존재를 곁에 둘 정도로 안전 불감증은 아니었지만, 사실 파비안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주술사들 대부분은 오래전 모두 처형당해 그가 마지막 주술사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제대로 소환한 거 맞나?”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틀림없이 전하께서 찾으시던 ‘그것’입니다.”

주술사는 이미 몇 번의 소환술을 통해 파비안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준 바가 있었다.

주술사의 확신에 찬 말에 그제야 파비안은 불안이 누그러진 듯 굳은 표정을 풀었다.

“신기하군. 이세계에서도 오메가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메가와 비슷한 능력이 아닙니다, 전하. 보다 월등하고, 보다 악한 존재이지요. 저것은 ‘몽마’라 합니다,
전하. 오로지 유혹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다루기 어려우실 겁니다.”

저것이 꿈에 스며들어 상대를 유혹하면 사내든 여인이든 당해낼 자가 없다고 했다.

또 주기적으로 정기를 먹어야 하는 이들이기에 겉으로만 봐서는 발정 난 오메가와 다를 게 없다고.

이세계에서 온 저것은 오로지 아르카이츠와 그 아내를 찢어 놓기 위한 존재였다.

“다루기 어려워도 해내야 하지 않겠나. 원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몽마를 소환하실 만큼 강한 욕망이니, 뭐든 해내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전하께서는 몽마를 다루기
수월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저것 보십시오. 저 몽마라는 것도 임프린팅을 하는 것인지, 아무래도 갓 태어난 몽마를 소환하였나 봅니다.
운이 좋네요. 이미 성체가 된 몽마는 그만큼 바라는 것도 많고, 자존심도 고집도 세다 들었거든요.”

“임프린팅?”

“예. 왜, 흔히들 하는 말 있지 않습니까. ‘각인’이라고.”

“저것이 나한테 각인이라도 했다, 이 말이더냐.”

“졸졸 따라오는 것을 보십시오. 전하의 행동 그대로 따라 하지 않습니까.”

주술사의 말에 파비안은 발걸음을 멈추곤 뒤돌아 몽마를 쳐다봤다.

그러자 졸졸 따라 내려오던 그 역시 발걸음을 멈추는 것 아니겠나.

그의 시선은 오로지 파비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28.

파비안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몽마 역시 그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각인이 되면 오히려 일이 틀어지는 것 아닌가? 난 나한테 각인한 상대는 필요 없어.”

“몽마들에게 있어 각인한 상대는 그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인?”

“예. 아주 잘 훈련된 개들이 주인 말에 복종하는 것처럼, 저것 역시 잘만 훈련시키신다면 전하의 말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할 것입니다.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요.”

“인간의 정기를 빼먹고 사는 몽마가, 각인을 하면 내 말에 절대 복종을 한다…. 그것 참 재밌는 종족이군.”

이내 마차에 도착한 파비안은, 몽마가 계단을 밟고 마차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줬다.

아직 사내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대체 저놈이 뭐길래 황태자 전하께서 손도 잡아 주시나 궁금해했지만,
사내가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려 그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주술사는 마차에 타지 않은 채 그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하면, 부디 대가를 치르신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셨으면 합니다.”

파비안은 그런 노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무서운 말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네 역시 성치 못할 테니까.”

주술사는 대답 대신 더욱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파비안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출발하라는 듯 마차 천장을 툭툭 두들겼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몽마의 시선은 아주 올곧게 파비안을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눈을 빛내는 것이 꼭 파비안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 보였다.

“미카엘.”

“…….”

“이제부터 그게 네 이름이다. 네 이름. 미카엘.”

파비안은 그의 심장 부근을 검지로 쿡 찍어 누르듯 가리키며 그의 이름을 지어 줬다.

그러자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던 몽마가 천천히 파비안의 입 모양을 따라 해 중얼거렸다.

“미…카엘.”

제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미카엘, 미카아에엘, 중얼거리자 파비안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네 주인은 이제부터 나다. 넌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아르카이츠를 유혹하는 거야.”

그러자 몽마는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파비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몽마에게 있어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 * *

파비안의 마차가 사라지고 난 뒤, 주술사는 수그렸던 몸을 반듯이 편 뒤 마차가 떠난 방향을 가만히 바라봤다.

희뿌옇게 변한 눈동자로 앞도 보이지 않을 터인데 그는 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주술사는 뒤쪽에서 인기척을 확인했다.

파비안이 소환술을 끝낸 주술사가 혹여나 입을 놀릴까 염려해 그의 뒤처리를 자신의 병사들에게 맡긴 듯했다.

황궁 소속 병사들이 아닌, 파비안의 그림자라 불리는 이들.

그들은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가린 채 그림자처럼 슬며시 나타나 주술사를 에워쌌다.


아무리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주술사라고는 하나, 그들은 말 그대로 주술을 행하지 않는 이상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흑마법을 행하는 주술은 간단한 언령과는 달리 까다로운 준비물들이 필요했다.

살수로 훈련받은 이들에게 무기 하나 없는 이를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살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주술사를 향해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부메랑과 같은 작은 표창들이 빠르게 날아와 그들 중 하나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다.

살수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자, 다른 이들은 당황하여 얼른 경계태세를 갖췄다.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이가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잡아 내렸다.

곧 그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의 정체에 그림자들은 모두 한껏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곧 살수들의 대장 되는 이가 얼굴의 복면을 내리며 불청객을 바라봤다.

“당신은…!”

이 시간에 그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었고, 더군다나 저 주술사와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림자들은 파비안의 ‘소환이 끝나면 주술사를 처리해라.’라는 명령을 어쩌면 불복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주술사를 내게 넘겨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미 파비안의 수는 내게 읽혔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 나보다 약한 이들은 죽이지 않는다. 나는 그
규율을 어기고 싶지 않다.”

“……”

“그런데도 협조해 주지 않겠다는 건, 제 목숨을 생각보다 가볍게 여기는 건가.”

남자가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림자들은 대답 대신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밤.

붉은 달이 선득하니 빛났다.

어두운 숲 속에서는 몇 번의 간헐적인 단말마가 짧고 굵게 울려 퍼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 사이를 걸어온 남자가 이내 주술사 앞에 섰다.

주술사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튄 핏자국들을 닦아 주었다.


“규율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이치고는 참 많이도 피를 묻히셨습니다. 아르카이츠 전하.”

요요히 빛나는 붉은빛을 품은 금안이 이내 차갑게 내려앉았다.

사람을 죽인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 그는 조용히 에스코트하듯 주술사의 손을 잡으며 짧게 묵례했다.

* * *

아르카이츠는 합방을 추진할 땐 언제고, 며칠이 지나도록 매일 밤 르네 혼자만 잠들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단두대에 머리를 집어넣고, 저 위에 날 선 칼날이 언제쯤 떨어질지 모르는, 죽기 직전의 가장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를 미리 경험해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다 기억해 내서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말할 거라더니. 진짜 말 자체를 안 걸 셈인 건가…? 나


이거 부모님한테 말해야 하나? 그래도 되는 건가?’

르네는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고, 또 상스럽다며 절대 하지 않던 오른다리를 달달 떨어 대기 시작했다.

‘뭐라도 반응을 보여야 할 거 아냐. 화를 내든,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내막이라도 묻든.’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어찌하여 르네가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고 있는지 그 자세한 이야기조차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기, 뭐 안 물어봐요…?”

“뭐를.”

“그러니까, 왜 제가 누이의 행세를 했는지, 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까 눈물 콧물 쏟아 내며 싹싹 빌면서 말했잖아. 누이가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여장했다고.”

“그렇긴 한데….”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가 그리 태연하냔 말이다.

차라리 잔뜩 화를 내면 아, 이제 곧 죽겠구나. 마음 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화를 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아르카이츠를 보며 르네만 마음고생 중이었다.

이 사태를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사내인 것을 들켰고, 그로도 모자라 사내의 몸으로 아르카이츠와 밤을 보냈다.

‘잠깐. 나 이렇게 되면 내가 내 남편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내 매형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가? 아니, 그깟 게 지금 중요한 건가? 나 어떡하면 좋지? 일주일 동안의 시간을 벌어서 그 안에
탈출하기는커녕 완전히 올가미처럼 여기 묶이고 만 거나 다름없잖아…!’

르내는 자신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생각했다.

단두대나 올가미나 결국 목이 잘리느냐, 졸리느냐의 차이겠다만.

적어도 자신이 어떻게 죽을 건지는 알 권리가 있지 않나.

유언장을 미리 써 둬야 할까.

아니면, 사실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항변을 해야 할까.

“나 어떡해, 애나? 나 어떡하면 좋아, 그 미친놈한테 들킨 걸로도 모자라….”

르네는 완전히 넋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으로 애나에게 울먹거리며 물었다.

사실 이 황궁에서 르네가 자신의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이는 유일하게 애나뿐이었다.

자신의 유모이기도 했던 애나이기에, 제 2 의 누이 혹은 어머니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르네는 일단 애나에게 그날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

도저히 혼자서만 앓기에는 너무 큰 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누이고 진짜 어머니였다면 차마 털어놓지 못했을 테지만, 애나는 타인이자 가족 그 애매한 경계선상의


인물이었기에 오히려 조금 수월하게 터놓을 수 있었다.

물론 마음 여린 어머니에게 간밤의 일을 말했다간 거품 물고 쓰러지실 게 분명해서이기도 했다.

“나 어떡해?”

“…그, 그러게요….”

애나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29.

물론 피어스 공작은 애나에게 르네가 절대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 따위 하지 못하도록 잘 타이르라 당부했지만.

그 사이에 ‘르네가 황태자에게 정체를 들키고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사실이 들어가진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주인어른에게 알린다면 분명 그들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다.

“이, 일단은 황태자 전하께서 죽이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거면 일단 다행인 거죠!”

“뭐어? 그게 다행이야? 그게 다행이냔 말이야…! 나 여기서 못 나가면 어떻게 해!”

“그건 일단… 조금 더 두고 보죠. 일단 공작 각하께 이 사실은 비밀로 해요.”

“왜?”

“…말하시고 싶으세요, 도련님?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

애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르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도리질했다.

이 사실을 알면 분명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시고 말 거다.

하나뿐인 아들이, 금지옥엽 키운 막내아들이, 여장한 것을 들킨 건 물론 제 매형 되는 이와 잠자리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사실 막장 중의 막장 아닌가.

“그냥 콱 죽어 버리고 싶어….”

“그런 말씀 마세요, 도련님….”

“어차피 안 죽을 거긴 한데, 살고 싶긴 한데, 이게… 맞는 거야?”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데, 그날 밤의 일이 확실히 기억나시긴 하세요? 대체 술을 드신 것도 아니고,


미약을 드신 것도 아니라면….”

“…말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인즉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었어. 그건 분명해. 그러니까 애나, 부모님한테 가서 좀 물어봐. 내가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지. 그러니까, 그, 꼭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든지. 그런 거 말이야.”

“네, 그럴게요, 도련님.”

애나 역시 사실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피어스 가문의 막내 도련님은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고, 태어나길 유약하게 태어났다.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애나 역시 아무리 르네의 시녀라 해 봤자 시녀가 알아야 할 그 이상의 것들은 알지 못했으니까.

그 병이 정말로 르네의 말처럼 꼭 다른 사람이 몸에 들어온 양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피어스 공작 부부는 제 막내아들의 병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 말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히려 들키니까 가끔은 이렇게 여장을 풀고 있을 수도 있어서 편하긴 해. 근데 대체 아르카이츠


그놈은 무슨 꿍꿍이길래 내 정체를 알고도 가만히 있는 걸까?”

“그러게요, 도련님.”

“애나, 너는 그럴게요, 그러게요, 그런 말밖에 할 줄 몰라?”

“그야 저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네…. 나 돌아갈 수 있을까, 애나?”

이 넓은 황궁에 믿고 의지할 이가 시녀 애나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

르네는 최근 들어 애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많이 걸기 시작했다.

원래 도련님이 이렇게나 말이 많았던가 싶을 만큼.

애나는 그런 르네가 안쓰러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은 해 줄 수 없었다.

르네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는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애나가 얼른 바깥에 나가 인기척을 확인하더니, 이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르네는 이제 그럴 때마다 불안해져 저도 모르게 손톱을 틱틱 물어뜯곤 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난 르네가 얼른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왜 그래?”

“아, 그것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해서요. 접견 요청이 있다고 합니다. 얼른 채비하셔야겠어요.”

“이렇게 갑자기? 누가 접견을 요청하는데?”

“페르나서스 후작님이요.”

“알빈? 알빈이 찾아왔다고?!”

소꿉친구가 누이로 여장한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기분을 서술하라면, 대체 어떤 식으로 서술해야 할까.

누군가는 수치스럽고, 누군가는 당혹스러울 테며 누군가는 울고 싶은 기분일 테지만.

그 모든 예상을 깨고 르네는….

“빨리 알빈을 만나러 가야겠어!”

그 어떤 때보다 가장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한편 아르카이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 제 할 일 미루고 거들먹거리는 놈팡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뭐든 열정적으로 해 내는 편은 아니었기에,


황궁에서는 이런 그의 변화를 누군가는 긍정적으로 누군가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도 보이지 않던 학구열을 최근 들어 아주 불태우고 있단 소문이 있던데, 아르카이츠. 왜. 부인이


학구열 높은 사내가 좋다던가?”

파비안은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듯 제 이복형제의 집무실을 찾아와 소파에 늘어지듯 앉으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한데 왜 신혼을 안 즐기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는 소리가 들려.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라면 어지간히 너도
무심하단 말이지. 말해 봐. 뭐가 문젠데?”

“문제 같은 거 없어.”

“문제 같은 거 없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너 그러다 소박맞아. 아니면 네가 소박맞히는 거냐? 그 아델라이드


피어스를 아내로 들이고선? 혹시 너 뭐…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왜, 남자의 자존심이라든지. 그런 거
말이야.”

“파비안. 그딴 거 없으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꺼져 줘.”

“형님한테 말하는 것 좀 봐. 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내 동생이 어디 가서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어서 매일 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가 싶어 걱정해 줘도 고마운 줄 몰라요.”

말 많은 파비안은 너무하네, 야멸차네, 아내한테도 이렇게 냉소적이냐며 계속해서 투덜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조잘거림에 아르카이츠가 보던 문서를 탁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

“아, 진짜 이러기야? 나한테도 말 안 해 줘?”

“가라니까.”

“이럴수록 의혹만 더 커지는 건데? 내가 나서서 정리해 주면 너도 좀 편하지 않겠어? 너 그런 소문들이


황태자비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지 알고는 있지?”

“…….”

“봐. 넌 소문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관심도 없고, 그걸 바로잡을 생각도 없고. 너야 뭐 워낙에 무던하고
무심하니 상관없다 쳐도. 네 아내 입장은 좀 다르지. 사람들은 네가 무서워서 널 물어뜯지는 못해도 대신 네
부인을 물어뜯으려 할걸?”

“…….”

파비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황궁에서는 언제나 여러 세력들이 존재했으며 그들 중에는 야만족이라고도 불리는 아르콘 부족의 피가 흐르는
아르카이츠를 혐오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아마 아르카이츠를 까 내리기 위해서라도 황태자비를 같이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이유는 어떻게든 만들어 낼 거다.

“합방을 했지만, 이상하게 황태자가 밤마다 방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한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겠어? 네 아내가


네 진짜 오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소리가 나돌지도 모른다는 거지.”

“곧 그딴 소문들은 사그라들 테니 걱정 마.”

“그걸 어찌 알아?”

파비안은 아르카이츠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물었지만, 아르카이츠는 속 시원히 대답해 주기보다는


의미 모를 미소만 픽 지으며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파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부부 사이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이구나, 아르카이츠.”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오메가라는 게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 난 살면서 네가 그리 다정한 미소를 짓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파비안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지작댔다.

평소와 별반 다를 거 없는데 괜히 주책맞게 구는 거라 치부한 아르카이츠는 별 상관 안 한다는 듯 이내 다시


새로운 문서를 펄럭대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진짜 무슨 기분이야, 각인한 오메가를 품에 안는 기분은?”

파비안의 질문에 아르카이츠가 휘갈기듯 문서에 사인을 하며 대꾸했다.

“안 말해 줘. 궁금하면 너도 네 오메가 찾아 나서든지.”

“…에이, 야박한 놈.”

파비안은 업어 키운 동생이 이복형제라고 이제 와 거리를 두려 한다며 온갖 서운한 소리를 해 댔다.

새빨간 거짓말에 주접이었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업어 키우기는 무슨.

파비안은 평소에도 실없는 소리를 곧잘 하는 인간이었기에 아르카이츠는 익숙한 듯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제 할 일


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나가 있었던 보좌관이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아르카이츠에게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무심하던 아르카이츠의 얼굴에 쩌적쩌적 마치 금이라도 가듯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파비안은 또 무언가 재미난 일이 일어나려나 싶어 흥미로운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주시했다.

“뭔데 그래?”

파비안의 질문에 역시나 대답해 주지 않은 아르카이츠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뒤로 안절부절못하던 보좌관이 얼쯤하게 파비안에게 인사를 한 뒤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어느새 아르카이츠의 집무실에 혼자 남은 파비안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보좌관이 다가와 구태여 묻지 않았음에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파비안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아니, 저놈도 질투라는 걸 하긴 한단 말이지.”

아르카이츠가 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갔나 했더니.

그게 다름 아닌 질투 때문이란다.

#30.

갑자기 찾아온 황태자비의 오랜 친우인 페르나서스 후작의 방문에 심기가 뒤틀렸던 걸까.

제 아내가 자신 말고 다른 사내와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일이 손에 안 잡힌 걸까.

파비안은 별일을 다 보겠다며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이것 참 웃기지 않느냐! 아르카이츠가, 질투를 다 해! 아하하!”

“아르카이츠 님이 정말로 부인을 사랑하시나 봅니다.”

그 순간 감히 말을 얹는 이가 있었으니, 제 1 황태자의 집무실로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견습 보좌관이었다.

그의 말에 고참 보좌관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고, 파비안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다른 시종들 역시 헙,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랑. 사랑이라. 알파가 제 오메가를 만난 것뿐이지 그게 사랑일까?”

“예…?”

“자네,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견습 보좌관은 그저 해맑은 얼굴로, ‘이제 세 달 정도 되었습니다!’ 대답했다.

“세 달. 세 달 정도라면, 그래 모를 수 있지.”

“무엇을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 모르는 것이 있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자네 입궁하기 전에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무어라 배웠나? 그저 운명적인 사랑, 뭐 이런 식으로밖에 배우지
않았겠지?”

“예, 그렇게 배웠습니다, 황태자 전하.”

“쯧쯔… 스승이라는 작자들이 다들 이래. 고상 떠는 척, 빛 좋은 것만 내놓고 흠집들은 감추기에 급급하지. 내


친히 정정해 주마. 알파와 오메가, 그것들은 그저 짐승이나 다름없다. 그저 발정기의 짐승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파비안은 평소에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주 더럽고, 비도덕적이며, 상스러운 것을 대하는 듯한 표정.

끔찍하다 못해 혐오스럽다는 듯 치를 떨며 말하는 파비안의 모습에 견습 보좌관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다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를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 저는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서도 알파 중의 알파이시기에….”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이냐. 짐승들과 나를 같은 취급하는 것을?”

“…주, 죽여 주십시오.”

자신이 큰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견습 보좌관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파비안은 아주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다,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 평소의 해사한 미소를 지은 그가 견습 보좌관의 어깨를 다독이듯 두들겼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것이니까. 내 사람이 될 거라면 다음번엔 조금 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파비안 님!”

파비안은 보좌관을 흘기며 지나갔다.

견습 보좌관을 비롯해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한 파비안은 보좌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들 집무실 바깥에 나가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들 모두 익숙한 듯 조용히, 하지만 재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견습 보좌관은 어리바리한 얼굴로 허둥대다 얼른 마찬가지로 그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시종들이 모두들 한숨을 내려놓듯 ‘휴.’ 하며 참았던 긴 숨을
내뱉었다.

견습 보좌관은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가, 저가 이렇게나 큰 실수를 한 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제, 제가 큰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풀이 죽어 시무룩해진 견습 보좌관에게 파비안의 시종들이 괜찮다는 듯 그의 등을 다독였다.

“앞으로 조심하기만 하면 돼. 파비안 님은 처음 실수는 대체로 넘어가 주시니까.”

“저, 저 근데 알파와 오메가가 그렇게 큰 잘못인 건가요? 전 그저 배운 대로…. 파비안 님도 알파시잖아요….”

헬리오스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은 알파의 힘을 타고난다고 배웠다.

그 알파라는 것은, 굳이 이렇다 할 표식이 있지는 않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자.

외모부터 신장, 체격, 체력, 두뇌.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이들을 알파라 부르지 않던가.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알파는 선망의 대상, 오메가는 그런 알파가 각인하는 운명적인 상대.

이 정도는 누구라도 아는 내용인데.

이 이야깃거리가 그렇게나 혼이 날 만한 주제였던가, 조금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 견습 보좌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참 시종이 다가와 작게 말했다.

“자네 억울한 마음도 이해는 되는데, 웬만해선 파비안 전하 앞에서 절대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좋아.”

“그치만.”

“그래. 전하께서는 본인이 직접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괜찮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극도로 불쾌해하신다네.”

“아니, 대체 왜요…?”

“전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를 혐오하시니까.”

“…아니, 그건 또 대체 왜요…?!”

“자네 앞으로도 파비안 전하를 곁에서 보필할 생각이지?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냥 그렇게 행동하도록 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파비안 전하께서 왜 그리 싫어하시는지.”

“…그냥 지금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또 무슨 실수를 할지 불안해 죽겠어요.”


그러자 시종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다 이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열성 알파에 대해 알고 있나…?”

이건 파비안의 치부이자, 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과도 같은 것.

하지만 그의 측근들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파비안은 열성 알파였다.

알파 중에서도 더욱 특출한 우성 알파가 있다면, 반대로 알파이기는 한데 어째 알파라 치기에는 조금 뒤떨어지는


그런 열성 알파도 존재했다.

“열성 알파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아는데요?”

“알파와 오메가는 발정 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 기간이 되면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침실 근처에 가는 것이 금지되는 걸.”

“예.”

“알파와 오메가의 발정 기간이 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그야 황궁의, 그것도 황태자의 사람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수로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 중의 하나


아니던가.

알파의 발정은 러트라 부르고, 오메가의 발정은 히트 사이클이라 부른다고.

“…파비안 전하께서는 그 러트의 시기가… 온 적이 없네.”

“예? 그럼 알파가 아니잖습니까…!”

러트가 없는 알파가 있던가. 그건 그냥 베타 아닌가.

그저 알파처럼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베타가 아니냔 말이다.

견습 보좌관의 말에 시종들 중에선 그 누구 하나 부정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파비안 황태자는 사실 알파가 아닌 베타인데, 그 베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알파인 척한다는 것


아닌가.

파비안의 측근이라면 모두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만 했다.

“화, 황제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건 우리도 모를 일이네.”

“…속여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저희끼리 제국 전체를 속여도 되는 ….”

“해서, 말할 생각인가?”
함부로 입을 놀릴 생각이냐 묻는 시종들의 시선이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직감한 견습 보좌관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파비안의 집무실 안.

그는 아르카이츠 앞에서 실없는 농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툭, 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겨 규칙적인


음을 만들어 냈다.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 앞에 선 보좌관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미처 주의를 주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주의? 무슨 주의. 내가 사실은 베타 주제에 알파인 척하니, 그 앞에서는 알파니 오메가니 이야기조차 꺼내지
말라는 주의?”

“전하…. 어찌 그리 단정 지으십니까. 전하께서는 분명 알파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신 알파이신데 어찌


베타라 말하십니까.”

“자네 지금 날 놀리나? 러트조차 오지 않는 알파가 세상천지 어딨다고. 실없는 척 구니, 진짜 실없다 생각하는
건가.”

“아닙니다, 전하. 부디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견습 보좌관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내버려 둬. 입 가벼운 놈이라면 네가 애초부터 들이지도 않았겠지. 네가 들이고자 한 놈이니 어딘가에 쓸모는
있는 것 아니겠나?”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어리바리하던 견습 보좌관의 본가가 무려 마이어스 백작 가문이었다.

마이어스는 대대로 황제의 주치의나 보좌관을 배출해 내던 가문이었다.

원래는 성조차 없던 이였는데, 러트와 히트 사이클을 억제하는 약을 만들어 낸 뒤로 작위와 땅을 하사받았다지.

“마이어스라면 내게 유용한 가문일 테니. 무엇보다 완벽히 내 사람으로 만들도록 해라.”

“예, 전하.”

저 맹한 견습생을 시작으로 마이어스 가문 전체를 제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파비안은 어쩌면 이 망할 체질도 조금은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31.
베타인지 알파인지. 사실 본인조차 잘 몰랐다.

누가 봐도 우성 알파인 아르카이츠와는 달리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은 죄다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 낸 것들이었다.

태생을 다 갖고 태어난 제 이복형제, 그리고 태생을 다 잃고 태어난 자신을 비교하면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르카이츠가 처음 러트를 겪을 때.

파비안에게는 러트라는 것이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들이 제 1 황태자가 정말 알파가 맞긴 한 거냐, 왜 러트가 찾아오지 않는 거냐 저들끼리 이런저런 말을 해


댔을 때의 그 굴욕감.

자살한 첫 번째 황후와, 그녀의 아들을 둘러싼 수많은 근거 없는 소문들을 저조차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움.

알파가 아니면 황권을 이을 수 없다.

적어도 헬리오스 제국에서 베타가 황제가 된 적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는 아르카이츠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파인 척 매일 러트 제어약을 먹어야 했다.

먹지 않아도 러트가 찾아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약을 매달 규칙적으로 먹는다.

그래야만 이 황궁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 생각했으니까.

이내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파비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보좌관이 꾸벅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 그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는 그의 감정은 복잡했다.

원망, 미움, 부러움, 시기, 질투. 자기혐오, 피해의식, 자격지심.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죄다 모여 물 잔뜩 먹인 솜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아르카이츠는 저에게 호의적이라는 걸.

그래서, 감히 그를 끌어내릴 생각을 하는 본인이 가장 못난 이라는 것조차 알고 있다.

가만히 상념에 잠긴 파비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슨 기분일까. 자신의 오메가를 발견한 그 기분은….”

그저 발정 난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치부하던 그가 가질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궁금은 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자신만의 오메가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어떻길래 어머니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고, 어떻길래 아버지는 그렇게 쉽게 어머니를 잊고 곧장
페트라 황후, 그 악독한 여자를 다음 황후로 맞이했을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사람을 이렇게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파비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파니 오메가니, 그딴 것들은 다 사라져야 맞는 거라고.

운명적인 사랑, 각인, 그런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건지.

그건 사랑이 아닌 단순한 성욕이고 욕망일 뿐이라는 걸.

파비안은 모두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없었다면 서로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들이.

그걸 진정한 사랑이니 짝이니 떠들어 대는 게 얼마나 같잖은지.

* * *

“네가 여기 왜 있어?!”

아주 반갑게 웃으며 드레스자락을 꼭 쥔 채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르네의 모습에, 알빈은 기겁하다시피 창백하게
질려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날 놀리려는 건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아 괘씸하여 아델라이드 누이가 날 골리려는 건가?

그래서 지금 르네를 이렇게 여장시켜 내보낸 건가?

알빈은 그 짧은 순간 온갖 상상을 했다.

가장 유력한 건 아마 심술궂은 아델라이드가 제 동생을 데리고 또 인형놀이하듯 저를 골리려는 걸 거다.

어느새 안겨들듯 달려온 르네가 아주 반갑다는 듯 알빈의 손을 꼭 잡았다.

“알빈, 출장에서 돌아왔구나…!”

“잠깐, 너 아프다고 들었는데 왜 네가 여기…. 누이도 참 장난이 갈수록 심해져. 아직도 너 여장시키면서 놀고
그러는 거야?”

“아, 그게….”
“놀랄 만큼 놀랐으니 이제 좀 나와요, 아델라이드 누이. 어찌 황태자비까지 오르셔 가지고는 아직도 르네를 이리
괴롭히십니까. 정말 깜짝 놀랐네.”

알빈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딘가에서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델라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황태자비를 알현하러 온 거지, 놀림감이 되려 온 것이 아니라고요.

그러자 르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급히 눌러쓴 가발이 살짝 기울어지려 하자 르네가 얼른 바로잡았다.

“알빈. 그런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누이 여기에 없어.”

“응? 아직 준비 중이라는 소리냐, 르네?”

“그런 게 아니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알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피어스 공작은 르네가 큰 병을 앓고 있다 하지 않았나. 혹시 그것마저 장난이었던 건가?

“르네. 근데 공작 각하께서는 네가 많이 아프다 했는데. 몸은 좀 어때, 다 나았어?”

“내 말 좀 들어 봐, 알빈.”

“황태자비 전하는 왜 이렇게 준비가 늦어? 너 빨리 가서 옷 갈아입고 와. 다른 이들이 보면 놀리겠다.


소문나겠어. 그나저나 너 이렇게 입으니까 꼭 누님 같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르네를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만나서 그런 걸까.

알빈은 꽤나 조잘대며 르네의 차림새를 다시 한번 살폈다.

진짜 이러니까 아델라이드 같아.

맨 처음 르네가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잠깐의 순간 동안엔 르네가 아닌 아델라이드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델라이드가 인형놀이랍시고 종종 르네한테 여장을 시켜 데리고 다니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가장 가까이서 오랜 시간 지켜봤기에 알빈은 르네의 여장이 낯설지 않았지만….

르네라면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써도 행동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자부하던 알빈이 이 정도라면 아마 다른


이들은 여장한 르네를 충분히 아델라이드라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알빈. 일단 앉아 봐.”
“왜 그래, 답지 않게 그런 진지한 얼굴을 다 하고. 너 정말 옷 안 갈아입고 올 거야?”

여장한 상태의 르네를 보는 건 사실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적 아델라이드 옆에 손잡고 걸어가는 여장한 어린 르네를 보고 한눈에 반해 피어스 가문의 막내와 약혼을
추진하고 싶다 조잘댔던 전적이 있었던 알빈이었다.

여장한 르네만 보면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불편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잘도….’

사실 그렇게 훤히 드러난 옷도 아니었다.

르네는 최대한 가짜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넣어야 했고, 그 내용물이 훤히 드러나지 않도록 오히려
한창 유행하는 가슴의 절반이 드러나는 그런 드레스는 지양하고 있었다.

꽁꽁 싸매듯이 여미고 다니는 옷이었는데, 그나마 여름이라 목덜미에서 쇄골 부분만 살짝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흰 피부에 움푹 파여 도드라진 쇄골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지 알빈은 괜히 단정히 여민 목 부근의 러플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옷 안 갈아입는 게 아니라, 못 갈아입는 거야, 알빈.”

“대체 뭔 소리야? 아까 전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르네. 누님은 왜 안 오시는 거야?”

“…하아….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답지 않게 한숨까지 내쉬면서. 안 좋은 일이야?”

심각한 르네의 표정을 보니 그제야 알빈 역시 심각성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르네는 천천히 알빈을 소파에 앉히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어차피 내가 널 속일 수는 없으니 말해 주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걱정되게.”

“…사실.”

르네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 이내 알빈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

아마 이 제국에서 르네가 가장 믿는 이를 고르라 한다면 그건 알빈 페르나서스가 될 것이다.

분명 동갑내기였지만 알빈은 언제나 르네를 제 친동생처럼 아껴 주고, 챙겨 주고, 이끌어 주었다.

몸이 약했던 르네는 저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빼어난 알빈을 형처럼 여겼다.

소꿉친구이자 형제이자 가족이었던 알빈에게는 모든 걸 털어놔도 좋지 않을까.


어렸을 적 읽었던 우화가 떠올랐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칠 만한 우물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만 끙끙 앓던 르네는 알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나서야 아주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알빈의 얼굴은 꼭 결혼식을 올리던 르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여긴 어디고 난 누구인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거냐.

믿을 수 없어, 잘못 들은 게 분명해.

흔들리는 눈빛으로 르네를 쳐다보자 르네는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듯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2.

“진짜야? 진짜로 하는 말이야, 그거?”

“내가 지금 이런 걸로 농담할 것 같아 보여, 알빈…? 나도 제발 이게 꿈이길 바라.”

“…허. 잠깐만, 그러니까 네 말은…. 아델라이드 누님이 결혼식 당일에 도망을 쳤고. 그래서 네가 여장을 하고
결혼식을 올렸고. 그래서 네가 황태자비로서 여장한 채 살아가고 있고. 근데 그걸 황태자한테 걸렸다는 거지.”

알빈의 말에 르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체 어쩌다가…. 아니, 걸리긴 또 왜 걸려. 뭐 하다가 걸린 거야? 조심했었어야지…!”

르네는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얼른 할 말을 찾아야만 했다.

여태까지 알빈에게 숨김없이 말하긴 했는데 딱 하나 빼먹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아르카이츠와 동침을 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으나 뺀 이유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절대 말 못 하지, 내가 어떻게 알빈한테 말해…. 부모님한테도 말 못 할 비밀을. 내가 황태자랑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걸 대체 어떻게 말하냔 말이야…!’

무덤까지 들고 갈 비밀이었다.

르네는 살면서 처음으로 비밀이라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언제나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들을 누이며 부모며 하물며 친구들에게도 참새처럼 조잘대던 르네가 처음으로
선택한 침묵이었다.

“그래서. 다른 일은 또 없었어?”

“…없, 었어.”

“진짜 없는 거 맞아? 숨기는 거 아니고?”

“전혀!”

“딱 봐도 뭔 일 또 있는 것 같은데.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해. 앞으로 어떡할지 같이 머리 굴리려면


나도 다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냐. 너 혼자 앓아 봤자 답 안 나와.”

“아, 아무것도 없다니깐.”

“너 거짓말에 소질 없는 거 알지.”

“…….”

“지금까지 여장으로 버틴 것도 용하다. 너 거짓말할 때마다 은근 말 더듬어. 알기나 해?”

“내가 말을 더듬어?”

“그래. 눈치 살살 보고, 거짓말할 때는 귀 끝이 이렇게 빨개지지. 너 지금 딱 거짓말하고 있네. 뭘 숨기고 있어.


황태자는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르네. 내가 널 몇 년 동안 봐 왔는데 진짜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알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꾸만 채근하는 탓에 르네는 진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입으로 직설적으로 말은 죽어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마냥 숨기고 있자니 나중에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고.

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을까.

‘하, 긴장해서 그런가.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가. 또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고 속이 울렁거려.’

르네는 속이 좋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명치 부근을 꽉 조인 코르셋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어째 나아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꼭 거대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양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르네. 빨리 말하라니까.”

“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속이 좋지가 않아서….”

“속이 안 좋다고?”

“아, 며칠 전부터 계속 속이… 우웁…!”

“뭐야, 왜 그래?”
“아까 전에 먹은 게 얹혔나, 속이 자꾸만 메스껍… 우욱!”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헛구역질 하던 르네와 바깥에 서 있던 아르카이츠가 눈이 마주쳤다.

르네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고 ‘웁!’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아르카이츠 뒤 수많은 시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비 전하…! 얼른 주치의를 데려오라!”

아르카이츠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아주 커다란 경사가 일어났다는 듯 환한 얼굴로 뒤쪽의


시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시종들은 르네가 말리기도 전에 빠르게 주치의를 데리러 달려갔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닌데…!”

“부인. 일단 안정을 위해 침실로 돌아갑시다.”

아르카이츠는 갑자기 다정한 남편인 양 르네의 어깨를 껴안듯 감싸며 부축하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더없이 멀쩡하고,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원래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 하지 않았나.

르네는 자신이 이런 식의 벌을 받는 건가 싶어 한껏 흔들리는 동공으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아니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라는 걸…! 괜히 일 키우지 말자고!

눈빛을 애타게 보냈지만 아르카이츠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가족처럼 지냈다지만. 남녀 사이가 유별나다지 않나. 부부는 같은 마음, 같은 몸. 난 질투가


많은 편이니 앞으로 사내를 만날 땐 꼭 내게도 말해 줬으면 하군요, 부인. 그럼 내 오늘같이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저는 본체만체하며 르네를 데리고 가는 황태자를 바라보던 알빈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고


나서야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르네는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황태자를 속였다가 우연찮게 들켰다고 말했지만….

르네를 대하는 황태자의 눈빛을 보니 아르카이츠가 마냥 피해자는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진짜 모르고 있던 건 맞아…?’

이건 누군가를 좋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특유의 눈빛이었다.

좋아함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하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아 보자면….

그래, 누군가를 갈망하는 이의 눈빛이 딱 그러했다.

그 눈빛을 알빈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르네 곁에서 그를 갈망해 오던 알빈이, 자신의 마음을 그저 단순한 우정으로 포장할 때
나오는 그 눈빛이었다.

* * *

알빈과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나눴다.

도와 달라, 너뿐이다, 제대로 된 구원 요청을 하려는 결정적 순간 하필이면 구역질이 올라올 게 뭔가.

그리고 또 왜 하필이면 그 순간 아르카이츠가 나타났고.

무엇보다 자신의 헛구역질을 보고 다들 단단히 착각하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아르카이츠의 듬직한 부축과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치 유리 인간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침실로
돌아온 르네는 슬그머니 아르카이츠에게 속삭였다.

“아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황태자비가 헛구역질을 했는데. 당연히 정밀 검사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만, 어차피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않나.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뒤쪽에서 눈을 빛내고 서 있으니,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판정되었을 때 시무룩해질
눈빛을 르네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저렇게 기대하는 눈빛은 부담스럽다고요.”

“그럼 기대에 부응해 주든지. 열심히 했잖아.”

“내, 내가 언제 뭘 열심히 했다고….”

한데 르네를 보는 아르카이츠의 눈빛이 영 불안했다.

그는 진짜로 마치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 주치의가 도착하지 않았느냐 닦달부터 시작하여 르네가 편히 침대에 기댈 수 있도록 등받이 쿠션을
가져온다든가, 연신 열을 잰다든가, 또 헛구역질 나지 않느냐며 물어본다든가.

“그냥 체한 거라니까요.”

애초에 제가 임신할 리가 없잖아요.

르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르카이츠의 호의를 쓸데없는 호들갑 취급했다.

그야 물론 르네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호의들이었다.

그냥 등 좀 두드리거나, 아니면 누이가 어디 책에서 봤다며 동쪽 나라에서 쓰는 민간요법이네 뭐네 하며 손가락을


바늘로 찌른다는 등의 행위가 아닌 이상은 그냥 누워 있으면 나을 것이었다.

그냥 좀 체한 거 가지고, 갑자기 왜 이래? 며칠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니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와서는 르네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기 시작했다.

초로의 노인네 이마에 주름이 짙어지더니, 그는 진맥뿐만 아니라 청진기를 대고 조금 더 심층적으로 검진했다.

“아, 그냥 체한 것뿐이라니….”

“감축드리옵니다! 회임이 맞습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뭐, 뭣, 뭐라는….”

“회임이옵니다!”

주치의의 말에, 어느새 침실에 모여든 황궁의 대신들은 물론 시종들이 일제히 르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감축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이게 대체 뭔 개소리야?!

설마 이거, 황태자가 일부러 주치의에게 거짓 소견을 내라 사주한 건가 싶어 얼른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한데 아르카이츠의 표정은 결코 그런 계략이나 모략 따위를 꾸미는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한껏 경직되어 있었으며, 묘하게 기쁜 듯하면서도 또 묘하게 르네를 걱정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다 르네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한 건지, 자신이 꾸민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르네는 한껏 요동치는 눈동자로 다시 한번 주치의에게 진맥을 해 보라며 자신의 손목을 냅다 들이밀었다.

“다, 다시 해 보세요.”

그러자 주치의는 다시 한번 꼼꼼히 진맥을 하더니 이번에도 역시 우렁차게 외쳤다.

“예! 틀림없는 회임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이거 순 돌팔이 아니야…!

르네는 벌떡 일어나 당장에 저 돌팔이 의사를 끌어내라 말하고 싶었지만….

르네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아르카이츠를 비롯해 병풍처럼 서 있던 대신들과 사용인들이 ‘어어어!’ 하며 기겁하기


시작했다.

마치 유리잔이 바닥 아래로 추락하려는 것을 보는 이들처럼.

“부인. 안정을 취할 때입니다.”


아니, 얘는 또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건가?

당황한 르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또 저를 어떤 식으로 골려 먹을 생각인가 싶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자 아르카이츠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주치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냈다.

#33.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할 사람처럼, 그는 르네를 천천히 침대에 다시 앉게 한 뒤, 배 위에 두툼한 이불까지 덮어


주며 도닥였다.

“르네.”

“아니, 황궁에 순 돌팔이들만 있고….”

“르네. 오메가에 대해 알고 있지?”

“오메가? 그야 당연하죠.”

헬리오스 제국인이라면 황궁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모를 리 있나.

그걸 지금 왜?

어차피 베타인 내 누이와 결혼한 것도, 그저 서로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오메가를 찾고 그래?

“…네가 바로 그 오메가야.”

“…네?”

“내가 각인한 오메가가 바로 너라고, 르네. 아델라이드가 아닌, 너.”

“…으응…?”

르네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말했다.

“저는 남잔데요…?”

“남자도 오메가가 있어.”

“…잠깐만 그럼… 그….”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화가 나기는커녕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르카이츠는 조금 있다 분명 펄쩍 뛸 르네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리 그의 양손을 꼭 붙잡고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오메가는 알파의 아이를 가질 수 있지.”

“…잠깐만. 그래서 내가 지금.”

“그래. 넌 내 아이를 가진 거야, 르네.”

“…아. 그렇군요. 그래. 그렇구나….”

비교적 태연해 보이는 르네가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르카이츠는 예상보다 르네가 덜 날뛰는 것 같아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얘가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는데


싶어 불안한 눈빛을 거두지 않고 르네를 쳐다봤다.

하나, 둘, 셋….

정확히 10 초 만에 르네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르네? 르네!”

“아이… X 발… 내 인생….”

마치 그게 유언이라도 된 양, 평생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르네치고는 굉장히 거친 비속어를 읊조리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르카이츠는 곧장 주치의를 불렀고, 그날 이후 ‘회임 소식에 크게 기뻐한 황태자비가, 너무 행복해서 기절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온 제국에 파다하게 퍼졌다.

* * *

“황태자비가 회임을 했다고?”

“예, 파비안 님.”

“그게 확실한가?”

“주치의 10 명이 모두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합니다.”

“아르카이츠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군.”

파비안의 농담에, 같이 있던 대신들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여태껏 단 한 번 빠진 적도, 지각한 적도 없는 아침 회의에 처음으로 불참한 것이 이상하더라니.

아르카이츠의 행동에 다들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하며 기뻐하는 대신들의 모습을 파비안이 둘러보았다.
“파비안 전하께서도 얼른 분발하셔야겠습니다. 허허허!”

“곧 전하께서도 오메가를 만나실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운명이라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베타들과는 전혀


다른, 신이 점지해 준 상대 아닙니까.”

한껏 들떠서 농담을 던지는 늙은 대신들의 짓궂은 말에도 파비안은 그저 유한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아침 회의 내내 가장 뜨거운 감자는 바로 황태자 아르카이츠와 그의 비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태어날 또 다른


알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막 회임 소식을 접했고, 아직 인간이라 할 만한 형상도 갖추지 못한 태아에게 ‘곧 태어날 알파 황자’라


말하는 대신들을 바라보는 파비안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원래 논하려 했던 주제에서 한참 벗어난 채로 흐지부지 아침 회의가 끝났다.

“대충 구휼미 풀어 주고, 또 뭐 대충 복구 좀 해 주면 되겠지요. 그 자그마한 마을에 난 홍수 가지고 오늘 같은


경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건 아주 아쉬운 일 아닙니까. 자 자, 그만들 하고 다들 일어나 황태자비 전하께
축하의 말이라도 전하러 갑시다!”

“그래요,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도 오늘 참석도 안 하셨는데 저희끼리 이러지 말고, 파비안 전하께서도 아직 말씀
안 나누셨지요?”

대신들 대부분의 반응이 ‘이렇게 제국의 경사가 일어났는데, 동쪽 땅의 마을에 홍수가 난 사항이 대체 뭐가
중요해?’였다.

“경들은 제국을 지탱하는 대신들이지, 누구 축하만 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다니는 광대가 아닐 텐데요.”

“에이, 무슨 말을 그리 하십니까, 파비안 전하. 오늘 같은 날은 다들 들뜨는 것이 당연지사이지요. 설마 아직


오메가를 만나지 못하여 질투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하하!”

유독 파비안의 성질을 긁어 대는 대신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또 황제가 총애하는


트레버 후작이었다.

파비안은 그를 늙은 여우라 불렀다.

아르카이츠 앞에서는 입 꾹 다물고 언제나 진중한 척하던 노인이 파비안 앞에서는 곧잘 깝죽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다고, 그의 행동이 딱 그랬다.

아직 파비안이 자신의 오메가를 찾지 못한 것을 두고 미묘하게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질투를 하는 게 맞나 봅니다. 경한테 딱 들켰으니, 내 항복하지요. 안 그래도 오늘 아델라이드


비와 아르카이츠를 찾아가 볼까 했는데. 지금 다 같이 가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에 찾아가 우르르 인사를 하면 부담스러워할진 몰라도, 깔짝깔짝 하나둘 찾아가 인사하는 쪽이 더 성가시지
않겠습니까.

파비안의 말에 대신들은 또 신나서는 떠들어 댔다.

“아유, 우리 파비안 전하께서는 이렇게 유머감각까지 뛰어나신데, 왜 아직도 오메가를 못 찾으셨을까 몰라!”
저 늙은 여우는 필시 파비안을 간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책상 아래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언젠가는 저 늙은 여우를 내 직접 들에 풀어놓고 사냥하리.

* * *

“아, 목이 좀 마르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앞에 대령되는 크리스털 잔 안의 투명한 물.

르네는 잔을 받아 들어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좀 덥다.”

그러자 얼른 시종들이 들어와 대형 부채를 퍼덕이며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기분 좋은 송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르네는 그 부채질에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즐기는가 싶더니.

“이만 다들 나가 봐. 아, 내가 부르기 전까진 들어오지 말고.”

또 그의 말에 시종들이 후다닥 뒷걸음질 치며 방을 나갔다.

르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드레스 자락을 펄럭 들어 올려 스툴 위에 다리를 올려 두었다.

그리고 더운 듯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러다가 제 앞에 앉아 있는 아르카이츠를 쳐다보았다.

“왜 안 나가셨어요?”

“나도 나가라는 말은 안 했잖아.”

“다들 나가라 했잖아요.”

“허.”

“나가 주세요. 저 혼자 쉬고 싶거든요. 아. 혼자는 아니지.”

르네는 아직 홀쭉한 배 위에 제 손을 턱 올려놓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나가라니까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르네의 말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아 아르카이츠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르네는 황태자의 표정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문 닫고 얼른 나가요.”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르네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곤 몸에 힘을 뺐다.

그러자 주룩, 반쯤 소파에서 흘러내릴 듯한 자세가 되었다.

르네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 하하하….”

그렇게 혼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요상한 소리를 내던 르네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메가라는 거잖아.

제국 내에서 남자가 오메가였던 선례가 아주 극히 드물어서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은 여장을 해야만
하는 거고.

그날 밤 나는 난생처음 히트 사이클을 겪은 거고.

하필이면 그때 아르카이츠가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그대로 애가 들어섰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 배 안에 애가 자라고 있다는 거잖아?

애가… 자라고 있….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르네는 또다시 슬그머니 제 배 위에 손을 올려 봤다.

물론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질 리 없으며 아직 배는 홀쭉했다.

그날 밤으로부터 4 주 조금 안 되게 지난 것 같은데.

입덧을 하기에 너무 이른 시기 아닌가?

주치의가 돌팔이가 아니라는 것은 10 명의 의사들에게서 모두 동일한 소견이 나온 것으로 증명되었다.

기절했다 다시 깨어난 르네는 제국에서 유명한 의사들은 죄다 불러들였고, 그들은 하나같이 ‘감축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회임하셨습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놨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한 여섯 번째부터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완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 담담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아르카이츠의 애를….”

잠깐만. 그럼 아르카이츠는 애초부터 누이가 아닌 나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한 건가?


알파는 자신의 오메가를 한 번에 알아본다 하지 않았던가.

그걸 각인이라 부르는 것 역시 알고 있던 르네는 ‘그럼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각인했다는 건가?’ 온갖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제 와 그런 걸 궁금해해서 뭣 하나.

이미 사달은 벌어지고 만 것을.

“내가 오메가…. 내가 애를 낳는…. 내 애의 아빠가 아르카이츠…. 아르카이츠는 누이가 아닌 나한테 각인을


….”

#34.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중얼거리던 르네는 이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수긍했다.

적어도 기쁜 일을 꼽자면, 아르카이츠는 저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 아닌가.

저를 죽이지 않는 건 물론, 누이가 도망쳤다 하여 가문이 몰락할 일도 없는 거다.

“근데 그럼 나는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해.”

한데 모든 사실을 알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모든 사실을 알고 포기를 해 버린 걸까.

르네는 이상하게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전과는 달리 마냥 싫지 않아졌다.

무엇보다, 방금 전처럼 앉아서 말하기만 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카이츠가 딱딱 알맞게 뭐든 대령하는 것을


보면….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의외로 마냥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아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르네였다.

물론 맨 처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기절할 만큼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다시 눈을 뜨고, 열 명의 의사들에게 동일하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현실 부정, 현실 분노, 현실 체념,


현실 순응 등의 일련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지금은 체념과 순응 그 중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그리 쉽게 죽어도 될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알게 모르게 안심되기까지 했다.

“일단 목숨은 부지한 거잖아. 가문도 건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해…!”
베타가 낳는 알파의 아이와 오메가가 낳는 알파의 아이는 확연히 다르다 들었다.

오메가와의 사이에서 난 알파의 아이는 가장 성스런 황위의 후계자이며, 베타가 낳은 아이보다 훨씬 월등하다
들었다.

오메가로 발현된 여인들을 찾기가 영 어려워, 가끔 오메가를 찾지 못하는 세대에서는 베타와 아이를 낳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황족들 중 베타들은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일찍이 요절해 버린다고.

그런 의미에서 알파들에게 있어 오메가는 단순히 운명의 짝 이상으로 장차 제국의 후계자를 낳아 줄 아주 귀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 귀하고 드문 존재가 바로 나라는 거잖아.

“아, 이걸 기뻐해야 해, 말아야 해….”

살면서 피어스 공작 가문에 태어난 것 말고는 이렇다 내세울 만한 게 없었던 르네였다.

다재다능한 누이와는 달리, 사람 대하는 것도 영 시원찮아 알게 모르게 주눅 들어 있던 르네는 가끔 자신이


살면서 한 번쯤 중요한 인간이 될 수는 있을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의 인간이 되기는 할까 의구심이 들고는
했었다.

운이 좋아 피어스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영식인 거지, 평범한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손재주도 없어, 그렇다고
천재적인 두뇌도 아니야, 사회성 떨어져, 그나마 재능이랄 것은 미모밖에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자기 객관화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던 르네는, 자신이 이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열쇠라는 생각에
뭔가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면서도, 과연 내가 애를 낳아 황태자비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에이, 모르겠다. 목숨 부지한 걸 의의로 두자. 애야 뭐, 낳으면 되니까!”

유감스럽게도 르네는 아직 애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과 희생을 동반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야 피어스 가문의 막내였으며, 금지옥엽이었으며, 온실 속 화초였으며, 주변에 애를 출산한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임신했고, 때가 되면 배가 부르고, 때가 되면 순풍 나올 거다. 뭐 그런 안일한 생각이었달까.

하여 르네는 그저 앞으로 닥쳐올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생각은커녕, 앞으로 어떤 식으로 아르카이츠를 시켜
먹을지 고민하기 급급했다.

“앞으로 아르카이츠는 내 손바닥 안이잖아?”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난 딱히 잃을 게 별로 없잖아?

애야 낳아 주면 되는 거고.

아, 여장에 대해서는 조금 상의를 해 봐야겠군. 평생을 여장한 채 살 수는 없잖아.

여름마다 더워 죽을 일 있나.
적어도 자신이 아르카이츠가 각인한 오메가인 이상, 그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어마무시하게 이득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또 아르카이츠야? 쟤는 왜 자꾸 들러붙어 있는 거야.

아주 잠깐 새에 매우 건방진 생각을 한 르네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아, 저리 가라니까요.”

그러자 문이 달칵 열리며 들어오는 이는 바로, 아르카이츠의 이복형제이자 제 1 황태자 파비안이었다.

당황한 르네는 널브러져 있다 얼른 몸을 일으켰다.

가발이나 드레스를 제대로 갖춰 입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여장을 안 한 상태로 마주쳤다간 무슨 사달이 났을지
몰랐다.

“파, 파비안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르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방문에 아까 전 건방졌던 태도는 싹 사라졌다.

“어라. 생각보다 목소리가 꽤 허스키하시네요, 아델라이드. 예전에 만났을 때는 굉장히…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제가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요…. 큼큼.”

아르카이츠에게 자신이 르네라는 걸 들킨 이후부터는 그 앞에서도 목소리를 꾸미지 않았었다.

그 짧은 기간 긴장이 풀렸던 건지, 아니면 파비안이 꽤나 기억력이 좋은 건지.

르네는 나름 목소리를 변조했다 생각했는데도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한데 여긴 어쩐 일로….”

“회임을 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델라이드.”

“아… 네. 감사합니다.”

“아르카이츠도 함께 있을 줄 알고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래도 일전엔 이


정도까지 어색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저한테 먼저 말 놓으라 할 정도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혹시 아르카이츠
그 녀석이 질투라도 하던가요.”

르네는 살면서 제 1 황태자 파비안을 오늘 처음 대면하는 거였다.

누이야 워낙에 발이 넓고 온갖 사교 파티에 다 참석해서 제국 귀족들 99.9 퍼센트를 알고 있다 쳐도, 르네가


아는 귀족들은 10 퍼센트가 될까 말까.
친한 이들이 한 손에 꼽을 정도인데, 감히 제 1 황태자와 쉽게 말을 섞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호, 호호. 그렇죠 뭐….”

“아르카이츠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애 같다니까요. 한데 질투까지 할 정도라면 아델라이드를 정말 끔찍이도


아끼나 봅니다.”

살포시 웃으며 말하는 파비안의 모습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파비안 황태자, 생각보다 되게 사람이 유하게 생겼네.

그동안 아르카이츠처럼 온몸으로 ‘나 맹수요!’ 말하는 사내만 보다 이렇게 부드러운 선의 파비안을 보니 르네는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아르카이츠가 사람을 압도시킨다면, 파비안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제가 불편하면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델라이드.”

“아, 아니. 불편한건 아닌데….”

르네는 급하게 구겨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 뒷굽을 두들기며 뻐근하게 조여 오는 앞코를 어떻게든 늘리고


있었다.

분명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파비안은 정말 섬세한 사내인 건지 그새 그걸 눈치챘다.

“발이 아픕니까?”

“네?”

“어디 한번 봐요. 이런, 구두 때문에 발에 상처가 생겼네.”

파비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르네를 의자에 앉히곤 상처 난 발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남의 발을 그렇게 막….”

“아, 죄송합니다.”

르네의 말에 파비안은 이제 와서 제가 더 놀랐다는 듯 화들짝 놀라 얼른 발에서 손을 뗐다.

뭐, 뭐야 이 사람, 유부녀 발을 막 조물락거리고.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끼 부리는 거 아니야?!

잠깐, 혹시 파비안 황태자, 우리 누이 짝사랑하고 그런 거 아니겠지?

르네는 그 짧은 시간 여러 생각을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델라이드. 예전 생각이 나서….”


“예전?”

“기억 안 납니까?”

“…네?”

“우리 처음― 아. 잊었나 보네요.”

“…네에?!”

르네는 어째 가는 곳마다 자꾸만 지뢰를 밟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누이, 제 1 황태자랑도 만난 적이 있었단 말이야?

이거 치정이야? 아니면, 가슴 아픈 첫사랑이야? 뭐야 대체!

르네는 아무래도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파비안에게 상처 줬다는 생각보다는, 이러다가 이 남자한테까지도 제 정체를 들킬까 봐 걱정해서였다.

누이의 치정 따위 제가 알 게 뭔가.

“잊은 겁니까, 아델라이드?”

“…….”

저 아련한 눈빛 좀 봐라.

저 눈빛은 꼭 버림받은 강아지, 그것도 장대비 속에서 꼬리와 귀를 축 늘어뜨린 아기 골든리트리버 같은 그런


모습 아닌가.

르네는 그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이런 전개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설마 누이와 파비안 황태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니, 꼭
삼류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형제 삼각관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누이 성격에 잊었다면 잊었다 야멸차게 말하겠다만, 또 그리 말하면 파비안에게 아주 미안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기억도 안 나는 일을 기억난다 말하면, 그 기억이 대체 무슨 기억일 줄 알고.

“굳이 기억할 필요 있나?”

“…아르카이츠!”

#35.
그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문설주에 기댄 채 느른하게 말하는 아르카이츠의 목소리는 여유 넘치는 표정과는 달리 미묘하게 다급하게 들렸다.

르네는 아주 때맞춰 잘 왔다는 듯, 아까 전 쫓아낼 땐 언제고 슬그머니 그만 볼 수 있도록 엄지를 들어 올렸다.

파비안이 몸을 일으켰다.

“거참, 은근 질투 많다니까.”

“지금 내 아내 꼬시는 거지, 파비안.”

“아델라이드가 어디 꼬신다고 넘어올 사람인가. 그저 축하를 하러 온 것뿐이야. 그쵸, 아델라이드. 내


부담스러울까 대신들도 몰려오겠다는 걸 저 앞에서 다 떨구고 왔는데.”

파비안이 르네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자, 르네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 아델라이드였다면 이미 진즉에 바람을 피웠거나 혹은 아예 여지를 주지 않았을 거다.

제 누이와 관련된 치정들은 사실 하나같이 남자 쪽에서 착각을 했던 것들뿐이니까.

“…하하.”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긴 다리로 빠르게 르네 곁으로 와 앉아서는, 르네의 어깨를 감싸듯 안았다.

“내 아내는 내가 직접 돌보도록 하지. 어디가 아픈 거요, 부인? 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참지 말고.
언제든지 부르라니까.”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르네는 한껏 당황하여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것 아닌가?

이게 애교가 아니면 대체 뭔가.

커다란 몸과 우락부락, 주체 못 하는 근육을 가진 사내가 저를 한껏 애기 취급한다.

르네는 아주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파비안 역시 비슷했다.

“…아무튼, 최대한 안정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우리 부인은 내가 신경 쓴다니까. 자, 이러지 말고 어서 가서 누워요, 부인.”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자, 얼른. 다른 남자가 신경 쓰게 만들지 말고. 나 질투 많으니까.”

뭐야 대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싶은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묘하게 연극 톤으로 말하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르네는 지금 그의 기행들이 하나같이 의도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흠흠.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해요, 아델라이드.”

파비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 특유의 부드러운 눈빛을 르네에게 보냈다.

르네는 아주 잠깐, 그 따스한 햇살 같은 눈빛에 저도 모르게 설렜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곧장 ‘이런 꼴을 보고도 저런 눈빛을 보낸다고…? 진짜 누이랑 치정이었던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치정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응?”

“그런 사이 아니었다고. 파비안이랑 네 누이.”

“내가 소리 내서 말했었나….”

르네는 진심으로 진지하게 궁금했다.

내가 이제는 속으로만 생각할 말과 겉으로 내뱉어야 할 말을 구분도 못하는 건가?

내 뇌가 드디어 제 기능을 못 하고 곧장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입에 내보내는 건가?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픽 웃으며, 르네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놓았다.

“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겠어. 그냥 떠보는 거야. 르네 널.”

“나를 왜 떠봐요? 나 혹시 들킨 거예요?”

“글쎄. 저 인간 가까이하지 마. 웃는 얼굴 뒤에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니까. 특히 당신은 더더욱. 잠깐 설렜지?


파비안 웃는 얼굴에.”

“아니, 제가 언제 설렜다고.”

그러자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살짝 붉어진 뺨을 죽 잡아당겼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니까.”

“아, 피부 늘어나!”

르네는 얼른 아르카이츠가 잡아당긴 제 뺨을 도로 집어넣기라도 하겠다는 듯 양손으로 꾹꾹 눌러 댔다.

슬쩍 눈치를 살피자 살짝 굳은 아르카이츠의 표정에 화라도 난 건가 궁금해졌다.

…설마 진짜 질투니 뭐니 그런 건 아니겠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알았다니까요.”

“질투도 맞고, 걱정하는 것도 맞아.”

“…알았어요….”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의 눈빛에 르네는 괜히 자꾸만 위축되었다.

어쩐지 얼굴에 또다시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아 괜히 애꿎은 뺨을 벅벅 문질렀다.

무슨 질투한다는 말을 저렇게 담백하게 하고 난리야?

사람 설레게.

* * *

아르카이츠와 황태자비가 지내고 있는 동쪽 황궁에서 파비안이 걸어 나왔다.

앞으로 걸어 나갈수록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내 그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서쪽 황궁이 아닌 북쪽으로 향했다.

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그 존재조차 잘 모른다는 북쪽에서도 가장 최북단, 거대한 산의 그림자 아래


위치한 어두운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딱히 살 만한 곳도 못 되었다.

죄를 지은 대신이나 황족들이 유예 기간 동안 감옥 대신하여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던 이곳은 근 몇 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한데 몇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은 곳치고는 계단에 먼지도 없고, 벽에 걸린 액자에도 거미줄 하나 없이


말끔했다.

파비안은 깨끗해진 복도를 거닐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익숙하게 어느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카엘.”

파비안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주인님.”

그러자 저 안에서부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미카엘이 파비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제 명치까지 오는 기다란 빗자루로 방 안을 청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소하지 말라니까.”
“심심해서요. 별로 한 건 없습니다.”

“잘 지냈나?”

“너무 심심했어요. 왜 요즘엔 잘 안 찾아오세요?”

“바빴어.”

바빴다는 무심한 말에 몽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예쁘장한 얼굴 역시 실망한 듯한 눈치였다.

그날, 자신의 무언가를 대가로 팔아 이계의 몽마를 데려온 그날.

파비안은 몽마에게 미카엘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지어 줬다.

그날부터 미카엘은 파비안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았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 뭐 하는 곳인지, 자신인 누구인지조차 자각이 없는 백지 상태였으나, 친절한 파비안은


미카엘에게 그의 이름도, 이곳에 대한 설명도, 그의 정체까지 모두 빠짐없이 가르쳐 줬다.

그로도 모자라 갈 곳 없는 저를 이곳에 데려와 씻겨 주고, 입혀 주고, 또 먹여 주기까지 했다.

물론 육아하는 것도 아니고 파비안이 직접 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미카엘에게 있어 파비안은 혼란 속에 나타난 구원자, 그리고 하늘같이 높은 주인님 그 자체였다.

“그동안 내준 숙제는 잘 하고 있었니, 미카엘.”

파비안이 몽마의 머리통을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미카엘의 얼굴이 꼭 제 머리색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네. 그럼요. 주인님께서 내주신 숙제 열심히 했어요.”

미카엘은 몽롱한 눈빛으로 파비안을 바라보다, 이내 책상 한쪽에 놓인 두꺼운 책을 들어 올렸다.

언어, 역사, 문화 등 모두 제국에 관련된 서적들이었다.

파비안은 뿌듯한 얼굴로 얼른 칭찬해 달라 눈을 빛내는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몽마란 참으로 신기한 존재이지 않나.

겉보기에는 틀림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한데 마치 주술사들이나 가능할 법한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게다가 이곳에 온 지 겨우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몽마는 완벽한 헬리오스 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아르콘 부족처럼 구릿빛을 띠는 피부는 파비안에게 그 어떤 거부감도 주지 않았다.


파비안은 페트라 황후처럼 그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구릿빛 피부를 싫어했다.

제국민의 피가 섞여 흰 피부를 가진 아르카이츠는 그나마 그의 비위를 덜 거슬렀다.

하지만 결국 피가 섞인 것은 어쩔 수 없나.

아르카이츠는 아무리 햇빛 아래 있어도 피부가 상하지 않았다.

꼭 저들이 마치 신의 자손이라는 걸 자부하는 것같이 그들은 아무리 햇빛 아래 있어도 피부가 타들어 간다거나,
화상을 입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활력을 얻는 듯했으니까.

피부가 희고 연하고 약해 햇빛 아래 오래 있을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헬리오스 제국에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존재했다.

페트라 황후와 아르카이츠를 비롯한 아르콘 부족을 선망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천박한 야만족이라 여기는 이들.

파비안은 당연히 후자였다.

‘한데 얘는 왜 거부감이 들지 않지?’

파비안은 조금 신기한 듯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외양만큼은 아르콘 부족같이 이국적인데, 그런 ‘다름’을 제일 싫어하는 파비안이 그를 봐도 혐오감이 들지


않는다.

‘몽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어쩌면 미카엘이 제게 완벽한 호의와 절대적인 복종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쪽 세계에서는 각인, 저쪽 세게에서는 임프린팅이라 부른다던데.

임프린팅된 몽마는 주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다 하지 않나.

“궁금한 게 있어, 미카엘.”

“네? 무엇인데요?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미카엘은 파비안이 저에게 질문하자 아주 기쁘다는 얼굴을 했다.

“몽마는 어찌하여 주인을 섬기지? 보다 많은 정기를 먹기 위해서라면 주인을 만들 필요가 없잖아.”

#36.
“사실, 저도 아직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몽마라 잘은 모르겠지만, 간혹 있대요. 어느 날 갑자기 임프린팅되는
경우가요. 대부분의 몽마들은 주인을 섬기지 않아요. 말씀하신 대로 보다 많은 정기를 먹기 위해 인간들을 현혹할
뿐이죠.”

“그러고 보니 넌 아직 정기를 먹지 않는구나.”

“아직 저는 성장이 덜 되어서, 시기가 안 온 것뿐이에요. 아마 몇 달 뒤에는 정기를 먹어야 할걸요?”

“내가 아는 그 방법으로 정기를 먹어야 하나?”

파비안의 질문에 미카엘은 잠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아주 작게 ‘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몽마가 정기 먹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뭐 그리 부끄러워할 일인가.

“그때가 되면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도 더 강해지고?”

“네. 지금이야 미약한 수준이지만. 성체가 되어 정기를 흡수하게 되면 더 강한 힘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꿈에 들어가 정기를 먹는다 들었다. 하면 정기를 먹지 않아도 인간의 꿈에 들어가는 게 가능한가?”

“네. 그것도 가능하죠! 다만 주기적으로 정기를 먹지 않으면 그 능력도 사그라들 거예요.”

“정기를 먹는 일이 중요하겠구나.”

“저 근데, 주인님.”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파비안 님. 그게… 제가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 있는데….”

미카엘이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이내 말하기로 결심한 것인지 부끄러운 듯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임프린팅된 몽마는 주인에게서만 정기를 얻을 수 있어요!”

“해서?”

“그러니까, 제가 성체가 되려면, 파비안 님의 정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다른 이들의 정기는 먹어 봤자


별맛도 없고, 아마 영양분도 얻지 못할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꼭 나여야만 한다는 소리니, 미카엘.”

“네.”

“네 목숨줄은 내게 있다. 이 말인가?”

“네. 맞아요. 파비안 님.”


제 목숨줄이 남의 손에 들려 있다는 데에도 미카엘은 불합리하다, 불공정하다, 두렵다, 초조하다 등의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아주 낯 뜨거운 고백을 한 이의 얼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성체가 되는 날에, 파비안 님을 찾아뵈어도 될까요?”

“그리하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 아니니, 미카엘.”

정기를 먹지 못한 몽마는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다 결국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들었다.

그러니까 미카엘을 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파비안과 동침을 해야만 한다는 거다.

파비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미카엘을 쳐다보다 이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언제든 찾아오거라, 미카엘.”

“파비안 님….”

다정한 말투에 애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그럼에도 미카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설레고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랑에 빠진 듯했다.

파비안은 그런 미카엘을 바라보며 비소를 지었다.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이라니. 몽마 주제에.’

모순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잠자리를 갖는 존재인 몽마가,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나쁘진 않네. 적어도 내 말에 절대 복종은 물론 날 배신하게 될 일도 없을 테니까.’

* * *

알빈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테이블 위에 종이들을 탁, 내던졌다.

어이가 없어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도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서성이기 시작했다.

“보십시오, 각하. 저 소식지들에 쓰인 것들을 말입니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듯, 평소라면 예를 갖췄을 피어스 공작에게 소리치며 테이블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보라며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답답한 듯 다른 한 손으로는 마구잡이로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

“아니, 어쩌시려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묵인하셨던 겁니까? 예?”


“…….”

피어스 공작은 대답 대신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소식지들의 제목을 죽 훑었다.

회임 소식에 크게 기뻐한 황태자비, 기쁨의 눈물과 함께 기절!

행복에 겨워 쓰러진 황태자비와, 그런 아내를 안아 든 황태자

세기의 결혼, 세기의 사랑, 세기의 축복!

신성한 알파와 오메가의 결합, 그 결실을 맺다

푹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안와 부근을 꾹 내리누르는 공작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알빈은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감히 공작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피어스 공작은 그런 알빈에게 무례하다느니, 건방지다느니,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동안 비밀로 해 오신 겁니까, 공작 각하. 하다못해 르네는… 르네는 제 체질에 대해 알고 있었어야죠.


게다가 어찌 그 체질을 알고도 황태자 곁에 둔 것입니까?”

“…그게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한가. 이미 일은 다 벌어진 것을….”

“각하! 하여, 르네를 이대로 그곳에 두자는 말씀입니까? 평생 아델라이드 누님 행세를 시키면서, 여장한 채로,
여인인 척, 그리 살라고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세, 알빈.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이고, 또 그 아이나 우리
가문 또한 모두 황태자께 달려 있네. 가타부타하여 무언가 바뀔 것은 하나 없다는걸세.”

“각하!”

“하니 알빈, 자네도 상관하지 말게.”

“어찌 상관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제 친구입니다. 제 제일 절친한 친구이자, 형제같이 큰 르네입니다! 그


애가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각하께서 모르실 리 없지 않으십니까!”

“하면 오메가인 사내라는 점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더냐! 사내가
아이를 낳는다. 선례가 있다면 그나마 수용이라도 되겠지. 르네는 선례조차 없는 아이다!”
피어스 공작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피어스 공작 부인은 르네가 황궁에 입궁한 뒤부터 다 오메가로 낳은 제 죄가 제일 크다며 앓아누웠고,


아델라이드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공작은 뭣도 모른 채 속없이 축하하는 귀족들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만 있어야 했다.

피어스 공작은 오메가임을 철저히 비밀로 부쳤던 황제가 얼마나 불안에 떨며 살아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필한 대신인 만큼, 하필이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황제가 달고 산 수많은 억제제들, 그리고
평생을 거짓으로 사는 이가 갖는 불안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모두를 속이고 사는 이가 갖는 고독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제 아들에게 같은 고통을 느끼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산다면 적어도 모두를 속여야만 하는 고독과 불안은 모르지 않을까.

알고 있다. 르네의 체질에 대해 비밀로 한 자신들의 죄를 르네가 돌려받는 거라고.

하지만 어쩌겠나. 아델라이드가 아닌 르네한테 각인했다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미 둘이 애까지 가졌는데.

피어스 공작 역시 눈앞이 깜깜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부인 따라 침대에 누워 이마에 수건 올려놓고 끙끙 앓고 싶었지만, 그는 건사해야 할 가문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번 시작된 거짓말을 아르카이츠의 요구대로 지속할 의무도 있었다.

“르네는…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거다.”

“예? 각하!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르네는 저한테 황궁에서 나오고 싶다고, 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곧 각하께서 그곳에서 빼내 줄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라는 것입니까?”

“네가 지금 이리 열을 내 봤자, 내가 이리 참담해해 봤자, 이미 둘이 각인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러니 이건


우리 소관 밖의 일이다. 네 아무리 소꿉친구라 한들, 르네를 아낀다 한들, 베타인 우리는 절대 그들 사이에 낄
수가 없다.”

“…하지만, 각인한 것은 오로지 황태자 쪽 아닙니까? 르네가 정말 각인했다면, 황태자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르네는 도망치고 싶어 했습니까. 이건 르네에게 너무한 처사입니다!”

알빈이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는 이유는 많았다.

그에게는 친구이자 형제로서 르네를 지킬 명분이 있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당사자의 구원 요청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장을 한 르네는 마치 알빈이 한 줄기 빛이라도 되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좀 살려 줘.”

“살려 달라니?”

“아무래도 나 여기 있다가, 심장이 콱 막혀서 뒈질지도 몰라. 진짜 숨쉬기도 버거울 만큼 여기 너무 무서운


곳이야…! 제일 무서운 건 그 황태자, 미친 또라이라고…! 그런 미친놈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라니. 절대 못 해.
절대 못 하겠는 와중에 거짓말이 들켰는데 이상하게 얌전해. 진즉 날뛰어야 할 미친놈이…! 이건 폭풍전야나
다름없는 것 같아. 그놈 손에 뒈지느니, 그냥 내 손으로 죽고 말지…!”

“르네, 너 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배운 거야…!”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해, 알빈? 나 좀 도와줘, 나 진짜 여기서 못 살겠단 말이야!”

그 얌전하던 르네의 입이 온갖 거친 풍파를 겪은 전장의 장수인 양 거칠어졌다.

조곤조곤, 나긋나긋, 부드러운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쌍욕들에 알빈은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르네는 자신의 교양이 박살 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알빈의 손을 꼭 잡고 애원했다.

#37.

“나 좀 도와준다고 약속해.”

“어떤 식으로 도와주면 되는 건데, 응?”

“몰라. 모르겠단 말이야! …너 머리 좋으니까 좀 생각해 봐.”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와 고집과 떼를 쓰는 건, 르네가 그만큼 수세에 몰렸다는 뜻 아니겠나.

절대로 르네의 원래 본성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한 채 알빈은 그저 하루아침에 누이 행세를 하다 미친개에게


물릴 위기에 처한 불쌍한 르네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아침 이렇게 르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로 알빈은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후작으로서 지켜야 할 명예와 교양, 그리고 공작에게 갖춰야 할 예의 역시 반토막 난 상태다.

물론 뭐든 반토막 난 것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제 아들의 임신 사실을 알고는 최대한 티를 내지는 않으려 하나, 무척이나 동요하고 있었다.

“아, 거참! 부모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자네가 왜 이렇게 열을 올려?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게! 그 관심,
르네한테 말고 자네 사업이나 열심히 하게나!”

“각하!”

“이만 돌아가게!”

공작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홀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넓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성품이던 공작은 억지를 부리며 알빈을 쫓아내듯 방 밖으로 떠밀었다.

이 둘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동안, 다행히도 비밀은 견고하게 잘 지켜졌다.

아직 피어스 가문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지 않나.

그들은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는 것을, 그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하던 알빈이 이내 마지막으로 말하겠다며 제 등을 밀어 대는 공작을 진정시켰다.

“그럼 이거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

“만일 르네가 정말 무너질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그때는 어떡하실 것입니까. 정녕 르네를 희생시키실
것입니까?”

“…나라고 별수 있나. 일단은 그 애가 조금 더 버텨 주길 바라는 것뿐이지.”

“만일, 버티지 못한다면요.”

“…….”

“제가 데리고 나와도 되겠습니까.”

“가능할 거라 믿나. 피어스 가문은 물론 자네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걸세.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가만히 르네를
빼앗기겠나? 각인한 오메가를, 그리 쉽게 내어 주겠어? 어쩔 수 없네. 버텨야만 해. 그 애는 무너져도, 계속
버텨야만 해.”

공작은 그렇게 말한 뒤,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시종을 시켜 알빈을 배웅하게 했다.

그 역시 지치는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뒷모습이 휘청거렸다.

알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마차 에 올랐다.

뭣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된 것 하나 없이 흐지부지 끝난 대화가 찝찝해, 피어스 공작저를 빠져나가는 알빈의


표정이 한껏 굳어져 있었다.
마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보좌관과 시종조차 쉽게 말을 걸지 못할 만큼.

“…분명 무너질 거야.”

창밖에 보이는 우중충한 먹구름 가득한 피어스 공작저를 바라보던 알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르네는 분명 무너질 거다.

그 애는 그곳에서 버티질 못할 거다.

* * *

그날 저녁, 아르카이츠는 늦은 시간까지 황궁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두꺼운 책을 정독하는 아르카이츠를 보며 뒤에 일렬로 서 있던


보좌관은 물론 시종들까지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미 시간은 저녁을 넘어서 밤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보좌관이 슬그머니 물었다.

“전하,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피곤해.”

옳다구나 싶어 보좌관이 얼른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도서관 출구를 가리켰다.

“하면, 이제 돌아가시지 그러십니까. 오늘 아침 일찍부터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요.”

말은 그럴싸하게 주군을 걱정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상 저들 퇴근하고 싶어 죽겠다는 뜻이었다.

보좌관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도서관 시계탑을 쳐다봤다.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자네들은 이만 퇴근해. 난 조금 더 알아볼 것이 있으니 여기 있겠다.”

아르카이츠의 말에도 다들 기쁜 마음으로 퇴근하기는커녕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보좌관 벤자민이 가장 빠르고 우렁차게 외쳤다.

“하면, 저흰 이만 먼저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카이츠 님!”

그러곤 정말 도서관을 나갔다.

아르카이츠 역시 별다른 생각 없는 듯, 책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다들 눈치 그만 보고 나가.”

그러자 다른 시종들도 슬금슬금 하나둘 아르카이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물러가기 시작했다.


도서관에는 문 앞을 지키는 최소한의 경비들을 제외하곤 아르카이츠 혼자였다.

그는 수하들이 일찍 퇴근하든, 저 혼자 이곳에 계속 있든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보는 눈들이 사라지자, 의자에 앉아 책을 뒤적대던 아르카이츠가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한층 더 풀어진


자세를 했다.

사실 그는 지금 도서관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메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아르콘 부족을 찾아가면 되는 일이다.

황궁 도서관에 있는 오메가 관련한 책들 중 아르카이츠가 읽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럼 왜 굳이 이 늦은 시간까지 불편한 도서관 의자에 앉아 시간을 죽이냐면….

그건 지금 제 아내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와서 배려할 게 뭐가 있겠냐마는.

같이 밤을 보낸 그다음 날 마치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어 대는 르네를 보며 뭔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만 건가, 아주 살짝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알파는 속수무책이다. 특히나 오메가라는 존재가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저 글로만
배웠던 아르카이츠에게는 더욱더.

이건 비단 르네만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어쩌면 본인의 이성을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그날 르네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손을 뻗었을 때.

아르카이츠는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르네의 페로몬이 짙어진 순간이 아니었다. 그저 단내가 난다거나, 그래서 조금 흥분을 한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을 난생처음 맞이한, 무방비한 상태의 오메가를 눈앞에 둔, 마찬가지로 무방비했던 알파.

그다음의 일이야 뻔했다.

머리로는 르네의 유혹에 넘어가선 안 된다,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몸은 그를 품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거,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정신력으로만 승부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르네의 갑작스런 히트 사이클은 다행히 그날 하룻밤 만에 사그라들었다.

강한 발정이 찾아올 경우 몇 날 며칠을 앓을지도 모른다는데, 열성 오메가라 히트 사이클이 짧은 걸까.

뭐든 알아내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로 아르콘 부족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전까지는, 웬만해서는 르네와 조금의 거리를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날 자신이 그렇게까지 자제력을 잃게 될 줄 몰랐던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그때의 르네를 떠올리면….

“아르카이츠, 물어 줘. 여기….”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성 잃은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내저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목이 타는 듯해 끝까지 채운 블라우스를 슬쩍 풀어 헤쳤다.

하마터면 정말로 르네의 목덜미를 물 뻔했다.

알파가 오메가의 목덜미를 물면, 완전히 서로에게 각인되어 죽음이 갈라놓지 않은 이상 평생의 짝이 된다지 않나.

만일 그리했다면 르네의 마음을 얻기는 쉬웠을 거다.

서로의 반려가 되고, 르네는 아르카이츠 아닌 다른 이들 앞에서는 페로몬을 내뿜지 않게 될 거다.

한데 그런 르네의 목덜미를 물지 않은 이유는….

‘날 좋아하지도 않는 애 목덜미를 물어 반강제로 짝을 맺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르네를 제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아델라이드인 척하는 르네를 모른 척 눈감아 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인 오메가는 제국 내에 선례가 없었고, 유일하게 정보를 아는 이인 황제는 자신의 위상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평생 오메가로서의 삶을 비밀로 부쳤다.

르네 같은 겁 많은 성격에, 자신이 제국 유일의 남자 오메가이며, 황태자의 반려로 선택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지레 겁부터 먹고 도망을 가든 뭔 짓을 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오해를 만든 것이 여장한 르네를 본 자신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아무튼, 남자인 오메가가 겪는 수많은 시선들을 과연 르네가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설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요, 황태자 전하.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내 동생 르네한테 각인을 했다는
말씀이죠?”

“맞습니다. 하여 우리 둘의 약혼은 없던 걸로 하자는 겁니다.”

“왜요? 그냥 진행하죠.”

“내가 왜 당신이랑.”
“내가 르네 성격을 아는데. 걔는 딱 당신 같은 유형의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게다가 아직 걔,
본인이 오메가라는 자각 없어요. 감히 상상도 못 하겠죠. 사내인 오메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걸요. 근데 르네는 그런 거 못 버티거든.”

“해서.”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지. 넓은 아량으로 제국의 황태자 전하와, 내 사랑스러운 남동생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난 우리 르네를 세상에서 제일 아끼니까.”

#38.

가문에서조차 르네의 체질에 대해 비밀로 하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체질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니.

아마 아르카이츠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쪽은 오메가도 아닌데, 피어스 공작은 어찌 내가 당신을 신붓감으로 고른다 하였을 때 이상함을 느끼지
않은 거요?”

“사실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을걸요? 우리 아버지, 마냥 그렇게 사람이 좋지만은 않거든요. 르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위해 눈 뜬 장님으로 만드는 거. 충분히 해낼 사람이거든요.”

그건 아르카이츠와 아델라이드가 긴히 나눈 어느 날의 대화였다.

자신에게 다 계획이 있으니 이 결혼, 그대로 추진하라는 아델라이드의 말을 그는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가 결혼식 당일에 도주한 것이 그 계획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델라이드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고, 지금 르네 곁에 있는 건 자신뿐이다.

“난 그냥, 나와 같은 마음일 때 물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히트 사이클에 이성을 잃은 채, 이전의 행동과는 전혀 다른 말투와 행동으로 뒷덜미를 물어 달라 애원하는


르네 말고.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그래서 마침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물고 싶었다.

페로몬에 취한 채로 말고, 지극히 또렷한 정신으로.

이제 다른 짝은 필요 없어. 난 너뿐이야.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답지 않게 감상적이 된 제 모습에 자조적인 표정을 지은 아르카이츠가 도서관 정중앙에 우뚝 솟은 시계탑을
쳐다봤다.

지금쯤이면 르네가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갔다.

길고 어두운 복도에는 간간이 양초들만 켜져 있는 상태였다.

황궁은 증축과 재건을 반복하여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은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어둠이 깔리자
얽히고설킨 수많은 복도들이 까마득하게 저 앞에 뻗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도 침실을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르카이츠는 슬며시 눈을 감고 코끝에 느껴지는 르네의 체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굳이 킁킁대지 않아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그를 안내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개도 아니고, 냄새로 길을 알아차리다니.

아르카이츠는 본인이 사실 귀랑 꼬리만 없다 뿐이지 르네 한정 꼬리 흔들어 대는 개나 다를 게 없다 생각했다.

문제는 르네는 자신을 어디 집에서 기르는 사랑스러운 애완견 말고, 길가에서 마주친 들개 취급한다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다르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들이 얼른 경례를 하며 인사를 올리려 했다.

잔뜩 군기 든 이들의 소리에 혹여나 안에서 잠든 르네가 깨기라도 할까. 조용히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댄
아르카이츠가 마치 그림자가 스미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아주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는 경비병들이었다. 천하의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한다니.

르네의 말대로 이전에는 능글맞게 행동하며 온갖 음담패설로 사람 당황하게 만들 땐 언제고, 첫 히트 사이클을


함께 맞이한 이후 확연히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아르카이츠는 분명 모순적이었지만.

그 누구도 아르카이츠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르네가 보였다.

그날 이후 아르카이츠는 르네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르네의 순진무구한 눈빛 뒤편에 얼마나 야한 것이 숨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일단 억제제를 몰래 구해 와 잠들기 전 미리 먹여 놔서 다행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그를 보면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어쩌자고 너는 이렇게 무방비할까.

아르카이츠가 천천히 침대에 앉아 잠든 르네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찰나였다.


분명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르네가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제 머리를 쓰다듬던 아르카이츠의 손을
탁 잡았다.

“…아니 누구 지금 놀려요…?”

분명 황궁의 그 누구도 아르카이츠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르네 제외하고.

“아직 안 잤어?”

“아니, 왜 갑자기 사람이 막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어요?”

“…….”

“평소처럼 굴라고요. 능글맞고, 뻔뻔하고, 변태 또라이처럼.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내외를 하고 그런대?”

그렇게 말하는 르네의 눈에 억울함과 황당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오히려 그런 눈빛을 해야 할 건 르네가 아닌 아르카이츠였는데 말이다.

“아니 왜 당신이 억울해해?”

“당연히 억울하지, 그럼 안 억울해요?”

이전에 제 앞에만 서면 달달 떨던 그 토끼 같은 하찮은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또 저를 올려다보던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은 어디로 간 건지.

초식동물은 무슨.

이젠 앙칼진 고양이처럼 저를 째려보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당황했다.

물론 그 모습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다면 좋다. 마냥 맹탕인 줄만 알았던 르네의 이런 새로운 모습은
환영이다만.

“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건데. 여태껏 내가 불편한 거 아니었나?”

“…….”

“근처에만 가도 화들짝 놀랄 땐 언제고. 시켜 먹을 때만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고. 그래서 배려 차원에서 내가 좀


꺼져 줬더니 이젠 또 기만하는 인간으로 만드는군. 우리 부인은 대체 뭐가 그리 요구와 불만이 많으실까.”

그러자 르네는 단 한 치의 물러남이라든지, 죄책감도 없이 말했다.

“왜 그날 이후로 방에서 안 자는데요? 갑자기 왜 거리를 두고 그러냐고요. 사람 기분 나쁘게.”

“언젠 나랑 합방하는 거 싫다더니.”

“그, 그건 내가 누이가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았을 때고요!”

“그래서, 지금은 또 같이 자고 싶다?”


“마냥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그날 이후부터… 엄청 거리를 두니까 꼭 내가….”

“…‘꼭 내가’ 뭐.”

“꼭 내가… 되게 별로인 건가 싶잖아요. 아니, 각인했다면서, 근데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둬도 되는 거냐고요. 나


되게 귀중한 재원인 건데….”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지며 르네는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가 배려랍시고 한 행동이, 르네에게는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아르카이츠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처음은 아니다. 세 번째였다.

남자는 살면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지만 아르카이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세 번, 당황해 본 적은 있었다.

첫 번째는 각인 직후 어린 르네가 여자가 아닌 사내라는 걸 알았을 때.

두 번째는 갑작스런 히트 사이클이 발현되어 온갖 유혹을 하는 르네를 마주쳤을 때.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지금 곁에 있지 않아 서운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찌 되었건 첫 경험은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다 르네 덕분에 한 경험이니, 아르카이츠에게 있어 르네는


유일하게 그 속을 알 수 없는 이였다.

“혼자 있기 싫으니 같이 있어 달라는 거야, 르네?”

“아니 그럼 여태까지 내가 말한 걸 뭐로 들은 거예요.”

“…언젠 내가 무섭다면서.”

“그때야 그쪽이 날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무서운 거지.”

“그럼, 지금은 그게 아니다?”

“당연하죠.”

뭐지, 이 뻔뻔함? 뭐지, 이 당당함?

아르카이츠는 아주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하는 르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한테 각인했다면서, 못 죽이잖아요? 나 없으면 평생 짝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

“그러니까, 이제 예전만큼 무섭진 않아요. 난 또 우리 누나가 아니면 다 죽일 기세처럼 보여서 이 악물고 누나


행세했던 건데…요.”

“하, 하하! 하하하!”


“왜 무섭게 그렇게 웃고 그래요?”

맹랑하게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젠 저보다 아래로 본다는 것 아닌가.

“이젠 내가 무섭지 않다?”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을 만큼은 안 무서워졌다는 거네.”

“당연하죠. 그, 그쪽도 이제 나한테 잘해야 할 테니까. 안 그래요? 난 전하의 하나뿐인 오메가인데! 곧


후계자도 낳아 줄 거고! 당연히 나한테 잘해 줘야죠. 거기엔 혼자 외롭게 두지 않는 것도 있고요. 아니, 내가
남자라서 실망했어요? 왜 그날부로 꼭 나가서 자냔 말이야, 내가 쫓아낸 것도 아니고.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

아직 분이 덜 풀린 건지, 르네는 중얼거렸다.

사실 르네는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론 르네가 아르카이츠와의 합방을 반대했던 이유는 아델라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 제일 컸다.

하지만 그 이유뿐 아니라 원래부터 르네는 잠귀가 밝아 누군가 함께 잔다거나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어렸을 적 아델라이드가 종종 같이 잠을 자러 왔었을 때 조금만 움직여도 잠에서 깨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날 이후부터 아델라이드는 르네 방 근처로도 가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해서 르네는 살면서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플 때조차 누군가 병간호를 해 주는 게 더 신경 쓰여 나가라 할 정도였는데.

‘침실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이라는 그 대쪽 같은 신념에 금이 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굳이 시기를 따져 보자면, 아마 르네의 첫 히트 사이클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르네는 혼자 잠드는 넓은 방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고, 또 그때부터 아르카이츠는 밤늦게까지


도서관이나 집무실에 있었다.

새벽에 어딘가 휑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제 옆자리는 비어 있는 것에 르네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임신을 하게 되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주치의의 말이


있었는데, 혹시 이것 역시 그중 하나인 걸까.

“아무튼, 혼자 자고 싶지 않아요.”
#39.

“…….”

“내가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각인’했다면서.”

각인이라는 말에 힘주어 말하는 르네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무래도, 르네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듯했다. 각인했다는 것은 반려를 만났다는 소리지, 마치


무조건적인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물론 아르카이츠는 그걸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다. 각인이나 복종이나 저한텐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다만.

“…이것 참, 다행인지 아닌지….”

르네의 이런 변화를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고민이었다.

저에게 마냥 털만 세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곁을 내어 주는 걸 보면 마냥 한 방향의 애정이 아닌 것 같아 다행인


듯도 하고.

반면에 생각해 보면 르네는 아직 제 페로몬 조절하는 법을 잘 몰라 이따금 때와 장소를 구별 못 하고 마구잡이로


흘려 대지 않나.

이게 페로몬인지, 르네의 특이한 체취인지 그것조차 불확실하지만.

“다행으로 여겨요. 제가 아량이 넓어서 이번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묘하게 기고만장해진 르네다. 어쩐지 자신이 한번 봐주겠다는 듯 건방지게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근데, 저 어깨가 결려요.”

“지금 보니 혼자 자는 게 외롭다느니 이런 거 다 거짓말이고, 사실은 날 부려 먹고 싶은 거지, 르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원래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제 아내가 이렇게까지 뻔뻔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혐오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그런 감정이 아니란 것에 기뻐해야 한다 생각하며 아르카이츠는 자신이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여기가 이렇게 막 결리고… 여기도 좀 아프고….”


르네는 승모근 쪽을 툭툭 두들기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어깨가 심하게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르네는 살면서 노동이라는 걸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귀한 몸인데, 어깨가 결리고, 몸 이곳저곳 쑤시는 건


반복된 고된 훈련 혹은 노동으로 인해서 아닌가.

르네에게 있어 어깨가 결린다는 건 그저 잠 좀 잘못 잤다. 이 정도였다.

그 별것도 아닌 것에 이리 앓는 소리를 내는 건 아르카이츠의 말대로 일단 그를 부려 먹고 싶어서도 있었다.

과연 어디까지 제 부탁을 들어줄지, 정말 그가 나에게 각인을 한 상태인지, 정말 내가 그에게 있어 아주 귀한


존재인 건지.

한마디로 응석부리는 것이었지만, 르네는 나름 이것을 자신의 주제 파악이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말랑하기만 한데 대체 어디가 결린다는 건데.”

“아니, 잘 좀 주물러 봐요. 그래, 그래, 거기. 옳지.”

“어, ‘옳지?’ 지금 뭐 나 조련하는 건가, 부인?”

“원래 알파들은 오메가 페로몬에 꼼짝도 못 한다면서요? 또 오메가들은 어떤 능력이 있어요?”

“…….”

“아 또 있을 거 아니야. 남자인 오메가는 뭐 더 특별한 거 없어요?”

“뭐, 애 못 낳네, 말도 안 되네, 현실 부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은데 르네, 정말 괜찮은 거야? 아니면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거야.”

“뭐가요? 애 낳는 거요? 뭐, 낳아 보죠. 그러니까 일단 저랑 우리 가문이 죽을 일은 없다는 거잖아. 그치?”

“은근슬쩍 말도 놓네.”

“뭐 어때. 안 되나? 응?”

살살 눈웃음치며 묻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나중에 가선 저 눈빛이 원망으로 바뀔 게 분명해 살짝


걱정되었다.

‘야, 이 개새끼야, 아파 뒈지겠네!’ 하며 엉엉 울 르네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일단 지금은 르네가 원하는 대로 그의 응석을 받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둘 이것저것 다 받아 주면 언젠가는 제 마음도 받아 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 * *
제 이복형제의 오메가 아내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날.

황궁의 모든 이들이 경사가 났다며 기뻐하던 그날.

파비안 역시 그 누구보다 크게 기뻐했다.

“그러니까 황태자비가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니라, 그 남동생 르네 피어스라고?”

“예, 전하. 그림자들이 달라붙어 감시한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 합니다.”

“하면 임신에 대해서는. 그건 조작된 건가.”

“…그, 임신 역시 맞다고 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사내 오메가인 듯합니다.”

“…사내 오메가…. 허, 그래. 그랬군. 그래서 아르카이츠 네가….”

파비안은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사내 오메가라는 점에 크게 놀라기보다는 아주 괘씸한 것을 바라보듯 인상을


찌푸리며 낮게 욕지거리를 읊었다.

“전하, 사내 오메가가, 가능한 일입니까?”

“안 될 게 무어가 있나. 여자인 오메가, 여자인 알파, 사내인 알파도 있으니 당연 사내인 오메가도 있겠지.”

“예? 여자인 알파가 있습니까?”

“드물지만 있다고는 하더군. 7 대 황제의 딸 역시 알파였다는 사실 모르는가.”

파비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제 서재에 꽂힌 책을 하나 잡아당겼다.

그러자 책꽂이 뒤편이 끼기긱, 끌리는 소리와 함께 마치 문이 열리듯 저편의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의 보좌관이 눈을 멀뚱대는 동안 파비안은 자주 드나들어 익숙하다는 듯 공간 아래 계단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주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올라왔다.

그는 어느 부분을 펼치면 어느 부분이 나올지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책을 펼치더니 이내 어느 한 지점을


콕 가리켰다.

보좌관이 고개를 쭉 내밀어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이게 대체….”

두꺼운 책에 빼곡히 쓰인 글을 읽는 보좌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책과 파비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바로 제국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알파와 오메가의 진실이지.”

“…….”

“또한 페트라 황후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비밀이기도 하고.”

“…전하.”

“나는 그 여자가 숨기려 했던 이 비밀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야.”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아르카이츠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파비안은 픽 웃으며 책을 덮었다.

뽀얀 먼지와 함께 두꺼운 것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책은 죽어 가던 페트라 황후가 어떻게든 감추려던 진실.

제 남편을 위해 제 부족과 진실을 저버린 여자.

파비안은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진실을 덮어서라도 자신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 생각하려는 더러운 자기합리화일 뿐이라 생각한다.

“다가올 황제의 탄신일에, 내 아버님께 잊지 못할 선물을 드려야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낡은 고서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죽기 전까지 제 목숨보다 그 책의 행방을 걱정하던 여자였다.

그 여자는 파비안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불쌍한 여자의 불쌍한 아들, 그리하여 온정을 베풀고 동정해 줘야 하는
존재라 생각하겠지만.

파비안은 온정을 바라지도, 동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파비안. 네겐 미안한 것들이 참 많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황후 폐하.”

“…나는 너에게….”

“황후 폐하, 저는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황후 폐하를 원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딱,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입니다.”

“…파비안, 너….”
“아르콘 부족으로 도망가던 황후 폐하의 시종 하나를 제가 잡아들였습니다. 감히 황후의 물건을 지니고 도망간 죄,
죽음으로 다스렸습니다. 한데 제가 아주 재미난 것을 손에 쥐었지 말입니다. 그자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던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파비안의 말에 병환으로 죽어 가던 페트라 황후의 얼굴이 그 어떤 때보다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기억하려는 듯, 그녀와 마주친 눈을 결코 먼저 피하지 않았다.

“본래 알파는 병을 얻지 않지요. 살 만큼 살아 늙어 죽기 전까지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던데. 어찌하여


황후께서는 병에 걸리셨을까. 본인도 모르겠죠?”

“…너…! 네가 어찌…!”

“당신이 나한테서 내 어미를 빼앗았듯, 나 역시 아르카이츠한테서 어미를 빼앗을 생각이야. 그러니, 부디, 가장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

생긋 미소를 지은 파비안이 차갑게 돌아서던 날, 갑작스러운 병환에 몸져누운 페트라 황후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벽, 모두가 잠든 밤의 일이었다.

황후는 갑작스런 병환을 얻었지만 잠에 든 상태에서 편안하게 영면에 빠졌다.

그다음 날 발표된 황후의 사인이었다.

#40.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소식지를 든 아델라이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애를 가진 거야? 둘이? 아니 얘가 진짜…!”

황태자비가 회임했다.

나라의 큰 경사였고,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지금의 아델라이드에게는 그런 것 다 필요 없었다.

얘는 왜 겁도 없이 애를 덜컥 가진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 줄 알고…!


그냥 모른 척 해외로 도피하면 원작에 휘말릴 일도 전혀 없겠지만, 아델라이드는 차마 르네에게 닥쳐 올 미래를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무려 자신이 만들어 낸 ‘내 새꾸’였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훨씬 더 캐릭터가 잘 뽑혀 저도 모르게 정을 주고 만 걸까.

어쩌면 아델라이드로 빙의했을 때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르네가 제 곁에 찰싹 붙어 위로해 주던 그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 르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란 말이다!

우리 르네는 수 후보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소심하고, 병약하며, 또 무조건 ‘사약 엔딩’ 나는 캐릭터로
내정되었단 말이다!

보통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바뀐다지만, 이상하게도 르네의 경우 무엇을 선택하든 사약 엔딩이었다.

“이대로 두면… 이대로 두면 우리 르네는…. 아, 진짜 내가 도망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원작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델라이드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꼬박 3 일이 걸려 제 발로 뛰쳐나갔던 집구석에 돌아가는 기분이란, 매우 머쓱하고, 어색하고,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어스 공작저에 내린 아델라이드는.

“넌 누구냐!”

“아니, 나 아델라이드야, 이것들아!”

완벽한 변장 때문인지 대문 근처도 가지 못한 채 경비병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나 아델라이드라고, 이놈들아! 얼굴 보면 몰라!”

* * *

머리에 수건을 질끈 묶은 채로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피어스 공작 부인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피어스 공작.

그는 마치 이 침대에 이미 관짝이라도 된 양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 자신의 명치 위에 올려놓았다.

르네는 잘 지내고 있나, 편지를 써 볼까.

한데 이러다 집에 오고 싶다는 답장이라도 받으면?

내가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건가?

그럼, 이렇게 애를 버리다시피 해?


아델라이드도 가출한 마당에 그럼 우리 가문은 어찌 되는 건가?

“부인….”

“입도 열지 말아요. 당신이 나까지 속인 걸 생각하면 아주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미, 미안하오….”

“아이고, 아이고, 우리 막내아들, 아이고, 우리 르네… 불쌍해서 어쩌니…. 그 애가 뭘 안다고… 애를….


아이고… 아이고오… 애 낳는 거 본 적도 없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아니 평생 품에 안고 살 것도 아니고, 스무 살이면 이미 진즉에 성인이오!”

“그렇게 다 큰 성인한테 체질도 속이고 평생 온실 속 화초로 살게 한 게 어디의 누구신지!”

“…미안하다니까….”

“이게 지금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고요! 장녀는 가출, 차남은 임신! 이게,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에요! 아유, 아유, 머리야….”

공작 부인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아예 등 돌려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의 체질에 대해서도 모르다니, 이러고도 내가 어미란다, 어미.

중얼거리며 공작 부인이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고개만 빼꼼 들어 부인의 눈치를 살피던 공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관짝에 누운 것같이 양손을
들어 가슴팍에 올려놓은 뒤 두 눈을 감았다.

르네에게 한 게 비겁하고 못된 짓이라는 것쯤은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속이는 제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갑작스레 인생이 바뀐 르네를 떠올리면 또 마냥
미안하고.

그냥 콱 죽어 버리면 그만이긴 한데. 그렇다고 또 아프게 죽는 건 싫고.

대신 반성의 의미로 자진해서 관짝에 들어간 양 한껏 정자세로 불편하게 누워 있어 본다.

“우리 르네, 잘 지내고 있을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훌쩍이며 묻는 공작 부인의 물음에 공작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요, 부인…. 걔가 어디 애를 낳아 봤어야 말이지요…. 아직 영애들 손도 안 잡아 본 애인데


대체 어찌하다….”

“아휴, 아휴…. 우리 아델라이드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요, 부인…. 걔가 어디 가출을 해 봤어야 말이지요…. 아직 제 손으로 직접 디저트 찍어


먹은 적도 없는 애가 대체 어찌하다….”
“…아휴, 아휴…. 다 상관없으니 우리 아델이라도 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걔가 돌아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거지요, 부인…. 그럼 아델라이드를 르네인 척 평생 남장시키고 살아야
하는 건데….”

“그냥 다 말해 버려요, 예?! 에구, 에구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

“아델라이드는 어디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시다…. 우리 아델라이드는 똑똑하고 영리해서 얼굴로 살아남든


두뇌로 살아남든 뭔가 하나는 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때 누군가 급하게 부부 침실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이제 노크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기 바빴다.

여태껏 저런 노크 소리 이후 들은 소식이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 열지 말아요. 또 무슨 소식을 들고 오려고….”

하지만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 각하, 공작 부인! 아델라이드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뭣?!”

공작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맨발로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지만, 공작은 여전히 관짝에 누운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우리 아델라이드는 호랑이가 될 운명인가 보오…. 체념하듯 중얼거리며.

* * *

누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르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누이가 가출했다가 돌아왔다고?! 아니 왜?”

“그게, 중요한 일이 생겨 가지고….”

“중요한 일? 아니, 대체 본인 결혼식 날 도주해 놓고 다시 돌아올 만큼 중요한 일이 뭔데? 어디 다친 덴 없고?


무사하대?”

“예, 아가씨는 아주 무사하세요. 그동안 잘 먹고 잘 주무셨는지 묘하게 살도 오르셨다고….”

“뭐?! 누구 마음 고생하게 해 놓고 누군 호의호식했단 말이야?”

“아무튼, 곧 아가씨께서 르네 님을 만나 뵈러 오실 거예요. 긴히 할 말이 있으시다던데, 그게 무엇인지는 절대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보나마나 사과 같지 않은 사과겠지. 어디 누이가 중요하단 말 중에 진짜 중요한 적이 있었어? 만나기만 해 봐,
이번엔 절대 그냥 안 넘어가. 화도 내고, 삐친 척도 할 거야. 이게 뭐야 대체.”

르네는 아주 벼르고 있다는 듯 이번에야말로 누이한테 처음으로 언성을 높일 생각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출을 한 거냐, 가출하기 전의 말들은 다 무슨 뜻이냐, 누이와 아르카이츠는 대체 무슨


대화를 했던 거냐, 내 체질에 대해 알고는 있었냐, 부모님은 왜 연락을 안 받냐, 기타 등등 묻고 따질 게 아주
많았다.

그리고 고대하던 그날이 다가왔다.

르네 인생 처음으로 누이한테 화를 내기로 한 날.

보고 싶었고 그리웠고 걱정도 되었으나 이번에는 절대 안 봐줘, 하는 심정으로 아델라이드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남장을 한 아델라이드였다.

“누이! 가 아니라 르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르네는 진짜 예전의 자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아차 싶어 얼른 표정을


굳혔다.

다른 시녀들도 함께 있다는 것을 잠깐 잊었던 르네가 아차 싶어 얼른 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저 멀리 창가에 앉아 쯧쯔 혀를 차던 아델라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은 모두 나가 있거라.”

시녀들이 우르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르네는 드레스를 번쩍 들어 올린 뒤 냅다 누이 앞으로 달려가서는 최대한 작게 속삭이듯 소리쳤다.

“누이! 대체 그동안 어디 갔었던 거야!”

눈물겨운 상봉은 불가능했다.

분명 이번에야말로 다 말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머릿속으로 이미 대본까지 다 짜 두고 이제 읊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원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라고, 르네보다 아델라이드가 한발 더 빨랐다.

“야! 너 어쩌려고 그래! 여기가 어떤 세계관인데! 너 이제 큰일 났어!”

적반하장으로 르네를 나무라는 아델라이드였다.

목청이 높아지자 르네는 당황하여 얼른 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아직 황궁 사람들은 내가 르네인 줄 모른다고!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제 입을 틀어막는 르네의 손을 쳐내며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이건 게임 설정 오류 난, 그 어떤 수를 골라도 사약 엔딩이라는 악평 자자한 비엘 게임이란 말이야!”

“…누이, 혹시 술 마시고 왔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델라이드에, 혹시나 낮부터 진탕 와인을 마시고 온 건가 합리적 의심을 해 보는


르네였다.

그러자 아델라이드가 르네 곁으로 오더니 손을 꼭 잡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내가 예전에, 그러니까 도망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나니?”

“…뭐 빙의인지 뭔지 하는 말들?”

“그래! 그거 말이야! 나 빙의자야. 빙의자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난 아델라이드가 아니라, 정확히는


아델라이드 몸에 깃든 다른 사람이라는 소리야.”

“…누이. 나 진짜 무섭게 왜 그래.”

“일단 들어. 지금 시간 없으니까.”

#41.

이 세계가 어떤 세계관인 줄 아는가?

이곳은 무려 알파인 아르카이츠가 자신의 진짜 오메가를 찾는 비엘 게임!

그러나 게임 설정에 이상이 생긴 건지, 그 어떤 오메가 후보들도 게임의 악역으로 나오는 ‘미카엘’에게 번번이
지고 말아 악수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그 어떤 수를 골라도 사약 엔딩이라는 악평 자자한 비엘 게임이었다.

출시 후 가장 인기 많았던 르네 캐릭터는, 한편으로 또 가장 많은 항의를 받은 캐릭터이기도 했다.

┖ [아니 왜 르네는 뭘 선택하든 다 사약엔딩임?]

┖ [개발자 르네 미워하나? 젤 예쁘게 뽑아놓고 왜 다 죽는 거임?]

┖ [르네 어떻게든 살리려고 온갖 현질 다했는데 또 죽음. 우리 르네 좀 행복하게 해 주세요.]

┖ [이거 버그임. 백퍼 오류 났음. 게임 그냥 망할 듯? 젤 인기 캐릭터한테 버그라니.]


아무튼 그렇게 해서 결국 망했던 비엘 게임이라는 거다.

수많은 오메가 수들이 아르카이츠의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온갖 루트들을 탔지만, 하나같이 미카엘이라는 악역


수에게 당해 내지 못했다는 것.

특히나 르네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할 정도로, 게임 내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은 다 겪은 뒤 또 허망하게 죽는다는


거였다.

하여 아델라이드는 직접 게임을 시연하여 원인 불명의 버그를 찾아보고자 했다.

“한데 눈을 뜨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소리야. 알아들었니? 그냥 요약하자면, 네 앞은 이제 사약길이라는


소리야. 꽃길 아니고, 가시밭길이라고. 곧 미카엘 놈이 나타나면 넌 무조건, 무조건 사약 엔딩이라고.”

“뭔 소리야, 대체. 게임은 뭐고 비엘은 또 뭔데. 사약은 또 뭐고? 버그? 곤충 말하는 거야? 누이 지금 나한테
곤충 같은 놈이라 욕한 거야? 다짜고짜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아 답답하네, 진짜…. 아니, 너 곧 죽는다고. 아니, 죽지 않더라도 곧 버려진다고. 나중에 그때 돼서 죽네


마네 울지 말고 지금 나랑 같이 여기 뜨자.”

아델라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르네의 손을 잡아당겼다.

“지금 당장 어떻게 여기서 도망쳐.”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너한텐 다가올 비극을 대처할 계획이 필요하다는 거야.”

“갑자기 와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비극? 버려져? 누나,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왜 악담을 못 해서
난리야. 나 진짜 서운하고 화나려고 해. 가출한 동안 어디 가 있었어? 어디 이상한 데라도 간 거 아니지? 응?
약을 했다거나, 아니면 뭐 나쁜 일이라도 당한 거야? 그런 거라면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제발 내가 알던
누이로 돌아와 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르네는 아주 딱한 것을 바라보듯, 누이의 손을 꼭 잡더니 손등을 토닥였다.

아무래도 살면서 고생 한 번 안 해 본 누이가 가출하고 난 뒤로 정신이 아픈 것 같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너, 미카엘이 나타나면 어차피 나 다시 부를 거 같으니까.”

“미카엘이 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야? 미카엘이라는 자가 누나 괴롭혔어?!”

“아니, 이제 곧 나타나 널 괴롭힐 거다. 알겠냐고.”

“뭐 미래라도 보는 거야? 왜 그런 말을 해?”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르네한테 백번 진실을 말해 준다 한들, 저 애가 이 세계관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아델라이드는 그제야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예지하는 거다. 나 미래를 볼 수 있어, 르네. 가끔 신이 몸에 들어오는 기분인 거지.”

“뭐야, 장난하는 거 아니고?”

“내가 너 상대로 왜 장난을 쳐? 지금까지는 신이 내 입을 빌려 말했던 거야, 르네.”

“…뭔가 속는 기분인데.”

“아니야, 진짜야. 두고 봐, 미카엘이라는 사내가 곧 나타날 거니까. 그놈이 나타나는 순간, 그때가 네가
도망쳐야 할 때야. 알겠지? 그때까지 배 속의 아이 건강하게 잘 지켜.”

“누나 진짜 무섭게!”

“난 이만 간다, 르네.”

“잠깐. 기다려, 누나. 나도 물어볼 거 있어.”

“응?”

“누나… 내가 오메가인 거 알고 있었지. 아르카이츠랑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던 거야? 왜, 그때 아르카이츠가


피어스 공작저에 찾아왔던 날 말이야.”

빙의한 아델라이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말에 잠깐 당황했다.

기본 설정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뭐지.

그냥 아델라이드는 황태자의 표면적 아내일 뿐, 사실 아르카이츠는 수 후보자들과 바람나는 설정 아닌가.

거기에 막장으로 제 혈육까지 후보자로 있는, 나름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한 캐릭터였는데.

“누나가 도망치는 것도 아르카이츠의 계획 중 하나였던 거야?”

“그걸 왜, 왜 나한테 물어? 네 남편한테 묻지. 내 말 믿지도 않으면서 그런 건 물어보는 거야?”

“…아니 그냥,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말을 잘 안 해 줘서….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그놈이 잘 안 해 줘?”

“아니, 행동은 잘해 주긴 하는데, 그냥, 뭔가를 숨기는 거 같아서.”

“너 아르카이츠 너무 믿지 마라. 그놈 버그 먹은 놈이야. 해킹을 당한 건지 오류가 뜬 건지, 아무튼 미카엘만


보면 회까닥 눈 도는 놈이야. 걔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놈이라고. 그러니까, 믿지 마. 정도 주지 말고.
네가 이용할 생각만 해. 그리고 그 미카엘,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질 거다. 이계에서 온 설정이니까. 아마
운명적인 사랑이네 뭐네, 잔뜩 떠들어 대겠지. 걔도 오메가거든. 너랑 똑같이 사내인 오메가. 예언서에나
나오는.”

아델라이드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방을 나가 버렸다.

“뭐라는 거야, 진짜.”


혼자 남겨진 르네는 누이의 이상행동에 괜히 서운해 입을 삐죽였다.

무슨 그런 듣기만 해도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누이가 원래 말은 좀 못되게 해도, 저한테만큼은 덕담도 해 주던 이 아니던가.

이런 유의 저주에 가까운 말들은 너무한 거 아닌가.

“진짜 뭐 예지라도 하는 거야 뭐야….”

그런 거라면 좀 무서워지는데.

르네는 괜히 목이 타는 것 같아 앞에 놓인 찻잔에 든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제 배를 쳐다봤다. 이전보다 아주 살짝, 미세하지만 본인만 눈치챌 수 있는 정도로 배가 불렀다.

매일 밤마다 주치의에게 검진을 받는데 별다른 문제도 없다.

아르카이츠는 여전히 제 응석을 잘 받아 준다.

딱히 불안할 필요가 없는데,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괜히 이상한 말만 하고…. 미카엘? 그게 대체 누군데….”

아르카이츠는 자신한테 각인했다 하지 않았나.

각인이라는 건 죽음이 갈라놓지 않은 이상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 들었다.

제 3 자가 나타났다 하여 그리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라니까.

“하여튼 누이 진짜 못된 심보….”

르네는 오늘의 일을 아델라이드의 질 나쁜 장난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누이는 예전부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종종 르네를 놀려 먹지 않았나.

적어도 그 미카엘이라는 이가 직접 르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당연히 누이의 말을 믿지 못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오메가라서 임신했다는 사실도 지금 충격적인데, 어찌 이계의 사람이 이리로 떨어져?

지금도 충분히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이런 일이.

누이의 말대로 정확히 3 개월 뒤.

이계의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는 이를 받아 든 건 황태자라더라.
제 1 황태자 말고, 제 2 황태자 말이다.

Chapter 5. 이계에서 온 운명의 상대

르네의 회임 사실이 알려지고 며칠 뒤 황태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황궁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제 1 황자 파비안은 그야말로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엄청난 비밀을
발설한다.

페트라 황후가 죽기 전 숨기려 했던 아르콘 부족의 고서에 쓰여 있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진실과 예언 말이다.

가장 처음의 오메가는 사내였으며, 가장 처음의 알파는 여인이다.

여인의 피를 나눈 이들은 아르콘의 부족민이 되었고, 그들은 곧 지배계층이 된다.

오메가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은 그 지배 계층의 후계를 낳아야만 한다.

이것은 아르콘 제국의 더없는 번영을 위함이다.

첫 번째 오메가의 불충으로 진노한 신이 사내에게서 번식력을 빼앗으니, 최초의 오메가는 권능을 잃고 인간이
되었다.

그들을 곧 베타라 부른다.

베타는 죄를 지은 오메가의 자식들이다.

정확히는 아르콘 부족의 역사를 적어 둔 책이었다.

야만족이라 불리던 아르콘 부족이 원래는 제국의 지배 계층이었다는 것에 귀족들은 큰 혼란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아르콘에서 태어나는 사내 오메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이것은 잉태를 위한 신의 선물이며,
고유 능력이 없을 경우 오메가가 아닌 베타다.
사내인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그것은 예언의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아르콘의 피와 예언의 오메가가 만나게 될 시, 그 후손은 제국을 더없이 번영하게 만들리라.

사내인 오메가라니.

오메가는 오로지 여인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내인 오메가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단 거짓을 숨기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하리라.

“이 고서는 오래전 아르콘 부족에서 도난당했던, 부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는 고서입니다. 아르콘의 역사는
물론, 아직 제국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알파와 오메가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죠. 저는 돌아가신
선대 황후, 페트라 황후의 유언을 따라, 제국을 진실로 인도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담긴 모든 지식과 진실들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그대들에게는 모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42.

“한데 어찌 파비안 황자님께서 이 책을….”

다들 얼떨떨한 와중에 의문을 가졌다.

적어도 아르콘 부족의 도난당한 고서를 찾아내는 이는 파비안이 아닌 그 피가 흐르는 아르카이츠여야지 맞는 것


아닌가?

“저는 비밀리에 황후의 명을 받들었습니다. 황후께서 제게 남기신 유언은 진실을 알려라. 하여 저는, 황후
폐하의 유언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콘 부족에서 도난당한 고서를 발견해 냈습니다.”

파비안은 따듯한 미소를 유지한 채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황후 폐하께서 아르카이츠에게 남기신 유언은 제국을 번영케 하라. 저희 둘은 받은 유언이 달랐기에, 당연히
아르카이츠는 이 고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카이츠가 이 제국을 위해 세운 공적이
몇입니까.”
황후의 친자식이든 아니든, 그녀가 남긴 유언을 이행하는 것은 황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그저 맡은 바가 다르니 그동안 왜 너는 하지 않았느냐 같은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 파비안의 말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꽤나 입을 잘 털었다.

귀족들은 그럴싸한 말이면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라.

르네는 몸이 좋지 않아 길게 참석하지 못해 그날의 일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황제의 축사까지만 듣고 르네는 빈혈 때문에 부축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그저 후에 전해 들은 일들로 짧게 요약하자면, 파비안 황태자가 아르콘 부족의 잃어버린 고서를 찾아 외교적으로


공적을 세운 것은 물론, 그동안 제국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그 오랜 역사에 비해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보와 예언들을 알아내었다는 것이다.

해서 그는 지금 황족과 귀족들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르네는 파비안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 그래? 파비안 황태자가 그런 걸 찾아냈단 말이야?

혹은 아, 그래? 황후를 정말 친어머니처럼 따랐나 보네.

제 1 황태자 파비안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좋았다.

물론 첫 번째 황후의 죽음이 불미스럽긴 하지만, 그는 알파가 분명했으며, 아르카이츠와 사이도 좋고, 또 페트라
황후를 친어머니처럼 따랐기 때문이었다.

아르카이츠가 불이면 파비안은 물이다. 그 성격이 상반된 것은 물론, 뭐든지 불같이 화내는 편인 아르카이츠와
달리 파비안은 조용히 분노하는 편이었고, 제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으며, 무엇보다 백성들을 끔찍이 아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무튼 이것이 오늘 연회에서의 일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애나는 르네의 가장 총애하는 시녀로서, 르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짧고 간결하게 추려
전달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네. 황제 폐하께서도 굉장히 놀라셨고, 또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도 전혀 몰랐단 듯한 눈치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거 슬슬 영토 싸움이라도 나려는 것 같습니다. 파비안 황자님께서 큰 공적을 세워 남쪽 땅을
가지시려는 것 같아요.”

커다란 제국을 반으로 갈라 공평히 나눠 준다고는 하지만, 남과 북, 서와 동 어느 쪽으로 나눠도 사실 누군가는


조금 더 이득을, 누군가는 조금 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파비안은 조금 더 이득을 볼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르네가 본 파비안 황태자는 굉장히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이였기에, 어찌 보면 그다운 선제공격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르카이츠는 어땠어?”

르네는 그 순간 자신이 자리를 비운 것을 괜히 후회하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빈혈이 올 게 뭔가.

그 중요한 순간 자리를 비우면, 다른 이들이 황태자비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논하지 않을까 뭐 이런 걱정도 되었다.

“전하께서는 원체 표정을 알기 어려우신 분이라… 그냥 무표정이셨어요. 언제나와 같이요.”

“응? 아르카이츠가 알기 어렵다고?”

르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애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알기 어려우신 분이잖아요. 파비안 전하께서 나긋나긋하시고 부드러우시고, 햇살처럼 해사한 미소를 가지신
분이라면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는 항상 의중을 알 수 없는 무표정에, 미소보다는 인상을 더 잘 찌푸리시고….”

“누가 그래?”

“다들 그러는데요?”

“다들 누구?”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요!”

“…아닌데…. 그렇게 알기 어려운 인간 아니야.”

“네?”

“무표정도 다 달라. 기분 좋을 때 무표정, 기분 나쁠 때 무표정, 어이없을 때 무표정. 그리고 맨날 무표정만


짓는 거 아닌데. 가끔 어이없어하는 표정도 있고, 또 가끔 능글맞게 웃을 때도 있어.”

아무렇지 않게 아르카이츠에 대해 술술 말하는 르네를 보며 애나는 아주 잠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진짜야. 그렇게 알기 어려운 인간 아닌데.”

“…르네 님. 언제부터 그렇게 아르카이츠 전하랑 가까워지신 거예요?”

“응?”

“예전엔 마냥 무서워하시고, 질색하시더니…. 진짜… 진짜 부부 같아요!”

아주 뿌듯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애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르네는 그제야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럼 혼인도 올리고 애도 생겼는데 부부가 맞지, 아니야? 하며 괜히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가도 살짝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목 부근을 매만졌다.

애나 역시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목덜미를 만지는 르네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낮에 귀족들이 떠들어 댄 이야기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르네 님. 각인이 뭐 꼭 물고 그래야만 각인인가요?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는 분명 저희들에게 있어 매우 어려우신


분이지만, 르네 님 한정으로 엄청 다정하시잖아요. 그런 게 각인인 거죠. 보세요, 르네 님도, 아르카이츠
전하의 미묘한 표정 변화들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애나의 말에 풀이 죽어 있던 르네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오늘 낮에 열린 황궁 연회 도중 빈혈이 와 먼저 자리를 뜨겠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물론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쓰러질 정도가 아닌 이상 황궁 연회에는 끝까지 참석하는 것이 황태자비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던 르네는 그들이 숙덕대는 것을 듣고 만 것이다.

“아니, 한데 황태자비 전하 뒷덜미에 각인 자국이 없는데요?”

“이상하다. 보통 제 오메가를 찾으면 바로 무는 것이 알파라고 들었는데.”

“각인을 안 한 거 아닐까요?”

“에이, 하지만 황태자비께서 이미 회임까지 하셨는데….”

르네가 사람들 많은 곳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인간들은, 타인에 대해 너무나 쉽게 떠들어 댄다.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누군가를 입에 올리는 것도 싫어서 아예 공작저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르네였다.

그동안 황궁에서 지내면서 잠시 자신이 왜 이런 자리를 싫어했는지 잊고 있었다가, 그 수군거림을 듣고 번뜩


떠올리고 말았다.

아, 내가 이래서 사교계를 싫어했지.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행복을 누구보다 빌면서도, 그 사이에 난 틈을 누구보다 바라는 이들.

남의 불행이 저의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는 그런 곳 말이다.


아직 목덜미에 각인 자국이 없는 르네를 보며 무슨 말을 수군댈지 뻔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것 아니냐, 아르카이츠가 물지 않은 데에는 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것 아니겠나.

“파비안 황태자가 고서를 공개했다고 했지. 그 안의 내용들이 어떤지 자세히 좀 알아봐야겠어.”

르네는 아직 자신의 체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고서 안에는 자신이 모르는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정보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마냥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나.

르네는 이상하게도 이제 와 자신이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나 너무 안일했나?”

“네에? 안일하시다뇨, 르네 님은 그동안 여장도 하시고, 회임도 하셨는데. 그 누구보다 안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 내 체질에 대해서도, 내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르잖아. 그런 건 좀 이상하잖아. 덜떨어져 보이지


않을까. 게다가 평생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만 여장한 채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 거 같고. 나도 뭔가 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겠어.”

“르네 님….”

“이상해. 그냥 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뭐라도 좀 하고 싶은데… 또 그렇다고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래도 임신 중에는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질 수 있대요.”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르네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황태자비 전하, 아델라이드 전하, 하며 인사를 올릴 때마다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졌었다.

평생 이렇게 제 진짜 이름이 아닌 누이의 이름을 빌려 살 수는 없지 않나.

태어날 아이한테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가? 그게 가능할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고, 언젠가는 걸릴 게 분명한데.

나 지금 이렇게 안일해도 되는 걸까?

요즘 들어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43.
황제는 애써 굳은 표정을 숨기며 제 아들 파비안을 불렀다.

그 고서가 어찌하여 네 손에 들어 있는지, 어찌하여 내겐 상의도 없이 모두에게 공개했는지, 물어볼 것이 아주


많았다.

황제 역시 페트라 황후의 죽음 이후 그 고서를 애타게 찾아다녔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비안이 작게 문을 두들기곤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는 제 아들의 인사를 받아 줄 여유 따위 없어 조급하게 물었다.

“그 책을 어찌하여 네가 가지고 있느냐.”

“제가 갖고 있다니요, 아버지. 전 그저 찾아내었을 뿐입니다. 책은 다시 아르콘 부족에 돌려줄 생각입니다.”

“어찌 그런 결정을 너 혼자 내리느냔 말이다. 아르콘 부족과의 교류 건은 아르카이츠에게 일임하지 않았더냐. 네


권한 밖의 일이다.”

“제 권한 밖의 일이라니, 섭섭한 말씀을 하시네요. 공적을 아르카이츠에게 넘기라, 이 말씀이십니까.”

“파비안,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게 아니라면 대체 제가 아르카이츠한테 넘겨야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아, 더 이상 고서의 내용이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 때문입니까?”

“그 책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느냐. 그 책은 페트라가 제 시종을 시켜 숨기려 했던 책이야. 그녀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터. 드러나서는 안 될 것들을 고작 백성들의 알 권리랍시고 네 멋대로 들춘 것이다!”

“제가 공개한 고서의 일부 내용 말고도, 아버지께서 숨기려는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그러시는 거군요. 이미 이
제국의 근간은 흔들렸습니다, 아버지. 평생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너…! 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

황제의 표정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파비안은 그가 그런 피해자 같은 표정을 짓는 게 퍽이나 웃기다는 듯 이죽댔다.

“뭘 원한다라…. 보통은 왜 이러는 것이냐 이유를 묻기 마련인데, 원하는 바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이미 이유를


짐작하셨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과의 말도 하나 없는 황제는 참으로 비겁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저런 인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다는 거지?

저렇게 볼품없는 인간 때문에.

저깟 오메가 때문에.
“폐하. 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파로 만들어 주십시오.”

“…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반쪽짜리 알파를 완전한 알파로 만들어 달라 이 말입니다. 당신이 모두를 속였듯 나
역시 모두를 속일 테니까.”

“단지 그뿐인 것이냐. 설마 파비안, 러트가 오지 않아 네가 반쪽짜리라 생각하는….”

“내 친부 따위 궁금해하지도, 내 어머니의 복수도 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 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전한


알파로 만들라 이 말입니다.”

“…….”

“제가 어찌 아버지를 협박하려는 패륜을 저지르겠습니까.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한들, 폐하는 제
아버지이십니다. 제국의 아버지이시기도 하지요. 편애 없이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숨길 게 많은 인간들은 평생을 고독하게 살 뿐이지요. 페트라 황후가 죽은 이후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저도 그 고독에 동참할 테니, 노여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전처럼 그저 저를 동정하시면 됩니다. 그 알량한
동정, 겸허히 받아들일 테니까요.”

황제는 여태껏 파비안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꼭 저런 얼굴을 하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나일까. 그런 생각만 하지.

자신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해 왔는지 반성하는 법은 없다.

“절 가엽게 여겨 주시겠습니까, 아버지.”

“…….”

“피차 같은 입장.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알았다. 그리하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알파로 만들마. 네가 알파라는 것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그리하마.”

결국 황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제야 파비안은 샐쭉 미소 지으며 다시 예를 갖춰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그제야 황제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겨우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너지려는 상체를 악착같이 지탱했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대체 어찌하여 이런 일이.

파비안이 예상한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일절 없었다.

* * *
분명 원하는 바를 얻은 것은 맞는데, 파비안은 이상하게 기분이 통쾌하다거나 상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가장 기분이 더러웠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아주 진득한 늪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 혹은 그의 발아래 그림자가 꼭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

파비안은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다 저 앞에서 걸어오는 아르카이츠를 발견했다.

아르카이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

제 어미 페트라 황후를 닮아 그런가, 아니면 원래 알파들은 감정이랄 게 없나,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번에도 역시 파비안은 제 이복형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앞에서 제 수를 들키지 않기 위해 파비안 역시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제 의사와는 달리 얼굴은 자꾸만 이죽대며


일그러지기 일쑤였다.

울화가 치밀었다. 무표정한 아르카이츠와는 달리 여유 부리지 못하는 저를 보며 화가 났다.

아르카이츠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저를 지나치는 순간 파비안의 입에서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임신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여러 가지로 힘들다던데. 그 와중에 여장은 좀 무리지 않겠나? 아내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이번에도 네가 과연 그따위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하는 그런 유치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

아르카이츠는 대답도 없었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춰 파비안을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오히려 먼저 도발해 놓고 발걸음을 멈춘 건 파비안 쪽이었다.

아르카이츠가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파비안은 그가 멀어지는 소리만 가만히 들었다.

이내 그 소리가 사라질 때쯤이 되자 파비안은 나직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를 지나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 느껴진 살기.

처음으로 아르카이츠가 여유를 잃은 거다.

친모의 유언이니, 공적이니, 영토니 그런 것들로 툭툭 건들 땐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르네 피어스를 들먹이자 그


대쪽 같은 얼굴에 금이 갔다.

“하, 하하… 하하! …각인한 오메가라는 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가 보네.”

중얼거리는 파비안의 표정은 아주 완벽한 사냥감을 찾아냈다는 얼굴이었다.


* * *

처소로 돌아온 아르카이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와 지낸 지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르네가 봐 온 그 수많은 험상궂은 표정들 중에서도


이번이 단연코 일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험악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그래요. 사람 겁먹게.”

“겁먹을 정도로 험악해?”

아르카이츠의 굳은 표정이 일순간 풀어졌다.

분명 저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자신의 말 한마디에 바로 표정을 푸는


그를 보며 르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아니, 나는 뭐 괜찮은데. 배 속의 애기가 겁먹겠어요.”

르네는 아주 뻔뻔하게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슬그머니 아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르네는 자신이 어디까지 발 뻗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해 보는 것 같았다.

자꾸만 말이 짧아지는 르네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아르카이츠는 그저 픽 웃으며 르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몰라도 돼.”

“아니, 지금 황태자비 무시하는 거예요? 나도 뭐라도 좀 알고 그래야죠.”

“부인은 일단 태중의 아이에게만 신경 쓰세요.”

“짜증 나,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르네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는 것뿐이야.”

“그런 표정을 짓는데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아주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들어와 놓고서는. 걱정해 줘
봤자야, 하여튼.”

괜히 걱정해 줬다며 휙 등을 보이는 르네에 아르카이츠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르네 복부 위에 제 커다란 손을 올려놓지 뭔가.

“르네 피어스가 신경도 다 써 주고. 그새 내가 많이 좋아졌나 봐. 역시 합방의 묘미는 이런 거지. 스며들듯이


정이 드는 거. 안 그래? 우리 애기 겁먹었어?”
그러곤 르네의 배를 천천히 문지르며 아주 야살스럽게 묻는데, 그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르네는 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르네는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화들짝 놀라 얼른 그에게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아,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애기 놀라겠어, 부인.”

“아니 막 뒤에서 껴안았잖아요!”

“날 걱정해 주기에 사랑스러워 껴안았지. 안는 거 정도는 해도 되잖아, 우리 사이에.”

“…….”

“아. 더 진한 걸 원했다면.”

“아뇨. 우, 우리 사이가 뭐라고.”

“결혼도 하고, 잠도 같이 자고, 애도 만든 사이.”

“그거야… 그거야 뭐, 보통의 정략결혼한 부부도 마찬가지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우린 정략결혼이 아니지. 난 너한테 각인했고, 넌 네 발로 내 곁으로 왔고.”

“…뭐 그래서 연애결혼은 아니잖아요? 난 결혼 전에 그쪽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누이도 초상화로만 봤다고


그랬었고. 또 초상화랑 실물이랑 전혀 다르잖아요. 데이트도 안 해 봤고.”

르네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제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초상화랑 실물이랑 달라서 실망했나?”

“응?”

“초상화랑 실물이랑 달라서 실망했냐고. 내 얼굴. 마음에 안 들어?”

#44.

르네는 왜 또 갑자기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는 건가 싶어, 아주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정녕 자신의 초상화를 보지도 않고 보낸 건가?

양심이 있다면, 그 초상화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내가 동일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아르카이츠. 혹시 본인 초상화 본 적 없어요?”

“있지.”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요?”

“그래서 내 얼굴 마음에 드냐고, 안 드냐고.”

“아니, 초상화랑 실물이랑 다르다 말한 게 어떻게 얼굴이 마음에 드냐 안 드냐로 바뀔 수 있죠?”

“그러니까 대답해.”

“뭘 ‘그러니까 대답해.’예요.”

르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참, 하! 같은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는 쉼 없이 흔들렸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나 못생겼어?”

“아니 진짜 이 양반이 왜 이래?”

“대답해 봐. 얼른. 내 얼굴 마음에 안 들어?”

르네는 못 들은 척 괜히 졸리다며 침대에 누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불을 걷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아르카이츠를 등진 채 휙 돌아누워 자는 척하려는 거다.

아무래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를 상대해야 할 때는 이런 식의 무시가 최고의 방법인 것이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는데.”

“…….”

“분명 저번 밤에는―.”

결국 르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아, 알았다고요, 알았어요. 잘생겼어요. 무서울 만큼 잘생겼다고요. 왜 갑자기 외모 얘기에 꽂혀서는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요?”

“르네 취향 맞지. 내 얼굴.”

“…허.”

“맞잖아. 그때 막 내 얼굴 어루만지고.”

이 인간은 왜 자꾸 그날 일을 약점 잡아서 말하는 거야?

르네 역시 그날 자신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했다. 아주 잘 기억했다.


“아르카이츠. 너 완전 내 취향이야….”

“내 얼굴 마음에 들어?”

“응. 이거 내 거 할래. 나 줘. 너 나 줘….”

“알았어. 줄게.”

“좋아. 이제 이거 내 거야.”

애써 잊어 겨우 찾은 평화를 왜 자꾸 깨려는 건지.

“아 진짜. 알았어요. 아르카이츠 얼굴 완전 내 취향이에요! 됐냐? 됐어? 너 완전 잘생겼어. 초상화가 실물을


담지도 못해서, 초상화도 잘생겼는데, 실물 보고 얼어서 신부 입장 때 겨우 걸었다! 됐냐! 됐어!”

그저, 우리는 정략결혼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서로 죽고 못 살아서 한 결혼은 아니다.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냐면 어쩌다 얽히고 만 알파와 오메가 사이다.

이 정도만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 오히려 된통 당하고 만 것 같은 결말이었다.

어쩌면 르네 입에서 너 내 취향이다, 너 얼굴 내 마음에 쏙 들어, 같은 말을 듣고 싶었던 아르카이츠의 큰


그림이었을까.

르네는 결국 아르카이츠가 원하는 말을 해 줬고, 그제야 아르카이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세상 잘생긴 미소를
짓더니 르네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한 것은 누가 봐도 저 잘생긴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로 웃는 그 모습조차, 르네에게는 아주


잘생겨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르카이츠가 잘생긴 것은 누구라도 동의할 사실이었다.

아르카이츠에겐 불변의 법칙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 잘생기면 잘생겨졌지, 결코 퇴화하지 않는다는 법칙이었다.

공식적인 법칙은 아니지만 제국 영애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비공식적이나 공식이나 다름없는 기묘한
법칙이었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걸 왜 굳이 내 입으로 듣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하여튼 악취미.”

“내가 사랑하는 이 입에서 잘생겼다 말 들으면 기분 좋지. 그 어떤 때보다 내 얼굴에 감사하는데?”

“사, 사랑은 무슨.”

“정략결혼 아니잖아.”
“연애결혼도 아니라 말했을 텐데요.”

“이제 보니 르네, 연애결혼이 하고 싶었구나.”

“…왜 또 이야기가 그리로 튀는 건지?”

“자꾸 연애, 연애 하는 거 보면. 연애를 하고 싶은 거잖아. 아니야?”

“…….”

“조용한 거 보니 맞네.”

르네는 이번엔 딱 잘라 ‘전혀요?’라고 시침 뗄 수가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르네는 실제로 연애를 해 보고 싶었다.

상대가 여인이든 사내든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서로 좋아한다 고백하기 직전의 그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껴 보고 싶었다.

집돌이 르네의 취미는 유일했다. 로맨스 소설 읽기.

아델라이드 누이는 그딴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은 거 왜 읽느냐 학을 뗐지만, 왜 말이 안 돼? 세상에 사랑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얘, 르네야. 그렇게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더 연애 못 해. 고르고 고르다가 시간만 허비할걸?”

“시간 허비하는 게 아니지, 누이. 난 많은 이들과 연애하고 싶은 마음 없는데? 신중하게 기다리고 싶을


뿐이야.”

“기다린다고 오니? 네가 찾아가야지.”

“진정한 운명의 상대라면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어.”

“쯧쯔. 그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하여튼 그놈의 로맨스 소설이 애를 다 버려 놨다니까. 현실을 살아, 르네.
현실을.”

그때는 누이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누이의 말대로 일단 연애나 해 볼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고 갑자기 애가 들어설 줄 알았겠나.

단둘만의 세상, 단둘이서 몰래 데이트, 단둘이서 사랑의 도피.

뭐가 되었든 일단 르네에게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데이트는 무슨. 기껏해야 정무 보느라 바쁜 아르카이츠가 잠깐 짬 내서 티타임을 갖는 정도밖에 더 되나.


“어차피 기대도 안 해요.”

“왜?”

“그야 당신은 황태자고, 바쁘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로 시작된 건 아니니까. 내가 만일 히트
사이클을 그날 겪지 않았더라면 난 더 악착같이 누이인 척 숨겼겠죠. 아니면 애초에 여장을 하고 들어오지
않거나.”

연애를 못 해 보고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게 된 것이 억울한 면도 있었다.

르네는 적어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며, 한 번 데이트하면 그대로 결혼까지 이어 갈 만큼 진중한 이를 바라


왔으니까.

이렇게 불같은 사내 말고,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사람 말이다.

애까지 들어선 마당에 이제 와 무슨 연애를 하나.

르네는 지금도 그리 나쁘진 않다 생각했다. 데이트나 몽글몽글, 꽁냥꽁냥, 로맨스 소설에서 봤던 강렬한 첫 만남,
앙숙에서 동지애, 그리고 사랑으로 이어지며 결말엔 해피엔딩으로 결혼식까지 올리는 이런 클리셰들은
불가능하겠지만.

“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에요. 생각보다 아르카이츠도 저한테 잘해 주는 것도 같고. 뭐, 가끔 못


괴롭혀서 안달 난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애도 아니고 연애에 그렇게 로망 있는 거 아니니까.”

“연애에 로망이 없다니.”

“진짜라고요. 나 막 로맨스 소설에 환장하고 그런 남자 아니라고요. 아, 나 이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요.


졸리니까 잘래요.”

르네는 이제 진짜 더 이상 아르카이츠에게 휘말리지 않겠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뒤 질끈 감은 눈으로 잠들겠다는 의지를 보여 줬다.

이만하면 이제 꼬투리 잡지 않고 놀리지 않겠지?

아르카이츠와 대화하면 할수록 자꾸만 말리는 느낌이 드는지라. 르네는 이제 웬만해선 그에게 먹잇감을 주지
않기로 했다.

“하자.”

“…….”

“연애하자, 르네.”

“…진짜 뭐라는 거야….”

“연애하자니까. 순서는 좀 바뀌었지만. 그대가 원하는 대로 연애하자.”

“아, 이제 와서 무슨 연애를 해요,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데이트도 하고, 같이 여행도 가고, 원한다면 정식으로 고백도 할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준다 했잖아.”

“…놀리는 거죠?”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르네는 푹신한 매트리스가 슬쩍 기우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 확인하자 어느새 제 몸 위로 드리워진 아르카이츠가 보였다.

“놀리는 걸로 보여?”

“…….”

“하자. 연애.”

“…하든가 그럼….”

꾸물꾸물 이불을 끌어 올린 르네가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아르카이츠의 집요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다시 이불을 내리고 물었다.

“근데 연애해 봤어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럴 리가.”

그 얼굴로 아직까지 연애를 안 해 봤을 리가 없지. 게다가 내가 들은 소문만 몇 개인데.

르네는 웃기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되도 않는 거짓말 말고요.”

“왜 거짓말이라 생각하는 건데?”

“그야 내가 들은 소문도 있고, 게다가 그 얼굴에 그 혈기에, 나보다 4 살이나 많으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안 해 봤다는 게 말이나 돼요?”

“말이 안 될 건 뭔데. 내가 막 이 여자 저 남자 다 자고 다니는 그런 아랫도리 가벼운 놈이라 생각하는 거


같은데. 말했잖아. 내가 각인한 건 너라고. 너한테 각인한 이후부터 난 너밖에 없었는데.”

그런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르카이츠를 보며 르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괜히 머쓱해져서는 심통을 부렸다.

“대체 각인을 몇 살에 했길래 그렇게 순정남인 척을 해요?”

“내가 14 살 무렵이었을 거야.”


#45.

“…….”

“왜. 10 년 동안 너 하나만 보고 수절해 왔다니까. 조금 더 기쁜 모습이든 거만한 모습이든 보여 봐. 너 그러는


거 귀여우니까.”

“내가 언제 거만하게 굴었다고…. 딱히 기쁘진 않거든요? 뭐야, 나는 또 하도 능글맞게 굴어서 경험 엄청 많은


줄 알았네.”

툴툴대는 말투와는 달리 르네의 뺨이 꼭 복숭아처럼 뽀얀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르네 넌 얼굴만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겠다니까.

아르카이츠는 꾹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르네를 바라봤다.

묘하게 기뻐하는 저 얼굴.

또 묘하게 ‘내가 그렇게까지 좋단 말이야?’ 하는 듯한 거만한 표정.

그걸 애써 숨기려 하지만 결코 숨기지 못하는 순진한 천성까지.

“참 다채롭다, 너.”

“제가 뭘요?”

“10 년간의 수절 생활, 네가 책임져야 해. 앞으로 평생.”

르네는 역시 아르카이츠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생각했다.

어찌 보면 지고지순한 듯 보이다가도, 또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게 웃는다기보다는 경고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마냥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 또라이 새끼, 빨리 어떻게든 여길 떠야겠어, 다짐했겠지만.

‘그럼 10 년 동안 정말 나만 기다린 거야? 나한테 각인해서? 나만?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절대 안 되고? …뭐야,


진짜 내가 아르카이츠의 운명의 상대인 거야?’

묘하게 두근대고 설레는 이 마음은 대체 뭘까.

르네는 본인 역시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너, 네가 제일 이상한 거 알지, 르네?”

“내가 뭐가?”

오랜만에 찾아와 한다는 말이, 이 모든 상황 중에서 네가 제일 이상하다는 누이의 말이다.

르네는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아델라이드를 쳐다봤다.

“아무렇지도 않아? 너 오메가야. 게다가 애도 가졌고. 거기에 곧 네 연적도 나타날 거라니까.”

“아르카이츠가 사내인 오메가가 없는 건 아니라고 그랬어. 애야 당연히, 내가 히트 사이클을 겪었으니 생겼을


거고. 연적이 나타날 기미는 없거든? 누이야말로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그렇게 무서운 말만 하면,
애기가 다 듣거든?”

“애가 왜 이리 위기의식이 없어…. 아이고 두야. 아이고, 두야. 그래, 넌 원래 이런 설정이었지. 온실 속 화초,
머릿속엔 꽃밭, 고생 한 번 안 한 그저 세상이 아름다운 철부지.”

“진짜, 자꾸 이럴 거야? 지금으로선 아무 문제 없거든? 게다가 애초에 누이가 도망친 바람에 내가… 씨이.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내 죄가 크다. 커서 다시 돌아왔잖니. 이렇게 너인 척 남장하고.”

어쩌다 피어스 가문의 남매가 서로의 행세를 하며 살게 되었을까.

르네는 아델라이드로서, 아델라이드는 르네로서.

“알빈이 찾아왔어. 나한테 와서 온갖 성은 다 내고 가더라. 걔는 아직도 널 좋아하는 듯싶은데.”

“…알빈은 그냥 내 친형제 같은 절친일 뿐이야.”

“알아. 네가 알빈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 없는 건.”

원래부터 설정 자체가 알빈은 르네를 짝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사내.

아델라이드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마 알빈은 르네가 저를 데리고 도망가 달라 하면 틀림없이 그리할 사내였다.

“아니, 어쩌자고 르네를 황궁에 들여보낸 겁니까?”

“안 그래도 다시 빼올 생각이야.”

“예?”

“다시 데려올 거라고. 내가. 그러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해.”

“홑몸도 아닌 애를, 어떻게 데려오려고요. 아니, 일단 본인이 나오고 싶다고는 합니까? 저번에는 절 빼
달라더니, 이제는 괜찮다, 잘 지낸다, 이런 말밖에 답장 오지 않고.”
“르네는 곧 다시 네게 도움을 요청할 거야, 알빈. 그때가 되면 그 애가 내민 손을 무시하지 말아 줘. 그 애가
믿고 의지할 이는 너뿐일 테니까.”

아델라이드는 곧 닥쳐 올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결국 르네는 그 비극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 새끼가 무너지는 모습, 게임에서 죽도록 봤어. 게임할 때도 질질 짤 만큼 그 끝이 안 좋았는데. 이렇게 내


동생으로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 꼴 못 보지. 아르카이츠는 르네를 배신할 게 분명해. 버그가 먹어서 그 미카엘
요물 같은 것을 어떻게 해도 이겨 낼 수가 없었어. 르네는 틀림없이 내게 도움을 요청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아델라이드는 앞에서 과일 주스만 호로록 마시고 있는 르네를 쳐다봤다.

여장에 위화감이 없는 르네를 보며, 얘가 이러다 정말 황궁 생활에 적응이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들었다.

아니, 이미 적응은 완료인 것 같다.

오히려 르네인 것을 들키고 제 체질에 대해서도 알게 되니 묘하게 체념하게 되었다나.

“르네. 아르카이츠한테 너무 정 주지 마.”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누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도 네가 들어먹질 않으니까.”

누이의 말에 르네는 호로록 마시던 주스가 든 유리컵을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그런 뒤 두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또 피식 웃음을 흘리다가, 또 분홍빛 뺨을 발그레 붉히기 시작했다.

“뭐야?”

아델라이드는 직감적으로 불안을 감지했다.

뭔가, 르네의 입에서 아주 엄청난 말이 나올 것 같은 느낌.

르네는 쑥스러운 듯 괜히 양손으로 허벅지를 쓱쓱 비비다가, 몸을 또 배배 꼬기도 했다.

“…나, 아르카이츠랑…로 했어.”

“뭐라고? 아니. 아니다 무슨 말이든 하지 마―.”

“나 아르카이츠랑 연애하기로 했어.”

르네의 말에 아델라이드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눈만 끔뻑이다, 이내 손을 들어 귀를 후비적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네. 하다가도 에이, 설마 싶어 다시 되물어 봤다.

“뭐, 뭘 해?”

“연애. 연애하기로 했다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진짜…?”

“뭔 소리기는. 우리는 중간 과정 다 뛰어넘었으니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서로에 대해 알아 가기로 한 거지.


어차피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각인했고, 나도 뭐, 아르카이츠가 마냥 무섭지 않고. 그러니까… 태, 태어날
아기한테도 부모 사이가 돈독한 게 좋은 거 아닌가?”

르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다시피, 아직 미카엘이 등장하지 않았잖아.

그의 등장 이후 언제나 빠짐없이 매번! 르네는 모든 걸 잃는다고!

아델라이드는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퍽퍽 쳐 댔다.

그러자 이번엔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단단히 화난 얼굴을 한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또 잔소리하려는 거면, 누이 이제 그만 돌아가.”

“잔소리가 아니라 나는 정말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 걱정, 내가 필요할 때 걱정해 주면 좋잖아. 지금 나, 누이가 도망가고 누이인 척 혼인해서 황궁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평화롭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꾸 불행이니, 비극이니, 배신이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르네….”

“이제 그만 돌아가 줘.”

평소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르네가 처음으로 돌아가 달라며 아델라이드의 시선을 회피했다.

순진하다 못해 순둥하던 아이의 변화에 아델라이드는 더 이상 걱정을 가장한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애초에 아델라이드가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르네가 이런 식으로 여장하며 살아갈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게 미안하지만, 또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그래. 르네가 필요로 할 때 도와주면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이렇게 나선다 한들, 사람 마음을 멋대로 바꿀 수는
없는 법이지.’

도움도 필요로 할 때 손 내밀어 주는 게 도움인 거다.

아델라이드는 잠깐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약한 르네는 그 와중에도 독하게 외면하지 못한 채 풀 죽은 듯한 누이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알았어, 르네. 본의 아니게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정말 미안해. 그치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날
부르렴.”

“…누이.”
“하지만 하나 약속해. 뭐든, 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내가 만들어 낸 내 새끼. 이번만큼은 절대로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어.

굳은 의지가 보이는 아델라이드의 눈빛에 르네 역시 누그러진 듯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알겠어.”

“그래서 네 지금 행복은, 아르카이츠와 함께하는 시간인 거니?”

“아무래도, 그렇게 된 거 같아.”

“…참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응. 누이.”

“그럼 잘 지내.”

“응. 누이도.”

그래도 결말은 화해였다.

언제나 그랬다. 아델라이드와 르네는 싸워도 반나절 이상 간 적이 없었다.

아델라이드가 특히나 르네를 아껴, 웬만해선 져 주지 않는 인간이 르네한테만 져 주는 것도 있었고.

또 르네는 천성이 순해서 누군가 사과를 하면 곧장 마음이 풀리는 아이였으니까.

배웅 같은 거 전혀 안 해 줄 것처럼 성을 내더니, 미안하다는 누이 말에 그새 마음이 풀어져 같이 일어나는


르네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다시 생각해 봐도 웃긴 꼴이었다만 남매는 서로 진한 포옹을 나눴다.

#46.

“그럼 누이. 잘 가.”

“응. 잘 있어.”

이윽고 르네가 방 안에 구비된 설렁줄을 흔들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황태자비 전하.”

“르네를 배웅해 주렴.”


“예, 전하. 따라오시지요, 르네 도련님.”

르네와 아델라이드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올게, 누이.”

낮게 목소리를 깐 아델라이드가 말하자 르네는 피식 웃었다.

내 목소리 그렇게 안 낮아, 누이.

곧 르네의 차림새를 한 아델라이드가 헛기침을 하며 시종의 뒤를 따랐다.

누이가 시종을 따라 복도를 거니는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르네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이내 모퉁이를 돌며 아델라이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푹 한숨을 내쉰 르네가 그리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다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개의치 않는 척해도 신경 쓰이는 것은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미카엘? 미카엘이라는 자가 나타나면, 난 정말 불행해지는 걸까?’

누이가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르카이츠는 정말로 날 배신하게 될 거라는 소리인가?

르네는 생각이 많아졌다.

물론 지금의 아르카이츠를 떠올린다면 전혀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가 파비안 황자처럼 모두에게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 같은 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르네에게만큼은 기어올라도


그저 웃어 주고, 또 별 시답잖은 시중을 시켜도 웬만해선 들어주는 이였다.

어쩌면 모두에게 친절했다면 르네는 오히려 그에게 덜 관심을 가졌을 거다.

아르카이츠는 ‘르네 한정’ 다정다감이었다.

물론 르네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많았지만, 사실 르네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다.

아르카이츠의 다정다감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는 걸.

‘그런 건 처음이니까.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집돌이일 뿐인데. 별 대단하게 잘난 점도 없는데.


근데도 나한테 각인한 거잖아.’

아르카이츠를 사랑하는가? 묻는다면 르네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답할 거다.

이게 사랑이라기보다는, 글쎄. 알파와 오메가의 만남이니 당연히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기야 하겠지.

‘사랑보다는 강렬한 끌림 정도겠지. 솔직히 아르카이츠가 내가 오메가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대우를 해 줄지


모르는 거고. 뭐 결과적으로 내가 아르카이츠의 운명의 오메가니까, 이런 대우 받는 거 아니겠어?’

르네는 최대한 좋은 식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헬리오스 제국에서 알파는 일생에 단 한 번의 오메가에게 각인한다 하지 않았던가.

오메가는 극히 드문 개체여서, 어떤 알파는 오메가를 만나지도, 하여 각인도 하지 못한 채 죽는 경우도 많다


들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는 건 제국의 아주 커다란 축복, 신이 내린 인연.

쉽게 깨지지 않는 운명적인 관계.

‘그래. 그렇게 다들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인연인 건데, 쉽게 깨지겠어?’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각인했댔어. 그러니까 날 쉽게 배신하지도 못할 거야.

중얼거리는 르네는 그럼에도 불안한 듯 조용히 손톱을 틱틱 튕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르네의 손을 슬며시 잡아 왔다.

“어… 아르카이츠?”

“여기서 뭐 해?”

“…아, 그냥….”

“얘기 들었어. 아델라이드가 돌아왔다면서. 당신인 척 남장을 하고 왔겠네. 르네 피어스로서.”

“응. 맞아. 나는 누이인 척, 누이는 나인 척. 상황이 웃기더라고.”

어쩐지 자조적으로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슬쩍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르네를 살폈다.

어쩐지 표정이 마냥 좋지가 않았다.

필사적으로 해맑은 척하기는 하는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

아델라이드를 만났다더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르카이츠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아델라이드 성격에 무슨 말을 하고 갔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 여자, 분명 르네와 혼인하도록 도와주겠다더니, 기껏 한다는 방법이 결혼식 직전 도주였지 않나.

거기까진 좋았는데, 돌아오기는 왜 돌아와?

돌아오기 전에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델라이드는 르네를 지극히 아낀다. 그건 아르카이츠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한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 행동에는 여러 가지 모순점이 있었다.

일일이 걸고넘어지기엔 아르카이츠 쪽에서 바라는 것이 있어 다물었다지만. 지금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그 여자는 왜 돌아왔나. 그리고 르네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렇게 표정이 죽상인가.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어쩌면 르네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르네는 제 곁에 있는 것보다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바라지 않을까.

오랜만에 누이를 만나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르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호감까지는 있다 쳐도, 아직 자신을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르네는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정도일 거다.

그런 호기심이 언제까지고 이어질지는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순수한 만큼 빨리 타오르고 빨리 식는다 생각하는 아르카이츠였으니까.

그런 면에 있어 르네는 아르카이츠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순수한 이였다.

때 묻지 않은 도련님을 건든 대가는 꽤나 혹독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홑몸도 아닌데, 지금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면 이혼 말고 더 있어요?”

황당하다는 르네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아르카이츠는 조금 안심했다.

아,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구나.

“네 표정이 좋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했지.”

“도망가고 싶은 거였다면 진즉에 도망쳤겠죠. 지금 이 몸으로 어떻게 도망쳐요? 난 아직 각인 자국도 없어서,


히트 사이클 때마다 매번 발정이 날 텐데. 그냥 물어 주면 좋았을 것을….”

“나름의 족쇄야.”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너도 뭐 하나 나한테 코 꿰인 게 있어야지.”

“그러는 그쪽은!”

“나? 난 이미 르네 너한테 코 꿰였지. 네 모든 건방도 무례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데.”

“…….”

아르카이츠는 씩 웃으며 르네의 손을 잡고는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가자.”

“어딜요?”
“연애, 하고 싶다면서. 그러니까 연애하러 가야지.”

* * *

아니 분명 연애하러 간다지 않았던가?

르네는 지금 눈앞에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을 바라보며 반쯤 얼이 나가 있다.

“…이게 연애하러 가자는 거예요?”

온몸을 리넨으로 돌돌 감싼 채 눈만 빼꼼 내민 르네가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물었다.

눈빛으로 욕한다는 것이 이런 말일까.

당장 지금 눈앞의 광경에 대해 설명하라는 듯 어울리지도 않게 살벌한 눈빛을 내뿜는다.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 가고 싶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의 체질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어?”

“데이트는?”

“겸사겸사.”

“이게 뭐야! 나 그냥 돌아갈래요!”

더우면 부채질해 주고, 추우면 이불 덮어 주고, 다리 아프다 그러면 주물러 주고, 배고프다 하면 먹여 주는
황궁이 아닌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에서의 데이트라니.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보는 건가.

르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당장 뒤돌아 가고 싶었지만, 사실 르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 말을 몰고 있는 것은 아르카이츠였기 때문이다.

“얼른 말 돌려 줘요.”

“가고 싶으면 르네 혼자서 가 봐.”

“…이, 이런 무도한….”

“뭐가 무도해? 이 나이 먹고 승마조차 제대로 못하는 네 체력이 무도하지.”

아르카이츠의 빈정대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르네는 운동 신경이 저질인 수준이었다.

단 한 번도 그을린 적 없는 듯한 새하얀 피부도, 주근깨 없는 고운 얼굴도, 모두 다 그 저질 체력의 수혜였다.

하지만 승마를 못하는 것에 있어서는 나름의 슬픈 이유가 있단 말이다.


“어릴 적 낙마한 이후부터 못 타는 거거든요? 체력이 무도해서가 아니라.”

“아, 그래?”

“그래요. 그때 얼마나 크게 다쳤냐면, 머리에서 피도 흐르고, 팔도 부러졌단 말이에요.”

“아, 그래?”

“어린 나이에 얼마나 심하게 다쳤으면 그날 일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기억 못 한다니깐요?”

“아, 그래?”

“…지금 나 놀려요?”

성의 없는 대답에 르네가 눈을 부라리며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저를 내려다보는, 마찬가지로 온통 리넨 천을 둘러 가려진 얼굴에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따지고자 그를 노려본 건데, 르네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풀고선 멍하니 아르카이츠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아르카이츠. 당신 눈이….”

사막의 모래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보석을 떨군 것처럼 빛이 난다고 들었다.

살면서 사막에 와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인지라 그게 대체 무슨 말을 의미하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는데….

르네는 아르카이츠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 안에 햇빛에 반사된 모래들이 반짝이는 것이 아주 찬란했다.

사람을 홀릴 듯이 아름다운 눈동자라 생각했다.

#47.

아르카이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어쩌면 이번이 처음 아닐까.

그는 잘생긴 사내라고만 생각했는데, 눈이 제일 아름다운 것 같다.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르네는 방금 전까지 아르카이츠의 눈동자가 아름답다 생각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내 눈이 뭐?”

“…그냥 사막 모래들이 빛나는 게 반사된다고요. 엄청 반짝거렸어요. 방금 전에. 아무튼! 빨리 말 돌려요. 난


안 갈래요. 어떻게 말 한 마리에 의존해서 아르콘 부족까지 간다는 말이에요!”

“바로 가는 거 아니야. 이 근처 마을에서 하루 지내고 다음 날 마차를 대여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이해할 수가 없네. 황궁에 마차가 얼마나 많은데 왜 그것들을 안 타고요?”

“황궁의 마차는 공식 일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

“그런 게 어딨어!”

“원래 황궁 법도가 그러합니다, 부인.”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데이트가 세상 어딨냐며, 르네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가도 혹여나 말에서 떨어질까, 투레질해 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몸을 움찔대며 얌전해졌다.

아르카이츠는 구시렁대는 르네를 조금 미안한 듯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나 임신부인데.”

“주치의가 괜찮다고 말했어.”

“주치의도 여행지가 사막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일걸요? 하, 어쩐지 갑자기 주치의를 불러 진찰하게 시키더니,
날 걱정해서가 아니라 여기 끌고 오려는 거였구만?”

르네는 마치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기막혀하며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연애하러 가자기에 잠깐 설렜었다.

그전에 주치의에게 건강 상태부터 확인하자기에, 아, 날 걱정하는구나 하며 또 잠깐 설렜었다.

“아직 초기라서 각별히 몸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가만히 있는 것도 몸에 좋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유산이 제일 많이 일어나는 시기는 무사히 넘기셨으니 여행 정도는 무리 없이 다니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우리 여행 가는 거예요?”

“응. 여행 갈 겁니다, 부인.”

주치의의 말에 다정스레 미소 지어 주는 그 부분에서 아주 잠깐 설렜다가, 여행을 갈 거라는 말에 엄청 설렜다가,


말을 탈 줄 모른다는 르네의 말에 제 앞에 태워 주는 아르카이츠에게 또 아주 잠깐 설렜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간 설렘은 거대한 모래 폭풍 이는 사막 앞에서 한 줌 모래로 흩날렸다.

아, 설렌 게 아니라 내가 또 휘둘렸구나!
“기대한 내가 바보지.”

“모래 폭풍은 곧 걷혀. 아르콘 부족의 영토는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거야 모를 일이죠.”

“분명 좋아할걸.”

“…안 좋기만 해 봐라.”

어깃장을 놓는 르네를 보며 아르카이츠가 픽 웃음을 흘렸다.

곧 그의 말대로 휘몰아치던 사막의 모래 폭풍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르네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건지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규칙적인 시간에 따라 마치 함정처럼 모래 폭풍이 시작된다고 하더군. 아르콘 부족의
침입자들을 막기 위한 선조의 주술이라고도 하고.”

“진짜 주술인 거예요?”

“글쎄. 규칙적인 시간에 맞춰 모래 폭풍이 시작되고 사라지는 건 맞지만, 그게 과연 주술에 의한 건지는 나도


모르지.”

“에이.”

“가서 물어보는 건 어때.”

“뭐… 신화니까 당연히 허구겠죠.”

“알파와 오메가도 신화에 불과했는데?”

그러자 르네의 눈빛에 이채가 생겼다.

궁금하거나 호기심이 생길 때면 르네는 꼭 눈을 반짝였다.

더 이상 황궁으로 돌아가자느니, 이건 사기라느니, 구시렁대는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나름 아르콘 부족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모래 폭풍이 멈춰 얼른 호위기사들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는 사막의 영토였다.

르네를 데리고 하루 만에 아르콘 부족의 영지로 가는 건 무리일 듯하여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갈 생각이었다.

“근데, 정말 체질에 대해 알려고 아르콘 부족까지 가는 거예요?”

정말 그뿐이냐는 르네의 질문에는 다른 의미도 섞여 있는 듯했다.


아르카이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어.”

“뭔데요?”

“가서 직접 봐.”

“직접 봤는데 별거 없기만 해 봐라.”

툴툴대는 목소리가 묘하게 들뜬 걸 보면, 아무래도 르네는 또 그새 기대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참 다루기 쉬운 듯하면서도 묘하게 그 속을 알기 어려운 사내였다.

“네가 좋아할 거야.”

넌 예전에도 그걸 참 좋아했으니까.

아르카이츠는 뒷말은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도로 삼켰다.

* * *

“아르카이츠가, 황궁 마차를 내버려 두고 외출을 했다고?”

“예, 전하.”

“…웬만해서는 비공식 일정을 하지 않는 이인데.”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여행을 간다 한 것 같습니다.”

“여행?”

“예, 황태자비 전하와 여행을 떠나시는 것 같다고…. 하여,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지 미리 진찰까지 받았다
합니다.”

“어디로 간다 하던가?”

“그것에 대해서는 주치의도 아는 바가 없다 합니다. 시녀들도, 시종들도 아무도 모른다 합니다. 소수 정예


호위기사들만 대동하여 가셨다고….”

보좌관의 말에 파비안은 문서에 사인을 하다말고 깃털 펜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가 여행을 가? 이 시기에?

그것도, 임신부를 데리고?

“여행이 아니군.”
“예?”

“여행을 간 게 아니라고. 아마 제 눈으로 직접 볼 생각이었던 거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혹, 설마.”

“내 아우는 나와 대놓고 싸우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고상을 떠는구나.”

파비안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비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르카이츠는 제 오메가를 데리고 아르콘 부족으로 향했다.

비공식 일정? 여행?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명분일 뿐이고 아마 고서를 확인하러 가는 거겠지.

그 고서 속에 나오는 예언의 오메가가 과연 르네 피어스가 맞는지, 아닌지.

“만일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고서가 위조된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떡하죠, 황태자 전하.”

“아르콘 부족조차 그 고서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웃기지 않느냐? 본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이 왜곡된 줄도 모른 채 그저 고서가 돌아왔다며 기뻐하는 꼴이란. 그 고서의 진실에 대해서는 페트라
황후만이 알 텐데. 그 여자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

“아직 페트라 황후의 친부가 살아 있지 않습니까.”

“늙은 추장은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이제 와 고서를 찾아 준 내게 감히 고서를 위조했느냐 화를


낼 수 없겠지. 사실 제 딸이 그 고서를 파괴하려 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고서에 대해 항의를 하려면 제 딸이 부족을 배신하려 한 것을 들춰내야만 한다.

제국의 근간과 부족의 영광,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라도 추장은 절대 진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웃기지 않나. 고작 본인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수용하는 꼴이라니.

* * *

태초의 신은 두 가지 인간을 만들었으니, 그들은 알파와 오메가로 불렸다.

알파에게는 사막의 지대를, 오메가에게는 드넓은 초원의 지대를 주었으니 그들은 화합하여 땅을 일궈냈다.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각자의 능력이 있었는데, 알파에게는 불의 능력, 오메가에게는 생명을 길러내는 능력이
있었다.

[너희들에게 내 능력의 일부를 주겠다. 다만 이 항아리만큼은 열지 마라.]


신은 알파와 오메가에게 항아리를 건넸다.

그 안에는 대지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것들이 들어 있어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첫 번째 발정기가 왔을 때 사막의 알파는 초원의 오메가를 제 아내로 맞이했다.

그들은 자손을 낳아 신의 땅을 더욱 번영하게 만들었는데, 어느 날 이를 시기 질투한 베타가 나타나 말했다.

베타는 신이 처음 만들어 낸 태초의 인간 중 하나였으나, 실패한 종이었다.

베타는 자신이 실패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자신을 버린 신과, 그 사랑을 듬뿍 받는 알파와 오메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하여 베타는 간교한 말로 알파와 오메가를 현혹하여 신이 준 항아리를 열게 했으니, 그 안에서 온갖 역병과


부정의 감정들이 튀어나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은 진노하여, 알파와 오메가에게서 힘을 빼앗았다.

그런 뒤 예언을 하나 했다.

[베타는 결코 우두머리가 될 수 없으며, 미완의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알파는 힘의 일부를 남겨 주겠으나 오메가를 만나지 못한다면 평생을 고독하게 살 것이다.

오메가는 번식의 능력을 남겨 주겠으나 알파를 만나지 못한다면 평생을 외로이 살 것이다.

다만 마지막 만회의 기회가 있을 테니, 그건 바로 예언의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이다.

100 년째 되는 해, 그들이 만나 다시 온 땅을 번영하게 만든다면 모든 부정들이 사라질 것이다.]

“…뭐야, 그게 끝?”

르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48.

지금 이 이야기는, 사막 근처 마을에서 묵게 된 르네가 이런 허접한 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느니, 어찌


지푸라기로 만든 가짜 침대 위에서 잘 수 있냐느니 온갖 투정을 부리다, 누워서는 잠이 오지 않는다, 뭐라도 좀
해 봐라, 하여 아르카이츠가 르네 등을 토닥이며 잠을 재우듯 한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그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태초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끝이야. 이제 그만 자는 게 어때?”

“너무 허무해서 오던 잠도 달아나겠어요.”

“보통 임신하게 되면 잠이 많아진다는데. 르네 너는 왜 잠을 안 자는 거야. 이래 놓고 내일 피곤하다, 못 가겠어


징징대지 말고.”

“안 징징대거든요? 아무튼, 그러니까, 아르콘 부족도, 헬리오스 제국도, 결국엔 이 예언의 아이들을 기다린다는
거네요? 근데, 파비안 황태자가 공개했던 고서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데요?”

“그걸 이제 알아보러 가야지. 파비안의 진짜 의도가 뭔지.”

“…걱정돼요? 파비안 황태자랑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날이 올까 봐.”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당신 얼굴이 좀… 어두워 보여서.”

“전혀.”

“그럼 무슨 생각하는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요?”

어둡고 좁은 방 안, 더 좁은 지푸라기 침대 위에 마주 보고 누운 르네와 아르카이츠는 서로를 바라봤다.

달이 너무 커서 눈이 부시니, 그 덩치로 좀 가려 달라 하여 아르카이츠는 달빛을 등진 채로 누워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달빛에 비친 르네의 모습이 꼭….

“너 요정 같아.”

“…응?”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당황한 르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고, 아르카이츠는 누워 있던 몸을 단번에 일으켜 세워 앉았다.

“뭐야, 어디 가요?”

“바람 좀 쐬러.”

“이 시간에?”

“원래 이 시간에 산책 자주 했어.”

그렇게 말한 아르카이츠는 쌩하니 나가 버리고, 지푸라기 침대 위에 르네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반쯤 몸을 들어 아르카이츠가 나간 문을 바라본 르네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뭐야…? 은근 귀여운 구석도 있잖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 놀란 얼굴을 하던 그는, 곧 아까 전 아르카이츠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푸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문 밖으로 나간 아르카이츠는 그 앞을 보초하고 있던 경비병들과 딱 마주쳤다.

그들은 바짝 군기가 들어서는 얼른 경례를 하며, 주군에게 충성을 보였다.

“내리실 명령 있으십니까, 전하!”

“아니. 없다.”

아르카이츠는 낯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얼른 갈무리하며 애써 평소의 얼굴을 하려 했지만, 이미 경비병들은 모두


목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봤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얼굴이 붉으십니다! 혹, 열 기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마을의
의사를 불러올까요?”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눈치 없는 병사 하나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걱정이랍시고 오지랖을 부려 댔다.

눈치 없는 병사의 말에 아르카이츠의 표정은 빠르게 굳었고 다른 병사들은 탄식하듯 두 눈을 슬며시 감으며 저


눈치 없는 새끼,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보통의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거나 쑥스러워한다거나 그런 것을 감추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들키면 되레 화를 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평생을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과는 거리 두고 산 아르카이츠라면 더욱이 그럴 거라 생각했다.

곧 황태자의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생각한 병사들은 예의 눈치 없는 병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닙니다, 전하!”

아니긴 뭐가 아닌가. 아르카이츠의 얼굴은 지나가던 개가 봐도 ‘나 지금 부끄러워.’ 하고 있는데.

오히려 ‘아닙니다, 전하!’ 함으로써 아르카이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확인 사살되어 버렸다.

그들은 이를 어찌하나 싶은 얼굴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아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붉었던 얼굴도 다시 원래의 혈색으로 돌아왔으며, 무엇보다 저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묘하게….

“내 얼굴이 붉은가.”

“그, 그것이.”

“…다 티 나는가?”

“…예?”

“티 나냐고. 좋아하는 거.”

“…네?”

병사들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분명 화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 모습이 꼭….

마치 첫사랑을 만난 자의 얼굴 아닌가.

좋아하는 거 티 나느냐 물을 땐 언제고 아르카이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길을 나섰다.

“저, 전하?”

“근처에 거닐다 오겠다. 황태자비 호위에 신경 써. 난 괜찮으니.”

“하지만.”

“됐어. 머리도 식힐 겸 혼자 가겠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말안장에서 호신용 검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

사실 아르카이츠에게 호위는 필요 없다는 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병사들도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웬만한 장정 열댓과 싸워도 이기는 사내인데, 누가 누구의 호위를 한단 말인가.

아무튼 아르카이츠가 흙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 사이로 지나가자 병사들은 슬그머니 저들끼리 숙덕대기 시작했다.

“한데, 진짜 각인을 하신 건 맞나 봐. 황태자 전하께서 저리 말씀하실 정도면.”

“각인을 했으니 황태자비로 맞이하셨겠지.”

“그치만, 자네도 그 소문 들었잖나. 사실―.”

눈치 없는 병사가 또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 대기 전에 다른 병사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는 그 입이 문제야, 항상. 그 입이 방정이라니까.”

“내가 뭘?”

“입조심하면서 살아야 해. 괜히 떠들어 댔다간 사달이 난다. 소문을 들어도 못 들은 거고, 뭘 봐도 못 본 걸로


치고 살아. 알겠냐?”

“나 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눈치 없는 병사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다.

그런 동료가 답답한 듯 병사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조동아리를 콱 잡아당겼다.

지푸라기 침대에서 뒹굴다 바깥에서 ‘악!’ 하는 소리를 들은 르네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쇠창살 같은 창문 너머 보이는 것은 그저 저들끼리 장난치는 것 같은 병사들이었다.

“설마 진짜 산책을 간 거야? 이 시간에?”

* * *

사막의 밤은 제국의 밤과 많이 달랐다.

모든 것이 드높은 제국의 건물들과는 달리, 사막은 모래 폭풍에 무너지고 휩쓸리지 않기 위해 대부분 아주 낮고,
둥근 지붕을 가진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여 이렇게 고요한 밤에 사막 마을의 거리를 거닐면 꼭 작은 동산 사이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르카이츠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진 않았지만.

“아르카이츠. 너는 사막으로 와서는 안 된다.”

“왜입니까, 어머니?”

“…사막은 결코 널 환대하지 않을 거다. 넌 내가 그들을 떠나면서까지 선택한 이의 자식이니까.”

“그들이라면,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사막 그 자체 말이다. 사막은 한 번 이곳을 떠난 이들을 결코 다시 받아 주지 않는다.”

“전 받아 달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머니.”

어린 마음에 아르카이츠는 사막에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전 제국을 호령할 거니까요. 하지만 어머니와 제 부족이기도 한 아르콘의 전사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거예요.”
다섯 살 난 꼬마 아이의 맹랑한 말에, 페트라 황후는 그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녀는 제 아들이 그 당시에 이해하지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을까.

“아르카이츠. 먼 훗날 네가 운명의 오메가를 만나게 되는 그날. 절대 그 오메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렴.”

“제 운명의 오메가가 왜 도망을 가요?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걸까요? 어떻게 하면 도망치지 못하게 하죠? 묶어
놔야 하나요? 아니면, 좋아하는 걸 잔뜩 안겨다 줘야 하나요?”

“아르카이츠. 사람의 마음은 결코 묶어 두고 물질로 채워 준다 하여 가질 수가 없는 법이란다. 너는 그


오메가에게, 팔 하나를 내어 줘야 해. 그리할 수 있겠니?”

그때는 무슨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 하나를 내어 줘야 한다는 게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진짜 내어 줘야 한다는 건지.

“운명의 오메가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그리할 거예요!”

그때 어머니가 이후에 무슨 말을 했었더라.

분명 아르카이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말을 했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르카이츠는 어느새 모래 언덕에 도달했다.

언덕이라기엔 낮고, 그렇다고 평지라기엔 성인의 키와 맞먹는 정도의 작은 모래 언덕.

그 위로 올라가자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마치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어머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막에 왔을 때 데려와 주셨던 곳이었다.

사실 그는 페트라 황후를 진득하게 그리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사막에 온 것이니 만큼 사막의


풍경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아르카이츠는 비싼 실크가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모래 언덕에 풀썩 드러누웠다.

#49.
깎아내린 작은 모래 언덕의 턱 아래로 뒤통수를 쭉 내민 채 거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는 밤하늘이 땅이었고 모래 언덕과 저 멀리 작은 마을이 하늘 위로 올라가 들쑥날쑥한 모양새였다.

아르카이츠는 한동안 그 상태를 지속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나는 파비안과의 갈등을 모두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황궁이
어수선해진다면, 르네가 제일 위험해질 테니까.’

두려워서 파비안에게 맞서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르카이츠가 그 불같은 성격을 꾹 눌러 담는 이유는.

“임신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여러 가지로 힘들다던데. 그 와중에 여장은 좀 무리지 않겠나? 아내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파비안이, 르네가 남자라는 걸 알고 있다.

파비안이, 르네가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파비안이, 황태자비가 아델라이드가 아닌 그녀의 남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대체 언제부터 르네를 감시한 거지?’

파비안이 자신에게 마냥 호의적인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귀가 있으면 파비안과 저에 대해 어찌 떠들어 대는지 모를 수가 없으니까.

항상 웃고 있는 듯한 파비안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얼마나 냉랭한지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황후의 죽음을 페트라 황후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파비안이 지금 이 시기에 발톱을 드러낼 거라는 예상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은연중에 제 이복형제를 얕보고 있었던 걸까.

그가 감히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 어떠한 전쟁이든 결국 피해 보는 것은 가장 약한 것들이니까.

아르카이츠는 자신과 파비안의 싸움에 르네의 등이 터질까, 우려했다.

‘파비안은 뭘 원하는 거지? 그저 날 괴롭히려는 건가? 제국 영토를 혼자 차지하려는 속셈인가?’

차라리 후자이길 바랐다. 후자라면 적어도.


“아르카이츠. 여기서 뭐 해?”

“…르네.”

지금 이렇게 모래 언덕 아래에서 절 올려다보는 르네가 위험에 빠질 확률은 적어질 테니까.

만일 르네와 제국의 영토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아르카이츠는 주저 없이 고를 수 있었다.

“난 땅 같은 거 바란 적 없어.”

“뭐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뒤로 고개를 젖히고 있어요? 얼굴에 피 다 쏠리겠다.”

르네는 거꾸로 매달린 채 아르카이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카이츠는 르네, 당신이 왜 거꾸로 매달려 있어? 하는 조금 멍한 얼굴로 르네를 바라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 좀 잡아 줘요. 나도 올라가게.”

“르네. 너 여기서 뭐 해?”

“그건 아까 제가 한 말이죠. 아르카이츠야말로 이 새벽에 진짜 산책을 나간 건가 싶었는데. 진짜 나갔잖아? 이


한밤에 나 혼자 두고.”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척 들어 올렸다.

잡아 달라는 건가 싶어 아르카이츠는 얼른 르네의 양손을 잡아 그가 언덕을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호위병들은 어쩌고 너 혼자 여길 왔어.”

“호위병들이 데려다준 거거든요?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도 없이 누워 있기만 해서 여기서 잠든 줄 알았네.”

“왜 나오고 그래. 더 자고 있지.”

“잠이 오겠냐고요. 그런 말을 하고 휙 나가 버리는데.”

그렇게 말한 르네는 잠시 뚫어지게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런 르네의 입꼬리가 씰룩쌜룩, 주체 못 하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 내가 그렇게 요정 같았나? 아르카이츠 눈에는 내가 막 요정 같고 그래요? 요정 중에서 무슨 요정?”

“무슨….”

“아까 전에 나보고 요정 같다면서요. 그거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 맞잖아. 그쵸. 쑥스러워서 여기까지 온 거


맞죠? 맞잖아.”

르네는 마치 신난 말티즈처럼 총총대며 말했다.

그런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무표정을 유지하려다가 실패하곤 픽 웃으며 르네의 얼굴을 제 커다란 손으로 턱
덮어 버렸다.
“읍!”

“르네. 가끔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르네는 얼른 그의 손을 치워 내며 자랑스레 말했다.

“해맑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는데요.”

“그래. 너 참 해맑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맑았으면 해.”

“걱정 마요. 우리 누이가 그러는데 내가 보기엔 마냥 순두부 같은데, 또 막상 으깨 보면 두부가 아니라 치즈


같대요.”

“그건 또 대체 무슨 비유인데?”

“순두부처럼 산산조각 나더라도, 치즈처럼 고약한 냄새로 상대한테도 피해를 준다던데요? 마냥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거죠.”

대체 순두부와 치즈가 인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르네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묘하게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런 헛소리를 해도, 다 받아 주네. 진짜 내가 좋은가 봐….’

조금 자의식 과잉이긴 했지만, 저를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의 무표정 너머 미묘한 미소와 어쩐지 조금 붉어진 듯한
그의 귓불을 보면 또 맞는 것도 같다.

“내가 좋은 게 단순히 오메가라서 좋은 거예요?”

“네 대화법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그새 또 주제가 바뀐 건가?”

“빨리 대답해 줘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어. 알파가 오메가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거니까. 화학적
작용일 수도, 원초적 본능일지도 모르지.”

“그럼 나 말고 다른 오메가가 나타나면요?”

“내가 각인한 오메가는 너야, 르네. 이미 내 아이까지 품고 있으면서 더 확인할 게 필요한가.”

아르카이츠는 진득한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던 르네는 이내 수긍한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요정 같은데요.”

“달의 요정 같았어. 잠깐.”

“아하. 달의 요저엉?”
“…이게 당신 전략인가?”

“아뇨, 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유도한 것뿐이죠. 왠지 곧 죽어도 대답 안 해 줄 거 같아서.”

씨익 승자의 미소를 지은 르네가 흥얼흥얼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의 요정 같다고? 내가?

꽃 같은 사내, 도자기 같은 사내, 인형 같은 사내, 예쁘장한 미소년 등등 살면서 제 외모를 찬탄하는 여러


감탄사들을 들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런 찬사를 들어도 기분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무감각했는데.

요정 같다는 말은 처음인지라.

“기분 좋네요. 요정이란 말은 못 들어 봤거든요. 그러니까 그쪽 눈에는 내가 꼭 달의 요정 같다는 거죠? 근데 왜


하필 달의 요정인데요?”

르네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곱씹을수록 기분이 좋아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누가 아델라이드 동생 아니랄까 봐, 당황한 아르카이츠의 모습을 보면 더 흥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물으면 분명 쑥스러워하겠지?

그 대쪽 같고 철옹성 같은 남자의 얼굴에 쩌적쩌적 금이 갈 걸 예상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영 딴판이다.

“넌 달이랑 잘 어울려. 그 금발, 짙은 금발이 아니라 옅은 백금발인 것도. 푸른 녹음 같은 눈동자도, 흰 피부도.


달의 요정 말고, 꼭 달의 신 같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요정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말을… 하고 그러는….”

당황하기는커녕, 아주 뻔뻔스럽게도 말하는 아르카이츠를 보며 이게 아닌데? 싶었던지 오히려 르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말 바란 거 아닌가?”

“허, 하! 어, 어이가 없네.”

씩 웃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르네는 결국 또 손바닥 안에 놀아난 건 자신인가, 하고 생각했다.

할 말을 잃은 르네가 뾰로통한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두 사람의 꽁냥거림에 알아서들 자리를 비킨 건지, 호위병들이 저 멀리 성냥개비만 하게 보였다.

마침 주변에 보는 눈도 없고, 이곳에는 오롯이 둘뿐이고, 또 마침 어두운 밤이니.

아르카이츠와 르네는 서로를 바라보며 픽,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기류가 바뀐 것처럼 실없이 웃던 르네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아르카이츠의 얼굴이 르네 앞으로 한 뼘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거리를 남긴 채 다가왔다.

키스다. 여기서 더 다가오면 이건 백 퍼센트 키스야!

르네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입을 맞춘 적이 있었던가?

로맨스 소설에서는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울린다던데, 진짜 울리려나?

잠깐, 이렇게 모래 언덕에 앉아 키스해도 되는 건가? 조금 더 로맨틱한 장소 많지 않나?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르네의 뇌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르네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분홍빛을 띠는 도톰한 입술을 모아 쭉 빼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르카이츠의 입술이 르네의 입술 위에 포개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전하! 아르카이츠 전하! 급한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전보입니다!”

#50.

헬리오스 제국의 신전에서는 태초의 신 파테르를 모셨다.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은 매일같이 거대한 신전 안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푸른 불에 제를 올렸다.

그리고 이따금 신탁이 내려오면 그것을 점쳐 해석하곤 했다.

제국의 초기 시절에는 황제만큼이나 권력이 강한 곳이었다.

하지만 근 몇 대에 걸쳐 신탁이 내려오지 않아 사실상 놀고먹기 딱 좋은 직군이 바로 이곳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이었다.

“이봐, 자네 오늘밤 열리는 연회에 참석할 건가?”

“당연하지. 다들 튜닉을 입고 논다면서?”

“파테르 사제복을 입고 놀 순 없지 않나.”

그들은 오늘도 푸른 불꽃 제단 앞에 껄렁껄렁 모여서는 마치 모닥불 쬐며 캠핑이라도 하는 양 시시덕대고 있었다.

“아, 심심해. 빨리 시간이 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놀고 싶군.”


“하는 일도 없는데, 어찌저찌 신전은 계속 굴러가는구만.”

“명분이지, 명분. 그럴싸한 명분. 황제는 파테르 신이 임명한 알파의 혈통이니 뭐니. 한데 자네 그 이야기 못
들었나?”

“뭔데?”

“파비안 전하께서 아르콘 부족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고서를 찾아내셨는데, 글쎄 그 안에 적힌 내용이 헬리오스
제국의 신화와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많다는 거야.”

“아아, 그렇다고는 들었는데. 뭐, 같은 대륙이니 그럴 수 있지 않나?”

“뭐가 ‘그럴 수 있지 않나’야, 그 책에서는 오메가가 남자라는데.”

“으응?!”

“또 제대로 안 들었지? 아 근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네.”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요, 생각 없이 놀리는 것이 혀끝이니.

할 일 없이 푸른 불만 바라보는 것에 질린 사제들은 며칠 전 황궁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고서 속의 예언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사내인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그것은 예언의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아르콘의 피와 예언의 오메가가 만나게 될 시, 그 후손은 제국을 더없이 번영하게 만들리라.]

“단, 거짓을 숨기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더군. 파비안 전하께서는 제국의 모든
이들이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며 공개하셨다네.”

“사내인 오메가라니, 오메가는 오로지 여인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내인 오메가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야?”

“뭐, 한데 그래 봤자 고서 아닌가. 사람들 말로는 100 년이 되는 날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난다는데, 누군가 그


날짜를 계산해 보니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던데.”

“오늘? 오늘 정말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날까?”

“정말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난다면, 아마 파테르 신전에서 나타나야 맞는 거 아니겠어?”

“어쩐지. 그래서 오늘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사제들이 다들 출근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만일 정말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은 근 몇 년간 할 일이 그리 없었다.

옛날에야 신탁이 자주 내려왔을지라도, 선대 황제 이후로부터는 예언도 잘 내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어쩌다 가끔 신탁이 내려와도 어디에 가뭄이 난다, 어디에 홍수가 난다 같은 자질구레한 사실일 뿐,
황궁에 크게 영향을 줄 만한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오랜만에 화두에 오른 파테르 신전에 나타날 예언의 오메가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다.

“예언 속 오메가는 남자래잖아. 아마 이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내랑 견줘도 지지 않을 만큼의 미남일 거야.”

“이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내가 있나?”

“자네 진짜 친구 없는 티 좀 내지 말게. 사교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나?”

“아니, 신성한 파테르 신전의 사제인 자네야말로 너무 속세에 찌든 거 아닌가? 그래서, 자네는 알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사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바로, 현 황태자비 전하의 하나뿐인 남동생 르네 피어스 공자일세.”

사제가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부정을 저지르는 짓.

다만 신전에서 주최하는 연회는 부정이 아니니 어쩌다 한 번 신전 연회에서 스치듯 본 것이 다일 뿐이지만,


사제는 꽤나 아는 체하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본 적이 없어. 그때 자네 참석 안 했지?”

“…그 정도로 아름답단 말이야?”

“그냥 딱 황태자비 전하께서 남장을 하시면 똑 닮을 것처럼 생겼어. 아니, 솔직히 내 주관적으로는 공자 쪽이
조금 더 아름다운 것 같아.”

“진짜?!”

“뭔가… 베일에 싸여 있는 느낌? 워낙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니까. 어쩌다 한 번 뵌 얼굴을 내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면 상당한 미형인 거지. 뭐, 적어도 예언 속의 오메가 사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좀 신비스럽지
않을까 해.”

그는 눈을 딱 감고는, 그날의 르네를 떠올리며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신전에서 주관하는 파테르의 날에 초대받았던 르네는 누가 봐도 그의 말에 동의할 만큼 아름다웠다.

흰 튜닉을 걸친 하얀 피부에, 녹안을 가진 금발의 소년.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게 흘러내린 반곱슬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을 때 얼마나 아름답던가.

그 자리에 있던 사제들 모두 르네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였다.

따르던 술이 잔을 넘쳐흐르든, 들고 있던 포도알이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가든, 먹으려고 집어 든 것이 배인지


사과인지 구분도 못 할 만큼 모두들 르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 연회가 끝나고 한동안 신전 사제들 입에 오르내렸던 인물이 바로 르네였다.

누군가는 차기 으뜸 사제로서 르네를 추천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아마 신께서도 없던 신탁을 만들어 내보내지 않겠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며.

물론 르네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 그때 황태자 전하께서 참석하셨더라면 지금 황태자비 자리는 아마 동생이 차지하지 않았을까, 할


만큼이라니까? 그분이 오메가가 아니라서 참 아쉽게 되었어.”

“자네 그런 농담 하다가 걸리면 최소 사형일세.”

“그러니까 우리끼리만 하는 말이지. 아무튼, 예언의 오메가라면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재밌겠다, 싶은 거지.”

“한데 만약에 진짜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나면 어떡해? 아까 전에 한 말 중에 ‘단, 거짓을 숨기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하리라.’라는 구절 말이야. 황궁에서 현재 오메가는 황태자비 전하 아니신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이윽고 언제나 타오르기만 하던 푸른 불꽃에서 마치 불똥이 튀듯 무언가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툭, 하고 튀어나온 것이 작은 불씨나 조약돌, 장작이라기엔 굉장히 큰….

인간이었다.

인간? 인간이 맞나?!

사제들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인간 추정의 무엇인가를 바라봤다.

불에서 태어난 듯한 붉은 머리칼은 파도처럼 굽이치고, 황금 눈동자는 찬란하게 빛이 나며, 작은 얼굴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아름답다 못해 현혹될 것 같으니.

“…나는 파테르 신께서 보내신 예언의 오메가.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

“…….”

사제는 아까 전 동료가 물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한데 만약에 진짜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나면 어떡해?”

그 물음에 그는 이제야 대답했다.


“…마, 망한 거지.”

* * *

눈을 꼭 감고 붕어처럼 입술만 오므려 내민 르네만 웃긴 꼴인 거다.

이미 닿고도 시간이 남았을 텐데 왜 아직 안 닿아? 하며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전하! 아르카이츠 전하! 급한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전보입니다!”

병사 하나가 저 멀리서부터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소리치는 통에, 가까이 다가오던 아르카이츠가 몸을 돌려


확인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둘만의 묘한 기류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르네는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 전보를 받는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씨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아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왜 자신이 아쉬워했는지 이해하지 못해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누가 보면 내가 기대한 줄 알겠네.”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렸을 뿐이지, 내가 아쉬워할 입장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르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급히 전보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썩 좋지가 않다.

아니, 썩 좋은 것이 아니라. 아주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여전히 아르카이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었지만, 르네 눈에는 꼭 그가 당황한 듯해 보였다.

르네 역시 괜히 모래를 한번 발로 툭, 골이 난 듯 찬 다음 언덕을 내려갔다.

전보를 받아 든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손을 잡아 언덕에서 내려오도록 에스코트해 줬다.

“무슨 일인데? …요?”

멀뚱멀뚱 저를 쳐다보는 병사의 모습에 르네는 슬그머니 다시 한번 자신의 매무새를 떠올렸다.

분명 숙소에서 나올 때 기다란 리넨 천으로 얼굴 빼고 죄다 둘러 감았으니, 머리털이 짧은 것도, 사내인 것도


들키지는 않았을 거다.
다시 목을 가다듬은 뒤 황태자비로서의 인자한 미소를 한번 보여 주자 병사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르네는 무의식적으로 아르카이츠의 손을 조금 더 진득이 잡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급히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응? 황궁으로? 지금?”

“응. 황궁으로. 지금.”

“왜요? 대체 무슨 일인데?”

르네는 아르카이츠 손에 들린 전보를 가져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헬리오스 신전에 예언 속 오메가가 나타남.

급히 아르카이츠 황태자의 환궁 요망.

“이게 대체 무슨….”

#51.

한 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전보였으나, 그것을 보는 르네는 마치 아주 긴 장문의 칙서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녹색 눈동자가 한껏 당황해서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예언 속 오메가가 나타났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게다가 그 오메가가 나타난 거랑, 아르카이츠가 환궁하는 거랑은 대체 무슨 관계인데?

그런 르네의 손에서 칙서를 가져간 것은 아르카이츠였다.

그는 칙서를 재빨리 구기듯 접은 뒤 르네의 어깨를 감싸곤 병사에게 말했다.

“곧바로 채비하마. 먼저 돌아가라.”

“네, 전하.”
황궁에서 나온 병사가 다시 말을 타고 빠르게 돌아갔다.

르네는 여전히 당황한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별일 아닐 테니까, 걱정하지 마, 르네.”

“…응.”

아르카이츠는 별일 아니라 말했지만, 사실 그 역시 저와 똑같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르네는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째깍째깍 시침 소리, 혹은 스륵스륵 모래시계 속 모래가 흘러가는 거 같은 소리가 르네 귀에만 들리기 시작한
것이.

마치 누군가 르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Chapter 6. 36 계 뭐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마치 전쟁터의 화살 쏟아지듯 거세게 내리는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

누군가 피어스 가문의 문을 거세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가문의 집사와 시녀들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대체 누가 마차까지 끌고 찾아온단 말인가.

“누구시오?”

그러자 문을 두들기던 사내 앞으로 망토를 쓴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집사는 당황한 얼굴로 망토 쓴 이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무슨…. 하며 예의를 논하려던 찰나. 낯선 자가 후드를 휙 뒤로 젖혔다.

“영감!”

“…도, 도련님?!”

후드를 젖히자 보인 것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집사를 와락 껴안는 르네 피어스였다.


집사는 그 짧은 순간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도련님께서 여장을 하지 않으셨다.

한데 타고 오신 마차도 황궁 마차가 아닌, 그저 길거리에서 잡을 수 있는 평범한 마차.

주변엔 황태자 전하도, 호위기사도 없으시다.

그렇다는 건…!

‘도련님께서 몰래 탈출을 하셨다는 거다…!’

지금 이 상황이 비상사태라는 걸 빠르게 판단한 집사는 얼른 르네를 데리고 피어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들은 가서 얼른 각하와 아델라이드 님께 이 사실을 알리게. 도련님은 일단 이리로 오시지요. 비에 쫄딱


젖으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다들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에 있어야 할 르네가 이곳에 있으니 뭔 일인지는 몰라도 큰일은 맞구나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곧 소식을 들은 피어스 공작 부부와 아델라이드가 파자마 차림으로 달려 나왔다.

르네는 일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서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 후 주치의의 검진을 받곤 이불을 두른 채로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리고 가족들이 뛰쳐 들어오자, 르네 역시 이불을 확 걷곤 부모님에게로 달려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어머니!”

공작 부인과 막내아들의 눈물겨운 상봉이었다.

그와는 달리, 공작과 아델라이드는 다가올 미래가 얼마나 암담할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르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이 한밤중에 어찌 너 혼자 호위 하나 거느리지 않고, 여장은 어쩌고 이


모습인 게냐. 몸은? 몸은 좀 어떠하고? 홑몸이 아니잖니.”

공작의 말에 모자의 눈물 상봉은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공작 부인은 얼른 르네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이제 슬슬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하는구나. 맙소사, 신이시여.”

“아, 아직 배불러 오는 시기 아닌데. 3 개월이거든요.”

“그럼 이건 살찐 거니?”

“어머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구요!”


“내, 내 정신 좀 봐. 그래. 대체 무슨 일이기에 너 혼자 그 먼 길을 온 거야. 설마 부부 싸움 좀 했다고 온 건
아니지?”

그러자 르네는 건들면 톡 하고 눈물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모아 우물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아델라이드를 쳐다봤다.

“어머니, 르네 이야기는 제가 듣겠습니다. 아마 저한테는 조금 더 털어놓기 쉬울 거예요.”

아델라이드의 말에 공작 부부는 잠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내 그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비켰다.

다른 시종들까지 모두 물린 뒤, 단둘만 남게 돼서야 아델라이드는 르네를 데리고 소파에 가 앉았다.

르네의 입에서 대충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이미 예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반응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 ‘버그 먹은 망할 게임’대로 진행되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한참 침묵하던 르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X 됐어, 누이.”

“…….”

“나 완전히 X 됐다고…!”

르네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어찌 그런 말을 내뱉느냐, 태중의 아가가 듣는다’는 둥의 잔소리를 할 순 없었다.

정말 너무 당황스럽고, 막막하고, 정말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의 그 표현은 저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르네의 입에서는 기어코 그 이름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진짜 미카엘이 나타났단 말이야. 나 어떡해…. 나 진짜… 이대로 가면 죽는 거야? 응? 그럼 배 속의


아기는?!”

“일단 진정해, 르네.”

“내가 대체 어찌 진정할 수 있냔 말이야, 누이이! 제발 나 좀 도와줘!”

르네는 거의 패닉 상태라, 아예 아데라이드의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르네의 손을 잡아 겨우 진정시킨 아델라이드는 동생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알겠어. 도와줄게, 르네. 네가 도와 달라 했으니,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와주마.”

그러자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는 르네의 눈빛이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빠짐없이 말해 봐.”

“그게… 그러니까….”

르네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미카엘의 그 요망한 미소는 몇 날 며칠 르네를 잠 못 이루게 할 만큼 괴롭혀 댔으니까.

* * *

사막에서 전보를 받은 직후, 아르카이츠와 르네는 곧장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아르카이츠는 손수 르네에게 리넨 천을 돌돌 말아 주며 조금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널 데려오지 않는 거였는데. 본의 아니게 헛수고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군.”

“그러니까.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다시 왔던 길 돌아가야 하는 게 짜증 나네요.”

미안해하는 것 같긴 했는데, 물론 사람 생고생시킨 건 정말 짜증 나는데.

이상하게 진짜 화가 난다든가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르네는 사실 걷는 걸 제일 싫어하여 산책도 집 근처 정원만 거닐지 않던가.

앉아 있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서 있어?

누워 있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앉아 있어?

집이 최고, 그중 가장 최고는 폭신한 침대.

이런 신조 아래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르네인데.

‘근데 이상하지. 분명 헛수고한 게 짜증이 나야 할 텐데. 왜 화가 안 나지?’

오히려 화가 난다기보다는, 걱정이 되었다.

아르카이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헬리오스 신전에 예언 속 오메가가 나타났다. 급히 아르카이츠 황태자의 환궁 요망한다.’

이 대목에서 르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예언 속 오메가와 아르카이츠의 환궁에 대한 상관관계일 텐데….

오히려 아르카이츠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이 더 먼저 걱정되었다.


“걱정돼요?”

결국 르네가 물었다.

혹여나 입이나 코에 모래라도 들어갈까 꼼꼼히 리넨 천을 둘러 주던 아르카이츠의 손길이 멈췄다.

“아까 나보고는 다 괜찮을 거라 말했으면서, 사실 아르카이츠도 불안한 거죠?”

“…….”

“내 얼굴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고 말했잖아요. 나도 그런 거 같아요. 이제 아르카이츠 얼굴 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알거 같아…. 그 예언의 오메가라는 거, 나한테 좋지 않은 거 맞죠.”

그러자 아르카이츠는 한참을 말없이 르네를 쳐다봤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에 르네가 아주 살짝, 서운해지려던 찰나였다.

“읍!”

아르카이츠가 냅다 리넨 천으로 르네 눈과 입을 가려 버렸다.

이 진지한 상황에 대체 무슨 장난이냐며 허우적대는 손을 아르카이츠가 깍지 껴 잡으며 말했다.

“안 불안해, 나는. 그리고 너도 불안해할 필요 없어.”

허우적대던 르네가 리넨 천 너머 반투명하게 보이는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그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대자 아르카이츠가 조금 더 힘주어 그 손을 단단히 잡았다.

“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내 곁에 있는 한.”

“…진짜로?”

“르네 넌 내가 지킬 거니까.”

“…정말?”

르네의 입꼬리가 또 씰룩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깍지 껴 잡은 손에 르네 역시 힘을 줬다.

아르카이츠는 그제야 르네의 얼굴을 가린 천을 내려 줬다.

아까 전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올곧게 서로를 바라봤다.

르네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때의 르네는 단순했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단세포 중의 단세포였다며 자학 개그까지 했다.

너무나도 단순해서, 넌 내가 지킬 거라는 그 유치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말이라는 건 얼마나 한없이 가벼운지.

그래서 언제든지 선심 쓰듯 뱉어 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을 수 있는 것인데.

그걸 잊었던 거다.

#52.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르네를 맞이한 것은 붉은 머리칼에 아르카이츠와 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답고 묘한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황궁에 도착한 아르카이츠는 급히 대신들과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르네도 같이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모종의 이야기가 오고 갔었는지, 혹은 황태자비가 낄 곳이 아니라 생각한


건지.

대신들은 르네에게 ‘태중의 아이가 놀랄 수 있으니 돌아가 쉬십시오.’ 같은 말로 회유하여 보내 버렸다.

하여 르네는 지금 혼자 침대에 앉아 아르카이츠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회의를 하기에 황태자비인 나를 쏙 빼놓는 건데?”

시간이 지나도 아르카이츠가 돌아오지 않아 르네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무엇이냐.”

“황태자비 전하, 저희는 파테르 신전에서 나온 신녀들입니다.”

“들어오라.”

그러자 문이 열리며 신녀들이 들어왔다.

르네의 눈에 띈 이가 있었다.

아주 귀하게 대접받은 것인지 살굿빛이 도는 실크로 짜인 키톤을 입고 있는 이였다.

르네는 이제 막 사막에서 돌아와 온통 천으로 둘둘 말려 모래투성이였는데 말이다.

‘저건,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 중에서도 고위직들만 입는 옷인데. 예언의 오메가가 저 사람인가?’
예언의 오메가.

그 신비스러운 이름과 같이 정말 신비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두 눈은 여우처럼 위로 올라가 있고, 입꼬리는 뱀처럼 길게 찢어져 있는데, 그게 묘하게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또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한데 이자가 왜 지금 여기에?’

르네는 붉은 머리칼의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가 생긋 미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신전의 신녀들 또한 따라 인사를 올렸다.

그새 신녀들까지 호령을 한다고?

“넌 무엇이냐.”

르네는 조금 가시 돋친 말투와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자 신녀들이 르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쳐 방을 빠져나갔다.

뭐야, 왜 단둘이서만 나둬?

르네는 왜 나가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신녀들은 못 본 척 슬그머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문을 닫았다.

“…뭐야….”

르네는 황당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 이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사내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과연 같은 인간이 맞나?

사람마다 풍기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눈앞의 사내는 꼭 사람인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건가?’

딱히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르네의 기분을 상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까


스스로를 돌아봤지만.

‘하지만, 역시 이상해.’

르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무엇이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아까 전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시침 소리 같기도, 모래시계 속 모래가 흘러내려 가는 소리 같기도 한 게 자꾸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사막에서 아르카이츠와 함께 있었을 때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이었다.

‘뭘까, 대체?’

르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이제는 두통까지 동반하는 것 같았다.

르네는 저 앞에 있는 사내에게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가거라. 몸이 좋지 않으니, 주치의를 불러오라 해야겠어.”

“…….”

“나가라니깐?”

그러자 사내는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르네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르네는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그것을 표현할 기력도 없었다.

점점 더 이상한 소리가 커지자 고통에 제 머리통을 감싸곤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어디 몸이 잘못된 건가?

그 순간 머리를 싸맨 채 고개 숙인 르네의 머리 위에 사내가 손을 올렸다.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들렸던 그 이상한 소리가, 사내의 손이 닿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르네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붉은 머리칼의 사내를 쳐다봤다.

그리고 빛나는 황금 눈동자를 본 순간.

방금 전 저를 괴롭혔던 그 알 수 없는 소리가 일종의 본능적인 경보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르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내를 쳐다봤다.

“너 아르카이츠 너무 믿지 마라. 그놈 버그 먹은 놈이야. 해킹을 당한 건지 오류가 뜬 건지, 아무튼 미카엘만


보면 회까닥 눈 도는 놈이야. 걔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놈이라고. 그러니까, 믿지 마.”

왜 갑자기 누이의 말이 떠올랐을까?

그때는 주의 깊게 듣지도 않고, 분명 흘려들었을 뿐인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다.


“정도 주지 말고. 네가 이용할 생각만 해. 그리고 그 미카엘,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질 거다. 이계에서 온
설정이니까. 아마 운명적인 사랑이네 뭐네, 잔뜩 떠들어 대겠지. 걔도 오메가거든. 너랑 똑같이 사내인 오메가.
예언서에나 나오는.”

르네는 제 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사내가 천천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미카엘. 파테르 신께서 내려보내신 예언의 오메가.”

“내려…오다니?”

창백하게 질린 르네의 두 번째 물음에 미카엘은 생긋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신께서 널 보냈다니, 왜 널 보냈다는 것이냐.”

르네는 이제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신께서 명하신 대로 제국의 번영을 위해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내려왔습니다.”

“…뭐?”

“전 그분의 운명의 오메가입니다.”

“…무,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르네는 자신의 배를 감싸 쥐곤 소리를 질렀다.

그 뒤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 * *

기절했던 르네는 얼마 후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닌지 시녀들이 옆에서 부채질을 하다 르네가 일어나자 얼른 그를 부축했다.

“너희,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고 애나만 남거라.”

애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르네의 손을 꼭 잡아 줬다.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르네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물었다.

“꿈이지? 아까 그거 꿈 맞지?”
“…르네 님.”

“…꿈 맞지? 응?”

“…….”

“그 예언의 오메가니 뭐니, 그거 다 내 꿈인 거지?”

르네답게 가장 맨 처음은 현실 부정이었다.

이건 꿈일 거야. 그래. 꿈이 맞는 거야.

나 침대에서 일어났잖아. 꿈꾼 게 분명해!

르네는 한참이 지나도 침묵하는 애나의 안색을 살폈다.

현실 부정을 하긴 했지만, 바로 앞에서 저리 창백하게 질린 애나의 얼굴을 보고도 모른 척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 붉은 머리 사내, 미카엘이라 부르는 자… 정말 예언의 오메가래?”

그러자 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망했다. 망했구나.

“정말 아르카이츠를, 남편으로 맞이하기 위해 왔다는 거지. 나한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정도면 이미 다른 이들도
다 알고 있을 테고.”

“…도련님.”

“…하하, 하하하….”

한참 동안 실소를 하던 르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해. 불안해하지도 않고.”

“르네 님?”

“아르카이츠가 그랬거든. 나한테 각인했다고. 불안하게 만들지도, 위험하게 만들지도 않는댔으니까. 그러니까…
그래. 그 말을 믿는 수밖에 더 있어?”

“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내 곁에 있는 한. 르네 넌 내가 지킬 거니까.”

그날 밤에 아르카이츠가 한 약속, 잊지 않았다.

르네는 믿기로 했다.


자신은 아르카이츠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이며, 그는 자신을 쉽게 놓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흔들릴 만큼 그리 약한 관계는 결코 아닐 거라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댔어. 난 이미 한 번 아르카이츠의 굴에 들어가서도 살아남은


몸이야. 누이인 척 여장하고 아르카이츠를 속이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세상에 또 있겠어? 이 정도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여길 수 있을 거야.”

르네는 어떻게든 정신 승리를 하기 위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누이의 말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댔잖아. 그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잖아? 하하, 시, 신전
불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면서? 그럼 틀린 거 아니야? 적어도 아르카이츠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미카엘을
받아 한눈에 반하는 게 아닌 이상 내가 불안할 건 하나도 없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문제될 건 하나도 없다니까?’ 하며 실소를 터트리는 르네였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 아르카이츠는 호랑이였던 걸까.

갑자기 시녀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는 매우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황태자비 전하! 전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뭐야, 뭔데 그래.”

“…헉, 허억. 그것이, 그러니까….”

시녀는 제대로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방금 전에 정원을 거니시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붉은 머리 사내를 받아 냈다는


소식입니다. 한데요, 한데 그 붉은 머리 사내가요…! 황태자 전하께 ‘나는 그대를 남편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합니다!”

시녀의 말에 방금 전까지 정신 승리를 하던 르네의 표정이 싹 굳었다.

#53.

“…그리 말했다고…? 아르카이츠는? 그래서 그놈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대체 뭐라 대답했는데.”

“그게….”

시녀는 방금 전까지 신나게 떠들어 댈 땐 언제고 이제 와 르네의 눈치를 살폈다.


르네는 됐으니 빨리 말하기나 하라는 듯 손짓을 하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시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내질렀다.

“그것이…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 사내를 보자마자 대신들을 다섯 보 뒤로 물리셨다 합니다!”

“뭐?!”

다섯 보 뒤로 대신들을 물렸다고?

르네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섯 보 뒤로 물렸다는 것은, 상대와 긴히 할 말이 있을 때.

그것도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나 하는 것이었다.

르네와 이야기할 때도 아르카이츠는 대신들에게 ‘세 보 뒤로 물러나라.’, ‘네 보 뒤로 물러나라.’ 이렇게


얘기하곤 했는데.

다섯 보? 다섯 보를 물렸다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거야, 다섯 보 뒤로 물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붉은 머리 사내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아르카이츠 전하 역시….”

“역시 뭐.”

“…마, 마냥 싫지만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셨다… 합니다.”

“뭐라고? 싫지만은 않은 얼굴? 허… 하!”

르네는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다, 괜히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다 이내 뒷골을 잡고 뒤로


쓰러졌다.

애나가 얼른 르네를 받아들었다.

“전하, 이러다 태중의 아기씨에도 무리가 갈 듯합니다.”

“마냥 싫지만은 않은 얼굴이라니….”

“그거야 그저 사람들의 말뿐 아닙니까.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그리 쉽게 변심할 만큼 쉬운 사내는 아니십니다.”

애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의 시녀에게 어서 동조하지 않고 뭣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시녀 역시 후다닥 르네를 부축하며 말을 보탰다.

“네. 그럼요. 게다가 미모로 봐도 황태자비님을 이길 수는 절대 없습니다. 눈이 발에 달린 이가 아닌 이상,


감히 황태자비님을 놔두고 어찌 다른 이의 미모를 찬탄하겠습니까?”
“그럼요, 황태자비 전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복중에는 귀한 후계자까지 품고 계시잖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위로 따윈 르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르네는 반쯤 넋이 나간 눈빛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미 나도 내 눈으로 그 붉은 머리 예언의 오메가를 봤다…. 이름이… 미카엘이라지. 이름도 성스럽구나.”

“황태자비 전하….”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아르콘 부족의 고서에서 어떤 예언이 적혀 있었는지 모를 리 없잖니.”

중얼거리던 르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큰거리는 통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코에 알싸하게 열감이 올라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르카이츠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나만 혼자 두고 뭘 하냐고.”

“그… 다시 회의를 이어 가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 야심한 밤에? 이 늦은 시간까지? …미카엘은 어디에 있는데?”

“그게… 그자 역시 2 차 회의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창밖에서 ‘우르르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르네를 비롯해 애나와 시녀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 비가 올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갑작스런 천둥에 다들 놀랐다.

르네는 이상하게도 놀랍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다.

“뭐야. 나는 왜 배제해?”

“…황태자 전하께서는 비 전하의 건강을 염려하시어….”

건강을 염려하기는 무슨. 이건 염려가 아니라 제외인 거잖아!

르네가 볼멘 목소리로 외치자 애나와 시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 순간 르네는 결심했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신이 아득해지기 전에 호랑이 굴을 나와야 한다.

그것이 살길이다.

* * *
“…이렇게 된 일이야, 누이.”

이야기를 마친 르네가 풀이 죽어선 고개를 떨궜다.

아델라이드는 기어코 미카엘이 나타나고 말았다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누이의 반응에 르네의 가슴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럼 아르카이츠는 네가 여기 온 줄 모르는 거지?”

“그 인간 아직도 회의하고 있을걸?”

“일단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 르네.”

“뭐? 지금까지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누나! 미카엘이 나타났다니까? 누이가 예전에 나한테 그랬었잖아. 뭔
버그인지 뭐시기인지 때문에, 난 결국 비극을 맞이할 거라고. 그 꼴을 예상하고도 돌아가라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르네는 나름 큰마음 먹고 황궁을 빠져나온 거였다.

적어도 르네는 그리 생각했다.

시녀의 옷을 몰래 훔쳐 입고 황태자궁을 빠져나온 뒤, 또 사내의 옷으로 몰래 갈아입고 황궁의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온 것은 르네 본인이 생각해도 참 은밀하고 신속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황궁에서 도망치는 게 그리 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니? 아르카이츠가 알면서도 보내


줬을 거란 생각은 안 해?”

“그게 무슨 소리야?”

“황궁에는 눈이 많아, 르네. 눈만큼 많은 것이 귀야. 입도 많지. 네 일거수일투족이 아르카이츠한테 보고될


거다. 황궁 생활을 하고도 아직 모르는 거야?”

르네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뒤를 밟히진 않았는데.

“장담컨대 네가 침실에서 시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순간부터 아르카이츠는 이미 보고받았을 거야. 그놈은 집착


하나는 대단한 놈이니까.”

“…….”

“네가 목줄을 풀고도 집으로 돌아오는 개인지, 아니면 그대로 떠나 버릴 개인지, 지금 그는 간을 보고 있는


거라고.”

아델라이드의 말에 르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개야?”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 아르카이츠는 네가 혼란스러운 걸 알고 잠시 느슨하게 줄을 놔준 것뿐이라고.


도망치려거든 적어도 지금은 안 돼. 아직은 네게 시선이 몰려 있어.”

“나한테 시선이 몰려 있기는, 다들 그 미카엘을 보고 있을 게 뻔한데! 이대로 황궁에 돌아가면, 내 눈으로 그


꼴을 직접 봐야 하는 거잖아.”

르네의 눈에 또 슬금슬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너 울어?”

“호르몬 때문이야.”

“르네….”

“씨이. 내 인생. 나 아직 스무 살이란 말이야. 20 년밖에 못 살았다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애 엄마 되는


것도 황당한데, 근데 이제는 남편 불륜도 직접 봐야 한단 말이야? 난 딱히 큰 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데에….”

사실 호르몬 때문이 아니라 서러워서 눈물 나는 거였다.

르네는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피어스 가문의 금지옥엽 막내아들.

살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가 오늘 먹을 디저트를 고르는 것이 다인 그런 온실 속 화초.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미움받아 본 적도 없었다.

놀림은 받았어도 다들 르네를 좋아했다.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괴롭히는 애들은 있었어도 외면받아 본 적은 없었던 거다.

노동을 해 본 적도, 훈련을 해 본 적도, 하다못해 사교계에 나가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성적인 자신이 곧 치정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아닌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이런 막장의 한복판에 떨어지게 된 거야, 누이….”

한탄하는 르네를 바라보던 아델라이드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미안해, 르네.”

“뭐가….”

“그냥. 미안해.”

버그 먹은 게임이라 나도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넌 데드 엔딩을 맞이할 거야.

…라고는 곧 죽어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야. 누이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 누이는 나한테 경고까지 해 줬는데,
내가 잠깐 동안은 특별함에 취해 안일했어.”

“특별함?”
“응. 특별함. 아르카이츠가 나한테 각인했다잖아. 웃기지? 각인 자국도 없는데, 그저 그렇게 말해 주는 건 또
처음이라서. 내가 꼭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된 거 같았거든.”

르네는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에는 알파가 문 각인의 증표, 잇자국 같은 것 없이 희고 매끈했다.

그때 아르카이츠가 물지 않은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을까?

그도 사실은 진짜 각인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에 잠긴 듯 르네는 한참 동안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듯 빙긋 미소 지으며 아델라이드를 쳐다봤다.

“일단 누이 말대로 오늘은 황궁으로 돌아갈게. 대신에 나는 누이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준다고 그랬지.”

“르네….”

“나 일단은 한번 참아 볼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언제까지 철없게 굴 수만은 없으니까.”

르네는 붉어진 눈에 힘을 줘 부릅떴다.

그래, 이렇게 질질 짜고 있어 봤자 바뀌는 건 없어. 나도 뭐라도 해야 해.

“내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면 안 되지.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할 거 아니야?”

르네의 말에 아델라이드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직 아르카이츠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못했잖아. 믿어 볼 거라 했으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충동적으로


여길 오고 말았어. 지금은 누이의 말대로… 황궁에 돌아가는 게 좋아.’

그렇게 생각한 르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54.

“누이. 고마워.”

“르네. 누누이 말했지만 너의 행복이 최우선이 되어야 해. 버티지 못할 거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망치게 해 줄 테니까.”
아델라이드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아르카이츠의 회의가 끝나기 전에 먼저 침실로 돌아가 있어야겠어. 기껏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여장을 해야 하네. 수고스럽게 됐어.”

시답잖은 말을 덧붙이는 걸 보면 르네는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안겨 울고 싶은 것 같았다.

아마 아델라이드가 그를 껴안는 순간 르네는 엉엉 울음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살면서 겪는 첫 풍파가 돌풍을 넘어 거의 토네이도 수준 아닌가.

갓난쟁이가 몸을 꿈틀거리다, 네 발로 기다, 두 발로 엉거주춤 서고, 한 발 떼고, 몇 번 넘어진 뒤에서야


비로소 뛸 수가 있는 건데.

르네는 사실상 아직 네 발로 기는 수준이었다.

사람 대하기 껄끄러우면 그냥 안 만나면 되고, 일할 필요 없으니 집에서 책만 읽으면 되는.

그런 애한테 갑자기 황궁 암투에 뛰어들라 밀어붙이면 두 발로 서다가 그대로 뒤로 고꾸라져 어디 하나 깨지기


마련이었다.

‘내 새끼 어디 하나 부러져선 안 되지. 내가 비록 빙의하고 당황해서 도망치긴 했다만, 그래도 르네… 내가 널


어떻게 만들었는데!’

게임 출시하겠다고 몇 날 며칠을 밤새우지 않았나.

인물을 디자인하고, 캐릭터를 구축하며 가장 정이 많이 든 이는 다름 아닌 르네였다.

팀에서 그녀는 ‘르네 맘’으로도 유명했다.

아무튼 르네에 대한 애정은 아마 공작 부인 못지않은 모성애로 가득 차 있다는 거다.

아델라이드는 힘없이 축 처진 르네의 어깨를 보며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또 아주 조금, 뿌듯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래도 르네… 마냥 어리광만 부릴 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스무 살 철없기만 한 르네는 사실 게임에서 가장 유약하고 하찮으며 딱히 미카엘에게 이렇다 할 반항 없이 죽는


캐릭터였다.

날 버리지 말아 주세요, 어떡해, 나 무서워, 도와주세요.

르네의 단골 대사였다.

“내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면 안 되지.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할 거 아니야?”

한데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르네답지 않은 대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갸웃댔다.

‘조금 캐릭터가… 변한 건가?’

아델라이드는 마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르네에게 애써 미소 지으며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런 거라면… 어쩌면 버그 먹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부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아델라이드는 멀어져 가는 르네의 마차를 바라봤다.

르네는 마차가 출발했음에도 여전히 창밖에 고개를 내민 채 피어스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르네가 잘 버틸 수 있어야 할 텐데….”

아델라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카엘은 역대 비엘 게임 중에서 최악의 악수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이였으니까.

그에 대한 설정 떡밥이 제대로 풀리기도 전에 버그를 먹어, 사실상 미카엘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저는 없었다.

‘내가 뭔가 좀 아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미카엘 담당 작가가 마지막까지 비밀이랍시고 설정을 안 푸는


바람에….’

이런 식으로 버그 먹은 비엘 세계관에 빙의할 줄 알았다면, 미리 캐릭터들 약점 좀 파악해 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조금 더 르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지금 도울 수 있는 건 고작 도피뿐이니….’

르네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었다.

그건 바로 르네의 소꿉친구이자 르네를 짝사랑하는 알빈이었다.

‘그래. 원작을 바꾸려면 가장 중요한 건 남주가 바뀌는 것 아니겠어? 공을 바꿔 버리면 되는 거지…!’

나름 기발하다 생각하며 아델라이드는 잽싸게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 * *

르네가 황궁에 돌아와 젖은 몸을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뒤 다시 침대에 누우려던 때였다.

때맞춰 아르카이츠가 방으로 들어왔다.


르네는 바깥에서부터 아르카이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얼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했다.

“하면 전하, 들어가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카이츠는 대답 대신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시종들이 그의 시중을 들려 했지만 아르카이츠가 그들을 물렸다.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을 테니, 그만들 나가 보도록.”

그렇게 시종들까지 문을 닫고 나가면, 방 안에는 아르카이츠와 르네뿐이었다.

르네는 여전히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잠든 척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오는 발소리, 천끼리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로 인해 움직였다.

“르네.”

아르카이츠의 낮은 음성이 르네의 이름을 불렀지만, 르네는 묵묵부답이었다.

눈을 감은 상태로 눈알 굴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르네는 여전히 잠자는 척할 뿐이었다.

‘바보야, 일어나서 빨리 물어보지 않고 뭣 하는 거야.’

르네의 머릿속은 자아 1 과 자아 2 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서 아르카이츠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라는 자아와 일단 오늘은 자는 척해, 무슨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망설이는 자아의 싸움이었다.

“르네. 자는 거야?”

“…자는 중이에요.”

두 자아가 알아서 절충을 했는지, 르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자는 중이라 대답했다.

아르카이츠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자는 중인데 어찌 대답을 할까.”

“자는 중이니까요.”

“그럼 마저 잘래?”

그러자 르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는 뾰로통한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자다가 깨 버렸잖아….”

“내가 깨운 건가?”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씨알도 안 먹힐 투정이었지만 아르카이츠는 기꺼이 받아 주겠다는 듯 픽 웃었다.

“미안하게 됐군.”

“뭐예요, 그래서. 자는 사람 깨우고…. 회의는 끝난 건가? 무슨 회의를 이렇게 길게 하고 그런대. 기다리는


사람 피곤하게.”

“그러게. 그것 역시 미안하게 됐어.”

“뭘 자꾸 미안하대요.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거지.”

르네는 연신 틱틱대면서도 아르카이츠를 힐긋 쳐다봤다.

그는 오랜 시간의 회의로 인해 지친 듯 보였다.

참 웃긴 일이었다. 체력이 강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아르카이츠가 이렇게 피곤해하다니.

황궁에 들어와 살면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길래 그렇게 지친 얼굴을 한대요?”

“내가 그래?”

아르카이츠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당연했다. 그의 매끈한 피부에는 그새 까칠하게 턱수염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르네는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괜히 이불자락을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아니, 나만 쏙 빼고 회의를 하니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있나. 나도 황태자비인데, 황자까지 잉태한


황태자비인데. 왜 나만 쏙 빼고.”

“서운했나?”

“서운하죠, 당연히! 대체 안에서 무슨 회의를 했는데요. 그 망할 놈의 예언의 오메가요, 그 붉은 머리 미카엘!


그놈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 나보고, 당신을 남편을 맞이하러 왔다잖아요! 내가 부인인데, 난 이미 애까지
있는데! 아니, 얘기하고 보니까 어이가 없네. 서운이 아니라 화가 나요! 어이없고 기가 막혀!”

말을 하면 할수록 르네는 점점 그라데이션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힌 상황 아닌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아니 왜 이럴 때는 나만 쏙 빼놔? 내가 그냥 후계자 낳는 도구야? 아니잖아요! 나도


당연히 회의에 참석했어야 하는데, 왜 나는 못 들어가게 하는데요? 난 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도 된다 생각하는
건가?”
“그 회의는 네가 참석하지 않아도 됐어. 들어 봤자 좋은 말도 아닐 테고, 오히려 너에게 스트레스만 줄 테지.”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죠. 스트레스 받아도 내가 받는 거라고요. 내가 뭐 허수아비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싫다고요.”

르네는 말끝을 흐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다고요’가 아니라 ‘불안하다고요’였지만.

자존심이 르네의 본심을 숨기게 만들었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아르카이츠는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기나 할까?

저 무심한 인간은 아마도 르네가 화난 이유가 단순히 ‘황태자비’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일 거라고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미카엘의 등장이 르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변수이자, 사망 플래그인 건지 그는 가늠조차 못할 거다.

“미카엘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르네.”

“…어떻게 걱정을 안 하죠? 뜬금없이 하늘에서 똑 떨어져서 한다는 말이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데.”

“불안한가? 내가 널 저버릴까 봐.”

“…예언의 오메가니 뭐니 떠들어 대면, 당연히 불안하죠.”

게다가 난 아직 각인의 표식도 없는걸.

르네는 자신의 뒷덜미를 가만히 만지작댔다.

아르카이츠는 르네가 미처 뱉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역시 조용히 손을 들어 르네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자 르네가 놀라 고개를 들어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의 손길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55.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 대는지 아르카이츠도 알고 있죠? 다들 내 목에 자국이 없어서… 이상하대. 각인한 표식도
없으면서 어찌 아이가 생겼는지 말도 많고. 왜 물어 주지 않는 거예요? 이제 미카엘을 두고 날 더 흉볼 게 뻔해.
다들 내가 가짜라 생각할 거야.”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만큼 르네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델라이드가 그동안 사람들 입에 어떤 식으로 오르내렸고, 또 어떤 식으로 소문이 퍼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만큼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떠들어 대고, 또 얼마나 쉽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지 르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 물지 않은 거지?

그날 밤, 히트 사이클에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던 와중에.

왜 그때 물지 않은 거야?

오메가의 페로몬에 취한 알파는 본능적으로, 오메가의 뒷덜미를 물어 완전히 제 것이라는 표시를 하려 한다고
들었다.

한데 어찌하여 아르카이츠는 그리하지 않았나.

사실 맨 처음에는 표식이 없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가 보다, 물지 않았나 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큰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던 거다.

“지금이라도 물어 줘요. 얼른.”

르네는 뒤돌아 냅다 머리칼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뒷덜미를 아르카이츠에게 내보였다.

빨리 물어 줘요, 아픈 거 참을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물라고요.

난 이대로 사람들 입에 ‘가짜’니 뭐니 오르내리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물어 달라니까요?”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르네가 조금 짜증을 내듯 말하자 아르카이츠가 그를 다시 제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르네. 날 사랑하나?”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날 사랑하냐고. 완전히, 나의 것이 될 자신이 있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애도 있고, 당신의 것이 될 게 아니면 난 폐위되는 수밖에 없다고요. 그럼 우리


가족은? 나는? 배 속의 아이는?”

갑자기 사랑하네 뭐네 이런 걸 묻는 건 너무 뜬구름 아닌가?

평화 위에 사랑이 올라와야 맞는 거지, 지금 평화고 뭐고 까딱하다간 나락 갈 위기인데 이 마당에 사랑을


논하기엔 너무 머릿속이 꽃밭 아닌가?

르네는 아주 황당하다는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우리가 언제 사랑해서 결혼했나요?”

“…그래. 그렇지.”

“당신이 나한테 각인했다면서요.”

“맞아. 난 너한테 각인했어.”

“근데 왜 그 증거를 만들지 않느냐고요. 덕분에 나만 위험해졌잖아요. 분명 나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책임지고


빨리 내 뒷덜미 물어요.”

“르네. 오메가는 알파에게 뒷덜미를 물리면, 표식을 남긴 알파 외의 다른 알파에게는 다시 안길 수 없어.”

“그래서요?”

“내가 없으면 넌 안 된다는 거야.”

“어차피 지금도 안 되거든요?”

거참 말 많아, 빨리 물어 줘요! 하며 르네가 당당히 표식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거부했다.

“싫어.”

“…뭐, 뭐라고요?”

“물 수 없어.”

“왜요? 내가 아르카이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그건 아직 모를 일이라니깐?”

“그러니까 더더욱 물 수 없어.”

“…….”

아르카이츠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거부했다.

지금 날 거부한 거야? 나한테 표식을 안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르네는 충격으로 인해 한참 동안 넋이 나간 채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르네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철회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널 물지 않을 거야, 르네.”

널 물지 않을 거야.

너 따위 물지 않을 거야.

너 따위 말고 다른 이를 물 거야.

너한테 각인한 게 아니야.


넌 곧 버려질 거야.

순서대로 그의 말이 변형되어 르네의 뇌에 도달했다.

“미카엘이랑 단둘이서 대화를 했다던데.”

“…….”

“그 대화 내용이랑, 지금 당신이 이렇게 대답한 거랑. 관련 있는 거예요?”

하늘 위에서 뚝 떨어졌다지.

그걸 받아 든 건 아르카이츠였고.

아르카이츠는 대신들을 모두 물렸고, 둘이서 꽤나 긴 시간 대화를 했다고 들었다.

아마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와 계속 대화를 나눴겠지?

방금 전까지 미카엘과 함께 있다 왔는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 주진 않는다.

그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데?”

“…….”

“대답도 안 한다 이거지. 관련 있네. 관련 있는 거 맞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면서 르네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뽀얀 얼굴을 단번에
일그러트렸다.

그러곤 손을 들어 아르카이츠의 뺨을 세게 갈겼다.

짜악!

“이… 개새끼…!”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더 갈기고 싶었지만, 르네는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가 버렸다.

아르카이츠의 왼쪽 뺨은 발갛게 부어올랐고, 고개는 완전히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샌님이라고 마냥 약할 줄 알았는데, 제법 손톱 세울 줄도 안다.

아르카이츠는 손톱에 긁혀서 피가 맺힌 자신의 뺨을 가만히 매만졌다.

당장 가서 르네를 잡아 그 뜻이 아니라 말은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고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동요하고 있는 거였다.
르네가 제 뺨을 때린 것 때문이 아니었다.

“황태자비가 불쌍합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목덜미를 물려 평생 귀속되는 게


너무 불쌍하군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하던 미카엘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결국 그분을 불행하게 만들 겁니다. 왜냐면,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저 얕은 술수에 불과하다. 간교한 말뿐이다. 이간질시키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치부하기엔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실 아르카이츠 역시 무의식적으로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르네는 자각이 없으니, 언젠가는 마음을 열겠지.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마음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 저와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게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르카이츠는 걸려들고 말았다.

“그분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지 않으세요?”

한심하게도,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열어 봤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걸 알면서도.

진짜 르네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거다.

“네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없으니, 더더욱 네 목덜미를 물 수 없어. 르네.”

나 혼자 좋다고 네 모든 것을 소유할 순 없잖아.

아르카이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만일 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이가 생겼을 때, 날 원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함부로 네 목에 족쇄 채우지 않겠다는 거야.”

* * *

사막에서 돌아온 아르카이츠는 곧장 대신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

“파테르 신전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정확히! 신성한 푸른 불에서 불씨가 튕겨 나오듯 나타났다 합니다.”

“예언의 오메가가 확실한 겁니다. 이보다 더 신성한 등장이 어딨겠습니까?”

“이세계에서 온 걸까요?”

“신께서 보낸 사도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신이 명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콕 집어 아르카이츠 전하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왔다는 걸
보면. 게다가 그 모습을 보십시오. 영락없이 아르콘 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신들은 다들 미카엘이 예언서에 나오는 그 예언의 오메가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회의에 참석한 것은 아르카이츠뿐만이 아니었다. 파비안 역시 그 자리에 함께했다.

파비안은 대신들이 실컷 떠들어 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르콘의 초대 왕비는 붉은 머리칼과 황금 눈동자를 가졌다고 하지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대신들은 아무래도 그가 예언의 오메가가 확실하다,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한데, 그럼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누구 하나가 눈치 없이 르네를 입에 올렸다.

그들은 황태자비라는 단어에 다들 아르카이츠 눈치만 보기 바빴다.

아르카이츠는 일일이 그들에게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신이 보낸 사도라면, 이미 진즉에 신탁이 내려왔었어야 하는 법.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은 이전에 내려온 신탁이
없다 하였으니. 조금 더 두고 보도록 하지.”

“하지만 아르카이츠 전하. 그자는 전하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왔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황태자비께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실 테고, 다른 귀족들도 모두 알게 될 텐데 이리 흐지부지 넘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자 파비안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편하게 의자에 앉아 또 툭 질문을 던졌다.


“한데 아르카이츠. 그 미카엘이라는 자를 만났느냐?”

“내가 어찌 그를 만나.”

“아니. 아까 전에 신녀들이 그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간다길래 미리 자네한테 눈도장 찍으려는 줄 알았는데.”

“…뭐?”

“그게 아니라면, 황태자비한테 인사를 하러 갔나 보군. …이미 파테르 신전에서는 설 줄을 정한 것 같은데.”

약 올리듯이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파비안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이마에 힘줄이 설 정도로 순간 이성을 잃었다.

#56.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울퉁불퉁 솟아오른 핏줄에 파비안은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픽 비소를 지었다.

지킬 게 있으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하면 이미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미카엘을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피어스 공작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길길이 날뛰겠죠. 장녀가 자칫하면 가짜 오메가로 몰릴 위기인데.”

“어쩌면 가짜 오메가인 것이 맞고, 피어스 공작이 이를 숨기려 했던 것 아닙니까? 그 양반, 원래 성격 같으면


매일같이 사교 모임에 나와 제 딸 자랑하기 바쁠 텐데 요새 묘하게 조용한 것도 그렇고….”

탕!

아르카이츠가 책상을 조용히 내리쳤다.

늙은 대신들은 심장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노, 놀랐습니다, 전하.”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고 걸러내는 것을 잊지 마시오들.”

“…….”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다들 입만 벙긋했다.


그 누구도 나서서 아르카이츠에게 황태자비와 예언의 오메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네 마네 함부로 떠들 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구원자라도 되는 양 애타는 눈빛으로 파비안을 쳐다봤다.

이 자리에서 아르카이츠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을 얹을 수 있는 건 이복형제인 제 1 황태자 파비안 뿐이었다.

굳은 표정의 아르카이츠와는 달리 파비안은 그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여유롭게 그를 쳐다봤다.

“일단 만나는 게 어때? 그 ‘예언의 오메가’ 말이야.”

“난 이미 황태자비에게 각인했으니, 다른 오메가를 만날 이유는 없어.”

“글쎄, 나는 좀 생각이 다르네. 아르카이츠. 너는 황태자비에게 각인했다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단순히 가슴이
설레서? 끌려서? 알파는 일생에 단 한 명의 오메가에게 각인해. 하지만 오로지 단 한 번뿐이라는 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횟수 아닌가?”

파비안의 말은 사실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각인해 본 경험도 없으면서 어찌 이것이 각인인지 아닌지 확언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네요?”

“오오, 일리가 있습니다.”

대신들은 생각해 보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수염을 쓸어내렸다.

“난 오히려 아주 신중하게 되더군. 내 오메가를 아직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그


누구에게도 설렌 적이 없는 건 아닐세. 오히려 나는 다른 이들을 마음에 품을 때마다 이것이 과연 ‘각인’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감’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어.”

한데 너는 무엇 때문에 아델라이드가 네 하나뿐인 오메가라고, 네가 각인한 유일무이한 사람이라 확신할 수 있는


거지?

파비안의 질문에 아르카이츠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건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하여 구별해 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 오로지 당사자가 되어야 느낄 수 있는 거였다.

유일무이한 오메가라 어찌 확신할 수 있냐고?

그냥 처음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알았다.

이건 단순히 호감이니 호기심이니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양된 감정이었다.

그깟 말장난으로 놀아날 만큼 얕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당사자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본능에 가까운 직감은, 언제나 신뢰성을 잃기 마련이었다.

“몸에 같은 문양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서로의 이름이 몸에 새겨진 채 태어난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수로 네


짝임을 확신할 수 있느냔 거지.”

쿡쿡 웃음을 참으며 파비안이 말을 이었다.

“그냥 한번 만나기라도 해 봐. 이번 기회에 확실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미카엘이라는 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황태자비는 확신의 네 오메가겠지.”

“…….”

“하지만 만일 흔들린다면 아델라이드는 애초에 네 운명의 짝이 아니었던 거다.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하자
없는 알파를 생산해 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 미카엘이라는 자를 만나서 네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나.

진정 알파와 오메가가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의 운명으로 묶인 존재라면 말이야.

파비안의 말에 다른 대신들 역시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며 하나둘 말을 얹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는 머리에 피가 쏠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난생처음 알았다.

불같은 성격이긴 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 성질머리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아 아르카이츠의 화를 돋운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전쟁터에 참여했을 때 분개하는 정도였지.

이렇게 할 말을 잃게 만들고, 이성을 잃고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은 적이 또 있었던가.

하지만 참아야 했다. 참아 내야 했다.

여기서 주먹질했다간 오히려 대신들에게 신뢰를 잃게 될 거였다.

신뢰를 잃은 황태자, 신뢰를 잃은 황태자비.

신뢰를 잃은 권력은 없는 거다.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해야 르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다.

겨우 자신을 다독인 아르카이츠가 드디어 입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아르카이츠의 입을 향했다.

“…공기가 혼탁한 듯하니, 잠시 정원을 거닐고 오지.”

그렇게 말한 아르카이츠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병신, 공기가 혼탁하기는.’

사실 혼탁하다 느끼는 것은 회의장의 공기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한 그의 마음이었다.

다행히 대신들은 그의 말을 비웃기는커녕 일단 일어납시다, 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달이 참 밝습니다. 전하.”

“혼란스러우시겠지만, 달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네요.”

아마 다들 말은 그렇게 하며 아르카이츠 눈치만 보고 있을 터였다.

각인하여 맞이한 황태자비가 임신까지 하였는데.

하필이면 갑자기 신전에서 나타난 이가 콕 집어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 왔다 말할 게 무엇인가.

차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르카이츠는 제 각인 상대도 헷갈린 멍청이가 되는 거고.

또 황태자비를 갈아치우게 될 경우엔 피어스 가문과의 갈등도 모두 오롯이 아르카이츠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골치 아픈 일이다. 당연히 공기가 혼탁하고 눈앞이 흐릴 거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대신들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한껏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야심한 밤, 그들은 다 같이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혼자 걷겠다 한 것을, 왜 다 따라오는 거야.”

“에이, 적적하실까 봐 그러지요.”

늙은 노인들, 괜히 눈치나 살살 보기는.

아르카이츠는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회의장에서부터 아르카이츠는 종종 창밖을 바라봤다. 장미덤불이 만개하여 붉은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인데도, 이 장미들은 만개하여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낮만 해도 꽃이 덜 폈었는데, 밤새 피었나 봅니다.”

“향기롭기까지 합니다. 허허.”

대신들이 하나둘 말을 얹는 동안 아르카이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미덤불을 바라봤다.

흰 보름달 아래 핏빛과도 같은 붉은 장미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르네가 꽃을 좋아하던가.’

아르카이츠는 장미 다발을 받아 든 르네의 모습을 상상했다.

달과 장미라. 르네와 참 잘 어울린다.

‘지금쯤 잠들어 있으려나.’

아마 르네라면 분명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잠들진 않았을 것 같다.

그동안 어디까지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을지.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가겠다느니 그런 말을 할 게 분명했다.

물론 르네의 걱정이 현실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내겠다 약속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낼 거다.

만개한 장미를 바라보며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 다짐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장미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는 손을 펴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미 잎을 쥐었다.

“웬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질까요?”

옆에 있던 대신이 희한한 일이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어! 전하! 조심하십시오!”

“사람이 떨어집니다!”

그 말에 아르카이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장미 꽃잎과 함께 추락하는 사내를 발견했다.

흰색 키톤을 입은 그는 길고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을 나풀대며, 장미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떨어지는데 어찌하냐며 발만 동동 구르는 대신들과는 달리 아르카이츠는 사내를 받아 냈다.

정확히 아르카이츠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긴 사내는, 꽤나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다 이내 생긋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붉은 머리칼, 저와 같은 황금 눈동자, 그리고 구릿빛 피부.

한눈에 봐도 이 사내가 파테르 신전에 나타났다는 그 ‘예언의 오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르카이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미카엘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를 땅에 내려 주었다.

옆에 있던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자네는 그 파테르 신전의 미카엘 아닌가?”

“맞습니다.”

“대체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요?”

“그게…. 장미 꽃잎을 모아 신녀들과 함께 화관을 만들고 있었는데. 발코니에 앉아 있다 균형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미카엘이 아르카이츠를 빤히 쳐다봤다.


“절 살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르카이츠 전하.”

#57.

아르카이츠가 말없이 미카엘을 내려다보고 있자, 대신들이 눈치 없이 신기하다는 듯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아직 황태자 전하를 뵌 적도 없을 텐데 바로 알아보는구만.”

“그야 전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기 위해, 신께서 보낸 사도이니까요.”

“정말 신께서 자네를 보낸 건가? 아, 아니지. 미카엘 님. 정말 신께서 미카엘 님을 보내신 것입니까?”

“그럼요. 전 예언의 오메가. 제국과 아르콘 부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내려왔습니다. 남편 될 이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법이지요.”

그는 마치 매우 성스럽고 순결한 것이라도 되는 양, 양손을 가슴에 얹고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대신들이 모두 넋이 나가선 ‘오오’ 같은 작은 탄성을 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절 받아 주신 분이 아르카이츠 전하니까요.”

“그러게요, 그것도 미카엘 님의 붉은 머리칼과 아주 잘 어우러지는 붉은 장미와 함께요.”

“허허허. 생각해 보니 이 장미 정원, 선대 황후께서 굉장히 아끼던 정원 아니었습니까. 황후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줄곧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가꾸셨고요. 묘하게… 이어지는 듯합니다? 허허허….”

대신 중 하나가 눈치 없이 웃으며 말했다.

평소 피어스 공작과 앙숙으로 지내던 이였기에 오히려 지금 상황을 반기는 듯했다.

그에 동조하는 몇몇 이들도 하나둘 말을 얹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미카엘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이 인간.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몽마는 원하는 이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건 바로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을 때.

혹은 다른 강한 감정이 지배하고 있을 때.

이때는 현혹이 불가능했다.


아르카이츠의 경우에는 전자였고, 파비안의 경우엔 후자였다.

‘현혹이 먹히지 않는 걸 보면, 애초에 그른 계획인데. 파비안 님께서는 내가 이 사내를 유혹하길 바라겠지.’

꿈에 나타나 정기를 취하고.

그와 황태자비 사이를 갈라놓고.

하여 황태자비가 비참하게 쫓겨나면 그 이후에야 제정신이 돌아오게 한 뒤 절절하게 후회하게 만드는 것.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이만큼 사람을 망가트리는 법도 없을 거다.

미카엘은 이곳에 소환되기 전 마계에서 인간들이 사랑에 빠져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급 몽마였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선배 몽마들의 선례를 보고 들으며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얄팍한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가벼운지, 그러면서도 또 한 번 전염되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통은 사랑이 실패했을 때 인간들은 가장 좌절하지. 한데 이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데.’

미카엘을 힐긋 파비안을 쳐다봤다.

아르카이츠와 대신들 뒤쪽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웃어 주셨어.’

저를 보며 생긋 미소 지어 주는 파비안의 모습에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파비안의 눈빛에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씁쓸해진 미카엘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아르카이츠를 현혹하는 것은 실패할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못 하겠다.’, ‘이미 아르카이츠는 황태자비를 사랑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실패할 것
같다.’ 하는 말은 곧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쓸모없는 몽마는 버려질 게 분명했으니까.

미카엘은 파비안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혹되지도 않을 아르카이츠를 유혹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미카엘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모두들 다섯 보 뒤로 물러나도록.”

아르카이츠가 그렇게 말하더니, 파비안을 쳐다봤다.

“형도 다섯 보 뒤로 물러나.”

그 말에 대신들은 당황하다가 얼른 다섯 보 뒤로 물러났다.


파비안 역시 싱긋 웃더니 이내 그들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요?”

“저 예언의 오메가, 미모가 상당합니다.”

“꽤나 운명적인 만남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황태자비 전하와 아르카이츠 전하가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서로를
알아봤는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모로, 신비로운 관계네요.”

“이보시오들, 자꾸 그러시면 황태자비 전하가 뭐가 됩니까?”

“아니… 뭐, 솔직히 각인 자국도 없고.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 뭐냐… 예언의 오메가는 이런저런 능력도
있다는데. 황태자비 전하는 아주 평범하시잖아요. 물론 좋으신 분입니다만.”

“거짓말을 하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할 거라 했습니다. 만일 둘 중 하나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신중히
선택해야지요. 어라? 파비안 전하? 들어가시는 겁니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파비안이 뒤돌아 가자 대신들이 쪼르르 그 뒤를 쫓아갔다.

저 멀리서 아르카이츠와 미카엘이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듯한데 미카엘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정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도 같다.

상황이 흥미롭게 흘러가는 와중에 이 재미난 자리를 왜 뜨냐는 눈빛이었다.

“경들도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빠져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한 파비안은 뒤도 안 돌아보고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대신들은 그런가 싶어 아르카이츠와 미카엘 쪽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 * *

예언의 오메가.

그것이 실제든 아니든 아르카이츠는 미카엘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붉은 머리칼, 황금빛 눈동자, 태양에 그을린 듯한 구릿빛 피부.

외양만 봐서는 영락없는 아르콘 부족의 혈통 같아 보였다.

대신들이 옆에서 무어라 떠들든 아르카이츠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제 앞의 사내가 얼마나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든 아르카이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들이 멀찍이 떨어지자 그제야 아르카이츠가 입을 열었다.


“파비안이 몽마를 소환했군.”

그의 말에 미카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초승달처럼 샐쭉 호선을 그렸다.

대충 무슨 꿍꿍이냐, 썩 꺼져라 등의 협박성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보자마자 눈치채시다니, 대단하네요. 제국에 저 말고도 또 다른 몽마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다.”

“한데 어찌 바로 아십니까? 뿔도 꼬리도 없는 데다 이렇다 할 능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마계의 몽마는 아르콘 부족과 꽤나 흡사한 외향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들은 대부분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지. 파비안이 주술사를 통해 뭔가를 소환하려 한 정황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르카이츠는 미카엘이 몽마라는 것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확신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줬던 아르콘 전사들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 몽마의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몽마는 아름다운 외양과 달큼한 향기로 처음 본 인간들도 모두 목메게 만든다던데.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파테르 신전의 신도들을 속일 만큼의 초자연적 능력이 있으면서,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것들은
마계의 존재 외에는 없지 않나.

미카엘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정체가 들켜 버린 것에 뭐 어쩌겠나, 싶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파비안이 아르카이츠를 너무 얕본 건지, 아니면 아르카이츠가 생각 외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건지.

“파비안이 날 유혹이라도 하라던가? 아니면, 나와 내 아내 사이를 이간질하라던가? 뭐가 됐든, 그건 실패할


거다. 괜히 그의 복수에 끼어들어 명줄 재촉할 필요 없다. 어차피 그럴 마음도 없어 보이는데. 하기 싫잖아.
유혹.”

“어찌하여 제가 하기 싫다 생각하시는지요? 전 몽마입니다. 강한 이의 정기를 취할수록 강해지죠. 저로서는 그


유혹을 마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미소 짓는 척하며, 그 시선이 계속 파비안을 향해 있는데. 자각이 없나 보군.”

“…제가요?”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던 미카엘이 당황한 듯 물었다.

딱 잡아뗐어야 하는 것을, 저도 모르게 인정하고 만 꼴이었다.

“억지로 날 유혹해서 파비안의 환심을 사고 싶은가 본데. 포기해. 그런다고 파비안은 마음을 주지 않아. 그저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지.”

“…….”
“르네를 찾아가 무슨 말을 했지?”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세요? 지금 이러실 시간에 황태자비를 찾아가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

아르카이츠 역시 그게 나을 거라 생각한 건지, 미련 없다는 듯 그대로 뒤돌아 정원을 빠져나가려 했다.

당황한 건 오히려 미카엘 쪽이었다.

대놓고 건방을 떠는데 거기에 화를 내기는커녕 진짜로 바로 물어보러 간다고?

‘생각보다 단순한 건가? 이렇게 쉽게 나한테 관심을 끈다고?’

그렇게는 안 될 일이지.

미카엘은 얼른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전하의 하나뿐인 오메가라서, 잃을까 봐 두려우십니까?”

그의 말에 아르카이츠가 발을 멈추고 뒤돌아 미카엘을 쳐다봤다.

#58.

딱히 화난 것처럼 보이지도, 불안한 것처럼 보이지도,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두렵지 않아. 내 오메가를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

“확신하시네요. 한데 상대 쪽도 같은 마음일까요.”

“말장난에 맞장구쳐 줄 생각 없다. 괜한 기운 빼지 말고 돌아가도록.”

“전하께서는 황태자비한테 각인하셨다죠? 한데 황태자비 목덜미에는 그 자국이 없다던데. 이유가 달리 있는 것


같습니다만.”

미카엘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카이츠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황태자비께서는 아직 확신이 없으신 것 맞죠? 하여 전하께서도 마크를 남기지 않은 거고요.”

“너 따위가 감히 뭘 안다고.”

“기만 아닙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각인되었다, 너뿐이다 그리 말하면서 억지로 곁에 두는 것이야말로.


그런 건 사랑이 아니지요. 그건 그저 소유욕일 뿐입니다. 황태자 전하. 비께서는 과연 전하를 정말 사랑하실까요?
그저 어쩌다가 함께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 얄팍한 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두렵진 않으십니까? 전
두렵습니다. 그런 얄팍한 관계. 저 역시 딱 그러한 상황이거든요.”

그리 말하는 미카엘은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절박함 따위 아르카이츠에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네 감정이 어떻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런 무심한 눈으로 아르카이츠는 미카엘을 쳐다봤다.

“사람 마음이라는 거,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아 열지 말라 하면 더 열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저는 열 수 있지요.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얕고 하찮은 건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제 능력이거든요.”

“해서 네가 황태자비의 본심을 대신 알아 주겠다, 뭐 이딴 소리인가? 참으로 하찮은 제안이군. 온갖 장황한 말로


한다는 말이 고작 그뿐인가?”

시간만 낭비했어.

아르카이츠가 다시 뒤돌아 가려는 때였다.

“전하의 예상대로, 저는 파비안 님께 당신과 황태자비 사이를 이간질하고, 당신을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데 전 그 명령, 이행할 생각 없습니다. 전 그분을 사랑하거든요. 하여 저는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들을 필요도 없다.”

그러자 미카엘이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전 파비안 전하의 계획이 실패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걸 결코 그분께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전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그분을 저지하셨으면 합니다. 하여 도와주십시오. 그분의 계획을 망칠 수 있도록.”

아르카이츠로서는 그 행동조차 신뢰가 없었다.

저게 과연 고도의 전략이 아니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런 식으로 제 패를 드러내는 척하여 방심을 유도하려는 건지 어찌 안단 말인가.

아르카이츠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미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뭐 저렇게 대쪽 같은 인간이 다 있지?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볼 법한 것 아닌가?

몽마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제 모습을 보고도 얼굴 붉히지 않은 인간은 파비안과 아르카이츠 둘뿐일 거다.

묘하게 닮은 이복형제가 둘 다 저를 아주 무시하고 있다.


한 놈은 저를 수단으로서만 바라보고, 한 놈은 저를 하잘것없는 미물 취급이나 한다.

미카엘은 접근 방식을 조금 달리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저 사내는 자신이 황태자비의 손을 놓을 일이 절대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도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몽마에게는 인간에게는 없는 여러 능력들이 있었다.

보다 수월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열망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 법.

하여 몽마들에게는 수많은 능력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열망 대상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눈을 보는 순간, 그들의 본심은 물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욕망들을 단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인간도, 그 속내를 알기 어려운 인간도, 그 속내를 속이는 인간도, 모두들 몽마
앞에서는 홀딱 벗겨질 뿐.

“전하께서는 그 일방적인 사랑이 과연 오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정말 황태자비전하께서는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세요? 황태자비가 불쌍합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목덜미를 물려 평생 귀속되는 게 너무 불쌍하군요.”

황태자비가 불쌍하다.

그 말에 아르카이츠의 발이 멈췄다.

“당신은 결국 그분을 불행하게 만들 겁니다. 왜냐면,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 저와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지 않으세요?”

황태자비는 결국 당신으로 인해 불행해질 거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져 있을 것을 미카엘은 확신했다.

저 인간이 가장 열망하는 것은 황태자비의 사랑이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것 말고, 황태자비에게 사랑받는 것 말이다.

“전하께서는 잃으실 게 없을 겁니다. 그분의 본심이 어떤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지금까지처럼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일 테니까요. 한데, 아까 전 저는 황태자비 전하를 만났습니다. 전 몽마입니다. 인간의 눈을 보면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죠. 제가 그분 눈을 통해 무엇을 봤는지, 그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안타깝게도 미카엘은 르네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 건지 알아 버렸다.

아르카이츠는 천천히 다시 뒤돌아 미카엘을 쳐다봤다.


아까 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그 경멸의 표정은 사라진 채였다.

이제야 조금 미카엘의 마음이 동할 만한 표정이 나왔다.

사실 불안한 거다. 르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내기는 간단합니다. 전하께서는, 황태자비 전하의 마음을 얻으시는 겁니다.”

“…….”

“뭐 사실 내기라 할 것도 없지요. 이기든 지든 전하께서 잃으실 건 하나 없으시잖습니까? 이 내기를 계기로


황태자비께서 전하 곁을 떠나신다면. 보내 드려야 하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상대를 위한 희생 아니겠어요.”

“…….”

“그저 같은 처지인 것 같아 안쓰러울 뿐인 겁니다. 누구보다 사랑받길 바라지만 사실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요.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는 걸. 단언컨대, 파비안 님은 황태자비 전하를 이용하여
당신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분은 아직 제 마음이 어떤지조차 모를걸요. 자, 이제 제 얘기 들어 보실 마음이
있으신가요?”

* * *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사람이 저리 종이 뒤집듯 바뀌어? 원래 그리 가벼운 놈이었냐, 아르카이츠 이


개새끼야!”

르네는 분개하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임신부라는 것을 자각한 듯 진정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쉬길 반복했다.

그러곤 자신의 납작한 배를 만지작댔다.

아니, 납작했었던 배였다.

조금 불룩해진 거 같은데.

“나보고 대체 어떡하라는 거야. …엉덩이 가벼운 자식….”

아직 아르카이츠의 엉덩이가 가벼운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저번보다 더 불룩해진 거 같은데 원래 이렇게 배가 빨리 나오나?

그딴 말이나 하는 놈이 가벼운 놈 아니면 대체 뭔가.

르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누이한테는 아주 당당하게 아르카이츠를 믿겠노라 말했지만.

“…꼴이 아주 우습게 됐잖아.”


뭐가 그렇게 변심이 빠르냔 말이야.

호기롭게 뺨을 올리고 방을 나오긴 했지만.

사실 르네는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게다가 붙잡지도 않네. 뭐지 진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난 뭘 해야 하는 걸까. 그동안 내가 너무


….”

르네는 진지하게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봤다.

생각해 보면 놀고먹기 바빴지.

그래서 질린 건가?

베짱이같이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릴 대로 질린 건가?

“…뭐 그런 걸로 질리고 그래?!”

그런 거라면 이쪽도 할 말 많다고.

르네는 어쩐지 찝찝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황궁을 거닐었다.

붉은 장미 정원에 도착한 르네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꼭 제 처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걱정되십니까.”

중저음의 목소리에 놀란 르네가 얼른 뒤돌아 쳐다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파비안이었다.

“파비안 님.”

“얼굴에 근심이 많아 보입니다.”

“…다 아시면서 일부러 물어보시는 건 심술이십니까, 아니면 눈치가 없으신 것입니까?”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놀란 듯한 파비안의 모습에 르네는 제가 더 놀라 슬쩍 고개를 까닥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파비안 님께 괜한 화풀이를 했습니다.”

“이해합니다. 혼란스러울 테지요. 아르카이츠와 대화는 나눴습니까?”

“그 대화의 결과가 지금 이 상태네요.”

르네는 잠옷 차림에 로브만 걸치고 나온 초라한 제 모습을 자조적으로 말했다.


파비안은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르네에게 권유했다.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파비안과 함께 있는 게 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혼자 청승 떨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황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파비안과 단둘이 함께하게 됐다.

#59.

아르카이츠는 파비안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다 보니 사실 르네는 파비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사이가 좋은 듯 보였으나 최근 들어 이상한 기류가 있다는 정도.

얼마 전 아르카이츠가 파비안을 믿지 말라 했던 점 등으로 보아 파비안 역시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르카이츠도 못 믿는 마당에 내가 이 황궁에서 대체 누굴 믿고 의지하겠어.’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황태자비께서도 이미 만났다 들었습니다. 미카엘이라는 자 말입니다.”

“네. 만났지요. 제 앞에서 내 남편을 남편으로 맞이하러 왔다 태연하게 말하던데요.”

“아르카이츠는 어떤 반응입니까? 사실 고서를 모두에게 공개한 이후부터 묘하게 절 피하는 것이, 아무래도
신뢰를 잃은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참 이상해요. 분명 누구보다 그 표정을 구분해 낼 수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그를 못 믿겠습니까.”

“믿어요.”

“정말요?”

“믿어는 봐야죠. 뭐, 물론 지금 한 대 갈기고 오긴 했는데…. 일단 그동안 봐 온 아르카이츠는 한순간에 변할


이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르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아직, 완전히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니니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 말해 주지 않았으니 나도 일단은 기다려 보자.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르네는 아직 아르카이츠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나 봅니다.”

“아직은… 응?”

“왜요.”

“방, 방금 이름을….”

“르네. 르네 피어스.”

“…….”

“언제까지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르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 텐데.


순수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하하. 뭐, 르네라면 둘 다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피어스 가문의 화초
아닙니까.”

르네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파비안을 올려다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눈빛이 매우 차갑다.

아르카이츠에게서 보이는 그 차가움과는 결이 매우 달랐다.

아무리 르네가 살면서 고민 한 번, 풍파 한 번 겪어 본 적 없다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매우 위험한


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명백한 적의.

르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파비안은 그런 르네를 아주 하찮은 것 쳐다보듯이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르네. 도망치는 게 좋을 겁니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요. 도망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그리고 숨으세요.


숨어서, 쥐 죽은 듯 사십시오.”

“…….”

“그게 당신과 배 속의 아이, 그리고 당신 가문이 살 유일한 방법입니다.”

“…….”

“아르카이츠 옆에서 사라지십시오. 꽁꽁 숨으면 숨을수록 좋을 겁니다.”

“…당신….”

“어차피 그쪽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잖아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할 의지도 없고, 그저 그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게 살아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일 텐데요.”
픽 웃는 파비안의 모습에 르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 자세한 내막을 모르더라도, 미카엘의 등장과 그로 인해 불안정해진 자신의


입지, 그리고 아르카이츠와의 불화까지.

모두 파비안이 원하는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대놓고 적대를 드러내면 제가 겁먹고 바로 도망칠 거라 생각하시나 봐요. 아르카이츠도 버리고.”

“무슨 말을 그리 하십니까, 르네. 당신이 아르카이츠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아르카이츠가 당신을 버리는
거지.”

“…….”

“제가 왜 그대를 적대하겠습니까. 당신을 쥐고 흔들기만 하면 그거야말로 아르카이츠의 약점이 될 텐데.”

“…….”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과연 아르카이츠가 각인한 오메가라는 당신은, 제 알파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한데 보니, 딱히 그리 흥미로운 인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 도망칠 기회를 주는 거예요.”

“…….”

“좀 불쌍한 것도 같아서. 여기 더 있어 봤자, 최악의 끝만 맞이할 테니까.”

잔뜩 조롱하듯 던지는 파비안의 말에 부들부들 떨던 르네가 결국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파비안은 아르카이츠처럼 가만히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참, 얼마나 나약하면 고작 한다는 짓이 뺨 올려붙이기뿐인지.”

“…이거 놔요!”

“르네. 조금 깊이 생각하는 법을 길러 보라니까요.”

“…….”

“아델라이드가 이상해진 것도, 아르카이츠가 이상해진 것도, 당신의 인생이 꼬여 가는 것에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뿐이라니까.”

“…….”

“내가 너무 얕보였나.”

그렇게 말한 파비안이 그대로 잡고 있던 르네 손을 밀치듯 놨다.

가느다란 손목, 힘없는 팔뚝, 마찬가지로 힘없는 몸뚱이.

르네는 그의 힘에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져 엉덩방아 찧었다.

놀란 르네는 얼른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난 당신과 아르카이츠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야, 르네.”

천천히 몸을 수그려 주저앉은 르네와 눈을 맞춘 파비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난 그저, 아르카이츠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빼앗고 싶을 뿐이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아르카이츠는 당신의 것을 빼앗은 적도 없는데!”

“빼앗은 적이 없다니, 그거야말로 참… 유감스럽군.”

“…이러는 거 다 자격지심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아르카이츠가 당신 계략에 쉽게 당할 사람으로 보여?”

“뭔가 착각하나 보군, 르네. 난 아르카이츠가 목표가 아니야. 뭐, 궁극적으로는 아르카이츠의 몰락이 목표지만.
그래서 내가 과녁으로 삼은 건 바로 당신인 거지.”

파비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르네는 그런 파비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저런 사이코 같은 인간이 다 있지?’

파비안의 시선이 천천히 르네의 배로 향했다.

더 이상의 말을 하진 않았지만, 르네는 그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

어쩜 저리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이런 협박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도망가요. 르네. 아르카이츠는 당신을 지켜 내지 못할 겁니다. 뭐, 배 속의 아이에게 크게 정이


없다면야. 어떻게든 빌붙어 보든지. 딱히 뭔갈 하지도 못할 거잖아.”

생각해 보니 도망치라 하면, 도망칠 깜냥이라도 있을까 모르겠네.

그렇게 말한 파비안은 비소를 지으며 르네를 지나쳐 갔다.

파비안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르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델라이드였다면 감히 그딴 말로 이간질을 하려 하느냐며 길길이 날뛰거나, 달려가 머리채를 잡든가 할


테지만.

르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마치 거대한 나무뿌리가 땅속에서 솟아나 르네의 발목을 턱 잡고 있는 양,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다리를 들어 움직였다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넘어지면 옷도 더러워지고, 배 속의 아이한테도 위험할지 몰라.

무엇보다 아프잖아.

‘…아픈 건 싫어. 난, 조금의 고통도 견디지 못한단 말이야. 나약하단 말이야.’

난 나약해. 파비안의 말대로 도망칠 깜냥도 없지.

하지만 어떡해. 평생을 평화로이 집 안에서만 살아온 내가 대체 이런 상황에 뭘 어쩔 수 있냔 말이야.

르네는 억울했다. 자신이 이런 비극에 놓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타고나길 다 가지고 태어나, 뭔가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 본 적 없었다.

누군가와 싸우는 것도 싫고, 마찰이 있는 것도 싫었다.

아픈 건 더더욱 싫었다. 종잇장에 베여도 하루 종일 엄살을 떨던 르네다.

하지만 르네의 귓가엔 아까 전 파비안이 했던 말이 메아리쳤다.

배 속의 아이에게 크게 정이 없다면, 어떻게든 빌붙어 보든지.

그건 이 아이를 공격하겠단 소리 아닌가.

르네는 손을 들어 제 배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내가 여기에 있으면.

이 아이도 위험해지는 건가?

그만큼 난 보호받지 못하는 건가?

난 아르카이츠를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 정도의 감정이 있었던가?

과연, 내가 그의 단 하나뿐인 오메가가 맞긴 한가?

내가 온갖 더러운 꼴을 보고도 그 옆에 붙어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나?

르네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사막에서 함께 바라보던 달은 한없이 크고 둥글어 아름답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어두운 밤 혼자 빛나는 것이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날 밤 황태자비는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비가 밤새 정원 중정에 앉아 밤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가녀린 뒷모습이 어찌나 가여운지.

경비병들과 시종들은 못 본 척 지나다니면서도 안쓰러운 눈빛으로 황태자비를 바라봤다.

그다음 날 르네가 왜 축 처져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갖은 이유를 추측하는 수많은 소문들이 얼마나 빠르게
퍼져나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문은 하나의 추론으로 향했다.

르네는 시녀들이 저들끼리 숙덕대다 자신이 나타나면 얼른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저… 황태자비 전하. 혹 현재 황궁의 나인들 입에서 어떠한 소문이 나도는지 알고 계십니까.”

보다 못한 애나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피곤에 찌든 르네에게 살며시 다가와 물었다.

#60.

피곤한 안색에 한껏 예민해진 눈으로 애나를 바라보던 르네가 대답했다.

“그 미카엘이라는 놈한테 내가 쉽게 당할 줄 아느냐. 내가 누군데. 난 피어스 가문의 사람이다. 내 뒤에는 공작


가문이 버티고 있는데. 아르카이츠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짧은 시간에 그에게 홀리지 않은 이상, 감히 공작
가문을 한순간에 적으로 돌리진 않겠지. 무엇보다 나는. 이미 후사까지 잉태하고 있는데. 그리 쉽게 변심할
작자가 아니야.”

믿자. 믿어 보자.

아르카이츠는 바보가 아니니까 그리 쉽게 변심하지 않아.

무엇보다 파비안의 그 더러운 속내를 내가 알고 있으니, 나 역시 휘둘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르네가 애써 태연하게 대답하자 애나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그 소문이 어떠한 내용인지, 아십니까?”

“보나마나 미카엘의 등장을 두고 수군대는 것 아니겠어?”

“맞긴 합니다만, 그간 추가된 내용이 있습니다, 전하.”

“…그사이에 추가될 내용이 뭐가 있는데? 정원에서 아르카이츠가 그를 받아 준 거 말고도 또 뭐가 있단 말이야?”


르네의 물음에 애나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는 시녀들은 이를 어쩜 좋아, 정말 아직 모르시나 봐 하며 발을 동동 굴러대며 저들끼리 숙덕였다.

애나는 뒤돌아 그녀들에게 조용히 하고 나가 있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얼른 방을 나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애나는 르네의 손을 다급히 잡으며 말했다.

“르네 님. 어젯밤 르네 님이 침실을 나가신 이후,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도 방을 비우셨습니다.”

“…아르카이츠도 방을 비웠다고?”

르네는 오늘 아침 동이 터 오르고도 한참을 방에 돌아가지 못했다. 아르카이츠의 얼굴을 마주 보기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침실로 돌아와서 그가 없는 것이 단순히 일찍 정무를 보러 나갔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 역시 어제 방을 비웠다니?

“대체 어딜 갔는데?”

“그게 저희도 확실한 건 모르지만…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물론 저희도 정말 확실한 것이 아니라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련님….”

“왜, 무슨 소문인데 그래, 대체?”

“…그러니까, 오늘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걸어오신 복도 길 말입니다. 침실의 방향이 아니었어요.”

“계속 말해 봐.”

“…미카엘이 머물고 있는 임시 처소 쪽의 방향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

“르네 님. 더 이상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르네 님과 무관하지 않아요. 정말 힘드시고 혼란스러우시겠지만,


르네 님께서는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셔야만 해요. 그래야지 차후의 일에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네 말대로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이상 나와 무관하지 않아. 내 목표는 생명 부지야. 나뿐 아니라
태중의 아이까지도. 그러니까 애나. 나는 더더욱 이 모든 일들의 진실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 그런
소문이 돈다면, 난 그 소문의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 한다는 거야.”

“르네 님.”

“그러니까, 가자.”

“예?”
“가자고.”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둘이 정말 같은 방에 있다 나왔는지 다들 그게 알고 싶은 거 아니야? 물론 나 역시 그렇고.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러 가자.”

“아, 아르카이츠 전하한테요?”

“아르카이츠와 미카엘 둘 다. 만약 둘이 같이 있었다면, 이건 불륜이나 다름없는 건데. 어느 한쪽만 조질 순


없잖아?”

“르네 님….”

“그러니까 둘 다 물어봐야지.”

“…….”

“가자.”

르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씩 당겨 미소 지었지만, 그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렸다.

동이 터 오를 때까지 가만히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던 파비안의 말에 반은 동의하면서도 또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믿고 곁에 있고 싶으면서도 또 도망치고 싶었다.

살면서 이렇게 고민했던 적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르네는 직접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 확신이 부디, 절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르네는 애나와 다른 시녀들을 대동해 아주 화려한 단장을 시작했다.

화려하되 절대 천박해서는 안 되며, 황태자비로서의 기품을 유지하되 그렇다고 너무 정숙해 보여서도 안 된다.

상대는 갑자기 신전에서 나타나 남의 남편을 제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 정체불명의 상대.

호락호락해 보여서는 안 돼.

미카엘이든, 아르카이츠든!

난 더 이상 겁쟁이 르네가 아니라고!

그런 르네의 다짐은 약 30 분 만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애초에 부실공사로 인한 무너짐이었다.

“어허어엉! 나 그냥 도망갈래. 나 집에 갈래애! 다 허세야, 나 사실 센 척한 거야, 애나아. 나 진짜 이런 거


너무 싫어. 싫단 말이야! 흐어어엉!”

“르네 님!”

“다 때려쳐. 다 때려칠 거야.”

르네는 양팔을 벌리며, 마치 하늘에 있는 신에게 들으라는 듯 외쳤다.

“나 그냥 돌아갈래에에!”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어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뀐 건가 하면….

그건 바로 르네의 아주 말끔하고 깔끔하며 상처 하나 없는 뒷덜미 때문이었다.

매끈한 제 뒷덜미와는 달리, 미카엘의 목덜미엔 아주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으니까.

* * *

한 시간 전.

호기롭게 방을 나간 르네는 곧장 아르카이츠의 집무실로 향하려다 급히 발길을 돌렸다.

미카엘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은 한숨도 못 자 피곤한 르네와는 달리 매우 생기 넘치는 외모로 르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티타임’을
권했다.

예전에 가끔 누이가 ‘티타임이야말로 귀족들에게 있어 가장 조용한 전쟁터다.’라 말한 적이 있었다.

르네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여 지금 르네와 미카엘은 예쁘게 세공된 도자기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더없이 조용한 눈싸움을 하는
중이다.

르네는 밤을 새워 당장이라도 감길 듯한 눈에 애써 힘을 줬다.

‘젠장, 조금이라도 자고 나올걸. 이상하네. 벌써부터 졸음이 쏟아지고 있어….’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오히려 활동적인 일을 한다면, 이를테면 아르카이츠에게 소리를 지른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침묵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한다면 열이 뻗쳐서라도 잠이 덜 올 텐데.

이 나약한 몸뚱이.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어 태아에게 모든 영양분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 지금 상태로는 조용하고 따듯한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연적보다는 당장의 잠이 먼저인 것 같다.

‘어쩌지. 이상하다. 차에 약이라도 탄 거 아니겠지? 졸려….’

잠이라도 깰 겸, 누이의 성질머리를 본받아 당장 미카엘의 뺨이라도 갈길까.

그러면 손바닥이 아파서라도 좀 잠이 깨지 않을까.

“잠을 못 주무신 것 같네요, 황태자비 전하.”

“…이런 상황에도 숙면을 취할 만큼 무딘 성격은 아니니까.”

“태중에 아기씨도 있으신데, 건강에 해롭습니다.”

“진즉 내 건강을 생각해 줬다면 내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네요.”

“그래. 어쭙잖게 걱정하는 척할 필요 없어.”

르네는 최대한 가시 돋친 말투로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손톱만큼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원래 고슴도치는 본인이 되게 뾰족하고 날카롭고 위험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참 귀엽게 보이듯이.

르네 역시 그래 봤자 르네였다.

그래 봤자 남 미워해 본 적 없고 우유부단한, 피어스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란 소리다.

저주하고, 물 뿌리고, 따귀 갈기고, 머리끄덩이 잡아 흔드는 것보다 지금 당장 졸려 죽겠으니 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 하는 얼굴인 거다.

‘나한테 별다른 위기의식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지금 당장 자고 싶다, 이런 얼굴이잖아. 아직 제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냥 호의적인 것도 아니긴 한데. …누굴 미워해 본 적이 없나? 뭐 저렇게
무방비하지?’

한편 미카엘은 미카엘 나름대로 르네를 관찰하고 있었다.

파비안의 말에 따르면 누이인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는 별 볼 일 없는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

본인이 오메가인지도 몰랐던 열성 오메가.

온실 속 화초로 자라 겁쟁이에 게으름뱅이 도련님.

거기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제 감정 또한 남이 말해 주는 대로 생각해 버리는 그야말로 우유부단한


인간.

“르네 피어스를 아르카이츠 옆에서 떼어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그저 꿈으로 들어가 그 얄팍한


정신머리를 괴롭혀 주면 될 일이야. 뭘 지킬 의지도 별로 없고, 그냥 목숨 부지가 최대 고민거리일 뿐.”
파비안은 르네를 대단히 한심한 종자로 말했지만.

미카엘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61.

‘정말 처음 보는 인간 종류야.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속을 알기가 정말 어려워. 게다가 무엇보다… 괴롭히고


싶은 생각 자체가 안 들잖아. 뭐지? 왜 이런 거지? 너무 하찮아서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건가? 아니야. 그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전혀 르네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거다.

맨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래, 처음 만난 사이니 아직 어색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생각했다만.

또 생각해 보니 괴롭힐 상대에게 낯을 가리는 것도 웃기지 않나.

더군다나 미카엘 본인은 몽마다.

하찮은 인간들, 그들이 원하는 욕망을 건드려 괴롭히거나 유혹하여 정기를 취하는 존재.

인간 따위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어 주인의 말을 거스를 만큼 감성적이지 않다는 거다.

‘근데 이상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미카엘은 처음 르네를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쉽게 제칠 수 있는 인간.

파비안 님을 위해서라면 살인을 불사해서라도 제거할 아르카이츠의 가장 소중한 존재.

뭐 대단한 매력이 흘러넘칠 만큼 사교계의 명사도 아니라 들었고.

소심하고 겁 많은 초식동물 같다고 들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예쁘다. 엄청 아름답네.’

절 바라보는 르네의 눈빛에 아직 크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아주 못된 이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아르카이츠와 내기를 한다고는 했지만.


‘…이런 미인을 괴롭히는 거 자체가 좀…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네. 아니 근데 몽마도 아니면서 뭐 저렇게
아름다워? 인간 맞나? 정말로? 마계의 수많은 몽마들 중에도 저런 미모는 없었는데. 원래 오메가는 저렇게
아름다운 건가? 나보다 더 예쁜 거 같은데…. 잠깐. 파비안 님, 설마 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는 게 황태자비를
차지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미카엘은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파비안이 르네에 대해 하찮게 설명한 것은 다 계략인 거고, 사실은 저를 이용해 아르카이츠와 르네 사이를
이간질하고, 상심에 빠진 르네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는 속셈 아닐까?

저렇게 아름다운데, 감히 사랑스러워하지 않고 배긴단 말인가.

‘아… 나 이래도 되는 건가? 괜히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가 오히려 내가 낭패를 보는 거 아니야? 뭐 조는 것도


저렇게 예쁘게 졸아?’

스르륵 눈이 감기는 것을 애써 버티는 르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저리 속눈썹이 길어.

뭐 저렇게 피부가 하얘.

뭐 저리 이목구비가….

몽마는 단순하다.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위해 다른 욕망들을 이뤄 주는 만큼 매우 단순했다.

파비안이 예상치 못한 것은, 생각보다도 미카엘이 단순한 몽마라는 거였다.

단순한 몽마는 변덕스럽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러므로 배신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이 했던 말을 멋대로 철회하는 것 역시 몽마에게 있어 죄책감 따윈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이는 거다.

하여 미카엘은 반쯤 졸고 있는 르네를 바라보며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계심이 없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찌 연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앞에서 이리 태연하게 졸 수가 있는 거야?


정말 아르카이츠가 생각하는 것처럼, 르네 이자는 아르카이츠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르네의 눈을 바라본 순간 르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했다.

모든 인간들의 눈을 들여다보이면 발가벗은 것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한데 르네의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고 오히려 제가 빠져들겠다.

몽마인 자신이 한낱 인간에게 빠져든다니.

이상하지 않나.
‘몽마인 나조차 그 밑바닥을 알아내지 못하는 데에는 딱 하나야. 제 감정도 모를 만큼 순수한 거지. 젤 위험한
부류야. 가까이해서는 안 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니까. 역시. 내쫓아야겠어. 적어도 뭘 원하는지 내가
알아낼 수 있을 때까지는.’

몽마에게 있어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

그러니까 파비안의 절대적인 명령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미카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말장난과도 같은
속임수를 써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르카이츠와 내기를 건 거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미카엘은 르네를 이곳에서 쫓아내야만 했다.

‘르네 당신은 본인의 감정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여럿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어제 파비안
님이랑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다 들었는데. 돌아오신 파비안 님이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짜증
나. 기분 나빠. 위험해.’

그리 생각한 미카엘은 자신의 능력을 르네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몽마는 꿈을 통해 인간을 조종한다.

순수한 이라 해도 조종하는 법은 간단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톡 건드려 미모사처럼 움츠리도록 하는 것뿐.

그래서 너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니.

미카엘은 르네의 녹안을 빤히 바라보며 뭐라도 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 결과 그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죽음’이었다.

물론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지만.

보통 죽음 이전에 다른 뭔가가 더 있지 않나.

오히려 인간들 중 죽음같이 원초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드물었다.

명예를 잃든지, 부를 잃든지.

제 신념을 스스로 버린다든지.

제 자식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든가.

혹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하다못해 배신당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진짜 그냥 죽는 게 두렵다고? 그거 말고는 없단 말이야? 진짜로?’

뭐 이리 쉬워?
너무 쉬워서 오히려 생각을 읽히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죽는 게 가장 두려운 거면, 죽지 않기 위해 뭐든 할 인간이라는 거 아닌가.

제 목숨만 부지할 수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는 건가.

원래 저런 인간들이 제일 골치 아프고 어려운 상대였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니 빨리 쫓아내야겠어.’

진절머리 난 듯 미카엘이 아주 작게 도리질했다.

그리고 다시 르네의 녹안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 *

“멀리 떠나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대체 무슨 권리로 나한테 그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게 황태자비 전하와 태중의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에요. 어제, 파비안 님을 만나셨죠? 얘기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휘둘려 아르카이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도 잘 알겠네.”

“글쎄요. 인간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게 또 어딨겠습니까.”

“…….”

“파비안 님께서 다른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내 진짜 정체에 대해서.”

“네가 예언의 오메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아, 그거 말고.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뭐라는 거야.”

어이없어하는 르네를 바라보며 미카엘이 생긋 미소 지었다.

붉은 머리칼과 같은 붉은 입술을 혀로 한번 훑으며 살짝 입술을 깨문다.

이게 대체 어디서 교태야?

르네는 불쾌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에 당황했다.

이놈 봐라, 교태 한두 번 부린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르카이츠 앞에서도 저런단 말이야?


나랑 완전 정반대잖아. …원래 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끌린다던데….

아르카이츠도 혹시….

나는 저런 거 해 본 적도 없는 데다, 하지도 못할 거 같은데.

저런 교태에 안 넘어갈 이가 있을까?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보면 위험을 감지한다 했다.

그 위험이 극도의 혐오가 될지, 혹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르네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 재미없었던 인간은 아니었나, 저도 모르게 잠깐 되돌아봤다.

저를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빛은 그 누구라도 홀릴 기세였다.

“방금 ‘그 누구라도 홀릴 기세인 눈빛’이라고 생각했죠?”

“…….”

“맞아요. 난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홀릴 수 있어. 내 눈빛에 안 넘어오는 인간이 없지. 난 인간이 아니야.
몽마거든요. 꿈에 들어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기를 취하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카엘을 바라보는 르네의 얼굴이 뚱했다.

“난 당신을 홀릴 마음이 없어요, 황태자비 전하. 그러니 당신이 나한테 넘어오지 않은 거고. 난 관심 밖의
인간은 유혹하지 않거든.”

코웃음 치며 미카엘은 계속해서 도발을 이어 갔다.

“다만, 아르카이츠 황태자는 다르지. 그는 꽤… 좋은 정기를 가지고 있거든. 알파 수컷의 정기는 몽마들이 가장
원하는 최상의 정기. 내가 파비안 황태자와 손을 잡은 이유는 그뿐이야. 아르카이츠의 정기를 먹는다고 내가 손해
볼 건 하나 없잖아? 게다가 잘만 하면 황태자비도 된다 하고. 그럼 아주 손쉽게 인간들을 다 취할 수도 있을 거
아냐.”

“…몽마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몽마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나 보군요? 어지간히 머릿속이 백지 상태네. 백치미라는 게 이런 건가 봐요.
그런 순진한 눈망울로 말하는 걸 보니, 몽마인 나도 마음이 조금 동하네. 뭐. 그렇다고 그쪽이 나한테 정기를 줄
순 없을 거 같지만. 보아하니 전하도 나처럼 받아 내는 쪽인 것 같은데.”

미카엘의 무례한 발언에 르네의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한데 전하를 보니, 주는 쪽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도 들어요.”

“감히 그따위 말을!”


#62.

르네가 벌떡 일어나 그대로 미카엘의 뺨을 내리쳤다.

손바닥이 얼얼하게 아플 만큼 강한 힘이었다.

르네는 살면서 세 번째로 남의 뺨을 쳐 보는 거였다.

처음과 두 번째는 아르카이츠, 세 번째가 미카엘.

뺨을 내리치는 건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정작 맞은 미카엘은 의연했고, 때린 르네의 손바닥이 아파 왔다.

르네는 얼른 주먹을 쥐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손바닥으로, 애써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대로 나한테 찻물을 부을 셈인가? 그래도 꽤 맹탕은 아닌가 본데.’

미카엘은 저 뜨거운 찻물이 곧장 제 얼굴에 부어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르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후 작게 숨을 내쉬며 차를 홀짝였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인간.

저걸 들이켜는 것보다 뜨거운 물을 부어 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속 시원할 텐데.

미카엘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르네를 바라봤다.

‘바보인가? 뭐 저렇게 아방하지?’

미카엘은 대체 얼마큼 몰아붙여야 르네가 이성을 완전히 잃고 겁을 내 도망갈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카엘은 르네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 꿈을 조작하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일지 헷갈리게 만들어
결국 도망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설마, 아직까지 아르카이츠를 믿는다느니 그런 건 아니겠지?’

미카엘은 입술을 잘근 깨물다, 천천히 기다란 머리칼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쇄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기장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미카엘의 모습에 르네는 또 뭔 짓을 하려고,


하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뜨거운 물을 저한테 부으실 줄 알았는데.”

“그쪽이 아무리 꼴 보기 싫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얼굴에 이 뜨거운 물을 부어 화상 입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네가 진짜 몽마, 인간을 홀리는 몽마라는 존재라면. 그 예쁜 얼굴 망가지는 순간 상품 가치 떨어지는 거
아니겠어?”

“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위기에 몰릴수록 차분하고, 고상하게.

그 어떤 때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고고한 것이 진짜 귀족이라 배워 왔다.

당장이야 뜨거운 물이고 뭐고 붓고, 그대로 달려들어 머리칼을 반쯤 쥐어뜯으면 마음이야 조금 후련하겠지만.

여긴 보는 눈이 많았다.

황태자비는 이성을 잃을수록 수세에 몰린다.

권력을 가진 자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

제국의 오랜 역사 동안 황태자비가 감정을 드러내어 해피엔딩을 맞이한 적은 없었다.

파비안 황태자의 친모이자 첫 번째 황후만을 봐도 그렇지 않나.

르네는 어째 자신이 꼭 첫 번째 황후와 비슷한 처지라 생각했다.

이게 파비안의 의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하지 않을 거다.

“걱정이 아니라, 내 품위를 지키려는 거지. 난 황태자비니까. 그에 걸맞은 품격을 지녀야 하지 않겠니.”

“그 품격,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와도 지킬 수 있는 거라면 인정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허세 아니겠어요?


혹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거나.”

“대체 뭘 믿고 그리 방자하게 굴 수 있는 걸까.”

“황태자비 전하를 두고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다들 온실 속 화초래요. 아마 온실 밖으로 나오면 금세


말라 죽을 거라고. 그만큼 당신은 나약하다는 겁니다. 나약하고, 눈치 없고, 멍청한, 그저 예쁘기만 한 화초.
향기가 없는 것은 금세 질리기 마련이죠. 온실에 새로운 꽃이 들어오면 누구라도 그 새로운 것에 시선이 가기
마련이겠죠.”

“…….”

“남의 뺨 갈기는 것조차 엉성하신 도련님께서 과연 얼마나 버티실지. 한데 말씀드렸잖아요, 아름다우신 분. 난


인간이 아닌 몽마라고. 인간은 몽마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어요. 내가 향기를 풍기면, 인간은 그 향에 취해
달려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뒤돌아 방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 르네는 코웃음 치려다 이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미카엘의 목 뒤에 아주 선명한 잇자국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 * *
“백 퍼센트 거짓말이야.”

르네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과는 반대로 오른 다리를 달달 떨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애나가 르네의 손을 그의 입술에서 빼냈다.

“백 퍼센트 거짓말이라고. 그 잇자국이 아르카이츠의 것이 맞는지 어찌 알아? 몽마? 그딴 존재라면 정기를


위해서 누구와도 뒹굴 존재다. 아르카이츠가 아닌 파비안이나, 하다못해 특이 취향을 가진 인간이 물었을지 어찌
알아?!”

“네. 그럼요. 르네 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물론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밤마다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그곳이
어딘지는 소문만 무성하지만…. 네,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그럴 리가 없으시죠. 물론 미카엘이라는 자가 인간이
아닌 인간 홀리는 요물 중의 요물 몽마라는 존재이긴 하고, 또 목표를 아르카이츠 전하로 삼긴 했지만요.”

애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날 미카엘과의 독대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아르카이츠는 르네와의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가서 자는 건지, 함께 방을 쓰지 않으니 정무로 바쁜 아르카이츠의 얼굴 보기가 영 힘들었다.

한 달 동안 급격히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한 르네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그를 쫓아다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망할 꿈 때문에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고, 눈을 떠도 깨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이건 분명 그 몽마라는


것이 내 꿈을 조종하는 게 분명해. 날 괴롭히려는 거라고! …하지만 이런 말 해 봤자 누구도 믿지 않겠지. 다들
날 미친 취급할 거야.”

르네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눈 밑은 검게 그을린 것처럼 어두웠고, 얼굴은 광대 밑이 움푹 파여 수척해졌고, 뽀얗던 피부는 창백해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입맛이 없어 절식하려는 것을 매 끼니 때마다 애나와 다른 시녀들이 태중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한다며 르네를 붙들고 떠먹이기까지 했다.

하여 마치 모든 양분은 아이가 다 가져가는 양, 르네는 말라 갔지만 배는 점점 임신부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르네는 수척해진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몽롱한 정신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무기력했다.

그렇게 한참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던 르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애나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 시간이 된 거 같아, 애나.”

“네?”

“가자.”

“네?”

“도망가자고.”

“…….”

“탈주하는 거야.”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뭘 갑작스럽게야? 탈주하겠다는 말은 결혼 전부터 항상 하던 말인데. 내 문제점은 이거야. 말만 하고,


행동하질 못하는 거. 그래. 그래서 나도 한번 보여 줘야겠어.”

“…도련님.”

르네는 그동안 꾹 참고 있던 말을 뱉어 냈다.

“나 애 데리고 튈래.”

씩 미소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참 슬퍼 보였다.

* * *

한 달가량이 지나도록, 아르카이츠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매우 바빠 보였고, 어쩌다 마주치게 되어도 르네가 먼저 그의 시선을 피하거나 자리를 떠나 버렸다.

고작 미카엘의 말에 쉽게 신뢰를 잃고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아르카이츠 얼굴을 보면, 결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에 칭얼댈 것만 같아서.

아무튼 황태자와 황태자비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르네가 아닌 미카엘에게 집중되어 그런 걸까.

르네는 이곳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비교적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하여 르네는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도 별다른 제지나 걸리적거리는 시종들을 달고 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곧 여길 떠날 거라는 마음이 확실해지자, 르네는 마지막으로 여길 둘러보겠다는 심정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황궁


탐방을 시작했다.

그건 굉장히 즉흥적인 결론이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와 하루 종일 흐리고 어두웠다.

날 좋은 때에도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아 비어 있는 곳이나 다름없는 남쪽의 별궁으로 발길이 향한 것은 어쩌면


흐린 날에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황궁에서 별궁으로 사용하는 곳은 북쪽과 남쪽 두 군데가 있었다.

북쪽의 별궁은 굉장히 어두운 곳이지만 남쪽의 궁은 묘하게도 따스한 느낌이 있었다.

하여 르네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따스한 곳을 찾는 것처럼,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남쪽 별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도착해 있었다.

남쪽은 대부분 요양을 위한 황족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아마 미카엘이 등장하지 않고 별 탈 없이 르네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곳에서 요양을 할 게 분명했다.

요양을 위한 목적이니만큼 남쪽 별궁에는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이국의 온갖 약재료들을 모아 놓은 약방이


있었다.

르네는 그 길을 지나 조금 더 안쪽 깊이 들어가 봤다.

워낙에 미로 같은 황궁인지라 사실 반쯤 길을 잃어 포기한 심정으로 돌아다닌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음, 이제 진짜 위험한데.”

르네는 정말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63.

여기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쪽 별궁의 어디쯤인지조차 모를 만큼 길을 잃었다.

본인이 길치라는 걸 잠시 잊은 탓이었다.

르네는 잠시 멍하니 복도에 서 있었다.

무척 피곤하기도 하고, 막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아 일단 근처 아무 방에 들어가 잠이라도 청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뭐 어때. 날 찾든 말든 고생 좀 해 보라지.

약간의 심술궂은 마음과 함께 르네는 어느 방에 들어갈까, 수많은 별궁의 방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궁 대부분의 방들은 비어 있어도 간단한 집기 정도는 있었기에 여기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여긴 누가 지내기라도 하는 곳인가? 침대까지 있고, 소파도 있네.”

르네가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집기가 모두 갖춰진 것은 물론 마치 누군가 지내고 있기라도 하는 듯 생활감이


있었다.

여긴 그냥 의원이나 시종의 처소인가?

아무래도 타인의 방에 침입한 것 같아 얼른 나가려 몸을 돌릴 때였다.

저 안쪽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그릇 같은 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항상 이런 상황에 가장 고개를 쳐드는 건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

르네는 천천히 인기척이 들리는 푸른 벨벳 커튼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가까스로 ‘까불지 말자’ 생각하고선 다시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황태자비로군요.”

“…….”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르네가 천천히 뒤돌았다.

르네는 방에 함부로 들어온 것을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그에게 말을 건넨 이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검은 망토로 온몸을 휘감고, 얼굴은 흰 도자기 가면을 쓰고 있었다.

르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댔다.

…왜 얼굴을 가린 거지? 황궁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아, 죄송해요. 잘못 들어왔네요.”

뭔가 수상함을 직감한 르네는 빠르게 사과하고 얼른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고 했다.

“이름이, 르네 피어스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르네의 진짜 정체까지 쉽게 말했다.

저도 모르게 한껏 예민해진 르네가 뒤돌아 쏘아붙이듯 물었다.


“듣다니, 누구한테요?”

설마 파비안이나 미카엘과 관련된 사람인가?

내가 지금 내 발로 함정에 들어온 건가? 나 위험한 건가?

이 바보 같은 르네 피어스! 그러니까 왜 여길 들어와서는…!

머릿속으로 한창 자책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당신 남편, 아르카이츠요. 앉아요. 보아하니 길을 잃다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

그녀는 굉장히 다정한 목소리로 르네에게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차를 좀 줄까요?”

어쩐지 다른 누군가를 만나 신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르네에게 “다과를 줄까요, 차를 줄까요, 과일도 있어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 피곤하지 않나요?” 별별
것들을 권하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뇨. 사양할게요. 그저 길을 잘못 들어온 것뿐이니까 다시 나가면 돼요.”

“나가는 길은 아시나요?”

“…뭐, 왔던 길을 떠올려 보거나, 아니면 누가 날 찾으러 오겠죠.”

“밤이 깊었는데, 걱정할 거예요.”

“누가요?”

“아르카이츠 전하요.”

과연 그러긴 할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르네가 코웃음 치자 가면을 쓴 여인이 잠시 손을 꼼지락대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본인의 방인데도 마치 본인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르네를 바라봤다.

“근데 앞이 안 보이는 듯한데 어찌 날 알아본 거지?”

가면 너머로 보이는 흰 눈동자는 분명 장님의 것이었다.

역시 더더욱 기묘한 사람이다. 가까이해서 좋을 거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르네는 일단 여길 벗어나자 생각하여 무작정 문을 열었다.

그러자 뒤에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그대한테는 내가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고개를 떨구었다.

“내 이기적인 거짓말이, 그대와 아르카이츠를 괴롭혔으니까.”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굉장히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으니까.

르네는 그녀가 어떤 거짓말을 고했는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신과 아르카이츠를 괴롭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떤 이기적인 거짓말인지, 그래서 내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가면 뒤에서 하는 사과는 딱히


와 닿지 않는 거 같아요.”

딱히 비아냥대는 말투는 아니었다.

가면 쓴 여인이 다시 고갤 들어 르네를 쳐다봤다.

그렇다고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니 그 가면을 쓰고 계신 거겠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땐 가면을 벗고 말해 주세요.
진심이 보인다면, 사과 받아들일게요.”

르네의 말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르네 역시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가는 길이 어디예요?”

여인은 친절하게 길을 알려 줬다.

네, 여기서 오른쪽 복도로 꺾어 들어가서 쭉 간 다음에, 왼쪽 길로 들어가서 또다시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면 될 거예요.

르네는 설명을 듣고 생각보다 내가 깊이 들어왔구나, 당황했다.

“잠시만요.”

그의 얼굴을 살핀 여인이 갑자기 책상에서 뭔가를 꺼내 끄적이기 시작했다.

“약도예요.”

“…감사해요.”

잉크 펜으로 손수 그려 준 약도를 건네받은 르네가 살짝 고개를 숙여 까딱였다.

어색한 인사 끝에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던 르네가 이내 주저하는 듯하다 여인을 바라봤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면 좋겠네요.”


여인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르네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면 쓴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르네.”

* * *

르네에게 맞은 뺨은 분명 아프지 않은데, 아팠다.

그 얇은 손목으로 때려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아파야 할 뺨은 안 아프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고통에 아르카이츠는 당황했다.

아르카이츠는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지? 원래 이렇게 아픈가?

뺨을 맞았는데, 심장 부근이 아파 올 수가 있나?

르네가 원래 이렇게 힘이 셌던가?

살면서 처음 맞아 본 것에 대한 당혹감으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는 동안 르네는 방을 나가 버렸다.

뒤늦게 아차 싶어 일어난 아르카이츠는 르네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면서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정원의 중정에 앉아 있는 르네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가가야 하나 망설이던 아르카이츠는 지금 다가가 말을 해 봤자 르네에게 그다지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 뺨을 갈기고 벌벌 떨면서 방을 뛰쳐나가 버린 르네를 잡지 않을 만큼 무심하게 행동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르카이츠는 어떻게 하면 르네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파비안과 미카엘을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가장 편한 방법이야 그냥 그 둘을 죽여 버리면 될 일이다.

알파 중의 알파인 자신과 달리 파비안은 저에 비해 한참 딸렸으며, 미카엘 역시 몽마라고는 하나 그 유혹의


기술이 저한테 통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나뭇가지 부러트리듯 금방 죽일 수는 있을 거다.

둘 다 죽이고, 르네한테 가서 ‘우리 이제 안전해. 우리들만의 세상이야. 내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널 지켜


내겠다 했잖아.’ 말한다면.

르네가 과연 행복하게 웃으며 그를 껴안아 줄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아마 기함하며 저도 살려 달라 두 손 싹싹 빌며 울고불고 두려워할 거다.

그 뒤부터는 저를 무슨 폭군처럼 볼 게 뻔하디뻔하다.

게다가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쉽게 남을 죽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만큼 생명을 경시하는 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문제 해결은 장차 헬리오스 제국의 안위에도 해를 끼친다.

‘하지만, 과연 파비안과 화해가 가능한가?’

그건 또 확실치 않았다.

파비안은 지금 아르카이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 거짓을 고를래, 아니면 네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모두를 등질래.

하지만 제국의 평화와 르네의 안전 둘 다 아르카이츠에겐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권력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르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민들보다도 아르카이츠가 가장 으뜸으로 고민하는 것은….

바로 르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저 때문에 억지로 제 곁에 있게 되는 것.

너무 갑작스러운 임신에 르네에게는 더더욱 남편을 사랑하라는 감정이 강요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게 결국 르네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그저 단순히 르네의 본심을 알기 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미카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런 말장난에 넘어갈 만큼 멍청한 이는 아니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아르카이츠가 가장 멍청해질 만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만약 르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어 하면? 내가 억지로 곁에 두고 있는 거라면?’

#64.

아르카이츠가 르네에게 각인한 것과 달리 르네는 아르카이츠에게 각인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르카이츠는 그답지 않은 고민을 하고, 그답지 않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르네가 원한다면 보내 주자.


왜, 사랑해서 보내 준다는 말도 있지 않나.

아르카이츠는 르네를 사랑하지만, 르네가 떠나길 바란다면 보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밤새 생각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미카엘이 지내고 있는 거처로 가 선전포고하듯이 말했다.

“난 르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다 한다면 보낼 생각이다.”

“…네?”

“르네의 마음을 인질 삼아 날 조종할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거야.”

“…….”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방을 나갔다.

그는 정말로 기다릴 참이었다.

르네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니 기다려 주자. 기다려 줘야 한다.

하여 제 딴엔 나름의 배려랍시고 르네에게 혼자 생각할 수 있을 시간을 위해 방을 따로 사용했다.

르네가 침실에 있는 동안 아르카이츠는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그런 되도 않는 삽질을 하던 아르카이츠는 마치 거대한 통나무로 세게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르카이츠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저, 전하께서…!”

“대체 뭔데 그리 호들갑인가.”

“…황태자비 전하께서 해,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르네가 사라졌다. 아니. 도망쳤다.

태중에 아이를 가진 몸으로, 야밤에, 금품 몇 개만 들고서는.

그 순간 아르카이츠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르네가 원한다면 보내 주자. 르네를 사랑한다면 놔주자.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말인 거다.

르네를 놔준다느니 뭐니 그런 헛소리는 르네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실히 깨닫지 못해 할 수 있는,
그런 간 큰 소리였다는 것을.
Chapter 7. 온실 화초

르네는 야밤에 냅다 도망쳐 버렸다.

시녀들과 함께 이미 황궁의 온갖 개구멍과 비밀 통로를 꿰고 있는 애나의 도움을 받아.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르네는 곧장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혹시 몰라 제 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황궁의 금품 몇 개를 훔쳐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완전 뒤도 돌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르네는 아주 잠깐, 그 누구도 모를 만큼 찰나의 순간 살짝 뒤돌아 침실을 쳐다봤다.

저마저 방을 나오니 텅 비어 버린 아르카이츠와의 신혼방은 그렇게 주인들을 모두 잃고 텅 비어 버렸다.

미리 누이한테, 도망을 갈 테니 알빈과 함께 저를 데리러 와 달라는 전서구를 보냈기에 도망치는 것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무리라 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불룩해지는 배를 부여잡고 들키지 않게, 그러나 늦지 않게 인기척을 죽인 채 달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련님,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하아, 하아… 으응….”

조금만 달려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느낌, 잔뜩 물 먹인 솜이불을 덮고 뛰는


기분이랄까.

시종들과 바깥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오가는 문을 통해 겨우 빠져나온 르네를 맞이한 것은 알빈이었다.

“르네.”

“알빈!”

“시간이 없어. 자, 얼른 가자.”

알빈은 르네의 몸에 두꺼운 진녹색의 망토를 둘러 준 뒤, 그를 제 말 위에 태웠다.

“애나, 잘 있어.”

“도련님. 부디 무탈히 가셔요.”

어쩌면 다신 못 볼지도 모르는 순간이지만 오랜 시간 손을 붙들고 추억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애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고, 알빈은 곧장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말이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구르기 시작하더니 곧장 숲 속으로 달려갔다.


르네는 눈을 꼭 감고는 그대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말의 속도가 빨라 강한 바람 때문에 눈이 시린 것도, 숲의 거친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얼굴을 치는 것도


싫어서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혹시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질끈 감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꼈지만 르네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알빈은 자신이 우는 걸 모를 것이다.

르네는 약한 모습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이 터 올 때쯤, 그들은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며칠분의 식료품과 물, 구급약과 여분의 옷가지들을 챙긴 보따리를 건넸다.

“르네. 한동안 황궁에서 샅샅이 뒤질 것이 분명해. 그동안에는 쥐 죽은 듯 숨어 살아야 해. 때가 되면 신호를


줄게. 그럼 곧장 배를 타고 알빈과 함께 제국을 빠져나가.”

아델라이드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돌려 알빈을 쳐다봤다.

“가문을 버리고 나와 함께하겠다는 거야?”

“무책임하게 굴 생각은 없어. 황궁에선 내가 장기 출장을 가는 걸로 알고 있을 테니 네 도주를 완벽히 도울


때까지는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일인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알빈. 고마워.”

고맙다 말하는 르네의 입과는 달리 눈동자는 마치 죄인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그런 동생을 한번 바라보다 이내 외면하듯 시선을 돌렸다.

“항구에서 지낼 만한 곳을 찾아 뒀어. 그곳에 도착하면 붉은 망토에 눈이 애꾸인 자가 찾아갈 거야. 그자는 믿을


만한 자이니―.”

“누이.”

“왜 그래?”

“…나, 항구에 가지 않을 거야.”

“뭐? 그럼 어디로 숨게. 달리 찾아둔 곳이라도 있는 거야?”

“숨으려고 도망친 게 아니야, 누이.”

그럼 대체 뭣 때문에 도망친 건데? 하는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자 르네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난 사막으로 갈 거야.”

“뭐?”
“사막에 가서, 나와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보려고.”

“르네!”

“르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델라이드와 알빈이 동시에 르네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의 르네였다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아이,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렇게 목청 높이지 마.’ 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을 테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움츠러들기는커녕 아델라이드와 알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제 의사를 밝혔다.

“사막에 갈 거야. 아르콘 부족에 가서, 내 체질에 대해 알아낼 거야.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예언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난 숨으려고 도망친 게 아니야. 날 지키려고 도망친 거지.

그건 달라 누이. 그 두 개는 다르다고.

르네의 말에 아델라이드와 알빈은 더 이상 그를 닦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막에 갈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막에 갈 거야.”

“거긴.”

“갈 거야! 나, 온실 속 화초라 불리는 게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건지, 이제야 알게 됐어. 겨우 온실 밖에


나왔는데 또 누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는 건 그냥 화분째로 들려 다른 온실 들어가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자 알빈이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르네. 사막을 가든 항구를 가든, 네 마음대로 해. 대신 네가 어딜 가든 나도 따라갈 거야.”

비장한 얼굴로 말하는 알빈의 모습에 르네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알빈을 쳐다봤다.

“응. 어차피 거기 나 혼자서는 못 가.”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가 뭐겠어.

네가 같이 안 가 준다고 그랬다면 아마 난 눈물로라도 호소했을 거야.

그런 뻔뻔한 모습에 알빈은 그제야 좀 자신이 아는 르네가 맞는 거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사막으로 가서 정확히 뭘 하려고. 네 체질에 대한 거. 사막에 가면 알 수 있다는 거야? 제국에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지 않겠어?”
아델라이드는 답답한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알빈과 르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녀는 르네가 사막에 가는 걸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거긴 너무 위험해. 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모래 폭풍도 심한 데다가, 도적 떼를 만날 수 있어. 천운으로


아르콘 부족에 도착했다 쳐, 그래서 대체 뭘 할 건데. 너 그쪽 언어는 할 줄 아니? 너 홑몸 아니야. 배도
이렇게 나왔는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막을 들어가겠다는 거야!”

“나도 뭔갈 해야겠단 말이야!”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돼! 아무도 너 쓸데없는 인간이라 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생각해! 내가! 나 스스로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인간 같다고. 뭔가를 하려는
의지도 없고, 생명 부지만이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라고. 그게 뭐야. 그게 어떻게 업적인 거냐고….”

르네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하지만 르네는 애써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꾹 줬다.

여기서 울면 진짜 바보 등신이다. 여기서 울면 진짜 머저리 겁쟁이인 거야.

우는 거 아니다. 울지 않아, 나 이제 강해져야 해!

#65.

난 이제 어엿한 성인에, 애기까지 품고 있는 엄마니까!

칭찬받아야 할 마음가짐인데, 르네가 원했던 말은 ‘너 정말 강해졌구나, 르네!’ 정도의 대사였는데.

르네의 눈에 고인 눈물은 강함보다는 아직까진 여림을 보여 주는 건지.

자칭 ‘르네 맘’ 아델라이드가 눈을 시퍼렇게 뜨며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걸리면 때려죽일 듯이 물었다.

“뭐? 감히 누가 그딴 말을 우리 르네한테 지껄여? 누가 그래? 아르카이츠가 그러디? 미카엘 그놈이 그래?


시녀들이야? 말만 해. 그리 말한 것들 혀를 확 뽑아 버리게! 어떤 놈이 우리 애 기를 죽여? 누가 그딴 말 해서
우리 르네 허파에 바람 들게 하냐고!”

“누, 누이.”

“말해, 르네. 어떤 놈이야? 역시 아르카이츠냐? 아르카이츠 그놈이 미카엘한테 눈이 뒤집혀 그딴 말을 한 거야?


그래서 네가 증명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 쌍놈의 호로 새끼! 그놈 내가 죽이고, 나도 참수당할란다!”

“누이! 좀 진정해 봐! 아르카이츠가 한 말 아니야!”


“…그래? 그럼 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해?”

“파비안! 파비안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파비안? 파비안 황태자가 왜?”

“…뭐야 누이, 누이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르네의 말이 대체 뭔 뜻인지 아델라이드는 전혀 모르겠단 얼굴로 르네를 쳐다봤다.

르네는 오히려 제가 더 황당하다는 얼굴로 ‘파비안의 계략인 거잖아!’ 하며 꽥 소리를 질러 버렸다.

“아니 누이, 꿈에서 예언을 본다면서. 근데 파비안이 계략을 세워 날 내쫓을 거라는 건 모르고, 미카엘이 나타날
건 안단 말이야?”

“…파비안이, 미카엘과 손을 잡고 널 몰아내려 한다는 거지?”

“응.”

“그것 참 이상하네. 파비안이 그럴 인간이 아닌데…. 걔는 널 좋아하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아델라이드의 말에 르네가 굉장히 충격받은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파비안이 날 왜 좋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이. 대체 어떤 미친놈이 좋아하는 이를 쫓아내려고


해?”

르네는 생각만 해도 아주 소름 끼친다는 듯 어깨를 싹싹 쓸어 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극도로 혐오하는 얼굴 표정이 볼만했다.

아델라이드는 그런 르네를 보며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물론 원래도 버그 먹은 게임이라 일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상하네. 파비안은 원작에서는 르네를 짝사랑하는 설정인데…. 미카엘이랑 파비안이랑 협력하는 사이란 말이야?
이것 참… 원작이랑 너무 다르잖아? 아무리 버그 먹어도, 원작 설정까지 틀어질 정도인가?’

원작의 파비안은 르네에게 그야말로 헌신적인 남자였다.

마찬가지로 알파인 그는 매우 늦게 각인 상대를 알아보게 되는데, 하필이면 아르카이츠와 같은 상대에게 각인해


버려 삼각관계가 시작되는 거였다.

그 상대가 바로 르네였고.

미카엘의 등장 이후 버그 먹은 아르카이츠가 르네를 버릴 때마다 파비안은 계속해서 르네 곁에 있어 주던 그런


헌신남이었다.

“한데 그런 헌신남이 어쩌다가 르네한테 막말을 한 호로 자식이 된 거지…?”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이… 틀어질 수도 있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럼, 아르카이츠의 변심 역시 버그 먹은 원작과 달리 갈 수도 있는 건가?

그녀가 오만 생각을 하는 동안 르네는 다시 한번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나 마냥 당하고 있지 않을 거야. 나도 지킬 거 있어. 내 아기. 내가 지킬 거야. 그리고….”

뒷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르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빈은 그저 르네가 또 눈물이 차오르려나 보구나 하며 안쓰러운 것을 바라보듯 갸륵한 눈으로 르네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정작 르네는 매우 비장했다.

‘그리고 아르카이츠까지. 내 남자 내가 지킬 거야. 그 미친 이복형이랑 몽마로부터! 내가!’

동이 완전히 터 오기 전, 르네는 갈 길이 바빴다.

곧장 알빈과 함께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뒤 다시 한번 환복을 하곤 미리 섭외한 작고 초라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어 아델라이드와 아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르네가 아델라이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누이. 부모님을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이드에게 작은 편지를 건넸다.

“그리고, 나 다시 돌아올 거야.”

“르네.”

“나 도망치는 거 아니고, 다시 돌아올 거야. 그거 믿어 줘.”

“…알겠어, 르네.”

* * *

“르네가 황궁에서 가출했습니다. 도주했어요.”

아델라이드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피어스 공작과 공작 부인은 그대로 뒷목을 붙들고 앓아누웠다.

저번엔 장녀가 뒷골 잡게 하더니, 이번엔 막내가 뒷골 잡게 한다.

피어스 공작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제 피어스 가문은 여기까지인가 보오, 부인.’ 하며 파르르
눈썹을 떨어 댔다.
화를 낼 힘도 없다는 듯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다시 몸을 일으킨 공작이 아델라이드에게 물었다.

“해서… 어, 어디로 도망갔다는 게냐.”

“사막이요.”

“…사, 사막?”

“네. 아르콘 부족이 살고 있는, 그 사막이요. 지옥의 사막, 전갈의 사막, 폭풍의 사막.”

아델라이드는 부모님이 이해하기 쉽게, 친히 악명 높은 수식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이마를 짚은 채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 사막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홑몸도 아닌 애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델! 어찌하여 넌 그걸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거니!”

그러는 동안 공작은 중얼거렸다.

“우리 가문은 이제 끝이야. 우리 모두 죽는 거야. 모두를 속이려 했던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우린 목이 떨어져


죽을 거야.”

“아이고, 차라리 단두대에서 죽는 게 마음 편하죠! 여보, 우리 막내가, 우리 르네가 제 발로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는데 지금 걱정도 되지 않아요?”

“부인. 죽으면 어차피 다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만날 곳이 천국은 아닌 것 같소. 부인.
다음 생에도 부부가 될 수 있다면 그때도 내 부인이 되어….”

“에잇, 됐어요! 당신 같은 남편, 두 번은 필요 없다고요! 잡혀갈 때 잡혀가더라도, 우리 아들 얼굴은 보고


죽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부인 말이 맞는 것도 같소…. 아델라이드. 말해 보렴. 르네가 어디 갑자기 가출할 아이는 아니지 않느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닌 거지? 응?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게냐? 아니면, 설마 우리
르네가 다른 놈과 눈이라도 맞고 그런 건 아니지?”

아직 피어스 공작과 공작 부인은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궁에서는 아직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그 누구도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쉽게 떠들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으니, 사교 시즌이 오기 전까진 아마
그 누구도 미카엘에 대해 알지 못할 거다.

아르카이츠가 이 사실을 막고 있는 건지, 아니면 파비안이 적기에 터트리려 감춰 두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르네에겐 뭐든 미카엘의 존재 자체가 가시방석이었을 거다.

아델라이드에게서 미카엘이라는 인물에 대해 뒤늦게 전해 들은 공작 부부는 이제 더 이상 받을 충격도 없다는 듯


비교적 침착한 얼굴로 조용히 경청했다.
“…그래서 르네가 도주했다는 거니. 황태자비 자리에서, 끌려내려 올까 두려워서?”

“어머니. 르네가 단순히 저 혼자 살겠다고 가문까지 버려가며 도망칠 아이로 보이세요? 르네, 어째서인지
확신하고 있더라고요.”

“확신하다니, 뭘?”

아델라이드는 르네의 편지를 공작 부인에게 건넸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얼른 편지를 펼쳐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 어머니께.

아마 지금쯤 무모한 제게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제게 하신 말씀이 있으셨죠. 식물은 뿌리를 내린 만큼 자란다고.

그래서 작은 화분에 나무를 키우면, 그 나무는 그만큼 작은 뿌리를 내려 평생 작게 살거나 혹은 견디지 못해


죽는다고요.

저는 처음으로 화분 밖으로 나가 뿌리를 내려 볼 생각이에요. 화분 말고, 맨땅에요.

운이 좋으면 뿌리가 적응하여 더 길게 뻗어 나갈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썩어 버릴지도 모르겠죠.

…(중략)….

아르카이츠는 절대 피어스 가문을 저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마 제가 도주한 것조차 은폐하려 들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전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화분을 옮기는 것뿐이에요.

전 다시 돌아올 거예요.

부디 절 믿고 기다려 주세요.

르네의 편지를 읽은 공작 부부는 별다른 반응 없이 한동안 서로 눈을 마주 보다, 이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 있어 르네는 그저 한없이 어린 막내아들이었던 걸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델라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뭣 하니. 어머니랑 아버지 좀 누가 침실로 뫼셔라.”


“네, 아가씨…!”

동생이 거하게 벌여 놓은 사고를 뒷수습할 시간이었다.

#66.

아르카이츠와 함께 갔었던 모래사막과 지금 알빈과 함께 있는 이 모래사막은 분명 같은 곳이었다.

한데 르네에게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르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자.”

알빈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내저으며, 온몸을 감싼 리넨 천을 얼굴 쪽으로 단단히 끌어 올렸다.

사막 입구의 마을에서 산 허접한 고글을 쓰고는 낙타 등에 탄 채 알빈보다 앞서 사막 안으로 들어갔다.

“르네! 너 말도 탈 줄 모르면서 낙타는 어찌 타려고!”

“아르카이츠랑 탄 적 있어! 느려서 이 정도는 나도 탈 수 있거든? 빨리 안 오고 뭐 해, 알빈! 지금부터


출발해야 모래 폭풍을 만나지 않는다잖아!”

그렇게 말한 르네는 낙타 줄을 잡아 주는 상인에게 그럴싸한 수신호를 보내며 빠르게 사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까 전 고글을 살 때도, 옷가지를 살 때도, 하다못해 낙타를 대여하는 것까지도.

평소의 르네였다면 알빈 옆에 딱 달라붙어 그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영 딴사람이 된 양 달랐다.

“…쟤가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나서는 걸 잘했지…?”

알빈은 굉장히 당황한 듯 중얼거리다, 이내 르네 뒤를 따라 옷매무새를 다듬고 사막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르콘 부족이 살고 있는 영토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도적 떼를 만날 수도 있는 위험은 물론, 사막의 모래폭풍에 휩쓸려 날아갈 수도 있었다.

또한 모래 수렁에 빠지거나, 독을 가진 전갈에 쏘일지도 모르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낮에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뜨거운 태양 아래 열기로 힘들었고,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추위에 떨었다.

넉넉히 챙겨 왔다 생각했던 물통은 금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르네는 물주머니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댔다.

똑똑 떨어지는 마지막 물방울을 음미하곤 푹 한숨을 내쉬며 빈 통이 되어 버린 물주머니를 집어 던졌다.

아르카이츠와 함께 있었을 땐 이렇게까지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작 사흘째 되는 날인데도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입 안이 바짝 마르고, 곧 한계에 다다를 것 같았다.

시장통에서 돈을 주고 채용했던 낙타 상인 둘은 아르콘 부족으로 간다는 말에 진즉에 발길을 돌린 지 오래였다.

저들 돈벌이 수단인 낙타까지 두고 가 버리는 모습에 르네는 왜 저렇게까지 아르콘 부족을 무서워하나 생각했다.

알빈 역시 말로는 야만족이니 뭐니, 당장 돌아가야 한다느니 마뜩찮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르네를
보살펴 줬다.

가령, 지금처럼.

“르네. 조금 더 가까이 붙자. 어제 보니까 추위 타는 것 같던데. 이거라도 좀 덮어.”

“네 옷이잖아. 넌 어쩌고.”

“난 체력이 좋으니 괜찮아. 넌 임신부잖아.”

“고마워, 알빈.”

르네는 알빈이 덮어 주는 담요를 꼭 쥔 채 옆으로 새우처럼 누웠다.

제법 배가 나오다 보니 반듯하게 자는 건 숨이 막혀 불가능했다.

끙차,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잡자 그 모습을 보던 알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임신부는 매사에 조심해야 한댔는데. 침대에서 재워도 모자랄 판에 널 모래 위에서 자게 하다니.”

“내가 오자고 한 건데 누굴 탓하겠어? 나름 괜찮아. 푹신하기도 하고. 동굴도 은근 포근하다는 걸 알게 됐어.”

“넌 이런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야, 르네.”

“알빈?”

“…넌 이런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르네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생각해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았다.

알빈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꼭 자신이 르네에게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왜 그래?”

“아르카이츠 그 망할 놈.”
“야아.”

“나라면 절대 네가 황궁을 떠나 이런 곳에 오게 놔두지 않았을 거야.”

“왜 또 그런 말을 해. 나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지금 네 모습을 봐. 목덜미도 물지 않았으면서 널 임신시키고, 그런 주제에 다른 오메가한테


눈이나 돌린다니. 그것도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간이. 나라면 절대 널 이렇게 혼자 두지 않았을 거야.”

“네가 옆에 있는데 내가 왜 혼자야.”

르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 지으며 알빈을 쳐다봤다.

“나 혼자 아니야.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동정할 필요는 없어, 알빈.”

“그가 원망스럽지 않아?”

알빈은 생각보다 침착한 르네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의 물음에 르네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원망?

물론 맨 처음에는 아르카이츠가 밉고 야속하고 서운하고 그러긴 했지.

한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황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마음에 안정을 찾은 느낌이다.

뭐 때문인 걸까. 상황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데 말이다.

“글쎄.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답을 알기 위해 가는 거야. 이제 그만 자자, 알빈. 내일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면 어쩌면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르네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주 작은 뭔가가 배를 툭, 하고 치는 느낌이 났다.

화들짝 놀란 르네는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왜 그래, 르네!”

“배, 배가! 배를 찼어!”

“뭐?”

“애기가 배를 찬 거 같다고! 아니, 확실히 분명하게 찼어! 움직인 게 분명해!”

르네는 굉장히 놀랍고 충격적이고 또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양 알빈을 쳐다보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아, 태동을 느꼈나 보구나. 어디 아프진 않고?”


“뭐야. 무슨 반응이 그래?”

“응?”

뭐 문제 있냐는 알빈의 표정을 르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애기가 내 배를 찼다니까?

이렇게 확실한 태동은 처음이었단 말이다.

이 기쁜 순간, 이 신기한 순간을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르네는 들떴던 기분에 누가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들었다.

같이 기뻐해 줄 줄 알았는데.

‘아르카이츠였다면….’

아르카이츠가 떠오르자 르네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르카이츠였다면 뭐 크게 기뻐할 거라 생각한 건가.

미카엘이 나타나고 근 한 달이 다 되도록 얼굴 한번 보기 어려웠던 사람이다.

또 괜히 코가 시큰거리는 것 같아 르네는 얼른 다시 담요를 덮고는 옆으로 누웠다.

“…에잇. 됐어.”

“르네. 어디 아픈 건 아닌 거지?”

“하나도 안 아파!”

그렇게 말하며 르네는 얼굴 위까지 담요를 끌어 올렸다.

눈을 꼭 감고는 자신의 배를 감싸며 생각했다.

괜찮다고. 엄마인 내가 제일 기뻐하면 된 거라고.

* * *

르네가 새벽에 황궁을 빠져나간 그 당일 아침.

황태자비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아침 정무 회의 직전에 들은 아르카이츠는 그대로 회의를 내팽개치고 침실로


향했다.

함께 사용하던 침실은 깨끗하다 못해 어쩐지 냉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아르카이츠는 곧장 황태자비궁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도 르네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황궁 안에 숨어 버린 건지, 아니면 나가 버린 건지.

확인하는 길은 평소 르네가 시녀로 두던 피어스 가문의 애나를 잡아 다그치는 것뿐.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하!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정말 눈떠 보니 사라지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애나 역시 만만치 않은 시녀였다.

조금이라도 르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모르쇠로 일관했고, 그 기세를 꺾을 방법은 아마 고문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굳이 제 손을 더럽힐 생각도, 아랫사람에게 화풀이할 생각도 없었다.

이 모든 건 자신의 실수다.

르네가 제 발로 황궁을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르네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또 무엇보다 르네가 원한다면 떠나보내 줄 수 있다는 그런 착각을 한.

자신의 실수였다.

아르카이츠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곤 발발 떨면서도 르네의 행방을 함구하는 애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르네를 놔줄 생각 없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애나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순 없었으나, 저도 모르게 힐긋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애나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르네를 놔줄 생각이 없다 했어, 나는.”

“…….”

이윽고 아르카이츠는 바깥에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일부러 들으라는 듯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황태자비는 여전히 황태자비 궁에, 내 곁에 있는 거다. 행방불명은 물론 가출 따위도 하지 않았다. 르네는 그저


몸이 아파 당분간 공식 활동을 하지 않을 뿐인 거야.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거다. 산달을 기다리며 요양 중인
거다.”

“…….”

애나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생각했다.

‘세상에 도련님, 르네 님, 절대 잡히시면 안 됩니다…. 잡히시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애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르카이츠는 살짝 몸을 수그려 주저앉은 애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년이 르네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쯤은 알고 있다. 르네는 조금만 잘해 주면 제 속을 모두 털어놓는 이다.
그런 애가 너한테 제 계획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 음성은 아주 부드러웠으나, 그 안의 내용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67.

눈치 빠른 이가 아니더라도 지금 아르카이츠가 얼마나 이를 꽉 깨물고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칫 수틀리면 이 방 안의 모두를 도륙하는 것쯤은 아주 쉬울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애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르네 도련님 곁에서 그의 시선으로 아르카이츠 황태자 이야기를 전해 들어 잠깐 동안 그의 본모습을 잊고


있었다.

“…저, 저는.”

“걱정 말거라. 르네는 반드시 이곳에 돌아올 거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 발목을 잡아서라도 끌고 올
생각이니까. 하니 아델라이드에게 전해라. 르네의 가출에 대해 일절 입 열지 말라고.”

그는 원래 르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드럽고 다정하고, 또 어딘가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예, 아, 아르카이츠 전하…!”

예전부터 아르카이츠에게 붙은 수식어 중에는 ‘잠자는 사자’라는 별명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은 사자가 잠들어 있어 평화로웠으나, 이제 매우 사나운 꿈자리로 한껏 예민해진 사자가 눈을 뜨고 말았다.

애나는 납작 몸을 수그려 엎드린 뒤 얼른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아르카이츠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신들 역시 대충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이미 문 너머 아르카이츠의 고성으로 전해


들었을 거다.

보통 때였다면 황태자비가 도망쳤느니, 사랑의 도피니, 불륜이니, 가짜 오메가니 모두들 말이 많았을 거다.

피어스 가문을 적대하는 대신들은 아마 지금이 바로 미카엘을 새로운 황태자비로 맞이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저, 전하. 앞으로 어찌하실….”

용자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며 물으려다 차마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늘그막의 영감들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서슬 퍼런 눈빛을 한 아르카이츠가 그를 쏘아봤기 때문이다.

그동안 르네에게 일부러 들으라는 듯 미카엘에 대해 종일 떠들어 대던 이들이 몇이던가.

당장이라도 경을 치고 싶었으나 아르카이츠는 그게 결국은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태자비는 내가 직접 데리러 갈 것이오.”

“예? 하지만, 전하! 어찌 황궁을 비우신단 말입니까!”

“황태자비는 내가, 직접, 데리러 간다 말했소.”

두 번 친절하게 말해 줬으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듯 아르카이츠가 단호한 어조로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대신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만 할 뿐이었다.

아르카이츠는 으름장을 놓듯 그들을 빤히 둘러보다 이내 짤막하게 말했다.

“황태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황궁 담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어기는 이에게 어떠한 처벌이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몇몇 이들이 입을 꾹 다물며 괜스레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죽을 게 뻔했다.

대신들이 괜스레 아르카이츠의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이 사태를 전해 들은 파비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아르카이츠에게 다가왔다.

아르카이츠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그를 지나치려 했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네. 르네 말이야.”

“…뭐?”

하지만 파비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르카이츠의 속을 벅벅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이었을까.

파비안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도망도 못 치고 벌벌 떨면서 울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쿡쿡 웃는 파비안의 낯짝이 재수 없기 그지없었다.

결국 그냥 지나치려던 아르카이츠가 기어코 그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껏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두 황태자의 신경전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파비안의 보란 듯한 중얼거림을 들은 것은 아르카이츠뿐이었다.

남들 눈에는 아르카이츠가 제 이복형제의 멱살을 틀어쥔 무도한 황태자로 보였을 것이다.

혹은 제 아내의 도주를 제 형제에게 화풀이한다든가.

뭐든 아르카이츠의 이미지를 훼손하기는 딱 좋은 장면이었다.

“르네가 도망간 마당에 이미지 관리고 뭐고 없다는 거냐, 아르카이츠? 나와 적대할 생각은 없다며 고고하게 굴
땐 언제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르네가 사라진 마당에 내가 언제까지 네 유치한 심술을 받아 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파비안.”

“대단한 사랑꾼이군. 제국과 오메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고르겠다, 이건가?”

“나한텐 르네가 곧 제국이야.”

“…그렇게 애절한데, 어찌 네 아내는 널 등지고 도망갔을까. 넌 어찌 그 애가 도망갈 거란 생각도 못 했지? 모순


아닌가. 각인 표식도 남겨 주지 않았으면서.”

아르카이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안쓰러운 것을 바라보듯 파비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도 알파와 오메가가 혐오스럽나? 각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하고 변하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인데. 그리 혐오스러워하면서도 알파인 척하는 파비안 네가 참 불쌍해.”

“…나한테 훈수 두기에는 지금 네 상황이 그럴 만하지 못하다는 걸 알 텐데.”

“훈수가 아니야. 동정하는 거지.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원망스러운가? 형 어머니의 죽음이 마냥 내 어머니의 탓
같아?”

“…….”

“원망하는 것까진 이해하겠지만, 그 모순적인 행동은 그만두지 그래. 복수를 하려거든 두 개의 무덤을 파라는
소리가 있어. 날 무덤 아래 처넣고 싶으면, 너도 같이 떨어질 준비를 해야지.”

제국의 평화니 뭐니, 지금 아르카이츠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이러고 서서 말씨름할 여유조차 없기에 비소를 지으며 그대로 파비안을 지나쳐 갔다.

그는 자신의 정예 부대를 모은 뒤,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한데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어디로 가셨을지 알고 계십니까? 이 드넓은 제국에서 마음먹고 도망쳤다면,
해외로 밀항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황궁을 뜨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아니겠냐는 보좌관의 말이었다.

아르카이츠는 마치 르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눈빛을 보였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어디로 향하셨는지 알고 계신 것입니까, 전하?”

보좌관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아르카이츠는 곧장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보좌관은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해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로 ‘언제쯤 돌아오실 것입니까!’ 하며 말 뒤를


졸래졸래 따라 달리며 물었다.

“일주일. 그전에 돌아오도록 하지.”

“예에… 예에?”

보좌관은 일주일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얼른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황태자비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이 넓은 제국을 언제 뒤져서 언제 찾아낸단


말인가.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미 아르카이츠는 저만치 앞서간 상태였다.

대신들이 우르르 보좌관에게 달려와 물었다.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대체 뭐라 하셨나?”

“황태자비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계시다던가?”

아까 전 다들 입 꾹 다물고 눈치만 볼 땐 언제고.

대신들의 눈빛이 다시 하이에나같이 변해 있었다.

파비안은 그 꼴을 바라보다, 저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파비안 님―.”

미카엘이 애타는 눈빛으로 파비안에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를 무시한 채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남겨진 미카엘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 * *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고, 예전에 누이가 그랬었다.

르네는 그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아니, 바뀌기로 마음먹었잖아.’ 하며 다짐하듯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힘들어….”

하지만 내적 갈등과 달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힘들다.

온갖 고민거리들은 ‘힘들다’는 한마디로 퉁 칠 수 있었다.

“르네. 조금만 힘내자.”

“으응….”

“거의 다 와 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다행히 도적 떼를 만나진 않았네. 물론, 여기서 도적질할 만큼 멍청한
이들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알빈 역시 사막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배를 타고 이국으로 가 유학 생활을 하거나, 고도의 기사 훈련을 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사막에서는 딱히 생활해 본 적도, 훈련받아 본 적도 없었다.

사막의 도적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실 아르콘 부족이라는 것을, 그때까진 르네와 알빈 둘 다 알지 못했다.

“…그러게. 정말 이상하네. 사막에 도적 떼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는데.”

악명 높지 않았나. 황궁과 아르콘 부족이 교류를 위해 서로 공물을 주고받았을 때 그걸 모두 털어 간 이들이


사막의 도적 떼 아니었나.

“듣기로는 아르콘 부족에서 추방당한 이들이 앙심을 품고 모인 거라 흉악한 이들투성이라던데….”

하지만 르네와 알빈은 사막에 들어온 사흘의 시간 동안 도적 떼를 만나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한 번은 공격받았을 텐데 말이다. 아쉽다기보다는 조금, 이상하지 않나.

“거참 이상하네….”

르네는 고개를 갸웃대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평화로운 도주 아닌가?

“하늘이 도운다 생각하자, 르네.”

“…으응.”

르네는 아주 잠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아무리 아르카이츠여도 내가 여길 올 줄 예상할 리가 없지.


#68.

르네는 나름 허를 찌른 고도의 전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황태자비가 사막으로 도주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 아닌가.

아델라이드조차 맨 처음엔 기를 쓰고 반대했었다.

‘다들 내가 사막을 건넜으리란 생각은 못 할 거야. 그건 아르카이츠 역시 마찬가지고. 다들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온실 화초라고만 생각하니까.’

응. 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르네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스스로가 조금 대견하고 뿌듯했었다.

나름 고심해서 고른 도피 장소였으니까.

허를 찌르는 계획이라 생각했다. 그럴싸한 계획이라 생각했단 말이다.

“…….”

“여기서 다 보는군요, 부인.”

“…….”

그 고생을 해서 도착한 아르콘 부족의 영토에서 아르카이츠를 만나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 * *

아르콘 부족의 영토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린 것 말고는 크게 위협 요소가 없었다.

그 악명 높은 사막길을 너무 쉽게 평정해서였을까.

르네는 지금 알게 모르게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내가 사막을 횡단했어!’

뭐 딱히 횡단이라 부를 정도의 긴 대장정은 아니었다만….

초심자의 행운인지 도적 떼 한번 만나지 않고 무사히 아르콘 부족의 영지에 도착한 것은 르네에게 있어 굉장한
도약이자 성취였다.

‘아가야, 엄마가 사막을 지나왔어!’


르네는 자신의 배를 한번 쓰다듬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엄마의 생각을 읽은 건지 배 속의 아이가 르네의 배를 콩콩 두들기기 시작했다.

르네는 또 그것에 감동을 받아 조금 벅차오른 얼굴로 칭칭 감고 있던 리넨 천을 내려 알빈에게 말했다.

“나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 보는 거 처음이야.”

그러나 알빈의 표정은 르네를 대견하게 여긴다든가, 대단하게 여긴다든가 하는 게 아니었다.

아주 딱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넌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눈빛.

르네는 왜 또 그런 눈빛으로 보느냐 묻고 싶었지만 듣기 좋은 말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낙타 고삐를 조용히 그러쥐었다.

어쩐지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들어가 볼까, 알빈?”

“…응. 그러자, 르네.”

알빈은 그저 르네가 애써 해맑은 척 연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르네는 해맑았지만, 이게 콩깍지인지 아니면 편견인지 알빈 눈에는 르네의 눈이 매우 촉촉해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 보였다.

‘불쌍한 르네. 애써 자존심 세우느라…. 내게 조금 더 기대도 되는데.’

알빈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한계까지 몰린 르네는 고장 나기 직전이며, 이 아르콘 부족에서의 생활을 결코 적응하지 못할 거다.

지금 이러는 건 일종의 고집이다.

르네는 도시 생활이 어울린다.

귀하고 좋은 것만 보고 자란 르네니까, 이런 방황은 금방 끝내고 알빈과 함께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제국에서 숨어 지내든, 아니면 밀항하여 이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꾸리든.

알빈은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내려놓고서라도 르네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제국을 떠나 유학하는 동안 알빈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알빈이 바라는 건 대단한 명성을 얻거나, 대단한 사업체를 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란 바로 그의 첫사랑이자 소꿉친구인 르네 피어스라는 것.

유학을 마치고 제국에 돌아오면 르네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한데 뭔 말도 안 되는 운명의 장난인지….

아델라이드 대신 르네가 황태자의 부인이 된 걸로 모자라, 열성 오메가라는 말도 안 되는 체질로 애까지 덜컥


들어서고 말지 않았나.

르네의 회임 소식을 들은 그날 알빈은 정말 눈물이 차오른다는 것이 뭔지 절절히 깨닫게 됐다.

눈앞에서 첫사랑의 회임 소식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르네가 다른 사내의 부인이 될 거라는 사실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평생 바라만 보다 끝나겠구나 하는 순간 동아줄이 내려왔다.

이번에야말로 르네를 지킬 거다.

제 곁에 두고 아르카이츠한테서 받은 상처를 보듬어 줄 거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얘기만 듣게.

그렇게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해 줄 거다.

‘도망자의 삶을 살아도 상관없고, 가문을 내팽개쳐도 상관없으니, 르네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르네와의 행복한 도피 생활에 대한 계획도 세워 놓은 상태였다.

르네가 원하는 대로 아르콘 부족에서 열성 오메가에 대한 체질 정보를 좀 얻은 뒤, 잠깐 몸을 쉬었다 르네를


설득해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저자들이다! 잡아라!”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에게 냅다 붙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르네!”

“알빈!”

“당장 잡아라! 도망자다!”

기골이 장대한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르네와 알빈을 낙타 위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얼굴에 검은 천을 씌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를 하지 못할 만큼 급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얼굴에 천이 씌워져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저 멀리서 르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잠깐! 잠깐만!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는 아르콘 부족의 추장을 만나러 왔단 말이야! 내 신분을 보여 줄 테니
이딴 밧줄이랑 천을 당장 치우지 못해! 나 임신부야, 임신부라고!”

“르네!”

“알빈! 어딨어?”

“르네!”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은 저들끼리 원주민 언어를 사용하여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그대로 알빈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르네! 르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로 보아, 알빈은 다른 곳으로 끌려간 듯했다.

이런 취급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기에 르네는 심장이 쿵쿵 뛸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이상해, 아르콘 부족은 외부인에 대해 경계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작정 포박하지는 않는다고 그랬어. 오히려
과하게 대접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목적을 불게 만드는, 그런 식의 환대 아닌 환대를 한다고 들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카이츠가 했던 말 아니던가.

아르콘 부족이 야만인이라는 소리는 그저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외지인이 찾아오면 그 누구도 아닌 추장이 가장 먼저 나와 그들을 맞이한 뒤, 위험한 자들이라 판단되면 그때


처분을 논한다 하지 않았나?

“난 무기도 없단 말이야!”

이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르네는 손이 뒤로 포박되고,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매우 황당하고


두려울 뿐이었다.

“낙타에 매달린 주머니 안에 내 신분을 설명해 줄 소지품들이 있다고요! 내가 무슨 범죄자인 줄 알아?


아르콘에선 이런 무도한 접대는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이거 순 거짓말이잖아! 나 임신부라니까,
조심히 대하라고,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그러자 저들끼리 뭐라 원주민 언어로 말하던 이들이 정말로 르네를 조심스레 대하는 것 아니겠는가.

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진심은 언어를 초월한다, 이게 그런 의미인가 싶어 르네는 다시 한번 외쳤다.

“난 범죄자가 아니니까 이런 취급하지 말고, 당장 손의 결박을 풀어 줘요! 머리에 이 망할 보자기도 좀 치우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잖아!”

아무래도 강하게 밀어붙이면 이들 역시 자신의 기세에 눌려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네는 아까 전보다 한층 더 기세등등한 말투로 소리쳤다.


그러자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 기세가 먹힌 것인지 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내 르네를 무릎 꿇려 앉혔다.

감히 누구 무릎을 꿇리는 거냐고, 나는 제국의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이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르네의 시야를 막고 있던 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밝아지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찌푸린 르네는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햇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어두운 석조 건물 안이었다.

여기가 아르콘 부족의 신전이라는 것을 깨닫는 찰나였다. 거대한 손이 그의 얼굴을 움켜쥐듯 잡았다.

어찌나 큰지, 르네의 얼굴이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손은 르네의 양 뺨이 붕어처럼 납작해질 만큼 힘주어 잡았다. 그렇다고 아픈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손길이 얼마나 많은 화를 꾹꾹 눌러 담아 겨우 힘을 뺀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르네는 이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눈을 굴려 위를 올려다봤다.

“…….”

르네는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 물 밖으로 뛰쳐나와 숨 못 쉬는 붕어처럼 입만 빠끔댈 뿐이었다.

아니, 아니, 왜 네가 여기서 나와?

르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한껏 놀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

“여기서 다 보는군요, 부인.”

“…….”

“왜 그런 눈빛일까. 꼭, 완벽한 계획이 틀어진 사람처럼.”

“…….”

“누구다 다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르네. 그게 망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르네는 겨우 붕어 입을 오물거렸다.

한참을 오물대던 르네 입에서 아르카이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 아르카이츠.”
그는 그걸 기다렸던 것처럼 생긋 웃었다.

#69.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뺨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사람을 붕어로 만들 땐 언제고, 이젠 그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묻는다.

“그래서. 사흘간의 도주는 어땠나? 내 곁을 떠나니 후련했어? 아니면, 후회되던가?”

후련이고 후회고 나발이고,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어?

르네는 마치 유령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빨리 들켜? 분명 허를 찌른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몇 번을 말해 줘도 모르는군. 난 당신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니까.”

사흘간의 가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르네는 굉장히 절망적이고, 당황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나 미친 거 아니야? 뭘 또 두근대고 그러는 거야? 이러려고 나온 게 절대 아닌데,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르잖아


…!’

별안간 자신의 홀로서기가 이대로 허무하게 끝이 날까 걱정스러워졌다.

기껏 마음 다잡고 ‘더 이상 보호만 받고 있지 않겠다!’ 호기롭게 선언했던 지난날들이 다 뭐가 되냔 말이다.

“혼자 있을 시간, 줄 만큼 줬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 르네. 네 장단에 맞춰 주기엔 아무래도 내가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으니.”

그제야 르네는 그간의 이상했던 점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래, 사막의 도적 떼가 보이지 않았던 건 그냥 르네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하늘이 도운 도주? 그딴 게 아니란 거다.

그건 모두 르네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미리 길을 닦고 치운 아르카이츠 덕분이었던 거다.

“내가 여기에 올 줄 알고 있었어…?”

“…이제 와서 그걸 묻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나? 르네, 이만 일어나도록 해. 몸에 무리 가겠어. 내 장난이


조금 심했군. 얼른 가서 씻고, 먹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고작 이러려고 사흘 밤낮 개고생해 가며 온 줄 알아?”

“반항은 이 정도면 됐어. 다 설명해 줄게. 그러니….”

“싫어! 안 가, 적어도 지금은 절대 안 가!”

르네는 고개를 내저으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곤란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검은 천을 르네 머리 위에 씌우는 것 아니겠는가.

“뭐, 뭐야? 왜 다시 씌워?”

“길 외워서 도망갈까 봐.”

그대로 르네를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 들었다.

웃긴 상황이었다. 르네는 손은 뒤로 결박되어있고, 모래 뒤집어쓴 꼴은 영락없는 사막의 노숙자였는데, 황태자


정복을 갖춰 입은 사내는 그런 꼬질꼬질한 이를 아주 귀한 이 대하듯 안아 드니 말이다.

“뭐 하는 거야?”

“말 안 들을 거 같아서.”

“내려놔. 나 당신 싫어서 떠난 거야.”

“아닌 거 잘 알아.”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네…. 한 달 가까이 본체만체할 땐 언제고….”

투덜대긴 했지만 르네는 나름 얌전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어차피 지금 반항해 봤자 힘들어지는 건 본인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으니까.

뭐 이렇게 짧은 방황이야?

본인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는 듯 입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얼굴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고? 그런 사람이 그렇게 굴어?’

콧방귀를 뀌는 르네였다.

내 비록 미약한 가출이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르네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 없었다.

이대로 황궁에 돌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한데 참 신기했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던 아르카이츠의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황궁에 돌아갈 생각 없다는 거 알아. 당신이 무슨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지도 알고 있고.”

“…….”

“억지로 데려갈 생각 없어.”

“…….”

“보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무슨 의미야, 그거?”

르네의 물음에 아르카이츠는 침묵했다.

르네는 이상하게도,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아르카이츠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안아 든 그의 손이 매우 뜨거웠고, 또 아주 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꼭 아주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의 행동 같았다.

‘아까 전에 내 얼굴을 만질 때만 해도 체한 사람처럼 차갑더니. 닿기만 해도 불덩이처럼 뜨겁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 * *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르카이츠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르네가 제 곁을 떠난 지난 사흘간.

그는 자신이 이렇게 쉽게 평정심을 잃는 사람일 줄 몰랐다.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며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그런 하찮은 행동을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 하찮은 행동.

르네가 하면 귀엽고 사랑스럽겠지만 제가 하면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멍청해 보이는 행동 말이다.

한데 다리라도 떨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 걸 대체 어쩌란 말인가.

르네가 아르콘 부족의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흘 밤낮 동안 아르카이츠는 잠에 들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다.

심각한 얼굴로 앉아 오른 다리를 연신 떨어 대며….

“도적들을 미리 다 처리해 뒀는데,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지?”

또는….
“혹 식수나 식량이 떨어진 거 아닌가?”

혹은….

“밤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는데, 르네가 이 추위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해서….

“아무래도 정찰대를 꾸려 르네를 찾아야겠다.”

아무래도 르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정찰대를 보내서 확인이라도 해야 한다, 닦달을 해 댔다.

결국 보다 못한 아르콘 부족의 추장이자 그의 할아버지 되는 이가 아주 질린 듯한 얼굴로 제 손자에게 말했다.

“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황태자 전하.”

“아무리 그래도 이리 늦게 도착할 수가 없잖소.”

“전하께서 출발하시고 하루 만에 도착하신 건, 아르콘 부족의 명마를 타고 오신 데다가 쉬지 않고 곧장 모래


폭풍까지 뚫어 최단 거리로 오셨으니 가능한 거지요. 보통은 제국 경계선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데 평균 사흘
정도 걸립니다.”

“…….”

“그러니 이제 제발 좀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그리 왔다 갔다 하시니 보는 제가 더 불안합니다.”

추장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쉴 새 없이 왕복해
댔다는 걸 깨달았다.

머쓱해진 얼굴로 자리에 앉은 아르카이츠는 이번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그리도 걱정이 되십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면 왜 도망치도록 놔둔 겁니까? 이리 불안할 줄 몰랐던 겁니까.”

“…몰랐던 건 아니고.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오.”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각인한 오메가를 제 손으로 떠나보낼 알파가 세상 어딨단 말입니까?”

추장은 제 손자를 바라보며 쯧쯔 혀를 차곤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페트라의 아들 아니랄까 봐, 어쩜 제 어미와 하는 짓이 저리 비슷한지.

아르카이츠가 저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것은 알파 특유의 완벽함에서 기인했다.

살면서 가지고 싶은 것들은 죄다 가졌을 거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으며,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뤄 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 모든 문제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알파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딱 하나 빼고.

알파들은 감성적이지 못했다.

해서 그들은 언제나 감성적인 것에 유약했다.

사랑에 관련한 것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해서 해결될 게 아니니까.

그래서 언제나 정답만을 맞히던 알파들은 연속적인 오답의 향연에 정신 못 차리고 당한다.

지금 아르카이츠가 바로 그 꼴이었다.

그는 언제나 완벽했었기에, 완벽하지 못한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을 테지만 그 짐작은 당연히 빗나갔으며, 어마어마한 치명상을 남길


거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들은 자주 이런 실수를 했다. 특히나 우성 알파들은 더더욱.

각인한 오메가를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다는 착각.

자신은 그 어떠한 때에도 동요하지 않고 굳건할 수 있다는 오만.

‘…알파들은 각인한 오메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가.’

추장은 다시 한번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아까 전까지 앉아 있던 그가 또 언제 일어난 건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각인한 알파는 위험하다는 거로군.’

알파가 각인하는 일은 드물었다.

애초에 각인이란 알파와 오메가면 무조건 눈이 맞는 그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알파 중에 평생 각인할 오메가를 만나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대부분의 알파들은 그저 발정기의 오메가나 아니면 호감인 베타와 몸을 섞어 후사를 이을 뿐이었다.

추장 역시 그랬다. 해서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는 몰랐다. 다만 이론으로 배워 알 뿐이었다.

아르카이츠 역시 르네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이론과 달리 현실에는 온갖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아르카이츠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터.

추장은 페트라 황후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70.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절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그 진실은 제 남편을 고통스럽게 할
거예요. 그는 평생을 알파로서 살아왔습니다.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마침내 제가 보듬어 줄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이 시기에 아르콘 부족의 번영을 위한다는 이유로 고서를 공개한다니요!”

“그 고서는 과거 아르콘 부족과 헬리오스 제국이 동등한 위치였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다! 헬리오스의 왕들이
대대로 알파였던 것은 모두 이 아르콘 부족의 핏줄 덕분인 거다! 지금 저들을 봐라.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우릴 사막 너머로 쫓아낸 걸로도 모자라 야만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까지 달아 붙이지 않느냐!”

“그깟 칭호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넌 아르콘 부족, 그것도 추장의 딸이라는 자가. 평생 알파로서 추앙받던 이가
스스로 오메가인 척 평생을 거짓 속에서 살겠다는 것이냐! 전사의 긍지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사랑에 눈이 멀어
제 혈족을 버리는군!”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이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실이 알려지는 걸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차마… 단지 부족의 명예를 위해 그를 저버릴 순 없어요.”

그날 이후 추장은 페트라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그녀는 고서를 훔쳐 숨긴 것에 대해 속죄라도 하듯 아르콘 부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고자 노력했으며,


아르콘 부족에 부족한 온갖 물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아르카이츠가 태어났을 때.

하여 아르카이츠가 알파 중의 알파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제야 페트라는 마음의 짐을 덜어 놓은 듯 보였다.

추장은 제 딸의 그런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제 딸과 손주를 완전히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파비안 황태자가 아르콘 부족의 고서를 이용해서 황태자비를 몰아낼 계획이라고요.”

추장은 아르카이츠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환기시키고자 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마뜩찮은 얼굴로 고서를 넘기던 아르카이츠는 그에게 뭔가를 짚어 줬다.

추장은 그가 가리킨 곳을 지그시 읽어 내려갔다. 노안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적인 부분만 보자면, 사실 파비안 황태자의 행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부족에


피해를 주는 요소가 아니니까요.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 전하를 지키기 위해 지금 우리더러 고서의 진실을
스스로 밝혀내라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찌하여 이 고서가 파비안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까지. 그렇게
된다면 결국엔 황제의 비밀까지 들춰야 하는 일입니다. 감당, 가능하겠습니까?”

하나의 거짓말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것에 얽힌 수많은 거짓말들을 모두 밝혀내야만 했다.

아르카이츠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고, 아마 황제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황제가 과연, 그 거짓말들을 들춰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무리 병석에 누웠다 해도 아직 제국의 황제. 어쩌면,
그 역시 파비안 황태자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거래가 있든 없든, 난 그 누구도 르네를 건들지 못하게 할 겁니다.”

“아르카이츠 전하.”

“그러니, 르네가 도착한다면 그 애의 체질에 대해 한번 봐 주십시오. 열성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이곳밖에 없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불리하신 입장이라는 거 잘 아시죠? 그곳엔 몽마까지 있다면서요. 몽마의
능력을 너무 얕보지 마세요. 전하께서 홀리지 않는다 한들, 다른 모든 인간들이 홀린다면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혈육에게 위로나 위안은 못 해 줄망정 실패할 거다, 포기해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아르콘 부족의 추장이었다.

현실적으로 봐도 아르카이츠가 르네를 포기하는 것이 모든 면에 있어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파비안 황태자의 목적이 전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뺏는 것이라면서요. 알파에게 각인한 오메가를 잃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를 두고 황궁에 돌아가십시오. 그렇다면
황태자비의 안전은 보장하도록 하죠.”

“르네는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갈 거요.”

“이제 곧 산달이 다가올 텐데, 그 몸으로 앞으로의 일들을 버틸 수 있을까요. 온실 속 화초 같은 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

“모든 것들과 척을 진 채 피를 묻혀서라도 그를 지켜 낼지, 아니면 황태자비를 포기하고 제국과 모두의 비밀을
지키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전자를 선택하겠소.”

“전자를 선택하게 된다면 우리 아르콘은 당신에게 협력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비밀은, 우리의 수치와도
관련되어 있으니까. 하여, 황태자비의 신분은 도망자일 뿐입니다. 그가 우리 부족의 영토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는 제국의 도망자로 간주하여 그에 맞는 처우를 할 겁니다.”

제국에서 도망친 도망자는 대부분 범죄자나 추방된 이들. 혹은 처형될 위기에 도망친 겁쟁이.

아르콘 부족은 그런 비겁자들을 환대하지 않습니다.

추장의 말을 듣고 있던 아르카이츠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 아르콘 부족의 명예와 긍지 그리고 법도를 중시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점은 잊고 계신 것 같군요.”


“…….”

“아르콘 부족의 추장 자리는 혈육만이 승계할 수 있다는 것을. 외동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아르콘 부족의 추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 추장이 죽기라도 한다면, 뒤이어 추장 자리에 올라 아르콘 부족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르카이츠 본인이라는 소리였다.

아르카이츠의 말에 추장의 얼굴이 급속히 굳어졌다.

“지금 날 겁박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손자님.”

“그럴 리가요, 할아버님. 그저 손자와 손자며느리에게 아량을 좀 베풀어 달라는 것이지요.”

“아량을 베풀어 달라는 이가, 꼭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쳐다봅니다.”

“처자식을 지키기 위한 자의 발악쯤이라 생각하고 어여삐 여겨 주신다면야. 이 은혜.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능글맞고 뻔뻔한 놈 같으니.

말이야 그럴싸하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할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손자처럼 보이겠지만.

그 말을 잘 들여다보면 어차피 죽으면 이 부족은 내 것이며,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라도
그 자리를 가져갈 테니,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순순히 협조해 달라.

이런 뜻 아니겠는가.

아르카이츠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가 난 듯 보이다가도, 안도한 듯, 또 그리웠다는 표정을 하는 얼굴을 보니.

‘도착했나 보군.’

르네 피어스가 도착한 듯했다. 저런 얼굴 보일 만한 이가 이 세상에 달리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추장은 잠시 제 손주를 가만히 바라봤다. 페트라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페트라. 정녕 이래야만 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이를 너무 사랑해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두어도 싸울 수 있을 만큼요.”

추장은 그를 지나쳐 르네를 맞이하러 가려는 아르카이츠에게 물었다.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두어도, 싸울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십니까.”

제 딸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아르카이츠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궁금했다. 각인하여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알파의 심정을.

어디까지 제 오메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고개를 돌려 추장을 바라봤다.

“그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잘도 그런 말을….”

아르카이츠의 말에 추장은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런 희생적인 말들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가장 강해야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파비안
황태자의 계략에 놀아나기만 하면서, 그런 말들이 신뢰가 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아르콘 부족은 오로지 강한
자만을 인정합니다.”

“누가 그럽니까. 내가 파비안의 계략에 놀아났다고.”

“…….”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겠습니다. 아르콘 부족은 강한 자를 위해 몸을 수그리는 것이 아닌,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수그린다, 그리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미 죽은 사람의 말로 날 설득하려 해 봤자, 페트라는 아르콘 부족의 수치고 배신자입니다. 그 애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우리 부족을 배신한 거나 다름없으니! 하니 내게 혈육의 정을 들이밀지 마십시오.”

추장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 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것에 대한 씁쓸함이 남아 있는 듯 동요하는


눈빛으로 괜히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말과 행동이 영 다르니, 아르카이츠는 그런 추장을 바라보다 짧게 말했다.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이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자 노력을 어찌 한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추장은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양 놀란 듯한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설마…!”

아르카이츠는 픽 웃어 보이곤 그대로 제 아내를 맞이하러 방을 나갔다.

남겨진 추장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르카이츠가 나간 자리를 쳐다봤다.

#71.
아르카이츠에 품에 안긴 르네는 여전히 얼굴이 천에 가려진 채로 어디론가 향했다.

몇 번 내려 달라, 나도 다리 있다, 내가 걷겠다, 반항을 해 봤지만 그런 게 아르카이츠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르네는 반항하는 것도 지쳐 얌전히 안기기로 마음을 바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르네는 제 몸이 아주 조심스레 폭신한 솜 덩어리 위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조심스레 벗겨졌다.

탁 트인 시야에 보이는 것은 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아르카이츠의 금색 눈동자.

꽤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빛에, 르네는 조금 그리웠다 생각했다.

“그 눈빛, 그 시선.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네요.”

침대에 앉아 있는 르네의 시선에 맞춰, 아르카이츠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르네는 이렇게 저보다 낮은 시선에 있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은 또 처음이다 생각했다.

위치적으로 우위를 선점하니, 아르카이츠의 금색 눈동자가 더더욱 잘 보인다.

“얼굴 한 번 보기가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가출하고 나서야 내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있네.”

“날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건가, 정말로?”

“글쎄, 그건 말해 주고 싶지가 않은데요.”

“달리 할 말이 없나?”

“그러는 아르카이츠는요. 나한테 할 말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요.”

“미안해.”

“그게 끝?”

“보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바보 같았어. 널 놓아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 후회하는 중이야.”

“날 왜 놓아주려고 했는데요. 참 웃기네.”

“네가 나한테 각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날 사랑하지 않는데, 억지로 곁에 두면 괴로워할 거라
생각해서.”

“뭐어?”
르네는 살면서 제일 황당한 말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런 생각까지 한 사람이, 가출한 사람을 사흘 만에 잡아 내는 것도 참 웃기네요. 도적 떼 하나 만나지 않는


것이, 나는 꼭 하늘이 내 가출을 도와주는 줄 알았지. 근데 알고 보니 이게 덫이었을 줄이야.”

“…….”

“뭘 그렇게 눈치를 봐요. 답지 않게?”

아르카이츠의 얼굴은 꼭 르네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살면서 천하의 아르카이츠가 눈치 보는 모습도 다 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르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어 올려 아프지 않게 그의 이마를 툭, 때렸다.

“덩치만 컸지, 알고 보니까 겁쟁이네. 난 나만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이거 참 동지가 생겨서 기쁘다고 해야


하나.”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손을 잡아 내리며 꽤나 간절하게 잡아 왔다.

“우습게도, 당신 말이 맞아.”

“…….”

“네가 곁에 없다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어.”

“…….”

“차라리 죽으라면 죽겠어.”

“뭘 또 죽기까지….”

“르네. 날 미워하나? 날 떠나고 싶은가?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었나?”

“아르카이츠.”

“이곳에서 당신이 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더 이상 널 놔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됐어. 다시 내 곁에


두고 싶어. 널 데리고 황궁에 돌아갈 거야. 너는 내 아내이고, 나는 네 남편이자 배 속의 아이는 우리의
결실이니까.”

르네는 갑작스런 고백에 조금 놀라 눈을 끔뻑이며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이상하다. 미카엘에게 홀려서 날 무시한 게 아니었던 건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애절하게 구는 이유가 정말 단순히 날 원해서인가?

“한 달.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날 멀리했던 이유가 뭔지 궁금해요. 그동안 당신은 나뿐만 아니라, 배 속의


아이까지도 외면한 시간이니까. 두 배로 설득해야 할 거예요.”

르네는 그렇게 말한 뒤, 스스로에게도 조금 놀라선 잠시 눈을 크게 뜨며 작게 숨을 들이켰다.


뭐야, 나 방금 되게 침착하고 진중하게 말했잖아?

이런 말을 할 줄도 알고, 나 꽤 대단한데?

아르카이츠 역시 그런 르네의 말에 놀란 듯이 그를 쳐다봤다.

르네는 어쩐지 조금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 도망치려는 마음으로 당신 곁을 떠난 게 아니에요. 당신이 미워서 도망친 것도 아니고. 뭐… 물론 한번


긴장 좀 해 봐라, 하는 마음은 조금 있었긴 한데. 그저 그냥 치기 어린 마음으로 가출을 한 게 아니에요.”

“르네.”

“내가 여기에 온 건, 내 감정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내가 나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어서.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온실 속 화초인지. 아니면 땅에 뿌리를 내려 살아갈 수 있는 나무인지 궁금해서.”

“…….”

“그래서 당신 곁을 떠난 건데….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좀 확실해지는 것 같아요.”

르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아르카이츠의 얼굴을 감쌌다.

“응. 역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게 맞아요. 사실 나 말고 다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잘 몰랐었는데. 그 잠깐의 이별에도 가슴이 이렇게 아린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아르카이츠한테 각인했나
봐요.”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되레 당황한 건 아르카이츠였다.

사실 그는 르네가 저를 밀어낼 줄 알았다.

신뢰를 저버렸다, 널 믿을 수 없다, 네가 싫다, 끔찍하다, 원망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그를 혐오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들 아르카이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곁에 둘 생각이었다.

개처럼 기며 용서를 구하든, 아니면 완력을 써서라도, 혹은 처절하게 빌든, 뭐 어떤 식으로든 르네의 발목을 쥘
생각이었다.

한데 이런 고백이 돌아올 줄이야.

“…날 미워할 줄 알았어.”

“또 모르죠. 이렇게 말했는데 가끔 얄미워질 수도.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날씨처럼 바뀌는 거라잖아요. 아직


나에 대해서조차도 다 알지 못하는데. 근데 제 장점이 뭔지 알아요? 엄청나게 솔직한 거예요. 만약 그런 감정이
든다면 말할게요. 서운한 건 서운하다, 미운 건 밉다, 좋은 건 좋다. 지금은… 음. 역시.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나 봐요.”

따귀 정도는 때려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상했다. 아르카이츠를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까 막상 든 생각이….


그래, 당신이 날 배신할 리가 없지.

이런 생각이 들지 뭔가.

“그래도, 굳이 맞아서 아르카이츠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면. 때려 줄 의향은 있을 것 같네요.”

어디 필요하다면 말하라는 듯, 르네는 조용히 오른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대며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르카이츠는 그런 르네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뭔가 좀 바뀐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성숙해진 느낌이랄까.

“미안해.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니까요. 어디 한번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 보시죠. 두 배로.”

아르카이츠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얌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르네의 양손을 꼭 잡은 뒤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일을


말했다.

미카엘의 정체가 몽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왜 자신이 그동안 르네를 본체만체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

“…이유라 해 봤자 사실 변명이나 다를 거 없지만. 몽마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르네?”

“본인이 직접 얘기해 주더라고요. 인간의 속마음을 읽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 자기가 건드려서 안 넘어오는


이가 없다고.”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몽마에게 예외인 존재가 있어.”

“예외?”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인간의 마음은 읽을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거예요? 내가 아르카이츠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계획을 말해 주면 그


계획이 미카엘에게 들통날까 봐?”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세상에 뭐 이런…. 화를 내고 싶긴 한데, 생각해 보면 또… 당신 입장도 이해 가니까…. 아니, 근데 그거야


둘째 치고, 왜 침실에는 안 들어와요? 그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자는 게 얼마나 옆구리 시린 일인지 알기나 해요?”

“파비안을 속이기 위해서 조금은 거리를 둬야 한다 생각했어. 우리 사이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모습을 보이면
파비안의 다음 타깃은 네가 될 테니까.”

사실 무엇보다 아르카이츠는 저에게 서운해하는 듯한 르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상하게 그런 얼굴만 보면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운 뒤 르네를 꽉 껴안고 온갖 주접은 다 떨고 싶어지는


그런 기묘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아르카이츠가 주책맞게 군다며 우스운 꼴이 나는 건 둘째 치고, 여태까지 쌓아 왔던 모든 계획들이 모조리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알겠어요. 일단, 미카엘한테 흔들린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한 거 같으니 믿을게요.”

“…르네. 고마워.”

“대신에 궁금한 건. 앞으로 이제 어떡할 거냐는 거예요. 아니, 당신이 황궁을 비우면 어떡해요? 파비안이
지금쯤 대신들을 다 구워삶고 있을 게 뻔한데! 미카엘은 몽마잖아요. 꿈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요. 대신들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면 어떡하려고. 나한테도 그래서….”

“미카엘이 당신한테 능력을 썼나?”

“별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미카엘의 목덜미를 문… 자국이…. 뭐 그거 때문에 속상해서 뛰쳐나온 건
아니거든요?”

#72.

“목덜미?”

“아이, 표식이요. 표식! 미카엘이 아주 대놓고 자기 목덜미에 난 잇자국을 보여 주던데. 솔직히 믿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 파비안 황태자랑 짜 놓고 만든 걸 수도 있고, 몽마의 능력으로 환시를 보여 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런 허튼수작에 넘어갈 만큼 바보는 아니라 말하는 르네였다.

“근데, 나는 당신을 믿지만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황태자비 자리에 있는 게 싫을 사람도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그걸 신나서 믿고 떠들어 댈 게 분명하니까.”

미카엘의 등장 이후, 평소 피어스 가문을 탐탁지 않아 하던 몇몇 대신들이 마치 활어처럼 신나서 팔딱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봐 온 르네였다.

궁중암투, 살면서 전혀 관련 없을 것 같던 일이 코앞에 닥쳐 있다 생각하니 막막해지는 건 당연했다.

“아무튼, 지금 이 상태로 돌아가 봤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는 거예요, 내 말은. …사실 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당신한테 잡힌 거 같아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뭔가… 조금은 버티다 가야 내 체면이… 가출한 사람 체면이
살지 않겠어요?”

머쓱한 얼굴로 말하는 르네에 아르카이츠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왜 웃어요! 난 지금 당황스러워 죽겠는데! 이렇게 오해고 갈등이고 쉽게 풀릴 줄 알았겠냔 말이야.”


적어도 사람이 가출했으면, 좀 애타게 여기저기 찾으며 후회하고, 걱정하고….

뭐 이런 모습을 보여 줘야 도망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최소 한 달은 생각했다.

한 달 정도는 그 누구도 자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 르네 피어스가 사막으로 도망쳤을 리가 없지. 걔는 그렇게 못해. 다들 그리 생각했을 테니까.

가출한 기간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래도 이제 막 홀로서기를 해 볼 결심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참이었다.

기껏 사람이 큰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바람 빠지는 결말이 될 줄이야.

르네는 다시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잠깐만. 근데 내가 지금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생각해 보니 황궁에 돌아가면 도망자의 체면은 둘째 치고.

대신들에게 시달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최악의 경우엔 황태자비가 사실 남자였는데 그간 모두를 속였다는 것이 탄로


나 재판에 회부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헤헤 웃고 있던 르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아니야. 안 갈래요.”

“응?”

“안 갈 거예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래.”

“왜 그래, 응?”

르네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갑작스런 변덕에 당황한 아르카이츠가 뭣 때문이냐 달래듯이 물었다.

그러자 르네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

“돌아가면 모든 거짓말이 다 탄로 나잖아요…!”

사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 거였다.

미카엘의 거짓말을 들추기 위해선 본인의 거짓말도 들춰야 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이후의 일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냥 지금이라도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르카이츠가 과연 따라와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곧 산달이 다가오는데, 황궁에 돌아가면 분명 태어날 아이는 엄청난 위험에 놓일 거예요. 당신을 노리다
실패하면 날 노릴 거고, 날 노리다 실패하면 당연히 아이를 노리겠죠.”

“르네.”

“어쩌면 황궁 밖에서 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지도 몰라요. 그곳에선 언젠가 분명 당신한테 나와 아이가 약점이
될 테니까. 언젠가는 다 지칠 거라고요. 지금은 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겠는데, 다시 그곳에 돌아갔다가 다시
내 발로 걸어 나오게 되든 혹은 타의로 밀려나오든, 그때의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지금은 내 의지로 나온 거니까.

내 의지로 당신 곁을 떠나온 거니 그 누구도 원망하지도, 탓하지도 않을 수 있는데.

다음번에는 이게 내 의지일지, 다른 누군가의 의지일지 확실하지 않아서 두려워.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무모하고 철없다 느껴질 만큼 행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아르카이츠는 르네를 진정시키려는 듯 머리에서부터 뺨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 눈을 피하는 그의 고개를 잡아 저를 보도록 했다.

“르네. 진정해.”

“…미안해요.”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런 준비 없이 널 잡으러 왔을까.”

“…….”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널 건드리지 못해. 물론 태어날 이 배 속의 아이까지.”

“…아르카이츠.”

“처음 널 본 그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모든 것을 바쳐 널 위할 생각뿐이었어.”

“…….”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해 가면서까지.”

“연극…?”

르네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르카이츠는 그에게 힌트라도 주듯 말을 흘렸다.

“너도 만났을 거야.”

“내가요? 내가 누굴 만났다는….”

그 순간 르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몇 주 전 르네가 황궁에 있었을 때 마주쳤던 정체불명의 가면을 쓴 여인.

“아,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황태자비로군요.”

“……”

“이름이, 르네 피어스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듣다니, 누구한테요?”

“당신 남편, 아르카이츠요. 앉아요. 보아하니 길을 잃다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휘감고, 얼굴에는 하얀 도자기 가면을 쓴 여인.

눈동자는 하얗게 바랜 것이 장님인가 싶다가도 행동은 또 앞을 훤히 내다보는 사람처럼 거침없던 그런 기묘한 사람.

정체가 뭔지에 대해서는 절대 말해 주지 않으면서, 르네나 아르카이츠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무도한 자.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는데.

“르네. 그대한테는 내가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내 이기적인 거짓말이, 그대와 아르카이츠를 괴롭혔으니까.”

그날 이후 몇 번 그곳으로 가 봤지만 다시 그 가면 쓴 이를 마주치진 못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대체 정체가 뭘까?

지금 와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거다.

“가면 쓴… 사람, 말하는 건가요?”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당신의 연극이랑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요?”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증인이야. 그 누구도 감히 매도할 수 없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인.”

“증인?”

“…그 사람은, 내 어머니야. 르네.”


흰 가면 너머 가려진 이는 다름 아닌 병환이 깊어져 죽고 말았다던 황후 페트라.

르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한참 뒤에야 르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페트라 황후는 이미 죽어서 국장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모습으로 아직 황궁에서 지내고 있다니.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사실인가요?”

“나와 어머니, 단둘만 알고 있는 사실이야. 이제는 르네 당신까지 포함해야겠지만.”

“…….”

모든 것은 아르카이츠가 자신이 각인한 상대가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 시작됐다.

* * *

약 10 년 전.

14 살 무렵의 아르카이츠가 피어스 공작과 독대를 한 날이었다.

당시 체스가 취미였던 피어스 공작은 함께 게임을 하자는 아르카이츠의 제안에 신이 나서 입궁했다.

결과는 열네 살의 아이에게 처참하게 체크메이트되고 말았지만.

피어스 공작은 그게 기분이 나쁘다거나, 창피하다기보다는 그저 ‘역시 알파는 달라도 뭐가 다르군!’ 같은 속


편한 생각이었다.

체스를 둔 뒤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아르카이츠는 원래 그를 불러들인 목적을 슬그머니 물어봤다.

“피어스 가문의 막내딸 말입니다.”

“막내딸이요? 아, 하하하!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아르카이츠 전하.”

“오해라뇨?”

“저희 집에 딸아이는 장녀 아델라이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막내아들인 르네가 있지요.”

“하지만, 저번에 분명 봤을 땐 여인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걸요.”

“아델라이드 고 녀석이 제 남동생을 여장시킨 뒤 데리고 다니는 악취미가 있습니다.”


“…여장? 그럼, 사내란 말입니까?”

“르네요? 예, 그럼요. 틀림없는 사내아이입니다.”

피어스 공작은 머쓱한 얼굴로 ‘아델라이드에게 주의를 주든 해야겠습니다. 매번 이리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헷갈려하는 이들이 있어서…. 허허.’ 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 아들의 체질에 대해 모르는 건가?’

그저 딸의 장난에 골치 아파하는 아버지의 얼굴 너머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르카이츠는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무언가 불편한 듯 괜히 목을 매만지고, 콧잔등을 찡그리는 것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의 태도였다.

‘…숨기고 있군. 숨겨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그 자리에서 피어스 공작에게 숨기는 것을 모조리 불어라, 할 만큼 급한 성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르카이츠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르카이츠 역시 사내가 오메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 아버지가 악착같이 숨기는 그 비밀 역시.

해서 아르카이츠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제 운명의 오메가를 만났습니다.”

“그게 정말이니, 아르카이츠! 세상에. 축하한다. 어느 가문의 오메가이니?”

“…피어스 가문이요.”

“피어스 공작 가문이라. 아델라이드 피어스 영애로구나. 이렇게 빨리 제 오메가를 찾는 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는데. 내 얼른 황제께 말하여 너와 영애의 약혼을 추진하도록 하마.”

황후는 제 아들이 각인한 오메가를 만난 것에 크게 기뻐했다.

“한데 아르카이츠, 어찌하여 얼굴이 그리 어두운 게냐.”

“어머니. 제가 각인한 오메가는… 아델라이드 피어스 영애가 아닙니다.”

“…응?”

“르네 피어스요. 제 오메가는 르네 피어스입니다.”

#73.
“…무언가… 오해를 한 게 아닐까? 아델라이드 피어스를 보고 각인한 것을, 네가 착각을 했겠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

“어머니.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선례를 알고 계시죠? 고서 말입니다. 아르콘 부족의 고서에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수많은 선례와 정보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 고서를 보고 싶습니다.”

“안 된다.”

“어째서요?”

“…….”

“어머니. 뭔가를 숨기시는 거죠? 피어스 공작 역시 르네 피어스의 체질에 대해 알면서도 숨기는 것 같은데.
사내인 오메가인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될 선례가 있는 것이 분명하죠?”

아르카이츠는 살면서 어머니가 당황하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언제나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던 분이, 말을 잇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예전부터 짐작만 해 왔던 점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르카이츠!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될 일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황후는 필요 이상의 예민하게 반응하다 아차 싶어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제 아들은 우성 알파라서, 아주 미약한 페로몬이라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황제가 그 어떤 강한 억제제를 먹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알파인 페트라 황후가, 그의 목덜미를 물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황제의 목덜미에 버젓이 잇자국이 있다면 누가 그를 알파라 믿겠나.

우습게도 잇자국은 페트라 황후의 목덜미에 새겨져 있었다.

황후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모든 이야기를 아르카이츠에게 털어놓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카이츠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럼 제 오메가인 르네는요. 르네는 사내입니다.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선례도 없이 그를 황태자비로 맞이할
경우, 다른 대신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르네를 끌어내릴 게 분명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르네 역시 너한테 각인을 했느냐다. 아직 시간은 많다. 급할 것은 하나 없으니,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 보자꾸나.”

황후는 어린 아르카이츠를 달래듯 말했지만, 사실 그건 본인을 안심시키려는 것이기도 했다.

어린 아르카이츠가 성인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전에 이 엉켜 버린 거짓말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를 거다.

이건 페트라 황후가 살면서 처음으로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걸까.

황후는 해를 거듭할수록 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간단한 빈혈 정도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각혈을 하고 난 뒤부터는 침대 밖으로 거동이 힘들어질


정도였다.

오메가들은 원래 잔병치레가 잦은 이들이 있다고 했다.

황후 역시 그래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약을 써 봐도 차도가 없는 황후의 병명에 수많은 의사들이 달라붙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그게 병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파는 보통의 인간들보다 신진대사가 원활하여 병에 걸리지 않는다.

잔병치레 없이 남들보다 장수하다 자연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황궁에 황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었다.

황후가 처음 쓰러지고 난 뒤, 황제는 대외적으로는 황후가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 공표했지만, 뒤로는 그녀에게
독을 먹인 이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궁을 뒤엎어도 그게 누구인지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황후의 병세는 더 짙어졌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문병하러 온 아르카이츠는, 침대에 축 늘어진 어머니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머니. 어머니…!”

아르카이츠는 곧장 페트라 황후를 안아 들고 그녀의 심장이 완전히 멈췄는지 확인했다.

창백하게 식은 몸은 차가웠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물들었지만 아주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었다.


아르카이츠는 조용히 의원을 불러 얼른 죽어 가는 황후를 가까스로 살려 냈다.

의원은 황후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이것저것 약을 조제하기 시작했고, 시녀들은 황후의 차가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푸르뎅뎅하던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병세가 짙어지셨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만큼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해독제는 꾸준히 드시고
계셨으니까. …어머니를 죽이려 한 자가 아직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짧은 순간 아르카이츠는 거짓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르카이츠는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뒤, 의원에게만 조용히 말했다.

“지금부터, 황후 폐하가 죽었다고 공표할 것이다.”

“예?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으셨으나,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아르카이츠 전하.”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 맥박이 느리게 뛰게 만드는 약초를 먹여라.”

“하면… 황제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들은 황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후의 침실에 달려왔지만, 이미 황후는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다.

황제는 의원을 다그쳐 몇 번이고 다시 맥박을 확인하라 명령했다.

그럼에도 믿지 못하겠는 듯 직접 황후의 가슴에 귀를 대었지만 안타깝게도 황후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아르카이츠는 아내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황제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장례가 준비되는 동안 그는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가짜 시신으로 바꿔치기했다.

정교한 밀랍인형이었다. 장례 동안 감히 황후의 시신에 손을 대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장례 기간 동안 아르카이츠는 제 사람들을 시켜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황후를 숨긴 뒤, 의원과 함께 황후의


회복에 주의를 기울였다.

페트라 황후는 자신의 장례식이 끝나 갈 때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독에 노출되고, 그 이후에도 해독제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그녀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생각만큼 불편하지는 않구나.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 그런지 보이진 않아도 느낄 수는 있다. 목숨을 부지했는데
눈 정도야, 신께 바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른 페트라 황후는 장님이 된 것에 대해 그리 크게 절망하지 않았다.


“벌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려 했던 죄에 대한 벌.”

“얼굴을 보셨겠죠. 누구입니까.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자요.”

“…파비안.”

아르카이츠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의 생모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던 아르카이츠는 제 이복형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파비안의 손에 고서가 들어갔다, 아르카이츠. 그 애는 고서를 이용해서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거야. 나와
황제에 대한 미움을 너한테 풀려는 것이다. 그 애를 저지해야만 한다.”

“어머니. 어머니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

“황궁에 돌아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모두를 속여 온 것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만 합니다.”

“아르카이츠!”

“무엇보다, 제 아내가 될 르네를 위해서라도요.”

“너 설마….”

“예, 파비안의 계략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게 뭐든 간에, 그는 내 것에 손댈 수 없음을 알려 줘야죠.”

파비안은 제 어머니를 죽였다. 죽인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생모에 대한 복수든, 혹은 그의 태생에 대한 원망이든 중요치 않았다.

아르카이츠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파비안은 결국엔 르네를 위험에 빠뜨리는 식으로 제게 고통을 줄 것이라는 걸.

확신에 찬 아르카이츠의 눈빛을 보기라도 한 양, 페트라는 희뿌연 눈을 깜빡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각인을 한 알파는 위험하다는 말이 맞아. 제 오메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면에서….
어쩌면 그게 본인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대답했다.

“네 말대로 모두를 속인 대가를 치르도록 하마.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아르카이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듯, 영원한 거짓말도 없는 법.

처음 자신의 오메가를 마주하고 너무나도 깊은 사랑에 빠져 장님이 되었던 페트라는 비로소 진짜 눈을 잃고 나서야
완전한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늦게나마 속죄하듯 아르카이츠를 돕기로 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주술을 다루신다 들었습니다. 아르콘 부족에서는 제국과는 달리 흑마법이 금지된 영역이
아니라고요.”

“그렇긴 하다만, 흑마법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흑마법을 쓰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제가 아닙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파비안이요. 파비안은 흑마법을 필요로 할 겁니다. 그가 고서를 훔쳐 갔다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고서를


이용해 나와 르네를 공격할 건데, 아마도 그건 예언서의 부분을 이용해서겠죠.”

“그걸 어찌 확신하니?”

“파비안이 단순히 에밀리 황후에 대한 복수심으로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게는 친모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습니다.”

아르카이츠는 예전에 파비안이 한 말을 떠올렸다.

#74.

에밀리 황후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이복형제인 그들을 두고 귀족들이 떠들어 대는 말들.

어린 시절의 아르카이츠는 제 이복형이 그런 말들을 듣는 게 조금 안쓰러웠다.

그 당시의 아르카이츠는 꽤나 정이 많았으니까.

“파비안 형…. 혹시 나와 내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르카이츠?”

“대신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만약 아버지가 아르콘 부족에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밀리 황후께서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고….”

“누가 그런 말을 해? 빌먼 경이 그래?”

“응.”

“그 영감 말 듣지 마. 그 사람은 그냥, 제 조카가 두 번째 황후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거랑은 별개로 맞는 말이잖아. 나 때문에 형 위치도 불안정해진 거고.”

“뭐가 불안정해? 아버지는 우리 둘에게 공평하게 제국을 나눠 주신댔는데. 뭐야. 이 녀석, 설마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서?”

“아니야, 그런 거!”

손사래 치는 어린 아르카이츠에게 어깨동무를 한 파비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 너니까 해 주는데, 사실 에밀리 황후께는 죄송하게도, 내 어머니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아. 그리움이
없달까. 오히려 난 페트라 황후께 감사해. 차별 없이 날 키워 주셨으니까. 피부색만 다르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친모로 알고 지냈을걸?”

“형….”

“난 딱히 상관없어. 우리 둘 다 알파고, 오메가를 만나 제국을 번영시키면 될 일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둘이 아버지가 같은 건 맞잖아? 난 크게 상관 안 해. 그러니 대신들이 뭐라 떠들어 대든,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르카이츠. 난 내가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알파는 그런 걸로 상처받는 거 아니야.”

“응.”

아주 어릴 때, 고작 한 살 형인데도 파비안은 꽤나 의젓하구나 생각했었다.

아직 알파로서의 능력이 발현될 나이가 아닌데도 파비안은 완벽한 알파였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 그의 원망 대상은 단순히 ‘불쌍한 내 어머니를 밀어낸 황후’가 아니다.

파비안은 알파가 아니다.

황제가 오메가임을 속이듯, 파비안은 자신이 베타임을 속이는 것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파비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부러움과 열등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미소가 이전처럼 해사하지 못하고, 파르르 입꼬리가 떨리던 것은.

아마 그건 아르카이츠의 첫 러트 발현 이후부터였을 거다.

왜 나는 러트가 오지 않나.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역시 불안했을 거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길 알파로 태어났는데, 어찌하여 나는 러트가 오지 않지?

황위를 잇기 위해서는 알파여야만 하는데.


그런 불안들은 황제가 알파가 아닌 오메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열등감에서 분노로 변했을 거다.

“그 역시 아버지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겁니다. …어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습니다, 어머니.”

“…파비안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죠.”

페트라 황후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였으나 아르카이츠와 차별 없이 제 아들처럼 키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 것 또한 황제와 자신의 업보였다.

* * *

굉장히 방대하고도 복잡한 이야기에 르네는 뇌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아르카이츠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연 르네가 말했다.

“그러니까… 파비안에게 일부러 몽마를 소환하도록, 아르카이츠 당신이 페트라 황후를 주술사로 속여 붙인 거라는
거죠?”

“맞아.”

“왜, 왜 그랬어요!”

르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따졌다.

그러니까 그 미카엘을 불러낸 게 겉으로 봐서는 파비안 같겠지만, 결국엔 아르카이츠와 페트라 황후 때문 아닌가?

그를 돕지 않았더라면 몽마를 소환하는 일도 없을 거고, 몽마를 소환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마음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무슨 짓을 하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낫다 생각했어. 한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자만 같군.”

“…한 대 때려도 돼요?”

르네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르카이츠는 잠시 르네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슬그머니 자신의 오른뺨을 내줬다.

뺨을 갈기든 후려치든, 아무튼 간 자신의 자만으로 르네가 마음고생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걸까.
이를 악물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린 르네는 이상하게도 내려치진 못했다.

원래 처음이 어렵다고, 저번에도 아르카이츠 뺨을 시원하게 갈겼으니 이번에도 그리할 셈이었는데.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한 대 치면 좀 울화가 사그라들 것 같은데, 왜 손이 안 내려오는 걸까.

르네는 제 앞에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르카이츠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그의 손을 잡아 올려 제 배 위에


올렸다.

“르네?”

“가만히 있어 봐요.”

때리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카이츠는 순간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태동을 느꼈다.

아주 정확히 르네의 배를 통통 차고 있는 것 작은 발의 느낌.

“나 대신 애기가 화내 주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딱히 안 때리고 싶어졌어요. 감사한 줄 알아요.”

태연하게 말하는 르네와는 달리 아르카이츠는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살면서 태동이라는 것이 뭔지 느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했다.

“뭘 그렇게 굳어 있어요?”

“…움…직이는….”

“아니 그럼 배 속의 애가 살아 있으니 움직이죠.”

며칠 전 먼저 태동을 경험해 봤다고 그새 여유 있는 척하는 르네였다.

사실 신기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저보다 더 놀란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조금 뿌듯하기까지 했다.

르네가 그토록 바랐던 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신기하네.”

“그 말이 끝?”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기뻐.”

“얼마큼?”

르네의 물음에 아르카이츠가 고개를 들어 르네를 바라봤다.


금색 눈동자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당황한 르네가 어쩔 줄 모르며 얼른 그의 뺨을 움켜쥐었다.

“아, 아니, 울 정도로 기쁘다고요?”

“당신은 안 그래?”

“나야 뭐, 처음엔 그랬죠.”

“처음?”

“사실 사막을 지나오는 동안에 먼저 느꼈거든요. 뭐… 살짝 코가 시큰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네. 당신이
이렇게 눈물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뭔가 좀… 놀라게 만든 보람이 있는데요.”

실실 웃으며 르네가 아르카이츠의 얼굴을 제 쪽으로 죽 잡아당겼다.

아르카이츠의 눈시울이 붉어진, 이런 기묘하고도 희귀한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르네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자, 아르카이츠는 조금 뚱한 얼굴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잖아. …미안해. 이런 몸으로 사막을 거닐게 해서.”

“어차피 당신이 도적 떼를 다 치워 주고 가는 바람에 무사히 도착했잖아요. 뭐, 오는 길에 목이 좀 마르긴


했지만. 그 정도 고난은 이겨 낼 줄 알아야죠. 나는 장차 아이도 낳을 몸인걸? 나 강해요. 이 정도면 조금,
강해진 거지. 안 그런가?”

“응. 강해졌어.”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르네의 배를 아주 조심스레 매만지며 껴안았다.

르네는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제 배에 귀를 대는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픽


미소 지었다.

‘누이가 말한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은 건가…. 아르카이츠가 날 배신한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황궁에


돌아가도 안전하겠지…?’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르네? 아무리 네 남편이라고 해도, 그가 밉지도 않아? 원망스럽지도 않냐고.
너한테 말뿐이라도 신뢰를 주지 못한 인간이야. 나라면 그러지 않았어.”

알빈이 기가 찬다는 듯 잔뜩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소리쳤다.


“황궁으로 돌아가겠다니, 네 마음가짐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너… 온실을 나가겠다느니 뭐니 그런 말
다 그냥 말뿐이었냐고. 그곳에서 네가 무슨 대접을 받았는지 잊은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알빈.”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여기 오자마자 다시 황궁에 돌아가겠다 말하는 건데? 황태자가 널 협박이라도 한 거야? 응?
피어스 가문을 볼모로 삼기라도 하겠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대체 왜 그 자식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건데!”

결국 폭발한 알빈이 ‘쾅!’ 책상을 내려쳤다.

그에 놀란 르네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75.

뒤늦게 인지한 알빈이 아차 싶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내가 너무 큰소리를 냈네.”

“아니야. 이해해. 네가 화내는 거. 나라도 황당했을 거야. 기껏 같이 여기까지 와 줬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돌아가겠다는 말이라면 나 같아도 화났어. 화내는 게 맞아.”

“근데도 무르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구나.”

실망한 듯이 가라앉은 알빈의 목소리에 르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그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르네는 한번 마음먹으면 그걸 쉽게 바꾸는 편이 아니었다.

은근히 외골수 기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알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르카이츠가 무릎이라도 꿇었나?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미안하대? 잘못했대? 그 미카엘인지 뭔지 모를 그


새로운 놈한테 질리기라도 했대?”

“그런 거 아니야.”

“넌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니, 르네?”

평소와는 달리 날카로운 알빈의 말에 르네는 그저 고개를 떨군 채 손톱만 틱틱 튕겼다.


“이 와중에도 그 인간은 너 혼자 여기 보냈어.”

“같이 오겠다는 거, 내가 혼자 가겠다 말한 거야, 알빈.”

“감싸 주기까지 하네.”

“지금은 너한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말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정말 미안해,
알빈.”

르네의 말에 알빈은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르네는 한번 고집을 피우면 끝까지 간다.

만일 그 고집을 꺾었다면 그의 심경 변화가 컸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거나, 혹은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을 때 주로 그랬다.

이번에도 둘 중 하나겠지.

그중에서도 후자의 경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럼에도 알빈은 르네가 내린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르카이츠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겠다니.

물론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르네를 선택했다는 것은, 르네에게 있어선 최고의 엔딩이었다.

황태자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으니 여기까지 와 르네를 기다렸을 테고, 르네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한번


신의를 저버렸던 사내를 다시 선택할 리는 없으니까.

둘 사이에 뭔가 긴 대화가 오고 갔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둘만 알고 있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거였다.

알빈은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르네의 죄책감 어린 얼굴을 본 순간부터 그런 말이 나올 줄 예상했다.

예상했지만, 역시.

“르네,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와 함께했는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야? 내가 지금 고작 사흘 동안 사막에서 굴러 댄 게


억울해서 이렇게 화내는 거라 생각하는 거냐고.”

“…나한테 실망했다는 거 알아. 쉽게 결정 바꾸는 거, 미덥지 않겠지.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한심해 보일
거라는 것도 알아.”

손을 꼼지락대며 말하는 르네에 알빈은 기가 찬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 그래. 르네는 정말 눈치가 더럽게도 없었지.’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우정이 모두 르네의 진절머리 날 만큼의 ‘눈치 없음’ 덕분이라는 걸
떠올렸다.

“…잊고 있었네. 르네 넌 정말 눈치가 없다는 걸.”

“응?”

“미덥지 않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한심하다거나, 그런 건 다 의미가 없어, 르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

“널 그 사람 곁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야.”

“…….”

“널 좋아한다는 의미야. 아니, 좋아하는 걸 넘어서,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네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던 그날
이후부터, 난 모든 걸 버리고 너와 함께 새로 시작할 다짐을 했었어.”

“알빈.”

“차라리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라고 말해 줘. 이용당한 편이 덜 비참하니까.”

“…미안해….”

“뭐가. 뭐가 미안한데.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대체 뭐가 있는데. 애초에 넌 정말 호의로만 받아들인 것뿐이잖아.


지금 내가 화내는 건, 그냥… 내 이기심 때문인 거야. 네가 다시 그를 선택한 게 싫어서. 난 결국 또
친구로서만 곁에 있었구나. 허탈해서.”

진짜 친구였다면, 네가 다시 황태자와 사이가 좋아져 안전을 보장받고, 황궁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기뻐하고


안도했어야 하는 거야. 알아?

자조적으로 말하는 알빈의 모습에 르네는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넌 잘못한 게 없어, 르네. 그냥… 나 혼자 설레발쳤다는 게 문제인 거지. 인정해야만 하는데, 인정하고 싶지가
않네.”

입 안에 쓰디쓴 것을 문 것처럼 알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르네는 그런 알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알빈, 너는 나한테 있어… 형제이고 친구였어.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알빈은 남 챙겨 주길 좋아하는 아이구나.

알빈은 날 친동생처럼 생각해 주는구나.

알빈은 정말로 좋은 친구구나….

정말 그렇게만 생각했나?

르네는 목이 콱 막히는 듯했다.


‘내가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건가.’

알빈이 널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했을 때 르네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알빈의 감정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그가 덜 상처받을지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아니. 이거 내가 사과해야 할 게 맞아. 알빈. 나… 어쩌면 네 마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지금도


이렇게 말하는 거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근데 말해야 할 거 같아. 모른 척해서 미안해. 그리고 내 마음은…
변함없어. 넌 나한테 그냥 좋은 친구일 뿐이야.”

부탁하면 다 들어준다고. 알빈은 분명 도와줄 거라고.

그리 생각했던 것 자체가 알빈이 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어서였다.

지금도 봐라. 아르카이츠에게 혼자 가서 말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어쩌면 지금 모든 상황들을 미리 예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르네는 사실, 알빈이 저를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좋아한다는 것을, 우정 이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거다.

그래야 그를 대하는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테니까.

예전의 르네였다면 분명 끝까지 모른 척했을 거다.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역시 넌 내 절친이야.

내 가장 친한 친구, 형제 같은 내 친구.

그런 말들로 알빈에게 더 상처를 줬을 거다.

“이제 그렇게 못 하겠어, 알빈. 미안해. 다시는 나 안 본다 해도 이해할게. 진짜 미안. 정말 미안해….”

르네의 말에 알빈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며 픽 웃음을 흘렸다.

“좀 창피하다.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것 같아서. 아. 맞지. 맞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고 있는 르네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놨다.

“됐어. 모른 척하는 것보다 이렇게 대차게 차이는 편이 나아.”

“…알빈.”

“뭘 또 친구로도 안 본대. 네가 이러니까 내가 할 말이 사라지잖아. 그런 거까지 계산할 만큼 네가 영악한 애도


아니고. 내가 어쩌다 널 좋아해서는. 답도 없다. 그치.”

르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다, 또 그렇게까지 답도 없는 사람은 아닌데… 하며 슬그머니 서운한 티를 냈다.


“…뭘 또 그렇게까지….”

그런 모습에 결국 알빈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뭘 또 그렇게까지야, 답 없지. 하필이면 황태자가 각인한 오메가를 짝사랑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봤을 때부터 단념하는 건데.”

“…….”

“내가 너한테 화를 내서 뭐 하냐. 황궁에 돌아가는 게 너와 네 배 속의 아이에게 제일 안전한 선택이라면.


돌아가는 게 맞겠지.”

“미안. 나 때문에 고생해서.”

“됐어. 그런 건 고생 축에 끼는 것도 아니야.”

“…….”

“아, 물론 아주 고생 안 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오히려


속 시원해. 후련하고. 언제까지 말 못 하고 사나 걱정했는데.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네.”

그래.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어.

알빈은 곱씹듯 중얼거리며 르네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더니 양팔을 벌렸다.

“친구끼리 포옹 한 번은 할 수 있잖아. 나 포기 빠른 남자야. 그렇다고 사심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네.


위로 한 번 해 준다 생각해.”

알빈의 말에 르네 역시 따라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알빈을 살짝 껴안았다.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힘주어 꽉 껴안진 못했지만.

사실 외간 남자와 깊고 진한 포옹을 할 이유도 없으니.

르네는 손을 들어 알빈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 * *

알빈이 머물고 있던 방을 나온 르네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잠시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커다란 발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르카이츠가 가만히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르네는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화가 잘 풀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그보다는 아직 르네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눈치챈 듯했다.
“적당히 착해서 문제가 되는 거야.”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손을 잡아 오며 말했다.

“명백하게 못된 인간이라면 죄책감 따위 들지도 않았을걸.”

“…그걸 지금 위로라고.”

“위로할 생각 없는데.”

아르카이츠는 다정한 미소로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널 짝사랑하는 사내와 야반도주는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르카이츠가 나한테 지금 불평을 늘어놓을 입장이 되나요?”

“…내가 졌어. 당신이 이겼어.”

“그쵸?”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당신은 이제 평생 내 옆에서 도망치지도 못하는데.”

이내 르네의 손을 깍지 껴 꽉 잡으며 아르카이츠가 마치 귀한 분을 에스코트하듯 이끌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르네가 도착한 곳은, 굉장한 풍채를 가진 아르콘 부족의 추장 앞이었다.

#76.

“…안녕하십니까….”

“…흠….”

르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부족의 추장이자 아르카이츠의 조부 되는 그는 칠순이 넘는 나이와는 별개로 굉장한 동안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앳되거나 하기보다는… 굉장히 험악한 쪽인지라.

‘아르카이츠도 험악한 인상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유전이었던 거구나.’

제국인과 부족인 간의 혼혈인 아르카이츠와는 달리 아르콘 부족 추장은 캐러멜 같은 구릿빛 피부였다.

르네는 문득 아르카이츠가 저런 구릿빛 피부였어도 참 잘 어울리겠다 같은 쓸데없으나 행복해지는 상상을 했다.

“…흠…!”
그러다 곧 추장의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대며 망상을 끝냈다.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르네는 어째 표정이 밝지 않은 추장을 보며 혹여나 미운털이 박힌 건가 걱정했다.

추장의 눈동자는 아르카이츠와 같은 금색이었으며, 머리칼 역시 짙은 흑발이었다.

“르네 피어스, 아니, 르네 헬리어스 황태자비여.”

추장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르네는 뭘 어찌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잠시 우물쭈물하다 추장의 손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놨다.

그런 뒤 가만히 추장을 바라보았다.

추장은 물음표가 떠 있는 듯한 얼굴로 르네를 쳐다봤다. 르네 역시 물음표로 응수했다.

꾹 웃음을 참고 있던 아르카이츠가 르네에게 조심스레 귀띔해 줬다.

“르네… 악수를 청하는 겁니다.”

“아…!”

빨개진 얼굴로 르네는 얼른 추장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까 전보다 더 당황한 듯한 추장은 조용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제국의… 인사법은 악수를 하는 거라 들었는데….”

“…….”

그러자 옆에 있던 아르카이츠가 대신 대답했다.

“맞습니다. 악수로 인사하는 거.”

쿡쿡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아르카이츠를 르네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며 왜 당연히 악수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나 잠깐 자책했다.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르네는 도련님으로 살았을 시절엔 사교 모임이고 뭐고 참석하지 않아 다른 사내들과
인사할 일이 손에 꼽았다.

그리고 황궁에 입궁한 뒤에는 여인의 차림새로 여인의 흉내를 내느라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 에스코트해 주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날 바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르네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애써 식혔다.

그런 손자며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추장이 고개를 돌려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아르카이츠는 대체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르네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쯧쯔…. 장차 헬리오스 제국의 황제가 될 놈이 저리 실없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손자며느리 눈에 바보로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군.’

물론 황태자로서의 예우는 갖추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손자가 아닌 것은 아니니.

추장은 꽤나 복잡한 마음으로 아르카이츠와 르네를 쳐다봤다.

그간 추장이 봐 온 헬리오스 제국민들은 흰 피부만큼이나 까탈스러운 종족이었다.

어두운 색의 피부가 뭐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손에 닿는 것도 싫어하는 이들도 태반이었다.

아르카이츠를 통해 르네가 사실 제집 외에는 다른 곳에 가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분명 이곳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손을 내미니 무슨 훈련하는 개도 아니고, 손을 턱 올려 주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지 않나.

순간 ‘이게… 맞나?’ 싶어 당황한 추장이었다.

물론 이후 제대로 된 악수를 하긴 했지만.

‘굉장히 말랐는데, 골격 자체는 나쁘지 않아. 열성 오메가라기에는 체격이 준수한데? 무엇보다 한 번의 히트


사이클로 임신이 되었다는 건. 역시 아무리 봐도 열성 오메가는 아닌 듯하단 말이지.’

아르카이츠는 제 아내가 열성 오메가인 것 같다 말했지만 추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몸이 마르긴 했으나 골격이 모난 데 없이 월등히 비율도 좋고, 선도 고왔다.

아르카이츠가 너무 커서 그렇지, 사실 르네의 체격 역시 보통의 사내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면은 없었다.

열성 오메가들은 기본적으로 골격부터가 모자랐다. 열성이 임신이 어려운 이유도, 일단 골격이 너무 약해 낳다가
죽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었다.

뼈 자체가 매우 약하고, 그 모양새 또한 결코 건강하지 않다.

추장은 그동안 봐 온 열성 오메가들을 떠올렸다.

열성 자체가 그리 많은 개체는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따금씩 보이는 그들의 양상은 다들 비슷했다.

‘물론 히트 사이클이 늦게 찾아왔다는 것은… 열성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데. 하지만 열성이라기엔 너무… 우성
오메가스러운 외양을 가졌는데?’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지만, 어쨌든 열성 오메가로 알려진 대표적인 이로 황제가 있었다.

한데 황제와 르네는 조금 결이 달랐다. 황제는 실제로 열성이 맞았다.

황제는 키가 작아 항상 높은 굽 위에 올라탔으며, 덩치가 커 보이기 위해 두꺼운 옷들을 껴입었다.

다행히 황족은 알파로 태어난다는 편견 때문에 속여 넘길 수 있었다.


또한 황제는 다행히 외동이었고, 선대 황제가 알파로서 대신들을 꽉 쥐고 있었기에 무탈히 황위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추장의 눈에는 영락없는 열성 오메가였다.

잔병치레가 잦은 것도, 그걸 숨기려는 것도.

물론 페트라는 그걸 안쓰러워했지만.

황제는 페트라를 만나기 이전부터도 꾸준히 히트 사이클이 있어 왔고, 억제제를 먹어서 겨우 잠재웠다지만.

르네의 경우는 성인식 이후 처음으로 히트 사이클을 경험했다.

“황태자비께서는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셨습니까?”

“…네?”

“히트 사이클이 매우 늦게 찾아왔다 들었습니다. 첫 히트 사이클 이후, 두 번째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 아니요.”

“첫 히트 사이클 이후, 6 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하는 르네의 모습에 추장은 홱 고개를 돌려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각인의 표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네.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오메가들은 알파들이 목덜미를 물어 주지 않는 한, 즉 각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한 주기적으로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다.

물론 각인 이후부터는 각인한 알파 외의 다른 이들은 오메가들의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오메가 역시 각인한 알파 외의 다른 이들과 잠자리를 가져도 히트 사이클 때 충족이 되지 않는다.

이는 알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뿐인 상대인 것인데….

“…이상하군.”

정말 이상했다. 어찌하여 르네는 첫 히트 사이클 이후 히트 사이클을 맞이하지 않는 건가.

오메가들의 히트 사이클은 임신 기간에도 해당되는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오메가가 맞기는 한가? 아, 아니. 맞긴 하겠지. 사내가 임신을 했으니…. 그럼 열성이 맞는가…?
열성이라기엔… 다른 요건들이 매우 우수한데…? 그렇다고 우성이라기엔… 히트 사이클 주기가 마음에 걸리고.
대체 뭐지, 이 아이는?’

추장은 눈앞의 손자며느리가 과연 열성 오메가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저리 우성 오메가의 외양을 하고서는 첫 번째 히트 사이클이 스무 살이 되어서야 찾아왔다는 것은.

“피어스 공작을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건 단순히 르네와 아르카이츠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피어스 공작은 제 아들의 체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걸 숨기고 있었으니 그에게 얘기를 들어
보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저희 아버지요?”

“예. 황태자비 전하. 어찌하여 전하를 이리 키우신 건지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르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추장은 그것을 가문을 버리고 황궁을 떠나 도망쳤던 이가 다시 가족의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배려하고자 말을 덧붙였다.

“아. 굳이 전하께서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굳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서 전하의 발언이 필요하진 않아 보이니까요.”

“…네에….”

불편할 것 같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어째 르네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 태중에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몸이 좋지 않겠군. 이런 기본적인 것을 놓치다니.

추장은 자책하듯 생각하며 아르카이츠에게 말했다.

“더 할 이야기는 없으니, 두 분 다 가 보셔도 좋습니다. 당분간은 요양에 집중하시지요.”

추장은 르네가 이곳에서 지내는 것에 분명 만족할 거라 생각했다.

사막이지만 아르콘 부족이 딛고 있는 영토는 마치 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커다란 오아시스와 온갖 특이한


식물들이 가득한 비옥한 토지였다.

제국에서는 나지 않는 특이한 과일들도 많으니 양질의 보살핌으로 그간의 여독을 풀길 바랐다.


르네와 아르카이츠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추장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약해서야… 특제 보양식이라도 해 먹여야겠구먼.”

먼 길 오느라 고생한 손자며느리에게 손수 보양식을 해다 바칠 요량이었다.

문제는 추장의 나름 따듯한 배려가 르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77.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요….”

방으로 돌아온 르네가 한참 만에 꺼낸 말이었다.

아르카이츠는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르네를 쳐다봤다.

“…혹시 이것이 바로 시집살이라는 걸까요….”

“시집살이?”

아르카이츠가 황당하여 되묻자 르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때 이리 말하던 대목이 있었다.

어찌하여 널 이리 키운 건지, 네 부모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어찌하여 황태자비 전하를 이리 키우신 건지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말 아닌가!

어찌 아들을 저따위로 키우셨소!

내 손자는 장차 황제가 될 재목인데, 황후 될 사람이 너무 떨어지는 수준 아니오!

…하며 으름장이라도 놓으시려는 걸까.

무엇보다, 방을 나오기 전 르네는 듣고 말았다.


“저렇게 약해서야….”

쯧쯔 혀를 차던 추장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 거 같아요.”

“할아버님이 그러실 분은 아닌데.”

“아이, 진짜 내가 들었다니까요…! 만약에 할아버님이 이 결혼 반대하시기라도 한다면….”

“반대해 봤자 뭐 어쩌겠어. 이미 혼인은 했고, 배 속에 아이까지 있는데. 르네. 그런 생각 말고 황궁에


돌아가기 전까지 푹 쉬어. 걱정이군. 엄마가 이렇게 상상력도 풍부하고, 잔걱정이 많아서. 태어날 아이가 이런
걸 닮기라도 한다면.”

“한다면…?”

“…뭐, 삽질하는 모습 보면서 좀 귀엽긴 하겠네.”

“씨, 아르카이츠! 난 지금 진지하다고요!”

르네는 진지한 상황에 농이 나오느냐며 아르카이츠를 투닥투닥 때려 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장이 손수 만든 보양식이라며 가져온 방대한 양의 만찬 상을 보고 그것이 또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장님께서 황태자비 전하의 몸보신을 위해 직접 조제하신 보양식 만찬입니다.”

“이, 이걸 다요?”

“아르콘 부족에서는 임신한 오메가를 위해 추장이 직접 만찬 상을 차려 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모두 태아와


임신부에 좋은 재료들로 엄선된 것들이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추장은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셔야만 하는
것들이라 했습니다.”

“혼자 먹기 너무 많은데…. 아르카이츠, 아직 식사 안 했죠? 알빈도 불러서 같이 먹어야겠다.”

약 2 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상에 차려진 온갖 먹음직스러운 것들을 바라보며 르네가 말했다.

그러자 하인들과 함께 상을 가져온 부족의 귀족들이 아주 단호한 어조로 잘랐다.

“아니 됩니다. 굉장히 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로지 황태자비 전하와 태어날 태중의 아기씨만
드셔야 한다 하셨습니다.”

“너무 많은데요? 혼자 다 못 먹어요. 저만 먹는 동안 아르카이츠는요?”

“아르콘 부족의 전통입니다. 태아와 임신부가 음식을 먹고 남은 것을 다른 부족민들이 나눠 먹는 것입니다.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도 예외는 없습니다.”
“…융숭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럼 일단 잘 먹겠습니다.”

르네는 자리에 앉아 추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르네는 입덧으로 고생해 보거나, 먹덧 같은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도 식탐이 있기는커녕 하루 한 끼 제대로 챙겨 먹기도 귀찮아하는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음식이 맛있어 봤자 뭐 얼마나 맛있겠나 싶은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죽을 퍼 입에 넣은 그 순간.

“……! 맛있…어!”

그동안 제국에서 먹어 왔던 요리들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고소하고 짭짤하면서도 달기까지 한,


그 와중에 맛의 조화까지 최상인 음식들에 눈을 떠 버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뭐죠!”

“추장께서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의사에게 직접 배우신 보양 음식입니다. 닭 안에 온갖 보약 재료들을 더해 푹 끓인


것입니다.”

“너무 맛있어요!”

르네는 살면서 처음으로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그 와중에 뒤에서 저를 지키고 서 있는 아르카이츠에게 제가 다 먹기 전 이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슬그머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닭다리를 뜯어 몰래 아르카이츠에게 전해 주려 했다.

“몰래 먹어요, 아르카이츠. 진짜 맛있어요.”

작게 속삭이는 그 모습에 아르카이츠가 감동받은 듯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려던 그때였다.

찰싹!

“오로지 임신부 먼저 드셔야 합니다. 전통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옆에 지키고 서 있던 귀족이 아르카이츠의 손등을 때렸다.

아르카이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많이 드시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르네는 아주 조금 아쉬운 표정을 한 뒤 도톰한 닭다리를 와앙 입에 물곤 행복하게 마저 음미했다.

굉장히 무섭고 어려운 분일 줄 알았던 시할아버지께서는 굉장한 손맛을 가지신 분이지 않나.

“입맛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이십니다. 추장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원래는 임신 기간 내내 이리 보양하는


것이 저희 부족의 전통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하셨거든요.”
“정말요?”

“예. 페트라 황후께서 아르카이츠 전하를 회임하셨을 때도 해 주지 못하셔서 굉장히 서운해하셨으니, 아마


손자며느리이신 르네 님께 못다 한 것들을 다 해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황궁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푹 쉬시다
가시지요.”

하인의 말에 르네는 어째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다시 사라질 것 같았다.

적어도 이곳에서 살면,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이런 음식들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음, 역시, 우리 안 돌아가면 안 돼요, 아르카이츠?”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그저 생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사흘 전 이곳에 온 뒤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르네 걱정에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갈 리 없었다.

지금은… 르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 하기엔 그 역시 인간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르네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먹성으로 앉은 자리에서 상 위의 온갖 음식들을 빠짐없이 맛봤다.

배 속의 아이 역시 음식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르네는 트림 한번 하지 않고 3 시간에 걸친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태중의 아이 때문인지 아니면 음식 때문인지 모를 한층 더 볼록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야, 너도 맛있었지?”

그러자 르네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태중의 아이가 배를 통통 찼다.

흐뭇한 미소로 아이와 교감하는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콘 부족의 귀족이 물었다.

“황태자비 전하, 아기씨의 태명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태명이요?”

“예, 태명이요.”

“이름이라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태어나고 난 뒤에 정해도 되지 않나요?”

“아르콘에서는 태중의 아기씨에게도 이름을 지어 준답니다. 정식 이름과는 달리, 애칭과도 가깝지요.”

르네는 생전 처음 들어 본다는 듯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제국에서는 태어날 아이에게 태명까지 지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애칭을 지어 준다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에요.”

그러자 귀족들의 시선이 르네를 지나쳐 아르카이츠에게로 향했다.


아르콘 부족의 혈통을 지닌 자가 애 아빠가 되어서는 태명도 짓지 않고 뭐 했느냐는 듯 잔소리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태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아르카이츠는 본의 아니게 변명이나 하는 무심한 아빠가 된 듯하여 살면서 처음 말끝을 흐렸다.

“뭐, 아무렴. 지금이라도 지으면 되죠!”

르네가 손뼉을 짝 치며 말하자 다른 이들 역시 사르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갑작스러운 태명 짓기가 시작되었다.

르네는 생각보다 진지한 얼굴로 애칭일 뿐인 태명 짓기에 진심으로 임했다.

“저희 부족에서는 태명을 무엇으로 짓느냐에 따라, 태어날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믿습니다. 대부분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튼튼이나, 건강이, 혹은 새싹 등으로 짓는답니다. 달콤한 아이라 하여
꿀벌이라 짓는 이들도 있지요. 전하께서는 아기씨가 어떤 인생을 살길 바라십니까?”

“으음, 나는… 나는 씩씩하게 자라길 바라요. 이제부터 태명은 씩씩이에요. 씩씩아! 마음에 드니? 마음에 들면
한 번 통 차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통통 차렴.”

한데 놀랍게도 아기가 배를 두 번 통통 차는 것 아니겠는가.

“마, 마음에 들지 않나 보네. 뭐가 좋을까….”

르네는 조금 당황한 듯 얼른 다른 태명들을 이것저것 나열하기 시작했다.

한데 정말 아기가 모든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무얼 권유해도 통통 두 번씩 걷어차는 것 아니겠나.

“뭐 이런 까탈스러운 애기가 다 있어?”

르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또 두 번 ‘통통!’ 하며 아까 전보다 좀 더 세게 차는 것이 꼭 제 어미를 나무라는 듯했다.

그 황당하고도 웃긴 광경에 귀족들은 르네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 아르카이츠가 말을 얹었다.

“딱 당신 같네.”

“엥?”

“태명으로 르네 투라고 짓지.”

“잘도 그런 태명을….”

코웃음 치며 비웃으려는데, 연신 배를 두 번씩 통통대던 것이 가만히 있다가 이내 통 하고 한 번 가볍게 걷어차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드나 보네? 한 번만 걷어찼어요! 잠깐만, 아니 그 귀여운 태명들 놔두고 왜 하필 르네 투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게다가 아르카이츠, 딱 나 같다는 게 무슨 의미죠? 내가 언제 까탈스러웠다고…!”

르네는 태명이 정해진 것에 기뻐하다가도 어쩐지 뭔가 이상하지 않나 생각했다.

씩씩이, 귀욤이, 포동이, 장군이, 뭐 그런 좋은 의미의 태명들은 다 걷어차더니 하필이면 르네 투가 뭔가?

그리고 내가 대체 언제 까탈스럽게 굴었다는 건데?

르네는 ‘허! 참!’ 하며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씰룩씰룩 입꼬리가 올라갔다.

르네는 슬며시 태명을 불러 봤다.

“르네 투.”

그러자 다시 한번 배를 통 걷어차는 르네 투다.

뭐 어쩌겠나. 생각해 보면 제가 낳은 아이니 르네 투가 맞긴 맞으니까.

“아기씨가 태명도 직접 고르시는 걸 보면, 장차 크게 되실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콘의 귀족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르네와 아르카이츠 그리고 태어날 르네 투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 * *

황태자가 돌아왔다.

가출한 제 아내와 그리고 태중의 아이까지 모두 안전한 상태로.

헬리오스 황궁은 황태자의 귀환으로 인해 다시 한번 시끌벅적해졌다.

대신들은 연신 아르카이츠에게 황태자비가 맡은바 책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해 댔다.

평소 피어스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대신들은 아예 작정한 듯 미카엘과 황태자비를 두고 누가 예언서에 나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오메가’이며 ‘예언의 오메가’인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아르카이츠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전하, 어찌 이리 귀를 닫으십니까! 저희는 황궁의 대신들입니다. 전하께서 본 체도 안 하실 만큼 가치가


없는 이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다못해 듣는 척이라도 해 주십시오! 늙은이들이 이리 열을 내는데, 어쩜 이리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시하십니까.”

“이보시오, 페럴 경. 듣는 척이라도 해 달라 구걸하는 건 또 뭡니까?”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소? 가서 직접 황태자비 전하를 데려오신 분인데, 그분을 두고 청문회를 하자는 우리의
의견이 수용이나 되겠냔 말이오. 거 아무리 피어스 공작이 눈엣가시라지만 눈치는 챙깁시다그려.”

“내가 언제! 피어스 가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오!”

“아님 말고—.”

결국엔 저들끼리도 의견이 통합되지 않아 티격태격하며 싸웠지만 말이다.

저들끼리 솜방망이나 휘둘러 대는 늙은 여우들의 싸움은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

대신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78.

당장에 청문회를 열어 황태자비가 왜 도망쳤는지, 그리고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알리자는
의견 하나.

그래도 아직 태중에 아이도 있는 마당에 황태자비의 건강을 위해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열어도 무방하다는 의견
하나.

집무실 책상 앞에서 시장통인 양 떠들어 대는 이들을 두고 아르카이츠는 그동안 밀린 정무를 보다 조용히 문서를
덮었다.

그러더니 별다른 말 없이 지그시 대신들을 쳐다봤다.

시끄럽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황태자비에 대한 청문회를 열자라….”

그러자 맨 앞줄에 서 있던 허드슨 경이 고개를 추켜올리며 꽤나 건방진 태도로 이죽댔다.

평소 파비안과 가까이 지내던 이였던지라 어쩌면 아르카이츠가 황궁을 비운 동안 무언가 지시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문회는 기필코 열려야 합니다. 황태자비에 대해서 궁 안에 어떤 소문이 떠다니고 있는지 전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건수 하나 잡았단 표정으로 아르카이츠를 몰아붙였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분명히 모두를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장차 황후가 되어 제국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백성들을 상대로 거짓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것입니다. 아닙니까, 전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허드슨 경?”

그와 반대 의견을 내놓던 대신이 묻자 허드슨 경이 거들먹거리며 답했다.

“아니, 제가 일전에 말입니다. 피어스 공작저를 지나가는 와중에 공작 얼굴이나 보고 덕담이나 좀 나눌 겸,


공작저를 방문했는데 말이죠?”

숨겨진 비장의 무기라도 있단 양 그는 고의로 뜸을 들이며 이목을 끌었다.

“그곳에서 꽤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습니다. 아 글쎄, 나는 황태자비 전하가 공작저에서 지낸


것이었나 싶을 정도였지 뭡니까.”

“그게 대체 뭔 소리요, 알아듣게 좀 말하시구려.”

“아니, 거기에 피어스 영애가 있지 뭡니까! 머리를 짧게 잘라 맨 처음엔 영식인 줄 알았습니다. 한데 거기에
생활복 드레스를 입고 다니지 뭡니까!”

허드슨은 아주 못 볼 것을 본 양 기함했다.

“통보도 없이 온 것에 무작정 화부터 내는 공작을 보고 내 확신했지요. 아직 황태자비가 행방불명된 줄도


모르는데 이리 화를 내는 걸 보니, 또한 영애 역시 당황한 꼴을 보니! 황태자비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르네
피어스라는 것을요!”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가, 어리둥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들 마저 이야기해 보라는 듯 그를 쳐다보자 허드슨은 아주 기고만장해졌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되어 이걸 확인하기까지 말을 아꼈습니다만, 황태자비 시중을 들던 시녀들을 불러 하나씩


심문을 하니, 공작저에서 데려온 애나라는 시녀 하나 빼고는 옷을 갈아입을 때 시녀를 모두 물렸다지 뭡니까.”

그는 이 모든 사실을 매우 우연하게 발견한 것처럼 말을 꾸며냈다.

그로써 사실 파비안에게 귀띔을 받고 한 계획적인 행동임을 교묘하게 숨겼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터였기에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여장이 들통난 것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킬 거짓말이었다.

“이는 황궁을 모독한 것입니다. 어찌 모두를 속여 여자 행세를 한단 말입니까?”

“이보시오, 허드슨 경. 한데 이상한 것이, 르네 피어스는 남자 아닙니까. 사내가… 임신이 가능한 거요?”

“그러니 그 임신도 거짓일지 모른단 소리지요! 예언서에도 떡하니 나와 있지 않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한다.”

“한데 미카엘 그자도 사내 아닙니까. 그자도 오메가인데요. 사내인 오메가가 가능하다는 결론은 그때 매듭짓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사내인 오메가가 불가능하댔소? 사내가 임신이 가능하느냐 묻는 것 아니오. 그런 선례를 본 적이


없는데 어찌 그 거짓투성이 황태자비의 말을 믿느냐는 소리지. 백번 양보해 진짜 사내가 임신했다 칩시다. 그래
봤자 모두를 속이고 제 누이 행세를 하며 황제 폐하를 비롯해 모두를 속인 건 틀림없는 사실 아니오?”

허드슨 경은 그렇게 말하며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의 시선 역시 그를 향했다.

아르카이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그시 쳐다봤다.

아무 반응 없는 황태자의 얼굴에 허드슨 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황태자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이 사실을 들추면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당황할 거라 생각했는데.

파비안 님의 예상이 빗나간 건가?

드디어 아르카이츠가 입을 열었다.

“청문회….”

과연 그는 황태자비를 감싸고 제가 모든 화살을 맞을지.

혹은 꼬리 자르기를 할지.

모두들 궁금한 듯한 얼굴이었다.

“…열도록 하게.”

한데 그는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로 청문회를 열라고 지시했다.

허드슨 경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정말 청문회를 열어도 되겠습니까?”

“열도록 해. 모두 진실이 궁금해서 청문회를 열어 달라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진실은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래. 거기서 실컷 하이에나들처럼 물고 뜯고 늘어져 봐.”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허드슨 경. 그대가 아무리 초로가 넘었다지만 그래도 아직 청음은 가능한 상태 아닌가? 들은바 그대로야.
청문회를 열어, 그 자리에 앉은 이를 마음껏 물어뜯게.”

“어, 음, 아, 예… 그, 그리하라시면야… 그리하지요… 뭐어….”

되레 마음껏 물어뜯으라는 말에 대신들은 당황해했다.

뭐지?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건가?

황태자비와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인가?


하지만 저 묘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보라.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하게 올라간 저 조소.

저건 꼭 뭔가… 달리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허드슨 경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청문회가 열린 것이 뿌듯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조금 불안했다.

“만일 황태자비의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면 아르카이츠 님께서 극도로 분노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르카이츠는 그리 쉽게 제 감정을 내비치지 않네, 허드슨 경. 그리 오래 그를 봐 왔으면서도 어찌 그것 하나


모르나? 감정을 드러내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예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르카이츠 황태자와 본격적으로 척을 진다는 것을….”

“영감. 영감은 참 단순한 노인네라 좋겠어. 아르카이츠가 분노하든, 슬퍼하든, 감정을 들킨다는 건 동요한다는
뜻일세. 오히려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 거라는 뜻이지. 영감이 걱정해야 할 것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그 표정을 알기 어려울 때야.”

“…….”

“동요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일을 예상했다는 거지.”

더 나아가 파비안은 허드슨 경에게 이런 충고까지 덧붙였다.

“만일 그럴 경우에는, 다시 그의 편으로 기우는 쪽이 좋을걸세.”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파비안과 손을 잡고 아르카이츠와 황태자비를 공격하려는 와중에, 손을 놓길 추천한다니.

협력 관계가 맞긴 하냔 말이다.

그 누가 일을 도모하며 만일 이럴 경우가 된다면 날 버리고 상대를 택하라 조언을 하나.

“예? 하면 제 조카를 황태자비로 맞이해 주신다는 약속은….”

“없던 일이 되는 거겠지?”

“하지만….”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카를 황태자비로 올리고 싶다면야 내 마다하진 않겠네만. 자네는 조카의 안위보다
본인 명성을 더 생각하는 편 아닌가. 그 목이 댕강 떨어져 나가면, 명성이 있은들 무엇 하나?”
“하면 전하께서는요?”

일개 황궁 대신인 저에게 충고를 하면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 파비안이었다.

허드슨 경은 아르카이츠만큼이나 파비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병석에 누워 있는 황제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자는 데에 할애했다.

가사 상태에 빠질 만큼 위태로운 상태도 아니었고, 병세가 짙어져 거동이 아예 불가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병은 사실 무기력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온몸이 거대한 돌덩이에 깔린 것처럼,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된 것은 페트라 황후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알파는 잔병치레가 없다는데, 어찌하여 황제의 병세는 이리도 짙어지는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독을 먹인 것이 아닌가 싶어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 왔지만 수많은 의사들이 ‘독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오메가인 페트라 황후를 잃은 상심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은 것 같다.

운명으로 이어진 이들이며, 알파는 각인한 상대가 없으면 극심한 우울감과 권태로움을 느끼니 마음의 병이 맞는
듯하다.

마음의 병에는 이렇다 할 약이 없다 보니, 결국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뭐 이런 말들뿐이었다.

의사들의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았다.

황제는 페트라 황후를 잃은 뒤 그의 세상 전반이 무너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황후에게 필요 이상으로 의지해 왔다.

또한 자신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그녀가 없어지자, 언제 들킬지 모르는 자신의 치부를 두려워해
왔다.

그럼에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아르카이츠를 지키려 하지도 말고, 저를 저지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기왕


모두를 속일 거면, 스스로부터 속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그래 왔거든요. 전 저 스스로조차 속였습니다.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자괴감을 느꼈는지. 아비가 아들 마음 알아주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것이냐. 네 오메가를 찾아 주겠다 했다. 허드슨 경의 조카가 오메가라 하여 그 아이를
소개해 주지 않았더냐. 또 무엇이 필요해 날 이리 괴롭히는 게냐.”

“괴롭히다뇨. 아버지가 페트라 황후에게 본모습을 알려 주고 의지하듯 저도 좀 그래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얼마나 사이좋은 부자지간입니까. 오메가임을 숨기고 알파인 척하는 아비와, 베타인 것을 숨기고 알파인 척하는
아들이라니.”

파비안의 말에 황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파비안은 자신이 알파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니, 그 분노는 아마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주범은 자신이었으니, 황제는 그 죄책감에 더더욱 무기력해졌다.

“당신도 나도, 그깟 알파라는 체질 앞에 이리 벌벌 떠는 모습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참 닮았습니다.


아마 우리 둘 다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며 살겠죠.”

그럼에도 파비안은 황제가 자신의 진짜 체질을 밝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며, 이를 조롱하듯 비소를 지었다.

황제는 그렇게 육체는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이어 나갔다.

황태자비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도, 아르카이츠가 제 아내를 찾아 궁을 비웠다는 소식에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에도, 또한 황태자비를 둘러싼 소문과 관련하여 청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에도.

그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래 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 친아들에게 닥쳐 올 풍파에 대해서도 차마 아비로서 그걸 막아 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없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 주던 페트라가 없으니, 그는 사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생각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소, 페트라….”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침상에 누워 작게 중얼거리는 황제는 마치 곁에 페트라가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모든 거짓말을 끝내기 위한 용기가 나한테 없소…. 두렵소. 내 편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사람을


이리 나약하게 만드는 군….”

황제는 모두에게 외면당할까 두려웠다.

평생을 일궈 온 자신의 평판이 무너지는 게 두려웠다.


모두가 저에게 손가락질하며 가짜라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아득해지는 눈동자를 끔뻑이는 순간이었다.

“내가 알던 황제는 이리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초점 없던 황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 듯 침묵한 채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79.

이 목소리는 틀림없는 페트라의 목소리였다.

황제는 그렇게나 무거웠던 몸을 겨우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어두웠던 벽 너머에서 누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흰 도자기 가면을 쓴 괴한은 온통 검은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내가 곧 죽는 건가….”

황제는 그것을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쯤으로 생각한 듯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할 만큼 허무하게 죽은 건가?

혹은 곧 죽을 예정이라 사신이 찾아온 것인가.

황제의 발치에 선 죽음의 사자는 조용히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목숨을 구걸한다거나 두려움에 질리기는커녕 오히려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식의 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쉽게 포기하다니. 내가 사랑한 남자는 이러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들려오는 페트라의 목소리에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죽음의 사자여, 생을 구걸하며 저항할 생각 따위 없으니, 페트라의 목소리로 날 괴롭히지 마시오….”

“어휴. 그래. 내가 이런 허접스런 당신의 모습도 사랑하긴 했다만. 한 발 물러나 바라보니 답답한 건 어쩔 수가
없네.”
“……?”

가면을 쓴 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답답하다는 듯 곧장 자신의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 줬다.

멀뚱멀뚱한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황제의 눈에 점점 커다래졌다.

“…어찌하여….”

황제는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천천히 자신의 눈을 비비적댔다.

몇 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제 앞에 나타난 이는 자신의 알파, 페트라 황후였다.

“…페트라, 날 데리러 온 것이오? 역시 난 죽었나 보군….”

그러자 페트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페트라가 그 입을 틀어막았다.

이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황제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파랗게 질렸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 쳤다.

페트라는 그런 제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여보. 너무 큰 소리 내지 말아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서는 안 되는 이들이 있으니.”

“…정말 페트라가 맞나? 정말 내 아내가 맞냔 말이야. 아니, 아니야. 당신은 내 손으로 보내 줬는걸….
파비안이 날 조종하려고 보낸 첩자로군…!”

그러자 페트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라는 듯 코웃음 쳤다. 곧장 그의 손을 잡아 들어 자신의 뺨 위에 올려놨다.

경직되어 있던 황제는 페트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겁했다. 그러다 이내 손바닥에 닿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멈칫했다.

황제가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하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분명 희게 멀어 버린 눈동자인데, 신기하게도 마치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금색이 비치는 듯했다.

틀림없는 페트라의 눈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정말로 그녀가 살아 있는 채로 제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정말 당신이 맞는 건가? 정말 당신이…. 페트라, 세상에, 나의 알파, 나의 사랑… 당신이 어떻게…!”

그는 감격한 듯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토록 무거웠던 몸이 단번에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언제 누워 있었냐는 양 페트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머금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트라에게는 마냥 재회의 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페트라는 눈을 빛내며 제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한때 정말로 사랑했던 사내.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후세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거짓말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 * *

청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르네는 그곳에 출석하여 그동안 자신이 해 온 거짓말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리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훌쩍 코앞에 다가오니 신경 쓰이다 못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카이츠는 청문회를 승인했고, 오늘이 바로 청문회가 열리는 그날이었다.

르네는 부쩍 침대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밤새 잠은 잘 잤지만, 아무래도 날이 날인지라 동도 트지 않은 시간에 눈이 번쩍 떠져 버렸다.

지평선 너머에 걸쳐진 태양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깨에 포근한 담요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카이츠.”

“잠드는 거 보고 나갔었는데. 왜 또 일어나 있어. 잘 못 잔 거야?”

“아뇨…. 그냥 눈이 일찍 떠진 것뿐이에요. 오히려 정신 맑아요. 피곤하지도 않고. 동 트는 모습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르카이츠도 아직 안 돌아오길래.”

어젯밤 아르카이츠는 손수 르네를 재워 주기까지 했다. 배를 토닥이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직접 지은


아이의 태명을 불렀다.

르네 투라니.

르네는 그 순간에도 황당해서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아르카이츠의 음성에 화답이라도 하듯 발로 통 차는 르네 투에 잠시나마 모든 긴장을 풀고 웃었다.

궁에 돌아온 이후, 아르카이츠는 르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를 두고 꽤나 말이 많았지만, 그들 목소리가 르네가 머물고 있는 부부 침실 안으로 넘어온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간 궁에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애나를 통해 얼추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비는 제 누이 행세를 하는 르네 피어스라는 사실을 파비안이 흘린 건지….

대신들이 모두 아르카이츠를 찾아가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폐위를 시켜야 한다 온갖 말들을 해 댄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에도 르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마 아르카이츠가 미리 귀띔해 줬기 때문일 거다.

“…마냥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런 자리는 처음이니까 긴장은 되네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르카이츠는 안 피곤해요? 일찍부터 청문회일 텐데….”

“여러 가지 준비하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어. 피곤하지 않아. 이제 다 끝날 텐데, 오히려 기대까지 되는군.”

“뭘 또 기대를 해요…. 난 그래도 좀 걱정되긴 하는데.”

르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아르카이츠를 믿기 때문에 걱정할 게 하나 없다는 것도.

내일 그 자리에서 오히려 당황할 것은 파비안 그가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증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자꾸만 불안해. 왜 자꾸만 불안한 걸까. 이건… 청문회가 두려워서만은 아닌 거 같은데….’

르네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 위에 아르카이츠의 손이 덮였다.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르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너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뭔가… 자꾸만… 내가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내가 떠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떠날 것 같다고? 그건 또 무슨 의미일까. 날 두고 다른 이와 또 도망가겠다


미리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가?”

“아, 그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르네의 말에 아르카이츠가 살며시 웃으며 르네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불안하게 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내가 아직 부족한 모양이야.”

“…그냥 기우겠죠. 나는 원체 겁이 많으니까. 에휴. 태어날 ‘르네 투’가 이런 날 닮지 말아야 할 텐데.”

르네는 애써 별일 아니라 치부하며 르네 투로 화제를 옮겼다.

태어날 아이는 부디 저처럼 너무 겁이 많지도, 너무 까칠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태명부터 ‘르네 투’


이니만큼 혹여나 엄마의 단점들을 닮을까 걱정이 된다며.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카이츠가 말했다.

“딱히 단점 아니야.”

“응?”

“겁이 많은 것도, 예민한 것도, 까칠한 것도. 단점 아니라고.”

“…잠깐, 뭐 하나 더 추가된 것 같은 게 꼭 묘하게 욕하는 거 같은데.”

“뭐. 사랑스럽다는 거지.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이봐요, 아르카이츠 씨.”

“내가 널 지키고, 맞춰 주면 되는 일이니까.”

“…또 갑자기 감동을 주고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엔 이렇게까지 다정한 말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무슨
짐승인 양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까.”

“알게 되다니, 뭐가요.”

“…르네는 다정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뭐, 평생 다정하게만 굴 거예요?”

“네가 그러라면 그렇게 할게.”

“막 내 발닦개처럼 굴 거라고요?”

“…이제 보니 그리 겁 없는 거 같진 않은데?”

아르카이츠의 말에 르네는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뜬 채로 예쁘게 깜빡대다, 이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겁 많은 이는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태자한테 발닦개가 되라는 말은 못 할 거다.

저건 보통 건방진 이가 아니고서야 못 할 말이지.

하지만 르네가 건방지다 못해 오만하게 굴지라도 아르카이츠는 뭐라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렇게 만든 건 본인이니까.

“이리 와서 누워. 조금 더 자.”

아르카이츠는 침대에 반쯤 몸을 누인 뒤, 자신의 팔을 베개라도 된 양 펼치곤 그 앞을 툭툭 두들겼다.

하지만 르네는 딱히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잠이 안 오는데.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든 몸을 좀 움직여야겠어요. 너무 정신이 또렷해서.”


“…그래?”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앉아 있는 르네의 몸을 돌렸다.

“응?”

“정신이 또렷한 게 문제라면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카이츠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르네의 발목과 종아리를 타고 올라 허벅지를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 온 이후부터는 사실 편의의 목적에서라도 파자마를 입고 지내던 르네였다.

그 말인즉슨, 지금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맨살을 만지고 있다는 소리다.

또 그 말인즉슨, 지금 아르카이츠는 엄청난 유혹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자, 잠깐…. 이, 이래도 되나…?”

“의사가 말하길 7 개월까지는 안정적이라고 하던데.”

“…….”

“딱 시기가 좋은 거 같지?”

“좋긴 뭐가 좋…아….”

아르카이츠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르네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80.

Chapter 8. 꿈에서 깨어날 때

미카엘은 불안한 눈빛으로 파비안을 바라봤다.

오늘은 드디어 그가 원하던 대로 황태자비, 르네 피어스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미카엘은 피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는 파비안의 옷가지를 잡아당겼다.

파비안이 권태로운 얼굴로 뒤돌았다.

“…정말로, 그것을 사용하실 것입니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물었다.

파비안은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옷가지를 잡은 미카엘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묻는 거니. 미카엘.”

“만약에, 정말 만약에 황태자비가 폐위되면 제가 그의 황태자비가 되는 거죠? 그리고 파비안 님께서는 허드슨
경의 조카와 혼인하는 거고요.”

“그래.”

“…….”

미카엘은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다는 사실에 상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파비안은 그런 미카엘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이내 선심 쓰듯 그를 꼭 껴안았다.

“어차피 내 혼인은 표면적인 것뿐이다. 폐위가 된다 한들 아르카이츠는 널 품을 리 없을 테고, 너 역시 그에게


안길 생각 따위 없겠지.”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바보가 아니다. 사랑에 눈이 먼 한심한 종자가 아니라는 거지.”

“…….”

“그는 결국 제국을 선택할 거야. 모두가 그걸 바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황태자비에게―.”

“미카엘.”

파비안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흠칫 놀란 듯한 미카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자각하곤 파비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자꾸 나약한 소리만 하는 게 이상하구나.”

“…….”

“설마 뭐… 양심에 찔린다거나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인간도 아닌 네가 느낄 수 있는 건 절정밖에 없다


하지 않았나.”

희롱에 가까운 그의 말에 미카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파비안은 미카엘의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긴 뒤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이름을 지어 줬다고 인간처럼 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파비안 님.”

“나는 네가 좋다, 미카엘. 네가 인간이 아니라 좋아. 몽마의 힘을 가진 네가 나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다는 거다.
한데 자꾸 인간처럼 굴면 싫어진단다.”

마치 어린아이 타이르듯 어르는 파비안의 말에는 일말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와 새삼 애정이 있을 거라 기대하는 자신도 우스웠지만, 미카엘은 어쩐지 자꾸만 뭔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파비안 님. 저는 파비안 님을 사랑합니다.”

미카엘의 고백에 파비안은 코웃음 치며 쯧쯔, 혀를 찼다.

“정기만 채울 수 있으면 온갖 사내들에게 다리 벌릴 네가 대체 그게 뭔 줄 알고 사랑을 하네 마네 말할 수 있단


거니. 이상하군. 아르카이츠한테 바보 병이 옮았나? 아, 아니면 르네 쪽에서 옮은 건가?”

“파비안 님! 저는, 저는 파비안 님께 각인하여 당신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정기를 취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해서 날마다 원할 때마다 주잖니, 미카엘. 그날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각인했다면, 넌


그자에게 벌릴 것 아니었느냐.”

“…….”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야. 내 어찌 너같이 귀하고 소중한 것을 책망하겠어. 괜히 인간 놀음 하지 말라는 거야,


미카엘. 인간에게 가장 쓸모없는 감정을 따라 해서 일만 그르치지. 안 그러니?”

“…어찌하여 사랑이 쓸모없는 감정이라 말하십니까? 파비안 님, 파비안 님께서는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으십니까? 가족을 사랑한다든가,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든가, 하다못해 키우던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든가…!”

“너는 아느냐?”

“…….”

“알지도 못하는 거, 말해 주면 이해할 수는 있느냐.”

“…….”

“좋은 패를 가졌다 생각했는데, 뒤집어 보니 영 시원찮은 몽마를 소환해 버렸군.”

그 말에 미카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조차 꼴 보기 싫다는 듯 파비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파비안은 이내 미카엘 옆에 앉아 그를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우습게도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폭 안겼다.

자존심이니 뭐니 따질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몽마는 원래 주인에게 맹목적이었다.

그 맹목적인 애정은 때론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

미카엘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단단히 목을 끌어안았다.


파비안은 미카엘의 등을 토닥였다.

귀찮은 듯 보였으나 제가 어떤 말을 해도 품을 내어 주면 곧바로 안겨드는 어린 몽마를 보며 또 나름의 재미를


느꼈다.

“난 그 무엇에도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어, 미카엘.”

“…….”

“그래서 아르카이츠나 르네 같은 부류들이 싫다는 거다.”

“…….”

“알파니 오메가니, 각인한 운명의 사랑이니…. 그런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내 몸소 보여 주마, 미카엘.”

“…….”

“너도 알게 될 거다. 그런 하등 쓸데없는 감정은 애초에 품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건 일종의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예외는 없어.”

“…….”

단호한 파비안의 모습에 미카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이 조금 진정된 듯 보이자 파비안은 그를 다시 침대에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미카엘은 한참 동안 파비안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아까 전 그가 껴안았던 자신의 몸을 둥글게 말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신녀들이 들어와 미카엘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그 역시 오늘 열리는 청문회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최대한 정숙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미카엘은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칼을 불편한 듯 매만졌다.

준비를 마친 미카엘은 청문회가 열리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파비안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멍한 얼굴로 걷던 미카엘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르네를 발견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괜히 못 본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미카엘이 못 본 척한들, 청문회장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었으니 어떻게든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신녀들이 걸음을 멈추고 ‘아직’ 황태자비인 르네에게 허리 굽혀 예를 갖췄다.


미카엘 역시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로 최대한 르네 쪽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살짝 고개를 수그린 그의 시선에 못 본 새 많이 불룩해진 르네의 배가 보였다.

‘두 달 정도 못 본 거 같은데, 그사이 저렇게 배가 불렀네…. 저 안에 정말 아이가 든 건가?’

그 순간,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르네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모른 척하려던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지나치던 르네에게 물었다.

“…아르카이츠 전하를 사랑하십니까?”

그동안 황궁에서 파비안이 저를 찾아오지 않을 때 줄곧 읽어 대던 삼류 연애 소설 따위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질문이었다.

분명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거나, 따귀를 때리거나, 머리칼을 잡아당기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그것도 아니면


비웃고 갈 거라 생각했는데.

르네는 아주 담담하고 여유 넘치는 얼굴로 대꾸했다.

자신의 둥근 배를 쓰다듬으며.

“이리 결실이 눈에 보이는데, 못 본 척하는 건가 아니면, 보지 못한 건가?”

“…….”

미카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르네의 저 얼굴은, 엄청나고도 확고한 사랑을 받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건방지고도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을.

미카엘은 한 번 더 물었다.

“…쓸데없는 감정이라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감정인 것을.”

“사랑해 보지 못한 이들이 그런 말을 하지. 참 불쌍한 이들이야.”

그렇게 말한 뒤 르네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미카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돌덩이가 된 양,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 허공을 바라봤다.

온몸의 피가 머리에 쏠렸다, 정체되어 있던 것이 단번에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사랑해 보지 못한 이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미카엘이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 뒤에 서 있던 신녀들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엘 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너희들도 그리 생각하니?”
“예?”

“…너희들 눈에도 내가 불쌍해 보이느냐고.”

“…예?”

신녀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카엘을 쳐다봤다.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미카엘은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르네는 꼭 저 스스로를 어여삐 여기는 것 같았다.

제 남편을 전적으로 믿는 건가?

자신의 이간질도, 환상도 통하지 않을 만큼의 신뢰가 있다는 건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인간 사이 이간질시키는 것만큼 쉬운 일은 또 없다 생각했었던 미카엘이었다.

한데 도리어 자신이 동정받지 않았나.

미카엘은 그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몽마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강한 유대가 생길 수 있는 건지.

태중의 아이가 있어서 가능한 건지, 그게 없어도 가능한 건지.

미카엘은 손톱에 살이 파여 피가 맺힐 만큼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죽을 만큼 창피했고, 죽을 만큼 부러웠다.

* * *

아르카이츠가 말한 대로 청문회는 르네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헬리오스 제국을 이끌어 가는 대신들인 만큼, 그러니까 다들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


사람들이고 학문에 조예가 깊은 엘리트들이니 교양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시장통도 아니고… 뭐가 이리 시끌벅적하고 난잡해?’

르네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제 앞에 펼쳐진 싸움판을 바라봤다.


중후한 나이대의 대신들부터, 비교적 젊은 중년의 대신들까지 체면 따위 팽개친 채로 소리 지르기 일쑤였다.

“아니 지금 피어스 가문을 모욕하는 겁니까!”

“모욕은 무슨! 그쪽이 먼저 거짓말을 쳤으니 그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받는 거지!”

“허어, 지금 보니 대의고 나발이고 사실은 피어스 공작을 끌어내리고 싶은 거로구만? 황태자 눈에 제 딸이 안


차는 걸, 왜 애먼 데 화풀이요!”

“그러는 너도 니 조카 황태자비로 올리고 싶어서 안달이었잖아!”

“뭐, 뭐?! 니? 니라고 했소? 내가 네 삼촌뻘이다!”

“아, 그쪽이 먼저 공격했잖아!”

“그럼 네놈이 하려는 건 뭐 공격이 아니냐?”

“난 진실을 밝히는 것뿐!”

“웃기시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이들이 엄숙해야 할 청문회장에서 서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삿대질, 침 튀기면서 사이좋게


비방을 나눠 먹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피어스 가문을 옹호하려는 이들, 어떻게든 황태자비를 폐위시키려는 이들.

양측으로 나뉜 이들은 누구 하나 물러날 기색 없이 서로를 향해 욕설과 비난을 뱉어 냈다.

그들은 정작 이 자리에 불려 나온 르네에게는 큰 관심 없어 보였다. 그냥 누가 목소리가 더 크냐 겨루는 듯


보였다.

이러다간 본격적인 청문회 시작도 전에 대신들끼리 멱살 쥐고 싸우는 꼴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81.

아르카이츠가 르네의 양쪽 귀를 막더니 무어라 말을 했다.

아니, 말보다는 호령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개싸움으로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가 뭐라 말했는지 르네는 들을 수 없었다.

제 얼굴의 절반이 가려질 만큼 커다란 손으로 귀를 턱 막아 준 덕분이었다.


다만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이들이 다소곳하게 착석하는 것을 보면 얼추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드디어 엄숙한 분위기 속에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르네는 자신을 쳐다보는 황궁 대신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움츠러들지 않으려 몸을 곧추세웠다.

곧 르네를 향한 심문에 가까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그가 아델라이드가 아닌 르네 피어스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 그들은 르네를


‘가짜 황태자비’ 취급했다.

르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이러했다.

어찌하여 누이인 아델라이드 피어스 행세를 했습니까?

혹 평소에도 여장을 즐겨 하는 취미가 있습니까?

본인의 성정체성이 여성이라 생각합니까?

누이의 작위를 탐냈습니까?

이전부터 누이를 질투했습니까?

황태자를 흠모한 것이 맞습니까?

임신은 확실한 겁니까?

오메가인 것은 확실한 것입니까?

무례하다 생각되어질 정도의 사적인 질문은 물론, 르네의 신체에 대한 질문 및 태중의 아이까지 의심하는 내용이
나왔다.

질문 도중 아르카이츠가 나서려는 걸 르네는 몇 번이고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이런 말들을 태중의 아이가 듣게 된 상황이 정말 미안했다.

아르카이츠 역시 이런 수준의 질문을 듣게 된 르네가 스트레스 받아 그 영향이 르네 투에게까지 갈까 염려했다.

아르카이츠는 직전까지 르네를 회유했다.

네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들은 널 물어뜯길 바랄 거다, 네가 그런 말들을 들을 필요 없다.

내가 대리인으로 참석하겠다. 등등.

하지만 르네는 아델라이드와 알빈도 인정한 외골수 기질이 있는 이로, 결국 아르카이츠도 르네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르네는 청문회를 보기 위해 참석한 귀족들이 앉는 자리를 한번 힐끗 쳐다봤다.


피어스 공작 부부와 아델라이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낯빛이 노랗게 된 채로 르네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피어스 공작 부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기에, 르네에게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한 듯, 혹은 예상했던 질문들을 미리 말하는 연습이라도 한 듯.

르네는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차근차근 질문들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누이가 도망쳤습니다.”

“…예?”

“제 누이가 황태자와의 결혼식 당일에 도망쳤습니다. 식을 올리기 몇 시간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대로


가문이 몰락할까 두려워 누이의 행세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여, 네. 모두를 속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살기 위해…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황궁의 모두를 속였습니다. 여장에
대한 남다른 취미는 없습니다만, 잠옷이 편하긴 편하더라고요. 아래가 뻥 뚫려서 시원하기도 하고.”

“처 청문회는 농이나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황태자비! 아니, 르네 피어스!”

“폐위된 것도 아니고, 아직 황태자비 맞으니까 말은 조심해 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고성 지르지 말아 주실래요?
배 속의 아이가 듣고 있거든요! 누군 목청 못 높이는 줄 아나!”

르네 역시 지지 않고 언성을 높이자 심문하던 대신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심문석에 앉은 르네 뒤에 장벽처럼 선 아르카이츠의 서슬 퍼런 시선에 위축된 것도 있었다.

“아니, 대체 결혼식 당일에 도망쳤다니. 이 역시 황실 모독 아니오! 큰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저지르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죽은 대신과는 달리 허드슨 경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당장에 피어스 가문의 전체에 죄를 물려야 한다며 큰
목소리를 냈다.

파비안을 등에 업어서 그런지, 그는 아르카이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피어스 가문은 오늘 청문회의 심문 대상으로서의 참석도 거부했습니다. 이건 명백히 황제와 황태자를
무시하는 행위! 침묵은 곧 긍정일 뿐입니다. 어찌하여 피어스 공께서는 그 자리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소이까!”

그는 오늘 청문회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들 가운데,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피어스 공작 부부와 아델라이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문석에 앉은 본인의 아들보다도 못하십니까!”

그 말에 피어스 공작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허드슨이 내친김에 두 번째 공격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피어스 가문의 참석은 내가 불허했네.”

아르카이츠가 말했다.
“예에?”

“피어스 가문의 참석은 내가 불허했다고. 그들은 내 명령을 받든 것뿐이니까.”

“…네?”

허드슨은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다.

허드슨은 ‘이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파비안을 쳐다봤다.

파비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황태자비는 할 말을 다 한 듯하니, 이제 내가 심문석에 앉도록 하지.”

“예? 아니, 잠시만요. 이리 멋대로 하실 순 없으십니다.”

“황태자비에게 더 물어볼 것이 있나? 그보다는 나한테 질문하는 게 더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걸세. 르네


피어스는 그저 가족을 위해 헌신한 것뿐이니까.”

“…꼭 전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계획하신 것처럼 말하십니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긴 하군. 맞네, 허드슨 경.”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아르카이츠의 말에 심문에 가장 열의를 올리던 허드슨의 기가 한풀 꺾였다.

그는 꽤나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하, 하면 심문석의 자리에 앉아 주시든지요….”

곧 르네 옆에 의자가 마련되고 아르카이츠가 그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심문할 이가 르네가 아닌 아르카이츠가 되자 허드슨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이 아까처럼 마냥


쏘아붙이지는 못했다.

“전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다 계획하셨다, 아까 전 스스로 인정하셨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혼인을 치르신 상대가 아델라이드 피어스가 아닌 르네 피어스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알고 있다는 것을 넘어, 그렇게 하도록 내가 만들었소.”

“…그럼 아델라이드 피어스의 도주도, 르네 피어스의 여장도, 모두 꾸며낸 일이라는 겁니까?”

“그러하네.”

“아니 어째서요?”

“사내인 오메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어찌하여 그 사실을 숨기려 했습니까?”


“제국에서 그토록 선망하고 추앙하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야 하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하면 나는 이 자리에서 증인을 요청하겠네.”

“예?”

“시간만 질질 끄는 건 아무 의미 없지 않나.”

뭐 저리 제멋대로야?

심문받는 주제에 뭐가 저리 당당한가 싶다가도.

또 시간 질질 끌어 봤자 의미 없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허드슨은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고개를 갸웃댔다.

이상하네. 이번 청문회 주관은 파비안이 그에게 일임하여, 사실 이 심문을 주도하는 것은 허드슨 본인이어야
하는데.

‘꼭 내가 아르카이츠 황태자한테 휘둘리는 것 같은데? 이게… 맞나?’

그는 파비안의 충고를 잊은 건지, 애써 별거 아니란 듯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대체 뭘 증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전하 말씀대로 시간 낭비만큼 헛짓거리는 없으니 증인 신청


허용하도록 하지요. 증인은 안으로 들어오시오!”

이내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청문회장의 모두가 당황하여 기립했다.

증인으로 들어온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 시종으로 보이는 이와 함께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파비안의 시선이 황제에게 닿았다가, 이내 그 뒤에 휠체어를 밀고 있는 시종에게로 향했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파비안은 그 순간 빠르게 고개를 돌려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아르카이츠 역시 파비안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하!”

파비안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미카엘은 파비안이 내색하진 않아도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비안은 손가락을 튕겨 미카엘에게 미리 암시해 둔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사용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뜻을 이해한 미카엘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미카엘 님?”

“잠시… 두통이 이는 듯하여, 바깥에 나가고 싶구나.”

그는 신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장 바깥으로 나갔다.

근처의 휴게실에 들어간 미카엘은 소파에 반쯤 몸을 누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소란스러움에 익숙지 않아 두통이 온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그가 물을 떠오는 신녀들에게 요구했다.

“너희들은 다시 들어가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내게 상황을 전달해 주겠느냐? 아무래도 난 사람들 많은


곳은 아직까진 영 불편한 것 같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신녀들이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엘은 천천히 방을 나와 식당가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발이 무거워지고,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카엘은 차라리 누군가에게 지금 자신이 하려는 짓을 들켰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미카엘의 명령을 이행해
그에게 예쁨받아야 한다는 마음 반이었다.

* * *

황제가 증인석에 섰다.

허드슨 경은 물론 다른 귀족들까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할 황제가 어찌하여 지금 증인석에 서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제라면 지금 이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도 아르카이츠와 르네를 꾸짖어야 할 상황인데.

“어찌, 어찌하여 폐하께서 이 자리에.”

“증언할 게 있으니 증인석에 서지 않았겠나.”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황제의 모습에 허드슨은 다시 한번 파비안을 힐긋 쳐다봤다.

파비안은 허드슨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봤다.

허드슨은 달리 할 말이 없는 듯 잠시 주춤대다, 이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다들 청문회에 황제가 등판할 줄은 몰랐기에 더더욱 어찌해야 하나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즈, 증인께서는 대체 어떠한 증언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어색한 말투로 허드슨이 물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참석한 이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르카이츠 황태자의 말대로, 제국에서 가장 선망하고 추앙하던 존재가 감추는 진실을 증언하려 하오.
피어스 가문과 황태자가 숨기려 한 ‘사내 오메가’에 대해. 그리고 진짜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고 있는 자에
대해.”

황제의 입술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곧 있으면 자신의 치부를 온 세상이 알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는 알파가 아닌 오메가요. 알파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모두를 속여 왔지만. 나는 오메가가
틀림없소. 페트라는 내 운명의 오메가가 아니요. 내 운명의 알파지.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나의 직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동안 모두를 속여 왔소.”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리 대단한 위압감도 없었으나 그들은 마치 압도된 것처럼 침묵했다.

마치 너무도 놀라서 놀라는 것마저 하지 못할 만큼 얼어붙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한동안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누군가 경악을 금치 못한 이상한 소리를 내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시끌벅적하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이를테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피어스 공작은 르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귀족들이 그 선례를 찾기 위해
조사를 시작할 테고, 그러는 와중에 황제의 비밀까지 까발려질까 그동안 누구에게도, 심지어 르네 본인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피어스 가문의 함구는 결국 황제를 위한 충심이었고, 르네는 본인의 체질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이 또한
완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

황제가 알파가 아닌 오메가였다는 사실만도 대신들이 감당하기 벅찬 상황이었다.

거기에 황제는 한술 더 떠 또 다른 폭로를 이어 갔다.

#82.

“그대들이 알고 있는 고서에 나오는 ‘예언의 오메가’는 모두 조작된 사실이오. 페트라 황후는 죽기 전, 고서를
숨겨 나를 보호하려 했소. 그 고서에는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으니 그걸 숨겨야만 날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고서의 내용이 조작되었다니요? 그 고서를 밝힌 사람은 파비안 황태자이신데!”

허드슨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얼른 끼어들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나.”

아르카이츠의 간단명료한 말에 다시 한번 장내에 침묵이 돌았다.

그러니까 황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거나, 혹은 파비안 황태자가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천륜까지 저버리며 거짓
고서를 공개했거나.

파비안이 피식 작게 웃음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내가 워낙에 조용해서, 그 작은 소리조차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파비안에게로 돌아갔다.

아르카이츠도, 황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뭘 그리 돌려 말하십니까. 그냥 내가 다 꾸민 일이라고 말하면 되실 것을.”

오만한 태도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파비안은 그간 귀족들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파비안은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하고 침착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찌 파비안 님께서 그런 거짓말을…. 하면 페트라 황후께서 남기셨다는 유언은.”

“그 역시 모두 거짓말이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의 진실도 말한 적이 없소.”

황제의 뒤에서 휠체어를 잡고 서 있던 페트라가 천천히 망토의 후드를 걷어 내려 자신의 얼굴을 공개했다.

그 자리에 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보다 훨씬 더 긴 침묵이 장내에 흘렀다.

이윽고 마치 유령을 보듯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이가 생긴 것은 물론 비명을 지르는 이들로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야 할 사람인 파비안은 여전히 그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 채였다.

“…살아 계셨군요.”

“유감스럽게도. 살아 있었다, 파비안.”

“…아르카이츠, 네 계획인가? 너도 참 대단하군. 장님이 된 제 어미를 주술사로 내 옆에 붙여 놓다니.”

저 하얀 눈동자는 분명 파비안의 의뢰를 받아 몽마를 소환했던 주술사의 눈과 같았다.


파비안은 세상에 우연은 없다 생각했다.

또한 그동안 묘하게 여유로웠던 아르카이츠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완전히 나를 가지고 놀았군. 난 그에 장단 맞추듯 놀아난 거고.”

파비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혀로 입 안을 굴리다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분노하기보다는, 마치 자신이 바라던 바를 이룬 승리에 찬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아르카이츠가 인상을 찌푸리던 순간.

“컥.”

짧은 소리와 함께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르네가 그대로 자신의 명치 부근을 틀어쥔 채 옆으로 고꾸라졌다.

* * *

그저 목이 말라 권하는 물을 마셨을 뿐이었다.

아무런 맛도, 향도 나지 않는 물이니 당연히 방심했다.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물이 아니었다.

불타는 듯 뜨거운 것이 명치에 턱 막힌 기분에, 르네는 그대로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자신이 물이 아닌 뭔가를 들이켰다는 걸 안 르네는 곧장 다른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온몸이 마치 거대한 불덩이에 삼켜진 듯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아, 내 아기….’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르네는 난생 처음 보는 장소에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르네는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운 하늘에, 보랏빛 구름과 적색의 구름이 실타래처럼 뒤엉킨 곳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로라처럼 묘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매우 두려웠다.

자신이 누군지, 어디에 살았는지, 무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

르네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눈떠 보니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런 기묘한 상황이었다.

하여 그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단 걷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내딛자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어렴풋이 주변이 보였다.

기묘하게 뒤틀린 나무들은 옹이마다 꼭 절규하는 인간의 얼굴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그들 주변에 울창하게 피어난
수풀들은 꼭 자아라도 있는 것처럼 저들끼리 꾸물꾸물 움직여 댔다.

어디선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때마다 이상한 악취는 물론, 나무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꼭 비명
소리처럼 들렸다.

끼에에엑, 끼에에에엑, 끄아아아악―!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 같은 비명 소리에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흔들렸다.

이 기괴한 광경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굳고 말았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같은 사람 모습을 한 누군가가 창백하게 질린 채로 달려왔다.

르네는 얼른 그를 붙잡았다.

“저기요, 여기가 대체 어딘가요?”

“뭐, 뭐야…? 너, 너 모르는구나?”

“네?”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었나 보네. 너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마귀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뭐가 돌아다녀요?”

“마귀들! 완전 굶주렸으니 널 보자마자 씹어 먹을걸? 얼른 도망쳐! 얼른! 에잇, 진짜! 따라와!”

그는 그대로 르네의 손을 잡고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르네는 저도 모르게 같이 뛰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저와 같은 흰색의 단벌 차림새로 창백하게 질려 뛰고 있는 사람들 위로 무언가가 보였다.

“…저, 저게 대체 뭔…!”

“마귀라니까 그러네!”

인간과 기본 형태는 비슷한데, 몸은 온통 시뻘건 색에, 기다란 뿔이 양쪽 눈썹 위에 돋아났고, 붉은 눈을


희번덕대는 그것은 등에서 붉은 박쥐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그것은 실실 웃고 있었는데, 곧 달리는 인간 중 하나를 집어 올려 그대로 목에 이를 박고 피를 뽑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르네는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얼른 제 손을 잡아당기는 이를 따라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이리로 들어와!”

그는 꽤 오랫동안 도망쳐 다닌 건지, 어딜 가면 저 마귀들의 눈에 덜 띄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르네는 그를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속이 텅 빈 나무 아래 기어 들어가 잔뜩 몸을 웅크렸다.

“숨 쉬는 소리조차 내면 안 돼.”

바깥에서는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온갖 비명 소리와, 고기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 숨을 죽였을까.

어느 정도 소리가 잦아든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르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르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잡아끈 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내가 왜 마계에 있는 건데요…?”

“…그야 네가 죽었으니까 여기로 왔겠지.”

“내, 내가 죽다니…?”

“마계에는 죽은 이들이 오는 거야. 죽지 않아도 죽음이 확정된 사람이나. 딱 보아하니 자살할 것 같아 보이진
않고. 누구한테 살해당했나? 아니, 병에 걸린 건가? 뭐 기억나는 건 없어?”

“없어요. 아무것도….”

“그럼 이제 막 여기서 눈떴나 보군. 이봐. 나는 너까지 달고 다닐 여유가 없거든? 여긴 무조건 개인전이야.
혼자서 다니는 게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거지.”

“…….”

“지금이야 막 죽은 맹한 애를 또 죽게 하기 불쌍해서 도와줬다지만 이제 너 혼자 다녀. 대신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항은 내가 알려 줄게.”

그는 르네에게 이곳에 대해 몇 가지 알려 줬다.

아까 전 그가 말해 준 대로, 이곳은 마계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 혹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이들, 혹은 반쯤 죽어 가는 이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저승으로 가는 길인데, 이따금 운이 안 좋으면 주변을 날아다니는 마귀들에게 먹혀 버린단 거다.

죽은 상태로 한 번 더 죽는다는 건데, 마귀한테 먹히면 환생이고 뭐고 없었다.

그야말로 소멸이니 뭐로든 환생하고 싶다면 죽을힘을 다해 마귀한테서 벗어나 저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
“저 앞?”

“아까 우리가 달려온 방향 있지? 거기로 냅다 달리다 보면 계단이 나올 거야. 일단 계단에만 닿으면 마귀들도
잡지 못해. 그 이후부터는 천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

“그러니까 죽은 인간들이, 죽기 싫으면, 죽도록 달리는 거지. 알겠어? 그리고 기억은 차차 돌아올 거야. 원래
다들 그래. 나도 그랬거든. 여긴 해가 지고 달이 뜨질 않으니 시간이 얼마만큼 흘러가는지 몰라. 그냥… 도망
다니다 보면 어느새 다 떠오를 거야.”

아, 그리고 너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마.

마귀들은 후각이 발달되어서 그런 건지, 한곳에 오래 있으면 특정 향이 나는 건지.

하여튼 들키기 십상이니까.

“이제 그만 찢어지자.”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르네만 두고 다시 후다닥 길을 떠나 버렸다.

르네는 ‘잠시만!’ 하며 그를 부르려다 이내 저 멀리서부터 다시금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얼른 입을 틀어막고


옹이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무서워…. 구해 줘, 아르카이츠… 응?”

무심코 입에서 튀어 나온 단어에 르네는 잠시 고개를 갸웃댔다.

아르카이츠? 그게 대체 누구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보통 본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지 않나.

제 이름조차 기억 못 하면서 르네는 방금 제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집요하게 생각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조금 전 이름도 알려 주지 않고 가 버린 이의 조언대로, 르네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일단 도망쳐야 했다.

자신이 지금 죽었든 살았든 간에 적어도 마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뛰어야 했다.

그리하여 르네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저 멀리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는 계속해서 달리다, 수풀이나 옹이 사이, 혹은 동굴 깊숙이 들어가 몸을 피신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얼마만큼 흐르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는데도 어두운 하늘에 태양은 뜨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달이 뜨지도 않았다.
보랏빛과 붉은빛의 구름들은 처음 본 형태 그대로 하늘에 떠 있었다.

자그마한 동굴에 몸을 피신하고 있던 르네는 웅크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녹색 눈동자는 심히 떨렸고, 창백하게 움푹 파여 있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르카이츠라는 이름을 떠올린 이후부터 드디어 두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르네 투.

르네 투가 대체 뭘까?

곱씹어 생각하던 르네는 그것이 자신의 아이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기억이 떠오른다더니.

정말 그 말대로 한번 기억이 떠오르자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천천히 하지만 방대한 기억들이 스며들듯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르카이츠에 대해 떠올렸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이자 자신이 사랑했던 이의 이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르네 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르카이츠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아이.

그 아이가 태중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떠오른 날 르네는 자신의 홀쭉한 배를 부여잡고 소리 죽여 울음을 삼켰다.

‘아르카이츠, 난 어떻게 된 거야? 배 속의 아이는 무사한 걸까?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야.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르네 피어스.

피어스 가문의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자 황태자 아르카이츠의 단 하나뿐인 오메가.

그의 아내, 그의 사랑. 제국의 황태자비.

그리고… 청문회가 열리던 날, 자신이 마셨던 의문의 차까지도.

‘내가 독을 마셨구나…. 바보같이, 어떠한 의심도 않고 독을 마시고 말았어. 파비안의 짓일까? 미카엘의 짓일까?
난 정말 죽은 거로구나. 그럼 르네 투는? 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아르카이츠는? 많이 슬퍼할까?’

무엇이 되었든, 르네는 현세로 돌아갈 방법 따위 몰랐다.

저를 도와줬던 이의 말처럼 이곳은 죽은 이들, 혹은 죽을 만큼 위중한 이들이 오는 곳 아닌가.

‘일단 그 사람이 말한 계단 쪽으로 가야겠어.’


그곳에 가면 마귀들도 건들지 못하고, 저승에 가 환생할 수 있다지 않나.

환생을 하게 된다면, 아르카이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무엇으로 환생하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르네는 적어도 마귀한테 먹혀 소멸될 수는 없었다.

‘소멸되어선 안 돼. 난… 난 이렇게 사라질 수 없어.’

일차적인 목표는 그뿐이었다.

현세로 돌아간다든지, 자신의 죽음을 밝혀낸다든지.

그런 건 모두 차치하고 마귀로부터 소멸되지 않는 것.

그 계단을 올라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다시 환생하여 아르카이츠를 만나는 것.

동굴에서 잠시 숨을 고른 르네는 다시 슬그머니 나와 발소리를 죽인 채 맨발로 흙을 밟으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건지, 저 멀리서 성스런 흰 빛을 뿜어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계단이다!

르네는 드디어 고지에 도달했다 생각했다. 그는 뛰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붉은빛의 마귀가 불쑥 튀어나와 르네를 덮치더니 그대로 날카로운 입을 쩌억
벌렸다.

#83.

“영혼이다, 배고파! 배고파!”

기겁하다 못해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지만, 바닥에 나동그라진 르네는 손에 집히는 대로 그의 얼굴에 냅다


휘갈겼다. 돌덩이가 안구에 정통으로 맞은 듯했다.

마귀도 고통을 느끼긴 하는 건지, 다행히도 마귀는 제 눈을 감싸 쥐며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르네는 벌떡 일어나, 그것이 저를 쫓아오지 못하도록 돌로 다시 한번 날개 한쪽을


짓눌렀다.

그런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뛰기 시작했다.

저 계단에만 다다르면, 저 계단에만 도착하면!


분명 코앞인 듯한데….

어째 닿을 듯 닿지 않는 신기루처럼 쉬이 도착하지 않는 것에 르네는 초조함을 느꼈다.

엄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부림치던 마귀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날개를 다시 맞추곤 그대로 날아올랐다.

“이 망할 놈이!”

그는 화가 난 듯이 무어라 욕지거리를 읊다가 르네를 비웃듯 깔깔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펄럭였다.

“따라오지 마, 마귀 새끼야!”

“이 망할 음식 주제에 날 때려? 나 배고파, 인간 영혼은 맛있다! 배고파!”

“할 줄 아는 게 그 말밖에 없냐고! 따라오지 마!”

“네가 마지막 영혼이다. 너까지 모조리 먹어 치워 주마!”

“꺄아아악! 오지 말라고오오오!”

르네는 비명을 지르며 계단으로 더 빨리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마귀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놀며 봐주었다는 양 재빨리 하강하여 르네의
머리칼을 그대로 틀어쥐었다.

“아악!”

마귀의 새빨간 손에 르네의 금색 머리칼이 엉켜들었다.

르네는 고통스러워하며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기는 힘에 어쩌지 못하며 뒤로 끌려갔다.

“마지막이니까, 가지고 놀다 먹어 주마. 으헤헤헤!”

마귀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르네를 보곤 혀를 날름거렸다.

그 기다랗고 뱀 같은 혀가 르네의 뺨에 닿으려던 순간.

“끄아아아아악!”

마귀가 비명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무언가가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르네는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는 힘이 사라지자 뭔가 싶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그 무언가가 바로 마귀의 혀끝과 제 머리칼을 쥐고 있던 손목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당황하던 찰나, 르네는 그대로 악마의 뿔을 잡고는 목을 베어 버리는 이를


발견했다.
르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칼에 묻은 검은색 피를 한번 털어 낸 이가 천천히 뒤돌아 르네 쪽을 바라봤다.

“…르네.”

르네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르카이츠!”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르네는 울면서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아, 아르카이츠도 죽은 거예요? 응? 르네 투는? 우리 애기는? 당신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에…!”

르네는 꾸역꾸역 참아 왔던 눈물을 터트리며 아르카이츠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안도감도, 그리움도 아니었다.

네가 왜 마계에 있어. 네가 왜 여기 있냔 말이야. 당신도 죽으면 어떻게 해.

속상한 마음이었다.

“르네. 죽은 게 아니야.”

“…엉?”

“데리러 왔어. 돌아가자.”

“…….”

“네가 돌아가야, 아이도 살 수 있어.”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어요. 두 분 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르네가 뒤돌았다.

“미카엘?”

미카엘은 르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르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르네. 날 용서해 줘요.”

* * *

황태자비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그를 아르카이츠가 얼른 붙잡아 바닥에 부딪치진 않았지만 르네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듯 쌕 쌔액,
앓는 소리를 냈다.

하얀 목덜미에 푸른 혈관이 도드라지더니, 이내 목 주변이 붉어졌다.

독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여 급히 청문회를 중단하고 의원을 불렀다.

“도, 독이 맞는 것 같사온데 난생처음 보는 독입니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달리 방도가 없을 듯합니다. 일단


해독제들은 모두 다 먹여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태중의 아이는?”

“아직까진 맥박도 정상이고, 움직임도 보이지만… 산모가 위독해질수록 태아 역시 위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르카이츠는 착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파비안이 승리의 미소를 보여 주던 그때.

바보 같았다. 파비안의 진짜 목적을 잠시 잊고 말았다.

그는 나한테서 르네를 앗아 가고 싶은 거야. 내 소중한 것을 영영 보지 못하도록.

아르카이츠는 병석에 누운 르네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비의 상태를 살피러 온 황제와 황후 역시 제 아들의 실의에 빠진 모습에 감히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루, 이틀, 르네의 몸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르네와 태중의 아이 둘 다 말이다.

“…태중의 아이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려면 지금 아이를 꺼내야 합니다.”

“이제 겨우 7 개월 된 아이를 배에서 꺼낸단 말인가.”

“이대로 두면 둘 다 죽습니다. 물론 지금 아이를 꺼낸다 해도 백 퍼센트 살 거란 장담은 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말했다.

둘 다 죽을 바에 한쪽은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냐며 아르카이츠를 설득하려 했다.

아르카이츠는 살면서 이렇게나 무력하다 느낀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자신이 끔찍했다.

“나보고, 르네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라, 그걸 허락하라 말하는 건가.”

“…전하.”

“나보고, 르네를 포기하라 말하는 건가. 내가 어찌 그런 선택을….”

아르카이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애써 억누르듯 크게 목울대를 움직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두려웠다. 미치도록 두려웠다.

이대로 르네를 잃고 싶지 않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 *

사흘째가 되는 날, 아르카이츠는 파비안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르네를 살려 달라 애원했다.

“르네가 먹은 독은 인간 세상의 독이 아니야. 네가 데리고 있는 그 몽마가 사용한 독이지? 너라면 그 해독제를


받아 낼 수 있잖아. 차라리 날 공격해. 날 죽여. 르네와 아이만큼은… 제발, 건들지 말아 줘.”

르네가 쓰러진 이후 단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해 퀭해진 얼굴로 아르카이츠가 빌었다.

뭘 요구해도 들어줄 테니, 제발 르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

무릎까지 꿇으며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생명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겠다는 모습으로 애원했다.

파비안은 그런 아르카이츠를 쳐다보다,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아르카이츠. 잠을 자지 못해 아주 피곤한 듯한 얼굴이야. 돌아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지 그래?”

“네 모든 거짓말들과 계략들, 없던 걸로 칠 테니 제발 르네를 살려 내 달라고. 르네는 죄가 없잖아!”

“널 사랑한 게 죄라면 죄겠지. 그리고 아르카이츠… 난 지금 네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구나.”

파비안이 바란 것은 지금 아르카이츠가 보이는 비굴한 모습 자체였으니, 그가 아르카이츠의 애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알 게 뭔가. 남의 오메가가 죽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파비안은 어차피 자신의 죄가 모두에게 까발려질 마당에 뭐라도 하나 얻는 게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그 얻는 거라는 건 바로, 곧 모든 걸 잃은 자신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실의에 빠진 아르카이츠.

“이 개 같은 새끼가…!”

아르카이츠는 분개한 얼굴로 파비안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런 모습조차 재밌다는 듯 빈정거렸다.

“이렇게 광분한 모습도 보이고. 참, 신기해.”

“…….”

“그렇게 미쳐 가는 것 아니겠나. 너도 뭔갈 잃는 게 있어야지. 항상 그렇게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아르카이츠.”

#84.

가지고 싶은 걸 갖지 못해 미쳐 가는 이의 마음을 알라고.

그리 말하는 파비안에 아르카이츠는 멱살을 놓고 터덜터덜 르네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르네의 입술이 델피니움처럼 푸르렀다. 온몸은 차가운 눈밭에 방치된 것처럼 차가웠고, 태중의 아이는
아르카이츠의 목소리에 아주 간간이, 아주 힘겹게 반응할 뿐이었다.

이대로 정말 르네를 포기해야 하는 건가?

르네를 영영 잃어야 한단 말인가?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손을 꼭 쥔 채, 듣지 못할 그에게 말했다.

“르네, 나는… 나는 너 없이 살 수가 없어….”

그 눈에서 눈물이 툭, 투툭,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너무 슬펐고, 르네가 떠날까 두려웠다.

르네가 없는 삶이 가능할까?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파비안의 말처럼, 아마 그렇게 미쳐 갈 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미워하고,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다 그렇게 미쳐 가는 거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의사를 불러 매우 힘겹게 말했다.

“…아이를 꺼내도록 하지….”

“…예, 전하.”

아르카이츠의 선택에 그 자리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수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르네의 숨은 너무나도 미약해서, 곧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이 정도면 진즉에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르카이츠는 그 마지막 숨을 가까이서 듣겠다는 듯 르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울음이 잠깐 튀어나오려는 것을, 그는 이를 악물어 참아 냈다.

의사가 르네의 배를 가르기 위해 날카로운 칼날을 집어 든 순간이었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만요! 잠시만!”

미카엘이 다급한 목소리로 수술을 멈춰 달라 애원했다.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마지막 순간에 미카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를 이 자리에서 당장 도륙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파비안이 악착같이 숨기고 있었는데 제 발로, 감히 르네와 자신의 침실로 들어오다니.

애달픈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카이츠는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나직하게 경고했다.

“당장 나가라. 네가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살려 내겠습니다…. 제가, 황태자비를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죄를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기만도 아니고 장난도 아닙니다. 제발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따져 물을 여유 따윈 없었다.

“정말 살릴 수 있나?”

“예, 살릴 수 있습니다. 다, 다만 아르카이츠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계로 가서 직접 데려와야 합니다.


함정 같은 거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목숨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와 함께 마계로 가시겠습니까?”

“그리해서 르네를 살릴 수 있나?”

“네.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르카이츠는 가릴 것이 없었다.

르네를 살릴 수만 있다면야 마계로 가는 것 따위 두려울 리 없으니.

* * *

몽마의 힘을 이용하여 마계로 들어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몽마는 애초에 꿈과 저승을 넘나드는 힘을 가진 존재.


미카엘은 르네 옆에 아르카이츠를 눕게 한 뒤, 그 앞에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았다.

곧 아르카이츠는 온통 어두운 하늘에 보랏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기묘한 구름이 빼곡한 하늘 아래서 눈을 떴다.

어느새 미카엘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이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 마계입니다. 완전히 죽지 못한 인간, 혹은 미련이 많은 영혼들이 이곳을
떠돕니다. 르네 님은 아직 숨이 멎지 않았으니 이곳에 있을 겁니다. 찾아서 데려오면 됩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와 함께 인간들이 떼거지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위로 보이는 거대한 붉은 박쥐와 인간의 혼합 개체에 미카엘이 당황하여 경고했다.

“마, 마귀예요. 보통은 지옥에 갇혀 있는 것들인데 마계로 기어 올라왔나 봐요. 큰일이에요. 르네 님을 얼른


찾아야 해요. 마귀한테 먹힌 영혼은 소멸되어 찾을 수 없으니까요.”

르네는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완전히 죽은 것도, 마귀한테 먹혀 소멸된 것도 아닌 상태.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거다.

“마계의 영혼들은 직선의 길 끝에 있는 계단으로 향할 테니까요. 저 앞으로, 쉬지 말고 달려야 합니다. 르네


님도 아마 도망치고 계실 겁니다. 마귀한테 잡히기 전에 얼른 저희가 먼저 찾아야 해요.”

그렇게 말한 미카엘은 앞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르카이츠 역시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다른 길은 없이 오로지 하나의 길만 있는 곳.

숲 안쪽으로 숨어들어 가는 인간들.

뒤에서 마귀한테 먹혀 비명 지르는 인간들.

아르카이츠는 온갖 두려움에 떠는 영혼들로부터 르네를 떠올렸다.

부디 자신이 그를 찾아낼 때까지 르네가 무사하길 바라면서.

한참 달려가고 있을까, 마귀 한 마리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검을 휘두르며 인간들을 도륙하고 있었던 건지, 검에 피가 흥건했다.

반쯤 두려움에 정신 나가 뛰어다니는 인간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 마귀가 미카엘과 아르카이츠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상한 게 들어왔네. 어째서 몽마가 여기에 있지? 마계의 주인이 화낼 거다. 하지만 몽마의 영혼, 맛있지.
몽마는 맛있다. 그리고 난 배고파. 다른 마귀들이 뺏어 먹기 전에 나도 먹어야지.”

그러자 앞서 나갔던 미카엘이 슬그머니 아르카이츠에게 자리를 양보하듯 뒤로 물러났다.

“…마, 마귀는 육탄전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예요. 무서워하지만 않으신다면. 전 못 싸워요. 전하께서 싸워


주세요.”

그가 굉장히 뻔뻔하게 권유했다.


아르카이츠는 저에게 달려드는 것의 날개를 잡은 뒤 그대로 양쪽 날개 뼈를 부러뜨렸다.

“아아악!”

그런 뒤 마귀가 가지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려 그 심장을 세게 찔렀다.

한데도 마귀는 죽지 않으며 비틀대며 움직였다.

“목을 베어 버려야 해요!”

아르카이츠는 미카엘의 말에 따라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마귀가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통통통, 마귀의 머리가 굴러 미카엘의 발치에 다다랐다. 미카엘은 그 옆으로 슬그머니 비키며 말했다.

“…마귀가 꽤나 여러 마리 몰린 것 같아요. 아무래도 무기까지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영혼들을 사냥하며 노는 놈들


같은데. 제일 악질이에요. 잡아서 먹는 것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데리고 노는 놈들이니까요…. 근데 지금처럼
목만 베면 될 거 같아요.”

미카엘은 슬그머니 엄지를 들어 올리며 전하만 믿겠다는 식의 눈빛을 보냈다.

아르카이츠는 딱히 별다른 반응 없이, 마귀한테서 빼앗은 검을 들고 다시 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미카엘의 말대로 마귀들은 꽤 많았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영혼을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하는 것이 특징이라, 대부분은 그대로 입에 처넣기 바빴다.

하지만 간혹 무기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마귀들은 배고픔보다는 사냥하는 유희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들이니


특히나 더 조심해야 했다.

그것들을 만나는 족족 아르카이츠가 목을 베어 의도치 않게 그가 걸어온 길은 마귀들의 검은 혈흔으로 진창이 되어


버렸다.

그럴수록 아르카이츠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르네의 흔적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와 길이 엇갈렸나?

설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적거리는 동안 이미 먹히고 만 것인가.

사람 가지고 놀기 좋아한다는 질 나쁜 마귀한테 걸려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조금 더 빠르지 못해서, 그래서 르네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 때쯤 저 멀리서부터 아주 익숙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르네의 목소리였다.

아르카이츠는 그대로 내달렸다.


르네의 머리채를 잡은 채 불결한 긴 혀를 날름대는 마귀를 본 순간 아르카이츠는 그대로 그것의 팔과 혀, 그리고
목을 동강 내 버렸다.

극적인 순간의 멋진 등장이라든가, 애틋한 재회 그딴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동강 낸 머리통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그런 뒤 혹시나 더러운 피가 르네에게 묻기라도 할까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뒤돌아 마주했다.

“…르네.”

르네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르카이츠!”

곧이어 그의 멱살을 쥐듯이 잡고는 탈탈 털었다.

“아, 아르카이츠도 죽은 거예요? 응? 르네 투는? 우리 애기는? 당신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에…!”

아무래도 르네는 아르카이츠 역시 죽어서 여기 온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르네. 죽은 게 아니야.”

“…엉?”

“데리러 왔어. 돌아가자.”

그러자 르네의 눈에 다시 한번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듯, 대체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 건지 이해 못 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저 아르카이츠의 말을


믿고 희망을 찾았다는 얼굴이었다.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주 잠깐이나마 영영 보지 못할 뻔했던 이를 다시 만났다는 것에 그제야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

“네가 돌아가야, 아이도 살 수 있어.”

#85.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어요. 두 분 다.”


르네는 그제야 미카엘 역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미카엘?”

하지만 미카엘은 이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르네. 날 용서해 줘요.”

“…근데, 여기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 건데요?”

르네의 질문에 미카엘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르네가 이곳에서 지낸 시간 동안은 분명 구름에 움직임이나 변형 따위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의 구름들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무언가의 형상이 만들어지며 거대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곧 마치 뻥 뚫린 것처럼 검은 구멍이 하늘 위에 생겨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게 분명했지만, 미카엘은 태연한 얼굴로 르네와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으로 마계에 들어온 것이니,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나실 겁니다. 르네 님은 무사하실 것이고, 태중의 아이도
문제없을 거예요. 어차피 신경도 안 쓰실 것 같지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미카엘의 말에 르네가 물었다.

“당신은? 저게 뭔지 알고?”

“곧 마계의 주인이 나타날 겁니다. 전 여기에 남을 거예요. 어차피 마계에서 왔으니, 여기에 남는 게 맞겠죠.
이제 돌아가세요. 마계의 주인을 만나게 되면 성가시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파비….”

미카엘은 달리 말할 게 있는 듯 보였지만 곧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행복하게 사세요. 아니, 두 분은 행복하게 살 거예요.”

미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그 검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구멍이 점점 작아져 사라지더니 돌풍을 일으키던 바람 역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화, 황태자비 전하께서 눈을 뜨셨다!”

“살아나셨습니다!”

…르네는 다시 눈을 떴다.

옹기종기 모여 르네와 아르카이츠를 들여다보던 의원과 간호사들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르카이츠 역시 눈을 뜨곤 몸을 일으켜 르네를 부축했다.

의원은 얼른 청진기를 가져와 르네의 상태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곧 그가 매우 기뻐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황태자비 전하의 맥박이 정상이옵니다! 태중의 아기씨도 무사하십니다. 황태자비 전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불편하신 곳은요? 춥거나, 덥거나 하진 않으시고요?”

“네. 없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멀쩡해요.”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십니다! 한데 아르카이츠 전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어떤 해독제를 써도


불가능하던 일이….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이걸 다른 이들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그때 르네가 눈을 뜨자마자 이 소식을 바깥에 전하러 나간 시종과 함께 황제와 황후 그리고 대신들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죽음에 가까워졌던 황태자비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에 대단히 기뻐하면서도, 의아해하는 얼굴들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대체 어찌 된… 아니, 미카엘 님은 왜 저기에….”

그들은 침대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미카엘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봤다.

르네와 아르카이츠가 눈을 뜨고 난 뒤에도 미카엘은 미동 없이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방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시끄러울 법한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엘의 몸이 마치 산산조각 나기 직전의 도자기처럼 쩌적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미카엘의 몸에서 연기처럼 작은 가루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바람이 일자 미카엘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먼지가
되어 그대로 파스스 사라지고 말았다.

미카엘이 이 방 안에 있었다는 흔적은 다 타 버린 재의 쾨쾨한 냄새뿐이었다.

몇몇은 코를 막고 기침을 하거나, 눈이 매워 충혈된 눈을 비비적대곤 했다.

그러다 다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파비안이었다.

“…….”

파비안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자신이 본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린 것이 정녕 미카엘이 맞느냐, 하는 눈빛이었다.

그를 소환하는 데에 도움을 줬던 황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계에서 무언가를 가져올 때는 대가를 치러야 해.”

마계에서 르네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르카이츠는 잃은 것이 없었고, 무언가 거래한 기억도 없으니.

르네도, 아르카이츠도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미카엘이 그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간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파비안 역시, 미카엘이 자신을 배신하고 르네와 아르카이츠를 도왔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 보였다.

더불어 곧 모든 상황들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걸 예상한 듯했다.

며칠 뒤.

르네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나서 다시 청문회가 열렸다.

이번에 심문석에 앉은 건 파비안이었다.

그는 화살처럼 날아오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후 마지막 발언에서는 딱 한마디만 했다.

“어떠한 처벌이든… 알아서 하시오.”

그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궁금치도, 개의치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대가를 치러야 했다.

* * *

파비안의 청문회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는 자신이 저지를 죄를 부인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청문회는 곧 재판으로 변했다.

그곳에서 파비안은 황후 페트라의 살해 미수, 그리고 황태자비 르네 피어스의 살인 청부 및 암살 미수, 제국 내


금지된 흑마술 사용, 황궁 모독, 황궁 위협, 그 외 기타 외교적 문제 등등 수많은 죄목으로 폐위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

원래라면 처형당하고도 남았을 죄명이었지만, 황제와 황후 그리고 아르카이츠와 르네 모두 그의 처형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결정 내릴 생각이었다.
하여 파비안은 황궁의 가장 외지고 높은 탑에 갇혀 자신의 형이 확정될 때까지 감금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귀족들은 파비안에 대한 벌이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 의문을 가지다가도, 영혼마저 죽어 버린 듯 텅 비어 버린


파비안의 눈빛을 보고는 조용히 수긍했다.

황제와 황후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모두 인정했다.

황제는 거짓으로 귀족들을 속인 죄.

황후는 아르카이츠의 계획이었다고는 하나, 제국에서는 금지된 흑마법을 사용한 죄.

물론 황제의 죄는 체질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비롯되었다는 점.

황후는 아르콘 부족 출신인 만큼 그곳에서는 흑마법이 금지된 주술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하여 그들의 죄는 일정
부분 차감되었다.

다만 귀족들과 백성들을 속여 신뢰를 잃었으니 그들의 자리에서는 물러나야만 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새로운 황제와 황후가 헬리오스 제국을 이끌어야만 했다.

아르카이츠는 만삭에 가까운 르네가 혹시라도 무리할까 즉위식 따위 그냥 생략하자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르네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굉장히 짧고 간결하게 즉위식을 올렸다.

간단한 즉위식 이후, 즉위식으로 책정되어 있던 상당량의 예산을 백성들에게 구휼미 등의 구호품으로 풀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권위보단 백성을 위하는 황제라며 절로 그들을 떠받들기 시작했다.

피어스 가문은 오명을 벗었다.

파비안과 일을 도모하던 허드슨 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르카이츠에게 아부를 떨어 댔지만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요양을 목적으로 황궁을 도망쳐 나왔다.

르네는 이제 험난한 일들은 모두 끝이 났고, 행복한 일들만이 남아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감히 그는 상상하지 못한 거다.

“얘, 르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육아야말로 지옥이야.”

“…무슨 말이 그래, 누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거야.”

“응?”

“…그니까, 황태자를 손에 넣은 게 끝이 아니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누이?”

“육아가 그냥 육아인 줄 알지, 르네? 애를 낳는 것보다 키우는 게 더 힘들다고. …이거 말이야. 원래 시즌 2


까지 있다? …시즌 2 는 육아야. 육아 게임…! 세상에서 제일 키우기 힘든 육아 난도 최상의 아이를 키우는 공과
수!”

르네는 호들갑을 떠는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누가 누이 좀 밖으로 내보내렴.”

“르네! 르네에!”

“진짜 못 살아….”

빙의자를 가족으로 두면 안 되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꾸만 알고 싶지 않은 미래를 알아서 예견해 준다는 거다.

사실 르네의 고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끝…이 아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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