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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가끔 그곳에 있을 너를 그리곤 한다.

1 화. Nouveau Depart(1)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엔 딱 두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하나는 ‘그럴 줄 알았다.’


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이었다. 내 인생이건, 가족으로서의 책임이건. 아니면 그들이
내게 기대하던 최소한의 보상이건.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그런 상투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고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늦기까지 했다. 다만 길었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조차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는 게
허무해졌을 뿐.

“잘된 일이지. 그런 곳에서 너 같은 반편이 오메가를 데려가 준다니까.”

아버지는 말을 잇는 내내 드물게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간혹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눈을 빛내기도 했다. 물론 이따금 떠오르는 경멸 어린 시선에는 반쪽짜리 오메가를 향한 혐오가
가득했지만 말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고. 원래 사업이 다 그런 거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이 애비 맘 이해할


거라고 믿으마.”

이리도 인자하게 말할 거면 적어도 표정만큼은 숨겼으면 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마치 값어치
나가는 물건을 내다 파는 듯했으니. 신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야심만이 남았는데, 어떤 마음을 이해하면 좋을까.

“세진이 너한테 기대가 커. 너만 잘해주면 네가 우리 기업을 살리는 영웅이 되는 게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건 알고 있지?”

“……예, 아버지.”

이번엔 도무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아버지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들떠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당장 다음 주 토요일이 약혼식이니까 일정 다 비우고 관리라도 받으러 다니든가 해. 왜, 민재가 다니는


그거 말이다.”

다음 주라. 그 말인즉 이 혼사를 꽤 오래전부터 논의해 왔다는 의미였다. 내가 거부하지 못할 걸 알면서,


구태여 당사자만 쏙 빼놓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니, 어차피 선택권이 없으니 포함할 생각조차 못 한 게
분명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 봐.”

사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상대 기업은 나를 왜 받아들였는지. 능력 좋은 여자 오메가가 아닌


남자 오메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버지는, 아니 해신그룹은 나를 넘기는 대가로 무얼 받기로
했는지.

“뭐해? 얼른 가서 준비하지 않고.”

하지만 물어본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조금 더 확실히 알게
되는 정도일까. 이럴 때일수록 현실은 적당히 회피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웠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느리게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예의상 안부라도 여쭐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어깨가 무거웠다.

“아, 그렇지. 참.”

아버지는 내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잠깐 서 보라며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조그만 물건 하나가 휙 날아왔다.

“최 교수한테 말해서 받아 놨어. 괜히 퀭한 얼굴로 나와서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이번 주는 그거라도


먹고 푹 자둬.”

바닥에 떨어진 약통이 데구루루 구두 앞까지 굴러왔다. 일부러 받지 못할 위치에 던졌으면서 아버지는
그거 하나 못 받냐며 혀를 끌끌 차기 바빴다. 허리를 숙여 약통을 줍는 와중에도 머리맡에선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봐줄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놈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내게 그나마 딱 하나 잘난 구석이 있다는 게. 그러니


아버지도 그걸 빌미 삼아 정략결혼을 제안했겠지.

“제가 잠 못 자는 거 알고 계셨네요.”

“그럼, 내 아들인데.”

동그란 약통을 손안에 꼭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성분을 표기한 글자가 보였다. 진정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는 게 우스웠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살가운 미소를 머금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움이 피어났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눈매엔 자기
자신을 향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가보거라.”

“네, 아버지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가볍게 묵례를 건네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회장실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소리 없이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약통을 손톱으로 갉작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이미 내성이 생길 만큼 복용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지난해, 해신은행에서 출시한 애플리케이션이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입자 90%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저장된 인증서는 백여 건이 넘게 악용됐다. 황급히 보안을 강화했지만, 이미 잃어버린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신금융 본사의 채용 비리가 고발된 것이다.
아버지는 곧장 관련 직원을 잘랐으나, 동시기 지원자의 자살 소동으로 논란은 점점 불거지기만 했다. 당연히
해신은 언론의 뭇매를 맞으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폭락한 주가를 1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기업 이미지를 바꾼들 해신은
결코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없다. 늦으냐 빠르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었다.

그런 시기에 회장님 아들인 내게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망조가 들어선 해신금융그룹과 사돈을 맺을
기업이라니. 그 수준이 어떨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기만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래야 할 터인데.

“다음 주 토요일에 선호그룹과의 약속이 잡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근묵자흑이니, 도긴개긴이니. 한가득 떠올랐던 생각들이 새하얗게 휘발됐다. 그 대신 머릿속을 채운 건


잔뜩 고양됐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김 실장은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 갔다.

“장소는 명성호텔이고,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반입니다. 정세진 본부장님께서는 그날 오전부터…….”

“아니, 아니, 잠시만요, 김 실장님.”

넥타이를 매주던 직원을 밀어내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김 실장이 직원을
피팅 룸 밖으로 내보냈다. 달칵, 문이 닫힌 뒤에야 목까지 차오른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결혼 상대가 선호그룹입니까?”

다음 주 토요일이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약혼식 날짜였다. 김 실장은 ‘약속’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런


거물급 상대를 두고 다른 일정을 이중으로 잡을 리가 없다. 거기다 장소가 무려 명성호텔, 선호그룹의 연계
사업체였다.

“예, 그렇습니다.”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뉘앙스였는데 내가 정말 꿈에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엉망이 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 결혼 상대가 선호그룹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만…….”

김 실장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그는 의아한 눈을 한 채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봤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

모르다마다.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이고 외모는 어떻게
생겼는지. 하물며 뭐 하는 기업인지도 모른 채 대충 알파겠거니 짐작했을 뿐.

“……상대도 모른 채로 약혼식 날 입을 예복을 맞추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니 저토록 기막힌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말한 아버지나,
자세히 묻지 않은 나나. 남들이 보기엔 둘 다 어이가 없겠지.

“뭐, 벌거벗고 만날 건 아니니까…….”

실크로 된 넥타이를 행거 위에 걸쳐 놓고 몸을 돌렸다. 김 실장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는데,


아쉽게도 맞은편에 거울이 자리한 바람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김 실장은 나직이 한숨을 삼키며 거울 속 나와
시선을 맞췄다.

“더 묻지 않으십니까?”

“뭐를요?”

무얼 더 물으면 좋을까. 선호가 왜 해신을 선택했는지는 의아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아버지가 신경 쓸


문제였다. 그냥, 적당히 옷이나 맞추고 방긋방긋 웃으며 결혼하면 그만이었다.

“제가 알기로 선호그룹에는 미혼인 자제분이 두 명이나 되시는데요.”

“예,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순순히 대답했으나 김 실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번엔 소리까지 섞어 한숨을 내뱉는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보였다.

“둘 중 누구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아.”

순간, 멍청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미처 생각지도 못해서가 아니라, 김 실장이 그리 물을 줄 예상도 못


해서.

“뭐하러 물어봅니까.”

선호그룹 부회장인 권상미에게는 총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하나는 이미 결혼한 부사장이었고, 다른 둘은


애매하게 결혼 적령기를 지난 알파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내게는 과분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둘 다 선호면 됐죠.”

“그런 말이 아니라…….”

곧장 반박하려던 김 실장은 이내 아차 싶은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고개를 돌린 내가 거울이 아닌


맨눈으로 시선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슬쩍 눈길을 피했던 그가 한결 정제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세진 본부장님께선 선호그룹과 혼사가 진행 중이십니다.”


겨우 외면하던 현실을 발가벗겨 보여 주는 말이었다. 더 이상 회피하지 말라는 듯, 그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덧붙였다.

“상대는 차남인 권이도 전무고요.”

“…….”

권이도.

그의 이름은 질리도록 들어 봤다.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100 인이자, 가장 주목해야 할
젊은 기업인 중 하나.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전무를 달고 선호전자 총책임자 자리까지 위임받은 사람.

“그건…… 의외네요.”

사실, 나는 이 결혼이 권이도가 아닌 그의 형과 이뤄질 줄 알았다. 고작 세 살 차이지만, 젊고 총명한


권이도와 달리 권이정은 제대로 된 입지도 없이 기생하고 있을 뿐이니까. 선호와 해신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면
약간의 하자가 있는 쪽을 내놓는 게 수지가 맞았다.

“정말 에스테틱이라도 가야 하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을 휘휘 젓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엔 놀라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직원 불러 주세요. 상대가 권이도면 끝나고 민재가 다니는 샵도 들러야 할 텐데.”

“…….”

꽉 다물렸던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하려는 말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게 끝입니까? 라든가, 그


외에 물어보실 건 없습니까? 라든가. 앞선 두 가지 중 김 실장이 택한 건 후자였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올곧게 향해 오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기대가 가득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대가 아닌 미련이었다. 나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면서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는 것쯤은 그 또한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

“있습니다. 궁금한 거.”

그래서 넌지시 운을 뗐다. 반듯하게 서 있던 김 실장이 일순 두 눈을 반짝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행거에 걸어 두었던 넥타이를 가리켰다.

“역시 보타이보단 넥타이가 낫겠죠?”

옷을 맞추는 내내 김 실장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사가 제대로 꼬였는지, 원래라면 직원을
말렸어야 할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심술의 대가로 긴 시간 직원이 건네는 립서비스를 받아
줘야 했다.
“정말 이런 색이 잘 받는 분도 드물거든요. 체형도 마네킹이랑 거의 흡사하시고……. 제가 본부장님 옷
맞춰 드릴 때마다 이 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니까요.”

평소에도 살갑던 직원은 말리는 사람이 없자 한층 수다스럽게 진화했다. 재킷은 원 버튼보단 투 버튼이
낫다느니, 베스트는 조금 더 딱 붙어야 한다느니. 다리 길이가 어떻고, 피부톤이 어떻고. 매장에 있던 모든 옷을
입혀 볼 기세로 착의를 돕던 직원은 독특한 매듭으로 넥타이를 매준 뒤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피부가 흰 편이라 밝은 계열이 잘 어울리시네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이 원단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건데 남자분들은 진주색이 잘 안 받거든요. 근데 본부장님께서는


…….”

고작 약혼식 예복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를 필요가 있을까. 듣자 하니,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끼리
조용히 치른다던데. 물론 추후 뒷말이 없으려면 가능한 한 꼼꼼히 준비해야겠지만.

그래도 슬슬 마무리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김 실장에게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정세진!”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누군가 피팅 룸 문을 열어젖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엔, 익숙한 얼굴이


직원 둘을 매단 채 들어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직원들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애걸했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씨발, 정세진 너……!”

나를 발견한 남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위협적인 태도에 옷을 봐주던 직원이 정중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손님, 안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참으로 프로페셔널한 대처였으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남자가 성난 얼굴로


직원을 노려봤다.

“비켜. 안 비켜?”

남자에게선 희미한 아로마 냄새가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둘둘 감고, 밝게 염색한 머리를
완벽히 세팅한 상태였다. 어디서 관리라도 받고 왔나 보네. 그런 감상을 떠올리는데, 남자가 이죽거리듯 입매를
늘어뜨렸다.

“야, 너네 내가 누군지 몰라? 다 잘리고 싶어서 이래? 어?”

“…….”

직원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저런 대사를 하는 손님치고 뒤처리가 조용했던 적이 없다. 정말


거물급 손님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진상이거나. 그럼에도 저자세로 나가지 못하는 건 나 또한 웬만큼 무시 못 할
거물이라서겠지.
“손님, 우선 밖으로…….”

결국, 내 앞을 가로막았던 직원이 결단력 있게 입을 열었다. 퍽 친절한 서두에도 남자의 표정은 점점


사나워지기만 했다. 나는 남자가 입을 여는 걸 확인하고 황급히 직원의 말을 가로챘다.

“제 동생입니다.”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말을 잇던 직원도, 남자를 말리던 이들도, 장식처럼 서 있던
김 실장도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해신금융그룹 차남 정민재. 그들이 떠올렸을 누군가가 보란 듯이 이를 드러냈다.

“씨발, 그렇다니까.”

“……다들 나가 보세요.”

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직원들은 선뜻 나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구 흔들리는 두 눈이 그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런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민재는 불만스럽게 인상을 구겼으나, 직원들을 내보내는 데에는 이의가 없어 보였다. 한참, 멍하니 있던
직원들은 내가 살짝 웃어 보인 뒤에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사실 실례는 민재가 했고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언제나 펼쳐지는 풍경이 이따위다. 더


껄끄러운 건, 빠릿빠릿하게 피팅 룸을 떠나는 그들에게 민재가 덧붙인 한마디였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

아무래도, 입어 봤던 옷을 모두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 이거나 저거나 비슷해 보이던 참이니 김


실장에게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되겠지.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민재는 제가 주인이라도 되는 양 가운데 놓인 소파에 주저앉았다. 척, 다리를 꼬는 모습이 아주 당당하기


짝이 없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닫힌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나 잡았던 새끼들 다 자르라고 해요.”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였다. 불쾌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는 것까지 그러했다.

“얘 옷 봐주던 직원도 같이.”


- 다음 화에 계속

2 화. Nouveau Depart(2)

“…….”

“얼굴 다 봤죠?”

흥,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못 배운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느니, 주제도 모르고 사람을 열받게
한다느니. 그가 뇌까리는 말들을 듣고도 김 실장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제를 바꾸는 건 쉽지만, 민재의 정신을 돌려놔도 김 실장은 명령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꼼꼼한 일 처리가 이럴 땐 꼭 방해가 됐다.

“……아쉽게 됐네.”

하나하나 베스트 단추를 채우며 입을 열었다. 한창 불만을 표하던 민재가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성난
시선에 가시가 돋고, 비틀린 입매가 차갑게 벼려졌다.

“왜, 뭐가 아쉬운데?”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민재는 내가 반대 의견을 낼 때 더 불이 붙는 경향이 있다. 아마 조금이라도


직원들 편을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해고할 거다.

민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무관심한 태도. 그래, 딱 얼굴만 아는 사람이 퇴사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중요했다.

“아니, 아까 그 직원이 조용해서 편했거든.”

“…….”

의외로 반응을 보인 쪽은 김 실장이었다. 슬쩍 미간을 좁힌 그가 고개를 돌린 채 실소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는 눈치채지 못했고, 삐딱한 얼굴로 눈썹을 씰룩였다.

“졸라 수다스럽게 생겼더만…….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알잖아. 나 남이랑 말 섞기 싫어하는 거.”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단추를 채웠다. 베스트 밑단을 탁탁 털어 내자 민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쭉 내려왔던 입매가 움찔 달싹였다.

“또 얼굴 트기 귀찮은데…….”
반쯤 사실에 기반한 핑계였다. 적응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은 귀찮고
번거롭기만 했다. 민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며 혀를 찼다.

“아무튼, 사회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새끼……. 그러고도 네가 본부장이냐?”

무어라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가볍게 마주 웃는 것으로 민재는 기분이 완전히 풀린 듯했다. 까딱, 까딱,
발끝을 움직인 그가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쳐올렸다.

“김 실장님, 아까 걔들 그냥 둬요.”

대단한 선처였다. 적어도 민재만큼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정세진 저 모자란 새끼 쪽팔려서 어디 내놓을 수가 없네.”

거울 속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예, 알겠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답하면서 눈으로는 뚫어져라
나를 관찰한다. 새삼스럽게. 이게 뭐 드문 일이라고.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야?”

지금이야말로 주제를 돌릴 타이밍이었다. 김 실장은 눈치껏 내가 입은 옷과 같은 색의 재킷을 들고


다가왔다. 그가 입혀 주는 대로 팔을 꿰자, 민재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너 결혼한다며?”

눈만 들어 민재를 바라봤다. 거만하게 소파에 기대 있던 민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진짜야?”

얘도 모르고 있었나?

“그거 물어보러 여기까지…….”

“씨발, 진짜냐고 묻잖아!”

버럭 소리친 그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양팔을 무릎 위에 걸친다. 탁, 탁,


바닥을 치는 구둣발이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결혼하는 거 맞아.”

재킷의 옷깃을 잡아 앞섶을 단정하게 여몄다. 김 실장이 구겨진 목 뒤를 똑바로 펴주었다. 새로 들어온
원단이라더니 몸에 감기는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연차까지 내고 이러고 있지.”

아직 학생 신분인 민재는 해신그룹 실무에 일절 관여권이 없었다. 원래는 외국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고,
지금 한국에 있는 것도 휴학을 빙자한 도주였다. 내 혼담을 몰랐을 수는 있지만, 그걸 확인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이상했다.

“별일이네. 네가 사업에 관심을 다 가지고.”

“……사업?”
낮게 되물은 민재가 탁! 발을 굴렀다. 아드득 어금니를 맞무는 소리가 음산했다.

“미쳤네.”

그는 벌떡 일어나 공격적인 기세로 다가왔다. 눈높이가 엇비슷해서 그런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민재는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리듯 말꼬리를 늘였다.

“사어업? 지금 사업이라고 했냐?”

“…….”

“야, 주제 파악해. 너 팔려 가는 거야. 고작 너 따위가 결혼하는 게 사업이라고?”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아로마 향기도 짙어졌다. 늘 뿌리던 향수까지 잊은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오긴 했나 보다.

“상대는 뭐, 알파? 그쪽에서 특이 형질이라도 낳아 달래? 아니면 나이 많은 노친네가 너 같은 오메가


맛이 궁금하대?”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권이도는 서른두 살로, 나와는 고작 세 살 차이였다.
오메가 맛이 궁금했는지는,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었고.

“관둬, 씨발. 괜히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아버지한테 못하겠다고 얘기해.”

할 얘기가 끝났는지, 민재는 휙 소파로 돌아갔다. 시근덕거리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게 결혼은 무슨…….”

“…….”

김 실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염려와 다르게, 이 역시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 얘기 하러 왔어?”

남들은 특이 형질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라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내 형질에 감사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말처럼 ‘반편이 오메가’이기 때문이건, 민재의 말처럼 오메가 구실을 못 하기 때문이건. 내게 오메가라는
형질은 가족들이 나를 비하할 또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그럼, 내가 설마 너 보러 왔겠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독 까칠한 감이 있다.

“미안한데, 벌써 날짜도 잡혔어.”

결혼식 날짜가 잡힌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얘기했다. 구구절절 사정을 얘기해 봐야 어차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

“게다가 당장 다음 주 토요일에 약혼이고.”


“그걸 누가 몰라서 이래? 그딴 건 캔슬하면 되잖아!”

아버지에게 말했다간 당장 호적에서 파일 소리였다. 선호그룹과의 약속을 취소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

“상대도 끽해야 어디 중소기업 사장일 텐데 약혼식이 뭐 대수야? 김 실장님! 당장 토요일 일정 취소해


버리세요.”

민재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김 실장을 향해 명령했다. 분명 제 말을 들을 줄 알았나 본데, 안타깝게도


그의 희망은 단번에 깨부숴졌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도련님.”

“……뭐라고요?”

민재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김 실장은 제법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털어 냈다.

“약속 상대가 선호그룹입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일깨워 주는 한마디였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단호한 뒷말이 덧붙여졌다.

“저희 쪽에서의 일방적인 취소는 어렵습니다.”

“…….”

민재도 알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렸는지. 그러니 저렇게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겠지.

“기업 간의 신뢰가 걸린 문제야.”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진주, 라기보단 흰빛에 가까운 상아색 정장이었다. 행커치프를 색
있는 걸로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곁눈질로 민재를 살폈다.

“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잖아.”

“…….”

민재는 한풀 기가 꺾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짜증은 온데간데없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알파 새끼한테 다리나 벌리면서 살겠다고?”

“도련님!”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발언은 좀 선을 넘지 않았나 싶다. 물밀듯


밀려오는 현실감에 나도 모르게 비소가 터졌다.

“모르지. 다리를 벌릴지, 아니면 입만 벌리고 끝날지.”

“…….”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민재는 물론, 그를 말리려던 김 실장까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의지와 달리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뭐 결국엔 둘 다 벌리겠지만…….”

민재의 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나는 팔려 가는 게 맞고, 높은 확률로 그쪽에서 요구할 건 특이


형질을 타고날 아이다. 권이도와 결혼하면 매일 밤 종마처럼 뒤를 대줘야 할 게 분명했다.

“잘됐네. 이럴 때 아니면 오메가 구실을 언제 해보겠어.”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씨발, 그렇게 지껄이는 목소리가 마구 떨리고 있었다. 목에 핏대가
선 걸 보니, 한마디만 더 하면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

“……농담이야.”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엎지른 물을 주워 담았다. 내게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김 실장이고, 민재고. 왜 사람을 들쑤시지 못해 안달인지.

“뭘 정색하고 그래. 그냥 하는 말 가지고.”

“…….”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정장 하나 할래? 결혼하기 전에 형이 옷 한 벌은 해주고 갈게.”

괜히 친근한 척 말을 붙였다. 막내인 서영이 것도 고르라고 하자 민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한 반응이었다.

“형은 씨발…….”

물론 뒷말은 잔뜩 까칠했지만.

“보는 눈도 거지 같은 게 사주긴 뭘 사줘. 야, 너 그 옷 존나 안 어울려.”

“그래?”

고개를 돌려 거울 속 내 모습을 살펴봤다. 피팅용 옷이긴 해도 그럭저럭 사이즈는 괜찮았다. 어깨선은 딱


떨어지고 세로로 들어간 재봉선도 깔끔하다. 내가 보기엔 이거나 저거나 비슷한데. 역시 부담스러운 하얀색이
문제였을까.

“어, 조온나 구려. 너한텐 저런 어둡고 칙칙한 색이 딱이야.”

그러면서 민재가 가리킨 건 기성복으로 나온 평범한 정장이었다. 직원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었고,


내가 입은 것과 원단부터 달랐다. 누군가 하나쯤 훔쳐 가도 개수를 세어 보지 않는 이상 눈치채지 못할 물건.

“저게 네 수준이지.”

입고 있던 예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줄지어 걸린 옷들은 언젠가 처우를 기다리던 내 모습 같았다.


아니, 그래도 지금은 값비싼 껍데기로 포장할 수 있어 다행인 걸까.
“그럼 저 옷도 하나 하지 뭐.”

“…….”

김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높디높은 안목을 가진 그로선, 저런 양산품이 눈에 차지 않을 법도 했다.


너까지 왜 그러냐는 표정이었지만, 내게 그 의문을 해소해 줄 의무는 없었다.

“김 실장님. 오늘 입었던 디자인 다 맞춰 달라고 해주세요. 치수는 전에 쟀던 걸로 하면 될 겁니다.”

“……정말 저쪽 의복도 하실 겁니까?”

“그럼요. 제가 언제 농담하는 거 보셨어요?”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삽시간에 표정을 굳혔다. ‘아까는 농담이라며?’ 그리 말하려다 애써


집어삼킨 게 분명했다. 물론 저런 얼굴로도 성실히 주문을 넣을 걸 알고 있었다.

“이후 일정은…….”

“글쎄요.”

입고 있던 재킷은 벗어서 김 실장에게 건네줬다. 민재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한단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했다. 다시금 밀려 나간 현실감은 조금 샘솟았던 의욕마저 앗아가 버렸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잘까…….”

약혼식 날까지는 최소한 컨디션을 관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수면제까지 챙겨 줬으니,
가능한 잠도 실컷 자둬야 했고. 물론 수면제를 한 움큼 먹어도 숙면을 취하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럼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김 실장은 의외라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내 휴식에 동의했다. 어딘가 안쓰럽단 눈으로 나와 민재를
번갈아 보기도 했다. 나는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다 황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은 회사로 가죠.”

“……미친, 일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민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껏 연차까지 써놓고 회사로 돌아간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김 실장 역시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쉬셔도 될 텐데요.”

“아뇨.”

쉬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뇌리를 스친 생각이 그 욕구를 막아섰다. 앞으로 일주일. 약혼식이 끝나고도
휴가를 쓸 일은 충분히 많을 테니.

그리고 어쩌면,

“인수인계를 미리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 평생, 쉬게 될지도 모르겠고.

***

해신금융그룹 경영기획 본부장 정세진.

내 이름 석 자에 달린 타이틀은 아버지가 손수 적어 넣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 된 그 날부터. 추운 겨울, 맨발로 눈을 밟으며 길거리를 서성이던 그 날부터. 가족 없는 나를, 해신그룹
맏아들로 데리고 온 그 날부터.

그 후로 스무 해가 지나,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 해신그룹 본부장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 비해 많은 걸


얻었고, 얻은 만큼 잃었으며, 남아 있는 것들마저 조만간 잃게 될 운명이었다. 뭐,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이렇다 할 미련은 생기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


기어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버지는 김 실장을 시켜 내 모든 일정을 취소했고, 대신
마사지와 피부 관리 등으로 하루를 꽉꽉 채워 넣었다.

그 덕에 아까부터 차 안엔 민재가 풍기던 것과 같은 아로마 냄새가 풍겼다. 운전하던 기사가 코를


킁킁대며 향수를 새로 바꾸셨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신을 안정시켜준다는 허브 향조차, 오랜 불면증으로
인한 피로까지 해결해 주진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기사는 차 문을 열어 주며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기사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그리고 김 실장도,


오늘 마주친 모두가 저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만큼 내 안색이 별로였던 모양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잠을 좀 설쳐서요.”

이렇게 말해두면 열에 아홉은 납득한 얼굴로 관심을 거두곤 했다. 유일하게 김 실장만은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라며 동정의 시선을 보내 왔지만 말이다. 다행히 기사는 전자였는지, 무어라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넌지시 눈인사를 건네고 그를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무거운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잠을 좀 설치는, 고작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 사정을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진아.’

“…….”

후우, 한숨을 내쉬며 건물 입구에 카드 키를 갖다 댔다. 쓸데없이 높기만 한 오피스텔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독립한 곳이었다. 말이 독립이지, 반쯤 쫓겨난 것에 가까웠다.

‘세진아.’
“……그만 좀 불러라.”

그놈의 세진이. 아버지를 제외하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대체 언제 봤다고 세진이,
세진이, 하며 친한 척 구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금세 바뀌어 버리던 호칭까지.

‘정세진.’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 웅웅거리는 기계음에 집중했지만, 도리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만 더 뚜렷해졌다. 세진아.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더없이 싸늘한 어조로 뒤바뀌었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재킷 안쪽에 넣어 둔 약통을 꺼냈다. 안에


남은 약이 하나, 둘, 셋, 네 개. 조금 애매하지만, 이 정도면 얼추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수 있는 양이다.

“하아…….”

본능적인 두려움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불면증이야 예삿일이라지만 잠들기 무서운 건 얘기가


달랐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오는데, 자기 싫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니. 요 며칠 제대로 잤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우웅,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높은 층에 다다르기까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목까지 차오른 갑갑함을 토해 냈다.

요즘, 매일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꾼다.

- 다음 화에 계속

3 화. Nouveau Depart(3)

‘세진아.’

사위가 어두웠다. 누군가 내 귓가를 어루만지고,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
손길은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세진아.’

또다.

또 그 남자였다.

‘정세진.’

‘…….’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미묘한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안개처럼 흐릿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남자는 느리게 손을 뻗어 내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큼직한 손이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다. 하릴없이 넘어간 고개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새에 다가온 살덩이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투둑,
한계처럼 벌어진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으웁…….’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구역질은 혀뿌리를 누르는 감각에 막혀 버렸다. 느릿느릿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을 긁으며 안으로 전진했다.

‘입 똑바로 벌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토록 차게 느껴질 수 있을까. 눈치채지 못한 사이 맺힌 눈물은 미처 삼키기도


전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리적인 눈물이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그 안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도 담겨
있었다.

‘정세진.’

남자의 부름은 마치 재촉과도 같았다. 어서 빨리 똑바로 빨라는 재촉, 울 시간에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라는 재촉.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렇게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우으…….’

목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은 언제나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경하다. 고개를 뒤로 빼고 싶었지만, 머리채를
잡은 손은 약간의 퇴로마저 완벽히 차단한 상태였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귀두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제 영역을
넓혀 갔다.

‘후…….’

남자는 기어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뒤에야 삽입을 멈췄다. 낮은 숨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찌걱,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조금 더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었다.

‘욱……!’

코끝에 음모가 스쳤다. 갑작스러운 구역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확 오므렸다. 머금고만 있던 성기에
앞니가 닿고, 남자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머리채를 내던졌다.

‘……!’

깜박,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나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어디선가 고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런 건 또 처음인데…….’

낯선 손길이 허벅지를 더듬었다. 벌레가 기어가듯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내 다리를 좌우로 벌린


남자는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내며 하반신을 밀착했다. 그리고 아래쪽에 무언가 닿았다고 느낀 순간,

‘아악……!’

끔찍한 통증이 파도처럼 범람했다. 좁은 입구를 파고든 성기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겁게 내벽을 건드렸다.
뭉툭한 선단이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내장이 마구 뒤틀리는 듯했다.

‘아, 아…… 흐윽…….’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상체를 바르작거리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붙잡힌


다리를 비틀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씨발, 가만히 안 있어?’

뜨문뜨문 이어지는 장면들은 대체로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로 점철됐다. 커다란 손이 내 목을 움켜쥐는


느낌, 무지막지하게 뺨을 갈기는 감각, 그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몸을 뒤집어 개처럼 엎드리게 하는 것까지.

‘헉, 허억…….’

벌어진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렀다. 혀를 잘못 깨물었는지, 약간의 피 맛도 함께였다. 내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은 상대는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한 채 역겨운 숨결을 흘렸다.

‘……하, 그 새끼랑 잔 거 맞아? 구멍이 씹, 아다 같은데.’

‘아, 흑…….’

‘괜히, 헉, 힘이나 빼게 만들고…….’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앞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그는 자비라곤 없는 몸짓으로
나를 짓눌렀다. 모자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바닥을 긁는 손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걸레 같은 새끼……. 봐, 너도 좋으니까 이렇게 조이는 거 아니야.’

‘허윽, 악……!’

‘페로몬도…… 후, 끝내주네.’

속이 잔뜩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명치 안쪽에서부터 욕지기가 솟았다. 그러다


끝내,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나를 보며 남자는 숨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뒤이은 한마디가 저항할 의지를 모두 앗아 갔다는


사실.

‘……가 ……이거였을 줄은…….’

‘…….’
먹먹한 귓가를 파고든 음성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잔인했다.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자, 더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작 이럴 것이지.’

그 후엔 익숙한 내용의 반복이었다. 남자는 아래가 너덜거릴 즈음에야 사정했고, 성기가 빠져나간
입구에선 주르륵 피 섞인 정액이 흘러내렸다. 스멀스멀 차오른 모멸감은 갈 곳 잃은 원망과 함께 존재감을 잃었다.

‘가끔 붙어먹자고. 응?’

‘……흐.’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심장을 통으로 들어낸 것 같은 감각이 더


고통스러웠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서, 고장 난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대체로 악몽은 거기서 끝이었다.

“……!”

번쩍, 눈꺼풀이 뜨였다. 뒤바뀐 풍경 너머로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차게 식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자, 그제야 주변 공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아, 꿈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피가 도는 것처럼 굳었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됐다. 더디게 고개를 돌린 곳엔 ‘1 회 1 정’이라고 쓰인 약통이 보였다.

“……언제 잠들었지.”

어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싫다는 생각 반, 자야 한다는


강박 반. 긴 고민 끝에 후자가 승리했고 약통을 손에 쥔 채 물도 없이 수면제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악몽이었다. 끽해야 무섭기만 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 악몽은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양 불쾌했다. 아무리 수면제를 네 알이나 먹었다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하다.

“…하다 하다 이젠…….”

성의 없이 약통을 밀어내고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핑그르르 돌아간 약통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남아 있던 약을 모두 먹은 터라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텅, 텅, 공허한 소리가 났다.

협탁에 놓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전 7 시. 평소보단 늦은 기상이지만, 예정된 것보단 한 시간쯤


빠르다. 아마 여유롭게 준비해도 기사가 오기까진 한참이나 남으리라.

“샤워부터 해야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식은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밤새 몸부림을 쳤는지, 옷과 이불 역시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늦지 않게 눈을 떠서 씻고 나갈 시간이 있다는 점일까.

비틀비틀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쪽에 딸린 욕실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어제 벗어


놨던 옷들이 발치에 걸렸다. 구겨지면 입지 못할 옷들이었지만,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진아.’

“……하아.”

어느 순간 시작된 악몽은 약혼식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엔 어렴풋이 상황만 기억나다가,


이제는 그 감정과 기분, 느낌까지 생생히 떠오르는 식이었다. 꿈속에서 만난 남자는 억센 손길로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한 채 이렇게 속삭였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없다. 그저 몸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과 그 당시 느꼈던 서러움만 생생히 떠오를 뿐.

‘가끔 붙어먹자고. 응?’

“…….”

아니, 오늘은 좀 달랐던가.

‘……가 ……이거였을 줄은…….’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꿈속에서의 내가 저항하길 포기한 걸까. 피가 나도록 찢어진 아래보다 가슴


언저리가 더 아팠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도 없이 악몽을 꿨지만, 어제와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긴커녕 다른 이와


몸조차 섞어 본 적 없는 나인데. 물밀듯 밀려들던 무력감은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파혼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매일 강간당하는 꿈을 꾸는 결혼 상대라니. 어디서 이런 정신병자를 데려왔냐며 선호가 기함할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나를 집안에서 내쫓아 버리겠지.

픽 헛웃음을 흘리며 하나둘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몸을 푹 담그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잠을 잤으니 남은 건 오늘 있을 약혼식을 무사히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그토록 고대하던 해신그룹의 마지막 기회였으니.

***

선호그룹과의 약혼식은 암암리에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훨씬 나중이었다. 듣자 하니 결혼식도 미정이라던데, 결국엔 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어쨌든 나는 이른 아침부터 김 실장이 예약한 샵에 들러 옷과 머리를 세팅했다. 예복을 입을 땐 착장을


돕기 위해 달라붙은 직원만 세 명이었다. 한 명이 넥타이를 매주면 다른 한 명은 재킷을 준비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무릎을 꿇고 구두를 신겨 주는 식이었다.

그 후엔 직원들끼리 소소한 실랑이가 있었다. 머리를 올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리는 게 좋을지. 한참
논의하던 그들은 이마가 예쁘니 반은 넘기는 게 좋겠다며 저들끼리 원만한 합의를 마쳤다. 당사자인 내 의견을 쏙
뺀 결론이었으나, 김 실장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그냥 그러기로 했다.
“벌써 이러면 결혼식 땐 다섯 명쯤 붙겠네요.”

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에 김 실장은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잘하면 그땐 전날 밤부터 미리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긴장은 안 되십니까?”

무심코 차창 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반면에 내


기분은…… 뭐랄까, 조금 애매했다.

“글쎄요.”

완벽히 갖춘 차림새는 오늘따라 참 어색한데, 텅 빈 속은 울렁거리긴커녕 편안하다. 민재가 ‘존나


구리다.’라고 표현했던 그 옷, 그 상아색 예복조차 부들거리는 질감이 달갑지 않았다.

“아직 본 식도 아니고…….”

“…….”

“잘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은 잔뜩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적나라한 시선이 안경알 너머로도 따갑게 느껴졌다. 그럼
본 식 땐 긴장할 거냐고, 마치 그리 물으려다 관둔 것처럼.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한참을 이동하던 차는 명성호텔 영빈관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차를 빙 돌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감사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리려던 나는 기사가 내민 손을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에스코트는 제가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면 부탁드리죠.”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오메가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에스코트해 주려는 베타들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것도 아닌데. 오메가 중엔 여자가 많은 데다, 워낙 특이 형질이
드무니 그런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기사는 멋쩍게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맞추자, 귀 끝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김 실장이 그 모습을 보며 흠흠, 헛기침했다.

“정세진 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호텔 직원을 따라 별채로 가는 길엔 일정 간격으로 경호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 아버지가 지시한 건 아닌


듯했고, 아마 선호가 준비한 인력이지 않나 싶다. 기자들을 막기 위함이겠지만, 오히려 이편이 더 눈에 띈단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직원은 대기실 앞에 서서 손수 장지문을 열어 줬다. 드르륵, 열린 문틈으로 건너편에 있는 출입구가


보였다. 아마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나 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꽃 냄새가…….”

꽃 내음이 났다. 고작 한두 송이가 아닌, 꽃밭에 있는 것처럼 화사한 향기가. 찬찬히 둘러본 내부는
가지각색의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에 보라색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생화였다.

“……호텔 측에서 준비한 겁니까?”

이런 행사에 꽃이 빠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렇게 많이 장식된 걸 처음 볼 뿐. 그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한가득.

“선호에서 준비한 겁니다.”

직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짐작이 틀렸음을 알려 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안쪽에 놓인 테이블까지
가리켰다.

“전부 생화로 준비하라 일러두셨습니다.”

“…….”

‘정세진’ 그렇게 쓰인 카드 옆엔 가지런히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에, 그것도


정략결혼 상대에게. 무려 그 구하기 힘들다는 은방울꽃으로.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홀린 듯,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직원이 무어라 덧붙이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반으로 접힌


카드를 열어 보자, 자필로 은방울꽃의 꽃말이 적혀 있었다.

“……꽃을 좋아하셨습니까?”

김 실장은 장지문이 닫히기 무섭게 대뜸 질문을 건넸다. 몹시 의외라는 말투였는데,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카드를 내려놓고 방울방울 흔들리는 꽃다발을 한 손에 쥐었다.

“예, 뭐…….”

꽃이라면, 좋아한다. 정확히는 꽃이 아니라 그들이 머금고 있는 포근한 향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주 어릴 땐 조향사가 되고 싶었다. 나무, 꽃, 풀, 혹은 흙이나 모래. 제각기 다른 요소들은 계절마다,


그리고 날씨마다 다른 느낌을 주곤 했다. 진작부터 그 미묘한 매력에 취했던 나는 언젠가 이러한 향기를 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은방울꽃은 특히 더 좋아하고…….”

한때 내 꿈에 대해 들었던 상대(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는 모르겠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페로몬 냄새도 없는 오메가 주제에,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고.

“향이 좋아서 향수로도 많이 쓰이는 꽃이거든요, 이게.”


이 이야기엔 딱 두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첫째, 페로몬은 냄새가 아니고, 둘째, 내 페로몬엔 냄새가
없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내 후각은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꽃 같은 걸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말씀을 안 드렸으니까요.”

어쨌든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는 조향사가 되겠다는 꿈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옳았다. 내 미래는, 아버지가 만들어 낸 탄탄대로를 달릴 뿐이니까.

“미리 알았으면 종종 사다 드렸을 텐데요.”

“하하…… 김 실장님이 저한테요?”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향긋한 꽃향기를 맡자마자, 정체 모를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대신 떠오른 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분 좋은 미소였다.

“그런 건 아내분께 해드려야죠.”

“…….”

사실은, 무의식중에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고작 꽃다발 하나에 이토록 감성적인 기분이 되는 걸 보면.
이런 비즈니스로도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역시…… 향수보단 생화가 낫네.”

슬며시 눈을 휘었다. 그런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원에도 생화가 많을 겁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감이 묻어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놨다. 손끝에 남은 은방울꽃 향기에, 처음으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 화. Nouveau Depart(4)

대기는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졌다. 지나치게 일찍 집을 나선 데다, 부르기 전엔 대기실에서 있으라는


아버지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대와 인사는 나눠 봐야 할 텐데. 통성명을 하긴커녕 얼굴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본부장님.”

대기실에 콕 틀어박힌 나와 달리 김 실장은 바쁘게 안팎을 오가며 아버지의 말을 전달했다. 한 번은


대략적인 식순을 알려 줬고, 또 한 번은 간단히 먹을거리를 가져다줬으며, 다른 한 번은 태블릿 PC 로 권이도의
정보를 띄워 줬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내민 건, 조그만 립스틱 크기의 공병이었다.

“회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담겼을 내용물이 충분히 짐작 갔다. 가만히 몸체를 만지는 내게 역시나


예상했던 한마디가 건네졌다.

“페로몬 향수입니다.”

페로몬 향수라. 이런 건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아버지께 몇 번이나 얘기했건만.

“곧 부를 테니 식이 시작되기 전에 뿌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김 실장은 담담히 말하면서도 어쩐지 멋쩍은 낯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삼키기도 했다. 나는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열심히 고르셨나 봐요.”

무겁지 않은 향기가 정말 페로몬처럼 자연스러웠다. 페로몬을 못 느끼는 베타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특이


형질의 향을 낸 제품. 지금껏 많은 향수를 봐왔지만, 개중엔 가장 그럴싸하지 않나 싶다.

“김 실장님이 고르셨어요?”

“…….”

김 실장은 말없이 안경을 추켜 올렸다. 그가 곤란할 때면 알게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직접 발품을 팔았던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어요. 잘 쓰겠습니다.”

예의상 건넨 말이었지만, 실제로 향 자체는 좋았다. 뭐, 페로몬적인 효과가 없다는 건 베타인 그가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손목에 찬 시계를 끌어 내려 혈관이 지나가는 윗부분에 향수를 뿌렸다. 지그시 양 손목을 맞대는 동안,
김 실장은 묵묵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나는 향긋이 남은 잔향을 목덜미에 바르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더 뿌릴까요?”

“……아뇨.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심란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지난 일주일 내내 나를 보던 시선이었다. 깊이 파고들면


이유를 알겠지만, 부러 들여다보려고 한 적은 없다.

“그…….”

가볍게 운을 뗀 김 실장이 한참 망설였다. 말하라는 의미로 눈을 들자, 그제야 어색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이런 게, 의미가 있습니까?”

“…….”

꽃향기가 이리도 자욱한데. 무뎌진 후각은 낯선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잡아챘다. 차분하고 온화한 향기는
오메가인 내게 결코 페로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잠깐의 눈속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노력.

“향기 없는 꽃에 향수를 뿌린다고 나비가 꼬이진 않죠.”

곧장 노크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김 실장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약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방 안쪽에 있는 장지문은 예상대로 정원과 연결된 출구였다. 직원 두 명이 문 옆에 섰고, 또 다른 한


명이 이런저런 사소한 것들을 알려 줬다. 가령 문이 열리면 신랑분이 데리러 온다거나, 손을 잡고 이동하면
된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건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시면 돼요.”

모든 게, 리허설이 아닌 진짜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대기시키더니, 끝내 누구도 보지 못한 채


약혼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뭐, 봤다고 한들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었겠지만.

“혹시 뭐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정리하고 옷매무시를 똑바로 가다듬었다. 뒤쪽에서 대기하던 김 실장이 재킷 뒤쪽의
구겨진 부분을 펴주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까지 손보자, 직원이 양옆에 있는 이들에게 눈짓했다.

“도련님.”

문이 열리기 직전,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 나를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김 실장의 목소리는


또렷이 전해졌다.

“잘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별말을 다 한다 싶다. 내가 잘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걱정하지 마세요.”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좁은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가가 시큰거릴 만큼 따사로웠다.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자, 열린 문 너머로 널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도련님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닌걸요.”

가장 먼저 보인 건,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들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꽃잎이 주단을 대신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생화가 하객이 있어야 할 곳을 장식했다.

화사하고 찬란한 오색의 정원 속,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른 봄의 한가운데.

그곳에 그가 있었다.

“…….”

첫인상은 그랬다. 단정히 넘긴 머리가 깔끔했고, 베스트까지 차려입은 예복이 우아했으며,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걸음걸이가 고상해 보였다.

방송으로, 혹은 신문으로, 무수히 봐왔던 얼굴이 이리도 우월한 것이었을까.

우습게도 나는 소매 끝에 달린 커프스마저 특별하다고 느꼈다. 고급스러운 음각이 새겨진 구두 역시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 모든 게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자는 몸에 걸친 모든 걸 완벽히 소화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정세진 씨?”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건 단순히 그의 외모에 감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 프로그램에서 절대 웃지


않는 기업인으로 꼽힌 그가 엷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어서였지.

“권이도입니다.”

젖은 나무처럼 묵직한 페로몬은 기품 있는 목소리와도 썩 잘 어울렸다. 고작 향수 따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존재감. 인위적으로는 만들어 내지 못할 향기가 발끝에서부터 나를 옭아맨다.

그건, 조금 전 뿌린 향수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감각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압감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것도, 그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알파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처음 보는 우성을 향한 호기심인지.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이 자꾸만 이성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버릇된 미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습관적으로 눈을 휘고,


권이도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닿는 찰나의 순간, 짙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정세진입니다.”

“…….”

그는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아주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을 뿐. 왜 그러냐거나, 무슨 문제가 있냐거나. 그런 질문을 건넬 수도 없었다.

“……확실히.”
커다란 손이 서서히 내 손을 그러쥐었다. 조금 강하다 싶을 만큼 붙잡았다가, 이내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
힘을 풀어낸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체온이 이상하리만치 포근히 다가왔다.

“실제로 보는 게 낫군요.”

“…….”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햇살이 지나치게 강해서, 아니면
권이도의 페로몬이 서글프게 넘어와서.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그가 이런 시선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사진이 안 받는단 말을 많이 듣죠.”

장난스레 대꾸했으나 권이도의 표정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유지하는 무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면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상대가 내게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단순히 사진보다


실물이 나아서라기엔 이래저래 걸리는 부분이 많건만.

하지만 그러한 위화감을 지적하기엔 장소도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을 할 사이지만, 사실상
동등한 입장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가 나를 고까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거다.

“그거 압니까?”

한 박자 늦게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무슨…….”

그가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나는 무어라 묻지 못한 채 그를 뒤따랐다. 우리는 나란히 꽃으로 뒤덮인 길을


걸었고, 단상에 다다를 때까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비스듬히 보이는 얼굴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

약혼식은 마치 결혼식처럼 진행됐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예물을 교환하고, 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케이크를 커팅했다. 오른편엔 부모님과 민재, 서영이. 그리고 왼편엔 선호그룹 일가족. 하객만 없을 뿐 그
형태는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권이도는 처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 이후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내 손에 반지를 끼워 줄 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아마 내뱉는 숨을 듣지 못했다면 가까이 있는
나도 몰랐을 터였다.

그가 끼워 준 반지는 선호그룹에서 준비한 것이었는데, 중앙에 박힌 보석이 아무리 봐도 큐빅은 아니었다.


아마 다이아몬드, 혹은 다른 무언가. 어느 쪽이건 약혼반지로 쓰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모든 식이 끝난 뒤, 샴페인을 터뜨리며 두 가족의 식사 자리가 시작됐다. 사실상 상견례였고,


실질적으로는 기업 간 신뢰를 다지는 미팅이었다. 나란히 앉은 나와 권이도, 그 앞에 두 가족이 마주 앉은
모습에, 기자가 있었다면 연방 셔터음이 들렸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돈을 맺게 돼서 영광입니다. 권상미 부회장님.”

아버지는 드물게 굽신거리는 얼굴로 선호그룹의 비위를 맞췄다. 민재는 묵묵히 식사만 이어 갔고, 그건
서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어머니만 평소와 같았는데, 그마저도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영광은요. 저희 아들이 선택한 집안이니만큼 저희 쪽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선호그룹 부회장이자 권이도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기업인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대했다. 무리하게 과한
칭찬을 건네지도 않았고, 자만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겸손을 떠는 일도 없었다. 그저 으레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느긋하게 아버지의 아부를 받아쳤을 뿐이다.

“아쉽게도 둘째가 참석을 못 했는데, 해신 측에서 양해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부디 이번 거사가 두 기업


모두에게 이점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일 때문인 걸 어쩌겠습니까. 예, 부회장님. 절대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권상미의 옆에는 그의 남편이 앉았고, 나란히 권이도의 누나 부부와 일곱 살배기 딸아이도 있었다. 저
조그만 아이가 그 드물디드문 여자 알파라던가.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기억이 있다.

그보다 저거…… 썰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제 얼굴만 한 스테이크와 씨름하는 모습이 못내 가엽게 느껴졌다. 조그만 손에 나이프를 쥐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 성과는 없어 보인다. 자리가 가까우면 접시라도 바꿔 주련만. 그런 생각으로 눈을 가늘게 뜰
즈음이었다.

“…….”

퍼뜩,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필 멍하니 있던 터라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동그란 눈이 크게 뜨여지고, 꽉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달싹인다.

내가 해명하기도 전에 아이는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제 부족함을 창피해하는 것처럼 뽀얀


뺨이 씰룩 움직였다. 괜스레 미안한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 누군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혜율이가 낯을 좀 가리죠.”

“……아.”

권이도였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건지,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아이를 번갈아 봤다. 그래,
이름이 권혜율이었지.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의 이름을 따 혜율이라고 지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었다.

“매형. 혜율이 고기 좀 썰어 주세요.”

권이도는 민망해하는 나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제 가족에게 얘기했다. 한창 문화재단 후원금에 관해


대화하던 남자가 권혜율의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권이도의 누나 역시 퍼뜩 권혜율을 살펴봤다.

“우리 혜율이 고기 못 먹고 있었어?”


“아니야, 먹고 있었어.”

“그래? 그럼 남은 건 아빠가 잘라 줄게.”

상냥한 미소는 누가 봐도 딸아이를 사랑하는 아빠의 그것이었다. 권이도의 누나는 자꾸 해 버릇해야


는다며 그를 만류했지만, 그마저도 애정이 듬뿍 담긴 잔소리에 불과했다. 그토록 냉철한 기업인이라 평가받던
이들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사장님 부부는 금슬이 참 좋군요.”

아버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칭찬했다. 괜히 내 쪽을 보며 감회에 젖은


얼굴을 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세진이도 어릴 땐 나이프 다루는 게 익숙지 않아서 고생 많이 했는데……. 그렇지, 여보?”

“그럼요. 당신이 가르쳐서 지금 이렇게 는 거지.”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퍽 다정한 대화였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화목한 가정이구나, 그렇게 여길 정도로.

“지금이야 세진이가 이렇게 번듯하지만, 어릴 땐 얼마나 챙겨 줄 게 많았는지…….”

“…….”

먹고 있던 음식이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았던 식욕도 이제는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가만히 눈을 내려 내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봤다. 가지런히 썰어 놓은 음식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의 성과가 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낮을 굶어 가며 살기 위해 배웠던 예절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은 뭐든 미숙한 법이죠.”

먹먹한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권이도는 쓸데없이 발음이 좋았다.
페로몬이 실려서 그런지, 조금 오묘한 느낌이기도 했고.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돕는 게 당연히 부모가 해야 할 일이고.”

왠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었다. 하나 그렇게 느낀 건 나뿐인지, 아버지는 신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오, 권이도 전무님 교육관이 저랑 잘 맞는군요. 나중에 아주 훌륭한 아빠가 되실 겁니다.”

아들의 배우자에게 하기엔 조금 과한 존대가 아닌가 싶다. 우스운 건, 그 모습에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이었지만.

“말 나온 김에, 어떻게 저희 세진이랑 자녀 계획은…….”

쟁그랑.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질적인 소리가 대화를 갈라놨다. 묵묵히 있던 민재가 포크를 접시에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민재는 발개진 얼굴로 잽싸게 다시 포크를 쥐었다.

“죄송합니다.”

어색한 정적이 테이블에 붕 떠올랐다. 매섭게 눈을 치켜떴던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저희 애가 아직 학생이라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서…….”

“아뇨, 이해합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이번엔 상대가 권이도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입가를 떨며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권이도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긋한 동작으로 잔을 내려놨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이들은 미숙한 게 많다고. 아까 보셨다시피 제 조카도 식기 다루는 게 익숙지


않거든요.”

순식간에 일곱 살 어린이와 동급이 된 민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겠는지,
분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일지라도 이런 상황에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오랜 시간 기업을 경영한 사람답게, 아버지는 민재보다 훨씬 표정 관리에 능했다. 민재에게 냅킨을


건네주던 어머니도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권이도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가볍게 운을 뗐다.

“자녀 계획을 물으셨던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을 쭉 훑어보곤 담담한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을 뿐.

“뭐, 이 약혼식이 계약의 일종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은 없을 거고…….”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그럴싸한 예식을 치르면서도 아버지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있는 것을.

“말 나온 김에 조건이나 얘기하죠.”

- 다음 화에 계속

5 화. Nouveau Depart(5)

본능적으로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지금까진 방관하듯 있었지만, 자녀 계획과 관련된 조건이라면 들어


둬야 했다. 게다가 권이도의 말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조건은 두 가집니다.”
차분한 눈매가 여유롭게 모두를 둘러봤다. 기대에 찬 얼굴들을 지나 바로 옆에 앉은 나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두 눈이 지금까지와 다른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첫째, 정세진 씨가 당장 내일부터 내 집에 들어와서 살 것.”

대답하라는 건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권이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금세 표정을 지우고 이번엔 아버지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둘째.”

지금이야말로 민재가 말했던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생판 모르는 알파 새끼한테 다리나 벌리고 사는
것.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이유도 아마 아이를 좀 더 쉽게 갖기 위해서겠지.

“해신그룹 본부장 자리를 관둘 것.”

“…….”

잠깐 권이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말도 마찬가지였다. 황망하게 눈을


깜박이는 우리에게 그는 퍽 자비로운 어투로 덧붙였다.

“이의가 있다면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 권이도 씨.”

당황스러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권이도의 팔을 붙들었다. 사소한 행동이었으나 권이도는 물론, 손을 올린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약혼식 내내 손을 잡고 있었어도 이렇게 막 건드려도 되는 사이는 아니건만.

“죄…….”

“죄송하지 않아도 되니까 얘기부터 듣죠.”

그는 단호하게 내가 건네는 사과를 끊어 버렸다. 어색하게 들어 올린 손을 다시 제 팔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지그시 시선을 맞춘 그가 깔끔한 눈썹을 찌푸렸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듭니까?”

설마하니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나를 언제 봤다고 이런 눈빛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녀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시려는 줄 알았는데요.”

나는 분명 그가 결혼으로 얻고 싶은 내용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아이를 몇 명 낳아야 한다거나,


양육권을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 수지가 맞지 않는 오메가를 골랐다면 그의 목적은 단연 2 세뿐일
테니까.

“글쎄요.”

그러나 권이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답을 미적거렸다. 내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그건 추후에 나랑 둘이 논의하죠.”


“……둘이?”

턱, 말문이 막혔다. 둘이 논의하겠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장난처럼 덧붙인 뒷말 때문에.

“아직 미숙한 아이들도 있는데, 가족들을 모아 놓고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이건 알아서 잘하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조크일까.

둘이 논의하겠다는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세한 계약 내용을 정하려면 히트나 러트 사이클 주기를
필히 공유해야 할 테니. 그러기 위해서는 여럿이 모인 자리보단 조금 더 사적인 공간인 게 낫긴 했다.

진짜 문제는 그가 내민 두 번째 조건이었다. 내가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권이도에게 그 어떤


이득도 되지 않는다. 암만 후계를 위한 결혼이라 한들 최소한의 지위조차 없는 나를 도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

아, 혹시 그런 건가.

간혹 있었다. 구시대적 사고로 배우자가 집에서 내조만 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던
기사처럼 권이도도 나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흠흠, 전무님?”

잡념을 깨트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곤 느물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세진이가 일개 직원도 아니고, 본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만두면 저희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눈빛은 강경한데,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곤란함을 어필하면서도 권이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래는…….”

“그럼 정세진 씨한테 묻도록 하죠.”

세 번째. 말이 끊긴 아버지가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무시당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로선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다. 그런 아버지를 뒤로하고 권이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정세진 씨, 본부장으로 계속 일하고 싶습니까?”

기회를 주는 듯했다. 그렇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것처럼. 물론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

“말씀하신 조건에 맞추겠습니다.”

희비가 교차했다. 권이도의 표정은 예상대로였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뿌듯하게 웃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왜인지 못마땅한 눈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내게 권력을 쥐여 준 걸 탐탁잖게 여겼건만. 본부장이라는 직급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달아 줬을 뿐, 언젠가 쓸모를 다하면 직접 거둬 갈 예정이었을 텐데.

“그렇다는군요.”

거보라는 듯 권이도가 입매를 늘어뜨렸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히


전달됐다. 아버지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일을 관두는 건…….”

“정 회장님.”

네 번째.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주름진 눈가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니, 이 자리가 끝나면 김
실장의 고생길이 열리겠구나 싶다. 그건 이어진 권이도의 질문으로 더 확실해졌다.

“내가 지금 제안하는 걸로 보입니까?”

부회장인 권상미도 갖춰 주던 예우를 권이도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갑을 관계를 명확히 하겠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로 덧붙였을 뿐이다.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셨다면 유감이군요.”

“…….”

“한 그룹의 총수씩이나 되는 분이 그 정도 상황 판단이 안 되면 곤란하죠.”

가식적이고 친근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아들의 독재를 막을 법도 하건만, 권이도의 가족은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동등한 입장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일까.

“대충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 건배나 한번 할까요?”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샴페인 잔을 들었다. 나는 가족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잔의


가느다란 부분을 어루만졌다. 저마다 불쾌함이 드러나는 표정들은 그리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었다.

“약혼 축하는 아까 했으니까, 오늘부로 은퇴할 정세진 본부장님을 위해?”

“……!”

아버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욕적인 언사도 모자라, ‘오늘부로’라는 갑작스러운 시간 제약 때문이었다.


이제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보면서도 권이도는 뻔뻔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정 회장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상이 엎어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어서 잔을 맞대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도발하는 사람의 그것이었으니.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내키지 않는단 얼굴의 가족들과 영 속을 알 수 없는 선호그룹 식구들. 불유쾌한 건배가 일방적인 협상의
성사를 알렸다.

***

식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정원에 땅거미가 질 즈음이었고, 꽃과 함께 장식된 조명이


하나둘 주변을 밝힐 즈음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가족들의 표정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근데 정세진 씨.”

디저트를 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의 누나가 입을 열었다. 선호그룹 부사장이자 권혜율의 엄마인 그는


권상미와 꼭 닮은 우성 오메가였다. 길게 내려온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오메가 맞죠?”

시선이 느껴졌다. 선호그룹 식구들이 의아해하는 시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혀를 차는 시선, 민재의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과 서영이의 방관하는 시선까지.

“우성 오메가라고 들었는데,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질 않네요.”

“…….”

그러니까, 향수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대도.

“오메가 맞습니다. 우성이고요.”

나는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게 있는 하자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그런 건 이미


수백 번 시뮬레이션해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오메가의 기능엔 문제가 없다는 것도 간결히 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만 제가…….”

“꽃 냄새에 코가 무뎌졌나 보네.”

그런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뒷말을 빼앗았다. 유일하게 시선을 보내지 않던
권이도였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깔고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거든.”

꿈결 같은 말씨였다. 조금 전까지 아버지를 몰아붙이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권이도 정도


되는 알파가, 고작 향수 따위에 속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나는 멀거니 권이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반듯한 눈썹뼈 아래, 그려놓은 것처럼 정갈한 콧대가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얼굴이 자꾸만 다정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내 약혼자 페로몬을 다른 사람이 알 필요는 없지.”

권이도는 그리 말하며 넌지시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벼운 물음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의 누나 역시 남편과 시선을 교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해결이었다. 애초에 큰 관심은 아니었는지 내게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아버지는 뿌듯한 미소(향수가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를 지었으나 나는 이게 아버지의 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

이 사람은 왜 나를 도와줬을까.

세간에선 권이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공과 사 구분이 뛰어난 만큼 냉철한


사람이라고. 정확히는 업계 소문이었지만,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내용일 게 분명했다.

그런 권이도가 내게는 벌써 두 번째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한 번은 그의 팔을 건드렸을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조금 전 그의 누나에게서. 그것도 내 페로몬이 꽃향기와 비슷하다는, 그런 간지러운 말까지 해가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무심코 적나라한 눈길을 보낸 모양이다.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가


선택지를 내밀었다.

“지금 할래요, 아니면 내일 들을까요.”

“…….”

아, 내일.

“……별거 아닙니다.”

당장 내일 들어오라고 했던가. 하루아침에 거처를 옮기게 됐지만, 이렇다 할 불만은 생기지 않았다.
상대도 모르는 약혼식에 결혼보다 이른 동거. 비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오히려 정상적인 과정이 더 드물었으니.

“그래요, 나중에 둘이 얘기합시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포크로 디저트를 톡 건드렸다. ‘둘이’라는 말에 입 안이 달아진 탓이었다. 사실은


내가 타인의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 한편이 저릿저릿했다.

그로부터 10 분쯤 지났을까. 식기를 내려놓은 권상미가 슬슬 일어나자는 말로 자리를 정리했다. 권상미와


아버지가 악수를 나누는 동안,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코트를 걸쳐 줬다.

“자택으로 가시겠습니까?”

“음, 원래는 본가로 갈까 했는데…….”

흘긋 가족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서영이는 그나마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특히나 민재는 평소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게 낫겠네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써 내뱉은 말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을 거다. 부탁한다는 의미로 웃어 주려는데,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씨.”

일부러인지, 권이도는 정확히 민재의 눈초리를 가로막고 섰다. 눈치를 살피던 김 실장이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정원을 밝히는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권이도의 얼굴을 비췄다.

“괜찮으시면 좀 걸을까요.”

***

정원에 딸린 산책로는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식장으로 돌아오는 구조였다. 판판한 돌길을 따라 조성된


조경이 걷는 내내 눈요기가 되었다. 원래는 개방된 곳인가 본데, 미리 손을 쓴 건지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권이도는 산책로에 들어온 이후 내게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춥진 않겠냐며 코트를 살펴본 게 그가


보인 마지막 반응이었다. 그러는 본인은 정작 외투도 없는 예복 차림이면서 말이다.

“…….”

“…….”

타박, 타박, 돌바닥을 밟는 소리가 선명했다. 주변이 고요한 터라 조그만 풀벌레 울음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권이도의 구두를 한 번, 내가 신은 구두를 한 번. 느릿느릿 시선을 옮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을 참 예쁘게 꾸며 놨네요.”

어떤 의도로 산책을 권했는지 몰라도, 대화를 주선해야 하는 쪽은 나였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도 하나도 빠짐없이 온통 내 역할이다.

“조명이 있어서…… 별로 어둡지도 않고.”

“…….”

“봄이 되면 더 예쁘겠어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지만, 그렇다고 실수할 만큼
미숙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사근사근 굴다 보면 적어도 나쁜 첫인상을 남기지는 않을 테니까.

“날이 풀리면 꽃을 심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권이도는 지그시 눈을 맞춘 채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밤공기와 어울리는 음성이 그의


페로몬처럼 깊이 있었다.

“봄에는 봄꽃을, 여름에는 여름꽃을, 가을에는 가을꽃을.”

“…….”
“아직은 조경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전부 완성된 건 아닙니다.”

만약 선호그룹 자제가 아니었다면, 배우 같은 걸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발성이 좋은 터라 한마디


한마디가 무게감 있게 귓가에 감기는데.

“완성되면 한 번 와야겠네요.”

차가워진 귀 끝을 문지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권이도의 시선이 머리꼭지에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권이도는 나보다 반 뼘은 더 커다랬다.

“오늘…….”

그는 넌지시 운을 떼고 잠깐 말을 골랐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던 그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대기가 길었을 텐데, 지루하진 않았습니까?”

“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짙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덕분에? 그렇게 묻는 것처럼.

“꽃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거든요.”

정말이지, 지루하지 않았다. 가지각색의 꽃들을 구경하느라 전에 없는 편안함을 느꼈으니까.

“꽃다발도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내일 댁으로 갈 때 가져갈까 하는데…….”

장식된 생화는 몰라도 은방울꽃은 김 실장이 챙겨 뒀다. 원래는 집에 가져갈 예정이었으나, 거처를
옮기는 김에 함께 챙겨 갈까 고민 중이었다. 그래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으려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권이도 씨?”

“…….”

그는 처음 내 손을 잡았을 때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운 탓인지,


얼핏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간신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정세진 씨.”

“…….”

“우리 내일도 봅시다.”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내일부터 한집에 살게 될 텐데.

“내일은 권이도 씨 집에서 뵙겠네요.”

우리는 당연히 내일도 만나게 될 사이였다. 내일뿐만 아니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매일 얼굴을
보게 되겠지. 굳이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도 결혼을 약속한 이상 그럴 터였다.

“이렇게 된 거…… 조금 늦었지만 통성명을 다시 하죠.”


장난스레 말하자, 권이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정세진입니다.”

반쯤 농담처럼 건넨 악수였다. 분위기를 풀 겸, 이 민망한 기분도 해소할 겸.

“……권이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눈을 살짝 내리깔며 더할 나위 없이 그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세진 씨.”

“…….”

그 말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유 모를 기시감에 멍하니 권이도의 얼굴을 바라봤을 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보듯 따사로웠다.

- 다음 화에 계속

6 화. Deja vu(1)

난생처음 만난 상대를 마냥 애틋한 눈으로 쳐다볼 이유가 뭐가 있을까.

권이도와 만난 이후 내 머릿속엔 온통 그의 생각밖에 없었다. 내리깔린 시선, 그리고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 이따금 전해지던 페로몬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눈앞을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보이는 것처럼 손이 차갑고, 그럼에도 간간이 상냥한 표정을 짓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겐 안하무인처럼 굴더니 내가 곤란해지자 곧장 도와주는 것까지 그러했다. 다정한 건지, 아니면 냉정한
건지. 고작 하루로는 그 기준을 바로 세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의문을 꿈결 삼아 밤새 지나간 하루를 곱씹었다.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 대신, 가슴


한편에 남은 기억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렸다. 끝내 잠이 들진 못했지만, 악몽을 꾸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새벽이었다.

“선호 측에서 차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찾아온 김 실장은 어쩐지 초췌한 얼굴로 권이도의 소식을 알렸다. 눈 밑이
퀭한데 옷차림은 어제와 같은 걸 보니, 지난밤 아버지에게 온갖 신경질을 들은 게 분명했다.

“고생하시네요.”

“…….”

이럴 때마다 김 실장도 참 대단하지 않나 싶다. 싫은 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내 옷가지를 챙기는 걸 보면.


“따로 더 챙기실 건 없습니까?”

“네, 그거면 됩니다.”

권이도의 집에 가져갈 짐은 조그만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필요한 건 고용인을 시키면 그만이고,
애초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거였다.

‘정세진 씨 생활에 필요한 건 저희 쪽에서 챙겨 놓겠습니다.’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였다. 거기다 친절히 덧붙이던 뒷말까지.

‘맨몸으로 와도 된다는 말이에요.’

하기야, 갑자기 들어오라고 했으니 그 또한 생각이 있었겠지.

“딱히 아까울 것도 없고…….”

9 년을 산 곳이지만, 살림살이는 많지 않았다. 끽해야 버리지 않은 전공 서적과 몇몇 소설책이 전부일까.


드레스룸에 가지런히 걸린 옷들도 그다지 미련이 남는 물건은 아니었다.

“수면제는 꽃이랑 같이 저녁 즈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권이도에게 받은 은방울꽃은 김 실장이 오래 보관할 수 있게 가공해 놓는다고 했다. 건조제를 뿌려


유리돔을 씌운다던가. 대충 물에 꽂을 줄 알았는데, 과할 정도로 정성스러운 대우였다.

“차는 몇 시쯤 온답니까?”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슬슬 내려가 있죠.”

약혼반지가 있는 걸 확인하고, 김 실장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당분간 돌아올 일 없는 곳이었으나 아쉽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 실장은 약간의 텀을 두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나를 조용히 뒤따랐다.

우웅, 엘리베이터가 이동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미묘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곳과


완전히 차단된 기분이기도 하고. 멍하니 기계음에 집중하는 내게 조심스러운 부름이 들렸다.

“본부장님.”

음, 나 이제 본부장 아닌데.

“말씀하세요.”

“따로 뵙고 갈 분은 없으십니까?”

“뭐…….”

낮게 침음하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 좁아터진 인간관계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가족들을 안


보고 가도 되겠냐는 말을 돌려 말한 듯했다.

“김 실장님만 봤으면 됐죠.”


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진심이었다. 환송받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아무런 배웅 없이 떠나는 게 낫다.
평생 가버리는 거면 모를까, 요란스럽게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 팔려 가는 것도 아닌데요.”

가볍게 흘린 말에 그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는 변명조차 없는 걸 보니, 차마


거짓말은 못 하겠는 모양이다. 그게 또 김 실장다워서 괜히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다.

“아시잖아요.”

“…….”

“피할 수 있는 건 피해야죠.”

어떤 말을 들을지 뻔한데, 구태여 내 발로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날에는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고,


아무리 나라도 항상 괜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쯤 하면 내가 할 도리는 끝난 것 같으니, 이건 김 실장도
이해해 줘야지.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던 건 아닙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다다랐다. 나는 한 발짝 앞서 걸으며 뻐근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옷을 좀 더


신경 써서 입을 걸 그랬나. 항상 정장만 입었더니 넥타이 없는 차림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

바깥 공기는 아직도 추운 기가 남아 쌀쌀했다. 어제는 그래도 따뜻하던데, 누가 환절기 아니랄까 봐


날씨가 변덕을 죽 끓듯이 부렸다. 겉옷을 입길 잘했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별안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일순, 얼굴이 구겨졌다. 오늘만큼은 조용히, 그 작은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상대를 발견했는지, 김 실장이 얼떨떨한 말투로 내뱉는 목소리도.

“……도련님?”

“야, 정세진!”

민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지고, 옷차림도 평소와 달리
수수하다. 뒤쪽에 주차된 스포츠카는 아무리 봐도 민재의 실력(주차선이 이상했다)이 분명한데, 운전도 못 하는
녀석이 왜 직접 차까지 끌고 왔을까.

“너 씨발…….”

코앞까지 다가온 민재가 위아래로 나를 훑어봤다. 분을 이기려는 듯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기도 했다. 이런 얼굴을 할 땐, 무언가 단단히 심통이 난 것임을 알고 있다.

“무슨 일이야?”
“…….”

대답 대신 민재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어머니를 닮은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너 지금 그 새끼 집 가냐?”

그 새끼라 함은, 아무래도 권이도를 말하는 거겠지. 아버지조차 높임말을 쓰는 상대에게 썩 버릇없는
호칭이었다.

“가는 길이었어. 왜?”

“그걸…… 야, 그걸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물어보지. 왜 그러는데?”

혹시 연락을 했었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아래는 부재중
전화는커녕 메시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재는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삐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뭐?”

뜬금없는 말이었다. 민재에게 들을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황당한 마음에 눈을 깜박이자, 얼굴을 구긴


민재가 톡 쏘아붙였다.

“넌 가족들도 안 보고 그냥 가냐?”

가족? 그렇게 되묻지는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그가 눈썹을 올리며 덧붙인 것이다.

“정서영이랑 나는 몰라도 부모님은 뵙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어떻게 아버지 얼굴도 안 보고 갈 생각을 해?


아버지 서운해하시는 거 몰라?”

“……아버지가 그래? 내가 안 보고 가서 서운하다고?”

“씨발,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버럭 소리친 민재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얼굴이 새빨간 걸 보니, 본인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단 걸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뒤에 있는 김 실장도 아는 사실인데, 아버지는 그런 걸로 서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아들이라는 새끼가…….”

“민재야.”

나직이 운을 떼며 왼손으로 눈가를 뒤덮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됐다.


아무리 나라도 항상 괜찮을 수는 없다니까. 왜 꼭 마지막에 와서 사람을 뒤집어 놓을까.

“그럼 어제 대기할 때 보러 왔어야지.”

어제, 나는 세 시간을 넘게 대기실에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김 실장만이 유일하게 내
식사와 안부 따위를 물어 왔다. 아버지가 줬다던 작은 향수만이 일방적인 소통의 전부였단 말이다.

“약혼식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그래.”

“…….”

민재는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손에 낀 반지를 노려봤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흡사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 짧은 숨을 토해낸 그가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그 새끼가…….”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민재는 뭐에 놀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에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차에서 내린 상대를 확인했다. 이토록 정갈한 걸음걸이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느리게 옮겨 간 시선 끝에 재킷을 가다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딱 한 마디였지만, 분위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고, 그 당당한


모습이 위압감을 안겨 줬다.

“……권이도 씨.”

그는 여유롭게 걸어와 정확히 내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새카만 시선이


올곧게 나를 향해 온다. 가을비를 맞은 나무가 이러할까. 묵직한 페로몬이 가슴 언저리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냐니.”

권이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어진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유독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데리러 오겠다고 얘기한 걸로 아는데요.”

가볍게 대꾸한 그가 무심히 김 실장을 바라봤다. 내 말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리 묻는 것처럼.


애꿎은 김 실장 대신 대답은 내가 했다.

“차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죠.”

설마하니 직접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권이도는 바쁜 사람이고, 나를 데리고 가는 건 아랫사람을


시켜도 충분하니까. 하나 권이도의 생각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차를 타고 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쁩니다.”
정말 바쁘다는 듯,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까지 확인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찼다는 이유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그 시계였다.

“그러니 이만 갔으면 하는데…….”

길게 늘어진 말꼬리는 정확히 민재를 보고 멈추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던 민재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다. 권이도는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안을 가장한 통보를 건넸다.

“형제간의 대화는 나중에 하죠.”

일부러일까. 그는 거만한 눈으로 지그시 민재를 내려다봤다. 작게 코웃음을 치며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런 건 동생이 양보해야지.”

아, 일부러 그러는 거 맞네.

“……김 실장님. 민재 좀 집에 데려다주세요.”

나는 권이도의 팔을 잡으며 자연스레 민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흘긋 내 왼손을 바라본 권이도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민재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민재야,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하자.”

주먹을 꾹 쥔 걸 보니, 조금 더 있다간 물불 가리지 않고 폭발할 터다. 더 늦기 전에 적당히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 우리나라 면허도 없는데 웬만하면 운전하지 마.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하고…….”

잠깐 고민이 됐다. 이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고. 그러나 민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입술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드려.”

“…….”

“형 갈게.”

이번에야말로 민재는 어금니를 악문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가늘게 떨리는 입매가, 조금이지만 안쓰러워
보였다.

***

권이도의 차는 운전석과 뒷자리가 분리된 프라이빗한 세단이었다. 원래 이런 차종이 아닌데, 개인적으로


내부를 개조해 만든 모양이었다.

권이도는 손수 차 문을 열어 주고, 옆좌석에 타자마자 서류와 태블릿 PC 를 오가며 업무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전화도 받았는데, 내가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영어로 대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알아들은
티를 낼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날이 좋죠.”

얼마나 지났을까. 세 번째 통화를 끊은 권이도가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마침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던


터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네요.”

눈이 시린 이유가 단순히 잠을 못 자서는 아닐 만큼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새하얀 게,


당분간은 비 소식도 없을 듯했다.

“잠을 못 잤습니까?”

“……?”

나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권이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그가 느긋이 내 얼굴을 살펴봤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피곤해 보여서요. 어제보다.”

“……아.”

언제부터 편하게 표정을 드러내고 있던 걸까. 피곤한 티를 내지 않는 건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피곤하진 않고…… 그냥 잠을 좀 설쳤습니다.”

굳었던 얼굴을 애써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기도 했지만, 권이도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무릎에 내려놓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얘기했을 뿐.

“집에 가면 우선 밥부터 먹죠.”

그리 이상할 거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이 함께 먹자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않았다면.

“아침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정세진 씨가 좋아하는 요리로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혹시 해서 묻는데, 같이 드시나요?”

“…….”

반듯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라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바쁘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정세진 씨랑 밥 먹을 정도는 됩니다.”

타이밍 좋게 권이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내게 양해를 구한 권이도는 이번엔 딱 한 마디 만에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바쁘니 비서를 통하라는 성의 없는 통화였다.

“아무튼, 식사가 끝나면 욕조에 몸이라도 담갔다가 좀 자도록 해요.”

“…….”

“입욕제도 종류별로 있으니까, 좋아하는 향으로 골라 쓰고.”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와 똑같은 반지를 보는 순간, 가슴께가 옥죄일 정도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

암만 우리가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모든 건 계약에 의한 결과였다. 잘 보여야 하는 쪽은 나고,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쪽은 권이도란 말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자꾸만 자신이 을인 것처럼 구는 걸까.

“그리고…….”

권이도는 느리게 서두를 꺼내며 보일 듯 말 듯 눈가를 찌푸렸다. 어쩐지 멋쩍은 표정이었는데, 뒷말을
듣는 순간 표정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네?”

“우리가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고,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순간 물어볼 뻔했다. 우리가 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냐고.

“아뇨, 말은 천천히 놓겠습니다.”

좋은 기회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잘해 주는 걸 기뻐하진 못할망정,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이 생겼다. 분명 적당히 가식을 부려야 할 텐데. 권이도의 앞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제가 존댓말이 더 편하거든요.”

구질구질하게 변명했지만,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싶어 살펴본 얼굴엔


다행히 불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요, 천천히 편해지면 되니까.”

글쎄요, 안 편해질 것 같은데.

뒷말은 겨우겨우 목구멍 너머로 삼켜 냈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에 권이도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는 다시금 서류를 들어 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말은 천천히 놔도 되는데, 그 죄송하단 말은 하지 말죠.”

“…….”

“내가 사과 듣는 걸 안 좋아해서.”

이건, 처음부터 죄송할 짓을 하지 말란 의미일까.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죄송합니다.’일 텐데.

“정세진 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한결 상냥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여전히 차분한 음성이었고, 페로몬이 실린 것처럼
뚜렷하기까지 했다. 괜히 명치가 울렁거리는 기분이라,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말을 돌려 버렸다.

“……길이 많이 막히네요.”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권이도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거의 다 왔다며 졸리면 눈을 붙이라고


했을 뿐. 금세 조용해진 차 안엔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분명 졸리지 않았는데, 주변이 고요하니 잠이 쏟아졌다.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가 뜨는 동안, 머릿속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령 알파 페로몬이 아늑하다거나, 히트 사이클이 얼마 안 남았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다 문득 다 늦은 의문 하나가 몰려드는 잠기운을 쫓아냈다. 별건 아니었고, 그저 사소한 위화감 정도.

권이도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알고 준비했을까.

- 다음 화에 계속

7 화. Deja vu(2)

식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대화는 없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요리는 입에 딱
들어맞았다. 너무 자극적이지 않게 준비한 메뉴들은 아침 겸 점심으로 빈속에 먹기에도 적당했다.

권이도는 정말 식사만 하고 집을 떠났는데, 집을 나서기 전 고용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갔다.


얼핏 들어보니 내게 방을 안내해 주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이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권이도의 집은 위로 3 층 지하로는 1 층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내가 쓸 곳은 정원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2


층 맨 끝 방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고용인은 친히 문까지 열어 주고 안에 있는 물건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방을 떠나 버렸다.

“……호화롭네.”

딱, 처음 느끼는 감상이 그거였다. 침실과 소파를 분리해 놓은 건 물론, 안쪽에는 개인 욕실과


드레스룸까지 있다. 방이라기보단 또 하나의 집 같은 장소. 골방을 주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이토록
사치스러운 공간이 제공될 줄은 몰랐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감의 인테리어는 원래 살던


집보다 안락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늘하늘한 커튼이나 구석에 장식된 화분 따위에서 작은 것 하나하나
공들인 티가 난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가구가 다 취향이었다. 하다 못 해 푹신하지만 무게감 있는 침구까지도.


센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건지. 약혼식 때부터 느꼈지만, 이런저런 놀라움의 연속이다.

드레스룸에 다다라서도 내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줄지어 걸린 옷가지는 둘째치고, 서랍 한 편엔


손목시계와 넥타이핀까지 있다. 설마하니 잘못 가져다 놓은 건 아닐 테고. 내로라하는 고가 브랜드를 이렇게 갖춰
놓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걸…….”

이제는 백수가 되어 버린 내겐 너무도 과분한 물건이었다. 아니, 원래도 이토록 비싼 액세서리엔 관심이
없긴 했지만.

그다음 향한 곳은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이었다. 입욕제를 종류별로 두었다는 말대로 찬장에 여러


목욕용품이 줄지어 나열돼 있었다. 동그란 건 거품이 나는 제품인가 본데…… 유리병에 담긴 건 소금인가?

“…….”

멍하니 욕조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 언저리를 손으로 짚자 대리석 특유의 찬 기운이 훅 올라왔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천장에 달린 유리창 너머 탁 트인 하늘까지 보였다.

권이도의 말대로 입욕제를 풀고 몸이라도 담그고 싶은 욕조였다. 마침 날씨가 좋으니 하늘만 구경해도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르리라. 아니, 반대로 비가 오더라도 물방울이 튀는 것조차 예쁠지도 몰랐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겠어요.’

내가 그걸…… 누구한테 말했더라.

손을 쭉 뻗어 푸르른 풍경을 반쯤 가려 봤다. 손가락 사이로 나타난 구름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창문


바깥으로 흘러갔다. 얼핏 떠올랐던 기억 역시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팔자 좋다.”

여유로운 한때였다.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맘 편히 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시간. 때 되면 차려


주는 밥을 먹고, 퇴근한 권이도를 맞이하면 되는 무탈한 하루.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미래가 마치 어제 일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디뻔한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취미라도 하나 만들어 둘 걸 그랬다고.

***

권이도는 밤이 늦을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소설책을 반쯤 읽을 즈음이었고, 김 실장이


유리돔을 씌운 꽃을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집을 나설 때처럼 완벽한 차림으로 돌아온 그는 현관에 선 나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

“…….”

“……다녀오셨어요?”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뜻 모를 시선을 보내던 권이도가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까지. 찰나의 순간이 억겁과도 같았다.
“왜.”

“…….”

“왜 나와 있습니까?”

“……?”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셨다는 말을 들어서요.’ 그리 대꾸했으나, 권이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을 뿐.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특유의 고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굳이 마중을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는 모습이 어쩐지 불쾌해 보였다. 미묘하게 찌푸린 미간마저 그가 기분이
상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왼손에 낀 반지를 응시한 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시면 내일부턴 방에 있겠습니다.”

그냥, 최대한 살갑게 굴려고 했을 뿐이다. 우선은 약혼자이니 무언가 친근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고용인에게 언질을 해두었고, 권이도가 왔다는 소식에 방에서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얌전히 방에서 책이나 보는 쪽이…….

“불편한 건 아닙니다.”

“…….”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표정을 구겼냐는 듯, 권이도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한번 강경하게 덧붙인다.

“불편하지 않아요.”

“네…… 뭐.”

두 번이나 말할 필요가 있나.

“그럼 마중 나와도 되겠네요.”

지그시 시선을 맞추고 습관적으로 눈을 휘었다. 권이도는 한결 표정을 누그러뜨리곤 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이는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면 착각일까.

권이도를 따라 2 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른 걸음걸이와 곧은


어깨가 그의 완벽한 성미를 보여 주는 듯했다. 일을 다녀왔으니 지칠 법도 한데. 어쩜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진
구석이 없다.

그가 걸음을 멈춘 건 계단과 멀지 않은 방문 앞에서였다. 그를 지나칠지, 아니면 함께 들어가야 할지.


그걸 고민하는 내게 나직한 부름이 건네졌다.

“정세진 씨.”
“네?”

새카만 시선이 내 몸쪽을 향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살펴본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방에 있는 옷이 별로던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그 속내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입은 옷들은 방에 준비된 게 아닌


캐리어에 챙겨 온 내 것이었으니. 옷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게 그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새삼 그의 눈썰미가 감탄스러웠다.

“그냥 입던 옷이 편해서요.”

권이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옷은 마음에 듭니다. 아, 시계도요.”

“…….”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한번 가볍게 움직였다.

“괜한 질문을 했군요. 입어 보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사이즈 맞게 사둔 거니까 가능한 한 입도록 해요. 그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정세진 씨 겁니다.”

권이도는 그리 말하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누가 봐도 대화를 끝내려는 모양새라, 나도 그를 지나쳐


방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혹시 바쁩니까?”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바쁘겠습니까?’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방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안 바쁘면 들어오지 그래요.”

열린 문틈으로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우성 알파가 머무는 공간답게 취할 것처럼 묵직한 향이었다.

“잠깐 얘기나 하죠.”

“…….”

나는 권이도를 한 번, 방문을 한 번 쳐다보고 남몰래 숨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알파와


오메가가 한 방에서 나눌 대화는 뻔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권이도의 방은 내 방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방엔 침대와 소파밖에 없었고,


생활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노톤의 침구와 단조로운 인테리어는 깔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권이도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샤워부터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내게는 편히 앉아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 넓은 방에서 편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소파와 침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욕실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페로몬…….”

누가 우성 아니랄까 봐, 방 안 가득 알파 페로몬이 넘쳐 났다. 웬만한 오메가였다면 개다래나무 향에


취한 고양이처럼 해롱거렸을 터였다. 권이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여유롭게 나를 두고
들어갔을까.

“뭐…… 씻으면 좋지.”

나는 다리를 꼬고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그다지 긴장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도 가능성을 높이려면 히트 사이클 때 하는 편이 좋지 않나.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린 곳엔 아까의 정장 대신 편한 옷차림을 한


권이도가 보였다. 향긋한 체취 때문인지, 아니면 자연스레 내려온 앞머리 때문인지. 분위기가 다른 사람 같았다.

“차라도 드리고 들어갈 걸 그랬군요.”

권이도는 느긋하게 걸어와 내 대각선 소파에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들이마신 숨결에 여러 냄새가
섞였다. 페로몬은 우드 계열인데, 샴푸는 코튼 계열이라니.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고용인이 차려 준 식사는 역시나 내 입맛을 전적으로 고려한 메뉴였다. 한식 위주의 식단에 국물이
자작한 갈비찜이 있었고, 반찬의 가짓수도 많았다. 심심하게 무친 나물이나 달큼한 매실차도 웬만한 한정식집
버금가게 맛있었다.

“주방장이 요리를 잘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걱정?

“내일부턴 오늘처럼 늦진 않을 겁니다. 별일 없으면 저녁을 같이하죠.”

권이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가 현실감을 앗아 갔다. 그건,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합니다.”

“……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입에서 나온 사과 때문에. 살다 살다 선호그룹
차남에게 미안하단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고작 식사를 혼자 했다는 이유로.

“아뇨…… 괜찮습니다. 바쁘셔서 그런 걸…….”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였다. 손이라도 내젓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참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이지만 시무룩해 보여서, 안 어울리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밥을 혼자 먹는 것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겸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토록 겸연쩍은 표정을 지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굳이 무리하실 필요…….”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권이도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중이 불편하지 않다던, 아까의 그 표정
같았다. 안 그렇게 생겨서, 혹시 부부 관계에 환상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아침은 어떠세요?”

눈가를 찡긋하며 말하자 그가 선선히 되물었다. 아침?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녁은 권이도 씨 일정에 지장이 갈 수도 있으니까, 오늘처럼 아침을 같이 먹죠.”

“…….”

“저도 한 끼는 같이하는 게 좋고…….”

뒷말은 반쯤 빈말이었다. 굳이 따지면 누군가와 함께 먹는 편이 좋지만, 상대가 권이도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오늘은 어색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음에도 편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게 배웅해드리기도 편하니까요.”

“…….”

말을 끝냈음에도 권이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동자로 가만히 내 얼굴을 마주
봤을 뿐. 말실수했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상냥하군요.

뒷말은 아주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여전히’라. 내가 언제 또 권이도에게 상냥하게 굴었더라. 정말


상냥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괜히 무리해서 일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엔 푹 자도록 해요.”

“아, 원래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별로 무리하는 건 아닙니다.”


가뜩이나 불면증까지 있는데 한가로이 늦잠이나 잘 생각은 없었다. 출근하던 버릇이 있어서 새벽이면 눈이
떠지기도 했고.

“……그래요, 그럼.”

권이도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아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배우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잠은 좀 잤습니까?”

이야기는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권이도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가 바뀌었으니 적응까진 시간이 걸리겠죠.”

딱히 그래서 안 잔 건 아니었건만. 마땅히 핑계 댈 말도 없어서 괜히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권이도는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다시 거둬들였다.

“…저녁에 정세진 씨 비서가 왔었다죠.”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어투였다. 마치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져다줬습니다.”

“놓고 온 물건이라면…….”

“권이도 씨가 주신 꽃다발이요.”

중요한 건 수면제 쪽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불면증이 있다고 밝혀 봐야 내게 득이


될 건 없으니까.

“오래 보관할 수 있게 가공해 놨거든요. 방에 있으니까 한번 보러 오세요.”

살갑게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는 제 입가를 가렸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돌린
채 눈가를 찌푸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줄 테니까, 만약 시들면 버리도록 해요.”

“……예, 감사합니다.”

웬만하면 무언가 더 받고 싶진 않은데. 그게 꽃이건 아니면 다른 물건이건.

“남는 시간엔 뭘 했습니까?”

“별건 안 했고, 방에 책이 있길래 좀 읽었습니다.”

“책이라면, 어떤 걸?”

“그냥 소설책을…….”

고분고분 대답하다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이 사람, 정말 ‘대화’나 하자고 나를 부른 건가?


“방 위치는 불편하지 않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라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감미로웠다. 방송에 나올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발성부터 남다르다.

“인테리어를 다시 했는데 그 끝방만 천장에 창문을 낼 수 있다더군요. 3 층을 주자니 오가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냥 그 방으로 했어요.”

“창문이라면…… 욕실에 있는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

다 마른 머리칼이 사르르 이마에 흩어졌다. 눈가에 닿는 게 거슬렸는지,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잖아요.”

“…….”

그 좋은 걸, 왜 권이도 씨 방이 아닌 제 방에 하셨나요. 안 그래도 과분한 방을 인테리어까지 다시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들이 과하다 싶을 만큼 완벽했다. 후계를 생산할 오메가에게 원래 이 정도는


해주는 건지. 권이도에겐 별거 아닌 씀씀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방은 다 마음에 듭니다. 전부 취향에 맞더라고요.”

살짝 떠보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그저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건지, 아니면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권이도는 입꼬리를 올린 채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해서 기쁘다는 듯이. 질문의 성과를 내기엔 참으로 모호한
답변이기도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책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아니면 뭐 차 같은 것도


괜찮고.”

“아뇨, 그렇게 일방적으로 받을 수는…….”

말을 하다 보니 저절로 뒷말이 흐려졌다. 권이도는 금방이라도 괜찮다고 말할 것처럼 눈가를 움찔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조건을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건?”

“네, 조건.”

일방적이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그 모든 건 결국 일종의 투자일 텐데. 권이도가 내게 해주는 만큼 내가


해줘야 할 일이 분명히 있으련만.

“아직 자녀 계획에 관해 듣지 못해서요.”

- 다음 화에 계속

8 화. Deja vu(3)

이 결혼은 달콤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약속이었고, 갑을이 분명한 계약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도 다정한 부부가 아닌 똑똑한 후계일 게 분명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마침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고, 병 같은 것도 따로 없습니다.”

오메가의 임신 확률은 성별에 따라, 그리고 우열에 따라 달라진다. 남자보단 여자가 높고, 열성보단
우성이 높은 게 보통이었다. 나는 남자였지만 동시에 우성이었으니 하자는 있어도 임신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권이도 씨 러트에 맞추는 게 좋긴 한데, 약을 쓰는 건…….”

“정세진 씨.”

권이도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고,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때 섹스하자는 말을 낭만 없이 하는군요.”

“…….”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 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눈치 없지 못했다.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건 분명한데, 그게 그의 호의를 매도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 확실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러나 상냥하게 굴던 권이도보다 이쪽이 더 익숙한 건 사실이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정세진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그는 눈가를 찌푸린 채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럼 표정이라도 좀 풀면 좋으련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아이를 좋아합니까?”

“네,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이라면 꽤 예전부터 좋아했다. 간혹 부하직원이 아이를 데려오면 그 사랑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은 보고 있는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윤 대리 아들이 곧 유치원에 간다던데. 그 앙증맞은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래요, 정세진 씨라면 좋은 아빠가 되겠죠.”

권이도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양손을 무릎 위에 얹기도


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음에도 왼손엔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세진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는 아직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군요.”

“…….”

혹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일까. 어차피 육아는 권이도의 역할이 아닐 텐데.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이도는 여유로운 낯으로 뒷말을 더 했다.

“그렇다고 내 애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생각도 없고…… 자녀 계획은 정식으로 결혼한 뒤에 다시


정했으면 합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하는지, 내가 집으로 들어올


이유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때문이었다.

“정원에 온실이 있습니다.”

짙은 눈동자가 얘기했다. 그와 관련된 주제는 여기서 끝이라고.

“관리인을 시켜서 꽃 같은 걸 심어 놨는데,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심어도 좋아요.”

“……꽃 말씀입니까?”

“네, 기르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됩니다.”

“…….”

“좋아하잖아요? 꽃.”

머리가 복잡했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살면서 몇 번 해본 적이 없는데, 권이도를 만난 이후 자꾸만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목구멍이 옥죄는 감각은 일종의 위기감과 비슷했다.

“네…… 좋아합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까?

냉정히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거 없는 일이었다. 나는 권이도가 선물한 꽃다발을 소중히 챙겨 왔고,


꽃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내 기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단 말이다.

하나 그렇게 넘겨짚기엔 이런저런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가령 그가 준비한 은방울꽃이라거나, 내 입맛에


맞는 식사라거나, 정원에 마련된 온실 같은 것들.

나는 조건 없는 다정함에 기뻐할 만큼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결혼은 적선이 아니고 권이도는


이해가 맞아야 움직이는 사업가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명이 부족했군요.”

멍하니 있는 내게 권이도가 숨결 같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무릎 위에 얹어둔 손가락을 톡톡 움직이기도


했다. 별거 아닌 동작조차 그가 권이도이기 때문에 유려해 보였다.

“조건이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 아니라,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시선 때문에.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눈빛은 그가 두어 번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서류 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임신부터 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날짜에 맞춰 의무적으로 섹스하는 취미도
없고, 정세진 씨에게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요.”

“그럼 원하시는 건…….”

“정세진 씨.”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단순히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불호령이라도 들은 양 긴장이 됐다. 권이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 결혼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마냥 방관하던 나를 질책하는 말이라면 모를까.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자, 그가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조건 없는 친절이 부담스러운가 본데, 그럴 거면 이 약혼 자체를 거절했어야죠.”

“…….”

“정세진 씨처럼 똑똑한 사람이 이게 수지가 안 맞는 결혼이라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이제 와 그러기엔


늦은 감이 있군요.”

권이도의 말대로 결혼 자체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유리한 승부였다. 선호그룹과 연이 닿은 것만으로 해신은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본 셈이었으니. 그렇기에 대가가 따르리라 생각했고, 나는 그걸 ‘우성 형질을 낳되 언제든
팽할 수 있는 다루기 쉬운 오메가’라고 결론 내렸다.
“고작 후계자 따위를 원했다면 정세진 씨보다 좋은 조건의 오메가가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딱 한 마디로 내가 세운 가정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미처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고, 내가


가장 먼저 가졌던 최초의 의문이었다.

권이도는, 왜 많고 많은 기업 중 굳이 다 망해 가는 해신을 선택했을까.

“간단한 얘기예요.”

깊어지려던 생각은 권이도의 한마디로 끊겨 버렸다. 절묘하게 맞닥뜨린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게 고정됐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잘 그려 놓은 그림이라도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나는 바라는 게 있지만 그걸 지금 말하고 싶지 않고,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정세진 씨가 내가 주는


모든 걸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말이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손짓


하나로 모든 걸 취할 수 있는 사람이다. 괜히 시간 아깝게, 이것저것 쥐여 주며 타이밍을 잡아야 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니면, 받아 달라고 애걸하길 바랍니까?”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관찰과 경계, 혹은 약간의 미련마저 느껴졌다. 여태껏 친절하게 굴었으면서,
어조는 아버지를 대하던 모습처럼 거만하다.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당연해 보였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게 결국엔 부질없는 과거가
되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어차피 쓸모를 다 하면 권이도는 미련 없이 나를 버릴 텐데. 그의 의도를 파악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권이도 씨 말씀 이해했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어요.”

때로는 포기가 그 무엇보다 나은 해결책이 되곤 한다. 그간 착한 아들로 지내며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너무 많은 사실을 직시할 필요도,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게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생존 방법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권이도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말로는 다행이라고 하면서 표정은 전혀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별안간 조그만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가볍게 차부터 시작하죠.”

차?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느새 입매를 말아 올린 그가 나긋나긋 이야기한 것이다.

“일주일 내로 정세진 씨가 갖고 싶은 차를 세 대 골라오는 거로.”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세 대보다 많아도 괜찮습니다.”

“……그 차라는 게, 설마 자동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심 아니길 바라고 건넨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권이도가 코웃음을 칠 줄은 몰랐지만.

“내가 설마 녹차 따위를 사줄까요?”

그는 배포를 좀 키워 보라며 친히 조언까지 덧붙였다. 자칫 무시처럼 들리는 말엔 약간의 뻔뻔함이


묻어났다. 내가 눈가를 찌푸리자, 그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종류는 상관없지만 적어도 내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겠죠.”

“…….”

“기사가 필요하면 함께 붙여 드리겠습니다.”

도무지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권이도는 완고했고, 우리는 앞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와


필요 없다고 말하면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터였다.

“대답은?”

“그…….”

나는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너그러운 눈매가 차분히 내 뒷말을 기다렸다. 어찌 보면


기대하는 시선 같기도 했다.

“세 대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많다고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고작 세 대가? 그리 묻는 목소리에도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기야, 권이도가 소유한 차만 두 자릿수를 웃돌 텐데. 이 정도 소비는 보잘것없이
느껴지겠지.

“차에 관심이 없어서요.”

부담스럽다기보단 번거로운 쪽에 가까웠다. 그다지 갖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타고 다닐 곳도 없었다.


게다가 이 결혼 생활이 끝나면 어디에 처분하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권이도 씨가 좋아하는 차로 한 대만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기사도 필요


없고요. 제가 면허가 있거든요.”

최대한 권이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다. 시선을 맞추고 눈을 휘며 살갑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상냥하게 웃는 것쯤은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왕 선물해 주시는 거니 잘 쓰면 좋잖아요.”

“…….”
권이도는 나직이 침음하며 턱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는 것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본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느긋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협상을 잘하는군요.”

여유로운 미소였다. 성과가 나쁘진 않구나.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권이도와 있으면 자꾸만 긴장감이 들곤 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남은 얘기는 내일 하죠.”

권이도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확인했다가 시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 권이도도 실수를 한단 사실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가를 가린 나를 보며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실소했다.

“……그만 일어납시다.”

***

권이도와의 대화는 논점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았고 나는 아주 조금의 힌트도 얻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말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아예 말해 줄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알아낸 건, 그가 바라는 게 특이 형질로 태어날 후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다리나 벌리고
살지 않아 다행인 건지, 오메가 구실마저 못하게 돼서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어느 쪽이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속을 모르겠네…….”

나는 김 실장이 가져다준 수면제를 먹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권이도를 떠올렸다. 저녁을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하다는 권이도. 꽃이 시들면 다시 사주겠다는 권이도. 나를 위해 온실을 마련하고 이제는 차까지 사주겠다는
권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권이도는 나와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내게 말을 낮추지도 않았고,


폭언을 퍼붓거나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이따금 엷은 미소를 지을 때면 내게 호의에 가까운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거기까지 생각하니 잠깐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가 내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물론 그러한 착각은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권이도 정도 되는 사람이 뭐하러 내게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무언가 교류가 있었으면 모를까, 약혼식을 기점으로 처음 만난 사이인데.

가만히 눈을 감자, 그윽한 나무 냄새가 한가득 느껴졌다. 그의 방에 오래 머문 탓에 온몸이 권이도의


페로몬으로 범벅이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숲에 서 있는 것처럼, 묵직한 향기가 숨결에 스며들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익숙할 리 없는 페로몬에 불쾌함은커녕 안정감을 느낀다는 게. 가슴 언저리를 포근히


감싸, 고요한 체향에 흠뻑 빠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는 게.
금세 잠기운이 쏟아졌다. 하루를 꼬박 지새운 몸은 밀려드는 잠의 수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깜박깜박 멀어지는 의식 속에,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그 후로 며칠간,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권이도와 아침을 함께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는


권이도는 편한 차림새인 나와 달리 모델처럼 멋들어진 모습으로 식탁에 앉곤 했다. 와이셔츠에 단추를 굳게 잠근
베스트는, 니트 따위를 입고 있는 내겐 과분한 감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 먹는 모습마저 우아했는데, 특히 젓가락을 쥐는 모양새가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정석적이었다.


반찬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이 그토록 품위 넘칠 수 있다니.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간간이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출근을 하기 전, 권이도가 늘 건네는 말이었다. 경호원과 고용인이 빼곡한 집에 일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으리라고. 그 말을 하고도 두어 번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는 마치 미련처럼 보였다.

어쨌든 이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권이도에 대해 여러 가지 부분을 알게 됐다. 그가 평소엔 정말


표정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화할 땐 종종 웃는다는 것, 고용인이 그를 무서워한다는 것과 그의
말이 이 집에선 곧 법이라는 것.

그리고 혼자 밥을 먹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한낱 빈말은 아니었다는 것까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비단 아침뿐만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매시간 칼 같이 퇴근해, 샤워를 마치고
나와의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가 모두 끝난 뒤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방에서 대화까지 나누었다.

‘오늘은 뭘 했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대개 낮 동안 내가 무얼 했는지에 관해서였다. 정원을 산책하고 책을 읽는 게 전부인


일상을 그는 매일 다른 얘기를 듣는 양 흥미로워했다. 특히, 내가 온실을 언급하면 그 냉랭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괜찮은 생활이었다.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컨디션은 가히 최상에 가까웠다. 그간 꿔왔던


악몽을 꾸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도 생기지 않았다. 늘 챙겨 먹던 수면제 한 알보다, 두어 시간
묻혀 오는 권이도의 페로몬이 숙면에는 훨씬 도움이 됐다.

그렇게 딱 나흘 만에 나는 권이도의 퇴근을 기다리는 약혼자가 됐다.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그와의


대화 역시 즐겁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넓은 집에 나와 교류할 상대는 오로지 권이도밖에 없었으니까.

- 다음 화에 계속

9 화. Deja vu(4)

금요일 아침. 일기 예보에도 없던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졌기 때문일까,


권이도의 페로몬이 유달리 선명한 하루였다. 묵직하고 그윽한 페로몬은 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피부에 밀도
높게 들러붙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권이도는 오늘도 완벽한 차림으로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섰다. 짙은 회색의 원단에 허리선이
높게 빠진 정장은 푸른빛이 감도는 넥타이와 무척 잘 어울렸다. 수려한 눈매를 살짝 찌푸린 모습마저 잘 찍어
놓은 화보처럼 보였다.

“혹시 몰라서 2 층은 다 비워 두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

2 층은 왜?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난 며칠간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고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저 권이도 씨 번호 모릅니다.”

권이도의 번호를 모른다. 그는 연락하라고 말했으나, 내게 연락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차를


보내겠다는 말은 김 실장이 전달했고, 그 이후엔 항상 한 집에 머물렀으니까. 고용인은 알지도 몰랐지만, 다른
이에게 묻기에도 모양새가 영 이상하지 않은가.

“내 번호를 모른다고요? 그럴 수가…….”

그는 말을 꺼내고도 잠깐 뒷말을 망설였다. 움찔, 찌푸린 얼굴에 아차 싶은 기색이 가득했다.

“……있겠군요.”

콩트도 아니고 도대체 무얼 하나 싶다. 내가 피식피식 웃자, 권이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까딱 고갯짓을 보냈다.

“핸드폰 줘봐요.”

“아, 방에 놓고 와서…… 제가 알려 드릴게요.”

아침을 먹을 땐 핸드폰을 가지고 내려오지 않는다. 급하게 연락이 올 곳도 없고,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번거로우니까. 그렇다고 올라갔다 내려올 순 없으니 내 번호를 알려 주는 게 나을 터였다.

“핸드폰 주시면…….”

“…….”

“…….”

“…….”

“……권이도 씨?”

내밀었던 손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멀거니 내 손바닥을 보던 권이도가 가만히 눈가를 찌푸린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건네주는 대신 잠금을 해제했다. 지난번에 차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기종이었다.
“번호.”

“010…….”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 열한 자리 숫자를 모두 부른 뒤에야 ‘뚜르르’ 미약한 신호음이 흘러나왔을 뿐.


두 번 묻지 않고 전화를 끊은 권이도가 핸드폰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전화 걸어 놨으니까 이따 확인해요.”

“네, 뭐…….”

이 사람 지금, 저장 안 한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가 핑계처럼 덧붙였다.

“차에서 저장할 겁니다.”

의심스러운 대답이었다.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는데,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포커페이스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가끔은 이렇게 속내가 훤히 읽히곤 한다.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방에서 쉬고 있어요. 정 힘들면 내 방에 들어가 있든가 하고. 가능하면 온실은
가지 말아요.”

권이도는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알겠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건 오직 의문뿐이었다.

“오늘 뭐가 있습니까?”

마치 기념일을 까먹은 연인이 된 것 같았다. 권이도가 이러는 걸 보면 뭔가 있나 본데, 안타깝게도 짐작


가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2 층을 비워 놓을 이유는 무엇이며, 내가 힘들어서 권이도의 방에 갈 이유는 또
무엇인지.

“평소보다 더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요.”

걱정. 그 단어를 말하고 나니 뒤늦게 알 것 같았다. 지금껏 권이도가 나를 돌아본 이유는, 미련이 아닌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집 안에 있는 내게 그가 걱정할 만한 일은 단 하나도 없는데도.

“정세진 씨 오늘…….”

그는 무언가 갑갑한 듯 단정히 맨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 아래, 두드러진 핏줄이 손등


위로 드러났다. 키가 커서 그런가, 손도 무척이나 커다랗다.

“히트 사이클, 아닙니까?”

“네?”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봤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는


내리깔린 속눈썹마저 관능적으로 보였다.

“그게 무슨…….”

히트 사이클이라니, 갑자기? 그 생각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마침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고…….’

아, 그때 그거.

“오늘이 아니라 내일모레입니다. 이틀 뒤.”

나는 담담히 대꾸하며 머리로 날짜를 가늠했다. 우성은 대체로 주기가 정확했고, 나도 예상 날짜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 덕에 지난 몇 년간 미리미리 회사에 병가를 낼 수 있었고.

“이틀?”

그런데 권이도는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저 또한 우성이니 주기의 정확성을 모르지
않을 텐데,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이 영 개운치 못했다.

“……그렇군요.”

결국, 애매한 어투가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이제는 정말 나가야 할 시간인지, 그는 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고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마 중문 밖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있는 차고로 내려갈 터다.

“어쨌든… 연락해요. 이 번호는 바로 받으니까.”

아무래도, 세간에서 권이도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매스컴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프라이드가 높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랬으니. 하지만 지금의 권이도는 그러한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지금 제안하는 걸로 보입니까?’

“…….”

음, 아예 멀진 않던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소나기도 아닌


것이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늘이 새카만 걸 봐선 웬만해선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온실에서 책이나 읽을까…….”

권이도가 없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방에서 쉬거나, 아니면 온실을


가꾸거나. 여차하면 수영장이나 피트니스룸에 가도 되지만, 내 소유도 아닌 공간을 마음대로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에 들러서 책과 핸드폰을 가지고 온실로 가야지. 어제 읽다 만 소설책을 마저 읽으면 얼추 두어 시간은


때울 수 있을 거다. 이후엔 꽃을 좀 돌보다가 막연히 비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속이 갑갑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권이도
없는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지는지.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이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늦으려나.”
가능하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일모레가 되어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권이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 내가 반편이 오메가라는 사실과, 그 또한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를 그러한 하자를.

***

내가 머무는 권이도의 집은 그가 소유한 집 중 가장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어릴 적 살던 본가보다


커다랬고, 전체를 살피려면 반나절이 꼬박 걸릴 만큼 광활했다. 모든 곳을 둘러보진 않았지만, 조경에 신경 쓴
정원조차 웬만한 공원만큼이나 넓었다.

정원을 지나 돌이 깔린 길을 따라 걸으면 권이도가 이야기한 온실이 나온다. 새하얀 나무로 프레임을


만들고 벽면과 천장을 유리로 가공해, 얼핏 카페로도 보일 만한 작은 집이었다. 꽃은 물론,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산 하나, 그리고 소설책 한 권.

오늘도 빗소리를 따라 도착한 온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좌우로 아기자기한 꽃들이 심겨


있고, 조금 깊이 들어가면 허리께까지 오는 나무들도 있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은 상판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병과 스탠드 따위로 장식해 놓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온실에서 광합성을 하는 데 쓰곤 했다. 심어진 꽃을 관리할 필요도 없으니,


주변을 구경하다 적당히 책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대략 사흘 전부터는 권이도의 지시에 따라 고용인이
매일 다른 종류의 꽃차까지 가져다줬다.

“……어.”

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몇 발짝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이 시간대엔 혼자여야 할 온실에서 정체


모를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가 오니 다과도 필요 없다고 일러뒀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멈칫하기도
잠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단 근처에 쭈그리고 있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

“…….”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은 경계심과 호기심을 띠고 오랫동안 그 자리 그대로에
머물렀다. 어색한 공기 속,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안녕하세요.”

흙이 묻은 목장갑과 지저분한 앞치마. 나이는 50 쯤 되었을까. 서글서글한 인상에 피부색이 건강한


남자였다. 이 보안 좋은 집에 도둑이 들 리도 없고, 기껏 들어와 꽃을 훔쳐 갈 이유도 없으니 그가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처음 뵙네요. 온실 관리해 주시는 분이죠?”

“아이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아이고, 반복해서 내뱉는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낸 그가 허겁지겁 주변에 늘어뜨린 물건을 정리했다.

“예, 예. 여기 관리하는 정원삽니다. 아휴, 오늘은 안 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면 모를까,
성실하게 흙을 정리하고 있지 않던가. 거기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내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는 뉘앙스다.

“잠시만요, 금방 치울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뇨, 천천히 하셔도…….”

“아이고, 아닙니다. 죄송해요.”

굽실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얼마 전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약혼식 예복을 맞추던 날,


민재를 향해 연신 사과를 건네던 직원들의 모습이.

“음…….”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에 든 우산으로 바닥을 긁어냈다. 온실에 가겠다는 말에 고용인이


제발 비를 맞지 말아 달라며 쥐여 준 장우산이었다. 새카맣고 커다란 우산은 사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
새것이었다.

“아휴, 이게 왜 이래…….”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나를 어려워하지.

처음 방을 안내해준 사람은 물론, 주방장부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정원사까지. 권이도의 집에 있는 모든


고용인은 지나치게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게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거나, 우연히 마주치면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저는 가볼 테니까 편히 쉬십쇼. 실례 많았습니다.”

정원사는 금세 주변을 정리하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손에는 도구들을 잔뜩 들고, 도망을 치듯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온실 밖엔 여전히 거센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나 우비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예?”

파드득, 정원사가 어깨를 들썩였다. 설마하니 불러 세울 줄 몰랐는지, 얼굴에도 잔뜩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다.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무척이나 과한 반응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 없으세요? 아니면 뭐 우비라든가.”

나는 부러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쨌든 지나치게 긴장하니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허물어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정원사는 멋쩍게 눈가를 찌푸렸다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예, 예. 제가 온실 담당이라 우비는 따로 없고…… 저 정도는 그냥 맞고 가면 됩니다.”

“올 때는 어떻게 오셨어요?”

“아, 그때는 비가 많이 안 와서…….”


결국, 올 때도 그냥 맞고 왔다는 말이었다. 우산을 쓰고 안 쓰고는 자기 마음이라지만, 지금 내리는
비는 맞으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단 들고 있는 것부터 정리하죠.”

나는 소설책과 우산을 옆구리에 끼우고 그의 손에 들린 도구를 전부 빼앗아 왔다. 정리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였는데, 내 손이 닿자마자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아이고, 흙이 묻으시는데! 아니, 이걸 어째…….”

고작 분무기와 모종삽 따위를 가져왔을 뿐인데, 그는 내가 똥이라도 만진 양 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허둥대는 모양새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니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제가 들고 있을 테니까 하나씩 가방에 넣으세요. 거기 다 들어가죠?”

“예, 예, 잠시만요……. 아이고…….”

그는 더듬거리는 손길로 제 허리에 찬 가방을 열어젖혔다. 부피가 꽤 된다 싶더니, 원예 도구를 전부


수납할 수 있는 가방이었나 보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여기다 넣을 것이지. 의미 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는
빛과 같은 속도로 내 손에 있는 도구를 정리했다.

“아휴, 이 지저분한 걸…….”

그다지 지저분한 흙은 아니었다. 안쪽에 수도가 있으니 거기서 씻어 내면 되기도 했고.

“이제 이거 쓰고 가세요.”

거의 떠넘기다시피 그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 줬다. 목장갑을 끼고 있던 터라 새카만 손잡이에 마른


흙이 덕지덕지 묻었다. 정원사는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니, 이걸 절 주시면 그, 사모…… 아니, 사장님은…….”

사장님이라.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호칭이었다. 보아하니 베타 같은데, 남자가 남자의 약혼자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영 어색하겠지.

“괜찮으니까 쓰고 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저는 데리러 오라고 할 사람이 있잖아요.”

일부러 주어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연락을 넣으면, 그 많은 고용인 중 한 사람 정도는 나를 데리러


올 테니. 연락처를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정원사가 알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아…….”

선한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창밖을 내다봤다가, 다시 우산을 살펴봤다가. 곧바로 우산을 돌려주지
못한 건, 손잡이가 지저분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그래도 오늘 사장님이 늦으실 텐데…….”

“…….”

……사장님?

“물론, 부르면 오시겠지만, 아니, 그래도…….”

어버버 흐리는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다. 사장님, 그 한마디에 한가득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나를 부르는 건 아닐 테고.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권이도가 날 데리러 올 거라고?

“……자꾸 그러시면 저도 민망해집니다. 정말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내가 강경히 얘기하자 그가 입을 딱 다물었다. 우산은 다음에 달라는 말에는 무어라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말로 그를 내쫓고,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 냈다.

‘오늘은 안 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온실에 올지 안 올지, 그


사실을 알 만한 상대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으니.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그러고 보면, 이 집에 처음 온 날에도 권이도는 고용인에게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이들이 조심할 리는 없으니, 그에게 무언가 다른 언질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그들이 나를 피하는 모습은 무시보단 꺼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게 무례를 저지르면 큰일이라도
나듯, 한껏 날을 세운 상태였단 말이다.

“따돌림…… 뭐 그런 건 아닌가 본데.”

분위기를 읽는 데에는 익숙했다. 집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나는 온갖 종류의 적대심과 마주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질감과 낙하산이라는 낙인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흉터와도 같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배운 건, 오로지 나를 향한 평가를 면밀히 살피는 법뿐이었다. 나를 어려워하는지,


아니면 불편해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따위의 것들. 내 위치에 맞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였고, 내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나는 정말 약혼자 대우를 받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10 화. Deja vu(5)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온실에 앉아 종일 소설책을 읽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대다수의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내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일수록 깊이 파고들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비는 그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그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가늘고 약해지고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 역시 아까처럼 새카맣거나 흉흉하진 않았다.

그렇게 12 시가 조금 지났을까.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 울리는 모양새는


부하직원이 사고를 쳤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내심 놀라서 확인한 화면엔 온갖 울음 표시로 뒤덮인 메시지가
가득했다.

「본부장님 퇴사하신 거 진짜예요ㅠㅠ?」

「돌아오세요 본부장님 ㅜㅜㅜ」

「보고 싶어요!!!」

그간 함께 일했던 직원들의 연락이었다. 익숙한 이름도 보였고, 비교적 교류가 없던 이름들도 보였다.
내 퇴사 소식이 이제야 전해졌거나, 아버지가 새로운 본부장을 뽑아 자리에 앉힌 모양이었다.

아쉽다는 말은 물론, 내가 오길 기다리겠다는 말까지. 생각보다 많은 연락에 당황하기도 잠시, ‘


본부장님 없는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라는 말을 보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잘만 다닐 거면서.”

상사 하나 없어졌다고 크게 서운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잔소리하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홀가분함을 느끼면 모를까. 그래도 예의상 해주는 말들이 나쁘지 않아서, 한 명 한 명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점심을 안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입맛이 없단 이유로 점심을 걸렀던 날, 권이도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얘기했다. 정 귀찮으면 점심은
온실에 차릴 테니, 웬만하면 밥은 거르지 말라고.

실제로 다음 날, 온실에 틀어박힌 내게 고용인이 진수성찬을 들고 찾아왔다. 테이블까지 펼쳐 세팅하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낮에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이틀 전의 일. 식사를 거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는 그 부담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나를 놓아줬다.

그 후로 나는 웬만하면 시간 맞춰 온실을 나서곤 했다. 그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으니 약속한 건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빗줄기도 약해졌으니, 이 정도는 맞으면서 가도 될 듯했다.

‘저는 데리러 오라고 할 사람이 있잖아요.’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우산이 없다고 연락하면 권이도는 귀찮은 기색 없이 고용인을 보내


줄 거다. 요 며칠 지켜본 권이도는 그 정도 호의는 기꺼이 베풀 만한 사람이었다.

“뭐, 직접 오진 않겠지만…….”

그러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을수록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고, 권이도가 내게 그 정도 성의까지 보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는 말이, 고작
비를 맞아야 하는 위기 따위는 아닐 것이다.
‘연락해요.’

“…….”

그런데 왜, 내가 비를 맞으면 권이도가 싫어할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비 오는 날은 좋아한다. 비가 내리는 소리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도, 전체적으로 채도가 떨어진


풍경도, 모두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다. 간간이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를 맡으면 폐부가
청량해지는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내리는 비를 맞곤 했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줄기에 젖어,


떠오르는 잡념을 모두 씻어 낸 것이다. 그런 나를 걱정하는 건, 오로지 김 실장밖에 없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분명 김 실장밖에 없었는데…….

뿌옇게 흐려진 기억 속에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그려 놓은 것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머리 위에 드리운 우산 그림자까지.

‘정세진.’

“…….”

퍼뜩, 잔상이 깨어졌다.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나는 순간적으로 테이블을 붙잡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욕지기가 솟구쳤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열기는 불이 붙은 것처럼 온몸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장에서부터 아랫배, 하다 못 해 손끝까지. 뒷덜미가 뻣뻣하게 굳고, 달뜬 숨결이 허공에 흐트러졌다.

“흡…….”

꽃향기가 났다. 짙고, 밀도 높은, 내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러한 향기가.

파르르 떨리는 팔은 힘없이 무너지는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했다. 폐부가 납작 짓눌려서, 나는


바르작거리며 돌로 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피가 점점 빠르게 뛰는 듯했다.

“으…….”

왜, 갑자기?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금세 또 다른 감정에 뒤덮여 버렸다. 허벅지가 배배 꼬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바짝 조여든 아랫배는 점점 차오르는 욕정을 담고 움찔움찔 경련했다.

“아, 안 돼…….”

히트 사이클이었다. 원래라면 이틀 뒤에 왔어야 할, 일정한 주기마다 찾아오는 오메가의 발정기. 단 한


번도 주기를 벗어난 적 없어서, 오늘은 아니리라 확신한 바로 그것.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철제조차 달뜬 열기를 식혀 주진 못했다. 그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페로몬은, 마구 쏟아지는 비처럼 하릴없이 터져 나갔다.

‘정세진 씨 오늘…….’

‘히트 사이클, 아닙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 당신은, 내가 이럴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걸까.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약해진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고, 새카만 먹구름이 끊임없이
몰려들었을 즈음. 불덩이를 삼킨 듯 홧홧한 목구멍이 침을 삼킬 수조차 없이 바싹바싹 마를 즈음.

“하아, 하아…….”

심장은 쉴 새 없이 거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사정할 것처럼
예민한 상태였다. 사방이 꽃으로 가득한 온실, 그것도 투명한 유리로 된 공간. 그런 곳에서 자위할 수도 없으니,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마냥 쌓이기만 했다.

사실, 단순히 자위 정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 형질, 그것도 우성의 사이클은 홀로 이겨 내기
버거운 짐승 같은 시기였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차오르는 욕구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단 말이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전화…….”

나는 기듯이 의자를 잡고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핸드폰을 쥐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도움을 청하다니. 누구한테?

‘하자품을 주워 와서…….’

드문드문 사고가 끊겼다. 힘없이 추락한 핸드폰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걸 주워 오는 게 아니었는데.’

“……흐…….”

대체 누구에게 연락하려고 했던 걸까. 히트 사이클이 왔다고 선뜻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나마 김 실장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꼬박꼬박 억제제를 가져왔건만.

아마 오늘이 지나기 전에 누군가는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베타일 게 분명한 고용인은 내 모습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권이도는 제 몸뚱이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나를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

파혼당하면 어떡하지?
우습게도, 가장 두려운 부분이 그거였다. 권이도의 말을 무시하고 온실에 와버려서, 그가 나를 버리고
내칠까 봐. 그렇게 버림받고 돌아간 내게, 아버지가 또 한 번 쓸모없는 놈이라며 실망할까 봐.

분출되지 못한 성욕이 명치께에 고였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은 미처 삼키지 못한 채 손바닥에 짓눌렸다.
아래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앞이고 뒤고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테이블 아래에 몸을 웅크렸다. 이런다고 숨어지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내 초라한 모습을
감춰 버리고 싶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아 버리자, 뺨을 타고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흐…….”

귓가가 먹먹하게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잘 들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욕구를 해결하고
싶다는 충동 반, 남들 다 겪은 사이클 하나 견뎌 내지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 반. 그리고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정체 모를 두려움 조금.

“흑…….”

차라리, 이대로 아무도 오지 말았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권이도에게만큼은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상체를 더 납작하게 숙이는 순간이었다.

끼익, 낯선 소리가 들렸다. 내 페로몬으로 가득 찬 공간에 청량한 비 냄새가 섞여 들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익숙한 걸음걸이가 서서히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

타박, 타박. 돌바닥을 밟는 소리는 내 심장이 뛰는 속도만큼이나 조급했다. 거의 뛰듯이 다가온


누군가는 정확히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미미하게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흘렸다.

“하…….”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개를 살짝 옆쪽으로 돌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단정한 바짓단이 보였다.


히트 사이클이 온 내게, 정장을 입고 찾아올 만한 사람.

“김 실장님……?”

“…….”

기분 탓일까.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내 페로몬으로만 가득하던 공간에 타인의 존재감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결 속에, 묵직하고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보통…… 이럴 때 비서 이름이 나오나.”

울림이 독특한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귓가에 쏙쏙 와 박혔다. 언제 숨 쉬는 게 어려웠냐는 듯,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씩 편안해진 숨결에 섞인 건, 젖은 나무와도 같은 묵직한 페로몬.

“……권이도 씨.”

그 말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권이도의 페로몬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재킷을 벗어 내 머리에 씌우고


늘어진 몸을 테이블 아래에서 끌어 내렸다. 이내 등과 엉덩이를 받친 손길이 나를 어린아이 들듯 번쩍 안아
올렸다.
“……!”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은 아주 어릴 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자, 그가


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퍽 안정적인 자세였으나, 높이가 높은 탓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죠.”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어조였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색색거리는 작은 신음뿐이었다.
권이도는 재킷을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 안 보이게 고개 숙여요.”

“…….”

아무래도, 내 얼굴이 제법 이상했나 보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으니 몰골이 초췌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걸 확인하고,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무님!”

웅웅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누군가 권이도에게 말을 거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 젖은 흙을 밟는 소리, 권이도가 내뱉는 한숨 소리와 짜증 섞인
속삭임까지.

“고개 들지 말라니까.”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얼핏 권이도의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에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그렇게 물을 생각이었다.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물어볼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등을 다독이는 순간, 터져 버린 설움이 그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

“나중에.”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우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웠다. 서툴기 그지없는 위로엔 아버지조차 보여
주지 않던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조금은 서늘한 체온도, 차분히 내려앉는 페로몬도, 그 모든 것들이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따사로웠다.

“…….”

나는 원인 모를 눈물을 삼키며 이마를 그의 목덜미에 문질렀다. 꾸역꾸역 숨을 들이켜자, 권이도 특유의


체향이 한층 짙어졌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무언가가 히트 사이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2 층 아무도 못 올라오게 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나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온실에서부터 집 안까지,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그가 우성 알파의 근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페로몬으로 가득 찬 자신의 방이었다. 평소에도 취할 것 같던 페로몬은 오늘따라 유독 더


예민하게 감겨들었다. 그는 헐떡거리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줬다.

“……흐.”

확실히, 우성은 우성이었다. 내가 조절하지 못하고 뿌린 페로몬도, 권이도의 페로몬에 조금씩 잡아먹혔다.
비를 맞은 나무처럼 묵직한 향기가 다디단 감미료라도 되는 양 끈적하게 얽혔다.

“억제제…….”

나는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부분이 있어서였는데,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알아.”

뭘 안다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아니…….”

손을 뻗어 권이도의 소매를 그러쥐었다. 혹시라도 그가 나를 두고 가버릴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마비된 사고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가지 말고…….”

기다란 손가락에 얼기설기 깍지를 꼈다. 가지런하고 곧은 손가락은 보이는 것보다 굵기가 굵었다. 맨살이
맞닿은 탓일까. 다시금 뜨거워진 몸뚱이가 눈앞의 알파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나는 그의 손을 가져와, 얼굴 가까이에 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나를 뿌리치는 대신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온몸을 적시듯 쏟아진 페로몬은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피부에 들러붙었다.

“정세진 씨.”

가라앉은 목소리는 언뜻 경고처럼 들렸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권이도의 손가락에 입술을 문질렀다.


혀를 내어 한마디 정도를 핥아 올리자 더할 나위 없이 달큼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알파 페로몬이, 이토록 중독성 넘치는 것이었구나.

“하아…….”

뚝, 무언가 끊기는 기분이었다. 그게 마지막 이성이었는지, 아니면 간신히 유지하던 수치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권이도의 페로몬 역시 한층 짙어졌다는 것 정도.

그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갑갑한 바지춤을 붙잡았다. 요령 없이 불룩한 부분을 주무르자,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힘없이 사정했다. 울컥, 짙어진 페로몬에 권이도가 내 손목을 붙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잠까…… 읍…….”

눈 깜박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권이도가 나를 찍어누르듯 침대에 올라온 것.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춘 것. 빈틈없이 겹쳐진 입술로 말캉한 혀가 부드럽게 침입한 것.

“으응…….”

내 것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러내렸다. 내 혀를 옭아맨 권이도는 입술로 직접 제


페로몬을 넘겨줬다. 입천장을 간지럽혔다가, 혀 아래쪽을 문지르는 감각에 허리 아래가 오싹오싹 떨렸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기분 좋은 키스였다. 비교적 서늘한 체온도, 서서히 뜨거워지는 입 안도, 모두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페로몬 역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꾸물꾸물 하반신을 들썩였다. 손목이 고정된 탓에 움직일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또다시 부푼 아랫도리를 그에게 문지르자, 그가 목울대를 울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아!”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혀를 깨물었다. 따끔, 느껴지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권이도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지그시 나를 내려다봤다.

“세진아.”

“…….”

가슴 언저리가 옥죄는 듯했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 장면이 너무도 현실감 없어서. 그리고
정체 모를 기시감이 자꾸만 목구멍 안쪽을 건드려서.

“충동질하지 마.”

그는 짧게 경고하고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미처 감지 못한 시야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보였다.


단단히 붙잡았던 손목을 놓아준 그가 내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히트 사이클을 진정시키는 데는 알파 페로몬이 가장 좋다고 했던가.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생명수처럼 페로몬을 받아 마셨다. 권이도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고, 대신 몇 번이고 호흡을 섞어 왔다.

- 다음 화에 계속

11 화. Petit a Petit(1)

내가 처음,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의 일이다. 으레 특이 형질이 그렇듯 나는 사춘기를 겪을 즈음에야 첫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아버지는 주치의를 불러 곧장 억제제를 주사했지만, 마구 터져 나온 페로몬은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체질상…….’
주치의는 곤란한 얼굴로 내 체질과 억제제에 관해 이야기해 줬다. 총 다섯 가지 종류의 주사를 놨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드문 케이스긴 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말도 함께였다.

‘현재로서는 맞는 억제제가 없을 겁니다.’

우성 오메가인 내겐 거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앞으로 히트 사이클이 올 때면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이겨 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더욱더 잔인한 통보를 덧붙였다.

‘그리고 페로몬샘이 기형이네요.’

사실, 내게는 그다지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 겪는 히트 사이클로 정신이 없었고, 그런


나를 둘러싼 채 의사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눴을 뿐이니까.

‘아마 발현 전이라 몰랐을 텐데, 페로몬 배출이 전혀 안 되는 몸이에요. 평상시엔 베타처럼 페로몬이
없다가 히트 사이클이 오면 갑자기 폭주할 겁니다. 억제제도 그래서 안 들을 가능성이 크고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버지가 지어 보였던 표정만큼은 선명했다. 실망감, 그리고 배신감. 약간의
후회와 함께 떠오르던 혐오까지.

‘다행히 우성이라 날짜는 규칙적일 테니까…….’

의사는 건강엔 이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치의가 짐을
챙겨 물러난 뒤,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했으니.

‘하자품을 주워 와서…….’

페로몬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오메가는 완벽주의자인 아버지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이었나 보다. 기껏 챙겨
둔 기회가 반쪽짜리라는 걸 깨달은 이상, 아버지가 내게 성의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사흘간, 나는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첫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모든 증상이 사라졌을 땐 의사의


말대로 약간의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고용인이 가져다준 미음을 먹다가 게워 냈고,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먹는다는 이유로 나흘을 더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걸 주워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갖는 기대는 알고 있었다. 세간에선 다정한 마음씨를 가진 재벌이라며 아버지를 칭송했지만,


실상은 그러한 봉사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해신그룹의 유망한 후계자가 아닌, 값비싼 장기 말에
불과했다.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놈을 어디다 쓰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것도, 반편이 오메가라며 온갖 실망감을 내비치는


것도, 민재가 아버지의 태도를 그대로 답습해 형이 아닌 애완동물 정도의 취급을 하는 것도.

내가 모자란 하자품이라, 그래서 원래의 부모님에게마저 버림받은 낙오자라,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 것뿐이니까.

그 후로 히트 사이클이 올 때면, 나는 텅 빈 방에 틀어박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다


가족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지저분한 것을 보는 양 혐오스러워하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병적으로
주기를 계산했고, 또 강박처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근데 정세진 씨, 오메가 맞죠?’

예, 오메가 맞습니다. 우성이고요. 다만 제가 페로몬 배출이 잘 안 되는 체질이라 베타처럼 느끼셨을


거예요. 그 외에 걱정할 만한 부분은 없을 테니까…….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얼핏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냉랭한 어조는 열에 들뜬 와중에도 매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후우, 길게 내뱉는 한숨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조소 어린 한마디.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서늘한 손길이 억세게 내 턱을 움켜잡았다. 간헐적으로 내쉬는 숨에 데일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섞여들었다. 눈조차 뜨지 못하는 내게, 그는 다시 한번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세진.’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았지만, 호된 매질을 당한 것처럼 온몸이 저렸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토할 것처럼 배 속이 마구 뒤틀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모든 게 남자의 페로몬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조그만 벌레를 짓누르듯,
위압적인 공기가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다. 날카롭게 폐부를 난도질한 페로몬은 내가 끝내 구역질을 시작한 뒤에야
거둬들여졌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머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다. 바르작거리며 몸을 웅크렸지만, 괴로운 공기는 바뀌지 않았다.
억울함 반, 그리고 정체 모를 서러움 반.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여러 감정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식사는 어떻게…….’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여. 억제제는 의사 불러서 주사로 놓든가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게 아니라거나, 그저 오해일 뿐이라거나. 이건 내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며


그저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라거나.

하지만 붙잡을 새도 없이 멀어진 인기척은 손을 뻗는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내민 손조차


허공을 움켜쥔 채 떨어뜨리고 말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 그 언젠가처럼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

“…….”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어두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높디높은
천장에 내 방과는 다른 방 구조. 어슴푸레한 여명이 비치는 공간은 조금 전 보았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꿈?”

의식이 흐릿한 탓일까. 잠깐 현실 분간이 되질 않았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그쪽이 꿈인지, 혹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꿈인 건지.
나는 몸을 옆으로 뉘여 멍하니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몸 상태는 지나치게 개운하고, 피부에 닿는 모든
감촉이 보드라웠다. 원래라면 갑갑해야 할 숨조차 안정제를 먹은 것처럼 편안하기만 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히트 사이클이 끝났구나. 일찍 찾아온 만큼 일찍 물러가기라도 한 걸까.


평소엔 일주일쯤 괴롭혀야 할 열병이 고작 하루 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계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텅 빈 옆자리를 더듬었다. 좌우로 팔을 뻗어도 남는 침대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가득 남아 있는 페로몬은 분명 권이도의 것인데, 본체는 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아니…… 같이 누워 있는 쪽이 더 이상하지.”

엉망이 되었을 머리를 성의 없이 흐트러뜨렸다. 여전히 몽롱한 머릿속에 차츰 여러 기억이 되살아났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히트 사이클, 숨기 위해 온실 바닥을 기다시피 했던 행동, 그리고 그런 나를 찾아온
권이도까지.

‘세진아.’

어제, 권이도가 해준 건 동아줄과도 같은 페로몬 샤워였다. 하등의 도움도 안 되는 억제제와 달리, 그의


페로몬은 예민한 몸뚱이를 기분 좋게 바꿔 놨다. 한껏 고조된 성감은 오로지 한 사람, 권이도를 향해 반응했다.

섹스할 줄 알았다. 페로몬을 섞고 호흡까지 섞었으니 이제는 몸을 섞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억제제를


먹이지 않은 이유가 관계를 쉽게 맺기 위해서라고 넘겨짚었다.

‘충동질하지 마.’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키스만 이어 갔다. 나를 어르고 달래다, 선을 넘을 만하면


입술을 떼어 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제아무리 우성이라 한들 내 페로몬엔 충동을 느꼈을 텐데. 애초에 손을
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 따위, 하고 싶은 대로 다루면 그만이건만. 나를


끌어안고 구태여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일종의 봉사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에게 아늑함을 얻었지만, 그는 금 같은 시간을 빼앗겼을


뿐이다. 내게는 과분한 사치였을지 몰라도, 그에겐 보잘것없는 희생이었을 거란 말이다.

왜 내게 억제제를 먹이지 않았을까.

귀찮게 매달리는 나를 밤새 안아 줄 필요가 있었을까.

발정 난 페로몬을 흘리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내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수히 많은 의문 중 해답이 나오는 건 없었다. 애초에 머리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면 애초에


의문스럽지도 않았을 거다. 문제는, 가장 이해되지 않는 또 다른 부분.

‘조금만, 조금만 더…….’


그의 페로몬도, 나를 달래는 온기도, 낯설어야 할 모든 것들이 익숙했다. 익숙하다 못해 반가워서
자꾸만 매달리고 보채야 할 정도였다.

그리움이었다. 더 정확히는 서러움이었고.

“…….”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어젯밤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이 조금


길고 품이 넉넉한 셔츠는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페로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젖은 나무 냄새. 혹은 비를 맞은 흙냄새.

소매 끄트머리를 당겨 코와 입술을 파묻었다. 무척 변태 같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완전히 의식이 배제된


행동이었다. 한 번, 두 번, 호흡을 이어갈수록 길게 이어지던 생각이 사르르 흐트러졌다.

“알파는 다 이런가…….”

막연히 그가 나를 건드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라면, 굳이


나 같은 오메가와 일을 치를 필요가 없었겠지. 내가 반가움을 느낀 건 글쎄, 정신이 많이 약해진 탓은
아니었을까.

잡념을 툭툭 털어 내고 이불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기장이 긴 하의 역시 아무리 봐도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아니었다. 넉넉한 허리춤을 붙잡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어쩐지 다리 사이가 휑하게 느껴졌다.

“…….”

그래, 속옷까지 권이도 물건인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나으려나.

나는 방문을 열고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를 쭉 둘러봤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권이도는 아마


다른 방에 있나 보다. 방이 한두 개도 아니니 어련히 잘 쉬겠지만, 민폐를 끼쳤단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우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기다려야지. 날이 밝으면 온실에 들렀다가 권이도에게 사과의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상황을 설명하면…….

“……?”

언뜻, 시야에 불빛이 걸렸다. 내 방이 아닌, 반대쪽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이었다. 평소라면 못 본 척


등을 돌렸을 터인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의아함이 생겼다.

“서재에 불이 왜…….”

홀린 듯 불빛이 스미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에 자꾸만 바짓단이 걸렸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다다른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다고 한들,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전부 권이도의 공간이고, 내게
허락된 건 내 방과 온실 정도였으니.

그 생각이 들자마자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갑작스레 떠오른 위화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서재에 불이 왜…….’

왜 여길 서재라고 생각했지?

“…….”

단조로운 음각이 새겨진 나무 문은 복도에 있는 모든 방이 똑같았다. 유달리 특별한 부분도 없고, 이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자연스레 이곳을 서재라고 생각했을까.

정체 모를 기시감은 평소라면 억눌렀을 호기심을 불러왔다. 예의가 아니라는 이성보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단 충동이 앞섰다. 판도라가 끝내 상자를 열어 버리고 만 것처럼, 본능이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안한 기분이었다. 기대인지, 아니면 긴장인지. 빠르게 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순간은 느리게 감기는 테이프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문고리가 내려가는 감각, 굳게
닫힌 문을 밀었을 때의 느낌, 서서히 벌어진 문 틈새로 은은히 쏟아지던 빛줄기까지.

가장 먼저 보인 건,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었다. 빼곡히 꽂힌 책들은 이곳이 정말 서재라는 사실을


보여 줬다. 내 짐작이 맞았음에 놀라기도 잠시, 고개를 들자마자 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

권이도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감정한 눈을 한 권이도. 눈조차 깜박이지 않아서 하마터면 환상이라고
착각할 뻔한 권이도.

“……정세진?”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내 이름을 읊조렸다. 부름이라기보단 혼잣말 비스름한 감탄사였다.


생기 없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르고, 빈틈없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왜 여기…….”

사과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불이 켜져 있길래 잠깐 확인한 것뿐이라고.


방해하지 않을 테니, 하던 걸 마저 하시라고.

“……그거.”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느릿느릿 옮겨간 시선 끝에 걸린,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에 관해서.

“진짜예요?”

날카로운 총구가 섬뜩하게 빛났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은 분명 총이었다.

***

달그락. 식기가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흘긋 바라본 권이도는 예의 그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오믈렛을 입에 넣는 동작조차 잘 찍어 놓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접시를 내려다봤다. 노릇노릇 구운 베이컨이 제법


식욕을 돋웠지만, 평소처럼 맛있게 먹을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결국, 샐러드를 뒤적이는 내게 그가 가볍게
이야기했다.

“한식으로 준비하라고 할 걸 그랬죠.”

아무렇지 않단 어조였다. 우리가 새벽에 나눈 대화를 그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 얼굴만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다시 차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뇨, 맛있습니다. 그냥 입맛이 좀 없네요.”

“그럼 주스라도 마셔요. 이따 배고플 텐데.”

권이도가 눈짓한 음료는 사과와 치커리 따위를 갈아 만든 것이었다. 썩 맛있어 보이는 생김새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마지 못해 유리잔을 손에 쥐자 그가 조그만 한숨과 함께 식기를 내려놨다.

“정세진 씨.”

“…….”

권이도의 부름엔 미묘한 힘이 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저절로 고개를 들게 하는 힘이.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 말대로였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꾸만 입가가
내려가는 바람에 평소처럼 사근사근 말을 붙이는 일도 없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하다고 말하면 상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단호히 대꾸하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건가. 평소보다 이르게 식사를
시작했으니 그나마 여유는 있을 터다.

톡, 톡, 시계를 건드린 그가 지나가듯 물어 왔다.

“내가 무서워요?”

짙은 눈동자는 새벽에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허하게 텅 비어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생기가
또렷이 보였으니까.

“……아뇨.”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며 애써 담담함을 꾸며 냈다. 그에 매끄러운 눈썹이 삐쭉 올라간다.


‘그럼 뭐가 무서운데?’ 그렇게 묻는 것처럼.

“권이도 씨가 아니라…….”

내리깐 시선에 권이도가 끼고 있는 반지가 보였다. 저 손이 뭘 쥐고 있었는지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었다. 권이도의 질문대로, ‘무섭다.’고 밖에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총이, 무서운 것 같습니다.”

‘진짜예요?’

아까 서재에서 권이도는 분명 총을 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장난감은 아니었고, 빛이 반사되는


모습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건넨 질문에 곧장 부정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총은 진짜가 맞습니다.’

마침내 그러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숨을 멈춰야 했다. 그는 새카만 총을 서랍에
집어넣고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로 덧붙였다.

‘총알은 다 버렸지만.’

- 다음 화에 계속

12 화. Petit a Petit(2)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총알이 없는 총 따위, 결국엔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진짜 총을 처음 보거든요.”

철컥, 서랍이 잠기는 소리는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누가 꼼꼼한 사람 아니랄까 봐, 그는 잘 잠긴 서랍을


두 번이나 당겨 봤다. 서랍이 열리지 않는단 걸 확인한 뒤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방으로 가죠. 몇 시간 못 잤을 텐데.’

상냥하게 말했지만, 결국엔 축객령이었다. 왜 왔냐고 묻지도 않는 걸 보면 용건이 없다는 것도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군말 없이 권이도를 따라나섰고, 그는 뒤늦게 나를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맨발?’

‘아, 슬리퍼가 없길래.’

때마침 서재 문이 닫히는 바람에 복도는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가느다란 빛줄기에 의지한 시야는
권이도가 내민 손을 놓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내가 화들짝 놀라 버렸단 점이었다.

‘…….’

‘…….’

탁, 권이도의 손을 쳐내 버렸다. 서재에서 총을 들고 있던 왼손이었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고


반사적으로 밀쳐 낸 나조차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 그게…….’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뒷덜미가 오싹해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젯밤엔
분명 위로가 되었던 손길이, 그때만큼은 나를 위협하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사과를 건네고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었다. 내 옷으로 갈아입은 뒤엔 곧장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1 층에 내려왔을 때, 권이도는 내게 그 어떤 잘못도 묻지
않았다.

“정말 권이도 씨가 무서운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권이도가 직접 대화를 시작했으니 나 또한 그에게


해줘야 할 말들이 있었다.

“여러모로 실례 많았습니다.”

권이도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열 마디 말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해야 하는 변명을 읊었다.

“여태껏 이런 경우가 없어서 그렇게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올 줄 몰랐습니다.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


책임감 없게 굴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못 볼 꼴을 보일 때면 아버지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대놓고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꾸했었다.

‘모자란 놈. 다음부턴 똑바로 처신해.’

“조심이라…….”

권이도는 그리 중얼거리며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있다가 가만히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조심할 겁니까?”

비웃음…… 아니, 어이없음이라고 해야 할까. 온실이 아닌 방에 틀어박혔다면 나았을 거라고, 그렇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내가 건넨 사과를 단조롭게 반박했다.

“그게 조심해서 해결되는 문제인지 몰랐군요. 정세진 씨 말대로 갑자기 찾아온 거면 달리 방법이 없을
텐데.”

비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예의 그 기품 있는 말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을 뿐.

“잘못한 사람이 없어도 사고는 생깁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고를 막을 방법은 없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였다. 물론 그의 입에서
이러한 말들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권이도는 금세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내게도 먹으라며 권했는데, 이미 사라진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볍게 운을 뗐다.

“……억제제가 안 듣는 체질입니다.”

진작 이 얘기를 해줬어야 했다. 사실은 약혼 전부터, 아버지가 그에게 알려 줬어야 할 부분이었다.

“의사 말로는 페로몬샘이 기형이라 그렇다던데, 평소에 페로몬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만 어제처럼 되고요.”

담담한 척 이야기했으나, 사실은 긴장한 상태였다. 가족들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내 하자를 고백하는 건
처음이었으니. 아니, 가족들에게도 내 입으로 말한 게 아니니 그냥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군요.”

권이도는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고, 무언가 더 물어볼
생각도 없는 듯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은 약혼식 날 이 말을 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거든.’

“…….”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들었건, 아니면 홀로 눈치챘건.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척이나 많았으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대신 나는 미뤄 뒀던 고마움을 전하기로 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을 가득 담은 인사였다. 물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권이도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텅 빈 옆자리를 보며 서운함을 느꼈다. 찰나처럼 스친 감정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안일하게 굴었는지 알아차리는 계기가 됐다. 더 긴장감을 잃기 전에, 적당히 경각심을 가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신기한 일이죠.”

생뚱맞게도, 권이도는 나직이 중얼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으로 보였다.

“처음엔 편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걸림돌이 될 줄이야.”

걸림돌이라니? 그렇게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그가 다시금 시선을 들어 올리며
이야기한 것이다.

“물어보지 않길 바란 것들이 있는데, 정말 안 물어보니까 내 입으로 말하고 싶어지는군요.”

“……어떤 부분이 그러십니까?”

글쎄. 그는 낮게 침음하며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면 나오는


특유의 버릇 같았다.
“예를 들면…… 내가 온실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가벼운 예시는 이미 한 번 질문한 적 있는 것이었다. 권이도도 ‘아, 이건 물어봤던가.’라며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면, 정세진 씨 옷을 누가 갈아입혔는지.”

“그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데요.”

반사적으로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내뱉기 직전에 삼킨 모양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어 왔다.

“왜?”

“그거야…….”

왜냐니. 당연히 누구건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렇지. 고용인이 그렇게 많은데 설마 뒤치다꺼리할 사람 하나


없으리라고.

“……궁금해야 합니까?”

한가득 의문을 담은 질문에 권이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정세진 씨 속옷을 누가 벗겼다는 건데, 궁금해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

옷 하나 갈아입힌 게, 그런 뉘앙스로 말할 건 아니지 않나. 그것도 저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별로 상관없…….”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일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내 쪽을 향하는 시선에 불쾌함이 서렸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 씨가 갈아입혔습니까?”

“…….”

이어지는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권이도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지그시 눈을 맞춰 왔다.


그 모습을 보자, 아주 당연한 의문 하나가 튀어나왔다.

“왜 다른 사람한테 안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면 굳이 권이도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고용인 중 하나를 골라 적당히 지시만


내려 두면 그만인 것을. 온갖 체액으로 엉망인 옷가지를 뭐하러 직접 건드린단 말인가.

“번거로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예의상 인사를 건넸으나,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한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봤을 뿐.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핸드폰은 오후에 비서가 가져올 겁니다.”

“…….”

핸드폰? 그 말을 듣자마자 퍼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을 온실에 두고 왔구나, 하고. 내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권이도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별로 안 궁금했나 보군요.”

“……정신이 없어서요.”

가끔 눈치가 정말 귀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표정에 티가 나는 편은 아닐 텐데.

“액정이 다 깨졌길래 새 걸 사 오라고 했어요. 백업은 다 해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뇨, 그러실 필요는…….”

“정세진 씨.”

“…….”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입을 꾹 다문 채 권이도와 시선을 마주했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그가 불만스러워한단


느낌을 받았다.

“……잘 쓰겠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자신이 주는 모든 걸 받으라고 했던가.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의아해서 그렇지.

권이도에겐 별거 아닌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고, 백 원짜리


사탕을 양보하는 것만큼 사소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것들이 마치 대가 없는 친절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일까.

“알아들었으면 잠깐 같이 내려가죠.”

권이도는 그리 말하며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그런 의미로 고개를 들자, 그가 턱을


까딱했다.

“줄 게 있어서.”

***
중문 밖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곧장 지하에 있는 차고로 연결된다. 자주 쓰는 차 몇 개만 주차해
놨다는 공간은 내가 이 집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곳이었다. 뭐, 내 방과 온실을 제외한 대부분은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권이도는 나를 데리고 차고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널찍이 주차된 차들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그의
개인 차량이었다. 자동차 수집이 취미라더니, 종종 아버지가 탐내던 한정판 모델들도 세워져 있었다.

“일주일 전에 정세진 씨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권이도 특유의 음성이 차고 내부에 울렸다. 그는 나를 흘긋 바라보곤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기사 없이, 내가 좋아하는 차종으로, 딱 한 대만.”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권이도 씨가 좋아하는 차로 한 대만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기사도 필요


없고요.’

“예, 기억합니다.”

차를 주려고 그러나?

권이도가 원하는 차를 말하라고 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원래라면 내일이 히트 사이클이었고, 나는


오늘 저녁 즈음 방에 틀어박힐 예정이었다. 워낙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데다, 그 이후로 따로 언급한 적이 없어
잊고 있었다.

“마침 M 사에서 신모델이 나왔는데, 보니까 정세진 씨한테 잘 어울리겠더군요.”

M 사라면 독일에 있는 유명 승용차 브랜드의 하나였다. 안정성과 편의성을 모두 챙겨 마니아층에게


극찬받는 브랜드이기도 했다. 부하직원 중 하나가 침을 흘릴 기세로 카탈로그를 보던 기억이 있다.

“사실 마음에 드는 건 다른 라인이지만, 정세진 씨가 운전할 거면 세단이 나으니까.”

그러면서 권이도가 가리킨 건 좌측에 주차된 스포츠카였다. 민재가 보면 눈에 불을 켜고 탐낼


차종이었으나,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저렇게 납작한 자동차는 승차감이 썩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걸 주려는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탁, 권이도가 멈춰 섰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비스듬히 나를 내려다봤다.

“최대한 빨리 빼도 대기가 한 달이라네요.”

“한 달이요?”

“정확히는 3 주 정도.”

“그 정도면…… 빠른 편 아닙니까?”

브랜드에서 새로운 차종이 나오면 적게는 반년, 길게는 2 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보았다. M 사 같은
경우엔 애초에 개수가 많지 않으니 예약을 걸기부터 쉽지 않을 거다. 아마 권이도의 이름으로 순번을 앞당긴 게
한 달이겠지.
“날짜만 보면 빠를지 몰라도, 차가 없는 상태에서 한 달은 길죠.”

정확히는 3 주라고 했으면서, 권이도는 마치 터무니없는 기간을 들은 사람처럼 눈가를 찌푸렸다. 계획이
어긋났단 사실에 유감을 표하는 듯했으나,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였다.

이내 모양 좋은 입매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죠.”

한 발짝 옆으로 비켜 선 그가 제 뒤편에 주차된 자동차를 눈짓했다. 나란히 주차된 차 두 대는 참으로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건 선호에서 출시한 것이었고, 하얀 건 M 사의 경쟁사인 B 사에서 출시한
것이었다.

“내가 고른 차가 나올 때까지, 여기 두 대를 번갈아서 쓰는 걸로.”

“……네?”

멍하니 권이도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권이도가 빨랐다.

“기간 내에 못 주게 됐으니까 임시방편으로 주겠습니다. 신뢰의 바탕은 시간 약속인데, 그걸 그르칠 수는


없잖아요.”

그 말과 함께 그는 주머니에서 차 키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누구나 알 법한 상표가 조명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다. 차 키를 한 번, 자동차를 한 번 돌아보는 내게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랬다.

“쓰던 거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도 됩니다.”

“…….”

쓰던 거라니. 아무리 차에 관심이 없어도, 저게 선호에서 지난달에 출시한 차종이라는 걸 알고 있건만.


온갖 매체에 요란스럽게 광고하던 무광 블랙이 여기저기 얼마나 화제였는데.

“……기간을 따로 정하진 않았죠.”

키를 받는 대신 권이도를 바라봤다. 나도 웬만해선 올려다보는 경우가 없는데, 그는 가까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야 할 만큼 눈높이가 높았다. 어쩐지, 기자들 틈에 있을 때도 홀로 머리 하나가 튀어나와 있더라니.

“일주일은 차를 고르는 기간이었으니까, 한 달 뒤에 주셔도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권이도도 내 의도를 알았을 텐데, 차 키를 거둬들이긴커녕 손을


까딱이며 재촉했다.

“그냥 받죠.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내가 거절할 걸 알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마치 사약이라도 받는 양 두 손으로 차 키를 건네받았다. 조그만 흠집조차 없는 걸 보면 ‘쓰던 거’라는


말은 정말 거짓인 듯싶었다. 하긴, 차를 ‘수집’하는 사람이니 갖고만 있었어도 사용했다고 쳤을 거다.

그래서 이걸 어쩌면 좋지…….

사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한 달 뒤에 권이도에게 돌려주면


그만이다. 그때는 새 차가 있을 테니, 이걸 돌려줘도 뭐라고는 못할 거다.

그러나 눈치가 귀신 같은 권이도는 딱 한 마디로 내 계획을 무산시켰다.

“참고로 전 남의 손에 들어갔던 건 안 씁니다.”

“…….”

차 키를 쥔 손이 움찔 떨렸다.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는 건, 지금껏 봐온 권이도의 성격으로 알 수 있었다.


말로는 차가 나올 때까지 쓰라고 했으면서, 결국 세 대를 모두 줘버릴 요량이었나 보다.

“나중에라도 기사가 필요하면 얘기해요.”

“아뇨……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턱까지 차오른 한숨을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게 무슨 억지냐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의 얼굴을
보면 반박할 마음이 사라졌다. 미묘하게 들뜬 눈빛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습니까?”

권이도는 입을 꾹 다문 내게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이상하다고, 네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만 솔직할 필요가 있었다.

“예, 좀…… 그렇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입꼬리를 올렸다. 잘 웃지 않는 사람이라더니. 다들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보다. 내가 보기엔 이 사람이 김 실장보다 더 잘 웃는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할까요.”

아직 웃는 낯으로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짙은 눈동자에 답지 않게 장난기가 엿보였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가를 찡긋했다.

“일주일.”

“…….”

“그 안에 정세진 씨가 진짜 갖고 싶은 걸 골라 오면 차 키는 다시 생각해 보죠.”

- 다음 화에 계속

13 화. Petit a Petit(3)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제안이 나올 줄 몰랐기에 나는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세진 씨가 받고 싶은 걸 말하지 않으니, 나로선 주고 싶은 걸 주는 수밖에.”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주고 싶냐고.

“……이번에도 권이도 씨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종류여야 합니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권이도가 건넨 제안이 사실상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같은
걸 두 개나 받을 바엔, 내게 필요한 거 하나를 받는 쪽이 후처리가 편하기도 했고.

“그렇진 않은데, 적어도 갖고 싶은 이유는 설명할 수 있어야겠죠.”

“금액대는 아예 무관한가요?”

“다른 사람이라면 상한가를 묻는 거겠지만…… 정세진 씨는 하한가겠군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무관합니다.”

쾌재를 불러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며 내가 무언가 쥐여 주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생겼으니 잡아야 했다.

“그럼 대신…….”

“대신?”

“생각해 보지 말고, 가져가는 걸로 하시면 안 될까요.”

“…….”

권이도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차 키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 확실히


가져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여지를 남기는 말이었다.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이런 데에서까지 말장난을 한다.

“예리한 면이 있네요.”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수려한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는 모습은, 약혼식 날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방송에 나와서도 이렇게 좀 웃으면 좋을 텐데. 웃는 모습이 예쁜데 아깝지 않은가.

“한 가지만 물어보죠. 왜 그렇게 차를 싫어해요?”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차라면 평범하게 좋아한다. 권이도처럼 수집할 정도가 아닐 뿐, 나름대로 기호라는 것도 있었다.

“굳이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많이 가지다니……. 보통 두 대를 많다고 합니까?”


지극히 권이도다운 기준이었다. 이 사람이 뭘 모르나 본데, 세 대 이상은 많은 게 아닌가.

“뭐 그래요. 정세진 씨 말대로 하죠. 가지고 싶은 걸 골라 오면, 차 키는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눈가를 찌푸린 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장난이었지만, 왜인지 장단을 맞춰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자 권이도가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

“……도장을 찍을 계약서가 없으니까.”

살짝 얽혔던 손가락은 엄지끼리 꾹 맞물린 다음에야 풀어졌다. 권이도는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괜히 장난쳤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약속할 땐 이렇게 하죠.”

“…….”

설마, 농담이겠지.

“어쨌든 일주일 동안은 임시로 쓰도록 해요. 정세진 씨도 외출하려면 차가 필요할 텐데.”

“네, 뭐…….”

남이 쓰던 건 안 쓴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할 필요가 없다는 말 또한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사실, 차가 필요하면 본가에서 내 차를 가져와도 될 텐데. 쓸 일이 없어 아예 놓고 왔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권이도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정말 나갈 시간인지, 차고


입구에서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이 사인을 보냈다. 권이도는 대충 한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조만간 의사한테 검사 하나 받아요.”

“검사요?”

“네, 페로몬 검사.”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몸에 변화가 오는 게 그리 긍정적인 신호는 아닙니다. 억제제가 안 들으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생길
텐데 히트 사이클 주기가 달라진 원인은 알아야죠. 정세진 씨가 집에만 있으면 모를까, 만약의 경우는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
“주치의 부를 테니까 페로몬 관련으로 간단한 검사만 몇 개 받아요. 병원이 편하면 병원으로 가도 됩니다.
어떻게 할래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언젠가 주치의인 최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다만 권이도가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게 놀랍고, 내가 집에만 있지 않으리라고 가정한 게 당황스러울
뿐.

“……권이도 씨가 편한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집에서 받죠. 아무래도 병원은 정세진 씨도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할 텐데.”

“네, 그럼 집에서 부르는 쪽으로…….”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집으로 불렀지만, 한 번도 외출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차를 주면서도 ‘외출을 하려면 필요하다.’라는 말을 전제로 깔지 않았던가.

“……저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질문?”

권이도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언뜻 보니, 평상시라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집 밖에, 자유롭게 나가도 되는 겁니까?”

“……?”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까지 기울이는 게,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잠깐, 뜸을 들였던 권이도가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정세진 씨를 감금한 게 아닙니다.”

“…….”

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저릿하니 아팠다. 누군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처럼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권이도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세진 씨 행동반경을 제한할 생각은 없어요.”

묻고 싶었다. 그럼 왜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냐고.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게 그 쪽에게 어떤 이득이 있냐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묻지 못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권이도가 정말 출근할 시간이 된 것 같았고,


둘째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경고를 보내는 듯해서.

“슬슬 나가 봐야겠군요. 오늘은 정말 늦을 테니까 점심 잘 챙겨 먹고 쉬고 있어요.”

권이도는 그리 말하고 나보다 앞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걸으며 복잡한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손에 쥔 열쇠가 잘그락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

누군가 핸드폰을 가져온 건 점심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였다. 오늘까진 조심하잔 생각에 내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을 즈음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는 현관으로 나온 내게 새 핸드폰을
내밀며 꾸벅 인사했다.

“전무님 경호원인 이태성입니다.”

핸드폰은 내가 쓰던 브랜드의 최신 기종이었다. 선호 전자의 제품을 줄 줄 알았는데, 취향을 존중해


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반짝거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토요일인데 고생하시네요.”

비서가 아니라 경호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예의상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인을
이태성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감흥 없이 나를 살피곤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반응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백업은 다 해뒀으니 확인하고 이상한 게 있으면 다시 말씀 주시면 됩니다. 이쪽은 원래 쓰시던


핸드폰인데, 혹시 몰라서 액정도 같이 고쳐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전부 전무님 지시입니다.”

간혹 있었다. 제 상사의 주변 인물을 죄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전무님’이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권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난가


본데, 아무래도 약혼자로서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하기야, 대단한 사람의 보좌로 있는 제가 이런 잔심부름을 하게 생겼으니, 이 상황이 못마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권이도 씨한테도 감사하단 말씀 전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그가 곧장 나갈 줄 알고 한 행동이었는데, 그는 어딘가


껄끄러운 느낌으로 머뭇거렸다. 가만히 시선을 맞추자, 이태성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퇴근하기 전까지 수행원으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원?”

“예, 운전이나 잔심부름 같은…….”

“…….”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태성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던 나까지도.

“……경호원이면 권이도 씨를 경호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저 말고도 경호할 사람은 많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권이도 정도 되는 사람에게 보좌가 한둘이진 않을 테니까. 나도 본부장으로 일할 땐


경호원이 여럿이었으나, 번거롭단 생각에 소수만 데리고 다녔었다.

“그럼 집에서 계속 제 옆에 계시는 겁니까……?”

넌지시 물은 말에 이태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긍정의 침묵은 아니었고, 이번엔 정말 제 입으로 말하기


싫단 느낌이었다. 이내, 은근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할 때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이태성 씨, 정확한 업무가 뭐라고요?”

“운전이나 잔심부름, 그리고 경호입니다. 그 외에 전무님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 편을 통해


전달하셔도 됩니다.”

요컨대 정말로 잡일꾼이었다. 그의 본업이 경호원이라는 게 정말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권이도의 집은 설치된 보안 시스템만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무장 경찰이 출동하고,


CCTV 는 사각지대 없이 관리됐다. 당장 안에 배치된 경호 인력이 몇 명인데, 굳이 뭐하러 개인 경호원을
낭비한단 말인가.

“저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나는 이태성을 그대로 둔 채 새 핸드폰을 들고 몇 발짝 멀어졌다. 내가 멀어졌음에도 그는 뒷짐을 진 채


각 선 자세로 서 있었다. 괜히 나까지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똑같네…….”

새로 산 핸드폰은 정말로 내가 쓰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배경 화면은 물론, 전화번호부와 메시지


기록까지도. 나는 ‘권이도’라고 저장된 번호를 누르고 그와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뚜르르, 익숙한 신호음과 함께 나직한 음성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권이도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무언가 일을 하고 있던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인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인기척에 등허리가 빳빳하게 긴장됐다.

“정세진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바쁜가? 그런 생각도 잠시. 건너편에서 다시 권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왠지 모르게 다급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정말 달려올 것처럼. 나는 흘긋 이태성을 쳐다보고


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태성이라는 분이 핸드폰을 가져다줬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권이도
씨가 제 수행원으로 붙여 줬다고 하시길래요.”

-……아.

나직이 터진 탄성은 안도와 깨달음 두 가지를 담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 역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보내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순간 말을 더듬을 뻔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보내 주겠다니. 그게 그렇게 쉽게 할 말인가.

“권이도 씨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정말 기사는 필요 없습니다. 잔심부름할 사람도 필요 없고요.”

-내가 주는 걸 다 받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권이도가 눈앞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눈앞에 있었다면 지금의 황당한 표정을 그대로 들켜 버리고
말았을 테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이없단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을 게 뻔했다.

“어쨌든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 씨한테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죠.”

-전화라…… 오늘 경호원을 보내지 않았으면 정세진 씨가 나한테 전화할 일이 있었을까요?

“…….”

대답은 두말할 것 없이 ‘아니’였다. 일하는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는 일 따위, 집에만 있는 내게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방해되지 말라고 했으니까 데리고 있어요. 비서랑 경호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전 비서도 두 명 이상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데리고 다닌 게 ‘김 실장’입니까?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입을 다물자, 권이도가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이야기했다.

-원래는 경호 팀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전직 유도 국가대표 출신이고, 운전도 잘합니다.

덩치가 좋다 했더니, 운동하던 사람인가 보다. 게다가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그렇게 좋은 인재를 왜
나한테 붙여 주냔 말이다.

“저분은 권이도 씨한테 고용된 건데, 제 수발을 들면 어떡합니까…….”

-내가 고용한 사람을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도무지 말이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누구 하나가 물러날 텐데,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곁에 붙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권이도 씨, 수행원은 정말 필요 없습니다. 감시를 할 거라면 차라리 CCTV 를…….”

-감시?

“…….”

아, 말을 이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세진 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은 없군요.

“……아뇨, 실언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정세진 씨 마음 이해해요.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권이도 씨, 저는…….”

-차라리 감시를 할 걸 그랬죠. 그랬으면 정세진 씨가 그렇게 오래 온실에 안 있었을 텐데.

입이 딱 다물렸다. 분명 냉랭한 목소리였음에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뒤이은
권이도의 말을 듣는 순간 더 뚜렷해졌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말없이 쓰러져 있던 건 정세진 씨예요. 만약 내가 온실에 안 갔으면
종일 그러고 있었을 겁니까? 만약 온실이 아니라 정원에서 그랬으면, 그럼 정세진 씨가 나한테 연락했을 것
같아요?

나긋나긋 이어지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더 귀에 꽂혔고, 그래서 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안 바랄 테니까 집 밖에 나갈 때만 데리고 다녀요.

……이 사람 왜 이렇게 나를 걱정하지?

-미안한데, 정세진 씨가 먼저 연락할 거란 생각이 도무지 안 드는군요.

곤란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부분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권이도와 내


사이라면 더더욱. 우리 관계는 그냥…….

‘우리가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고,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권이도 씨.”

-네.

“지금 걱정하시는 겁니까?”

-…….

무심코 질문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주변에 숨소리만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미미하게
들리던 부스럭 소리 역시 정지 버튼을 누른 양 뚝 끊겨 버렸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권이도가 얕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제법이네요. 이런 식으로 말을 막을 줄은 몰랐는데.

퍽 김새는 답변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건지 목덜미가 뻐근하게 굳었다. 멋쩍게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권이도는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슬슬 끊어야겠군요.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하고, 우선 경호원은 데리고 있어요. 아까 말했지만,


방해되진 않을 겁니다.

“……네, 뭐.”

그 잠깐 사이에 의욕이 팍 식어 버리고 말았다. 이따금 있는 일인데, 열을 내다가도 금방 해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었지.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권이도가
느릿하게 운을 뗐다.

-그리고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그는 말을 꺼내 놓고도 잠깐 뒷얘기를 망설였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귀를 기울이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권이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뚜, 뚜, 이어지는
신호음이 멍한 귓가에 맴돌았다.

- 다음 화에 계속

14 화. Petit a Petit(4)

이태성은 정말로 권이도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중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신경 쓰여 들어오라고 하자,


이번엔 현관에 멀뚱히 서 있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심히 거슬렸지만, 못 본 척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차라리 온실을 가죠.”

결국 나는 그를 대동한 채 여느 때처럼 온실로 향했다. 늘 다과를 챙겨 주는 고용인에게 차를 두 잔


준비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태성은 그런 날 흘긋 바라보고 로봇처럼 무뚝뚝하게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온실에 도착했을 때, 역시나 그는 입구에 선 채 더 들어오지 않았다. 바르게 뒷짐을 선 자세가
얼핏 문지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권이도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동상처럼 서 있으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팀장님도 들어오세요.”
“아뇨, 저는…….”

“못 나가게 감시당하는 기분인데,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곤란한 척 눈가를 찌푸리자, 이태성이 뺨을 씰룩거렸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얼굴로, 그는 결국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뒤를 쫓는 걸음이 권이도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테이블에는 고용인이 미리 세팅한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처음엔 함께 따라와 차를 따라 줬지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일러둔 뒤엔 소리소문없이 준비해 놓곤 했다. 그런데도 늘 차가 따뜻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앉으세요.”

“…….”

나는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아 내 잔과 이태성의 잔에 차를 따랐다. 투명한 주전자에 들어 있는 꽃은


아무래도 목련인 듯했다. 꽃잎 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게, 신선하게 잘 관리한 모양이었다.

“서서 드실 겁니까?”

힐끔 이태성을 보며 물었다. 앉으라는 말에도 그대로 서 있던 이태성은 눈을 내리깐 채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전 괜찮습니다.”

“음…….”

평소라면 살살 구슬려서 앉힐 텐데, 이태성은 그런 게 통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뻣뻣하게 굴 가능성이 컸다.

“그냥 앉지 그래요.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그래서 그냥 권이도의 말을 따라 했다. 역시 효과는 직방이었다. 이태성은 한껏 똥 씹은 얼굴로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차 키를 받던 나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새삼 권이도가 왜 그리 재밌단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건 없죠? 수술은 다 제거한 것 같긴 한데 혹시 몰라서.”

“……예, 없습니다.”

그는 영 불편한 기색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두툼한 손과 앙증맞은 찻잔이 보기 드문 부조화를


이루었다. 손 크기는 권이도랑 비슷한 것 같은데. 모양의 차이인지, 아니면 익숙함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편하게 드세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지고 온 소설책을 펼쳤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 중 가장 마지막 시리즈였다.


이것만 읽으면 방에 있는 책을 다 읽는 터라, 권이도에게 서재를 써도 되냐고 물을 참이었다.

“…….”

팔랑, 책 넘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가 책을 세 장이나 넘기는 동안, 이태성은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책을 읽는 와중에도 그가 가시방석에 앉은 양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꽃향기로 가득한 온실에, 꽃차 향기까지 부드럽게
감기는 순간. 아무런 잡념도 없이 책 속에 푹 빠져들어 현실감이 사라지는 순간.

평소엔 오전에 오지만, 오늘은 오후에 온 터라 해가 비치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미색의 종이 위로


늘어지는 햇빛이 잘게 부서지며 반짝였다. 눈이 좀 부신가 싶어 책을 대각선으로 세웠는데, 내내 조용하던
이태성이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앉히신 거 아닙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이태성을 바라봤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불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뇨, 사람 세워 놓고 책 읽는 취미는 없어서 앉힌 건데.”

이태성은 서 있는 게 편할지 몰라도, 나는 몇 시간 동안 누군가를 세워 놓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면


모를까,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 텐데.

“내일부터는 이 팀장님도 책 한 권 들고 오세요. 차는 계속 두 잔을 준비할 겁니다.”

권이도는 퇴근 후 자세한 얘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그런다고 무언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아마 무슨


억지를 부려서라도 경호원을 붙여 놓고, 내가 계속 거절하면 새로운 사람을 붙여 주겠지. 그럴 바엔 적당히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근무 중에 여유롭게 차나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근무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팔랑, 책을 한 장 더 넘겼다. 인간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눈을 내리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이태성을 향해 친근하게 물었다.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그는 이건 뭔 개수작이냐는 듯 나를 노려봤다. 금세 눈에 힘을 풀었지만 불순한 눈빛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먹었습니다.”

“뭐 드셨는데요?”

“그냥 김밥을……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사람을 경계하는 들짐승도 아니고, 몇 가지 물어봤다고 경계심이 더 날카로워졌다. 짙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한껏 날 서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싫으신 것 같아서, 이 팀장님이랑 대화나 좀 할까 했죠.”

“…….”

“일은 안 힘드십니까?”

내가 웃으면 웃을수록 이태성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표정만 보면 내가 일을 힘들게 만드는


주범으로 보일 정도다.

“할 만합니다.”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경호 팀장까지 하기 힘들 텐데.”

외관으로 보면 30 대 초중반 정도려나. 권이도의 경호팀, 그것도 팀장을 맡을 정도이니 능력은 확실히
좋을 터였다.

“……이제 팀장 아닙니다.”

하나 이태성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가를 한껏


찌푸리기도 했다.

“팀장직 내려놓고 업무가 바뀐 겁니다. 그러니까 이 팀장 말고 다르게 불러 주십쇼.”

“…….”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팀장직을 내려놓은 게 나 때문이라서,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그러나 이태성은 여전히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사고 치고 좌천됐습니다.”

“……제 쪽으로 온 걸 좌천이라고 표현하시네요.”

“…….”

마주친 두 눈에 아차 싶은 느낌이 스쳤다. 웬만해선 동요하면 안 되는 경호원이면서, 쓸데없이 솔직한


반응이었다. 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아뇨, 장난이니까 그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굳이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니고.

“차 드세요. 식겠어요.”

“…….”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땅히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이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십니까?”

“뭐를요?”

온실이 따뜻했기에 찻잔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잔을 손으로 감싸 목련향이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태성은 내가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주제를 꺼냈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별로 달가운 주제는 아닌가 본데. 굳이 확인하려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사람도 그렇고, 권이도도 그렇고.

“이태성 씨도 그겁니까? 물어보지 않길 바랐는데, 진짜 안 물어보니까 말하고 싶어진 거.”

“…….”

아니나 다를까, 이태성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정말 정곡을 짚은 모양이었다.

“별로 안 궁금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으세요.”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굴 예정이었지 속내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꺼낸 주제는 대개


열에 아홉쯤 껄끄러운 내용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웬만하면 다들 물어보시길래 여쭤본 겁니다. 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눈치껏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조금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껄끄러운 화제이긴 했나 보다.

그 후론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책을 읽었고, 이태성은 여전히 좌불안석인 채로 살살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가 몇 번이나 몸을 들썩였지만, 나는 일어나도 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그가 드디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누가 봐도 입에 안 맞는 표정이었는데, 그는 사약을 마시듯 벌컥벌컥 찻잔을 비웠다.

“본부장님.”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분명 익숙한 호칭이었으나, 이 장소에서 듣기엔 지나치게 낯설었다. 느릿느릿
책에서 시선을 떼자, 아까처럼 무뚝뚝한 표정의 이태성이 보였다.

“……본인은 팀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놓고 저는 본부장입니까?”

내가 본부장을 관둔 걸 모르진 않을 테고. 이미 퇴사한 사람의 직급을 부르는 건 조금 가혹하다 싶다.


새삼, 내가 그를 팀장이라고 부른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흔쾌히 이야기하자, 이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어 장 남은 책장을 넘겨 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말씀하세요, 이 팀장님.”

“…….”
마치 욕지거리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앞에서 욕을 하진 못할 테니, 저게 최선이겠지만.

“……저녁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아.”

나는 가벼운 탄성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쩐지 주변이 어두워지더라니 어느덧 6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근래에 해가 길어진 데다, 배가 고프질 않아 잊고 있었다.

“슬슬 먹으러 가야겠네요.”

책과 핸드폰을 챙겨 일어나자, 이태성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게, 제법


불편했나 보다. 오늘 처음 봤지만, 아무튼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가능하면 식사는 때맞춰 드셨으면 합니다.”

“……이태성 씨가 그걸 왜 챙깁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물었다. 하다 하다 권이도가 식사까지 챙기라곤 안 했을 테고. 수행원이 뭐하러


거기까지 신경 쓰냔 말이다.

“식사를 거르시면 전무님께서 걱정하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툭,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파라락 넘어간 책장이 돌바닥에 부딪혀 구겨졌다. 이태성은 별반 놀라는


기색 없이 잽싸게 내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 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책을 떨어뜨린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태성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떠오른 권이도와의 통화 때문에.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전화 너머로 페로몬이 느껴질 리도 없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께가 울렁였다. 권이도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통해 배 속 깊숙한 곳까지 전달된 느낌이었다. 목구멍이 조여들고 명치가 짓눌리는 감각은,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 ‘걱정’이라는 말을 듣는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저녁을 혼자 먹었을 때도 그는 서슴없이


걱정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그러나 이번에 그가 건넨 한마디는 지난번 경우와는 근본적인 무게부터 달랐다.

부담스러워야 했다. 이상해야 했고, 또는 낯설어야 했다. 그에게 차 키를 받았을 때처럼 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야 한단 말이다.

“제가 식사를 거르면…… 권이도 씨가 걱정을 합니까?”

하지만 이 어색한 기분은, 아무리 숨긴들 결코 불쾌함은 아니었다. 만족감, 그리고 기대, 혹은 약간의
설렘이라면 모를까. 마치 내도록 그의 걱정을 바라고 있던 사람처럼.

“예, 어제도 점심을 걸렀다는 말만 듣고 전무님이 곧장 귀가하셨습니다.”


“어제…….”

나는 책을 꽉 붙잡으며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어제라면, 권이도가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터진 나를


온실에서 발견한 날이었다. 분명 늦는다고 했으면서 점심이 조금 지나 곧장 귀가한 날이기도 했다.

“권이도 씨한테 연락이 갔다고요?”

조금 놀라서 묻자, 이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내 반응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 하나 걸렀다고 퇴근하진 않았겠죠. 이태성 씨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닙니까?”

반쯤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밥 하나 굶었다고 나를 찾으러 왔으리라고.

“……아뇨, 확실합니다. 밥을 안 먹었냐고 되물으시곤 곧장 퇴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랬냐고, 이태성은 그런 느낌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철없는 아이를 보듯


한심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이제야, 이 사람이 왜 나를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부턴 그러면 안 되겠네요.”

할 수 있는 말은 딱 그거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갑게 웃어 버리고 마는 것. 의아함을 느낀들


티를 낼 수는 없으니 지금은 그냥 넘겨 버리는 수밖에.

“가죠, 이태성 씨도 식사해야 할 텐데.”

뒤에서 이태성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먼저 온실을 나서며 뒤숭숭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머릿속엔 어제 나를 찾아왔던 권이도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엔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원래는 그럴 계획이 없었는데, 고용인이 직접


입욕제까지 풀어 주는 바람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설마, 목욕을 하실 거냐는 질문이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지.

새하얀 펄이 섞인 입욕제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미된 배스 밤이었다. 장미와 자스민을 합친 것으로,
무릇 플로럴 계열이 그렇듯 산뜻하면서도 포근한 향이 일품이었다. 이다지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쓸 걸
그랬다고, 새삼 반성할 정도였다.

나는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물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노곤해서 잠자리에 들면 딱 좋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권이도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한 시간 정도 그의 페로몬까지 쐬면 아마 정말로


단잠을 자지 않을까 싶다.

“…….”

아니, 언제부터 거기에 의지했다고.

그간 악몽을 꾸지 않는 밤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 집에 들어오면 심해질 줄 알았던


불면증마저 나아졌으니, 그의 페로몬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래라면 한 통씩 털어야 할
수면제도 지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정신 차려야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자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있었나?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박이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씨, 안에 있습니까?”

권이도였다. 특유의 나직한 음성이 방문 하나를 놓고 들려왔다. 시간이 꽤 흘렀더니만, 내가 목욕한


사이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달칵, 망설일 것 없이 방문이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편안한 차림을 한 권이도가 보였다. 아, 진짜 오래


씻긴 했구나. 이 사람이 퇴근해 샤워를 마칠 때까지 멍하니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니.

“제가 씻느라 소리를 못 들어서…….”

“…….”

“……권이도 씨?”

딱,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코 고개를 든,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고,


권이도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

그는 조그만 탄성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봤다. 짙은 눈동자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반듯한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방금 씻고 나왔습니까?”

“…….”

그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자, 권이도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 아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려한 눈매가 보였다.

시선이 나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15 화. Petit a Petit(5)

권이도는 아무 말 않고 있는데, 단순히 눈빛만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이대로 긴장을 늦추면 그가 내게


무슨 짓이건 할 것처럼. 강렬한 예감이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듯했다.
“네, 지금 막…… 다 씻었습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는 그 조그만 움직임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그래요, 그래 보이는군요.”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그리고 입에서 턱으로. 차근차근 내려간 시선은 마침내 목덜미 아래까지
내려갔다. 가운을 잘 여몄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심이 일었다.

“왜 그러고 열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나직한 질문은 가만히 있던 나조차도 흠칫 놀랄 만큼 페로몬투성이였다. 어느 틈엔가 스며 나온 존재감이


온몸에 살금살금 들러붙었다. 조금 전까지 입욕제 향기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권이도의 향으로 정신이 없다.

“왜 그러고 열었냐니…….”

다시금 되물으려던 나는 금세 권이도가 무얼 물어보는지 알 수 있었다. 막 샤워하고 나온 차림새로,


누군가 보면 자칫 유혹이라고 보일 정도의 가운 차림으로, ‘그러고’ 문을 연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그냥…… 바로 연 것뿐입니다. 별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꾸만 목구멍이 말랐다. 할 수만 있다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들이켤 수 있는 건 페로몬뿐이었기에,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오해하면 어쩌지?

비록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착각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필 어제는 히트 사이클까지 겪었으니


몸이 달아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순간,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거리며 울렸다. 냉정하게 뒤를 돌아 나가던 뒷모습 역시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났다. 나는 다시금 목울대를 움직이고,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는 단호한 어투로 내 뒷말을 잘라 버렸다. 문을 닫기 위해 잡았던 문고리조차 그가 한 걸음


다가오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나 대신 문고리를 잡고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이 과했군요.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거 알아요.”

여전히 긴장감이 들었다. 주변을 맴도는 페로몬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온몸이 그와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자나 싶어서 잠깐 왔던 겁니다. 얼굴 봤으니까 쉬어요. 늦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 말을 하고, 권이도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닫았다. 스르륵, 닫히는 문틈으로 그가 한숨을 토해 내는


모습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은 듯 그 자리 그대로에 서 있었다.

달칵,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소용돌이치던 페로몬도 일순간에 뚝 끊겨 버렸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막혔던 숨이 한순간에 탁 튀어나왔다.

“하.”

나는 무너지듯 제자리에 쭈그려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가운이 애매한 부위를 절묘하게 덮고 있었다.

“……미치겠네.”

욕지거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허벅지를 바짝 오므렸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출되지 못한 페로몬이 온몸을 마구 들끓게 하고 있었다.

섰다.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언가 야한 장면을 본 것도 아닌데, 권이도의 시선과 페로몬에
욕정하고 말았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기는 감각은 히트 사이클이 끝난 내가 느낄 만한 욕구가 아니었다. 어제 몇 번이나


사정해 놓고 발기할 일도 아니었고,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알파 페로몬에 반응할 일도 아니란 말이다.

“아…….”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손을 내려 가운을 헤집었다. 허리끈이 느슨해진 덕분에 앞섶을 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기를 쥐자 달뜬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읏…….”

이 나이에, 자위를 할 줄이야. 그것도 만난 지 며칠 안 된 그런 알파를 반찬 삼아.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기다란 기둥을 쓸어내릴 때마다 등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공기


중에 남은 알파 페로몬이 예민한 성감을 더욱더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아…….”

어느새 나는 바닥에 엎드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끈은 다 풀린 상태였고, 이마에 닿는 바닥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미끄덩거리는 프리컴이 질척이며 야한 소리를 냈다.

“흐…….”

조금만 더 하면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제는 히트 사이클 때문에 쉬웠던 걸까.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감질나게
스미는 권이도의 페로몬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아…….”
이제는 앞뿐만 아니라 뒤까지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줄줄 새어 나온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바짝 붙인 채 손을 빨리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세진아.’

“……흡.”

그러나 우습게도, 나는 권이도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무섭게 사정감을 느꼈다. 귓가에 입을 맞추고,
상냥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마치 실재처럼 나를 절정으로 내몰았다.

‘가도 돼.’

“흣…….”

정체 모를 목소리가 속삭이는 순간, 묽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어제 몇 번이나 사정한 탓에 투명하고


양까지 적은 정액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뉘여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잔잔히 퍼지는 쾌감의 여운은 허리가 잘게 떨릴 만큼


자극적이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쿵, 쿵, 거센 소리를 냈다.

그러나 쏟아지던 충동이 가시자마자, 물밀듯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하아.”

이래서야, 권이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앞으로 매일 밤, 페로몬으로 가득한 방은 또 어떻게


들어가고. 당장 마주 앉아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사이에, 이게 무슨 되바라진 짓인지.

“…….”

바닥에 흩뿌린 정액이 오줌을 싼 것처럼 부끄러웠다. 한차례 욕구는 해소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아랫도리와, 권이도를 향한 죄책감 따위의 것을.

***

여러 우려와 다르게 나는 평소처럼 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역시 수면제보단 권이도 페로몬이 낫구나. 새삼 자각한 안정감은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권이도는 여느 때와 같이 완벽한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일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혹시 쉬는 날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매일 쉬기만 한단
사실이 민망해서 관두기로 했다.

아침 메뉴는 부드러운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이었다. 적당히 간이 된 국물은 고슬고슬한 쌀밥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어제와 달리 꿋꿋하게 밥을 먹는 내게 그가 여상한 어투로 얘기했다.

“역시 한식이 낫군요.”

권이도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반쯤 비운 밥공기를 향하고 있었다. 왠지 잘 먹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밥이 제일 낫긴 하죠.”

눈가를 찡긋하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자신 있으니, 평소처럼
권이도를 대할 생각이었다. 내가 입만 다물면, 이 사람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경호원은 불편하던가요?”

다행히 권이도는 내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곧장 눈을 돌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간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주제 역시 그리 달갑지 않다는 거였지만.

“불편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만 못합니다.”

“적응되면 괜찮을 겁니다. 가능하면 눈에 띄지 말라고 일러두죠.”

“……그러진 마세요.”

이 사람은 경호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눈에 띄지 않는다고 없는 게 되는 건 아닌데, 그게 정말


편하다고 느끼나. 왠지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답할 것 같아서 굳이 확인하진 않기로 했다.

“만약 별로면 얘기해요.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것도 괜찮습니다. 마음에 들어요.”

“…….”

순간, 권이도가 표정을 확 굳혔다.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지, 시선이 가라앉은 듯했다. 이내, 그는 예의
그 냉랭한 얼굴로 물잔을 손에 쥐었다.

“어떤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듭니까?”

“뭐, 여러모로…….”

역시, 손 크기는 둘이 비슷한가. 권이도가 손가락이 곧아서 잔을 쥐는 느낌이 퍽 달랐나 보다.

“대단하잖아요. 그 나이에 팀장까지 달고.”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 말했을 뿐인데, 권이도는 대번에 변색하고 되물었다. 잠깐 내 말이 이상했나


싶었지만, 뒤이은 한마디가 그의 표정이 바뀐 이유를 설명해 줬다.

“정세진 본부장님.”

“…….”

아, 이 호칭을 설마 오늘도 들을 줄이야.

“이젠 본부장도 아닌걸요.”

애초에 본부장이라는 직급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성과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아버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권이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압박에 못 이겨
내려왔을 자리였고.

“아쉬운가 보네요. 본부장을 관둔 게.”

말없이 권이도를 마주 봤다. 여전히 물잔을 쥐고 있던 권이도가 시선을 내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공들여 만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다지 아쉽진 않습니다.”

정말 아쉽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허전해서 그렇지.

“본부장이 별로 적성에 안 맞았거든요.”

그 자리에 오른 건 타의였을지 몰라도, 그곳에서 해낸 건 전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직접 일궈 낸 성과,


신뢰를 다진 동료들, 그리고 실제로 상승 곡선을 그리던 실적까지.

“새로운 본부장이 잘할 텐데요, 뭐.”

물론 허전하다고 해서 그게 돌아가고 싶단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습관 된 무언가가 사라져 대체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

“그렇군요.”

권이도는 내 체질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동정을 했다면 기만


같았을까, 건조하리만치 무던한 대답은 어떤 의미에선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럼 정세진 씨는 본인 적성에 뭐가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

왜 그 질문에, 다 잊어버렸던 장래 희망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잊고 산 지 한참이나 돼서 약혼식


날에나 겨우겨우 떠올렸던 것을.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권이도 전무님은 지금 하시는 일이 적성에 맞으십니까?”

능청스럽게 되물었지만,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렸다.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였는데, 이유는 그다음 말에


있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요.”

“…….”

하마터면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지. 아니, 사람 자체를 잘


파악하는 건가.

“적성이라……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굳이 따지면 전무 자리는 잘 안 맞습니다.”

“……그렇군요.”

권이도의 대답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가 진지하게 대답해 준 것도 의외였지만, 전무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게 더 의외였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타고난 사업가 체질인데.
“차라리 부회장 자리라면 모를까.”

“…….”

음, 야망가라고 할걸.

“지금 선호그룹의 주축이 어느 계열사라고 생각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곧장 한 계열사를 떠올렸다. 선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같은


대답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선호물산 아닙니까?”

선호그룹에는 한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계열사가 있다. 선호물산, 선호전자, 선호전기에 선호생명,


그리고 연계 사업인 명성호텔과 광고 회사인 유일기획까지. 그 외에 재단 소유의 유치원과 미술관도 있지만,
역시 주축은 선호물산이었다.

“맞아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죠. 아무래도 자본이 가장 큰 곳이니까.”

그런데 권이도는 내 말이 틀렸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치 식사 메뉴를 평가하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선호그룹이 와해되면 가장 먼저 각축장이 되는 건 선호물산입니다. 권력층이 분리된 후에는


선호전자가 근간 사업이 될 거고, 그럼 명실상부 부회장은 최고 책임자인 내가 되겠죠.”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었는데, 머리가 이해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가 내뱉은 첫 가정부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호그룹이 왜 와해됩니까?”

절대 망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딱 하나, 선호만 빼고.

선호그룹은 우리나라의 여러 대기업 중에서도 최고로 뽑혔다. 선호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경제권을 꽉 쥐고 있는 독재자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룹이 흩어질 거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예상할 사람은 충분히 예상했고, 실제로 집안에서도 몇 번 얘기가 나왔어요.
덩치가 그렇게 커졌는데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하시니, 그룹 하나 쪼개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죠.”

“아니, 잠시만요. 권이도 씨.”

황급히 권이도의 말을 끊어 버렸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권이도를 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권이도가 말하는 ‘회장님’은 선호그룹의 최고 책임자인 권병욱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대략 2 년 전을


기점으로 대외 활동을 멈췄고, 현재는 요양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알음알음 임종을 앞뒀단 말이 들리긴 하지만, 실제 손주인 권이도에게 ‘오늘내일한다.’라는 말을 듣는
건 무게감이 다르단 말이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정세진 씨는 궁금하지 않아도, 정철호 회장은 궁금해할 텐데요.”

“…….”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서.

“정세진 씨도 아버지를 위한 선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이 얘기를 아버지에게 하길 바라십니까?”

“글쎄, 그건 정세진 씨 선택입니다.”

의뭉스럽게 말했지만, 결국엔 가서 전하라는 말이었다. 결국엔 본인이 부회장이 될 거라는, 자신만만한
근거들을. 그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권이도에게 대체 어떤 이득이 있길래.

애초에 권병욱 회장이 별세해 권상미가 회장이 된다고 해도, 권이도의 위로는 형제가 둘이나 더 있었다.
형인 권이정은 둘째 치더라도 누나인 권이경은 호락호락하게 부회장 자리를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권이도의
주장대로 모든 걸 쉽게 얻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사업은 정보 싸움이었지만, 오답보단 백지가 나았다. 확실치 않은 내용을 전하는 것보단 가만히 있는
쪽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군요.”

권이도는 조금 서운하다는 듯 입매를 길게 늘였다. 그 표정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건, 아무리 봐도


연기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봐 온 권이도라면, 내가 전달하지 않을 걸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 재미없는 적성 얘기 그만하고, 다시 경호원 얘기로 돌아가죠.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왜 이런 얘기가 나왔나 했더니, 저게 시초였다. 분명 이태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 뉘앙스가


저렇게 오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든다기보단…… 굳이 다른 사람으로 바꿀 정도는 아닙니다.”

적당히 과묵하고 다루기 쉬운 게, 웬만해선 껄끄럽지 않을 듯했다. 나를 좀 불편해하는 것 같긴 해도,


그걸 숨기려고 하지 않는 점이 나쁘지 않았고. 정확히는 숨기지 못하는 거겠지만 어쨌든.

“다행이군요. 혹시 나중에 마음에 들게 되면 이야기해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건 왜요?’ 이렇게 묻자
권이도가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기특하니 다시 팀장으로 데려가야죠.”


- 다음 화에 계속

16 화. Petit a Petit(6)

얼핏 좋은 조건 같았으나, 그 말을 하는 표정이 그렇지 못했다. 마음에 드니까 다시 승진시키라고, 그리


말하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나는 확답을 주는 대신 은근슬쩍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부탁?”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지런한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경호를 없애는 건…….”

“아뇨, 그게 아니고.”

의도치 않게 말을 끊었는데, 다행히 그는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불쑥 말을 꺼낸 나만이 내심 놀라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자꾸 이 사람이 편해지면 곤란한데, 자리를 내어 주니 자꾸만 다리를 뻗게 된다.

“서재를 좀 써도 될까 해서요.”

“……서재를요?”

“예, 제 방에 있는 책을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게 없거든요.”

오늘도 권이도가 출근하면 어김없이 이태성이 찾아올 터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잔뜩 불편한 얼굴로
온실에 함께 가겠지. 그럴 거면 책을 두 권 챙겨 가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서재…….”

금방 알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권이도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나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짧게 혀를 찬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편한 대로 해도 됩니다. 1 층에 있는 서재를 쓰면 되겠군요.”

1 층이라. 내가 본 서재는 2 층이었는데.

“책장이 높을 텐데 위쪽에 있는 건 직접 꺼내지 말고 고용인을 시키도록 해요. 사다리 위험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 넓은 집에 서재가 하나만 있을 리는 없지만, 굳이 1 층을 콕 집어서 이야기한 건 이상했다. 말은 ‘1


층 서재를 써라.’지만 사실상 ‘그 외의 곳은 쓰지 마라.’라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런 의아함을 느끼기도 잠시, 때마침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의 거긴 내가 일을 하는 곳이라.”

“아.”

어쩐지 책상에 사용감이 있더라니. 서재 겸 집무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2 층이 아닌 1 층을 콕


집어 이야기한 것도 이해는 갔다.

“…….”

그런데 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지.

“슬슬 일어나죠.”

그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런히 놓아둔 식기가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권이도를 따라 주방을 나서려는 순간, 그가 별안간 휙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정세진 씨.”

간혹, 미미한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바로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때라든가.

“혹시 몰라서 확실히 말해 두는데, 2 층 서재는 들어가지 말아요.”

“……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부분을 설마 권이도가 제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에.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척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한테 위험한 물건이 많습니다.”

위험한 물건이라는 말에 곧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는, 다시금


권이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를테면, 총 같은 거.”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정체 모를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스멀스멀 끼쳐 온 두려움은 가슴


한구석에 짙게 남아 둔탁한 통증을 안겨 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총의 생김새가 또렷이


떠올랐다. 새카맣고 날카로운 손잡이와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방아쇠까지.

‘총은 진짜가 맞습니다.’

‘총알은 다 버렸지만.’

권이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서랍에 총을 넣고 잠그던 일련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들어갈 일도 없습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대답에 권이도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한 표정이었으나, 그 내면엔 약간의 불안감이 엿보였다.

“다행이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섰다. 가슴 한편에 남은 묵직함이 그의 뒷모습을


선명히 담아 두는 듯했다.

***

1 층 서재는 2 층에 있는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했고,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한 사다리까지 준비돼 있었다. 나를 서재로 안내해 준 고용인은 사다리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공손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두 개를 꺼내 온실로 향했다. 역시나 이태성이 따라붙었고, 그는


어제와 달리 군말 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비록 내가 책을 내밀었을 땐 벌레 씹은 얼굴로 표정을 굳혔지만 말이다.

“……이게 뭡니까?”

“책이죠.”

이걸 물은 게 아니겠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역시나 이태성의 눈에 불퉁한 기색이 스쳤다. 이런


말은 좀 미안한데,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어떤 의미에선 민재 같았다.

“심심하실까 봐 가져온 겁니다. 꼭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에게 한글로 된 책을 내밀고 다른 하나는 내 앞에 펼쳐 두었다. 흘긋 내 쪽을 살폈던 이태성이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그 시선이 뭘 뜻하는지 알 법해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프랑스어예요.”

“……아아.”

대학에 다닐 때 취미로 불어 교양을 들은 적이 있다. 기본적인 회화만 배웠지만, 꽤 흥미로웠던 터라


개인적으로 추가적인 공부를 했었다. 마침 권이도의 서재에 익숙한 언어가 있기에 반가운 기분으로 들고 온
참이었다.

한 가지 간과한 건,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점일까.

예전엔 별 무리 없이 읽었을 내용일 텐데, 지금은 한 문장을 읽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서술 구조가


헷갈려 다시 읽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가 나와 잠깐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도 빈번했다. 다행히 크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기에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어도 하십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지, 이태성이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면서도 호기심은 참지


못했나 보다. 아마 외국어를 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동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아뇨, 그냥 그림책 보듯 보는 겁니다.”


새로운 대화 주제가 생겼지만, 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잘하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 그게 무슨……. 차라리 그거 말고 이걸 읽으시죠.”

그는 황당한 얼굴로 아직 표지조차 넘기지 않은 책을 가리켰다. 적어도 읽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내가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워서 푸스스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그건 다 읽었습니다.”

“그럼 왜 가져오신 겁니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태성 씨 심심할까 봐 가져왔다고.”

“……전 심심하지 않습니다.”

“압니다.”

“그럼 왜…….”

아무래도 대화까지 나누면서 외국어로 된 책을 읽는 건 무리였다. 나는 방금 읽은 문장을 눈으로 훑으며


무미건조하게 운을 뗐다.

“그 책, 재밌는 편인데.”

“…….”

“웬만하면 첫 페이지라도 보지 그래요.”

이번에야말로 이태성은 입을 꾹 다문 채 책을 가져갔다. 팔랑, 첫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둔탁하기


그지없었다. 이제야 완전히 제대로 된 독서의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코끝엔 유채꽃 향기가 감돌았고,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처음엔 버벅거리기 바빴던 문장


해석도 나중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비록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내용이 재미있으니 괜찮았다.

첫 챕터를 읽으며 한 시간. 그리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며 두 시간.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이 빠져라 책을 읽고 있는 이태성을 발견했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도 함께 좋아할 때 느끼는 뿌듯함.

“볼 만하죠?”

넌지시 질문하자, 이태성이 퍼뜩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반쯤 읽은 책을 내려놓으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민망한 기색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네, 엄청.”

***

이태성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었지만, 내 것이 아니라 그러지 못했다. 내일 마저 읽으라고 이야기하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산책을 마친 강아지 같아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아야 했다.

점심 메뉴는 아침과 비슷한 한식이었다. 곱게 간 흑임자죽으로 입맛을 돋우고 명태 무침과 탕평채, 잘


구운 채끝살 따위가 차려졌다. 후식으로는 수정과가 나왔는데, 적당히 달큼한 것이 마무리로 딱 제격이었다.

이태성은 고용인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와 멀찍이 떨어져 산책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명목은 분명 경호인데,
아무래도 감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정말 인기척 없이 쫓아다녔다는 점일까.

권이도가 퇴근한 건,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식사 시간에 맞춘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샤워를 마치고 저녁을 함께했다. 분명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는데도, 어떻게든 일찍 퇴근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뭘 했습니까?”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여느 때처럼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 가득 차 있는 페로몬은 다행히


어제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지는 듯해서,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늘 비슷해요. 오전엔 온실에서 책 보고, 오후에는 정원을 좀 걸어 다니고…….”

“서재는 봤고?”

“네, 고용인분이 사다리 쓰지 말라고 강조하시길래 손 닿는 데서 적당히 골라 읽었습니다.”

대화는 아침에도 나누는데, 이상하게 저녁엔 항상 느낌이 색달랐다. 권이도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조금 더 거리감이 좁혀지는 것이다. 그가 편안한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경호원은 여전히 불편합니까?”

“뭐, 오늘은 그다지…….”

불편한 쪽은 내가 아니라 이태성일 텐데.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고용주인 권이도가 그러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 편해지자고 억지를 부렸으니, 불똥이 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무슨 책을 읽었어요?”

권이도는 대각선으로 몸을 돌린 채 기분 좋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엔 눈썹 앞머리에 힘이


들어간다면, 저녁엔 전체적으로 유순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완벽한 외모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향수의 기원이라고…… 불어로 된 책인데, 혹시 아세요?”

그냥 가볍게 물은 것이었다. 서재가 얼마나 넓은데, 설마 그곳에 있는 책을 다 읽었으리라고.


제목이라도 알면 신기한 일이지.

그런데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Origine du parfum>?”

“…….”
우아한 불어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몇 개 안 되는 단어긴 해도, 발음은 물론 악센트까지 완벽했다.
놀란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권이도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알아요. 샤를이 쓴 거.”

“……불어 할 줄 아십니까?”

“대충?”

그는 가볍게 대꾸하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지런히 드리운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잠깐 배울 기회가 있었거든요.”

고작 시선 하나 내렸을 뿐인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내뱉는 얼굴이 너무도 애달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음이 정확한데…… 잘 가르쳤나 보네요.”

“워낙 똑똑한 사람한테 배워서.”

어깨를 으쓱한 권이도가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좀 전까지 보였던 그늘은 어느새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이거 봐, 이 사람이 김 실장보다 잘 웃는다니까.

“향수를 좋아해요?”

권이도가 웃는 얼굴은 화사한 꽃이 만개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
웃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향수라기보단, 향 같은 거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릴 땐 조향사가 되고 싶어서…….”

나는 무심코 말을 하다가 퍼뜩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말해도 좋을 꿈이 아닌데, 별생각 없이


이야기가 흘렀다. 조향사가 되고 싶다니. 말했다간 비웃음만 살 이야기를.

“잘 어울리는군요.”

“…….”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잘 어울린다니, 내가?

“정세진 씨한테 잘 어울리는 직업이에요. 금융 그룹 본부장보다 훨씬.”

깊이 고민해 봐야 했다. 저 말이 너에겐 본부장이 과분하단 말인지, 아니면 정말로 조향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인지.

“그러고 보니 G 사에 매년 론칭하는 향수가 있던데, 관심 있으면 얘기해요. 나한테는 너무 꽃향기라 좀


그랬지만 정세진 씨는 잘 어울릴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들어 봐도 권이도의 말에 비꼬는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거나, 네


페로몬 냄새나 제대로 맡으라거나 하는 얘기도 아니었다.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며 현실을 자각시켜 주는 말도
아니었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페로몬 향도 없는 사람이 향을 만든다는 게…….”

“페로몬 향?”

갑작스러운 질문에 권이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괸 채


느긋하게 입을 열기도 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다고.”

약혼식 날, 그가 그의 누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달큼한 말씨로, 사근사근 내뱉었던


한마디.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거든.’

“애초에 페로몬은 향으로 취급될 게 아니지만…… 후각을 잃은 게 아니라면 향수와 상관인지 잘


모르겠군요.”

“…….”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그러게요. 그게 정말 무슨 상관일까요?’ 하고.

‘페로몬 냄새도 없는 게…….’

누군가 사과는 빨가니까 먹지 말라고 하면 처음엔 그게 왜 먹으면 안 되는 이유냐고 물어볼 거다. 그러다
그 말을 세 번쯤 들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고. 그런데 만약, 왜 안 되냐고 이유조차 묻지 못할
상황이라면.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조향사라고 향수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식품에 향료를 첨가하는 직업군도 있어요.”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가 폈다. 약지에 낀 반지가 살갗에 살짝 자국을 남겼다. 권이도는 그건


몰랐다며, 가볍게 질문했다.

“정세진 씨가 하고 싶던 건 어느 쪽입니까?”

“저는…….”

아, 왜 이렇게 목이 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향 자체를 만들고 싶었던 거라.”

온 방 안에 퍼진 페로몬이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를 울렸다. 호흡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권이도가


벅차오를 만큼 생생했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러한 것들을 직접 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찰나의 감각을 놓치기
싫어서 가능한 한 오래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풀이나 꽃 같은 게, 냄새가 좋잖아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흔적을 남긴다는 부분이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천천히, 내가 늘 느끼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비가 오는 날엔 냄새가 어떻게 바뀌고, 계절이
달라지면 공기에 무슨 냄새가 섞이는지. 그래서 꽃을 좋아하고, 고용인이 만들어 준 꽃차가 늘 향긋하고 기분
좋단 말까지.

권이도는 내 말을 끊지 않았고, 모두 들은 뒤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굳이 조향사가 되지 않아도, 향을 만드는 건 시간을 내서 해보면 재밌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내가 지금껏 들은 어떤 말보다 상냥했다. 그는 평소처럼 말했지만, 받아들이는


내 기분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찰방이며 차오른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았던 날, 우리가 처음 만난 약혼식 날. 당신은 내


페로몬을 어떻게 알았냐고.

- 다음 화에 계속

17 화. Petit a Petit(7)

며칠간 나는 <향수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느라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이태성도 책 한 권을 다


읽었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억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요지는 왜 이런 슬픈 책을 추천했냐는 거였는데,
그래서 재미가 없었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란다.

그사이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면, 권이도가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듯 설마


다 읽은 거냐고 물었더니 ‘읽지 않은 책을 왜 꽂아 놓습니까?’라고 되묻는 바람에 알아차렸다. 괴물 같게도.
하루를 72 시간으로 쓰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태성의 말에 따르면 권이도는 대체로 쉬는 날 없이 일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태성이 팀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농땡이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도 꽤 바쁘게 살았지만, 주말이 없다는
말에는 절로 경악하고 말았다.

물론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그럼 이태성 씨도 못 쉽니까?’라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이제 자연스럽게 앉네요.”

오늘도 경호를 맡은 이태성은 내가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그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나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대충 턱짓했다.

“농담이니까 편하게 있어요.”

오늘 고용인이 준비한 꽃차는 달짝지근한 향이 풍기는 매화꽃 차였다. 송이송이 말린 매화가 유리로 된
찻잔에 두둥실 떠다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맞은편에서 어색한 질문이 들려왔다.

“……꽃도 먹습니까?”
풉, 웃음이 튀어나왔다.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말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탓이었다. 나는 입가를
가린 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꺽 삼켜 냈다.

“아…… 미안합니다. 귀여워서.”

대번에 이태성이 표정을 굳혔다. 제법 험악한 포스였으나 내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먹어도 상관은 없는데, 맛있진 않을 테니까 웬만하면 먹지 마요. 사레들리지 말라고 띄워 주는 찻잎


같은 겁니다.”

하얀 꽃잎은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예뻤다. 미관상 보기에도 좋으니 제 역할은 톡톡히 한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어 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나 싶다.

이태성은 내 말대로 조심조심 차를 마셨다. 여전히 입에 안 맞는단 표정이었으나, 며칠 마시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물을 제외한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마신 적이 없다고 그랬었지.

“지난번에 읽었던 책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같은 작가 걸로 가져왔어요.”

들고 온 책 중 하나를 건네주자, 그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도 슬픈 거냐고,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나는 정답을 알려 주는 대신 그냥 의뭉스럽게 웃었다.

“내용을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그럼 이것만 알려 주십쇼. 주인공 죽습니까?”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주인공은 죽지 않을 거다. 대신 그의 연인이 죽던가.

“일단 보시면 압니다.”

“…….”

새카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궁금하긴 궁금한가 본데 차마 물어볼 자신은 없나 보다. 한 번 더


물어보면 알려 줄 생각이었지만,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을 듯했다.

나는 가져온 책을 펼쳐 목차를 차례대로 훑었다. 이번에 읽으려는 건 불어로 된 조그만 시집이었다. 척


보기에도 새것 같았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볼펜으로 적어 놓은 글자가 보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가장 처음 쓰인 ‘Mon Cher Amour’를 한국말로 적어 놨을 뿐이니까. 단지,


모음이 기다란 필체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서 그랬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 나는 이 글씨의 주인이 권이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간단한 이유였는데,


약혼식 날 꽃다발과 함께 놓인 카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의 꽃말을 적어 놓았던 카드에도 이것과 같은
필체가 남아 있었다.

팔랑,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첫 번째 시엔 아무것도 없었고, 두 번째 시에만 부분부분 메모가 남아


있었다. 처음엔 발음을 표시했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라 몇몇 단어에 해석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

두서없이 적힌 문구들은 맞는 해석도, 틀린 해석도 있었다. 의역해야 할 부분을 대책 없이 직역하기도


했고, 아마도 관용어인 표현을 사실적으로 적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시에서, 나는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달 속에 있었다.」

“…….”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시였다. 권이도가 해석한 부분은, 아마 그가 이해한 뜻은 아닐


거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그런 관용어와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멍하니 손끝으로 권이도가 쓴 글씨를 덧그렸다. 종이가 닿는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이질적이었다. 왜


이렇게 눈앞이 뿌옇지.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박이는 순간, 종이 위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어…….”

비가 오나.

“……본부장님?”

먹먹한 귓가에 이태성이 화들짝 놀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로 모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까지. 하릴없이 넘어진 의자가 우당탕 정신없이 뒹굴었다.

“왜, 왜 그러시는…….”

딱 한 방울 떨어졌던 빗방울은 뚝, 뚝, 종이에 짙은 흔적을 남기며 번져 나갔다. 조금 더디게 고개를


들자, 비인 줄 알았던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나는 이게 비가 아니라 내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아…….”

한 손을 들어 무성의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울컥 울음이


치솟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시집을 읽었을 뿐이고, 거기서 권이도가 써놓은 글씨를 발견했을
뿐이다.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구절도 없었으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쉬이 울어 버릴 만큼 감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요?”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신경을 어떻게…….”
이태성은 크게 당황하며 테이블을 돌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휴지가 있나 찾는 듯했지만, 온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괜찮다고, 그냥 책이나 마저 보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불쑥 이야기했다.

“휴지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정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때였다.

“정세진.”

익숙한 음성이 먹먹한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이 감겨드는 음성은 내가 아는 한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꽃향기로 가득한 주변에 나무 냄새가 섞이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인기척이 성큼 가까워졌다.

“……전무님?”

“세진아.”

잔잔히 퍼지던 페로몬은 어느새 한 품에 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늘한 체온이 내 손목을 감싸고,
그보다 억세게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을 때 보인 건, 권이도 특유의 짙은
눈동자였다.

“너 왜 울어.”

“…….”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다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움이 터진 것도 아닌데,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조절이 되질 않았다. 주룩주룩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며 권이도가 큼직한 손으로 내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온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옆에 서 있던 이태성이 입을 떡 벌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정세진 씨, 나 봐봐요.”

안타깝게도, 그의 얼굴을 보는 건 눈물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분에


목소리까지 막혀 버렸다면 모를까.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가 내 뒤통수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토닥토닥, 어색한 손길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단 한 번도 타인을 달래 준 적 없는 사람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우스운 건 그런 손짓에도 정말로 설움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이지만.

“저 전무님, 여긴 어떻게…….”

“그만 들어가 봐요.”

“……예?”

“퇴근하라는 말입니다.”
이태성은 한 박자 늦게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이도의 품에 갇혀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허리까지 깊게 숙여 인사했을 거다. 묵직한 발걸음이 성큼성큼 멀어지고, 나는 그의 옷깃을 그러쥔 채
이야기했다.

“……저 괜찮습니다.”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울음기는 잦아들었다. 그제야 권이도의 페로몬도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아픈 건 아니죠.”

다정한 음성이 머리맡을 빙빙 도는 듯했다. 그의 손은 물론, 페로몬과 목소리까지. 온통 나를 위로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았다.

“……네, 안 아픕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왜 울었을까…….”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원래도 내게는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만큼은 정말 어린
아이를 대하듯 상냥하다. 이러니까, 자꾸만 내가 다리를 뻗는대도.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자세도 신경 쓰였고, 뒤늦게 부끄러움도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이도는 나를 놓아주는 대신 조금 더 강하게 제 품에 뒤통수를 고정했다.

“잠깐 이러고 있죠.”

“…….”

“울음 그친 거 아는데…… 그냥, 잠깐만.”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사르륵 쓰다듬는 손길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야릇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양팔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가만히 내 머리칼에 뺨을 문질렀다.

권이도가 나를 놓아준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내가 울음을 멈추고도 남은 설움을


모두 해소할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종국엔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떠야 했다.

“정말 왜 울었는지 말 안 해줄 겁니까?”

그는 조금 전까지 이태성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차분히 나를 심문했다. 그래서 왜 울었냐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나 또한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냥 책을 보다가…….”

“주인공 연인이 죽은 게 슬퍼서?”

그의 시선이 내가 이태성에게 가져다준 책을 향했다. 정말 내용을 알고 있단 사실도 놀라웠지만, 나는 저


책 때문에 울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아뇨, 제가 읽은 건 이겁니다.”

나는 손바닥만 한 시집을 가지런히 권이도에게 내밀었다. 잘 들고 있다 놓치는 바람에 구깃구깃 엉망이


된 책이었다. 아마 안쪽을 보면 눈물 때문에 글자도 조금 번졌을 거다.

“아끼시는 책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

민망한 기분에 사과를 건넸는데,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사과하지 말라는 등의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무언가 놀란 눈으로 멍하니 시집을 바라봤을 뿐.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읽었다고요?”

마치 일기장을 들킨 사람 같았다. 뭐, 엄밀히 따지면 굳이 다르진 않으려나. 이번엔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권이도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세진 씨, 혹시…….”

혹시?

“……아뇨, 아닙니다.”

“…….”

말을 하다 마는 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저 얘기해 달라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미안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후, 한숨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니 무어라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전부터 느꼈는데, 저렇게


처연한 얼굴을 하면 웃을 때보다 더 거부하기 어려웠다.

“근데 정세진 씨.”

권이도는 이태성이 읽던 책을 들어 휘리릭 책장을 넘겨 봤다. 마지막까지 쭉 훑어본 그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를 마주 본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왠지 모르게 음산해 보였다.

“찻잔이 왜 두 개입니까?”

“…….”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 없이 정확하다. 대체로 안 좋은 기운을 감지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
본능이 빠른 법이었다.

“책은…… 그래, 정세진 씨가 두 권을 읽었다고 치고.”

그의 시선이 소설책과 시집을 번갈아 응시했다. 손끝으로 유리로 된 찻잔을 톡톡 건드렸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내, 가볍게 코웃음 친 그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잔심부름에 말동무가 포함된단 말은 안 했는데.”

“……그.”

툭, 말을 내뱉고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황하면 더 이상하니, 어떻게든 머리를


굴릴 수밖에. 결국, 그냥 생각한 그대로 입 밖에 꺼내기로 했다.

“이태성 씨를 몇 시간씩 세워 놓는 게 부담스러워서요.”

시원스럽게 트인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름이 이태성입니까?”

“…….”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권이도 씨가 붙여 주셨잖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아, 이름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참으로 권이도다운 이유였다. 내가 황당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고, 알고 있었습니다. 정세진 씨가 경호원이랑 같이 차 마시는 거.”

“……이름을 몰랐던 건 농담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알아야 하나요?”

그걸 말이라고……. 아니지, 그러고 보니 민재도 경호원 이름을 다 못 외웠던가.

“미리 말 못 드려서 죄…….”

나는 사과를 하려다 말고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멈춘 걸 칭찬하듯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마저 말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근무 태만 같은 건 아니고, 제가 앉아서 책 보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세워 놓고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럽길래.”

같이 차를 마신다는 사실은 권이도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게 꽃차를 준비해 주는 사람은


권이도의 고용인이었으니까. 매일 두 잔씩 준비해야 하는데, 보고가 올라가고도 남았겠지.
“책은…… 마음대로 빌려줘서 죄송합니다. 멀뚱히 앉혀 놓으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불편하더군요.”

그러니까 이태성에게 잘못을 묻지 말아 달라는 얘기였다. 그가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할 것 같진


않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만약에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거니까. 나 때문에 상황이 곤란해지면 꿈자리가 영 좋지
못했다.

“뭐, 사실…….”

권이도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기다란 검지가 움직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경호원을 어디에 앉히건 그런 건 별로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정세진 씨한테 붙여 준 순간부터 내 사람은


아닌 거예요. 처음부터 불편하다고 얘기했으니 가능한 편한 길을 찾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거기까지 말한 권이도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천천히 깜박이는 두 눈이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기분 탓인가. 다시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게다가, 정세진 씨한테도 낮에 대화할 상대는 필요했겠죠.”

그는 너그러운 말투로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얘기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쯤 온화했고, 전혀


화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뒤이은 말만큼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거슬리는 건, 나와도 공유한 적 없는 장소를 다른 사람이랑 공유했다는 것 정도.”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권이도는 이태성이 마셨던 잔을 들어 성의 없이 바닥에 부어 버렸다.


돌로 된 바닥에 찻물과 꽃잎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이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군요.”

- 다음 화에 계속

18 화. Petit a Petit(8)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권이도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것 같았다. 그는


찻물이 번지는 모습을 보며 테이블 위에 찻잔을 툭 내려놨다.

“별로 미안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것치곤, 기분이 아주 나빠 보이는데.

“…….”

이태성과 함께하는 시간은 권이도와 보내는 시간이 비하면 무척이나 짧았다. 끽해야 오전 몇 시간을
함께할 뿐이고, 각자 책을 읽느라 말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그와 반대로, 권이도는 매일 밤 나와 두어 시간씩
대화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나는 그렇게 묻는 대신 테이블 아래에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간질거리는


기분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내비치는 불쾌함에 의문이 들기보다 이해가 먼저 돼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입술이 움직였다.

“……온실에 조명을 달까요.”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살짝 눈가를 찡긋했다.

“그러면 권이도 씨가 퇴근하고 나서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솔직히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이 통할까, 잠깐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이것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아직 여기서 그 시간대를 공유한 사람은 없거든요.”

“…….”

온실에 조명을 달면 해가 진 다음에도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다. 오는 길은 좀 어둡겠지만,


나란히 걸어오면 그리 무서운 것도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건 권이도가 내 말을 기꺼이 수락한 다음이겠지만.

“그게 싫으시면…….”

“아뇨.”

대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색하게 목을 풀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귀가 간지러울 만큼 부드러웠다.

“그렇게 하죠.”

드러난 눈에 엷게 웃음기가 묻어났다.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였다. 어쩐지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정세진 씨는 정말…….”

“상냥하다고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특유의 알파 페로몬이 잔잔히
감겨들었다. 누누이 생각하지만, 정말 상냥한 건 그쪽이라니까.

“그보다…… 벌써 퇴근하신 겁니까?”

오늘 아침, 권이도는 분명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일찍 들어온다는 말은 물론, 온실로


찾아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옷차림은 여전히 정장 그대론데, 이 시간에 퇴근할 일이 뭐가 있을까.

“다시 나가 봐야 하는데, 잠깐 들른 겁니다. 정세진 씨한테 할 말도 있고 그 김에 겸사겸사.”


“할 말이요?”

“오후에 병원에서 주치의가 올 예정입니다.”

주치의라는 말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있던 다음날, 지하에 있던 차고에서 권이도가


제안했던 페로몬 검사.

“1 시쯤 온다고 했으니까 점심 먹고 곧장 검사받으면 됩니다. 오후에 딱히 일정 없죠?”

“네, 그런 건 없습니다.”

집에서 놀고먹는 사람한테 일정이 어디 있다고. 끽해야 정원을 좀 거닐 생각이었건만.

“아마 피검사를 할 텐데,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말만 들으면 내가 주사 맞기 싫어하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페로몬 검사라고 해봤자, 권이도의 말대로


피를 좀 뽑아 가는 게 다일 텐데.

“걱정은 권이도 씨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냥 내가 걱정돼서 온 겁니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어조라 반박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내가 내려놓은 시집을 가져와 첫


페이지를 살펴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가지고 싶은 건 생각해 봤습니까?”

“아, 그거…….”

차 키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말하기로 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무슨 물건을 고르면 좋을지 생각해 본 참이었다.

“지난번에 권이도 씨가 말씀하신 향수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했던 향수라면…… G 사에서 나온 그거?”

“네, 그거.”

권이도가 만족할 만한 물건이면서, 나중에 뒤처리가 어렵지 않은 것. 책 따위를 말하기엔 서재가 너무도
넓으니 그가 말한 향수가 적당할 듯했다. 정확히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일 테니까.

“똑똑하군요.”

그는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선은 여전히 시집에 고정된 상태였다.

“무슨 향수인지도 모르면서, 내 입에서 먼저 나왔으니 적어도 거절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나 보죠.”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다행히 그가 책을 보는 중이었기에 동요한 티를 들키기 전에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척 의외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라고 안 합니까?”

“……어차피 들킬 거짓말은 하지 말자 주의라.”

뭣 하러 아는 척을 한단 말인가. 그게 무슨 향이냐고 한 번만 물어봐도 금세 들켜 버릴 것을.

“갖고 싶진 않아도 궁금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권이도 씨가 잘 어울릴 것 같다길래 관심이 간 것도


있고……. 이걸로는 안 됩니까?”

“아뇨, 당연히 됩니다.”

그는 시집을 내려놓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 흥미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궁금하면 가져 봐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라면 정말로 궁금한 모든 걸 가져 보고 말 테니까.


그럴 만한 돈도, 능력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말한 향수는 은방울꽃을 모티브로 한 거예요.”

그는 예의 그 기품 있는 목소리로 나긋나긋 향수를 설명해 줬다. 매년 디자인이 바뀌어 새로 나오는데,


국내엔 딱 100 개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전 세계를 통틀어 4,500 개밖에 없다는 말에는 나도 멋쩍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한정판이었군요.”

“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그는 왼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은색과 금색이 섞인 금속이 약혼반지와도 썩 잘 어울리는


시계였다. 아마 날짜를 볼 수 있는 제품인지, 그가 한쪽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기간을 가늠했다.

“마침 예약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직이 말꼬리를 흐린 권이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일 자로 다물린 입술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그렇게 물으려는데, 그가 툭 내뱉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네?”

“정세진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하던 대화와는 전혀 무관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권이도가 그저 예시일 뿐이라며 뒷말을 더 했다.
“그 사람이 정세진 씨한테 뭘 좀 훔쳐 갈 건데, 그걸 잃어버리면 정세진 씨한테 오는 피해가 굉장히
커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서 무얼 훔쳐 갈 거라니. 혹시 책 얘기인가 싶었지만, 그는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으로 시계를 감싸며 무덤덤한 어투로 덧붙였을 뿐.

“이 경우에 선택지는 두 개. 선뜻 내어 주느냐, 아니면 주지 말고 숨겨 놓느냐.”

“…….”

“정세진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시선이 마주쳤다. 단순히 예시일 뿐이라기엔 권이도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한껏 가라앉은 두 눈이
어떤 의미에선 가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는, 일단 물어볼 것 같은데요.”

무엇을? 권이도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버린 것처럼, 그의 시선이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는 난감함에 눈꼬리를 내리고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그게 왜 필요한지 물어보겠죠. 그 사람한테.”

무작정 훔쳐 갈 만큼 필요한 거라면, 나는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오는 피해가


얼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랑하는 상대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을 테니까. 애초에 잃어버리면 안 될 만큼 소중한
걸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작정 남의 걸 훔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사랑은커녕 누군가와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구체적인 상대가 없음에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남의 걸 훔쳐 갈까.

“일단 물어보고, 정 필요하다 싶으면 그냥 줄 것 같습니다.”

“…….”

“훔칠 정도니까 뭔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거기까지 말하니, 문득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이 이리도 따듯한데, 대화는
이리도 삭막할 수 있나. 심각한 이야기도 아니고,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것을.

“물론 손해를 보는 건 곤란하지만…… 그거 하나 주고 점수 따면 좋죠.”

마지막 말은 거의 장난에 가까웠다. 권이도가 웃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으면 해서. 그런데 그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렇군요.”

민망한 기분이었다. 보잘것없는 대답을 그가 너무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도 도움이


되냐고 물었는데,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많이.”
“…….”

뭔진 몰라도 정말 도움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개운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일리 있는 말이네요. 정세진 씨는 사랑하면 퍼주는 타입인 것도 알겠고.”

“음, 뭐…….”

“근데 전 그거 못합니다. 퍼주는 거.”

픽, 웃음을 흘린 권이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것처럼 깔끔한 구둣발에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아무리 봐도 고의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 건 아무것도 뺏기지 말자는 주의라.”

“…….”

대체 어떤 사람이 간 크게 권이도의 것을 빼앗아 갈까. 잘못 훔쳐 갔다간 그보다 배로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는데.

“뭐…… 내가 내 손으로 준다면 얘기가 다르긴 하겠네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게 내민 손엔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기도 잠시. 그가 까딱, 손을 움직였다.

“그만 들어가죠.”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약혼식 날 그랬던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약간은 서늘한 체온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빛을 띠었다.

***

권이도가 말한 대로, 오후가 되자마자 주치의가 찾아왔다. 자신을 심 교수라고 소개한 여자는
선호병원에서 특이 형질과 관련된 과를 담당하는 의사였다. 그는 피를 뽑아 이런저런 검사를 진행하고, 어디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정상. 원래부터 이상했던 부분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페로몬
농도도, 이런저런 건강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 정상치를 웃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잠도 잘 자고, 먹는 것도 잘 먹었으니, 문제가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할 터. 주기가


안 맞는 건 좀 곤란했지만, 그와 관련해서 심 교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얘기했다.

‘보통 각인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간혹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상대방한테 맞춰서 주기가
조금씩 당겨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 심 교수는 정확히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결국, 내 주기가 당겨진 게 권이도의


페로몬에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가 워낙 우성인 데다, 내게 알파 페로몬 면역이 없는 탓도 있다는 말도
함께였다.
‘아마 반년 정도에 걸쳐서 조절될 거고, 완전히 같아지면 안정기에 들어갈 겁니다.’

퍽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닌데, 주기가 같아지면 어쩐단 말인가.
권이도의 목적이 2 세라면 반길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진작 못 박아둔 상태였다.

‘건강엔 이상이 없으니…….’

심 교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시선을 피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
날, 아버지가 보여 준 반응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기를 계산하는 것도 소용없는데, 권이도는 나를
얼마나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다행이군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딱 한 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한 목소리는 아버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 됐습니다.’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실질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히트 사이클의 유일한 해답이
억제제가 아니라 권이도의 페로몬이라는 말까지 들었건만.

어쨌든 결과는 무탈했고, 권이도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오늘은 저녁을 혼자 먹어야
할 거라며 미련이 남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식사는 혼자 해도 괜찮다니까.

“……근데도 아쉬운 게 문제지.”

후우, 한숨과 함께 욕조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따끈따끈한 물에서 모락모락 수증기가 올라왔다.


지난번처럼 향긋한 입욕제는 아니고, 소금인지 뭔지 무언가 풀어 놓은 것이었다. 권이도가 지시해 놓고 나간 덕에
고용인이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준비해 주었다.

‘기다리지 말고 자요.’

속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복잡했다. 생각이 잔뜩 떠올랐다가, 다시 새하얗게 지워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가득 잡념으로 뒤덮이길 반복했다.

고민의 원인은 단 하나, 권이도였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안면도 없는 상대이자, 이제는 내 약혼자가 된


권이도. 그가 내게 보여 주는 태도들이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켜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사랑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호감을 닮은 무언가인 건 확실했다. 나를


걱정하고, 챙기고, 아끼는 모습은 보편적인 애정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단순히 인정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그럴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도무지 계산이 맞질 않아 아닐 거라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그렇지.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에게 감당 못 할 마음을 품으리란 예감 정도일까.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가장 먼저 마음을 줄 상대를 찾는다고 한다. 고독의 끝은 외로움인지라 공간이
남을수록 여백을 채우기에 급급해진다. 내게는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던 여유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그를 담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보여 준 불쾌함이 질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시선에 반응해 끝내 자위까지 했을 때, 늘


혼자였던 히트 사이클을 그와 함께 보냈을 때, 아니면 그가 나를 위해 무리해서 시간을 내어 줬을 때.

짐작 가는 부분이 많으니 오히려 정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

나는 고개를 들어 투명한 유리창 너머 하늘을 응시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시간대라 보라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오묘한 색이었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우스갯소리처럼 바라던 그대로였다.

‘세진아.’

그러고 보니, 나를 세진이라고 불렀지. 키스는 자연스럽게 했으면서 우는 걸 달래는 손길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귓가를 만질 땐 늘 있는 일인 양 능숙했고.

“세진이라고…….”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젖은 머리는 대충 털어 내고, 가운 하나만 걸치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김 실장이었는데,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나는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애써 담담한 척 전화를 받았다.

“네, 김 실장님.”

-본부장님. 접니다.

몇 번이고 들은 호칭이었다. 이제 본부장 아니래도.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 김 실장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본가에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19 화. Petit a Petit(9)

높디높은 담벼락은 어릴 때 보았던 것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회색의 벽이 얼마나


무섭던지. 이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 두려움은 반만 맞아떨어졌다. 처음엔 감금과도 같은 생활을 했지만, 나는 끝내 쫓겨나고


말았으니. 평생을 이 울타리 속에서 살 것이란 생각이 다행스럽게도 현실을 비껴간 것이다.

“본부장님.”
내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겨우겨우 담벼락
꼭대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네, 괜찮습니다.”

본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민재, 서영이가 있는 본가. 내가 어릴 적부터 살아왔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타의에 의해 걸어 나온 아버지의 집.

“들어가죠.”

‘조만간 본가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김 실장의 말을 듣고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민재가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내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권이도가 나를 돌려보내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 달리, 김 실장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고 그러셨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뜬금없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했고. 가족끼리 하는 식사 자리. 거기에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건만. 아버지가 말하는 가족엔 내가 들어가지 않을 텐데.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용건은 따로 있었다. 단지 그게 김 실장의 입을 통해 전달될 말이 아니었을 뿐.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권이도는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자마자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얘기했다.

‘데려다줄게요.’

일도 바쁜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빼겠다고. 심지어 그 차를 운전하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그의 기사일


텐데.

‘아뇨, 김 실장이 데리러 오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표정이 안 좋아졌던 건, 단순히 잘못 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불쾌함이었으니.

‘하루 자고 올 테니까, 그 김에 이태성 씨는 쉬라고 해주세요. 복지가 영 엉망이던데.’

장난처럼 건넨 말이었다. 가능하면 당일에 오고 싶었지만, 민재가 붙잡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두
번을 다녀올 바에는 한 번에 해결하는 게 낫기도 했고.

권이도는 내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무척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복지를 돈으로 주면 되겠군요.’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드레스룸에 준비된 것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이즈가 내 몸에 꼭 들어맞았다. 셔츠에 넥타이, 거기에 재킷까지 걸치자 제법 본부장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도련님 오셨어요?”

커다란 대문을 지나 잘 조경된 정원을 지나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권이도의 집만큼 커다랗진
않았고, 그렇다고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나는 현관까지 마중 나온 노인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집사님.”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노인은 어린 시절 바쁜 부모님 대신 나를 키우고, 민재와 서영이까지 키운


사람이었다. 모든 고용인이 나를 외면할 때 남몰래 음식을 챙겨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집을 나간 이후엔 연락할
일이 없어 얼굴을 보는 건 몇 년 만이었다.

“아유, 결혼 생활이 괜찮은가 봐요. 얼굴색이 엄청 좋아졌네.”

“하하…… 거기서 워낙 잘 먹어서 그런가.”

문 집사가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살짝 허리를 굽혀 줬다. 이제는 나이가 있는 터라 뺨을 만지는 손길이


까칠까칠했다. 어린아이 다루듯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본 문 집사는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잽싸게 물러났다.

“세진이니?”

어머니였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몸에 꼭 맞는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늘 그랬지만, 꾸미기 좋아하는 공작새 같은 사람이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회장님은 서재에 계시니까 인사하고 오렴.”

어머니와는 항상 애매한 관계였다. 사이가 나쁘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았지만, 사이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할 관계. 십몇 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대화를 나눠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녀올게요. 김 실장님, 그건 이분 드리면 됩니다.”

나는 김 실장에게 눈짓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뒤 편에 서 있던 김 실장이 근처에 대기하던 고용인에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권이도가 집에 가져가라며 들려 준 선물이었다.

“와인인데 실온에 두면 될 겁니다. 권이도 씨가 식사 때 마시라고 주셨어요.”

척 보기에도 값깨나 나갈 것 같은 와인은 그의 집에 있는 와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술을


모으는 것도 취미인지. 널찍한 창고에 국가별, 연도별, 종류별로 와인이 분리되어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진귀한 풍경이었으나, 그가 꺼내 든 병을 보았을 때보다 놀라진 않았을 거다.

‘……이걸 지금 주시겠다고요?’

‘네, 와인 싫어합니까?’

시가 오천만 원이 넘는 와인이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을 만큼 희귀한


술이기도 했다. 병에 붙은 라벨과 그 앞쪽에 적힌 숫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냥 식사 자리일 뿐인데…… 너무 과분한 것 같습니다.’

‘과분하다니.’
권이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그 집에 제일 과분한 건 정세진 씨인데.’

똑똑.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들어오거라. 육중한 나무 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책상이 아닌


서재 오른편에 선 아버지가 보였다. 골프채를 들고 한창 퍼팅 연습 중이었던 모양이다.

“찾으셨다고요.”

“그래.”

골프채의 헤드가 골프공을 툭 건드렸다. 데구루루 굴러간 공은 아슬아슬하게 홀 옆으로 빠져나갔다. 쯧,


혀를 찬 아버지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그놈은?”

대뜸 본론이었다. 그는 골프공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어깨를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그놈이랑은 잘 지내고?”

“……네, 뭐.”

권이도의 앞에선 꼬박꼬박 존칭을 부르더니.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놈’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적대심이 가득 느껴졌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툭, 곧게 굴러간 골프공은 이번엔 정확히 홀 안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골프채를 어깨에 걸쳤다.

“2 세는 아직이냐.”

“…….”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처음부터 가장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 이거였을 거다. 사이를 먼저 물어본


걸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근황을 살피지 않아 서운해야 할지.

“별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허.”

어이가 없다는 듯, 아버지가 크게 숨을 토해 냈다. 한껏 찌푸린 미간이 몹시 짜증스러워 보였다. 탁, 탁,


골프채로 어깨를 두드린 그가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기껏 히트 사이클도 지나서 불렀더니…….”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똑바로 서 있는데도 스멀스멀 바닥으로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가 천천히 수그러들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아직이고?”

“……그거라면.”

“쯧, 척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아버지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 책상을 뒤적거렸다. 너저분하게 쌓인 서류 틈에서 무언가 찾는 듯했다.

“암만 결혼이 아직이래도 한집에 살면 갈 데까진 갔을 거 아니야.”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말한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요컨대 권이도와 섹스했냐는 거겠지.

“아버지.”

“얘기해.”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등진 채 서류를 뒤적였다. 몇 장을 뽑아 가지런히 정리하고 또 몇 장을 뽑아 옆에


내려 둔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권이도 씨는…… 서류 정리가 끝나기 전까진 임신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내게 ‘정세진 씨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도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나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2 세를 원하니, 서로의 바람이 반대가 된
게 아닌가.

“……뭐?”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 서류를 든 채 나를 돌아봤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녀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런 걸 바라지 않으신다고…….”

“그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부리부리한 눈이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당장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큰 불호령이 떨어질 듯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네. 권이도 씨가 그랬습니다.”

“…….”

숨 막히는 침묵이 서재 내부에 엄습했다. 갑작스러운 고요함이었지만, 무어라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냥 시선을 내린 채 뒷말을 기다리는데, 아버지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망할 놈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낼까. 내가 권이도의 아이를 가지면 아버지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으리라고.


“그래서 세진이 넌, 그냥 알겠다고 대답한 거야?”

“……네.”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골프채를 바닥에 내던졌다. 반으로 두 동강 난 파편이 바닥에 퉁 퉁 굴러다녔다.


그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그놈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든 그 자식 애를 가져야 돼. 알겠어?”

부릅뜬 두 눈에 초조함이 가득 엿보였다.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과한 반응이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마음대로 왜 안 돼, 응? 너네는 그 뭐야, 페로몬으로 성욕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냐. 넌 우성


오메가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마 내가 평소에 페로몬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파고들었다.

“모자란 것.”

“…….”

티 나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페로몬 얘기는 아니었는데.


무어라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내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럼 적어도 히트 사이클 때라도 뭘 했어야지. 우성 오메가씩이나 돼서 알파 하나 못 꾀는 게 말이


돼?”

엄밀히 따지면 꾀어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아니, 만약 일을 치렀다고 해도 권이도가 원치 않으면


아이를 가지지 못했겠지만.

오메가가 임신하기 위해선 알파가 반드시 노팅을 해야 한다. 성기가 빠지지 않게 깊이 박아 넣고 오랜


시간 배 속을 채워야 한단 말이다. 중요한 건, 이 노팅이 오로지 알파의 의지로 이뤄진다는 점일까.

“서류 정리는 무슨…… 약혼 사실도 못 알리게 하는 놈이, 감히 서류 정리를 운운해?”

“……약혼 사실을 못 알리게 한다고요?”

내가 되묻자, 아버지가 내 어깨를 확 놓아 버렸다. 그리 큰 힘은 아니었으나 잠깐 비틀거리기엔 충분했다.


이내 자세를 바르게 한 나를 보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짓씹었다.

“선호 측에서 기사를 막고 있어.”

그리 이상할 거 없는 말이었다. 애초에 공식 발표는 한참 나중으로 미뤄 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지 성난 목소리가 뒷말을 이었다.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소문이 나도 진작 났어야 하는데 업계고 언론이고 죄 쉬쉬하는
분위기야. 선호가 이렇게까지 완벽히 통제하는 이유가 뭐겠어, 응?”
“…….”

“너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지. 그냥 인질로 데리고 있는 거라고. 그 망할 뱀 같은 놈이…….”

이제야, 아버지가 아이에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해신과 선호를 잇는 연결고리가 갖고
싶은 것이다. 언론에 노출조차 하지 못한 이 시점에, 나와 권이도의 2 세가 그 역할을 해주리라 믿을 테니까.

“……저를 인질로 해신에 요구할 게 있습니까?”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그걸 제외하고도 훨씬 많았다. 우선, 가장 먼저 이 결혼이 행해진 이유.

권이도는 나와의 결혼으로 무얼 얻었을까.

“그걸 모르니까 문제인 거지!”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성큼성큼 서재 안을 걸어 다녔다. 같은 공간을 빙빙 도는 게, 어지간히 속이


갑갑한가 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후계도 아니고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권이도가 너 따위 오메가를 어디에 쓰냔
말이야.”

타당한 의문이었다. 내가 권이도의 대화 끝에 늘 품고 있던 의아함이기도 했고. 문제는, 아버지가 가진


불안이 내가 가진 것보다 한참이나 커다랗다는 점일까.

“애초에 결혼이 아니라 약혼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연신 중얼거리는 말들은 대개 자신의 안일함과 권이도의 비겁함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말만


들으면 권이도가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살살 꼬드겨 극악무도한 불공정 계약을 맺은 것처럼.

“아버지.”

그래서 나는 끝내 물어보고 싶지 않던 마지막 질문을 입에 올리기로 했다. 이 혼사가 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지 않던 한 가지 사실.

“권이도 씨가 뭘 준다고 그랬습니까?”

나는 정말 대가를 치르고 넘겨진 물건이구나. 사업 수단의 하나이고, 아버지에겐 기회를 잡을 카드였구나.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단돈 몇 푼에 팔렸는지, 혹은 어떤 조건에 협상됐는지,


흥정을 얼마나 했는지 따위의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선호전자의 보안 시스템.”

하지만 무심하게도,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우뚝, 제자리에 선 채로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기업의 오메가를 넘겨주면 선호에선 애플리케이션에 도입할 시스템 권한을 준다고 그랬지. 뭐……
그 외에 건 네가 알 필요 없고.”

우리 기업의 오메가라. 그나마 ‘우리’라는 말이 붙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런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 하나 없잖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무시만 하니…….”

“……계약서는 없습니까?”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다. 사업에 증거가 남는 계약은 필수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 야비한 놈이 투자금을 줬어. 계약서는 유출되면 위험하니까 계약금 대신으로 챙겨 두라면서. 말은


번지르르하기에 철석같이 믿었더니 이 사달이 난 거 아니냐.”

아마도 아버지는 권이도의 말만 믿고 구두 계약을 맺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답지 않게 안일한 행동이었으나,


상대가 권이도라면 그럴 만도 했다.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로, 신뢰와 불안을 번갈아 주며 사람을 한계까지
내몰았을 테니까.

그래도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사이에 혼사가 몇 개나 들어왔는지 알아? 선호까진 아니어도 괜찮은 곳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다


거절하느라 우리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는 알기나 해?”

아버지의 불안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막힌 타이밍에 온 기회였고,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높은 성과엔 높은 위험이 따른다고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러다 그놈이 널 팽하기라도 하면…….”

“…….”

그 마지막 말에는 나조차도 머리가 식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머릿속에 그가 날 내치는 장면이 또렷이
떠올랐다. 냉랭한 눈동자나,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싸늘한 한마디까지.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세진아.”

움찔, 고개를 들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모양이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아버지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 기억하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할 뒷말을 언젠가 들은 적 있는 것처럼. 이 탐욕스러운 두 눈이 내게 할


말을 직감하는 것처럼.

“이 애비 말 잘 들어.”

나직한 서론은 선택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나를
북돋웠을 뿐.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 다음 화에 계속
20 화. Petit a Petit(10)

본가에서 내가 쓰던 곳은 현관과 가까운 작은 방이었다. 나를 내보내자마자 새로이 개조해, 지금은


고용인들이 묵는 공간이라고 했다. 안쪽에 조그만 화장실도 딸려 있으니 사용하기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말없이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2 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 집에 불이 나지 않는 이상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올 일은 없을
터였다.

덩그러니 앉아 있길 두 시간.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진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어두운 공간에 추적추적 가랑비가 쏟아졌다.

‘훔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빨리 보자는 거지.’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비 오는 풍경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의 무게를 달아 봤다.

‘네가 우리 기업의 영웅이다, 세진아.’

나는 영웅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 간단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한 아버지가


이토록 거창한 걸 기대한다. 내가 무얼 바라는지, 그런 건 묻지도 않은 채. 권리 없이 의무만 주장한다.

‘……권이도 씨가 알면 무조건 파혼당할 겁니다.’

애써 용기를 내서 말했지만, 아버지에겐 먹히지 않았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내 어깨를


다독였을 뿐.

‘파혼이라니. 너희는 결혼한 적도 없어.’

그래, 확실히 그랬다.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저 기약 없는 약속을 했을 뿐이라는걸.

‘잘 생각해야 해. 네가 이걸 안 가져온다고 이 혼사가 무사히 성립될 것 같아?’

‘…….’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바닥은 계속해서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깊은 웅덩이 빠진 것처럼 발목부터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아갔다.
어깨에 올라온 아버지의 손이 추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물어보고 싶었다. 그 가족에 나는 포함되는 거냐고. 영웅이 되지 못한 아들도 거기에 자리가 있느냐고.

‘이제 본부장도 아닌 네가 그렇게 버림받고 나면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항상 코앞에 놓인 상황을 해결하며 살아왔다. 먼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고, 당장에 갈등을 해결하며
살아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자꾸만 나중의 일을 짐작하게 됐다. 바다 위의 부표처럼 흔들리던 마음이
줏대 없이 뒤집히려고 했다.

‘너만 잘하면 돼. 만약 그놈이 널 내쳐도 너는 돌아올 곳이 있지 않냐.’

내게 정말 돌아올 곳이 있을까. 권이도에게 버림받아도, 혹은 파혼을 당해도, 아버지는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이제 쓸모를 다했다고 미련 없이 내쳐 버리는 건 아닐까.

‘모자란 널 지금까지 키워 준 게 누군지 알고 있지?’

‘……그럼요.’

그걸 왜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걸 주워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그래, 알아들었으면 됐어. 내 아들인데 당연히 현명해야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체한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토할 것처럼 무언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까딱 잘못하면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빵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정세진 씨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권이도 당신에게 물을 걸 그랬다. 그러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 같냐고. 그랬다면 조금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가랑비가 부슬비로 바뀌고, 울렁거리던 속이 간신히 진정될 즈음. 외출해
있던 민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심코 집 안에 들어왔다가 마중을 나온 날 보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치장한 모습이, 어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지 않았나 싶다.

“왔어? 일찍 들어왔네.”

“……너, 너!”

민재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넘어갈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경악스러워하는 얼굴이 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나 보다. 아버지도 무심하시지, 민재와 서영이에겐 내 소식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왜 집에…….”

성큼, 가까이 다가온 민재에겐 희미한 아로마 향기가 났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는데, 금세 눈동자엔
이채가 떠오른다. 그는 왜인지 기대하는 얼굴로 대뜸 질문했다.

“파혼당했냐?”

“…….”

설마, 파혼이었으면 이 집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텐데. 아니, 아마도 곧 당하겠지만.

“아버지가 부르셔서 저녁 먹으러 온 거야.”


내 한마디에 민재의 얼굴에 희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표정을 못 속이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물론 곤란해지는 건 민재가 아니라 아랫사람이겠지만 말이다.

“염색했구나.”

나는 민재의 머리칼이 어두운색으로 바뀐 걸 확인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소위 날티라고 해야 할까.


건방지던 인상이 제법 순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어머니를 닮아서, 생긴 거 하난 예쁘장한 놈이었다.

“잘 어울린다.”

“…….”

가볍게 건넨 칭찬에 민재가 휙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흠흠 헛기침을 내뱉는다. 귓가가
발갛게 물든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 옷은 뭐야? 처음 보는 건데.”

그는 기민한 눈매로 내가 입은 정장을 꼼꼼히 살펴봤다. 옷에 관심이 많은 녀석답게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나 보다. 이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핏이 레디투웨어가 아닌데…….”

안 그래도, 옷을 입으며 느낀 것이었다. 엷게 스프라이트 무늬가 들어간 밤색 정장은 기성복이라기엔


모든 부분이 내 체형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기장은 넉넉한데 허리는 크지 않다거나 하는 부분이.

“선물로 받았어.”

“선물? 누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묻던 민재가 똥 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게 정장을 줄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긍정하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민재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나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왔다. 손부터 씻고 오라고 하자, 자기가


어린애냐며 버럭버럭 성질을 내기도 했다. 반쯤 놀리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투덜거리면서도 착하게 화장실에
다녀왔다.

“…….”

“…….”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새삼 근황을 묻자니
귀찮았고, 그렇다고 다른 주제를 쥐어짜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정세진.”

침묵을 참지 못한 쪽은 민재였다. 민재는 꼬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어쩐지 머뭇거리는 느낌으로


질문했다.

“……그 새끼가 잘해 주냐?”

아, 이런 주제는 좀 곤란한데.
“권이도 성격 존나 더럽다며. 업계에 소문 다 났는데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음…….”

낮게 침음하며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민재의 말대로 권이도의 소문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겪은 권이도는 글쎄, 소문과는 무척이나 달랐지만.

“너한테 욕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잘해 줘. 존댓말도 쓰고.”

“……그 새끼가 존대를 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재가 눈을 크게 떴다. 잘해 준다는 말은 한 귀로 넘기고 존댓말을 한단 사실만


신기한가 보다.

“약혼식 때도 존댓말 썼잖아.”

“그거야 어른들 계시니까 그런 거겠지.”

민재가 말하는 어른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거다. 애초에 어른 취급을
해줬다면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거고.

“정말 잘해 줘. 말도 얼마나 상냥하게 하는데.”

“미친.”

권이도는 늘 내게 상냥하다 말하지만, 정말 상냥한 쪽은 권이도였다.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써주고,


동등한 입장에서 나를 대해 준다. 이따금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는 타고난 천성일 뿐이니 제외하고. 늘 꼭대기에
머물던 사람으로서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이상할 터다.

“……그래서 만족해? 지금 그 결혼 생활에?”

민재는 초조한 얼굴로 꼬았던 다리를 똑바로 풀었다. 다리를 달달 떠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생긴 건 어머니와 같은데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은 아버지와 비슷했다.

“야, 만족하냐고 묻잖아.”

엄밀히 따지면 결혼이 아닌 약혼이었다. 그마저도 우리가 정말 약혼자다운 하루를 보내는지는 미지수였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역시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

민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꽉 다물린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리고,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씨발, 형 같은 소리 하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누가 봐도 화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런 민재를 붙잡지 않았다.

***

원래는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으나,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본가를 빠져나왔다. 아버지는 어서 가보라며


나를 재촉했고, 유일하게 민재만이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럼에도 붙잡지 못한 건 낮에 나와 나눴던
대화가 그때까지도 앙금으로 남았기 때문이겠지.

이미 퇴근한 기사 대신 운전은 김 실장이 도맡아 했다. 올 때도 데리러 왔으니 갈 때도


모셔다드리겠다면서 말이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선뜻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아, 권이도 씨 댁 말고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원래 사시던 곳 말씀입니까?”

차를 출발시키려던 김 실장이 기어에 손을 얹은 채 멈칫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했나, 그게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위치 모르시면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

장난처럼 말하자, 그가 군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원래 아버지의 기사였기 때문일까 운전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원래 있던 기사보다 김 실장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사람 시켜서 청소해 놓길 잘했네요.”

권이도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원래 살던 오피스텔을 처분하지 않았다. 정리하기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만간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덩그러니 바닥에 나앉으면 아무래도 좀 곤란하지 않은가.

“본부장님.”

“저 이제 본부장 아닙니다.”

나는 그간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김 실장에게 이야기했다. 승진할 때마다 잘만 바꿔 부르더니, 백수가


된 뒤에는 영 바뀔 기미가 없었다. 그는 흘긋 백미러로 나를 살피곤 곧장 호칭을 정정했다.

“도련님.”

“……말씀하세요.”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이라. 이따금 들을 때면 간지럽고 어색한 호칭이다. 이태성은


절대로 못 부를 호칭이기도 했고.

“왜 오피스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김 실장은 퍽 걱정스러운 느낌으로 물었다. 내가 오피스텔로 가는 이유가, 권이도에게 가기 싫어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사실이 또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권이도 씨가 저 괴롭히는 것 같습니까?”


문 집사는 얼굴이 좋아졌다던데, 민재와 김 실장은 왜 권이도를 의심할까. 하다못해 그 무심한
서영이조차 집을 나서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었다. 내가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한 건지, 아니면 이 사람들의
걱정이 과한 건지.

“아뇨, 사실…… 좋아 보이십니다.”

또 거짓말은 못 하는 김 실장이 순순히 사실을 고백했다. 최근엔 수면제도 안 찾지 않냐며, 말씀이


없기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도 함께였다.

“……수면제 많이 남았습니다.”

“…….”

“요즘 먹을 일이 없어서요.”

창밖에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김 실장은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넌지시 물어왔다.

“오피스텔은, 종종 들르려고 그냥 두신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비나 좀 맞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하필 옷이 이래서 그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갈 곳은 있어야죠.”

무심코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김 실장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선 할 말이 없는


것일지 몰라도, 무리해서 위로하려 들지 않는 게 내가 그를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그 후 집으로 갈 때까지 김 실장은 내가 별다른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피곤하면 조금 주무시라고 그 말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딱히 잠은 오지 않았지만,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눈을 떴을 때,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걸 아는 김


실장이 눈치껏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댄 덕이었다.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친 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잔인하시네요. 맞는 건 안 되고, 보기만 해라?”

“비 맞으면 감기 걸립니다.”

은근슬쩍 말해 봤지만, 김 실장은 단호했다.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맨몸으로 비를 맞고 있으면서.

“감기는 김 실장님이 걸리겠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김 실장이 들고 있던 우산을 가져왔다. 아마 입구까지 씌워 주려던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에스코트 받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우산을 씌워 주며 운전석을 턱짓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가세요. 운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역시, 분위기를 잘 읽어서 좋았다. 괜한 실랑이를 해봐야 내가 물러서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가 운전석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결국, 이곳에 돌아왔다. 내가 본부장으로 일하던 그때처럼,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결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 피었던 여유 역시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올 곳이라면 처음부터 떠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다른 곳에 안주할
수 있으리라 꿈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비 냄새가 났다. 눅눅히 젖은 흙냄새, 싱그러운 풀 냄새, 습기 가득한 공기와


잔잔히 풍기는 나무 냄새.

“…….”

뚝, 걸음을 멈췄다. 밤이라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왼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권이도?”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는데, 그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먼 거리에서 마주친 시선이 서서히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뿌리 내린 나무처럼 멈춘 나 대신, 이번엔 그쪽에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빗소리에 맞춰 뛰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가 딱 세 걸음 정도를 남겨 놨을 때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왜,”

“…….”

“왜 여기에 있습니까?”

권이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의 생김새가 또렷이 뇌리에
각인됐다. 섬세하게 그려 놓은 눈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냥, 우연히.”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우산에 톡톡 부딪혔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는데. 이 사람의 우연은 지나치게
필연적이지 않나.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를 과연 우연이라고 칭해도 되는 걸까.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굳이 이 사람이 지나갈 이유가 뭐가 있으리라고. 그것도


홀로 우산을 들고 이 빗속에 서 있을 만한 사연이 없었으련만.
“정세진 씨가 언제 돌아올까 싶어서.”

“…….”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온 본가도, 나름의 안식처였던


오피스텔도 아닌, 단순히 권이도의 말 한마디에.

“조금 늦었네요.”

다정한 인사는 못다 한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온종일 마주친 가족들도 보여 주지 않던 그리움이


권이도의 한마디에 가득 묻어났다.

“……비 맞는 거 좋아해요?”

나는 충동적으로 물으며 우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툭 떨어진 우산이 빗물로 가득한 바닥 위에


뒤집어졌다. 한 발짝 그에게 다가가자 권이도가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그냥, 타이밍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호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고, 권이도의 숨결이 바짝 가까워졌다. 온통 비 냄새로
가득하던 코끝에 향긋한 페로몬이 훅 풍겨 왔다.

입술은 아주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우산 아래서 포개진 입술이 누구 것인지 모를 떨림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빗줄기는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우리는 한참 우산 아래를 벗어나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21 화. Raison d'etre(1)

조용한 차 안에 톡, 톡, 빗소리가 들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허벅지에 가지런히 두 손을 놓은 채 멀거니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했다.

한적한 도로는 지나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늦은 데다, 비까지 내렸기 때문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늘어지고, 떨어지는 빗줄기에 자잘한 빛이 부서졌다.

아, 이거 되게 이상하네.

그런 생각으로 흘긋,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드물게 운전석에 앉아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볍게 핸들을 쥔 손에 적당히 도드라진 핏줄이 보였다.

‘……비 맞는 거 좋아해요?’

조금 전 그와 함께한 일들이 몽글몽글 머릿속에 떠올랐다. 느리게 맞닿은 숨결, 코끝에 맴돌던 권이도의
페로몬, 기울어진 우산 그림자 아래 다가온 보드라운 입술까지도.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린 건지. 그의 입술은 살짝 서늘한 감이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체온이 낮은
사람이라 그럴까. 그건, 뒤늦게 내 뺨을 감싸던 손길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깨지는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검지로 귓가를
덧그리기도 했다.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손은 살금살금 내려와 내 목덜미까지 어루만졌다.

분명 차가운 손이었는데, 그가 닿을 때마다 뜨겁단 생각이 들었다. 목이 움츠러들 만큼 아찔한 기분에,


동아줄이라도 잡는 양 권이도의 손을 붙잡았었다. 그는 내 아랫입술을 살며시 베어 물고 다가올 때처럼 느리게
입술을 떼어 냈다.

‘집으로 가죠.’

그 말에 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고작 입맞춤 한 번에 몸이 권이도를 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혀조차 섞지 않은 행위에 아쉬움이 밀려들었기 때문인지.

어쨌든 나는 권이도를 따라 그의 차로 향했다. 차 안엔 아무도 없었고,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운전석에 올랐다. 설마 직접 운전하고 왔냐는 말에는 픽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가끔은 기사가 없는 게 편하니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수석에 앉은 뒤에야 깨달았다. 차 문이 닫히고 바깥 소리가 차단된 순간,


놀라울 정도로 권이도가 의식되기 시작했으니까.

분명히 말하건대, 첫 키스는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우리는 좀 더 농밀하게 혀를 섞었다.


마른 목을 축이듯 조급했고, 정신이 아득할 만큼 안달 나는 행위였단 말이다.

그런데 그때의 키스보다 이 사소한 입맞춤이 더 긴장되는 건 왜일까.

차를 출발시키고, 한적한 도로에 오를 때까지. 분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차 안 가득


권이도의 페로몬이 느껴져서, 창밖을 보는 동안에도 그가 의식될 정도였다.

그래, 기사가 없는 게 다행이지. 만약 그랬다면 나는 권이도뿐만 아니라 죄 없는 그의 운전기사까지 신경


써야 했을 거다.

“……늦었지만, 와인 감사합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요.”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가까스로 이야깃거리를 쥐어짰다. 나쁘지 않은 주제 선정이었는데, 권이도가 썩


적극적이지 못했다.

“와인 맛 안 나던데.”

“…….”

그 말을 이해하기까진 잠깐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내가 황당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농담이에요.”

누누이 생각하지만, 보면 볼수록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능글맞은 장난을 칠 이미지가


아니었건만.
“맛있게 먹었으면 다행이고. 집에 있는 건 다 마셔도 되니까 취향껏 골라 먹도록 해요. 양주가 좋으면
장식장에도 있습니다.”

“네, 뭐…….”

술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취할 정도로 먹어 본 적도 없고, 간단한 반주가 아니면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 이유는 별거 없는데, 취기가 오르면 그냥 나 자신을 잃는다는 느낌이 싫어서였다.

“가족들이랑 얘기는 잘했고?”

권이도의 질문에 나는 티 나지 않게 움찔 손끝을 떨었다. 시선은 창밖에 고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기도 했다.

“네, 덕분에요.”

덕분에는 무슨. 그 잠깐을 버틸 수 없어서 냉큼 도망쳐 버렸으면서.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아버지의 말은 마치 주문처럼 의식 깊은 곳에 들러붙었다. 그 사람은 널 버릴 테니 제 말을 들어야


한다는 한마디가, 씻어 내지 못한 진흙과도 같았다. 덕지덕지 들러붙은 원성들은 권이도가 앗아간 현실감을
다시금 되찾아 오기 시작했다.

“근데 왜 안 자고 왔을까.”

“…….”

권이도는 자꾸만 대화에 비협조적이었다. 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닐 텐데.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만 골라서 언급한다. 게다가 대답하지 않자 덧붙여진 말까지.

“기껏 간다는 게 그 조그만 오피스텔이면서.”

“……그 집이 작진 않죠.”

“작던데.”

확신 어린 목소리였다. 내부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참으로 당당한 말씨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톡톡 핸들을 건드리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적어도 도망치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더군요.”

도망이라는 표현에는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도망친 게 맞고, 그러다 문득 권이도와 마주쳤을
뿐이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극히 우연히도 말이다.

“거기서 비 맞으면 감기 걸립니다.”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그 내면은 곧 걱정이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비 맞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정말, 비를 맞으려던 건 아니다. 충동적으로 우산을 내려놨으나 그 또한 권이도가 직접 비를 막아 주지
않았던가. 그가 없었다면 얌전히 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낸 후 마음을 다잡았겠지.

물론 비를 맞지 못할 이유는 하나였지만.

“이거, 권이도 씨가 주신 옷인데 망가뜨리면 안 되잖아요.”

“…….”

그는 말없이 내 쪽을 봤다가 살짝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필 시선이 마주친 터라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정확히 보았다. 이윽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 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비를 맞지 않아 다행이라는 건지, 아니면 옷을 망가뜨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건지. 떠오르는 이유는 두


개였으나, 왜인지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별거 아닌 이유였는데, 옆에서 본 권이도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표정이어서.

“미국에 좀 다녀와야 합니다.”

대뜸 들려온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가로등 불빛이 높은 콧대를 비스듬히 비추고 지나갔다. 그는


핸들 위에 손목을 올린 채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시티그룹 주주 총회가 있거든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거의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이럴 때면 적응이 안 된다.

“……며칠이나 다녀오세요?”

시티그룹이라면 권이도가 사외 이사로 있는 곳이었다. 관례적인 참석이겠지만 거리가 거리이니만큼 날짜는


좀 걸릴 것이다.

“내일 출발해서…….”

권이도는 말끝을 흐리며 미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매가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일주일쯤.”

“…….”

일주일. 당장 내일부터 일주일 뒤까지 그 넓은 집에 홀로 있어야 한단 말이었다. 정확히는 고용인들과


함께겠지만.

“올 때 선물을 가져오죠.”

그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어느새 권이도의 집에 다 다다른 상태였다.

“갖고 싶은 건?”

자료를 달라고 해볼까. 어차피 받아야 할 것이라면 권이도에게 직접 받는 게 나을 텐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저 꿈같은 얘기였다. 약혼의 조건을 언급하고, 아버지와의 대화를 토로한 뒤, 네 의견이
어떠하냐고 묻는 것. 그러기엔 권이도와 내 사이에 부족한 게 너무도 많았으니.

“그럼 일주일 동안 생각해 봐요. 만약 그 후에도 갖고 싶은 게 없으면 다시 차 키를 주고 싶을 것


같으니까.”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차 키라면 아직도 내 방에 놓여 있다. 사용 한 번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권이도는 자신이 주는 모든 걸 받으라고 했지만, 그걸 다 받았다간 배가 터질지도 몰랐다. 그의 기준으로


가벼운 차 세 대가 언젠가 집 세 채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필요한 건 다 주고 계시잖아요.”

그사이 차고에 진입한 권이도가 능숙하게 차를 세웠다. 기어를 바꾸고 시동을 끌 때까지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야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알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는 거.”

페로몬이 실린 목소리는 화가 났다기보단 단조로웠다. 무미건조하게 운을 뗀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세진 씨가 욕심 없는 사람인 것도 알고, 내가 이렇게 주지 않아도 스스로 뭐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인


것도 압니다.”

달칵, 권이도의 왼손이 내 안전벨트를 풀어 줬다. 스르륵, 말려 올라가는 벨트를 따라 그가 상체를 점점


내 쪽으로 기울였다. 한 뼘을 남긴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야트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건 그냥 내 욕심이죠.”

“……욕심?”

“적어도 물건을 고르는 일주일 동안 정세진 씨가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거든요.”

숨을 쉬는 게 의식이 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숨결이 권이도에게 닿을 것만 같았다.


한 뼘을 남겨 놓고 내리깔린 두 눈이,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 물건을 사용하는 동안에도 나라는 사람을 의식했으면 좋겠고.”

벨트를 놓은 손이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닿을 듯 말 듯 턱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넥타이가 있는


목덜미에 멈춰 선다. 모양을 확인하듯 매듭진 부분을 덧그린 그가 셔츠 깃을 단정히 접어 줬다.
“예를 들어, 정세진 씨가 오늘 내가 선물한 옷 때문에 비를 못 맞은 것처럼.”

“그게…….”

“나는 그런 작은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는 겁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맸다. 바람결에 사라질 것처럼, 숨결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귓가가 간지러운 기분에 눈가를 움칠거리자, 그가 사근사근 속삭였다.

“키스할 건데…… 눈은 감지 그래요.”

주문을 거는 것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왔다. 살포시 맞닿은 입술이 내려앉는 깃털처럼
무게감 없었다. 잠시 그대로 머물던 권이도는 가볍게 내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

아까는, 빗속에 서 있어서 차가웠구나. 지금은 이렇게 따듯하고 포근한 걸 보면.

말캉한 혀가 조심스레 입술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허락을 구하듯 잇새에서 머물다가 내가 저항하지
않자 조금 더 깊게 영역을 넓혀 간다. 입 안을 파고든 감촉이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선명했다.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타액과 함께 넘어온 페로몬이 온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권이도의 혀가 내 혀를 옭아매고, 의자를 붙잡았던 오른손이 내 뒤통수로 올라온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칼을 헤집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참 야릇한 것이었다. 뒤통수, 목덜미, 귀 뒤쪽과
귓바퀴까지. 섬세한 손길이 차례차례 손에 닿는 모든 걸 어루만졌다. 그대로 고개의 각도를 바꾼 그는 다른
손으로는 내 눈가를 덧그렸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확인하는 행위 같았다. 제게 닿는 모든 걸 기억하듯, 권이도는 매 순간순간 내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일렁이며 흘러나온 페로몬과 이따금 떨리는 숨결을 느끼며 알 수 있었다.

“…….”

나는 가늘게 눈꺼풀을 떨며 권이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주는 충족감에


어디론가 뚝 추락할 것 같았다. 권이도는 나를 밀어 내는 대신,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고작 입맞춤 하나로 이토록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손을 내밀어


봤을 텐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밀듯 희열감이 차올랐다. 그가 내 혀를 문지를 때마다 목덜미에 솜털이 오소소


서는 듯했다.

그는 양껏 입을 맞춘 뒤에야 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느리게 들어 올린 두 눈에


열감에 휩싸인 권이도의 시선이 보였다. 짙은 눈동자엔 한가득 달뜬 기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세진 씨.”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또렷하고, 또 그럼에도 여느 때처럼 우아하다.

“나는 정세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늘 젖은 나무처럼 묵직한 페로몬이, 지금은 꽃을 피운 양 화사했다. 향기를 피워 벌레를 꾀어내듯,
머리가 아득할 만큼 달큼한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아무거나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권이도가 여유롭게 두 눈을 휘어 웃었으니.

“뭐…… 그럼 일주일 뒤에 듣죠.”

그는 그렇게 대꾸하고 곧장 몸을 바로 했다. 뒷좌석에서 무언가 가져온 그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받아요. 내가 말했던 향수입니다.”

하얀 리본이 묶인 쇼핑백엔 그와 이야기했던 화장품 브랜드가 쓰여 있었다.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자


마찬가지로 새하얀 상자가 보였다. 권이도의 페로몬에 가려져 몰랐는데, 쇼핑백에서부터 향긋한 잔향이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향수라면, 간간이 김 실장이 가져다준 것들을 써본 게 전부였다. 대개 어설프게 페로몬을 흉내 낸


무언가였고, 뿌리는 목적은 오로지 ‘오메가인 척’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아무런 효과는 없었겠지만.

“쓸 때마다 권이도 씨 생각이 나겠네요.”

“…….”

무심결에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가늘게 숨을 내뱉곤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이내, 픽 웃음을 흘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엷은 웃음이 서려서 보고 있는 나조차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그만 들어가죠. 피곤할 텐데.”

향수를 꺼내 보지는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열어 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권이도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사실 향수보단 그의 페로몬이 그를 기억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될 텐데. 그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는 투명한 풀잎 색 병에 방울방울 천으로 만든 꽃잎과 큐빅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뚜껑은 동그란 구슬로 되어 있고, 주둥이를 감싼 리본은 마치 반투명한 날개처럼 보였다. 은방울꽃을 모티브로 한
제품답게 디자인도 참으로 청초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청량함이 짙던 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물 섞인 꽃 냄새로 바뀌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남은


잔향이 얼마 전 사용한 입욕제처럼 자스민과 장미 향기를 닮아 있는 듯했다. 나는 이러한 향기를 한껏 만끽한 뒤,
약간의 고민 끝에 함께 들어 있는 공병에 향수를 조금 나눠 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는 권이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잠깐 손 좀 주세요.”

“손?”

오늘도 완벽한 차림새의 권이도는 아무 무늬가 없는 정장에 투 버튼이 달린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넥타이는 살짝 회색이 돌았는데 자세히 보면 브랜드 로고가 아주 조그맣게 비쳐 보였다.

“손은 갑자기 왜…….”

그는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도 군말 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게 내민 손은 나보다


한마디 정도가 커다랬다. 조심스레 그의 손을 감싸 쥐자 그가 가만가만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향수를 뿌리는 겁니까?”

“네, 어제 권이도 씨가 주신 거.”

손목이 아닌, 손등 윗부분. 그곳에 향수를 뿌리고 비어 있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조금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는 잘 길들인 강아지처럼 반대쪽 손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양쪽 손등을 살짝 맞물리게 한 후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무직인 사람들은 향수를 손목보다 손등에 뿌리는 게 지속력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권이도가 지그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렇게 묻는 것처럼. 나는 소분한 향수를 권이도에게
쥐여 주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이제 이 향이 사라질 때까진 제 생각을 하시겠네요.”

- 다음 화에 계속

22 화. Raison d'etre(2)

그다지 로맨틱한 의도는 아니었다. 권이도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 나는 이 넓은 집에서 권이도를 기다릴 테니, 그 또한 나를 떠올렸으면 해서.

“…….”

그런데 그는 금세 멍한 얼굴이 되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그가 손에 쥔 향수병을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큰일이군요.”

큰일?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숨결처럼 흘러나온 한마디가 정확히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을 못 할 텐데.”
“…….”

가끔, 지나치게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담이라곤 안 할 것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이나 하다니.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다녀올게요.”

권이도가 떠난 집 안은 평소보다 세 배쯤 더 허전했다. 쓸데없이 모든 공간이 넓었고, 오전 시간대는


지루하다 여겨질 만큼 느렸다. 늘 그랬듯 책 한 권을 들고 온실로 향했는데, 하필 동행인인 이태성마저 멍하니
넋을 놓는 바람에 더 그랬다.

“……연봉이 올랐습니다.”

이태성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딱 이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 무어라 더 물으려던 나는 그의 연봉이 오른


이유가 떠오르는 바람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게 복지와 맞바꾼 수입이라는 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점심 식전 요리로는 차갑게 조리한 성게알과 오징어 따위가 나왔다. 조금 시큼한 감이 있었지만, 입맛을
돋우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살이 통통한 새우를 납작하게 구운 전도, 심심한 듯 고소하게 간을 한 육회도, 모두
전적으로 내 취향을 고려한 메뉴였다.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 막연히 시간을 보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키를 보며 권이도가


오면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 차 키에 관련된 주제를
꺼내지 않을 테니까.

“일주일이라…….”

가만히 소파에 앉아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없는 일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림자처럼 머무르는 고용인조차 내게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기간.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었다. 대책 없는 명령이었으나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 할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할지’만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란 말이다.

죄책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몹시 미안하게도 아직은 권이도를 향한 마음이 그렇게 깊지 않았으니까.


비록 간절히 입을 맞추고, 간지러운 말을 주고받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단언컨대, 권이도 역시 내게
그만큼의 마음을 품고 있진 않겠지.

“……왜 하필 이럴 때 집을 비워.”

타이밍의 신이 있다면 지독히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게


취미라거나.

나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인 채 문으로 다가갔다. 이 방엔 나밖에 없었지만, 지금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방을 나서 향할 곳은, 그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2 층 서재였으니까.

왜냐고 물으면 그냥 직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가 업무를 보는 장소, 내게 특별히 주의를 준 장소.
보통 중요한 자료는 그런 곳에 보관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나는 철두철미한 권이도가 낯선 약혼자가 있는 집에 그
어떤 것도 보관하지 않길 바랐지만.
“…….”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지나, 끝자락에 있는 서재에 다다를 때까지. 심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뛰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덕에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잘하면 두근거리는 소리로 들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서재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익숙한 나무 문을 보며 차갑게 식은 손끝을 매만졌다.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내가 지금부터 할 행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확실치 않았다.

조심조심 서재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긴장감에 손이 식은 탓에 평소라면 차가울 쇠조차 지금은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올 만큼 긴장해서, 아차 하면 손잡이를 놓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다란 문고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작은 결심과 함께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던 찰나,

“…….”

철컥. 잘 내려가던 문고리가 중간에 멈췄다. 무언가에 고정된 듯 문이 열리긴커녕 제대로 다


돌아가지조차 않았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서재는 이미 잠겨 있었다.

***

세상엔 분명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한들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예시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으니 굳이 한두 마디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잠겨 있는 서재를 확인했을 때,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그다음엔 허무였고, 마지막엔


실망이었다. 무엇에 대한 실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료를 빼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멍청하고 무능한 아들이 될지언정 적당히 좋은 핑계였다. 아버지도 내게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다. 권이도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데, 대체 뭘 어쩐단 말인가.

-자고 있었어요?

다음 날 아침, 권이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은 아직 일렀기에 미국은 아마 오후 6 시쯤 되었을


거다. 나는 수면제를 두 알이나 먹고도 잠들지 못해, 밤새 뜬눈으로 침대를 뒤척이던 참이었다.

“아뇨…… 일어나 있었습니다.”

아, 목을 좀 가다듬고 받을걸.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이토록 민망할 줄이야.

“잘 도착하셨어요?”

-나는 잘 도착했는데…… 정세진 씨는 일어난 건지 안 잔 건지 모르겠군요.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알아차리곤 한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동안 전화 너머에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불면증이 심합니까?

“아뇨, 어제는…….”

그냥 평소와는 달랐다고. 요새는 잘 잔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문득 의아한 부분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이


집에선 잠도 잘 잤고, 수면제를 들킨 적도 없는데, 권이도는 나한테 불면증이 있단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권이도 씨가 없어서 잘 못 잤습니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온화하게 말을 돌리는 걸 택했다. 구태여 따져 묻기엔 타이밍이


애매해졌기 때문이었다. 립서비스를 섞은 말이 나쁘지 않았는지,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했다.

-내 방에서 자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해요.

“네, 뭐…….”

빈말로도 괜찮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로 혹해 버렸기 때문에.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렸던 커튼을 활짝 젖혔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푸르른 정원이 묘하게
신비로웠다. 창틀에 걸터앉아 창문을 열자,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다른 게 아니고, 놓고 온 자료가 있어서 오후에 비서가 잠깐 들를 겁니다. 괜찮으면 정세진 씨가 좀


챙겨서 전달해 줘요.

“자료라면…….”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던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정작 권이도는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평소처럼 이야기했을 뿐인데 말이다.

-내 방 테이블에 노트북이 하나 있을 텐데, 거기 꽂혀 있는 USB 뽑아서 비서한테 주면 됩니다.

“USB 말씀입니까?”

그 꼼꼼한 권이도가 웬일로 물건이 놓고 갔을까. 그것도 가는 데 10 시간이 넘는 외국에 나가면서.


비서를 보낸다는 걸 보면, 비서 없이 혼자 출국한 걸까.

-네, USB. 괜찮으면 지금 가서 봐봐요.

열려 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권이도는 담담한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다.

-전화 끊지 말고.

“……안 끊었습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가 뭘 알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권이도가 말하는 자료는 내가 찾는 자료와는 당연히 다른 종류일 테고.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복도를 지나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혹여나 숨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바짝 긴장해야 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다가 머쓱하니 손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아침은 먹었습니까?

달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훅 밀려든 페로몬을 만끽하며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이요. 권이도 씨는요?” 그렇게 묻자, 나긋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곧 먹으러 가야 합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드세요.”

아까 권이도가 뭐랬더라. 제 방에서 자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하라고 했던가. 듣지도 않는 수면제를 먹는


것보다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잠깐 그의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 가물가물 눈이
감겼으니 말이다.

-있습니까?

“네, 검은색 USB 맞죠?”

테이블 위에 선호 로고가 그려진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아마 옆에 꽂힌 USB 가 그가 말한 자료였나 보다.


나는 USB 를 빼내고 무심코 그 옆에 쌓인 종이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이따 비서분께…….”

딱, 입술이 닫혔다. 비서분께 드리겠다고, 그리 말하려던 그 찰나였다. 목소리를 내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고 가슴 언저리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명치가 옥죄였다.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서…….

권이도가 무어라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가 먹먹하게 변해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럼 잘 부탁한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권이도의 방을 빠져나와 또 정신없이 방에 틀어박혔다.


고용인이 아침 식사를 하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점심이 될 때까지 멍하니 있었을 터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뒤엔, 속이 더할 나위 없이 불편했다. 늘 향하던 온실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재미있게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하염없이 시간을 죽였을 뿐.

권이도의 비서는 내가 점심을 다 먹은 뒤에야 찾아왔다. 꾸역꾸역 음식을 넘긴 탓에 체한 것처럼 배 속이


갑갑하던 참이었다. 아픈 티를 내면 권이도에게 연락이 갈 것 같아서, 아무도 몰래 방에서 끙끙 앓던 중이기도
했다.

“전무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비서는 30 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얇은 안경을 낀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김 실장을 닮아
있었다. 그는 내가 건넨 USB 를 받아들고 조금 놀란 얼굴로 물어 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그리 안 좋았을까.

“아뇨, 잠을 좀 설쳐서요.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눈을 휘자 비서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건넨 뒤 곧장 집을 빠져나갔다.


용건만 간단히. 누가 봐도 그 말을 실천하는 사람 같았다.

“……하아.”

나는 명치 언저리를 꾹 누르며 2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갈 기분은 아니었고, 묵직한
속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망할 불면증이 이럴 때까지 나를 괴롭힌다.

2 층 가장 끝 방. 오가기엔 불편하지만, 개인 공간으로 두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

달칵, 방문을 닫았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나 됐다고, 오로지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에
있던 방에서도, 스무 살부터 살던 오피스텔에서도, 이토록 아늑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자꾸만 속이 술렁이는 건, 권이도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일까.

‘올 때 선물을 사 오죠.’

멍하니 테이블이 놓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과 분리된 오른편에 부들거리는 재질의 하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권이도의 방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구조. 나는 기다란 소파 대신 1 인용 소파에 앉아 가만히
테이블을 응시했다.

‘갖고 싶은 건?’

“…….”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걸 말하면, 권이도 당신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히트 사이클을 도와주고 입까지


맞춘 상대에게 그는 어디까지 내어 줄 수 있을까.

‘나는 정세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조심스레 테이블에 놓아둔 서류를 들어 올렸다. 영어가 빼곡한 서류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온갖


프로그래밍 용어가 가득했다. 여러 도식과 설명들은 모르는 단어를 제외해도 무얼 나타내는지 뻔했다.

“……적어도 이걸 주진 못하겠지.”

아버지가 바라던 자료였다. 정확히는 선호 전자에서 새로 출시하는 핸드폰과 관련된 보고서. 아버지가
권이도에게 받기로 했다던, 보안 시스템과 관련된 내용.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종이 뭉치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지는 몰랐다. 단지, 적어도
이걸 가져가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 정도는 된단 사실을 알았지. 늘 모자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내보일지 생생히 그려졌다.

‘역시, 이래야 내 아들이지.’

“…….”

어떤 정신으로 이걸 권이도의 방에서 가지고 나왔을까.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몸이 움직였고, 그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애써 합리화했다.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며 아팠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단 말이다.

도둑질이었다. 권이도가 알게 되면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도둑질. 그뿐만 아니라 약혼을


파기하고 손해 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는 도둑질. 그가 돌아오면,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도둑질.

‘밑져야 본전인데, 아무거나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서류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종이가 구겨질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구석에 찍힌 선호그룹 마크가 미미하게 주름 잡힌 모습이 보였다.

역시, 늦기 전에 돌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서류가 아버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야 빈손으로 돌아가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테니.

‘쓸모없는 새끼…….’

배 속이 아프도록 뒤틀렸다.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시선이 낙인을 찍은 것처럼 피부에 새겨졌다.


울렁거리며 파도친 바닥이 나를 머리끝까지 집어삼키고 목덜미를 옥죄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건, 아니면 권이도건. 맨발로 눈길을 헤매던 그때처럼, 다시금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내가 아는 가족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데. 지금껏 바라고 욕망했던 울타리가 이다지도 가지기 힘든


종류였나 보다.

“…….”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억지로 먹은 식사가 문제였는지.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자꾸만


욕지기가 솟구쳤다. 속을 한 번 게워 내면 나으려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세진 씨.’

차라리 아무것도 놓고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잠가 놓은 서재처럼 보지 못할 곳에 꼭꼭 숨겨


놓지.

원망의 대상이 잘못됐단 생각은 있었으나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저녁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상태에서 뭘 더 먹었다간 속이 망가져도 제대로 망가질 테니.


권이도에게 연락이 오면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몰래 훔쳐 온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수면제 몇 알을 씹어 삼킨 뒤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뒤엔 아주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다행히 하룻밤을 지새운 덕에,
잠기운은 평소보다 이르게 몰려들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지독히도 끔찍한 악몽을 꿨다. 차가운 표정의 권이도가 아버지와 똑같은 눈으로 내
뺨을 때리는 꿈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3 화. Raison d'etre(3)

3 일이 흘렀다. 권이도가 없는 시간은 첫날과는 달리 그리 허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다음날부터 다시


온실에 갔고,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온실에 조명을 달겠다던 약속대로, 권이도는 내가 본가에 가 있는 동안 사람을 시켜 대대적인 작업을


마쳐 놓았다. 전선을 따와 천장에 연결해서 밤이 늦은 시간엔 자동으로 켜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두울 때
와보진 않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일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를 마시던 중. 이태성이 뜬금없이 물었다. 향긋한 라벤더 향기를 맡으며 찻잔 위에


동동 뜬 꽃잎을 구경하던 즈음이었다. 아직은 개화 시기가 아닐 텐데, 그리 생각하며 되묻자 이태성은 저가 더
의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전무님께서 내일은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던데요.”

“……음.”

내일 무슨 일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권이도가 돌아오는 날도


아니었고, 내가 어디에 나가기로 한 날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짐작이 가는 부분은, 기껏해야 다 늦은 복지를
챙겨 주는 정도.

“뭐…… 쉬시면 되지 않을까요.”

권이도에게 생각이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얘기했는데, 이태성의 표정이 영 이상해졌다. 그는 나를 따라


라벤더 차를 한 입 마시고 눈가를 찌푸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이태성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제가 본부장님을 경호하는 의미가 있습니까?”

“……음.”

나 또한 궁금하던 바였다. 권이도는 내게 무슨 의도로 이태성을 붙여 놨을까. 감시가 목적이 아니라면


이렇게 가까운 곳에 누군가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글쎄, 그건 고용주에게 물으셔야죠.”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안단 말인가. 경호 겸 잔심부름꾼이라는데, 경호의 의미가 없다고 하면 심부름을 시키라고 할 게
분명했다.

“저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담담히 대꾸하자, 이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기에 이태성도 제가 읽던 책을 챙겨 나를 따라 일어났다.

점심에는 본식에 앞서 얇게 저민 밤을 올린 타락죽이 나왔다. 말갛고 찐득거리는 식감이었지만, 끝맛이


고소하니 목 넘김이 나쁘지 않았다. 원래도 식전 요리가 꼭 있긴 했지만, 며칠 전을 기점으로 어쩐지 소화하기
쉬운 음식만 나오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마치, 그날 내가 체했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3 일 전. 권이도의 방에서 서류를 훔쳐 온 날.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전날 먹은 모든 걸 토해 냈다.


침대는 밤새 흘린 식은땀으로 엉망이었고, 안색 역시 파리하게 질려 볼품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봤더라면 이제는
정말 쓸모를 다했다며 내다 버리고 싶어 할 정도로 말이다.

구역질의 이유가 체기 때문이었을까. 그 사실은 아직까지도 조금 애매했다. 분명 소화가 안 되긴 했지만,


속이 울렁거렸던 건 그날 밤에 꾸었던 악몽 때문이었으므로.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꿈에서 마주친 권이도는 내게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보잘것없는 벌레를 대하듯 나를 내려다봤다. 얼얼하게 부은 왼뺨보다, 날카롭게 쏟아지던
페로몬이 더 괴로웠던 것 같다.

내장을 칼로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내가 만나본 우성 알파는 권이도밖에 없는데. 그는 내게


성난 페로몬을 뿌린 적이 한 번도 없건만.

고작 꿈일 뿐인데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감에 걸려 앓았던 어린 시절보다,


맨몸으로 페로몬을 맞는 그 순간이 더 고달팠다. 아프고, 괴롭고, 또 서러워서, 눈을 떴을 땐 온 얼굴이 눈물로
가득할 정도였다.

악몽이 원래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것이던가. 아니,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꿈보다는 권이도에게
냉대를 당하는 꿈이 훨씬 나으려나.

어쨌든 나는 속을 모두 비워 낸 후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그냥 본능적인


아집이었는데, 아픈 걸 티 내 봤자 내게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다행히도
그날 차려진 식사는 모두 죽 종류였다.
“내일모레 돌아온다고 했지…….”

나는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채로 날짜를 가늠했다. 일주일이 제법 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턱없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싶다. 머릿속이 잔뜩 복잡한 바람에 생각을 정리하는 데만 온종일이 걸리는
기분이었다.

“…….”

내 방 테이블 위엔 여전히 권이도에게서 훔쳐 온 자료가 놓여 있었다. 도로 가져다 놔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그의 방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여나 고용인이 볼까 싶어 책장에 숨겨 두었다가도, 오후
시간대가 되면 굳이 내 손으로 꺼내 확인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정세진 씨.’

권이도가 나를 불렀다. 평소처럼 다정한 말씨는 아니었다. 그건 뒤이은 싸늘한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

살면서 한두 번쯤 인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이 오곤 한다. 내 경우엔 그게 여러 번이었고, 지금이 그중


또 한 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를 배신하느냐, 아니면 아버지를 배신하느냐.

“……배신이라.”

픽 헛웃음이 나왔다. 저버릴 신의가 없는데 감히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자아가 비대해도 너무
비대한 것이 아닌가.

권이도가 오기 전에 정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으로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근 3 일간 제대로 잠든 시간이 세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오고, 한 번 잠이 들면 악몽을 꿀 것 같단 생각에 잠기운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유리돔이 보였다. 약혼식 날, 권이도가 준 꽃다발을 예쁘게
꾸며 놓은 장식품이었다. 그 옆에는 풀잎 색 병에 담긴 향수도 보였다.

……역시, 돌려놓고 오는 게 좋겠지.

습관처럼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요 며칠 고민에 잠길 때면 무심결에 나오곤 하는


행동이었다. 이 집도, 이 방도, 그리고 옆에 치워 둔 차 키까지, 온통 권이도가 준 물건투성이다.

내가 아무리 근본 없이 태어나 자랐다지만, 지금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양심 없는 짓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걸 고민하는 것부터가 몹쓸 짓이라는 사실도. 자꾸만 웅웅 울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진작 서류를 제자리에
돌려놨겠지.

‘짐승도 키워 준 은혜를 알건만…….’

“…….”

이 결혼의 목적은 해신의 재기를 위해서인데,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이렇게라도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내 존재의 이유가 곧 아버지의 지시이니, 언젠가 돌아갈 가족의 울타리를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애써 이성적인 판단을 가능케 해놓으면 마지막에 마지막 즈음 외면하던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벌써 3 일이 흘렀다. 당장 행동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결론을 내릴 만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결국, 나는 서류 뭉치를 들고 일어나 다시 책장 한구석에 티 나지 않게 숨겨 놨다. 권이도가


돌아오기까지 이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결론을 내려야 할 터다. 이대로 덮어 두고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이태성에게 출근하지 말라고 했단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저녁을 먹은 뒤엔 고용인이 받아 준 목욕물에 몸을 푹 담갔다. 거품이 몽글몽글 차오른 욕조에선 낮에


마신 차와 비슷한 라벤더 향기가 풍겼다. 라벤더에 진정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딱딱하게 굳었던 뒷덜미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가운 하나만 입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물기를 대충 닦은 탓에 머리카락은 여전히


축축한 상태였다. 옷을 갈아입고 누워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물에 젖은 솜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약을, 미리 먹길 잘했지. 딱 적당한 타이밍에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진 의식 속에 온갖


지저분한 잡념이 하나둘 흩어져 갔다. 정체 모를 악몽에 대한 두려움 역시,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렇게 잠이 든 뒤엔, 자꾸만 지나치게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이렇게 더울 만한 날씨가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체온이 오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도 생생한 꿈을 꾸니 이 더위도 어쩌면 꿈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하게 변하겠지.

‘세진아.’

그래, 역시 꿈이었던 모양이다. 익숙한 음성이 나를 세진이라고 부르며 작게 채근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나직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정세진.’

남자는 내 양 손목을 그러쥔 채 머리맡에 단단히 고정했다.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데, 마치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를 붙잡은 그가 억지로 다리를 벌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분명 비꼬는 말투였는데,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가슴께가 저릿했다. 변명을 내뱉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저 달뜬 숨을 몰아쉬며 가물가물 눈을 깜박였을 뿐.

‘다리 똑바로 벌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도무지 가늠되질 않았다. 분명 익숙한
음성인데, 이토록 차가운 말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흐.’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주저 없이 은밀한 곳에 닿은 손가락이 질척거리며


아래를 파고들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구멍을 확인하곤 멈칫하며 억눌린 목소리로 짓씹기도 했다.

‘이따위 취급을 받으면서…….’

숨을 크게 토해 냈다. 남자는 금세 손가락을 빼내고 내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손을 놓아줬지만,


내 양팔은 여전히 머리맡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 커다란 무언가가 거칠게
아래쪽을 꿰뚫었다.

‘……!’

내장이 납작하게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좁은 내벽을 억지로 벌린 기둥은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서서히 뒤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한 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 아파…….’

‘……아파?’

신음처럼 흘린 말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며 되물었다. 그러곤 제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고 픽 헛웃음을 흘린다.

‘여길 이렇게 세워 놓고…… 아프다고?’

커다란 손이 한껏 발기한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선단에서 묽은 액이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며 깊게 쑤셔 넣은 성기를 크게 쳐올렸다.

‘흐, 으……!’

아랫배가 결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억지로 벌어진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이미 고조된 성감은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쥐가 난 것처럼 몸을 비틀자, 그가 도망가지 말라는 듯 내 골반을 바투


쥐었다. 찌걱, 빠져나간 성기가 내벽을 길게 긁으며 푹푹 밀고 들어왔다.

끝내, 나는 남자가 두어 번 더 삽입했을 즈음 사정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을 보고 그가 무어라


모욕적인 말을 했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물건을 다루듯 나를 성의 없이 뒤집은 그가 날개뼈 사이를 꾹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허억……!”

막혔던 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나는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화들짝 눈을 떴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던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따가웠다.

“허억, 헉…….”

둥글게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퍼지기 시작한 열기는 멈출 수 없었다. 손끝으로 이불을 긁어 내고


어금니를 악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배 속 가득 차오른 욕구와 질식할 것처럼 터져 나온 페로몬.

히트 사이클이었다.

***

심 교수는 내게 반년 정도 주기가 서서히 앞당겨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비할 방법은 없고, 그저


앞뒤로 일주일 정도는 바짝 긴장한 채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그의 말을 대충 넘겨 들은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집에만 있으니 전보다 안일하게 굴었던 건 사실이다.

“흐…….”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아직은 일주일 넘게 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물론 미리 예고하고 온다 한들 지금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아…… 으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열이 훅훅 밀려드는 바람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렸다. 몸을 뒤척여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자, 바짝 발기한 성기가 가운 깃에 문질러졌다.

“흐, 으…….”

본능적으로 아래를 만졌지만, 그럼에도 한참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져서 자위를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헛손질을 하듯 몇 번 문지른 다음에야 개운하지 못하게 억지로 사정했을 뿐.

“……하아.”

시간이 몇 시쯤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둡지 않은 걸 봐선 적어도 해가 뜰 정도는 되었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나를 찾아올 텐데.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방으로 들어올까,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어느 쪽이건, 내게는 그다지 달가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방에 방치된 상태로 있고 싶지도 않았다. 나조차도 모순이라고 여기는 감정 속에 흐릿한 시야로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하자품을 주워 와서…….’

“…….”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끌고 와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자꾸만 죄인처럼 숨어야 할까. 억울함이 밀려드는 반면 어쩔 수 없다는


단념도 함께였다. 늘 이렇게 지내 왔으니, 이제 와 탓한들 무엇이 바뀌겠느냔 말이다.

“……흐.”

울음 섞인 신음이 입술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불 틈새로 보이는 방문은 여느 때와 같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내일이 될 때까지. 아니, 히트 사이클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 문이 열리는 일도 없겠지.

‘다녀올게요.’

헛웃음이 나왔다. 무심코 그 사람을 떠올려서가 아니라, 그를 떠올리며 느낀 감정이 그리움이라서. 딱


한 번, 온실에 있던 나를 찾아줬을 뿐인데, 이번에도 보잘것없는 기대가 생겨서.

느리게 두 눈을 깜박이며 설움을 삼켰다. 지나치게 과잉된 욕구는 고통보다 더한 괴로움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이틀…… 아니, 사흘 정도일까. 적어도 그 안엔 권이도가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불에 얼굴을 파묻을 즈음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소리였는데, 왜 그렇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

그냥, 막연히 바랐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열렸던 적 없는 문이 이번만큼은 열려 주길.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이 갑갑함을 해소해 주길. 그리고 조금 더 바랄 수 있다면, 그 상대가 부디 내가 떠올린 그 사람이길.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지 화면처럼 이어지던 풍경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문고리가 서서히
내려가고, 굳게 닫힌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꿈을 꾸듯 멍한 기분이 되어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느리게 내 쪽을


바라봤다.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과 묵직하게 풍기는 나무 냄새.

“……권이도 씨.”

권이도였다.

- 다음 화에 계속

24 화. Raison d'etre(4)

“…….”

“…….”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눈물이 날 만큼 간절했다. 지독한 갈증을


느낄 때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운 기분에 가슴께가 벅찼다.

그는 말없이 문을 닫고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페로몬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권이도의 존재감이 섞였다. 뭉텅뭉텅 흘러나왔던 페로몬이 단숨에 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어 들어갔다.

“권, 이도…….”

내가 두 번째 불렀을 때, 그는 미묘하게 눈가를 움찔거렸다. 깊게 숨을 토해 내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기도 했다. 가볍게 방 안을 둘러본 그가 예의 그 고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행이군요.”

“…….”

“이번엔 그게 내 이름이라서.”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따라 힘없이 흘러내렸다. 권이도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한 채 나긋이 운을 뗐다.

“정세진 씨.”

권이도 특유의 페로몬이 넘실넘실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꾸물거리며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기 위해


노력했다. 탐스럽게 익은 과실을 코앞에 둔 것처럼, 간절히 손을 뻗으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페로몬 좀…….”

“…….”

겨우겨우 건넨 손은 그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한 채 떨어졌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내게 권이도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얼핏 보이는 눈빛이 평소와는 달리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힘듭니까?”

그걸, 말이라고. 저 또한 우성이면 주기가 올 때 얼마나 힘겨운지 알고 있을 텐데. 물론 그는 주치의가


처방한 억제제를 복용해서 이렇게까지 한계로 내몰린 적은 없겠지만.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권이도는 그리 물으며 내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눈물을 닦으려던 건지, 엄지가 눈 밑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대로 멀어지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

할 수만 있다면 손가락을 씹어 삼키고 싶었다. 비정상적인 충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 끝을 입술에


물어 볼 정도였다. 권이도는 지그시 내 아랫니를 내리누르며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얘기해 봐요. 해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까.”

자상한 말씨였다. 그런데 왜, 그가 화를 내고 있단 생각이 들었을까. 표정도 목소리도 멀쩡한데 그의


기분이 상했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나 좀.”

나는 운을 떼놓고도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기분이 샘솟아서 문장을 만드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여전히 입술 틈엔 권이도의 손가락이 물려 있는 상태였다.

“제발…….”

말이라기보단 신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숨결 섞인 음성은 잔뜩 억눌린 데다 쉬어 빠지기까지 했다.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쉰 나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며 애원했다.

“어떻게든…….”

페로몬이 훅 풍겨 왔다. 내 얼굴 옆에 손을 짚은 그가 잡혀 있던 손으로 턱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인 채 깊숙이 입술을 맞물린다.

“…….”

살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가 숨을 불어 넣는 순간, 정말 인공호흡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한가득


넘어온 페로몬이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온몸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닿기 위해 고개를 비튼 채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으며 헐떡거리는 나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흐으.”

절로 신음이 터졌다. 조심스럽고 섬세한 키스였지만, 그저 닿아 있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였다. 더


진하게, 깊은 곳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권이도와 섞이고 싶었다.

그래서 입 안에 들어온 혀를 쪽쪽 빨아들였다.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을 생명수처럼 받아 마시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하릴없이 혀를 움직였다. 정신이 혼미할 만큼 능숙한 입맞춤 뒤엔 그를 원하는 마음 하나로 비
오듯 페로몬을 쏟아 내기도 했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깃털처럼 스쳤다. 달큼하게 섞인 숨결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녹여 내는 듯했다. 권이도는 한참 그대로 머물다가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숨을 멈췄다.

“…….”

“…….”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상황이었다. 신호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타이밍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흐읍…….”

아까보다 깊게, 그가 입술을 맞물렸다.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서는 나를 덮치듯 위에서 내리눌렀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질척거리며 울리고, 숨을 쉬는 게 버거울 만큼 그가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키스가 이렇게 아찔할 수 있는 거구나. 입 안쪽 예민한 점막을 건드릴 때마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느 틈엔가, 그는 벌어진 가운 깃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어깨 따위를


매만진 그가 맨살이 드러난 상체를 따라 손바닥을 문질렀다.

“……흣.”
이미 달뜬 몸뚱이에 비해 그의 손은 지나치게 서늘했다. 그가 닿는 순간순간마다 움찔거리며 어깨가
떨렸다. 한동안 빗장뼈 부근을 맴돌던 손은 감질날 만큼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넓은 손바닥이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의도한 건지, 손가락 사이사이에 꼿꼿이 선 유두가 툭 툭 걸렸다.
두어 번 그렇게 장난을 치던 그는 이번엔 손등으로 제가 건드리던 부분을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으응…….”

타인의 손이 닿은 적 없던 부위는 권이도의 손길 하나에 지나치게 반응했다. 허리가 움찔움찔 떨리는 게


차마 신음을 참지 못할 정도다. 뭐라도 잡아야겠단 생각에 옷깃을 쥐려는데, 힘이 들어간 손끝은 정장 재킷을
긁어내리기만 했다.

딱, 미칠 것만 같았다. 아까보단 훨씬 나았지만, 오히려 성감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혼자 견디는


히트 사이클이 고통이었다면 이쪽은 오히려 고문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비틀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이 욕망을 해소해 줬으면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애걸했다.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설마하니 내가 알파에게 목을 매는 날이 올 줄이야. 매일 수면제 대용으로


쓰던 그의 페로몬이, 이토록 온몸을 열에 들뜨게 할 줄이야.

“……하아.”

권이도는 살짝 입술을 떼어 내고 잠시 숨을 골랐다. 조금 더 가까이 상체를 숙인 그가 얼굴을 내 귓가에


파묻었다. 그리고 귓불을 잘근거리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끝까지 할 생각인데.”

“…….”

“멈추고 싶으면 지금 얘기해요.”

늘 생각하지만, 권이도의 목소리는 타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발음이 정확해서일까,


아니면 울림이 독특해서일까. 듣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푹 잠겨 버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해도 돼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옷가지가 마구 구겨졌지만, 그걸 생각할 겨를


따위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딱 하나의 생각만이 온 머릿속을 가득 뒤덮었을 뿐.

“아니…… 해주세요.”

“…….”

“하고 싶어요.”

권이도와 자고 싶다. 더 닿고, 더 섞이고, 조금 더 체온을 공유하고 싶었다. 넘칠 것처럼 차오른 성감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단 욕구가 치밀었다.

“……하.”
그는 달뜬 호흡을 터뜨리며 내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몽롱한 머리에 잠깐 정신이
돌아올 정도. 이내, 깨물었던 부분을 혀로 핥은 그가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내 이름 불러 봐요.”

“……권이도 씨?”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짙은 페로몬이 와르르 쏟아지고,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기까지. 가슴께를


맴돌던 손가락이 가운의 허리끈을 풀고 앞섶을 풀어 헤친 것도.

“아, 흣…….”

커다란 손은 망설임 없이 바짝 발기한 성기로 향했다. 나조차 잘 만지지 않는 부분을 그는 가볍게 그러쥔
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지만, 한참 전부터 흥분한 터라 성기는 금세 정액을 사출했다.

“흡……!”

절정에 내달리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참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내 손으로 직접 한 것도 아니고, 준비되지


않은 과정이라 더더욱 그랬다. 허리를 잘게 떠는 나를 보며 그는 무심히 제 손에 묻은 정액을 살펴봤다.

“양이 적은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듯했다. 이미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지만, 저런 감상평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한 말인지, 그는 대충 이불에 손을 닦아 내고 내 목 부근에 입을 맞췄다.

“세진아.”

“흐으…….”

쪽, 민망한 소리가 들렸다. 높은 콧대가 턱과 목이 이어지는 언저리를 건드렸다. 말캉한 입술은 그 아래


맥이 뛰는 자리를 베어 무는 중이었다. 정확히 페로몬샘이 있는 부분. 그곳에 입술을 문지른 그가 하반신을 바짝
붙였다.

“…….”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상대가 권이도이기 때문이라거나, 이러면 안 된다거나 하는 시시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감각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묵직해서였지.

“……이게.”

권이도가 다 벗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허벅지에 닿는 부피감이 내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아니, 단순히 그뿐이 아니라 평균보다 훨씬 커다랗다는 사실도.

내가 멍하니 있는 걸 알아챘는지, 그가 흘긋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여유롭게 눈을 내리깐다. 쪽, 목덜미에 한 번 더 입을 맞춘 그가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

“작을 줄 알았어?”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그리 묻는 목소리가 너무도 야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넋을 놓은 사이, 그가 상체를 일으킨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대충 풀어냈다. 방해만 되던 재킷을 벗은 뒤엔, 베스트 단추를 풀어


마찬가지로 침대 아래로 치워 버렸다.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릴 때는, 목을 좌우로 까딱이며 후, 숨을
내뱉었다.

“옷 벗는 걸 구경하는 취미가 있나 보죠.”

“…….”

가볍게 건넨 말에는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실제로 무슨 영화라도 보는 양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언가에 홀린 듯,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취미가…… 없어도 생길 것 같은데요.”

가끔 움직이는 게 신기할 만큼 잘생긴 사람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현실감이 아득히 멀어질 정도로.


정장을 차려입으면 그걸 입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은데 반대로 벗는 모습은 또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여유 부리긴…….”

권이도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느릿느릿 풀어낸 넥타이마저 툭


떨어뜨린 뒤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긴……. 나도 몰랐던 취향을 아는 중이라.”

그의 시선은 앞섶이 다 벌어진 내 몸뚱이를 향하고 있었다. 아래쪽은 반쯤 가려졌지만, 상체는 벗느니만
못한 상태로 드러났다.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됐지. 그런 의문을 가져 봐야 이제 와선 달라지는 것도 없다.

“남은 건 하면서 벗죠.”

권이도는 옷을 다 벗지 않고 다시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아까처럼 혀를 섞은 건 아니었고, 도장을 찍듯


가볍게 내리누르고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목 안쪽 여린 살을 잘근거린 그가 오른손으로 내 허리께를 문질렀다.

“앗…….”

크게 소스라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얇은 셔츠 너머로 단단한 몸이 만져졌다. 조심스럽고


감질나는 손길이 납작한 배를 타고 와 배꼽까지 간지럽혔다.

“흐읍…….”

그는 내가 밀어 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양껏 만지고 싶은 부분을 어루만졌다. 목덜미에 머물던 입술은


어느샌가 가슴으로 내려와 톡 튀어나온 돌기를 머금었다. 혀를 세워 꾹꾹 짓누르는 감각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몰랐던 사실인데, 내가 간지럼을 꽤 타는 체질이었나 보다. 권이도가 건드리는 모든 부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지러운 걸 보면. 더 정확히는, 간지러운 게 아니라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읏.”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어금니로 혓바닥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 사그라졌던 성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권이도는 내 골반을 만지다 말고 다른 손을 입술로 가져왔다.

“깨물지 마.”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혀를 깨물고 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보지도 않아 놓고


익숙하게 혓바닥을 내리누른다. 순식간에 벌어진 입술로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갔다.

“하으…….”

가슴이, 이토록 예민해질 수 있는 부위인지 몰랐다. 말캉한 혀가 스칠 때마다 찌릿한 쾌감이 명치께에
고였다. 골반을 건드리던 손은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여린 살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중이었다.

분명 손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미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가령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 같은 것들이. 그리고 가슴으로 모자라 갈비뼈가 있는 곳을 깨무는 행동까지도.

“긴장 풀어요. 안 아프게 할 테니까.”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조금 더 깊숙이 들어왔다. 다른 손은 거추장스럽게 치대는 가운을 옆으로 벌리는


중이었다. 회음부를 지나 은밀한 부분에 닿은 손가락이 꽉 닫힌 입구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흣…….”

이미 젖을 대로 젖은 덕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조금


빠듯하다 싶을 만큼 길어서 그랬지. 반사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자, 권이도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흐, 으…….”

분명, 낯선 감각이었다. 누군가 건드리긴커녕 나조차 써본 적 없는 곳이었으니까. 남자 오메가가 알파를


어디로 받아들이는지는 알았지만,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전엔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

“……흐으, 읏.”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 모든 행위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가 조심조심 내벽을 넓히는 것도, 내가


습관적으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것도. 하나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서, 권이도가 안쪽 어딘가를 꾹
짓누르는 것도.

“아흣!”

허리가 파드득 경련했다.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새된 신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낸


소리에 내가 놀라는 사이,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건드렸던 부분을 다시 자극했다.

“잠까, 아, 흣, 흡…….”

“잠깐이 어디 있어.”

“아니, 권이도 씨, 하으…….”

잔뜩 흘러나온 애액이 질척거리며 민망한 소리를 냈다.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린 그가 내가 느끼는 곳을


은근하게 자극했다. 내가 다시 혀끝을 깨물려고 하자, 그가 다른 손으로 내 턱을 움켜쥔 채 입술을 겹쳐 왔다.

“……흐읍.”

넘쳐흐르던 신음이 목울대를 울리고 사라졌다. 권이도의 혀가 침입한 탓에 무언가를 깨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래를 헤집을 때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되는데 혀와 혀를 문지르는 행동은 마냥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아무리 비교 대상이 없다지만, 그가 퍽 능숙한 축에 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손이 닿는 모든 부분이 성감대였고, 호흡으로 넘겨주는 페로몬조차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응…….”

마치 가을비를 맞은 나무에 꽃이 피는 듯했다. 늘 묵직하고 고상한 페로몬이 지금은 취할 것처럼


화려하고 달콤했다. 내가 흘리는 페로몬 반, 권이도가 뿌리는 페로몬이 반. 온 피부로 누구 것인지 모를 흥분이
전해졌다.

한참 혀를 섞은 뒤에야 그는 손가락을 빼내고 입술까지 떼어 냈다. 얼핏 마주친 시선은 욕망과 열기가


한데 뭉쳐 득실거리는 중이었다.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는 사이, 권이도는 내 다리를 어깨에 걸치며 이야기했다.

“못 하겠으면 얘기해요.”

툭, 아래쪽에 무언가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짜 하면서


벗었네. 그런 생각도 잠시,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일단 참고는 할 테니까.”

- 다음 화에 계속

25 화. Raison d'etre(5)

느릿느릿, 굵은 성기가 대가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아래가 빠듯이 벌어지는 감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권이도의 팔뚝을 붙들었다. 셔츠 자락이 손끝에 걸리고 그가 조금 더 깊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흑…….”

손가락을 넣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 충분히 풀어 놨을 텐데, 그럼에도 버겁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밀고 들어온 귀두가 가장 굵은 부분만 넣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흐, 으, 아, 안 돼…….”

“……안 된다는 말을, 지금 하면 안 되지.”

“으응, 잠깐…….”
나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옆으로 뒤틀었다. 다리가 달랑 붙잡힌 탓에 멀리 도망가는 건 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권이도가 느른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뭐가 안 돼, 세진아.”

“잠깐, 흣…….”

눈물이 아롱아롱 눈꼬리에 맺혔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대로
내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한 채, 인정사정없이 아래를 꿰뚫은 것이다.

“……!”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푹, 밀려 들어온 성기가 내벽을 빠듯하게 채웠다.
순식간에 뿌리 끝까지 삽입한 그는 상체를 납작하게 숙인 채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 좁아.”

“아…… 아, 읏…….”

과장 하나 없이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벌어진 내벽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가 삽입한 성기가


목까지 들어올 것처럼 길게 느껴져서. 뒤늦게 밀려든 현실감에, 배 속이 경련하듯 덜덜 떨렸다.

“못 하겠…… 흐, 못 하겠는…….”

“못 하기는.”

그는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여유롭게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의 틈도 없이 내벽을 채운 기둥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했다. 마치 적응할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그가 삽입한 채 안쪽을 쿡 쳐올렸다.

“항상 잘만 해놓고.”

“……아흣!”

내가 언제 항상 잘했냐고. 그리 물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밀려든 쾌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탈색했기 때문이었다. 허리가 둥글게 말리고, 여전히 깊게 들어온 권이도가 서서히 내벽을 문질렀다.

“흐…… 하으…….”

그래, 일단 참고는 하겠다고 했지, 빈말로도 멈추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자신은 끝까지 할 생각이니,
멈추고 싶으면 지금 이야기하라고도 했다. 그 말이, 그때를 놓치면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을까.

“이건, 너무…….”

풀풀 페로몬이 흘렀다. 내 것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하나처럼 뒤섞인 향내는
입 안에 침이 고일 것처럼 달큼한 것이었다.

“……너무?”

“아, 너무…….”

벅차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겁다고 해야 할까. 안쪽이 열리는 느낌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간 꿔 온 악몽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견디긴 힘들었다.

“너무 큰, 데, 흐으…….”

겨우겨우 그 말 한마디를 내뱉자, 권이도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내 다리에 뺨을 문지르며 여유롭게


눈을 깜박인다. 짙은 눈동자엔 여태껏 보지 못한 욕구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침대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흣, 으응, 으…….”

“조르는 걸로밖에 안 들리는데.”

느릿느릿,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몽롱한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해롱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다시 한번 깊숙이 성기를 쳐올렸다.

“아……!”

허리가 파르륵 튀어 올랐다. 바짝 조여든 내벽이 움찔움찔 굵은 기둥에 들러붙었다. 잠깐 미간을 좁힌


그가 아랫도리를 밀착한 채 한 부분을 꾸욱 짓눌렀다.

“하읏!”

새된 신음이 목울대를 울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손가락으로 만졌던 그 부분.
내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자극한 그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아, 아!”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몇 번인지 모를 절정에 내몰렸다. 왈칵, 정액을 토해 낸 성기가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동시에 뒤에 힘이 들어갔는지, 권이도가 고개를 숙인 채 소곤거렸다.

“힘 빼요, 정세진 씨.”

“그게…… 흣…….”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였던가. 이미 힘이 빠진 몸뚱이는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건만.

“아, 잠깐…….”

그는 사정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금세 허리를 움직였다. 반쯤 물렸다가 깊숙이 삽입하고, 뿌리 끝까지


박아 넣은 채 아래를 비비적거렸다.

“흐, 읏, 흐응…….”

푹, 내리찧는 감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찌릿한 희열도 함께였다. 호흡으로,
그리고 피부로, 열에 달뜬 페로몬이 나를 흥분시켰다.

“거기, 흣…….”

“……여기?”
나직이 되물은 권이도가 내가 느끼는 부분을 쿡 쿡 건드렸다. 사실, 굳이 거기가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여 주던 중이었다. 그는 어깨에 걸쳤던 다리를 내려 주고 푹, 내벽을 쳐올리며 상체를 숙였다.

“하으응……!”

그냥 습관처럼 권이도의 목을 끌어안았다.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흥건하게 젖은 아래쪽에서 질척이며 난잡한 소리가 들렸다.

“아아…… 흐…….”

“못 하겠다더니, 여긴 이렇게 조이는데.”

“흐, 으읏…….”

살짝 고개를 저으며 권이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욱한 페로몬 틈에서 익숙한 은방울꽃 향기가
느껴졌다. 물을 탄 것처럼 말간 향기가 묵직한 나무 냄새에 섞여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들었다.

그는 대롱대롱 매달린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내 등 뒤로 손을 넣어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반쯤 입고 있는 가운을 보며 혀를 차기도 했다. 코끝을 내 목덜미에 문지른 그가 드러난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하으…….”

고통인지, 아니면 쾌락인지 모를 신음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흐르고 있었다. 푹, 푹, 안쪽이 꿰뚫릴 때마다 이성이 날아가는 것처럼 의식이 아득해졌다.

“하으, 흐…….”

좋아도, 너무 좋았다. 바보가 된 것처럼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밖에 못 할 정도로. 그래서 바짝


하반신을 밀착하고, 허벅지를 조이며 아랫배에 힘을 줬다.

“세진아.”

“…….”

“숨 쉬어.”

그는 손가락을 밀어 넣어 억지로 입술을 벌리게 한 채 아래턱을 고정했다. 할딱거리며 숨을 몰아쉬자,


상체를 따라 말캉한 입술이 가슴께로 내려갔다. 가슴 윗부분을 쪽쪽 빨아들인 그가 꼿꼿이 선 유두를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흐…….”

온몸을 벅벅 긁고 싶은 기분이었다. 모든 부위가 성감대가 된 것처럼 그가 건드리는 곳들이 죄 예민하게


곤두섰다. 권이도가 몸을 밀착할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그의 아랫배에 꾹꾹 뭉개졌다.

“하…… 정세진.”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깨물었던 부분을 혀로 핥으며 가운 속에 넣은 손으로


등을 매만졌다. 다른 손은 뒤통수를 받친 채로, 그가 벌떡 내 몸을 일으켰다.
“……아흣!”

힘없이 허벅지 위에 푹 주저앉았다. 무게가 실린 탓에 음모가 스칠 만큼 권이도가 깊게 들어왔다. 잠깐,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엮은 채로 귓불을 깨물었다.

“아…… 귀, 그거…….”

“하지 마?”

“응, 흐, 읏…….”

기껏 물어 놓고, 권이도는 대답을 듣지 않고 귓바퀴까지 깨물었다. 씹어 삼킬 것처럼 잘근잘근 문 뒤엔


혀를 내어 여린 부분을 핥기도 했다. 아릿한 귓불을 입술로 물었을 땐, 쪽쪽 소리가 날 만큼 내 귀를 잔뜩 빨아
놓았다.

“하아, 빨리, 흣…….”

그는 잠깐 멈췄을 뿐인데, 안달 난 몸이 들썩이며 권이도를 졸라 댔다. 귀가 빨리는 것도 좋았지만,


조금 전처럼 더 강한 쾌감을 얻고 싶었으므로. 그래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는데, 그가 내 엉덩이를 붙잡아
위에서 아래로 푹 주저앉혔다.

“흐읏……!”

찌르르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파들파들 어깨를 떠는 동안, 그는 오로지 팔 힘으로 나를


들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아, 흐, 좋아, 흣…….”

“……그만 보채, 응?”

“으응, 흐, 응…….”

권이도는 바르작거리는 나를 끌어안고 두어 번 입술을 내리눌렀다. 쪽, 쪽, 맞닿은 입술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그와 닿은 모든 부분에서 홧홧 데일 것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답삭 목을 꼭 끌어안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마자, 그가 내 쇄골 부근에 연신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다 도드라진 뼈를 따라 이를 세우곤, 귓불에 그랬던 것처럼 세게 빨아들인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발갛게 자국이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입느니만 못한 가운을 손쉽게 벗겨
내던지곤 조금 더 편안하게 내 몸을 끌어안았다. 떡 주무르듯 엉덩이를 움켜쥐며 위에서 아래로 쾅 쾅
내리누르기도 했다.

“거기, 흣, 아……!”

“…….”

그가 무어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단 생각이 들었다. 큼직한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내린 그가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양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몸을 숙여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었다.

“……아흑!”
퍽! 굵은 성기가 배 속을 거칠게 내리찧었다. 언제 여유롭게 굴었냐는 듯, 허리 짓이 서서히 빨라졌다.
푹, 푹, 몇 번 더 삽입한 그가 귀두만 남기고 빼내었던 성기를 단숨에 밀어 넣었다.

“……!”

전립선이 길게 자극됐다. 찰방, 차오른 쾌감은 단숨에 파도처럼 내 온몸을 뒤엎었다. 이미 한계까지
내몰렸던 성감이 풍선이 터지듯 펑 하고 터지는 듯했다.

“……큿.”

그는 내가 사정함과 동시에 안쪽 깊숙한 곳에 파정했다. 내벽을 가득 채운 성기가 움찔움찔 뜨듯한


액체를 한가득 내뱉었다. 배가 부를 만큼 길게 이어진 사정은, 내가 달뜬 숨을 터뜨릴 즈음에야 끝이 났다.

“하아, 하아…….”

“후…….”

권이도는 사정을 마치고도 곧장 성기를 빼내지 않았다. 이어지는 여운을 즐기듯 배부른 사자처럼 은근히
아랫도리를 문질렀을 뿐. 내 다리를 옆으로 내려 준 그가 한 손으로 셔츠 앞섶을 성의 없이 뜯어냈다.

투두둑 단추가 떨어졌다. 새하얀 셔츠는 잔뜩 구겨진 데다 내가 싸지른 정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나는 흐려진 시야 너머로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는 모습을 멍하니 관찰했다.

“정말 그런 취미가 있나 봐요.”

“…….”

그가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나 굴곡진 복근 따위가 신이 빚은


피조물처럼 완벽해 보였다. 자세가 바르니 몸의 균형도 바른 건지. 배꼽 아래에 도드라진 핏줄마저 아름답다
여겨졌다.

“……그거 압니까?”

픽, 권이도가 웃음을 흘렸다. 내가 꿀꺽, 침을 삼키는 그 타이밍이었다. 그는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은


채 가볍게 허리를 움직였다.

“한 번 하면.”

“……흐읏.”

“여기가, 잔뜩 젖어서…….”

“아, 잠깐…… 흣…….”

“더, 부드러워지는 거.”

분명 방금 사정했는데, 그는 여전히 발기한 상태였다. 커다랗고 단단한 성기가 젖은 내벽을 여기저기


문질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찌걱, 찌걱, 안에 있는 정액이 뭉개지는 듯했다.

“……내가 싼 걸로만 젖은 것도 아니네.”


그 말과 동시에 권이도가 느릿느릿 성기를 빼내었다. 내벽이 그를 따라 딸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정액과 이미 뒤를 적셨던 애액 따위가 뻐끔거리는 구멍을 따라 함께 흘러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반쯤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의아함에 시선을 맞추자, 권이도가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단숨에, 빠져나갔던 성기를 푹 밀어 넣었다.

“하으응……!”

푹, 푹, 연신 삽입하며 그가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좀 전에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우스운 건, 나 역시 히트 사이클이 끝나지 않아 금세 몸이 달아올랐단 사실이지만.

“아, 흐, 으응…… 거기…….”

“벌써, 후, 조일 줄도 알면서…….”

이미 한 번 적응한 몸은 권이도가 드나들 때마다 적절히 조이길 반복했다. 안쪽을 넓힐 땐 힘이 빠졌고,


그가 빠져나갈 땐 아쉬운 듯 입구가 조여들었다. 이미 그에게 맞춰 놓은 것처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본능이
알아서 움직였다.

“아, 아……!”

분명 처음인데, 처음 같지 않았다. 매일 강간 당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그 행위는 섹스가 아닌


폭력이었을 뿐인데도. 권이도와 하는 행위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느 순간, 그는 자연스레 입을 맞춘 채 느긋이 속도를 늦췄다. 지나친 쾌락 탓에 내가 목이 쉬도록


신음할 즈음이었다. 잠깐 숨을 돌릴 시간을 주려는 듯, 그는 부드럽게 혀를 섞곤 입으로 직접 페로몬을 넘겨줬다.

“……흐읍.”

시기적절하게, 진 빠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이었다. 꼴깍꼴깍 받아 마신 페로몬은 명치께에 고인


성욕에 불을 지피는 매개체가 되었다. 녹초가 되었던 몸이 욕구로 뒤덮여서, 내가 힘들었단 사실도 잊은 채 다시
그를 바라게 만들었다.

“하아, 조금만…… 흐, 천천히…….”

“천천히 할게.”

흥분으로 가라앉은 목소리엔 다정함과 애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비록 그 말과는 반대로, 권이도는


서서히 속도를 올렸지만 말이다. 너른 등판에 손톱을 세운 채로, 나는 뒤통수를 베갯잇에 문지르며 미치도록
차오른 희열에 몸부림쳤다.

“아흐으……!”

딱, 죽지 않을 만큼 좋았다. 아니, 죽어도 괜찮을 만큼 좋다고 해야 하나.

이대로 열락에 취한 채 현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늘 원망스럽기만 했던 히트 사이클이


오늘처럼 황홀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내가 오메가고, 그가 알파라서, 꼭 맞아떨어지는 몸뚱이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세진아.”
권이도는 행위 중간부터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 단순히 부르기만 했다.
내가 신음을 흘리며 매달리면 그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러붙는 식이었다.

“정세진.”

그러다 그가 목소리를 내리깐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졌다. ‘정세진’ 세 글자가 낯설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몰아치는 쾌감이 밖으로 흘러나온 거였을까. 어느 쪽이건 지독한 설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단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흐으…….”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며 뺨 언저리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권이도가 입술을
눈가로 옮겨 오면서 사라졌다. 한가득 맺힌 눈물을 핥아 낸 그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땀에 젖은 머리를 넘겨
줬다.

“흐윽, 흡…….”

드러난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귓가에도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살거렸다.

“세진아.”

“…….”

“나 봐.”

마치 명령 같은 말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 한마디엔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흐르는 눈물을 응시하던 그가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흑!”

퍽, 밀려 들어온 성기가 사정할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낮은 신음과 함께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찰나,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널…….”

그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말하려고 했던 뉘앙스만 전해졌을 뿐. 미안함과 미련, 그리고


사무치는 후회가 담긴, 권이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많은 감정의 찌꺼기들.

“…….”

권이도는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아주 잠깐 떠오른 의문은 금세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방금 사정한


권이도가 또다시 내 몸을 고정한 채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몸을 섞었다. 그는 내게 노팅하지 않았고,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다정하게 나를 안았다.

조심스러운 손길, 그리고 한가득 풍기는 페로몬과 따사로운 체온. 그 모든 것들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단 생각이 들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6 화. Raison d'etre(6)

보편적인 특이 형질들은 사이클이 돌아오면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으로 이겨 낸다. 열성의 경우 시판되는
억제제로 충분했고, 우성의 경우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알맞은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끔 억제제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미 기혼이거나 아니면 함께 욕구를 해소할


파트너가 있는 경우였다.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지만, 억제제가 듣지 않으니 늘 휴가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반년. 사이클이 찾아오는 주기는 형질의 우열에 따라 달랐다. 우성이면 우성일수록
더 자주 찾아오고, 열성이면 열성일수록 더 드물게 찾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성 오메가로 매달 꼬박꼬박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그럴 때면, 방 안에 틀어박혀


들끓는 욕망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죽여 버텨야만 했다. 모든 소용돌이가 사그라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순간순간을 버텨 냈다.

그렇게 히트 사이클을 보내면서도 누군가와 만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파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배 속에 고인 성욕을 해소해야겠다는 생각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만나는 분을 만드시면 어떻습니까.’

한 번은 김 실장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답지 않은 오지랖이었고, 온갖 망설임과 머뭇거림


끝에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내가 얼마나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연애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

그가 긍정하지 못한 건, 아마 그 말의 의도가 ‘연애’를 뜻한 게 아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본부장의


자리에 있는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고.

‘아직은 그럴 여유가 없군요.’

여유가 없다. 여러 의미가 담긴 핑계였다. 시간도 감정도 막연히 부족했으니, 이보다 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주는 것 역시, 체력과 정신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그게 연애가 아닌 단순히 섹스 파트너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알파를 만나는 게 쉽진 않죠.’

히트 사이클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선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페로몬을 분출하고,
교류하며, 번식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한단 말이었다. 짐승 같은 과정이었을지언정 상대는 꼭 ‘알파’
여야 했다.

‘애초에 소문이 안 날 만한 사람도 없고…….’

그러나 대개 특이 형질은 저마다 한자리씩 꿰찬 거물인 경우가 많았다. 베타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이들이 오랜 옛날부터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재산이 대물림하는 사회답게, 그들이 가진 형질 역시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구시대적 귀족 문화가 다를 바 없었지만, 달리 이어지는 굴레를 끊을 방도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어느


회사의 누구를 만나건 업계에는 반드시 소문이 돌 터였다.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지.’

특이 형질은 특이 형질 사이에서만 유전되기에, 베타가 끼어들 자리는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아버지가


오메가인 나를 주워 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결혼과 출산이 수단에 불과한 사회에선 알파와
오메가라는 형질이 크나큰 메리트로 작용하곤 했으니까. 내가 오메가라는 형질에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차마
원망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결국, 김 실장은 죄스러운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제아무리 선의로 건넨 말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

‘흐, 으읏…….’

그러니, 히트 사이클을 온전히 본능대로 보낸 건 처음이었다. 권이도가 해줬던 페로몬 샤워 이후,


이토록 만족스러운 시간은 없었다. 종국엔 그가 싸지른 정액에 배가 부를 정도였지만, 그를 밀어 내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 권이도, 흑…….’

임신할 가능성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권이도가 노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자라 중간
즈음엔 친히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까지 제 손으로 해버렸고.

‘잠, 아, 흐응…….’

세 번인가, 아니면 네 번인가. 그가 내 안에 사정한 직후의 일이었다. 나 또한 셀 수 없이 많이 사정한


탓에 성기에선 이제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깊게 삽입한 성기를 쑥 빼낸 뒤, 별반 힘들이지 않고 내
몸을 뒤집어 침대에 엎어뜨렸다.

‘……하아.’

자세가 바뀌었음에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힘없이 늘어졌는데,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했다. 몹시 수치스러운 자세였으나, 진짜 수치스러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아, 잠, 잠깐, 흣!’

여전히 벌어진 구멍에 성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처음 풀어 줄 때와는 달리 그는 한 번에 두


손가락을 동시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디마디 손을 구부려 안에 가득 찬 정액을 부드럽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왜, 흐읏…… 흡…….’

‘가만히 있어야죠.’

아랫배가 움찔움찔 떨렸다. 꿀렁이며 흘러나온 정액이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굳이


헤집지 않아도, 이미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만큼 양이 많았단 말이다.

‘흣, 싫어…….’

나는 이불을 움켜쥔 채 포복하듯 앞으로 기어갔다. 물론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가 발목을 잡아 쭉


잡아당겼지만 말이다. 힘없이 무너진 나를 끌어안으며 그는 날개뼈 부근에 두어 번 입술을 내리눌렀다.

‘안이 너무 가득 차서, 이러다 정세진 씨 배가 터질 것 같던데.’

‘아흐, 흐응…….’

‘그런데도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정액이 가득 차서 배가 터진 오메가는 들어 보지 못했다.


거짓말하지 말란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권이도는 다른 손으로 내 배를 꾹 누르기까지 했다.

‘……흐.’

그가 가위질하듯 구멍을 좌우로 벌렸다. 배에 힘을 주며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에 있던


것만 더 새어 나올 뿐이었다. 권이도는 끝까지 날 놓아주지 않았고, 여유롭게 그 모습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아쉽군요. 정세진 씨는 이걸 못 본다는 게.’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엔 목덜미가 홧홧할 만큼 수치심이 들었다. 차라리 오줌 싸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 흣, 제발, 제발 그만…….’

그는 내가 간절히 빌기 시작했을 때야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물론, 그게 내가 애원해서인지,


아니면 안에 있던 걸 모두 빼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고생했다는 듯 내 배를 쓸어내리며 흘리는
웃음소리만 들렸을 뿐.

‘왜 매번 이것만 그렇게 싫어하는지…….’

큼직한 손이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엄지로 입구를 덧그리던 그는 엉덩이골에 귀두를 문지르며 다시
삽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아흐응!’

아프지는 않았다. 이미 길든 구멍은 아무런 무리 없이 굵은 성기를 한 번에 받아들였다. 잠깐 조여든


내벽을 즐기던 권이도가 뒤에서 나를 덮치듯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아, 천, 천히…….’

‘얼마나…… 후, 얼마나 더 천천히 해, 응?’


정액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이번엔 그의 성기로 가득 찼다. 원래는 둘 다 가득했으니, 이쪽이 더 낫다고
해야 할까. 권이도는 성기를 빼내지 않고 내가 느끼는 부분을 꾸욱 꾸욱 짓눌렀다.

‘흐, 나, 흣…… 갈 것 같……은…… 아아…….’

몇 번째 느끼는 사정감인지, 그런 건 셀 수조차 없었다. 발기가 풀린 성기에서 물 같은 정액이 흐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느긋하게 빼냈던 성기로 내가 느끼는 부분을 단숨에 쳐올렸다.

‘……흐…….’

그가 나를 머리끝까지 뒤덮는 기분이었다. 정액이 나왔는지, 아니면 나오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쾌감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강하게 몰아쳤을 뿐.

‘하아, 하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힘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개처럼 혀를 내밀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권이도의 손이 이미 발기가 풀린 성기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는 것 정도.

‘……아, 읏! 잠깐, 아…… 흐읏!’

한껏 예민해진 성기가 그의 손에서 마구 뭉개졌다. 젖을 대로 젖은 귀두를 문지르고 말랑한 기둥을 살살


주무른다. 솜털이 오소소 설만큼 자극적인 기분에, 정체 모를 배뇨감까지 밀려들었다.

‘아, 안 돼, 안 돼…….’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오줌을 싸는 게 덜 부끄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앞에서 실례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미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된 침대에, 그런 것까지 흘리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다.

‘흡, 제발, 아, 흐으……!’

다급히 권이도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움직였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축


늘어진 몸을 한 팔로 단단히 고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상체를 숙인 그가 밀착한 하반신을 비비적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쉬이…….’

‘……!’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사정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매질을 당한 것처럼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한가득 차오른 배뇨감이 찰방 흘러넘침과 동시에, 그의 손에 잡힌 성기가 줄줄 말간 액체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무언가는 억지로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정액도 오줌도 아닌 것이, 권이도의
손을 가득 적시고 침대로 흘러내렸다. 움찔, 움찔, 가늘게 경련하는 내게 권이도 특유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잘했어요.’

‘…….’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신음을 참는 동안, 권이도는 나를 꼭 끌어안고 어깨와
날개뼈 따위를 깨물었다. 마치 이갈이를 하는 짐승처럼, 온 피부를 잘근대며 드러난 모든 부위에 입술을 문질렀다.

‘욕 한마디 안 하는군요.’

‘……하.’

솔직히, 욕지거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변태 새끼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어진


뒷말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기대했거든요. 정세진 씨가 하는 거면, 욕을 좀 먹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고상한 목소리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얌전한 섹스를 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굴 줄은 몰랐다. 나는 헛웃음을 흘릴 기력도 없이 색색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그런 취향은 없어서요.’

‘그래요, 시간은 많으니까.’

‘그게 무슨…… 흐읏…….’

그가 다시 움직였기 때문에 짧은 휴식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뒤에서 내 상체를 만지작거리며 내내


괴롭혔던 유두를 꼬집었다. 이러다 옷에 쓸리면 아플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내 상체를 휙 들어
올리기도 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제가 언…… 하읏!’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그가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무너지려는 나를 억지로 붙잡아, 무릎을
세우게 한 채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덮은 그가 다른 손으로는 내 턱을 붙잡아 입을
맞춰 왔다.

‘으응…….’

그가 깊이 삽입할 때마다 뱃가죽이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는 바람에 내벽이 더


자극되는 것 같기도 했다. 호흡을 이어 나가는 것도 힘이 드는데, 혀까지 섞기 시작하니 금세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성은 얄팍한 종잇장보다 더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그가 넘겨주는 페로몬에 화답하듯, 내 페로몬 역시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아래를 헤집는 걸로도 모자라 입 안까지 헤집던 그는 내가 흘리는 타액을 모조리 빠짐없이
받아 마셨다.

그렇게 이어진 행위는 밤이 늦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어두운 정도가 달라졌으니,
시간이 뭉텅뭉텅 사라질 만큼 정신없는 섹스였단 말이다. 만약 체력이 떨어진 내가 잠들지 않았다면,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세진아.’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가운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나를 감싸고, 귀중한 것을 다루듯 온몸을 닦아 줬다. 중간중간 부드러운 입술을
내리누른 뒤엔 익숙한 체온과 페로몬에 둘러싸여 몸이 붕 떠오르기도 했다.

사랑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늘 그려 왔던 안온함이 사실은 이런 거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감싼 온기에 더 파고들었고, 또 그래서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무언가를 꼭
끌어안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새카맣게 어두웠으니, 꼬박


하루가 지나 아침이 밝았다는 말이다. 수면제 한 알 없이 눈을 감았음에도, 근래에 꾸던 악몽 하나 꾸지 않고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이 하나둘 상황을 인식했다. 피부에 닿는 보드라운 이불이나, 흐리지만 익숙한 방
안 풍경 같은 것들. 분명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되었을 침대가, 이상하리만치 보송보송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또렷해진 시야가 그제야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이 권이도의 방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스미는 페로몬도 권이도
특유의 묵직하고 관능적인 종류였다. 어제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잠기운이 남은 채로도
스멀스멀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이래서 푹 잠들었던 걸까. 둔탁한 근육통마저 잊힐 만큼 포근한 감각이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날 때면


언제나 죽었다 살아나는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평화롭게 쉬고 일어난 사람처럼 온몸이 나른하다.

시선을 천천히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옆으로 누워 있던 탓에 방 안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내 방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정적으로 꾸며진 공간. 채도가 낮은 인테리어가 권이도를 쏙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

의외라고 해야 할까. 그는 내가 잠이 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는지, 머리를


깔끔히 정돈한 채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서류를 읽는 그의 손목엔 은색 메탈 시계
역시 채워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진 모르겠지만, 참으로 완벽한 차림새였다. 온종일 그토록 난잡한 행위를 해놓고 배덕감이
느껴질 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측면에서 보이는 얼굴도 어제와는 달리 우아하고 기품 있기만 했다.

문득,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매끄럽게 이어진 콧대를 한 번 만져 볼 걸 그랬다고. 그가 내 모든 곳을


만지는 동안 나도 그의 입술 같은 곳들을 건드려 볼걸.

권이도 씨. 그렇게 부르려던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협탁을 바라봤다. 조명이 있는 조그만 테이블,
그곳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들이 놓여 있어서.

“…….”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책이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순서대로 가장 먼저 읽은 책. 전적으로 내


취향을 고려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었던 소설.

내 방에 있던 책이 권이도의 방에 있다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물건이니, 그가 멋대로


가져와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다만, 저 책을 꺼낸 장소에 함께 숨겨 두었던 무언가가 문제였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권이도가 읽고 있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고개를 돌렸던 그가 잠에서


깬 나를 보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

“…….”

손끝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눈앞이 캄캄하게 변하고, 변명을 내뱉어야 할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 구겨진 흔적이 남은 두꺼운 종이 뭉치. 영어로 빼곡한 한구석에 또렷하게 찍힌 선호그룹
마크까지.

“일어났어요?”

권이도가, 내가 그의 방에서 훔쳐 간 자료를 읽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7 화. Raison d'etre(7)

“…….”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감싸던 아늑함은 사라지고,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변명…… 아니, 해명이라고 해야 하나. 왜 저걸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지 나 자신의 멍청함에 어이가


없었다. 귀신에게 홀렸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던 건지.

“…….”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조금 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화를 내겠지. 그게 아니라면 냉랭한 눈으로 야멸차게 나를 욕하겠지. 어떤 반응을
보이건 내게는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정세진 씨.”

“……네.”

겨우겨우, 대답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는 비스듬히 나를 응시한 채 들고 있던 서류를 무릎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오랜 침묵 뒤에야, 예의 그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왜, 필요했습니까?”

“…….”

나는 그게, 권이도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자비라고 생각했다. 어떤 변명이든 해보라고 친히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아버지가 시켰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권이도의 분노가 해신그룹을
향한다면 내 쓸모는 거기서 끝나는 것일 테니. 그냥, 탐욕스러운 약혼자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 아닐까.

“……욕심이 나서 그랬습니다.”

핑계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표정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내게 권이도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욕심?”

티 나지 않게 이불깃을 움켜쥐었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지만, 겨우겨우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 내가 그의 옷을 입고 있단 사실이 가슴이 아릴 만큼 미안하게 느껴졌다.

“……본부장을 관둔 게 아쉬웠거든요.”

‘아쉬운가 보네요. 본부장을 관둔 게.’

떠오르는 내용이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권이도와 한 번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랐다.
본부장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했지만, 권이도가 부디 그쪽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걸 가져가면…… 기업에서 한자리 꿰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출세욕.”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한 단어로 함축했다. 출세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모든 게


허무해졌다. 출세라니.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합니까?”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서류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 느릿느릿 속눈썹을


내리깔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는 눈을 깜박이는 게 신기할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선뜻 내어 주느냐…… 주지 말고 숨겨 놓느냐.”

그가 숨결처럼 내뱉은 말은 반쯤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재킷 안주머니를 뒤진 그가 무언가 꺼내 드는


모습만 뇌리에 각인됐지. 가지런한 손가락이 들고 있는 건, 내가 그의 비서를 통해 전해 줬던 USB 였다.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그는


서류 위에 USB 를 내려놓고 담담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정세진 씨한테 주도록 하죠.”

“…….”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고, 그에게 시선을 떼어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권이도는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필요하면 말하지 그랬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막혔던 숨이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뒤늦게 밀려든 현실감은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정세진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질문의 전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모든 걸 내어 주겠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뭐…… 내가 내 손으로 준다면 얘기가 다르긴 하겠네요.’

“……하.”

떨리는 시선 끝에 권이도가 꺼내 놓은 USB 가 보였다. 내가 직접 노트북에서 뽑아 그의 비서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삐, 이명이 들리는 귓가에 그가 미국에 가기 전 했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올 때 선물을 가져오죠.’

가져오겠다고 했다. 사 오는 게 아니라, 가져오겠다고. 내가 그에게 뭘 요구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눈앞에 놓인 성과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버지와 권이도,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네가 바라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는 기회라고.

***

내가 살아온 삶에는 딱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한 번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오던 날, 맨발로


길거리에 뛰쳐나왔던 순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무작정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를 붙잡아 다짜고짜 내뱉던
순간.

‘저 오메가예요.’

그날, 남자는 지저분한 오메가를 주웠고 맘씨 좋은 재벌이라며 언론의 찬사를 들었다. 건강 검진을
빙자한 피검사가 형질 검사였다는 건, 아버지와 나, 그리고 주치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를 얻었으니, 이제 와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기회라고 해야 할까.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그러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미래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나는 두 번의 선택을 모두 만족했지만, 때로는
더 나은 결정이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곤 한다.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이도가 내게 건넨 건, 단순한 USB 가 아닌 해신그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열쇠였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내어 줬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하늘이 내린
동아줄을 잡을지 말지, 그건 오로지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차는 부드럽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김 실장의 한마디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잡념을 모두 지워 낸 내 머릿속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김 실장은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 줬다.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물었다.

“……밑에서 대기할까요?”

긴 시간 나를 봐왔던 사람답게,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나 보다. 가령 오늘 내 용건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차 빼지 말고 근처에 계세요.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건넨 말에 그는 꾸벅 인사한 뒤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천천히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해신금융그룹 본사.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가 있는 회사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는 익숙한 얼굴 몇몇과 마주쳤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시간대를 피했건만,


우연이라는 게 참 야속하기만 하다. 멀리서부터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들은 나와 거리가 좁혀질 즈음엔 저마다
반가운 얼굴로 크게 인사를 건넸다.

“본부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윤 대리는 그중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었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왔는지, 양손에


음료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윤 대리를 향해 습관처럼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아휴, 제가 본부장님 없이 어떻게 잘 지내요. 오늘 무슨 일로 오셨어요. 복직하신 거예요?”

“아뇨, 잠깐 볼일이 있어서.”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윤 대리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버지를 뵙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려 보고자, 나는 윤 대리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달라진 점을 언급했다.

“머리 잘랐네요. 잘 어울려요.”

“정말요?”

윤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원래는 허리까지 오던 머리가 지금은 턱에도 닿지 않을 만큼


짧아져 있었다. 윤 대리는 샐쭉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

“애 키우면서 일까지 하려니까 머리 정리할 시간도 없더라고요. 다들 아깝다고 난리던데 본부장님이 잘


어울린다고 해주시니까 좋네요.”

“바쁘겠어요. 유치원 갈 때 되면 챙겨 줄 것도 많을 텐데.”

“말도 마세요. 애가 말이라도 잘 들으면 좋겠는데, 요새 얼마나 미운 짓만 하는지…….”


나는 윤 대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았다. 윤 대리는 아들이 영 말을 안
듣는다며 잘 때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분명 막 걸음마를 떼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말을 하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유치원 들어가는 기념으로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요. 비싼 것도 괜찮으니까.”

“와…… 본부장님 그러시면 저 진짜 큰 거 바라요.”

“얼마나 큰지 한 번 들어나 보죠.”

원래 직통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잠깐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게다가


음료를 들고 있는 탓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도 힘겨워 보였고. 이제 커피 심부름을 할 연차가 아니었음에도
윤 대리는 신입 사원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아휴, 아니에요. 본부장님한테 뭘 더 어떻게 받겠어요. 지난번에도 거의 혼수급으로 해주셨으면서.”

내가 그랬던가. 곰곰이 기억을 되살리며 경영기획팀이 있는 층수를 눌렀다. 뒤이어 회장실이 있는 층도


누르자, 윤 대리가 은밀하게 이야기했다.

“직원 생일 선물로 안마 의자를 주시는 분은 본부장님밖에 없을걸요.”

“뭐…….”

확실히 그런 적이 있긴 했다. 육아가 몹시 고돼 보여서 사 줬을 뿐이지만.

“그건 윤 대리 선물이었고, 이번엔 아들 선물이니까요.”

“정 그러시면 다음에 회사 데리고 왔을 때 한 번 놀아 주세요. 애기가 애 아빠보다 본부장님을 더


좋아해요.”

차마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윤 대리가 아들을 회사에 데려왔을 때, 나는 권이도의 집에


있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권이도의 집이 아닌 내 오피스텔일지도 모르겠다.

“그…… 잠깐 기획팀 들를 시간 없으신 거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즈음, 윤 대리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그를 향해 슬쩍 눈짓을


보냈다. 눈꼬리를 축 내린 윤 대리가 내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맞다, 윤 대리.”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막 생각난 것처럼 윤 대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하며 이야기했다.

“다음에 만날 땐 본부장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얼핏 윤 대리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금세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기 때문에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회장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하나하나 높아지는 숫자를 보며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USB 를 꺼냈다. 우웅, 울리는 기계음이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듯했다.

‘……회사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나는 아침을 먹는 권이도에게 이렇게 통보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 또한 용건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무어라 묻는 대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했겠지.

‘3 일이 걸렸군요.’

‘…….’

그래, 3 일이었다. 그가 내게 자료를 쥐여 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이어 나간 게. 내가


온실에 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마음을 다잡은 것도. 그와의 정사 이후 몸에 남은 흔적이 전혀 흐려지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

‘……오후에 김 실장이 데리러 올 거고, 금방 돌아올 것 같습니다. 아마 권이도 씨보다 빨리 올 거예요.’

권이도는 그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를 지워 낸 채로 가만히


눈을 들어 올린 것이다.

‘왜 내가 준 차를 안 타고 김 실장이 옵니까?’

‘……차 키는 권이도 씨 방에 두겠습니다.’

선물을 받았으니 앞서 받은 차 두 대는 돌려줘야 했다.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이상, 권이도도 이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이의가 있다고 한들 이번엔 나도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 그래요.’

그러나 권이도는 생각보다 쉽게 내 말에 수긍했다.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세진 씨한테 필요한 게 차 키는 아니었겠죠.’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널찍한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건네자


안쪽에서 작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입니다.”

손에 쥔 USB 가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금세 대답했고, 나는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가죽 냄새와 풀 냄새가 섞인 회장실은 구석진 곳에 비서가 관리하는
화초가 잔뜩 놓여 있었다.

“그래, 할 얘기가 있다고?”

아버지는 내게 결혼을 통보할 때처럼 잔뜩 초조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내


쪽에 다가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문 앞에 선 내게 불쑥 다가온 아버지가 한껏 고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성공한 게냐?”
“…….”

잠깐 고민이 됐다. 이제 와 망설이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고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주기 위해 3


일 전부터 미리 준비한 자료였건만.

“왜 대답이 없어, 응? 성공했냐니까?”

아버지는 그 찰나를 참지 못한 채 내 양어깨를 붙들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그간


맡지 못했던 담배 냄새가 났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해신그룹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따금 피우곤
하던 것이었다.

“……아버지.”

“그래, 세진아.”

내 선택이 과연 옳은 걸까. 다정한 대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탐욕스러운 눈에 가득 담긴 기대가


적어도 나를 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말 없이 그에게 들고 있던 USB 를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하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뒤바뀌었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내지를 것처럼,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으려던 찰나였다.

“선호그룹 재정 상태에 관한 자료입니다.”

“……뭐?”

기쁘게 밝아졌던 표정에 가늘게 금이 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혹은 그게 대체 지금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 더 이상 자애로운 기색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권병욱 회장이 곧 별세할 것 같다고 합니다.”

언젠가, 권이도가 내게 해줬던 말이었다. 그룹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고,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한다고.
아버지를 향한 선물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해줬던 이야기들.

“권병욱 회장이 별세한 뒤엔 선호그룹이 해체될 거라는 경영주들의 의견도 정리해 놨습니다. 추가로
투자해서 이득을 볼 만한 계열사와 가망이 없는 계열사를 분리해서 문서화시킨 겁니다.”

그저 궤변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한 게 고작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런 것들 뿐이기에,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이것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끝내, 권이도를 배신하지 못했다. 권이도가 내게 건네준 USB.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자료는 차
키와 함께 그의 방에 놓아두었다. 그에게 받은 선물은 향수로 충분했기에, 배가 터지도록 받은 무언가는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았다.

“죄송합니다.”
- 다음 화에 계속

28 화. Raison d'etre(8)

부당한 방식으로 권리를 취하고 싶지 않다. 그가 보여 준 다정함을 저버리고, 채우지 못할 갈증을


채우려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아버지가 내게 시킨 건 도둑질이었는데,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허.”

아버지는 헛웃음을 흘리며 순간 몸을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부축해드리려 했지만, 그가 거칠게 뿌리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내게 아버지가 짓씹듯 이야기했다.

“알파 하나 못 꼬셔서 씨도 못 배는 놈이, 이젠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지그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퍽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별달리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가지고 있는 인식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권이도 씨에게 정식으로 협상 조건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말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도 한 번 넘겨줬던 자료이니 이번엔 정식으로


요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가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계약의 대가로 말이다.

“미리 약속한 자료를 달라고…….”

“그 입 다물지 못해?”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들고 있던 USB 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몸체를 구둣발로
짓밟기도 했다. 시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쉰 그는 까드득 어금니를 갈며 눈을 번뜩였다.

“그 새끼가 달라고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

“넘겨줄 것 같았으면 진작 줬겠지. 그 자식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는 거야. 우릴 등쳐 먹고 버리려고


한 거라고!”

아버지는 눈가가 시뻘게진 채로 연신 소리를 질렀다. 내게 바짝 다가와서는 어깨를 꽉 붙든 채 한마디


한마디 힘을 줘 내뱉기도 했다.

“내가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나 듣자고 널 보낸 줄 알아? 네가 그 자식한테 자료 얘기를 하면, 그럼 그


자식이 더 꼭꼭 숨겨 놓지 않겠냐, 응?”

그 격한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아버지의 초조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우선 얘기해


보겠다는 말에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내가 권이도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뭐, 권병욱 회장이 별세를 해?”

“…….”

“그 노인네가 창창히 돌아다니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아직도 여기저기 좆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알파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아?”

권이도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물론 올해로 여든다섯이 된 권병욱이 여기저기 좆질을 하고 다니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 전에 우리 기업이 먼저 죽으면, 그럼 어떡하려고 그러냐.”

“아버지.”

순간, 나는 그의 눈에 스치는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 내가 부르는 호칭에 그는 반사적으로 덜컥


거부감부터 내비쳤다. 그렇게 다정한 아버지를 연기할 땐 언제고, 내가 쓸모없다고 판단하자마자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기업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생각한 그대로를 입 밖에 내뱉었다. 평소라면 결코 말하지 않을 내용이었고,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 만큼 시건방진 소리였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해 봤자 원인을 뿌리 뽑지 않으면 결국 똑같을 겁니다. 시스템 하나 빼


온다고 뒤집힐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도태된 경영 방식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해신금융그룹이 무너지는 건,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수없이 많은 경영 비리를 묻어 둔 채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여 먼 미래의 손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바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운
길을 찾겠다며 빙빙 돌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오히려 멀리 봤을 땐 권이도를 등지지 않는 편이…….”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가만히 있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번쩍 새하얗게 번진 시야는 고정되지 못한 채 바닥 언저리를 맴돌았다.

“네까짓 게 감히 훈계 질을 해?”

귓가에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뇌가 크게


흔들리면 이러할까. 눈앞이 핑 도는 감각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금, 쥐새끼처럼 그 자식한테 빌붙으라고?”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왼뺨에서 알싸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살짝 달싹인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도 함께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이 서서히 내게로 돌아왔다.

“…….”
뺨을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에게. 감히 훈계 질을 했다는, 고작 그러한 이유로.

깨닫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모든 통증이 밀려왔다. 뺨은 물론, 잘못 깨문 혀라든가, 아니면


너덜너덜하게 터진 입 안쪽 살 같은 것. 혹은 명치가 옥죄는 감각과 함께 딸려 온 극심한 욕지기 따위가.

“쓸모없는 새끼…….”

입 안에 피 섞인 침이 고였다. 목으로 넘기고 싶었지만, 자꾸만 치솟는 토기가 그 모든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며 아려 왔다.

“너 같은 걸 괜히 주워 왔지.”

느리게 들어 올린 시선에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보였다. 발끝에 채는 돌멩이를 보듯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다.

“주제 파악을 해, 주제 파악을. 짐승도 키워 준 은혜를 안다는데,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내가


아니었으면 산 사람도 아니었을 놈이…… 태생부터 길바닥에서 구르던 게 경영에 대해 알긴 해?”

그래,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차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죽었을 테니까. 이


자리에서 뺨을 맞는 게 아니라, 정말 길거리에 널린 돌멩이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었을 테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 당분간 얼굴 보는 일 없을 게다.”

그런데 왜,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들에 왜 이렇게


마음이 무너졌을까.

“……가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내게 그 어떤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운하진 않았고, 대신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했다.

‘쓸모없는 새끼…….’

묻고 싶었다.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이냐고.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장기 말에 불과하냐고.


그럼 그러한 쓸모조차 없어진 지금은 대체 무얼 하며 살아가야 하냐고.

***

엘리베이터에 타면 누군가 마주칠까 싶어 높은 건물을 계단으로 내려왔다. 두어 번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난간을 붙잡은 덕에 볼썽사나운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다행히 1 층에 도착할 즈음엔 왼뺨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

건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김 실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차


문을 열어 주고,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을 뿐. 다시 돌아왔을 땐 손에 조그만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봉지가 차갑다 싶더니만 넓적한 팩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뚜껑이 달려 있고,
눈꽃이 그려진 겉면엔 ‘밀크셰이크’라고 쓰인 제품이었다. 나는 묵묵히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아직 아이스크림 먹을 날씨는 아닌데…….”

금방 생각나는 게 아마 이런 것밖에 없었나 보다. 나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다가 조심스레


부어오른 왼뺨에 가져다 댔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예.”

이럴 때 보면 김 실장도 표정을 너무 못 숨긴다. 적당히 웃어넘기면 될 텐데 미간 사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눈매가 퍽 심각해 보여서 도리어 내 기분은 점점 더 괜찮아졌다.

그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김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아이스크림이 말랑하게 녹았고,


나는 멍하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을 텐데, 오늘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질 않았다.

유일하게 고민이 된 건, 권이도와 함께해야 할 저녁 식사였다. 그때까지 뺨이 가라앉으면 좋으련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원체 피부가 예민한 탓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유독 도드라지곤 했다. 그
때문에 옷을 벗으면 권이도가 남긴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넘어졌다고 하면 믿을까.

사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분명 몸을 섞었지만, 그 이전보다 멀어진 사이가


되었으니. 평소처럼 식사를 같이하면서도, 저녁 식사 후 대화를 나누던 시간만큼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김 실장은 대문 앞에서 차 문을 열어 주고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없나 보다. 괜찮다고 말해 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여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딱 그 말 한마디만 하고 그를 뒤로한 채 초인종을 눌렀다. 이 집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대문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손에는 다 녹아 빠진 아이스크림을 달랑 들고, 왼뺨은 팅팅 부어서는 말이다.

끼익, 대문이 열렸다. 김 실장은 아직도 차에 올라타지 않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 신경


쓰였지만, 모르는 척 한 걸음 옮기려던 때였다.

“……도련님.”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약혼식 날이었던가.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던 순간에 그가 나를 불렀던
그때처럼.

“들어가면 약부터 바르세요.”

고르고 골라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걱정이라는 게 우스웠다. 물론, 가장 어이없는 건 그 말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춘 나였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말 한마디에 휘둘릴 괜찮은 척이었나 보다.
일부러 알겠다고 대답하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걸음을 옮겨 대문을 지나쳤을 뿐. 그런데 넓게 펼쳐진
정원을 보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내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오피스텔에서 나를 데리고 왔을 때처럼, 이 으리으리한


저택이 평생을 살아온 안식처인 양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돌길을 따라 걸으며 잘 조경된 정원을 둘러봤다. 매일 온실에 갈 때마다, 점심 식사 후 산책을 할


때마다 질리도록 봐 온 곳이었다. 이른 새벽 정원사가 관리하고, 잘 정돈된 잔디엔 이따금 참새 같은 것들이
총총 뛰어다니곤 했다.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비록 아직도 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뜨면 다 사라져 버릴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선, 조금이나마 잠을 자볼까 했다. 수면제를 최대한 많이 먹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조용히 잠들


생각이었다. 악몽을 꿔도 좋으니 우선은 이 모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모든 계획은, 집 안으로 들어가 2 층에 다다르는 순간 모조리 어그러졌다. 내 방으로 가는


어귀. 그곳에 선 한 사람이 나를 보며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제 옵니까?”

“…….”

권이도가 아침과 똑같은 차림으로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선 채 누가 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분명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엔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왜 여기에…….”

나는 멍하니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짙은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아, 망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무서우리만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 들어.”

“…….”

흠칫, 어깨가 들썩였다. 모르는 척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그보다 권이도가 더 빨랐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그는 우악스럽게 턱을 움켜쥔 채 내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

“…….”

나무 냄새가 났다. 묵직하고 고요한 페로몬은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쏟아졌다. 그와 몸을


섞은 이후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짙게 흘러넘쳤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건 숨이 막힐 만큼 무거운 분위기인 건 사실이었다.

“정세진 씨.”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이랬습니까?”

별거 아니라고,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권이도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새끼냐고 묻잖아.”

붙잡힌 턱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는데, 권이도의 손이 닿는 부분이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대답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냥, 이런 변명으로라도 그가 넘어가 주길


바랐을 뿐이지. 당연히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또박또박 내뱉었다.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죠. 정세진 씨가 누굴 보고 왔는지 이미 아는데.”

그는 내 턱을 놓아주고 부어오른 뺨을 검지로 건드렸다. 내가 움찔 눈가를 찌푸리자 곧장 손을 떼어


내기도 했다.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조심스럽게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언제부터 손바닥이 길바닥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

“날 속일 생각이면 적어도 이런 얼굴은 보이지 말았어야지.”

귓바퀴를 어루만진 손이 눈가로 옮겨 왔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는 엄지로 눈꼬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내 뒤통수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기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울지 마, 세진아.”

“…….”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점점 더 많아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못다 한 설움이 자꾸만 쏟아져
내렸다.

‘이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거라.’

“……흐윽.”

그냥, 내가 잘하면 달라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형질이건, 아니면 이 세상이건, 혹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있는 그들이건.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그래서 부족함을 티 내지 않으면, 언젠가 더 나은 상황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노력했다. 성적은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학교에선 조는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사랑받는 아들을 연기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장한 여유까지 보였다. 누군가 칭찬을
건네면 이게 다 아버지 덕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선심 쓰듯 돌아온 말은, 언제나 가뭄 난 마음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그게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른


목을 축이듯 애정을 갈구하기 바빴다. ‘아들’이라는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나라는 사람을 죽인 채 내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

“흡…….”

사랑받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가족이 되고 싶었다. 비록 그 끝엔 의무만 남더라도 잠깐의 만족감이 주는


위로를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엔 애를 쓴다고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페로몬이 없다고 베타가 되는 게 아니듯, 한집에
산다고 내가 그들의 진짜 가족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 준 애정은, 고작 말 한마디에 사라질
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진이 너한테 혼사가 들어왔어.’

또 다른 가족을 얻을 기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최후의 종착지는 인질과도 같은 결혼이었다. 나를


데려올 때부터 예정된 목표를 끝내 얻어 내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내몰린 내가 결국 권이도의 품 안에
안겨 있다.

“……흐윽.”

뭐가 그렇게 서럽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 맞은 곳이 아팠던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건지. 너른 품이 주는 온기가 마음을 무너뜨려서, 숨이 차오를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오랜 시간, 그는 숨죽여 우는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서툴렀지만, 내게는 열


마디 말보다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부드럽게 스미는 페로몬이 온전히 나를 향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9 화. Quelques Fleurs(1)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척박한 땅에 돋아나는 새싹이나 삭막한 나뭇가지에


움트는 꽃봉오리 같은 것. 살랑이는 바람에 찬기가 가시고 이르게 찾아오던 밤이 서서히 늦어지는 시기.

약혼식을 올릴 땐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밤이 되면 외투가 필요했고, 바람이 불면


코끝에 시린 느낌이 남았다. 권이도와 함께 걸었던 산책로 역시 내게는 조금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한 달하고도 절반. 계절은 눈 깜박할 새에 바뀌었다. 원래도 화사하던 정원에 하나둘 처음 보는


꽃들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굳이 온실을 가지 않아도 정원에서 테이블을 펼치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날씨였다.

“날이 많이 풀렸네요.”

나는 온실 천장 너머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고용인이 내어 준 꽃차는 비취처럼


맑은 색감을 띠는 붓꽃 차였다. 은은하게 달큼한 향내가 풍겨서, 한입 머금었을 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태성은 흘긋 나를 바라보곤 “예, 그렇군요.”라며 성의 없는 대답을 건넸다. 금세 책에 시선을 고정한


걸 보니, 이번 소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방해하지 말자 싶어 차나 마시려는데, 그가 불쑥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인공 죽습니까?”

“…….”

픽, 웃음이 나왔다. 각인 효과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가장 처음 빌려준 책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매번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걸 보면.

“안 죽습니다.”

깔끔하게 대답하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정말 몰입할 모양새라, 나도
멀거니 다시 온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구름이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쓸모없는 새끼…….’

“…….”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던가.

시간이 참 여러모로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영영 복구되지 않을 것 같던


마음도 어느 순간 괜찮아지기 마련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던 모든 게, 아직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울지 마, 세진아.’

그날,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돌아온 나는 권이도의 품에서 서러운 눈물을 토해 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데. 뭐에 씐 것처럼 참았던 감정을 모두 토해 냈다. 권이도는 가만히 날 달래 줬고,
내가 눈물을 멈춘 뒤에야 딱 한마디를 건네왔다.

‘왜 그랬어요?’

그의 시선엔 여러 억눌린 감정이 가득했다. 걱정이나 미련, 혹은 미미한 분노. 그가 늘 보여 주던


권이도 나름의 상냥함 같은 것.

USB 를 건네주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료를 건네주고 왔더라면 나는


권이도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칠 자신이 없었을 테니.

‘……별로 가지고 싶지가 않아서요.’

감정을 표출하는 데도 체력이 필요했기에, 나는 언제나 나를 괴롭게 하는 상황을 외면하며 살아왔다.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회피했고, 최대한 고분고분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는 말이다.

‘권이도 씨가 그랬잖아요. 갖고 싶은 걸 골라 보라고.’

그러니 이번 행동은 내가 처음으로 결정한 나 혼자만의 선택이었다. 비록 그 결과는 처참할지언정, 체념


비슷한 확신은 생겼다. 만약 내가 자료를 건네줬어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확신.
‘……그래서 갖고 싶은 걸 골랐습니까?’

가족이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런 욕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이 쥐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기에,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게 요구하진
못할 터였다.

‘글쎄…… 우선은 권이도 씨와의 시간을 가지고 싶군요.’

내가 장난처럼 건넨 말에 그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부어오른 왼뺨을 만지며 살짝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이내 맞닿은 입술은 깃털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가벼웠다.

그냥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눈 뒤에,
내 방으로 돌아와 수면제 없이 잠이 들었다. 그가 내게 선사하는 평화가 마음에 들어서, 굳이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MRI 부터 찍어보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그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했으나, 워낙


강건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말리지 못했다. 소문이 나면 어떡하냐는 걱정에는, 입막음을 시키겠다는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향한 선호병원에서 나는 과하게 친절한 의사에게 고막에 천공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권이도는
무섭게 표정을 굳혔으나, 사람의 고막은 생각보다 자연 치유가 잘 되는 기관이었다. 처음엔 종종 이명이 들리던
귀가, 며칠이 지나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멀쩡해졌으니.

정작 문제가 되었던 건, 뺨 언저리에 크게 자리 잡은 울긋불긋한 자국 정도.

‘……와, 심하네.’

처음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모습에 놀라야 했다. 왼뺨이 팅팅 부은 건 그렇다 치고


얼룩덜룩 실핏줄이 터진 자국이 가득했으니. 입 안이 너덜너덜하게 헤질 정도였는데 그 바깥이 엉망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온실로 가는 길을 따라온 이태성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보통은 조금


머뭇거리기라도 할 텐데 상당히 호쾌한 질문이었다. 그게 또 이태성다워서, 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더랬다.

‘길바닥에 넘어졌습니다.’

‘…….’

그가 보내던 눈빛이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설마 믿는 건가? 그런 의심이 들 만큼 황당하단 시선이었다.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가 지극히 평범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조심하셨어야죠.’

그러게, 조심할 걸 그랬지.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굴었을까.


‘다음부턴 조심하려고요.’

덤덤히 대꾸하자, 이태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지시 물어 오기도 했다.

‘……길바닥은 어떻게 됐습니까?’

참으로 시적인 질문이었다. 길바닥이 사람이라는 걸 그도 모르지 않으면서.

‘뭘 어떻게 됩니까. 길바닥이 길바닥이지.’

내가 뺨을 맞은 건, 아버지에겐 별거 아닌 일이었을 거다. 어디 가서 말할 곳도 없으니, 상처가 나으면


없었던 일이 되겠지.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고, 이제는 감흥조차 없었다.

‘……전무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이태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영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권이도 씨가 왜 나옵니까?’

‘그거야…….’

곧장 운을 뗐던 그는 이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휘휘 저으며 급히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닙니다.’

뒷말이 궁금하긴 했지만, 무어라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와 관련된 주제는 나 역시 불편했으니까.

어쨌든 그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영위했다. 오전엔 온실에서 책을 읽었고,


오후엔 가볍게 정원을 산책했다. 권이도의 서재는 무척이나 넓어서, 내가 몇 년을 더 지낸다고 해도 읽을 책이
부족하진 않을 듯했다.

달라진 건, 권이도가 이상하리만치 바빠졌다는 것 정도.

‘당분간은 좀 늦을 겁니다.’

늘 저녁은 함께 먹던 그였는데,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출근해, 잠이 든


이후에 퇴근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오나 싶어 복도로 나와보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2 층 서재에 불이
켜진 모습만 보이곤 했다.

섭섭한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허전해서 그랬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애매한 관계였다. 분명 약혼을 했는데, 이 모든 건 결국 계약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몸은 섞었고, 또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은 밝힌 적이 없다.

권이도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보여 주는 애정을 모를 만큼 나는 무지하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그에게 품은 감정을 헷갈릴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이태성 씨.”
“예.”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이태성은 내 질문을 듣자마자 날벼락이라도 맞은 양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상처받은 눈빛이라 오해하지
말란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이태성 씨 정도면 인기도 많을 것 같아서.”

뒷말은 립서비스였지만, 그렇다고 빈말은 아니었다. 표정이 좀 딱딱해서 그렇지, 이태성 정도면 무척
잘생긴 축에 속했다. 경호원이라는 직업답게 체격도 좋았으니, 인기는 제법 많을 터였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냥 호기심에 물어봤을 뿐이니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태성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만나는 사람 없습니다.”

결코 나쁘지 않은 눈치로 보건대, 연애할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닌가 보다. 괜히 물어봤다 싶어 주제를


돌리려는 찰나,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뭐, 그냥.”

찻잔을 톡 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따듯한 기운이 남은 찻물은 하늘색과 청록색이 섞인 오묘한 빛을


띠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태성 씨는 매일 제 경호를 하니까, 데이트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권이도가 주말 없이 일하는 만큼 이태성도 쉬는 날 없이 내 경호를 맡았다. 정작 하는 일은 독서였으나,


어쨌든 그게 자유시간은 아니었다. 연인에게 하루를 고스란히 내어 주는 게 어려웠을 거란 말이다.

“만약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나는 연애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로 바쁜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몰랐다. 얼마나 허전한 티를 내도


되는지, 그에게 어디까지 간섭해도 되는지 이런 것들. 권이도에게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막연히 홀로
생각해 본 것이었다.

“서운하지 않게 해야죠.”

이태성은 퍽 당당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뭐 그렇게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기도


했다.

“원래 연애는 시간을 내서 하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라 그랬지. 다만, 뒤이어 흘러나온 말만큼은 무척이나


자조적이었다.

“그러다 정 엇갈리면 헤어지겠지만…….”

“…….”

바빠서 헤어진 연인이 있었나. 원체 숨기는 데 재능이 없는 건 알았지만, 여러모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저렇게 씁쓸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나 보다.

“연애 경험이 많은가 보네요.”

“남들만큼은 있습니다.”

그는 담담히 대꾸했고, 나는 무어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더는 궁금한 것도 없으니 그와의 사담은 거기서
끝이었다. 사실, 원래는 책만 읽다 헤어지기에 오늘은 좀 친근한 하루에 속했다.

붓꽃 차에서 풍기는 향내가 달짝지근하게 코끝에 맴돌았다. 나는 다 읽은 책을 훑어보다 말고 문득


궁금했던 사실 하나를 더 떠올렸다. 이번에도 답해 주지 않으면 굳이 캐낼 생각은 없는 질문이었다.

“……근데 이태성 씨,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

침대 옆 협탁엔 유리돔을 씌운 은방울꽃이 놓여 있었다. 꽃을 가지런히 모아 받침 위에 세워 놓고 하얀


리본으로 줄기를 둘둘 감아 놨다. 뚜껑을 분리할 수 있나 본데, 괜히 건드리면 잘못될까 봐 따로 열어 보진
않았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옆에 놓인 향수병을 매만졌다. 방울방울 달린 큐빅을 건드릴 때마다 천으로


만든 꽃잎이 함께 흔들렸다. 권이도에게 뿌려준 이후 사용한 적이 없기에, 아직도 내용물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였다.

괜히 뚜껑을 열어 허공에 향수를 뿌려 봤다. 안개처럼 분사된 향수는 장미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가벼운
풀 냄새가 났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차츰 자연스럽고 희미한 향으로 변해 갈 거다.

“오늘도 늦으려나…….”

시간은 어느덧 저녁 식사 때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권이도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만, 아마 오늘도


식사는 혼자 해야 할 터다. 꼬박꼬박 늦는다고 연락이 오긴 했는데, 유독 바쁘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한번 걸어 볼까.

그런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어 홀린 듯 권이도의 번호를 찾았다. 괜히 바쁜 사람을 귀찮게 하나 싶었는데,


그리 생각했을 땐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른 뒤였다. 귓가에 가져다 댄 핸드폰에서 신호음이 들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씨?

“…….”

고작 이름 하나 불렸을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뛰었다. 반가운 기분이 드는 한편, 내심 품었던


섭섭함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잠깐 숨을 가다듬는 사이, 건너편에서 한마디가 더 들렸다.
-여보세요?

“……아, 네. 듣고 있습니다.”

그와 전화할 때마다 느끼는데, 목소리가 실제로 듣는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둘 다 비슷하게 듣기 좋지만,


이쪽이 조금 더 나직하다.

권이도는 어쩐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듣지 말고 얘기를 해야죠. 전화는 정세진 씨가 건 건데.

“…….”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까. 늘 하던 통화인데 오늘따라 더 가만히 있질 못하겠다.

“핸드폰 보고 계셨어요?”

-네, 마침 연락하려던 참이라.

바빠서 까먹은 게 아니었구나. 연락하려고 했다는 걸 보면 아마 오늘도 늦는 모양이었다.

“…….”

-…….

잠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얕게 들이마신 숨에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 냄새가 섞였다. 공기 중에


엷게 스며든 향기는 조금만 더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정세진 씨는 뭐 하고 있었습니까?

“저야 뭐…… 그냥 평소랑 똑같습니다.”

내가 집에서 하는 것들은 뻔한데, 그는 늘 뭘 하고 있었냐고 물어봤다. 그마저도 처음엔 바쁘냐고


물었다가 내가 어이없어하자 바뀐 질문이었다.

-평소랑 똑같으면…… 낮에 온실에 갔다가 지금은 방에 있겠네요.

“…….”

집에도 잘 안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오늘도 이 팀장이랑 차 마셨습니까?

권이도가 뭐라고 했더라. 저와 공유한 적 없는 공간을 남과 공유하는 게 싫다고 했던가. 그래서 온실에
조명까지 달았는데, 정작 권이도와는 한 번을 가보지 못했다.
“이태성 씨가 저랑 동갑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아까 몇 살이냐고 물은 질문에 이태성이


돌려줬던 대답이 생각나서.

‘스물아홉입니다.’

설마하니, 동갑이었을 줄은 몰랐다. 못해도 나보다 한두 살은 많을 줄 알았는데. 그리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권이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팀장이 아직 서른이 안 됐다고요?

“…….”

풉, 웃음이 나왔다. 이태성의 이름조차 모르는 권이도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역시,
이태성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그 풍채가 20 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권이도 씨.”

-네.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이불깃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바로 전까지 웃고 있었는데 괜히 또 기분이


이상했다. 이 전화를 끊으면 권이도의 목소리를 듣는 건 또 내일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분명 한 집에 살고
있는데도 며칠째 머리카락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퍽 어색해서.

“요즘 늦으시네요.”

그래서 그냥, 별생각 없이 이야기했다. 특별한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고, 그냥 그게 사실이니까. 일이


얼마나 바쁜지는 궁금했지만, 그걸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한참, 침묵만 흐르던 전화 너머에서 권이도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지금 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당황한 내가 미처 그를 부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 안 가득 정적이


내려앉고, 뒤늦게 권이도의 말이 이해됐다. 멍하니 바라본 핸드폰 화면엔 그와의 통화 시간만이 나타나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0 화. Quelques Fleurs(2)

정말 지금 온다는 말이었을까. 그 의문은 정확히 30 분 만에 해결됐다. 전화를 끊은 내가 집안을 서성일


즈음, 차고에 차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하필 고용인이 내 몫의 식사만 식탁에 올렸을 때였다.

나는 곧장 현관으로 나가 곧이어 들어올 권이도를 기다렸다. 그가 중문을 열고 들어오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내가 철없이 한탄한 게 아니라, 그냥 의미 없이 한 말이라고 변명할 요량이었단
말이다.

“…….”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드물게 흐트러진


차림새여서가 아니라, 그의 손에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이 들려 있어서.

“……이게 대체.”

새빨간 장미와 안개꽃으로 만든, 화려하고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온통 생화였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온
순간 자욱한 꽃향기가 훅 풍겨 왔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사이, 권이도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요?”

“…….”

차마 꽃을 받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물게 흐트러진 차림새의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급해 보이는 분위기가, 가슴 언저리가 저릿할 만큼 미묘했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서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곤 엷은 미소를 띤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내가 가지려고 사진 않았겠죠.”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그다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지만.

“내 집에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세진 씨밖에 없지.”

“…….”

나는 홀린 듯, 그가 내민 꽃을 받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스친 손끝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다.


권이도에게 받는 두 번째 꽃다발이라니. 비록 첫 번째는 직접 받은 게 아니었지만, 양쪽 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

입술을 달싹였지만,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약혼식 날엔 이런저런 감사 인사를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예쁘네요.”

겨우겨우 내뱉은 말은 미처 닿지 못할 만큼 조그맸다. 권이도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지나가듯


가벼운 목소리로 동의했다.

“그러게요.”

왜, 그 한마디에 목덜미가 홧홧할 만큼 부끄러워졌을까. 권이도의 시선이 꽃이 아니라 내 얼굴에


따라붙었기 때문일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쳤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았다. 권이도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다음이었고, 내가 고용인에게
부탁해 꽃다발을 화병에 꽂은 다음이었다. 한참이나 장미꽃을 안고 있던 탓에 식탁에 앉을 때도 온몸에서 꽃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주방장은 갑작스러운 권이도의 퇴근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새 식사를 차렸다. 천혜향 소스를 넣은 새우와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여름 나물무침이었다. 본식으로 나온 오리고기는 속살이 부드러워서 그런지 식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입 안 좀 괜찮습니까?”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입 안이 터졌던 첫날, 식사를 하며 몇 번이나 인상을
찌푸렸던 걸 기억하기 때문일 거다. 나는 혀끝으로 다쳤던 부분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직 제대로 나은 건 아니었지만, 음식을 먹는 데 불편하진 않았다. 처음에 꽤 아팠을 때도 대체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들만 먹은 덕에 괜찮았다.

“다행이군요.”

권이도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별거 아닌 한마디였는데, 그리 말하는 눈빛이


정말 안도하는 기색이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매사 무뚝뚝하게 대하는 사람이,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요새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꽃향기에 중독되기라도 한 걸까. 자꾸만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무리해서 퇴근하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려서 권이도를 집으로 불러온 것만 같았다. 마침 퇴근할 시간이었다고 합리화하기엔
누가 봐도 나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었다. 손수 꽃다발까지 사 온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글쎄, 내가 왜 바쁜지 알면 그게 얼마나 괜한 걱정인지 알게 될걸요.”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리며 수저를 내려놨다. 식사를 다 마친 건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괜찮으면 잠깐 같이 내려가죠.”

데자뷔가 느껴졌다. 전에 한 번, 권이도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식사 자리를 뜬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가 내게 차 키 두 개를 쥐여 줬던 날이던가.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정세진 씨 차가 왔거든요.”

***
권이도가 내게 주겠다던 자동차는 M 사에서 새로 출시한 새하얀 세단이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라인이었고,
자사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 클래식하게 다시 뽑은 스테디라고 했다. 국내에 한정판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아마 몇 대 있지도 않은 걸 권이도가 가져왔을 터였다.

“검수를 마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검사할 게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기껏 선물한 차에


문제라도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는 차 키를 손에 든 채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M 사가 새로 적용한 기술이나, 운전자


보호를 위해 도입한 안전 시스템 같은 것. 차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사람답게 전문 딜러가 할 법한 설명을
유창하게 이어 갔다.

“옵션은 내가 알아서 달았고, 내부 디자인은 마음에 안 들면 얘기해요. 다시 바꿔 줄 테니까.”

자동차에 문외한이 내가 봐도 이번 디자인은 썩 예쁘게 뽑히지 않았나 싶다. 흰색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데도, 보는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얼핏 앞 유리로 들여다본 내부는 여타 자동차와는 달리 베이지
계열의 밝은 색감으로 꾸며져 있었다.

“잘 쓰겠습니다. 마음에 들어요.”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 키를 내밀었다. 브랜드 로고가 은색으로 박힌


차 키는 이제 정말 그에게 돌려주지 못할 내 것이었다. 이거 하나 받는 게 왜 그리 고되었는지. 새삼 감회에
젖는 와중에 권이도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내뱉었다.

“차 한 대 주기가 이렇게 어렵군요.”

“……하하.”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뒤늦게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이자,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내가


쥐고 있던 차 키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어온 차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시승해 볼래요?”

차 내부는 온통 상아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가죽이었다. 핸들과 콘솔, 그리고 천장과 카시트까지 같은
재질이었는데 핸들 너머에 있는 계기판까지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고, 권이도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늘 뒷좌석에 앉는 모습만 봐왔기에 참으로
낯선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의자 위치를 조정하는 동안,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잘 어울려서요.”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산뜻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고른 차에, 정세진 씨가 앉아 있는 모습이 좋아서.”

참으로 가감 없는 표현이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제가 걸친 모든 게 권이도 씨가 준 물건일 텐데.”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신고 있는 신발과 핸드폰도. 전부 권이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하물며
샴푸 하나를 써도 그의 것이었는데, 차 하나 탔다고 좋아할 건 뭐란 말인가.

“전부 정세진 씨 마음에 들어야 말이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나는 몰랐던 취향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를테면 가구는


화사한 색을 좋아한다거나, 과일 계열의 향보단 자연스러운 꽃향기를 선호한다거나 하는 것. 혹은 에세이보단
소설을, 그중에서도 주인공에게 큰 갈등이 생기지 않는 류를 좋아한다는 것.

“제 취향을 잘 아시는 것 같더라고요.”

“뭐…… 관심이 있으면 자연스레 아는 것도 많아지기 마련이니까.”

그가 하는 말은 어쩐지 항상 모호한 느낌이었다. 언뜻 보기엔 그럴싸한 대꾸 같은데, 정작 모순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약혼식 날 처음 만났는데, 권이도는 그때부터 이미 내가 들어올 방을 준비해 놓지
않았던가.

“면허는 몇 살에 땄습니까?”

이런 것도,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다.

“면허는 스무 살 때 땄고, 운전 시작한 건 스물다섯부터입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차가 있었지만, 대학교에 다닐 때 자차를 끌고 다니지는 않았다. 애초에 차를 끌고


나갈 일이 있어도 늘 기사와 경호원 따위가 따라붙곤 했다.

“혹시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운전 잘합니다.”

일단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운전


잘하는 거.” 그 짧은 대답에 나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런 건 그냥 차 만지는 것만 봐도 압니다.”

“…….”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냥 군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누가 새 차 아니랄까 봐, 첫 시작부터


움직임이 아주 매끄러웠다. 나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며 예의상 권이도에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까. 그 중간에 차를 대고 구경할 장소도 있는 것 같던데.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강물에 야경이 비치는 모습이 제법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오죠.”

“…….”
핸들을 쥔 손이 움찔 떨렸다. 권이도가 내가 생각한 장소를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원래부터
무난한 드라이브 코스긴 하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나긋나긋한 뒷말도 들려왔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잠깐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요.”

“…….”

“강물에 야경이 비치는 모습이 예뻐서, 아마 정세진 씨도 좋아할 겁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만들어 낸 운명일까. 만약 후자라면 권이도는 대체 어떻게 저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위화감과 함께 드는 기시감은 이따금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느끼던 것이었다. 정확히 따져 물으면


좋으련만,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가보셨나 봐요.”

그래서 그냥,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막상 말하고 나니, 그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염려스러웠지만 말이다. 권이도는 아주 미미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한 번 가봤습니다.”

누구와 가봤냐고, 나는 거기까지 묻지는 않았다. 그 질문까지 꺼내면 정말 마음 좁은 연인처럼 보일 것


같단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고를 나와 도로에 오르자, 이게 얼마나 좋은 차인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세단보다 제로백이


훨씬 짧다던데, 브레이크를 밟는 감각부터 차이가 났다. 핸들이 돌아가는 것도 부드러웠고, 차체 내부의
흔들림도 적었다.

딱히 안 좋은 차를 타 본 적이 없는데도,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승차감이었다. 만약


스포츠카였다면 절대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을 거다.

“……차가 정말 좋네요.”

그에게 차를 받은 이후,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역시 안목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내 옆얼굴을 바라보며 고저 없이 차분히 이야기했다.

“내가 보기에, 정세진 씨는 차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차를 못 만난 거예요.”

운전 중이라 돌아볼 수는 없지만, 아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싶다. 보일 듯 말 듯 눈매를


접고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겠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그려졌다.

운전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한강에 다다르는 건 금방이었다. 노을이 지던 하늘이 어둠에 뒤덮였지만,
내게는 모든 게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자의적인 외출이었다. 늘 아버지에게 불려가기만 했는데, 내가 내 손으로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있었다. 그래 봤자 스쳐 지나갈 순간이었지만, 탁 트인 도로를 보는 순간 기분이 상쾌해졌다.
‘난 정세진 씨를 감금한 게 아닙니다.’

왜 하필 지금 권이도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단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집에만


있는 일상이 조금은 답답했던 모양이다.

조수석에 앉은 권이도는 차가 움직이는 내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이 따끔거릴 만큼 집요한


시선이었으나, 나는 끝내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강변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을 때야,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뿐.

“…….”

“…….”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권이도는 가만히 있는데, 나를 꽁꽁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유독 짙은


눈동자는 가로등 불빛이 담긴 이채마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이게 했다. 느리게 감은 테이프처럼, 그가 더디게
운을 뗐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고요한 차 안엔 오로지 권이도의 목소리만 들렸다. 주변 소음이 모두 차단된 공간, 그와 나 둘뿐인 공간.
느껴지는 건 그를 닮은 페로몬뿐이었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

그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느리게 뻗어온 손길은 부어오른 왼뺨이 아닌 오른쪽에 닿았다. 엄지로 살살
눈꼬리를 매만진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뒤통수로 옮겨 머리카락 사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도 됩니까?”

그게 뭐에 대한 허락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느릿느릿 다가왔으니.


갈증이 날 만큼 긴 시간 동안, 나는 권이도와 눈을 맞춘 채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

“…….”

살포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숨결에 페로몬이 짙게 섞이기 시작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나무 냄새, 그를 닮아 차갑지만 다정한 향기. 그 모든 것들이 알싸하게 나를 취하게 했다.

뒤통수를 붙잡았던 손은 조심스럽게 목덜미까지 내려갔다. 고개를 살짝 비튼 그가 입술 틈새를 혀로


간지럽혔다. 허락을 구하듯 입구에서 맴돌았다가, 내가 저항하지 않자 조금 더 깊게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는 뺨에 난 상처를 확인하겠다는 듯, 내가 다쳤던 쪽을 혀로 덧그렸다. 움찔거리며 눈가를 떨자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뒷덜미 아래를 다독이기도 했다. 살살 혀를 문지른 그가 맞닿은 입술로 살살 페로몬을 흘려
넣었다.

“…….”

흥분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애정 표현, 아니면 영역 표시 그 비슷한 것. 내게 제 흔적을


남기려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그를 각인시키는 행위.
권이도는 키스를 잘한다. 몇 번의 입맞춤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조용한 입맞춤에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고일 리 없으니까.

“흣, 잠시만…….”

살짝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눈이 뒤집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히트 사이클은 이미 끝났는데, 그가 주는 쾌락을 알아 버린 몸이 벌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권이도는 멀리 떨어지지 않고 입술을 붙인 채로 이야기했다. 소리 없이 두어 번 입맞춤을 건넨 뒤엔


뒷덜미를 감싼 손으로 귀 뒤쪽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 아래 움푹 파인 부분을 문지르는 감각이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간지러웠다.

“하고 싶어서?”

“…….”

두말할 것 없이 정답이었다. 그는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두 눈에, 나와 비슷한 욕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1 화. Quelques Fleurs(3)

“……여기서 그러면 안 되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긴장의 끈을 늦추면 그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는 내 말에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가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왜 안 됩니까?”

일부러 거리를 넓히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말할 때마다 입술이 스쳐서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 풍기는 페로몬과 체온 따위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

아, 설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한 손으로 권이도를 밀어 냈다. 의외로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금세 거리를


넓혔다. 아직도 입술이 간질거렸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몰라서 물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오늘 선물 받은 차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키스 정도야 로맨틱하게 넘어간다고 해도 그보다


더 나가는 건 내 이성이 용서하지 못했다. 만약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다면, 이성 자체가 마비되었을 테지만.
“몰라서 물은 건데…… 안 될 이유가 있어요?”

권이도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 차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그럼 새 차가 아니면 괜찮고?”

“…….”

입이 딱 다물렸다. 순간적으로 정말 괜찮겠다고 생각해 버린 탓이었다. 어색하게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자,


권이도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무언가 더 대답했다간 그의 페이스에 말려 버릴 것 같았다.

“……야경이 예쁘네요.”

그래서 겨우 운을 뗐건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어색한 화제 전환이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한 번


봐주겠다는 듯 푸스스 조그만 웃음을 흘렸다. 똑바로 조수석 시트에 기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게요. 예쁘네.”

기분 좋은 음색이었다. 듣고 있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

멀거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둘러봤다. 길게 이어지는 교량 아래, 넓게 펼쳐진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아스라이 흐트러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 가슴이 벅찰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총총히 비치는 가로등 불빛이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보였다. 야경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보다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장면을 많이도
봐왔건만.

사실,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한번 와보고 싶었던 장소였다. 여름이면 같은 과 동기들이 한강에 가서


치킨과 맥주를 먹곤 했으니까. 내게는 단 한 번도 권하지 않았기에 함께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물론
권했다고 해도, 내가 돌아다니는 걸 아버지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권이도와 한강이라. 이보다 더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권이도는 차에서 강물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명성호텔 최상층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아무래도 더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여길 알려 준 사람과 같이 왔던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굳이 확인하진 않았다. 권이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곧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이 있을 예정이에요.”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소식이 들려왔다. 선호그룹의 창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리는 기념행사.
관련 계열사에서도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온갖 이벤트가 열렸다. 여태까지는 대체로 이런 기념식엔
아버지가 홀로 참석하곤 했다.

“늘 그랬지만, 이번엔 행사를 더 크게 할 겁니다. 겸사겸사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타사 사람들도 부를


거고요. 당연히 여기저기 초대장을 보낼 텐데, 그중에 해신도 있어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해신’은 지나치게 낯선 단어였다. 그간 일부러 생각을 피했기에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묵묵히 눈을 내리깔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세진 씨도 참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그간 외면하고 있던 부분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있었던 일, 내가 해야 할 의무, 아직 끝나지


않은 혼사와 우리 사이의 관계.

‘선호 측에서 기사를 막고 있어.’

아버지가 말하길. 권이도는 나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계약의 대가도 주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무시하고 있다고. 그런데도 내가 직접 협상을 시도하겠다고 말하자 원치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권이도를 돌아봤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눈만 돌려 내 쪽을 바라본다.


주변이 어두운 와중에도 짙은 눈동자만큼은 또렷이 보였다.

“권이도 씨가 저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면 피치 못하게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다. 권이도의 가족이라든가, 혹은


선호그룹과 연줄 한번 놓아 보겠다고 안달 난 사람들. 거기서 내 역할이 약혼자일지 아니면 다른 것일지. 그
사실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왜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권이도는 잠깐 입술을 다문 채 나를 응시했다. 올곧게 향해 오는 시선이 참으로 권이도다웠다. 길게 음영


진 콧날 그림자 아래, 모양 좋은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건 내 약혼자로서 묻는 건가요, 아니면 해신그룹 맏아들로서 묻는 건가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의 약혼자인 건, 결국 해신그룹 맏아들이기 때문인데. 후자가 성립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나란히 차 안에 있는 일도 없었으련만.

“……두 가지가 다릅니까?”

“다르죠.”

그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린아이 다루듯 상냥한 말투로 덧붙였다.

“후자인 것 같아 말하는데, 나한테 약혼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손에 들어온 오메가를 어떻게 하건, 그건 권이도가 정할 문제였으니까. 다만,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묘해져서 그렇지.

“굳이 안 알릴 필요도 없지 않나요.”

이 기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목구멍에 조그만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들떴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아서 종국엔 가슴 언저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급작스러운 변화였는데, 권이도는
엷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건 전자로서 묻는 것 같군요.”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내가 불쾌한 티를 내는 게 마음에 든다는 듯이.

“나와 약혼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넌지시 묻는 말에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권이도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는 것. 해신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내게는 번거로운 일임이 분명했으니까. 이번 창립 기념식에 갈 때도, 약혼자인 것과 아닌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저는 권이도 씨가 편하신 쪽이 좋습니다.”

그래도 일단 최선의 대답을 내놨는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입을 다물었던 그는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세진 씨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본부장을 관둔 것만으로도 정세진 씨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나와의 약혼


사실까지 알려지면 여러모로 더 번거롭겠죠. 정세진 씨가 그런 관심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가능하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있고 싶었다. 일부러 찾아보진 않았는데,


아마 본부장을 관뒀단 것으로도 수없이 많은 말이 돌았을 터다. 실제로 얼굴을 보게 되면 직접 이유를 묻는
사람도 많겠지.

“약혼 사실을 알리는 건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정세진 씨가 자유로워질 때 해도 충분합니다.”

“……절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고.”

권이도는 그건 너무 아름다운 포장이 아니냐며 픽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으로 보였다.

“이건 그냥 내 욕심이죠.”

지난번에,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이렇게 나란히 차에 앉아서.

“불확실한 무언가에 투자하고 싶지 않거든요.”


모든 걸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가 불안해하고 있단 생각은 들었다. 모자란 것 하나 없는 권이도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도.

그는 금세 그러한 표정을 지우고 비스듬히 시선을 보내왔다.

“뭐…… 이 정도면 대답이 된 것 같은데.”

“…….”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권이도가 그렇다면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마 창립 기념식 때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모르는 척 있어야겠지. 아버지는 불만이 많겠지만, 적어도 마음대로 움직이진 못할 테니.

“그럼 전날에 미리 본가로 가야겠군요.”

가족들과 함께 출발하는 쪽이 그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 좋을 것이다. 여러 인사가 오는 자리니, 옷과


머리 역시 단정히 세팅해야 할 거고. 김 실장에게 연락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필요한 건 내가 챙겨 줄 테니까 그냥 내 집에서 출발해요.”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특유의 완고한 어투로 말한 그는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정세진 씨가 어디서 출발했건, 그걸 기자들이 알진 못하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찬 시계와 자동차 따위엔 관심이 있을지 몰라도,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관심이
없을 터였다. 가족들과 따로 도착한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자리도 아니었고.

“만약 참석하기 싫으면 그것도 편히 얘기해요.”

“…….”

“정세진 씨는 아무 의무도 없어요. 그냥 권리만 취하면 됩니다.”

퍽 달큼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머리 아프고 번거로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구미가 당겼다. 그러나 권이도에겐 내게 면죄부를 쥐여 줄 자격이 없었다.

“권이도 씨 약혼자는 그래도 되지만, 해신그룹 맏아들은 그럴 수 없어서요.”

“…….”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가 삐딱하게 눈가에 힘을 줬다. 그럼에도 반박할 말이 없는지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이내,
나직한 숨을 토해 낸 권이도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그럼.”
강물에 부서지는 야경이 그의 눈동자에 그대로 담겼다. 고요히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권이도는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온실에 조명을 달았더라고요.”

그가 흘긋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굴러오는 장면이 현실감 없이 신비로웠다.

“다음에 권이도 씨 바쁜 게 좀 끝나면…….”

“…….”

“그땐 거기서 차나 마실까요.”

한가로운 소리였으나, 나로선 진심이었다. 그를 위해 단 조명이었으니, 이 평화로움이 오랜 시간


지속되길 바랐다. 창립 기념식이 끝나고 권이도가 좀 한가로워진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군요.”

그러나 애매한 대답은 결코 긍정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 미묘한 뉘앙스에 미간을 좁히자 그가 대뜸 나를
보고 물었다.

“정세진 씨는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하고 싶은 거요?”

하고 싶은 거라. 여태 갖고 싶은 걸 묻더니, 이번엔 또 색다른 질문이었다. 도통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 가느다란 실소가 나왔다.

“글쎄…… 출세?”

“그런 거짓말 말고.”

가볍게 받아친 권이도가 눈썹을 찌푸렸다. 장난기 어린 표정이었다.

“취미라든가…… 승마나 레이싱, 아니면 뭐 요트를 띄워도 좋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봐요.”

“……음.”

이건, 갖고 싶은 물건보다 더 어려웠다. 그가 예시로 든 모든 걸 민재가 하는데, 단 한 번도 재밌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한참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권이도가 나긋나긋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지난번에 말했죠. 나는 정세진 씨를 감금한 게 아니라고.”

언젠가 그가 차를 빌려주며 했던 말이었다. 탁 트인 도로를 보고, 내가 떠올린 말이기도 했다. 그는


너그러운 말투로 그리 이야기했다.

“나가고 싶을 땐 나가도 괜찮아요.”

“…….”
알고 있었다. 그가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다만, 그럼에도 양심이 콕콕 찔려 와서 그랬지.

“……항상 어려운 걸 물어보시네요.”

그가 문을 열어 준다 한들,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본부장이라는 직급이 없는 이상 내게는 그럴


만한 구실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얌전히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정원을 산책할 뿐.

“이번에도 일주일을 주시나요?”

엷은 웃음을 띤 채 묻자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허벅지에 얹은 손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그대로 있던 그가 느릿느릿 물었다.

“향수를 만들어 보는 건?”

“……향수?”

어색하지만 익숙한 단어였다. 권이도는 그대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까딱였다.

“조향사가 되고 싶다고 했으니까…….”

“…….”

“비슷한 걸 해보면 어떨까 하고.”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별거 아닌 이유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정말 ‘재밌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버려서. 그 찰나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정답이었나 보군요.”

정말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표정에 그리 티가 나는 편도 아닌데 말이다.

“하고 싶으면 해야죠.”

어떻게 해줄 거냐고, 나는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곧장 안전벨트에 맨 권이도가 시간을 확인하며 눈가를
찌푸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대화를 종결시켰다.

“늦었는데 그만 돌아가죠.”

“…….”

나는 묵묵히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꿀꺽 삼켜 냈다. 그리고 곧 헤어져야 할 야경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가슴이 벅찰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무척이나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단 생각이 들 정도로.

***

날짜는 빠르게 바뀌었다. 권이도는 여전히 바빴고, 얼굴을 보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늘
그랬듯 별거 없이 나날을 보내다가, 이따금 먼발치에서 불 켜진 서재를 바라보곤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의
반복이었지만, 다행히 악몽을 꾸지 않아 버틸 만했다.

그가 내게 남겨 놨던 자국들은 이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뺨도 다 가라앉았고, 입 안쪽도 완벽히


아물었다. 그날의 일이 꿈인 것처럼 과거를 기억할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집에서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금요일엔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이 있는데, 그


사실을 내게 알리지도 않았다. 권이도가 내게 알리리라 생각한 건지, 그게 아니면 이제 내게 그 정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어느 쪽이건 무책임한 처사가 분명했다.

“경호…… 말씀입니까?”

그리고 창립 기념식 당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실에 따라온 이태성은 오늘 일정에 관해 이런저런


것들을 전달해 줬다. 가령, 권이도가 내가 입고 갈 옷을 준비해 놨다는 것. 차와 기사는 물론, 경호원까지
꼼꼼히 챙겨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경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까지.

“예, 몇 명 더 붙겠지만, 제가 보좌로 있을 예정입니다.”

“뭐, 보좌씩이나…….”

본부장으로서 행사에 참석할 땐 항상 김 실장이 함께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래 왔으니,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누군가가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그 역할을 이태성이 한다니 무언가 어색하면서도 생소한 기분이라
그랬지.

“고생하시네요.”

너도 참 여기저기 바쁘구나. 존경하는 상사를 모시지 못하고 이런 일에나 불려 다니다니. 그런 의미로


말했는데 이태성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대답이 아무래도 영 어색했다. 원래라면 특유의 무표정 뒤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으련만.
인제 보니, 그다지 귀찮은 기색도 아니었다.

“특별 수당 받습니까?”

“…….”

장난처럼 말했는데, 이태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간 숨기는 데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니까.


조용히 이어지는 침묵이 곧 긍정이나 다름없어서,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복지가 좋은 직장이네요.”

- 다음 화에 계속

32 화. Quelques Fleurs(4)

사람을 다룰 줄 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결과는
비슷할 테니 권이도가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태성도 차마 부정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겠지.
“……특별 수당이 없어도 해야 할 업무입니다. 고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입에 발린 말도 하시는군요.”

“…….”

나는 어이없어하는 이태성을 보며 기분 좋게 눈을 접었다. 황당해하는 얼굴이 이제야 좀 이태성다웠기


때문이다. 입가를 가린 채 웃음소리를 참자, 그가 퉁명스레 물었다.

“재밌으십니까?”

“뭐,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여러 사람을 봤지만, 이태성은 또 새로운 인간상이었다. 애써 아부를 떨지 않는 점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권이도가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건가. 어쩜 불편하지 않을 사람을 잘만 골라 왔다.

“오후에 출발합니까?”

“예, 식사 마치시는 대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나는 투명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내리깐 시선 끝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가 보였다. 오늘은 이걸 빼고 움직여야겠지.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아쉽게 느껴졌다.

점심에 잠깐 사라졌던 이태성은 내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옷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어디서 보고 있었나


싶을 만큼 놀라운 타이밍이었기에 그가 슈트 케이스와 구두를 내밀 땐 조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현관을 나섰고, 나는 그에게 받은 옷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색이 너무 밝은 거 아닌가.”

권이도가 고른 옷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감의 회색 정장이었다. 역시나 사이즈는 내 몸에 꼭 맞았고,


자로 잰 것처럼 바짓단도 정갈히 떨어졌다. 넥타이는 조금 더 짙은 색이었는데, 별다른 무늬가 없었음에도
포인트처럼 잘 어울렸다.

나는 정장을 멀끔히 차려입고 드레스룸에서 액세서리를 골랐다. 권이도가 기껏 옷을 챙겨 줬으니 그 외의


것들을 나름대로 갖춰 볼 요량이었다. 행커치프는 넥타이와 비슷한 색으로 하고, 넥타이핀과 시계는 굳이 튀지
않는 디자인으로 고르면 될 듯했다.

“이걸 쓰는 날이 오긴 하네.”

서랍에 가지런히 정돈된 물건들을 내 손으로 직접 사용하게 될 줄 몰랐는데. 내 것이라는 인식조차 없던


예전과 달리, 적어도 몸에 두르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이미 그에게 더 엄청난 것들은 많이 받았기 때문일 거다.

나는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린 뒤 약혼반지를 빼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간 단 한 번도 빼지 않았기에


손가락에 엷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아마 오늘 기념식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1 층으로 내려와 현관을 나설 때는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차려입는 게 얼마 만인지.


아버지를 뵐 때도 정장을 입긴 했지만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마치 권이도와의 약혼식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던 그때처럼 말이다.

이태성은 중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고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끔벅였다.

“…….”

“…….”

핸드폰 너머에서 뭐라 뭐라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갑작스레 침묵을 유지하는 이태성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전화 안 합니까?”

“……아,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이태성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자연스레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그가 뒤늦게


나를 따라 문과 가까운 곳에 올라탔다. 그러곤 흘긋 내 쪽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그 옷은…… 맞춤복입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권이도 씨가 고른 건데.”

그 눈 높은 권이도가 골랐으니 기성복은 아닐 터다. 기장이나 핏으로 봐선 치수를 재서 오더 메이드로


제작한 게 분명했다. 내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었지만, 그건 드레스룸에 걸린 옷들을 본 순간
물어봐야 했던 것이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셔서 놀랐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보좌로서 최선을 다할 모양이었다.


물론 잘 차려입은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정장이 안 어울리는 남자는 없죠.”

가볍게 대답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태성은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권이도가 타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운전도 이태성 씨가 하나요?”

“예, 오늘 제가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익숙하게 차 뒷문을 열어 줬다. 놀랍게도, 비서 역할부터 운전까지 홀로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김 실장은 운전까진 안 했던 것 같은데, 특별 수당을 두둑이 받았길 바랄
뿐이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대로, 이태성은 운전을 제법 잘했다. 정확히는 안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엔 거칠게 차를 몰 것 같은데, 실제로는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댔다.

“시간 빠르네…….”

근래에 있던 모든 것들이 지나치리만치 현실감 없었다. 권이도와 약혼식을 치르고 그의 집에서 보내 온


나날들이 말이다. 눈 깜박할 새에 시간이 흘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봄의 한가운데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

“…….”

습관처럼 반지를 꼈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걸리는 게 없으니 아무래도 영 허전했다. 버릇이
생기는 건 금방인데, 한 번 몸에 익은 것들이 사라지기까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당분간 얼굴 보는 일 없을 게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잡념이 끊기고, 귓가가
먹먹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고막도 다 나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나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렇게 헤어진 뒤에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안 했을까. 내가 건네준 USB


는 정말 그렇게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해답은 없었다. 애초에 어떤 대답이 돌아오건 내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아버지의 생각 역시 바뀌지 않을 테니.

“저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태성이 가장 먼저 데리고 온 곳은 3 층을 통으로 쓰는 샵이었다. 옷은 이미 다 입었으니, 아마 머리를


좀 만져 주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까이 가자 문을 열어 준 직원은 꾸벅 인사를 건네고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정세진 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샵 내부는 약혼식 날 착장을 도와줬던 곳과 비슷했다. 여러 피팅용 옷들이 걸려 있고, 유리로 덮인


장식함엔 여러 액세서리도 있다. 화장품이 가득 놓인 곳을 지나 거울 앞에 앉자, 직원 하나가 능숙하게 머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걸 권이도가 직접 신경 쓴 걸까. 미리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머리 모양을 만지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일전에 있던 약혼식 날에는 나를 두고 직원들끼리 토론이 벌어졌는데 말이다.

“머리 자르실 때가 되셨네요.”

상냥한 인상의 직원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정돈했다. 가르마를 타서 한쪽에
고정하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드라이기로 그 언저리의 볼륨을 살렸다.

“아휴, 워낙 두상이 예쁘셔서 제가 손질할 맛이 있네요. 머릿결 관리 따로 하세요?”

“하하…….”

이런 샵 직원들 특유의 립서비스는 몇 번을 들어도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특히나 이번에 말을 붙인


디자이너는 원래 다니던 샵의 수다스러운 직원만큼이나 말이 많았다.

머리를 깔끔하게 세팅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머릿결이 좋다는 말을 총
네 번 듣고, 두상이 예쁘다는 말을 세 번 들은 뒤에, 다음에 머리를 자를 때 제게 오라는 얘기를 두 번이나 더
들었다. 제 개인 번호까지 적힌 명함을 건네줄 땐 그 열렬한 직업 정신에 홀로 감탄해야 했다.

“……이게 뭡니까?”
밖에서 대기하던 이태성은 내가 내민 명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물끄러미
보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덧붙였다.

“이태성 씨 머리 자를 때 한번 오세요. 직원이 아주 친절합니다.”

그는 묵묵히 내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필요 없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친히 안주머니에 넣기까지


했다. 직원의 목적은 영업이었을 테니, 반 정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호텔로 가는 거죠?”

“예, 더 들를 곳은 없습니다.”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은 명성호텔 리브라홀에 있는 대연회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명성호텔이 보유한


연회장 중 두 번째로 큰 곳으로, 테이블 구조에 따라 대략 400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선호그룹 주요
임직원들과 관련 거래처 사람들을 불러 자유로운 분위기의 파티처럼 진행될 거라고, 이태성이 말해 줬다.

“이태성 씨는 권이도 씨 경호원이었는데, 저한테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볼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가 한창 운전하던 중에 묻자, 이태성이 백미러 너머로 나를 돌아봤다. 인제 보니, 그 또한 평소보다


더 꼼꼼히 머리를 정돈해 놓았다. 그는 숱 많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제가 경호로 있던 건 같은 경호팀들을 제외하면 잘 모릅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호원 얼굴을 외우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요. 본부장님도 누가 경호로 있었는지 못 외우시지 않습니까?”

“음…….”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내 경호로 있던 사람들이 주르륵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곁에 두는 사람을 그렇게 모르던가.

“자랑은 아닌데, 저는 다 외우는 편입니다.”

“…….”

이태성은 침묵을 유지한 채 또 한 번 백미러로 나를 살펴봤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고,


그냥 복합적인 시선이었다.

“……모든 경호에게 저처럼 대하십니까?”

“이태성 씨처럼 대하는 게 뭡니까?”

“그거야…… 아니, 아닙니다.”

이번에도 싱거운 마무리였으나, 나는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


권이도가 참 철저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 후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타이밍 좋게 앞차에서 내리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익숙한


남자 두 명이 한 차에서 내렸고, 뒤에 있던 차에선 여자 두 명이 내렸다.

“…….”

가족들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치는, 내 식구들. 사이좋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단란한


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화목한 모습을 보니, 새삼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왜 연락 한 통 없었을까. 그냥 나를 참여시키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걸까.

마친 외부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외부인이 맞으니 단순히 비유로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을 터다. 내가 저 사이에 껴있었다면 참으로 이질적이었을 텐데. 날 때부터 가족인 사람들과 노력해도 가족이
못 되는 사람 사이엔 많은 간극이 있다.

“왜 그러십니까?”

“……별거 아닙니다.”

나는 애써 여러 감정을 지워 내고 이태성이 열어 준 뒷문으로 차에서 내렸다. 앞선 가족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그 잠깐 사이에 표정이 썩 나빠진 모양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거면…….”

“아뇨. 그냥 좀 긴장해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애써 웃어 보이기까지 하자, 이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네가 긴장이라는 걸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차는 발렛 맡기고 같이 올라가죠.”

“…….”

그는 호텔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고 묵묵히 내 뒤에 따라붙었다. 덩치 큰 경호원이 함께 있으니 왠지


모르게 든든한 기분이었다. 내게 해코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냥 느낌이 말이다.

명성호텔 로비는 언제 봐도 참 화려했다. 특히 홀 중앙에 걸린 크고 요란한 샹들리에가. 줄줄이 달린


큐빅을 따라 빛이 부서지는 모습은 호텔을 찾는 손님들이 볼거리로 꼽는 것 중 하나였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시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정작 로비는 조용했고, 잔잔한


클래식만 은은히 들려왔는데. 아직 본격적인 인파에 휩쓸리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력을 소모한 것처럼 지치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 좀 들르죠.”

숨통을 좀 트고 싶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면 자리를 비울 타이밍이 나오지 않을 테니.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보기 전에 잠깐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이태성은 오늘 내 의견에 딴지를 걸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멋대로 방향을 트는 데도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는 걸 보면. 애초에 시간은 넉넉했으니 나를 만류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나는 그를 밖에 세워 둔 채 홀로 화장실에 들어왔다. 볼일을 보려던 건 아니었고, 손이나 씻고 안색을 좀


확인한 뒤 나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

단정히 정돈한 머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눈썹과 눈매가 반듯하다는 걸 빼면 별반 특징 없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봐줄 건 외모밖에 없는 놈이라며 나를 욕하지만, 정작 봐줄 만한지도 잘은 모르겠다.

이태성이 왜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파리했으니. 나름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티 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크게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조차도 왜 이리 안 좋은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이 고달파질 것 같단 예감이 자꾸만 경고 신호를 보냈다.

물론, 괜한 염려였다. 나는 권이도의 약혼자가 아니고 그저 해신그룹 맏아들의 거죽을 썼을 뿐이니까.


누가 내게 말을 걸더라도 늘 그랬듯 착한 아들을 연기하면 그만이었다.

“후.”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꼼꼼히 닦았다. 세수라도 하고 싶었지만, 물기를 뚝뚝 흘리며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마음을 좀 가다듬은 덕에 아까보단 안색이 훨씬 나아졌다.

그리고 핸드 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화장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문 바깥쪽 코너를 돌려는 찰나,
안으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떡하니 마주쳤다.

“…….”

“…….”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주 미미했지만, 그건 분명 페로몬이었다. 권이도의 것과는 달랐고, 빈말로도 좋은


느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탓에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상대방을 확인했다.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한


정장 위로 화려한 브로치와 독특한 색감의 넥타이가 보였다. 그리고 나보다 아주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얼굴은,
차마 몰라볼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아.”

권이정이었다. 선호그룹 둘째이자 권이도의 형이며 명성호텔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 나와는 대화


한 번 나눠 보지 않았고, 약혼식 날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사람.

권이경, 권이정, 권이도. 선호그룹 삼 남매는 권이정 혼자만 다르게 생겼다는 평가를 듣는다. 권이경과
권이도는 부회장인 어머니를 닮았으나, 권이정은 홀로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바늘 하나 들어갈 데 없이 냉랭한
외모인 두 사람과 달리, 권이정은 웃으면 나름대로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등줄기에 원인 모를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등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뒷덜미에 오소소 솜털이 일어났다. 거부감, 혹은 또 다른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순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실례했습니다.”

겨우겨우 그 말을 뱉었지만 한 번 돋아난 소름은 쉬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나, 그걸


고민할 수도 없을 만큼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그냥 몸을 옆으로 비켜섰는데,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야?

- 다음 화에 계속

33 화. Quelques Fleurs(5)

“…….”

황당함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한들, 내가 누군가에게 ‘야’라는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입을 다물자, 권이정이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맞네, 너 권이도 그거지?”

“…….”

퍽 어이없는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쓰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말이었다. 권이도도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으나,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와,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이야.”

권이정은 정말 의외라는 듯 눈가를 찡긋하며 웃었다. 아버지를 닮아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성격 나빠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매스컴에서 재벌의 정석이라며 에둘러 욕하는 게, 괜한 이유는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야, 뭘 그렇게 조용히 있어. 나 몰라?”

“……아뇨, 알고 있습니다.”

우선 침착하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여전히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권이정 대표님. 저는 해신금융그룹 전 본부장 정세진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정중히 인사했는데, 권이정이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오늘 모르는 척하기로 했던가?”

“…….”

“그래요, 그럼. 명성호텔 대표 권이정입니다. 이런 누추한 데서 마주치게 되어 유감이네요.”

언제 반말을 했냐는 듯, 그는 금세 고상한 말투를 구사했다. 악센트가 특이한 발음은 권이도와


비슷했으나, 그와는 달리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생글거리며 운을 뗐다.
“근데…… 오메가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도 되나?”

천천히 훑어보는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대놓고 품평하듯 나를 살핀 권이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쩝,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렇잖아요. 오메가면 남자를 만날 텐데, 괜히 옆에서 볼일이라도 봤다가 민망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해. 바지를 까는 건 좀…… 장소가 여기면 안 되지.”

지저분한 페로몬이 스멀스멀 내 쪽으로 흘러왔다. 지적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 페로몬이 내 목을 덥석 움켜쥐는 듯해서.

“…….”

분명히 말하건대, 영향을 미칠 만큼 짙은 존재감은 아니었다. 나는 우성이었고, 그는 삼 남매 중 유일한


열성이었다. 그가 아무리 페로몬을 뿌린다고 한들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숨이
막힐 정도로 원인 모를 긴장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면 그런 걸 기대한 건가? 우연히 알파라도 마주쳤으면 해서? 정세진 씨, 그래요?”

권이정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그가 왜 이렇게 이죽거리는지, 왜 자꾸 나를 도발하려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만큼 정신이 아득하게 변하고 있었다.

“벙어리도 아니고 아까부터 왜 대답이 없어. 이봐요, 정세진 씨. 지금 나 혼자 떠듭니까?”

“…….”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아차 하는 사이 정신을 잃을 것 같기도


했다. 그 불안한 기분은 권이정의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심화되었다.

“본부장님.”

“…….”

퍼뜩, 고개를 들었다. 권이정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음성이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옮겨 간 시선엔 화장실 입구로 들어온 이태성이 보였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태성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저 둘뿐인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피가 제대로 도는 기분이었다.

“뭐야, 오메가라고 화장실까지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

권이정이 불쾌한 얼굴로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몰아쉬며 이미 습관처럼


굳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눈을 휘자, 권이정이 눈썹을 삐쭉 올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가 있어서 불편하셨을 텐데, 편히 볼일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살짝 묵례를 건네고 이태성보다 먼저 화장실을 나섰다. 이태성도 권이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나를
바짝 따라왔다.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크게 휘청였다.

“……!”

이태성이 화들짝 놀라 내 팔을 붙들었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사양할 텐데, 이번만큼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손끝이 벌벌 떨리는 게, 그가 없었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 터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이고, 내게는 그다지 화를 낼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지.

“괜찮은데…… 잠깐만 이러고 있죠.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서.”

“…….”

그는 별반 힘들이지 않고 뒤에서 나를 받쳐 줬다.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도착했을 땐 조심조심 나를


부축해 안에 태우기도 했다. 내빈들만 사용하는 분리된 승강기라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식은 이마를 매만졌다. 조금 더 편안하게 몸을 기대자, 이태성이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따라 들어오면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서 망설였습니다.”

“……이태성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해코지를 당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경호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태성도


권이정의 얼굴을 알아봤을 테니 곧바로 들어오기엔 더더욱 무리가 있었을 터다.

“고마워요. 덕분에 곤란한 상황은 피했군요.”

나는 억지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이태성은 여전히 내 두 팔을 단단히 붙든 상태였다.


이제 놔줘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화장실에서 들은 말은…… 신경 쓰지 마셨으면 합니다.”

“들었습니까?”

“…….”

“들었군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태성은 내가 말 몇 마디에 휘청일 만큼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겠지.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니었고.”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이태성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오메가라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건, 권이정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았다. 내 사회적 위치 때문에 말로


하지 못할 뿐, 뒤에서 입에 올리지 못할 소문을 주고받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아버지와 민재조차 남들이
들으면 인상을 찌푸릴 언사를 잔뜩 구사하지 않던가.

“남자가 오메가인 게 이상할 법도 하죠.”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태성은 그제야 내 팔을 놓아줬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한 걸음 내딛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미미한 아로마 향기와 헤어스프레이 따위의 인공적인 향. 불쾌한 종류는
아니었지만, 여러 인위적인 것들이 섞여 숨을 쉬기에는 조금 거슬리는 그 향기.

“정세진 너…….”

민재였다.

***

명성호텔에는 총 세 개의 홀이 있는데, 저마다 각각 다른 별자리 이름이 붙었다. 연회장이 있는 곳은


천칭자리를 뜻하는 리브라(Libra)홀이었고, 그 이름대로 천장에 별빛을 수놓은 것 같은 조명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내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민재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성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척


보기에도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는데, 나로서는 그가 왜 이런 눈빛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민재를 봤을 때, 어느 정도 평화롭게 헤어지지 않았던가.

이태성은 먼발치에서 그런 나와 민재를 따라왔다. 처음 우리를 마주친 순간부터 민재는 그런 이태성조차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봤더랬다. 그게 한낱 경호원에게 보일 경계는 아니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세진 님, 정민재 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태성은 입구에서 대기했고, 우리는 호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중앙에 있는 라운드 테이블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건지 덩그러니 빈 의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중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고, 민재도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

“…….”
또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그를 바라보자, 도리어 민재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어머니와 똑 닮아 있었다.

“……옷 잘 어울린다. 확실히 머리 검은 게 낫네.”

나는 그가 불만을 표하기 전에 먼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민재가 이런 곳에서 화를 내면, 아무래도 좀


곤란했으니까. 눈썹을 삐쭉 올린 민재는 그제야 평소처럼 삐딱하게 이야기했다.

“넌 그 옷 존…… 엄청 구려.”

그래도, 여기가 공적인 자리라는 자각은 있나 보다. 욕지거리를 쓰려다 말고 급히 말을 바꾼 걸 보면.


물론 이 옷이 구리다는 건 지나치게 심술스러웠지만.

“그보다 민재 너는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어. 다른 가족들은?”

“…….”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민재는 다시금 눈을 치켜뜨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어투로 목소리를 내리깐다.

“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 거야?”

“뭘 하고 지내다니…….”

영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나야 항상 권이도 집에 머무르건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민재가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아주 호강하나 보다? 시계는 또 더럽게 비싼 거 찼네. 혼자 잘 먹고 잘사니까 좋아?”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난은 날이 섰다기보단 투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민재를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잘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제 맘을 알아주지 못하는 게 원망스럽다는 투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래서 넌지시 물었는데,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잘근거리며 시선을 내렸을 뿐. 그러다
내 손가락을 응시하곤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딴 게 무슨 약혼이라고…….”

아마, 약지에 엷게 남은 반지 자국을 발견했나 보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약혼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미리 언질도 들었겠지. 그게 어떤 방식인지는, 나를 제외한 가족들만 알고 있을 터다.

“무슨 일 있는지는 아버지한테 직접 들어. 그 망할 새끼가 입막음을 단단히 시켜 놨으니까.”

“…….”

반사적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 ‘망할 새끼’라는 어감이 지나치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짓씹듯 내뱉은
민재는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휙 돌려 버렸다.

달래 주는 게 좋을까. 내가 잘살려고 약혼한 게 아니라고, 내 의지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냐고.


그런 것들을 이해시키고 사과하며 좋은 형, 좋은 첫째를 흉내 내는 게 좋을까.
“…….”

그러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잠깐의 망설임조차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그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커다란 의문이 머릿속에 한가득 남아 버리는 바람에.

망할 새끼는, 아마 권이도가 맞을 텐데. 그가 입막음시켰다는 건 대체 뭘까.

민재가 말하는 뉘앙스만 들으면 약혼 사실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하나 아버지보다 입이


가벼운 녀석이 말을 못 한다는 건, 아버지에게 물어 봤자 답을 얻어 내기 힘들다는 말이다. 민재는 ‘입막음
당했다.’ 정도는 이야기하는 녀석이고, 아버지는 그러한 사실조차 일언반구 없는 사람이었으니.

가족들은 그 후 기념식이 시작될 즈음에야 겨우 나타났다. 홀 내부가 어느 정도 찼을 즈음이었는데,


정확히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서영이만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머니가 앉아
있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라.”

사실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도 별로 없으련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빨갛게 칠한 립스틱이 오늘따라 조금 과하지 않나 싶다. 화장이 좀 진한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서영이와 민재를 한 번씩 둘러보고 차분히 대답했다.

“네, 뭐……. 워낙 잘해 주셔서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머니는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그냥 그렇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도 살갑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오늘은 무언가 조금 더 이상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가 하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원래는 나를 껄끄러워했다면 지금은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어…… 그래, 마치 권이도의 집에 있던 고용인들처럼.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가장 궁금한 사실을 묻자, 어머니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가를 찌푸렸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주름 한 점 없는 얼굴이 지금껏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려 줬다. 잠깐의 침묵 끝에 어머니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는…….”

그때였다. 조그만 기계음과 함께 단상에 선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곧 기념식을 시작할


테니, 내빈 여러분들께서는 착석해 달라는 안내였다.
나는 무심코 단상과 가까운 또 다른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단상에 있던 사회자는 물론, 그 앞쪽에
앉은 사람들까지 한 번에 그쪽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몰려든 시선 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

선호그룹 일가족이었다. 부회장인 권상미, 그 자제인 권이경과 권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이도까지.

간혹 권가(家) 사람들을 보면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정말로 참 부조리한 일의


연속이라고.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그들이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외적인 요소까지 모두 갖추었으니 말이다.

“인물들이 어쩜 저렇게 좋은지 몰라…….”

누군가 홀린 듯 중얼거린 말대로였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뇌리에 새겼다.
정확히는 그중 딱 한 명, 내 약혼자인 권이도를.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정장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별달리 특징 없는 정장에 베스트
단추만 색이 독특했을 뿐인데, 그걸 입은 사람이 권이도라는 것만으로 특별해 보였다. 어깨를 반듯이 펴고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내가 오늘 아침, 저 사람과 한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있었던 모든 일이 어쩌면


전부 내 상상에 의한 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모습은 그 어떤 명화의 한
장면보다도 우아했으니.

정말 계약이 아니면 엮일 수 없는 상대였구나. 그리 생각한 내가 시선을 떼어 내려던 순간이었다.

“…….”

“…….”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느꼈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주변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짙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 정지 화면처럼 그 자리 그대로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절대 웃지 않는다던 권이도가, 내게는 늘 웃으며 대하던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것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는, 단 한 번도 대외적으로 보여 준 적 없는
것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4 화. Quelques Fleurs(6)

“……뭐야?”

“누구 보는 거야?”
숙덕거리는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민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와 권이도를 번갈아 보는 것도
느껴졌다. 어머니와 서영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

심장이 쿵쿵 뛰는 듯했다. 목덜미가 홧홧 달아오르고,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께가 뜨거웠다.

어쩌면 나를 보고 웃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재미난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발견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도 기분이 들뜨는 건 그와 지내는 사이 지나치게 뻔뻔해진 탓인 걸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누나인 권이경이 나를 돌아봤지만,


그 역시 금세 관심을 꺼버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창립 기념식은 미리 고지된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 사회자가 선호그룹의 그간 연혁을 말해 줬고,


부회장인 권상미가 간단한 인사말(권병욱 회장이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단 사과와 내빈 여러분께 감사하단
내용이었다)과 임직원 시상식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엔 3 층짜리 거대한 케이크의 커팅식도 있었다.

아버지는 식의 1 부가 끝나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 즈음 돌아왔다. 코끝을 스치는 담배 냄새에 고개를


들었던 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눈두덩이 움푹 들어간 건 물론,
살도 무척이나 많이 빠진 듯했다.

“…….”

고작 보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회적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가 이런


자리에 이토록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어머니가 잠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하기야,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는 나와 달리 그들은 한집에서 늘 얼굴을 봐왔을 테니.

“…….”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살갑게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것처럼 자칫 잘못했다간 모든 게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았다.

2 부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복잡한 속을 달래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케 했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건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도무지 가늠되질 않았다.

“그럼 저희가 준비한 음식 맛있게 드시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끝내 모든 식순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따로 비워 둔 연회장 한 편엔 선호그룹에서


초청한 셰프들이 뷔페 형식으로 음식을 차려 냈다. 줄줄이 샴페인 잔과 핑거 푸드도 있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그쪽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아버지는 그제야 처음 내게 말을 붙였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재킷을 단정히 정돈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뒤따랐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떤 용건이 있는
건지.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한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으니.

“아니, 이게 누구야. 정철호 회장 아니야?”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고민하던 것들이 싹 사라지고 그 대신 무력감과 허무함만 남았다.


무의식적으로 헛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남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이런 데서 얼굴을 다 보네. 이쪽은 그래, 자네가 애지중지 키운다던 오메가 아들이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착한 아들을 연기할 시간이었다. 인사조차 없던 아버지가 나를 데려온 것도, 마침


내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날의 일을 언급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름이 정…… 정 뭐더라?”

“……정세진입니다.”

나는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살짝 묵례를 건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입력된 정보를 출력하는


것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학습했기에, 내가 무얼 하면 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훤칠하게 컸네. 자네는 올해 몇 살인가?”

“이번에 스물아홉 됐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하게 큰 자식 정도면 충분했다. 입양되었지만 구김살 없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처럼 살갑게 굴면 됐다. 누군가가 칭찬을 건네면 겸손을 떨며 나를 한 단계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장가가야겠어. 아, 오메가니까 시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버지는 내 자식을 누구에게 보내냐며 친근하게
내 등을 다독였다.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 더 애달프다는 말엔 눈치껏 약지에 남은 반지 자국을 가려야만 했다.

“정 회장이 정말 사람이 좋다니까.”

“아휴, 아닙니다, 회장님.”

물밀듯 밀려든 공허함은 그 무엇도 채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으로 남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사치레에 감사히 반응하고, 내 쪽에서 몇 마디 빈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이미 여력이 다한 기분이었다.

‘만약 참석하기 싫으면 그것도 편히 얘기해요.’

한창 웃고 떠드는 와중에 문득 권이도의 말이 떠올랐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정말로 참석하기 싫다고 했다면. 그랬다면 권이도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줬을까 하고.

***
으레 목적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저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논점을 빙빙 도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서로 끝없이 근황과 칭찬을 주고받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주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한 시간쯤 이어가면, 자연스레 정신력이 달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유명 건설업 회장의 차남이라던가. 끽해야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는 웬만한 회장들


버금가는 수다를 자랑했다. 죄 자랑투성이에 영양가 없는 정보만 모여서, 벌써 그에게 들은 가십과 스캔들만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대단하시네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그렇죠? 역시 뭘 좀 아신다니까.”

아버지는 이미 한참 전에 최초의 목적이었던 회장과 담배를 피우러 사라진 뒤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시가를 피운다던가, 내게도 권했으나 눈치껏 뒤로 빠져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 이거 제 명함인데…….”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보통 가장 먼저 명함부터 주는데, 어지간히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나 보다. 지금껏 많은 명함을 받은 건 둘째치고, 문제는 내게 그들에게 돌려줄 물건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거 어쩌죠. 제가 지금 명함이 따로 없는데.”

회사를 나왔다는 말은 처음 몇 번으로 충분했다. 본부장을 관둔 이유가 ‘다른 공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질릴 만큼 충분히 많이 읊었다. 그렇다고 명함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 애써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잘 챙겼다가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열에 아홉 정도는 예의상 건네는 명함이었다. 실제로 내게 연락이 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을 거고,
어설프게나마 얼굴도장을 찍어 둘 생각이겠지. 그러니 소속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내가 할 도리는 다한
셈이다.

그로부터 건설업 명함을 두 개, 금융권 명함을 세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송 3 사 기자의 명함을 각각


하나씩. 안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눈을 매만졌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느라 잔뜩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마침 나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또 다른 무리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타이밍이다 싶어 몸을 틀었는데, 때마침 내 뒤쪽에 지나가던 사람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어.”

축축한 느낌이 배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나와 부딪친 상대가 들고 있던 와인을 엎질렀기 때문이었다.


와인 특유의 달짝지근한 냄새와 함께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이고, 이걸 어쩌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상대는, 아까 화장실에서 마주친 권이정이었다. 한 손엔 비어 있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그는 제 손과 내 배를 번갈아 보곤 눈을 찡긋하며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옷이 다 젖었네. 괜찮으세요?”

이 사람이 왜 이쪽에 있지.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하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권이도는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지만, 권상미와


권이경이라면 저 앞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라면 권이정도 여기가 아니라 저쪽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필 와인이라 자국이 심하네요.”

그의 말대로 연한 색감의 베스트에 짙은 보라색 자국이 퍼져 나갔다. 많고 많은 샴페인을 두고 굳이


와인을 마시다니.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없다.

“어떻게, 세탁비라도 드릴까요?”

“아뇨, 제가 실수한 건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엷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내가 산 옷도 아니었고, 일을 크게 키워


봐야 득 될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면 모자란 놈이라고 욕을 할 테니, 그저 적당히 상황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기 바쁜 데다, 권이정은 그다지 친해져서 메리트가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망 있는 사람의 대다수는 이미
저쪽 권상미의 근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러나요. 제가 옷을 망가뜨렸는데.”

그러나 권이정은 도무지 내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덥석 내


팔을 붙잡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미간을 좁히자 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이야기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죠.”

“…….”

물로 해결될 옷이 아니라는 건, 그 또한 알고 있을 텐데. 오히려 물에 젖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질 터다.

“저는 정말…….”

“정세진 씨,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요?”

입이 딱, 다물렸다. 그의 입에서 ‘정세진’이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아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이름이 불리는 순간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기껏 참석해 주신 손님께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죠. 같이 갑시다.”


아까 화장실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거부감이 목덜미를 콱 붙들었다.
서서히 숨통을 옥죄다가 산소가 부족할 즈음엔 가슴 언저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것만 놔주셨으면 합니다.”

“아, 손?”

겨우겨우 건넨 말에, 그는 그게 뭐 그리 어렵냐는 듯 팔을 놓아줬다. 구겨진 재킷을 바로 하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꾸 나를 데리고 가려는 것도 그렇고, 괜찮다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그렇고. 내가 예민한 것이겠지만, 그 모든 게 무언가 빌미를 만들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럼 가죠. 물들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지.”

그럼에도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는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소란을 일으킬 바에야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일까.

권이정과 함께 연회장을 나갈 때는 출입구에 서 있던 이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엉망이 된 옷가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칠칠치 못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는데, 정작 내 얼굴을
바라볼 땐 눈빛이 심각해졌다.

“…….”

“…….”

찰나의 순간 스친 시선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 이태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권이정을 번갈아 봤다. 그런 이태성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권이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차라리 방을 하나 잡아 줄까요? 어차피 호텔이니까 그게 나을 텐데.”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권이정이 앞서 걷고, 내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걸이는 권이도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뒤를, 이태성이 몇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었다.

***

권이정이 향한 곳은 연회장과 먼 곳에 위치한 화장실이었다. 왜 이렇게 멀리 가나 했는데, 내가 묻기도


전에 사람들이 보면 곤란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뉘앙스는 굉장히 미묘했지만, 나는 부러 모르는
체하며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정말 방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권이정은 그 질문을 과장 하나 없이 다섯 번도 넘게 했다. 내게 어떤 대답을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말은 “괜찮습니다.”밖에 없었다. 고작 옷 하나 망가졌다고 호텔 방을 잡고 싶지도 않고, 처음 보는
사람과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보기보다 고집이 세네. 하긴, 정세진 씨처럼 생긴 애들이 오히려 성질은 더 하더라고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목소리에 신난 기색이 묻어났다. 나는 괜스레 샘솟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그와


거리를 조금 더 넓혔다. 물론 내가 조금만 뒤처져도, 그가 귀신같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지만 말이다.

“……화장실을 벌써 두 개나 지나친 것 같은데요.”

“응? 아, 저기 끝에 있는 곳으로 가려고요.”

그가 가리킨 건,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이었다. 그새 시간이 늦은 탓에 홀을 지키는 직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권이정은 화장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들어가요.”

“…….”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돌아다니는 직원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만 벌써 두어 명은 되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이태성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억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권이정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난생처음 만나 본 상대에게 이토록 두려운 기분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같은
남자 대 남자로서 웬만하면 해코지를 당할 만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권이정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갈 땐, 밖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딱딱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그는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뻔뻔한 반응이었다.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운 채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떡하니 입구에 버티고 선 권이정이 턱을 까딱했다.

“그거 재킷부터 벗어요.”

아까부터 말하지만, 뉘앙스가 이상하다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를 보는 저 눈빛이. 값어치를 매기려는 듯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아버지가 나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찝찝함이 있었다.

“……권이정 대표님.”

그래서 재킷을 벗는 대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애초에 물로 빨 생각도 없었고, 그를 따라온 건 그냥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물로 지워질 자국도 아니고요.”


“뭐…… 그거야 당연히 알죠.”

권이정은 온유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픽 웃기도 했다.

“뭘 순진한 척을 해? 너도 알고 따라왔을 텐데.”

- 다음 화에 계속

35 화. Quelques Fleurs(7)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말은 둘째치고, 그가 뿜어낸 페로몬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호흡으로, 피부로 들러붙은 페로몬은 의도하는 바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진짜 실수로 와인을 엎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나를 발정시키기 위한, 저급하고 지저분한 페로몬이었다. 덕지덕지 들러붙는 감각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알파가 상대를 ‘억지로’ 흥분시키기 위해 흘리는 페로몬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접해 본 알파 페로몬은 권이도가 처음이었으니, 이토록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금씩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폐부가 따끔거렸다.

“그냥 좋게 좋게 서로 즐기자고.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귀찮게 하지 말자. 응?”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머리가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가 느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한데,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건만.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일들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상대는 남자였고, 나도 남자였다. 권이정이 아무리 페로몬을 흘린다고 해도 나는 페로몬 분비가 되지도
않는 우성 오메가였다. 이 정도 자극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지 마시고…….”

“야, 뭘 자꾸 이러지 말래.”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권이정에게 잠식돼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단 공포심이
생겼다. 눈앞이 컴컴하게 죽는 것처럼 그와 가까워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도 이 판 좆 같은 거 알잖아. 지금 거절 못 하는 상황인 거 아니까 고소니 뭐니 말 안 하는 거


아니야.”

권이정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판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를 밀어 내거나 거절하면 추후에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한테 그런 협박은 안 통합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본부장이라는 직급은 내 손으로 내려놨고, 그 외에는


타격을 입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권이도와 계약으로 묶인 몸이 아니던가. 권이정이 내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면,


권이도가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되어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권이정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협박? 내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걸까. 뭐가 이렇게 두려워서 손이 덜덜 떨리는 걸까. 그는 아직 내게


손을 대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밀어 낼 수도 있을 텐데. 그가 제아무리 알파의 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필요는 없으련만.

“내가 사내새끼 구멍엔 관심이 없는데, 권이도 그 새끼가 환장하는 거 보니까 한 번 맛이라도 봐
봐야겠거든.”

나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먹잇감을 모는 것처럼 서서히 거리를


좁힌 권이정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놈이 애지중지 집에 가둬 놓나 했더니……. 이 정도면 같은 게 달려 있어도 한


번은 할 만할 것 같단 말이지.”

그의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가 하면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아서, 있는 힘껏 어금니를 악물어야만 했다.

“씹, 그놈의 약혼식엔 가지도 못하게 하고…….”

“…….”

권이정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로 물러나던 내가,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어 벽에 등을 기대고 섰을 즈음이었다. 자꾸만 호흡이 가빠져서 억지로 자세를 다잡는데, 권이정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정세진.”

‘정세진.’

목소리가 두 번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들었던 음성이 그의 부름 위에 덧씌워졌다. 아득히 멀어진


주변 소음에 권이정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너 어차피 도망 못 가.”

“…….”
“여기 원래 내가 쓰던 데라 아무도 안 온다고. 알아들어?”

“…….”

“이쯤 했으면 힘 빼지 말고 얌전하게 좀 굴자. 씨발, 오메가라는 게 애교가 없어, 애교가.”

눈앞이 까맸다가 하얗게 점멸하길 반복했다. 권이정의 페로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사지 끝까지 내모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처럼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보니까 페로몬도 안 느껴지는데…… 이거 오메가 맞아?”

“…….”

“아니, 아니지. 그래, 오메가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없지.”

권이정은 다시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아 억지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크게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스르륵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싫으면 입으로 한 번 하든가. 혹시 알아? 잘 빨면 한 번은 봐줄지?”

억센 손길이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잘 세팅된 머리를 흐트러뜨린 뒤엔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한 채
제 바지춤으로 끌어당긴다. 역겨운 페로몬이 더욱더 짙어지고, 바지 너머로 잔뜩 부푼 그의 성기가 보였다.

“성의껏 해, 성의껏.”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능숙하게 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입으로 지퍼부터 열든가.”

‘창부처럼 굴어야지.’

“…….”

무릎 너머로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모욕적인 자세라는 생각보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이 더 생생했다.
입꼬리가 투둑 찢어지던 느낌, 억지로 입 안을 파고들던 물건과 목을 비집고 영역을 넓히던 그 억겁의 과정.

“…….”

멍하니 눈꺼풀을 떨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머리칼을 단단히 붙잡았던 권이정은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며 연신 입맛을 다셨다.

“와, 우니까…… 더 꼴리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입을 잘못 열었다간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지만, 내가 울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머리칼을 움켜쥐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억지로 얼굴을 끌어당겨 바지춤에 문지르는 것도. 바지 너머
부푼 성기가 뺨에 닿고, 억세게 내 뒤통수를 잡아 고정하는 것까지도.

“뭐 해, 빨리 하지 않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이정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감이
지독히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권이정이 아니라 내가 복종해야 할 다른 누군가로 느껴졌다.

“그래, 씨발. 처음부터 이랬으면…….”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잠시였다. 권이정이 양손으로 내 뒤통수를 붙잡은 순간, 그의 손이 거칠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내가 입을 뻐금거릴 새도 없이, 권이정의 페로몬이 훅 멀어졌다.

“……악!”

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터진 것처럼 엄청난 소리였다. 바위가 깨졌다고 해도 믿을 법한


소리였는데, 그 거친 파열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

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정장. 조금


밝은 색을 띠는 단추. 가슴께에 달린 화려한 브로치와 남자다운 목선 위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

“……권이도 씨.”

“…….”

권이도는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 입매를 비튼 채 무언가 읊조렸다. 언뜻 보기에 욕지거리 같았는데,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늘 차분하고 침착하던 시선이, 지금은 분노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렸지.

“이 미친, 여기가 어디라고 이게……!”

권이정이 버럭 소리치는 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 권이도가 멱살을
끌어당겨 다시 한번 크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가고, 권이정이 쿨럭 피 섞인
침을 토해 냈다.

“…….”

고작,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권이도는 권이정을 놓아주지 않고 몇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자비 없이


주먹질을 하는 모양새가 내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무님!”

뒤늦게, 화장실 안으로 이태성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가


아직까지도 권이정에게 분풀이를 하는 권이도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죽습니다.”

퍽! 그가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권이정은 이제 완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같은 알파에, 같은


남자인데,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이토록 무서웠다.

“전무님, 거기서 더 하시면…….”

“죽는다고?”
냉랭한 목소리에 차가운 페로몬이 한가득 쏠렸다. 그 분노의 대상이 나는 아니었지만, 나조차 움츠러들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권이정의 페로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협감에 나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이 새낀 죽어도 쌀 텐데.”

권이도는 딱 ‘눈이 돌아갔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분노로 일렁이는 두 눈은 이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태성을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권이도 씨.”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하라고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위해서.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 눈앞에 있는 권이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하기
위해서.

“여기, 여기는 어떻게…….”

그런데 말을 하려다 보니,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나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고, 지금은 두려움도
들지 않는데.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공포가 씻은 듯 깨끗이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

권이도는 화를 삭이려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붙잡고 있던


권이정을 성의 없이 내던졌다. 옆에서 대기하던 이태성이 권이정이 쓰러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몸뚱이를 받아 챘다.

“내 눈에 안 띄게 치워.”

차갑게 이야기한 권이도가 세면대로 다가갔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피 묻은 손을 벅벅 씻는 게 아닌가.


손에 남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

“…….”

어떤 말을 들을까. 잠깐이지만 걱정이 되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왜 따라왔냐고, 네 발로 스스로


걸어간 게 아니었냐고 나를 탓할 것만 같았다.

“세진아.”

그러나 권이도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줬다.


내 뺨을 감싸 얼굴을 꼼꼼히 살핀 그가 뒷머리에 손을 얹은 채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늦게 와서 미안해.”

“…….”

온몸의 긴장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차가웠던 손끝에 피가 도는 듯했다.
따사롭게 전해지는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해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
권이도는 내 머리칼에 턱을 문지르며 내게만 들릴 만큼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나는 손을 들어 권이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푹 얼굴을 묻자, 권이도 특유의 체향이 한가득 전해졌다.

“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구해 줬다는 고마움이 아니라, 내 두려움이


사실은 헛것에 불과했다는 안도감이 더 커다랬다.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가, 향긋한 나무 냄새를 끝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고슬고슬 머리칼을 만지다가 느낌도 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이마에 닿아 왔다. 얼굴의 생김새를 확인하듯 가장자리를 덧그린 상대가 눈꼬리를 살짝 문지르며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훔쳐 줬다.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그러나 따사로운 손길과 달리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을 칼로 얇게 저미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찌르르 아파 오는 듯했다.

‘이런 재주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지…….’

얼굴을 매만지던 손길은 순식간에 억센 것으로 바뀌었다. 내 목을 붙잡았다가, 머리채를 움켜쥐고, 아플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얌전히 굴어, 정세진.’

그 한마디는 마치 족쇄와도 같았다. 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손과 발을 단단히 옭아매는 족쇄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없이 늘어져 그가 하라는 대로 무릎을 꿇는 것밖에 없었다.

‘씨발, 뭣도 아닌 오메가가…….’

장면은 계속해서 끝없이 바뀌었다. 아니, 이걸 장면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끝없이
누군가 내게 속삭이고,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지독히 나를 괴롭혔을 뿐이니까.

악몽을 꾸고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꿈이었기에 큰 동요 없이 모든 게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인내심도 생겼다. 다만, 이번만큼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너무도 모호해서 그랬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놈이 애지중지 집에 가둬 놓나 했더니…….’

권이정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억에 남았다. 별거 아닌 말들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나를 보는


눈빛까지 영상으로 찍은 것처럼 또렷했다.

“……으.”

그래서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금방이라도 토기가 솟구쳐서 먹은 것도 없는데 모든 걸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선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건만, 강간이라도 당한 것처럼 배 속이 뒤집혔다.
“착하지…….”

상냥한 목소리가 차분히 나를 달래 줬다. 은은하게 쏟아져 내린 페로몬도 함께였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묵직하게 감도는 익숙한 체취.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감각.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이 너무도 상냥해서, 조금 전까지 들었던 나쁜 생각이 사르르 지워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머릿속엔 이제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자자…….”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눈 깜박할 새에 져버릴 평온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나를 달래 줄


위로였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그저 그간의 불면증을 설욕하듯 아주 오랜 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뿐.


가만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상대는 내가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내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조용했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천장을 응시했다. 새하얀 벽지와 불이 꺼진 조명. 내가 사용하던 방보다 훨씬 높은
천장까지.

“…….”

처음 보는 공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유는 무척 사소했는데. 내가 있는 공간의


모든 곳에 익숙한 페로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도, 잠든 와중에도, 내 곁에 머무르던 은은한 페로몬이.

“일어났어요?”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걸친 차림이었고,


넥타이마저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주변이 어두운 탓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가…….”

“호텔이에요.”

아직 잠기운이 남은 머리가 앞서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것, 권이정이


내게 와인을 엎은 것, 화장실에 따라갔다가 벌어진 피치 못할 사고까지도.

“집으로 가자니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내가 쓰던 방으로 데려왔습니다.”

“…….”

“불편하면 얘기해요. 차를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권이도는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기에, 사라졌던


잠기운이 다시 밀려들려고 했다.

“더 잘 겁니까?”

“……아뇨.”
“졸려 보이는데.”

“아뇨…… 일어나야죠. 기념식도 아직이고…….”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투정 비슷한 대답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념식이 끝난 지가 언젠데.”

“…….”

“더 자요. 깰 때까지 있을 테니까.”

- 다음 화에 계속

36 화. Quelques Fleurs(8)

허락이 떨어졌지만 오히려 잠기운은 더 멀어졌다. 기념식이 끝났다면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넣어야 할 텐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한가로이 침대에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권이도가 나직이 덧붙였다.

“정세진 씨 가족들한테는 내가 얘기해 놨습니다.”

가만히 눈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예의 그 짙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내게 고정돼 있었다.

과연 그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권이정과의 일을 자세히 설명했을까, 아니면 그냥 먼저 집으로


간다고 둘러댔을까. 양쪽 모두 권이도답지 않으니 그냥 참견하지 말라고 통보했을 가능성이 제일 크긴 했다.

나는 침대에 한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재킷과 베스트는 벗겨져 있었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느슨하게 맨 차림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손을 댔을 리는 없으니 권이도가 벗겨 준 것일 터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피곤한 탓에 머리가 무뎌진 기분이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고, 다만 모든 상황이 끝났단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귀찮은 일이 다 마무리되다니, 썩 나쁘지 않은 결과가
아닌가.

“덕분에 번거로운 일을 면했네요.”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눈동자엔 복잡한 기색이


가득했다.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인 그가 애매한 질문을 건네왔다.

“……아픈 데는?”

갑자기 눈앞에서 의식을 잃었으니,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상한 점은 그가 과할


만큼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는 점일까.

“없습니다. 괜찮아요.”

“속이 안 좋거나 이러지도 않고?”

“네, 다 멀쩡하네요.”

안심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잠을 푹 잔 덕에 오히려 컨디션이 좋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여전히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지그시 내 얼굴을 응시했다.

“…….”

“…….”

정적이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괜히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실은 무슨 질문이 나와야 할 타이밍인지는 알고 있다. 권이정이 어떻게 되었냐고, 그 사실을 물어야


마땅하겠지. 정신을 잃기 전에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도 한정돼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그런 것들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권이정은 선호그룹 둘째였고, 일을 크게 키우면 불리한 건 내


쪽이다. 미수에 그친 해프닝을 굳이 짚고 넘어가 봐야 내게 이로울 건 없단 말이었다.

“이태성 씨가 연락했습니까?”

권이도의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권이정과 나를 뒤따른 이태성이 몰래 그에게 연락을


넣었을 터였다. 한낱 경호원이 나섰다면 문제가 더 커졌을 테니, 퍽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특별 수당을 더 주셔야겠네요.”

“……나한테 할 말은 그게 답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텐데,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아, 아니면 혹시 듣고 싶었던 얘기가 이런 걸까.

“화장실은…… 일부러 따라간 게 아니었습니다.”

잔잔히 넘어오던 페로몬이 뚝 끊겨 버렸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내가 한 말에 무슨 생각이건


한 모양이었다. 나는 와인 자국이 남은 와이셔츠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권이정 대표님이 제 옷에 와인을 엎는 바람에 혹시 소란스러워질까 싶어 그랬던 거예요.”

“…….”

“책임을 물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아예 몰랐다면 거짓말이지만, 거기까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남자고, 권이정도 남자라서,
쉽게 저항할 수 있으리라 방심했을 뿐이니까. 사실 권이정이 내게 무력을 행사하진 않았으니 진정
불가항력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다면…….”

“거기까지 하죠.”

서늘한 목소리가 내 뒷말을 끊어 버렸다. 사과를 드리겠다고, 혹은 책임을 지겠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권이도는 한 손으로 제 넥타이를 끌러 내리며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내가 애꿎은 사람한테 화낼 것 같군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그는 정말 화난 얼굴이었다. 권이정을 대할 때처럼 이성을 잃은 건 아니었고,


눈동자 속에 억눌린 분노가 잔잔히 일렁였다. 차분하고 고요한 감정이었으나 그렇기에 더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그 새끼를 거기서 죽일 걸 그랬죠.”

“…….”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음산한 목소리가 도무지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권이도 씨 형님이지 않습니까.”

“형님?”

권이도의 입술이 미미하게 비틀렸다. 비웃는 것처럼 오묘한 표정이었다.

“그딴 게?”

“…….”

“난 다섯 살 이후로 권이정을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에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호그룹 식구들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건 매스컴에서도 이미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실제로 약혼식 날에 본 기억에 의하면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으신가 보네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권이정에게 주먹질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우성 알파의


완력이라면 이가 한두 개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친하지 않아서, 그래서 선뜻 내 편을 들어
줬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오해하나 본데.”

그러나 권이도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듯이 운을 뗐다. 날카로운 시선이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만약 사이가 좋았어도 나는 똑같이 했을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단순히 허세가 아니라는 건,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알 수 있을 거다.


내가 대꾸할 말을 찾는 사이, 그는 더디게 내 얼굴로 손을 뻗으며 이야기했다.
“다시 물어보죠. 아픈 데 없습니까?”

기다란 손가락이 뺨 언저리에 닿았다. 부드럽게 턱을 받쳐 들고 귓가를 서서히 어루만진다. 그가 건넨


질문이, 비단 몸에 한정해서 묻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역시나,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는 내게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고 있노라니, 꿈을


꾸던 내내 들렸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었다며 나를 달래 주고, 몇 번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그 다정함이, 정말 권이도였던 모양이다.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으면 얘기해요.”

만약 그렇다면 의사를 불러 주겠다고, 그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안 좋냐고 물었던 게, 몸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질문이었나 보다.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섬세한 배려였으나, 악몽은 원래부터 꾸던 것이었다. 그와 약혼하기 전부터, 나는 늘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꾸곤 했다.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엔 기억의 잔상처럼 또렷한 경험들을 말이다.

“어차피 아무 일도 없었고…….”

“…….”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몸이 닳는 것도 아닌데요.”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것과 권이정에게 강간당하는 것. 둘 다 폭력에 불과하니 시간이 지나면 나을


터였다. 모욕이나 수치의 정도가 다를지는 몰라도 그가 걱정하는 것만큼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난 뒤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려하게 그려 놓은 속눈썹이 차분히 내리깔려


있었다. 이윽고, 눈을 들어 올린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세진 씨는 화도 안 납니까?”

따지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일상적인 질문이면 모를까. 마치 점심은 먹었냐고,


그렇게 묻는 것처럼.

“……글쎄요.”

상황에 맞지 않게 참으로 순수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지도 모르면서.

“화를 내는 것도 권리의 일종이거든요.”

“…….”

“어차피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감정 소모를 해서 뭐합니까.”


단순히 이번 일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었다. 분노에도 체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부조리한 일에 일일이
화를 냈다간 누구보다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뿐이다. 착한 게 아니라 귀찮은 거였고, 화가 안 나는 게 아니라
체념한 거였다.

민재가 물불 가리지 않고 끌리는 대로 구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책임져야 할 것도 없고, 충족해야 할


기대도 없으니 굳이 참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겠지. 그래서 권이도의 앞에선 반대로 한마디도 못 하고
입을 다무는 거였다.

“내가 그랬죠. 정세진 씨는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야기했다.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닌 모양인데,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나 보다.

“나한테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해줄 텐데, 바라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

퍽 달큼한 속삭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그때처럼.

“……바쁜 와중에도 도와주러 오셨잖아요.”

하지만 그가 내게 보여 준 성의는 권이정에게 분노를 표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보다 더한 대처를


바라지도 않고, 무언가 더 엄청난 일을 해주리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약혼자로서 최소한의 방어를 해줬으니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사치가 아닐까.

“손수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기도 했고…….”

“…….”

“그거면 됩니다. 권이도 씨가 해줄 건.”

사람에게 거는 기대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그가 아무리 유혹적인 말을 해도 나는 내 주제를 똑바로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을 잊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딱 하나 바라는 건 이 얘기를 그만하는 건데…… 이거라도 들어주실래요?”

살짝 난처한 얼굴로 웃자, 그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흘러나온 숨결이 여러 의미를


한가득 담고 있었다. 다행히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인지, 그는 금세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더 잘 생각이 없으면 뭐라도 좀 먹어요. 보니까 종일 굶었을 텐데,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하죠.”

권이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룸서비스를 시키려는 모양인데, 나도 모르게 무심코 그의 팔을


붙들고 말았다. 멈칫, 움직임을 멈춘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냥 이야기를 쥐어짰다. 다행히 그에게 궁금한 점은 셀 수 없이 많이 떠올랐다.


그중, 내가 입에 올린 건 평소라면 물어보지 않을 어리광 비슷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 주세요?”


솔직히 말하면, ‘네가 좋아서.’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권이정에게 보인 분노, 그리고 내게
내비치는 걱정,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딱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그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몹시 미묘한 대답을 내놓았다.

“환심을 사야 하거든요.”

“……환심?”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권이도가 내 왼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반지 자국이 남은 약지를 살살


덧그리다가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기도 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눈을 가늘게 뜨자, 우아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내가 나중에…… 아주 못된 짓을 해도 정세진 씨만큼은 내 편을 들어 주면 좋겠어서.”

못된 짓이라니. 권이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내겐 절대 그럴


것 같지 않건만.

“못된 짓 안 하실 것 같은데요.”

“글쎄…….”

그래서 장난스레 반박했는데, 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 그러더니 일전에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말을 입에 올렸다.

“내 건 아무것도 빼앗기지 말자 주의라.”

영문 모를 말이었다. 환심을 사겠다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바라는


것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렇게?”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지분거리던 손길을 멈춘 채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자 단정한 눈썹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오늘 저를 도와주셨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엔 저도 권이도 씨 편을 들어 드릴게요.”

습관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편을 들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과분한 바람도 아니다. 굳이 약속하지 않더라도 애초에 나는 권이도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누가 뭐래도 일단 약혼한 사이잖아요. 권이도 씨랑 저랑.”

계약으로 엮인 관계였지만 이 정도 뻔뻔함은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 권이도가 내게 허락한 울타리는


이보다도 더 넓었으니. 그는 잠깐 멍한 얼굴로 있다가 픽 웃음을 흘리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약속할 수 있습니까?”

“뭐……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을 따라 했다. 그는 감싸 쥐고 있던 왼손을 제 쪽을 가지고 간 뒤 반지 자국이
남은 약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약속은 이걸로 하죠.”

간지러운 행동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가 깍지 낀 손을 침대에 내리눌렀다.


그러곤 비어 있던 손으로 살짝 내 뺨을 감싼다.

“더 자지도 않을 거고…….”

“…….”

“보니까 배도 안 고픈 것 같고.”

서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슬금슬금 귓가로 옮겨 간 손바닥은 어느새 뒤통수를 감싼 채


새끼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가까운 거리에서 속살거렸다.

“따로 하고 싶은 건?”

살랑이며 풍겨 오는 페로몬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뚜렷했다. 그가 무얼 바라는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내가 돌려줘야 할 대답이 무엇인지까지.

“…….”

말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감질나는 손길 때문일까, 아니면 그윽하고 짙은 페로몬 때문일까. 히트


사이클이 아닌데도 몸이 달뜨는 듯했다. 조금 더 가까이, 권이도를 피부로 느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어라 더 묻는 대신 더디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게감 없이 맞닿은 입술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감촉은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한 쾌감을 안겨 줬다.

“권이도 씨 페로몬이…….”

“…….”

“되게…… 좋은 거 아세요?”

나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댄 채로 사근사근 속삭였다. 깍지 낀 손가락으로 손등을 건드리며 살살


간지럼을 태우기도 했다. 슬며시 들어 올린 눈꺼풀 너머로 고동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깜박,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그가 다시금 입술을 맞물렸다. 깊이 겹친 입술 틈새로 페로몬 섞인 숨결이


훅 밀려들었다. 내가 목울대를 움직이는 찰나 말캉한 혀가 부드럽게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조용한 키스였다. 서서히 흥분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마치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가을비에 젖은 나무와도 같은 묵직한 향이 코끝을 아른아른 맴돌았다.

그는 살짝 떼어 낸 입술로 은근하게 턱 언저리를 문질렀다. 말랑한 감촉이 스친 곳에 권이도의 체온이


남는 듯했다. 내 뒤통수를 감싼 채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그가 높은 콧대로 맥이 뛰는 자리를 건드렸다.

“내가 준 향수를 뿌렸군요.”


“흣…….”

숨결이 닿는 느낌이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배 속이 홧홧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를


밀어 내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마음껏 내버려 두고 싶단 마음이 자꾸만 속에서 충돌했다.

“잔향이…… 엄청 옅게 남나 본데.”

그는 한가롭게 향수에 대한 감상까지 덧붙였다. 그러더니 입술로 목덜미를 베어 물며 여린 살갗에 이를


세웠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약을 바르듯 말캉한 혀가 그 언저리를 핥아 냈다.

“정세진 씨한테 붙어 있던 사람들도 이 냄새를 맡았겠네요.”

- 다음 화에 계속

37 화. Quelques Fleurs(9)

“붙어 있던 사람들이라니…….”

간질거리는 태도와 달리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 안에 담긴 뉘앙스가 도무지 불만 외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며 되물은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태진건설 둘째라든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수다스럽기 그지없던 한 남자가.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향수 냄새를 맡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 그 또한 내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을 터였다.

“하긴, 그래도 그 사람은 양반이었죠.”

권이도는 순순히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넓게 목 언저리를 입술로 야금야금 깨물었다.


비비적거리며 쇄골까지 내려간 그가 도드라진 뼈 부근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

따끔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권이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깨문 부위를 빨아 댔다. 빨간


자국이 남을 만큼 못살게 굴더니, 목덜미를 받쳤던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다른 사람들은 굳이 여기저기 만져 대면서 여우짓을 하던데.”

“……흣.”

“마음 같아선 정세진 씨가 받은 명함을 다 찢어 버리고 싶더군요.”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맨 그가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을 콰득


깨물었다. 대놓고 심술을 부리는 행동이었으나, 나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를 만져 댔다고…….”

기념식 내내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눴음에도 그가 ‘만져 댄다.’라고 표현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내 넥타이를 풀어내며 가느다란 실소를 흘렸다.

“눈치가 없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그의 손이 등과 어깨를 매만졌다. 그대로 팔을 타고 내려왔다가 팔꿈치 위쪽을 살짝 움켜쥔다. 커다란


손이 와이셔츠 너머로 또렷이 느껴졌다.

“굳이 팔까지 잡으면서 대화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

그가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팔을 잡는다거나 어깨를 감싼다거나 하는 의미 없는 접촉.


전자는 주로 나보다 키가 작은 여자들이었고, 후자는 키가 비슷한 남자들이었다.

“그거야…….”

사실, 그들에게서 사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굳이 경계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그랬지. 오늘이 아니면 볼 일 없는 상대에게 뭐 하러 그런 정신력을 쓴단 말인가.

“관심이 없는 거였군요.”

권이도는 내 생각을 정확히 알아채고 딱 잘라 이야기했다. 느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뒷말을 더 했다.

“그래서 딱히 뿌리치지도 않고.”

“…….”

딱히 날카로운 어조가 아니었음에도 혼나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단 사실에서 오는 놀라움보다


당장 변명할 말이 없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커다랬다. 권이도는 긴장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뺨 언저리에 입을
맞춰 왔다.

“베타들은…… 그래,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보는 거라고 치고.”

특이 형질은 보통 특이 형질끼리 맺어진다. 별다른 외압은 없었으나 대개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다.


다시 한번 쪽 입을 맞춘 그가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주제 파악 못 하는 알파들은 좀 경계할 필요가 있겠더군요.”

대답해야 할 타이밍일까.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권이도도 그 사실을


알기에 경고처럼 나직이 내뱉었겠지.

“날 생각하라고 준 향수 위에 다른 향을 묻혀 오면 안 되지.”

“…….”
내게 페로몬이 없는 탓에 도드라졌을 뿐, 그다지 짙은 페로몬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묻는 엷은 존재감 정도. 애초에 이제는 향수 냄새만 은은하게 남은 상태였다.

“그게 싫으면…….”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맞잡은 손을 얼굴로 가져왔다. 그리고 권이도의 손등에 뺨을 문지르며 살짝 두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이제부터 권이도 씨 향으로 덮으면 되겠네요.”

“…….”

그 말이 불을 붙이는 기폭제였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페로몬을 쏟으며 빈틈없이


입을 맞췄다. 질식할 것처럼 자욱한 페로몬 속에서 그가 내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는 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반라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드러난 상체를 손바닥으로 문지른 그가


허벅지로 내 중심부를 꾸욱 눌러 왔다. 발기한 성기를 자극하는 감각에 목울대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읏…….”

“여기,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잠, 흐…….”

꾸욱, 꾸욱, 탄탄한 허벅지가 연신 다리 사이를 자극했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는데도 뒤이을 행위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내가 몸을 파르르 떨자, 그가 바지 버클을 풀고 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우선 한 번 빼고 느긋하게 할까요.”

“아, 잠깐…… 흐…….”

큼직한 손이 성기를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단숨에 속옷 안쪽까지 침입한 탓에 하릴없이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팔뚝을 붙잡은 채 신음을 삼키자 그가 요령껏 손바닥으로 귀두를 자극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느끼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 손으로 여유롭게 주무를 뿐인데


착실히 쾌감이 쌓이고 있었다. 내가 혼자 자위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극적인 손길이었다.

“흡……!”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권이도의 손안에 사정했다. 그의 유려한 손길과 파도치는 페로몬의 결과였다.
여유롭게 내 정액을 모두 받아 낸 그가 힘들이지 않고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겨 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저러면, 옷이 다 망가질 텐데. 힘없이 시선을 돌리는 내게 나직한 한마디가 건네졌다.

“벗기려고 사준 옷이에요.”

“…….”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다. 하긴, 이미 와인으로 엉망이 된 옷이긴 했다. 내가 체념하는 사이,


그는 제가 입고 있던 옷가지도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재킷 가슴팍에 달린 브로치가 잘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설프게 반만 벗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 그는 와이셔츠까지 모두 벗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새하얀 셔츠가 사라진 몸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떡 벌어진 어깨 아래 너른 가슴팍.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상체엔 올록볼록 자리 잡은 복근도 있다.

“밝히긴.”

“……음.”

민망한 말이었으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단연코 밝히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드러난 나신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가고 말았다. 권이도는 애써 시선을 돌리는 나를 보며 흥미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 얼굴로 제법 변태 같은 면이 있네요.”

“그런 얼굴이라니…….”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제가 더 집요하게 내 몸을 훑은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정세진 씨, 본인이 좀 더럽히고 싶은 인상이라는 거 압니까?”

더럽히고 싶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그가 여전히 발기한 성기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처음 보이는 알몸도 아니건만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렇게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가끔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실제로 몹쓸 짓을 하고 계시는데요.”

그의 손이 장난치듯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에 사정한 탓에 성감이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혀를 꾹


깨물며 신음을 참자, 권이도가 놀라운 타이밍으로 경고했다.

“혀 깨물지 말고.”

“…….”

가끔 투시 능력이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속마음을 읽는 능력도 함께.

“……바지는 안 벗으세요?”

괜히 민망한 기분에 말을 돌렸는데, 무심결에 눈을 내렸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새카만 정장 바지


너머로, 두드러진 성기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으니까.

주머니에 뭘 넣었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작지 않은 크기라는 걸 알고


있고, 이미 한 번 넣어 본 적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엔 하도 정신이 없어 그의 물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권이도는 내 시선을 개의치 않고 느릿느릿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벌어진 바지 틈새로 새까만 속옷과
함께 불룩 튀어나온 부피감이 느껴졌다. 배꼽 아래, 은밀한 곳으로 이어지는 아랫배엔 도드라진 핏줄 따위가
있었다.
“빨아 볼래요?”

그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내 무릎을 매만지며 물었다. 내가 흠칫 놀라 시선을 들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기도 했다.

“맛있겠다는 듯이 보길래.”

“……빠는 거 말고.”

“말고?”

“만지는 정도라면…….”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것처럼 휘어진 두 눈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만져요.”

“…….”

“어차피 정세진 씨가 넣을 건데.”

홀린 듯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내가 손을 뻗는 순간에도 가만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손끝으로


다리 사이에 있는 둔덕을 쓸어내리자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조심조심 권이도의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뜨겁고 굵은 살덩이가 손바닥에 닿았다. 내


것조차 잘 만지지 않으니, 타인의 것을 만지는 행위가 지나치게 긴장이 됐다. 살살 기다란 기둥을 손에 쥐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입을 맞췄다.

“더 세게 쥐어야지.”

그가 속삭이는 말대로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맥박이 뛰는 것처럼 울퉁불퉁한 핏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쓸어내리자, 꺼덕거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위협적이었다.

히트 사이클로 정신이 없을 때와 맨정신일 때는 확연히 다르다. 눈으로 보는 것과 손으로 만져 보는 것도


확연히 달랐고. 왜, 주사 맞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더 아픈 기분이 드는 것처럼.

“이거…… 못 넣을 것 같은데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하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듯 차분히 반박한다.

“지난번에 정세진 씨가 넣은 건 이게 아닌가 보죠.”

침이 꿀꺽 넘어갔다. 긴장감인지, 아니면 기대감인지는 모르겠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 호흡에


열기가 섞일 정도였다. 아마 히트 사이클이었다면 내 페로몬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그의 성기를 빠듯이 감싸 쥐었다. 굵은 만큼 길이도 길어서, 그렇게 잡았는데도 남는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다 선 게 아니었는지 몇 번 손을 움직이자 조금 더 부풀어 오른 듯했다.

키가 크고 손도 크니 여기까지 큰 모양이다. 내게 아무리 비교 대상이 없다고 한들, 그의 것이 한참이나


커다랗단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는 내 귓바퀴를 지그시 깨물어
왔다.
“……재밌습니까?”

부정할 말이 없었다. 사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심정이긴 했다. 그가 내 성기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던


게 이해될 정도로.

“좀…… 신기하긴 하네요.”

“정세진 씨한테도 똑같은 게 있을 텐데요.”

“크기가 이만하지 않아서요.”

뒷말은 장난이었는데 그는 퍽 진지하게 내 아랫도리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감상평이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모양은 그쪽이 더 예쁜데.”

“…….”

“가끔 아까울 정도예요. 정세진 씨가 오메가라 이런 걸 달고도 쓸 일이 없다는 게.”

“…….”

“제법…… 사치스러운 사이즈거든요.”

먼저 장난을 건 사람은 나인데, 왜 항상 부끄러운 것도 내가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그가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나를 침대에 눕혔다.

“만지는 건 나중에 더 해요. 지금은 나도 급하니까.”

바지와 속옷을 벗은 그가 나를 덮치듯 위에서 내리눌렀다. 맨 살결이 스치는 감각은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기분 좋았다. 턱 언저리에 입술을 문지른 그가 곧장 가슴께로 위치를 옮겨 갔다.

“으응…….”

뜨뜻한 혀가 톡 튀어나온 유두를 짓눌렀다. 반대쪽은 길쭉한 손가락이 꼬집듯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간지러운 감각을 참지 못해 이불깃을 움켜쥐자, 그가 조금 더 세게 가슴께를 빨아들였다.

“……흐.”

분명 평소엔 있는 줄도 몰랐던 부위였다. 그런데 그가 몇 번이나 만졌다고 이렇게까지 몸이 근질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는 집요하다 싶을 만큼 돌기를 깨물다가 따끔한 감각이 들 즈음에는 혀를 세워 괴롭히던 부분을
문질렀다.

“거기, 그만……. 흐응…….”

한 번에 터지는 쾌감은 아니었지만, 미칠 것 같은 건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트는


나를, 그는 별반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음에도 소용없었다.

“아, 흐으……!”
쪽쪽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부근에 얼룩덜룩 자국이
남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또 병에 걸린 사람처럼 반점을 매단 채 며칠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권이도는 양껏 가슴을 희롱한 뒤에야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가슴 위편을 잘근잘근 깨물고 쇄골과 어깨
부근까지 빈틈없이 빨아들였다. 그러다 팔 안쪽에 다다라서는 여린 살을 콱 깨물어 잇자국까지 남겨 놨다.

“하아…….”

이러다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집요한 행위였다. 권이도는 내 모든 부분을 맛보려


들었고, 실제로 망설일 것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온통 권이도의 흔적으로 가득 차서, 이제는 향수 냄새가 아닌
그의 페로몬에 범벅될 정도였다.

“그만 빨고…….”

나는 허리를 들썩여 그에게 하반신을 문질렀다. 머릿속이 몽롱해서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바짝


발기한 성기가 서로 문질러지자, 그 또한 눈가를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넣어 달라고?”

가라앉은 목소리는 진작 흥분에 뒤덮인 상태였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 그가 아랫입술을 쪽 빨고


멀어졌다. 그러고는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양 무릎을 어깨에 걸쳤다.

하반신이 쑥 들어 올려졌다. 무얼 하는 건가 싶어 눈을 깜박이는 찰나였다. 허벅지에서부터 입술을


미끄러뜨린 그가 바짝 발기한 성기의 뿌리 부근을 가볍게 깨문 것이다.

“잠깐, 권이도 씨……! 흡.”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성기를 한입에 물었기 때문이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에서 그의 혀가 귀두를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그걸로 모자라, 그는 한 손을 내 엉덩이 사이로 가져왔다. 이미 흠뻑 젖어 버린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그가 내벽을 덧그리며 안쪽을 헤집었다. 헤매는 기색 없이 정확히 한 지점을 자극했을 땐, 허리가 튀어
오를 만큼 강렬한 쾌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그는 입 안쪽 깊은 곳까지 성기를 삼키고는 목구멍을 조이며 혀로 기둥을


옭아맸다. 아래를 꿰뚫은 손가락은 벌써 한 개에서 두 개로 늘어난 다음이었다.

“아, 안 돼…….”

허우적거리던 손으로 권이도의 머리를 붙잡았다. 하반신이 들어 올려진 탓에 그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나, 음모를 건드리는 콧대 따위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외설스러웠다.

“그, 그만…… 흐으.”

정신없이 다리를 오므렸다. 그는 고개를 움직이며 내 사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뒤를 푸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기에, 앞뒤로 오는 자극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뒤에서 나는 건지 헷갈렸다. 어디까지 넣나 싶을 만큼 깊이
성기를 머금은 그가 목구멍을 꽉 조이며 손가락을 내벽을 꾸욱 짓누른다.

“그만, 제발…… 권이도 씨, 흡…….”

절정에 마구잡이로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앞이고 뒤고 죄 권이도의 손안에서 놀아나니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제는 한계라고 간곡히 애원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손가락을 핑그르르 돌릴
뿐이었다.

“아, 아……!”

끝내, 나는 그의 입 안에 길게 사정했다.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고,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릴 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손가락이 들어온 아래쪽을 한껏 조이자,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흐으…….”

그의 입에서 성기가 빠져나오는 광경은 꿈에 나올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선단에서부터 이어진 액체가 발간


혀를 따라 길게 늘어졌다. 입 안 가득, 내가 싸지른 정액을 머금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다. 권이도가 머금고 있던 정액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것이었다.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는 사이, 그는 번들거리는 귀두를 입술로 머금으며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여전히 맛은 없군요.”

- 다음 화에 계속

38 화. Quelques Fleurs(10)

“그걸 왜…… 흣…….”

깊이 들어왔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그걸 대체 왜 삼키냐고 항의하려던 찰나였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내벽이 아쉬운 것처럼 한껏 조여들었다.

“가끔 맛있을 것 같거든요.”

“…….”

“정세진 씨 물건이 워낙 예쁘게 생겨서.”

예쁘다고 표현할 만한 부위가 아니었다. 색이 좀 연할 뿐,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내 허벅지 안쪽에 짙게 키스 마크를 남겼다.

더럽히고 싶다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을까. 내 몸이 도화지도 아니고, 뭘 저렇게 울긋불긋하게 칠해


놨나 싶다. 흉터 하나 없던 몸이 이제는 온통 지저분해졌다.

“……누가 보면 전염병 걸린 줄 알겠어요.”

“나 말고 여길 누가 본다고.”

연달아 다리를 깨물던 권이도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허벅지는 둘째치고, 상반신은
옷을 입으면 교묘하게 가려지는 위치였다. 느슨하게 파인 니트를 입어야 쇄골 근처가 좀 보이는 정도.

“넣을 거니까 힘 풀어요.”

그는 내 다리를 팔꿈치에 걸치고 한 손으로는 제 성기를 붙잡아 회음부에 길게 문질렀다. 고환 아래를 꾹


눌렀다가 흐물흐물하게 풀린 구멍까지 천천히 옮겨 간다. 귀두 끄트머리를 입구에 맞춘 그가 느리게 안으로
전진했다.

“……아흑.”

밑이 억지로 벌어지는 감각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도 버거웠으니,


맨정신인 지금은 얼마나 아득하겠는가.

“아…… 잠깐, 잠깐만…….”

그래서 간절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늘 서늘하던 피부가 지금은 뜨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단한
살갗을 콱 움켜쥐자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까딱했다.

“정세진 씨.”

흐리멍덩한 시야로 그를 바라봤다. 정염에 뒤덮인 두 눈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할 정도로


본능으로만 가득했다.

“심호흡해요. 최대한 길게.”

“…….”

“후우, 하고.”

끙끙 앓다 말고 그를 따라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숨을 내뱉자마자 그가 한 번 더 하라는 듯


가볍게 눈짓한다. 이러면 좀 덜 아픈가.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번 후우, 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

푹, 미끄러지듯 굵직한 성기가 단숨에 삽입됐다. 잠깐 방심하고 있던 터라 아래쪽에 힘을 줄 새도 없었다.


망설임 없이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그는 나직이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큿.”

내벽이 한껏 조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물밀듯 밀려든 압박감은 눈앞이 새카맣게 점멸하기에 충분했다. 그 또한


빠듯한 내벽이 버거웠는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흐읍.”

부드럽게 내려앉은 입술에선 달뜬 숨결과 페로몬이 넘어왔다.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듯 그는 한참이나


혀와 호흡을 섞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고, 마비된 것 같던 아래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흐,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다. 정확히는 무섭고 버거웠다. 몸이 잘못되는 기분이었는데, 어리광처럼


내뱉은 말에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응, 괜찮아.”

가벼운 입맞춤이 두어 번 입술에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뺨으로 향했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닦아
주기도 한다. 이윽고 상체를 바로 세운 그가, 칭찬하듯 내 아랫배를 다독였다.

“잘했어요.”

“……흐으.”

쪼그라들었던 폐가 서서히 펴지는 듯했다. 나는 그의 팔뚝을 꼭 붙든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겨우겨우 숨을 헐떡이는데, 그가 손바닥을 허벅지로 미끄러뜨렸다.

“섹스를 좀 자주 해야겠죠.”

“……아흣!”

덜컹, 몸이 흔들렸다. 억지로 아래를 끼워 맞춘 그가 가볍게 허리를 튕긴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깜박이는데, 권이도가 다시 한번 허리를 가볍게 들썩였다.

“기껏 길을 텄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곤란하잖아요.”

“흣, 아, 그만…… 아으…….”

꾸욱, 꾸욱, 안쪽이 억지로 벌어졌다. 이미 가득 찬 배 속을 그는 여유롭게 헤집기까지 했다. 하,


웃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낸 그가 내가 느끼는 부분을 지그시 짓눌렀다.

“흐으응…….”

찌릿찌릿한 쾌감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었다.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는 내게, 그는 자비 없이 다시 한번 허리를 쳐올렸다.

“하읏!”

푹, 삽입된 성기가 같은 부분을 자극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남은 건 오로지 성감뿐이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손에 힘을 주자 그가 내 팔을 제 목에 둘러 줬다.

“아…… 흐응, 흣…….”

지난번과는 달리 느린 시작이었다. 권이도는 적응할 시간을 주려는 듯 반쯤 빼내었다가 같은 곳을


자극하길 반복했다. 여유롭고 느긋한 행위였으나 그의 페로몬에 범벅된 나로서는 그렇지 못했다.

“거기, 흣…… 조금만 빨리…….”

그래서 안달이 났다. 이미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을 아는 몸이다. 첫 삽입은 버거웠을지언정 지금은
그에게 꼭 맞춘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다리를 탄탄한 허리에 감고 칭얼거리듯 하반신을 비비적거릴 정도로.

“빨리, 흐응, 더…….”

“보채지 마, 여기 아직 덜 풀렸어.”

권이도는 그런 나를 내리누르며 여전히 더딘 움직임을 반복했다. 최대한 길을 내려는 것처럼 깊이 삽입한


채 허리를 둥글게 돌리기도 했다. 단번에 끝까지 밀어 넣은 건 본인이면서, 이제 와 다칠 걸 걱정하는 모양이다.

“아응, 흐, 거기…….”

“……여기? 응?”

쿡, 내벽을 건드린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내리찧듯 성기를 깊숙이 삽입한다. 배꼽 아래를
길게 긁어내리는 감각에 그의 등 뒤에서 발목이 교차했다.

“아, 아……!”

또 사정감이 들었다. 그는 한 번도 안 했는데, 나 혼자 세 번이나 절정에 다다르게 생긴 것이다. 그를


꼭 끌어안은 채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자, 권이도가 내 머리칼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아흣!”

묽은 정액이 배 언저리에 터져 나왔다. 사정을 하는 동안에도 민감해진 성기가 그의 몸에 문질러졌다.


그는 나직이 신음을 흘리곤 잠깐 조여드는 내벽을 즐기는 듯했다.

“……하아.”

포식자와도 같은 숨소리였다. 그는 내가 싸지른 정액을 손으로 훔쳐 내곤 한쪽 다리를 붙잡아 몸을


옆으로 돌리게 했다. 하릴없이 삽입 각도가 달라진 탓에 굵은 성기가 이번엔 다른 곳을 자극했다.

“아, 으으…….”

등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무릎을 세우고 상체를 바로 한 권이도가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그에게 안길 수 없는 자세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베개에 뺨을 문지르며
이불깃을 움켜쥐는 것밖에 없었다.

“아응, 흐, 천천히…… 흣…….”

찌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비 오듯 쏟아진 페로몬은 이제 열기인지 페로몬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권이도가 밀려들어서, 그에게 흠뻑 젖어 버린 기분이었다.

퍽, 퍽, 그가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기운이 쭉 빠져 버린 와중에도 열락에 취한


몸은 접합부를 조였다가 풀길 반복했다. 마치 예전부터 쭉 이어져 온 행위인 것처럼 적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배가, 흐, 배가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해, 세진아.”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덮었다. 여전히 한쪽 다리는 높이 들어 올린 채 단단히


고정한 상태였다. 깊숙이 뿌리 끝까지 삽입한 그가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꾸욱 눌러 왔다.

“여기?”

“잠, 아, 안 돼, 싫, 흐읏……!”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몸을 뒤집으려고도 해봤지만, 그는 붙잡은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저 삽입할
때마다 배를 꾹꾹 누르며 터질 것처럼 아래를 자극했을 뿐.

“제발, 흑, 잠깐만, 아, 아흣!”

푹, 푹, 안쪽을 꿰뚫는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지나치게 차오르는 희열에 다리를 허우적거리자, 그가
자세를 고치려는 것처럼 성기를 빼내었다. 잠깐 쉴 시간을 줄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침대에 엎드리게 한 후 내
양 손목을 머리맡에 고정했다.

그리고 뒤에서 나를 덮친 채로 다시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하으응!”

찌르르, 묵직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양손이 고정된 탓에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도망칠 곳이라도 있으면 몰랐으련만, 납작 엎드린 몸을 옴짝달싹하기도 쉽지 않았다.

“흐, 아, 권이도, 흑…… 권이도 씨…….”

“……흣, 얘기해. 세진아.”

“흐으으, 미칠 것, 같…… 흐읏…….”

무게를 실은 삽입만큼 자극이 극심한 것도 없다. 푹, 푹, 밀려 들어온 성기는 건드리는 족족 성감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어깻죽지에 이를 박아 넣은 채로 빠듯하게 벌어진 안쪽을 연신 쳐올렸다.

“아, 아응, 흐으!”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그는 제 다리로 손쉽게 나를 제압했다. 발목으로 종아리를 누르며 느슨하게


페로몬을 풀어 낸 것이다. 체격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일까. 잠깐 시도했던
저항은 금세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 미치겠, 는데, 후으…….”

좋은데, 좋은 만큼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뇌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몽롱한 눈앞엔 뵈는 게 없었고, 그가 날개뼈를 깨무는 감각조차 쾌감으로 느꼈다.

“……흐, 으.”

“하, 씨발…….”
그는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꽉 붙잡은 채 속도를 올렸다. 그가 내뱉는 욕지거리에 놀랄 틈도 없었다.
퍽, 퍽, 거칠게 이어지는 삽입 끝에 나는 또 한 번 이불에 묽은 정액을 질질 흘려야만 했다.

“하으…….”

동시에, 움찔거리는 내벽에 뜨거운 액체가 뿌려졌다. 아래를 바짝 밀착한 권이도가 내 안에 파정한
것이다. 내벽을 꽉 들어찬 성기가 꿈틀거리며 길고 진한 사정을 이어 갔다.

우성 알파답게, 그는 배가 부를 만큼 많은 정액을 쏟아 냈다. 만약 노팅했더라면 이 한 번으로 권이도의


애를 배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벽이 움찔움찔 그에게 들러붙고, 온몸 가득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

“…….”

등 뒤에서 쿵쿵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하아, 숨을 몰아쉬는 동안 권이도는 보이지 않는 부위에 연신


입을 맞춰 왔다. 아마 앞과 마찬가지로 뒤 역시 그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할 것이다.

“물먹은 솜처럼 됐네요.”

그는 축 늘어진 나를 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결합 된 아래는 떨어뜨리지 않은 채였다.


내가 흘린 애액과 권이도가 사출한 정액, 그 두 가지로 젖은 안쪽은 권이도가 조금 움직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힘들어요?”

“……하아.”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아니었는지 그는 내 목덜미에 쪽, 입을 맞추고


사근사근 질문했다.

“예의상…… 의견을 묻죠.”

“……의견이요?”

의견이라니. 겨우 고개를 젖혀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은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몽롱하게 풀린 두 눈이 여전히 흥분감이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 줬다.

“어떤 자세가 편하겠어요?”

“……자세라면 어떤, 으응.”

“나는 아직 한 번밖에 안 쌌는데…….”

“아…… 흣, 잠시만…….”

“지친 건, 정세진 씨니까.”

“……흐.”
“정세진 씨가…… 후, 편한 자세로 해야죠.”

말을 이으면서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처럼 격한 행위는 아니었고, 뭉근히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정도였다. 더 이상 배출될 정액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지도 않다.

“저는 그냥…….”

느리게 운을 떼고 잠깐 뒷말을 망설였다. 내가 내 손으로 무덤을 파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힘이 드니, 이쯤 그를 말리는 게 좋을 텐데. 아득히 멀어지는 환락은 그 무엇보다 중독성 넘치는 것이었다.

“……그냥?”

그는 대답을 재촉하며 내벽을 슬슬 문질렀다. 일부러 자극이 강한 부위는 미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것이 지나치게 커다란 탓에 꾹꾹 눌리긴 했지만.

“그냥…….”

“…….”

“권이도 씨가…… 하아, 편한 대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푹, 들어온 성기가 경련하는 내벽을 거세게
자극했다. 그의 말대로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나는 허리를 간헐적으로 떨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성감이 차오르는 건 금방이었다. 권이도는 딱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며 내 몸을 여기저기 건드렸다. 손을


앞으로 넣어 가슴을 꼬집거나, 배꼽 아래 발기가 풀린 성기를 조몰락거린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물론, 나를 달뜨게 하는 데엔 화사하게 퍼진 페로몬 역시 한몫했다. 비를 맞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처럼,


그가 흥분할수록 달큼한 향내가 자욱이 스며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았음에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욕이 차오를 정도였다.

“후으…… 읏…… 거기, 아으…….”

“또 입 안 다치려고.”

자꾸만 혀를 깨무는 나를 보고 권이도가 입술 틈새에 억지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내가 언제 또 입 안을


다쳤더라. 그런 생각 역시 잠시였다.

그는 내 상체를 일으켜 세우곤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미 지쳐 버린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너른


품에 단단히 고정해 놓았다. 스르륵 배를 타고 내려간 손길이 축 늘어진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흣…… 그거, 싫, 아읏…….”

“여기 만지는 거 싫어?”

고개를 끄덕였지만, 권이도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물조물 손장난을 치며 조금 더 속도를 높여


허리를 움직였을 뿐. 다른 손은 여전히 내 입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턱 언저리로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으응…….”
기다란 손가락이 내 혓바닥을 잡아 빼내었다. 내가 숨을 헐떡이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권이도가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뒤로 돌리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난잡한 키스였다. 타액은 줄줄 새고 혀가 섞이는 소리마저 적나라했다.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그는 넣어도 넣어도 부족하다는 듯 제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숨 쉬는 연습을 다시 해야겠네.”

입술을 떼어 낸 그가 흘러내린 타액을 혀로 핥아 줬다. 헐떡거리며 지쳐 있는 나를 보고 장난스럽게 뺨을


깨물기도 했다. 그 표정이 정말 귀여운 것을 보는 듯해서, 자꾸만 기분이 미묘하게 간질거렸다.

그는 이후에도 오랜 시간 나를 붙잡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사과를 건네진 않았지만, 무언가 갈망하는


느낌인 건 분명했다. 이따금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던 권이도는 끝내 두 번째 사정을 할 땐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왔다.

“……세진아.”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치 이 부름을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 본 것처럼. 얼핏 기억


하나가 스친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날, 그는 총 세 번 사정했고, 날이 밝을 즈음에야 나를 놓아줬다. 몸이 잔뜩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기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나를 온전히 감싸는 체온이 마음에 들어서, 종국에는 내가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권이도에게 꽤 많이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권이정과의 기억을 털어 버릴 수 있던


것도, 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권이도가 아니었다면, 그 기억은 또 다른 악몽이 되어
매일 밤 나를 괴롭혔겠지.

창립 기념식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는 권이도와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평화로운 마무리였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그가 권이정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9 화. Origine du parfum(1)

열네 살. 아버지에게 입양되고 5 년 뒤, 중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이미 정철호 회장의 입양아로 유명하던 나는 입학과 동시에 여러 유명세를 치렀다. 같은 학생들은 물론,
나를 맡게 될 선생들까지 내게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낸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단순히 ‘재벌 가의 입양아’
라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성 오메가래.’
알파와 오메가의 비율은 전국적으로 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대다수는 열성이었고, 우성에
속하는 건 그중에서도 또 3%였다. 일반적으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기에, 나를 신기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이랑은 다르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그 말을 과장 없이 하루에 세 번씩은 들었다. 신입생 대표로 연설을 할


때도, 학기 초 어영부영 임시 반장이 되었을 때도, 그리고 첫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던 그때도.

‘부럽다, 나도 특이 형질 되고 싶어.’

내가 노력해 이룬 모든 건 결국 특이 형질이기에 얻어 낸 무언가로 변질됐다. 물론 근거 없는 평가는


아니었다. 특이 형질이 베타보다 월등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러한 기대치만큼 나에 대한 잣대가 엄격해졌다는 게 문제였지.

무언가 잘하면 오메가라 그렇다는 평가를 받았고, 무언가 실수하면 특이 형질도 대단한 건 아니라는
힐난이 따라붙었다. 그래 봤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다르지 않은데, 마치
외계인이라도 보는 양 신기해하곤 했다.

‘쟤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물론 그 당시의 나는 몇몇 아이들이 내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직접적인


괴롭힘이 없었을 뿐, 몇 번 작은 심술이 뒤따르는 일도 있었다. 뭐, 결국엔 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질
갈등이었지만.

‘쟤는 진로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해신금융그룹’과 ‘우성 오메가’ 타이틀은 꼬리표처럼 내 뒤를


따라다녔다. 내가 진학할 대학, 앞으로의 내 미래, 그러한 것들이 기정사실화되어 공공연하게 낙인찍혔다.
진로라는 걸 고민해 볼 시간도 없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전진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부러움과는 달리 정작 나를 기다리는 미래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만들어


준 자리는 단순히 해신의 번성을 위한 밑바탕일 뿐이었으니. 그곳에 내 의견과 선택은 눈곱만큼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게 스물아홉, 나는 권이도와 결혼했다. 아주 어릴 적에 품어 본 조향사라는 꿈만이 내가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래 희망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단 한 번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 적은 없었지만.

“……향수 공방이요?”

창립 기념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함께 식사를 이어 가던 권이도가


대뜸 내게 질문했다. 혹시 향수 공방에 다닐 생각이 없느냐고.

“네, 정세진 씨가 향수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나를 바라봤다. 오늘도 말끔한 차림새에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모습이었다.


반듯하게 맨 넥타이가 답답해 보일 만도 한데, 오히려 금욕적인 분위기까지 풍겼다.
“아, 그때 그거…….”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권이도와 대화를 나눴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가 사준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던 날, 한강의 야경을 보며 권이도가 물어 왔던 것.

‘정세진 씨는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일주일을 줄 거냐고 되묻자, 향수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말 없이 침묵을 유지했으나, 그는 그게 긍정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괜찮은 조향사가 있는데, 향수 공방에서 원데이 클래스 비슷한 걸 한다더군요. 정세진 씨만 괜찮으면
경험 삼아 다녀오는 것도 좋겠죠.”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고 했던가. 정말 빈말로 꺼낸 얘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가 여태까지


본인 입으로 뱉은 말 중 지키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긴 했다.

“나중에 얼마나 나쁜 짓을 하시려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게 보여 주는 섬세함에, 환심을 사겠다던 그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땐 내게 바라는 게 있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게 ‘제 편을 들어 달라.’는 요구와
상통할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겠네요.”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하자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내가 제안한 걸 정세진 씨가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는 또 처음이군요.”

“…….”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거절만 해왔던가. 아니, 어쩔 수 없었다. 권이도의 제안은 대체로 원치 않는


부담감을 동반하곤 했으니까. 다 받았다간 제대로 소화도 못 시킨 채 배가 빵빵하게 차버릴 거란 생각이 들 만큼.

“……아무래도 관심 있는 분야였으니까요.”

“그래요,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그는 장난이었다는 듯 가볍게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는 나긋나긋 뒷말을 덧붙였다.

“생각 있으면 오늘 당장 다녀와도 됩니다. 대신 다녀올 땐 이 팀장이랑 같이.”

이태성과 함께 갈 필요가 있을까. 과보호가 아닌가 싶었는데,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감시가 아니라 경호입니다.”

“…….”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이번엔 농담이 아닌 듯했다.

“……그때 그건 실언이었습니다.”
“글쎄,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표현을 안 믿어서.”

안 어울리게 뒤끝이 길다. 감시를 할 거면 CCTV 를 달라는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다니. 멋쩍게 시선을
피하는 내게,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부담 갖지 말고 한 번 해봐요. 일반인 상대로 하는 거라 설명도 자세할 거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을 겁니다.”

“음…….”

퍽 끌리는 제안이었으나 이래저래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에게 미안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막상 판을 깔아 주니 머뭇거리게 되는 정도.

“하루만 생각해 봐도 될까요?”

뭐, 그렇다고 길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내게도 퍽 흥미로운 제안이었고, 물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니
뒤처리가 곤란하지도 않다. 그의 말대로 감금당한 것도 아닌데, 가볍게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요. 일주일도 줬는데 하루 정도야.”

다행히 권이도는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거절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그 또한 짐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마저 식사를 이어 갔고,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와 관련된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식사를 모두 마친 뒤엔 권이도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다. 권이도는 문을 나서기 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다음 주에 혜율이가 올 겁니다.”

“혜율이라면…….”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의 이름이자, 권이도의 누나인 권이경의 딸. 몇 안


되는 여자 알파이자 약혼식 날 제 얼굴만 한 스테이크를 가지고 씨름하던 아이.

“권이도 씨 조카분이 오시는 겁니까?”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내가 감히 무시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존칭을 사용했는데, 권이도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그런 나를 재밌어했다.

“그냥 혜율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원래 달마다 한 번씩은 그림을 보러 오는데 이번에도 그럴 때가


됐네요.”

권이도가 말하는 그림은 아마 그가 종종 사들이곤 하는 유명 화가의 작품일 거다. 호가 몇십억이


넘어가는 그림들이었는데, 딱히 취미가 있어서라기보단 절세가 목적일 게 분명했다. 그림은 비과세 품목이니만큼
아버지 역시 이따금 뭔지도 모르면서 대뜸 구매하곤 했다.

“혜율이가 그림을 좋아하나요?”

“제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보는 눈이 있긴 하더라고요.”


권혜율의 아빠인 신대웅은 선호재단이 소유한 혜율미술관의 관장이었다. 본인도 미대를 나온 데다
예술적인 소양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배우자인 권이경과 눈이 맞은 것도, 함께 전시회를 감상하다 그런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매달 놀러 올 정도면.”

“뭐…… 평범하게?”

평범이라니. 그 무엇보다 권이도와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러고 보면 약혼식 날에 ‘매형’이라고


부르던 호칭도 썩 친근했었지. 권이정과는 달리, 다른 가족들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란한 사이인
모양이다.

“정세진 씨가 따로 신경 쓸 건 없고,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불편하면 인사도


안 해도 됩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배려는 고맙지만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라 할지라도
머무는 집에 놀러 온 손님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권이도 씨가 출근한 사이에 오는 거죠?”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

“혜율이도 온실을 좋아하면 좋겠네요.”

살며시 그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를 이 넓은 집에 홀로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고용인이 함께하겠지만, 어른 된 도리로서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 아이를 좋아한다고 했었죠.”

권이도는 바람 빠지듯 실소를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그럼 혜율이 오는 날 부탁 좀 할게요. 말썽을 부리진 않을 겁니다.”

권혜율이 얼마나 의젓한지, 그건 이미 약혼식 날 보았었다. 그 긴 행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단 한 번도


칭얼거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가정교육을 꽤 엄하게 받았겠지.

“오늘도 늦으세요?”

이제는 정말 권이도가 출근할 시간이었다. 그는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받고 미안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기다리지 말고 식사해요. 이번 주까지는 늦으니까.”

창립 기념식이 끝난 뒤에도 권이도의 바쁜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나아진 건, 나와의 아침 식사를
다시 함께하기 시작했단 점일까. 언제 퇴근했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완벽한 차림으로 내려오곤 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그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권이도는 살짝 내게 손을 뻗었다가 뺨
언저리를 살짝 문지르고 멀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아쉽단 표정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외에 다른 스킨십은 없었다.

“다녀올게요.”

권이도가 집을 나서는 뒷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참 익숙해지지 않았다. 뭐가 아직도 이상하냐면, 그가


내게 등을 돌리는 순간 느껴지는 찌르르한 통증 따위가. 그리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내려앉는 고요한 정적 따위가.

“…….”

습관적으로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 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끼게 된 그와의


약혼반지였다. 나한테는 짙게 자국이 남았는데, 나중에 보니 정작 권이도한텐 아무것도 안 남았더라. 아마,
집에서는 반지를 끼고 나간 그가 밖에서는 빈손으로 다니기 때문이겠지.

“……여전히 속을 모르겠네.”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에겐 미묘한 선이 느껴졌다. 이미 갈 데까지 가놓고, 정작 손을 댈 때는


망설인다는 점 따위가. 약혼 사실을 꼭꼭 숨긴다거나, 그럼에도 나까지 숨겨 놓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것도.
그리고 나를 감금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꿋꿋이 과보호하려 드는 점까지도.

물론, 권이정과 맞닥뜨린 날엔 그의 과보호가 빛을 발했었지만.

‘청소 중 팻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태성이 말하길, 사고가 있었던 화장실은 원래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곳 같다고 했다. 권이정과 내가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출입구를 막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태성을 저지했다고. 하는 수 없이 권이도를
불러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판단력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요. 상사한테 연락하기 힘들었을 텐데.’

‘아뇨, 애초에 비상시에 연락하라고 전무님께서 개인 번호까지 주셨습니다.’

내가 권이도의 행동을 과보호라고 부르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비상 상황이 생길 일이 뭐가 있다고. 실제로 위험한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모두의 예상 밖이었을
텐데.

‘……이태성 씨를 막은 직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권이정의 처사를 묻는 대신, 그 직원들의 처사를 물었다. 본능적인 촉이었는데, 권이도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역시나 이태성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다 잘렸습니다.’

‘…….’

동정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내게 큰일이 날 뻔했는데 그걸 도운 사람들까지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역시 단호한 사람이구나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을 뿐.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뭐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깊이 고민해서 답이 나올 문제면 애초에
고민거리가 아니었겠지.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고, 지금까지 그랬듯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만인걸.

나는 그저, 지금 이 평화가 깨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날이 많이 따듯해졌지만, 온실은 여전히 일정한 온도를 유지했다. 여름이 되면 사용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이 안이 쾌적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이곳에서의 미래를 그리게
되었는지, 그 사실은 조금 새삼스러웠지만 말이다.

“향수 공방 말씀입니까?”

“예, 만약 다니게 되면 이태성 씨가 경호로 같이 갈 겁니다.”

오늘 고용인이 준비한 차는 새빨간 색감이 매력적인 장미 꽃차였다. 불그스름한 꽃잎이 둥둥 떠다녀서


눈으로 즐기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이태성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향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는 듯했다.

“그게 저한테 선택권이 있습니까?”

향수 공방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자, 이태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없지만, 예의상 한 번 물어봤습니다.”

“…….”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이태성이 더 편해져서


큰일이었다. 원래도 그다지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뭐…… 그리고 이태성 씨 의견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의견이라면…….”

가만가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온기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차근히 전해졌다. 온통 꽃향기가
감도는 와중에 짙은 장미 향기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그런…… 향수 만드는 일과 제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얼굴이었다.

“그게 어울려야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나는 뭘 망설이는 걸까. 그의 말대로 어울려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뭐


대단한 걸 하려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한 번 체험 삼아 다녀오면 되는 것을.
“오히려…… 잘 어울리시는데요.”

이태성은 여전히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와 찻잔을 번갈아 보며 한쪽 눈썹을 팍 찌푸리기도


했다.

“안 어울린다는 표현은 저랑 이 찻잔에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의도하지 않았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리 묻는 이태성이 정말 솥뚜껑 같은 손으로 찻잔을 쥐고 있어서. 손


크기는 비슷한데, 권이도가 들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라.

“저는 온실에 있으나 외출하나 그게 그겁니다. 오히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편이 좋긴 하고.


본부장님께서 편한 쪽으로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명쾌한 답변이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덮어 놨던 책 표지로 시선을 돌렸다. 불어로 된


소설책이었는데, 내용이 빼곡한 탓에 아직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아마 오늘까지 읽으면 종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 한 번 다녀 볼까.”

- 다음 화에 계속

40 화. Origine du parfum(2)

그가 애써 신경 써 준 것이니 여러모로 그게 좋을 터였다. 사실상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은


이미 기울었고, 자그마한 망설임이 남아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 큰 변화가 생기리라 기대하진 않지만, 가벼운
기분 전환 정도는 될 듯했다.

“만약 가게 되면 언제 가십니까?”

“글쎄요. 권이도 씨는 오늘 당장도 괜찮다던데.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쯤?”

뻐근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요새 불면증이 다시 도진 탓에 조금만 눈을 오래 쓰면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악몽을 꾸진 않았는데, 수면제를 다 털어 먹어도 아침까지 잘 수가 없었다.

잠이 잘 오는 향을 만들면 좋을 텐데…….

사실, 불면증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매일 저녁 권이도의


페로몬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질 수 없으니, 그와 비슷한 냄새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태성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내게 남은 수면제 개수를 헤아리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조만간 김 실장에게 연락해야 할 듯했다.

***

권이도는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퇴근하지 않았다. 남은 수면제를 털어 먹은 게 새벽 3 시, 그 후 눈을


뜬 건 6 시였으니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한 게 된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식탁에 앉는 나를 보고, 그가 삐쭉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을 못 잤습니까?”

“네, 뭐…….”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며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세수를 하며 얼핏 봤는데 오늘은 정말 안색이 좋지


못했다. 권이도가 보면 신경 쓸 텐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좀 설쳤습니다.”

“조금 설친 게 아닌 것 같은데.”

권이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가볍게 묻기도 했다.

“아직도 불면증이 심합니까?”

“그냥…….”

나는 대충 얼버무리려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콕 집어서 ‘불면증’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하는 것만 들으면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뉘앙스다.

뭐…… 불면증 정도는 현대인에게 종종 있는 고질병이긴 하니까.

“심한 건 아니고. 가끔 그러네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하게 말했다. 심각하다고 말해 봤자 별로 득 될 것이 없었다. 권이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죠.”

“예?”

“저녁 먹지 말고 있어요. 빨리 올 테니까.”

분명 이번 주까지는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일찍 들어온다면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오늘


즈음 김 실장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러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래서, 공방은 생각해 봤어요?”

“아, 네. 괜찮으시면 오늘 다녀올까 합니다.”

아침 메뉴는 연어를 통으로 구운 스테이크와 샐러드였다. 겉은 노릇노릇한데 나이프로 슥 잘라 보니


안쪽은 육즙이 그대로 살아 촉촉했다. 나는 반으로 잘라 놓은 방울토마토를 하나 찍어 먹고 그를 보며 눈가를
찡긋했다.
“물론 이태성 씨도 같이요.”

“잘 생각했어요.”

권이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턱을


까딱한 것이다. 표정 변화가 크진 않았지만, 평소에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웃을 때면 그 차이가 커다래 보였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으니까 편할 때 가면 돼요. 시간은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쪽도 일정이 있을 텐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가도 됩니까?”

“일정?”

그는 별소릴 다 한다는 듯 되물었다. 픽 코웃음을 흘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뻔뻔해 보였다.

“그런 건 다 비우면 그만이죠.”

“…….”

아무래도 두 번 갈 곳이라면, 오늘 가서 시간 약속을 정하는 게 좋을 듯했다.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일정을 확실히 해두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잘 다녀와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저 연락하라는 말은 이제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저


걱정스러운 뉘앙스는 늘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 가만히 마주친 짙은 눈동자까지.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겠네요.”

슬쩍 시선을 피하고 포크로 샐러드를 짓이겼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행동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저 간지러운 웃음을 흘리며 제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이 지나치게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권이도가 출근한 뒤, 나는 공방으로 가기 위한 간단한 채비를 마쳤다. 드레스룸에서 편한 옷을 찾아


갈아입고, 그에게 받은 차 키까지 챙겼다. 혹시 방해될까 싶어 서랍에 줄줄이 진열된 시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문 밖에는 이태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딱히 서두를 필요까진 없었는데, 빠릿빠릿하게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누른다.

“고생하시네요.”

“……인사차 하시는 말씀인 건 아는데,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태성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무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내가 하면


진담처럼 들린다는 이유였다. 진담이 맞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차는 어떤 걸 타고 가십니까?”

“저쪽에 세워 둔 걸…… 아, 운전은 제가 할 겁니다.”

나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와 함께 한강에 다녀온 이후 얌전히 주차만
해둔 새하얀 세단으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이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뽑으셨습니까?”

“아뇨, 받았습니다.”

부러움 반, 그리고 아연함 반. 누구에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상대가 누군지 눈치챈
듯했다. 하기야, 이 정도 고가의 차를 선물할 상대가 권이도 빼고 누가 있겠느냐마는.

“선물 받은 차를 남한테 맡길 순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향하자, 그가 차 앞에서 머뭇거렸다. 덩치가 커다래서 그런지 망설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가 조수석에 앉습니까?”

“예, 그럼 어디 앉습니까?”

그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그가 앉을 수 있는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었으므로.

“뒷좌석에 앉으셔도 되고요.”

“…….”

묵묵히 조수석 문을 여는 모습이 참으로 어색했다. 구태여 토를 달지 않는 걸 보니 그간 내게 적응이 잘


되었나 보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마냥 융통성 없는 줄 알았는데, 요새는 무인도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안전벨트부터 하세요.”

“…….”

차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는지, 이태성은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안전벨트를 매며 뒷좌석을


살피고, 정면을 보는 척 콘솔과 백미러도 살폈다.

“편하게 구경해도 되는데.”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말했는데, 오히려 움직임은 더 딱딱해졌다. 꼿꼿하게 정면을 보는 모습이 참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얌전이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은 터라 조신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것보다 비싼 차도 타 보셨으면서 뭘 그럽니까.”

“……그건 조수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운전하는 쪽이 더 긴장하지 않나?”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역시나 승차감 하나는 끝내주는


차였다. 이태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차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네요.”

권이도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조수석을 내어 줬단 사실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내가 직접


운전하고 싶었다면 별말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온실과 달리, 이 차는 이미 권이도와 공유한 공간이지 않은가.

“차를 본부장님이 직접 고르신 겁니까?”

“아뇨, 선물해 준 사람 센스예요.”

“역시…….”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 영 미묘했다. 역시 권이도가 대단하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골랐을 것 같진


않았다는 건지. 아마도 후자였는지, 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본부장님은 차에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았습니다.”

“맞아요. 잘 모릅니다.”

권이도는 내게 잘 맞는 차를 못 만났을 뿐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지만 그냥 대충


긍정하고 말았다. 차를 좋아한다기엔, 권이도가 골라 준 이 하얀 세단만이 유일하게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저는 가게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가 소개해 준 향수 공방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깔끔한 외관에 지하에는 주차장도


있어서 차를 가지고 왔음에도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자, 나무로 된
간판이 가장 먼저 보였다.

<Mon chou chou>

“이태성 씨, 그거 알아요?”

“모릅니다.”

그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퍽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여기 가게 이름, 몽슈슈라고 읽는데 거기서 슈(chou)가 양배추예요.”

“……양배추요?”

“네, 양배추. 직역하면 나의 작은 양배추.”

처음 프랑스어를 배울 때 교수님이 가장 먼저 해준 얘기였다. 정확히는 자기야 정도의 애칭이었지만,


나는 거기까지 말해 주는 대신 유리문을 밀었다. 이태성은 황당한 얼굴로 뚫어져라 간판을 보고 있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발랄한 인사가 들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벽면엔
갈색 병에 담긴 향료가 줄줄이 세워져 있고, 테이블엔 시향 용지와 여러 가지 공병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무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아늑하고 따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중요한 건, 유리문을 기준으로 안쪽엔 온통 향긋한 냄새가 가득하단 점이었다.

“…….”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꽃향기, 아니면 조금 더 상큼한 열매 향기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딱 기분을 전환하기에 좋은 정도였다. 향수 가게를 안 가본 것도 아닌데, 여긴 유독 공기가
청량했다.

“어…… 정세진 씨?”

“……아, 안녕하세요.”

멍하니 그 향기에 취해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쪽을 바라봤다. 조심스레 내 쪽을 살피던 여자가


활짝 해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오셨어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선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부드러운 재질의 하얀 블라우스에 통이 넓은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고 있다. 나보다 한참 작은 체구의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TV 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뵈니까 새롭네요. 저는 이희나예요.”

예쁜 이름이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가 내민 손을 붙들었다. 키가 작다 싶더니만 손 크기도 나보다


한참은 작았다.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요.”

베타인가.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아마 베타일 것이다. 그럼에도 잔뜩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게,


누가 봐도 향을 만드는 사람다웠다. 어릴 적에 ‘조향사’를 생각하면 어렴풋이 떠오르던 이미지대로였다.

“저, 근데 밖에 서 계시는 분은…….”

이희나는 슬쩍 유리문 바깥을 내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문을 등진 채 올곧게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이태성이었다.

“제 경호원인데, 앞에서 대기한다네요.”

“와…… 저렇게 서 계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텐데.”

그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나 코가 다 동글동글해서 인상도 둥근 게 아닌가


싶다. 슬쩍 내 눈치를 살핀 이희나가 넌지시 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씀드려도 되나요?”


편한 대로 하라고 말하자마자, 그는 금세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기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희나가 이태성의 팔을 툭툭 두드리고 선하게 웃으며 안쪽을 가리키는 모습만
보였지.

딸랑.

“안에서 기다리시기로 했어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태성은 묵묵히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동상처럼 문


근처에 서 있었지만 말이다. 내일부터는 책을 가져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가느다란 미성이 나를
불렀다.

“세진 씨는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그가 가리킨 건, 마찬가지로 원목으로 된 의자였다. 입구를 기준으로 앞면에 바 형식의 테이블이 있고,
이희나와 내가 마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 호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나는 의자에 앉아 이희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배우러 온 입장이니 선생님이 적당할 것 같은데,
이희나의 의견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가늘게 침음한 그가 민망한 얼굴로 콧잔등을 찡긋했다.

“대부분 배우러 오는 분들은 희나쌤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그가 하려는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나한테 그 말을 듣기엔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희나가 깔끔하게 호칭을 정리했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저도 세진 씨라고 부를 테니까.”

“그럼 희나 씨 정도로 부를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참으로 해말갛다. 구김살 없이 서글서글한 걸 보니,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불편하진 않을 듯했다. 그러고 보면, 권이도가 괜찮다고 표현한 사람(비록 이태성뿐이었지만)들은 정말 다
대하기 편했던 것 같다.

“경호원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 이태성을 바라봤다.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태성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온실에 처음 따라올 때도 그러긴 했지만, 가만 보면 정말 우직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팀장님,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하는 수 없이 한마디 덧붙이자, 이태성이 흠칫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아마 ‘팀장’이라는 호칭이 불만스러웠나 본데, 안타깝게도 무어라 항의하진 못했다. 그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뿐.

“이태성입니다.”
가만히 있던 나까지 민망할 만큼 딱딱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희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을 뿐.

“태성 씨도 괜찮으면 와서 같이 들으세요. 거기 가만히 서 계시면 힘들잖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서 있는 게 편합니다.”

대답은 단호함을 넘어 냉랭하게 들렸다. 내가 한마디만 하면 앉을 게 분명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굴고 싶진 않았다. 아마 이태성의 성격상 정말 서 있는 게 편하기도 할 거고.

“그럼 나중에 내키면 같이 들으세요. 거기 의자 있으니까 다리 아프면 편하게 앉으시고요.”

다행히 이희나는 별다른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무안함이나 짜증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묶었던 머리를 다시 고쳐 묶은 그가 책꽂이에서 얇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향수를 만들고 싶으시다고 했죠?”

노트엔 또박또박한 글씨로 여러 가지 용어가 적혀 있었다. 그는 노트를 돌려 내 쪽으로 내밀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우리 수업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세진 씨가 원하는 향을 하나 만드는 거예요.”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그리 적힌 글씨 깨알같이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기본적인 단어였기


때문에, 나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딱히 향수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샵에 있던 직원의 설명만
들어도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희나는 가만히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만들어 보고 싶은 향이 있으세요?”

- 다음 화에 계속

41 화. Origine du parfum(3)

첫 방문이었기 때문에 공방에서의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에 가까웠다. 이희나는 앞으로 진행될 수업에 관해
설명해 주고, 내킬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며
“괜찮아요. 두둑이 받았거든요.”라고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권이도는 정말 내가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왔다. 공방에 다녀와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고용인이


전달해 주는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현관으로 나왔다. 마침 실내로 들어오던 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는 나를 보고
잠깐 멈칫했다.

“다녀오셨어요?”

“…….”
짙은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입가를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짓는다.

“진작 일찍 올 걸 그랬네요.”

권이도는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잔잔히 풍기는 페로몬 덕에 기분이 느슨하게
풀렸다.

“이렇게 열렬히 맞이해 줄 줄 몰랐는데.”

그렇게 말한 권이도가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

순간, 키스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입술이 아닌 목덜미로 향했다. 주인을
맞이하는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은 그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향수 뿌렸습니까?”

“아…….”

괜히 멋쩍게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러나 했더니. 나한텐 뭔가 다른 냄새가 났던 모양이다.

“아뇨. 향료 때문에 그럴 겁니다.”

“향료?”

“네, 희나 씨가 숙제를 내줬거든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에게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향기가 난다면 목보다는 이쪽이 더 짙게 날


터였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그랬듯 손끝 냄새를 맡았다.

“종일 향료를 가지고 놀았더니 냄새가 뱄나 봐요.”

‘숙제를 하나 내드릴게요.’

공방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이희나는 내게 손가락만 한 갈색 병을 건네줬다. 저마다 다른 향료가 담긴


병이었는데, 표면엔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개수는 총 16 개였고, 그는 내게 각각 냄새를 맡고 설명을
적어 오라고 했다.

‘꼭 글이 아니어도 되고, 노래나 그림, 아니면 동작 같은 것도 괜찮아요. 대신 이 향을 맡아 본 적 없는


사람도 구분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자세하게 쓰는 게 좋죠.’

그리 어렵지 않은 숙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냄새를 맡아 보니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차이점을


모르는 건 아니었고, 그 차이점을 남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정도.

“아, 향료…….”

권이도는 의미 없는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눈썹을 삐쭉 치켜올린다.

“강사 이름이 이희나입니까?”


“…….”

아, 데자뷔. 분명 제 입으로 괜찮은 조향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황당해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름까진 몰라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참으로 뻔뻔스러웠다. 픽 웃음을 흘리자 권이도가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씻고 내려올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오랜만에 그와 함께한 저녁 식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한결 나았다. 권이도는 차분히 공방에서의 일을 들어 줬고,
괜찮으면 제게도 숙제한 노트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노트를 들고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그의 방엔


역시나 우성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 가득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기분이라, 잠깐 멍하니 방문 앞에 서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게 공방에서 받아 온 노트예요?”

권이도는 한 장 한 장 노트를 넘기며 내가 적은 내용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래봤자 ‘장미가 가득한


꽃밭을 지나가는 느낌. 날씨 좋은 날 햇빛 아래 잘 말린 옷 냄새.’ 따위의 내용인데 말이다. 서류를 검토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인 탓에, 괜히 보고서를 올린 직원이라도 된 양 긴장이 됐다.

내리깔린 두 눈이 찬찬히 내가 적은 글씨를 따라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꼰 모양새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일할 때와는 달리 차분히 내려온 앞머리가 반듯한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잘 썼네.”

고작 한마디였는데, 그 칭찬에 기분이 들뜨려 했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라


더욱 그랬다. 마지막 열여섯 번째 향료까지 읽은 권이도는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들어 올렸다.

“공방은 내일도 갑니까?”

“네, 평일에는 매일 가려고요.”

할 게 생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선 일주일 정도 기초를 배우기로 했다. 향을 구분하고, 차례대로


배합해 보며 원하는 향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희나가 말하길, 실제로는 더 복잡한 과정이지만 일단은 흥미
위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숙제는 방에서 했어요?”

“네, 테이블에서…….”

“공부할 방이 하나 필요하겠군요.”

권이도는 홀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공방에 얼마나 오래 다닐지도 모르면서 방까지 내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가 주제를 돌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거, 정세진 씨 페로몬이랑 비슷할 것 같네요.”

그러면서 가리킨 건 내가 세 번째로 쓴 향료였다. 병에 있는 라벨을 따라 ‘White jasmine’이라고


적은 뒤, 여러 비유적인 표현으로 향기를 적어 놨었다. 노트를 한 장 더 넘긴 그는 이번엔 ‘Warm Cotton’
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것도 그렇고.”

“…….”

별거 아닌 행동이었는데, 왜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목소리가 꿈꾸는 것처럼 감미로웠기 때문일까.

“그 옆에 있는 건 권이도 씨 페로몬이랑 비슷하던데요.”

‘Sandalwood’ 그렇게 적힌 페이지를 가리키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사실, 대충 가장 비슷한


걸 골랐을 뿐이고 그의 페로몬은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것만 봐도 머릿속이
녹진해질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한동안 내가 적어 놓은 향료를 가지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온실에 가면 이런 향기가


난다느니, 새로 뽑은 차에선 이런 냄새가 난다느니. 이것과 이걸 섞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향수가 나올 것
같다느니.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별거 아닌 주제로 온종일 수다를 떠는 고등학생들처럼, 영양가


없고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마련된 대화 자리가 마음에 들어서 사사로운 잡담을 주고받는
것조차 나쁘지 않았다.

“불면증에 좋은 향은 없습니까?”

“음, 있긴 한데…….”

진정 효과가 있는 게 라벤더였던가. 그렇지 않아도 불면증 때문에 이미 온갖 향초를 종류별로 써보았다.


물론 제대로 효과를 본 건 아무것도 없었고, 숙면에 도움이 된 건 딱 하나였다.

“가장 좋은 건 권이도 씨 페로몬이라서요.”

그가 페로몬을 뿌려 주길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생각난 김에 넌지시 이야기했을 뿐. 오늘은 네


덕에 잘 잘 수 있다. 그 정도 감사 인사를 하려고.

“오늘은 덕분에 푹 자겠어요.”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내게로 향해 온 시선에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이내,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그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내가 없어도 내 방에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됩니다.”

모순되지 않는가. 2 층 서재엔 들어가지 말라고 해놓고, 방에는 마음껏 들어오라는 게.


“잠이 안 오면,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도 되고.”

너그러운 허락이었으나 알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기껏 일하고 온 권이도가, 늘어지게 잠든 나를


보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게다가 멋대로 그의 공간을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권이도 씨는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그래서 장난스레 말했는데, 그의 미소가 미묘해졌다. 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군요.”

그의 시선이 침대를 향했다. 세 사람이 누워도 남을 만큼 커다란 침대였다.

“침대가 저렇게 넓은데…… 이제 와서 나랑 내외라도 하려고?”

“…….”

하기야, 알몸으로 뒹굴기까지 해놓고 한 침대를 쓰는 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단순히 섹스를 하는 것과


같은 곳에서 잠이 드는 건 좀 다르지 않나. 정신없이 몸을 섞은 기억은 있어도 연인처럼 나란히 누워 있던 기억은
없단 말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거절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승낙하기에도 곤란했다. 예의를 차려 웃음으로 때우려는 내게 그는 알


만하다는 듯 대꾸했다.

“절대 내 방에서 자진 않겠군요.”

이제 이 정도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가 눈치 빠르게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간이 늦었네요. 외출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그만 자도록 하죠.”

권이도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슬슬 졸리던 참이라 군말 없이


노트를 챙겨 일어났다. 그런데 방을 나서려는 내게 권이도가 대뜸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내 침대에서 자요.”

“……예?”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와 노트를 가져갔다. 다시 테이블에 노트를 내려놓은 그가 힐끗 침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처음이 어렵지, 한두 번 자다 보면 정세진 씨도 익숙해지겠죠.”

“…….”

텅 비어 버린 손이 움찔 떨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나를, 권이도는 은근한 목소리로


꾀어내기 시작했다.

“내일도 공방에 가야 할 텐데 푹 자두는 게 좋잖아요.”


“…….”

“내 페로몬이 가장 좋다면서,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생각입니까?”

사실,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없는 방에 들어오는 거면 몰라도, 권이도가 자고 가라고


권유했으니 꺼릴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모락모락 떠오른 민망함 정도.

“……같이 눕습니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과정이 지나치게 쑥스럽단 생각이 든다. 첫날밤을 치르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도 아닌데 말이다. 함께 이불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이토록 의식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나랑 더한 짓도 해놓고, 고작 그게 부끄러워요?”

권이도는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되묻곤 입가를 가린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으니. 서늘한 눈매가 곱게 휘어지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기대하게 했으면 미안한데, 오늘은 내가 할 게 좀 남아서.”

“…….”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부푼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안도감이 드는 한편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런 표정을 권이도에게 정확히 들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정세진 씨.”

가늘게 웃음을 흘린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을 매만지고 귀와 목 언저리를


차례대로 쓸어내렸다.

“오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무슨…….”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내 뒤통수를 고정한 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진 입술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

스르륵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문 그가 혀로 입술 틈새를 간지럽혔다. 내가 파르르


어깨를 떨자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는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지 않았다면 진작 휘청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를 단단히 옭아맨 그는 지금껏 하지 못한 행위를 다 하겠다는 듯 양껏 농밀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 또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각도를 바꾼 그가 장난스럽게 내


혀를 깨물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잘근거리다가 약을 발라 주듯 혀로 비비적거리기도 한다.

온종일 향긋한 향료와 있었는데도, 그에게 풍기는 페로몬이 가장 근사하단 생각이 든다. 숨결에 섞인
잔잔한 페로몬은 권이도 특유의 묵직함과 달큼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으응.”

나도 모르게 비음이 샜다. 그가 온 성감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물럭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봤자 고작


키스일 뿐인데. 열렬히 몸을 섞은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곧 있으면 또 히트 사이클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야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못다 한


행위를 아쉬워하듯 두어 번 같은 위치에 문대졌다. 한 뼘 정도 거리를 넓힌 그가 내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자고 있어요. 금방 일하고 올 테니까.”

이번엔 무어라 거절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도도 만족스럽게 나를 놓아줬다.
온몸 가득 스며든 알파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늑한 안정감을 안겨 줬다.

***

어느 정도 불편하리라는 염려와 달리, 나는 그의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푹신한 침구와


짙은 나무 냄새에 둘러싸여 가을비가 내리는 숲에 편안히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건조하디 건조한
페로몬인데, 어찌 이리 밀도 높은 향을 띠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잠이 든 다음에는 그 흔한 악몽 하나 꾸지 않았다. 요 며칠 불면증과 함께 나를 괴롭히던 마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수면제를 한 움큼 먹고도 고통스럽게 떠오르던 장면들은 권이도의 페로몬 한 번에
깨끗이 지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이렇게 단잠을 취하고 싶었다. 수면의 질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지라 하루만 제대로


자고 일어나도 몸 상태가 확 달라졌다. 이 정도면 염치 불구하고 매일 그의 방에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토록 개운하게 잔 게 얼마 만일까. 그런 생각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땐,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고슬고슬한 머리칼을 만지다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줬다.

“…….”

나는 무의식중에 그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눕고 멀어지려는 손을 다시 붙잡아


끌고 왔다. 그대로 이마를 가져다 대자,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리광은…….”

조그만 목소리였으나 귓가에 감기는 느낌이 참으로 또렷했다. 묵직한 음성은 중독될 것처럼 그 울림이
독특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았는지, 어슴푸레한 여명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만가만 눈을 깜박이자 기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살짝 간지럽혔다.

“내가 깨웠습니까?”
권이도는 섬세한 손길로 내 얼굴선을 살며시 덧그렸다. 이마에서 눈썹, 반쯤 감긴 눈꼬리, 뺨을 지나 턱
아래까지.

“아침 먹을 때까지 더 자요.”

“…….”

벌써 나가는 걸까. 잠기운이 남은 시야로 그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들어왔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평소와 달리 셔츠 단추마저 두어 개 풀어 놓은 채였다.

“……안 주무셨어요?”

결코, 자고 일어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안색이었지만 본능적인 촉이 주는


신호가 그랬다. 나를 침대에 재워 두고, 그는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뭐…… 일부러 안 잔 건 아니고.”

역시나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혹시 내가 있어서 불편했나 싶었는데, 마냥 부드러운 눈빛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귀한 것을 만지듯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어루만진 그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뭘 좀 생각하느라.”

밤새 무슨 생각을 그리했을까. 늘 빈틈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처연해 보였다. 속눈썹이 가지런하고


길어서인지, 아니면 가만히 다문 입술이 고와 보여서인지.

권이도는 예의 그 단정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는 시간을 아껴서 볼 게 있었거든요.”

- 다음 화에 계속

42 화. Origine du parfum(4)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 남은 잠기운에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밤새 봐야 할


거라니. 일이 많이 바빠서, 챙겨야 할 자료라도 있었던 걸까.

“지금은 다 보셨어요?”

내가 묻는 말에 권이도는 숨결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손을 거둬들이며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아뇨, 아마 평생 봐도 다 보진 못할 것 같군요.”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습은 고작 넥타이를 맬 뿐인데도 유려했다. 능숙하게 매듭짓는 모양새가


이상하리만치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던 것 같다.

“넥타이…… 제가 매드릴까요?”
“…….”

멈칫, 권이도가 움직임을 멈췄다. 자고 일어난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나도 권이도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매듭을 가져왔다.

“해보고 싶은 매듭이 있었거든요.”

그는 스르륵 손을 내려 가만히 침대 위에 올려놨다. 나는 언젠가 직원이 해줬던 모양을 떠올리며 더디게


그 매듭을 흉내 냈다. 평상시에 하고 다니기엔 좀 과할지 몰라도 그 주인이 권이도라면 잘 어울릴 것이었다.

“오늘은 옷에 패턴도 없으니까 매듭이 독특하면 예쁘겠네요.”

단조로운 진회색 정장에 실크로 된 넥타이도 검은색이었다. 이 정도 포인트를 준다고 해서 크게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는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완성된 매듭을 보고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습니까?”

왠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었다. 입매를 늘이며 덧붙인 말까지도 그러했다.

“보통, 남의 넥타이는 잘 못 매줄 텐데.”

그의 말대로, 매일 넥타이를 매는 사람들도 정작 타인의 넥타이는 잘 못 매주는 경우가 많았다. 제가 맬


때와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였다.

“다니는 샵에서 직원이 해줬습니다.”

권이도가 눈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한 번 보고 잘 배워서요.”

“…….”

그제야, 그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넥타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베스트 안에 넣은 그가 나긋나긋


칭찬했다.

“손재주가 좋네요. 엘드리지 노트를 한 번 보고 따라 하긴 힘든데.”

매듭의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대충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러다 새삼 갓 깨어난 차림새가 신경 쓰여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권이도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푸는 것도 직접 해줍니까?”

“……일찍 들어오시면 생각해 볼게요.”

실소를 흘리며 답하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한탄처럼


이야기했다.

“아쉽군요. 원래 입혀 줬으면 벗기는 것까지 한 세트인데.”

결국, 오늘도 일찍 들어오진 못할 거란 말이다. 나도 일 다닐 땐 저렇게 바빴던가. 고작 두 달 전의


일이 아득히 지난 과거 같았다. 권이도는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안하지만 오늘도 아침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 사실이, 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오늘도 권이도에게 받은 차를 타고 공방으로 향했다. 조수석엔 이태성이 앉았고,


그는 어제보단 덜 긴장한 느낌이었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나란히 온실에서 책을 읽던 것처럼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서 오세요.”

이른 시간임에도 이희나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다. 뒤이어 들어온 이태성이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자, “태성 씨도 안녕하세요.”라며 살갑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숙제는 다 해오셨어요?”

“네, 여기…….”

이미 권이도에게 보여 주었던 노트인데, 검사를 맡게 되니 새삼 긴장됐다. 내가 노트와 함께 챙겨 온


향료를 내밀자, 이희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건 가지셔도 돼요.”

어차피 수업료에 다 포함된 거라고, 그는 앞으로 자신이 주는 키트는 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본 그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어때요, 냄새 많이 맡아서 머리 아프고 이런 건 없으셨어요?”

“네, 괜찮던데요.”

“다행이에요. 코가 되게 쉽게 피로해지는 기관이라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거든요.”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공방에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천연 오일을 사용한다고 그랬던가. 그래서인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향은 아니었다. 페로몬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보편적으로 파는 향수와도 미묘하게 다르다.

“후각이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좋은데, 또 너무 예민하면 쉽게 피로해지니까.”

하나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백여 개가 넘는 원재료 향을 맡아 본다고 했다. 끊임없이 코를


써야 하는 만큼 두통을 느끼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물론 그 또한 훈련을 통해 차차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잘 써오셨네요. 내용도 구체적이고 이미지화도 잘 돼서 이대로 향수 홍보 문구로 내걸어도 되겠는데요.”

다정한 미소만큼이나 조곤조곤한 음성도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예의상 해주는 말이 분명한데,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이희나는 노트를 마지막 장까지 모두 확인하고 빙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늘도 수업 끝날 때 어제처럼 향료 몇 개 드릴게요.”

본격적인 수업 시작에 앞서 이희나는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플로럴 타입 향의


구조를 배운다면서, 수업 말미엔 간단히 후각 훈련도 해보겠다고 했다. 고작 나 혼자 듣는 수업인데, 발향
단계와 구조를 꼼꼼히 적어 놓은 프린트물까지 건네줬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과정이 재밌지는 않았다. 이론이야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거고 조향 실습을 해보는


것도 이희나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 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런데도, 나는 수업을 듣는 내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손으로 선택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작 두 달이라는 시간을 백수처럼 보내다가, 바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점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세진 씨.”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내게 이희나가 가볍게 운을 뗐다. 이태성은 내 쪽으로 다가와
익숙하게 노트와 향료 따위가 담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그럼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질문했다.

“세진 씨는 향수 만드는 수업을 왜 듣고 싶어 하셨어요?”

퍽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다. 내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자,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차분히 뒷말을
덧붙였다.

“보통 이런 건……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재미 삼아 한두 번씩 들으러 오거든요. 아니면 연인들이


이색 데이트로 오기도 하고요.”

곱다란 양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느슨하게 묶고 있던 머리가 어깨를 따라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 사실 저는 세진 씨도 그냥 취미 삼아 한두 번 듣고 마실 줄 알았어요. 애초에 금융그룹


본부장까지 하시던 분이니까 이런 데 관심이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

“근데 꽤 진지하게 들으시길래…… 괜히 궁금해지더라고요.”

말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입으로


말하자니 쑥스러운 기분이긴 했다. 그간 기억 속에 묻어 놨던 무언가를 벌써 두 번이나 타인에게 말하게 된다는
게.

“……어릴 때 꿈이 조향사였거든요.”

느릿느릿 운을 떼자 이태성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붙었다. 마치 그게 정말이냐고 묻는 것처럼.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벼운 말투로 얘기했다.

“꼭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한때 막연히 가졌던 로망 정도예요. 그러다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서 온


거고요. 별거 없죠?”
“와…… 근데 세진 씨랑 너무 잘 어울려요.”

동그랗게 뜬 눈을 보니 아부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희나는 나직이 감탄사를 흘리며 이태성을 향해


동의를 구했다. 물론, 이태성은 목석처럼 선 채 이희나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럼 일 그만두신 것도 조향사 되려고 그러신 거예요?”

“아, 그건…….”

이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권이도가


소개해 준 사람이라고 해서, 이태성처럼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희나는 눈치 빠르게 질문을 거둬들였다.

“이번엔 정말 부담 드리려고 여쭤본 거 아니에요.”

그는 잠깐 내가 낀 반지를 바라봤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그럼 혹시 조향사 자격증엔 관심 없으세요?”

“자격증이요?”

“네. 국가 공인 자격증은 없고 민간 자격증이라면 있는데, 우선 그거라도 따보시는 건요?”

자격증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다. 애초에 제대로 조향사가 되려던 것도 아니고, 책을


읽던 시간에 다른 취미가 생겼을 뿐이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가 오른편에 놓인 책장을
가리켰다.

“뭐라도 하나 남겨 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되거든요.”

‘HUI NA LEE’라고 적힌 자격증이었다. 상패처럼 생긴 자격증 세 개가 쪼르르 한 줄에 놓여 있었다.


비단 조향사 자격증만 있는 건 아니었고, 화장품 제조 관리와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사실 자격증이 있어도 취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닌데, 없는 것보단 낫더라고요. 어차피 제대로 된
실무는 입사 후에 배우고…… 아, 이건 세진 씨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겠네요.”

이희나는 멋쩍게 입매를 당기며 눈을 찡긋했다. 취업이라. 내게는 지나치게 낯선 단어였다. 민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성과가 있으면 기분은 좋으니까.”

대답 없이 다시 책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책 몇 권과 향수와 관련된 에세이 몇


권도 보였다. 스프링 노트가 한가득 꽂혀 있는 칸도 있었고, 시향지를 책갈피처럼 사용한 책도 간간이 보였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희나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일 또 보자는 말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태성과 함께 공방을 나오면서도 이희나가 한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

그 후로 며칠, 왠지 모르게 바쁜 나날이 반복됐다. 나는 오전엔 공방에 갔다가, 오후엔 이희나가 내준


숙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숙제할 방이 필요하겠다던 말대로, 권이도는 고용인을 시켜 해가 잘 드는 3 층
방을 내 전용으로 내어 줬다. 하얀 탁자와 의자가 놓인 곳엔 온갖 필기도구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렇게 숙제를 하다 보면 어느새 창밖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해가 많이 길어졌지만, 저녁


시간대가 되면 하릴없이 하늘이 컴컴해지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퇴근하지 않기에, 나는 홀로 진수성찬
같은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후에는 또 오지 않는 잠과의 싸움이었다. 김 실장에게 부탁해 받아 온 수면제는 늘 그랬듯 눈곱만큼도


효과가 없었다. 달라진 건, 막연히 잠들려고 노력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책을 읽거나 조향사 자격증에 대해
알아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점일까.

“……잠을 또 못 잤나 보군요.”

그렇게 한 주가 지난 월요일. 드디어 권이도가 아침 식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퀭한 얼굴로 내려온


나를 보며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내 방에서 자는 게 불편합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을 구긴 모습조차 반갑게 느껴졌다면 이상할까.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피곤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잠을 드문드문 자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밤에 뭘 좀 하느라 그랬습니다.”

“밤새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권이도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민망한
것이었다.

“미리 알았으면 같이 좀 새울 걸 그랬죠.”

“…….”

뭘 어떻게 같이 새울 거냐고, 그렇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와 밤새 할 만한 거라곤 굳이 입으로 듣지


않아도 뻔하기만 했으니.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내게 그가 젓가락을 손에 쥐며 이야기했다.

“오전 중에 혜율이가 올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권혜율이 온다고 했지. 그림을 보러 오는 거였지만, 그림‘만’ 보고 가진 않을


것이다.

“아마 정세진 씨가 공방에 다녀오면 집에 와 있을 거예요.”

어린아이를 혼자 둬도 되는 걸까. 그리 생각했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집에 없다고 해도, 수많은


고용인이 그의 조카를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권이도 씨는 언제 퇴근하세요?”

“한…… 5 시 정도면 퇴근하겠네요. 이제 바쁜 건 얼추 끝났거든요.”

그리 말하는 얼굴이 참으로 개운해 보였다. 나는 젓가락으로 더덕무침을 가져오며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전에 공방에 다녀오고, 오후엔 혜율이를 보다가, 공방에서 내어 준 숙제는 자기 전에
하면 될 듯했다. 권이도가 이르게 퇴근한다면 오늘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늦는 일 없을 겁니다. 내일은 오전에만 잠깐 나갔다가 올 예정이고.”

“내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뭐…… 대충 그렇다고 해두죠.”

어차피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라며, 권이도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크게 궁금하진 않았기에 무어라


캐묻지는 않았다. 일과 관련된 부분을 들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혜율이가 버릇없게 굴진 않을 텐데, 만약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요. 어차피 낯을 많이


가려서, 웬만하면 얌전히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 내게 아무런 의무도 없다고 했던가. 불편한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내가


권혜율을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말로 들렸는데, 그게 또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다.

“……권이도 씨는 아이를 좋아하세요?”

넌지시 권이도에게 물었다.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권이도는 무심히 시선을 들었다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달싹였다.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죠.”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무언가를 회상하듯 꿈결 같은 표정이 된 그는, 이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근데,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아직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은 없어서.”

매사 자신만만하게 굴던 권이도가, 아이와 관련된 부분에선 영 그렇지 못했다. 예의상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섣불리 아니라고 말해 줄 부분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공방 조심해서 다녀오고.”

식사가 끝나고, 권이도는 가벼운 인사만을 남긴 뒤 집을 나섰다. 나는 멀거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이


닫힌 다음에야 2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온실이라도 가봐야지.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

지난 일주일 사이 나는 이희나에게 꽤 많은 것들을 배웠다. 플로럴 타입의 향은 여러 가지 조향을 끝낸


상태였고, 현재는 오리엔탈 타입으로 넘어가 향을 분류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중이었다. 후각도 훈련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더니, 이젠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됐다.

“세진 씨 오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수업이 끝났을 때, 이희나는 예의 그 발랄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했다. 혹시 데이트라도 하느냐는 말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했다. 권이도와의 사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실이 조금
헷갈렸던 탓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새롭게 받은 향료와 노트를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 권혜율은 아직 안 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3 층에서부터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조그만 인영이 나타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난간을 꼭 붙잡고,
똘망똘망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

“…….”

“…….”

권이도의 조카인 권혜율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3 화. Origine du parfum(5)

긴 머리를 양쪽으로 예쁘게 땋은 권혜율은, 베이지색 멜빵 바지에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발에는 사이즈가 작은 어린아이용 슬리퍼도 신겨져 있었다. 분명 알파이긴 했으나, 아직은 발현
전이기 때문에 페로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 안녕.”

나는 반사적으로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벌써 와 있었구나. 그 사실에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만약 여기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방에서 시간을 보냈을 거다.

“우리 전에 만났는데, 혹시 기억나?”

계단을 올라 2 층에 서자, 권혜율의 시선이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어머니인 권이경을 많이 닮아서, 눈만


보면 권이도와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똑 닮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나를 관찰하기만
한다.

“…….”

“……왜?”
혹시 반말을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으로 되물었지만, 권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등지고 휙 몸을 돌렸을 뿐. 그리고 내가 붙잡기도 전에, 그는 뛰듯이 걸음을 옮겨 3 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

권혜율이 낯을 가린다는 사실은 이미 권이도에게 들은 바 있었다. 실제로 약혼식 날에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놓고 고개를 돌려 버리지 않았던가. 낯 가리는 아이가 처음도 아니고, 어느 정도 충분히 예상했단
말이다.

“…….”

“…….”

그런데 설마, 밥을 먹을 때에도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달짝지근한 소스가


뿌려진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권혜율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는 모양새가,
차라리 내가 비켜 주면 조금 더 편하게 먹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 혜율아.”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바르게 앉아 있던 권혜율이 느릿느릿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권이경을 닮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똘똘하게 생겼다.

“삼촌은 다섯 시쯤 오신대.”

일곱 살이면, 시간 감각이 있는 나이던가. 윤 대리 아들은 바늘로 된 시계를 못 봤지만, 권혜율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사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그다지 상관없었고.

“이거 먹고, 삼촌 오시기 전까지 뭐 할 거야?”

권혜율은 나와 식탁을 번갈아 보며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말을 거니까 불편한가 본데,
그렇다고 음식을 남기고 자리를 뜰 수는 없나 보다. 그 사실이 못내 미안했지만, 우선은 얼굴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삼촌은 혜율이가 그림 보는 거 좋아한다던데.”

“……맞아요. 또 그림 볼 거예요.”

겨우겨우, 앳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권이도가 소유했다고 알려진 그림 몇 점을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이름을 불렀다.

“그림이면…… 고흐?”

“아니요.”

권혜율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다시 시선을 식탁으로 내렸다. 반 정도 남은 함박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으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기도 했다.

“고흐 말고, 모네 거.”

소위 권이도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미술품엔 세계 각지에 있는 유명 화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고갱,
샤갈, 피카소와 방금 언급된 모네까지도.

웬만한 그림은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에서 보관 중이지만, 고르고 고른 세 점만은 그의 집에 장식해


두었다고 했다. 아마 권혜율은 그 그림들을 보러 놀러 왔을 것이다.

“모네 그림이 제일 좋아?”

“네, 제일 멋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얘기가 나오니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문제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푸르른 연못에 연꽃이 떠 있는, 밀도 높은 유화 하나가.

“…….”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모네 하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수련이었으니.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수련


시리즈 중 왜 눈으로 본 것처럼 딱 한 작품이 떠오른 걸까.

“……그럼 이따 혜율이 구경할 때, 옆에서 같이 구경해도 돼?”

나는 그 미묘한 위화감을 떨쳐 내며 넌지시 권혜율에게 물었다. 그림을 같이 보겠다는 말에 그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것처럼 야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신 떠들면 안 돼요.”

“응, 알겠어.”

“시끄럽게 하면 감상하는 데 방해되니까, 꼭 조용히 해야 돼요.”

“응, 조용히 있을게.”

귀엽게도, 권혜율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게 주의 사항을 읊었다. 짐짓 엄하게 눈에 힘까지 준 게,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총 다섯 번 알겠다고 대답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얌전히
있겠다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어야 했다.

“뛰지 마, 혜율아. 넘어져.”

권혜율은 식사 후 양치까지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길게


땋은 머리가 토끼처럼 팔랑팔랑 움직였다. 애들은 왜 움직이는 것도 귀엽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림이 있는 방문 앞이었다.

“쉿.”

또 한 번 권혜율이 내게 주의를 줬다. 진지한 상황에 웃고 싶진 않은데, 입술에 가까이 댄 검지가 너무


귀여워서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권혜율은 조막만 한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살금살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천장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는, 미술관 같은 공간이었다. 혜율이가 말한 모네의 그림이 가장 가운데에


있고, 좌우로 또 다른 그림 두 개도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걸음을 옮기며 눈앞에 보이는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정말로, 수련일 줄이야.

“이게 모네 그림이에요.”

팔을 좌우로 뻗은 것보다 더 커다란 그림이었다. 녹색에 가까운 파란 연못에 부평초와 연꽃이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그림이었고, 매스컴엔 공개조차 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림에 관심 없는 권이도조차 이


그림의 작품성만큼은 한눈에 알아보고 구매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내게는 왜 익숙하게 느껴졌을까.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처럼 그린 듯이 또렷이


떠올랐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요?”

넋을 놓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지, 권혜율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오빠도 모네 좋아해요?”

“……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들었다. 오빠라니, 어쩜 이리 양심에 걸리는 호칭이


나왔을까. 나는 비스듬히 권혜율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눈을 찡긋했다.

“오빠 아니고 삼촌이라고 해야지.”

“삼촌은…… 우리 삼촌밖에 없는데.”

권혜율이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투정을 부린다기보단 고민에 빠진 탓에 자연스레 나온 행동 같았다.


그는 한참 진지한 표정으로 있다가 불쑥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모네 좋아해요?”

“……응, 좋아하는 편이야.”

그림엔 나 역시 문외한이었지만, 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권혜율이 처음으로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

아, 애들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모네를 좋아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이 그림만이라도.

“제가요, 어릴 때 파리에서 미술관에 갔었는데, 거기 있는 동그란 벽에 수련이 걸려 있었거든요.”

내게는 조용히 하라고 그랬으면서, 권혜율은 먼저 신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딱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일곱 살인 그가 어릴 때라면, 기껏해야 여섯 살쯤 되었을까.
“이 방보다 넓은 방에, 저기부터 여기까지 다 수련이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커다란 수련이 걸려 있는 미술관이면, 파리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일 것이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얘기는 많이 들어 봤다.

“…….”

아니, 얘기를…… 들었던 적이 없던가.

“그게 너무 멋있어서 엄마한테 사 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사 달라고 했어?”

“네. 엄마랑 갤러리 가면 엄마가 제가 고르는 그림 하나씩 사주시거든요.”

또박또박 말하는 와중에 ‘갤러리’만 본토 발음이었다. 권혜율은 도르륵 눈을 굴렸다가 조심스럽게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오빠도 수련 좋아하면, 거기 있는 그림 오빠가 사면 안 돼요?”

“……음.”

권이경이 못 사는 거면 아마 나도 못 살 텐데. 금액적인 측면은 둘째치고, 도의적인 문제였다. 게다가


내가 가져와 봤자, 그림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할 거다.

“그…… 우리가 그걸 사 오면, 다른 사람들은 그 그림을 못 보게 되잖아.”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 된다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는 보고 싶을 때마다 파리 가서 볼 수 있으니까, 멋있는 그림일수록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미술관에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혜율 미술관에 두면 되잖아요.”

“…….”

잠깐, 말문이 막혔다. 권혜율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파리는 너무 멀고,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드니까 혜율 미술관에 두면 우리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곱 살짜리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논리정연하게 돌아온 의문을 도무지 반박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슬쩍 책임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따 삼촌 오시면 같이 얘기해 볼까?”

“삼촌이랑요?”

“응.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 보고, 그다음에 혜율이 생각도 얘기해 주자. 어때?”
미안합니다, 권이도 씨.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매달 어린 조카와 놀아 주는 사람이니,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삼촌 다섯 시에 오니까, 네 시간 남았어요.”

다행히 권혜율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간 개념이 확실히 있는 모양이었다. 남은


시간까지 계산할 줄 아는 건 조금 놀라웠지만 말이다.

“혜율아, 혜율이는 평소에 놀러 오면 삼촌 오실 때까지 여기서 그림 구경만 해?”

“아니요. 서재에 가서 책도 보고, 간식도 먹고, 삼촌 방에서 낮잠도 자요.”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해 주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혼자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었는데,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별로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권이도가 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심심했던
모양이다.

“오빠는 삼촌 올 때까지 집에서 뭐 해요?”

“오빠 아니라니까…….”

푸스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나을 텐데. 나는 벽면에 걸린


그림을 눈에 담으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혜율이랑 비슷해. 책 보고, 밥도 먹고, 가끔 산책도 하고.”

“심심하겠다…….”

역시, 어린아이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착하게도, 권혜율은 이 집에 홀로 있을


나까지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접어 웃으며 넌지시 혜율이에게 물었다.

“혜율아, 혹시 꽃 좋아해?”

오랜만에 온실 테이블에 차가 준비됐다. 늘 꽃차였지만, 이번엔 권혜율을 신경 쓴 탓인지 딸기를 넣어


달게 만든 과일 차가 올라왔다. 함께 차려진 부드러운 버터 쿠키 역시, 어린아이의 입맛을 고려한 메뉴였다.

소리 없이 우리를 따라온 이태성은 오늘만큼은 온실 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혜율이가 무서워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하기야, ‘그’ 권이경의
외동딸이니 평소에 경호원을 한두 명 봤으리라고.

“여기 언제 생겼어요?”

“온실?”

“네. 예전에는 이거 없었는데…….”

권혜율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양옆에 한가득 심은 꽃을 구경하다가 테이블과
천장에 달린 조명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마냥 신기해하는 줄 알았더니, 퍽 진지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꽃에 물 주기 힘들겠다…….”
“…….”

다시 말하지만, 일곱 살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른스러운 나이인가 보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면 오히려 나이 많은 어른보다 생각이 깊은 것 같았다. 말투나 어휘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오빠랑 비슷한 냄새 나요.”

권혜율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코를 킁킁댔다. 나한테 어떤 냄새가 났나 싶어 손등을 코에 가져다 대자,
권혜율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꽃 냄새…… 하얀색 꽃 같은 거.”

“……꽃?”

향료를 만져서 그런가. 그렇지만, 오늘 배운 향기는 플로럴 타입이 아니었다.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햇빛 냄새 나고, 아빠는 물감 냄새 나요. 그리고 삼촌은 나무 냄새.”

“…….”

단적인 설명이었지만, 아마도 페로몬일 것이다. 앞선 두 사람은 둘째치고, 권이도에게 맡았다는 냄새는
단순히 향기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향수를 잘 뿌리지도 않지만, 뿌린다고 해도 우디한 계열을 사용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물론 혜율이는 알파였으니, 발현 전에 페로몬 냄새를 맡은 건 이상하지 않았다. 나 또한 첫 히트


사이클을 겪기 전에 어렴풋이 페로몬을 느끼기는 했으니까. 다만, 그가 내게도 꽃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게
문제였지.

“…….”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남았더라. 아마 조만간일 텐데, 날짜가 불규칙하니 가늠이 되질 않았다. 혜율이를
앞에 두고 몹쓸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저 이거 다 먹으면 서재에서 책 읽을래요.”

다행히 혜율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온실에 질려 했다. 그림은 몇십 분을 넋을 놓고 보더니, 빼곡히


심어진 꽃에는 금세 관심을 꺼버린다. 달큼한 딸기 차를 홀짝홀짝 마신 혜율이가 먹다 만 버터 쿠키를 냉큼
한입에 넣었다.

그 후에는 함께 1 층 서재로 향했다.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있으려나 싶었는데, 혜율이는 알아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 소파에 앉았다. 글씨는 별로 없고 동양화가 가득 수록된 책자는, 놀랍게도 정확히 권혜율의
눈높이에 맞춰 꽂혀 있었다.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다면서.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불편함 없이 갖춰져 있었다. 가령


전용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다거나, 식단이 평소와는 다르다거나 하는 것들. 고용인이 챙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왜인지 전부 권이도의 명령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대략 30 분쯤 지났을 때, 권혜율은 책을 다리에 얹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디저트까지 챙겼으니, 잠기운이 밀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조심조심 그의 손에서 책을 빼내고, 곤히
잠든 혜율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권이도의 방이었다. 삼촌 방에서 낮잠을 잔다고 했으니, 아마 그의 침대에서


재워도 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권이도는 조카를 제 방에서 재웠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쉬이…….”

혜율이를 침대에 눕히고 살살 가슴께를 다독였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새근새근 잠든 모양새가 절로


미소가 그려질 만큼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쁜지, 젖살이 통통한 볼까지도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두 시간…….”

권이도가 오기까진 앞으로 두 시간 정도.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방 안 가득 그의 페로몬이 퍼져 있던 탓에 수면제를 잔뜩 먹은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하게 변했다.

홀린 듯, 혜율이의 옆에 쪼그리고 누웠다. 잠시만 눈을 감고 있자고 생각했는데, 눈꺼풀이 내려앉는


순간 수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온기와 권이도 특유의 페로몬이, 긴장하고 있던 근육을 느슨하게
풀어 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혜율이와 함께 나란히 잠이 들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잠기운에 져버린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몽중에 빠져 버린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언제까지 자?”

“……오빠?”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내 뺨에 닿는 조심스러운 감촉도 함께였다.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엄하게 얘기했다.

“안 돼, 삼촌 약혼자야.”

그 한마디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나는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한때였다.

- 다음 화에 계속

44 화. Origine du parfum(6)

잠에서 깨어난 건 바깥이 어두워질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뜨자, 캄캄해진 방
안이 나를 맞이해 줬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옆으로 누웠던 몸을 뒤척여 천장을 향해 누웠다.

“…….”
흐린 시야로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팔은 이마에 얹고, 다른 쪽 팔은 배에 얹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천장만 바라봤다. 너무 푹 자고 일어난 탓에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더디기만 했다.

여기가 어디더라. 내 방이라기엔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른데. 결정적으로 이렇게 아늑한 페로몬이
느껴질 리가 없건만.

포근한 이불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졌다. 다시 눈을 감으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태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게 꿈이라도 되는 양, 그간 자지 못했던 만큼 졸음이 밀려들었다.

다시 잠을 청하지 못한 이유는, 문 쪽에서 달칵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스며든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다란 인영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려던 상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

“…….”

편한 홈웨어 차림에 머리를 차분히 내린 권이도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수려한 이목구비만큼은 그려 놓은


것처럼 똑똑히 보였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권이도는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깨웠나 보네.”

커다란 손이 내 이마로 다가왔다. 열을 재는 것처럼 그 언저리를 만졌다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 준다. 눈썹 뼈를 따라 간질간질 움직인 손가락은 뺨을 타고 찬찬히 턱까지 흘러갔다.

“깨어 있었어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타이밍이 좋았지. 눈을 뜨자마자 권이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다니. 내 대답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얼굴을 만지던 손을 거둬들였다.

“더 자요, 어차피 저녁 먹긴 글렀는데.”

시간이 그렇게 늦은 건가. 몽롱한 머릿속에 아까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공방에 다녀와 혜율이를 만난
것, 함께 그림을 구경하고 온실에서 차를 마신 것, 그리고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권이도의 침대에 누운 것까지.

“혜율이는요?”

“아까 집에 갔어요.”

“아…… 인사도 못 했는데…….”

“괜찮아요. 조만간 또 놀러 온다고 했으니까.”

민망하게, 어린아이를 옆에 두고 곤히 잠들고 말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 걸 봐선, 아마 누군가 잠자리를


봐준 모양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 상대는 권이도겠지.

“혜율이가 정세진 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리를 꼬았을 뿐인데, 그
모습이 퍽 고고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오빠라고 불리는 기분은 어땠습니까?”

“…….”

멋쩍게 눈가를 찌푸렸다. 푸스스 실없는 웃음도 함께였다.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라니까. 끝내 호칭을
정정해 주진 못했다.

“좀…… 양심이 아프긴 했죠.”

“그래요?”

권이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담담히 덧붙였다.

“네, 안타깝게도 제가 여동생이 있어서요.”

서영이와는 거의 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호칭만큼은 오빠였다. 그마저도 열 살이나 차이 나는 바람에


어설프게 존댓말을 섞어 썼지만 말이다. 그런데 혜율이는 그런 서영이보다도 열댓 살이 더 어리지 않던가.

“다음엔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해주시겠어요.”

“아저씨라니…….”

작게 중얼거린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별 소릴 다 한다는 듯 실없이 중얼거린다.

“혜율이도 눈이 있을 텐데.”

지나치게 민망한 말이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그냥 눈가를 찡긋하고 말았다.

“…….”

“…….”

그러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멀뚱히 어둠 속에서 권이도를 응시했다. 그런 날


확인했는지, 그가 잠투정하는 아이를 대하듯 목소리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린다.

“더 자야지.”

살랑이며 풍기는 페로몬이 기분 좋았다. 알파 페로몬을 많이 느껴 본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권이도는


독보적으로 좋은 페로몬을 가지고 있었다. 내 취향에 꼭 맞는 것이, 가끔은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오늘도 바쁘세요?”

나는 그렇게 물으며 살며시 권이도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잠기운이 무심코 손을 움직이게 했다. 권이도는 느릿느릿 시선을 내려 붙잡힌 제 소매를 바라봤다.

“만약 시간이 남으면…….”

“…….”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가물가물 눈앞이 흐려졌다. 금세 잠이 들 만한 상태였으나, 권이도가 가버린다면 맨정신이 될 게


분명했다. 내가 지금 곤히 잘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존재 때문이었으므로.

“겸사겸사 페로몬도 뿌려 주시면 더 좋고요.”

“…….”

“물론, 바쁘지 않으시다면 말이죠.”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롭게 입매를 당긴 권이도가 스르륵, 붙잡힌 소맷자락을 빼냈다. 아,


바쁜가 보네. 그런 서운함을 애써 내리누르던 때였다.

“가만 보면…… 졸릴 때 어리광이 늘더군요.”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반쯤 감고 있는 눈두덩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뒤이어 콧잔등과 뺨에도 입술을 문지른 그가 마지막으로 귀 옆쪽에도 쪽, 입을 맞춘다.

“좋다는 말이에요. 나한테만 이러는 거니까.”

정말, 애정을 듬뿍 담은 행동 같았다. 섹스의 전희가 아니라, 그저 나라는 사람을 아껴 주는 것처럼.


가슴께가 몽글몽글 설레는 바람에 눈가에 열이 몰리려고 했다.

권이도는 그대로 이불을 걷어 내 옆으로 들어왔다. 몸을 움직여 그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데, 그가


어딜 가냐는 듯 내 팔을 붙잡는다. 그리고 머리 아래 팔을 넣어 주며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리 와야지.”

“…….”

이렇게…… 안아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하릴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짙은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권이도는 내


목덜미에서부터 등허리까지를 쓸어내리고, 내 정수리에 가만히 턱을 기댔다.

사람의 체온이 이토록 기분 좋은 것인 줄 몰랐다. 넌지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막연히 남아 있던


불안감을 모두 녹여 버렸다. 큼직한 손이 날개뼈 부근을 다독이고, 얼굴을 파묻은 목덜미가 가늘게 떨렸다.

“내일은 일찍 들어올 테니까…….”

“…….”

“정 힘들면 전화라도 해요.”

내가 힘들 만한 일이 뭐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밀려드는 잠기운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의 페로몬과 따사로운 온기에 취해 눈을 감자마자 의식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간 못 이룬 잠을 다 자려는 거였을까. 나는 수면제 한 알 없이 그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기 직전, 코끝에 옅은 꽃향기가 느껴진 것도 같았다.

***
잠결에 주변이 너무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선선한 날씨에 해가 뜨기 전까지는 바람조차 차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뜨거운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운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왜 이렇게 정신이 없을까. 잠을 자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머리가 팽팽 도는 것도 같았고,


배 속이 바짝 조이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다 지독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밀려드는 열기를 참지 못해
숨을 크게 토해 내야 했다.

“하…….”

주변 풍경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이제는 완전히 환해진 방 안엔 권이도의 페로몬 대신 짙은 꽃향기만


가득했다. 자욱하고 밀도 높은 페로몬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것이었다.

“……흐으.”

또 주기가 돌아왔구나. 그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슬슬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으니 새삼 당황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 권이도와 나눴던 대화가 벼락같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어차피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을 거라던 말투가, 이제 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어떻게…….”

벌써 세 번째였다. 온실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한 번, 이태성을 출근시키지 않았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오늘까지 총 세 번.

권이도는 내 히트 사이클 주기를 알고 있다. 가정을 확신으로 바꾸는 증거는 충분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하고, 의사마저 알 수 없다고 대답한 주기를 어째서인지 그는 정확히 꿰고 있는 것이다.

“흣…….”

간헐적으로 생각이 끊겼다.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에 관한 의문과 끝없이 차오르는 욕망이 서로 충돌했다.
그러다 끝내 승기를 든 건 후자였다.

“하아…….”

그가 뭘 어떻게 알았건 지금 내 상황을 해소하는 게 중요했다. 터질 것처럼 들끓는 열기와 숨이 막히도록


자욱해진 페로몬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권이도의 페로몬이 필요했다. 이 넘치는 모든 걸 사그라뜨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권이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엉금엉금 몸을 움직여 이불을 끌어모았다. 그대로 품에 안자, 권이도의 페로몬이 한가득 밀려들었다.
나무처럼 고요하고 묵직한, 우성 알파 특유의 감미로운 페로몬. 비 오는 날 그와 입을 맞췄던 기억처럼, 잔잔히
감겨드는 차분한 향기.

“……흐.”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퍼져 나갔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푹 파묻고, 덜덜 떨리는 손을 바지춤으로


가져갔다. 이미 한껏 부풀어 있던 성기는 약간의 자극만으로 묽은 정액을 사출했다.

정액이 이불과 손을 엉망으로 더럽혔다. 여기가 권이도의 침대라거나, 그에게 못 할 짓을 한다거나 하는


이성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페로몬에 취해 본능대로 욕구를 해소하고자 했을 뿐.

“아…….”

만취할 때까지 술을 퍼부은 기분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취할 때까지 술자리를 가진 적도 없으면서.


이성을 잃으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이 마냥 좋기만 했다. 편안하고, 안온하고, 그리고 또 안락하다. 히트 사이클이


오면 늘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러한 와중에도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

아니, 이 모든 배경에 부작용이 있던 모양이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페로몬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말도 안 되는 부작용이.

“하아, 권이도…….”

이불에 하반신을 비비적거렸다. 짐승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가 날 만져 주는 감각을 상상하며 손으로는 어설프게 그의 손길을 따라 했다.

그러나 이미 흥분에 젖은 몸뚱이는, 진짜와 가짜를 기가 막히게 구분했다. 내가 아무리 재주 좋게 자위를


한다고 해도 권이도가 내게 안겨 줬던 쾌감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하아, 하아…….”

바짝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움찔움찔 떨렸다. 발기한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가, 아무래도 영 부족하단


생각에 몸을 움츠렸다. 원래는 뭐가 부족한지도 몰랐을 텐데, 지금만큼은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떠올랐다.

“…….”

뒤를 만져 줬으면 했다. 굵은 손가락이 비좁은 내벽을 벌리고, 그보다 더 굵은 성기가 안을 빠듯하게


채워 줬으면 좋겠다.

간당간당하게 짧아진 이성의 끈은 수치심의 역치를 놀라울 만큼 높여 줬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앞을


만지던 손을 뒤로 가져간 것이다.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뒤에선 허벅지를 타고 흐를 만큼 애액이 흐르고 있었다.

“흐으…….”

팔을 뒤로 젖혀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중지를 엉덩이골에 미끄러뜨리자, 꽉 닫힌 입구가


만져졌다. 그대로 꾹 밀어 넣었더니, 손가락 하나가 밀려 들어가듯 쑥 삽입됐다.

“흣, 으…….”
나는 권이도가 그랬던 것처럼 내벽을 꾹꾹 문질렀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엔 좁히려야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단숨에 내가 느끼는 부분을 찾았던 그와는 달리, 나는 불편한 자세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손가락을 가지고 씨름해야 했다.

분명,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약지를 함께 밀어 넣었다. 이보다 더 굵은 걸 아무렇지


않게 삼켰었으면서, 지금은 고작 손가락 두 개가 빠듯하게 느껴졌다.

“……으.”

하나부터 열까지 죄 엉망진창인 행위였다. 분명 내 몸이 맞는데, 나조차 어디를 만져야 제대로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령 없이 뒤를 풀어 주다가 혀를 내민 채로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권이도…….”

둥글게 모아둔 이불에 코를 폭 파묻었다. 어렴풋이 남아 있던 권이도의 체취에, 내가 흘린 존재감이


서서히 섞여 들기 시작했다. 나무에 꽃이 피듯 자연스럽게 엉겨든 페로몬은 처음부터 한 사람의 것인 양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이렇게 달뜬 몸도, 페로몬처럼 섞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권이도가 내 다리를
벌리고 깊숙이 삽입해 주면 바랄 게 없을 텐데.

“……하아.”

달뜬 호흡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렇게 요령 없이 움직였는데도 빠듯하게 조였던 내벽이 어느 정도 풀려


있었다. 좀 더 굵고, 긴 무언가. 그래, 배꼽까지 닿을 것 같던 그의 성기가 안을 채워 줬으면 했다.

“흣……!”

마침내, 나는 내가 느끼는 부분을 찾아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내벽 어딘가를 무식하게 손끝으로 꾹꾹


자극했다. 찌릿찌릿한 쾌감이 간헐적으로 터지고, 이불에 문지르고 있던 성기에서도 희뿌연 액체가 흘러나왔다.

“흐읏…….”

아무래도 영 부족하다. 조금만 더, 더 강한 자극을 느끼고 싶었다.

아프다는 생각도 없이 손가락을 세 개까지 늘렸다. 권이도가 할 땐 능숙하기만 했는데, 정작 내가 하려니


자꾸만 입구에 틱 틱 걸렸다. 나도 손이 작은 편은 아닌데, 그의 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기다랗고 곧은 손가락을 떠올렸다. 여리여리한 생김새는 아니었으나 손톱 끝까지 단정한 모양이긴 했다.
그럼에도 뼈마디는 굵었고, 손등엔 볼록하게 핏줄 따위가 도드라져 있었다.

“으응…….”

그 손이 마구잡이로 나를 주무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톡 튀어나온 유두를 꼬집고 드러난 상체를 매만지며
아래로 향하던 손길을. 그리고 삽입을 위해 뒤를 풀던 그 감각까지.

어느샌가, 나는 손가락 세 개를 모두 넣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움직이는 건 불편했지만, 당장 그의


성기를 삼킬 수 있을 만큼 풀리긴 했다. 억지로 배에 힘을 풀며 손을 움직이자 질척거리는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손목을 움직여 안쪽을 넓혀 갔다. 다른 손으로는 침대를 더듬어 가며 권이도에게 연락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전화하라고 했으니, 핸드폰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다행히 내 핸드폰은 정말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뒤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잔뜩 발기한 성기 끄트머리가 여러 체액으로 반질반질 젖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권이도의 번호를 눌렀다. 등록된 번호를 찾은 것도 아닌데, 손이 익숙하게 열한 자리 숫자를


기억했다. 뚜르르, 신호음이 두 번쯤 흘렀을 때 전화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명치가 확 조여들었다. 단순히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그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성감이 고조됐다. 나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발기한 성기를 감싸 쥐었다.

“흣, 권이도 씨…….”

-……정세진 씨?

“언제…… 언제, 오세요?”

정액인지, 아니면 오메가의 애액인지. 미끄덩거리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금방 갈 거예요. 지금 거의
다 왔고…….” 전화 너머로 권이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한 채 기둥을 살짝
쓸어내렸다.

-5 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흣, 네.”

-정확히는 한 3 분 정도면 올라갈 텐데…….

“흐…….”

-……근데 정세진 씨.

기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귓가를 파고든 음성이 심장을 콱 붙들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질문했다.

-설마 지금, 내 목소리 들으면서 자위합니까?

- 다음 화에 계속

45 화. Origine du parfum(7)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정신도 아니었고, 그가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척였을 뿐.

“……흐.”

-…….

전화 너머에선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위하는 걸 알면 목소리라도 좀 들려주지. 그런 염치


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빠르다시피 걸음을 옮기는 소리도.

“하아…….”

-…….

“흣, 으응…….”

발소리가 들렸다. 단정하고 올곧은 소리는 평소와 달리 훨씬 조급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있던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터뜨리고, 들릴 듯 말 듯 욕지거리를 짓씹는 소리까지 들렸다.

“……권이도 씨.”

-얘기해요.

“흣, 빨리…….”

3 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을까. 그가 내게로 오고 있단 생각에 점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의


침대에 남은 페로몬으로는 내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빨리 와요…….”

-…….

권이도는 아무런 대답 없이 또 한 번 한숨을 터뜨렸다. 어쩐지 화를 내는 느낌이라 너무 보챘나 싶어


살짝 신경이 쓰였다. 물론 이미 이성을 앞선 본능이 그 모든 생각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흐.”

손에 힘이 빠져서 내가 만지는 거로는 사정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조금 더 세게 쥐고 흔들었으면 하는데


자꾸만 붙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아, 이걸 정말 어쩌면 좋지.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야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이 넓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쓸데없다느니, 대충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다. 그 내용이 아니라 목소리에 집중한 탓에 그가 내뱉은


말들은 잘 와닿지 않았다. 지금 들리는 발걸음 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전해진 건지 아니면 문밖에서 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언젠가처럼 굳게 닫힌 문이, 이번만큼은 열릴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조금 거칠다시피 방문이 벌컥 열렸다.

“…….”

“…….”

권이도는 잔뜩 웅크린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방문을 닫고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었다. 나는 여전히 볼품없이 널브러진 채로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왔어요?”

그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단정히 정리되었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침대로 올라온 권이도가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가지런히 눕혔다.

“이것도 재주지.”

“…….”

“나를 전화 한 통에 뛰게 만드는 사람은 정세진 씨밖에 없거든요.”

권이도가 성의 없이 이불을 치워 버렸다. 조금 전까진 동아줄 같은 것이었으나, 이제 진짜 권이도가


생겼으니 별로 상관없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얼른, 얼른 해요…….”

목덜미에 코를 폭 파묻었다. 페로몬샘이 있는 부위였기에 고작 이불에 남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양이


흘러나왔다. 비비적거리며 얼굴을 문지르자, 이미 흐려진 이성이 몽롱하게 취해 갔다.

“빨리 넣어 줘…….”

“……하.”

하반신을 그에게 밀착했다. 그는 나를 억지로 떨어뜨리며 내려다봤다. 그러면서 반쯤 벗겨져 있던 바지를


속옷과 함께 벗겨 버렸다.

“너 바로 못 넣잖아, 세진아.”

희게 드러난 다리를 권이도가 붙잡았다.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젖어 버린 성기를 슬쩍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다 회음부를 따라 손을 미끄러뜨릴 땐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이렇게 좁아서…….”

뚝, 뒷말이 끊겼다. 그가 뒤쪽을 더듬으며 손가락을 밀어 넣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쑥


삽입된 손가락이 움찔 제자리에 멈췄다.

“아…….”

권이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차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해서. 짙은 눈동자가
음습하게 가라앉고 비틀린 입매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진짜 미치게 하네.”


그는 망설임 없이 바지 버클을 풀고 아랫도리를 밀착했다. 정장을 벗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바지를 다
내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삽입만이 목적인 것처럼, 성기를 꺼내 뿌리 끝까지 거칠게 밀어 넣었을 뿐.

“아흑……!”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그가 공들여 풀어 놔도 조금은 버겁던 행위였다. 그런데 내가 어설프게
준비한 상태에선 어떻겠는가.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감각은 통증과 함께 강렬한 쾌감이 수반됐다.

“…….”

나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덜덜 떨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는 순간,
상체에 묽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권이도는 무언가 가늠하듯 허리를 가볍게 튕기곤,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대충 벗겨 냈다.

“아, 아파…….”

“……엄살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가지 말라는 의미로 허리에
다리를 감았는데 그는 애초에 뺄 생각이 없던 것처럼 거칠게 아래를 꿰뚫었다.

“하으응!”

“내 좆이…… 그렇게 좋은 건 알겠는데.”

“으읏, 흐…….”

“놔줘야 내가 움직이지.”

좁은 내벽이 권이도의 성기를 콱 물었다. 아랫배가 납작해지도록 힘을 주자, 권이도가 성난 짐승처럼


목울대를 울린다. 그는 살살 허리를 돌리며 내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힘 풀어.”

“……아, 아아, 하읏!”

푹, 푹, 굵은 성기가 내벽을 건드렸다. 딱히 섬세한 움직임이 아니었음에도 크기가 크기인지라 내가


느끼는 부분을 마구 짓눌렀다. 배가 터질 것처럼 가득 차는 기분이었으나, 그보다 온몸에 쏟아지는 쾌락이 더
커다랬다.

“흣, 거기…… 으응, 흣, 아……!”

벼랑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흐르고, 부푼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엉망이 된 침대에서, 그보다 더 엉망으로 이어진 행위였는데, 그가 주는 모든 자극이 만족감으로 탈피했다.

“흐읏…….”

손을 뻗어 권이도의 옷깃을 붙잡았다. 나체가 된 나와 달리, 권이도는 넥타이까지 모두 갖춘 차림이었다.


머리가 흐트러졌다는 것만 빼면 무척이나 금욕적인 모습이었단 말이다.

“……아, 아흣!”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도 나를 몰아붙이는 힘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난잡하게 아래를 헤집던 그는 내가
유독 커다란 반응을 보일 때면 눈치 빠르게 그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흐응, 아으, 거기, 응…… 흣…….”

미치도록 좋았다. 앞으로 그 없는 히트 사이클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 너무…… 흣, 좋아…….”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가 조금 더 깊이 들어왔으면 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에게 몸을 밀착했다. 다리를 내려 주고 상체를 숙인 그가 내 얼굴 옆에 손을 짚었다.

“오늘 왜 이렇게 급해.”

급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러트도 안 왔을 사람이 눈이 다 풀려 있지 않은가.

“흣, 으응…….”

“하…… 진짜.”

쪽, 쪽, 얼굴이 연신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쾌감을 이기지 못해 흐른 눈물은 권이도가 냉큼 받아마셨다.


온 얼굴에 한가득 키스를 퍼부은 그는 뒤이어 목으로 내려가 여린 살을 입술로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아으, 흣, 흐응.”

아마 이 행위가 끝나면 온 살결에 그의 흔적이 가득 찰 터였다. 이제는 목을 가리는 옷도 입기 힘든데,


병에 걸린 사람처럼 죄다 울긋불긋해질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게 상관없을 만큼 지금 당장 그에게 속해
있는 기분에 마냥 들뜨기만 한다.

그는 나를 꽉 끌어안은 채 연신 허리를 움직였다. 꺼덕거리며 흔들리던 성기가 권이도의 배에 문질러졌다.


흥건한 정액이 그의 옷에도 묻어나서 정장이 죄 엉망이 되고 말았다.

“흣, 옷이…….”

“옷 걱정할 여유도 있고.”

권이도는 느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뭘 하려나 싶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옷가지를 벗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게 깊숙이 삽입한 채로, 넥타이부터 와이셔츠까지 찢듯이 벗어 냈다.

후두둑, 떨어진 단추가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벌써 몇 개째 셔츠를 해 먹는 건지. 이러다 그가 가진


옷들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가지고 있는 셔츠를 다 망가뜨리려면 앞으로 몇 달간 매일 섹스만 해야
하려나.

“세진아.”

집중하라는 듯,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은 나처럼 흥분에 잠식돼 있었다. 풀풀
풍기는 페로몬은 이제 내 온몸을 물들일 것처럼 한가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집중해야지.”
“……아흣!”

덜컥, 그가 허리를 튕겼다. 동시에 뱃가죽이 볼록 튀어나왔다. 손바닥으로 내 아랫배를 덮은 그가 배를


꾹 누른 채로 다시 한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흐……!”

가뜩이나 좁은 배 속이 더욱더 버거워졌다. 핏줄 하나하나가 그려질 만큼 그의 성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차오르는 희열은 배가 되었지만, 좋은 만큼 훨씬 고문당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흐으, 흣……. 안 돼…….”

그는 내가 엄살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파하는 건지 기가 막히게 알아냈다.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저어 봤자, 속도를 늦춰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깊숙이 들어왔다가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배꼽 아래쪽을 길게
긁으며 들어왔다.

“아흐……!”

쾌감이 팡 하고 터지는 듯했다. 벌써 몇 번째 사정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물처럼 묽은


정액을 흘리는 나를 보고,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이따 깨물어 봐도 됩니까?”

“흣, 될 리가, 으응, 없잖아요…….”

인상을 찌푸린 채 권이도의 어깨를 밀어 냈다. 어차피 이 자세에선 입에 넣지도 못하겠지만, 괜히


위기감이 든 탓이다. 흥건히 젖은 성기가 대체 뭐 그리 맛있게 생겼다고. 아쉬워하는 눈빛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 말고…… 흣, 빨리…….”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박기나 해라?”

괜히 불만스레 되물어 놓고, 그는 내가 요구하는 대로 착실히 움직였다. 가늘게 웃음을 흘리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내 위에 바짝 엎어진 그가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 아……, 흐응!”

“……후.”

“하으, 응, 좋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질척질척 야한 소리가 들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은 내벽이 그에게 맞춰


조였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귀두만 남기고 허리를 뒤로 물린 그는, 다시금 매끄럽게 안으로 푹 파고들었다.

“흐으응…….”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새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비교할 상대는 한 명도 없었지만 권이도가


아니라 다른 상대였다면 이러지 못했을 거다. 그가 원체 노련한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좋을 수
있는 건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하아, 흣, 아, 아……!”

푹! 밀려든 성기가 강렬한 쾌감을 안겨 줬다. 내 목에 얼굴을 묻은 권이도가 푹푹 허리를 움직였다.


가뜩이나 커다랗던 성기가 조금 더 부푼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흐.”

숨이 탁 터져 나왔다. 등허리를 따라 올라온 환락이 파도처럼 거센 오르가슴이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노팅하는 줄 알았다. 그가 움찔거리는 게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그는 까드득 이를 악물며 내 안에


길게 사정했다.

“하아…….”

극우성 알파이기 때문에 그는 한 번 사정하는 정액조차 나와는 달리 양이 많았다. 지나가듯, 정세진 씨


배가 터질 것 같다고 한 게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지금은 딱 한 번뿐임에도, 이토록 배가 부르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정말…… 임신시킬 생각 없는 거 맞아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느릿느릿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사정의 여운을 즐기던 권이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어깻죽지에 뺨을 대고 있는 모양새가, 그답지 않게 귀엽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노팅 없이도 애가 생길 것 같은데…….”

중얼거리듯 한 말에 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쇄골 언저리를 살짝 깨문 그가 아직


삽입되어 있는 상태로 은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한 번 해볼까요.”

“흣, 뭐를…….”

“노팅 없이, 애가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푹, 내벽이 거칠게 꿰뚫렸다. 어느 포인트에서 다시 흥분했는지 그에게선 열기로 가득한 페로몬이 한가득
느껴졌다. 물론, 내 페로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임신할 때까지 하면 되겠네.”

“그게 말이…… 하읏!”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그게 권이도에게 불을 지폈던 모양이다. 하늘이 반으로 갈라져도,


노팅 없이 임신이 될 리가 없건만. 게다가 나는 가뜩이나 그 가능성이 작은 남자 오메가인데.

“뭐든 직접 해보기 전엔 모르죠.”

“하아…… 천천히, 흣, 으응……!”

이미 가득 차 있던 정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꿀렁이는 기분이었다. 처음 삽입할 때보다 부드러웠지만,


그렇기에 자극은 더 강했다. 벌써 몇 번이나 절정에 내달린 나를, 권이도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흣, 권이도 씨, 제발…….”

그만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두려울 정도로 차오른 열락에 위기감이 들었을 뿐. 이러다 뇌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어쩌지, 나는 정세진 씨가 애원하는 게 그냥 듣기 좋은데…….”

“……하으, 흣, 으…….”

“더 해볼래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변태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놓고, 정작 권이도는


다정하게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신음을 참지 못해 혀를 깨물려는 찰나엔, 억지로 내 양 뺨을 누르기도 했다.

“……흐읍.”

빈틈없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조금 강압적인 손길이었으나, 결국 이어진


입맞춤만큼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집요하게 내 입 안을 탐닉한 권이도가 숨과 함께 페로몬을 후 불어 넣었다.

“…….”

긴장했던 근육들이 느슨하게 풀렸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던 부분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축 늘어졌다.


그의 페로몬이 주는 안식은 거의 마약이나 다름없어서, 복잡한 생각 따위는 깨끗이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권이도를 꼭 끌어안은 채 열심히 타액을 받아마셨다. 뜨거운 혀를 쪽쪽 빨아들이며 조금이라도 더


그를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권이도는 내가 마음껏 자신을 음미할 수 있도록 고개까지 틀어가며 집요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으응…….”

그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두근거리는 박동을 느끼려는 것처럼, 한동안 그 가운데에 그대로


머물렀다. 아까보다 여유로워진 허리 짓은 이제는 마구잡이로 나를 한계까지 내몰지는 않았다.

“하아…….”

떨어진 입술로 가늘게 실타래가 늘어졌다. 권이도는 다시 입을 맞춰 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 위에 올라왔던 손은 그 옆으로 옮겨 가 꼿꼿이 선 유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흣.”

평소엔 있는 줄도 모르는 부위가, 이럴 때면 유독 예민했다. 엄지와 검지로 꼬집듯 문지르는 것도,


손톱을 세워 살짝 긁어내는 것도 모두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기까지 하면 나도
모르게 허리가 들썩거렸다.

“잘하면…… 여기로만 갈 수도 있겠는데.”

권이도는 학구열에 불타는 아이처럼 제법 순진하게 이야기했다. 넣은 채로 가슴만 만지면 어떻겠냐고,


믿을 수 없는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당황한 내가 눈을 부릅뜨자, 그가 더없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요. 지금은 나도 급하니까.”


“…….”

그럼, 다음에 급하지 않으면 하겠다는 말일까.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침대에선 왜 이렇게 천박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취향 진짜…… 흐읏…….”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다시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휴식이 마지막 자비였을까. 이번엔 꽤


마구잡이로 푹푹 성기를 밀어 넣는다. 견디기 힘든 쾌감에 그에게 손톱을 세우려다가, 혹여나 등을 다치게 할까
싶어 손을 떼어 내려던 때였다.

“상처 내.”

그가 너그럽게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달큼하게 속삭이기도 했다.

“긁고 싶은 만큼 긁어도 돼.”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손끝을 세웠다. 제법 아프다시피 살갗을 긁었지만,


권이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세를 한껏 낮춘 채 배 속을 거칠게 쳐올렸을 뿐.

“아, 흑!”

정신없는 쾌감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나는 그에게 매달린 채 힘없이 흔들렸다. 종국에는 이 벅차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어서, 생전 해본 적 없는 욕지거리까지 뱉을 뻔했다.

짐승 같은 행위였다. 그는 내 몸을 죄 깨물고 빨아 대며 흔적을 남기기 바빴다. 정말 임신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성기를 빼내지 않고 몇 번이고 안쪽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가 온전히 지날 때까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46 화. Origine du parfum(8)

잠에서 깨어났을 땐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고, 잠에 취한


와중에도 나긋이 풍기는 페로몬에 기분이 좋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은 아늑한 안정감이 되어 나를 뒤덮었다.

본능적으로 꿈지럭꿈지럭 내 앞에 있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나를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바짝 밀착했다. 간지러운 숨결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넓은 가슴팍이 시야에 들어왔다.

“…….”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었다. 그와


달리 나는 큼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이불 속에서 얽힌 다리는 반대로 상대방만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도드라진 목젖을 지나 보인 것은, 곤히 잠든


권이도의 얼굴이었다. 곱게 감긴 두 눈엔 가지런한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곧은 콧날과 입술은 공들여 빚어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아, 아침이구나. 그 사실은 환하게 밝아진 방 안을 보고 알았다. 커튼 틈새로 햇살이 비추는 바람에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여기가 어디인지 뚜렷이 보였다. 잠든 건 권이도의 방이었는데, 장소를 옮겼는지 지금 누워
있는 곳은 내 침대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웬일로 같이 누워 있을까.

내게는 늘 다정한 그였으나 이렇게 편안히 눈을 감은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긴장감이 사라진 표정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목구멍이 간질거릴 만큼 미묘했다.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권이도의 얼굴을 구경해야 할
정도였다.

‘흣, 그만…….’

‘힘들면 자.’

‘그게…… 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대화를 나눈 게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을 때였나. 그 너그러운 허락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기억이


있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내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았고 잡아먹을 것처럼 내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그리고 곧장 잠이 들었으니,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온몸에 뻐근한 근육통이


가득하고, 그럼에도 피부나 이불이 보송보송한 걸 보며 대략 짐작할 뿐.

체력도 좋지. 나는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는데 나를 다 씻기고 옷까지 입혀 잠자리에 누운 모양이다. 비록


하반신은 휑했으나 권이도의 티셔츠가 워낙 커다란 덕에 엉덩이까지는 다 덮어졌다. 그의 체온 덕에 춥지도
않았고 히트 사이클이 끝난 뒤라 몸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나는 한참이나 가만히 그 잘생긴 얼굴을 구경했다. 어제, 짐승처럼 몰아붙이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금욕적인 외모였다. 어떻게 자는 얼굴마저 이럴 수가 있는지. 딱히 얼굴을 밝히는 건 아니었는데, 가끔
권이도를 보면 그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곤 했다.

……그보다, 팔 저릴 것 같은데.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단단한 팔을 옆으로 치우고 얽혀 있던 다리를


슬쩍 빼내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잠든 줄 알았던 권이도가 나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풀썩,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졌다. 권이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크게 뜨자, 머리맡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아침부터 들리는 음성이 참 외설스럽게 느껴져서.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꽉 옭아맸다.

“더 자, 세진아.”
참, 한가로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둘째치고 권이도는 일을 나가야 할 텐데.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권이도건만.

“출근 안 하세요?”

그래서 조그맣게 묻자 권이도가 자세를 고쳤다. 아마 가슴팍에 닿는 숨결이 조금 간지러웠던 모양이다.


내 정수리에 입술을 문지른 그는 티셔츠 위로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사근사근 속살거렸다.

“5 분만…….”

“…….”

“5 분만 이러고 있죠.”

잠투정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정작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잠기운이 다 날아간 것 같았지만. 등을


지분거리는 손길은 누가 봐도 졸린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는데.

사실, 마음 같아서는 5 분이 아니라 한 시간을 이러고 있어도 좋을 듯했다. 그렇게 오지 않던 잠이


지금은 눈만 감아도 다시 나를 찾아올 기세였으니. 늘어지게 부리는 여유를 싫어할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지 않을까.

“……숨 막히는데.”

그런데도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중얼거렸다. 아예 거짓은 아니었고 숨 쉬는 게 조금 답답하긴 했다.


머리에 벤 팔은 딱딱한데다 간간이 전해지는 숨결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야 할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권이도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살짝 떼어 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가만히 시선을 맞추자, 그의 입에서 간지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러워요?”

“…….”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내가 느끼는 민망함을 그는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려는데
이번엔 그보다 더 수위 높은 말이 나왔다.

“날 기다리면서 뒤까지 푸는 건 안 부끄럽고?”

“……음.”

그러고 보니 그랬지. 넘쳐흐르는 성욕을 참을 길이 없어서 평소라면 건드리지 않을 뒤에까지 손을 댔었다.


그걸로 모자라 권이도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오라며 칭얼칭얼 재촉까지 했고.

“좀…… 맨정신이 아니긴 했죠.”

그냥 순순히 시인하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권이도는 군말 없이 내 뒤통수를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칼을 헤집는 감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다시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들
것처럼.
“……오늘은 언제 들어오세요?”

딱히 자면 안 되는 이유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으로 그와 함께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지금이. 그래서 가볍게 건넨 질문에 권이도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녁 먹기 전에 올 거예요.”

바쁜 게 끝났다더니, 전처럼 일찍 퇴근할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당분간 수면제를 먹을 일은 없겠지.


이렇게 의존도가 높아지면 안 되는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공방에 갑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순간을 아쉬워하듯 권이도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괜히 뻔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내가 잠드는 게 아쉬워서는 아닐까 하고.

“오전 중에 다녀오려고요. 숙제 검사받고 진도 나가려면 가능한 한 평일엔 매일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부지런한 수험생 같네.”

가늘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별거 아닌 대답에도 그는 퍽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감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운을 뗐다.

“희나 씨가 자격증 얘기를 하던데…….”

‘그럼 혹시 조향사 자격증엔 관심 없으세요?’

향수 공방에서 이희나가 내게 했던 말. 그는 지나가듯 말한 것일지 몰라도 그 이후에 내 관심사는 대부분


그쪽에 쏠려 있었다. 딱히 열정이 넘쳐서는 아니었고, 그냥 관심 비슷한 호기심이었지만.

“조향사 자격증이 있나 봐요. 국가 공인은 아니고, 그냥 민간 자격증으로. 뭐라도 하나 남겨 놓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권이도는 내가 말을 잇는 동안에도 가만가만 뒷머리를 매만졌다. 부스스한 부분을 정돈해 주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강아지를 만지듯 머리칼을 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권이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수려한 눈매가 순간 움찔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조금 멍한 느낌으로 내 얼굴을 응시한다.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는 느리게 운을 떼곤 잠깐 뒷말을 망설였다. 거리가 가까운 터라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한 번, 두 번,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늘어뜨렸다.

“내 의견을 물을 줄 몰랐거든요.”

그게 그리도 의아한 일이었을까. 아니, 정확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른하게 풀린 눈이 다정한 빛을


한가득 띠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는 건 긍정적인 일이죠.”

나직이 이야기한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은 건데,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오랜 시간 갈등했단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에 얘기했죠.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고.”

‘하고 싶으면 해야죠.’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조향을 배우고 있으니, 결국엔 그의 말대로 된 것이었다.
빈말을 하지 않는 그답게 지금 하는 말도 빈말은 아닐 터였다.

“이왕 시작했으니 성과를 내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사실 어찌 보면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권이도가 긍정의 대답을 하리라는 건, 처음 운을 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직접 입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모르는 척 물었을 뿐.

자격증을 한 번 따볼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아도 언젠가 지금의 경험을 추억할 거리는 될 듯했다. 그때,
권이도가 내게 그런 기회를 줬었지. 딱 그 정도면 남겨 놔도 가치 있지 않을까.

“취미로 향수 사업을 하나 할 거예요.”

한창 그러한 생각에 잠겼는데, 권이도가 생뚱맞은 주제를 꺼냈다. 향수 사업?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투자의 일종으로.”

“……투자 말씀입니까?”

그걸 그쪽이 왜 투자하냐고, 그런 의문을 내비치지는 못했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향이라는 게, 우리 삶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치거든요. 모 자동차 브랜드에선 처음 운전석에 앉았을


때 맡아지는 향기가 자사 브랜드의 첫인상을 결정한다고 얘기했죠.”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얘기였다. 자동차 브랜드 대표의 인터뷰 내용이다. 실제로 그 회사의 차는


카시트에서 맡아지는 냄새가 조금 독특했던 기억이 있다.

“선호도 시대에 발맞춰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 이야기한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것처럼 휘어진 눈매가 왠지 모르게 의뭉스럽게 보였다.
이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굳이 내게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적당히 경력 있는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내뱉을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역시나, 권이도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세진 씨가 총책임자로 와줬으면 해요.”

황당한 기분이 드는 것과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를 듣는 바람에 대꾸할 말은


금세 떠올랐다.

“……전 금융 쪽에서 일했습니다.”

“회사 업무가 다 거기서 거기죠.”

거기서 거기라니.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정세진 씨는 그냥 하고 싶은 걸 다 하면 되니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살금살금 맨살을 덧그리다가 티셔츠 옷깃에 가려진 뒤쪽 목뼈를
매만진다. 기다란 손가락이 닿는 감촉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원하는 향수를 만들어도 괜찮고…… 아니면 경영 쪽으로 일해도 되고. 마케팅 상품을 개발해 봐도
좋습니다.”

“……직업 체험이라도 해보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직업 체험?”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그는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내 말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괜찮은 표현이네.”

“농담도…….”

대체 누가, 회사 책임자 자리를 주고 이것저것 경험해 보라고 한단 말인가. 애써 웃음으로 때우려는 내게


그는 꽤 진지하게 물었다.

“설마 낙하산은 싫습니까?”

“…….”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낙하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있어서. 그 모양 좋은 입술에선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주어진 기회가 있는데 아등바등 기어 올라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 들었다간 논란거리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자, 그가 티셔츠
위로 은근히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아니면 본부장까지 했던 분께 너무 약소한 자리인가?”

“그런 게 아니라…….”

손길이 이상하리만치 농밀했다. 척추뼈를 하나하나 덧그리며 내려오더니, 옷자락 아래 드러난 허벅지를
부드럽게 움켜쥔다. 움찔, 다리를 오므리는 순간 그가 한쪽 다리를 내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저희 대화 중이지 않았나요?”

“대화 중이죠. 앞으로도 할 거고.”

티셔츠 속으로 권이도의 손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옆에서부터 골반을 따라 올라오더니 이번엔 손가락으로
간질간질 등을 지분거리기 시작한다. 찌푸린 내 눈가에 입을 맞춘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겸사겸사 몸의 대화도 하는 거지.”

“잠시만…….”

고작 등을 좀 만질 뿐인데 지나치게 온몸이 예민했다. 온종일 그와 몸을 섞은 터라 기분이 나른하게 풀린


터라 더 그런 듯했다. 자연스럽게 내 위로 타고 올라온 권이도가 쇄골 부근에 코를 파묻었다.

“뭐 하시는…… 흣.”

“그냥 말하면 당연히 안 들어줄 테니, 베갯머리송사라도 하려고요.”

살랑살랑 페로몬이 풍겨 왔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무릎이 지그시 중심부를 눌렀다. 본능적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자 그가 티셔츠 속에 있던 손을 내 가슴께로 옮겨 왔다.

“아……!”

그가 밤새 괴롭힌 탓에, 유두가 조금 부어 있었다. 예민한 살결이 스치자 따끔한 감각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쪽, 쪽,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춘 그가 피아노를 치듯 갈비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안 돼요…… 더 못 합니다.”

그의 뒤통수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랫배에 열기가 모였지만, 섹스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난 직후인데다, 이미 모든 체력을 밑바닥까지 끌어다 쓴 이후였으니까.

“내가 지금 요구하는 건 섹스가 아닌데.”

그런데 권이도는 내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야살스럽게 웃었다. 눈매를 조금 가느스름하게 떴을 뿐인데,


명치가 바짝 옥죌 만큼 영향력이 엄청났다. 베갯머리송사를 하겠다던가. 협박보단 온건한 방법이었으나, 이 또한
평화로운 해결은 아니었다.

“사업 기반은 다져 놨고, 직원도 다 섭외해 놨어요.”

“……읏.”

“정세진 씨는 그냥…… 내킬 때 출근해서 보고 싶은 업무만 보면 됩니다.”


“그게 말이 되는…….”

“물론 정세진 씨 성격상, 막상 일을 하면 열심히 하겠지만…….”

“권이도 씨, 이거 좀……. 흣.”

“우선 출근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깃털이 스치는 듯한 손길과 귓가에 닿는 입술이 감질나기 짝이 없었다. 분명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힘없이 늘어졌던 성기가 반쯤 발기할 만큼.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

픽 웃으며 내뱉은 말엔 대꾸할 내용조차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기 싫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끝내 그가 내게 차 키를 쥐여 줬듯 비슷한 수순에 따라 출근길에 오르게 되겠지.

“정 부담스러우면 우선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봐요.”

그는 자비로운 척 친히 기간까지 정해 줬다. 얼핏 듣기엔 짧은 시간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과정을


이수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린다던데, 거의 수습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연봉도 잘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본부장으로 있을 때 얼마를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물론, 권이도라면 그것의 두 배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냥 취업한다고 생각해요.”

“취업이라니…….”

왜 그 말에 낯선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사회로 나가는 사람처럼, 이유 모를 긴장감이 덜컥


엄습했다. 여전히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예전처럼 일하고 싶잖아요.”

“…….”

움찔,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지금껏 건넨 어떤 말보다, 지금 들은 이야기가 가장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집에만 있는 게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던데.”

그 말대로였다. 온실에서 차나 마시는 일상은, 그다지 살아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근래엔 공방에


다닌다지만, 그 이전까지는 책을 읽는 게 일과의 전부였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넓은 집에서 단 한 사람
권이도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정세진 씨가 그 똑똑한 머리를 썩히는 게 아깝거든요.”


- 다음 화에 계속

47 화. Origine du parfum(9)

“…….”

실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럼 왜, 내게 본부장을 관두라고 한 거냐고. 그건, 내가 그의


배우자로서 집에만 머물길 바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이름은요?”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들을 묻는 대신 다른 질문을 택했다. 그를 살짝 밀어 내자, 이번엔 권이도도


별다른 저항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사업, 타이틀이 있을 거잖아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느리게 움직인 입술이
하나하나 익숙한 알파벳을 읊조렸다.

“S, E, J, I, N.”

“…….”

“세진.”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는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달큼하게 이야기했다.

“정세진 대표님이 론칭할 향수 레이블이에요.”

“……허.”

그냥, 가볍게 다녀 보라고 했으면서. 우선은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이라고 기간까지 정해 줘 놓고.

물건으로 모자라, 이제는 회사까지 안겨 주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막 조향을 배우기 시작한 내게


지나치게 과한 선물이기도 했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사이,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레이블이 마음에 안 들면 일하면서 바꿔도 됩니다.”

“……권이도 씨.”

“당장 향수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차피 정세진 씨는 경영 쪽 일이 더 익숙할 거고.”

머릿속이 잔뜩 복잡했다. 베갯머리송사고 뭐고, 곧장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줄까요.”
“…….”

“생각할 시간…… 아니, 정확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그가 말하는 준비는 아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겠지. 선택권을 주는 게 아니라 선택의 시간을 잠시


유예해 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당당히 얘기했다.

“일주일을 주죠.”

***

누군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내가 한 건 약혼이었지만, 반쯤 미래에 관한


것들을 포기하고 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그가 내게 요구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미래
지향적이었다.

처음엔 가지고 싶은 걸 묻더니, 그다음엔 하고 싶은 걸 물어 왔다. 나를 위한 온실에 차와 향수를 쥐여


주고, 이제는 회사까지 안겨 주겠다고 한다. 단순히 약혼자의 비위를 맞춘다기엔 고작 ‘물질’ 따위로 한정시킬
수 없는 선물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 내게 잘해 줄까. 처음, 권이도는 내게 바라는 게 있으니 그전까지는 자신이 주는 모든 걸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엔 이 모든 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가 보여 주는 친절에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 모든 걸 받아들이는


나였지만.

‘일주일을 주죠.’

권이도가 이야기한 일주일은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갔다. 그사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밤이면 늘 그랬듯이 함께 대화를 나눴고, 그러다 눈이 맞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까지
섞길 반복했다. 당연히 그동안 수면제는 단 한 알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이 팀장을 조수석에 태우고 다닙니까?’

당신이 사준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에 만족스러워하던 그는 직접 운전한다는 말까지 듣고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고, 선물 받은 차는 직접 운전하고 싶다고 말하자 픽 웃음을 흘렸다.

‘차를 하나 더 줘야겠군요.’

……그 뒷말은,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이태성은 공방에 다니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뒷짐을 진 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희나가 항상
앉으라고 권유했지만 매번 이게 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온실에서 그랬듯, 중간부터는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네요.”

그렇게, 오늘로 공방에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되었다. 2 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향사라는 직종을
단적으로 배우기엔 충분했다. 애초에 원데이클래스 정도를 생각했으니, 이 정도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숙제 검사도 이게 마지막이겠어요.”

노트를 내려놓은 이희나가 미리 준비한 물건들을 꺼냈다. 향료를 묻힌 시향지 몇 개와 원두가 담긴


통이었다. 그 단조로운 준비물을 살피는 내게, 이희나는 시향지에 밴 향을 선호도 순으로 적으라며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건네줬다.

“우디 계열 향수가 좋다고 하셨죠?”

“아…… 네, 그랬었죠.”

오늘은 그간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첫날 이야기했던 향수를 만들 예정이었다. 물론 이미 완성된 향료를


조합할 뿐이니 ‘만든다.’라고 부를 만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혹시 만들어 보고 싶은 향이 있으세요?’

첫날, 이희나의 질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 묵직한 느낌의 나무 냄새가 나는 향을


만들고 싶다고. 퍼뜩 떠오른 상대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마 이희나와 이태성 모두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터다.

“냄새 맡으면서 최대한 비슷한 향을 골라 보세요.”

아마 이러한 향료로는 권이도의 페로몬을 흉내조차 내지 못할 텐데. 애초에 페로몬은 향이 아니었지만,


그 발치에조차 다다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퍽 아쉬웠다. 물론 내가 진짜 조향사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종류별로 시향지의 냄새를 맡으며 마음에 드는 향을 골라냈다. 중간중간 코가 피곤해지면 통에 담긴


원두 냄새로 후각이 무뎌지지 않게 주의했다. 지난 2 주간 수없이 많은 향료 냄새를 맡으며 이희나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희나가 비율과 종류를 골라 주고, 향의 목록을 보며 몇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이 두 가지가 섞이면


어떤 느낌이 나는지,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설명해 줬다.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이희나는 유일하게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저울을 놓고 향료를 배합하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밌었다. 나는 이희나가 보여 준 시범을 따라


신중하게 여러 가지 향료를 섞었다. 그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든 향료를 섞은 뒤에야 넌지시
물었다.

“이쪽 관련 일 하실 거죠?”

“네?”

무심코 시선을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둥글게 내려온 눈꼬리가 찡긋 움직였다. 기분 좋게 입매를 말아


올린 그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되게 적성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요. 보통 적성 맞는 일 찾기 힘들잖아요.”

그는 흘긋 저울 위에 올려놓은 비커를 눈짓했다. 말간 액체가 담긴 비커에선 정제되지 못한 짙은 향기가


풍겨 왔다. 공병을 가져와 뚜껑을 연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난번엔 대충 넘겼지만, 사실 전 세진 씨가 이직 준비 중이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언제였더라. 두 번째 수업이었나. 향수 만드는 수업을 왜 들으러 왔냐는 질문과 함께, 본부장을 관둔 게


그런 이유 때문이냐고 물었었다.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쪽 일 하실 줄 알고 더 열심히 가르친 건데…….”

“…….”

“아니었나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이번에도 부담 갖지 말라는 듯이. 나는 푸스스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딱히 그런 목적으로 온 건 아니고…….”

공방에 좀 다녔다고 관련 직종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엔 취미에 불과했고, 지금도 조향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경험 삼아 온 게 맞아요. 게다가……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네요.”

뒷말은 내가 누누이 곱씹고 있던 생각이었다. 객관적으로 나이가 많진 않아도, 이제 와 새로운 시도를


하자니 두려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도 미래를 그리며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염원하는 게 영 낯설었다.

“세진 씨 아직 스물아홉 살 아니에요?”

이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내 나이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출생 연도가 뜨지 않던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샐쭉 미소 지었다.

“그 나이엔 뭐든 할 수 있어요.”

“하하…….”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이희나도 모르지 않는지 나를 따라 실없이 웃었다. 아마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나 본데, 뒤이어 흘러나온 말만큼은 농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작년에 저희 이모가 병 때문에 수술을 하셨는데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이희나는 데구루루 시선을 굴리며 언젠가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수술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 금방 피로해지고 몸 쓰는 일을 못 하게 되셨거든요.”

“아…… 힘드시겠어요.”

“그렇죠, 뭐.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까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걱정을 많이 했고.”

모르긴 몰라도, 꽤 큰 병이었던 모양이다. 이희나는 지금은 다 완치됐다고 덧붙이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근데 최근에 공부를 다시 하신대요. 장애인 전형으로 고시를 치를 수 있어서, 지금부터 일하고 10 년
정도 뒤에 정년 퇴임하면 연금이 나온다나 봐요.”

열심히 사는 분이구나. 딱 그 정도 감상이 들었다. 10 년 뒤에 정년이면 나이는 아버지와 비슷할 텐데.


그때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가 이 얘기 듣고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거나, 혹은 그 나이엔 뭐든 할 수 있다거나. 대충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희나는 아연한 얼굴로 이렇게 얘기했다.

“와, 진짜 앞으로 살날이 너무 많구나.”

“…….”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말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이희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전 이 일을 좋아하지만, 앞으로 몇십 년을 더 하라고 하면 약간 아득하거든요. 우리 앞으로 지금 산


것보다 세 배는 더 살 텐데, 지금 하는 일이 찰나에 불과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익살스럽게 눈가를 찡긋했다. 딱히 틀린 말은 없었는데, 다른 무엇보다 유독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지금 산 것보다 세 배는 더 살 거라는 부분이.

“늦고 빠르고의 문제라기보단, 살면서 몇 년 정도는 헛짓거리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헛짓거리라뇨.”

황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적나라한 표현에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기회가 되면 몇 년만 한 번 해보세요. 세진 씨 정말, 제가 본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희나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비커에 담긴 향수를 공병에 옮긴 뒤 뚜껑을 꼭 닫아 테이블에


내려놨다. 라벨을 종류별로 보여 주며,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사용은 2 주 정도 숙성시키고 하시면 돼요.”

네모난 유리병에 담긴 향수엔 ‘정세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따로 이름을 지어 줘야 했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회에 젖어 향수병을 만지는 내게, 상냥한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세진 씨.”

***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엔 잠깐 온실에 들러 꽃을 구경했다. 사시사철 화사하게 심어 놓은 꽃들이


가라앉았던 기분을 한결 낫게 만들었다. 여기 달아 놓은 조명을 언젠가 쓸 때가 와야 할 텐데. 기회가 생기지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게만 됐다.

권이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을 즈음에 퇴근했다. 현관까지 마중 나온 나를 보고 다정하게


웃다가 씻고 내려오겠다며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그가 편한 옷차림으로 내려왔을 땐, 식탁에 한 상 가득
진수성찬이 차려진 뒤였다.

탕평채와 칠리새우, 그리고 유자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자잘한 밑반찬과 함께 밥을 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저녁 식사가 시작된 이후, 내가 내내 준비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생각은 해봤습니까?”

주어는 필요 없었다. 기간은 이미 끝났고, 권이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권이도를 바라봤다.

“자격증 따려고요.”

며칠간 틈틈이 생각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걸 해본다는 사실이 염려스럽긴
했으니까. 긴 시간 고민하고, 권이도의 확답까지 들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회사는…….”

“…….”

“낙하산도 나쁘진 않겠더라고요.”

권이도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습관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제가 언제 대표님 소리를 들어 보겠어요.”

거절하지 못할 거라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편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내게도, 그리고 권이도에게도 말이다.

“잘 생각했어요.”

권이도는 그런 내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짙은 눈동자에 기분 좋은 빛이 한가득 떠올랐다.


내가 할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근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는 얘기해 보라는 듯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협상을 하듯 한껏 진지한 어투로 얘기했다.

“받기만 하면 죄송하니까, 원하는 걸 하나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게 받은 걸 다 합치면, 갚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결과가 나오곤 했다. 아무리 대가 없이 주는 거라고


해도 그냥 받기엔 부담스러웠단 말이다. 물질적인 것들이 마냥 번거롭기만 했다면, 이제는 미안함과 함께
자그마한 고마움도 생겼다.

“저도 권이도 씨한테 뭔가 해주고 싶어서요.”

“원하는 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권이도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늘 당당한 사람이 내 앞에선 간혹 이렇게 처연한


표정을 짓곤 한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기에 나조차 길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선물도 좋고, 아니면 뭐…….”

“…….”

“몸도 괜찮고.”

장난처럼 덧붙인 말에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당황스러운 건, 그가 정말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는


점이었다. 농담이었다고 정정해 주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몸으로 주면 정세진 씨가 손해일 텐데.”

진지한 어투였다. 미처 반박할 틈도 없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 페로몬을 닮은 향수를 가지고 싶습니다.”

천천히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큼한 음성이 요구한 한 가지가 지나치게 로맨틱했다. 권이도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고상하게 턱을 당겼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아요. 만약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하고, 그 외에도 요구 사항이
있으면 들어주죠.”

언뜻 들으면 그가 바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내게 해주는 것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가지고 싶은 게 고작 내 페로몬 향이라니.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이건 정세진 씨가 아니면 못 하는 일이에요. 그 페로몬은 우리 둘밖에 모르니까.”

“……그건 그렇지만.”

페로몬샘이 기형이기 때문에, 내 페로몬은 오로지 히트 사이클 때만 느껴졌다. 당연히 페로몬을 느껴 본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권이도가 유일했다. 나를 진료한 의사는 물론, 가족들 역시 특이 형질이 아닌 베타였으니까.

“이 정도는 돼야 정세진 씨가 생각하기에도 수지가 맞겠죠.”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단하다. 아마 그가


원하는 향수를 만들기 전까지는, 대표직을 내려놓을 수 없겠지.

“대답은?”

자신이 없다고 해볼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내가 먼저 제안해 놓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못 이기겠다는 듯 눈가를 찡긋했다.

“오래 걸릴 겁니다.”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릴수록 좋죠.”

뻔뻔하게도,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약속을 하겠냐며 새끼손가락을 펼쳐 오른손을


내밀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테이블이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을 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세진 씨가 만드는 향수.”


예의 그 당당한 미소가 가슴 언저리에 짙게 남았다. 기약 없는 바람이었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할
약속이기도 했다.

그가 내어 준 회사에서 만들, 내 페로몬을 닮은 향수. ‘Sejin’의 론칭이 잠정적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8 화. Bonheur quotidien(1)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날씨가 바뀌었다. 곧 장마가 오리란 소식이 들렸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계절의 변화를 준비하듯, 전체적으로 채도 낮은 하늘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오전 6 시 반. 알람 하나 없이 눈을 뜬 나는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룸 앞에 섰다. 단조로운


디자인의 정장과 무난한 색감의 넥타이. 출근할 때면 늘 입고 다니던 차림이었는데 오랜만에 입으니 제법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거울 앞에 서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표정을 한 내가 보였다.

“후…….”

상태는 괜찮았다. 잠을 잘 잔 덕에 눈이 붓지도 않았고, 다크서클이 내려오거나 하지도 않았다. 유일한


흠은 단추를 풀면 목덜미 아래로 보이는 울긋불긋한 흔적 정도. 물론 그마저도 넥타이를 잘 동여매면 보일 걱정은
없었다.

나는 줄지어 진열된 손목시계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골라 손목에 찼다. 부담스러울 만큼 비싼


브랜드의 시계였으나,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브랜드였다. 그 때문에 민재는 이곳의 액세서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민재가 여길 보면, 눈이 돌아갈 만큼 좋아하겠지.

빼곡히 채워진 장식품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정확한 사이즈의 옷들, 이름
모를 보석이 박힌 넥타이핀, 내 손목에 꼭 맞는 손목시계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두까지.

처음엔 쓸데없다고 생각한 물건들을 어쩌면 앞으로 매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챙겨 온 짐에는


오늘 같은 날 입을 만한 옷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몸만 오면 된다던 말대로 나는 최소한의 짐만 꾸려 권이도의
집에 들어왔다.

“일을 하게 될 줄 몰랐지…….”

오늘은 다름 아닌 첫 출근 날이었다. 권이도가 내게 마련해 준 향수 브랜드의 대표 자리. 자격증을 따기


전까지로 약속했다가, 그에게 향수를 만들어 줄 때까지로 기한이 변경된 내가 다닐 직장.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냥 조금 긴장이 된다면 모를까. 언젠가 처음으로 해신에 출근하던 그때처럼,
눈을 뜬 순간부터 미묘하게 비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했다. 드레스룸에서 나왔을 땐 협탁


위에서 은방울꽃과 향수 두 개를 발견하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하나는 권이도에게 받은 향수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공방에서 만들어 온 우디 계열 향수였다.

“…….”

별생각 없이, 그가 선물한 향수로 손을 뻗었다. 전체적으로 하늘하늘한 디자인의 향수는 그 향 또한 병의


생김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 섞인 풀 냄새, 장미와 자스민이 섞인 은은한 향기. 은방울꽃 특유의 청량함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한 건, 약혼반지를 빼내 협탁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사적인 장소면 모를까,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들을 끝도 없이 마주칠 터다.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길 바라는 권이도이니, 내 선에서 조심하는 게
좋겠지.

반지 자국이 남은 손을 괜히 쥐었다가 폈다 했다. 시계는 어느덧 7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래층으로 내려갈 시간이었다.

***

“…….”

“…….”

권이도와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끔히 차려입은 내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가, 텅 빈 손을 보며 말끔한 눈썹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변화였으나,
그간 권이도를 살펴본 내게는 또렷이 보였다.

아침 메뉴는 향긋한 쑥죽과 독특한 소스를 뿌린 연두부,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과 떡갈비였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꼬박꼬박 식사를 챙겼더니 아침에 먹는 양이 조금 늘어난 기분이었다. 원래는 한 공기를 다 비우는
게 살짝 거북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됐다.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권이도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무려 정적 속에 밥을 먹었지만, 그 침묵이 예전처럼


머쓱하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 역시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나쁘지 않습니다. 조금 긴장도 되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권이도가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예의 그 짙은 눈동자로 꼼꼼히 내


얼굴을 살폈다. 적나라한 시선이 내 얼굴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긴장한 얼굴이 아닌데.”

“그런 건 티 내지 말라고 배워서요.”

장난스럽게 권이도의 말을 받아쳤다. 눈을 맞춘 채로 미소 짓자 반대로 그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는 다시


한번 내 손가락을 내려다봤다가 묵묵히 식사를 마저 이어 갔다.

늘 권이도를 배웅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오늘은 둘이 함께 현관을 나서야 했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안 좋은 건지, 그렇다면 왜
갑자기 안 좋아졌는지. 그러한 것들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먼저 안쪽에 올라탄 권이도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안 타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남몰래 입맛을 다시며 안에 들어서자, 그가 망설임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차고가 있는 층을 누르지 않은 터라 우리를 태우고도 잠깐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그가 조금 억세다시피 내 손목을 붙잡았다.

“왜 그러시…….”

휙, 몸이 돌아갔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 채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쳤다.

“……!”

화들짝 놀란 시야로 곱게 감긴 두 눈이 보였다. 내 팔과 어깨를 단단히 붙든 그가 각도를 바꿔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차 하는 사이 입술 틈새를 파고든 혀는 방심하고 있던 내 혀를 부드럽게 옭아맸다.

“…….”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늘 키스만큼은 상냥한 그였는데, 지금은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기만 하다. 혀와 혀를 문지르며 입 안 곳곳을 탐닉하던 그는 왼손으로 내 뺨을 감싼 채 귓가를 은근히 문질러
왔다.

반사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를 붙잡았으나, 그는 힘들이지 않고 내 왼손에


깍지를 껴 벽으로 내리눌렀다. 저항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목덜미를 딱딱하게
굳힌 채 숨을 멈춰야만 했다.

쪽,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모자란 숨 때문에 버거워할 즈음이었다. 마찬가지로 달뜬 숨을 내뱉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숨 쉬어.”

“…….”

그와의 잠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만 하고, 그는 다시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고 이번엔 아까보다 느리게 입 안에 혀를 밀어 넣는다.

코끝에 권이도의 페로몬이 스쳤다. 내가 뿌린 향수 냄새에 묵직한 나무 냄새가 섞여 들었다. 역시


공방에서 만든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고, 감히 향수 따위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안달을 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위태로운 감정이 전해졌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농밀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래서 더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을 권이도의 허리에 감았다. 내가 자신을 끌어안자 그가 움찔하며 깍지를 낀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붙잡은 손을 내 목에 둘러 주고 양팔로 그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

쪽쪽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에게 몰입해 열심히 페로몬을 받아먹기
바빴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할 때는, 그가 내 허벅지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어 온몸으로 나를 받쳐 왔다.
“……흣.”

탄탄한 허벅지가 은근슬쩍 중심부를 눌렀다.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는데, 큼직한 손이 내 턱을


단단히 고정했다. 혀 아래쪽을 간지럽게 쓸어내리는 감각엔 허리를 파르르 떨며 그에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껏 입을 맞추고, 내가 정말 흐물흐물 녹아내릴 즈음에야 나를 놓아줬다.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리멍덩한 시야 너머로 진한 고동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덧그린 그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빨아들이길 반복했다.

“으응, 잠시만…….”

이러면 입술이 부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그를 밀어 냈지만, 역시나 권이도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 씹어


삼킬 것처럼 아랫입술을 괴롭히다가 느릿느릿 빨아들이며 고개를 떼어 냈을 뿐. 한껏 예민해진 입술을 앞니로
깨물자, 그가 가만히 이마를 마주 댔다.

“세진아.”

가라앉은 음성이 외설스러웠다. 그는 숨결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로 상냥히 제안했다.

“그냥 집에 있을래?”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는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내 뺨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리고 귓가로 입술을 가져와 귓불에 입을 맞추며 사근사근 속삭인다.

“밖에 내놓으려니까 내 방에 가둬 두고 싶은데…….”

“…….”

“어떻게 생각합니까?”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게 내리깔려서. 정말


진심이라는 듯, 페로몬 실린 음성이 등허리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억지를 부리시네요.”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탓에 아직까지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일자리를 준 건 권이도 씨면서.”

딱히 탓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보여 주는 모순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을 해도 그는 절대 나를 가둬 둘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이라도 다시 가져가셔도 되고요.”

장난처럼 건넨 말에 권이도는 들릴 듯 말 듯 웃었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내 귀 아래쪽에 입을


맞춘 것이다. 목과 이어지는 부분을 입술로 문지른 그가 마찬가지로 장난스레 말했다.
“줬다 뺏기엔 모양새가 좀 그렇죠.”

딱히, 상관없지 않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별다른 미련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권이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것도 첫 출근이라고 각방까지 쓴 사람한테.”

“…….”

각방이라니. 어감이 좀 그렇지 않나.

“……원래 방은 따로 쓰지 않았습니까.”

어제, 언제나처럼 권이도와 시간을 보낸 나는 분위기가 무르익자마자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냥 눈이


마주친 순간 느낀 건데, 그대로 있었다간 다른 의미로 밤을 새우게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일을 나가는 건데
컨디션 조절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게. 내가 생각을 잘못했지.”

권이도는 그 사실이 썩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를 보낼 때도 미련 넘치는 시선을 보내더니, 오늘까지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안 어울리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괜히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잘 어울리네요. 옷 입은 거.”

“옷 사준 사람 센스가 좋아서요.”

조그만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잠깐 나를 안고 있던 권이도는 그제야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우리 두 사람을 태운 승강기가 우웅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차고엔 권이도와 내가 각각 타야 할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가 내게 선물한 차 대신, 권이도가 타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까만 세단이었다. 역시나 운전은 이태성이 할 예정이었기에 그는 나를 보자마자 차 뒷문을
열어 줬다.

“조심히 다녀와요.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자신이 투자하는 사업이면서, 권이도는 뻔뻔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반드시 저녁을 먹기 전엔
돌아오라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정말 바쁘게 일하던 게 누군데, 이제 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굴고 있다.

“이따 뵐게요.”

나는 그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네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태성이 뒷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에 오를 때까지
권이도는 못이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대표로 일하게 될 향수 회사는 엄밀히 따지면 향수 하나만을 다루지는 않았다. 우선은 선호와
연계해 여러 방향제 따위를 납품하고, 더 나아가면 코스메틱 브랜드로서 여러 화장품도 개발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스타트업 수준의 소규모 기업이지만, 선호의 투자를 받는 한 성장은 금방일 것이다.
며칠 전 권이도가 건네준 사업 계획서엔 이러한 내용들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나는 그가 제안한 최소
투자금을 듣고 놀랐다가,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투자’의 기본은
수익률일 터인데, 이렇게 되면 권이도가 하는 건 그냥 기부가 되지 않는가.

나는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Sejin’이라고 쓰인 사업 계획서를 다시 훑어봤다. 휘갈겨 쓴 필기체


로고는 S 와 j 부분을 볼륨 있게 적어 포인트를 준 모양이었다. 대표란에 적힌 내 이름 세 글자가 회사 로고와
어우러져 두 배로 민망한 기분이 든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영인으로서 생각하면 이런 리스크가 큰 사업 따위 하지 않는


게 옳다. 그리고 그냥 평범한 시각으론 타인에게 덜컥 이런 회사를 맡기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선호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괜히 전문 경영인을 이사로 따로 두는 게 아니었다.

“세진이라니…….”

회사 이름을 세진이라고 지어 놓고, 마음에 안 들면 레이블을 바꾸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론칭될 상품의 이름은 바꿀 수 있더라도 사명을 바꾸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건만.

“이태성 씨, 향수 브랜드가 ‘세진’이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운전을 하던 이태성이 백미러로 흘긋 나를 바라봤다. 나는 사업 계획서를 허벅지에 내려놓고 괜히


콧잔등을 찡긋했다. 무어라 질문하는 것조차 멋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가 출근할 회사 이름이 ‘세진’인데, 제가 보기엔 영 이상해서요.”

으레 명품 브랜드들이 디자이너의 이름을 땄다는 건 알고 있었다. 회사명을 대표 이름으로 짓는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나. 조향 경력이라고는 이희나에게 배운 2 주가 전부인
내게 너무도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볼 땐…… 그냥 평범한 것 같습니다.”

이태성은 퍽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내가 “그래요?”라고 되묻자 핸들을 돌리며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예, 그냥 본인 성함이라 어색하게 느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이유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덜컥 만들어진 회사라 더욱 그랬고. 게다가


가장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것.

“날 위해 만든 것 같아서 그렇지…….”

원래 추진하던 사업에 그냥 내 이름을 붙인 것과 애초에 내게 주기 위해 사업 자체를 기획한 것엔 많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억지로라도 납득이 가능했지만, 후자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있어도, 내게 환심을 사야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품을 들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과정이 이 회사가 후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름부터 내용, 그리고 지나치게 좋은
조건까지. 마침 추진하던 사업에서 한자리 내어 준 게 아니라, 내게 한자리를 주기 위해 회사 하나를 통으로
차린 것처럼.
“본부장님.”

“본부장 아니라고 얼마나 더 말해야 합니까?”

갑갑한 기분에 괜히 이태성에게 딴지를 걸었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항상 저


호칭을 고집한다. 이태성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대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 다음 화에 계속

49 화. Bonheur quotidien(2)

말문이 턱 막혔다. 혹시 일부러 이러나 싶었는데, 이태성은 정말 괜찮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 말았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나직이 운을 뗀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여상스러운 투로 묻는다.

“이제 공방은 아예 안 가시는 겁니까?”

공방? 백미러로 이태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궁금할 수는 있어도,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일정을 궁금해하진 않았는데.

“네, 수업도 끝났으니까 이제 갈 일 없을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거울로 그의 눈매를 보는 순간,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좀 더 살갑게 대하지 그러셨어요.”

“…….”

핸들을 움켜쥔 손이 순간 움찔했다. 뒤이어 흐르는 침묵엔 잔뜩 어색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있던 그는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출 즈음에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숨기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래도. 아닌 척하려면 좀 더 열심히 숨길 것이지.

“그 사람이 누군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묻자, 그가 핸들을 꾹 움켜쥐는 게 보였다. 자꾸 놀려 버릇하면 안 되는데,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건드리게 된다. 나는 소리 없이 웃음을 삼키며 넌지시 이야기했다.

“연애도 많이 해본 사람이 왜 그렇게 숙맥같이 굽니까.”

“…….”

이태성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조차 어느 정도 뻔뻔한 성미여야
가능한가 보다. 묵묵히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 요령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습니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그가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얘기했다. “남들만큼 해봤다고 했죠.” 그리 덧붙이는


핑계가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백미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스물아홉에 남들만큼이면…… 꽤 많은 편인 것 같은데요.”

“본부, 대표님도 저랑 비슷하시지 않습니까.”

“전 연애 경험이 없어서요.”

이태성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동시에 짙은 눈썹이 삐쭉 추켜 올라간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는 아까보다 더 까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말만 존댓말이고 내용은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그냥 조금 황당한


정도.

“제 말 안 믿으시네요.”

“예, 안 믿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 차에 올라탄 이후 처음으로 보는 단호함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누군가를 만난 적 없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진짭니다. 뭐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는 눈가를 찡긋하며 내 결백을 주장했다. 딱히 자랑거리도 아닌데 내가 왜 그를 속이려고 든단 말인가.


이태성도 그리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눈에 차는 사람이 없으셨던 겁니까?”

“뭐…… 딱히 눈이 높진 않은데.”

눈이 높고 낮고를 따지기 전에 애초에 상대를 고르려고 한 적조차 없었다. 누군가 내게 호감을 보인 적은


있지만, 크게 설레거나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이걸 눈이 높다고 말하면야, 나로선 할 말이 없었지만.

“그런 것치곤 첫 상대가 전무님이시군요.”

“…….”
그 말에는 그냥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하는 게 연애인가.’라는 의문과 ‘이태성은 이
약혼의 전말까지는 모르는구나.’라는 깨달음이 함께 찾아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권이도를 내 첫 상대라고 일컬을
리가 없으니.

“권이도 씨가 좀 과분한 상대긴 하죠.”

픽 웃으며 흘린 말에 이태성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을 때, 잠깐 뒤를 돌아본 게


내게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자연스레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나는 의미 없이 다시 사업 계획서를 훑어봤다.

권이도가 내게 맡긴 회사는 높은 빌딩이 즐비한 거리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척 보기에도 값깨나


나갈 것 같은 건물은 권이도의 집에서도, 그리고 해신금융 본사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아마 선호그룹의
자본금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좋은 위치에서 사업을 시작하진 못했을 거다.

이태성은 지정된 구역에 차를 주차하고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말하길, ‘Sejin’은 이


건물의 10 층을 통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분명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실 규모가
지나치게 과분하지 않나 싶다.

“도착하면 경영지원팀에서 나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태성이 따라붙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그는 운전부터 비서 역할까지 도맡아 할 모양이었다. 권이도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몰라도, 회사에 대해 나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일을 다니는 내내 이런
포지션을 유지하는 건지. 새삼 김 실장의 존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세진 대표님?”

10 층에 도착했을 땐 그의 말대로 경영지원팀에서 직원이 나와 있었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윤지영이라고 합니다.”

“정세진입니다.”

“윤 팀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같은 윤 씨라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윤 대리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칼같이 자른 단발도 그렇고,


서글서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도 그렇고. 그런데도 눈빛이 또랑또랑해서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직원들한테 인사만 하시고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윤 팀장을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면에 큼직하게 창이 트인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책상마다 파티션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고, 구석구석 잘 관리된 화초 따위도 놓여 있다.

기존에 일하던 사무실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새로 지은 건물에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해신은 연식이
오래된 만큼 사내 시설도 많이 낡은 감이 있었다. 리모델링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해서 굳이 입에 올리진 않았다.

“흠흠.”
내가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 윤 팀장이 가볍게 헛기침해 주의를 끌었다. 아니, 딱히 시선을 끌 필요도
없긴 했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이 한참 전부터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한가득 쏠린 시선은,
마치 처음으로 본부장 자리에 올랐던 그때를 생각나게 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오시게 된 정세진 대표님입니다.”

윤 팀장은 정중히 내 쪽을 가리키며 나를 소개해 줬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오기 전부터 이런저런


언질을 들었을 터였다. 나는 한창 본부장으로 일하던 그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주변을 쭉 둘러봤다.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금 부담스럽다시피 박수가 터졌다. 경계심 반, 그리고 호기심 반. 나를 관찰하는 시선들도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낙하산으로 맡은 직급엔 당연히 따라오는 반응이었으니, 이러한 상황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지만, 앞으로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으면 합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많이 배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예의상 몇 마디를 덧붙이고 말이 길어지기 전에 인사를 마무리했다. 내가 오래 버티고 있어 봤자


직원들에게는 방해만 될 터였다. 친해지는 건 좀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대충 얼굴도장만 찍으면 될 듯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대표님. 아무래도 이 호칭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태성은 둘째치고 회사 사람들이
부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민망하진 않을 터였다.

“여길 쓰시면 됩니다.”

윤 팀장이 안내해 준 방은 사무실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벽면은 불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고,
벽면 가득 커다란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책상과 책장. 기본적인 가구만 놓인 내부는 널찍한
창문 덕에 채광도 퍽 훌륭했다.

“그럼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윤 팀장은 제 역할을 마치자마자 곧장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말을 붙이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편했다. 이태성까지 자리를 비켜 준 덕에(아마 옆에 딸린 비서실로 가는 듯했다) 넓은 방 안엔 어느덧 오로지 나
혼자만이 남게 됐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영기획팀도 10 층이었지. 그곳에서 보는 풍경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여기선 얼마나 일하려나…….”

자격증을 따기까지 앞으로 대략 두 달. 그 후 내 손으로 직접 향수를 만들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다. 모르긴 몰라도 생각보다 오랜 기간을 머물러야 할 게 분명했다.

현실감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이 모든 게 온전한 내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일은 일찍 들어올 테니까…….’


‘…….’

‘정 힘들면 전화라도 해요.’

세 번이었나. 그가 내 히트 사이클 주기를 정확히 알아차린 게.

향수를 만들어 준 후 그에게 모든 걸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 약혼의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당신이 내게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 관해 어떻게 그리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

기회를 위한 인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히 갈등을 피하기 위한 안주라고 해야 할까. 그 유예


기간에 어떤 이름을 붙이건 별로 상관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를 만난 이후 자꾸만 미래를 그리게
된다는 것 정도.

“…….”

창문에 대고 있던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우습게도 잠깐 권이도를 떠올린 것만으로 그리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그에게 사무실 이야기를 해줘야지. 마음에 쏙 든다고 얘기하며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전할 생각이었다.

때로는 사소한 일상이 현재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되곤 한다. 그와의 저녁 식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평온함이었다.

***

처음 취임한 날이었기에 본격적인 업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회사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였고 간간이 직원들의 업무를 파악하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자본이 있는 회사라 그런지, 내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체계가 잡혀 있었다.

점심에는 이태성에게 부탁해 직원들에게 점심을 사주라고 했다. 내가 끼는 건 좀 불편할 테니 카드만


쥐여 주고 나는 함께 나가지 않았다. 이태성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군말 없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부터 늦게까지
일하면 직원들이 눈치를 살피느라 퇴근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충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타이밍 좋게 이태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 어디 가십니까?”

“슬슬 퇴근해야죠. 이태성 씨도 짐 챙겨서 나오세요.”

간단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태성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넌지시 물어 왔다.

“회식 안 하십니까?”

“……회식?”

“예, 대표님 환영회 말입니다.”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환영회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건


직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려는데 이태성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아까 직원들이…….”

“대표님, 벌써 들어가세요?”

그때, 근처에 있던 직원이 슬쩍 말을 붙였다. 개발팀 팀장으로 있는 남자였다. 그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면 처음 오신 기념으로 환영 회식을 하려고 했거든요.”

“어…….”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뒤로 사무실을 둘러봤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은근슬쩍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눈빛들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바쁘신 것 같아서…….”

개발팀 팀장은 내게 말을 거는 게 꽤 불편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나 미처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팀장을 한 번, 그리고 이태성을 한 번 쳐다본 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눈가를 찡긋했다.

“환영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 말을 듣자마자 팀장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나는 권이도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왕 회식을 할 거면, 직원들이 좋아할 걸 먹이는 게 나을 듯했다.

“메뉴는 소고기로 할까요?”

***

회식 장소는 내가 팀원들과 종종 가곤 했던 소고깃집이었다. 철저히 예약제로 운영되지만, 워낙


단골인지라 예약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우선 가게를 통으로 빌려 놓고, 권이도에게 연락해 오늘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술 마십니까?

권이도는 ‘회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산하게 내리깔린 음성에서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듯했다. 핸드폰을 통해 전해질 리가 없으니 당연히 기분 탓이지만 말이다.

“아뇨, 술은 안 마실 겁니다.”

음주를 즐기지도 않는 데다, 어색한 사람만 가득한데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몇 잔
마실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일찍 들어갈게요.”

이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미안하단 말을 할까 했다가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권이도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반지를 끼고 가라고 할 걸 그랬지.


“…….”

이 말도, 설마 권이도에게 들을 줄 몰랐는데. 반지를 빼고 다니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 먼저였건만.

“다시 끼고 다니는 건 어렵지 않죠.”

가볍게 말했지만, 권이도는 긍정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음을 흘리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대답했을 뿐. 빈말로라도 그러라고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약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따 뵐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멀거니 통화 시간이 남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머리로는 그를 이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그가,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반지를 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식당에는 이미 대부분의 직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태성은 차에서 기다린다고
했기 때문에 식당으로 들어선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일이 있으면 편하게 가도 된다고 했는데, 정작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표님!”

잠깐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는 내게, 그나마 익숙한 얼굴의 윤 팀장이 알은체를 해왔다. 윤 팀장의
테이블엔 경영지원팀 직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인제 보니 각각 팀별로 친한 사람끼리 모여 앉은 듯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윤 팀장이 슬쩍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대표님, 여기 금액대가…….”

“아.”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바짝 긴장한 직원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마 저 안에도 가격은 없을 터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마음껏 드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직원들은 선뜻 메뉴를 주문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식당 점원에게


언질을 줬었다. 타이밍 좋게, 내 얼굴을 확인한 점원이 테이블마다 고기를 내어 왔다.

“어, 저희가 안 시켰는데…….”

줄줄이 나오는 술과 고기를 보고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윤 팀장이 건네는 수저를 받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혹시 몰라서 제가 종류별로 시켜 놨어요. 드셔보시고 마음에 드는 걸로 더 시켜 드시면 됩니다.”

- 다음 화에 계속
50 화. Bonheur quotidien(3)

맨 처음, 팀원들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었다. 다들 눈치만 살피고 메뉴는
고르지도 못한 채 바짝 긴장해 있던 것이다. 건물부터 고풍스러운 한옥 구조인 데다, 이래저래 쓸데없이 격식
있는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럴 땐 딱히 방법이랄 게 없었다. 그냥 내가 먼저 나서서 고기를 굽고,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음식을 좀 먹다 보면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리기 마련이니까.

“어어, 제가 구울게요!”

역시나, 내가 집게를 들자마자 직원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눈치만 보던 다른 테이블도 하나둘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윤 팀장은 묵묵히 있다 말고 슬그머니 질문했다.

“……회식을 항상 이런 데서 하셨어요?”

“뭐…… 늘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그때그때 메뉴만 바뀔 뿐 전체적으로 비슷하긴 했다. 가게는 주로 내가 고르고, 계산도 항상 내가


했으니까. 어쩌다 한 번 맛있는 걸 사줄 기회이니, 고생한 만큼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첫 회식에 점수 따기엔 소고기가 제일 좋잖아요.”

장난스레 말하자 윤 팀장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여긴 얼마냐고 묻기에, 그냥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고만 대답했다. 나도 확실히는 몰랐고, 나를 대신해 내 카드로 계산했던 김 실장만이 정확한 금액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님, 한잔 받으시죠.”

그 잠깐 사이에 주변이 시끌벅적하게 변해 있었다. 윤 팀장은 가장 먼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종류별로


시킨 술 중에서 하얀 병에 붓글씨로 이름이 적힌 도수 높은 소주였다. 거절할까 하다가, 한 잔쯤은 받아 두는 게
좋다는 생각에 술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투명한 액체가 술잔을 채웠다. 나는 윤 팀장의 잔도 채워 주고 대충 분위기에 맞춰 건배까지


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직원들도 다 익힌 고기를 먹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 고기가 살살 녹네.”

“대표님, 여기 너무 맛있는데요?”

맛있는 술과 음식은 그 무엇보다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날그날 질 좋은 한우를 들여오는 식당이니만큼


고기 맛은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새삼 기획팀 팀원들이 떠올랐지만, 직원 하나가 불쑥 술병을 내미는 바람에
생각이 깨져 버렸다.

“대표님!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아, 저는…….”

아직 윤 팀장이 주는 술도 마시지 않았기에 슬쩍 술잔을 가렸다. 아무도 내게 강권하지 않고, 거절하려면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막상 뒤로 빼자니 직원의 시선이 너무도 초롱초롱했다.

“잠시만요.”

그래서 그냥 잔에 있던 술을 꿀꺽 삼켜 버렸다. ‘오오!’하고 감탄사를 흘린 직원이 내가 내민 잔에


쪼르륵 술을 채워 줬다. 잔뜩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적당히 맞춰 줘도 될 것 같았다.

“대표님, 저도요!”

“제 잔도 받아 주십쇼!”

분위기가 무르익는 건 금방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적당히 계산이나 해주고 빠질 생각이었다.


대표와 직원이라는, 가뜩이나 불편한 위치일 텐데. 눈치 없이 함께 어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오늘 처음 본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술이


들어가자마자 친근하게 바뀐 것이다. 경영지원팀은 물론 다른 테이블에 있던 직원들까지, 자리를 옮겨 가며 내게
술이나 고기를 권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제가 쌈 하나 싸드릴게요!”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여러분 많이 드세요.”

웬만한 술은 받아 마시고, 고기를 주는 건 대부분 거절했다. 나중에는 살짝 취기가 오르려고 해서 겉에


입은 재킷을 벗어 옆에 내려놨다. 술을 마시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싸한 감각이 영 달갑지 못했다.

“근데 대표님 향수 뭐 쓰세요?”

“어, 맞아. 저도 여쭤보고 싶었는데.”

알딸딸하게 취한 직원들은 아까보다 더 편안하게 말을 붙였다. 지금 물어보는 건, 아마 제품개발팀에


속한 조향사들이었던 것 같다.

“들어오시자마자 좋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지금은 술을 마셔서 모르겠다며, 직원 하나가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향이 별로 진한 향수는 아니었는데,


원체 후각이 좋은 모양이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오늘 뿌리고 나온 향수를 설명해 줬다.

“G 사에서 나온 향수인데…….”

놀랍게도, 그들은 이름을 듣자마자 어떤 제품인지 알아차렸다. 마니아층에게 유명한 제품인지, 한 직원은
연도별로 컬렉션을 모았다며 사진까지 보여 줬다. 다른 한 직원은 가격이 너무 비싸 고민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대표님, 그거 시계는 어디 거예요?”

“어디 건 줄 알면 살 수 있어요?”

“당연히 못 사지.”

“봐봐, 근데 뭘 물어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대화가 마무리됐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지금 친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간이 너무 지체됐단 사실을 깨달았다. 차에서는 이태성이 기다리고,
집에서는 권이도가 기다릴 텐데.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대표님 벌써 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같이 노래방 가요, 노래방!”

내가 일어서자마자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일이 되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처음과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더 먹고, 혹시 2 차 갈 거면 영수증 끊어서 내일 나한테 줘요.”

다행히 직원들은 곤란할 정도로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계속 아쉬운 티를 내긴 했지만, 마지막엔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꾸벅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감사했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시끌벅적한 가게를 나와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제는 꽤 따듯해진 밤공기가 나를 맞이해 줬다. 웅웅거리던 소음이 사라진
터라 알싸하게 올랐던 술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이 홧홧거리는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재킷을 굳이 입지는 않았다.

“후우…….”

나는 나직이 숨을 토하며 고개를 두어 번 털어 냈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고, 익숙한 숫자


열한 개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술자리를 나왔으니, 나를 데리러 오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는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겼다.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

멈칫, 몸을 똑바로 세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습관처럼, 이태성이 아닌 김 실장에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도련님?

“아…… 김 실장님.”

-……술 드신 겁니까?

“…….”

눈치도 빠르지. 딱 한 마디 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별로 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혀가


꼬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예, 마시긴 했는데 별로 안 마셨습니다.”

-웬일로 술을…… 무슨 일 있으십니까?

김 실장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길게 목울대를 울렸다.


습관처럼 왼손 엄지로 약지를 매만졌으나, 원래라면 만져져야 할 반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김 실장님.”

-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태성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가만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회식을 했어요.”

-회식…… 말씀입니까?

“네, 이번에 일을 다니게 돼서.”

-…….

“친해지려고 몇 번 술잔을 받았더니, 평소보다 좀 마셨네요.”

가까이 다가온 이태성이 의아한 눈을 해보였다. 누구냐고 묻진 않았고 차에 있겠다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어두컴컴해진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서 기사한테 연락한다는 게, 실수로 김 실장님한테 걸었습니다.”

-…….

“습관이 참 무섭네요.”

김 실장은 잠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쉬라고 말하고 끊을 생각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도와는 달리, 결연한 말투였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그맣게 들리는 엔진 소리, 이따금 도로에서 들리는 소음과 자동차 특유의 엷은 가죽 냄새까지.

“피곤하시면 좀 주무셔도 됩니다.”

그 익숙한 감각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보다 더 익숙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리며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백미러에 비쳐 보이는 눈매는, 이태성이 아닌 김 실장의 것이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

김 실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그의 눈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가듯 짧은


변화였기에 정말 웃는 건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까, 그렇게 말한 김 실장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이태성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다고.

‘전무님이 오시는 겁니까?’

이태성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가 내가 고개를 젓자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다는 양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살펴본 것이다. 나는 결백하단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는 그러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얘기했다.

‘같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김 실장이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이보다 더 어색할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서로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나를 사이에 둔 채 시선만 교환했다. 나도 서로를 소개해 주진 않았기에 아마
이름조차 모른 채 스쳐 지나갔을 터였다.

‘이제 퇴근하셔도 됩니다.’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전 기사가 아니라 대표님 경호원입니다.’

김 실장도 참 대단하지. 대놓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데도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이태성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게 더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나는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고, 우리 뒤에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운전을 잘한다고 그랬던 말대로, 소리 없이 따라붙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경호가 아니라 미행을 당하는 기분이었으나, 아무렴 뭐 상관은 없었다.

“제가 그 고깃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본부장님 회식 때마다 따라다닌 게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맞다, 그랬었지. 예약부터 계산까지 항상 김 실장이 도맡아 해줬었다. 회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괜히 죄송하네요. 집에서 쉬고 계셨을 텐데.”

“아뇨…… 회사에서 잔업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쉬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내가 그만둔 뒤에도 김 실장은 참 바쁘구나 싶다.


그래도 일이 좀 줄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아버지를 보필하며 이런저런 일거리가 늘어났나 보다.

“김 실장님.”

“예.”

“저 어디서 일하는지 안 물어보세요?”

그가 흘긋 백미러로 흘긋 돌아봤다. 그러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감흥 없이 물어 왔다.

“어디서 일하게 되셨습니까?”

엎드려 절받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말할 구실이 생겼으니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중얼중얼 이야기했다.

“권이도 씨가 취미로 하는 향수 사업이랍니다. 좀 더 키워서 나중에 상장까지 할 건가 본데…… 저한테


대표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오늘이 첫 출근 날이었습니다.”

“대표…….”

김 실장이 무심결에 내 말을 따라 했다. “출세하셨군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조차 참으로 무뚝뚝했다.


누가 김 실장 아니랄까 봐, 장난처럼 하는 말조차 사무적이다.

“그리고…….”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밤 풍경이 아스라이 잔상을 남겼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니, 권이도와 함께 봤던 한강 풍경이 떠올랐다.

“회사 이름이 세진이래요.”

‘같이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래요?’

내가 그 말을…… 누구한테 했더라. 머릿속이 몽롱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한강에 가본 건,


딱 한 번 차를 선물 받았던 날밖에 없는데. 어렴풋이 떠오른 장면이 현실감 없었다.

“대체 누가 사명에 남의 이름을 붙이는지…….”

작게 중얼거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온통 어두컴컴해진 시야가 내 속마음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래서, 술을 즐기지 않는 건데. 취기가 오르면 기분이 제멋대로 들쑥날쑥했다.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내가 몇 번이고 그를 불러도, 김 실장은 같은 대답을 들려줬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문 집사와 김 실장. 단 두 명의 어른만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김 실장님이 보기엔…… 이 약혼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히 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지도 못한 채 마냥


품고만 있었겠지. 그런데 알코올에 마비된 뇌가 제멋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먼 미래에,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그때 내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차가 가만히 멈춰 섰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그저 신호에 걸렸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김 실장은


한참을 뜸 들인 뒤에야 느리게 운을 뗐다.

“저는…….”

실눈 뜬 시야로 그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신호등엔 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적어도,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목구멍이 바짝 옥죄였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숨죽여 속을


달래는 동안 김 실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얘기했다.

“단순히 계약으로 약혼한 거였으면 도련님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요.”

픽 웃음이 나왔다. 취기는 물론, 잠기운까지 쏟아져서 머리가 생각을 이어 가는 속도가 느렸다.

“‘그렇게까지’라니.”

“…….”

“권이도 씨가 뭘 더 한 줄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 실장이 쓰기엔 어색한 표현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설명을 보탰다.

“대표 자리를 줬다길래 드리는 말씀입니다. 회사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으면 말 다 했죠.”

잠깐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언가 깊이 생각하기엔 여러모로 체력이 부족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도 무어라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김 실장은 나를 차고에 내려 줬다. 김 실장의 차가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차고


입구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태성이 미리 언질을 준 건지. 어쨌건 나로선 편하게 내릴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잔업 열심히 하시고요.”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준 김 실장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뒤를 쫓던 이태성도 차고


한편에 차를 주차한 뒤였다. 김 실장은 푹 주무시라는 말만 남기고, 운전석에 올라타 곧장 집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는 괜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재킷은 아까부터 입지도 않았고,
목이 갑갑해서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야만 했다.

“…….”

“…….”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펴봤다. 그려 놓은 것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 어느 때보다 환상처럼


느껴졌다.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권이도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나직이 내뱉었다.

“늦었네요.”

- 다음 화에 계속

51 화. Bonheur quotidien(4)

너무 놀라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마침 닫히려는 문을 권이도가 성의 없이 한 손으로


붙잡았다. 덜컹, 멈춘 엘리베이터가 다시 스르륵 좌우로 열렸다.

“……왜 여기 계세요?”

권이도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홈웨어 차림이었는데, 정장을 다 차려입은


것보다 더 박력 있었다. 한참 그대로 있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왜일 것 같습니까?”

“…….”

뒷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그의 기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권이도는
대답 없는 나를 보고 상냥히 운을 뗐다.

“모르겠으면 보기를 주죠.”

까딱, 고개가 움직였다.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그가 나긋나긋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찍 들어온다던 동거인이 이 시간까지 안 들어와서.”

“…….”

“술을 안 마신다던 약혼자가 회식 내내 연락 한 통 없어서.”

“…….”

“정세진 씨 경호원이 나한테 따로 연락을 넣어서.”

“…….”

“대답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너그럽게 선택지를 주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고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답이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요.”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분명 미소를 그리고 있는데 그다지 기분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 권이도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칭찬을 건넸다.

“똑똑해서 좋군요.”

“하하…….”

멋쩍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슬그머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권이도가 붙잡고 있던 문을 놓아줬다.


스르륵, 문이 닫히기 무섭게 고요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는 묵묵히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중문을 열며 잠깐 비틀거리자 나를 대신해 문을 잡아 주기도


했다. 고맙다는 의미로 눈을 맞췄는데, 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얘기했다.

“출근은 정세진 씨가 했는데, 퇴근은 주정뱅이가 했나 보죠.”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았습니다.”

조금 알딸딸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정뱅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권이도의


기분이 상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는 내 손에서 재킷을 가져가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겠죠. 보통 취한 사람들은 본인이 취했다고 안 하니까.”

“권이도 씨 되게…….”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마저 말하라는 듯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아서, 잠깐 눈을 굴린 다음에야 뒷말이 흘러나왔다.

“바가지 긁는 남편 같네요.”

“…….”

뻔뻔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 맨정신이었다면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거다. 가만히 눈으로 웃는


나를 보고 그가 한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직 내가 남편은 아닐 텐데.”

권이도의 페로몬이 부드럽게 풀렸다. 내내 술 냄새로 가득한 공간에 있던 탓에 청량한 나무 냄새가


반갑게 느껴졌다. 배 속 가득 만족감이 차올라서, 푸스스 가느다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약혼자면…… 남편이나 마찬가지죠.”

“…….”

“안 그래요, 여보?”

뒷말은 반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분위기도 풀 겸, 권이도의 기분도 조금 풀어 줄 겸.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시선이 짙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아차 하는 사이,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뒤통수를 감싸 쥐고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한 그가 방심하고 있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말캉한 혀가 입술 틈새를 간지럽히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깐 멈칫한


권이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았다. 억지로 제 쪽을 보게 하는 손길이 사뭇 강압적이었다.

“왜 피합니까?”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목소리 역시 화난 것처럼 허스키하게 갈라졌다. 나를


위협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차오른 흥분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에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술 마시고 왔습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권이도가 곧장 대꾸했다.

“많이 안 마셨다면서요.”

“그래도 마신 건 마신 거죠.”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종일 밖에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권이도답지 않게 조급한 느낌이었다. 키스를 조르듯, 말을 하면서도 연신 입술을 가져다 댄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를 꾹 밀어 냈다.

“……씻고.”

“…….”

“씻고 올게요.”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가늘게 길어진 시선에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본인은 퇴근하면 늘 샤워부터
하면서. 내가 씻고 오겠다는 말에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권이도는 그렇게 말하며 능청스럽게 허리에 팔을 감았다. 바짝 밀착한 그가 내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흠칫 놀라 목을 움츠러뜨리자, 나긋한 목소리가 감미롭게 속삭였다.

“씻으면서 하죠.”

***

“흣…….”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이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었다. 뜨겁고 습한 공기 속에서 나는 너른 품에 매달려
연신 숨을 헐떡였다.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질척질척 민망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 흐응…….”

굵은 손가락이 세 개까지 들어와 내벽을 넓히기 시작했다. 아래가 빠듯이 벌어지고, 간신히 서 있는
다리에 힘이 풀리길 반복했다.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리자, 권이도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낮은 목소리가 샤워 부스 안에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녹진하게 풀릴 만큼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물론,


그 기분은 단순히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안이 엄청 뜨겁네.”

‘씻으면서 하죠.’

씻으면서 하자는 말대로, 권이도는 정말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와서는 제 방으로 들어와 거의 찢듯이 내 옷을 벗겨 냈다. 다짜고짜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선 뒤엔 제 옷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부터 틀어 버렸다.

“씻고…… 읏, 씻고 하자니까…….”

“씻고 있잖아.”

그는 뻔뻔하게 대답하며 등허리에서 손을 미끄러뜨렸다. 오른손은 좁은 구멍을 헤집고, 왼손으로는


엉덩이를 꽉 움켜잡는다. 내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운 그가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내가 느끼는 부분을 꾹
자극했다.

“아흣……!”

허리가 절로 튀어 올랐다. 바짝 발기한 성기가 권이도의 것과 문질러졌다. 귀두에서 흐르는 액체가


프리컴인지 아니면 샤워기에서 나온 물인지 알 수 없었다.

“흐…… 그만…….”

“부탁을 확실하게 해야죠.”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그는 손가락을 멈추지는 않았다. 성교를 하듯 넣었다 빼길 반복하다가, 빙그르르


돌리며 얼마나 넓어졌나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으응, 흐…….”

“그만하라는 건지, 아니면 이제 그만 넣으라는 건지…….”

“아…… 거기, 흐읏…….”

“전자는 아닌 것 같네.”

그는 나지막이 이야기하곤 손가락을 빼내었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내벽이 바짝 오므라들었다. 내


한쪽 다리를 잡아 제 허리에 감게 한 그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

푹, 굵은 성기가 뿌리 끝까지 삽입됐다.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언가 전조가 있지도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거칠게 꿰뚫는 감각이 숨이 턱 막힐 만큼 묵직했다.

“아…….”

그는 낮게 탄성을 흘리며 내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날아갔던 정신이 돌아올


정도는 되었다. 아래가 한가득 들어차는 바람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랫배가 납작해지도록 힘을 주고, 온 힘을 다해 권이도의 몸을 끌어안았다. 선


채로 그의 물건을 받아들이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버거운 일이었다.

“……착하지.”

쉬이, 달래는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진짜 힘들어하는 걸 알았는지, 권이도는 깊숙이


삽입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잠깐 머물렀다. 꼬리뼈 부근을 은근하게 어루만진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줬다.

“입 벌려 봐요.”

“……흐읍.”

맞닿은 입술에서 페로몬이 넘어왔다. 뭉텅뭉텅 전해지는 숨결이 성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아팠던 감각 대신 찌르르한 쾌감이 그 빈자리를 채워 갔다.

“아흐응……!”

권이도는 귀신같은 눈치로 내가 괜찮아졌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움직인 것이다. 가장 느끼는 부분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자지러지듯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아, 안 돼…… 흐…….”

“왜 안 돼, 응?”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릴수록 삽입만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기본적인 신장 차이 탓에 내가 자세를


낮추면 그가 조금 더 깊이 들어왔다. 그 거대한 쾌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발뒤꿈치를 한계까지 들어
올리는 게 최선이었다.

“싫, 너무, 깊어, 흣…….”

푹, 푹, 내벽이 계속해서 자극됐다. 내가 아무리 저항해 봤자 한 발로 선 상태에선 별반 의미가 없었다.


그는 내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한 채 계속해서 내가 느끼는 부분만을 자극했다.

“권이도 씨……. 제발, 흐읏…….”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간절히 애원하기도 했다. 이건 너무 힘들고, 자세도
불편하다고.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소리를 하자 그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하.”

달뜬 숨을 터뜨린 그가 성기를 쑥 빼내었다.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붙잡았던 다리도 놓아줬다.


웬일로 금세 물러서나 했는데, 그는 내 몸을 돌려 벽을 짚고 서게 만들었다.

“아흑……!”

뒤에서, 묵직한 물건이 단숨에 밀려 들어왔다. 이번에야말로 다리가 풀렸지만, 그가 양팔로 내 허리를
감싸 단단히 고정했다. 벽에 바짝 밀착한 채 도망가려고 하자, 그가 어림없다는 듯이 하반신을 빈틈없이 밀착했다.

“아, 아아…… 흐……!”

“힘 빼야지. 배 결리겠네.”

그는 뿌리 끝까지 삽입한 그대로 비비적거리며 안쪽을 헤집었다.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감싼 채 배앓이


하는 아이를 달래듯 살살 그 부분을 어루만진다. 그러다 한껏 예민해진 내 성기를 붙잡고는 뒤에서부터 내벽을
크게 쳐올렸다.

“아흐으……!”

찌릿찌릿한 절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은 욕실 벽면에 기다란 자국을 남기고


흘러내렸다. 권이도는 막 사정한 성기를 조물조물 만지며 서서히 속도를 높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흐, 흣, 흐응!”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손끝을 세워 벽을 긁는 나를 보고 권이도가 내 상체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하자, 이번엔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순순히 바닥에 앉도록
도와줬다.

“흐, 잠깐, 잠깐만…….”

그런데 바닥에 무릎이 닿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말았다. 벽면 가까이 밀착하는 바람에
도망칠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벅지를 세운 채로 다리가 벌어지고, 뒤에서는 권이도가 빈틈없이 나를
내리눌렀다.

“이거, 아…… 흣!”

양손으로 벽을 짚고 상체를 밀착했다. 권이도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다른 손은 가슴께로 가져온 그가 꼿꼿이 선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문질렀다.

“하아, 흐, 으응…….”

엎드려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하면 삽입이 깊어지고, 그렇다고 몸을


일으키자니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벽과 권이도. 그사이에 낀 채로 그가 주는 쾌감에 하릴없이 휘둘려야만 했다.

“아흐, 흣…….”

“무릎 아프면…… 후, 얘기해요.”


“흐…… 으응…….”

그는 느릿느릿 성기를 빼내어 푹, 깊숙이 삽입했다. 아까처럼 빠르게 몰아붙이진 않았지만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쾌감이 쏟아졌다. 뒤에서 어깻죽지를 깨문 그가 꾸욱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흣……!”

또 한 번 묽은 정액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벽이 아닌 권이도의 손안이었다. 내가 싸지른 정액을 모두


받은 그가 아랫배에 받아 낸 모든 걸 펴 발랐다.

“아, 흐응!”

큼직한 손이 배꼽 아래를 꾹 눌렀다. 그대로 안쪽을 쳐올리는 바람에 배 속을 쳐올리는 감각이 한껏


극대화됐다.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늦어서건, 아니면 술을 마셔서건. 나를 못살게 구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

크게 허리를 움직인 권이도가 까득 이를 사리물었다.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끌어안고 내 온몸에 한가득


페로몬을 쏟아붓는다. 동시에, 안쪽에 머무르던 성기가 울컥 정액을 사출했다.

“하으…….”

배가 볼록하게 부푼 것만 같았다. 긴 사정이 이어지는 동안 권이도는 벽을 짚은 내 왼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스르륵 깍지를 낀 손에는 나와는 달리 약혼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진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권이도는 그런 나를 칭찬하듯 내 입술에 살짝 입술을 마주


댔다. 쪽,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이번엔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후응…….”

터져 나오는 신음은 권이도에게 온통 잡아 먹히고 말았다. 그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곧장


뒤이은 행위를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쾌감이, 긴 밤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권이도와의 섹스는 무척이나 좋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체력이 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첫
출근을 앞뒀을 땐 구태여 그를 두고 내 방으로 가서 잔 것이었다. 일을 쉴 때야 늘어지게 잠을 잤다지만, 출근을
하는 이상 제시간에 맞춰 눈을 떠야 했으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내가 대표로 출근하는 두 번째 날. 평소처럼 눈을 뜬 나는 익숙한 온기가 나를


꼭 끌어안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안은 상대는 굳이 페로몬을 느끼지 않더라도
권이도였다.

“…….”
그래서…… 지금이 대체 몇 시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몸을 옆으로 돌아누웠다. 허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목에서 어깨까지 죄 안 결리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끄응, 앓는 소리를 냈는데 곤히 잠든 줄 알았던 권이도가 뒤척이던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풀썩,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는 그와 나 모두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욕실에서 긴


정사를 나눈 후에 권이도가 나를 깔끔히 씻겨 침대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아직 안 일어나도 돼.”

권이도는 나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문제는, 방이 이렇게 환할 정도면 슬슬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 정도.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속아 넘어가 주고 싶었다.

“숙취는?”

기다란 손가락이 가만가만 뒷머리를 매만졌다. 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다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권이도가 조금 더 세게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 정도로 안 마셨습니다.”

“그래요?”

조금 취해 보였을 수는 있어도 정말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남들이 봤을 땐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을 거다. 그냥 기분이 유독 이상해서 술기운에 생각이 조금 느슨해졌을 뿐.

그런데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또 그 사람을 불렀지…….”

“…….”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분명 여상스러운 말투였는데, 왜 그리 오싹 소름이 끼쳤는지


모르겠다. 내가 한참 대답하지 않자, 그가 가만히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생각을 해봤거든요.”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권이도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만약 정말 취할 정도로 마신 게 아니면, 맨정신에 다른 남자를 찾았다는 건데…….”

“…….”

“그렇다고 술김에 연락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기분이 나쁘고.”

어감이 참 미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 실장이 ‘다른 남자’라고 칭해질 상대는 아닌데 말이다.
권이도는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넌지시 물어 왔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다음 화에 계속

52 화. Bonheur quotidien(5)

“음…….”

가느다란 침음성을 흘리며 자세를 조금 더 편하게 바꿨다. 꾸물꾸물 다리를 움직이자, 이불 아래에서
하체가 겹쳐졌다. 그러다 문득, 주먹 쥔 손가락에서 무언가 딱딱한 금속이 느껴졌다.

“…….”

왼손 약지에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분명 어제 출근 전에 빼놓고 나갔는데. 내게 반지를 끼운 상대가


누구인지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했다.

“……권이도 씨.”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향수를 만든 뒤에야 물어보려고 한 것들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자는 사이에 반지를 끼워 둘 정도면서, 어째서 나와의 약혼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얘기해요.”

그런데 그의 의도를 파헤치는 게, 지금의 평화를 망치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 이 찰나의 행복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의 관계가, 끝내 헤어짐으로 남아 버리면 어쩌면 좋을까.

‘적어도,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실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가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아서, 굳이 내가 가진 의문을 해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현실을 외면하며 그의 품에 안주하고 싶었다.

“……질투를 귀엽게 하시네요.”

인정해야 한다. 끝내, 권이도에게 스며들고 말았다고. 소중한 것 하나 없던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중한 상대가 생겼다고.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도망치듯 회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본능적인 촉이 주는 신호는 이따금 열 가지 의심보다 확실한 증거가 되곤 한다. 끝까지 모를 수 있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외면하고 싶었다. 기껏 유예 기간까지 만들어 놓고, 몹시 나약한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김 실장님은 부인이 있습니다.”

“…….”

느리게 내뱉은 말에 권이도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가만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 반응이 우스워서, 푸스스 바람 빠지듯 실소를 흘렸다.
“그분이 얼마나 애처가인지 알면 그런 식으로 말씀 못 하실걸요.”

김 실장은 올해로 벌써 결혼한 지 20 년이 넘어갔다. 아이는 없지만 금실이 좋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만큼 가정에도 충실했다. 이따금 부인과 통화를 할 때만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남편이 되곤 했다.

“유부남을 밤에 불러낸 겁니까?”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말하면 어감이 좀 그렇지 않나. 황당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가만히 입매를 말아 올렸다.

“농담이에요.”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멋들어진 얼굴에 흐트러짐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 말도 도통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는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로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비서한테 많이 의지하는 타입인가 보죠.”

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얄팍한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이 거리에서, 권이도를 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편한 차림을 본 건 나밖에 없을
듯했다.

“꼭 비서라서 그렇다기보단…….”

어제 김 실장에게 연락한 건 단순한 실수였다. 내가 전화를 거는 상대는 늘 김 실장이었고, 자연스레


그의 번호를 누르는 게 습관이 되었으니까. 그걸 의지한다고 말하기엔 조금 애매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익숙해졌나 봐요. 사회생활을 하기 전부터 김 실장님이 기사로 계셨거든요.”

아버지의 기사였던 그가 비서 실장이 되어 나를 보필할 때까지.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이겠지만, 내게는


인생의 절반이었다. 많고 많은 습관 중에 그를 찾는 습관이 한두 개쯤 섞여도 이상하지 않았단 말이다.

“이걸 의지한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어쨌든 권이도 씨가 신경 쓸 상대는 아닙니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 없단 말이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려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나를


살펴본 권이도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나는?”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감질날 만큼 느리게 움직였다.

“나한테는 의지를 해요?”

“…….”

단언컨대 질투는 아니었다. 유치하게 내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언뜻 차분해
보이는 두 눈에 잔뜩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제가 권이도 씨한테 의지하길 바라세요?”


그래서 그에게 되묻자, 그가 내 뒤통수를 잡아 품으로 끌어왔다. 아늑한 페로몬에 향긋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느껴졌다.

“……그러게. 나도 그걸 모르겠네.”

대답은 마치 숨결처럼 조용했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차 하는 사이 놓쳐 버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는 내 머리께에 입을 맞추고 미련 없이 품에서 나를 놓아줬다.

“슬슬 일어나죠. 정세진 씨도 출근해야 할 텐데.”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나를 뒤로한 채 욕실 걸어갔다. 나는 그런 권이도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너른


등판을 바라봤다.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

“대표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회사에 출근했을 때, 직원들은 어제 고깃집에서 헤어질 때처럼 활달하게 나를 맞이해 줬다. 술김에 잠깐
친화력이 높아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오늘까지 유효한 친분이었나 보다. 나를 향한 경계심이 많이 사그라진 걸
보니,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에는 각 팀장들로부터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일정 따위를 보고 받았다. 어제 대략적으로 파악해


두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기반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브랜드는 론칭 전이었으나, 선호물산을 통해
유통하는 방향제의 종류가 제법 많았다.

자체 브랜드인 ‘Sejin’은 올여름 론칭으로 기획돼 있었다. 현재 웬만한 제품은 개발이 끝난 단계였고,
디자인과 네이밍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선호 계열사의 백화점에 가장 처음 입점한다고 하니,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제품 샘플로 시향도 가능한데, 준비해 둘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레이블을 바꾸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디자인 로고까지 뽑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아마 권이도도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예상했겠지.

“아, 지금 말고 오후에 천천히 준비해 주세요. 식사하셔야죠.”

나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끼니를
뭐로 때울까, 그리 고민하는 와중에 문득 출근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필요한 거 있으면 써요.’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 내게 권이도는 대뜸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받지 않고 의아해하자 무어라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했다.

‘가지고 싶은 걸 사도 되고.’
지난 경험상,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진작 카드로 줄 걸 그랬다는 말을 들으니, ‘가지고 싶은 게
있냐.’라는 질문의 연장선인 게 분명했다. 그래, 그래도 이건 안 쓰면 그만이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정확히 내 생각을 꿰뚫어 봤다.

‘써야 하는 금액까지 지정해 줄 필요는 없겠죠.’

‘…….’

만약 나를 부담스럽게 만들 생각이라면 반 정도는 성공이었다. 나머지 반이 실패인 이유는 이미 권이도의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뒤탈이 생기지 않으려면 적당히 내 선에서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최 팀장님, 보통 직원들 점심 어디서 먹습니까?”

나는 그렇게 물으며 권이도가 준 카드를 챙겨 일어났다. 아마 개인마다 식대가 나올 테니,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대충 때울 가능성이 컸다. 역시나 제품개발팀 최 팀장은 내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돌려줬다.

“어…… 그냥 사 먹거나 아니면 시켜 먹거나 하죠?”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래도 어제는 대표님 덕에 맛있는 걸 먹었다고 덧붙였다. 이태성에게 들으니,
그래 봤자 별거 먹지도 않았던데. 사실 양껏 비싼 걸 먹기에도 눈치가 보이긴 했을 거다.

“잘됐네요. 오늘도 맛있는 거 먹을 텐데.”

씩 미소 짓자, 최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향해 카드를 까딱 흔들었다.

“비싼 거 먹으러 갑시다.”

***

어제 귀가가 늦었기 때문에 오늘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바쁜 게


끝났는지, 권이도는 나보다 먼저 퇴근해 있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현관까지 나와
있던 권이도가 나를 맞이해 줬다.

“왔어요?”

“…….”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별거 아닌 이유였는데 지금의 상황이 퍽 낯설게 느껴져서. 내가 밖에서


들어오고, 그가 안에서 기다리는 이 풍경이. 정장을 입은 게 내 쪽이고, 편한 옷차림을 한 게 권이도인 이러한
모습들이.

“왜?”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권이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리깔린 두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현관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뇨, 그냥…….”

어제는 술김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늘 텅 빈 오피스텔로 돌아가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나를 마중해 주는 권이도가 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순간이 마음 한구석에 덩그러니 자리 잡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서요.”

사소한 일상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 있던 모든 일이 미화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업무는


보람찼고, 직원들과의 식사도 즐거웠다. 그렇게 퇴근한 집에 나를 맞이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정말 내 안식처로
돌아온 것만 같다.

“동거인이 있는 게 좋긴 하네요.”

“…….”

권이도는 무어라 답하지 않고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자,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가만가만 엷은 미소를 띤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먹고 온실에 갈래요?”

“온실이요?”

“네, 잠깐 차나 마실까 하고.”

그러고 보니, 최근엔 온실에도 가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 일을 다니면 점점 더 갈 만한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권이도도 그리 생각했는지,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조명까지 달았는데, 바빠지기 전에 가 봐야죠.”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온실로 향했다. 그와 함께 걷는 밤길은 몇 달 전 명성호텔 영빈관에서


치른 약혼식을 떠올리게 했다. 잘 정돈된 정원. 그리고 곳곳에 피어 있는 화사한 꽃들. 예복이 홈웨어로 바뀌고,
날씨가 따뜻해진 만큼 그날 느꼈던 어색함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실에는 앞서 고용인이 준비한 복사꽃 차가 있었다. 미리 조명도 켜놓았기에, 은은한 색감의 불빛이
온실 내부를 예쁘게 밝혀 주었다. 진한 분홍빛의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찻잔에선 옅은 복사꽃 향기가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밤에는 또 느낌이 다르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권이도가 주변을 둘러봤다. 왼손으로는 찻잔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곧은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조명의 불빛을 따라 반짝거렸다.

“일은 할 만해요?”

“네, 재밌습니다. 직원들도 다 착하고.”

온실 가득 차 있는 꽃향기에 이따금 권이도의 페로몬이 스며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올 때면 내 페로몬과


섞이던 그 향기를 사뭇 닮아 있었다. 물론 성감을 고조시키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포근한 느낌이 더 강했지만
말이다.

“마음에 들면 다행이네요. 오래 다녀야 할 텐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뻔뻔히 얘기했다.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니라더니, 이제는 아예 그런


구실조차 붙여 주지 않는다. 그게 또 권이도다워서, 그냥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찻잔을 어루만졌다.
“카드 얘기 안 하시네요.”

“카드?”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제가 어디에 썼는지 아실 줄 알았거든요.”

그가 내게 준 카드는 직원들의 식사와 디저트를 책임지게 됐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사용할 곳은


그것밖에 없을 거다. 그 쓰임새를 지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쓰고 싶은 데 써도 됩니다.”

가벼운 말투였다. 허락이 아니라, 그냥 사실 그 자체를 설명해 주듯.

“정세진 씨가 쓰고 싶어서 쓴 거면 됐어요. 억지로 쥐여 줘 놓고 어디다 썼는지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억지로 줬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차를 한 모금 마신 권이도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놨다. 딱히 의식한


행동도 아닌데 누가 봐도 잘 교육받은 티가 났다.

“자격증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아, 알아보니까 학원이 있더라고요.”

이희나의 말대로 내게 조향사 자격증은 활용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뭐, 원래도 목적이 있던 건


아니었으니 그다지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시간과 돈을 좀 투자하면, 무난하게 취득할 수 있을 듯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세진 씨가 나한테 줄 선물.”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분명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를 노릇이다. 짧은 찰나, 스쳐 지나간 표정을 보고 나는 테이블 너머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격증 따면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슬그머니 그의 왼손을 그러쥐었다. 검지로 그가 낀 반지를 매만지자 그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가지런하니 단정했다.

“그렇게 밥을 같이 먹었는데, 우리 외식은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

이 집을 벗어나면 권이도와 가본 곳이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우리의 관계가 대문을 기준으로 안쪽에만


머물렀단 뜻이다. 약혼자임을 숨겨도, 함께 밥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으로 그의 손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

그리고 쪽,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호텔에서 권이도가 내게 했던 행동이었다. “약속은 이걸로 하죠.”


그렇게 그의 말을 따라 하자,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것도 기대할게요.”


아늑하게 풀어진 페로몬이 이상하리만치 달큼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에 깍지를 끼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마주 잡은 손은 온실을 떠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평화로운 일상은 별다른 굴곡 없이 꽤 오래도록 반복됐다. 아침이면 이태성과 함께 출근길에 오르고,


비슷비슷한 업무를 본 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직원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Sejin’의
론칭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권이도는 쉴새 없이 바빠진 나를 보고 이따금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는데 귀가가 늦을 때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조금 그래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날엔,
예외 없이 밤이 깊을 때까지 침대 위에서 유독 집요한 괴롭힘을 받아 줘야만 했다.

이후, 또 한 번 찾아온 히트 사이클은 타이밍 좋게 정확히 주말과 겹쳤다. 권이도는 출근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틀 내내 짐승처럼 서로를 갈구했다. 그러다 겨우겨우 잠에서 깨어났을 땐, 나란히 눈을 뜬 권이도를
보고 진한 입맞춤까지 나누었다.

나쁘지 않은, 아니,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에게 느끼던 위화감을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그리고 해신금융그룹이라는 이름이 내 안에서 거의 지워질 만큼.

“좋은 아침입니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나는 늘 그랬듯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윤 팀장이 먼저


인사를 받아 주고, 최 팀장이 쾌활하게 주말 잘 보내셨냐며 물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

“…….”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늘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던 사람들이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분위기를 살피는데, 직원 하나가 급히 노트북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

신기한 일이지. 그 사소한 행동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는 게.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는 것도.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나는 빼앗듯 노트북을 가져와 화면을 열어 봤다.

“어어……!”

놀란 직원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밝아진 화면엔 조금 전 그가 보고 있던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유명 3 대 언론사 중 한 곳의 포털 사이트. 대문짝만한 타이틀과 조그만 글씨.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53 화. Complete Strangers(1)

해신금융그룹은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기업이었다. 비록 한때는 전도유망한 기업으로


손꼽혔으나 현재는 하락세에 접어들어 무너져가는 추세였다. 실적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미 있는 고객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리라고, 해신은 그러한 평가를 받았다. 주가가 그렇게 폭락했는데, 주주들의
민심이 좋을 리도 없었다.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배였고 배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물을 빼낼 방법도 없다.

당연히 나 또한 기업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약혼시켰지만, 권이도와의 계약은 순탄하지 못한 모양이었으니. 불과 몇 달 전까지 본부장으로 일했던 나는,
해신의 재정 상태와 자금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오늘 아침 정철호 해신금융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정 회장은 549 억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을 예정입니다. 현재 추가 탈세 혐의가 의심되는 상황으로, 내부 고발에 따르면…….

기사는 쉴 새 없이 터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채,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오른 갑질 논란과


속속들이 밝혀지는 비리들. 아버지가 행한 불법적인 일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폭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실, 이상함을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아버지와 몇몇 임원들이 돈 장난을 친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감히 말을 얹을 수 없는 위치인데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입 다물고
있었을 뿐.

-또한 정 회장은 근로자들에 대한 임금 및 퇴직금 등 총 200 억 원 상당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변호 측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주장하고 있으나 검찰은 이에 대해…….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의 3 할도 되지 않았다. 보통의 기업도 아니고 무려


금융권인데. 무엇보다 투명해야 할 기업에서 부조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뇌물 수수는 물론,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까지. 개중엔 정말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일도 있었기에, 이 고발의 뿌리가 굉장히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금융 당국에서는…….

“이태성 씨, 뉴스 꺼도 됩니다.”

“……예, 대표님.”

뚝, 목소리가 끊기고 차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떠오르는 생각이 산더미같이 많았으나, 그중 무엇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버지가 구속됐다. 오늘 아침 접한 소식은 반복되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직원의


노트북으로 기사를 보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그리 좋지 못하던 어머니의 안색. 유독 까칠하던 민재와 한참이나 자리를 비웠던 아버지. 창립 기념식 날
보았던 흩어진 퍼즐 같은 장면들이 차츰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제아무리 하루아침에 터진 일이라고 한들 내부에서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날 가족들의
안색이 이상했던 것도, 이러한 소식을 미리 들었기 때문일 거다.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그런데 왜, 내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을까. 해신의 상태를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아버지는 왜 나를 통해 권이도에게 매달리지 않았을까.

‘무슨 일 있는지는 아버지한테 직접 들어. 그 망할 새끼가 입막음을 단단히 시켜 놨으니까.’

뒷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민재가 했던 말이, 지금의 상황과 무관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권이도가 얼굴조차 못 볼 만큼 바빴던 게, 어쩌면 민재가 했던 말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환심을 사야 하거든요.’

“…….”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빠르게 바뀌는 차창 풍경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내 머릿속 같았다. 섣부른 추측은,
이로울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지금의 짐작들이 단순한 의심에 불과하지만은 않았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나는 차가 멈추자마자 내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차고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는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고작 한 층을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마냥 길게만 느껴졌다.

“왔어요?”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권이도는 늘 그랬듯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은 학원에 다녀오지


않았음에도 나보다 먼저 퇴근한 모양이었다. 홈웨어가 아닌 정장 차림인 걸 보면, 아마 그 또한 귀가한 지 얼마
안 됐겠지.

심장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긴장이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처럼, 이 모든 상황에서 데자뷔가 느껴졌다.

“……권이도 씨.”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권이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이, 내가 할 뒷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권이도 씨가 그런 겁니까?”

질문을 건네는 순간에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내 예상이 맞았다는 확신이 생겨서.
여전히 올곧은 그의 시선에 미동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무해져서.

“늦었네요.”

권이도는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대답했다.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오전 중에 퇴근할 줄 알았거든요.”


“…….”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변명을 건네지도 않았고,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
잡아뗄 생각 따위 처음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나 보다.

“……왜.”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그래서일까. 꼬박꼬박 반지를 빼고, 이유 모를 선을 유지한 게 그런


이유일까. 아버지가 구속되면 그 아들인 내게도 여파가 있을 테니, 약혼자인 제게도 피해가 올까 봐.

“왜 그러셨습니까?”

의도치 않았는데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목에 힘을 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머리로는 그에게


돌아갈 이득 따위를 열심히 계산하면서.

“권이도 씨한테…… 아니, 선호그룹에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권이도는 사업가였고,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수지가 맞지 않는 행동은 웬만해서 하지 않는


편이다. 타 기업에서 비리를 저지르건 말건, 그가 직접 나서서 손을 쓸 이유가 없단 말이다.

“대체 왜…….”

“정세진 씨.”

그가 차분히 내 말을 끊었다. 평소에도 늘 불리는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정세진.’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권이도의 음성에 겹쳐 들렸다.

“나는 내 걸 빼앗기는 것도 싫어하지만, 내 걸 건드리는 건 더 싫어합니다.”

아버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내게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내 사람이 길바닥에 넘어져서 다쳤으면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게 해야죠.”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하는 말이 단어 하나하나 쪼개서 인식됐다. 내 사람. 그리고 길바닥.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고작 그거 때문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고작, 고작 그거 때문에. 뺨 하나 맞고 돌아왔다고 아버지를 벼랑 끝에서 내몰


수는 없었다.

“……넘어진 사람이 조심하면 되는 일입니다.”

주먹을 꾹 쥔 채로 그에게 얘기했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되물었다.


“뭐하러 그럽니까?”

“…….”

“그냥 길바닥을 없애 버리면 되는데.”

소름 끼칠 만큼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고압적인 시선은 약혼식 날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이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긋이 얘기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나는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까지 잠근 단추, 그리고 단정히 맨 넥타이. 잘


차려입은 정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전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그리고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시선이, 이 모든 게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다.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겁니까?”

이런 건 복수라고 부르면 안 된다. 난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만약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생각이었다.

“원래 망했어야 할 기업입니다.”

“…….”

“나는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고.”

권이도는 얄미울 정도로 당연한 말을 했다. 늦건 빠르건, 언젠간 무너질 기업. 친절히 그 사실을 되짚어
준 것이다.

“원망할 상대가 필요하면 기꺼이 되어 주겠지만, 정세진 씨도 날 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죠.”

“……하.”

작게 탄식이 나왔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와 한집에 있을 수 없었다. 김 실장에게


연락도 넣어야 했고,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사태 파악도 필요했다. 본가는, 아마 기자들로 가득하겠지만.
어떻게든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만 했다.

“세진아.”

그런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 가라앉은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전해졌다.

“너만은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했잖아.”


“…….”

비어 있던 왼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짙게 남았던 반지 자국은 그사이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뒤로한 채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쾅 닫힌 문은 다시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대문을 나서자마자 김 실장에게 연락해 나를 데리러 오라고 부탁했다. 권이도에게 받은 차가 있었지만


뻔뻔하게 그걸 가지고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혹여나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김 실장은 곧장
차를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요?”

“조사받고 계십니다.”

김 실장은 담담한 대답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모시냐고 묻지 않는 걸 보면, 어련히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모양이다.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겨우겨우 한숨을 삼켰다.

“……김 변은 뭐라고 합니까?”

“증거가 확실해서 빠져나올 구멍이 없답니다. 금액적으로 다 물어내기엔 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최악의
경우 징역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고 간단한 설명이었다. 요컨대 이번엔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 몸값 비싼 김 변호사가 포기할
정도면 이미 끝난 얘기였다.

“관련 임원들은 벌써 조사받고 있고 저도 내일쯤엔 출석해 봐야 합니다. 사옥은 물론이고 본가도 압수


수색에 들어가서 사모님을 포함한 가족분들은 호텔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나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모욕엔 예민한 분이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면 정신적인
충격으로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배우자 신분으로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예, 회장님께서…….”

김 실장은 그렇게 운을 떼며 흘긋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어진 뒷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가족들에게는 피해 가지 않도록 조치해 놓으셨습니다.”

“…….”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민재가 망나니처럼 굴어도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제 고작 열아홉인 서영이에게도 혼사가 들어오지만, 칼같이 쳐내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터진 기사 말고 더 터질 건 있습니까?”

“많습니다. 급하게 막은 기사도 있는데, 늦어도 이번 주 내로는 다 터질 것 같습니다.”


이런 때조차 김 실장은 사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요란스럽게 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피곤한
티를 내지도 않았다. 눈 아래가 움푹 들어가긴 했지만, 딱히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자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우선은 가장 처음 궁금했던 부분을 묻기로 했다.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셨어요?”

술김에 김 실장을 부른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내부에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언질을 줄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충분히 많았단 말이다.

“도련님이 하실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

“본부장으로 계셨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도련님과 무관한 일입니다.”

무력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정확히는 소외감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해결해 줄 부분이 아니니


내게 말조차 전하지 않았다는 게, 모든 부분에서 나를 배제하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말씀을 섭섭하게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사과는 할지언정, 그는 변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답답한
만큼 한숨을 쉬었다간 정말 바닥에 구멍이라도 생길 것 같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울렁거리는 속을 정리했다.
조금만 생각을 이어 가면 그 끝에 떠오르는 건 권이도의 얼굴이었다.

“……내부 고발자는 다 찾았습니까?”

이번 일은 권이도 한 사람만의 짓은 아니었다. 그와 내통해서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결과겠지.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기반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필요한 인원을 솎아 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격상 김 실장에게 우선적으로 지시했을 게 이거였다. 비리를 폭로한 사람이 누구인지,
제게 피해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추려 내는 것. 아마 어떻게든 찾아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이익을 줄 터였다.

“아뇨, 못 찾았습니다.”

“……못 찾았다고요?”

“예, 아마 찾는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김 실장은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퍼뜩 놀라 그를 돌아보자,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사뭇 심각한 어조로 운을 뗀다.

“……도련님.”

“네.”

백미러 너머로 김 실장을 바라봤다. 테가 가느다란 안경과 피곤이 묻은 눈매가 보였다. 그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해신그룹 경영권이 넘어갈 것 같습니다.”

“…….”

움찔, 손가락을 떨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구속됐다고 해서 회장직을 내려놓는 게 아닐 텐데, 김 실장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도련님이 관둔 몇 달 사이에 재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경영난도 심각하고 이번 일로 윗선이


대거 물갈이될 예정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대기업은 절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금이 간 독처럼 서서히 물이 빠지다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면 그제야 밑바닥이 드러나는 식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을 때도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

“제가 관둔 지 고작 두 달입니다.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도련님이 잘 막고 계셨던 겁니다. 본부장직을 내려놓으면서 막고 있던 부분이 뚫린 거고요. 아마


회장님께서 사퇴하시면 주주 총회가 열릴 겁니다.”

“……아니.”

무어라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기를 쓰고 막았던 구멍이 그 잠깐 사이에 터져 버린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언제부터 그랬냐고. 그리 물으려는 내게 김 실장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 선호 측에서 해신을 인수할 것 같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54 화. Complete Strangers(2)

“…….”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호가 해신을 인수할 예정이라니. 나와 권이도의


약혼이 아니면 두 기업 사이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다. 선호가 해신을 눈독 들일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약혼의 이유가 이거였나.


무심코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선호는 처음부터 무너져 가는 해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의 약혼을 받아들이고, 내가 본부장을 관두게 한 뒤 감시한 거겠지.

‘감시가 아니라 경호입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은 뒷덜미를 빳빳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에
있던 피가 쑥 빠져나가듯이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깊이 생각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 모든 건 내 억측이고,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은 자꾸만 생각을 안 좋은 쪽으로 흐르게 했다.

“……남은 직원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와 일하던 팀원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무수한 직원들. 경영권이 넘어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들이었다. 선호 정도 되는 기업이 무책임하게 굴진 않겠지만, 구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김 실장은 변화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마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상층부만 교체되고 구조는 지금과 비슷하게 갈 거라고 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제법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불쑥 찾아온 위화감을 느끼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럼 정리 해고 당하는 인원이 없는 겁니까?”

“예,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통 회사에 찾아온 경영 위기는 중심부를 이루는 직원들이 가장 먼저 눈치채기 마련이다. 그즈음 되면


퇴사가 잦아졌고, 회사에 남은 직원들은 어떻게든 보상을 받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윤 대리와 마주쳤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던가.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였다. 주요 임원들과 협상을 끝내고,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것.
어차피 크게 바뀔 건 없으니까, 이 안정적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그 말인즉, 아버지의 최측근인 사람들만 매수해 정보를 빼내고 이 일을 진행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참 인복이 없으시죠.”

혼잣말처럼 흘린 말에 김 실장은 그 어떤 부정도 하지 못했다. 백미러를 통해 나를 살펴보고 무심히


정면을 바라봤을 뿐이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씁쓸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보였다.

“인복은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더 잔인했고.

“김 실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버지가 구속되면 가장 곤란한 건 김 실장일 거다. 가장 큰 불똥이 튀는 것도 마찬가지로 김 실장일
테고. 대책이 따로 없다면 앞길이 막막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저는…….”

여태껏 막힘 없이 대답했으면서, 그는 이번만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까딱, 움직인 손가락이 핸들을


톡 건드렸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어딘지 모르게 머뭇거리는 감이 있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대답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그가 나를 오래 보필한 만큼, 나 또한 그를


오랜 시간 봐왔으니까. 말을 아낄 때면 어떻게 나오는지, 그런 건 눈빛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심란할 사람을 더 괴롭히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귀찮게 굴지 않아도 요 며칠 이런저런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한숨 자라는 말이 김 실장과 내 사이를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 내 불면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김 실장은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내가 눈을
붙이길 원했다.

“사모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김 실장은 내게 민재가 있는 방의 카드 키를 건네줬다. 어머니와 서영이는 한 방에 있고, 민재만 홀로


다른 방을 쓰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를 먼저 뵈어야 했지만, 부재중이라면 우선 민재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VIP 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가족들은 스위트룸이 있는 21


층에 머무르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객실 문 앞에 다다르자, 김 실장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들어와 있으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으나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김 실장이 따라 들어와 봐야


장식처럼 서 있는 것밖에 할 게 없을 터다. 오랜만에 보는 민재가, 가뜩이나 예민해진 녀석이, 내게 무슨 소리를
할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삑, 카드 키로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넓디넓은 스위트룸을 가로지르자 가장 먼저 기다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벽면에 걸린 커다란 TV 따위가 보였다.

“…….”

침실과 응접실. 민재는 어느 쪽에 있을까. 아마도 침실이겠지만, 그럼 또 두 개의 침실 중 어느


쪽일지가 갈렸다.

그런데 내 망설임이 무색하게, 무척 가까운 곳에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실장님…….”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소파 팔걸이 쪽에 삐쭉 튀어나온 발 두 개가 보였다.
앞코가 반질거리는 갈색 구두는 민재가 즐겨 신는 브랜드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아마 김 실장이 민재와 함께 있던 모양이다. 그 후 내 전화를 받고 나를 데리러 왔겠지. 바로 와준 건


고마웠지만, 이렇게 위태로워 보이는 녀석을 그냥 두고 온 건 좀 의외였다.

“제가 말한 건 사 오신…….”

“미안.”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소파 등받이 뒤에서 민재를 내려다봤다. 길게
누워 이마에 팔을 얹고 있던 민재가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 실장님은 밖에 계셔.”

“……!”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민재가 소파에서 떨어진 것이다.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에
흠칫 놀라자, 민재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너, 너……!”

커다랗게 뜨여진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경악 어린 표정이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했다. 김 실장은


가족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 주지 않은 걸까. 아무리 내가 연락 없이 왔다지만 이런 반응은 좀 과하지 않나 싶다.

“너 어떻게 여기……!”

“……뭘 그렇게 놀라.”

나는 그리 대꾸하며 찬찬히 민재를 살펴봤다. 떨어지면서 크게 부딪친 것 같던데, 다행히 아픈 기색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자각조차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기사 봤어.”

아버지의 소식을 기사로 접해야 하다니. 그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마 민재 또한 김 실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소식 듣자마자 김 실장님한테 연락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드렸어. 오면서 무슨 일인지 대충 들었고.”

“…….”

“김 실장님한테 뭐 사 오라고 했는데?”

민재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를 닮은 눈매가 매섭게 추켜 올라갔다. 언뜻 보면


화를 내는 듯했으나 그를 오래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급한 거면 내가 말씀드릴게.”

“…….”
눈물을 참고 있는 거다. 여러 감정이 잔뜩 뒤섞여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게 분명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나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무리 성질을 부려 봤자 민재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외국에서 하는 공부가 어렵다며 도망치듯


귀국해 버리는 철없는 어린애란 말이다. 서영이는 나름대로 똘똘하지만, 민재는 이런 상황에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을 거다.

“…….”

“……민재야?”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대답이 없는 건 이상했다.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늘 풍기던 아로마 냄새, 그리고 그 위에 남은 향수의 잔향. 거기다 옅게 풍기는 술
냄새까지.

……와인을 마셨나?

술을 못하는 민재가 유일하게 마시는 게 포도주류였다. 그것도 드라이한 건 안 먹고, 오로지 스위트한
종류로만. 아니나 다를까, 흘끗 살펴본 테이블에 술병과 와인 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괜찮아? 김 실장님 불러 줄까?”

혹시 취기가 많이 오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김 실장을 시켜 술 깨는 약이라도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민재가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뭐?”

영 달갑지 못한 질문이었다. 묘하게 선을 긋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왜 왔는지, 이미 조금 전에 설명해


놓았건만.

“왜 왔냐니…….”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민재의 얼굴을 살펴봤다. 얘가 왜 이럴까. 평소처럼 괜히 한 번 건드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진심으로 내가 올 줄 몰랐던 것 같다.

“기사 봤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이번에 인상을 찌푸린 쪽은 나였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민재가 짓씹듯 차갑게 얘기했다.

“기사 봤는데, 그게 뭐.”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마구 솟구치는 분노를 참으려는 것처럼.

“아, 그래서 놀리러 왔냐? 꼴 좋다고?”


“왜 말을 그렇게 해.”

지나치게 화를 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화풀이라기엔 오늘따라 유독 냉랭하다. 민재는 그런 나를


보고 비웃듯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우리 다 버리고 그 새끼 집에서 잘 먹고 잘살더니 인제


와서 동정이라도 하려고?”

“…….”

아무래도, 근래에 내 얼굴빛이 지나치게 좋았나 보다. 창립 기념식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가정하는 걸 보면.

“아니면 뭐, 착한 척 가식이라도 떨러 왔어?”

“그런 게 아니라…….”

“씨발. 솔직히 너도 잘됐다고 생각하잖아. 어차피 넌 그 새끼랑 결혼할 거니까……!”

“민재야.”

우선, 차분히 민재의 말을 끊었다. 고작 이 정도 같잖은 도발에 발끈할 만큼 인내심이 모자라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권이도의 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게 맞으니까. 다만, 이 지긋지긋한 말씨름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피곤해서 그랬지.

“내가 왜 약혼했는지 너도 알잖아.”

“…….”

머리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내게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나는 단지 오메가 구실을 하기 위해


권이도와 약혼했다는 걸.

“그리고 결혼할지 안 할지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달렸지.”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냥, 모든 게 예정된 일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진행된
것처럼 매 순간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기사엔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익숙하기만 했다.

“동정하러 온 게 아니고 걱정돼서 온 거야. 놀리러 올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고, 착한 척 가식 떨 만큼


이 일을 자세히 알지도 못해.”

“…….”

“꼴 좋다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민재가 재미있는 건, 내게 폭언을 퍼부으면서도 그게 폭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기분이 상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 튀어나오는 감정을 참지는 않는다. 그런 주제에 내가
조금만 정색해도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피곤 했다.

“가족들한테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상식적인 대답이었다. 차라리 어리광을 부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민재의
심기를 거스를 게 분명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민재는 잠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가족?”

주먹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 헛웃음을 내뱉은 민재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호적에도 없는 네가 내 가족이라고?”

“…….”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밀려든 현실감이 간신히 유지하던 평온함을 마구 뒤집어 놨다.
민재는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야.”

“…….”

“너랑 나는 남이야.”

남. 그 한마디가 왜 이리 마음에 남았을까. 여태 그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지독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머릿속이 민재의 한마디로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가서 피검사를 하건 아니면 서류를 떼건, 너랑 나는 남이라고. 알아들어?”

민재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린 데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 있지 않고, 법적으로


우리가 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그 넓은 집의 조그만 방 하나는 얻었을지언정, 고작
서류에 올라가는 한 칸은 내게 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딴 게 무슨 가족이라고…….”

그런데 그걸, 민재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정말 완전한 타인이라는 걸 그 또한 모르지 않았구나. 나조차


스무 살쯤에야 알게 된 걸, 그는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걸까.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들의 가족인 적이 없었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아득한 현기증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애써 차분한 척 입을 열었다.

“민재야, 형이…….”

“형, 형, 씨발 그놈의 형!”

그런 내게 민재는 버럭 소리치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 너머 서러움에 젖어 든 두 눈이 보였다.

“제발 그 좆같은 소리 좀 그만해!”

“…….”

아무래도, 술기운이 오르긴 오르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빨개진 두 눈은 단순히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로와 취기가 섞여 만들어 낸 감정적인 얼굴이면 모를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뭐만 하면 일부러 형 소리 하는 거, 그러면서 은근히 눈치
주는 거, 그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쉬어 빠진 목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민재의 눈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금니를 악문 채 그간 쌓아 놨던 설움을 토해 냈다.

“내가 너 좋……!”

“민재야.”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술 틈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 하자.”

“…….”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민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걸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갑갑한 목을 매만지며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만약 우리가 정말 남이었다면, 나는 권이도를 두고 호텔로 오지 않았을 거다. 그의 집에서, 그가 마련해


준 회사에 다니며, 하루하루 평온한 일상을 반복했겠지. 민재가 내 가족이니까, 그래도 한때 친근하게 굴던
동생이니까, 내가 이곳에서 민재와 대화하고 있는 거다.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내가 네 어리광을 들어 줄 이유도 없어.”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민재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로 들릴지도. 그러나 내가 그어
놓은 선이 엉망으로 지워지기 전에 한 번은 단호하게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

“민재 네가 날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민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커다랗게 뜬 눈이 덜컹 흔들렸다.


최대한 담담히 말할 생각이었건만,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너, 정말 다시는 나 안 보려고?”

- 다음 화에 계속

55 화. Complete Strangers(3)

협박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의문이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약혼 따위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아버지의 구속. 그 두 가지로 인해 나는 간신히 유지하던 가족의 형태마저 잃게 되는 걸까.

“…….”
민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을 뿐이다.
그러다 끝내, 터져 나온 탄식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

나직이 욕지거리가 들렸다. 허탈함, 허무함, 그리고 사그라든 분노에 섞인 무력감까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민재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씨발, 진짜…….”

아까처럼 호전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포자기하듯 모든 걸 내려놓은 느낌이면 모를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만 가봐야겠다.”

아마, 울고 있진 않을 것이다. 며칠은 좀 낙담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르겠지. 김 실장에게


잘 챙겨 달라고 말하고, 시간이 약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쉬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더라. 그래도 어렸을 땐 나름대로 잘 지냈던 것 같은데. 형, 형, 하고 쫓아다니는


민재가 정말 피를 나눈 동생처럼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건만.

“…….”

나를 향하는 시선에 미련이 득실거렸다. 직면할 자신이 없어 방치한 감정이 나도 모르는 새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조금 더 일찍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그리 생각한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형 갈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민재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번엔 민재도 무어라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울음을 삼켰을 뿐.

그렇게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발짝 옮기는 순간, 등 뒤에서 자그마한 물음이 들렸다.

“……이제 또 연락 안 받게?”

“…….”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내가 연락을
또 안 받다니. 생뚱맞은 말이었다.

“연락했었어?”

민재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민재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한테 연락했었다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온 연락이 있나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이 나타난 화면엔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통화 기록에도 들어가 봤지만, 그곳엔 권이도와 김 실장의
번호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전화 온 게 없는데.”

“……뭐?”

민재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직 남은 감정의 잔재가 꾸역꾸역 지워지는 듯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장난해?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욱해서 말하던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팩 돌려 버리는 걸 보니 별안간 민망해진 모양이다.


나는 차단 목록과 메시지 함을 차례대로 확인하고 연락처에서 민재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핸드폰에서 팝송으로 된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와 똑같은 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불과 한 시간 전엔 김 실장과 통화도 했고, 지금도 신호가 잘 가는 걸 봐선 핸드폰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뭐야.”

마침 제 핸드폰을 확인한 민재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보곤 배신이라도 당한 양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콱 움켜쥐었다.

“이젠 몰래 번호까지 바꾸냐?”

“…….”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민재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목을 붙잡았다. 움찔, 뒤로


물러나려던 민재가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난생처음 보는 열한 자리 숫자였다. 분명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나인데, 평생을 써온 번호가 아닌


전혀 모르는 번호가 나타나 있었다. 혹시 몰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흘러나오던 팝송 역시 뚝 하고 끊겨
버렸다.

“…….”

번호가…… 바뀌었을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민재는 표정을 굳힌 나를 보고 말없이 눈치를 살폈다. 이명이 들릴 것처럼
멍한 귓가에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울리는 듯했다.

‘핸드폰은 오후에 비서가 가져올 겁니다.’

뒷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입가를 가린 채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액정이 다 깨졌길래 새 걸 사 오라고 했어요.’

온실에서 히트 사이클이 왔던 다음날. 권이도는 이태성을 시켜 내게 새 핸드폰을 사다 줬다. 정보를 모두


백업해 두었다며 친절하게 전에 쓰던 핸드폰까지 액정을 고쳐 왔다. 그런데 아무 의심 없이 쓰고 있던 핸드폰이,
사실은 내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로 되어 있었다면 어떨까.

“……하.”

멈췄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 이태성의


번호는 내 쪽에서 받았고, 창립 기념식에서 만난 이들에게도 연락처를 주지는 않았다. 부하직원들에게 왔던 안부
인사도 그때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권이도가 내 번호를 바꿔 놨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한 가지 모순을 깨달았다. 가족들은 물론, 당사자인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번호. 권이도와 이태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내가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

‘본부장님. 접니다.’

“……뭐야, 야, 어디 가? 야!”

뛰듯이 객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했다. 한 손에 핸드폰을 움켜쥔 채 민재의 부름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자마자 그 옆에 서 있던 사람이 퍼뜩 나를 바라봤다.

“도련님?”

얇은 안경알 너머로 의아해하는 시선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만큼 예전과는 달리 잔주름이 있는


눈매였다. 나는 민재가 듣지 못하게 객실 문을 닫으며 그를 향해 운을 뗐다.

“김 실장님.”

“예.”

그는 말없이 얘기하라는 듯 가만히 눈을 맞춰 왔다. 내게서 무얼 느꼈는지 목덜미를 빳빳하게 굳히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말도 안 되게 느껴져서. 질문을 건네는 순간까지 헛웃음이 나왔다.

“제 번호 어떻게 아셨습니까?”

“…….”

벌어진 입술이 딱 다물렸다. 아까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아무
말 않던 그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딱 한마디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구나. 권이도에게 모든 정보를 건네준 게.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김 실장에게 느꼈던 위화감, 그리고 차에서 본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 유독 김 실장을 신경 쓰던 권이도와 얼마 전 차에서 들었던 그 말까지.
‘단순히 계약으로 약혼한 거였으면 도련님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김 실장이 말한 ‘그렇게’는 해신의 파멸을 의미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최측근이자 내부 고발자는


아마도 다름 아닌 본인이었겠지. 그래서 찾아 봤자 의미가 없다고, 굳이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았나 보다.

“…….”

배신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었다. 김 실장은 아버지의 사람이고, 한순간에 등을 돌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의심이 생겼으니 최소한 진위라도 확인해야 할 터인데, 이상하리만치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

“정말 인복이 없으시네요.”

만약 딱 한 번이라도 내가 먼저 연락했다면. 김 실장을 통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안부를 물었다면.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왔다면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도, 해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도, 김 실장이 권이도의 편에 섰다는 것도.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김 실장의 말대로 인복은 스스로 만드는 거였다. 저지르지 않은 비리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이게 과연 원인을 타인에게 돌릴 일일까.

우습게도, 나는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상황이 슬프지도 않았고,
그가 안타깝거나 동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통쾌한 기분이 든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방관자가 된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사모님도 알고 계십니다.”

김 실장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이번엔 정말 놀라운 내용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어머니한테 가죠.”

***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여름을 앞두고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온 세상을 회색으로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김 실장은 빗길을 운전하는 내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늘 건네던, 피곤하면 눈을 붙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이따금 섞이는 도로의 잡음만이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전부였다.

‘세진이 너는…… 그냥 모르는 척하렴.’

나는 내내, 내내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민재의 같은 층 스위트룸에서, 서영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응접실에 앉아 나누었던 대화를. 이토록 엉망인 상황 속에서도 고고한 학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널 끌어들이는 쪽이 기업 이미지엔 더 안 좋겠지.’

어머니는 긴말 없이 내가 해야 할 행동만 알려 줬다. 아무것도 관여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라고. 아버지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으니 그저 지금까지처럼 권이도의 집에 조용히 머물라고.

‘어차피 너는 남이니까, 너한테 피해가 가진 않을 거야.’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가족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내가


조용히 있으면 세간에선 은혜도 모르는 입양아라며 나를 욕할 텐데.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말을 묻기까진 제법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혹시라도 그조차 내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서. 너는 남이니


알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 어쩌나 하고.

‘이혼할 계획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스스럼없이 앞으로의 예정을 말해 줬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그이랑도 얘기는 끝났어.’

어머니는 해신그룹 사람이 아니었고, 민재와 서영이는 학생이었다. 기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그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다 이혼까지 한다면 피해는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돌아갈 터였다.

‘냉정한 말이지만, 애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개인의 희생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다면 꼬리 자르기라도 해야겠지. 꼬리를 맡은


아버지가 동의한 이상 별다른 이견은 없을 테니.

부자는 망해도 3 대가 먹고 산다고 했던가. 그들의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 가진 재산만 해도
죽을 때까지는 먹고 살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민재의 씀씀이는 조금 줄여야겠지만.

‘너한테는 아무런 해가 안 되게 할 테니까…….’

말을 잇는 중간중간 어머니는 지나치게 내 눈치를 살폈다. 입양된 아들을 향한 불편함이 아니라 정말


조심스러운 상대를 대하는 듯이. 그 과한 반응이 거북해서 오히려 더 불편하다는 것도 모르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

가만히 턱을 괸 채 비가 내리는 바깥을 바라봤다. 이렇게 습도가 높아지면 주변 사물의 냄새가 더


예민하게 다가오곤 한다. 가령 차 안에 있는 지금조차 카 시트의 가죽 냄새가 선연히 느껴지는 것처럼.

“다시 여쭤볼게요.”

나는 대뜸 입을 열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나가서 비나 맞으면 좋겠다고,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 실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권이도에게 한자리 받기로 한 걸까. 그가 무얼 대가로 아버지를 배신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처음부터
신의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 그걸 배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정말 정해진 건 없습니다.”

김 실장은 이번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분명 아까와 같은 내용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드럽게 핸들을 꺾은 그가 여상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우선 내일 조사 받고 인수인계를 좀 해야 합니다. 비서실에도 비상이 떨어져서 처리할 것도 몇 개


있습니다.”

쓸데없이 성실한 답변이었다. 내가 물은 게 당장 이번 주 일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바라는 대답을 얻기 위해선 조금 더 직접적인 질문을 건네야 했다.

“권이도 씨가 뭘 준다고 했습니까?”

세상에 조건 없는 계약은 아무것도 없다. 김 실장처럼 꼼꼼한 사람이 단순히 협박을 당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오는 이득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손해는 안 볼 터였다.

“그냥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입니다.”

김 실장은 어쩐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리깔린 음성은 비가 내리는 하늘처럼 무채색이었다.
감정을 절제한, 정제된 말투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 줬다.

“회장님이 저지른 일들이 언젠간 알려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불안하셨던 겁니까?”

“……예.”

그는 깔끔하게 제가 느낀 불안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실직이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불안했습니다.”

가벼운 대답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주는 무게감은 더 무거웠다.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서 비리를 도와야
했을 김 실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처지였을 거다.

“도련님이 본부장직을 내려놓은 뒤에 회장님이 더 초조해하셨습니다.”

김 실장의 살길은 권이도였고, 어머니의 살길은 이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살길은 아마 나와 권이도의
약혼이었을 거다. 그 약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아버지도 불안했겠지.

“이렇게 위태롭게 지낼 바엔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회장님을 배신해야겠다거나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회장님을 위해서도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들으면 화내시겠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을 아버지가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게 그랬던 것처럼 뺨 한 대쯤은 갈길 것이었다.

“그리고 도련님 번호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건…… 조금이나마 편하시길 바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김 실장은 이번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얘기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는 게 양심에 걸리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상태였다.

“그 집에서 잘 지내시는 듯해서…….”

불면증이 나아가는 게 가장 안심이었다고, 그는 내가 먹는 수면제의 양이 반의반으로 줄었다고 말해줬다.


주치의인 최 교수가 장난처럼 다른 곳에서 약을 타냐고 물을 정도였단다.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진심으로 아낀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 말에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내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얼마큼의 크기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아낀다.’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그런 걸 가늠할 수 없었기에.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어떤 질책을 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누가 김 실장 아니랄까 봐, 이야기를 끝내는 말투도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화를 낼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화가 났더라도 직접적으로 성질을 내진 못했을 거다.

“질책이라니…….”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모두가 치열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 혼자만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원래는 부품의 하나였다면 지금은 맞물리는 톱니가 하나도 없는 동떨어진 바퀴가 된 것 같았다.

“제가 무슨 권한으로 김 실장님을 혼냅니까.”

“…….”

“이제 내 비서도 아닌 사람을.”

- 다음 화에 계속

56 화. Complete Strangers(4)

이젠 정말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때일까. 아버지를 만나진 못했지만 나는 오늘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임을 알았다. 더 이상 내게 연락할 일도, 김 실장을 통해 전해야 할 말도 없겠지.

치열하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가로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을 해왔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부였단 말이다.

그런데 덜컥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일직선으로 난 좁은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넓은 공터를


마주한 것처럼. 어디로건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지, 아니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피스텔로 모실까요?”

차가 사거리 신호에 걸렸을 때,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자연스레 권이도의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건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건 좀 그럴지도 몰랐다.

“아뇨.”

“…….”

“권이도 씨 집으로 가주세요.”

그러나 나오는 건 생각과는 모순되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 이유까지 물어보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신호등을 따라 권이도의 집 쪽으로 차를 돌렸을 뿐. 매끄럽게 회전한 차체에 빗방울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

집 앞에 다다를 즈음엔 창밖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복잡하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정리됐다. 사실 정리되지 않아 버린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치워 버렸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김 실장은 나를 대문이 아닌 차고에 내려줬다. 그냥 대문 앞에서 내려 달라고 했지만, 비를 맞을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여름 감기가 독하다는 말엔 나 또한 굳이 부정하지 못했다.

“들어가세요. 빗길 운전 조심하시고요.”

아마 김 실장은 가족들이 있는 호텔로 돌아갈 거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필하며 이런저런
잡일들을 처리하겠지. 그리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머물 사람은 다름 아닌 민재일 터였다.

“그리고 김 실장님이 민재 좀 잘 챙겨 주세요.”

“…….”

그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침착한 시선을 돌려줬다. 가끔 이렇게 말없이 있으면 권이도 못지않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나직한 서론은 결코 내 부탁의 대답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는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리며 얘기했다.

“오늘따라 다신 안 볼 사람처럼 인사하시는군요.”

“…….”

가느다란 실소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지듯 미소 짓는 내게 김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살짝 목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연은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을 기약한들 기회가 생기면 닿을 터였다.
물론 그 기회의 순간을 앞으로 내 쪽에서 만들진 않겠지만.

“그럼 가볼게요.”

뭘 느꼈는지, 김 실장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푹 쉬시라며 인사를 건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차 옆에 우뚝 선 채로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을 뿐.

“……하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미뤄 뒀던 피로가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아무래도 하루가 너무 길지


않나 싶다. 출근을 하고, 아버지가 구속됐단 기사를 보고, 업무를 모두 끝낸 뒤 권이도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저녁을 먹을 시간에 가족들을 만나고 온 탓에, 그 많은 일을 하고도 남은 하루가 있었다.

권이도는 내가 그를 두고 나가 있던 동안 집에서 무얼 했을까. 그 의문은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해결됐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린 곳에 아까와 같은 차림을 한 그가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

“…….”

퇴근 후 보았던 것과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물론, 나를 기다리는 위치와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설마 저기서 한 발짝도 안 떼진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깜짝 놀라기엔 충분했다.

“……왜 그러고 계세요?”

그는 내가 질문을 건넨 다음에야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순간, 그제야 나는 그가 얼마나


동상처럼 굳어 있는지 깨달았다. 정지된 영화를 다시 재생시킨 것처럼, 그를 둘러싼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고 있냐니…….”

“…….”

“보통 이러고 있으면, 기다렸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나.”

집을 지키는 개 같다고 하면 무례하다고 화를 낼까.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곳에 서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아마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때마침 현관으로 나왔겠지만 말이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돼서요.”

그의 입에서 ‘걱정’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모든 걸 다 가진


권이도가 세상에 걱정이 있어 봤자 몇 개나 있으리라고. 끽해야 내일은 어떤 넥타이를 맬까, 그 정도 걱정이나
해야겠지.

“정세진 씨가 좀, 다신 안 올 것처럼 밖으로 나갔으니까.”

“……설마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습도 높은 공기에 권이도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섞였다.


늘 젖은 나무와도 같은 냄새가 풍기는 페로몬은 오늘따라 더 밀도 높게 일렁였다.

“제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갈 곳을, 그쪽이 없애 버리지 않았나. 애초에 돌아갈 곳인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졌다. 내가 남겨 둔 오피스텔, 그리고 권이도의 집.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 그 정도였다.

“제 번호까지 바꿔 놓으셨으면서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비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권이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처럼


얘기했겠지.

“화낼 줄 알았는데.”

“그런 걸로 화 안 냅니다.”

진작 말하지 않았던가. 화를 내는 것도 권리의 일종이라고. 감정을 소모해서 바뀔 문제라면 좋겠지만,


무어라 따져 묻는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근데 이유는 좀 궁금하네요. 왜 그러셨어요?”

제 계획을 완벽히 이루기 위해서라고, 대충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가족들이 내게 연락하면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그랬다고. 그러나 권이도가 한 말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정세진 씨가 연관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우아한 목소리가 차분히 얘기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엔 거짓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식구들이 정세진 씨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 식구들. 그리고 정세진.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남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큰


걸 바랐던가.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마음이 상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냥
허무했다.

“미안합니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할 게 고작 그거일까. 단순히 고지의 문제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괜찮고 말고를 따질 문제는 아니고…….”

그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 번호를 바꿨다고 말하지 않은 것만 사과하고 있었으니까. 그 외에


일어난 일들은 딱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식사하셨어요?”

갑작스레 건넨 질문에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주제넘은 짐작일지는 몰라도 아마 저녁을 먹지는


않았을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배고픈데 밥부터 먹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자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평소보단 가짓수가
적었고, 대체로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권이도와 나는 서로 아무 대화 없이 식사만 이어 갔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공기는,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가족들을 만나고 왔어요.”

권이도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분히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려고.”

“다정하군요.”

“…….”

“나 같으면 모르는 척했을 텐데.”

무미건조한 감상이었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들렸고.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권이도라면


정말 그렇게 했겠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얘기해요.”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연연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좀먹는 짓도 없으니까. 길게 끌어 봐야 손해 보는 건 내 쪽일 것이다.

“권이도 씨가 하겠다던 못된 짓, 그게 이거였습니까?”

여러 가지를 통틀어 묻는 것이었다. 해신의 비리를 터뜨린 것, 내 번호를 마음대로 바꾼 것, 그리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 아니, 마지막 건 못된 짓이라기엔 너무 당연한 일인가.

‘너만은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했잖아.’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집에서 나가기 전, 권이도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호텔에서


그와 약속했던 내용. 이미 결론은 나와 있고, 권이도는 고개만 끄덕이면 끝나는 것이다.

“선호가 해신을 인수하기로 했죠.”

그런데 권이도는 ‘네.’라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앞서 김 실장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는데, 특유의 고상한 목소리가 설명을 이었다.

“해신금융 윗대가리를 전문 경영인으로 갈아 치우고 사명을 변경할 겁니다. 정철호 회장을 포함한 주요
임원 10 여 명을 제외하면 정리 해고는 없을 거예요.”

“……너그러운 처사네요.”
그런 설명을 바란 게 아니라고, 그렇게 물으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뭐…… 기업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편이 나으니까. 그리고 조만간 주주 총회가 열릴 텐데, 거긴 나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권이도 씨가요?”

“네, 저한테도 주식이 좀.”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많이 있거든요.”

“…….”

기업이 돌아가는 일을 내가 이토록 몰랐을까. 아니면 권이도가 물밑 작업을 열심히 해놨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예상치 못한 일임은 분명했다.

“인수가 끝나고 안정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겠죠. 정철호 회장의 재판도 그만큼 길어질 거고.”

긴긴 싸움이 될 터였다.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마 정해져 있겠지만. 어쩌면 길게 저항하지 않는 편이


아버지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정세진 씨, 정 회장에게 약혼의 조건을 얼마나 들었습니까?”

권이도는 가볍게 질문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딱히 답을 바라진 않았는지 곧장 뒷말을 덧붙였다.

“그쪽 기업엔 특이 형질이 없죠. 그나마 하나 있는 오메가는 친자식이 아니고.”

참으로 가감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다지 상처가 되는 말도 아니었다.

“정철호 회장은 나한테 해신이 가진 오메가를 줄 테니 선호카드와 제휴를 맺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투자금과 시스템을 가지고 협상을 걸었어요.”

여기까진 아버지에게 들은 것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먼저 제안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대가는 같았다. 고작 나 따위 오메가를 가지고 선호그룹에 손을 뻗다니, 아버지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그때 정세진 씨에게 줬던 시스템. 그건 내가 원래 주기로 약속한 자료가 맞습니다.”

“…….”

그의 입에서 순순히 이 사실이 나올 줄 몰랐는데. 가만히 입을 다무는 순간,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비록 불량이었지만.”

“……네?”

퍼뜩 눈을 크게 떴다.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그 시스템에 큰 하자가 발견돼서 고치는 중입니다. 실제로 적용하기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더군요.”

“…….”

목소리는 평온한데, 내용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그가 내게 쥐여 준 시스템이 불량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만약 내가 그걸 그대로 아버지에게 가져다줬다면, 그랬다면 해신은 또다시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불량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고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대답했다.

“몰랐습니다, 처음엔.”

미묘하게 찜찜함이 남는 대답이었다. 그 처음이 언제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되물을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날 정세진 씨가 한 번 해신을 구한 겁니다. 정 회장은 멍청하게 그것도 모르고 자기한테 득이 되는


사람을 내친 거고.”

지나친 억설이었으나 딴지를 걸기에도 애매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날 뺨을 맞고 온 나를 떠올린 것처럼.

“못 믿을 수도 있는데, 내 손으로 직접 무너뜨릴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정세진 씨 얼굴을 봐서라도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죠.”

“…….”

“아까 말한 것처럼, 그 방아쇠를 당긴 건 정 회장이고.”

양가감정이 들었다. 시기를 앞당긴 건 권이도지만, 그의 말대로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을 테니까. 이걸
권이도의 탓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나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정세진 씨 비서랑은 처음부터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에 필요한 자료를 많이 가져다준 건 맞지만,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고작 한두 사람의 영향으로 터질 일이 아니라는 건. 아버지가 뿌린 씨가


그대로 독이 되어 되돌아왔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정 회장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하긴, 아내까지 등을 돌렸으면 말 다


했지.”

“……어머니와도 연락하셨습니까?”

“…….”

권이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못 들었냐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현명한 사람이군요. 정 회장이랑은 다르게.”

유독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마 권이도가 어머니에게도 입막음을 시킨 모양이었다.


내가 가족들을 만나고 왔으니, 내게 모든 걸 토로했으리라 짐작했겠지.

“정 회장 외의 식구들을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정세진 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정세진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오늘 느꼈던 예감이 진짜였구나. 놀랍다기보단 마음이 침착해졌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정이


없다는 게 조금 의외였을 뿐. 물밀듯 밀려드는 상실감은 미련이라기보단 허전함에 가까웠으니.

“정세진 씨는 더 이상 정철호 회장의 아들이 아니에요. 키워 준 은혜를 갚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일에 강제로 함께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혹시 개운하다고 얘기해야 할 타이밍이었을까. 지금 드는 이 기분이 그런 긍정적인 것이라면 나는 긍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세진 씨.”

권이도는 느릿느릿 내 이름을 불러 왔다. 그 나직한 부름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서론에 가까웠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봤다.

“여기까지가 내가 한 못된 짓입니다.”

마주친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씁쓸했다. 왜인지, 그가 내게 미안해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느릿 운을 뗐다.

“정 회장을 구속시킨 게 아니라…….”

“…….”

“정세진 씨한테 가족을 빼앗은 거.”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이 꽉 옥죄여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내게 사뭇 냉랭한 목소리가 이야기했다.

“내 눈에는 학대범들이었지만, 당신한텐 유일한 가족이었을 테니까.”

- 다음 화에 계속

57 화. Complete Strangers(5)

“…….”

하릴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야트막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울 것 같아서가


아니라, 속이 울렁거려서. 기탄없는 한마디가 소화되기도 전에 배 속에 얹히는 바람에.

“정 회장만 구속시킨 게 나로선 최대한의 선처예요.”

권이도의 말투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을 나열하듯 무미건조하고, 별거 아닌 일이라는 양


담담하기만 하다. 잘못은 그 사람 하나에게만 있지 않다는, 그 단조로운 평가조차 온화하게 들렸다.

“……학대라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정도 중얼거림이 전부였다. 애써 입매를 말아 올렸지만, 그 노력은 웃음이


되기 전에 사그라들었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리는 듯해서, 마른침을 삼키며 먹먹한 귓가를 해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듣기 거북했다면 사과하죠.”

권이도는 그러한 사과마저 거리낌 없이 건넸다. 거북하다는 표현에 그제야 나오지 않던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기분을 고작 불편함 따위로 정의해야 할까. 그러한 사실에 의문이 든 탓이다.

“……아뇨.”

나는 느리게 대답하며 흐려진 눈을 깜박였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서 심장이 느릿느릿 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용하다 못해 공허한 공기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폐부를 난도질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에게 모든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절대 들키면 안


될 비밀을 까발려진 것처럼 모욕감과 함께 수치심이 일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걸요.”

나도 모르지 않았다. 내가 맡은 역할이 기형적이라는 걸. 아버지는 가해자였고, 민재는 조력자였으며,


어머니와 서영이는 그저 방관자에 불과했다.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협조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권이도 씨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피해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를
얻었고, 질 좋은 식사를 받았으며,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학벌과 직위까지 생겼다. 부분적으로나마 충족된 게
있으니, 어쩌면 이건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이런 건 가족이 아니죠.”

눈을 내리깐 그대로 기계적인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텅 비었지만, 입술은 의지와 달리 저절로
움직였다.

“근데…….”

“…….”

“그냥 모르는 척하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부질없는 원망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한 번 흘러나온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억울함인지,


아니면 답답함인지. 영문 모를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보통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듣고 싶어 하진 않거든요.”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비참하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으니 그냥


창피하다고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저에 대해 잘 아시잖아요.”

“…….”

“취향, 입맛, 체질, 히트 사이클 주기에…… 그리고 이젠 가정사까지.”

천천히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음식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식사를 잇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바람 빠지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얘기했다.

“그럼 제가 무슨 기분을 느낄지도 아셨어야죠.”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을 들어 주겠다던, 그 꿈결 같은 약속. 내 손에 입을 맞추던 권이도가 이리도


생생한데, 그는 그때도 이러한 결말을 준비하고 있던 걸까. 그 달큼한 순간조차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권이도 씨.”

그는 내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와 시선을 맞춘 채 가만히 눈을 깜박였을 뿐이다.


나는 그 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직이 내뱉었다.

“약속대로 할게요.”

그를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금 혼자가 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밖에 없었다. 가족마저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오로지 권이도 하나뿐이었으니까. 텅 빈 오피스텔로 돌아갈 바에야, 그가 만든 아늑한
둥지에 머무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고.”

“…….”

“향수도 만들어 드리기로 했으니까.”

변명처럼 덧붙인 말들이 구질구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향수를 건네준 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한낱 계약에 불과하던 약혼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권이도는 이런 내 대답이 그다지 달갑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운을 뗀 것이다. 내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씁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내 방법이 또 잘못됐군요.”

“…….”
‘또’라고 이야기했다. 제 방법이 또 잘못됐다고. 위화감을 느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사 마저 해요. 난 일이 좀 남아서.”

무례한 행동이었는데, 기분이 나쁘기보단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게 너무도


불편했으니까. 식사를 마저 할 생각은 없지만, 우선 대화를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방은 비워 둘 테니 잠이 안 오면 내 방에서 자고.”

그 말을 끝으로 권이도는 곧장 주방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식사는 손조차 대지 않은 새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의 페로몬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을 즈음에는 어두운 정원에 나가 홀로 비를 맞았다. 온종일 쏟아지던 장대비 대신 내리는지도


모를 부슬비가 소리 없이 내 온몸을 적셨다. 눅눅한 공기에 섞인 풀 냄새가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 줬다.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할 행동이었다. 체온이 점점 떨어져서 종국에는 몸을 으슬으슬 떨기까지 했다.


미련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꺼릴 것도 없었다.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 물에 젖은 생쥐처럼


볼품없는 모습이 될 때까지. 이대로 물에 녹아 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염치없게도, 그 후 샤워를 마치고 향한 곳은 권이도의 방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잠이 들면 정말 끔찍한


꿈을 꿀 것 같단 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권이도는 방에 없었고, 방 안 가득 퍼진 페로몬만이 나를 맞이해 줬다.
밀도 높은 페로몬에 취해, 그렇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순간에도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하루를 보내면 해가 지고, 잠을 자면


해가 뜨기 마련이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날짜는 매일 꼬박꼬박 바뀌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았기 때문일까, 나는 그날 이후 자잘한 감기 기운으로 고생했다. 크게 몸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미열과 함께 잔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마 속에 아버지의 소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왔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요새


가장 뜨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 이름도 나왔지만 진작 일을 관둔 터라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그동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Sejin’의 론칭을 준비했다. 최근엔 신제품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향료를 이희나의 공방에서 조달받기로 했다. 재료인 천연 오일이 꽤 마음에 드는 데다 이래저래
고생하는 이태성에게 그 정도 낙은 만들어 줘도 될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대표님, 오늘도 학원으로 가십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퇴근 후엔 항상 학원에 들러 조향 수업을 받았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정해진 커리큘럼을 모두 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야 하는 수업을, 약간의 웃돈을 주고 혼자 들을 수 있게 신청해
놨다.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태성은 껄끄러운 눈으로 내 얼굴을 살펴봤다. 말하는 중간중간 기침을 하는 내가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옮길까 싶어 미안하다고 얘기하자 이번엔 더 황당한 눈을 해보였다.

“전 감기 같은 거 안 걸립니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던데. 그리 말하려다가 너무 놀리는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태성이
툭 내뱉는 게 아닌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저한테 개라고 하신 겁니까?”

“…….”

“와, 아니라고도 안 하네.”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태성은 진심으로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니.

“비 맞아서 그렇습니다. 저도 감기 같은 거 잘 안 걸려요.”

“아니, 항상 차 타고 다니는 분이 비를 왜 맞습니까?”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그냥 손을 내저었다. 신호가 바뀌었으니 운전이나 마저 하라는 의미였다. 이태성은


묵묵히 기어를 바꾸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심해지기 전에 약이라도 드십쇼. 이희나 씨가 그러는데 조향사는 감기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둘이 따로 연락도 합니까?”

나랑 있을 땐 그런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묻자 이태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더니, 아무래도 내 말이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약이라면 먹고 있습니다.”

내 감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이태성 말고도 챙겨 주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그중 8 할은


다름 아닌 권이도였지만.

‘약 꼬박꼬박 먹어요. 혹시 몰라서 졸린 약은 빼라고 했으니까.’

그 어색한 대화 이후에도 우리는 매일같이 식사를 함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집에 들어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반복된 것이다.

‘자꾸 아프면 큰일인데…….’

권이도는 내가 중병이라도 걸린 양 늘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 감기가 뭐 그리 대수라고.


감기를 옮길까 봐 내 방에서 자려고 하면 억지로라도 제 방 침대에 눕혀 놓을 정도였다. 나야 푹 잘 수 있으니
좋지만, 그의 태도는 이따금 민망한 감이 있었다.

‘일을 좀 쉬는 게 어떻습니까?’

약을 챙겨 주는 건 물론, 매일 밤 조심스레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가 좀 몽롱한 걸 빼면 거의 아무렇지


않은데, 심지어는 직접 출퇴근까지 도와주려고 했다.

‘이 정돈 금방 나아요.’

‘금방 안 낫고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막연히 느끼던 불안감이 눈 녹듯 녹아내릴 만큼.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그의 다정함으로 메워질 만큼.

‘……잠을 푹 못 자서 그런가 본데.’

사실 감기가 안 낫는 이유는 뻔했다. 원래도 심하던 불면증이 근래에 조금 더 심해진 것이다. 권이도의
페로몬만으로도 숙면을 취하던 나는, 이제 그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깐 잠든다 해도 금방 깨기
일쑤였고, 어쩌다 깊이 잠들면 발작처럼 눈을 뜨곤 했다.

원인은 딱 하나였다. 나를 내친 가족들이 돌아가며 꿈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왔고,


하루는 민재가 나왔으며, 또 하루는 어머니와 서영이가 함께 나왔다. 꿈속에서 나를 못 본 척 외면하던 그들은,
나중에는 사람들 틈에 섞여 힐난하듯 손가락질했다.

여기까진 그나마 참을 만했으나, 그 끝에 권이도가 나오는 순간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는 늘, 매 순간순간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진 않았지만 그 차가운 시선은


호된 매질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길가에 널린 쓰레기를 보듯 경멸 어린 표정은 뭇사람들의 비난보다 더 억울했다.

고작 꿈일 뿐인데, 바늘을 삼킨 기분이었다. 뱉어 내지도 소화하지도 못해서 옴짝달싹 못 한 채 처분만


기다렸다. 조금만 크게 움직이면 배 속이 아파서, 몸을 웅크린 채 최대한 숨을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내 유일한 일상을 이루는 사람이, 내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텅 빈 침대를 보는 게 두려워서, 본능적으로 권이도를 찾을 정도였다.

잊고 있었는데, 그건 아주 무서운 감각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겉도는 경험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잃은 것도 허무한데 거기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설움이
덧씌워졌다.

권이도는 그런 내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악몽이 몇 번 반복되자, 내가 자는 동안에는 절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직접 온기를 나눠 줄 땐 나 또한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비록, 그게 일시적인 안정감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

“오늘 늦으신다고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권이도는 집에 있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걸려 온 전화 한 통만이
그가 전해 준 소식의 전부였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자기 전엔 들어갈 테니까 저녁은 먼저 먹어요.

“…….”

권이도는 바쁜 사람이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었다. 지난번처럼 새벽에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전에 들어온다면 그리 늦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나 또한 일이 생기면 그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얼마나 늦으세요?”

그런데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피치 못 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한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놀랐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권이도에게 길들었단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약속을 지키는 척 그의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사실 의지할 곳이 필요한 건 나였던 모양이다.

-감기 기운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간질거리는 목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조금만 방심하면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괜히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말이 없던 권이도는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쉬고 있어요.

뚝, 끊긴 전화에서 수화음이 들려왔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화면을 바라봤다. ‘권이도’


그렇게 저장된 이름이 오늘따라 참 새삼스러웠다.

권이도 없는 저녁 식사는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기만 했다. 국물이 많은 불고기는 적당히
달큼했고, 아삭한 연근무침 역시 내 입에 꼭 들어맞았는데 말이다. 블루베리 퓌레를 올린 우유푸딩은 두 입
먹자마자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기다리는 사이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 고용인이 제가


하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욕실에 걸터앉아 물이 받아지길 기다렸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는
장맛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입욕제는 굳이 풀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도 대충 바닥에 벗어 버리고 욕조로 들어갔다. 물 온도는 딱


적당했고, 목까지 몸을 푹 담그면 긴장이 풀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하늘이 한눈에 보였다. 빗방울이
통통 튀어 오르고, 저마다 한데 모여 힘없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제법 중독성 있는 구경거리였다.

그렇게 한참 빗방울을 구경하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스르륵 몸을 미끄러뜨렸다. 아까보다 식은 물속에


머리까지 잠근 채, 꽤 오랜 시간 그렇게 숨을 참았다. 세상과 차단된 것처럼 먹먹한 귓가엔 잔잔한 물소리만이
전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물속에 잠긴 채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이 순간 그대로 더는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욕조에 빠져 죽는 건, 지나치게 볼품없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숨이 가빠질 즈음에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모자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

“…….”

권이도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의 권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파르르 눈가를 떨던 권이도.
언제 퇴근한 건지, 언제부터 있던 건지. 그런 걸 물을 새도 없이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들어가 있던 건 나인데, 도리어 제 쪽이


숨이 막힌다는 듯이. 잠깐 그대로 서 있던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냥 가게요?”

나는 넌지시 물으며 욕조에 팔을 걸쳤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한 손으로 쓸어


넘기기도 했다. 속눈썹에 맺혔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오지 그래요.”

- 다음 화에 계속

58 화. Complete Strangers(6)

첨벙! 물이 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등줄기를 따라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모락모락 피어난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다. 바닥에 벗어 둔 내 옷가지 위에 넥타이와 재킷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흣, 잠깐…….”

나는 상체를 숙여 욕조 턱을 간절히 붙들었다. 손끝에 잔뜩 힘을 줬지만 물이 묻은 탓에 자꾸만 헛손질을


하길 반복했다. 하는 수 없이 팔을 겹쳐 엎드리자 목구멍으로 삼킨 신음이 더 적나라하게 울렸다.

“아……!”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아래쪽에 닿았다. 말캉한 감촉이 민망한 부위를 길게 핥아 냈다.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자세를 무너뜨리자, 억센 손길이 내 골반을 붙들었다. 그러곤 엉덩이를 콱 깨물며 이야기한다.

“똑바로 서야지.”
권이도는 그 말만 하고 다시 그곳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예민한 부위를 핥는 바람에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혀를 세워 다물린 근처를 건드리던 그는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린 채 비좁은 입구를 파고들었다.

“아, 흐, 안 돼…….”

어쩌다 이런 자세가 됐을까. 야릇한 행위가 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절차를 밟을 줄은 몰랐다.
권이도가 하나하나 정장을 벗을 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욕조에 들어왔을 때도 말이다.

“흐읍…….”

혀를 꾹 깨문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물이 튀는 소리에 섞였다. 높은


콧대가 꼬리뼈 아래를 툭툭 건드리고 말랑한 입술이 애액이 고인 부분을 빨아들였다.

“흐으…….”

안쪽 깊숙한 곳을 쑤시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에서 프리컴이 뚝 뚝


떨어졌다. 아래쪽을 핥고, 깨물고, 빨아들이던 권이도는 내가 조금만 자세를 무너뜨릴라치면 손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 그만…… 거기, 흣…….”

“왜, 이거 싫어?”

나지막이 물은 권이도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미끄러지듯 뒤에서 앞으로 문지르더니 발기한
성기를 한 손에 그러쥔다.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꽉 움켜쥐기도 했다.

“아흐……!”

뻐끔거리던 구멍에 입술이 닿았다. 쪽쪽 빨아들이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수치스러운 줄 몰랐다. 그가


뒤처리를 해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유려한 동작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뒤에선 뜨거운 혀가 공들여 뒤를 풀었다. 이미


한차례 괴롭혔던 터라 흐물흐물하게 풀린 구멍이 더 예민하게 자극을 받아들였다.

“흐응, 흣, 아, 아흐…….”

눈을 감으면 촉감이 생생하고, 그렇다고 눈을 뜨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뒤쪽에 닿는 축축한 느낌이


물인지, 타액인지, 아니면 애액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쾌감 탓에 머릿속이 녹진하게 풀리고
있었다.

기둥을 감싼 손가락은 딱 사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여유롭게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뒤를 빠는 동안


손에 쥐고 있을 장난감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손으로는 젖은 살결을 주무르는 거로 봐선 그게 틀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제발, 권이도 씨…… 흐, 힘들, 힘들어…….”

권이도는 내가 고개를 저으며 사정사정할 즈음에야 나를 놓아줬다. 정확히는 입술을 떼어 내고 뒤에서 날


끌어안으며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몸을 축 늘어뜨렸지만, 그가 단단히 받치고 있는 터라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싫어하는 것도 많지……. 뒤처리하는 것도 싫어하고, 쉬하는 것도 싫어하더니, 이젠 빠는 것도
싫습니까?”

“그걸 누가 좋아하는…… 하아…….”

싫어할 만한 것만 골라서 말해 놓고,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허리를 감싸 안았던 권이도는 뒤에서


하반신을 바짝 밀착한 채 아랫도리를 비비적거렸다. 굵고 기다란 기둥이 한껏 예민해진 부위를 길게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느끼니까 문제지.”

“흐응…….”

두툼한 귀두가 엉덩이골부터 회음부까지를 집요하게 문지른다. 삽입할 것처럼 입구에 틱 걸렸다가
미끄러지듯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 감질나는 감각에 신음을 흘리는 순간, 그가 단숨에 뿌리 끝까지
성기를 푹 처박았다.

“……!”

너무 놀라는 바람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리가 낭창하게 휘고, 아랫배가 납작하게 들어갔다. 큿,
신음을 삼킨 권이도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쉬이…….”

그는 얼어붙은 나를 달래듯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벌어진 입술을 억지로 파고들어 손가락으로 혀를
꾹 누르기도 했다. 그가 내 아래턱을 내리누르는 바람에 턱을 따라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아, 아흐…….”

생리적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니,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물일지도 모르겠다. 모자란 숨을 헐떡이는
동안, 권이도는 입에 넣지 않은 손으로 내 상체를 매만졌다.

“반응만 보면 아파하는데…….”

“…….”

“그런 것치곤 너무 토끼처럼 쌌죠.”

미끄러지듯 내려온 손이 움찔거리는 성기를 붙잡았다. 그의 말대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사이 나도 모르게


절정에 다다라 버렸다. 내가 싸지른 정액은 상반신과 물에 지저분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렇게…… 흐으, 갑자기…….”

이미 셀 수 없이 넣어 본 물건이었으나 넣을 때마다 버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5cm 만 작았어도


조금 덜 그랬을 텐데. 길이는 물론 굵기도 장난 아니게 굵었다.

“다음엔 천천히 넣을게요.”

권이도는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 소릴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내 턱을 한 손에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게 해


입술을 겹쳐 왔다. 그가 넘겨주는 페로몬을 꼴딱꼴딱 받아 마시는 동안, 그는 허리를 슬슬 움직이며 움직여도
될지를 가늠하는 듯했다.
“……아!”

툭, 깊이 들어온 성기가 내벽을 건드렸다. 가벼운 탄성과 함께 입술을 떼자 그가 강제성 짙은 손길로 내


얼굴을 고정했다. 그러더니 내 혀를 옭아매며 몸을 바짝 밀착한다.

“후응, 흐, 흐웁…….”

타액과 온기가 입 안에서 정신없이 섞였다. 화사하게 피어난 페로몬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내 온몸에
쏟아졌다. 말캉한 혀가 문질러지는 감촉,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과 느릿느릿 안쪽을 넓히는 허리
짓까지.

“으으응…….”

오늘따라 제법 입맞춤이 집요했다. 이갈이하는 어린 짐승처럼 간간이 혀나 입술을 깨물어 대기도 했다.
그러면서 성기는 빼내지 않고, 비비적거리며 여유로운 움직임을 이어 간다.

몰아치는 쾌감은 없었으나 찰방찰방 차오른 희열은 더 감질났다. 내게 바짝 들러붙은 그는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결코 작은 체격이 아닌데, 권이도가 뒤에서 덮으면 거의
파묻혔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우응.”

그는 양껏 입을 맞추고,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 냈다. 수증기 탓에 유독 반질거리는 입술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톡 건드리면 핏물이 배어 나올 것처럼 어여쁘고 선연한 색이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다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는 살짝 젖어 있고 얇게


쌍꺼풀진 눈매는 나와 마찬가지로 흥분에 젖어 들었다. 생긴 것만 보면 금욕적이고 우아한데, 이렇게 잔뜩
흐트러진 얼굴은 또 더없이 야하기만 했다.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그는 한쪽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느른하게 깜박이는 두 눈이 한가득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살며시 내 아랫입술을 베어 문 권이도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속살거렸다.

“누가 할 소릴…….”

그는 내 뺨에 입을 맞추고 턱 아래쪽에 코를 문질렀다. 페로몬샘이 있는 부분에 얼굴을 묻더니 양팔로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기도 했다. 슬금슬금 올라온 손이 유두를 긁어내리는 순간, 그가 갑작스럽게 크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흣……!”

찌르르한 쾌감이 등허리를 울렸다. 그 가벼운 움직임이 그 나름의 예고였던 모양이다. 그는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단숨에 속도를 올려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읏, 흣, 아, 아, 흑……!”

입으로 잔뜩 풀어 놨던 덕에 그가 움직이는 게 훨씬 수월했다. 이미 흐물거렸던 구멍은 빠듯하게 삽입된


성기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빠져나갈 때면 아쉬운 듯 조였다가, 깊이 삽입될 땐 의지와 상관없이
길을 열어 줬다.

“거기, 응, 흐읏, 아…….”

권이도는 내가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느끼는 부분을 알아서 자극했다. 꾹꾹 짓누르다가 내가 움찔거리면


뒤에서부터 거칠게 꿰뚫었다. 나는 열에 들뜬 몸으로 정신을 못 차리다가 동아줄처럼 욕조 턱을 꼭 붙들고 있어야
했다.

“아흑……!”

푹, 들어온 성기가 배꼽 아래쪽을 난잡하게 헤집었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린 터라 첨벙이며 욕조 물이


넘쳐흘렀다. 억지로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한 그가 뒤에서 내 목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 들어가니까 제대로 들고 있어요.”

“아, 흐, 싫어…….”

물이 들어가긴커녕 조금의 틈조차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자꾸 무릎걸음으로 기려고 하자, 응징하듯


날개뼈 부근이 콰득 깨물렸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그는 약이라도 바르는 양 제가 깨문 분위를 핥아 내렸다.

“너 나중에 배 아파.”

경고하듯 건넨 말은 이번에도 그다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르는 것만으로 체력이
빠지는데, 자세를 유지하는 건 더 힘들었다. 그러다 별안간 권이도가 성기를 쑥 빼내었다.

몸이 휙 돌아갔다. 가끔 느끼는 건데, 권이도는 나를 종잇장 뒤집듯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곤 했다.


멍하니 숨을 헐떡이는 동안 나를 제게 안기게 한 권이도가 다시 깊이 삽입했다.

“아흐응……!”

첨벙, 물속에 몸이 잠겼다. 따뜻한 물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괜스레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매달린 채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에 권이도는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내벽을 쳐올렸다.

“흣, 아, 아으, 안, 안 돼…….”

입욕제를 안 풀길 잘했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꿀렁이며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말 배라도 아프면


어쩌나, 그 사실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머리가 녹아내릴 만큼 기분이 좋아서, 열락에 취한 채로 그의
목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으응, 거기, 더…… 흣, 좋아…….”

“……하.”

뜨거운 숨을 뱉은 그가 내 귓가를 깨물었다. 혀로 귓바퀴를 문지르곤 귓불을 쪽쪽 빨아 댄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욕조에 채워진 물이 찰방찰방 물소리를 냈다.

끝내, 그는 물속에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사정했다. 꿈틀거리는 성기에서 배가 부를 만큼 많은 양의


정액이 한가득 쏟아졌다. 동시에 나도 사정한 탓에 투명한 물에 묽은 액체가 가라앉았다.

“하아, 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와중에도 그의 품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발가락을 잔뜩 오므린 채 허벅지를
움찔거리며 절정의 여운을 즐겼다.

“그대로 있어요.”

권이도는 그 말과 함께 나를 받쳐 안고 불쑥 몸을 일으켰다. 몸뚱이에 딸려온 물이 쏴아, 욕조 안으로


떨어졌다. 방금 사정한 건 매한가지인데,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욕조 바깥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 잠깐, 흐…….”

문제는, 그가 성기를 빼내지 않은 탓에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자극됐단 점이었다. 팔을 놓자니 떨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그에게 매달리자니 고조된 성감이 잔뜩 예민했다.

“흣, 으으…….”

들썩거리는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을 나선 권이도는 내가 떨어지지 않게


안정적으로 나를 고쳐 안았다. 그가 걸어온 바닥에 물로 된 발자국이 흥건하게 남았다.

권이도는 침대에 다다른 뒤에야 나를 내려놓고 성기를 빼냈다. 벌어진 입구로 유독 흥건한 정액이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해서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젖은 입구에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흣, 뭐 하는…….”

질척질척,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헤집었다. 다른 손으로는 배를 쓸어내리며 안에 들어온 내용물을 모두


빼내려 했다. 꿀렁이며 정액이 빠져나갈 때마다 옅은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열을, 흐, 누가 거기로 재요…….”

“정세진 씨가 뭘 모르나 본데.”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손가락을 쑥 빼내기도 했다. 이제 다 끝났나 싶어


안도하는 사이 권이도가 다시 입구에 귀두를 맞췄다.

“아이들은 원래 여기로 재요.”

“……아흐.”

굵은 성기가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길게 숨을 내쉰 권이도가 나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깐


조여드는 내벽을 즐기던 그는 내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상체를 숙여 침대를 짚었다.

“아, 아흑, 흐응……!”

아까보단 느렸지만, 이번에도 자비는 없었다. 안쪽을 쿡 쿡 건드리곤 내 발목을 잡아 입으로 가져간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발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정세진 씨 진짜…… 맛있게 생긴 거 압니까?”


하얗다는 둥, 말랑거린다는 둥, 그는 변태 같은 소리를 하며 내 발을 깨물었다. 발 옆부분을 깨물고
핥다가 복사뼈가 있는 곳까지 올라와 빈틈없이 입을 맞췄다.

“하읏…….”

잘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발부터 종아리까지를 연신 깨물어 대는 게, 진심으로


나를 맛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니. 반대쪽 발로 그의 어깨를 밀어 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그쪽 발목도 덥석
붙잡았다.

“……흐, 아, 그거…… 그만…….”

“왜, 간지러워서?”

“으응, 흐…….”

온 다리를 다 깨물린 후엔 뒤이어 상반신까지 내어 줘야 했다. 그는 못다 한 애무를 다 하겠다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가슴께를 괴롭혔다. 나중엔 유두가 따끔거릴 정도였으니 그의 행동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알 만했다.

“흣, 권, 이도, 아…… 아흣……!”

그가 두 번째 사정하는 순간엔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과하게 밀려든 쾌감이 끝없는 절정에 나를 가둬
뒀기 때문이다. 배 속 깊이 차오른 충족감이 그에게 완전히 속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

“…….”

맞닿은 가슴에서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뛰는 속도가 가빠진 호흡만큼이나


빨랐다. 그는 사정한 뒤에도 삽입한 것을 빼내지 않고, 연신 내 몸뚱이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런 권이도를 살짝 밀어 내며 눈을 깜박였다.

“권이도 씨.”

“응, 세진아.”

나직한 대답은 평소와 같은 존댓말은 아니었다. 섹스할 때면 늘 반말을 하는 그가 한가득 달큼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다. 내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았구나. 그걸 29 년을 산 뒤에야 깨달았다.

“이 집에 처음 왔던 날…… 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내 것이라고 했던 말 기억나요?”

그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내리깔린


속눈썹을 어루만지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당신도 이제 내 방에 있는데…….”

“…….”

“내 건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 연결된 채였고, 아마 이 행위는 끝나지 않은 듯해서. 내게


약간의 쉴 틈을 준 뒤 권이도가 곧장 나를 몰아붙일 게 뻔했으므로.

“아쉽게도 나는 물건이 아니지만…….”

권이도는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눈두덩을 만지는 내가 조금 더 편하게 만질 수 있게


허락해 주는 것처럼.

“이 방에 있지 않아도 당신 소유긴 하지.”

“…….”

퍽 너그러운 허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내 것이라고 확답을 줄 줄 몰랐는데. 그 사실이


신기하기도, 벅차기도 해서 그 입술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럼…….”

“…….”

“우리 각인할래요?”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은 도무지 잊을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 얄팍한 눈꺼풀에 가려졌던 눈동자가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반질거리는 눈동자에 담긴 빛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였다.

“이제 나한테 남은 건 권이도 씨밖에 없거든요.”

내가 가진 모든 건, 권이도의 너그러움 속에 만들어진 환경이다. 내가 속해 있던 모든 울타리가 허물어진


이상, 이제는 그에게 속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

권이도는 선뜻 긍정의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살며시 두 눈을 감은 채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조심


입을 맞춰 왔을 뿐. 다정하게 섞인 혀는 분명 따스했으나, 내게는 그게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그 후에도 셀 수 없이 오래 몸을 섞었다. 몸에 남은 물기가 다 마르고, 축축하게 젖은 침대가


온갖 체액으로 뒤덮일 때까지.

그러나 끝내, 권이도는 끝내 내게 각인하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59 화. Le Bon Choix(1)

특이 형질의 각인은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노팅한 채 온


페로몬을 쏟아부으며 페로몬샘이 있는 부위를 깨문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방법.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페로몬만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

각인을 하면 사이클 주기는 물론 그 수명까지 같아졌다. 한쪽이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기에


선뜻 각인을 다짐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상대가 어디에 있건 서로를 느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연인과 각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마음이 맞아야 했고, 그다음엔


몸이 맞아야 했으며, 양쪽 모두 서로에게 속하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들어맞아도
운명적이지 못한 이유로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소문으로는 이러한 각인이 형질의 우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열성끼리의 각인은 거의 불가능하고,
반대로 우성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찍어 누르는 게 가능하다고. 워낙 우성 형질이 드문 데다 대개는 고위층에
속해 있어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우리 각인할래요?’

권이도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막연히 그가 승낙하리라고 짐작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분위기였고,


우리는 둘 다 우성이었으니까. 비록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본능적인 촉이 그쪽의 편을 들어 줬단 말이다.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각인하지 않았다. 상냥히 건넨 입맞춤만이 그가 돌려준 대답의 전부였다. 마음이
맞았고, 몸을 섞었으나, 그 낭만적인 약속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그래,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약혼 사실도 알리지 못하는 마당에 각인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빈말로나마 내 것이라고 말해 줄지언정 진심으로 속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실망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가진 감정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친절은 의무가 아니니
내가 그에게 바랄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버린 서운함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을 뿐.

‘……내 방에서 안 잡니까?’

유치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날 이후 나는 권이도의 방에서 자지 않았다. 대외적인 이유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에게 덜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권이도 없이는 잠조차 자지 못한다니,
갑작스러운 위기감이 내가 처한 현실을 자각시켰다. 그래서 한참을 그의 방에 머물다가도, 잠을 자야 할 때면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정세진.’

당연히 나는 매일, 매일 악몽을 꿨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에 접어들고 ‘Sejin’의 론칭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뉴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이름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때까지. 그의 페로몬으로 모자라 내가
만든 향수까지 뿌렸음에도 함께 잠을 자던 권이도의 부재를 채워 주진 못했다.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솔직히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꿈속에서 보는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내비치던 모멸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기 학대적인 방법이었고, 이런다고 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 또한 익숙해지지 않을까. 익숙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뎌지지 않을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20 년을 살아왔듯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

-정철호 해신금융그룹 회장이 오늘 낮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정 회장은 현재 구속 수사를 받는


가운데…….
출근길.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아버지가 회장직을 내려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한차례
들은 내용이었으니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무너져 내렸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도 갈라설 터다.

-검찰은 정철호 전 회장에 대해…….

“감기는 다 나으셨습니까?”

뚝,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끊고 이태성이 물었다. 나는 차창 밖을 구경하다 말고 흘긋 그쪽을 바라봤다.


이태성은 백미러를 통해 마치 김 실장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뭐…… 덕분에.”

지지부진 머물던 감기는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는 기침이 나지도 않았고 열
때문에 나른한 기운도 없었다. 큰 열병이 되지 않아 다행인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 걸 탓해야 하는
건지. 당연히 좋아해 마땅할 일이었는데 왜인지 별로 상쾌하진 않았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이태성은 뒤이어 퍽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끄더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핸들을


붙잡는다. 나는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픽 웃음을 흘렸다.

“요새 걱정이 많으시네요.”

“…….”

아무래도 비서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김 실장이 내게 그랬듯 사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걸 보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온실 입구에 서 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잠은 그냥저냥 잤고, 기분도 괜찮습니다. 아침도 먹은 데다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외운 것처럼 줄줄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사실 잠은 잘 자지 못했고 아침도 대부분 남겼지만 기분과


몸 상태만큼은 진짜였다. 다만 한 가지,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부분이 조금 애매해서
그랬지.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아뇨…… 그거면 됐습니다.”

이태성은 눈치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차 안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며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반지 자국이 있었던 약지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Sejin’의 업무는 해신금융 본부장으로 있던 때보다 훨씬 강도가 낮았다. 우선 기본적인 업무량이


달랐고, 내가 책임지고 수습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모두 열정이 가득했기에 저마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임하곤 했다.

“대표님, 이쪽 샘플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레이블 론칭이 코앞이기 때문에 새로이 출시될 패키지의 샘플은 모두 제작 완료됐다. 패키지는 총 다섯
개였고 여름에 맞는 청량한 계열과 스테디하게 쓸 수 있는 무난한 향수가 함께 출시될 예정이었다. 내가 대표로
오면서 관여한 건 이름과 디자인, 그리고 마케팅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살펴보고 말씀드릴게요. 나가 보셔도 됩니다.”

나는 최 팀장을 내보내고 주르륵 놓인 향수병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냄새를 맡아 봤다. 갓 돋아난


꽃봉오리처럼 곡선으로 된 보틀은 앞으로 ‘Sejin’의 아이덴티티가 될 디자인이었다. 뚜껑 끄트머리엔 유리로
된 꽃잎이 달려 있고 보틀 자체에 브랜드 마크가 각인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마 추후에 권이도에게 선물한 향수를 만들게 되면 그 또한 이것과 비슷한 병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이 새겨진 병에 내가 만든 이름이 붙은, 내 페로몬을 딴 향수가 담기게 되겠지.

“…….”

손끝으로 매끄러운 병 표면을 쓸어내렸다. 론칭은 코앞이고, 내가 자격증을 따는 것도 금방이었다. 아마


곧바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개발팀의 도움을 받으면 제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다. 그리고 그 향수를
권이도에게 건네줄 땐, 물어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 앞에서는 꾸역꾸역 참았지만 이따금 차오르는 갑갑함을 막을 길이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건 예전과 같은데, 지금은 내가 처한 상황에 자꾸만 의문이 생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누구를 위한 선물이고 대체 무얼 위한 과정일까. 권이도가 내게 바라는 건, 그리고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부분들이 이제는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권이도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을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어 모든 걸 토로하게 만들고 싶을 만큼.

그러나 내게는 권이도에 대해 알 권리가 없었다. 내 질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면, 마지막에
나올 게 행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내게는 권이도가 전부지만, 그에겐 나를 제외한 많은 것들이 있으니.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혼자가 되어도 괜찮을 때까지 마냥 버티는 수밖에.

퇴근길엔 늘 그랬던 것처럼 자격증 학원에 들렀다. 이태성은 밖에 차를 세워 놓고 대기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건물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인적이 드문 비상구를
이용했지만, 가끔 마주치는 수강생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집엔 역시나 나보다 먼저 퇴근한 권이도가 있었다. 권이도는 다녀왔냐는 한마디만 내뱉고
씻고 내려오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조금 조용한 느낌이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결국, 먼저 운을 뗀 건 내 쪽이었다. 나직이 입을 열자 권이도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이 유독 고요하단 생각이 든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

권이도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입매를 당겼다.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에 조금이지만 씁쓸한 빛이 스쳤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말이 없어야 먼저 말을 걸어 주는군요.”

“……뭐.”

그러고 보니, 근래에 내가 먼저 말을 건 게 처음이던가. 그날 이후 미묘하게 서먹한 관계가 되었던


우리였으니까. 물론 권이도는 아니고 나 혼자 일방적으로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일은 내일 생기겠군요.”

권이도는 그리 대답하고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내가 더는 묻지 않으리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일은 내일


생길 거라니.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해놓고 말이다.

“내일이 제 히트 사이클입니까?”

툭, 건넨 질문에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볍게 덧붙였다.

“가끔 제 주기를 정확히 맞히시길래요.”

가끔이 아니라 매번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얘기했다. 딱히 떠보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무심코


내뱉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돌렸다.

“…….”

“…….”

한동안 식사 자리엔 정적만 맴돌았다. 간간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빼면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체할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근래엔 이게 보통이었다.

끝내, 우리는 모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엇비슷하게 식기를 내려놓은


권이도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물잔을 내려놨다. 도드라진 목젖이 꿀꺽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세진 씨.”

가만히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봤다. 언제부턴가 이름이 불리면 미미한 긴장감이 들었다. 지금도 의도치
않았는데도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오늘도 내 방에서 안 잡니까?”

그렇게 묻는 권이도는 미련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방에서 자겠다는 게 뭐가 그리


아쉽다고.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따로 잔 시간이 훨씬 많은데 말이다.

“론칭 전까지는 준비할 게 많아서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습관적인 미소를 그렸다. 한 침대에서 얌전히 잠만 잘 리도 없고, 그 또한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까딱하며 이렇게 대꾸했겠지.

“안 건드릴 테니까 내 방에서 자요.”

“…….”

도르륵 시선을 굴렸다. 권이도는 눈가를 찌푸린 채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잠을…… 영 못 자는 것 같은데.”

“…….”

“불면증이 더 심해지면 큰일이잖아요.”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이미 더 심해질 것도 없지만, 죽을 때까지 이런다면 문제가


되긴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이도에게 그걸 해결해 줄 의무는 없었다.

“권이도 씨가 신경 쓰실 부분이 아닙니다.”

수면제로 안 되면 병원에 가고, 그래도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이제는 최 교수를 만날


수 없으니 새로운 의사를 알아봐야겠지.

“자꾸 의지해 버릇했다가 출장이라도 가시면 더 큰일인걸요.”

내 불면증의 해결책이 권이도라는 건 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래서 방을 비워


주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페로몬이 아무리 가득해도, 권이도 자체가 없으면 무용지물일 테니.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내리깔았다. 기분 탓일까.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무척이나 처연해


보인다. 한참 그렇게 있던 권이도는 아주 느린 속도로 운을 뗐다.

“내가…….”

뒷말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그가 다시금 나를 마주 볼 때까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은 눈으로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사과하죠.”

“…….”

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욱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대뜸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바람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툭 되묻고 말았다.

“뭘 사과하시는 겁니까?”

이걸 화가 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미안하단 말을 듣고 이런 적이 없는데


지금은 도무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직면하는 순간 더 불쾌해지고 말았다.

“저한테 각인하지 않은 걸 사과하신 거예요?”


“…….”

직접적인 질문에도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안하단 말 듣겠다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권이도 씨한테 그걸
강요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내가 이러는 게 너무 우스운데, 한 번 말문이 트이니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이렇게 사과할 거면 뭐하러 그랬나 싶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면서도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 게 참으로
권이도다우면서도 괘씸했다.

“애초에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니었고…….”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열을 받았던 만큼 사그라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땐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리깔렸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

권이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가를 떨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가 느른하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럴 사이라…….”

별거 아닌 중얼거림이었는데, 그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불쾌함이나 짜증, 혹은 섭섭함 따위의


것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럼 우린 무슨 사입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조금 전까지는 또 괜찮았는데, 권이도가 내게 묻는 순간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 질문을 권이도 씨가 하면 안 되죠.”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 그걸 정하는 사람은 권이도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권이도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 그런 걸 묻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제가 권이도 씨 허락 없이는 약혼반지도 못 끼는 걸 아시잖아요.”

“…….”

숨결처럼 건넨 말에 잔잔히 느껴지던 페로몬이 뚝 하고 끊겼다. 나를 향하는 시선이 일순간 덜컹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약혼한 그때부터 저한텐 아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권이도 씨가 주는 걸 다 받으래서 받고


있었더니, 이제는 저한테 관계를 정의하라고 하시는군요.”
아슬아슬하게 차 있던 물웅덩이에 누군가 돌멩이를 집어 던진 기분이었다. 한 번 뒤집힌 이상 수면이
잔잔해지기 전까진 계속해서 물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권이도 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에 취했던 거고, 각인 하나 안 했다고 제 태도가


바뀔 일도 없으니까요.”

사실은 서운했던 모양이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한 적 없는 우리가, 약혼자는커녕 연인조차


아니라는 사실에. 남들에게는 남보다 못한 비밀스러운 관계라는 점이.

“……할 말 없으시면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권이도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60 화. Le Bon Choix(2)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간 누군가에게 화를 낸 기억은 없었다. 어릴 땐 그럴 만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고 어른이 된 이후엔 딱히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부하직원이 큰
실수를 했을 때, 기분이 상하거나 골치 아프다는 생각은 했어도 화가 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권이도의 사과를 듣는 순간 나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분노라기엔 거창했고


짜증이라기엔 시시했으며 그 외에 이름을 붙이자니 마땅한 표현이 없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고,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내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봐야 결국 피해는 내 쪽에 돌아온다는 것도.

민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을 때, 그리고 권이정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했을 때. 화를 내는 건 권리의 일종이기에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 노력했다. 당연히
원래였다면 권이도에게도 그러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내가 한 모든 행동을 후회했다. 그에게 화를 내지 말걸, 서운한 티를 내지


말걸,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먼저 식사 자리를 뜨지 말걸.

염치없이 그 많은 걸 받아 놓고 또 염치없이 더 많은 걸 바란 기분이다. 그토록 감정적이었단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한편 만약 시간을 돌린대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 핑계를
붙이다가 그 안일함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마지막에 느낀 감정은 개운함이었다. 어쨌든 속에 담긴 말을 꺼냈다는 후련함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조금씩 지워 냈다. 물론, 상처받은 권이도의 얼굴과 약간의 미안함도 함께 남아 버렸지만.

“…….”

“…….”
다음 날 아침. 권이도와 나는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고요한 식사를 이어 갔다. 권이도는 어제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나 또한 별다른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몇 번 입을 열려고 했다가 도무지 내키지
않아 관둬야만 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식사를 따로 하는 게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행동으로 옮길 의지는


없었다. 아마 권이도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막연히 그렇게 추측할 뿐.

그 후 차고로 내려가면서도 우리는 내내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그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길 기다렸다. 검은 정장을 입어서 그런지, 아니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런지. 그에게선 오늘따라 유독 더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가 풍겼다.

띵,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멈췄다. 이번에도 권이도는 내가 먼저 내리길 기다렸다. 이렇게 아무런 대화


없이 출근하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한 발짝 떼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랑 말도 안 할 겁니까?”

느리게 흘러나온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권이도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선 눈도 안 마주치던 주제에 뒤에서 내내 눈길을 보내고
있었나 보다.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말씀이 없는 건 권이도 씨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내가 조용히 있으면 어제처럼 말을 걸어 줄 줄 알았거든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곤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평소와 같은


여유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내 옆에서 멈춰 선 그가 지그시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조심스러운 말투엔 나를 향한 걱정이 잔뜩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고작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 것은. 잔잔히 넘어오는 페로몬에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어때요.”

“아뇨…….”

나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귓가를 매만졌다. 새삼스레 그의 걱정이 민망했던 탓이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일은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담담히 대꾸한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내리깐 시선에 익히 알고 있는 브랜드의 구두가


들어왔다. 정장과 마찬가지로 신고 있는 구두 역시 무늬 없는 검은색이었다.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는 걸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다.
“조심히 다녀와요.”

차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나는 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멈칫 그를 돌아봤다.


차 문을 잡아 주던 이태성이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저녁에 뵐게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인사라고.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섬세한 이목구비가


미소를 그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참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아마 평생을 봐도 익숙해지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내가 차에 올라타자 이태성이 문을 닫아 줬다. 오늘도 권이도는 내가 탄 차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서히 멀어지던 그가 완전히 안 보이게 되었을 즈음, 이태성이 넌지시 운을 뗐다.

“외람되지만…….”

퍽 정중한 서론이었다. 그와 반대로 본론은 무척이나 적나라했다.

“싸우셨습니까?”

“…….”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소한
충격을 받는 바람에.

“싸우다니…….”

이태성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어제 싸웠다는 사실을.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따져


물었을 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비슷할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권이도가 편해졌을까. 그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줬다.

“……그런 거 아닙니다.”

뒤늦게 부정했지만 이태성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알 만하다는 듯 흘긋 백미러를 살피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무어라 더 캐묻진 않았기에 나는 애써 침착한 척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권이도의 집에서 회사까지는 대략 30 분 정도가 소요됐다. 길이 막히면 더 걸리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별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대충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오늘 일정을 확인하면 딱 적당한 정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기분은 계속 싱숭생숭했지만, 회사에 도착했을 땐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직원들의 힘찬 인사에


살갑게 웃으며 친근한 답을 돌려줄 수도 있었다. 태연한 척 업무를 보는 것쯤은 아버지가 구속되던 날에도 하던
것이었다.

“오늘 점심은 뭐로 할지 정했어요?”

점심시간에는 또 권이도의 카드로 직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렇게 많은 상황이 변했음에도 바뀌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그와 함께하는 식사, 그리고 자기 전에 가지는 대화 시간. 이미 버릇된 습관들은 일부러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표님 저희한테 돈 너무 쓰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저희 회사 식대도 괜찮게 나오는데.”

처음엔 신이 나서 얻어먹던 직원들은 얼마 전부터 슬그머니 내 지갑 사정을 걱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마


아버지가 구속된 직후부터일 텐데 그 여파가 내게도 오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재미난 건, 그럼에도 누구 하나
직접 해신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이 정돈 괜찮아요.”

내 카드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아버지가 횡령으로 잡혀갔는데, 나까지


의미심장한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정도 지출은 굳이 권이도의 카드를 쓰지 않더라도 내 선에서
괜찮은 정도였다.

“나중에 부담스러워지면 슬쩍 모르는 척할게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직원들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메뉴가 김밥 정도로 바뀌면 대충 알아듣겠다는 말에는 나 또한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와, 아니 어쩜 좋아.”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직원 하나가 핸드폰을 보며 경악했다. 마침 대표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스치듯 ‘선호’라는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직원은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제 핸드폰을
내밀며 이야기했다.

“권이정 대표 실종됐대요.”

“…….”

권이정. 익숙한 이름이 귓가에 꽂혔다. 실종이 무슨 뜻이었더라. 순간적으로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디게 조금 전 들은 말을 되짚는 사이,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권병욱 회장이 별세했다고…….”

***

조향사 자격증 취득을 결심한 이래 처음으로 퇴근길에 학원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기사는 온통 선호그룹 이야기였고, 차에서 흘러나온 라디오에서도 그와 관련된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 단어 한 단어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릿속에 주워 담았다.

-오늘 새벽 권이정 호텔명성 대표이사가 실종됐습니다. 권 대표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산책을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찰과 소방관이 수색에 나섰으나 현재까지 행방은 묘연한 상태입니다.

-권병욱 선호그룹 회장이 향년 85 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고 권병욱 회장의 마지막 길은 권상미


부회장을 포함한 유족들이 지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권상미 선호그룹 부회장은 잇따른 비보에 애도를 표하며…
….

“……이태성 씨, 조금만 빨리 가주세요.”

초조한 손길로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권이도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고민했지만,


혹시 방해가 될까 싶어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가 집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권병욱 회장이 곧 별세할 것 같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권이도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선호 측에서 권 회장의


치료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못해도 몇 년은 더 버티겠지, 막연히 그리 생각하며
믿지 않았단 말이다.

-권병욱 회장의 빈소는 서울선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그런데 권병욱 회장이 별세했다. 그것도 권이정이 실종된 바로 직후에. 마치 짠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아니, 딱 한 명 예상한 사람이 있긴 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일은 내일 생기겠군요.’

어젯밤 유독 조용했던 권이도의 모습. 오늘따라 차분하게 차려입었던 검은 정장. 히트 사이클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까지.

내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일’은 다름 아닌 권병욱 회장의 부고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제 조부의 죽음을 먼저 예상했을까.

“도착했…….”

나는 이태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려 뛰듯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버지의 구속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토록 마음이 급하지는 않았는데. 머리털이 삐쭉 서서, 소름이 끼치는 만큼 심장 박동까지 빨라졌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예상하고 남들보다 먼저 대비하는 것처럼.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이 스멀스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

“…….”

벌컥,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역시나 권이도는 문 앞에 있었다. 아침과 똑같은 차림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면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느른하게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타이밍 좋게 왔네요. 못 보고 갈 뻔했는데.”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 조금이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엔 여유롭다고만 느꼈던 눈빛이 지금은 지친
기색을 가득 띠고 있었다.

“잠깐 들어온 거라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저녁은 혼자 먹어요.”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걸음을 옮겼다. 나를 지나쳐 아마 밖으로 나갈 예정이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가 옆을 지나가는 순간 그의 팔을 붙들었다.

“…….”

짙은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바라본다.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페로몬은 내가 만든 향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얄팍한 눈꺼풀이 움직이는 모습에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그건,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존엄사라고 하죠.”

나직이 튀어나온 말은 높낮이 없이 담담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더 이상 치료에 의미가 없다고 사료돼서 연명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신께서 입원 전에


동의하신 일이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함께 있었어요.”

“…….”

“지금은 잠깐 일이 있어서 집에 들른 거고.”

울림이 독특한 목소리는 멍한 머릿속에도 또렷이 전해졌다. 발음이 명확한 탓에 귓가가 먹먹한 와중에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한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뇨.”

스르륵,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기에 그에게 더 확인할 부분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예정된 죽음이었다면, 내 의심은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걸리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쉬어요. 3 일은 못 들어올 테니까.”

나는 무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권이정의 실종과 권병욱 회장의 죽음. 둘 중 어떤 것인지
짚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내가 어디에 의문을 가질지 예상한 사람처럼 망설임 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권이도 씨.”

내 부름에 그가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뒤를 돌아봤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의


뒷모습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다.

“같이…….”

그래서 온갖 위화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저절로 이 입술이 움직였다. 이대로 혼자 보내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신경이 쓰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같이 가죠.”

***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권이도는 계속 일을 했다. 바쁜 건지, 아니면 집중할 거리가 필요한 건지.
입을 꾹 다문 채 서류만 들여다봤다. 그 모습은 약혼식 다음 날, 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흘긋 그를 살피길 반복했다. 따라오지 말 걸 그랬나. 그


고민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고, 그가 없는 집에선 잠조차 자지 못할 텐데. 상황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주제넘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들었다.

새까만 넥타이를 매만지기를 몇 번, 차창 밖으로 바뀌는 풍경을 응시하길 한참, 결국 나는 어색하지만


가장 무난한 주제를 입에 올렸다.

“날이 좋죠.”

권이도의 차에서, 그가 내게 처음 건넸던 말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썩 안 어울리는 화제기도 했다.


권이도는 눈가를 움찔하며 천천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맞췄다. 허공에서 얽힌 시선은 한참이나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네요.”

무난하고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내가 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이기도 했다. 내가 픽 웃음을 흘리자,


그가 조금 멋쩍게 눈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옆에 사람을 두고.”

“아뇨, 바빠서 그러신걸…….”

“……바쁘다기보단.”

옆에서 본 그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그는 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에서 일하는 건 반쯤 습관입니다. 남는 시간이 아까워서 하다 보니까 버릇이 들었군요.”

참 바지런한 습관이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무어라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보고
있던 서류를 허벅지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더 일할 생각은 없는 듯해서, 나는 넌지시 그에게 이야기했다.

“조부님과 사이가 좋으셨나 봐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내면에 착잡함이 보여서 건넨 말이었다. 권이도는 살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냥 평범했습니다.”

좋다는 뜻이다. 권혜율을 이야기할 때 그랬듯이.

“…….”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데엔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내리깔았는데,


권이도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뭐…… 딱히 슬픈 건 아니고.”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실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잠깐 목소리가 멈췄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 다음 화에 계속

61 화. Le Bon Choix(3)

나는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에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그들은 나와


얼굴만 아는 남이나 다름없었다. 펑펑 우는 민재를 앞에 놓고 함께 울어 주지 못한 채 등을 다독였던 기억이 있다.

“……괜한 말을 했군요.”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리며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그러쥐었다. 이번엔 눈가가 떨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느릿느릿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살짝 올려놨다.

“…….”

그는 손을 빼내지 않고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차게 식은 체온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은 없었고, 어설픈 공감 따위는 하느니만 못할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조심조심 그의 손을
어루만지는 것뿐이었다.

맞닿은 온기는 한동안 떨어지지 않고 머물렀다. 우리가 약혼하던 그 날처럼, 그는 잔뜩 일렁이는 눈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은 비단 권병욱 회장의 죽음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차가웠던 체온도 어느덧 미적지근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던
권이도는 손을 돌려 살며시 깍지를 껴왔다.

“정세진 씨.”

큼직한 손이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모양이 예쁜 것과 달리 뼈마디가 굵고 손등엔 핏줄이 도드라졌다.


내가 손이 작지는 않은데, 그와 맞잡고 있으면 유독 여리게 보일 정도였다.
“말씀하세요.”

나는 순순히 대답하며 엄지로 그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고작 손 하나 잡았다고,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약지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지만, 내 왼손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좀, 어쩐지 민망해서 맞잡지 않은 왼손을 그에게 보이지 않게 숨겼다.

“우리는 한 집에서 살고, 가끔은 섹스를 하고,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데.”

그는 우아한 말투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섹스가 정말 가끔일까. 그런 의문을 품는 동안 권이도의


시선이 깍지 낀 두 손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런 건 무슨 사이라고 부릅니까?”

어제처럼 기분이 가라앉진 않았다. 그 질문을 하는 권이도가 정말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어서.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부분에서 모자라게 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대답이 흘러나왔다.

“보통은 연인이라고 할 텐데…….”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권이도는 여전히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뒷말을 이었다.

“우린 순서가 좀 이상하네요.”

첫 만남에 약혼을 했고,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 입부터 맞췄다. 함께 잠을 자는가 하면 대놓고 질투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관계를 나타낼 단어가 없으니, 뒤죽박죽 엉망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입매를 당겼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그다지 웃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우리도 할까요, 그거.”

그거? 그리 되묻는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연인.”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였는데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권이도는 내 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잘 모르겠거든요.”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기분이 좋기보단 얼떨떨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너무도 쓸쓸한


표정이라. 내게 연인을 하자고 말하는 주제에 확신 없는 눈으로 고개를 숙여서.

“내가 정세진 씨를 어디까지 욕심내도 될지…….”

“…….”
“그게 가늠이 잘 안 돼서.”

가슴 언저리가 내려앉을 만큼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심장이 지끈 조여들어서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사이 차는 장례식장에 도착했고, 인적 드문 주차장 한구석에 멈춰 섰다.

“대답을 들으려던 건 아닙니다.”

그는 아쉬움을 남긴 채 내 손을 놓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늦게 손가락을 움찔거렸지만, 권이도는 이미


차 문을 닫은 뒤였다. 차를 빙 돌아 내 쪽으로 다가온 그가 문을 열어 주며 고개를 까딱했다.

“올라가죠.”

***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기자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됐고 식장
내외로 경호원을 배치해 놓는다고 했다. 가까운 친인척조차 부르지 않는다니 얼마나 조용한 장례일지 충분히 알
만했다.

권이도는 차에서 기다리겠다는 내게 괜찮으니 올라오라고 이야기했다. 혹시 몰라 검은 옷을 입긴 했지만,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내가 껴도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다행히도 그를 따라 식장으로 올라왔을 때, 그의
가족들은 내 존재에 별다른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故 권병욱>

복도부터 줄줄이 놓인 화환, 그리고 벽면에 세워 둔 근조기. 그곳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과
온갖 기업 총수들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조문객은 없었지만, 수많은 꽃들이 권병욱 회장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나는 권이도와 시선을 교환한 뒤 향이 피워진 곳으로 다가갔다. 권병욱 회장의 사진은 수많은 국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분향은 하지 않았고, 절만 올리고 가족들이 서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권이정은 없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보네요.”

완장을 차고 있던 권이도의 어머니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권이도가 미리 연락을 넣은 걸까. 권상미는


내가 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공손히 양손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실종. 두 가지 일로 힘들 권상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여러


비보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담담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늘 화려한 모습만 보았는데 수수한 차림새로도 느긋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요. 인사는 다음에 제대로 하죠.”

약혼식 날에도 이토록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해신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을 테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혜율이는?”
“신 서방이랑 쉬고 있어.”

권이도의 질문에 권이경이 다른 쪽을 가리켰다. 아마 빈소 바깥 식당에 제 아빠와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식구들에게도 눈인사를 건네고 권이도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인파를 완벽히 차단했는지, 식당으로 가는 길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몇몇 장례식장 직원들만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권이도는 그 누구의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정면만 보고 걸었다.

식당 한편에는 권혜율이 신대웅과 함께 앉아 있었다. 조화가 너무 많이 들어온 탓에 그곳 벽면에도


줄줄이 하얀 리본이 걸려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검은 옷을 입고 있던 권혜율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촌!”

권혜율이 쪼르르 권이도에게 다가왔다. 권이도는 자연스럽게 그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늘 의젓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오빠 데리러 갔었어?”

권혜율은 권이도의 목을 끌어안고 나를 바라봤다. 곱다란 눈매는 역시나 권이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권혜율을 따라 일어났던 신대웅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얘기했다.

“혜율아, 인사부터 드려야지.”

그제야 권혜율이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에 나도 “응, 안녕.” 하고


친근히 대꾸했다. 지난번에 안면을 터놓은 덕분에 이번엔 내게 낯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뇨, 저야말로 연락 없이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내가 신대웅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권이도는 혜율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밥은


먹었는지, 옷이 불편하진 않은지, 아빠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따위의 것들이었다.

“삼촌, 우리 정말 여기서 3 일 동안 있어?”

“응, 여기서 증조할아버지 보내 드리는 거야.”

일곱 살이면 죽음의 개념이 있는 나이던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권혜율은 그다지 슬픈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가만히 그를 살펴보자, 신대웅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할아버님께서 병상에 누우신 게 벌써 5 년이 넘었거든요.”

“아…….”

5 년이면, 아직 매스컴엔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지금도 어린 권혜율이 말조차 못 할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 혜율이에겐 증조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겠지.

“어린애들은 금방 잊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신대웅은 무척이나 씁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잊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괴롭기 마련이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신대웅은 어른스럽게 웃었다. 언젠가 권혜율이 제 아빠의 페로몬이 물감 냄새를


닮았다고 했던가. 엷게 느껴지는 알파 페로몬은 향냄새와 섞인 푸른빛이었다.

“오빠도 3 일 동안 여기 있어요?”

권이도에게 안겨 있던 혜율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호칭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신대웅의 시선을 피하며 혜율이를 보며 눈가를 찡긋했다.

“오빠 아니라 삼촌, 혜율아.”

“세진이 삼촌, 해야지.”

권이도가 한마디 거들자, 권혜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상을 구긴 얼굴이 제 엄마인 권이경을 똑 닮아
있었다. 신대웅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둬, 처남. 나랑 혜율이 엄마도 말했는데 안 듣더라고. 세진 씨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런가 봐.”

호칭은 천천히 바꾸면 된다며 그는 권혜율의 편을 들어 줬다. 혹시 다른 데서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생각해 보니 ‘다른 데’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따지면, 호칭을 천천히
바꿀 만큼 권혜율을 자주 보지도 못하겠지만.

“그래서 오빠도 여기 3 일 있어요?”

권혜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어 왔다. 고집스럽게도 여전히 호칭은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이 밉지


않아서, 그냥 살갑게 웃고 말았다.

“글쎄…… 잘 모르겠네.”

우선 따라오긴 했지만, 가족장을 치르는 데 내 존재는 방해일 것이다. 나는 가족도 아니고, 그들과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선호그룹 식구들은 나를 권이도의 계약 상대이자 집안이 망한 오메가
정도로 생각할 터였다.

“편한 대로 해요. 중간에 가도 괜찮고.”

권이도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 너그럽게 얘기했다. 신대웅 역시 좋을 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중에 내 존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두 사람 식사는?”

“안 했습니다. 이 사람은 먹어야 돼요.”

권이도는 권혜율을 한 번 추스르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내가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신대웅은 가볍게


뭐라도 먹으라며 훌쩍 안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안 한 건 둘 다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게 웬
말이냔 말이다.
“저 배 안 고픕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먹어야죠. 어차피 매형이 차리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권이도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앉으라는 듯이 제 옆자리 의자를 빼준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자, 권혜율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붙었다.

“……가족들 계시는데 제가 있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게 신경 쓰였으면 안 데려왔죠.”

명쾌한 답변이었으나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 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가장


웃어른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오빠.”

그때 권혜율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혜율이는 권이도의 무릎에 앉아 꾸물꾸물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너른 품에 편히 등을 기대는 걸 보니, 한두 번 저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저기서 잘 수도 있어요.”

“응?”

“저기 안에서 자도 되고, 밥은 여기서 먹으면 돼요.”

앳된 목소리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를 붙잡지 않은 손가락으로 여러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 화장실은


저기에 있고, 음료수는 또 이쪽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 그래?”

역시 똘똘하네. 나는 딱 그 정도 감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잠깐 사이에 장례식장 구조를 정확히


꿰고 있나 보다. 권이도는 그런 우리를 보며 풋 웃음을 흘렸다.

“오빠가 눈치가 없네, 혜율아.”

“…….”

슬쩍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혜율이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조카의 말을 대변했다.

“혜율이는 오빠한테 가지 말라는데.”

권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한 시선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봤다. 의식주가 해결되니 가지 말라는
얘기였을까. 곤란한 기분으로 눈을 굴리는 내게 권이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정세진 씨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네?”

한 타이밍 늦게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기분이 좀…….”


“…….”

“정세진 씨가 필요해서.”

차에서 보았던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겹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라던 그의


표정이. 가만히 내리깔린 속눈썹은 권이도답지 않게 약해 보였다.

“정 불편하면 새벽에라도 보내 줄 테니까 우선은 있어요.”

“…….”

그 부드러운 권유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권혜율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웃는 모습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

고용인이 차려 준 식사를 마치고, 신대웅은 우리에게 권혜율을 맡긴 뒤 빈소로 돌아갔다. 권혜율은


여전히 권이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조잘조잘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이야기가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수련이 가지고 싶어?”

“응, 근데 엄마가 안 된대. 삼촌이 사서 3 층에 걸어 놓으면 안 돼?”

권혜율은 또박또박 제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했다. 권이도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너그러운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권혜율이 우려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때 오빠한테 말했더니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보자고 그랬거든.”

“……그랬어?”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마치 혜율이가 아니라 내게 묻는 듯이. 내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그 또한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삼촌 집에 놓으면 혜율이가 매일 못 보잖아.”

“그래도 파리에 있는 것보단 자주 볼 수 있어.”

“그러지 말고, 나중에 혜율이 혼자 살면 삼촌이 거기다 걸어 줄게. 그때도 가지고 싶으면 다시
얘기하자.”

“음…….”

미간을 잔뜩 좁힌 권혜율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권이도는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런 권혜율을


기다려 줬다.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더니. 조카를 저렇게나 예뻐하는데 말이다.

“약속할 거야?”

“그래, 약속.”

권이도는 익숙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이 권이도의 손가락에 꼭꼭 고리를


걸었다. 엄지로 도장까지 찍는 모습을 보니, 일전에 권이도에게 차를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

왜 그런 간지러운 짓을 하나 했지. 조카를 대할 때처럼 장난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장단을
맞추겠다며 냉큼 손가락을 걸지 않았던가.

“오빠가 증인이에요. 알았죠?”

“……그래, 기억하고 있을게.”

아, 애들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혜율이가 혼자 살 때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3 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그렇게 먼 미래에 내가 증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높은 확률로 혜율이가 지금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괜히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62 화. Le Bon Choix(4)

그 후에도 혜율이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언제쯤 어디서 혼자 살지, 그때 가면 수련을 어디에
장식해 놓을지 따위의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진짜 사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수다를 떨었을까, 잔뜩 신났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또랑또랑한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고는 권이도의 품에 폭 머리를 기댄다. 가물가물 감기는 두 눈이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3 층에 미술관을 만들 거야.”

“응, 예쁘겠네.”

권이도는 익숙하게 제 조카를 고쳐 안고 조그만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그를 다독일


때마다 숨소리가 차츰 고르게 변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권혜율의 얼굴을 살폈다.

“……잠든 거예요?”

속살거리듯이 묻자 권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독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마찬가지로 작게


대답했다.

“혜율이도 오늘 일찍 일어났거든요. 피곤할 만하죠.”

아이를 재우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금방 잠이 드는 건가. 곤히 잠든


얼굴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듣고 나까지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나는 한동안 그림을 감상하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온갖 매체에서 봤던 권이도는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렇게 온화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이렇게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 정도면 퍽 훌륭한 아빠이지 않나. 암만 부모와 삼촌은 다르다고 해도,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눕혀서 재우는 게 낫겠네.”

권이도는 혜율이를 품에 안고 휴게실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찍한 휴게실엔 담요와 방석이 구비돼
있었다. 내가 이부자리를 봐주는 사이 그는 권혜율의 묶은 머리를 풀어 줬다.

자그마한 담요는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에겐 충분한 이불이 되었다. 옷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크게 거슬릴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꼼꼼히 혜율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휴게실 바깥을 눈짓했다.

“나가 있죠.”

장례식장에 도착한 게 저녁이었기에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될 무렵이었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혜율이는 아침까지 곯아떨어질 것이다. 장례식장에 와 있는 것도 어린아이에겐 꽤 고된 일정이었을 테니.

“뭐라도 마실래요? 마땅히 줄 게 없긴 한데.”

식당엔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권이도는 냉장고 앞에 서서 안에 있는 음료수를 쭉 훑어봤다. 원래


장례식장에 비치된 물건인지, 탄산음료와 소주 따위가 그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아뇨, 음료수는 괜찮고…… 그보다 가족분들한테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대나무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병이었다.


음료수가 아니라 술을 주겠다는 거였나.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그는 종이컵 두 개까지 챙겨 테이블로 다가왔다.

“내가 필요하면 부르겠죠.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어차피 조문객도 없을 테니 그가 빈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긴 했다. 중간에 누군가 휴식을 취하러 오면
그즈음 바꿔 줘도 될 것이다. 물론 그 기다림을 술로 보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주도 드세요?”

소주를 마시는 권이도라. 눈앞에서 보는 풍경임에도 그다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권이도에게 생각보다 소박한 취미가 있다 싶다.

“아뇨, 안 먹습니다. 원래는.”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소주 뚜껑을 열었다. 종이컵 끄트머리에 병 주둥이를 대고 마치


와인이라도 따르는 양 조르륵 잔을 채운다. 내게도 한잔하겠느냐며 권하기에 예의상 양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걸 그냥 드시려고요?”

마침 종이컵을 들어 올렸던 권이도가 잠깐 멈칫했다. 테이블 위엔 술병 하나와 종이컵 두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삐쭉 들어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그의 시선이 옆에 놓인 술병으로 향했다. 병을 돌려 라벨을 살피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린다.

“양주보다 도수가 낮은데.”

“…….”

암만 그래도 깡소주를 마실 셈인가. 그것도 소주잔도 아니고 이런 종이컵에. 나도 소주를 즐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안주 없이 마시기엔 부담스럽다는 걸 안다.

“양주도 온더락으로 드시는 분이…….”

게다가 그는 얼음 없이는 양주를 즐기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물었을 땐 그냥 습관일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소주에 얼음을 넣진 못해도, 이렇게 무식하게 마시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지 말고 간단한 안주라도…….”

“…….”

“……왜 그러세요?”

짙은 시선이 뚫어져라 나를 응시했다. 손에는 종이컵을 든 채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한순간 넋 나간


표정이 되었던 그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온더락으로 마시는 걸 어떻게 압니까?”

“…….”

일순, 나 또한 그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고, 나는 한 번도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

“…….”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자칫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나로선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조차 이유를 모르는데 왜냐고 물어봤자 답해 줄 말이 있을 리가.


권이도는 내 말을 듣고도 속내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한참 나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마침내 권이도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참았던 숨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권이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종이컵에 담긴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
그렇게 마시지 말라니까.

하나 이제는 그를 말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권이도의 눈치를 살피며 내 잔에 있던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고 쌉싸름한 알코올 향 뒤에 아주 약간의 단맛이 느껴졌다.

권이도는 말없이 다시 제 잔을 채웠다. 컵이 커다랬기 때문에 딱 석 잔을 따랐는데 벌써 한 병이


사라졌다. 이번엔 적당히 나눠 마신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한 건, 냉장고에서 소주 세 병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걸 보면 술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나 본데. 아무렇지 않게 뚜껑을 돌려 또다시 제 잔을 채운다.

“권이도 씨.”

이번엔 나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 병이야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네 병까지는 좀 곤란했다.


주량이 약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속을 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정세진 씨 되게…….”

그는 느리게 운을 떼며 술병을 내려놨다. 뒤이어 종이컵을 쥔 왼손엔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댄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잔소리하는 남편 같네요.”

“…….”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종이컵을 기울였다. 꿀꺽, 꿀꺽, 목울대가 시원스럽게 움직였다. 눈 깜박할


새에 그는 한 잔을 모두 비우고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이번엔 여보라고 안 해줍니까?”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어찌 들으면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권이도 씨가 아직 남편은 아니죠.”

권이도는 눈썹을 삐쭉 들어 올리곤 느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조금 허무해 보이긴 했다. 금방이라도 따져 물을 것 같았으나, 그의 뻔뻔함은 거기까지인 듯했다.

“…….”

“…….”

오랜 시간, 우리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주로 잔을 비우는 건 권이도였고, 나는 그를 구경하며


간간이 컵에 따라 둔 소주를 한 모금씩 머금었다. 술은 여전히 맛없었지만, 묵묵히 있는 권이도를 감상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권이도가 네 번째 병을 열며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가 봤던 총, 그건 할아버지가 주신 겁니다.”

갑작스러운 주제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 ‘총’이라는 단어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깐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교육관이 좀 괴팍한 분이셨거든요.”

표현은 과격했으나 그 내면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듯 그 눈빛 역시 무척이나


씁쓸했다. 역시, 사이가 좋았나 보네. 나는 그런 생각으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스무 살 때였나. 생일이 되자마자 실탄이 장전된 총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기업을 잇고 싶으면 죽을
각오로 노력하라고, 사업엔 어느 정도 대범함이 필요하니 자신 있으면 집에 장식해 놓으라면서.”

그의 표현을 빌려 괴팍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손주들에게 총을 쥐여 주다니. 누군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터였다. 자수성가해 이 정도 대기업을 일구어 내려면 그 정도 도전정신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누나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받았고, 권이정은 받았다가 1 년이 채 안 됐을 때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권이경을 부르는 호칭과 권이정을 부르는 호칭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누나와 이름의 차이는 아니었고,
그 안에 담긴 친근함의 무게가. 전자는 익숙해 보였지만, 후자를 말할 땐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으니.

“괴팍하긴 해도 현명한 분이시죠. 그대로 권이정이 가지고 있었으면 부하직원 한둘은 쏴버렸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실종되었다던 권이정은 어디로 갔을까. 눈앞의 권이도가 아무렇지 않아서,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권이도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비슷했지만 말이다. 걱정하는 기색이 하도 없어서, 내가
들었던 뉴스가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이네.”

권이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있는 내게 가볍게 물었다. 잠깐 권이정을 떠올렸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장례식장에서 실종된 사람에 대해 묻다니. 지나치게 무례한 일이 아닌가.

“……총기 소지는 불법 아닙니까?”

그래서 그냥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물었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 몰랐으니까. 내 질문에
권이도가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중요한 게 그겁니까?”

실없이 눈가를 찌푸렸다. 사실 불법이고 말고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그럴싸한 의문
하나를 제시했을 뿐. 돌아올 대답도 충분히 예상됐다.

역시나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요.”

절대 불변의 진리였다. 아무렴, 다른 누구도 아닌 선호그룹인데. 그런데 그는 잠깐 멈칫하며 미소를


지워 냈다. “아니…… 안 되는 게 있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권이도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쨌든 나는 내가 제일 오래 머무는 장소에 그걸 장식해 놨어요. 서재 벽면에,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내가 봤을 땐, 장식해 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새카만 총을 서랍 속에 넣던 장면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걸로 모자라 서랍을 잠그고 제대로 잠겼는지 두어 번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안 됐는데…….”

권이도는 전혀 취하지 않은 얼굴로 주정과 같은 한탄을 내뱉었다. 척 보기에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술의 힘을 빌리는 것 같았다. 조부님의 죽음이 그토록 마음에 남았을까. 안쓰럽다는 생각과 함께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가끔 생각해요. 그렇게 장식해 놓지 않았으면 조금 달라졌을까 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후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왜 내게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실수가 아니에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고.”

품위 있는 음성이 단조롭게 얘기했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총알을 버렸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권이도가 입을 다물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런 걸 물어도 될까. 나는 종이컵을 매만지며 눈가를 찌푸렸다.

“실수라면…….”

대략 짐작하길, 무언가 사고가 있던 모양이다. 실탄이 장전되었던 총에서 총알을 버릴 만한 일이라면


떠오르는 게 몇 개 있었다. 실수로 발포됐거나, 혹은 발포될 뻔했거나.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래서 그런 의미로 물었는데 권이도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을 뿐이다.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서.”

대충 듣기에도 거짓말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치곤 너무도 적나라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처연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결코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각오는 그래요.”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냉랭하게 들릴 만큼 단호했다.

“올바른 선택을 할 것.”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특유의 정확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일을 그르치지 말고, 실수하지 않을 것. 감정적인 행동 대신 이성적인 판단으로 움직일 것. 최초의


계획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쉽게 말하고 있지만 죄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어기는 건 눈 깜박할 새고, 지키는 건 평생을 다해도
모자라다. 타인에게 늘 칼같이 구는 이유가 있었다고, 내가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근데 그거 압니까?”

조용히 되물은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더할 나위 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권이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아무리 굳은 다짐을 해도, 그게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는 거.”

“…….”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너무도 서글퍼 보여서, 나는 차마 그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저 종이컵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뿐.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나직이 나를 불렀다.

“정세진 씨.”

“……네.”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비치던 감정을 억지로 지운 채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비록 그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나와의 각인이 정세진 씨한테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마 권이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그에게 각인하자고 이야기한 게,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속하기 위해, 그리고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내가 간절히 찾아낸 생존 수단
중 하나라는 걸.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 약혼은 선호와 해신의 계약이 아닌 우리 두 사람의 혼사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곧장 이해하기엔 모호한 말이었다. 일전에 권이도는 이미 우리의 약혼을 계약의


일종이라고 못 박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두 가지가 다르다고 선을 긋다니.

“해신과의 계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고, 당연히 정세진 씨가 거기에 따라야 할 의무도 없어요. 더 이상
해신의 후계자가 아니니 계약의 범주에 묶기에도 구실이 부족하죠.”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의 말이 이제는 약혼 생활을 끝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내가 쓸모없어졌으니 그만 내 집에서 나가라고.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권이도는 더없이 쓸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세진 씨는 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

설마하니, 이 말을 권이도에게 들을 줄이야. 늘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가 뿌리째 부정하고 말았다.


그걸로 모자라, 가만히 눈을 맞추며 건넨 말까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라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나일 테니까.”

- 다음 화에 계속
63 화. Le Bon Choix(5)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짙은 눈동자엔 더없이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고백이라도 하는


양 달큼한 말을 하면서, 표정은 쓰디쓴 약을 먹은 것처럼 착잡하다.

“우리 관계를 정의할 자격은 정세진 씨한테 있습니다.”

그냥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얘기가 지난번 그와의 다툼에서 파생된 내용이라는 걸. 한참 늦은


대답이었고 먼 길을 돌아 건네진 허락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권리만 취하면 돼요.”

권이도에게 차를 받았던 날, 그날도 그는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게는 아무런 의무도 없고 그저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그때는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러 갔으나, 이제는 정말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권리…….”

알고는 있었다. 그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나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의 무게가 달라서 그랬지.

“……저한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나는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 단순히 궁금해져서. 그가 내게 뭘


얼마만큼 해줄 수 있는지 그 깊이를 알아보고 싶었으므로.

“달라는 대로 주도록 하죠.”

권이도는 선뜻 그렇게 대답했다.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향수를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다시 해신에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됩니다. 정세진 씨 비서를 데려오는
것도 괜찮고, 막말로 지금 당장 집에 가버리는 것도 할 수 있어요.”

꿈을 꾸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가 말만 하면 모든 걸 다 이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가 상냥히 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게요.”

“…….”

기뻐해야 하는 타이밍일까. 혹은 기회라고 생각해 덥석 물어야 할까.

내가 정의해 둔 권이도와의 관계는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맞춰 줘야 할 상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배려에 스며들고 말았다. 그러한 안일함에 취해 방심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게 얼마
되지 않았단 말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기뻐하지 못했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기엔 떠오르는 의문이 너무도


많아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달라는 걸 다 해주면서 약혼 사실을 알리지는 않는다. 내게 모든 선택권을 주는 듯 보여도 결국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건 권이도였다. 그가 미묘하게 그어 뒀던 선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다.

“왜 저한테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건지…….”

“…….”

“그래서 권이도 씨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지.”

그는 내게 연인이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내게 관계를 정의하라


이야기했지만, 그건 결코 내게 온전히 속하겠단 말은 아니었다. 내 주변 환경을 통째로 바꿔 놓고 왜 그 환경
속에 본인이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그거야…….”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달싹였던 입술이 퍽 그럴싸한 이유를 내뱉었다.

“내가 정세진 씨를 좋아하니까.”

“…….”

“바라는 걸 다 해주고 싶거든요.”

설레어 마땅할 말이었는데, 거짓이라도 들은 양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애매한 사실 속에 진실을 감춘 것만 같아서.

“……권이도 씨 말씀에 모순이 있는 걸 아시죠.”

언젠가 말했듯, 그와의 대화는 논점을 중심에 놓고 주변을 빙빙 도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또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았고, 애매하게 자신이 주고 싶은 것들을 얘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권리 따위가 아닙니다.”

내가 속할 수 있는 울타리, 그리고 안정적인 관계.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충족되기 어려운 건가.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권이도는 그 두 가지만 빼고 내게 모든 걸 약속했다.

“제가 좋다고 하시면서, 결국 저와의 관계를 욕심내진 않으시네요.”

나는 대가 없는 친절을 믿지 않는다. 그가 내게 해주는 모든 게 단순히 호감과 호의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마음을 표현할 뿐이라면, 그 대가는 내 마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 모든 걸 줄 테니 연인이 되어 달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

권이도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도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복잡하게 일렁이는 두 눈이 끝내 모든


속내를 보여 주진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속삭이듯 조그맣게 이야기했을 뿐.
“내가 지금 연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면 정세진 씨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하겠죠.”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동요하던 눈빛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가볍게 그러쥔 권이도가 느리게 얘기했다.

“근데 나는 정세진 씨가 완벽히 독립된 개체가 되길 바랍니다.”

독립된 개체라니. 나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뒷말을 이었다.

“정세진 씨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항상 정세진 씨 혼자만의 결정이었으면 좋겠군요.”

어렴풋이 느꼈다. 이번에 하는 말은 정말 진심이라는 걸. 올곧게 나를 향하는 시선이 티끌 하나 걸리지


않을 만큼 투명했다.

“그 어떤 외압이나 강요 없이 그냥 정세진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해요. 그 선택의 기반이 불안은


또 아니었으면 하고.”

“…….”

이번에야말로 정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오로지 애정에만 기반하지는 않았으니까. 움찔,


미간을 좁히는 사이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데.”

거기까지 말한 권이도는 잠깐 입을 다문 채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이라기보단 허탈한 한숨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곤 들릴 듯 말 듯 억눌린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어, 세진아.”

“…….”

목까지 차올랐던 전의가 바람 빠지듯 사그라들었다. 맥이 탁 풀림과 동시에 울컥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공허하게 비워진 머릿속엔 누구 것인지 모를 속삭임이 떠올랐다.

‘……세진아.’

“…….”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스친 기억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당황스러웠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권이도는 창백하게 질린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세진 씨?”

차게 식은 손을 움켜쥐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순간 떠올랐던 장면은 눈 깜박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이며 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가 나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거의 뛰듯이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일지도 몰랐다.
인파를 모두 차단한 덕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어 몇 번이나 얼굴을
닦았다. 괜히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이 올라오는 기분이라, 어떻게든 열기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즈음, 수도꼭지를 꾹 눌러서 흘러나오던 물을 잠가 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턱에 맺혔던 물방울이 세면대에 똑, 똑, 떨어졌다.

‘세진아.’

“……하.”

머리가 어지러웠다. 퍼뜩 떠오른 장면 하나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간절히 내 손을


붙잡고 애원하던 모습.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리고 눈앞에 보였던 익숙한 얼굴.

‘내가 미안해.’

권이도가 울고 있는 기억이었다.

***

문득문득 내 것이 아닌 기억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 가령 그의 집에 처음으로 들어갔던 날 욕조에서 창문


너머 하늘을 보며 생각한 것. 혹은 비가 내리던 날 온실에서 떠올린 나를 걱정하던 누군가.

왜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지, 대체 어디에서 온 기억인지, 의문이 든 적은 많았지만 깊이 고민해 보진


않았다. 잔상처럼 남은 장면에 직면했다간 무언가 어그러질지도 모르겠단 위기감 때문이었다. 권이도가 주는
아늑함이 마음에 들어서, 막연히 이대로 안주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억이 권이도의 얼굴이라면 달랐다.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신경 쓰였다. 설령 그게 내 상상일 뿐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선명한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화장실에 머물렀다.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려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그사이에 세수를 두 번이나 다시 했고, 젖은 앞머리는 마를 새도 없이 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즈음이었다. 다시 식당으로 가는 길. 코너를 돌려는 순간 웬 오메가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어?”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이 근처는 모두 막아 놨고, 당연히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여자는 딱 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권상미, 혹은 권이경. 그리고 이 익숙한 목소리는 아마도 권이경일 것이다.

“……그래.”

“…….”

“아니, 괜찮아. 그 자식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통화를 하는 중이구나. 다른 쪽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안타깝게도 길이 이거밖에 없었다. 나는 막다른


복도를 한 번, 내가 가야 할 코너를 한 번 쳐다보고 곤란한 얼굴로 혀를 찼다.
“할아버지가 데려가신 거지. 벌 받은 거야.”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타박타박 소리가 들리자마자 “가족들도…….”라고 운을 떼던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긴 곳엔 역시나 핸드폰을 든 권이경이 있었다.

“……아.”

그는 아차 싶은 얼굴로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입에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이 건물은 금연일 텐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경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다시 전화할게.”

뚝, 전화가 끊겼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까딱이며 눈을 찡긋했다. 우선은 이것부터


해명해야겠다는 듯이.

“안 피워요. 물고만 있었던 거라.”

설마하니 권이경 정도 되는 사람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지는 않겠지. 그런 개념 없는 행동을


했다간 기업 이미지에 썩 좋지 않을 것이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권이도와 닮은 눈매가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다. 조금 더 가냘픈 턱선에 입술은 굳게 다문 채였다.


권이경은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넌지시 물었다.

“들었죠?”

“네.”

그냥 이실직고했다. 어차피 별말 듣지도 못했으니까.

“찾았냐고 물으실 때부터 들렸습니다.”

“아아…….”

알 만하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가를 찌푸리기에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뇨, 내가 여기서 통화하면 안 됐죠.”

권이경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겼던 얼굴도 금방 풀어졌다. 담배를 반으로 똑
부러뜨린 그가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그걸 버렸다.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거든요.”

아마 가족들만 있는 공간이라 내가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 어차피 이쪽엔 화장실밖에 없으니 오고


가는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럼 저는 이만…….”

더 할 말도 없고 그냥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통화 내용은 아마 권이정을 뜻하는 거겠지만, 굳이 관심을


둘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한 발짝 떼자마자 권이경이 나를 불렀다.

“세진 씨.”

이 집안 식구들은 혹시 어디서 발성이라도 배우는 걸까. 어쩜 하나 같이 말투나 목소리가 고상하기 짝이


없다. 나도 화술 교육은 받았지만 이렇게 우아한 느낌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방금 들은 얘기는 잊어버려요. 어디 가서 말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말은 해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부드러운 목소리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간혹 권이도를 대할 때면 느끼던 것이었다. 아니,


약혼식 날 그들의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걱정하시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딱히 말할 곳도 없고, 크게 기억에 남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래서 곧장 대답하자, 권이경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요.”

“…….”

뭐랄까. 권이도가 생각났다. 표정이나 말하는 방식 같은 게.

“왜 그래요?”

“아뇨, 남매라 그런지…… 권이도 씨랑 말씀하시는 게 비슷해서요.”

“아아. 그런 말 많이 듣죠.”

권이경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긍정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도랑 난 어머니를 닮고, 이정이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요. 뭐, 성격은 셋 다 다르지만…….”

길게 늘어진 말꼬리엔 많은 말이 함축돼 있었다. 나는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권이경이 힐긋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세진 씨도 들었죠? 이정이 실종된 거.”

“네, 기사로만 봤습니다.”

적당히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유감을 표해야 할까 싶었는데,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해봐야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이도는 뭐라고 해요?”


“딱히…… 별말 없으셨습니다.”

“하긴, 약혼자한테 꺼낼 말은 아닌가.”

‘약혼자’라는 말에 움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의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칭할 줄은


몰랐으니까. 권이경 역시 그 형식적인 약혼식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아마 못 찾을 거예요. 부모님도 별로 찾을 생각 없으신 것 같고.”

문득 빈소에서 보았던 그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권병욱 회장의 죽음에 슬퍼하는 듯 보였는데, 거기에
권이정을 향한 걱정은 없었던 걸까.

“우리 집안이 좀 그래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다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건 별로 신경 안 쓰거든요.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는 거고, 좋게 말하면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한 거고.”

그런 것치곤 가족끼리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이정이는 하도 원한 살 짓을 많이 해서 언제 한 번은 문제가 생길 줄 알았어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권이경이 픽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가볍게 묻는다.

“이도는 걱정하던가요?”

“…….”

“거봐요.”

직접적인 이야기는 나눠 보지 않았지만 아마 권이도라면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다섯 살 이후로는


형이라고 부른 적도 없다는데, 내게 해코지하려 했다는 이유로 주먹다짐까지 하지 않았던가.

“벌 받았다고 생각해요. 피가 섞였다고 무조건 편을 들 필요는 없죠.”

혹시 권이경은 그의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아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냉랭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미안하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갑자기 넋두리가 길었죠. 그냥 좀 답답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설령 권이정에게 아무런 정이 없어도 동생이 실종된 이상 신경 쓰이긴 할 거였다. 아까 세 사람 다


성격이 다르다고 했던가. 권이경과 권이도의 차이는 이런 건가 보다.

“그리고 늦은 인사지만…… 혜율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부드럽게 웃는 권이경의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사무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혜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우리 애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요.”

새삼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냥 평범한 인사였는데 그렇기에 더 낯설었다. ‘그’ 권이경이, 차기 부회장


후보로 뽑히는 냉철한 사람이, 지금은 그냥 평범한 부모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종종 놀러 갈 텐데 잘 부탁해요. 내가 당분간 좀 바빠질 예정이라.”

“회사 일로 정신없으시겠어요.”

“뭐, 그렇죠.”

선호그룹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얼마간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부회장인 권상미가 회장이 되고,
부사장인 권이경이 차기 부회장 후보로 꼽히겠지. 명실상부 부회장은 자신이라던, 권이도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말이다.

그런데 권이경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렇게 얘기했다.

“부사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이거든요.”

- 다음 화에 계속

64 화. Le Bon Choix(6)

식당으로 돌아갔을 때, 권이도는 내가 떠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깐 모습은 무언가 깊이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도무지 방해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그에게 말을 거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왔어요?”

나를 먼저 발견한 건 권이도였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내가 돌아왔음을 알아차리고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다가가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걸렸네요.”

그러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세수만 하고 돌아오면 될 것을 너무도 긴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다.

“잠깐 부사장님을 마주쳐서요.”

“……누나를?”

권이도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하나 아까 나눴던 대화를 마저 이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술이 반쯤 담긴 종이컵을 톡톡 건드린 권이도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그냥…….”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솔직히 말해 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곧장 그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리는 것도 왠지 고자질을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어차피 선호그룹은 조만간 해체될 거예요.’

아까, 부사장직을 내려놓겠다던 권이경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해줬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룹 대표자가 갖는 상징성은 생각보다 더 영향력이 크거든요.’

나도 모르지 않았다. 권병욱 회장이 선호그룹에 어떤 존재인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앞으로 그룹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지금 선호의 형태는 권병욱 회장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기업 이념은 물론 그 체제와 권력,
그리고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잠깐이겠지만 그 공백으로 인해 선호는 피치 못하게 주춤할 것이다.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주변에서 쥐잡듯이 물어뜯겠죠.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기업이 없는 건


세진 씨도 알 거고.’

아마 권이경은 그 말을 하며 내 너머로 해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온갖 비리로 인해 무너진 아버지와


처참하게 망가진 신뢰 같은 것. 해신은 좀 과하게 먼지투성이였지만, 대개 기업이란 적당한 비리를 공익을 위한
것이라 속여 운영하는 곳이었다.

‘줄줄이 터지기 전에 우리 선에서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죠.’

그 수단이 그룹의 해체일까. 이해되지 않는 표정인 내게 권이경은 상냥히 설명했다.

‘권력을 분립하겠다는 명목하에 계열사별 자율 경영 체제로 바뀔 거예요. 서민 친화적 기업이 되겠다는


느낌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 줘야죠.’

참으로 이상적인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는데, 다행히 권이경도 웃는 바람에 무안하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 분리할지언정 지분 관계는 별로 달라지지 않겠지만…….’

선호그룹이 10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10 정도의 계열사 열 개로 쪼개겠다는 말이었다. 그
지배 관계는 변하지 않을 테니 결국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가진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민심을 잡을 경영 쇄신안은 늘 필요하거든요.’

‘그 말씀을 왜 저한테…….’

‘왜겠어요?’

권이경은 그걸 모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권이도와 닮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언젠가 권이도가 내게 내비쳤던 자신감과 일치했다.
‘차기 부회장은 이도가 될 거예요.’

“부사장님이…….”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슬쩍 권이도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가만히 내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혜율이랑 잘 놀아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들은 말이기도 했고. 그 말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던 거지.

“부사장님 부부가 정말 금슬이 좋으신가 봐요.”

“뭐…… 평범한 편이죠.”

권이도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이 있는 쪽을 쳐다본 그가 종이컵 끄트머리를 입술에


대며 얘기했다.

“둘 다 성격이 좋아서.”

‘내가 관심 있는 건, 부회장 따위가 아니라 선호재단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선호재단 이사장이 권이경이었다.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보육 사업과 그 외 문화예술사업을


구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재단 안에 있는 선호미술관, 즉 혜율미술관은 그의 남편인 신대웅이 관장으로 있었고.

‘기업이 쪼개진 후의 그런 귀찮고 지저분한 뒤처리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그리 말하는 권이경은 지금껏 본 적 없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매체에 나올 땐 늘 딱딱한 표정인데, 마치


제 아이인 권혜율을 떠올릴 때처럼 부드러웠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십니까?’

내가 아는 권이경은 결코 권력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계자라는 유리함을 제외하더라도 그


능력과 노력으로 꼭대기에 우뚝 섰단 말이다. 그런데 끝내 포기할 자리였다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올라갔단
말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게 아깝지 않으세요?’

‘글쎄…… 아까울 이유가 있나?’

권이경은 픽 웃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단정히 묶은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남들은 배부른 소리로 듣겠지만, 위로 올라가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런 게 아니라고.’

꿈이라고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의 영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권이경이 씩 웃으며 물었다.

‘세진 씨는 본부장 일이 만족스러웠나요?’

‘…….’
이 집안사람들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자격증이라도 딴 모양이다. 식사는 했냐는 듯 가볍게 묻고
있는데 그 내용은 두말할 것 없이 정곡이었다. 내가 말없이 입을 다물자, 권이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거기서 그만두면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한 사람인 줄 알겠지.’

충분히 상상되는 그림이었다. 만약 거기서 권이경이 그만뒀다면 그의 능력은 딱 거기까지로 평가됐을


것이다. 그룹을 이을 자신이 없으니 도망치는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건 달라요. 난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관두는


거예요. 이 차이를 알겠어요?’

내 손으로 직접 선택한다는 게 뭘까. 깊이 생각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내게는 남 일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무언가 선택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않고 이도한테 모든 걸 넘겨줬으면 넘겨준 게 아니라 빼앗겼다는 소리를


들었겠죠.’

권이경은 어림도 없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권가 특유의 여유로움과 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후계 싸움에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룹엔 관심이 없지만 능력이 없어서 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이도는 주변 평가가 어떻건
제 손에 들어오면 괜찮다는 주의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권이도도 참 대단하다 싶다. 그 드높은 자존심에 거저먹는 권력을 거부하지 않다니. 아니,
어쩌면 그 또한 드높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타협일 수도 있었다.

‘이해관계가 맞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로 윈윈해야죠.’

권이경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여전히 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이정을 찾았냐고


묻는 짧은 통화는 입막음을 시키고, 이런 깊은 사정은 자세히 설명해 주다니. 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권이경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었다.

‘놓치기 아깝지 않아요? 장차 선호그룹의 모든 게 정세진 씨 약혼자 손에 들어갈 텐데.’

‘…….’

두 번째, 그의 입에서 약혼자라는 말을 들었다. 놓치기 아깝다는 게 설마 권이도일까. 권이경은 내가


애써 부정하려던 사실에 못을 박았다.

‘동생이 세진 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신기한 일이지. 일적인 이야기를 할 땐 냉철하기만 했는데, ‘동생’이라고 말하는 순간 느낌이 달라졌다.
나긋하게 내려앉은 페로몬이 권이경의 다정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오지랖인 걸 알지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요. 나는 그 약혼이 계약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다른 가족 일에 신경 안 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말한 게 불과 몇 분 전이 아니던가. 권이경은 퍽 재미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보통 그걸 속으로는 생각해도 말로는 못 따지던데.’

그야 그렇겠지. 권이경에게 말로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도 순간적으로 물었을


뿐, 결코 따지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 혜율이가 세진 씨를 좋아해요.’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권이경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이야기했다.

‘세진 씨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얼핏 내 칭찬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권혜율의 칭찬이었다. 제 아이의 보는 눈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좋게 봐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거 하나만 믿고 결혼을 부추긴단 말인가.

‘이도가 실연 좀 당했다고 일을 때려치우진 않겠지만, 만약 그걸로 업무가 마비되면 나도 편히 쉬진


못하거든요.’

아마, 권이경의 본론은 그 마지막 말이었나 보다. 제 계획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 혹시 모를 불안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싶은 거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알고 그 리스크를 감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탁 좀 할게요.’

권이경은 내게 명함 하나를 쥐여 주고 먼저 자리를 떴다. 개인 번호가 적힌 명함엔 그의 직급과 사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과연 연락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졸립니까?”

퍼뜩, 고개를 들고 권이도를 바라봤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오래 침묵했던 모양이다.


권이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얘기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혜율이 옆으로 가서 쉬어요. 혹시 중간에 깨면 잠깐 놀아 주고.”

그를 따라 나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늦었을까. 평소라면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론 잠이 들긴커녕 뜬눈으로 하염없이 이불 위를 뒤척였겠지만.

“난 잠깐 나갔다가 올 테니까…….”

“권이도 씨.”

넌지시 그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권이도가 내 쪽을 내려다봤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독립된 개체가 되길 바란다고 하셨죠.”

내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런 외압 없이, 그리고 아무런 강요 없이. 권이경이
그랬듯 제 앞길을 스스로 만드는 게 내게 감히 가당키나 할까.

그에게 덜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는 내게 분명히 선을 그었고, 내게는 그 선을 넘어갈 만한


용기가 없었으니까. 버림받는 게 두려워 전전긍긍해 왔는데, 사실은 그게 나를 자립시키기 위함이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뿌리 내리기도 전에 그에게서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사흘간 나는 권이도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웠다. 발인 때까지 함께해 주려고 했지만, 권이도가


피곤해 보인다며 나를 먼저 돌려보냈다. 혜율이에게 다음에 보자며 약속을 하고, 어른들에게 인사까지 한 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샤워를 하고 곧장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권이도는 오지 않을 테니


조금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으면 해서. 그의 방으로 향하기 전,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페로몬을 본떠 만든
향수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가서 쉬고 있어요.’

푹신한 침대에 누웠을 땐 권이도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 짙은 눈동자와 높게
뻗은 콧날.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고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기는 것까지.

‘정세진 씨가 부탁한 건 빠른 시일 내에 들어주죠.’

당연히 들어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까지 요구해도
될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자리를 내어 주면, 자꾸 다리를 뻗기 마련인데. 권이도는 오히려 그걸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나는 긴 잡념 끝에 겨우겨우 선잠을 청했다. 늘 그랬듯 잠은 오지 않았지만, 오늘은 왜인지 악몽을 꾸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불에 남은 페로몬과 내가 뿌린 향수 냄새. 그 두 가지 속에서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르륵,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와중에 익숙한 페로몬이
한가득 느껴졌다. 긴 손가락이 앞머리를 넘겨 주고 이마로 내려와 귀에까지 닿았다. 귓바퀴, 귓불, 그리고 턱선.
느릿느릿 이어진 손길은 조심스레 내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

막연히 기분이 좋단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페로몬은 비를 맞은 나무에 화사한 꽃이 핀


것처럼 은은했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달싹이자, 틈새로 들어온 손가락이 아랫니를 톡 건드렸다.

“응…….”

졸리다는 생각, 그리고 페로몬이 고프다는 생각. 쏟아지는 존재감이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

드문드문 현실감이 끊겼다. 아직 잠이 다 깨지도 않았는데 몽롱한 감각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건드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지고 그다음엔 조금 더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

그게 입술이라는 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 권이도가 돌아왔구나. 그 사실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서 저항하지 않았고, 입술을 움직여 그의 숨결을 받아 마셨다.

“…….”
“…….”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었다. 더 깊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혀를


밀어 넣거나 은근슬쩍 입술을 베어 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감질나는 감각에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듯 주변 공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 가까운 거리에서 닿는
숨결, 그리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짙은 페로몬. 마지막으로 간간이 얼굴에 떨어지는 정체 모를
물방울까지.

“…….”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혹시, 아주 혹시라도 그 물방울이 눈물은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두 눈은 곱게 감겨 있을 뿐 울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쪽, 소리가 나게


떼어 냈다. 그에 권이도가 실눈을 뜬 채 나를 내려다봤다.

“……언제 오셨어요?”

인제 보니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다. 샤워를 한 건지 입고 있는 옷도 가운이 전부였다. 몽롱하게 풀린


눈을 느리게 깜박인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한참 전에 왔어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교를 부리듯 코를 비비적거리고 드러난 목을 쪽쪽


빨아들였다. 늘 비슷한 전희를 해왔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덜떨어진 느낌이었다.

“술 드셨어요?”

“……아니.”

그래서 물었는데, 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문제는 그 대답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귀


아래쪽부터 쇄골이 있는 부분까지, 코끝으로 쓸어내린 그가 도드라진 뼈에 입을 맞췄다.

“흣, 왜 갑자기…….”

그가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자고 일어난 탓에 발기해 있던 성기가 꾸욱 짓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향긋한 페로몬이 한가득
쏟아졌다.

“내가 생각을 못 했는데…….”

갈라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허스키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페로몬도 조금 이상한 감이 있었다. 그가


고의적으로 흘리는 게 아니라, 질질 새어 나오는 것처럼. 일부러 힘을 줘서 참는데도 양이 너무 많아 넘치듯이.

“날짜가…….”

그는 느릿느릿 운을 떼며 온몸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내 뒤통수 아래에 손을 밀어 넣고 머리칼을 살짝


그러쥐기도 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품에 안겨 있는 와중에, 나직한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벌써 그렇게 됐더라고.”

“…….”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내용이 아니라 속삭이는 음성이 지나치게 야해서. 그리고 귓가에 입을
맞춘 그가 뒤이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근데 억제제를 늦게 먹었어.”

- 다음 화에 계속

65 화. Le Bon Choix(7)

위기감이라고 해야 할까.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숨이 막히는 이유가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내리누르는 체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느리게 몰아쉬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하아…….”

“…….”

러트 사이클이 온 모양이다. 그런데 억제제 먹을 타이밍을 놓친 거다. 이미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으니


약효가 들기까진 한참이나 걸리리라.

특이 형질의 주기는 약만 시간 맞춰 먹으면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권이도 같은 우성은 날짜도


규칙적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러트 사이클이 온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억제제를 어쩌다가…….”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등에 손을 댔다. 어찌나 몸이 뜨거우면 보드라운 가운 너머로 열기가


느껴졌다. 쿵, 쿵, 격하게 뛰는 심장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깜박했어.”

“…….”

깔끔하게 돌아온 대답에 해줄 말이 없었다. 그사이 나풀나풀 흘러나온 페로몬은 점차 나까지도 물들이고
있었다. 피부로, 숨결로 느껴지는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로 피어올랐다.

“……하아.”

권이도는 계속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어린 짐승처럼 내게 얼굴을 문지르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딱히 저항할 생각은 없었지만, 벗어나고자 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진아…….”

내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남았더라. 페로몬을 뿌려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방법이


없었다. 권이도도 그 사실을 알기에 구태여 페로몬샘이 있는 자리를 야금야금 깨무는 거겠지.

“세진아, 흣…….”

나는 그의 이성이 점점, 점점 날아간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족히 이틀 정도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생각도. 바짝 밀착한 하반신에 위협적일 만큼 커다란 무언가가 느껴졌다.

“……권이도 씨.”

“응…… 얘기해.”

그리 대답하는 목소리가 억눌려 있었다.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끌어안은 주제에 그는 곧장 행위를


시작하진 않고 하반신을 문지르기만 했다. 목울대를 울리는 신음은 머릿속이 아득할 만큼 외설스러운 것이었다.

“안 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뒷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나 또한 급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뜸했었지. 그런 생각으로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억제제 들으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텐데…….”

나는 억제제가 듣지 않지만, 먹어야 하는 타이밍은 알고 있었다. 권이도 정도의 우성은 타이밍을 놓치면
이미 요동치기 시작한 페로몬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도. 오히려 약 때문에 더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어떻게 참으……흐읍.”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칠게 입술이 맞닿았다. 내 머리칼을 그러쥐었던 그는 이제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붙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빈틈없이 맞닿은 입술 틈새로 뜨거운 혀가 숨결과 함께 침입했다.

“…….”

잡아먹히면 딱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아니 쪽쪽 빨아 먹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타액이건, 아니면


숨결이건, 그게 아니면 페로몬이건. 분명 넘겨주는 사람은 권이도인데 진이 빠지는 건 내 쪽이었다.

“흐…….”

그는 내 혀를 옭아매며 끝없이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달큼한 감각에 취해 가운을 움켜잡자, 몸을 웅크려


나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혀는 물론 입 안쪽 여린 살까지. 빈틈없이 희롱하던 그가 다른 손을 허리
아래에서부터 티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맨살에 닿는 손길이 평소와는 달리 뜨거웠다. 그와 닿는 족족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릴 만큼.


정확히는 체온이 아니라 페로몬 때문이겠지만, 어느 쪽이건 지나치게 예민한 건 사실이었다.

“……하.”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도 그는 입과 뺨 언저리에


연신 입을 맞췄다. 등으로 들어온 손은 척추뼈 하나하나를 기억하듯 덧그리고 있었다.

“세진아.”
“……그만 좀.”

내 이름이 세진이라는 걸 백 번쯤 확인시켜 줄 생각인가. 괜히 민망함이 드는 바람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하자마자 그가 우악스럽게 머리를 고정했지만.

“왜 피해?”

“피하다니……. 방금까지 키스했으면서.”

“……그래?”

마주친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서야,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와
한마디 한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피하지 마…….”

아니, 이건 대화가 아닌가.

“……흣.”

목덜미로 내려간 그가 여린 살점을 입술로 물었다. 조금 아프다 싶을 만큼 빨아들이고는 혀끝으로 그


부분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아, 자국…… 거긴 안 돼요.”

한 번 정사를 치르고 나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그가 조금의 틈도 없이 나를 물고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대개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였지만, 이번엔 목도리를 두르지 않는 이상 숨기지
못하는 곳이었다. 지금이 겨울이면 모를까. 한여름엔 그조차 불가능했다.

“안 된다니까.”

나는 다급히 그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머리채를 잡는 것과 비슷한 행동에, 그는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심술을 부리듯 조금 더 세게 목 언저리를 깨물어 버린다.

“아!”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다. 보지 않아도 잇자국이 났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이제는


진정 내 살점을 먹을 생각인가.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 권이도 씨 잠깐…….”

그는 말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냈다. 당황한 내가 다리를 오므리는데,


허벅지를 붙잡고 강제로 벌리기도 했다. 오금 아래쪽을 단단히 쥔 그가 내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흐……!”

그는 순식간에 발기해 있던 성기를 한입에 물었다. 목구멍에 닿을 만큼 깊게 머금고는 혓바닥으로 기둥을


감쌌다. 쭙쭙 소리가 날 만큼 빨아들이는 감각에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아, 안 돼, 흐…….”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받았지, 어디 가서 해보진 않았을 것 같은 권이도다. 그런 사람이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시각적인 자극이 장난이 아니었다.

“쌀 것, 같…….”

이대로라면 언젠가 그가 말했듯 토끼처럼 싸버릴 거다. 러트 사이클이 온 그는 지나치게 뜨거웠고, 그건


입 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용케 구역질 하나 없이 뿌리 끝까지 머금은 그는 목까지 조여 가며 내 사정을
재촉했다.

“……!”

끝내, 나는 그의 머리칼을 콱 붙잡으며 사정했다.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내는 동안에도 그는 내 성기를


입에서 빼내지 않았다. 마치 생명수라도 받아 마시는 양 아무렇지 않게 그 모든 걸 삼켜 버렸을 뿐이다.

“하으…….”

수치심, 그런 건 이제 들지도 않았다. 이성이 날아갈 것 같은 고양감과 쾌감의 여운이 찌르르 허리를
울렸을 뿐. 손까지 덜덜 떨며 아랫배에 힘을 주자, 권이도가 느릿느릿 입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

새빨간 입술은 정액인지 타액인지 모를 액체로 젖어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 안엔 희뿌연 정액이 남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몽롱한 눈으로 흘긋 나를 바라봤던 그가 혀를 내어 반질거리는 귀두를 꼼꼼히 핥았다.

“으응, 흐…… 그만, 흣…….”

마침내 만족할 만큼 핥았는지, 그가 내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조물조물 만지는 손길에 지나치게 민감해졌다.

“진짜…….”

변태 같다고, 그리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권이도는 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다리를 내려 주곤 내 윗옷까지 깔끔히 벗겨 버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

“…….”

진득한 시선이 내 몸을 꼼꼼히 살펴봤다. 알몸을 보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토록 적나라하게
구경거리가 된 건 처음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그는 느릿느릿 제 가운의 허리끈을 풀고
있었다.

벌어진 가운 틈으로 탄탄한 상체가 보였다. 너른 가슴이나 오밀조밀 짜인 복근, 배꼽 아래 은밀한 곳에


도드라진 핏줄과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까지.

“…….”

권이도를 변태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 자극적인 장면엔 나조차 넋을 놓고 말았으니까. 우성


알파면 기본적인 신체 능력부터 뛰어났지만, 권이도는 그보다도 더 우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구경 다 했습니까?”

한 타이밍 늦게 권이도가 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이성이 날아간


눈빛이었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권이도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곤
나긋이 얘기했다.

“다 했으면…… 입 좀 벌려 볼래요.”

“……입?”

별생각 없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는 한 손을 내 입가로 가져오더니 검지로 아랫니를 꾸욱 눌렀다.


그게 조금 불편해서 눈가를 찌푸리자, 뒤이어 중지까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느…….”

그리고 그가 한 건, 다른 손을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큼직한 손으로 기둥을 감싸고는


여유롭게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쓸어내린다. 손이 큰 만큼 그곳도 커다랬기에 꺼덕거리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읏.”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그는 내 입 안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오른손으로는


제 성기를 매만졌다. 시선은 내 입술에 고정한 채, 눈가는 잔뜩 찌푸리고 있다.

“…….”

“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집요하게 내 입 안을 살피는 시선도, 마치 유린하듯


혀를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반찬 삼아 그가 자위를 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지.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혀를 움찔거렸다.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혀뿌리를 지그시 눌렀다. 입술로 타액이
흐르는 순간에는 그가 미간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아.”

왜, 넣는 게 아니라 자위를 할까. 눈앞에 내가 있는데 구태여 제 손으로 해결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숨 쉬는 게 불편해서 혀로 살짝 그의 손가락을 밀어 냈다. 오히려 그 반응에 권이도는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다 새는 발음으로 물었다.

“……안 너어요?”

권이도가 흥분한 만큼 나 또한 기대감에 젖은 상태였다. 뒤쪽은 잔뜩 젖었고, 의도치 않았는데도


하반신이 들썩였다.

“…….”

그런데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마주 보기만 했다. 움직이던 동작도 뚝 끊긴 상태였다. 숨을


고르는 것처럼 가슴께를 부풀렸던 그가 한껏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은 정말 너 임신시킬 것 같아서.”

빈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 어린 경고였다면 모를까. 그다지 위협적인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니까…….”

“…….”

“손가락 좀 빨아 봐요.”

그는 당황해 말을 잃은 내게 뻔뻔히 요구했다. 그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움찔 오므렸다.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만족스럽게 입매를 당겼다.

“…….”

“……후우.”

한동안 질척거리는 소리와 신음만이 들렸다. 내가 어설프게 혀를 감을 때면, 그는 관자놀이에 핏줄이 설


만큼 이를 악물곤 했다. 차라리 입으로 해준다고 할 걸 그랬지. 그 시선이 뜻하는 바를 모를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내 혀를 꾹 누르며 사정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은 드러난 상체에 난잡하게


흩뿌려졌다. 가볍게 목을 울린 그가 사정의 여운을 즐기듯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빼냈다. 입술을 깊게 맞물리곤 입 안을 부드럽게 탐닉했다.


그러면서 내 위에 엎어지는 바람에 여전히 발기한 성기가 내 성기와 문질러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성 알파인데, 그것도 무려 러트 사이클에, 고작 이 정도


수음으로 만족이 될 리가 없다.

나는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자 그가 움찔하며


입술을 떼어 냈다.

그냥 하자고, 아니면 입으로 해주겠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권이도 씨?”

가물가물 감았다가 뜨는 눈엔 흥분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는 내 부름에 답하는 대신


손바닥에 살살 뺨을 문질렀다. 나른하게 풀린 눈을 느리게 깜박이곤, 뺨은 물론 이제는 입술까지 손바닥에
문지른다.

“수면제…….”

그는 내가 떠올린 의문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자신이 왜 이렇게 다 풀린 눈을 하고 있는지. 그 눈에 왜


흥분이 아닌 졸음까지 담겨 있는지. 불분명한 발음으로 이야기해 준 것이다.

“……수면제 같이 먹었어.”
말문이 턱 막혔다. 특이 형질, 그것도 우성의 억제제는 다른 약과 함께 먹으면 위험할 정도로 독했다.
이미 진정제 계열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수면제까지 먹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왜…… 아니, 얼마나 먹었는데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물었지만 권이도는 답하지 않았다. 내 손목을 붙잡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을
뿐이다. 정신이 영 들지 않는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감은 뒤엔 다시 눈을 뜨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권이도 씨, 내 말에 대답해요. 한 알만 먹은 거 맞죠?”

“…….”

한 알만 먹은 게 아니구나. 그 사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시선을 피하는 걸 봐선 내


생각보다 많이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퍽 무식한 방법이었고, 내가 생각하기엔 쓸모없는 짓이었다.

“왜…….”

서운함이라고 부르면 적당할까. 차오르던 욕구보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실망감이 더했다.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요?”

나는 히트 사이클 때마다 권이도의 도움을 받았다. 아니, 처음엔 도움이었을지언정 근래에는 그런


일방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와의 섹스는 오로지 성욕 해소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는데, 그 기회마저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임신할까 봐?”

설령 임신을 시킬까 봐 걱정됐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굳이 제 몸을 상하게 하지


않아도 러트 사이클을 넘길 수단은 꽤 많았단 말이다. 혼자 참거나 결론 내리기 전에 내게 의견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그가 걱정되는 만큼 서운한 기분에 화가 났다.

“권이도 씨 대체…….”

“세진아.”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가늘게 뜨인 두 눈에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성욕, 밀려드는 졸음과 미미하게 피어오른 두려움 같은 것들.

“불안해서 그랬어.”

“…….”

숨이 턱 막힐 만큼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분명 기분이 더러웠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나 음울하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내 감정도 함께 물들였다.

“뭐가…….”

“…….”
“뭐가 그렇게, 불안하길래.”

나는 떠듬떠듬 그에게 이야기했다. 모자란 것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내게 매달리는지. 정체 모를 불안이


대체 어디서 시작됐는지.

“……뭐가 불안해요, 권이도 씨.”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달래듯이 나갔다. 그가 너무도 작게 느껴져서,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얘기해봐요. 괜찮으니까.”

“…….”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나올 듯 말 듯, 망설임이 한가득 담긴 움직임이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맞추자, 느리게 입술이 움직였다.

“……너는 내 눈앞에서 죽었고.”

툭, 튀어나온 말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심장이 콱 조여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숨을 멈추는 사이,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눈꺼풀을 떨었다.

“나는 너를 따라서 죽었지.”

그걸로 끝이었다. 그 한마디만 남기고 권이도는 기절하듯 내 품에 무너져 내렸다. 공기 중에 남은


페로몬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 다음 화에 계속

66 화. Boite de Pandore(1)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화를 부르는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이야기다.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제우스가 건네준 작은 상자. 절대 열어 보지
말라는 당부에도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어 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재앙들이었다. 욕심, 원한, 시기, 질투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 판도라는 황급히 상자를 닫았으나, 비통하게도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 버린 뒤였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내린 저주는 다른 무엇도 아닌 호기심이었다.

이렇듯 호기심은 인간에게 결코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득보단 실이 많고, 해소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적당한 외면이 진실과 마주하는 것보다 낫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알고자 하는 욕구를 최대한 억누르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럴 자격이 없어서,
크고 난 이후엔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어서, 그리고 권이도와의 약혼 이후에는 왠지 모를 위기감 때문에.
그가 내게 숨기는 건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권이도가 아니면 해결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에게 직접 물어야 했고,


확인한 뒤 모든 사실을 들어야 했다. 비록 그게 달가운 내용이 아닐지언정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판도라처럼 그 상자를 열어 볼 용기가 없었다. 처음엔 자격이 부족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미지에서 오는 불안감이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권이도가 주는 아늑함에 빠진 채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예라는 이름의 준비 시간을 갖고 내 나름의 계획을 세웠던 거다. 조금만 더 나중에,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그의 말이 어떤 내용이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약 그게 지금의 평온함을 깰
무언가라면 내가 숨 쉴 구멍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대표님, 이쪽 서류 결재 부탁드립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보름이 지났다. 권이정의 실종은 결국 실족사로 마무리됐다. 시체를 찾지는
못했으나, 들짐승에게 변을 당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원래라면 매스컴이 떠들썩해질 소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권병욱 회장의 죽음과 겹치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부재로 선호 측은 이런저런 일 처리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조만간 권상미가 회장으로
올라가야 했고, 그에 따른 구조 조정도 잇따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때 떠들썩하던 해신금융그룹의 이야기는
이제 신문 말미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론칭 행사 일정은 다 나왔나요?”

“예,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그사이, ‘Sejin’의 모든 론칭 준비가 마무리됐다. 중간부터 합류한 대표였지만, 나 또한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해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했다. 처음에는 잠깐 머무는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일과 관련해서는 또 대충이
되질 않았다.

“저…… 대표님.”

한창 서류를 훑는 와중에 직원이 넌지시 운을 뗐다. 이야기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들자, 그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요새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습관적으로 눈언저리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땐 나조차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눈이 퀭한 건 둘째치고 전체적으로 너무 지쳐 보여서. 근래엔 항상 이런 식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더 심했나 보다.

“괜찮습니다. 론칭 때문에 긴장돼서 잠을 잘 못 잤네요.”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그럴싸한 핑계를 가져다 붙였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고 그
또한 피곤의 이유 중 하나긴 했다. 직원은 내 말이 영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장이요? 대표님도 그런 걸 하세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침착하셔서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하, 웃으며 서류에 사인을 휘갈겼다. 전에 일할 때부터 늘 쓰던 사인인데, 이제 보니 ‘Sejin’의


로고와 퍽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면 아마 분명히 내가 만든 회사라고 생각할 터다.

“대표님도 행사 날까지는 푹 주무세요. 밥도 잘 챙겨 드시고요.”

잘 챙겨 먹는 걸 넘어서 아침저녁으로 진수성찬이 차려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한 뒤 서류를 들려 내보냈을 뿐.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대표실 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을…….”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잠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요 며칠 한시도 내 몸을 떠난 적이 없었다.

“잘 잘 수가 없지.”

그래, 푹 잘 수 있을 리가. 내 오랜 불면증과 악몽이 아직까지도 매일 반복됐으니까.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면 모르련만, 이제는 또 다른 고민까지 생겨 버렸으니.

‘……뭐가 불안해요, 권이도 씨.’

그날, 권이도에게 러트 사이클이 왔던 날. 우습게도 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권이도의 페로몬이 충분했고, 그가 내 곁에 머물렀기 때문일 거다. 지난 며칠간 쌓여 온 피로 역시
한몫했을 거고.

‘일어났어요?’

다음 날이 되었을 때, 권이도는 잠에서 깬 나를 말끔한 얼굴로 맞이해 줬다. 상냥히 머리를 넘겨 주고


조금 더 자도 된다며 시간을 알려 줬다. 새벽 중에 주변을 다 치웠는지, 지저분하게 뿌려졌던 정액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일 기억나세요?’

나는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잠들기 전 보았던 것과 달리 그는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가를 찌푸린 채 가볍게 대꾸했다.
‘대충.’

‘대충이라면 얼마나…….’

‘아예 안 나는 건 아니고.’

전부 기억하진 못한다는 말이었다. 대충 뭉뚱그리는 게 아니라, 정말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는 듯이.


잠깐 눈을 내리깔았던 권이도는 영 난감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하죠.’

모르는 척하는 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아무리 표정 관리에 능해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뇨.’

‘…….’

‘실수하신 거 없습니다.’

그냥, 복합적인 이유였다. 그가 한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엿보면 안


될 무언가를 훔쳐본 것처럼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드는 바람에. 마지막에 보았던 권이도의 얼굴에서 불가침의
감정을 발견했으니까.

‘다행이네요.’

죄책감이었다. 후회이자 역린이기도 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감정 끝에 그는 실수한 게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를 내비쳤다. 내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상대를 앞에 두고, 나는 차마 그 평온함을
망가뜨릴 자신이 없었다.

“미련한 일이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묻지 않았는데, 이제는 또 기분이 상할까 봐 묻지 못하고 있다. 호기심을
이기는 건 두려움이구나. 직면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게다가 대화도 결국엔 타이밍이라고 했다. 그날 아침에 묻지 못했더니 도무지 물어볼 순간이 오질 않더라.
권이도가 바쁜 건 둘째치고, 진짜 시간이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함께 식사를 못 하는 날도
수두룩했으니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고.”

나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였고 곧장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걸로 모자라 이어진 그 뒷말까지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믿고 싶지도 않았다.

“…….”

드르륵 의자를 움직여 창문 바깥을 내다봤다. 널찍한 도로엔 오고 가는 차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한적했다. 부유감이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나는 갑갑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
퇴근길엔 자격증 학원에 들렀다. 그간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했지만, 앞서 부지런히 수강한 덕에 다음 주
즈음에 조향 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계절 이미지에 맞는 향수를 조향하고, 간단한 필기시험을 치르면 드디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운 건 톡 쏘는 향이 독특한 스파이시 노트였다. 개성이 강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오리엔탈 향료에 섞으면 이국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권이도의 페로몬에도 이것과 비슷한 성분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허무맹랑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일찍 들어왔네요.”

학원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른 시간도 아닌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얘기했다. 비꼬는 건 아니었고, 그냥 담담히 내뱉은 사실이었다.

“식사하셨어요?”

“아뇨, 아직.”

“……아직 안 드셨다고요?”

가볍게 물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근래보다 좀 일찍 들어왔을 뿐, 원래라면 식사를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옷까지 갈아입은 걸 보면 제시간에 퇴근했나 본데, 왜 아직도 밥을 안 먹었냔 말이다.

“혹시 몰라서 기다렸거든요.”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고개를 까딱했다. 보일 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가 제법 뿌듯해 보였다.

“기다리길 잘했네요. 같이 먹죠.”

“…….”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든 탓이다. 혹시 내가


늦은 며칠간 항상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리 생각했다가 괜히 고개를 저었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역시나 식탁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대체로 찬기가
도는 음식에 새콤한 소스를 얹은 메뉴였다. 산미가 감도는 해산물 냉채와 통후추를 뿌린 양갈비, 간장 소스를
곁들인 민어찜이 그것이었다.

나는 오독오독한 식감의 해파리를 씹으며 흘긋 권이도를 살펴봤다. 집에 있을 땐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도저히 서른두 살로는 보이지 않았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제도 잘 못 잤습니까?”

한참 식사를 이어 가던 중,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입 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곤 애매하게


눈을 굴렸다. 늘 대답할 말은 비슷한데 답할 때마다 어쩐지 머뭇거리게 됐다.

“그냥 좀 설쳤습니다.”

역시나 권이도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냥 좀 설친 수준이 아니라는 걸 그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눈가를 찌푸리며 혀를 찼겠지.
“수면제를 바꿔야겠군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 그에게 총 두 가지를 부탁했다. 하나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면제를 처방받을 의사가 필요합니다.’

기존에 먹던 수면제가 다 떨어졌으니, 약을 처방해 줄 의사가 필요했다. 원래는 김 실장이 전해줬으나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병원에나 가기엔 애매하니, 권이도가 연결해 준다면 좋을
듯했다.

‘언제까지고 권이도 씨 페로몬에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반쯤 시위하듯 건넨 말이었다. 네가 나를 독립된 개체로 만들려면 내 불면증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권이도 당신과 함께 잠이 드는 게 아니라,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상담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수면제 정도는 내가 가져다주죠.’

권이도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묻기도 했다.

‘원래 먹던 약이 뭡니까?’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권이도가 그다음 날 곧장 가져다준 약이었다. 최 교수가 늘 처방해 주고, 김


실장이 전달해 주었던 것. 흔히 사용되는 수면제였는데, 문제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마 바꿔도 비슷할 겁니다.”

물론 이게 단순히 약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한차례 최 교수에게 여러 가지 수면제를 처방받아


봤다. 수면 환경을 바꾸는 건 소용 없었고, 그가 조심스레 권유했던 상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불면증이 워낙 심해서요.”

“…….”

살면서 처음으로 최 교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그 또한 차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겠지.

“……그렇군요.”

저와 함께 자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해줄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권이도는 포기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화제였다.

“……다음 주가 론칭이죠?”

그답지 않게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뒤이어 질문 하나가 더 건네졌다.
“학원도 그때까지 다닙니까?”

“네, 그 주에 다 끝날 겁니다.”

다음 주면 바쁜 일정도 어느 정도 일단락됐다. 고생한 직원들을 위해 회식을 하고, 앞으로의 추이를


살펴보며 안정 궤도에 들어서는 일만 남았다. 그때에는 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도 확실히 줄어들 거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권이도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짙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과는 달리 퍽 복잡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주 주말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밥?”

권이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지금 먹고 있는 건 밥이 아니냐는 듯이. 나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가 아직 외식은 안 해봤잖아요.”

집이 아닌 곳에서 식사한 건 약혼식과 장례식 때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우리 둘만의 식사는 아니었으니


외식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말이다.

“제대로 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만약 싫다고 하면 깔끔히 포기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자리라 구색을 갖추고 싶었을 뿐, 집에서 먹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대화를 나누기엔 편할지도 몰랐고.

“식당은 제가 빌릴 테니까…….”

“…….”

“권이도 씨는 몸만 오면 됩니다.”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얘기했다.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양 눈까지 찡긋하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권이도는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기대해야겠네요. 첫 외식.”

자상한 목소리였다. 내 제안이 그다지 껄끄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드시고 싶으신 건 따로 있으세요?”

“아뇨, 정세진 씨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됩니다.”

가볍게 대꾸한 그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언뜻 무표정 같았으나, 그간 권이도를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권이도는 지금 정말로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바쁘면 얘기해요. 식당 예약은 내가 해도 되니까.”


“……그럼 제가 대접하는 게 아니죠.”

괜히 명치에 돌덩이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식사를 청했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미소


짓는 모습이 양심에 찔렸다.

“제가 가 본 곳으로 예약해 둘게요.”

식당은, 역시 통으로 비우는 게 좋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그에게 물어볼 것들과 확인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지나갔던 수없이 많은 의문.

‘나는 너를 따라서 죽었지.’

그가 건네준 상자엔 대체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 내가 그걸 열어 봤을 때,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안에 담긴 게 부정적인 것이라면 부디 마지막에 남은 건 행복이길.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67 화. Boite de Pandore(2)

‘Sejin’의 브랜드 론칭 행사는 명성호텔 연회장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과


마찬가지로 리브라홀에 행사장이 있었고, 프라이빗하게 구성해 초대받은 손님들만 올 수 있는 자리였다.

초대장 디자인부터 행사장 구성까지, 모든 부분에 내 검토가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나는 그쪽으로는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의 조언을 듣고 십분 반영하기로 했다. 다행히 업체 측과 우리의
의견이 크게 갈리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이게…… 초대장이라는 거죠?”

그리고 론칭 행사를 앞둔 날. 나는 이태성과 함께 이희나의 공방을 찾았다. <Mon chou chou>라고


쓰인 나무 간판과 아늑한 공방 내부는 언제 봐도 참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종아리까지 오는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은 이희나는 초대장을 살펴보며 선하게 웃었다.

“예쁘다. 디자인 세진 씨가 고르셨어요?”

“고르는 건 디자인 팀이 했고, 저는 그냥 사인만 했어요.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행사 초대장은 엽서 같은 형태로 안에는 간단한 행사 소개와 반투명한 시향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시향지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난한 향기가 나게 했는데, ‘Sejin’의 대표 향수 중 하나가 될 제품이었다.

“향도 좋네요. 저 오라고 주신 거 맞죠?”

“그럼요.”
우선은 거래처였기에 이희나에게도 진작 초대장이 갔어야 했다. 다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겸사겸사 할
말도 있어서 직접 찾아왔을 뿐. 잠깐 이태성을 통해 줄까도 고민했다가 이제는 구실이 필요 없을 사이라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대표님이 직접 초대장까지 주러 오고…… 출세한 기분인데요?”

이희나는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성격도 좋고, 일 처리도 잘하고, 그간 봐 온
바로는 이태성에게 제법 아깝지 않나 싶다. 물론 이태성도 어디 하나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선 성격이 꽤
무뚝뚝했으니.

“희나 씨.”

이희나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 이번 주에 자격증 수료합니다.”

“세상에, 조향 자격증이요?”

이 말을 하러 이희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내게 길을 알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이희나니까. 그는 별 의미


없이 건넨 말이었을지 몰라도, 사소한 한마디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너무 축하드려요.”

이희나는 마치 제 일이라도 된 양 순수하게 기뻐했다. 아직 시험을 본 건 아니었지만, 수료 시간을 모두


채운 이상 웬만하면 취득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사르르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겠지.

“이제 어엿한 향수 회사 대표가 되셨네요.”

장난스러운 말이었으나 반쯤 진담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주곤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슬슬 돌아갈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잠깐 회사에 들렀다가 별일 없으면 집으로 가도 될 듯했다.

“저는 이제 슬슬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행사 때 뵐게요.”

이희나가 초대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공방에서 나는 달큼한 향기에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섞였다.
이번 행사 이후에 출시될 라인엔 이희나에게 조달받은 향료를 사용한 향수가 포함돼 있었다.

“아, 그리고…….”

나는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고 힐긋 이태성을 돌아봤다. 그사이에 공방을 몇 번이나 왔는데, 이태성은


여전히 늘 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예전엔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나 했더니, 제가 이희나에게 품고 있는
사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랬나 보다.

“이태성 씨는 여기서 퇴근하세요.”

“……예?”

이태성이 눈을 끔벅였다. 짙은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티 나지 않게 이희나를 돌아본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운전은 누가…….”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서요. 아, 차는 놓고 갈 거니까 이태성 씨 마음대로 써도 됩니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대신 다 도착했다는 메시지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역시


시간 약속은 칼이라니까. 정확히 5 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가 참으로 그다웠다.

“그럼 내일 보죠.”

이희나의 공방을 나와 향한 곳은 건물에 딸린 지하 주차장이었다. 미리 등록된 차만 주차할 수 있는 탓에


주차장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몇몇 이름 있는 브랜드의 외제 차와 내가 타고 온 권이도의 차. 그 모든 걸
둘러본 나는 입구와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차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한 명의 남자도.

“…….”

“…….”

특징 없이 차려입은 정장이 그의 성격을 보여 줬다. 투 버튼으로 된 재킷을 깔끔히 여미고, 무채색


넥타이엔 아무 무늬도 없었다. 나는 시선을 올려 얇은 테의 안경까지 확인하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예.”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습관적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넨다. 정중한
태도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김 실장님을 제 쪽으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게 부탁한 두 가지 중 다른 하나. 그건 김 실장을 다시 내 비서로 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능력 좋은 비서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권이도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새로운 비서를 뽑자니 번거로울 것 같고, 이태성 씨한테 계속 비서 일을 시키기엔 복지가 별로인 것
같아서요.’

이태성이 권이도의 사람이라면 김 실장은 해신의 사람이었다. 뭐, 이제는 해신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애매한 포지션이 되었지만 말이다. 다만 나를 정말 완전히 독립시킬 거라면, 내 주변에 있는 그의 사람들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해신…… 아니, 구 해신그룹에서도 내부 기밀을 유포한 비서 실장을 데리고 있긴 힘들


테니까요.’

허울뿐인 구실이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그냥 화풀이하듯 내뱉은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시는 손


내밀지 않을 인연이라고 생각해 놓고, 이렇게 쉽게 불러들이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이게 제가 처음으로 내린 혼자만의 결정입니다.’

그러나 밀려드는 서운함은 그러한 감정을 모두 지워 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할


거라면, 애초에 다른 곳에서 뿌리 뽑지 말았어야 했다. 비가 오면 떠내려갈 미약한 땅이었지만, 그 비를 내린 건
결국 권이도였으니.

‘들어주실 겁니까?’

도발하듯 건넨 말에 권이도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차례 김 실장을 경계하던 그였으니 제


손으로 데려오기엔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퍽 차분한 말씨로 얘기했다.

‘……그게 정세진 씨가 바라는 거라면 내가 의견을 낼 부분은 아니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그가 보이는 반응이 겸손인지 아니면 단념인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표정을 꾸며 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비서로 붙여 주겠습니다. 인수인계를 해야 할 테니 수면제보단 늦겠군요.’

그렇게 지금, 정말 김 실장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해신에서 일할 때 타던 차를 끌고, 내 비서로


있을 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회사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안부를 묻는 대신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아 준 김 실장이 뒤로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동안 그와 내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차는 지하 주차장을 나와 익숙한 길을 따라 회사로 향했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이 정적이 깨지지 않을 듯했다. 어색함을 느끼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김 실장은 평소처럼 ‘피곤하면
눈을 붙여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

운전을 하는 뒷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그 몇 달 사이에 이태성에게 익숙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덩치가


산만 한 이태성과 달리 김 실장은 뒤에서 봤을 때 운전석이 꽉 차 보이지는 않았다.

“용케 이 차가 아직도 있네요.”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넌지시 이야기했다. 앞으로 계속 함께 일할 텐데 이런 상태로 회사에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 외에 물어볼 것도 몇 개 있었고 말이다.

“정리하면서 팔아 버렸을 줄 알았는데…….”

김 실장이 가져온 건 내가 본가에 두고 왔던 차였다. 권이도에게 차를 받는 바람에 굳이 찾지 않았던


그것. 오피스텔에 둔 것도 아니니 분명 처분했을 줄 알았는데, 김 실장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도련님 재산에는 손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재산이라 함은 자동차 몇 대와 오피스텔일 것이다. 현금성 재산은 당연히 못 건드리겠지만, 물건까지


그대로 둘 줄은 몰랐다.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김 실장이 담담히 덧붙였다.
“권이도 전무가 손 써놓은 거 맞습니다.”

“…….”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 놨던 건지, 그 치밀함이 아득할 지경이다. 아무리 서류상 남이라고 해도, 내게
아무런 불똥도 튀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본가에 있던 고용인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볼까. 그리 생각했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문 집사의 안부는


궁금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내가 챙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관심을 두는 것도 월권이었다.

“도련님.”

김 실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홀로 고개를 젓기도 했다.

“아니…… 대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김 실장만큼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AI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진할 때면
꼬박꼬박 호칭을 바꾸고, 벌어진 상황에서 항상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뭐, AI 는 자의로 누군가를 배신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를 보는 대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백미러로 눈을 맞춰 봤자 괜히 기분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할 질문이야 어차피 뻔했으니까.

“저를 왜 다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역시나 김 실장은 내가 충분히 예상한 질문을 건넸다. 거기다 친절하게도,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건네는지까지 설명해 줬다.

“외람되지만, 사실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결코 김 실장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바꾸기엔 그만한 체력과 여유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원래는.”

그래서 솔직히 대답하자, 김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근데 비서가 필요해졌어요.”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다시 나를 보필하게 됐지만, 예전처럼 사적인 부분까지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수면제도 내 선에서 해결하고, 최대한 업무를 분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게 답니다.”

“…….”

김 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층 고요해진 분위기는 아까의 어색함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공허함이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거 알고 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 실장이 이야기했다. 이번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운전을 하고 있는 터라 눈을 맞추진 못했지만 말이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아니, 도련님이 저한테


실망하고 배신감 느끼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뜻 건조한 사과였으나 김 실장 나름의 진심일 것이다. 오히려 절제된 감정이 더 크게 와닿았다. 나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에게 딱히 실망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근데 도련님.”

넌지시 운을 뗀 김 실장이 잠깐 말을 멈췄다. 동시에 신호에 걸린 차도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김


실장은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봤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신혼 때부터 진지하게 입양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무어라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그런


이유였는지는 몰랐다. 그냥 일이 바쁘니까 2 세를 보지 않는 줄만 알았지.

“……처음 듣는 얘기네요.”

“예, 처음 말씀드렸으니까요.”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눈이 살짝 접혔는데 사실 남들이 보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실제로 쉬는 날엔 아내랑 봉사도 몇 번 가고 그랬습니다. 근데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둘이 살고 있고요.”

그 신중한 성정에 입양을 쉽게 결정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물건을 사도 고민하는데 한 생명을 데려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런데 해신에 도련님이 입양됐죠.”

아버지가 나를 주웠을 때, 김 실장은 아버지의 기사였다. 내 나이가 아홉이었으니, 그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주제넘은 건 알지만, 간혹 도련님이 제 자식 같을 때가 있어서요.”

그 말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 또한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 실장이 나를 보는 시선은 자식을 보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절 너무 내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욱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여태껏 차분하던 마음이 파도치듯 크게


흔들렸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명치 언저리가 울렁거렸다.
“도련님을 남이라고 생각해서 말씀을 안 드렸던 게 아닙니다. 내 자식 같으니까,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서운했나 보다. 이미 여러 번 권이도에게 그랬듯이. 나를 쏙 빼놓고 벌어진 상황에, 그걸 알리지조차


않았던 무심함에. 그러는 나야말로 최소한의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 놓고.

“지난번엔 저도 경황이 없어서 설명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몇 마디 해봤는데……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셔도 됩니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김 실장은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기어를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유독 먹먹하게 들렸다.

“다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긴. 내가 김 실장을 잘못 봤던 게 분명했다. 이토록 사사로운 마음을 가질 줄


알았다면 그런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김 실장님은 왜 다시 저한테 오셨습니까?”

나는 잔뜩 복잡한 기분으로 김 실장에게 물었다. 이 마음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그런 건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이 서운함이었노라 깨달은 것만으로 오늘의 할당량이 끝난 기분이었다.

“제가 자식 같아서 돌봐 주려고 오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김 실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지 않으시냐는 말엔 나까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식 같다느니 뭐니 해놓고, 돌봐 줄 나이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건 뭐란 말인가.

“그냥 스카웃 조건이 좋았습니다.”

깔끔한 대답은 그 무엇보다 신뢰 가는 것이었다. 복지를 돈으로 주겠다던 말대로, 권이도가 제법


그럴싸한 조건을 불렀나 보다. 그럼 다른 데서 더 좋은 조건이 오면 거기로 가버리겠다는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김 실장이 운을 뗐다.

“전에 그러셨죠, 이제 내 비서도 아닌 사람을 무슨 권한으로 혼내냐고요.”

가족들을 보고 왔던 날 내가 차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이제는 더 이상 연결 고리가 없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는 허무함을 느꼈더랬다.

“관계엔 구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무심히 튀어나온 말이 귓가에 꽂혔다. 나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김 실장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제가 비서를 관둔다고, 저희가 생판 남으로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 다음 화에 계속

68 화. Boite de Pandore(3)

나도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아주 당연한 얘기였고,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간단한 진리였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무척이나 다르다. 간신히 유지하던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진 그 날, 나는 김 실장과의 인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예전 같은 관계는 될 수 없으리라고, 홀로
결론 내렸단 말이다.

“도련님한테는 제가 단순히 비서일 수 있어도…….”

“……아뇨.”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데, 반대로 머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자식 같다던 말과 자신을 너무 내치지 말라던 말이 아른아른 귓가에 남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약혼식을 치르던 날, 나를 걱정하던 유일한 상대가 김 실장이었다. 권이도의 집으로 들어오던 날, 내가


유일하게 인사를 하고 온 상대도 김 실장이었다. 단순히 비서라서가 아니라 항상 나를 챙겨 준 게 그였기
때문이다.

“김 실장님 말씀 이해했어요.”

권이도가 그랬다. 비서에게 많이 의지하는 타입이냐고. 술에 취해 김 실장을 찾을 만큼 내 삶에 그가


버릇되어 있었으니까. 그러한 일상이 깨어졌단 사실에 상실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

“…….”

그는 조용히 있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한동안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저 멀리 회사가 보일 때가 되어서야 김 실장이 나직이 이야기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차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나는 하염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김 실장이 뒷좌석으로 다가와 정중히 차 문을 열어 줬다. 기계적인 동작이었는데, 가볍게 건넨 말만큼은 퍽
친근하게 들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
도련님이었던 호칭이 다시 대표님으로 바뀌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게 그다지
서운한 기분은 아니라서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행사 준비에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신금융에서는 해본 적 없는 업무들이었지만, 다행히 그간 익숙해진 덕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행사 날이 다가오기에 앞서 권이도에게도 초대장을 건네줬다. ‘Sejin’의 큰 투자자이니만큼 초대


순서에서는 1 순위가 되어야 했다. 공적으로도 한 장 보내 놨고, 사적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권이도는 달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네준 초대장을 살펴봤다. 안에 든 시향지를 흔들어 냄새를 맡아
보곤 느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특유의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나는 동작에, 괜히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었다.

‘무리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그런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향수 회사 론칭 행사에 얼굴을 내비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도. 만약 업무 관계였다면 권이도가 아닌 그의 대리인이 대신 참석했을 것이다.

‘무리를 해야죠. 정세진 씨가 만든 자리인데.’

그런데 권이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얘기했다. 정확히는 본인이 만든 자리건만. 모든 공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초대장을 고이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가 장난스럽게 건넸던 말까지도 기억난다.

‘기대할게요, 정세진 대표님.’

“대표님.”

“……아.”

퍼뜩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내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눈을 내리깔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태블릿 PC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일정 들으셨습니까? 못 들으셨으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뇨…….”

나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눈앞에 있는 거울을 살펴봤다. 명성호텔 리브라홀 연회장 옆에 딸린 관계자실.


벽면에 있는 널찍한 거울로 정장을 차려입은 내 모습이 보였다.

“들었습니다, 일정.”

마침내, 대망의 론칭 행사 날이 되었다. 처음으로 ‘Sejin’을 세상에 공개하고 그동안 준비한 향을


널리 알리는 날. 내가 만든 향수는 아니었지만, 내 이름과 함께 팔릴 물건을 최초로 예약받는 날.
평소엔 최대한 수수하게 입고 다녔지만 오늘은 차림새에 꽤 신경을 썼다. 잘 입지 않는 밝은 색의 정장을
입고, 잘 차지 않던 독특한 디자인의 시계를 찼다. 중요한 날이면 하던 대로 머리도 이마가 보이도록 깔끔히
정돈했다.

“그만 나가보죠.”

나는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김 실장과 함께 관계자실을 나섰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태성이 소리 없이 내 뒤에 따라붙었다. 김 실장이 비서로 온 덕에 그는 다시 기사 겸 경호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긴장되십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내 표정이 굳은 게 그에게도 보였나 보다.
그렇게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굳이 부정하는 대신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너무 조용히 살아서요.”

그간 매스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내 이야기를 쏙 빼놓고 기사를 내보냈다. 정철호 회장의 구속 사실과
이혼 소식은 알렸지만, 그의 오메가 양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리지 않았다. 아마 권이도가 손을 썼으리라고
나는 막연히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하릴없이 나와 관련된 기사가 나게 될 거다. 암암리에 선호 측에 납품하던 것과


공식적으로 브랜드를 론칭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해신의 본부장이던 정세진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대대적으로 공표될 거란 말이었다.

“반응이 어떨지 좀 걱정이 되네요.”

아무리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도, 이건 사업의 일환이었다. 투자자인 선호 측에 최소한의


면은 살아야 할 게 아닌가. 대박을 내진 못해도 망하지는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았단 말이다.

“그런 거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 김 실장은 뭐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성호텔을 빌려 론칭 행사를 열고, 곧장 유명 백화점을 통해 유통되는데 오히려 망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남들보다 한참 앞선 곳에서 출발하니, 걱정은 사치일지도 몰랐다.

“뭐…… 기분상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나는 괜히 손목시계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긴장감이 드는 이유가 단순히 위에 나열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론칭 행사가 끝나고 주말이 되면, 그간 미루고 미루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해야 했으니까.

“이왕이면 시작부터 순탄하면 좋겠군요.”

단계를 밟는다고 해야 할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마무리도 잘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 이


자리를 완벽하게 해낼 필요가 있었다. 권이도가 준비해 주고, 내가 기꺼이 받아들여 내 손으로 일구어 낸 결과를
말이다.

***
우리가 행사를 열 연회장은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 때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명성호텔에 속한 디자이너가
내부 인테리어를 담당했고, 직원들과 함께 향수 배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우리가 주력으로 내놓을
제품과 호불호가 갈릴 법한 제품을 구분해 내부 동선에 맞춰 장식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향수를 판매하는 만큼 행사장 내부 향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입구를 포함한 곳곳에 은은한 디퓨저를
놓아두고 장식품이 있는 근처에는 작은 향초도 켜 놨다. 샘플로 놓아둔 향수와 그에 맞는 시향지도 구비해 놓되
향들이 섞이지 않도록 간격 조절에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향수 샘플과 카 디퓨저였다)을 확인하고, 포장에 하자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펴봤다.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걸어 둔 엽서는 향수를 구매하는 분들이 함께 골라 포장에 넣을 수
있도록 장식한 것이었다.

“대표님,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행사장을 쭉 둘러본 뒤 손님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단상 쪽으로 향했다. 언뜻 살펴본 홀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얼굴을 찾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인사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온다고는 했지만, 내게 말을 걸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반지를 끼지 않았고, 밖에서는 그와의


연결 고리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행사장에 온다고 해도 모르는 사이인 척 악수나 주고받지 않을까
싶다.

“대표님, 계단 조심하십시오.”

김 실장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회자가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홀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내게 건네진 마이크를 받았다. 사회자가 흠흠
헛기침을 하곤 먼저 운을 뗐다.

“귀빈 여러분들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일부러 자유로운 분위기의 행사를 기획했지만, 우선은 최소한의
과정을 밟아 시작해야 했다. 가령 내 인사라든가, 간단한 제품 설명 같은 것들. 앞서 대본을 준비해 놨던 터라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오랜 시간 버릇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고 너무 과하지 않게


눈웃음을 지었다. 거래처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직원들을 대할 때처럼 적당히 사무적인 표정이어야 했다.

“‘Sejin’의 론칭 행사를 찾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말을 꺼내자마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람을 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지금


여기는 내가 평가받을 자리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착한 아들을 흉내 낼 필요도, 사랑받고 자란 겸손한 후계자의
탈을 쓸 필요도 없단 말이었다.

“저는 대표 정세진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익숙한 얼굴이 반, 그리고 익숙하지 못한 얼굴이 반.


평소라면 품평하듯 나를 바라봤을 시선들이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기대감과 흥미, 딱 그 정도의 감정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외워 두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러 투자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그간


고생했던 직원들에게 수고했단 말까지 전했다. 본격적으로 패키지 스토리를 설명하기 전에 ‘Sejin’에서 준비한
소정의 선물을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저희 ‘Sejin’에서는…….”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은 말을 하면 할수록 서서히 돌아왔다.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고, 사람들은


오로지 나라는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제품부터 시향하시길 추천 드리겠습니다.”

권이도가 보고 싶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가 눈앞에 있었으면 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다른 방법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홀 내부를 아무리 돌아봐도 권이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웬만하면 눈에 띌 사람이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모든 연설이 끝나고 또 한 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분 좋은 표정의 손님들과 남몰래 엄지를


들어 주는 직원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역시나 권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잔뜩 취한 것처럼 들렸다. 누구는 발음이 샜고, 또 누군가는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비틀거리며 꾸벅꾸벅 인사하는 직원들을 향해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출근은 천천히들 하세요.”

‘Sejin’의 론칭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직원들과 함께한 회식 자리까지 마무리가 됐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늘 가던 소고깃집 대신 코스 요리가 나오는 일식집을 다녀왔다. 회를 포함한 해산물을 잔뜩 먹은
직원들은 마찬가지로 사케 역시 한가득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채로 일식집을 나섰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이태성이 대기하던 차에 올라 뻐근한 눈을 꾹꾹 눌렀다. 김 실장은 미리 퇴근시켰고, 그 탓에


이태성이 회식이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살펴보곤 느릿느릿 차를 출발시켰다.

“…….”

어두컴컴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간판에 들어온 불빛들이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게 있었던 탓인지, 차 안이 유독 조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태성 씨.”

“예.”

나는 눈을 깜박이며 느릿느릿 이태성을 불렀다. 론칭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예상했던 것보다 예약된
향수도 많았다. 새로 출시된 향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며, 농담으로라도 나쁜 말을 하는 손님도 없었단 말이다.

“별건 아니고…….”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착잡할까. 공허한 기분과 함께 물밀듯 허무함이 밀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은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권이도 씨, 오늘 보셨습니까?”

‘무리를 해야죠. 정세진 씨가 만든 자리인데.’

분명 온다고 했는데, 권이도가 끝까지 오지 않았다. 인사는 건네지 못한다고 해도 얼굴은 내비칠 줄
알았건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행사장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권이도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고, 그가 등장하는 순간


자연스레 이목이 끌렸을 터다. 오고 가는 손님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넸는데 그중 당연히 권이도는 없었다.

“아뇨, 오늘은 못 뵀습니다.”

이태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했다. 역시나, 단순히 내가 그를 놓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이의 입으로 마지막 확신을 듣자마자 머리가 차게 식어 버렸다.

“……그렇군요.”

언제부터 이렇게 서운함이 쉬워졌을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울컥 억하심정이 들었다. 무리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달큼하게 웃지라도
말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자꾸만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권이도가 나를 지나치게 오냐오냐한 모양이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뻔뻔한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 입으로 무리하지 말라고 한 주제에 이토록 아쉽단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차는 집으로 향했다. 애써 잡념을 떨치려고 노력해 봤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기분만 더 나빠져서 막상 차에서 내릴 땐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

나는 이태성에서 묵례를 건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권이도를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리로는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애써 곱씹던 말들이 새하얗게 휘발됐다.

“늦었네요.”
예의 그 우아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 줬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아침에
세팅한 그대로였다. 혹시 지금까지 일을 했던 걸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바쁘셨나 봐요.”

수려한 눈매가 느리게 깜박였다. 짙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이내, 발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빴죠.”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고개를 까딱했다. 왜일까,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얼 얘기하는지도 모르면서, 권이도는 담담히 덧붙였다.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요.”

- 다음 화에 계속

69 화. Boite de Pandore(4)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일을 하는 입장에서 갑자기 생긴 돌발 상황에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안다. 론칭 행사 정도야 사실은 별것도 아니니,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 연락 한 번만 해주지 그러셨어요.”

그런데도 툭 튀어나온 말이 이따위였다. 미묘하게 엇갈린 시선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기다렸거든요. 권이도 씨가 무리를 해서라도 온다고 하셨으니까.”

이런 말을 그에게 하는 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어리광 비슷한 행동이었고, 권이도가


기분 나빠해도 할 말은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말이었는데, 한 번 입에 올리니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계속 찾았는데, 끝날 때까지 안 보이시더라고요.”

왜 자꾸, 그가 일부러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바빴다는 말이 고작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행사에 오고 말고는 권이도의 마음인데, 자꾸만 뻔뻔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권이도는 천천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가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몇 번이나 들은 사과였다. 내게는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는 미안하다는 말이 이다지도 쉽다.

“…….”

“…….”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은 상대방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그 시선이 좇는 건 서로가
아니었다. 그의 사과가 거짓 같지는 않았으나, 진짜 속내는 감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죠.”

나는 넌지시 운을 떼며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사과였던가. 기분이 풀리지 않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브랜드 론칭했어요. 권이도 씨 덕분에.”

이 한마디를 행사장에서 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 사이는 밝히지 못해도 적어도 감사 인사는 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다.

“반응도 괜찮았고…… 기사도 긍정적으로 났더군요.”

“…….”

“아마 수익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끼웠다. 퍽 그럴싸한 시작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비록 그


과정에 권이도가 없었을지언정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 권이도 씨 덕분이에요.”

“…….”

권이도는 내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짙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


긴긴 침묵 끝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걸 바라시는 줄 알았는데요.”

축하한다는 말이 듣고 싶던 모양이다. 그가 주는 모든 걸 받았으니, 권이도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정세진 대표’라는, 그가 안겨 준 직책으로나마 당당히 그의 앞에 서고 싶었단 말이다.

“그러게.”

그런데 권이도는 영 알 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은 긍정적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느릿느릿 두 눈을 깜박인 권이도가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했다.

“그게 내가 바라던 거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대답해 놓고 전혀 아니라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불만……


아니,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원인 모를 눈빛에 기시감이 들었다.

“정세진 씨.”

“……네.”

그 부름이 오늘따라 참 낯설었다. 권이도는 가만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 주려고 장미를 샀어요.”


보면 볼수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분명 웃고 있는데,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질 않다니.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한 눈매가 처연한 빛을 띠었다.

“근데 이번엔 못 주겠군요.”

왜 못 주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장미를 어떻게 했냐고, 그렇게 묻지도 못했다. 권이도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가장한 채 부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끝마쳤다.

“쉬어요. 피곤할 텐데.”

그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긴다. 점점 멀어지는 그에게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향기 하나가 느껴졌다. 그의 페로몬에 섞인 은은하고 달큼한 향기는, 행사장에 있던 디퓨저 냄새와
비슷했다.

***

바로 어제가 회식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모두 두어 시간 늦게 출근했다. 나도 천천히 나올 생각이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 바람에 평소처럼 출근하고 말았다. 늘 먹던 수면제는 역시나 효과가 없었고, 잠깐 잠이 들 때면
계속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악몽을 꿨다.

‘오늘 늦을 겁니다.’

아침 식사 때, 권이도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혹시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뒷말은 퍽 다정했다.

‘학원 조심히 다녀와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권이도가 평소와 달랐다. 오늘
아침.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니 왜
그러냐고 묻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모르는 척 인사를 나누고 회사에 출근했다. 오늘도 권이도는 내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주차장에 서서 차 뒤꽁무니를 바라봤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 모습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단 생각이
들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업무 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제부터 ‘Sejin’의 본격적인


시작이었기에 내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장난 아니게 많았다. 새삼 김 실장을 데리고 와서 다행이지. 그가 일정
관리를 해주지 않았다면 여러모로 벅찼을 터였다.

퇴근길, 나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자격증 학원으로 향했다. 오늘 마지막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면 모든 강의를 수강했다는 수료증이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면 시험 결과가 나오고, 또 며칠 뒤에는
자격증이 발급될 거다.

“브랜드 론칭하신 거 봤어요.”

이희나와 비슷한 이미지의 강사는 모든 시험이 끝난 내게 상냥히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언젠가 학원 홍보를 해달라는 장난스러운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미리 챙겨 두었던
향수 샘플까지 선물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학원을 나섰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밖으로 나왔을 땐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는 게 계절이 아닌가 싶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태성과 함께 대기하던 김 실장은 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정중히 이야기했다. 무슨 수험생이라도 대하듯


진심이 듬뿍 담긴 인사였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고생은요.”

사실, 내가 딴 건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고 남은 자격증은 두 단계가 더 있었다.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으면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혹시 관심 있으면 말해 달라며 학원 강사가
알려 준 것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더라고요.”

이희나의 말이 맞았다. 나는 학원에서 받은 수료증을 만지작거리며 새삼스레 생각했다. 성과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던 말대로, 내 손으로 무언가 이뤄 낸 결과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정 부담스러우면 우선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봐요.’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문득 권이도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정한 대로라면 나는 오늘부로 대표직을


내려놔야 한다. 짧은 유예 기간은 끝났고, 그와 약속한 때가 다다랐으니까.

“김 실장님.”

“예, 대표님.”

“제가 해신에서 몇 년 일했죠?”

“5 년 조금 넘게 일하셨습니다.”

“5 년이라…….”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곧장 해신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20


대의 절반을 바쳤으니 그리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하나 본부장을 관두는 데는 하루가 걸렸고, 그 사실에 미련을
가졌던 적은 없다.

그런데 왜, 고작 몇 달 일한 회사를 관두는 건 이토록 아쉬울까.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손에서 놓자니 입 안이 썼다.

욕심이 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내 이름이 붙은 회사에,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수료증에.


하물며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이 순간까지.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냥 짧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 깜박할 새에 차고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태성과 김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월요일에 보자고 말한 뒤 집으로 올라왔다.

집에는 역시나 권이도가 없었다. 오랜만에 텅 비어 버린 집을 보니 허전한 기분이 물씬 밀려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누군가의 온기에 익숙했다고. 본가에 살 때도, 오피스텔에 살 때도, 나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다.

“언제 오려나…….”

많이 늦지 않으면 저녁 식사는 함께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기다렸듯, 나 또한 그를 기다리면 될 테니까.


식사를 마친 다음엔 늘 그랬듯 대화를 나누고, 내일 있을 우리의 외식을 확실히 정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권이도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갔다. 고용인이 풀어 준 입욕제는 몽실거리는 거품이


올라오는 배쓰 밤이었다. 솔솔 풍기는 냄새가 지나치게 달큼했지만 피로를 풀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목욕을 다 하면 온실에서 책이나 읽으며 권이도를 기다려야지. 조명을 달아 놨으니 어두울 때 가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두 시간만 머물다가 돌아오면 권이도도 퇴근하지 않을까. 즉흥적인 계획이었으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온실에 다녀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권이도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세진아.’

잠결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정하다면 다정한 그 목소리는 내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부르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그리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세진아.’

나는 이 악몽이 근래에 더욱더 심해진 그 내용이라는 걸 알았다. 약혼식을 앞뒀던 날,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누군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거칠게 뒤로 젖히던 그 감각.

‘창부처럼 굴어야지.’

수치심을 비롯한 모멸감은 그동안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벌어진 입술 틈새를 억지로 파고드는 살덩이도
이제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적응이 되었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으웁…….’

‘입 똑바로 벌려.’

굵고 기다란 성기는 구역질조차 하지 못할 만큼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입천장을 긁으며 들어와 혀뿌리를


꾸욱 눌러 왔다. 내가 입을 아무리 벌려도 도무지 머금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정세진.’

목구멍을 억지로 벌리는 그 감각은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것이었다. 목울대가 불룩 튀어나올 것처럼 깊이
삽입된 성기가 마침내 뿌리 끝까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반쯤 빠져나갔다가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는다.

‘욱……!’

나는 이다음에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알았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오므리는 바람에 두꺼운 성기에 앞니가
닿는 순간. 움직임을 멈춘 상대가 거칠게 내 머리채를 잡아당겨 내던지는 것까지.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냉랭한 목소리가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상대방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눈물은 쉴 새 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서러움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을 기었지만, 쏟아지는 페로몬은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것이었다.

“……허억!”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리멍덩하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새것
같은 구두 앞코가 아닌 높디높은 방의 천장. 그리고 피부에 닿는 건 칼로 저미는 듯한 페로몬이 아닌 포근하고
보드라운 이불.

“하아,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갑게 식은 이마를 매만지며 찬찬히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와 은방울꽃, 그리고 내가 만든 향수병과 소설책 두 권까지.

“……언제 잠들었지.”

내 방이었다. 권이도의 집에 있는, 그가 마련해 준 나만의 공간. 내가 무릎을 꿇을 필요도 모멸감을


느낄 일도 없는 아늑한 안식처.

나는 상체를 일으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고작 두어 시간을 잔 건지,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권이도는 집에 돌아온 걸까. 그런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향했다.

복도는 밤이 늦은 탓에 어둡기만 했다. 정체 모를 불빛에 의존해 걷는 사이, 내가 실내용 슬리퍼를 신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맨발에 카펫이 밟혔지만 굳이 방으로 돌아가 슬리퍼를 신고 오기엔 또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마저 권이도에게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왔는지만 확인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의 방에 다다를 즈음, 나는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서재의 불이 켜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

아, 퇴근했구나.

그 사실엔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정체 모를 불안감이 끝도 없이 떠올라서, 당장이라도 권이도의 페로몬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권이도가 서재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불빛에 홀린 건지, 그게 아니면 잠이 덜 깬 건지. 마치 불나방처럼 서재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역시나 긴장감이 들었다. 일전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공포였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문고리에 얹고,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순간엔 노크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다음이었고,
나는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봤다. 원목으로 된 가구들과 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단 한
명의 사람.

“…….”

“…….”

권이도가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기품 있는 페로몬이 느껴지는 권이도. 방금 퇴근한 것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주제에 평소와 달리 머리는 조금 흐트러진 권이도.

“……안 잤습니까?”

그는 다급히 책상에 내려놨던 무언가를 서랍에 넣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철컥 서랍 잠그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가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총이라는 사실을.

“아…… 자다가 깨서요.”

부적 같은 걸까. 할아버지가 선물한 것이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지고 있던 걸까.

권이도가 종종 새벽을 서재에서 보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해 방을 비워 줬을 때, 그가 있을


만한 곳은 오로지 서재밖에 없었다. 다만 이렇게, 총을 만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여기서 뭐 하세요?”

“…….”

그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찬찬히 내 모습을 살펴봤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코앞까지 걸어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었다.

“……권이도 씨?”

그리고 그가 한 건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숙이는 것이었다. 내가 주춤 놀라 뒤로 물러나자, 조심스레


오른 발목을 그러쥐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가 내 발을 가져가 제 슬리퍼를 신겨 줬다.

“발이 찬데.”

“…….”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대쪽 발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무리 여름이어도 맨발로 다니지 말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저야말로 맨발로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남들이 보면 기함할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가서 다시 자요. 난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가 내리는 축객령은 다른 때보다 더 단호한 감이 있었다. 친히 문까지 열어 주는 그를 보고 나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살며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기다릴까요?”

“…….”
권이도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는 풍경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까…… 같이 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동안 좀 드물지 않았나. 그의 러트 사이클을 마지막으로 한 침대에서 잠을 잔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라도 좋을 듯했다.

“……아뇨.”

그러나 권이도는 나를 바라본 그대로 느리게 대꾸했다. 나직이 내려앉은 음성이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오늘은 안 되겠군요.”

왜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내 등에 손을 얹어 서재 밖으로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손길은 아니었으나, 거부하기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자요. 내 방에서 자도 되니까.”

결국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그를 뒤로한 채 서재를 빠져나왔다. 언제 퇴근했냐고 질문도, 내일의 약속을


기억하냐는 질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를 둔 채 내 방으로 돌아왔을 뿐.

그날은, 서재로 향하기 전에 꾸었던 것과 이어지는 내용의 꿈을 꿨다. 누군가 나를 억지로 바닥에
엎어뜨려 제압하는 꿈. 바르작거리는 몸을 내리눌러 개처럼 다루던 끔찍한 꿈.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나를 강간하는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권이도였다.

- 다음 화에 계속

70 화. Boite de Pandore(5)

악몽의 시작이 언제였더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습관처럼 이어지는 악몽의 출처를 찾으려고 한 적은 없고, 그게 현실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으리라 추측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꿈에 권이도가 나왔다. 그저 꿈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장면들이었다. 당연히 그
여파는 현실까지 이어졌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한참을 침대 위에 멍하니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히


머릿속에 남았다. 우성 알파의 힘에 짓눌려 처참하게 무너지던 그 순간은 내가 상상하던 그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다.

권이도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권이도를 보았다간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 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두려움이 꿈과 현실의 감각을 모호하게 무너뜨렸다.

“……출근하셨다고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주방으로 내려갔을 때 권이도는 집에 있지 않았다. 고용인은 권이도가 먼저


출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주말에 출근하는 거야 예삿일이라지만
식사까지 거르고 나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홀로 식사를 마치고 소설책 한 권을 챙겨 온실로 향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엔 주말마다 조향 공부를


했지만, 다음 자격증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여가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한 이태성은
묵묵히 나를 쫓아 온실로 따라왔다.

온실에는 고용인이 준비한 수국 꽃차가 놓여있었다. 계절을 고려해 차가운 차였는데, 파란 색감의 꽃잎이
무더운 여름날과 퍽 잘 어울렸다. 보이는 것과 달리 쌉싸름한 맛 때문인지, 이태성은 한입 머금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주말인데 이희나 씨 안 만납니까?”

아, 꽃차가 아니라 나 때문인가.

“……그게 대표님이 물어보실 말입니까?”

이태성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게 제법 어이가 없나 보다.


하긴, 주말을 빼앗고 있는 당사자가 묻기엔 좀 뻔뻔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퇴근 후에 만날 수도 있죠.”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놨다. 생각보다 향은 진하지 않았고 꽃잎의 색도 물에는


우러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태성이 조용히 있는 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보다 이젠 아닌 척도 안 하시는군요.”

그렇게 모르쇠로 굴더니 관계가 확실해지긴 했나 보다.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오냐고 시치미를 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남의 연애사에 왜 이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게 ‘연애’사이긴 한가 보네.”

“…….”

자꾸 이렇게 놀려 버릇하면 안 되는데. 무뚝뚝한 주제에 반응이 재밌어서 매번 건드리게 된다. 내가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그러실 때마다 진짜 주책입니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제가 대표인걸.”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술 더 떠 그래서 어떻게 잘된 거냐고 묻자,


마지못해 책 취향이 맞았다고 대답해 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한참 간격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표님께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감사할 일이 있던가. 마땅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뭐를요?” 그렇게 되묻는 내게


이태성은 어쩐지 멋쩍은 기색으로 덧붙였다.

“책 말입니다. 대표님께서 권하지 않으셨으면 평생 안 읽어 봤을 거라…….”

머뭇거리는 말투가 이태성답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영 민망한가 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덕에 이희나와 잘됐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이태성 씨 정말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위협적인 표정이었으나 역시나 내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입매를 당겼다.

“꼭 책이 아니었어도 잘됐을 겁니다. 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잘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되더라. 책이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을 거다. 아마 비슷한 책을 읽지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에 연이 닿았겠지.

“정 감사하면 얘기나 더 해주셔도 되고요. 남의 연애가 재미있을 줄 몰랐네.”

장난스레 건넨 말에 이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마움이 싹 달아난 얼굴이었다. 그는 차라리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말을 돌렸고, 나도 더 이상 무어라 묻지는 않았다.

대화를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정신을 차리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고,


이태성은 은근히 눈치를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길 채근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작 세 페이지가 남은 소설책을
들고 온실을 나서야만 했다.

오후가 지날 즈음엔 권이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좀 더 걸릴 것 같으니 식당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 그리 생각하며 장소와 시간 따위를 알려 줬다. 어차피
외식을 할 거라면 굳이 한 집에서 출발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고 그와의 약속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론칭 행사를 준비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입고 갈 옷을 고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결국 고른 건 무난한 디자인의 회갈색 정장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반지를 꼈다. 은색의 링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힌 권이도와 내 약혼반지. 이제는 자국도
모두 지워진 터라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기분에 반지를 만져 보던 나는 문득 다
늦은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

반지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호수를 알려 준 기억도 없건만 맞춘 것처럼 손에 꼭 들어맞았다.


옷이야 눈대중으로 때려 맞췄다고 해도 이건 나조차도 사이즈를 모르는데.

“……이것도 물어봐야겠네.”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품은 의문과 그에게 물어야 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됐다.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으니 말을 더듬거나 떨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향수까지 뿌렸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를 손목에 뿌리고, 목
뒤에 가만히 대고 있다가 떼어 냈다. 그럼에도 좀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그 위에 내가 그의 페로몬을 본떠 만든
향수까지 한 겹 덧씌웠다.

꽃향기와 나무 냄새, 두 가지가 섞인 잔향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마치 그와 몸을 섞을 때면 느꼈던


페로몬처럼 미미하게 남은 긴장을 풀어 주는 듯했다. 물론 그보단 훨씬 모자랐지만, 은은하게 코끝에 스치는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후…….”

오늘이 지나면, 권이도와 내 사이가 어떻게 바뀔까. 권이도는 과연 내가 물어보는 것들에 솔직히 대답해
줄까. 만약 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각은 그 중간 즈음에서 억지로 끊어 버렸다. 계속 생각하다간 기껏 날까지 잡아


놓고 모든 게 무용지물로 돌아가리란 기우 때문이었다.

지금 드는 불안감이 부디 현실이 되지 않길.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였다.

***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은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양식집이었다. 재계 유명 인사와 국회의원들도 종종


찾는 곳이었고, 나도 아주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몇 번 와본 기억이 있다.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식당답게 음식의 질과 맛 역시 훌륭했다.

처음엔 한정식집을 예약하려고 했으나, 내가 자주 가는 곳이 의선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곳으로


골랐다. 의선당은 권이도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선호그룹의 요식업 계열사였다. 권이도에게 대접하는 식사를
그와 연관된 곳에서 할 수는 없었으니까.

“길이 많이 막히네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움직이는 사이 바깥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찍 출발한 덕에


시간은 넉넉할 듯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하니 식사 중에 볼 야경이 참 예쁘겠구나. 여러모로 중요한 대화를 하기엔
안성맞춤인 분위기가 될 터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까지는 20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이태성을 돌려보내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해 주고, 일행이 오면 음식을 준비해 주겠다며
정중히 물러났다.

이 시간대를 모두 빌린 덕에 홀에는 나와 직원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초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예상과는 달리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오죠.’

그때 그 야경은 굉장히 예뻤던 것 같은데.

“…….”

둘과 혼자의 차이일까. 반짝이며 부서지는 조명에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1 분 1 초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권이도 없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권이도를 기다리길 15 분. 그는 약속 시간 딱 5 분 전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웨이터를 따라 들어오는 권이도의 모습이 보였다.

“…….”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는데 몸이 굳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고, 고작 하루


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뇌리에 각인돼서.

그는 늘 그랬듯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정장 차림이었다. 어깨에서 딱 떨어지는 재킷과 빈틈없이 채운


베스트 단추가 탄탄한 상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출근할 때와 비슷한 복장이었는데, 각을 맞춰 넣은 행커치프
때문인지 이상하리만치 신경 쓴 태가 났다.

“오래 기다렸죠. 배고플 텐데 미안해요.”

권이도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나긋이 사과를 건넸다. 의자에 앉는 그 별거 아닌 동작조차 권이도가 하니


우아해 보였다.

“길이 좀 막혀서…… 왜 그렇게 봅니까?”

“……아뇨.”

나는 떠듬떠듬 입을 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다. 곧게 뻗은 목과 반듯한 어깨, 그리고 다시 수려한 얼굴까지.

“오늘 되게…… 신경 쓰셨네요.”

“…….”

권이도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알아주니 고맙군요.”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을 뿐.

“중요한 날이라 신경을 좀 썼어요. 겸사겸사 할 얘기도 있고.”

“중요한 날이라니…….”

나와의 외식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내게는 엄선된 날이지만 그에게는 흔해 빠진 하루 중 하나일 텐데.


그보다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이 거슬렸으나, 우선 나는 권이도에게 양해를 구했다.

“메뉴는 제가 골라 놨고, 편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한 번에 내어 오라고 했어요. 괜찮으시죠?”

사실 안 괜찮다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나는 일부러 뻔뻔하게 물었다. 다행히 권이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와인 병을 들고 다가왔다.

“와인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따라 준 와인은 살짝 산미가 감도는 화이트와인이었다. 이름과 연도, 풍미 따위를 설명해


줬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감흥 없는 눈으로 와인 잔을 보고 있었다.

권이도와 내 잔이 모두 채워지고 곧이어 주방장이 요리를 내어 왔다. 설명을 최대한 간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기에 메뉴마다 간단히 이름과 재료만 소개해 줬다. 물론 요리에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답게 그마저도 긴
편이긴 했다.

“세계 3 대 진미인 오세트라 캐비어와 블랙 트러플, 푸아그라로 만든 아뮤즈 부쉬입니다. 이쪽은 저희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버터와…….”

코스로 나와야 하는 요리가 한 번에 나온 탓에 테이블 위에 음식이 빼곡히 채워졌다. 나는 차례차례 내어


온 요리를 모두 확인하고 주방장에게 살짝 눈짓했다. 눈치 빠른 주방장이 황급히 설명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비켜
줬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그에 권이도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나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긴 힘들죠.”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근사한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잘 먹을게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
역시 달큼하기 짝이 없었다. 이 자리가 성공적으로 끝나리라고, 그런 환상을 가지게 될 정도로.

이름깨나 있는 레스토랑답게 요리는 굉장히 맛있었다.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고,
그사이 와인을 두 잔 정도 비웠다. 권이도는 ‘Sejin’의 론칭을 축하하며 간략히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물어
왔다.

“곧 홍보 모델이랑 미팅을 할 예정이에요. 광고도 다른 버전으로 하나 더 찍을 거고. 카 디퓨저 쪽은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판매하는 쪽으로 해볼까 합니다.”

“백화점에 입점된 디스플레이는 확인해 봤어요?”

“우선 사진으로만 보고 받았고, 조만간 시간 내서 다녀오려고요. 아무래도 첫 론칭이니까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투자자로 있기 때문일까 그는 ‘Sejin’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가능한 한


생산적인 계획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도, 내심 신경 쓰였던 참이니까.

그런데 묵묵히 있던 권이도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기획팀이…….”

“…….”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나는 이야기를 끊고 슬며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심기가 불편한 건가 싶어서. 물론 그건 아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뇨, 그냥…….”
역시나 그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입매를 당기며 눈가를 찌푸렸다.

“괜히 욕심이 나서.”

무슨 욕심이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권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린 것이다.

“다른 얘기를 하죠. 어제는 잘 잤습니까?”

“아, 어제…….”

나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뭉뚱그렸다. 문득 다 잊어 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억지로 제압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이어 가던 그 악몽이.

“……늘 비슷합니다.”

“잘 못 잤다는 뜻이군요.”

권이도는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권이도가 나직이 운을 뗐다.

“보니까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다. 잠든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자, 그런 나를 푹 잘 수 있도록 재워 준 사람이었으니.

“무슨 꿈을 꾸는 겁니까?”

“……음.”

딱히, 대답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질문을 듣자마자 입이 간질거렸다. 입 안에 한가득 이야기가 담겨서
툭 내뱉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모든 걸 묻기 전에, 나부터 솔직해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강간당하는 꿈을 꿉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선호 측에서 나를 정신병자 취급할
거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고…… 가끔 이유 없이 꾸더군요.”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권이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서서히 입꼬리가 내려오더니 이내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나를 응시한다. 그래서 노파심에 괜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딱히 트라우마 같은 건 아닙니다. 제가 잤던 상대는 권이도 씨밖에 없거든요.”

“…….”

일순, 권이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멍하니 넋을 놓았던 그가 한 타이밍 늦게 물었다.

“……상대가 나뿐이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요?”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 내가 몸을 섞은 상대는 권이도밖에 없었다. 애초에 만나는 사람이 없었으니,


섹스는커녕 키스조차 유일했다.

“권이도 씨뿐입니다. 처음부터 다.”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이자, 권이도가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시선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괜히 이런 말까지 해버린 게 멋쩍어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런가……. 어젯밤엔 그 상대가 권이도 씨로 나오더군요.”

- 다음 화에 계속

71 화. Boite de Pandore(6)

나를 납작 엎드리게 해 개처럼 강간하던 사람.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다던 그 냉랭한 한마디가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잊히질 않았다. 말을 하는 지금조차 원인 모를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 정도로.

“웃기는 일이죠.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미소를 그렸다. 억지로 말아 올린 입꼬리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딱히


무언가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냥 말문을 트기 위한 초석이면 모를까. 내가 이런 꿈을 꾸었고 솔직하게
말하니, 너도 내가 묻는 부분을 솔직히 답해 달라고.

“아무튼 그래서…….”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던 권이도가


이번에야말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찬물을 맞은 것처럼 차게 식은 얼굴로 미동조차 없이 숨을 참고 있어서.

“……권이도 씨?”

조심스레 권이도를 불렀다. 그는 그제야 느릿느릿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마치 욕조 밖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때처럼, 무언가에 놀란 듯 아득한 표정이었다.

“…….”

“…….”

왜 이런 표정을 지을까. 잠깐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못 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으면…….”

“……아뇨.”
더디게 대답한 권이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는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조적으로 들렸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페로몬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우성이
아니라면 몰랐을 미미한 변화였는데, 가까이 붙어 앉은 게 아님에도 그의 페로몬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

나는 말없이 권이도의 동태를 살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좋지 못한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드러난 입매는 어색하게 굳어 있고 얼굴을 가린 손끝이 덜덜 떨렸다.

“권이도 씨.”

나는 조금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공포감이 내게도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가 왜 이러는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음에도 안쓰럽단 생각이 들 정도다.

“혹시 어디 안 좋으면…….”

“……정세진 씨.”

뚝, 내 말을 끊은 그가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으나, 여전히 그 짙은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감질날 만큼 느리게 눈을 깜박이곤 나직이 운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본능적인 긴장감이 어깨를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겸사겸사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내가 이날을 기다렸듯, 그 또한 무언가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세요.”

권이도는 내 허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눈가를 찌푸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에 시선을 고정하자,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삼스럽지만…… 브랜드 론칭 축하해요. 그 회사는 오롯이 정세진 씨 거니 앞으로도 잘 키웠으면


좋겠군요.”

“……아뇨, 다 권이도 씨 덕분인걸요.”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권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투자만 했고, 그 과정엔 손댄 게 없어요. 시작을 정세진 씨가 하진 않았어도 이제는 정세진 씨가
일구어 낸 회사가 맞죠.”

몇 달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모든 과정에 내 손길이 닿은 건 맞았다. 이다음에 있을 프로젝트 역시


직원들과 내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정 부담스러우면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보라고.”

왜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수료증을 받고 나왔던 그 순간부터 내내 생각하던 것을.


“정세진 씨, 그 회사에 계속 다니고 싶습니까?”

약혼식 날, 그에게 들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본부장으로 계속 일하고 싶냐고 너그럽게 물었던 그 목소리.
그렇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것처럼 기회를 주었던 그 질문 말이다.

‘아뇨, 말씀하신 조건에 맞추겠습니다.’

그 당시엔 내가 해야 할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렇다 할 미련도 없었고, 딱히 그에게 밉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이번엔 정말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도 되지 않을까.

“……네.”

“…….”

“계속 다니고 싶습니다.”

내 말에 권이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어 놓은 얼굴이 완벽한 미소를 그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으나, 왜인지 딱히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음 컬렉션도 기대하죠.”

아마 권이도는 처음 회사를 넘겨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을 거다. 기간을 주는 척해 놓고,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짐작했겠지. 끝내, 자신이 주고자 한 물건을 다 안겨 줬던 사람이니까.

“자격증 수료한 것도 축하합니다. 일 다니면서 자격증까지 땄으니 앞으로 뭘 하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말씀 감사합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축하를 들을 뿐인데,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모든 건 그의


진짜 용건을 위한 밑밥이고, 그 용건이 내게는 결코 달가울 내용이 아닐 것처럼.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

그 말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미미하게 피어오른 의심이 그의 모든 말을 수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인사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미심쩍은 내용들이.

“갑자기 그 집에 들어와서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 압니다. 내가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정세진 씨한테
곤란한 일도 많았을 거고.”

작별 인사 같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지금껏 고생했으니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정확히는 내가 한 건 고생이 아니라 호사였는데 말이다.

“정세진 씨.”

“……예.”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그가 하는 말들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슬슬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날인 것 같으니까 얘기하죠.”

머리털이 삐쭉 섰다. 본능적인 촉이 이다음에 나올 말을 어렴풋이 예상했다. 그래서 황급히 그의 말을


끊으려던 찰나였다.

“잠시만요, 권이도 씨 지금…….”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툭, 튀어나온 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주변에 이명까지 들렸다.
내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무의미한 약혼은 이제 끝내야겠죠.”

내내 우려하던 현실이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지 몰랐다. 아버지가 잡혀갈 때부터 걱정했던 문제. 내내
품고 있었으나 미처 해소하지 못한 의문.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나가도 좋아요.”

이 근사한 식사는 우리의 약혼이 끝나는 자리였나 보다. 그제야, 나는 앞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권이도의 왼손에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

이 약혼의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일까. 그 사실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처음 약혼한 그때부터,


아버지가 구속되던 그 날까지. 권이도와 통성명을 나눴던 그때부터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이 들던 그 날까지도.

‘우리가 약혼한 사실은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양가 가족들밖에 모릅니다. 해신 쪽 사람들은 입막음을


해놨고, 선호 쪽 사람들은 애초에 알릴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끝을 맺을 줄은 몰랐다. 평생 지속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끝이


이토록 허무한 통보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가 또박또박 내뱉은 말들이 내게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세진 씨는 그냥, 나와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처럼 지내면 됩니다. ‘Sejin’의 대표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고.’

내게 연인이 되자고 하지 않았던가. 지나가는 말이었으나 나를 얼마나 욕심내도 될지 가늠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나를 밀어 내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나와의 약혼이…… 지난 몇 달이, 정세진 씨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권이도는 처음부터 이러한 끝을 예상한 거라고. 그래서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내게 약혼반지를 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지 않았노라고.

“…….”

“…….”

집으로 오는 길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이


스치는 일도 없었다. 무어라 주고받을 얘기도 없을뿐더러 마땅히 그럴 만한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어영부영 파투 난 저녁 식사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통보를 향한 억울함인지는 모르겠다. 그에게 물으려던 것들을 묻지 못했고, 알아내고
싶던 것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답답함도 함께 밀려들었다.

배신감. 그 단어를 떠올린 건 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우리 관계를 정의할 자격은 나한테 있다고
했으면서. 이 약혼은 계약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혼사라고,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나는 을이 아니니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달큼한 말을 속삭인 주제에.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도 했다. 손끝이 차게 식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질 것처럼 명치가 옥죄였다.

그래서 나는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권이도를 둔 채 집으로 올라왔다. 계단을 뛰듯이 올라 방으로 돌아왔고,
드레스룸을 뒤져 내가 가지고 왔던 캐리어를 꺼냈다. 식사를 위해 차려입었던 옷들을 성의 없이 벗어 버린 뒤엔,
내가 챙겨 온 옷가지 중 하나를 골라 갈아입었다.

짐을 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번거롭게 굴지 않은 게, 이날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

짜증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이 감정을 감히 짜증 따위로 칭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죄


없는 김 실장을 향해 원망의 말을 읊조리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나는 가족을 잃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 권이도는 내킬 때


나가라고 했지만, 그건 허락을 가장한 통보에 불과했다. 그가 축객령을 내린 이상 그게 언제가 되었건 끝내 이
집을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정세진 씨는 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고작 두 잔 마신 와인이 문제였을까. 머리가 어질어질 정신이 없었다. 캐리어를 챙겨 나갈 채비를 갖춘


건 문제가 아니었는데, 막상 방을 나서려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물건이 아니지만…….’

‘이 방에 있지 않아도 당신 소유긴 하지.’

“…….”

평생 내뱉지도 않던 욕지거리가 끝도 없이 떠올랐다. 입으로 내뱉고도 나아지질 않아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성을 잃는 바람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어, 세진아.’


자격, 그딴 걸 대체 누가 정한다고. 내가 원하는 걸 전부 내어 주겠다고 다정히 약속한 주제에.

‘불안해서 그랬어.’

던지듯 캐리어를 내려놨다. 제대로 닫지도 않았던 터라 열린 지퍼 틈으로 옷가지가 삐쭉 튀어나왔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내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권이도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멋대로 마지막을 고했다면, 나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볼 자격 정도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러나 그의 방문을 열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그 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불빛은 스며 나오지 않았지만, 이 안에 권이도가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

판도라가 상자를 열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살며시 문고리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어 대고, 익숙한 페로몬이 피부로 느껴졌다.

“…….”

“…….”

역시나 서재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서랍이 있는 쪽을 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권이도를 보며, 아무런 말 없이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 고요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놀라우리만치 강렬히 전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짐을 챙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더 정확히는 좌절감 비슷한 것. 표정은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데,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 모든 걸 보여 줬다.

“인사라도 하러 왔나 보죠.”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그시 나를 향하는 시선에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나는 서재의 문을 닫고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아뇨.”

“…….”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요.”

잠깐 잊어버렸던 분노가 다시금 차올랐다. 울컥, 솟구친 감정은 억누를 새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성적으로 질문을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왜 이 약혼을 끝내겠다는 겁니까?”

나는 아직 향수를 만들어 주지 못했고 우리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다. 관계를 정의할 권리가 내게 있다면
관계를 끝낼 권리도 내게 있어야 했다. 이렇게 쫓겨나듯 도망칠 게 아니라, 이해가 될 때까지 그에게 따져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놓아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아까는 무의미한 약혼이라고 했으면서. 권이도는 순순히 다른 대답을 꺼내 놨다. 문제는, 그 대답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단 사실이다.

“제가 억지로 잡혀 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놓아주다니. 인과 관계가 잘못된 말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나를 감금한 게 아니라고.

“틀린 말은 아니죠. 이 약혼의 시작에 정세진 씨 의견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제가 다니는 회사도 억지로 다니는 게 되겠군요.”

“그거랑 이건 다릅니다.”

“어디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얼음장을 걷는 듯했다. 누구 하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날 선 어투는 베일


것처럼 차가웠다. 나는 야트막한 숨을 내뱉으며 조그맣게 얘기했다.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권이도는 그 말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내게서 시선을 거뒀을 뿐.

“당신을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고 싶다면서요.”

“…….”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애걸을 해야지.”

그의 행동은 온통 모순투성이였다. 을을 자처하면서도 홀로 결론 내린 뒤에 내게 통보했다. 힌트는


주지도 않으면서 묻는 말에조차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를 갈망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모든 걸 초연한 것처럼
자꾸만 내려놓으려고 했다.

“이봐요, 권이도 씨.”

따지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 이제는 들지도 않았다. 이 지저분한 기분을,
그리고 배신감을, 그에게 낱낱이 고해야겠다는 충동만 들었을 뿐.

“나는 당신 때문에 내지도 않던 욕심을 냈어.”

“…….”

“이 집에 들어와서, 평생 상상도 못 해본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고.”

“…….”

“근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겠다고?”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미래를 권이도가 꿈꾸게 했다.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선택하고, 바라본 적 없는 것들을 바라게 됐다. 만약 이럴 거였다면 내게 그런 달큼한 것들을 안겨 주면 안
되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답답했다. 이 상황이, 그리고 이 순간조차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는 권이도가. 눈치만 살피느라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내 미련함에.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권이도 씨.”

권이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도 아니었다. 고작 와인 두 잔으로


솔직해지기엔 그의 입이 너무도 무거울 테니.

“왜.”

“…….”

“내가 당신 눈앞에서 죽을까 봐?”

욱해서 건넨 말은 그의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당혹이 서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당신이 그런 나를 따라 죽을까 봐?”

- 다음 화에 계속

72 화. Boite de Pandore(7)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지금껏 쌓여 왔던 답답함과 그를 향한 서운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

권이도는 떠듬떠듬 멍한 목소리를 냈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듯했고, 얼빠진 모습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점 잃은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너 기억…….”

“기억?”

기억이라니. 이 얘기에 지금 ‘기억’이라는 표현을 쓴 건가.


“역으로 물어보죠.”

정말 무언가 숨기고 있었구나. 그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내게 했던 말이 단순히


약에 취해 내뱉은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그 사실에는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

권이도의 입이 딱 다물렸다. 굳게 닫힌 입술은 아마 웬만해선 다시 열리지 않을 거다. 낭패감 반,


두려움 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감정이 번갈아 떠올랐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상했어요.”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굳이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분노였고, 대상이


뚜렷한 배신감이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애정과 신의를 품은 상대에게, 내 감정을 오로지 쏟아붓게 됐다.

“권이도 씨.”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엔 유독 입 안이 썼다. 결국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 사무치리만치 서러웠다.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이 질문을, 이제야 겨우 건네고 있다. 그를 보자마자 느꼈던 위화감을 몇 달이 지난 지금에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따금 밀려들던 기시감,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 줬던 알 수 없는 감정들. 애써 무시해 온 것들이
응어리져 튀어나왔다.

“내 취향, 입맛, 옷 사이즈에 반지 사이즈까지.”

“…….”

“나도 모르는 히트 사이클을 당신이 맞힌 게 벌써 세 번이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적할 수 없었다. 혹여나 그를 잃을까 봐, 이 아늑함을 영영 느끼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니까. 그래서 인내하고 기다린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보답 받지 못한 마음에 억울함이 샘솟았다.

“이걸 설마, 다 우연이라고 부를 건 아니죠?”

이런 게 우연이라면 세상엔 필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없을 터였다. 이 모든 게 그저 기분 탓이라면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겁니까?”

권이도는 내 말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번에도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생각이 없나 보다.

“이러다가 또 나만 모르게 결론 내리고 행동하려고?”

뭐가 나를 위한 일이냔 말이다. 대체 뭐가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거고.

“이게 뭐가 내 손으로 하는 선택이야…….”


짙은 무력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던 말들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줄 몰랐다.

“이럴 거면 좋아하게 만들지 말지 그랬어요.”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꼈고, 또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피치


못할 선택인 척했지만, 이 사람이라면 각인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거면, 그럼 이 집에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죠.”

그런데 이제, 그를 떠나가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이 집에서 나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을 테니, 무의미한 관계를 끝내자고. 내게는 그게 잔인한 이별 통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놓아줄 때가 됐다고?”

“…….”

“놓아주긴, 씨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르륵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속에서부터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세진아.”

권이도는 들릴 듯 말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또 처량한 느낌이라, 안도감과 함께 억하심정이 생겼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서,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걱정하는 주제에.

“세진아, 내가…….”

“변명할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문 채로 참아 냈다. 여기서


울기까지 했다간 정말 비참해지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한테 다 말해 줄 게 아니면, 세진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요.”

우습게도, 그 말을 하자마자 권이도가 조용해졌다. 나는 얼굴을 가린 그대로 억눌린 숨을 토해 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진짜 말해 줄 생각 없구나, 당신.”

아마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모든 걸 숨길 요량인가 보다. 나에 대한 마음은 보여 줄지언정 그


속에 담긴 각오는 꺼내 놓지 않는다. 모든 걸 안겨 주겠노라 말해 놓고 내가 그에게 속하는 건 끝까지 거부했다.

“……날 좋아하긴 합니까?”

작게 물어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입매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권이도는
여전히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의미 있는 존재긴 해요?”


“……내가 의심스러운 건 알겠는데.”

그는 입가를 떨며 숨결처럼 이야기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조그마한 소리였다. 하나 그


뒷말만큼은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내 마음까지 의심하진 마.”

“…….”

왜,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지. 네가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그렇게 말했으면 포기했을
텐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해요…….”

사실 단 한 번도 그러한 부분을 불신한 적은 없었다. 그가 내게 보여 주는 자상함이 결코 가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늘 정에 굶주려 있던 내가 그가 주는 온기에 난생처음 목이라도 축이지 않았던가.

“나한테 한 번이라도 솔직해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 이건,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어리광과 애정을 갈구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내가 바라는 걸 다 해준다면서, 내가 진짜 뭘 바라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고?”

내가 바란 건 아주 사소한 안정이었는데. 받고 싶은 것에 비해 과분한 것들을 받아 버렸다. 곁가지로


얻은 즐거움이 무의미하진 않았지만, 근본적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다 당신을 위한 일이잖아.”

“…….”

“다 자기만족이라고, 지금.”

권이도는 그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눈가를 움찔하며 입술을 달싹인 것이다.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내면에 엿보이는 감정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는 기분이었겠어요.”

그는 내게 뭘 바라고 있던 걸까. 내가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과연 만족하고 있었을까.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대충 돌보다가, 이제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거 아닙니까?”

한 번 사람 손을 탄 동물은 야생으로 돌아갔을 때 적응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자유가 아니라 박탈이었고,


방생이 아니라 유기였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을 준비해 줬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다.

“내가 멍청했죠.”

“…….”

“우리가 고작 이딴 관계였는지도 모르고.”


그간 쌓아 온 관계가 고작 이따위로 무너질 종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을지언정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느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마구 헤집어진 가슴께를


진정시켰다. 내내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말을 잇는 동안에도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너는.”

권이도는 그제야 천천히 운을 뗐다. 시야가 캄캄한 터라 목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이윽고 흘러나온
한마디는 지금까지와 달리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지.”

기분 탓일까, 그 또한 감정이 격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거기서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늘 여유롭고 당당하던 권이도가 지금만큼은 한없이 초라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매 순간순간이 지옥 같았어.”

“…….”

뭐가 그렇게 괴로웠냐고,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그냥 손을 내리고 그와 시선을 맞췄을 뿐. 가슴께를


크게 들썩인 권이도가 눈가를 잔뜩 일그러뜨렸다.

“눈을 감으면 네가 없어질 것 같아서…… 하루도 맘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고.”

“……그럼 앞으로는 불안할 일 없으시겠네요.”

픽,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었으나 내 심정을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나 없는 삶을


상상하느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젠 내가 있는 날이 없을 텐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절망으로 뒤덮인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죽을 일도 없겠지.”

상처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욱하는 마음에 비꼬고 말았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

“잘 지내봐요, 한번.”

그대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 내렸다. 이대로 방을 빠져나가 캐리어를 챙겨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정말 내가 없는 삶이 지옥 같은지, 그 지옥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그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열렸던 문이 닫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주먹으로 문을 쾅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자욱한 페로몬과 함께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보라고?”

억센 손길이 내 팔을 붙잡았다. 휙, 돌아간 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에 부딪쳤다. 내 어깨를 잡아


벽에 내리누른 권이도는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 올리곤 단숨에 입술을 맞물렸다.

“……흡.”

따닥, 이가 부딪칠 만큼 다급한 입맞춤이었다. 입 안을 파고든 혀가 그 어느 때보다 강압적이었다. 부술


것처럼 아래턱을 움켜쥔 그가 숨결에 페로몬을 한가득 실어 보냈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농도 짙은 페로몬이었다. 권이도 특유의 나무 냄새가 저항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를 휘감았다.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양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고개를 들어 타액을 받아마시고, 파도치는 페로몬에


흠뻑 빠져들었다. 뇌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큼한 감각에 간절히 그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이 차오를 때가 되어서야 입술을 떼어 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숨결이 달뜬 열기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턱을 움켜잡았던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린 그가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세진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냥, 그 한마디에 그가 내게 애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그리고 내 곁에 머물라고. 내게 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내가 놓아줄 때 갔어야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끝내, 권이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소유욕과
집착으로 얼룩진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기분 좋았다.

“놓아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라고 했잖아.”

이번엔 내가 먼저 입술을 맞물렸다. 눈을 감고 혀를 섞는 나를, 권이도는 밀어 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손으로 옷 속을 파고들어 맨살결을 어루만지며 위로 올라왔을 뿐.

이성은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졌다. 애초에 간당거렸던 것이었으니, 이제 와 붙잡은들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나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나를 안고 서재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위에 있던 물건들을 한 팔로 쓸어버린 뒤에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나를 그 위에 내려놨다. 정작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들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말이다.

“……흐.”

옷가지를 벗겨 내는 짧은 찰나. 그 순간조차 권이도와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칭얼칭얼 그에게 매달려


입술과 턱 언저리에 입술을 비비적거려야 할 정도로. 계절은 여름이었으나, 드러난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가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아……!”

그리고 전희라고 부르기엔 거친 행위가 연달아 이어졌다. 짐승처럼 내 상반신을 깨물고 빤 그가 아무런
전조 없이 아래쪽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젖지 않은 곳이었으나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건 금방이었다.

“권이도…… 흣…….”

그의 모든 행동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머릿속이 이렇게 아득한데, 모든 순간순간이 뇌리에 남았다.


아래가 서서히 젖는 것도, 권이도가 온몸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것도,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페로몬도.

“아흑……!”

아래가 꿰뚫리는 순간에는, 몸이 갈라지는 느낌에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분명 덜 풀린 곳이었으나


고통보단 쾌감이 앞섰다. 그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배 속이 아릴 정도의
충족감이 차올랐다.

“허윽, 흐, 아……!”

권이도는 아무런 배려 없이 본능만으로 행위를 이어 갔다. 내가 적응할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이다. 평소라면 버거웠을 텐데, 지금은 나조차 그를 말릴 생각도 못 한 채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거기…… 아, 흐응, 으…….”

“……하.”

넣어도 넣어도 모자라단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이 권이도를 느끼고


싶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그를 조르는 동안, 권이도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품에 가두고 있었다.

“흑, 흐윽…….”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던 모양이다. 줄줄이 흐르는 눈물이 가뜩이나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가렸다. 몸이 잘못된 것처럼 심장이 뛰는데, 그의 품에 안기면 이다지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진아, 정세진.”

“아흐, 흐윽…….”

권이도는 내 눈물을 혀로 핥곤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이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입술을 문지르며 목덜미까지 내려온 그가 움칠거리는 나를 억지로 고정시켰다.

“아흑……!”

깊은 삽입과 함께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크게 부풀었다. 안 그래도 빠듯하던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압박됐다. 나는 그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울컥 참았던 정액을 사출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페로몬을 쏟은 그가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

찌릿, 오묘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숨이 턱 틀어 막히고 심장이 멈춘 것처럼 아득한 감각이
몰아쳤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죽었다가, 다시 새하얗게 변하길 반복했다.
“아, 아……!”

바닥이 없는 절벽에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쾌감 끝에, 멈췄던 시간이 차근차근


흐르기 시작했다. 속에서 요동치던 오메가 페로몬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권이도의 페로몬과 얽히기 시작했다.

묶였다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그에게 반응하듯 향긋한 꽃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그와 연결되었다고 느낀 순간.

‘정세진입니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성대하고 요란한 결혼식, 그리고 새하얀 정장을 입은 내 모습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권이도.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웨딩로드와 그 끝에서 터져 나온 박수
소리까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고, 먼저 손을 내민 건 내 쪽이었다. 살갑게 웃으며 건넨 손은 그 누구와도


닿지 못한 채 어색하게 거둬들여졌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저택에 홀로 남아, 외로이 권이도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작스레 몰아친 기억의 폭풍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슷하지만 다르고, 같은 시간대지만 다른 순간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랭했던 그 기억 속의 권이도.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권이도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망각하고 있던 나의 기억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73 화. Hiver Rigoureux(1)

눈이 끝도 없이 내렸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고, 내뱉는 입김마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눈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쌓였다.

“헉, 허억…….”

나는 그 거리를, 인적 드문 골목을 끝도 없이 걸었다. 숨을 한껏 몰아쉬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얇은 티셔츠 한 장과 기장이 맞지 않는 바지를 입고,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쉼 없이 눈을 밟으며 말이다.

집을 나왔다. 이토록 추운 겨울날, 집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 끔찍한 곳을. 퀴퀴한 곰팡이가 핀 바닥


위로 술병이 굴러다니던 그 조그만 방을.

부모님은 처음부터 없었다. 왜 없었는지는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이 함께였고, 정신을 차렸을 땐 항상 매를 맞고 있었다. 남자 새끼가 웬 오메가냐며, 제 어미를 똑 닮아
여우 같은 년이라며 온갖 욕지거리를 들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굶다 못해 위액을 토하는 순간이 싫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력하게


맞아야만 하는 날들이 싫어서, 추울 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일어나는 처지가 싫어서.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이었다. 술에 취해 잠든 그 사람을 집에 놓고


반쯤 열린 문틈으로 뛰어나오는 것.

그러나 도피처라 생각했던 집 밖은 사실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길거리는 너무 넓었고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은 춥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이제 발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돌멩이에 스쳐 상처가 났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쟤 뭐지?”

“애가 혼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숙덕거렸다. 이따금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걸어갔다. 집을 나왔다고 하면, 다시 그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차갑게 식은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는가 하면 드문드문 정신이 끊기기까지 했으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납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었다.

“꼬마야, 여기로 오면 안 돼.”

그러다 커다란 건물 앞에서, 나는 웬 새카만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남자들은 짐짓 엄하게 나를 타일렀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으로…… 야!”

그냥, 본능이 시켰던 것 같다.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과 저 남자는 좀 다르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척 보기에도 비싼 옷을 입고, 구경도 못 해본 커다란 차에서 내리니까, 나 정도는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초인적인 힘이었을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외투조차 없이 눈을 맞는


나와 달리, 남자는 두툼한 코트를 입고 누군가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뭐야, 이건.”

나는 그에게 다가가 덥석 코트를 붙잡았다. 이미 흐려진 시야 탓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인상을 찌푸렸단 사실만 알아차렸을 뿐.

“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에도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저 오메가예요.”

그 사람이 그랬다. 너 같은 오메가는 언젠가 팔아먹고 말 거라고. 특이 형질이 귀한 세상이니 못해도


술값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오메가?”

남자가 그리 물었을 때, 나는 딱 두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하나는 그 목소리가 결코 부정적으로 들리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너지는 내 몸을 그가 따뜻하게 안아 줬다는 것.

아버지에게 처음 입양되던 날이었다.

***

남자는 나를 데리고 오자마자 커다란 병원으로 데려가 피를 뽑았다. 키와 체중을 재고 이런저런 검사를
시킨 뒤에 오메가가 맞느냐며 의사에게 세 번이나 확인했다. 오메가가 확실하다는 말에는 혹시 하자가 있는지 잘
보라며 두 번쯤 더 닦달했다.

그리고 데려간 곳은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고, 신발을 벗는 현관은 내가 있던 집보다 훨씬 커다랬다.

“당신 왔어요?”

집이 커서일까, 그 안에는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푸근한 인상의


중년. 그리고 그런 중년의 옆에 서 있는 남자아이와 떨떠름한 표정의 여자까지.

“아무리 그래도 애를 막 주워 오면…….”

“줍다니. 하늘이 내린 거지.”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빨간 여자는 연신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는 어떻게 할 거냐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섣불리 결정을 내리냐며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기업을 위한 선물이라니까.”

선물.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망할 새끼라든가, 쓰레기 같은 놈이라든가, 하여간


지금껏 내가 들었던 부름보단 훨씬 나은 말이었다.

“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호칭이 허락되고, 단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따뜻한 옷을 입었다. 난생처음


배부르게 밥을 먹었고, 솜이 들어간 이불 속에서 깊은 단잠을 청했다.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았고, 또 누구도
내게 폭언을 퍼붓지 않았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어.”

원래 나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내 먼 친척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떠맡듯 나를 돌보게 됐고,


늘 짐이라고 생각하며 지내 왔다고. 혹시 나를 데려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거지새끼. 누가 못 배운 놈 아니랄까 봐 그 귀한 오메가를 헐값에 넘기더라고.”

나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와 두 분이 대화하는 소리였지. 내가 모든 걸 듣고 있단 사실을,


아버지도 모르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정철호 회장의 입양아로서 지내게 됐다. 식사 예절에서부터 화술, 심지어 한글까지 새로
배우고 어디서 어떤 말을 듣건 동요하지 말라며 여러 훈련도 받았다.

“……안녕.”

그 모든 과정은 고작 네 살배기 꼬마가 함께했다. 늘 중년(나를 돌볼 집사라고 했다)의 뒤에 숨어 있던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인 민재였다. 예쁘장한 얼굴이 어머니를 똑 닮았고, 그 경계하는 눈빛마저 비슷했다.

“잘 부탁해, 민재야.”

알은체도 안 하던 민재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집에 꽤


익숙해졌다. 몸에 있던 상처는 모두 사라졌고, 하루가 다르게 키가 쑥쑥 자라났다. 이따금 밀려드는 외로움은
몸이 편해지니 느끼는 배부른 감정이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이듬해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다. 열 달이 지나 서영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매일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화목한 가정, 그리고 부족함 없는 완벽한 집안. 이물질처럼 끼어든 나를
향한 관심은 고작 이런 거였다.

“발현은 아직이냐?”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게 아들 노릇이 아니라 오메가 노릇이라는 걸. 어서 빨리 본전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 눈을 빛내는 것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중학교에 갈 무렵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서영이가 간단한 의사 표현을


시작하고, 나를 잘 따르던 민재가 괜히 심술궂은 장난을 건넬 즈음. 아버지가 슬슬 나를 귀찮아하고, 어머니와는
여전히 대화조차 없을 시기. 나는 첫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

아껴 두었던 보석이 사실은 돌멩이나 다름없단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때 빼고 광내느라 들인 돈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면.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펑 터져 버리고, 손안에 남은 돌멩이를 그 어디에도 버릴
수 없게 된다면.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을 빙자해 오피스텔로 쫓아냈다. 대학과 가깝다는 이유였으나 더는


집에서 두기 싫다는 마음이 커다랬을 것이다. 물론 매몰차게 내보내면서도 혹시 어디서 사고를 칠까 경호를
핑계로 감시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휴학 한번 없이 모든 학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점을 미리 다 채우고, 남는 시간엔 유학까지
다녀왔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될 수 있게, 누가 봐도 낙하산이지만 아닌 척 본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진이 너한테 혼사가 들어왔어.”

그리고 스물아홉이 되던 해의 봄. 아버지는 나로 인해 이루려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또 아무런 설명 없이,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다고 통보한 것이다.

“잘된 일이지. 그런 곳에서 너 같은 반편이 오메가를 데려가 준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알았다는 것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그 사람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제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딱 하나 놀랐던 건, 그 상대가 선호그룹이라는 것 정도.

“본부장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언제 그렇게 연애까지 하셨어요?”

“역시 능력 있는 분들은 다르다니까.”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하루아침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선호그룹 측에서 기사를 뿌리고, 우리의
결혼을 낙인찍은 탓이었다.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알파가 내 비밀스러운 연애 상대이자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로 탈바꿈돼 있었다.

“선호 측에서 옷 사이즈와 반지 사이즈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김 실장이 말하길, 결혼 준비는 선호그룹이 다 한다고 했다. 내가 입을 옷도, 결혼반지도, 그들의 눈에


맞게 전부 준비해 놓겠다고. 나는 샵에 들러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수를 재고, 단 한 번도 잰 적 없던 반지
사이즈까지 측정했다.

“야, 주제 파악해. 너 팔려 가는 거야.”

민재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모르는 알파 새끼에게 다리나 벌리며 살 거냐고,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게 무슨 결혼이냐고.

“모르지. 다리를 벌릴지, 아니면 입만 벌리고 끝날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불면증은 내가 민재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 힘들게 만들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한밤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성의 없이 던져 준 수면제는, 역시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래도 역시 형 생각해 주는 건 민재밖에 없네.”

사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족으로 보지 않는 민재가, 내 결혼으로 마음을 접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해가 바뀔수록 짙어지던 시선이 이제는 내게 닿지 않을 테니까.

“정세진 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결혼식 당일. 나는 이른 새벽부터 명성호텔로 향했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고, 역시나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도착한 스위트룸에서, 그들은 나를 인형 다루듯 다루며 머리와
옷가지를 세팅해 줬다.

새하얀 예복, 그리고 단정히 넘긴 머리. 은방울꽃으로 만든 부케와 비슷한 디자인의 부토니에까지.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영빈관에 있는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 완벽히 치장한 나를 보고 아버지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대상이 나였는지, 아니면 나를 키운 본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 서 있던 민재는 딱 이
말 한마디만 내뱉고 신경질적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씨발, 존나 안 어울리네.”

나 또한 동의하는 말이었다. 외모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내게는 과분한 차림이라는 점에서. 대놓고
보여 주기 위해 꾸민 모양새가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잘해야 해. 너한테 해신의 미래가 달려 있어.”

나는 그 말을 식이 시작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들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조용하길 바랐는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김 실장만이 착잡한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봤을 뿐.

“이 애비가 믿는 거 알지?”

“……예, 아버지.”

습관적인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조그만 립스틱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뿌리고 나가거라.”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담긴 내용물이 충분히 짐작됐다. 역시나,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꽃향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페로몬 향수가 분명했다. 한참을 멍하니 있는 내게 아버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얘기했다.

“김 실장이 골라 온 거야. 효과는 확실할 거다.”

그러는 김 실장도 베타가 아니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이런 건 효과가 없다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나로선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향수를 뿌리는 게 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돌리러 갔다. 모르긴 몰라도, 온갖 유명 인사를 다 초대한
모양이다. 김 실장까지 자리를 비운 탓에, 텅 빈 대기실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우습게도, 나는 그 공허한 정적을 외롭다고 느꼈다. 분명 조용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정작 혼자가


되니 사무치는 고독함이 밀려든 탓이다. 어쩌면 대기실 내부가 아무 장식도 없는 삭막한 공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권이도라…….”
결혼 상대가 권이도라고 했던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나와는 평생 인연조차 닿지 않던 상대였다.
외모 좋고, 사업 수완 뛰어나고,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며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랑 연애는 무슨.”

사람들도 순진하지, ‘그’ 권이도가 연애결혼 따위를 할 리가 없는데. 아니, 정략결혼임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축하를 건넨 걸 수도 있었다. 그에겐 결혼조차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단이라는 걸, 그 누가 모르고
있겠느냔 말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손버릇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고, 침대 위에서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다리를 벌려야 할 운명이었으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에 드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그쪽을
바라보진 않았다. 김 실장이거나, 아니면 민재.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으니까.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발걸음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근처에서 향긋한 나무
냄새가 풍겨 올 즈음에야 깨달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은은한 페로몬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진짜 알파의
것이었다.

“…….”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나와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만나 본 그 누구보다 키가 컸고, 나를 응시하는 얼굴은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

권이도였다. 신문에서, 뉴스에서, 온갖 매체에서만 접했던 선호그룹 전무이사. 고작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선호전자 총책임자 자리에 앉아, 오늘 나와 결혼하게 될 내 결혼 상대.

“정세진?”

나직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내 이름을 내뱉는 발음마저 남다르게
느껴졌다.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물건의 값어치를 매기듯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정세진입니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 나는 긴 시간 습관 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눈을 접고, 나긋나긋 정중히 이야기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맞잡지 않았다. 흘긋 내민 손을 내려다보곤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드는 와중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았고, 그건 나를 대하는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가 참으로 무미건조했다.

“얼굴 빼곤 봐줄 게 없군.”

- 다음 화에 계속

74 화. Hiver Rigoureux(2)

순간,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금 전, 그의 외모를 보고 잠깐이나마 두근거린 게 우스울 만큼.


퍽 무례한 평가였고 첫 만남에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하…….”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을 거둬들였다. 한가로이 악수나 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거절당한


인사는 포기하는 게 좋았다. 그냥,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수밖에.

“다행이네요. 얼굴은 봐줄 만해서.”

장난스러운 대꾸에도 권이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분위기를 맞출 생각도, 나를 따라


웃을 생각도 없나 보다. 그러니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덧붙였겠지.

“그마저도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니까. 앞서 말했듯,


봐줄 만한 수준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권이도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내게 용건이 있나 본데, 짐작되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은 한 번 보고 가려고요.”

그는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존댓말을 쓰는데도 반말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아하게 이어지는 음성이 무심한 눈빛과 어우러졌다.

“물건을 살 때도 눈으로 고르는데 결혼할 상대니까 봐두긴 해야죠.”

“…….”

나를 ‘결혼할 상대’라고 칭해 줘서 다행인 걸까. 표정만 보면 물건보다 못한 것 같다. 차라리 쇼핑할


때가 더 흥미로운 표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쪽이 나를 초면인 것처럼 대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런 건 미리 전달받았다. 연인이라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는데 남들 보는
앞에서 데면데면하게 굴 생각도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돈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폐 끼치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정중히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왜인지 만족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곤 무심히 이야기했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군요.”

이걸…… 인정받았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건 부정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가 혼잣말처럼 “아니,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건가.”라고 덧붙이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죠.”

권이도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대기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장지문을
눈짓했다.

“저 문이 열리면 내가 그쪽을 데리러 올 겁니다. 내가 내민 손 자연스럽게 잡고, 최대한 행복한 얼굴로


웃어요.”

주문 사항은 간단했다. 내가 그리던 결혼식장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았다.

“인사를 좀 하러 다닐 건데, 그쪽이 이야기할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이랑 대화할 땐 나한테 팔짱 낀 거


빼지 말고.”

아마 장식품처럼 그의 옆에 머물기만 하면 되리라. 괜히 나설 필요 없이 방긋방긋 웃으면 그만이었다.

“알아서 처신하리라고 믿습니다. 날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없길 바라죠.”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대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내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가 까딱 고개를


움직였다.

“궁금한 게 있다면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아버지보단 낫다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내게 질문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

“아뇨, 궁금한 거 없습니다.”

하나 나는 그 무엇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 돼도 내 쪽에서 저자세로 나가야 한단 사실은


변함없었으니까. 이건 선호와 해신 사이의 계약이고, 내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테니. 대충 눈치껏
행동하면 중간은 갈 것이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뭐, 굳이.”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굳이 편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의미가 아니라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였다.
“식이 끝나면 우선 내 집으로 갈 겁니다. 얘기 들었겠지만 그쪽은 당분간 거기서 살 거고.”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였으나 별로 상관은 없었다. 필요한 건 김 실장에게 부탁하면 되고 애초에 필요한


물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회사는 며칠 연차를 써놨으니 그 또한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얘기 끝났으니 이만 가보죠.”

그 말만 내뱉고 권이도는 곧장 몸을 돌렸다. 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가만히 그


너른 등판을 보는 와중에, 장지문을 연 권이도가 나직한 탄성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향수 취향은 바꾸는 게 좋겠군요.”

“……네?”

“향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말을 멈춘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그런 걸로 조잡한 페로몬을 숨기려고 하면 안 되지.”

“…….”

말을 해야 할까.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나오지 않는 거라고. 페로몬샘이 기형이라 이렇게라도 흉내를


냈을 뿐이라고.

그러나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드르륵, 닫힌 문틈으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은 건, 고작 향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묵직한 페로몬이 전부였다.

권이도가 떠난 후에도 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직원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들은 말없이 내
옷과 머리만 확인했다. 예복이 구겨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듯해서, 나중에는 소파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하염없이 이어지던 대기는 내내 굶은 배 속이 뒤집힐 즈음에야 끝이 났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김 실장 역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장지문 앞에 서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려운 건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시면 돼요.”

내 최후의 종착지가 결국은 결혼이었을까. 권이도를 잠깐 본 것만으로 어떤 결혼 생활이 될지 뻔하기만


했다. 본가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고, 본가에서의 삶보다 조금 더 보잘것없을 것이다.

“…….”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손에 든 부케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문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물이 날 것처럼 따사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자, 널찍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정원을 가득 채운 하객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주단이 웨딩로드를 장식하고,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박수를 쏟아 냈다.
누가 봐도 과시가 분명한 식장 속,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정원의 한가운데.

그곳에 권이도가 있었다.

“…….”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나를 보는 시선에 감흥이라고는


없었다. 내게는 행복한 척 웃으라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사르르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을 정말 기대하던 사람처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부족함 없는 연애를 한 것처럼, 지금 이 모든 게 정말 나를 위한 순간이라는 듯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늘, 아버지의 완벽한 아들을 연기했으니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왔다고, 모두를 속이며 살아왔으니.

손이 닿는 순간엔 권이도가 눈가를 움찔거렸다. 아주 작은 반응이었기에 가까이 있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그의 손은 따사로운 봄 날씨에도 서늘했고, 내 손을 감싸는 손길 역시 그다지
다정하지 못했다.

우리는 나란히 새하얀 주단 위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수없이 많은 시선이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는데, 연신 터지는 셔터음은 조금 거슬린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상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일부러 가족들이 있는 쪽을 보지 않았다.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재가 어떤 시선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었으니까.

“다음으로 예물 교환이 있겠습니다.”

주례는 생략됐고, 권이도가 미리 준비해 놨던 반지를 끼워 줬다. 은색의 반지 한가운데는 다이아몬드가


분명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소재는 백금인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그의 오른손이 내 뺨에 닿아 왔다.

“…….”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 입을 맞추는 순서가 있었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을 땐,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떨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손은 차가운 사람이, 그래도 입술은 따뜻하구나. 딱 그 정도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찬가지로 눈을 뜬 그가 잠깐 그대로 나를 바라봤다.

기분 탓일까. 그의 시선이 짙게 물든 것 같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고 느릿느릿 손을 떼어 냈다.

***
결혼식은 자칫 방심했다간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했다. 그나마 괜찮았던 건, 권이도가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발성을 따로 배우는 건지, 목소리가 웬만한 배우 못지않게 듣기 좋았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모든 식순이 끝난 뒤엔 권이도와 함께 하객들에게 인사를 돌리러 다녔다. 그가 말한 대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겐 예의 바르게 웃었다. 모든 대화는 권이도가(정확히는 상대가 아부를 떨면
권이도는 듣기만 했다) 했기에 내가 나설 순간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액세서리 정도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옆에 달랑달랑 달린, 예쁘게 꾸며 놓은 장식품. 내게


돌아오는 평가 역시 ‘오메가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다.’ 따위가 전부였다.

“저희 세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상대에게 꼬박꼬박 ‘전무님’이라고 말을 높였다. 우스운 건, 권이도 역시


아버지를 ‘정 회장님’이라고 불렀다는 거다. 연애결혼으로 보이려면 호칭부터 바꾸는 게 좋을 텐데. 물론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진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슬픔을 참는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자꾸만 내려오려는 입꼬리가 민망하지 않을 테니.

나는 권이도와 함께 내 식구들은 물론 그의 식구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의 부모님과 누나 부부는


별말 없었지만, 그의 형만큼은 능글맞게 웃으며 흥미롭다는 양 내 얼굴을 살폈다.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에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끼쳤다.

“와, 오메가라 그런가? 생각보다 훨씬…….”

뒷말은 대충 귓등으로 듣고 말았다. 곱상하다느니, 이 정도면 남자도 괜찮겠다느니, 별 영양가 없는


얘기였으니까. 내가 그다지 가녀린 체격은 아니었는데, 권이도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을 거다.

“쓰다 질리면 얘기해. 나도 맛이나 좀 보게.”

“말조심해. 여기 지금 듣는 귀 많아.”

“정색은. 이렇게 작게 말하는데 누가 듣는다고.”

권이정은 키득키득 웃으며 권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먼 거리에서 보면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일 터였다.
진득한 눈으로 내 목덜미 따위를 훔쳐본 권이정이 목소리를 낮춘 채 한마디를 보탰다.

“내가 먹다 버린 건 잘 안 먹는데, 늘어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거든.”

“…….”

“그러니까 잘 좀 해봐. 알았지?”


살면서 많은 말을 들었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수치심이 든 건 아니었고,
그냥 뭐랄까 조금 신기했다.

“그쪽도 얘가 만족 못 시켜 주면 얘기해요. 그건 내가 나을 수도 있어.”

그 짓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며, 생각 있으면 한 번씩 연락하라고 했다. 이런 말에도 대답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권이도가 나를 데리고 다른 쪽으로 가는 바람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얼핏 표정을 보니, 그다지
사이좋은 형제는 아닌가 보다.

뉘엿뉘엿 노을이 질 때쯤 길고 길었던 결혼식이 마무리됐다. 권이도가 잠깐 볼일이 있다며 가버리고,


나는 정원에서 이어진 산책로 근처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아직은 날이 제법 쌀쌀했던 터라 날이 어두워지면
공기가 차가울 것 같았다.

“정세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엔 민재가 있었다. 밝게 염색한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넥타이 없이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였다. 어머니를 꼭 닮아 곱상한 얼굴에 그득그득 지저분한 감정이 가득했다.

“너 씨발…….”

“…….”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슬쩍 그에게 눈짓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조심하란 의미였는데, 민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짓씹듯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뭐?”

오늘 들은 말 중 권이정 다음으로 황당한 말이었다. 배은망덕하다니. 많고 많은 사람 중 민재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는데.

“돈 많은 놈이랑 결혼하니까 그렇게 좋냐?”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저 또한 이런 말을 할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얘가 대체 왜 이러나. 그런 생각으로 마주 보는 내게 민재가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키워 준 정이 있지, 아들이라는 새끼가 결혼식 내내 실실 웃으면서…….”

먼저, 이 결혼식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내내 웃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권이도의 요구였다. 물론


민재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 내가 좋아서 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버지 서운해하시는 거 몰라? 그러고도 네가 아들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걸 민재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나는 어제 채 5 분을 자지 못했고,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온종일 긴장한 상태였단
말이다.

“누가 오메가 아니랄까 봐 그딴 알파 새끼한테 혹해 가지고…….”


“민재야.”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민재는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움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가만 속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아직 결혼식 중이잖아.”

자칫 민재를 더 흥분시킬 수 있는 이야기인 건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더 침착하게 말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만큼은 여유가 부족했다.

“형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

“그런 건 나중에 가족들끼리 있을 때 얘기하자.”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잔뜩 토라져 가버릴 민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형과 가족. 민재의 역린이 그 두 개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

“하, 씨발.”

역시나 민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문제는 그런 민재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단


사실이었다. 향긋한 페로몬에 고개를 들자, 무표정하게 있던 권이도가 보였다.

“……아.”

낭패였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없었는데. 민재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는 사이,
권이도는 여전히 관심 없는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재미없는 대화 더 할 겁니까?”

“…….”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한 걱정이 참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권이도에게


중요한 건 계약일 테니, 민재와 내 사이가 어떻건 별반 상관없겠지.

“더 할 거여도 가죠.”

권이도는 먼저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민재의 시선을 피했다.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하자.”

“…….”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하고…….”

이 말을 한 번 더 해도 될까. 고민이 되었지만, 그에게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형 갈게.”

- 다음 화에 계속
75 화. Hiver Rigoureux(3)

권이도가 향한 곳은 차를 세워 둔 정원 입구였다. 원래라면 웨딩 카를 타고 신혼여행을 갔을 텐데, 그런


과정은 생략한다고 했다. 하기야, 이토록 바쁜 사람이 팔자 좋게 정략결혼 상대와 여행이나 가고 싶진 않을 거다.

권이도가 먼저 차에 올랐고, 나도 그를 따라 옆자리에 올라탔다. 운전석과 뒷좌석이 분리된 프라이빗한


세단은 개인이 개조해 만든 차종인 게 분명했다. 아버지에게도 같은 차가 있지만, 내부가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었다.

“…….”

“…….”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어둑어둑해진 바깥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피로감과 함께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드는 듯했다.

권이도는 아까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을까.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곤란할 부분이라면 있었다.
가령 ‘그딴 알파 새끼’ 같은 부분.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데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면 아마 그와 대화할 일이 없을


테니까. 계속 눈치를 볼 바엔 우선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묻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권이도는 태블릿 PC 로 업무를 보다 말고 흘긋 나를 바라봤다. 그게 얘기하라는 허락처럼 느껴져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뭐에 관련한 질문인지는 그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오메가 아니랄까 봐 그딴 알파 새끼한테 혹했다는 부분부터.”

“…….”

들었구나. 민재의 목적은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 알파 새끼가 칭하는 건 결국 권이도였다.


누구보다 잘 보여야 하는 상대인데,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곧장 그에게 정중한 사과를 내뱉었다. 그가 마저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동생이 아직 학생이라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잘 타이르겠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거라고 민재를 변호할 필요도 없었다.


괜히 잘못 말하는 것보단 순순히 인정하는 게 나을 테니.
“아뇨, 상관없습니다.”

의외로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문제는 대수롭지 않게 이어진 그 뒷말 정도.

“해신금융 차남이 피 안 섞인 오메가를 좋아하건 말건,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죠.”

“…….”

고저 없이 건넨 말들이 참 가혹했다. 고작 그 대화만 듣고, 제법 많은 걸 눈치채지 않았나. 내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부분을 타인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나이대에는 좋아하는 사람 일엔 눈이 돌아가곤 하니까.”

너그럽게 말하는 주제에 권이도의 표정은 전혀 너그럽지 않았다. 민재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남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민망한 기분에 괜히 또 한 번 사과를 한 번 더 건넸다. 권이도는 대화를 끝내려는 듯 다시 태블릿 PC 로


시선을 돌렸다. 픽, 조그만 비웃음과 함께 그의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쓸데없는 변명이 없어서 좋군요.”

단조로운 평가를 끝으로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창밖을
내다봤고, 권이도는 더는 내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손에 낀 결혼반지가 괜히 갑갑하게 느껴졌다.

***

앞으로 내가 머물게 될 집은 권이도가 소유한 집 중 가장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위로 3 층짜리 건물에,


지하에는 그의 차가 모두 들어갈 만큼 넓은 차고도 있다. 아버지가 머무는 본가보다 커다란 곳에서, 내게 허락된
장소는 3 층의 작은 방이었다.

“이 집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게 방을 안내해 준 고용인은 사무적인 말투로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해 줬다. 가령 내게 허락된 공간이
내 방과 주방 정도라는 것, 집에서는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내고 친구나 가족을 데려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

“방 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대단한 선처라고 해야 할까. 가장 구석진 방이었지만, 있을 건 다 갖춰져 있었으니. 화장실과


드레스룸까지 딸린 공간은, 내가 어릴 적 살던 집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만, 그게 내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단
괜히 돌아다니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지.

“식사는 끼니때마다 챙겨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주방장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살가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고용인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며 방을 나가 버렸고, 나는 넥타이를 풀며 방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뭐…… 나쁘진 않지.”

골방을 준 것도 아니고 딱 생각한 그대로의 방이었다. 크기가 좀 작고, 가구라곤 달랑 침대가 전부여서
그랬지. 뭐, 내게 필요한 건 옷가지 정도였으니 더 넓은 공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예복을 벗은 뒤 샤워를 마쳤다. 옷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가,


옆쪽에 곱게 걸어 놨다. 어쨌든 내 옷은 아니었으니 막 다루기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 넓지 않은 욕실엔 덩그러니 샤워 부스만 놓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으니 포기해야 했다. 물론 만약 욕조가 있다고 하더라고 한가롭게 여유를 부릴 입장은
아니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앞서 챙겨 두었던 홈웨어로 갈아입었다. 김 실장이 챙겨 준 캐리어엔 간단한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결혼식 내내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내 오피스텔로 가서 짐을 챙겼던
모양이다.

나는 짐을 완전히 풀지 않고 당장 필요한 것들만 꺼내 드레스룸에 정리했다. 지나치게 약소한 짐이었기에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진짜 필요한 건 수면제뿐이었으니까.

침대에 걸터앉아 물 없이 수면제를 세 알 정도 씹어 삼켰다. 귀찮을 때마다 그냥 먹어 버릇했더니 혀에


남는 쓴맛이 이제는 익숙했다. 알약이 큰 편이 아니라 다행이지. 물이 필요했다고 해도 지금은 1 층으로 내려가기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나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잠깐 망설였다. 밤이 늦었는데, 그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방으로 올라오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어 버렸다.

‘내가 부르기 전엔 귀찮게 하지 말아요. 그쪽도 일상생활은 알아서 해도 되는데, 그 대신 내가 찾을 땐


무조건 시간 비워 두고.’

아마 권이도는 내가 이 집에서 가능하면 조용히 있길 바라나 보다. 그러니 그 말만 하고 휙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버렸겠지. 그가 어떤 방으로 갔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굳이 밤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피로가 잔뜩 쌓인 탓에 오랜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한 세 시간 정도면 깨겠지만, 잠깐이나마 단잠을 취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한 끼도 안 먹었네. 몸이 지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내일은 몇 시쯤 1


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잡념을 끝으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권이도와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염려했던 일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가령
내게 손찌검을 하는 권이도라든가, 침대에서 다리를 벌리는 일이라든가, 혹은 매일같이 듣는 모욕적인 말 따위들.

나는 미리 회사에 휴가를 냈지만, 권이도는 매일같이 출근길에 올랐다. 아침이 되면 출근했다가 저녁


늦을 즈음에야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시간을 방 안에서 보내다가, 권이도가 퇴근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1 층으로 내려오곤 했다.

‘……왜 여기 있습니까?’

처음 그를 마중 나갔을 때 권이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의도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다. 오셨다는 말을 들어서 나왔을 뿐이라고 답하자, 들릴 듯 말 듯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아부를 떨어도 꼭…….’

그냥, 마중을 나오려고 했을 뿐이다. 우선은 최대한 살갑게 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걸 아부라고


부르면야, 나로선 할 말이 없었지만.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하단 한마디에 권이도가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물론 착각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큼 짧은 찰나였지만 말이다.

‘불편하시면 내일부턴 방에 있겠습니다.’

그 말엔 권이도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미간을 좁혔을 뿐이다. 약간의
간격을 둔 뒤에야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었다.

‘이런 짓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쪽이 진짜 내 배우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한 거고.’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적어도 내조를 잘하는 배우자는 아니구나. 나와 결혼해서 무얼 하려던 건지는


몰라도 살갑게 굴 필요는 없었나 보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말했는데 이번에도 권이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방으로
올라갔고, 그날은 더 이상 권이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나흘, 나는 더 이상 권이도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 그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으로 정원을 구경했을 뿐이다. 자연스레 대화할 일은 줄어들었고, 권이도와 마주치는 시간은 채 5 분도 되지
않았다.

“……비?”

그리고 금요일 아침. 일기 예보에도 없던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늘 그랬듯 창가에 앉아


정원을 구경했고, 열린 창문 틈으로는 온갖 젖은 냄새가 풍겨 왔다. 비를 맞은 흙냄새, 산뜻한 풀 내음, 그리고
간간이 섞여 드는 나무 냄새까지.

“그 사람 페로몬 같네…….”

열린 창문 틈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봤다. 잠깐 느껴 보았을 뿐이지만, 권이도의 페로몬은 비 오는 날의


공기와 비슷했다. 가을비를 맞은 나무처럼 살랑이는 향기가 우성의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슬슬 말해야겠지.”

앞으로 이틀, 그 이후엔 내 휴가도 끝이었다. 월요일엔 다시 회사에 나가야 했고, 본부장으로 복귀해
그간 못 했던 업무를 해야만 했다. 물론 높은 확률로 병가를 써야겠지만, 그 전에 권이도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억제제가 안 듣는다고…….”

나는 페로몬샘이 기형이라서, 히트 사이클 때가 아니면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 권이도는 모르겠지만 그


여파로 인해 억제제도 듣지 않았다. 그나마 주기가 규칙적이라 다행이었는데, 하필 내일모레인 일요일이 바로 그
히트 사이클 날이었다.

“…….”

하자품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가 내게 뭘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억제제가 듣지 않는 오메가가 번거로울 법도 했다. 물론, 만약 내게


바라는 게 그런 쪽이라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길 것이다. 확률은 반반이었고, 나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내게 있는
하자가 그리 크지 않다고 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자품을 주워 와서…….’

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라는 고용인의 호출이었다. 식사는 잘
챙겨 주겠다던 약속대로 주방장은 내가 요구한 한식 위주의 식단을 꼬박꼬박 챙겨 줬다.

“네, 나갑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 위에 얹어 놨던 책은 창틀에 잠깐 올려놨다. 센스 좋은


김 실장이 함께 챙겨 준 소설책이었다.

“……?”

그런데 한 발짝 떼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에 있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혈압이 떨어진 건가, 그리 생각하기도 잠시. 눈 깜박할 새에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뭉치기
시작했다.

“윽……!”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제대로 몸을 일으키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멈췄던 피가 온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안 돼.”

꽃향기가 났다. 익숙하고 진득한 향기가 연기가 나듯 풀풀 피어올랐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가 하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히트 사이클이었다. 단 한 번도 주기를 벗어난 적 없던 그것. 억제제 따위로는 막을 수도 없고,


이성으로 버티기엔 너무도 가혹한 바로 그 시기.

“……흐으…….”
나는 기듯이 몸을 웅크린 채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욕구가 이제는 아프게까지
느껴졌다. 대체 왜, 어째서 더 빨리 찾아온 건지. 그런 것들을 고민할 새도 없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아, 하아…….”

만약 이 모습을 보면 권이도가 뭐라고 할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발정한 오메가를 그가 얼마나


쓰레기처럼 취급할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미래가 또렷이 그려졌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몸은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다. 넘치도록 차오른 욕구가 터질 것 같아서 입가로 침이 줄줄 새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흐윽…….”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들어왔다. 베타일 게 분명한 고용인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고, 그럼에도 열기를
해소하지 못한 채 몸을 뒤틀어야 했다.

권이도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고용인이 억제제를 종류별로 가져오고, 열에


들뜬 내가 정신없이 고개를 젓길 다섯 번쯤 반복한 뒤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서 왜 억제제를 안 먹는지
설명할 여유도 없었다.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내 방으로 들어온 권이도는 침대 위 풍경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용인이 무어라 대답하자
짜증스럽게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언뜻 풍기는 페로몬에 숨을 헐떡이는 내게, 조소 어린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그는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억세게 내 턱을 붙잡았다. 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악력이었으나 그의 손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물가물 눈을 뜨자, 싸늘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정세진.”

무거운 페로몬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감각이었다. 자욱한 페로몬이


폐부를 난도질하고, 드러난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만 같았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허억…….”

아마 그는 내가 히트 사이클로 자신을 꾀어내려는 줄 알았나 보다. 방 안 가득 퍼진 무거운 존재감은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으니. 아니라고, 억제제가 듣지 않을 뿐이라고. 그리 설명하고 싶었으나 나오는 건
오로지 눈물뿐이었다.

“저, 식사는 어떻게…….”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여. 억제제는 의사 불러서 주사로 놓든가 하고.”

그 말만 남기고, 권이도는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닫히는 문이 그토록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더 원망스러운 건, 미미하게 남은 페로몬에조차 발정하는 몸뚱어리였지만.

그 후로 이어진 기억은 뜨문뜨문 끊겨 있었다. 고용인은 정말 억지로 밥을 먹이려 했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치의를 불러왔다. 바르작거리는 나를 세 사람 정도가 붙잡은 뒤엔 팔뚝에 주사를 두 방이나 맞아야
했다.

“……흐.”

당연히, 주사된 억제제 역시 내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나는 그로부터 꼬박 하루를 히트 사이클로 더
앓았고, 과하게 복용한 억제제 탓에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권이도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76 화. Hiver Rigoureux(4)

눈을 떴을 땐 온몸이 땀과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옅게 남은 페로몬과 잔뜩 찝찝한 몸뚱이. 그런 것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익숙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며 히트 사이클의 흔적을 모두 지워 냈다. 사정을 몇 번이나 했는지, 나중엔 한껏


예민해진 살이 건드리기만 해도 따끔거릴 정도였다. 당연히 종국엔 정액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하아…….”

지독한 회의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나면 항상 느끼곤 하는 감정이었다. 자괴감 비슷한,
그런 원망들이 대상을 찾지 못해 속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이번엔 일찍 끝났으니 다행일까. 보통은 꼬박 일주일을 앓곤 했으니. 그보다 문제는 주기가
갑자기 왜 앞당겨졌냐는 건데…….

“……우선 사과하러 가야겠지.”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예의상 인사를 해둬야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권이도에게 말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겸사겸사 주말이 지나면 회사에 나가야 한단 말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애매하게 점심에 가까워진 시간이니 지금 찾아간다고
해서 딱히 무례하진 않을 것이다.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고, 지저분한 페로몬이 남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내 방을 빠져나와 1 층으로 내려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게 식사를


하겠냐며 물었고, 괜찮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마 내 방을 치우려는 듯 보였는데, 나는
스치듯 지나가는 고용인을 붙잡아 물었다.
“혹시 권이도 씨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권이도는 2 층 서재에 있다고 했다. 원래는 주말에도 출근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나는 2 층 끝자락에 있는 방이 서재라는 것과 그가 주로 그곳에서 업무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단조로운 음각이 새겨진 나무 문은 2 층에 있는 모든 방과 똑같았다. 문을 열어 보지 않는 이상 이 방이


무슨 쓰임새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붙잡아 내리는 순간엔 이유 모를
긴장감까지 들었다. 권이도가 내게 보였던 차가운 표정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달칵, 문이 열리고 서재 내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문을 마주 보게 놓인


책상.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 자리한 의외의 물건까지.

“바쁘니까 용건만 하죠.”

총이었다. 새카만 몸체에 주둥이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기다란 총. 그 무게감과 정교함이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는 물건.

라이터인가?

서재에 총 같은 걸 장식해 놓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대부분 가짜였고, 벽에 걸린 저 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무로 짠 프레임 안에 곱게 걸린 모양새가 조금 현실감 넘쳐서 그랬지.

“무슨 일입니까.”

내가 멍하니 있자, 권이도가 다시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권이도를 바라봤다.


서류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어지간히 바빠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

왜인지, 그가 멈칫했단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 역시 뚝 하고 멈춰 버렸다.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저 사람도, 집에선 편하게 입고 있구나. 머리를 편하게 내린 모습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빡빡해 보이던 인상이 지금은 좀 더 유하게 느껴졌다.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을…….”

“…….”

“……왜 그러십니까?”

그의 시선이 찬찬히 내 온몸을 훑었다. 저렇게 보는 건 습관인가. 전처럼 평가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깊이 생각에 잠긴 것 같긴 했다.
“씻었나 보군요.”

느리게 흘러나온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눈가를 찌푸린다.

“페로몬이 전혀 안 남았길래.”

“……아.”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권이도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안엔 적나라한 페로몬이 가득했을


테니. 대놓고 욕정으로 넘실거리던 페로몬은 알몸을 드러낸 것보다 더 민망했다.

“네, 씻고 왔습니다.”

“얘기해요.”

그는 펜을 내려놓고 양손을 포개 책상에 올려놨다. 여전히 눈가는 찌푸린 상태였고 시선도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제는 여러모로 실례 많았습니다.”

히트 사이클이 오고 나면 아버지는 늘 나를 짐승 보듯 보곤 했다. 베타인 그에겐 발정기나 다름없는 그


시기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권이도는 우성 알파지만, 밑바닥을 드러낸 오메가가
추잡스러웠을 것이다.

“원래는 주기가 일정해서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올 줄 몰랐습니다.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 책임감 없게


굴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알면 됐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말에 권이도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냐는 듯


귀찮음이 듬뿍 담긴 표정이었다.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는데, 문제는 그 무관심함에 오히려 불안함이 생겼단
사실이다.

“……그.”

억제제가 안 듣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 왜 이런 불량품을 보냈냐고 아버지에게 따져 물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가 나라는 오메가에게 바랄 건 끽해야 거기서 거기일 텐데. 손조차 대지 않고 넘어간 어젯밤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라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위해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에게 조건을 듣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말한 ‘오메가 구실’이 무엇일지 모르고 있지 않았으니까.

“병 같은 것도 따로 없고, 병원에서도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듯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러니 최대한 말씀하시는 조건에 맞추겠다고 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 있는데.”

그런데 지나치게 냉정한 목소리가 내 말을 뚝 끊어 버렸다. 움찔 고개를 들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보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최소한의 노력 없이 다른 수단만 찾는 사람들, 예를 들어 그쪽처럼 몸이나 팔아서


한자리 얻으려는 한심한 경우.”

몸이나 판다는 부분에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민재에게 들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정말 나를 혐오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게 그 비루한 몸뚱이밖에 없는 건 알겠지만, 그딴 식으로 낳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는


생각해야지.”

권이도는 진심으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 짙은 눈동자에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수치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내게 요구한 건 이런 일일 텐데, 이제 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작 후계자 따위가 필요했다면 그쪽 말고 더 좋은 조건의 오메가가 많았을 겁니다. 몸을 팔 생각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 몸을 사주는 덜떨어진 놈들한테 가면 되겠군요.”

“……죄송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었고, 그냥 괜한 짓을 했다 싶다.


그럼 내게 바라는 게 무어냐고 묻고 싶었으나, 거기까지 따져 물을 만큼 눈치 없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의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이는 일이건, 혹은 후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건. 어느 쪽이건


다음부턴 조심해야 했다.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기엔 그 이후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인정이 빠른 건 편하군요.”

권이도는 금세 시선을 거둬들였다. 다시 펜을 들고 내게서 완전히 관심을 끄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불쾌함 역시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자, 삐딱하게 물어 오기도 했다.

“안 나갑니까?”

“월요일부터 다시 회사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사과드릴 겸 이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용건까지 그에게 이야기했다. 이대로 서재를 나가면 또 한참 그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쪽 생활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일상생활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다. 그게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은 방치에
불과했나 보다.
“바쁘신데 실례 많았습니다.”

꾸벅,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런 것들을 대략 알
것 같았다. 살갑게 구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주제 파악만 제대로 하면 될 듯했다.

“아.”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은 그대로 그를 돌아봤다.


권이도가 나를 보며 오른손으로 제 왼손 약지를 가리켰다.

“반지, 까먹지 말고 하고 다녀요.”

“…….”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반지를 안 끼고 있는데.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이도는 곧장 시선을 돌렸고, 우리 사이의 대화도 거기서 끝이었다.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가 지나는 동안, 회사엔 별달리 변화라고 할 게 없었다. 경영기획 본부는
여전히 바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았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김 실장과 함께 출근하자,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쾌활하게 나를 맞이해 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유부남 된 본부장님이시잖아?”

“본부장님한테 신혼 냄새 나는 것 같아요.”

“결혼 일주일 차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나는 잔뜩 관심을 내비치는 그들에게 늘 그랬듯 살갑게 웃어 보였다. 그 삭막한 집보다는 회사에 나오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았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권이도와의 결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우와, 반지! 이거 다이아예요?”

직원들의 관심은 금세 내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로 돌아갔다. 척 보기에도 값비싼 물건이니 그들이


신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식이 얼마라느니, 예물이 얼마라느니, 그런 말들이
인터넷에 끝도 없이 올라왔다.

“반지 너무 예뻐요.”

“아니야, 이건 본부장님 손이 다 했지.”

“맞아요, 오백 원짜리 문방구 반지 껴도 예쁠걸요?”

그들은 한참이나 돌아가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워낙 관심을 보이기에 반지를 빼주려 했는데, 정작


누구 하나 받아드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비싼 물건이라 괜히 흠집이라도 내면 큰일 날 것 같단 이유였다.

“전 본부장님 인수인계하시길래 그만두시는 줄 알았어요.”

“하하…… 그거야 오래 쉴 거니까 그런 거죠.”


“이거 봐, 또 고작 이주 쉬셔 놓고 오래라고 하신다니까?”

윤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본부장님 정도면 농땡이를 좀 피워도 된다며
짓궂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직원들을 쭉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회식이나 할까요?”

회식 장소는 늘 그랬듯이 소고깃집이었다. 처음엔 눈치만 살피던 직원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술과


고기를 주문했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며 술잔을 주고받다가 이따금 내게도 한 잔씩 권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여전히 본부장으로 일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정해져 있었다.

“본부장님이 행복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사랑받는 아들 다음엔, 사랑받는 배우자일까. 나는 회식 내내 그들에게 축하와 감탄을 번갈아들어야 했다.


권이도가 얼마나 잘해 주냐는 식의 질문에는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듯 웃기만 반복했다.

그리고 모든 회식이 끝나 권이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유 모를 한숨을


삼켜 내야 했다. 넓은 내부와 높은 천장. 본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집이 유독 갑갑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아무도 나를 맞이해 주지 않는 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건만.


상황이 변했을 뿐, 환경만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소리 없이 3 층으로 올라가 구석진 곳에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내일도 일을 나가야 하니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수면제는…… 오늘도 세 알 정도면 되겠지.

한적한 복도가 지나치게 넓게 느껴졌다. 방문을 여는 순간엔 목 언저리가 콱 옥죄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대체 며칠이나 반복될까. 그러한 의문은 억지로 머리에서 지워 냈다.

***

며칠이 흘렀다. 나는 변함없는 일상을 반복했고, 잠깐 짬을 내 최 교수를 만나고 왔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이상해졌다는 이유였는데, 그가 말해 준 원인이 참으로 터무니없었다.

‘간혹 있는 일인데, 상대가 너무 우성이거나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주기가 당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련님 같은 경우엔 형질 차이는 아닐 거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요컨대 권이도와의 상성이 좋아서 각인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는 말이다. 최 교수는 부부 사이엔 좋은
일이라며 축하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웃기만 했다. 주기가 들쑥날쑥해지면, 곤란한 건 오로지
나뿐일 테니까.

권이도의 주기를 물어봐야 하나. 안타깝게도 그 생각조차 실천으로 옮길 기회가 없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항상 쥐 죽은 듯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권이도와 마주치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였고, 혹여나 식사 시간이 겹칠 것 같으면 내 쪽에서 피하길 반복했다. 피치 못하게 마주칠 상황이
생기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그냥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본가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나는 이런 식으로 지내 왔으니까. 아버지의 눈에


거슬릴 때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고 저자세로 나가야만 했다.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날수록 고용인들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는 점이었다. 내 방을 치워 주는


하우스키퍼와 요리를 맡은 주방장, 그리고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그들이었다.

‘고생은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사장님은 맛있다는 말을 안 하시거든요.’

‘아이고, 꽃 같은 데 관심 있으세요?’

내가 한 건 별거 없었다. 그냥 마주칠 때마다 간단히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한결


살가워졌다. 삭막하던 방에 예쁜 장식품을 놓아 준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구태여 물어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권이도가 출근한 주말엔, 온종일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으니. 나를 고깝게
여겼다면 그 시간마저 껄끄러웠을 터였다.

그래, 마치 이렇게 권이도와 마주치는 순간처럼.

“…….”

“…….”

출근을 앞두고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평소라면 이미 일을 나갔을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함께 밥을 먹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식사를


거르고 출근할 생각이었다. 원래도 아침밥을 챙겨 먹지 않았지만, 주방장이 하도 챙겨 줘서 먹던 참이었다.

“그냥 앉죠.”

그런데 등을 돌리는 순간, 나직한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우아한 동작으로 식사를 이어 가던 권이도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명령하듯 이야기했다.

“두 번 말하기 싫으니까 앉아요.”

- 다음 화에 계속

77 화. Hiver Rigoureux(5)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말과 함께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 빠른 주방장이 내 식사를 차려 주고,


넌지시 눈인사를 건넨 뒤 돌아갔다. 곱게 차려진 식사는 고슬고슬한 쌀밥과 불고기 따위였다.

권이도는 흘긋 내 앞에 차려진 음식을 살펴봤다. 그의 앞에는 나와는 달리 잘 구운 빵과 달걀, 그리고


샐러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메뉴가 다른 게 신경 쓰였지만, 그는 딱히 지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

“…….”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식사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돌을 삼킨 것처럼


명치가 무거웠다. 암만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커다랗다. 밥을 먹는 내내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음식을 절반쯤 비웠을 때, 권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랑 마주칠 때마다 귀신 보듯 피할 필요 없습니다.”

“…….”

의외의 말이었다. 저 말을 하려고 앉으라고 했던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시위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시위라니.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는 입장이던가.

“죄송합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아뇨.”

“…….”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

잠깐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뭘 어쩌라는 건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어쩐지
불쾌함이 서린 눈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근데 그게 기분이 나빠서.”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는데, 다음부터


그러지 않도록 신경 써야지.

“…….”
하나 권이도는 정작 내 사과를 듣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을 뿐.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안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금세 등을 돌렸고, 짧은 식사는 그렇게 끝이었다.

분명히 체하리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출근길에 오른 다음에도 속은 편안했다. 늘 그랬듯 기사와 김


실장이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김 실장이 전달해 주는 오늘 일정을 들었다. 오전에 있는 내부
미팅을 제외하면 특별히 바쁠 것 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브리핑을 끝낸 김 실장이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아직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얘기하라는 의미로


그를 돌아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조만간 본가에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본가에 들르라니.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해선 아버지가


나를 본가로 부를 일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결혼하라는 통보조차도 회장실에서 듣지 않았던가.

혹시 민재가 사고를 친 걸까, 아니면 권이도가 기어코 나를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은 걸까. 온갖 안 좋은


생각만 떠오르는 와중에, 김 실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유를 말해 줬다.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고 그러셨습니다.”

“……식사요?”

“예, 온 김에 하룻밤 묵고 가라고…….”

이번엔 더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가족끼리 하는 식사에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데. 아버지가


말하는 가족엔 내가 포함되지 않을 테니까.

역시나 이어진 뒷말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 줬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아.”

그럼 그렇지. 용건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그게 김 실장의 입을 통해 전달될 말이 아니었을 뿐.

“급한 일입니까?”

“아뇨, 천천히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치곤 너그럽지 않나 싶다. 볼일이 있을 때면 항상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당장 찾아오라며


재촉하던 분인데. 권이도와의 결혼으로 어지간히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보다.
“다음 주쯤 들른다고 전해 주세요.”

“예, 우선 주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권이도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하룻밤을 자고 온다면 말하는 게
좋을 듯했다. 권이도는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없이 사라지는 건 얘기가 다를 테니.

“당일에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마…… 결혼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보시려나. 혹은 자녀 계획은 아직이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뭐,


높은 확률로 전자에서 후자로 이어지는 질문을 건네겠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건 부디 조용히 넘어갈 수 있길. 적어도 지금의 생활을 더 나쁘게 만들 용건만은 아니길.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

며칠,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그사이 나는 권이도와 꽤 많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는데, 내가 내려갈 때마다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있던 탓이다. 귀신 보듯 피하지 말라고 했으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종 민재에게 전화가 왔었다. 별 쓸데없는 용건들(“넌 씨발, 결혼하고 얼굴도 안 비치냐?”)
이었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대부분 술에 취한 듯싶었다. 문제는, 민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하필 권이도와
마주쳤다는 것 정도.

‘술도 못하면서 와인은 왜 그렇게 마셨어.’

하필 전화를 받을 시간대가 퇴근길이라서 그랬다. 그냥 무시했다간 후폭풍이 심각할 테니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방으로 올라가며 전화를 받았을 뿐이다. 당연히 권이도가 2 층 계단에 서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 걱정하실 텐데 얼른…….’

어색하게 웃고 있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스로 살갑게 누그러뜨렸던 음성 역시 굳어 버릴 뻔했다.


떡하니 마주쳐 버린 권이도의 모습에 하마터면 계단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가까스로 말을 마쳤으나, 권이도는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마저


통화하라는 듯이. 하필 민재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핸드폰 너머로 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대부분이 어리광 비슷한 투정이었다. 씨발이라든가, 혹은 너 따위가 왜 날 걱정하냐든가. 반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누가 봐도 미련 가득한 목소리엔 갈 곳 잃은 마음을 향한 분노도 섞여 있었다.

‘……민재야, 형이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

다급히 통화를 끊었지만, 권이도는 별말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불쾌함과 혐오감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권이도는 민재의 마음도, 내가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민재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눈 깜박할 새에 아버지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권이도의 집을 나섰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청명하기만 했다.

‘본가?’

권이도는 집에 다녀온다는 말에 이전처럼 싸늘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이었으나


날짜를 가늠하려는 듯 시계를 확인한 것이다. 톡, 톡, 검지로 손목시계를 두드린 뒤엔 혼잣말처럼 말하기도 했다.

‘내가 출장 가기 전날이군요.’

그는 자신이 사외 이사로 있는 시티그룹 주주 총회에 다녀온다고 했다. 대략 일주일 정도가 될 테니,


본가에는 마음대로 머물다가 오라고. 언뜻 상냥한 허락 같았으나 결국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겠네요.’

‘네, 뭐…… 그럴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웬일로 잡담을 할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권이도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쪽 동생도 볼 테고.’

‘…….’

뭐랄까. 일부러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알 수 없는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다.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선물을 하나 주죠. 사업 파트너한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권이도가 꺼내 준 건 시가 오천만 원이 넘는 와인이었다. 이렇게 과분한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과분한 게 싫으면 이 결혼을 거절했어야지.’

맞는 말이었다. 내게 가장 과분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권이도일 텐데. 고작 몇천만 원짜리 술은 그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겠지.

‘그딴 알파 새끼가 준 거라고 얘기해요.’

사실, 화제가 안 돌아갔던 모양이다. 민재의 말 따위 상관없다고 대답해 놓고 사실은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말이 괜히 가시 돋친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겠지.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대문 앞에 도착했다. 회색 담벼락은 어릴 때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높게만


느껴졌다. 크기로만 치면 권이도의 집 쪽이 높을 텐데, 답답하긴 이쪽이 더 심한 것 같다.
“괜찮으십니까?”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애써 담벼락 꼭대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담담한 척


괜찮다고 대답한 후엔 먼저 대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오셨어요?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집으로 들어가자 문 집사가 나를 맞이해 줬다. 뒤늦게 어머니가 나왔고, 그는 아버지가 서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나는 고용인에게 와인을 건네준 뒤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땐 배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할까, 결코 좋지


못한 얘기를 들으리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선택권은 없으니, 결국 노크를 건네야 했지만.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들어오거라. 인자한 목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끼익, 열린 문틈으로 골프채를 들고 퍼팅


연습 중인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 안에서 무슨 말을 들을지, 그게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런 건 전혀 상상도 못 한 채로.

“찾으셨다고요.”

***

해가 질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통 새카만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끝없이 비가


쏟아졌다. 나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그 비를 구경하다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본가를 빠져나왔다.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김 실장은 내 요구에 별다른 반박 없이 차를 돌렸다. 내가 오피스텔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건, 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멍하니 창밖에 내리는 가랑비를 응시하길 한참, 김 실장이 넌지시 물어 왔다.

“……수면제는 안 필요하십니까?”

“아.”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곧 수면제가 다 떨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몇 달 치를 한 번에


받아오지만, 정작 내가 복용하는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필요합니다. 말씀드린다는 걸 까먹었네요.”

“조만간 챙겨서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차 안엔 다시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응시하며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관계에 진전이 없냐는 질문과 아이는 아직이냐는 의문. 아들에게 하지 못할 모욕적인 말들 끝에
흘러나온 진짜 용건까지.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게 수락과 거절은 아닐 것이다. 단지 기꺼이 알겠다고 할지, 아니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지의 차이일 뿐.
‘훔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빨리 보자는 거지.’

아버지가 늘어놓는 말들은 온통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도둑질이었고, 배신이었으며, 권이도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낼 내용이었다.

‘잘 생각해야 해. 네가 이걸 안 가져온다고 너희가 이혼을 안 할 것 같아?’

‘…….’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그 말엔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애정 하나 없는 오메가를 권이도가 얼마나 데리고 있으리라고. 내게


바라는 게 후계가 아니라면 마침내 쓰임새를 다했을 땐 팽하고 말겠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여태껏 나를 키워 준 아버지와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낸 권이도.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뻔하기만 했다. 애초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가 배신감을 느끼진 않을 터다.
그저 걸리적거리는 오메가가 일을 쳤구나, 그 정도 평가를 하면 모를까.

‘……그 새끼가 잘해 주냐?’

응접실에 앉아 있을 즈음 민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어둡게 염색한 탓에 오늘따라 어머니와 더


닮아 보였다. 나는 그런 민재를 보고 최근 들어 가장 열심히 흉내 냈던 미소를 또 한 번 지어야만 했다.

‘잘해 줘. 집에 다녀온다니까 선물까지 줬잖아.’

잘해 주긴 무슨. 애초에 대화조차 없는 사이건만. 그와 나눈 대화를 모두 합쳐도 책 한 페이지조차 안


되는 분량일 텐데. 그마저 대개는 권이도의 일방적인 조소가 아니던가.

‘……그래서 만족해? 지금 그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게 다른 길이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건네는 말이야말로 정말 잔인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져온 와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내 결혼 생활이 어떤 식인지 보지도 못한 주제에.

‘역시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화풀이가 그것이었다. 화제를 돌릴 수 있는 적당한 말이기도 했다. 역시나


민재는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얼굴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도착했습니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 실장은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산을 펼친 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오늘은 비 맞으시면 안 됩니다.”

단호한 말에는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비를 맞는 걸 좋아한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잔인하게도 맞는 건 안 되니 보기만 하라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온전히 나를 향한 걱정 때문이었지만.
“도련님 안색이…… 오늘은 정말 안 될 것 같습니다.”

문 집사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삼시 세끼 꼬박꼬박 얻어먹는데도 얼굴이 별로였나 보다.

“감기는 김 실장님이 걸리겠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그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왔다. 아마 입구까지 씌워 줄 요량이었겠지만, 그렇게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습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그럼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절대 비를 맞지 말라고 강조하기에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차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뒤꽁무니를 보다가 팔을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가랑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

비 맞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갑갑한 속을 씻어 내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 여러 냄새가 섞여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했고. 눅눅히 젖은 흙냄새, 싱그러운 풀 냄새, 잔잔히 풍기는
나무 냄새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

시간이 늦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멀쩡히 정장을
차려입고 주차장에서 비를 맞는 젊은 남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꽤 구질구질한 장면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곳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온몸이 차갑게 식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속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 때문일까. 홀로 오피스텔에서 잠이 든 다음 날, 나는 지독한 열병 속에서 눈을 떠야만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78 화. Hiver Rigoureux(6)

아주 오랜만에 걸린 열 감기였다. 아침이 되자마자 찾아온 온 김 실장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병원부터


가자고 이야기했다. 딱히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기에 의사에게 약을 처방받아 권이도의 집으로 향했다.

사실 오피스텔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권이도가 돌아오려면 일주일이나 남았고, 괜히 몸


관리를 못 해 감기에나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하려면, 권이도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정말 권이도 전무 집으로 가십니까?’


김 실장은 탐탁지 못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런 내 뜻을 꺾지는 못했다. 내가 그에게 건넨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아무렴 그 또한 이게 자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 명령의 내용까지는 몰라도 내


선에서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게 나는 좋지 못한 몸을 이끌고 권이도의 집으로 향했다. 약을 먹었음에도 뜨끈뜨끈하게 오른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를 괜히 맞았지. 김 실장이 하는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게 없었는데.

그의 집에 도착한 뒤에는 곧장 방에 틀어박혔다. 아픈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고용인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점심에는 달걀이 들어간 죽이 나왔고, 내 방 침대 옆엔 가습기까지 틀어졌다.

미안함이라고 해야 할까. 권이도에게 들지 않던 감정이 그들에겐 들었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이 집에


파란을 일으킬 텐데. 커다란 위기가 되진 않더라도 들썩이는 수준의 문제로는 작용할 텐데 말이다.

‘모자란 널 지금까지 키워 준 게 누군지 알고 있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엔 끊임없이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깊은 웅덩이가 생긴 것처럼, 눈을


감으면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눈밭 속에서 죽었을 테니.
가까스로 연명하는 남은 삶은 아버지가 뜻하는 대로 써야만 하는 게 아닐까.

‘역시 내 아들이야.’

우습게도 나는 그 한마디에 가까스로 목을 축였다. 메마른 땅에 고작 한 방울 뿌려진 단비였기에 그


갈증이 얼마나 간절한지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식으로밖에 얻지 못할 애정이지만, 이깟 애정이나마
아버지가 아니면 얻을 수 없었다.

딱 사흘을 감기로 앓았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회사에 나갔는데, 아버지는 매일 나를 회장실로 불렀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안부 인사를 건네며 이미 받아야 할 자료였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내 좋지 못한 몸 상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집에 돌아오면 기절하듯 쓰러지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다 하루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비몽사몽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고 눈앞은 흐리멍덩하게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밤인지, 아니면
새벽인지. 그런 것조차 모른 채 내 방을 빠져나갔다.

어두컴컴한 복도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권이도가 돌아오지 않은 데다, 이 시간대엔 고용인들도


모두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다. 맨발에 닿는 카펫은 무척이나 부드러웠으나, 발바닥이 따끔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향한 곳은 2 층 끝자락에 있는 서재였다. 권이도가 일을 할 때 늘 머무는 장소. 집에 있을 때면


제 방보다 오래 머무른다는 곳.

‘너밖에 없다, 세진아.’

사실 그런 생각도 했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내 능력이 부족해 알아낼 수 없었다고.


그렇게 핑계를 대며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는 것이다. 무능한 녀석이라며 욕은 좀 먹겠지만, 그거야 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문고리를 내리는 순간에는 염치없게도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자료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또
이왕이면 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게 내가 살아갈 방법 중 하나라면 살아갈 길이 또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고.

내 바람이 신에게 닿았을까.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달칵, 열린 문틈으로 옅게 남은 페로몬이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번과 전혀 바뀌지 않은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책장, 벽에 장식된 총, 단정히 정리된 책상과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 뭉치.

“…….”

아버지가 내게 요구했던 자료였다.

***

또 3 일이 흘렀다. 권이도 없는 저택은 오히려 편안하다고 느낄 만큼 고요했다. 평소에 그가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그의 부재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감기가 다 나은 이후,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내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에 남은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고 김 실장에게 수면제를 비롯한 다른 약들을 부탁했다. 이번엔 감기약이 아니라 위장약과
소화제로.

이 집에 들어와서 속을 게워 내는 일이 꽤 잦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엔 배가 고파서 토를 했는데,


이제는 멀쩡한 음식을 먹고도 소화를 못 시켰다. 배가 한참이나 불렀지. 몸이 편안한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모양이다.

뭐, 구역질의 이유가 체기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전자의 이유조차 후자가
원인이겠지만, 나는 애써 그 모든 사실을 외면했다. 현실과 직면하는 순간, 버틸 수 없으리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부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직원들은 하루가 다르게 내 몸 상태를 걱정했다. 내가 애써 웃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해


보였나 보다. 혹시 무슨 일 있냐며 진지하게 묻기에 비를 한 번 잘못 맞았더니 된통 감기에 걸렸다고 대답했다.

“비를 왜 맞으셨어요!”

“하하…….”

그러게, 왜 그랬을까. 비가 내린다고 가만히 맞고 있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건만. 물론 과거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겠지만 말이다.

몸이 좋지 않아서일까, 퇴근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그의


집으로 가는 걸 ‘돌아간다.’라고 불러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그가 내어 준 공간은 내 방이 맞건만,
언제든 떠나야 할 장소처럼 정이 붙질 않았다.

그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권이도는 내일모레에나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는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 없던 척, 그를 맞이할 준비 말이다.

잠이 드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각한 불면증조차 몸이 한계까지 약해진 순간엔


조금 너그러워지나 보다. 나는 꿈조차 꾸지 않는 단잠을 취했고, 잠에서 깨어난 건 어슴푸레한 여명이 떠오르는
새벽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예정에도 없던 히트 사이클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

“흐으…….”

몇 시간을 열기 속에서 몸부림쳤다. 초인적인 힘으로 김 실장에게 연락을 넣고,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분명 며칠 전까지 열 감기로 고생했는데, 또 이렇게 열이 오른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흐, 흡…….”

최 교수가 그랬다. 권이도에게 맞춰 히트 사이클이 앞당겨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대중이라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면, 만약 회사에 나가 있을 땐 어떻게
하라고.

온갖 억울함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욕구는 끊이지 않았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에선 이미 프리컴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앞이고 뒤고 죄 젖는 바람에 나를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수치심이 들었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아무도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숨기면서도 이유 모를 눈물이 줄줄이 나왔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즈음에는 내가 있는 곳이 권이도의


집인지 아니면 오피스텔인지조차 헷갈렸다. 이 성욕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김 실장님……?”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들이마신 숨결에 짙은 나무 냄새가 섞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냉랭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비서랑도 붙어먹나 보죠.”

“…….”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헐떡이는 숨조차 뚝 하고 끊겨 버렸다. 이불 속에서 머리를 내밀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권이도가 보였다.

“감기에 걸렸다더니…….”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서늘한 눈으로 나를 살펴봤다. 누에고치처럼 둘둘 싸여 있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추잡한 아랫도리 사정을 그대로 보여 줄 뻔했다.

“……페로몬 갈무리도 못 합니까?”

“흣…… 그게 마음대로…….”

그걸 할 수 있었으면 억제제 제약 회사는 진작 망했겠지. 그러는 저 또한 러트 사이클을 생으로 버티지는


못할 거면서.
“하아, 흐…….”

그냥 나가 버렸던 지난번과 달리,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은 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에게서 풍기는 페로몬에 실낱같던 이성이 점점 날아갔다는 것 정도.

“으응…….”

기듯이 권이도 쪽으로 다가갔다. 사실은 꾸물꾸물 손을 내민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러면 안 되는


상대라거나, 내 행동이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페로몬 좀…… 제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마구 튀어나오는 페로몬을 그에게 흘려보내며 내게 자비를


베풀길 간절히 애원했다.

의외로 그는 내가 붙잡는 대로 손가락을 내어 줬다. 서늘한 손바닥에 입술을 문지르자, 비웃듯 코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맨 살결에서 풍기는 페로몬은 녹진하게 풀린 이성을 아득히 멀어지게 했다.

“흐, 좋아…….”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한 손은 권이도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다리 사이로


가져가 문질렀다. 요령이라곤 없는 손길로 사정을 재촉하며 혀를 내어 그의 손가락에 감기도 했다.

“꼬시는 게 아주 자연스럽군요.”

그는 이성적인 말투로 차분히 이야기했다. 여유롭게 페로몬의 양을 늘려 차근차근 나를 적시기도 했다.


내가 몽롱한 얼굴로 손가락을 빨아들이자, 그가 내 아래턱을 꾸욱 눌러 왔다.

“정세진.”

“흐으…….”

“나랑 자고 싶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이 페로몬을 더 느끼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짐승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짐승 같이 굴면 안 된다는 판단 따위는 하지 못했다.

“나랑 자도 그쪽한텐 아무 이득도 없을 텐데.”

“……으응.”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그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열심히 페로몬을 뿌리고, 그가 넘겨 주는


페로몬을 받아 마셨다. 비를 맞은 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우듯 공기 중에 어우러진 페로몬이 입 안을 달큼하게
만들었다.

“바라는 게 그냥 씹질인가…….”

그리 중얼거린 권이도가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내게 붙잡힌 손은 가져가지 않고 다른 손으로 버클까지


풀었다. 훅 짙어진 페로몬과 함께 코앞에 무언가 가까이 다가왔다.
“빨아 봐요. 잘 빨면 넣어 줄 테니까.”

“…….”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커다란 성기였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외모와 달리 핏줄이 도드라진 모양새에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일 틈도 없이 그가 명령처럼 재촉했다.

“얼른.”

나는 홀린 듯 입술을 벌려 귀두를 머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떠나 버릴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혀로 선단을 문지르자, 권이도가 눈가를 확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흐웁!”

쿡, 밀려 들어온 성기가 입 안을 억지로 파고들었다. 아직 다 발기한 게 아님에도 턱이 빠질 것처럼


거대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려는 순간, 그가 뒤통수를 강하게 붙잡았다.

“입으로 받아 본 적은 없나 보지.”

“……흡.”

귀두만 겨우 머금었는데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이 아니었다면 진작 구역질을 했을


터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권이도가 성기를 쑥 빼내었다.

“관두죠.”

그는 금세 옷매무새를 고치고 등을 돌렸다. 김이 샌 것처럼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떠나기 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래로는, 흣…….”

“…….”

“넣을 수 있…….”

시야가 휙 뒤집혔다. 권이도가 나를 내던지듯 침대에 내리누른 것이었다.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하반신을 비비적거렸다.

“제발, 흐으…….”

“얼마나 대주고 다녔길래…….”

그 중얼거림이 왜 그리 불쾌해하는 것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저분하게 느껴지기라도 한 걸까.


남의 손을 탄 오메가는 혹시 권이도의 취향이 아닌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경험이 없단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세진.”

페로몬 실린 음성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겨우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시야가 눈물로 흐렸지만,


그 수려한 얼굴만큼은 또렷이 들어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권…… 이도, 흣…….”

“알고도 이래, 지금?”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묻곤 짓씹듯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내가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 밀착하는 나를, 그는 별반 힘들이지 않고 뒤집어 버렸다.

“……잠, 깐.”

순식간에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졌다. 드러난 맨살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굳게 닫힌 입구에
무언가 툭, 닿아 오고 큼직한 손이 억지로 엉덩이를 벌렸다.

그리고 푹.

“……!”

비명조차 내뱉지 못할 만큼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기도 했고, 내장이
납작 짓눌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암전될 만큼 충격적인 감각에 숨이 턱 틀어막혔다.

“아, 아…… 아…….”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끊어지는 신음만 흘렸다. 권이도가 몸을 숙이며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생리적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마자, 그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누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흑!”

“그렇게…… 넣어 달라고 조르더니.”

“아, 아흣, 흑, 아, 안 돼…….”

“힘을, 큿, 이렇게 주면…….”

“……아윽!”

“움직일 수가 없잖아.”

아래가 잘못된 기분이었다. 흥건히 젖은 내벽이 단순히 애액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응할 시간 없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온 성기가 억지로 아래를 넓히는 게 느껴졌다.

“아흐으……!”

그런데도 나는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분출했다. 권이도의 페로몬 덕분인지, 아픈 와중에도 열기가


계속해서 들끓었다. 그는 성의 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좁은 내벽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하읏!”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쾌감이 일었다. 내가 아랫배를 납작하게 집어넣자, 권이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그가 같은 부분을 크게 쳐올렸다.
“헉, 으, 흐윽, 아……!”

침이 질질 새어 나올 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희열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배 속이 엉망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하윽……!”

지잉,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정신없이 신음을 내지르던 나와 달리, 권이도는 그


작은 소리를 정확히 알아챘다. 내 뒤에서 상체를 숙인 그가 손을 뻗어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가져왔다.

「정민재」

화면에 나타난 이름이 마치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내가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그가 전화를 받는


게 더 빨랐다. 숨을 흡, 들이마심과 동시에 스피커폰으로 돌린 핸드폰에서 민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정세진.

“…….”

순간, 맨정신이 돌아왔다. 발기했던 성기가 일순 가라앉을 뻔할 정도로. 혹시 민재가 허튼소리를 하진


않을까. 가뜩이나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씨발…… 대답 안 하냐?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전화를 끊어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권이도는 전화를 끊는 대신 오히려
내 가까이로 가져왔다.

-어디서 뭘 처하길래 출근도 안 하고…….

“……하응!”

푹, 깊이 삽입된 성기가 안쪽을 건드렸다. 하릴없이 터진 신음이 전화 너머로도 또렷이 전해졌을 거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는 또 한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읏, 흐…… 흐응……!”

-…….

전화 너머에선 정적만 흘렀다. 권이도는 자비 없이 계속해서 삽입을 이어 갔다. 내가 혀를 꾹 깨물자


억지로 내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기도 했다.

“하으, 흐, 우응…….”

-…….

숨을 터뜨리는 소리가 또렷이 전해졌다. 온몸으로 나를 내리누른 권이도가 핸드폰에 대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어디서 뭘 처하는진 알았을 텐데.”


-…….

“더 들을 생각 없으면 끊어.”

뚝, 전화가 끊겼다. 민재가 아니라, 권이도의 손에 의해서. 혀를 누르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고 그가


거칠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으으……!”

그렇게 이어진 행위는 하루가 꼬박 지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 총 세 번이 넘게 사정했고,


그렇게 배출한 정액은 고스란히 배 속에 가득 찼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민재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79 화. Hiver Rigoureux(7)

한 번의 섹스는 관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섹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배설 행위 끝에 내가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뭐가 허무했냐면, 이토록 쉽게 히트 사이클을 끝낼 수 있단 사실이.

뭐, 그게 ‘쉬웠냐.’라고 물으면 그건 정말 할 말이 없었지만.

‘아흑, 흐읍, 더, 흐…….’

‘……하, 씹.’

아무리 내게 비교 대상이 없어도 이게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을 만큼 쾌감이 일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아마 섹스를 잘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마구잡이로 박아 대는데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배려는 좀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건 굳이 배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으…….”

아침이 되었을 때, 권이도는 내 옆에 누워 있지 않았다. 나는 온몸 가득 근육통을 달고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스로 욕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주말이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섹스 후유증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병가를 낼 뻔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엔 흐르는 정액을 빼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누가 알파 아니랄까 봐, 한 번 사정할 때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종국엔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만일 노팅했더라면 틀림없이 임신이 됐을
거다.

부끄럽냐고 물으면 딱히 그렇진 않았다.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할 터였다. 권이도는 성욕을 풀고, 나는 히트 사이클을 무사히 넘겼으니, 어쩌면 이건 상부상조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후의 어색함까지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

분명 꽤 늦게 내려왔는데,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차려입은


모습으로. 출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시간까지 집에 있을 이유가 없건만.

“앉아요.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실례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늦잠을 잤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엉거주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굴고 싶었지만 말하기조차 민망한 곳들이


다 아픈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원래 다음 날은 다 이런 건지. 일상생활에 영향을 너무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식사가 차려지고,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권이도와의 식사는 이게 보통이었다. 딱히 대화거리도 없는 데다 내가 먼저 살갑게 구는 건 그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를 살핀 뒤 젓가락을 움직였다. 권이도가 식사하는 모습은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작위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젓가락을 쥐는 손동작도,
턱을 움직이는 모습도, 가끔 신기할 정도로 시선을 빼앗아 갔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예?”

대뜸 튀어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필 그를 지켜보던 중이라 더 그랬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권이도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이야기했다.

“돈이든 뭐든, 하나 정돈 들어주죠.”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니, 그와 내 사이에 나올 주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보상을 해주듯…….

“아.”

순간, 탄성이 나왔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화대처럼 말씀하시네요.”

내 몸을 사주는 덜떨어진 놈한테 가라고 했으면서, 그 대가를 쥐여 주면 결국 본인이 덜떨어진 놈이 되는


게 아닌가. 히트 사이클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침대에 엎드려 신음하던 내가 그런 실리를 따지리라 생각한 걸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뭘 바라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정신이 없었을 뿐이고, 이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정중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다. 자존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받고 싶은 게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정 바라는 게 있다면…… 욕조에 몸이나 좀 담그고 싶군요.”

“……욕조?”

권이도는 그렇게 되물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제 방엔 욕조가 없거든요.”

“…….”

아차 싶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데 자세히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워낙 남을 살피는 게 습관이라, 늘 예민하게 눈치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겠어요.”

뒷말은 너스레를 떨듯 덧붙였다. 정말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듯 건넨 가벼운 희망


사항이라고 어필하기 위해서. 왜, 사람들이 그냥 버릇처럼 ‘여행 가고 싶다.’라고 말하듯이.

“고용인한테 말해 놓죠.”

그런데 권이도는 흔쾌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고개를 까딱하기도 했다.

“하늘은 못 보겠지만.”

아마, 이걸 빌미로 어제 일을 없었던 셈 치려고 하는 걸 수도 있었다. 나와 잔 게 퍽 후회스러운


모양이니 뭐라도 해주고 입을 닦으려는 거겠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여유를 부릴 상황이 되었으니 처음보단 낫다고 해야 할까.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건 내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으니까.

또 한동안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내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이 지금은 모래알처럼 꺼끌꺼끌하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한 입씩 삼키는 와중에 권이도가 내게 물어 왔다.

“감기는 어쩌다 걸린 겁니까?”

“아…… 비를 맞았습니다.”

“어디서?”

“……그냥, 뭐.”

구체적인 상황을 꼭 말해야 하나. 혼자 청승을 떨었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영 민망했다. 그래서 그냥,
대화를 끝내고자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 드렸다면…….”

“걱정이라니.”

권이도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눈가를 확 찌푸린 채 혀를 찼다.

“내 집에서 빌빌거리고 다니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그 말만 하고 권이도는 젓가락을 내려놨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이었는데 사과를 하기에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고, 덩그러니 나를 내버려 둔 채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출근한 뒤엔 약속대로 고용인이 목욕물을 받아 줬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향긋한 입욕제까지 풀어져 있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실컷 몸을 담그고 있다가 살이 발갛게 익을
즈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돌아온 방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침대 시트도 새것이었고 어지러이
흐트러졌던 옷가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거라곤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 정도.

신도 참 불공평하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에게 우월한 형질까지 안겨 줬다. 그 대신 성격이 좀 나빴지만,


그 또한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야금야금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페로몬은 매일 복용하던


수면제보다 훨씬 나았다. 그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함께 히트 사이클을 보냈지만, 우리 사이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딱히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늘 함께 아침을 먹게 됐지만, 그마저도
살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냥 달라진 건, 내가 늘 그 인사를 건넨다는 것 정도. 그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눈앞에서 일어나니 뭐라도 말했을 뿐이다. 처음엔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권이도도 시간이 지나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뚝 끊겨 버린 연락은 내게 여러 가지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가령 내가 정말 멍청했다는 사실과 이제는 돌이키기엔 늦어 버렸다는 사실 따위.

마치 잔잔한 바다 위를 부유하는 뗏목이 된 기분이었다. 조만간 비바람이 칠 게 확실한데,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떠는 것뿐이었다.

“……하잖아.”

늘 그랬듯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차고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그 앞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그게 권이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나도 알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


권이도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옆모습은 방금
카탈로그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보이던 여유로운 모습 대신 이상하리만치 처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 봐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누나가…….”

일순, 권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그는 딱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띵,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는 안으로 올라타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묻는다.

“안 탑니까?”

위로 올라가는 내내 숨 막히는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엿들으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했어야 하는데,


정신을 차리니 타이밍이 애매해졌다. 좋게 보여도 모자랄 상대에게 왜 자꾸 나쁜 모습만 보이는지. 아니, 이제는
어떻게 보이건 상관없으려나.

“정 회장한테 가서 말할 생각입니까?”

1 층에 도착했을 때, 권이도가 내게 물었다.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

“그런 가족사를 함부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권이도의 할아버지라면 현 선호그룹 회장인 권병욱이었다. ‘돌아가신다.’라는 가정이 나왔다는 건 실제로


오늘내일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알음알음 도는 찌라시가 반쯤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들었다는 얘기군요.”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듣고말고. 그 거리에선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들렸을
텐데. 게다가 차고는 원체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 아니던가.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한 얘기 아닙니다.”

그는 딱딱하게 대꾸하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째서인지,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내가 지금, 심적으로 지쳐서일까. 그를 그냥 보내는 게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권이도 씨.”

그래서 충동적으로 권이도의 이름을 불렀다. 놀랍게도 그와 만난 이후로 처음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가


느리게 나를 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같이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래요?”

뜬금없는 제안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그만큼 친하지 않았고, 내게는 이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낸 건, 따끔거리는 양심이 자꾸만 그를 붙잡으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잠깐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

“강물에 야경이 비치는 모습이 예뻐서, 아마 권이도 씨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권이도가 보기엔 분명 보잘것없는 풍경일 터다. 강물에 비치는 야경 따위를 이 사람이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게 뭔 개소리냐고. 그리 거절당할 준비를 하는 와중에, 그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물어 왔다.

“운전 잘합니까?”

“……예?”

그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약지엔 나와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왼
손목을 가볍게 턴 권이도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운전을 그쪽이 하면 생각해 보죠.”

***

한강으로 향하는 길은 오고 가는 차 한 대 없이 한적했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데다 아직은 평일이라


놀러 가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줄줄이 세워진 가로등을 따라가며, 나는 넌지시 자연스러운 화제를 꺼냈다.

“……차가 정말 좋네요.”

아까, 운전을 내가 하라던 말대로 권이도는 내게 차 한 대를 빌려줬다. 선호에서 나온 세단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출시한 차종답게 승차감이 나쁘지 않았다. 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 정도면 한 대 장만해도
좋을 것 같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요.”

권이도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뒷말을 이었다.

“내가 남의 손을 탄 물건은 안 써서.”

“…….”

그럼 차를 빌려주지 말았어야지. 괜히 핸들을 쥐고 있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나는 신호에 맞춰 차를


돌리며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사양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가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옆얼굴에 따라붙은 시선은 한동안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운전


중이라 그를 마주 보지도 못하는데, 동물원 속 원숭이처럼 고스란히 관찰당하고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데.”


그가 입을 연 건, 강변에 차를 세울 즈음이었다. 역시 이 사람을 데려오기엔 보잘것없는 곳이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기도 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쪽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으로도 내 속내를 읽지 못한다는 게. 내가 그냥


웃어넘기려는 찰나, 권이도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목구멍이 콱 옥죄는 느낌이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 안에 풍기는 페로몬마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바라는 거라면.”

“그쪽 성격상, 여기까지 오자고 했으면 하려는 얘기가 있었겠지.”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면서.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나.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나랑 데이트나 하자고 부르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권이도는 뭐라고 대답할까. 상상하는 것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짜


배우자라도 된 것 같냐고 싸늘한 냉대가 돌아올지도 몰랐다.

“정 회장이 그쪽한테 협상이라도 시켰습니까?”

“…….”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정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담담한 척 있었지만,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양심의 가책이 뱃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내려앉았다.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세진아.’

“저는…….”

“…….”

“저는 정말 바라는 게 없습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회사에서 한자리 꿰차고 싶지도 않았고, 권이도에게 빌붙어 한몫
챙기고 싶은 야망도 없었다. 그냥 아들로서의 인정. 그리고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울타리. 딱 그 정도를
바라고 평생을 살아왔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

그는 내 사과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 바라는 게 없어서 죄송하다는 말로 알아들었겠지. 그


안에 어떤 고백이 담겨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로.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한 번 더 사과를 내뱉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었다. 한강에 오자고 하지


말걸. 대학 시절부터 기대하던 야경을 고작 이런 상황에 보고 싶었던 게 아닌데. 자꾸만 고개가 수그러드는
와중에, 권이도가 느리게 운을 뗐다.

“보통…… 아들은 아빠를 많이 닮던데.”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차라는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쪽은 정말 친아들이 아니군요.”

해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은, 단순히 피가


섞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리라. 좀 더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내 사이에 차이점을 찾아냈다면 모를까.

“그만 돌아가죠.”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렇게 요구했다. 나는 곧장 차를 돌렸고, 우리는 고작 5 분 만에 한강을


벗어났다. 강물에 비치는 야경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 다음 화에 계속

80 화. Hiver Rigoureux(8)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따사로워진 바람이라든가, 파릇파릇한 정원에 수놓아진


화사한 꽃들 같은 것. 창문을 열면 봄 내음이 풍기고 출근길 옷차림이 한 겹 얇아지는 시기.

권이도와 나는 초봄에 결혼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공기가 남아 있었다. 내리는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릴 정도니 그 계절의 여파를 충분히 알 만했다. 아마 눈 깜박할 새에 여름이 오고, 금세 녹음이
우거지겠지.

어쨌든 한 달하고도 절반. 그와의 결혼 생활 역시 익숙해졌다. 정확히는 바뀐 거처와 갑작스럽게 생겨


버린 식사 상대가 더는 불편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적응이 안 되는 건,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태도 정도.

‘그만 돌아가죠.’

한강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권이도가 조금 이상했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긴 애매한데, 나를 보는 시선이


예전과는 달랐다. 원래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바람 없는 날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그걸 가장 먼저 느낀 건 그와의 아침 식사에서였다. 늘 그랬듯 아침을 먹던 권이도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던 그때부터.
‘먼저 일어나죠.’

그 말이 뭐가 이상하냐고 묻겠지만, 나로선 놀랄 만한 일이었다. 권이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양해를


구하고 일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통보였으나, 내 인사도 무시하던 때와 비교하면 퍽 눈에 띄는 차이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 당시만 해도 딱 그 정도 의문에 불과했다. 진짜 이상함을 느낀 건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욕조는 쓰고 싶을 때마다 써도 됩니다.’

‘……네?’

함께 아침을 먹는 와중에 권이도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뜬금없는 주제였고, 그답지 않게 자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사람 다음 말을 듣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 거다.

‘또 쓸데없이 감기나 걸리지 말고.’

이걸…… 잘해 준다고 해야 할까. 사실 애매했으나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를


벌레 보듯 보지 않는 것만으로 숨 쉴 구석이 조금은 생겼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뀐 태도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를 마주할 때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명치


언저리가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굴을 보는 횟수가 적을 땐 괜찮았는데, 날이 지날수록 점점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본부장님 나오셨어요.”

그리고 주말 오후. 홀로 정원을 산책하던 때였다. 원래는 늘 방에만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마침 화단을 정리하던 정원사가 나를 보고 살갑게 알은체를 해왔다.

“산책하시나 봐요.”

정원사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피부색이 건강한 남자였다. 나이쯤 50 대쯤 됐고, 늘 흙이 묻은 목장갑과


지저분한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네, 꽃이 많이 폈길래 좀 보려고요.”

살갑게 웃으며 대꾸하자, 정원사의 얼굴에도 해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간 알게 된 사실인데, 본인 일에


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 조경된 정원을 칭찬하면 누구보다 뿌듯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 방에 장식할 수 있게 꽃 좀 드릴까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원사가 화단에 쭈그려 앉았다. 주섬주섬 장미와 작약 따위를 꺾더니 손이 다치지
않도록 가시를 깔끔하게 다듬어 한 뭉텅이를 만든다. 잘 자라던 꽃을 꺾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민망해할까
싶어 말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이고, 너무 많아졌네. 자, 본부장님이랑 잘 어울리는 예쁜 놈들로만 골랐습니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화사하고 예뻤다. 향긋하게 풍기는 꽃내음이 가라앉은 기분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냥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 입매가 부드럽게 풀릴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화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물에 꽂아 놓으면 얼마나 가려나.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냄새를 맡아 봤다. 방에 장식해 두고 며칠 정도


달큼한 향기를 만끽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정원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다시금 감사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꽃향기가 솔솔
느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꽃다발을 좋아하나. 그리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던
때였다.

“…….”

그 언젠가처럼, 2 층에 권이도가 서 있었다. 빈틈없이 정장을 차려입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완벽한


차림새로. 아직 들어올 시간이 아닐 텐데. 내심 당황하는 바람에 대뜸 묻고 말았다.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의 시선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향했다. 뒤이어 움직인 입술에선 “방금.”이라고 단조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내 느릿느릿 눈을 내린 그가 물끄러미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라봤다.

“어…… 좀 드릴까요?”

나는 반사적으로 꽃다발을 반으로 나눠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지 않고 미간을 좁히기에 멋쩍게


덧붙이기도 했다.

“선물로.”

“……선물?”

아,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

“권이도 씨 정원에서 나온 거니까 선물이라기엔 뭐하지만…….”

결국엔 이 꽃도 권이도의 소유일 텐데. 남의 물건으로 생색을 낸 기분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접어 웃었다.

“예쁘잖아요.”

“…….”

그는 말없이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꽃을 받지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혹시 기분이


상할 행동이라도 한 걸까.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누가 줬습니까?”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들은 그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더 빛을 발했다. 이 사람은 뭘 들어도 잘 어울리겠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대답했다.

“정원사분께서 주시더라고요.”

“고용인들이랑 사이가 좋군요.”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 표정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혹시 정원사에게 불똥이 튈까 싶었는데, 다행히
권이도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꽃을 좋아해요?”

“네,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꽃이라면 평범하게 좋아했다. 그들이 머금고 있는 향기는 언제 느껴도 참 따사로운 것이었으니. 한때


조향사를 꿈꿨던 내겐 그 모든 냄새가 퍽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그는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언뜻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너무 작은 소리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왼손으로 장미 한 송이를 뽑아 든 그가 줄기를 빙그르르 돌리며 이야기했다.

“조만간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이 열릴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소식이 들렸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몇 번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엔 내가 그의 파트너로 참석해야 할 거다.

“입을 옷은 내 쪽에서 준비할 테니까 그날 시간만 비워 놔요.”

그의 왼손엔 내가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기념식 날이 되면 우리는


모두의 앞에서 금실 좋은 부부를 연기하겠지. 아마 결혼식 때처럼 나는 방긋방긋 웃고, 권이도는 남들의 아부를
듣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또다시 가슴 언저리가 뭉치는 듯했다. 아까는 향긋하게 느껴지던 꽃향기가 지금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권이도에게 인사를 건네고 3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는 그런 나를 붙잡는 대신 가만히 내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이 양심을 콕콕 건드리는 듯했다.

***

창립 기념식은 명성호텔 리브라홀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기념식 당일이 되자마자 나는 권이도가 준비한
샵에 들러 옷과 머리를 세팅했다. 나란히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뒤엔 우선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짱부터 껴야
했다.

넓은 식장에서 내 자리는 당연히 권이도의 옆이었다. 권이도의 식구들도 근처에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딱 한 명 권이정만이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추파를 던졌을 뿐이다.

“인물들이 어쩜 저렇게 좋은지 몰라…….”

누군가 중얼거린 말대로였다. 내가 이 사이에 섞인 게 민망할 정도로 그들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만큼이나 외적인 요소도 훌륭했다. 식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쏠린 시선은 대부분이 경외와 탐욕으로 가득했다.
미리 고지된 순서에 따라 기념식이 행해지고, 부회장인 권상미가 권병욱 회장의 부재를 사과했다. 얼핏
권이도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지만,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권이도 전무님.”

식순이 끝나고 마주친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권이도에게 악수를 청할 때도


이전과 같은 비굴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쭉 편 채, 사근사근 웃으며 이야기했을 뿐.

“아직 신혼이라 바쁘실 텐데, 일도 좀 쉬엄쉬엄하셔야죠. 부부 관계에 너무 소홀하면 이 애비 마음이


어떻겠어요.”

늘 생각하지만, 뻔뻔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물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주제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진짜 뻔뻔한 건 권이도의 옆에 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 있는 나겠지.

“글쎄…… 잘 쉬고 오라고 본가에 보내 놨더니 하루 만에 돌아오던데.”

권이도는 느릿느릿 이야기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영이를 번갈아 봤다. 내가 느끼기에도
위압적인 시선이었기에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그 냉랭한 시선이 닿은 곳은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민재였다.

“부부 관계에 소홀한지 아닌지는 거기 있는 아드님이 제일 잘 알겠군요.”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말없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민재는 별안간 아무런 말 없이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버렸다.

“……하, 하하, 애가 오늘 종일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아버지는 능청스럽게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였다. 배가 아파 보였다거나, 속이 안 좋아 보였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무척이나 상투적인 핑계였고, 정작 권이도도 나도 그가 왜 자리를 떴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조만간 연락하실 일이 있을 겁니다, 전무님.”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얼핏 내 쪽에 시선을 보낸 것 같기도 했다. 권이도는 괜한


허세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나로선 숨이 턱 막힐 만큼 두려운 경고였다.

이미 예정된 결과가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무시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와 내 발목을
붙잡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 크게 넘어져 다치는 날이 오고 말 테다.

그 후엔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하러 다녔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려서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솟구칠 것 같았다. 다행히 배 속이 뒤집힌 와중에도 내 본분을 다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과정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휙휙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퍼뜩 고개를 돌렸는데,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권이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이 확 밀려들었다. 그건, 토기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상체를 확 웅크리자, 권이도가 앞좌석과 연결된 인터폰에 대고 이야기했다.

“차 세워.”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 출발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조금만 방심하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눈물인지, 아니면 구역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으.”

겨우겨우 지탱하던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고 침몰할 걸 알면서도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구조 요청을 보내고 싶은데,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멀미라도 해요?”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게 걱정하는 말투로 들린 건, 그만큼 내가 정신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는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키고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단 말은…….”

권이도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운을 뗐다. 멈춰 있는 차 안엔 권이도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다랬다. 그의


페로몬이라든가, 혹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같은 것들이.

“습관인가 보죠. 본인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매번 사과하는 걸 보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이번엔 내가 잘못한 게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이도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단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뿐.

“고쳐요. 나쁜 버릇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목구멍이 확 조여들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지끈거리는 통증이 온몸에
일었다. 언젠가 그가 페로몬을 쏟을 때 그랬듯, 호된 매질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모든 걸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결국엔 모든


게 예정대로 진행되겠지. 이제 와 돌이키려고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게는 그럴 용기도, 권한도, 그
무엇 하나 주어지지 않았으니.

“……출발하셔도 됩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차마 그를 바라볼 자신은 없어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그대로 창밖을 바라봤다.

권이도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으면 병원을 가죠.”


“……아뇨.”

“…….”

“괜찮아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군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한 번 혀를 차긴 했지만, 무어라 질타를


건네지는 않았다. 나는 억지로 여러 말들을 삼켜 냈고, 그렇게 닫힌 입술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망쳤단 사실을 알아도, 그 선택을 돌이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를 바꿔야 하는데, 그럴 만한 기회가 찾아오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히
외면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출구 없는 수렁에 목까지 잠겨 버린 나를 발견하고 만다.

권이도에게 사실을 고하는 게 좋을까.

그 고민을 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하필 회사는 지나치게 한가했고, 아버지가 내게 장기 휴가를


명령하는 바람에 더 그랬다. 몸이 안 좋아 보이니 집에서 몸조리나 하라는 이유였는데, 당연히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번씩 저울을 기울였다. 툭 치면 무너질 울타리 안에 머물 것인지, 간사한


양심일랑 지켜볼 것인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평생을 갈구한 애정을 쉬이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 내 모든 고민은 끝내 그곳으로 귀결됐다. 지금껏 어떻게 지켜 온 울타리인데, 그걸


내 손으로 부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숨죽여 지내는 와중에 권이도의 조카인 권혜율이 놀러 왔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아이는
베이지색 멜빵 바지에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엔 낯을 가리기 바빴으나, 함께 권이도가 가진
그림을 구경하다 보니 경계를 허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권이도는 내가 권혜율과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 퇴근했다. 화단에 핀 꽃들을 보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던 즈음이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아냐는 질문에, 책에서 봤다고 대답하려던 순간이기도 했다.

“오빠?”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엔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린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혜율이에게 다가와 그 조그만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까지.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지, 혜율아.”

“…….”

저무는 노을이 권이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매끄러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노을은 짙은 눈동자에
선명하게 고였다. 그가 다정하게 눈을 접는 모습, 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 그리고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잘 놀고 있었어?”

누군가에게 반하는 이유는 간혹 아주 보잘것없곤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뇌리에 남아 버린


특별함. 내 경우엔 그게 고작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반했다고 표현하면 안 될지도 몰랐다. 나한테는 보여 주지 않는 표정, 태어나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애정 어린 눈빛. 그러한 것들을 나 또한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 다음 화에 계속

81 화. Hiver Rigoureux(9)

갈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막연히 바라던 애정이 정말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잘하면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걸 깨닫는 바람에.

“뭐 하고 놀았어?”

“오빠랑 그림 구경하고, 과자도 먹고, 꽃 이름도 들었어.”

“재미있었겠네.”

“으응, 그리고 오빠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나를 권이도가 힐긋


내려다보는 것만 느껴졌지. 권혜율이 무슨 말을 했는지,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래?”

“응!”

권혜율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권혜율을 한 번, 나를
한 번 돌아본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삼촌도 다음에 볼게.”

나는 그제야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이도가 돌아왔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애초에
권혜율과 놀아 주고 있던 것만으로 꽤 주제넘은 짓이니까.

“어디 갑니까?”

그런데 한 발짝 움직이는 순간, 권이도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혜율이를 고쳐 안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아이를 안고 있기 때문일까. 그 표정이 평소처럼 냉랭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이나 먹죠.”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저녁을 함께했다. 권혜율의 입맛에 꼭 맞춘 식사는 내가 먹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땐 혜율이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어 준 덕분에 정적이 감도는 순간은 없었다.

다만, 그 주제만큼은 조금 불편했지만.

“오빠도 밥 혼자 먹는 거 싫어한대.”
혜율이는 나와 있을 때 나눴던 대화를 미주알고주알 권이도에게 설명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권이도는 관심조차 없을 텐데 조카가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나에 관한
사소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일 테니.

“그리고 프랑스어 엄청 잘해. 학교에서 배웠다고 그랬어.”

“불어를 잘합니까?”

“……네, 뭐. 어느 정도는.”

권혜율이 가지고 싶은 그림이 파리에 있다기에 나온 말이었다. 자기는 프랑스어를 잘하고 싶은데, 아직
기본적인 인사밖에 못 한다며. 오빠는 잘하냐고 묻기에 이런저런 인사말을 알려 줬었다.

“삼촌, 나 그 수련 가지고 싶어.”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 그림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게 가지고
싶냐고, 상냥하게 물은 권이도는 우선은 기억해 두겠다며 대답을 보류했다.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맞아,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권혜율이 콧잔등을 찡긋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도 했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그의 입에서 범상치 않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오빠한테 꽃냄새 나.”

***

아직 발현하지 않은 아이들은 타인의 페로몬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보통은 제 페로몬에 묻힐


것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게 ‘페로몬’이라는 사실은 구분하지 못해도 냄새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 알아차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혜율이가 했던 말은 내 히트 사이클을 알리는 전조였던 모양이다. 권혜율이 다녀간 다음


날 나는 권이도의 집에서 세 번째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열병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내
밑바닥을 낱낱이 드러냈다.

“……흣.”

무슨 생각을 했더라. 빨리 이 과정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누군가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었다. 평소엔 그 상대가 추상적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원하는 상대가 뚜렷이 정해져 있었다.

“권, 이도…….”

그 달큼한 페로몬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가차 없이 쏟아 내도 좋으니 차라리 그의 페로몬에


휩쓸리고 싶었다. 고이고 고인 열기를 마구잡이로 터뜨리고, 그때처럼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내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노크를


건넸음에도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결과였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는 내게,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그냥 알 수 있었다. 권이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걸. 지금 손을 뻗으면 이번에도 나와 몸을 섞어


주리라는 걸. 그게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배설에 불과한 행위라 한들, 내게는 실낱같은 희망이 될 거라는
사실도.

“……왜 안 내려오나 했더니.”

왜, 그 말이 내 부재를 신경 쓰는 것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밥을 먹으러 내려오지 않아서


직접 찾으러 왔다는 것처럼. 그가 내게 그 정도로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는데도.

“정세진 씨.”

우습게도, 나는 그 부름을 듣자마자 가능성을 엿봤다. 그가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랑 자요.”

“…….”

손바닥에 느껴지는 체온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원체 손이 차가운 사람이지만, 지금은 내가 뜨거워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서, 고개를 들었음에도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안 줘도 되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잡아당겼다. 피부로 전해지는 페로몬이 이다지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내가 가진 페로몬을 보여 주며, 이 모든 걸 내어 줄 테니 나를 안아 달라고 애원했다.

“제발, 흣…….”

그는 성의 없이 이불을 걷어 내고 내 위로 올라왔다. 내가 알아서 엎드리려고 하자, 짜증스럽게 내 팔을


붙잡아 똑바로 눕히기도 했다. 깜박, 깜박, 감았다가 뜬 눈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간하는 기분이니까 울지 마.”

그 말만 하고 권이도는 곧장 내 바지를 벗겨 냈다. 속옷까지 한 번에 침대 아래로 떨어뜨린 뒤엔 잔뜩


젖은 아랫도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흥미가 식기라도 한 걸까. 그리 걱정하는 와중에 그의 페로몬이 훅
짙어졌다.

“흐읍…….”

나는 모자란 숨을 채우듯 다급히 그 페로몬을 받아 마셨다.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고 몸을 잔뜩


웅크리기도 했다. 곧장 삽입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아래를 파고든 건 손가락이었다.

“……흐, 왜…… 거길…….”

“……뭐?”
“거길 왜, 손으로…… 흐읏…….”

권이도가 쯧, 혀를 찼다. “풀어 준 사람도 없나 보지.”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냉랭하게 들렸다.


깊숙이 밀려 들어온 손가락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벽을 넓히기 바빴다.

“그쪽 지난번에 피 났거든.”

그랬던가. 사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유독 앉는 게 불편하긴 했는데, 모든 게 처음이니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릴 리가. 다리 사이에 흐르는 건 그저 권이도가 싸지른 정액인 줄로만 알았다.

“아, 아흣!”

한 개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고, 어느덧 세 개까지 여유롭게 삼키게 됐다. 이따금 가장 느끼는
부분을 건드리는 바람에 앞을 만지지 않았음에도 줄줄 새어 나온 정액이 배꼽 아래에 고였다.

“……아흑!”

권이도는 금세 손가락이 아닌 제 것을 삽입했다.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속이 결리는 기분이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는 동안 그가 내 허벅지를 붙잡아 제 어깨에 걸쳤다.

“아, 아흣……, 흐, 흐읍…….”

건조한 섹스였다.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상반신이 겹쳐지는 일도 없었다. 자욱한 페로몬은 분명 열에


달뜬 상태인데, 몸을 섞는 과정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그에게 매달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해놓고 사람의 온기가 느끼고 싶었다. 그저
성욕을 해소하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기, 읏, 흐응…….”

“……하.”

어느 순간, 그가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신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날 선 발음은 그대로 전해졌다.


역시,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을까. 그런 생각으로 떨어지려는 나를 그가 단단히 끌어안았다.

“정세진.”

나직한 부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고 했다.
애교를 부리듯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자,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왔다.

“그 조그만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진 모르겠는데…….”

“……흐으, 흣!”

“이럴 때만, 후, 나한테…….”

맨살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이따금 내뱉는 짜증스러운 욕설과 억눌린
신음까지.

“……정말 바라는 게 없어?”


권이도는 그 질문을 한 세 번쯤 더 했다.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퍽 집요한 확인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고, 모든 행위가 끝날 때까지 그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을 느끼고, 내게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 말보다 솔직한 게 몸이었고, 몸보다 솔직한 건 페로몬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권이도와의 두 번째 섹스 이후, 우리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도 참 애매한 부분이었는데


이전과 달리 대화가 조금 늘어난 것이다. 정확히는 아침에 마주칠 때 나누는 인사가.

“잠을 못 잤나 보군요.”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권이도는 내 모든 행동에 점수를 매기려는 사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하는 시선을 보냈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우선 경계를 하고 봤다.

“잠자리가 적응이 안 됩니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껍질이 한 풀씩 벗겨졌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시선에 서서히 미풍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처럼 찬바람이 아닌, 따사로운 계절만큼이나 온화한 바람이.

“아뇨…… 제가 불면증이 좀 있어서요.”

20 년을 지내 온 가족들에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점점 누그러지는 태도는 내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을 안겨 줬다. 불편하던 자리가 편해지고 기다려진다는 게,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

“직장인이면 다들 한 번씩 겪잖아요.”

“하긴, 수면 장애는 흔하니까.”

그에게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전한 애정을 내비칠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내


오랜 기갈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그런 바람이 생기는 한편,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자괴감이 자꾸만 내 목을
졸라 왔다.

“쉴 때 좀 자둬요.”

권이도가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 관계는 순식간에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을빛이 서렸던 그 얼굴이 얼마나 차가워질 수 있는지 이미 한 번 겪지 않았던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멈추든가, 혹은 손을 내밀든가. 불확실한 위험성만 가득한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눈앞의 길이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아, 그래. 정세진 씨.”

그는 식사를 하다 말고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따끔거리는 속을 달래며 고개를 들자, 단조로운 질문


하나가 건네졌다.
“불어를 잘한다고 했던가요?”

***

권이도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를 2 층 서재로 데려갔다. 아직 출근 시간이 남았으니, 간단히 부탁할 게


있단 것이었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역시나 벽에 걸린 총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얘기해요.”

“저 총…… 장식 맞죠?”

끽해야 라이터일 텐데, 자꾸 진짜처럼 보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총구가 반짝여서일까, 혹은 몸체가
정말 묵직해 보여서일까.

“아뇨.”

권이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이기도


했다.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입니다.”

“…….”

말문이 턱 막혔다. 진짜 총이, 여기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총기 소지는 불법인데. 아니,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 능력을 갖춘 사람이지만 아무튼.

“이건 정 회장한테 말할 겁니까?”

“……아.”

장난이었나?

“아버지께 우리 대화를 막 전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애초에 아버지와 연락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다. 아니,


이 경우엔 아예 없다고 해야겠지.

“뭐…… 그렇겠죠.”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휴가 낸 이후로 아무와도 연락을 안 하던데.”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는 오싹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통화 기록을 뽑았거든요. 근 한 달 정도.”

“…….”
“비서가 왔다는 얘기도 못 들었으니, 전서구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외부와의 소통은 없었겠죠.”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큰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엔 운이 좋아


걸리지 않았지만, 만약 아버지와 연락이라도 나눴다간 들켜 버렸을 것이다.

“혹시 불쾌했더라도 넘어가요. 나도 최소한의 경계는 해야 하는 입장이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권이도 몰래 주먹을 꾹 움켜쥐는 사이, 그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내밀었다.

“이거 읽어 봐요.”

“…….”

<Origine du parfum>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목을 읽자, 권이도가 무심히
표지를 살폈다.

“발음이 좋네.”

나는 겨우겨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온갖 최악의 경우가 다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뿐.

“저자는…… 샤를?”

“……네, 샤를.”

“그래요, 그럼 다음엔 이거.”

이번에 내민 건 작은 사이즈의 시집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볼펜을 가져와 옆쪽에 있는 소파를


턱짓했다.

“거기 앉아서 내가 가리키는 거 해석해 봐요.”

이게 갑자기 웬 테스트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펜을 건네받았다.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그가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문장 하나를 가리켰다.

“이것부터.”

「Mon Cher Amour」.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뜻이었다. 또박또박 글씨를 쓴 다음엔 그가 두 장을


더 넘겨 두 번째 시를 펼쳐 줬다.

“이거랑 이거, 이것도.”

“…….”

그냥 기계적으로 옆에 해석을 달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은 터라 맞는 해석도, 틀린 해석도 있었다.


의역해야 할 부분을 대책 없이 직역하거나 관용어를 사실적으로 적어 버리기도 했다.

“내가 못 알아본다고 막 적으면 곤란한데.”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권이도가 다리를 꼰 채 다섯 번째
시를 펼쳤다.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서정시였다.

“이거, 적어 봐요.”

「나는 달 속에 있었다.」 그렇게 적은 뒤엔 잠깐 망설여졌다. 아마 이것과는 다른 의미일 텐데, 그걸


설명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내 옆모습을 지켜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입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자칫 숨결이 섞일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다.

“……무슨 뜻입니까?”

권이도는 한 타이밍 늦게 내가 적은 구절의 의미를 물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않고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현실감.”

그냥, 타이밍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호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코끝에 숨결 섞인 페로몬이 스쳤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진다고 느낄 즈음, 입술에 보드라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

“…….”

이 사람도, 입술은 따뜻하구나. 그걸 몸을 두 번이나 섞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옅게 전해지는 떨림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낀 채 그대로 머물렀다.

- 다음 화에 계속

82 화. Hiver Rigoureux(10)

권이도는 내게 불어를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했다. 일 때문에 잠깐 필요해졌는데 그렇다고 또 선생을


고용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가르치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냥 간단한 인사말과 읽는 법 정도면 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와의 입맞춤은 다소 충동적인 경향이 있었다.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아니고,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아니다. 밖에서는 살가운 관계를 연기할지언정 집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단 말이다. 그런데 불어를
가르쳐 달라니.

‘정세진 씨.’

‘…….’

‘나랑 섹스도 하고 방금은 키스까지 했으면서. 불어 하나 가르쳐 주는 건 못 합니까?’

그 말에 반박할 얘기가 없었던 게 문제였다. 그때까지도 권이도의 온기가 남아 있는 기분이라, 머릿속이


잔뜩 혼란스러웠다. 정말 달 속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말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으니까. 권이도는
그제야 만족한 듯, 드물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후에는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우리는 항상 아침 식사를 함께했고 그가 퇴근한 뒤에


간단한 불어를 가르쳐 줬다. 장소는 2 층 끝자락에 있는 서재였는데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은은하게 권이도의
페로몬이 몸에 배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엔 더할 나위 없이 깊은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처음엔 그와의 시간이 너무 긴장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터라 잔뜩 지쳐 버린


몸뚱이가 나가떨어졌을 뿐이라고. 혹은 불면증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정말 잠을 자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됐다. 그의 페로몬이 늘 먹던 수면제보다 훨씬 낫다는걸.

아마 최 교수가 말한 상성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권이도의 페로몬에 안정감을 느꼈고,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와의 섹스 후에 원 없이 잤던 것도, 체력을 다 써서가 아니라 페로몬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감히 권이도에게 ‘안정감’을 느끼다니. 모순적이게도,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권이도였건만.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그가 내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타오르는 갈증만큼이나 부푸는


감정이 있었다. 자괴감과 죄책감, 그리고 일말의 양심을 건드리는 가책 같은 것들.

‘……정말 바라는 게 없어?’

바라는 게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와 처음 만나던 날로, 그게 안


된다면 아버지를 만났던 그때로, 아니면 권이도와 가까워지기 이전으로.

도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 회피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양심을 좀먹히는 통증이 싫어서 나중엔 아예
생각 자체를 죽여야만 했다. 다행히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그를 제외한 다른 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오늘은 내 방에서 하죠.”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 권이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마쳤기에 식탁엔 빈 그릇만 놓여 있었다. 나는 식기를 옆으로 모아 놓고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2 층에 있는 권이도의 방은 계단과 멀지 않은 위치였다. 그가 문을 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먼저 찾아갈 일도 없고, 그가 나를 부를 일도 없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내부는 삭막하리만치 깔끔했다. 가구는 최소한으로 놓여 있었고, 인테리어에 쓴 색채도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활감 없는 모습조차 권이도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앉아요.”

나는 권이도가 가리키는 대로 옆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방 안 가득 풍기는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보다 더 묵직한 권이도 특유의 향기.

“졸려 보이는군요.”

권이도는 내 대각선 위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몽롱하게 눈을 깜박이다 말고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나른한 감각이긴 했지만, 졸린 것보단 편안한 것에 가까웠다.

“아뇨, 졸린 건 아닙니다.”

“요새는 잘 잡니까?”

“네, 뭐…….”

어설프게 대답을 뭉뚱그렸다. 네 페로몬 덕에 잘 잔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좀 민망했으니까. 권이도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배울 건 뭡니까?”

“아, 오늘은…….”

간단한 불어를 가르쳐 달라는 말대로 나는 그에게 기본적인 스펠링과 읽는 법 따위를 알려 줬다. 대학
시절의 기억이 흐릿한 탓에 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나 또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낮 동안엔 개인적으로
책을 보고, 오후가 되면 그날 익힌 내용을 바탕으로 그를 가르쳤다.

사실 번거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권이도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배움이 빨랐다. 원체 머리가 좋은


건지, 무언가 말해 줬을 때 까먹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발음은 또 기가 막히게 좋아서, 어쩔 땐 나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항상 느끼는데…… 되게 빨리 배우시네요.”

대충 준비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을 즈음, 나는 책을 읽는 권이도를 보며 이야기했다. 힐긋 시선을 들어


올린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한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

으스대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듯 담담했을 뿐.


“웬만하면 한 번 본 건 안 까먹거든요.”

이 사람은 정말 부족한 게 뭐지. 모든 걸 다 갖췄는데 이제는 머리까지 좋단다. 유일하게 성격만 좀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요새는 그마저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뭐, 잘 가르치는 선생 덕도 좀 있고.”

립서비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장난스레 말하는 권이도가 좀 귀엽게 느껴져서. ‘그’ 권이도가 귀엽다니. 남들이 들었다간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영광이죠.”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은은히 느껴지는 페로몬이나 지금 이 분위기가


불안한 기분을 모두 지워 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도 된다면 이 안온함에 안주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

권이도는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예의 그 짙은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였다. 왜 이러나


싶어 시선을 맞추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이네.”

뭐가 정말이냐고 묻지는 못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권이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이다.
관찰하듯 나를 꼼꼼히 살피고는 별안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정세진 씨.”

“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엄습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을 굳히자, 반대로 권이도의 표정은 누그러졌다.


그는 테이블에 얹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나한테 그랬죠. 서재에 있는 총이 진짜냐고.”

서재 벽면에 장식된 총. 가짜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에 갈 때면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 맞습니다.”

장난…… 아니, 진담인가. 지난번에도 들었던 말이 지금은 도무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거예요.”

“…….”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가를 찌푸렸다. 그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보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나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아.”

궁금하긴 했다. 그렇다고 진짜라는 걸 확인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건 내 각오이자 다짐이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는 다짐.”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기 넘치는구나. 나는 그걸 권이도를 보며 깨달았다. 제 손으로 뜻한 바를


얻어 내려는 의지란 이런 느낌이라는걸.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탐욕스러움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지켜봤지만, 권이도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금 쉬엄쉬엄해도 괜찮을 텐데,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일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전…… 무서워서 장식해 두진 못할 것 같은데.”

아마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히지 않을까. 언제 발사될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겠지. 나는


무슨 일이건 직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맞닥뜨렸다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신기하네.”

권이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단조로운 감상을 내뱉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두 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비로웠다.

“총은 무섭고, 그걸 장식해 놓은 난 안 무서워?”

무슨 당연한 말을 하나 싶었다. 그 총이 진짜라고 해서 권이도가 무서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걸 내게


겨누거나 쏘지도 않을 텐데.

“……무서워해야 하나요?”

“적어도 미친놈 소리 정도는 들을 줄 알았거든요.”

권이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아,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

그 말엔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에게 총이 있건 말건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권이도는 눈치 빠르게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봤다.

“신기하죠.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데 또 미묘하게 건조하게 구는 게.”

“…….”

“아니…… 날 안 싫어하는 부분이 가장 신기하지만.”

그 취급을 받고도 그럴 생각이 드냐며, 권이도는 단조롭게 물었다. 내 취급에 문제가 있었던가. 그
부분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한테 바라는 게 없습니까?”

자꾸만 이 질문을 건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능하면 이제 그만 물어봤으면 했다. 그가 이런 시선을


보낼 때마다, 진심으로 숨이 막히곤 했으니까.

“저는…….”

갑갑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확신이 부족했고, 권이도처럼 문제와
직면해 스스로를 다잡을 용기도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권이도 씨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가장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어떤


대가도 원하지 않는다고. 비록 중간부터 목이 메는 바람에 점점 고개가 수그러들었지만.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염치없는 놈이라며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배 속이 잔뜩


뒤틀려서 명치 언저리가 콕콕 쑤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건 나한테만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는 겁니까.”

권이도는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느새 그의 페로몬 역시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내가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그의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아 왔다.

“가끔 궁금해요. 대체 어떤 집에서 자랐길래 이렇게 된 건지.”

이렇게가 어떻게지. 그렇게 묻지도 못했는데, 그가 내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억지로 눈을 맞추고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본다.

“얼굴만 보면…… 모자란 거 없이 컸을 것 같은데.”

“…….”

“본인도 알잖아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민망하진 않았고, 그냥 어이가 없긴 했다.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야말로 모자란 거 없이 컸을 것처럼


생겼으니까. 아니, 실제로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족함을 느껴 보지 못했겠지.

“어쨌든…… 그 대답을 감안하고 묻겠는데.”

턱을 잡았던 손이 옆으로 옮겨 갔다. 뺨을 살짝 문지르고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그가 매만지는 손길을


따라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피부에 남았다. 누덕누덕 엉망이던 머릿속이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졌다.

“오늘 내 방에서 잘래요?”

그는 페로몬만큼이나 달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평범하게 말했어도 지금 이 분위기에선 그렇게


들렸을 거다. 손가락을 머리카락으로 미끄러트린 그가 사르륵 옆통수를 어루만졌다.

“사실 이럴 생각으로 불렀거든요.”

내가 지금, 이 상황에 설레도 되는 건가. 두근거리는 심장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시간대에 입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누구 하나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는 그런
스킨십이.

“정 싫으면 뿌리쳐도 되는데…….”

“…….”

“내가 눈치가 좀 좋아서.”

확신 어린 눈동자가 나를 옭아매는 듯했다. 목덜미에서 시작해서 내 양 손목과 발목,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까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이야기했다.

“자고 가, 세진아.”

***

관계를 바꾸는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잘 만나던 연인과 헤어지거나, 혹은 연락도
없던 친구가 다르게 보인다거나. 혹은 권이도와 나처럼 하루아침에 부쩍 가까워진다거나.

‘으응, 흣…….’

그날, 권이도의 방에서 나는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은 채로 그와 몸을 섞었다. 세상에 오로지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간절히 그에게 매달려 온기를 구걸했다.

‘세진아.’

어떤 시점부터였을까. 그 부름이 더는 차갑지 않았던 게. 시나브로 스며든 마음이 이전과는 달리


따사롭게 바뀌어 버린 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 버린 깨달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나친 쾌감을 참지 못해 온 입 안을


깨무는 것 정도. 그리고 권이도가 한 건, 다음날 그런 나를 보고 걱정 어린 눈으로 혀를 찬 것 정도.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우리는 평범한 감정을 공유했다. 권이도는 더 이상 고압적으로 굴지 않았고,
이따금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일도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라는 구실 없이 몸을 섞었고, 그 행위는 더 이상 배설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게 이런 관계였을까.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에게 받는 애정이, 그리고


온기가, 내도록 갈망하던 바람과 비슷했으니까. 그건, 마지막에 닥치는 게 무엇일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길고 길었던 휴가가 끝나던 날, 일기 예보에선 장마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 아버지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고, 나는 불안함을 넘어 그 불안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내가 두려워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쉬어서 적응하려면 좀 걸리겠어요.”

“……잘하실 겁니다.”

김 실장은 왠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경을 추켜올리는 습관은 그대로였으나, 미처 내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무어라 캐묻지는 않았다. 마침 권이도와 그럴싸한


입맞춤을 나눈 직후라 기분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차는 침묵 속에서 회사에 도착했고, 나는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사무실은 김 실장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직원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데다, 어딘지 모르게 내부도 어수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낯선
얼굴의 남자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세진 씨?”

김 실장이 습관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뒤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내밀었다. 사진과 이름, 그리고 소속이 적힌 신분증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기관이 적혀 있었다.

“공금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83 화. Hiver Rigoureux(11)

정신없이 질문을 들었다. 처음 보는 서류가 계속해서 나왔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돈이 통장 잔고로 남아 있는가 하면, 내가 결재한 적 없는 서류에 내
도장이 찍혀 있기도 했다.

“정세진 씨, 대답 안 하시면 곤란합니다.”

난생처음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새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이 건물 앞에서 내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어 갔다. 기업 비리를 뿌리 뽑겠다는 생각이었는지, 퍼포먼스와도 같은 연행이었다.

“변호인이 오기 전까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으나, 돌아온 건 알 만하다는 시선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소곤거림은 ‘은혜도
모르는 놈’ 따위가 주된 내용이었다.

뭐라더라, 거액의 횡령 혐의라고 했다. 수백억이 넘는 돈이었고 그게 모두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고.


금액을 계속 강조하면서, 금융 기업이 그래도 되냐는 질책이 따라붙었다.

나는 오랜 기간 휴가를 다녀왔기에 그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재정이 기울었다는 것도,


공금에 구멍이 났다는 것도 몰랐다. 분명 위태롭긴 했으나, 이렇게 와르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건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내 휴가조차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수작 정도로 보았다.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을


들이밀며 이게 사실임을 인정하라고 끝없이 닦달했다. 김 실장조차 없이 홀로 남은 처지에선 그저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정세진 님 담당 변호인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변호사는 아버지의 전담 변호인이 아니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변호사는 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러 갔다. 나는 하염없이 내 무죄가 증명되길 기다렸으나, 돌아온
변호사가 해준 말은 고작 이따위였다.

“회장님께서 죗값을 치르고 나오라고…….”

“……예?”

죗값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해신에서 일하는 몇 년간 나는 단 한 번도 돈 장난을 친 적이


없는데. 이따금 임원들이 그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건 내 선에서 건드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정세진 님을 도와줬다간 기업 이미지가 나빠질
거라면서…….”

변호사가 전해 준 말들은 전체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죄를 인정하라는 말도, 형량을 다 받고


나면 돌아오라는 말도,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말도.

“형량을 줄이려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끼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친아들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욕심이 생겼을 뿐이라고,
변호사는 그런 식으로 동정표를 얻자고 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떼라거나, 누명을 벗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내용도 없었다.

“저, 그리고…….”

알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뿐,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내게 덤터기를 씌운 채 이번 문제를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기회에 내게서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인지도 모르지.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하루를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고 들리는 거라곤 정체 모를 기계음이
전부였다. 핸드폰을 압수당한 탓에 연락 수단조차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도와 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을
거다.

나는 밤새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온통 믿지 못할 상황 속에, 지금껏 지내 온


날들을 끝없이 반추했다. 맨발로 눈밭을 가로지르던 순간, 아버지를 마주했던 그 날의 일,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했던 많은 노력과 그럼에도 해소하지 못했던 갈증까지.
이런 결과를 보겠다고 여태까지 발버둥 쳐왔을까.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꿈일 것만 같았다. 아득히
멀어진 현실감은 도무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였다.
눅눅한 공기에 쇠 비린내가 섞이고, 들이마신 숨결엔 비 맞은 아스팔트 냄새가 느껴졌다.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세진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아마 그럴 수 없을 거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번 일을


끝으로 내 쓸모는 다했을 테니. 만약 징역살이를 한다면 그 이후엔 정말 타인이 되어 버릴 터였다.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가 손가락에 걸리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던 것이 지금은


없으면 허전할 만큼 익숙해졌다. 권이도는 이 소식을 들었을지. 그럼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런
잡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진아.’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들켰을 잘못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할 수 있을 테니.
비록 그에겐 최악의 사람으로 남겠지만 이렇게라도 도망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수도.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건 창밖에 해가 떠오를 무렵이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온통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보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제 나를 쥐잡듯 몰아붙이던 남자가 들어왔다.

“따라 나오세요.”

남자가 향한 곳은 내가 조사를 받던 장소였다. 그는 내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연신 탐탁지 못한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내가 핸드폰을 받지 않자, 억지로 손에 쥐여 주며 혀를 차기도 했다.

“죄짓고 살지 맙시다. 예?”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밤새 굳어 버린 머리로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변호사조차 변호를 포기했는데, 갑자기


소지품을 돌려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아직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않았건만, 이건 마치 나를 놓아주는 것
같지 않은가.

“하여튼 돈 많은 것들은…….”

남자는 짜증스럽게 중얼대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래서 재벌들은 안 된다느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느니.


억울함 담긴 한탄을 듣고 있노라니 뒤늦게 머리가 돌아갔다.

“거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누군가가 나를 보석으로 풀어 준 것이다.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고 재판을 받기도 전에 밖으로 빼낸


거였다. 혹시, 그게 설마 아버지는 아닐까. 그러한 기대는 잠시였다.

“정세진 님?”
열린 문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30 대쯤 되어 보였고, 끼고 있는 얇은 안경이 김
실장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명함을 한 장 내밀며 이야기했다.

“전무님 비서인 박경석입니다.”

가장 먼저, 선호그룹 마크가 보였다. 이름과 직급, 연락처 따위가 적힌 명함은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전무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전무님 지시로 모시러 왔습니다.”

***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꺼져 있던 핸드폰


전원을 켜 그간 쌓인 연락을 확인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온 메시지, 권이도가 남긴 부재중 기록, 연락도 닿지
않던 친구들의 안부 확인과 김 실장이 남긴 메시지까지.

「죄송합니다.」

“…….”

당신도 알고 있었을까.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그래서 출근길 내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잘하실 거라던 말은 어쩌면 구치소를 뜻했던 건 아닐까.

우습게도, 그중에 가족들의 연락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민재와 서영이까지도. 내가
하루아침에 검찰에 구속됐는데,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닫아 버렸다. 제대로 된 변호인조차
없이 죗값을 치르고 나오라며 절벽으로 등을 떠민 것이다.

아, 나는 진짜 버림받았구나. 그저 쓰다 버릴 카드에 불과했구나.

무심코 깨달은 사실이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 새삼 뼈에 사무칠 만큼


절절히 억울했다. 이제 와 비참해질 부분이 남지도 않았건만, 가슴 한편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우리 기업의 영웅이다, 세진아.’

나는 영웅이 아니라 아들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고작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실제로
저질렀을 비리를 내게 다 뒤집어씌우고 잘라 낼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장기말로서 수명을 다했으니 꼬리를
자르듯 내다 버린 것이다.

“……하.”

멀미가 났다. 속이 잔뜩 뒤집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욕지기가 솟구쳤다. 입을 열면 모든 걸 쏟아


낼 것 같아서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숙여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권이도의 비서는 사무적인 얼굴로 내 안위를 살폈다. 불편하면 부축해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내 팔을
붙잡았다.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그를 밀어 낼 생각도 못 한 채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렸다.

“……정세진?”

그런데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어두운 색으로 물들이고, 답지 않게 수수한 옷차림을 한 사람.

“정세진 너……!”

민재는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내 양팔을 붙들었다. 나를 부축해 주던 비서가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잔뜩 일렁이는 두 눈이 보였다.

“너…… 너 어떻게 나왔어?”

우습게도, 그 내면에 담긴 감정은 분명 걱정이었다. 눈 밑은 퀭하게 변한 채로, 민재는 분명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부담스러웠을 그 감정이, 지금은 마냥 우습게 느껴졌다.

“분명 아버지가…….”

말을 이으려던 민재가 입을 딱 다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또한 함구령을 들었을 게 분명했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민재라도 이런 중요한 일에 멋대로 굴진 못하겠지.

“……그 새끼가 빼줬냐?”

민재는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한껏 사나워진 두 눈이 나를 지나 비서에게


닿았다. 비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자리 피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성의 없이 민재의 팔을 떨어뜨렸다. 거칠게 붙잡고 있던 것치고 민재는 금세 나를 놓아줬다. 나는


옷자락을 털어 내며 민재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긴 왜 왔어?”

어떻게 들어왔을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나 좀 쥐여 주거나, 아니면 면회를 핑계로


아버지의 이름을 팔았겠지. 올라오지 못하고 주차장에 머물던 걸 보면 아마 그냥 돌아갔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왜 왔냐니.”

민재는 떠듬떠듬 입술을 달싹였다. 내 표정을 보고 뭘 느꼈는지, 평소보다 성질이 한풀 꺾여 있었다.


이내, 인상을 팍 찌푸린 민재가 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네가 잡혀갔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생각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망가진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문제였지.

“내가 잡혀갔는데, 그게 뭐.”

“…….”

냉랭한 말투에 민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착한 아들 연기에는 언제나 착한 형 연기도 자연스레 따라붙었으니까.

“동정이라도 하러 왔어? 아니면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야 씨발, 너 말을 그따위로……!”

“정민재.”

그냥 다 지긋지긋했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이 말을 하는 상황조차 피곤했다. 원래라면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이제는 이러면 안 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잡혀 왔는지 너도 알잖아.”

지금의 상황이 아버지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해자가 있으면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고,
조력자가 있으면 방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커다란 집에 있는 식구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 편이나
다름없었다.

“알면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

나를 보는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역시, 민재도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왜 잡혀 왔고,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앞으로 어떻게 되었을지 따위를.

“알아들었으면 집에 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민재를 지나쳤다. 통쾌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냥 공허했다. 물밀듯 밀려드는


허무함에 눈물 한줄기조차 나오지 않았다.

“씨발, 정세진!”

그런데 한 세 발짝 걸었을까. 민재가 버럭 소리쳤다. 손목이 억세게 붙잡히고 몸이 휙 돌아갔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민재가 짓씹듯 이야기를 꺼냈다.

“너 진짜 그따위로밖에 말 못 하냐?”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설령 이 일에 민재의 잘못이 없더라도.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왜 잡혀 왔는지 알면, 그럼 씨발 오지도 못해? 지금 그 새끼가 너 빼줬다고 뵈는 게 없어?”

왜 얘는 배우는 게 없지. 내가 이 정도로 말했으면 적당히 물러서야 하는 게 아닌가. 왜 기어코 사람을


끝까지 뒤집어 놓느냔 말이다.

“너 씨발 지금……!”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민재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프도록 붙잡힌 손목에서조차,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지.”

“…….”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비겁하다고 해도 좋았다. 항상 모르는 척 무시해 놓고, 이런 상황에서 알은체를 한다는 게. 그가 미처


놓지 못한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 그걸 이용해 말문을 막아 버린다는 게.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일부러 형 소리하는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딱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지금껏 지켜온


울타리가 지저분한 잔재만 남긴 채 와르르 무너져 버린걸.

“형은 무슨…….”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형은 씨발…….’ 그리 말하던 민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형 이름 부르면서 자위하는 동생이 어디 있어.”

어머니를 닮아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구 흔들리는 두 눈은 이제 안쓰러울 정도였다.


울긋불긋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민재의 손을 떼어 냈다.

“민재야.”

“…….”

“내가 여태 널 봐준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만약 우리가 정말 가족이었다면, 나는 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누가 봐도 안쓰러운 몰골인 민재를


보며 이토록 무미건조한 감상을 느끼지도 않았겠지. 우리가 정말 남이니까, 호적조차 올리지 않은 타인이니까,
그래서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 거였다.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내가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이유도 없어.”

그는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가 가족이라 유지되고 있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질없는 관계였으나,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 덕에 여기까지 온 거였다.

“나는 여태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했거든.”

나 혼자 놓지 못한 미련이었다. 애초에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부득불 고집을 부린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 마땅한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근데 이젠 아닌 것 같다.”

밤새,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다. 그 처참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씁쓸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메마른 것처럼 내내 고요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런 마지막을 맞이할 텐데, 대체 뭘 그렇게 노력한 걸까.

“갈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정말 민재와의 마지막 대화라는걸. 나는 그대로 민재에게 등을 돌렸고, 민재
역시 나를 붙잡지 않았다. 20 년간 이어진 인연은 딱 거기서 끝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84 화. Hiver Rigoureux(12)

빗줄기는 계속해서 거세졌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인 건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낀 먹구름 탓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의 비서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감 있는 태도가 정말 김


실장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또다시 넋을 놨고, 차는 빗길을 지나 내가 머물던 그의
집에 다다랐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비서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왔다. 권이도는 아직 퇴근 전이었기에 그 커다란 집엔 고용인들만 남아 있었다.

“…….”

설마, 이 집에 돌아오게 될 줄 몰랐는데. 만약 무죄가 증명된다고 해도 다시 권이도와 만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미 한 번 누명을 쓴 나를, 그가 구제해 줄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민 사람이 권이도였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비참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와중에 드는 생각이 이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를 도와준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모르니까. 만약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단순히 배신감을 느끼는 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나는 홀린 듯 걸음을 돌려 정원으로 나갔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고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간 뒤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빗속으로 나아갔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맨몸으로 맞기엔 또 굵은 비였다. 이미 다


구겨진 정장이 쫄딱 젖고, 비 맞은 생쥐처럼 볼품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화사하게 꽃이 핀 정원이 이토록 우중충하게 보일 줄이야. 하늘이 온통 회색이었기 때문에 푸르른


풍경마저 낮은 채도를 띠었다. 가라앉은 기분처럼 정적인 풍경은, 쏟아지는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정지 화면처럼
느껴졌을 거다.

나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온몸을 적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비에 잠겨 숨이 멎고 싶었다.


뒤이어 밀려올 미래가 너무도 두려워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꼭 모든 바람이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진작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정받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빗줄기는 내 마음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진아.’

권이도가 보고 싶었다. 양심 없게도, 두려움 끝에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비로소 혼자가 되어 버린


나를 그가 딱 한 번만 받아 줬으면 했다.

기분 탓일까.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갈하고 올곧은 걸음걸이가 내가 아는 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타박타박,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감겼다. 습기 가득한 공기에 짙은 나무 냄새가 섞여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건,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와 수려한 이목구비.

“정세진.”

“…….”

비 내리던 하늘이 우산 그림자에 뒤덮였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걱정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것이길 바랐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아.”

나는 뒤늦게 그가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분명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권이도가 한쪽 팔로 단단히 붙들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권이도 특유의 페로몬이 비 냄새에 섞여 훅 풍겨 왔다. 이미 젖어 버린


몸뚱이를 한 품에 안은 그가 우산을 내 쪽으로 좀 더 기울였다.

“몸이 찬데…….”

늘 서늘하다고 느꼈던 권이도인데, 지금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 그의 말대로 내가


지나치게 차가운 걸 수도 있었다. 붙잡힌 팔뚝도,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그 모든 게 가슴에 응어리져
남았다.

“기껏 빼 왔는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까칠한 말투와 달리, 그 내면에 담긴 내용물은 분명 걱정이었다. 민재가 내비치던 그것, 그의 눈을 통해


전해지는 달큼한 감정.

“왜…….”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데도 갈증이 났다. 목을 축이고 싶다는 충동과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함께 찾아들었다. 몸이 이렇게나 젖었는데, 반대로 목은 바짝바짝 말라 갔다.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차라리 그냥 두지. 그랬다면 민재를 마주칠 일도, 권이도의 얼굴을 보고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심을 쥐어짜는 것처럼 이토록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도…… 남편이 잡혀가면 좀 곤란해서.”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나와 시선을 맞췄다.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다가 코와 입술, 그리고 어깨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느리게 움직인 입술이 야트막한 숨결을 내뱉었다.

“뭐, 이게 명목상의 이유고.”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젖은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너한테 그럴 깜냥이 없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담담히 내뱉은 한마디가 그 어떤 위로보다 마음에 남았다. 그의 단조로운


평가를 듣는 순간, 그제야 손목에 찼던 수갑이 풀어진 기분이 들었다.

“돈이 필요했으면 그냥 내 환심을 사려고 했겠지. 몇 푼 되지도 않는 그깟 공금을 횡령하는 게 아니라.”

자칫 재수 없을 말이 권이도의 입에서 나오니 타당하게 들렸다. 실제로 내게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권이도의 편에 붙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을 거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래서 지난밤 내내 내게
내려질 선고만을 기다렸다.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버릇은 고쳐야지.”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뒤늦게 밀려든 억울함이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눈두덩이에 뜨겁게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흑…….”

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 눈을 깜박이기 무섭게 눈물이 쏟아졌다. 힘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부끄럽단


생각이 들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윽…….”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됐을지도 몰랐다. 남들은 부럽다고 할 만한 것들을 갖췄는데, 그럼에도 이런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크게 어그러진 게 아니고서야, 항상 이런 결과를 맞이할 리가 없지
않은가.

“……흡.”

“…….”

권이도는 어설프게 나를 품에 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비 한 방울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 준 채


자신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내 몸을 끌어안았다. 짙은 나무 냄새와 권이도 특유의 향긋한 체향이 응어리진
마음을 살살 어루만졌다.

“……흐윽.”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말도 안 나오는구나. 정말 미칠 만큼 죄책감이 들어도, 그걸 사과하는 것마저
용기가 필요하구나. 내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었구나.

“흡…….”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래서 고백할 수 없게 됐다.
혹시라도 그가 한순간에 나를 내칠까 봐, 나라는 사람에게 차갑게 등을 돌려 버릴까 봐.

“흐읍, 흑…….”

속으로 얼마나 많은 고해 성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고, 그리고 또 미안하다고. 당신을 실망하게
만들 것 같아 너무 면목이 없다고. 내가 이렇게 너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정말 양심 없는 짓이라 해줄 말이
없다고.

“울지 마, 세진아.”

나는 그의 품에서 내리는 비처럼 끝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권이도는 한참이나 나를 안아 줬고, 나긋나긋
부드러운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나를 달래는 음성,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 등을 다독이는 손길까지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상냥했다.

그래서 끝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도 흐느낌이 새는 바람에


다시 다물어야 했다. 지금의 다정함을 차마 잃을 자신이 없어서 나를 구해 준 그에게 감사 인사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며칠 뒤, 해신금융그룹에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다. 독보적인 보안 시스템을 갖춘,


해신만의 프로그램이었다. 그건, 내가 권이도의 서재에서 훔쳐 간 바로 그 시스템이었다.

***

냉랭한 공기가 서재 내부를 한가득 채웠다. 분명 서늘한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손끝이 차갑게 식을 만큼
차가운 기온이 느껴졌다. 드러난 목덜미가 따끔거리는가 하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나를 보는 시선은 지금껏 느껴 본 그 무엇보다 두려운 종류였다. 짙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으면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싹싹 빌고 싶어지곤 했으니까. 하물며 이번엔 내 잘못인데,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 예의상 물어는 봐야겠죠.”

평소엔 풍부했던 음색이 지금은 바닥을 기듯 가라앉아 있었다. 얼핏 무뚝뚝한 목소리였으나 그에게 제법
익숙해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눈앞의 남자는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간신히 내리누르고 있다는 걸.

“그쪽이 그랬습니까?”

그의 손에 들린 건 선호그룹 마크가 찍힌 서류뭉치였다. 이미 한 번 눈으로 본 적 있는 것이었고, 나는


그게 어디에 놓여 있던 서류인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권이도와 대치하고 있는 바로 이곳. 벽면에 총이 걸린
서재의 테이블 위에서 그것과 같은 서류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말밖에 없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서재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권이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눈으로 나를 보는지, 그런 것들을
도무지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죄송하다고…….”

픽,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권이도는 그다음 말을 내뱉을
때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괴로울 정도로 긴긴 침묵 끝에 그가 딱 한마디를 더 물어봤다.

“언제 그랬습니까.”

질문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손에 서류가 들어온 날짜. 그 시기를 묻고 있는 거겠지.

“권이도 씨가 출장 갔을 때…….”

본가에 들러 저녁을 먹고, 나 홀로 오피스텔에서 밤을 보냈던 날. 나는 그날 아버지의 말을 거절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은혜 갚기건, 이미 학습된 복종이건, 아버지의 말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그때 전달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평소엔 철두철미한 권이도가 실수로 서류를 놓고 갔을 테니. 하필 고용인조차


들어오질 않아서, 핸드폰으로 모든 내용을 찍을 시간이 충분했으니.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모자란 사람이라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구차한 애정 한 조각 받아 보겠다고 해서는 안 될 행동조차 구분하질 못했다.

권이도가 가진 시스템은 미완성이었기에 아마 아버지는 내가 전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머지를 완성시켰을


거다. 세상에 출시하기 전에 특허를 내서, 그 이후엔 해신의 허락이 없으면 사용하지 못할 터다.

“……하.”

사업은 아주 조그만 일로 틀어지곤 했다. 개발에 필요한 건 자원이기에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필히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선호는 매년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으니, 이번 일로 연 단위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을지 몰랐다.

“정세진 씨.”

나는 그의 부름을 듣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 잔뜩 숨을 죽인 채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그때는 나랑 아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권이도의 손에서 서류가 떨어졌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서류들이 마치 지금의 내 심정과도 비슷했다. 팔랑,
날아온 서류 한 장은 정확히 내 발치에 안착했다.

“왜 그동안 안 말했습니까?”
그가 느낄 감정을 알고 있다. 입을 맞추고 감정을 나누는 동안, 자신을 속였단 사실에 화가 나겠지.
우리가 섞은 건 비단 몸뿐만은 아니었는데,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단 사실을 견딜 수가 없을 거다.

“그 시간이, 정세진 씨한테도 짧지 않았을 텐데…….”

“…….”

“나한테 한마디만 했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겠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계획이 제대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아까보다 훨씬 싸늘한 부름이 흘러나왔다.

“정세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화가 났으리라 생각한 그에게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들이 느껴졌으니까. 덜덜 떨리는 눈으로 보게 된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처참한 눈빛을 한
권이도였다.

“난 지금 변명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저 원망 따위가 가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엿보였다. 가령 배신감과 후회, 그리고 허무함과
쓸쓸함 따위의 것들이. 심지어는 지저분하게 얼룩진 애정과 그 끝에 피어오른 작은 상처까지도.

“그럴싸한 핑계라도 대봐요. 안 그러면 나 좋을 대로 생각할 것 같으니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건, 권이도가 주는 마지막 자비였다. 그저 아버지가 시키신


일이라고, 당신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바짝 엎드려서 빌 기회.

“협박이라도 당했어요?”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고 보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협박당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그 어떤 대가도


약속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걸 타인의 탓으로 돌려도 되는 건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알 수가 없어졌다.

‘세진이 네가 선택한 일이야.’

무언가 일을 그르쳤을 때,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고. 마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이상 반드시 해야 할 의무들이 있듯이.

“……협박 같은 거 안 당했습니다.”

홀린 듯 입술을 움직였다. 변명거리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막상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결국 나오는 말들이 이런 거였다.

“제가…… 제 손으로 훔친 거예요.”

‘그냥 네가 했다고 하면 끝나는 일 아니냐, 응?’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변명이 통했던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겠습니다. 딱 그 정도
이야기가 내게 허락된 전부였다. 무어라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항상 최악에 가까워지곤 했다.

“처음부터 해신이 받을 자료라고 들어서…….”

짝, 가벼운 파열음이 들렸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한참이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건, 그 통증이 지나치게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아까보다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미쳤다고 남한테 그런 서류를 넘겨주나?”

남이라니. 방금 맞은 뺨보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왼뺨에선 이제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데,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낮게 헛웃음을 흘린 권이도가 짓씹듯 이야기했다.

“내가 변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보죠.”

“…….”

아,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보다.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방금 날려 버린 게 분명했다.

“바라는 게 없다더니…….”

“…….”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명치가 확 비틀렸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고 뒷덜미가 싸하게 굳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표정을 지워 냈다. 아까의 상처받은 표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딱딱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을 뿐.

“정세진 씨.”

모르고 있었다. 가장 예의를 차린 이름이 가장 남처럼 느껴진다는걸. 그가 내게 화를 내는 것보다 싸하게


굳은 얼굴이 더 두렵다는걸.

“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는 나를 지나쳐 곧장 서재를 빠져나갔다. 쾅, 하고 닫힌 문소리가 우리 사이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고, 내게 남은 건 날카롭게 날이 선 그의 페로몬이 전부였다.

- 다음 화에 계속

85 화. Hiver Rigoureux(13)
계절이 하루아침에 바뀌듯 권이도와 내 사이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불던 시선에선 이제
더 이상 나를 향한 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날씨는 아직 여름에 머무르는데, 그와 내 사이에만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혼당할 줄 알았다. 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다시 갈 곳을 잃어버릴 거라고. 어쩌면 다시 수갑을 차고


영영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내가 돌아갈 곳은 아무 데도 없으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냥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와 결혼해 이 집에 처음 들어왔던 그때처럼.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 나를 무시했다. 나는 죽은 듯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가, 고용인이 식사를 하라고 부를
때만 밖으로 나왔다.

언제 나를 버리려나. 그런 두려움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를 타 오고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잠이 들 때마다 항상 권이도의 꿈을 꿨다. 처음엔 평범했던 꿈이 날짜가 바뀔수록 점점


악몽에 가까워졌다. 그에게 자료를 들켰던 날의 일이, 그가 내 뺨을 때리던 손길이 현실보다 더 끔찍하게
바뀌었다.

‘정세진.’

마치 앞뒤로 길이 막혀 고인 강물이 된 기분이었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조금만 더 지나면 썩어 버릴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망가진 관계를 고치는 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감정을 쌓는 계기는 보잘것없었는데
부서진 감정을 잇는 데엔 많은 품이 필요했다. 그와 나눴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에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사소한 변명을 하나라도 해볼걸.

진작 그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 볼걸.

자료를 훔치는 대신 무능력한 아들이 될걸.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친 게 분명했다. 가족의 울타리에 속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는데,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결백을 믿어 준 유일한 상대에게 용서를 빌 수조차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날이 지날수록 나는 초조함에 점점 말라 갔다. 우연히라도 나를 마주치면 지저분한 것을 보듯 피해


버리는 권이도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 하나 받지 못해서, 방치된 화초처럼 시들시들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늘 주어진 상황에 맞춰 살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래가 걱정됐다. 마침내 나를 버린


가족들처럼 권이도도 언젠가 나를 버리고 말 테니까.

맨발로 눈밭을 헤매고 다닐 때 이러했을까. 눈을 감으면 금방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차라리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것 정도.

“……언제 들어오는 거지.”

권이도는 매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내 방은 3 층 구석이었지만, 계단 언저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고, 혹시 조금이라도 그의 페로몬을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

그날도 나는 2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권이도를 기다렸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운이 좋으면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막연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타박, 계단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

그런데 기분 탓일까, 발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는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느껴진 것이다. 간격도 뭔가…… 이상한 것 같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 권이도의 페로몬이었고, 걸음걸이 역시 눈에 익었다.


역시나 상대는 권이도가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달랐다.

어디 아픈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2 층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취한 거였다. 그리 나쁘지 않은 후각으로 짐작하건대, 그의 페로몬에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많고 많은 양주조차 가끔 온더락으로 마시는 게 다이지 않았나.

나는 홀린 듯,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권이도는 비틀거리지 않았지만, 현저히 느려진 걸음걸이가 영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마침 2 층에 다다른 권이도가 무심코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

“…….”

한참, 시선이 오고 갔다. 느리게 깜박이는 두 눈은 분명 취기가 오른 사람의 그것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권이도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려고 누워 있다 나온 터라, 나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정장 차림의 그와 대조적으로


홈웨어를 입고 있는 모습이 퍽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그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이젠 헛것도.”

고개를 저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쳤다. 그대로 방으로 가려는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권이도 씨.”

“…….”

그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권이도는 물론, 그의 이름을 부른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던 권이도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뒤를 돌아봤다.
마주친 시선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물게 당황한 얼굴은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남았다.
이게 얼마 만에 마주 보는 얼굴이지. 고작 마주 보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그와 마지막 대화 이후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던 한마디가 이제야 입 밖으로 나왔다.

“……변명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얼마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오해를 풀었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저는 그냥,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대단하네요.”

그런데 권이도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대단하다니. 긍정적인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멍한 시선을 보내는 내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어투로 내뱉었다.

“며칠간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게 고작 그따위 변명인가 보죠.”

“…….”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표정이었다. 좀 전의 당황스러움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고, 마른


모래처럼 무미건조한 시선만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나를 지나쳤다. 내가 멍하니 눈을 크게 뜨자, 스치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기회를 줬었잖아, 세진아.”

비로소 알게 됐다. 정말 무슨 짓을 해도 돌아갈 수 없겠구나. 타이밍이 어긋났던 그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미래구나.

“……잠, 권이도 씨!”

머릿속이 하얘지는 바람에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미 등을 돌린 그를 붙잡아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그를 놓쳤다간 또다시 고립되고 말 거란 생각에,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

“하라는 대로…… 권이도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평생에 거쳐서 갚고, 자료가 필요하다면 다시 훔쳐 오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내


도둑질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 관계를 돌이킬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가 나를 버리지 않고, 또다시 온전한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의 뒷모습을 더는 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한 번만…….”

“……뭐든지 하겠다고?”

권이도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흐릿한 음성이었다. 픽 웃음을


흘린 그가 느리게 되물었다.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 볼래요.”

“…….”

“용서를 구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아마, 그는 내가 못 하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붙잡은 팔을 툭 털어 내고


등을 돌렸겠지.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스르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짙은 시선이 내 머리꼭지에 따라붙었다. 나는 그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댄 채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

“권이도 씨를 배신하려던 게 아닙니다.”

나는 정말 그의 신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상처 주거나 화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충분히 예상했지만, 그게 이토록 아플 줄은 몰랐단 말이다.

“제 생각이 짧아서…….”

“압니다. 그러려던 게 아닌 거.”

권이도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분명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그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비웃듯 흘러나온 한마디가 들렸다.

“그쪽은 배신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

가끔, 그가 정말 내 속내를 읽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말대로, 처음 자료를 훔칠 때까지도 그가 내게


실망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었고, 이런 사이가 될 줄도 몰랐으니까.

“정세진 씨 머릿속엔 딱 두 개밖에 없었겠죠. 정 회장, 그리고 해신그룹.”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아버지는 몰라도, 해신의 영광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나는 그저, 그
누구에게도 버림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거기에 나는 없고.”

하나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건, 술기운에 흐려진 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내가


간절히 갈망하던 감정이 스치듯 내비쳤기 때문이었고.

“……그래, 거기에 나는 없고.”

그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가만히 날 내려다봤다. 그러다 문득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세진아.”

커다란 손이 느릿느릿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지르고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다.
어린 짐승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그 손길을 갈구했다. 눈앞이 흐려지는 이유가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귀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던 손이 확 떨어졌다.

“정세진.”

“…….”

날카로운 페로몬이 나를 한가득 짓눌렀다. 마치 집중하라는 것처럼. 아, 이건 페로몬 때문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색색 숨을 몰아쉬는 나를 권이도는 한참 내려다봤다.

“…….”

“…….”

말주변이 좀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 정적을 깨뜨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권이도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든지 하겠다니…….”

“…….”

“그쪽이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는데.”

그 말을 이해할 시간도 없었다. 그가 내 뒤통수를 잡아 바지춤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뜨자 권이도가 내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한번 해봐요. 마음에 들면 그깟 자료쯤은 더 줄 테니까.”

“…….”

나도 모르지 않았다. 권이도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지금의 상황이, 무얼 뜻하는 건지.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머리채가 붙잡혔다고 느꼈다.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던 손길은 이내 억센 것으로 바뀌었다. 하릴없이
넘어간 고개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에게 저항할 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새에 커다란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은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물건은 입을 한계까지 벌렸음에도 제대로 물 수조차 없었다.

“으웁…….”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의 행동에 놀라기보다,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더 놀라고 말았다.


구역질이 차올랐지만, 그마저도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감각에 막혀 버렸다. 느릿느릿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과
혀뿌리를 꾸욱 짓눌렀다.

“입 똑바로 벌려.”

나는 이런 걸 바라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그저 권이도가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길


바랐을 뿐이지. 그게 변명할 기회건 아니면 사죄를 할 기회건. 어느 쪽이건 이깟 분풀이를 바란 게 아니었다.

“정세진.”

분명 무덤덤한 목소리였는데,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냉정하게 구는 권이도를 향해 울컥
원망스러움이 솟구치는 바람에.

“우으…….”

그는 내게 아무런 자비도 보여 주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은 손길은 내가 물러서지 못하게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투툭, 입꼬리가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이 억지로 열리기 시작했다.

“후…….”

목이 불룩, 나온 기분이었다. 권이도는 기어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뒤에야 삽입을 멈췄다. 낮은


숨소리를 내며 멈췄던 그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허리를 느릿느릿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이내,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아무런 전조 없이 목구멍을 확 꿰뚫었다.

“욱……!”

목젖이 콱 짓눌리고 구역질이 치솟았다. 목구멍이 조여드는 만큼 가까스로 벌렸던 입술 역시 함께


오므라들었다. 그저 머금고만 있던 성기에 앞니가 닿는 순간, 그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

힘없이 상체가 옆으로 무너졌다.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는 동안 권이도는 제 페로몬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온몸을 덜덜 떨며 널브러진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뿐.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흐…….”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터졌다. 살면서 울어 본 기억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데.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줄줄 흘러내렸는지 모르겠다. 입을 열면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문 채로 숨까지 참아야 했다.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차라리 다리를 벌리겠다고 할까. 처음엔 죄책감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이제는 서러움과 분노로 얼룩지고
말았다. 심장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었다.

“이런 재주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지…….”

권이도는 일부러 나를 상처 주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콜록거리며 웅크리고 있는 나를 아무런


감흥 없이 내려다본 것이다. 분명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주제 파악을 하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하.”

모자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다시 뒤통수가 붙잡혔다. 눈물로 뒤덮인 얼굴에 그가 제 성기를 문질렀다.
뺨을 툭 건드리곤 꾹 닫힌 입술에 다시 귀두를 가져다 댄다. 억울함에 눈을 들어 올리자,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얌전히 굴어, 정세진.”

그 한마디는 마치 족쇄와도 같았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풀어 주지 않겠다는 가혹한 족쇄. 내 손에


채워졌던 수갑처럼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그런 종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끊어 낼
수 없는 그런 굴레 말이다.

“……욱.”

양 뺨을 그러쥔 권이도가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입 안을 파고들고, 아까처럼


목구멍을 억지로 열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지만, 그마저도 힘없이 미끄러졌다.

“흐웁…….”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권이도를 밀어 냈다간 정말 다시는 얼굴조차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푹, 밀려든 성기가 입 안을 마구 헤집었다. 혓바닥에 닿는 액체가 눈물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토기가 치솟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목구멍을 조이며 견디는 것뿐이었다.

“……하.”

엉망진창인 행위였다. 나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고, 모자란 호흡 탓에 눈앞이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기둥이 이에 긁힐 것이 분명한데도, 권이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마침내, 그는 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꿀렁이며 넘어온 정액에 페로몬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권이도는 내가 모든 걸 삼킬 때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성의 없이 나를 놓아주고 옷차림을 갈무리했다.

“콜록, 콜록…….”

그리고 끝이었다. 나를 바닥에 버려둔 채, 그는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갔다. 달칵, 닫히는 문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들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본 회차에는 강압적 성관계 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86 화. Hiver Rigoureux(14)

그날의 일이 있고도 권이도와 내 사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여름은 점점 무르익는데, 반대로 우리


관계는 혹독한 계절에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날 무시했고, 나는 그에게서 관심을 구걸하길 포기했다.

권이도의 것을 입으로 받은 뒤, 며칠간은 뜨거운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목구멍이 잔뜩 부어서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운 좋게 식사는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들로 준비됐고 후식은
대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부었던 목도 가라앉았다. 그날의 일은 되풀이되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먼발치에서


권이도를 바라봤다. 가만히 있는 날들이 너무도 불안해서, 차라리 그가 날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비정상적인
바람까지 들었다.

사고에 장애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가 내게 한 짓이 폭력임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고 싶었다. 이미 무너진 가족의 울타리 대신 또 다른 허울이라도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계속 이런 삶이 이어지는 걸까. 매일 방에 틀어박혀 그런 생각만 했다. 권이도는 왜 나를 내보내지 않는


건지, 그렇다면 나는 그가 나를 버릴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지.

그나마 유일한 기대는 그에게 내게 아직 쓸모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끝까지 사용했듯
권이도도 그때까진 나를 두고 볼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때까진 이 집에서 나가지 않아도 된단
말이겠지.

그러던 어느 날, 주방장이 차려 준 점심을 먹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즈음이었다. 두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주방을 나왔는데, 이른 시간부터 출근했던 권이도가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마주치자마자 굳어 버렸지만,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가 내려온 건, 5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원래 입고 있던 정장이 아닌 새카만 정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원래도 채도 낮은 색을 입긴 했지만, 오늘은 어디 장례식장이라도 가는 것 같다.

“권…….”

권이도 씨.

그렇게 부르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그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뒷모습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근래엔 늘 뒷모습밖에 보질 못했는데 새삼 그 단정한 걸음걸이에 사무치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
권이도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았다.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고 속이 잔뜩 뒤집혔다.

나는 황급히 1 층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를 부여잡은 채 속을 게워 내려 했으나, 정작 튀어나온


건 토기가 아닌 눈물이었다.

“흐윽…….”

저항 없이 터진 흐느낌은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울어 본 적이 없는데,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멈춰지질 않았다. 권이도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보고 웃어 주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흑, 흐읍…….”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언가 잘못됐단 사실은 알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바로잡으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살았는데, 이제 와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한들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할 거다. 멍청하고 무능한 머리로는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겠지.

“……흑, 흐윽.”

차라리 나를 원망했으면 좋겠다. 화를 내고 미운 소리를 하며, 그날처럼 나를 괴롭히길 바랐다.

대놓고 드러내는 적의보다 불확실한 감정이 두렵단 걸 처음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바람에
권이도와 나눴던 감정들조차 흐릿해졌다. 다시는 가질 수 없는 따뜻함이라는 걸 알기에 더 뼈를 발라내는 것처럼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긴 시간, 화장실에 주저앉아 설움을 토해 냈다. 머리가 핑핑 돌 만큼 운 뒤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럽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허윽.”

폐부가 납작 짓눌리는 듯했다. 정체 모를 꽃 냄새가 풀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랫배에 열기가


차오르고, 터지듯 페로몬이 분출됐다.

“흡…….”

히트 사이클이었다.

***

권이도가 무슨 지시를 내린 건지, 고용인들은 내가 어디에 있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전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살갑게 무언가를 챙겨 주지도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식사를 차려 주고 내가
식사할 때마다 방을 치워 놨을 뿐.

“허억, 헉…….”

그러니, 내가 어디에 있건 그들이 나를 찾을 일은 없었다. 적어도 저녁을 먹기 전까진 이렇게 화장실에


널브러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 정말 온갖 볼품없는 짓은 다 하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숨을 헐떡이던
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아마 상대는 권이도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아마 누군가가 보면 멍청한 짓이라고 말했을 거다. 내가 그에게 가려는 이유는 차라리 다리를 벌리겠다고
애원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영영 외면받을 바에는, 그런 방식으로나마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을 게 있어서…….”

그런데 현관으로 향했을 때,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권이도가 아니었다. 권이도와 마찬가지로 새카만
정장을 입고, 고용인을 향해 짜증스럽게 지시하던 사람. 회장인 권상미가 아닌, 그의 남편인 이석인을 닮은 남자.

“어?”

“…….”

“뭐야, 그 재수 없는 권이도 새끼 오메가 아니야.”

권이정이었다. 온화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귀찮다는 듯이


고용인을 물리고 저벅저벅 내 쪽으로 걸어오기도 했다.

“정세진? 그런 이름이었지, 아마.”

“…….”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본능적인 위기감이 불쑥 엄습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흣.”

권이정이 내 팔을 덥석 붙들었다. 밀어 낼 생각이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으나 오히려 더 안기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와, 페로몬이…….”

그는 뒷말을 뭉뚱그리며 나를 조금 더 세게 품에 안았다. 표정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이내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픽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런 거였어?”

“흐, 이거 놓으…….”

“씨발, 페로몬 질질 흘리면서 어디서 내숭이야.”

그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나를 끌어안고 고용인들을 둘러봤다. 그들에게


도와 달란 시선을 보내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야, 얘 방 어디야?”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3 층으로 올라왔다. 아무리 열성이어도 알파는 알파인지, 그는 늘어진 나를


부축하는 게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히트 사이클이 온 몸으로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 새끼도, 결혼까지 해 놓고 존나 구석에 처박아 놨네.”

“하아, 하…….”

“조금만 참아. 너도 이왕 하는 거 침대가 좋을 거 아니야.”

권이정은 방문을 열며 연신 느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제가 섹스 매너는 좋다느니, 그 새끼랑은


다르게 만족할 거라느니, 그가 지껄이는 말만 들어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상상됐다.

“흣, 아, 안 돼……!”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서 권이정을 확 밀어 내고 방


안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핸드폰을 찾아 권이도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나보단 권이정이
훨씬 빨랐다.

“씨발, 뭣도 아닌 오메가가…….”

“악!”

머리채가 붙잡혔다. 권이도가 붙잡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권이정이 나를 휙 넘어뜨려 몸으로 내리눌렀다.

“싫다는 소린 아까 걔들 있을 때 했어야지.”

“아, 안 돼…… 이거 놔……!”

“아니면 페로몬이라도 갈무리하든가. 씹, 속 보이는 새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지가 벗겨졌다. 속옷까지 모두 벗긴 뒤에 권이정은 이미 젖은 아랫도리를 보며


비웃음을 참지 않았다. 딱딱한 바닥에 나를 눕힌 채로 양다리를 벌려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벗기면 식을 줄 알았더니…… 여기 색이 씨발…….”

“이거 놓으…… 하지, 하지 마……!”

온 힘을 다해 거부했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니,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오히려 유혹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적당히 반항하면 더 꼴리니까.”

“안 돼, 싫어…… 아흑…….”

“하, 이런 건 또 처음인데…….”

권이정이 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벌레가 기어가듯 미끄러진 손길이 간신히 오므렸던 양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래쪽에 무언가 닿아 왔다.

“아악……!”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으로 인해 수축된 내벽을 굵은 성기가 억지로 파고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었으나, 권이정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 흐윽…….”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가 비슷하게 삽입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적당히 페로몬에 취해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히트 사이클이 왔음에도 전혀 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싫, 악…… 아파, 아……!”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어깨를 밀어 내고 붙잡힌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몸으로 나를 내리누르던 권이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 목을 콱 붙잡았다.

“씨발, 가만히 안 있어?”

“캑…….”

알파의 완력은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권이정은 우성이 아니었지만, 오메가인
나와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폐가 쪼그라드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바람에, 손톱으로 그의 손목을 확 긁어내는
순간이었다.

“……!”

짝! 커다란 파열음이 울렸다. 눈앞이 번쩍이며 점멸하고 머릿속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권이정이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뺨을 갈긴 탓이었다.

“아…….”

“별것도 아닌 게, 씨발.”

억지로 욱여넣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눈에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권이정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나를 뒤집고는 날개뼈 사이를 꾹 누른 채 다시 삽입했다.

“악……!”

입 안에선 온통 피 맛이 느껴졌다. 뺨을 맞으며 안쪽이 터지고, 신음을 참으며 또 한 번 혀를 깨문


탓이었다.

“헉, 허억…….”

벌어진 입으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바닥에 떨어진 침에는 역시나 새빨간 피가 섞여 있었다. 내 머리통을
붙잡아 바닥에 처박은 권이정이 귓가에 역겨운 숨결을 흘렸다.

“……하, 그 새끼랑 잔 거 맞아? 구멍이 씹, 아다 같은데.”

“아, 흑…….”
“괜히, 헉, 힘이나 빼게 만들고…….”

쾌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아프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핸드폰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으나 권이정은 별반 힘들이지 않고 나를 짓눌렀다.

“악, 아흑…… 싫, 흐, 허억……!”

푹, 푹, 밀려든 성기가 잘 벼려진 칼과 같았다. 목을 졸리고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숨을 쉴


수는 없었다. 지나친 고통이 밀려들 때마다 바닥을 긁었더니, 어느 순간부턴 손톱 틈새에 피까지 맺혀 있었다.

“걸레 같은 새끼……. 봐, 너도 좋으니까 이렇게 조이는 거 아니야.”

“허윽, 악……!”

“페로몬도…… 후, 끝내주네.”

권이정이 내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페로몬 역시 나를 녹일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반응하긴커녕, 그냥 연신 욕지기만 솟구쳤다.

“제발…… 그, 흑…… 우욱…….”

끝내, 위장이 뒤집히는 것처럼 헛구역질이 나왔다. 먹은 게 없어서 나오는 것도 없었지만, 시큼한
위액이 목으로 역류했다. 토할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나를 보고도 권이정은 익숙하게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욱, 우욱…….”

“허억, 씹…… 존나 조여…….”

푹! 밀려 들어온 성기가 배 속을 난도질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고,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해야만 했다.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채 달뜬 숨을 토해 낸 권이정이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을 줄은…….”

“…….”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멍해졌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권이정의


한마디만 계속해서 되풀이됐을 뿐.

“……아.”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나를 제 형에게 넘긴 것이었다. 이제 쓸모를 다했으니,


새로운 쓰임새를 찾기로 한 걸까. 제 손으로는 건드리기도 싫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걸 수도 있었다.

“진작 이럴 것이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저항할 의지 역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만히 있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권이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흔들었다.

“아, 흑, 윽…….”
“하아, 씹…….”

목덜미에 코를 문지르는 감촉이 생생했다. 원래라면 소름이 끼쳤을 텐데, 지금은 그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권이도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했을 뿐.

“흐윽…….”

심장을 통으로 들어내면 이럴까.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더 끔찍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서,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크흑.”

퍽, 깊숙이 처박힌 성기가 부풀기 시작했다. 이미 너덜거리는 배 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도, 그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권이정은 결국 내 안쪽 깊은 곳에 사정했다.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노팅한 그대로 한가득 정액을


토해 냈다.

“하아…….”

“……흡.”

“후, 처음부터 얌전하게 굴었으면 좋았잖아.”

그의 손이 내 뱃가죽 위로 올라왔다. 삽입된 성기를 느끼려는 것처럼 꾹꾹 누르더니 키득키득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차피 내 애나 그 새끼 애나 비슷할 텐데…….”

오메가의 임신 확률은 형질의 우열과 주기, 그리고 노팅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권이정보다 훨씬


우성이었지만, 히트 사이클에 노팅까지 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쯧,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천천히 빠져나간 성기가 엉덩이에 문질러졌다. 찢어졌을 게 분명한 입구에선 주르륵, 묽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가물가물 흐려진 시야로, 허벅지에 흘러내리는 피가 또렷이 보였다.

“가끔 붙어먹자고. 응?”

“……흐.”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그에게 억지로 당해서가 아니라, 그게 권이도가 사주한 일이라는 부분이.


미처 놓지 못했던 희망을 이제는 정말 놓아 버려야 한다는 점이.

권이정은 금세 옷차림을 갈무리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그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나를 두고 떠나던 권이도와 겹쳐 보였던 건 왜인지.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이 집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도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던 건.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핸드폰으로 기어갔다. 다 찢어진 옷가지가 자꾸만 무릎에 걸렸다. 핸드폰은
액정이 깨져 있었지만 다행히 전화를 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흐르는 동안 속으로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제발 전화를 받길.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나를 도와주길.

뚝, 신호음이 끊겼다. 그 사실에 절망하려는 찰나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아…….”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손을 내밀 곳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그게 나를 내버려 둔 사람이란 사실엔 허탈함이 들었다.

“저 좀…….”

-……

“저 좀 도와주세요.”

내가 들어도 처참한 목소리였다. 다 쉬어 빠진 데다 덜덜 떨리기까지 했으니. 한참 침묵하던 김 실장은


내가 커다랗게 숨을 내쉴 즈음에야 대답했다.

-……지금 모시러 가겠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87 화. Hiver Rigoureux(15)

김 실장은 정말 30 분 만에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몸을 씻는 대신 옷만 갈아입고 모든 짐을 챙겨 집을


빠져나왔다. 운 좋게 고용인을 마주치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다.

김 실장과 함께 향한 곳은 내가 남겨 놨던 오피스텔이었다. 만약 징역을 살았다면 처분해야 했을 텐데,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김 실장이 그 사이에 사 온 약을 내밀었다.

“……근무 시간 아닙니까?”

“근무 시간 맞습니다.”

약국 봉지엔 눈치 빠르게도 열상에 바르는 연고도 들어 있었다. 이건 퍽 민망한데……. 나는그리


생각하며 연고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널브러뜨린 짐을 정리하던 김 실장이 멋쩍은 투로 덧붙였다.

“……아내가 아프다고 하고 잠깐 나왔습니다.”


얼굴만 아는 부인께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일을 그만둔 다음에도 귀찮게 하려던 게 아닌데.
연락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이렇게 됐다.

“고생하셨습니다. 돌아가 보세요.”

그래도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비록 내가 잡혀갔던 날을 기점으로 연락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 경찰엔 연락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그는 한참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물었다. 쓸데없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눈치챈 모양이다.


아마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쪽이랑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

“어차피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것 같고…….”

내가 당한 건 강간이 맞지만, 딱히 신고할 생각은 없었다. 매스컴만 신나 할 내용이었고 내가 이길


가능성도 없었다. 일을 크게 키워 봤자 권이도가 막아 준 횡령 건만 다시 수면 위로 떠 오를 거다.

“……죄송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협탁에 약을 내려놓고 비틀비틀 침대로 다가갔다. 목욕 가운 차림이었지만, 옷을 입을 만큼 체력이


남지도 않았다.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지 말라고.”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가 보다. 권이도가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할 수 있는 걸 보면. 지금은 그냥


…… 그냥 자고만 싶었으니까.

“들어가세요. 감사했습니다.”

“…….”

김 실장과의 인연도 여기까지겠지. 진작 끊겼을 관계를 내가 한 번 연장한 것뿐이었다. 김 실장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가보겠습니다.”

“……아, 맞아.”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그런 김 실장을 붙잡았다. 몸이 잔뜩 지쳤는데도, 정신은 또렷하기만 했다. 망할


불면증이, 이대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혹시 수면제 가진 거 있으세요?”

이틀을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잤다. 김 실장이 내게 건네준 수면제 덕분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불안하단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안 죽겠다고 이야기하자 약통을 건네줬다.

‘가끔 붙어먹자고, 응?’

꿈에선 계속, 계속 악몽이 반복됐다. 권이정에게 붙잡혔던 순간이 떠올랐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가끔은 배경도 바뀌었는데, 그중엔 권이도가 그 모습을 구경하는 악몽도 있었다.

열이 몇 번이나 올랐다가 내린 것 같다. 잠에서 깨면 다시 수면제를 먹었고, 그러다 일어나면 또다시


수면제를 먹었다. 권이정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도 페로몬이 남는 바람에, 그날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설마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을 줄은…….’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데, 망가진 마음이 시간으로 나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건만, 그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한 몸뚱이를 침대에 늘어뜨린 채,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제를 먹고 죽는 게 아니니, 이 정도면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저 오메가예요.’

그냥, 그날 죽는 게 나았으려나. 뭐 가치 있는 삶이라고 꾸역꾸역 연명했을까. 아니, 적어도 눈밭에서


죽는 건 아니니 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쾅!

악몽은 점점 애매하게 바뀌었다. 이제, 나를 강간하는 상대는 권이정이 아닌 권이도였다. 내 뺨을


때리는 사람도 권이도였고, 억지로 나를 굴복시킨 사람도 권이도였다.

쾅!

시끄럽게.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모르겠다.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은 현실 같은데,


먼발치에서 들리는 쿵쿵 소리는 꿈만 같았다. 이제 진짜, 정신이 나간 걸까.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굉음이 들릴
리가 없는데.

쾅!

깊이 잠들지 못한 몸뚱이가 주변 소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중엔 권이정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으니,


뭐가 진짜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는데.

“…….”

드디어, 쿵쿵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먹먹한 귓가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타박타박,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과연 꿈일까, 현실일까.

“……정세진.”

“…….”

뚝, 잡념이 끊어졌다. 머릿속을 울리던 웅성거림이 싸늘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는 내게,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을…… 아직도 남겨 놨을 줄이야.”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내가 아는 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성격처럼 명확한 발음이, 이불 속에 있었음에도


귓가에 또렷이 파고들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고요하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때도 여기로 왔던 건가…….”

어떻게 들어온 걸까. 금방이라도 날 일으켜 세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권이도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속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흐.”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흐느끼고 말았다. 무척이나 조용한 소리였지만, 권이도의 귓가엔 똑똑히 들렸을
거다. 동시에 그는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 냈다.

“…….”

“…….”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완벽한 차림새의 권이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잔뜩 지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은 나조차 흠칫 놀랄 만큼 냉랭했지만.

“어떤 새끼가 이랬어.”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매섭게 내려앉았다.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권이도가 내 턱을 붙잡았다.


아직도 얼얼한 뺨에 손가락이 스치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이었다.

“……권이정?”

퍼뜩, 권이도가 중얼거렸다. 내밀었던 손을 침대에 짚곤 짓씹듯 뒷말을 덧붙인다.

“그 새끼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

왜 모르는 척을 하지.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기대하게 됐다. 모든 게 내 오해고, 사실은 권이도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렇게 기대했다가 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았건만.

“정세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권이도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뭘


바라는지는 둘째치고, 왜 이곳에 와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오셨어요?”

그래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눈꺼풀을 한번 감으면 다시 뜨는 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시간을 느리게
감은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속도 역시 더디기만 했다.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는데.”

나를 무시하지 않았던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항상 외면했던 주제에.


“멋대로 나온 건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건네고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약 기운에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가까스로 침대
아래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

덥석, 팔이 붙들렸다. 그가 나를 붙잡아 줬다는 사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잠을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몸이 현실에 적응하질 못했다.

“아…… 감사합니다.”

권이도의 얼굴을 올려다보진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살짝 그를 밀어 냈을 뿐. 다행히 그는


금방 물러섰고, 거실로 향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권이도는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니,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손엔 내가 먹다 남은 수면제 통을 들고 있었다. 지그시 성분표를 응시하던 권이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려고?”

질문을 이해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아무래도 물을 마신다고 차려질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몸에선 기운이 쭉쭉 빠졌다.

“……아뇨.”

“…….”

“자려고 먹은 건데.”

정신이 왜 이렇게 없지.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사고가 이어지질 않았다. 머리가 자꾸 한쪽으로 쏠려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권이도에게 물어야 했다.

“안 가세요?”

“뭐?”

그는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아, 이게 아닌가. 이상한 질문을 건넨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정세진.”

아까보다 차분해진 음성이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권이도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

“내가…… 그게 누구 짓이냐고 물은 것 같은데.”

기시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에도 이런 식으로 기회를 줬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누가 이랬는지 아시잖아요.”

그러나 정작 나오는 말이 이따위였다. 나는 이미 너무 지쳤고, 속에 있는 말들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조차 체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대처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럴 거 예상 못 하신 것도 아닐 테고.”

이 모든 건, 그가 권이정을 집으로 부르는 순간 예정된 일이었다. 보안 시스템이 그렇게나 많은데 타인의


방문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CCTV 가 널리고 널렸는데 이제 와 모르는 척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권이도 씨 형이랑 잤습니다.”

잤다고 표현해도 되나. 처음엔 강제였으나 마지막엔 나도 저항하지 않았다. 이틀 내내 그 일을


곱씹었더니 권이정이 했던 말들만 고스란히 남았다.

“보이는 그대로예요.”

내 몸에 남은 폭행의 흔적은 짙은 정사와 애무의 흔적 같기도 했다. 결국엔 다 멍이었지만, 얼굴에 남은


상처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원래도 멍이 잘 남는 편이라, 권이도와 잤을 때도 비슷한 자국이
남았으니까.

“어차피 이걸 바라셨을 텐데…….”

“정세진 씨.”

그는 내 이름을 부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억지로 속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느릿느릿 가슴께가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모르나 본데, 우리 아직 서류상으로 부부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단 얘기예요.”

부부라니, 그런 근사한 이름을 붙여도 되는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혼하면 되지.”

이미 내 쓰임새는 끝났고, 남은 건 관계의 종말뿐이었다. 체념이라기보단 포기였는데, 그 또한 내게


바라는 게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걸 먹이고 재울 바엔 사라져 주는 게 편할 거다.

“어차피 진짜 부부도 아니었고…….”

“……이혼이라니.”

그런데 권이도는 선뜻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픽, 헛웃음을 흘린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초점이 흐려서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마 화가 난 것 같은데, 어디가 그럴 부분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는 내게 한껏 억눌린 목소리가 경고했다.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

비슷한 말을 너무 많이 들었나. 내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는데, 정작 그 말을 하는 권이도만


불안해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눈을 찌푸렸으나, 역시나 흐려진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짐 챙겨요. 다시 내 집으로 갈 거니까.”

그는 더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들고 있던 약통을 쓰레기통에 처박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병원이라든가, 링거 따위의 말이 들린 것도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부족하면 한 번 더 하겠습니다.”

“…….”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머리가 핑 도는 바람에 나는 벽에 손을 짚은 채 중심을 잡아야 했다.

“어차피 자주 붙어먹자고 했고…….”

권이정이 그랬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어쩌면 몇 번 더 비슷한 행위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권이도 씨가 만족하실 때까지 할게요.”

모든 걸 끝내고 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만약 또다시 외면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단기간에 끝냈으면 했다. 기약 없는 두려움만큼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혼합시다.”

“아…… 씨발.”

날카로운 욕지거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이도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세진아.”

“…….”

“왜 사람을 미치게 해.”

그렇게 말한 권이도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움찔 놀란 나를 붙잡더니 억지로 침대를 향해 질질


끌고 간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힘이 나를 거칠게 침대로 내던졌다.

“아윽……!”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에 무리가 가긴 했다. 신음을 참으려 끙끙 앓는 나를 보고


권이도는 싸늘한 어투로 내뱉었다.

“내가 가잘 때 갔으면 좋았잖아.”

그제야, 권이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정확히는 짙은 눈동자에 담긴 그 감정들이. 온갖 너덜너덜한


감정들은 대개 분노와 원망 따위가 전부였다.

“잠깐, 이게 무슨…… 아, 허윽……!”

그의 손이 가운 깃을 억지로 벌렸다. 파도처럼 범람한 페로몬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과 함께 몸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억…….”

꺼진 줄 알았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댐을 잃은 강물처럼 페로몬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짙은 꽃 냄새가 훅 풍기는 순간, 권이도가 내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맡에 고정했다.

“정세진.”

“하아, 하읏…….”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밀려든 성감이 본능적으로 그의 페로몬을 갈망했다. 그런데도 그는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비웃듯 건넨 말에 애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가슴 언저리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욱한 페로몬이 그의 것과 섞여서 비를 맞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만 같았다.

“……하으윽.”

그의 다른 손이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이미 벗겨진 가운은 몸을 가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가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다리 똑바로 벌려.”

“……흐.”

그는 이미 부드럽게 풀린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페로몬을 느낀 순간부터 그와의 정사를


준비하고 있던 곳이었다. 질척거리는 내벽을 확인한 권이도가 억눌린 목소리로 짓씹었다.

“이따위 취급을 받으면서…….”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불같이 쏟아지는 페로몬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이도가 내 손을


놓아줬지만, 나는 팔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그는 내 무릎을 어깨에 걸친 채, 아무런 전조
없이 귀두를 푹 찔러 넣었다.

“……!”

다 풀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덜 나은 상처가 버거웠기 때문일까. 주먹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강타했다. 깊이를 가늠하려는 듯 허리를 움직인 그가 반쯤 빠져나간 성기를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 아파…….”

“……아파?”
목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신음처럼 흘린 말에 권이도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웃음을 흘린다.

“여길 이렇게 세워 놓고…… 아프다고?”

그의 손이 발기한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프리컴을 질질 흘리는 성기는, 비단 히트 사이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권이도를, 그의 온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

그는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며 깊이 쑤셔 넣은 성기를 크게 쳐올렸다. 덜컹, 흔들린 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흐, 으……!”

아픈데, 아픈 만큼 쾌감이 일었다. 다리가 한계까지 벌어지고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뻐근했는데도 말이다.
마음과는 달리 몸이 반응해서,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나는 허벅지를 파르르 떨며 몸을 비틀었다. 이미 한번 혹사당했던 몸이 쥐가 날 것처럼 아렸기 때문이다.


그는 내 골반을 단단히 붙들고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흑, 흣……!”

지나친 쾌감은 사실 통증이나 다름없다. 권이도가 딱 두 번 움직였을 때, 나는 찌릿찌릿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을 보고 그가 그르렁거리며 목울대를 울렸다.

“권이정이 박아 줬을 때도 이랬어?”

- 다음 화에 계속

88 화. Hiver Rigoureux(16)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화가 안 났는데, 이번엔 조금 모욕감이 들었다.
다른 모든 부분을 욕해도, 그것만큼은 권이도가 욕할 부분이 아니건만. 눈이 확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이불깃을 붙잡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어느샌가 맺힌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랬으면 어쩌려고.”

화가 났다. 그와 만난 이후에…… 아니, 아버지의 아들로 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억울함이 오로지 권이도를 향해 튀어나왔다.

“내가 그쪽 형이랑 붙어먹으면서 질질 쌌으면.”

“…….”

“그럼 더럽…… 하윽!”

쾅! 내리찧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권이도가 무리할 정도로 안쪽을 꿰뚫은 탓이었다. 항상 봐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정말 닿으면 안 될 곳까지 닿은 기분이다.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나를 믿지도 않았으면서. 그는 정말 상처받은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내게 더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은 채,


처음 나와 섹스했을 때처럼 물건 다루듯 나를 휙 뒤집었다.

“악, 아, 잠, 아흑…… 흐윽!”

그 후엔 분노할 기회조차 없었다. 베개에 얼굴이 처박히고, 그의 체중에 온몸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손을 뒤로 해 그를 밀어 냈지만, 권이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팔을 잡아 등 뒤에 고정한 채 퍽, 퍽,
허리를 움직일 뿐.

“그만, 흑, 악……!”

아무리 히트 사이클이 왔어도 모든 행위를 쾌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마구잡이로 쑤셔 박는 동작이


매질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질식할 것처럼 쏟아지는 페로몬에 이대로 내가 잠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하윽……!”

“……하.”

퍽! 깊게 삽입한 권이도가 몸을 웅크렸다.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부풀기 시작했다.
주먹처럼 커다랗게 부푼 귀두는 평소라면 닿지 않을 곳에 덜컥 걸렸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꺽꺽거리는 나를
권이도가 꾸욱 내리눌렀다.

“세진아.”

왜 이런 순간에서까지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그 부름만큼은


온전히 전해졌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조그만 속삭임까지도.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사근거리는 음성이 나를 옭아맸다.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내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덜컥 불안함이 밀려드는 와중에 여린 살결이 콰득 깨물렸다.

“……!”
폐가 한껏 쪼그라들었다. 내장이 뒤틀렸다가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쥐어짜인
페로몬샘에서 마구잡이로 페로몬이 터져 나왔다.

“아, 악……!”

그는 마치 짐승처럼 내 살점에 이를 박아 넣었다. 울컥 터진 페로몬이 그의 페로몬과 묶이기 시작했다.


박제된 것처럼 침대에 고정된 채로, 온몸을 갈가리 찢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 아으, 윽……!”

각인당하고 있었다. 이건, 당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 남은 자유를 모조리 빼앗기고,


마치 물건처럼 상대방에게 소속되는 것이다. 억지로 타인에게 소속되는 감각은 칼로 장기를 난도질하는 것과
비슷했다.

“흐윽……!”

차라리 강간당하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일방적인 각인으로 짓밟힌 건 고작 내 인격만이 아니었다.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였기에 나는 어느 한군데가 잘못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때, 권이도가 아무런 말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으스러뜨릴 듯이 나를 끌어안은 채로, 왜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그가 선택한 일이면서, 왜 순간 그렇게 놀란 것처럼 보였는지.

특이 형질의 각인은 형질의 우열에 따라 일방적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우성이었지만, 권이도는


그를 능가할 정도로 우월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몰랐던 건, 억지로 맺은 각인으로는 그
무엇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

“……아으윽.”

마음이 통하지 않은 탓일까, 나는 그의 감정과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통증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전원이 나가듯 픽 쓰러질 때까지, 권이도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눈을 떴을 땐, 다시 권이도의 방이었다. 넓은 침대와 높은 천장이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 감옥처럼


느껴졌다.

고작 이틀. 도망치겠다고 결심한 지 이틀 만에, 나는 다시 그 커다란 집으로 잡혀 들어갔다.

***

특이 형질의 각인은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방법.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페로몬만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

그에게 각인을 당하고 눈 깜박할 새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 몇
달간은 히트 사이클조차 오지 않았다. 권이정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목덜미를 깨물린 흔적은 흉터처럼 남았다.

권이도는 이번엔 나를 3 층 구석이 아닌 자신의 방에 가둬 놨다. 문을 잠그지는 않았지만, 그건


가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잠을 잘 땐 늘 그의 침대에서 자야 했고, 그 외에 공간을 돌아다닐 땐 반드시
경호원이 붙었으니까.
감금이었다. 감시였고, 새로운 종류의 방치였다. 경호원의 얼굴을 질리도록 보면서도, 나는 권이도의
얼굴만큼은 쉽게 볼 수 없었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지 그가 방을 비워 놓은 채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뭐, 사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어붙은 것처럼 감당 못 할 공포가


일었으니까. 그에게 억지로 속해지던 그 순간의 기억 때문에, 환상통이라는 걸 알면서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나는 그날 죽었고, 지금 남은 건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처음엔 집 안을 돌아다녔으나 어느 순간부턴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밥을 굶다 굶다 탈진할 즈음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의사가 찾아와 수액을 놓아 줬다.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엔 으레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평생 놓지 못했던 희망이나,


구질구질하게 남은 감정 따위의 것들. 남은 날을 위해 품었으나 마지막 가는 순간엔 고작 미련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것들.

더 이상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버림받는 게 두렵지도 않았고, 추운 겨울 맨발로 눈밭을


헤매는 게 무섭지도 않았다.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사라져서 멍하니 숨만 쉬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날씨 탓에 몸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는 내가 이상했던지, 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심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내 팔뚝에서 피를 세
병이나 뽑으며, 제발 밥이라도 잘 먹으라고 내게 애원했다.

“이러다 정말 죽습니다.”

권이도가 오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그날 죽었을 텐데. 수면제에 취해 영면할 수 있던 나를 억지로


데려온 게 권이도였다. 권이정과 똑같이 나를 강간하고, 그와는 다르게 나를 떠나는 대신 주워 왔다.

이럴 거면 각인을 왜 했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나와 대화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를 놓아주지도


않는 건지.

그리고 왜, 내가 잠든 사이에만 나를 찾아오는 건지.

“세진아.”

계절은 겨울에 가까워졌는데, 권이도의 겨울은 끝나는 모양이었다. 각인의 여파로 마음이 풀린 걸까.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가만히 눈을 감은 내게 천천히 다가와 가끔은 이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무릎을 꿇어 보라고 할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뒤늦게 깨달은 건데, 그 말을 하던 권이도는
나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을 거다. 그저 화풀이처럼 욱하는 마음에 내뱉었겠지.

“세진아.”
이름을 부를 거면 적어도 눈을 뜨고 있을 때 불렀으면 했다. 왜 내가 깨어 있을 땐 한마디도 못 하다가
잠이 들 즈음에야 찾아오는 건지.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몰라도 이상했고, 이미 알고 있어도 이상했다.

아마 조금만 더 기력이 있었다면 물어봤을 거다. 눈을 뜨고, 권이도를 바라보며 얘기했겠지.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데, 너는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임신하셨네요.”

다음 날, 심 교수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줬다. 멍하니 있던 나조차도 놀랄 만큼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고, 심 교수는 이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 자리를 떠버렸다.

“식사는 꼭 하세요.”

나는 오메가였지만, 단 한 번도 임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권이도에게 임신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도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이다.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구실이, 그에게 후계를 낳아 주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날 밤, 나는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서재로 향했다. 맨발로 카펫을 밟으며 긴긴 복도를 열심히


가로질렀다. 오랜 시간 걷지 않아 자꾸만 무릎이 꺾였지만,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끌고 다리를 움직였다.

‘어차피 내 애나 그 새끼 애나 비슷할 텐데…….’

내 배 속에 있는 건 과연 권이정의 아이일까, 권이도의 아이일까. 나는 두 명의 알파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들은 모두 내게 노팅했다. 고작 3 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게 누구의 아이건 간에,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달칵, 서재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권이도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내부를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장식품으로 다가갔다.

‘나한테 그랬죠. 서재에 있는 총이 진짜냐고.’

나무로 짜인 프레임에 곱게 걸어 놓은 총. 검은 몸체와 이어진 은색의 총구가 매끄럽게 반짝이는 묵직한


물건. 처음엔 라이터인 줄 알았으나 그가 말해 주는 바람에 진짜라는 걸 알게 된 흉기.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거예요.’

천천히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무슨 생각이었냐고 물으면,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늘 이 순간을 기다려 왔고 마땅한 전환점이 없어서 흘러가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건 내 각오이자 다짐이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는 다짐.’

가짜이길, 조금 바랐던 것 같다. 그가 말한 각오와 다짐이 약간의 허세이길 바랐다. 나 또한 타협하지


않기 위해 이 물건을 골랐으면서, 마지막 순간엔 망설임이 생겼나 보다.

나는 그에게 불어를 알려 주던 테이블에 걸터앉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살면서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물건이었으나, 그 무게감이 라이터와는 달랐다.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탓에 그간 약해진 내가 들기엔 버겁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현실 감각이, 없다는…….’

그때, 입을 맞추지 말걸. 아니면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 볼걸. 그랬다면 혹시라도 그와 내 사이가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머리는 좀…… 너무 징그러운가.”

그동안 말을 너무 안 했더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잣말임에도 불구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와의 추억을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느릿느릿 총구를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어디가 정확한 위치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어림잡아 그
언저리를 겨누었다. 혹시 불발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우습게도, 나는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에 권이도를 떠올렸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모든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를 내려다보던 눈길, 그 눈빛이 차분하게 변하던 순간, 그리고 끝내
따사롭게 웃던 모습까지.

‘오늘 내 방에서 잘래요?’

아,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해봤다. 그토록 자주 몸을 섞었는데 입으로 마음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에게 들어 본 적도 없으니 그나 나나 마찬가지일까.

“……권이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은 소름이 끼칠 만큼 낯선 것이었다. 속에서 질리도록 외운 이름이었지만 입술을


움직여 발음한 건 몇 번 되지 않았으니까. 기회가 있다면 더 불러 봤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어 두었던 문틈으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던 상대방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세진?”

왜 그때,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인지, 아니면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는 도취감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를 한 번이라도 봤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웠기 때문인지.

“잘 지내요, 권이도 씨.”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멈춘 것처럼 살아왔던
날들이 이제 와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괜한 억하심정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잘 지내봐요, 한번.”


당신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후회하길 바라진 않아도 나라는 사람을 잊지는
않았으면 했다.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기억 정도로는 남고 싶었다.

“안 돼…….”

권이도가 숨결처럼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에 총구를 바짝 들이밀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오므라드는 순간, 그제야 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세진!”

탕! 커다란 발포음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평온함이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고,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을 거라고. 끔찍하게 되풀이되던 날들도 이제는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

“안 돼, 안 돼…….”

그 후엔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모습,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절망 어린 표정,


피가 쏟아지는 가슴팍을 누르는 손길, 그리고 내 손을 부여잡은 채 제 얼굴로 가져가는 것까지.

“세진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온전한 사랑을 받아 봤으면 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군가
방법을 알려 주길 바랐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길. 그리고 이번엔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길.

“안 돼, 제발…….”

추운 겨울이 지나 눈이 녹듯, 차디찬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상황에
맞지 않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우는 건, 나를 잃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날에 대한
허무함 때문일까. 적어도 그게, 내게 남은 감정 때문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구급차 소리를 들었던가. 아니면 그 소리가 들리기 전에 세상에 어두워졌던가. 단 하나 확실한 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권이도가 나를 놓지 않았다는 것 정도.

“허억…….”

서서히, 공간이 어그러졌다. 나를 보며 눈물짓던 권이도 대신, 나를 내려다보는 권이도가 보였다.


뿌옇던 머릿속에 안개가 걷히고,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근차근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벽면에 걸린 총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그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던 테이블 역시 더는 그곳에 놓여


있지 않았다. 같은 시간이지만 서로 다른 장면들. 그리고 지금껏 잊고 있었던 그와의 다른 추억들.

“……세진아.”

그 기억의 끝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권이도는 더 이상 과거의 환상이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은 따듯한 온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다음 화에 계속
89 화. Muguet du Bonheur

시간을 돌리는 게 가당키나 할까. 이미 한 번 지나온 순간을 다시 마주하고, 잘못된 선택을 돌이킬 수
있다는 게. 곧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내게 닥칠 위험을 미리 방지한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기억들은 열 마디 말보다 더한 증거가


되었다.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순간들이 권이도와의 추억을 낱낱이 보여 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기억들은 모두 사실이고 나는


권이도와 두 번의 만남을 겪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치채지 못한 사이 조금씩 달라진 현재를 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늦은 새벽이었다. 그때까지도 내 곁을 지키던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소는 더 이상 서재가 아니었고, 부서질 것처럼 아프던 몸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세진아.’

그는 가물가물 눈을 뜬 나를 보며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불렀다. 나지막이 가라앉은 음성은 사무치는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던 페로몬조차 그의 기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왜 그랬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 많았으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다 지난 지금에야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왜…….’

그러나 돌이킬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걸 놓친 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변명하지


못했지만, 권이도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됐단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이 앞서는 바람에 모든 걸
그르치고 말았다.

‘나한테 그러지 말지…….’

나를 무시하지 말지. 내 말을 조금만 더 들어 주지. 끝없는 이해를 바라는 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미안해.’

‘…….’

‘미안해, 세진아.’

권이도는 내 손을 붙잡고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얼굴처럼 짙은 눈동자에 처연한
빛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개를 숙인 그가 숨결처럼 속삭였다.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

맞닿은 손을 통해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와 각인한 탓에 마치 한 몸처럼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가진 후회, 그리고 과거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했던 나를 향한 애정까지.

‘내가 너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졌다. 모자란 거 없던 권이도가 사실은 누구보다
두려운 눈을 하고 있다는 것. 늘 여유로워 보였던 그가 사실은 누구보다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

‘너를 망쳤어.’

참담한 한마디는 그가 가진 가장 큰 미련이었다. 나를 망쳐서 사지로 내몰았다는 후회. 나라는 사람을


끝내 무너뜨리고 말았다는 죄책감.

우리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그 또한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터였다. 이미 한차례 지나간 폭풍이었기에, 내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왜 나한테 권이정을 보냈어요?’

그래서 물을 수 있었다. 내가 모든 걸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에 대해. 내가 권이도의 선물이라던


권이정의 한마디를.

각인으로 전해지는 기억은 어렴풋이 데자뷔를 느끼는 정도였다. 사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 혹은 좋은
느낌, 그런 것들을 모두 합쳐 기억으로 뭉뚱그린 것이다. 그가 아팠다는 사실은 알아도, 왜 아팠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보낸 게 아니야.’

그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그의 감정을 느끼는 만큼, 그에게도 내 감정이 전해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정말 널 사랑했어.’

‘…….’

이 말을 이제야 듣게 됐다.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건 굳이 각인으로 연결된 마음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내게 보여 준 다정함, 그리고 온기 따위의 것들이 모든 걸 보여 줬으니까.

‘……그래도 죽지는 말지.’

권이도가 그랬었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죽었고, 그는 나를 따라서 죽었다고. 내 세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그냥 거기서 아파하지.’

그러나 내가 죽은 뒤에 후회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잘해 준다고 해서


과거의 기억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다 들켜 버릴 진실이었다면 애초에 숨기지조차 말았어야지.

‘결국 날 또 버릴 거면서…….’
그 말을 했을 때도 권이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온전히 전해지는 마음이 내게도 저릿저릿한 통증을
안겨 줬다. 그가 내 말에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꿈을 꾸는 것처럼 달큼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가 시간을 돌아 다시 나와


마주쳤을 때, 그때 느꼈을 감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다시 만나서, 다시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됐으니까.’

약혼식 날, 권이도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그래서 내 손을 잡는 순간엔 눈물을 흘릴 것처럼 벅찬


표정을 지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보며 모든 걸 되돌릴 기회라고 여겼을까.

‘다시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는데…….’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들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
또한 그러지 못했으니 원망할 수 없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떤 말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근데 내가 널 망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간간이 내비치던 애틋함이 그런 종류였을까.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았던 그 미묘한 선은 권이도 스스로
만들었던 방어 체제일지도 모른다.

‘나한텐 널 행복하게 해줄 자격이 없으니까…….’

‘…….’

‘그래서 널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화가 났던 건, 그가 내게 또다시 선택지를 주지 않았단 점이었다. 잘못을 밝히는 게 두려워 사실을


숨겼고, 모든 걸 덮어놓은 채로 나를 내치려 했다. 그게 나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한들, 내 손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세진아.’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왜 그리 애원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말로는 자신을
떠나라고 하면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원.

‘너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

‘…….’

‘향수를 만드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서는 것도, 그리고 이 집을 나가는 것도.’

그의 말대로였다. 과거를 떠올리고 나니 나를 속박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버림받는 게 두렵지도


않았고, 혹시나 그가 나를 싫어할까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나를 떠나는 것까지.’

그는 내게 모든 발판을 마련해 줬고, 내게서 딱 두 가지를 빼앗아 갔다. 이미 곪은 관계였던 가족들과


미처 보답받지 못할 마음. 버리고 말고를 정하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사실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약혼은, 없었던 일로 해요.’

무어라 더 따지지 못한 건 자꾸만 괴로운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체 일부분을 똑 떼어 놓은


것처럼 권이도가 아파하고 있어서. 금방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라.

‘권이도 씨도 그럴 생각이었을 거고…….’

‘…….’

‘나도 당신 얼굴을 볼 자신이 없으니까.’

나는 천천히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었다. 손가락을 움찔 떨면서도, 그는 차마 나를 붙잡지 못했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공기 속에 흔들리는 그의 시선만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잘 있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는 말 역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는 그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을 뿐.

‘당신을 많이 좋아했어요.’

‘…….’

이렇게 아픈 감정을 알려 줄 거라면 나와 각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정의 전염성이 이토록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할 걸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억을 되찾은 걸 후회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그와의 약혼을 마무리했다. 그의 집에 들어갈 때처럼 작은 캐리어 하나만 들고 권이도를


떠났다. 그와의 추억이 남은 물건은 전부 그대로 둔 채로, 내 모든 기억을 그에게 버리고서.

“……정말 괜찮으십니까?”

주말 아침부터 나를 데리러 온 김 실장은 귀찮은 기색 없이 내 안위부터 살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대신 아픈 데는 없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괜히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제가 김 실장님한테 많이 의지하긴 하나 봐요.”

“예?”

“그 상황에서도 김 실장님 생각이 먼저 나더라고요.”

권이정과의 일이 있던 날,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김 실장이 떠올랐다. 그 또한 아버지와 한패라고


생각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하진 못했나 보다.

“궁금한 게 많은데…… 물어볼 수가 없네.”

이번엔 아버지를 배신해 놓고 왜 과거엔 그러지 못했을까. 권이도는 그러한 과거를 알면서도 왜 선뜻 김
실장과 손을 잡았을까. 내가 도와 달라고 연락한 뒤에 김 실장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어보면 안 되는 겁니까?”
“아뇨, 그걸 답해 줄 상대도 대답을 모를 거라서.”

그는 의아한 눈으로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봤다. 아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는데, 나로서도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과거의 당신이…… 아니, 정확히는 과거도 아닌 당신이 내게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병원으로 먼저 가주세요. 주말에도 여는 데 있죠?”

나는 오피스텔로 가기 전에 우선 병원부터 들렀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난밤, 그가 내게 노팅한 채 제 존재를 확실히 남겨 놨으니까.

“…….”

김 실장은 내가 말하는 병원을 듣고도 한참을 침묵했다. 차를 돌리긴 했지만 납득 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내게 한마디를 물었다.

“……경찰엔, 연락 안 하셔도 되는 겁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습니다. 거기에 별로 안 좋은 기억도 있고.”

괜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수갑이 채워졌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떠올랐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은 건, 그 후로 또 많은 기억이 쌓였기 때문이겠지.

“김 실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

김 실장은 이번에야말로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내 표정을 보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것도 끼우지 않은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

오랜만에 찾은 오피스텔은 여전히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시켜 청소하는 덕에 내가


손봐야 할 곳도 많지 않았다. 나는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 두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기껏 간다는 게 그 조그만 오피스텔이면서.’

“……이 집이 작진 않은데.”

권이도가 뭐라고 했더라. 도망치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그랬던가. 그가 여길 어떻게 알았는지, 그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그런 것들은 좀 물어볼 걸 그랬다.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침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둘러본 뒤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로지 나
혼자만 남은 공간. 그 정적인 침묵 속엔 여태껏 잊고 있던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이 침대에서, 권이도와 내가 각인했다. 그에게 도망친 뒤에 고작 이틀 만에 잡혀간 곳도 여기였다.


이제는 기억에만 남은 일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각인…….”

그와 멀리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권이도가 느껴졌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는데, 그냥 그가 울고


있단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진 않더라도, 속에선 계속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칠 거다.

“……별거 없네.”

반대로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오랜
꿈을 꾼 것처럼 그동안 일어났던 일이 모두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던데.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더니 모든 일에 초연해졌다. 이전처럼 죽고


싶진 않았고, 그냥 마냥 남 일같이 느껴졌다. 막상 깨어나면 별거 아닌 악몽처럼, 이미 지나간 일이라
무덤덤해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왜 이번엔 히트 사이클이 안 왔을까. 권이정이 집으로 찾아왔던 날은 권병욱 회장이 별세한
날일 텐데. 날짜까지 겹치는진 모르겠지만, 그 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건너뛰지 않았다면 권이도의
러트 사이클과 겹쳤을 거다.

“몸이 기억하나…….”

머리가 모든 걸 잊었을 때도 나는 총을 보면 두려움을 느꼈다. 권이정을 향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이따금 권이도를 보면 눈물이 났다. 어쩌면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은 것도, 본능이 모든 걸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세진아.’

“……하아.”

계속 생각이 깊어지는 바람에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앉아 있다간 권이도의 감정에 동화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캐리어부터 열어서 가지고 온 옷을 몽땅 꺼내 드레스룸에 정리했다.

드레스룸에서는 약혼식 날 입었던 예복과 다른 정장들을 발견했다. 내가 입고 다니던 옷들과 단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옷. 민재가 딱 내 수준이라고 말했던 기성복이 그것이었다.

‘저게 네 수준이지.’

이 새카만 정장을 살 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모든 걸 잊어버린


사이, 권이도는 나를 기억하고 있던 걸까. 결혼을 약혼으로 바꾸고, 삭막한 식장을 꽃으로 채우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자꾸 궁금했다.

“…….”

애써 고개를 젓고 드레스룸을 나왔다. 세수라도 해야겠단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로션 따위가 놓인


선반에서 눈에 익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립스틱 크기의 조그만 병은 약혼식 날 뿌렸던 향수였다.

‘회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페로몬 향수였지, 아마. 향은 퍽 좋은 편이었으나 권이도는 그 조잡한 페로몬을 가릴 생각이냐며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다. 아무튼 성격 참 대단하지. 초면인 상대에게 보통 그렇게까지 말하진 못할 텐데.
“……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권이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만 멍하니 있으면 떠오르는 게 온통 그와의
기억이었다. 원래는 하나여야 할 시간이 두 개가 되는 바람에 내가 곱씹어야 할 순간까지 늘어나고 말았다.

‘나와의 각인이 정세진 씨한테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각인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던가. 나를 묶어 놓기 위한 일종의 장치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그다지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으니,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한 번 맺은 각인은 상대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는 이상 누구 하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유지될 터였다. 물론, 그 수명마저 같아졌으니 중간에 끊기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는 와중에 문득
시야에 무언가 걸렸다. 공병 옆에 가지런히 놓인 무언가가.

「정세진」

약혼식 날, 꽃다발과 함께 받은 작은 카드였다. 홀린 듯 반으로 접힌 카드를 펼치자, 자필로 적은


은방울꽃의 꽃말이 보였다. 그 당시엔 단순히 로맨틱하다고 여겼던, 미처 그 의미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했던 한
문장이.

「다시 찾은 행복」

“…….”

아무래도, 권이도의 감정에 동화되어 버린 모양이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서, 카드 위에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미처 참아 내지 못한 설움이 눈 깜박할 새에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하.”

네게는 내가 다시 찾은 행복이었을까. 나는 널 악몽으로 기억하는데, 너는 그 악몽마저 놓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끝내 나를 울리고, 내게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겨 놨다.

“흑…….”

눈물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흘렀다. 그게 권이도를 향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원망인지, 혹은 과거를


향한 후회인지도 모른 채. 내 슬픔이 오로지 나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슬픔이 옮은 건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리의 약혼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너에게 행복을 찾아 주지 못했고, 마침내 홀로서기를 다짐했다. 긴


시간을 돌아 되찾은 기억은 그렇게 하루 만에 끝이 났다.

- 다음 화에 계속

90 화. Retour des Saisons(1)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쇼!”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온통 어두컴컴해진 하늘엔 덩그러니 뜬 달 하나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서늘한 기온 탓에,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직원들은 꾸벅꾸벅 인사를 건네고 저마다 택시를 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소고깃집도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고기가 정말 맛있었네, 오늘 술이 잘 받았네, 다음엔 뭘 먹어야겠네,
하는 말들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에게 다가가 그가 문을 열어 주는 대로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미리


히터를 틀어놓은 건지 내부엔 따뜻한 공기가 가득했다. 여몄던 코트 깃을 놓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자, 운전석에
올라탄 김 실장이 얘기했다.

“한숨 주무시면 도착해서 깨워 드리겠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는 차만 타면 꼭 나를 재우려고 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그게 막 퇴근한


자식을 보는 듯한 안쓰러움이라는 걸 안다. 그러는 본인도 나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면서 말이다.

“아뇨, 집에 가서 자려고요.”

나는 느릿느릿 이야기하며 가만히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따듯한 내부와 달리 차갑게 식은 창문이 바깥
공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의사가 가능하면 쪽잠은 자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김 실장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고, 조용한 귓가엔
윙윙거리는 기계음만 들렸다.

“…….”

반짝이는 야경이 창밖을 스쳤다.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뜨자, 뽀얗게 김이 서린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더 추워지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Sejin’의 겨울 컬렉션을 내놔야 한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그걸 요새 들어 새삼 느끼곤 한다. 언제 날씨가 더웠냐는 듯, 이제 여름의 흔적은


찾아볼 수조차 없으니까. 푸르른 녹음은 이제 단풍잎으로 바뀌었고, 아이스크림 따위를 팔던 길거리에 슬금슬금
붕어빵 트럭이 나타났다.

가을, 겨울의 초입에 선 계절. 권이도의 집에서 나온 지도 벌써 석 달째였다.


***

‘당신을 많이 좋아했어요.’

그에게 건넸던 마지막 고백, 그 후로 석 달이 지났다. 그간 많은 게 바뀌었고, 많은 게 그대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밤이면 먹는 수면제라든가, 내가 다니는 회사 같은 것들.

그의 집에 모든 물건을 두고 나왔지만, 딱 하나 버리지 못한 게 ‘Sejin’이었다. 권이도가 마련해 준


회사였으나 내게는 소중한 터전이고 안식처였다. 그간 정이 든 직원들과 내 손으로 일군 프로젝트를 미련 없이
버리기란 불가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Sejin’은 이미 완전한 내 소유였다. 권이도는 투자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게 회사 지분을 모조리 넘겨준 걸 보면 그의 일 처리가 얼마나 빈틈없는지 알 수 있었다.

‘전무님께서 대표님 말씀대로 하라고 그러셨습니다.’

이태성은 완전히 내 고용인이 되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팀장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던데, 왜인지 그건


죽어도 싫어 보였다. 그는 권이도와 내가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내가 계속 경호원으로 일해 달라고 말하자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혹시 주말 보장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희나와의 연애 전선도 뭐, 순조로운 듯했다.

‘축하드려요, 세진 씨. 이제 정말 조향사라고 해도 되겠어요.’

나는 그 석 달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중 가장 큰 성과가 바로,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조향 자격증이었다. 이희나의 말에 따르면 웬만한 회사엔 취직도 할 수 있을 거라던데, 어차피 나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나는 제품개발팀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향수를 만들어 봤고, 그중 몇 개는 아직도 개발 중이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그런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괜찮냐는 걱정을 끝도 없이 들었다. 보란 듯이 평소 같은 삶을


살려고 했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 실장은 물론, 이태성과 최 팀장, 끝내 윤 팀장까지
나서서는 내 안부를 물어 왔다.

‘뭔가…… 더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사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멍하니 있으면 죽는 순간이 떠올랐고, 끝내 마지막에
보았던 권이도가 그려졌다. 모든 게 지난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따금 헤아릴 수 없는 공허함이 내 모든 걸 앗아
가는 기분이었다.

‘정세진 님, 들어오세요.’

그래서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하직원들의 대화(아내가 산후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를
듣고 알아본 것인데, 반복적인 상담이 생각보다 도움이 된단다.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다 보면 정신적인
문제도 감기처럼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괜찮은 의사를 만날 때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섣불리 동정하지 않되, 너무 말이 많지 않고,
적당히 거리감 있는 태도가 중요했다. 내 이야기를 너무 캐묻지 않는 대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경험도 필요했다.

다행히 병원을 네 번쯤 옮기자,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개인


병원이었는데, 의사의 성씨가 ‘심’ 씨였다. 혹시 선호병원 심 교수를 아느냐고 물으려다, 굳이 알은체하지
말자는 생각에 관두었다.

‘대개 수면 중에 일어나는 문제는 수면의 질을 개선하면 좋아지거든요.’

상황은 나아졌지만, 악몽은 아직까지도 꾸곤 한다. 불면증도 완전히 낫진 않았고, 그럼에도 전처럼
수면제를 몇 개씩 씹어 먹는 일은 없었다. 우울증 약을 먹는 건 좀 귀찮았는데, 먹고 나면 몽롱하게 고양되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꾸준히 노력하시니까 금방 나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결핍된 부분이 있고, 그걸 어떻게 채워 나가는지에 따라 상황이 바뀌기 마련이다. 석 달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소한 부분을 바꾸기엔 또 충분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죽을 때의 통증을 떠올리면 지금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생각보다 살만했다. 아니, 괜찮았다. 전보다 훨씬 나아졌고 차츰 안정되고 있다고 느꼈다.

어딘가에 속하길 포기했더니, 사실은 이미 많은 곳에 속해 있더라. 나는 ‘Sejin’의 대표고, 직원들의


상사였으며, 다니는 병원의 환자이자, 이희나에겐 사업 파트너였다. 비록 가장 최초의 바람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외에 많은 것들을 이룰 테니 괜찮지 않을까.

“와, 이게 무슨 일이야.”

회식이 있고 다음 날, 느지막이 출근한 사무실은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 모든


직원이 출근한 건 아니기에 자리는 반 정도 비어 있었다. 직원들은 내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고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대표님 이거 보셨어요? 선호그룹 해체된다는 거?”

그들이 보여 준 건 선호그룹 전략기획실의 공식적인 해체를 예고하는 기사였다. 최근에 있던 대규모 구조


조정과 관련하여 그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다. 나로선 놀랍지 않은 내용이었는데, 직원들이
보기엔 그렇지 못했나 보다.

“이러면 주가 떨어지는 거 아니야?”

“에이, 그런 걸로 안 떨어져요.”

“맞아요, 선호는 뭘 해도 안 망하지.”

숙덕거리는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골라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선호그룹의


해체라. 언론이 떠들썩해질 소식이었으나, 모두가 예상하듯 그 규모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계열사가 부피를 키워 결과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우뚝 서겠지.

그리고 아마, 그중 대부분은 권이도의 손에 들어갈 테고.

‘부사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이거든요.’


얼마 전, 앞서 예고한 대로 권이경이 부사장 자리를 내려놨다. 권상미가 권병욱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와중에, 차기 부회장 후보로 꼽히는 게 바로 권이도였다. 권이경과 어떤 협상을 한 건지, 그는 물산 쪽 지분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싸웠기 때문일까. 그리 짐작했지만, 금세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권이도라면 과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집에 잡혀간 이후, 기업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일정 브리핑해 드리겠습니다.”

김 실장은 간결히 오늘 있을 일정을 알려 줬다. 오전엔 별거 없었으나, 점심엔 투자처와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장소는 선호 계열사의 한정식집인 의선당이었고, 상대는 당연히 선호 측 사람이었다.

“오후에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들어가셔도 되는 일정입니다.”

회사에 복귀할지 말지, 그건 시간을 봐서 정해야 할 것 같았다.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일찍 끝나면


돌아와서 개발하던 향수를 마저 만지는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나가 보셔도 돼요.”

꾸벅, 인사한 김 실장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렸다. 선호와의


미팅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참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기분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다른 이의 기분이.

“……아침부터 난리네.”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권이도가 느껴졌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그날 맺은 각인은


아직까지도 유효했기 때문이다. 지금, 자꾸만 뒤숭숭한 감정이 드는 것처럼. 이따금 권이도가 느끼는 절절한
설움이 전해지곤 했다.

내가 각인의 문제점을 실감한 건, 그의 집에서 나온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종일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나는, 눈을 뜨자마자 이유 모를 슬픔에 잠식되어야만 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컴컴한 감정이 물밀듯 가슴 언저리에 밀려들었다.

‘…….’

권이도의 감정이었다. 카드를 보며 울었을 땐 헷갈렸지만, 그 당시에 느낀 건 분명 권이도의 것이었다.

나는 각인이 두 번째였지만, 감정이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지는 몰랐다. 첫날엔 조금 얼떨떨했을 뿐인데


둘째 날부터는 그의 모든 게 적나라하게 구분됐다. 지금 슬퍼하고 있다는 것,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는 것, 금방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괴로워한다는 것.

처음엔 어땠더라. 조금은 통쾌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그 완벽해 보이던 사람이 끝내 나를 놓치고
후회한다는 게, 내게는 마냥 이기적인 만족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의 얘기지. 내가 그를 느끼는 만큼, 그 또한 나를 느낄 텐데. 그렇다면


최소한 제 마음을 다스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나는 서서히 바로잡고 있는데, 반대로 그는 점점 망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이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파도가 몇 달이 지나도록 점점 거세지기만 하는 걸 보면. 혹시 감정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건지, 그는 내가
가라앉힌 슬픔마저 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

몇 번이나 생각했다. 이럴 거면 나를 놓지 말지. 그렇게 다정한 척 내게 자유를 안겨 주지 말지. 더


욕심을 내서 나를 끝까지 가진 뒤에, 내게 속죄하는 기분으로 곁에서 노력했어야지.

나를 거슬리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이다. 그러나 동정심을 느끼게 할 계획이었다면 실패였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아주 조금도 권이도가 안쓰럽지 않았으니까.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감히 그 감정을 동정할 수 없을
만큼 이해가 돼서.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떤 생각이건 오랜 시간을 떠올리면 마침내 고민이 된다고
했다. 생각이 더 깊어져서 고민이 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잡념을 떨쳐 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정말 널 사랑했어.’

“…….”

탁, 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끌었다. 넓은 통유리 너머로 넓은 찻길이 보였다. 여전히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그의 감정 역시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쁘게 움직이면 무시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이마를 콩 창문에 기대자 차갑게 식은 유리가 느껴졌다.


얼굴에 열이 올랐었나 보네. 그 사실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세진아.’

두근거리는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의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오로지 권이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정과 기분이 전해진다고 해서 두근거림까지 전염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반
정도는 내 몫이라는 거다.

“……권이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름이 가슴에 응어리졌다.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은 내가 죽기 전 그를


불렀을 때와 비슷했다. 그의 손을 놓은 게 석 달, 그리고 그를 보지 못한 게 석 달,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도 벌써 석 달.

인정해야 했다. 나도 가끔, 권이도가 그리웠다.

***

만들던 향수를 계속 손보다 보니 오전 시간대가 지나갔다. 프로젝트 하나가 갓 끝난 참이었기에 다른


직원들은 드물게 한가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어제의 회식으로 출근도 늦었던 터라 점심시간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카드를 쥐여 주고 의선당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권이도의 카드로 사줬지만, 이제는 내


사비로 사줘야 했다. 사실 식사는 알아서 챙기도록 둬도 될 텐데, 습관이 되어 버린 이상 굳이 그만둘 필요도
없었다.

“정세진 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의선당은 마당이 있는 넓은 한옥으로, 일반 손님들을 받는 본채와 귀빈들을 모시는 별채로 나뉘었다.


서울과 제주도, 딱 두 곳밖에 없는 한정식집이었고 하루에 받는 예약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차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곱게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빠져나가고 드르륵, 장지문이 닫혔다. 약속 시간까진 10 분 정도가 남아


있었으니 곧 있으면 미팅 상대도 도착할 터였다. 나는 괜히 시계를 한 번 만지작거리고 넥타이와 재킷 깃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내 것이 아닌 기대감을 느끼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침엔 우중충하던 권이도의 기분이 지금은 조금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 눈물을 쏟을 것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다. 근 몇 달간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반대로 내 기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뭐…… 그래, 괜찮아질 때가 되긴 했지. 당신도 언제까지고 나를 그리워만 할 수는 없으니까.

“실례합니다.”

문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억지로 입매를 가다듬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 나오면
그거나 마시면서 속을 진정시켜야지. 그리 생각하며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둔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일까. 그 짧은 찰나에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나한테 이 정도면…… 권이도는 일상생활이 안 될 텐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장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무 냄새가 났다. 은은하고 묵직한 향기가 들이마신 숨결에 섞여 들었다. 예민해진 촉각이 그 모든
공기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순간적으로 넋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온몸에 퍼지는 바람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까먹은 기분이었다.

“……아.”

무려 석 달 만에 보는 권이도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늘 그랬듯 완벽한 차림새를 한 권이도. 정장


바깥에 걸친 트렌치코트조차 화보에 나올 것처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권이도.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권이도.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권이도.

- 다음 화에 계속

91 화. Retour des Saisons(2)

“…….”

“…….”

우리는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로를 마주 봤을 뿐이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내게는 그 모든 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왜 여기 있습니까?

그렇게 묻지 못한 건, 안으로 들어온 종업원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종업원은 테이블에 차를


세팅하고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힌 다음에도 우리 사이의 정적은 깨어지지 않았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권이도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미팅 상대가 선호그룹 사람이긴 해도, 그게 권이도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단 말이다. 고작 투자처와의 미팅에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천천히 권이도를 살펴봤다. 그새 살이 좀 빠졌는지, 이목구비가 조금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눈매가 한층 깊어졌고, 목으로 이어지는 턱선이 유독 도드라졌다.

환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권이도는 분명 현실이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눈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도,
이따금 깜박이는 눈꺼풀까지도 모두 진짜였다.

“……권이도 씨.”

이름을 불렀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게 과연 내 감정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표정하게 있을 거면 시선을 좀 거둬 보지. 저런 눈을 하고 왜 태연한 척을
한단 말인가.

“왜…… 아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꾸욱 다물었을


뿐이다. 이내 내리깔린 두 눈이 참으로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미팅을 하러 왔죠.”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권이도다웠다. 그 시간 동안 목소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고, 뒤이은 말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정세진…… 대표님하고.”

그와 장난을 칠 때나 듣던 호칭이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는데, 그


와중에 향긋한 페로몬은 또렷이 느껴졌다. 배 속 가득 차오른 아늑함은 오로지 권이도에게만 느끼던 종류였다.

“미팅이라니…….”

정말 미팅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구도가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그가 허락을 구하듯


문간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갑은 저쪽인데 눈치를 보는 건 내 쪽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무님께서 직접 오신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요.”

그는 ‘전무님’이라는 호칭에 잠깐 눈가를 움찔했다. 내가 대표님 소리에 어색해하듯 그 또한 어색함을


느꼈나 보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그가 느릿느릿 운을 뗐다.

“우선 천천히 얘기하고 싶은데…….”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정말 미팅을 하러 온 건지, 그렇다면 나는 그를


그냥 사무적으로 대하면 되는 건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와중에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앉아도 됩니까?”

그 질문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권이도가 착석을 허락받는 상황이 올 줄이야.

“안 된다고 하면 서 계실 겁니까?”

“그래야죠. 갑자기 찾아온 건 난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기분 나쁜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표정 정도는 바뀔 줄 알았건만. 지나치게 덤덤한 표정이다.

“……앉으세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을 뿐. 정갈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

“…….”

이번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차려진 다과를 눈으로


구경했다. 말린 대추와 고구마로 만든 전병이었다. 찻물로도 체할 수 있던가. 이 분위기라면 숨만 쉬다가도
체기가 생길 것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체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내어 왔다. 모든 코스가 다 나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새삼 아득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드세요.”

권이도는 군말 없이 식기를 들었다. 하나 에피타이저로 나온 밤수프를 먹을 때도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왕 각인을 했으면, 차라리 생각이라도 읽히면 좋으련만.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온통 조용한 와중에 음식은 차례차례 꾸준히 나왔다. 의선당은 내가 좋아하는 식당인데, 이런 상황에서
먹으니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하면 밥만 먹다가 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겨울에 크리스마스 컬렉션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조심스레 테이블에 식기를 내려놨다.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권이도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옆에


챙겨 두었던 서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기대 수익과 반응을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예산과 관련된 내용도 함께 정리해 놨습니다.”

“…….”

그는 서류를 받지 않고 잠깐 멍하니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모자라게 굴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오늘따라 멍하기 짝이 없다.

“미팅하러 오셨다면서요.”

“…….”

내가 한 번 더 재촉하자, 권이도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며 살펴보는 동안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를 훑어봤다. 역시, 살이 좀 빠진 모양이다. 볼품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날 선 듯 예민한
느낌이 생겼다.

“제품 개발은 끝난 겁니까?”

“……아.”

퍼뜩, 시선을 떼어 냈다. 하필 조금 까칠해진 입술을 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다행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권이도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끝나서 간단한 테스트 중입니다. 라벨링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이번 달 내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리고 이 부분 말인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요?”

그가 가리킨 건, 이번 컬렉션의 기획 의도였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내용이었고, 서류에 적힌 걸


제외하면 딱히 설명할 이야기도 없었다. 나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여름 시즌에 나왔던 향수와의 연관성, 그리고 계절감에 따른 향의 변화. 몇몇 제품은 크리스마스


한정으로 출시해 희소성으로 가치를 더하겠다는 내용을 얘기했다. 틀에 박힌 것처럼 뻔한 내용이 끝난 후에,
권이도는 곧장 바로 그 아랫줄을 가리켰다.

“여기도 설명해 줬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마땅히 설명할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이어서 그와 관련된 것들도 설명을 시작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권이도가 손가락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여기도.”

“…….”

이 사람이 지금 뭘 하는 거지.

차근차근 말을 이으면서도 그가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고서만 읽어 보면 끝날 일을 굳이 말로


들으려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물론 투자자인 만큼 꼼꼼하게 챙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이상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시면.”

“아뇨.”

“…….”

“마음에 듭니다. 그냥 말로 듣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면서 그는 종이를 한 장 뒤로 넘겼다. 이번엔 프로젝트의 순서를 나열해 놓은 부분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역시나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희 계획은 이렇습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나는 서류에 있는 모든 내용을 입으로 설명했다. 이럴 거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까다로운 미팅 상대가 아닌가 싶다. 차라리 불만스러운 부분을
지적하면 모를까,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를 일일이 해석하게 하다니.

“……이상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 서류는 그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끝내, 내가 직접 한 부분 한 부분


짚어 가며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모든 설명을 끝내자 권이도가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래…… 그렇군요.”

“…….”

왜일까, 내리깔린 두 눈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그를 응시하자, 그가 흘긋 내 눈치를


살폈다.

“더 설명할 건 없습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내게 추가적으로 다른 내용까지


요구한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어이없는 기분에 대뜸 묻고 말았다. 서류 내용엔 문제가 없는데, 계속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권이도는 눈을 서류에 고정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냥…….”

“…….”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 건, 권이도가 정말 기분 좋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부터 전해지는 감정


역시 그간의 우중충함과는 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평온했을까. 의식하지 않은 사이 그의 기분이 누그러져
있었다.

“……내용은 제대로 들으셨어요?”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속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바람에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야 했다. 이렇게 동요하면, 그 또한 내 감정을 읽을 텐데.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럼요. 정세진 씨 입에서 나온 말은 다 기억합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내가


지나가듯 말했던 모든 것들을 이뤄 줬으니까. 하물며 욕조에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다던 그 지나가는 말까지도.

“미팅을…… 하러 오셨다면서요.”

권이도의 목적이 미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정돈 진작 눈치챌 수 있다.
그럼 그는 왜 이 자리에 나왔을까. 나는 그 이유가 딱 하나라고 여겨졌다.

“미팅을 하러 왔죠.”

“…….”

“정세진 대표님이랑.”

나를 만나러 온 거다. 자그마치 석 달 만에, 내 눈앞에 나타난 거였다. 나를 놓아주겠다고 당당히 말한


주제에, 참으로 짧은 기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 사심 채우지 말고 일 얘기를 하셔야죠.”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 테이블을 바라봤다. 메인 요리로 나온 갈비찜과 옥돔구이는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았다. 식사까지 멈추고 나눈 대화는 일 얘기가 분명했지만, 그게 정말 ‘일’의 영역은 아니었다.

“귀한 점심시간을 그냥 버리시면 안 되잖아요.”

권이도는 지금 1 분 1 초가 소중한 사람이었다. 선호그룹은 크나큰 격변기를 맞이했고, 그 정상엔


권이도가 서야 했으니까. 차차 부회장 자리를 얻어 내려면 나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어야 한단 말이다.

“뭐…… ‘Sejin’엔 원래도 관심이 많았고, 귀한 시간일수록 필요한 데 써야죠.”

순간,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움찔 놀랐는데, 권이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눈두덩을 누르는 척,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걸 왜 이제야…….”

3 개월이었다. 내가 일하기 시작한 걸 기점으로 하면 더 오래였고. 그 시간 동안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더니, 왜 이제 와서 그런단 말인가.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요.”

권이도는 속 시원히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했을 뿐.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피하며 질문했다.

“나랑 일적으로 만나는 건 괜찮습니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권이도가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내가…….”

“…….”

“정세진 씨 눈에 띄어도 되겠냐고 묻는 거예요.”

미처 대답하지 못할 만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계속 눈에 띌 거냐고, 그렇게 묻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내게 허락을 구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나는 그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공과 사 구분은 합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말을 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고작 한 시간 전으로만 돌아가도 확신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권이도와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나니 대답할 수 있었다.

“투자자한테 눈에 띄지 말라고 할 만큼 뻔뻔하지 않아서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를 마주친다고 해서 예전처럼 두려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와의 각인은 이미
다른 기억으로 뒤덮였고, 그를 향한 원망은 피어오르기도 전에 불씨가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은 좀 곤란하군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불쾌함이라기보단 불편함이었고,


기피라기보단 회피였다. 그와의 해후가 지나치게 어색해서 ‘괜찮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할 말 끝나셨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이도는 나를 붙잡는 대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선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는 모습이, 그 당당하던 권이도와는 사뭇 달랐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무님.”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뚝 추락했다. 내가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권이도의 기분이. 나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고 우리의 짧은 재회는 거기까지였다.

***
일상이 흔들리는 계기는 가끔 아주 사소한 데에서 오곤 한다. 가령 손가락을 베여서 타자 치는 게
어렵다거나, 발목을 삐어서 계단을 오르기 어렵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게 아니면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난 후에
같은 음식을 못 먹게 되는 것처럼.

권이도와 만나고 난 이후, 평화롭던 일상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각한 건 아니었고, 그냥 평소와
조금씩 달라지는 정도. 여전히 일과는 비슷했는데 아주 사소한 것들이 무의식중에 나를 괴롭혔다.

“……그러지 말 걸 그랬나.”

그중 하나가 바로, 가끔씩 떠오르는 그 날의 권이도였다. 조금 수척했던 얼굴, 흔들리는 시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그 모습까지.

우습게도 나는 시간이 남을 때면 그날의 일을 곱씹었다. 뒤를 한 번은 돌아볼 걸 그랬지. 착잡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가 내게 등을 돌리는 순간이 어떤지, 무력하게
뒷모습만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지, 그런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안부라도 한 번 물어볼걸. 아니면 이왕 만난 김에 궁금했던 것들을 확인할 걸 그랬다. 공과 사 구분을


한다고 말해 놓고, 지나치게 사적인 감정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는가.

미안함…… 아니 찝찝함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여태껏 안 볼 땐 괜찮더니 딱 한 번 마주쳤다고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이다.

‘정세진 씨 페로몬을 닮은 향수를 가지고 싶습니다.’

어차피 날 놔줄 거라면 그런 부탁은 왜 했을까.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 따위 없었으면서 왜 나를 완전히


밀어 내지 않았을까.

시간이 미화하는 기억은 퍽 아름다워서 나빴던 순간보다 좋았던 순간들이 도드라졌다. 나를 매몰차게
외면하던 모습은 다정함에 뒤덮이고, 그 위에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그려졌다.

‘세진아.’

그럴 때면 나는 일부러 더 일에 집중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향수들을 시향하고, 직원들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앞으로의 프로젝트를 대비했다. 그러다 정 안 되겠다 싶을 땐 이희나가 납품한 향료로 직접 향수까지 만들어
봤다.

나로선 최선의 노력이었다. 고작 얼굴 한 번 봤다고 그와의 기억에 연연할 수는 없으니까. 비록,


권이도는 그날 이후 언제나 나를 떠올리는 것 같았지만. 잔잔히 전해지는 감정 역시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다.

“여기서 탑 노트가 너무 무거우니까…….”

“대표님.”

한창 개발팀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 실장이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왔다. 최 팀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라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봤다. 김 실장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그……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말입니까?”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직원들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나를 찾는 걸 보면.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는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권이도 전무가 찾아왔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92 화. Retour des Saisons(3)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김 실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가 찾아왔다니.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애써 의식적으로 외면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 권이도의 감정이 달라졌단
사실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아까 권이도 보셨어요?”

“와, 말도 마. 진짜 잘생겼더라. 웬만한 연예인보다 낫지 않아?”

“나은 수준이 아니라 당장 영화 찍어도 되겠던데요? 분위기가 무슨…….”

그새 소식이 퍼진 건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직원은 고개를 쭉 내민


채 응접실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불투명한 문이 뚫리지 않을 텐데,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근데 트렌치코트가 원래 그런 핏이었나……? 면세점에서 비슷한 거 입었을 때 난 그냥


바바리맨이던데.”

“아, 팀장님. 저희랑은 기럭지가 다르잖아요.”

“키 몇일까? 190 넘는 것 같지?”

응접실 문을 열기 전,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직원들에게 눈치를 줬다. 대부분 칭찬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나, 어쨌든 투자자를 앞에 놓고 숙덕거리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직원들은 금세 조용해졌고,
미어캣처럼 내밀고 있던 고개도 쑥 들어갔다. 물론 그럼에도 흘긋흘긋 이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말이다.

“…….”

후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는 순간이 왜 그리 긴장됐는지 모르겠다. 달칵, 문고리가


내려가고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은 권이도가 보였다.

“……전무님.”

내 부름에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그냥 아무렇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그 두근거림이 생생히


전해졌다. 평소와 달리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 문을 닫았다. 김 실장은 밖에서 대기했기에 좁은 방에는 오로지


권이도와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직원이 커피를 내어 왔는지, 내부엔 향긋한 원두 냄새가 가득 퍼져 있었다.
“…….”

“…….”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두 번째, 권이도와 마주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엔 석 달 만이었으나 이번엔
고작 며칠 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나았으나, 역시나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최대한 담담한 척 물었는데,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제 발로
찾아온 주제에 망설임이 길었다. 그가 왜 입을 열지 못하는지, 그런 건 지금 느껴지는 기분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권이도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대답했다.

“……투자자로서 온 겁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허울뿐인 구실. 아니, 겉으로는 무표정했으니 남들이
보기엔 진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약속을 잡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합니다. 다음부턴 미리 연락하고 오죠.”

‘다음’이 있다는 건가. 기껏 따지려고 내뱉은 말이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막혀 버렸다.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자, 권이도가 맞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선 앉아요. 정말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건 맞으니까.”

“…….”

그래, 바쁜 사람이 단순히 내 얼굴만 보자고 찾아오진 않았을 거다. 그건 너무 자아가 비대한 짐작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번 미팅 때처럼 구실이 있긴 할 터였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권이도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무의식중에 눈으로 좇는 것 같기도 했다. 내 한 동작 한 동작을 모두 살펴본 뒤에는 한껏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바쁩니까?”

“……네, 바쁩니다.”

사실 바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만약 바쁘다면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대접해야 하는


상대였는데 말이다. 정말 바쁜 게 누구인지, 그건 권이도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용건만 간단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권이도는 아쉬운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본인은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차마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깜박이는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번에 선호재단에서 새 프로그램을 짤 예정인데, ‘Sejin’과 콜라보를 했으면 해요. 올겨울에


기획하는 컬렉션 수익의 일부를 재단에 기부하는 형태로.”

“…….”

“당연히 기획 자금은 선호에서 대줄 거고.”

정말 공적인 일이구나. 그 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왜 이런 기분을 느낀단 말인가. 나는 애써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게 귀사에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권이도가 제안한 사업은 결국 ‘Sejin’이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구조였다. 선호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다시 선호로 들어가는 그런 형태였으니까. 우리는 그냥, 선행을 베푸는 척 좋은 이미지만 남기면 그만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들어 봐야겠지만, 지금 말씀해 주신 것만 보면 너무 일방적인 투자 같아서요. 그건 너무


…… 저희 쪽에만 좋은 일이고.”

“‘Sejin’에만 제안한 건 아닙니다. 여러 기업과 연계할 거고, 재단 홍보 효과와 더불어서 수익적인


면에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일종의 상징성이죠. 해신금융을 우리가 인수한 게 결코 좋은 그림은 아닐 테니, 정세진 대표님과
손을 잡아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좀 탈피할 생각입니다.”

얄밉게도, 권이도는 한 번 입이 트인 다음부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를 보여줬다. 여유를 좀 찾았는지,


언뜻 자신만만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그 말대로 일방적인 이득이라면 더더욱 정세진 대표님이 거절할 부분은 아니군요. ‘Sejin’은
패키지에 씰 하나만 추가하고 이득만 보면 될 테니까.”

사실, 답이 정해진 제안이었다. 그의 위치, 제안의 내용, 내 처지와 우리 관계. 그 모든 걸 감안해도


수락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건, 본능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직원들과 논의도 해봐야 하고요.”

“불가능한 시간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그래, 갑자기. ‘갑자기’ 부분이 중요했다. 그날 이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다가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는지. 그 행동이 자꾸만 의심되는데, 그걸 의심하는 내가 지나치게 건방진 것 같아서.

“……원래 재단 일에 관심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툭, 그 말이 튀어나왔다. 지나치게 비꼬는 말투였기에, 권이도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권이도 씨 이러는 거 솔직히 이해 안 됩니다. 아무리 공적인 용건이라고 해도 권이도 씨가 직접 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김 실장님이 얼마나 당황했으면 저를 불러왔겠어요.”

나는 대표고 그는 전무였지만, 그 위치는 기업의 크기만큼이나 달랐다. 권이도는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자그마한 회사의 한낱 대표 따위를 직접 만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 나란히, 응접실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쿵, 쿵, 뛰는 심장은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당황했다는 게,


그리고 긴장했다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대답해야 합니까?”

권이도는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되물었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그의 대답 역시 달라질 모양이다. 그


사실에, 힘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뇨…… 사실 아무것도 안 듣고 싶거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덜컥 두려움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게 무엇일지, 그걸 확인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지 아시잖아요.”

우리는 솔직하지 못해서 어긋났고, 끝내 침묵하는 바람에 헤어졌다. 그 멍청한 실수를 반복해 마침내
맞이한 결말이 그따위였다. 기적이라는 이름이 모든 걸 돌려놨지만, 이미 깨져 버린 관계를 붙이지는 못했단
말이다.

“…….”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을 멈추기도 했다.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고 싶어서 왔어.”

숨결 같은 목소리가 속내를 털어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저릿해서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어야 했다.

“이러다 진짜…… 미칠 것 같아서.”

억눌린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권이도는 말을 고르려는 것처럼 가슴께를 들썩였다. 미미하게
흐르는 페로몬은 그의 기분처럼 음울한 빛이었다.

“하루만 견디면 되겠지, 하루만 더 참으면 되겠지, 그런 식으로 버틴 게 3 개월이야. 그러다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 미팅을 나갔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까 돌이킬 수가 없더라.”

“…….”

“알아, 이러는 게 우습겠지. 이럴 거면 왜 널 놓아주겠다고 했는지 이해도 안 될 거고.”


혼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주절주절 늘어놓은 감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담담했다.
얼마나 속에서 곱씹었으면,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개운해 보였다.

“근데 숨을 못 쉬겠어.”

“…….”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각인으로 전해지는 감정이 꽤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그건 고작 일부였던 모양이다.


권이도의 입으로 듣는 그의 마음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온전히 느껴지는 상실의 고통은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종류였다.

“그래서 이딴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도 만들어서 만나러 온 거야.”

“…….”

“그래야 숨이라도 쉴 것 같아서.”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머릿속이 온통 백지였다.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세진아.”

권이도는 그 말까지 한 뒤에야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떨리긴 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그 사실을 아는 건 아마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냥 3 주만…….”

“…….”

“이 기획이 끝날 때까지만 볼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그 안에 마음을 접을 거냐고,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잡념이 떠오르다가도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계약서 가지고 오셨죠?”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도장이 대표실에 있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는 말에는 권이도가 눈가를
움찔했다. 그 모습이 참, 겁먹은 강아지 같아서.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턴 약속 잡고 오세요.”

***

나한테 바쁘냐고 물어 놓고, 정작 바쁜 건 권이도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무섭게 짐을 챙겨


일어나야만 했으니까. 언뜻 보이는 핸드폰엔 부재중 기록이 장난 아니게 찍혀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대한 사무적으로 악수를 했다. 비록 맞잡은 손을 그가 한참 놓아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살갑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고, 그는 여전히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다음엔 연락하고 오죠.”

이보다 더한 짓을 수도 없이 했는데, 악수 좀 했다고 기분이 좋아질 건 뭐란 말인가. 권이도의 기분이


하도 들떠서, 나까지 영향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괜히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와중에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

권이도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자, 그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느리게 운을 떼며 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여기…….”

그의 엄지가 내 눈 아래쪽을 문지르고 멀어졌다. 너무도 익숙한 행동이었기에 나 또한 그를 말리는 대신


얼굴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는 내게 손가락을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속눈썹이 붙었길래.”

“아, 감사합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살짝 매만졌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권이도


특유의 엷은 미소가 목구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또 올게요.”

그 말만 남기고, 권이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 지하에 도착하면 그의 비서가 대기하고 있을 거다.


지금 느껴지는 아쉬움은…… 아마 권이도의 것이겠지. 나는 애써 그리 생각하며 사무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벽 너머에서 고개를 쭉 빼고 있던 직원들과.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직원과. 하필 벽이 유리로 된 터라 내부가 지나치게 잘 보였다.

설마 권이도가 있을 때도 저러진 않았겠지.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직원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눈빛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보며
묻고 말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직원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 역시 지나치게 잘 들렸다.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랬나?”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좀…….” 따위의 대화였다. 그중 직원 하나가 용기 있게 질문했다.

“대표님, 권이도 전무랑 원래 알던 사이셨어요?”

“…….”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들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만지는 걸 그냥 두면 안 됐는데.


악수는 어색하게 해놓고 이상한 부분에서 익숙하게 굴었다.

“아뇨, 일하다가 마주친 게 답니다. 아까는 그냥 속눈썹 떼어 준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담담히 대꾸했는데, 다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잔잔한 야유를 흘리며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질문한다.

“그걸 보통 막, 그렇게…… 그렇게 간지럽게…… 막 그렇게 떼어 줘요?”

질문 하나에 ‘그렇게’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웃긴 건, 그 추상적인 설명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였다. 나는 푸스스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라니…… 홍보팀 표현력이 그래도 됩니까?”

“아니, 그게 있잖아요. 거시기…… 거시기한 그거…….”

아까보다 더 애매한 표현이 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일부러 눈치 없는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모르쇠가 통했는지, 직원들은 금세 공격 대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역시 그분 눈에도 대표님이…….”

“맞지, 게다가 대표님 오메가시잖아.”

“아까 무슨 한 폭의 그림처럼…….”

실시간으로 멋들어진 로맨스 하나가 뚝딱 탄생했다. 권이도가 첫눈에 내게 반해 속눈썹을 떼어 주는 척


추파를 던진 것으로. 우리가 정말 약혼했던 사이라는 걸 알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어라 말리자니 되려
장작을 넣는 기분이라, 그냥 슬쩍 주제를 돌렸다.

“다들 그 얘기 그만하고, 일거리 생겼습니다. 오후에 회의할 거니까 다들 시간 비워 놓으세요.”

권이도는 권이도고, 일은 일이었다. 이왕 도장을 찍었으니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시간은 조금


빠듯하겠지만, 차라리 바쁘게 지내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계산하며 대표실로 향했다. 컨펌이 빨리빨리 돼야 할 텐데. 씰 하나만 추가하는
게 말이 쉽지,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재단 측과도 연락해야 했고, 프로젝트팀도 다시 꾸려 봐야
한다.

3 주라는 시간. 그 과정에서 권이도와 마주칠 일은 별로 없을 거였다. 암만 내가 보고 싶다고 해도,


설마하니 일일이 모든 일에 관여하진 않을 테니까. 곧 담당자가 배정되면 따로 연락할 일도 줄어들겠지.

왠지 모를 서운함은 그냥 모르는 척했다. 권이도의 기분이 지나치게 들뜬 것도 애써 외면해야만 했다.


어차피 우리는 끝난 관계고, 조금씩 연명하는 순간을 붙잡고 있을 뿐이니까. 과거에 그랬듯,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이 관계는 끝나고 말겠지.

“…….”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책상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3 주 뒤,


본격적인 겨울에 들어서는 차가운 계절. 과거의 내가 죽은 시기도 이맘때였다.
- 다음 화에 계속

93 화. Retour des Saisons(4)

보통 유예 기간을 둘 땐, 그 기간이 끝난 뒤에 준비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내가 그에게 향수를


만들어 주고 모든 걸 물어보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혹은 그가 내게 선물을 주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줬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권이도가 내건 3 주는 단순히 프로젝트의 종결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대충 막 던진


기간도 아닐 거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도 아니었겠지. 내가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권이도의
방식과는 달랐다.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세진아.’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안에 나를 잊을 자신이 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 이후에


또 다른 핑계를 대며 만남을 이어 가려는 걸까.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히 내 기분상의 문제인
걸까.

“……권이도 씨가 또 오신다고요?”

마주칠 일이 적을 거란 예상과 달리 권이도는 다음 날이 되자마자 김 실장을 통해 회사에 찾아오겠다고


연락했다. 구실은 ‘진행 상황 점검’이었고, 당연히 그를 독대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오전 내내
그를 기다리다가, 또 한 번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응접실로 향해야 했다.

“대표님 차도 준비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다른 일 보고 계세요.”

그렇게 들어선 응접실 안에는 오늘도 향긋한 원두 냄새가 풍겼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도
함께였다. 권이도는 나와 각인했으니, 이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건 이제 오로지 나뿐일 거다.

“전무님.”

내가 그를 부르자, 권이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기다랗고 곧은 손가락은 가만가만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바짝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빨리 왔네요.”

빨리 오긴 무슨. 그를 기다리게 만든 것부터 마이너스건만. 도리대로라면 내가 직접 버선발로 마중을


나가야 했다. 어제도 본 얼굴이 뭐 그리 반갑다고 저리도 달큼한 미소를 짓는지 모르겠다.

“우선 앉아서 얘기하죠.”

“…….”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를 재고 가늠해서, 의도를 캐낼 생각에 절로 긴장이 됐다.

“중간 점검을…… 하러 오셨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

그 뒷말은 간신히 꿀꺽 삼켰다. 암만 그래도 하면 안 되는 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어쨌든 권이도는


갑이었으니, 투정을 부리듯 비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드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내가 말한 자료는 가지고 왔어요?”

순순히 들고 있던 서류들을 내밀었다. 어제 회의 후에 컨펌을 받기 위해 준비해 놓은 기획서들이었다.


오늘쯤 메일을 보내서 선호 측으로부터 최종적인 결재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좀 심심한 부분들이 있네요. 혹시 예산이 부족합니까?”

“아뇨, 예산은 충분한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우선 기본적인 틀만 잡아 놓고 추가적으로 살을 붙일


예정이었습니다.”

또 말로 설명해 달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권이도는 진지한 눈으로 서류를 훑어봤다. 그때처럼
장난을 걸 생각은 없는지, 몇몇 부분을 짚어서 착실히 피드백도 덧붙였다. 나는 긴장감을 좀 누그러뜨리며 그가
말한 부분을 볼펜으로 표시했다.

“패키지 디자인은 크게 안 바꿔도 됩니다. 번거롭게 만들 생각은 아니니까, 광고 쪽에 좀 더 치중하죠.


여기랑 여기는 쳐내고, 콜라보 제품에만 마킹 하나 더 해요.”

“그 디자인 말인데, 디자인팀 의견으로는 보틀이 들어가는 세트에 변화를 주는 쪽이 나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홍보팀이…….”

‘Sejin’의 보틀 디자인은 갓 돋아난 꽃봉오리처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 컬렉션에서는


여기에 금색 각인과 리본을 추가해 연말 분위기를 낼 예정이었다. 선호재단과 콜라보하게 될 제품은 그쪽에서
만든 씰을 하나 추가해 차별성을 주면 될 듯했다.

“광고는 유일기업 측에 맡기면 됩니다. 비용적인 측면은 선호가 알아서 할 거예요.”

유일기업이라면 선호의 계열사 중 하나인 종합 광고기획사였다. 선호재단과 관련된 일이니 이상할 건


없다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쪽에서 할 일은 확 줄어드는 셈이다.

“……향수 시향해 보시겠어요?”

이건 너무 날로 먹는 기분인데. 그런 생각으로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가 온다는 말에 괜히 껄끄러워하지


말 걸 그랬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도 않았고, 그는 정말 열심히 일만 했으니까.

“아뇨, 시향은 나중에 하죠.”

모든 미팅이 끝나고,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유로운 행동이었으나,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핸드폰에 부재중 기록이 잔뜩 찍혀 있을 거다.

“자료는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놔요.”


권이도는 서류 위에 가지런히 제 명함을 내려놨다.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따위가 적혀 있었는데, 번호가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연락은 이거 말고 정세진 씨가 알고 있는 번호로 하는 게 빠를 겁니다. 그쪽이 개인 연락처라.”

“…….”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핸드폰이 두 개였지. 내 전화를 받을 때와 업무 연락을 받을 때의 핸드폰 기종이


서로 달랐던 기억이 있다.

“……이번 프로젝트 담당자가 따로 없습니까?”

설마, 메일을 권이도에게 직접 보내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물었는데 권이도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느릿느릿 이야기한 것이다.

“담당자가 없냐니……. 내가 여기 있는데.”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고작 그거뿐이었는데, 가슴께가 덜컹 흔들리는 듯했다. 권이도는 퍽 다정한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거든요.”

“…….”

세상 어떤 전무가 이런 소일거리를 하십니까. 적당히 팀장급에게 돌리고 미팅은 주에 두 번 정도면


적당한걸.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그는 선호재단과는 연관도 없을 텐데.

“……내일도 오실 겁니까?”

설마 싶어 물었는데,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음을 흘리며 내게서 시선을 떼어 냈을 뿐.


또 한 번 시간을 확인한 권이도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다음에 시향하러 오죠.”

***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료를 주고받을 수 있는 21 세기에 대면 미팅을 선호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피차 바쁜 입장에, 한쪽은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대기업 전무라면.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미친 워커홀릭이 바로 권이도였다. 그날 이후, 권이도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Sejin’에 출석 도장을 찍었으니까. 향수를 시향하러 오겠다는 말이 설마 긍정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그는 늘
같은 시간에 회사를 찾아와 프로젝트를 점검했다.

‘……또 오셨습니까?’

나는 직원들을 대표해 항상 그를 맞이하러 응접실로 가야 했다. 그사이 장소는 회의실로 바뀌었고,


권이도에게 대접하기 위한 차 종류도 늘어났다. 차라리 시간 낭비였다면 이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볼 텐데, 그가
한 번 다녀가면 프로젝트의 진척도가 달라졌다.

‘바쁘지 않으세요?’
‘이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 없다는 건, 시계를 확인하는 눈빛만 봐도 알았다. 나야 끽해야 20 분 정도만 투자하면


되지만, 오고 가는 거리를 따지면 권이도는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그의 5 분에는 수억의 가치가 있다는데,
그는 매일 수십억을 내다 버리는 셈이었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권이도와 마주한 채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적당히 산미가 도는 커피 두


잔과 하얀 생크림으로 뒤덮인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의 비서가 인원수에 맞춰 사 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하나뿐이었다.

‘대표님은 무슨 케이크 좋아하세요?’

며칠 전 권이도가 찾아올 즈음, 나는 직원들과 소소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 보면 단 게


당긴다는 말부터 시작된 화제였는데, 하필 그가 들어온 시점이 내가 대답할 즈음이었다.

‘전 굳이 따지면 생크림 케이크가 제일 좋더라고요. 우유로 만든 거.’

그때 권이도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무심코 지나간 한마디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 날부터 그의 비서가 명성호텔에서 직접 만든 케이크를 종류별로, 인원수에 맞춰 배달한 것이다.

‘세상에, 잘 먹겠습니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역시 얼굴처럼 마음씨도 훌륭한 분!’

직원들은 뭐…… 좋아했다. 처음엔 권이도에게 낯을 가리더니, 몇 번 보고 나서 경계심을 허문


모양이었다. 정작 권이도와는 한마디도 안 해본 주제에, 나를 대하는 모습만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주위에서 보는 우리의 관계였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줄 알았던 직원들은


권이도가 돌아간 뒤 슬쩍 내게 다가와 요구했다. 권이도의 비서가 왜 케이크를 사 왔는지, 충분히 눈치챈 듯한
말들이었다.

‘대표님, 다음엔 마카롱 먹고 싶다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전 쿠키 종류도 좋아요.’

‘물론 케이크도 좋고…….’

장난에 가까운 요구였으나, 직원들도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만 더 하면 다음 날 사 올 간식의


종류가 바뀌리라는 것을.

이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 줄 몰랐다니까. 내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면서, 마치 나를 꼬시려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직원들이 탄생시킨 로맨스에 점점 살을 붙이는 격이었다. 오해받기 싫으면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무어라 설명해 주자니 영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말씀드릴 이슈는 이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완성 단계라, 마지막 컨펌만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권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언트가 까다롭게 굴지 않으니 프로젝트는
막힘없이 척척 진행됐다. 처음엔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일을 잘하는군요.”

“……직원들이 능력이 좋아서요.”

사실 권이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사람이 모든 일을 잘할 수는 없건만, 권이도는 모든


일을 잘했다. 이런 기획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음에도 막힘없이 척척 조언을 던져 줬다.

“이런 건 보통 리더가 잘해야죠.”

권이도는 한 번 더 들고 있던 서류를 훑어봤다. 그의 앞에는 시향지 몇 개와 패키지 샘플로 나온 보틀도


놓여 있었다. 뚜껑 끄트머리에 달린 유리로 된 꽃잎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생크림 케이크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예?”

대뜸 던져진 말에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는 내 쪽을 보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은 새하얀 우유 생크림 케이크였다.

“그거, 며칠 내내 손을 안 대길래.”

그걸 보고 있었구나. 그러는 그쪽도 간식거리엔 손조차 안 대면서 말이다. 김 실장이 꼬박꼬박 차와


케이크를 내오지만, 미팅이 끝날 때까지 누구 하나 먹는 사람은 없었다.

“입에 안 맞으면 얘기해요. 다른 거로 사 올 테니까.”

“…….”

왜, 나 때문에 사 오는 거라고 아예 광고를 하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속이 잔뜩 복잡했다.


그의 앞에서 무언가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가 선물한 음식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장식품처럼 놓아두고 말았지만.

“……권이도 씨.”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눈을 마주칠 때면 그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근거리는 설렘이나 명치가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는 가벼운
통증까지.

“이제 그만 찾아오셨으면 합니다.”

“…….”

툭, 내뱉은 말에 그가 표정을 굳혔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짙게 물드는 그의


시선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어떤 담당자가 매일 중간 점검을 하러 옵니까.”


“…….”

“그것도 권이도 씨 정도 되는 사람이.”

진작부터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야멸차다는 걸 알지만, 적당히 선을 그을 시점이었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행동에 여러 책임감을 느꼈으니까.

“전무님이 오시니까 저희 쪽에서도 제가 직접 나와야 하잖아요.”

권이도도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일방적인 만남인지. 구실은 미팅이었으나, 상대가 내가 아니면


성사되지 못할 일정이었다. 무리하게 강행하는 스케줄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테고.

“디저트도 사 오지 마시고요.”

고맙다는 말은 덧붙일걸. 말을 꺼내 놓고 후회했다. 그의 성의를 짓밟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최대한


간결하게 말한다는 게 이런 식으로 굴고 말았다.

“……아직 기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인걸요.”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했다.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니, 더 늦기 전에 그를 말릴


타이밍이었다. 모진 대처일지언정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듯했다.

“이러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보답도 해줄 수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평온함에 균열이 생기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권이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일상에 스며들기엔 우리는 너무 가혹한 이별을 하지
않았던가.

“…….”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올곧게 나를 향하는 눈빛에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배 속이


뒤틀릴 만큼 소란스러운 감정과 달리, 겉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에 3 주를 약속했죠.”

겨우, 흘러나온 말이 그거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언저리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내 기분일까, 아니면 권이도의 기분일까. 느리게 눈을 내리깐 그가 나직이 이야기했다.

“아직 시간이 남은 걸로 압니다.”

“…….”

약속이라면 진작 많은 것들이 깨지지 않았던가. 내가 향수를 선물해 주기로 했던 것도,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고.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닙니다. 정세진 씨가 불편하다면 찾아오는 횟수도 줄이도록 하죠.”

권이도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그와 각인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정말 표정 관리에


능했다. 아마 예전 같았다면 아무런 상처도 안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디저트도…… 그래, 안 사 올 테니까.”

“…….”

“그만 오라는 말만 하지 마.”

내가, 그를 끊어 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이거였다.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서.
처연하게 내리깔린 두 눈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은연중에 그를 기다리다가, 그가 떠나간 뒤에 아쉬운
기분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그에게 받은 상처가 덜 나았던 모양이다. 그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가도,
다 잊은 줄 알았던 부분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일 얘기는 아니고…… 사적인 거거든요.”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봤다. 당연히 물어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사적인 건 따로 약속을 잡고 물어봐야 되는데요.”

지금…… 나한테 심술을 부리는 건가. 조금 전까지 한껏 심각했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게 황당한 웃음이
나오려 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안 물어보지, 뭐.”

“…….”

그가 눈가를 움찔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니까 왜, 이기지도 못할


오기를 부릴까. 낭비할 시간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면서.

“물어봐도 됩니까?”

“……얘기해요.”

나지막이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티 나지 않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질문을 건네기 위해선 나 또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전에 나한테 각인했을 때…….”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에, 그는 일방적으로 내게 각인했다.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건넬 수 있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와중에도, 이따금 떠올랐던 의문 하나.

“왜 날 방치했어요?”

- 다음 화에 계속
94 화. Retour des Saisons(5)

왜 나를 살피지 않았을까. 나를 억지로 제게 종속시켜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몰래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내게 배신감을 느낄 만큼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죽기 전에 조금만 더 온기를 나눠 줬어도 좋았을
텐데.

그 당시엔 호기심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서운함이었다. 그가 나를 막 대하던 순간보다


무시하고 외면하던 날들이 가슴에 더 사무쳤다. 왜 이제 와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 채,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권이도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설마하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날 너무 무서워해서.”

짙은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서서히 젖어 들어 가는 시선이 마치 설움처럼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두 눈에 눈물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말이다.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어.”

“…….”

짧은 대답을 이해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그를 무서워해서, 그래서 나타날 수 없었다니.


과거의 권이도가 내 두려움을 느낄 수단이 대체 뭐가 있었길래.

“……내가 무서워하는 걸 어떻게 알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향한 공포를 들켰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아픈 와중에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권이도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각인했으니까.”

“…….”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가 느릿느릿 뒷말을 보탰다.

“그래서 다 느껴졌어.”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권이도는 모든 걸 느꼈던 모양이다. 내 감정과 기억, 그리고 그를 볼


때면 밀려들던 두려움까지.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환상통이 나를 얼마나 좀먹었는지까지도.

“물론 각인이 아니어도 알았겠지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눈앞의 권이도가 너무도 괴로워 보여서 나조차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를 떠올린 그의 표정이 가슴 언저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럼 내가 안 자고 있는 것도 알았어요?”

그렇다면 그가 나를 찾아오던 밤, 그는 내가 깨어 있단 사실을 알았을까. 사실 구태여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씁쓸히 내리깔리 두 눈이 열 마디 말보다 더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미안.”

“…….”

사과를 받으려던 건 아닌데. 잠든 내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만의 고해 성사를 이어 갔을


뿐이니. 그 순간들이 불쾌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제 와 새삼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그리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미안해, 세진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이 들었다. 권이도는 마냥 죄인이었고, 나는 선고를 내리는 판사였다.


불쑥, 솟구치는 많은 말 중 정작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이 정도였다.

“……그만 일어나죠.”

***

퇴근길엔 병원을 찾았다. 일주일에 세 번, 정기적으로 있는 상담을 위해서였다. 한 번에 딱 30 분씩만


갖는 상담은 잡다한 일상 얘기와 내 몸 상태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번에 약 줄이고 좀 어떠셨어요?”

심 교수와 무척이나 닮은 의사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넨 뒤 차트에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잠은 잘 잤는지,
식욕에 이상은 없는지, 기분은 좀 어떤지 따위의 것들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부작용은 없었기에 복용하는
약들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한 확인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놨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색했는데, 이제는 편히 말을 꺼낼 수 있게 됐다. 밤중에 꾸는 악몽(내용은 말하지 않았다)부터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 감정들에 대해서 말이다.

“제가 내린 선택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면, 이렇게 대뜸 속에 있던 불안이 튀어나오곤 했다.

“선택이라면, 어떤 것들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냥 살면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그럴 때마다 확신이 안 생기더라고요. 이게 맞는지,


혹시 잘못되는 게 아닌지, 내가 이걸…… 나중에 후회하진 않을지.”

어떤 선택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콕 집어서 말하기엔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들이었으니까. 내가 그의 집을


나온 것, 지난번에 그를 놔두고 와버린 것, 그리고 이번엔 그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까지.

“제가 모든 걸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권이도한테 과연 잘못이 있을까. 그는 주어진 상황에 노력했을 뿐인데 내가 모든 걸 그르친 건 아닐까.


기껏 마지막을 고해 놓고, 이제 와 내 일상에 그를 포함시키는 건 또 욕심이 아닐까.

욕심. 그래, 욕심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계속 오겠다는 권이도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를 끊어 내야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에 안도했단 말이다. 그럼에도 억울함이 들었고, 그 억울함은 권이도를 향한 원망으로
돌아갔다.

‘왜 날 방치했어요?’

사람의 감정은 지나치게 복합적이라 하나의 이름으로 획일화시킬 수 없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종종 떠올랐다.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서운함인지도 모른 채,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고 속에 쌓이기만 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게 맞는 거예요.”

의사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담담히 대답했다. 내가 눈을 들어 마주 보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고 그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이유가 있겠죠. 모든 선택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가 내린 선택을 존중해 주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선택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어떻게 바꿔 나가냐는 거거든요.”

“…….”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걸요. 저도 그렇고, 우리 환자분도 그럴 거고.”

권이도가 그랬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실수가 아니라고. 나는 과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있을까. 그 부분은 또 확신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그 또한 지금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아, 선생님.”

상담이 마무리될 무렵, 나는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을 떠올렸다. 원래는 당연히 안 되는 일인데 이번에


약을 줄였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남들은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니까, 원래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이 하나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가볍게 술 한잔해도 되나요?”

***

더는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권이도는 매일같이 회사를 찾아왔다. 나는 늘 권이도와 미팅을 했고,


평소처럼 회사 업무를 보다가 남는 시간엔 향수를 만들었다. 부러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도맡아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더 손 볼 건 없겠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권이도는 디저트를 사 오지 않았고


딱 해야 할 일만 끝내고 돌아갔다. 그게 조금 안쓰럽다가도, 마땅히 해줄 말이 없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행사 론칭을 앞둔 금요일. ‘Sejin’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제품도, 홍보 수단도 마련됐으니, 남은 건 시간이 지나 순차적으로 오픈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와, 드디어…….”

직원들은 감격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들끼리 벅찬 한숨을 토해 내는가


하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대표님……!”

“……그렇게 힘들었어요?”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직원들을 쭉 둘러봤다. 조금 빠듯한 일정이긴 했지만, 가능하면 야근은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말이다. 역시나 직원들은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사실 일은 많이 안 힘들었는데, 그냥 무사히 끝내니까 너무 좋아요.”

“맞아요. 실은 처음 기획할 땐 죽었구나 싶었거든요.”

“이번엔 대표님이 가장 고생하셨죠.”

한마디씩 건네는 말들이 살갑기 짝이 없었다. 대표님은 좀 쉴 필요가 있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찡긋했다. 쉬기 싫어서 더 열심히 한 건데,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를 노릇이다.

“우리 오늘 회식해요. 회식!”

“대박, 회식 좋다!”

직원들은 잔뜩 신이 나선 떠들썩하게 회식을 추진했다. 재미없는 상사랑 놀아 주는 게 뭐 그리 재밌다고.


회식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우리 직원들밖에 없을 터였다.

“행사 끝나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끝나고도 하고 지금도 해야죠!”

뭐,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사기를 북돋기 위한 회식도 좋을 듯했다. 가볍게 식사만 한 뒤에 들어갈
사람들은 들어가라고 하면 되니까. 혹시 소고기가 질렸을까 싶어 메뉴를 물어보는 와중에, 문득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식?”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그 두 글자가 또렷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퍼뜩 고개를 돌린 곳엔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서 있었다. 매일 이맘때면 회사로 찾아오는 권이도였다.

“전무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남들이 들으면 권이도가 우리 회사 전무라고 생각할 인사였다. 그간 매일 얼굴을 본 탓에 그를 향한


직원들의 태도가 참으로 친근했다. 권이도는 딱히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술 마십니까?”
권이도는 많고 많은 사람 중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애초에 대화를 나누는 건 항상 나밖에
없긴 했다. 술을 마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답하려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말을 고쳤다.

“네, 뭐……. 그럴 것 같습니다.”

의사가 그랬다.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건 긍정적인 일이라고. 가능하면 음주는 하지 않는 게


좋지만, 정 마시고 싶을 땐 수면제만 빼고 마시라면서. 딱 하루 정도는 괜찮다고 했으니 오늘은 마셔도 될
것이다.

“……그렇군요.”

한 타이밍 늦은 대답이 영 탐탁잖게 들렸다. 그는 느리게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다물었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그가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네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Sejin’의 첫 회식을 하던 날. 일찍 들어가겠다고 말해


놓고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다가 귀가했던 그때.

‘출근은 정세진 씨가 했는데, 퇴근은 주정뱅이가 했나 보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마,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기약 없는 약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헤어질 미래를 그려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일상의 행복에 푹 잠기는 바람에 그런 나날이 계속되길 은연중에
바라기도 했다.

“…….”

문득 시선을 떼어 냈다. 아무런 계기 없이 새삼 그립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가지 긁는 남편


같다며 농담을 건네고, 그가 나와 김 실장의 사이를 오해하던 그 당시의 일이. 지나치게 사소한 일상 속 그와의
추억들이 말이다.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묵묵히 서 있는 권이도를 지나쳐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뒤에선 여전히 직원들이 숙덕거리며 회식


메뉴를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립다고 한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일 텐데. 이런 기억의 편린에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제는 내가 술에 취한다고 해도, 권이도가 그 사실을 알 수조차 없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니.

***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시끌벅적한 내부는 온통 직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눈앞엔 해산물이 종류별로 세팅돼 있고, 날것을 못
먹는 이들을 위한 익힌 대게 따위도 있었다. 랍스터 회에, 복어 회에, 단체로 먹기엔 값비싼 음식들이
테이블마다 줄줄이 차려졌다.
“전무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은 권이도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감흥 없는


눈으로 이런저런 감사 인사를 받고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마, 오뚝한 코 아래 굳게
닫힌 입술까지. 이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홀로 우아하기 짝이 없다.

“많이들 먹어요. 부족하면 더 시키고.”

기품 있는 목소리가 하는 말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모두에게 전해졌다. 직원들은 요란스럽게 기뻐하며


술잔을 돌렸고, 저마다 고급스러운 잔에 사케를 따라 마시기 바빴다. 나는 최 팀장이 채워 주는 술을 받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따 회식하는 거 말입니다.’

아까, 미팅을 마친 뒤에 권이도는 회의실을 나서며 대뜸 말을 꺼냈다. 퍽 갑작스러운 주제였고, 그 말을


할 때 권이도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단 의미로…… 내가 사고 싶은데.’

‘……예?’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그걸 권이도가 사줄 이유가 뭐가 있다고. 애초에 우리 회사 직원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마침 밖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권이도의 말을 듣고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대표님만 괜찮다면 제가 대접하고 싶군요.’

‘……바쁘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마침 금요일은 무슨. 주말에도 안 쉬는 사람이 금요일이건 월요일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매일같이


회사에 출근하던 모습을 내가 아직까지도 기억하는데.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냥 어색하게 웃어야 했지만.

‘그래도 신세를 질 수는…….’

‘갑자기 맡긴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해냈으니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죠.’

이제 와 짐작하건대, 아마 일부러 모두가 보는 데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나와 둘만 있을 때 말했으면


내가 무조건 거절했을 테니까. 빠져나갈 구실을 모두 차단하려고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불쌍한 척까지
했겠지.

‘물론, 대표님이 불편하시다면 포기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권이도는 저녁 시간대에 맞춰 근처에 근사한 일식집을 예약했다. 그런 권이도의 행동에


이태성이 내게 어찌나 묘한 시선을 보내던지. 심지어는 김 실장마저 조금 짠하다는 눈을 해 보였던 것 같다.
“전무님도 한잔 받으십쇼!”

친화력 좋은 최 팀장이 권이도에게 술을 따라 줬다. 의외로 권이도는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술잔을


내밀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이렇게 비싼 음식을 사주고 있으니 직원들에겐 상냥하게 보였을 거다.

“대표님, 건배사 해주세요!”

“아니지, 이런 건 돈 내는 사람이 해야지.”

“아, 그런가? 그럼 전무님 부탁드립니다!”

아직 술이라곤 한 방울도 안 마셔 놓고, 직원들은 벌써부터 분위기에 취한 모양이었다. 권이도가


건배사라니. 그 안 어울리는 조합에 직원들을 말리려는데, 권이도는 흔쾌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내 보죠.”

단조로운 말이었으나 직원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엔 충분했다. 저마다 건배를 한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간 권이도가 사 오는 디저트에 익숙해진 탓일까, 누구 하나 사양하거나 빼지 않았다.

“……우리 평소에 회식 자주 하지 않습니까?”

“에이, 대표님. 그거랑은 또 다르죠.”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메뉴를 좀 다양하게 할 걸 그랬나. 잘 먹는 걸 보니 좋긴 한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나랑 있을 때보다 더 신난 것 같아서,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대표님, 짠 해주세요. 짠!”

나는 의식적으로 권이도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다른 직원과 잔을 부딪쳤다. 알싸한 사케를 한입에 쭉


털어 넣고 그 낯선 알코올 향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두어 번 그렇게 잔을 주고받은 뒤엔 아무렴 어떤가 싶어
긴장도 누그러뜨렸다.

“대표님 정말 고생하셨어요.”

“맞아요, 이게 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아뇨, 여러분이 잘한 거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본인이 대접하고 싶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으니까.

한 잔, 두 잔, 술잔이 오고 갔다.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고, 직원들도 서서히 취해 가기 시작했다.


원래도 들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빨리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전무님,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권이도는 의외로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리는 중이었다. 술을 따라주면 받기도 했고, 무언가 수다를
늘어놓으면 묵묵히(절대 대답은 하지 않았다) 들어 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마냥 지켜보던
이들도 슬쩍 한두 마디씩 끼어들었다.

“전무님, 저도……!”
“저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적당히 거절해야 할 텐데……. 그리 생각했다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권이도라면


알아서 잘 처신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서 감히 술을 강권할 사람도 없건만, 쓰잘데기없는 걱정이었다.

“전무님 보면 볼수록 좋은 분 같아요.”

“……그래요?”

내 옆자리에 있던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그에게 술을 따라 주며 적당히


대꾸했다. 권이도가……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던가. 사실 딱히 나쁜 버릇은 없었던 것 같다. 제법 성실하게
일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리고 진짜 너무 잘생기셨어요.”

“와, 맞아요. 저 요새 안경 안 쓰잖아요. 전무님 보면 시력 좋아지는 것 같아서.”

그 옆에 앉은 직원이 맞장구를 쳤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력이 좋아진 것 같다니


……. 술기운이 오르니 속에 있던 말들이 툭툭 나오는 모양이다. 피식피식, 입가를 가리고 웃는 와중에 권이도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따라붙었다.

- 다음 화에 계속

95 화. Retour des Saisons(6)

“선호 다니는 사람들은 전무님 얼굴이 복지라니까요.”

“근데 이제 우리한텐 대표님이 있는 거지.”

“맞아, 맞아.”

한 번 느껴진 시선은 직원들이 몇 마디 덧붙일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복지라뇨…….”라고


웃어넘길 때도 그대로였고, 어색하게 술을 한 잔 더 마실 때도 그대로였다. 특유의 짙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한 잔 더 드릴까요?”

다행히 이미 취한 직원들은 권이도가 누구를 보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텅 빈 술병을 발견하곤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사케를 한 병 더 시켰을 뿐이다. 그러다 다른 직원이 새우를 까주겠다며 소매를 걷기에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여러분 많이 드세요. 저 배부릅니다.”

“에이, 대표님은 좀 많이 드셔야 해요.”

“맞아요, 살이 더 빠지신 것 같던데.”


종종 있는 일인데, 회식만 하면 직원들은 유독 내게 음식을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고기를 구워서
앞에 놔준다거나 반찬을 내 앞에 끌어 놓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처음엔 아첨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이젠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표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그러고 보니까 대표님 되게 날 거 못 먹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회 잘 드셔서 다행이에요.”

“……그건 무슨 이미지예요?”

나는 애써, 필사적으로 권이도의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눈이 마주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양 직원들만 바라봤다. 누군가 발라 준 대게 다리 살을 한 입 먹고, 또 다른 직원이 따라 준
술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저 진짜 ‘Sejin’에 뼈를 묻을게요…….”

그러다 대뜸, 한 직원이 감격한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양손에 얼굴을 묻곤 입사하길 잘했다며
벅차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 역시 회식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장난처럼 대꾸했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퇴사하던데.”

“진짜라니까요, 대표님!”

“그래요, 믿을게요.”

알겠다는 의미로 직원의 어깨를 다독였다. 푸근한 체형을 가진 직원이 우는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폭 안긴 게 아니었음에도 품이 가득 차는 듯했다.

“대리님 또 이러시네.”

“그런 거 받아 주지 마세요.”

“어리광 부리는 거 버릇 든다니까요?”

직원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주정을 부리는 모습이 꽤 귀여웠기에, 나도


웬만하면 다 받아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토닥토닥 직원을 달래 주는데, 딱 한 명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권이도의 감정이 전해졌다. 조금 전부터 내리막길을 타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대리님 진상이에요!”

“그러지들 마. 원래 다니던 회사가 많이 힘들었나 보지.”

“확실히 우리 회사가 복지가 좋긴 해요.”

‘복지’라는 말엔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도 슬슬 술기운이 오르는 터라,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모르는 체할 수 있었다. 술에 취하는 건 늘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이성이 흐려지는 게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으, 화장실 다녀와야겠어요.”

한참을 어르고 달래자, 그제야 직원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직원 하나가 그런 건 말로 하지


말라며 질색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면서 또 내게 술을 권하기에 그냥 흔쾌히 술잔을 내어 줬다.

“오늘 대표님 술 잘 받으시나 봐요.”

“사케 좋아하세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그냥 잘 들어가네요.”

그만 좀 쳐다보지. 아무리 다들 취했다고 해도, 슬슬 남들 시선을 의식할 때가 됐건만. 설마, 이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동상처럼 저러고 있을 셈인가.

“전무님, 술 더 안 드세요?”

“……아,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오죠.”

마침내 권이도는 누군가 말을 건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쪽으로 사라지는 권이도를 보고,
뒤늦게 빳빳하게 긴장했던 어깨가 풀리는 듯했다. 암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게 권이도였으니까.

“근데 저희 너무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이게 돈이 얼마람.”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먹어도 돼요.”

아무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인데.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사준다고 해놓고 다른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암만 많이 먹어 봤자, 권이도의 씀씀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일 테니까.

“권 전무님 천사일지도 몰라…….”

맛있는 거 사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법칙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얼핏 보기에도 권이도를 향한 직원들의
호감도가 쑥쑥 자라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원래는 좋은 분이었다면, 이제는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분 정도로.

그 후로 술을 얼마나 더 마셨을까. 비어 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원래 있던 직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엷게 풍기는 페로몬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피부로, 호흡으로 느껴지는 존재감이 목까지 올라왔던 취기를
가라앉히는 기분이었다.

“…….”

권이도였다. 그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차지한 거였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이


공간에서 페로몬을 풍길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리님 화장실 다녀오셨어요?”

“그런 거 말로 하지 말라면서요…….”
때마침 돌아온 직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원래 권이도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한결 울음기가 가신
얼굴이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휙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흘긋흘긋 눈치를 살피는 게, 왜인지 잔뜩
고양된 표정이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설마 그게 내 옆에 앉았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넘겨짚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권이도가 저 직원을 따라가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닐까 하고.

“어? 전무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지?”

“뭐 어때요. 전무님, 한잔 따라 드릴까요?”

권이도는 이번엔 직원들이 주는 술을 받지 않았다. 술잔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앞에 놓인 젓가락 역시


손도 대지 않았다. 아마 제 것이 아니라 직원이 쓰던 물건이라 그런 듯했다.

“저희 이번에 출시하는 향수 진짜 잘될 것 같아요.”

“특히 플로럴 머스크가…….”

맞은편에 있을 땐, 그래도 모르는 척할 수 있었는데. 바로 옆에 앉은 터라 조금만 움직이면 권이도와


팔이 스쳤다. 일부러 가까이 앉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대표님 사케 더 드실래요?”

직원이 술병을 내밀었다.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서 나는 한 손으로 술잔을 가린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 게 분명했으니까.

“저는 이제…….”

“그만 마시지 그래요.”

그런데 내가 거절하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여태껏 묵묵히 있던 권이도였다.


더디게 고개를 돌리자,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혼자 거의 한 병을 마시더군요. 술도 잘 안 하는 사람이.”

“…….”

그러니까, 대놓고 광고하지 말래도. 나도 모르는 내 음주량을 왜 권이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권이도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나와 눈을 맞췄다. 이 술자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세진 씨한테 지금 꽃향기 나는데.”


“…….”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언뜻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더 깊이 들어가면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내게, 그 비슷한 향이 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괜찮은 겁니까?”

권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끈, 가슴 언저리가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간신히 그에게서 눈을
돌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네.”

“…….”

“좋아진 겁니다, 오히려.”

별로…… 권이도한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페로몬샘이 많이 안정됐네요.’

각인의 효과일까. 예전과는 달리 평소에도 페로몬을 낼 수 있게 됐다. 아직도 정상적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거나 하면 조금씩 피어오르는 정도였다. 물론 굉장히 미미한 수준인 데다, 일부러 내보낼
만한 일이 없어서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럼 다행이고.”

권이도는 그리 말하면서도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젠 내가 타인의 페로몬을 느끼지도,


타인이 내 페로몬을 느끼지도 못할 텐데. 권이도를 제외한 모두가 베타나 다름없었고, 그건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김 대리님, 저 한 잔 더 따라 주세요.”

“오, 더 드시게요? 잠시만요. 새거로 따라 드릴게요!”

손으로 막았던 술잔을 직원 쪽으로 내밀었다. 그만 마실 생각이었는데, 속이 복잡해지는 바람에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의사가 들으면 기함할 생각이 머릿속 가득 떠올랐다.

“자자, 대표님 받으세요.”

권이도는 이번엔 그런 나를 말리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물끄러미 내 안색을 살폈을 뿐. 잔뜩


심란한 기분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

눈앞이 자꾸만 뿌옇게 변했다. 몸이 계속 한쪽으로 기울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는 바람에, 직원이 한마디 할 때마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

“진짜, 그때 장난 아니었어요.”
직원이 하는 말은 반 정도만 이해됐다. 무언가 웃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말을 하는 직원도 혀가
잔뜩 꼬부라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취한 와중에, 나는 스르륵 옆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

“그걸 제가 봤어야 하는데…….”

“대표님 보셨으면 일주일은 웃으셨을걸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취기가 올라서 한 행동이었다. 내가 기댄 게 벽인지 아니면 사람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직원 역시 불콰하게 들뜬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러게요. 웃겼겠다.”

내가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누군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어 있던 벽이 움직인단 생각이
들었는데, 금세 자세가 편안해졌다. 나는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살짝 털어 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헉, 속 안 좋으세요?”

“아뇨, 그건 아니고…….”

내가 지금, 술을 얼마나 마셨더라. 주는 족족 마셔 댔으니 살면서 가장 과음한 순간일 게 분명했다.


주량도 정확히 모르는데, 아마 확실히 넘어서긴 했겠지.

“심장이…… 너무 뛰는데.”

길게 숨을 내뱉으며 한 손을 가슴 언저리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박동은 평소보다 조금


빠른 정도. 이상하다. 분명 조금 더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말이다.

“원래 술 마시면 그러잖아요.”

“……그래요?”

“그럼요.”

그렇구나. 또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원체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머리끝까지 취기가


오르는 게 이런 기분인 줄은 몰랐다.

“또 재미있는 얘기 없어요?”

“와, 많죠. 기다려 보세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익숙한 페로몬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알딸딸하게 취한 머리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술이 들어간 속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기분이 좋으니 다 괜찮았다.

“학교를 재밌게 다니셨네요.”

“대표님은 대학 때 어떠셨는데요?”

“저는 뭐 그냥 공부하고…….”
나는 느릿느릿 대꾸하며 오른손으로 의자를 짚었다. 자세가 무너지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몸을 바로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섬주섬 손을 움직이자, 약지와 소지가 옆에 앉은 이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재미있었던 건 글쎄…… 유학 다녀온 거?”

“오, 유학 어디로 가셨는데요?”

사람 허벅지가 참 단단하네. 내 손이 닿자마자 무슨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맨정신이었다면 금세 손을


치웠으련만, 평소와는 다른 사고는 신기하단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 그래서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였고,
촉감 좋은 바지가 손끝에 감겼다.

“어디더라, 프랑스였나…….”

동시에, 서늘한 손길이 손등에 닿았다. 조금 다급히 붙잡힌 손은 금세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감촉에 문득 입을 다물자,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프랑스요?”

“……아, 네. 프랑스 다녀왔어요.”

손을 빼내지 않은 건, 그 손길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큼직한 손도, 나와는 달리 서늘한
체온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페로몬까지.

“경영 쪽으로 배우긴 했는데…….”

붙잡힌 손이 의자에 내리눌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영 불편해서 빼내려고 했는데,
역시나 취한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저는 유학 못 다녀온 게 한이에요. 학교 다닐 때 교환 학생 같은 거라도 가볼걸.”

스르륵, 맞닿은 손이 손등 위에 미끄러졌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 손길이 점점 대담하게 바뀌었다. 내


손을 꼭 쥐었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의자와 손바닥 사이를 파고든 것이다.

“그럼 불어도 잘하세요?”

“…….”

손을…… 잡아도 된다고는 안 했는데.

어느샌가 그는 내 오른손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얼기설기 엮인 손가락이 족쇄처럼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세게 쥐었다가, 망가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천천히 힘을 푼다.

“……대표님?”

“아…… 불어, 불어 잘하냐고 했죠?”

“네, 불어 잘하세요?”

“그냥 기본적인 정도만…….”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직원과의 대화에 제대로 집중도 되지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정말 술기운인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리털이 삐쭉 서는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잔뜩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멋있어요. 대표님 못하시는 게 없네요.”

“하하…… 그 정돈 아니에요.”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굳이 빼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옆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힘을


뺀 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뇨, 이제 그만 마시려고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가지 긁는 남편 같다니까. 잔소리를 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고, 비어 있던 왼손으로는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많이 드시긴 했어요. 저도 지금 막…… 어우 취기가…….”

술을 마시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빨개진 얼굴을 들켰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해 그 어떤 핑계도 대지 못했을 테니. 아니,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으려나.

손가락에서도 맥박이 뛴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는 권이도의 체온으로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손 역시 서서히 온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윤 팀장님이…….”

이렇게 좋아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게 이상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이건 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애써 그렇게 변명까지 해가면서.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스킨십을 해왔는데.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고 그보다 더 깊이


몸을 섞는 날도 많았건만.

긴장한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온전히 느껴지는 설렘 역시 오로지 권이도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한참 그의 손을 모르는 척했고, 그는 기꺼이 지금의 상황을 만끽했다. 그렇게 얽힌 손가락은 꽤 오랜 시간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96 화. Retour des Saisons(7)

회식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파했다. 원래라면 적당히 마무리시켰을 텐데, 오늘은 내가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직원들은 한껏 흥이 올라 고주망태가 되었고, 그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차에서 대기하던 김 실장은 회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데리러 왔다. 내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고
비틀거리는 나를 정중히 부축했다. 권이도의 비서 역시 그를 데리러 왔는데, 권이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전무님!”

“2 차 갈 사람?”

“오, 노래방 가요! 노래방!”

직원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몽롱하게 멀어졌다. 찬바람이 뜨거운 얼굴을 조금 가라앉혔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가만히 김 실장에게 기댄 채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술 많이 드셨습니까?”

“네, 좀…… 취하는군요.”

알딸딸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내뱉는 숨결에 알코올 향이 섞이는 건 조금 별로였지만 말이다.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리자, 권이도의 페로몬이 잔잔히 느껴지는 듯했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김 실장은 곧장 나를 차로 데려가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취한 건 처음이라 내심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아마 나를 뒷좌석에 태운 뒤엔 늘 그랬듯이 잠깐 눈을 붙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잠시만요.”

나는 겨우 자세를 바로 하며 그런 김 실장을 만류했다. 김 실장이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권이도에게 말을 걸었다.

“전무님.”

“…….”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게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마 절반은 노래방을 가고, 절반은 집으로 돌아갈
터였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실컷 놀고 휴일에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되었다.

“혹시…….”

나는 느릿느릿 운을 떼며 눈을 깜박였다. 그의 페로몬이 남은 오른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폈다 하면서.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절대 건네지 못할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이후에 일정 있으십니까?”

권이도의 눈동자가 덜컹 흔들렸다.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가를 찡긋했다.

“바쁘면 뭐…….”
“아뇨.”

“…….”

“안 바쁩니다.”

거짓말은.

진짜 안 바쁘면 옆에 있던 비서가 사색으로 질릴 이유가 없건만. 이름이 박경석 씨였나. 김 실장이랑


이미지가 비슷해서 유독 기억에 남았다.

“얘기해요. 안 바쁘면?”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 또한 술을 좀 마셨을 텐데, 흐트러짐 없이 멀끔한 차림이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모습조차 무슨 화보처럼 보였다.

“별건 아니고…….”

살짝 김 실장을 밀어 냈다. 취하긴 취했지만, 그렇다고 혼자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 빠른 김


실장이 한 발짝 물러나고, 나는 권이도를 향해 뭉개지는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오늘…… 수면제를 못 먹거든요.”

의사가 그랬다. 술을 마시면 수면제는 먹지 말라고. 이렇게 많이 마셔도 된다고는 안 했지만, 어쨌든
양심상 그 부분만큼은 지킬 생각이었다.

“근데 아시다시피 제가 불면증이 심해서요.”

권이도는 마저 말하라는 듯이 지그시 시선을 맞춰 왔다. 이 말을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르긴


몰라도 제법 이기적인 말인 건 사실인데.

“잠을 좀 푹 자고 싶은데, 그러려면 권이도 씨 도움이 필요합니다.”

“…….”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페로몬으로 숙면을 취한다는


건 권이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과거에도 그랬고, 그리고 현재에도 그렇고.

“어떻게 할래요?”

그는 의외로 곧장 대답하진 않았다. 비서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을 뿐이다. 김


실장 역시 차에서 기다리겠다며 우리 근처에서 멀어진 뒤였다.

“나는 괜찮지만…….”

권이도는 그렇게 운을 떼며 나를 내려다봤다. 가끔 그의 시선을 받으면 지나치게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기도 하고, 혹은 지나치게 고양된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괜찮겠어요?”
“……뭐가요?”

“정세진 씨 내일…….”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그런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권이도는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딱 한마디를 덧붙였다.

“히트 사이클일 텐데.”

“…….”

머리가 더듬더듬 날짜를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술기운에 잠깐 망각했는데, 내일이면 다시


주기가 돌아왔다. 마침 주말이라서, 그래서 평소보다 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자고 갈 생각부터 하네.”

나는 툭, 성의 없이 대꾸했다. 권이도가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는 권이도 씨도 내일 러트 아닙니까?”

내가 내일 히트 사이클이라는 건, 결국 권이도도 러트가 온다는 말이었다. 이 또한 각인의 여파였는데,


서서히 맞아 가던 주기가 이제는 완벽히 일치하게 됐다. 원치 않게 서로의 주기를 속속들이 꿰게 되었다는 말이다.

“너 억제제 안 듣잖아.”

권이도는 딱 한마디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유치하게 구는 걸 보니 그 또한 술을 마시긴 했나 보다.


나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린 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체질 바뀌어서 듣습니다.”

“…….”

“……조금.”

뒷말은 소심하게 덧붙였다. 아직 완벽히 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 히트 사이클이 폭주하던 건, 평소에 페로몬 배출이 전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로몬샘이


안정되면서 조금씩 억제제가 듣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러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했다.

“싫으면 관둬요.”

자고 가라고 붙잡은 것도 아니고, 섹스를 하길 바란 것도 아니다. 술자리 내내 손을 잡고 있었더니 새삼


그의 페로몬이 고파졌을 뿐이었다. 그래, 어쩌면 히트 사이클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를 향한 감정과 우리의
상황을 배제해도, 이성을 잃은 상태에선 권이도를 바라게 됐으니까.

“싫다고 안 했습니다.”

등을 돌리는 순간, 권이도가 억세게 내 팔을 붙들었다. 그 또한 반사적으로 잡은 건지 아차 싶은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다. 스르륵 흘러내린 손이 이번엔 손과 가까운 손목을 그러쥐었다.
“같이 가죠.”

***

“흣, 으응…….”

덜컹, 현관문이 닫혔다.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고 다리 사이에 단단한 허벅지가 끼워졌다. 나를
문으로 밀어붙인 권이도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흡…….”

타액과 함께 짙은 페로몬이 훅 밀려들었다. 원체 술기운 탓에 정신없던 머리가 이제는 완전히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를 밀어 내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오히려 그게 불을 붙이는 매개체가 된
모양이다.

“……흐으.”

말캉한 혀가 입 안 곳곳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입 안쪽 여린 살을 훑다가 입천장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쪽, 쪽, 소리가 날 만큼 혀를 빨아들이고 열띤 페로몬이 뭉텅뭉텅 넘어왔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우리는 분명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내 오피스텔로 왔다.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고, 대화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단지 꾸벅꾸벅 졸던 내가 그의 어깨에 몇 번 머리를 기대는 일만
있었을 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권이도에게 기대어 있었다. 술기운 반, 잠기운 반.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이번엔 김 실장이 아닌 권이도가 부축했다. 김 실장은 영 불안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무어라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페로몬 나온다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는 권이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일부러 더 느슨하게 힘을 풀었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하아…… 흐읍…….”

생각이 자꾸만 뚝뚝 끊겼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권이도가 단단히 붙잡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권이도의 목에 팔을 감은 상태였다.

“하으…….”

그래, 그냥 뜬금없이 불이 붙었다. 눈이 마주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서로의 페로몬이
진득이 얽혀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든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왔을 땐, 이미 갈구하듯 그가 나를 탐하기
시작했으니.
“……흣, 잠깐.”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들고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 냈다. 그래봤자 다른 팔은 목에 두르고 있는


터라 그다지 저항처럼 보이진 않았겠지만.

“이러려고…… 하아, 이러려고 부른 거 아니에요.”

“…….”

그의 시선이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권이도가 흥분했다는 사실이 눈으로, 피부로, 그리고 연결된
감정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를 느끼는 만큼, 그 또한 나를 느낄 텐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리 아직 이럴 사이 아니잖아요.”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가 나직이 건넨 말에 권이도의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짙게 물든


눈동자가 집요하게 내 눈을 들여다봤다.

“……아직?”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소름 끼칠 만큼 외설스러웠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서 머리털이 삐쭉 서는


느낌이었다.

“세진아, 나는…….”

권이도는 거리를 넓히지 않고 그대로 내게 얼굴을 문질렀다. 높은 콧대로 뺨을 건드리고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린다.

“난 고작 그딴 말에도 기대가 생겨.”

“…….”

내가 지금, 아직이라고 했나. 머리가 어지러워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는데, 은연중에 대체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권이도 씨.”

뜨거운 숨결이 쇄골 언저리에 닿았다. 와이셔츠로 가려져 있었지만, 얇은 천 쪼가리는 열에 달뜬 숨을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나한테 미안해요?”

조용히 이어지는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지끈거리며 전해지는 통증 역시 내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냐는 질문에, 권이도가 정말 죄책감을 느껴 버린 것이었지.

“그럼…….”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대로 본능에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반,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반. 품에 안긴
권이도가 안쓰러운 반면에 울컥 솟구치는 낯선 감정도 있었다.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 볼래요.”


뒤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하필 정확히 떠오르는 바람에. 그 당시엔 아무렇지
않던 순간들이 이제 와 새삼 억울한 마음으로 남는 바람에.

“미안하면 그 정도는 해야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화풀이였고, 억지였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이제 와 이런 말을 들으면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애초에, 권이도 혼자만의 잘못도 아니었고.

“…….”

역시나 권이도는 예의 그 담담한 얼굴로 품에서 벗어났다.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해본 소리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권이도가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힘없이 움켜쥔 손길이 그토록 조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춘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내 손등에 이마를 댄 채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그냥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할까, 세진아…….”

가늘게 흘러나온 음성은 권이도답지 않게 기죽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입을 맞추던 상대에게 무릎을 꿇어
놓고, 그 높은 자존심에 흠조차 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내 손에 이마를 문지르고, 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겠지.

“내가 뭘 해야…… 그래야 네가 안 아플까.”

가만히 현관문에 뒤통수를 기댔다. 조용한 와중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현관에서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이, 미처 들지 못하는 고개가 마음 한구석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할게.”

“…….”

“그러니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용서를 해달라는 건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바람만큼 이루기 어려운 것도 없건만.

“……왜 이렇게까지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런 질문밖에 없었다. 나는 점점 괜찮아지고 있는데, 권이도는 아직도 그


슬픔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내게 모든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자신이 헤어날 발판은 단 한 개도 남겨 놓지 않은
사람처럼.

“뭐든지 하겠다니…….”

내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권이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혹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충동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서 그랬던 걸까.
“뭘, 어디까지 할 수 있길래.”

비이상적인 욕구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시험하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가엾게
느껴지는 만큼 원망스러웠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갈 곳 잃은 분노가 삐뚤어진 방향으로 표출됐다.

“……권이도 씨.”

그는 내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또한 내 의도를 알아차렸으리라고


생각한다.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내 손을 놓아주고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벨트가 풀렸다. 뒤이어 그는 앞니로 지퍼를 물어 내렸다. 얇은 속옷 너머로 뜨거운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중심을 잃을 것 같아서 문에 등을 기대자, 권이도가 이번엔 속옷을 끌어 내렸다.

“……흣.”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을 때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입에 물었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이 예민한 부위를 섬세하게 자극했다. 혀로 기둥을 감싸는 감촉에 목덜미가 홧홧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

성감이 확 고조되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뒤통수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권이도의 입 안에서 성기가 점점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하아…….”

먹먹한 귓가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짝 눈을 찌푸린 채 입 안 가득 기둥을 머금었다. 혀로


귀두를 문지르다가 조금 무리다 싶을 만큼 목구멍 안쪽으로 깊게 밀어 넣기도 했다.

“……흡.”

아, 이건 좀…… 위험한데.

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머리칼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거렸다. 좀 더 깊이, 큰 자극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그를 단단히 고정한 채 허리를 움직였다. 푹, 목구멍 깊은 곳을 건드리자 권이도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금세 아무렇지 않게 내 움직임을 받아 냈다.

“……읏.”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기분이다. 그가 입으로 해준 게 처음도 아닌데,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사실만으로 훨씬 흥분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권이도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고, 서늘한 줄만 알았던 체온이
무색하게도 그의 입 안만큼은 델 것처럼 뜨거웠다.

“하아, 흣…….”

좁고, 뜨겁고, 그리고 부드러웠다. 목구멍을 억지로 여는 게 분명한데, 구역질을 하지 않으니 내가 그를


막 다루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래서 양껏 허리를 움직였고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뒷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

사정감이 몰려오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권이도를 확 밀어 냈다. 마지막 남은 이성이 입 안에 싸는


것만은 안 된다고 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필 타이밍이 어긋나는 바람에, 성기를 빼내는 순간 울컥 파정하고
말았다.

“하아, 하아…….”

“…….”

가물가물한 시야로 인상을 찌푸린 권이도가 보였다. 그는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눈가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희뿌연 액체가 기다란 속눈썹에 맺혀다가, 매끄러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단언컨대, 얼굴엘 쌀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나는 그런 모습에 흥분하는 변태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새빨간 입술에 묻은 정액을 보는 순간, 다시 설 것 같았다.

- 다음 화에 계속

97 화. Retour des Saisons(8)

권이도가 잘생겼다는 생각은 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직원들의 말을 빌려 시력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 만큼 수려한 외모였으니. 그런데 그 금욕적인 얼굴에 몹쓸 짓을 하고 나니, 배 속이 뻐근할 정도로
배덕감이 들었다.

“…….”

그 와중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질척거리는 정액이 발간 혀를 따라 입 안으로


사라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색정적인 장면에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그걸 왜.”

“그냥.”

“…….”

“맛있을 것 같아서.”

권이도는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젖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미미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뿐이다. “역시 맛은 없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젖어 있는 성기에 제 뺨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얼굴에 싸는 게 좋아요?”

“…….”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전에 없던


취향이 생길 만큼 자극적이었으니까. 얼마나 그대로 있었을까. 방금 사정한 탓에 예민한 귀두를, 그가 혀를 내어
문질렀다.

“흣…….”

나한테 창부처럼 굴라고 했으면서, 정작 이 사람이 그러고 있지 않나. 비위가 상할 법도 한데 젖은


성기를 아무렇지 않게 핥고 있다. 그가 다시금 귀두를 입에 넣으려고 하기에 화들짝 놀라 붙잡은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그만…… 그만 해요.”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의도치 않게 머리채를 움켜쥔 꼴이었으나, 권이도는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 말리냐는 듯이 아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왜?”

“왜냐니…….”

한 번 했으면서 설마 또 할 생각인가.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을


내렸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정장 바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내 거 빨면서 섰어요?”

허벅지 위로 두드러진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 원체 크기가 커다란지라,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얼굴은 흥건히 젖어서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다니. 아연해하는 나를 두고
그는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잘못 걸렸다는 표정이네.”

왜 아니겠는가. 누누이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진짜 변태 새끼 같다는 생각이 드는걸. 잠깐 떨어져 있는


동안 내가 이 사람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하아…….”

머리가 어질어질 정신이 없다. 이제 깨달았는데, 권이도는 눈까지 풀려 있다. 아까 입을 맞췄을 때처럼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에 정욕이 가득했다.

“……세진아.”

어떻게 하지. 권이도도 권이도지만, 저 부름에 반응하는 나도 미친 것 같다. 허벅지를 짚었던 손이


살금살금 올라와서 허리 뒤쪽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이내 꼬리뼈 아래로 미끄러진 손가락이 젖은 입구를 꾸욱
눌러 왔다.

“흣…….”

아랫배가 납작하게 들어갔다. 권이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좁은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벽을
더듬으며 파고드는 손길에 머리카락을 붙잡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내 성기에 입술을 문질렀다. 빳빳하게 발기한 기둥을 아래에서 위로 핥고는
반질거리는 귀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키스라도 하듯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뗀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라는 대로 다 해줄게.”

아…… 그냥 될 대로 되라지.

***

어떤 정신으로 침대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옷가지가 툭 툭 떨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권이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린아이 들 듯 나를 달랑 들어 올린 권이도가 입을 맞춰 가며 나를 침실로 데려온 것이다.

“하아, 흐…….”

숨은 쉬어도 쉬어도 모자랐다.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빈틈없이 몸이 겹쳐졌다. 권이도는


집요하게 내 몸을 끌어안고, 나를 어르고 달래 가며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 권이도 씨 심장이…….”

“…….”

“너무, 뛰는데…….”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자욱하게 쏟아진 페로몬도 그랬고,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도 그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전히 전해지는 감정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고양된 상태였다.

“흣, 흐…….”

말랑한 입술이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가 톡 튀어나온 유두로 위치를
옮긴다. 잘근잘근, 앞니로 장난을 치던 권이도가 다른 손으로는 내 허벅지를 문질렀다.

“하아…….”

그가 닿을 때마다 온몸이 움칠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권이도가 그 무엇보다 커다란 기대가 되었다.
유독 질척거리는 애무까지도 앞으로 이어질 행위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 그만…….”

이제, 넣어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몸을 살짝 떼어 냈다. 그리고 내 허벅지를


붙잡아 좌우로 벌렸다.

그런데 온기가 멀어지는 찰나의 순간, 벼락처럼 뇌리를 강타하는 기억이 있었다.

‘다리 똑바로 벌려.’

“…….”

냉랭한 목소리가 호된 매질을 하는 듯했다. 이 침대 위에서, 지금과 비슷한 자세로, 그가 내게 했던


폭력적인 섹스가 떠올랐다. 나를 개처럼 내리누르고 덜 풀린 내벽에 삽입한 채, 온갖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이어 갔던 그 행위가.
‘권이정이 박아 줬을 때도 이랬어?’

“허윽…….”

순식간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달아올랐던 몸이 단숨에 식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흥분으로 뛰던 심장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

이상함을 느꼈는지 권이도가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멍하니 나를 내려다봤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는 와중에, 권이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조그맸다. 죄책감으로
물든 얼굴이, 그리고 덜덜 떨리는 시선이,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미안해, 세진아…….”

그는 내 다리를 놓아주고 느리게 내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는 페로몬과 함께 따사롭게 나를 덮쳐 왔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히고,
목덜미에 새근거리는 숨결이 닿았다.

“내가 잘못했어.”

“…….”

“내가 미안해…….”

내가 그의 감정을 느끼는 만큼, 그 또한 내 감정을 느꼈을 터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몰라도


지금 그를 보며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는 알아차렸겠지. 분명 좋았던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죄인이 되어
버린 걸 보면.

“미안…….”

“……하.”

취기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던 모양이다. 멀쩡하던 시야가 점점 뿌옇게 뒤덮이기 시작했다. 하긴,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벌써 맨정신이 되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흑.”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아무런 전조 없이 일어난 일이었으나, 이미 터져 버린 설움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가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지금이, 미안하다며 내게 애원하는 목소리가, 그 모든 것들이
안타까운데, 그럼에도 원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흐윽…….”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점점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잿더미에 뒤덮인 기억이었나


보다. 찰나에 불과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 안에 사그라들었던 감정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왜…….”

“…….”

“왜 그랬어요, 나한테.”

한 번 살아난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화르륵 타오른 감정이 오로지 권이도를 향해
쏟아졌다. 속이 마구 끓는 기분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어…….”

나한테 그러지 말지.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외면하고 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삐쭉삐쭉 날이 선 가시들이 내가 막아낼 새도 없이 권이도를 공격했다.

“내가…… 내가 얼마나 맞았는지 봤잖아요. 권이정이 나를…… 흐, 날 강간한 걸 알았잖아.”

한눈에 보기에도 엉망이었을 몰골을 권이도가 몰랐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어떤


새끼가 이랬냐며 화를 냈다. 내가 억지로 당한 걸 알아차려 놓고, 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불같은 분노를
쏟아 냈단 말인가.

“근데 나한테 똑같은 짓을 하면 어떡해…….”

나는 그때 두 사람에게 강간당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만큼은 아직까지도 흉이 진 상태였다.

“권이정이, 흑, 박아 줬을 때도 그랬냐고?”

“…….”

“하, 씨발…….”

울컥, 밑도 끝도 없이 화가 났다.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은 내 얼굴을 적시고 그의 어깨까지 적셨다.


본능적으로 마주 안았던 그의 몸에 그리운 기분이 들면서도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기분으로 그 순간을 버텼는지 알아요? 뒤가 찢어져서 피가 나는데, 나는 그것보다 당신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더 아팠어. 권이정이…… 그쪽 형이 날 선물이라고 불러서…….”

말을 하면 할수록 목이 멨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권이도가 더 세게 끌어안았다. 까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전해진 감정엔 미안함과 함께 분노도 섞여 있었다.

“딴 새끼랑 붙어먹은 게 그렇게 화가 났어요?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대했어?”

“…….”

“그럴 거면 날 찾으러 오지 말았어야지!”

그는 왜 오피스텔까지 나를 찾으러 왔을까. 내가 그 집에서 나온 게, 권이도에게 변명조차 못 한 게,


그가 나를 짓밟고 망가뜨릴 일이었을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길래.”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인지, 그걸 끝도 없이 고민했다. 고용인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면, 애초에


권이정이 있는 현관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보다 먼저 권이도에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다면.

“나라고 훔치고 싶어서 훔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당신한테 말하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그냥,
아버지가 시킨 거라고…… 흐, 근데 그게 너무…….”

“…….”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러나 다시금 시간이 돌린대도 그날의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버림받을까 무서워서 몸을 사린
채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 숨죽이고 있겠지. 그게 나를 얼마나 좀먹을지 하나도 모른 채로, 등신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됐는데요……. 거기서 뭘 더 해야 됐는데. 그쪽도, 그쪽도 잘한 거 없잖아…….”

내 모든 행동은 딱 한 가지 두려움에서 나왔다. 타인을 실망시킬까 봐, 그래서 결국 버림받고 말까 봐,


다시 그 추운 눈밭으로 돌아가 마침내 혼자 남아 버릴까 봐.

“……미안해.”

“흑…….”

“미안해, 세진아.”

권이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속삭였다.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로 시근덕거리는 숨을


몇 번이나 삼켜 냈다. 배 속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죄책감은, 그 또한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단 사실을 알려 줬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

“미쳐서 그랬어.”

말을 이을수록 권이도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하, 씨발 등신같이 너를 몰라서…….”

그 말엔 또 한 번 눈물이 터졌다. 엉엉 소리를 내며 흐느끼다가 끌어안은 등을 퍽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왜, 흐…… 왜 욕을 해!”

“…….”

“뭘 잘했다고 당신이 욕을 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목놓아 울어 본 적이 없는데, 부끄럽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달래려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붙잡히지도 않는 등을 밀어 내려고 하기도 했다.

“당신 처음부터 그랬잖아. 나한테 막 대하더니, 흑…… 주제 파악, 흐끅, 주제 파악하라고…….”

착한 척을 하면 뭘 한단 말인가. 이제 와 반성하고 후회하면 대체 뭐가 바뀌냔 말이다.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만큼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만신창이가 되었건만.

“그쪽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왜 맨날 혼자만 알고, 흐, 기회를…… 두 번 줄 수도 있으면서, 다


끝났다고, 나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권이도의 어깨에 이마를 콩콩 박다가


억울함을 참지 못해 버둥거리기도 했다. 얄밉게도, 권이도는 그런 나를 놓아주는 대신 사과를 건네기만 했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면 어쩔 건데…… 그럼 어떡할 건데!”

떼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과를 건네는 권이도조차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서럽게 토해 낸 감정은 내가 아닌 권이도까지 적시고 있었다.

“다 싫어, 이제……. 흐엉, 맨날 나한테만…….”

마지막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제법 아프도록 움켜쥐었음에도 권이도는 내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들고는 울지 말라는 듯이 내 뺨에 입을 맞췄을 뿐.

“흐윽, 흑…….”

따뜻한 입술이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온 그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누구 맘대로
입을 맞추냐고 화를 내려는 순간, 권이도가 내 뺨에 가만히 제 뺨을 가져다 댔다.

“미안해, 세진아.”

우는 데도 지구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처럼 쏟아지던 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고, 대신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딸꾹질이 나왔다.

“흐끅, 흐…….”

권이도는 내 상체를 받쳐 안고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쓸어줬다. 우스운 건, 그 손길에 실제로 진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밀어 내려다가도 온기가 그리워져서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권이도를 노려봤다.

“…….”

“…….”

눈이 마주쳤다. 짙은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왜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토록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볼까.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받아 줄 것처럼.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시근덕시근덕 숨을 몰아쉬다 말고 그를 내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억지로


입술을 맞물렸다.
“…….”

의사가 그러지 않았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게 옳은 거라고.

하도 화를 내며 울었더니 무언가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그게 술기운이건, 아니면 생떼와 비슷한 충동이건. 지금 이 순간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으응.”

당연한 말이지만, 권이도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해달라는 대로 혀를 섞고 잔잔히 페로몬을


넘겨줬을 뿐. 숨이 모자라서 혀를 물고 빠는 동안, 그는 차근차근 숨과 페로몬을 불어 넣었다.

와르르 쏟아졌던 설움은 이제 다른 감정으로 뒤덮였다. 그를 향한 욕망, 약간의 흥분감, 그리고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대까지.

“하아…….”

쪽, 입술을 떼어 낸 권이도가 턱 언저리에 입을 맞췄다. 뺨과 코, 눈 할 것 없이 뽀뽀를 하다가 다시


입술로 돌아와 한참을 머무른다. 어느새 가슴 위로 올라온 손은 심장 박동을 느끼려는 것처럼 가만히 왼편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하.”

나는 그때, 권이도가 탄식한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짙은 안도감과 함께 울 것처럼 표정이


무너졌다는 사실만 알았지. 스르륵, 미끄러진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고 맥박이 뛰는 부위를 야금야금 깨물었다.

“아, 흐응…….”

누구 것인지 모를 페로몬이 공기 중에 섞였다. 권이도의 페로몬이 뻗은 나무에 향긋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그는 간절히 매달리는 나를 한 품에 안은 채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프면 얘기해.”

기다란 손가락이 아래쪽을 파고들었다. 이미 한차례 풀어 놓은 곳이었기에 두 개까지 머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 개부터는 조금 빠듯했으나, 이미 한참 전부터 기대감으로 인해 열린 몸이었다.

삽입은 아주 천천히 이뤄졌다. 먼저 다리를 벌린 쪽은 나였고, 권이도는 몇 번이나 조심조심 내 반응을


살폈다. 굵은 귀두를 지나, 기다란 기둥이 쑥 밀려 들어올 때도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아, 거기…….”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행위가 결코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버거운 기분과는 달리 통증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공들여 풀어 놓은 데다, 봉사하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으니까.

“하아, 응, 흐…….”

여유로운 행위였다. 다정했고, 따뜻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상냥했다. 다시는 날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무섭게 굴지 않겠다는 듯이.

그날, 우리는 그간 못다 한 대화만큼이나 오래 몸을 섞었다.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췄고, 그러다 절정에


다다르면 간절히 서로에게 매달렸다. 오로지 권이도와 나 둘만 남은 것처럼. 그 모든 과정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98 화. Retour des Saisons(9)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감정만큼 부패하기 쉬운 게 또 있을까. 덮어 두고 무시했던 감정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곪아 가고 있던 모양이다. 뒤늦게 존재를 깨닫고 들춰 낸 순간, 나조차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버린 걸 보면.

권이도에게 울분을 쏟아 낸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실엔 여전히 페로몬이 가득했고 피부와 옷가지는 보송보송하니 말끔했다.

‘더 자지, 왜.’

그는 부어올랐을 게 분명한 눈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비서를 시켜서 옷을 가져온 걸까. 원래


입었던 것과 다른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하기야, 전날 입고 있던 옷은 바닥에서 엉망으로 구겨져 입을 상태가
아니긴 했다.

‘드레스룸에서 옷 좀 꺼내 입혔어요. 벗고 자기엔 추울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는 당신은 안 잔 거냐고, 그리 묻지도 못했다. 무어라
말을 꺼냈다간, 금방이라도 지금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마치 그와 약혼했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우리가 평화롭게 마음을 나눴던 그때로. 물론 그 당시 권이도의 심정이 어땠을지, 거기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 후 권이도가 뭐라고 했는지,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바빠서 가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리 이야기할 땐 이미 수마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권이도는 없었고, 나는 억제제 한
알을 먹고 그럭저럭 버틸 만한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사실, 다행이었다. 정신이 드는 순간 권이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머쓱해졌으니까. 술김에 내뱉은


말들이 민망한 한편, 그럼에도 아직 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못했단 사실이 갑갑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과거의 감정을 청산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했다.


권이도를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감정의 물꼬를 튼 뒤에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실패를 경험했기에 섣불리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간밤 잠을 설친 김에 만들던 향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늘 일찍부터 대기하는 이태성이 나를 회사에 데려다줬고, 김 실장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했다.

딱 마지막 확인만 남아서일까, 작업은 생각보다 이르게 마무리됐다. 완성된 샘플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올
즈음엔 어느새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하나둘 출근하는 직원들은 금요일 밤 회식이 끝나고 귀가하던
때와는 달리 표정들이 영 좋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어요?”

“회사는 안 싫은데 출근이 싫어요…….”

소위 ‘월요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직원 하나가 한 말에 너도 나도 공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회사가 싫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 출근은 싫으니 그게 그거인지. 푸스스 웃음을 흘리는 와중에
다른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은 금요일에 잘 들어가셨어요?”

“네, 뭐…….”

나도 모르게 멋쩍은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들고 있던 향수는 슬쩍 몸 뒤로 숨겼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문득 회식 자리에서 권이도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깨에 기대어 있는다거나 혹은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러고 보니까 전무님한테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오늘도 오시지 않을까요? 대표님, 권 전무님 오신대요?”

다행히 직원들은 나와 권이도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딱 한 명, 내 옆자리에 앉았던 대리만이 유독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나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상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굳이 오늘까지 미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권이도라면 마지막 점검을 핑계로 찾아오지 않을까. 나와 그런 하루를 보냈으니, 그 또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고.

“이따 오시게 되면 제가 말씀드리죠, 뭐.”

아마 높은 확률로 늘 오던 시간에 올 거라고 생각했다. 회식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때 전하면 될 듯했다.


직원들이 좋아했고, 다음엔 내 쪽에서 대접하겠다고. 우선은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해봐야지.

나는 직원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오전에 있는 회의를 제외하면 권이도가 오기까지
별다른 업무는 없었다. 이틀 만에 보는 권이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또 속이
갑갑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권이도가 도착했을 시간.
그 시간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는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다.
***

“…….”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향수병을 톡톡
두드렸다. 읽고 있던 서류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고, 왠지 모를 초조함에 기분은 점점 하향세를 그렸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어느덧 권이도가 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 명분뿐인 미팅을 끝냈을 텐데, 오늘은 아직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매일 올 필요는 없지만, 앞서 3 주 동안은 빼먹지 않고 들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

먼저 연락해 볼까. 그런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책상 위에 툭 내려 뒀다. 이기적인 생각임을


알면서도 주말 내내 연락 하나 없었단 사실이 못마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더니. 하루아침에 태도가 너무 달라지지 않았는가.

“대체 뭘 하길래…….”

이럴 땐 각인이 하등 쓸모가 없었다. 기분이나 감정만 알지 말고, 어디서 뭘 하는지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럼 이렇게 목이 빠져라 그를 기다릴 일도…….

“…….”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다리다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만지작거리던 향수를 놓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원래는 번거롭다고 생각하던 주제에 이제는 더
나아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도 정하지 못했으면서 무작정 시계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하아.”

이래서 싫었다. 일상이 어그러지는 기분이라.

일에 방해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마음이 들썩이는 정도임은 분명했다. 간신이 유지하던
평온함이 권이도가 끼어듦으로써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평온함을 안겨 준 게 결국엔
권이도였지만 말이다.

나는 권이도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정작 그를 마주하면 밀어 내기 바쁜 주제에, 고민하고 있단


사실부터 모순이었다. 실수로 가득했던 기억들은 분명 괴로운데, 그럼에도 이따금 과거로 돌아가고 싶단 바람이
생겼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지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에는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물론 누군가 돌아가겠냐고 물으면, 선뜻 긍정의 대답을 내놓진 못하겠지만.

지잉, 지잉.
“…….”

한창 잡념에 잠겨 있던 와중에 윙윙거리는 진동이 나를 방해했다. 하필 핸드폰을 책상에 엎어뜨려 놨던


터라 그 소리가 요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들었다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권이도」

“…….”

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머리털이 삐쭉삐쭉 서는 기분이라 전화를 받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선 약간의 웅성거림만 들려왔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 달칵거리는 잡음, 도로에서 들리는
마찰음과 그 끝에 들린 익숙한 음성까지.

-아, 정세진 씨.

“…….”

그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옥죄였다. 덕지덕지 묻었던 찝찝함이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그를 향한 불만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대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좀 늦을 것 같아서 연락했습니다.

“……아.”

안 오는 게 아니었구나.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가 날 포기하지


않았단 사실에 안심이 되는 한편, 소소한 심술도 함께 따라왔다.

“……얼마나 늦으세요?”

연락을 좀 더 일찍 했어야지. 이미 한참 늦고 나서 하면 어쩌라고. 내가 오후에 일정이 있으면, 그럼


우리는 미팅을 할 수 없을 텐데.

-글쎄…… 그게 좀 애매한데.

권이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많이 바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이어진 뒷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차 사고가 나서.

“…….”

사고라니.

“……사고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방금 들은 한마디가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고가 나서 늦었다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이 되도록 발이 묶였단 말인가.
“어…… 어떤, 얼마나…… 아니, 다치셨어요?”

손끝이 차갑게 식는 바람에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바꿔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이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대답하기까지 고작 3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거리는 내게,
한 타이밍 늦게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세진아.

그 한마디가 왜 그리 달큼했는지 모르겠다. 전화 너머인데도 불구하고 권이도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봄날의 바람처럼 따사롭게 날 부른 권이도가 사근사근 부드럽게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진정해.

“…….”

그제야, 뒤늦게 숨이 쉬어졌다.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하릴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렸지만, 다정한 음성이 그런 나를 상냥히 달래 줬다.

-가벼운 접촉 사고예요. 처리할 게 있어서 좀 걸리는 거고.

만약 권이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느꼈을 거다. 우리는 각인했고, 언제나


서로에게 연결돼 있으니까. 바로 지금, 그가 내 불안을 느끼고 나를 안정시킨 것처럼.

-다치진 않았는데 병원은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내가 느꼈던 불안감만큼, 권이도가 나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본인이 사고가 났을 땐 동요조차 없더니


이제 와 제법 새삼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닌가.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날 걱정할 걸 떠올리면 목구멍이 확 조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안 다치셨으면 다행입니다.”

나는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간신히 대답했다. 직접 전화를 걸 정도니까 당연히 큰 사고는 아니겠지.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크게 놀라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앞이 캄캄하게 변할
정도로.

-그럼 우선 끊을 테니까…….

권이도는 이따 보자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뚝, 전화가 끊겼음에도 나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침착함을 되찾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참았던 숨을 토해 냈을 땐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하…….”

모든 걸 체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웬만한 일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이리도 놀라 버린 걸 보면. 쿵쿵거리는 심장이나 아득한 기분이 딱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권이도.”

권이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작 접촉 사고 소식 따위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감히 그를


지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는 끝내 권이도에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돌이켜 보면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증거였다. 그를 집으로 데려간 것부터, 아니 그 이전에 미팅을


수락한 것부터. 그가 제안한 사업의 의도를 가늠하고 미팅에 나온 권이도를 보며 불편함을 느꼈던 것부터.

사그라진 줄 알았던 원망의 불씨가 피어났을 때, 모든 걸 태우고 남은 게 그를 향한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머리로는 그를 밀어 내야 한다고 끝없이 되뇌면서 가슴으로는 그를 밀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과정이 실수로 점철돼 있다고 한들 그 마음까지 실수는 아니었으니까.


어딘가에 속하고 싶단 바람을 포기하더라도, 그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단순히 그러한 갈망에 불과하진 않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권이도는 오후가 되어서야 ‘Sejin’을 찾아왔다. 나는 점심 내내 그를 생각하다가 정작 얼굴을 봤을 땐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보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입을 열었을 땐 사무적인
이야기들만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뭘 느꼈는지, 권이도 역시 별다른 사담은 없었다. 지난밤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를 걱정했단 사실을 확인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한 타이밍 늦게 시선을 돌렸을 뿐.

“그리고 자선 행사는…….”

각인이 참 별거 없지.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왜 긴장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추슬렀는지
모르고 있을 거다.

감정은 자각과 동시에 부풀기도 하지만, 어떨 땐 오히려 편안해지기도 한다. 원인 모를 감정보단 이름을
아는 감정이 낫기에, 쓸데없는 고민을 해소하는 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바로 지금, 내가 그에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진 것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먼저 미팅을 끝낸 사람은 권이도였다. 권이도는 추후 일정을 확인한 뒤 서류를 챙겨 가지런히 내려놨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기에, 애초에 그와 회의할 내용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제야 넌지시 안부를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을 가장 조심해야 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입원을 했겠지만 왠지 권이도라면 입원하지 않고 회사로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별 이상은 없다더군요. 애초에 정차된 차를 뒤에서 경차가 박은 거라 내 차는 멀쩡하기도 했고.”

“상대방 과실이에요?”

이번엔 조금 더 아연한 느낌으로 묻고 말았다. 권이도의 차를 뒤에서 박았다니. 수리비만 최소 수천만


원이 나올 텐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긴 한데…….”

권이도는 별반 대수롭지 않은 투로 운을 뗐다.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운전자가 초보인 데다, 아이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가다가 그랬다더군요. 수리비는 안 받았고, 병원에
좀 데려다주느라 늦었어요.”

아이가 아팠다고 말할 때, 그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변화였으나, 나는 그게


권이도가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표정임을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픈 아이가 그 또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사고가 난 건 안타깝지만 다친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후처리는 선호에서 할 거고,


권이도가 차 수리비 하나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권이도는 눈을 내리깔며 느릿느릿 물었다.

“내가 안 다친 게, 아니면 그쪽이 수리비를 안 물어 줘도 되는 게?”

“…….”

선뜻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다. 내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농담이에요.”

익숙한 눈빛이었다. 입꼬리는 말려 올라가 있는데 반대로 눈동자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게 체념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 다음 화에 계속

99 화. Retour des Saisons(10)

나한테 바라는 게 없다더니.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그런 하루를 보내 놓고 지금까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렇다면 그는 정말 3 주간 나를 보기만 하려던 걸까. 그리 생각하자마자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곧 3 주가 끝날 텐데.”

갑작스레 던져진 화두에도 권이도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을 뿐. 이 미팅이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이후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늘, 권이도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는 아직도 내게 미련을 품은 채였고, 간혹 보여 주는 행동은 한결같이


다정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글쎄…… 사업을 하나 더 할까.”

돌아온 대답은 분명 장난이었다. 권이도 역시 픽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이야기했다.

“약속한 게 있으니까 그 이후엔 찾아오면 안 되겠죠.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이 사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울며불며 쏟아 낸 말들을 들어 놓고, 나와 그런 밤을 보낸


주제에 결국에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걱정이라니. 설마 내가 날 계속 귀찮게 할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하나.

“……권이도 씨 속을 모르겠어요.”

숨결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권이도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명치가 바짝 조여드는 기분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말은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하고, 매일 회사로 찾아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나한테 만나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

“이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는 내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한데 달싹이는 입술엔 망설임이 가득했으니.

“용서를…….”

겨우 흘러나온 한마디가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잠깐 말을 멈춘 권이도가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저 사실을 고하듯 담담했다.

“구할 자격이 안 되니까.”

그의 얼굴에 자조적인 빛이 떠올랐다. 제게는 애걸할 자격조차 없다던, 바로 그때처럼.

“그걸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게 뭘 원하는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다고. 정말 중요한 건,


내가 그에게 뭘 원하는지일 테니. 그가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제자리에 멈춘 것도, 결국엔 내게 선택권을
쥐여 주기 위해서일 거다.

“……저한테 어려운 걸 정하라고 하시네요.”

그러나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한 문제였다. 먼저는 용서가 필요했다면, 이번엔 관계를 이어 갈 확신이
필요했다. 과연 우리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확신하고 도전할 용기.

“내가 권이도 씨를 용서 못 하겠다고 하면, 그걸 받아들일 자신은 있어요?”


나직이 건넨 질문에 권이도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왔다. 그의 입술이 열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만약 3 주가 끝났으니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자신은 있고?”

말을 잇다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정체 모를 불쾌함이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고작 석 달 만에


숨이 막힌다고 찾아왔으면서. 이 3 주로 대체 뭘 바꿔 보겠다고.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질 거 아니잖아요.”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나왔다. 그런 내게 권이도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네가 그걸 원하면.”

“…….”

“그렇게 해야지.”

왜, 그 말에 기분이 상했을까. 모든 걸 포기한단 사실에 실망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벌써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구는 게 짜증 났던 건지. 그게 아니면 남몰래 기대해 버린 나 자신이 황당해서 그랬는지.

“……그래요, 그럼.”

갑갑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 또한 알아차렸을 텐데,


그는 여전히 내 쪽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이쯤 하죠.”

***

억지로 미련을 접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내가 그를 포기했을 때, 그 안엔 내 삶도 함께 포함돼 있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준비를 했기에, 미련 없이 모든 걸 체념할 수 있었다. 만약 일말의 미련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토록 쉽게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과연 권이도는 어떨까.

그는 내게 모든 밑바탕을 마련해 줬고, 마지막으로 내게 자유까지 안겨 줬다. 내가 박탈이라고 여겼던


이별은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한 자립이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내 존재의 가치를 타인에게 찾지도 않는다. 전부 그가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그 또한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걸까.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권이도와 약속한 3 주는 눈 깜박할 새에 흘렀다. 우리는 평소처럼 같은 시간에 미팅을 가졌고, 커피 한


잔을 놓은 채 형식적인 일 얘기를 나눴다. 내가 먼저 사담을 꺼내지 않으니, 권이도 역시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이게 마지막 미팅이네요.’

마지막 회의가 끝나고, 내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가 기약한 3 주는 딱 행사 날까지였기에, 회사에서


만나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에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일은 행사장에서 뵙겠어요.’

권이도와 약속한 3 주. 그게 끝나면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줘야 할 물건도 있었고, 전해야 할


감정들도 있었다. 물론 그 전에 그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야 했지만.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말에 권이도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단 사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는 것도. 그러나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
버렸다.

“저희 ‘Sejin’의 행사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렇게 오늘, 고대하던 선호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이 론칭됐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에 도착해 직접
관계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밤새 권이도에게 할 말을 정리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컨디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저는 ‘Sejin’의 대표인 정세진입니다.”

론칭과 함께 열린 자선 행사는 초대장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당연히 지난번과는 달리


기업인보다 일반인 방문객이 더 많았다. 사전에 빵빵하게 홍보한 덕분일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방문해
신제품과 관련된 감상을 들려줬다.

“이번 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은 수익금 일부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기부되는 형태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바쁘게 내부를 돌아다니며 여러 일을 처리했다. 방문객에게 제품을 소개해
주고, 몇몇 협력 업체 직원들과 간단한 안부 인사도 나눴다. 그러면서 면밀히 주변을 살폈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세진 씨, 이번 론칭도 축하드려요.”

중간에 마주친 이희나는 내게 인사를 건네고 이태성을 향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그에 이태성이


억지로 표정을 굳힌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찍 퇴근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자, 입꼬리가
움찔거렸던 것도 알고 있었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기념식이 모두 끝날 즈음,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상태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는데, 일이 끝났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미 겨울과 가까워진 만큼 하늘에 밤이 찾아오는 속도 역시
무척이나 빨랐다.

“그래도 이제 진짜 한숨 돌렸네요. 물론 행사 기간 끝날 때까진 바쁘겠지만…….”

직원들은 저마다 시원섭섭한 얼굴로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준비는 길었는데 결과는 참
한순간이라느니. 3 주가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들려왔다.

“대표님?”
“……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나는 애써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미리


챙겨 두었던 상자가 만져졌다.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은 천천히 출근해도 됩니다.”

원래라면 회식을 했겠지만, 여러 연유로 재단과의 협업이 모두 끝난 뒤에 하기로 했다. 바로 전 주에


회식을 한 데다, 기념식이 끝났다고 판매가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며칠은 좀 긴장하고 있다가 또 모든
게 마무리되면 다시금 맛있는 걸 먹기로 약속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직원들을 모두 배웅하고 김 실장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네모난 상자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행사 내내 울리지 않았던 핸드폰을 꾹 움켜쥔 채.

“집으로 모실까요?”

김 실장이 그렇게 물었을 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울컥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이, 다 끝나 가는 하루가, 그리고 여전히 담담한
감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뇨.”

권이도가 오지 않았다.

행사는 이미 끝났는데, 정작 권이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말한 3 주는 분명 오늘까지고, 오늘이


지나면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을 텐데.

왜 자꾸 제멋대로 군단 말인가. 여태 담당자라는 이름으로 잘만 나타나던 주제에 정작 중요한 날에는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정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시작조차 못 하게 되길 바라진 않았다.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질 거 아니잖아요.’

어쩌면 또 홀로 마지막을 기약한 건지도 몰랐다. 내게 약혼의 종결을 알렸던 그때처럼. 나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저 홀로 결론을 내려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기로. 내가, 그를
귀찮아하지 않도록.

“집 말고 다른 데로 가주세요.”

권이도를 만나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3


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이건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갈 곳을 잃고 말았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으니까.
“…….”

“…….”

눈이 마주쳤다. 주차장 한가운데서. 아니, 내가 타야 하는 내 차 앞에서. 무릎까지 오는 모직 코트를


입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한 사람과. 멀리서 보기에도 훤칠한 키에, 빚어 놓은 것처럼 완벽한 생김새의
남자와.

“……권이도?”

권이도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찬 바람이 부는 계절과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땅거미가 지는 하늘 아래, 그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감 없을 정도로.

내가 헛것을 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분명 현실이었다.

“행사 끝났나 보네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있자, 뒤이어 작은 사과가 흘러나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아.”

나를 포기한 게 아니었구나. 그 사실엔 안도감이 들었다. 홀로 3 주를 끝내고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그러한 사실에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 우는 것도 습관이 되는 모양이지.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눈치 빠른 김 실장이 슬쩍 거리를 넓혔다. 딱 세 걸음 정도를 남겨 둔


거리. 그곳에서 나는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벌써 두 번이에요. 권이도 씨가 내 론칭 행사에 안 온 거.”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두 번부터는 실수가 아니라고.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잠깐을


내어 줄 수 없었던 걸까. 사고가 난 날에도 회사에 찾아왔으면서, 왜 이런 공적인 행사는 꼭 빠지고 마는 건지.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변명이라도 해봐요.”

이런 서운함을 내비치려던 게 아닌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권이도의 기분이


지나치게 잠잠해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헛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권이도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볼 자신이 없어서.”

“뭐를?”

“세진이 너를.”

그는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를?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으니까.

“이제 정말…… 내가 필요 없어진 널 볼 수가 없어서.”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은 몇 번을 느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못 갔습니다, 그날.”

첫 론칭 행사가 있던 날, 권이도는 나를 위해 장미를 샀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행사장에 오지 않았고,


끝내 장미도 받지 못했다. 그날의 권이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제 손으로 만들어 준 자유를,
두 눈으로 보기 힘들다고.

“……그럼 오늘은요?”

느리게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날은 그렇다고 쳐도, 오늘은 왜 오지 않았는지. 일이 생겨서 늦었다고
말했지만, 권이도 역시 그게 설득력 있는 변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오늘은…….”

권이도는 앞서 대답했던 것보다 더 망설이는 듯했다. 표정이 워낙 차분해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미련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

그게 무슨 미련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건, 처음부터 딱


하나였으니까. 아무 기대 없는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있는 지금까지 말이다.

“……그래서 미련은 다 버렸어요?”

주머니 속에서 네모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요 며칠 사이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으니.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대답은,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거의.”

“…….”

멍하니 권이도를 바라봤다. 전해져 오는 감정은 무척이나 담담했고, 그건 뒤이은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다 버렸어.”

방금까지 하던 생각이 하나도 빠짐없이 휘발됐다. 그를 보는 시선이 크게 흔들리고, 상자를 만지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오려던 말들이 죄 목구멍 너머로 사라지는 바람에, 말없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거의라고 한 건가, 지금. 고작 3 주 만에 나를 향한 미련을 거의 버렸다고. 이토록 차분한 감정으로,


이토록 평온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하.”

텅 비었던 머릿속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억울함과 허무함, 배신감,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망과 민망함 같은 것들.

“다행이네요. 거의 다 버려서.”

나는 그에게 할 말을 준비했는데, 그는 나와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코가 시릴 만큼 추운


계절을 앞둔 시기. 그와 이별해야 했던 과거의 계절에서, 또다시 나를 놓아주겠다고 말이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대체 뭘 기대한 걸까.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건만. 권이도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나는 그를 붙잡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잘 가요.”

“…….”

“이제 다신 볼 일 없겠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그를 지나쳐 영영 그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에게


주기 위해 챙겨 온 물건은, 그냥 대충 버리든가 하고. 미처 버리지 못한 감정은 시간이 지워 주길 바라면서.

“…….”

그러나 나는 권이도를 지나치지 못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허공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무표정한 얼굴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

“…….”

시간이 멈춘 기분이었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오로지 그의 눈에서만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뺨을 타고 힘없이 흐른 눈물은 이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아.”

뒤늦게 권이도의 입술이 달싹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이미 눈물에 푹 젖은 상태였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미안.”

- 다음 화에 계속

100 화. Retour des Saisons(11)

“…….”
너무 당황하면 정말 아무 말도 안 나오는구나. 권이도는 이미 얼굴을 가렸지만, 나는 좀 전에 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눈물만 쏟아 내던 그 장면을.

“아니…….”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한


발짝 다가가자,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이래서…….”

“…….”

“……이래서 안 오려고 했어.”

이래서 안 오려고 했다고?

“그게 무슨…….”

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지니 깨달은 건데, 내쉬는 숨결에 엷게 울음이 섞여 나왔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도무지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 울어요?”

뭘 잘했다고 운단 말인가.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데. 본인 입으로 미련을 거의 버렸다고 말해


놓고, 정작 가버리려고 하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쪽이……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운 기분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를 두고


가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은 우선 이유를 물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 봐봐요.”

“…….”

“나 봐요, 권이도 씨.”

그러나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내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을 크게 들이시며 입술을


깨물었을 뿐. 그 모습이 답답해서 손목을 붙잡자, 그제야 스르륵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세진아.”

툭,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그에게선 날씨만큼이나 찬 기운이 느껴졌다.


비비적, 어깨에 얼굴을 문지른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잘못했어.”

숨을 흡 들이켰다. 흘러나온 한마디가 지금껏 들어 왔던 어떤 사과보다 절절했다.

“내가 미안해.”
목이 메는 모양이다. 늘 발성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흐릿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양팔을 붙잡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러니까…….”

데자뷔……라고 해야 하나. 그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그때처럼. 내 손을 잡고 간절히 애원하던


그때처럼. 하라는 걸 모두 하겠다던 권이도의 목소리가 귓가를 아른거렸다.

“가지 마.”

“…….”

아, 이 말을 이제야 듣게 됐다.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도, 용서해 달라는 말도 아닌, 그저 가지 말아


달라는 그 한마디를.

“……미련 다 버렸다면서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숨결처럼 흘러나온 대답엔 지금껏 쌓였던 울분이 섞여


있었다.

“내가 사라지라고 하면 사라질 거라면서.”

이렇게 울면서 말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 여태 아무렇지 않던 주제에 이제 와 감정이 북받치기


시작하다니. 서서히 일렁이는 슬픔은 옅은 페로몬과 함께 온전히 내게 쏟아졌다.

“근데 본인이 울면 어떡해요.”

“…….”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럽게 이어진


숨소리가, 덜덜 떨리는 손이, 간간이 들리는 흐느낌이 모든 걸 보여 줬으니까.

“권이도 씨.”

나는 천천히 그의 팔을 마주 잡았다. 그를 밀어 내려고 했으나, 그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놓아준다더니, 지금은 붙잡고 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사근사근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 봐봐요, 빨리.”

“…….”

“얼른.”

말 안 듣는 아이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요지부동이다. 한 번 더 재촉할까 했다가,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엄하게 다그치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 안 들면 저 집에 갈 겁니다.”

우습게도, 그 협박의 효과는 대단했다. 짧게 움찔거린 권이도가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그가 기댔던 코트에 눈물 자국이 남았다.

“…….”
“…….”

아까와는 달리 새빨개진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흘러내려서는,


매끄러운 턱을 타고 똑 떨어졌다.

“……정말 미련 다 버렸어요?”

나는 살며시 그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젖은 피부가 찬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기를


찾는 어린 짐승처럼, 그는 눈을 감고 내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이내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아까와는 다른 대답이었다. 울컥, 목울대를 움직이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못 버렸어.”

이럴 거면서, 왜 고집을 부렸을까. 그게 자책감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토록 아파하는 주제에 앞으로 어떻게 지내려고 한 건지. 혹은 아까 우리가
마주 봤을 땐 왜 그리 평온했던 건지.

“너랑 관련된 건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어.”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끝이 갈라지는 음성에선 늘 보여 주던 여유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서히 눈가를 일그러뜨린 권이도가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안.”

“…….”

“미안해, 세진아.”

이렇게 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서럽게, 처량하게 울 수 있었구나.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어 댄다.

“나한테 이럴 자격 없는 거 아는데…….”

“…….”

“근데 안 될 것 같아.”

분명 가여운데, 가여운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려서 주머니 속에 넣었던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 대단한 사람이, 늘 흔들림 없던 권이도가, 내 앞에서 날것의 감정을
드러낸단 사실에 만족감이 일었다.

“제발 가지 마…….”

내가, 권이도한테 변태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네.

손을 거둬들이고 목구멍 너머로 꿀꺽 한숨을 삼켰다. 조금…… 아니 실은 많이 귀여운 것 같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괴롭히고 싶은 걸 보면.

“그만 울어요.”

“…….”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계속 울어.”

위로를 하는 방법은 몰랐다. 안아 주고 다독여 주기엔 그가 보여 준 태도가 아직도 괘씸했다. 그를


어르고 달랠 수도 있었지만, 부러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럴 거면서 왜 그랬어요?”

“……하.”

탄식처럼 터져 나온 숨에 물기가 가득했다. 내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젖은 두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음을 참다 참다 안 됐는지, 권이도는 다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늘 젖은 나무와도 같던
페로몬이 지금은 장대비가 내리는 숲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빌지.”

“…….”

“그랬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이야기를 꺼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에 시선을 두고, 이따금 달싹이는
입술을 가끔 구경하면서. 금방이라도 그에게 뻗고 싶은 손을 애써 주먹을 쥐어 참아 가면서.

“미안하니까 가지 말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자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 없으면 안 되겠다고


매달렸어야지.”

통쾌하다는 생각보단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쌓였던 속내를 늘어놓으면서, 나도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영영 내 눈앞에서 사라지긴 무슨…….”

그에게 서운해하면서도, 분명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괜한 고집으로 강한 척하는 게 분명하다고, 나


홀로 결론 내렸었단 말이다.

“거의 다 버렸다고 하질 말든가.”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들었다. 나를 향한 미련을 버렸다는 그 한마디에.

“각인한 사이에 그게 될 리가 없는데…….”

그가 시야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항상 권이도를 느낄 수 있었다.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우리는 분명 이별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겠지. 각인이…… 그래, 우리의 연결 고리가 풀리지 않는 이상.

“어차피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말을 꺼내자마자


갑작스럽게 기시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내게서 거둬진 시선, 체념 어린 눈동자, 그리고 지나치게 차분하던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권이도 씨.”

천천히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머리로는 하나둘 날짜를 되짚으면서. 우리가 헤어졌던 계절, 과거의 내가
죽었던 시기. 막연히 이맘때라고 생각했던 날짜를 차근차근 떠올렸다.

‘……잘 지내봐요, 한번.’

그게 오늘이구나. 깨닫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거의 다 버렸다던 한마디가, 조금씩 죽여 가던


기대가, 권이도가 보여 줬던 모든 반응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

죽으려던 거였다. 나를 여기에 두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리려고. 나에 대한 감정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고. 내가, 그를 두고 했던 선택을 그대로 따라서 말이다.

“어떻게…….”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아서, 그에게 바짝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얼굴을


가린 손을 억지로 끌어내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마주 봤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죠.”

“…….”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은 분명 낭패감이었으니까. 여전히 눈물에 젖은


눈동자엔 모든 걸 들킨 사람의 체념도 함께였다.

“……아니라고 해요.”

“…….”

“아니라고 하라고요.”

삐쭉삐쭉,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정체 모를 무언가가 뻥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를 재촉했건만. 그런데 권이도는 처연히 눈을 내리깔며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

“대체 어떻게……!”

울컥, 입을 열었다가 목이 메는 것처럼 뒷말을 삼켰다. 눈을 꾹 감았다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바람에


붙잡았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언제였더라. 그가 나와의 약혼을 끝냈던 그 날처럼. 갑작스레 밀려든 실망과
배신감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왜 맨날 그런 식이에요? 혼자 결론 내리고, 혼자 끝내고,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그에게 화낼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문은 모르는 척했다. 눈앞이 캄캄하게 물드는 것만 같아서
짓씹듯 쏘아붙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요? 귀찮은 사람이 없어졌다고 좋아할 것 같았어? 그렇게 각인이
풀리면, 그럼 내가 잘 살 줄 알고?”

“…….”

“왜 그러는데, 대체, 왜!”

퍽! 권이도의 어깨를 내려쳤다. 나까지 눈앞이 뿌예지려고 해서 잠깐 입을 다물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권이도와 눈이 마주쳤을 땐,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얼굴이 또렷이 생각났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댄 채로 시근덕거리며 비꼬기도 했다.

“왜, 잘 지내라고도 해보지.”

“…….”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번 잘 지내보라고 했어야지.”

나는 그때, 권이도가 후회하길 바랐다.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의 기억 속에 남길


바랐단 말이다. 그렇다면 권이도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내가 그를, 잊지 않았으면 하고.

“……그거 말고 방법을 몰라서 그랬어.”

그런데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릴없이 구겨진 얼굴이 아까 울음을 참던 것과
비슷했다. 느릿느릿 내 손목을 붙잡은 권이도가 억눌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한테 복수하려던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마음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었구나. 그 죽음에 그를 향한 원망이 담겼단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구나.

“내가 널 어떻게 망쳤는데 너한테 다시 만나자고 해.”

그가 늘, 해왔던 말이었다. 아롱아롱 맺혔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를 붙잡은 손엔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걸 용서해 달라고 하겠어.”

한 방울, 두 방울,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넘쳐 버린 감정을 참을 길이 없어서, 말을


하면서도 권이도는 울고 있었다.

“나도 내 곁에 남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 울고 무릎 꿇고, 그렇게 매달려서라도 널 잡을 수 있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
벅차오르는 감정만큼이나 목소리도 격해졌다. 이제 그는 눈물을 참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차오른
흐느낌을 꿀꺽 삼킨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3 주…… 그래, 그 안에 포기하려고 했지. 미련도 다 버리고, 그다음에 널 놓아주려고.”

그가 정한 3 주는 정말 마지막을 위한 유예 기간이었나 보다. 내 얼굴을 보면서도 그는 서서히 마음을


죽이고 있었다.

“근데 네가 한마디 할 때마다 기대가 생겨.”

“…….”

“나랑 자고…… 그리고 내일은 나한테 웃어 주지 않을까. 또 내일은 괜찮아졌다고 해주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거기까지 말한 권이도가 말을 멈췄다. 찌푸린 눈가가 숨이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자아냈다. 이윽고 터져


나온 숨결에 그간의 설움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예전처럼, 날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로 숨을 골랐다. 뚝, 뚝, 떨어진 눈물이 발치를 한가득 적시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처럼 아스팔트 위에 짙은 그림자가 남았다.

“근데 아니잖아.”

“…….”

“너 마음 정리 다 했잖아, 세진아.”

각인이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 모든 걸 공유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에게 울며 화를 냈던 다음 날부터, 차분해진 내 마음을 보고 그리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거기서 내가 무슨 염치로 너를 잡아.”

언제 잠잠했냐는 듯 그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덮어놓고 무시했던 감정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구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없이 살 자신이 없어.”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러다 또 네가 싫어할 짓만 할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는 자괴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싫다는 듯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원망도 떠올랐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

“…….”

“그래야 각인이 풀리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다 괜찮아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줄 알았건만, 사실은 더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아직도 풀어야 할 실타래가 많아서.
각인이 전해 주지 않은 모든 걸 구태여 입으로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붙잡힌 손을 빼냈다. 이번에도 권이도는 쉽게 나를 놓아줬다. 스르륵 손을 거둔


그가 힘없이 아래로 팔을 떨어뜨렸다.

“정말 바보 같네.”

내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했었구나.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그저 벼랑 끝에 내몰린 선택에 불과했다. 그 당시엔 최선이라고 여겼건만, 돌이켜 보니 온통 실수투성이였다.

“권이도 씨.”

기분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그에게 해야 할 말들이 별반 어려움 없이 떠올랐다.

“내가 죽은 뒤에 그쪽이 날 따라서 죽었죠.”

나는 그의 죽음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따라서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 또한 비슷한 시기에 죽지 않았을까.

“그럼 그쪽이 죽은 뒤에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데요.”

“…….”

순식간에, 권이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덜컹 흔들린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죽으면 남는 사람만 힘들지.”

나를 놓아준다고, 그런 건 다 핑계였다. 본인이 괴로우니까 내린 선택에 내 사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거다. 그저 도망치기에만 급급해서 뒷생각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원래 기억하는 사람만 힘들잖아요.”

“…….”

“그건 권이도 씨가 가장 잘 알 거고.”

권이도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진 못했다.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몇 달간, 누구보다 가장 괴로운


사람이 권이도였을 테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꿀꺽 삼키고, 집에서 챙겨
나온 상자를 꼭 움켜쥐면서.

“이러지 말고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
“시간도 늦었고…… 겸사겸사 줄 것도 있으니까.”

흘긋 살펴본 권이도는 울음을 거의 멈춘 상태였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아까처럼 비 오듯


쏟아지진 않았다. 여전히 발갛게 물든 눈가가 안쓰럽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엾잖아요. 저기, 김 실장님 계속 기다리는데.”

김 실장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 어깨 너머를 바라봤던 그가 나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이며 후, 한숨을 토해 냈다.

“가요. 식당 예약해 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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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화. Retour des Saisons(12)

우리가 향한 곳은 마지막에 헤어졌던 레스토랑이었다.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식당. 벽면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밤이면 야경이 아름다운 장소. 권이도와 내가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리의 약혼이 끝났던
바로 그곳.

나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권이도와의 식사를 위해 이곳을 예약해 둔 참이었다. 그가 기념식에 참석해
나와 대화를 나누리라고 확신했었으니까. 설마하니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다가 주차장에서 그렇게 펑펑 울 줄은
몰랐지만.

“…….”

“…….”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라 줄 때도 조용했고, 주방장이


요리를 설명해 줄 때도 조용했다. 내가 묵묵히 음식을 먹는 동안, 권이도는 그저 식기를 움직이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한 얼굴이었으나 그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주방장이 눈치 보던데.”

나는 그런 권이도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그가 모든 음식을 남긴 탓에 주방장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웨이터까지 돌려보낸 터라 아마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을 거다.

“조금이라도 먹어요. 저녁도 안 먹었을 사람이.”

“……입맛이 없어서.”

그렇게 울었는데 입맛이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게다가 여전히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고.

“…….”

나는 살짝 식기를 내려놓고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창가 쪽 테이블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아름답게
펼쳐진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은, 적어도 지난번에 왔을 때보단
아름다웠다.

“그럼…… 얘기를 좀 해볼래요.”

넌지시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우리에겐 아직 할 말이 많았고,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


홀을 통째로 비운 덕에 누군가 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권이도 씨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요.”

“…….”

“우리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권이도를 마주 보진 않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걸 알면서도 시선 한 점 건네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불빛을 눈으로 헤아리며 느릿느릿 이야기했을 뿐.

“어디서부터 얘기할까요. 우리가 헤어지고…… 아니, 이건 아까 했지.”

쯧,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나라고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이, 그리고 아까 남았던 감정이, 그에게서 전해진 긴장이 생각을 잔뜩 어지럽혔다.

“미안한데 나도 지금 머리가 복잡해서.”

내가 양해를 구할 때도, 권이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권이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와 한 계약이 뭡니까?”

모든 일의 시초가 그거였다. 우리의 정략결혼. 해신과 선호 사이에 오간 내가 모르는 계약.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거든요.”

나는 모든 사실을 외면했기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른다. 이제 와서는 굳이 필요 없어진


부분들이었지만, 하나하나 되짚으며 내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모르고 넘어간
사실들부터 파악해야 했다.

“올 초에…….”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정히 내리깔린 속눈썹이 아직도 눈물에 젖은 느낌이었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 회장이 나를 찾아왔어.”

권이도가 말하길, 아버지는 선호카드가 제휴 맺을 은행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라고 했다. 어디서
들린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과 무관하진 않았다고. 아버지는 본인 기업의 오메가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권이도는 그 협상을 받아들였단다.

“아마 나한테 필요한 게 후계라고 생각했나 본데, 나는 계속 들어오는 혼사를 막을 구실이 필요했어.
후계야……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더 자잘한 조건이 있었을 텐데, 권이도는 거기까진 말해 주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별로 알 필요 없는


내용이었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과정이었으니까.

“물론 정 회장이 내건 조건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고요?”

조건이 나쁘지 않다니. 누가 봐도 나쁜 조건이건만. 권이도가 얻는 건 고작 나 하나고,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이득을 취했을 텐데.

그런데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해신을 통으로 삼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그가 느릿느릿 덧붙였다.

“딱 봐도 운영은 불안한 데다, 윗대가리들 사업 수완도 별로인 것 같고, 거기다 정작 협상하러 온 정


회장까지 초조해 보이니까.”

“…….”

“제휴를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놨다가 흡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부부로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처음부터 해신을 잡아먹을 생각이었구나. 나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던
권이도의 말이, 설마 어차피 해신을 흡수할 예정이었다는 말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와 협상할 단계면, 아직
겉으로 망조가 드러나지도 않았을 텐데.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신 정도면 내가 팽했을 때 뒤탈도 없으니까. 나로선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다른 대기업이면 모를까, 무너져 가는 기업을 어떻게 대하건 그건


권이도의 마음일 테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서 단물만 빼먹을 생각이었을 거다. 그러다 뭐, 이혼을 하더라도
그의 커리어엔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그게 더 궁금한 건 없냐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내가


물어보면 정말 다 알려 줄 생각인가. 어느덧 차분해진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빼간 자료가 불량이라는 건 언제 알았어요?”

당장 떠오르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분명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권이도를 보고 있으면


마구 떠올랐던 잡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아직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우리가 각인한 다음에 알았어.”

“…….”

“너를…… 내 집에 데려오고 나서.”

그는 고분고분 내 질문에 대답해 줬다. 우리가 각인한 다음이면 그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내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바쁘게 다른 일에 집중하던 시기기도 했다.

“그때 해신이 무너졌거든.”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한 말이 지금껏 들은 어떤 말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과거에도


해신이 무너졌었다는 건가. 그렇게 발버둥 쳤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세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미완성인 보안 프로그램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했다는 이유로 고객들이


대거 탈주했고…… 그 타이밍에 내가 정 회장의 비리를 뿌렸지.”

“…….”

“그렇게 망한 거야, 해신은.”

내가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의 집에 갇혀 있을 때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권이도가 차단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갇힌 거였다.

“……그럼.”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엔 알았겠네요. 자료가 불량이라는걸.”

그가 내게 쥐여 줬던 자료. 선뜻 내밀었던 USB. 그 또한 해신을 망가뜨릴 열쇠였던 모양이다. 처음엔


불량인 줄 몰랐다고. 그리 말하던 권이도가 미심쩍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시스템이 완성품이었어도 너한테 줬을 거야.”

그러나 권이도는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담담한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자조 어린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선호를 달라고 해도 줬겠지.”

“…….”

제법 무서운 소리를 하지 않나. 이 사람이 하면 도무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데.

“또 궁금한 건?”

내 성격이 진짜 나쁘긴 나쁜가 보다. 그렇게 꾸준히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어쩜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 무표정한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길 바라는 걸 보면.

“……권이정이 그러던데.”

우습게도 권이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더 우스운 건, 다시 무너진 표정을 보고 곧장


후회한 나였지만 말이다. 조금 더 준비가 된 이후에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을 줄 몰랐다고.”


“…….”

“그 선물이…… 설마 나는 아닐 테니까.”

오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오해인지는 몰랐다. 그가 왜 권이도의


집을 찾아왔는지, 나를 ‘선물’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람한테 뭘 주려고 했던 거예요?”

그는 이번만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껏 술술 이야기하던 주제에 눈까지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내, 입술을 달싹인 그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소할 자료.”

자료? 그렇게 되묻자 권이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까득, 이 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자식이 건드렸던 피해자들한테 모은 증거.”

어떤 피해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명성호텔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 ‘그런 용도’로


쓰인다던 장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나랑 얘기했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모았던 증거를 터뜨려서 매장시키기로. 기업 이미지는 잠깐


나빠지겠지만 그 자식이 설치고 다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가 불쾌해하고 있단 사실이 피부로 전해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이경과 함께 권이정을


완전히 처리할 예정이었나 보다. 그 이유가 경영권인지, 아니면 범죄에 대한 응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었어. 넌 방 안에 있을 테니까 마주칠 일 없을 줄 알았고. 상을 치르느라 정신도


없었던 데다가…….”

느릿느릿 말하던 권이도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내, 마른침을 삼켰는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니, 그냥 다 변명이지.”

“…….”

미안하단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표정에 담긴 무수히 많은 죄책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할 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더 궁금한 부분은 없었다. 그를 심문할 생각이 아니니 무언가 더 묻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권이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실을 입에 올렸다.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반응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지금껏 봐온 권이도의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하던 이유가 아마 그래서였겠지.

“누구 아이인지…… 그것도 알아요?”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죽을 당시엔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와 새삼 궁금해져서.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달라질까 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존재가 기억으로라도 남길
바랐으니까.

“…….”

당연히 권이도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망설인 뒤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을 뿐이다. 짙은 눈동자에


자책감을 비롯한 후회가 스쳤다.

“……우리 애였어.”

“…….”

“너랑 내 아이.”

차분한 목소리가 주는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울컥, 치솟은 게 안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전해지는 권이도의 감정 역시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음식은 이미 다 식어 버린 뒤였다. 마지막에 후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우리 둘 다 딱히 먹을 생각은


없었다. 고스란히 남은 음식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그와 내 감정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밤새 고민했지만 아직까지도 순서가 애매했다. 나도 이런 게 처음이라서, 무수히


많은 망설임이 생겼다.

“……이거.”

그래서 우선, 테이블 구석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올려 둔 물건. 내가 집에서부터 챙겨 나와 내내 만지작거리던, 내 지난 몇 달을 담은 권이도에게 주기 위한 선물.

“선물이에요. 전에 약속한 거.”

권이도는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약속이라고 말했음에도 곧장 떠오르는 게 없나 보다.
나는 상자를 슥, 권이도 쪽으로 밀며 눈을 내리깔았다.

“향수 이름을…… 권이도 씨가 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종이로 된 포장지 속엔 내가 직접 만든 향수가 들어 있었다. 아직 샘플이라 디자인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용물은 완성된 상태였다. 내 페로몬을 딴 향수를 만들어 달라던,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만, 정작 내가 만들어 온 향기는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당신 페로몬을 따서 만든 거거든요.”

“…….”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권이도와 떨어져 있는 내내,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향수를 만들었다.


온갖 향료를 조합해서 최대한 그의 페로몬을 비슷하게 흉내 냈다.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에 한 번
혹은 온종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조향 작업을 했었다.
“미안하게도, 내가 내 페로몬을 잘 못 느껴서.”

권이도를 그리워한 흔적이었다. 은연중에 그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후각이 무뎌진 와중에도 그의 페로몬은 잊어버릴 수 없었다.

“…….”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도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향수를 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밀어 내지도


않았다. 역시 그의 요구와 다른 물건은 좀 그랬을까.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정세진 씨 꽤 잔인한 사람이네요.”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느리게 들어 올린 시선엔 서서히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발간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이 내뱉는 한마디도.

“파혼한 약혼자한텐 정세진 씨 페로몬을 추억할 기회도 안 주는 겁니까?”

“……그게 무슨.”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늘이 아니라 권이도의
눈에서. 예의 그 수려한 눈매가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세진아.”

그는 물기 어린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기다란 속눈썹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혔다. 처연하게


떨리는 입술이, 안쓰러울 정도로 가여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네 방을 못 치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서글퍼 보였다.

“네 물건들이…… 나한테 그대로 남아 있어.”

내가 뭘 얼마나 놓고 왔더라. 아마 거의 모든 걸 버리고 왔었지. 그가 알아서 처분하리라고 믿으며,


추억을 곱씹는 것마저 그의 역할로 남겨 놨었다.

“근데 이런 걸 또 주면 어떡해.”

아……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향수를 끝으로, 내가 정말 자신을 떠나는 줄 알았나 보다.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고, 약속까지 지켰으니. 이제 정말 우리 헤어지자고.

“……권이도 씨.”

아마 처음부터 선택권은 내게 있었겠지.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온전히 내


역할이었으니까.

“손 좀 줘볼래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권이도는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감싸 쥐자, 저 또한 꼭


붙잡기도 했다. 나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이야기했다.
“좋아해요.”

그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지는 페로몬마저 뚝 끊겨


버렸다. 곧은 손가락을 살짝 그러쥐자, 그가 손끝을 움찔거렸다.

“……우리 연애할래요?”

이 말을 사실은 꽤 오래 곱씹었다. 미처 용기 내지 못했을 뿐. 속으로는 몇 번이나 상상해 봤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권이도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런 걸 수도 없이 그려 봤다는 말이다.

“결혼도 해봤고, 약혼도 해봤으니까…….”

“…….”

“연애를 하면, 좋을 것 같거든요.”

아마, 나는 절대 권이도를 잊을 수는 없을 거다. 그가 보여 준 다정함, 그에게 느꼈던 온기, 난생처음


품어 본 감정들은 분명 진짜였으니까. 그를 지우는 것도,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히 외면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내 페로몬을 닮은 향수 대신에…… 내 페로몬을 느끼게 해줄 수는 있는데.”

이런 말로 위로가 될까. 그런 고민은 잠시였다. 이것저것 재다가 그를 더 울리게 되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평생 울 걸 오늘 다 운 것 같은데, 이쯤 달래 줘도 되지 않나.

“아니면 권이도 씨가 만드는 걸 도와줘도…….”

하나 거기까지 말한 나는 미처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주 잡고 있던 손을 그가 억세게


붙잡은 것이다. 이건 무슨 반응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왜 또 울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권이도가 잔뜩 숨을 죽인 채 울고 있었다. 드러난 입술은 꾹 깨문 채로, 다른


손으로는 나를 간절히 부여잡으면서.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또 울음을 참지 못해 굳게 다물길 반복한다.

“그만 울어요.”

레스토랑을 모두 비운 게 다행이지. 어색하게 건넨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가 더 고개를 숙이고 말았으니. 아마 흐느끼며 울지 않는 게 그로선 최선이 아니었을까.

“…….”

그는 오랜 시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얼굴을 가린 손을 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주 잡은 손을


놔주지도 않았다. 그저 간간이 서러운 숨을 내뱉으며 벅차오른 감정을 표현했을 뿐.

그러다 가까스로 열린 입술에서 우는 것과 다름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잘할게.”

이토록 상투적인 한마디에 이렇게 진심 어린 감정이 담길 줄 몰랐다.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대답이었으니,


그걸로 이미 충분했다. 그래서 그냥, 가늘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요. 믿을게.”

우리가 헤어졌던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시기. 먼 길을 돌아 다시 똑같은 계절을 맞이했다. 봄이
오기 전까진 시린 추위가 이어지겠지만, 이번 겨울은 그다지 외롭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돌아온 계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102 화. A La fin de La Memoire(1)

등 뒤로 펼쳐진 바깥엔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 몇 대가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푸르른 색이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풍경 아래, 대표실 내부엔 질척거리는 소리와 앓는 신음만
울려 퍼졌다.

“아…….”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창문에 등을 기댔다. 손끝으로 창문을 긁는가 하면 미치겠다는 듯 뒤통수를
유리에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한 손으로 어깨를 밀어 냈지만, 그 역시 큰 효과는 없었다.

“그만, 흣…….”

뜨거운 입 안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머금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귀두를 조이고 혀로 기둥을
부드럽게 감싼다. 벼랑 끝에서 뚝 추락하는 듯한 쾌감에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으.”

아, 이거 맛 들일 것 같은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가물가물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깔끔하게 세팅한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따위가
보였다. 내리깔린 속눈썹은 퍽 단아했으나 높게 뻗은 콧대 아래 발간 입술엔 민망한 물건이 물려 있었다.
움찔거리는 허벅지는 이미 큼직한 손에 잡힌 상태였고, 내가 밀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움직임만 더 집요해졌다.

“권이도 씨, 나 이제…… 흣…….”

차마 그 머리에 손을 댈 수가 없어 어깨만 꾸욱 붙잡았다. 대표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허벅지를 살살 다독였다. 그러면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허벅지 뒤쪽을 제 쪽으로 꾸욱
잡아당긴다.

“흡……!”

부드러운 점막이 성기를 뜨겁게 감쌌다.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는 듯해서 창문에 콩 뒤통수를 부딪쳤다.
눈을 꾹 감은 채로 아랫배에 바짝 힘을 주고, 혀를 꾹 깨물었다.
“……!”

서서히 차오르던 쾌감은 그가 다시금 목구멍을 조이자마자 펑 하고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좁은 목구멍 속에 파정했다. 내가 정액을 토해 내는 동안에도 그는 내 성기를 입에서 빼내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목울대를 움직이며 그저 내가 쏟은 모든 걸 받아 마셨을 뿐이다.

“흐…….”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귓가가 발개질 만큼 수치심이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부를 정도로 만족감이 들었다. 느른한 숨을 내뱉으며 몸에 힘을 빼자, 권이도가 그제야 내 성기를 입에서
빼내었다.

“양이 많네.”

기품 있는 목소리가 여유롭게 감상평 따위를 내뱉었다. 타액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반질거리는


입술이 야하기 짝이 없었다. 혀를 내어 내 귀두를 핥은 그가 눈만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한 번 더 해줄까?”

“……됐거든요.”

나는 그를 밀어 내고 잽싸게 바지를 추슬렀다. 버클과 벨트를 모두 채우자 그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그때까지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기에 그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빨리 일어나요. 왜 그러고 있어.”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권이도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으리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성기를 입에 넣고, 더 빨고 싶다는 듯이 아쉬움을 내비칠 줄이야.

“아, 바지 구겨졌네…….”

나는 권이도의 바지를 살펴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던 옷차림이 대표실에 한 번


들어오기만 하면 엉망이 되곤 했다. 물론 그조차도 권이도가 입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았지만.

“괜찮아. 아무도 몰라.”

그는 내 허리에 팔을 감고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키스를 하지 않는 건, 방금 입 안에 정액을


머금었던 탓일 거다. 내가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이상한 데서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나보단 세진이 네 표정을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

도통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여전히 얼굴이 빨개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간지럽게 웃은 권이도가 다시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얼굴 식히고 나와. 먼저 나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게서 한 발짝 떨어져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가 붙잡았던 어깨를 탈탈 털고


넥타이를 정리한 뒤 바지까지 살폈다. 머리를 안 건드려서 다행이지. 대표실로 들어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회의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대표님.”

정중히 웃은 권이도가 묵례를 하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홧홧거리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와의 연애를 시작한 지도 벌써 석 달째였다.

***

지난겨울은 유달리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계절이었다. 눈이 끝도 없이 내렸고, 아침저녁으로 살을 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무실 내부가 냉장고처럼 느껴졌고, 잠깐만 창문을 열면 직원들의 원성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계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끝나기 마련이다. 해가 바뀌고, 눈 깜박할 새에 봄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쌓였던 눈은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이제는 먼저 나서서 환기를 시키는 직원들도
생겼다.

그사이 ‘Sejin’은 선호재단과 본격적인 전속 계약을 맺었다. 콜라보 제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던 데다,
그해 후원금이 예년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권이도의 제안으로 맺은 계약이었으나, 그 이후엔 내가 직접
권이경에게 연락을 넣었다.

‘세진 씨, 오랜만이네요.’

장례식장에서 받은 명함으로 연락했을 때, 권이경은 의외로 흔쾌히 나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실종된
권이정 대신 명성호텔을 소유하게 된 그는, 복지재단과 문화재단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제 관심사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덕일까, 다시 만난 권이경은 지난번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장기화하고 싶다고요?’

그는 권이도와 내 사이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고, 진지한 얼굴로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만 검토해 봤다.
한껏 집중한 모습은 역시나 권이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을 들은 뒤엔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야 좋죠. 세진 씨랑 일하면 이도가 돈도 안 받고 알아서 봉사할 텐데.’

권이도가 끼면 성과율이 다르다며, 권이경은 제 동생의 호구 짓을 응원했다. 우리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면서 권이도가 무언가 열심히 한다는 사실만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말없이 입을 다무는 내게
상냥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혜율이가 세진 씨 보고 싶어 하니까 다음에 시간 좀 내줘요.’

빈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 작은 아이가 나를


기억한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얼굴로 웃은 모양이다.

‘삼촌이랑 같이 보자고 전해 주세요.’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고, 권이경이 이야기했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 계약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Sejin’과 선호재단 사이의
계약이 체결됐다.

“……회사에서 이러지 말라니까.”


그리하여 지금, 나는 담당을 자처한 권이도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예전처럼 매일 오진 않았지만,
그는 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미팅을 가지려고 했다. 일이야 알아서 잘하니까 둘째치고, 딱 하나 곤란한 게
바로 아까 같은 상황이었다.

“난 세운 걸 빼준 죄밖에 없는데.”

울린 게 미안해서 다 받아 준 게 문제였을까. 버릇을 잘못 들여도 한참 잘못 들였다. 나와 둘만 남는


일이 생기면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애정 표현을 퍼부었다. 대표실 창문이 매직미러라고 말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러다 정말 일을 치를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권이도 씨가 자꾸 건드리니까 그렇죠.”

“그랬나?”

권이도는 시치미를 떼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까 대표실을 찾아오자마자 은근슬쩍 페로몬을 뿌리던


사람이 누군데. 아니, 귓가를 농밀하게 만지는 손길에 목을 움츠린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가 나를 창문에 세워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무 데서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나마 미팅을 하는 회의실에선 얌전히 있으니 다행일까. 대표실이야, 문만 잘 잠그면 밖에서 무슨 수를


써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른지,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면 더 들이대지는 않았다.

“맛도 없다면서 그걸 왜 자꾸…….”

“익숙해지니까 괜찮더라고.”

뻔뻔하게 대꾸한 권이도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그런 짓을 했냐는 듯 단정한 옷차림이 퍽


금욕적이었다. 이런 사람이 남의 걸 빨면서 세우는 변태라니. 세상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지 않았는가.

“자꾸 이러면 못 오게 할 겁니다.”

단호하게 건넨 말엔 그 또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의 일을 반성하는 것 같진 않았고, 정말 못 오게


할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매일 얼굴을 보면서, 낮에 잠깐 만나는 게 뭐 그리 간절한지 모르겠다.

대표실에서 시간을 꽤 보낸 탓에 회의는 생각보다 일찍 끝냈다. 권이도가 먼저 시간을 확인하며 일어섰고,


나 또한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뒤따랐다. 이번에 출시할 상품 역시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난 뒤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늘 그랬듯,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데려다줬다. 권이도는 계기판의 숫자를 확인하고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내 눈가에 쪽, 입을 맞췄다.

“이따 데리러 올게.”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가벼운 촉감이었다. 너무 짧은 찰나였기에 순간적으로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붙잡을 수는 없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배웅했다.

“연락할게요.”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덜컹거리며 닫힌 승강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 다섯
층쯤 내려갔을까. 나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유리 벽 너머에서 고개를 쭉 내밀고 있던 직원들과. 한 명도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망했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권이도가


눈치를 살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입을 맞추게 내버려 둔 거였건만.

“…….”

나는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고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따끔거릴 정도로 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눈빛이라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 안 합니까?”

“대표님!”

직원 하나가 새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흠칫 눈가를 움찔하자, 이번엔 다른 쪽에서 억울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아니라고 하시더니!”

그래, 눈이 있는 이상 그걸 못 봤을 리가 없지. 절묘한 각도 탓에 오히려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직원들이 저마다 호소하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난처한 얼굴로 웃는 수밖에 없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아니라곤 안 했어요.”

선호와의 전속 계약을 맺었을 때, 직원들은 한 번 사그라졌던 우리의 로맨스를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다.


권이도가 나를 잊지 못해서 다시 찾아왔다는 것이었는데, 엄밀히 따지면 전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맨날 대답 안 하고 웃기만 하셨잖아요.”

“하하…… 그랬나?”

“봐봐요, 지금처럼!”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대놓고 티를 내려던 것도 아니었다. 직원들이 그런 걸로 흉을 볼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대표인 내가 공과 사 구분을 못 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뭐…… 이제는 다 틀려 먹었지만.

“두 분 언제부터 만나셨는데요? 네?”

그들은 사춘기 중학생처럼 권이도와 내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일하기 싫은 와중에 즐거운
가십거리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럴 줄 알았다느니, 누가 먼저 고백했냐느니, 잔뜩 들뜬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들려왔다.
“당연히 고백은 권 전무님이 하셨겠지. 대표님한테 한눈에 반한 게 분명하다니까?”

“하, 대표님 우리 회사 마스코튼데!”

“그래도 권 전무님 정도면…….”

추측이 난무하던 대화는 어느샌가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됐다. 권이도의 끝없는 구애 끝에 내가 그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번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한 가지 정정할 부분이 있긴 했다.

“만나자고는 제가 했습니다.”

연애하자는 말은 내가 했으니까, 결국 고백도 내가 한 게 아닌가. 권이도가 들으면 뭐라고 반응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직원들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누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용해졌던 내부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유가 터져 나왔다. 닭살이라느니, 할


땐 하는 남자라느니. 요란스럽게 굴던 직원들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시긴 해요.”

우스운 일이지. 고작 그런 말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꾸며 내지 않은 관계를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건,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아, 재단과의 협업은 권이도 전무랑 상관없는 거 다들 알죠?”

“그럼요! 저희가 대표님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직원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그 주제를 마무리했다.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고, 과하게 장난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역시, 직원 하나는 잘 뽑아 놨다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일합시다, 다들.”

***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창밖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해가 짧은 터라 눈 깜박할 새에 어둠이


내려앉을 터였다. 나는 퇴근하는 직원들을 배웅하고 외투를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세진아.”

권이도는 전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사귀게 된 이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회사로 데리러 왔다. 기사도 있는 사람이 직접 차를 운전해서는, 손수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곤 했다.

제가 잘하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매일 그와 함께 퇴근하는 덕에 이태성과 김 실장만 어부지리로


칼퇴근을 얻게 됐다. 이태성은 데이트할 시간이 생겨 좋은 모양이었는데, 김 실장은 왜인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다. 자식을 빼앗긴 부모 같다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맨날 데리러 오고…… 일은 언제 하나 몰라.”

나는 운전석에 오르는 그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안전벨트를 채워 준 후엔 자연스럽게 쪽 소리가 나게 입까지 맞췄다.
“내가 능력이 좋아서.”

능청스러운 대답은 발화자가 권이도라는 것만으로 이미 신뢰 가는 것이었다. 연애에 눈이 멀어 회사를


말아먹진 않을 테니, 나를 만나지 않는 동안 일 처리를 다 해놓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한 번
능률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 먹고 싶은 건?”

넌지시 물은 권이도가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손을 그러쥐었다. 차를 출발시킬 생각은 안 하고, 얼기설기


깍지를 끼더니 엄지로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사귀게 된 이후 그는 틈만 나면 나와 닿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눈이나 뺨, 입술에 뽀뽀를


하는 건 기본이고 손을 잡고 있다가도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글쎄…… 배가 별로 안 고픈데.”

“그래도 먹어야지.”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나와 헤어질 생각을 했을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온몸에 선연히
느껴졌다. 살랑살랑 풍겨 나온 페로몬은 내 것과 섞여 이미 차 안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의선당으로 갈까.”

그는 넌지시 이야기하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습관처럼 그의 손을 맞잡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달싹였다. 마침 내일이 주말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찾아와야 할 물건들도 있었으니까.

“권이도 씨 집으로 갈까요?”

- 다음 화에 계속

103 화. A La fin de La Memoire(2)

지난 몇 달간 나는 권이도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굳이 방문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만남을


밖에서 가졌기 때문이다. 함께 밤을 보낼 때는 그의 집이 아닌 내 오피스텔에서 머물렀다.

내가 말을 꺼내지 않으니, 권이도 역시 딱히 집으로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 짐작건대, 내


기억에서 비롯될 트라우마를 염려하는 게 아니었을까. 정작 나는 별생각 없건만 아직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가
보다.

“……집?”

역시나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그시 향해 온 시선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깍지 낀 손을 꼭 움켜쥔 그가 넌지시 물어 왔다.

“괜찮겠어?”
“걱정은…….”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눈을 찡긋했다. 사업을 할 땐 그렇게 대범한 사람이, 나와 관련된 일에는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구는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말해 봤자 듣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손을 기어 위에 올려
주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슬슬 놓고 온 물건도 가지러 가야죠.”

“…….”

그는 군말 없이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시켰다. 핸들 위에 올려 둔 왼손엔 까만 가죽으로 된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모 명품 브랜드에서 권이도를 위해 각인까지 새겨 만들어 준 제품이었다.

“물건은 전부 가져가려고?”

“뭐 우선은 꽃이랑 향수…… 그리고 차 키?”

대부분 반쯤 장난이었다. 전부 권이도에게 받은 것들이고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문제없는 물건들이었으니.

그런데 내 얘기를 듣자마자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수려한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버렸어요?”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흘긋, 백미러를 살핀 권이도가 핸들을 돌리며 느릿느릿
운을 뗀다.

“버린 게 아니라…….”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버린 게 아니면 뭘 그렇게 망설일까.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뒷말이 나왔다.

“내가 좀 썼어.”

“…….”

이 사람이 쓸 만한 물건이 있던가. 굳이 내 걸 쓰지 않아도 옷이고 시계고 차고 넘칠 만큼 많을 텐데.


그중에 굳이 권이도가 쓸 만한 거라면…….

“차를?”

“아니.”

“…….”

“향수를.”

“……향수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의 냄새를 맡았다. 옅은 페로몬에 섞인 묵직한 향기는 우리가 사귀게
되었던 날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설마 이걸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그 외에 떠오르는 향수는 두 개였다.

“어떤 향수요, 내가 희나 씨 공방에서 만든 거?”

“아니, 내가 너한테 선물한 거.”

아무래도 G 사에서 출시한 은방울꽃 향수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출장 가는 권이도에게 공병에
조금 덜어 줬던 기억이 있다. 혹시 그때 써보고 마음에 들었던 걸까.

“잠이 안 와서 몇 번 뿌리고 잤거든.”

“…….”

멍하니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 위로 도로의 불빛이 조금씩 비쳐 보였다. 잠이
안 와서 뿌리고 잤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이유였다.

“……그래서 잠은 잘 잤고?”

“뭐…….”

못 잤구나.

애매하게 돌아온 대답이 퍽 난감해 보였다. 살포시 찌푸린 눈매는 권이도답지 않게 멋쩍은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푸스스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써도 상관은 없는데…….”

내가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안 어울리게 귀여운 짓을 한다는 생각이 반, 불면증이 있었나 싶어


당황스러운 마음이 반. 내 향수를 뿌리고 잤다면 이유는 하나일 텐데, 그러면서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마주했던 모양이다.

“요새도 뿌리고 자요?”

“요새는 그럴 시간이 없지.”

왜일까, 그 담담한 대꾸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요새는 그럴 시간이 없긴 하지. 향수를
뿌리는 게 아니라 매일 서로의 페로몬에 범벅 돼서 잠이 드니까.

우리는 그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시답잖은 잡담을 주고받았다. 직원들이 우리 사이를 알게 됐다는 말에


소리 없이 웃던 권이도는 이제부터 조심해야겠다는 얘기를 듣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남들이
보고 있는 걸 알면서 내게 입을 맞춘 게 분명했다.

회사에서 권이도의 집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멀리 익숙한 대문이 보이자마자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여길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운 권이도는 이번에도 친히 내 안전벨트를 풀어 줬다. 안전벨트를 따라


올라온 손은 그 언젠가처럼 내 뺨을 살짝 어루만지고 멀어졌다. 간질거리는 손길에 눈꺼풀을 떨자, 조심스레 입을
맞추기도 했다.
“……원래 이렇게 뽀뽀하는 걸 좋아해요?”

애정 표현이 헤픈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요 몇 달 사이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았나 싶을 만큼 숨 쉬듯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다정한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원래는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는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하곤 다시금 입술을 맞물렸다. 아까보다 진한 입맞춤이었으나 내가 입술을


벌리려는 순간 곧장 떨어졌다. 아쉬움에 눈꼬리를 내리는 내게 그는 어르는 것처럼 상냥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너 밥부터 먹고.”

갑작스럽게 찾아왔음에도 주방장은 익숙하게 두 명분의 식사를 내어 왔다. 호화롭게 차려진 식사는
의선당에서 먹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는 유명 호텔의 수석 셰프로 있던 사람이라는데, 왜
개인이 그런 인재를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사를 마친 뒤엔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내 방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곳이었으나, 집을


나가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으니 아직까지는 그리 부를 만했다. 2 층 끝자락에 있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나도 바뀌지 않은 방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짜 아무것도 안 버렸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내가 쓰던 침대, 테이블, 내 책들과 옷가지, 그리고 협탁에 놓인 물건들까지.

“이걸 다…… 그대로 보관했어요?”

나는 묵묵히 있는 그를 뒤로한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처음 약혼했던 그때처럼, 넓은 방 안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가구나 인테리어는 모두 내 취향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엔 서서히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슬쩍 돌아본 권이도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내가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게, 그리고 권이도와 함께 있다는 게, 모든 게 참 낯설게 느껴졌다.

“이 방에 자주 들어왔어요?”

“……아니.”

그는 내가 질문한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쭉


둘러보며 가까이 걸어온 그가 눈을 찌푸린 채 이야기했다.

“네 생각이 나서…… 못 들어왔어.”

“…….”

웃기지 않나. 잠이 안 와서 향수까지 뿌려 놓고 정작 방에는 못 들어오다니.

침대 옆에 놓인 협탁으로 다가갔다. 유리돔을 씌운 은방울꽃과 내가 이희나의 공방에서 만든 향수가 놓여


있었다. 그중, 권이도가 사용했다는 향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향수는 어디 있어요?”

“내 방에.”

“……방에?”

아주 본격적으로 가져가서 사용한 모양이었다. 향수에 수면제 성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도 그를


타박할 입장은 아니지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권이도 씨 방으로 가요.”

그렇게 찾은 권이도의 방 역시 마지막에 기억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조로운 모노톤의 가구, 방


안에 퍼져 있는 페로몬과 옅은 향수 냄새. 그리고 그의 말대로 침대 옆 협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향수 하나.

“…….”

향수병을 들어 올리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무게가 가벼울 때부터 이상했건만, 절반…… 아니 그보다
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나도 몇 번 사용하지 않은 향수를 대체 얼마나 쓴 건지.

“……몇 번 뿌렸다더니.”

몇 번 수준이 아닌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병을 살짝 기울였다. 안에 들어 있는 액체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뚜껑에 달린 은방울꽃 장식엔 반짝이는 조명 불빛이 부서졌다.

“나한테 선물한 걸 본인이 다 썼네…….”

픽, 웃는 와중에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살그머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귀 뒷부분에 코를 문지른다.

“다시 사줄게.”

간지러운 숨결이 닿아 왔다. 가끔, 그가 하는 행동이 어린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지금처럼 애교를 부리듯 비비적거리거나 할 때.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사줄게.”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페로몬샘이 있는 부분을 입술로 깨물었다. 여린 살결을 살짝 베어 물고


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목을 움츠리자, 허리를 감쌌던 손이 넥타이 위로
올라왔다.

“응? 세진아.”

“…….”

굳이 다시 사줄 필요는 없는데.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목선을 따라 입술을 문지른 그가


마침내 내 입에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새가 모이를 쪼듯 입맞춤을 이어 간 그가 넥타이 윗부분에 손가락을 걸며
속삭였다.

“자고 갈 거지?”

***
“흐, 잠깐…….”

푹신한 침대에 뒤통수가 닿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그는 내 턱을 부여잡고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입술 틈새를 간지럽히고, 거부할 새도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으응.”

향긋한 페로몬은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운 뒤였다. 누구 것인지 모를 두근거림 탓에 온몸의 피가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의 혀를 쪽쪽 빨다가,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손으로 꾹 움켜잡았다.

“……하아.”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정신이 혼미했다. 머릿속이 녹진하게 풀려서, 오로지 권이도 하나만 바라게 됐다.
언제부터였더라. 자고 가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던 그때였나. 아니면 권이도가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을 때였나.

“아, 흣…… 으으…….”

느릿하게 미끄러진 입술은 쇄골을 지나 가슴께에 닿았다. 우리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탓에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발기한 성기가 자꾸만 그의 것과 닿았고, 씻으면서 풀어 준 뒤는
흥건할 만큼 젖은 상태였다.

“아……!”

그가 앞니로 톡 불거진 유두를 깨물었다. 근래에 항상 못살게 군 터라 조금만 건드려도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아파하는 걸 기가 막히게 아는 권이도는, 금세 나를 달래듯 혀끝으로 튀어나온 돌기를
살살 건드렸다.

“흐응…….”

그가 건드리는 모든 부위가 성감대가 된 기분이었다. 입술이 지분거리는 가슴도, 손끝으로 간지럽히는


허리도, 그리고 다른 손이 파고든 허벅지 사이도.

“앞이고 뒤고 다 젖었네…….”

“……으응, 아, 거기…….”

커다란 손이 내 성기를 살짝 그러쥐었다. 내가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닌데, 그의 손이 워낙 큰 탓에 한


손으로 쥐면 사이즈가 꼭 맞았다. 모양새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훑은 그가 엄지로 귀두를 살짝 문질렀다.

“흐읏……!”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 그가 가슴 윗부분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허리를 간지럽히던 손이 내 허벅지를 붙잡아 제 옆구리에 단단히 고정했다.

“……하아, 얼른.”

나는 어깨를 붙잡았던 손으로 목과 이어진 부분을 어루만졌다. 늘 일하기 바쁜 사람이 몸은 어찌나


좋은지. 만지는 부분마다 보기 좋게 근육이 붙어 있었다. 피부는 부드러운데, 감촉은 단단해서 손으로 만지다
보면 그 촉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른 넣어요…… 응?”

“보채지 말고.”

그는 간지럽게 웃으며 내 코에 코를 문질렀다. 그러는 저야말로 눈에서 이미 이성이 날아갔는데 말이다.


온몸에 손자국을 낼 것처럼 조몰락거리던 권이도는 뺨과 귀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하반신을 바짝 밀착했다.

“……하아.”

몇 번이나 넣어 본 것인데, 이 상황에서는 항상 긴장됐다. 그가 내 다리를 붙잡고 회음부에 귀두를


문지르는 바로 지금이. 질척거리며 젖은 입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듯하게 벌어지는 그 감각이.

“아, 흡…….”

“……큿.”

둘레가 조금만 작았어도 이렇게 버겁진 않을 것이다. 그의 페로몬에 취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중인데도
그가 내 안을 파고드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두툼한 귀두가 좁은 내벽을 억지로 벌리고, 가장 굵은 부분을
지나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쑥 삽입됐다.

“아, 흐……!”

미끄러지듯 들어온 성기는 내가 느끼는 부분을 긁으며 안쪽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쾌감에, 사정감이 팡 하고 터지고 말았다. 내가 덜덜 떨며 정액을 배출하는 동안 권이도는 느른한
숨을 뱉으며 내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흐으.”

“항상 생각하지만…….”

그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께를 문질렀다. 질척거리는 정액이 피부에 뭉개졌다. 깊이 삽입한 그대로 허리를
둥글게 돌린 그가 흥분에 젖은 눈을 깜박였다.

“잘 느낀다니까.”

“……하읏!”

권이도가 크게 허리를 쳐올렸다. 덜컹이며 흔들리는 몸이 하릴없이 움찔거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끙끙 앓자, 그가 배앓이 하는 아이를 달래듯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

“착하지…….”

“아아, 흐…….”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배가 볼록 나오지 않았을까. 거의 배꼽까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으니, 아마 내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가물가물 실눈을 뜨자, 그가 내 양 눈두덩에 입을 맞춰 왔다.

그리고 깊이 삽입됐던 성기를 천천히 뒤로 물리기 시작한다.


“……하으!”

푹! 안쪽이 거칠게 꿰뚫렸다.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게 또 아프다기보단


지나치게 좋아서, 방금 사정한 성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흐으, 흣, 아…… 흐응…….”

권이도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크게 움직여 놓고, 그다음엔
감질날 만큼 느린 움직임이었다. 아마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러나 본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미칠 지경이었다.

“……더, 흐, 빨리. 얼른…….”

칭얼칭얼 그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내가 먼저 하반신을 들썩이고 그의 허리에 다리를 꾹 감기도 했다.
그가 빠져나가는 게 너무 아쉬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바짝 몸을 밀착했다.

“……후.”

그는 억눌린 숨을 토해 내며 내 등을 끌어안았다. 미치겠다는 듯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내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를 만나는 동안 서서히 양이 늘어난 탓에, 이제는 어느 정도 평범한 오메가만큼 페로몬을 낼
수 있게 됐다.

“감당 못 할 거면서 맨날 조르지.”

경고성 짙은 한마디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난번에 한 번 몸을 섞었을 때, 몸이 달았던 내가 그를


자극했다가 다음 날 걷지도 못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별거 하지도 않았고, 그냥 장난처럼 호칭 한 번 바꿨을
뿐인데 말이다.

“으응, 거기…….”

하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 아닌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긴 했지만, 그 당시엔 무척이나
좋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더 빠르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아, 자기야…….”

“…….”

그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깊이 들어왔던 성기가 더 커다래진 느낌이었다. 아플 정도로 빠듯한


감각이었으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내일 주말인…… 아, 흐윽!”

퍽! 내리찧는 듯한 쾌감이 온몸에 일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할 만큼 거센 움직임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래, 자기야. 내일 주말이지.”

- 다음 화에 계속
104 화. A La fin de La Memoire(3)

그 말이 시작이었다. 비 오듯 쏟아진 페로몬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아, 잘못


건드렸나. 그런 후회도 잠시, 그가 또 한 번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아……!”

발가락을 있는 힘껏 오므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간절히 이불깃을 붙잡았다. 파드득 튀어 오른 몸을


어르고 달래며 그는 자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못 걸으면 내가 안고 다닐게.”

“그게…… 힉!”

휙, 다리가 들어 올려졌다. 내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그가 한쪽 어깨에 발목을 모두 걸치게 했다.


각도가 바뀐 탓에 꼬리뼈가 찌르르 울려서 나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헐떡거리는 신음을 내질렀다.

“……흑, 아, 으, 하읏!”

철퍽거리는 소리가 외설스럽게 울렸다. 그는 내 종아리에 뺨을 문지르며 다짜고짜 속도를 높였다. 다리가
붙잡힌 탓에 도망칠 수조차 없었고, 그저 상체를 비틀며 앓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흐, 하윽, 너무, 빨…… 아흐응……!”

“네가…… 후, 빨리, 해달라며, 응?”

“아흑, 흣, 흐…… 아!”

“너무 조이지, 하아, 말고…….”

한마디 할 때마다 그의 것이 깊은 곳을 건드렸다. 깊숙이 밀고 들어온 성기는 내가 느끼는 부분을 마구


짓눌렀다. 그가 무게를 실어 푹, 푹, 내리찧을 때마다 지독한 고양감이 온몸을 감쌌다.

“흐으…….”

머리가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분명 맨정신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처럼 정신이 몽롱해서, 팡팡 터지는 쾌감만이 온몸 가득 차올랐다.

“권이도, 흣, 권이도 씨…….”

“……그게 아니지, 세진아.”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다리를 옆으로 내려 주고 내 위로 상체를 숙였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그가 내 옆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자기야, 라며.”

“……흣, 으.”
반쯤 들어온 성기가 둥글게 움직였다. 그대로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오더니, 비비적비비적 내벽을
헤집는다. 배가 결리는 것 같아서 몸을 웅크리자, 그가 내 눈가를 살짝 혀로 핥았다.

“울지 말고.”

어느샌가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어리광을 부리듯 키스를 졸랐다.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핥자 권이도가 내 혀를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으응…….”

쪽, 그가 내 혀를 빨아들였다. 이내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머금더니 페로몬과 함께 뜨거운 숨결을


넘겨준다. 미처 받아 마시지 못한 타액이 옆으로 흐르고, 그가 내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

나직이 터진 신음이 달짝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권이도는 턱이고 입술이고 할 것 없이 입을 맞추고


고개를 움직여 귓불을 쪽쪽 빨아들였다. 그러면서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기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방울이 희열을
담고 흘러내렸다.

“좋아, 흐…… 하으응!”

“하, 씹. 진짜…….”

그가 흥분하는 포인트는 알 만하다가도 가끔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엔 내가 우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이럴 땐 내가 눈물을 흘릴수록 더 반응하곤 했다. 각인한 이후 서로의 감정을 너무도 잘 아는 터라, 지금 머리가
뜨거워질 만큼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기야, 거기, 응, 흐으…….”

거기에 더 불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음 섞인 목소리로 불렀을 뿐인데 배 속을 가득 채운 성기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까득 소리가 들릴 만큼 이를 악문 그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푹, 푹,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

찰방, 차오른 쾌감이 일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아래가 얼얼할 만큼 빨라진 움직임은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삽입을 이어 가며 배꼽 아래쪽을 마구 긁어내고 있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버거웠으나, 아찔한
쾌감도 함께였다.

“……큿.”

푹! 허리를 움직인 권이도가 몸을 웅크렸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내리누르고, 노팅할 것처럼


한계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내가 울컥 정액을 배출함과 동시에, 그 또한 내 안쪽에 길게 파정했다.

“흐…….”

우성 알파의 사정량은 평범한 남자들보다 많은 편이라고 했다. 몇 번이나 받아 본 것이었으나, 배 속이


가득 차는 감각은 영 낯설었다. 그는 느른한 숨을 내뱉으며 사정감을 즐기다가 여유롭게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하아, 흐읍…….”
섹스가 좋은 건, 행위의 쾌감뿐만 아니라 온전히 느껴지는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권이도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내게 입을 맞추는 것처럼.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마음껏 만끽하자,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그는 내 혀를 집요하게 옭아매며 키스를 이어 갔다. 말캉한 혀가 입 안 곳곳을 건드리고 여린 점막을


문지르며 양껏 서로를 탐닉했다. 여전히 그가 내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허리를 움찔거릴 때마다 굵은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아.”

느리게 떨어진 입술에 길게 실타래가 늘어졌다. 나는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 일부러 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였다. 별안간 아랫입술이 잡아당겨진 권이도가 눈가를 찌푸린 채 헛웃음을 흘렸다.

“체력이 남나 보네.”

“조금……?”

사실은 거의 바닥났지만, 부러 여유를 부리며 장난을 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가물가물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귀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곤 땀에 젖은 머리를 조심조심 넘겨 줬다.

“잘됐네요. 내일 주말이니까.”

“……꼭 이럴 때만 존댓말 쓰더라.”

이 사람 뒤끝이 기네. 먼저 나가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참 열심히 돌려 하고 있다.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가만가만 나를 쓰다듬다가,
뒤늦게 허리를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으…….”

굵은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들어올 때보다 더 이상한 느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아래를
바짝 조이고 말았다. 아직 발기가 풀리지 않았던 기둥이 제자리에 문득 멈춰 섰다.

“빼지 말라고?”

“아니…….”

그 또한 웃음기가 서린 걸 보니 농담으로 한 말인가 보다. 내가 힘없이 고개를 젓자, 그가 내 배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굵은 성기가 모두 빠져나간 곳에서 묽은 정액이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불쾌하진 않았는데, 조금 민망한 기분이긴 했다. 실례를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몸을 섞는 건 많이 익숙해졌는데, 뒤처리만큼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다.

“반만 싸면 좋을 것 같은데…….”

“……?”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충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자, 싱겁다는 듯이 시선을 돌린다.
문제는 여전히 젖어 있는 입구에 이번엔 손가락 두 개가 쑥 들어왔단 것이었다.

“……잠까, 안…….”

찌걱찌걱, 손가락이 안쪽을 헤집었다. 몸을 돌려 도망가려고 했으나, 발목이 단단히 잡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나를 엎드리게 한 권이도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엄지를 밀어 넣었다.

“흣, 내가 이거 싫다고……!”

“싫어도 해야지.”

주르륵, 정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바들바들 허리를 떨었다. 무릎을 세우고
엉덩이를 들어 올린 자세는 지나치게 무방비한 기분이 들었다.

“안에 두 번 싸면 배부르잖아.”

특유의 우아한 음성이 이토록 얄미울 수 있을까. 단조롭게 말한 권이도가 구석구석 정액을 긁어냈다.
이미 말랑해진 내벽을 손가락으로 꾹꾹 문지르며 제 흔적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굳이 그걸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텐데. 어떤 이유를 붙여도 이게 반쯤은 그의 취향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진짜.”

변태 새끼도 아니고.

귓가가 홧홧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무것도 싸지 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럴수록 뻐끔거리는 구멍만 더
잘 보일 뿐이었다. 기어코 그는 모든 정액을 빼낸 다음에야 느릿느릿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흣…….”

다시 말랑한 귀두가 엉덩이 사이에 닿아 왔다. 엉덩이골을 지나 입구를 꾹 눌렀다가, 미끄러지듯 고환


아래까지 쭉 문지른다. 딱히 체위를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 자세로 있으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줄어들었다.

“……권이도 씨.”

“응.”

그가 나긋이 대꾸했다. 이야기하라는 듯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느긋하게 상체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가슴께를 덧그리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위에서 할게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걸 반쯤 후회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위로 올라간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몸 곳곳을 훑어봐서가 아니라, 그 커다란 물건을 내가 직접
넣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아.”
호기롭게 무릎을 세우고 앉은 것까지는 좋았다. 손을 뒤로해서 그의 성기를 고정하고 귀두에 입구를 맞춘
것까지도 괜찮았단 말이다. 위에서 하겠다는 말에 권이도가 멈칫하는 순간 알아야 했는데. 설마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흣…… 크기 좀, 작게 못 줄여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조물조물 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는 발기한 성기를 톡


건드린다. 장난감을 만지듯 까딱거린 그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정세진 씨, 그러다 날 새우겠어요.”

아래를 세운 사람치곤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눈동자엔 이미 초점이 나갔는데, 내가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게 조금 얄미워서 손끝으로 그의 성기를 문지르며 하체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응…… 조금만 도와주면…… 쉬울 것…… 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하반신을 들썩였다. 허리를 빳빳이 곧추세우자, 이번엔 양손으로 내 골반을


붙잡는다. 내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권이도가 팔 힘으로 나를 꾹 내리눌렀다.

“아흑……!”

푹! 안쪽이 깊게 꿰뚫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의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넣고 있었는데, 자세가 바뀌니 또 새롭게 버거운 기분이었다.

“흐, 잠시만…….”

“세진아, 내가…….”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눈을 깜박이는 얼굴에 이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숨을 몰아쉰 그가 반쯤 일어선 내 몸을 다시 붙잡았다.

“인내심이 별로, 안 좋아서.”

“……아, 흡!”

또다시 푹, 배 속이 가득 찼다. 무게가 실린 터라 자칫 목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있으면 내가 조절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망갈 곳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흐으, 흣…….”

그는 나를 단단히 고정한 채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를 따라 하반신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의 상체에 손을 짚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이따금 몰아치는 쾌감에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했다.

“하아, 흐, 흐응…….”

“……하.”
나를 붙잡았던 손은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상체로 옮겨갔다 튀어나온 유두를 손톱으로 튕기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고 은근히 문지른다. 잡을 것도 없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주무르는가 하면, 갈비뼈를 지나 배꼽 근처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내가…… 후, 말했던가.”

“……흣, 뭐를?”

“좀…… 더럽히고 싶은 인상이라고.”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몹쓸 짓을 하고 싶다고 그랬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그가 내


뒷덜미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키스해 줘, 얼른.”

바라는 것도 많지. 여기저기 날 만지고 있으면서 이제는 입술까지 내어 달라고 한다. 그게 또 싫은


요구는 아니라서 그의 얼굴 옆에 손을 짚고 입술을 맞물렸다.

“흡, 흐응…….”

그는 무릎을 세우고 조금 더 편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 날개뼈를 덧그리며 푹푹


내벽을 자극한다. 빠듯이 벌어진 입구가 기둥을 바짝 조여서, 그가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움을 내비쳤다.

“……흐.”

끝내, 나는 그의 혀를 깨물며 또 한 번 사정했다. 토끼처럼 싼다는 말에 공감하고 싶진 않은데. 그와


섹스하다 보면 절정에 다다르는 횟수가 내 쪽이 훨씬 많긴 했다. 체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테크닉의 문제인지.
어느 쪽이건 간에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아, 흣, 그, 아……!”

그런데 사정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그가 내 성기를 붙잡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하반신을 들썩여서,


전립선이 자꾸만 꾹꾹 짓눌렸다. 그가 한껏 예민해진 귀두를 문지르는 바람에 눈앞에 번쩍번쩍 별이 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싫어, 흣…… 그만, 아, 흑……!”

배뇨감이 일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미 열락에 취한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그의 상체를 짚었으나, 그 역시 내가 싸지른 정액 탓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 아……!”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고양감이 가슴께를 크게 부풀렸다. 그가


밭은 숨을 몰아쉬는 소리, 그리고 질척거리며 성기가 안쪽을 헤집는 소리, 상체를 무너뜨린 내게 숨결처럼
속삭이는 소리까지.

“쉬이…….”

“……!”
발기가 풀린 줄 알았던 성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래를 바짝 조이자, 그 또한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서서히 배가 부르는 느낌과 함께 성기 끄트머리에서 울컥, 물이 터져 나왔다.

“……흐.”

투명하고 말간 액체는 결코 정액이 아니었다. 참으려고 해서 참아지지도 않았고, 억지로 막는다고 해서


막힐 무언가도 아니었다. 울컥, 울컥, 새어 나온 무언가는 내 상체는 물론 권이도의 몸까지 적시고 흘러내렸다.

“…….”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시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상체를 일으켰다간 내가 싸지른 액체를 권이도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 못 하고 얼굴을 붉히는데, 그가 내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잘했어.”

기시감이 느껴지는 칭찬이었다. 지난번에도 분명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다. 이 사람 또 일부러


그랬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울컥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 변태 새끼.”

기어코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만든다. 내가 그의 어깨를 콱 깨물었지만, 그는 조금 움찔할 뿐 나를


밀어 내지 않았다. 뒤통수를 지나 뒷덜미를 주무르며 내 정수리에 입술을 내리눌렀을 뿐이다.

“침대에서 하는 욕은 애교라니까…….”

“……흐읏!”

다시금 안쪽에서 성기가 부풀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대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어떻게든 해보고자
쇄골까지 깨물었으나, 오히려 그 행동이 자극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하으, 흡, 아…….”

“……더 깨물어도 돼.”

깨물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깨물라는 말처럼 들렸다. 마음껏 상처 내도 된다고 너그럽게 허락했던
그때처럼.

나는 그의 위에서 야금야금 온 상체에 흔적을 남겼다. 그가 내게 그러듯 세게 빨아들였다가, 이따금 힘


조절을 못 하고 잇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역시나 권이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하, 세진아.”

이제는 그 부름이 나를 갈구하는 목소리라는 걸 안다. 애정 어린 음성이 주는 만족감은 내가 늘 바라고


갈망하던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내게 온몸을 내어 주고, 내가 부리는 심술을 전부 받아 줬다.

그렇게 우리는 밤새 서로에게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드러지게 핀 페로몬은 아주 오랜만에 그의


방 안을 자욱하게 물들였다. 무리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몸을 섞은 탓일까. 다음 날, 권이도는 정말 온종일 나를
안고 다녀야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105 화. A La fin de La Memoire(4)

온전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은 그 어떤 약물보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곤 한다. 내가 가진


만성적인 결핍은 대개 상실에서 오는 박탈감과 비슷했다. 원인이 해결됨과 동시에 자연스레 해소될 문제들이었단
말이다.

권이도와 만난 이후, 나는 수면제를 완전히 끊었다. 상담은 아직도 다니고 있지만, 횟수는 세 번에서 두
번으로 줄어들었다. 의사는 호전되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며 조만간 그 외의 약도 끊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정말 낫긴 낫는구나. 나는 내가 아픈 것도 몰랐는데 어느샌가 회복세에 들어서고 있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만큼이나 우리의 연애 전선과 내 건강 역시 순조로웠다.

그리고 그건, 그가 선물해 내가 일군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Sejin, 연말 맞이 컬렉션 출시...선호와 손잡아」

「퍼퓸 코스메틱 브랜드 ‘Sejin’, 수익금 기부」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 ‘Sejin’에서 출시한 향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호의
힘일까, 평소보다 홍보 효과 역시 뛰어났다. 자연스레 만족할 만한 수익이 뒤따랐기에, 기껏 투자한 권이도에게
누를 끼칠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Sejin’은 봄 시즌을 맞이할 새로운 컬렉션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이 끼어 있었고, 지난번과는 달리 모든 제품 개발에 내가 직접 참여했다. 그간 조향 실력이
많이 는 덕에 내 아이디어로만 구성된 제품도 몇 개 있었다.

“저희 ‘Sejin’의 세 번째 행사에 참여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하여,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해 가지게 된 론칭 행사. 그와 사귀게 된 이후로 처음 하는 행사이자,


앞으로 분기마다 치르게 될 이벤트의 이번 콘셉트는 다름 아닌 꽃이었다. 묵직한 향이 많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엔 가볍고 잔잔한 향을 베이스로 하는 향수가 많았다.

“저는 ‘Sejin’의 대표 정세진입니다.”

내가 인사하자마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이르지만, 행사는 명성호텔 영빈관 야외 정원에


마련됐다. 향수마다 모티브로 삼은 생화를 한 송이씩 놓아둬서, 천연 향료로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향기를
구현했는지 어필할 예정이었다.

“이 다섯 번째 제품은 수익의 일부를 미혼모를 비롯한 한부모 가정에게 기부하는 형태로…….”

벌써 세 번째 행사이기 때문일까, 마이크를 쥐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그리 떨리지 않았다. 늘 왠지 모를


긴장감이 명치를 옥죄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두근거리는 설렘이 더 커다랬다. 정체 모를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나서,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들떠 있었다.

‘이번엔 꼭 갈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나와 연인 사이가 된 권이도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나를 놓아줄 필요도, 우리의 관계를 끝낼 필요도 없이, 그저 직원들과 만들어 낸
결과를 축하해 주겠다고.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간단한 인사말을 마무리하고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줬다. 초대장을 배부해 초청한 기업인이 반,
그리고 추첨을 통해 선정한 일반인이 반. 그중에 아직 권이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오려나…….

이번만큼은 오겠다는 말을 반드시 지킬 터였다. 지난 두 번의 행사는 그냥 지나쳤지만 그때와는 관계도


다르고 상황도 달랐으니까.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공개하진 못해도 사업 파트너로서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겠지.

나는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손님들을 응대하며 눈으로는 권이도를 찾았다. 나름대로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누구 찾으세요?”

“……아.”

이희나였다. 기장이 짧은 코트에 회색 슬랙스를 입은 그는 하얗고 부들거리는 니트와 퍽 잘 어울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글생글 웃은 이희나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저도 향수 하나만 추천해 주세요.”

어차피 매번 내가 모든 제품을 선물하곤 하는데.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그를 데리고


향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꽃과 향수를 번갈아 시향하게 해주자 이희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건 향이 되게 세진 씨 같네요.”

자스민을 베이스로 한 가벼운 향수였다. 언뜻 장미 향이 나는가 하면 마지막에 남는 잔향은 코튼 계열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까 그 향수는 출시 안 하세요?”

“그 향수요?”

“왜, 작년에 세진 씨가 한창 만드시던 거요.”

“……아, 그거.”

작년이라는 말에 생각나는 향수가 있었다.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에 온종일 만들곤 했던 나무 냄새가
나는 향수. 이희나에게 조언까지 구했던 터라 그 또한 기억하고 있나 보다.
“그건 주인이 따로 있어서요.”

권이도에게 선물한 향수는 아직까지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원래는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조용히
그 제품을 묻어 두기로 했다. 그냥 사소한 이유였는데, 다른 이들이 그의 페로몬을 아는 게 싫어졌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독점욕이었을지언정, 내게 그 향수의 주인은 오로지 권이도뿐이었으니.

“맞다. 세진 씨, 조만간 시간 좀 내주세요.”

이희나는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문득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순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청첩장 드릴게요.”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이태성은 내게 티 한 번 내질


않았는데, 벌써 그럴 때가 된 모양이다. 퍽 놀라운 소식이었고, 듣는 나조차 기분이 좋아졌다.

“축하해요. 꼭 시간 낼게요.”

“세진 씨 덕분이죠.”

그는 자세한 건 나중에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걸음을 옮기기 전, 입구에 서 있던
이태성에게 남몰래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또 은근슬쩍 놀려야겠네. 그리 생각한 내가 다른 손님들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

어디선가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또렷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자, 사람들 틈에서 새빨간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서서히 차오르던 기대감이 한순간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고,
동시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설렘 역시 고스란히 전해졌다.

“…….”

“…….”

그는, 한 손에 장미꽃을 든 채 정갈한 걸음걸이로 내게 걸어왔다. 언제였더라. 약혼식 날 새하얀 꽃잎


위를 걸어오던 그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입가엔 엷은 미소를 띤 채로. 그저 올곧게 걷고
있을 뿐인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세진 대표님.”

기품 있는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는 넌지시 장미꽃을
내밀며 시선을 맞춰 왔다. 두근, 두근,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이번 론칭도 축하드립니다.”


“……하하.”

어색한 웃음은 긴장을 푸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꽃을…… 사 오실 줄은 몰랐는데.”

행사에서 꽃을 받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종종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선물하곤 했다. 대부분 김 실장이 대신 옮겨 줬지만, 이 꽃만큼은 아마 끝날 때까지 내 품에 있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권이도 전무님.”

그는 내 말에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꽃과 함께 스친 손가락이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졌다.


눈을 내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그가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으며 이야기했다.

“향수 설명 좀 해줄래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권이도는 행사장 내부에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절반 정도는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보기 위해 기회를 노렸고, 나머지 절반은 연예인 보듯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워낙 유명 인사인데다
그 외모가 뛰어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 모든 사람을 무시한 채 오로지 내 옆에만 붙어 있었다. 내게 모든 제품의 소개를


듣고 그걸로 모자라 별 시답잖은 질문까지 건넸다. 향수를 섞어 뿌려도 되냐느니, 대표님이 추천하는 제품은
뭐냐느니. 그저 수작에 불과한 말들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대답해 줬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두 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모든 행사가 끝났을 때,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묵묵히 서 있는 권이도를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직원들의 적응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황당한 웃음을 흘리는 와중에 직원 하나가 퍼뜩 나를 불렀다.

“아, 맞다. 대표님!”

나는 물론 권이도 역시 그 직원을 돌아봤다. 우르르 몰려 있던 직원들이 저마다 수군수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의아해하는 찰나, 그중 한 명이 들뜬 얼굴로 씩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

생일? 그렇게 물을 시간은 없었다. 그 축하를 시작으로 줄줄이 다른 직원들까지 한마디씩 거든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내일 즐겁게 보내세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요!”
나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던가. 까맣게 잊고 있던
생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래서 곧장 반응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생일 아니세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언제 신이 났냐는 듯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뇨, 맞습니다. 내일 생일이에요.”

평소에도 그러긴 했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마다 해신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도 나조차 까먹는 생일을 항상 기억하곤 했다.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에이,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들은 금세 기분 좋은 얼굴로 한 번씩 더 축하를 건넸다.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장난을


치다가 옆에 선 권이도를 보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직원이 자리를 떠났을 때, 권이도는 미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 있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자 권이도가 한술 더 떠 깍지를 껴왔다. 올곧게 나를 향하는 시선엔 길게 늘어진 노을이 부드럽게 스며
있었다.

“데려다줄 거죠?”

***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그랬든 권이도와 나 둘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내 오피스텔로 향했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어둑어둑하게 변해 있었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 이번엔 권이도가 먼저 내
손을 맞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날 한잔해야 되는데…….”

기분은 딱 취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즐겁게 마시는 술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버린 터라 이럴 때면


이따금 회식이 그리웠다. 진상을 부리는 상사가 되고 싶진 않은데, 이러다가 매일 술자리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한잔할까?”

“술을?”

“전에 가져다 둔 와인 있을걸.”

권이도는 마치 제집처럼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몇 번 있던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나. 문득 떠오른 생각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와인이 있었나?”

“아마 찬장에…….”

그가 내 집에 들르기 시작한 이후, 집에 이런저런 물건이 많아졌다. 원래는 가구조차 몇 개 없었는데


지금은 아예 권이도의 슈트 케이스가 몇 개씩 걸려 있을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여분 이불까지 생겼고, 그의
말대로 찬장엔 와인까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 있었어요?”

“좀 됐지. 지난번에 선물로 들어온 거니까.”

몸체가 둥글게 빠진 레드와인은 일전에 그가 가져다 둔 것이라고 했다.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내가


지나가듯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다면서. 나는 기억조차 안 나는데 수납까지 알아서 해놓은 모양이었다.

“한잔하고 자면 되겠네.”

그 말엔 나도 모르게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 건너편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자다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는 와인을 한 손에 쥔 그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손을 내 쪽으로 뻗은 그가 왼뺨을 부드럽게


감싼 채 상체를 기울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입가에 쪽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내일도 주말인 걸 알아야지, 세진아.”

“…….”

불쑥 위기감이 엄습하는 경고였다. 목소리는 우아하고 나직했지만, 나는 아직도 지난주의 일을 잊지


못했다. 눈물이 날 만큼 좋은 행위였음에도 다음 날 감당해야 할 여파가 너무도 커다랗긴 했다.

권이도가 와인 잔(이조차 나는 집에 있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두 개를 꺼내고, 오프너로 능숙하게


와인을 땄다. 스크루를 밀어 넣고 잡아당기는 동작이 왜 그리 섹시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쪼르륵, 와인 잔을
채운 그가 잔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한 잔 받으셔야죠, 대표님.”

능구렁이 같게도, 정말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잔의 가느다란 부분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권이도 역시 와인 잔을 들어 내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 후, 우리는 도란도란 별거 아닌 일상 얘기를 하며 와인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중간부터는 식탁에


치즈가 놓였고, 그 역시 권이도가 미리 챙겨 둔 것이라고 했다. 이게 내 집인지, 아니면 그의 집인지. 이럴
거면 정말 살림을 합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 것 같다.

“졸려?”

“으응…….”
와인을 모두 비운 뒤엔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욕조에 몸을 담그게 해줬다. 그의 집에선 전부
고용인이 해주던 건데. 권이도가 직접 수발을 들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가벼운 손장난과 함께 샤워를
마쳤고, 나란히 가운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권이도 씨.”

조명 하나 없는 방 안엔 어렴풋이 권이도의 얼굴이 보였다. 내게 팔베개를 해주고 등을 다독이던 그가


흘긋 나를 내려다봤다. 샤워를 하며 두 번쯤 사정한 탓에 노곤하니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내가 전에 알려 줬던 불어 기억나요?”

“불어?”

내가 묻는 말에 그가 나긋이 되물었다. 밤이라 그런가,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냥했다. 지금 풍겨 오는


페로몬처럼 긴장이 잔뜩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달 속에 있다고…… 그랬던 거.”

우리가 처음 입을 맞췄던 날의 기억이었다. 그가 내 불어 실력을 알아보겠다고, 작은 시집을 해석시켰던


그때. 현실 감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부드럽게 입을 맞췄던 그날의 일 말이다.

“그거, 정신이 딴 데 팔렸다는 의미래요.”

생각보다 로맨틱한 뜻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아마 그때의 우리처럼


무언가의 홀렸다는 뜻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몽롱한 상태와는 조금 다르다고. 그리 말하기도 전에 권이도가 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너 취했어.”

입술이 깃털처럼 스쳤다. 간지러운 감각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알딸딸한 정신이 몽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이야기했다.

“자기도 같이 마셨으면서.”

“또 자기라고 하네.”

“……이건 그 자기가 아니지.”

아무래도, 나를 놀리는 것 같다. 그 호칭을 누구보다 좋아하면서, 내가 맨정신엔 불러 주지 않으니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사근사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야.”

“…….”

그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픽 웃는 걸 보니 그때처럼 이성이 날아갈 정도는 아닌가 보다. 하긴,


함께 씻으면서 그 또한 한 번은 사정했었지.
“내가 어릴 때 얘기 들을래요?”

술기운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냥 무작정 계속해서 떠들고 싶은 생각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지만, 그도 나도 멀어지진 않았다.

“응, 얘기해 줘.”

그는 일부러 입술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이야기했다. 각인으로 전해지지 못한 기억. 그리고 아마 내


입으로 말하지 않은 이상 평생 몰라야 할 내 어린 시절. 막연히 털어놓고 싶은 과거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두서없고 재미없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 나를 다독이며 차분히 귀를 기울였을 뿐. 나는 하염없이 내 과거를 늘어놨고,
그러다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었다.

- 다음 화에 계속

106 화. A La fin de La Memoire(5)

눈을 떴을 땐, 어슴푸레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술기운이


많이 날아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가물가물 눈을 깜박이자, 머리맡에서 권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깼어?”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반쯤 눈이 감기고 있는데, 여전히 말끔한 얼굴의 권이도가 보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가 자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잤어요?”

“자다 깬 거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내놓았다. 우리가 함께 지낸 밤이 몇 번째인데. 아무렴 내가 그걸


믿으리라고.

“팔 저리겠다.”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권이도가 나를 끌어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머리칼에 얼굴을 문질렀다. 내내 붙어 있던 터라 뜨끈뜨끈한 체온이 한가득 전해졌다.

“이대로 다시 자.”

“…….”

아무래도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나 보다. 그래서 그냥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조금 빠른 듯한 박동이 멀어졌던 잠기운을 스멀스멀 불러왔다.

“……그러는 권이도 씨는 왜 안 자고.”

그러나 나는 곧장 잠을 청하는 대신 그에게 말을 붙였다. 자기 전까지 수다를 떨어 놓고, 또 잠이 드는


게 아쉬워졌기 때문이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나. 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날.

“그냥, 잠이 안 와서.”

저 대사는 내가 해야 되는데. 그리 생각하며 꾸물꾸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리에 팔을 감자 그가


조금 더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향수라도 뿌려야겠어요.”

“그것보단 네 페로몬이 나을걸.”

페로몬 좀 달라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나는 군말 없이 그에게 찬찬히 페로몬을 넘겨줬다. 옅은


꽃향기가 짙은 나무 냄새에 섞여들었다. 언제 기분이 가라앉았냐는 듯, 권이도의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

“…….”

한동안 숨소리만 들렸다. 잠들기 딱 좋은 환경이었는데, 오히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따듯한 체온이,
이따금 전해지는 두근거림이, 그리고 무언가 심란해 보이는 권이도가 신경 쓰였으니까.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슬쩍 입을 열었다. 물론 없는 궁금증을 억지로 끄집어낸 건


아니었다. 그와의 기억을 모두 되찾은 뒤에 문득 궁금해진 것이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무슨 기준으로 고른 거예요?”

우리가 다시 약혼했을 때, 권이도는 본인이 선택한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워 놨다. 기준이 없는 듯


보이지만, 분명 심사숙고해서 고른 사람들일 거다.

“김 실장님이나 이태성 씨, 그리고 이희나 씨…… 맞아, 그거 들었어요? 두 사람 결혼한대요.”

문득 떠오른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권이도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나직이


대꾸했다. 하긴, 이태성을 마주칠 일도 없는데 어딜 가서 들었겠냐마는.

“그래서 대답은?”

“…….”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권이도를 마주 보자 어둠 속에서도 또렷한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앞머리를 넘겨 준 그가 평소보다 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예전에…… 네가 누명을 쓰고 잡혀갔을 때, 널 빼달라고 부탁한 게 네 비서였어.”


“…….”

비서라 함은 김 실장인데, 그가 하는 말은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누명을 쓰고 잡혀갔을 때.


횡령 혐의로 수갑을 찼던 그 날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연락을 했더라고.”

권이도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그가 말하길, 김 실장은 다짜고짜 그에게 연락을 넣어
무작정 애원했단다. 내가 그런 게 아니니까 제발 빼달라고, 나중에 사례는 제대로 하겠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빨리 조치할 수 있었어. 그게 아니어도 빼 오긴 했겠지만, 아니었으면 하루 만에는 못 빼


왔겠지.”

“……김 실장님이 권이도 씨한테 연락했다고요?”

그의 입으로 듣고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나는, 김 실장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어서 끝내 날 놔버렸다고, 배신감을 느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더 충격적인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 회장에 관한 자료를 건네준 것도 그 사람이야.”

“…….”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던 부분을 권이도가 구태여 확인 사살시켜 줬다. 그냥


이해관계가 맞았다던, 김 실장의 목소리 위에 권이도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과거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김 실장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배신할 생각이었구나. 아니, 어쩌면 신의를 가지고 있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렸던 결론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모든 걸 버릴 각오였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팀장은…….”

권이도는 내가 충격받은 걸 알고도 곧장 뒷말을 이었다. 아마, 더 생각에 잠길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놀랐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원래 경호 팀장으로 있었는데 아랫놈들이 뇌물 먹은 거 뒤집어쓰고 그대로 잘렸지.”

“경호원이 뇌물 먹을 게 있어요?”

“왜 없겠어. 걔네만큼 비리를 많이 보는 사람도 드물 텐데.”

요령 없고, 융통성 없고, 핑계를 댈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직하니 한 길만 보고 걸어서,


누명을 썼을 때도 한마디도 못 했다고.

“그만두고 나가겠다는 거 데리고 온 거야. 적어도 헛짓거리할 놈은 아닌 것 같아서.”

사고 쳐서 좌천됐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래서 말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어 했었나 보다. 아마 내가 물어본다고 해도 사실을 알려 주진 않았겠지만.

“이희나라는 조향사는 과거에도 이 팀장 애인이었어.”

“…….”

오늘, 놀라운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싶다. 아무래도 다시 잠을 자긴 그른 것 같았다. 내가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흘리자, 권이도가 내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지.”

당신이 말하는 운명엔 우리 사이도 포함되어 있을까. 과거에도, 지금도, 같은 관계가 된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물론 그 끝은 다르겠지만, 이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또 궁금한 게 있어?”

곧장 자라고 할 줄 알았건만, 권이도는 나긋이 내게 질문했다. 내가 자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 또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권이도 역시 딱히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내가 생각해도 모호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했다. 마땅히 대답할 말도 없을 거고, 대략적인 이유는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과거의 모든 기억이 나와 관련된 증거였으니. 그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겠지.

“……각인이 안 풀려서.”

그런데 권이도는 아주 천천히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뱉었다. 이마를 콩 부딪치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가끔, 네 기분이 온전히 느껴질 때가 있었어.”

“…….”

각인이 안 풀렸다니. 그게 정확히 어느 시점을 이야기하는 걸까. 우리가 처음 각인했던 그때, 나는 그의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그 홀로 내 감정을 느끼던 각인이 설마 재회한 다음에도 이어졌던 걸까.

“……힘들었겠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정도였다. 차마 그의 상황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떠듬떠듬 아연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권이도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힘들어야지.”

“…….”

“널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모순되게도, 나는 권이도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도하곤 한다. 그가 진심으로 내게 속죄하려고


했다는 게, 그리고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적어도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날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처럼 느껴졌으니까.
“당신만 잘못한 거 아니에요.”

이 말을 조금 더 일찍 해줄 걸 그랬나. 더는 죄인일 필요가 없다고, 충분히 이야기해 줬어야 했는데


말이다. 내가 그의 속죄를 보며 안도하는 반면, 내게 소중한 사람이 힘들어하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건만.

“애초에 내가 그랬던 건…….”

권이정 탓도 있다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를 떠올리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권이도의 기억이 전해지는 바람에 함께 공유된 미묘한 찜찜함이.

“……권이도 씨.”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부름에서 뭘 느꼈는지 권이도가 맞닿았던 이마를 떨어뜨렸다. 나는 가만히


그를 마주 본 채 대뜸 이야기했다.

“권이정을 어떻게 했어요?”

매스컴에서는 권이정의 실종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권이경은 그를 찾는 듯했지만, 끝내 찾아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가족들 역시 선호그룹 장남을 포기했고, 그 기이한 상황 가운데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 사람한테…… 손을 썼어요?”

그와 각인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거다. 권이정을 떠올리자마자 느낀 기시감이 아니었다면 이 질문을


건넬 일도 없었겠지.

“죽이진 않았어.”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담담히 대꾸했다. 그 대답에 놀라지 않은 건, 나 또한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 죽을 각오까지 한 그가, 권이정을 가만히 놔뒀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그게 뭐야.”

그럼에도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가 정확히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말을


얹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헛웃음을 흘리는데 권이도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냥 잊어버려.”

“…….”

“네 몫까지 내가 기억할게.”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까. 그 맹목적인 애정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가 품을 내어


줄수록 더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맞추자, 그가 내 아랫입술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가벼웠던 입맞춤은 금세 농밀하게 변해 갔다. 먼저 입을 맞춘 건 나였지만, 조금 더 매달린 쪽은


권이도였다.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은 그가 내 혀를 문지른 것이다.

아…… 이게 이렇게 좋아도 되나.

키스가 이토록 만족스러운 행위라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니, 미리 알아 봤자 어차피 할 상대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상대가 권이도가 아니라면 이런 기분 따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조심조심 목 언저리를 주무르다가 새끼손가락으로 가운 깃을


건드린다. 슬그머니 내려온 손은 목 아래 볼록 튀어나온 뼈를 간지럽혔다.

“응…….”

이럴 때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앓는 소리가 나왔다. 숨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나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 그와 나 둘만 남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대로 딱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쪽, 입술이 떨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온화한 입맞춤이었다. 더 해달라는 듯이 그에게 입술을


문질렀지만, 권이도는 입을 맞춰 주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세진아, 우리…….”

왜일까. 그 서두를 듣는 순간 가슴께가 내려앉았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들어서. 뒷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음에도, 그게 나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같았으니까.

“결혼할까.”

“…….”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금 들은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귓가에 울렸다. 테이프를 느리게 감은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와중에 그가 속삭이듯 내게 이야기했다.

“남들한테 보여 주는 결혼 말고, 정말 너랑 내가 하는 결혼.”

아, 결혼을 하자고 그랬구나. 지극히 일상적인 어조로, 그렇기에 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명치가 결릴


만큼 바짝 긴장한 주제에, 이렇게 달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

“너랑 가족이 되고 싶은데.”

그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권이도가 해준 말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잠이 들기 전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다 했다고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던 숨겨 놓은 진심이.

‘……나는 그냥 가족이 가지고 싶었거든요.’

“…….”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냥 평범하게 대답하면 되는 말들이, 때로는 내게 과분할 만큼 벅찬 감동을


안겨 줬다. 그가 고심해서 건넨 제안들이,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마음에 짙게 남아 버렸다.
“……청혼을 반지도 없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부러, 무심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왈칵 모든 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게


눈물이건, 아니면 그간의 설움이건, 혹은 참고 참았던 어리광이건. 조금 너무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반지 있어.”

“…….”

“네 생일 선물도 있고.”

실은 내일 주려고 했는데……. 그리 중얼거린 권이도가 조심스럽게 내 눈가를 문질렀다. 분명 울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처럼. 그대로 눈두덩에 입술을 내리누른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

아, 이렇게 말하는 건 반칙인데.

이토록 기쁜 감사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매년 누군가가 생일을 챙겨 줬음에도 그 상대가


권이도라는 것만으로 감상이 남달랐다. 내게 소중한, 단 하나뿐인 상대가, 내 존재를 감사한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거 알아요?”

돌이켜 보면, 그때에도 같은 선물을 받았었다. 비록 기분은 지금과 달랐지만, 불러올 상황만큼은
비슷했을 테니.

“작년 생일에도…….”

말을 꺼내 놓고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목이 멨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모든 걸


삼켜 낸 뒤엔 그에게 딱 한마디만 해줄 수 있었다.

“당신이랑 결혼하란 말을 들었어요.”

‘세진이 너한테 혼사가 들어왔어.’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생일을 축하받지 못했다. 바빠서 까먹었으리라고 위안 삼았으나, 사실은 내


존재를 감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용하는 물건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직원들도 전부 부를래요.”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억지로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나를, 권이도는 굳이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은 채 숨을 죽였을 뿐.

“해신에 있는 기획팀 직원들이랑, ‘Sejin’ 직원들…….”


“…….”

“기자 말고, 딱 우리 사람들만 불러서.”

“…….”

“……그렇게 결혼해요, 우리.”

축의금은 받지 말자고 해야지. 장소는 영빈관이어도 좋지만, 장식은 조금 달랐으면 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꽃과 향수를 선물하고, 우리에겐 좋은 기억만 남기길 바랐다.

“그래.”

“…….”

“그렇게 결혼하자.”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엔 딱 두 가지만 떠올랐다. 하나는 ‘그럴 줄 알았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이었다. 아픈 과거건, 이루지 못한 미련이건. 아니면 그가 내게 바라던
최소한의 용서건.

“세진아, 내가…….”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는 내 마지막 결핍을 채워 주는 단 하나의 고백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같은


대답을 돌려줬고, 그에게 내 미래를 약속했다.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의 미래에 더는 아픈 날들이 없길 바라며.

그 기억의 끝에서 나는 너와 함께하려고 한다.

<그 기억의 끝에 본편 완결>

-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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