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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AI

〈2 권〉

#chapter 12

#chapter 13

#chapter 14

#chapter 15

#chapter 16

#chapter 17

#chapter 18

#chapter 19

#chapter 20

#chapter 21

#chapter 22

#chapter 12

* * *

세드릭의 얼굴은 어딘가 평온했다. 불쌍하냐고? 글쎄. 자신이 밀고하여 잡은 스캔들이지만 유리의 마음은
편안하기는커녕 불안했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해결했다면, 블라디미르라면 우쭐대며 제 업적을
자랑했을 것이고, 디미트리라면 무표정하게 제 할 일을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그 둘을
신랄하게 비웃었겠지. 그렇지만 유리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 알 수 없는
마음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모르겠어.”

그러나 자신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모르겠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딘가, 조금씩
감정이 뒤섞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애정으로 그런, 일을 감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늘 실패의 결과를 염두에 두는
자신에게는 전혀 수지맞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것은.

“그들이 왜 그랬는지….”

어릴 때 읽던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해피 엔딩을 맞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그럼 자신은 그 아름다울 수


있는 동화를 망쳐버린 악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왕자님의 칼에 맞아서 사라져야 할 운명을 가진.
그렇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할 리가 없다.

동화 속의 공주와 왕자는 마법사의 작은 말 한마디에 무력하게 헤어져 버렸으니까. 문득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드문드문 머리를 비집으며 마음을
쿡쿡 찔렀다. 유리의 옆에 있던 차가운 맥주잔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잔의 곡선을 타고 주륵 미끄러졌다.

“궁금하죠?”

이거다. 유리의 복잡한 얼굴은 본 세드릭은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것이지만 그게 말로 쉽게 설명될 리가 없다. 세드릭의
가슴이 긴장으로 뛰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유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혹시, 세드릭, 그의 아버지가 따로 언질을 주었나?

자신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다른 이유가 붙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걸 알면,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조금은 해소될 수 있을까.

“알고… 있어?”
“음…. 아버지가, 외교관이라서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게 많아요. 다니엘라가 원한다면….”

세드릭은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커틀러리를 접시 위에 얌전히 내려두었다. 유리의 표정도 함께


심각해졌다. 조금의 침묵 이후에 세드릭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알려줄까요?”

꿀꺽. 달콤한 유혹이 유리의 긴장한 목젖 너머로 들어가고 말았다. 자신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연유를
어떻게 알았을까, 란 의문과 함께, 역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나 라는 경계심이 슬쩍 고개를 치들었다.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안, 세드릭은 다시 접시 위에 놓인 커틀러리를 쥐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유리의 청명한 벽안에 의심의 눈빛이 서렸다. 한번 당한 전적이 있기도 하고, 허풍을 꿰뚫어 볼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 세드릭의 속 모를 까만 눈에 닿았다. 세드릭은 따갑게 쏘아오는 눈빛마저 즐거이
받아들였다. 불신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즐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의심을
한다는 건, 믿고 싶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이미, 걸린 것이다. 다니엘라는, 유리는.

“제가 가진 이야기를 판단하는 건 다니엘라의 몫이에요. 전,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

“….”

걸렸다. 유리의 내리깐 벽안이 흔들리는 램프의 불빛을 볼 때 세드릭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불안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지만, 그는 애써 여유를 유지했다. 그래야, 그녀와 만날 구실을 늘릴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지?”

“그렇지만, 이건 극비로 취급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니까요. 저도 맨입으로 얘기해줄 수는


없어요.”

“뭘 원하지?”

“얘기가 빠르네요.”

적군은 적군이라 이건가. 역시 외교관의 아들이다. 이런 면을 보면 상당히 손익을 계산하는데


약삭빠르기가 짝이 없다. 시골에 박혀 있는 학교라지만 이튼이라는 이름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익은 브로콜리를 먹었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조건을 넌지시
일렀다.

세드릭은 못내 흐뭇한-유리의 눈에는 오만하기가 짝이 없는-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계속 저랑 만나는 것으로 하죠. 이런 중요한 내용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알려줄 수
없으니까.”

역시, 무언가가 있던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실패했을 때 감당도 안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유리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밀한 사이라. 세드릭은 비집어 나오는 웃음으로 입술
근육이 틀어지기 전에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가렸다.

반짝이는 푸른 눈이 순수한 궁금증으로 맑았다. 그 두 명이 도망친 이유?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눈앞의 다니엘라, 유리를 본 순간부터.

“…하지만 오늘 다 알려줄 수는 없어요. 이건 굉장히 길고,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니까. 이해하죠?”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다정한 말은 마치 유리가 이해할 때까지 알려줄 의지가 돋보였다. 그에 유리는 조금
의아해질 따름이었다. 어째서….
“너.”

“네.”

유리는 으음, 하고 눈을 살짝 찡그리며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적국이라는 게 실감이 안 되는 건가? 온실


속에서만 자라서? 아니면…. 어린 녀석이 벌써 그런 짓을 좋아하는 건가. 유리는 세드릭의 곁을 맴도는
프랑스 대사의 방탕한 아들 쟝을 생각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얼버무렸다. 뭐…. 그 녀석이랑
어울리는 거 같더니만. 끼리끼리였나. 약 냄새만 안 풍긴다면….

“…아니다.”

“왜요?”

“너…. 우리가 무슨 사이인 줄은 아는 거지?”

“그럼요.”

그런데 그런 반응이라니? 자신만만한 세드릭의 반응에 유리는 더더욱이 의아해졌다. 생긴 건


멀쩡하더니만, 속은 딴판인 건가. 그런 유리의 속도 모르고 세드릭은 오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부끄러운 듯이.

“그, 친구잖아요.”

“…친구?”

“그래요. 친구. 뭐, 더 친해진다면…. 더 자세하게, 알려줄 수도 있고요.”

차마 친구 앞에 ‘여자’라는 것을 붙일 정도로 뻔뻔하지 못한 세드릭은 헛기침을 했다. 맥주로 인한


술기운인지 볼이 살짝 새빨갰다. 생각보다 술이 약한 편인가. 유리는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적어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나 어른이나 국적을 막론하고 정보를 알려주는 데에는 특별한 사이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의 몸을 탐하는 고위 인사들도 늘 친밀한 사이를 넌지시 원했으니까. 섹스 프렌드라. 어려서
발랑 까졌군.
“그렇다면, 좋아. 친구를 하지.”

“큽, 음. 좋아요. 우선…. 친구들이 하는 악수부터 하죠.”

세드릭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떨다가, 다시 환한 얼굴을 드러내며 기쁘게 웃었다. 내밀어진 커다란 손에
유리는 순순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세상 어느 친구들이 이렇게 격식을 차리겠냐 싶지만, 유리에게는
친구라는 것들이 없었으니 의심을 하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동료, 혹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타인. 그게 사람을 나누는 잣대의 전부였다. 그가
사는 세상의 전부기도 했고. 그래서 유리는 알지 못했다. 세드릭이 말하는 ‘친구’의 의미를. 세드릭도
결국은, 몸이 목적이었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

“…? 그래.”

“좋, 아요. 잘했어요. 우린 오늘부터 ‘친구’인 거예요.”

“그러든가.”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얄쌍한 유리의 손을 살짝 쥐었다. 가볍게 쥐었지만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열기는
여전했다. 스치듯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마치 화인처럼 홧홧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 * *

같은 날 저녁 시간 달렘 지구의 마이센가

던디에서 엘리자베스를 돌봐주던 유모는 나이로 인해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일가족이


베를린으로 옮기는 여정에 같이하지 못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태어날 때부터 돌봐서 아이를 어떻게 잘
구슬리고 말을 듣게 하는지 통달해 있었다. 그랬던 그녀의 부재로 인해 엘리자베스의 응석은 나날이
더해가고, 유모 대신에 그 응석을 받는 메이드 겸 유모, 폴리나가 제법 애를 먹고 있었다.

“아가씨, 소파에 가셔요. 여긴 추워요.”


“싫어!”

영어로 말하는 폴리나에게 그녀는 짧은 독일어로 대답하며 강한 반항심을 보였다. 그게 얼마나 얄미운지
아마 아는 게 분명해서 그렇게 대답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반항심을 가진 엘리자베스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눈보라 치는 바깥을 굳건하게 막아주고 있는 대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폴리나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은 어머니 앤이 키친에서 나왔다.

“베스, 말했잖니. 세드릭은 저녁을 먹고 올 거라고. 추운데 거기에 계속 있을 거니?”

“하지만 이제 저녁 시간이 지났는걸요. 곧 올 거예요. 엣- 취!”

지프의 운전병이 전해준 말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의 고집은 꺾어질 줄을 몰랐다.

“아가씨….”

“아무튼 올 거라구요. 고마워 폴리나.”

싹싹한 폴리나는 거실에서 담요를 가져와서 고집스러운 엘리자베스에게 둘러주었다. 그걸 본 앤은 지친


듯이 머리를 짚었다. 저 망아지. 누가 말리나. 그전에도 세드릭을 잘 따르긴 했지만, 요즈음에 둔한 저가
알아차릴 정도로 둘이 찰싹 붙어 있는 게 잦아졌다.

하물며 세드릭이 어쩌다 조금 늦게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저렇게 시위를 하듯이 계단에 앉아 있는 거
아닌가. 그 모습은 마치 정원석으로 쓰는 정원 요정과 같은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키친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에,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대문이 끼익 대며 열렸다.

열린 틈으로 바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언뜻 보이면서 차가운 바람을 로비에 채워 넣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을 맞은 엘리자베스의 퉁퉁 부은 얼굴이 누가 보기에도 기대 넘치는 얼굴로 환해졌다.

“오빠!”

“베스. 또 기다린 거야?”


눈송이를 머리에 매단 세드릭이 커다란 대문을 닫으며 쪼르르 달려온 엘리자베스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세드릭은 집 안에 들어오자 훈훈하게 감도는 온기에 달아오른 뺨을 비로소 녹일 수 있었다. 안겨 있는
세드릭의 품은 추워서 도리질이 날 법도 한데, 엘리자베스는 마르지 않는 기대감이 넘치는 눈을 반짝였다.
동시에 바깥의 서늘함이 여전히 감도는 세드릭의 코트 자락을 붙잡으며 추궁하는 것은 덤이었다.

“만났지? 만나서 늦게 온 거지?”

“베스, 오빠 숨 좀 돌리게 하렴. 세드릭, 몸을 녹일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니?”

오빠를 가만두지 못하고 다시금 버릇처럼 응석을 부리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세드릭은 아직 김이 오르는 숨을 푸스스 뱉으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안도를
주었다.

“괜찮아요. 올라갈게요.”

“얼른, 얼른!”

“베스.”

엘리자베스가 세드릭의 목에 매달려서 재촉하는 것을 두고 앤은 미처 꺼내지 않던 잔소리를 꺼내려 했다.


세드릭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만 아니었어도, 그녀의 잔소리는 끝이 없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의 발이
나무 바닥에 기름을 먹여 진하게 반질거리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동안 베스의 궁금증은 바닥나지
않고 세드릭을 쏟아졌다.

“그래서, 만난 거지?”

“응.”

한 손으로 동생을 안고 올라가는 세드릭의 다른 손에는 이튼을 다닐 때부터 쓰던, 손때 묻은 가죽으로 된


메신저 백이 있었다. 묘하게 들떠있는 세드릭의 대답을 들은 베스의 눈이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가늘어졌다.

“흐흥…. 좋은 일 있었구나?”

“뭐…. 그렇다고 해두자.”

“뭐야! 알려줘! 치사해!”

세드릭의 알쏭달쏭한 대답에 베스는 작은 손을 모아 세드릭의 어깨를 푸닥푸닥 쳤다. 제법 살벌한 얼굴을
한 게 세드릭이 말해 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투지가 보였다. 그 장난 같지 않은 장난에 세드릭은 애써
아픈 척을 해 보이며 온정에 호소했다.

“아야, 아야야. 베스, 이런 행동을 보면 다니엘라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착한 아이가 되어야 다니엘라가
베스, 너를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알려줄 거지?”

베스는 세드릭의 말에 내심 찔리는지 조그맣게 주먹 쥐었던 손을 펴고 세드릭의 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세드릭은 엘리자베스의 허벅지를 받치던 팔을 천천히 풀면서 3 층 마룻바닥에 내려주었다. 타닥, 하고
엘리자베스의 구두 굽이 바닥을 울리자 세드릭은 굽혔던 몸을 피면서 두툼한 네이비색 모직 코트의
금단추를 풀었다.

“그래. 자. 잠시만 방에 가 있어. 차 한잔 마시고 말해줄게.”

“차, 내가 가져올게!”

올라온 것이 무색하게, 엘리자베스는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이것을 두고 유리는 마음속으로 괴수가 산다고 표현했다- 세드릭은 피식 웃으며 어두운 방 안의 스위치를
눌렀다. 자신과 다니엘라와 만나는 것을 알게 이후로는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조금
더 늦게 돌아오는 자신을 기다리곤 했다.

주로, 그녀의 근황을 귀 기울여 들으며 나름대로 숙녀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사실상 어린
동생이니 반은 듣고 반은 흘려듣곤 했지만 어쨌든 더 없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세드릭은 들어간 방 안이
밝아지자 문 앞 쪽에 위치한 책상 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벗은 코트를 행거에 걸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돌아다니는 덕에 훈기가 감돌던 공용 층과 달리 낮 동안 자리를 비웠던 방은 조금


한기가 들었다. 그는 방구석에 위치한 라디에이터의 호스를 돌리고 정돈된 침대 위에 앉아서 엘리자베스가
차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보이는 것은 커튼을 치지 않은 책상 앞에 위치한 커다란 창문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창문가에는 혹여나 누군가가 밖에 서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창문가로 가서 커튼을
내리고, 책상 위에 놓여진 램프에 작은 불을 붙였다. 후, 하고 부는 입김에 성냥이 검게 그을리고 동시에
램프 안의 불꽃이 흔들거렸다.

그 흔들림에 다시금 저녁의 테이블을 밝혀주던 램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하니 그의 얼굴에는 절로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달콤한 힘이 어깨를
밀어뜨리며 커다란 몸을 침대에 푹 눕혔다. 푹신하게 감겨오는 침구 사이로 흩어진 검은 머리는 한바탕
눈보라를 맞은 탓에 반듯하게 고정되지 않고 가볍게 흩어졌다.

“아아….”

감겨오는 느른한 눈을 손으로 쓸며 세드릭은 신음했다.

“너무, 너무 귀여웠지.”

자신의 손에 훅 감겨들던 그 하얀 손도, 진지하게, 친구 하자고 끄덕이던 그 얼굴도! 갑자기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어찌어찌 잘 넘겼다.

“깜짝 놀랐잖아요….”

그 말을 듣자, 얼마나 후회했던가. 성급하게 말한 탓인가, 너무 부담스러웠나, 갖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순진한 성격으로 스리슬쩍 넘어가긴 했지만 내심 세드릭은 아찔함 속에 확인된 마음에 환희를
맛보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녀가 스캔들에 마음이 혼란스럽다거나,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도 내심 마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서 괴로웠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내는 게 그녀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도리어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세드릭은 누가 착각에 늪에 빠져가는지도 모르고 즐겁게 상상의 바다에서 허우적대었다. 그가 비실비실
웃는 동안 바깥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요란하고 참을성 하나 없는 소리는 분명 엘리자베스겠구나, 세드릭이 쉽게 추측하며 뉘었던 몸을


일으키자 의외로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어쩐 일이지.

“웬일이지, 우리 꼬마 숙녀님….”

“도련님, 차 드세요.”

“오빠! 얼른 얘기해줘!”

문을 열자 마주한 것은 선하게 웃는 메이드 겸 유모인 폴리나였다. 그럼 그렇지. 응석받이가 그렇게


예의를 차릴 리가 없다. 더더욱이 요즘 빠져 있는 다니엘라에 관한 거라면. 폴리나의 손에는 앤이 챙겨준
게 분명한, 김이 사르르 오르는 찻주전자와 꽃무늬와 금테가 찻잔 끄트머리에 둘러진 찻잔 두 개, 그리고
쇼트 브레드가 트레이 위에 놓여져 있었다.

폴리나의 치마 뒤에서 톡 튀어나온 엘리자베스는 세드릭을 지나쳐서 방 한편에 있는 암체어에 올라갔다.


세드릭은 폴리나에게서 트레이를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베스, 폴리나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당케!”

“뭘요.”

폴리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포기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갔다. 빠른 포기와 인내심은 사용인의 미덕이었다.
세드릭은 트레이를 암체어가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방문을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곱슬진 갈색 머리를 늘여 뜨려 둔 채로 손 받침을 만들어 얼굴에 대고 눈을 반짝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세드릭은 푸흐흐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맞은편
암체어에 앉았다.
“그래서? 나 많이 참았어! 얼른!”

“그게….”

* * *

같은 시각 브란덴부르크 러시아 대사관 정보부, 베를린

밖에 거세게 부는 눈보라 덕분에 안 그래도 무거운 모직 코트가 살짝 젖어서 무게를 더했다. 남은 물기를
툭툭 털면서 감청실 구석에 코트를 걸었다. 그 모습을 당번인 게오르그가 헤드셋을 쓴 채로 보고서를
쓰다가 발견했다. 작게 손 인사를 건네는 유리의 모습에 게오르그는 쓰고 있던 헤드셋의 한쪽을 열고
인사했다.

“왔어? 늦었네.”

“응. 밖에 눈이 좀 내려서.”

“어쩐지 좀 춥긴 했어. 수고해.”

“너도.”

유리가 게오르그와 등을 맞댄 반대편 책상에서 세팅을 하는 동안 게오르그의 펜을 쥔 손이 바삐 놀려졌다.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동안 유리는 자리에 착석했고, 두꺼운 기계에 라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번호가
뜨자 게오르그는 답답했던 헤드셋을 벗었다.

그의 앞에서 둥글게 돌아가던 녹음기가 멈추고, 유리의 앞에 있는 녹음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오르그는 감청으로부터 벗어난 게 후련한지 헤드폰에 잠시 눌려 있던 짧은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게오르그가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유리의 헤드셋, 귓가에는 한창 떠들고 있는 마이센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 세드릭의 방에서.

[…뭐라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보 같으니라고! 내가 그랬잖아! 서두르면 안 된다고! 오빠는


멍청한 남자들 사이에서만 있어서 여자 마음을 몰라!]
마이센가의 작은 괴수는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밥을 주지 않았나. 유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동안
귓가에 달그락거리는 다기 소리가 났다. 영국인들이니까…. 차를 마시고 있으려나. 그나저나 서둘렀다니?
무엇을…. 유리의 귓가에 멋쩍어하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그건 나도 잘못했다고 생각해.]

[아, 틀렸어. 당장 가서 미안하다고 가서 빌어. 아니야, 이건 아니지. 매달리는 남자만큼 꼴불견도


없어.]

[엘리자베스. 내 말도 좀 들어보지 그래.]

조곤조곤히 이르는 세드릭이 무색하게 막내딸 엘리자베스의 괴성이 헤드셋을 타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빠랑 다니엘라 언니랑 바꾸면 안 될까? 사실, 이제까지 오빠랑 지냈으니까 남은 인생은 언니랑 지내고
싶어.]

“….”

유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펜으로 책상을 툭. 툭. 두들기며 회피해보려 애를 썼다. 이게 무슨 말….


애초에 이 마이센가 괴수의 생각은 자신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거 같다.

[들어봐. 그렇지만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어.]

[뭐어? 어떻게? 왜? 어째서야?]

[그야…. 잠시만, 나랑 다니엘라랑 만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베스, 어쩐지 네가 말하는 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들리는데….]

[오빠랑은 딱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다니엘라 언니를 더 가까이 보는 거라구.]

[너무한데, 베스. 지금 살짝 마음이 아팠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드릭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마이센가의 괴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드릭을 졸라대었다. 어디 있는지 모를 다기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원체 말괄량이인 것은 알았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듯.〉

유리는 그렇게 적으면서 만약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꼭 밥을
잘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어트, 이런 건 시키지 말아야지.

[아무튼! 어떻게 만나기로 한 거냐고!]

이렇게 포악해지니까. 유리는 감청기에 달린 볼륨 버튼으로 볼륨을 조금 내렸다. 도청이라는 게 무색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귓구멍이 제법 얼얼했다.

[진정해, 베스. 우선 친구로…. 친구로 먼저 시작하기로 했어.]

[치- 인- 구?]

[매주 점심시간마다 만나기로 했어.]

[나도 데려가! 나도 친구 할래!]

[그건 좀….]

난색을 표하는 세드릭의 반응에 엘리자베스는 항의를 온몸으로, 아니 목소리로 표현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주장했다. 유리, 아니, 다니엘라-여자로 착각한-가 좋다고.
[왜? 난 다니엘라 언니를 좋아하는걸.]

[알아. 하지만 다니엘라도 너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잖아. 그리고,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숙녀는
다니엘라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도대체 언제 그런 소리를 했지? 완전 새빨간 거짓말에 이용하고 있잖아. 프림로즈 가족 중


두 명을 제 편으로-사실 편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만든 것에 대해 도저히 기뻐해야 할지, 기분이
나빠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유리는 뒷목을 쓸었다. 어쨌건 우선은,

[거짓말!]

…이렇게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썽꾸러기인 아이는 처음 보는지라
은근히 대화 내용에 신경이 쏠렸다.

[정말이야. 다니엘라는 손이 섬세해서 움직임이 굉장히 조심스러웠어. 이렇게….]

세드릭은 엘리자베스에게 정말이라는 듯, 짐짓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었다. 그러고 세드릭의 목소리는


말이 없었다. 유리는 적다 말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알아. 오빠가 그랬잖아. 손이 되게 예쁘다고. 사실 난 얼굴이랑 목소리 빼면 기억도 나지 않아.]

자신의 손이 예쁘다고…. 유리는 길고 곧은 손가락을 무심한 눈으로 보면서 까닥까닥거리다가 이어지는


목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집에 데리고 올게.]

[정말? 약속해!]

[정말. 자, 약속.]

“….”

이것들이…. 정작 유리, 자신이 간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둘이서 좋다고 웃는 소리에 유리의 머리만
무거워져 갔다. 그리고 그 무게를 더하는 것은 이어지는 엘리자베스의 천진난만한 말이었다.

[헤헤. 근데 어떻게 마음을 돌렸어? 보통 여자애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정말, 끝일 때나 하는


소리라구.]

[음? 아…. 그거.]

게오르그는 자리를 뜨기 전에 유리의 감청 중인 모습을 흘끗 보았다. 평소의 올곧은 자세와는 달리 의자의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울이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웬일이람.
뻣뻣하기로라면 시베리아 침엽수 저리가라인 녀석이. 그러나 진지하게는 듣고 있는지 눈은 보고서를 쓰는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아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어서.]

계속해서 돌아가는 녹음기 앞에 위치한 손이 보고서 위에서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chapter 13
* * *

톡, 톡….

유리의 손에 쥐어진 펜이 노트 위에 푸른 점들을 새겼다. 집중할 때나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도 그럴 게,


유리는 제법 고민 중이었다.

[나는 아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어서.]

전날 도청으로 들은 내용 때문에, 그가 도대체 무엇을 놓친 것인지 밤을 새우면서까지 기억을 되짚어 보게


했다. 유리는 펜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한숨을 폭 쉬었다. 요즈음 한숨이 늘었다고 종종
들었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더더욱이.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스캔들에 대해서 세드릭이 알고, 자신이 모르는 게 뭐지? 아니, 오히려
언더커버-위장 요원-로 있는 자신이 더 많이 알면 알았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세드릭이 저처럼 어릴
때부터 요원으로 길러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 달달 외운 이력들과
지나칠법한 버릇들까지, 유리는 다 외우고 있었다.

기억력 하나는 자신이 있는 유리였다. 하다못해 학생들의 입을 타고 흐르는 작은 소문들까지. 다만,


줄줄이 읊을 수 있는 정보들로는 치환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그 일에 대한 이유를 세드릭은
안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

고집스러운 입을 살짝 내민 채로 유리는 노트 구석에서 푸르게 번져가는 잉크 점 자리에 다시 볼펜을


반복적으로 쿡쿡 찔렀다. 쉬는 시간의 도서관은 조용하기가 짝이 없어서 그 작은 소음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그래서 반추하는 유리의 머릿속에는 화장실에서 엿들었던 이탈리아 대사 부인과 알바니아
공사의 대화가 잘 녹음된 테이프처럼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당신이 아니면….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와 권력, 그 모든 게 한 사람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니. 언뜻 들으면 참 달콤한 말이 아닌가. 피하려


해도 끈적끈적한 덫처럼 사람을 붙잡아둘 수밖에 없는, 그런 말. 그렇지만 그런 달콤함이란 참 덧없어서,
빠지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질 것을 유리는 알았다. 그 또한 거짓된 달콤함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더 잘 알았다.

동유럽의 구석에 있는 나라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서 나름대로 정점에 있던 그녀는 왜 뻔한 말에 넘어가


버린 것일까? 안전한 지위도, 약속된 국적도, 넘치는 부도…. 그 덫으로 인해 굳어버린 설탕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히려 그 마음을 접었더라면 육체적인 이득이라도 얻지 않았을까. 그날
크리스마스 파티의 정원에서 이뤄지던 밀회처럼.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단순히 사랑이라고 치환하기에는….

“…얻는 게 하나도 없어.”

이 바닥을 전전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완벽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다. 승자로 보이는 자도 그
일반율에서 피할 수가 없다. 달의 이면처럼, 각기 다른 손해를 끌어안고 산다.

그 말은 즉, 제 몫을 내어줄 수 없는 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 두 명의


거래는, 그 둘 중에 누구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실패의 리스크에 비해 성공했을 때의
보상이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으니 말이다.

그 어느 유럽 국가로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중립국에서 뼈가 스러질 때까지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실패했을 때는…. 메트로놈처럼 쿡, 쿡 볼펜 자국을 남기던 유리의 손이 멈췄다.

“3 차 대전인가.”

금방 크게는 번지지 않아도, 세계 대전을 향한 포문을 여는 데 도움이 좀 되었겠지. 미국 놈들도 군수


물자로 다시 한탕 해볼 생각에 입질이 왔을 것이고, 땅따먹기에 혈안이 된 서유럽 놈들도 바람을
불어준다면,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을 거다. 아마,

〈바르샤바 연맹의 연합국 인사 인질극〉

뭐…. 이런 제목으로. 잉크가 번져 울어대는 노트에 자극적인 황색선전을 흉내 내어 적은 유리는 픽


웃으면서 취소 선을 죽죽 그었다. 기사의 내용은 대사의 달콤한 말을 어리숙한 공주님을 꼬여내는 간악한
시도로 둔갑해서 내보냈겠지. 그래, 딱 이 정도면 사람들을 자극하기 딱이었을 것이다.

물 위의 세상은 진실 아래 숨겨진 그럴듯한 가짜를 곧이곧대로 듣곤 하니까. 예를 들면 이 베를린도


그러하지 않던가. 말로만 평화의 발판을 위한 중립지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도 그러한 몸짓을
내지 않는다. 그런 속고 속이는 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 사랑 같은, 수지맞지 않는 이런 일
따위를 할 리가 없다고, 유리는 곱씹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건다는, 이상적인 말을 하기엔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정보부 소속인 자신도 모르는 이유라면, 분명
중요한 일이 틀림 없고…. 유리의 투명한 금색 속눈썹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뺏기기만 하는 일방적인 길을 갈 리가 없다.

추운 겨울이 한창인 가운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햇빛이 격자무늬 창틀을 가진 긴 창문가에 부서졌다.
그렇지만 유리는 도통 제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정리를 할라치면 이윽고 고개를 드는 작은
의문 때문에.

정말 그들은….

다시 되뇌는 유리의 눈길이 창문가로 향했다. 옅은 햇살에 차갑게 굳어 있던 창가의 고드름이 점점이
녹아가며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 *

댕- 댕-

점심시간을 알리는 근처 대성당의 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피곤한 얼굴을 집어치우고 들뜬 얼굴로 입고


있던 가운과 쓰고 있던 보안경을 벗었다. 화학 수업이 한창이었는지 요란한 색색깔의 플라스크와 비커,
샬레, 뷰렛 따위가 코팅 처리가 된 너른 석조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쟝은 교실 한구석에 있는 거울
앞에서 알콜 램프에 타버린 곱슬머리를 연신 정리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이런 젠장! 오늘 저녁에 놀러 나가기로 했는데….”

“너무 놀아서 벌 받은 거 아냐? 중간시험도 별로 안 남았으니까 이참에 공부나 좀 하지 그래.”

쟝의 곁에 있는 미케가 고소하다는 듯이 까르륵 웃었다. 그러자 쟝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깟 시험 따위에….”

“그러다가 저번에도 낙제점 받았잖아? 내기할래?”

“좋아! 조건은?”

“조건이라….”

미케는 흐음, 하고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백금발에 가까운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뱀과 같은 눈빛에 쟝의 등골이 잠시 서늘해졌다.

우, 네덜란드 사람 아니랄까 봐. 구두쇠 기질이 이런 장난에도 발동하네.

분명 걸리면 뼈도 못 추리고 털릴 게 보여서 쟝은 잠시 후회했다가 말았다.

뭐 어때. 시험 잘 보면 되지.

걱정을 털고 금세 능청스러운 얼굴이 된 쟝은 미케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미케의 날카로운 눈빛은


쟝의 뒤에 서 있는 훤칠한 세드릭에게 향했다. 까만 밤을 훔쳐 온 듯한 넘겨진 결 좋은 머리칼과 움푹
파인 눈에 박힌 진한 오닉스와 같은 눈, 곧게 자리 잡은 굵은 뼈대는 완벽 그 자체였다.

흠.

그녀의 눈이 즐거움으로 빛났다. 미남이란,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법이었다. 이러니까 미아, 그 애가


빠질 만도 하다. 그 열렬한 눈빛에 쟝 또한 제 뒤편을 향해 돌아보았다. 뭔가 했더니…. 세드릭이잖아.
쟝의 눈에 비친 세드릭은 가운과 보안경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후 노트와 교실 뒤편에 걸려진
코트를 챙기느라 바빠 보였다. 그 모습에 쟝의 버릇 같은 오지랖이 참지 못하고 나왔다.

“세드릭, 뭐가 그리 바빠? 이따 파티오에서 보는 거지?”

“아, 난 오늘 일이 있어서. 점심 맛있게 먹어, 쟝, 미케 너도.”


“뭐? 오늘 과제 없….”

과제가 없는데 일은 무슨 일? 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드릭은 책상 밑에 두었던 햄퍼 바구니와 코트를


커다란 손에 들고 화학 실험실을 나섰다. 그에 쟝은 뒤통수를 긁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녀석.

“저 바구니는 또 뭐지…. 분명 여자 하나 생긴 게 분명해. 요즘 통 넋이 나가 있다니까. 내 눈은 피할 수


없지. 으아, 내 머리…!”

탄 머리가 긁는 손짓에 푸슬푸슬 부서지는 것을 두고 쟝이 기겁을 하는 동안 미케는 호들갑을 떠는 쟝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케가 등 뒤에서 비추는 햇살을 등지고 금발 머리를 반짝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내기 조건, 생각났어.”

“어…. 뭔데?”

그렇지만 눈 속에 숨겨진 빛은 싱그럽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 * *

세드릭은 제 사물함에 놓여진 가방을 급하게 꺼내 들고 있던 노트와 필기구 따위를 급하게 쑤셔 넣었다.
늦으면 안 되는데. 커다란 손이 서툴게 잠금쇠를 덜컥덜컥 헛손질을 하며 매었다. 손때가 살짝 진 갈색
가죽 가방은 물건들을 평소와 같지 않게 급하게 쑤셔 넣은 탓으로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왔지만 세드릭은
신경 쓰지 않고 코트를 걸치고 영국 대사관 부속 학교 건물의 대문을 나섰다. 학교 경비원으로 서 있는
영국군의 로열 가드가 적색 군복을 입고 총을 어깨에 멘 채로 세드릭의 앞을 막아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나가시는 사유라도?”

“날씨가 좋아 테니스를 칠 생각입니다.”

“아, 확실히 테니스를 치기엔 오랜만에 맞은 좋은 날씨지요. 시간 엄수 부탁드립니다.”

익숙한 억양의 영어에 로열 가드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세드릭이 내민 사유서를 훑고 돌려주었다. 세드릭은
끄덕이면서 사유서를 코트 윗주머니에 꽂아 넣고 저 반대편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관을 잠시 보았다.
그들은 아직 점심 휴식시간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계단참에 사람 하나 없이 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로열
가드도 세드릭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작게 빈정거렸다.

“저 빨갱이들도 곧 나올 시간이군요. 괜히 가는 길에 마주쳐서 눈살 찌푸리지 마시고 다녀오시죠.”

“…예.”

빨갱이들이라니,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세드릭은 목울대를 치고 흐르는 말을 삼키며 대외적인 미소를


지었다. 빗장 같은 철문이 열리고, 티에르가르텐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한창의 겨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무색하도록 추웠다. 빨갱이들이라. 치우지 않은 눈들이
나뭇가지들 위에 얹혀져서 반짝거렸다. 공원이라는 게 무색하게, 숲이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무들이 가득 들이차 있는 티에르가르텐 공원은 점심시간을 맞아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리가
길어 보폭을 넓게 저벅저벅 걷는 세드릭의 검은 구두의 굽에 눈이 녹아버려서 질척해진 진흙이 조금
묻었다. 적국의 사람. 섞일 수 없는 빨간색.

그렇지만, 세드릭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그저, 생각하는 방향이 조금 다른 것 아닌가. 그들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로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게 아닐까…. 첫사랑에 빠진 사내의 말이란
어떻게 보면 구차하기가 없지만 세드릭은 끝끝내 마음속으로 우겼다.

그런 생각으로 그녀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느끼는 것은, ‘빨갱이’라는 느낌보다는, 편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학교가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끌리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튼에서 읽던 책으로만 알던 적국의 사람에 대해 이런


참을 수 없는 관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그냥, 생각해본 적 없는 세드릭의 취향을 저절로 만들 정도로
그녀 자체가 강렬한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생각하는 만큼으로 심장께가 욱신거리니까.

생각을 정리할수록 들뜬 얼굴을 하는 세드릭의 빠른 걸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구두에 묻은


진흙이 굳어서 떨어질 무렵,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공원의 한구석에 나무들로 가려진 낡은 피크닉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저게 그때 말한 저긴가.
-…이쪽으로 오면 테이블이 하나 있을 거야. 네가 알 수 있게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표식을 달아둘게.
이걸로.-

유리가 말한 장소를 긴가민가한 눈치로 세드릭이 테이블 근처로 다가가자, 전에 일러주었던 것처럼 까만
리본이 테이블 다리에 묶여 있었다. 맞구나. 확신을 가진 세드릭은 햄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코트를 옆의 너른 의자 위에 걸쳐두었다.

사람이 없을 법하게 깊숙한 곳으로 제법 걸었더니 몸에서 열이 났다. 하얗게 후후 숨을 불어 올리며


세드릭은 우선 햄퍼 바구니에 넣어두었던 테이블 매트를 꺼냈다. 빨간 깅엄 체크로 짜여진 깜찍한-
엘리자베스의 추천이었다- 테이블 매트를 펼치는 동안 저벅저벅 하고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테이블 매트
너머로 들렸다.

“…뭐 해?”

붕 떴던 테이블 매트가 내려앉자 매선 추위를 막기 위해 눈만 빼꼼 보이도록 꽁꽁 싸맨 검은 교복 차림의


유리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서 있었다.

“잘 지냈어요?”

“어제 봤잖아.”

멀뚱히 서 있는 유리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눈은 무채색이 풍경인 사이에


시선을 잡아끄는 테이블 매트에 잡혔다. 이 빨간 네모 무늬 천은 또 뭐람. 싸구려 상담소라도 차리는
듯한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눈을 좁혔다.

“그, 그랬죠. 앉아요. 아직 점심 안 먹었죠?”

“너가 먹지 말고 오라며.”

“잘… 했어요. 여기 앉아요.”


유리가 맞은편에 앉자 세드릭은 자신의 말이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연신 햄퍼 바구니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먼저 앉은 유리와 자신의 앞에 작은 플레이트를 두고,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부터 해서 찻잎,
아침에 구워진 빵, 산딸기 잼, 햄, 치즈 같은 것들이었다.

유리는 점점 테이블 위를 메워가는 것들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정보를 알려 준다고 해서
왔는데. 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면 영…. 정보가 아니라 소풍을 나온 풍경이었다. 입가심으로 제격인 것
같은 비스킷과 초콜릿까지 꺼낸 세드릭은 기쁘게 웃었다.

“우선, 점심부터 먹을까요?”

* * *

“먹어요. 맛있어요.”

“…그래.”

유리는 세드릭이 한 세 입 먹은 후에야 겨우 입을 벌려 햄치즈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요란한 빨간


테이블 매트 위에 푸짐하게 나온 먹을거리가 독버섯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드릭이 평범하게 베어 물은
샌드위치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서야 짙은 의심이 환기되어 그도 같이 이 웃기지도 않은 식사를 같이했다.

입 안에서 진한 햄과 치즈 맛이 느껴질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이런 우스운 일들이 그가


알게 될 중요한 정보의 대가라고 하면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는 게 좋겠지 싶어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샌드위치를 씹었다. 그래도 속으로 나오는 투덜거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치즈 맛없어….

먹던 것을 멈추고 냅킨에 치즈를 뱉으려고 눈치를 보던 유리의 눈이 마침 빤히 보는 세드릭과 마주쳤다.


멈췄던 구강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

“….”
“원래 먹을 때 말 잘 안 해요?”

“딱히.”

늘 혼자서 식사를 하는 유리에게 대화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유리를


두고 세드릭이 픽 웃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세상 혼자 사는 사람처럼 구는 게 어쩐지 눈을 끌어당긴다고
할까. 무심하게 티에르가르텐의 너머를 바라보는 푸른 눈을 바라보는 채로 세드릭은 보온병의 입구를
열었다.

“가족들이 다들 과묵한가 봐요? 아차.”

워머를 두른 보온병에 찻잎을 넣다가 살짝 엎지른 세드릭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세드릭은 민망한지
커다란 손바닥에 엎지른 찻잎을 얼른 한줌 한줌 주웠다. 유리는 그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 샌드위치를
내려두고 열린 찻잎 통에서 능숙하게 찻잎을 스트레이트너에 가두고 담갔다. 뜨거운 김을 타고 오르는
향기가 제법 괜찮았다. 치즈 선택은 영 꽝이지만 영국 출신답게 차는 잘 고르는 것 같았다.

“같이 먹지 않아.”

“…그렇군요.”

평이하게 말하는 대답에는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그 느낌에 세드릭은 입이 다물렸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할 줄 모르던가. 바람이 한차례 스산하게 몰아치면서 유리는 멋쩍은 얼굴로 찻잎을 바닥에
털어버리는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가족들끼리 집 어디서라도 무엇을 하던 늘상 단란하게-혹은 시끄럽게- 대화를 하는, 그중에서도 식사


시간의 대화가 일상인 세드릭에게는 제가 요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신의 루틴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세드릭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니 조금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래서 차가 붉게 우러나오는 동안 작게 덧붙였다.


“그래도, 너랑 있으면 계속 얘기하게 되는 거 같군.”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변명을 덧붙이고 나서 조금은 후회했다. 하고 나서 후회하는 쓸데없는


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짜로 유리는 세드릭과 함께면 평소보다도 말이 많이 했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도 그럴 게, 세드릭의 오묘한 성격-어쩐지 보고서와는 딴판인-이 말이 없을 유리에게서 툭툭


튀어나오게 했다. 나오는 말의 반은 핀잔이었고, 반은 불만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남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더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유리의 말에 세드릭의
시무룩하게 있던 눈이 휘어졌다.

“저도요.”

유리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볼이 미어지게 먹는 모습에 세드릭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전부 다 말해주진 않았지만 하나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보니 그날 잡일을 하던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이튼에서도 정실의 출신이 아닌 학생들은 종종


방학 때 제법 궂은일을 하며 용돈을 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껄끄러워질 법한 이야기도 숨김없이
내미는 모습에 세드릭 또한 작은 진심을 하나 털어놓았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편안해요.”

나라도, 학교도, 언어도 다 다르다. 그렇지만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은커녕, 마치 알았던 사람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함께하는 이 편안함에 계속 파묻혀 있고
싶어서 어린애처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 말이다.

사랑은 미친 짓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좀 이해된다고 하나.

세드릭이 흐뭇하게 유리를 바라보는 동안 유리는 뜨거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눈이 녹은 질척한
흙바닥에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눈을 할 때마다 가슴팍이 쑤셔서 내키지가 않았던 탓이었다.
“정보는.”

“아…. 그거요. 대사 부인과 공사가 자주 만나던 장소를 알았어요. 혹시 알아요? 여기, 으아.”

세드릭은 햄퍼 바구니와 같이 가져왔던 가죽 가방의 잠금쇠를 열었다. 그러자 급하게 쑤셔 넣었던 노트와
필기구 따위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가 미처 잡기도 전에 잉크병과 연필들, 발간 줄이 쳐진 노트들이
흙바닥을 굴렀다.

“잠시만요, 이것 좀 줍고….”

“됐어.”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게…. 완전 애잖아. 그 동생에 그 오빠군. 매일 감청실에서 듣는-하늘이 무너지게


우당탕거리는- 엘리자베스처럼 손이 가는 게 마찬가지라, 참 가지가지 한다며, 유리는 혀를 차고 몸을
굽혀서 세드릭의 물건들을 같이 주워주었다.

그 모습을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훔쳐보다가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얼굴을 보이지 않게 돌렸다.


셰익스피어의 후손다웠다. 그러다가 다시 얼굴을 고쳐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아. 손이 더러워졌네요. 안 그래도 됐는데.”

“씻으면 돼.”

유리는 주운 것을 세드릭에게 마저 건네주고 흙이 묻은 손을 털었다. 그걸 보고 있던 세드릭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코트 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한겨울의 바람으로 금방 식어버린 홍차의 찻잔을
기울여서 손수건을 적신 세드릭은 유리의 손을 가볍게 쥐고 닦았다.

“예쁜 손인데, 그러면….”


아깝다고 하려다가 세드릭은 단발에 가까운 금발 머리를 바람에 살랑이며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맑은 파란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손에 유리의 손이 있다는 것을.

#chapter 14

* * *

아. 손…. 숙녀의 손을 허락도 없이 잡다니, 이런 건 애도 하지 않을 실수였다. 분명 어머니가 보았으면


한 소리를 들을 법한…. 세드릭은 유리의 손에 묻은 흙을 마저 닦지 못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했다.

“아, 이건, 그, 동생이 자주 손에 뭘 묻히고 먹다 보니. 버릇처럼….”

“…어련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유리는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식사 시간마다 와장창 소리가 나고, 프림로즈
부인이 잔소리를 하는 걸 늘상 들었던지라 보이지 않아도 그 장면이 절로 그려졌다. 세드릭은 무덤덤한
유리의 반응에 괜스레 잡고 있는 손에 온 신경이 몰렸다.

참, 작다.

유리의 손은 작은 편까지는 아니었지만 세드릭의 손이 워낙 크고 마디가 커서 그런지 비교적 작고 가늘게


보이는 편이었다. 깃털 같은 무게감은 덤이었다. 아무튼 세드릭의 눈에는 그게 자신의 손에 쏙 들어와
보였다. 자신의 손바닥에 유리의 손을 얹어두고 더러워지지 않은 손수건의 면으로 세심하게 흙 얼룩을
털었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얹어둔 것뿐인데 긴장으로 세드릭의 입 안이 말랐다. 바보같이 손을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세드릭은 유리의 질문으로 그 두근거림으로부터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둘은 어디서 만났다는 거지?”

“노이에 미술관 알아요? 베를린 필하모닉 근처에 있는, 투명한 유리 벽으로 된 미술관이요.”

“알아.”
모를 수가 없었다. 세드릭의 입에서 나온 장소는 얼마 전 세드릭의 뒤를 쫓으면서 거쳐 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유리가 베를린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으니까. 유리의 짧은 대답에 세드릭은 닦은 손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라는 저보다 먼저 살았을 테니 모를 수가 없겠네요.”

“아무래도….”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머지 손도 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철골과 통유리만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미술관은 반파된 베를린의 시내와 달리 깔끔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유리는 비번인 날에 다른 일이 없으면 한 번씩 다녀오곤 했다.

생각에 빠진 유리의 얼굴을 본 세드릭은 애써 바보같이 보일 미소를 참으며 유리의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아까 전 손도 그렇지만, 지금 쥐고 있는 손도 제법 차가웠다. 그게 무척이나 그녀다웠다.

“들어보니 이번 전시 작품이 들어왔을 때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전시?”

“네. 공교롭게도 이번 전시 작품 화가가 영국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이번에 베를린에 들어오면서 같이


가져왔던 작품들이었고요. 그래서 들었어요.”

이번 전시가 누구였지, J. M… 으로 시작했는데. 유리가 곰곰이 떠올리는 동안 이어지는 세드릭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 녀석 아버지가 문화부 참사관이었지. 그래서 알았군. 그렇다면, 둘이
보던 작품에 무슨 답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유리는 자신이 속한 정보부 일정 중에 비번인 날을 골똘히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그리고 그 말을 놓칠 리가 없는 세드릭이 입술을 휘었다.

“같이 갈래요?”

“왜?”

당연하게 ‘아니오’라는 얼굴을 한 유리에게 세드릭은 자신 있게 말했다. 평소에는 아버지의 권한을 쓰는


것에 대한 지독한 부담감과 작은 혐오감이 있었지만. 그런 마음조차도 유리에게라면 접어줄 마음이
만연했다.

“그들이 보았던 몇몇 작품은 로테이션으로 이미 들어갔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있으면….”

처음 사랑을 하는 세드릭은 재고 따지는 방식의 사랑 따위 몰랐다. 남들이 그를 재단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껴서인지, 그저 내어줄 뿐이었다.

“창고에 들어가서 직접 볼 수 있는데 어때요?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좋아.”

그리고 계산과 이익에 움직이는 유리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철저히 극점에 서 있는 둘의 눈이 마주치며
각기 다른 생각으로 뇌가 부풀었다. 한쪽은 마약 같은 낙관으로, 다른 하나는 의문에 감싸인 비관으로.

* * *
“그럼, 다음 주에 보는 거예요. 늦어도 되니까 오기만 해요. 아니면, 배웅 나갈까요?”

은근히 주소를 물어보려는 세드릭의 눈빛이 집요했다. 저번 연말 음악회 일을 넌지시 말하는 세드릭의
짓궂은 얼굴에 유리가 시선을 돌렸다. 그게 은근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시간 맞춰갈게.”

“믿을게요.”

“간다. 눈에 띄지 말고 얼른 돌아가.”

유리는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무성의한 태도 같지만 말 자체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눈에 잘 뜨이는 티에르가르텐 산책길 한가운데에 있었다. 상반된 교복 차림인 두 사람이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면 후환이 좋지 못할 테다. 특히나 유리 그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 세드릭은
이해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잠시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직 우리 학교 학생은 없네요. 그럼, 전 여기서 가볼게요.”

“그러든가.”

“근데, 언제 갈 거예요?”

도대체 가는 길에 왜 저런 게 궁금한지. 유리는 도무지 세드릭이 이해가 안 갔다.

“같이 나가면 수상하잖아. 너 잘 가는 거 보고 나서 나도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 그렇죠. 역시, 다니엘라는 똑똑하네요. 그럼.”

세드릭은 유리가 자신이 가는 길을 살핀다는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생각이 짧았던 자신의 멍청함을
속으로 탓했다. 난 정말 세심하지 못하구나. 그는 바구니와 가방을 들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면서
사람들이 나가는 티에르가르텐의 동쪽 출입구로 향했다.

물론 유리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이제는 저 잘못된 이름을 고쳐주기도 유리의
골이 아팠다. 세드릭이 멀어지는 것을 잠자코 보는 유리의 등 뒤로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작게 욕을 하며 몸을 떨 만한 세기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딱히 시리지 않았다. 방금
샌드위치에 따뜻한 차까지 마셔서 그런가.

유난히 차가운 손을 가진 유리의 장갑 속 손끝이 열기로 따끈했다. 그게 못내 어색했다. 열기도 전염되는


성질이 있던가. 요즈음 평소 같지 않은 자신의 생체 변화에 유리는 작은 의문감을 느끼며 세드릭이 나간
동쪽 출입구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 * *

“세드릭!”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브란덴부르크 문을 넘어가려던 세드릭의 발이 멈췄다. 부르는 소리 쪽으로
몸을 돌리니 네이비색의 겨울 코트 안에 하얀 테니스복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에드워드가 테니스 라켓을
어깨에 걸치고 손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에드.”

“외출했어? 너 나가는 거 못 봤는데.”

“음…. 응. 필요한 게 있어서.”

멈춰 있는 사이에 세드릭에게 다가온 에드워드는 테니스를 제법 쳤는지 차가운 겨울에도 땀과 훅하는


열기가 풍겼다. 헤어밴드 밑으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던 에드워드는 세드릭의 손에 들린 햄퍼
바구니를 보고 의아해했다.

“뭐야, 먹을 거라도 필요했던 거야? 카페테리아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냥. 먹다 보면 질릴 때가 있잖아.”
대충 맞장구를 쳐주자 에드워드는 알아서 세드릭의 외출을 이해했다.

“역시, 어릴 때 남유럽산 녀석들은 입맛이 까다롭다니까. 난 어렸을 때부터 영국에서 살아서 그런가
입맛이 아주 틀려먹었어. 미아가 그러는데 나보고 데이트할 때 절대 먼저 레스토랑 고르지 말라고
하더라.”

“그럴 리가.”

얄미운 계집애 같으니라고. 에드워드는 장난으로 씨근덕대며 웃었다. 세드릭은 에드워드의 농담에 킥킥
웃으면서 나란히 브란덴부르크 문을 넘어서 그들의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가
생각났는지 세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야. 너랑 같이 다니면서 귀족적인 입맛 좀 가꾸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진짜 관심 있는 건


자기면서 나를 들볶는다니까.”

“우리 베스도 그래. 동생이 다 그렇지 뭐.”

“참, 저번에 스캔들 관련해서 물어봤었지? 뭐 때문에 물어본 거야? 알려줘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너가
그런 스캔들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

평이한 에드워드의 말에 세드릭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영국 대사관에 파견된 근위대
출신의 대령이었는데, 보안과 정보는 무력과 가장 가까이 있는 탓에, 종종 남들은 모르는 대사관
소문들을 알곤 했다. 예를 들면 세드릭이 물어본 스캔들 당사자들의 밀회 장소라든지.

“아는 사람이 전시회에 관심이 있어서. 여담으로 알려주면 재미있어할 것 같았어.”

“뭐야. 여자냐? 안 그래도 쟝이 너 수상하다고 쉬는 시간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데. 요근래


여자애들 눈빛이 얼마나 사나워졌는지 몰라. 내가 다 아플 지경이라고.”
에드워드의 떠보는 말에 세드릭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쟝, 그 녀석은 딱히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 무슨
참견이 이렇게 많은지. 쟝 특유의 급해 죽을 거 같은 억양의 영어가 귓가에 울리는 환청이 들렸다.

“왜 이렇게 관심들이 많은지 모르겠어.”

“이래서 가진 놈들이란!”

에드워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허, 하며 세드릭의 등을 퍽 쳤다. 세드릭은 억울한 표정으로


에드워드에게 농담을 건넸다.

“정말이야. 특히 쟝이 그래. 이제는 귀찮을 정도야….”

매일같이 밤에 나가자는 말-주로 고급 사교 클럽-부터 해서 점심시간만 되면 조용히 먹고 싶은 세드릭의


팔을 붙잡는 게 영 성가실 정도였다. 세드릭의 한숨에 에드워드는 킥킥 웃으며 차가운 눈을 웃음 아래
숨겼다. 세드릭의 말을 들어보니, 에드워드, 자신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자 맞나 보네.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어떻게 말을 할까 고르던 세드릭의 앞에는 아직 닫히지 않은 학교의 철 빗장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로열 가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세드릭과 에드워드를
보고 반가운 미소를 작게 지었다.

“테니스 매치는 즐거우셨나 보군요.”


둘이서 테니스를 치고 온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하지만 세드릭은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영 폼이 좋지 않아요. 예전 실력이 되돌아오려면 꽤


노력해야겠더군요. 즐거운 오후!”

“…하하….”

에드워드는 보란 듯이 경비병에게 인사를 덧붙이고 세드릭은 어색한 웃음으로 경비병과 눈인사를 나눴다.
에드워드는 학교 로비로 들어가면서 옆에 선 세드릭의 팔을 팔꿈치로 쿡 쳤다.

“이러면 경비병이 너랑 나랑 맨날 테니스 치러 가는 줄 알겠지.”

“고마워, 에드워드.”

“뭘. 빚진 거다.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 테니 각오하라고.”

“물론.”

세드릭이 고마움으로 미소짓자 에드워드는 그 얼굴을 잠시 보다가 땀이 식어서 엉킨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심이구나, 너. 미아 녀석, 짜증 좀 내겠는데. 아무튼, 나중에 소개시켜 주라. 누군지 궁금하네. 난


샤워하러, 이따 끝나고 보자.”

“그래.”

라켓으로 어깨를 퉁퉁 치는 에드워드를 보내고 나서 세드릭은 작게 되뇌었다. 미아?


“미아는 왜…?”

학년이 달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조용한 이미지의 미아를 떠올리던 세드릭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철제


사물함에 다가갔다. 다음 라틴어 수업의 교재가 사물함에 있는 터였다. 대충 교과 서적을 옆구리에
끼우고 햄퍼 바구니를 대신 넣으며 사물함의 문을 닫자 사물함 문이 있던 자리에 한 사람이 비딱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좋은 오후, 우리 신사님.”

“쟝, 너도.”

끈질김 하나는 봐줄 만한 쟝이었다. 악마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세드릭의 대답에 쟝은 단추를 다


팔아먹었는지 잔뜩 흐트러진 교복 차림에 주먹 쥔 손을 입에다 대고 눈을 가늘게 뜨며 서 있는 세드릭을
샅샅이 관찰했다.

“옷차림은 멀쩡한 걸로 보아…. 홍등가는 아니고.”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처음부터 나온 기막힌 추리에 세드릭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쟝은 그런


세드릭의 태도는 개의치 않고 세드릭의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탐정 놀이를 계속했다.

“요즘 아주 바쁘단 말이지. 내가 알기론 너랑 친한 놈이라고는 에드워드 그 근육 덩어리인데…. 아까


샤워실로 간 걸로 보아 같이 운동한 것도 아니고.”

“…뭐가 궁금한 건데?”

과도한 관심에 세드릭은 지끈거리는 눈 사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에드워드, 부럽다는 말 정말


진심이야? 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세드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그렇게 차가울 것까지야. 친목 도모 좀 하자는 거지. 너랑 친해지고 싶은 애들이 많으니까.”

“글쎄….”

어차피 만나서 하는 소리라고는 쓸데없는 가십거리 아니던가. 세드릭은 흥미 없는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런 세드릭의 곁으로 쟝이 다시 다가와서 다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니면, 누구 사귀는 사람 있는 거냐? 그럼 순순히 포기할게. 미케도….”

헙. 쟝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이고. 그러자 세드릭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썹


한쪽을 찌그러뜨리며 라틴어 수업실 문을 열었다.

“미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온 것뿐이야.”

쟝은 세드릭이 열은 라틴어 수업실의 문을 도로 닫고선 복도를 살피고 세드릭에게 바짝 다가섰다.


아무렇게나 헤쳐진 셔츠의 가슴팍 사이에서 쩔은 대마 냄새가 은근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그래, 그래. 근데 미케한테 내가 이런 거 물어봤다고는 하지 말고. 어?”

세드릭보다 작은 쟝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턱짓을 했다. 마주친 쟝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려 있었다.


냄새도 그렇고, 눈의 모습도 영 좋지 않은 게…. 세드릭은 말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해봤자
들어먹을 상태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쟝이 조금 만족스러운 얼굴로 킥킥대고, 다시 수업실로
들어가려는 세드릭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저지했다.
“그래, 그래. 넌 딱 봐도 입이 무거울 거 같아. 워워, 기다려. 말 안 끝났어. 아무튼, 그래서 다음 주
수요일에 워터게이트에서 보는 거다. 알았지?”

이번에는 또 뭐람, 맥빠진 표정을 짓던 세드릭은 쟝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뭐? 왜?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이튼 다녔다며! 아무리 기숙학교라고 해도 할 건 다하고 살잖아?”

잇새로 씨근덕대는 쟝의 말에 세드릭은 멀쩡한 머리가 아파 오는 듯했다. 어쩌면 쟝의 품에서 나는 대마


특유의 냄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가까이 좀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러다가 지독한 냄새가 밸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날은 선약이 있어.”

다니엘라, 유리와의 노이에 미술관에서 만나기로 한날이었다. 하루 동안 휴일이었기에 둘에게 가장 좋은


날짜였던 것이다. 그러자 쟝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젠장! 미케가 또 지랄하겠구만…. 그래서, 언제 도대체 시간이 되는데?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마, 될


때까지 물어볼 거니까.”

쟝은 그렇게 말하고 히죽 웃었다. 동시에 복도를 지나치던 몇몇 학생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복도에 점점이
울렸다.
“뭐야, 왜 저래?”

“쟝이잖아. 또 저런다. 점심에 또 한 대 피웠나 보네.”

“세드릭이다.”

“어디? 아까 안 보이더니….”

거의 반협박 수준으로 나오는 쟝을 두고 세드릭도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도, 이


복도의 시선을 이끄는 것도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답을 뱉었다. 우선 이
상황을 탈피하는 게 먼저였다.

“다음 주 목요일. 어때.”

“다음 주 목요일….”

쟝이 세드릭의 대답을 듣고 따라 말하며 가까이했던 몸을 뒤로했다. 동시에 불쾌한 대마 냄새도 잠시


코끝을 벗어났다. 영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니 진짜 정상은 아니었나 보다. 엘리자베스에게 혹시나 쟝을
보면 피하라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쟝은 중얼중얼거리다가 흡족하게 웃었다.

“좋아. 목요일. 대신.”

또 남은 건가? 세드릭은 라틴어 수업실의 문을 열다가 쟝의 말에 들어가려던 것을 멈췄다.

“안 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간다고 했잖아.”
싱거운 말에 세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털면서 쟝을 스치고 라틴어 수업실로 들어갔다. 쟝은 억지로
조르고 졸라 못내 나온 대답이 기쁘기가 그지없는지 킬킬대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세드릭을 따라
들어갔다.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둘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세드릭, 그래서 다음 주 수요일에 어디 가는데?”

“알아서 뭐 하게?”

세드릭의 어조가 조금 빨라졌다. 일종의 물어보지 말라는 신호였지만 고장 난 군용 트럭 같은 약쟁이에게


그런 신호가 소용 있을 리가 없다. 쟝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뭐 어때.”

“…아주 지루한 곳.”

쟝의 입장에서는 아주 지루할 장소라, 세드릭은 부러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자 쟝의 추측이 따라붙었다.

“지루한 곳?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대학? 맞아?”

“…모르겠어.”

“쟝, 문은 좀 닫아주련?”

라틴어 수업 교실의 문이 닫히자 사람이 없던 복도의 하얀 벽 뒤에 가려져 있던 검은 구두 한 쌍이 뒤로


돌았다. 조용한 복도에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가 스쳤다.

“미술관….”
* * *

같은 날 저녁, 달렘 지구의 마이센가

포근한 느낌을 주는 녹색 벽지로 둘러싸인 다이닝 룸은 환하게 켜진 샹들리에의 반짝임으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빛냈다. 장인이 손수 깎은 수정이 벽면에 영롱하게 반사될 때, 길쭉한 다이닝 테이블 위의 하얀
도자기 플레이트에 얹어진 따끈한 음식들 사이로 잘 손질되어 새것처럼 반짝이는 은제 식기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두고 가장 다이닝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알버트가 한마디를 더했다.

“못 보던 식기인데.”

그러자 오른편에 앉은 앤이 뿌듯한 얼굴로 어필했다.

“어제 백화점에 갔더니 드레스덴에서 만든 식기가 있지 뭐예요. 부인들과 구경하다가 그만…. 하지만
예쁘지 않나요?”

“그렇군. 동독에서 물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런 것도 들어온 모양이야.”

알버트가 대사관에서 읽은 공문을 떠올리는 동안 엘리자베스의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냥 하얀 그릇인데.”

그리고 엘리자베스 옆에 앉은 앤이 그 소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세상에, 베스. 이 엄마는 네 눈이 저기 누워 있는 청어 눈은 아닌지 의심이 좀 되는구나.”

“큼.”

세드릭은 감자구이를 먹다가 목에 걸렸는지 켈룩거렸다. 그것을 두고 옆의 폴리나가 일어서서 물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여전히 기침을 참고 있는 세드릭은 손 인사로 감사를 대신했다. 그 모습에 알버트가
생각났다는 듯이 와인을 마시던 것을 멈췄다.

“그렇지, 세드릭.”

“…음, 네. 아버지.”

“그로벤 대령이 다음 주에 가족끼리 저녁이나 한번 하자고 하더구나. 그러고 보니 그 집 차남이랑 같은


학년이었지?”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저녁을 권유했다는 소리에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말인가요? 예.”

“맞아. 에드워드, 그랬지. 이제 기억나는군. 다음 주 수요일 저녁이니 다들 시간을 비워 놓았으면


하는데.”

다음 주 수요일이라는 말에 냅킨으로 입을 닦던 세드릭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렇지만 그것을 눈치챌 리가


없는 아버지 알버트는 와인을 마시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또 베를린에서 만날 줄이야. 당신도 그로벤 부인과 제법 친하지 않았소?”

“줄리아 말인가요? 물론이죠. 오늘도 같이 미테 지구의 백화점을 같이 갔는걸요. 여전히 생기발랄해서


보기 좋더군요. 벌써 막내가 고등수업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네요.”
“그 작은 아이가? 거참 세월 하나 빠르군.”

앤은 즐겁게 말하다가 은으로 만든 포크로 완두콩을 으깨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에 숙녀가 되어버렸던데 우리 베스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난 아직 초등교육이라고요.”

귀엽게 항의를 하는 것을 두고 알버트는 허허 웃었다.

“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세드릭도 금방금방 크지 않았소. 엘리자베스도 눈 깜짝할 사이에
철이 들겠지.”

“그럼요.”

세드릭도 동의하며 앤의 한숨을 막아보려 애를 썼다. 그에 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와인을 마셨다.

“아무래도 엘리자베스에게는 다음 주 저녁 식사를 위한 특훈이 필요하겠어요. 안심이 전혀 되지 않아.”

“뭐어-? 안 돼요!”

엘리자베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앤도 눈 사이를 좁히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 달 동안 간식은 금지하도록 하자.”


“…치사해요.”

“인생은 원래 치사한 법이란다, 엘리자베스.”

그렇게 왁자지껄하다면 왁자지껄한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거실에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폴리나는


앤을 따라서 트레이 위에 찻주전자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짜여진 붉은 톤의 카펫이 깔린 바닥에 엘리자베스는 엎드려 누워서 팔로 얼굴을 받친 채로 벽장 안에 있는
흑백 TV 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창 유행 중인 드라마였다. 세드릭과 알버트는 작은 원형의 테이블을 두고 각자의 안락소파에 파묻혀서


책과 신문 따위를 읽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 있는 벽난로가 딱, 따닥 소리를 내며 타오를 때, 그들의
테이블 위로 따뜻한 차 한 잔씩이 올려졌다. 찻잔 특유의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활자 속에서 헤엄치던 두
부자가 깨어났다.

“고마워요.”

“고맙네.”

찻잔과 같이 온 우유와 설탕 따위를 입맛대로 넣은 둘은 한 모금씩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학교생활은 좀 어떻니.”

“확실히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새로워요.”

세드릭의 무릎 위에는 〈역사란 무엇인가 – E. H. CARR〉라는 제목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지.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튼으로 돌아가도


괜찮단다. 베를린의 대사관 부속 학교도 나쁘지는 않지만…. 네가 좋아하는 승마도 할 수 없고, 아무래도
제한이 많으니까 말이다.”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말을 했다가는 바로 영국으로 보내줄 듯한 아버지 알버트의 분위기에 세드릭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면 말씀드릴게요.”

“그렇다면야…. 그나저나 그로벤 대령의 차남과는 반갑겠구나.”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먼저 온 에드워드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죠. 좋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에드워드는 세드릭이 같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이모저모로 챙겨주고 있었다.


각 수업 교사들의 성향 같은-주로 욕이 포함된- 것들이나, 주의해야 할 녀석들-쟝-같은. 세드릭의
편안한 표정에 아버지 알버트도 조금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무래도. 좋은 사람들이지. 그로벤 가문 사람들은….”

“저….”

그 표정에 세드릭은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문지르며 머뭇거렸다. 다음 주 수요일 저녁 식사가 생각난
탓이었다. 어차피 다니엘라의 약속은 점심 전이지만, 그래도, 시간의 자유를 두고 만나고 싶었다.

저녁까지 같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저런 아쉬움을 떠올리는 동안 알버트는 차를 마시다 말로 세드릭에게 곁눈질을 했다.

“흠? 뭔가 말할 거라도 있니?”


“아… 아뇨. 그냥 다음 주 저녁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는 건가 궁금해서요.”

“아아, 그거라면 그로벤 가에 가게 될 것 같구나.”

알버트의 대답에 세드릭은 멋쩍게 끄덕였다. 그가 가진 수요일의 시간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요….”

“어렸을 때를 빼면 그로벤 가에 가는 건 오랜만이겠구나.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커갈수록 좋은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알버트는 그 말을 다시 꺼내며 커텐이 쳐진 창문가를 향해 느른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도 찻잔에 남은 차를 마셨다. 좋은 사람들이라.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벽장 안의 TV 를 보고 있던 앤과 엘리자베스의 탄성이 나왔다.

“와아! 세상에!”

“이럴 줄 알았어! 저런 천하에 못된 놈 같으니!”

유모 폴리나까지 옹기종기 모여서 터키에서 가져온 쿠션을 바닥에 깔고 셋은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드릭과 알버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저녁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같은 시간 러시아 대사관 내 정보부

유리가 감청을 마치고 작성한 보고서를 율리아에게 내자 카키색 제복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율리아가 방긋
웃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유리.”

“율리아 너도.”

보고서를 넘기고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는 유리를 앞을 율리아의 손이 막았다. 허벅지에 손이 스치자


유리의 차가운 푸른 눈이 다시 율리아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율리아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덧붙였다.

“잠시만, 가기 전에 라스콜니코프 대령님에게 보고해줄래?”

“명령인가?”

“응.”

귀찮게. 유리는 바로 방향을 틀어서 대령의 사무실이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또 접대가
잡혀 있는 건가. 대령의 개인 사무실 앞에 도착해서 벨을 울리자 기다렸던 것처럼 문이 바로 열렸다.

환한 정보부 사무실에서 대령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자 취향인지는 몰라도 확연하게 어둑한 분위기로
변해서 눈이 침침했다. 유리가 문을 닫고 정면으로 고개를 향했다. 오랜지 색 벽지를 배경으로 책상
너머에 대령이 등 돌려서 앉아 있었다.

“유리입니다.”

그 말에 대령이 앉아 있는 의자가 빙글 돌았다. 그는 책상에 두 손을 올려두고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래.”

“앞선 계획이라도?”
“으음…. 비슷하지.”

그는 야릇한 표정으로 턱을 쓸며 즐거운 듯이 눈을 휘었다.

“뭐, 아마 조만간 네가 나갈 일이 있을 것 같긴 하구나.”

“예.”

역시나 접대 이야기였다.

“아직까지는 시작 단계라 네가 힘을 쓸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새로 들어온 영국


대사관 참사관의 아들과 만나고 있지 않던가?”

세드릭을 갑자기 언급하는 말에 유리의 목울대의 핏줄이 살짝 도드라졌다. 그렇지만 표정은 아무런 자극
없이 무표정했다.

“…예.”

“사이는 어떻지?”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라….”

대령은 책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 방향으로 의자를 돌렸다. 책 너머로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은 유리가
알 수 없는 생각을 꼬아내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참사관의 자식에게 관심을 두는 거지
…? 괜스레 유리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꼭 저런 표정 뒤에,
“영국 대사관 안에 빨간 끈이 하나 생겼는데 말이야.”

별스러운 짓을 하곤 했으니까.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나쁘지 않게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신가요.”

“그러니까 말이다.”

대령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느글거리는 눈빛을 담았다.

“이왕 나쁘지 않은 사이인 거, 더 좋은 사이가 되면 좋겠구나.”

* * *

다음 주 수요일 아침, 브란덴부르크 러시아 대사관 정보부 지하 벙커, 베를린

블라디미르는 휴일에 잡힌 당직 일정에 속으로 욕을 하며 정보부의 지하 벙커 문을 열었다. 가만히 앉아서


쓸데없는 서류를 보느니, 가볍게 사격 연습으로 몸이라도 풀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헐렁한 검은색의 스웨터와 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모직으로 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워커를 신은 발로 벙커의 문을 쾅, 걷어차서 열었다.

“…유리?”
휴일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벙커 안에는, 블라디미르의 눈을 달달하게 적셔주는 유리가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만남에 블라디미르는 짜증으로 구겨졌던 얼굴을 확 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요즘
공주님이 학교를 다니느라 얼굴 하나 보기가 귀하건만, 이게 웬 횡재람.

유리는 테이블 위에 있던 부품들을 조립하다가 블라디미르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탄창을 확인했다. 9 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유사시를 위한 거니까. 유리는 꺼냈던 탄창을 발터
PPK 의 개머리판에 죽, 넣으면서 허리 뒤에 매어둔 홀스터에 끼웠다.

그걸 본 블라디미르는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와서 유리를 죽 훑어보았다. 교복 차림도 아니고 깔끔한


자주색 스웨터에 검은 하이넥을 받쳐 입은 유리의 모습은 하얀 얼굴을 부각시키는 맛이 있었다.

“공주님, 어디가?”

“…외출.”

유리는 테이블에 있던 총탄과 총기 박스를 잘 정리해서 닫았다. 유리의 냉담한 태도에 블라디미르는
익숙한 듯 꼬치꼬치 캐물었다.

“오늘 휴일인데? 오늘 당직 아니잖아. 총까지 챙기고.”

“신경 좀 꺼.”

블라디미르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아 물론. 집요한 남자는 인기 없는 걸 알지. 그렇지만 우리 팀의 공주님이 어디로 행차하시는 것까지는


당직 요원으로서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무단 총기 유출이라고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대령이 명령한 일이야. 너랑은 상관없어.”


유리는 모직 바지의 밑단을 대충 걷어서 종아리 쪽에 있는 가터벨트에 탄창을 하나씩 끼웠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일어난 다음, 철제 의자에 대충 걸쳐둔 울 코트를 들어서 탁탁 털고 코트 소매에 팔을 차례로 끼워
넣었다.

블라디미르는 유리가 손을 대지 않은 다리 쪽의 바지 밑단을 워커 발끝에 걸쳐서 슥 올렸다. 까칠한


워커의 앞 굽이 유리의 종아리를 타고 긁었다.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에 둘러진 가터에는 아까의 탄창과는
다른 은색의 원통형 나이프가 잘 고정되어 있었다.

“흐음. 발리스틱 나이프까지? 누구 목 하나 따러 가나 보지?”

“호신용.”

유리는 발을 뒤로 탁 차면서 블라디미르의 발을 쳐냈다. 별일은 없겠지만, 버릇처럼 챙기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다. 안 그래도 스캔들로 인해서 예민한 시기이기도 하고. 유리의 차가운 대답에 블라디미르는
진한 색의 곱슬대는 금발을 쓸어올리면서 앉아 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침실용으로는 꽤 과한데. 엉덩이 한 번 만지다가는 바로 손 날라가겠어.”

“….”

“대령이 요즘 새로운 생각이 있다는 거 같은데, 그건가?”

자신이 등지고 있는 블라디미르가 넌지시 떠보는 말에 유리는 정리했던 총기 박스를 자신의 라커에 던져
넣고 라커 문을 소리 나게 탕, 닫았다.

“글쎄.”

유리는 모호함으로 그를 지나치려 했는데 그가 웃는 낯으로 지나가려던 유리의 팔을 잡았다. 지겨운 자식.
유리는 속으로 욕을 하며 블라디미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블라디미르의 빙글빙글 웃는 낯에는
무시할 수 없는 정욕이 묻어 있었다. 벙커의 천장에 달린 전등의 삼각 갓에서 퍼지는 검은 그림자 빛은 그
정욕을 유난히 부각시켰다.
“새로운 건 좋은데, 너무 바람 쐬고 다니진 마. 나도 남자라서 질투 나거든.”

“작작해.”

유리는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유리의 등 뒤에 대고 블라디미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진심인데.”

쾅, 하고 벙커의 문이 닫히며 블라디미르만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채로 남았다. 그는 곱슬진 금발


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너무 애태워도 힘들단 말이지.

“솔직하면 좀 좋아?”

뭐, 저렇게 튕기는 맛도 각별하지. 블라디미르는 달아오르는 하체를 무시하며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나저나 누굴 만나러 저렇게 다니는지.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로커에 있는 사격 연습용 기관총
부품 박스를 꺼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 저차하면 대충 정신없이 때려눕히고 모스크바로
데려가면 되니까.

그는 레고를 맞추는 어린애처럼 익숙하게 기관총 부품들을 끼워 넣으며 유리와의 미래를 상상했다.
블라디미르는 유리를 언제든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유리의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가기만 하면 평생을 자신의 저택에 처박혀 살 건데, 밖에서의 잠깐을 못 기다려줄 것도 없었으니까.
블라디미르는 대충 기관 소총 데그타료프를 어깨에 대고 과녁판으로 탕탕탕, 연사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제법 너그러운 남자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자유는 보장해 주잖아.”


어깨를 진동하는 총신의 자극은 하체의 뻐근함을 감추어주진 못했다. 그는 연기가 나는 총구를 대충
내려놓고 개판으로 조각난 과녁판과 금 하나 가지 않은 과녁판 쪽 벽을 대충 훑었다. 그렇다고 날뛰는 걸
봐줄 생각은 없지만…. 이번 임무가 끝나면, 슬슬 데려갈 준비를 해 볼까. 블라디미르는 옆에 굴러다니는
탄피를 발로 대충 쳐서 치우고 다시 총신을 들었다.

#chapter 15

* * *

점심시간 전, 노이에 미술관 앞, 베를린

세드릭은 미술관 입구에 서서 코트에 손을 넣었다 빼었다, 미술관 입구 벽에 몸을 기대었다 말았다,


하면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독일 국경일로 온갖 곳이 쉬는 가운데 새로 지어진 미술관 구경을 하러
온 인파로 미술관의 내부든 외부든, 혹은 연인이든 가족들이든 몰려와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입구로 가는 사람들은, 입구 쪽 벽에 서 있는 세드릭에게 한 번,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시선을 주곤 했다. 다들 옆에 짝이 있더라도 혹은 없다면 더더욱이, 준수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란
칙칙한 계절 가운데 더 빛나는 법이었다.

자신의 초조함에 빠져 그런 눈길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세드릭은 손목에 찬 산토스 시계의 판이


보이도록 코트의 소매를 걷었다가 말았다를 반복하며 하염없이 길가를 쳐다보았다.

“…오겠지?”

그는 오겠다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던 다니엘라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 표정으로
내심 불안감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불안감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올 거야. 온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위안을 삼으면서도 그는 오늘 하루 잡혀 있는 약속들을 떠올리니 그저 지나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호리호리한 검은 인영이 인파가 붐비는 미술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세드릭의 불안한 입가가 환희로 번졌다. 그는 얼른 계단을 내려와서 어둑한 인영에게 한걸음에
다가갔다.

“다니엘라!”

유리는 자신에게 순식간에 다가온 커다란 사람 그림자에 움칫, 하고 어깨를 떨었다. 이 감자 놈은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그래.”

“잘 왔어요. 아니, 일찍 왔네요. 천천히 와도 됐는데….”

“딱히. 휴일이고.”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집을 나선 세드릭이 할 말은 아녔다. 너 때문이잖아….

유리의 작은 원망의 원인은, 유리가 아침부터 감청하는 와중에 세드릭이 예상 시각보다 일찍 자신의 집을
떠나자 유리 또한 뒤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쫓아가는 이유에는 일종의 혹시나, 약속 장소 말고
다른 곳을 가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과 어차피 또 이상하게 들떠서 일찍 약속 장소에 있을 거라는
허탈감이 비례했다.

그리고 세드릭은 그 허탈감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일찍이 나와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 투명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린애만도 못한 인내심이라고 해야 할지.

심지어 유리에게도 오늘은 휴일인 데다가 세드릭의 약속 때문에 아무런 계획을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사관 정보부 로커에서 호신용 무기를 착용하고 오자마자 유리가 갈 곳은 세드릭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 외에는 없었다.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짧게 일축하자 세드릭은 부끄러운 듯, 목 뒤를 긁으며 안내했다.

“저, 춥죠? 얼른 들어가서 볼까요.”


“그래.”

둘은 들어가자마자 지하 쪽의 갤러리로 향했다. 그들은 외투 보관함에 두꺼운 겨울용 외투와 목도리들을


맡기고 나서 전시실로 향했다. 유리는 코트를 벗으면서 내심 둔부 위, 허리께에 있는 소총과 두 발목에
고정해둔 나이프와 총탄이 신경이 쓰여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이런, 깜빡했네. 괜히 착용했나.

평소 같으면 별 의식도 없었을 것을, 옆에 있는 사람이 유난히 신경을 몰리게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움직임에 신중을 더했다. 그렇게 들어간 전시실에는 저번 달에 본 미술관의 광경과 무척 달랐다. 확실히
전시가 바뀌었는지 작은 리플렛부터 시작해서 걸려 있는 회화 작품들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유리는
리플렛을 하나 들어서 대충 살폈다. 세드릭은 그 옆에서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며 옆에서 말을 더했다.

“영국 화가인데…. 관심 있어요?”

“아니, 처음 봐. 유명한가 보지?”

“네. 저도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하고…. 저희 집에도 세 점 정도 있어요. 나중에 관심 있으면 본가에


초대할게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외교관도 아닌 유리 자신이 자유롭게 연합국 영역에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걸 잘 아는 유리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그럼 네가 좋아하는 만큼 이 화가를 잘 알 테니까…. 이제 그 일에 관련해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래요. 그러기로 했죠.”

세드릭은 자연스럽게 나온 초대를 받아들이는 다니엘라의 대답에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키면서


다니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그것을 보고 눈썹 한쪽을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돈 달라는 건가?

“왜.”
“그, 사람이 많으니까…. 치일 거 같아서요. 괜찮다면….”

세드릭은 내심 부끄러운지 말을 하면서도 목을 두어 번 고르며 작게 속삭였다. 유리는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구경하러 온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전시실의 회화 액자들이 가려지도록 인파가 제법
메우고 있었다. 유리는 리플렛을 잡지 않은 손으로 세드릭의 손을 텁 잡아서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의 얼굴에 세드릭의 얼굴이 연하게 물들었다.

“아, 그.”

“어디로 가면 되지?”

“…이, 쪽이요.”

유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잡은 손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세드릭이 걸으면서 유리의 잡은 손을 살살


이끌었다.

“윌리엄 터너는 대체로 유화 작품이 많아요. 풍경을 주로 그리는 편이고…”

유리를 이끌고 미술관 지하로 들어온 세드릭은 관리자에게 출입 허가 서류를 보여주며 유리의 손을
당기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팔을 뻗은 채로 앞만 보고 설명했다. 유리와 세드릭이 관리자가 맞춰주는
금고형 창고의 비밀번호를 기다리는 동안 유리는 손을 잡지 않은 손에 들려 있는 리플렛을 보고 있었다.
세드릭은 살짝 곁눈질을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쑥스럽게 덧붙였다.

“영국에서 싣고 온 그림의 반은 이미 창고로 들어가 버려서, 좀 칙칙하겠지만…. 스캔들의 주인들이


보았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상관없어.”
아니, 사실 그게 더 나았다. 유리에게는 복작복작한 인파에 짜부라지느니, 차라리 사람 없는 칙칙한
창고에서 그 스캔들의 설명을 듣는 게 백배는 나았다. 일이 벌어질 거라면,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낫기도
하고. 무심한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은 살짝 웃었다.

가만 보면, 다니엘라는 까다롭게 굴 것 같은-뭔가 취향이 확고한-느낌을 풍기면서도 정작 무던한 편이라


의외라는 느낌을 주었다. 미술관 관리자가 금고형 창고를 열어주면서 세드릭에게 작은 키를 주었다.

“안에서 창고 문을 열 수 있는 키입니다. 창고에는 다른 작품들도 보관 중이니 부디, 취급을


조심해주시길.”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슈타트 씨.”

슈타트 씨라고 불린 관리자는 작게 찡긋 웃으며 열려 있는 창고 입구를 나섰다. 세드릭과 유리는 열려


있는 창고 문 안으로 들어갔고, 육중한 문은 두꺼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슈타트 씨라 불린 사내는 미술관 소장품 창고 문이 닫힌 소리를 듣고 허리 쪽에 매어둔 무전기를 빼서


들었다.

“목표물 잠입.”

사내가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는 빨간 불이 들어오며 걸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접수. 특이 사항?]

“애인과 동행 중.”

어린 놈의 새끼가…. 하여간 귀족 놈들이란. 슈타트는 귀족이라는 놈의 비행에 고개를 내저으며 무전기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확인. 15 분 후 작전 개시]

뭐, 그것도 오늘까지지만. 슈타트는 창고지기의 방으로 들어가서 입고 있던 평상복을 바로 벗었다. 옷


아래에는 검은색의 얇은 슈트가 있었다. 그는 방구석에 던져둔 더플백에서 탄창 띠를 매다가 곧바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읍, 읍….”

“아 그렇지. 미안, 미안. ”

창고지기의 책상이 분명할 자리에는 중년의 남자가 입에는 덕 테이프를 붙인 채, 손발이 마른 로프로
억세게 묶여 있는 상태였다. 사내는 숨이 막혀서 새빨개진 얼굴로 무언의 항의를 하는 ‘진짜’
창고지기에게 가슴 홀스터에 끼워진 권총을 빼서 바로 조준했다. 탕!

“내가, 조용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묶여 있던 남자의 머리 반이 날아가며 벽 뒤에는 검붉은 피와 뇌 파편이


강렬한 자국을 남겼다. 사내는 조준했던 권총을 다시 홀스터에 끼우면서 느릿한 어투로 혼잣말을 했다.

“협조 좀 부탁해?”

* * *

유리와 세드릭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로 된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걸 본 세드릭은 슈타트 씨가 준


키를 골라서 유리문 열쇠 입구에 넣었다. 유리문 너머로 이어진 유리 벽에는 유리 벽 너머의 온도와
습도가 적혀 있었다.

[18 도, 55%]

투명한 열쇠 구멍의 안이 열쇠 모양에 따라 움직이며 문이 열렸다. 둘이 문 너머로 들어가자 아까 창고 문


앞에서 느꼈던 지하 특유의 냉기가 좀 덜했다. 마지막 입구 같은 유리문 너머로는 회화 작품들이 걸려진
랙이 마치 도서관의 서가처럼 촘촘히 늘어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랙과 중앙의 텅 빈 공간을 둘러싸고서
지하로 층이 세 개나 더 있었다. 거대한 미술관에 걸맞은 창고였다. 세드릭은 들어온 창고를 살피는
유리를 두고 말했다.

“이번 전시 품은 모두 지하 2 층에 있다고 해요.”

“꽤… 크군.”

“이전에 있는 미술관들이 작아서, 관리가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런가….”

둘이서 나선형으로 된 복도를 걷는 동안, 세드릭은 잡고 있는 손의 신경을 죽여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인파를 뚫고 왔으니, 손을 놓을 법도 한데 다니엘라는 정말 신경이 하나도 쓰이지 않는지
여전히 세드릭의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숨을 살살 내쉬며 곁눈질을 하면서
물어보았다.

“그, 좋아하는 화가나… 작품 있어요?”

“딱히. 그런 거 잘 몰라.”

실로, 유리는 쉬는 날에 미술관을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작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물감


덩어리를 분석하고 분해하는 고상한 취미는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좋으면 그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고
별로다 싶으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을 찾으러 이어진 갤러리를 돌아다닐 뿐.

그저 앉아서 무언가를 가만히 쳐다볼 대상은 시간을 흘리다 못해 죽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금세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유리의 말에 세드릭은 진열된 랙 한 곳에 유리를 데려갔다.

“그 대사 부인과 영사는 이번 전시 중 세 개의 그림 앞에서 늘 서성거리곤 했다고 직원에게 들었어요.


우선….”

그는 멈춘 랙을 복도 쪽으로 죽, 밀어서 꺼냈다. 그러자 경사로 위에 바로 커다란 회화 작품이 랙에 걸린


채로 그들 앞에 드러났다.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회화는 이 세상에 없는 낙원 같은 장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호수 위에 드리워진 정원과 호수 근처를 돌아다니는 인영들. 그 모습에 유리는 세드릭의 설명을
기다렸다.

“제목은 ‘여왕 마브의 동굴’이라고 해요. 여왕 마브는 셰익스피어 극에 나오는 요정을 의미하는데….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소망을 꿈으로 보여준다고 하죠.”

“비밀스러운 꿈….”

유리는 세드릭의 낭만적인 설명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마, 그들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던 소망.

“어때요?”

“…글쎄.”

시큰둥한 반응에 세드릭은 관심을 전환해보려고 애썼다. 관심을 보인 거에 비해 반응이 영 시원찮았던


탓이다.

“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까요?”

“그래.”
유리 취향에 맞는 그림은 아니라 그들은 방금 보았던 랙을 집어넣고 금방 다음 작품이 있는 랙으로
넘어갔다. 그다음 작품 랙으로 넘어갔을 때는, 좀 더 강렬한 황금빛 너울이 캔버스에 춤추고 있었다.
중앙에 그려진 인영을 유리가 바라보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여전하게 쥔 채로 어물어물, 설명했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대천사 미카엘이고…. 마지막 심판 장면을 그린 거라고 하더군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홀로페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를 그린 거라 하고. 아, 이건 화가를 낮게 보던 비평가들에 대한
표현이라고들….”

덜컹, 둘밖에 없을 창고치고는 요란한 소리가 중앙의 빈 공간을 타고 울렸다. 그 소리에 유리가 기민하게
소리의 근원을 쫓아서 고개를 돌렸다. 돌린 시야에는 뭐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 있기만 했다. 유리는
세드릭과 잡았던 손을 떼고 스웨터와 그 안의 셔츠, 그리고 그 안의 맨살에 채워둔 소총의 총신에 손을
올려둔 상태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세드릭에게 말했다.

“여기, 우리만 들어온 거 맞아?”

세드릭은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얼결에 뿌리침 당한 손을 등 뒤로 감추면서 얼떨떨한 얼굴로 끄덕였다.

“아마…. 랙에 걸린 그림이 떨어졌나 봐요.”

아니, 그건 단순히 커다란 그림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녔다. 유리 같이 훈련된 사람이라면, 익히 듣고


들은 소리였다. 두터운 워커가, 바닥을 울리는, 그런 소리. 유리의 예민한 반응에 세드릭은 유리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까요?”


“아니. 넌 거기 들어가 있어.”

유리는 자신의 어깨를 잡았던 세드릭을 랙 안쪽으로 밀고서 랙의 끝쪽에 몸을 숨겼다. 둘밖에 없는 곳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리,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공간. 유리의 예민한 촉이 팽팽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여기 있다.

“왜, 무슨….”

“쉿.”

세드릭은 자신의 가슴팍을 힘차게 밀면서 랙 안쪽으로 넣어버리고 랙 끝쪽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나선형
계단을 살피는 유리의 모습에 입을 작게 벌린 채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유리에게 바싹 다가갔다.

“잠시만요,”

“누가 있어.”

유리는 시선을 여전히 고정한 채로, 허리 뒤에 숨겨둔 발터 PPK 를 꺼냈다. 그늘진 랙 사이에서도
선연하게 보이는 총신의 모습에 세드릭의 눈이 멈췄다. 그동안 유리의 눈은 기민하게 사방을 살폈다.

어디지?

소리는 분명 이 후방의 열 개 남짓한 랙 사이에서 들렸다. 그렇지만 그들이 들은 소리 이후의 경사로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세드릭은 다니엘라의 손에 쥐어진 검은 총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는 채로
들었다. 탕!

“다니엘라!”
세드릭의 놀란 외침에 유리는 랙 안쪽으로 가서 세드릭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젠장, 누군가 붙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지금이라니. 같은 연합국일지, 아니면…. 유리는 자신보다 키가 좀 더 큰 세드릭을
살짝 치켜보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마. 구멍 뚫린 치즈처럼 인생 마감하고 싶지 않으면.”

“….”

세드릭의 눈이 혼란스러움으로 떨렸다. 이래서 곱게 자란 놈들은…. 유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덧붙였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안 그러다가는 우리 둘 다 여기서 저기 있는 미이라처럼 박제될 거니까.”

“….”

세드릭의 고개가 끄덕, 하고 작게 기울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도 상황이지만 새삼스러운 다니엘라의


박력에 세드릭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유리가 세드릭의 입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랙의 끝쪽에서 등을 지고 서서 권총을 쥔 손을 얼굴 쪽으로


올렸다. 그러자 경사로에서 조용한 공기를 울리는 파공음이 탕탕, 하고 매섭게 날라왔다. 유리는 살짝
내밀었던 몸을 다시 랙 쪽으로 사리다가 같이 잔뜩 움츠린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에 유리가 그 검은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정말 귀찮은 놈이야.”

내가 어쩌다 이런 놈이랑 만나게 됐는지…. 유리는 속으로 한탄하며 발터 PPK 의 총신을 꽉 쥐었다.

탕, 탕탕탕! 쉴새 없이 연발되는 총탄 세례에 유리와 세드릭이 숨어 있던 그림의 랙이 형편없이 반파되고


말았다. 값을 매기기 어려운 유화 작품이 산산이 찢겨나가는 광경에 세드릭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아니, 사실상 총알이 귀를 먹먹하게 때리는 지금의 상황은 누가 겪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도대체…. 점점 좁혀오는 총탄을 피할 생각도 없이 멍하니 떨리는 눈동자로 유리 자신을 바라보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세드릭을 급하게 안고 랙의 중간 정도에 와서 어깨를 흔들었다.

“너,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가 죽고 싶은 거야?”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보면 모르겠어? 너를 노리는 놈들의 짓이잖아.”

유리의 짤막한 대답에 세드릭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저를… 요?”

“넌, 영국 대사관 외교부의 요직을 가진 아버지가 있잖아. 저 미친 새끼….”

미술관의 지하 창고의 그림을 다 박살 낼 기세로 기관총을 쏴대는 상대를 향해 유리는 욕을 뱉으며 반대로
위협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소총과 기관총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이라서 큰 효과는 없었다.

“그, 렇지만, 아버지는 외교 전략 쪽 부서가 아니라서…. 이런 일에 관련이….”

“나이에 맞게 순수한 건 칭찬해주겠는데, 지금은 아니야.”

유리는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잠시 천장 쪽을 살피다가 총탄이 날아다니는 나선형의 복도를 보고


말했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하지만 보나 마나. 유리는 자신의 스웨터를 살려줄 동아줄처럼
잡은 세드릭의 떨리는 손을 보고 다시 눈을 맞췄다. 검은 눈은 전과 같지 않고 혼란으로 흐려져 있었다.
이런 일을 겪었을 리가 없다.

곱게,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니까. 그럴 바엔, 훈련이라도 실컷 받은 유리 자신이 미끼가 되는 게 낫다.


몸 하나 부러지더라도 생존확률은 더 높다.

내가 다치는 것과 저 녀석이 반죽음이 되는 것.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기관총을 든 사람은 이제야 탄창을 다 썼는지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 같이 쏟아지던 총알 세례가


멈췄다. 유리는 둘이 서 있는 자리 외에 이제는 남아나지 않은 랙을 살피면서 세드릭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잘 들어. 다시 설명 안 해. 우리 둘이서 지금 쌓여 있는 랙을 발로 차서 밀어뜨릴 거야. 이게 넘어가는
동안 넌 아래쪽으로 뛰어. 내가 저 녀석을 상대할 테니까. 알겠어? 하나 둘 셋 하면 하는 거야. 하나,”

“잠시만요, 다니엘라. 그럼 당신은요?”

“내가 말했지.”

유리는 참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세드릭을 보았다. 유리의 손에 들린 총이 천장을 향했다.

“의심하라고.”

탕!

그 소리와 함께 쥐가 파먹은 듯 유화의 파편이 남은 랙에 다시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유리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큰 세드릭의 팔을 질질 끌어서 그들의 앞에 있는 랙으로 이끌었다.

“그게, 무슨….”

유리가 워커를 신은 발을 올리자 세드릭도 뒤이어 어색하게 발을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며 말없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언제까지 이름 그렇게 부를래?”

셋. 둘의 다리가 비교적 멀쩡한 랙으로 힘차게 뻗었고, 흔들리며 쓰러지는 랙이 그 뒤에 랙을 덮치고, 또


그 뒤를, 또 그 뒤를, 연속적으로 덮치며 쓰러지면서 마치 도미노같은 행렬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총탄이 점점 멎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가깝게 마주친 파란 눈에 작은 이채를 잡아내는 순간 작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름? 이름이
…. 유리는 자신의 발목에 채워두었던 발리스틱 나이프를 얼른 꺼내서 자신을 잡고 있는 세드릭의 손을
떼서 그 손 안에 억지로 떠넘겼다.

“뛰다가 누구 나오면 버튼 눌러. 어서, 가!”

“하지만, 저기.”

“두 번 말 안 해!”

유리는 여전히 쓰러지는 랙의 도미노 행렬 앞으로 세드릭의 등을 떠밀고 총탄이 멎은 복도로 나와서
사격을 가했다. 탕탕, 그 모습에 세드릭은 우선 유리가 말한 대로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들리는 정신
없이 뛰어가는 소리에 유리는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멀쩡한 반대편 랙 쪽으로 숨은 미친놈의 정체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짐작은 들지 않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마주하는 순간, 굉장히 기분이
나쁠 거라는 것.

탕탕, 탕!

멀쩡히 늘어진 랙 사이로 살짝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를 보자마자 유리는 인정 사정할 거 없이 총구를


겨눴다. 짤랑, 천천히 다가가는 유리의 발치에 황동 빛 탄피가 굴러떨어졌다. 유리는 여전히 사격 자세를
유지한 채 무거운 워커로 소리 없이 걸었다. 랙 사이로 걸걸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평범한 애인이 아니었나.”

“소속을 밝혀.”

“그런 거 없는데.”

철컥. 랙 사이로 들리는 육중한 총기 소리에 유리는 몸을 낮추고 멈췄다. 독일어 억양이 외국인치고는
제법 깔끔했다. 용병인가? 궁금함을 풀어주려는 듯, 랙 사이에서 투박한 발걸음이 스륵, 나왔다.
“그러는 넌 소속이 있나 보지? 응?”

총구를 바닥으로 내려둔 곰 같은 덩치의 사내는 이리저리 뻗친 짧은 갈색 머리를 긁으며 입술 사이에 문


담배를 까딱거리면서 유리에게 능글맞게 웃었다. 갈색 머리, 초록 눈…. 전형적인 코카시안. 유리의
머리에서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는 용병들의 프로필 사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긴 다 너같이 예쁜이들만 있나?”

탕, 사내가 물고 있는 담배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등 뒤에 있는 랙에 꽂혔다. 사내는 눈도 까딱하지


않고 흥미롭게 유리에게 고정했다.

“고정하시지. 너 같은 유능한 애인이 붙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나이 들어서 그런가 요즘은 쉬운 일이


아니면 나도 내키지 않거든.”

“누가 시켰지?”

“야하, 요즘 살벌하더라? 순진한 도련님 하나 죽여달라고 다섯 장 쥐여주고. 근데 그 도련님, 정말 뭐가


있긴 있나 봐? 이렇게 든든한 보험도 하나 두고.”

사내는 과장이라도 하듯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그걸 보는 유리는 서 있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연합국인가?”

“아, 내가 산골에 살아서 그런 걸 잘 몰라. 새파랗게 어린놈이라는 것만 알지.”

알려줄 생각이 없음이 역력하게 보이는 용병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유리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매섭기 짝이 없는 유리의 태도에 사내는 허리에 손을 대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라니까. 의심이 많은 애인일세. 그러면 남자친구가 피곤해할 텐데.”

“….”

탕.

사내의 가랑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총알의 매서움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말해도 모를 텐데….”

“누가 사주했는지 말해.”

“오, 그건 우리 예쁜이가 부탁해도 들어줄 수가 없지.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어?”

이 미친 새끼가…. 유난히 거슬리는 호칭에 유리의 눈썹 사이가 짜부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내는
마치 앨리스를 놓친 5 월 토끼처럼 발을 바쁘게 굴렀다.

“으음, 이제 곧 교대 시간이라…. 난 가봐야겠어. 이미 틀려먹은 거, 얼른 도망쳐야 할 시간이거든.”

“쏴버리기 전에 말해.”

유리의 냉철한 말에 남자는 하하, 하고 웃었다. 총알이 언제 날라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인데도
태연자약한 그 모습은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경험한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에이, 너무하네. 이미 다 썼잖아, 그 총?”

“…대가리에 총알이 박혀야 그 입을 열건가.”


유리가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에도 남자는 미소를 은은하게 머금은 채로 말했다.

“뭐, 덕분에 시골에만 박혀 있던 몸을 좀 풀었으니까 서비스로 알려줄까. 난 열 번째야.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네. 이미 기차를 놓쳤어. 덕분에 세 정거장이나 이 꼴로 걸어가야 한다고. 이해 좀 부탁해? 그럼,
이만!”

“뭐? 기다려,”

유리가 사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사내는 재빨리 쥐고 있던 기관총을 유리의 등 뒤에 겨눴다. 그러자 깡,
하고 쇳소리가 파열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기계적인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유리의 시선이 천장에
머물렀다가 신속하게 돌아오는데 또다시 탕, 하는 소리가 그 짧은 순간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유리의
팔에 뜨뜻한 아픔이 퍼졌다.

“윽!”

“아, 미안미안.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너네 둘이 온전히 걸어 나가면 내 신용이 위태로워져서 말이야.


적어도 살로메의 팔은 꺾고 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내가 좀 체면이 살지. 안 그래?”

유리의 스웨터 소매 안쪽에서 핏줄기가 주르륵 흐르며 총을 쥐고 있던 두 손 중 하나를 위태롭게 했다.


덜덜 떨리는 왼팔의 감각에도 불구하고 총을 놓지 않는 유리의 모습에 남자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뒷걸음질을 치며 기관총을 천장으로 향했다. 탕, 탕, 그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탄피가 튀었다.

“오, 역시. 살로메야. 유명인사를 만나서 아주 반가웠어. 다음엔 사인이라도 해주길 바라.”

그가 그렇게 말하고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제법 웃긴지 킥킥 웃으며 천장에서 쏟아지는 화재용


스프링클러의 뿌려지는 물벼락을 맞았다.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방용 살수를 맞으며 푹
젖어가는 유리는 비교적 멀쩡한 손으로 팔죽지의 상처 부위를 지혈하면서 총구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젠장.”

그러나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로 조준을 한 탓인가, 팔의 상처로 인한 필연적인 아픔으로 사내를 향해


눈을 한 번 찡그리고 뜨자 방금 전만 해도 그 자리에 서 있던 곰 같은 사내가 사라져 있었다. 쏴아아,
하고 천장에서 쉴새 없이 쏟아지는 살수 용수는 조용한 지하를 메우며 발걸음 소리와 그간의 흔적을
바닥으로 쓸려 보냈다.

유리는 방금 전에 쏜 총알을 마지막으로 비어버린 탄창을 가진 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그 위를


바로 워커로 팍팍 밟아서 산산조각을 낸 후에 푹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는 어깨 길이의 금발 머리를 넘겼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그칠 줄 모르는 천장의 물이 얼굴선을 타고 듬뿍 적셨다.

-새파랗게 어린놈이라는 것만 알지.-

-난 열 번째야.-

자신이 아는 다국적 용병 중에는 저런 얼굴이 없었다. 그리고 용병을 고용했다는 것은 결국 뒤를 밟히기


싫은 놈이라는 건데…. 유리는 얼굴을 때리는 살수 용수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팔에 스며드는 고통을 다른
손으로 누르며 곰 같은 사내가 두고 간 기관총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보기 위해 무릎을 바닥에 굽히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데그타료프….’

블라디미르가 자주 쓰는 총이었다. 다만 길거리에서 요원이 쓸만한 총은 아니지만 말이다. 러시아 총을


쓰는 용병이지만, 동구권 놈은 아니라니. 나라 하나도 짐작 가지 않던 처음 보는 용병은 제가 느끼기에도
제법 노련한 놈이었다.

흔적 남을까 스프링클러를 터뜨리고 가는 솜씨 하며, 몸놀림도 빨랐고. 유리는 빠르게 이름 모를 용병의


정체를 추측하며 몸을 일으켰다. 비교적 멀쩡한 랙 사이에서 일어난 유리의 앞에는 랙에 걸린 회화가
보였다.

태양 빛을 받는 옛 성곽 위로 불길한 빛을 띠는 검은 구름이 삼킬 듯이 밀려오고, 성곽의 열린 문으로부터


창백하게 늘어진 시체들을 붙잡고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이었다. 유리의 눈앞에 있는 압도적인 분위기의
그림은 아까 전 세드릭과 감상하던 편안한 분위기의 그림과 달리 강렬하게 유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천장에서 뿌려지는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조금 잦아들 무렵, 찰박찰박하고 물이 찬 바닥을 헤치고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유리는 깊은 속눈썹 위로 젖어오는 물을 헤치며 다가오는
발걸음의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주인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의 랙에
꽂혀진 그림의 정보가 보였다.

〈애굽의 열 번째 재앙,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 1802〉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부터 가축의 첫 새끼까지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음이라-

“…다니엘라?”

이윽고 도착한 세드릭의 젖은 발밑으로 쉬이 섞여들지 않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재앙이었다.

* * *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피할 새도 없이 몸으로 받아내는 세드릭은 못내 혼란스러운 듯, 유리의


앞에 섰다.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으로 천장의 전등이 반쯤 부서지는 바람에 불이 들어왔다 간간이 지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빛을 머금는 세드릭의 동공은 서서히 수축하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유리는 이 난감한
상황에 내리는 물줄기들로 푹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한숨을 푹 쉬며 쓰린 입을 혀로 잠시 축였다. 유리의 그 몸짓에 세드릭의 시선이 유리의 손을 따라가다가


이윽고 손등을 타고 실낱처럼 흐르는 핏줄기를 발견하고 절로 손이 나갔다.

“너….”

“다쳤어요?”
“읏, 손 떼.”

용병의 총에 맞은 팔을 잡히자마자 탄식을 내뱉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게
도대체 무슨…. 여전히 피를 흘리는 팔을 잡고 있는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본 유리는 아픈 팔을 틀어서
세드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예요? 아니, 어서 병원을 가요! 총에 맞은 건가요?”

“내가 말했지. 여긴 위험하다고. 여긴 네가 다니던 시골 바닥 학교가 아니야.”

천천히 뒤를 돌아서 나선형의 복도를 걷는 유리의 뒤에 세드릭이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금세 뒤따라


붙었다. 세드릭의 손 마디마디 부근에는 붉은 와인 같은 핏자국이 쏟아지는 물줄기에도 쉽사리 흐려지지
않고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유리는 걷다가 말고 세드릭에게 뒤돌아섰다.

“….”

“이럴 줄 알고 나에게 가라고 그런 거예요?”

지금, 내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닌데. 세드릭의 눈은 다른 온도의 물줄기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점점


멎어 드는 이 차가운 살수 용수와는 다른 물기에 유리의 눈이 복잡하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자신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아주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떻게 넘어갔다지만, 이다음은?

-난 열 번째야.-

용병의 말을 떠올리는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열 번째라면 도대체 이다음에는 몇 번이 오는 것일까,


아니면 몇 번이라도 오겠다는 걸까?
“다니엘라?”

이 녀석이, 죽을 때까지?

이제는 차갑게 느껴지는 피가 무딘 감각의 손끝으로 방울방울지며 지면으로 톡 톡 터지듯이 떨어지는 것을


보던 유리는 고장 난 전등을 등진 채로 서 있는 세드릭에게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그리고 그렇게 그만 좀 불러. 그거 내 이름 아니니까.”

유리의 폭탄 같은 말에 세드릭의 얼굴이 더욱이 혼란스러움으로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네?”

* * *

“이렇게요?”

“아니, 좀 더 조여 봐.”

“그러면 아플 텐데요…. 그보다 저,”

“뭐가 문제야?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아니, 그게 그…. 살이 보여서요. 저 말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게….”

머뭇거리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그제야 짐짓 유리의 눈치를 보며 검은 눈을 이리저리 불안하게 돌리는
세드릭을 이해했다. 맞다. 이 녀석 아직 나를 여자로 알고 있지.
“너랑은 정말 한두 가지 잘못된 게 아니야….”

한숨을 푹 쉬는 유리를 두고 세드릭은 은은하게 얼굴이 빨개진 채로 헛기침을 했다. 다니엘라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고 말았던 걸까. 그렇지만 눈에 확 보이는 저 젖은 셔츠 너머의 살결이…. 이런, 안 되지,
안 돼. 세드릭은 스멀스멀 퍼지는 상상을 한 겹 접어두고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은근한 불쾌함이 퍼진 유리의 목소리에 소매를 다 걷어 올린 세드릭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뻗어서 유리의


다친 팔을 손끝으로 더듬어갔다.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말하는 꼴이란. 소중한 감자를 찾는 두더지랑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튼, 이제야


도와주겠다는 세드릭의 말에 유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명령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요?”

“아니, 더 위로…. 그냥 눈 뜨고 하면 안 되겠어?”


유리의 한탄이 섞인 말에도 세드릭은 고집을 꺾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숙녀의 벗은 몸을 쳐다보는 신사는….”

환장하겠군. 유리는 점점 지체되는 시간에 눈알을 천장으로 굴리다가 결국 세드릭의 더듬거리는-어떻게


보면 더 기분이 요상스러운- 손을 턱 잡아서 자신의 가슴팍에 올렸다.

“다니엘라? 지금 무슨, 아니, 어디다가….”

축축하게 젖은 천 위로 느껴지는 온기와 감촉에 세드릭은 감은 눈을 찡그리면서 손을 빼내려고 힘을


썼지만 영 쉽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유리 또한 같은 남자였고, 훈련받은 요원이었으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다니엘라는 힘이 세구나. 단순하게 생각하던 세드릭의 생각을 깨트린 것은 그의 닿은 손바닥에
조금씩 쿵쿵 울리는 리듬이었다.

쿵쿵? 이게 뭐지?

눈을 감은 세드릭의 귓가에 아스라이 울리는 스스로의 고동 소리에 입을 열려는 순간, 유리는 덤덤한
말투로 세드릭에게 대답했다.

“내 가슴.”

“아, 그렇군…. 네? 가슴이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떠버린 세드릭에게는 느른하게 웃는 사자와 같은 유리가 움찔대는 세드릭의 손을


여전히 자신의 심장 위에 얹어 놓은 채였다. 이쯤이면, 알아차리겠지? 얼마나 얼간이 같은 짓을 했는지
알아….

“지, 지, 지금 무슨 짓을 하, 하, 하! 하지 말아요!”
…차리지 못하는구나.

“하아….”

이튼 학년 수석이라며. 유리는 보고서에서 읽은 세드릭의 성적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눈앞에서


시뻘건 토마토 같은 세드릭이 혹시 동명이인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외간 남자에게 이, 이러면 안 돼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많아요, 다니엘라!”

“남자라고.”

“그러니까요! 남자에게 이러면 착각한단 말이에….”

유리는 천장을 향해 다시 눈알을 굴렸다가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남자라고.”

이 멍청아.

#chapter 16

* * *
“…네?”

세드릭의 멍한 눈이 유리의 얼굴에 한 번, 그리고 유리의 가슴에 닿은 자신의 손을 한 번, 그러다 다시


얼굴을 한 번.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여자로 알 거야? 기분 나쁘니까 그만둬.”

“남, 남, 남자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빨리 팔에 이거나 묶어. 내가 과다출혈로 죽는 걸 원하지 않으면.”

“….”

“이봐,”

유리는 여전히 자신의 젖은 셔츠 가슴팍에 손을 대고 있는 세드릭을 불렀다. 그러자 세드릭의 눈이 잘게


흔들리며 유리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정말… 남자예요?”

“왜. 아래도 보여줘?”

짐짓 그러겠노라고 일어서려는 유리를 두고 세드릭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아뇨! 아니,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빨리 묶어.”

“….”
세드릭은 몇 번 손을 들었다 말았다 하다가 결국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유리의 팔뚝에 커다란 손을
살짝 올려두었다. 힘줄이 제법 푸르게 난 손등이 제 셔츠 자락을 잡은 것을 본 유리가 픽 웃었다. 삼류
코미디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상황이람. 뭐, 그래도 지금에야 말해서 다행인가? 어이가 없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유리는 세드릭에게 명령했다.

“그렇게 하면 풀려. 더, 쎄게.”

“…아, 네.”

세드릭은 유리의 차가운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투른 손길에 유리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더, 더, 더.”

“하지만…. 정말로요?”

뭐가 문제인지 자꾸 머뭇거리는 세드릭에게 유리는 짜증이 깃든 목소리로 일갈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그게…. 정말 이런 걸로 괜찮은 거예요? 그, 여자, 가 아니어도 이런 상처는 병원이 낫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병원을 가자는 세드릭의 말에 유리는 이 멍청한 감자 같은 세드릭을 구두 굽으로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대답했다.
“하라면 좀 해. 너 말대로 난 손 한 번 대면 부서질 거 같은 여자가 아니니까.”

“….”

서서히 조여들던 셔츠가 곧내 스스슥 대는 천 특유의 스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작게 신음했다.

“아, 그래. 그 정도로.”

“…이 정도면 되나요?”

미술품 창고 앞의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은 마찬가지로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유리의 찢어진 셔츠 소매를 매듭지며 지혈을 했다. 여전히 걱정스러움을 띠는 검은 눈에 유리는
시선을 피하며 대충 일어서며 남은 셔츠 소매를 반대쪽 어깨에 걸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간이 깁스를 한
환자 같았다.

“곧 베를린 자치경비대가 올 거야. 그 전에 얼른 찾아봐야 해.”

“찾는다고요? 뭘요? 다쳤는데 어서 병원에 가야죠!”

“오늘은 내가 있었으니까, 넘긴 걸지도 몰라.”

“….”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쩌려고?”

“당연히 대사관에 우선 보고를 해서, 조사를….”

검은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 세드릭을 두고 유리는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마냥 하하, 하고 웃었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너무나도 정석적인 대답을 할 줄은 대충 알았지만, 그걸 직접 듣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유리가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세드릭은 멍하니 그 시리도록 하얀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늘 예쁜 얼굴이다, 생각은 했지만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

“미안,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망울을 막 터트린 봄꽃과도 같았다. 다니엘라는, 아니, 이 사람은…. 남자인데. 세드릭의 눈은 차마


두기 어려운 가슴팍으로 향했다가 웃음을 잔잔히 머금고 있는 유리에게 향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런 일이 있는다면,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해서 수사를 요청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오늘 일은 내일 신문에 나오지 않을 거야. 나오더라도 아주 작게 흘러가겠지.”

“그럴 리가요, 지금 이 많은 미술품이 이상한 사람에게 파괴당했는데….”

“정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내일 신문을 확인해 봐.”

이런 일이 뭐 한두 번이던가. 유리는 자기가 참여했었던 앞선 사건들 너머로 평온한 베를린의 길거리가


지독하게도 괴리감이 들어 하루 종일 티에르가르텐 벤치에 앉아 있던 날들을 생각했다. 세드릭은 아직까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듯 유리에게 되물었다.

“…베를린은 이런 일이 일상인가요?”

“그럼, 평온할 줄 알았던 거야? 네가 보는 책 속의 세상처럼?”

유리는 셔츠로 만든 간이 깁스에 걸쳐진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감각을 되살렸다. 그러다가 이내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복도를 성큼성큼 헤쳐나가는 발걸음에 세드릭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서서 유리를 따라갔다.

“…난…. 잠시만요, 어디 가요?”

“집에 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어디를요? 설마 지금 그 상태로 혼자 가려는 건 아니죠?”


“넌 도움이 안 되니까.”

총을 쏠 줄을 알겠나, 나이프로 숨통을 끊어 놓을 줄을 알겠나…. 허우대만 큰 녀석은 짐만 될 뿐이라며


냉정하게 말하는 유리의 태도에 세드릭은 허가 찔린 듯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마음을 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같이 가요.”

“뭐?”

“내 일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가야겠어요.”

“…마음대로 해. 죽어도 난 책임 못 져.”

유리는 못내 말해놓고도 사실 불안했다. 복도의 끝에 혹시….

“괜찮아요. 사실 베를린에 올 때 생명 담보 보험을 잔뜩 들어놓고 왔거든요. 제가 죽으면 베스의


지참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참도 기뻐하겠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영국 놈이군. 유머가 아주 형편없어.”

저리 생각 없이 허허실실 웃는 세드릭, 그를 노리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 * *

“내가 준 나이프 이리 줘. 안 썼지?”


유리가 멀쩡한 손을 세드릭에게 내밀자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썼어요. 하지만 주지 않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유리는 복도를 걷다 말고 세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세드릭은 굳은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유리의 앞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다쳤잖아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마음대로 해.”

유리는 지는 싸움에 뛰어드는 가학적인 취미가 없었기에 빨리 포기하고 복도에 나 있는 문에 달린 명패를


훑었다. 보일러실, 전등…. 창고 사무실. 여기다. 유리는 아까 세드릭과 자신을 창고로 들어가게 해준
인력의 사무실 문 옆의 벽에 붙었다.

세드릭은 두어 걸음 더 걸어갔다가 따라오지 않는 유리의 발걸음에 뒤늦게 몸을 돌려서 유리의 옆에 서서


벽에 몸을 붙였다. 유리는 옆에 있는 세드릭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속삭였다.

“여기 있어.”

“같이 가요.”

“너가 다치면 걸리적거려. 신경 쓰이게 하지 마.”

“그렇지만….”

세드릭이 항변을 하기도 전에 유리는 발로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박찼다. 요원으로서 훈련받은 덕택인지,


지하 복도에 있던 사무실의 문은 형편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에 세드릭은 입을 살짝 벌리고 유리의
뒤에 서 있다가 유리가 사무실 안으로 잽싸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만류했다.
“그,”

“죽었군.”

유리는 사무실 구석에 두개골이 사정없이 부서진 -진짜 창고지기일 게 분명한- 사람의 흔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세드릭은 뒤늦게 유리의 뒤에 따라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유리는 시신에 가까이 가서 흔적을 살피다가 연노랑색 콘크리트 벽에 박힌 총탄 자국을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정체 모를 그 용병이 쓰던, 데그타료프와 같은 회사에서 나온 총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리고 누가….


유리가 아는 바로는, 러시아는 아녔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 있으니 고위급 인사를 이렇게 대놓고 노리는
짓을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제가 소위 말하는 몸이 편안한-접대-쪽으로 주로 간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작전의 실행과 과정을 더 자세하게 알았다.

심지어 대령이 친분을 가지라고 하다못해 회유하라고 노리는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러기엔
아직, 세드릭은 쓸만한 패였다. 그 무엇도 모르고 때 묻지 않아서 오염시키기 아주 쉬운…. 유리는
그렇게 생각을 마치며 세드릭이 있을 뒤로 몸을 틀었다.

“너, 어디 원한이라도….”

“욱, 우욱….”

원한이라도 사고 베를린에 온 것인가 물어보던 유리는 벽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뭐 하는….

“너, 왜….”

“욱…. 그, 피….”

피? 유리는 다시 그 흔적에 고개를 돌렸다가 대충, 수긍했다. 허옇게 부서진 뇌 조각이며, 붉은 피와


눈알이 굴러다니는 바닥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그걸 자주 보는 유리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는 거지만. 세드릭이 다시 구역질을 뱉으려는 순간 복도 쪽에서 울리는 여러 명의 거친
발걸음 소리에 유리의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우욱….”

“어서 와,”

“잠시만요, 웁….”

유리는 세드릭의 팔을 움켜잡고 얼른 문을 나서서 발걸음 소리가 나는 반대편 복도로 뛰었다. 세드릭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겨우 유리의 발걸음을 따라서 뛰었다. 그런 둘을 보고 반대편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거기! 멈춰!”

멈추라고 멈추면 경찰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게 분명하다며 유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유리는 늘
와서 익숙한 구조인 미술관 끝에 위치한 비상계단 쪽으로 세드릭을 밀었다. 유리는 비상계단의 잠금장치를
처음 보면서도 능숙하게 걸어 잠그고서 세드릭의 팔을 당기며 계단을 올라섰다. 그러자 충격으로 힘이
빠진 세드릭이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헉, 잠, 잠시만요. 다니엘라…. 지금,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어. 베를린 자치군 놈들이 왔다고. 여기서 붙잡히면 우리 둘 다 끝이니까 어서!”

유리의 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은 안 그래도 구역질로 벅찬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죠? 난 외교관의 아들이에요. 무슨 일에도,”


체포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소리에 유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도
권리를 찾고 있다니, 참 영국인이라고 해야 할지.

“네가 체포되는 순간 네 아버지도, 가족들도 싸잡아서 송환되고 빌미를 주는 게 좋다면 거기 있어도


좋아.”

“….”

냉정한 유리의 말에 세드릭이 숨을 차분하게 고르고 계단을 올라섰다. 그제야 유리는 대충 안심을 하며
이미 잠겨진 비상계단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둘이 급하게 비상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혼란스럽게 미술관을 뛰쳐 다니는 관람객들로 난리판이 벌어져 있었다.

지하뿐 아니라 지상의 관람실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터졌는지 젖은 생쥐 꼴을 한 관람객들과 건너편의


바닥은 물로 흥건하기가 짝이 없었다. 세드릭이 그 광경을 구경하기도 앞서 유리가 당기는 손에 힘없는
허수아비처럼 미술관을 빠져나갔다.

“….”

“….”

둘은 숨이 넘어가도록 걸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그 둘의 말 없던 동행은 미술관 근처에 위치한


티에르가르텐 정원 안쪽에 이르러서야 깨졌다. 먼저 걸음을 멈춘 것은 세드릭이었다. 유리는 걷다가 멈춘
세드릭에게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그런 유리에게 세드릭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헤집으며 눈을
감았다. 세드릭의 목울대가 두어 번 넘기고, 무겁던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

“알았어요?”

“…그럴 리가.”

“근데…. 왜….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난데없이 이상한 괴한이 죽이려 들려고 하지를 않나, 그를 지켜준 다니엘라는 남…
자라고 하지를 않나, 자신을 끌고 간 사무실 안에는 사람이 머리…. 세드릭은 다시 그려지는 그
잔인하고도 형용할 수 없는 모습에 다시 토기가 미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킷 안쪽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서 입을 겨우 막고, 눈에 스며드는 생리적 눈물을 깜빡이면서 지웠다.


그걸 지켜보던 유리는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안 속에서 살던 세드릭, 이
도련님에게는 지금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고, 궤변투성이였을 게 분명했기에…. 세드릭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유리에게 다가섰다.

“내게 설명을 좀 해줘요. 난 지금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유리도 참으로 꼬이고 꼬인 이 상황에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민스럽게
눈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세드릭은 한탄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니엘라….”

“…그건 우선 내 이름 아니야.”

“…그래요.”

유리의 냉철한 대답에 세드릭은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서 나무에다 손을 기댄 채로 섰다. 이제껏 알던
이름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며, 군인 저리 가라 하는 몸놀림에 세드릭은 이곳이 마치 오베론의 왕국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당신 이름이 뭐예요?”

“….”

유리는 입을 뗐다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유리’라는 이름은 알면 안 되었다.


그건….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마요.”

“…다니엘.”

세드릭의 맑은 검은 눈을 피해서 유리는 대답했다. 세드릭은 그런 유리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붙잡았다.

“정말인가요?”

“…내가 뭐 하러 네게 거짓말을 하겠어.”

“그럼 이때까지 왜 말을 안 했어요? 나를 속이려던 건….”

“…너가 먼저 착각했잖아. 타이밍을 놓쳐서 그런 것뿐이야.”

곧게 맞춰오는 유리의 눈빛에 세드릭은 작게 한숨을 쉬고 유리를 껴안았다. 예기치 못한 그 포옹에 유리는
몸이 굳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이 거리에 몸을 떼려던 유리는 작게 떨려오는 큰 몸집의 세드릭을 보고
들었던 손을 내렸다.

“…놔.”

“…이게 꿈은 아닌가 봐요.”

세드릭의 품 안에 있는 다니엘은, 부드럽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서 있는


티에르가르텐의 정원수처럼. 그제야 그가 딛고 있는 현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다니엘은, 남자라는 것.

“여기서 미치면 곤란해. 책임지는 건 질색이야.”


철 지난 꿈 타령에 유리의 입가에 헛웃음이 피식하고 흘렀다.

“…날 살려줬죠.”

그리고, 세드릭, 자신을 살려준 것. 스스로가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에게 나이프를


쥐여주고 뛰어가라고 하던 그 진지한 얼굴이 눈을 감아도 선하게 그려져서 세드릭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는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점점 미궁과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도대체 당신은….

“…네가 죽으면 귀찮은 일이 생기니까 그런 것뿐이야.”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죠?”

“….”

“정말 폴란드 사람인가요?”

답지 않게-혹은 이제야-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세드릭에게 유리는 궁색하게 대답했다. 스스로가 들어도


구차한 대답이었다.

“…그래.”

“나 안 믿어요.”

“….”

“이제, 못 믿겠어요.”

실망감이 역력한 목소리에 유리는 해줄 말이 없었다. 이 이상한 일들과 진실들 가운데 말을 한다고 해서
기꺼이 믿는 게 더 이상할 따름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미 스스로가 자초한 길이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늘상 그래왔었고, 그래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근데 참 이상하죠.”

왜인지 가슴 한쪽이 따끔따끔했다.

“자꾸 당신을 믿고 싶어져요.”

“….”

“당신이 하는 말, 당신이 하는 행동들…. 그냥, 내게 새로운 진실을 알려주는 거 같아서, 믿고 싶어요.”

이게 무슨 감정일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통증에 유리는 잠자코 자신을 안고 있는 세드릭의 말을


들었다. 그가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커져 오는 통증이라서, 그의 말에 뭔가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상하네요. 내가, 내가 아닌 거 같아요. 지금, 이 모든 게 마치 꿈에서나 일어나는 일 같고….”

당신을 만난 것도, 그동안의 짧은 날도, 오늘의 일도.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를 껴안고 서서 중얼거렸다.

“다니엘.”

“….”
세드릭의 입에서 떨어진 ‘이름’에 유리는 멍해졌다. 자신이 말한 이름이었지만, 그걸 다시 입으로,
귀로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주….

“다니엘….”

아주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이름. 그 묘한 기분에 유리의 잔뜩 긴장한 몸에서 힘이 사르륵 풀리는 게
세드릭은 느껴졌다. 세드릭은 유리의 관자놀이에 입가를 대고 속삭였다.

“난 단순한 편이라, 그냥 오늘부터 당신을 처음 아는 걸로 시작하고 싶어요.”

“….”

“그렇게라도, 당신을 알고 싶어요. ”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유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세드릭의 말에 쏘아붙이려던


입을 달싹거렸다. 임무 때문이라고 해도 속인 것은 저인데, 세드릭은 그걸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도 세드릭은….

“그러니까 하나만 약속해줘요. 이제부터 내게 진실되겠다고요.”

“…난 남자야.”

“…알아요.”

세드릭은 슬픈 눈으로 유리를 잠시보다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전이었다면 마치 자신을 거절하려는


핑계는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유리의 곧은 눈빛을 보노라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남자를 좋아해 본 것은 처음이고…. 아직은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아요.”


“….”

아무래도, 그게 정상일 것이다. 유리는 보고서에 적힌 세드릭의 성애성향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꼭


깨무는 세드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얗게 핏기가 없는 입술을 깨무는 모습은 아파 보였다. 마치,
자신의 다친 팔처럼.

“하지만, 내게 조금만 시간을 주면…. 그러면, 돼요.”

그러면, 지금은 이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세드릭은 그렇게 자신을


수긍시키며 무의식적으로 유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에 유리가 반사적으로 신음을 뱉었다.

“아, 아파.”

“아, 미안해요! 잠시만, 그 병원부터 가죠? 저기로 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가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세드릭은 뻔한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요? 치료를 해야죠!”

“…안 돼. 시끄러워지니까.”

안 그래도 이 일로 양쪽이 모두 예민하게 곤두세워져 있는 상황에 자신이 병원에 가면…. 유리는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다 말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팔을 못 쓰기라도 한다면….”

“치료는 할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유리는 말하려다가 말았다. 걱정인가? 이게? 하지만 이 녀석이 왜 나를 걱정하지.
속였잖아. 물론 멍청하게 착각한 것도 있지만…. 유리는 그 생소한 감정에 숨을 쉬다가 안고 있는
세드릭에게 속삭였다.

“…걱정되면 다음 주에 그곳에 와서 보고 가. 그럼 됐지? 이만….”

간다고, 말하려는 유리에게 세드릭은 눈에 화색을 머금고 덥석 대답했다.

“내일 만나면 안 되나요?”

“…안 돼.”

그에 유리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자신만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세드릭이
이해되지 않았다.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던 유리가 뒷걸음질 쳤다.

“…그렇지만….”

“안 돼. 지금 너가 움직이면 이목을 끌기 쉬우니까. 그새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놈은 널 노리고 왔단


말이다.”

다시금 생각나는 그 용병의 행태에 유리는 작게 인상을 썼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봐야겠어. 그런 유리의 앞에 있는 세드릭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생각을 하는 유리의
시선에 그 모습이 걸리자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애도 아니고.
“….”

“…나도 오늘 일에 대해서 조금 시간이 필요하고. 바로 치료도 할 거야. 그러니까 그만 그렇게 봐.”

“…정말이죠?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으면요?”

다시 불거지는 불안함으로 유리를 잡아 올 듯한 표정에 유리는 몸을 돌려서 빠르게 티에르 가르텐을


나갔다. 오지 않으면? 아마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유리는 이뤄지지 않을 일을 물고 늘어지는
세드릭에게 작게 웃으며 과감하게 말을 던졌다.

“그땐…. 우리 학교로 오든가.”

그랬다가는 베를린이 뒤집어질 테니, 그러지는 않겠지.

#chapter 17

* * *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세드릭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유리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섭섭함도 잠시, 다시금
찾아오는 긴장감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젖은 옷차림과 상처를 처치하며 묻은 검붉은 핏자국. 그 모든 증거를 확인하자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너,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가 죽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쩌려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도.

“하아….”

처음 겪어보는, 위협이었다. 이제껏 지내던 영국의 이튼에서 누리던 안온하고도 연구적인 분위기와는 정
반대다. 사실 그 평온한 분위기에 점점 질리던 차에 찾은 새로운 장소는 기대만큼 신선함을 선사해주어
방심했다. 전쟁을 피해간 스위스를 빼면 유일한 중립지대라고 해서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땅.

“…그래도 덕분에, 살아남은 건가.”

하지만 결국은 한쪽으로 기울이기 위한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 세드릭은 유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위협에 손은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지켜주던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마음은 다른 쪽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주 싫은 건 아닌 거겠지.”
세드릭, 자신이 다니엘라가 남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이렇게 떨리는 것처럼. 남자끼리의 관계는
영국의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지할수록 더욱 비밀스럽게
퍼져가는 게 실상이었다.

그가 다니던 남학교인 이튼에서도 그런 모습을 심심찮게 봤다. 가끔씩 권유도 받았고. 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제쳐두고 사실 세드릭 자신은, 다니엘과는 전혀 다른 진영의
사람이니 저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든 말든 별 상관도 없을 텐데.

‘다니엘은, 언뜻 보면 차가워 보이지만 가만 보면 다정한 구석이 있어.’

그동안 친밀도를 쌓아보려던 노력은 헛되지 않은 것 같아, 그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여자로


착각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용히 눈감아 주다니. 배려심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이러니 자기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며 세드릭은 즐거운 착각을 더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팔을 잡고 필사적으로
지켜주던 모습을 뒤늦게 떠올리며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면목 없이 쓸어내렸다.

‘신사가 되어서 이게 무슨 추태인지.’

아무리 다니엘 자신이 남자라고 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너무 무력했다. 귀족의 기본 소양으로
배운 검술이나 사냥시즌 때만 연습하다 마는 총 쏘는 솜씨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다니엘은 제법 능숙해 보이는 게, 어디 훈련이라도 받은 걸까. 순발력이 대단했다고 다시


떠올리며 세드릭은 다음에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며, 감탄했다. 어느 정도 놀란 마음과
자책을 가라앉혔을 무렵, 세드릭의 이름을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가 있었다.

“세드릭! 세드릭! 여기!”

“음? 아, 에드워드. 여긴 어쩐 일로.”

싸늘한 겨울이 지나가는 티에르가르텐의 공원을 걷던 세드릭은 창문을 내린 자동차에서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훤칠한 사내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예기치 못하게 만난 그의 친우 에드워드가 하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세드릭의 어깨를 친근하게 둘렀다.

“헉, 헉. 숨이 차서. 잠시만, 후우… 그래, 동생과 주말 쇼핑을 마치고 지나가던 길이었어. 아, 미아도
저기 오는군.”

에드워드의 말처럼, 얼굴을 몇 번 마주친, 그의 동생 미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세드릭은 다가오는


미아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맞았다. 그 와중에 에드워드는 세드릭의 복장을 훑으며 탄성을 내었다.
세드릭이 생쥐처럼 꼴딱 젖은 모습에 에드워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었지? 세드릭, 평소보다 더 ‘신사’다운 모습인걸.”

“오빠! 같이 가자고 말했는데… 안녕하세요, 세드릭. 어머!”

“대체 무슨 꼴이야? 수영하기엔 너무 이른 거 같은데.”

“한눈을 팔다가 호수에 발을 헛디뎠어. 반갑습니다, 미아. 다시 뵙는군요.”

세드릭의 정중한 인사에 미아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드워드가 걱정스럽게 권유했다.

“세드릭. 날씨가 제법 추운데, 내 외투라도 걸치겠어?”

“아니, 어차피 집으로 갈 생각이었어.”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게 된 미아는 둘러대며 막았다. 어쩜 언제나 저렇게 상냥하고, 예의가
바를까. 예전에도, 지금도 한결같은 모습에 나이를 먹고 몸이 자라서도 연모하는 마음이 여전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세드릭 자체가 겸허한 사람이라서 굳이 티를 내지는 않지만 영국에서도 여왕의 친인척에 해당하는
고위 귀족이면서 서열 순위도 있는 편이라 누구든지 탐을 낼 만한 사람이었다. 미아 자신뿐만이 아니라.
몽롱한 눈빛으로 변해가는 제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세드릭의 어깨를 툭 치면서 주의를
끌었다.
“집? 노이에 미술관에서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건.”

“아, 데이트였나?”

“아냐. 그런건 아니고.”

허를 찌르는 에드워드의 질문에 세드릭은 평소답지 않게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안전하다고 말이 나오는 중립지대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 리가.
그 생각이 미친 세드릭을 보던 에드워드의 눈이 일순간 싸늘함이 감돌더니 다시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순식간에 변모했다.

“여성분에게 차였나보지? 호수에 넣을 정도로 싫다던가?”

“데이트, 라니. 그런….”

“어떤 여자야? 우리 쪽인가?”

세드릭은 당황하는 눈빛으로 나름 부정을 표했으나, 미아는 대충 상황을 눈치챈 모양인지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저번에 제 오빠 에드워드가 집에 돌아와서 세드릭이 짝사랑을 하는 것 같다며 흘리듯이
말하던 헛소리를 눈앞에서 확인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내색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았다.

“그래요, 괜찮으시면 알려주세요. 괜찮은 사람이면 저도 친해지고 싶네요. 전 에드워드 오빠처럼 좋은


친구가 있는 게 늘 부러웠거든요.”

“아…. 에드워드가 장난을 치는 겁니다.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미아, 세드릭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게 돌려 말 해봤자 별 소용은 없을 거야.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잘되었어. 어차피 저녁 식사 때 우리 집에 와야 했으니, 돌아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는 거 어때.”

“아, 그렇지. 하지만 옷을….”


그러고 보니, 그로벤 대령의 집에서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세드릭은 깨달았다. 만찬용 복식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말에 에드워드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이끌었다.

“이미 멋진 차림새를 하고서 그런 말이라니. 초대한 주인을 초라하게 만드는 게 취미였는지는 몰랐어.”

“그럴 리가. 그저….”

“복장이라면 내가 빌려줄테니 걱정하지 마.”

예의를 갖추려던 것뿐이라는 세드릭의 말에 에드워드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면서 다시 한번 만류했다.

“친구끼리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도 좋지 않아. 내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줘.”

* * *

“독일 사람들의 유머는 도저히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세드릭 씨가 농담의 귀재라든지.”

“그럴 리가요. 에드워드가 저보다는 훨씬 재밌을 텐데요.”

“들었지 미아?”

“글쎄, 그 농담은 다리가 달렸는지 집에만 오면 사라지나 봐.”

그들이 도착하는 길에 에드워드의 추임새에 따라 미아와 세드릭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조용한
모습과 다르게 작은 농담에도 까르르 웃는 미아의 모습에 남매가 넉살이 좋다고 세드릭이 생각할 무렵,
그로벤 가 사람들이 지내는 베를린 외곽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그로벤 부인이 반갑게
자식의 도착을 맞이하다 말고 이른 손님의 도착에 녹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들 오니. 어머, 손님이 오신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어머니, 여긴 세드릭입니다. 세드릭,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 제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로벤 부인.”

겉옷을 정리하며 전해지는 세드릭의 정중한 인사에 그로벤 부인이 화색을 띠고서 세드릭의 훤칠한 모습을
살폈다.

“세상에, 미아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구나. 꼬마 신사님이 어느새 이렇게, 늠름해지셨을까. 에드워드,


너도 좀 배워야겠구나. 이튼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과찬입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돌아간다면 이튼의 테니스 클럽에서 무척 기뻐하겠어요.”

“칭찬이 심하네요!”

세드릭의 칭찬에 그로벤 부인, 제인도 덩달아 부드럽게 웃었다. 같은 영국 사람치고는 세드릭은 유난히
부드러운 면이 돋보였다. 이런 사람이니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신의 딸, 미아가 집에서 그렇게 칭찬을
했던 것이겠지.

‘정략혼 같은 건 질색이라고 하던 애가 달라질 법해.’

“그래요, 앞으로 우리 애를 잘 부탁해요.”

“예, 에드워드가 있어서 저도 낯선 생활에 도움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와 함께 촉촉하게 젖은 흙과 같은 눈빛은 누가 보아도


준수한 모습이었다.
“물론, 철없는 자식도 포함이지요.”

“그게 무슨….”

어머니 제인의 흐뭇한 표정에 에드워드는 혀를 차며 의문에 빠진 세드릭을 계단 쪽으로 끌었다.

“나 원, 어머니의 수다는 만찬에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지 말고 어서 와.”

“저녁 식사에 늦지 말거라. 아버지가 기대하고 계시니.”

“아, 그럼 부인. 이따가 뵙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잔뜩 기대감 어린 집안 여자들의 눈빛을 피해서 세드릭을 제 방으로 데려왔다. 무거운


문소리가 쿵, 하고 나자마자 에드워드는 정리되어 있는 침대 위에 재킷을 대충 던지고 넥타이를 편하게
끌렀다.

“정신 사납지? 미안. 오랜만에 봐서 반가우신 모양이야.”

확실히 고등부로 올라간 이후로는 큰 교류가 없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세드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의 방 안을 살폈다. 방은 꽤 넓어 보이는 것이 적어도 두 개 방을 터 둔 크기였다. 그리고 넓은
만큼 제 방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 차고 넘치게 있었다.

예를 들면, 어디 사교 클럽이나 저택의 지하에나 있을 법한 당구 테이블이라든지. 주말마다 이튼 바깥의


펍에서 자주 내기를 하던 친우들을 생각하며 세드릭이 신기한 눈빛으로 당구 테이블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나도 반가웠어. 여긴, 네 방이야?”

“음. 미아는 아래층을 쓰고 있어. 그래서 가끔 친구들이 와서 한 게임씩 하다 보면 시끄럽다고 천장을


치기도 하지. 늘 생각하는 거지만, 동생과 결혼할 녀석은 매일이 골치 아플 게 틀림없어.”
에드워드가 소매를 편하게 접어 올리면서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철제 케이스를 하나 열어서
세드릭의 앞으로 내보였다. 얇은 종이에 곱게 싸인 담배였다.

“한 대 피울래?”

“아니. 괜찮아.”

찰칵, 하고 피어오르는 작은 불빛과 함께. 에드워드의 입가에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동시에 세드릭의 앞으로 기다란 무언가가 휙, 던져졌다. 날아오는 막대기를 잘 잡아챈 세드릭의 고개가
에드워드에게 향했다. 그는 큐대를 가루에 마찰시키면서 큐대 끝을 까딱거렸다.

“저녁 식사 때까지 한 게임이라도 할래? 몸이나 풀 겸.”

“뭐… 좋아.”

“완전 범생이는 아니구나, 너.”

에드워드의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큐대가 공에 맞부딪혔다. 공이 홀인 하며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세드릭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튼을 나온 거 보면 모르겠어?”

“그렇지. 어쩌다가 나온 거야? 졸업도 앞둔 자식이.”

세드릭의 당구 자세를 유심히 보던 에드워드가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재떨이에 툭툭 쳤다. 따닥, 하고 공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램프의 촛농이 하나씩 흘러내렸다.
“겸사겸사. 변덕이지.”

“아하, 귀족 나으리 특유의?”

“그럴 수도 있고.”

슬쩍 빈정대는 말투에 세드릭은 작게 웃고 말았다. 이튼 같은 학교에 귀족 출신은 한두 명이 아니건만,


여왕의 친인척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게 지겨워서 이튼을 나온 것도 있었지만,
등급처럼 매겨진 꼬리표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으쓱대는 세드릭의 모습에 에드워드는 큐대의 모서리를
갈아대다 말고 세드릭의 손을 낚아챘다.

“잠시만 손에, 뭐가 묻었는데? 어디 신사가 편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웃으려던 에드워드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검붉은
자국은 손바닥을 넘어서 외투와 재킷에 가려진 소매를 물들였다. 누가 봐도 핏자국이었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의 초록 눈이 슬쩍, 진동했다.

“세드릭, 너… 어디 다쳤어?”

“아, 아니.”

그걸 뒤늦게 확인한 세드릭도 웃다 말고 에드워드에게 잡힌 손을 확 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굳은 낯에


확연한 반응. 에드워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녀석, 다친 곳이 있었으면 바로 얘기했어야지. 당장 병원으로….”

외부에 알리겠다는 에드워드의 말에 세드릭이 급하게 달려들어 만류했다.


“괜찮아. 정말이야. 별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피가 꽤 나는 거 같은데.”

물론 그랬다. 그게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게 더 문제였지만. 세드릭은 아까 전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 상처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세드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결국 고백하고 말았다. 약속한 사람을 만났던 미술관에서 겪은 기묘한 습격에
대해서, 차근히 설명하자 에드워드 또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확실히 예삿일은 아닌데. 대사관에 연락은 했어?”

“아니. 그럴 시간도… 없었어.”

“…그래.”

세드릭의 말에, 그가 잠시 침묵하다 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말하지 못하더니 골치


아프다는 식으로 머리를 긁다 말고 읊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그 약속으로 만난 사람이 구해줘서 살았으니.”

“…그런가.”
살짝 패닉하는 세드릭을 두고, 에드워드가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허탈하게 웃었다.

“대단하군, 대영제국의 귀족을 노리는 놈이라. 전쟁을 다시 하고 싶은 놈이 아니고서야. 이래서 바르샤바


녀석들이란. 앞에서는 고고한 척 말하다가 언제나 뒤통수를 노리기 마련이지.”

씨근덕대는 에드워드의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 구해준 사람은… 폴란드 사람이었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바르샤바 진영의 사람이 구해줬다는 말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살짝 일그러졌다.

“세드릭, 농담하지마. 아무리 중립지대라지만 저쪽 진영 사람을 만나는 건….”

위험하다. 모르지 않았다. 해협을 넘어오는 배에서 귀가 따갑게 듣던 소리다.

“알아. 하지만…. 좋은 사람이야.”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켜주던 그 금빛 머리카락 타래를 생각하며 세드릭은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에드워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철제 케이스에서 담배 한 대를 더 꺼내서 피웠다.
“좋고 나쁜 건 중요하지 않아. 세드릭.”

스르르 벌려진 입가 사이로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제법 자욱했다. 에드워드는 난감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얼굴을 긁다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어느 쪽에 있냐는 거지. 어디든 좋고 나쁜 사람은 있어.”

“알아. 하지만.”

세드릭의 거듭된 변명에 그는 고민이 깊어 보이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다행이지, 네가 이상한 사람과 깊게 빠지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났으니 말이야.”

“무슨… 결정?”

“아, 아직 프림로즈 경에게 듣지 못했어?”

에드워드는 살짝 흥이 깨졌다는 표정으로 당구대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톡, 하고 스치는 큐대의


마찰음과 함께 에드워드의 입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 약혼 상대.”

“…뭐?”

에드워드는 굽혔던 상체를 피면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늦은 소식을 마주한 세드릭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랐구나. 그럼 상대도 더더욱 모르겠네.”

느릿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로 인해서 에드워드의 얼굴이 언뜻 흐릿하게 가려졌다. 에드워드의 대답은
방 안을 또렷하게 울렸다.

“내 동생, 미아라는 거.”

“….”

세드릭과 에드워드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에드워드의 초록 눈이 세드릭의 어두운 눈을 바라보며 언뜻


생각했다. 저 눈은 침침한 색깔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이 없어지면 영 속을 알아차리긴 어렵다.

“미아 양과…. 내가 약혼을 한다고?”

세드릭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핏자국이 묻은 손도 움직임을 같이 했다. 그걸 알아챈 에드워드는 속으로


슬쩍 웃었다. 세드릭은 행동 하나는 정직한 녀석이라, 파악하기 까다로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세드릭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에게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무척 유감스러울 뿐이야.”

“아니, 그 전에. 왜, 어째서….”

범생이처럼 순진한 성격인 세드릭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에 에드워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저렇게 빠져버린 건지.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에드워드는 언뜻 세드릭이 그렇게 마음속 한구석에 꼭꼭 숨기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단순히 미모를 제치고
중요한 이유도 하나 있었던 탓이다.

“미안 에드워드. 미아 양이 싫거나, 달갑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정말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

“아, 이해해. 세드릭.”

‘그리고 특수 부대 출신 용병에게서 목숨을 구해줄 정도의 실력이라….’

보통의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고도로 훈련된 요원이면 모를까. 어느 진영인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지만 아무튼 운이 좋았다. 에드워드는 세드릭의 소매에 물들어 있는 검붉은 자국을 보면서
아쉬움을 삼켰다. 여왕의 가까운 친인척인 만큼,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분쟁 거리가 된다. 물론
에드워드 그가 물밑 작업을 마쳤을 때 여동생이 타깃의 약혼 상대로 정해질 줄은 몰랐지만.

“미아는 좋은 애야. 내 동생인 만큼 매일이 심심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은 해두지.”

“에드워드… 나는.”

그래서 일부러 약혼 소식을 듣기 전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부산스럽게 행동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세드릭의 모습에 에드워드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색을 가렸다. 어쩔 수 없지. 세드릭의 어떠한 반응도 이해한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사를 좀 더 해봐야겠군.’

“그래도 식사 시간에 표정 관리는 좀 해줘. 아무리 골칫덩이 동생이지만 나름대로 아끼는 가족이라
말이야.”

“…아, 미안.”

“그동안 마음 정리를 좀 하는 게 좋겠어. 그래, 내가 차를 한잔 가져올게. 설탕은?”

에드워드는 사과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방문을 나서기 전 여유롭게 세드릭의 취향을 물어보았다.
세드릭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작게 대답했다.

“듬뿍.”

예기치 못한 실연의 씁쓸한 맛을 지워보려는 것일까. 평소 담백한 맛을 즐기는 것을 보아온 에드워드는


피식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세드릭은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면서 에드워드의 앞에서 내뱉지 못한 근심을 털어내었다.

“하아….”

어째서, 라고 하기엔 맞지 않는 걸 안다. 어떻게 보면 귀족의 자식치고 ‘아직도’ 상대가 없었던


것이겠지. 그도 그럴 게 방학 때만 되면 못다 읽은 책을 완독하거나 어린 동생과 놀아주다 보면 짧은 날이
다 가고 말았으니. 세드릭의 부모님도 결혼에 대한 큰 압박을 주지 않는 편이어서 약혼이란 소식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그것도, 지금 막 첫사랑에 눈을 뜬 그에게는 너무 잔혹한 일. 세드릭은 지끈대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침침한 방의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를린의 낮은 아직도 뿌옇게 흐렸다.


* * *

“세상에, 그로벤 부인. 어디서 데려온 요리사인지는 몰라도 정말 솜씨가 뛰어나군요. 디저트까지 아주
완벽했어요.”

“프랑스인인데, 전쟁 중에 베를린을 찾았다가 그만 억류되는 바람에 우리가 고용했어요. 덕분에 영국도


아닌 곳에서 아주 풍요로운 식탁을 누리게 됐죠.”

“프림로즈 부인, 좋은 날에 비하면 소박한 식사입니다.”

프림로즈 부인의 칭찬에 그로벤 부인은 기분 좋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로벤 경은 와인을 한 번 마시고
조촐한 식사라고 일축했다. 프림로즈 경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린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좋은 날에는 좋은 차 한 잔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차예요. 이웃 중에 커피랑 차를 수입하는 사업가가 있거든요. 종종 미아가 찾아가서


좋은 차를 구해오곤 해요.”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런 안목이. 향기가 참 좋은데요. 그렇지 않니, 세드릭. 베스?”

“네에.”

“베스 아가씨의 입맛에도 좋다니 다행이에요.”

그로벤 부인과 프림로즈 부인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웠다. 베스의 천진한
대답을 들은 미아가 귀엽다는 눈빛으로 살짝 웃었다. 식사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분위기와 다르게
세드릭은 그저 조용했다.

“….”

“…세드릭?”
프림로즈 부인의 부름에도 골몰히 생각에 빠진 세드릭을 깨운 것은, 옆에 앉아 있던 베스의 소리 없는
옆구리 공격이었다. 그제야 현실에 되돌아온 세드릭을 두고 그로벤 부인이 미소 지었다.

“…네, 어머니.”

“오늘의 주인공에게도 부디 좋아야 할 텐데요.”

“그럼요. 안 그러니, 세드릭?”

“…예.”

세드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다가 맞은편에 앉아서 기대에 찬, 그리고 어딘가 행복해 보이는
미아의 표정을 마주했다. 식사 시간 동안 서로의 약혼 상대로 정해졌다는 말이 나온 이후로 연신 웃음 띤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미아를 본 세드릭은 입 안에서 까끌대는 대답을 겨우겨우 꺼냈다.

“좋습니다. 향기가….”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게, 그의 마음은 바닥을 기었다.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 언뜻 약혼을 거절할까,
생각도 했다.

“입맛이 벌써 따라가는 모양이에요.”

“혼란스러운 시대에 서로 의지가 되려면 공통점이 많아야죠.”

“그러고 보니 접점이 많네요. 아버지들부터 해서.”

부모님의 은근한 압력.


“언제 좋은 여식을 데려오려나 걱정은 덜었습니다. 성격은 좋은 녀석이지만, 책 읽는 것 말고 별다른
일에 큰 관심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미아의 기대에 찬 얼굴.

“재밌군요. 미아는 오히려 그 모습에 끌린다고 하던데요.”

“에드워드!”

웃음기 어린 친우의 눈빛에 서린 경고.

그게 세드릭을 망설이게 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맞는 말이다. 여자도 아니고, 같은 국적의 사람도
아니었으며, 다니는 학교도, 하다못해 연합국 사람도 아니었다. 모든 게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 그쪽에
있는 조건 어느 하나 그에게 이로운 것은 없었다.

“그래서, 약혼식은 언제 할까요.”

“봄이 올 때 해도 좋겠지요. 아직 베를린의 날씨가 좋지 않아서….”

“프림로즈 부인, 영국처럼 좋은 날씨를 기대하려면 여름이나 되어야 할 겁니다.”

부모들끼리 약혼식 날짜를 의논하는 와중에 베스의 천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 약혼식이 뭐예요?”

“오, 베스. 그건 말이지. 미아 양이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날이자, 베스 네게 새로운 언니가


생기는 날이란다.”

“새로운… 가족이요? 왜요?”


새로운 가족이 온다는 말에 베스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듯이 찡그려졌다. 그러자 프림로즈
부인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이해하는 듯, 낭만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야, 미아 양과 세드릭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엄마의 말과 달리 고민에 빠진 나머지 세드릭이 어두운 표정에 잠긴 것을 본 베스는 세드릭의 팔을


쿡 찔렀다. 세드릭의 고개가 천천히 베스에게 돌아갔다. 프림로즈 부인은 그런 베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스?”

“세드릭 오빠. 정말이야? 정말 미아 언니를 사랑해?”

“…베스, 그건.”

솔직하게 부딪혀오는 베스의 질문에 세드릭은 난감한 기색을 띄웠다. 그는 넉살이 좋은 편이 아니라
거짓말로라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있는 저 사람이 좋다고.

베스는 말하지 못하는 세드릭을 연신 채근했다.

“오빠는 다니엘라를 좋아하잖아? 금빛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예쁜 언니.”

“베스.”

“두 사람을 좋아하면 그건 어제 드라마에서 나온 나쁜 남…. 읍!”

세드릭의 속마음을 대변한 순수한 성토는 어머니의 다급한 손길로 막혔다.


“….”

“….”

짤그락. 찻잔과 받침이 미세하게 부딪치던 소음마저도 멎고, 말을 마치지 못해서 불만 어린 어린아이를
가만히 모두가 쳐다보았다. 보기 좋은 두 사람의 약혼식 날짜를 잡으며 화기애애하게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그 원인을 손에 쥐고 있는 프림로즈 부인은 급한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서 억지로
웃었다.

“요즘 애가 연극에 빠져 있어서요. 시도 때도 없이 그 내용을 종알거린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구나, 엘리자베스.”

“흐디망!(하지만!)”

헛소리라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을 두고 베스는 항의했지만 막고 있는 어머니의 손은 완고했다. 그로벤 경과


부인은 서로를 보면서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아까 전과 다르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린 날의 치기는 돌아보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현명한 청년이라고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도 자자하니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약혼식 전까지는 변덕인지 치기일지 모를 사람을 정리해달라는 권유에 프림로즈 부인은 무마를 위한
웃음을 연신 지었다.

“어린아이의 말은 작은 사실도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요. 혹시 오해하는 상황은 없으면 합니다. 그렇지


세드릭?”

“…예.”
한 박자 늦은 세드릭의 대답은 미묘한 부정을 키워냈다. 그 이후로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약혼식 날짜를
선뜻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 미지근해질 무렵, 결국 돌아가는 길이 더 어두워질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프림로즈 가족은 그로벤 저택을 떠났다. 프림로즈 저택을 향하는 차가 어둠을 헤쳐나가는 동안
프림로즈 부인은 갑갑함을 호소했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부인, 진정하시오.”

“지금 진정이 되겠어요? 난 이미 연합국 외교관 부인들에게 약혼식에 대해서 말을 다 해두었는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리던 프림로즈 부인은 베스 옆에 앉은 세드릭에게 토로했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 얼핏 말이라도 해줘야지! 자식에게 불행한 약혼을 주는 부모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누구니? 베스는 알고 내가 모르는 것도 이 어미는 너무 섭섭하구나!”

“….”

아는 사람인데도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는 이미 몇 번이고 담아둔 사람인데 정작 입에는


담아낼 수 없었다.

다시금 시작된 세드릭의 침묵에 프림로즈 부인의 흥분이 슬며시 가라앉으며 이성이 되돌아왔다.

“왜 말을 못 하니?”

부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지켜보던 프림로즈 경도 자세를 비틀어 세드릭을 향했다.


“집에 도착하면 나와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구나, 세드릭.”

#chapter 18

* * *

[…그래서 어떤 사람이길래, 네가 이러는지 궁금하구나. 말 좀 들어보자.]

게오르그는 한창 도청을 듣다 말고 어두운 감청실을 밝혀주는 바깥 불빛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방 안에서 환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이제나저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게오르그는 감청 중이던 헤드폰
한쪽을 벌려서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늦었네.”

“의무실 좀 다녀오느라.”

빛바랜 녹색 군복 아래 붕대가 감긴 팔을 유리가 들어 보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빡빡하게 둘러진


붕대가 영 거추장스러운지 연신 하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제법 불만이 많아 보였다. 게오르그는
헤드폰을 내려두고 살짝 흐트러진 갈색 머리를 정리하면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오늘의 손님은 제법 격한 손길을 바랐던 모양이지. 그래서 손님 만족은 시키셨나?”

“자유 진영 놈들은 취향도 자유로워서 말이야. 뭐, 환대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수고가 많아. 참, 네 몫의 감청 기록은 내가 우선 시작했어.”


“고마워.”

동료의 지각을 메꿔준 게오르그를 등진 유리가 제자리에 앉았다. 유리가 자리를 잡고 막 도청기를
작동시키며 헤드폰을 쓰려는 참에 유리 앞에 있는 벽으로 게오르그의 손 그림자가 언뜻 흘리듯이 다가왔다.

“뭘. 다음에 네가 좀 수고해줘. 다음 주에 중요한 약속 있어서 대타 꼭 필요해.”

“…시내에서 만난 아가씨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봐?”

“….”

‘…맞구나.’

어째 봄은 한참 멀었는데 다들 봄기운이 완만하다. 유리의 눈초리가 벽에 드리워진 손 그림자를 향해서


좁혀졌다. 그사이에 말 없는 게오르그의 침묵이 더욱 길어졌다. 유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들 아무리
혹독한 특수 훈련을 받는다고 한들, 한창의 나이라 그런 것인가 몰래몰래 연정 놀음을 벌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평소 무뚝뚝하면서도 칼같이 일 처리를 하던 동료가 시내 상점 한구석에서 유창하기 그지없는 독일어를


연신 더듬어가며 얼간이 노릇 하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리지는 않겠지만, 장소가 좀
에러라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줘.”

“말할 사람도 없어.”


유리는 동료의 간절함을 일축하고 헤드폰을 귀에 꼈다. 유리 자신이 굳이 거들지 않아도 언젠가 게오르그
그 자신이 알아서 책임을 지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마워.”

감청 장치만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만 나는 조용한 방 안에서 채널을 돌려주며 감청실을 나가던 게오르그가
희미하게 감사를 표했다. 사방으로 막혀 있는 감청실에 혼자 남은 유리의 신경은 온통 프림로즈 가의
도청에 집중됐다.

[…세드릭,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라도 있었던 거니?]

낮의 습격으로 은근히, 아니 무척 신경이 쓰였던 참이다. 저희들도 아닌 다른 세력이 세드릭을 노리는


것도 이상하고. 막 영국에서 넘어와 베를린의 분위기 파악은커녕, 어디 척을 졌다고 보기 힘든 인물이
위협당하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병원, 가요. 피가….-

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팔을 걱정하던 세드릭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 얼굴로 걱정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가 괜히 아픈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평생에 그의 상처를 가지고 누가 걱정 한 번
해주는 일이 없어서 그 반응이 생소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착각하던 ‘반대 진영의 아가씨’도
아닌 마당에 그렇게까지 챙길 필요도 없는데.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아버지.]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늘 일찍 스러지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유리 자신의 아버지 대령이 제거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으니….

[대사관 소속 학교에서 만난 사람이니? 아니면, 시내에서?]

그때까지만이라도 유리, 제 옆에 두면 어디 다칠 일은 없겠지. 대령이 명령한바, 친밀해지는 순간을


노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유리는 서재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대화에 집중하며 감청기의 볼륨을 키웠다.
그러자 프림로즈 부자의 대화가 좀 더 또렷하게 들렸다.

[….]

[세드릭.]

프림로즈 경의 부름에 세드릭이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처음, 베를린에 온 날 만났습니다.]

“….”

설마. 유리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낡은 연필을 불안하게 까딱거렸다. 그러고 보니, 프림로즈 가족이
처음 이사하는 날 마주쳤지. 혹시 그런 거 저런 거 다 해서 눈치를 챈 건가. 언뜻 조바심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세드릭의 대답으로 다른 면에서 불안함이 번졌다.

[그러다가 베스를 잃고 헤매던 마켓에서도, 가던 길에서, 이따금씩 마주치게 되면서….]


“…아주 내 이야기라고 광고를 해라.”

그게 다 작전을 이행하느라 만났다는 걸 알까. 아마 모르겠지. 자신을 한참 동안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둔한 녀석이니. 유리는 평소와 다르게 피식 웃으면서 계속되는 말을 들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의 뭐가
그렇게 좋을까. 얼굴? 머리색? 눈? 유리는 세드릭의 취향이 제법 별나다고 생각하면서 자유 진영
사람답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프림로즈 경도 끼어들면서 유리의 누그러진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그래서, 어디 사람이니?]

“…나왔군.”

어디 사람인가. 어느 진영인가. 지금 순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저 신분으로, 허투루 외교관을 하던


것은 아닌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유리의 어깨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와 같이 세드릭도 마음을 같이
하는지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폴란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뭐? 폴란드 여자랑?]

“…미친.”

유리는 대책 없는 세드릭의 무모함에 혀를 찼다. 여기서 남자라고까지 더 말하면 프림로즈 경은 놀라서


자빠진다고 한들 이상하지….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입니다.]

[…오, 주여.]

“…미쳤어.”

짙게 그림자가 진 감청 기록지에 유리가 손에 쥐고 있는 연필 끝부분이 툭, 툭 끌리면서 자국을 냈다.


아니, 이럴 때마저 솔직하면 어쩌잔 말인가. 영국은 남색이 사형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유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프림로즈 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림로즈 경은 소파에 앉은 모양이다. 푹신한 것이 움푹
들어가는 소음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냐?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것도 다른 진영의 사람이 좋다니? 제정신인지 궁금할
지경이구나!]

탄식하는 프림로즈 경의 반응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중립지대라고 해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그런 마음. 세드릭이 순수하다 못해 유별났던 것이라고 유리는
무거워지는 가슴팍을 붕대가 감긴 팔로 툭, 쳤다. 근데, 왜 이렇게 갑갑한지. 아버지의 탄식과 유리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낮에 미술관에 갔다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뭐? 습격? 누가? 어디 다친 것은….]

[아버지.]
세드릭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저는, 생각보다 세상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세상에는 제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까요.]

[누가 그런 짓을, 설마 그 폴란드 여자가? 왜 일찍 말을 하지 않고! 대사관에 당장….]

드물게 화를 내는 프림로즈 경의 반응에도 세드릭의 반응은 침착을 넘어서다 못해 담담하기만 했다.


이제는 유리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대사관에 연락을 하고 세드릭이 영국으로 소환을 당하는 게
제일 좋은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제가 말한 폴란드 사람.]

[그 사람은 왜….]

[그 사람이 저를 구해줬습니다, 아버지.]

그러면, 그도 나를 잊고 살고. 나도, 그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분명, 그 사람은 반대편의 사람인데…. 총을 든 괴한 앞에서 서서 제게 살아서 나가야 한다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정신이 들더군요.]

“…전쟁이 나는 게 싫었을 뿐이야.”

유리는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천장을 향해서 쓸쓸하게 읊조렸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싫었다고 말은
하지만….

[착각이야. 세드릭, 네가. 이튼에서 많은 사람을 접하지 못해서 그런 게야. 지금 당장은 너를 살려준 것
같아도 언제 뒤로 와서 찌를 줄 모르는 시대란 말이다.]

[그 사람이 살려준 목숨이니, 나중에 거두어 간다고 한들 뭐가 다를 게 있나 싶습니다.]

[세드릭!]

“…미친놈.”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이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드릭
그의 말마따나 적군이니 죽어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유리는 다친 팔로 책상을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저렇게 말하면 다치면서까지 세드릭을 살린 유리 저 자신이 뭐가 된단
말인가.

다음에 만날 일이 있다면. 아니, 프림로즈 경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럴 기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야 할 듯싶다. 때 늦은 유모 노릇을 하며 살려내는 것도
귀찮고, 무딘 신경 줄만 어울리지 않게 더 쓰일 뿐이니.

[…일주일간 근신하도록 해라. 학교에는… 내가, 내가 말해두마. 세상에….]

프림로즈 경은 제법 충격을 받은 것인지 헤드폰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그걸 듣는


유리의 마음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세드릭이 서재를 나서는지, 끼익대는 문소리와 함께 굳건한
대답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결국, 약혼을 하겠다는 말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참 대단하군.


〈영국 대사관 무관 그로벤 경의 여식과 약혼 예정, 프림로즈 주니어는 내키지 않음.〉

유리는 게오르그가 적어둔 내용을 읽으면서 세드릭을 속으로 탓했다.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라서 그런
것인가. 취향이 별난 것인가. 그로벤 경이면 높은 지위의 귀족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 의회 제 1 당의
배경을 뒤로한 영국군 내의 유력자가 아니었던가.

‘결혼하는 순간부터, 정치로 나가는 길이 보장되어 있을 테고….’

학연도 모자란 편이 아니니 영국 안에서만도 펼쳐진 성공 대로가 눈앞이건만. 그걸 한순간에 지나칠


감정에 휘둘리다니. 참, 별난 녀석이다 싶다. 유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감청 일지에 기록을 더했다. 그
와중에 프림로즈 막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오빠? 쟝이라는 사람 알아?]

[베스? 그 애를 네가 어떻게 알아?]

[방금 전화 왔어! 술 먹었나 봐. 혀가 꼬부라져가지고 워터게이트인지 테이트인지에서 만나자는 거 잊지


말래.]

[….]

약쟁이 쟝이라. 유리는 평소 세드릭의 곧은 심지를 알고 있는지라 그 전화를 가볍게 넘겼다. 아니,
넘기려고 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지금? 엄… 읍!]
“…뭐?”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유리는 손목의 시계를 보면서 헤드폰을 바짝 대고 대화에 집중했다.


워터게이트면, 시내에 있는 유명한 사교 클럽이 아니던가. 더불어 약쟁이 쟝이 매일 주말마다 약 판을
벌인다고 대사관 자식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그런 곳을 설마 가겠다는 건가? 유리의 마음이
불안함에 요동쳤다.

[…비밀로 해줘, 베스.]

[…오빠.]

그리고 그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건 평소와 다른 세드릭의 대답이었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누가 너를


노리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그런 곳에 간다는 건 자살행위다. 똑똑한 녀석이 그걸 모르겠나.

[오늘만.]

“…정신이 나갔지!”

유리가 헤드폰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급하게 감청실을 나섰다. 밖에서 서류 정리를 하던 게오르그가
튀어나오는 유리를 보고서 의아한 표정을 했다.

“유리? 그 대사 가족들 벌써 잠들었어?”

“게오르그, 감청 좀 부탁해! 다음번에 대타해줄게.”


“뭐? 지금?”

게오르그는 멍하니, 유리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깐깐한 녀석이 웬일이지.”

화장실이라도 급했던 것인가, 게오르그는 서류를 다시 되돌려 놓고 감청실로 향했다. 베스에게 모른


척해달라 당부를 해놓고 나온 세드릭은, 정원을 비추는 불빛을 제외하면 깜깜한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유리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아무리 마음이 복잡하다고 해도 쟝에게 갈 마음은 없었다. 오밤중에,
시내도 아닌 곳에서 차량 없이 움직이는 건 힘들었다. 그래서 집 주변을 잠시 산책할 겸 나왔을 뿐인데.

“세드릭.”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꼬부라지는 발음에 막, 저택의 대문을 열고 나오던 세드릭의 고개가 올라갔다.
쟝이 어둑한 그림자 아래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밤이 제법 깊어서 침침한 분위기 가운데 쟝의 웃음기
어린 이빨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세드릭은 주변을 살피다가 다가갔다. 마주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아까 전화했는데.”

“…쟝.”
“얼굴 보기가 힘들어. 귀한 몸이라 그런가.”

“…여기는 어쩐 일로.”

친근하게 다가와서 어깨동무를 거는 쟝의 모습에 세드릭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끈질기다 싶을 녀석의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평소 같은 마음도, 상황도 아니라서 그런가. 쟝이 이끄는
힘에 세드릭이 터벅터벅, 한 발자국씩 끌려가고 있었다. 쟝은 빈손으로 가로수 그림자에 가려진 지프
하나를 마술사처럼 보여주었다.

“쨔잔. 특별히 귀한 친우를 위한 서비스. 타.”

“…관심 없어.”

가까워진 곁에서도 제법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하니, 그가 권유하는 장소가 평범한 클럽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이튼의 기숙사에서 종종 맡던 냄새를 기억해내며 세드릭은 몸을 빼려 했다. 쟝의
느긋한 말만 아니었더라면.

“그러지 말고. 특별히 네가 온다고 해서, 네 취향대로 맞춰두었으니까.”

“내 취향이라니.”

언제 말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 자기 취향을 안단 말인가. 세드릭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쟝이 다 안다는


식으로 세드릭을 회유했다.

“바르샤바 여자들이 취향이면, 숨기고 다닐 법도 하지.”

“바르샤바?”

“걱정 마. 거기 녀석들은 그렇게 입 가벼운 녀석들 아니니까. 특별히, 너를 위해서 내가 클럽 녀석들에게


순수 금발로만….”
세드릭의 목소리가 의아함으로 치솟았다. 중립지대라고는 하지만, 쟝은 세드릭 자신처럼 조금 별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연신 바르샤바 연맹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방금처럼 친근하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세드릭의 반응에 쟝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뭐야, 맞구나? 그래, 그 러시아 부속 학교 다니는 바르샤바 자식들도 잘 오는 곳이니 네 유별난 탐구에
꽤 도움이….”

“…러시아 학교 사람들이… 온다고?”

“어… 응. 뭐, 앞에서는 쌀쌀맞게 굴어도, 뒤에서는 제법 친밀한 편이라서….”

거북스러워하던 분위기는커녕, 쟝의 팔을 붙잡고 캐묻는 세드릭의 반응에 도리어 쟝이 당황했다.


세드릭을 데려오라는 학교 녀석들의 성화에 그동안 보고 들은 내용을 잘 섞어서 내보냈건만.

“러시아 학교 다니는 녀석들은 대부분 오지. 그렇다고 아무나 오는 건 아니니까 수준은 걱정 말고.”

“…갈게. 어디라고?”

조수석 문을 열고 타는 모습에 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샌님의 취향이 진짜로 바르샤바 여자일 줄은


몰랐다.

‘이거 잘하면 커다란 스캔들 하나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런 놈들은 깔끔하게 놀 줄을 모르는데 말이지. 쟝은 속으로 우려를 표하면서도 다시 웃음기를 입에


걸고서 주차해둔 지프로 세드릭을 이끌었다. 또 모르지, 이런 놈들이 맛 들이면 꽤 재밌으니까. 한 수
가르쳐주는 재미도 있겠다며 쟝은 운전석을 향했다.
“진작 이랬으면 좀 좋아? 샌님.”

* * *

마이센가를 떠나서 뒷골목에 대충 주차 해두고 내리자 불빛 하나 없는 건물 사이로 길이 보였다. 세드릭이


가만히 그 골목의 입구에 서 있자 쟝이 손짓했다.

“이리로 따라와. 처음 오면 잘 모르거든.”

“…확실히 그러겠네.”

창문도 널빤지 따위로 꽁꽁 막아두어서 빛 하나 새어 나올 틈이 없었다. 두 명의 짙은 그림자가 으슥한


골목 사이로 스며들면서 둔탁한 문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 후에도 그 후미진 골목길을 지나는 인기척은
없었다.

“으, 추워. 들어가자마자 한 대 피워야지 원.”

“오셨습니까. 이분은?”

촘촘한 벽돌에 가려진 비밀 문을 더듬던 쟝이 특정 위치를 밀어내자 두꺼운 철문이 기울여지며 바로 거인


같은 가드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하고서 양복을 걸친 그는 익숙한 얼굴의 쟝을 향해서 아는 척을 하다
말고 뒤따라온 세드릭을 경계했다. 쟝은 거인의 어깨를 치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음, 우리 새로운 회원. 잘 기억해 둬. 뭐, 까먹을 얼굴은 아니지.”

“실례했습니다. 환영합니다. 위층에 다들 계십니다.”

“…예.”
‘이튼에서도 사교 클럽은 있었지만,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드릭은 제법 삼엄한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가던 사교 클럽이라고 해봤자


학문에서 파생된 연구를 탐구하는 쪽이라든지, 놀이라고는 크리켓, 체스, 카드 게임 따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가도 아침의 일들, 그리고 지금 그가 있는 장소를 생각하며 대충 이해했다. 바르샤바 쪽 사람도


모이는 거면, 확실히 허투루 관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세간에 들키는 순간
보통의 사건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테니까. 뒷문 너머로 좁은 계단 따라 올라가는 동안 쟝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바르샤바 녀석들은 특유의 꼿꼿함이 있어서 말이야. 한 대 같이 피우면서 이야기를 좀 트여줘야 말하기
시작하거든. 그동안 네 취향을 난 잘 엄선하고 있을 테니 잘 해봐.”

“뭐?”

“녀석, 겁먹지 마. 우리 쪽 녀석도 몇몇은 있으니까. 네가 온다고 다들 기대하고 있으니 거칠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일하는 사람들도 다 훈련받은 사람들이라 정보 같은 게 새어나간다든지,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올라간 층은 마치 어디 화려한 저택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와중에 어둑어둑한 램프의 불빛이
간신히 공간의 크기를 짐작게 해주었다. 계단참 옆에 굳게 닫힌 내실 앞에서 쟝은 외투 안쪽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내서 세드릭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이베리아에서 특별히 들여온 거니까. 한 대씩 주면 분위기가 괜찮을 거야. 그
녀석들은 워낙 추운 곳에서만 살아서 싸구려 대마만 들어오는 모양이라. 그럼, 이따가 보자고.”

쟝은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무작정 세드릭을 내실 앞으로 훅, 넣었다. 예기치 못한 쟝의 악력에


세드릭은 뭐라 할 새도 없이 내실로 툭, 들어왔다. 그러자 한창 소파에 앉거나 그 주위로 서서 잔을
나누고 어둑한 램프 사이로 북적이던 소리가 멎었다. 동시에 내실의 사람들의 시선이 멈추고 분위기마저도
고요하니 잦아들었다.
“….”

“….”

쟝이 넘겨준 케이스를 손에 쥔 채로, 세드릭은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자세를 고쳤다. 주변에 사람들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따금씩 속닥대거나 얼음이 들어 있는 크리스털 잔으로 옅은 웃음을 숨겼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시각이 마비된 것도 같았다.

“흠.”

세드릭은 입이 말라가는 중에 헛기침을 하며 문 앞에서 슬슬 움직이며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향했다. 그런


움직임을 모두가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순간 괜히 왔다고, 세드릭은 후회했다. 뒤늦게 주인 없는 술잔을
드는 그의 주위로 속닥이는 소리가 여러 언어로 들려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부임한 영국 참사관 아들이야. 귀족 출신이래.”

“여왕이랑 친인척이라지?”

“흠, 잘생겼지만 그런 배경은 함부로 건드리기는 좀 무서운데.”

“뭐 어때, 여기쯤 오면 생각이 없지는 않겠지.”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매캐하다 못해 은근히 고약함이 퍼졌다. 서로의 입에 돌아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냄새에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평소 쟝에게 풍기는 냄새 때문이라도 대충 평범한 사교 클럽이
아닐 것은 알았다. 그는 외투 소매로 입가 근처를 짓누르며 냄새를 막았다.

‘…대마랑 양귀비인가.’
짐작은 했지만 그런 쟝을 따라온 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그의 눈이 어둑한 램프 아래에서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친 것 같은 얼굴들이 희미한 램프의 불빛 아래서 속닥대기를 반복했다.
영어와 독일어가 간간이 섞여 있는 어투 사이에는 신랄함이 섞여 있었다.

“아서라. 아까 쟝이 그러는데 좀, 특별한 취향이래.”

“예를 들면?”

“왼손잡이가 좋다던데.”

“영국인이? 그건 정말 특이하네. 귀족이면 보통, 같은 쪽을 원하는 것 같던데.”

“제약이 더 생기기 전에 맛보고 싶은 거 아니겠어?”

보통의 귀족들이라면 보통 비슷한 사람을 찾을 것이다. 이튼에서도 본 학우들도 다들 그러했고, 그


가까운 예로 세드릭 그의 아버지도 별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그렇게 다르지 않게 살아갈 거라고
짐작은 했다. 같은 나라의 사람이다 못해 친구의 동생이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니 그저 적당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약혼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눈앞에서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야기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범생이니 샌님이니 하는 만큼, 무난하게 잘 살아갔을 것이라는 걸. 그는 쟝이 건네준 케이스를
만지작대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르샤바 사람들도 온다는 말에 충동처럼 왔다. 정말로 약혼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새로운 얼굴이신데. 누구 소개로 오셨는지.”


짙은 금발 머리를 쓸어 올리는 사람이 세드릭에게 다가왔다. 딱딱한 어조로 보아 세드릭 그가 속한 진영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다니엘? 아니, 아니다. 달라.’

“재밌는 걸 가지고 있네.”

그는 세드릭이 쥐고 있는 철제 케이스를 보면서 회색빛 눈이 슬며시 웃었다. 그때 세드릭은 깨달았다. 좀,


닮긴 했지만 온도 차가 제법 났다. 그 사람은 평소에 차가워도, 웃을 때는 진심으로 웃는다. 보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지게 웃는데, 이 사람은 가리고 웃는다. 세드릭 앞에 선 그는 들고
있는 잔으로 입을 축이고 넉살 있게 아는 척을 했다.

“쟝의 친구로군. 아, 혹시 새로 왔다는 그 친구인가. 반가워요. 난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여기서는


같은 친구입니다. 알렉스라고 불러요.”

“…그런가요. 그럼 내게도 친구가 되겠군요. 기념으로 한 대 피우고 싶다면.”

말도 없이 꿰뚫어 보는 눈치에 세드릭은 대충 감지했다. 이유 없이 말을 걸 필요는 없으니, 목적은


이거겠지. 세드릭의 권유에 알렉산드르가 번지르르하게 웃었다. 세드릭의 눈치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잘 말려진 한 개비를 꺼내서 근처 불을 빌려 태웠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럴 때마저 고급을 추구하는 모양이라. 가까이 두면 즐겁죠. 오래 두고 싶지 않은 게


흠이지만. 한잔하지 그래요.”

“아니, 난….”

알렉산드르의 손짓에 비슷한 느낌의 청년 하나가 벌건 얼굴로 보드카 병을 들고 왔다. 알렉산드르는 병을


받아서 세드릭의 잔에 적절하게 부어주었다. 순식간에 녹아드는 투명한 술을 보면서 알렉산드르가 독한
연기를 뿜어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쿨럭대는 세드릭의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피식 웃었다.

“쟝이 버릇이 나빠서, 꼭 괜찮은 사람 꼬아내는 버릇이 있지. 고상한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
나가는 문은 저기 있다고 미리 말은 해주죠.”

알렉산드르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세드릭을 보고 파하하, 크게 웃었다. 속닥대던 여학생들은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환히 반겨줄 거라고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러다가는
기다리지도 못하고 쫓겨날 모양새였다. 세드릭은 대충 기침을 멎어두고, 보드카가 독하게 섞인 잔을
비웠다.

“어어….”

연신 꿀떡꿀떡 대는 울대를 보던 사람들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나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술을 호기 있게 비운 세드릭을 두고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동시에


알렉산드르도 손짓으로 친우들을 불렀다.

“재밌는 친구가 하나 들어왔네. 이거 가지고는 부족하겠어.”

벌게진 세드릭의 곁으로 각기 다른 잔을 쥐고 있는 손이 들어오며 새로운 인물을 반기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독주를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중에, 쟝이
돌아왔다.
“오, 세드릭. 내 친우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줘. 고운 얼굴이 벌겋게 물든 것이 마치 난쟁이 같군.”

“그건 네 이야기 아닐까, 쟝.”

“원,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까르르 웃어대는 사람들 가운데 쟝이 어깨를 으쓱대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있던 알렉산드르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대마 한 개비를 까딱대며
인사했다.

“재밌는 친구를 데려왔어. 어디를 그렇게 갔다 온 거야?”

“취향도 재밌는 녀석이라, 환영 준비 좀 하고 왔지. 뭐야, 벌써 다 피웠어? 젠장. 세드릭 녀석 3 층에


두고 올 테니 기다려.”

“글쎄다.”

알렉산드르가 입 안에 담고 있던 하얀 연기를 분한 얼굴을 하는 쟝에게 뿜어내었다. 그러자 세드릭을


부축하는 쟝의 얼굴에 황홀감이 깃들었다.

“역시, 이 향기. 그 어떤 대마도 이베리아 산 대마에 비할 게 없지. 에휴, 미케 소원 들어주려다가 이게


무슨 고생이람.”

투덜대는 쟝이 세드릭을 부축해서 내실을 이끌어 나가는 동안 다들 키득대었다. 3 층이면 소위 관계가


벌어지는 곳 아닌가. 알렉산드르는 술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쟝의 부축에 끌려나가는 세드릭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영국인이라….’
원래 맛을 들인 사람도 아닌데, 쟝에게 걸려서 각종 맛은 다 보고 나가겠다며 마시던 잔을 비웠다.

#chapter 19

* * *

“이봐, 세드릭. 정신 좀 차려봐.”

“…으응.”

“바르샤바 녀석들, 너무 심하게 했잖아. 세드릭, 나 알아보겠어? 응?”

“…쟝?”

까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다 못해 벌건 뺨에 가닥가닥 드리워진 세드릭의 얼굴을 본 쟝이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알렉산드르 녀석에게 걸려서, 특유의 신고식을 톡톡히 치러준 모양이었다. 독한 술도 그렇고 약
냄새가 제법 밴 것을 보니 정신이 나가고도 남을 게 분명하다. 저보다 더하다고 혀를 쯧쯧 차면서 그는
세드릭을 3 층 별실 침대에 우선 눕혀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 나야. 그래. 준비해뒀어. 어쩌다가 정신이 좀 나간 거 같긴 한데…. 무튼 난 하라는 대로 다 했어.


나머진….”

크지 않은 방은 들어오는 문을 빼면 창문 하나 없었다. 어렴풋한 작은 불씨를 빼면 얼굴도 자세히


보이지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밀한 일을 하는 곳에서 상대를 정확히 알아볼 필요는 없었으니
일부러 조성해둔 것이다. 그런 일탈을 즐겨하는 장소에 세드릭을 둔 쟝은 나가기 전 나름의 당부를 했다.
“이봐 세드릭, 내 말 들려?”

“음….”

그렇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쟝은 뜨끈뜨끈한 체온이 느껴지는 세드릭의 뺨을 살짝 치면서 말을


이었다.

“네 취향대로 잘 준비해뒀으니 제대로 즐겨보라고. 응?”

“으음….”

“난 네가 해달라는 대로 했다. 끝내주는 밤 보내.”

“응….”

넘실대는 의식 중에 열기에 들떠서 대답하는 세드릭을 두고 쟝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케가 부탁한 대로


할 만큼 했다. 잡은 물고기가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한들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니까. 무책임한 쟝이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걸음 소리가 나던 문 앞에서 새된 소리가 살짝 났다.

-윽!

동시에 질질 끌려가는 소리도 어렴풋하게 들리던 바깥이 조용해진 후에 세드릭이 있는 방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응….”

잠시 동안 불어오는 바깥 공기가 달아오른 체온을 낮춰 주는 게 반가운지 세드릭이 뺨을 누워 있는 침대에


살짝 비볐다. 문이 찰칵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군화 특유의 무거운 소리가 터벅, 터벅 울리다가 이내
세드릭이 누워 있는 침대 앞에서 멈췄다.

“…이봐.”
짧은 한숨과 함께, 골치 아프다는 목소리가 내려왔다. 골치 아픈 녀석. 갑자기 이런 짓을 하다니….

‘그렇게나 약혼이 싫었나.’

유리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째 일탈 한번 벌리는 게 거대하다. 이런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서로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놈들이 득실대는 곳이라서 잔을 나누다가도 그다음 날
서로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일이 잦았다.

‘알렉산드르도 자주 오는 곳이라, 내가 온 걸 들키면 골치 아파져…. 빨리 나가야겠군.’

유리는 세드릭이 있던 문 앞에서 대충 기절시킨 여자를 떠올리며 세드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름의
배려로 옆방에 눕혀 둔 여자는 언뜻 보아하니 연합국 쪽 여자였다. 다행히 그가 우려했던 큰일은
없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바르샤바 쪽 사람이었다면 당장 송환 당해도 모자라지 않을 일이었다.

“이봐, 세드릭.”

유리는 조그맣게 속삭이며 가쁜 숨을 쉬는 세드릭의 몸을 흔들었다.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냉정한 목소리는


세드릭의 정신을 깨우는 것에는 제법 효과적이었다.

“…다…니엘?”

“….”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세드릭의 입술에서 나온 이름에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빨리 온다고
왔는데 이미 술에 절어 있는 것부터 해서 온몸에서 진동하는 약 냄새를 보면 정신이 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세드릭의 반응에 유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새어들었다.
흐린 시야 속에서도 휘어지는 곡선만은 확실하게 포착한 세드릭도 마주 웃었다.

“진짜…네. 진짜…. 어떻게 왔어요?”

“그건 알 거 없고. 당장 일어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세드릭을 부축하는 가운데, 독한 숨이 유리의 귓가에 불어왔다.

“…좋아해요.”

“…헛소리하지 말고, 서.”

간지러운 말에 유리의 몸이 굳었다가, 세드릭의 몸을 등에 업다시피 해서 일으켜 세웠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이렇게 마신 것인지. 옆에서 풍기는 취기에 유리가 세드릭의 허리를 간신히 잡고서
일으켰다.

“으, 무거운 녀석….”

보고서에서 봤던 것처럼 세드릭은 이튼에서 승마를 했다던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유리의 팔 안에 간신히
다 잡힐 만큼 덩치가 제법 되었다. 유리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도록, 세드릭의 팔이 유리를 얽매어 들면서
둘의 몸이 기울여졌다.

“윽!”

“좋… 아한다고….”
다행히, 넘어지는 몸 뒤로 침대가 있어서 다친 곳은 없었지만 유리의 몸 위로 세드릭이 기대어 있었다.
유리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남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하아, 아침에도 말했지만. 남자라고 했잖아. 정신 차려, 집에 가야지.”

“싫어요….”

“….”

집에 가자는 말에 세드릭이 제 밑에 깔린 유리의 몸을 꼭 껴안았다. 늦된 어리광에 유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주사 부리는 거야? 제 몸통을 껴안은 세드릭의 어깨를 꾹꾹, 떼어 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싫어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기 싫어요….”

“그럼, 나랑 결혼할 거야? 그럴 건 아니….”

“…네.”

“…남자랑 어떻게 결혼을 해. 말이 되는 소리를….”

어째 세드릭 녀석, 술에 취하니까 제법 순한 성격이 증폭되는 것도 같다. 물론 대답은 반대로만 말하는


게 그리 순하지만은 않지만. 제법 술이 들어가서 정신이 녹아드는지 세드릭은 풀린 눈빛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다니엘만… 괜찮으면 할 수 있어요….”

“안 괜찮아. 좋은 말 할 때 당장 일어서. 안 그러면 아프게 깨워줄 테니.”

“아픈 건 싫은데….”
시무룩한 세드릭에게 유리가 눈을 감고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사람 걱정시키게 만들어서 달려오게 만든
것도 모자라 보모 노릇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 놈이다. 싶을 때, 입술에 말캉한 것이 맞닿았다.

“읍!”

유리의 눈이 떠지고, 젖어 드는 살 특유의 쪽쪽 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세드릭은 풀린


눈꺼풀 사이의 짙은 눈으로 유리를 올곧게 바라보며 집요하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아프게, 안 할게요.”

“그게, 읍. 무… 슨….”

세드릭이 연신 입을 맞추며 뜨거운 입 안의 온도를 유리에게 전달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독한 술 특유의


씁쓸한 내음이 전해지는 입맞춤에 유리가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달뜬 숨을 쉬는 것을 보던 세드릭이
유리의 하얀 얼굴 위로 입술을 자잘하게 맞췄다. 침대 위 둘의 몸이 가깝게 달라붙으면서 두툼한
옷감으로도 숨겨질 수 없는 하체의 부피감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유리는 기겁하며 세드릭의 어깨를
밀쳐내었다.

“그만, 그만해.”

“왜요, 내가 싫어요?”

“그것보다도, 약혼까지 한 녀석이 이런.”

“내가, 약혼한 거 알았어요?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 하하….”

‘아차.’
감청으로 알게 된 내용을 유리는 무심코 말하고 말았다. 죽, 밀려 나가는 세드릭이 붙잡은 유리의 코트
자락이 풀어지며 갈아입지 못한 짙은 녹색의 군복차림이 드러났다. 유리가 아차 싶어서, 코트를 여미는
동안 세드릭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입고 있던 옷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몸에 남은 취기와 약 기운이 다시
그의 몸에서 돌아다니며 열을 연신 피웠다.

“잔인해요. 내가 사랑하는 걸 알면서….”

“알겠으니까. 옷 입어.”

“그럼 그것도 알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거?”

“…대충은.”

깨어나면 한 대 쥐어박아 주겠다고, 유리는 마음먹으며 세드릭의 주사를 애써 달랬다. 그러자 세드릭이
제 옷자락을 잡은 유리의 손을 잡고 언뜻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럼 다니엘은, 나… 싫어요?”

“뭐?”

이건 또 무슨. 유리도 당황으로 바로 대답하지 못할 때, 세드릭이 더운 숨을 뱉으며 유리의 어깨를


잡았다.

“하아, 하아…. 나는 다니엘,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너.”

바지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본 유리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세드릭을 데리고 나가야 하건만, 어떻게 당사자가 도와주지를 않았다. 몸 상태도 보아하니 약에 술에 전
모양새라 그냥 나가다가는 눈에 띌 게 뻔하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유리를 안고서 코트
위의 몸을 더듬어가며 열에 들떠서 고백을 연신 읊조리는 세드릭에게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약혼녀… 생각해서라도 손으로 참아.”

손으로 세드릭의 달아오른 흥분을 달래줄 생각으로 유리가 코트 소매를 접어 올릴 참이었다.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빼자마자 세드릭이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어! 내가 준 장갑이다. 잘 쓰고 있네요.”

“…사이즈가 잘, 맞길래. 버리긴 아깝고.”

“그렇구나, 우리도 잘 맞아야 하는데.”

솔직하지 못한 대답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가늘게 눈을 뜨고서 살폈다.

“으음….”

“빨리하게 놔.”

“뭘요?”

“….”

굳이 그걸 말로 해야 하나 싶은데, 세드릭은 유리의 손바닥을 입가로 끌고 와서 입술을 대었다. 뜨뜻한


입술의 체온이 차가운 손길에 머무르다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동맥이 뛰는 손목 안쪽으로 움직이며 곧은
콧날이 손바닥을 긁었다. 오싹한 감촉에 유리가 움찔하며 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싫지 않으면요.”
“…놔.”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세드릭이 유리의 손바닥과 손목에 제 얼굴을 묻고서 짙은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유리가 그 강렬한
눈빛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세드릭이 제법 침울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돼요?”

“….”

“당신 말대로, 난 이제 약혼하면….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랬어야 하고. 어쩌면 유리 자신이 얽히지 않는 게 세드릭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자신 또한 어찌 됐든 명령을 받고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니.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세드릭은 그에게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구했다.

“사랑해요.”

“….”

흘러내리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유리의 손목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다시금 정중한 입맞춤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다가, 유리의 이마에, 뺨에 그리고 코끝에 차례로 넘어 들었다. 순수한 애정이 어린 몸짓에,
유리는 늦된 사춘기를 맞은 소년처럼 몸에 열이 올랐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훈련을 통해서 쾌감을 목적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것은 배웠지만, 이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것에 가까웠지. 이렇게 열이 나고, 가슴팍이 답답한 적은 없었다. 그것뿐이면
밀실이라서, 약 냄새 때문이라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납득해볼 텐데. 귓가에 부드럽게 얹혀 드는 세드릭의
진심 어린 고백이, 그의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어둑한 방에서 용케 유리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알아차린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빨개졌다.”

“…조용히 해.”

“그래도 예뻐요.”

“….”

“그건 모르죠? 모를 거야. 내 눈을 뺏어가지 않는 이상….”

보고서에는 분명 남학교를 다녀서 이성 교제 따위는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말하는 것 한마디


한마디에 채신머리없이 유리 자신의 가슴팍이 답답해지다 못해 점점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리의
눈이 한 번, 깊게 깜빡였다. 분명히.

“…후회할 거야.”

되돌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돌아갈 곳이 있을 때 돌려보내야 한다.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그의 삶과


다르게 세드릭은 언제든지 양지바른 곳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넘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드릭을 유리,
그가 있는 곳으로 끌어당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래도 사랑해요.”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육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도, 눈을 즐겁게 한다는 이유도 아닌.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솔직하게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 다시금 깨달은 사실에 유리의 푸른 눈 위로 촘촘히
흐드러진 엷은 금색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멍청한 녀석….”

유리는 말하고서도 그 말이 누구에게로 향하는지를 몰랐다. 평소와 같은 판단이 서지 않는 건, 세드릭이


먼저 돌발행동을 해서 그런 것이라며 그의 입술에 다시 닿아오는 뜨거운 체온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리 감시 대상이었다고 해도, 앞선 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그러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끌려갈 것이라면. 그저 무시하고, 그 자리에 두었어야 하는데.

“하하, 당신이 똑똑하니… 평균은 되겠네요.”

그의 얼굴이, 목소리가, 점점 궁금해서, 눈이 가서 다가가다가 결국… 다친 팔에서 비롯한 통증이 유리의


가슴을 찌릿하게 울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다친 팔을 잡는 손에서 온기가 전해지자 순간의 통증은
멎었다.

“읏….”

입을 맞춘 자리에 또 입을 맞추는 세드릭의 집요한 키스에 당황한 유리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세드릭의 입술이 유리의 뺨에, 연한 귓가에 죽, 이어졌다. 말랑한 귀 연골의 갈라진 틈 사이로 곧은
콧날이 파고들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었다.
“흣!”

이윽고 전달되는 짜릿한 간질거림에 유리의 하얀 목울대가 한 번 들썩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처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명령으로 가지는 관계가 아닌 것은.

“사랑해요….”

그리고 열이 오르는 귓가에 조심스럽게 닿아오는 말도, 전부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푹신한 침대의 면을


짚고 있는 세드릭의 손이 결국 움직이며 유리의 턱밑에 공고하게 여며진 군복의 재킷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풀어지는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살결이 유난히 희었다. 그걸 보던 세드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피부가 참 하얗네요.”

말은 곱게 하면서도 정작 전혀 곱지 않은 모양새로 부푼 세드릭의 하체를 가만히 보다가, 유리는 잘 빗어


올린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박게 하고 끝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하는 거지. 평범한, 관계는….’

보통은 요구를 하는 놈들에게 맞춰서 했던지라, 이런 경우가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놓쳤다.
심지어 세드릭은 제가 아는 게 맞다면 처음일 테니. 그냥 막, 하기도 좀 그렇다. 어찌 됐든 여자도
만나지 못한 세드릭에게는 남자도 처음이 아닌가. 고민하던 유리는 결국 세드릭의 어깨를 슬쩍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누워.”
코트를 대충 벗고, 군복의 재킷마저도 벗어낸 유리가 셔츠만 걸치고서 세드릭의 바지춤을 잡았다. 혁대를
익숙하게 풀어 내리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왜 그래요?”

“사랑하자며.”

제가 좋다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키스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는 마치 강제로 당하는 사람처럼 말을


더듬는 것에 유리가 입술을 끌어올려서 웃었다.

“그래서 나도 해주려고.”

“…정말요?”

“싫으면 말고.”

그럼 가짜겠냐. 제 옷을 풀어헤친 사람의 반응치고는 수줍기가 그지없었다. 처음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체 순수한 녀석이라 그런 것인지. 이럴 때마저도 정중하다니.

‘출신은 못 속이는군.’

유리가 피식 웃었다. 약이랑 술을 동시에 먹어서 어딘가 나사 빠진 대답을 죽 잇는 세드릭에게 유리가


고개를 들어서 세드릭의 상체로 살짝 올라왔다. 평소에도 좀 멍청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럴 때에도
멍청한 대답을 하는 게….
“아니, 아니. 그런 아닌데… 믿기지 않아서요.”

“눈이나 감아.”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면 미친 거겠지. 유리는 피식 웃으면서 살짝 벌려져 있는 세드릭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 사이로 번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힘이 스스르 풀렸다. 그에 유리의
손이 세드릭의 부풀어 오른 속옷을 헤치고 터질 것처럼 세우고 있는 물건을 잡았다. 익숙하게 바지춤을
풀어 내린 것에 비해 유리는 살짝 당황했다.

“….”

생각보다 물건이 컸다. 아니, 이전에 접대로 나간 고위 인사들이 작았던 것인가. 한 손에 간신히 잡히는
두둑한 부피감에 입이 선뜻 가지 않았다. 세드릭은 그런 유리를 보면서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흥분에
겨운 것인지 붉은 얼굴을 하면서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 저기. 이상…해요?”

“…그런 건 아니고.”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의 표면에 도드라진 핏줄을 보면서 유리의 입이 벌려졌다. 생각 외로 뒤쪽이 아플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끝을 입 안에 머금자 세드릭의 복근이 전율했다.

“그, 하으… 입, 에 왜….”

동시에 유리의 머리를 밀어내려는 손길에 유리가 물고 있던 선단의 끝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그러자
발기한 물건이 진동하며 끈적한 액을 혀 아래로 흘려내었다. 유리의 맑은 눈이 웃음을 흘렸다. 한 번
핥아줬다고 느끼다니. 솔직한 반응에 유리가 웃으며 갈라진 선단의 끝을 혀로 쓸어주었다. 까슬한 혀가
훑어지는 감각에 세드릭이 연신 헐떡였다.
“아으, 그, 만….”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잔뜩 느끼는 모습이라니. 어째 유리 제가 잡아먹는 기분이다. 유리는


세드릭의 단단한 기둥을 손으로 문지르며 깊숙하게 물었다. 목구멍 깊숙하게 그의 물건을 물고서
빨아들이자 세드릭이 결국 쾌감을 참지 못하고 유리의 머리를 잡고서 본능적으로 허리 짓을 했다.

“하아, 하아….”

“잠시, 윽….”

밀어내던 아까와 다르게 붙잡고 좆질을 하는 모습에 유리가 당황했다. 세드릭이 고개를 숙이고 풀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리를 보면서 연신 사과했다.

“미, 미안… 흣…. 윽….”

“끄윽, 윽….”

뜨거운 입 안에 자비 없이 박아대는 움직임에 생리적인 눈물이 매달린 눈을 유리가 한 번 깜빡였다. 사실


세드릭이 미안할 것도 없다. 이전의 놈들에 비하면 세드릭은 꽤 부드러운 축에 속했으니까. 성격을
닮아서 얌전하다고 할까.

‘물건의 크기는 좀 의외였지만.’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깔고서 혀로 움직이는 기둥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세드릭의 얼굴과 하체에 더욱 열이
몰렸다. 동시에 유리의 입 안에 뜨거운 액체의 씁쓸함이 퍼졌다. 그걸 알아차린 세드릭이 놀란 듯,
하체를 뒤로하고 유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 미, 미안해요. 그게, 너.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네. 평소에 자주 안 하나 봐.”

“뭘, 뭘요?”

“자위. 맛이 진해서.”

유리가 떨어져 나가는 성기 끝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하얀 정액의 흔적을 보면서 빨간 혀를 내밀었다. 입술


끝에 맺히는 하얀 액체의 행적을 세드릭이 시선으로 쫓자 혓바닥 안쪽에 고여 있는 모습이 선연하게
보였다.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세드릭에게 유리가 긴 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사정 흔적을 훔치며 꿀꺽
삼켰다.

“그, 그걸 왜 먹어요! 뱉어요!”

“윽. 아파.”

“아, 아파요? 미안해요. 그러려는 건… 그러게 왜 삼키고.”

세드릭이 벌게진 얼굴로 유리의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 안을 쑤셨다. 제 흔적을 망설임 없이 삼키는
모습을 본 세드릭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역력했다. 그런 세드릭을 유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보며 제 입
안을 거칠게 탐색하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왜?”

“왜, 왜라뇨. 그, 그런걸… 제 손, 가락을 지금!”

화들짝 놀란 듯, 손가락을 빼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가 도리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하면, 다들 좋아하던데.”

“좋, 좋다고요?”

“싫었어?”

“그, 건 아니지만!”

세드릭은 아닌 건가. 혹시 다른 취향이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먼저 박고 시작했어야 하는 거였나.


고민하는 가운데 세드릭이 유리의 몸을 눕혔다.

“뭐 해.”

“그러면 저, 저도 좋게 해줄게요.”

“뭐, 읏!”

그 말과 함께 유리의 바지춤을 헤친 그가 덥썩 입에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세드릭의 돌발행동에 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예측하기가 어려운 녀석이었다. 가만히 받아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해주려
한다니.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아니면, 원래 다들 이러는 건지. 유리는 세드릭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윽! 응!”

“아까 이렇게, 하면….”

의외로, 유리의 물건을 물고서 핥아 내리는 서툰 혀 놀림이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그리고 덩치부터 해서
힘이 제법 센 세드릭은 밀려나지 않고 계속해서 유리의 하체를 탐했다. 뜨거운 입 안에서 얽혀드는 온도와
피부의 마찰이 유리의 몸에 열기를 피워 올렸다.
“으읏, 하아. 그, 렇게…. 아으….”

선단 사이를 혀로 정성스럽게 애무하는 가운데 유리가 손으로 신음을 막았다. 분명 서툴기 짝이 없는


실력이지만 어딘가 애태우게 하는 쾌감을 전달했다.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힘이 들어간 허리가 뜨면서
들썩대는 움직임에 유리가 걸치고 있던 셔츠 자락이 벌어지며 땀이 밴 가슴팍이 드러났다. 세드릭이 한창
핥다 말고 유리의 가슴팍 위로 올라오며 가시지 않은 취기로 중얼거렸다.

“여기도, 섰네요…. 빨아줄게요.”

“뭐? 거기는….”

유리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세드릭이 꼿꼿하게 세워진 유리의 젖꼭지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성기와
다르게 작고 짧은 것이라 그런지 세드릭이 입질을 반복하며 유리의 신음을 키웠다.

“흐으, 읏! 응, 깨물지… 마…. 응!”

“조그…맣네요.”

세드릭이 마치 귀엽다는 듯, 웃다가 혀를 넓게 펴서 쓸어 올리자 유리가 신음하며 세드릭의 머리를 꼭,


잡았다.

“하으, 응, 그, 만….”

“다른 데는 다 하얀데, 여긴 분홍빛이네요. 알고 있어요?”

“으응!”

부끄러운 소리를 무해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해서 이상하게 열이 더 올랐다. 나올 것도 없는 판판한


가슴에 매달려 연신 애무하던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젖어 드는 하체의
감촉에 누워 있던 유리가 눈물 맺힌 투명한 눈을 깜빡대며 더운 숨을 뱉었다.

“흐으, 흐, 으….”

“처음, 인데 괜찮았어요?”

처음인 사람치고는 묘하게 쾌감 포인트를 짚어서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유리의
가슴팍에, 세드릭이 다시금 입을 천천히 맞췄다.

“심장, 소리가 빨라요.”

“…흥분해서 그래.”

퉁명스러운 대꾸에 세드릭이 서운한 듯, 매끈한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에 유리의 살결이 파득,
떨렸다.

“흐윽!”

“그러고 보니 못 들었어요.”

“뭐를, 흐응!”

“다니엘도, 빨리 말해줘요, 네?”

안 그래도 쾌감으로 예민해진 허리 부근을 그의 두꺼운 손이 지나다니며 유리의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면서도 유리의 목 부근에 입술을 맞추며 경애를 더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니.

“…오지도 않았어.”

유리의 입장에서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풋사랑 내를 풀풀 내는 세드릭의 모습이 그다지 밉지


않은 걸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유리 자신이 가진 마음의 방향은 확실했다. 들릴 듯 말 듯한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의 시무룩한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맞닿은 피부 사이에 전해지는 온도가 제법 뜨거웠다.
이제 사정도 했고 대충 약효가 풀렸겠다 싶어서 일어서는 유리를 세드릭이 붙잡았다.

“…어디 가요?”

“가야지.”

“왜 이렇게 급해요. 다니엘은 늘 그렇더라.”

세드릭은 붙잡은 유리의 팔을 강하게 당겨서 그의 품에 안았다. 기울어지는 유리의 몸을 꼭 껴안고서


세드릭이 젖은 귓가에 속삭였다.

“쫓기는 사람처럼.”

“무슨… 흐, 읏. 거기는… 아, 흐응.”

“난 아직 모자란데.”

유리의 가슴팍을 지분대는 느릿한 손길에 유리가 숨을 급하게 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박고 끝내는
것을 세드릭은 이상하게 제 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특히, 풍만하지도 않은 가슴팍을 연신 만지면서
신음하는 저를 만족스럽게 보았다.
“예쁘다.”

“무슨… 헛… 응, 흐윽, 아!”

“또 섰네요.”

“계속, 네가… 아응, 으, 흣!”

계속 세드릭 그가 집요하게 만져대니 몸이 자연스레 반응을 하는 걸 어떡하겠는가. 하지만 유리의 항의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다시 유리를 침대에 눕혀두고 가슴팍부터 시작해서 복부, 그리고 하체를
정성스럽게 핥아 내렸다. 두 번째로 정을 토해낸 유리를 웃으며 보던 그는 회음부 쪽으로 손을 움직여서
입구 쪽을 덧그렸다. 연한 살결을 긁어대는 손길에 유리의 몸에 긴장이 더해졌다.

“그, 내가… 할게.”

연이어진 사정으로 힘이 풀린 유리의 등을 세드릭의 손이 고정시켰다.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두고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 모르….”

여자도 사귀어 보지 않은 녀석이 남자랑은 어떻게 하는지 안단 말인가. 유리의 말을 끊은 것은 세드릭의


다정한 키스였다. 따뜻한 입술이 멀어지며 우습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책에서 봤어요.”

“…뭐?”
그가 엎드려진 유리의 자세를 고쳐서 둔부를 잡고서 갈랐다. 벌려진 살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다
싶을 때, 질척한 감촉이 한 번 스쳤다.

“뭐, 읏!”

“핥아서, 적셔주면… 좋대요.”

그 말과 함께 도톰한 혓바닥이 연한 살을 연신 질척한 체액으로 적셔 들어갔다. 유리의 신음도 다시 터져


나왔다.

“아응, 흐! 내, 내가… 할, 으응! 손가락으로….”

“괜찮아요… 제가….”

워낙에 고집이 센 세드릭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섹스를 할 때마저도 세드릭은 완고하기가 짝이 없었다.
유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는 한참 입구 근처를 침으로 척척하게 적시다가,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입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부드러운 침범에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하는 녀석의 손길에 잔뜩 흥분한 것도 제법 우스운데, 박지도 않고서 벌써 몇 번이나 갔다. 그리고


지금도. 세드릭은 유리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 열심히 빨고, 찔렀다. 입구 안쪽으로 혀가
부드럽게 확장될수록, 유리의 허벅지가 참을 수 없는 쾌감으로 덜덜 떨려왔다.

“하으, 응, 으!”

시트 사이에 얼굴을 묻어도 계속 터지는 울음소리에 세드릭이 더욱 천천히 핥고, 찔러대었다. 혹시라도
제 물건을 넣었을 때 유리가 아파하는 건 아닐까 싶은 우려에서 비롯한 것이 도리어 유리를 궁지에 몰았다.
세드릭이 읽은 책에서 그냥 삽입하면 제법 아프다고 쓰여 있던 것이 이러한 열정의 이유였다.
‘그것도 이렇게 작은 곳으로 넣는다면….’

속으로 걱정을 하는 세드릭의 몸짓이 유리의 흥분을 더 크게 그리고 안달 나게 했다. 다시 꼿꼿하게 세운


유리의 물건을 보고서 세드릭이 예민한 둔부에 대고 중얼거렸다.

“이제, 넣어도… 괜찮죠?”

“빨리, 넣기나… 해!”

“다행이다. 이제는, 저도 못 참겠어요.”

유리의 탄식 어린 허락과 함께, 방금처럼 부드러운 침입이 아닌, 커다란 것이 그 자리를 메우다 못해
잔뜩 벌려대었다. 세드릭은 아까 전 애무로 제법 부드럽게 풀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침입자를 허락할 줄
모르고 빡빡하게 조여 오는 압박감에 신음했다.

“다, 니엘…. 너무 좁아요. 윽.”

“으읏, 흑! 너, 무 커. 천, 천히… 해. 윽!”

유리의 진심 어린 애원이 무색하도록 세드릭은 허리를 더욱 바짝 대었다. 진입하다가 도중에 막힌 것이


제법 불만스러운 듯. 밀어붙이는 몸짓에 유리가 시트를 잡고 신음을 터뜨렸다.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그가 경험한 것 중에 세드릭의 물건이 유독 커서 적응을 하기가 힘들었다. 난폭한 침입을 가감 없이
받아내는 중에 세드릭의 선단이 유리의 안쪽에 닿았다. 순간, 유리가 고통스러워하던 아까와 다르게 새된
신음을 뱉었다.

“하으, 으응! 흐읏!”

“거기가… 좋아요? 응?”


물어본 것이 무색하게 세드릭이 유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 부분에 허리 짓을 더했다. 그에 유리의 대답
대신 열띤 신음이 연신 터져나갔다.

“흐아으, 으응, 흣, 좋, 아흐….”

“하아, 저도, 윽, 좋아요. 뜨겁고….”

세드릭이 뒤에서 연신 쳐올리는 몸짓에 유리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었다. 세드릭이 웃는 얼굴로
뒤에서 속삭이는 바람에 유리의 등골이 오싹하게 뒤흔들렸다.

“아흑, 흐읏, 응! 깊, 깊어….”

눕혀둔 몸을 거센 악력으로 고정시키고 느끼는 부분만 쳐올리는 바람에 유리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눕혀진
그 자세로 세드릭의 거친 허리 짓을 받아내어야 했다. 세드릭은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거세게 압박하기를 반복해서 쾌감의 여파를 더욱 세게 만들었다. 그런 유리에게 쉴 새 없이
박아대던 세드릭이 유리의 몸을 뒤집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으, 응….”

“하아, 하아, 얼굴. 보고 싶어요.”

“마음, 대로… 흑!”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리의 눈에 살짝 키스하고서 세드릭은 유리의 다리를 제 허리에 걸치고 움직임을


반복했다. 거대한 물건이 배 안쪽을 빠듯하게 채워나가는 부피감에 유리가 붙잡을 것을 찾다가 앞에 있는
세드릭의 상체를 안았다. 그러자 세드릭도 유리의 몸을 껴안고서 하체를 바짝 대었다. 연이은 흥분의
여파로 사정이 가까웠다.
“흐읏, 응!”

“아, 윽.”

“흐으, 흐으….”

‘끝까지 해버렸…어.’

배 안쪽에 퍼져가는 체액의 온기에 유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온몸이
물들어 있었다. 식지 않는 열기를 떨쳐보려고 안고 있던 세드릭의 어깨를 쥐다 못해 손톱으로 박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런 유리의 떠나가는 손을 세드릭이 제 목에 걸었다. 유리의 지친 눈이 들썩였다. 그런
유리에게 세드릭은 어딘가 총명해진 눈빛으로 요구했다.

“저기, 다니엘.”

“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쉬는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세드릭은 유리의 장밋빛 뺨에 살짝 입 맞추며 종알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뭐?”

약 기운이 가신 것이 분명한데도, 유리의 안에 여전히 들어차 있는 물건의 부피감은 여전했다.

“…아.”
유리는 가슴팍 쪽에서 느껴지는 낯선 무게감에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떴다. 그제야 제가 깜빡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누워 있던 몸을 급히 일으켰다. 열기가 가신 몸이 움직이며 좁은 침대의
시트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으응….”

“….”

유리에게 무게감을 주고 있던 원인은 여전히 꿈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편안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잠에 빠진 세드릭을 확인한 유리가 손으로 머리를 짚고서 한숨을 쉬었다. 셔츠 자락 겨우
걸치고 있는 몸은 붉은 자국들로 제법 화려했다. 첫 경험이라는 세드릭은 대체 무슨 책을 읽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가 활자로 습득한 것을 마음껏 실천했다.

“하아….”

‘끝까지 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그냥 가볍게 풀어주고 세드릭을 집에다 데려다주려고 했던 것일 뿐인데. 그 생각과 다르게 정신을 잃을


때까지 거하게 해버렸다.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횟수를 세는 것이 무익할 정도로 관계를
맺어본 유리가 생각 외로 세드릭에게 끌려다녔던 탓이다. 멈추려면 멈출 수도 있었건만, 그러지 않은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어.’

처음 느껴보는 감각들이었다. 그동안 접대로 관계를 맺은 고위 간부들에 비하면 세드릭은 경험이 없어


서툴긴 해도 유독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같은 남자인데도 거리낌 없이 만지고, 물고….’

그 탓에 유리도 제대로 흥분을 느끼는 바람에 그가 이끄는 대로 울면서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되돌아본들 후회는 늦었다. 유리는 혹사당해서 뻑적지근한 허리를 손으로 받치면서 좁기 그지없는 침대를
나섰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바닥에 닿자, 마룻바닥이 들릴 듯 말 듯 삐걱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창문도 없는 이 독실은 빛이 한 점 들지 않아 시간을 가늠하기가 도통 어려웠다. 결국 유리는 제 몸에서


툭 떨어져 나간 세드릭의 손목에 있는 산토스 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5 시… 25 분. 아, 이런. 게오르그!’

시간이 이렇게 흘렀단 말인가. 평소 보다 일찍 일어난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저


대신 밤새워 근무를 했을 게오르그의 생각에 유리는 얼른 몸을 일으켜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군복을 급히 주워 입었다. 그러자 침대 위에 그의 빈자리를 더듬는 세드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으응… 다니엘….”

“…일어나.”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정말.’


제집에서도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지는 않으리라.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대는 세드릭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무심하게 치워주던 유리의 손길이 멎었다. 졸음에 취한 눈이 유리의 손길에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겨울을 맞은 북해의 색깔과 같이 까만 눈이 유리를 가득 담고서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웃었다.

“다니엘.”

“…정신이 들어?”

“꿈이… 아니었어요.”

“….”

“기분… 좋네요.”

“…뭐가.”

“눈을 떠도, 당신이 있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좋아요.”

웃음기 어린 눈에는 그 어떤 후회도, 한 점의 어두움도 없었다. 이럴 때마저도 저와 다를 줄이야. 유리는


마지막으로 군복 재킷의 단추를 채우고서 재빨리 코트를 입어 제가 입고 있는 복장을 가렸다. 세드릭이
지금마저도 정신머리 없는 녀석이라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유리의 재빠른 행동에 세드릭도 정신이
돌아오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베개에 짓눌린 까만 머리칼이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긁는 모습에 유리가 세드릭의 바지와 셔츠 따위를 집어서 던져 주었다.

“빨리 입어.”

“뭘 그래요. 이미 다 봤잖아요.”

“….”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에 짐이 얹혀진 자신과 다르게
세드릭의 얼굴은 어딘가 개운해 보여서 유리의 마음을 긁었다. 유리가 대충 신고 있던 군화의 매듭을
조이는 것을 보면서 세드릭이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피식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유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왜?”

“쟝 따라오길 잘했네요. 오면서도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 만날 줄은 몰랐는데.”

“다음부터는 이런 곳 오지 마.”

“왜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유리의 손이 군화의 매듭을 꼭 매고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세드릭은 넥타이를
매다 말고 그 시선을 곧게 받았다. 아직 정돈이 되지 않아 흐트러진 차림새에도 특유의 당당함은 어디 갈
줄을 몰랐다.

고작 옷을 입는 데 평생이 걸린다며 유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철부지와 엮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리는 아직도 전날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선이 있다면,
서로의 자리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

“위험하니까.”

‘…여전히 멍청이 같이 웃어.’

처음처럼. 아무것도, 서로에 대해서 몰랐던, 그 시절로.

유리의 달은 발걸음이, 세드릭이 편히 걸터앉은 침대 앞으로 향했다. 하얀 손이 뻗어오는 걸 세드릭은


그저 잠자코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온몸으로 유리,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의 손이 목에 둘러진 넥타이를 쥐었다. 세드릭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씩 웃었다.

“내가 걱정돼요?”

“…안 해.”

유리의 손이 능숙하게 매듭을 만들고,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을 소리 없이 조여서 보기 좋게 넥타이를


만들었다. 목을 순식간에 조여드는 감각에 세드릭의 등골이 일순간 서늘해졌다. 그가 좋아하는 섬세한 그
손길이 그의 급소를 슬쩍 스치는 그 기분.

‘…마치 올가미에 걸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고 하나.’

섬뜩하다고도 일컬을 수 있는 그 기분이. 재밌게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가는 저 손길이 아쉽게
느껴질 뿐. 그는 밤새워 내내 침대 위에서 맞잡았던, 가는 손마디를 떠올리며 냉정하게 떨어져 내리는
특유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우리 둘이 있는 모습을 누가 보면 곤란해지니 그런 것뿐이야.”

“…아. 확실히.”

솔직하지 못한 대답도 섭섭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어째 귀에 달기만 하다. 저 냉정한 말도 왠지 세드릭


자신이 곤란해질까 걱정된다고 들릴 지경이었다. 세드릭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더욱 날카로워진 감각을
느끼며 옷가지를 추슬렀다.

쟝이 고급품이라고 너스레를 떨던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친구들에게 듣던 이야기와 다르게 약 기운이


찝찝하게 남지 않고 개운했다. 몸을 일으키며 삐져나온 셔츠와 조끼 따위를 챙겨 입는 동안 그를 등지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다, 입었어?”

“…아, 직요.”

유리가 걸친 각진 코트의 옷깃 너머로, 짙은 녹색의 깃 위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도드라진 자국. 그 위로 스치는 엷은 색의 금발 머리가 그의 가슴팍에 진동을
만들었다.
“…왜 가만히.”

“….”

유리는 움직임이 없는 세드릭에게 몸을 돌렸다가 제 뒤에 바짝 기대어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읍.”

“…하아.”

얌전하던 녀석이 갑자기, 제 입술 끝에 입을 한 번 맞추더니만. 유리 그를 빤히 보다가 열띠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짧게 쪼아대듯이 턱 끝을, 아랫입술을, 물어대는 움직임에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응.”

그마저도 뒷목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에 막히고 말았다. 결국 열렬한 입맞춤에 유리도 이기지 못하고
서로의 혀가 엉켜 들면서 질척한 소리를 내었다. 매끄러운 두 입술이 번들번들하게 젖어가는 동안,
유리의 맑은 눈빛이 금방 푸르게 젖어갔다. 세드릭이 그 눈빛에 홀려서 입술 위로 살짝 입 맞추었다.
다시금 열을 품어내는 세드릭의 눈을 본 유리가 애원했다.

“…안 돼.”

“안, 할게요.”

세드릭은 유리의 말에 따르면서도, 그가 유리의 목덜미에 남겨둔 자국에 입술을 살짝 내렸다. 낯선


숨결이 연약한 살결에 닿으면서 유리 그에게 남겨진 자국을 깨닫게 했다. 손을 올려서 그 자국을
확인하려던 유리의 손은, 그 자국 위로 부드럽게 닿는 감촉에 멈추고 말았다.
“읏….”

쪽, 하고 소중하게 입 맞추는 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들렸다. 세드릭의 아랫니 끝이 옴폭 파인 살 자국에


걸리면서, 유리의 살결을 더욱 자극했다.

“…잘 남았네요.”

“…떨어져.”

‘언제 또 이렇게….’

유리의 말에 세드릭은 다시금 그 자국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유리 그가 명령한 대로 떨어져 나가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감촉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유리가 불만 어린 눈빛으로 목덜미의 자국을 확인하는 모습에
세드릭이 몰래 웃었다.

제 연인은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 모습도 제법 귀엽다. 목덜미의 자국이 연신 신경 쓰이는


유리가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고 코트의 깃을 올려서 완전 차단을 하는 동안 세드릭은 그사이에 재킷과
코트까지 잘 갖춰 입었다. 유리는 문을 열기 전에 세드릭에게 눈을 맞추고 당부했다.

“나가면.”

세드릭, 그의 눈을 보고서 분명히 말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일을 끝으로 만나지 말자고. 그는 가족들의


품으로, 유리 자신은 그가 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 눈 안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낯선 탓인가. 그의 시선이 아까 전 입맞춤으로 부어오른 세드릭의 입술에 걸쳐졌다.

“나가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알겠어요.”

“이런 곳은… 다시는 오지 마. 앞으로 나도 오지 않을 거니까.”

얄궂게도 멍청하고도 뻔한 소리가 나오는 입술은 멈춰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자신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유리는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재빨리 방을 나섰다.

“잠시만, 같이 가요.”

급히 걸음을 하는 유리를 따라오는 세드릭도 같이 걸음을 빨리했지만, 골목을 넘어가자마자 유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기운이 세드릭의 뺨을 긁어대며 달콤했던 시간을 깨트렸다. 이른
시간인지라 적은 수의 사람이 걸어 다니는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유리를 찾지 못한 세드릭이 흐트러진
머리를 긁적였다.

“…요정도 아니고. 매번 감쪽같이 사라진단 말이지.”

결국, 그의 연인이 명령한 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chapter 20

* * *

“…요정도 아니고. 매번 감쪽같이 사라진단 말이지.”

“….”
한참 뒤에야 사라지는 세드릭의 인기척에 유리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숨겼던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고요함이 머무르는 골목길이 무색하게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숨어 있는 동안에, 혹시라도
그의 고동이 들켜서 다시 세드릭이 그를 찾아내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반복된 훈련 아래 죽였던 심장이 깨어난 것은. 새벽녘 차가운 공기에도 식을 줄 모르는 얼굴의 열을
간직하고서 유리는 정보부로 향했다.

“…으음….”

“…게오르그.”

역시나 게오르그가 급히 자리를 비운 유리 자신을 대신하고 있었다. 감청실의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는 기계


앞으로 게오르그가 머리를 대고 졸고 있었다. 그의 얼굴 밑으로는 지난 밤 감청으로 인한 메모가 제법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저 때문에 불쌍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게오르그의 어깨를 유리가
흔들었다. 그러자 게오르그가 반사적으로 퍼뜩 일어나서 경계 자세를 취했다.

“…누구…. 유, 리?”

“미안, 게오르그. 나가서 제대로 눈이라도 붙여. 여긴 내가 정리할게.”

“다음엔… 일찍 좀, 와라. 하아암…. 졸려 죽는 줄 알았어.”

“정말 미안.”

“알면 됐고. 참, 라스콜니코프 대령님이 너 오면 보고하러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

“아, 그래. 전달 고마워.”

게오르그는 군복의 목깃 부분을 느슨하게 풀고서 기지개를 한 번 크게 하고 감청실을 나섰다. 유리는


자리에 차분하게 앉아서 게오르그가 도청을 하면서 받아 적은 정보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와
세드릭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이센에 있는 세드릭의 집과….

“그로벤… 대령?”
그로벤 대령은 영국 대사관 쪽의 무관인지라 평소에도 주요 감시 대상이긴 했다. 그렇지만 몇 년 동안
기록해도 그 결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정이라서 크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그로벤 대령의 집에서 나온 도청 기록에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프랑스 대사, 이탈리아 대사, 네덜란드 무기 상인과 함께한 저녁 식사.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이미 베를린으로 부대 파견 허가 완료.

영국만 아직 불투명. 여왕의 비밀 칙서 내용은 거부에 가까운 듯.

따라서 약혼으로 친 여왕 파이자 친척인 프림로즈 가의 세력을 끌어오려고 함.

영국의 참전 여부는 여왕의 결정에 달려 있음.〉

‘참전? 전쟁을 한단 말인가?’

겨우 휴전을 통해서 잠잠해진 유럽의 세력을 뒤집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그것도 연합국의 중요한 주축으로
있는 영국의 참여라면, 사소하고도, 작은 분쟁 하나만 있어도 거대한 전쟁으로 번질 것은 뻔했다. 이전의
전쟁도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설마.’

순간 유리의 머릿속에 전날 외국 용병의 습격이 스쳤다. 유리 그가 알기로는 아직 바르샤바에서 프림로즈


가는 주시 상태였지, 즉결 처분 따위는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제 3 의 세력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의뢰자였는데. 유리의 손이 움직이며 다음 장을 뒤적거렸다.

〈적을 앞에 두고서 눈먼 평화에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다.〉


“…미쳤군.”

그야말로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세력이, 두 주축국이 방심한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유리 그와 살을 맞대고 있었던 세드릭이 남겨준 열로 달아오른 머리의
온도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로벤 대령이라면 대사관에서 차출로 온 무관 중에 제법 직위가 높은 실무관이었지.’

저 멀리에 있는 영국의 의회와 여왕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한들. 이들이 꾸며놓은 함정에 빠져서 사건이
터진다면. 예를 들면, 여왕의 친척이라고 하는 사람이 적군이 꾸민 불의의 사고에 휘말린다면.

‘그 녀석이… 죽는다면.’

전쟁의 이유는 충분했다. 여왕의 입장에서도 가까운 왕족을 잃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노릇이니. 그
사실에 유리의 식은 마음으로 불안함이 엄습하며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유리는 지금쯤 달콤한 잠에
곯아떨어졌을 게 분명한 게오르그의 성실함을 속으로 칭찬하면서 감청실을 나섰다. 유럽 대륙 전체를
혼돈으로 일으킬 수 있는 정보를 손에 쥐고서.

‘하필 이럴 때….’

세드릭의 맑은 웃음소리, 휘어지는 진한 눈썹 따위를 떠올리던 유리는 머리를 거칠게 저었다.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그 대상이 세드릭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꼭 그 녀석일 필요는 없어….’

아무리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학교라고는 하지만, 개중에는 남아 있는 삶이 기대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알량한 욕심 아래 휘두르는 녀석도 있는 마당에 보기 드문 성품을 가진 사람이
희생당할 필요는 없다고, 유리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아무리, 반대편에 있는 녀석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니.’

유리의 군화가 그의 아버지이자 라스콜니코프 대령의 사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분명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정보라고 생각되어 바삐 오긴 했지만.

“하아… 골치 아프군.”

유리는 손에 감청 기록을 쥐고서 망설였다. 대령도 전쟁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유리 그가


쥐고 있는 정보는 그야말로 절호의 정보일 뿐이다.

‘어떻게 말해야 그 녀석이 휘말리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
유리는 우선 가져온 기록을 대충 구겨서 군복 재킷 안쪽에 넣었다. 정갈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희미한
허락이 떨어졌다. 유리가 사무실에 들어가 경례를 하자 라스콜니코프 대령은 위스키를 마시던 컵을 원목
책상에 내려놓고 눈알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관찰하는 모습이 역력함에도, 유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령은 감이 좋은 사람이라서 조금만 틈을 보이면 가족이고 부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곤 했으니.

“…게오르그에게 전달받았습니다.”

“…지금 복귀했나?”

“…예.”

“게오르그는 바쁜 일이 있었다고만 하던데. 근무지 이탈을 할 정도로 바쁜 일이 뭐지?”

대령은 이른 아침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군인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한


치의 빈틈없는 모습에 유리는 절로 긴장이 되어 주먹을 더욱 꼭 쥐었다.

‘자리를 비웠을 때 하필 대령이 방문을 했을 줄이야.’

유리는 낭패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을 꺼냈다.

“감시 대상이 예기치 못한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에, 끝까지 추적하고 왔습니다.”

“감시 대상… 아. 그래, 생각나는군. 새로 온 영국의 참사관 아들이었나. 내 기억이 바뀐 게 아니라면.”

“…맞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같은데. 그래, 무슨 움직임이었지?”

대령은 어딘가 흥미가 당기는지, 주름진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유리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가,
문득 말문이 막혔다. 순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대령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지금 시간까지 쫓아다닌 걸 보면. 예삿일은 아니겠어.”

“…그게.”

유리가 뒷짐을 진 손을 들키지 않게 몰래 꼼질거리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생각 외로, 향락에 빠져 있더군요. 외교관 자녀들이 다닌다는 사교 클럽에 드나든다고 하여,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몰래 뒤를 쫓고 왔습니다.”

“흠? 분명 영국에서 온 보고서에서는 온순한 성격의 우수한 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의외로군.”

“…새로운 환경은 사람을 바꾸기 마련이니까요.”

대령의 날카로운 기억력에 유리는 꿋꿋이 대답했다. 감시 대상이 똑똑하다는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잘 안다. 그 좋은 지력이 그들의 곁에 서지 않는 이상 위협의 대상일 뿐. 유리는 애써 세드릭의 일탈을
포장했다.

“그래… 그래서, 사교 클럽에서 어떠했지? 이토록 긴 시간을 비워둘 정도면 중요했으리라 보는데. 단순히
젊은 치기에 비롯한 일탈을 빼고서.”

“…영국 출신이지만, 보통의 영국인보다 제법 유연한 사고를 가진 모양입니다. 우리 쪽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을 보아 나중에 회유할 수 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왕과 친인척인 것을 염두에 두면 그가
접하는 정보의 양이나 질이 괜찮아 보입니다.”

정보부의 감시 대상일 정도면, 어떻게든 대령의 관심을 완벽하게 지우기 어려웠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용가치가 있다고 말이라도 더해서 이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게 낫다.

“참고로… 알렉산드르와 제법, 잘 대화하더군요.”


“알렉산드르와?”

“예.”

유리의 꾀가 통한 것인지 대령은 다분히 흥미가 당기는 얼굴을 했다. 세드릭은 큰 위협을 끼칠 만큼의
인물은 아니지만, 잘 구슬린다면 정보통이 될 거라는 유리의 평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하던 대령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쪽도 가끔 그런 녀석들이 나오지. 흠, 재밌군. 영국 쪽 연결이 두 개나 만들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두 개?’

영국에서 우리 쪽 사람 말고도 정보를 전해주는 영국인이 있었단 말인가. 어렴풋한 단서를 얻은 유리의
시선은 여전히 생각에 빠진 대령의 옆얼굴을 향했다. 대령은 눈을 슬쩍 굴려서 유리를 보았다.

“너도, 몇 번 마주쳤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통성명 정도라.”

“흠. 그래도 제법 오랫동안 관찰했으니 대체로 파악은 했겠지.”

“…어느 정도는.”

“이만하면 됐다.”

라스콜니코프 대령은 책상에 내려뒀던 위스키 잔을 들어서 입을 살짝 축이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빠른 시일 내에 목줄을 매달아 놓도록.”


그들의 편으로 완벽히 붙들어 두라는 말에 유리의 시선이 분명하게 꽂아 들었다. 누런 램프의 불빛이
대령이 들고 있는 위스키 잔에 녹아들면서 짙은 색깔의 물결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너울졌다.

“…제가, 합니까?”

“그럼 너 말고 할 사람이라도 있나?”

당연하다는 대령의 대꾸에 유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확실히, 유리 그 말고는 할 사람이 마뜩잖긴 했다.
다른 녀석들은 세드릭의 정체는 알아도 말 한 번 걸어본 적이 없으니, 대화를 이끌어 갈 만한
유대감조차도 없다.

“…알겠습니다.”

대령은 그와 세드릭의 긴밀한 접점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나온 명령인데도 유리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유리가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으레 하고 마는 경례를 두고 대령은 작게 웃었다.

“기대하마.”

유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대령이 있는 사무실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없었다. 은밀하게
숨겨진 방이라서 갑갑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가슴팍에 숨겨둔 중요한 정보 때문일까. 아니면,
세드릭을 그들의 편에 설 수 있게 태어난 조국도, 돌아갈 수 있는 가족도 버리게 만들라는 명령 때문일까.

‘배신, 을 하게 만들어라….’
어느 쪽이든 가슴팍이 조여 들어왔다. 베갯머리 송사 따위를 하면서 언제나 달게 부탁하던 뻔한 말들.
수없이 했던 말이 왜 지금 와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정보부의 복도를 걷다가
창문가 너머로 보이는 쓸쓸한 중앙 정원 위로 은밀하게 비춰드는 햇볕으로 인해 눈을 내리깔았다.

“….”

애초에 대령은 유리가 세드릭과 돈독한 관계에 있기를 바랐다. 이번 명령도 그가 내렸으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들에게 정보를 공급할 유용한 개로 만들어 달라는 명령이,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이상해.”

이미 세드릭은 유리 그에게 흠뻑 빠져 있으니 좋을 대로 끌어당기기만 하면 되는데. 이보다 손쉽고 간단할


수가 없는데. 영 내키지가 않았다. 심지어 세드릭의 정보를 대령에게 보고할 때는.

“…미쳤지.”

그의 생사를 최우선으로 두고 입이 움직였다. 그 간단한 행위마저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팍이 쿡쿡


쑤셨으니, 그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변화에 머리를 헤집을 뿐이었다.

‘…정말로.’
세드릭, 그가 연신 말하는 사랑이라도 하게 된 걸까.

유리의 하얀 얼굴에는 전에는 볼 수 없는 생기가 돌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변화.

* * *

“근신이라… 얼마 만이지.”

세드릭은 방에 들어와서도 싱글벙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근신 처분을 받은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는 외투를 대충 벗고서 침대로 몸을 향했다.

‘기숙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로는 집에서 근신을 받은 적이 없었지.’

시트가 잘 정돈된 침대 위로 풀썩하는 소리가 나도록 그가 편하게 누웠다. 마지막으로 근신을 받은 적이


언제인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눈앞에 선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 그만… 흣.-

시트 위로 흐드러진 화사한 금발은, 램프 하나 제대로 켜지지 못해 어둑한 방 안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흔들리던 고운 머릿결과 반짝대던 그 궤적이 유독 눈에 박혔다. 동쪽에서 수입한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위가 열이 오르는 바람에 발갛게 그늘지던 모습.

-천, 천히… 으응….-


붉게 반들거리던 입술에서 흩어지는 달뜬 숨이 마치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아 세드릭은 참지 못하고 계속
입을 맞췄다. 아직도 선연하게 남은 부드러운 감촉을 떠올리며 그는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체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갔다. 이 무슨 낭패인가. 갓 사춘기를 맞은 나이도


아닌데 이상하게 몸이 바로바로 반응했다. 특히….

‘아읏, 아파….’

이상하게도, 그 투명한 푸른 눈을 가지고 고통스럽게 신음할 때마다 기묘한 가학심이 들었다. 평소에
성격 자체가 순하다 못해 무르다는 평을 듣는 그가, 그런 음심을 품게 될 줄은 몰랐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에 몸부림치는 유리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동해서 허리를 밀어붙이고 제 아래에
꼼짝없이 두게 되었다. 그냥, 그가 자신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예뻐 보였던
탓이다.

“…미친 건가….”

소중하게 대해줘도 모자랄 판에, 아파하는 모습에 흥분이 겨워 잔뜩 괴롭혀버리다니. 세드릭은 제


아래에서 기절하다시피 했던 연인을 생각하며 뒤늦게 후회에 빠졌다. 혹시나, 아프게 했다고 자신을
거부하면 어쩌나, 다음에 만나면 미안하다고 꼭 사과를 해야겠다며 마음을 먹었다. 세드릭은 입술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으면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진한 속눈썹과 입술선이 곡선으로 휘어지기를
반복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전혀 배려하지를 못했어….’


그는 다음부터는 좀 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욕실로 향했다. 밤사이 열띤
관계로 제법 땀을 흘려서 찝찝한 감은 있었지만 목욕이 영 내키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애초에 영국인인
이상 목욕하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런가. 이대로 말끔하게 몸을 씻고 나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옷가지를 풀어내는 움직임이 유독 굼떴다. 그는 희미한 새벽녘이 터오는 욕실 안에서
마지막으로 걸친 셔츠를 벗다 말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시선이 잡혔다.

“…아.”

근육이 제법 균형 있게 잡힌 어깨너머로 가느다란 붉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세드릭은 반대편 손으로 제


어깨너머를 더듬다가 미미하게 느껴지는 통증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거.’

제 목을 껴안고 쾌감을 바라던 그가 남겨준 손자국이었다. 그 원인을 다시 떠올리던 그의 얼굴에는 홧홧한


열감이 맴돌았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가 황홀해 마지않던 연인이 손수 남겨준 자국이었다. 그는
핏방울이 굳은 어깨너머를 가만히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목욕으로 씻어지는 흔적 말고도 남는 흔적에 그의 마음이 풋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콩닥거렸다. 하찮을


만큼 작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자국일 뿐인데도 세드릭에게는 마치 평생을 맹세한
증거물처럼 느껴졌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고들 하던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군인, 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군복 특유의 각이 잡힌 옷을 입은 유리의 모습은 오히려 세드릭의 마음이 울렁거리게 했다. 평소 성격처럼


틈 하나 없이, 금욕적인 옷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느꼈던 기묘한 희열이란. 그는 방금 받아둔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서 곰곰이 떠올렸다. 약 기운에 취해서 시야도 제법 어두웠고, 그 탓에
정확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들어오는 문양이 있었다.

‘쌍두 독수리가 금실로 새겨진 가슴팍의 문양….’

그가 다니고 있는 대사관 학교 바로 반대편에 위치한 군인들의 복장에서 매일같이 보는 문양이었다.

“러시아어는… 잘 못하는데.”

욕조 안에서 요동치는 물결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세드릭이 젖은 팔을 욕조 턱에


걸쳤다. 찰박대는 물소리와 함께 그가 가볍게 웃자 요동치는 턱선을 타고 물방울이 구슬처럼 똑똑
떨어졌다.

“…왠지 엄격하게 잘 가르쳐 줄 것도 같고.”

모르면 배우면 된다. 그것도 제 마음에 들어온 연인이 알려주는 언어라면, 그 말 한마디에 달콤한 맛이
혀끝에 맴돌 것도 같다. 무심하게 가르쳐주다가도, 자신에게 못 미더운 점이 보이면 이해가 될 때까지
끝까지 신경 써줄 것 같은 선생님이라고 하나. 이제껏 세드릭 자신에게 그랬듯이.

‘…뭔가, 틀리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옆에 앉아서 손수… 아.’


옆에 앉아서, 이런 것도 못 하냐고 그 붉은 입술로 타박하면서도…. 그 예쁜 손으로 제가 실수한 부분을
하나하나 자세히 짚어줄 것 같다고 하나. 그는 언뜻 선생님이 된 유리를 상상하다가, 움찔대는 하체의
반응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도자기로 만들어져서 하얗고 부드러운 선을 가진 욕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물에 몸을 깊숙하게 담갔다.


넘실대는 잔물결이 그의 머릿속까지 파고들며 온기를 전달했다. 그의 연인이 안다면 분명 따가운
눈초리를 보낼 게 분명한 상상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끄러운
상상을 하던 세드릭은 자신을 다시 가다듬다가 다시 전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곳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반신반의, 그리고 버거운 마음의 짐을 풀어볼 겸 갔던 곳에서 만나서 기뻤다.
그리고 황홀했던 시간까지. 세드릭은 얼굴마저도 아슬아슬하게 잠긴 채로 웃다가 물이 기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한참 기침을 했다.

“큽… 하아.”

사랑에 빠진 남자는 멍청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얼굴에 달라붙는 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다급해 보이던 유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 기운에 멍하니 들리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느껴졌다.

-그건 알 거 없고.-

-나가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이런 곳은… 다시는 오지 마. 앞으로 나도 오지 않을 거니까.-

그러면서도 세드릭의 머리 한구석에는 의문이 들었다. 마치 세드릭 그가 오는 걸 알았던 사람처럼 얘기를


해서 그런가. 예상치 못한 재회로 인한 기쁨도 잠시. 유리의 얼굴에 비치는 감정을 다시 되짚어 보며
세드릭은 생각에 빠졌다.

‘…후회, 하는 걸까.’

적군의 사람과 관계를 해서, 큰 실수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약혼을 하게 될 자신과의 관계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우습게도, 정작 세드릭 자신은 어느 쪽이든지 아무렇지 않았다. 확실히, 유리는
그에게 적군에 가깝지만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고 세드릭을 살려주었고. 하다못해 예정되어 있는
약혼도, 세드릭이 유리를 향해서 품은 마음이 더 크게 번진다면 모를까 억누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약혼, 무를 수는 없는 건가.”

방금까지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도취되어 있던 세드릭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솔직히 귀족의 일원이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는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처럼 좋은 배우자를
찾아서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 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아냈다고
생각한 순간, 닥쳐온 의무에 그의 마음은 무겁게 얹혔다. 어떻게든 부모를 설득해보고자 말을 꺼냈건만,
돌아온 것은 실망과 작은 분노, 그리고 근신.

“…젠장.”

세드릭은 작게 욕을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차라리 제게 또 다른 형제가 있었더라면. 혹은 어린 여동생


베스가 저와 나이대가 비슷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텐데.

성인 남성에게 가문 승계와 재산이 귀속되는 만큼 세드릭이 떠올린 후자의 경우도 만만찮게 파격적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의무였다. 아마도,
이 학교에서 졸업을 마치고 나면 꼼짝없이 이행되어야 할 그런 구속. 그는 고민이 드리워진 얼굴을 젖은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를 만나는 하루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마당에 근신이라니. 그것도 제법 효과가 좋은


고문이었다. 그의 어깨너머 패인 상처 자국에 닿는 뜨거운 물이 제법 찌릿한 통증을 주었다.

‘근신만 아니어도, 좀 더 만날 수 있을 텐데.’

물이 식기 전까지 지샌 밤의 피로를 씻어 내린 세드릭은 이윽고 방으로 돌아왔다. 다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고민은 시원하게 씻어내지 못했다는 게 한 가지 흠이었다. 여전히 물에 젖은 머리를 천 수건으로 털어
내리며 튀기는 물방울을 새로운 튜닉 소매에 적셨다.

박공지붕의 비스듬한 선을 따라서 벽 천장 부근에 나 있는 창문가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던 세드릭은 저


멀리 우체부가 이른 아침부터 바삐 우편물을 나르는 것을 발견했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모습에,
세드릭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아.’

꼼짝없이 근신이라고 절망하던 것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그는 당장 서랍의 필기구를 꺼내서 급하게 펜을


쥐고 마른 편지지에 잉크를 물들여나갔다.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아직 마르지 않아서 머리끝에 맺힌 물방울이, 급한 손짓에 진동하며 편지지에 뚝, 뚝 떨어졌다. 그것을
피하기도 전에 만년필의 잉크 따위가 순식간에 지나가며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번졌다.

[자택에 잘 돌아갔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는, 걱정해준 덕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

‘이건 좀, 식상한가.’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고민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이렇게라도 그와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펜을 들었더니 뭐라고 해야 할지 깜깜해졌다. 몸은 좀 괜찮은지, 제가 처음이라 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세드릭은 생각과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두고서 원목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사각사각
소리가 나도록 그려나갔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아쉽습니다.

부끄럽지만 아버지가 근신을 명한지라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당시에는 마음이 급하여,

그리고 당신을 향한 마음이 너무 커서 억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변변찮은 남자의 변명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난밤 나로 인해 아픈 곳이 있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알려줄 게 하나 있다면, 방금 목욕을 하면서 당신이 남겨둔 상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등에 상처를 내는 기이한 버릇은 없으니,

아마 지난밤 당신이 나를 안아주면서 남겨둔 것….]

“윽.”
세드릭은 어딘가 저속한 기분이 들어 쓰던 문장에 급하게 선을 그었다. 이런 얘기 말고, 뭔가 괜찮은
이야기가 없을까. 평소 에세이를 많이 쓰고 토론은 일상인지라 글감이나 화술에 자신이 없던 적은
없었건만. 이때만큼은 세상에 더 없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으음.”

세드릭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면서도 펜을 쥔 손을 간헐적으로 놀렸다. 어떻게든 말을 적어야 그의 여동생


베스가 집을 나서기 전에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어린 동생에게 러시아 대사관 앞까지 가란 소리는 절대
할 수 없고, 그들이 언제나 모이는 티에르가르텐 정원의 벤치 아래에 넣어두라고 부탁을 할 셈이었다.

‘어쩌면, 오지 않을까.’

그는 말로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빠짐없이 약속 장소에 나왔으니까.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렇게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서 정신없이 두 페이지 정도를 써 내려갔을까. 시간은 흘러서 그의 얼굴에는 아침 녘이
찾아들고 베스가 있는 반대편 방 쪽에서 쿵쿵대는 발소리와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은
편지지를 대충 접어서 봉투에 넣고 손에 꼭 쥐었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새로 온 하녀 그레타가 베스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약속했어요. 5 분 후에 내려와야 해요?”

“알겠어. 세상에! 그레타도 폴리나에게 옮았어.”

잔소리가 싫다고 베스의 투덜거리는 모습을 본 세드릭은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베스의 방으로 걸어갔다.


교복을 곱게 차려입은 베스는 윤이 나는 구두의 끈을 조이다 말고 눈앞에 들어온 슬리퍼에 고개를 올렸다.

“…오빠 왜 아직도 교복 안 입었어?”


“근신이라서.”

“아 맞다, 근신…. 미안.”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베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두고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못해 태연한 세드릭의 반응에 베스의 표정이 묘하게 색을 달리했다.

“…생각보다 슬퍼 보이지는 않네.”

“음.”

“…뭐야, 다니엘라 언니를 진심으로 좋아하던 게 아니었어?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그런 나쁜….”

오해에 빠져서 골똘하게 읊조리는 베스에게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베스는 격분한 얼굴로 따졌다.
그 모습에 세드릭이 누가 들을세라, 뒤를 돌아보면서 베스의 방문을 닫고 검지를 입술에 걸쳤다.

“쉿, 쉿.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바람둥이! 이 호색한!”

“…베스, TV 보는 시간을 좀 줄이는 게 좋겠어.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다니엘라 관련해서 부탁이 있어.”

세드릭은 베스의 찬란한 어휘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꼭 쥐고 있던 편지를 베스의 눈앞에 보였다.
베스의 녹색 눈이 세드릭과 편지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야?”

“아침에 학교 들어가기 전에. 티에르가르텐에 가 줘. 큰 산책로를 걷다 보면 세 갈래 길에서 맨 왼쪽의


….”
세드릭은 그와 유리가 만나던 벤치로 가는 길을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 벤치 밑에 리본에다가 편지를
묶어서 두면 된다는 말에 베스는 다니엘라와 관련된 부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이다가, 이내
설명을 듣고서 사르르 웃었다.

“좋아!”

“그리고 집에 오기 전에, 혹시 편지나 다른 게 있으면 꼭 가져와 줘.”

“물론이지! 뭐야, 나 몰래 다 만나고. 할 거 다 했구나.”

“무, 무슨. 그냥 말만 했어.”

“…흥. 그래도 이번에는 오빠가 불쌍하니까 도와주도록 할게.”

베스의 장난스러운 표정 아래 도움을 꾀하는 말에 내심 찔린 세드릭의 표정이 당황에서 행복함으로 번졌다.


그러면서도 베스에게 연신 부탁했다.

“꼭, 꼭 잘 묶어두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도 꼭, 확인하고 와. 알겠지?”

그에게 직접 말로 할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세드릭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chapter 21

* *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책걸상 따위가 바쁘게 부딪히며 마룻바닥이 이동하는 발걸음 따위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꽉 차 있던 교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면서 한산해졌다. 아직도 회색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창문가에 비쳤다.

유리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뭉근한 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텅 빈 교실 안에 홀로
있는 모습은 물이 빠져버린 해변에 서 있는 이름 모를 방문객과도 같았다. 마치,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바다를 기다리는 것처럼.

“….”

학교 근처의 교회 첨탑에서 비롯한 게 분명한 희미한 종소리에 유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식당으로 내려가서 혼자 먹었겠지.’

지루한 휴식시간. 그게 색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낯선 손님 덕분이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김이 오르는 따뜻한 차를 마시는 시간. 불행하게도 그 작은
온기를 오늘은 느낄 수 없었다. 근신을 당하고 있을 그가 학교에 나올 리가 만무하니, 그 장소에 간다고
한들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그걸 깨달을 무렵에는 이미 유리의 몸은 티에르가르텐의 정원 초입부를 넘어가고 있었다. 돌아가기도 제법


애매한 거리라서, 유리는 바람이라도 쐴 겸 정원의 산책로를 걸었다. 겨울의 추위에 얼은 흙바닥이 구두
바닥 아래로 으스러졌다. 가을을 맞은 잎사귀처럼 사각대는 불편한 감촉을 떨쳐보려 연신 발걸음을 옮겼다.
그 탓에 생각보다 얼마 걸은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나던 장소에 도달했다.

“….”
없을 것을 알면서도 왔다. 어쩌면 언뜻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 철없고 순진한 녀석이니
어떻게든 몰래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 유리는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서도
낙심되는 마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실망이라니.’

그가 실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좋으면 모를까. 더 이상 가까워지기 전에.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리기 전에, 거리를 둘 수 있다면 그보다 서로에게 다행일 것은 없다. 그걸 잘 알고는 있지만,
환영의 인사 대신 쓸쓸한 바람만 부는 벤치를 발견한 유리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유지한 채로 터벅터벅 걸어서 벤치의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몇 번, 우연히 연달아 유리가
앉게 된 이후로 암묵적으로 굳어진 그의 자리였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유리의 파란 시선이 쓸쓸한
바람이 스치는 빈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항상 이 자리에 있었다. 유리 그가 일찍 오든, 혹은 늦게 오든.
언제나 이 자리에서 2 인분이라고 하기엔 과도한 바구니를 가지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추운 공기에 얼어붙은 볼과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식사를 시작하곤 했었지.
피할 수 없는 계절감으로 인해 버릇처럼 굳어버린 식사 순서를 떠올리던 유리가 피식 웃었다.

“…먼저 좀 마시고 있지.”

고집이라고 하나. 참 미련한 구석이 있다. 저와 같이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도 아니면서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무어 있을까. 그 당시에도 이해가 어려웠지만, 기다리는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은 더
그러했다.

유리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 잃은 빈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세드릭은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유리는 평소 세드릭의 자세를 떠올리며 짐짓
흉내를 내보였다. 팔 한쪽을 가슴팍 앞의 테이블에 걸쳐두고, 나머지 손으로 턱을 괴고서.
“…흠.”

그러자 을씨년스럽게 드리워진 가지들 사이로 나와 있는 산책로의 샛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단박에 보일 수 있는 그런 시야. 외투 자락 하나만 일렁인다고 해도 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자리. 세드릭과 같은 시선을 한 유리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날이 춥다고 생각했을까. 매일에 적어도 한 번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추위에 무감한 유리


자신마저도 제법 따가운 바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니까. 저 자신이 찾아와야 비로소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 만큼, 금방 오지 않는 것을 조금은 원망했을 게 분명하다.

지금, 유리가 그러한 것처럼.

“…춥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대에 빠져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겨울바람을 막지 못하는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기다림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 중에 좋은 것은 하나도 없건만. 대체 무슨 유익이 있어서.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나왔는지. 유리가 홧김에 구둣발로 벤치의 다리를 툭 쳤다.
동시에 툭, 하고 엷은 두께의 물건이 유리의 발목 위를 스쳤다.

“…음?”

낯선 감촉에 유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벤치의 그늘이 드리워진 흙바닥에는 이질적인 미색의 편지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유리의 손이 떨어진 봉투를 주웠다. 이미 흙먼지가 미미하게 묻은 앞면에는 〈C〉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단순한 한 글자에 유리는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밀봉된 봉투를 뜯었다. 이 장소에, 이 시간에 만나는
사람은 그와 세드릭 말고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한 이니셜의 주인은 확실했다. 봉투 안에는 정갈하게
접혀 있는 편지지가 있었다. 급한 손길이 편지지를 펼쳐 들며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자택에 잘 돌아갔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는, 걱정해준 덕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아쉽습니다.

부끄럽지만 아버지가 근신을 명한지라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당시에는 마음이 급하여,

그리고 당신을 향한 마음이 너무 커서 억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변변찮은 남자의 변명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난밤 나로 인해 아픈 곳이 있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알려줄 게 하나 있다면, 방금 목욕을 하면서 당신이 남겨둔 상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등에 상처를 내는 기이한 버릇은 없으니,

아마 지난밤 당신이 나를 안아주면서 남겨둔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편지지를 꼭 쥐고 있던 유리의 손이 살짝 떨렸다. 동시에 유리의 얼굴에 낯선 열감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다만 파란 빛의 눈은 여전히 편지를 읽었다.

[…쓰고 보니 조금 부끄러운 같은 말 같군요. 미안합니다.]

“…알고 있으면 하지 좀 말라고.”


유리의 붉은 입술에 작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전날, 제가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이 나이를 먹고서 부끄럽기 그지 않은 처분을 받은 이유는….

아버지가 정해주신 약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놀랐을까요?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까요.

사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평생, 부모님이 바라시는 길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언제나 따라왔습니다. 내 주변의 친우들도 그러했으니까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정해진 내 길에 대해서 의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평소 같았더라면…. 그저 약혼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드릭의 덤덤한 고백이 담긴 내용에 작게 웃던 것도 잠시. 유리는 편지를 읽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유리 그가 더 잘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으레 가지기 마련인 고압적인
구석을 세드릭에게서는 발견하기가 참 어려웠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까만 눈을 가진 것과는 다르게 너무도 읽기 쉬운 순한 성격 하며.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태어난 나라도, 성격도, 하다못해 언어도. 어느 것 하나 닮은 점이 없는 그런 사람.
그래서 자신에게 없는 점을 가진 사람.

[단순히 약혼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 같은 사람에게 과분할 정도로 약혼 상대는 아름답고, 좋은 사람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우의 동생으로, 웃음이 많고, 사려 깊은 성격입니다.

꼭 제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사람입니다.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그녀는 평소 화단을 가꾸는 것을 즐겨 온실에서 키워낸 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기르는 주인을 닮은 것인지 색 색깔의 꽃이 제법 탐스럽더군요.]


“…지금 나한테 약혼녀 생겼다고 자랑하는 거냐.”

친구 동생인 데다가 예쁘고 좋은 여자. 꽃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여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읽기만 해도 숙녀의 표본 그 자체였다. 하루하루 실낱같은 정보 아래 이용가치를 연명하는 유리
자신과는 한참 동떨어진 그런 안온한 세계.

자신이 갈 수 없는 삶에 대해 말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인가. 약혼녀 자랑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자신을


고른 의미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니면 그런 여자를 두고서 자신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게 정신 차려보니
후회가 된다는 것인가. 표정을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굳히다 못해 은근히 짜증 섞인 혓소리를 내던 유리의
눈은 그다음 내용에 꽂혔다.

[그때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시간에 쫓겨서 편지를 쓰던 것인지, 깔끔하던 편지봉투와 다르게 편지지 곳곳에는 잉크 자국이 제법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한 글자 쓰다 말고 선을 긋고, 다시 펜촉이 닿아서 까맣게 번져 들어간
지저분한 자국. 아마, 이다음에 써야 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 못해 나온 게 분명한 흔적이었다.

[그 사람이 보여준 꽃을 보고 있자니, 당신에게 한 아름 꺾어다 주고 싶었습니다.]

“….”

제가 여자도 아니고 무슨 꽃을, 준단 말인가. 유리는 속으로 타박을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다든지,
세드릭이 바보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세드릭다운 고백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분히 실례인 것은 잘 알지만, 그녀와 함께 온실에 있는 벤치에 앉을 때.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우습지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했다시피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잘 알면서 꼭.”

똑똑한 녀석이 왜 그럴까. 그래서 유리 그 자신도 더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 평생에 받아 보지 못한,
대가 없는 애정.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어디에서 왔든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그 다정함.

[나는 생각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었나 봅니다.]

유리와 세드릭, 두 명 다 그 감정에 대한 답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시인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곁에 없고 나니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자신과 닮은 점 하나 없었던 사람이라는 건. 아마
제게 부족하고,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라는 것을.

* * *

“…발견해야 할 텐데.”

세드릭은 침대에 누워서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 시간을 좀 죽여보려고 아침부터 오후 나절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를 않았건만. 그 긴 시간 동안 10 페이지 남짓한 진도를 나간 게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눈으로는 글귀를 읽어도 머리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니 책의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탓이다.
부드러운 커버를 가진 양장본이 톡, 하고 가볍게 닫혔다. 평소에는 낮 시간이 언제나 짧다고 느꼈는데,
이때만큼 긴 시간도 없었다. 겨울이 다 지나는 바람에 낮 시간이 늘었다며 투덜대는 세드릭의 귓속에 1
층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 추워!”

“베스 아가씨, 오셨어요.”

“응, 오빠는?”

“도련님은, 점심 이후로 계속 방에 있으셔요.”

‘베스.’

지루한 중에 반가운 손님의 등장에 세드릭이 뉘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편지. 조심성이 없는 여동생이
쿵쿵대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올라오는 인기척에 세드릭도 얼른 방을 나섰다. 달은 마음이 전달되는
바람에 떨리는 손으로 세드릭이 방문을 열자마자 공교롭게도 놀란 얼굴을 한 베스와 마주쳤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하얗고 동글동글한 손에 구겨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오빠!”

“베스! 학교는 잘 갔다 왔어?”

세드릭에게 안긴 베스가 그의 셔츠 가슴팍에 뺨을 부비적 비비다가 녹색 눈을 반짝이며 화답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편지, 언니가 봤나 봐! 오빠 말대로, 집에 돌아오기 전에 들렀더니 글쎄….”

“고마워. 베스. 정말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다음에 베스 네가 원하는 봉봉이랑 퍼지 사다 줄게.”

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드릭이 작은 손에서 구겨진 종이를 휙 뺏었다. 바람보다도 잽싼 움직임에


베스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그녀는 제 앞에서 쾅, 하고 닫히는 세드릭의 방문을 보면서 허망하게
읊조렸다.

“아니…. 뭐.”

다시 열릴 움직임이 없는 방문 앞에서 베스는 커다란 녹색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아침나절 내내


시무룩하던 표정과 다르게 지금 활기찬 오빠의 모습도 그렇고. 눈 깜짝할 새에 뺏긴 편지지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오, 오빠! 나도 보여줘! 빨리 오느라 못 읽었는데!”

장난꾸러기인 베스가 이번에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것처럼 방문을 아무리
작은 손으로 두드려도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오빠!”

* * *

“진짜, 읽었구나.”

[D]
자신이 보낸 편지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급하게 찢어낸 메모장 종이의 구석에 작은 이니셜이 있었다. 단 한
글자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솔직히 답장을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답장을 받을 줄은 몰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편지를 두긴 했지만 그가 실제로 발견한 건 더없는 행운이었다. 지루함으로


한탄하던 낮 시간이 단박에 즐거운 시간으로 변하며 세드릭은 떨리는 손끝으로 접혀 있는 메모장을 펼쳤다.
그러자 파란 잉크로 세밀하게 적힌 답장이 있었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아, 이런.”

첫 부분을 읽자마자 세드릭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터졌다. 평소에 유리가 꽤 무뚝뚝한 성격임을 아는지라
이런 문구를 쓰는 상상을 하자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 벤치에 앉아서 썼을까.’

그걸 상상하는 세드릭의 정신은 이미 저 위의 구름을 타고 있어서 방문을 두드리는 베스의 외침 따위는


저절로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포기하는 바람에 잠잠해진 상황과 함께 정신이 팔린 세드릭의 눈은 답장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편지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편지가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걸 읽는 당신은 내가 어떻게 편지를 찾아냈는지 궁금하겠지요.

때 이른 부활절의 보물찾기도 아니고.]


무뚝뚝함이 묻어나는 문장은. 필히 농담일 게 분명했다. 그걸 알게 된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뻤다.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는 점에서, 또 답장을 정성 들여 보내준 것에 대해서
근신 처분으로는 막을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날 밤, 당신이 약혼을 하게 되었다고 내게 말해주었습니다.

아마 당신은 기억을 못 한 것 같지만.]

“…내가, 말… 했구나.”

순간 행복에 겨운 마음이 뚝, 꺾였다. 급속하게 불안해진 마음을 잡고서 그의 눈이 이어지는 답장 위에서


바삐 움직였다.

[당신의 약혼 상대가 좋은 여자라는 건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기껏 알려줬으니 고맙다고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참 안타까운 여자군요.

그렇게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의 짝으로 몹쓸 당신을 만났으니까.

심지어 당신이 다른 사람과 밤을 보냈다는 걸 알면,

섬세한 성격의 여성을 비롯한 모든 여성에게는 분명 충격적일 겁니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해도, 그날 밤에 내가 듣게 된 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설마, 이거….”

답장에는 생각 외로 신랄한 비난일지 유머일지 모를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세드릭에게는


달콤하게 들렸다. 그건 아마 세드릭 자신의 고백이 증거처럼 남았다는 말을 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몹쓸 버릇을 가진 남자와 한평생을 사는 건 그녀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람의 작은 의견을 보태자면, 그녀가 기르는 꽃을 생판 남에게 줄 남자보다는….

그녀가 가꾸는 화단의 작업을 도와줄 괜찮은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그녀에게 훨씬 더 이롭고, 한결 멋진 삶이겠습니다.

아니, 분명 더없이 현명한 선택이겠지요.

꼭 그 여성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여성이 약혼 상대로 정해진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가 이제껏 본 것을 토대로 하면, 당신은 구제 불능의 남자니까.]

“…질투하는 건가?”

세드릭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입가에는 김빠진 바람 소리가 피식피식 나왔다. 세드릭 자신의 생각을
몹쓸 짓이라고 나무라는 어투에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따라서, 부족한 당신을 거두어가는 사람은 나 정도의 사람이면.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에게는 행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불행을 치워주었으니, 감사 인사를 받아도 좋을 것 같지만 그건 내가 사양하도록 하죠.

아무튼 갑자기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그 당연한 질문에는 답이 뒤따라왔다. 그는 얼른 다음 장으로 손을 넘겼다.


[그렇지만 발이 내 말을 듣지 않고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또 생각지도 못한 보물찾기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리에 앉아서, 당신이 늘상 하던 자세를 따라 해보았지만 큰 재미는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큰일 날 사람입니다. 몹쓸 성격과 버릇에 게다가 재미도 없는 남자라니.

앞으로 좋은 배우자를 가질 확률이 요원해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당신의 약혼녀는 아마 당신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여자일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니 어쩌면 서로에게 적당하겠습니다.]

“…세상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는 작은 고백이 숨겨져 있었다. 세드릭의 고동은 이제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에 안주하기도 전에, 다시 붙잡는 글귀가 있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 *

[흠흠, 이러면 안 되지. 조심히….]

[오빠, 대체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답답하게 왜 담요를 둘러쓰고….]

유리는 이른 저녁부터 감청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들리는 목소리에 몸이 살짝 굳었다. 근신 당한 게


거짓말은 아닌 것처럼. 그가 감청실에 들어가 있는 오후부터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나 움직임이 평소보다
잦고, 많았다.
[…담요? 아, 그게… 소중히 하려고.]

[뭐를?]

[음… 얼굴?]

[…얼굴? 왜?]

세드릭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인지. 공룡 같은 성질의 여동생이 연신 세드릭의 외향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유리는 감청하던 것을 적다 말고 턱을 괴고서 편히 들었다. 기이한 행동 취급을 하는
여동생의 말에도 태연한 세드릭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동시에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유리의
입술이 꼭 다물렸다.

“…정말. 못 말리겠군.”

[그게… 누가 말해줬거든.]

[뭐를? 얼굴을 소중히 하라고? 왜?]

[…그나마 봐줄 만한 건 얼굴이라서 그렇대.]

“…큭.”

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용히 끅끅대며 웃었다. 자신의 말을 너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다니. 유리는


자신이 써놓은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타자기로 기록된 보고서를 정리했다.

[아무리 중립지대라지만, 당신과 함께 하는 건 내게도 많은 희생이 필요하겠습니다.


물론 당신도 그러겠지요.

그런 우리에게 남은 건 젊음과 육신뿐이니 부디 소중히 하기를 바랍니다.

위험한 일 없이 잘, 지켜내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볼 때까지 다친 곳이 있다면 우리 약속은 무효입니다.

부디 안전한 집에서 잡초처럼 건강하고, 또 게으른 고양이처럼 얌전히 지내기를 바라며.

p.s. 특히, 당신은 가진 것 중에 얼굴이 제일로 보기 좋으니 신경 쓰기를 바랍니다.]

저번에 감청 보고서에서 들은 것도 그렇고. 혹시라도 그가 근신 중에 사고를 쳐서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작게 경고를 해두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세드릭의 상황이 그려졌다. 감청을
교대하러 온 게오르그가 그걸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유리?”

“…음. 흠. 왔어?”

“…뭐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먼지 때문에 코가 간지러워서. 갈게.”

“어어….”

유리는 헛기침으로 웃음을 갈무리하며 자리를 떴다. 감청실을 나서는 유리를 가만히 보던 게오르그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일이 많이 힘든가.”

연신 터지는 웃음을 갈무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리는 율리아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기 위해 복도를 걷다가, 코너를 막 돌았을 때였다. 눈앞에 확 들어온 군복차림에 누군지
확인하려고 시선을 살짝 올린 순간.
“…유리?”

“…아.”

껄끄러운 사람과 마주쳤다. 블라디미르가 능글대는 웃음으로 유리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다가 특유의
날카로운 회색 눈을 빛냈다.

“요즘 웃는 일이 꽤 잦아? 응?”

“…음. 게오르그가… 재밌는 말을 해줘서.”

감이 좋은 녀석이라서, 탐색하는 시선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유리가 대충 둘러대며 걸어가려는 순간.


블라디미르가 유리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며 씩 웃었다.

“흐음…. 자리도 자주 비우던데. 평소답지 않게.”

“…내가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섭섭하군. 내가 얼마나 너를 눈독 들이는 줄 알면서. 대령에게 모스크바에 같이 갈 사람으로 늘….”

블라디미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는 재빠르게 블라디미르의 팔 밑으로 걸어가며 일축했다.

“그럴 일 없어. 난 베를린에서 일하는 게 좋거든. 대령도 그걸 알고.”

둔탁한 군화 소리를 울리면서 긴 복도를 꼿꼿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던 블라디미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나 저렇게 깜찍하게 넘어간단 말이지. 평소 같은 반응은 맞았지만 어딘가 결리는 구석에 블라디미르의
머리가 묵직하게 얹혔다. 방금, 환하게 웃던 표정.

“…저렇게 웃던가?”

처음 보던 그 표정에 블라디미르의 아랫배가 제법 묵직하게 흥분했다. 그 표정도 그렇고 머릿속에는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요즘,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잘 비운단 말이지.’

#chapter 22

* * *

그날도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교실. 개 중에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오랜만에 하늘에 구름이 없었다. 겨울의 온도와 같이 하늘은 제법 맑고 푸르렀다. 하지만 외투를 걸치고
바깥에 나온다고 한들 바깥의 추위는 여전했다. 그 덕분에 입에서 하얀 김을 솔솔 뱉으며 걷는 유리의
발이 제법 바빴다. 이전처럼 불안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있을까.’

색다른 기대로 인한 조급증이었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고, 또 누군가와 마주치더라도 신원을


모르게 모직 머플러를 둘둘 매고 있으니 파란 눈만 빼꼼히 보였다. 파란 눈에 깃든 기대감은 어느새
벤치에 도달했다. 그는 이제 익숙한 손길로 벤치 아래에 끼워진 편지봉투를 집었다. 그제야 숨을 편히
고르며, 밀봉된 편지를 찢었다.
‘…나쁘지 않네.’

세드릭의 근신은 아득한 기간 아래 이어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아무런 장벽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면대면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을 편지로 이야기하면서 서로에게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유리는 열
번째 되는 편지를 벤치에 앉아서 읽었다.

[경애하는 다니엘에게,

어제 보내준 편지는 무사히 읽어보았습니다.

베스는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나쁜 취미는 없지만, 가끔은 불안하게 만드는 점이 있습니다.

그나마 당신이 편지에 써준 이야기를 하면서 궁금증을 달래고 있어요.

저번에 당신이 알려준 농담을 듣게 된 베스가 저녁나절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베스가 요즘 부쩍 친근해 보인다며 서운한 반응을 보일 정도입니다.

가족들 이야기가 너무 많았죠. 사실 방 밖에서 베스가 문을 두드리며 보채는 덕에… 아, 이런.

편지 밑 부분의 얼룩은 방금, 창문에서 길고양이가 들어와서 찻잔을 엎지르는 바람에.

오늘따라 편지를 쓰는 일이 험난합니다.

열 번째 교향곡을 쓰다가 불의의 사고를 겪는 작곡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간단한 말 하나로 마무리하는데 장애물이 많군요.]

“…칠칠찮기는.”

편지의 내용처럼, 편지지 밑 부분에는 홍차 물이 들어서 연하게 물든 얼룩이 확연히 보였다. 유리는
반짝이는 눈을 호선 아래 숨긴 채로 작게 웃었다. 길고양이의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황해서 난감한
표정으로 변명을 적고 있는 게 글만 봐도 눈앞에서 생생히 보였다. 그러다가 세드릭이 꺼내는 본론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내일은 저를 뺀 나머지 가족들이 대사관 오찬에 초대될 예정입니다.

듣자 하니 바르샤바 연맹국도 온다고 하니, 어쩌면 다니엘의 나라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국 대사관 주최로서 준비를 하기 위해 일찍 자리를 비울 것이고,

또 동생도 유모와 함께 참석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사관 오찬? 아.”

‘대령도, 초대받았다고 했지.’

유리는 편지지의 페이지를 넘기며 일람 받은 대령의 일정을 떠올렸다. 전날 학교에서 알렉산드르가


으스대는 말을 스치듯이 들었던 것 같다. 연합국,

‘그것도 영국 쪽에서 준비한 행사라고 들었던 게 맞았나 보군.’

확실시되는 뜬 소리를 정리하면서 외투 안쪽에 넣어둔 만년필을 꺼냈다. 막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을 무렵,
두 번째 장에 적혀 있는 첫 줄이 눈에 깊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여 당신의 고운 얼굴을 까먹을까 두렵습니다.]

“…뭐?”
달랑 적혀 있는 그 내용 아래로 펼쳐진 공백이 마치 유리의 마음 같았다. 지금 무슨 말을 적은 것인가.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만나자고 초대를 하다니. 그것도 적군의. 철없다, 철없다 웃던 유리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편지로 조금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던 것도 잠시. 환한 낮에, 그것도 세드릭의
만나자는 소리에 순순히 그러자고 답장을 쓸 수 없었다.

[추운 날씨지만 집 정원에 이름 모를 들꽃이 피었습니다.]

“….”

당연했다. 그는 세드릭이 생각하는 것처럼의 보통의 학생도, 폴란드 사람도 아니었다. 유리는 펜을 쥐고
있던 손을 비어 있는 공백 편지지 위에 가만히 두었다. 만년필의 촉은 편지지에 천천히 닿았다가 이내
허공으로 향했다.

[그러니 내일은, 우리 집의 정원을 함께 구경하는 건 어떤가요?]

“…안 돼.”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니 사정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한 번도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서 원망 따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태어난 이상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유리는 다시 편지를 곱게 접어서 도로 넣어두고 꺼지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리고 이때에는, 이 당연한 삶이 이토록 짐 덩어리 같을 수가 없었다. 제 마음과 다르게 푸르기
그지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유리의 뒤로,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당신만 괜찮다면.]

* * *

“세드릭, 점심 즈음에는 그레타가 와서 식사 준비를 도와줄 테니 늦지 말고 챙겨 먹으렴.”

“예. 다녀오세요.”

녹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두툼한 모피코트를 입고서 멋을 낸 프림로즈 부인은 지프의 뒷좌석에


타고서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 옆에 베스가 유모 폴리나와 함께 올라타면서 뒷좌석의
창문을 돌돌이 손잡이로 내렸다.

“안녕!”

“잘 갔다 와, 베스.”

“웬일로 베스가 의젓할까. 세드릭, 미안하다. 그래도 널 위해서 어제 책을 몇 권 사 왔으니….”

“전 괜찮아요, 어머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익숙하니까.”

프림로즈 부인은 오늘따라 얌전하기 짝이 없는 베스의 행동거지에 감탄하며 열린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남편이 단단히 내린 근신 처분으로 대사관 행사도 따라가지 못한 세드릭에게 미안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법 가라앉은 집안의 분위기와 세드릭의 분위기가 반복될까 우려하는 것도 있었다.


이왕 약혼을 진행할 거라면 좋게 잘 다독여서 가는 게 좋지 않겠나 싶었지만, 남편인 프림로즈 경은
프림로즈 부인의 의견을 듣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덕분에 남편과 아들의 묘한 대치 전이 길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서 가만히
정면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고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외골수라 고집이 대단하건만. 야단났구나.’

“…네가 그렇다면야. 걱정은 좀 덜었구나. 곧 출발하는 모양이네, 그럼 세드릭.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예. 식사 잘하고 오세요.”

그녀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지프에는 시동이 막 걸렸다. 곧장 출발하는 지프를 향해서 손을
흔들던 세드릭은 웃는 낯을 유지했다. 집에서, 방에서 꼼짝없이 갇힌 쥐가 된 나날이 반복된다고 해서
지겹지 않은 건 아니다.

‘그저 익숙해질 뿐이지.’

하지만 오도 가도 못 하는 방 안에 한 줄기 바람 같은 숨통이 있었다. 세드릭은 가족들이 타고 있는


지프가 저 멀리 나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꼭 넣어둔 편지지를 다시 꺼냈다. 나름,
용기를 내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건만.

[아직 꽃이 피기엔 이른 계절입니다.]

“….”

거절의 의미가 다분하여 더 아쉬웠다. 세드릭은 근심이 가득한 눈빛을 띠고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손에는
편지가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세드릭에게 주말 나절의 이 시간에 조용한 집은 낯설기만 했다. 부모님과
그리고 베스, 유모 폴리나는 차를 타고 방금 떠난 것도 있고.
마이센가에서 일하는 두 명의 독일인 일꾼들도 오늘 같은 날에는 큰 일거리가 없으니 저택에 없었다.
커다란 저택에 혼자 남은 세드릭은 저택의 뒷문을 통해서 정원가로 향했다. 끼익 대는 철문을 넘어서니
매서운 겨울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곳곳에는 상록수와 잔디가 메마른 곳 없이 푸르게 지켜지고
있었다.

“…만나고 싶었는데.”

어쩌면 같이 구경할 수 있는 그런 풍경. 그는 편지가 들어 있는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고서


침울하게 읊조렸다. 동시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애꿎은 잔디의 바닥을 구둣발로 툭툭
파고들었다. 유치한 투정을 부린들 만날 수 없다는 걸 더 잘 알아서 그랬을 것이다. 주름 없던 바짓단이
흙으로 얼룩진 것을 막 확인한 그가 막 몸을 돌렸을 무렵. 조용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정원을 구경하자고 해놓고.”

언뜻 들릴 듯 말 듯 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작은 타박이 섞여 있었다. 세드릭이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고 얼른 몸을 틀었다. 그러자 촘촘한 침엽수 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옆으로 움직이며
둔탁한 코를 가진 워커가 보였다. 검은 코트를 입고서 회색 목도리를 코 밑까지 둘러맨 인영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하얀 숨결이 간간이 뿜어져 나왔다….

“…엉망으로 만들면 뭘 보여주려고.”

“다, 니엘!”

까만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뜬 세드릭이 단숨에 달려왔다. 마음이 앞세워 부르는 외침이 제법 컸다. 단숨에
달려오는 덩치와 함께 울리는 제 이름이 낯설어 유리의 파란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흔들리다가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어 주의를 주었다.

“쉿, 조용히 좀 해.”


“여기는 어쩐 일로, 분명 편지에는….”

황망하니 서서 유리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혹시 자기가 빠트리고 읽은 부분이 있었나, 긴장된 몸짓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유리가 보내준 답장을 꺼내었다. 하지만 눈을 잽싸게 굴려보아도 자신이 모르는 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런 세드릭의 앞으로 피식 웃는 숨결이 닿을 듯 말 듯 다가오다가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힘들게 대답을 꺼냈다.

“…저번처럼 정원에서 계속 기다릴 것 같아서.”

유리는 예전에 송년음악회를 떠올리는지, 가만히 세드릭의 얼굴을 살폈다. 당시에는 거절의 의미로
답장을 적어두긴 했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유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새로 늘어난 편지를
넣어두다가 그동안 받은 편지들을 처음부터 읽었다.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새로운 편지를 받을 때마다
이전의 편지들을 꺼내어 하나씩 읽어보는 것.

그러다 문득, 세드릭이 과연 자신의 거절을 순순히 납득할까 의문이 들었다. 평소 세드릭의 성격을
아는지라 그 의문의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마 밤이 새도록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다가
봄이 오기도 전에 감기라도 들면 의도치 않은 근신이 늘어날 테니 얼굴만 비추려고 살그머니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다 아프면 근신이 끝나도 침대에 갇혀서 골골….”

솔직하지 못한 변명을 마치지 못하도록 세드릭이 유리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유리는 저를 넉넉하게
안아주는 품의 크기가 어색하여 자연스럽게 몸을 굳혔다. 그런 그가 혹시 달아나기라도 할까, 세드릭은
더욱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낮 밤이 무색하도록 온종일 생각나던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게 세드릭에게는 그저 기쁘고


벅차올랐다. 정말 자신을 걱정한 것이든, 혹은 우스운 꼴을 보러 왔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유리는
따뜻한 품에 갇혀서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뺨을 세드릭의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기대었다. 군인이
된 그에게 애정에서 비롯한 포옹은 무척 낯선 것이었다.

“…그래.”

유리가 기대고 있는 너른 가슴팍에서 바삐 울리는 고동의 울림은 참 듣기 좋았다.

“…나도.”

그의 머리 위에서 가쁘게 떨어지는 목소리의 주인만큼이나.

* * *

두 명의 인영이 낡은 철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푸르른 정원의 녹음이 그 두 명이 앉아 있는 벤치


주위로 펼쳐진 모습이 제법 평화로웠다. 간간이 우는 새의 울음소리와 그 아래로 드리워지는 미온의 햇빛.
그 광경이, 그 찰나의 순간만으로 둘은 알 수 없는 안온함을 느꼈다. 손바닥에 턱을 괴고서 앞으로 몸을
숙인 유리가 부시는 햇빛에 눈을 이따금씩 깜빡이는 것을 보던 세드릭은 입술을 연신 달싹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편지에는 쓰지 못하던 이야기를 아껴두고 만나서 이야기 해주고


싶었는데. 막상 그러한 순간이 오니 말문이 쉽사리 트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서로가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다. 덕분에 잔뜩 들은 긴장으로 피가 돌지 않는 두 손을
슬슬 비비면서 세드릭은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날이 좋지… 요.”

물론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세드릭은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아니, 무시해요. 헛소리를….”

“좋아.”

“그게, 저도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예?”

하루에 한 번씩은 한심한 언변을 가진 자신을 탓하던 세드릭은 맞장구를 치다 말고 들은 대답에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지금 뭐라고….’

앞으로 숙이고 있던 상체를 찬찬히 일으키니 여전히 아까 전처럼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유리가 그를


웃음 띤 얼굴로 보고 있었다. 미미한 호선을 담은 붉은 입술이 짧게 대답했다.

“좋다고. 날씨.”

“아…. 아. 그렇지요.”

“정원도 예쁘고.”

“어머니가 꽃을 보는 것을 좋아하셔서…. 제법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무심한 입술에서 툭툭 나와는 칭찬에 세드릭은 마음이 쿵쿵 뛰었다. 평소에는 가차 없던 성품의 사람이
저렇게 언뜻언뜻 좋은 소리를 해줄 때 왠지 어린아이처럼 기뻤다. 그들이 맞고 있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둘
사이에 흐르던 경직도 작은 대화를 통해서 스르륵 풀려나갔다.

“꽃은 좋아합니까?”

“뭐… 싫어하진 않아.”

“키우는 건요?”

“…자신 없어. 생물 키우는 건….”

언제 넘어왔는지 모를 검은 고양이가 벤치 밑에서 슬그머니 나오다니, 세드릭의 다리에 비비적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세드릭은 익숙한 손길로 고양이의 판판한 이마를 손 마디로 긁어주며 씩 웃었다.

“그래요? 의외네요. 잘할 거 같은데.”

“…어울리지 않는 빈말은 그만둬.”

그러다 고양이가 유리를 포착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서 그의 워커 발등에 핑크색 코를 슬쩍슬쩍 대었다.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생물의 몸짓에 세드릭은 다리를 꼬고서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가끔 먹이를 주는 녀석인데, 이 시간만 되면 와서 이렇게 애교를 피워요. 아주 영리한 녀석이죠. 낮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너에게는 수많은 하루고 순간이지.”

유리의 눈이 언뜻 불안함으로 흐려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턱을 괴고서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떠돌이 고양이는 앞으로 얼마나 살까.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금방이라도
길가를 건너다가 운이 없어 치어 죽을 수도 있고. 혹은 봄이 오기 전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주인이 없는 것들이란 그렇다. 책임도 안정도 없다.

“그 녀석에게는 그 순간이 평생일 수도 있어.”

정착할 수 없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책임질 수 없는 마음을 품은 들 보답받을 수 없는 이상, 그 끝은


비참의 말로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순간의 기억을 가지는 건, 평생에 지워지지 않을 마음을 품는 건
국적이 어떻든, 어디 소속의 사람이든 자유다. 그렇다면 그걸로 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망자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인 것은 알지만, 들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도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작게 주의만 주고 가자.’

야옹야옹 보채는 고양이를 보던 유리는 일어서려고 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세드릭의 진지한 눈빛이 다시 그를 깜깜한 눈 속에 가두었다.

“…마치 헤어질 사람처럼 말을 하네요.”

“…영 눈치가 없던 건 아니네. 평소에도 그러면 좀….”

좋겠다고 대답하는 유리를 끌어당기는 강한 악력이 막았다. 휘청이는 몸은 거친 손짓에 벤치 등받이에


고정 당했다. 팔을 잡힌 것을 빼보려고 애써도 세드릭의 힘이 풀어질 기미가 전혀 없었다.

“…당신은 매번 그래요.”

이걸 발로 찰 수도 없고. 고민하는 가운데 세드릭의 우울한 얼굴이 유리의 머리 위에서 쓸쓸하게 읊조렸다.
그의 상체가 유리 앞에 드리워지는 햇빛을 가리며 그늘을 만들었다.
“내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꼭 이렇게 도망가려고 하죠.”

“…내가, 언제.”

“나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요?”

평소 웃던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그늘진 얼굴을 보자니 또 분위기가 달랐다. 태양을 등진 캄캄한 모습에
유리가 뭐라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고백했다.

“나만큼 똑같이, 혹은 더 사랑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

“먼지 만큼의 동정이라고 해도 좋고, 자비를 베푼다는 우월감에서 비롯해도 좋아요. 그 어떠한 이유라도
좋으니….”

그 말을 하다가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기는 어려운지, 세드릭의 숨이 거칠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그가 점차 진정을 찾아가는지 연신 숨을 고르다가 속살거렸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내게 찰나의 순간을 줘요.”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유리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그러면 당신의 순간이 내게는 평생이 될 텐데….”


세드릭의 얼굴이 내려오며, 곧은 콧등이 스쳤다. 서로의 숨결이 교차하며 입술이 막 닿을 때였다.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정원을 황망하게 울렸다.

“…도련님?”

의아함이 담긴 부름에 세드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새로 온 하녀 그레타가 점심을 준비하러 왔다가 발견한
모습에 저택의 뒷문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세드릭의 표정이 당황으로 번져가는 틈에 유리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얼른 몸을 틀어도 화사한 빛의 금발 머리는 유독 눈에 띄었다. 자연히 그레타의 시선이
따라붙었고, 세드릭이 몸을 일으키며 얼른 그 모습을 가렸다. 그레타는 조심스럽게 식사 준비를 알렸다.

“…저, 그… 점심 식사 준비….”

“…방으로, 가져다줘요.”

“저, 친구분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큼.”

이 순간을 포착한 사람이 세드릭 그의 부모님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숨겼다. 그레타는 눈치 빠르게 제안했다.

“…그럼, 같이 계신 손님 몫도 같이 준비할까요?”

“그래요. 그, 먼저 가서 준비해요. 우리도 곧 따라갈 테니까.”

“네.”

손을 휘저을 정도의 축객령을 못 알아들을 사용인은 없었다. 그레타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얼른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정원에서 어색한 분위기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동시에
말을 꺼냈다.
“저기.”

“저.”

“….”

“….”

다시 묘하게 민망한 침묵이 시작되기 전에 세드릭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 방으로 갈까요?”

“아…. 아니.”

그 말에 유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래, 라고 속 편하게 말할 뻔했던 탓이다. 아까


하녀가 말한, ‘친구’ 사이라면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인데. 세드릭이면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유리는
점차 다가오는 세드릭을 피해서 뜰의 곁문으로 향했다.

“…이후에 약속이 있던 걸 깜빡했어. 너무 오래 있었….”

‘저택보다는 대사관 오찬 모임에 가는 게 더….’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드릭 그를 노리는 사람을 확실하게 찾아내고, 지켜줘야 했다. 달은 마음의 유리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세드릭이 결국 툭, 내뱉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정말 나한테 말할 거 없어요?”

평소 같으면 도련님 같은 투정 그만하라고 할 텐데. 세드릭의 얼굴에 서린 묘한 당당함이 유리에게


기시감을 주었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나.

“없어.”

“그럼 힌트. 러시아.”

“…뭐?”

웃기지도 않은 퀴즈에 유리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세드릭은 한숨을 쉬면서 유리가 잡고 있는 곁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날 봤어요. 군복.”

“…너!”

봤다고? 어두운 밀실에서 제 군복 차림을 봤다는 세드릭의 말에 유리의 파란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유리의 반응에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바르샤바의 연합국도 아닌, 연합의 주축국인 러시아 쪽
사람이었다면 숨길만도 했다. 서로에게 적국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심지어.

“…섹시하던데요. 군복 차림.”

군 소속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끌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너 미쳤어?”

세드릭의 솔직한 감상에 당황한 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국적과 군복차림을 보고서 나온
감상이 겨우, 겨우….

“…안 되겠다. 돌아갈게.”

숨기고 있던 치부를 들킨 유리가 벌건 얼굴로 세드릭을 밀치고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걸 세드릭이
따라갔다.

“난 이해해요. 사정이 있었던 거죠? 지금 말하지 않아도….”

연신 말을 하던 세드릭에게 유리가 대문을 막 나서기 전 발걸음을 딱 멈췄다. 사정. 그래 사정이 있긴


했다.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

“다니엘!”

그를 죽일 사람이 될지도 몰라서 감시를 했다는 이유.


“오늘 그걸 알려주려고 온 걸 깜빡했네.”

“왜, 왜 그래요? 내가 말해서, 기분이….”

차라리 그런 하찮은 이유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유리 자신도 이런 복잡한 마음이 아닐 텐데. 세드릭의
격렬한 반응에도 유리는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그는 세드릭에게 경고했다.

“…누군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해. 그래서 혹시 몰라서 찾아온 거야.”

“…나를요? 왜… 요?”

“…글쎄.”

유리는 막, 저택의 정문 걸쇠를 열어서 넘었다. 끼익 대는 철문 특유의 소리와 함께 둘 사이에 철장 같은


빗장이 쳐졌다.

“그러니까 더 이상 걱정하게 하지 마.”

제가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온전하게라도 지키고 싶었다.

<2 권 끝. 다음 권에 계속>

살로메 (SALOMÉ) 2 권

ⓒ 2021, pome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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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일 2021 년 7 월 9 일

지은이 pomelo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 년 3 월 25 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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