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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자를 가족으로 두면 안 되는 이유 1 85화 완
빙의자를 가족으로 두면 안 되는 이유 1 85화 완
누이가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으레 ‘야반도주한 영애’로서 몇 번 입방아에 오르다 말겠지만 문제는 누나가 결혼했어야 할 상대가
차기 황제, 그러니까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고, 붉고 통통한 입술, 조각같이 뻗은 콧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몸의 굴곡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거세게 흔들어 놓곤 했다.
좋은 집안에, 타고난 외모까지 더해지니 모두들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만큼 피어스 가문에서는 그녀의
신랑감을 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다름 아닌 아르카이츠.
“아델 누나?”
원래의 누이라면.
“와아, 역시 누이야!”
“뭐 어때서? 오호호호!”
“…흐음, 글쎄.”
르네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아델라이드의 모습에, 결국 르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이. 요즘 좀 이상해. 맨 처음엔 아르카이츠 전하와 혼인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했잖아.”
“내가?”
…하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하지 않았던가.
“누이의 평생소원이 그거 아니었어? 황실에 들어가는 거. 근데 어쩐지 요즘 며칠간 너무 우울해 보여서 걱정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결혼하고 싶지 않아.”
“우, 우라질?”
“시발!”
“뭐 어때! X 된 걸 어쩌라고!”
“누이!”
“그때는 그랬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네가 뭘 알아,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복잡하고 심란할지 아냔
말이야! 아이, 시바 진짜! 아, 돌아 버리겠네 정말! 아 개빡쳐, 진짜! 왜 하필 여기냐고. 아, 왜 하필
여기냐고오!”
“누, 누이!”
“시바, 다 꺼져 진짜! 아악! 이쁜이들이 많으면 뭐 해, 존잘남이 많으면 뭣하냐고! 왜 하필이면, 아후, 속
터져!”
시종들은 그 옆에서 팔과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며 피가 원활히 돌도록 했고, 르네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떻게든 두 분을 위로하려 했다.
“일단 시종들을 풀어 누이를 찾도록 했어요.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랑 아버지 둘 다
기운 차리세요. 어떻게든 결혼식을 늦춰야죠. 아직 시간은 남아 있잖아요.”
“왜, 왜들 그러세요?”
“방법이 아주 없진 않구나.”
#2.
현재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르네 피어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올해로써 20 살이 되는 그는 피어스 가문의 막내아들로, 황제의 충신인 피어스 공작과 온화한 피어스 부인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 이였다.
조금의 참고사항이라 함은, 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제국의 영식들에 비해 조금 성장이 더디다는 거였다.
흰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녹안은 생기를 주었고, 흰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은 꼭 체리같이 도톰했다.
제국에선 동성을 사랑하는 일이 흔한 일이었고,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르네에게 구혼서를 보내는
영식도 많았다.
르네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르네! 부디, 누이 연기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알았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보렴, 가발까지 쓰니 정말 아델이랑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야. 응?”
걸리면 사망이다.
이 무슨 큰일 날 소리인가.
미친 짓이 분명하다!
“예…?”
한데 황태자가 동성애라니?
“…황제께서 그리 원하셨다. 어차피 아델라이드도 권력에 더 흥미를 보였지 않느냐. 지금이야 대관절 무슨 이유로
도망을 친 건지 모르겠다만. 자 자, 시간이 다 되었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은 우리부터
살아야지.”
르네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런 알 수 없는 말들은 다 무엇이며.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남매지간이었으니까.
#3.
역시 아델라이드야.
역시 황태자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이지.
* * *
혹여나 그들에게 들키진 않을까, 눈을 마주치면 날 알아보지 않을까, 르네는 최대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걸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내향적이고, 사람에 큰 관심이 없어 그 성질을 들키지 않은 것뿐.
‘진짜 돌아 버리겠네.’
칠흑처럼 검은 남색의 머리칼, 황금 사자를 닮아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 곡선과 직선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강렬한 이목구비까지.
“뭐야, 통 얼굴을 안 드러내길래 추남인 줄 알았더니, 이리 미형이란 말이야? 세상에, 그동안 숨긴 얼굴이
아깝군. 혼혈이라더니 정말 이국적으로 생겼네. 르네! 이리 와 봐. 네 매형 될 사내야. 어때. 꽤 잘생겼지?
초상화대로만 생긴 거면 참 행복할 텐데! 아하하하!”
그 초상화랑 전혀 다른 사람이잖아!
너무 크고, 너무 우락부락했다.
본능적이라고나 할까.
분명 들켰을 거다.
“왜 이리 잔뜩 겁을 먹었습니까, 아델라이드.”
평소 누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났던 르네에게 아델라이드를 모욕하는 말은 저를 모욕하는 말과도 같았다.
저게 감히 우리 누나한테!
적어도 억지로 합방하는 일은 없겠는데? 기대가 되는군. 그 눈빛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뀌게 될 때가.
‘젠장, X 됐다…!’
* * *
“후….”
몸의 곡선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슈미즈 차림은 조금만 몸을 더듬으면 여인이 아닌 사내의 몸이라는 게 들킬 게
분명했다.
가발을 뒤집어쓴 긴 머리칼은 무겁고 더웠으며, 아까 전 본 그 우람한 팔뚝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기라도 한다면
덜렁 들려 올라갈 게 뻔했다.
방의 정중앙,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캐노피 침상은 다양한 체위로 엉키기 편하도록 넓은 크기를 자랑했다.
#4.
왜 옷을 입다 마냔 말이야!
“남자 몸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웬만해선 말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기도 했고, 딱히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분명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 근원이 뭔지 몰랐던 르네는 그저 생존에 대한 욕망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악 소리를 내기도 전 제 가랑이 사이를 무릎으로 누르며 들어오려는 아르카이츠의 저돌적인 행동에 르네가
기겁했다.
이미 슈미즈 치마는 무릎까지 올라가 흰 다리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며, 아르카이츠의 한 손은 르네의 발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쇄골 부근의 단추를 뜯듯 잡아당기고 있었다.
“자, 잠깐!”
진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뭐?”
물론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었다.
아, 너무 말이 많았나.
“불만인가요?”
뒤늦게 입술을 한번 깨물곤 ‘저기요!’라고 고쳐 말하는 르네를 보며 아르카이츠가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발, 제발 빨리 좀 쳐 자!
“너 진짜 희다. 자국 나면 볼만하겠는데.”
차라리 도망친 누이가 현명한 선택이었고, 지금 자신이 누이 대신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 그건 또 아닌가? 지금 아주 죽을 맛인 걸 보면.
빨리 좀 기절해, 제발 빨리!
#5.
슈미즈는 너덜너덜해졌고, 가발은 이리저리 헝클어진 걸로도 모자라 반쯤 머리통에서 벗겨져 있었다.
“진짜 못 해 먹겠네.”
이렇게는 제 명에 못 살 것이다.
* * *
“이, 일어났어요?”
“하!”
“근데 이걸 보면 또, 그렇게 격하게 보냈나 싶기도 하고.”
“이건 누가 낸 자국입니까.”
“장난입니다, 장난. 근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지, 최음제 때문인지. 한데 꼭
수면제라도 먹은 양 푹 잠만 잔 기분이 들어서요.”
이걸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아르카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르네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러자 르네의 어깨가 크게 움찔댔다.
“오, 옷 입고 있는데요.”
얘는 이런 표정이 잘 어울린다니까.
정말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정말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뇨. 저 혼자 입을게요.”
“그, 그게 머, 뭐, 뭔.”
르네는 제 허벅다리를 꾹 누르는 묵직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쳐다봤다가, 매우 당황하고 심지어는 겁에
질린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아니, 어제 잘만 해 놓고 왜 그리 놀라십니까.”
* * *
황제의 거처가 있는 중앙의 본궁으로 가는 길, 그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제 1 황태자 파비안과 맞닥뜨렸다.
“소감이랄 게 있나.”
#6.
후계권을 둘러싸고 피 터지게 싸워 봤자 저들에게 득 될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지금은 평화를 추구할 때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하, 너는 결혼했다 이거지? 그래서 어때. 네 오메가를 만나는 느낌이. 정말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나?”
첫눈에 보자마자 각인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베타들의 언어로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요 몇 년간 황제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제는 거동까지 불편해져 아르카이츠의 결혼식 때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예, 아버지.”
완벽한 최상위 계층으로서 헬리오스를 가장 번영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자신의 짝인 오메가를 찾지 못하면 대를
이을 수 없었다.
“운명의 짝을 만나는 건 노력한다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알파와 오메가뿐이어서는 안 되지.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도, 서로에게 각인을 하지 못하면 그건 짝이 아니야.”
하지만 오메가에게서 태어난 알파와는 달리 베타에게서 태어난 알파들은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문제는 이거였다.
아르카이츠는 르네에게 각인을 한 상태인데, 정작 각인된 당사자 르네 피어스는 본인이 오메가라는 자각조차
없다는 것.
헬리오스의 피를 물려받은 알파들은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심한 열병을 앓는다 했다.
“…피어스….”
“아니에요, 아버지…. 나중에. 나중에 제가 직접 말하고 싶어요. 당분간은 비밀로 해 주세요. 네? 그리하고
싶습니다.”
대대손손 황실의 충신이었던 피어스 가문이 오메가와 알파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며, 또 헬리오스의 역사에서
오메가가 사내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또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7.
아무리 황궁의 도서관 자료를 뒤적대도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문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 아내도 아버지를 반가워할 것 같고, 폐하께서도 오랜만에 친우이자 충신이었던 자를 만나면 기운이 나시지
않을까 해서요.
아르카이츠의 말에 황제 역시 제안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그의 은퇴 선언에 많은 이들이 놀라긴 했으나 그동안의 수고와 그리 젊지만은 않은
공작의 나이에 수긍하는 눈치이기는 했다.
늦은 나이에 막내아들을 얻었으니 애틋할 만도 하다 싶어 황제는 순순히 피어스 공작을 사가로 돌려보냈었다.
* * *
피어스 공작은 왕년에 황궁에서 ‘철면의 사내’라 불릴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던 이였다.
어쩐지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 같아 슬그머니 왼손으로 오른 어깨를 주물렀다. 동시에 눈은 얼른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거 참 이상하네, 원래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이런 호탕한 성정이었던가…?’
패악이나 사치가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를 가까이서 보필하던 모든 이들은 그녀가 신분을 막론하고 자신들과
무언가가 확연히 다름을 본능적으로 느껴 왔다.
피어스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걸까. 피어스 공작은 맨 처음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알현하였을 때 페트라 황후에게서 받은 느낌을
똑같이 느꼈다.
그런 자의 곁에 르네를 오랜 시간 둬선 안 될 일이었다.
“아, 예에.”
“많이 걱정되시겠지요.”
“예에….”
“…….”
그것 말곤 그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8.
“…예에?”
“하면…?”
피어스 공작은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다시 한번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그제야 공작은 사실 자신들이 차악이라 믿었던 선택지가 진짜 최악의 수였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 * *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황태자비 궁에 저택의 시녀들을 보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듯했다.
하등 쓸모없는 말들이었다.
“네.”
따라서 거짓 죽음을 만든 후 누이의 장례식을 치르면, 그때 자신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꼭 아버지에게 전해 드려.”
그 모습이 가여워 성질 고약한 누이조차도 르네가 앓을 때면 말없이 곁에서 손을 잡아 주거나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곤 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좀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시기가 다가오면 르네는 조금 예민해지고, 또 감성적이
되며, 많이 나약해진다.
그리 생각했건만.
* * *
“…으음. …으응.”
“허, 허억.”
내가 어제 술을 마셨던가?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리 머리를 헤집어도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었는데.
“으응, 더 해 줘. 더!”
“아르카이츠, 물어 줘. 물어 줘어….”
그냥 지금 혀를 콱 깨물고 죽어 버릴까.
#9.
어떻게 해야 누이의 죽음을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의심받지 않게끔 꾸며낼 수 있을지, 한참 머리를 굴려
댔다.
“대충 꾸미기만 하면 그만이지요. 도련님이나 각하께서 시신 확인하시며 아델라이드 님이 맞다, 확언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예?”
“아뇨, 르네 님. 그럴 리가요.”
“뭐야…. 왜 대답을 안 하고 그래, 애나. 부모님이 뭐라시는데? 너무 위험한 방법이래? 응? 설마, 아무런
말도 없으신 건 아니었지? 응? 말 좀 해 보라니까아. 나 무섭게 왜 그래….”
“헤헤, 많이 놀라셨죠? 여, 역시 우리 도련님은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아니, 황태자비 전하는. 호호. 당연히
각하께서도 걱정하지 말라 하셨어요! 물론,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 바로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그래도
피어스 각하께서 언제까지고 이곳에 유일한 아드님을 방치하시진 않으시겠죠! 아델라이드 님께서 사라지신 뒤로,
유일한 후계자이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르네의 입꼬리는 샐쭉 올라가 있었는데, 그런 도련님의, 아니, 황태자비 전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애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졌다.
애나는 자신이 감히 피어스의 주인님들께 거짓을 고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차마 르네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순 없었다.
애나는 자신이 비록 시녀일 뿐이라 할지라도, 피어스 가문에 뭔가 아주 커다란 일이 닥쳐 올 것이란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제 입에서 튀어나올 희망적인 말만 기다리고 있을 르네를 보니, 너무나도 안쓰럽고 가여웠던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러니까 르네가 이 황궁 생활에 아주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했다.
“그래. 뭐든 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치? 너무 서둘렀다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부모님
말대로 최대한 신중히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애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하자, 르네는 그제야 씩 미소를 지으며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인의 볼륨감을 위해서는 이 더운 여름날에도 브래지어 안에 도톰한 손수건들을 마구잡이로 넣어야만 했다.
테이블 위에 꼬깃해진 손수건들이 널브러졌다.
* * *
제국에서 가장 흔하다는 적색의 머리칼로 염색한 뒤, 빛나는 미모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 주근깨도 가득하게 그려
넣었다.
그렇다 하여 거지꼴로 돌아다녔다가, 웬 거지가 유람선 일등석을 타느냐 의심이라도 받을까 싶어 그녀는 나름
‘시골에서 올라온 부잣집 아가씨’ 행세를 하고 다녔다.
오히려, 완벽한 시골 아가씨 역할을 위해 늙수그레한 유모를 사들여 데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노출이나 장신구가 포인트였던 평소의 화려한 차림새와는 전혀 다른, 어딘가 촌스럽기도 한 소박한 옷차림이지만
결코 값싼 원단은 아닌.
#10.
“한데, 아가씨는 대체 어느 댁 아가씨이시기에 이렇게까지 다른 이 행세를 하시는 것입니까? 귀하신 분인 것
같은데, 어찌….”
“죄송합니다, 아가씨.”
“빙…의요?”
아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녀가 피어스 가문의 아델라이드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싶었다.
“예? 제가 마담은 아닌지라 많은 정보를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저잣거리 나가면 들려오는 이야기들 정도는 알고
있지요?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큰일이요?”
“유명한 가문의 여식이요…? 글쎄요. 누가 실종되었다거나 가출했다는 소문은 없는걸요. 그리 유명한 가문이라면
소문이 안 나려야 안날 수가 없… 헙, 절대 아가씨의 가문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고요!”
“그러고 보니?”
“네.”
“네에, 맞다니까요?”
“이런 미친.”
“예에?”
“…세상에, 아델라이드 피어스 영애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제 2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되겠어. 안 그래? 오호호호,
둘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아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시던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결혼식 때 정말 천상에서 내려오신 것
같은 미모였다고 합니다.”
그냥 모른 척, 마저 도주하면 될 일이지만.
그 어떤 오메가 후보들도 게임의 악역으로 나오는 ‘미카엘’에게 빈번이 지고 말아 악수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어떤 수를 골라도 사약 엔딩이라는.
혹 떼려다 혹 두 개 붙인 격이 이런 걸까?
“르네.”
“너 진짜로….”
“난 이전 누이의 모습이 더 좋아. 당당하고, 어디서든 자신감 넘치는. 지금의 누이는 너무 풀이 죽었잖아.”
아델라이드의 도주를 모른 척 눈감아 주겠다 말하던 하나뿐인 남동생 르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에이 씨, 모르겠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더운 건 둘째 치고, 찝찝하다.
이맘때쯤 원래 르네였다면, 통풍 잘되는 얇디얇은 리넨 반바지와 너풀대는 헐렁한 포에트 셔츠만 입고 침대에서
뒹굴대며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을 갈아 만든 빙수를 먹으며 유유자적하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봐라.
이 더운 날 이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으니, 르네는 본인이 불속으로 뛰어든 불나방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모든 원흉은 다름 아닌 아르카이츠였다.
실제로 아르카이츠는 티타임을 명목으로 제 아내를 본궁까지 오게 했으면서, 막상 마주하자 별다른 인사도,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이 상황에 갑자기 왜 그런 상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 뙤약볕 아래서 육체미를 뽐내는 야수 같은
….
‘아 왜 이래, 나 진짜.’
고수, 중수, 하수 중에 하수가 하는 어설픈 시치미 떼기에 르네는 본인이 한심스러워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자책했다.
“여, 여름이라서.”
“…….”
“내가 언제!”
“…….”
르네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내가 참자, 참아야 해, 참아야 하느니라.’ 머릿속으로 몇 번 다짐했다.
‘지랄 말라지!’
영애들이 르네를 꽃 같은 사내라 추앙했다면, 반대의 경우라 추앙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잖은 내숭 그만 떨고.”
“…이봐요!”
아무리 황태자가 자신을 쿡쿡 찔러 대며 반응을 기대하는 듯해 보여도 곧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재미없어할 것이
분명하다.
#12.
물론 르네 역시 걱정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었다.
“으악! …꺄악…!”
“…저 냄새나요?!”
“네. 냄새납니다.”
Chapter 3. 페로몬
물론 그게 문제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제가 남자인 것을 들키지 않았다 생각하여 악착같이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는 르네를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에게는 그저 저 모습이 하찮고 귀여울 뿐이었다.
아르카이츠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아르콘 부족들은 대대로 체취가 연해 아무리 땀을 흘려도 냄새가 나지 않는
특이 체질이었기에 향수를 뿌릴 일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향수병 모으는 게 취미라 매일 방물장수가 찾아가 이것저것 팔아 댄다지만, 르네는 향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독하다고 싫어했다.
그 역시 이 정체 모를 향을 맡은 걸까.
“여, 여름이라서.”
그 순간 르네가 더운지 가슴팍의 레이스를 펄럭이며 손부채질을 했다. 아까보다 훨씬 다디단 향이 훅 끼쳤다.
“…….”
“내가 언제!”
또 타격감은 왜 이리 좋은지.
그다음 날 저 혼자 태연하게 첫날밤을 치렀네 마네 거짓말하는 르네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골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직 초야는 치르지도 않았는데, 공식적으로는 치러진 셈이니. 아르카이츠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
“같잖은 내숭 그만 떨고.”
“…이봐요!”
#13.
왜 하필 나는 널 봐 버리고 말아서.
“네, 어머니.”
어떻게든 그 곁에 있기 위해.
황궁에도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신화적, 전설적 존재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알파가 있다 한들, 자신의 운명적인 오메가를 만난 적이 없어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에게 페로몬을 느낀다는 점은 알고 있었어도, 이 페로몬이 이렇게나 다디단 향을
내뿜는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본능적으로 자꾸만 제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 최음향과도 같은 것을 르네가 내뿜고 있다는 것을.
몸과 정신의 불통이라니.
어떻게든 제 분신이 발광하지 않도록 머릿속에서는 녹음의 초원과 푸르른 하늘, 맑은 개울 등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제 신부를 강제로 탐하기라도 할까, 스스로를 불신하게 된 아르카이츠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저 냄새나요?!”
“네. 냄새납니다.”
그 향은 정말 지독했다.
너무 지독할 정도로 달아서, 아르카이츠는 수천 송이의 꽃에 파묻혀 행복한 상태로 질식해 죽어 가는 듯한 몽롱한
느낌에 취해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분명 극도로 분노한 상태일 것이라
생각해 다들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밖에서 쭈뼛대고 있던 시종들은 그런 아르카이츠의 상태가 이상하다 여긴 건지, 황태자의 보좌관에게 얼른 들어가
확인하라는 듯 저들끼리 수신호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일단 들어가시라니깐요!
“…….”
“괜찮으십니까?”
“…….”
“언제?”
“조금 되었습니다.”
“…허.”
“나 뺨 맞았나?”
“예?”
“황태자비한테 나 뺨 맞은 거냐고.”
“…예에….”
“왜?”
#14.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아니. 이 방에서 나는 냄새 말이야. 후각이 마비될 것같이 강한 단내, 안 느껴지나? 아무렇지도 않은가?”
“단내요?”
“재밌군.”
“예?”
“재밌다고.”
그냥 못 들은 척, 못 본 척할 걸 그랬나.
황태자의 기행에 보좌관은 혹여나 자존심 강한 전하께서 어떻게든 태연한 척하시는 건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데 르네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자각도 없는 듯하고, 자신이 내뿜는 그 미치도록 단 페로몬 역시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모두들 침을 꼴깍 삼켰다.
“벤자민.”
보좌관이 후다닥 그 옆으로 와 고개를 숙이고 경청하려는 자세를 하자, 아르카이츠가 물었다.
“나 왜 맞았나?”
“…예…?”
“…….”
“저희의 불찰이옵니다!”
“진짜 기억 안 난다니까.”
“그것이 말입니다, 전하. 저희도 확실하진 않지만… 전하께서 황태자비 전하께… 냄새가 난다 하셨던 것 같은
….”
“완전히 미움받았겠군.”
“…죄송합니다, 전하.”
보좌관과 시종들 역시 일제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알아.”
“맞아.”
그러나 아르카이츠는 친절히 설명해 주는 대신 언제나처럼 픽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 *
“네? 냄새요?”
애나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슬그머니 코를 킁킁대며 르네에게서 무언가 냄새가 나는가 유심히 맡기 시작했다.
킁킁, 킁킁킁.
“악취 안 나?”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그제야 애나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5 살 무렵이었던가.
“…이상한 냄새?”
“……”
#15.
상위 귀족가의 자제들은 르네를 놀리기 시작했고, 르네는 냄새난다는 말에 충격받은 뒤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작은 몸을 씻겨 달라 부탁하곤 했다.
워낙에 어린 시절이라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게 나진 않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아델라이드의 말에 따르면.
“냄새가 나긴 무슨 냄새가 나? 뽀얀 아기 궁둥이 냄새만 나는구만! 뭘 안 껴 줘? 보잘것없는 너희들이랑 우리
르네가 놀겠냐? 우리가 먼저 너네 따돌리는 거야!”
“르네. 너 향수 뿌렸니?”
“나 씻으러 가야겠다.”
그게 오히려 더 역한 냄새를 풍기고 마는 극악의 계절인데도 르네는 땀을 흘리면 오히려 향기가 짙어지기 일쑤였다.
“누이가 내 입장이 아니라 그래. 변태들이 얼마나 꼬이는지 알아? 다들 이상한 소리나 해 대고…. 저번에 어떤
미친놈은 내 몸에서 나는 체취로 향수를 만들겠답시고 공격하려 했다니까!”
“누이!”
“농담이야, 농담.”
“맞아. 보통 땀 흘리면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너한테선 오히려 상큼한 냄새가 나니 좋은 것
아니겠냐, 상큼아.”
“보기만 해도 흐뭇하죠?”
르네가 말한 대로 일전에 미친 향수 조향사 놈이 르네의 체취를 채취하여 향수를 만들겠다며 공격하려던 사건이
있던 이후부터 르네는 완전히 집돌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그렇게 참을 수 없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독한 냄새’라 칭하는 것은 더욱이 순하디순한 르네를
단번에 앙칼지게 만들었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에 애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자, 방금 전까지 죽상이었던 르네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당장이라도 잡아먹겠다는 양, 그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눈빛을 한 아르카이츠는 어쩌면 정략혼을 어떻게든 파하기
위해 누이에게 이런 식으로 일명 ‘꼽 주기’를 하는 것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누이 성격에 가만히 앉아 참기만 할 사람은 아니니, 만일 황태자비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면, 이 제국에서
결국 욕을 먹는 것은 누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아르카이츠는 이혼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그래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성질을 살살 긁고 있는 것이
분명한 거다.
절대 그렇게는 두고 못 보지.
황태자비가 황궁을 나가는 건, 제 발로 이곳을 박차는 것이 아닌, 아주 비극적인 사고로, 황태자의 무심함에
외로이 죽어 나가는 것뿐일 거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단은 르네가 투지를 불태우는 동안 옆에서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기로 한 애나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르네는 덥다며 훌렁 치마를 들어 올리고, 브래지어 안의 손수건들을 죄다 빼놓은 상태였기에 허겁지겁 치마를
내리고 손수건들을 다시 꾸역꾸역 가슴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예요!”
내심 불안한 르네였다.
“전하, 가발…!”
르네는 그 모습에 아까 전 따귀를 날리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조금 창백하게 질린 채로 꼿꼿이 허리를 세워
긴장한 듯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많이 아프겠지…? 쌤통이긴 한데 설마 이걸로 트집을 잡는다거나, 나한테 뭔가 불이익이 온다거나… 그렇진
않겠지? 근데 표정이 뭐 저렇게 위협적이야. 설마, 보복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저 두툼한 손으로 따귀
맞으면 내 목 돌아갈지도 모르겠는데…?’
한데 왼쪽 뺨에 불에 데는 듯한 고통이 들지 않는다.
“…엥?”
‘지금 이거, 놀리려는 건가? 아니면 진짜 사과를 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저 사과를 들이민 거고? 설마 이거
고급 유머니 뭐니 이런 건 아니겠지…?’
“…….”
뭐지, 이 또라이는?
“당연하지. 자, 이제 손 이리 내. 다시 잡게.”
“…웅.”
사과가 공중에 붕 뜨는 순간 모두의 표정이 하나같이 ‘황태자비께서 사과를 거절하셨다! 심지어 사과를 집어
던지셨다! 우린 다 죽었다!’ 같은 얼굴을 했으나….
“…허….”
이렇게 치사하고 유치하게 사람 괴롭혀서, 어떻게든 제 발로 뛰쳐나가 본인은 무결하게 이혼당한 남편인 척하려는
거지?
우리가 이혼하는 건, 내 누이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거지, 네 등쌀에 밀려 나가는 건 절대 아니니까!
“아델라이드.”
“네, 전하.”
“아델라이드. 내 이름 모릅니까?”
르네의 내성적이고 유순함은 사실, 아델라이드가 평소에 대신 지랄맞게 굴어 르네가 지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을.
르네는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최대한 제 누이가 짓던 가식적이고 아름다운 미소를 따라 지으며 생글생글,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17.
“…….”
“…….”
“침묵은 곧 동의 아니겠소.”
“아니, 손은 왜…!”
“갑시다, 부인.”
“내 신발!”
아르카이츠가 뒤돌자 창백하게 질린 르네가 절규하며 시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애나는 그저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살짝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다 하더군요.”
“…계속요?”
“아무래도 그럴 듯싶습니다만.”
“…낮에도, 밤에도요?”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애나는 멋쩍은 듯 괜히 머리를 꼬아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 *
“나 코 고는데.”
“상관없어.”
“이도 막 가는데.”
“상관없어.”
“상관없어.”
“…갑자기 위해 주는 척은….”
허, 참, 하, 허허!
아까 전부터 내려 달라 버둥대던 르네의 말도 무시한 채 걸어가는 행동에, 창피함은 오롯이 르네의 몫이었다.
무슨 말 안 듣는 어린애 덜렁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찌 매번 요리조리 피할 수 있을까.
아무튼 아르카이츠와 합방을 하게 되는 날에는 르네의 목은 물론 피어스 가문이 몰락하는 날이라 봐도 무방했다.
“부부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 부부는 한마음,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나와 부인 사이가
하루빨리 돈독해져야 원자도 생기고, 제국의 백성들도 굳건해진 황태자 부부의 모습에 안심할 것 아닌가.”
그야말로 끔찍 그 자체.
“…예?”
“…….”
“내가 알던 그 아델라이드와는 전혀 다른데. 일전에 우리가 나눴던 대화, 잊은 건가?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텐데.”
그저 초상화만 보고 만남 없이 곧장 식을 올린 것 아니었나?
“계약….”
“그래. 계약. 당신이 가족들까지 속여 가면서 한 계약 말이야. 난 그때의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그 계약에
서명한 건데. 어째 그때의 당신과는 영 다른 게, 꼭 아델라이드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고개를 한껏 쳐들고, 언제나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부채를 촥, 펴며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뻔뻔한 모습과는 달리 르네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뒤죽박죽, 아수라장이었다.
‘아 씨, 망했다. 망했어! 누이가 대체 언제 이 또라이를 만나서, 또 언제 계약을 한 거야? 대체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지? 뭐지? 황태자를 상대로 사채라도 끌어 쓴 건가? 그게 아니면 대체 무슨 계약이냐고! 누이,
도망치기 전에 한 짓은 말해 주고 갔어야 할 것 아냐!’
“내, 내가?”
“그래. 당신이 말했잖아. 원자를 낳아 주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조건을 걸지 않았나. 그때 그 말을 돌려주자면.
‘나는 세 번 이상 하는 놈이랑만 합방한다.’라고.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다니까.”
“…….”
“기억하는 거 맞지?”
“몸이 좋지 않아?”
“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어쩐지 물도 안 맞는 느낌이 들고… 잠자리도 뒤숭숭하고. 겨우 지금
침실에 적응했는데 또 잠자리가 바뀌면 더 예민해질 것 같은데요? 제가 잠버릇이 험한 만큼 잠자리에 예민하기도
하여.”
“…….”
“…….”
“난 더위를….”
“…….”
“당신이 싫다면 억지로 잠자리를 갖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당연한 소리를 일일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은
무슨, 날 무도한 이인 양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
“하아….”
빠른 시일 내에,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누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저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최대한 많이 해서 최대한 빨리, 원자를 만들고 싶다고.”
“…….”
“알다시피 지금 황제께서는 많이 유약해지신 상태니, 나와 파비안이 자리를 승계한다 하더라도 제국은 흔들릴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동안 원자가 태어난다면, 이건 나라의 경사일뿐더러 아직 황실의 건재함을 보여 주는
것이니 정치적으로도 아이는 꼭 필요하지 않겠나.”
“…….”
아, 그러니까 이 사내는 정치적인 이유로 누이와 혼인하고, 또 정치적인 이유로 아이를 원하기에 잠자리를 갖는
거였군.
고위 귀족이라면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요구 사항이었지만 르네는 어쩐지 더더욱
아르카이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르네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 * *
아무래도 제 신부는 오메가라는 자각도 없는 듯하고, 또 페로몬을 내뿜는다는 자각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조절하는
방법도 모르는 듯했다.
혹은 피어스 가문조차 르네가 오메가라는 것을 몰라, 이렇다 할 억제제도 먹지 않아 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경우.
게다가 아무리 아르카이츠가 이성을 유지하려 애쓴다 한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페로몬을 마구잡이로 내뿜는
르네를 눈앞에 두고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아마도 페트라 황후의 기일이 다가오는 만큼, 아르카이츠를 보면서 그는 제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릴 것이다.
“황궁의 자료들은 마치 일부러 그 내용을 숨긴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자료를
지운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절 속이려 하지 마십시오. 페트라 황후가 제 어머니이십니다. 정녕 제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제국은 일부일처제였다.
황제에게 두 명의 황후가 있었던 것은 에밀리 사일러스가 제 아들을 낳자마자 자살하여 공석이 생기고 말았고.
#19.
페트라 황후가 황제의 진짜 오메가였으며, 둘은 운명의 장난으로 뒤늦게 서로를 각인한 것이었다고.
“…….”
“…….”
“제 아내. 열성 오메가입니다. 게다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무어라?”
“…그것이, 사실이더냐.”
그것도 열성 오메가.
“…페트라가 말해 주었더냐.”
제 아들에게 평생을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치부를 이런 식으로 들키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 고맙다. 나는 파비안이 이 사실을 몰랐으면 한다. 어쩌면, 평생을 몰랐으면 해.”
“혹, 파비안을―.”
“폐하, 폐하와 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틀림없는 알파, 장차 이 제국을 호령할 알파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사막을 혼자 가시다니요. 차라리 가지 마십시오, 폐하.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듭니다. 가지
마십시오. 예?”
황제는 난생처음 억제제를 먹지 않았고, 그들이 페트라 아르콘의 자택에서 몇 시간을 함께했다는 소식은 사막의
바람을 타고 에밀리 황후의 귀까지 들어갔다.
황제와 페트라가 함께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황후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버지. 형님을 끌어내릴 생각 따위 없습니다. 이 커다란 제국을 독식할 생각도 없고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제 아내가 부디 겁먹지 않는 것뿐이니까요.”
일단 제 비밀이 들킨 건 차치하고.
그래서 숨긴 걸까.
제 아들이 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어쩌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르니까.
#20.
“오메가는 아주 드문 존재야. 하여, 선대 황제들도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사내인 오메가에
대해서는 더더욱 전무하다 봐야 할 거다. …하지만 아르콘 부족이라면 다를 거다. 그들은 뭔가 알고 있을 거야.
페트라는 나보다 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만큼. 아마 아르콘 부족은 대대로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계승했을지도 모르지.”
본인은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니 뭐니 생각하지만 사실 태생이 귀찮은 것투성이인 게으름뱅이에 집돌이인 것이다.
단.
“…….”
“전 좀 그래요. 마냥 쉬운 이가 아니라서요.”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어쩐지 저를 이렇게나 거부하는 르네의 모습에 살짝 심술이 나고 말았달까.
“아파, 이거 놔요!”
“이젠 말도 놓네.”
#21.
“당신은 나한테 원자를 낳아 주기로 약속했고, 그걸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야, 부인. 혼인을 올린 이상 당신은
황태자비이자 내 하나뿐인 아내이니까.”
“…이제 그만 손을 놓아….”
“좀 익숙해져 봐. 유치하게 선이니 담이니 만들어 대는 것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어루만지는 편이 그 ‘마음의
준비’에 더 도움되지 않겠나?”
“…….”
“마음의 준비가 이렇게 길어서야 초야는 대체 어떻게 치렀을까. 난 취해서 기억도 안 나는데. 사실은 초야를 안
했는데 한 척하는 건 아니지, 부인?”
“그, 그럴 리가.”
“한 달!”
“엥?”
“일주일 안에 마음 준비 끝내.”
“…일주일로 협상하죠.”
르네는 속으로 뭐 저런 무도한 인간이 다 있나, 생각하다가 아, 그렇지, 원래부터 무도한 인간이었으니 자신이
눈뜨고 코 베인 격으로 당한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말았다.
르네는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같이 막막함과 동시에, 그래도 일주일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볼 생각이었다.
페트라 황후가 즉위한 이후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국 내에서 아르콘 부족은 야만족 취급을
받았다.
살아 있는 전갈을 먹는다, 사냥해서 생고기를 그대로 뜯어먹는다, 식량난에 시달리면 식인을 행한다 등의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문과 억측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페트라 황후는 딱히 소문을 정정할 생각도, 자신들의 고귀함을 증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거친 행동들, 이를테면 맨손으로 사냥감을 죽인다든지 하는 행동을 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아르콘 원주민들은 번식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고 그랬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그런 번식… 아니, 그렇고 그런 행위에 집착하는 건가…?’
정말 온실 속 화초였다.
“물어보세요, 부인.”
“그 부인이라는 말 좀….”
“그럼, 여보?”
자신이 사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은 이상, 알고 보니 누이가 남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아닌 이상, 아르카이츠는
아델라이드에게 일절 관심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부인 말대로 난 여자한테는 관심 없어. 여자 몸에는 더더욱 관심 없고. 남자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래. 난
남자를 좋아해.”
“…….”
“무, 무슨 그런 농담을.”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저 페로몬이라도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든, 아니면 자신이 페로몬 향을 맡지 못하도록 뭔가 약을
먹든 해야 할 것 같다.
“뭐 하려고요?”
음. 역시 아무 냄새도 안 나.
#22.
빨리 죽음을 위장하여 장례식까지 무사히 치르고, 얼른 피어스 저택으로 돌아가 여생을 평생 놀고먹으며 살고
싶었다.
“아, 오늘 하루 정말 피곤하다.”
살면서 가장 큰 고민이라고는 디저트를 푸딩으로 먹을까 아니면 마카롱으로 먹을까. 이 정도뿐이었던 르네에게
지금의 고민은 너무나도 커서 마치 거대한 산에 이정표 없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즉, 그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오히려 점점 더 순응해 버리는 쪽이랄까.
‘일단, 하루빨리 아버지한테 연락을 받아서… 약이든 뭐든, 잠깐이라도 죽음을 위장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자
….’
그게 망하기 전까지는.
너무 쉽게 방심하고 만 것.
그저 잠깐 눈만 붙이는 거였는데.
“깼어?”
“으응…?”
뭐가 이렇게 몸이 편해.
뭐가 이렇게 몸이 가벼워.
뭐가 이렇게 몸이….
“허, 허억.”
…나 왜 알몸이야?
“아르카이츠, 물어 줘. 물어 줘어….”
“으아아아악!”
“흐아아아악!”
지금 이 모습 들킨다면 그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르네는, 제 정체를 숨겨야만 하던 존재에게 정체를 들킨 주제에 그에게 정체를 숨겨 달라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것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으니 다들 나가.”
“예?”
“아…! 죄, 죄송합니다!”
“예!”
르네는 솜이불 아래 몸을 숨긴 채 꾸물꾸물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올 뿐이었다.
방문이 닫히고 아르카이츠가 이불을 걷자마자 르네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빠르게 말했다.
#23.
“누이가 도, 도망을… 아니, 실종이 되어, 급하게 제가…. 결코 황태자 전하를 속이려 들려던 것은… 물론
속이려는 건 맞지만…! 아무튼 농간을 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르네.”
“…….”
“르네 피어스.”
“…네.”
“나긴 하는데?”
화가 난 걸까.
하지만 그게 르네에게는 잡아먹기 직전의 소동물을 가지고 노는 맹수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모른다고.
나도 이 상황을 알지 못한다고.
살면서 나쁜 짓 한 번 안 해 봤다.
“…해.”
혹여나 르네가 저렇게 앙상한 것이 마음 고생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가. 눈치를 봐서 못 먹었나.
저 겁쟁이 성격에 남 속이는 와중에 식욕이 왕성할 리는 없다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마른 것 아닌가. 저러니까
맨날 골골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울…해.”
“뭐라고?”
“…억울하다고요.”
“…뭐?”
“뭐, 뭐라고요!”
간파당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커다란 눈을 끔뻑이는 르네는 마저 주섬주섬 이불을 둘러 어느새 제 몸을 꾸물꾸물
감싸기 시작했다.
“…….”
“안 죽일 테니까 일단 진정하라고.”
“…진짜요?”
“…놀리는 거죠?”
“아닌데.”
아르카이츠는 그런 하찮은 모습마저 귀엽다는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아무래도 각인이라는 것이 꽤나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서 하찮고 나약한 것들을 제일 경멸하다시피 했던 아르카이츠는 하필이면 이 제국에서 제일 하찮고 나약하다
할 수 있는 사내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야 나는….”
“가짜 신부라서?”
“…….”
“약속하지. 절대 너 안 죽여.”
“…….”
르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
“…….”
무엇보다 죽지 않는 것이 우선 아닌가.
단순한 르네에게 있어선 일단 ‘아르카이츠가 진실을 알고도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당장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비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어제….”
“…….”
“…….”
“우리 어제 했어.”
“하, 하긴 뭘 했다는….”
저에게 손을 내미는 수많은 영식들의 손길과 추파에도 별로 끌리지 않는 걸로 보아 자신은 아무래도 여인을 사랑할
몸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내가 언제 그랬다고…!”
#24.
“왜 말이 안 돼? 네가 먼저 유혹했으면서.”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 없이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아르카이츠를 유혹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건 필시 아르카이츠의 농간질이었다.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야.
그래, 그건 내가 아니었어!
“…….”
아르카이츠와 해사한 미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 르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x 됐음’을 직감했다.
알아서는 안 될 거 같은 느낌 말이다.
그걸 알게 되면, 절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먹이사슬 최하층이 위기를 감지하듯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 말 안 해 줄 거예요?”
“…….”
“…….”
“아니 왜 굳이 그렇게….”
“아까 전에 말했잖아. 어차피 지금은 인정도 이해도 안 하고 날 무도한 이로 매도할 텐데. 그럼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상처받지 않겠어요, 부인?”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르네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아르카이츠가 나간 자리만 멀뚱멀뚱 쳐다보다, 이내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X 발… 망했네….”
피어스 공작 가문은 여타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달리, 묘하게 후광이 비친다는 소문이 있다.
해서 누군가는 후광은 물론이거니와 어쩐지 피어스 저택 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인다고도 하는데.
“이상하네요, 후작 각하. 피어스 저택이 어째 우중충해 보이지 않습니까? 장마 기간도 아닌데, 어째 여기만
흐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요.”
“에이, 그래도 언제나 후광과 무지개가 떠 있기로 유명한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니까 이상해서요.”
“넌 이상할 것도 많구나. 오히려 지금쯤 피어스 가문은 경사가 나지 않았겠느냐. 아델라이드 누님께서
황태자비가 되셨으니, 내 결혼식에 참여 못 해 미안할 뿐이지.”
피어스 저택에 도착하면 르네의 방에 찾아가 그동안 이 형님의 편지에 답장 한번 안 한 괘씸한 녀석을 흠씬
괴롭혀 주겠다, 생각해 보는 후작이었다.
#25.
“각하?”
“으응… 왜 왔느냐…?”
“아아, 맞다. 그랬지. 네가 온다는 전언 받았다. 받았지…. 부인은 지금 침실에 있다. 몸이 좋지가 않아서
말이야. 앓아누운 거지…. 앓아누운 거야…. 에휴….”
“각하?”
제국 내에서도 피어스 가문이 앞으로 황태자비, 조금 있으면 황후가 될 이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쥘지 말이 많던데.
“르네도 아픈 겁니까?”
“어어, 그러하네. 미안한데 특별한 용건 없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겠나? 병이라도 옮을까 걱정되어
말일세.”
“그래. 내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연락 주겠네. 일단 황태자비는 찾아가지 말고, 알겠나? 아무튼 간, 여기까지
와 줬는데 미안하구나, 알빈.”
“외부 접근도 막고, 또 소문이 퍼지지도 않는 걸 보면, 피어스 공작께서는 이 사실을 덮고 싶으신가 봅니다.”
언제나 생글생글, 대형견같이 순하고 포근한 미소만 짓고 다니던 알빈의 이마에 보기 드물게 주름이 깊게 파였다.
“…선물도 사 왔는데.”
말로는 존경하는 피어스 공작 각하, 공작 부인을 생각해서 산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뚜껑을 열고 보면 죄 르네가
좋아하는 것들만 들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 누이 진짜.”
“…티 나?”
티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니, 내 말은….”
“…….”
“알았어….”
이렇다거나….
또 언젠가는 한번 이런 일이 있었다.
“……? 응. 그래.”
“너 나랑 같이 살래?”
“…진짜?”
“으, 응. 그래.”
“고마워, 역시 너뿐이야!”
“하아….”
뭐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아무튼, 그래도 알빈은 자신이 르네의 유일한 친구라 자부했으며, 르네 곁에 있는 것은 결국 마지막엔 자신일
것이다 생각해 왔다.
“무슨 병에 걸렸기에, 저렇게까지 거리를 두려는 거지?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마른 애가
더 야윌까 봐 걱정이네.”
#26.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으며, 입술이 부르튼 가련한 모습으로 저에게 유언을 남기는 르네의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하지 않나.
“…아니….”
“알빈…!”
“알빈! 진짜 보고 싶었어!”
* * *
그의 게으름은 사실 유복한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르네는 알빈처럼 매사에 열심히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며 살지는 않더라도 주어진 걸 베풀며 살아갈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르네의 인생 계획에 자신의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기가 막히고 황당하고, 어이없게 보내는 건 전혀
없었다.
르네는 죽고 싶었다.
“몸이 좀… 이상한데….”
“아픈… 건가…?”
“하아… 응?”
머리와 몸이 전혀 맞지 않았다.
안 돼, 진짜 안 되는데….
그때쯤 아르카이츠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기 시작해 어느새 알몸이 된 르네와 딱 마주쳤다.
기억이 끊겼을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르네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 얼른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르네, 너 설마 지금….”
기뻐해야 하는 게 분명한데.
가령 지금처럼 말이다.
#27.
이전에는 잘만 들이댔으면서.
왜 내외하는 거냔 말이야.
“꼭 내가 르네인 걸 알고 나서부터는….”
커다란 침상을 혼자 데굴데굴 구르다가 이내 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산 분출 직전처럼 새빨개지더니,
이내 또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던 르네는 괜히 이불을 발로 팡팡 차거나 나직이 아르카이츠 험담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베개를 꼭
껴안고 잠에 들었다.
* * *
이윽고 맨 앞쪽에 도달한 파비안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당황과 두려움에 온몸을 잔뜩 웅크린 웬 사내를
마주하게 됐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전하.”
“그만.”
“예…?”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분의 정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감히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저지르는 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무지한 놈의 충성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상관의 말에 파비안은 조용히 병사를 흘기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모자란 건가?
파비안은 소환을 위해 수많은 주술사를 찾아다녔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능력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가면 뒤의 얼굴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추악한 얼굴일 뿐입니다. 저는 제 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신원을 숨기는 것은 금지된 주술을 행하는 주술사들에게 생명입니다. 저는 그저 돈을 받고, 원하는
것을 소환해 드리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오메가와 비슷한 능력이 아닙니다, 전하. 보다 월등하고, 보다 악한 존재이지요. 저것은 ‘몽마’라 합니다,
전하. 오로지 유혹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다루기 어려우실 겁니다.”
“…몽마를 소환하실 만큼 강한 욕망이니, 뭐든 해내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전하께서는 몽마를 다루기
수월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저것 보십시오. 저 몽마라는 것도 임프린팅을 하는 것인지, 아무래도 갓 태어난 몽마를 소환하였나 봅니다.
운이 좋네요. 이미 성체가 된 몽마는 그만큼 바라는 것도 많고, 자존심도 고집도 세다 들었거든요.”
“임프린팅?”
#28.
“주인?”
아직 사내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대체 저놈이 뭐길래 황태자 전하께서 손도 잡아 주시나 궁금해했지만,
사내가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려 그 모습을 알 수 없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미카엘.”
“…….”
“미…카엘.”
* * *
파비안의 마차가 사라지고 난 뒤, 주술사는 수그렸던 몸을 반듯이 편 뒤 마차가 떠난 방향을 가만히 바라봤다.
파비안이 소환술을 끝낸 주술사가 혹여나 입을 놀릴까 염려해 그의 뒤처리를 자신의 병사들에게 맡긴 듯했다.
“당신은…!”
다만 그림자들은 파비안의 ‘소환이 끝나면 주술사를 처리해라.’라는 명령을 어쩌면 불복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주술사를 내게 넘겨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미 파비안의 수는 내게 읽혔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 나보다 약한 이들은 죽이지 않는다. 나는 그
규율을 어기고 싶지 않다.”
“……”
붉은 달이 선득하니 빛났다.
* * *
아르카이츠는 합방을 추진할 땐 언제고, 며칠이 지나도록 매일 밤 르네 혼자만 잠들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어찌하여 르네가 아델라이드 행세를 하고 있는지 그 자세한 이야기조차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기, 뭐 안 물어봐요…?”
“뭐를.”
“그렇긴 한데….”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가 그리 태연하냔 말이다.
유언장을 미리 써 둬야 할까.
“나 어떡해?”
“…그, 그러게요….”
애나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29.
그 사이에 ‘르네가 황태자에게 정체를 들키고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사실이 들어가진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주인어른에게 알린다면 분명 그들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다.
“이, 일단은 황태자 전하께서 죽이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거면 일단 다행인 거죠!”
“왜?”
“…말하고 싶지 않아.”
애나 역시 사실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피어스 가문의 막내 도련님은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고, 태어나길 유약하게 태어났다.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게요, 도련님.”
“그야 저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페르나서스 후작님이요.”
소꿉친구가 누이로 여장한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기분을 서술하라면, 대체 어떤 식으로 서술해야 할까.
그 모든 예상을 깨고 르네는….
* * *
한편 아르카이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파비안은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듯 제 이복형제의 집무실을 찾아와 소파에 늘어지듯 앉으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한데 왜 신혼을 안 즐기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는 소리가 들려.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라면 어지간히 너도
무심하단 말이지. 말해 봐. 뭐가 문젠데?”
“문제 같은 거 없어.”
“가.”
“가라니까.”
“…….”
“봐. 넌 소문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관심도 없고, 그걸 바로잡을 생각도 없고. 너야 뭐 워낙에 무던하고
무심하니 상관없다 쳐도. 네 아내 입장은 좀 다르지. 사람들은 네가 무서워서 널 물어뜯지는 못해도 대신 네
부인을 물어뜯으려 할걸?”
“…….”
파비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황궁에서는 언제나 여러 세력들이 존재했으며 그들 중에는 야만족이라고도 불리는 아르콘 부족의 피가 흐르는
아르카이츠를 혐오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걸 어찌 알아?”
“뭔데 그래?”
파비안의 질문에 역시나 대답해 주지 않은 아르카이츠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게 다름 아닌 질투 때문이란다.
#30.
갑자기 찾아온 황태자비의 오랜 친우인 페르나서스 후작의 방문에 심기가 뒤틀렸던 걸까.
“예…?”
“세 달. 세 달 정도라면, 그래 모를 수 있지.”
“자네 입궁하기 전에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무어라 배웠나? 그저 운명적인 사랑, 뭐 이런 식으로밖에 배우지
않았겠지?”
“…주, 죽여 주십시오.”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한 파비안은 보좌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들 집무실 바깥에 나가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시종들이 모두들 한숨을 내려놓듯 ‘휴.’ 하며 참았던 긴 숨을
내뱉었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자.
“자네 억울한 마음도 이해는 되는데, 웬만해선 파비안 전하 앞에서 절대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좋아.”
“그치만.”
“그래. 전하께서는 본인이 직접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괜찮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극도로 불쾌해하신다네.”
“아니, 대체 왜요…?”
“…아니, 그건 또 대체 왜요…?!”
“자네 앞으로도 파비안 전하를 곁에서 보필할 생각이지?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냥 그렇게 행동하도록 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파비안 전하께서 왜 그리 싫어하시는지.”
파비안은 열성 알파였다.
“알파와 오메가는 발정 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 기간이 되면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침실 근처에 가는 것이 금지되는 걸.”
“예.”
“해서, 말할 생각인가?”
함부로 입을 놀릴 생각이냐 묻는 시종들의 시선이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편 파비안의 집무실 안.
“주의? 무슨 주의. 내가 사실은 베타 주제에 알파인 척하니, 그 앞에서는 알파니 오메가니 이야기조차 꺼내지
말라는 주의?”
“자네 지금 날 놀리나? 러트조차 오지 않는 알파가 세상천지 어딨다고. 실없는 척 구니, 진짜 실없다 생각하는
건가.”
“내버려 둬. 입 가벼운 놈이라면 네가 애초부터 들이지도 않았겠지. 네가 들이고자 한 놈이니 어딘가에 쓸모는
있는 것 아니겠나?”
“예, 전하.”
#31.
베타인지 알파인지. 사실 본인조차 잘 몰랐다.
태생을 다 갖고 태어난 제 이복형제, 그리고 태생을 다 잃고 태어난 자신을 비교하면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르카이츠가 처음 러트를 겪을 때.
자살한 첫 번째 황후와, 그녀의 아들을 둘러싼 수많은 근거 없는 소문들을 저조차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움.
어떻길래 어머니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고, 어떻길래 아버지는 그렇게 쉽게 어머니를 잊고 곧장
페트라 황후, 그 악독한 여자를 다음 황후로 맞이했을까.
* * *
“네가 여기 왜 있어?!”
아주 반갑게 웃으며 드레스자락을 꼭 쥔 채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르네의 모습에, 알빈은 기겁하다시피 창백하게
질려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날 놀리려는 건가?
“잠깐, 너 아프다고 들었는데 왜 네가 여기…. 누이도 참 장난이 갈수록 심해져. 아직도 너 여장시키면서 놀고
그러는 거야?”
“아, 그게….”
“놀랄 만큼 놀랐으니 이제 좀 나와요, 아델라이드 누이. 어찌 황태자비까지 오르셔 가지고는 아직도 르네를 이리
괴롭히십니까. 정말 깜짝 놀랐네.”
“알빈. 그런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아니고….”
“내 말 좀 들어 봐, 알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알빈. 일단 앉아 봐.”
“왜 그래, 답지 않게 그런 진지한 얼굴을 다 하고. 너 정말 옷 안 갈아입고 올 거야?”
어렸을 적 아델라이드 옆에 손잡고 걸어가는 여장한 어린 르네를 보고 한눈에 반해 피어스 가문의 막내와 약혼을
추진하고 싶다 조잘댔던 전적이 있었던 알빈이었다.
르네는 최대한 가짜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넣어야 했고, 그 내용물이 훤히 드러나지 않도록 오히려
한창 유행하는 가슴의 절반이 드러나는 그런 드레스는 지양하고 있었다.
꽁꽁 싸매듯이 여미고 다니는 옷이었는데, 그나마 여름이라 목덜미에서 쇄골 부분만 살짝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흰 피부에 움푹 파여 도드라진 쇄골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지 알빈은 괜히 단정히 여민 목 부근의 러플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여긴 어디고 난 누구인가.
믿을 수 없어, 잘못 들은 게 분명해.
흔들리는 눈빛으로 르네를 쳐다보자 르네는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듯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2.
“…허. 잠깐만, 그러니까 네 말은…. 아델라이드 누님이 결혼식 당일에 도망을 쳤고. 그래서 네가 여장을 하고
결혼식을 올렸고. 그래서 네가 황태자비로서 여장한 채 살아가고 있고. 근데 그걸 황태자한테 걸렸다는 거지.”
무덤까지 들고 갈 비밀이었다.
“그래서. 다른 일은 또 없었어?”
“…없, 었어.”
“전혀!”
“너 거짓말에 소질 없는 거 알지.”
“…….”
“내가 말을 더듬어?”
하지만 제 입으로 직설적으로 말은 죽어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마냥 숨기고 있자니 나중에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고.
그런데도 어째 나아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꼭 거대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양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르네. 빨리 말하라니까.”
“속이 안 좋다고?”
“뭐야, 왜 그래?”
“아까 전에 먹은 게 얹혔나, 속이 자꾸만 메스껍… 우욱!”
아르카이츠는 갑자기 다정한 남편인 양 르네의 어깨를 껴안듯 감싸며 부축하기 시작했다.
* * *
도와 달라, 너뿐이다, 제대로 된 구원 요청을 하려는 결정적 순간 하필이면 구역질이 올라올 게 뭔가.
어쩌다 보니 아르카이츠의 듬직한 부축과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치 유리 인간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침실로
돌아온 르네는 슬그머니 아르카이츠에게 속삭였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뒤쪽에서 눈을 빛내고 서 있으니,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판정되었을 때 시무룩해질
눈빛을 르네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직 주치의가 도착하지 않았느냐 닦달부터 시작하여 르네가 편히 침대에 기댈 수 있도록 등받이 쿠션을
가져온다든가, 연신 열을 잰다든가, 또 헛구역질 나지 않느냐며 물어본다든가.
“그냥 체한 거라니까요.”
초로의 노인네 이마에 주름이 짙어지더니, 그는 진맥뿐만 아니라 청진기를 대고 조금 더 심층적으로 검진했다.
“아, 그냥 체한 것뿐이라니….”
“뭐, 뭣, 뭐라는….”
“회임이옵니다!”
주치의의 말에, 어느새 침실에 모여든 황궁의 대신들은 물론 시종들이 일제히 르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야?!
그러다 르네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한 건지, 자신이 꾸민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다, 다시 해 보세요.”
이거 순 돌팔이 아니야…!
#33.
“르네.”
“오메가? 그야 당연하죠.”
그걸 지금 왜?
어차피 베타인 내 누이와 결혼한 것도, 그저 서로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던가.
“…네가 바로 그 오메가야.”
“…네?”
“…으응…?”
“저는 남잔데요…?”
하나, 둘, 셋….
“르네? 르네!”
“아이… X 발… 내 인생….”
* * *
“그게 확실한가?”
아르카이츠의 행동에 다들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하며 기뻐하는 대신들의 모습을 파비안이 둘러보았다.
“파비안 전하께서도 얼른 분발하셔야겠습니다. 허허허!”
“그래요,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도 오늘 참석도 안 하셨는데 저희끼리 이러지 말고, 파비안 전하께서도 아직 말씀
안 나누셨지요?”
대신들 대부분의 반응이 ‘이렇게 제국의 경사가 일어났는데, 동쪽 땅의 마을에 홍수가 난 사항이 대체 뭐가
중요해?’였다.
아르카이츠 앞에서는 입 꾹 다물고 언제나 진중한 척하던 노인이 파비안 앞에서는 곧잘 깝죽댔다.
한 번에 찾아가 우르르 인사를 하면 부담스러워할진 몰라도, 깔짝깔짝 하나둘 찾아가 인사하는 쪽이 더 성가시지
않겠습니까.
“아유, 우리 파비안 전하께서는 이렇게 유머감각까지 뛰어나신데, 왜 아직도 오메가를 못 찾으셨을까 몰라!”
저 늙은 여우는 필시 파비안을 간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책상 아래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 * *
“아, 목이 좀 마르네.”
“좀 덥다.”
“왜 안 나가셨어요?”
“허.”
나가라니까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문 닫고 얼른 나가요.”
제국 내에서 남자가 오메가였던 선례가 아주 극히 드물어서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은 여장을 해야만
하는 거고.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날 밤으로부터 4 주 조금 안 되게 지난 것 같은데.
기절했다 다시 깨어난 르네는 제국에서 유명한 의사들은 죄다 불러들였고, 그들은 하나같이 ‘감축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회임하셨습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놨다.
#34.
“일단 목숨은 부지한 거잖아. 가문도 건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르카이츠는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해…!”
베타가 낳는 알파의 아이와 오메가가 낳는 알파의 아이는 확연히 다르다 들었다.
오메가와의 사이에서 난 알파의 아이는 가장 성스런 황위의 후계자이며, 베타가 낳은 아이보다 훨씬 월등하다
들었다.
오메가로 발현된 여인들을 찾기가 영 어려워, 가끔 오메가를 찾지 못하는 세대에서는 베타와 아이를 낳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황족들 중 베타들은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일찍이 요절해 버린다고.
운이 좋아 피어스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영식인 거지, 평범한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손재주도 없어, 그렇다고
천재적인 두뇌도 아니야, 사회성 떨어져, 그나마 재능이랄 것은 미모밖에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자기 객관화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던 르네는, 자신이 이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열쇠라는 생각에
뭔가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면서도, 과연 내가 애를 낳아 황태자비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하여 르네는 그저 앞으로 닥쳐올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생각은커녕, 앞으로 어떤 식으로 아르카이츠를 시켜
먹을지 고민하기 급급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난 딱히 잃을 게 별로 없잖아?
애야 낳아 주면 되는 거고.
여름마다 더워 죽을 일 있나.
적어도 자신이 아르카이츠가 각인한 오메가인 이상, 그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어마무시하게 이득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리 가라니까요.”
가발이나 드레스를 제대로 갖춰 입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여장을 안 한 상태로 마주쳤다간 무슨 사달이 났을지
몰랐다.
“…한데 여긴 어쩐 일로….”
“아… 네. 감사합니다.”
그동안 아르카이츠처럼 온몸으로 ‘나 맹수요!’ 말하는 사내만 보다 이렇게 부드러운 선의 파비안을 보니 르네는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발이 아픕니까?”
“네?”
“아, 죄송합니다.”
“기억 안 납니까?”
“…네?”
“…네에?!”
누이의 치정 따위 제가 알 게 뭔가.
“…….”
저 아련한 눈빛 좀 봐라.
이런 전개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설마 누이와 파비안 황태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니, 꼭
삼류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형제 삼각관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아르카이츠!”
#35.
그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문설주에 기댄 채 느른하게 말하는 아르카이츠의 목소리는 여유 넘치는 표정과는 달리 미묘하게 다급하게 들렸다.
파비안이 몸을 일으켰다.
“거참, 은근 질투 많다니까.”
“…하하.”
그러자 아르카이츠가 긴 다리로 빠르게 르네 곁으로 와 앉아서는, 르네의 어깨를 감싸듯 안았다.
“내 아내는 내가 직접 돌보도록 하지. 어디가 아픈 거요, 부인? 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참지 말고.
언제든지 부르라니까.”
뭐야 대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싶은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바라봤다.
묘하게 연극 톤으로 말하는 아르카이츠의 모습에 르네는 지금 그의 기행들이 하나같이 의도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응?”
“내가 소리 내서 말했었나….”
“아니, 제가 언제 설렜다고.”
“아, 피부 늘어나!”
“알았다니까요.”
“…알았어요….”
사람 설레게.
* * *
“미카엘.”
“주인님.”
“청소하지 말라니까.”
“심심해서요. 별로 한 건 없습니다.”
“잘 지냈나?”
“바빴어.”
게다가 이곳에 온 지 겨우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몽마는 완벽한 헬리오스 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피가 섞인 것은 어쩔 수 없나.
꼭 저들이 마치 신의 자손이라는 걸 자부하는 것같이 그들은 아무리 햇빛 아래 있어도 피부가 타들어 간다거나,
화상을 입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미카엘이 제게 완벽한 호의와 절대적인 복종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36.
“사실, 저도 아직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몽마라 잘은 모르겠지만, 간혹 있대요. 어느 날 갑자기 임프린팅되는
경우가요. 대부분의 몽마들은 주인을 섬기지 않아요. 말씀하신 대로 보다 많은 정기를 먹기 위해 인간들을 현혹할
뿐이죠.”
“인간의 꿈에 들어가 정기를 먹는다 들었다. 하면 정기를 먹지 않아도 인간의 꿈에 들어가는 게 가능한가?”
“정기를 먹는 일이 중요하겠구나.”
“저 근데, 주인님.”
“해서?”
“네.”
“파비안 님….”
* * *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듯, 평소라면 예를 갖췄을 피어스 공작에게 소리치며 테이블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보라며
가리켰다.
“…….”
“각하! 하여, 르네를 이대로 그곳에 두자는 말씀입니까? 평생 아델라이드 누님 행세를 시키면서, 여장한 채로,
여인인 척, 그리 살라고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세, 알빈.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이고, 또 그 아이나 우리
가문 또한 모두 황태자께 달려 있네. 가타부타하여 무언가 바뀔 것은 하나 없다는걸세.”
“각하!”
“하면 오메가인 사내라는 점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더냐! 사내가
아이를 낳는다. 선례가 있다면 그나마 수용이라도 되겠지. 르네는 선례조차 없는 아이다!”
피어스 공작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피어스 공작은 오메가임을 철저히 비밀로 부쳤던 황제가 얼마나 불안에 떨며 살아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필한 대신인 만큼, 하필이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황제가 달고 산 수많은 억제제들, 그리고
평생을 거짓으로 사는 이가 갖는 불안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산다면 적어도 모두를 속여야만 하는 고독과 불안은 모르지 않을까.
“예? 각하!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르네는 저한테 황궁에서 나오고 싶다고, 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곧 각하께서 그곳에서 빼내 줄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라는 것입니까?”
“…하지만, 각인한 것은 오로지 황태자 쪽 아닙니까? 르네가 정말 각인했다면, 황태자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르네는 도망치고 싶어 했습니까. 이건 르네에게 너무한 처사입니다!”
그에게는 친구이자 형제로서 르네를 지킬 명분이 있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당사자의 구원 요청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장을 한 르네는 마치 알빈이 한 줄기 빛이라도 되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좀 살려 줘.”
“살려 달라니?”
#37.
“나 좀 도와준다고 약속해.”
물론 뭐든 반토막 난 것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제 아들의 임신 사실을 알고는 최대한 티를 내지는 않으려 하나, 무척이나 동요하고 있었다.
“아, 거참! 부모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자네가 왜 이렇게 열을 올려?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게! 그 관심,
르네한테 말고 자네 사업이나 열심히 하게나!”
“각하!”
“이만 돌아가게!”
넓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성품이던 공작은 억지를 부리며 알빈을 쫓아내듯 방 밖으로 떠밀었다.
“…….”
“만일 르네가 정말 무너질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그때는 어떡하실 것입니까. 정녕 르네를 희생시키실
것입니까?”
“…….”
“가능할 거라 믿나. 피어스 가문은 물론 자네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걸세. 아르카이츠 황태자가 가만히 르네를
빼앗기겠나? 각인한 오메가를, 그리 쉽게 내어 주겠어? 어쩔 수 없네. 버텨야만 해. 그 애는 무너져도, 계속
버텨야만 해.”
창밖에 보이는 우중충한 먹구름 가득한 피어스 공작저를 바라보던 알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피곤해.”
보좌관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도서관 시계탑을 쳐다봤다.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다들 눈치 그만 보고 나가.”
이제 와서 배려할 게 뭐가 있겠냐마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알파는 속수무책이다. 특히나 오메가라는 존재가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저 글로만
배웠던 아르카이츠에게는 더욱더.
단순히 르네의 페로몬이 짙어진 순간이 아니었다. 그저 단내가 난다거나, 그래서 조금 흥분을 한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을 난생처음 맞이한, 무방비한 상태의 오메가를 눈앞에 둔, 마찬가지로 무방비했던 알파.
“아르카이츠, 물어 줘. 여기….”
알파가 오메가의 목덜미를 물면, 완전히 서로에게 각인되어 죽음이 갈라놓지 않은 이상 평생의 짝이 된다지 않나.
남자인 오메가는 제국 내에 선례가 없었고, 유일하게 정보를 아는 이인 황제는 자신의 위상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평생 오메가로서의 삶을 비밀로 부쳤다.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요, 황태자 전하.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내 동생 르네한테 각인을 했다는
말씀이죠?”
“왜요? 그냥 진행하죠.”
“내가 왜 당신이랑.”
“내가 르네 성격을 아는데. 걔는 딱 당신 같은 유형의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게다가 아직 걔,
본인이 오메가라는 자각 없어요. 감히 상상도 못 하겠죠. 사내인 오메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걸요. 근데 르네는 그런 거 못 버티거든.”
“해서.”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지. 넓은 아량으로 제국의 황태자 전하와, 내 사랑스러운 남동생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난 우리 르네를 세상에서 제일 아끼니까.”
#38.
“한데 그쪽은 오메가도 아닌데, 피어스 공작은 어찌 내가 당신을 신붓감으로 고른다 하였을 때 이상함을 느끼지
않은 거요?”
“사실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을걸요? 우리 아버지, 마냥 그렇게 사람이 좋지만은 않거든요. 르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위해 눈 뜬 장님으로 만드는 거. 충분히 해낼 사람이거든요.”
황궁은 증축과 재건을 반복하여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은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어둠이 깔리자
얽히고설킨 수많은 복도들이 까마득하게 저 앞에 뻗어져 있었다.
문제는 르네는 자신을 어디 집에서 기르는 사랑스러운 애완견 말고, 길가에서 마주친 들개 취급한다는 거지.
잔뜩 군기 든 이들의 소리에 혹여나 안에서 잠든 르네가 깨기라도 할까. 조용히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댄
아르카이츠가 마치 그림자가 스미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 누구 지금 놀려요…?”
르네 제외하고.
“아직 안 잤어?”
“…….”
초식동물은 무슨.
물론 그 모습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다면 좋다. 마냥 맹탕인 줄만 알았던 르네의 이런 새로운 모습은
환영이다만.
“…….”
“…언젠 내가 무섭다면서.”
“당연하죠.”
“…….”
물론 르네가 아르카이츠와의 합방을 반대했던 이유는 아델라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 제일 컸다.
새벽에 어딘가 휑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제 옆자리는 비어 있는 것에 르네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튼, 혼자 자고 싶지 않아요.”
#39.
“…….”
물론 아르카이츠는 그걸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다. 각인이나 복종이나 저한텐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다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
“뭐, 애 못 낳네, 말도 안 되네, 현실 부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은데 르네, 정말 괜찮은 거야? 아니면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거야.”
“은근슬쩍 말도 놓네.”
그때가 되면.
* * *
제 이복형제의 오메가 아내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날.
“그게 뭔 소리야.”
“안 될 게 무어가 있나. 여자인 오메가, 여자인 알파, 사내인 알파도 있으니 당연 사내인 오메가도 있겠지.”
그러자 책꽂이 뒤편이 끼기긱, 끌리는 소리와 함께 마치 문이 열리듯 저편의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
“…전하.”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그 여자는 파비안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불쌍한 여자의 불쌍한 아들, 그리하여 온정을 베풀고 동정해 줘야 하는
존재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너에게….”
“…파비안, 너….”
“아르콘 부족으로 도망가던 황후 폐하의 시종 하나를 제가 잡아들였습니다. 감히 황후의 물건을 지니고 도망간 죄,
죽음으로 다스렸습니다. 한데 제가 아주 재미난 것을 손에 쥐었지 말입니다. 그자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던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너…! 네가 어찌…!”
“당신이 나한테서 내 어미를 빼앗았듯, 나 역시 아르카이츠한테서 어미를 빼앗을 생각이야. 그러니, 부디, 가장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
#40.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황태자비가 회임했다.
우리 르네는 수 후보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소심하고, 병약하며, 또 무조건 ‘사약 엔딩’ 나는 캐릭터로
내정되었단 말이다!
“넌 누구냐!”
* * *
내가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건가?
“부인….”
“미, 미안하오….”
“…미안하다니까….”
“이게 지금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고요! 장녀는 가출, 차남은 임신! 이게,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에요! 아유, 아유, 머리야….”
그 옆에서 고개만 빼꼼 들어 부인의 눈치를 살피던 공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관짝에 누운 것같이 양손을
들어 가슴팍에 올려놓은 뒤 두 눈을 감았다.
속이는 제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갑작스레 인생이 바뀐 르네를 떠올리면 또 마냥
미안하고.
“걔가 돌아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거지요, 부인…. 그럼 아델라이드를 르네인 척 평생 남장시키고 살아야
하는 건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뭐, 뭣?!”
공작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맨발로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지만, 공작은 여전히 관짝에 누운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 * *
“너희들은 모두 나가 있거라.”
#41.
그러나 게임 설정에 이상이 생긴 건지, 그 어떤 오메가 후보들도 게임의 악역으로 나오는 ‘미카엘’에게 번번이
지고 말아 악수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뭔 소리야, 대체. 게임은 뭐고 비엘은 또 뭔데. 사약은 또 뭐고? 버그? 곤충 말하는 거야? 누이 지금 나한테
곤충 같은 놈이라 욕한 거야? 다짜고짜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너한텐 다가올 비극을 대처할 계획이 필요하다는 거야.”
“갑자기 와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비극? 버려져? 누나,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왜 악담을 못 해서
난리야. 나 진짜 서운하고 화나려고 해. 가출한 동안 어디 가 있었어? 어디 이상한 데라도 간 거 아니지? 응?
약을 했다거나, 아니면 뭐 나쁜 일이라도 당한 거야? 그런 거라면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제발 내가 알던
누이로 돌아와 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뭔가 속는 기분인데.”
“아니야, 진짜야. 두고 봐, 미카엘이라는 사내가 곧 나타날 거니까. 그놈이 나타나는 순간, 그때가 네가
도망쳐야 할 때야. 알겠지? 그때까지 배 속의 아이 건강하게 잘 지켜.”
“누나 진짜 무섭게!”
“난 이만 간다, 르네.”
“응?”
“그놈이 잘 안 해 줘?”
그런 거라면 좀 무서워지는데.
“하여튼 누이 진짜 못된 심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이런 일이.
떨어지는 이를 받아 든 건 황태자라더라.
제 1 황태자 말고, 제 2 황태자 말이다.
르네의 회임 사실이 알려지고 며칠 뒤 황태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황궁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제 1 황자 파비안은 그야말로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엄청난 비밀을
발설한다.
페트라 황후가 죽기 전 숨기려 했던 아르콘 부족의 고서에 쓰여 있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진실과 예언 말이다.
첫 번째 오메가의 불충으로 진노한 신이 사내에게서 번식력을 빼앗으니, 최초의 오메가는 권능을 잃고 인간이
되었다.
야만족이라 불리던 아르콘 부족이 원래는 제국의 지배 계층이었다는 것에 귀족들은 큰 혼란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아르콘에서 태어나는 사내 오메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이것은 잉태를 위한 신의 선물이며,
고유 능력이 없을 경우 오메가가 아닌 베타다.
사내인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그것은 예언의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사내인 오메가라니.
“이 고서는 오래전 아르콘 부족에서 도난당했던, 부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는 고서입니다. 아르콘의 역사는
물론, 아직 제국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알파와 오메가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죠. 저는 돌아가신
선대 황후, 페트라 황후의 유언을 따라, 제국을 진실로 인도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담긴 모든 지식과 진실들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그대들에게는 모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42.
“저는 비밀리에 황후의 명을 받들었습니다. 황후께서 제게 남기신 유언은 진실을 알려라. 하여 저는, 황후
폐하의 유언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콘 부족에서 도난당한 고서를 발견해 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아르카이츠에게 남기신 유언은 제국을 번영케 하라. 저희 둘은 받은 유언이 달랐기에, 당연히
아르카이츠는 이 고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카이츠가 이 제국을 위해 세운 공적이
몇입니까.”
황후의 친자식이든 아니든, 그녀가 남긴 유언을 이행하는 것은 황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어찌 보면 그는 꽤나 입을 잘 털었다.
물론 첫 번째 황후의 죽음이 불미스럽긴 하지만, 그는 알파가 분명했으며, 아르카이츠와 사이도 좋고, 또 페트라
황후를 친어머니처럼 따랐기 때문이었다.
아르카이츠가 불이면 파비안은 물이다. 그 성격이 상반된 것은 물론, 뭐든지 불같이 화내는 편인 아르카이츠와
달리 파비안은 조용히 분노하는 편이었고, 제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으며, 무엇보다 백성들을 끔찍이 아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애나는 르네의 가장 총애하는 시녀로서, 르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짧고 간결하게 추려
전달했다.
르네가 본 파비안 황태자는 굉장히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이였기에, 어찌 보면 그다운 선제공격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르카이츠는 어땠어?”
그 중요한 순간 자리를 비우면, 다른 이들이 황태자비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논하지 않을까 뭐 이런 걱정도 되었다.
“완전 알기 어려우신 분이잖아요. 파비안 전하께서 나긋나긋하시고 부드러우시고, 햇살처럼 해사한 미소를 가지신
분이라면 아르카이츠 전하께서는 항상 의중을 알 수 없는 무표정에, 미소보다는 인상을 더 잘 찌푸리시고….”
“누가 그래?”
“다들 그러는데요?”
“다들 누구?”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요!”
“네?”
“응?”
르네는 그제야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럼 혼인도 올리고 애도 생겼는데 부부가 맞지, 아니야? 하며 괜히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가도 살짝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목 부근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 손을 꼭 잡았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각인을 안 한 거 아닐까요?”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누군가를 입에 올리는 것도 싫어서 아예 공작저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르네였다.
뭐 그런 것 아니겠나.
“나 너무 안일했나?”
“르네 님….”
르네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황태자비 전하, 아델라이드 전하, 하며 인사를 올릴 때마다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졌었다.
#43.
황제는 애써 굳은 표정을 숨기며 제 아들 파비안을 불렀다.
“제가 공개한 고서의 일부 내용 말고도, 아버지께서 숨기려는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그러시는 거군요. 이미 이
제국의 근간은 흔들렸습니다, 아버지. 평생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저깟 오메가 때문에.
“폐하. 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파로 만들어 주십시오.”
“…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반쪽짜리 알파를 완전한 알파로 만들어 달라 이 말입니다. 당신이 모두를 속였듯 나
역시 모두를 속일 테니까.”
“…….”
“제가 어찌 아버지를 협박하려는 패륜을 저지르겠습니까.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한들, 폐하는 제
아버지이십니다. 제국의 아버지이시기도 하지요. 편애 없이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숨길 게 많은 인간들은 평생을 고독하게 살 뿐이지요. 페트라 황후가 죽은 이후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저도 그 고독에 동참할 테니, 노여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전처럼 그저 저를 동정하시면 됩니다. 그 알량한
동정, 겸허히 받아들일 테니까요.”
“…….”
그제야 황제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겨우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너지려는 상체를 악착같이 지탱했다.
* * *
분명 원하는 바를 얻은 것은 맞는데, 파비안은 이상하게 기분이 통쾌하다거나 상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가장 기분이 더러웠다.
“임신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여러 가지로 힘들다던데. 그 와중에 여장은 좀 무리지 않겠나? 아내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자꾸만 말이 짧아지는 르네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아르카이츠는 그저 픽 웃으며 르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몰라도 돼.”
“그런 표정을 짓는데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아주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들어와 놓고서는. 걱정해 줘
봤자야, 하여튼.”
“아, 뭐 하는 거예요!”
“…….”
“아. 더 진한 걸 원했다면.”
“응?”
#44.
“있지.”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요?”
“그러니까 대답해.”
“뭘 ‘그러니까 대답해.’예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나 못생겼어?”
“마음에 안 들 리가 없는데.”
“…….”
“분명 저번 밤에는―.”
“아, 알았다고요, 알았어요. 잘생겼어요. 무서울 만큼 잘생겼다고요. 왜 갑자기 외모 얘기에 꽂혀서는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요?”
“…허.”
“맞잖아. 그때 막 내 얼굴 어루만지고.”
“내 얼굴 마음에 들어?”
“알았어. 줄게.”
“좋아. 이제 이거 내 거야.”
르네는 결국 아르카이츠가 원하는 말을 해 줬고, 그제야 아르카이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세상 잘생긴 미소를
짓더니 르네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식적인 법칙은 아니지만 제국 영애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비공식적이나 공식이나 다름없는 기묘한
법칙이었다.
“정략결혼 아니잖아.”
“연애결혼도 아니라 말했을 텐데요.”
“…….”
“조용한 거 보니 맞네.”
상대가 여인이든 사내든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서로 좋아한다 고백하기 직전의 그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껴 보고 싶었다.
“얘, 르네야. 그렇게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더 연애 못 해. 고르고 고르다가 시간만 허비할걸?”
“쯧쯔. 그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하여튼 그놈의 로맨스 소설이 애를 다 버려 놨다니까. 현실을 살아, 르네.
현실을.”
“왜?”
“그야 당신은 황태자고, 바쁘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로 시작된 건 아니니까. 내가 만일 히트
사이클을 그날 겪지 않았더라면 난 더 악착같이 누이인 척 숨겼겠죠. 아니면 애초에 여장을 하고 들어오지
않거나.”
르네는 지금도 그리 나쁘진 않다 생각했다. 데이트나 몽글몽글, 꽁냥꽁냥, 로맨스 소설에서 봤던 강렬한 첫 만남,
앙숙에서 동지애, 그리고 사랑으로 이어지며 결말엔 해피엔딩으로 결혼식까지 올리는 이런 클리셰들은
불가능하겠지만.
아르카이츠와 대화하면 할수록 자꾸만 말리는 느낌이 드는지라. 르네는 이제 웬만해선 그에게 먹잇감을 주지
않기로 했다.
“하자.”
“…….”
“연애하자, 르네.”
“못 할 게 뭐가 있어. 데이트도 하고, 같이 여행도 가고, 원한다면 정식으로 고백도 할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준다 했잖아.”
“…놀리는 거죠?”
“놀리는 걸로 보여?”
“…….”
“하자. 연애.”
“…하든가 그럼….”
꾸물꾸물 이불을 끌어 올린 르네가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아르카이츠의 집요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럴 리가.”
“그야 내가 들은 소문도 있고, 게다가 그 얼굴에 그 혈기에, 나보다 4 살이나 많으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안 해 봤다는 게 말이나 돼요?”
“…….”
“참 다채롭다, 너.”
“제가 뭘요?”
* * *
“너, 네가 제일 이상한 거 알지, 르네?”
“내가 뭐가?”
“애가 왜 이리 위기의식이 없어…. 아이고 두야. 아이고, 두야. 그래, 넌 원래 이런 설정이었지. 온실 속 화초,
머릿속엔 꽃밭, 고생 한 번 안 한 그저 세상이 아름다운 철부지.”
“진짜, 자꾸 이럴 거야? 지금으로선 아무 문제 없거든? 게다가 애초에 누이가 도망친 바람에 내가… 씨이. 다
누구 때문인데!”
“안 그래도 다시 빼올 생각이야.”
“예?”
“홑몸도 아닌 애를, 어떻게 데려오려고요. 아니, 일단 본인이 나오고 싶다고는 합니까? 저번에는 절 빼
달라더니, 이제는 괜찮다, 잘 지낸다, 이런 말밖에 답장 오지 않고.”
“르네는 곧 다시 네게 도움을 요청할 거야, 알빈. 그때가 되면 그 애가 내민 손을 무시하지 말아 줘. 그 애가
믿고 의지할 이는 너뿐일 테니까.”
여장에 위화감이 없는 르네를 보며, 얘가 이러다 정말 황궁 생활에 적응이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들었다.
“뭐야?”
“뭐, 뭘 해?”
르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이번엔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단단히 화난 얼굴을 한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그 걱정, 내가 필요할 때 걱정해 주면 좋잖아. 지금 나, 누이가 도망가고 누이인 척 혼인해서 황궁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평화롭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꾸 불행이니, 비극이니, 배신이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르네….”
그의 말마따나, 애초에 아델라이드가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르네가 이런 식으로 여장하며 살아갈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 르네가 필요로 할 때 도와주면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이렇게 나선다 한들, 사람 마음을 멋대로 바꿀 수는
없는 법이지.’
“알았어, 르네. 본의 아니게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정말 미안해. 그치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날
부르렴.”
“…누이.”
“하지만 하나 약속해. 뭐든, 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응. 알겠어.”
“응. 누이.”
“그럼 잘 지내.”
“응. 누이도.”
#46.
“응. 잘 있어.”
이윽고 르네가 방 안에 구비된 설렁줄을 흔들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누이가 시종을 따라 복도를 거니는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르네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이게 사랑이라기보다는, 글쎄. 알파와 오메가의 만남이니 당연히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기야 하겠지.
“어… 아르카이츠?”
“여기서 뭐 해?”
“…아, 그냥….”
어쩐지 자조적으로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슬쩍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르네를 살폈다.
아,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구나.
“나름의 족쇄야.”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그러는 그쪽은!”
“…….”
“자, 그럼 이제 가자.”
“어딜요?”
“연애, 하고 싶다면서. 그러니까 연애하러 가야지.”
* * *
“데이트는?”
“겸사겸사.”
더우면 부채질해 주고, 추우면 이불 덮어 주고, 다리 아프다 그러면 주물러 주고, 배고프다 하면 먹여 주는
황궁이 아닌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에서의 데이트라니.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보는 건가.
“얼른 말 돌려 줘요.”
“…이, 이런 무도한….”
“아, 그래?”
“아, 그래?”
“아, 그래?”
“…지금 나 놀려요?”
분명 따지고자 그를 노려본 건데, 르네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풀고선 멍하니 아르카이츠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아르카이츠. 당신 눈이….”
#47.
르네는 방금 전까지 아르카이츠의 눈동자가 아름답다 생각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내 눈이 뭐?”
“그런 게 어딨어!”
“나 임신부인데.”
“주치의도 여행지가 사막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일걸요? 하, 어쩐지 갑자기 주치의를 불러 진찰하게 시키더니,
날 걱정해서가 아니라 여기 끌고 오려는 거였구만?”
“우리 여행 가는 거예요?”
아, 설렌 게 아니라 내가 또 휘둘렸구나!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거야 모를 일이죠.”
“분명 좋아할걸.”
이게 대체 어찌 된 건지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규칙적인 시간에 따라 마치 함정처럼 모래 폭풍이 시작된다고 하더군. 아르콘 부족의
침입자들을 막기 위한 선조의 주술이라고도 하고.”
“에이.”
르네를 데리고 하루 만에 아르콘 부족의 영지로 가는 건 무리일 듯하여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갈 생각이었다.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어.”
“뭔데요?”
“가서 직접 봐.”
넌 예전에도 그걸 참 좋아했으니까.
* * *
“예, 전하.”
“여행?”
“예, 황태자비 전하와 여행을 떠나시는 것 같다고…. 하여,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지 미리 진찰까지 받았다
합니다.”
“어디로 간다 하던가?”
“여행이 아니군.”
“예?”
“아르콘 부족조차 그 고서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웃기지 않느냐? 본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이 왜곡된 줄도 모른 채 그저 고서가 돌아왔다며 기뻐하는 꼴이란. 그 고서의 진실에 대해서는 페트라
황후만이 알 텐데. 그 여자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
제국의 근간과 부족의 영광,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라도 추장은 절대 진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 * *
알파에게는 사막의 지대를, 오메가에게는 드넓은 초원의 지대를 주었으니 그들은 화합하여 땅을 일궈냈다.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각자의 능력이 있었는데, 알파에게는 불의 능력, 오메가에게는 생명을 길러내는 능력이
있었다.
베타는 자신이 실패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자신을 버린 신과, 그 사랑을 듬뿍 받는 알파와 오메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런 뒤 예언을 하나 했다.
오메가는 번식의 능력을 남겨 주겠으나 알파를 만나지 못한다면 평생을 외로이 살 것이다.
“…뭐야, 그게 끝?”
#48.
“끝이야. 이제 그만 자는 게 어때?”
“안 징징대거든요? 아무튼, 그러니까, 아르콘 부족도, 헬리오스 제국도, 결국엔 이 예언의 아이들을 기다린다는
거네요? 근데, 파비안 황태자가 공개했던 고서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데요?”
“왜 그런 생각을 해?”
“전혀.”
“너 요정 같아.”
“…응?”
“뭐야, 어디 가요?”
“바람 좀 쐬러.”
“이 시간에?”
* * *
“아니.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봤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얼굴이 붉으십니다! 혹, 열 기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마을의
의사를 불러올까요?”
“내 얼굴이 붉은가.”
“그, 그것이.”
“…다 티 나는가?”
“…예?”
“…네?”
마치 첫사랑을 만난 자의 얼굴 아닌가.
“저, 전하?”
“하지만.”
아무튼 아르카이츠가 흙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 사이로 지나가자 병사들은 슬그머니 저들끼리 숙덕대기 시작했다.
“내가 뭘?”
“나 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 * *
모든 것이 드높은 제국의 건물들과는 달리, 사막은 모래 폭풍에 무너지고 휩쓸리지 않기 위해 대부분 아주 낮고,
둥근 지붕을 가진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왜입니까, 어머니?”
“전 제국을 호령할 거니까요. 하지만 어머니와 제 부족이기도 한 아르콘의 전사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거예요.”
다섯 살 난 꼬마 아이의 맹랑한 말에, 페트라 황후는 그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제 운명의 오메가가 왜 도망을 가요?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걸까요? 어떻게 하면 도망치지 못하게 하죠? 묶어
놔야 하나요? 아니면, 좋아하는 걸 잔뜩 안겨다 줘야 하나요?”
팔 하나를 내어 줘야 한다는 게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진짜 내어 줘야 한다는 건지.
#49.
깎아내린 작은 모래 언덕의 턱 아래로 뒤통수를 쭉 내민 채 거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나는 파비안과의 갈등을 모두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황궁이
어수선해진다면, 르네가 제일 위험해질 테니까.’
두려워서 파비안에게 맞서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르카이츠가 그 불같은 성격을 꾹 눌러 담는 이유는.
“임신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여러 가지로 힘들다던데. 그 와중에 여장은 좀 무리지 않겠나? 아내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르네.”
“난 땅 같은 거 바란 적 없어.”
아르카이츠는 르네, 당신이 왜 거꾸로 매달려 있어? 하는 조금 멍한 얼굴로 르네를 바라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 좀 잡아 줘요. 나도 올라가게.”
“무슨….”
그런 르네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무표정을 유지하려다가 실패하곤 픽 웃으며 르네의 얼굴을 제 커다란 손으로 턱
덮어 버렸다.
“읍!”
“그건 또 대체 무슨 비유인데?”
“순두부처럼 산산조각 나더라도, 치즈처럼 고약한 냄새로 상대한테도 피해를 준다던데요? 마냥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거죠.”
대체 순두부와 치즈가 인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르네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묘하게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자의식 과잉이긴 했지만, 저를 바라보는 아르카이츠의 무표정 너머 미묘한 미소와 어쩐지 조금 붉어진 듯한
그의 귓불을 보면 또 맞는 것도 같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어. 알파가 오메가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거니까. 화학적
작용일 수도, 원초적 본능일지도 모르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던 르네는 이내 수긍한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요정 같은데요.”
“아하. 달의 요저엉?”
“…이게 당신 전략인가?”
달의 요정 같다고? 내가?
요정 같다는 말은 처음인지라.
“왜. 이런 말 바란 거 아닌가?”
#50.
“명분이지, 명분. 그럴싸한 명분. 황제는 파테르 신이 임명한 알파의 혈통이니 뭐니. 한데 자네 그 이야기 못
들었나?”
“뭔데?”
“파비안 전하께서 아르콘 부족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고서를 찾아내셨는데, 글쎄 그 안에 적힌 내용이 헬리오스
제국의 신화와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많다는 거야.”
“으응?!”
[사내인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그것은 예언의 오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단, 거짓을 숨기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더군. 파비안 전하께서는 제국의 모든
이들이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며 공개하셨다네.”
“사내인 오메가라니, 오메가는 오로지 여인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내인 오메가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야?”
하여 그들은 오랜만에 화두에 오른 파테르 신전에 나타날 예언의 오메가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다.
“예언 속 오메가는 남자래잖아. 아마 이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내랑 견줘도 지지 않을 만큼의 미남일 거야.”
“아니, 신성한 파테르 신전의 사제인 자네야말로 너무 속세에 찌든 거 아닌가? 그래서, 자네는 알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그냥 딱 황태자비 전하께서 남장을 하시면 똑 닮을 것처럼 생겼어. 아니, 솔직히 내 주관적으로는 공자 쪽이
조금 더 아름다운 것 같아.”
“진짜?!”
“뭔가… 베일에 싸여 있는 느낌? 워낙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니까. 어쩌다 한 번 뵌 얼굴을 내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면 상당한 미형인 거지. 뭐, 적어도 예언 속의 오메가 사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좀 신비스럽지
않을까 해.”
“그러니까 우리끼리만 하는 말이지. 아무튼, 예언의 오메가라면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재밌겠다, 싶은 거지.”
“한데 만약에 진짜 예언의 오메가가 나타나면 어떡해? 아까 전에 한 말 중에 ‘단, 거짓을 숨기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하리라.’라는 구절 말이야. 황궁에서 현재 오메가는 황태자비 전하 아니신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인간이었다.
“…나는 파테르 신께서 보내신 예언의 오메가.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
“…….”
* * *
“씨이.”
암, 아니고말고.
“무슨 일인데요?”
“왜요? 대체 무슨 일인데?”
“이게 대체 무슨….”
#51.
“네, 전하.”
황궁에서 나온 병사가 다시 말을 타고 빠르게 돌아갔다.
“…응.”
그때부터였을까.
째깍째깍 시침 소리, 혹은 스륵스륵 모래시계 속 모래가 흘러가는 거 같은 소리가 르네 귀에만 들리기 시작한
것이.
Chapter 6. 36 계 뭐다?
“누구시오?”
“영감!”
“…도, 도련님?!”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이 비상사태라는 걸 빠르게 판단한 집사는 얼른 르네를 데리고 피어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에 있어야 할 르네가 이곳에 있으니 뭔 일인지는 몰라도 큰일은 맞구나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어머니!”
그와는 달리, 공작과 아델라이드는 다가올 미래가 얼마나 암담할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건 살찐 거니?”
“X 됐어, 누이.”
“…….”
“나 완전히 X 됐다고…!”
“그게… 그러니까….”
르네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 * *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널 데려오지 않는 거였는데. 본의 아니게 헛수고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군.”
앉아 있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서 있어?
누워 있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앉아 있어?
결국 르네가 물었다.
“…….”
“읍!”
“…진짜로?”
“르네 넌 내가 지킬 거니까.”
“…정말?”
말없이 깍지 껴 잡은 손에 르네 역시 힘을 줬다.
그걸 잊었던 거다.
#52.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무엇이냐.”
“들어오라.”
르네의 눈에 띈 이가 있었다.
‘저건,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 중에서도 고위직들만 입는 옷인데. 예언의 오메가가 저 사람인가?’
예언의 오메가.
두 눈은 여우처럼 위로 올라가 있고, 입꼬리는 뱀처럼 길게 찢어져 있는데, 그게 묘하게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또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넌 무엇이냐.”
“…뭐야….”
과연 같은 인간이 맞나?
‘하지만, 역시 이상해.’
‘뭘까, 대체?’
“…….”
“나가라니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려…오다니?”
“저는 신께서 명하신 대로 제국의 번영을 위해 아르카이츠 황태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내려왔습니다.”
“…뭐?”
* * *
“꿈이지? 아까 그거 꿈 맞지?”
“…르네 님.”
“…….”
망했다. 망했구나.
“정말 아르카이츠를, 남편으로 맞이하기 위해 왔다는 거지. 나한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정도면 이미 다른 이들도
다 알고 있을 테고.”
“…도련님.”
“…하하, 하하하….”
“르네 님?”
“아르카이츠가 그랬거든. 나한테 각인했다고. 불안하게 만들지도, 위험하게 만들지도 않는댔으니까. 그러니까…
그래. 그 말을 믿는 수밖에 더 있어?”
“…그래. 누이의 말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댔잖아. 그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잖아? 하하, 시, 신전
불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면서? 그럼 틀린 거 아니야? 적어도 아르카이츠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미카엘을
받아 한눈에 반하는 게 아닌 이상 내가 불안할 건 하나도 없어!”
“뭐야, 뭔데 그래.”
#53.
“그게….”
“뭐?!”
다섯 보 뒤로 대신들을 물렸다고?
다섯 보? 다섯 보를 물렸다고?
“역시 뭐.”
“황태자비 전하….”
르네는 이상하게도 놀랍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다.
“뭐야. 나는 왜 배제해?”
그 순간 르네는 결심했다.
그것이 살길이다.
* * *
“…이렇게 된 일이야, 누이.”
아델라이드는 기어코 미카엘이 나타나고 말았다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누이의 반응에 르네의 가슴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뭐? 지금까지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누나! 미카엘이 나타났다니까? 누이가 예전에 나한테 그랬었잖아. 뭔
버그인지 뭐시기인지 때문에, 난 결국 비극을 맞이할 거라고. 그 꼴을 예상하고도 돌아가라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
“내가 개야?”
“너 울어?”
“호르몬 때문이야.”
“르네….”
단 한 번도 미움받아 본 적도 없었다.
노동을 해 본 적도, 훈련을 해 본 적도, 하다못해 사교계에 나가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성적인 자신이 곧 치정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아닌가.
“미안해, 르네.”
“뭐가….”
“그냥. 미안해.”
“…아니야. 누이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 누이는 나한테 경고까지 해 줬는데,
내가 잠깐 동안은 특별함에 취해 안일했어.”
“특별함?”
“응. 특별함. 아르카이츠가 나한테 각인했다잖아. 웃기지? 각인 자국도 없는데, 그저 그렇게 말해 주는 건 또
처음이라서. 내가 꼭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된 거 같았거든.”
“일단 누이 말대로 오늘은 황궁으로 돌아갈게. 대신에 나는 누이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준다고 그랬지.”
“르네….”
“내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면 안 되지.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할 거 아니야?”
#54.
“누이. 고마워.”
“르네. 누누이 말했지만 너의 행복이 최우선이 되어야 해. 버티지 못할 거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망치게 해 줄 테니까.”
아델라이드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의 단골 대사였다.
“내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면 안 되지.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할 거 아니야?”
한데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르네답지 않은 대사라고 해야 할까.
르네는 마차가 출발했음에도 여전히 창밖에 고개를 내민 채 피어스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설정 떡밥이 제대로 풀리기도 전에 버그를 먹어, 사실상 미카엘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저는 없었다.
‘내가 지금 도울 수 있는 건 고작 도피뿐이니….’
르네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었다.
* * *
그가 걸어오는 발소리, 천끼리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르네.”
“르네. 자는 거야?”
“…자는 중이에요.”
“자는 중이니까요.”
“그럼 마저 잘래?”
“내가 깨운 건가?”
“미안하게 됐군.”
“내가 그래?”
“서운했나?”
저 무심한 인간은 아마도 르네가 화난 이유가 단순히 ‘황태자비’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일 거라고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죠? 뜬금없이 하늘에서 똑 떨어져서 한다는 말이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데.”
#55.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 대는지 아르카이츠도 알고 있죠? 다들 내 목에 자국이 없어서… 이상하대. 각인한 표식도
없으면서 어찌 아이가 생겼는지 말도 많고. 왜 물어 주지 않는 거예요? 이제 미카엘을 두고 날 더 흉볼 게 뻔해.
다들 내가 가짜라 생각할 거야.”
왜 물지 않은 거지?
왜 그때 물지 않은 거야?
오메가의 페로몬에 취한 알파는 본능적으로, 오메가의 뒷덜미를 물어 완전히 제 것이라는 표시를 하려 한다고
들었다.
“빨리 물어 달라니까요?”
“르네. 날 사랑하나?”
“…그래. 그렇지.”
“그래서요?”
“싫어.”
“…뭐, 뭐라고요?”
“물 수 없어.”
“…….”
“널 물지 않을 거야, 르네.”
널 물지 않을 거야.
너 따위 물지 않을 거야.
너 따위 말고 다른 이를 물 거야.
“…….”
하늘 위에서 뚝 떨어졌다지.
그걸 받아 든 건 아르카이츠였고.
“…….”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면서 르네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뽀얀 얼굴을 단번에
일그러트렸다.
짜악!
“이… 개새끼…!”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더 갈기고 싶었지만, 르네는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는 지금 동요하고 있는 거였다.
르네가 제 뺨을 때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 * *
“이세계에서 온 걸까요?”
“신이 명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콕 집어 아르카이츠 전하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왔다는 걸
보면. 게다가 그 모습을 보십시오. 영락없이 아르콘 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대신들은 아무래도 그가 예언의 오메가가 확실하다,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신이 보낸 사도라면, 이미 진즉에 신탁이 내려왔었어야 하는 법. 파테르 신전의 사제들은 이전에 내려온 신탁이
없다 하였으니. 조금 더 두고 보도록 하지.”
“하지만 아르카이츠 전하. 그자는 전하를 남편으로 맞이하러 왔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황태자비께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실 테고, 다른 귀족들도 모두 알게 될 텐데 이리 흐지부지 넘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내가 어찌 그를 만나.”
“…뭐?”
약 올리듯이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파비안의 모습에 아르카이츠는 이마에 힘줄이 설 정도로 순간 이성을 잃었다.
#56.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탕!
“…….”
“글쎄, 나는 좀 생각이 다르네. 아르카이츠. 너는 황태자비에게 각인했다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단순히 가슴이
설레서? 끌려서? 알파는 일생에 단 한 명의 오메가에게 각인해. 하지만 오로지 단 한 번뿐이라는 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횟수 아닌가?”
그러니까 그전에는 각인해 본 경험도 없으면서 어찌 이것이 각인인지 아닌지 확언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네요?”
그냥 처음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알았다.
하지만 오로지 당사자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본능에 가까운 직감은, 언제나 신뢰성을 잃기 마련이었다.
“…….”
“하지만 만일 흔들린다면 아델라이드는 애초에 네 운명의 짝이 아니었던 거다.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하자
없는 알파를 생산해 내야 하지 않겠어?”
그냥 답답한 그의 마음이었다.
또 황태자비를 갈아치우게 될 경우엔 피어스 가문과의 갈등도 모두 오롯이 아르카이츠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르네가 꽃을 좋아하던가.’
“사람이 떨어집니다!”
옆에 있던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습니다.”
#57.
“정말 신께서 자네를 보낸 건가? 아, 아니지. 미카엘 님. 정말 신께서 미카엘 님을 보내신 것입니까?”
“그럼요. 전 예언의 오메가. 제국과 아르콘 부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내려왔습니다. 남편 될 이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법이지요.”
혹은 다른 강한 감정이 지배하고 있을 때.
‘현혹이 먹히지 않는 걸 보면, 애초에 그른 계획인데. 파비안 님께서는 내가 이 사내를 유혹하길 바라겠지.’
미카엘은 이곳에 소환되기 전 마계에서 인간들이 사랑에 빠져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 얄팍한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가벼운지, 그러면서도 또 한 번 전염되면 얼마나 치명적인지.
‘웃어 주셨어.’
그렇다고 ‘못 하겠다.’, ‘이미 아르카이츠는 황태자비를 사랑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실패할 것
같다.’ 하는 말은 곧 죽어도 할 수 없었다.
“형도 다섯 보 뒤로 물러나.”
“꽤나 운명적인 만남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황태자비 전하와 아르카이츠 전하가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서로를
알아봤는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 뭐, 솔직히 각인 자국도 없고.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 뭐냐… 예언의 오메가는 이런저런 능력도
있다는데. 황태자비 전하는 아주 평범하시잖아요. 물론 좋으신 분입니다만.”
“거짓말을 하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할 거라 했습니다. 만일 둘 중 하나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신중히
선택해야지요. 어라? 파비안 전하? 들어가시는 겁니까?”
저 멀리서 아르카이츠와 미카엘이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듯한데 미카엘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정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도 같다.
* * *
예언의 오메가.
“그건 아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마계의 몽마는 아르콘 부족과 꽤나 흡사한 외향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들은 대부분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지. 파비안이 주술사를 통해 뭔가를 소환하려 한 정황은 눈치채고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파테르 신전의 신도들을 속일 만큼의 초자연적 능력이 있으면서,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것들은
마계의 존재 외에는 없지 않나.
“…제가요?”
“억지로 날 유혹해서 파비안의 환심을 사고 싶은가 본데. 포기해. 그런다고 파비안은 마음을 주지 않아. 그저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지.”
“…….”
“르네를 찾아가 무슨 말을 했지?”
“…….”
그렇게는 안 될 일이지.
미카엘은 얼른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58.
“확신하시네요. 한데 상대 쪽도 같은 마음일까요.”
“너 따위가 감히 뭘 안다고.”
시간만 낭비했어.
“전하의 예상대로, 저는 파비안 님께 당신과 황태자비 사이를 이간질하고, 당신을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데 전 그 명령, 이행할 생각 없습니다. 전 그분을 사랑하거든요. 하여 저는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전 파비안 전하의 계획이 실패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걸 결코 그분께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전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그분을 저지하셨으면 합니다. 하여 도와주십시오. 그분의 계획을 망칠 수 있도록.”
미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보다 수월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열망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 법.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인간도, 그 속내를 알기 어려운 인간도, 그 속내를 속이는 인간도, 모두들 몽마
앞에서는 홀딱 벗겨질 뿐.
황태자비가 불쌍하다.
그 말에 아르카이츠의 발이 멈췄다.
“당신은 결국 그분을 불행하게 만들 겁니다. 왜냐면,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 저와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지 않으세요?”
“전하께서는 잃으실 게 없을 겁니다. 그분의 본심이 어떤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지금까지처럼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일 테니까요. 한데, 아까 전 저는 황태자비 전하를 만났습니다. 전 몽마입니다. 인간의 눈을 보면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죠. 제가 그분 눈을 통해 무엇을 봤는지, 그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
* * *
조금 불룩해진 거 같은데.
사실 르네는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질린 건가?
붉은 장미 정원에 도착한 르네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걱정되십니까.”
“파비안 님.”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59.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아르카이츠는 어떤 반응입니까? 사실 고서를 모두에게 공개한 이후부터 묘하게 절 피하는 것이, 아무래도
신뢰를 잃은 것 같습니다.”
“그를 못 믿겠습니까.”
“믿어요.”
“정말요?”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아직은… 응?”
“왜요.”
“방, 방금 이름을….”
“르네. 르네 피어스.”
“…….”
명백한 적의.
“…….”
“…….”
“…당신….”
“그렇게 대놓고 적대를 드러내면 제가 겁먹고 바로 도망칠 거라 생각하시나 봐요. 아르카이츠도 버리고.”
“무슨 말을 그리 하십니까, 르네. 당신이 아르카이츠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아르카이츠가 당신을 버리는
거지.”
“…….”
“…….”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과연 아르카이츠가 각인한 오메가라는 당신은, 제 알파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한데 보니, 딱히 그리 흥미로운 인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 도망칠 기회를 주는 거예요.”
“…….”
“…이거 놔요!”
“…….”
“아델라이드가 이상해진 것도, 아르카이츠가 이상해진 것도, 당신의 인생이 꼬여 가는 것에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뿐이라니까.”
“…….”
“내가 너무 얕보였나.”
“…이러는 거 다 자격지심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뭔가 착각하나 보군, 르네. 난 아르카이츠가 목표가 아니야. 뭐, 궁극적으로는 아르카이츠의 몰락이 목표지만.
그래서 내가 과녁으로 삼은 건 바로 당신인 거지.”
“…….”
파비안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르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아프잖아.
르네는 손을 들어 제 배를 쓰다듬었다.
* * *
그날 밤 황태자비는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르네가 왜 축 처져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갖은 이유를 추측하는 수많은 소문들이 얼마나 빠르게
퍼져나갔는지 모른다.
“저… 황태자비 전하. 혹 현재 황궁의 나인들 입에서 어떠한 소문이 나도는지 알고 계십니까.”
#60.
믿자. 믿어 보자.
그렇게 생각한 르네가 애써 태연하게 대답하자 애나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아르카이츠도 방을 비웠다고?”
한데 그 역시 어제 방을 비웠다니?
“대체 어딜 갔는데?”
“그게 저희도 확실한 건 모르지만…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물론 저희도 정말 확실한 것이 아니라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련님….”
“계속 말해 봐.”
“…….”
“그래, 네 말대로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이상 나와 무관하지 않아. 내 목표는 생명 부지야. 나뿐 아니라
태중의 아이까지도. 그러니까 애나. 나는 더더욱 이 모든 일들의 진실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 그런
소문이 돈다면, 난 그 소문의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 한다는 거야.”
“르네 님.”
“그러니까, 가자.”
“예?”
“가자고.”
“어딜…요?”
“르네 님….”
“그러니까 둘 다 물어봐야지.”
“…….”
“가자.”
화려하되 절대 천박해서는 안 되며, 황태자비로서의 기품을 유지하되 그렇다고 너무 정숙해 보여서도 안 된다.
호락호락해 보여서는 안 돼.
미카엘이든, 아르카이츠든!
“르네 님!”
“나 그냥 돌아갈래에에!”
* * *
한 시간 전.
미카엘은 한숨도 못 자 피곤한 르네와는 달리 매우 생기 넘치는 외모로 르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티타임’을
권했다.
하여 지금 르네와 미카엘은 예쁘게 세공된 도자기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더없이 조용한 눈싸움을 하는
중이다.
오히려 활동적인 일을 한다면, 이를테면 아르카이츠에게 소리를 지른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침묵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한다면 열이 뻗쳐서라도 잠이 덜 올 텐데.
이 나약한 몸뚱이.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어 태아에게 모든 영양분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 지금 상태로는 조용하고 따듯한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연적보다는 당장의 잠이 먼저인 것 같다.
“그러네요.”
르네 역시 그래 봤자 르네였다.
#61.
하찮은 인간들, 그들이 원하는 욕망을 건드려 괴롭히거나 유혹하여 정기를 취하는 존재.
쉽게 제칠 수 있는 인간.
막상 실제로 보니.
‘예쁘다. 엄청 아름답네.’
사실 파비안이 르네에 대해 하찮게 설명한 것은 다 계략인 거고, 사실은 저를 이용해 아르카이츠와 르네 사이를
이간질하고, 상심에 빠진 르네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는 속셈 아닐까?
뭐 저리 속눈썹이 길어.
뭐 저리 이목구비가….
이상하지 않나.
‘몽마인 나조차 그 밑바닥을 알아내지 못하는 데에는 딱 하나야. 제 감정도 모를 만큼 순수한 거지. 젤 위험한
부류야. 가까이해서는 안 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니까. 역시. 내쫓아야겠어. 적어도 뭘 원하는지 내가
알아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파비안의 절대적인 명령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미카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말장난과도 같은
속임수를 써야만 했다.
‘르네 당신은 본인의 감정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여럿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어제 파비안
님이랑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다 들었는데. 돌아오신 파비안 님이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짜증
나. 기분 나빠. 위험해.’
미카엘은 르네의 녹안을 빤히 바라보며 뭐라도 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봤다.
뭐 이리 쉬워?
너무 쉬워서 오히려 생각을 읽히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 * *
“멀리 떠나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황태자비 전하와 태중의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에요. 어제, 파비안 님을 만나셨죠? 얘기
들었습니다.”
“…….”
“…뭐라는 거야.”
이게 대체 어디서 교태야?
이놈 봐라, 교태 한두 번 부린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르카이츠도 혹시….
“…….”
“맞아요. 난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홀릴 수 있어. 내 눈빛에 안 넘어오는 인간이 없지. 난 인간이 아니야.
몽마거든요. 꿈에 들어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기를 취하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을 홀릴 마음이 없어요, 황태자비 전하. 그러니 당신이 나한테 넘어오지 않은 거고. 난 관심 밖의
인간은 유혹하지 않거든.”
“다만, 아르카이츠 황태자는 다르지. 그는 꽤… 좋은 정기를 가지고 있거든. 알파 수컷의 정기는 몽마들이 가장
원하는 최상의 정기. 내가 파비안 황태자와 손을 잡은 이유는 그뿐이야. 아르카이츠의 정기를 먹는다고 내가 손해
볼 건 하나 없잖아? 게다가 잘만 하면 황태자비도 된다 하고. 그럼 아주 손쉽게 인간들을 다 취할 수도 있을 거
아냐.”
“…몽마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몽마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나 보군요? 어지간히 머릿속이 백지 상태네. 백치미라는 게 이런 건가 봐요.
그런 순진한 눈망울로 말하는 걸 보니, 몽마인 나도 마음이 조금 동하네. 뭐. 그렇다고 그쪽이 나한테 정기를 줄
순 없을 거 같지만. 보아하니 전하도 나처럼 받아 내는 쪽인 것 같은데.”
미카엘은 대체 얼마큼 몰아붙여야 르네가 이성을 완전히 잃고 겁을 내 도망갈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카엘은 르네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 꿈을 조작하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일지 헷갈리게 만들어
결국 도망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당장이야 뜨거운 물이고 뭐고 붓고, 그대로 달려들어 머리칼을 반쯤 쥐어뜯으면 마음이야 조금 후련하겠지만.
여긴 보는 눈이 많았다.
“걱정이 아니라, 내 품위를 지키려는 거지. 난 황태자비니까. 그에 걸맞은 품격을 지녀야 하지 않겠니.”
“…….”
* * *
“백 퍼센트 거짓말이야.”
“네. 그럼요. 르네 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물론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밤마다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그곳이
어딘지는 소문만 무성하지만…. 네,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그럴 리가 없으시죠. 물론 미카엘이라는 자가 인간이
아닌 인간 홀리는 요물 중의 요물 몽마라는 존재이긴 하고, 또 목표를 아르카이츠 전하로 삼긴 했지만요.”
무엇보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몽롱한 정신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무기력했다.
“네?”
“가자.”
“네?”
“도망가자고.”
“…….”
“탈주하는 거야.”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도련님.”
“나 애 데리고 튈래.”
* * *
르네는 이곳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비교적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북쪽의 별궁은 굉장히 어두운 곳이지만 남쪽의 궁은 묘하게도 따스한 느낌이 있었다.
“…음, 이제 진짜 위험한데.”
#63.
황궁 대부분의 방들은 비어 있어도 간단한 집기 정도는 있었기에 여기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그때였다.
“…….”
“차를 좀 줄까요?”
그녀는 르네에게 “다과를 줄까요, 차를 줄까요, 과일도 있어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 피곤하지 않나요?” 별별
것들을 권하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가는 길은 아시나요?”
“누가요?”
“아르카이츠 전하요.”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굉장히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으니까.
르네는 그녀가 어떤 거짓말을 고했는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신과 아르카이츠를 괴롭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니 그 가면을 쓰고 계신 거겠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땐 가면을 벗고 말해 주세요.
진심이 보인다면, 사과 받아들일게요.”
그제야 르네 역시 생긋 미소 지었다.
“잠시만요.”
“약도예요.”
“…감사해요.”
* * *
아르카이츠는 어떻게 하면 르네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파비안과 미카엘을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건 또 확실치 않았다.
권력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르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단순히 르네의 본심을 알기 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미카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64.
그게 밤새 생각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네?”
“…….”
르네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니 기다려 주자. 기다려 줘야 한다.
“대체 뭔데 그리 호들갑인가.”
르네를 놔준다느니 뭐니 그런 헛소리는 르네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실히 깨닫지 못해 할 수 있는,
그런 간 큰 소리였다는 것을.
Chapter 7. 온실 화초
물론 완전 뒤도 돌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무리라 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불룩해지는 배를 부여잡고 들키지 않게, 그러나 늦지 않게 인기척을 죽인 채 달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르네.”
“알빈!”
“애나, 잘 있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며칠분의 식료품과 물, 구급약과 여분의 옷가지들을 챙긴 보따리를 건넸다.
“…알빈. 고마워.”
“누이.”
“왜 그래?”
“난 사막으로 갈 거야.”
“뭐?”
“사막에 가서, 나와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보려고.”
“르네!”
“르네!”
평소의 르네였다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아이,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렇게 목청 높이지 마.’ 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을 테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사막에 갈 거야. 아르콘 부족에 가서, 내 체질에 대해 알아낼 거야.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예언에 대해서도.”
그건 달라 누이. 그 두 개는 다르다고.
“하지만.”
“거긴.”
비장한 얼굴로 말하는 알빈의 모습에 르네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알빈을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 내가! 나 스스로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인간 같다고. 뭔가를 하려는
의지도 없고, 생명 부지만이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라고. 그게 뭐야. 그게 어떻게 업적인 거냐고….”
#65.
“누, 누이.”
“아니 누이, 꿈에서 예언을 본다면서. 근데 파비안이 계략을 세워 날 내쫓을 거라는 건 모르고, 미카엘이 나타날
건 안단 말이야?”
“응.”
‘이상하네. 파비안은 원작에서는 르네를 짝사랑하는 설정인데…. 미카엘이랑 파비안이랑 협력하는 사이란 말이야?
이것 참… 원작이랑 너무 다르잖아? 아무리 버그 먹어도, 원작 설정까지 틀어질 정도인가?’
그 상대가 바로 르네였고.
알빈은 그저 르네가 또 눈물이 차오르려나 보구나 하며 안쓰러운 것을 바라보듯 갸륵한 눈으로 르네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정작 르네는 매우 비장했다.
“르네.”
“…알겠어, 르네.”
* * *
피어스 공작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제 피어스 가문은 여기까지인가 보오, 부인.’ 하며 파르르
눈썹을 떨어 댔다.
화를 낼 힘도 없다는 듯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다시 몸을 일으킨 공작이 아델라이드에게 물었다.
“사막이요.”
“…사, 사막?”
“네. 아르콘 부족이 살고 있는, 그 사막이요. 지옥의 사막, 전갈의 사막, 폭풍의 사막.”
“부인. 죽으면 어차피 다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만날 곳이 천국은 아닌 것 같소. 부인.
다음 생에도 부부가 될 수 있다면 그때도 내 부인이 되어….”
“부인 말이 맞는 것도 같소…. 아델라이드. 말해 보렴. 르네가 어디 갑자기 가출할 아이는 아니지 않느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닌 거지? 응?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게냐? 아니면, 설마 우리
르네가 다른 놈과 눈이라도 맞고 그런 건 아니지?”
이유는 간단했다.
그 누구도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쉽게 떠들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으니, 사교 시즌이 오기 전까진 아마
그 누구도 미카엘에 대해 알지 못할 거다.
“어머니. 르네가 단순히 저 혼자 살겠다고 가문까지 버려가며 도망칠 아이로 보이세요? 르네, 어째서인지
확신하고 있더라고요.”
“확신하다니, 뭘?”
…(중략)….
전 다시 돌아올 거예요.
부디 절 믿고 기다려 주세요.
#66.
* * *
낮에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뜨거운 태양 아래 열기로 힘들었고,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추위에 떨었다.
저들 돈벌이 수단인 낙타까지 두고 가 버리는 모습에 르네는 왜 저렇게까지 아르콘 부족을 무서워하나 생각했다.
알빈 역시 말로는 야만족이니 뭐니, 당장 돌아가야 한다느니 마뜩찮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르네를
보살펴 줬다.
가령, 지금처럼.
“네 옷이잖아. 넌 어쩌고.”
“고마워, 알빈.”
“알빈?”
“왜 그래?”
“아르카이츠 그 망할 놈.”
“야아.”
“왜 또 그런 말을 해. 나 괜찮아.”
원망?
“으악!”
“왜 그래, 르네!”
“뭐?”
르네는 굉장히 놀랍고 충격적이고 또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양 알빈을 쳐다보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응?”
같이 기뻐해 줄 줄 알았는데.
‘아르카이츠였다면….’
“…에잇. 됐어.”
“르네. 어디 아픈 건 아닌 거지?”
“하나도 안 아파!”
* * *
이 모든 건 자신의 실수다.
자신의 실수였다.
“르네를 놔줄 생각 없다.”
“…….”
“…….”
#67.
“…저, 저는.”
“걱정 말거라. 르네는 반드시 이곳에 돌아올 거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 발목을 잡아서라도 끌고 올
생각이니까. 하니 아델라이드에게 전해라. 르네의 가출에 대해 일절 입 열지 말라고.”
그는 원래 르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드럽고 다정하고, 또 어딘가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통 때였다면 황태자비가 도망쳤느니, 사랑의 도피니, 불륜이니, 가짜 오메가니 모두들 말이 많았을 거다.
피어스 가문을 적대하는 대신들은 아마 지금이 바로 미카엘을 새로운 황태자비로 맞이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는
듯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죽을 게 뻔했다.
“…뭐?”
“르네가 도망간 마당에 이미지 관리고 뭐고 없다는 거냐, 아르카이츠? 나와 적대할 생각은 없다며 고고하게 굴
땐 언제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르네가 사라진 마당에 내가 언제까지 네 유치한 심술을 받아 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파비안.”
“훈수가 아니야. 동정하는 거지.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원망스러운가? 형 어머니의 죽음이 마냥 내 어머니의 탓
같아?”
“…….”
“원망하는 것까진 이해하겠지만, 그 모순적인 행동은 그만두지 그래. 복수를 하려거든 두 개의 무덤을 파라는
소리가 있어. 날 무덤 아래 처넣고 싶으면, 너도 같이 떨어질 준비를 해야지.”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이러고 서서 말씨름할 여유조차 없기에 비소를 지으며 그대로 파비안을 지나쳐 갔다.
“한데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어디로 가셨을지 알고 계십니까? 이 드넓은 제국에서 마음먹고 도망쳤다면,
해외로 밀항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에… 예에?”
“파비안 님―.”
* * *
힘들다.
“으응….”
“거의 다 와 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다행히 도적 떼를 만나진 않았네. 물론, 여기서 도적질할 만큼 멍청한
이들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거참 이상하네….”
“…으응.”
나름 고심해서 고른 도피 장소였으니까.
“…….”
“…….”
* * *
그 악명 높은 사막길을 너무 쉽게 평정해서였을까.
초심자의 행운인지 도적 떼 한번 만나지 않고 무사히 아르콘 부족의 영지에 도착한 것은 르네에게 있어 굉장한
도약이자 성취였다.
“나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 보는 거 처음이야.”
아주 딱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실제로 르네는 해맑았지만, 이게 콩깍지인지 아니면 편견인지 알빈 눈에는 르네의 눈이 매우 촉촉해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 보였다.
한데 뭔 말도 안 되는 운명의 장난인지….
‘도망자의 삶을 살아도 상관없고, 가문을 내팽개쳐도 상관없으니, 르네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자들이다! 잡아라!”
“르네!”
“알빈!”
기골이 장대한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르네와 알빈을 낙타 위에서 끌어 내렸다.
“르네!”
“알빈! 어딨어?”
“르네!”
아르콘 부족의 전사들은 저들끼리 원주민 언어를 사용하여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그대로 알빈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르네! 르네!”
‘이상해, 아르콘 부족은 외부인에 대해 경계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작정 포박하지는 않는다고 그랬어. 오히려
과하게 대접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목적을 불게 만드는, 그런 식의 환대 아닌 환대를 한다고 들었는데!’
“난 무기도 없단 말이야!”
이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러자 저들끼리 뭐라 원주민 언어로 말하던 이들이 정말로 르네를 조심스레 대하는 것 아니겠는가.
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여기가 아르콘 부족의 신전이라는 것을 깨닫는 찰나였다. 거대한 손이 그의 얼굴을 움켜쥐듯 잡았다.
“…….”
르네는 입을 벙긋거렸다.
“…….”
“…….”
“…….”
르네는 겨우 붕어 입을 오물거렸다.
“…아, 아르카이츠.”
그는 그걸 기다렸던 것처럼 생긋 웃었다.
#69.
“뭐 하는 거야?”
“말 안 들을 거 같아서.”
“아닌 거 잘 알아.”
뭐 이렇게 짧은 방황이야?
콧방귀를 뀌는 르네였다.
“…….”
“…….”
* * *
르네가 제 곁을 떠난 지난 사흘간.
르네가 아르콘 부족의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흘 밤낮 동안 아르카이츠는 잠에 들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다.
또는….
“혹 식수나 식량이 떨어진 거 아닌가?”
혹은….
해서….
“…….”
추장의 말에 아르카이츠는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쉴 새 없이 왕복해
댔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언제나 정답만을 맞히던 알파들은 연속적인 오답의 향연에 정신 못 차리고 당한다.
지금 아르카이츠가 바로 그 꼴이었다.
‘…알파들은 각인한 오메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가.’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절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그 진실은 제 남편을 고통스럽게 할
거예요. 그는 평생을 알파로서 살아왔습니다.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마침내 제가 보듬어 줄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이 시기에 아르콘 부족의 번영을 위한다는 이유로 고서를 공개한다니요!”
“그 고서는 과거 아르콘 부족과 헬리오스 제국이 동등한 위치였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다! 헬리오스의 왕들이
대대로 알파였던 것은 모두 이 아르콘 부족의 핏줄 덕분인 거다! 지금 저들을 봐라.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우릴 사막 너머로 쫓아낸 걸로도 모자라 야만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까지 달아 붙이지 않느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넌 아르콘 부족, 그것도 추장의 딸이라는 자가. 평생 알파로서 추앙받던 이가
스스로 오메가인 척 평생을 거짓 속에서 살겠다는 것이냐! 전사의 긍지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사랑에 눈이 멀어
제 혈족을 버리는군!”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이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실이 알려지는 걸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차마… 단지 부족의 명예를 위해 그를 저버릴 순 없어요.”
“…해서, 파비안 황태자가 아르콘 부족의 고서를 이용해서 황태자비를 몰아낼 계획이라고요.”
“황제가 과연, 그 거짓말들을 들춰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무리 병석에 누웠다 해도 아직 제국의 황제. 어쩌면,
그 역시 파비안 황태자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르카이츠 전하.”
“아무리 봐도 아르카이츠 전하께서 불리하신 입장이라는 거 잘 아시죠? 그곳엔 몽마까지 있다면서요. 몽마의
능력을 너무 얕보지 마세요. 전하께서 홀리지 않는다 한들, 다른 모든 인간들이 홀린다면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혈육에게 위로나 위안은 못 해 줄망정 실패할 거다, 포기해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아르콘 부족의 추장이었다.
“파비안 황태자의 목적이 전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뺏는 것이라면서요. 알파에게 각인한 오메가를 잃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를 두고 황궁에 돌아가십시오. 그렇다면
황태자비의 안전은 보장하도록 하죠.”
“…….”
“모든 것들과 척을 진 채 피를 묻혀서라도 그를 지켜 낼지, 아니면 황태자비를 포기하고 제국과 모두의 비밀을
지키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셔야 합니다.”
“전자를 선택하게 된다면 우리 아르콘은 당신에게 협력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비밀은, 우리의 수치와도
관련되어 있으니까. 하여, 황태자비의 신분은 도망자일 뿐입니다. 그가 우리 부족의 영토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는 제국의 도망자로 간주하여 그에 맞는 처우를 할 겁니다.”
제국에서 도망친 도망자는 대부분 범죄자나 추방된 이들. 혹은 처형될 위기에 도망친 겁쟁이.
“아르콘 부족의 추장 자리는 혈육만이 승계할 수 있다는 것을. 외동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아르콘 부족의 추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말이야 그럴싸하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할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손자처럼 보이겠지만.
그 말을 잘 들여다보면 어차피 죽으면 이 부족은 내 것이며,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라도
그 자리를 가져갈 테니,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순순히 협조해 달라.
이런 뜻 아니겠는가.
‘도착했나 보군.’
“…잘도 그런 말을….”
“그런 희생적인 말들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가장 강해야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파비안
황태자의 계략에 놀아나기만 하면서, 그런 말들이 신뢰가 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아르콘 부족은 오로지 강한
자만을 인정합니다.”
“…….”
“이미 죽은 사람의 말로 날 설득하려 해 봤자, 페트라는 아르콘 부족의 수치고 배신자입니다. 그 애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우리 부족을 배신한 거나 다름없으니! 하니 내게 혈육의 정을 들이밀지 마십시오.”
“…설마…!”
#71.
아르카이츠에 품에 안긴 르네는 여전히 얼굴이 천에 가려진 채로 어디론가 향했다.
“달리 할 말이 없나?”
“미안해.”
“그게 끝?”
“보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나한테 각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날 사랑하지 않는데, 억지로 곁에 두면 괴로워할 거라
생각해서.”
“뭐어?”
르네는 살면서 제일 황당한 말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
“우습게도, 당신 말이 맞아.”
“…….”
“…….”
“뭘 또 죽기까지….”
“아르카이츠.”
이런 말을 할 줄도 알고, 나 꽤 대단한데?
“르네.”
“…….”
개처럼 기며 용서를 구하든, 아니면 완력을 써서라도, 혹은 처절하게 빌든, 뭐 어떤 식으로든 르네의 발목을 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지 뭔가.
“예외?”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파비안을 속이기 위해서 조금은 거리를 둬야 한다 생각했어. 우리 사이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모습을 보이면
파비안의 다음 타깃은 네가 될 테니까.”
“…르네. 고마워.”
“대신에 궁금한 건. 앞으로 이제 어떡할 거냐는 거예요. 아니, 당신이 황궁을 비우면 어떡해요? 파비안이
지금쯤 대신들을 다 구워삶고 있을 게 뻔한데! 미카엘은 몽마잖아요. 꿈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요. 대신들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면 어떡하려고. 나한테도 그래서….”
“별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미카엘의 목덜미를 문… 자국이…. 뭐 그거 때문에 속상해서 뛰쳐나온 건
아니거든요?”
#72.
“목덜미?”
“아이, 표식이요. 표식! 미카엘이 아주 대놓고 자기 목덜미에 난 잇자국을 보여 주던데. 솔직히 믿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 파비안 황태자랑 짜 놓고 만든 걸 수도 있고, 몽마의 능력으로 환시를 보여 준 걸 수도
있으니까.”
최소 한 달은 생각했다.
“…아니야. 안 갈래요.”
“응?”
“왜 그래, 응?”
“르네.”
“어쩌면 황궁 밖에서 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지도 몰라요. 그곳에선 언젠가 분명 당신한테 나와 아이가 약점이
될 테니까. 언젠가는 다 지칠 거라고요. 지금은 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겠는데, 다시 그곳에 돌아갔다가 다시
내 발로 걸어 나오게 되든 혹은 타의로 밀려나오든, 그때의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무모하고 철없다 느껴질 만큼 행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르네. 진정해.”
“…미안해요.”
“…….”
“…아르카이츠.”
“…….”
“연극…?”
“내가요? 내가 누굴 만났다는….”
“……”
“듣다니, 누구한테요?”
눈동자는 하얗게 바랜 것이 장님인가 싶다가도 행동은 또 앞을 훤히 내다보는 사람처럼 거침없던 그런 기묘한 사람.
“증인?”
“…그게 무슨.”
“…….”
* * *
약 10 년 전.
“오해라뇨?”
“…피어스 가문이요.”
“…응?”
#73.
“…무언가… 오해를 한 게 아닐까? 아델라이드 피어스를 보고 각인한 것을, 네가 착각을 했겠지.”
“…….”
“어머니.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선례를 알고 계시죠? 고서 말입니다. 아르콘 부족의 고서에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수많은 선례와 정보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 고서를 보고 싶습니다.”
“안 된다.”
“어째서요?”
“…….”
“어머니. 뭔가를 숨기시는 거죠? 피어스 공작 역시 르네 피어스의 체질에 대해 알면서도 숨기는 것 같은데.
사내인 오메가인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될 선례가 있는 것이 분명하죠?”
언제나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던 분이, 말을 잇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걸까.
황후가 처음 쓰러지고 난 뒤, 황제는 대외적으로는 황후가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 공표했지만, 뒤로는 그녀에게
독을 먹인 이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의원은 황후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이것저것 약을 조제하기 시작했고, 시녀들은 황후의 차가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병세가 짙어지셨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만큼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해독제는 꾸준히 드시고
계셨으니까. …어머니를 죽이려 한 자가 아직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몰라야 한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독에 노출되고, 그 이후에도 해독제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그녀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생각만큼 불편하지는 않구나.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 그런지 보이진 않아도 느낄 수는 있다. 목숨을 부지했는데
눈 정도야, 신께 바칠 수 있다.”
“…파비안.”
“파비안의 손에 고서가 들어갔다, 아르카이츠. 그 애는 고서를 이용해서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거야. 나와
황제에 대한 미움을 너한테 풀려는 것이다. 그 애를 저지해야만 한다.”
“…….”
“아르카이츠!”
“너 설마….”
“…각인을 한 알파는 위험하다는 말이 맞아. 제 오메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면에서….
어쩌면 그게 본인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처음 자신의 오메가를 마주하고 너무나도 깊은 사랑에 빠져 장님이 되었던 페트라는 비로소 진짜 눈을 잃고 나서야
완전한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주술을 다루신다 들었습니다. 아르콘 부족에서는 제국과는 달리 흑마법이 금지된 영역이
아니라고요.”
“그렇긴 하다만, 흑마법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흑마법을 쓰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제가 아닙니다.”
“그걸 어찌 확신하니?”
“파비안이 단순히 에밀리 황후에 대한 복수심으로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게는 친모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습니다.”
#74.
“대신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만약 아버지가 아르콘 부족에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밀리 황후께서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고….”
“누가 그런 말을 해? 빌먼 경이 그래?”
“응.”
“아니야, 그런 거!”
“이런 말 너니까 해 주는데, 사실 에밀리 황후께는 죄송하게도, 내 어머니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아. 그리움이
없달까. 오히려 난 페트라 황후께 감사해. 차별 없이 날 키워 주셨으니까. 피부색만 다르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친모로 알고 지냈을걸?”
“형….”
“응.”
그러나 그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 그의 원망 대상은 단순히 ‘불쌍한 내 어머니를 밀어낸 황후’가 아니다.
언제부터였을까. 파비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부러움과 열등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왜 나는 러트가 오지 않나.
* * *
“그러니까… 파비안에게 일부러 몽마를 소환하도록, 아르카이츠 당신이 페트라 황후를 주술사로 속여 붙인 거라는
거죠?”
“맞아.”
“왜, 왜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미카엘을 불러낸 게 겉으로 봐서는 파비안 같겠지만, 결국엔 아르카이츠와 페트라 황후 때문 아닌가?
뺨을 갈기든 후려치든, 아무튼 간 자신의 자만으로 르네가 마음고생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걸까.
이를 악물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린 르네는 이상하게도 내려치진 못했다.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르네?”
“가만히 있어 봐요.”
때리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카이츠는 순간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태동을 느꼈다.
“뭘 그렇게 굳어 있어요?”
“…움…직이는….”
“신기하네.”
“그 말이 끝?”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기뻐.”
“얼마큼?”
“당신은 안 그래?”
“처음?”
“사실 사막을 지나오는 동안에 먼저 느꼈거든요. 뭐… 살짝 코가 시큰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네. 당신이
이렇게 눈물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뭔가 좀… 놀라게 만든 보람이 있는데요.”
“응. 강해졌어.”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르네? 아무리 네 남편이라고 해도, 그가 밉지도 않아? 원망스럽지도 않냐고.
너한테 말뿐이라도 신뢰를 주지 못한 인간이야. 나라면 그러지 않았어.”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여기 오자마자 다시 황궁에 돌아가겠다 말하는 건데? 황태자가 널 협박이라도 한 거야? 응?
피어스 가문을 볼모로 삼기라도 하겠대?”
“그런 거 아니야!”
#75.
은근히 외골수 기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알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런 거 아니야.”
“지금은 너한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말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정말 미안해,
알빈.”
이번에도 둘 중 하나겠지.
그중에서도 후자의 경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럼에도 알빈은 르네가 내린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상했지만, 역시.
“…….”
“…나한테 실망했다는 거 알아. 쉽게 결정 바꾸는 거, 미덥지 않겠지.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한심해 보일
거라는 것도 알아.”
“응?”
“…….”
“널 그 사람 곁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야.”
“…….”
“널 좋아한다는 의미야. 아니, 좋아하는 걸 넘어서,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네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던 그날
이후부터, 난 모든 걸 버리고 너와 함께 새로 시작할 다짐을 했었어.”
“알빈.”
“…미안해….”
자조적으로 말하는 알빈의 모습에 르네는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넌 잘못한 게 없어, 르네. 그냥… 나 혼자 설레발쳤다는 게 문제인 거지. 인정해야만 하는데, 인정하고 싶지가
않네.”
정말 그렇게만 생각했나?
알빈이 널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했을 때 르네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알빈의 감정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내 가장 친한 친구, 형제 같은 내 친구.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고 있는 르네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놨다.
“…알빈.”
“뭐가 뭘 또 그렇게까지야, 답 없지. 하필이면 황태자가 각인한 오메가를 짝사랑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봤을 때부터 단념하는 건데.”
“…….”
“됐어. 그런 건 고생 축에 끼는 것도 아니야.”
“…….”
* * *
하지만 아르카이츠는 그보다는 아직 르네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눈치챈 듯했다.
“적당히 착해서 문제가 되는 거야.”
“…그걸 지금 위로라고.”
“위로할 생각 없는데.”
“그쵸?”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르네가 도착한 곳은, 굉장한 풍채를 가진 아르콘 부족의 추장 앞이었다.
#76.
“…안녕하십니까….”
“…흠….”
“…흠…!”
그러다 곧 추장의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대며 망상을 끝냈다.
“아…!”
“…….”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르네는 도련님으로 살았을 시절엔 사교 모임이고 뭐고 참석하지 않아 다른 사내들과
인사할 일이 손에 꼽았다.
그리고 황궁에 입궁한 뒤에는 여인의 차림새로 여인의 흉내를 내느라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 에스코트해 주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열성 오메가들은 기본적으로 골격부터가 모자랐다. 열성이 임신이 어려운 이유도, 일단 골격이 너무 약해 낳다가
죽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히트 사이클이 늦게 찾아왔다는 것은… 열성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데. 하지만 열성이라기엔 너무… 우성
오메가스러운 외양을 가졌는데?’
물론 페트라는 그걸 안쓰러워했지만.
황제는 페트라를 만나기 이전부터도 꾸준히 히트 사이클이 있어 왔고, 억제제를 먹어서 겨우 잠재웠다지만.
“…네?”
“…아, 아니요.”
“…그런 것 같은데요….”
“한데 어찌하여….”
“…이상하군.”
‘오메가가 맞기는 한가? 아, 아니. 맞긴 하겠지. 사내가 임신을 했으니…. 그럼 열성이 맞는가…?
열성이라기엔… 다른 요건들이 매우 우수한데…? 그렇다고 우성이라기엔… 히트 사이클 주기가 마음에 걸리고.
대체 뭐지, 이 아이는?’
피어스 공작은 제 아들의 체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걸 숨기고 있었으니 그에게 얘기를 들어
보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저희 아버지요?”
“…네…?”
추장은 그것을 가문을 버리고 황궁을 떠나 도망쳤던 이가 다시 가족의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아….”
“굳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서 전하의 발언이 필요하진 않아 보이니까요.”
“…네에….”
#77.
“시집살이?”
같은 말 아닌가!
“한다면…?”
“이, 이걸 다요?”
“아니 됩니다. 굉장히 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로지 황태자비 전하와 태어날 태중의 아기씨만
드셔야 한다 하셨습니다.”
“……! 맛있…어!”
“이게 대체 뭐죠!”
“너무 맛있어요!”
찰싹!
“부인 많이 드시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굉장히 무섭고 어려운 분일 줄 알았던 시할아버지께서는 굉장한 손맛을 가지신 분이지 않나.
“아가야, 너도 맛있었지?”
흐뭇한 미소로 아이와 교감하는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콘 부족의 귀족이 물었다.
“태명이요?”
“예, 태명이요.”
“저희 부족에서는 태명을 무엇으로 짓느냐에 따라, 태어날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믿습니다. 대부분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튼튼이나, 건강이, 혹은 새싹 등으로 짓는답니다. 달콤한 아이라 하여
꿀벌이라 짓는 이들도 있지요. 전하께서는 아기씨가 어떤 인생을 살길 바라십니까?”
“으음, 나는… 나는 씩씩하게 자라길 바라요. 이제부터 태명은 씩씩이에요. 씩씩아! 마음에 드니? 마음에 들면
한 번 통 차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통통 차렴.”
그때 아르카이츠가 말을 얹었다.
“딱 당신 같네.”
“엥?”
“잘도 그런 태명을….”
“르네 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콘의 귀족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르네와 아르카이츠 그리고 태어날 르네 투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 * *
황태자가 돌아왔다.
평소 피어스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대신들은 아예 작정한 듯 미카엘과 황태자비를 두고 누가 예언서에 나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오메가’이며 ‘예언의 오메가’인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아르카이츠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소? 가서 직접 황태자비 전하를 데려오신 분인데, 그분을 두고 청문회를 하자는 우리의
의견이 수용이나 되겠냔 말이오. 거 아무리 피어스 공작이 눈엣가시라지만 눈치는 챙깁시다그려.”
“아님 말고—.”
#78.
당장에 청문회를 열어 황태자비가 왜 도망쳤는지, 그리고 미카엘의 존재에 대해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알리자는
의견 하나.
그래도 아직 태중에 아이도 있는 마당에 황태자비의 건강을 위해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열어도 무방하다는 의견
하나.
집무실 책상 앞에서 시장통인 양 떠들어 대는 이들을 두고 아르카이츠는 그동안 밀린 정무를 보다 조용히 문서를
덮었다.
평소 파비안과 가까이 지내던 이였던지라 어쩌면 아르카이츠가 황궁을 비운 동안 무언가 지시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문회는 기필코 열려야 합니다. 황태자비에 대해서 궁 안에 어떤 소문이 떠다니고 있는지 전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분명히 모두를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장차 황후가 되어 제국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백성들을 상대로 거짓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것입니다. 아닙니까, 전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허드슨 경?”
“아니, 거기에 피어스 영애가 있지 뭡니까! 머리를 짧게 잘라 맨 처음엔 영식인 줄 알았습니다. 한데 거기에
생활복 드레스를 입고 다니지 뭡니까!”
허드슨은 아주 못 볼 것을 본 양 기함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터였기에 아르카이츠는 르네의 여장이 들통난 것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킬 거짓말이었다.
“이보시오, 허드슨 경. 한데 이상한 것이, 르네 피어스는 남자 아닙니까. 사내가… 임신이 가능한 거요?”
“그러니 그 임신도 거짓일지 모른단 소리지요! 예언서에도 떡하니 나와 있지 않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오메가는
제국을 망하게 한다.”
“한데 미카엘 그자도 사내 아닙니까. 그자도 오메가인데요. 사내인 오메가가 가능하다는 결론은 그때 매듭짓지
않았습니까.”
“청문회….”
혹은 꼬리 자르기를 할지.
“…열도록 하게.”
“허드슨 경. 그대가 아무리 초로가 넘었다지만 그래도 아직 청음은 가능한 상태 아닌가? 들은바 그대로야.
청문회를 열어, 그 자리에 앉은 이를 마음껏 물어뜯게.”
“만일 황태자비의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면 아르카이츠 님께서 극도로 분노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영감. 영감은 참 단순한 노인네라 좋겠어. 아르카이츠가 분노하든, 슬퍼하든, 감정을 들킨다는 건 동요한다는
뜻일세. 오히려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 거라는 뜻이지. 영감이 걱정해야 할 것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그 표정을 알기 어려울 때야.”
“…….”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협력 관계가 맞긴 하냔 말이다.
“없던 일이 되는 거겠지?”
“하지만….”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카를 황태자비로 올리고 싶다면야 내 마다하진 않겠네만. 자네는 조카의 안위보다
본인 명성을 더 생각하는 편 아닌가. 그 목이 댕강 떨어져 나가면, 명성이 있은들 무엇 하나?”
“하면 전하께서는요?”
* * *
온몸이 거대한 돌덩이에 깔린 것처럼,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된 것은 페트라 황후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독을 먹인 것이 아닌가 싶어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 왔지만 수많은 의사들이 ‘독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운명으로 이어진 이들이며, 알파는 각인한 상대가 없으면 극심한 우울감과 권태로움을 느끼니 마음의 병이 맞는
듯하다.
뭐 이런 말들뿐이었다.
또한 자신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그녀가 없어지자, 언제 들킬지 모르는 자신의 치부를 두려워해
왔다.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것이냐. 네 오메가를 찾아 주겠다 했다. 허드슨 경의 조카가 오메가라 하여 그 아이를
소개해 주지 않았더냐. 또 무엇이 필요해 날 이리 괴롭히는 게냐.”
파비안은 자신이 알파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니, 그 분노는 아마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파비안은 황제가 자신의 진짜 체질을 밝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며, 이를 조롱하듯 비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에도, 또한 황태자비를 둘러싼 소문과 관련하여 청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에도.
초점 없던 황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79.
“내가 곧 죽는 건가….”
“어휴. 그래. 내가 이런 허접스런 당신의 모습도 사랑하긴 했다만. 한 발 물러나 바라보니 답답한 건 어쩔 수가
없네.”
“……?”
“…어찌하여….”
“…정말 페트라가 맞나? 정말 내 아내가 맞냔 말이야. 아니, 아니야. 당신은 내 손으로 보내 줬는걸….
파비안이 날 조종하려고 보낸 첩자로군…!”
경직되어 있던 황제는 페트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겁했다. 그러다 이내 손바닥에 닿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멈칫했다.
“정말 당신이 맞는 건가? 정말 당신이…. 페트라, 세상에, 나의 알파, 나의 사랑… 당신이 어떻게…!”
* * *
“…아르카이츠.”
르네 투라니.
대신들이 모두 아르카이츠를 찾아가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폐위를 시켜야 한다 온갖 말들을 해 댄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마냥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런 자리는 처음이니까 긴장은 되네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르카이츠는 안 피곤해요? 일찍부터 청문회일 텐데….”
“여러 가지 준비하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어. 피곤하지 않아. 이제 다 끝날 텐데, 오히려 기대까지 되는군.”
‘이상하게 자꾸만 불안해. 왜 자꾸만 불안한 걸까. 이건… 청문회가 두려워서만은 아닌 거 같은데….’
그의 손 위에 아르카이츠의 손이 덮였다.
“딱히 단점 아니야.”
“응?”
“…또 갑자기 감동을 주고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엔 이렇게까지 다정한 말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무슨
짐승인 양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까.”
“막 내 발닦개처럼 굴 거라고요?”
“…이제 보니 그리 겁 없는 거 같진 않은데?”
그렇게 만든 건 본인이니까.
“응?”
“…….”
“딱 시기가 좋은 거 같지?”
“좋긴 뭐가 좋…아….”
#80.
“만약에, 정말 만약에 황태자비가 폐위되면 제가 그의 황태자비가 되는 거죠? 그리고 파비안 님께서는 허드슨
경의 조카와 혼인하는 거고요.”
“그래.”
“…….”
“하지만….”
“…….”
“미카엘.”
“…….”
“…파비안 님.”
“나는 네가 좋다, 미카엘. 네가 인간이 아니라 좋아. 몽마의 힘을 가진 네가 나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다는 거다.
한데 자꾸 인간처럼 굴면 싫어진단다.”
“…….”
“…어찌하여 사랑이 쓸모없는 감정이라 말하십니까? 파비안 님, 파비안 님께서는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으십니까? 가족을 사랑한다든가,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든가, 하다못해 키우던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든가…!”
“너는 아느냐?”
“…….”
“…….”
“…….”
“…….”
“…….”
“하지만….”
“예외는 없어.”
“…….”
한참 시간이 지나고.
최대한 정숙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미카엘은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칼을 불편한 듯 매만졌다.
르네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모른 척하려던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지나치던 르네에게 물었다.
자신의 둥근 배를 쓰다듬으며.
“…….”
르네의 저 얼굴은, 엄청나고도 확고한 사랑을 받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건방지고도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을.
미카엘은 한 번 더 물었다.
“…너희들도 그리 생각하니?”
“예?”
“…예?”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죽을 만큼 창피했고, 죽을 만큼 부러웠다.
* * *
“웃기시네!”
#81.
아니, 말보다는 호령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개싸움으로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례하다 생각되어질 정도의 사적인 질문은 물론, 르네의 신체에 대한 질문 및 태중의 아이까지 의심하는 내용이
나왔다.
하지만 르네는 아델라이드와 알빈도 인정한 외골수 기질이 있는 이로, 결국 아르카이츠도 르네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누이가 도망쳤습니다.”
“…예?”
“폐위된 것도 아니고, 아직 황태자비 맞으니까 말은 조심해 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고성 지르지 말아 주실래요?
배 속의 아이가 듣고 있거든요! 누군 목청 못 높이는 줄 아나!”
기죽은 대신과는 달리 허드슨 경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당장에 피어스 가문의 전체에 죄를 물려야 한다며 큰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피어스 가문은 오늘 청문회의 심문 대상으로서의 참석도 거부했습니다. 이건 명백히 황제와 황태자를
무시하는 행위! 침묵은 곧 긍정일 뿐입니다. 어찌하여 피어스 공께서는 그 자리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소이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문석에 앉은 본인의 아들보다도 못하십니까!”
아르카이츠가 말했다.
“예에?”
“…네?”
“그러하네.”
“아니 어째서요?”
“예?”
“시간만 질질 끄는 건 아무 의미 없지 않나.”
뭐 저리 제멋대로야?
또 시간 질질 끌어 봤자 의미 없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이상하네. 이번 청문회 주관은 파비안이 그에게 일임하여, 사실 이 심문을 주도하는 것은 허드슨 본인이어야
하는데.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파비안은 그 순간 빠르게 고개를 돌려 아르카이츠를 쳐다봤다.
“하!”
“예, 그리하겠습니다.”
미카엘은 차라리 누군가에게 지금 자신이 하려는 짓을 들켰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미카엘의 명령을 이행해
그에게 예쁨받아야 한다는 마음 반이었다.
* * *
“나는 아르카이츠 황태자의 말대로, 제국에서 가장 선망하고 추앙하던 존재가 감추는 진실을 증언하려 하오.
피어스 가문과 황태자가 숨기려 한 ‘사내 오메가’에 대해. 그리고 진짜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고 있는 자에
대해.”
“…나는 알파가 아닌 오메가요. 알파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모두를 속여 왔지만. 나는 오메가가
틀림없소. 페트라는 내 운명의 오메가가 아니요. 내 운명의 알파지.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나의 직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동안 모두를 속여 왔소.”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리 대단한 위압감도 없었으나 그들은 마치 압도된 것처럼 침묵했다.
그러다 누군가 경악을 금치 못한 이상한 소리를 내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시끌벅적하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피어스 공작은 르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귀족들이 그 선례를 찾기 위해
조사를 시작할 테고, 그러는 와중에 황제의 비밀까지 까발려질까 그동안 누구에게도, 심지어 르네 본인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피어스 가문의 함구는 결국 황제를 위한 충심이었고, 르네는 본인의 체질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이 또한
완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
#82.
“그대들이 알고 있는 고서에 나오는 ‘예언의 오메가’는 모두 조작된 사실이오. 페트라 황후는 죽기 전, 고서를
숨겨 나를 보호하려 했소. 그 고서에는 사내인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으니 그걸 숨겨야만 날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황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거나, 혹은 파비안 황태자가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천륜까지 저버리며 거짓
고서를 공개했거나.
황제의 뒤에서 휠체어를 잡고 서 있던 페트라가 천천히 망토의 후드를 걷어 내려 자신의 얼굴을 공개했다.
“…살아 계셨군요.”
“컥.”
* * *
‘아, 내 아기….’
“여기가 어디지?”
기묘하게 뒤틀린 나무들은 옹이마다 꼭 절규하는 인간의 얼굴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그들 주변에 울창하게 피어난
수풀들은 꼭 자아라도 있는 것처럼 저들끼리 꾸물꾸물 움직여 댔다.
어디선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때마다 이상한 악취는 물론, 나무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꼭 비명
소리처럼 들렸다.
르네는 얼른 그를 붙잡았다.
“네?”
“뭐가 돌아다녀요?”
“…저, 저게 대체 뭔…!”
“마귀라니까 그러네!”
“이리로 들어와!”
속이 텅 빈 나무 아래 기어 들어가 잔뜩 몸을 웅크렸다.
“숨 쉬는 소리조차 내면 안 돼.”
바깥에서는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온갖 비명 소리와, 고기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 숨을 죽였을까.
“내, 내가 죽다니…?”
“마계에는 죽은 이들이 오는 거야. 죽지 않아도 죽음이 확정된 사람이나. 딱 보아하니 자살할 것 같아 보이진
않고. 누구한테 살해당했나? 아니, 병에 걸린 건가? 뭐 기억나는 건 없어?”
“없어요. 아무것도….”
“그럼 이제 막 여기서 눈떴나 보군. 이봐. 나는 너까지 달고 다닐 여유가 없거든? 여긴 무조건 개인전이야.
혼자서 다니는 게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거지.”
“…….”
그야말로 소멸이니 뭐로든 환생하고 싶다면 죽을힘을 다해 마귀한테서 벗어나 저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
“저 앞?”
“아까 우리가 달려온 방향 있지? 거기로 냅다 달리다 보면 계단이 나올 거야. 일단 계단에만 닿으면 마귀들도
잡지 못해. 그 이후부터는 천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
“그러니까 죽은 인간들이, 죽기 싫으면, 죽도록 달리는 거지. 알겠어? 그리고 기억은 차차 돌아올 거야. 원래
다들 그래. 나도 그랬거든. 여긴 해가 지고 달이 뜨질 않으니 시간이 얼마만큼 흘러가는지 몰라. 그냥… 도망
다니다 보면 어느새 다 떠오를 거야.”
“이제 그만 찢어지자.”
일단 도망쳐야 했다.
자신이 지금 죽었든 살았든 간에 적어도 마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뛰어야 했다.
르네는 계속해서 달리다, 수풀이나 옹이 사이, 혹은 동굴 깊숙이 들어가 몸을 피신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는데도 어두운 하늘에 태양은 뜨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달이 뜨지도 않았다.
보랏빛과 붉은빛의 구름들은 처음 본 형태 그대로 하늘에 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르카이츠라는 이름을 떠올린 이후부터 드디어 두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르네 투.
르네 투가 대체 뭘까?
정말 그 말대로 한번 기억이 떠오르자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천천히 하지만 방대한 기억들이 스며들듯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르카이츠에 대해 떠올렸다.
그 아이가 태중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떠오른 날 르네는 자신의 홀쭉한 배를 부여잡고 소리 죽여 울음을 삼켰다.
‘아르카이츠, 난 어떻게 된 거야? 배 속의 아이는 무사한 걸까?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야.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르네 피어스.
‘내가 독을 마셨구나…. 바보같이, 어떠한 의심도 않고 독을 마시고 말았어. 파비안의 짓일까? 미카엘의 짓일까?
난 정말 죽은 거로구나. 그럼 르네 투는? 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아르카이츠는? 많이 슬퍼할까?’
바로 그 계단이다!
하지만 그 순간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붉은빛의 마귀가 불쑥 튀어나와 르네를 덮치더니 그대로 날카로운 입을 쩌억
벌렸다.
#83.
그런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뛰기 시작했다.
엄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부림치던 마귀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날개를 다시 맞추곤 그대로 날아올랐다.
“이 망할 놈이!”
그는 화가 난 듯이 무어라 욕지거리를 읊다가 르네를 비웃듯 깔깔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펄럭였다.
“따라오지 마, 마귀 새끼야!”
“꺄아아악! 오지 말라고오오오!”
마귀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놀며 봐주었다는 양 재빨리 하강하여 르네의
머리칼을 그대로 틀어쥐었다.
“아악!”
“끄아아아아악!”
“…르네.”
“아르카이츠!”
속상한 마음이었다.
“르네. 죽은 게 아니야.”
“…엉?”
“…….”
“돌아갈 수… 있어?”
“미카엘?”
* * *
쓰러지는 그를 아르카이츠가 얼른 붙잡아 바닥에 부딪치진 않았지만 르네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듯 쌕 쌔액,
앓는 소리를 냈다.
“…태중의 아이는?”
황태자비의 상태를 살피러 온 황제와 황후 역시 제 아들의 실의에 빠진 모습에 감히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전하.”
아르카이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애써 억누르듯 크게 목울대를 움직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이 개 같은 새끼가…!”
아르카이츠는 분개한 얼굴로 파비안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런 모습조차 재밌다는 듯 빈정거렸다.
“…….”
#84.
르네의 입술이 델피니움처럼 푸르렀다. 온몸은 차가운 눈밭에 방치된 것처럼 차가웠고, 태중의 아이는
아르카이츠의 목소리에 아주 간간이, 아주 힘겹게 반응할 뿐이었다.
르네가 없는 삶이 가능할까?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예, 전하.”
아르카이츠는 그 마지막 숨을 가까이서 듣겠다는 듯 르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시만요! 잠시만!”
애달픈 눈빛으로 르네를 바라보던 아르카이츠는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나직하게 경고했다.
“정말 살릴 수 있나?”
“네. 살릴 수 있습니다.”
* * *
곧 아르카이츠는 온통 어두운 하늘에 보랏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기묘한 구름이 빼곡한 하늘 아래서 눈을 떴다.
“이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 마계입니다. 완전히 죽지 못한 인간, 혹은 미련이 많은 영혼들이 이곳을
떠돕니다. 르네 님은 아직 숨이 멎지 않았으니 이곳에 있을 겁니다. 찾아서 데려오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이 오로지 하나의 길만 있는 곳.
“이상한 게 들어왔네. 어째서 몽마가 여기에 있지? 마계의 주인이 화낼 거다. 하지만 몽마의 영혼, 맛있지.
몽마는 맛있다. 그리고 난 배고파. 다른 마귀들이 뺏어 먹기 전에 나도 먹어야지.”
“아아악!”
통통통, 마귀의 머리가 굴러 미카엘의 발치에 다다랐다. 미카엘은 그 옆으로 슬그머니 비키며 말했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영혼을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하는 것이 특징이라, 대부분은 그대로 입에 처넣기 바빴다.
르네와 길이 엇갈렸나?
“…르네.”
“아르카이츠!”
“르네. 죽은 게 아니야.”
“…엉?”
“…….”
#85.
“돌아갈 수… 있어?”
“미카엘?”
그런데 갑자기 하늘의 구름들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무언가의 형상이 만들어지며 거대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게 분명했지만, 미카엘은 태연한 얼굴로 르네와 아르카이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으로 마계에 들어온 것이니,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나실 겁니다. 르네 님은 무사하실 것이고, 태중의 아이도
문제없을 거예요. 어차피 신경도 안 쓰실 것 같지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당신은? 저게 뭔지 알고?”
“곧 마계의 주인이 나타날 겁니다. 전 여기에 남을 거예요. 어차피 마계에서 왔으니, 여기에 남는 게 맞겠죠.
이제 돌아가세요. 마계의 주인을 만나게 되면 성가시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파비….”
그리고 머지않아….
“살아나셨습니다!”
…르네는 다시 눈을 떴다.
“황태자비 전하의 맥박이 정상이옵니다! 태중의 아기씨도 무사하십니다. 황태자비 전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불편하신 곳은요? 춥거나, 덥거나 하진 않으시고요?”
그때 르네가 눈을 뜨자마자 이 소식을 바깥에 전하러 나간 시종과 함께 황제와 황후 그리고 대신들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죽음에 가까워졌던 황태자비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에 대단히 기뻐하면서도, 의아해하는 얼굴들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바람이 일자 미카엘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먼지가
되어 그대로 파스스 사라지고 말았다.
파비안이었다.
“…….”
파비안 역시, 미카엘이 자신을 배신하고 르네와 아르카이츠를 도왔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 보였다.
며칠 뒤.
* * *
황후는 아르콘 부족 출신인 만큼 그곳에서는 흑마법이 금지된 주술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하여 그들의 죄는 일정
부분 차감되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새로운 황제와 황후가 헬리오스 제국을 이끌어야만 했다.
아르카이츠는 만삭에 가까운 르네가 혹시라도 무리할까 즉위식 따위 그냥 생략하자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르네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간단한 즉위식 이후, 즉위식으로 책정되어 있던 상당량의 예산을 백성들에게 구휼미 등의 구호품으로 풀었다.
“응?”
“르네! 르네에!”
“진짜 못 살아….”
<끝…이 아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