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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elo 2 Part
Pomelo 2 Part
〈2 권〉
#chapter 12
#chapter 13
#chapter 14
#chapter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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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chapter 19
#chapter 20
#chapter 21
#chapter 22
#chapter 12
* * *
세드릭의 얼굴은 어딘가 평온했다. 불쌍하냐고? 글쎄. 자신이 밀고하여 잡은 스캔들이지만 유리의 마음은
편안하기는커녕 불안했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해결했다면, 블라디미르라면 우쭐대며 제 업적을
자랑했을 것이고, 디미트리라면 무표정하게 제 할 일을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그 둘을
신랄하게 비웃었겠지. 그렇지만 유리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 알 수 없는
마음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모르겠어.”
그러나 자신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모르겠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딘가, 조금씩
감정이 뒤섞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애정으로 그런, 일을 감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늘 실패의 결과를 염두에 두는
자신에게는 전혀 수지맞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것은.
“그들이 왜 그랬는지….”
“궁금하죠?”
이거다. 유리의 복잡한 얼굴은 본 세드릭은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것이지만 그게 말로 쉽게 설명될 리가 없다. 세드릭의
가슴이 긴장으로 뛰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유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알고… 있어?”
“음…. 아버지가, 외교관이라서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게 많아요. 다니엘라가 원한다면….”
“알려줄까요?”
꿀꺽. 달콤한 유혹이 유리의 긴장한 목젖 너머로 들어가고 말았다. 자신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연유를
어떻게 알았을까, 란 의문과 함께, 역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나 라는 경계심이 슬쩍 고개를 치들었다.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안, 세드릭은 다시 접시 위에 놓인 커틀러리를 쥐었다.
유리의 청명한 벽안에 의심의 눈빛이 서렸다. 한번 당한 전적이 있기도 하고, 허풍을 꿰뚫어 볼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 세드릭의 속 모를 까만 눈에 닿았다. 세드릭은 따갑게 쏘아오는 눈빛마저 즐거이
받아들였다. 불신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즐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의심을
한다는 건, 믿고 싶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이미, 걸린 것이다. 다니엘라는, 유리는.
“….”
걸렸다. 유리의 내리깐 벽안이 흔들리는 램프의 불빛을 볼 때 세드릭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불안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지만, 그는 애써 여유를 유지했다. 그래야, 그녀와 만날 구실을 늘릴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지?”
“뭘 원하지?”
“얘기가 빠르네요.”
“이렇게 계속 저랑 만나는 것으로 하죠. 이런 중요한 내용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알려줄 수
없으니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다정한 말은 마치 유리가 이해할 때까지 알려줄 의지가 돋보였다. 그에 유리는 조금
의아해질 따름이었다. 어째서….
“너.”
“네.”
“…아니다.”
“왜요?”
“그럼요.”
“그, 친구잖아요.”
“…친구?”
세드릭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떨다가, 다시 환한 얼굴을 드러내며 기쁘게 웃었다. 내밀어진 커다란 손에
유리는 순순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세상 어느 친구들이 이렇게 격식을 차리겠냐 싶지만, 유리에게는
친구라는 것들이 없었으니 의심을 하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동료, 혹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타인. 그게 사람을 나누는 잣대의 전부였다. 그가
사는 세상의 전부기도 했고. 그래서 유리는 알지 못했다. 세드릭이 말하는 ‘친구’의 의미를. 세드릭도
결국은, 몸이 목적이었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
“…? 그래.”
“그러든가.”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얄쌍한 유리의 손을 살짝 쥐었다. 가볍게 쥐었지만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열기는
여전했다. 스치듯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마치 화인처럼 홧홧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 * *
같은 날 저녁 시간 달렘 지구의 마이센가
영어로 말하는 폴리나에게 그녀는 짧은 독일어로 대답하며 강한 반항심을 보였다. 그게 얼마나 얄미운지
아마 아는 게 분명해서 그렇게 대답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반항심을 가진 엘리자베스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눈보라 치는 바깥을 굳건하게 막아주고 있는 대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폴리나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은 어머니 앤이 키친에서 나왔다.
“아가씨….”
하물며 세드릭이 어쩌다 조금 늦게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저렇게 시위를 하듯이 계단에 앉아 있는 거
아닌가. 그 모습은 마치 정원석으로 쓰는 정원 요정과 같은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키친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에,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대문이 끼익 대며 열렸다.
열린 틈으로 바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언뜻 보이면서 차가운 바람을 로비에 채워 넣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을 맞은 엘리자베스의 퉁퉁 부은 얼굴이 누가 보기에도 기대 넘치는 얼굴로 환해졌다.
“오빠!”
오빠를 가만두지 못하고 다시금 버릇처럼 응석을 부리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세드릭은 아직 김이 오르는 숨을 푸스스 뱉으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안도를
주었다.
“괜찮아요. 올라갈게요.”
“얼른, 얼른!”
“베스.”
“그래서, 만난 거지?”
“응.”
“흐흥…. 좋은 일 있었구나?”
세드릭의 알쏭달쏭한 대답에 베스는 작은 손을 모아 세드릭의 어깨를 푸닥푸닥 쳤다. 제법 살벌한 얼굴을
한 게 세드릭이 말해 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투지가 보였다. 그 장난 같지 않은 장난에 세드릭은 애써
아픈 척을 해 보이며 온정에 호소했다.
“아야, 아야야. 베스, 이런 행동을 보면 다니엘라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착한 아이가 되어야 다니엘라가
베스, 너를 좋아하지 않을까?”
“차, 내가 가져올게!”
올라온 것이 무색하게, 엘리자베스는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이것을 두고 유리는 마음속으로 괴수가 산다고 표현했다- 세드릭은 피식 웃으며 어두운 방 안의 스위치를
눌렀다. 자신과 다니엘라와 만나는 것을 알게 이후로는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조금
더 늦게 돌아오는 자신을 기다리곤 했다.
주로, 그녀의 근황을 귀 기울여 들으며 나름대로 숙녀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사실상 어린
동생이니 반은 듣고 반은 흘려듣곤 했지만 어쨌든 더 없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세드릭은 들어간 방 안이
밝아지자 문 앞 쪽에 위치한 책상 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벗은 코트를 행거에 걸었다.
그 흔들림에 다시금 저녁의 테이블을 밝혀주던 램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하니 그의 얼굴에는 절로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달콤한 힘이 어깨를
밀어뜨리며 커다란 몸을 침대에 푹 눕혔다. 푹신하게 감겨오는 침구 사이로 흩어진 검은 머리는 한바탕
눈보라를 맞은 탓에 반듯하게 고정되지 않고 가볍게 흩어졌다.
“아아….”
“너무, 너무 귀여웠지.”
“깜짝 놀랐잖아요….”
“웬일이지, 우리 꼬마 숙녀님….”
“도련님, 차 드세요.”
“오빠! 얼른 얘기해줘!”
“당케!”
“뭘요.”
폴리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포기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갔다. 빠른 포기와 인내심은 사용인의 미덕이었다.
세드릭은 트레이를 암체어가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방문을 닫았다.
“그게….”
* * *
밖에 거세게 부는 눈보라 덕분에 안 그래도 무거운 모직 코트가 살짝 젖어서 무게를 더했다. 남은 물기를
툭툭 털면서 감청실 구석에 코트를 걸었다. 그 모습을 당번인 게오르그가 헤드셋을 쓴 채로 보고서를
쓰다가 발견했다. 작게 손 인사를 건네는 유리의 모습에 게오르그는 쓰고 있던 헤드셋의 한쪽을 열고
인사했다.
“왔어? 늦었네.”
“응. 밖에 눈이 좀 내려서.”
“너도.”
조곤조곤히 이르는 세드릭이 무색하게 막내딸 엘리자베스의 괴성이 헤드셋을 타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빠랑 다니엘라 언니랑 바꾸면 안 될까? 사실, 이제까지 오빠랑 지냈으니까 남은 인생은 언니랑 지내고
싶어.]
“….”
유리는 그렇게 적으면서 만약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꼭 밥을
잘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어트, 이런 건 시키지 말아야지.
[치- 인- 구?]
[그건 좀….]
난색을 표하는 세드릭의 반응에 엘리자베스는 항의를 온몸으로, 아니 목소리로 표현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주장했다. 유리, 아니, 다니엘라-여자로 착각한-가 좋다고.
[왜? 난 다니엘라 언니를 좋아하는걸.]
[알아. 하지만 다니엘라도 너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잖아. 그리고,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숙녀는
다니엘라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거짓말!]
…이렇게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썽꾸러기인 아이는 처음 보는지라
은근히 대화 내용에 신경이 쏠렸다.
[정말? 약속해!]
[정말. 자, 약속.]
“….”
이것들이…. 정작 유리, 자신이 간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둘이서 좋다고 웃는 소리에 유리의 머리만
무거워져 갔다. 그리고 그 무게를 더하는 것은 이어지는 엘리자베스의 천진난만한 말이었다.
#chapter 13
* * *
톡, 톡….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스캔들에 대해서 세드릭이 알고, 자신이 모르는 게 뭐지? 아니, 오히려
언더커버-위장 요원-로 있는 자신이 더 많이 알면 알았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세드릭이 저처럼 어릴
때부터 요원으로 길러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 달달 외운 이력들과
지나칠법한 버릇들까지, 유리는 다 외우고 있었다.
“….”
이 바닥을 전전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완벽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다. 승자로 보이는 자도 그
일반율에서 피할 수가 없다. 달의 이면처럼, 각기 다른 손해를 끌어안고 산다.
“3 차 대전인가.”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정보부 소속인 자신도 모르는 이유라면, 분명
중요한 일이 틀림 없고…. 유리의 투명한 금색 속눈썹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뺏기기만 하는 일방적인 길을 갈 리가 없다.
추운 겨울이 한창인 가운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햇빛이 격자무늬 창틀을 가진 긴 창문가에 부서졌다.
그렇지만 유리는 도통 제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정리를 할라치면 이윽고 고개를 드는 작은
의문 때문에.
정말 그들은….
다시 되뇌는 유리의 눈길이 창문가로 향했다. 옅은 햇살에 차갑게 굳어 있던 창가의 고드름이 점점이
녹아가며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 *
댕- 댕-
“내가 그깟 시험 따위에….”
“좋아! 조건은?”
“조건이라….”
뭐 어때. 시험 잘 보면 되지.
흠.
“어…. 뭔데?”
* * *
세드릭은 제 사물함에 놓여진 가방을 급하게 꺼내 들고 있던 노트와 필기구 따위를 급하게 쑤셔 넣었다.
늦으면 안 되는데. 커다란 손이 서툴게 잠금쇠를 덜컥덜컥 헛손질을 하며 매었다. 손때가 살짝 진 갈색
가죽 가방은 물건들을 평소와 같지 않게 급하게 쑤셔 넣은 탓으로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왔지만 세드릭은
신경 쓰지 않고 코트를 걸치고 영국 대사관 부속 학교 건물의 대문을 나섰다. 학교 경비원으로 서 있는
영국군의 로열 가드가 적색 군복을 입고 총을 어깨에 멘 채로 세드릭의 앞을 막아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나가시는 사유라도?”
익숙한 억양의 영어에 로열 가드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세드릭이 내민 사유서를 훑고 돌려주었다. 세드릭은
끄덕이면서 사유서를 코트 윗주머니에 꽂아 넣고 저 반대편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관을 잠시 보았다.
그들은 아직 점심 휴식시간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계단참에 사람 하나 없이 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로열
가드도 세드릭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작게 빈정거렸다.
“…예.”
하지만 그게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리가
길어 보폭을 넓게 저벅저벅 걷는 세드릭의 검은 구두의 굽에 눈이 녹아버려서 질척해진 진흙이 조금
묻었다. 적국의 사람. 섞일 수 없는 빨간색.
그렇지만, 세드릭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그저, 생각하는 방향이 조금 다른 것 아닌가. 그들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로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게 아닐까…. 첫사랑에 빠진 사내의 말이란
어떻게 보면 구차하기가 없지만 세드릭은 끝끝내 마음속으로 우겼다.
그런 생각으로 그녀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느끼는 것은, ‘빨갱이’라는 느낌보다는, 편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학교가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유리가 말한 장소를 긴가민가한 눈치로 세드릭이 테이블 근처로 다가가자, 전에 일러주었던 것처럼 까만
리본이 테이블 다리에 묶여 있었다. 맞구나. 확신을 가진 세드릭은 햄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코트를 옆의 너른 의자 위에 걸쳐두었다.
“…뭐 해?”
“잘 지냈어요?”
“어제 봤잖아.”
“너가 먹지 말고 오라며.”
유리는 점점 테이블 위를 메워가는 것들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정보를 알려 준다고 해서
왔는데. 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면 영…. 정보가 아니라 소풍을 나온 풍경이었다. 입가심으로 제격인 것
같은 비스킷과 초콜릿까지 꺼낸 세드릭은 기쁘게 웃었다.
* * *
“먹어요. 맛있어요.”
“…그래.”
이 치즈 맛없어….
“….”
“….”
“원래 먹을 때 말 잘 안 해요?”
“딱히.”
워머를 두른 보온병에 찻잎을 넣다가 살짝 엎지른 세드릭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세드릭은 민망한지
커다란 손바닥에 엎지른 찻잎을 얼른 한줌 한줌 주웠다. 유리는 그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 샌드위치를
내려두고 열린 찻잎 통에서 능숙하게 찻잎을 스트레이트너에 가두고 담갔다. 뜨거운 김을 타고 오르는
향기가 제법 괜찮았다. 치즈 선택은 영 꽝이지만 영국 출신답게 차는 잘 고르는 것 같았다.
“같이 먹지 않아.”
“…그렇군요.”
“저도요.”
유리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볼이 미어지게 먹는 모습에 세드릭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전부 다 말해주진 않았지만 하나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흐뭇하게 유리를 바라보는 동안 유리는 뜨거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눈이 녹은 질척한
흙바닥에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눈을 할 때마다 가슴팍이 쑤셔서 내키지가 않았던 탓이었다.
“정보는.”
“아…. 그거요. 대사 부인과 공사가 자주 만나던 장소를 알았어요. 혹시 알아요? 여기, 으아.”
세드릭은 햄퍼 바구니와 같이 가져왔던 가죽 가방의 잠금쇠를 열었다. 그러자 급하게 쑤셔 넣었던 노트와
필기구 따위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가 미처 잡기도 전에 잉크병과 연필들, 발간 줄이 쳐진 노트들이
흙바닥을 굴렀다.
“잠시만요, 이것 좀 줍고….”
“됐어.”
“씻으면 돼.”
#chapter 14
* * *
“…어련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유리는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식사 시간마다 와장창 소리가 나고, 프림로즈
부인이 잔소리를 하는 걸 늘상 들었던지라 보이지 않아도 그 장면이 절로 그려졌다. 세드릭은 무덤덤한
유리의 반응에 괜스레 잡고 있는 손에 온 신경이 몰렸다.
참, 작다.
“노이에 미술관 알아요? 베를린 필하모닉 근처에 있는, 투명한 유리 벽으로 된 미술관이요.”
“알아.”
모를 수가 없었다. 세드릭의 입에서 나온 장소는 얼마 전 세드릭의 뒤를 쫓으면서 거쳐 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유리가 베를린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으니까. 유리의 짧은 대답에 세드릭은 닦은 손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시?”
“같이 갈래요?”
“왜?”
“좋아.”
그리고 계산과 이익에 움직이는 유리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철저히 극점에 서 있는 둘의 눈이 마주치며
각기 다른 생각으로 뇌가 부풀었다. 한쪽은 마약 같은 낙관으로, 다른 하나는 의문에 감싸인 비관으로.
* * *
“그럼, 다음 주에 보는 거예요. 늦어도 되니까 오기만 해요. 아니면, 배웅 나갈까요?”
은근히 주소를 물어보려는 세드릭의 눈빛이 집요했다. 저번 연말 음악회 일을 넌지시 말하는 세드릭의
짓궂은 얼굴에 유리가 시선을 돌렸다. 그게 은근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시간 맞춰갈게.”
“믿을게요.”
“간다. 눈에 띄지 말고 얼른 돌아가.”
“그러든가.”
“근데, 언제 갈 거예요?”
세드릭은 유리가 자신이 가는 길을 살핀다는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생각이 짧았던 자신의 멍청함을
속으로 탓했다. 난 정말 세심하지 못하구나. 그는 바구니와 가방을 들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면서
사람들이 나가는 티에르가르텐의 동쪽 출입구로 향했다.
물론 유리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이제는 저 잘못된 이름을 고쳐주기도 유리의
골이 아팠다. 세드릭이 멀어지는 것을 잠자코 보는 유리의 등 뒤로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작게 욕을 하며 몸을 떨 만한 세기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딱히 시리지 않았다. 방금
샌드위치에 따뜻한 차까지 마셔서 그런가.
* * *
“세드릭!”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브란덴부르크 문을 넘어가려던 세드릭의 발이 멈췄다. 부르는 소리 쪽으로
몸을 돌리니 네이비색의 겨울 코트 안에 하얀 테니스복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에드워드가 테니스 라켓을
어깨에 걸치고 손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에드.”
“그냥. 먹다 보면 질릴 때가 있잖아.”
대충 맞장구를 쳐주자 에드워드는 알아서 세드릭의 외출을 이해했다.
“역시, 어릴 때 남유럽산 녀석들은 입맛이 까다롭다니까. 난 어렸을 때부터 영국에서 살아서 그런가
입맛이 아주 틀려먹었어. 미아가 그러는데 나보고 데이트할 때 절대 먼저 레스토랑 고르지 말라고
하더라.”
“그럴 리가.”
얄미운 계집애 같으니라고. 에드워드는 장난으로 씨근덕대며 웃었다. 세드릭은 에드워드의 농담에 킥킥
웃으면서 나란히 브란덴부르크 문을 넘어서 그들의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가
생각났는지 세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참, 저번에 스캔들 관련해서 물어봤었지? 뭐 때문에 물어본 거야? 알려줘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너가
그런 스캔들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
평이한 에드워드의 말에 세드릭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영국 대사관에 파견된 근위대
출신의 대령이었는데, 보안과 정보는 무력과 가장 가까이 있는 탓에, 종종 남들은 모르는 대사관
소문들을 알곤 했다. 예를 들면 세드릭이 물어본 스캔들 당사자들의 밀회 장소라든지.
“이래서 가진 놈들이란!”
“그건….”
“…하하….”
에드워드는 보란 듯이 경비병에게 인사를 덧붙이고 세드릭은 어색한 웃음으로 경비병과 눈인사를 나눴다.
에드워드는 학교 로비로 들어가면서 옆에 선 세드릭의 팔을 팔꿈치로 쿡 쳤다.
“고마워, 에드워드.”
“물론.”
“그래.”
“쟝, 너도.”
“….”
“글쎄….”
어차피 만나서 하는 소리라고는 쓸데없는 가십거리 아니던가. 세드릭은 흥미 없는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런 세드릭의 곁으로 쟝이 다시 다가와서 다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안 돼.”
쟝은 그렇게 말하고 히죽 웃었다. 동시에 복도를 지나치던 몇몇 학생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복도에 점점이
울렸다.
“뭐야, 왜 저래?”
“세드릭이다.”
“어디? 아까 안 보이더니….”
“다음 주 목요일….”
“안 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간다고 했잖아.”
싱거운 말에 세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털면서 쟝을 스치고 라틴어 수업실로 들어갔다. 쟝은 억지로
조르고 졸라 못내 나온 대답이 기쁘기가 그지없는지 킬킬대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세드릭을 따라
들어갔다.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둘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알아서 뭐 하게?”
“…모르겠어.”
“쟝, 문은 좀 닫아주련?”
“미술관….”
* * *
“못 보던 식기인데.”
“어제 백화점에 갔더니 드레스덴에서 만든 식기가 있지 뭐예요. 부인들과 구경하다가 그만…. 하지만
예쁘지 않나요?”
“그냥 하얀 그릇인데.”
“큼.”
“그렇지, 세드릭.”
“…음, 네. 아버지.”
“난 아직 초등교육이라고요.”
“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세드릭도 금방금방 크지 않았소. 엘리자베스도 눈 깜짝할 사이에
철이 들겠지.”
“그럼요.”
세드릭도 동의하며 앤의 한숨을 막아보려 애를 썼다. 그에 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와인을 마셨다.
“뭐어-? 안 돼요!”
“고마워요.”
“고맙네.”
“저….”
그 표정에 세드릭은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문지르며 머뭇거렸다. 다음 주 수요일 저녁 식사가 생각난
탓이었다. 어차피 다니엘라의 약속은 점심 전이지만, 그래도, 시간의 자유를 두고 만나고 싶었다.
알버트의 대답에 세드릭은 멋쩍게 끄덕였다. 그가 가진 수요일의 시간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요….”
“와아! 세상에!”
* * *
유리가 감청을 마치고 작성한 보고서를 율리아에게 내자 카키색 제복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율리아가 방긋
웃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유리.”
“율리아 너도.”
“명령인가?”
“응.”
귀찮게. 유리는 바로 방향을 틀어서 대령의 사무실이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또 접대가
잡혀 있는 건가. 대령의 개인 사무실 앞에 도착해서 벨을 울리자 기다렸던 것처럼 문이 바로 열렸다.
환한 정보부 사무실에서 대령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자 취향인지는 몰라도 확연하게 어둑한 분위기로
변해서 눈이 침침했다. 유리가 문을 닫고 정면으로 고개를 향했다. 오랜지 색 벽지를 배경으로 책상
너머에 대령이 등 돌려서 앉아 있었다.
“유리입니다.”
“그래.”
“앞선 계획이라도?”
“으음…. 비슷하지.”
“예.”
역시나 접대 이야기였다.
세드릭을 갑자기 언급하는 말에 유리의 목울대의 핏줄이 살짝 도드라졌다. 그렇지만 표정은 아무런 자극
없이 무표정했다.
“…예.”
“사이는 어떻지?”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라….”
대령은 책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 방향으로 의자를 돌렸다. 책 너머로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은 유리가
알 수 없는 생각을 꼬아내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참사관의 자식에게 관심을 두는 거지
…? 괜스레 유리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꼭 저런 표정 뒤에,
“영국 대사관 안에 빨간 끈이 하나 생겼는데 말이야.”
별스러운 짓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신가요.”
“그러니까 말이다.”
* * *
“…유리?”
휴일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벙커 안에는, 블라디미르의 눈을 달달하게 적셔주는 유리가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만남에 블라디미르는 짜증으로 구겨졌던 얼굴을 확 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요즘
공주님이 학교를 다니느라 얼굴 하나 보기가 귀하건만, 이게 웬 횡재람.
“공주님, 어디가?”
“…외출.”
유리는 테이블에 있던 총탄과 총기 박스를 잘 정리해서 닫았다. 유리의 냉담한 태도에 블라디미르는
익숙한 듯 꼬치꼬치 캐물었다.
“신경 좀 꺼.”
“호신용.”
“….”
자신이 등지고 있는 블라디미르가 넌지시 떠보는 말에 유리는 정리했던 총기 박스를 자신의 라커에 던져
넣고 라커 문을 소리 나게 탕, 닫았다.
“글쎄.”
유리는 모호함으로 그를 지나치려 했는데 그가 웃는 낯으로 지나가려던 유리의 팔을 잡았다. 지겨운 자식.
유리는 속으로 욕을 하며 블라디미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블라디미르의 빙글빙글 웃는 낯에는
무시할 수 없는 정욕이 묻어 있었다. 벙커의 천장에 달린 전등의 삼각 갓에서 퍼지는 검은 그림자 빛은 그
정욕을 유난히 부각시켰다.
“새로운 건 좋은데, 너무 바람 쐬고 다니진 마. 나도 남자라서 질투 나거든.”
“작작해.”
“진심인데.”
“솔직하면 좀 좋아?”
그는 레고를 맞추는 어린애처럼 익숙하게 기관총 부품들을 끼워 넣으며 유리와의 미래를 상상했다.
블라디미르는 유리를 언제든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유리의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가기만 하면 평생을 자신의 저택에 처박혀 살 건데, 밖에서의 잠깐을 못 기다려줄 것도 없었으니까.
블라디미르는 대충 기관 소총 데그타료프를 어깨에 대고 과녁판으로 탕탕탕, 연사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제법 너그러운 남자라고 생각한다.
#chapter 15
* * *
“…오겠지?”
그는 오겠다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던 다니엘라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 표정으로
내심 불안감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불안감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다니엘라!”
“그래.”
“딱히. 휴일이고.”
유리의 작은 원망의 원인은, 유리가 아침부터 감청하는 와중에 세드릭이 예상 시각보다 일찍 자신의 집을
떠나자 유리 또한 뒤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쫓아가는 이유에는 일종의 혹시나, 약속 장소 말고
다른 곳을 가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과 어차피 또 이상하게 들떠서 일찍 약속 장소에 있을 거라는
허탈감이 비례했다.
그리고 세드릭은 그 허탈감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일찍이 나와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 투명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린애만도 못한 인내심이라고 해야 할지.
심지어 유리에게도 오늘은 휴일인 데다가 세드릭의 약속 때문에 아무런 계획을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사관 정보부 로커에서 호신용 무기를 착용하고 오자마자 유리가 갈 곳은 세드릭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 외에는 없었다.
평소 같으면 별 의식도 없었을 것을, 옆에 있는 사람이 유난히 신경을 몰리게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움직임에 신중을 더했다. 그렇게 들어간 전시실에는 저번 달에 본 미술관의 광경과 무척 달랐다. 확실히
전시가 바뀌었는지 작은 리플렛부터 시작해서 걸려 있는 회화 작품들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유리는
리플렛을 하나 들어서 대충 살폈다. 세드릭은 그 옆에서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며 옆에서 말을 더했다.
“왜.”
“그, 사람이 많으니까…. 치일 거 같아서요. 괜찮다면….”
“아, 그.”
“어디로 가면 되지?”
“…이, 쪽이요.”
유리를 이끌고 미술관 지하로 들어온 세드릭은 관리자에게 출입 허가 서류를 보여주며 유리의 손을
당기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팔을 뻗은 채로 앞만 보고 설명했다. 유리와 세드릭이 관리자가 맞춰주는
금고형 창고의 비밀번호를 기다리는 동안 유리는 손을 잡지 않은 손에 들려 있는 리플렛을 보고 있었다.
세드릭은 살짝 곁눈질을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쑥스럽게 덧붙였다.
“상관없어.”
아니, 사실 그게 더 나았다. 유리에게는 복작복작한 인파에 짜부라지느니, 차라리 사람 없는 칙칙한
창고에서 그 스캔들의 설명을 듣는 게 백배는 나았다. 일이 벌어질 거라면,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낫기도
하고. 무심한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은 살짝 웃었다.
“목표물 잠입.”
[접수. 특이 사항?]
“애인과 동행 중.”
“읍, 읍….”
창고지기의 책상이 분명할 자리에는 중년의 남자가 입에는 덕 테이프를 붙인 채, 손발이 마른 로프로
억세게 묶여 있는 상태였다. 사내는 숨이 막혀서 새빨개진 얼굴로 무언의 항의를 하는 ‘진짜’
창고지기에게 가슴 홀스터에 끼워진 권총을 빼서 바로 조준했다. 탕!
“협조 좀 부탁해?”
* * *
[18 도, 55%]
“꽤… 크군.”
“그런가….”
“딱히. 그런 거 잘 몰라.”
그저 앉아서 무언가를 가만히 쳐다볼 대상은 시간을 흘리다 못해 죽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금세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유리의 말에 세드릭은 진열된 랙 한 곳에 유리를 데려갔다.
“제목은 ‘여왕 마브의 동굴’이라고 해요. 여왕 마브는 셰익스피어 극에 나오는 요정을 의미하는데….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소망을 꿈으로 보여준다고 하죠.”
“비밀스러운 꿈….”
유리는 세드릭의 낭만적인 설명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마, 그들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던 소망.
“어때요?”
“…글쎄.”
“그래.”
유리 취향에 맞는 그림은 아니라 그들은 방금 보았던 랙을 집어넣고 금방 다음 작품이 있는 랙으로
넘어갔다. 그다음 작품 랙으로 넘어갔을 때는, 좀 더 강렬한 황금빛 너울이 캔버스에 춤추고 있었다.
중앙에 그려진 인영을 유리가 바라보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여전하게 쥔 채로 어물어물, 설명했다.
덜컹, 둘밖에 없을 창고치고는 요란한 소리가 중앙의 빈 공간을 타고 울렸다. 그 소리에 유리가 기민하게
소리의 근원을 쫓아서 고개를 돌렸다. 돌린 시야에는 뭐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 있기만 했다. 유리는
세드릭과 잡았던 손을 떼고 스웨터와 그 안의 셔츠, 그리고 그 안의 맨살에 채워둔 소총의 총신에 손을
올려둔 상태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세드릭에게 말했다.
유리는 자신의 어깨를 잡았던 세드릭을 랙 안쪽으로 밀고서 랙의 끝쪽에 몸을 숨겼다. 둘밖에 없는 곳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리,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공간. 유리의 예민한 촉이 팽팽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여기 있다.
“왜, 무슨….”
“쉿.”
세드릭은 자신의 가슴팍을 힘차게 밀면서 랙 안쪽으로 넣어버리고 랙 끝쪽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나선형
계단을 살피는 유리의 모습에 입을 작게 벌린 채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유리에게 바싹 다가갔다.
“잠시만요,”
“누가 있어.”
유리는 시선을 여전히 고정한 채로, 허리 뒤에 숨겨둔 발터 PPK 를 꺼냈다. 그늘진 랙 사이에서도
선연하게 보이는 총신의 모습에 세드릭의 눈이 멈췄다. 그동안 유리의 눈은 기민하게 사방을 살폈다.
어디지?
“다니엘라!”
세드릭의 놀란 외침에 유리는 랙 안쪽으로 가서 세드릭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젠장, 누군가 붙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지금이라니. 같은 연합국일지, 아니면…. 유리는 자신보다 키가 좀 더 큰 세드릭을
살짝 치켜보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지금, 이게 무슨….
내가 어쩌다 이런 놈이랑 만나게 됐는지…. 유리는 속으로 한탄하며 발터 PPK 의 총신을 꽉 쥐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저를… 요?”
미술관의 지하 창고의 그림을 다 박살 낼 기세로 기관총을 쏴대는 상대를 향해 유리는 욕을 뱉으며 반대로
위협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소총과 기관총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이라서 큰 효과는 없었다.
“내가 말했지.”
“의심하라고.”
탕!
“그게, 무슨….”
세드릭은 가깝게 마주친 파란 눈에 작은 이채를 잡아내는 순간 작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름? 이름이
…. 유리는 자신의 발목에 채워두었던 발리스틱 나이프를 얼른 꺼내서 자신을 잡고 있는 세드릭의 손을
떼서 그 손 안에 억지로 떠넘겼다.
“하지만, 저기.”
“두 번 말 안 해!”
유리는 여전히 쓰러지는 랙의 도미노 행렬 앞으로 세드릭의 등을 떠밀고 총탄이 멎은 복도로 나와서
사격을 가했다. 탕탕, 그 모습에 세드릭은 우선 유리가 말한 대로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들리는 정신
없이 뛰어가는 소리에 유리는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멀쩡한 반대편 랙 쪽으로 숨은 미친놈의 정체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짐작은 들지 않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마주하는 순간, 굉장히 기분이
나쁠 거라는 것.
탕탕, 탕!
“소속을 밝혀.”
“그런 거 없는데.”
철컥. 랙 사이로 들리는 육중한 총기 소리에 유리는 몸을 낮추고 멈췄다. 독일어 억양이 외국인치고는
제법 깔끔했다. 용병인가? 궁금함을 풀어주려는 듯, 랙 사이에서 투박한 발걸음이 스륵, 나왔다.
“그러는 넌 소속이 있나 보지? 응?”
“누가 시켰지?”
“연합국인가?”
알려줄 생각이 없음이 역력하게 보이는 용병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유리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매섭기 짝이 없는 유리의 태도에 사내는 허리에 손을 대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라니까. 의심이 많은 애인일세. 그러면 남자친구가 피곤해할 텐데.”
“….”
탕.
이 미친 새끼가…. 유난히 거슬리는 호칭에 유리의 눈썹 사이가 짜부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내는
마치 앨리스를 놓친 5 월 토끼처럼 발을 바쁘게 굴렀다.
“쏴버리기 전에 말해.”
유리의 냉철한 말에 남자는 하하, 하고 웃었다. 총알이 언제 날라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인데도
태연자약한 그 모습은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경험한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뭐? 기다려,”
유리가 사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사내는 재빨리 쥐고 있던 기관총을 유리의 등 뒤에 겨눴다. 그러자 깡,
하고 쇳소리가 파열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기계적인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유리의 시선이 천장에
머물렀다가 신속하게 돌아오는데 또다시 탕, 하는 소리가 그 짧은 순간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유리의
팔에 뜨뜻한 아픔이 퍼졌다.
“윽!”
“오, 역시. 살로메야. 유명인사를 만나서 아주 반가웠어. 다음엔 사인이라도 해주길 바라.”
-난 열 번째야.-
‘데그타료프….’
“…다니엘라?”
재앙이었다.
* * *
그럴 때마다 빛을 머금는 세드릭의 동공은 서서히 수축하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유리는 이 난감한
상황에 내리는 물줄기들로 푹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너….”
“다쳤어요?”
“읏, 손 떼.”
용병의 총에 맞은 팔을 잡히자마자 탄식을 내뱉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게
도대체 무슨…. 여전히 피를 흘리는 팔을 잡고 있는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본 유리는 아픈 팔을 틀어서
세드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
-난 열 번째야.-
이 녀석이, 죽을 때까지?
“네?”
* * *
“이렇게요?”
“아니, 좀 더 조여 봐.”
머뭇거리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그제야 짐짓 유리의 눈치를 보며 검은 눈을 이리저리 불안하게 돌리는
세드릭을 이해했다. 맞다. 이 녀석 아직 나를 여자로 알고 있지.
“너랑은 정말 한두 가지 잘못된 게 아니야….”
한숨을 푹 쉬는 유리를 두고 세드릭은 은은하게 얼굴이 빨개진 채로 헛기침을 했다. 다니엘라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고 말았던 걸까. 그렇지만 눈에 확 보이는 저 젖은 셔츠 너머의 살결이…. 이런, 안 되지,
안 돼. 세드릭은 스멀스멀 퍼지는 상상을 한 겹 접어두고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
“아니, 거기 말고.”
“여기요?”
쿵쿵? 이게 뭐지?
눈을 감은 세드릭의 귓가에 아스라이 울리는 스스로의 고동 소리에 입을 열려는 순간, 유리는 덤덤한
말투로 세드릭에게 대답했다.
“내 가슴.”
“지, 지, 지금 무슨 짓을 하, 하, 하! 하지 말아요!”
…차리지 못하는구나.
“하아….”
“남자라고.”
“내가 남자라고.”
이 멍청아.
#chapter 16
* * *
“…네?”
“남, 남, 남자라고요?”
“….”
“이봐,”
“정말… 남자예요?”
“그러니까 빨리 묶어.”
“….”
세드릭은 몇 번 손을 들었다 말았다 하다가 결국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유리의 팔뚝에 커다란 손을
살짝 올려두었다. 힘줄이 제법 푸르게 난 손등이 제 셔츠 자락을 잡은 것을 본 유리가 픽 웃었다. 삼류
코미디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상황이람. 뭐, 그래도 지금에야 말해서 다행인가? 어이가 없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유리는 세드릭에게 명령했다.
“…아, 네.”
세드릭은 유리의 차가운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투른 손길에 유리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더, 더, 더.”
“하지만…. 정말로요?”
“….”
“….”
“아뇨…. 괜찮아요.”
“…베를린은 이런 일이 일상인가요?”
유리는 셔츠로 만든 간이 깁스에 걸쳐진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감각을 되살렸다. 그러다가 이내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복도를 성큼성큼 헤쳐나가는 발걸음에 세드릭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서서 유리를 따라갔다.
“집에 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래도 같이 가요.”
“뭐?”
* * *
“마음대로 해.”
“여기 있어.”
“같이 가요.”
“그렇지만….”
“죽었군.”
유리는 사무실 구석에 두개골이 사정없이 부서진 -진짜 창고지기일 게 분명한- 사람의 흔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세드릭은 뒤늦게 유리의 뒤에 따라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유리는 시신에 가까이 가서 흔적을 살피다가 연노랑색 콘크리트 벽에 박힌 총탄 자국을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심지어 대령이 친분을 가지라고 하다못해 회유하라고 노리는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러기엔
아직, 세드릭은 쓸만한 패였다. 그 무엇도 모르고 때 묻지 않아서 오염시키기 아주 쉬운…. 유리는
그렇게 생각을 마치며 세드릭이 있을 뒤로 몸을 틀었다.
“너, 어디 원한이라도….”
“욱, 우욱….”
“너, 왜….”
“욱…. 그, 피….”
“우욱….”
“어서 와,”
“잠시만요, 웁….”
유리는 세드릭의 팔을 움켜잡고 얼른 문을 나서서 발걸음 소리가 나는 반대편 복도로 뛰었다. 세드릭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겨우 유리의 발걸음을 따라서 뛰었다. 그런 둘을 보고 반대편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거기! 멈춰!”
멈추라고 멈추면 경찰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게 분명하다며 유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유리는 늘
와서 익숙한 구조인 미술관 끝에 위치한 비상계단 쪽으로 세드릭을 밀었다. 유리는 비상계단의 잠금장치를
처음 보면서도 능숙하게 걸어 잠그고서 세드릭의 팔을 당기며 계단을 올라섰다. 그러자 충격으로 힘이
빠진 세드릭이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어. 베를린 자치군 놈들이 왔다고. 여기서 붙잡히면 우리 둘 다 끝이니까 어서!”
유리의 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은 안 그래도 구역질로 벅찬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
냉정한 유리의 말에 세드릭이 숨을 차분하게 고르고 계단을 올라섰다. 그제야 유리는 대충 안심을 하며
이미 잠겨진 비상계단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둘이 급하게 비상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혼란스럽게 미술관을 뛰쳐 다니는 관람객들로 난리판이 벌어져 있었다.
“….”
“….”
“알았어요?”
“…그럴 리가.”
“….”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유리도 참으로 꼬이고 꼬인 이 상황에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민스럽게
눈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세드릭은 한탄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니엘라….”
“…그건 우선 내 이름 아니야.”
“…그래요.”
유리의 냉철한 대답에 세드릭은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서 나무에다 손을 기댄 채로 섰다. 이제껏 알던
이름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며, 군인 저리 가라 하는 몸놀림에 세드릭은 이곳이 마치 오베론의 왕국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다니엘.”
“정말인가요?”
곧게 맞춰오는 유리의 눈빛에 세드릭은 작게 한숨을 쉬고 유리를 껴안았다. 예기치 못한 그 포옹에 유리는
몸이 굳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이 거리에 몸을 떼려던 유리는 작게 떨려오는 큰 몸집의 세드릭을 보고
들었던 손을 내렸다.
“…놔.”
“…날 살려줬죠.”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죠?”
“….”
“…그래.”
“나 안 믿어요.”
“….”
“이제, 못 믿겠어요.”
실망감이 역력한 목소리에 유리는 해줄 말이 없었다. 이 이상한 일들과 진실들 가운데 말을 한다고 해서
기꺼이 믿는 게 더 이상할 따름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미 스스로가 자초한 길이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늘상 그래왔었고, 그래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근데 참 이상하죠.”
“….”
당신을 만난 것도, 그동안의 짧은 날도, 오늘의 일도.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를 껴안고 서서 중얼거렸다.
“다니엘.”
“….”
세드릭의 입에서 떨어진 ‘이름’에 유리는 멍해졌다. 자신이 말한 이름이었지만, 그걸 다시 입으로,
귀로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주….
“다니엘….”
아주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이름. 그 묘한 기분에 유리의 잔뜩 긴장한 몸에서 힘이 사르륵 풀리는 게
세드릭은 느껴졌다. 세드릭은 유리의 관자놀이에 입가를 대고 속삭였다.
“….”
“…난 남자야.”
“…알아요.”
“아, 아파.”
“…안 돼. 시끄러워지니까.”
안 그래도 이 일로 양쪽이 모두 예민하게 곤두세워져 있는 상황에 자신이 병원에 가면…. 유리는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다 말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팔을 못 쓰기라도 한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유리는 말하려다가 말았다. 걱정인가? 이게? 하지만 이 녀석이 왜 나를 걱정하지.
속였잖아. 물론 멍청하게 착각한 것도 있지만…. 유리는 그 생소한 감정에 숨을 쉬다가 안고 있는
세드릭에게 속삭였다.
“…안 돼.”
그에 유리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자신만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세드릭이
이해되지 않았다.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던 유리가 뒷걸음질 쳤다.
“…그렇지만….”
#chapter 17
* * *
세드릭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유리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섭섭함도 잠시, 다시금
찾아오는 긴장감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젖은 옷차림과 상처를 처치하며 묻은 검붉은 핏자국. 그 모든 증거를 확인하자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너,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가 죽고 싶은 거야?-
“하아….”
처음 겪어보는, 위협이었다. 이제껏 지내던 영국의 이튼에서 누리던 안온하고도 연구적인 분위기와는 정
반대다. 사실 그 평온한 분위기에 점점 질리던 차에 찾은 새로운 장소는 기대만큼 신선함을 선사해주어
방심했다. 전쟁을 피해간 스위스를 빼면 유일한 중립지대라고 해서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땅.
하지만 결국은 한쪽으로 기울이기 위한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 세드릭은 유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위협에 손은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지켜주던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마음은 다른 쪽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주 싫은 건 아닌 거겠지.”
세드릭, 자신이 다니엘라가 남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이렇게 떨리는 것처럼. 남자끼리의 관계는
영국의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지할수록 더욱 비밀스럽게
퍼져가는 게 실상이었다.
그가 다니던 남학교인 이튼에서도 그런 모습을 심심찮게 봤다. 가끔씩 권유도 받았고. 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제쳐두고 사실 세드릭 자신은, 다니엘과는 전혀 다른 진영의
사람이니 저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든 말든 별 상관도 없을 텐데.
아무리 다니엘 자신이 남자라고 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너무 무력했다. 귀족의 기본 소양으로
배운 검술이나 사냥시즌 때만 연습하다 마는 총 쏘는 솜씨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헉, 헉. 숨이 차서. 잠시만, 후우… 그래, 동생과 주말 쇼핑을 마치고 지나가던 길이었어. 아, 미아도
저기 오는군.”
세드릭의 정중한 인사에 미아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드워드가 걱정스럽게 권유했다.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게 된 미아는 둘러대며 막았다. 어쩜 언제나 저렇게 상냥하고, 예의가
바를까. 예전에도, 지금도 한결같은 모습에 나이를 먹고 몸이 자라서도 연모하는 마음이 여전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세드릭 자체가 겸허한 사람이라서 굳이 티를 내지는 않지만 영국에서도 여왕의 친인척에 해당하는
고위 귀족이면서 서열 순위도 있는 편이라 누구든지 탐을 낼 만한 사람이었다. 미아 자신뿐만이 아니라.
몽롱한 눈빛으로 변해가는 제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세드릭의 어깨를 툭 치면서 주의를
끌었다.
“집? 노이에 미술관에서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건.”
“아, 데이트였나?”
허를 찌르는 에드워드의 질문에 세드릭은 평소답지 않게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안전하다고 말이 나오는 중립지대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 리가.
그 생각이 미친 세드릭을 보던 에드워드의 눈이 일순간 싸늘함이 감돌더니 다시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순식간에 변모했다.
세드릭은 당황하는 눈빛으로 나름 부정을 표했으나, 미아는 대충 상황을 눈치챈 모양인지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저번에 제 오빠 에드워드가 집에 돌아와서 세드릭이 짝사랑을 하는 것 같다며 흘리듯이
말하던 헛소리를 눈앞에서 확인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내색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았다.
“미아, 세드릭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게 돌려 말 해봤자 별 소용은 없을 거야.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잘되었어. 어차피 저녁 식사 때 우리 집에 와야 했으니, 돌아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는 거 어때.”
“이미 멋진 차림새를 하고서 그런 말이라니. 초대한 주인을 초라하게 만드는 게 취미였는지는 몰랐어.”
* * *
“독일 사람들의 유머는 도저히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세드릭 씨가 농담의 귀재라든지.”
“들었지 미아?”
그들이 도착하는 길에 에드워드의 추임새에 따라 미아와 세드릭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조용한
모습과 다르게 작은 농담에도 까르르 웃는 미아의 모습에 남매가 넉살이 좋다고 세드릭이 생각할 무렵,
그로벤 가 사람들이 지내는 베를린 외곽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그로벤 부인이 반갑게
자식의 도착을 맞이하다 말고 이른 손님의 도착에 녹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들 오니. 어머, 손님이 오신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겉옷을 정리하며 전해지는 세드릭의 정중한 인사에 그로벤 부인이 화색을 띠고서 세드릭의 훤칠한 모습을
살폈다.
“칭찬이 심하네요!”
세드릭의 칭찬에 그로벤 부인, 제인도 덩달아 부드럽게 웃었다. 같은 영국 사람치고는 세드릭은 유난히
부드러운 면이 돋보였다. 이런 사람이니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신의 딸, 미아가 집에서 그렇게 칭찬을
했던 것이겠지.
“그게 무슨….”
확실히 고등부로 올라간 이후로는 큰 교류가 없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세드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의 방 안을 살폈다. 방은 꽤 넓어 보이는 것이 적어도 두 개 방을 터 둔 크기였다. 그리고 넓은
만큼 제 방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 차고 넘치게 있었다.
“한 대 피울래?”
“아니. 괜찮아.”
“뭐… 좋아.”
“이튼을 나온 거 보면 모르겠어?”
“그럴 수도 있고.”
가리지 않는다고 웃으려던 에드워드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검붉은
자국은 손바닥을 넘어서 외투와 재킷에 가려진 소매를 물들였다. 누가 봐도 핏자국이었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의 초록 눈이 슬쩍, 진동했다.
“세드릭, 너… 어디 다쳤어?”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세드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결국 고백하고 말았다. 약속한 사람을 만났던 미술관에서 겪은 기묘한 습격에
대해서, 차근히 설명하자 에드워드 또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그래.”
“…그런가.”
살짝 패닉하는 세드릭을 두고, 에드워드가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허탈하게 웃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스르르 벌려진 입가 사이로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제법 자욱했다. 에드워드는 난감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얼굴을 긁다가 말을 이었다.
“알아. 하지만.”
“무슨… 결정?”
“네, 약혼 상대.”
“…뭐?”
에드워드는 굽혔던 상체를 피면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늦은 소식을 마주한 세드릭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랐구나. 그럼 상대도 더더욱 모르겠네.”
느릿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로 인해서 에드워드의 얼굴이 언뜻 흐릿하게 가려졌다. 에드워드의 대답은
방 안을 또렷하게 울렸다.
“….”
범생이처럼 순진한 성격인 세드릭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에 에드워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저렇게 빠져버린 건지.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에드워드는 언뜻 세드릭이 그렇게 마음속 한구석에 꼭꼭 숨기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단순히 미모를 제치고
중요한 이유도 하나 있었던 탓이다.
“에드워드… 나는.”
“그래도 식사 시간에 표정 관리는 좀 해줘. 아무리 골칫덩이 동생이지만 나름대로 아끼는 가족이라
말이야.”
“…아, 미안.”
에드워드는 사과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방문을 나서기 전 여유롭게 세드릭의 취향을 물어보았다.
세드릭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작게 대답했다.
“듬뿍.”
“하아….”
“세상에, 그로벤 부인. 어디서 데려온 요리사인지는 몰라도 정말 솜씨가 뛰어나군요. 디저트까지 아주
완벽했어요.”
프림로즈 부인의 칭찬에 그로벤 부인은 기분 좋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로벤 경은 와인을 한 번 마시고
조촐한 식사라고 일축했다. 프림로즈 경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에.”
그로벤 부인과 프림로즈 부인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웠다. 베스의 천진한
대답을 들은 미아가 귀엽다는 눈빛으로 살짝 웃었다. 식사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분위기와 다르게
세드릭은 그저 조용했다.
“….”
“…세드릭?”
프림로즈 부인의 부름에도 골몰히 생각에 빠진 세드릭을 깨운 것은, 옆에 앉아 있던 베스의 소리 없는
옆구리 공격이었다. 그제야 현실에 되돌아온 세드릭을 두고 그로벤 부인이 미소 지었다.
“…네, 어머니.”
“…예.”
세드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다가 맞은편에 앉아서 기대에 찬, 그리고 어딘가 행복해 보이는
미아의 표정을 마주했다. 식사 시간 동안 서로의 약혼 상대로 정해졌다는 말이 나온 이후로 연신 웃음 띤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미아를 본 세드릭은 입 안에서 까끌대는 대답을 겨우겨우 꺼냈다.
“좋습니다. 향기가….”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게, 그의 마음은 바닥을 기었다.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 언뜻 약혼을 거절할까,
생각도 했다.
“에드워드!”
그게 세드릭을 망설이게 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맞는 말이다. 여자도 아니고, 같은 국적의 사람도
아니었으며, 다니는 학교도, 하다못해 연합국 사람도 아니었다. 모든 게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 그쪽에
있는 조건 어느 하나 그에게 이로운 것은 없었다.
“베스?”
“…베스, 그건.”
솔직하게 부딪혀오는 베스의 질문에 세드릭은 난감한 기색을 띄웠다. 그는 넉살이 좋은 편이 아니라
거짓말로라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베스.”
“….”
짤그락. 찻잔과 받침이 미세하게 부딪치던 소음마저도 멎고, 말을 마치지 못해서 불만 어린 어린아이를
가만히 모두가 쳐다보았다. 보기 좋은 두 사람의 약혼식 날짜를 잡으며 화기애애하게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그 원인을 손에 쥐고 있는 프림로즈 부인은 급한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서 억지로
웃었다.
“흐디망!(하지만!)”
약혼식 전까지는 변덕인지 치기일지 모를 사람을 정리해달라는 권유에 프림로즈 부인은 무마를 위한
웃음을 연신 지었다.
“…예.”
한 박자 늦은 세드릭의 대답은 미묘한 부정을 키워냈다. 그 이후로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약혼식 날짜를
선뜻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 미지근해질 무렵, 결국 돌아가는 길이 더 어두워질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프림로즈 가족은 그로벤 저택을 떠났다. 프림로즈 저택을 향하는 차가 어둠을 헤쳐나가는 동안
프림로즈 부인은 갑갑함을 호소했다.
“부인, 진정하시오.”
“좋은 사람이 있다면 얼핏 말이라도 해줘야지! 자식에게 불행한 약혼을 주는 부모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
다시금 시작된 세드릭의 침묵에 프림로즈 부인의 흥분이 슬며시 가라앉으며 이성이 되돌아왔다.
“왜 말을 못 하니?”
#chapter 18
* * *
게오르그는 한창 도청을 듣다 말고 어두운 감청실을 밝혀주는 바깥 불빛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방 안에서 환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이제나저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게오르그는 감청 중이던 헤드폰
한쪽을 벌려서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늦었네.”
“의무실 좀 다녀오느라.”
동료의 지각을 메꿔준 게오르그를 등진 유리가 제자리에 앉았다. 유리가 자리를 잡고 막 도청기를
작동시키며 헤드폰을 쓰려는 참에 유리 앞에 있는 벽으로 게오르그의 손 그림자가 언뜻 흘리듯이 다가왔다.
“….”
‘…맞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워.”
감청 장치만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만 나는 조용한 방 안에서 채널을 돌려주며 감청실을 나가던 게오르그가
희미하게 감사를 표했다. 사방으로 막혀 있는 감청실에 혼자 남은 유리의 신경은 온통 프림로즈 가의
도청에 집중됐다.
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팔을 걱정하던 세드릭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 얼굴로 걱정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가 괜히 아픈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평생에 그의 상처를 가지고 누가 걱정 한 번
해주는 일이 없어서 그 반응이 생소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착각하던 ‘반대 진영의 아가씨’도
아닌 마당에 그렇게까지 챙길 필요도 없는데.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아버지.]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늘 일찍 스러지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유리 자신의 아버지 대령이 제거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으니….
[….]
[세드릭.]
“….”
설마. 유리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낡은 연필을 불안하게 까딱거렸다. 그러고 보니, 프림로즈 가족이
처음 이사하는 날 마주쳤지. 혹시 그런 거 저런 거 다 해서 눈치를 챈 건가. 언뜻 조바심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세드릭의 대답으로 다른 면에서 불안함이 번졌다.
[그래서, 어디 사람이니?]
“…나왔군.”
“…미친.”
[…오, 주여.]
“…미쳤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냐?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것도 다른 진영의 사람이 좋다니? 제정신인지 궁금할
지경이구나!]
탄식하는 프림로즈 경의 반응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중립지대라고 해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그런 마음. 세드릭이 순수하다 못해 유별났던 것이라고 유리는
무거워지는 가슴팍을 붕대가 감긴 팔로 툭, 쳤다. 근데, 왜 이렇게 갑갑한지. 아버지의 탄식과 유리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세드릭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지금 그게 무슨.]
[그 사람은 왜….]
유리는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천장을 향해서 쓸쓸하게 읊조렸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싫었다고 말은
하지만….
[착각이야. 세드릭, 네가. 이튼에서 많은 사람을 접하지 못해서 그런 게야. 지금 당장은 너를 살려준 것
같아도 언제 뒤로 와서 찌를 줄 모르는 시대란 말이다.]
[세드릭!]
“…미친놈.”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이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드릭
그의 말마따나 적군이니 죽어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유리는 다친 팔로 책상을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저렇게 말하면 다치면서까지 세드릭을 살린 유리 저 자신이 뭐가 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아버지.]
유리는 게오르그가 적어둔 내용을 읽으면서 세드릭을 속으로 탓했다.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라서 그런
것인가. 취향이 별난 것인가. 그로벤 경이면 높은 지위의 귀족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 의회 제 1 당의
배경을 뒤로한 영국군 내의 유력자가 아니었던가.
[….]
약쟁이 쟝이라. 유리는 평소 세드릭의 곧은 심지를 알고 있는지라 그 전화를 가볍게 넘겼다. 아니,
넘기려고 했다.
[지금? 엄… 읍!]
“…뭐?”
[…오빠.]
[오늘만.]
“…정신이 나갔지!”
유리가 헤드폰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급하게 감청실을 나섰다. 밖에서 서류 정리를 하던 게오르그가
튀어나오는 유리를 보고서 의아한 표정을 했다.
“후우….”
유리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아무리 마음이 복잡하다고 해도 쟝에게 갈 마음은 없었다. 오밤중에,
시내도 아닌 곳에서 차량 없이 움직이는 건 힘들었다. 그래서 집 주변을 잠시 산책할 겸 나왔을 뿐인데.
“세드릭.”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꼬부라지는 발음에 막, 저택의 대문을 열고 나오던 세드릭의 고개가 올라갔다.
쟝이 어둑한 그림자 아래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밤이 제법 깊어서 침침한 분위기 가운데 쟝의 웃음기
어린 이빨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세드릭은 주변을 살피다가 다가갔다. 마주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아까 전화했는데.”
“…쟝.”
“얼굴 보기가 힘들어. 귀한 몸이라 그런가.”
“…여기는 어쩐 일로.”
“…관심 없어.”
“내 취향이라니.”
“바르샤바?”
“뭐야, 맞구나? 그래, 그 러시아 부속 학교 다니는 바르샤바 자식들도 잘 오는 곳이니 네 유별난 탐구에
꽤 도움이….”
“러시아 학교 다니는 녀석들은 대부분 오지. 그렇다고 아무나 오는 건 아니니까 수준은 걱정 말고.”
“…갈게. 어디라고?”
* * *
“…확실히 그러겠네.”
“오셨습니까. 이분은?”
“…예.”
‘이튼에서도 사교 클럽은 있었지만,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바르샤바 녀석들은 특유의 꼿꼿함이 있어서 말이야. 한 대 같이 피우면서 이야기를 좀 트여줘야 말하기
시작하거든. 그동안 네 취향을 난 잘 엄선하고 있을 테니 잘 해봐.”
“뭐?”
“녀석, 겁먹지 마. 우리 쪽 녀석도 몇몇은 있으니까. 네가 온다고 다들 기대하고 있으니 거칠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일하는 사람들도 다 훈련받은 사람들이라 정보 같은 게 새어나간다든지,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올라간 층은 마치 어디 화려한 저택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와중에 어둑어둑한 램프의 불빛이
간신히 공간의 크기를 짐작게 해주었다. 계단참 옆에 굳게 닫힌 내실 앞에서 쟝은 외투 안쪽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내서 세드릭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이베리아에서 특별히 들여온 거니까. 한 대씩 주면 분위기가 괜찮을 거야. 그
녀석들은 워낙 추운 곳에서만 살아서 싸구려 대마만 들어오는 모양이라. 그럼, 이따가 보자고.”
“….”
“흠.”
“못 보던 얼굴인데.”
“여왕이랑 친인척이라지?”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매캐하다 못해 은근히 고약함이 퍼졌다. 서로의 입에 돌아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냄새에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평소 쟝에게 풍기는 냄새 때문이라도 대충 평범한 사교 클럽이
아닐 것은 알았다. 그는 외투 소매로 입가 근처를 짓누르며 냄새를 막았다.
‘…대마랑 양귀비인가.’
짐작은 했지만 그런 쟝을 따라온 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그의 눈이 어둑한 램프 아래에서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친 것 같은 얼굴들이 희미한 램프의 불빛 아래서 속닥대기를 반복했다.
영어와 독일어가 간간이 섞여 있는 어투 사이에는 신랄함이 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왼손잡이가 좋다던데.”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야기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범생이니 샌님이니 하는 만큼, 무난하게 잘 살아갔을 것이라는 걸. 그는 쟝이 건네준 케이스를
만지작대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르샤바 사람들도 온다는 말에 충동처럼 왔다. 정말로 약혼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아니, 난….”
“쟝이 버릇이 나빠서, 꼭 괜찮은 사람 꼬아내는 버릇이 있지. 고상한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
나가는 문은 저기 있다고 미리 말은 해주죠.”
“어어….”
“…나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원,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까르르 웃어대는 사람들 가운데 쟝이 어깨를 으쓱대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있던 알렉산드르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대마 한 개비를 까딱대며
인사했다.
“글쎄다.”
‘영국인이라….’
원래 맛을 들인 사람도 아닌데, 쟝에게 걸려서 각종 맛은 다 보고 나가겠다며 마시던 잔을 비웠다.
#chapter 19
* * *
“…으응.”
“…쟝?”
“음….”
“으음….”
“응….”
-윽!
“응….”
“…이봐.”
짧은 한숨과 함께, 골치 아프다는 목소리가 내려왔다. 골치 아픈 녀석. 갑자기 이런 짓을 하다니….
유리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째 일탈 한번 벌리는 게 거대하다. 이런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서로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놈들이 득실대는 곳이라서 잔을 나누다가도 그다음 날
서로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일이 잦았다.
유리는 세드릭이 있던 문 앞에서 대충 기절시킨 여자를 떠올리며 세드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름의
배려로 옆방에 눕혀 둔 여자는 언뜻 보아하니 연합국 쪽 여자였다. 다행히 그가 우려했던 큰일은
없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바르샤바 쪽 사람이었다면 당장 송환 당해도 모자라지 않을 일이었다.
“이봐, 세드릭.”
“…다…니엘?”
“….”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세드릭의 입술에서 나온 이름에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빨리 온다고
왔는데 이미 술에 절어 있는 것부터 해서 온몸에서 진동하는 약 냄새를 보면 정신이 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세드릭의 반응에 유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새어들었다.
흐린 시야 속에서도 휘어지는 곡선만은 확실하게 포착한 세드릭도 마주 웃었다.
“…좋아해요.”
보고서에서 봤던 것처럼 세드릭은 이튼에서 승마를 했다던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유리의 팔 안에 간신히
다 잡힐 만큼 덩치가 제법 되었다. 유리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도록, 세드릭의 팔이 유리를 얽매어 들면서
둘의 몸이 기울여졌다.
“윽!”
“좋… 아한다고….”
다행히, 넘어지는 몸 뒤로 침대가 있어서 다친 곳은 없었지만 유리의 몸 위로 세드릭이 기대어 있었다.
유리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남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싫어요….”
“….”
“놔.”
“…네.”
“아픈 건 싫은데….”
시무룩한 세드릭에게 유리가 눈을 감고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사람 걱정시키게 만들어서 달려오게 만든
것도 모자라 보모 노릇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 놈이다. 싶을 때, 입술에 말캉한 것이 맞닿았다.
“읍!”
“그게, 읍. 무… 슨….”
“그만, 그만해.”
“왜요, 내가 싫어요?”
‘아차.’
감청으로 알게 된 내용을 유리는 무심코 말하고 말았다. 죽, 밀려 나가는 세드릭이 붙잡은 유리의 코트
자락이 풀어지며 갈아입지 못한 짙은 녹색의 군복차림이 드러났다. 유리가 아차 싶어서, 코트를 여미는
동안 세드릭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입고 있던 옷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몸에 남은 취기와 약 기운이 다시
그의 몸에서 돌아다니며 열을 연신 피웠다.
“알겠으니까. 옷 입어.”
“…대충은.”
깨어나면 한 대 쥐어박아 주겠다고, 유리는 마음먹으며 세드릭의 주사를 애써 달랬다. 그러자 세드릭이
제 옷자락을 잡은 유리의 손을 잡고 언뜻 진지하게 질문했다.
“뭐?”
“…너.”
“으음….”
“빨리하게 놔.”
“뭘요?”
“….”
“싫지 않으면요.”
“…놔.”
세드릭이 유리의 손바닥과 손목에 제 얼굴을 묻고서 짙은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유리가 그 강렬한
눈빛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세드릭이 제법 침울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
“사랑해요.”
“….”
흘러내리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유리의 손목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다시금 정중한 입맞춤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다가, 유리의 이마에, 뺨에 그리고 코끝에 차례로 넘어 들었다. 순수한 애정이 어린 몸짓에,
유리는 늦된 사춘기를 맞은 소년처럼 몸에 열이 올랐다.
훈련을 통해서 쾌감을 목적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것은 배웠지만, 이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것에 가까웠지. 이렇게 열이 나고, 가슴팍이 답답한 적은 없었다. 그것뿐이면
밀실이라서, 약 냄새 때문이라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납득해볼 텐데. 귓가에 부드럽게 얹혀 드는 세드릭의
진심 어린 고백이, 그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어둑한 방에서 용케 유리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알아차린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빨개졌다.”
“…조용히 해.”
“그래도 예뻐요.”
“….”
“…후회할 거야.”
“그래도 사랑해요.”
“읏….”
입을 맞춘 자리에 또 입을 맞추는 세드릭의 집요한 키스에 당황한 유리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세드릭의 입술이 유리의 뺨에, 연한 귓가에 죽, 이어졌다. 말랑한 귀 연골의 갈라진 틈 사이로 곧은
콧날이 파고들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었다.
“흣!”
“사랑해요….”
“피부가 참 하얗네요.”
보통은 요구를 하는 놈들에게 맞춰서 했던지라, 이런 경우가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놓쳤다.
심지어 세드릭은 제가 아는 게 맞다면 처음일 테니. 그냥 막, 하기도 좀 그렇다. 어찌 됐든 여자도
만나지 못한 세드릭에게는 남자도 처음이 아닌가. 고민하던 유리는 결국 세드릭의 어깨를 슬쩍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누워.”
코트를 대충 벗고, 군복의 재킷마저도 벗어낸 유리가 셔츠만 걸치고서 세드릭의 바지춤을 잡았다. 혁대를
익숙하게 풀어 내리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왜 그래요?”
“사랑하자며.”
“그래서 나도 해주려고.”
“…정말요?”
“싫으면 말고.”
‘출신은 못 속이는군.’
“눈이나 감아.”
“….”
생각보다 물건이 컸다. 아니, 이전에 접대로 나간 고위 인사들이 작았던 것인가. 한 손에 간신히 잡히는
두둑한 부피감에 입이 선뜻 가지 않았다. 세드릭은 그런 유리를 보면서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흥분에
겨운 것인지 붉은 얼굴을 하면서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런 건 아니고.”
동시에 유리의 머리를 밀어내려는 손길에 유리가 물고 있던 선단의 끝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그러자
발기한 물건이 진동하며 끈적한 액을 혀 아래로 흘려내었다. 유리의 맑은 눈이 웃음을 흘렸다. 한 번
핥아줬다고 느끼다니. 솔직한 반응에 유리가 웃으며 갈라진 선단의 끝을 혀로 쓸어주었다. 까슬한 혀가
훑어지는 감각에 세드릭이 연신 헐떡였다.
“아으, 그, 만….”
“하아, 하아….”
“잠시, 윽….”
밀어내던 아까와 다르게 붙잡고 좆질을 하는 모습에 유리가 당황했다. 세드릭이 고개를 숙이고 풀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리를 보면서 연신 사과했다.
“끄윽, 윽….”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깔고서 혀로 움직이는 기둥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세드릭의 얼굴과 하체에 더욱 열이
몰렸다. 동시에 유리의 입 안에 뜨거운 액체의 씁쓸함이 퍼졌다. 그걸 알아차린 세드릭이 놀란 듯,
하체를 뒤로하고 유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뭘, 뭘요?”
“자위. 맛이 진해서.”
“윽. 아파.”
세드릭이 벌게진 얼굴로 유리의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 안을 쑤셨다. 제 흔적을 망설임 없이 삼키는
모습을 본 세드릭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역력했다. 그런 세드릭을 유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보며 제 입
안을 거칠게 탐색하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왜?”
“좋, 좋다고요?”
“싫었어?”
“그, 건 아니지만!”
“뭐 해.”
“그러면 저, 저도 좋게 해줄게요.”
“뭐, 읏!”
“하윽! 응!”
의외로, 유리의 물건을 물고서 핥아 내리는 서툰 혀 놀림이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그리고 덩치부터 해서
힘이 제법 센 세드릭은 밀려나지 않고 계속해서 유리의 하체를 탐했다. 뜨거운 입 안에서 얽혀드는 온도와
피부의 마찰이 유리의 몸에 열기를 피워 올렸다.
“으읏, 하아. 그, 렇게…. 아으….”
“뭐? 거기는….”
유리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세드릭이 꼿꼿하게 세워진 유리의 젖꼭지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성기와
다르게 작고 짧은 것이라 그런지 세드릭이 입질을 반복하며 유리의 신음을 키웠다.
“조그…맣네요.”
“하으, 응, 그, 만….”
“으응!”
“흐으, 흐, 으….”
“처음, 인데 괜찮았어요?”
처음인 사람치고는 묘하게 쾌감 포인트를 짚어서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유리의
가슴팍에, 세드릭이 다시금 입을 천천히 맞췄다.
“…흥분해서 그래.”
퉁명스러운 대꾸에 세드릭이 서운한 듯, 매끈한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에 유리의 살결이 파득,
떨렸다.
“흐윽!”
“그러고 보니 못 들었어요.”
“뭐를, 흐응!”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니.
“…오지도 않았어.”
“…어디 가요?”
“가야지.”
“쫓기는 사람처럼.”
“난 아직 모자란데.”
유리의 가슴팍을 지분대는 느릿한 손길에 유리가 숨을 급하게 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박고 끝내는
것을 세드릭은 이상하게 제 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특히, 풍만하지도 않은 가슴팍을 연신 만지면서
신음하는 저를 만족스럽게 보았다.
“예쁘다.”
“또 섰네요.”
“너, 모르….”
“책에서 봤어요.”
“…뭐?”
그가 엎드려진 유리의 자세를 고쳐서 둔부를 잡고서 갈랐다. 벌려진 살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다
싶을 때, 질척한 감촉이 한 번 스쳤다.
“뭐, 읏!”
“괜찮아요… 제가….”
워낙에 고집이 센 세드릭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섹스를 할 때마저도 세드릭은 완고하기가 짝이 없었다.
유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는 한참 입구 근처를 침으로 척척하게 적시다가,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입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부드러운 침범에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으, 응, 으!”
시트 사이에 얼굴을 묻어도 계속 터지는 울음소리에 세드릭이 더욱 천천히 핥고, 찔러대었다. 혹시라도
제 물건을 넣었을 때 유리가 아파하는 건 아닐까 싶은 우려에서 비롯한 것이 도리어 유리를 궁지에 몰았다.
세드릭이 읽은 책에서 그냥 삽입하면 제법 아프다고 쓰여 있던 것이 이러한 열정의 이유였다.
‘그것도 이렇게 작은 곳으로 넣는다면….’
유리의 탄식 어린 허락과 함께, 방금처럼 부드러운 침입이 아닌, 커다란 것이 그 자리를 메우다 못해
잔뜩 벌려대었다. 세드릭은 아까 전 애무로 제법 부드럽게 풀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침입자를 허락할 줄
모르고 빡빡하게 조여 오는 압박감에 신음했다.
세드릭이 뒤에서 연신 쳐올리는 몸짓에 유리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었다. 세드릭이 웃는 얼굴로
뒤에서 속삭이는 바람에 유리의 등골이 오싹하게 뒤흔들렸다.
눕혀둔 몸을 거센 악력으로 고정시키고 느끼는 부분만 쳐올리는 바람에 유리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눕혀진
그 자세로 세드릭의 거친 허리 짓을 받아내어야 했다. 세드릭은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거세게 압박하기를 반복해서 쾌감의 여파를 더욱 세게 만들었다. 그런 유리에게 쉴 새 없이
박아대던 세드릭이 유리의 몸을 뒤집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으, 응….”
“아, 윽.”
“흐으, 흐으….”
‘끝까지 해버렸…어.’
배 안쪽에 퍼져가는 체액의 온기에 유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온몸이
물들어 있었다. 식지 않는 열기를 떨쳐보려고 안고 있던 세드릭의 어깨를 쥐다 못해 손톱으로 박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런 유리의 떠나가는 손을 세드릭이 제 목에 걸었다. 유리의 지친 눈이 들썩였다. 그런
유리에게 세드릭은 어딘가 총명해진 눈빛으로 요구했다.
“저기, 다니엘.”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뭐?”
“…아.”
유리는 가슴팍 쪽에서 느껴지는 낯선 무게감에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떴다. 그제야 제가 깜빡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누워 있던 몸을 급히 일으켰다. 열기가 가신 몸이 움직이며 좁은 침대의
시트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으응….”
“….”
“하아….”
‘5 시… 25 분. 아, 이런. 게오르그!’
“으응… 다니엘….”
“…일어나.”
“다니엘.”
“…정신이 들어?”
“꿈이… 아니었어요.”
“….”
“기분… 좋네요.”
“…뭐가.”
“빨리 입어.”
“뭘 그래요. 이미 다 봤잖아요.”
“….”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에 짐이 얹혀진 자신과 다르게
세드릭의 얼굴은 어딘가 개운해 보여서 유리의 마음을 긁었다. 유리가 대충 신고 있던 군화의 매듭을
조이는 것을 보면서 세드릭이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피식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유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왜?”
“다음부터는 이런 곳 오지 마.”
“왜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유리의 손이 군화의 매듭을 꼭 매고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세드릭은 넥타이를
매다 말고 그 시선을 곧게 받았다. 아직 정돈이 되지 않아 흐트러진 차림새에도 특유의 당당함은 어디 갈
줄을 몰랐다.
“위험하니까.”
“내가 걱정돼요?”
“…안 해.”
섬뜩하다고도 일컬을 수 있는 그 기분이. 재밌게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가는 저 손길이 아쉽게
느껴질 뿐. 그는 밤새워 내내 침대 위에서 맞잡았던, 가는 손마디를 떠올리며 냉정하게 떨어져 내리는
특유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아. 확실히.”
“다, 입었어?”
“…아, 직요.”
“….”
“무슨… 읍.”
“…하아.”
“지금… 응.”
그마저도 뒷목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에 막히고 말았다. 결국 열렬한 입맞춤에 유리도 이기지 못하고
서로의 혀가 엉켜 들면서 질척한 소리를 내었다. 매끄러운 두 입술이 번들번들하게 젖어가는 동안,
유리의 맑은 눈빛이 금방 푸르게 젖어갔다. 세드릭이 그 눈빛에 홀려서 입술 위로 살짝 입 맞추었다.
다시금 열을 품어내는 세드릭의 눈을 본 유리가 애원했다.
“…안 돼.”
“안, 할게요.”
“…잘 남았네요.”
“…떨어져.”
‘언제 또 이렇게….’
“나가면.”
얄궂게도 멍청하고도 뻔한 소리가 나오는 입술은 멈춰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자신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유리는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재빨리 방을 나섰다.
“잠시만, 같이 가요.”
급히 걸음을 하는 유리를 따라오는 세드릭도 같이 걸음을 빨리했지만, 골목을 넘어가자마자 유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기운이 세드릭의 뺨을 긁어대며 달콤했던 시간을 깨트렸다. 이른
시간인지라 적은 수의 사람이 걸어 다니는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유리를 찾지 못한 세드릭이 흐트러진
머리를 긁적였다.
#chapter 20
* * *
“….”
한참 뒤에야 사라지는 세드릭의 인기척에 유리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숨겼던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고요함이 머무르는 골목길이 무색하게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숨어 있는 동안에, 혹시라도
그의 고동이 들켜서 다시 세드릭이 그를 찾아내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반복된 훈련 아래 죽였던 심장이 깨어난 것은. 새벽녘 차가운 공기에도 식을 줄 모르는 얼굴의 열을
간직하고서 유리는 정보부로 향했다.
“…으음….”
“…게오르그.”
“…누구…. 유, 리?”
“정말 미안.”
“그로벤… 대령?”
그로벤 대령은 영국 대사관 쪽의 무관인지라 평소에도 주요 감시 대상이긴 했다. 그렇지만 몇 년 동안
기록해도 그 결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정이라서 크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그로벤 대령의 집에서 나온 도청 기록에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겨우 휴전을 통해서 잠잠해진 유럽의 세력을 뒤집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그것도 연합국의 중요한 주축으로
있는 영국의 참여라면, 사소하고도, 작은 분쟁 하나만 있어도 거대한 전쟁으로 번질 것은 뻔했다. 이전의
전쟁도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설마.’
저 멀리에 있는 영국의 의회와 여왕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한들. 이들이 꾸며놓은 함정에 빠져서 사건이
터진다면. 예를 들면, 여왕의 친척이라고 하는 사람이 적군이 꾸민 불의의 사고에 휘말린다면.
‘그 녀석이… 죽는다면.’
전쟁의 이유는 충분했다. 여왕의 입장에서도 가까운 왕족을 잃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노릇이니. 그
사실에 유리의 식은 마음으로 불안함이 엄습하며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유리는 지금쯤 달콤한 잠에
곯아떨어졌을 게 분명한 게오르그의 성실함을 속으로 칭찬하면서 감청실을 나섰다. 유럽 대륙 전체를
혼돈으로 일으킬 수 있는 정보를 손에 쥐고서.
‘하필 이럴 때….’
세드릭의 맑은 웃음소리, 휘어지는 진한 눈썹 따위를 떠올리던 유리는 머리를 거칠게 저었다.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그 대상이 세드릭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꼭 그 녀석일 필요는 없어….’
유리의 군화가 그의 아버지이자 라스콜니코프 대령의 사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분명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정보라고 생각되어 바삐 오긴 했지만.
“하아… 골치 아프군.”
살 수 있을까.
“….”
유리는 우선 가져온 기록을 대충 구겨서 군복 재킷 안쪽에 넣었다. 정갈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희미한
허락이 떨어졌다. 유리가 사무실에 들어가 경례를 하자 라스콜니코프 대령은 위스키를 마시던 컵을 원목
책상에 내려놓고 눈알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관찰하는 모습이 역력함에도, 유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령은 감이 좋은 사람이라서 조금만 틈을 보이면 가족이고 부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곤 했으니.
“…게오르그에게 전달받았습니다.”
“…지금 복귀했나?”
“…예.”
“…맞습니다.”
대령은 어딘가 흥미가 당기는지, 주름진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유리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가,
문득 말문이 막혔다. 순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대령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지금 시간까지 쫓아다닌 걸 보면. 예삿일은 아니겠어.”
“…그게.”
“…생각 외로, 향락에 빠져 있더군요. 외교관 자녀들이 다닌다는 사교 클럽에 드나든다고 하여,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몰래 뒤를 쫓고 왔습니다.”
대령의 날카로운 기억력에 유리는 꿋꿋이 대답했다. 감시 대상이 똑똑하다는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잘 안다. 그 좋은 지력이 그들의 곁에 서지 않는 이상 위협의 대상일 뿐. 유리는 애써 세드릭의 일탈을
포장했다.
“그래… 그래서, 사교 클럽에서 어떠했지? 이토록 긴 시간을 비워둘 정도면 중요했으리라 보는데. 단순히
젊은 치기에 비롯한 일탈을 빼고서.”
정보부의 감시 대상일 정도면, 어떻게든 대령의 관심을 완벽하게 지우기 어려웠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용가치가 있다고 말이라도 더해서 이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게 낫다.
“예.”
유리의 꾀가 통한 것인지 대령은 다분히 흥미가 당기는 얼굴을 했다. 세드릭은 큰 위협을 끼칠 만큼의
인물은 아니지만, 잘 구슬린다면 정보통이 될 거라는 유리의 평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하던 대령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두 개?’
영국에서 우리 쪽 사람 말고도 정보를 전해주는 영국인이 있었단 말인가. 어렴풋한 단서를 얻은 유리의
시선은 여전히 생각에 빠진 대령의 옆얼굴을 향했다. 대령은 눈을 슬쩍 굴려서 유리를 보았다.
“…어느 정도는.”
“이만하면 됐다.”
“…제가, 합니까?”
당연하다는 대령의 대꾸에 유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확실히, 유리 그 말고는 할 사람이 마뜩잖긴 했다.
다른 녀석들은 세드릭의 정체는 알아도 말 한 번 걸어본 적이 없으니, 대화를 이끌어 갈 만한
유대감조차도 없다.
“…알겠습니다.”
“기대하마.”
유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대령이 있는 사무실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없었다. 은밀하게
숨겨진 방이라서 갑갑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가슴팍에 숨겨둔 중요한 정보 때문일까. 아니면,
세드릭을 그들의 편에 설 수 있게 태어난 조국도, 돌아갈 수 있는 가족도 버리게 만들라는 명령 때문일까.
‘배신, 을 하게 만들어라….’
어느 쪽이든 가슴팍이 조여 들어왔다. 베갯머리 송사 따위를 하면서 언제나 달게 부탁하던 뻔한 말들.
수없이 했던 말이 왜 지금 와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정보부의 복도를 걷다가
창문가 너머로 보이는 쓸쓸한 중앙 정원 위로 은밀하게 비춰드는 햇볕으로 인해 눈을 내리깔았다.
“….”
애초에 대령은 유리가 세드릭과 돈독한 관계에 있기를 바랐다. 이번 명령도 그가 내렸으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들에게 정보를 공급할 유용한 개로 만들어 달라는 명령이,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이상해.”
“…미쳤지.”
‘…정말로.’
세드릭, 그가 연신 말하는 사랑이라도 하게 된 걸까.
* * *
“근신이라… 얼마 만이지.”
“…이런.”
‘아읏, 아파….’
이상하게도, 그 투명한 푸른 눈을 가지고 고통스럽게 신음할 때마다 기묘한 가학심이 들었다. 평소에
성격 자체가 순하다 못해 무르다는 평을 듣는 그가, 그런 음심을 품게 될 줄은 몰랐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에 몸부림치는 유리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동해서 허리를 밀어붙이고 제 아래에
꼼짝없이 두게 되었다. 그냥, 그가 자신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예뻐 보였던
탓이다.
“…미친 건가….”
“…아.”
‘이거.’
“…흠흠.”
“러시아어는… 잘 못하는데.”
모르면 배우면 된다. 그것도 제 마음에 들어온 연인이 알려주는 언어라면, 그 말 한마디에 달콤한 맛이
혀끝에 맴돌 것도 같다. 무심하게 가르쳐주다가도, 자신에게 못 미더운 점이 보이면 이해가 될 때까지
끝까지 신경 써줄 것 같은 선생님이라고 하나. 이제껏 세드릭 자신에게 그랬듯이.
‘…이런.’
“큽… 하아.”
-그건 알 거 없고.-
‘…후회, 하는 걸까.’
적군의 사람과 관계를 해서, 큰 실수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약혼을 하게 될 자신과의 관계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우습게도, 정작 세드릭 자신은 어느 쪽이든지 아무렇지 않았다. 확실히, 유리는
그에게 적군에 가깝지만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고 세드릭을 살려주었고. 하다못해 예정되어 있는
약혼도, 세드릭이 유리를 향해서 품은 마음이 더 크게 번진다면 모를까 억누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약혼, 무를 수는 없는 건가.”
방금까지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도취되어 있던 세드릭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솔직히 귀족의 일원이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는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처럼 좋은 배우자를
찾아서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 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아냈다고
생각한 순간, 닥쳐온 의무에 그의 마음은 무겁게 얹혔다. 어떻게든 부모를 설득해보고자 말을 꺼냈건만,
돌아온 것은 실망과 작은 분노, 그리고 근신.
“…젠장.”
성인 남성에게 가문 승계와 재산이 귀속되는 만큼 세드릭이 떠올린 후자의 경우도 만만찮게 파격적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의무였다. 아마도,
이 학교에서 졸업을 마치고 나면 꼼짝없이 이행되어야 할 그런 구속. 그는 고민이 드리워진 얼굴을 젖은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아직 마르지 않아서 머리끝에 맺힌 물방울이, 급한 손짓에 진동하며 편지지에 뚝, 뚝 떨어졌다. 그것을
피하기도 전에 만년필의 잉크 따위가 순식간에 지나가며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번졌다.
“….”
‘이건 좀, 식상한가.’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고민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이렇게라도 그와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펜을 들었더니 뭐라고 해야 할지 깜깜해졌다. 몸은 좀 괜찮은지, 제가 처음이라 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세드릭은 생각과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두고서 원목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사각사각
소리가 나도록 그려나갔다.
“윽.”
세드릭은 어딘가 저속한 기분이 들어 쓰던 문장에 급하게 선을 그었다. 이런 얘기 말고, 뭔가 괜찮은
이야기가 없을까. 평소 에세이를 많이 쓰고 토론은 일상인지라 글감이나 화술에 자신이 없던 적은
없었건만. 이때만큼은 세상에 더 없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으음.”
‘어쩌면, 오지 않을까.’
그는 말로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빠짐없이 약속 장소에 나왔으니까.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렇게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서 정신없이 두 페이지 정도를 써 내려갔을까. 시간은 흘러서 그의 얼굴에는 아침 녘이
찾아들고 베스가 있는 반대편 방 쪽에서 쿵쿵대는 발소리와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은
편지지를 대충 접어서 봉투에 넣고 손에 꼭 쥐었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새로 온 하녀 그레타가 베스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베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두고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못해 태연한 세드릭의 반응에 베스의 표정이 묘하게 색을 달리했다.
“음.”
“…뭐야, 다니엘라 언니를 진심으로 좋아하던 게 아니었어?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그런 나쁜….”
오해에 빠져서 골똘하게 읊조리는 베스에게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베스는 격분한 얼굴로 따졌다.
그 모습에 세드릭이 누가 들을세라, 뒤를 돌아보면서 베스의 방문을 닫고 검지를 입술에 걸쳤다.
“쉿, 쉿. 그런 게 아니야.”
세드릭은 베스의 찬란한 어휘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꼭 쥐고 있던 편지를 베스의 눈앞에 보였다.
베스의 녹색 눈이 세드릭과 편지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야?”
“좋아!”
#chapter 21
* *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책걸상 따위가 바쁘게 부딪히며 마룻바닥이 이동하는 발걸음 따위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꽉 차 있던 교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면서 한산해졌다. 아직도 회색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창문가에 비쳤다.
유리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뭉근한 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텅 빈 교실 안에 홀로
있는 모습은 물이 빠져버린 해변에 서 있는 이름 모를 방문객과도 같았다. 마치,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바다를 기다리는 것처럼.
“….”
학교 근처의 교회 첨탑에서 비롯한 게 분명한 희미한 종소리에 유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이런.”
“….”
없을 것을 알면서도 왔다. 어쩌면 언뜻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 철없고 순진한 녀석이니
어떻게든 몰래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 유리는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서도
낙심되는 마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실망이라니.’
‘왔어요?’
추운 공기에 얼어붙은 볼과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식사를 시작하곤 했었지.
피할 수 없는 계절감으로 인해 버릇처럼 굳어버린 식사 순서를 떠올리던 유리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을씨년스럽게 드리워진 가지들 사이로 나와 있는 산책로의 샛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단박에 보일 수 있는 그런 시야. 외투 자락 하나만 일렁인다고 해도 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자리. 세드릭과 같은 시선을 한 유리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춥다.”
“…음?”
낯선 감촉에 유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벤치의 그늘이 드리워진 흙바닥에는 이질적인 미색의 편지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유리의 손이 떨어진 봉투를 주웠다. 이미 흙먼지가 미미하게 묻은 앞면에는 〈C〉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단순한 한 글자에 유리는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밀봉된 봉투를 뜯었다. 이 장소에, 이 시간에 만나는
사람은 그와 세드릭 말고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한 이니셜의 주인은 확실했다. 봉투 안에는 정갈하게
접혀 있는 편지지가 있었다. 급한 손길이 편지지를 펼쳐 들며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쓸데없는 말을….”
시간에 쫓겨서 편지를 쓰던 것인지, 깔끔하던 편지봉투와 다르게 편지지 곳곳에는 잉크 자국이 제법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한 글자 쓰다 말고 선을 긋고, 다시 펜촉이 닿아서 까맣게 번져 들어간
지저분한 자국. 아마, 이다음에 써야 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 못해 나온 게 분명한 흔적이었다.
“….”
제가 여자도 아니고 무슨 꽃을, 준단 말인가. 유리는 속으로 타박을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다든지,
세드릭이 바보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세드릭다운 고백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똑똑한 녀석이 왜 그럴까. 그래서 유리 그 자신도 더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 평생에 받아 보지 못한,
대가 없는 애정.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어디에서 왔든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그 다정함.
* * *
“…발견해야 할 텐데.”
세드릭은 침대에 누워서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 시간을 좀 죽여보려고 아침부터 오후 나절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를 않았건만. 그 긴 시간 동안 10 페이지 남짓한 진도를 나간 게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눈으로는 글귀를 읽어도 머리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니 책의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탓이다.
부드러운 커버를 가진 양장본이 톡, 하고 가볍게 닫혔다. 평소에는 낮 시간이 언제나 짧다고 느꼈는데,
이때만큼 긴 시간도 없었다. 겨울이 다 지나는 바람에 낮 시간이 늘었다며 투덜대는 세드릭의 귓속에 1
층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 추워!”
“응, 오빠는?”
‘베스.’
지루한 중에 반가운 손님의 등장에 세드릭이 뉘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편지. 조심성이 없는 여동생이
쿵쿵대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올라오는 인기척에 세드릭도 얼른 방을 나섰다. 달은 마음이 전달되는
바람에 떨리는 손으로 세드릭이 방문을 열자마자 공교롭게도 놀란 얼굴을 한 베스와 마주쳤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하얗고 동글동글한 손에 구겨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오빠!”
“아니…. 뭐.”
장난꾸러기인 베스가 이번에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것처럼 방문을 아무리
작은 손으로 두드려도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오빠!”
* * *
“진짜, 읽었구나.”
[D]
자신이 보낸 편지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급하게 찢어낸 메모장 종이의 구석에 작은 이니셜이 있었다. 단 한
글자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솔직히 답장을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답장을 받을 줄은 몰랐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아, 이런.”
첫 부분을 읽자마자 세드릭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터졌다. 평소에 유리가 꽤 무뚝뚝한 성격임을 아는지라
이런 문구를 쓰는 상상을 하자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편지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내가, 말… 했구나.”
“…설마, 이거….”
“…질투하는 건가?”
세드릭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입가에는 김빠진 바람 소리가 피식피식 나왔다. 세드릭 자신의 생각을
몹쓸 짓이라고 나무라는 어투에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알고 있었다고?”
“…세상에.”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 *
[뭐를?]
[음… 얼굴?]
[…얼굴? 왜?]
“…정말. 못 말리겠군.”
[그게… 누가 말해줬거든.]
“…큭.”
“…유리?”
“…음. 흠. 왔어?”
“어어….”
유리는 헛기침으로 웃음을 갈무리하며 자리를 떴다. 감청실을 나서는 유리를 가만히 보던 게오르그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일이 많이 힘든가.”
“…아.”
껄끄러운 사람과 마주쳤다. 블라디미르가 능글대는 웃음으로 유리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다가 특유의
날카로운 회색 눈을 빛냈다.
“…저렇게 웃던가?”
#chapter 22
* * *
‘오늘도, 있을까.’
세드릭의 근신은 아득한 기간 아래 이어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아무런 장벽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면대면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을 편지로 이야기하면서 서로에게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유리는 열
번째 되는 편지를 벤치에 앉아서 읽었다.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칠칠찮기는.”
편지의 내용처럼, 편지지 밑 부분에는 홍차 물이 들어서 연하게 물든 얼룩이 확연히 보였다. 유리는
반짝이는 눈을 호선 아래 숨긴 채로 작게 웃었다. 길고양이의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황해서 난감한
표정으로 변명을 적고 있는 게 글만 봐도 눈앞에서 생생히 보였다. 그러다가 세드릭이 꺼내는 본론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내일은 저를 뺀 나머지 가족들이 대사관 오찬에 초대될 예정입니다.
확실시되는 뜬 소리를 정리하면서 외투 안쪽에 넣어둔 만년필을 꺼냈다. 막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을 무렵,
두 번째 장에 적혀 있는 첫 줄이 눈에 깊이 들어왔다.
“…뭐?”
달랑 적혀 있는 그 내용 아래로 펼쳐진 공백이 마치 유리의 마음 같았다. 지금 무슨 말을 적은 것인가.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만나자고 초대를 하다니. 그것도 적군의. 철없다, 철없다 웃던 유리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편지로 조금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던 것도 잠시. 환한 낮에, 그것도 세드릭의
만나자는 소리에 순순히 그러자고 답장을 쓸 수 없었다.
“….”
당연했다. 그는 세드릭이 생각하는 것처럼의 보통의 학생도, 폴란드 사람도 아니었다. 유리는 펜을 쥐고
있던 손을 비어 있는 공백 편지지 위에 가만히 두었다. 만년필의 촉은 편지지에 천천히 닿았다가 이내
허공으로 향했다.
“…안 돼.”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니 사정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한 번도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서 원망 따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태어난 이상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유리는 다시 편지를 곱게 접어서 도로 넣어두고 꺼지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리고 이때에는, 이 당연한 삶이 이토록 짐 덩어리 같을 수가 없었다. 제 마음과 다르게 푸르기
그지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유리의 뒤로,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 * *
“예. 다녀오세요.”
“안녕!”
“잘 갔다 와, 베스.”
프림로즈 부인은 오늘따라 얌전하기 짝이 없는 베스의 행동거지에 감탄하며 열린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남편이 단단히 내린 근신 처분으로 대사관 행사도 따라가지 못한 세드릭에게 미안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남편과 아들의 묘한 대치 전이 길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서 가만히
정면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고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외골수라 고집이 대단하건만. 야단났구나.’
그녀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지프에는 시동이 막 걸렸다. 곧장 출발하는 지프를 향해서 손을
흔들던 세드릭은 웃는 낯을 유지했다. 집에서, 방에서 꼼짝없이 갇힌 쥐가 된 나날이 반복된다고 해서
지겹지 않은 건 아니다.
“….”
거절의 의미가 다분하여 더 아쉬웠다. 세드릭은 근심이 가득한 눈빛을 띠고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손에는
편지가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세드릭에게 주말 나절의 이 시간에 조용한 집은 낯설기만 했다. 부모님과
그리고 베스, 유모 폴리나는 차를 타고 방금 떠난 것도 있고.
마이센가에서 일하는 두 명의 독일인 일꾼들도 오늘 같은 날에는 큰 일거리가 없으니 저택에 없었다.
커다란 저택에 혼자 남은 세드릭은 저택의 뒷문을 통해서 정원가로 향했다. 끼익 대는 철문을 넘어서니
매서운 겨울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곳곳에는 상록수와 잔디가 메마른 곳 없이 푸르게 지켜지고
있었다.
“…만나고 싶었는데.”
“다, 니엘!”
까만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뜬 세드릭이 단숨에 달려왔다. 마음이 앞세워 부르는 외침이 제법 컸다. 단숨에
달려오는 덩치와 함께 울리는 제 이름이 낯설어 유리의 파란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흔들리다가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어 주의를 주었다.
황망하니 서서 유리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혹시 자기가 빠트리고 읽은 부분이 있었나, 긴장된 몸짓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유리가 보내준 답장을 꺼내었다. 하지만 눈을 잽싸게 굴려보아도 자신이 모르는 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런 세드릭의 앞으로 피식 웃는 숨결이 닿을 듯 말 듯 다가오다가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힘들게 대답을 꺼냈다.
유리는 예전에 송년음악회를 떠올리는지, 가만히 세드릭의 얼굴을 살폈다. 당시에는 거절의 의미로
답장을 적어두긴 했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유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새로 늘어난 편지를
넣어두다가 그동안 받은 편지들을 처음부터 읽었다.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새로운 편지를 받을 때마다
이전의 편지들을 꺼내어 하나씩 읽어보는 것.
그러다 문득, 세드릭이 과연 자신의 거절을 순순히 납득할까 의문이 들었다. 평소 세드릭의 성격을
아는지라 그 의문의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마 밤이 새도록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다가
봄이 오기도 전에 감기라도 들면 의도치 않은 근신이 늘어날 테니 얼굴만 비추려고 살그머니 찾아 왔던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변명을 마치지 못하도록 세드릭이 유리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유리는 저를 넉넉하게
안아주는 품의 크기가 어색하여 자연스럽게 몸을 굳혔다. 그런 그가 혹시 달아나기라도 할까, 세드릭은
더욱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 * *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좋아.”
‘지금 뭐라고….’
“좋다고. 날씨.”
“아…. 아. 그렇지요.”
“정원도 예쁘고.”
“꽃은 좋아합니까?”
“키우는 건요?”
그러다 고양이가 유리를 포착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서 그의 워커 발등에 핑크색 코를 슬쩍슬쩍 대었다.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생물의 몸짓에 세드릭은 다리를 꼬고서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당신은 매번 그래요.”
이걸 발로 찰 수도 없고. 고민하는 가운데 세드릭의 우울한 얼굴이 유리의 머리 위에서 쓸쓸하게 읊조렸다.
그의 상체가 유리 앞에 드리워지는 햇빛을 가리며 그늘을 만들었다.
“내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꼭 이렇게 도망가려고 하죠.”
“…내가, 언제.”
평소 웃던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그늘진 얼굴을 보자니 또 분위기가 달랐다. 태양을 등진 캄캄한 모습에
유리가 뭐라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고백했다.
“….”
“먼지 만큼의 동정이라고 해도 좋고, 자비를 베푼다는 우월감에서 비롯해도 좋아요. 그 어떠한 이유라도
좋으니….”
그 말을 하다가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기는 어려운지, 세드릭의 숨이 거칠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그가 점차 진정을 찾아가는지 연신 숨을 고르다가 속살거렸다.
“…도련님?”
의아함이 담긴 부름에 세드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새로 온 하녀 그레타가 점심을 준비하러 왔다가 발견한
모습에 저택의 뒷문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세드릭의 표정이 당황으로 번져가는 틈에 유리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얼른 몸을 틀어도 화사한 빛의 금발 머리는 유독 눈에 띄었다. 자연히 그레타의 시선이
따라붙었고, 세드릭이 몸을 일으키며 얼른 그 모습을 가렸다. 그레타는 조심스럽게 식사 준비를 알렸다.
“…저, 그… 점심 식사 준비….”
“…방으로, 가져다줘요.”
“저, 친구분이신가요?”
“…그럼, 같이 계신 손님 몫도 같이 준비할까요?”
“네.”
“저.”
“….”
“….”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드릭 그를 노리는 사람을 확실하게 찾아내고, 지켜줘야 했다. 달은 마음의 유리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세드릭이 결국 툭, 내뱉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없어.”
“…뭐?”
“…너!”
“…섹시하던데요. 군복 차림.”
군 소속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끌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너 미쳤어?”
세드릭의 솔직한 감상에 당황한 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국적과 군복차림을 보고서 나온
감상이 겨우, 겨우….
숨기고 있던 치부를 들킨 유리가 벌건 얼굴로 세드릭을 밀치고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걸 세드릭이
따라갔다.
“다니엘!”
차라리 그런 하찮은 이유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유리 자신도 이런 복잡한 마음이 아닐 텐데. 세드릭의
격렬한 반응에도 유리는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그는 세드릭에게 경고했다.
“…나를요? 왜… 요?”
“…글쎄.”
<2 권 끝. 다음 권에 계속>
살로메 (SALOMÉ) 2 권
ⓒ 2021, pomelo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초판 발행일 2021 년 7 월 9 일
지은이 pomelo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 년 3 월 25 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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