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277

목차 AI

〈3 권〉

#chapter 23

#chapter 24

#chapter 25

#chapter 26

#chapter 27

#chapter 28

#chapter 29

#chapter 30

#chapter 31

#chapter 32

#chapter 33

#chapter 34

#chapter 35

#chapter 36

#chapter 37

#chapter 23

* * *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겨서 대사관 앞에 섰다. 줄줄이 놓아진 계단참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대로 너머 맞은편에 바로 영국 대사관이 있었다.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이 거리를
지켰어야 하는데.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어느새 정원 구석에 같이 앉아 구경을
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하루의 몇 안 되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유리의 마음은 진정을 찾지 못했다.

“…나이 먹었군.”

이래서야 군인으로 훈련받은 세월이 아깝다고 봐야겠지. 한낱 사람인지라 이렇게 흔들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 녀석이 특별한, 건가.’

유리는 낯부끄러운 고민이라며 피식 웃고 곧장 정보부로 향했다. 다행히 저택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지만. 다른 곳에서 언제 어떻게 위협이 가해질지 모른다. 유리 자신도 정보에 접근하는 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에 큰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미술관에서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던 것처럼. 그렇게 군복으로 갈아입고 정보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넓은 공간에 열을 지어서 놓여진 책상, 그 위로 바쁘게 타자를 치고 서류를 정리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

‘뭐지.’
유독, 오늘따라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저가 지나치는 테이블 직원들의 손이 멈추며,
시선이 따라붙으니 기묘한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분 탓인가.’

그래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유리는 군모 아래로 그늘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대령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텐데.

“유리 라스콜니코프 하사.”

“…디미트리?”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가 속한 부대의 디미트리였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사람이 오늘따라


유독 굳은 얼굴을 한 것을 본 유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대령의 호출입니까? 무슨 일이죠.”

“…자네 일이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 * *
군복을 갖춰 입은 디미트리를 따라서 대령의 사무실로 가자 대령의 의자가 돌아간 채로 있었다.
디미트리가 문을 닫는 동안 돌아가 있는 대령의 의자가 까딱까딱 진동했다.

“부르셨습니까?”

“내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유리의 파란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본론은커녕 돌다리 짚는 시늉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킨


건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가까워지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은 대령이었다. 자신과 세드릭의
사이를 의심하는 거라면, 그 이유로 무마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순간.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의 주인이 등장했다.

“연인과의 조우가 제법 눈물겹던데.”

“…블라디미르?”

“대령의 훈련이 과했던 모양입니다. 임무와 현실을 망각하는 걸로 보아하니.”

“…무슨 소리를.”

그제야 대령의 의자가 돌아가며 책상을 향했다. 끼익 대는 의자 소리에 유리의 떨리는 시선이 대령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대령의 모습에 유리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설마.

“…방금 어디를 다녀왔지?”

대령의 짤막한 질문에 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감이 좋고 눈치가 빨라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는
더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좋았다. 지금처럼 무언가를 알고서 추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타깃의 자택을 살피고 왔습니다. 오늘 오찬 모임으로 식구들이 자리를 비운다고 하여 혹시 허점이 있지는
않을까….”

“하!”

블라디미르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유리에게 걸어와서 멱살을 잡았다. 세드릭과 비슷한 색의 진한


눈빛에는 의심과 함께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아마, 세드릭은 하지 않을 그런 눈빛.

“연인 놀음은 즐거웠나?”

‘들켰구나.’

순간의 여운을 간직할 새도 없었다. 들이닥치는 위협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유리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직 그들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찍이 실토할 이유도 없다.

“…이유 없는 추궁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무슨 일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억센 손길에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도 세드릭을 떠올리는 유리 저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블라디미르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위협했다.

“감청 실력이 아주 형편없어. 이제껏 기록된 테이프도 무슨 내용만 시작될까 하면 지워져 있고, 왜. 네
기둥서방이 하면 안 될 말이라도 하던가?”

“…기계가 낡아서 가끔 끊기는 경우가….”

“그 매끄러운 혀가 좆 빠는 데만 특화된 줄 알았더니 거짓말도 제법 하는걸.”


“….”

“내통하는 기분이 그렇게 좋았나? 더러운 배신자.”

코웃음을 치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에 유리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틀렸다. 테이프를 언뜻언뜻
조작하던 것도 이미 다 알게 된 건가. 나름 신경 썼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
대령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기대해도 좋아. 수용소 녀석들은 너 같이 다리 벌리는 녀석들에게 제법 굶주려 있으니 심심한 일은 없을


거다.”

“…덕담 고맙군.”

“…뻔뻔한 자식.”

블라디미르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잡고 있던 유리의 멱살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강력한 완력에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유리가 옷매무새를 고친 순간. 대령이 가만히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더미를
유리의 발치에 던졌다. 접힌 미색의 종이들이 군화 아래 어지럽혀지는 모습이 낯익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보고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어.”

“….”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자신의 방에 있던 서랍 구석에 숨겨둔 세드릭의 편지였다. 그걸 어떻게 줍지도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유리에게 대령이 무심하니 처분을 읊었다.

“중앙에 보고는 이미 들어간 상태고…. 덕분에 내 꼴이 아주 우습게 됐어.”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하다 한들, 수용소로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아직 여기서 붙잡히면 안 된다. 적어도, 배후를 잡고 나서야 수용소에 끌려간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유리는 동요를 애써 감추고 천천히 변론을 꺼냈다.

“명령? 아, 그래. 그 참사관의 자제와 가까워지라고 한 건 맞아. 하지만 그가 주는 정보의 기록을


왜곡하고 훼손하다 못해 숨기라고 한 적은 없었지.”

“더불어 연인 놀음도.”

“그래, 그것도.”

블라디미르의 짓씹는 말에 대령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때 근무지를 이탈한 것도 다 이런 일 때문이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벌이다가 괜히 분란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었다?”

“…이용가치가 충분한 장기 말을 잃는 건 큰 손해니까요. 어느 쪽이든 우리가 확보하는 게 좋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세드릭이란 변수는 특별한 가치가 있었다. 전쟁을 위한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대령을 보던 블라디미르는 여전히 의심 어린 어투로 유리를 추궁했다.

“증거를 보고도 그런 뻔뻔한 태도라니. 왜, 그놈은 제법 신사답게 굴어주던가?”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유리는 담담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다들 이렇게 넘어갈 정도니, 그 녀석이 제 출신을 알고서도 매달리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유리의 말에 대령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출신을 알았다고?”

“그날 급하게 쫓아갔다가 군복 차림을 보게 된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유리는 제 발치에 있는 편지를 밟고서 대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랑한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제법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것 같습니다.”

“…눈물겹군. 곱게 자란 도련님들의 성격은 예상하기 영 어려워.”

대령은 우습다는 듯이 씩 웃으며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와 다른 분위기에 블라디미르가 항의했다.

“대령,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배신의 증거가 확실한데….”

“블라디미르. 자네 아버지가 중앙에서 명예로운 장군인 건 나도 잘 아는 바야. 하지만.”


대령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블라디미르의 입을 막았다.

“현재 자네는 내 소속 아래에 있고, 베를린은 내 구역이라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군.”

대령에게 보고하나 없이 제 아버지에게 사적으로 보고를 날린 행동에 대해 경고를 받은 블라디미르가


주먹을 쥐고 떨었다. 대령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식이라니. 수용소로 보내는 길에 몰래 유리를 빼돌리려고 하던 작전이 어그러져 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블라디미르의 인내심이 닳았다. 대령은 눈에 선한 모습을 피식 웃고 넘겼다.

“그래서, 유리.”

“…예.”

“너를 정치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러시아로 송환시키지 않을 이유를 좀 알려주지 그래.”

빙글빙글 웃는 낯은 보다 확실한 증명을 요구했다. 유리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에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좋은 질문이군.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래.”

대령이 턱을 괴고서 책상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유리의 눈이 대령의 입에 가만히 고정되었다.

“우리 중에 영국 참사관네 가족을 가장 잘 아는 요원은 자네니까.”

“….”
“자네가 손수 처리하면 되겠어.”

“…처리, 말씀입니까.”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에 동요나 일렁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유리는 노력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그래, 평화도 길어지면 지루해지니 슬슬 긴장감을 줄 때도 됐어.”

대령이 회색빛 눈을 어둡게 빛내며 한 자루의 총을 건넸다.

* * *

-사흘 후에 외교관들을 위한 파티가 있으니 거기서 처리하도록.-

“….”

유리는 깜깜한 방 안에서 대령의 명령을 곱씹었다. 그림자가 길다 못해 잡혔고, 지워지지 않는 의심은
증명을 요구했다.

‘사살이라.’
그는 답답한 군복의 목깃을 풀어헤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세드릭은 물론이고 유리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비겁한 변명인 걸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가운 침대 위의 시트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눈을 깜빡였다.
비참하게라도 살아 있어야 그를 구할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 있기만 한다면.

하지만 제 손으로 처리하라는 명령은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궁리를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손바닥을 살짝 펼쳐보면서 피식 웃었다. 쥐었다 싶으면 빠져나가는 건 자신이 아니라 세드릭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이런 사랑을 하고 말았을까. 책임도 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언제부터 시작을 하게
되고 말았을까….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오는 창가를 보던 유리의 귀에 문소리가 들렸다.

똑똑.

“….”

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켰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지? 대령인가. 사용인들은 일절 오지 않는 성질을


떠올리며 가만히 있자 망설이는 부름이 잇따라 울렸다.

“도련님, 혹시 손님을 초대하셨나요?”

“…손님?”

“사실 찾는 이름은 다른 사람인데 듣다보니 도련님 같아서요.”

“누구를 찾았는데?”

하녀의 대답에 유리의 말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게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제가 밤손님이
되는 것이면 몰라도.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찾아달라고 하던데요.”


하녀의 말을 들은 유리는 깜짝 놀랐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다.

“세드릭이라고… 전해달라 하셔요.”

“…아.”

“…어떡할까요?”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지? 의아한 마음도 잠시. 유리는 머리를 짚고 웃었다. 대체 어떻게 찾아서 온 건가.

“…내 방으로 안내해요. 주인 어른에게는…. 말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하하….”

유리는 침대 턱에 걸터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배신을 의심받는 상황에 자신의
집으로 들여보낸다니. 자살행위라는 건 안다.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는데도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좀 더 뚜렷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귀에 유독 잘 들렸다. 제 방문 앞에 멈춘 발걸음의 주인은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와.”

마치 제가 허락하는 걸 기다린 것처럼, 방문이 열렸다. 그러자 급한 숨을 내쉬며 발간 볼을 하고 있는


세드릭의 얼굴이 보였다. 누가 봐도 애가 타서 달려온 티가 역력하게 났다. 자신을 찾아대느라 그랬을까.
어느 누구에게 찾아갔을까. 가만히 침대에 있는 유리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세드릭을 보면서 유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탐정 일이 취미인가 봐.”


“….”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농담은 아니었는데.”

노리는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친히 경고까지 주었건만. 그런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올곧게 찾아온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게 이렇게 지척에까지 다가오면 어찌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어떻게 너를 거부할 수 있을까.

“도리어 걱정하게 만들고 가면 어떡합니까.”

세드릭이 유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교차하며 서로를 담았다.


세드릭이 무릎에 올려진 유리의 손등 위에 제 이마를 가만히 대었다.

“…나를 걱정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죽임을 당할 사람인가, 죽임을 저질러야 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떠나서도


걱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유리에게 낯선 말이었다. 누군가가 유리 자신을 걱정한다는 말. 세드릭이 제가
하는 말은 죄다 그러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데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사랑한다는 말도 그랬던 것처럼.

“…너를 만난 건 실수였어.”

“행운은 언제나 뜻밖에서 오는 법이죠.”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데.”

언제나처럼 씨익 웃는 세드릭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도 참 그답다 싶었다.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잡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침에도 그렇고.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요.”

“…이런 식으로 사람 놀라게 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은데.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그냥…. 러시아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뭐?”

소스라치는 유리의 반응에 세드릭이 까만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그게…. 분명 당신이 화를 낼 거 같긴 했는데. 가만히 있기도 좀 그래서요.”

“네 말을 듣고서 이곳을 순순히…알려줬다고?”

대체 누가 알려준 건지. 세드릭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이야기라고 파악할 사람은 몇 되지 않는데. 유리의


추궁에 세드릭은 진술을 술술 풀어 내렸다.
“네. 전화를 받은 사람도 당신처럼 한숨을 푹푹 쉬더니 광장에서 만나서 알려주더군요. 당신의 동료라고
했어요. 이름이 분명 게… 게….”

“…게오르그?”

“맞아요! 게오르그라고 했어요. 그나저나 정말 동료였군요.”

세드릭의 천진한 반응에 유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신음했다. 이 녀석, 방금까지만 해도 두 명 이상의
목숨이 황천길을 갈 뻔했다는 건 아는 건가. 그나마 게오르그가 전화 수신인으로 걸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블라디미르 같은 녀석에게 걸렸더라면 세드릭은…. 유리는 버릇처럼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제가 앉은 침대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앉아.”

“네.”

얌전히 제 옆에 앉은 세드릭의 허벅지를 유리가 꼬집었다. 손길이 제법 매서워 세드릭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야! 아파요.”

“참아.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을 했는데…. 어린 애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아야. 아야! 손이 매워요. 살살 좀 해요.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

세드릭이 억울함을 매단 표정으로 항의하며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습지도 않은 모습에 유리가 피식
웃었다.

“너는 정말 대책이 없는 바보구나….”


보기만 해도,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데. 마냥 좋지도 못했다. 이유 모를 슬픔이 드리워지는 유리의
얼굴을 보던 세드릭이, 붙잡고 있던 손목을 내리고 유리를 꼭 껴안았다. 군복을 벗어둔 셔츠차림의
너머로 따뜻한 살결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세드릭이 유리의 어깨 위에 이마를 꼭 기대는 것을 보고 유리도
눈을 감고서 세드릭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네가 이런 일만 안 해도 별일 없어.”

“…그래도 저 보면 좋죠? 저는 당신 봐서 좋은데.”

“…별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심장을 멎게 만들 사람이 뭐가 좋을까. 유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안겨 있는


세드릭의 품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품이 적당했다. 홀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미온의 온도. 임무라는 명목 아래 이따금씩 닿아 있을 때만 해도 이 온도가
소중한지 몰랐다.

“…무슨 일 있어요?”

떨어지고 나서야,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공허함을 느꼈다. 세드릭의 손이


천천히 올라오며 유리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조심스러운 몸짓에는
더없는 애정이 서려 있었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죽이라는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에 그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 것을.
“미안해요. 제가 기분, 나쁘게 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제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 평안하게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이 그라는 존재 하나로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는 세드릭의 등을 껴안고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만히 이렇게 있자.”

어쩌면 이 찰나의 순간이 유리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세드릭의 팔이 유리를 더욱 꼭 안으며 관자놀이 쪽에 부드러운 입술을 내렸다. 쪼아대듯이 천천히 볼
쪽으로, 특선을 타고서 내려오는 키스 세례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있었다. 이내
입술에 맞붙는 감촉에 눈을 꼭 감았다. 비로소 알게 된 사랑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도 했다.

그와 같이 비참한 삶에 찾아온 고귀한 사랑은 제 몫이 아니었다.

#chapter 24

* * *

적막한 밤 중에 조용한 흐느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때늦은 후회를 한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셔츠의 가슴팍이 젖어가는 희미한 감촉에 세드릭은 유리의 몸을 꼭 껴안고서 고백했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합니다.”

“….”
대답하나 없이 울고 있는 유리에게 세드릭은 입을 연신 달싹거렸다. 고백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때 세드릭은 예전에 본 이탈리아 대사 부인의 스캔들을 문득 떠올렸다. 이래서 그들은 도망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신분의, 평범한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이렇게 마음 아픈 사랑은 하지
않았을 텐데. 세드릭은 유리의 등에 두른 손을 살짝 떨었다.

“우리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든지. 혹은 조금 더 평화로운 시기에 살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합니다.”

어쩌면, 더없이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세드릭은 마른 입을 혀로 축이며 이내 방문한


이유를 고백했다.

“그러니 당신만 괜찮다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뭐?”

“스스로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외국어를 제법 잘하는 편이라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튼에서도 가끔씩 번역 일을 간간이 받았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 줄 알고 있는 거야?”

유리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스스로의 이해력을 의심했다. 지금, 자신과 도망치자고 하는


것인가. 세드릭은 유리의 손을 잡고 손바닥의 안쪽, 손목 부근에 제 뺨을 비볐다. 그러고 시선을 살짝
올려서 애원했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당신과 아침을 맞고 같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나 긍지 따위는 당장에라도 버릴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의 방향이야 같다 한들, 그 길이 평탄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심지어, 제가 죽여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세드릭의 등에 둘러진 유리의 손이 셔츠를 파고들었다. 떨리는 손끝 아래에 깔린 체온과 마찬가지로


세드릭의 고동이 톡, 톡 뛰는 게 선연하니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는 건지, 평소보다 박동이 빠르고
거셌다. 평소에 고지식하고 생각 많은 녀석이 가끔씩 돌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습기만 했는데.

“…그러게.”

그 우스운 제안을 잡고 싶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손 아래 뛰고


있는 이 박동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평생에 남의 피를 묻히고 살던 손이지만, 이때만큼은 이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임무에만 따라서 살던 의미 없는 삶이 그것 하나만 이룰 수 있다면, 목숨이 다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유리는 입술을 달싹대며 눈을 감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무가치한 삶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혹시 몰라서 티켓을 가져왔습니다. 제네바로 가는 열차입니다.”

그러다 숨이 다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유리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유리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이내 팔에 걸친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목적이 이거였나.’

모레 베를린의 중앙역에서 떠나는 티켓을 읽은 유리가 피식 웃었다. 서로의 입장이 흐려질 수 있는


중립국으로 가는 건 그래, 좋다. 다만 도망가는 사람치고 너무 정직하게 표를 끊었다. 이건 뭐. 대놓고
잡아가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리는 표를 보다가 가만히 세드릭을 지켜보았다.

“…왜, 왜요? 혹시 제네바 말고 다른 도시가 좋으면, 도착해서 다른 표로….”

“아니. 좋아.”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그와 함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세드릭 특유의 순수함.


이런 상황과 순간에마저도 유리 저만을 바라봐주는 순진함이 좋았다. 제 배경과 나라와 직업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라봐주는 그 올곧은 시선과 성격이, 눈을 끌다 못해 마음을 잡아당겼다.

“…정말요?”

“…네가 말해놓고 그런 반응은 뭐야.”

세드릭은 놀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웃었다.

“아니, 그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나를 잘 아는구나.”

“…너무해요.”
유리의 농담 어린 대답에 세드릭은 엉거주춤 일어서서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아쉬움을
풍겼다.

“…몰래, 나온 거라서 이만 가봐야 해요. 물론, 당신이 저랑 더 있고 싶으면….”

“그럼 가.”

“…모레 같이 가는 거 맞죠?”

세드릭은 떠나기 전까지 의심을 지우지 못하며 유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유리는 저택의 배웅을 하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작은 거 하나에 전전긍긍하는 녀석이 어떻게 도망칠, 대담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꼭, 꼭 오는 거 잊으면 안 돼요. 3 시 열차….”

“알겠어.”

유리는 세드릭의 목도리를 칭칭 둘러주면서 종알거리는 입을 막았다. 까만 눈과 코, 뺨만 살짝 내민


얼굴을 보면서 세드릭이 바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눈에는 아직도 작은 의심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내키지 않은 듯, 영 꾸물대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결국 팔짱을 풀고
다가섰다. 회색의 머플러 위에 드러난 창백한 뺨에 쪽, 하고 여린 살결이 접 붙는 소리가 났다.

“…으앗.”

“…갈 테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 하면서 돌발행동하지 마.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유리가 소곤대는 말에 세드릭은 까만 눈을 끔뻑였다. 처음이었다. 유리가 세드릭에게 나서서 키스를 해준


건. 기쁨과 동시에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확, 들어찬 세드릭이 말을 더듬었다.
“알겠어?”

“…아, 알겠어요.”

내가, 할 때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막상 연인에게서 키스를 받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야릇했다.


세드릭은 유리의 입술이 스친 부분의 간질거림을 유독 참을 수 없어서 손으로 만지작대며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유리는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공을 이리저리 흔드는 세드릭의 반응에 얼굴을 바짝 댔다.
이러다가 또 허튼짓을 해서 일을 만드는 건 아니겠지.

“…뭐야. 그 반응은.”

“왜, 왜요?”

“…됐어. 가.”

설마 이제 와서 자신이랑 같이 가는 게 후회되는 건 아니겠지. 유리는 눈을 살짝 치켜뜨면서 볼멘소리를


내었다.

“…후회해도 이제 와서 무르는 건 안 돼.”

“…그럴 리가요. 그저, 꿈 같아서 믿기지 않을 뿐이에요.”

꿈이면 깨지 말기를, 속으로 소원하던 세드릭이 손끝으로 제 볼을 쓸다 말고 멍하니 유리를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얼굴로 부탁했다.

“저,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도 될까요?”

“…그런 건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돼.”


이럴 때는 꽉 막혀가지고. 유리는 속으로 푸념하면서도 사냥개처럼 달려드는 세드릭을 꼭 안아주었다.

* * *

“중립국….”

유리는 아쉬움으로 가득 찬 세드릭을 보낸 후에 방의 침대에 누워서 열차 티켓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저야 가진 게 없으니 버릴 것도 없었다. 세드릭은 사정이 좀 달랐을 텐데. 그는 촉망받는 귀족의
자제이자 왕위계승 서열도 가진 인물이었다. 괜히 그로벤 대령이 자신의 친인척으로 만들고 싶어 한 게
아니었다. 그런 그가 ‘평범한 사람’을 자처하다니.

“…후회할 텐데.”

평생에 고귀하게 살던 사람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지금 당장에는 괜찮아도 나중 가서는 분명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유리 그 자신도 잘 알면서도 그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후회하고, 혹은 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알면서도 그 손을 잡았다.

“…미쳤지.”

하지만 그를 위험에 몰아넣는 사람이 되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는 티켓을 기대고 있던 베개
안쪽에 숨겨 넣고 털썩 누웠다.

“…원래 다 이런 건가.”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다 보면 욕심이 나고, 스스로가 정해둔 경계나 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게 되는 게.

‘다 그런 건가….’

자신이 내린 결심에 갈팡질팡하던 차에, 방을 박차고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일어날 필요는 없다. 게오르그에게 이미 보고 받았으니.”

라스콜니코프 대령은 동료의 이름을 언급하며 긴장한 유리에게 슬쩍 웃었다. 이미 다 무슨 내용인지 아는


눈치에 유리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령은 유리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임무에 꽤 충실한 모양이구나.”

“…보시다시피.”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을 맞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령은 비웃듯이 덧붙이고 유리의 방을 떠났다.

“이제껏 잘해온 만큼, 잘 마무리할 거라 기대하마.”


“….”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무리라.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라면 그가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겠지. 점점 멀어져가는 대령의 군화 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침대 위에 다시 누웠다.

“…젠장.”

모든 것을 쥘 수 없는 이상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자신의 안위 또한.

* * *

“…시간이 다 됐는데.”

세드릭은 역전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쳐다보다가 팔짱을 끼었다. 째깍대는 미세한
손목시계의 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쿵대는 조급함에 다리를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역전에 앉아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가 찾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얼굴을 가리기 위한
방법으로 중절모를 깊숙하게 눌러 쓰고 있는 세드릭은 결국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간에 쫓겨서 역
내의 플랫폼으로 향했다.

“…아직 안 왔는데….”

그들이 타고 가야 할 열차는 곧 출발할 모양인지 회색 구름을 역내의 천장에 내뿜으며 천둥 같은 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열차 칸 입구로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에 세드릭은 갈등했다. 눈이 빠져라
손목시계를 본다 한들 2 분이 채 남지 않는 시간에 여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걸 잘 아는 세드릭의
얼굴은 점점 시들어가는 장미처럼 빛을 잃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만큼이나 괴로운 것도 없는데,
무엇하나 쉽게 가는 게 없다며 끓는 애를 태울 때였다.

“…어!”

누군가가 세드릭의 곁을 지나쳐가며 그의 발치에 있던 슈트케이스를 자연스럽게 들고 걸어갔다. 혹시라도


유리가 나타날까, 역전의 입구를 쳐다보던 세드릭이 화들짝 놀라며 소매치기의 뒤를 다급하게 쫓았다.

“이봐요! 그건 제 물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짐과 얼마 없는 옷가지, 그리고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세드릭이 급박한


걸음으로 구름 같은 인파 사이로 새털같이 미끄러지듯이 도망가는 소매치기를 쫓아가니 어느새 열차에
올라타는 입구 앞에 다다랐다.

“…어?”

“안 타?”

“…아, 이런. 깜짝 놀랐잖아요! 하마터면 소매치기를 당한 줄 알고….”

그리고 세드릭의 짐을 가뿐하게 들고 도망치던 소매치기는 다름 아닌 유리였다. 그는 빛나는 금발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머플러 따위로 꽁꽁 둘러싸고 있었다. 넓적한 빵모자 아래에서 반짝이는 파란 눈의 주인은
열차 칸에 올라타기 위한 손잡이를 붙잡고 제 몸을 세드릭이 서 있는 플랫폼 쪽으로 기울였다.

“허술하기는.”

“…안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요.”

“…그럴 리가.”
시무룩한 얼굴도 잠시, 이내 수줍게 고백하는 세드릭의 얼굴에 대고 유리가 짧은 볼 키스를 해주었다.

“얼른 타. 그러다 너만 여기에 두고 가겠다.”

“앗.”

시원스레 웃는 유리의 표정에 넋을 놓고 있던 세드릭을 두고 열차가 천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드릭의 멍한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번져갔다. 유리도 농담처럼 뱉은 말이 진짜가 될까, 손에 들고
있는 세드릭의 짐을 우선 열차 칸에 던지고 다시 몸을 내밀었다.

“…세상에, 얼른 와!”

“가, 가고 있어요.”

세드릭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구둣발로 달리는 동안 달리는 열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그를 점점


뒤로 했다. 더불어 마음이 급해진 유리는 앞에 얼마 남지 않은 플랫폼의 길이를 보고 얼른 손을 뻗었다.

“얼른, 내 손 잡아!”

“헉, 헉….”

세드릭도 손을 뻗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거리가 띄워져 있어서 서로의 손끝이 닳을 듯, 말듯, 스쳤다.

“조금만, 조금만 더….”


유리의 장난스러운 얼굴도 짐짓 진지하게 변하며 한 걸음의 거리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마음이 급해진
세드릭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달리다가 눈을 꼭 감고 발돋움을 하며 제 얼굴 앞에 뻗어진 하얀 손을 덥석
잡았다.

“윽!”

‘됐다.’

유리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던 힘을 다해서 그를 끌어당겼다. 확, 이끌리는 힘으로 세드릭의 머리에


얹혀져 있던 중절모가 날아가고 말았다. 심지어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장신의 세드릭을 잡아당긴 반동으로
인해 유리가 열차칸 바닥에 쓰러질 정도였다. 쿠당탕, 하고 부딪히는 소리에 세드릭이 꼭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유리가 자신을 받아내느라 열차칸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이, 이런. 괜찮아요?”

“…넌 정말 마지막까지도 애를 먹이는구나.”

“미, 미안해요.”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

세드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유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연신 그의 기색을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는 모습에 화난 척도 못 하겠다며 유리는 피식 웃었다. 세드릭의 등 너머로 열려 있는 열차
칸의 문이 바람에 못 이겨 펄럭펄럭 대는 것을 두고 유리가 세드릭의 등을 껴안았다.

“떨어지겠다. 안쪽으로 더 와.”

“…어.”
유리가 기대어 앉아 있는 벽에 세드릭이 이마를 대고서 까만 눈을 슬쩍슬쩍 굴려대었다. 그러면 문을 닫고
오라고 하면 될 텐데. 제 상체를 껴안고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 됐든 같이 열차를 탔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상이 되겠지.’

서로 함께할 날만 남았을 테니까.

* * *

유리와 세드릭은 마주 보고 있는 열차 칸에 앉아서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았다. 봄기운이 완연한


계절은 아니라서 회색빛의 황량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

“….”

“…왜.”

‘앞으로 여덟 시간은 더 가야 하고….’

유리는 양쪽 대사관의 추적이 언제쯤 따라붙을지 곰곰이 계산하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드릭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세드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까만 눈을 빛내며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저, 혹시 배고파요?”

“그다지….”

“…그렇군요.”

시무룩하게 변하는 세드릭을 보고서 유리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반응할 거면 배고프지 않아도 배고프다
말해야 할 것 같잖아. 결국 유리는 세드릭과 함께 식당칸에서 간단한 샌드위치 따위를 먹고 다시 열차
칸으로 돌아왔다. 든든한 위장이 불러오는 포만감으로 인해 유리는 출발 때부터 긴장하던 몸에 나른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좀 자요. 피곤해 보여요.”

“…20 분 후에 깨워 줘.”

결국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는 눈을 감았다. 대사관에 보내둔 편지를 지금쯤에야 발견했을
것이고, 아마 대책을 꾸리는 동안에는 저희들은 이미 제네바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는 길에는
큰일이 없을 테니 긴장을 조금을 풀어도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리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울이자 세드릭은 읽던 책을 다시 펼치고 웃었다.

“네.”

대답은 곧잘 하지만, 유리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아마, 세드릭은 한참 후에나 저를 깨울 것이다.


피곤해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을 핑계로. 이미 알고 있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실제로 들으면 또 기분이 이상하겠지.’


유리는 잠에 빠져들었다.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종이 특유의 팔랑대는 소리가 먹먹하게
멎어 들어갈 때쯤. 깜깜한 가운데 인기척이, 천천히 제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유리가 눈을 바로
떴다.

“…윽!”

“누구….”

동시에 제 눈앞에 다가온 인기척을 거칠게 부여잡고 품속에 숨겨둔 소형 권총을 꺼내서 겨눴다. 유리가
잠결에 흐린 시야를 거두고 신음을 내뱉는 사람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멋쩍게 웃는 세드릭이 있었다.

“…하하…. 놀랐어요?”

“…몇 시야.”

벌써 20 분이 지났나. 유리는 아쉬운 잠을 덜어내며 꾹 쥐고 있던 세드릭의 팔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세드릭이 시큰대는 팔목을 잡고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녁 먹기 좋은 시간이죠. 6 시가 넘었어요.”

“…벌써? 분명 20 분 후에, 깨우라고….”

“피곤해 보여서요.”

“….”

“그리고 내 앞에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 제법 보기 좋아서 그랬어요. 그나저나 이거,


진짜 총이에요?”

예상했던 대답을 막상 들으니, 유리의 기분이 일렁였다. 세드릭은 유리가 쥐고 있는 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총신을 손끝으로 슬슬 만졌다. 호기심이 어린 눈빛에 유리가 질색하며 품 안에 차고 있던
홀스터에 총신을 숨겼다.
“그럼 진짜…. 만지지 마. 위험하니까.”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고 타박하는 유리에게 세드릭이 짐짓 쓴웃음을 지었다. 유리의 대답으로 인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탓이다. 제가 좋아하는 예쁜 손에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물건의 정체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잡고 나직하게 읊었다.

“…위험한 건 왜 가져왔어요.”

“…혹시 모르니까.”

유리는 가만히 제 손바닥의 거친 마디를 만지작거리는 세드릭을 보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다닌 삶이라 도망 끝에 맞이하는 날이 장밋빛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제 손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이 그저 핏빛으로 물들지 않기를 지켜내는 수 말고는 떠올릴 수 있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를 쳐다보다가 곧은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 걱정되잖아요.”

“….”

“이번에는 제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참으로 솔직한 고백이었다. 군인으로 훈련받은 자신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귀족 출신의 도련님.


누가 봐도 힘의 활용이 다른데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격이란. 그래도 웃음보다는,
기묘한 기쁨이 마음 언저리에 샘솟았다.

“…그래.”
‘행복이 있다면, 이런 걸까.’

유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을 느끼며 세드릭과 마주치고 있는 시선이 문득 간지러워져 피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열차는 긴 밤을 뚫고서 새로운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chapter 25

* * *

“세드릭.”

“…으음….”

“일어나.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새벽녘이 다가올 무렵, 유리는 제 어깨에 기대어 자던 세드릭을 깨웠다. 제네바 중앙역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달리는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철길 너머로 보이는 시내 외곽의 주택가를 보면서
유리는 졸린 눈을 비비는 세드릭을 챙겼다.

“벌써… 다 왔나요?”

“그래. 짐은 내가 챙길게.”

“고마워요. 생각보다 열차가 빠르네요.”

입가에 묻은 침 자국을 세드릭이 알아차렸는지 문지르는 모습에 유리가 피식 웃었다. 밤새워 내내


종알종알 이야기를 꺼내더니만 종국에는 잠을 참지 못하고 정신이 빠진 모습이 조금은 귀여웠다. 유리는
선반 위에 올려둔 세드릭의 슈트케이스를 꺼내고, 열차 칸 문에 걸어둔 코트와 머플러 따위를 세드릭에게
전달했다. 아침 햇살이 외투를 챙겨 입는 세드릭의 얼굴에 쏟아지며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내었다.

“하암….”

“얼른 잘 챙겨 입어. 바깥 공기가 꽤 추우니까.”

“…왠지 매일 아침마다 이런 잔소리를 들을 걸 생각하니….”

유리의 잔소리를 듣던 세드릭은 외투에 팔을 꿰입으며 살짝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상상했던 것 보다, 꽤 행복하네요.”

“….”

세드릭의 입꼬리에 새벽녘을 막 터오는 동으로 인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예전에 보던 말쑥한 모습도
없고, 흐트러진 머리 모양부터 해서 한량처럼 느슨하게 풀어진 양복 차림이 여유로운 모습에 분위기를
더했다. 그들이 지고 있던 책임이나 지위, 명예 따위가 온통 흐려진 모습이 유리가 보기에도 제법 좋았다.
유리는 막 정차하는 열차 복도로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세드릭에게 제 머플러를 꽁꽁
둘러주었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세드릭의 웃는 얼굴을 마음속에 몰래, 간직한 채로.

* * *
“휴가철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은 별로 없어서 제법 한산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휴식하기에
제격이지요.”

“그런 것 같군요. 그나저나 아까 저쪽 집이 여관이 아닌가요?”

“원래는 여관의 방으로 드리려고 했지만, 사람도 없으니 이 별장을 쓰셔도 좋습니다.”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세드릭과 유리가 찾은 것은 숙소였다. 대로나 시내 중심가가 아닌, 호수 쪽


기슭에 외진 여관에 한참을 걸어간 그들은 지친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찾는 사람도 없는 곳이라 와준
것이 오히려 고맙다고 호의를 베푼 여관 주인은 머플러를 꽁꽁 두르고 있는 세드릭을 희한하게 바라보며
유리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요하네스 씨, 동행한 분은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아.”

유리는 키를 받으며 세드릭의 우스운 꼴을 보고 입술을 꼭 깨물어서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훈련된
순발력으로 겨우겨우 수습했다. 이런, 세드릭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띄어 가렸던 것이 도리어 수상해
보였다.

“제가 모시는 분은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심해서, 평소에 기침을 자주 하는 바람에…. 요양을 하러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의사를 나중에 불러드릴까요?”

“아뇨. 처방 약은 충분히 가지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은 유리에게 받은 여권을 돋보기 외 안경으로 한 번 훑어보고는 돌려주며 짐짓 걱정스럽게


제안했다. 유리는 여권을 받아내며 가볍게 사양했다. 세드릭은 웃기지도 않은 유리의 거짓말을 가만히
듣다가, 안쓰럽게 바라보는 여관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간헐적인 기침을 꾸며내었다.
“에헴…. 으흠.”

“…저런. 저녁에 장작을 충분히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여관 주인은 돌아갔다. 세드릭은 유리가 짐을 들고 전달받은 별장으로 태연하게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도 얼른 따라갔다. 둘이 거실에 들어오고, 대문이 탁 닫히자마자 세드릭은 답답하게
두른 머플러를 풀어헤쳤다.

“푸하!”

“…연기력이 정말 형편없더라, 너.”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세상에, 그 여권은 뭐예요? 언제 가짜를 준비했어요?”

“진짜인데.”

“대체 이런 거 어디서 난 거예요? 혹시 말로만 듣던 암시장에서 파는….”

가짜라니, 유리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여권을 낚아채는 세드릭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연기나 거짓말이


아니라, 그가 가진 여권은 가짜가 아니었다. 유리는 세드릭의 트렁크를 풀어 내리며 변명했다.

“그건 아니고. 잠시 빌려왔지…. 응?”

물론 당사자 몰래. 유리는 아마 역 안에서 자신의 여권을 소매치기당해 울상을 하고 있을 젊은 청년을


대충 상상하며 열린 트렁크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세드릭은 가만히 있는 유리에게 다가가 질문하려 했다.
유리의 힘 빠진 탄식만 아니었더라면.

“아는 사람…. 뭐 해요?”

“너, 대체….”
유리는 트렁크 앞에 소중하게 감싸인 찻주전자와 두 사람 몫의 찻잔을 발견하고 물끄러미 세드릭을
째려보았다. 세드릭은 아직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지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싱글벙글 웃었다.

“아! 이건, 우리 둘이서 앞으로 지내면. 티타임이 많을 테니까….”

“…말을 말자.”

‘도망쳐 나오는 마당에 찻잔 세트라니….’

그야말로 뼛속까지 영국인 티를 낸다며 유리는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잠시, 유리는
세드릭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함께 도와주었다. 아까 찻주전자 세트만 빼면, 세드릭이 챙겨온 짐은 제법
평범했다. 셔츠와 바지, 양말과 같은 옷가지. 그리고 자주 읽는 듯, 가죽 양장이 닳은 책 두어 권.
종이와 필기구…. 그리고 트렁크 안쪽에 깊숙이 넣어둔 작은 상자.

“…이건 또….”

“앗. 이건 괜찮아요.”

유리가 이 상자는 무엇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세드릭이 전달받은 책을 내팽개치고 얼른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마치 목숨을 뺏긴 사람처럼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습에 유리는 바로 관심을 껐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 물건은 열어서 보여줄 수는 없어요!”

“…그래. 그럼, 식료품부터 사러 가자.”

“…안 궁금해요?”

“…안 보여 줄 거라면서.”
자기가 말해놓고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어찌해야 할지. 유리는 물건을 정리해 놓고 그사이 느슨해진
워커의 매듭을 다시 묶었다. 세드릭은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멋쩍은 표정으로 등 뒤에 숨겼다. 애써
캐묻지 않는 유리의 태도에 대해 어딘가 아쉬움이 보였다.

“그, 그렇긴 한데….”

“아침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왠지 좀, 쓸쓸해지네요.”

“…뭐? 왜. 가족들…때문에?”

유리는 세드릭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세드릭은 좋은 가족들 사이에 있었으니
잠시 만나고 말 인연에 평생을 등지고 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리는 지금이라도
세드릭을 열차에 태워 베를린으로 보내야 하나, 빠르게 계산을 하는 중에 세드릭의 뾰로통한 불만을 듣고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니요. 당신 때문에요.”

“….”

‘내가 뭘 어쨌다고?’

세드릭은 어딘가 마음이 상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식료품점에 가는


길까지 묘하게 삐진 세드릭의 기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사과는 좋아해?”

“…네.”

“…사과 파이 해줄까? 홍차에 같이 먹으면 맛있을 거야.”


“…정말요?”

완고한 입술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움찔대는 모습에 유리가 웃음을 참았다. 젠장, 너무 귀엽잖아.
이럴 때만 보면 세드릭이 유리 자신과 같은 나이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드릭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사실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잠시만이라도, 그가 말하던 평범한 삶과 행복을 같이 누리고 싶었다. 유리는
세드릭과 함께 호숫가를 걸으면서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식료품점에서 잡다한 것들을 사서 돌아오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늦은 점심을 챙겨 먹은 둘은


날이 좋은 정원에 식탁보를 깔고 누웠다. 셔츠차림의 둘이 나란히 누워서 엷은 봄 햇살의 기운을 즐겼다.

“…날씨 좋네요.”

유리 자신의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이는 숨결에 감고 있던 눈꺼풀을 살짝 떴다. 그가 좋아하는


세드릭의 해맑은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 흐린 날씨투성이인 데다가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대사관의 정보부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유리가 몸을 일으키며 햇빛에 부시는 눈을
끔뻑였다. 햇빛을 타고 엷은 색소의 속눈썹과 푸른 눈이 빛났다.

“그러게.”
팔을 풀밭에 기대고 비스듬하게 일어난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은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군복도 벗어
던지고 그와 함께 따라온 연인이 기쁘게 웃다가, 이내 메마른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

그게 자꾸 눈에 걸렸다. 제 눈앞에, 온전하게 있건만. 그들을 갈라놓을 사람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인가. 불안함에 마음이 달은 세드릭이 유리의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왜? 어디 가게?”

“…이왕 온 거, 우리 기분 전환이나 하죠.”

“기분 전환?”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둘의 맨 걸음이 별장 근처의 호수로 향했다. 작은 조각배가 있는 곳으로


세드릭이 유리를 이끌었다. 못 이기는 척, 유리가 따라가자 세드릭이 유리를 배에 태우고 제 허벅지가
호숫물에 잠기도록 조각배를 밀었다. 그러고는 능숙한 몸짓으로 배에 세드릭이 올라타자 작은 조각배 안이
꽉 차다 못해 흔들림에 호수 표면을 흔들었다.

“됐다.”

“윽. 이게 무슨….”

유리는 배의 옆구리를 부여잡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호수에 떨어질 것처럼 겁을
내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 배 무서워해요?”

“…그건 아니지만. 흔들리는 건 싫어. 수영도, 잘… 못하고.”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조각배의 옆구리를 꼭 부여잡은 채로, 유리는 투덜거렸다. 세드릭은 젖은 셔츠의
소매를 걷으며 고정되지 않아 흘러내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든지 잘해 보이고 빈틈이 없다 싶은
그의 연인의 솔직한 고백이 귀엽다 못해 깜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조각배 옆에 있는 노를 쥐고서
천천히 저어나가며 씩 웃었다.

“그럼, 수영. 제가 가르쳐 줄까요?”

“…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선생인 것 같으니 사양하지.”

“앗, 너무해요. 내가 수영하는 거 본 적도 없으면서.”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나아가는 조각배는 제법 순조롭게 호수의 중앙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맑은


물의 바닥이 선연하게 보이는 모습에 유리가 눈을 꼭 감고 다리를 끌어안았다. 확연하니 겁을 먹은 모습에
세드릭은 괜히 장난기가 돌았다.

“무서워요?”

“…구경 다 했어?”

“흠… 글쎄요. 아직?”

“뭐? 여기서 얼마나 더….”

세드릭의 애매한 대답에 기가 막힌 유리가 감았던 눈을 톡 뜨자 세드릭이 눈앞에서 씩 웃다가 키스했다.


유리가 불안함에 깨물고 있던 입술 위로 부드러운 체온이 맞닿으며 말랑한 것이 순식간에 침범해 들어왔다.
안쪽으로 얽혀 들어오는 침입에 둘 사이에 살결이 물결이 스치는 소리만이 났다.
“음….”

베를린도, 어디도 아닌 곳이니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유리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한참을 맛보는 세드릭을 가만히 두었다. 밀착되는 살결에 점점 두 사람 사이로
열이 오를 때쯤, 유리의 하얀 이마에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제야 둘 사이의 연결이 멎을 수 있었다.
세드릭이 욕정으로 들끓는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 그, 이건.”

제가 해놓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확 붉히는 모습에 도리어 유리가 동했다. 제가 먼저 해놓고 부끄럼을
탈 것은 또 뭔가. 그래도 그런 성격이라서 좋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따라오는 거겠지.
그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 입술을 혀로 훔쳤다.

“…더 해도 상관없는데.”

“그, 그렇게… 말하면.”

“왜, 싫어?”

“…그럴 리가요.”

세드릭은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끼는 자신을 다스리려고 하는지 끙끙대며 유리의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달콤한 시간도 잠시, 작고 좁은 배 안에서 두 성인 남자가 밀착한 탓에
양옆으로 슬쩍슬쩍 흔들리던 배가 이기지 못하며 결국 뒤집혔다. 서로에게 빠져 들은 탓에 그걸 모르는 두
사람은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호수에 파란을 일으켰다.

“푸핫.”

수영을 잘한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지, 세드릭이 제일 먼저 호수의 표면 위로 올라왔다. 그는 뒤집힌 배의


옆구리를 붙잡고 있다가 어디에도 없는 유리를 찾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수영을 잘 못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저 바닥 위로 유리가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의식이


있는지 헤엄쳐 다가오는 세드릭을 향해서 간신히 손을 뻗는 유리를 두고 세드릭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까, 기차역에서는 자신이 그랬는데 지금은 그의 차례였다. 더 지체할 것 없이 얼른 유리를 붙잡아
올라온 세드릭은 물이 얕은 곳으로 유리를 데리고 나왔다. 덕분에 물 밖으로 나온 유리가 참은 숨과 함께
물을 뱉었다.

“…괜찮아요?”

“켁, 켁….”

“…이런.”

진정이 되어가는지,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유리를 세드릭이 얼른 등에 업고서 별장으로 향했다. 젖은


몸에 닿는 공기가 제법 찼다.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며, 세드릭이 걸음을 빨리했다. 장난이
너무 과했다며, 살짝 자책하면서. 맨발로 턱턱, 언덕길로 걸어가는 것을 두고 유리가 세드릭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서 신음했다.

“…으.”

“…좀, 괜찮아요?”

“…응.”

“다행이다. 그래도,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곧 해가 질 테니까.”

“그래…. 고마워.”

정신을 차린 거 보면, 우려하던 불상사는 아닌데, 세드릭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세드릭은 별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욕실에 유리를 넣어두고, 추위에 떠는 유리의 젖은 옷을 벗겨주려 손을 뻗었다.

“…몸이 차니 목욕부터.”

유리가 입고 있던 하얀 셔츠가 방금 전 일로 젖는 바람에 하얀 살결을 투명하게 내보였다. 특히, 벌어진


셔츠의 틈 사이로 보이는 가슴팍의 유실이….

“…아.”

‘방금 큰일 날 뻔한 사람을 두고 이 무슨, 파렴치한 생각을….’

세드릭은 스스로를 타박하며, 유리의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러다 유리의 옆구리 부근에
전에 자신이 남긴 잇자국을 발견하자 손이 멈췄다. 하얗게 젖은 곳에 남겨진 불그스레한 자국이 묘한
분위기를 내었다. 양심이고 뭐고 순식간에 휩싸이는 욕구에 세드릭의 목울대가 긴장에 차서 느리게
움직였다. 유리가 바닥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물을 느끼며 욕조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었다.

“…고마워. 수영은 정말… 잘 못해서.”

“…아닙… 니다. 당연히….”

동시에 언제나 시선을 빼앗던 금발 머리도 물기에 젖어서 여린 목덜미에 달라붙으며, 알 수 없는 식욕을
자극했다.

“…그, 나가 볼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가지 마.”

괜한 죄책감이 들어 몸을 일으키려는 세드릭의 팔을 유리가 붙잡았다. 힘이 살짝 빠진 손은 손쉽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의 젖은 눈길이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다시 미련을 남겼다.

“…목욕 같이, 해. 너도 젖었잖아.”

유리의 우려 섞인 말이 세드릭에게는 이상한 열기를 전달했다. 세드릭은 한숨을 푹 쉬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한탄했다.

“…저기, 나를 너무 자극하지 말아요.”

“왜.”

“그야, 그런 말을 들으면….”

유리가 느른하게 웃으며 되묻는 모습에 세드릭이 살짝 발끈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놀리는 게 역력한
유리의 표정에 심술이 돋았다. 세드릭은 훈기로 발그레해진 유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못내 소중함을
표현했다.

“…제가, 자제하기가 어렵잖아요.”

“마음대로, 해.”

“….”

“이럴 때마저, 눈치 없을 필요는… 읍.”

결국 세드릭이 참지 못하고 유리에게 입을 맞췄다.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입술을 물고, 뜯었다가 입 안을


간질간질하게 더듬어가는 움직임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유리의 머리를 꼭 붙잡고 있는 세드릭의 두툼한
손마디 너머로 젖은 머리카락의 물줄기가 연신 흘러나왔다. 젖어서 살결에 질척대도록 달라붙는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내고, 세드릭이 욕조에 들어가자 너른 욕조가 금세 비좁아졌다. 덕분에 차오른 물이 넘치며
서로의 몸이 더욱 바짝 붙었다. 세드릭이 자신의 잇자국이 남은 유리의 허리께를 더듬으며 작게 웃었다.

“…자국, 남았네요. 알고 있어요?”

“…안 남는 게 이상하지.”

그렇게 세게 물고, 핥고 난 후에 자국이 안 남는 게 이상하다며 유리가 투덜대었다. 평소에는 차갑다고


느낄 유리의 투정이 지금의 세드릭에게는 묘한 애정같이 느껴졌다. 그는 유리를 제 품에 넣어서 안아
들고는 슬쩍 웃었다.

“왠지, 더 물어 달라고 들리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요?”

“어차피, 여길 볼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흣.”

“…정말 큰일이에요.”

세드릭이 유리의 등 부분을 너른 손으로 슬슬 더듬다가, 간지러움에 신음하는 유리를 보면서 탄식했다.
어쩌면 좋을까, 보면 볼수록 더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란. 절제도, 자제도 할 수 없는 마음. 세드릭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유리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살살해. 저번에는…. 너무 거칠어서 힘들었으니까.”

“…젠장.”

“흐윽…. 아, 거긴….”

결국 세드릭은 참지 못하고 유리를 덮쳐들었다. 격한 움직임에 욕조의 물이 넘쳤다. 제 몸에 달라붙어,


진득하게 애무해대는 세드릭을 보던 유리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쇄골과 갈비뼈 부근에 여린 살결을
잇새로 긁는 자극에 허리가 떨렸다. 동시에 그날의 자극을 몸이 떠올리며, 배 안쪽이 욱신거렸다. 마치
허전한 것처럼.

“흐윽, 으응….”

“여기가, 좋아요?”

세드릭의 부드러운 입술이 유리의 등에 대고 입을 맞추니 피부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흠칫, 흠칫 떨렸다.
동시에 다리가 배배 꼬여가며 쾌감을 선연하게 느꼈다. 세드릭의 손끝이 회음부 부분을 더듬자, 유리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그냥, 해줘… 읏.”

“하아….”

“흐읏, 으응, 천, 천히… 넣…. 흑.”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바로 침범해오는 부피감을 느낀 유리가 헛숨을 삼켰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 크기였다. 어디 남는 곳 하나 없이, 꽉 차버린 복부 쪽을 유리가
손으로 쓸어내리며 가쁘게 숨을 쉬었다. 살짝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마치 애라도 하나 임신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흐응, 응… 아읏. 움, 움직이지 마.”

“저는… 윽.”

세드릭과 이어져 있는 부분의 아슬아슬한 한계를 넘어갈 정도로 허리를 내리던 유리가, 안쪽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안쪽을 조였다. 세드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다가 자신의
물건을 사정없이 조여오는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를 꼭 껴안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해놓고, 도리어
고문하는 격이었다. 결국 세드릭은 유리를 꼭 부여잡고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그러자 유리가 욕조의
물에서 숨을 할딱이며 쾌감에 젖은 신음을 내었다.
“윽, 흐읏, 아, 안 돼….”

“아, 윽…. 가만히, 좀 있어요.”

“응, 으응… 흣.”

유리가 쾌감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거슬리는지 세드릭이 유리의 목덜미 쪽을 욕조의 벽에 밀어 넣고


연신 허리를 움직였다. 철벅 철벅대는 물소리와 함께 살이 부딪히며 매끈한 피부 위로 마찰로 인한 붉은
기가 돌았다. 욕조 밖으로 유리의 다리가 뻗어 나오며 쾌감으로 발끝이 오므려지기를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끊어먹을 것처럼 조여오는 내벽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드릭이 사정했다.

“읏.”

“아, 응….”

미지근해진 욕조의 물과 다르게, 내벽 안쪽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유리가 몸을 떨었다. 참았던 숨을


뒤늦게나마 내뱉는 유리에게 세드릭이 입을 맞췄다. 유리의 안에 들어가 있는 물건은 여전히 흉흉했다.
유리는 제 안쪽을 다시금 파고드는 단단한 감촉을 버거워하면서도 다리로 세드릭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자 세드릭의 묵직함이 다시 예민한 부분을 딱 좋게 눌러왔다.

“흐, 더…해줘.”

유리는 떨어져 나가는 세드릭의 입에 키스하며 졸라대었다. 어쩌면, 이 밤이 그와의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세드릭.”
마지막 순간을 후회 한 점 없이 보내고 싶었다.

#chapter 26

* * *

“….”

유리는 옆에서 곯아떨어진 세드릭의 옆에서 가만히 뜯어보았다. 커튼의 틈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에
드러난 세드릭의 얼굴은 여전히 유려했다. 쭉쭉 뻗은 콧날과 다부진 턱선, 적당히 도톰한 입술에 촘촘한
속눈썹이 내려진 얼굴이, 흠 하나 없이 완벽했다. 색이 엷은 저와 다르게 진한 색의 머리카락이 이마
쪽에 내려온 것을 유리가 슬쩍 정리해주면서 어디 놓치기라도 할까 세드릭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가득
담았다.

‘지금쯤, 국경을 넘고 있겠지….’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으니, 적어도 오늘 오후에는 지척에 다가올 것이다. 추격대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유리는 자세를 고쳐서 누웠다. 몸에 푹신하게 달라붙는 침구가 무게를 따라 축,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드릭은 우리들이 그저 이렇게, 안온하게 살아갈 줄로만 알고 있겠지.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찰나의 꿈이라는 것도 모르고.

이게 유리 자신이, 제 평생에 간신히 쥐어 볼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도 모르고.

“….”

유리는 옆에서 속 편하게 곯아떨어진 세드릭을 보고 있자니, 잘생김을 따져보기도 전에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복잡한 마음으로 심란한 가운데 혼자서 태평한 녀석을 보고 있자니 심술이 났다.
유리는 매끄러운 뺨 위에 제 손끝을 대고 슬쩍, 슬쩍 눌렀다.

“…바보 같은 녀석.”

이런 순진한 녀석을 데리고 살게 될 여자가 참으로 고생이 많겠다며, 유리는 혀를 찼다. 이 녀석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그런지 꽉 막히고, 반듯하기만 하고 스스로의 잇속에는 영 어두웠다.

그래서 사람이 속여도 그저, 허허 웃고 넘어가고. 눈치도 없어서 남의 사정만 생각하고 저 자신은 생각도
못 하는 녀석인데. 그런 녀석인데….

괜한 걱정만 이렇게 저렇게 만드는 그런. 유리의 사소한 괴롭힘에 결국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유리를 확인하자마자 느슨하게 풀린 눈꼬리가 이내 호선으로 휘었다.

“…더 자.”

“계속, 저 보고 있었어요?”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없잖아.”

퉁명스러운 유리의 말에도 세드릭의 눈꼬리는 풀릴 줄을 몰랐다. 유리는 멍청하게 웃는 세드릭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고 있는 걸 봤다는 말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가. 유리는 세드릭을 보면서
저도 똑같이 좋아하던 걸 까무룩 잊어버린 듯, 속으로 투덜대었다.

‘누가 데려가는지는 몰라도…. 아, 모르는 건 아닌가.’

유리는 전에 대사관 주최 파티에서 지나치듯 마주친 세드릭의 약혼녀를 떠올렸다. 같은 나라의, 괜찮은
집안의 여식. 그렇다고 못난 구석도 없는, 책에서 튀어나온 숙녀의 정석 같은 여자. 세드릭의 옆에 그
여자의 모습을 그려 넣으며 유리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저와 같은 사람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차라리, 유리 제가 여자였더라면 조금은 상황이 나았을까.


옆에 있을 수 없다면, 그와 닮은 아이 하나라도 훔쳐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세드릭이 졸린 눈을
끔뻑이다 말고 유리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사랑과 가난은 숨길 수가 없다는 말이 진실인지, 훈련받은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데 있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차마, 제가 여자였더라면 세드릭의 아이를 탐내었다는 부끄러운 말은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서 변명했다.

“…그냥.”

“걱정 있으면, 말해줘요. 이제 우리… 아, 우리라고 하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요. 물론, 나쁜 쪽은


아니고 좋은 쪽으로….”

“….”

“…내일은 뭐 할까요.”

“글쎄.”

“호수 너머에 공원이 있다는데, 가볼까요. 아직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제 오다가 봤는데 꽃이 조금


피어서…. 아, 이런 건 그다지 재미없겠죠. 다른 걸 생각해볼까요.”

세드릭은 혼자서 웃었다, 민망해하다가 결국에는 유리의 몸을 슬쩍 껴안았다. 유리는 코앞에 다가오는
탄탄한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피식 웃었다.

“좋아.”

“….”

유리도 세드릭의 등을 마주 안으며 생소한 체온을 느꼈다.


“뭐든지 상관없어.”

그 품이 참 따뜻했다. 정신없이 사는 새에 꽃이 피는 계절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추운 날에 만난 사랑이


못내 따뜻해서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세드릭이 유리의 말을 듣고 제 품에 있는 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미묘했다. 분명 자신과 함께 있는데, 이렇게 가까이 곁에 있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유독 쓸쓸해 보이는 연인의 얼굴이 기시감을 부채질했다. 그렇지만 이내 제 입에 살짝 입
맞춰주는 감촉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떨쳤다.

* * *

“아야.”

“이런, 조심해서 다녀야지.”

“얘, 조셉! 어머나, 죄송합니다. 어서 사과드리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둘은 아침이 오기 전까지 서로를 안고서 졸다가, 약속한 대로 공원을 산책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일러서, 아주 만개한 광경은 없었지만 산들거리는 바람에 맞추어 여린 꽃봉오리들이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서 걸으면 걸을수록,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물결이 눈앞을 간지럽혔다. 둘의 곁을 따라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일상과 한가로운 대화가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특히 방금 공원길을
뛰어다니다가 부딪힌 아이도 그렇고. 세드릭의 허벅지에 제대로 부딪혀서 나동그라진 아이를 쫓아온
어머니가 난색을 하는 것을 두고 세드릭은 가볍게 웃고 보냈다.

“…예쁘다….”

“조셉, 사람을 코앞에 두고 그런….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옆에 서 있던 유리를 뒤늦게 알아차린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속마음을 내뱉었다. 솔직함을 넘어선
감탄에 아이 엄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장난꾸러기 아이의 손을 잡고 황급히 떠나는 엄마를 보던 유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세드릭이, 나중에
애가 생긴다면….

“…귀엽네.”

‘왠지 저렇지 않을까.’

떠나가는 아이가 연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보던 유리가 속으로 상상했다. 까만 머리에, 동그란 뒤통수.
젖은 흙처럼 깜깜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면서 환히 웃겠지. 생각에 잠긴 유리에게 세드릭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런가요.”

‘아이를, 좋아하나.’

원체 말이 없는 연인이라 애를 좋아한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나중에 좀, 잠잠해지면 동생이라도


불러서 보여줘야 하나. 아니면 입양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어디서 애라도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요상한 쪽으로 튀는 것은 둘째치고 유리가 얼굴에 미소를 잔잔히 머금은 모습에 세드릭은 고민과
함께 살짝 질투가 났다. 아까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입이 꼭 다물렸다. 동시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앞으로 자신과 함께 하는 이상, 그가 좋아하는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데.

‘나랑 같이 있는 걸 후회하지는 않을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아줄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해도, 그저
좋았다. 그 정도에 포기할 거라면, 집을 등지고 평생을 보지 않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시
천천히 걸어가는 연인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스치는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조그만 함의 무게가 묵직하게 걸렸다.

‘언제쯤, 건네주어야 할까.’

세드릭은 혹시라도 걷다가 저도 모르게 흘릴까, 긴장이 되어 오른쪽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의 보석함에서 몰래 훔쳐 온 반지였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는 반지가 들어 있는 함을 손에 꼭 쥐고
건네줄 타이밍을 연신 엿봤지만 좀처럼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까 전해줄까 했더니만, 튀어나온 아이
때문에 놓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드물게 볼 수 있는 저 작은 웃음이 어린 얼굴을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 별장 입구에 들어와서야, 세드릭은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저기….”

“…쉿.”

“….”

다만 힘들게 꺼낸 그 말마저도, 갑자기 제 입에 다가온 하얀 손바닥 때문에 막히고 말았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별장의 문을 열지 않은 채로 표정이 싹 바뀌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집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 싶도록, 냉랭한 표정의 유리가 별장의 양옆에 난 유리창 쪽 벽에
몸을 바싹대었다. 경계하는 게 역력해서, 세드릭은 또다시 반지를 전해줄 타이밍을 놓쳤다.

“넌 여기에 있어.”

“무슨… 일이예요?”

“…별거 아니야.”
유리는 굳은 표정으로 가슴팍의 홀스터에 걸어둔 소총을 꺼내서 장전했다. 별거 아닌 데 왜 저런 얼굴을
한단 말인가. 눈치가 나쁜 세드릭이 봐도 지금, 그들의 보금자리에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 유리가 총구를 지면으로 두고, 슬쩍 덧붙였다.

“…괜찮아.”

“…저,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 제게 약속해요. 그리고 같이, 가요.”

“그건… 못 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무슨….”

대체 뭐가 괜찮은 것인가. 아니, 누가 괜찮은 것일까. 묵묵히 내려다보는 까만 시선을 두고 유리가 눈을


피했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행복한 삶도, 평화로운 날도. 원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너는….”

그래도 괜찮다. 조금이라도, 잠시만이라도, 너와 그날을 함께 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자신은 되었다.

“내가 지켜.”

그러니 어떻게든, 자신에게 온 귀한 사랑을, 삶을 지킬 생각이었다. 유리는 작게 숨을 뱉고, 세드릭에게


마지막으로 키스했다. 그가 느꼈던 찰나의 행복만큼이나 달콤했다.

유리가 세드릭을 바깥에 두고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라스콜니코프 대령이 1 인용 소파에


앉아서 태연하게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군복만 아니었더라면, 어디 평범한 가정집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유했다. 하지만 그 정도 눈속임에 속을 정도로 유리는 멍청하지
않았다. 희미한 인기척이 2 층에서 나는 것을 보아 아마 요원들이 뒤적거리고 있는 게 뻔했다.
“…사냥감이 달아나면 쫓아갈 게 아니라, 다리를 부서뜨려야지.”

대령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치고는 수지 타산 없게 멀리도 온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유리는 그랬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없이. 유리는 손에 들고 있는 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유리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아직인가.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야 해.’

더 이상 다가올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문 앞에 서 있는 유리를 두고, 대령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그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을 덤덤하게 흘리며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 있는 유리에게 눈을 맞췄다.

“곧 죽을 사람에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어느 정도야지.”

“….”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국도 요즘 들썩이는 것 같으니, 어서 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예.”

“요즘 망설이는 게 잦구나. 돌아가면, 블라디미르가 권유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로….”

대령은 혀를 차면서 접은 신문을 테이블 한구석에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요 이틀


사이에 베를린의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예를 들면, 영국 쪽
가드들이 평소와 다르게 움직인다는 소식이라든지. 그는 벗어둔 가죽 장갑을 다시 끼고, 짙은 카키색의
코트의 매무새를 챙겼다. 대령의 의구심 섞인 말은, 유리의 손에서 나온 굉음과 함께 이어지지 못했다.

탕!

탕, 탕탕….

한 번이 어려웠지, 곧이어서 쉴 새 없이 총알이 빠르게 몸의 급소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대령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정확하게 맞췄다. 연이은 총탄 소리로 유리의 귀가 먹먹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컥, 커헉… 대체….”

믿기지 않는 듯, 붉은 피를 꿀럭꿀럭 뱉다 말고 대령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2 층에서 다급한


발걸음이 천장을 두들겼다. 예상치 못한 격발로 인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유리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안녕히.”

유리는 황망한 자신을 바라보는 대령에게, 아버지에게 다시 총구를 겨눴다. 이 모든 것을 시작했던


사람도, 끝맺어야 하는 사람도 유리 자신이었다. 마음도, 사람도, 삶도. 이래서, 책임을 질 것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예상할 수 없고, 조절할 수 없는 것 따위는 시작을 말았어야 했는데.

탕!

강인한 몸이 천둥 같은 소리 하나에 힘 하나 쓰지 못하고 마른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계단을


내려오는 인영이 그 장면을 발견한 듯,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유리?”

“…게오르그.”

금방이라도 유리를 쏠 것처럼 겨누었던 총구가, 당황스러운 어투와 함께 살짝 허물어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눈도 감지 못한 라스콜니코프 대령이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며, 그가 유리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떨리는 동공과 목소리가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왜 데려온
녀석이 하필 게오르그인가. 그래도 나름 팀원 중에서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고. 블라디미르 같은 녀석이면
아무런 마음 없이 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대령님을….”
“…미안.”

탕, 탕!

연발되는 소음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눈에 빛이 꺼졌다. 커다란 몸이 계단참을 볼품없게 쿠당탕 구르는
것을 보면서 유리는 마른 입을 혀로 적셨다. 누가 더 있는 건가. 그는 얼른 2 층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대령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요원 두셋 정도는 데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는지, 유리가 몸을 숨기고 있는 벽 너머로 앙칼진 목소리가 고성을 질렀다.

“너, 미쳤어? 지금 누굴 향해서 총을 쏘는 거야?”

예카테리나 특유의 쟁쟁한 목소리에 유리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어도 이다음에 죽일 사람은


죄책감이 아깝지 않을 사람이었다.

‘물론 저쪽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리는 잽싸게 벽 너머로 나머지 총탄을 날렸고, 방어 사격이 날아드는 것을 피해서 발목에 숨겨둔 탄창을
갈아 끼웠다. 빈 탄창이 발치에 떨어지고, 착, 하고 들어맞는 새로운 탄창을 확인하자마자 사격이 멎은
예카테리나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대한 빨리 처치해야 했다. 그녀도 탄창을 갈아 끼우는 동안에
달려드는 유리의 모습에 손이 헛돌아 총을 놓쳤다. 그 상황을 유리는 놓치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창문 몇 개가 빗나간 총알을 맞고 와장창 깨져 들었다. 동시에 검은 핏자국이 바닥에 좌르르, 퍼져
들었다.

“윽! 이, 미친….”

그러나 성질이 워낙에 독한 여자라, 총을 맞고서도 유리의 멱살을 잡고 덤벼들었다. 결국 같이 바닥을


구르며 총알을 더 소모하고 나서야 난투가 끝났다. 덕분에 피범벅이 다 된 유리가 벽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유리는 저무는 노을이 창문가에서 스며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됐다. 이제, 그를
위협할 사람은 없다. 비릿한 혈향이 습한 땀방울에 섞여 들어가며 후각을 자극했다. 더불어 매캐한 화약
냄새도.

“….”

모든 게 끝이었다.

아까 누리던 평범하던 일상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참, 어울리지 않았다. 동료와 상관이자
아버지를 쏘고 그들의 피 위에 있는 그가. 숨을 재차 몰아쉬면서, 그가 몸을 일으키자, 급하게 2 층
쪽으로 올라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누가, 더 있었던 건가. 유리는 느슨하게 두었던 총신을 다시 바로
쥐고 기대고 있던 벽에다 몸을 바짝 대었다.

“다니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낯선 침입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유리가 살짝 미소를 짓다 말고 이내 표정을 굳혔다.


혹시라도 위험한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기우도 잠시였다. 세드릭을 따라서 뒤이어 들어오는 중년의
사내와 빨간 군복차림의 무리에 유리는 안심했다.

적군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연합국 소속의 영국 로열 가드의 모습에 안심이 되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가 동료들의 죽음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기다렸던 사람들이 드디어 왔다. 세드릭의 아버지,
프림로즈 백작은 유리에게 달려드는 세드릭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 저 사람은….”

“안다. 진정 좀 하거라. 누가 좀 이 녀석을 붙들고 있게.”


“예.”

“…아버지?”

프림로즈 백작은 근처에 서 있던 로열 가드 하나를 불러 세드릭이 돌발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아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래봤자,
이미 문제가 될 돌발행동을 하고도 남았지만. 제법 격렬한 상황을 겪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붉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유리를 보고서 백작은 굳은 낯으로 말을 건넸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보시다시피.”

유리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로열 가드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두 손을 들어서 펼쳐 보였다.


툭, 하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총신을 보던 프림로즈 백작은 지끈대는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이건 휴전 조약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하사.”

“…아버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난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다니엘?”

세드릭의 당황한 목소리에 프림로즈 백작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선량한 사람을 꾀어 납치하여 도청하고, 조종하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상의


자세한 진술은, 국제 연합 재판소에서 듣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포박하게.”
어차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패턴의 구속령에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박하기 위해
달려드는 로열 가드들에게 순순히 붙잡히고, 백작의 말에 대해서 전혀 부정하지 않는 유리의 태도에
세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말도 안 돼.”

아까만 해도,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던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언제나 그런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포박당해 끌려가며 자신의 옆을 지나쳐가는 유리를 향해 세드릭이 외쳤다.

“거짓, 말이죠? 당신이 그럴 리 없어. 아버지, 무슨 착오가 있는….”

애처롭게 유리의 무고함을 외치는 세드릭에게 프림로즈 백작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참, 어찌해야 할지.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차라리 그냥 러시아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름 아닌 러시아 대사관의 정보부 소속 첩보 요원이라니. 그것도 자신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따라붙은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백작이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무표정한 유리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대신 대답했다.

“멍청하긴.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백작은 아들을 얼간이로 키웠나 봅니다.”


유리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시선을 바닥 쪽으로 떨어뜨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그 둘이
진심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세드릭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얼마나 무지하면, 뻔한 유혹에 정신을 못 차리고. 저런 얼간이가 영국의 귀족이라니. 영국의 앞날이 볼
만합니다.”

“…뭐라고요?”

“…이런 것까지 말로 해줘야 알아듣는 건가. 멍청하긴.”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핏줄기와 먼지로 더럽혀진 바닥을 떨면서 짚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세드릭의 목소리로 유리의 마음이 지끈, 통증을 겪었다. 원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충분히
생각했었는데.

“평생에, 고위 인사를 접대하며 살아온 내게 이런 순진한 도련님은 일도 아니었죠. 그래요, 예를 들면


당신 같은 사람이면 모를까.”

유리의 뻔한 눈길에 옆에서 그를 포박하고 있던 로열 가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드가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하는 것을 두고 세드릭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외쳤다.

“…거짓말. 나를,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순진해서야, 놀리는 맛도 없군요. 여기서 그만하죠.”

“….”

“안 갑니까.”

조롱이 가득 담긴 유리의 목소리에 결국 세드릭의 입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서


문을 향했고, 프림로즈 백작은 고갯짓으로 명령했다.
“…끌어내도록.”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벌건 노을빛이 하루의 끝을 알렸다. 유리는 강제로 이끄는 가드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별장을 나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는, 그저….

‘잘, 살아 있기를.’

마음에 둔 사랑을,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명령을 어기고 아군을 사살한 죄로 본국으로 송환 당해서 즉결 처분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유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세드릭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주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chapter 27

* * *

녹음이 짙게 깔린 숲길 가운데에 위치한 고택은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감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자라온 푸릇한 이끼가 낀 돌 담벼락 사이로 다급한 발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벳시. 그 촛대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라고 했지. 정신을 대체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에반스 부인.”

“줄리? 잠시만. 그건 손님방에 들어갈 침구인데 왜 고용인 별관으로 가는 거지?”

“어… 깜빡했어요.”
“정신들 차려! 평소와 같이해선 절대로 안 돼.”

프림로즈 가에서 대대로 수석 하녀장을 맡아온 코델리아 에반스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서 저택의 중앙
홀을 사나운 기세로 돌아다녔다. 그녀의 곁으로 지나다니는 고용인들의 실수를 가감 없이 지적하면서 어디
하나라도 흠이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확실히 평소답지 않았다.

지금은 두 명의 건장한 자녀를 길러낸 지긋한 나이인 그녀는 다른 귀족 저택의 하녀장들에 비하면 꽤나
넉넉하고 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고용인들은 입 모아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는 풍성하게 드리워진 치맛자락을 붙잡고 평소와 다르게 잰걸음으로 저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니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신 주인께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게 생겼어. 세상에나.”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닌, 프림로즈 가의 어린 백작이 이 유서 깊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첫인상이 대부분의 이미지를 장식한다는 세간의 말처럼, 그녀는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러다 흠이라도 잡혀서 대대로 물려받은 하녀장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면 그것보다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기에 더 그러했다. 은 식기와 촛대 따위를 평소보다 윤이 나게 손질하는 것을 하나하나 관찰하던 에반스
부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옆에서 은 식기를 손질하던 집사장 로렌스가 위로했다.

“주인님은 저녁 늦게 도착하신다고 전보가 왔으니 좀 여유를 찾아도 좋을 텐데요.”

“오, 로렌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새로운 주인님이 어떠신 분인지를 모르니 영 불안해서야 말이죠.”

“그러고 보니 에반스 부인은… 새로운 주인님을 보신 적이 없으시겠군요.”

“그땐 어머니가 있으셨으니까요. 뭐, 멀찍이 본 적은 있지만 그게 다예요.”

에반스 부인은 자신의 어머니가 예전에 모셨다는 어린 주인의 귀환 소식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귀족이란 종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약한 성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겉으로는 젠체를 해도
안에서는 성질을 부리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프림로즈 가의 전 가주는 명예를 알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감사하며 오랜 기간을 일하다 못해 대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중간한 곳에 가서 고생하며 일하느니 나름대로 원활한 성격의 주인 밑에서 편하게 일하는 게 낫다는 걸
모두들 알기 때문이었다. 로렌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인님을 어린 시절부터 봤지만 전혀 걱정할 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집안사람들에겐 너그럽고 친절하신 분이니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참 위로가 되는 말이군요. 그렇지만 그것도 벌써 몇 년 전 이야기 아닌가요. 어린 주인님도


케임브리지에 가신 이후로는 저택으로 돌아온 날이 굉장히 드물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고 평소 성격이 어디 가곤 했겠습니까.”

에반스 부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로렌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사실 그 말도 맞았다. 세드릭이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니다 이튼을 졸업한 이후로 케임브리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여름이 되면
동기들과 함께 그랜드 투어를 다니느라 가끔 옷가지를 전해달라는 전보를 빼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본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근 8 년을 넘었다. 취향이 하나쯤은 바뀌어도 다르지 않을 시간이었다. 로렌스는 아직도


안절부절못하는 에반스 부인과 그녀의 눈치를 보는 하녀들의 애절한 신호를 위해 말을 꺼내다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로렌스, 어린 주인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죠?”

“그분은… 그러고 보니 에반스 부인.”

“너무 화려한 정찬으로 꾸미면 낭비 같다고 싫어하실까요? 사실 상인에게 미리 말해서 최대한 다양한
재료를 준비해 뒀는데….”

“부인, 진정해요. 새로운 주인님은 그렇게 까다로운 분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면 그만두세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잠시만, 지금


뭐라고 말하셨죠? 다만이라뇨?”

겉치레로 하는 말로 오해를 단단히 한 에반스 부인의 말에 로렌스는 하마터면 나올 뻔한 한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는 은 식기를 윤이 나도록 닦아내던 부드러운 천을 내려놓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다행히도 성난 에반스 부인의 귀에 집사장의 망설임이 전해졌는지 빠르게 추궁했다. 로렌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다시금 그녀를 진정시켰다.

“부인, 새로운 주인님이 이튼 졸업 전에 서독에서 사셨다는 건 아십니까?”


“이튼 졸업 전이라면… 아!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주인님의 발령을 따라서 베를린에서 잠시 사셨다고
하셨죠? 그건 어머니에게 전해서 들었어요.”

“다행이군요. 에반스 부인, 그래서 말인데 주인님 앞에서 그 시기와 관련된 대화는 꺼내지 마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어머님이 말씀해주지 않으시던가요?”

“글쎄요. 오래전 일이라… 아, 건강이 좀 나빠져서 돌아왔다고 들은 적은 있어요. 무슨 일이길래


그러세요?”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에반스 부인의 눈빛에 로렌스는 결국 담아두었던 한숨을 풀어내고 말았다. 아무리
미성숙한 시절의 사건이라지만 대영제국의 귀족이 반대 진영 쪽 사람과 추문으로 엮였다는 일 자체가
굉장한 모욕이자 추문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바르샤바 진영 인사들도 사건을 수습하는데 애를 쓴 덕분에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돌아가신 주인 어른에게서 드물게 보던 격노와 묵묵히 그 분노를 받아내던 어린 도련님의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로렌스는 회상했다. 헛기침을 두어 번 뱉은 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랫것들이 얘기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하찮은 소문 따위를 저도 믿진 않아요, 로렌스. 아무리 추남이니, 괴팍한 사람이니 세간에서
떠든다고 한들 제가 평생 모셔야 할 분이니까요. 그리고 분명 제 기억으로는 주인님이 도련님이실 적,
분명 늠름하고, 멋있으셨는데 대체 추남이라는 소리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원래 소문이라는 건 믿을 수 없기 마련이죠. 무튼, 에반스 부인. 혹여라도 실수로 그 시절에 대해서
주인님에게 물어보거나 언급하는 건 삼가해 주세요.”

“물론이죠.”

확실히 ‘그날’ 이후로 ‘서독’, ‘베를린’과 같은 단어는 저택에서 언급되는 일이 드물었고, 프림로즈
가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드릭은 이튼 스쿨로 돌아갔다. 그렇게 8 년이 지났다. 그가
모시던 주인 부부는 유행병에 걸려서 2 년 전에 자연으로 돌아갔고, 그가 모시던 도련님은 어린 백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기숙사가 마치 집인 것처럼 사교계에 얼굴을 통 비치지 않는 독특한 성격 덕분에 뜬


소문만 생겼다.

추남이라서 사교계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부터 시작해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취향 탓에 남자


기숙사에서 사는 것이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벙어리라서 귀족들 특유의 미끄러지는 듯한 화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둥.
로렌스의 어린 주인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코웃음도 나오지 않을 소문이 무성했다. 이는 로렌스의 어린
주인, 세드릭이 세간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인물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미혼의 젊은 귀족, 그것도
한미한 지역도 아닌 잉글랜드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비옥한 지대의 주인이라는 점은 여러 귀족가들의
흥미와 구미를 이끌었다.

추남이어도 좋고, 괴팍한 사람이어도 그저 좋다며 대필한 게 틀림없는 연서나 약혼 이야기가 저택으로
심심찮게 들어오곤 했다. 주인 없는 저택에 날아온 연서의 양도 꽤나 됐는데 주인이 거주하는 기숙사로는
대체 얼마나 날라왔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로렌스는 가물대는 도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어린 주인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 * *

시베리아의 혹한은 어디에도 비할 곳 없는 추위라고, 블라디미르는 늘 생각했다. 자주 오는 곳이


아니었기에 그것도 가끔씩 방문하는 날만 빼면 평소에 느낄 수 있는 추위는 아니었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생각날 법한 뼛속까지 시린 추위라며 속으로 투덜대다 어스름한 동이 터오는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봄이 완연한 시기에도 시베리아의 풍경은 변함없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동이 터오는 순간에도 한 줌의 빛줄기만 겨우 내보일 뿐이다.

우중충한 계절의 전나무 숲이 빛이 바랜 채로 빠르게 지나치는 걸 뒷좌석에 앉아서 구경하던 블라디미르가


보조석에 앉은 비서를 재촉했다. 횡단 열차를 타고서도 다시 좁은 공간 내에 갇혀 있던 게 제법 좀이
쑤셨다. 정신이 깨어 있는 동안 파이프를 물지 못한 입가가 떨려오는 것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겨우
진정을 하는 게 다였다.

“아직도 멀었나?”

“10 분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죄송합니다. 날이 따뜻해진 이후로 도로가 녹아서 상태가 엉망인지라
….”

비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용차가 덜컹, 덜컹하고 흔들리며 멈췄다. 진흙이 녹아 빠진 도로를 몇
시간씩 쉼 없이 달리던 게 결국 탈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군용차 곳곳에 더덕더덕 말라붙은 진흙처리와
함께 보닛 부분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엔진도 수리할 겸 쉬기로 했다.

숨이라도 돌릴 겸 수리하던 군용차 부근에서 서성이던 블라디미르는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켰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향긋한 향기에 찌푸려진 미간이 사르르 풀렸다. 막 불이 붙은 파이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비서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됐다. 주변이나 좀 걷다가 올 테니 그사이에 끝내.”

“예!”

주먹질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듯, 고장이 난 군용차로 돌아가는 비서의 얼굴이 한층 밝았다.


블라디미르가 파이프에서 입을 땔 때마다 황량한 풍경에 회색빛을 더했다. 평소의 그라면 휴가를
다녀오듯이 여유롭게 세월아 네월아 몇 날 며칠에 걸려서 다녀왔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위치한 지루한 중앙정보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니다. 질퍽하게 변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길에 요란한 모터 소리가 설핏설핏 들려왔다. 목표하던 곳이 멀지 않았다는 비서의 말이 허튼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두어 번 정도 파이프의 연기를 마시며 작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빽빽한 숲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도 들려왔다. 주로 목재 따위를 어디로 옮기고, 톱질을 좆같이 한다는 것 따위의 욕설이 주
내용이었다. 손질이 되지 않은 지 한참 되어 보이는 덥수룩한 머리의 산적 같은 사내가 낡은 옷차림의
사내에게 혀를 찼다.

“벙어리, 그쪽 나무는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내 참.”

“….”

“이쪽 나무를 손질해야지. 원, 저리 말라서 어디 한 대 쥐어 팰 수도 없고.”

“글만 읽던 곱상한 샌님이 뭘 알겠습니까.”

“…큭.”

갑갑한 숨이나 돌릴 겸, 그 악명높은 정치범 전용 수용소에 낯익은 얼굴이라도 있으면 안부나 전해줄 겸
들렀던 것이 이 급한 여행의 원인을 찾을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한 대 쥐어박고 싶다니. 저 말라깽이와 같이 생활하던 부대원들이 지금의 이 상황을 보았더라면


폭소했을 게 틀림없었다. 이름난 특수 부대원 중 한 명을 한 대 치지도 못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다니.
그랬다가는 사경을 헤매는 건 저 산적 같은 사내일 텐데.

수용소에선 이름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글만 읽다 온 샌님으로 오해를 받는 모양이었다. 그는


작업장 무리에서 멀찍이 서서 예전의 동료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형님, 참으세요. 벙어리 녀석이야 원래 말귀 못 알아듣는 게 하루 이틀인가요. 이 녀석아, 정신 좀
차리고 작업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

무지한 이들 가운데서 가만히 타박을 받고 있는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정돈되어 있던 밝은 금발의 머리는 먼지 구덩이에 구른 듯 칙칙했고 아무렇게나 자라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저러고 앞이 보이기는 할까.

허름한 옷차림 사이로 보이는 몸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좀 더 말라보였다. 다른 곳도 아닌 정치범


수용소는 죽이지만 못할 뿐 불의의 병이나 사고로 죽기를 바라는 곳이나 마찬가지이니 끼니를 제때 맞춰서
넉넉하게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저런 상태인 게 놀랍지도 않다. 빈민원에서나 볼 법한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군복만 입은 모습만 보다가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또 묘한 구석을 건드는 맛이
있었다.

옛날의 명성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시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저 모양새에 넘어간
정치 인사들이 몇이던가, 그 밑의 잔챙이들은 목숨을 달리했으니 그런 일을 만들어도 죽이지도 못하고
겨우 살려둘 만하다. 어찌 됐든 사람이란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기 때문이다.

오늘, 그가 급하게 새벽을 가로지르는 횡단 열차를 타고 이 오지까지 친히 발걸음을 한 이유도 그러했다.

“이봐, 벙어리! 어디 가는 거야? 아직 휴식시간은 멀었다고.”

“….”

“내비 두십쇼. 어차피 큰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이니 저희끼리 오늘 작업량을 빨리 끝내 놓는 게


낫지요.”

“허 참. 어디 출신이길래 손에 물 하나 안 묻혀본 티를 내는지 모르겠어.”

“우리나 되니까 저 녀석을 감당하고 있는 거지요.”

“뭐, 사실 저 녀석 몫의 할당량은 별로 없으니 감당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갑자기 등 돌려서 작업장을 떠나는 유리를 두고 작업장 동료들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원체 말도 없고
제멋대로인 녀석인 건 알지만, 가끔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한 녀석이라 말을 해도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는 건 알았지만 도통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 벙어리였다.
“자자, 저녁 시간 넘어서 일하기 싫으면 얼른 일하자고.”

“요즘은 날이 따뜻해져서 저녁에 일하기가 겁이 난다니까요. 어제도 옆 조 녀석이 일하다가 늑대에게


물렸다지 뭡니까. 당분간은 벙어리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입니다.”

그저 화장실이 급했나 보다, 짐작할 뿐. 작업장의 골칫덩어리, 벙어리 샌님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장은 손을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 * *

잘려나간 나무 둥치에 털썩 앉은 블라디미르의 앞으로 발걸음이 멎었다. 블라디미르는 괴인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여유롭게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솔솔 올라오는 탄내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지.”

“뭐야, 벙어리라고 해서 목소리라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

“현역도 아닌데 찾아오는 솜씨가 아주 좋아? 왜 너를 못 죽이고 이렇게라도 살려두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군. 이러면 굳이 설명할 것도 없겠어.”

8 년이면 아무리 훈련된 용병이라고 해도 그동안 쌓아 온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멀찍이 있던 자신을 알아차리고 바로 찾아올 정도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투입되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런 일은 시작이 빠를수록 좋았다. 다만 블라디미르의 말을 다르게 알아들은
것인지 유리의 대답은 갈렸다.
“그래서 이젠 살려두지 않아도 될 이유가 만들어진 모양이지.”

“당장이라도 죽었으면 해? 그거야, 어렵지 않지.”

방아쇠를 장전하는 소리가 공허한 숲속을 울렸다. 장교들에게 나오는 베레타의 권총음을 들은 지가 벌써
몇 년 만인지.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금속의 감촉이 유독 서늘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머리카락 속 유리의 눈빛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함부로 죽이기 어려운 정치범들을 모아둔 수용소지만,
그렇다고 정치범들이 계속 살아 있는 건 아니다.

가장 필요 없는 사람부터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그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폐기 처분의 날이 오늘이었던 건가. 집행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죽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은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다. 오히려 8 년 동안이나 살려 둔 것이 제법 신기할
따름이었다.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서 마지막을 기다리는 유리의 귓가로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쳤다. 탕, 하고 울리는


소리에 몇 초간 고막이 불에 덴 것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죽을 때 이런 느낌인가, 유리가 속으로 곱씹을
때 그나마 멀쩡한 반대편 귓가에 딱딱한 명령이 내려왔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중앙정보부로 복귀한 것을 축하하네.”

“…뭐?”

“지겨운 생활을 끝낸 소감은 나중에 듣기로 하지.”

마지막을 예상하며 감았던 눈이 번쩍 떠지는 명령이었다. 귀 옆에서 바로 총을 쏜 덕분에 먹먹한 고막이


돌아올 때쯤, 낑낑대는 신음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야생 늑대의 머리통이 반쯤 박살 나서
죽어가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쏘지 않았더라면 유리를 공격했을 법했다. 지끈대는 귀를 문지르던 유리가 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고서 여유로운 손짓으로 돌려대는 블라디미르에게 쏘아붙였다.

“모스크바엔 아직도 인원 충당이 안 된 모양이지.”

“아무래도. 네가 죽여놓은 인재가 우리 정예의 반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복귀시킨다고? 겨우 키워낸 정보부가 무너지는 꼴을 봐야겠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귀여운 협박에 블라디미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이 말을 듣고도 저렇게 나올까.

“프림로즈 백작이 이제야 공부가 끝나셨는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상원 의원으로 가다 못해 여왕의


곁에서 아주 든든한 오른팔이 되었다고 하던데. 들었나?”

“….”

“아, 여긴 좀 멀리 떨어진 곳이라 소식이 느려서 모르겠군.”

“그걸, 왜….”

“곧 연합국의 영국 쪽 대표로 나설 것 같던데, 안타깝게도 접점이 많이 없는 인물이라….”

블라디미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리에게 슬며시 웃었다. 8 년이 지나도 놈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동요하는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우리가 가진 접점은 네가 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 심지라도 불태워야지 않겠어.”

#chapter 28

* * *

어찌 된 일인지, 모스크바를 떠날 때 보다 돌아가는 열차가 더 오래 걸리는 듯했다. 덜컹, 덜컹대는 열차


칸 안에 앉아서 깜깜한 벌판을 바라보는 유리의 머릿속은 제법 번잡했다.

프림로즈 백작.

잊자, 잊어야 한다고 그렇게 되뇌던 사람이다. 하지만 어쩌면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둔 사람은 잊고 싶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었다. 열차 칸에 탑승할 때부터 유리의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블라디미르는 영 입맛이 썼다.
이전에 한 달에도 몇 번씩 찾아와 정보부 복귀 명령을 내렸지만 유리는 거절했다. 그 전의 죗값을
내려두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씩 주어도 번번이 거절하는 게 괘씸하여 한 번은
반년간 찾아오지 않고서 내버려 둔 적도 있었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내뒀어. 재료만 가지고서 바로 투입하면 돼.”

“장소는?”

편의를 봐주던 시베리아의 작업장 시설이나 인물 따위도 다 거두어들였다. 말이 좋아 작업장이지, 정치범


수용소라는 것들이 워낙에 열악한 시설이기에 그 반년 안에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중앙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적을 그렇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죽기를 원했다.

하지만 유리는 조용히, 끈질기게 살아 있었다. 블라디미르, 자신의 마음도 그런 것처럼.

“런던.”

결국 뿌리 뽑을 수 없는 마음이 신경 쓰여 또다시 이렇게 찾아왔다. 동요하다 못해 언제나 거절당하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유리의 모습을 무어라 할 것도 없었다. 블라디미르 자신도 결국은 배신자나
다름없는 이 녀석이 어떠한 일로도 살아가기를 바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청탁을 했고 잠시의 여흥으로 지나치게 될 중앙정보부에 남았다. 그


대가로 사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유리의 목숨을 건졌으니 사실상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정보부의 업무는 지루한 일투성이라는 게 조금 아쉬울 뿐.

“하인? 청소부? 어떤 식으로 준비… 왜 웃지?”

“아니. 그냥….”

아, 웃었던가. 유리의 일갈에 블라디미르는 급하게 웃음을 갈무리했다. 원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사람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라 정보부 업무를 유독 잘 처리한다고 평이 높았다. 그의 비서가 이 자리에서
봤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오랜만에 비죽 나온 웃음은 별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체념한 듯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눈을
하던 유리가 다시 예전의 시린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묘한 만족감을 피워 올렸다.

이 눈빛을 언제나 좋아했지.

“그런 하찮은 직업으로 준비했을 거라 생각한 게 우스워서.”

“…보통은 그런 직업으로 준비를 하지 않나.”

“모처럼의 복귀인데 핸디캡 정도는 줄 생각이라.”

“필요 없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거 하나 보겠다고 그렇게 애를 쓰던 게, 알량한 그 귀족 놈 이름 하나로 가능했다니. 조금은 부당하지


않은가. 정작 목숨을 살려준 자신은 지금도 뒷전이었다. 굳이 자신이 유리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알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괜한 심술보가 마음속에서 들췄다. 블라디미르는 스스로가
성질이 많이 죽었다며 조소했다. 예전이라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냥 끌어가고도 남았겠지.

“만에 하나의 안전을 기하는 거지. 어떻게 모신 귀한 몸인데.”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봤자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도, 유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영국 귀족 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죽어도 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뭐,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까진 없잖아. 난 그래도 부대원을 최대한 챙기는 좋은 상사라고.”

“헛소리.”

사실은 이런 작전 따위는 다른 사람을 써도 되었다. 아무리 유리가 정예 부대의 반을 죽이고 갔어도 10


년간 키워낸 인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프림로즈 백작이 그때와 같은 취향이라는 전제하에
유리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부대원을 투입하면 될 일이다.
오히려 그게 잘 먹힐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훈련받은 부원에게는 그 귀족 놈에게 사사로운 감정보다 저
자신의 안위와 인질과 다름없는 가족들의 목숨이 중요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유리를 굳이 투입시키는
이 도박 같은 일을 추진한 이유는 단 하나의 목적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됐다.

“내 비서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비서?”

“이틀 후에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할 테니 춤 연습이라도 좀 하고. 그동안 숲속에서
사느라 실력이 좀 녹슬었을 테니까.”

평생에 기억할 사람을 없애면 됐다. 물론 아직도 마음이 남아 있는 반응을 보아하니 성공률이 높아 보이진
않지만, 유리만 단독으로 투입시키는 일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제 눈앞에서 죽어야 정신이라도 차릴까
싶은 마음으로 걸어보는 도박이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도 없는 놈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삼을 이유가 있나.

“내가 왜 네놈 비서로….”

“유리 라스콜니코프.”

차라리 하인으로 가겠다는 어투에 블라디미르는 팔짱을 끼고서 으름장을 놓았다. 좀 편하게 가라고 해도
언제나 저런 식이다. 굳이 좋은 길을 놔두고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뻔하지. 나 같은 놈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는데, 좀 의지해줬으면 하는 건 블라디미르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 귀족 말고도 자신
또한 유리의 저 시린 눈빛이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게 선택지가 있을 거라 생각해? 아무리 우리가 전에 동료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상사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작전의 목적은?”

“글쎄….”
블라디미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작전이 정해졌다며 유리를 이끌었지만 정작 지금은 이 작전의 목적을
말하지 못했다.

“사살, 해야겠지.”

당연한 소리였다. 그 정도의 인물은 책략 적으로 이용할 인사가 되기도 어렵다. 그들이 굳이 회유를 하지
않아도 기존의 세력에서 입지가 이미 다져진 인물이기에 끄나풀이 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위협적인 인사라는 건 분명했다. 따라서 죽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목적을 들은 유리의
낯이 미미하게 굳어갔다. 이전에는 사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도 별다른 반응도 없던 녀석이 많이 물러졌다.

“…주요 인물을 공개 석상에서 사살하면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을 사살해야 파장을 만드는 거란 생각은 안 해? 영국의 새로운 기둥이자 연합국의 주축


인사다. 그 정도는 해줘야 겁을 좀 먹겠지.”

“하지만….”

복귀를 명령했을 때 보다 더욱 동요하는 유리의 반응에 블라디미르의 입꼬리가 사르륵 올라갔다. 10 년간


기다린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보상이 필요하지 않겠나. 유리가 엮인 영국의 알량한 귀족 놈이야 워낙에
블라디미르 자신과 빗댈 정도의 배경을 가진 녀석이니 기다리기만 한다면 연합국의 주축 인사로 나올 것은
알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왜 그러나 유리 라스콜니코프 하사.”

“….”

“자신이 없나?”

그때를 기다리는 긴 시간이 조금 지루했을 뿐.


“…아닙니다.”

진정한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실례합니다, 의원님.”

똑똑, 이른 새벽 아침부터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손짓이 제법 조심스러웠다.

“들어와요.”

흔쾌한 입장 허가에 비서는 들고 있던 간단한 아침 식사와 아침 보고 서류와 각종 신문 따위를 챙겨서


조심스럽게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에 앉아 있던 세드릭의 모습은 편하게 풀어헤친 셔츠차림으로 만년필을
서류 위에 놀리고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포마드가 풀려 있지 않은 짙은 색의 머리가 묘하게 야성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묘한 매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스쳐 가는 감상을 접고서 비서는 설명했다.

“오늘 자 조간 신문사 모음과 부탁하신 다음 주에 있을 수정궁 연회 참가자 목록입니다.”

“아, 그렇지. 수고했어요.”

세드릭은 서재 책상 앞쪽에 쌓인 조간신문을 자신의 왼편에 다시 놓고 비서가 건넨 ‘수정궁 연회 참여


인사 목록’이라고 적힌 서류 파일을 잡아서 훑었다. 10 년 만에 돌아온 평화 회담을 갱신하는 참에
준비한 연회인지라 모두의 촉각이 곤두서 있는 이벤트였다.

그런 이벤트에 누가 오는지, 어디 사람이 오는지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세드릭 그 또한 그들에게


접근해서 협상을 이끌어내는 중요 인사였기에 미리미리 그 사람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세드릭이 참여
인사를 훑고 있는 동안 비서는 가만히 서재 책상 앞에 서서 세드릭의 오늘 자 일정을 줄줄이 읊었다.

“오전에는 당원분들과 조찬모임이, 티타임 이후로는 주별 의회 모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

연합국의 목록을 비롯하여 적진이나 다름없는 바르샤바 측의 인원도 적혀 있었다. 세드릭은 개중에 러시아
연방의 목록을 최대한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 협상의 주축은 러시아 쪽에서 발언권이 제일 셌기 때문에
그쪽 인사를 미리 파악해두어야 했다. 그렇게 죽 훑어보던 짙은 색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참고로 약혼녀 분이 함께 하시는 저녁 식사는 소호 쪽의 프렌치….”

“…잠시만.”

“…혹시 이탈리안을 더 좋아하셨습니까?”

“아니, 아니. 지금… 이 참여 인사 목록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비서가 건네준 서류를 읽다가 갑자기 일어서는 세드릭의 급한 모습에 비서는 크게 당황했다. 평소 딱히
어느 레스토랑을 선호하는 걸 드러내지 않는 세드릭을 알았기에 이런 갑작스러운 반응이 익숙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그런 비서의 예상과 다르게 세드릭은 다른 점을 추궁했다.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세드릭에게 비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설명했다.

“외교부 서기관에게 어제저녁에 최신으로 갱신된 참여 인사 목록을 받았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정확한 겁니까, 이 목록.”


“예…. 아마 추가될 인원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예에….”

“나가도 좋습니다.”

“예,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서류 한구석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세드릭은 비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세드릭의 눈치를


보던 비서가 나가자마자 세드릭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비서가 가져온 참여 인사의 목록을
다시 훑어본들 바뀌는 건 없었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러시아 연방 중앙정보부 소속 사무관

이름 옆으로 간략하게 적혀 있는 소속을 다시금 확인한 세드릭의 짙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세드릭이라고 유리의 행방을 찾지 않은 게 아니다.

강제로 귀국한 그 날부터 몰래,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유리의 신분 따위나 소속, 그리고 현재 어디에
있는 것까지 찾아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알려준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바다 건너 저 너머에서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다는 또 다른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분명 자신을 지독하게 속이고 이용한 사람인데,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아도 분이 풀릴까 싶을 정도의
분노가 문득문득 치미는데, 흐르는 세월 속에서 분노로 벼려진 마음은 깊어지다 못해 문드러졌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세월 속에 가려둔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겨우 가라앉히고, 가려두고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젠장.”

자신의 배경과 위치를 목적으로 속이고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당장이라도 그가 있다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으로 달려가 눈앞에 두고 추궁하고 싶었다. 정말 그게 목적이었냐고. 하지만 베를린에서
있던 일로 인해 보안국의 감시를 받는 처지인지라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대학
동기들과 그랜드 투어라는 거창한 명목 아래 러시아 연방 부근의 연합국 나라의 경계선을 맴돌다 올
뿐이었다. 그 생각을 다시 하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오래됐어.”

그땐 아직 어렸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에 주체하지 못하고 그저 목줄에 매인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젊었을 적의 어린 행동을 떠올리자니 차마 눈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은 서재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때의 풍경이 선연했다.

가끔은 그 경계선 너머로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의 변덕으로 시작했던 기다림이 계절을 달리할 때마다 찾아가는 장소가 됐다.

겨울에는 온 세상이 하얀 곳에서 그의 그림자를 기다렸고, 서늘한 여름 자락과 같은 그의 푸른 눈을


떠올렸다. 창백한 낯에 시퍼런 두 눈이 빛나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싶지만, 당시에는 그걸 제외하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무고한 가족들마저도 피해를 본다. 자신은
사교계 생활 따위에 큰 미련이 없다고 해도 가족들의 일은 별개였다. 어쩌면 좋은 핑계였다.

정리하기 어려운 마음에 그럴듯한 핑계를 덧대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겨우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몇 년 만에 그의 이름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자신을 뒤흔들고도
남아도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덮쳤다.

분명 지금은 예전과 다른데, 상황도, 위치도 모든 것은 다른데 마음도 다를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세드릭은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동이 터오는 새벽녘을 바라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찾아올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잘 파악해서 대비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름이 올라왔다고 해서 진짜 유리일지, 그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그리던 사람은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는 사람이고, 그의 이름만 빌려 쓴 그럴듯한 첩보 요원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간에 ‘유리’가 이번 연회에 참가하는 목적도 뚜렷하다. 이제껏 이 이름으로
특별한 움직임도 없다가 갑자기 들어오는 거면 뻔하다.

아마 이전에 자신과의 일로 인한 접점을 통해서 다시 자신을 이용하려 들고, 또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겠지.
너무 정직하다 못해 빤하게 패를 보여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 살짜리 꼬마가 와도 이런 작전을
짜지는 않는다. 그가 있는 서재의 창 너머로 동이 터오는 야트막한 빛줄기가 그의 두 눈을 꿰뚫었다.
몽롱하게 번져가는 시야 속에서 그의 마음도 다른 식으로 번져갔다.

“…한심하긴.”

뻔한 작전이 보이면서도 자신이 아직은 접근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서 배신을 당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뼈저리게 아픈 일인지 안다. 그처럼 아픈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한 번 당해본 마음이, 두 번째를 기대하게 되는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도저히 설명할
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드디어 미친 건가.”

그저 그리고 그리다 이제는 더 이상 고칠 수도 없는 감정이 어긋나다 못해 미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세드릭은 우선 이 명단의 진실 여부와 함께 유리와 동행하게 될
인물들에게 대한 조사를 할 겸 몸을 일으켰다. 막 서재를 나설 때쯤, 낭랑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세드릭!”

“…아델라인?”

“뭐예요, 놀랐어요?”

“아니, 아닙니다. 이런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죠?”

잔뜩 신경을 썼는지 고운 빛깔의 드레스 차림과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로 자신을 반기는 약혼녀의 존재에
놀라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이었다. 저녁 식사에나 만날 줄 알았던 인물을 갑작스럽게,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방까지 들여보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안 그래도 서재에는 민감한 정보가 오고 가는 일이 잦아서 사용인들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서성이는


일도 없게 하던 차다. 세드릭이 의회 일을 하느라 머무르는 런던의 타운하우스 관리를 맡고 있는 집사장은
멀끔한 양복 차림으로 복도 쪽에 서서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세드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약혼녀
아델라인은 동이 터오는 빛을 받고서 금발의 머리로 착각할 듯한 고운 갈색 머리를 귀 너머로 넘기며
해맑게 웃었다.

“세드릭, 우리 사이에 시간이 중요한가요? 왜 그래요.”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낮에도 보고 싶은걸요. 물론 곧 있으면 매일 같이 보겠지만…. 그래도요.”

아무리 약혼녀라고 해도 그런 점은 지켜주었으면 하는데, 고용인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두어도 어떻게 몇


번씩 출입문을 넘어서는 경우가 잦았다. 세드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일투성이인데
약혼녀란 존재는 도와주기는커녕 골칫거리를 새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찾아온 일을 전혀
반가워하지 않다 못해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세드릭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말로 무마해보려 애를 썼다.
“세드릭이 일하는 동안은 런던에도 자주 머무르는 만큼, 일하는 사람들과 얼굴이라도 알아갈 겸
방문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제가 안주인이 될 테니 미리 서로를 알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일하는 시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씩 말했던 거 같은데, 경고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일하기 전에 보러 온 건데, 그래도 불편한가요? 오, 미안해요. 전 당신에게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어쩔 줄 모르는 약혼녀 아델라인을 두고서 세드릭은 딱 잘라서 말했다. 냉정하다 못해 불쾌함이 역력했다.
약혼 상대라고 하기엔 한 점의 애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편합니다. 앞으로는….”

“…네, 미안해요.”

하지만 더욱이 꾸지람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밝은 갈색 머리가 햇볕에 비춰오고 우울한 듯
푸른 눈에 깊이를 더할 때면, 예전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말문이 턱, 막히곤 했다. 세드릭은 다시금
떠오르는 잔상을 떨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녁에 봅시다.”

“…잘, 다녀오세요.”

건조한 인사를 뒤로했지만 약혼녀의 목소리는 한창 밝아진 감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혼담을
뿌리치고 한미한 배경의 여식을 약혼녀로 앉혀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과 닮은 얼굴이었기에 그러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모스크바의 풍경은 어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특유의
경직된 회색빛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가게나, 건물 따위가 새로 있고, 없어지고 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전의 기억과는 딴판인 곳도 제법 있었다.

갓 도착해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기차의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인파가 많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이 아닌 이상에야 모스크바까지 직통으로 가는 열차를 탈 사람은 중앙과 관련된 군인들이
아니고서야 평범한 사람들이 이용할 일이 드물었다.

그들이 도착한 모스크바의 중앙역은 높은 돔 천장에 화려한 빛깔의 샹들리에가 수없이 줄지어 있어서
사치스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역 앞에 차를 준비했어.”

“쓸데없게.”

블라디미르가 쓸데없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알았지만 아직도 여전했다. 정보부 사람이면서 위세를


떠는 모습을 좋아하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표적이 되어 숙청당하기 좋을 법도 한데 용케 그런 일이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깔끔하게 빗어 올린 갈색빛 고수머리를 하고서 사람 좋은 얼굴로 유리의 툴툴대는 말을
느물느물하게 받아쳤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알맞은 대우를 해야 하지 않겠어.”

“…퍽이나.”

“나름 진심인데, 흠.”

귀하다는 단어가 언제부터 저한테 쓰이던 말이던가. 유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아직은 쓸만한
패다 이거겠지. 블라디미르가 준비한 군용차 덕분에 모스크바의 중심, 붉은 광장에 금방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광장이라는 장소의 이름과 다르게 붉은 광장의 주변은 각 잡힌 군복을 입은
보초병을 제외하면 공허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가운데로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거셌다. 유리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낡은 외투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시베리아 벌판으로 쫓겨난 이후로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했다.
“…여전하네.”

크렘린궁 근처를 감시하는 보초병들로 인해 삼엄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는 10 여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저


입구를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던 시절이 눈을 감아도 선했다. 아직도 저 안에 있는 중앙정보부의 구조가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붉은 광장의 끄트머리에 서서 예전의 향수를 떠올리는
듯, 멍하니 서 있는 유리를 보던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집요했다.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지?”

“…아무래도.”

“그래서, 돌아온 감상은?”

“…피곤해.”

“생각보단 간단하군.”

칠흑 같은 밤을 넘어 동이 터오는 새벽녘까지 쉴 새 없이 기차를 타고 온 덕에 피곤함이 앞섰다. 눈앞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유리가 거친 손짓으로 쓸어올리자 헝클어진 머리가 이전보다 반듯하게 올라붙었다.
덕분에 가려져 있던 유리의 미모가 한순간에 드러났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금발의 푸른 눈이 러시아만 해도 흔하다지만 얼굴마저 받쳐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낡은 옷차림으로도 가릴 수 없는 황홀한 미모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던
보초병들의 눈길이 슬쩍 동요하고, 움직였다. 빙글빙글 웃던 블라디미르의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사내놈들이란, 거기서 거기지.

“아직도 요원들 기숙사가 있나.”

“있기야 있지.”

피곤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예전 같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릴 비밀스러운 눈길을 모르는 듯했다.


“그럼 배정 하나 해줘. 당분간 작전 준비하는 동안 머무를 곳이….”

물론 블라디미르, 그 자신도 한 사람 앞에서는 한낱 사내에서 별다르지 않았다. 크렘린의 별관 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정보부를 가는 길목에 있는 정원을 지나치면서 군인 숙소를 달라는 유리의 말을 막았다.

“방이 없을 뿐이지.”

“…그새 요원들 숫자가 많이 늘어났나 본데.”

“물론. 백업은 틈틈이 길러둬야지. 예전처럼 반이 죽어났는데 당장에 작전이 있어도 투입할 수 있는
정예가 하나도 없으면 안 되잖아?”

“….”

참 그럴듯한 이유였다. 정원에 멈춰 서서 가만히 자신을 노려다 보는 시린 눈빛과 마주치자 아까 입구에서


보초병들의 시선으로 인한 불쾌감이 확 달아났다. 하찮은 놈들이 바라보는 건 좀 짜증 나지만 뭐, 어떤가.

“그래서?”

“내 소유로 된 별장에 방이 많이 남으니,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도록 해. 어차피 작전 회의도, 준비도


별장에서 다 할 테니까.”

블라디미르가 바라던 사람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정보부 사무실이 아니라?”

“중앙엔 입과 눈이 너무 많아. 영감들도 나이를 먹고 나니 군기들이 빠져서 잔소리도 많고.”


블라디미르는 귀찮다는 듯, 대충 중얼거렸다. 확실히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일은 요즘 중앙의 분위기를
보면 별로 내켜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대화로 풀어가자는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사살과 같은 격렬한
이벤트가 일어나는 순간 평화 회담이나 휴전 협정은 단숨에 휴짓조각으로 변할 게 뻔했다.

아무리 시베리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유리라고 해도 그런 점은 단숨에 읽혔다. 한 마디로 이건,


블라디미르의 독단적인 작전이라는 것. 그 점을 유리가 바로 지적했다.

“내가 중앙에 보고를 하면 어쩌려고 그러고 있지.”

“누가? 유리, 네가?”

“그들도 휴전이 이어지는 걸 원할 텐데. 귀찮은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아, 물론 그렇지. 보통의 영감들이라면 말이지.”

그는 팔짱을 끼고서 여유롭게 설명했다. 그는 유리가 이런 얘기를 꺼낼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준비라도 한 사람처럼 팔짱을 끼고서 여유롭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내 생각과 다른 영감만 중앙에 있는 건 아니라서.”

“그럼 누가 너와 함께 하는 거지.”

“군부.”

명료한 대답 속에는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중앙에서도 가장 세력이 좋은 군부가 블라디미르의 뒤에


있다는 것은 곧 그게 중앙의 뜻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행정부의 몇몇 부서 책임자들일
것이다. 권력은 있지만 곁다리 격의 부서이니 거의 반대하는 시늉에 가깝다. 그러니 블라디미르가,
정말로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 생각하는 거라면.

“우리도 좀, 춥고 이 언 땅 말고 저 비옥한 대륙 쪽으로 내려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나 싶은데


말이지.”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네 고향도 저 지중해 쪽에 있지 않아. 이참에 진정한 고향이 되면 더 자주 가겠군.”

“아마도.”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온 격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서로의 위치였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네 복귀를 보고하고 일 처리를 마무리하고 오지. 먼저 별장에 도착해 있도록 해. 이미 대충


살 수 있을 정도로 정리는 했어.”

블라디미르가 흐트러진 자신의 군복 차림을 고치면서 씩 웃었다. 남들이 보면 유쾌하다고 느낄 미소가,


유리에겐 그보다 위협적인 것도 없었다.

“산장에서 총연습이나 좀 해둬. 이왕 죽일 거.”

“….”

“단칼에 죽이는 게 편하잖아. 너도, 그놈도.”

두 번, 세 번씩 쏘면서 고통을 주는 것만큼 더한 고문도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라 일상 대화처럼 나오는


말도, 지금의 유리에겐 손끝이 차가워지다 못해 저릿해지는 말이었다.

“그럼, 난 이만.”
유리를 두고 돌아서는 블라디미르를 두고 유리가 급하게 붙잡았다. 절도 있는 자세로 걸어가려던
블라디미르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작전 말고도 궁금한 거라도 있나.”

“만약….”

블라디미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유리의 붉은 입술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마치 꺼림칙한 상황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표정이 영 편치 않았다.

“만약에, 그 상원 의원이 사살 작전 도중에 부상이라도 입고 살아남기라도 하면, 우리가 불리할 텐데.”

말로는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본의와 불안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블라디미르의 입꼬리가 일자로 경직된 채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살려두면 안 되는 거지.”

“그럴 바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살하라는 걸,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

블라디미르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싸늘한 표정만이 남았다. 그는 유리가 붙잡은 손을
털어내면서 딱딱한 어조로 유리를 나무랐다.

“그럴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시베리아로 돌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훈련된 요원이지 감정에 휘둘리는
반푼이가 아니니까.”
“…현장에서 뛰어다닌 기억도 아득한 반푼이를 부른 건 너야.”

“이런 상황에선, 뛰어다닐 필요가 없지. 넌 그저 알량한 귀족 녀석의 정신만 빼두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유리의 대꾸에 블라디미르는 가볍게 웃고 넘겼다. 그러면서도 세드릭에 대한 임무를 받고서 확연하게
태도가 달라진 유리를 향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목숨이 아깝다면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마. 내가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 네가 언제부터 내 목숨을 그렇게 챙겼다고….”

“유리 라스콜니코프, 네 목숨이 온전히 네 것이라 생각하나?”

“….”

블라디미르의 입가에 잔혹하고도 냉정한 비소가 감돌았다. 블라디미르의 차가운 일갈에 유리의 불그스레한
입술이 달싹이다 말고 하얀 잇새로 뭉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욱 색을 더하는
것을 보고 블라디미르의 진한 눈썹이 살짝 무너졌다. 사람의 흥미를 끄는 게 타고날 수 있다면.

“간신히 붙어 있는 그 목숨이 누가 살려줬는지, 이제는 좀 알아줬으면 하는데.”

“난…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이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게 틀림없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은 걸 뻔하게 알면서도 괜히 아랫배가 들끓는


구석이 있다. 유리의 손을 차갑게 쳐낸 블라디미르의 손이 결국 그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올라갔다.

“넌 여전하군. 분명 시간이 지났는데,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기가 짝이 없어.”

“…무슨.”

“그래, 내가 멋대로 너를 살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버지와 동료들을 배신하고 죽인 것에 대해 즉결 사형을 받아도 마땅찮았다.
아니, 오히려 살려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은 문 개는 죽여야 한다. 한 번 피 맛을 본
짐승은 다시는 이전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

다만 블라디미르는 유리의 손에 죽어간 놈들을 단 한 번도 동료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붙잡힌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 한다고.”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제껏 자신을 이렇게 흔드는 존재가 있었던가. 총과
칼이 날아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블라디미르였다. 바르샤바의 주축국 중 하나인 러시아의 정보부
수장에 가까운 자신을 흔드는 존재는 드물다 못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요동하게 만드는 모습에 입맛이 썼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짓이 있다면, 이런 지루한 삶에 평생을 저당 잡히면서도 네 목숨을 살려둔 거다.”

입가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 다르게 유독 뜨거운 온기를 가진 손길의 감촉을 쫓던 유리의 파란 눈이


블라디미르의 손끝을 타고 올라가다가 한층 어두워진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유리의 등골 사이로 오싹함이 퍼졌다. 원래부터, 자신에게 집착하는 성격인 건 어느 정도


알았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없는 시기의 마음 따윈 시간이 지나며
흔적도 없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무슨.”

하지만 착각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담긴 깊이가 헤아릴 수 없도록 진득하고도 끝이 없었다.
블라디미르의 집착의 강도가 세지면 세졌지, 결코 약해진 적이 없었다는 걸 지금 와서야 깨달았다. 유리
자신을 향해 짓는 블라디미르의 미소가 진하게 물들었다. 선연하게 보이는 집착적인 눈길을 유리는 애써
외면했다. 위험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에 아까운 네 인생을 낭비했군.”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리고 세드릭의 소식을 듣고 너무, 성급하게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도,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도. 도리질을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매일 같은 특수 훈련으로 단련 받은 군인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살린 목숨이니, 죽는 것도 내가 정해주지.”

유리의 턱은 블라디미르의 손아귀에 강하게 붙잡히고 그의 엄지가 잇자국이 살짝 패인 입술 위를 살짝살짝


스쳤다. 갈구하는 눈빛이 제법 강렬했다. 유리의 떨리는 눈빛을 알아챈 블라디미르가 배부른 짐승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블라디미르는 유리의 하얀 살갗이 발갛게 일어나고 쓰릴 정도로 움켜쥐어 자국이 난
것을 제법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흠, 이래서야 조금은 너를 내보내는 게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는걸. 그렇게 겁먹은 눈빛으로 바라보면
아무리 나란 놈이라도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지.”

“…전혀.”

“걱정하지마. 난 너를 꽤 아끼니까, 네 아비처럼 아무에게나 함부로 돌리진 않아.”


블라디미르는 제 말을 증명하려는 듯 유리의 창백한 뺨을 제법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연약함을 보이는
사냥개는 당장에 죽여도 시원찮은 인간이. 유리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진득한 손길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는 밀쳐진 손을 가볍게 털어내면서 피식 웃었다.

“아니면, 예전의 그때처럼 누가 네 상대인지도 까먹을 정도로 돌려줄까. 오랜만에 네 명성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마침 그가 보유한 특수 요원들이 유리가 하던 접대 방식에 제법 흥미가 있다며 은근한 권유를 했다.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이 블라디미르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유리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서 간신히 대답했다.

“명…령이라면.”

명령이면 따르겠다는 유리의 말에 블라디미르의 짓궂은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심지가 곧은 나무일수록
꺾어보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으려는 것이 제법
불편했다. 결국 비뚤어진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생각과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간만에 네 실력 좀 볼까.”

살로메, 블라디미르가 짓씹듯이 내뱉는 유리의 요원 시절 적 이름에 유리는 눈을 감았다. 세월이 지나도,
있는 곳이 달라져도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에 붙어오는 과거의 이름은 떨어지지 않는다. 블라디미르는
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고서 딱딱하게 한 자, 한 자 끊어서 명령했다. 더불어 작은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장에 가서 미리 준비하고 있어.”

“…예.”
붙잡힌 머리채 사이로 블라디미르의 잔혹한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의 이면에 무슨 훈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로마의 탕녀를 본뜬 이름을 요원 이름으로 쓰던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제법 쓸모가 있어질 때까지 훈련시켜주지.”

#chapter 29

* * *

유리의 복귀는 블라디미르의 암묵적인 비호 아래 빠르게 승인이 났다. 8 년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썩은


요원에 무슨 가치가 있냐는 관리들의 뻔한 반발도 밤이 깊어진 으슥한 시간에 블라디미르가 ‘그럼 한번
시범으로 써보시죠.’라고 유리를 보내면 금방 잠잠해지곤 했다.

물론 잠잠해지다 못해 들끓는,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는 집요한 요청이 들어오는 건 덤이었지만,


블라디미르의 강철 같은 벽을 넘어설 순 없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관리라고 해도, 군부와 정보부를
비롯한 주요 고위 관료들은 오래전부터 이름난 인사인 블라디미르의 친인척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래도 사소한 이유로 시비를 걸 수는 있었다.

예를 들면 작전에 투입되는 일에 대한 준비를 늑장을 부린다든지, 준비된 서류에 대한 허가나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고약한 말로 핑곗거리를 댄다든지. 어젯밤도 그런 귀찮은 성격의 관리에게 걸렸던 터라
유리는 물론이고 유리를 데리고 떠나야 하는 블라디미르의 발목을 잡았다.

“대령님, 말씀하신 대로 열차 기관사에게 일러두었습니다. 약 5 분 후에 출발한다는 방송이 곧 나올


겁니다.”

“…늦는군. 영국 대사의 연락은?”

심지어 영국으로 출발하는 날까지 유리의 대접을 요구한 연합국 대사, 특히 영국 대사 덕분에 모스크바
중앙역에 대기하고 있던 특별 열차의 시간을 수리를 핑계로 대면서 늦춰야 했다. 부하의 전달에 평소에
서두르는 법도 없고,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던 블라디미르가 진한 카키색 군복 코트 안쪽에 달린
회중시계의 덮개를 열었다 말았다 만을 반복했다.

누가 보아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라도 심기를 건드릴까 블라디미르의 보좌관 세 명 중 단 한


명도 꼿꼿한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각진 군모의 챙 아래 회색빛 눈을 껌뻑이지도 못한 채로 대답했다.

“아까 전 관리인이 운전하는 차편으로 배웅을 보냈다는 연락 이후로는 자리를 비웠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뒹굴어대고도 정신이 없나 보군.”

어지간히 좀 하라며 블라디미르의 신랄한 평가와 함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에 옆에서 서 있던


보좌관들이 안절부절못했다.

“대령님, 우선 객실에 들어가 계시는 게….”

“됐다. 어차피 프랑스령까지 내려가기 전까진 계속 객실 안에 있어야 할 텐데 숨이라도 돌리고


있어야겠군.”

“알겠습니다.”

블라디미르가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자마자 부하들이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부하들은 눈치가 보이면서도 내심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어 같이 피우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바로
등을 돌려서 걸어가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저으며 할당된 객실로 들어갔다.

“…짜증 나게.”

한 모금씩 깊게 빨아올릴 때마다 슬렁슬렁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의 색깔만큼 어둡고 탁했다. 사실
복귀한 이후로도 꼿꼿하게 쳐든 얼굴에 좀 그늘이라도 만들면 우는소리라도 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로
적당히 막고 관리들에게 돌린 것도 있다. 그럼에도 어디 한 번 힘들다, 싫다 하는 소리를 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무감각하게 일 처리를 해내는 걸 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건 블라디미르
자신이었다.
“젠장.”

허탈하게 부스러지는 웃음과 함께 강직한 입가에서 작은 욕이 나왔다. 아무리 이 나이를 먹고도 구르고
구른 첫사랑에게 흔들리는 블라디미르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는 귀족이라는 신분도 없는 러시아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 계급 권의 최상위에 있는 자신에게 아쉬운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원체 남색을 하는 것도 아닌데 유독,


유리의 꼿꼿함에 끌릴 때가 있다. 저기 골목의 이름난 창녀들처럼 부드러운 기술로 녹이는 것도 아니고,
수컷들을 발정시키는 야살스러운 교태를 일부러 흉내 내지도 않는다.

-그, 그만….-

-아, 제발, 아파, 그만, 응, 블라, 디미르….-

굳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억지로 침대에 끌어당길 만큼 궁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정복욕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저를 밀어내는 손목을 잡고서 쳐올릴 때마다 파드득 놀라던 그 하얀 살결이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은근히 비쳤다. 하얀 피부 아래 적절하게 잡힌 마른 근육은 탄력이 넘치지만 여자들처럼 온몸이
푹신한 살결이라고 보긴 어렵다. 저와 같은 훈련을 하면서 만들어진 그 살결에 왜 잡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은 연약함을 느끼는지.

‘매일같이 하던 일이라 몸은 기억하고 있나 본데.’

그리고 동시에 흔적이 남는 곳이라면 자신의 손을 타게 만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몸은 이전과
다르게 길들여진 맛이 덜했다. 사실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한동안 쾌감을 느끼지 못한 몸이라 그런지
오히려 예전보다 감도가 더 좋아진 것도 같고. 짐승 같은 움직임을 받아내던 푸른 눈이 자신의 품 안에서
짙게 번져가며 사정하는 모습에 제법 만족감도 들었다.
-아, 흑, 거긴, 깊….-

제가 주는 쾌감을 이기지 못해서 달달 떨다가 바르작거리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랫배가 제법


뻐근해진다. 그래도 싫다, 싫다 하는 것이 마냥 기분 좋진 않았다. 저보다 떨어지는 놈들 뒤처리만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밑에서만 있을지 선택시킨 게 실수였다. 결국은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오는 인사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한심한 놈들.”

앗뜨. 몽롱한 회상에 젖어 있던 블라디미르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궐련형 담배가 다 타들어 가다 못해
제 살갗을 따끔하게 파고드는 것도 몰랐다. 물론 풋내기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침대 경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하는 자신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탁탁 털어내는 손길 아래 담배의 잔해가 흩어졌다. 동시에 출발을 준비하는지 프랑스령까지 이번 평화


회담 인물들을 실어나를 특별 열차의 선두 부분에서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플랫폼을
채워나갔다. 지금이라도 어서 열차에 타야 했다. 안 그랬다가는 눈앞에 기차를 두고 놓치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블라디미르를 염려한 한 보좌관이 나와서 그를 재촉했다.

“대령님, 지금이라도 객실로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번 신입 보좌관은 제가 부대원을 남겨두었으니


도착하는 대로 다음 역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지시했습니다.”

“그래, 고맙군.”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맙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선임들의 성화에 블라디미르를 재촉하러 나온 막내


보좌관은 움찔대는 손끝을 주먹 속에 감추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도착하는 대로 다음 역에서 꼭 합류시키도록.”

“예!”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유리의 모습에 블라디미르는 기차에 타는 것을 주저했다.
그렇지만 보좌관인 유리도 아니고 자신이 타지 않았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불상사나 그사이를
노린 암살 위협이 들어오면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결국 블라디미르는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특별 열차의 탑승구에 발을 디뎠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객실의 문이 하나씩 닫혔고, 기차 객실 복도에 서 있던 몇몇 군인과 관료들도 손에 쥐고
있던 파이프와 담배 따위를 창문 바깥으로 털고서 다시 객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여행이 시작되는군. 나가지도 못할 테니 이 판에 카드놀이나 좀 하는 거 어때.”

“좋지.”

“이 친구 제법 자신 있는데?”

“원래 잘 잃는 사람이 더 타오르는 법이죠.”

껄껄 웃는 소리도 출발하는 기차 소음에 묻히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의 끄트머리 계단을 중앙역
직원이 정리하고 닫을 무렵, 급한 발걸음 두 쌍이 그걸 만류했다.

“잠시만요!”

방금 블라디미르의 보좌관이 말했던 부하직원과 유리였다. 어째 약속된 시간보다 출발시각이 늦어진다


하더니만,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던 것인가. 보안 유지상 대략적으로 중앙 정부의 중요 인사들이 간다는
것만 동료들이게 귀띔으로 들었던 직원은 역시나 중앙의 관료들은 나이 먹고 느는 것이라고는 게으름밖에
없다며 속으로 투덜거리고 그 잘난 승객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정리하지 마십쇼. 이번 특별 열차에 배정된 승객입니다.”

꽤 젊은 나이에 중앙역 직원으로 발령받은 표트르는 이제껏 일하면서 러시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다 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 늙어빠진 배 나온 관료가 있을 거라는 추측과 다르게 미려하고
자신과 엇비슷한 연령대의 직원이 살짝 숨을 가쁘게 쉬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의
관료라고 하면 햇볕에 바싹 마른 정어리처럼 호감이 가지 않거나 아니면 돼지비계를 온몸에 칠하고 다니는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듣고 있습니까?”

“….”

“이봐요.”

흐린 날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찬란한 금발에, 분이라도 바른 듯이 하얀 피부, 그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은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 중에 손을 꽂을 만한 인상이었다.

혹시라도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기차를 놓치고 유리를 태우지 못할까 애가 탄 부하직원은 표트르의 눈앞에
이번 특별 열차 승객용 확인증을 다짜고짜 들이밀었다. 유리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다 못해 가쁜 숨이
뱉어지는 붉은 입술 사이로 시선이 깊게 들어가다가 자신의 눈앞에 견고한 벽처럼 나온 확인증 덕분에
표트르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예? 아, 예, 예. 죄송합니다. 어, 어서 타시죠. 곧 있으면 본격적으로 달릴 겁니다. 그나저나… 어느


부서 소속이십니까.”

“정보부, 정보부입니다.”

“그럼 저기 앞에 보이시는 첫 번째 칸의 세 번째 객실입니다. 우선은 탑승하시고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헉헉거리며 가득 찬 숨소리 가운데 대답을 들은 직원은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중요 인사 중에서도 이번


회담의 주역 인사들은 앞쪽 칸 객실에 배정되어 있었다. 뒤쪽일수록 소속이 한미한 부서나 연맹 국가의
직원이었다.

유리가 급하게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속도를 내는 기차 때문에 자신을 모스크바 중앙역 입구에서 바로
잡아서 각종 서류작성과 검사를 한 번에 끝내버린 군인에게 고맙다는 소리도 하지 못했다.

덜컹대며 흔들리면서 달리는 기차의 벽을 붙잡고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다시 들었다. 속도를 내는지
중앙역사의 수두룩한 철로가 점점 방향을 달리하면서 가짓수를 줄어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휴.”
아침이 되어서도 달라붙었던 연합국 대사, 그것도 영국 대표는 제법 끈덕진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껏 안 그런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날을 두고도 잡아둘 줄은 몰랐다.

결국 자신의 얼굴에 실컷 사정을 하고 나서야 보내주던 욕심 많은 노인네를 속으로 욕하며 기차의 칸을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제법 대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하는지라 앞으로 지나쳐야 할 기차 칸이 제법 길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급하게 오느라 졸리고 지친 유리는 잠시 한산한 객실에서 눈을 붙였다가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던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 객실에 앉아 있던 한 승객은 신문을 자세히 읽고 있는지, 누런
신문을 양쪽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승객이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는 창문가 너머로 유리의
흐트러진 모습이 비쳤다.

‘…이런 모습으로, 내내 돌아다닌 건가.’

평소 같으면 틈새 하나 없이 걸어 잠갔을 셔츠의 단추는 쇄골까지 풀어지고, 기차 시간을 맞춰보겠다고


정신없이 뛰어온 덕분에 땀에 살짝 젖은 열기가 드러난 속살에 윤기를 더했다. 항상 단정하게 가라앉은
적당한 길이의 백금발 또한 엉킨 금 실타래처럼 엉망이었다. 어디 환락가에서 나온 탕아의 모습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 모습에다가 유리가 늘 유지하고 있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촉박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서 역사를 헤집고 다닌 줄은 몰랐다. 유리는 작게
신음하며 얼른 풀어헤쳐 진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웠다. 어쩐지 자신과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빤히
바라본다 싶었다며, 낯 뜨거운 모습을 급하게 갈무리했다.

물론 유리의 시선에서 보면 군인답지 않은 부적절한 모습이었고, 역사 내에서 그를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유리의 그런 흐트러진 모습에서 시선을 사로잡히며 묘한 매력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들어왔으니, 한 번쯤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를 살필 법도
한데, 그때까지도 객실의 승객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리가 말을 건네도 고개 한 번 쳐 들어보지 않는 채로
신문 읽기에 제법 열중한 승객에게 유리가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혹시 자리가 있으면 잠시만 앉아도 됩니까. 아 물론, 계속 앉아 있는 건 아닙니다.”

자신은 정보부 소속의 보좌관이고, 원래는 앞에 자리가 있지만 급하게 타느라 잠시만 앉아 있으려 한다,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이 열차를 타는 사람들이라고는 한정된 사람들에 알음 직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정확하게 말할 필요까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한산한 객실에 잠시만이라도 있고 싶은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런 꼴로,


지친 정신으로 저 앞까지 가서 블라디미르의 피곤한 집착을 받아내 줄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정중한 부탁과 함께 슬쩍 둘러보니 한산한 객실에는 텅 빈 자리만큼이나 단출한 여행용 슈트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일주일이나 되는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의 짐이라고 보기엔 솔직히 너무 작았다.

‘연합국에 주재하는 공사나, 주무관인가.’

물론 연합국 쪽에서도 영국에서 주재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법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다. 그럼


주요 인물 중에 하나이니 저 앞에 자리를 주어도 무방하지 않을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한미한 꼬리 칸에
있는 것인가.

사실 그걸 부러 물어보기엔 아까 유리가 들어온 이후로 묘하게 말이 없음과 동시에 현재 이 승객의 반응을


통해서 납득할 수 있었다. 유리가 물어보고 나서 잠시 후에 신문 한쪽이 넘어가더니 귀찮음이 역력한
손짓이 허락을 뜻했다.

까딱거리는 손끝이 제법 펜대를 잡아 본 사람인지, 검지와 중지의 끝마디에 굳은살이 제법 박여 있는 게


유독 잘 보였다. 긍정의 대답을 받았지만 어째 찜찜한 방식이었다. 어쩌면 작은 불쾌함조차도 느껴질
정도로.

“…고맙습니다.”
물론 잘 훈련된 유리의 입에서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
그러시오’, ‘자리가 있으니 안 된다’, 그런 흔한 대꾸 한 번도 없이 손짓으로 오라 가라 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하지만 관료들이란 원체 배배 꼬인 심성이 있는지라 그런 모습을 억지로나마 이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유리 자신을 아침까지도 이런저런 이유로 침대에서 놔주지 않던 것도 그 잘나신 중앙의 외교부 관료가
아니었던가. 덕분에 긴 여행의 시작을 피곤과 지친 몸으로 시작하게 됐다. 그래도, 유리는 후회하진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을 볼 수만 있다면.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 길지 않은 삶에서 조금이나마 그 사람을 눈에 담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면, 몇 번이고도 이 구역질 나는 명령과 일 따위를 기꺼이 반복할 수 있었다. 진창에
구르라 하면 기꺼이 구르고, 원수의 구둣발을 핥으라 하면 또 그러할 것이다. 또다시 예전처럼 사람의
피와 살을 묻히고 또 그 위에서 춤을 추라 하면 부디 기꺼워할 것이다. 한 번은 어렵고 두 번은 쉽다. 세
번은 거리낄 것이 없다.

그만큼 눈에 그리고 담았던 사람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가 시베리아의 드넓은 평원을 도화지 삼아


그리움을 그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면, 같은 작업장의 동료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우스갯소리처럼 떠드는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듣곤 했다.

극동의 저 먼 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죽고 나서도 삶을 여러 번이나 반복한다던가. 마치 사슬과 같이 엮인


사람들이 이다음 생에도 이어진다고 했던가. 물론 유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선 그런 사고방식 따위는
미신처럼 치부되고 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리던 사람을 앞으로는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던 그 순간, 그때만큼은 그보다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낱같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며 희망과 절망 아래 살아가던 그
날에는 이 생을 마치고 나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그 상상에 작은 행복을 느꼈다.

어렴풋이, 그 사람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시대에서 다른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그렇다고 하면 눈에 그리고 마음에 묻어둔 마음이 좀 덜 아프기라도 했을까. 적대국과 드러날 수 없는 이


비참한 처지의 신분에서 조금은 자유로웠을까.

…조금은 떳떳하게, 더럽지 않은 신분으로 당신을 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문득 조소가 터지고 만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적어도 지금을 살아가는


생에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얄팍한 평화 회담이라는 것도 사실은 허울뿐인 전쟁이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조용한 전쟁. 그 소용돌이의 중앙에 있는 자신이 꿈꾸는 허무한 바람은 그저 미력하게
스러져가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위치한 현실을 깨닫고야 만다.

아니지,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기라도 했을까.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굳이 자신을 만날 이유도 없다. 누가 보아도 올곧고 좋은 사람이니, 그와 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의, 지금의 자신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의 삶에도 과연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일지, 그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천하게
태어났다고 또 비천하게 시작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들이 하나하나 모여 눈앞의 현실을 스쳐 가면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자신을


옭아맨다. 이렇게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 짧은 생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호사일지도 모른다.

감히 허락을 내려준 오만한 승객의 평온을 길게 방해하지 않겠다며 유리는 작게 덧붙인 후에 객실의 천장
가까이 설치된 짐칸용 그물망에 자신의 짐을 올렸다. 더불어 정보부 소속의 보좌관들이 외출 시에 입는
군복 외투를 그 위에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그때까지도 오만하고도 과묵한 성격의 이 승객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물론 보통의 승객들이라면,


시답잖은 자기소개를 으스대고, 이번 회담에서 무엇을 할지 떵떵거리며 외치다가 더불어 연합국의 사교계
인사들, 특히 귀족 여자들은 어떠할지에 대한 남자들의 특유의 대화가 벌어졌을 것이다. 뻔하고도 시시한
대화들.

하지만 아주 잠시만 앉아서 쉬다가 스치듯이 헤어질 사람이기도 하고, 딱히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의 귀찮은 손짓을 통해서 가식과 눈치가 섞인 쓸데없는 대화가
오가지 않을 거라는 강한 예감도 들었다. 그러니 조용히 눈을 붙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특히 새벽 내내 시달리던 유리에겐 간절한 순간이었다.

‘…눈이나 좀 붙여볼까.’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팔짱을 끼고서 창문가 쪽 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으니 쉼 없이 달리는
열차의 진동이 유리의 정신을 더욱 또렷하니 깨웠다. 더불어 간헐적으로 팔락, 대는 신문 특유의
바스락대는 소리는 유독 귓가에 거슬릴 만큼 크게 들렸다. 객실 내에 신문을 읽는 과묵한 사내와 유리밖에
없는 것도 이 거슬림에 한몫을 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한 깊은 피곤함은 결국 감겨 있던 유리의 두 눈을
깨웠다.
“…선생님은, 실례지만 어느 소속에 계신가요.”

피곤함과 거슬리는 존재의 자각이 만들어낸 충동이었다.

“글쎄요.”

과묵한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신문이 차곡차곡 접혀가며 비로소 가려진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말쑥한
정장 차림에 중절모를 푹 눌러쓴 사내의 모습은 우습게도 신문에 가려진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다.

실내에서도 중절모를 벗지 않는 탓에 윤기가 흐르는 모직의 챙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져 눈가를 가렸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와 곧게 뻗은 콧날 밑으로 슬쩍 웃고 있는 모습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알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가려진 그림자 뒤로 제법 미려한 외모를 가졌다는 점.

“…내 소속이라.”

아주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낯선 사내의 입에서 스치듯이 짧은 대답이 나왔다. 아주 찰나의 진폭과
떨림이었지만 절대 모를 수 없는 음색에 유리의 몸이 굳었다. 명령으로 내려온 임무였던 감청을 위하여
매일 밤마다 들었던 그 목소리.

‘설마.’

#chapter 30

* * *
유리의 파란 시선이 그가 들고 있던 신문의 헤드라인 쪽에 걸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평화 회담을 위한 양측의 만남… 과연 종전으로 이어질 것인가〉

베를린을 떠나게 된 이후로 꿈에서 만나는 일은 있어도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던 그 다정한 목소리였다. 애를 태우듯, 느릿한 어조가 유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잠시만 머무를 사람에게….”

지난 8 년 동안 유리가 시베리아에 퍼져 있는 정치범 수용소 세 곳을 지나쳤던 것처럼, 세드릭에게도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유리는 기차를 타기 전, 블라디미르의 별장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탓에
글씨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워버린 보고서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첫째는, 그는 영국 정보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케임브리지에서 제법 촉망받는 정치학도로 졸업을


했다는 것.

“굳이 알려줄 만큼 제법 대단한 소속은 아닙니다.”

둘째는, 8 년 전에 병사한 프림로즈 백작의 지위와 유산을 물려받으며 귀족원 내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

그 후로 2 년 동안 유력한 젊은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 놀랍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드릭 프림로즈는 영국 여왕의 가까운 친척이자 최측근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는 왕실의 일원 중 하나였고, 베를린의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과 부르주아 자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유리, 그가 본 귀족 중에서 가장 귀족다운 존재였으니까. 그의 적나라한 경계 어린 태도를 멍하니
지켜보던 유리는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벌리며 끊어질 것 같은 대화의 갈피를 잡았다.

“…그리 대단하지 못한 소속이라면.”

참 뻔한 거짓말이었다. 이 기차에 타는 사람치고 누구 하나 대단치 않은 소속의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그 또한 제법 높은 지위의 관료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유리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더욱이 어울리는 일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하면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순간이, 환각과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응당히 생각하게 됐다. 마른 우물처럼 깊어져 가는
그리움이 빚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그를 만나러 가는 이 여행의 시작에 들뜬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모른다.

“…저는 어차피 지나가고 말 사람이니까요.”

유리가 외워둔 세드릭의 하루 일정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런던의 타운하우스의 정원에서 단출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보고서에서 읽었던 마지막 정보가 유리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셋째, 그는 영국 사교계에서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남작가 출신의 여식과 약혼을 한 지 2 년째였다.

따라서 이 열차에 영국 상원 의원 세드릭 프림로즈 백작이 타고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세드릭.”
그렇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움을 거짓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마음이 흘러나와
객실을 가득 메웠다. 기차가 속도를 쳐올리는지, 그들이 있는 객실의 전등이 걸치고 있는 색유리로
장식된 갓이 흔들리며 객실의 명암을 어지럽혔다. 유리의 부름에 종일 굳건하게 다물려 있던 사내의 입술
끝이 슬쩍 비틀렸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그는 네모반듯하게 접어 내린 신문을 제 옆의 좌석에 내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앉아 있던 유리의


시선 안으로 객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치만큼 훤칠한 키를 가진 사내의 중절모 아래 가려진 얼굴이 훤히
보였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치 환영같이 사라질 것 같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 손 안에 잡히는
두터운 사내의 팔 근육이 도톰한 옷감 사이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8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달라진 모습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리워하던 그 모습은 여전했다. 비에 푹


젖은 땅의 색과 같이 짙은 흑색의 눈과 마주친 순간, 유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드릭이었다.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대감도 피어올랐다.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적군의 한 가운데에서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 공간에서 마주한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그제야 존재의 실재를 실감했다.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환영도, 환각도 아니었다. 팔을 붙잡은 유리의 손이 펴질 줄을 모르고 연신 움찔댔다. 크게 동요하는
유리의 반응에 세드릭은 기가 찼다.
“그게, 궁금합니까.”

그때도 그랬다. 이렇게, 사람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우연히, 아주 우연히 마주쳐 감정에 놀아나는 척
….

“…여긴 바르샤바 연방의 관료들이 널려 있고, 바르샤바 연방국 주요 도시를 정차합니다. 기차 여행을
하기엔… 별로 추천하고 싶은 코스는 아니군요.”

“…기차 여행이라.”

여전히 8 년 전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로 취급하는 것에 안 그래도 비뚤어진 세드릭의 마음이 더욱


기울었다. 지금의 자신은 멋모르고 적국의 연인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허황된 마음을 먹을 정도로 정신
나간 얼간이가 아니었다. 지난날의 뼈아픈 배신을 떠올리자마자 세드릭의 이성이 다시 고요하니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그런 낭만적인 여행을 즐기기엔 너무


커버렸습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아니었다. 그때는 자신이 너무 미숙해서 사랑을 의심할 줄 몰랐다. 목적이 있는


사랑의 끝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럼 왜 이곳에 있습니까. 당신은 런던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차하면 가장 가까운 연합국으로 갈 수 있으니 들키지만 않는다면, 핀란드를


통해서 배편으로 영국까지….’
유리는 어떻게 하면 세드릭을 무사히 이 열차에 내리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켜켜이 쌓아온 감정에
매몰된 이성이 세드릭이 어떻게 이 열차에 탑승해 있는지 따위는 까맣게 잊고서 그저 해결법만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왜 세드릭이 이곳에 있는지.

“…런던에서?”

“….”

덕분에 유리 자신도 모르게 세드릭의 일상을 말하고야 말았다. 누가 들어도 뒷조사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세드릭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런던에서 내가 뭘 한다는 겁니까.”

아차. 유리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자신의 쓸모없는 입을 애꿎게 탓했다. 이래서야 예전의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실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리는 세드릭의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그 모습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세드릭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말해보세요.”

“…실수로 나온 말입니다.”

“실수라…. 그럼 내가 한번 맞춰보죠. 왠지 난 그 답을 알고 있을 거 같거든.”

당연한 소리였다. 세드릭의 일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본인일 것이다. 그걸 본인 앞에서 흘렸으니 못
맞출 일도 없다. 발뺌하는 유리의 손을 세드릭이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전보다 너른 품이 유리를 감쌌다.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윽!”
“‘런던에서 티타임을 즐긴다’.”

“….”

그 너른 품에 안쪽으로 살결이라고 보기엔 딱딱한 물체의 실루엣이 보인다는 거였다. 오랫동안 훈련받은
유리의 눈썰미는 어렵지 않게 그 물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권총이었다.

“맞습니까?”

세드릭은 원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한 보좌관과 비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 대화로
마음이 더욱 기울여졌다. 새로 들어온 에식스 출신의 비서가 몇 번씩 정해진 일정과 다른 날에 런던의
타운하우스로 찾아오는 날이 종종 있었는데, 아마 그때 자신의 일정을 기록한 게 틀림없었다.

“살로메.”

“…그건 어떻게.”

숨겨온 이름으로 불리운 유리의 눈이 불안에 떨었다. 복잡한 생각에 가두어진 유리를 두고 세드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가증스럽지 않은가.

“당신이 내 일정을 꿰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을 8 년 전의 애송이로 보고 시답잖은 추억 놀음으로 흔들어 놓으려는 게, 불쾌하고 무척


거슬렸다.
“나 또한 당신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

런던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은 둘째 치고, 유리가 자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연신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드릭, 자신이 타깃이면 지금이라도 품에 안기며 아양을 떨어야
하지 않나. 지난날의 어리석은 추억을 달콤한 말로 속삭이며 유혹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 따위는 고사하고, 제일 피하고 싶던 사람을 만난 반응이었다.

“답을 말했는데, 어째 기뻐 보이지 않네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목적인가. 세드릭은 영국의 법령을 총괄하는 귀족원의 일원 중에 젊은 실세에


속하는 축이었고, 동시에 인질로 잡기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급소 부위를 살피기라도 해야 하는데
도리어 유리의 시선은 바닥만을 향했다.

심지어 세드릭의 이죽이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객실에 들어오는 걸 걱정하는 것처럼 객실의
커튼을 쳐서 가리고 문짝의 걸쇠를 잠갔다. 그와 함께 나온 유리의 말은 세드릭 마음을 어지럽혔다.

“…다음 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서 정차해.”

유리는 세드릭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을 이 장소에서 무사히 빼내는 방법에 모든 정신이
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지금은 자신을 처리할 수 있는 분명히 좋은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역에 도착하니 바르샤바 연방 관료들이 타기 전까지 주변을 주의하는 게 좋겠어.


사람이 적으면 눈에 띄기 쉬워.”

걱정을 속삭이는 그 붉은 입으로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자신의 손과 발을 저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걸고


얽매어야 한다.
“…그동안은, 내가 객실 주변에서 최대한 주위를 살피고 올게.”

저렇게, 슬프게 웃는 게 아니라.

분명 이번에도 세드릭, 자신이 타깃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러시아 쪽에서 연락 받고 있는


연락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진 그 많고 많은 요원 중에 굳이 유리를 꼽아서 뽑아올
이유가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흔들렸던 옛 감정을 이용하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연합국 소속인 핀란드를 통해서 배편으로 가면 영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이상하네요.”

유리는 세드릭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움찔거렸다. 자신을 피하다 못해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습에 묘하게 짜증이 났다. 아니면 자신이 타깃이 아니었던가, 살짝 의심도 들었지만
금방 사라졌다.

그랬다면 자신이 영국 공사로 가장하는 작전을 가지고 영국 왕실 보안국에서 위험하다고 만류를 하지


않았겠지. 그런 좋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도리어 가라, 가라 하는 판이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단어에 유리의 낯이 단박에 굳었다.

“나를 타깃으로 삼은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유리의 걱정하는 투에도 세드릭의 반응은 제법 매몰찼다. 차가운 답에 유리의 입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용케 이 열차에 올라탔다. 자살행위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적어도, 연합국의 주요 인사인 당신을 반기는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건 확실하겠어.”

“늘 그럽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타깃을 노릴 때 그렇게 어설픈 감정을 드러내면서 동정을 구걸하는 거 말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8 년과 다를 바가 없을까. 아름다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고 퇴색되기 마련인데, 시간은 꼭 이 사람을 비켜나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그리운 척, 반가운 척이라도 하면 내가….”

마치 예전과 같이, 그때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이라고 여전히 말해주는 거 같았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적을 코앞에 두고 이 무슨 안일한 생각인가. 세드릭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말자며 스스로를 붙잡았다. 하지만 유리의 담담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반가워 보였나.”

“…방금은 실언입니다. 잊으세요.”

“세드릭.”

유리의 무뚝뚝한 낯에 희미한 미소가 담겼다. 같은 하늘 아래에만 있다는 사실 하나로 족하다고 살아왔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당신은 원래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잘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거 하나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속내가 다 들킨 마당에 만나는 것도 우스운 일이죠.”

“당신이 내가 맡은 작전의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그리던 사람을 막상 눈앞에 마주하고 있으니 다른 바람이 생긴다. 오랫동안 잘 견뎌왔던 마음이 흔들리다
연약하게 부서지고 만다. 마음에 묻어 둔 건 기억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원하는 게 뭡니까. 정보? 아니면 회유?”

“달라고 하면 줄 건가?”

유리의 자조적인 웃음을 마주한 세드릭은 결국 그런 게 목적이었냐고 말하지 못했다. 곧이어 나온 유리의
한탄 같은 말이 세드릭을 멍하게 만들었다.

“난 당신과 관련된 작전은 성공시킬 수 없어.”

“….”

“당신은 내가 유일하게 실패한 작전 대상이니까.”

하물며 손끝 하나도 댈 수 없다. 마치 신성한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그런데 사살하라는 명령이라니. 그럴 바에야.

“거짓말.”
“좋은 자세야.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차라리 당신의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럼 당신의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을 수 있을 텐데.

“…말해.”

가벼운 대답을 듣고 있던 세드릭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적진의 한


가운데 있는 것도 잊어버리게 될 만큼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말하란 말입니다!”

“…목소리를 낮춰.”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앞에 있는 유리는 언제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뻔하디뻔한 계략
따위로 자신을 농락했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언제나 저렇게 푸른 눈으로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혼자서 짊어지고 간다. 모든 상처를 당연하게 가지고 간다.

“대체 내게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래서 자꾸 눈이 가는 건가. 그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상처를 지금 다시 마주해서. 가까워지는 눈망울에


빠져들 무렵, 서늘하게 식은 콧등이 스치고 한탄에 달아오른 입술이 부딪혔다.

“이러고 싶었다면 믿어줄 건가?”

“지금….”
가볍게, 살짝 대었다 멀어지는 입술이 아쉬울 무렵 가느다란 속삭임이 웃음을 담았다.

“농담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들켜서 총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목소리를 낮… 읍.”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입이 맞춰졌다. 동시에 멱살을 잡은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둥그런


뒤통수로 옮겨갔다. 안정감 있게 손이 자리를 잡자 유리의 입 안쪽을 거칠게 침범했다. 유리는 입 안을
간질대는 자극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달리는 기차 안 객실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두 몸이 원래 앉아 있던 좌석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유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는 게 그만 세드릭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격이 됐다.

“하아… 하아….”

“아직도, 키스 잘 못합니까.”

뜨거운 열기를 품은 숨결이 예민해진 목덜미 쪽에 은근히 퍼졌다. 푹 가라앉은 세드릭의 목소리가 유독
섬찟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의 침대를 매일 같이 다닌 것치고 형편없군요.”

“…그만.”

“더 해달라고 해야죠. 그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새 까먹은 겁니까.”

세드릭은 마치 천상의 과일을 탐하듯, 유리의 보드라운 목덜미를 은근히 물다가 어깨와 이어지는 근육에
날카로운 이를 대었다.
“뭐하면, 내가 다시 훈련 시켜주죠.”

“…아!”

파르르 떠는 살결 위에 세드릭이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유리가 꼭꼭 채워둔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 내렸다. 그러자 꼭꼭 숨겨둔 하얀 살결과 그 위에 빼곡하게 채워진 정사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게 무슨… 아.”

세드릭의 손이 멈춘 사이에 유리의 손이 셔츠 앞섶을 여몄다. 이런. 어젯밤부터 줄곧 자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던 관료가 만든 흔적이 분명했다.

“…누구랑 했습니까.”

세드릭의 어둡고 집요한 시선이 미처 가리지 못한 흔적을 빠짐없이 손끝으로 덧그리면서 눈에 담았다.
피딱지가 달라붙고 옴폭하니 파인 상흔이 하얀 살결 위로 붙어 있는 부분이 눈이 갔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서 세드릭의 눈길을 피했다.

“당신을 중앙으로 부른 남자.”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건, 매끄러운 가슴팍에 봉긋하게 솟은 분홍빛 유실 주위로 불그스름한 잇자국이 난


부분이었다. 여체의 풍만함은 보기 어려운 사내의 가슴팍이 묘하게 색기가 어려 있었다. 그 결과로
세드릭 자신도 이가 근질거렸다. 지금이라도.
“…그 남자입니까?”

이 사람의 몸에 있는 모든 자국을 자신의 것으로 덮어씌우고 싶었다.

“그 남자가 만든 겁니까?”

대답 없이 가만히 세드릭 자신을 쳐다보는 유리의 눈빛은 깊은 바다와 같은 색깔 때문인지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예전에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모든 것을 받아주려 했겠지.

실제로 과거의 그는 이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자신이 있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았다. 물론 종내에 그가 숨기고 있던 면모를 알게 된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뻔뻔한 남창.”

“….”

“대체 몇 명이랑 굴러먹으면 이런 식으로 됩니까?”

“…글쎄. 지나가는 사람들 숫자를 세는 취미까진 없어서.”

“…하.”

유리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이상하게 머리로 열이 치솟았다. 참, 사람을 여러모로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런 것마저도 한결같을 건 없는데. 본인 입으로 말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게
탄식하던 세드릭은 아까 키스하느라 붙잡았던 유리의 뒤통수를 거칠게 쥐었다.

“윽!”

“누구랑 해도 상관없다?”
“…명령에 따를 뿐이야.”

세드릭은 유리가 입고 있던 진한 녹색의 군복 바지의 혁대와 단추를 손쉽게 풀었다. 허리를 조이던 군복
바지가 헐렁하게 풀리자 유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번져갔다.

“지금 무슨….”

“이 자리에서 나랑 해도 상관없겠군요.”

“흣, 아! 거, 거긴.”

삐뚜름하니 웃는 세드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리의 속옷 안쪽으로 커다란 손이 침범해왔다. 잔뜩


성이 난 유리의 성기를 알아챈 세드릭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적군을 눈앞에 두고도 발정하다니.”

“그, 그런 거… 하지, 하지 마… 흣.”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다 되면서 나는 안 된다?”

도리질을 치면서 세드릭의 손을 밀어내는 것을 보고 세드릭이 유리의 머리카락을 더욱 강하게 말아 쥐었다.


목이 꺾이도록 고개가 젖혀지고, 흥분에 푹 젖은 푸른 눈빛이 제법 볼만 했다.

세드릭이 유리의 얼굴에 홀린 사이에 유리가 고개가 젖혀진 채로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벌어진 입 안에
미처 넘기지 못한 타액이 고여서 분홍빛 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마치 제 숨을
바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객실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으면.”


세드릭, 그가 위험에 처한다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아니나 다를까,
따뜻한 입 안으로 침범하자 촉촉하게 적셔진 혓바닥이 겹쳐지며 비벼지고 간지럽혔다. 계속해서 밀어내던
유리의 손이 주춤, 주춤 올라가다가 세드릭의 팔을 붙잡았다. 걱정과 우려가 되긴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깊이 묻어오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키스해요. 그럼 소리도 안 나고 딱 좋겠네.”

세드릭이 유리의 성기를 잡고 은근히 자극하는 바람에 유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신음을 세드릭의
입에 묻었다. 서로의 숨을 앗아버리겠다는 듯이 객실 안에서는 한참 동안 척척한 소리가 났다. 간간이,
자극을 이기지 못한 둘의 억눌린 신음도 튀어나왔다.

결국 유리가 먼저 이기지 못하고 사정했다. 끈적대는 액체가 거친 숨을 쉬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른 배


위로 흩뿌려졌다. 탈력감과 밀려오는 흥분감에 가만히 숨을 고르던 유리의 회음부 쪽으로 거친 손마디가
자연스럽게 더듬다가 파고들었다. 낯선 침입자를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속살에 세드릭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안쪽이 제법 부드러운데.”

“흑!”

“…설마 오늘 아침도 했습니까?”

오물오물 씹어오다 못해 안쪽이 물건을 품다 온 것처럼 눅진하게 풀려 있었다. 급하게 고개를 젓는 유리를
두고 굵은 손가락 하나가 더 예고도 없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세드릭의 거친
욕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사람의 앞에선 굳은 다짐 따위가 다시 손쉽게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달리는 열차에 다시 뛰어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세드릭은 씁쓸하게
되뇌었다.

“제발, 그만… 해. 당신, 정말 들키고 싶지….”

“당신만, 소리 내지 않으면 문제 될 거 없습니다.”


세드릭의 말과 함께 아까 전부터 유리의 엉덩이 쪽을 묵직하게 눌러오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두터운
굵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핏줄이 툭 불거져 있는 게 한눈에 봐도 순탄치 않은 시간이 되리라 예고했다.
아무리 아침내 정사로 인해서 풀려져 있다고 해도, 들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크기의 물건이었다.

“전부 참아요. 내가 주는 게 무엇이든지.”

유리가 세드릭의 팔을 꼭 잡고 말을 꺼내려는 사이,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에 두꺼운 물건이 푹,


들어왔다.

“하윽!”

“하아… 힘 빼요. 순진한 척 조여 봤자 재미없으니까.”

“그게, 아니라… 흐윽, 정말… 하으, 아, 응.”

“…후우.”

그때도 순진한 얼굴에 괴물 같은 녀석을 가졌던 터라 온통 몸살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 한창 벌려지지


않은 구멍에 길을 들이려니 긴장을 먹은 몸은 유리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오므려진 살을 억지로
벌리는 고통에 푸른 눈물이 하나둘 맺혔다. 그러자 고통으로 굳은 허벅지 위로 두툼한 손이 올라와 땀에
젖은 고운 살결을 연신 쓸었다. 마치 아픔을 덜어주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침대를 뒹굴어도 구멍은 멀쩡한가 봅니다.”

“그, 건… 아! 앗, 응, 흐응, 아.”

그것도 잠시, 배 안쪽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격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세드릭에게
자연스럽게 손이 뻗치고 숨을 갈구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건장한 육체에 맡기자 단단하고 중압감이
느껴지는 세드릭의 육체가 유리를 위에서 내리눌렀다. 찌릿하게 들어오는 쾌감의 향연에 유리는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허리 짓을 하며 발갛게 물들어가는 하얀 뺨을 구경하던 세드릭은 핏물이 들어가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마저도 달콤했다.

“흐으, 으응, 응, 천, 천히… 흣.”

“후, 지금 내게 명령을 내릴 때가 아닐 텐데.”

귓가에 울리는 낮은 저음이 어깨 쪽의 신경을 유독 건드리고 움츠리게 했다. 속삭이던 입술은 가까워지다
못해 귓바퀴 쪽의 연골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를 이용하고 싶으면 지금 더 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란 판 아닙니까?”

“그, 흐윽, 그런 생각….”

“그럼 무슨 생각으로 왔습니까.”

“응, 흐응, 아, 아무런 생각도….”

“응? 이렇게 좆 달라고 빌러 온 게 아니면.”

마른 아랫배 가죽 위로 도톰하니 드러난 성기를 덧그리며 비웃는 모습에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닳고


닳았다며 비웃어도 유리를 탐하는 걸 결코 멈추진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못 본 세월을 섹스로 채우려는
듯이 더욱 갈구하고 갈증 난 사람처럼 몰아붙이기 바빴다.

“대체 누구한테 좆 달라 하려고?”

“아, 아무도… 하, 윽! 아응, 응, 흐으….”

“신음 소리 듣기 좋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으면 더 내도 됩니다.”

세드릭의 면박에 유리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창녀로 모욕하고, 욕구 풀이 상대로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고위 관료가 이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분명
찝찝한 마음으로 받아줬을 텐데.

꼭 깨물고 있는 입술 위로 거친 손끝이 쓸어내렸다. 낯선 손길로 깨물었던 입술이 풀리는 것을 보고


세드릭은 혀를 찼다. 바람 한 점도 들어갈 새 없이 몸이 겹쳐지고 다시 입술이 마주쳤다. 유리의 몸을
들쑤시는 척척한 소리만큼이나, 민망하게 쪽쪽 대는 소리가 객실 내로 가득 찼다.

“천천히 해달라, 아프다, 하면서도 놓치긴 싫은가 봅니다.”

“….”

“중요한 사람들은 다 이런 식으로 유혹합니까?”

상처 난 입술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혀 놀림으로 살금살금 빨아들이는 것이 아까 자신의 성기를 쥐고


흔들 때 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리 사이를 조였던 것인지 세드릭의 손이 유리의 허리를 쓱,
쓸어내렸다.

“흐읏.”

“몇 명인지도 모를 사람들을 거쳤으면서… 순진한 얼굴을 하고 좆을 조르냐고 물어보잖아.”

“그, 그러지 않… 흑.”

대답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연신 허리를 쳐올리며 아득하게 만드는 쾌감을 주는 탓에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한다고 해도 믿어주기나 할까. 이미 자신은 그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을 잘 알면서도 말해주고 싶었다.

“…젠장.”

화가 난 것인지 속도를 가하는 모습에 유리는 그저 다리와 손을 세드릭의 몸에 감고서 바르작대었다. 언제


다시, 이렇게 맞닿을지 모르는 몸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었다. 그게 자극이 된 것인지 다시
입을 맞추는 모습에 유리도 응했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나갈까, 서로가 서로에게 붙어 있는 접합부 사이로 미처 담지 못한 사정의 흔적이


포말처럼 흘러내렸다. 열띤 정사가 끝나고 나서도 둘은 한참 동안 입을 맞췄다. 서로에게 말한 것으로
하자면 전혀 필요 없는 행위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 * *

긴 정사가 끝난 후에 세드릭은 기절한 유리를 객실 좌석에 눕혔다. 전날부터 죽 침대에서 관료를 접대한
것도 모자라 객실 안에서 몇 번이고 세드릭을 받아내느라 무리가 온 게 분명했다. 세드릭은 격렬한
몸짓으로 흘러내린 서스펜더 따위를 대충 끌어 올리다가 제가 눕힌 사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곤히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이 유독 눈에 밟혔다.

“…예쁘네.”

바르샤바 연방 인사들을 태운 열차에 잠입하는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자처했지만, 막상 유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열차에 타고 있는 고위 인사들만 수십 명에, 그들을 보좌하는 관료들과
도우미들만 해도 제법 숫자가 되었다. 그러니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빠져나오려고 했다.

만에 하나.

“…하.”

상황이 허락된다면 인파 속에서 멀찍이 얼굴 한번 보고 말 생각이었다. 세드릭은 유리가 누워 있는 좌석


가까이서 다리를 굽히고 유리의 안색을 살피다 말고 자조 띤 웃음을 흘렸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필 자신이 타고 있던 객실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기막힌 우연이었다. 세드릭은 굽힌 무릎
위로 얼굴을 묻고 탄식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무뎌질 것이다, 지나갈 것이다.

“왜.”
…결국 잊혀질 것이다.

“왜 하필 나를… 찾아왔습니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신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존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세드릭은 묻었던 고개를 들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혼잣말처럼 나온 말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왜 내게 그런 표정을 했습니까.”

왜 내게 어두운 새벽을 밝히는 아침 햇살과도 같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가지 말라 자신의 팔을


붙잡고, 더없는 애정이 깃든 입술을 맞추었는가. 그 맑은 미소 속에 무엇을 원하는지 차라리 말을 해주면
자신도 마음이 한결 편해질 텐데.

8 년 동안 듣지 못한 답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왜 내게….”

왜 다시 나를 찾아와서 흔들어 놓는지.

“…더 욕심을 내게 만듭니까.”

말없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이 그저 야속할 따름이다. 당신은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세드릭의
손이 흐트러진 유리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미려한 얼굴을 번잡스럽게 가리는 것들이 보기
싫었다. 하얀 뺨이 온기로 불그스레 달아오른 것이 참으로 어여쁘다.

오뚝한 콧날 아래로 도톰하니 부풀어 오른 분홍빛 입술이 아까 나누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촘촘하게 가려진 금빛 속눈썹 아래로 바다보다 푸르고 하늘보다 맑은 빛이 숨겨진 것을
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희열이 뻗친다.

“…한심하긴.”

동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더없이 고통스럽다. 그의 거친 손마디가 고운


선으로 그려진 유리의 얼굴을 더듬다 말았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움츠려진 손마디가 이내 주먹 쥔
손으로 굽어지고 손등 위로 불룩한 뼈가 터질 듯이 도드라졌다.

삼키지 못한 깊은 한숨이 탄식과 함께 나온다. 복잡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짚고서 기차 칸의 연결부 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정차하기 전, 담배가 간절했다. 한숨이 숨겨진 숨
자취를 가릴 이유가 필요했다. 잘 밀봉된 박스 같은 기차 칸 연결부의 쪽 창문을 열고 상아로 깎아진
케이스 안에 미리 말아둔 담배 하나를 물었다.

-치이익

호주머니 속 묵직한 지포 라이터가 불씨를 선사했다. 깊은 연기를 한숨 마시고 나니,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짓을 벌인 것인지 자각했다. 적진 한가운데서 대체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하지만 연신
신음을 참는 모습이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목적도,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고 하면.

“…너무 단순한가.”

이전과 같이 말없이 혼자서 참는 그 모습이 겹쳐지는 탓에 생각 외로 몰아붙인 격이 됐다. 얼굴 한 번


보고 말겠다는 작은 다짐은 넘쳐흐르는 마음에 휩쓸려 무용지물이 됐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에 지켜야
할 선을 기어코 넘었다.

“…후우.”
깊숙한 연기가 눈앞을 어른어른하게 가렸다. 잔뜩 열이 올라서 고정시켜둔 머리가 흘러내린 것을 대충
쓸어올렸다. 어차피 런던에서 가만히 기다렸어도 만날 사람이긴 했다. 자신은 그들의 타깃인 이상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래서 열차에 오르겠다고 자진했다. 가만히 노려지는 것을 지루하게 기다릴
바에야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딱 마지막으로, 얼굴만 한 번 보고.

“…죽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담배가 삽시간에 타들어 갔다. 자욱한 연기가 눈앞을
아릿하게 자극했다. 분명 나쁘지 않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팍 쪽에 걸어 둔 권총을 잡지 못했다.
우스운 것은 살로메도. 아니, 유리도.

“…가만히 있었지.”

분명 자신과 접촉하면서 가슴팍에 있는 권총의 무게를 느꼈을 텐데. 경계하는 몸짓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여 달라는 듯이 빈틈을 보였다. 분명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 그 무엇도 하나 잡을 수 없었다.

세드릭은 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차가운 고철로 이루어진 벽에 열이 잔뜩 오른


이마를 비스듬하게 기대고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아니면, 살로메도 알았을까.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알았겠지.”

유리가 고백했던 것처럼, 세드릭 또한 결코 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걸.

* * *
“…아.”

깜빡 잠이 들었다. 유리는 눈앞을 찌르는 객실의 주황 조명을 받고서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몸을 반쯤
일으키자 다리 위로 두툼한 코트 따위가 흘러내렸다.

“…이건.”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좌석 쪽에 손을 짚고 몸을 움직이다가, 손가락에 걸리는 부드러운 감촉의 천이


걸렸다. 자신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돌돌 말린 회색빛 양모 스카프는 마치 베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자신의 물건은 아니었다.

“아….”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았다. 모를 수가 없다. 자신에게 이런 배려심 깊은 행동을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자연히 유리의 시선이 반대편 좌석 쪽으로 향했다.

#chapter 31

* * *

“…세드릭.”
아무도 없었다. 유리가 반쯤 일으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힘을 잃은 손이 저절로 텅 빈 좌석 쪽으로
향했다. 그가 가져왔던 작은 짐가방도, 반듯하게 접혀진 신문 따위도 없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헛된 망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마음의 그리움이 깊다 못해 꿈이라도 꾼 것인가. 텅 빈 자리를 보던


유리는 뒤돌아서 자기가 누워 있던 좌석 한쪽에 구겨진 코트와 스카프 따위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

“있었어.”

살아 있었다. 유리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더듬다가 이내 앉았다. 그가, 여기 있었다. 그가 자신과


함께 같은 공간에 분명히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 말을 하고, 손을 뻗고….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 유리는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피부에 남은 미미한


고통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 거친 행위 후에 은은하게 저려 오는 이 통증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보잘것없는 이 몸뚱어리가 그에게 쓸모가 있다면. 쓸모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저 기꺼웠다. 유리는
자신의 자리에 남은 세드릭의 코트와 스카프 따위를 손에 쥐고 다시 그의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자신에게 보인 격렬한 감정의
반응을 돌이켜 보면 분명 좋은 기분만 존재하진 않았겠지. 유리는 그의 가슴팍 쪽에서 느꼈던 총구의
묵직한 실루엣을 떠올렸다.

호신용이라고 가볍게 넘기기엔 유리가 그간 지나쳐온 경험이 많았다. 그가 가져온 무기의 목적이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유리의 멍한 시선이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이 비치는 객실 내 창문을 향했다.
아직 이른 봄을 맞은 침엽수림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시퍼렇게 매달려서 스산한 회색빛 풍경을
그려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죽일 수 없다면 죽임을 당하는 게 낫다. 그때도, 지금도. 유리는 그가 남겨준 옷을 품에 꼭 껴안았다.
마음을 여한 없이 태우고 난 뒤의 매캐한 잔해가 후각을 타고 속 깊이 채웠다. 그의 품에서 풍기던 내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한참을 품에서 놓지 않았다.

* * *

“늦었군.”

“급하게 타는 바람에 숨 좀 돌리고 오느라.”

유리가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블라디미르가 지적했다. 그는 맞은편 자리 쪽으로 턱 끝을 까딱였다.

“앉아.”

그가 앉으라고 말해준 좌석은 제법 무두질이 잘된 매끈한 가죽으로 씌워져 있었다. 손걸이 부분은 상아와
귀갑, 값비싼 금속으로 세공되어 있었으며 보드라운 실크로 만들어진 쿠션이 장식을 했다. 저 같은
사람이 앉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했다. 유리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서 자리에 앉았다.

“…다른 보좌관들은?”

“글쎄. 나가서 카드게임이라도 하고 있겠지.”

“그런가.”

객실은 블라디미르만 홀로 있어서 넓어 보이다 못해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드릭과 유리가 있었던 꼬리


칸은 언뜻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휑한 고철 벽이 다였지만, 지금 머리 칸 객실 복도와 내부는 화려한
무늬에 금박이 입혀진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복도는 물론이고 객실 내 창문의 양옆으로 달려 있는 아담한
크기의 전등에 달린 크리스털 태슬 장식은 사치의 절정이었다.
“웬일이지. 유리 네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그냥.”

“국경을 넘었으니 연합국 진영으로 넘어가는 일은 시간 문제야.”

블라디미르가 무심한 듯 읊조리면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나가서 노는 게 아니라 아마 쫓겨난


모양이다. 그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태도가 일상이지만, 업무를 할 때만큼은
깐깐한 면이 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고 속내를 알기가 무척 어렵다. 유리는 기차의 흔들림을 따라서
짤랑거리는 투명한 크리스털 너머로 비치는 오후의 빛을 응시했다.

“지난 8 년 동안 너무 드넓은 곳에 살아서 기차 여행이 답답한 모양이지?”

“기차 여행은.”

블라디미르가 자신이 지내던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가지고 드넓은 곳, 이라 칭하는 말에 쓴 웃음이 나왔다.
수용소 바깥에 있는 사람이 보기엔 드넓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들어와 보면 그보다 좁은 세상이 더
있을까. 오히려 지금 이 기차 칸을 넘나들 수 있는 작은 자유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들어간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이 자신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몸은 조금이나마 편안한 곳으로 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마음은 가시밭길에 구르는 듯한 불편함이 앞섰다. 조용해진 유리를 알아챈 블라디미르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탁, 내려놓았다.

“어땠지.”
“…무엇이?”

의도가 보이지 않는 질문은 어렵다. 속을 알기 어려운 녀석이라 더 껄끄러웠다. 블라디미르는 태연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8 년 만의 재회 아니었던가? 내가 들은 게 맞다면 제법 반가운 거 같던데.”

“….”

“왜 그렇게 보지?”

“알고… 있었어?”

“물론.”

안 그래도 무표정한 유리의 얼굴에서 빛이 바랬다. 블라디미르는 다리를 꼬고 씩 웃었다. 유리가


세드릭을 만나고 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세드릭이 잠입할 것을 알았다. 그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감정으로 큰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깃이 움직이는 일을 모른다면 정보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없지.”

유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을 보고 블라디미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저러는군. 저러다 한 번 피를


… 아. 블라디미르의 진득한 시선이 붉은 입술을 따라가다가 입꼬리 쪽에 말라붙은 희미한 핏자국을
발견했다.

“왜 내게 말 안 했지?”

“왜 말을 안 했냐고?”
잠시만 빌려주는 아량을 받았으면, 좀 곱게 쓸 것이지. 기어코 흠집을 내. 블라디미르는 피어오르는
불쾌를 애써 참고서 대답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굳이… 너에게 말해야 할 필요를 모르겠는데.”

원래 저건, 자신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그물로 오는 물고기가 되어 자신이 잘 꾸민 어항 속에


고이고이 길러 예뻐했을 것인데. 도중에 그놈만 만나지 않았어도.

“말장난하지 마.”

“흠. 유리 네가 화를 내는 건 오랜만에 보는 거 같군. 보기 좋아.”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의 여유로운 말에 결국 유리가 먼저 소리쳤다. 세드릭을 제일 죽이고 싶어하는 놈이 자신을


만나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니.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간에서 떠들어 대는 평화를
위해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그는 평화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을 유리는 잘 알았다. 그런데 이 만남 속에 들어 있는 저의를


자신에겐 말하지 않았다는 건 자기가 모르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물론 결코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재회의 기쁨은 삽시간에 가시고 불길한 고동만이 유리의 안에서 퍼져나갔다.

“주변 관료들이 말하는 마누라 바가지가 이런 건가.”

“…뭐?”

“생각보단 나쁘지 않아. 계속해 봐.”

블라디미르는 대외적인 웃음을 짓다 말고, 갑자기 장난스러움이 번진 표정을 드러냈다. 마치 못 참겠는


것처럼.
“자주 하면 더 좋고.”

“헛소리하지 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유리의 고운 이마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블라디미르만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 태연하게 웃었다.

“그깟 정보 하나 안 알려줘서 섭섭하기라도 해? 참고하지.”

“…작전을 내릴 거면 똑바로 내려. 내가 관련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대체 뭐지?”

“이유?”

블라디미르는 테이블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위로 턱을 괴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옛정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은 엄연한 상사인데. 이거, 좀 너무한 처사 아닌가. 자기 밑에서 일하는 다른 놈들이 봤다면
기겁할 장면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유리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거 같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바라는 목적에 가까워졌으니까.”

“목적?”

“그래. 왜 세드릭 프림로즈를 안 죽였지?”

“…그건.”

“이상하군. 우린 분명 그놈을 사살하기로 최종 목적을 정했던 것 같은데.”

“평화 회담이 코앞에 있는데, 함부로 손을….”

“충분히 기회가 있었어. 그쪽이 먼저 침입했고.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블라디미르의 날카로운 추궁이 따라붙었다. 뻔한 대답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애초에 유리가 타깃을 바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한다는 쪽에 가능성을 높여둔 참이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물어볼 사람은 유리, 네가 아니라 나라는 걸 모르지 않겠지.”

블라디미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 투로 다시 강조했다. 유리는 자신에게 목적을 핑계로 말해주지 않는


블라디미르를 향해 입을 뗐다.

“…미친놈.”

“자주 듣는 소리야.”

블라디미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그에겐 그보다 더한 찬사도 없었다.

“나를 미끼로… 시험한 건가.”

함정이었다. 유리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죽여야 할 타깃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을 뻔히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좀 의외야.”

아니, 오히려 자신과 그가 만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가, 자신에게 감정을 드러내기를 고대했던
것처럼. 찰나의 틈이라도 보이기를 바랐던 것처럼.
“둘이서 꽤 좋은 시간 보냈다고 생각했거든.”

블라디미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리가 앉아 있는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블라디미르를 보는 푸른


시선에 미동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펜을 쥐고 있던 손이 유리의 턱을 슬며시 쥐었다.

“왜 여기에 아무도 없냐고 했던가?”

“별로 궁금하지 않….”

“네가 있는 객실을 감청하다 들은 신음 소리에 결국 못 참고 처리하러 나갔어. 나도 꽤….”

“닥쳐!”

“왜 그러지? 그게 네가 해야 할 일 아니던가.”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블라디미르의 손아귀에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살로메.”

돌아가는 고개를 힘있게 쥐고서 놓치지 말고 들으라는 듯이 블라디미르가 속삭였다.

“처음 너를 봤을 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사관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방학 때 잠시간 투입된 정보부에서 마주친 유리를
블라디미르는 아직도 기억했다. 여자보다 뛰어난 미색을 가진 것도 모자라, 사격 훈련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에 몸에 전율이 흘렀다.
특히, 그가 쏜 산탄총이 자신의 귀 옆을 스치는 것도 깜빡 모를 정도로. 상위 부서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고 정보부의 일개 요원으로 남아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놔.”

이 푸른 눈에 온전히 자신이 담기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이 응당 걸어가야 할 길을 벗어났다. 황홀한


눈빛으로 유리를 찬양하던 블라디미르는 잔잔히 떨리는 유리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세드릭이 입 맞춘
자리에 엎어지는 감촉에 유리의 목 뒤로 소름이 오싹하게 지나갔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 아느냐?’”

“비켜!”

“제 아무리 성자(聖子)라고 해도 너를 보면 동할 거다.”

반항하는 유리를 두고 블라디미르가 가볍게 제압했다. 아무리 훈련받은 요원이라고 해도 연속된 거친


관계로 힘이 빠진 사람 하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유리는 공백기도 있었지만 블라디미르는
아니었다. 이미 승부가 난 힘겨루기 후에 객실의 좌석 위로 뒷짐을 진 유리의 몸이 쓰러졌다.

“너랑 하룻밤을 보내는 놈들이 왜 반격도 못 하고 죽는 걸 알아?”

“윽!”

“살로메.”

군복 특유의 빳빳한 옷감이 끌러지면서 스치는 소리가 객실을 울리고, 등 뒤로 고정된 손목에 부드러운
줄이 뱀처럼 감겨 들어오며 결박했다. 무엇을 하려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반항하는 유리의 견갑골
사이를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무게로 누르며 귓바퀴 너머로 속삭였다.
“그대는 알몸으로 총을 들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야.”

* * *

의원실의 비서가 분주하게 나서는 세드릭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각하, 나가십니까?”

분명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이었는데. 혹시 그가 잊고 있던 일정이 있었나 비서가 곰곰이 떠올렸다.


세드릭이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고개를 까딱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

“타운하우스로 가십니까? 운전사를 불러드릴까요?”

“아니. 오늘은 혼자 따로 들릴 곳이 있어.”

세드릭은 평소 쓰지 않는 장식용 지팡이까지 옆구리에 끼고 실크해트를 쓰면서 웨스트민스터의 의원실을


나섰다.

평소 간결한 차림을 선호하는 세드릭의 성향을 아는 비서는 자기가 모르는 귀족들 간 비밀스러운 사교
모임이 있나, 추측했다.

“집사에게 미리 일러두겠습니다.”

“고맙네. 꽤 늦을지도 모른다고 전해주게.”

“예.”
의원실의 비서는 짧은 인사로 서두르는 세드릭을 배웅하면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사교 모임은 즐기시지 않는데 무슨 바람이 드셨지.’

세드릭은 그가 본 귀족 중의 귀족이지만 보통의 귀족과 달랐다. 일(Labour)을 천하게 보는 다른 귀족과


다르게 세드릭은 정치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나저나 요즘 부쩍 바깥 외출이 느셨단 말이지. 혹시….’

그렇다고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경매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먼지 쌓인 골동품을 모으는 괴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로 정부라도 두신 건가?’

세드릭이 나간 의원실을 정리하고 비서가 퇴근을 준비할 때, 야트막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비서가 문을 열고 세드릭의 부재를 알렸다.

“프림로즈 의원님은 나가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어머. 벌써요?”
노크의 주인은 세드릭의 약혼녀 아델라인이었다. 사교계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미모를 마주한 비서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예. 아델라이드 양.”

아델라이드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아쉬움을 토했다.

“그래요? 세드릭은 제게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아마 따로 약속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꽤 늦을 거라고 집사에게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복을 굴러 차는구나.’

참으로 죄 많은 남자다. 이런 아름다운 약혼녀를 두고 바깥으로 나돌다니. 비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디로 가신다고 말은 안 하시던가요?”

“글쎄요. 의원님의 개인 약속까진 제가 관여하는 게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아델라이드의 푸른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비서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비서님은 세드릭 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니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아델라이드 양.”

세드릭은 몰라도, 미인의 눈물에 이길 수 있는 남자는 굉장히 드물었다. 비서는 슈트 재킷 안쪽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델라이드가 반색했다.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신 모양이죠?”

“의원님은 아마….”

* * *

“좋은 저녁 시간 되십쇼, 의원님.”

“자네도.”

세드릭은 국회의사당 입구의 풋맨이 잡아준 블랙 캡에 올라탔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눈인사를 했다.
이름이나 작위를 굳이 대지 않아도 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남자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로.”

“예.”

행선지도 런던의 사교 클럽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세드릭이 서두른 덕에 런던의 출퇴근 인파에 밀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 스트리트에 여러 대의 블랙 캡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다들 몸이 달았군.’

오늘을 기다린 건 세드릭 자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세드릭이 타고 있는 블랙


캡의 문이 열렸다.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가 따라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시군요.”

“자네도.”

문지기는 세드릭 대신 택시 요금을 내며 세드릭을 스퀘어 앞에 우뚝 서 있는 사교 클럽의 입구로 모셨다.

“오랜만에 뵈어서 다들 반가워하실 겁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놀라서 기절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문지기가 세드릭의 자조적인 농담을 듣고 웃었다.

“하하,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두 분이나 계신 데 기절하긴 아깝습니다.”

특별한 손님이라. 그만큼 세드릭이 사교 클럽을 찾아온 게 별난 일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들어가시죠.”

그리고 세드릭이 평소 찾지 않는 사교 클럽을 찾아온 이유기도 했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장인이 죽기


직전까지 조각했다는 화려한 청동 부조 문이 열렸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옛 궁궐에서 가져온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여전하군.”

“오랜만에 뵈어서 영광입니다.”

바깥의 문지기를 이은, 현관의 포예(Foyer)에 서 있는 연미복 차림의 사교 클럽의 매니저가 세드릭을
알아보고 예를 표했다.

“위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지기가 여러 명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곳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소수에게만 허락된 장소였다.

“손님들은?”

“아직 2 층 내실에서 여독을 푸시는 중입니다.”

“우리 쪽은?”

“그로벤 대령을 제외하고 다 참석하셨습니다.”

“다 왔군. 대령은 보고만 마치면 곧 올 것이고.”


세드릭은 참석 인원을 보고하는 매니저에게 실크해트와 외투 따위를 맡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동인도
회사에서 약탈한 태피스트리로 바닥을 깔고 아프리카의 상아 조각이 화려한 벽지 위를 장식했다.

“…후우.”

한숨을 한 번 시원하게 내쉰 세드릭이 2 층 내실에 들어갔다.

“하하, 그랬지.”

“그랬던가? 난 기억이….”

“이게 누구야!”

“의원실에서 서류에 깔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프림로즈 백작 아닌가.”

위스키 잔을 들고 한창 떠들던 사내들이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중에 한 명이 두 팔을 벌려서 세드릭을


환영했다.

“이보게, 말해줘.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고 말이야.”

에저튼 후작 특유의 풍자에 세드릭이 바로 받아쳤다.

“의원실에 복잡한 외교부 서류를 늘려 놓은 사람들 얼굴은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지.”

에저튼 후작이 너스레를 떨면서 내실의 안쪽에 자리 잡은 젊은 남자에게 세드릭을 소개했다.


“하하, 실컷 보고 가게. 아 그렇지, 블라디미르 대령. 여긴 내 막역한 친우라오. 세드릭, 자네도
인사하게. 러시아에서 오신 중앙정보부 소속의 블라디미르 대령.”

목이 타는지 에저튼 후작이 크리스털 잔에 담긴 위스키를 들이켜는 동안 두 남자의 첨예한 시선이 스쳤다.

세드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블라디미르가 손에 쥔 크리스털 잔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반갑습니다, 세드릭…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악수를 받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오랜 기간 동안 훈련된 사람 특유의 몸짓을 은연중에 보였다. 특수


부대 소속이라고 했던가.

‘그와 같이.’

세드릭은 짧게 대답했다.

“세드릭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블라디미르의 회색빛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두 남자는 악수한 손을 놓지 않았다. 수컷들 특유의
힘겨루기가 여전히 이어졌다.

“의외로군요. 왕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제법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 미쳐 아쉽겠군요. 난 괴짜라서.”

손을 먼저 놓은 건 블라디미르였다. 그는 홈그라운드에서 위세를 떨 정도로 생각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아뇨, 재밌습니다. 앉으시죠.”

블라디미르의 손짓에 세드릭이 시종이 가져온 위스키 잔을 들고 입을 축였다.

“오늘의 주인공을 독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군요.”

세드릭이 블라디미르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영국 귀족원들의 눈길을 턱짓했다.

진심을 숨기는 세드릭의 모습에 블라디미르가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턱을 쓸면서 넌지시 물었다.

‘우리 귀족 나으리가 생각보단 쉽게 넘어오지 않는군.’


“체스는 좋아합니까?”

“즐기진 않지만.”

세드릭이 답지 않게 위스키 잔의 바닥을 빨리 비웠다. 그토록 바라던 목표물을 실제로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상하게 술이 당겼다.

“손님을 즐겁게 해줄 정도는 됩니다.”

블라디미르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잘됐군요. 전 체스 같은 고상한 게임은 젬병이라서. 이기는 맛이 좋을 겁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누구보다도 노련하게 체스의 말을 움직일 사람이었다. 블라디미르가 팔짱을 끼고


자리를 따로 만들자고 권유했다.

“의원님은 번잡함을 즐기는 편입니까?”

“그다지.”

짤막한 대답을 들은 블라디미르가 피식 웃었다.

“조용한 곳이 좋겠습니다.”

“바라던바.”
위스키의 원액을 꽤 진하게 탄 크리스털 잔을 들고 둘이 자리를 옮기자 에저튼 후작이 세드릭을 세웠다.

“자네, 벌써 자리를 파하는 건 아니겠지?”

세드릭이 에저튼 후작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럴 리가. 제대로 손님 대접하려는 참이네.”

귀족원의 중심에 있는 세드릭이지만, 평소 사교 클럽의 일원과 독대하지 않는 성향이 강했다.

‘먼 곳에서 온 중요한 손님이지만 세드릭이 독대를 한다고?’

에저튼 후작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세드릭을 뒤따라 오던 블라디미르가 덧붙였다.

“서로 구면이라.”

“아, 그러고 보니 세드릭 자네. 중립 진영에서 지낸 적이 있었지.”

“좋은 저녁 보내길.”

에저튼 후작을 비롯한 내실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을 따라붙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서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은 금방 대화를 재개했다.

독실에 들어온 두 남자는 사교 클럽의 시종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차려둔 체스판 양쪽에 섰다.

세드릭이 손짓했다.

“선호하시는 대로.”

“흑에 서겠습니다. 이쪽만 해서 익숙합니다.”

블라디미르의 빠른 결정에 세드릭이 백에 앉았다. 블라디미르가 세드릭에게 권유했다.

“시작하시죠.”

세드릭이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고 폰을 앞으로 움직였다.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세드릭의 손을 스쳤다.

“귀족치곤 험한 일을 즐기신다더니.”

블라디미르도 제 앞의 검은 폰을 움직였다.

“소문이 과장된 건 아닌가 봅니다.”

뒤따라서 세드릭의 손이 움직였다.


“거짓은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글쎄요. 의원님을 따라다니는 소문에 거짓은 없는 거 같던데.”

‘왜 이러실까.’

원하는 바가 있어서 자신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 아닌가. 블라디미르는 세드릭의 체스 말을 잡아챘다.


손쉬울 정도로 시시한 움직임이었다.

“거짓 안에 진실이 가려져 있다면 다른 이야기죠.”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였나? 실망스럽….’

블라디미르가 말하며 세드릭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얌전빼던 세드릭의 손은 날카로운 수를 뒀다.

“진실을 찾겠다고 너무 앞서가면.”

툭, 블라디미르의 자신 있던 체스 말이 사라졌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더군요.”
세드릭의 반격에 당한 블라디미르의 입매가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세드릭의 말처럼 앞서나간
블라디미르의 앞에는 백색의 체스 말만 남았다.

“…의원님, 내기는 좋아하십니까?”

명백한 경고였다. 세드릭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법에 당했다. 세드릭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기에 따라 다릅니다.”

“들어보시면 의원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번에 제 밑으로 들어온 부하인데.”

세드릭의 손이 체스판 위로 가다가 멈췄다. 그걸 포착한 블라디미르가 말을 이어갔다.

“의원님의 약혼녀와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

“우연찮게도 말이죠.”

우연. 세드릭의 약혼녀와 유리를 비교하는 말에 세드릭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갔다. 두 손을 맞잡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대령,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저는 제 부하를 걸겠습니다. 의원님은?”

“그것참 유감이로군요. 난 부하가 없습니다.”

세드릭의 대답을 들은 블라디미르가 체스 말 중에 퀸을 거침없이 밀었다.

“아쉽군요. 그럼 의원님을 거시는 건?”

“…유능한 부하인 거 같은데, 나 같은 허울 좋은 귀족원 하나로 되겠습니까?”

세드릭은 체스판 위에 있는 나이트를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블라디미르가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요. 차고 넘칩니다.”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chapter 32

* * *

창문 하나 없는 독실에서 이루어진 게임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갔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두 남자의 복장도 꽤나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빠짐없이 채워진 단추들이 벌어지며 틈새로 근육의 결을 내보였고,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머리카락은
까마귀들의 둥지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체크메이트.”

세드릭의 승리였다. 블라디미르가 가볍게 손짓하자, 검은색의 킹이 체스판 위로 툭, 기울어졌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연초가 블라디미르의 마음처럼 타들어 갔다. 담뱃재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 위로
비벼 끄면서 블라디미르가 허탈하게 말했다.

“여왕을 숭배하는 사람이 퀸을 그렇게 쉽게 희생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체스 말 위로 악수가 오갔다.

“희생 없는 승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블라디미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도 의외의 대답이었다.

“휴전을 이끌어가는 당원이 할 소리는 아니군요.”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입니다.”

서로의 대답에서 이념의 대립이 엿보였다. 국책은 따르지만 태도는 명백하게 반대인 세드릭. 중앙의
정책은 어쨌든 군말 없이 따르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비우며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까딱였다.


“동지들이 기다릴 것 같아 이만 가봐야겠군요. 오늘 게임, 즐거웠습니다.”

세드릭은 아직 남은 위스키 잔을 흔들며 답했다. 잔에 담긴 둥근 얼음이 두둥실 떠다녔다.

“덕분에.”

세드릭의 여유 넘치는 모습에 블라디미르는 속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제 부하, 약속대로 오늘 밤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피로한 가운데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교차했다. 살벌한 기운이 오갔다.

블라디미르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술기운이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절대로 지고는 못 사는 남자였다.

“제 부하가 고귀하신 분의 취향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엔드 게임에서 집중을 못 하고 악수를 뒀다.’

블라디미르의 도발에 세드릭이 긴 게임 동안 시달린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대령. 적어도 오늘 게임보단 기대가 됩니다.”

“그것참.”

블라디미르의 패배를 부각시키는 세드릭의 말에 악수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광입니다.”

‘저 반반한 낯짝을 지금이라도 패주고 싶은데.’

* * *

‘오늘 밤인가….’

마지막 손님이 떠난 사교 클럽의 화려한 벽지에 기댄 세드릭이 천장의 석고 부조를 남은 술기운으로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전날 저녁에 세드릭을 환영한 매니저가 와서 준비를 알렸다.

“백작님, 준비됐습니다.”

“벌써? 오늘은 또 다들 발이 빠르군그래.”

투덜대는 세드릭에게 매니저가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같이 간 숙취용 주스를 건넸다.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긴장한 모양입니다.”

셔츠의 팔과 목 부분을 대충 풀어헤친 모습이 돌아온 탕아라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세드릭은 씁쓸하게
찌푸린 미간으로 빈 잔을 매니저에게 넘겼다.

“그간 준비해온 게 있는데 긴장할 게 있나.”

“이번은 좀 대담한 축에 속하니까요.”

벽 쪽의 태피스트리를 걷어내고 화려한 무늬의 벽지 한구석을 손으로 더듬어서 눌렀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는 벽지가 스르륵, 튀어나오며 비밀의 문을 보였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매니저의 배웅에 세드릭이 손에 쥔 지팡이로 벽지를 불만스럽게 두드렸다.

“악담도 여전하군그래.”

비밀의 문을 타고 깊숙하게 만들어진 벙커로 들어가자 영국 보안국 요원들이 테이블 앞에 서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보안국 요원들이 세드릭을 보고 반색했다.

“오셨다, 오셨다.”
“나으리, 꼴이 왜 그러슈?”

“사우스 런던에서 한창 털리고 온 홈리스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네.”

신랄한 평에 세드릭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시끄러워. 골 아프니까 그런 건 나중에 말해.”

보안국 요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스킷을 하나씩 쥐고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술도 못 마시는 양반이 왜 그렇게 퍼마셨대?”

“실연당하셨소?”

“하여간 죄 많은 남자야. 예쁜 약혼녀를 떼놓고 다니니까 그렇지.”

“손님이 와서 가볍게 놀아줬을 뿐이야. 이상한 말은 그만해. 사교계의 마담들보다 자네들이 더 하군.”

세드릭은 어젯밤 내내 퍼다 마신 위스키로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동료 요원들에게 짜증을 냈다.


매니저가 가져다준 숙취 음료가 아직 돌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 있을 갈라 파티는 참석 가능하신 거요?”

“물론. 보고할 사항은?”

숙취에 찌든 세드릭이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자 다들 재잘재잘 떠들면서 차를 마시던 것을 멈추고


차례대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연방은 덩케르크에서 함선을 통해 도버해협으로 잘 넘어왔습니다. 약 4 팀으로 나눠서 대사관
근처의 벨그라비아와 첼시에 체류 중입니다.”

“연합국은 현재 런던 중심부의 메이페어와 러셀 스퀘어에 체류 중입니다.”

먼저 티 테이블보에 가려진 런던 지도에 분필로 바르샤바 연방이 머무른다는 중심가 쪽과 연합국의 주요


장소를 체크했다. 세드릭은 제 앞에 따라진 찻잔을 기울이면서 요청했다.

“이번 갈라 파티 작전에서 연합국의 공조는?”

“프랑스 공화국의 함대 3 대가 칼레에서 출발했습니다. 갈라 파티 시간에는 이스트 틸버리 쪽에서 대기할


예정입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전투기 16 대를 앤트워프에서 대기시키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동유럽 전선에서 서로 폭격을 퍼부으며 싸우고 있던 나라들이다. 휴전 선언을 겸한 파티가


열린다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까딱하면 런던에서 국가 사이에 축소형 3 차대전이 이루어질 판이었다. 세드릭이 체크된 런던 위 지도를
보다가 굳은 마디로 지도를 툭, 툭 쳤다.

‘갈라 파티가 켄싱턴 하우스에서 열리니 습격에 대비하려면….’

“이슬링턴과 트라팔가에 근위대를 배치하라고 런던 방위 부서에 연락해.”

“알겠습니다.”

연락하러 떠나는 요원을 뒤로하고 세드릭이 다른 요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티 참석 인원은? 변동 없나?”

“러시아 연방 쪽만 인원이 줄었습니다.”

“…러시아가?”

‘그럴 리가 없다.’

세드릭은 바로 의심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러시아가 주축국의 가장 중심이 되는 나라다.

대륙에서 횡단 열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도 그쪽이 가장 많은 인원의 참가를 알렸다. 보고하던 요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는 장교들이 아니라 부사관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참여를 제재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러시아 연방 인원의 체류지가 정확하게 어디지?”

세드릭의 추궁에 요원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다시 뒤적거리며 보고했다.

“어… 켄싱턴 하우스랑 가까운 클랜리카르드 6 번가입니다.”

“켄싱턴 하우스랑 가깝다고?”

세드릭이 바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원이 빠졌는데 체류 위치는 갈라 파티장과 5
분 거리 남짓. 너무나 노골적인 습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람 보내서 참가 인원 다시 받겠다고 전해. 사람이 갑자기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주축국의 다른 인원은?”

“그대로 참가합니다. 주요 인사인 폴란드 공화국의 비톨트 기에레크, 동독의 에리히 울브리히트 그리고
….”

주축국의 인사를 보고하던 요원이 마지막 이름을 읊었다.

“러시아 연방의 블라디미르 체르넨코 대령은 그대로 참가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파일.”

세드릭이 손을 뻗자 요원이 들고 있던 보고서 뭉치를 넘겨줬다.

“여기 있습니다.”

세드릭은 받자마자 바로 러시아 연방이라고 체크 된 부분을 읽었다. 빼곡하게 종이가 끼워져 있는 서류


위로 〈기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파라락 소리를 내며 넘어가던 서류의 페이지가 익숙한 사진
위에서 멈췄다.

‘블라디미르 대령이라….’

사진의 주인공은 그와 새벽이 새도록 체스 게임을 하던 남자였다. 전 정보부 수장인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은 젊은 수뇌부. 사교 클럽에서 몸풀기처럼 맛본 그의 제안은 노골적이었다.
-이번에 제 밑으로 들어온 부하인데. 의원님의 약혼녀와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귀족원의 일원이자 정계에 깊이 몸담은 세드릭에게 약혼녀의 유무를 제쳐두고, 사실 그런 종류의 제안은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이었다. 물론 평소의 세드릭이었다면 분명 그런 노골적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사람 붙여.”

하지만 그의 밑에 딸려온 부하가 누군지 아는 이상.

“알겠습니다.”

그럴 수 없었다. 세드릭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직접


접촉하는 걸 봐도 목적이 뚜렷했다.

“아니. 내가 간다.”

‘타깃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누구를 노리는지는 불투명하다. 세드릭이 여왕의 사촌인 이상, 왕위계승권에 가까운
왕족이었다.

보안국의 요원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의원님이 직접 하신다고요?”

“저번에 특급열차 작전도 보안국의 책임자가 난리를 피우지 않았슴까?”

“그러니까요. 누구 핏줄이신데. 너무 피가 끓는 거 아니십니까?”

어김없이 쏟아지는 1 차 잔소리에 세드릭이 이마를 짚었다. 보안국의 왕족 관리인이 세드릭 자신이 나설
때마다 난리 치는 것도 버거운데 이젠 동료들까지 난리였다.

“내가 사라지면 계승권 구도가 깔끔해지고 좋을 텐데 자네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태산이군. 마가렛이
슬퍼하겠어.”

여왕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세드릭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허공에 툭툭, 휘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 갈라 파티 작전을 설명한다.”

일어선 세드릭이 런던 지도에 표시된 하이드 파크 입구의 켄싱턴 하우스를 가리켰다.

“오늘 밤 8 시, 갈라 파티가 켄싱턴 하우스에서 열린다. 초대장이 없는 인원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이건 중요인물이든, 진영을 불문한 철칙이고. 문제는 습격이다.”

덩치가 좀 있는 요원이 투덜거렸다.


“하여간 이놈의 공산당 놈들. 뒤통수도 빨간 녀석들 같으니라고. 미국 놈들 끼어드니까 바로 휴전 선언
들어가자고 해놓고 이게 무슨….”

“바르샤바의 변덕이 이미 하루 이틀인가.”

세드릭이 찻잔을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 특급열차 작전 보고서에서도 봤겠지만. 바르샤바는 이번 갈라 파티의 습격을 위해 대량의 총기를


챙겨온 건 물론.”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어깨 쪽을 가볍게 툭, 툭 쳤다.

“특수 부대 요원을 비서나 서기관, 보좌관 등으로 둔갑시켜서 투입시켰다. 이건 분명히 대인원이 모이는
이벤트에서 습격을 계획한 명백한 증거고….”

이번 파티의 습격을 대비해서 고용한 메이드나 버틀러들도 보안국에서 협조받은 장교들이나 부사관
출신들이었다. 세드릭의 켄싱턴 하우스를 눈짓했다.

“습격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용인으로 위장한 호위들과 함께 주요 인사를 안전하게 내보낸다.”

“알겠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슬링턴과 강 건너 워털루를 짚었다.


“근위대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미리 신호를 보내서 켄싱턴 하우스와 클랜리카르드 6 번가를 포위한다.
추가적인 발포와 공중전, 혹은 해상전은 이후의 추이를 보고 결정한다.”

“넵.”

“우리는 총격전에 직접 맞서진 않는다. 그랬다간 자칫 고위 인사가 휘말리면서 피해가 커질 수 있어.


최대한 민간 쪽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요원들은 세드릭의 지시를 메모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사살이 불가피할 경우.”

런던 위의 지도를 짚던 세드릭의 손끝이 스스로에게 향했다.

“살인 면허가 있는 내가 처리하지.”

살벌한 선언과 다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 * *

“운전사를 불러드릴까요?”

“음.”

세드릭은 한참 동안 귀족원을 위한 사교 클럽에서 보안국 요원들과 회의를 했다. 클럽의 매니저가 불러준
블랙 캡의 뒷좌석에 비스듬하게 앉았다.

“고맙네.”

“아닙니다. 들어가시면 푹 쉬십시오.”

사교 클럽 매니저의 배웅을 뒤로하고 세드릭을 태운 블랙 캡이 아침이 밝은 번화가, 피커딜리 서커스를


달려나갔다.

“도착했습니다.”

“고맙네.”

피곤을 짊어진 세드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젠트 파크 아래 로열 크레센트에 위치한 타운하우스에


도착했다. 그가 내리자 타운하우스의 집사장이 현관 쪽 창문에서 포착하고 맞이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연락받았습니다.”

“그래, 알버트… 으.”

‘무리했나.’

세드릭은 얼굴을 찌푸리고 끄트머리에 은색의 장식이 달린 지팡이로 기대어 서서 뒤늦게 온 숙취의
후폭풍을 견뎠다.
“제게 기대십쇼.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알버트 집사장이 세드릭을 부축해서 타운하우스 안으로 이끌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세드릭이 들어가면서
목욕물의 안부를 물었다.

“알버트, 혹시 목욕물을 받아뒀….”

“세드릭 님!”

하지만 그의 품에 달려든 사람의 존재 때문에 피로를 풀기는커녕, 더 쌓였다. 세드릭은 자신의 품에


뛰어든 약혼녀의 어깨를 잡고 확인했다.

“…아델라인?”

“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에서 있으셨나요? 옷차림은 또 왜 이러시고….”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또 다. 분명히 사적인 공간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세드릭은


한숨을 쉬면서 아델라인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냈다.

“일이 있었어.”

아델라인의 호기심 어린 푸른 눈이 반짝였다. 세드릭은 듣지 않아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내용을 알았다.


일 났군. 안 그래도 피곤한데.
“무슨 일을 하시느라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세드릭이 다루는 일은 일반인에 가까운 그녀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기밀 사항이었다. 그걸 모르는


아델라인은 실망감이 어린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걱정했어요. 어제저녁부터 찾았는데 오시지 않아서….”

세드릭의 눈길이 집사장 알버트에게 향했다. 알버트가 난감한 기색으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름다운 약혼녀는 어제저녁부터 약혼자의 타운하우스에서 기다린 것이다.

“걱정이 과해. 자리를 비웠으면 돌아갔어야지.”

“그, 그게.”

아델라인은 차마 세드릭에게 약혼녀인 자신을 두고 정부가 생긴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밤새워 약혼자의 타운하우스에 있는 건 사교계에서나 좋아할 가십거리인 걸 모르나?”

세드릭은 정중한 사람이지만 증거 없는 의심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의심에
불쾌함을 느끼고 파혼 의사를 내비칠 수도 있다.

그녀가 뒷배가 있는 집안의 여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한미한 가문 출신인 이상 그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은 결과가 있을 리가 없다.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세드릭은 아델라인을 현관 쪽으로 밀어내며 집사장을 질책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알버트!”

“예, 아가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 세드릭. 물어볼 게 있어요.”

아델라인이 사교계의 추문을 무릅쓰고 찾아온 게 무색하도록 바로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세드릭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빨리 말해. 오늘은 인내심이 좋은 날이 아니니까.”

‘들으나 마나 주말에 케임브리지에 가서 펀팅을 해달라는 거겠지.’

“오늘 켄싱턴 하우스에서 외교부와 하원 의원, 그리고 귀족원들과 함께 갈라 파티가 있다고 들었어요.”

의외의 내용에 세드릭은 놀랐다. 평소 사교계 행사나 젊은 커플 특유의 이벤트만 관심 있는 그녀의


화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뭐?”

세드릭의 반응에 아델라인이 속으로 옳거니, 외치면서도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어째서 제게 파트너 신청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설마 저를 두고 다른 여성분과 함께 참석할 생각은
아니시죠?”

이걸 단순한 갈라 파티라고 생각하면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번 일은 순진한 그녀가
생각하는 화려한 궁정 파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언제 서로의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살벌한 파티장을 내세운 전쟁터였다.

세드릭은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런 생각은 아니야.”

“전 세드릭의 정식 약혼녀인 만큼 참석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요?”

난감 그 자체였다. 물론 평소 같았더라면 대충 ‘그렇다’ 말해줄 수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돼. 당신뿐 아니라 많은 레이디가 이번 파티에 불참해. 그걸 모르나?”

위험한 일이 터질 거라고 예측하는 만큼, 최소한의 필요 인원을 빼면 일반인은 이번 파티 참가 인원에


넣지 않았다. 세드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델라인의 서운함과 고집은 여전했다.

“하지만 포츠머스 자작부인과 퀸즈베리 남작부인, 몇몇 귀족 부인들도 이번 파티에 참석한다고


들었는데요.”

이런. 그들은 보안국 소속의 요원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아델라인에겐 애정없는 약혼자의 횡포로


보일 뿐.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안 돼.”

“왜요? 제 앞으로 나온 초대장이 없는 건가요? 여왕님이 주최하시는 갈라 파티면 분명 제 앞으로도 나온


초대장이 있는 거잖아요?”

“아델라인.”

물론 그렇다. 다만 세드릭은 아델라인에게 초대장을 전해주지 않았을 뿐. 그사이에 관련된 몇몇 귀족


부인들이 참석한다는 말에 말이 퍼지고 아델라인의 귀에 뒤늦게 들어간 모양이다. 세드릭이 딱 잘라
말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이번 파티는 안 돼.”

“하지만….”

“돌아가도록, 피곤하니까.”

세드릭은 가까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약혼녀를 어렵게 보냈다. 다른 사람의 어리광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아서 유난히 약해지는 감이 있었다.

‘새벽 나절 내내 그 얼굴만 떠올렸던 탓인가.’

세드릭이 자조적으로 웃고서 2 층의 욕실로 올라갔다.

* * *
“하아….”

알버트가 미리 물을 받아둔 욕조에 들어간 세드릭이 눈을 나른하게 떴다. 물기로 젖은 얼굴이 지독하게
섹시하게 보였다. 그는 천장에 금으로 장식된 장미 부조를 보면서 저녁에 있을 갈라 파티 작전을 다시
정리했다.

‘파티장 안에서는 블라디미르 대령을 마크하고… 여왕은 역시 대역을 내세우는 게 좋겠어. 출발 전에


시종장에게 일러둬야겠군.’

지금 당장 작전의 일부를 왕실 쪽으로 전달하면 끄나풀이 알아채고 보고할지 모른다. 대역 같은 경우는


아마 여왕인 마가렛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고. 놀라워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뭐.

‘뻔하지.’

총성이 오가며 개판이 된 파티장. 아무리 일반인의 출입을 최대한 줄였다곤 하지만 관료들의 멱따는
소리가 켄싱턴 하우스의 천장을 뚫어버릴 것이다.

세드릭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젖은 얼굴을 쓸었다. 그 가운데 세드릭 자신과….

‘다시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유리는 그를 반가워할까. 아니면 총을 들고 나타난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적어도 열차


안에서 만난 유리는….
‘한결같아. 숨기고 싶어 하는 필사적인 얼굴은….’

찰랑, 하는 소리와 함께 욕조 위의 수면이 일렁였다.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그가 자조적으로 웃고 욕조에 기대어 눈을 감고 다시 몸을 깊게 담갔다.

* * *

[무전 테스트 아, 아, 들리십니까.]

“윽.”

세드릭이 턱시도 소매 쪽의 커프스 링크를 채우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귀 안쪽에 끼워진 무전이 통신
불량으로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보안국 요원이 무전에다 대고 사과했다.

[아이고, 방금 건 실수.]

“실전에 뛰어들기도 전에 죽을 뻔했군.”

[그런 분들이 꼭 제일 오래 살더라고요.]

세드릭이 피식 웃으면서 자주 쓰는 권총, 베레타의 탄창을 끼워서 장전시켰다. 평소라면 안전을 위해


그러지 않겠지만 즉시 격발을 위한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다가 믿었던 동료에게 죽는 법이지.”

[살벌한 농담이네요. 참, 새벽에 말씀하신 근위대는 예정대로 이슬링턴과 워털루에 배치했습니다.]

세드릭은 장전된 베레타를 하얀 턱시도 드레스 셔츠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홀스터에 걸었다. 그 위로 잘


손질된 까만 턱시도 재킷이 사뿐히 덮어서 가렸다.

“바르샤바 사람들은?”

[바깥에서 수상한 움직임은 따로 없습니다.]

“얌전 빼는 모습에 속지 마. 안에서 탄창을 몸 안에 최대한 많이 숨기느라 지금쯤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까.”

[물론이죠. 참, 우리가 주목하는 블라디미르 대령 같은 경우는 보좌관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이후로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답니다. 즐거운 시간을 즐기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세드릭이 보안국 요원의 보고를 듣고 갈라 파티에 참석하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던 손을 멈췄다.

“…보좌관을?”

그가 아는 블라디미르 대령은 보좌관을 꽤 여러 명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 유리가 있었다. 요원은


놀랍지 않다는 투로 보고를 마쳤다.

[뭐, 대령도 한창 색을 밝힐 남자니까요. 원래 남색을 좀 했다는 소문이 돌긴 합니다.]

“그걸 적진 한가운데에서 드러내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군인들 중에 남색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드물지. 그나저나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제임스는 계속해서 선정적인 보고를 이어갔다.

[다니엘 말로는 그 보좌관, 남자인 게 안 믿길 정도로 굉장히 예쁘다고 하던데요. 여담이지만.]

“…그래?”

직접 보지 않았지만 누군지 알만했다. 유리였다.

[예. 아쉽네요. 이번 갈라 파티 작전에 실전 투입되면 미인 좀 구경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원래


미인이 유명하잖아요?]

블라디미르, 그가 유리를 방으로 불러들인 건 뭐. 뻔한 목적이다. 애초에 유리는 베갯머리 송사용


스파이로 키워졌으니. 세드릭은 러시아의 미인 특수부대 요원이 궁금하다는 보안국의 동료에게 헛웃음을
쳤다.

“한눈팔다가 목 날라간다.”

[그것참, 무서운 말이네요. 이번에 무장은 몇 개나 챙겨가십니까?]

그는 총격을 대비한 베레타와 예비용 탄창을 하나 더 들었다. 왠지 총을 쏠 일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았다.

“베레타 92 에 탄창은 네 개 정도.”


[오늘이 꽤 격렬한 날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챙기셨는데요. 의원님, 누구 하나 제대로 죽일
생각이십니까?]

세드릭과 농담을 주고받던 요원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관료 인사들의 호위에 집중하느라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줄 알았다.

“원래는 조용히 넘어갈까 했는데….”

세드릭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바뀌었어.”

#chapter 33

* * *

-켄싱턴 하우스, 저녁 8 시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켄싱턴 하우스 입구의 살벌한 보안 요원들을 지나쳐서 레드카펫이 깔린 중앙
연회장엔 왈츠곡이 울려 퍼졌다. 합주곡처럼 낯선 억양이 부드러운 연회 음악에 녹아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군, 먼지 풀풀 날리는 전선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환한 곳에서 보니 감회가 다르군요.”


관료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턱시도 차림, 군 장교들은 정식 제복에 견장과 훈장을 빠짐없이 달았다.

“하하, 앞으로 이런 날이 더 많아야 할 텐데요.”

손에는 휴전을 축하하는 둥그런 쿠페 잔을 하나씩 들면서 연신 이어지는 대화로 마르는 입을 축였다.

“입장.”

연회장으로 들어온 세드릭도 제 옆에 멈춰선 버틀러의 은쟁반 위에 놓인 샴페인 쿠페 잔을 들었다. 그의


혼잣말에 귀에 꽂힌 무전이 답했다.

[M 의 마차는 출발. 우선은 대기.]

M 은 여왕인 마가렛의 코드였다. 대역이 탔다는 신호를 들은 세드릭은 샴페인으로 타는 목을 적셨다.

세드릭의 시선이 화려한 불빛이 가득 찬 연회장 곳곳에 포진한 주요 인물의 위치를 파악했다.

“제독도 지난밤 공연을 보러 가셨습니까? 로열 오페라단의 극이 꽤 훌륭하더군요.”

‘폴란드 공화국의 비톨트 기에레크.’


“개인적으로 발레는 러시아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럽니까?”

‘동독의 에리히 울브리히트.’

‘러시아 연방의….’

“블라디미르 대령.”

이름을 불린 블라디미르가 손가락 사이에 걸친 샴페인 쿠페 잔을 굴리던 것을 멈췄다.

“글쎄요. 난 프랑스 쪽의 발레 스타일이 더 좋다고 하면.”

진한 카키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블라디미르의 한 발짝 뒤로, 보좌관들이 입는 까만 제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음, 이건 너무 속 보이는 대답인가?”

“하하, 대령은 러시아 사람치고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군요.”

연합국 쪽의 인사가 블라디미르의 능청에 웃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가 몸을 틀어 뒤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때, 유리 네 생각은.”

[근위대 이슬링턴과 워털루로 이동 중. 10 분 안에 배치 완료.]

“….”

세드릭의 귀에 무전을 통해서 보고가 들어왔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유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시한 대답이었지만 대답의 주인공은 전혀 시시한 미모가 아니었다.

[…의원님? 들리십니까? 혹시 화장실 가셨습니까?]

세드릭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의아함이 가득한 보고가 따라붙었다. 세드릭이 연회장 기둥 쪽으로 몸을
숨기고 뒤늦게 소리를 내었다.

“…음.”

[놀래라. 순간 화장실에 빠져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동료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자네, 꿈이 크군.”

한눈을 팔다 죽는 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지도. 지금 상황에마저 자신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면 어찌하잔 말인가. 세드릭이 자조적으로 생각하면서 보고를 들었다.

[M 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곧 연회장으로 입장할 예정입니다. 습격은 아마 M 이 드러나자마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알겠다.”

[다음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대기.]

긴장감을 두른 가운데 여전히 그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만 꽂혀 있었다. 세드릭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닿았다. 다들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이쪽은…?”

“옷차림을 보아하니 블라디미르 대령의 보좌관인 모양입니다.”

블라디미르가 사나운 눈매를 휘었다. 아, 이래서 러시아에서 데리고 나오기 싫었는데.

“예. 무척 아끼는 부하죠.”

“대령, 자랑 좀 해주시죠. 궁금하군요. 그쪽도 정보부 소속입니까?”

유리가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

“대령과 다르게 보좌관은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이군요.”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업무만 아는 충직한 부하라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유리에게 유독 관심을 가지는 이탈리아 대사의 눈빛이 뱀처럼 옭아맸다.

“이런, 지루한 정보부 업무만 하기엔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 아까운 거 아닙니까? 대령, 이런 부하가
있으면 종종 알려줘야지 않겠습니까.”

“하하, 최근에 불러온 부하라서. 미리 기별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노골적인 요구였다. 블라디미르는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빈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나중에 한번 따로 소개시켜드리지요.”

“대령, 언제까지 런던에 있습니까?”

“저도 궁금하군요.”

은밀한 접대 의사에 연합국, 추축국을 불문하고 블라디미르에게 주요 인사들이 쉴새 없이 말을 걸었다.


블라디미르는 말없이 사교적인 웃음을 짓고 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아.”

마찬가지로 맞춤 턱시도를 입은 세드릭이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교차했다. 블라디미르가 새로운


샴페인 잔을 들고 세드릭에게 성큼 다가왔다.

“기다렸습니다, 프림로즈 의원님.”

“…제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게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럴 리가요. 딱 알맞게 오셨습니다.”

유리의 흔들리는 시선이 세드릭에게 닿았다. 긴 세월을 넘어서 비로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 말한….”

블라디미르가 유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부하입니다. 유리, 이쪽은 세드릭 의원.”

“…반갑습니다.”

“마찬가지.”

어색한 인사가 오고 갔다.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에

“좋은 저녁 되시길.”

그가 유리의 어깨를 손으로 툭 치고 인파를 향해 몸을 돌리다가 당부했다.


“참, 부탁이 하나 있는데.”

블라디미르가 유리를 한 번 보고 짙은 미소를 올렸다.

“너무 험하게 쓰는 건 자제해주시길. 망가지면 곤란하거든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찾는 사람이 많다’며 블라디미르가 멀어져갔다. 분명 그들이 있는


연회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단둘이서 남겨진 세계에 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저.”

“…그.”

둘의 입이 동시에 열리고, 무안한 침묵이 흘렀다. 세드릭이 재빨리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

“먼저 말해요.”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리가 잠시 머뭇대더니 대화의 서두를 끊었다.


“오랜만… 입니다.”

유리의 붉게 물든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입술이 부풀어 올라 보이는 건 세드릭 자신의 착각인가. 그의


어두운색 눈이 가늘어졌다.

“…프림로즈 의원님.”

원인은 그 남자인가. 세드릭의 머리에 낮에 제임스가 보고한 쓸데없이 선정적인 내용이 떠올랐다.

“…몇 년 만이죠?”

-보좌관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이후로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답니다. 즐거운 시간을 즐기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세드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무슨 멋없는 인사인가. 이게 다 제임스가 말했던 쓸데없는 보고 때문이다.

‘젠장. 그래머 스쿨 다니는 철없는 애도 아니고.’

세드릭이 속으로 질책하는 동안 연회장 기둥 그림자에 가려진 유리의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8 년만입니다.”
“…건강해 보입니다.”

기껏 나온 말이라곤 안부였다. 제 맘대로 나오지 않는 입을 두고 세드릭이 속으로 애를 끓었다. 평소에


표정 하나 없는 인형 같은 사람이 웃어서 당황했던 탓이다.

덕분에 멋이라고는 귀 씻고도 없는 소리를 해버렸다. 유리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런 서툰 안부


인사마저도 기쁜 기색이었다.

“의원님도….”

“세드릭.”

“…네?”

유리의 시선이 살짝 찌푸린 세드릭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봤다.

“8 년 지났다고 설마 이름도 까먹은 겁니까?”

세드릭이 유리를 보던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섭섭하게. 긴장한 유리가 마른 입 안에 고인 침을


가까스로 삼켰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이런 자리에서 자신이 알아보면 세드릭이 곤란해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지난 세월 동안 마음에


묻어둔 이름을 불렀다.
“…세드릭.”

“나쁘지 않군요.”

세드릭이 짧게 답하고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벌컥벌컥 비웠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목이 탔다.


유리가 한창 주요 인사들과 파티장의 중앙에서 단란하게 담소를 나누는 블라디미르를 지켜봤다.
블라디미르가 사람들 사이에 분주한 지금.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말해야 해. 유리의 심장이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말해놓고도 염치가 없었다. 적대국의
대표로 만난 사람에게 부탁이라니.

“부탁?”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유리는 속으로 멍청한 자신을 탓했다. 이상하게도 이 남자의 앞에선 평생에 혹독한 훈련으로 익혀온
절제심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곧 습격이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유리가 세드릭의 팔을 잡고 가까이서 속삭였다. 모르는 사람이 둘을 봤더라면 꽤나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을 테다.
“지금 뭐라고….”

세드릭은 유리의 고백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요 작전을 말할 줄은 몰랐다. 유리는 그걸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오해했다. 유리의 어투가 다급한 마음처럼 점점 빨라졌다.

“물론 제 말을 믿기 힘드시겠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당신도.”

그때도, 지금도. 세월이 지나도 그 마음 하나만큼은 여전했다. 세드릭의 턱시도 재킷의 소매를 쥔 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왕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몸을 피해야….”

그 순간, 연회장의 입구 쪽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드릭의 귀에 달린 무전도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M 입장, 요원들 제자리로.]


오늘 파티를 주최한 여왕의 출현이었다.

“대영제국과 영연방을 다스리는 마가렛 3 세 여왕 폐하 납시오!”

유리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세드릭에게 보고한 보안국 요원의 말대로 여왕의 등장을 시작으로
연회장을 습격하기로 했다.

유리의 시선은 곳곳에 장교와 보좌관으로 분장한 낯익은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향했다. 모두 작전대로
인파에 섞여서 움직이면서 몰래 무장한 무기들을 꺼내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탕!

[M 피격, 작전 개시!]

“꺄아악!”

“여왕님이!”

연회장의 2 층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저격수의 총탄에 여왕이 쓰러졌다. 여왕의 붉은 가운이 붉은 피로


참혹하게 물들어갔다. 유리의 시선이 옆에 있던 세드릭을 먼저 살폈다.

-탕, 탕!

“엎드려!”

[파티장의 인원을 최대한 엄호하겠습니다.]


지켜보는 게 오래가진 못했다. 세드릭이 유리를 안아서 그들이 서 있던 연회장의 기둥 뒤로 숨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미리 준비한 권총을 꺼내서 총탄이 아비규환이 된 파티장의 총성에 더했다.

-와장창!

오가는 총성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테이블 위로 떨어지면서 시원하게 박살 났다. 서로의 진영 사람이 몰려
있는 쪽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이 물 폭탄을 맞은 개미처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살려줘요!”

“이봐! 경비를 불러!”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 사이로 샴페인과 푸드를 나르던 메이드들과 버틀러들이 손에 권총을 쥐고


관료들을 엄호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미리 짠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유리는 놀랐다. 물론 이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피치 못할 상황에


대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사이에 대체로 인파들은 정리가 됐고 총격전은 점점 첨예해졌다.

-탕, 탕….

“엄호, 내가 할 테니까 빠져나갑시다.”

유리를 안고 있는 세드릭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지금 총을 겨누고


있는 다른 진영 사람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품 안에 챙겨온 권총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빠져나가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고위 인사들이 곳곳에 있었다. 양쪽 진영 모두 무장한 인원수가 많아 틈을 노려서
빠져나갈라치면 양옆에서 매서운 총알이 날아들었다.
“세드릭!”

그때, 가녀린 외침이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세드릭과 유리,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델라인?”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세드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샹들리에가 무너진 자리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아델라인이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잡고서 기겁했다.

“이게, 무슨 일… 꺄악!”

유리도 놀랐다. 서류 속에 적힌 약혼녀를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너무 닮았다.

시선은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하필, 왜, 저 여자였던 것일까.

그것도 자신과 닮은 얼굴에 외모 특징을 가진 여자.

그때, 러시아의 특수 부대 요원이 세드릭의 약혼녀를 뒤에서 덮쳤다. 위험해. 유리의 손이 절로 움직였다.

-탕! 탕!

자신에게 날라오는 총알을 보던 아델라인이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난리인가.

이래서 약혼자, 세드릭이 오지 말라고 말했던 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오지 않을 것을. 괜한 고집을


부렸다며.

러시아 군복을 입은 아름다운 군인이 날린 총알을 담담히 기다렸다. 아델라인의 예상과 다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은 다른 사람에게서 터졌다.
“으윽!”

특수 부대 요원이 쓰러지고, 유리 덕분에 아델라인은 목숨을 건졌다. 세드릭이 근처에 있던 보안국


요원에게 수신호로 아델라인을 엄호해서 보냈다.

“레이디, 이쪽으로.”

매캐한 연기가 연회장 곳곳에서 퍼졌다. 하지만 총격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정신 나갔나? 왜 우리 쪽을….”

블라디미르였다. 그가 세드릭이 있는 쪽으로 총구를 두었다가 다른 쪽에서 날라오는 총탄을 피해서 다시


겨눴다. 격한 억양의 러시아어가 연회장을 채웠다.

“당장 죽여!”

그들의 목표였던 여왕은 처치했다. 그다음은 가까운 왕위 승계자인 세드릭이었다. 하지만 뻔뻔한 귀족
놈의 낯은 멀쩡하게 살아서 블라디미르 자신과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제길, 타깃을 코앞에 두고 뭐 하는 거야!’

처치가 늦어질수록 곤란해지는 건 그들이었다. 애초에 어느 정도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드들과 버틀러들이 진영을 갖추고 총격전을 본격적으로 만들 줄이야.

“죽여!”

유리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블라디미르의 외침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쩌다 가까워지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를 보기 위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신의 오만이었다. 자신은 평생 동안 그를 위협하는


존재로 이용당할 운명인 것이다.

세드릭의 품에서 빠져나온 유리가 뒷걸음질을 쳤다.

유리는 자신의 허리 쪽에 달린 발터 권총이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세드릭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유리를 다급하게 불렀다.

“뭐 하는 겁니까? 위험하니까 당장 이리로….”

주춤, 주춤 멀어지는 유리에게 세드릭이 손을 뻗었다가 깨달았다. 방금 전 도움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순간 까먹고 있었다.

“아….”

우리는 적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손을 잡은 순간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언제나 마음이 향한 사람을 결국 어떻게든 만났기 때문에. 그리움에 가려진 허상 사이에서 헤매는
세드릭의 손을 보던 유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은.”

여전하다. 시간이 흐르고 몸이 자라고 서로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다정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유리는 세드릭을 사살하기 위해 챙겨온 발터 권총을 꺼내 들었다.

까만 총구가 기둥에 기대고 있는 세드릭에게 겨눠졌다. 세드릭이 담담하게 말했다.

“쏴요.”

다시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렸다. 죽여야 하는데.

그토록 연습한 대상인데.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후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격 연습을 했다.

모든 건 작전대로 세드릭을 죽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훈련한 게 무색하게 총을 들고 있는 유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아무리 연습을 하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 스스로의 자아를 죽이고, 사람 하나 없는 황무지에서 8 년의


세월을 보내도 도통 소용이 없었다.

“너무 멀리 돌아왔습니다, 우리.”


그럴수록 자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세드릭을 죽일 수 없다.

“근데, 혹시 마지막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습니까.”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가 겨누고 있는 총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상하게,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와주면 좋겠는데.”

“….”

“그땐 진짜… 마지막이니까.”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토록 탐내던 이 목숨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살아 있는 날마다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그를 덮쳤다.

“이상한 말인 건 압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련의 일로 약간의 감시가 붙어 있긴 했지만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여전했다.

“…근데.”

어쩌면 사는 것으로는 다할 수 없는 복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따라서 응당 누릴 수 있는


양지의 삶을 포기했다. 내가 네가 있는 세상으로 간다면.
“날 죽인 사람의 얼굴이….”

우리 딱 한 번 어쩌다 마주치지 않을까. 아주 우연히, 그날처럼.

“보고 싶을 거 같아서요.”

서로 총을 겨눈다고 해도 딱 한 번은 이렇게 얼굴 마주 보겠지 싶어서.

“뭐, 잘 죽었다고 생각해도 되고.”

넘어갈 수 없는 국경선 앞에 서서 유리의 얼굴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은, 그날의
유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하고, 한심한 어린 날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울어주면 더 좋고.”

너 없이 살아가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을 알았더라면. 그날, 네 손에 죽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가문의 가주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가르침과 규율, 책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쏴요.”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침묵을 깬 사람은 세드릭이었다. 한창 사격을 퍼붓던 세드릭의 총은
천장을 향했다.

“작전, 끝내야지 않겠습니까.”

반격의 의지가 없었다. 블라디미르의 야멸찬 외침이 연회장을 다시 채웠다. 떨리는 손에 들린 총이


위치를 달리했다.

“유리!”

겨우 부지한 마음이 다시 무너져 내렸다.

“…못 해. 알고 있었어?”

여전히 바뀌지 않는 건 세드릭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난 당신을 죽일 수 없어.”

그건 절규에 가까웠다. 이상한 일이다.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고,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지금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했다. 자신이 죽어서 너를 위협하는 모든 게 없었으면.

“비켜!”

젠장. 그렇게 훈련을 시켜도 결국 제자리다. 그럼 내가 끝내주지. 저놈이 죽으면 유리의 미련도 없어질
것이다.

“대령님?”

망설이는 유리를 본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옆에 있던 부대원을 밀치고 세드릭에게 총을 들었다.

“내가 한다.”

사람이라는 게 보이는 게 없으면 식기 마련이다. 죽은 놈의 시체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도 한때다.


나머지는 자신이 채워주면 될 것이고. 방아쇠의 쇳소리와 함께 굉음이 울렸다.

-탕!

총성이 울린 순간. 유리는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지루한 인생이다.

유리가 총을 버리고 세드릭에게 쏘아진 총탄 앞으로 달려들었다. 가까이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걸 알아챈 세드릭이 불안하게 이름을 불렀다.
“유…리?”

대리석 바닥에 무거운 총신이 구르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허공을 저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유리의 등 뒤로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이 관통했다. 아.

“빌어먹을! 유리 라스콜니코프! 지금 뭐 하는 거야!”

블라디미르가 총을 내리고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이건 작전을 망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계획이
일그러지다 못해 진창에 구르는 셈이었다.

“세드릭.”

나의 요한.

사람을 죽일 줄만 알았던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행, 이다.”
네가 아니라서. 후회는 없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붉은 피가 하얀 대리석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미처 매듭짓지 못한 행위가 돌고 돌아 지금 이루어지는 것뿐.

“유리!”

허물어지는 자신의 몸을 세드릭이 급하게 붙잡았다. 근사한 하얀 드레스 셔츠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피가


물들었다.

눈앞이 피로 물들고, 손은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차가운 평정을 유지하던 세드릭의 까만 눈이 분노했다.

“대체… 대체!”

세드릭이 자신을 대신해서 총을 맞은 유리를 안고 다시 기둥 뒤로 숨었다. 그의 귀 너머로 놀란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췄던 총격전이 다시 시작됐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무슨 일이….]

“의료진, 얼른 대기시켜! 부상, 아니 긴급환자….”

[알겠습니다.]

“유리, 유리 내 말, 들립니까? 들리고 있죠?”

그의 투박한 손이 자신의 뺨을 애틋하게 쓸어내리고, 터지는 핏방울을 연신 막아보려 애썼다.

“대답해요, 제발.”
저 손이 주는 온기를 자신은 알고 있다.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왜, 왜….”

처음으로 느꼈던 타인의 온기, 타인의 곁, 타인의 소중함. 겨우 버티며 살아가던 자신에겐 그게 너무
낯설어서, 절대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어, 왜 또 그랬냐고….”

하지만 처음으로 느낀 온도는 결국 자신의 전부를 차지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을 알아서 그랬을까.

네가 나의 전부가 될 것을 알아서….

“제발 이러지 마. 제발, 제발!”

그동안 살아온 나날이 처음으로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업보였을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남의 생을


파먹고 살던 자신에 대한 업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네 곁을 탐내었다.

절규하는 세드릭이 유리를 껴안고 피가 줄줄 나오는 총탄 자국 쪽을 계속 눌렀다.

“너를 어떻게 다시, 다시 봤는데….”

모든 사람이 나를 더럽다고 해도 너만은, 네 앞에서만은 나도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사랑받고 싶었다.


모든 게 헛된 욕심이라는 건 알았다.

애초에 작전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었고, 작전이 끝나면 헤어질 사람이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젖은 푸른 눈이 점점 감겼다.

“…보고 싶… 어서.”

작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같은 시간과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것을.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일을 하면서….

“당신이….”

이 모든 것이 영원하지 못할 걸 알았다.

유리는 힘이 없는 손을 가까스로 올려서 세드릭의 뺨을 쓸었다. 피에 물든 손이 열기를 띤 피부 위로


스치며 핏자국을 남겼다. 한평생 사람의 피를 묻히고 더러운 것을 뒤집어쓴 자신의 손이 지킬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좋아… 서.”

그는 언젠가 자신을 잊는다고 해도 자신은 그 작은 추억 하나로 평생을 살아갈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러 시간을 끌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서.

“나도, 나도…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과 헤어지면 다시는 느끼지 못할 빈자리.

그 빈자리를 당신의 소중한 기억으로 채우고 싶어서.

“사랑해요….”

세드릭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한탄하듯이 읊조렸다. 세드릭은 복수할 기회도, 사랑할 기회도 주지 않는
애틋한 사람이 야속했다.

“언제나, 당신을….”

눈물에 젖어서 세드릭의 절규하는 표정이 잿더미를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삶의 마지막을 세드릭으로
장식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당신만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요한, 고귀한 사람아.

나는 가진 것이 없어 그대에게 줄 것이 이 하찮은 목숨밖에 없구나.

눈앞이 멀어지고 있었다. 늦었다. 이미 자신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나… 도.”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두 눈이 감겼다. 사람 없는 황무지에서 시작한 긴 여행의 마지막 장이었다.

유리의 다른 이름처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chapter 34

* * *

눈을 떴을 땐 하얗고 눈부신 것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평생을 어두운 곳에 숨어서 살던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빛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애초에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을. 제가 욕심을 내어 너무 멀리 돌아왔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하얀빛의 정체는 상앗빛의 모슬린 커튼이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흐르는 햇살이었다.

아. 눈을 감았다.

한 번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적도 있었다.

이 환한 햇살 아래서.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가다 너와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물어보는 것. 그때에는.

네 앞에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그저….

네 손을 잡고, 네 품에 안겨서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게 헛된 꿈인 걸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실낱같은 꿈에 얹혀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서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세상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서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유리의 감겨 있는 눈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는 괜찮을까. 혹시 저를 살리겠다고 괜한 짓을 하다가 블라디미르에게 해를 입은 건 아닌가.
연신 걱정이 됐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덜어내고자 깜빡거리자 주변이 선명해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적당히 포근한
느낌으로 꾸며진 방. 천국이라고 보기엔 방 안이 너무 목가적이고 정답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심지어 몸 전체에 욱신대는 고통이 존재를 증명했다.

살아 있었다. 다시, 살아 있었다. 그럼 누가….

“윽!”

유리의 손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몸은 운신조차도 힘들었다.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하게 걸고 있는 압박붕대가


어깨뿐만이 아니라 목, 오른쪽 손까지 미라처럼 걸려 있었다.

정성껏 치료한 흔적에 놀라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이었다. 누가 이런…. 심장이 뛰었다.

-끼이익….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할 테니, 한나는 나중에….”

방으로 들어온 이와 유리의 눈이 마주쳤다. 유리는 순간, 총을 눈에 맞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유리?”

세드릭은 마지막으로 봤던 멋진 턱시도 차림이 아니라, 편안한 셔츠와 바지, 그 위로 서스펜더를


느슨하게 걸치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툭, 와장창!

방 안으로 들어온 세드릭의 손에 물이 담긴 양철 그릇이 떨어지며 카펫 바닥을 적셨다.

“에구머니나! 주인님, 왜 그러세요?”

복도에 서 있던 하녀가 세드릭 대신 떨어진 그릇을 대신 줍다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하녀가 그릇을 줍고 허리를 편 순간, 2 주 전에 농장의 주인. 세드릭이 얼굴에 피와 잿더미를 뒤집어쓴
채로 품에 안고 온 금발 머리의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머나, 손님이 깨어나셨네.”

처음엔, 주인님의 약혼녀와 굉장히 똑 닮은 얼굴에 착각을 하고 놀랐더란다. 귀족 영애가 어쩌다가


머리를 피로 물들이고 혼절할 일이 무어 있단 말인가.

“…한나.”

하지만 주인님이 숨넘어가는 얼굴로 데려온 미인은 약혼녀가 아니었다. 심지어 남자였다. 요즈음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떠드는 소문의 주인.

〈켄싱턴 하우스, 습격…. 휴전은 수포로 돌아가다〉

지나가듯이 들은 집사장의 말에 의하면 저 미인의 정체는 무려 러시아에서 파견된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데려오다 못해 치료까지 하고, 왜 주인님이 손수 간병까지 했는지. 한나의 논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닥터 화이트를 모셔와.”

그저, 저 미색에 홀린 것인가 어렴풋이 짐작할 뿐.

“예, 주인님.”

한나가 봐도 비로소 눈을 뜬 남자는,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원래 사람이란


살아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법이다. 세드릭이 문고리를 잡고 깨어난 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까지… 이 방에 들어오지 마.”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쪼르륵, 물이 담기는 소리. 살랑대는 바람에 커튼이 어른대는 소리. 고요함 가운데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셔요.”

세드릭이 미지근한 물이 담긴 물컵을 건넸다. 유리는 그의 손에 들린 물컵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왜 데려왔어?”

적국의 사람인 자신이 세드릭의 곁에 있어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빨리 네 곁을 떠나야 하는데.

“깨어나서 내게 처음으로 할 말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유리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세드릭이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물컵을 유리의 침대맡
테이블에 놓았다. 세드릭의 타박에 유리가 뻣뻣한 목을 돌렸다. 하늘대는 금발이 미풍에 흔들렸다.

“…고마워.”

사실은, 그저 좋았다. 다시 살아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너를 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세드릭의 부드러운 대답과 함께 유리가 있는 침대가 출렁였다. 그가 침대맡 쪽에 앉았다.


“혹시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해요.”

“괜찮아.”

그런 걸 툭 털어놓고 말하기엔 우린 너무나 명백한 적이지 않나. 유리의 메마른 목울대가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을 삼켰다. 유리가 성치 못한 몸을 애써 일으켰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켄싱턴에서 벌어진 습격은, 어떻게….”

블라디미르와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됐을지. 아직 움직이는 게 더딘 유리의 몸은 침대 시트를 엉거주춤


짚다가 결국 바닥 쪽으로 떨어졌다. 아.

“유리!”

세드릭이 바닥에 떨어지는 유리를 급하게 받아내었다. 그의 너른 품에 꼭 안겨 있는 유리는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고동에 놀라고 말았다.

“괜찮습니까?”

열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그를 밀어내던 손이 멈췄다.


“…괜찮아.”

조금만. 이렇게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다시 머지않아 헤어질 것이고. 상처와 도움을 핑계로, 아주 조금만 그의 품이 주는


따뜻함을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유리의 두 팔을 붙잡은 세드릭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한 달 지났습니다.”

“…뭐?”

“당신이 눈을 뜨지 않은지 딱 한 달째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니. 어쩐지 몸이 기름칠이 덜 된 경첩처럼 삐걱댔다. 사실 맞은 순간부터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세드릭의 검은 눈이 유리의 붕대 부분을 샅샅이 훑다가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

“다시는….”

안겨 있는 세드릭의 품에서 새벽이슬로 싱그럽게 젖은 숲의 향기가 났다. 그의 어깨너머로 흔들리는 하얀


레이스 커튼 뒤로 푸른 정원 숲이 보였다. 얼핏 보이는 풍경으로 보아 런던 시내는 아닌 게 분명했다.
“다시는, 그런 짓거리 하지 말아요. 당신은 어떠한지 몰라도, 난.”

유리의 어깨 쪽이 뜨거운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다. 세드릭이 조용하게 흐느꼈다. 유리의 손이 세드릭의
등 뒤에서 가까이 다가갔다가, 어쩔 줄을 모르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리의 심장이 죄어들었다. 순간 유리는 ‘나도’라고 말할 뻔했다. 마지막 선처럼 남은


이성이 충동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세드릭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서 씁쓸하게 읊조렸다.

“축하해요. 유리 라스콜니코프.”

잊어야지, 잊고 살아야지. 세드릭 자신을 속이고 농락한 사람 따위 그리워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자신의 발걸음은 넘을 수 없는 국경선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 스스로 타일렀다.

“나를 평생토록 괴롭히고 싶었다면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자신의 마음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어느 날은 마음 깊이


소원했다. 거센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며 자신의 등을 떠밀어주기를.

“날 죽일 수 없다고 했던가요.”
누군가가 억지로라도 자신의 발걸음을 당신이 있는 쪽으로 이끌어주기를.

“그건….”

“마찬가집니다. 나도.”

그렇게라도 당신의 곁에 있고 싶었다. 세드릭은 파란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바닥으로 찡그린 얼굴을
가렸다.

“꼴사납다 비웃어도 좋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붙은 보안국의 감시와 제약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네 곁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게 사랑이겠지. 유리를 껴안은 세드릭은 눈을 감고 한 달 전 밤을 떠올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총탄을 몸소 받아내던 그 날 밤.

“세드릭.”

“사랑합니다.”
몇 번씩 기회가 있었는데도, 쓸모없는 자존심에 휩쓸려 미처 전하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세드릭이 유리의 손목을 잡고 손등에 입 맞췄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깨어나면. 깨어나기만 한다면 이번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이 고백하겠노라. 유리의 곁을


밤을 지새우며 맹세했다.

차가운 손등이 화인을 새긴 듯이 뜨거웠다. 유리는 잡힌 손을 빼내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세드릭.”

그냥, 그렇게 두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기에…. 유리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목이 메었다.

“…세드릭, 나는.”

나는, 살아서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사람의 약점이 됐다. 가족, 지위,
돈, 사랑….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일부러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넌…좋은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 남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평생에 피만 묻혀온 제 손이 스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다. 자신 같이 비천한 사람에겐 감히 바랄


수 없는 소중한 사람.

“늘 그랬지.”

“유리.”

“네 앞에 서면 난 그때만큼은 러시아의 더러운 탕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고 싶었다. 내게 온전히 오지 못할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너와 평범하게 웃고, 평범하게 슬퍼하고, 평범하게….”

네가 없는 세상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가 내 세상인데. 네가 나의 모든 것인데.


“평범하게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에겐 특별할 것 없는 그 짧은 날이 유리에겐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했다. 유리가 담담하게 고백했다.

“너를 잊은 적이 없었어.”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사는 이유를 알려준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잊혀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계속 네 생각이 맴돌았어.”

너는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좋은 사람들과 있는지, 자신이 곁에 없어도….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너는 행복한지.

“살아 있다면.”

지난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지난 모든 날을 후회했다. 조금 더, 네게 말을


해볼걸. 우스운 핑계를 대서라도 네 곁에 있어 볼 것을.
“살아 있다면, 언젠가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구차하고 더러운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다시 남의 침대를 구르는 탕녀가 되어도 좋았다. 유리의
시선이 세드릭의 얼굴에 닿았다.

“널 만날지도 모르니까.”

꿈에 그리던 얼굴. 저 얼굴을 보기 위해서 모든 모욕과 수치를 짊어졌다.

“너는 날 기억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난.”

누군가와 같이 행복해지는 사랑도 있지만 멀리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랑도 있다.
자신에게 한 줄기 구원처럼 비춰주던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난 평생을 행복한 기억으로 살겠지.”

붕대가 감긴 유리의 마른 손이 세드릭의 넓은 등판을 타고 덩굴처럼 얽혔다.

아주, 멀찍이서 그를 보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하지만 그를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났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가고 싶고, 스치는 손을 잡고 싶고, 네게 입을 맞추고 싶고. 네가 줬던 따뜻함을


다시 함께 느끼고 싶었다고.

“보고 싶었어.”

“유리.”

매 순간, 눈이 뜨고 감기는 순간까지….

“나도 널 보고 싶었어. 언제나.”

보통의 연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그러하듯, 자신도 그에게 그러고 싶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유리의
머리에 세드릭이 입을 맞췄다.

“좋은 판단이었어요.”

“….”

“그렇게라도… 당신이 살아 있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 환히 웃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고 유리의 마음에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유리가 파스스 웃었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휴전을 어그러뜨린 자신의 처치는 다시
러시아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든, 아니면 여기 영국에서 처분을 내리든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은
죽음을 예감한 유리에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껏 살아 있기를 잘했어.”

어쩌면 이날을 위해서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네 안부 한 번 물어보기 위해서.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마지막이니. 푸른 눈에 물기가 어렸다. 유리의 마른 입술이 세드릭에게 향했다.

“읍.”

유리의 마른 입술 너머로 세드릭의 부드러운 체온이 느껴졌다. 세드릭은 거부하지 않았다.

서로의 입술은 갈구하는 물기로 젖었다. 뜨거움이 서린 세드릭의 입술이 유리의 피부와 감각을 갈급하게
찾았다. 유리의 팔 안에 들어오지 않는 세드릭의 넓은 등이 살며시 떨렸다. 열락이 피어오르는 유리의
뜨거운 뺨 위로 세드릭이 더운 숨을 뱉었다.

“하아….”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입술을 두고 세드릭이 다시 붙잡았다.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살결을


파고들었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 위로 세드릭의 날 선 콧등이 스치고 서로의 입술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흐으….”

온몸의 모든 신경과 감각이 세워서 그를 향했다. 유리의 마른 입이 떨렸다. 다시 입을 맞출 기세였다.


그러다 세드릭이 문득 깨달은 듯 붉어진 눈으로 한탄했다.

“미안합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이런… 하아.”

아픈 사람에게 이 무슨 짓인가.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짧지만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대는 유리의 붉은 입술이 슬쩍 호선을 그리며 그의 이성을 유혹했다.

“세드릭.”

벌어진 속살처럼 선정적인 모습에 그가 천장을 향해서 눈을 연신 치켜떴다. 허공을 쥐락펴락하는 손등


위로 불거진 푸른 핏줄이 터질 듯이 솟아올랐다.

“…예.”

달콤함에 갈증을 맛본 세드릭의 목울대가 유독 느리게 움직였다. 유리의 서툰 손길이 그의 허벅지 쪽을


쓸었다. 긴장이 되는 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이건 그가 하던 임무나 훈련이 아니었고, 평범한 연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유리가 고민하며 말을 고르는 동안 젖은 입 밖에서는 느릿한 속닥거림이 이어졌다.

“괜찮다면.”

편한 승마바지 너머로 무시할 수 없는 윤곽이 도드라지게 잡혔다. 직접 보지 않아도 잔뜩 발기한 모양새에


유리의 손이 멈칫했다.

“지금.”

세드릭의 발기한 물건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만진 유리의 손을 그가 거칠게 낚아챘다.

“…일부러 그런 거죠.”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위로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 헤쳐진 튜닉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세드릭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다분히 흥분한 모습에 유리의 말문이 막혔다.

“그건… 읏.”

그사이에 세드릭이 반쯤 일으켜져 있는 유리의 몸을 침대 위로 떠밀었다. 가볍게 떠밀린 몸이 침대 위로


풀썩 내려앉았다. 세드릭의 검은 눈이 욕망으로 짙게 물들었다.
“…당신이 먼저 한 겁니다.”

* * *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저물다 못해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부상으로 지친 몸이 긴 정사로 인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세드릭을 찾았다.

“….”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면서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멀리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 유리의 다친 손이 곤히 잠들어 있는 세드릭의 얼굴에 다가갔다.

-사랑해요.-

세드릭이 자신을 안고서 말하던 고백이 아직도 귀에 울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유리가 중얼거렸다.


“…나도.”

살아 숨 쉬는 걸 깨달은 이후로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도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어.”

이 말을 전하기까지 8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어쩌면 이날을 위해서 그 허망한 벌판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버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리가 눈을 감았다.

꿈이라면 깨지 말기를. 아주 잠시만이라도, 사랑하는 그의 품에서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때,


유리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유리가 눈을 뜨자 회한에 가득 찬 세드릭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손이 소중한 것을 만지듯, 깃털처럼


살포시 스쳤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처음엔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죽은 듯이 잠든 채로 눈을 뜨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자신을 위해서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무사했을 것을. 모든 게
자신의 탓처럼 후회스러웠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음속 오랫동안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세드릭의 강한 팔이 유리를 사슬처럼 감싸 안았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은, 내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나 추악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유리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나를 떠난다고 하지 않으니까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유리를 숨기고 자신만 보고 싶은 어두운 욕망이 세드릭을 부채질했다.

“이렇게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곁에 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가 들어도 최악의 인간이다.


“이렇게 만이라도….”

세드릭이 자조적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던가요.”

세드릭이 누워 있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유리와 이마를 맞대었다. 막 잠에서 깬 연인의 체온이 제법


따끈해서 좋았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최악의 인간입니다.”

고아한 귀족의 낯을 해도 본질은 같았다. 순수했던 애정은 보답받지 못한 시간을 타고 고이다 못해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없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세드릭은 자신의 품에 있는 유리에게 애원했다.

“유리, 이대로 내 곁에 있어요.”

“세드릭.”
유리의 손끝이 그를 안고 있는 세드릭의 강한 손에 닿았다. 언제나 바라고 원하던 온기가 곁에 있었다.
세드릭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강하게 압박했다. 어떻게 만난 사람인데,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없는 앞으로의 생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예전과 같이 어리지도 않고, 무력하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유리가 자신을 배신했는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떠났는지.

“내게 기회를 줘요.”

모든 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연인은 너무 영리하다 못해 모든 것을 떠안았다.

“세드릭.”

그걸 알게 된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얼마나 구역질이 나던지. 다시는 예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유리의 그림자에 가려서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제발, 내게 기회를 줘요.”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한 마디만 말해주면 됩니다.”

내 손을 잡아요. 내게 의지해줘요. 그때도, 지금도 유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다. 가문의 후계라는 지위도, 핏줄에 얽힌 책임도, 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털어내고 유리의 곁에만
있고 싶었다.

아니, 예전부터 그래야 했던 것을 미처 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세드릭이 조용하게 오열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제발….”

그 어떤 이보다 강한 남자가 유리의 앞에서 삽시간에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자신을 떠날까.
기어코 맞잡은 손을 내칠까. 두려워하면서.

#chapter 35

* * *

세드릭은 첨예한 절벽이 바닷가를 따라 늘어져 있는 백사장을 유리와 나란히 걸었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하얀 포말이 그들이 걷는 백사장 위로 늘어졌다.
“여긴 데본셔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 말을 하는 세드릭의 검은 머리를 거친 바닷바람이 흐트러뜨렸다. 급한 고비를 넘긴 이후로, 세드릭은


잉글랜드 남부의 별장에 유리를 은밀히 데려왔다.

런던에는 그들을 주목하는 이목이 많기도 했고, 여전히 두 사람을 끌어내리기 위한 사람들이 여전했다.

그래서 자신은 부상으로 인한 병가와 함께 빠져나와서 가문 소유의 별장으로 유리를 숨겨두었다.

“가족들은 여기를 ‘농장’이라고 부르죠.”

꼭 바르샤바의 사람들이 아니라더라도.

유리가 백사장을 걷다가 멈췄다. 바람이 불어오는 수평선 너머로 한없이, 끝없이 자유롭게 펼쳐진 바다는
날씨가 좋아 풍경이 꽤 멋졌다.

햇빛에 수면이 반사되며 은빛으로 빛나는 것을 구경하던 유리의 곁에 세드릭이 서서 부드럽게 물었다.

“언젠가 한번,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예.”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서.”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묵직한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젯밤에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다가, 이내 품에 안아주던 손길인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럴까. 유리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어렸을 땐, 섬에 살았어.”

떠돌이 집시였던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지중해의 작은 섬. 파란 눈이 그리움의 바다에 물들어갔다.

“짧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자유롭게 살던 나날들. 바다를 그리워했던 이유는 명령이나 정치 같은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고 순수하게 살아가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커서는 아버지를 따라와 러시아와 독일에서 살았지.”

아버지의 이름을 외기도 전에 골방에 갇혀서 훈련을 받았다. 감정을 거세당하고 모든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유리의 어깨를 잡고 있는 세드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움직이는 모든 이유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그런 자신을 이용하는 것에 다들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괴로운 일을 일부러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언제나 너뿐이었어.”

도구로 이용당하는 일엔 익숙했다. 그래서 세드릭의 호의가 불편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이용하지 않는 그가 낯설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독점욕에
작은 환멸이 들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내겐 당연했어. 그래야 했어.”

둘 사이에 바닷바람이 휘몰아쳤다. 복종과 순종. 그게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족쇄를 부수고
들어온 건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인의 감정.

“그런데 너만 당연하지 않았어.”

뜨거운 화인처럼 새겨진 감정. 숨기려고 해도 계속 자신의 마음 안에서 피어올랐다. 한번 깨달은


순간부터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연한 목적을 집어치우고 나만을 보고 있었어, 너는.”

그때부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생각한 것. 나 또한 당연하게 바라던


목적과 임무를 버리고 살아가게 된 것도.

“당연한 목적에 순순히 따라가다 죽으면 그만이다. 원래 나란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생각할 이유 따윈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점점 그를 생각할수록 죽음이 두려웠고, 자신의 위치가 원망스러웠다.

“너밖에 없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사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료들을 도륙하는 짓을 해놓고도
이상하게 후회가 없었다.

“고된 삶이 아니었다면 거짓말이지.”

“유리.”

“난 후회하지 않아.”

지금도, 죽음이 목 앞에 있는걸 뻔히 알면서도 한 점의 미련은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달성했다. 유리는
눈부신 바다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를,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겠다는 목적.


“난 이루고 싶은 걸 이뤘어.”

이제는 가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곁에 있고 싶은 욕심이 없냐고 하면, 물론 있었다. 그도 한낱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없던 욕심도 생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이젠 나를 국제 재판소에 보내.”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세드릭이 놀란 듯, 소리를 치며 유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유리!”

“우리의 작전은 실패했다고 발표해야 해. 그래야… 저쪽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야 이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끝날 수 있다. 제가 원했던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러지 마요. 내가… 내가.”

얼마나 당신을 기다려왔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왜 당신은 언제나 나를 떠난다고 하는 건지.


또 무엇이 유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인지.

“난 네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평생 꼬리표가 되어 네 앞길의 걸림돌이 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곁에서 방해는 물론이고 난처한 골칫덩이가 되는 건 자신도 사양이었다. 유리가 자신을 안고 있는


손등을 스치듯이 어루만졌다.

“가지 말아요. 제발.”

“…세드릭.”

애원하는 그에게 차마 자신은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마 유리 자신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세드릭과 같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단해야 했다.

* * *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별장으로 돌아오자 세드릭을 찾는 급한 전보가 들어왔다. 별장의 대문으로
들어오자 하녀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주인님!”

“도리안, 무슨 일이지. 그리 급하게 오고.”

“그게… 런던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하녀는 유리를 흘끗 보면서 눈치를 봤다. 세드릭이 요 며칠간 주인 방에 누워 있던 저 환자 때문에 런던의


모든 업무를 버리고 온 것을 안다.

그 덕분에 런던의 타운하우스에 있는 집사가 굉장히 우려하고 있다는 것도. 세드릭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쁘다고 해.”

무시하고 들어가려는 세드릭을 향해 하녀가 다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드릭은 이제 단순히


귀족의 자제가 아니었다. 며칠만 자리를 비워도 큰일인 마당에 부상을 핑계로 세월아 네월아 별장에 박혀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굉장히 급한 연락이라고 하셔서요.”

도움을 갈구하는 하녀의 눈빛에 결국 유리가 나섰다. 자신 때문에 세드릭이 고집을 부리는 게 보였다.

“세드릭.”

“…신경 쓰지 마세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원래 나이 먹은 귀족들은 느는 게 허풍뿐입니다.”

귀족원에서 자신을 불러내려는 개수작이라며 세드릭이 불평했다. 하지만 유리가 보아도 아닌 것이 딱


보였다.

“정말입니다. 괜찮아요.”

그는 자신이 정보부로 복귀했을 때에도 굉장히 중요 인사로 뽑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관련된 사람들은 난리가 난 게 분명하다. 그런 그가 ‘괜찮다,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건
아마 자신 때문이겠지. 유리가 그의 외투 소매를 잡고 말했다.
“갔다 와.”

“…싫습니다.”

“정말로 급한 일이면 어쩌려고.”

“말했지 않습니까. 정말 급한 일이면….”

보기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하녀가 놀란 모습을 보였다. 주인님이 저런 분이셨나?

“들어가서 얘기하죠.”

세드릭은 유리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세드릭은 연락을 받고 오겠다며 서재로 갔고, 유리가 먼저 환히
꾸며진 응접실에서 미리 준비된 홍차를 마셨다. 햇살의 색깔이 살짝 진해졌을 무렵 세드릭이 응접실로
돌아왔다.

“하여간 귀족원 노인네들….”

징그러운 능구렁이들. 분명히 부상이 심하니까 당분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이젠 여왕의 명령을 이용해?

연인과의 단란한 만남을 방해받아서 세드릭의 기분은 저조했다. 유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 때문인가?”

“…아닙니다.”

“맞구나.”
잘 가꿔진 푸른 뒤뜰이 보이는 발코니 쪽 윈도우에 기대어 앉아 있는 세드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괜한 소리입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 때문에 급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리 고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여기


있어서 세드릭은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만이라도.

‘나라고 다른 생각은 아니었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하녀가 주인에게 재촉을 할
정도인 걸 보아, 아무리 봐도 급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유리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내가 갈게.”

“…잠시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왜 당신이 간다는 거예요?”

세드릭이 얼이 빠진 얼굴로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성치 않은 몸으로 대체 어디를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네가 가지 않으면 내가 가야지. 그리고….”


본래 네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건 알았다. 그걸 부상을 빌미로 조금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린 것뿐.
유리는 자신의 욕심이 들킨 것 같아서 얼버무렸다.

“평생 여기에 숨어 살 순 없는 노릇이지. 내가 들키면 너도 곤란할 테고.”

세드릭이 유리의 팔을 붙잡고 안았다. 훤칠한 덩치의 세드릭이 유리를 넉넉하게 안았다.

“안 곤란합니다.”

“…세드릭.”

“안 곤란하니까 그냥 있어 주면 안 됩니까.”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군인 자신을 계속 숨겼다간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세드릭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겠어.”

유리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그는 불안에 미쳐서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녀와. 나 때문에 네가 중요한 일을 못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러니 거짓말이라도 해서 우선 그를 보내자. 그사이에 자신이 떠나면 될 일이다.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아.”

유리를 안고 있는 세드릭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가 한 번 또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자신과


함께한다고 말하고 돌아오지 않았던 날이….

“이번에는 진짜로 약속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찾는 부름을 거절한 지 꽤 여러 번이었다. 다만 하녀가 괜히 재촉한 게 아니었다.


전갈을 보낸 사람이 단순한 귀족이 아니었던 탓이다.

여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귀족은 없다. 사적인 이유도 아니고 공식적인 일을 처리하라고 부르는
것이라 그동안 잘 써먹은 부상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그래.”

사실 세드릭이 멀쩡하게 내려온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여왕이었으니까.

“약속할게.”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었다.

* * *
유리와 불안한 약속을 한 세드릭은 런던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마저도 유리가 재촉하지 않았으면
날이 새도록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유리가 꾸물대는 세드릭에게 한마디 했다.

“늦겠어.”

“아직은 좀 여유 있습니다.”

세드릭은 외출할 준비를 다 해놓고 모른 척을 했다. 시선을 돌리며 차를 마시는 모습에 유리가 괜히
불안해졌다. 런던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며 별장의 관리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봤던 탓이다.

“나랑 있는 게 싫습니까?”

세드릭은 고운 세공이 된 찻잔을 내려놓고 짐짓 서운한 티를 냈다. 유리가 이마를 짚었다. 하는 짓이 8 년


전이랑 다를 바가 없다.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니 참 큰일이다.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지는 게 싫어서 그래.”

“전혀 곤란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세드릭은 잠시 질투를 드러낸 자신이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마음이 지나쳐서 그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 무슨 망신인가. 뒤늦게 말을 주워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실언입니다. 잊어주세요.”
“얼른 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웃음 어린 유리의 말에 세드릭이 멍하게 유리를 쳐다봤다. 아까 먹은 푸드의 잔해라도 묻었나? 왜 저러지.

“나한테 뭐… 묻었어?”

유리가 입술 쪽을 손으로 더듬자 세드릭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떨어진 기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그냥, 좋아서요.”

기다려준다는 말. 불안한 약속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믿고 싶어졌다.

“돌아오면 당신이 맞아줄 생각을 하니.”

“….”

그 모습마저 기대가 된다면 너무 중증인가. 하지만 세드릭은 진심이었다. 세드릭의 기대감 어린 말을


들은 유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너를 다시 속이게 되는구나. 유리의 반응에 적군으로 숨어 있어야 하는 처지를 되새김질하고 있다고
생각한 세드릭은 다시 유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혼자 짊어지고 사는 이 사람이.

그래서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하필 여왕이 끼어드는 바람에. 사촌이자 오랜 친우에게 원망이 들었다.

좀 괜찮은 신하를 키워둘 것이지. 무슨 일만 있으면 여왕은 자신을 곧바로 찾곤 했다. 유리는 자신을
껴안은 세드릭의 팔을 툭툭,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늦은 저녁 시간에 바로 돌아와 있을지도 몰라요.”

떠날 땐 떠나더라도, 직접 말은 하고 떠나는 게 나을까. 곧 돌아오겠다고 장담하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일은 제대로 하고 와야지.”

“벌써 잔소리를 하는 건가요?”

유리의 타박에 세드릭이 씩 웃었다. 잔소리 받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가 해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좋네요.”
평소 감정 표현이 없는 유리가 그렇게 말해주니 애정과 관심으로 느껴질 정도다. 자신이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결국 유리가 세드릭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 늦겠어.”

“다녀올게요. 식사는 사용인들이 때맞춰서 챙겨줄 거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자유롭게 꺼내서 봐도


돼요. 말도 몇 필 있으니 숨 돌릴 겸 승마를 해도 됩니다.”

세드릭은 별장 바깥에 준비된 디젤차를 타면서 유리에게 당부했다.

“아. 혹시라도.”

무슨 당부가 그렇게 많은지. 유리는 마치 집을 혼자 지키는 일곱 살이 된 기분이었다.

“제게 연락하고 싶으면 서재에 있는 전화를 이용하면 돼요. 전화번호는 책상에 메모해뒀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느낌이 급한 일을 처리하러 가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괜히 자신 때문에 신경 쓰일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일 일은 만들지도 않을 거고, 있다고 해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연하다.

“그런가요?”
그러나 세드릭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자기 전에 한번 연락해주면 좋겠습니다.”

‘출발할까요?’하고 묻는 운전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세드릭은 떠나기 전에 유리를 포옹하고 속삭였다.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기대할게요.”

여름 바람처럼 따뜻하게 불어오는 숨결에 유리의 귀가 달아올랐다. 간단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세드릭은 다시 디젤차에 올라타면서 장난스럽게 ‘해줄 거지요?’하고 덧붙였다.

“혹시 압니까? 저녁에 당신 목소리 듣고서 힘이 나는 바람에 밤새워 일을 빨리하고 내일 아침이면 돌아와
있을지.”

“…그러진 마.”

“다녀올게요.”

저 말만 들으면 일을 한참 하다가 자신 때문에 도망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유리가 까만 연기를 내는


디젤차의 뒤꽁무니를 가만히 쳐다봤다.

“…잘 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였다.

* * *

세드릭을 배웅하고 별장으로 돌아오자, 안 그래도 조용한 내부가 더욱 고요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곁에 있는 체온을 느꼈는데.

“…없네.”

그의 빈자리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쌀쌀해진 저녁나절의 공기에 마음이 헛헛해졌다. 언제쯤 나갈까.

얼굴은 보고 가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영영 발걸음이 떠나지 못할 것만 같다. 사용인들이 주는 이른


저녁식사를 먹고 나서, 응접실 쪽에서 서재의 책을 읽다가 책장을 막 덮었을 때. 별장의 집사장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별장에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손님이라면.”

유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세드릭의 손님인가? 주인이 없는데 어떡한담. 약간 난감한 기색을
띄우는 유리에게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저를 말입니까?”

“예.”
세드릭의 별장에 온 손님이, 세드릭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싶다고? 알 수 없는 손님의 등장에 유리의
몸이 긴장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대체 누구길래?

“만나 보시겠습니까?”

집사가 돌려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세드릭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 분명하고. 그럼….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시고 오겠습니다. 참고로 주인님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 정도의 사람이라. 대체 누구길래 노린 듯이 세드릭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만나보고 싶다는 건지. 무슨 목적인가. 그 궁금증은 얼마 안 가서 풀렸다.

“안녕하십니까.”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유리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실크해트를 물 흐르는 동작으로 벗어서
인사했다. 살짝 내리깐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는 모습은 누가 봐도 호감을 부르는 인상의 사내였다.

“앉아도 될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러시죠.”

유리가 어색하게 응접실의 소파를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는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앉았다.
그는 집사가 차려준 빈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 취향껏 밀크티를 만들었다.

“부상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더 아픈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그가 따뜻한 밀크티를 들어서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방이라도 떠나도 무리가 없겠군요.”

평이하게 나온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야 하는 건 알고 있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막상 남의 입으로


들으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예….”

유리가 앉아 있는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사내는 낯빛이 안 좋아진 유리의 모습을 보면서
반쯤 비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우리 여왕 폐하의 시종장을 맡은 윌리엄 소리안입니다. 세드릭의 케임브리지


동기이자 오랜 친우기도 하지요.”
그는 가슴팍에 한쪽 손바닥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리의 말문이 막혔다. 여왕의 시종장이라고 불린 윌리엄은 손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두고 씩 웃었다.

“덕분에 켄싱턴 하우스의 피해가 커지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왕실 예산이 올해는 꽤 빠듯한 편이라서 많이 부서졌으면 골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그는 기뻐하는 걸 숨기지 못했다. 물론 그런 표면적인 말 이외에도 다른 면에서 피해가 적었다는 말일


것이다. 외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도. 말을 마친 그는 유리를 찬찬히 살폈다.

“세드릭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부상으로 기절해 계셨을 때도 눈에 띄었는데 기운을 차리시니 눈을 떼기가 참 힘들군요.”

방금까지만 해도 떠날 생각을 말한 사람치고는 제법 친근하게 굴었다. 그는 씩 웃었다.

“이런 미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법도 합니다.”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유리가 시선을 돌렸다. 원하지 않은 외모의 칭찬은 받아도 별로 기분이 좋다거나
즐겁지 않았다. 면밀하게 탐색하는 시선은 달콤한 칭찬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은 게 역력했다. 유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나를 만나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뭡니까?”

“오, 역시. 이게 러시아식 대화법인가요? 꽤 시원하게 본론으로 들어가네요.”

비꼬는 건지, 순수한 칭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그쪽은 우리와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분명하지만.”

윌리엄 시종장은 차를 마시면서 차근차근히 본론을 꺼냈다.

“켄싱턴 때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고 우리를 꽤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 쪽 보안국에서도 그런 변수는


예측하지 못해서 꽤 당황스러워하는 중입니다.”

유리의 입매가 살짝 비틀어졌다. 자신이 연합국을 도와준다라. 자신은 딱히 연합국 쪽을 도울 마음은


없었다.

그저, 세드릭이 있던 쪽이 연합국이다 보니 그들에게 이익을 안겨준 것일 뿐. 만약 세드릭이 자신이 속해


있는 바르샤바 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더라면 그쪽을 도왔을 것이다. 입바른 칭찬을 두고 유리는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닐 텐데요.”


“결과라면?”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체를 하는 시종장의 모습이 살짝 짜증스러웠다.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가 지금.

“어차피 날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여왕의 가까운 사촌이자 가신. 그런 중요한 사람이 적 세력과 연결고리를 가진 게 세간에 알려지면 좋지
않다. 시종장은 살짝 허가 찔린 얼굴을 했다.

“아닙니까?”

하지만 말이라는 게 틀어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식으로 와서 자신을 처리하려는 생각


아닌가. 명령을 핑계로 세드릭을 런던으로 불러들이면서.

“진정하세요. 전 당신들처럼 손에 화약을 매일 같이 묻히고 다닐 정도의 전쟁광이 아닙니다. 그런 섬뜩한


말을 들으면 놀라는 일반인에 가깝지요.”

시종장은 능청을 떨었다. 그러면서 유리의 말을 어느 정도 긍정했다.

“하지만 당신이 세드릭에게 좋은… 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기엔 어렵겠군요.”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유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 처지는 내가 더 잘 압니다.”

시종장은 유리의 대답에 시원스레 웃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이군요. 우리 서로 마음이 맞는 거 같으니. 다만, 그쪽에서 해주셔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그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연맹에서 이번 일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릴 겁니다.”

유리의 생각이 맞았다. 그가 유리의 푸른 눈을 보면서 말했다.

“거기서 증인을 해주셔야겠습니다.”

#chapter 36
* * *

“증인… 말입니까?”

증인을 해달라는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사지에 제 발로 걸어가 달라는 거겠지.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였듯이, 이제는 자신의 나라를 저버리다 못해 죽어달라. 각오했던
바다. 유리의 침묵을 고민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시종장이 세드릭을 들먹였다.

“세드릭 의원이 구해준 목숨 아닙니까. 살려준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세드릭의 별장에서 천년만년 숨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한 상상을 하진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니까.”

“….”

“젊고 전도유망한 사람입니다. 괜한 소문이나 추문에 그를 욕보일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적군을 구해주다 못해 제 옆에 끼고 숨겨놨다는 게 알려지면
그에게 어떤 말이 오갈지 모릅니다.”

시종장은 유리의 존재가 세드릭에겐 도움이 안 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단념시키려고 하는 말이었다면
성공했다.

“어쩌면 세드릭을 눈에 성가셔하는 사람들이 처벌을 내려달라고 난리를 피울 수도 있겠군요.”

유리는 마음속에 남겨둔 자그마한 미련을 접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그의 앞길이 막히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시종장은 선뜻 대답하지


않는 유리에게 결정적인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예전에 당신과 세드릭이 휘말린 스캔들로 사망,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하신 지 오래고.
이복형제는 군내 사고로 반병신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다 조사했는지 놀랄 것도 없다. 자신도 정보부에서 세드릭의 정보를 다 들었던 것처럼,


보안국에서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겠지.

“애초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니 뭐, 딱히 가족이라고 하기도 힘들겠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이 러시아 사람이라서 다행입니다. 난 또 더 자세한 걸 말해줘야 하나 사실 조금 걱정했습니다.”

직설적인 지적에 시종장이 다행을 표했다. 천애 고아 수준이라는 말을 읊던 시종장이 요점을 짚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지만, 세드릭은 잃을 게 너무 많습니다.”

“그건.”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요. 그는 귀한 인재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정을 베풀었다는 이유 하나로 앞길이


막힌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있겠습니까.”

시종장은 턱을 짚고서 짐짓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왕 폐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 우려가 크십니다.”

말을 하는 건 윌리엄이었지만, 사실상 여왕의 말을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사촌이자


귀족원과 하원들을 이어주는 젊은 가교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

정치에선 사랑도 자로 잰 듯이 계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세드릭은 분명히 잘하고 있었다. 예전에
엮였던 유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휴. 가시 달린 소파에 앉았군.’

시종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폐하도 참 무심하시지. 왜 나쁜 역할을 자신에게 맡기셨단 말인가.

눈앞의 미인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자신도 살짝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사람이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랑이었다.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어차피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고.”


유리가 차게 식은 손을 꼼지락대며 대답했다.

“나 또한 그가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목적은 이루었다. 떠나야 한다는 건 애초에 알았다. 그저 그가 전해주는 따뜻한 감정에 잠시 사로잡혀
발을 떠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증인도… 하겠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죽게 될 목숨이라면 그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다.

작전이 실패한 이상, 블라디미르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재판이 열릴 예정이라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유리의 확답을 받은 시종장은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모든 걸 자신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과 세드릭의 연을 빌미로 끄나풀이라고 억지로


주장할지도 모른다. 세드릭을 위협하는 사람들이면 그 억지 주장마저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유리는
시종장에게 부탁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참고로 공식적으로 하는 일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시종장은 혹시라도 유리가 난처한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여왕의 비공식적인 명령을
받아온 이상, 그 또한 눈에 띄는 짓을 해야 하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떠나야 할 때가 되니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기쁘게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차피 재판이 끝나면 난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 사람을 보내든, 재판 결과를 받고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를 당해서 감옥에서 평생을 살든지 하겠죠.”

“너무 잘 알고 계셔서 제가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이왕이면, 재판 이후로 바로 죽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유리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예?”

“러시아에서는 죽어도 자신들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증인인 나만 없으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저희도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을 부탁한 겁니다. 실무에 투입되어 있던 당신이 증인을
해준다면 그 주장도 물거품이 되니까. 하지만… 굳이 죽음을 자처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무기징역이겠지만 결판 날 확률이 큽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지로 가달라고 하던 시종장은 내켜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펜을 쥐고 살던 그에겐


죽여달라는 말에 예, 하고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여왕은 유리에게 증인을 부탁했지, 죽어달라 한 적은 없었다. 또한 부탁을 들어준다면 최대한
옥형으로 마치기 위해서 이쪽도 나름 애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죽여달라니. 시종장의 반응에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질 겁니다.”

내가 그러하듯이, 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없는 게 낫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가 하찮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고 온당히 평온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를….”

유리의 눈이 깊은 감정 안에 빠져들었다. 단순한 애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 시종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달하겠습니다.”

그저, 유리의 부탁을 고려해보겠다는 말 말고는.

* * *

시종장은 짤막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보안국에서 사람이 출발했다고 하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사람이 도착할 겁니다.’

동시에 세드릭이 보낸 별장에 남긴 전보도 도착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런던에서 출발하지만 가는 와중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도로 상황이 나쁘니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유리는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을 구경하며 마지막 풍경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어쩌면 안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괜한 미련을 남기고 가느니,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응접실 한쪽에서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이 제법 훈훈하여 얼어붙은 온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이 뜨였을 땐, 뺨에 애정 어린 입맞춤이 따라왔다.

“이런, 내가 깨운 겁니까?”

손길의 주인공은 세드릭이었다. 그걸 알아챈 유리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러자 몸에 걸쳐진 담요가
스르륵 떨어졌다.

“아, 언제 왔지?”

눈을 비비며 바깥을 보니 벌써 깜깜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건가. 신경 쓰이는 일들로 피곤이


몰려왔던 모양인가 싶으면서도 방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아무리 세드릭의 별장이라고 해도 이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세드릭은 일어나려는 유리를
만류했다.
“더 자요. 아직 저녁 식사 시간까진 좀 남았으니까.”

그때, 별장의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쾅쾅, 대문 앞에 붙은 노커를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세드릭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이런 시간에….”

다른 사람의 별장도 아닌 자신의 별장인 것을 이 주변의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을 텐데. 세드릭은 유리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대충 넘겼다.

집사가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집사가 창백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왔을 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주인님, 보안국에서 사람이….”

“보안국? 무슨 사람?”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의아한 듯 물었다. 본인도 보안국 소속이지만, 자신을 찾아온다는 기별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우선,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왔구나. 유리는 직감했다. 낮에 시종장이 말했던 자신을 잡으러 올 사람들. 소리 없이 일어선 유리에게
세드릭이 눈치채고 안심시켰다.
“별일 아닐 겁니다. 제가 가서 처리하고 있을 테니, 여기 있어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지.”

“그럴 필요 없….”

세드릭의 말을 자른 건 유리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날 찾으러 온 사람들이야.”

“그게 무슨….”

그리고 응접실엔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레인코트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빗방울이


부드러운 카펫을 까맣게 적셨다. 진흙이 묻은 구둣발이 훈기가 감도는 응접실을 침범하며 소속을 밝혔다.

“실례합니다, 보안국에서 나왔습니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하사를 찾으러 왔습니다만.”

세드릭이 유리 앞에 서서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무슨 일이지? 보안국 특별 요원 소속인데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보안국 어디 소속인지
먼저 말해.”

“M 의 직속입니다.”

여왕의 직속 요원들이라는 말에 세드릭이 당황했다.

“…마가렛의?”

“예. 외람되지만 저희 목적은 백작님이 아니라 뒤에 계신 분입니다.”

“한시가 급하니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잠시만.”

세드릭을 지나쳐서 유리의 팔을 붙잡으려는 것을 다시 막았다.

“무슨 용건이지? 나 또한 방금 M 을 만나고 왔지만 이런 일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

“러시아 소속의 정보부 요원을 국제 재판소에 넘기는 일입니다. 당사자도 동의한 일입니다. 그만
비켜주실까요.”

자꾸 훼방을 놓는 세드릭이 귀찮은지 요원들은 대략적으로 대답했다.

“…뭐?”

세드릭은 당사자도 동의한 일이라는 말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리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간다고 했어.”

세드릭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보안국 요원에게 손을 내미는 유리에게 세드릭이 머리를 짚었다.

“잠시만 나가주겠나.”

“백작님.”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우선 나가주게.”

보안국 요원이 훼방을 놓는 세드릭을 불렀지만 세드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성이 난 투로 대꾸했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흔들리는 눈빛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세드릭의 눈빛은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신 한숨을 내뱉으며 눈가를
짚었다. 유리는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미안.”
“지금 미안하다는….”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지 않느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못했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재판에 나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몰라서 지금 그러는 겁니까?”

차라리 몰랐다고 했으면 좋겠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몰라서 나가겠다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세드릭 자신이 어떻게든 유리를 숨겨두고 최대한 상황을 고쳐볼 셈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바라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알아.”

푸른 눈이 슬프게 그를 보고 있었다. 세드릭의 빈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는데, 재판에 나간다고 했단


말인가.

“나가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걸 알고 있어.”

“당신은….”

세드릭이 유리의 대답을 듣고 짓씹듯이 말했다.

“내게 얼마나 더 고통을 줘야 만족하겠습니까.”

“….”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긴 합니까?”

“세드릭.”

그가 조용히 울었다. 그 또한 알았다. 유리가 왜 그러는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차라리 내게 살려달라고 말해요. 제발.”

“….”

“지금이라도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겠습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리의 안전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생각이었다. 유리가 쓰게 웃었다.

“원래 이랬어야 했어. 알고 있었잖아.”

“…제발.”

“가치 있는 것에 네 전부를 걸어.”

나 같은 사람 말고. 비참한 말이라 차마 말하진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커다란 손의 온기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돌려서 빼내었다.

“그리고….”

구속했던 손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당신이 언제 어디에 있든 잘 살기를 바라.”

진심이었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유리가 응접실을 걸어가다 문 앞에 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웠어.”

“….”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서자 축축하게 젖은 레인코트를 걸친 보안국 요원들이 유리에게
다가섰다.

“대화는 마치셨습니까?”

죄인을 호송하는 사람치고는 제법 깍듯했다. 괜한 소리로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예. 기다려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순순히 내민 손목에 거친 수갑이 기계적으로 걸렸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걸리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다.

비록 웃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고개를 간신히 억누르며 유리가 재촉했다.

“최대한 빨리…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예.”

보안국 요원들은 유리를 호송 차량에 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도 일한 경력 덕분에
대충 예상이 가는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군용 트럭 비슷한 호송 차량이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출발하자, 푸르른 녹음에 휩싸인 별장의 주변이
창문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푸른 숲을 벗어나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였다.
그와 함께 백사장을 걷던 날이 생각났다.

죽기 직전이라 그런 것인가. 세드릭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계속해서 창문 밖으로 필름처럼 지나갔다.

앞으로 있을 일은 분명 유쾌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살아온 게 이것을 위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의연했다. 그러다가도 눈앞에 어른대는 그의 웃는 얼굴이 시리도록 망막을 자극하는 바람에
눈을 감고 소원했다.

만약 신이 계신다면, 그가 부디 앞으로도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게 제


마지막 남은 소원입니다.

* * *

2 주 후,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 연맹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국제 재판이 열렸다. 두 연합의


군인들이 소속된 사건인지라 군사재판에 가까웠다.

유리도 사건의 중요 증인으로서 참석했다. 재판장에 나서기 전, 대기실에 함께 합석한 보안 요원이 하얀


죄수복을 입고서 수갑과 끈으로 구속된 유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시간을 확인하는 듯, 손목시계를
잠시 보다가 유리에게 다가왔다.

“곧 참석할 시간입니다.”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팔죽지에 묶인 줄을 잡고서 천천히 재판장 입구로 이끌었다.

“증인, 참석합니다.”

공개재판이라 그런지, 재판장에 참석해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중에는 유리의 눈에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였다. 그는 증인으로 나온 유리를 보고 주름진 이마를 찡그렸다. 살찐
입술로 욕설을 슬쩍 읊었다.

“러시아 정보부 소속 유리 라스콜니코프 하사, 맞습니까.”

일곱 명의 판사 중 하나가 유리의 관등성명을 대자 유리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증인에 대한 선서를 짤막하게 마치고 나서 구속한 검사와 판사들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증언을 요구했다.
유리는 약속한 대로 자신이 아는 내용을 말했다.

“러시아 정보부 소속의 블라디미르 대령이 계획한 일이었고, 저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목표는
영국의 여왕과 주요 정치 인사들이었고….”

물론 러시아 쪽이 그 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았다. 러시아 쪽 대변인이 그의 주장을 부정했다.


“모함입니다. 라스콜니코프 하사는 이전에도 정치적인 사건으로 개인적으로 형을 받은 적이 있어 앙심을
품은 겁니다. 유효한 증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연합군, 특히 영국 쪽 보안국에서 부정했다. 재판이 열리기 전, 유리가 작성해준 증언록을 제시하며


다시 혐의를 압박했다.

“그런 하사를 작전에 투입시킨 건 러시아 쪽이지 않습니까.”

“연합군 쪽의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러시아의 정보부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일련의 사건으로 좌천된 지 오래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자발적으로 탈출했다고 봅니다.
저희도 증거가 있습니다.”

러시아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온 것인지 증거 서류를 내밀었다. 유리는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주장이었다. 자신의 증언이 너무 결정타이다 보니 어떻게든 연관이 없다고
나서는 게.

물론 영국 쪽도 만만찮게 준비했던지라, 예전에 유리가 넘어오기 전 접대했던 영국 쪽 영사나 관리가


나와서 소속을 증명했다. 재판은 결국 유리의 증언이 유효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긴 시간 동안
공방을 거쳐 블라디미르와 나머지 부대원들에게 유죄 확정을 내렸다.

유리 또한 마찬가지로 유죄를 받았다. 물론 증언으로 인한 경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죽은 거나 다름없긴


했다. 무기징역이었으니까. 재판이 파하고 피고석에 있던 블라디미르와 유리가 보안요원에게 안내받으며
어깨가 스쳤다.

“잠시만.”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보안 요원을 세웠다. 그러자 보안 요원이 난감한 투로 그를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러시아 쪽 대변인이 나섰다. 이미 형이 나온 참이라 괜히 열을 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대령, 소란은 안 됩니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소란은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난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라서.”

“길게 끌지는 마세요. 호송 차량 올 때까지만입니다.”

대변인의 허락 아래 두 사람이 다시 섰다. 살짝 얼굴이 상한 블라디미르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유리.”

“….”

“넌 언제나 내 계산을 벗어나는 존재였어.”

대답 없는 유리에게 블라디미르는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된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나도 너를 손에 넣진 못했지만. 그놈도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안 그래?”

블라디미르가 비웃었다. 유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우리 같이 지옥에서 보자고.”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 블라디미르는 떠났다. 사실 천국에서 보자고 하기엔 둘 다 했던 일이 그렇게


깨끗하진 않았으니 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유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호송 차량을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푸른 녹음은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보안 요원은 다시 시계를
보다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자신을 찾으러 올 손님이 있었던가. 아니면 보안국에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러 온 건가. 유리의
눈은 대기실의 열리는 문을 향했다.

“반가워요.”

유리를 찾아온 사람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어딘가 귀한
티가 나는. 그녀는 옆에 따라온 경호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호원들은 자리를 잠시 비켰다.

“우리 처음 보죠?”

“저를… 아십니까?”

“그쪽은 날 모르겠지만, 난 자주 들었어요. 그 얼음장 같은 내 사촌이 죽고 못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척 궁금해서 말이지.”

사촌이라면. 작게 흘린 단서에 유리가 바로 알아차렸다. 여왕이었다. 그녀는 호호, 웃으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리를 살폈다.

“오늘도 나한테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작위도 박탈하고 싶은 걸 핏줄이라는 이유로 참았지 뭐야.”

보통 사람이 가진 눈빛이 아닌지라 유리는 자연히 긴장했다. 그러자 여왕이 말했다.


“긴장 풀어요. 난 오늘 꽤 기분이 좋거든. 당신이 협조해준 덕분에 꽤 골치 아프던 일도 해결했고.
당분간 바르샤바 측이 쓸데없는 짓은 안 할 테니까.”

콧노래를 하는 여왕에게 유리는 조심스럽게 세드릭의 근황을 물었다.

“그 사람은… 잘 지냅니까?”

“어머, 궁금해요? 사촌도 나한테 그 소리부터 먼저 하던데. 좋아하는 사람끼린 닮는다고 하더니, 진짜
그런가 봐.”

그녀는 배를 잡고 폭소했다.

“뭐, 내가 말해봤자 소용도 없는 이야기지.”

유리가 시계를 보면서 다시 부탁했다. 어쩌면 이게 그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리의 간절한 부탁에 여왕이 웃던 낯을 멈추고 대답했다.

“좋아요. 알려주지.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고맙습니다.”

“근데 궁금한데.”

세드릭의 안부를 기다리는 유리에게 그녀가 턱을 괴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증언으로 나서면 당신, 죽을 수도 있는데 왜 도망치지 않았지? 세드릭이면 그래도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유리가 작게 웃었다.

“나 하나 좋자고 그의 희생을 받을 만큼 염치없진 않습니다.”

“….”

“그리고… 도망간다고 해서 그가 불행해진다면 그건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여왕의 입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고 푹 한숨을 쉬었다.

“나 참. 둘이 똑 닮았군. 이래서야 내가 완전 나쁜 사람이잖아.”

투덜대는 여왕에게 유리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말했다.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나름의 보답을 해주죠.”


“보답이라면….”

그래도 나름 형을 맞춰서 목숨은 살려준 거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유리에게 여왕이 호위를 불렀다.

“조지, 들어와.”

그러자 아까 들어왔던 건장한 남성이 들어왔다. 여왕이 고개를 까딱였다.

“옮겨.”

“알겠습니다.”

조지라고 불린 남자는 유리의 뒤에 서서 짙은 천을 머리에 씌웠다. 당황해하는 유리에게 여왕이 웃었다.

“걱정 말아요. 대놓고 갈 순 없어서 약간의 처리가 필요한 것뿐.”

몰래 처리하려는 건가. 두건을 뒤집어쓴 유리가 체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리에게 여왕이 안녕을
고했다.

“그럼, 나가서 잘 살아요. 반가웠어요.”

#chapter 37
* * *

감옥에서 잘 살라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었다. 자국인들을 괴롭혀서 저주라도 하는 건가. 유리는
머리에 죄인처럼 천을 뒤집은 채로 몇 번을 생각했다. 그래도 어찌 됐든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나름의 자비라면 자비였다. 유리를 태운 호송 차량은 꽤 오랫동안 덜컹대었다. 코르시카에 있는 유배지로


보낸다고 했으니 마르세유나 모나코 쪽 항구를 통해서 가는 건가. 생각보다 길이 험한 모양이었다.

꽤 오래 걸리겠다 싶어 눈이나 붙일 겸, 막 눈을 감았을 때였다. 갑자기 호송 차량이 멈췄다. 그리고


유리의 양옆에 앉은 보안 요원들이 자리를 떴다.

뭐지? 어디 들르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러시아 쪽에서 매수해서 처리라도 시킨 건가.

놀랍지도 않은 처사였다. 공개로 열린 국제 재판에서 자신이라는 배신자를 통해서 보란 듯이 패소까지


했으니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었다.

여기까지인가. 어떻게 목숨은 부지했지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그래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떠날 수 있으니 미련도 없었고. 천으로 가려진 고개를 가만히 떨구고 처분을
기다리자 보안 요원이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항구가 이렇게 가까웠던가? 자신을 이끌어 갈 악력을 기다렸는데, 유리에게 찾아온 건 무력이 아니라
머리에 쓴 천을 벗겨주는 자유였다.

하얀 천으로 흐릿하게 보였던 시야가 환히 밝아지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침 일찍 공판이 열렸던
탓에 아직도 낮이 훤했다. 낡은 산장 앞에 있는 요원들이 주변을 살피며 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준비하시죠. 크루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리를 속박한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 주는 보안 요원들이 간략하게 대답했다.

“여왕 폐하께서 내리신 면책입니다.”

“면책… 이라면.”

지금, 나를 풀어준다는 건가? 다른 보안 요원이 대답 대신 미리 준비한 옷가지와 짐가방을 내밀었다.

“옷은 이걸로 갈아입으시고, 짐가방에 새로운 신분증이 들어 있습니다. 티켓이랑 같이 제시하면 됩니다.”

유리는 떨떠름하게 짐가방과 옷을 받았다. 자신이 왜 이런 알 수 없는 호의를 받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영국 안으로 들어오긴 힘드실 겁니다. 그건 특수 제작한 여권이라.”

우습게도, 그 말을 들었을 땐 작은 아쉬움이 몰려들었다. 다시는 영국으로 가서 그를 만나지 못하겠다는


계산이 살았다는 안도보다 더 먼저 떠올랐다.

요원들의 말대로 유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미리 준비한 평범한 트럭에 유리를 태워서 마르세유에 있는
항구까지 배웅해주었다. 정박해 있는 커다란 크루즈 입구로 가기 전, 보안 요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유리는 크루즈에 선뜻 탑승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요원들을 붙잡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던 탓이다.

“나를 살려주는 겁니까?”

“어차피 죽은 목숨 나가 살든 안에 갇혀 살든 차이가 없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대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괜한 불씨를 거두고 싶진 않으시다며.”

유리가 다시 불러 세우기 전에 그들은 떠났다. 그들이 남긴 말의 주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왕이 남겼던 말이, 이런 뜻이었나….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손에 있는 자줏빛 여권과 크루즈 티켓을 보면서 유리가 중얼거렸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복병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지금 상황에선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또 언젠가 우연히 그와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발이 절로 움직였다.

“티켓과 신분증 제시 부탁합니다.”

갑판에 오르기 전, 티켓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직원이 여권을 받아들고 꼼꼼히 살폈다. 유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괜한 행동으로 수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확인했습니다, 무슈 조엘. 수에즈와 뭄바이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홍콩까지 일등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조엘? 뒤늦게 여권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자 조엘 유스턴이라고 적힌 이름이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들어가자 두 명이 탈 수 있는 객실을 안내했다.

호화로운 일등석 객실은 두 개의 침대를 양쪽 벽에 두고 한껏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직원은 능숙하게


다음에 올 사람을 예고했다.

“다른 분은 다음 정박지인 팔레르모에서 탑승하실 예정입니다. 그럼 이만.”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탑승한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유리는 직원이 떠나자마자 직업병처럼 바로 방


안을 탐색했다. 탑승객을 대충 파악해야 했다.

혹시라도 바르샤바 쪽 인사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선. 갑작스러운 여왕의


호의는 기꺼우면서도 이럴 땐 약간 난감했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객실 문 앞 승객 탑승 표에 끼어 있는 두 명의 이름은 생소한 자신의 이름, 조엘 유스턴과 낯선 이의 이름,


더글라스 엘우드. 이름을 보고 바로 추측이 나왔다.

“영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 처음 듣는 이름인 걸로 보아, 귀족이나 유명 정치인은 아닌 거 같고. 신흥 부호정도 되는


사람인가. 꽤 여러 나라를 거쳐 홍콩까지 가는 호화 크루즈를 일등석으로 탈 사람이면 보통 돈 많은
사람은 아닐 터였다. 전쟁으로 떼돈을 번 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슬쩍 투덜거렸다.

“차라리 2 등 객실로 보내줄 것이지.”

사람 많은 곳에 묻혀 있으면 차라리 이상한 의심이라도 피할 수 있을 텐데. 영미권의 사람과 단둘이


객실에 있는 것은 좀 껄끄러웠다.

게다가 보통 사람도 아니 부호 정도 되는 사람이면 지금쯤 연합국 쪽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판이 아닐 텐데. 숨겨서 보내주는 건지, 아니면 도중에 들켜서 잡혀 오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거 무슨 함정도 아니고….”

유리는 살짝 한숨을 쉬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음 정박지에 도착할 무렵 밖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밤이 깊어서 같은 객실 손님이 잠들 무렵,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객실 안에 있던 비치용 도서를 심심풀이로 읽고 있을 무렵, 시칠리아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갑판에


울려 퍼졌다.

[연료 공급과 함께 잠시 정박합니다.]

슬슬 나가 있을까. 해가 저무는 것을 구경하러 갑판 위로 나섰을 때였다. 지중해 중앙에 멈춰서 있는


붉은 빛을 가져온 서풍이 제법 따스하게 유리의 뺨을 간질었다. 수평선 너머로 작은 섬도 보였다.

아마도 그의 고향이리라. 살아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무뚝뚝한


입술에 작은 미소가 띄워졌다.

가만히 푸른 바다 너머의 작은 섬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으로 인기척이 들어왔다. 수많은 크루즈 손님 중에


하나겠거니, 취급하고 있었는데 대뜸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바다, 좋아합니까?”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리가 없어. 유리의 뒷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인기척을 내던 사람은 유리의 옆에 난간에 팔을 기대고 산뜻하게 자신의 취향을 밝혔다.

“나는 좋아합니다.”
환청인가? 그 사람이…. 믿기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움직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눈 색깔과 닮았거든요.”

그러자 다정한 흑색의 눈빛이 유리를 마주했다. 유리는 믿기지 않아 목소리를 겨우 내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지금쯤 런던에서, 여왕의 곁에서 직무를 다해야 할 사람이 왜 자신과 함께 이 갑판 위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난간을 부서질 듯이 잡고 있는 유리의 손 위로 커다란 온기가 감싸 안았다.

“당신을 죽이면 나 또한 모든 걸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왕실 핏줄이 자살로 타블로이드를 화려하게 광고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생각대로 하라고 했어요.”

네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유리 자신이 모든 것을 걸었는데. 그걸 다 버리겠다고 했다니. 세드릭이 씩


웃었다.

“그러자 마가렛이 주인도 몰라보는 사냥견은 실격이라고 쫓아내던걸요.”

세드릭이 보안국 요원 자격을 파기하고 떠나는 길에 여왕의 선물이라고 받은 박스는 시칠리아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티켓과 새로운 신분증이었다.

“왜 그랬어? 당장이라도….”

돌아가라,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너무 꿈 같아서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면 신기루처럼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살아 있으면.”

거짓말 같은 온기의 감촉에 손이 움츠러들었다. 선연한 체온에 다시금 깨달았다.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 사실을 일깨웠다.

“우린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말.”

마지막인가 하면, 꼭 그 끝에서 너를 만나고 있었다.

“기억합니까?”

마치 마지막 구원처럼, 네가 나를 찾아왔다. 나 또한 언제나 너를 찾았던 것처럼. 세드릭이 유리를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앞으로는 계속, 눈 뜨고 감을 때까지 당신만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붉은빛이 푸른 바다를 물들였고, 모든 것을 걸었던 마지막의 끝에서 다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끝>

살로메 (SALOMÉ) 3 권

ⓒ 2021, pomelo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초판 발행일 2021 년 7 월 9 일

지은이 pomelo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 년 3 월 25 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저희 북팔은 작가님들의 스토리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금 o 요게 x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