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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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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화
#평점(9.9) #출판사(블래스트) #19 세 이용가 #글 (계자) #2022.04.29 완결 #사건물 #강공 #연하공 #능글

공 #광공 #계략공 #재벌공 #미인수 #연상수 #계약 #조직 #냉혈공


* 주의 : 해당 작품에 나오는 범죄 묘사는 모두 허구이며 다소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묘사가 등장할 수 있으니 구매 시 참

고 부탁드립니다.

<아르바이트 하나 해>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백수현과 양호범.

<네 아버지 잡게 도와. 그럼 돈 줄게.>

아버지를 팔아 한몫 챙기려는 호로새끼와,

웃으며 남의 배에 칼을 꽂아 넣는 개새끼.

<진실이 궁금해?>

한배를 탔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두 사람.

그 끝에 남은 건 결국….


[공금.갠소.본문수정有.AngKeumToKi]
1화

“김정우.”

남자의 손이 왼쪽 가슴 명찰을 툭 건드렸다.

“와꾸 좋네. 너는 하룻밤에 얼마야?”

또, 시작이다.

“남자하고 자 본 적 없지? 내가 아다 떼 줄까?”

질 나쁜 농담에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이 키득대고 웃는다 . 언제나 그렇듯 오아시스에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 찾아온다. 예전엔 그래도 잘나가는 술집이었는데, 가게가 웬 양

아치 놈 손에 넘어가면서 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손님이 현저하게 줄었다.

수현은 1 년 전부터 오아시스에서 웨이터 일을 했는데 눈에 띄는 외모 덕에 종종 추파를

던지는 손님이 많았다. 주로 여자들이었으나 가끔 오늘처럼 남자가 수작을 걸기도 했다.

물론 잘생기면 얼마든지 만지라 하겠지 . 하지만 그런 것들이 보면 얼굴도 좆같이 생겼

다.

딱 이 새끼처럼.

보라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술에 취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수현의 몸을 훑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하니 손이 이번엔 엉덩이로 움직인다. 수현은 들고 온 술병을 테

이블에 내려놓으며 가식적으로 웃었다. 세팅을 마치고 물러나려는데 남자가 지갑을 연

다. 지갑 사이로 오만 원권 지폐가 가득이다.

순간 설렜다. 과하게 팁을 주는 손님이 있긴 한데….


내심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지갑에서 수표 대신 명함을 하나 꺼내 내민다.

“필요하면 연락해.”

수현의 시선이 명함에 가 닿았다. 엔터테인먼트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띈다. 처음 들어

보는 회사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기획사를 운영하는가 보다 . 개새끼. 엉덩이도 주물러

놓고 주려면 돈이나 주지. 미소를 띠며 양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건네받고 밖으로 나오는

데 기어코 엉덩이를 또 친다. 가 봐.

“네.”

문을 닫고 나온 수현은 손에 든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주문을 받으려고

걸어가는데 복도 끝이 소란스럽다. 돌아보니 신입 아가씨 하나가 벌게진 얼굴로 뛰쳐나

오고 이어서 실장이 가드를 데리고 들어간다. 술 취한 손님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쩌렁쩌

렁하게 울렸다.

무슨 년 무슨 년 찾아 가며 젖 좀 주무른 게 뭐 어때서 그러냐고 지랄이다. 방에서 나온

아가씨는 카운터 앞에서 담배를 하나 빼 물고 마담에게 하소연을 한다. 오늘따라 피곤이

몰려왔다. 낮에 자 둘걸. 괜히 이상한 꿈을 꾸는 바람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누군가 수현을 밀치고 지나간다. 펑퍼짐한 뒷

모습에 보라색 셔츠는 수현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명함을 준 그 새끼였다. 그새 취했는지

몸을 가누는 것도 힘겨워 보인다.

그가 비틀거리며 화장실이 아닌 엉뚱한 문을 열려고 하는 걸 어린 웨이터가 말렸다. 겨

우 화장실로 찾아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수현은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진상 손

님 때문인지 직원들의 관심이 모두 안쪽으로 쏠린 상태다.

저벅, 저벅, 화장실 앞으로 태연하게 걸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볼일을 마친 남자가

소변기 앞에서 바지를 추켜올리는 중이다. 만취하여 지퍼를 제대로 잠그지 못하고 연신

헛손질을 하더니, 에이 씨발. 하고 욕을 내뱉고 포기한다. 그러다 그는 수현을 발견했고

눈을 찡그리더니 이내 손을 까닥였다.

“와서 이그즘 잠가 바.”


발음이 뭉개지고 말끝이 늘어졌다. 초점 없는 남자의 눈을 응시하던 수현이 다가가서 지

퍼를 올려 줬다. 꼴에 또 비싼 팬티는 처입고 다니네. 단추까지 채워 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니 남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손짓과 함께 잠꼬대처럼 말을 내뱉는다.

“고마어. 팁을 줘야 하는데… 팁을….”

남자가 재킷을 벌리고 안쪽 주머니를 만지다가 휘청인다 . 수현이 남자를 부축하며 웃었

다.

“팁은 무슨. 괜찮습니다. 사장님.”

“아냐, 아냐. 주고 싶어서 그래.”

“에이 사장님. 마음만 받을게요.”

남자를 부축하며 화장실 밖으로 밀어냈다. 아니야. 내가 팁을 줘야 해. 팁을. 아 잠깐만.

손은 안주머니에 채 닿지 못하고 반질반질한 옷감만 쓸었다. 애초에 놈은 팁을 줄 마음

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줄 생각이었으면 엉덩이를 만졌을 때 줬겠지. 엉뚱한 곳으로 들

어가는 남자를 수현이 돌려세웠다.

“거기 아니에요. 여기로 들어가셔야죠. 여기.”

문을 열자 방 안의 풍경이 가관이다. 다들 취해서 물고 빨고 난리가 났다. 남자를 방으로

밀어 넣고 잽싸게 문을 닫는데 뒤에 동석이 서 있다 . 그는 수현과 친했고 이곳에 일자리

를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노려보고 서 있길래 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마지막 방에선 실장이 손님과 여전히 대거리 중이다.

수현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화장실로 가 조끼 안쪽에서 조금 전 빼낸 남자의 지갑을 꺼

냈다. 지갑의 입을 벌리자 오만 원권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 족히 백은 넘어 보인다. 현

금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보니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눈에 띈다.

아이는 남자를 하나도 닮지 않아 귀여웠다.

개새끼. 자식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사진 속 남자의 불독 같은 얼굴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남의 엉덩이를 만졌으면 값을 치러야지.”


변기통 뚜껑을 열어 남자의 지갑을 그곳에 던졌다. 뚜껑을 닫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동

석이 앞을 가로막는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수현은 태연하게 물을 틀고 손을 닦았다.

동석은 바로 옆에 와 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방금 지갑.”

수현이 물 묻은 손을 허공에 탁탁 털고 나서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 아무것도 없다는 뻔

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자 동석이 손을 뻗는다. 수현은 잽싸게 피했고 뒷주머니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 동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수현은 거기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빼

그의 이름표가 달린 주머니에 팁을 주듯 쑤셔 넣었다.

“입 다무는 조건.”

“야, 너!”

나머지 돈을 빼앗으려 하기에 그것을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 불룩해진 사타구니를 툭

툭 치며 수현은 씩 웃었다.

“가져가 봐. 대신 네가 내 자지 만졌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테니까.”

동석이 기막힌 표정을 짓는다. 수현은 밉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모른 척해. 왜 남의

일에 껴들어. 동석은 뒤따라오며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대체 왜 이래. 손님 돈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다 들키면 사장이 너 가만히 둘 줄 알아. 왜 정신을 못 차리

고….

그러든 말든 수현은 탈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밖이 조용하다. 옷을 벗고 돈을 꺼내

점퍼의 안쪽 주머니에 넣은 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 시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긴 하

지만 실장에게 미리 말을 했으니 사장도 이해해 줄 거다 .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 아닌

가. 사실 특별하다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지하 계단을 올라가 지상으로 나오자 숨통이 트인다. 10 월의 새벽은 꽤 쌀쌀했다. 점퍼

앞을 여미고 걷는데 거리가 비교적 한산하다 . 근처에 있던 택시를 잡아타니 졸고 있던

운전기사가 뒤를 본다.
“홍제동이요.”

한참을 달린 택시는 24 시간 마트 앞에 정차했다. 마트로 들어간 수현은 사과 하나, 배 하

나, 소주, 박카스,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던 담배를 계산하고 나와서 한참을 걸었다. 동네

어귀에 도착하니 비탈진 골목길이 나타난다.

그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이른 아침 출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수

현에게는 일이 끝나는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들을 지나쳐 파란색 대문 앞에 도착한 수현은 담벼락 안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살폈

다.

다행히 집주인 아줌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혹여 뛰쳐나와 밀린 방세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까 봐 발소리를 죽였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옥탑방으로 올라가는데 평상

앞에 시커먼 남자 하나가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단숨에 그를 알아본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욕을 뱉었다.

이 새벽에 수금이라니. 존나 부지런하네.

수현이 문 앞으로 걸어가자 남자가 수현의 뒤에 와서 선다.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는

데 잠금쇠가 뻑뻑하여 잘 돌아가지 않는다. 뺐다가 다시 입김을 불어 집어넣는데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백수현.”

남들은 잘 모르는 진짜 이름을 남자는 익숙한 듯 불렀다.

“얘기 좀 하자. 돈 받으러 온 거 아니야.”

수현이 돌아섰다. 사채업자가 돈이 아니면 뭘 받으러 온 걸까. 남자는 사채업자 김창남

의 부하였다. 김창남은 악명 높은 사채업자였으며 수현이 어디로 도망을 치든 귀신같이

알아내 쫓아왔다. 게다가 이자는 얼마나 또 빨리 불어나는지 꽤 많은 액수의 돈을 갚았

음에도 여전히 원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수현을 찾아온 사람은 그의 부하 도끼였다. 돈을 갚지 않으면 도끼로 손목

을 잘라 붙여진 별명이라는데, 가끔 그가 자른 손목이 몇 개 정도 되는지 그게 궁금하였

다.
“돈 아니면 뭐. 콩팥 이런 거라도 떼 가게?”

도끼가 무심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 수현이 비죽 웃으며 점퍼를 열고 셔츠를

들었다. 배와 옆구리 쪽에 흉터가 선명하다.

“그런데 어쩌지. 다른 새끼가 예전에 떼 갔는데.”

도끼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고, 접힌 종이를 하나 건넸다.

“너 아르바이트 하나 해.”

수현이 얼굴을 구겼다.

“씨발. 이젠 하다 하다 사채업자가 일자리 주선까지 해 주냐?”

“형님이 시킨 거야.”

사채업자가 구해 주는 아르바이트라니, 안 봐도 훤하다. 본 체도 안 하고 그냥 집으로 들

어가려는데 도끼가 종이를 수현의 점퍼에 구겨 넣는다.

“새꺄, 이거 잘하면 너 원금 반 까 준대.”

열쇠를 돌리던 손이 정지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무슨 알바?”

“가면 알려 줄 거야.”

말이 없자 그가 수현이 들고 있는 봉투를 본다.

“그럼 간다. 어머니 제사 잘 지내고.”

씨발. 노려보며 욕을 하는데도 도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내려갔다 . 그가 어둠 속으로 사

라졌고 혼자 남은 수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단출한 살림살이가 주인을 반긴

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밟는데 냉골이다. 차라리 밖이 더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수현은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싱크대 옆에 올려놓고 주머니를 뒤져 조금 전 받은 쪽지

를 꺼냈다. 구겨진 종이에는 전화번호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2화

제사상이라고 해 봤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밥 먹을 때 쓰는 작은 상에 사과와 배를 올

려놓고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고 나서 향을 꽂아 둔 종이

컵에다 담배도 같이 세웠다.

어디서 본 건 있어 종이에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벽에 붙인 뒤 두 번 절을 올리고 종이컵에

박카스 반, 그리고 소주 반을 채웠다.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생전에 이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남은 술은 온전히 수현의 몫이었다. 병 주둥이를 잔에 툭 부딪친 다음 벽에 기대앉아 담

배를 물었다. 좁은 방에 향내와 담배 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어둡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다. 수현은 퍼석퍼석한 시선으로 벽에 붙은 엄마의 이

름 석 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김순정. 이젠 불러 주는 사람조차 없는 이름. 사진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 집이 불타 버리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시간이 흘러 향은 까맣게 타들어 가 재가 됐다. 넋을 놓고 앉아 술을 마시며 줄담배를 피

우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누군가 보니 동석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곧바로

메시지가 들어온다.

[실장이 알아챘어. 화장실에 카메라 달아 놨대. 너 나오면 죽여 버린다고 난리야. 잠잠해

질 때까지 숨어 있어.]

쯧. 혀를 차고 그것을 그대로 옆에 내려놨다. 액정에 금이 가고 모서리가 깨진 휴대전화

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초라한 그것마저 온전히 수현의 것이 아니었다. 친구의 명

의로 만든 것이었고, 옥탑방 역시 명의는 다른 사람의 것을 사용하였다.


성인이 된 수현에게 남은 건 말소된 주민등록과 빚이었다 . 만져 본 적도 없는 돈. 문득 얼

굴 하나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며 담배 맛이 써진다.

“씹새끼….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욕을 하며 담배를 빈 종이컵에 던졌다.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는 차디찬 바닥에 몸을 웅

크리고 누우니 죽은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본다면 펑펑

울겠네. 기껏 살려 놨더니 이렇게 한심하게 살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지, 엄마?

[이거 잘하면 형님이 너 원금 반 까 준대.]

수현은 주머니를 뒤져 도끼가 주고 간 쪽지를 꺼냈다 . 구겨진 그것을 펴자 열한 개의 숫

자가 적혀 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 . 설마 사람 죽이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이 새끼

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데 겨우 그깟 걸로 빚을 탕감해 줄 리가 없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던져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 번호를 그대로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잠시 뒤 신호가 간다 . 그러나 상대는 받지 않았다. 역시 너무 이른 시

간인가. 끊으려고 하던 찰나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말이 없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김창남 씨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아르바이트할 사람 구한다면서요.”

여전히 침묵. 느낌이 싸하다. 그냥 끊으려고 하는데 잔뜩 쉰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장소 알려 줄 테니까 2 시까지 와. 늦지 말고.]

툭, 전화가 끊긴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끊어진 전화를 보며 수현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잘하는 짓일까. 적어도 무슨 일인지 물어는 봤어야 하는 건 아닐까 . 그러다 곧 마

음을 고쳐먹었다. 뭐 어때. 돈만 많이 주면 뭐든 해야지. 그래야 김창남 이 지긋지긋한 새

끼한테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어.

❖❖❖
“이게 뭔가.”

“보잘것없지만 제 성의니 받아 주십시오. 일전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은혜는 죽을 때

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양 회장은 옥색 빛이 나는 고운 한복을 입고 안경 너머로 남자의 선물을 응시했다 . 머리

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의 가슴에서 금색 배지가 반짝였다.

“선물?”

예, 회장님. 머리를 조아린 박 의원은 예의를 갖췄으나 속으로는 딴생각 중이었다 . 막상

선거에 당선되고 나니 마음이 달라진다. 돈놀이나 하는 노인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는

가. 하지만 덕분에 배지까지 달았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겠지 . 박 의원은 노인을 욕하면

서도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는 자신에게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양 회장은 들고 있던 신문을 옆으로 내려놓고 선물을 박 의원에게 밀었다 . 박 의원이 고

개를 들고 눈치를 살핀다. 혹시 자신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가늠하는 표정

이다. 양 회장은 조금 전 직원이 내온 차를 남자에게 권했다.

“ 선물은 됐어. 이제 나랏밥 먹는 몸인데 함부로 돈을 쓰면 되나. 대신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예, 박 의원은 허리를 펴고 차를 받쳐 들었다. 양 회장의 등 뒤로 병풍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병풍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대부분 장수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고개를

돌리고 차를 마시던 박 의원은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노인과 남자 셋이

었는데, 두 명은 검은색 양복을 한 명은 교복을 입은 거로 보아 학생인 듯하였다.

“우리 손주들.”

양 회장의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며 박 의원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양 회장은 이른 나이

에 아내를 병환으로 잃었고 하나뿐인 아들을 앞세웠다고 한다.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

의 소행이라고 들었는데 범인이 잡혔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손주분들이 인물이 다 훤하십니다.”


역시 노인네들은 자식과 손주 칭찬하는 낙으로 산다더니. 양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다.

“그렇지?”

“예. 제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다들 복을 타고났네요.”

그 말이 듣기 좋았는지 양 회장은 손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 저기 왼쪽에 보이지? 우리 외손주. 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땄어. 내년 봄에 한국 들어

오는데 머리가 아주 비상해.”

노인이 가리킨 남자는 지적이면서도 깐깐해 보였다. 박 의원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

덕였다.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요. 얼굴에서 막 빛이 나는 게 크게 될 인물

입니다.

“그 옆은 우리 막내. 공부를 참 잘해. 저번에도 전교 일 등 했다네.”

박 의원이 감탄하며 대꾸했다.

“대단합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손주분들이 청와대에서 일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양 회장은 좋으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됐네, 이 사람아. 할애비가 이런 일 한다고 남들이 흉보면 어떡하라고.”

“감히, 누가! 회장님 흉을 봅니까. 그런 놈이 있으면 제가 이 박효철이가 가만 안 둡니

다!”

앞에선 못 보고 뒤에선 보겠지. 막말로 이 바닥에서 양 회장 도움 안 받은 놈은 없으니까 .

그게 돈이든 인맥이든. 박효철의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양 회장이 끌끌 웃으며 찻잔으

로 손을 가져갔다.

박효철은 궁금해졌다. 손주는 셋인데 앞에 두 명은 느낌이 비슷하고 나머지 하나는 전혀

다르다. 사진 속에서도 위협적으로 뿜어내는 눈빛은 마치 짐승을 연상케 하였는데, 그가

소문으로만 듣던 친손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의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기 마지막 손주분은…?”


그가 궁금한 것을 물으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박 의원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안내를 맡았던 최 비서란 사람으로 얼굴과 몸이 날렵했으며, 잘 웃지 않았

다. 최 비서가 다가와 귓속말을 하자 노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찾았어?”

“네.”

“백광무 아들이 확실하대?”

최 비서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확실하답니다.”

흠. 사진을 받아 든 양 회장이 침음을 삼키며 턱을 쓸었다 . 얼굴이 반반한 걸 보니 제 애

비하고는 하나도 안 닮았군. 무슨 일인지 눈치를 살피는데 노인이 그런 박 의원을 향해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애비가 지은 죄를 아들이 받는 거 말이야.”

박 의원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누군가

양 회장에게 죄를 지었고, 그 아들을 찾은 거 같은데… . 사연이 어떻든 노인이 원하는 대

답을 들려주면 그만이다.

“당연히 대신 받아야죠. 저는 연좌제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허허, 그렇구먼. 그럼 내가 어떤 벌을 내리는 게 좋겠나.”

“그거야 회장님 뜻대로 하셔야죠.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패셔도 되고, 여차하면 확,”

박 의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묻어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양 회장은 흡족하게 웃

었다.

“그럼 자네 아들이 죄를 지으면 내가 자네를 갖다 묻으면 되는 건가.”

예? 박 의원이 멈칫했다.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찜찜

하고 아니라고 하자니 앞서 말한 것에 어긋나 선뜻 말문을 열기가 어렵다. 노인이 대답

을 기다리길래 박 의원은 서둘러 입을 뗐다.


“당… 당연히 제 아들이 죄를 지으면 제가 받아야죠.”

“그래?”

“예, 회장님….”

노인이 찻잔을 들었다. 조금 전 손주를 자랑할 때의 그 인자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마치 먹이를 집어삼키려는 뱀 같은 눈이다. 박 의원의 등 뒤로 알 수 없는 불안

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양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그거 알고 있나?”

“예…? 어떤….”

“자네 아들 박윤우가 아버지 자금 출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다닌 모양이야.”

박 의원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오늘 양 회장

이 어째서 자신을 불렀는지 뒤늦게 이해됐다. 며칠 전에도 술 먹고 약에 취해 있던 아들

놈을 비서가 잡아 왔는데…. 이 망나니 같은 새끼!

“다시 묻지. 아직도 아비가 지은 죄를 아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뿔싸. 박 의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무릎 위 마주

잡은 양손에서는 진땀이 배어 나왔다.

“그, 그런 일은 제가 금시초문이라….”

“내 수하가 없는 소릴 지어낸 모양이군.”

서늘한 목소리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양 회장에게 밉보인 사람들이 어떻게 됐더라.

박 의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그는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궁리하는데 양 회장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탁, 소리에 누군가 칼로 목을 내리칠 것만 같았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자식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회, 회장님!”

“ 이번엔 내 그냥 넘어가지. 하지만 다음 기회라는 건 없네. 그땐 자네가 조금 전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박 의원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구질구질할 정도로 비는데 노인이 사진을

앞에 내려놓는다.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던 박 의원의 시선이 그곳에 가 닿았다.

거기엔 누가 봐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젊은 청년이 있었다 . 사진 속 청년은 환하게 웃

는 얼굴이었다. 조만간 자신에게 닥칠 일을 미처 알지도 못하는 듯.


3화

남자가 전화로 알려 준 장소는 시장통에 있는 가게였는데 워낙 골목이 많은 데다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 찾는 데 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수현은 맛조은 정육이라고 적힌 정

육점 간판을 올려다봤다. 정육점임을 확인시켜 주듯 안쪽에서는 덩치 큰 남자 둘이 날

선 칼로 고기를 썰고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거 같은데 … . 아르바이트라는 게 설마 고기 파는 건 아닐 테고. 안으로 들

어가니 고기를 썰던 남자가 손님인 줄 알았는지 눈도 안 마주치고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김창남 씨 소개로 왔는데요.”

남자가 동작을 멈추고 눈만 들어 수현을 본다. 살기가 등등한 게 고기가 아니라 사람도

썰 것 같은 눈빛이다. 남자는 여전히 고기를 썰면서 소리를 쳤다.

“철아, 손님 오셨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쪽 가림막 사이에서 누군가 나왔다. 검은색 앞치마와 검은색 옷

을 입은 남자의 옷에는 무언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게 피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

았다. 이곳에서 직접 돼지도 잡는 건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남자는 들고 있던 칼을 뒷주머니에 꽂으며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남자를 따라 가림막으로 들어가자 냉동 창고가 나타난다. 비릿한 냄새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온다. 그게 생고기 냄새인지 피 냄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현은 작은 가게와는 달리 안쪽이 크다는 사실에 놀랐다. 냉동 창고를 열자 거꾸로 매

달린 돼지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지나 더 안쪽으로 가니 또 다른 문이 나타난다. 문으

로 걸어가는 도중에 비명이 들려왔다. 돼지가 아닌, 사람의 비명.

수현이 걸음을 멈추자 남자가 돌아본다.

“뭐 해. 따라와.”

소리가 뚝 멎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남자를 따라 창고 밖으로 나오니 사무실 하나

가 나타났다. 더 들어가자 또 다른 문이 나오는 복잡한 구조다. 남자가 노크하자 잠시 뒤

덩치 하나가 문을 열어 준다. 그는 밑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야 이 새끼야. 바닥에 피 떨어진다.”

철이란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얼른 닦을게요.”

남자에게 수현을 인계하고 철이란 남자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코끝에서 머무는 피비린

내는 여전하다. 마치 이 건물 전체가 냄새에 절여진 것처럼. 남자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

어가니 커다란 가죽 의자가 하나 보인다 . 돌려진 의자 위쪽으로 머리가 튀어나와 있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덩치는 남자를 부르는 대신 그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

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현은 책상 위 남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대표, 김태신. 낯선 이름이

다. 잠시 뒤 인기척을 느꼈는지 의자가 돌아간다. 돌아앉은 남자는 형님이라고 불리기엔

생각보다 젊었고 얼굴도 멀쩡했다. 머리를 길러 대충 묶었는데 길에서 봤다면 연예인 지

망생이나 예술가라고 착각할 외모였다.

다만 입술 끝에 찢긴 상처가 거슬렸다. 누군가 일부러 찢은 것 같은. 덕분에 남자는 가만

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통화를 하면서도 눈으로는 수현을 주시했다.

“어, 왔어. 응.”

김태신의 시선이 수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더니 웃는다.

“얼굴은 쓸 만하네.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김태신이 맞은편으로 와 앉아 봉투를 던져 준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열어 봐.”

수현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짜 이름이 적힌 신분증과 휴대전화가 전부였

다. 눈으로 가짜 신분증을 응시하는데 남자가 사진을 한 장 내민다 . 머리를 노랗게 염색

한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 내일 외곽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난다 긴다 하는 고위층 자제들이 다 모여. 너는 거기

에 가서 이 남자가 차고 있는 목걸이만 빼 오면 돼.”

수현이 사진에서 눈을 떼고 김태신을 바라봤다 . 찢어진 입꼬리가 위로 더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창남이가 너 손 빠르다고 칭찬하더라. 나름 의리도 있고,”

도둑놈이란 소리를 참 좋게 포장한다. 게다가 김창남 그 인간이 나를 칭찬했을 리가 없

다. 오갈 데 없고 죽어도 찾을 사람도 없으니 적당히 쓰고 버릴 놈이라고 했겠지. 수현은

사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 데는… 몸수색하지 않아요?”

“물론. 들어갈 때 소지품 다 반납하고 팬티까지 다 벗어야 해 . 나올 때도 마찬가지고. 엉

덩이도 벌려서 검사할걸.”

수현이 인상을 쓰자 남자가 웃으며 묻는다.

“왜. 못 하겠어?”

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들어오는 거야 그렇다 치고 나올 때도 몸수색을 하면 훔친 물

건을 대체 어디다 숨긴단 말인가. 그러자 김태신은 수현에게 준 휴대전화를 가리키며 답

을 알려 줬다.

“휴대전화 꺼 두는 순간부터 안에 심어 둔 폭탄이 작동돼. 정확히 3 시간 뒤. 폭발력이 강

한 건 아닌데, 주의를 돌리기엔 충분하지.”

“…….”
폭탄. 무슨 일이길래 폭탄까지 등장해. 스케일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 냈다. 어려울 건 없어 보인다. 막말로 누굴 찔러 죽이는 것도 아

니지 않은가. 씨발, 이것도 재능이라고 물려준 아버지란 작자한테 감사해야 하나. 남자

는 수현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담배 끝이 빨갛게 익다가 잿

빛으로 변했고 담배가 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수현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할게요.”

남자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간다. 누가 찢었는지 몰라도 남자는 아마 그 사람을 평생 기

억할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잘린 손가락을 보며 누군가를 원망하던 것처럼 . 복수란

그렇게 해야 한다. 평생 잊지 못하게.

수현이 봉투에 신분증과 휴대전화를 담자 김태신이 번호를 적어 준다.

“끝나면 바로 이리로 연락해.”

수현은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예. 김태신은 펜 끝으로 수현을 가리켰다. 정확히

는 수현의 눈을.

“ 괜한 짓 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그건 네가 가져가 봐야 쓸모없는 물건이야. 그러니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

한마디로 물건을 훔쳐서 튈 생각 하지 마라 , 이거다.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봉투를 챙겨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데 그의 수하들이 냉동 창고 뒤쪽으로 무

언가를 옮긴다. 축 늘어진 그것은 얼핏 돼지처럼 보였으나 돼지는 아니었다. 수현은 모

른 척 시선을 돌렸고 반대편으로 걸어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아침 일찍 수현을 데리러 온 사람은 목적지로 가는 내내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 자동차

는 서울 외곽으로 한참을 이동했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


다. 커다란 철문 앞에서는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하는 중이었는데, 수현이 탄 차는 무리

없이 그곳을 통과했다.

커다란 문을 지나자 숲길이 나타난다. 누군가의 사유지인 것 같았는데 관리가 참 잘된

곳이었다. 10 여 분을 더 달리던 차가 멈춰 선 곳은 저택이라고 할 만한 크기의 장소였다.

마당에는 커다란 조각상과 분수가 있었고 직원들은 파티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

이는 중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남자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수현을 그에게 인계

한다. 저택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보아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남자가 이

곳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전기를 들고 리시버를 착용한 가드가 수현에게 손짓을 했다 . 따라와. 가드는 정문이

아닌 옆길로 빠져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현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

과 여자들이 줄을 서서 양쪽으로 이동한다.

안내를 받아 남자 줄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막힌 공간이 나타난다 .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 차례 몸을 수색당했고, 미리 알고 있던 대로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반납했

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례대로 옷을 벗는다.

문득 어제 본 정육점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엉덩이까지 벌려서 검사한다더라. 씨발 … .

설마.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옷을 다 벗은 첫 번째 남자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앞

에서 익숙하게 입을 벌리고 곧 뒤를 돌아 엉덩이를 손으로 벌려 보인다.

항문에 소형 카메라나 도청기를 숨겨서 들어오는 놈이 있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 아무

리 그래도 저건 … . 수현이 머뭇거리고 있자 뚱뚱하고 심술 고약하게 생긴 직원 하나가

수현을 쳐다본다.

“어이, 신참. 왜 그러고 서 있어?”

수현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 씨발, 내가 아무리 이놈 저놈 가리

지 않고 옷을 벗고 다니긴 해도 이건 싫은데… . 속옷까지 모두 탈의해 바구니에 넣고 나

니 조금 전 핀잔을 줬던 직원이 다가온다.

“입.”
수현은 앞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입을 벌렸다. 남자가 랜턴으로 입 안 구석구석을 비

추더니 돌아서라고 손짓을 한다. 수현은 돌아서서 손을 엉덩이로 가져갔다. 양쪽 볼기를

잡고 벌리는데 수치심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든다.

“새끼 구멍 존나 예쁘네.”

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키득댄다. 수현은 인상을 확 쓰면서 돌아섰다. 남자가 새 옷

을 수현에게 건넨다. 피식 웃는 꼴을 보니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 분을 삭이

고 남자에게 받은 옷을 살피는데 셔츠가 없이 바지만이다. 조금 전 그 남자를 불렀다.

“저기, 셔츠 없는데요?”

남자가 돌아보며 눈썹을 까닥 치켜든다.

“무슨 개소리야?”

“셔츠가 없다고요.”

남자의 두툼한 볼살이 일그러진다. 그러더니 대답 대신 옆을 가리켰다. 옷을 갈아입는

사람들 모두 셔츠가 없이 바지만 입고 있다. 바지에서 어깨로 넘어가는 멜빵을 하고 나

비넥타이를 맨 모습이 변태스럽기 짝이 없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읽었는지 저만치 멀어

졌던 남자가 다시 다가온다.

“왜 입기 싫어?”

“…….”

남자의 시선이 수현의 젖꼭지로 내려간다.

“설마, 분홍색이라 창피해?”

“….”

“누가 이 새끼 것 좀 빨아 줘라. 꺼메질 때까지.”

노골적인 희롱에 옆에서는 키득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 수현은 불쾌한 기색을 지우고 씩

웃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그러고 나서 남자를 무시한 채 옷을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맸다. 돼지 새끼, 두고 봐. 여기에서 나갈 때 네 대가리 먼저 깨 버릴 테니까.

그런데 저만치 걸어가던 남자가 돌아서더니 수현을 부른다.

“야, 신참.”
수현은 나비넥타이를 매며 남자를 바라봤다.

“너 어떤 동물 좋아해?”

갑자기 웬 동물 타령? 대답을 기다리길래 귀찮아서 대충 토끼라고 대답했는데 ,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번진다. 잘됐네. 라고 하더니 가 버린다. 뭐가 잘됐다는 건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4화

손님들이 오기 전까지 직원들의 교육이 시작됐는데,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어떤 경우에

도 손님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말 것. 대답은 정중하고 상냥하게 할 것. 예상치 못한 행동

을 해도 미소를 지어 표정 관리를 하고 깍듯이 대할 것.

교육을 마치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서 있자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

작했다. 고급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 같이 있던 직

원의 말로는 그게 오늘 파티의 컨셉이란다. 드레스에 턱시도를 입고 가면까지 쓰고 있으

니 마치 서양의 가면무도회를 연상케 하였다 . 다른 게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둘

짝을 지어 위층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거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술을 나르던 수현은 기둥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

었다. 턱시도까진 아니어도 평범한 복장이었으면 좋으련만. 알몸에 멜빵만 하게 한 것도

변태 같아 쪽팔려 뒤지겠는데, 거기다 토끼 귀까지 달고 있어야 하다니.

서빙을 하는 여자 직원 중에 바니 옷을 입은 직원들이 있긴 하였으나 남자 직원 중에는

오로지 저 하나였다. 당장 벗고 싶었으나 저 멀리서 돼지 새끼가 감시하는 바람에 그럴

수조차 없었다.

수현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이곳에서 나갈 때 꼭 돼지 새끼의 멱을 따 버리고 가겠노라

다짐하였다.

“어머, 잘생긴 토끼네?”


복장 때문인지 이곳저곳에서 짓궂은 손님들의 관심이 이어졌다. 엉덩이를 슬그머니 만

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놓고 위층으로 갈래냐고 묻는 손님까지. 말이 부잣집 애들 노

는 파티지 난잡하기는 자신이 일하는 오아시스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빈 음식들을 채워 놓고 샴페인을 따르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손님들의 끈적한 시선이 이

어졌다. 이참에 여기서 부자 하나 확 물어서 팔자나 필까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런 상

상을 하는데 손님 하나가 휘청이며 지나간다.

부딪치지 않으려 비켜서다가 등이 누군가의 몸에 닿았다 . 사과하려 돌아서던 수현은 잠

시 멈칫했다. 손님으로 보이는 상대는 분홍색 토끼 가면을 써 하관만 보였는데 키는 저

보다 한 뼘 이상 컸고 한눈에 봐도 체격도 다부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화려한 가면

이 아닌 종이로 대충 만든 가면을 썼다는 거. 심지어 귀도 앞뒤로 꺾여 토끼의 얼굴만 남

아 있다는 거.

남자는 음식을 먹는 건지 아니면 껌을 씹는 건지 턱을 느긋하게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

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수현이 옆으로 비켜서자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우연이었나 싶어 다시 반대편으로 옮

기자 똑같이 막아선다. 수현은 애써 미소를 띠며 먼저 가라고 정중히 손짓하고 재차 옆

으로 물러섰다.

그런데 남자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앞으로 와서 서더니 수현을 빤히

내려다본다. 얼굴은 가면 속에 가려져 있지만, 구멍을 통해 보이는 눈빛이 유독 서늘함

은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엮여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데 남자가 입을 연다.

“가져도 돼?”

뜬금없는 말에 수현의 눈이 커졌다.

“네?”

“그거.”
남자는 턱짓으로 수현이 쓰고 있던 머리띠를 가리켰다 . 난 또 뭐라고. 다짜고짜 주어 없

이 가져도 되냐고 물어서 헷갈렸잖아. 수현이 슬그머니 기둥 쪽을 살폈다. 돼지 새끼가

지켜보고 있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손님이 먼저 달라고 해서 줬으니 달려와 지랄하진 않

겠지. 이때다 싶어 냉큼 빼서 건네자 남자가 그걸 자기 머리 위에 쓴다.

남자는 가면 위에 머리띠를 쓰고 옆에 있는 남자에게 어떠냐고 묻는다 . 검은색의 깃털

달린 가면을 쓴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는 손등에 뱀 문신이 있었는데,

토끼를 자신의 윗사람처럼 대했다. 지켜보던 수현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고 하는 찰나

남자가 수현의 팔을 잡아챈다.

“팁 줄게.”

교육 때 돼지가 뭐라고 했더라. 팁은 마다하지 말아라, 라고 했지. 공손히 서서 기다리는

데 토끼가 손을 입으로 가져간다. 설마 했는데 놈은 돈이 아닌 씹던 껌을 입에서 꺼냈다.

당황해 피할 틈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수현의 젖꼭지에 껌을 붙여 놓고 피식 웃었다.

아, 씨발. 돼지 새끼의 경고도 잊고 수현은 얼굴이 구겨졌다.

“눈에 띄어서 거슬려.”

수현은 이를 꽉 물고 입꼬리를 애써 위로 올렸다.

“감사합니다. 손님.”

“별말씀을.”

토끼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준다. 잠깐이었지만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의 강한 악력이

다. 일행과 함께 옆으로 지나쳐 가는데 예상 밖의 좋은 향이 난다. 남자가 멀어지자 수현

은 젖꼭지에 붙은 껌을 떼어 내서 바닥에 버렸다. 오늘따라 젖꼭지에 시비 거는 놈들이

많다. 그래도 그 괴상망측한 머리띠는 가져가 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수현은 다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샴페인을 날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 노란 머리를 찾아야 하는데. 노란 머리… . 파티

가 무르익어 갈수록 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남자를 찾지 못하자 초조함과 동시에 요의가 몰려온다 . 수현은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한

뒤 파티 공간을 벗어나 화장실을 찾아 움직였다. 복도를 따라가다 보니 조금 떨어진 곳

에 화장실이 보이길래 서둘러 가는데 앞에서 직원이 막아선다.

“뭐야, 너.”

“화장실 찾는데요.”

“여기 손님들 전용이야. 밖으로 나가.”

하, 가지가지 한다. 젠장.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소리가 들린다.

“그냥 들여보내 줘. 똑같은 거 먹고 싸는데 왜 사람 차별하냐.”

돌아보던 수현의 눈이 커졌다. 이제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자는 사진 속 그 인물이 확

실했다.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안 보이더니. 그런데 머리가 노란색이 아니라 검정색이

다. 그새 염색을 했군. 수현은 남자의 셔츠 윗부분을 훑었다. 단단하게 채워진 단추 때문

에 남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 반드시 몸에 착용하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들어가세요.”

이영준이 눈짓을 하길래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졌습니다.

“아, 그럼 다행이고.”

이영준이 다시 가면을 쓴다. 검은색에 보석이 박히고 깃털이 달렸다. 아깝다. 조금 더 빨

리 알아봤으면 화장실 갔을 때 훔칠 수 있었는데. 앞서가는 이영준을 쫓아 움직이려는데

그가 홱 돌아본다. 수현은 남자를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거기,”

이영준이 손으로 수현을 콕 찍어 가리킨다.

“저요?”

“위층 네 번째 방으로 술 좀 가져다줄래요? 매니저한테 말하면 알아서 챙겨 줄 건데.”

이게 웬 횡재냐. 수현이 기쁨을 감추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예, 알겠습니다. 남자는 다

시 가면을 쓴 뒤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수현은 부리나케 움직여 매니저를 찾았다. 위


층 네 번째 방이라고 말하자 매니저는 어딘가로 확인을 했고, 술을 챙겨 줬다. 안주가 없

어 물었더니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수현은 밀차에 그것을 담아 위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걷

자 바퀴 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바닥을 긁으며 소리를 낸다. 긴장으로 손에 땀이 배어 나

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잠시 뒤 이영준이 나온다. 막 씻었는지 얼굴과 뺨에 물기가 묻

었다. 목 부분에 반짝이는 목걸이 줄을 확인한 순간 수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손님, 술 가져왔습니다.”

“들어와요.”

밀차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테이블이 나온다. 남자는 통화 중이었는지 손에 휴

대전화를 들고 있다. 술병과 잔을 세팅하고 얼음이 든 바스켓을 올려 두는데 한쪽에 작

은 상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옆에 주사기 뚜껑도.

몸을 일으키던 수현은 방의 한 면이 모두 통유리라는 걸 깨닫고는 잠시 멈칫했다.

“밖에 테라스가 있어요. 수영장이 바로 아래 있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더니 수현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낸다.

“아까 화장실 급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영준이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욕실. 씻고 나오면 더 좋고. 뒷말이 붙는다. 수현은 그제

야 매니저가 왜 안주가 필요 없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 차라리 잘된 일이다. 적어도 무력

을 행사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네가 알아서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는구

나.

욕실로 가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걸로 열 장을 말하는 걸 보니 누군가와 거래

를 하는 모양이다. 수현은 바짓단을 걷고 주방에서 빼돌린 나이프를 챙겼다. 그걸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오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통화를 하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좀 더 낮고, 굵직

한 저음. 손님이 찾아왔나. 씨발 이 새끼 설마 셋이서 하자고 덤비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불리해지는데.
벽 너머로 살짝 눈만 내밀어 보던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불청객은 한 명이었는데

뒷모습을 봤을 뿐인데 키며 덩치가 장난이 아니다 .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터질 것 같은

팔뚝은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시선을 더 아래로 옮기던 수현은

멈칫했다.

불청객의 손에 들린 구겨진 토끼 가면과 머리띠가 시선을 잡아끈다 . 조금 전 젖꼭지에

껌을 붙여 두고 간 변태 토끼 새끼가 눈앞에 있었다 . 토끼가 이영준 앞으로 저벅저벅 간

다. 이영준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섰고 토끼는 손에 쥔 머리띠

와 가면을 테이블에 툭 던지고 바로 컵을 집어 들었다.

“양, 양 대표. 내가, 내가,”

토끼는 들고 있던 컵으로 인정사정없이 이영준의 머리를 내리쳤다 . 퍽! 하는 소리와 함

께 이영준이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그가 고개를 드는데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른다. 수현

은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딨어?”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뒷모습뿐이었지만 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현은 눈

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저 새끼는 뭐야. 이영준이 대답하지 않자 토끼가 한 손으로 이

영준의 멱살을 가뿐히 잡아 유리 벽에 쾅 밀어붙인다.

“묻잖아. 어딨어?”

무언가를 찾는 듯한 말투. 설마 … . 머릿속으로 목걸이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이영준

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런. 안타까워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끼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뽑아낸다. 너무 빠

른 움직임이라 그것이 칼이라는 것을 수현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토끼의 손은 순식

간에 이영준의 배에 가서 꽂혔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이영준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

졌고 그가 입고 있던 흰색 가운은 눈 깜짝할 새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수현은 놀라 그대로 굳었다. 씨발.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 입구를 바라봤다. 문

은 닫혀 있었으나 이대로 뛰어나가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거리다 . 그러면 그다음

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숨어서 기다리면 눈에 띄진 않겠지만 재수 없어 이영준이

죽기라도 하면 살인범으로 몰릴 가능성도 컸다. 이미 한번 겪어 봤지 않은가. 없는 놈들

한테 법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수현은 밀려오는 옛 기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리려 입술을 잘끈 깨물고 밖을

다시 살피는데 토끼가 이영준의 상체를 받쳐 안은 채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아프지? 여기서 조금만 비틀어도 창자가 다 끊어져.”

남의 배에 칼을 꽂아 넣은 인간의 말투치고는 너무 평온하고 다정했다 . 이영준이 입을

벙긋거리며 칼자루를 쥔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 그의 이마에 핏대가 솟고 바닥은 피로

물들어 갔다.

“대답할 마음이 들어?”

이영준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쉬는 숨소리가 불규칙하다. 수현은 정신을 차

리고 고개를 돌렸다. 이영준이 벗어 둔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셔츠가 시야에 걸린다 . 수

현은 그것을 꺼내 복면처럼 얼굴을 가린 뒤 다시 밖을 내다봤다. 피를 흘리며 늘어지는

이영준의 목 아래로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가 달랑거리고 흔들렸다 . 사진에서 본 모양과

똑같다.

“모… 모….”

“모?”

수현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목걸이를 가지고 나가는 거. 그것만 생

각하자. 결심을 굳힌 순간 수현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수현을 먼저 발견한 이영준의 눈

이 커졌고, 토끼가 돌아본 건 그보다 뒤였다.

아, 토끼 얼굴이 저렇게 생겼군.

수현은 있는 힘껏 몸을 던져 토끼를 덮쳤다.


5화

와장창 유리가 깨지고 몸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토끼와 함께 바닥을 구른 뒤 수현은 재

빨리 일어섰다. 난데없이 유리가 깨지고 사람이 튀어나오자 테라스에 모여 있던 몇몇 사

람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방에서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수현은 머리를 흔들어 유리 파편을 털어 내고 이영준을 바라봤다. 그는 배에 칼을 꽂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서 반짝이던 목걸이는 이제 수현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이영준이 아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토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눈두덩

이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바람에 그의 얼굴 반쪽이 피범벅이었다. 가면 아래 숨겨져 있

던 토끼의 얼굴은 누가 봐도 잘생겼으나 눈빛은 야수처럼 살기가 가득했다. 밖에서 사적

으로 만났다면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토끼의 시선은 자연스레 수현이 들고 있는 목걸이에 닿았다.

“하, 씨발.”

토끼는 짜증이 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뒤로 젖혔다 원위치시켰다. 자신이 찾던 물건

이 어디 있는지 방금 깨달은 듯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현은 뒤로 물러서며 난간 밖을 내려다봤다. 이영준의 말대로 바로 아래가 수영장이고

다행히 물도 있다. 문제는 깊이였으나 태평하게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토끼

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여기서 근육 덩어리 토끼에게 맞아 죽으나 재수 없게 시멘트 바닥에 대가리 박고 죽으나

별반 다르진 않았다. 소란을 듣고 직원들이 도착했으나 그들은 토끼를 제지할 생각을 하

지 않고 피를 흘리는 이영준에게 응급처치만 할 뿐이었다.

토끼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던 그때 펑! 신호탄과 같은 폭음이 들려오고 바닥이 흔들린

다.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토끼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혼란에 빠진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수현은

그대로 목걸이를 입에 쑤셔 넣고 난간을 밟고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 토끼의 손이 멱살

을 잡기 바로 직전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풍덩, 물속으로 가라앉

았다. 혹여 USB 가 젖을까 염려되어 입술을 암팡지게 다물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수심

히 깊어 다행이다.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이영준의 검은 셔츠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니

고 있었다.

수현은 밖으로 헤엄쳐 나와 입에서 목걸이를 꺼내 확인했다. 또다시 폭음이 들리며 한쪽

에서 불길이 거세게 치솟는다. 파티장과 거리가 꽤 멀었으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비

명을 지르고 뛰쳐나왔다.

폭탄을 심어 뒀다던 정육점 사장 김태신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것의 위력은 생각보다 컸

다. 정전이 되었는지 건물 전체에 빛이 사라졌고 솟구쳐 오르는 불기둥만 보였다. 사람

들의 비명과 미처 나오지 못한 이들로 인해 입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현은 위를 올려다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테라스에 누군가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두워 잘 보진 못했으나 그가 토끼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지체할 시간이 없다.

수현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향해 죽어라 뛰었다.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으나 지금 잡히면 토끼가 이영준이 아닌 자신의 창자를 끊어

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개들과 한 무리의 사

내들이 쫓아온다.
수현은 출구 대신 산길을 택했다. 담을 넘어 미리 봐 뒀던 길을 이동하는 내내 개 짖는 소

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였다. 숨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거라곤 달빛과 무섭게 하늘 위로 뻗은 나무들뿐이었다.

❖❖❖

윗옷을 벗고 산길을 헤매던 수현은 민가를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 덜덜 떨며 마당

구석에 뒹구는 옷과 벙거지 모자를 훔쳐 밖으로 나와 갈아입는데 품은 얼추 맞았으나 길

이가 짧았고 농사할 때 입는 옷인지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 그래도 얼어 죽지 않으려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겨울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목걸이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양팔을 문지르며

걷고 또 걸었다. 기회를 봐서 차를 얻어 타려고 하였으나 워낙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차

들도 별로 없었다.

에취, 재채기가 연신 터져 나온다. 어느덧 날이 밝아졌고 저 멀리 파란 봉고차 한 대가 오

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세웠다. 얻어 탄 차에는 새벽부터 일하러 가는 노인들로 가득

했다. 노인들은 좁은 자리를 기꺼이 내주더니 시내에 도착하자 차비 하라고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주기까지 한다.

시골 인심 넉넉하구나, 라고 생각한 수현은 가게 유리창에 비친 제 몰골을 보고 대충 이

유를 짐작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따로 없다. 얼굴을 닦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혹여

누군가 알아볼까,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고서 근처에서 잔돈을 바꿨다. 그리고 공중전화

를 찾은 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달칵,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창남이었다.

[여보세요?]

“형님, 저예요.”
[너 이 새끼, 어디야. 연락이 안 돼서 죽은 줄 알았다.]

“죄송해요. 중간에 일이 좀 틀어졌어요.”

[물건은?]

“찾긴 찾았는데….”

수현은 손에 들고 있는 목걸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딴짓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정육점

사장의 말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곧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 이영준이 누군가와 통화

를 하며 거래를 했고, 무섭게 생긴 토끼 새끼가 이것 때문에 이영준을 칼로 찌른 걸 생각

하면….

어쩌면 더 값어치 나가는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김태신 그 새끼가 너 찾고 난리야. 어딘지 말해. 사람 보낼 테니까.]

수현은 대답 대신 목걸이를 꽉 움켜쥐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눈치 빠른 김창남이

알아챘는지 백수현. 하고 단호하게 부른다. 수현은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내가 이거 가지고 튀면, 형님 입장이 난처해지려나…?”

[이 새끼….]

“말해 봐요. 곤란해지나?”

[헛짓거리하지 마. 그랬다간 너 무사하지 못해.]

“형님은? 형님은 무사하고?”

상대방이 말이 없다. 가끔 이런 게 재미있다. 슬슬 약 올리면서 간 보는 거. 그게 자기보

다 센 놈이면 더 즐겁고. 물론 길게 끌었다가는 뒤끝이 나쁠 수도 있지만.

“아니면 원금 다 까 줘요. 그럼 생각해 볼게.”

[백수현!]

“ 양심에 손을 얹고 전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 안 해요 . 30 분 뒤에 전화할게요. 원하는

대답 해 주시길 바랍니다.”

툭, 끊고 나서 수현은 사악하게 웃었다. 씨발 존나 쫄리네. 김창남 이 개새끼. 맨날 이자

는 눈덩이처럼 불리면서 어쩌다 못 갚으면 사람 피를 말리지. 너도 당해 봐라, 씨발놈아.


놈의 애간장을 태워 놓고 수현은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삼각김밥을 샀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밤새 달렸더니 허기가 진다. 컵라면까지 해치우고 빵도 하나 사서 나오니 얼추

30 분이 지났다. 지금쯤 똥줄이 타고 있겠지.

수현은 다시 공중전화로 가서 김창남에게 연락을 했다 . 그런데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질

않는다. 달칵, 뒤늦게 누군가 전화를 받았으나 말이 없다. 수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형님 화났어요? 왜 말이 없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진짜 열받았나. 아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어….]

“여기 양평 터미널 근처예요. 빨리 안 오면 진짜 튑니다.”

[알았다….]

분명 김창남의 목소리가 맞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형님? 하고 부르는데 동전이 툭 떨어

지며 전화가 끊긴다. 에이 씨발. 주머니를 뒤져도 나오는 건 오십 원짜리가 전부였다. 수

현은 한숨을 내쉰 뒤 빵을 들고 터미널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때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지나간다. 시골 터미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

간들이다. 본능적으로 수현은 그들이 찾는 게 자신임을 알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사람들

속에 섞여 앉아 청각을 곤두세웠다. 벽에 걸린 TV 에선 뉴스가 나왔지만, 어제 있었던 일

에 대해선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가 사라진 뒤 수현은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이 된 거 같은

데. 기다리는 동안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손으로 잡아당기자

십자가가 분리되며 유에스비가 나온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나도 찾

겠다고 난리를 치는 걸 보니 중요한 물건임은 틀림이 없다.

마음 같아선 이걸 그대로 갖고 튀고 싶은데 처분할 수 있는 능력도 처지도 아니다 . 괜히

걸려서 팔다리 잘리고 장기까지 털리느니 숨통을 죄는 빚이라도 반 없애는 게 적절한 선

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니 저 멀리 낯익은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들

어온다. 김창남이 타고 다니는 값비싼 외제 차였다.


“씨발. 내가 낸 이자가 다 저기로 들어갔네.”

차가 속도를 늦춘다. 수현이 도롯가로 걸어가는데 김창남의 승용차가 수현을 지나치고

검은 봉고차가 와서 멈춘다. 뭐야,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봉고차의 뒷문이 열리며 험악하

게 생긴 사내들이 튀어나와 수현을 붙든다.

도망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몸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반항할 틈도 없이 칼날이

목 아래로 들어왔으니까. 아가, 움직이지 마라. 모가지 썰린다. 수현은 굳은 채 눈동자만

움직였다.

놀랍게도 낯선 사람들 속에 김창남이 앉아 있다 . 피떡이 되어 두려움에 가득한 표정이

다. 그를 알고 지낸 게 6 년이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다시 차 문이 열렸

고 사내들은 김창남을 짐짝처럼 밖으로 내던졌다. 그가 바닥을 구르는 동안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수현은 생각했다. 혹시 정육점 사장이 보낸 사람들일까.

그러나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전에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칼의 손잡이 부분으로 수현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퍽, 피할 틈도 없이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고 수현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6화

수현아. 정신 차려. 수현아. 백수현!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이었다.

퉁퉁 붓고 일그러진 얼굴은 평소 곱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거대한 나

무들이 괴물처럼 버티고 서서 바람에 흔들렸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수현은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이 커다란 구덩이란 것을 알게 됐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엄마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하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사라진 후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아버지가 어디 있는

지 말하라고 했다. 원래도 자주 집을 비우던 사람이다. 뭔가를 훔쳤다고 하는데 그게 무

언지 수현은 알 수가 없었다. 엄마도 당연히 모르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가는 대신 엄마와 수현을 구둣발로 난폭하게 짓밟았다 . 엄마는 수현

이 다치는 것을 막으려 감싸 안다가 더 두들겨 맞았는데 머리가 터지고 얼굴 한쪽이 깨

져도 그녀는 아들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맞다가 기절하기를 여러 차례. 눈을 뜬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게다가

손발이 뒤로 묶여 제대로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다. 엄마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으로 주

변을 살피며 수현의 손을 묶고 있는 테이프를 어떻게든 풀려고 애를 썼다.

손으로 어림도 없자 나중엔 이빨로 물어뜯는다. 부어오른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흐흑, 잇새로 터지는 울음을 참으며 그녀는 아들의 손을

묶고 있는 테이프를 이빨로 끊어 냈다. 수현의 손이 자유로워지자 엄마가 다그쳤다.

“네 다리 먼저 풀어, 어서.”
수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발목에 칭칭 감긴 테이프를 뜯어냈다. 그다음엔 엄마의 손과

발을 풀어 줬다. 됐다. 이제 됐어. 그런데 구덩이를 기어오르기 위해 일어서던 엄마가 윽 ,

신음을 내며 옆으로 주저앉는다.

수현은 뒤늦게 그녀의 정강이 가운데가 기이한 모양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수현은 쓰러진 엄마를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지만 , 또래보다 작은 열 살짜리 남자애가

성인 여자를 부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푸드드득, 새들이 날아가고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 엄마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수현은 마음이 다급해져 엄마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수현을 거칠게 떠민

다. 수현은 놀라고 두려운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가! 얼른!”

그녀답지 않은 사나운 얼굴이다.

“엄마….”

울음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수현에게 기어

와 어떻게든 구덩이 밖으로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수현은 몸부림을 치며 엄마를 막았

다.

“같이 가요. 같이, 같이요!”

울부짖는 소리에 엄마가 수현의 따귀를 내리쳤다. 귓속이 먹먹하다. 엄마는 수현의 뺨을

우악스럽게 감싸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 먼저 가. 엄마가 곧 찾아갈 거야.”

수현은 엄마의 얼굴이 무서워 더는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안 죽어. 그러니까 계속 달려. 소리 나도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엄마….”

“ 미숙이 이모 전화번호 알지? 공중전화가 보이면 이모한테 무조건 전화하는 거야. 알아

들었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미숙이 이모는 엄마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같이

가요. 수현이 고개를 젓는데 엄마가 수현을 꽉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더니
비틀거리고 일어서서 아들을 구덩이 바깥쪽으로 밀어낸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그녀의

다리는 기괴하기만 했다.

“가, 얼른!”

엄마!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데 그녀가 아들을 기어코 구덩이 바깥으로 떠민다. 수현이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 정말 왜 이래! 너 엄마 말

안 들을 거야!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엄마는 자신의 팔을 붙든 수현의 손을 떼어 내며 어르기 시

작했다.

“얼른 가. 수현아. 먼저 가 있으면 엄마가 찾아갈게.”

수현은 울음을 삼켰다.

“거짓말이잖아….”

엄마는 눈물을 참으며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 번째 손가락엔 아버지에게 받은 은

가락지가 걸려 있었다.

“우리 수현이 사내대장부 맞지? 네가 지금 가야지, 엄마도 살아. 알아들어?”

정말 그런 걸까. 그 말이 사실일까. 그래, 아버지는 몰라도 엄마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내일이면 분명 미숙이 이모네로 찾아올 거다. 눈물을 연신 닦으면서도 발길

을 떼지 못하자 엄마가 절박한 표정으로 얼른 가라며 손짓을 한다.

학교 갈 때 엄마는 늘 대문 밖까지 나와 저렇게 서 있었다 . 수현은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

가 다시 돌아보고를 반복했다. 그때 저 멀리 두 개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현은 나

무 사이로 들어갔다.

이제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엄마와 함

께 있을까. 망설이는데 차 소리가 멈추고 남자들의 고함이 들려온다. 찾아! 잡아! 두려움

에 사로잡힌 수현은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숲은 어린아이에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달리고 구르고, 넘어지고 또 달

리고 그걸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발을 헛디뎌 골짜기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정신이 들어요?”

수현은 쉽게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 감정을 추스르려는데 쉽게 되질 않아 눈가가

빨개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 보니 눈앞에 웬 앳된 남자애가 하나 있다.

“괜찮으세요?”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김창남을 만나기로 했고, 웬 낯선 놈들이 나타나 얻어

맞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러고 보니 목 뒤가 뻐근하다. 손으로 만졌더니 욱신거려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수현은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나오려 했다 . 그러다 기이한 방 안의 풍경에 잠시 넋을

놨다. 덮고 있는 묵직한 이불은 흡사 사극에서나 보던 것과 비슷했는데 이불뿐 아니라

방에 있는 것들이 모두 시대를 초월한 듯 예스러웠다.

먹으로 그려진 병풍이며 벽에 걸린 뜻을 모를 한자까지. 게다가 머리맡의 스탠드도 창문

도 모두 한지로 되어 있다. 혹시 나 다른 세계로 떨어진 걸까. 무슨 왕자나 귀한 집 도련

님 그런 걸로 빙의한 거 아니야. 존나 고생만 하고 살았다고 신이 나에게 선물을 준 건 아

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앞에 있는 꼬맹이의 옷차림이 딱 봐도 교복이다. 약간은 실망이

다.

“그쪽은… 누구?”

남자아이는 금색의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얼굴이 제법 반듯하게 잘생겼고, 어려

서 그런지 피부가 뽀얬다.

“저는 김우진이요. 열아홉. 형은 백수현 맞죠? 스물여덟.”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제 진짜 이름을 들으니 등골이 오싹

해진다.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데 남자애가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혹시 칼

인가 싶어 수현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꺼낸 건 수현이 입고 있던 옷이 담긴

바구니였다.

“더러워서 버리려고 하다가 혹시 몰라서 챙겨 놨어요.”


수현은 옷을 확인하는 척하며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만졌다 . 목걸이가 그대로 들어 있

다. 그렇다면 이걸 노리고 납치한 게 아니란 소린데. 하긴 납치라고 하기에는 대접이 너

무 융숭하다. 기절시켜 데려오긴 했지만, 이런 좋은 침대에 옷도 싹 갈아입혀 놓고.

“ 할아버지가 일어나면 데리고 오래요. 해치지 않을 테니 도망갈 생각은 말라고. 그러면

진짜 다리 분질러 버린다고.”

말간 얼굴로 무서운 얘기를 참 잘도 한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아이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데 해가 쨍하다. 얼마나 기절했던 거야.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뒤늦

게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입이 벌어졌다. 커다란 한옥은 마치 사극 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고 집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

리며 소리를 낸다.

“여기 뭐냐. 민속촌이야?”

“저희 집이에요. 따라오세요.”

우진이 앞장서 걸었고 수현은 그 뒤를 따라갔다. 곳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이 나이 어린 우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 온다. 우진 역시 그게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수현은 생소한 풍경에 잠시 넋을 놨다.

그때 앞에 가던 우진이 멈춰 선다.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에 수현은 그쪽을 바라봤

다. 한 노인이 자주색 생활한복을 입고 한 손엔 가위를 들고 손수 화단을 정리 중이다 . 작

은 키였고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생김새였다 . 하지만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

고 있으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노인의 시선이 손주에게서 수현에게로 옮겨 왔다.

“일어났군.”

수현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네가 백광무 아들인가.”

아, 젠장. 어째 불길하다. 꼬마가 수현의 이름을 알고 있길래 설마 했는데 . 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노인의 주름진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저놈 보게. 제 아비 닮아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기를 치네. 노인이 끌끌거리고 웃더니 들어가자며 손짓을 한다. 수현은 생각했다. 이

대로 도망칠까. 그러기엔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다.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분

명 이유가 있을 거다. 걸음을 떼지 않고 있으니 노인이 돌아본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저 돈 없어요. 배를 따든 모가지를 따든 알아서 하세요.”

“ 고놈 성질 한번 급하네. 네 애비 찾는데 돈타령부터 하는 거 보니 여태 그러고 살아온

모양이구나.”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나쁜 기억뿐이다. 노인이 무

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등 뒤가 시끄럽다. 노인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돌아보던 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대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오고 있

었는데 어딘가 실루엣이 낯이 익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려는데 가까워질

수록 확신이 든다.

“그 난리를 치고 가더니 어쩐 일이야?”

노인의 말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눈두덩이에 하얀 거즈를 붙인 채. 토끼 가면을 벗

은 남자의 얼굴은 밤에 본 것보다 더 멀끔하고 이목구비가 짙었다 . 여전히 걷어 올린 셔

츠는 팔이 터질 것 같았다. 수현은 재빨리 몸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

어나올 것처럼 두근댄다. 씨발.

저 새끼가 왜 여기에 있어…?


7화

“얼굴은 왜 그래?”

“다쳤어요.”

“별일이다. 누구한테 맞았냐.”

토끼가 웃는다. 하지만 그는 어제도 웃고 있었다. 사람을 칼로 찌르면서도.

“왜요. 고소하세요?”

“망할 놈.”

어디 보자. 얼마나 찢어졌나.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은근히 걱정이 묻어난다. 수현

은 여전히 돌아서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눈치채진 않겠지. 2 층에서 마주쳤

을 땐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수영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정전이 되어 어두워 보지 못했

을 것이다.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있으니 궁금해진 모

양이다.

“누구예요, 손님?”

수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백광무 아들.”

“아, 그 도둑놈.”

대수롭지 않은 말투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린다. 도둑놈이라고 하

는 걸 보니 이 인간이 뭘 훔쳤군. 다행히 얼굴을 보자거나 돌아서라거나 하진 않는다. 최

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으나 덕분에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드릴 말씀 있어요. 잠깐 시간 내 주세요.”


“지금?”

“30 분이면 돼요.”

흐음. 노인은 우진을 불렀다.

“우진아. 손님 데리고 먼저 들어가 있어라.”

우진이 가까이 오더니 수현에게 손짓을 한다.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아, 살았다. 다

행이다. 걸음을 서둘러 옮기면서도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루 쪽으로 걸어간 다음에야 수현은 대문 쪽을 바라봤다 . 토끼와 노인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직원들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마루를 짚고 주저앉으니

우진이 의아하게 본다.

“아직도 어지러워요?”

“아, 아니야. 괜찮아.”

“들어가시면 돼요. 따라오세요.”

수현은 마루 아래 신발을 벗어 두고 우진을 따라갔다 .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싶었으나

곳곳에 있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무엇보다 노인

이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앉아서 기다리시면 할아버지가 오실 거예요.”

수현은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도자기와 그림, 병풍과 분재, 곳곳에 골동품

같은 것들이 꽤 눈에 띈다. 응접실을 구경하던 수현은 우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

다는 걸 알아챘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눈을 피한다.

“왜. 내가 뭐라도 훔쳐 갈까 봐?”

“네….”

아, 거참. 어린 새끼가 솔직하네.

“나도 똥오줌은 가려. 잡혀 온 처지에 막 아무거나 훔치고 그러진 않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둘 사이에 어색함이 오고 갔다. 수현은 조금 전 본 토끼

를 떠올렸다. 설마 노인네하고 같이 들어오진 않겠지. 앞에 앉은 아이는 휴대전화를 만

지작대는 중이었다.
“우진이라고 했지?”

우진이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백광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란 사람이 뭘 훔쳤다는 거야?”

우진이 입을 다문 채 어깨를 으쓱한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알면서 말해 주기 싫은 건지.

어린앤데도 묘하게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나. 그 인간이 아

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데서 뭘 훔쳐 갔다는 사실 역시 놀랍긴 하다.

수현은 혹시나 하여 다른 것도 물어봤다.

“아까 그 키 큰 사람은 누구야? 네 할아버지 부하?”

“형이요.”

“누구라고?”

“양호범. 저희 형이에요.”

이름이 양호범? 토끼가 아니라 범이었군. 그나저나 형이라는데 어떻게 하나도 닮은 구석

이 없지 … .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우진을 위아래로 살폈다. 귀공자같이 생긴 얘하고 사

람 잡아먹게 생긴 그놈하고… 어떻게 한 배 속에서…? 이복형제인가?

“사촌이에요.”

귀신같이 속내를 알아채고 대답을 한다. 아아, 어쩐지.

“그럼 네 형도 여기서 살아?”

“아니요. 여긴 저만 살아요. 호범이 형은 어쩌다 와요.”

나이스.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졌다. 알아보지 못했으니

그냥 갈 테고 당분간 마주칠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라고 여기고 있

는데 우진이 휴대전화를 보며 얼굴이 굳어진다.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같았는

데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

에 넣으며 시선을 피했다.

둘이 어색하게 앉아 있는데 30 분이 채 되기도 전에 노인이 문을 열고 등장한다. 누군가

와 함께였는데 차림새로 보아 노인의 비서인 듯하였다 . 노인이 등장하자 김우진은 시키


지도 않았는데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간다 . 정말 감시할 목적이었군. 씁쓸해져

웃고 있으니 직원이 차와 다과를 내온다.

“자네 아버지가 백광무 맞지?”

수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노인이 말을 잇는다.

“자네 아버진 자네가 죽은 줄 알고 있던데.”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집은 불탔고, 처와 자식은 함께 사라졌으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인간을 찾지 않은 건 차라리 없는 게 나아서였다. 그러다 수현은

궁금해졌다. 그 인간은 나를 찾으려고 노력은 해 봤을까. 오히려 군식구가 없어져 홀가

분해하진 않았을까.

여러 생각이 드는데 노인이 사진 한 장을 내민다. CCTV 화면이었는데, 누군가의 모습이

다. 15 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얼굴을 보니 옛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백광무가 내 물건을 훔쳤어.”

사진 속 배경은 이곳이 아닌 듯하였다.

“이 인간이 아직 살아 있다니 놀랍네요.”

엄마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사진 속 멀끔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를 보니 순간 화가 치민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찾아내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수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고 노인을 바라봤다.

“그래서요?”

“ 자네한테 갚으라고 할 생각 없네. 그럴 형편도 아닌 것 같고. 다만 자네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게 미끼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미끼란 말에 웃음이 났다.

“잘못 짚으셨어요. 그 인간한테 저는 그만한 가치가 없을 텐데요.”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

“거절하면요.”
“선택은 자네 몫이야. 빚을 진 건 자네 아버지지 자네가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여기서 나

가고 싶으면 나가 . 막지 않겠네. 다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제안 하나를 하려고 하는

데….”

노인은 뜸을 들였고 수현은 느긋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애초 부자의 정 따위는 없어 보이는데, 차라리 나를 돕고 실속을 차리는 건 어떤가.”

실속이란 말에 수현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아버지를 잡게

도와주면 보상을 하겠다는 건가. 뭐로? 돈으로? 수현은 침묵했다. 대답이 없자 노인이 차

를 입으로 가져간다.

수현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다. 아니, 죽길 바랐던 아버지

다. 살아 있으면 평생 수현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지금도 그 인간 때문에 잡혀 와서 이

꼴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수현은 찻잔에 뜬 꽃잎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얼마 주실 건데요?”

찻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본다.

“얼마면 되겠나.”

수현은 곰곰이 생각했다. 노인이 무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살고 있는 집과 일하는 사람

들만 봐도 상당한 재력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게다가 그 손주 놈은 사람을 칼로 찌른 다

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건 권력까지 갖추고 있을 가

능성이 크다는 거다.

“시간을 주세요. 생각해 볼게요.”

노인이 보일 듯 말 듯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 수현이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용건 끝나신 거 같은데, 먼저 일어서도 될까요? 피곤해서요….”

“좋을 대로 하게. 오늘은 그 방을 쓰고, 불편하면 내일 바꿔 주지.”

“네.”
수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추운데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거 같다. 크게 숨을 고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조금 전 긴장으로

손에 땀이 축축하다.

어쨌든 당장 모가지 따일 일은 없겠군. 신발을 신고 툇마루 아래로 내려왔는데 벌써 날

이 어둡다. 온 길을 되돌아가는데 집이 얼마나 큰지 한참을 걸었다 . 담벼락 아래로 개를

끌고 다니며 경비를 서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방에 도착하자 갈아입을 새 옷과 속옷이 곱게 개켜져 놓여 있다 . 언제 두고 갔는지 스킨

로션과 칫솔 샴푸 같은 생필품도 채워져 있었다. 뒤늦게 긴장이 풀린 수현은 침대 아래

놓아뒀던 바지를 꺼내 목걸이를 확인했다.

일단 이건 숨겨 두는 게 좋겠어.

수현은 그것을 침대 매트리스 안쪽에 깊숙이 넣어 뒀다. 그러고 나서 욕실로 들어가 뜨

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씻는 김에 욕조에다 물까지 받아 반신욕을 하고 나니 피곤이 풀

리며 살 것 같다. 옥탑방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노곤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는데 졸음이 쏟아진다 . 수현은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잘 때 입으라고 준 옷마저도 실크처럼 부드럽다. 상의 단추를 아래부터 채

우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일하는 직원인가. 궁금해하던 찰나 똑똑,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대답 대신 문이 열린다. 수현은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토끼가, 아니 양호범이란 인

간이 문 앞에 서서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입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가 아닌가.”

그가 뒤를 돌아본다. 뭐야. 방을 잘못 찾은 건가. 속으로 안도하는 것도 잠시 양호범이 안

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슬리퍼가 아닌 구두를 신은 채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가 들려

있었다. 가다가 돌아온 걸까. 왜?

뒷골이 서늘해졌다. 머릿속에선 경고음이 울렸다.

긴장하여 쳐다보는데 뒤따라온 직원이 양호범을 말렸다.


“도련님. 회장님이 이 근처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양호범은 직원을 향해 예의 바르게 웃었다.

“김 실장님. 내가 도둑놈 아들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10 분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

세요.”

직원은 더 채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수현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긴장하여 손끝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누구시죠? 무슨 일이신데요?”

양호범이 문 앞에 선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다 . 그의 눈두덩이 위쪽에 붙어 있는 거

즈는 당시 유리가 깨지며 베인 상처인 듯 보였다. 양호범은 말이 없었고, 수현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죄송한데, 저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면 그만 나가 주시면 좋겠네요. 쉬어야 해서요.”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와 테이크아웃 커피를 문 앞에 있는 작은 서랍장에 올려 뒀다 . 톡, 톡

손끝으로 서랍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 그는 수현을 빤히 보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구면이죠?”

정말 궁금한 얼굴이다.

아니, 그런 척 연기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물어본 다음 바로 입꼬리가 슥 올라간 걸 보면.


8화

양호범의 말에 수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닌데요….”

“그래요? 왜 낯이 익지?”

“제가 흔하게 생겼나 보죠.”

아아, 요즘은 이런 얼굴을 흔하게 생겼다고 하는구나 . 양호범이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지

껄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린다. 나가는구나 싶었는데 문을 열고 밖을 확인하더

니 다시 닫는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양호범은 돌아섰고 수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

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턱을 살짝 치켜든 모습이 위협적이

다.

“왜 막 들어오세요?”

“줄 게 있어서.”

응? 의문을 품을 새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양호범이 순식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수현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고 몸이 옆으

로 날아가며 스탠드가 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이 아닌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이

다. 수현은 얼얼해진 뺨을 붙들고 일어서며 양호범을 노려봤다.

“씨발! 뭐,”

욕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다시 손이 날아온다. 막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

다. 그대로 몸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고통에 신음하던 수현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놈을 향해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그러고 나서 잽싸게 손을 뒤로 뻗어 놈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칼이 쑥 뽑혀 나온다.

그것을 허공에 휘두르자 놈이 가볍게 피하며 씩 웃는다.

“역시 손이 빨라.”

수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잡았다.

“이 개새끼….”

다시 칼을 휘두르다 손목이 붙들렸다. 놈이 힘을 주자 뼈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뒤

따른다. 수현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트렸다. 놈은 그것을 잡아 빙글 돌려

칼끝을 수현의 턱 아래 가져다 댔다. 그 모든 동작이 계산된 듯 빈틈없이 빠르고 깔끔했

다.

“제대로 쓸 줄 모르면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턱 아래 있던 칼끝이 목으로 타고 내려온다.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그대로 칼

등으로 머리를 후려친다. 윽, 수현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길질. 살

려 달라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갑자기 쏟아진 폭력에 수현은 몸을 둥글게 말고 속

수무책으로 당했다. 한참을 그러고 나자 양호범이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나서 후 , 하고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는 수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어딨어?”

수현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었다. 대답하지 않자 양호범은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눈빛은 그날 밤 목걸이를 도둑맞은 그 얼굴

이었다.

“두 번 묻게 하지 마.”

“…….”

“어딨어?”
수현은 숨을 헐떡이며 입과 코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갈아입은 셔츠가 온통 피로 물들

었고 바닥도 피투성이다. 비로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봤다. 삼

백안. 잘생긴 얼굴임은 분명하나 눈에 살기가 그득하다. 여태 나쁜 놈들을 많이 마주했

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하는 놈은 흔치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

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범이 일어서며 그대로 끌고 간다 . 머리채를 잡힌 채 발버둥을

쳐 봐도 소용이 없었다. 짐짝처럼 질질 끌고서 욕실로 가길래 벗어나려고 했으나 두피가

벗겨지는 것 같은 통증만 뒤따른다. 끌려가며 손톱으로 팔을 할퀴고 주먹을 휘둘러도 소

용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욕실로 끌고 가더니 바닥에 짐짝처럼 내팽개친다 . 기회다 싶어 밖으로 나가려는

데 뒷목을 잡아채 욕실 벽에 내던진다. 쿵 소리가 나며 등이 벽과 충돌하였고, 뼈가 으스

러지는 고통에 바닥에 누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폭력은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현의 목에 무언가를 감았다. 뒤늦

게 그것이 샤워기 호스라는 걸 알아챘다. 살의를 감지한 수현이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줄이 확 당겨지며 숨통이 조여 온다 .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에 수

현은 입을 벌리고 팔을 휘저었다.

“기분이 어때?”

풀어 달라며 한 손으로는 줄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양호범의 팔을 두드렸다 . 컥, 컥,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수현의 눈에 눈물이 줄줄 타고 흘러내렸다 . 그 얼굴을 가만히 바

라보던 호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대로 목을 조이는 힘은 더 강해졌다. 눈앞이 흐려

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미친 새끼. 정말 죽일 작정이구나.

수현은 두려운 마음에 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손으로 말하겠다는 동작을 했다 . 그제야

줄이 느슨해진다. 콜록, 콜록, 숨통이 트이자 수현은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해 댔다 . 얼굴에

피가 쏠려 터질 것 같다. 흐르는 침을 미처 닦을 새도 없었다.

숨을 몰아쉬는데 양호범이 앞에 쭈그려 앉는다 . 그러고 나서 그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다정하게 닦아 줬다.
“그러니까 왜 거짓말을 해. 응?”

그 손을 쳐 낼 기운도 없었다. 수현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 목소리

가 덜덜 떨려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쪽 할아버지한테 드렸어. 내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닌 것 같아서….”

양호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수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서 준다고 놈이

날 살려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일단 놈과 떨어지는 게 우선

이겠고… 그리고 그다음은….

“10 분 정도 지났으니까 지금쯤 보고 계실 수도 있겠네.”

평화롭던 그의 눈빛에 잔잔하게 파동이 인다. 양호범은 분명 수현을 처음부터 알아봤다.

그런데도 태연한 척 굴었던 건 그 물건이 할아버지라는 노인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거라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 말을, 믿으라고?”

“가서 확인하면 되잖아. 여기서 애먼 사람 잡지 말고.”

호범은 수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수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양호범은 능수능란

한 놈이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거짓말하는 것도 기가 막히게 알

아챘겠지. 하지만 수현은 어릴 적부터 그런 놈들을 상대해 왔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를 찾아오는 빚쟁이들과 사채업자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으니까.

수현의 표정을 잠시 읽던 그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욕을 뱉어 냈다. 씨발.

“너. 거짓말이면 그땐 몸뚱이를 뜯어서 고기밥으로 던져 줄 거야. 알아들어?”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간다. 놈은 직원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윽고 직원이 들어왔고, 욕실에 흥건

한 피와 널브러져 있는 수현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사람을 또….”

수현은 비틀거리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 그런데 직원이 앞을 가로막는다. 왜

그러나 봤더니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올 때까지 감시하래요.”

수현은 휴지를 뜯어 코와 입에 흐르는 피를 막았다.

“도망 안 가요.”

비틀거리고 나와 주머니를 뒤지니 남자가 쳐다본다.

수현은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죄송한데, 안에서 제 약 좀 가져다주세요….”

“약이요?”

“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빠진 거 같아요. 제가 심장이 안 좋은데 … 지금 … 숨이 잘 안 쉬

어져서….”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짓길래 수현은 일부러 숨을 토막 치며 내쉬었다 . 그래도 먹히지

않아 눈을 까뒤집고 힘들어하자 직원이 안으로 급히 들어간다. 약이 어딨다는 거야. 혼

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바닥에 뒹굴던 스탠드를 주워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대체 어디에,”

퍽, 스탠드 뒤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니 붙잡고 쓰러져 신음한다. 수현은 스탠드를 바

닥에 집어 던지고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루에서 신발을 신는데 지나가던 직원이

쳐다본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인의 말대로 수현은 이곳에 붙들린 인질이 아니다.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나가라고 노

인도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곱게 나가진 않을 것이다. 절뚝이며

노인이 머무는 쪽으로 뛰어가는데 어디선가 휘이- 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수현은 걸음을 멈췄고 소리가 난 쪽을 보다 몸이 얼어붙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줄

알았던 양호범이 담벼락에 기대 이쪽을 보며 서늘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어디 가?”

호범은 몸을 세웠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

은 태평한 자세였으나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과 흡사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안

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껌이다.
껍질을 벗겨 입에 넣더니 질겅질겅 씹는다 . 덕분에 어젯밤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인

다.

“내가 널 어떻게 알아봤는지 궁금하지 않아?”

수현은 말없이 호범을 노려보았다.

“너.”

그는 수현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수현의 가슴 부위를. 그러고 나서 짓궂게 웃는다.

“들키고 싶지 않았으면 얼굴이 아니라, 젖꼭지를 가렸어야지.”

그제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그가 젖꼭지에 껌을 붙이며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오른다. 거슬려. 너무 눈에 띄잖아. 얼굴을 가렸어도 알아본 건 눈썰미가 좋아서

가 아니라 빌어먹을 젖꼭지 때문이었다.

씨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손을 올린다. 수현은 또다시 폭력이 이어질

까 봐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커다란 손은 얼굴이 아닌 헝클어진 머리 위로 내려앉더니

쥐어뜯겨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 주기까지 한다.

“물건만 내놔. 그럼 없던 일로 해 줄게.”

손길은 다정한데 목덜미엔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 조금 전처럼 목을 조를까 봐 수현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양호범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수현은 이

를 꽉 물고 그를 노려봤다.

“용서해 준다니까.”

됐다, 개새끼야. 믿을 놈을 믿어야지. 수현은 슬그머니 뒤로 한 발 더 물러섰다. 호범은

더는 다가오지 않고 그저 수현이 하는 행동만 지켜볼 뿐이었다.

“거기서 한 발만 더 움직이면, 네 발목을 예쁘게 잘라 줄 거야.”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양호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고, 수현은 돌

아보지 않고도 누가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범이 넌 왜 아직도 여기 있고?”

수현은 뒤를 돌았다. 수현의 얼굴을 본 노인의 눈이 커진다. 노인 곁에는 아까 수현이 스

탠드로 머리를 내리친 사내가 서 있었다 . 그는 정신을 차린 뒤 양호범이 아닌 양 회장에


게 먼저 뛰어갔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맞은 뒤통수가 얼얼한지 연신 어루만지며 수현을

노려보긴 했지만.

“자네는 얼굴이 왜 그래?”

노인은 수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뒤에 있는 호범을 쳐다봤다.

“범아, 네가 그랬어?”

“예. 하는 짓이 귀여워서 몇 대 쥐어박았어요.”

씨발. 아주 뻔뻔스럽게도 지가 때렸다고 이실직고를 한다.

“대체 무슨 일인데 오밤중에 사람을 때려?”

“별일 아니에요.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그렇지?”

수현에게 동의를 구하지만 그것은 협박이었다. 노인은 혀를 차며 수현을 응시했다.

“백수현이라고 했나. 자네가 말해 봐. 왜 내 손주가 자네를 때렸는지.”

수현은 말없이 서 있다가 뒤를 돌아 양호범의 표정을 살폈다. 옅은 미소를 띠고 눈썹을

까닥 치켜올리는 그의 얼굴에서 해 볼 테면 해 봐. 어떻게 되나. 라는 속내를 읽을 수 있

었다. 노려보던 수현은 꼭 말아 쥔 양 주먹을 펴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곧이어 목

걸이가 딸려 나온다. 뒤통수에서 씨발. 이라고 욕하는 양호범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상관

없었다. 그걸 노인에게 내밀자 호범이 뒤에서 팔을 잡아챈다.

“너.”

눈빛이 이글이글 레이저를 쏘기 직전이다. 손에 매달린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가 공중에

서 흔들렸다. 수현은 호범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왜 계속 웃어 보지 그래? 이 씨

발 놈아.

“영감님 손자분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이걸 달라고 떼를 쓰잖아요.”

그리고 일그러지는 양호범의 얼굴에 대놓고 한 방 먹였다.

“애새끼처럼 말이죠.”
9화

“뭐, 몇 살?”

응접실 한쪽에서 얼굴에 약을 바르던 수현은 우진이 한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얼

굴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얻어터진 자리가 욱신댄다 . 아, 하고 신음을 내자 앞에 앉아서

연고를 바르던 우진의 표정이 덩달아 구겨진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 형이란 인간이….”

“스물넷이요.”

세상에.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애새끼라고 비아냥거리긴 했으나 진짜 애새끼일 줄은 몰

랐다. 그것도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 . 하. 응접실 밖은 여전히 조용하다. 그는 노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되었는데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쯤 USB 에 들어 있는 내용을 확인했을까. 대체 그게 뭔데 다들 찾으려고 난리인 거

지. 불현듯 김창남이 떠오른다. 처음 의뢰를 했던 정육점 사장이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

목숨은 보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참에 콱 죽어 버리면 더 좋고.

“저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우진이 약상자를 정리하며 수현이 한 행동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수현은 옆에 있

던 거울을 끌고 와 얻어맞은 자리를 눈으로 확인했다. 한쪽 눈은 부어서 제대로 떠지지

도 않았고 코와 입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야무지게 때렸네. 개새끼가.

“그럼 어떡해. 네 형이란 인간이 날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아마 그걸 건네줬어도 나는 맞

아 죽었을걸.”
우진은 정리한 상자를 한쪽에 밀어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상처를 만지려는 수

현의 손을 잡아서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다. 수현은 포개진 손을 바라보다 슥 빼고 나서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그 표정은 뭐야. 내가 한심하다는 얼굴이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마음대로.”

“할아버지는 호범이 형한테 꼼짝 못 하세요. 어떤 잘못을 하든, 설령 할아버지 눈앞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감싸 줄 분이세요. 어릴 적부터 그랬고, 그건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어요.”

“…….”

“그러니 형은 이제 살았다, 가 아니라 죽었다라고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안타깝지만.”

정말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구급상자를 가지고 일어선다. 수현은 급히 그를 붙들었다. 마

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어린놈이 은근히 팔이 단단하다 . 우진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수

현의 얼굴로 이동했다.

“너 어디 가?”

“불똥 튀기 전에 가려고요.”

수현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방 뒤편을 응시했다 . 조금 전 우진이 한 말이 영 께름칙

하다.

“여기 있어. 이따가 무슨 일 생기면 너라도 내 편 들어 줘야지.”

달래며 팔을 잡아당기는데 우진이 꿈쩍할 생각도 않는다.

“거절할래요. 죽기 싫어요.”

다시 가려고 하길래 아예 매달리듯 양손으로 잡았다.

“야 그러지 말고. 부탁 좀 하자.”

우진은 매달리는 수현의 손과 수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

더니 구급함을 옆에 내려놓고 다시 앉았다.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삐리


가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혹시 생명의 위험이 발생하면 잠시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도와주면 뭐 줄 건데요?”

뜬금없는 말에 수현은 한쪽 눈썹을 치켰다. 응?

“형 도와주면… 뭐 주실 건데요?”

수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갑이고 뭐고 다 두고 온 터라 줄 게 있을 리 없다.

“글쎄…. 뭘 줘야 네가 좋아하려나.”

말을 얼버무리니 우진이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이 새끼, 왜 이러

지. 어쩐지 귀가 살짝 붉어진 거 같기도 하고.

“나중에… 말할게요. 물론 제가 형 도와주면요.”

“어… 그래.”

대화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수현은 긴

장하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양호범과 노인이 나온다. 얻어터

진 곳이 없나 살폈는데 얼굴이 너무 멀쩡하다.

수현은 절망했다. 뭐야. 왜 멀쩡해? 그렇게 숨기려 하더니, 그냥 넘어가겠다는 건가.

“내 손주와 서로 오해가 있던 모양이군. 자네도 이 녀석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서로 없던

일로 하게. 그리고 범아.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그건 네가 사과하거라.”

수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내가 잘못 짚었나. 머릿속으로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양호범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수현을 내리깔 듯 쳐다보았기에.

“때려서 미안해요.”

손이 슥 들어와 뺨을 만지려 한다. 수현은 기겁하고 그 손을 딱 쳐 냈다. 아 개소름 돋아.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니 호범이 입술 끝을 올리며 뻔뻔하게 웃는다. 등지고 있어 노인에

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의 눈빛은 목을 조를 때와 비슷했다.

노인은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한마디를 보탰다.

“오해도 풀었으니, 앞으로 잘 지내 봐.”


잘 지내? 누구랑? 기함하여 뒤에 있는 노인을 쳐다보는데 양호범이 그대로 수현을 지나

쳐 나간다. 그만 가 볼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사라졌고, 수현은 어리둥절함에 닫

힌 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우진인 그만 들어가 자거라. 백 군도 방으로 돌아가게. 정 불편하면 방을 바꿔 주지.”

수현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우진의 말대로 노인은 양호범이 사람을 죽여도 용서하려

나 보다. 혈육이란 원래 그런 건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절대적으로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양호범이 조금 부러워지려 한다.

“왜. 내게 할 말이 남았나.”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무세요. 인사를 꾸벅하고 나와 신발을 신으며 주위

를 살폈다. 어디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봐 불안하다. 목숨을 위협받는 초식 동물

처럼 두리번거리며 숙소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형. 하고 부른다. 돌아보니 우진이

다.

그가 작은 약상자를 내밀었다.

“진통제예요. 주무시기 전에 드세요.”

그의 호의가 고마웠다. 물론 애답지 않아 정은 안 가지만. 미소를 띠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인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저기… 내일….”

“응?”

아니에요. 주무세요. 저 갈게요. 하고 꾸벅 인사를 하더니 돌아간다. 뭐야. 사람 궁금해지

게. 내일 뭐? 붙잡아 묻기도 전에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속으로 약간 그런 생각

이 들었다. 혹시 저 새끼 나한테 관심 있나. 아까 약 발라 줄 때도 낌새가 이상하더니….

수현은 어릴 적부터 남자든 여자든 자신에게 내비치는 호감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 그

걸 이용할 때도 있었고 그러다 된통 당한 적도 많았으니까.

아아, 궁금해. 왜 말을 하다 말아서 잠도 못 자겠네.


방으로 돌아오니 그새 누군가 깨끗하게 치워 뒀다. 자려고 누웠는데 몸뚱이가 아파 잠이

오질 않는다. 결국, 진통제를 까먹고 다시 누워야 했다. 점퍼를 입고 이불을 덮어도 춥던

옥탑방과는 달리 이곳은 잠을 이루기에 충분히 따뜻하다. 약이 효과가 좋은 건지 통증은

점차 줄어들었고, 몸을 뒤척이다 보니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

망할.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현은 강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

다. 아침 7 시에 밥을 먹다니. 평소 같으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막 잠이 들 시간이다. 입

안이 까끌까끌하여 먹기 싫다고 했더니 어제 얻어맞은 그 직원이 닦달한다.

머리를 후려갈긴 게 미안해 하는 수 없이 욕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하고 눈곱을 떼어 냈

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거울을 통해 본 제 모습은 눈 뜨고 봐 주기

힘들 정도였다. 붓기는 더 심해졌고, 멍도 퍼렇게 들어 누가 봐도 매 맞은 얼굴이다.

밖으로 나왔는데 직원이 늦었다며 걸음을 재촉한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았는데 곳곳에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두울 땐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

다. 그렇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어제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곳 근처

였다.

문 위에 한자로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알 수 있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신발을 벗

고 안으로 들어서니 우진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란 식탁 중간에 커다란 화병이 눈에 띈

다. 거기에 꽂혀 있는 꽃은 노인이 밖에서 손질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오셨어요?”

“어, 안녕….”

수현은 실내를 한번 둘러봤다. 노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너넨 원래 아침을 새벽에 먹니?”


“새벽이라뇨. 지금은 아침이에요.”

“나한테 12 시 전은 새벽이야….”

“형도 적응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수현은 웃음이 났다.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니고 적응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때 뒤쪽

미닫이문이 열린다. 노인이 나타난 건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등장한다. 수현보다 우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깍듯하게 인사를 한

다.

“형님. 오셨어요.”

드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양호범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정쩡하게 서 있

던 수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양호범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잘 잤어요?”

웃기지도 않는다. 그렇게 사람을 두들겨 패 놓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다니 . 괜히 휘

둘릴 필요가 없어 대꾸하는 대신 앞에 있는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거슬리고 불편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스물여덟이라면서요.”

“…….”

“어려 보여서 나보다 동생인 줄 알았네.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수현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말했으면.”

놈이 피식 웃는다.

“예의를 갖춰서 때렸겠지.”

기가 막혀 웃자 그가 손을 내민다.

“나는 양호범. 스물넷.”

씨발, 다시 들어도 놀라운 나이다. 그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홱 돌렸다. 놈의 얼굴을 마

주할 때마다 어젯밤 살인마처럼 목을 조르던 모습과 오버랩되며 자꾸 움츠러든다 . 그것


도 싫은데 놈이 이젠 아예 대놓고 돌아앉아 수현을 쳐다본다. 그 시선에 목덜미를 물어

뜯기는 착각이 들었다.


10 화

벌이라고 하면 받는 사람이 반성해야 하는 게 벌 아닌가 . 이걸 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

현은 옆에 있는 호범을 흘깃 봤다. 집에 자주 안 온다던 인간이 왜 아침 일찍 식사를 하러

왔나 했더니, 어제 있었던 사건에 대한 벌 때문이란다.

이건 양호범이 아닌 수현에게 내리는 벌 같았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수현이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양호범이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쳐

다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하였으나 덕분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

르겠다. 양호범 이 새끼, 손가락 페티신가. 아니면 내가 자기네 집 반찬 축내는 게 아까운

걸까.

눈치가 보여 고기 대신 나물을 집는데 호범이 수저를 내려놓고 수현의 젓가락을 쑥 빼

간다. 놀라서 봤더니 그가 수현의 손을 한 손으로 잡고 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

당황하여 빼려고 했더니 다시 자리를 잡아 놓는다.

그제야 수현은 호범이 왜 계속 쳐다봤는지 이해했다 . 자신의 서툰 젓가락질 때문이라는

걸.

“왜 그 나이 처먹고 젓가락질을 유치원생보다 못해요?”

이 새끼는 기분 나쁜 말을 하면서 꼭 다정하게 웃는다. 홱 뿌리치고 나니 양 회장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한다. 한마디 하려던 수현은 관뒀고 양호범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저

밥을 먹었다.

식사 자리라고 해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 직원들이 차를 내왔다.

찻잔에 우린 차를 따르는 동안 양 회장이 수현을 불렀다.


“백 군은 생각해 봤나.”

수현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 대신, 돈 주세요.”

대놓고 돈 얘기를 하니 좀 그렇긴 했지만, 보상이니 뭐니 둘러 말하는 것도 수현의 취향

은 아니었다. 노인이 돋보기를 벗으며 얼마나? 하고 물었다. 수현은 어젯밤 내내 생각했

던 걸 이야기했다. 적어도 빚도 갚고, 앞으로 손 털고 착실하게 살려면 꽤 많은 금액이 필

요할 것이다.

“한… 10 억 정도?”

큭. 옆에서 양호범이 웃는다. 수현은 눈치를 살폈다. 노인의 눈치도 보고 앞에 앉아 조용

히 밥을 먹는 우진의 반응도 보고 … . 왜 그러지. 너무 많이 불렀나. 그래도 물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0 억에 아비를 팔겠다는 말이군?”

“없다고 생각하고 지낸 지 오래예요. 그쪽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사실 수현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백광무가 찾아올 거라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

다. 그렇게 자식한테 애틋한 인간이었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을 만들지도 않았겠지. 키우

면서 물리적 학대를 받은 건 아니지만 남들처럼 오순도순 지내던 기억 또한 없다. 그는

늘 집을 비웠고, 어쩌다 와도 돈만 던져 주고 가는 날이 많았으므로 . 애초에 정이란 게 있

을 리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노인은 수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 어떤 사람은 아비가 지은 벌을 자식이 대신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자네 생각은 어떤

가.”

뜬금없는 질문에 수현은 피식 웃었다.

“좆같은 소리죠. 그랬으면 이 세상에 죄인 아닌 놈이 있겠어요.”


노인의 표정이 미묘하다. 그리고 곧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끄덕끄덕한다. 기분

탓인지 모르나 옆에 앉은 양호범의 표정이 굳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

나 수현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이거였다.

“이대로 진행하실 거면 계약서는 꼭 써 주세요. 제가 하도 어릴 적부터 믿던 도끼에 발등

을 많이 찍혀서요.”

“아무렴. 그래야지. 근데 나도 조건이 있네.”

조건이란 말에 수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양 회장은 뒤의 말을 이어 갔다.

“자네 아비를 찾을 때까지 여기서 일을 배우면 어떤가.”

하마터면 물을 뱉을 뻔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양 회장의 제안에 옆에 앉은 양호범을

봤다. 그의 표정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다. 조금 못마땅해 보이긴 했으나 미리 알

고 있던 눈치다. 대체 둘이서 무슨 작당을 한 거야?

“일이요…?”

“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에 강단 있는 사람 찾기가 어려워. 우리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일했

는데, 요즘은 다들 편한 것만 하려고 하지. 그런 의미에서 난 자네가 아주 마음에 드네.”

강단, 물불, 두 단어만 머릿속에 쏙쏙 박힌다. 존나 몸으로 구르는 일을 시킬 작정이군.

“거절하면요.”

“어제도 말했지 않나.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이대로 밖에 나가면 내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까. 김창남이 누군가. 서

울에서 울산으로 도망간 백수현을 하루 만에 쫓아왔던 놈이다 . 근데 그런 인간이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게다가 그 정육점 사장은 또 어떻고. 그는 김창남을 벌벌 떨게 할 만큼

위험한 사람인 것 같았는데 둘 다 아직 연락이 없다는 건 김창남에게 변고가 생겼거나

아니면 이 노인이 김창남도, 정육점 사장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의 힘이 있다는 얘기다.

“어떤가?”

수현은 끄덕였다.

“좋아요…. 할게요. 대신 일하는 수당은 따로 쳐주시는 건가요?”


노인이 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그걸 보니 조금 불길하긴 했으나, 뭐 어때. 돈이 생긴다

는데.

“그러도록 하지.”

일은 어떤 걸까. 노인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하여 묻기도 전에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은 범이 밑에서 배우면 되겠군.”

수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네? 잘못 들었나 싶어 옆을 보니 양호범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껌을 까 입에 넣는다. 노인은 식사 자리에서 껌은 씹지 말라고 야단을 쳤

다.

양호범은 노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봤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백수현 씨.”

말도 안 돼. 수현은 양 회장을 간절히 쳐다봤다.

“회장님… 일은 여기서 배우고 싶은데요. 손주분하고 저하고 껄끄러운 사인데 같이 일하

는 건 아무래도….”

“왜. 난 상관없는데.”

양호범이 싱긋 웃는다. 그래. 너는 상관없겠지. 근데 내가 싫다 이 새끼야. 누가 네 꿍꿍

이를 모를 줄 알아. 네 할아버지 없는 데서 나를 실컷 괴롭히고 싶은 거잖아. 수현은 그

낯짝을 외면하고 정면만 바라봤다.

앞에 앉은 우진과 시선이 마주쳤고 수현은 눈빛으로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 우진아

네가 나 한 번은 편들어 준다고 했지. 그게 지금이다. 제발…. 그랬더니 우진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이런 중요한 얘기에 제가 끼어드는 건 아닌 줄 아는데요….”

세 사람의 시선이 우진에게 향했다. 우진은 안경을 한번 추켜올렸고 빨갛고 도톰한 입술

을 한번 꾹 깨물었다 떼어 냈다.

“저는 수현이 형이 그냥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윤 비서님이 제 경호원 새로 구

한다고 했는데 수현이 형이 대신해 줘도 괜찮고요.”


그 말을 들은 양호범은 팔짱을 낀 채 뒤로 기대며 웃었다 . 우진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보

지 못하고 앞에 있는 음식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형 동생 사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우진인 백 군이 마음에 드니?”

노인의 물음에 우진은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 예. 그 말에 노인이 흐음, 하고 미간에

주름이 생긴다. 수현은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솔직히 남자에다 연하는 취향이 아니지

만, 네가 원하면 이 형이 한 번쯤은,

“이번엔 범이한테 양보해라. 범이가 먼저 내게 제안한 것이기도 하니.”

아, 씨발. 하마터면 노인네 앞에서 욕을 할 뻔했다. 앞에 앉은 우진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는 곧바로 그것을 누르고 표정을 감췄다.

“그럴게요, 할아버지.”

수현은 조금 전 먹은 음식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양호범이 수현을 향해 몸을 기

울이며 팔을 뻗는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더니 왼쪽에 있던

사과를 집어 한 입 베어 물고 악당처럼 웃는다.

“쫄긴.”

수현은 직감했다.

곧 저 입에 들어갈 게 사과가 아니라 제 모가지라는 걸.

❖❖❖

망했어. 틀렸어. 차라리 관두겠다고 할까. 그러면 이곳에서 나가 뭘 할 건데. 김창남한테

끌려가 맞아 죽기밖에 더 하겠어.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붙들려 있다고 해명할까. 빼앗긴

USB 를 어떻게든 되찾아 주겠노라고 해 볼까.

하지만 놈에게 그게 먹힐 리가 없다. 되찾을 방법도 만만치 않을 테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한다 . 몸이 움찔 반응했다. 문이 열리며 우진

이 나타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그는 손에 쇼핑백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 그리

고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할아버지께서 가져다드리래요.”

뭔가 싶어 확인해 봤더니 현금 뭉치다. 놀라자 우진이 바로 설명을 보탠다.

“주는 건 아니고 나중에 받을 돈에서 까신대요.”

그래도 이게 어딘가. 당장 돈 한 푼 없는데, 잘됐다고 생각했다.

현금을 챙겨 넣는데 우진이 나가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는데….”

음흉한 구석이 있다고 한 말은 취소다. 양호범에 비하면 마음이 아주 착한 소년이었다.

양호범이 얘 반의반만 닮았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괜찮아. 네 할아버지하고 네 형하고 둘이 밀어붙이는 걸 무슨 수로 막냐.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우진은 정말 미안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볼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는다. 휴대전

화 번호였다. 그걸 수현에게 내민다.

“이거 제 번호예요. 나중에 휴대전화 생기면 저한테도 번호 알려 주세요.”

“왜?”

“그냥, 가끔 연락하게요.”

수현은 갸웃했다. 그러니까 가끔 왜?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우진은 볼펜을 내려놓았

고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는다. 혹시 알아요? 그때는 도움이 될지. 라는 영문 모

를 말을 하더니 그러고 나서 사라졌다. 수현은 그가 적어 둔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얼굴도 잘생긴 게 글씨까지 반듯하네. 이런 동생 있었으면 나라면 잘해 줬을 텐데.

그러다 며칠 뒤 양호범을 따라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 아

아, 진짜 싫다. 수현은 침대에 철퍼덕 누워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11 화

숨이 막힌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막히다 못해 목이 졸려 질식사할 것 같은 기분

이다. 목 아래 단추를 풀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차창이 지잉 내려간다 . 바람이 들어오

니 조금 살 것 같다. 수현은 운전석을 봤다. 양호범이 직접 운전을 하는 중이었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더 열어 줘요?”

쳐다보며 묻길래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얼핏 듣기로 대표라고 하던데 양호범은 왜 직접

운전을 할까. 차라리 직원을 시켰으면 이렇게 바로 옆에서 숨소리까지 들어 가며 앉아

있을 일은 없을 텐데. 창문을 열어도 갑갑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며 양호범을 봤다.

“담배, 피워도 돼요?”

존댓말을 하자 양호범은 부드럽게 웃었다.

“말 놔요. 내가 어린데.”

“그래? 그럼 피워도 돼?”

“아니요.”

아, 개새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니 그가 껌을 내민다 . 놈이

금연 중이라던 양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껌을 씹는 건가. 됐다고

손짓을 하고 나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 거리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지

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차가 도심의 호텔 앞에 멈춰 선다.

“내려요.”
발레 직원이 나타나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호범의 키를 잽싸게 받아 챙긴다. 뒤늦게 내

린 수현이 쫓아가며 주위를 살폈다. 대낮에 호텔은 왜? 영문을 모르고 따라 들어가는데

회전문을 통과하자 로비에 외국인이 많다.

직원들이 양호범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다. 나오셨습니까, 대표님. 수현은 그제야

이 호텔이 양호범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가 조금 떨어져 있던

수현에게 오라고 손짓을 한다. 검지와 중지만 까닥, 까닥. 마치 개를 부르듯.

마지못해 옆으로 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 타자마자 그가 제일 꼭대기 펜트 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다. 수현은 숫자가 바뀌는 걸 보다가 양호범

을 한번 흘깃 봤다.

“왜 그러고 쳐다봐요?”

“그 나이에 이런 호텔 가지고 있는 게 부러워서….”

호범은 웃었다.

“그런가? 남들은 재수 없다던데. 할아버지 잘 만나 어린 새끼가 사장 노릇 한다고.”

수현은 웃었다. 그 밑바닥엔 부러움과 시기가 깔려 있을 거다 . 이래서 태어나길 잘 태어

나야 한다니까. 누구는 스물넷에 서울 한복판 가장 비싼 땅에 호텔을 가지고 있는데 , 누

구는 옥탑방 월세도 밀려 빌빌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PH 층에 도착하자 양호범이 품에서 카드를 꺼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수현은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전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 실내가 넓어 수현

이 살던 옥탑방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기다. 게다가 옆에는 개인 수영장이 따로 있다.

수영장 역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해 뒀다.

차마 대놓고 감탄하기는 쪽팔려서 태연한 척하고 있는데 갑자기 양호범이 셔츠를 벗는

다. 수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뭐 해?”

“씻게요. 나갔다가 왔더니 찝찝해서.”


더럽게 깔끔떠는구나. 셔츠를 훌러덩 벗고 바지 지퍼까지 내리길래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다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잠깐 봤

는데 등에 커다란 문신이 있다. 얼핏 용이었던 거 같은데.

수현은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집을 구경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꽤 지

저분하다. 언제 마신 건지 술병과 여러 개의 잔이 소파 앞 테이블에 굴러다녔다 . 파티라

도 있던 걸까. 바닥을 딛던 그는 발에 무언가 밟히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이 하얗게 부서진 게 보인다. 저 새끼 약도 하나.

그리고 소파 아래 틈으로 천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이게 뭐지 싶어 잡아당기는데

하늘하늘한 여자 슬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여기저기 떨어진 콘돔 껍질. 수현은

그것들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나왔는지 양호범이 수건 하나만 하체에 걸친 채 다가온다. 슬립을 보며 누구 거냐

고 묻는 말에 수현은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오는 여자들이 많으면 누가 벗어 놓고 간 줄

도 모르는 걸까.

“청소해 주는 사람이 없나 봐?”

“있었는데 죽었어요.”

너무 태연해 마치 관뒀어요, 라고 말한 것처럼 들렸다. 왜 죽었냐고 묻자 호범은 창문 어

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맞은편 건물 옥상이 보이는 지점이었는데 손가락을 허공에 사

선으로 긋더니 제 머리에 대고 빵 총 쏘는 시늉을 한다 .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건가, 물을 새도 없이 양호범은 말을 덧붙였다.

“난 줄 알고 쐈겠지. 어떤 병신이.”

수현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21 세기에, 그것도 총기 사용이 금지된 한국에서 가능한

일인가. 믿기지 않아 창문을 보는데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저 새끼

가 나를 놀려먹는 모양이다.

“원래 청소는 믿을 만한 사람한테 맡기는데, 그 일 있고 나서는 하겠다는 사람이 아직 없

어서.”
갑자기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아진다. 혹시 지금도 저 맞은편에서 누군가 양호범의 대가

리를 노리는 건 아닐까. 물론 양호범이 이 자리에서 뒈지면 땡큐지만, 잘못하여 내 대가

리가 깨지면 안 되니까.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기둥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양호범이

피식 웃는다.

“그런다고 안 죽나?”

수현은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됐고, 일할 데나 알려 줘.”

그 말에 호범이 생수의 뚜껑을 비틀어 따더니 고갯짓으로 수현이 서 있는 자리를 가리켰

다.

“왔잖아.”

응? 수현은 갸웃했다. 어디? 주위를 둘러보던 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간다. 저

도 모르게 오만상을 구기며 양호범을 다시 쳐다봤다. 양호범이 돌아서자 그의 등에 커다

란 용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여의주를 물고 눈을 번뜩인다 . 수현은 그 뒤를 쫓아가며 따

졌다.

“이봐, 양호범 씨. 아니 양호범 대표님.”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드레스 룸이다. 마치 쇼룸을 옮겨 놓은 것처럼 마네킹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청소 도우미를 하라는 거야?”

어이없어 묻는데 그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푼다 . 순간 수현은 두 눈을 의심했다.

씨발, 자지도 존나 크네. 저게 가능한 크기인가. 크기를 키우려고 일부러 보형물을 넣는

놈들을 보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저 정도로 큰 놈은 없었다 . 보통 씻고 나오면 좀 쪼그라

들지 않나. 도저히 눈을 못 떼니 호범이 피식 웃는다.

“마음에 들어요?”

당황한 수현이 귀가 빨개져 노려봤다.

“뭐가?”

“남자하고도 잔다며.”
수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노려봤더니 호범이 속옷을 입고 태연하게 셔츠에 팔을 넣는

다. 주름 하나 없이 다림질된 셔츠는 그의 몸에 딱 맞춘 크기였다. 그보다 그가 조금 전

한 말이 거슬렸다.

“누가 그런 소릴 해?”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 데리고 왔을까 봐. 더 읊어 줄까?”

“…….”

“빚도 남자 때문에 생긴 거라며. 이름이 누구더라.”

그가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좁힌다. 수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지껄여!”

“안심해요. 나는 남자 취향은 아니라.”

호범의 말에 수현이 썩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잘됐네. 너도 내 취향 아니야.”

그 말에 호범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네. 수현은 문득 놈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걸까 궁

금해졌다. 이미 거기까지 알고 잡으러 온 걸 보면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설마 더 오래전 일도 알고 있을까. 차마 묻기가 두려워진다. 대신 수현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여기서 있긴 싫어. 손님들 방 청소면 몰라도….”

“손버릇 나쁜 직원을 손님방에 들여보낼 순 없어요.”

그렇게 못 믿을 거면 여기 청소는 왜 시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 편하게 생각해요. 나 자주 안 와요. 친구들 불러서 파티하고 놀긴 하는데 그건 아주 가

끔이고.”

수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호범은 더 솔깃한 제안을 한다.

“급여는 많이 쳐줄게요. 생명 수당 붙여서.”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고려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일하겠다고 온 거 아닌가. 설마

어떤 미친놈이 또 총을 쏘진 않겠지. 아니면 처음부터 양호범이 만들어 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놈은 은근히 사람을 골려 먹는 재주가 있으니까.


긍정의 뜻으로 침묵하자 그가 손을 내민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쳐다보고만 있으니 손을 붙잡는다. 얼결에 손이 잡혀 위아래로 흔들렸다. 키만큼이나 좆

도 크고 손도 크다. 다 커서 좋겠다 개새끼.

“청소는 오늘부터. 이따 직원이 와서 알려 줄 거예요.”

어젯밤 제 목을 부러트릴 것같이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양호범은 우호적이었다.

대체 노인네하고 무슨 얘기를 나눈 걸까.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놈의 본심이

어떻든, 지금 모습이 꾸며 낸 것이든 상관없다고, 오로지 돈만 받으면 된다고, 그렇게 여

겼으니까.
12 화

“안녕하세요, 저는 객실 담당 매니저 이윤철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백수

현 씨의 교육을 맡게 되었어요.”

남자는 수현의 어깨 정도 오는 키에 2 대 8 가르마를 하고 있었다. 40 대 중반으로 깐깐하

게 생겼으며 말 그대로 수현의 선임이었다. 남자는 자기소개 후 수현이 할 일에 대해 구

구절절하게 설명했다. 대충 쓸고 닦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 보통 청소는 침구 정리, 객실, 객실 바닥, 욕실, 욕실 비품 정리 순서로 일을 진행해요 .

그런데 여기는 사장님이 묵고 있는 곳이라 더 각별하게 신경을 쓰셔야 할 것들이 많아

요. 특히 드레스 룸. 드레스 룸 같은 경우 워낙 고가의 물건들이 많다 보니 더더욱 조심하

셔야 하고요. 청소가 끝나면 물건을 항상 그 자리에 흐트러짐 없이 배치해 놓으셔야 합

니다. 사장님이 주로 사용하시는 셔츠, 바지, 속옷, 이런 것들은 알아서 앞쪽에 배치해 주

시고요.”

수현은 생각했다. 이젠 내가 양호범의 빤스 취향까지 알아야 하는구나. 남자의 말은 끝

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수현을 유심히 본다. 왜 저러지? 싶었는

데 대뜸 다른 질문을 한다.

“얼굴은 왜….”

아, 수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제 부은 얼굴을 손으로 슥 문질렀다 . 대답하지 않자 매니저

가 다음 질문을 한다.

“혹시 사장님 친척이세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이상하네. 여기 원래 신입들은 올려 보내지 않거든요. 경력 오래 쌓이신 분들이나 좀 믿

음직한 분들이 오시는데….”

“….”

“그렇다고 백수현 씨가 믿음이 안 간다는 건 아니에요 . 오해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직접

데리고 오셨으니 그만한 인재겠죠?”

인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인질이다, 인질. 수현이 심드렁한 표정을 하자 남자는 이

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것도 모자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소 매뉴얼이 적

힌 책자를 따로 준다. 휘리릭 넘겨 보는데 책자 뒤에 남자의 이름 이윤철이 적혀 있다 . 직

접 만든 건가 쳐다보니 남자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제가 만들었어요. 우리 사장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셨죠.”

“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저기… 청소는 저 혼자 하나요? 다른 사람들은요?”

“원래는 4 명이 들어와서 했는데, 사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거라 당분간은 혼자 하셔야 할

거예요.”

하하, 수현은 입만 벌려 어이없이 웃었다. 다시 봐도 어마어마한 평수다. 이걸 매일 혼자

어떻게 쓸고 닦아? 양호범 이 새끼 나를 골병 들게 하여 죽이려는 작전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전에 일하던 사람이 총을 맞아 그 이후로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

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양호범의 거짓말인 거 같아서.

“혹시… 전에 일하던 직원이 관두신 게….”

매니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들으셨군요. 총 맞았어요.”

“…….”

“머리에 빵. 안타깝게도 지금 백수현 씨가 서 계신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
“극비 사항이라 다른 데서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더니 매니저가 수현의 발밑을 유심히 보다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확인한다. 그는 신

속히 수첩을 펼치더니 가슴에 꽂아 뒀던 볼펜을 빼서 글자를 적었다 . PH 핏자국 흐리게

남아 있음. 수현은 제 발밑을 내려다봤다. 정말 얼룩이 희미하게 남았다.

믿기지 않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총 맞아 죽는 일이 가능한 거구나.

“더 궁금한 거 있나요?”

매니저가 일어서며 수현을 보고 물었다.

“혹시 그 총 쏜 사람은 잡혔나요?”

“아직이요.”

수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다시 쏠 수도 있는 건가. 그래도 매니저가 유리를 모두

방탄으로 바꿨다고 말해 주어 조금은 안심했다. 그래서 이젠 다른 걸 물어봤다.

“혹시 여기에 직원들 기숙사 따로 없나요?”

“물론 있어요. 기숙사는 아니지만 나하고 같은 방을 쓰면 될 거예요.”

“아… 매니저님하고?”

“기쁜가요?”

수현이 억지로 웃었다. 네 기쁘네요. 매니저는 수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 알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 알려 준다. 대부분 출퇴근을 하는데 부득이하게 머물러야 하는 직원

들을 대상으로 방을 따로 내준다고. 그들은 호텔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기

도 했다. 해석해 보자면 자기도 꼭 필요한 사람이란 뜻이다.

“거기서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 보안팀이에요.”

“보안팀이요?”

“지하에 카지노가 있거든요. 예전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해서….”

무심코 말하던 남자가 아차, 한다. 수현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안 좋은 일 뭔

데요? 라고 물었으나 그는 쉽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카

지노라… 예전에 강원도에 놀러 갔을 때 몇 번 가 보긴 했는데….

차라리 거기서 일을 시켜 주지. 손님들 구경하고 이것보다 나았을 거 같은데.


“더 알고 싶은 내용 있어요?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예전에 안 좋은 일 그게 뭔데요?”

집요하게 물으니 매니저가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수현은 더 알아내는 것을 포

기했다. 교육을 마친 뒤 매니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혼자 남게 된 수현은 양호범의

침실로 먼저 향했다. 난잡한 거실과는 다르게 침대는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깔끔했

다. 창 앞으로 가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러고 있으니까, 성공한 부자 같네.”

물론 현실은 청소부지만. 침실 안을 둘러보던 수현은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폭신폭신하다. 양 회장의 한옥도 좋았는데 여긴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좋다 . 몸을 들썩이

자 침대의 스프링이 움직인다. 시트의 감촉도 끝내주고.

수현은 눈을 감았다. 이런 호텔에서 뒹굴어 본 게 언제더라. 이름은 흐릿해도 섹스는 기

억이 나는 것 같다. 얼굴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고 몸도 괜찮았는데 . 차에서 섹스하고, 호

텔로 옮겨 가서 또 하고. 나중엔 계속 만나자고 졸라 떼어 내느라 애를 먹었었지.

수현은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랫도리가 서서히 뜨거워진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고서

기둥을 천천히 문질렀다. 최근엔 가볍게 만나는 것도 귀찮아 손으로만 해결하다 보니 야

한 동영상 없이도 가능한 지경이 됐다.

“하아.”

몸이 점점 달아오른다. 머릿속으로 파트너를 상상했다. 단단한 몸. 예쁜 입술. 깨끗한 피

부. 적당히 각진 턱. 커다란 좆.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손이 바지 안에

갇혀 있으니 쉽게 움직이질 않는다.

수현은 아예 바지와 팬티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좆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훨씬 수월하다.

다리를 양옆으로 벌려 세우고 허리를 들썩이며 좆을 잡고 빠르게 흔들었다. 눈을 감으니

상상 속 남자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인다.

수현은 숨이 넘어갈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손은 더더욱 빨라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랫배가 단단해진다.

“아!”
엉덩이를 올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자 울컥, 정액이 분출하며 손과 배를 적신다. 그대로

잠시 여운을 만끽하고 나서 몸을 축 늘어트렸다 . 등에 닿은 시트의 감촉이 나쁘지 않다.

숨을 몰아쉬며 창밖을 보는데 구름까지 파랗다.

씨발, 이런 데서 하니까, 좋긴 좋네.

❖❖❖

“하, 씨발.”

호범은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 지금쯤 백수현이 얼마나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나 궁금하여 CCTV 화면을 켠 건데, 청소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허락도 없

이 자빠져서 자위 쇼를 펼치는 게 아닌가.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첫 번째 사정 후 다시 침대에 엎드리더니 자지를 시

트에 비벼 대고 지랄 발광을 한다. 노인네의 꿍꿍이에 맞춰 주느라 데리고 오긴 했는데 ,

하는 짓을 보니 참….

화면을 보는 호범에게 근처에 있던 윤 실장이 다가왔다.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그는 호범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지만 충직한 부하였고, 일 처리에 빈틈이 없어 믿고 맡

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호범은 화면을 탁, 닫아 버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 실장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태블릿으로 조금 전 전송받은 것을 가져와 확인시켜 준

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사이로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보인다. 윤 실장이 사진을 확

대했다. 자세히 보니 입술 끝에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기억나십니까?”

알다마다. 저 입을 누가 찢었는데.
“김태신이네요.”

“그날 별장에 백수현을 보낸 게 김태신입니다. 장부에 대해 알았던 걸 보니 어느 정도 파

악은 끝낸 거 같습니다.”

호범은 책상에 있던 껌을 하나 까서 입에 넣고 화면 속 남자를 노려봤다 . 2 년 전 호범이

호텔을 막 인수해서 시작할 무렵에 김태신 패거리들이 한번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

원래는 그 호텔이 김태신 손에 넘어갈 거였는데, 호범이 중간에서 가로챘으니 김태신 입

장에선 열이 받을 만도 하다. 나 같아도 내 밥그릇에 누가 재를 뿌리면 빡돌아서 쫓아갈

테니까.

그때 호범은 김태신을 처음 알게 됐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입이 좀 작은 듯하여 기념으

로 선물까지 줬다. 물론 놈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설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일 걸 그랬나 봐요.”

윤 실장은 대답 대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호범은 짜증 난 얼굴로 화면 속 김태신

을 가리켰다.

“이 새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 같아요?”

“글쎄요. 분명한 건 혼자는 아니란 겁니다. 별장에서 터진 폭탄이 러시아제였고, 저희 쪽

정보원에 따르면 최근에 김도철하고 둘이 만나는 걸 본 적이 있답니다.”

호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김태신이야 한번 재낀 적이 있으니 말 그대로 좆밥이라고 치

자. 근데 김도철이 나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양반은 깡패 출신이지만 지금은 사업가

나 다름없었다. 정· 재계에 연줄도 있고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김현식 의원 라인이라는

소문도 자자했다.

김현식은 또 누군가. 양 회장과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서민준 검사의 장인 아니던

가.

“일단, 두고 보죠. 장부가 카피든 아니든, 내 손에 있으니 얘들도 쉽게 움직이진 못할 겁

니다.”

“그 백수현이란 친구는….”

“살려 둬야죠. 혹시 알아요. 영감 말대로 우리한테 히든카드가 되어 줄지.”


“여전히 아버지 때문에 붙들려 왔다고 알고 있습니까?”

호범은 잠시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그래서 찾으러 다닌 게 맞지.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윤 실장은 보일 듯 말 듯 웃었고 호범은 제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 영

감 말대로 백수현이 도움이 될까. 물론 지금은 남의 침대에 자위나 하는 씹새끼지만 . 노

트북 화면을 열었더니 조금 전까지 누워서 딸딸이를 치던 놈이 이젠 침대 위에 올라가

방방 뛴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씨발. 저 나이 처먹고 귀엽기도 쉽지 않은데,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13 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꿀밤을 맞았드래요. 씨발, 씨발

아이 씨발. 얼마나 울었을까요. 씨발, 씨발, 아이 씨바아아알!

“아이 씨발, 진짜!”

수현이 들고 있던 호스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기다란 청소 솔로 수영장을 닦는 중이었

는데 얼마나 넓은지 어깻죽지가 끊어지는 것 같다 . 그냥 봐도 깨끗한데 뭘 또 이걸 닦으

라고 닦달인지. 한숨을 내쉬며 구석에 앉아 주머니를 뒤지니 담배가 나온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뒤 허공에 내뱉고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에 누워 딸 칠 때는 좋았는데 막상 청소하려니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

매니저 말에 따르면 양호범이 언제 여기서 수영을 할지 모르니 물은 항상 가득 채워 놓

아야 한단다.

물 부족 국가에서 이게 무슨 지랄인지 모르겠다 . 에이 짜증 나. 괜히 따라왔나. 저녁 시간

은 다 되어 가는데 청소는 끝이 안 보이고 팔은 아파 죽겠다 . 후, 푸념과 함께 허공에 연

기를 뿜는데 시야로 누군가 불쑥 들어온다.

하마터면 담배를 그대로 삼킬 뻔했다. 언제 왔는지 양호범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마치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그날 밤 목을 조르기 직전 그 표정으로. 수현은 서

둘러 담배를 끄고 꽁초를 뒤로 숨겼다.

“일, 일찍 왔네?”
양호범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열이 받은 건지 아니면 공중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처마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에서 잠깐이나마 흡연에 대한 짙은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수현은 주머니에 넣었던 담배를 꺼냈다.

“하나, 피울래?”

그걸 보며 호범은 이를 꽉 물고 웃었다.

“말했잖아요. 씨발, 금, 연, 중이라고.”

그가 껌을 까더니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그저 껌일 뿐인데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

을 잡아 뜯어 먹는 것처럼 느껴진다. 뒤늦게 양호범 때문에 다른 직원들까지 금연에 동

참하고 있다던 매니저의 말이 떠오른다.

수현은 슬그머니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꽁초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솔을 이용

해 바닥을 닦는데 양호범이 여전히 같은 자세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서 있다.

수현은 괜히 찔려서 더 열심히 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불을 새걸로

갈고 나서 왔으니. 자기가 쓰는 이불에 누워 자위하고 정액까지 처발라 놓은 걸 알면 저

성질에 대가리를 씹어 먹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길래 수현은 고개를 들고 최대한 상냥하

게 웃었다. 얻어맞은 거야 맞은 거고 그래도 잘 보여서 나쁠 건 없겠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우선 직장 상사 아닌가.

“뭐 시킬 일이라도….”

호범이 다른 곳으로 홱 가 버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물을

틀자 팔뚝만 한 배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진다. 금세 차겠군. 이마에 땀을 닦으며 수영장

밖으로 나오는데 간 줄 알았던 양호범이 소파에 앉아 있다.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까닥하길래 수현은 살짝 긴장하여 그쪽으로 갔다 . 앞으로 가서 가

만히 서 있는데 그가 쇼핑백을 하나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누가 봐도 휴대폰이다.

“당분간은 이거 써요.”
아.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봉투를 열고 상자를 꺼내는데 최신 기종이다. 수현이 휴대

전화를 꺼내서 확인하는 동안 그는 BAR 로 가서 술을 하나 꺼내더니 잔에 붓는다 . 그러

더니 잔을 형광등에 비춰 확인한다.

쯧, 혀를 차는 걸 보아하니 아까 잔을 잘못 닦아 놨나 보다. 다른 잔을 꺼내길래 수현은

얼른 가서 얼룩진 잔을 수거했다. 호범은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른 뒤 수현을 바라

봤다. 잔을 흔들 때마다 얼음 섞이는 소리가 달그락거린다.

“ 입을 옷가지하고 생필품은 직원 시켜서 숙소에 가져다 놨어요 . 맨몸으로 끌고 왔으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다고 두들겨 패 주란 소리는 아니지만.

“번호는 필요한 사람 있으면 가르쳐 줘요. 상관없으니까.”

이것도 의외다.

여기 갇혀 있으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거나 그런 건 어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해도 돼?”

“마음대로.”

선뜻 그러라고 하니 조금 기뻤다. 궁색하긴 하지만 옥탑방을 비워 두고 와서 마음에 걸

렸는데 잘됐다. 이동석을 포함하여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수현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어디 끌려가 나머지 신장 하나도 털린 건 아닐까 염려하면서.

수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

“고마울 거 없어요. 어차피 그쪽 아버지 찾으려고 하는 거니까.”

웃고 있으나 어딘가 냉랭하다. 이해한다. 더 대화를 나눠 봤자 득이 될 건 없을 거 같았

다. 어느 정도 청소도 마쳤고 이젠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레 물어봤다.

“더 시킬 거 없으면, 나 이제 퇴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호범이 술잔을 쥔 손으로 가라는 시늉을 한다 . 수현은 휴대폰을

챙겨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긴 한숨을 내쉬니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의


아하게 쳐다본다.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고 셔츠를 단정하게 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로 향

했다.

매니저가 알려 준 지하로 내려가 방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 입구에 이미 수현의 이

름이 적혀 있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방은 두 사람이 사용하기엔 충

분히 넓고 깔끔했다.

수현은 휴대전화를 충전시키고 청소하느라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다가 멈췄

다. 옷을 뒀다고 하여 봤는데 생각보다 고가의 셔츠와 바지가 각이 잡혀서 개켜져 있다 .

설마 하여 옷장을 열었는데 한두 벌이 아니다 . 가격표는 없었지만, 대부분 누구나 알 만

한 명품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 이렇게 비싼 옷을….”

설마 짝퉁인가. 뒤집어 보고 만져 봐도 알 수는 없었다. 상황이 거듭될수록 아버지가 훔

쳐 간 게 대체 뭘까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 잠시 생각을 접어 둔 수현은 욕실에 들어가 샤

워를 하고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씻고 나와 새 옷을 몸에 대보는데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옷이 더 확 살아난다. 그러다 번

뜩 김창남이 떠올랐다. 그놈 성격이면 분명 수현 대신 지인들을 찾아가 족치고 있을지

모른다. 수현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놈에게 당했으니까. 고민하던 수현은 휴대전화로

김창남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얼마 뒤 김창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수현은 입을 벙긋댔다. 막상 전화를 걸었는데 입은 떨어지질 않는다.

[어떤 새끼가 전화해 놓고 말이 없어!]

“형님, 납니다.”

조용하다. 수현은 끙, 하고 미간을 구겼다. 이 새끼 왜 조용하지? 지금쯤 한바탕 지랄을

떨어 줘야 정상인데.
“미안하게 됐어요. 근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내가 일부러 그걸 어떻게 하려고 한

건 절대 아니에요. 형님은 믿죠? 여기서 나가면 돈 갚을게요. 그러니까 괜히 애들 찾아가

서 괴롭히지 말고,”

[야, 백수현.]

“왜요.”

[너 다신 전화하지 마.]

수현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벽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눈을 깜빡이며 영문 모르는 표

정을 하는데 김창남이 한마디 더 붙인다.

[네 빚 다 갚았으니까 연락하지 말라고, 새끼야.]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으니 김창남이 진저리를 친다.

[씨발! 아무튼 연락하지 마. 네 돈 그 인간이 다 갚았으니까! 알았어?]

뚝, 전화가 끊긴다. 그 인간? 누구? 수현은 끊어진 전화를 보며 의아해하다가 양호범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 . 그 인간이 그걸 왜 갚아 줘 … ? 그러나 아무리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해도 제 주위에 그만한 재력을 가진 인간은 없었다.

아니면 김창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런 거짓말을 해서 뭐가 남을 게 있다

고. 천 원짜리 한 장도 악착같이 받아 가는 인간인데. 수현은 휴대전화를 보며 혹여 저장

된 다른 번호가 있나 찾아봤다. 설마 했는데 딱 하나 있다. 양호범이라고 적힌 이름이 낯

설다.

그것을 응시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간다.

그리고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말이 짧다. 숨이 거칠다. 씨발. 욕설도 들려오고 여자 신음도 같이 들려온다 . 수현은 시간

을 확인했다. 저녁부터 아주 화끈하시게 노네. 씨발, 기껏 청소해 놨더니.

“바쁜 거 같은데 나중에 할게.”


끊고 나서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남자한테 관심 없다던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전화가 걸려 온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소리가 태연하다.

“방해해서 미안.”

[용건만 말해요.]

“혹시 내 돈 갚아 줬어?”

대답이 없길래 아닌가, 했는데.

[빌려줬어요. 똥파리 꼬이는 거 싫어서.]

“아….”

[나중에 갚아요. 우리 할아버지한테 10 억 받으면.]

만약 10 억을 정말 받는다면 이것저것 갚고도 꽤 많이 남는다. 상상만 한 건데도 좋다. 물

론 지금으로서는 노인네가 그 돈을 진짜 줄지 100% 장담할 수는 없다. 백광무를 잡으면

생각이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아비하고 그 자식놈하고 세트로 묶어 땅에 파묻어 버

릴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양호범이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한다.

[나 같으면 백억은 불렀을 텐데.]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자 한마디 더 보탠다.

[그러지 말고 영감하고 다시 흥정해요. 원하면 내가 도와줄게.]

“됐어. 욕심부리다 배 터진다.”

나지막하게 웃음소리가 들린다. 현명하네. 짧은 대화 후 통화가 끊겼다. 저를 죽어라 패

던 놈과 하루아침에 웃으며 대화를 하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새 옷을 끌어안고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뭐가 뭔지 아직은 얼떨떨하지만, 기분이 영 나쁘진 않았다.


14 화

조용하다. 밤이 되자 수현은 슬슬 배가 고파졌다. 직원 식당은 따로 없는 걸까. 궁금하여

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매니저란 사람은 언제쯤 오는 건가. 그렇다고 양호범한테 연

락해 밥은 어디서 먹냐고 묻기는 좀 그랬다. 일단 찾아볼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는데 문

을 열자마자 지나가던 덩치 하나가 멈춰서 쳐다본다.

“누구? 신입?”

걸걸한 목소리. 바싹 자른 머리카락과 험악한 인상은 보안 요원이 아니라 어디 조직원으

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새로 왔습니다. 사람 좋게 인사를 하니, 남자가 위아

래로 한번 훑고 옆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카지노를 찾은 대부분의 손님이 외국인이었다 . 외국인 전용이라 그

렇다는데 매니저 말로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가장 많다고 했다 . 가끔 도박을 하기 위해

필리핀 등에서 영주권만 취득하여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밖으로 나온 수현은 불어오는 찬 바람에 외투를 여미며 몸을 움츠렸다. 양호범한테 두들

겨 맞은 데가 아직도 욱신거리는데, 고기를 좀 먹어 볼까.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건너편

에 삼겹살집 하나가 눈에 띈다.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자마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 입에 침이 고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심 좋게 생긴 사장님이 계산대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수현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살폈다. 창가는 이미 자리가 다 찼고, 어디 구석진

곳을, 어? 그런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인다. 수현을 알아보고 먼저 손을 흔들길래 귀찮

아질 것 같아 모른 척 돌아섰다.

“사장님,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런데 이번엔 소리를 지른다. 신입! 수현 씨! 백수현 씨! 어찌나 크게 이름을 부르는지

다른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삼겹살 가게 사장 또한 수현을 향해 눈짓을 했다. 너 부

르는 거 아니야? 라는 표정이다.

수현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고 입가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 . 저 멀리 창가 끝 쪽 자리에서

매니저가 손을 흔들며 오라고 손짓을 한다. 빌어먹을. 조용히 밥 처먹긴 글렀군. 마지못

해 갔더니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벌써 의자를 조금씩 옆으로 이동해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매니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당 직원에게 밥과 술잔을 추가로 달라고 부탁했다 . 낮에

잠깐 교육을 받은 것뿐인데 그는 수현에게 퍽 친근하게 굴었다. 그의 일행은 2 명이 더 있

었는데 한 명은 수현 또래의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다.

“불이 꺼져 있길래 없는 줄 알았는데, 밥 먹을 거면 같이 가자고 하지 그랬어요.”

수현은 그저 웃기만 했다.

“다들 알지? 여기 백수현 씨. 오늘부로 대표님 방 청소 이 친구가 맡게 됐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 직원이 저런, 하고 탄식을 한다. 수현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

다. 그들은 곧 수현에게 각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하나는 보안팀으로 수현과 동

갑이었고 알고 보니 수현의 옆방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프런트 직원으로 수현보

다는 3 살이 많았다.

“수현 씨 여기 다 좋은 친구들이에요.”

“네….”

“수현 씨도 자기소개 해야지. 고향은 어디예요? 학교는 어디 나왔고?”

고향은 서울이고, 학교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학교는 아니라… . 애매하게 웃으니 여

자 직원이 눈빛을 빛내며 말을 가로챈다.


“여자 친구는 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직원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누나가 그게 왜 궁금해?”

“왜 궁금해하면 안 돼?”

“아 됐고, 나는 장성현이에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동갑인데 말 놔도 되나? 근데 그거

되게 비싼 티셔츠 아닌가. 명품인데.”

“그러게. 못해도 백은 넘을 텐데.”

수현은 입고 있는 티셔츠를 봤다. 비싼 건 줄은 알았는데 그 정도인가. 미친. 차라리 돈으

로 주지.

“수현 씨 사장님 친척이란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에요?”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아, 다들 약간은 실망하는 눈치다.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가게 직원이 수현에게 수저와 술잔을 주고 간다 . 매니저가 술을 따라

주길래 양손으로 받아 반 잔을 마셨다. 빈속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속이 찌르르 한다. 오

이를 집어 장에 찍어 먹는데 보안팀이라는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얼굴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수현은 입가에 남은 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양호범한테 얻어맞았어요.”

“…….”

다들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다. 수현은 한마디 더 보탰다.

“제가 양호범 물건을 훔쳤거든요. 얼굴 이렇게 만든 것도 양호범이에요. 여기 끌려온 것

도 그것 때문이고.”

씩, 웃고 나서 나머지 술을 털어 넣자 분위기가 싸해진다. 매니저가 하하, 웃으며 수현의

등을 툭 쳤다. 젊은 친구가 농담도 할 줄 알고. 수현이 입을 꾹 닫고 있자 매니저의 볼살

이 움찔 떨린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조용해졌고 보안팀 직원이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아! 맞다. 나 약속 있었는데. 먼저 일어날게요. 죄송해요, 매니저님.”


수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제발 가라. 조용히 밥 먹고 싶으니까. 이에 질세라

프런트 직원도 합세했다.

“매니저님. 저도요. 엄마네 들른다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그들은 자기 몫의 밥값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진다 . 아이, 참. 쟤

들이 왜 저래. 매니저도 일어서길래 수현은 그도 그냥 가 버릴 줄 알았다. 차라리 그랬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밥이나 편하게 먹게. 그랬는데 매니저가 앞자리로 이동해

수현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는 직원이 더 가져온 고기를 불판에 올려놨다. 치익, 고기 굽

는 소리가 좋다.

“원래 이런 건 나이 어린 사람이 하는 건데, 첫 출근이니까 인심 썼다. 내가 구워 준다.”

막상 자기가 굽는다면서 고기를 다 태워 먹고 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고 그에게서 집

게와 가위를 빼앗아 들었다.

“매니저님은 왜 남아 계세요?”

“나는 밥을 덜 먹었거든. 참 사석에선 말 놔도 되나?”

“네. 그러세요.”

수현은 그를 쫓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능숙하게 고기와 김치를 올려놓았다. 요령 좋게 구

워 내자 매니저가 감탄을 한다.

“오, 고기 좀 구워 본 솜씬데?”

그러고 나서 수현의 빈 잔에 술을 채운다. 얼굴 때문에 먹어도 되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돈 때문에 매일 얻어터지던 날에 비하면 이건 양호한 거다 . 그때는 멀쩡

한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

“ 아까 그 친구들 나쁜 애들은 아니야. 우리 사장님이 사람 좋을 때는 좋은데, 화나면 진

짜 무섭거든. 그러니까 웬만하면 찍히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

사실 그들이 가건 말건 상관은 없었다. 그저 밥을 편하게 먹고 싶었을 뿐이지.

“매니저님은요? 안 무서워요?”

수현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고기를 집었다.

“무섭지. 왜 안 무서워. 내가 아까 말했지. 예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아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그는 술을 한 잔 들이켜고는 입을 연다.

“그때 사실 깡패들이 밀고 들어왔어.”

“깡패요.”

“응. 이쪽에선 꽤 큰 조직.”

그는 그날 거기 있었다고 한다. 몇십 명 되는 조직폭력배들이 호텔 영업도 전에 연장을

들고 우르르 쳐들어왔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직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근데 그때 양호범이 나타났고 칼 하나 들고 단숨에 그들을 제압했다고 한다.

수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거짓말.”

“정말이야. 내 눈앞에서 그놈들 팔다리를 다 끊어 놨다니까.”

“왜 아예 나뭇잎을 타고 날았다고 하지 그래요.”

“안 믿네. 하긴 나도 직접 봤는데도 안 믿기더라. 정말 호랑이 같았는데.”

수현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양호범 키가 190 정도 되려나. 그 덩치로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니 무섭긴 하다. 8 척 귀신 같겠네. 이후에도 매니저의 양호범 미화는 계속되었다. 잘하

면 호텔 앞에 동상도 세울 기세라 수현은 그의 말을 끊고 빈 술잔을 채웠다. 그렇게 둘이

소주 5 병을 비우고 나자 매니저는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아우, 야, 너 술 엄청….”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 수현도 취기로 벌게진 얼굴을 연신 문질렀

다. 밥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11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다. 매니저를 부축하

여 호텔로 오는데 지나가는 사람들과 나무들이 곡선으로 휘고 바닥도 움직이는 거 같다.

그렇게 호텔 앞까지 왔는데 정문 앞에 검은 차가 서 있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서너 명이

대기 중이다. 중요한 손님이라도 온 건가. 하는데 회전문이 돌아가며 양호범이 나온다.

처음 놈을 마주했을 때 그 양아치 같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사람들 사이에 선 놈은 호텔 대표로서 손색이 없었다. 수현

은 괜히 기가 죽어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양호범이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

가 다가왔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러 개의 시선도 같이 따라온다.


수현은 흘러내리는 매니저를 추켜올리며 양호범을 쳐다봤다.

“어디 다녀와요?”

“밥 먹으러요.”

“매니저님하고 벌써 친해졌나 보네.”

“네.”

“왜 존댓말 해요?”

“사람들 많아서.”

양호범이 픽 웃는다. 매니저를 부축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양호범이 안 가고 가만히 버

티고 서 있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봤는데 시선이 수현이 입고 있는 옷에 닿아 있다.

“옷이….”

수현은 속으로 흐뭇해했다. 알아, 알아. 잘 어울리지? 나도 거울 보면서 감탄했어. 호범

이 손을 뻗어 수현의 셔츠 깃을 매만졌다. 손가락이 목에 닿자 저절로 긴장이 된다. 놈이

목을 또 조를까 봐.

“생각보다 영….”

“영?”

양호범은 쯧, 혀를 찼다.

“미모를 못 담네.”

어? 진지하게 듣고 있던 수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양호범의 손이 떨어져 나갔고 그는

돌아서서 검은색 롤스로이스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차가 출발하자 다른 검은 차 두 대

가 그 뒤를 따라붙는다. 수현은 얼빠진 얼굴로 멀어지는 차를 노려봤다.

방금 저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 ? 저건, 칭찬이야. 욕이야. 술에 취해서 구분이

가질 않는데, 매니저가 옆에서 좀비처럼 으으, 고개를 든다.

“수현아… 너….”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수현은 움찔했다. 혹시 토하려고 그러나….

“사장님 애인이었냐.”

뭐래, 이 인간이.
어이없어 쳐다보는데 매니저의 고개가 아래로 다시 툭, 떨어진다.
15 화

씻고 출근을 하며 수현은 연신 하품을 했다. 옆을 보니 매니저는 벌써 출근을 한 뒤였다.

호텔에 취직하고 벌써 2 주가 흘렀는데 그의 성실함을 정말 따라갈 수가 없었다 . 따라가

고 싶지도 않았고.

어젯밤 악몽에 시달렸고, 잠을 계속 깼더니 눈꺼풀이 무겁기만 하다 . 씻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옆방 문이 열린다. 처음 식사 자리에서 본 보안팀 직원이다. 서로 꾸

벅 인사를 하였으나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수현이 사장한테 빚을 지고 맞아서 끌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곁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바라던 바였기에 차라리 잘됐

다 싶었다. 매니저만 빼면.

“수현 씨, 안녕?”

“안녕하세요.”

“오늘 끝나고 저녁 먹을래? 내가 막창집 기막힌 데 알아 놨어. 다른 직원들도 오거든.”

“저는 바빠서.”

“맨날 뭐가 바빠. 그러지 말고 이참에 사람들하고 친해지면 좋잖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진짜 바빠요.”

“들어 봐. 직장 생활이라는 게 말이야, 참 그렇다.”

그의 잔소리가 이어질세라 수현은 프런트에서 펜트하우스 카드 키를 받았다. 엘리베이

터로 도망치는데도 끈질기게 쫓아온다. 다행히 외국인 손님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

다.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 위층까지 따라와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매니저는 볼 때마다 영어를 능숙하게 했는데 수현은 그 점이 무척 부러웠다 . 매니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직원들도 그러했다. 혹여 외국인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면 수현은 긴장

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기껏해야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오케이, 땡큐, 섹스, 이런 것뿐이

어서.

카드 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도 여전히 깔끔하다. 양호범은 최근엔 이곳에 오지

않았다. 매니저 말에 의하면 그의 거처가 여러 군데라 호텔에 머무는 날은 1 년에 많아 봐

야 100 일도 채 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주인 없는 방을 매일 쓸고 닦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낯짝을 안 보니 속이 후련하였

다. 청소를 하기 위해 블라인드를 걷고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오늘따라 먹

구름이 잔뜩 끼었다. 무거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졸음이 쏟아

진다.

수현은 청소 대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 친한 지인들의 단톡방에

서는 어제 새벽을 기점으로 대화가 끊겼다. 웨이터나 아니면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놈들

이 대부분이라 낮에 움직이는 건 저 하나였다.

자냐? 라고 한마디 던져 놓고 휴대전화를 계속하여 쳐다봤다 . 역시나 읽는 새끼가 없다.

전화를 옆에다 던져 놓고 그대로 몸을 뉘었다 . 모로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지 창문에 물방울이 맺힌다. 수현은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 바

닥에서 소문 퍼지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입 싼 놈 몇 놈만 섭외하면 된다. 누가 어젯밤

변고를 당했다느니, 어느 우두머리의 첩이 부하하고 바람나서 도망갔다가 칼을 맞아 죽

었다느니, 하는 그런 얘기들은 하루아침이면 퍼졌으니까.

그러니 지금쯤 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을지 모른다. 백광무도 나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

은 인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으로 올까, 확신을 못 하겠다. 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되

는 거지. 죽는 건가. 그렇게 죽어 버리길 바랐는데…. 아니면, 나도 죽으려나.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 보니 하늘은 어느덧 파랗게 변해 있었다 . 요상한 날씨다. 수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잠깐 잔 거 같은데 몸이 개운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를

할까 하는데 수영장 물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을 보니 이곳에 온 지 30 분도 채 지나지 않

았다.

며칠째 비워진 데다 어제 청소를 했으니 오늘 하루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누가 알아볼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다 프런트 직원이 분명 그러지 않았나. 오늘도 사장님은 오지 않

을 것 같다고.

수현은 입고 있던 유니폼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 그리고 바지도 벗고, 에라 모르겠다,

속옷도 벗었다. 다 벗은 채로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물이 따뜻하다 . 아아, 좋다. 수영

장 주변은 통창으로 되어 있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파란 하늘과 또렷하게 보이는 높은 건물들.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 한 대. 자신이 성공한

인생처럼 느껴졌다. 힘을 빼고 뒤로 누우니 몸이 둥둥 뜬다. 물속이 침대처럼 편안하다.

눈을 감고 물고기처럼 유영했다.

그러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사람이 보인다.

수현은 놀라서 몸을 바로 세웠다.

수영장 끝에서 양호범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다.

“뭐 해요? 남의 수영장에서.”

수현은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양호범이

소리 없이 웃으며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푼다. 왜? 끌어내서 패기라도 하게?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데 그가 셔츠를 벗었다 .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댔다. 그는 바지도

속옷도 모두 벗더니 물속으로 첨벙 들어왔다. 수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영장 끝으로 뒷

걸음질 쳤다.

양호범은 다가오며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요. 수영 가르쳐 줄게.

“갑자기?”
머뭇거리고 서 있으니 어서 오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수현은 긴장하여 걸음을 떼지 못하

였다. 저 새끼 설마 나를 잡아다 물속에 처박고 물고문하려는 건 아니겠지 .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수현은 천천히 양호범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 변명 같겠지만, 수영장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야. 물을 받아 놓기만 하고 사용을 안

하니까, 아깝기도 하고,”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양호범이 팔을 낚아챈다. 놀라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그를 힘

으로 당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이 이끌려 물을 가르고 쭉 끌려간다. 발이 꼬여

물속에서 넘어지려고 하니 그가 어깨를 잡아 준다. 기분이 … 영 그렇다. 알몸으로 물속

에서 붙어 있으려니 뭔가… 수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수영하려면 우선 몸에 힘 빼는 법부터 배워야 해요.”

그는 수현의 등 뒤로 손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손이 어깨와 날갯죽지를 타고 내려간다.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새끼 왜 이래. 물속

임에도 입술이 바싹 마른다. 척추를 따라가던 손이 허리에 닿는다. 여기까지 너무 뻣뻣

하던데. 엉덩이 위에서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현은 아랫도리가 홧홧하게 달아올

랐다. 양호범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준다고 하면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먹

고 나면 대가가 따를 것 같아 그게 좀 찝찝하긴 하지만.

고민하는 동안 양호범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가까이 다가왔다 . 그의 입술이 닿을 듯하더

니 그대로 지나쳐 수현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인다.

“빚도 갚아 주고, 옷도 사 줬는데, 이 정도는 만져도 되잖아.”

아아. 정말 그런 거야? 얼굴을 떼어 내고 눈을 응시했다. 색이 옅은 삼백안의 눈동자에

욕망이 깃들었다. 말을 하지. 난 또 온전히 아버지 때문인 줄 알았잖아. 오히려 마음이 가

벼워진다. 수현은 그를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너 나 마음에 들어?”

“응.”

“파티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응.”

수현은 피식 웃었다.

개새끼. 그래 놓고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냐.

어쩐지 젖꼭지 운운하면서 시비를 걸 때부터 수상쩍더라.

“그럼 처음부터 말을 하지…. 그냥 한번 달라고.”

한 발 가까이 다가가서 키스를 하자 양호범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그대로 입술 사

이로 혀를 밀어 넣으면서 아랫도리를 그의 좆에 대고 문질렀다 . 단단하게 발기한 좆은

어지간한 아이 팔뚝만 했다. 씨발, 크기도 하지. 수현은 한 손을 양호범의 목에 감고, 한

손은 그의 좆을 잡고 문질렀다.

“하아, 씨발.”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양호범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내가 빨아 줄까?”

수현은 믿기지 않았다. 남자한테 관심 없는 척하더니 굉장히 적극적이네? 빨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물에서 나가려는데 양호범이 수현을 잡아 세운다. 여기서 빨아 줄

수 있어.

“여기서?”

묻기도 전에 양호범이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어라? 이건 또 무슨 조화야. 그런데 진짜

물속에서 수현의 성기를 쪽쪽 빠는 게 아닌가 . 세상에. 이 새끼. 생각보다 더 대단한 새끼

구나. 수현은 쾌감에 입술을 깨물며 물속으로 손을 넣어 양호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

다. 환장할 만큼 짜릿하다.

그런데 좋은 건 좋은 거고 시간이 흘러도 양호범이 물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이러

다 뒈지는 거 아냐. 뒈지는 건 상관없지만 같이 있다 죽으면 나만 골치 아픈데 . 머리를 휘

어잡아 위로 당기는데 양호범이 같이 올라온다 . 그는 물에 젖은 얼굴로 웃으며 여전히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껌을 씹을 때처럼.

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삐죽 들어 올렸다. 뭘 먹는 거야?

물을 새도 없이 그가 혀를 길게 내민다.
“네 좆.”

새빨간 살덩이를 보며 수현은 아연실색하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 수영장 물이 빨갛게 핏

빛으로 번지고 제 좆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양호범이 피가 묻은 입술을 닦으며 얼굴

을 들이밀었다. 이제 네 혀도 뽑아서 먹어 줄까?

아아아아아악!

끔찍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는데 눈이 갑자기 번쩍 떠진다. 순간 하얀 천장이 나타난다.

“으억!”

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헉헉대며 제 가랑이 사이를 보고, 그것도 모자라

바지 위로 좆을 만졌다. 멀쩡하니 붙어 있는 좆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

을 쓸어내렸다.

“씨발, 아, 씨발. 다행이다. 아직 붙어 있어.”

“뭐가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던 수현은 그대로 정지했다 . 언제 왔는지 양호범이 근처

에 서 있다. 한 손에 먹다 만 생수를 들고. 그것도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현은 잡고

있던 좆을 냉큼 놓고 침대 아래로 서둘러 내려왔다.

“미, 미안. 양 사장.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콜록, 콜록, 잠깐 기절했었나 봐.”

“기절한 것치곤 존나 잘 처자던데요. 좆도 만지면서?”

비웃는 목소리에 수현은 멈칫했다. 씨발. 티 나지 않게 눈을 흘기고 얼른 시야에서 벗어

나려는데 양호범이 다가와 수현의 팔을 낚아챈다. 수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 마! 먹지 마, 씨발!”

호범의 눈 밑이 일그러진다. 먹지 마? 뭘? 수현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 그것이 꿈이었음을 아는데도 이 미친 새끼가 정말 자신의 좆을 씹어 먹을 거같

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데 양호범이 시계를 가리킨다.

“30 분 줄 테니 가서 옷 갈아입고 와요.”

“왜…?”
양호범의 얼굴에 미소가 생긴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정말 즐거워 웃는 것처럼 보였

다.

“청소 잘해서 선물 주려고.”


16 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양호범은 말이 없었다. 수현은 창밖을 내다봤다. 찝찝하던 꿈

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아, 기분 나빠. 소름 끼쳐. 양호범 혓바닥 위에 있던

붉은 살덩이가 현실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수현은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 안 해. 그에게 반말을 하자 운전대를 잡은 남

자가 룸미러로 수현을 한번 쳐다본다. 오른쪽 손등의 뱀 문신이 낯이 익다. 수현은 그가

별장 파티에 양호범과 동행했던 사내라는 걸 기억해 냈다. 나이는 어려보이지만, 눈매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제법 묵직한 인상을 준다.

“보기보다 맷집이 좋은가 봐요. 멍이 싹 빠졌네.”

자기가 때려 놓고.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은. 할 만해요?”

“응….”

“하긴, 놀면서 돈 받는데 개꿀이지. 오늘처럼 그냥 자빠져 자다가 내려가면 되고.”

“…….”

“그죠?”

수현은 그가 자신의 사장이란 것도 잊고 노려봤다. 개새끼. 그럴 거면 왜 물어봐. 눈으로

레이저를 쏘았으나 양호범은 뻔뻔하게 웃으며 껌을 하나 까더니 입에 넣는다. 하나 주냐

고 묻길래 수현은 단번에 거절했다.


그가 턱을 움직이는 것만 봐도 꿈이 떠올라 오싹하다. 차는 어느덧 도심을 벗어나 외진

곳으로 들어갔는데 그럴수록 수현은 긴장이 됐다. 저 멀리 낡은 창고들이 나타나자 불안

은 점점 커져 압박감이 몸을 짓눌러 왔다.

양호범을 보는데 선물을 언급한 사람치고는 표정이 어딘가 싸하다.

“여기가 어디야.”

“들어가 보면 알아요.”

우리 아버지, 백광무를 잡아 온 걸까. 혹시 둘이 세트로 묶어서 이참에 없애 버리려는 건

아닐까. 묻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은데 목구멍이 탁 막혀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동

안 편해졌다고 놈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나 보다. 수현은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손끝

을 쥐어뜯었다.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내려 뒷문을 열어 준다. 창고 앞에는 검은색 봉고차

가 서 있고 두 명의 남자가 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들이 양호범을 보며 90 도로 인사를

한다. 풍기는 분위기나 온몸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호텔 보안팀과는 사뭇 달랐다.

끼이익, 낡은 창고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등이 켜져 있고 중년의 남자

가 서 있다. 수현은 그가 양호범과 함께 있는 걸 몇 번 봤다. 매니저의 말로는 윤 실장이

라고 했나. 나이는 많지만 양호범의 수하이며 오른팔이라고.

그다음으로 수현의 시선을 잡은 건 바닥에 있는 물체 , 아니 사람이었다. 팔이 묶여 바닥

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복면을 뒤집어씌워 놔 누군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수현은 긴

장하여 그를 보다가 양호범을 돌아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호범이 손가락을 까닥 위로 올리자 부하들이 복면을 단번에 거둬

낸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남자는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는데 아무리 봐도 백광무는 아

니었다. 수현은 잠시지만 그 사실에 안도했고, 안도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어때요?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수현은 다시 양호범을 봤다. 무슨 선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누군가 갑자기 수, 수

현아! 하고 고함을 친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돌아보던 백수현의 얼굴이 경악으로


변했다. 복면을 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이 낯이 익다 . 아니, 낯이 익은 정

도가 아니라 분명 자신이 아는 사람이다.

“수현아!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양호범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부하에게 눈짓을 한다. 그러자 부하가 덕트 테이프를 가져

와 입을 막아 버린다. 읍읍, 읍읍, 수현은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고 양호범이 뒤로 와 선다. 그가 수현의 어깨에 턱을 걸친다.

진한 스킨 향이 피 냄새에 섞였다. 묻잖아요. 선물이 마음에 드냐니까. 수현은 입을 벙긋

거렸다. 저 인간을 어떻게 찾았지.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묻기도 전에 호범이 옆으로

와 선다.

“김도한. 38 세. 7 년 전 백수현과 동거.”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수현은 이를 꽉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김창남한테 5 천만 원을 빌린 뒤 잠적. 그때 보증인이 아마, 백수현 당신이었지.”

멍청한 자신을 책망하며 술과 약에 빠져 지내던 시절도 고스란히 떠오른다.

“덕분에 지금까지 좆빠지게 고생하는 중이고.”

“…….”

“더 읊어? 동영상 얘기까지 해야 하나?”

양호범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낱낱이 까발려 준다. 수현은 피가 맺힐 정도로 입

술을 깨물었다. 양호범이 품에서 꺼낸 종이를 펼친다. 그러고 나서 그 종이를 수현이 볼

수 있게 눈앞에 들이밀었다. 대부 계약서에 적혀 있던 채권자의 이름이 김창남에서 양호

범으로 바뀌었다. 채무자는 여전히 김도한이었지만, 보증인 이름에서 백수현은 사라졌

다.

“뭐 하자는 거야…?”

호범은 그 종이를 들고 수현을 보며 웃었다.


“ 난 보증인한테 돈 받을 마음이 없어요. 돈은 빌린 새끼가 갚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멍청하게 보증 서 준 것도 잘못이긴 하지만. 근데 저 새끼가 돈이 없다네. 약쟁이라

장기는 다 썩었을 테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죽여야지.”

그 말에 입이 막혀 있던 김도한이 발광을 하며 울부짖는다 . 그의 목에 핏대가 서고 흰자

가 터질 듯이 붉어졌다. 수현은 오랜만에 본 그 얼굴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한때는 그

래도 마음도 주고 몸도 줬던 새끼인데 저 꼴로 앉아 있는 걸 보니 참….

수현은 양호범을 다시 쏘아봤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뭔데.”

양호범의 부하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칼을 꺼내 건넨다. 양호범은 그 칼을 받아 수현

에게 내밀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눈앞에서 번뜩인다.

“말했잖아. 선물 준다고.”

칼을 따라 올라가던 시선이 양호범의 살기 어린 눈빛에 닿았다 .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수현의 손에 칼을 쥐여 줬다. 그리고 입술을 수현의 귓가로 가져가 속삭였다.

“ 복수할 기회를 줄게요. 맺힌 게 많을 거 아니야. 손가락을 자르든 눈을 파내든, 백수현

원하는 대로 해.”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칼자루는 이제 수현의 손으로 넘어왔다 . 수현은 칼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양호범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

는다. 정말 수현의 복수를 해 주려고?

“해 보라니까.”

수현은 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인해 호흡이 가빠진다. 김도한을 보니 겁에 질린 표정이

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에서 옛 기억이 떠오른다.

[네가 대신 갚아 줘. 아니면, 네 동영상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구경하게 만들어 줄게.]

[씨발년, 네가 먹은 거 그거 처음부터 진통제 아니었어. 이제 알았냐? 하하.]

[수현아, 이 병신아. 너는 누굴 좋아하면 앞뒤 가릴 줄을 몰라. 멍청하긴.]


눈이 뜨겁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았지. 약에 빠져 폐인처럼 지낸 게 2 년이었다. 수현

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떼며 양호범을 바라봤다.

“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 내 손에 피를 묻혀서 나를 끌어들일 작정인 거지? 너희 수법

이 그렇잖아. 서로 피를 묻히게 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양호범이 피식 웃었다. 영화를 너무 봤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근데, 그거 알아? 넌 내가 벌벌 떠는 그림을 원했겠지만,”

호범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고, 수현은 그대로 몸을 틀어 김도한에게로 걸어갔다.

“잘못 짚었어, 씹새끼야.”

수현은 김도한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공포에 질린 두 눈은 한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했던 그 눈이다. 읍, 읍, 눈동자가 요동친다. 살려 줘. 수현아. 살려 줘.

수현은 칼을 거꾸로 세워 그의 귀 아래로 들이밀었다.

읍, 읍, 저를 보는 김도한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살려고 버둥대는 그의 머리를

붙들고 칼을 아래서부터 위로 힘주어 긁어 올렸다. 귓불이 썰려 나가자 김도한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앞뒤로 들썩인다.

힘을 감당하지 못하자 양호범의 부하들이 김도한을 붙잡아 고정했다 . 수현은 힘을 주어

칼을 위로 당겼다. 두둑, 귀가 얼굴에서 떨어지며 수현의 옷과 얼굴에도 피가 튄다. 동시

에 김도한의 검은자가 뒤집어지며 바닥에 쓰러진다. 귀가 잘린 부위에서 피가 솟구쳤고

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수현은 잘린 귀를 들고 돌아서서 양호범에게로 걸어갔다 . 양호범의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대로 귀를 집어 던지자 양호범의 가슴팍에 탁, 맞고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 복수는 이걸로 됐어. 그러니 나머지 빚은 네가 직접 받아. 병신같이 나까지 끌어들이

지 말고.”

문을 열고 창고 밖으로 나오는데 참았던 숨이 툭 터진다 . 앞에 대기 중이던 장정 여럿이

수현을 본다. 수현은 태연한 척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양

호범의 검은색 승용차를 지나치자마자 다리가 휘청였고 뒤늦게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간신히 일어서는데 구역질이 치민다. 수현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처먹은 게 없으니 나오는 건 신물뿐이다. 바닥을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벅벅 문질렀다.

숨을 몰아쉬며 돌아서는데 양호범이 이쪽을 쳐다보고 선 게 눈에 들어온다.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이 꼴을 보면서 비웃고 있겠지. 그래, 실컷 비웃어라.

아까 칼로 김도한 귀도 자르고 저 새끼 눈깔도 파 버리는 건데 .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때 놈의 등 뒤로 그의 부하들이 자루에 무언가를 담아서 들고나온다. 그

리고 그것을 검은 봉고차에 싣는다.

수현은 그것이 조금 전 자신이 귀를 잘랐던 김도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수현아. 수현아 여기 봐야지. 응 착하네. 여기 봐. 약하게 들리는 신음과 함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명이 아니다. 수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을 흘리고 있었고 카메

라엔 그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와, 씨발년, 엄청 조이네. 미칠 것 같아.”

백수현 구멍에 삽입을 하고 허리를 움직이는 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하얗게 마른

백수현의 몸은 그대로 카메라를 통해 드러났다. 박을 때마다 몸이 흔들리고 예쁜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아, 교성을 내지르며 팔을 뻗자 남자가 몸을 숙인다.

“그래 서방님이 안아 줄게. 아 씨발 왜 이렇게 예쁘냐 너.”

씹새끼야. 얼굴 안 나오잖아. 안으면 어떻게 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영상에 섞여 들어

간다. 빨리 나와, 나도 하게. 씨발 다음은 내 차례야.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백수현은 환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영상을 보던 호범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하필 백수현의 흥분한

얼굴이 카메라에 정면으로 잡힌다. 7 년 전인데도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얼굴을 가

만히 응시하고 있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 온다.

백수현을 찾으러 간 태준이다.

“응.”

[백수현 찾았습니다. 데리고 갈까요?]

호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앞으로 걸어갔다. 반짝이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차들 옆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니어처처럼 작게 느

껴진다. 말이 없으니 태준이 대표님? 하고 부른다.

호범은 뒤늦게 대답했다.

“둬. 먼저 연락 올 거야.”
17 화

아, 씨. 수현은 옥탑방 문 앞에 쌓인 자신의 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짐이라고 할 것

도 없었다. 옷가지와 세면도구, 찌그러진 냄비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화분을 들추

었으나 옥탑방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현은 상자에 담아 놓은 노트에서 스프링을 빼냈다. 그 끝을 펴서 열

쇠 구멍에 넣고 쑤시니 문이 덜컥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나 방이 텅 비었다 . 어

쩌면 당연한 결과다. 보증금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것마저 월세로

다 까였을 테니까.

밖으로 나와 짐들 중에 쓸 만한 걸 박스에 담아서 들고 내려왔다 . 막상 양호범한테서 도

망치긴 했는데 갈 곳이 마땅히 떠오르질 않는다. 동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답이 온다.

오늘 일찍 끝날 거 같다는 말에 수현은 그럼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이야기했다. 바

쁜지 답장이 없다. 그래도 그를 만날 생각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전에 일하던 오아시스

근처로 가 하룻밤 지낼 숙소를 찾았다.

오아시스 근처에는 모텔촌이 있었는데 평일 밤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방

중에서 가장 싼 곳을 골라 계산을 하고 키를 받은 뒤 위로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에 같

이 탄 커플이 행여 알아볼세라 고개를 돌린다.

3 층 305 호에 들어간 수현은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 옷

을 벗으려고 보니 셔츠 밑단에 피가 튀어 있다. 손톱 아래에도 덜 씻겨 나간 핏자국이 선

명하다. 수현은 그것을 보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후, 욕조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면서 몇 시간 전 일어난 일을 되새김질했다 . 아직도 꿈만

같다. 김도한의 귀를 자르던 양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떨린다. 꽉 말아 쥔 다음 담배를

끄고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찬물을 틀어 머리부터 뒤집어썼는데도 정신이 나질 않는다. 밖으로 나온 수현은 옷을 갈

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김도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씨발. 눈 하나 깜

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는 새끼들도 있는데, 그깟 귀 하나 자른 게 뭐 대수라고.

따지고 보면 놈이 먼저 잘못한 거다.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수현을 꼬셔 동거를 시작하더

니 벌어 오는 족족 약값으로 갈취하고, 원하지도 않는 동영상까지 강제로 찍지 않았나.

그리고 이후에는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해 보증까지 서 줬었다.

어느 날 놈은 잠적했고 그 빚은 고스란히 보증을 섰던 수현의 몫이 됐다. 지금 같으면 그

깟 동영상 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땐 어렸고, 혹여 아버지와 관련된 누

군가 영상을 보고 저를 다시 찾아올까 봐 무섭기도 하였고 ,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죽

어도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지만….

그러니 그 새끼는 죽어도 싸다. 저뿐 아니라 김도한한테 피해를 당한, 앞으로 피해를 당

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새끼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죄책감은 어느덧

씻겨 나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같다.

아니, 사실 그의 귀를 칼로 자를 때부터 속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고 올라왔다. 그것

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뭐, 그런 거였지.

자리에서 일어난 수현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를 꺼냈다. 한 캔을

따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유흥가의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 전봇대를 붙들고 토

를 하는 사람도 보이고 택시를 타려 실랑이를 하는 이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두 캔을 단숨에 비운 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양호범은 지금쯤 나

를 찾고 있을까. 아니 그럴 생각이었으면 아까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 놈은 알

고 있다. 내가 다시 돌아가리란 걸. 갈 곳이 지금은 그곳밖에 없다는 걸.

수현은 한숨을 내쉬고 전화기를 한쪽에 던져 버렸다 . 빌어먹을. 빈속에 맥주만 깠더니

잠이 쏟아진다. 눈을 감고 있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꿀 같은 수면을 전화 소리가 방해


한다. 잠결에도 수현은 생각했다. 혹시 양호범인가.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동석이었다.

수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동석아. 벌써 끝났냐.”

[너 지금 어디야?]

“왜.”

[혹시 궁전 모텔 들어갔냐?]

수현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 여기가 궁전모텔이던가. 검은색 휴지 갑에

적힌 글자를 보니 궁전모텔이 맞다. 느낌이 싸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본 사람 있나 봐. 김 실장한테 연락 왔어. 근데 이 인간이 다른 데다 전화해서 너 있는

곳 알려 주더라.]

“다른 데 어디?”

[나도 몰라. 그러니까 빨리 튀어, 새끼야.]

수현은 모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새벽 12 시 30 분이다.

[가려면 멀리 가든가, 하필 가게 근처에다 방을 잡냐. 병신이냐.]

동석의 핀잔이 이어졌으나 수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몰라, 씨발. 일단 끊어. 짐을

상자에 대충 쑤셔 넣고, 휴대전화를 챙겨 나가려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린다. 수현

은 멈칫하고 그 문을 노려봤다. 다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기에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

다.

“손님, 잠깐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아까 계산이 잘못된 거 같아서요.”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문밖도 역시 조용하다. 씨발.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밑을 확

인했다. 뛰어내리면 얼추 도망갈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어라? 그런데 모텔 입구에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사내들이 서 있다. 수현은 그들이 정육점에서 고기를 손질하던 남자라

는 것을 알아봤다.

저들이 왜 여기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다시 문을 두드린다.


“백수현. 안에 있는 거 알아. 열어.”

“…….”

“너 이거 안 열면 부수고 들어간다.”

위협적인 목소리. 수현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육점 사장일 거라고 짐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가늠할 새도 없었다. 입구를 막을 수 있는 걸 찾다가 1 인용 소파를 옮겨 앞을 간신

히 막아 놨다. 그래도 안 되겠어서 이번엔 3 인용 소파를 문 쪽으로 미는데 갑자기 쾅 하

고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러시지 말고 저한테 열쇠 있어요. 잠시만요, 제가 가져다드릴 테니 제발 문은 부수지

마세요.”

간절한 목소리가 들린 뒤 조용해진다. 수현은 아연실색하여 창문을 열고 아래를 봤다 .

소란을 들었는지 밑에서 다른 부하들이 위를 올려다본다 . 그들의 험악한 표정에서 수현

은 앞이 깜깜해짐을 다시 한번 느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들고 있던 휴대전화로 다급히 어디론가 연락을 시도했다. 신호

가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말이 없다. 수현은 이를 까득 물었다. 씨발 자존

심 상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저를 구해 줄 사람은 양호범밖에 없다.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분명 끌려갈 테고 ,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대가를 치를 거다 . 정육

점 냉동고에 고기처럼 매달릴 수도 있고, 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

니 살려면 지금은 이 인간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와 줘.”

[안 들리는데?]

개새끼. 들었으면서.

“도와 달라고. 나 죽게 생겼어!”

달칵, 문고리가 돌아간다. 씨발. 양호범에게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는데 하필 도중에 휴

대전화 배터리가 수명을 다한다. 이래서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

던가. 서둘러 창문으로 뛰어올랐다. 아래에 있던 덩치들이 위를 쳐다보며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친다. 옆을 보니 배관 하나가 옥상까지 이어져 있다.


수현은 그대로 뛰어 배관에 매달렸다. 배관을 밟고서 위로 올라가는데 창문으로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힉, 기겁하고 보니 정육점에서 저를 안내해 줬던 남자다.

“이 새끼 너!”

그가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수현을 잡으려고 팔을 뻗는다. 하지만 닿을 리가 없다. 너 이

리 와, 개새끼야. 손이 닿지 않자 그가 회칼을 꺼냈고 그것을 수현에게 휘둘렀다. 닿을락

말락 시퍼런 칼끝을 보며 수현은 오금이 저려 왔다.

“말로 해요, 말로!”

“무슨 말? 네가 우리 형님 뒤통수 때리는 바람에 우리가 얼마나 피똥을 쌌는지 알아?”

“때리긴 누가 때려. 나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니까? 아, 씨발 칼 좀 치우고 말해!”

그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모텔 방 곳곳에서 창문

이 열리며 사람들이 얼굴을 내민다. 저거 뭐야? 사람이야?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

지만 유흥가 근처 모텔이 그렇듯 그들 중에 떳떳하게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수현은 안색이 질려 그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신고해 주세요. 얼른요. 깡패들이 사람 죽여요!”

덩치가 사라지고 이번엔 다른 사람이 고개를 내민다. 정육점 사장. 이름이 김태신이었던

가. 그는 어디서든 존재감을 뿜어냈다. 찢어진 입은 여전히 괴이했으며 웃지 않아도 웃

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수현은 그를 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알아. 창남이한테 들었어. 납치됐다며.”

그의 말에 수현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매달려 있으려니 다리도 떨리고 팔도 떨리고

온몸이 다 아프다. 밑을 내려다보니 덩치 여럿이 고개를 젖혀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감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
“물건을 잃어버렸으면, 값은 치러야지.”

억울하다. 미리 선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일부러 빼돌린 것도 아닌데. 나도 살려고 그랬

다고 말하면 믿어 줄까. 담배를 물고 있던 김태신이 위를 쳐다본다. 덩달아 고개를 들던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옥상에 그의 부하들이 있었는데 로프로 올

가미를 만들어 수현의 머리 위에서 낚시를 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씨발. 그대로 뒀다간 목이 졸릴 기세라 팔로 로프를 거둬 냈는데 순식간에 잡아당겨 손

을 낚아챈다. 당황한 수현이 팔을 휘둘렀으나 이미 묶인 줄이 풀릴 리 없었다. 동시에 그

들은 위에서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오른쪽 팔이 당겨지며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찾

아왔다.

놓으라고 발버둥을 칠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세진다. 아, 씨발! 아프니까 그만해! 그만!

몸이 반강제로 위로 점점 딸려 올라간다 . 묶인 손목은 잘려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놈들과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옥상 위로 수현의 머리가 올라오자 그들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고서 바

닥에 패대기쳤다. 이어서 발길질이 쏟아진다. 수현은 머리를 팔로 감싸고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폭력을 멈췄다.

“그만해, 새끼들아. 형님이 데리고 오래.”

그들은 비틀거리는 수현의 손을 테이프로 포박하여 아래로 내려왔다 . 담배를 피우던 김

태신이 더 물을 것도 없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수현의 뺨을 냅다 후려갈긴다.

“윽.”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코피가 터졌는지 입술과 턱으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린다. 돌아

서는 김태신의 뒷모습이 흐릿하다. 피를 뚝뚝 흘리며 끌려가는데 얻어맞은 머리가 띵하

다. 양옆에서 힘 좋은 두 놈이 붙들고 있으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차에 태워진 수현은 손목에서 반짝이는 은색 테이프를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입이 써진다. 그리고 이어서 수현의 옆에 김태신이 올라탄다. 차가 출발하자 그는 담배

를 꺼내 물었고, 고개를 돌려 수현을 응시했다.


“ 지금부터 너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대답 잘하면 풀어 줄 거고, 아니면 그대로 정

육점으로 간다.”

그가 말한 정육점으로 간다, 는 뜻이 무언지 알 것 같다. 차가 출발하고 그가 차창 밖으로

피우다 만 담배를 던져 버린다.

“첫 번째. 양호범은 납치한 너를 왜 살려 뒀을까.”


18 화

수현이 그를 돌아봤다. 놈은 양호범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

니다. 나는 지금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살 수 있을까. 양호범이 살려 둔 건

나의 아버지 백광무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 이 작자가 과연 수긍할까. 입을 달싹이는데,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너를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그 새끼 성격에 아직 살려 둔 게.”

“…….”

“대체. 왜?”

그때 옆으로 차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쳐 간다. 하지만 그 차는 멀어지기도 전에 김태

신이 탄 차 앞을 가로막았다.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자 몸이 앞으로 휘청이며 튕겨 나

간다. 수현은 중심을 잡으려다 이마를 앞좌석 등받이에 찧었다. 옆에 앉은 김태신은 자

세를 가다듬고 이를 갈았다.

“뭐야.”

운전대를 잡은 그의 부하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앞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운전사가 사나운 기세로 문을 열고 내린다. 수현이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 앞질러 간

차가 익숙하다. 차 앞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내렸고 조금 전 기세등등하게 내린 운전사는

뒤로 주춤 물러선다.

옆에서 김태신이 의자에 팔을 걸치며 헛웃는다.

“저게 누구야?”
어둠 속에서 정장을 입고 나타난 남자는 놀랍게도 양호범이었다 . 그는 김태신의 부하를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고 나서 수현이 앉아 있는 좌석의 창문을 똑똑, 두드렸

다. 김태신은 창밖을 노려봤고, 곧 뒤따라온 김태신의 부하들이 차에서 내린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양호범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수현이 묶인 채로 눈치를 살피자 양호범이 아예 뒷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뭐 해요, 안 내리고?”

눈치를 보던 수현이 내리려고 한쪽 다리를 차 밖으로 빼는데 김태신이 품 안으로 손을

넣는다. 수현은 그대로 정지했고, 호범은 그걸 보며 눈빛을 서늘하게 빛냈다.

“김태신.”

김태신은 대답 없이 양호범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양호범의 협박.

“그거 꺼내면, 넌 죽어.”

담담한 목소리는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다. 김태신은 죽일 것처럼 노려보면서도 더는 움

직이질 못한다. 그사이 호범이 수현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얼결에 차 밖으로 끌려 나온

수현은 뒤에서 김태신의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는 걸 발견했다 . 쪽수로 붙어도 양호범이

불리하다. 그런데도 양호범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김태신을 향해 서늘하게 일갈했다.

“웃어, 새꺄. 그러라고 내가 입도 찢어 줬잖아.”

김태신의 표정이 야차처럼 변한다. 호범은 생글거리며 문을 탁 닫았다. 김태신의 부하들

은 열받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 호범은 수현을 끌고 차로

가서 보조석에 밀어 넣은 다음 운전대를 잡았다.

수현은 백미러를 통해 뒤를 봤다. 김태신도, 그의 부하들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양호

범 역시 출발할 생각을 안 하고 껌을 찾고 있다. 껌이 없어 신경질이 났는지 얼굴을 찌푸

리길래 수현은 그를 재촉했다.

“빨리 가.”

양호범이 수현을 본다.

“왜요. 쟤들이 덤빌까 봐 무서워요?”


수현이 대답하지 않자, 양호범이 차 아래에서 칼을 쑥 뽑아낸다. 그리고 수현의 손목에

감긴 테이프를 뚝, 끊어 내더니 곧바로 운전석에서 내린다. 놀란 수현이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가 칼을 들고 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김태신과 그

의 부하들이 차를 출발하여 옆으로 비켜 지나간다.

양호범이 돌아왔고, 들고 있던 칼을 뒷좌석 바닥에 툭 던져 놨다.

“봤죠? 여기서 내가 젤 세.”

봤지? 내가 여기서 제일 잘해.

어린애가 자기 실력을 뽐내는 것 같은 유치함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왜 좆같이 지을까?”

수현은 얼굴을 폈다.

“아니야….”

그는 시동을 걸었고 수현은 얼얼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배관에 매달려 있느라 손 껍

질이 다 까지고 로프에 당겨진 손목도 엉망진창이다. 맞은 얼굴이 얼얼해 손등으로 뺨을

누르는데 양호범이 그 손을 붙든다.

만지지 마요. 부었어.

툭, 손을 쳐 냈더니 그가 소리 없이 웃고 나서 차를 출발시킨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차가 근처 오피스텔로 들어간다. 15 층에 도착하자 복도에 불이 켜진다. 1508

호라고 적힌 문 앞에서 양호범이 카드를 댔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양호범이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수현이 입구에 서서 버티자 호범

이 뒤를 돌아봤다.

“들어와요. 안 잡아먹어.”

오피스텔은 화려한 펜트하우스와 달리 모던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업무를 보다 만 서류, 조금 전까지 마신 것으로 보이는 커피가 놓여 있다. 두리번대고 서

있으니 양호범이 재킷을 벗으며 안쪽으로 간다.


수현은 주변을 좀 더 둘러봤다. 노트북 근처에 있는 USB 가 눈에 띈다. 저기에 뭐가 담겨

있을까. 빼앗아 간 USB 는 어디다 뒀을까. 물끄러미 보는데 양호범이 안쪽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가까이 와서 노트북을 덮었고, 소파로 오라고 눈짓을 했다.

가까이 가서 앉자 그가 가져온 구급함을 연다.

구급함 안에는 별별 약이 다 들어 있고 의료용 호치키스와 빈 주사기도 있었다.

“손 줘요.”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바닥을 펴자 약을 발라 준다.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약을 바르니

쓰라리다. 아아, 인상을 썼더니, 입으로 호, 불어 주기까지 한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기

겁을 하고 손을 빼려고 하는데 팔이 붙들린다.

“어떻게 생각해요?”

앞뒤 없는 질문이다. 뭘? 이라고 물었더니 그가 밴드를 뜯는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

“내 복수는 이걸로 됐어. 그러니 나머지 빚은 네가 직접 받아. 병신같이 나까지 끌어들이

지 마, 라고 했던가?”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고 양호범은 마지막 밴드를 벗겨 내며 웃었다 . 누가 병신 같은 줄

모르겠네. 하는 표정이다. 짜증이 나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더니 이젠 그가 연고를 꺼낸

다. 손가락 끝에 찍 눌러서 수현의 입가에 가져다 대길래 수현이 머리를 뒤로 뺐다.

“아, 하지 마.”

“약을 발라야 나을 거 아니에요.”

“손 닦았어?”

“닦았으니까 빨리 대요.”

우물쭈물 얼굴을 가까이 대니 손끝으로 입술 옆 터진 데를 문지른다 . 면봉을 사용하면

좋잖아. 라고 말했으나 씨알도 안 먹힌다. 입술 위에서 투박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어색

하다. 다 바른 거 같아 피했더니 연고 뚜껑을 닫고 나서 뒷정리를 한다 . 왜 저렇게 친절하


게 구는 거지. 혹시 나한테 뭐 다른 거 얻어 낼 목적인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말고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이봐, 양 사장.”

구급함 뚜껑을 닫던 양호범이 이쪽을 쳐다본다. 일하는 중이 아니니 반말해도 되겠지.

“너 왜 나한테 잘해 줘?”

그 말에 호범이 웃는다. 평소의 비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진짜로 웃는 얼굴이다 .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이것

도 어색하다.

“잘해 주는 걸 알긴 알아?”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여태 살아오는 내내 그랬다. 이유 없이 잘해 주는 사람들 중에 뒤

끝이 좋았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다들 이용해 먹기 바빴고, 덕분에 20 대 초반부터

빚더미에 올라앉아 사채업자에게 시달려야 했다. 말을 하지 않자 양호범이 노트북에 꽂

혀 있던 USB 를 뽑아 수현에게 내민다.

“자.”

수현은 그가 내민 검은색 USB 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백수현 동영상.”

시선이 양호범으로 향한다. 양호범은 그것을 수현의 손에 쥐여 줬다.

“직접 없애야 속이 후련하지.”

손끝이 떨린다.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졌다. 겨우 잊고 살았던 기억이 하나둘 스쳐 간다.

역시나 후회가 됐다. 아까 귀가 아니라 그 새끼 목을 그냥 따 버리는 건데 . 그러자 양호범

이 한마디 더 보탠다.

“거기 동영상에 나오는 새끼들, 다 잡아서 족쳐 줄까?”

수현은 고개를 들고 양호범을 쳐다봤다. 그는 무언가를 읽는 듯한 눈빛이더니 입가에 미

소가 생긴다.

“표정이 아주, 볼만하네.”

“…….”
“ 김도한 귀 자를 때, 그리고 내가 김태신한테서 빼낼 때. 그때도 존나 설레 보였거든. 지

금처럼.”

“…….”

수현은 침묵했다. 조금 전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양호범은 눈치채고 있다. 양호범이 그

놈들을 잡아 족쳐 준다고 했을 때 잠깐이지만 기뻤다 . 후련했다. 그들이 벌을 받기를 원

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나한테 죄를 지

은 그 새끼들만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양호범이 상체를 기울이며 사이를 좁혔다. 불과 한 뼘 거리에서 그가 수현의 얼굴을 뚫

어지게 본다. 삼백안. 색이 옅은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 고약한 성질머리만 아니면 누

가 봐도 잘생긴 남자다. 어렸지만 강하고,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 또한 충분했다.

“말해 봐. 거기 있는 새끼들 잡아서 모조리 죽여?”

눈빛이 진심이라고 말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걸까. 수현은

등을 소파에 기대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

“이상하잖아. 나를 싫어했으면서, 지금은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니까.”

여유작작한 얼굴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꼴 보기 싫다. 점차 아버지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 물론 그런 게 있다고 하여도 양

호범은 말해 주지 않겠지만.

“병신처럼 당하고 사는 게 불쌍해서.”

“구라치지 말고.”

“진실을 말해도 믿어 주질 않으니, 배를 갈라 까 보여야 하나.”

짙은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능글맞게 대꾸한다.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 진짜 호구

처럼 당하는 게 불쌍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 김도한을 혼내 준 거야 자기가 채권자가

됐으니 그런 거고. 더 생각하지 말자.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수현은 생각을 정

리하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요?”

“호텔로 돌아갈 거야.”

외투를 걸치고 출입구를 찾아 나가려는데 양호범이 앞을 가로막는다.

한 뼘 이상 차이가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수현이 미간을 좁혔다.

“왜.”

“자고 가요.”

뭐? 당황하여 눈이 커지자 양호범이 싱긋 웃는다.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더 긁지 않을게.”


19 화

수현은 BAR 에서 고가의 술을 몇 개 골랐다. 양호범이 먼저 자고 가라고 했고, 술을 마음

대로 마셔도 좋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술을 챙겨 잔과 함께 들고 소파로 오는

데 양호범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흰색 티를 입은 그의 모습이 낯설다. 머리까지 젖은 상태로 내

려져 있으니 제법 그 연령대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러고 봐요?”

호범의 물음에 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

르는데 양호범이 자연스럽게 가져간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다가 금세 폈다. 집주인은

양호범 아닌가. 일어나 잔을 하나 더 가져와 술을 부었다. 냉장고도 뒤져 안주도 그럴싸

하게 만들어 오니 양호범이 쳐다보며 웃는다.

“전에 뭐 했어요?”

다 알면서 묻는 게 가소롭다.

“웨이터.”

“그 지랄 같은 성격에 안 잘리고 잘 버텼네.”

사실 몇 번 잘리기도 많이 잘렸다. 욱해서 손님하고 싸우다 잘린 게 대부분이고, 지갑에

손대서 잘린 것도 있었고. 그나마 제일 오래 버틴 게 오아시스였는데 이젠 거기도 돌아

갈 수 없게 됐다.
술을 한 모금 마시는데 굉장히 독하다. 어우, 인상을 쓰고 나서 앞에 있는 접시에서 딸기

를 하나 집었다. 한 입 베어 무니 과즙이 흐른다. 손등으로 훔쳤더니 양호범이 휴지를 하

나 뽑아서 건네준다.

“고마워.”

“얘기 좀 더 해 봐요.”

“무슨 얘기?”

“아무거나. 어릴 때라든가.”

호범의 말에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린 시절 얘기는 온통 재미없는 것투성이다. 세 식

구가 함께 살 때도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었고, 엄마를 산속에 혼자 남겨 두고 온 뒤부

터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리고 감옥에 다녀온 뒤로는 가뜩이나 막장 같던

인생이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으니까.

“들어도 재미없을 거야.”

호범은 더 묻지 않았고, 수현은 TV 리모컨을 찾았다. 친하지도 않은데 둘이 앉아서 술을

마시려니 어색하다. 차라리 양호범이 들어가서 얼른 자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저는 소

파에서 자면 그만이니.

채널을 돌리는데 양호범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러 가려는 건가. 안으로 들어간 그는 잠시 후 손에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 그것을 알아

본 수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파티에서 가져간 분홍색 토끼 머리띠다. 호범이 그

걸 내밀기에 수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써 봐요.”

“왜.”

“어울려서.”

됐다고 고개를 저었더니 기어코 머리에 씌워 준다. 수현은 눈을 한번 흘기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양호범은 꽤 흡족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술 먹는 것에

만 집중했다. 술이 독해 확 올라온다. 취하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며 연거푸 들이

켰다.
TV 는 혼자 떠들고 있었고 둘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술만 마셨다 . 긴장이 풀어

지고 취기가 올라오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수현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댔다. 양호범이 술을 마시면서 쳐다본다.

“자요?”

수현은 잠꼬대처럼 대꾸했다.

“안 자.”

잠은 쏟아지는데 오늘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스쳐 간다 . 절규하던 김도한, 피투성이가

되어 잘려 나간 귀, 서슬 퍼렇게 노려보던 김태신의 일그러진 얼굴 . 그리고 그가 했던 말.

양호범은 너를 왜 살려 뒀을까. 너를 왜….

알코올이 들어가 사고는 더 둔탁해진다. 꾸벅, 저도 모르게 머리를 떨어트리며 졸다가

깜짝 놀라서 깨고 보니 양호범이 없다. 침실에서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른세수를

한 뒤 수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침실은 양호범이 써서 안 될 테고, 어디 남는 빈방이라도

있을까 해서.

옆을 보니 2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던 수현의 눈에 커다란 사진들

이 들어왔다. 누군가 찍은 듯한 사진의 아래엔 작가 양승택이라고 적혀 있다. 역동적인

사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2 층으로 올라가 누울 만한 곳을 찾는데 미닫이문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

을 열던 수현은 멈칫했다. 서재다.

수현은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통화 중인지 양호범의 말소리가 멀찍이서 들려

온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이곳에도 서류가 많다. 책장을 가득 채운 서적

이 눈에 띈다. 다가가 책을 살피던 와중에 아래쪽에 문이 달린 서랍을 발견했다. 그걸 열

던 수현은 눈이 커졌다.

금고다.

꽤 오래전에 나온 모델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놈이 가져간 USB 를 저곳에 두

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그것을 촬영했다. 그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고개를 돌리는데 책상 위에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단란한 가족이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는 양호범 같았다 . 어린데도 표정이

무시무시하다. 어지간한 일엔 울지도 않게 생겼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릴 적에도 그리

귀여운 타입은 아니었구나.

액자를 들고 유심히 보는데 누군가 그것을 낚아챈다. 인기척도 없이 등장한 양호범 때문

에 수현은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호범은 가져간 액자를 보이지 않게 바

닥에 뒤집어 놨다.

“도망간 줄 알았더니, 남의 서재에서 염탐 중이었군요.”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서늘하다. 수현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누울 곳을 찾고 있었어. 졸려서.”

“여긴 올라오면 안 돼요. 내려가요.”

수현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기둥을 중심으로 타고 올라가

는 모양이었는데 술이 많이 취한 데다 균형을 잡으려니 몸이 자꾸만 한쪽으로 치우친다.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삐끗했고 졸지에 앞으로 쏠리며 양호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아! 이상한 모양으로 양호범의 어깨에 매달려 있으니 그가 돌아서며 몸을 바로 세워 준

다.

“업어 달라는 거야, 안아 달라는 거야?”

“발이 끄였어.”

“혀도 꼬였는데?”

수현은 민망하여 시선을 피했다. 근데 진짜 졸리긴 하다. 눈꺼풀이 이제 참을 수 없을 정

도로 무거워졌다. 계단을 마저 내려와 소파로 가서 누우려고 하니 양호범이 팔을 잡는

다. 들어가서 자요. 나 여기서 일해야 해. 술은 비슷하게 마신 거 같은데 일을 한다고 하

니 놀라웠다. 수현은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야, 사람 배만 쑤시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 말에 호범이 아랫입술을 핥는다.

“왜 이래? 난 배 말고 다른 데도 잘 쑤셔.”
눈으로 지 아랫도리를 가리키길래 수현은 알아듣고 코웃음을 쳤다 . 자랑이다, 새끼야.

꼭 어린 것들이 저런 걸로 유세 떨지. 서류를 집어 드는 양호범을 뒤로하고 침실 쪽으로

가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옆으로 자꾸만 기울어진다 . 하, 뒤에서 양호범의 한숨과

함께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팔이 붙들린다.

“거긴 욕실이고.”

“집이 넓어서 그래.”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줄 알았으면 술 먹이지 않았을 거야.”

먹이긴 누가 먹여. 내가 알아서 먹은 거지. 대꾸하고 싶었으나 입을 여는 것조차 힘겹다.

빈속에 술을 마셨더니 삽시간에 취해 버렸고 , 몸은 이제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침

대에 누워 몸을 움직이는데 호범이 수현의 셔츠를 위에서부터 풀어 준다.

가만히 허공만 바라보던 수현은 눈을 아래로 내려 그런 양호범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

잘생겼다. 잘생기고 몸도 좋고 … . 갑자기 욕정이 들끓는다. 그러고 보니 안 한 지 꽤 됐

네. 하지만 여기서 말하면 양호범한테 맞아 뒈지겠지. 취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 새끼한테 얻어맞은 게 타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왜 음흉하게 쳐다봐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말이 늘어진다. 셔츠가 벌어지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수현은 오싹한 기분에 셔츠를 여미려고 했다 . 그러자 호범이 그 손을 붙들고

가슴을 유심히 본다.

“왜… 왜 그러고 봐?”

어느덧 호범의 눈에 욕망이 깃든다.

“빨아도 돼?”

수현은 숨을 몰아쉬며 하, 하고 짙은 숨을 토해 냈다. 이 새끼.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었

구나. 수현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봐. 남자하고 한 적 없다고 했지? 내가 가르쳐 줄게.

호범이 수현의 몸 위로 올라온다. 근육 덩어리라 무거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깃털처럼

가볍다. 수현은 다리를 호범의 허리에 감고 아랫도리를 노골적으로 비볐다.

“너 사실대로 말해 봐. 처음 봤을 때부터 나한테 꼴렸지?”


호범의 숨소리에 웃음이 섞인다. 응. 꼴렸어.

뜨겁다. 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나하고 섹스할래? 라고 묻는 목소리에 수현은 아랫

입술을 깨물고 허락을 뜻하는 의미로 그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호범은 침대 끝에 서서 팔짱을 끼고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백수현이 너무 졸리다고 해

서 침대에 눕혀 놨고, 잠시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셔츠는 풀어 헤치고 베개를 끌어

안고 지랄 생쇼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허리를 들썩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호범은 기가

차서 웃었다. 그런데 숨을 몰아쉬던 백수현이 좋아? 라고 묻는다.

호범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씨발. 좋아 죽겠어요, 수현이 형.”

그러자 수현이 베개를 더 꽉 끌어안는다. 나도, 나도 좋아.

다른 사내새끼였다면 눈앞에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을 텐데. 이건 인간이 하도 병신 같

으니 화도 나지 않는다. 한참 헐떡이던 수현이 잠잠해지며 잠꼬대하듯 알 수 없는 말을

한 번씩 중얼댄다. 가까이 가서 보니 뺨에 옅게 멍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느껴진다.

추운지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길래 호범은 이불을 끌어와 덮어 줬다 . 그제야 표정이

조금 편안해진다. 불을 끈 뒤 호범은 나가기 전 백수현을 한 번 더 돌아봤다 . 어느덧 곤하

게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20 화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수현은 억지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 어제 좋다고 술을

퍼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필름이 딱 끊겼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봤는데, 머리는 엉망이고 셔츠는 단추가 다 풀어져 가슴이 드러나고

난리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단추를 하나씩 여미는데 잠이 덜 깨서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

세수를 하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은 뒤 밖으로 나왔는데 낯선 사람이 와 있

다.

“일어나셨네요?”

검은 정장을 입고 인사를 하는 남자는 차를 운전하던 사내다 . 손등에 있는 뱀 모양의 문

신이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 안녕하세요….”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냉장고로 가서 생수를 하나 꺼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물

을 들이켜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양호범이 없다. 운전하던 사내는 여전히 수현을 주

시하고 있었다. 수현은 입가의 물을 훔치고 나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양 사장님은 어디 갔어요?”

“출근하셨습니다. 저한테는 백수현 씨를 호텔에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모셔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생전 누구한테 모셔지는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이

꽤 신선하게 들린다. 끌려가거나, 잡혀가거나, 제 발로 걸어가거나였지. 수현은 남은 물


을 마시며 거실로 나갔다. 어젯밤 양호범이 일을 하던 자리에 서류며 노트북이 싹 치워

져 있다. 거실을 둘러보던 수현은 자연스럽게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남자가 따라온다. 수현은 돌아서 그를 응시했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박태준입니다.”

“그래요. 태준 씨.”

“예?”

“왜 자꾸 저를 쫓아오세요?”

“대표님이 잘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 웃음이 나왔다. 안 훔쳐 가요. 아니나 달라 2 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바로 막아선다.

“2 층은 사장님 개인 공간입니다.”

“알아요.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래요.”

박태준은 여전히 비켜서지 않고 버텼다.

“어제 취해서 돌아다니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보이질 않아서요.”

남자가 전화를 꺼낸다. 제가 전화 걸어 드리겠습니다. 수현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빼

앗아 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위층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그것 보라는 표정을 했다.

“이제 올라가도 되죠?”

“같이 가겠습니다.”

거참, 의심 되게 많네. 수현은 앞서 계단을 올랐고 뒤에서 박태준이 쫓아왔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벨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소리가 난 곳을 찾다가 책상 아래 틈에

서 휴대전화를 발견하고 그곳에 손을 집어넣어 꺼냈다.

“술 취하면 이게 문제라니까요. 아무 데나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거.”

박태준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만 내려가죠.”
수현이 앞장서 걸으니 남자가 다시 쫓아온다.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온 수현은 몸을 씻

고 호텔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가운을 걸쳐 입고 나오는데 침대에 새 옷이 놓여 있

다. 사이즈까지 딱 맞춰서 가져온 게 신기할 따름이다 . 옷을 갈아입고 남자를 따라 주차

장으로 내려오니 차가 준비되어 있다.

보조석에 타려는데 남자가 뒷문을 열어 준다. 정말 뭐라도 된 기분이다. 등에 닿는 베이

지색 가죽이 무척이나 부드럽다. 손바닥으로 시트를 문지르는 동안 차는 출발하여 주차

장을 빠져나왔다. 거리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신기하다. 늘 보던 풍경인데도 대접을 받으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수현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등을 뒤로 기댔다. 좋네. 그 말을 하고 나니 운전석에서 뒤를

흘깃 돌아본다. 그를 보며 눈을 싱긋 접어 웃었다.

12 시가 되면 신데렐라는 마법에서 풀려나 다시 재투성이 아가씨로 변한다 . 수현의 꼴이

딱 그 짝이다. 청소 도구와 새 시트가 담긴 밀차를 끌고 펜트하우스로 들어가는데 누가

다녀간 건지 아주 개판을 쳐 놓고 갔다.

매니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

병부터 시작해 콘돔,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망사 속옷과 머리카락, 체모, 그리고 하얀

가루. 이곳에서 환각 종류의 약들을 한 번씩 볼 때마다 눌러 왔던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모아 담은 뒤 침대를 정리하려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비어 있

어야 할 침대에 누군가 엎드려 자는 게 아닌가. 상의를 탈의한 남자의 등에는 커다란 연

꽃이 문신으로 새겨졌다.

“뭐야….”

얼굴을 구기고 쳐다보는데 남자가 끄응, 하는 신음을 내며 몸을 뒤튼다. 그리고 감고 있

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린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수현을 보던 남자는 눈만 느리게 끔뻑였

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감쌌다.

“아, 대가리 아파.”

“…….”

남자가 고개를 들어 수현을 본다.


“다 어디 갔어?”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도 청소하러 지금 와서.”

“청소?”

남자가 수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더니 피식 웃는다.

“요즘 하우스 키퍼는 얼굴 보고 뽑나 봐.”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는데 키가 생각보다 크다 . 적당히 근육도 있고 옆구리에

기다란 흉터가 있다. 이 자식도 누군가에게 신장을 떼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

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입는다. 얼핏 봐도 여성용인데 잠이 덜 깬 건지 그걸 기어

코 몸뚱이에 끼워 맞춘다.

저런, 병신….

“왜 이렇게 작아졌지?”

바닥에 떨어진 다른 셔츠가 눈에 띈다. 수현은 그것을 주워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말려 올라간 셔츠를 억지로 내리던 남자가 미간을 찡그린다. 자신이 다른 옷을 입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벗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야, 이것 좀 벗겨 봐.”

하, 수현은 들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고 남자의 튼실한 몸뚱이에서 셔츠를 벗겼다. 완전

히 알몸을 드러낸 남자가 옷을 바꿔 입는다 . 고마워. 말하면서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

현은 남자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의 시트를 걷어 냈다. 베갯잇도 벗기는데 돌아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튕기며 수현을 향해 삿대질한다.

“기억났다! 너 범이가 직접 스카우트했다는 걔, 맞지?”

수현은 사무적으로 웃었다. 네. 맞는 거 같아요.

“아버지 빚 때문에 잡혀 왔다며.”

“…….”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판 심청이도 아니고, 쯧.”


수현이 뚱하게 쳐다보자 남자가 생수로 입을 헹구고 나서 얼음통에 뱉는다. 그리고 담배

를 하나 물더니 라이터를 찾는지 여기저기 두리번댄다. 수현은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눈으로 웃으며 담배를 물고, 땡큐, 라고 말했다. 수현에 대

해 자세히 알고 있고, 이곳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양호범과 꽤 친분이

있는 걸까.

“나는 김우영. 양호범 베프. 그쪽은 이름이?”

남자는 담배를 물고 이번엔 양말을 찾아 털어서 신는다 . 그러더니 바닥에 담뱃재를 턴

다.

“백수현입니다.”

“맞다, 백수현. 들은 거 같다.”

뭐라고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경계심이 생

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수현은 꾸벅 인사를 하고 다른 쪽으로 가 청소를 시작했다 . 그런데

금방 갈 줄 알았던 남자가 쫓아다니면서 말을 걸어온다.

“몇 살?”

“스물여덟이요.”

“나보다 두 살 어리네.”

수현은 남자를 봤다. 양호범하고 베프라고 하지 않았나. 어쩐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

긴 했다.

“그 나이로 안 보이지?”

“아니요. 보여요.”

“와, 되게 솔직하다. 범이한테 안 맞아 죽은 게 신기하네.”

이미 뒈지게 처맞은 적이 있다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 귀찮다. 그냥 빨리 가 줬으면 하고

청소에 열중하는데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허리를 펴고 돌아보던 수현이 멈칫했다.

양호범이다. 완벽한 출근 복장이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어제와 다른 사람 같았다.

인사를 꾸벅하고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던 사람을 쳐다봤다. 아니나 달라 양호범


도 그를 보고 있었다.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확히는 그가 피우는 담배를 노려봤던

거지만.

“씨발. 담배.”

호범이 그의 입에서 담배를 쑥, 빼더니 얼음통에 집어 던진다. 치익, 불꽃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났고, 담배를 빼앗긴 김우영은 서운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야. 아직 반이나 남은 걸….”

“가, 얼른. 청소하는데 걸리적거리지 말고.”

“너무하네. 형한테.”

뒤늦게 수현은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본가에서 본 김우

진과 무척이나 닮았다. 김우진이 안경을 벗고 10 년 정도 더 자라면 이런 얼굴이려나.

“본가에서 내 동생 봤지? 우진이.”

설마 했는데 정말 형제구나. 우진이 그랬다. 친형은 외국에서 공부하며 박사 과정을 밟

고 있는 인재라고. 수현은 그의 발밑에 뒹구는 티팬티를 바라봤다. 박사 과정이 아니라

호텔 방에서 여자 팬티나 밟고 있는 걸 알면 어린 녀석이 얼마나 속상할까.

대충 봐도 어떻게 된 사연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달라 김우영이 검지를 세워 입술을 누른다.

“나 여기서 본 거 비밀. 외국서 공부하는 줄 알거든. 노인네 알면 나 죽어.”

그 말에 호범이 대놓고 비웃었다.

“공부는 씨발, 약쟁이 새끼가.”

호범의 말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남자는 낄낄거리고 웃는다 . 너는 새끼야, 형한테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 그는 수현에게 재차 입단속을 시켰다. 그러더니 차 키와 휴대

전화를 주섬주섬 챙겨 사라진다.

“자주 봐.”

또 보자가 아니라, 자주 보자는 인사라니.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 수

현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 호범이 가지 않고 빤히 쳐다보길래 수현은

왜 그러나 싶어 물었다.
“왜.”

“청소하기 어때요?”

“보면 몰라? 존나 힘들어.”

그러더니 또 말이 없이 빤히 본다.

“왜.”

그는 대답 대신 묘하게 웃는다. 아, 기분 나빠. 소름 끼쳐. 또 왜 저래. 수현은 도망치듯 침

실로 향했다. 하던 일을 마저 하는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 빼꼼히 내다보

니 아무도 없다.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호텔로 나와 차로 이동하는 동안 윤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도 안 잡혀요?”

[예, 대표님. 아무래도 휴대전화 초기화시킨 거 같은데요.]

호범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 조금 전 본 백수현의 얼굴을 떠올렸

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청소하기 힘들다고 투덜대던 . 맹하게만 보였던 인간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휴대전화를 초기화시켰다. 덕분에 위치를 추적하고, 통화 내용과 문

자를 확인할 수 있는 해킹 프로그램이 싹 날아갔다.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운전을 하던 박태준이 룸미러로 뒤를 흘깃 본다.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친구 같습니다.”

그 말에 호범은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게. 예쁘기만 한 병신인 줄 알았는데.”

“사람 붙일까요.”

“아니. 당분간은 둬. 지가 날뛰어 봤자지.”


21 화

모처럼 쉬는 날이라 수현은 호텔 근처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었다 . 음식을 주문한 뒤

이어폰을 꽂고 휴대전화에서 녹음 파일을 찾아내어 틀었다 . 바로 양호범의 목소리가 들

려온다. 서재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이다.

[도망간 줄 알았더니, 남의 서재에서 염탐 중이었군요.]

[누울 곳을 찾고 있었어. 졸려서.]

[여긴 함부로 올라오면 안 돼요. 내려가요.]

녹음 속 양호범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다정했고,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그사이 식당 직

원이 반찬과 찌개를 앞에 놓아 주고 갔다. 밥을 먹기 시작하고 계산을 마칠 때까지도 이

어폰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밖으로 나오자 바

람이 차다.

재킷의 앞을 여미며 벤치로 가서 앉아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 주머니에 넣어 둔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는데, 드륵, 했다가 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목소리.

[현금?]

잠시 침묵.

[준다고 하세요. 대신 일정이 틀어지면 바로 처리하시고요.]

통화가 끊겼는지 조용하다. 이어서 삑, 삑, 삑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여덟

자리. 수현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양호범 서재에 있던 금고라는 것을 알아챘다 . 띠릭, 하

는 소리와 함께 탁, 닫히며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멀어지는 발소리.


드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이후로 1 시간 넘

게 녹음된 파일에 소리는 더 없었다. 수현은 파일을 앞으로 돌려 금고의 버튼을 누르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기계음이 조금씩 다르다.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던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밖을 보는데 차가

운 바람과는 달리 볕은 굉장히 따뜻하다.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하다 어느덧 목적지인 종로에 도착했다. 수현은

걸으면서도 한 번씩 뒤를 돌아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없나 확인을 했다. 일부러 골목

으로 들어가 인파 사이에 섞여 든 뒤 전자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걷다 보니 세일전자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눈에 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소리와 함

께 전자제품을 고치던 남자가 돌아본다. 안경을 쓰고 납땜을 하는 남자의 머리가 하얗게

셌다.

“어서 오세요.”

수현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람 좀 찾으려고 왔는데요….”

그때 안에서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남자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나온다. 오래된 고

물 TV 를 끌어안고 나오던 남자는 수현을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야 빡!”

납땜을 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수현을 위아래로 훑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 재선이 친구?”

“아니에요. 동생이에요.”

“어디서 만났는데.”

“학교요.”
학교는 학교지. 재선이 서둘러 수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그의 아버지가 모

여서 작당 모의하지 말라며 핀잔을 놓는다. 커튼을 치고 들어간 안쪽으로 오래된 가전제

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수현이 그것들을 살피는 동안 재선이 입을 열었다.

“요즘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어. 레트로다 뭐다 워낙 핫하잖아.”

“응….”

“잘 지냈냐? 새끼 연락도 없더니. 죽은 줄 알았다.”

수현은 뜸을 들일 것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부탁이 하나 있어서 왔는데….”

그 말에 재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돈 없다.”

“에이 씨. 그런 거 아니고.”

수현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보여 줬다. 거기엔 엊그제 찍은 양호범의 금고 사진이

있다. 몰래 찍느라 흔들리긴 했으나 알아보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 금고를 확인하는

이재선이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뿔테 안경을 치켜든다.

“구형 모델이네.”

이번엔 파일을 찾아 그에게 버튼 누르는 소리를 들려줬다. 그의 표정이 가관이다.

“야, 너….”

“훔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확인만 하고 도로 집어넣을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소리만 듣고 어떻게 맞춰?”

“한다며. 전에 형이 그랬잖아.”

“새끼야, 그건 구라 조금 보탠 거지.”

“어쨌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란 소리잖아.”

이재선이 고개를 돌려 문을 쳐다본다. 혹여 자신의 아버지가 들을까 싶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머뭇거린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닌데….”


수현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걸 보는 재선의 눈이 동그래진다. 뒤늦게 그는 수

현의 옷과 지갑이 명품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묻기까지 했다.

“너… 호구 하나 물었냐?”

수현은 대답 대신 지갑에서 지폐 여러 장을 꺼내 내밀었다.

“부탁 좀 하자. 성공하면 더 쳐줄게.”

이재선은 고민하다 받은 돈을 뒷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안 돼도 원망은 하지 마라.”

“알았어.”

“근데 금고 누구 거야?”

“있어. 형 말대로 호구라고 생각해.”

“역시, 하나 물었구나.”

수현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호범 같은 놈인 줄 알면 이재선이 꽁지를 내

빼고 달아날지 모르니 그냥 모르는 게 약이겠지 . 녹음 파일은 형한테 보내 줄게. 나오면

바로 알려 줘.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재선의 아버지가 바로 문 앞에 서서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서 있다. 아, 깜짝이야. 한 발 물러서니 그가 엄한 표정으로 꾸짖는다.

“우리 재선이 마음잡았다. 괜히 들쑤시지 마.”

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이재선은 좋겠

네. 편들어 주는 아버지도 있고. 백광무가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그 인간도 아버지

라고 이렇게 사는 걸 혼낼까. 아니면 역시 내 자식이라고 칭찬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가 유력하다. 씨발.

씁쓸한 기분을 감추고 건널목 앞에 서는데 검은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앞을 가

로막고 선다. 차를 왜 하필 여기에. 인상을 쓰며 옆으로 비켜서는데 운전석 문이 열리며

덩치가 하나 내린다. 수현은 그가 정육점 사장 김태신의 부하라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 뒷유리창이 지잉, 열리면서 김태신이 얼굴을 내민다. 그는 담배를 문 채 웃었다.

“안녕? 우리 자주 보네?”
수현은 주변을 살펴봤다. 혹시 양호범이 심어 둔 놈들이 튀어나와 저를 구해 줄까 해서.

“양호범 찾아? 그 새끼가 또 구하러 올까 봐?”

김태신이 귀신같이 알아채더니 손짓을 한다.

“죽이지 않을 테니 타.”

수현이 돌아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이미 놈의 부하 둘이 뒤를 막고 서 있다 . 수현이 다급

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나 건드리면 좋지 않을 거예요.”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무슨 얘기요?”

“궁금한 게 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

수현이 버티고 서 있자 그의 부하들이 등을 탁, 떠민다. 무력으로 끌고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쉰 뒤 뒷자리에 탔다. 차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

고 그의 부하들은 차 주위를 둘러쌌다.

“할 말이 뭐예요?”

그는 수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때 대답 안 했잖아.”

“뭘요.”

“양호범이 널 살려 둔 이유. 그게 너무 궁금해. 잠이 안 와.”

정말 USB 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찾아왔단 말인가.

“그게 왜 궁금한데요?”

“지금까지 양호범한테 잘못하고 살아남은 놈이 없거든 . 근데 넌 멀쩡하게 살아 있네? 도

대체 왜?”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긴데 … . 라고 말하니 김태신이 수현을

향해 방향을 비틀어 앉는다. 기다릴 테니 설명해 봐.

“사실은….”
수현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했다. 김태신의 눈빛이 반짝인다. 수현은 입을 달싹였

다 떼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결심을 굳힌 듯 이야기를 꺼내 놨다.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

김태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

“그러니까 양호범하고 저하고… 애인 뭐, 그런…?”

김태신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변하더니 주먹이 날아오려 한다. 이 새끼가. 장난을 쳐

도. 수현이 팔로 가로막으며 진짜예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김태신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고, 수현은 얼굴을 들며 싱긋 웃었다.

“진짠데.”

그의 뺨이 부르르 떨린다.

“장난해? 그 새끼 여자밖에 안 만나.”

“정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물어보세요.”

김태신의 표정이 묘하다. 믿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설마 하는. 복잡한 그의 얼굴을 바

라보며 수현은 어깨를 조금 펴고 의자에 편안하게 기댔다.

“그러니까 저 자꾸 만나러 오면 안 돼요. 걔가 연하라 그런지 질투가 좀… 심해.”

“…….”

“많이 심해.”

김태신이 이를 까득 문다.

“너 구라치지 마.”

“저도 거짓말이면 좋겠네요….”

수현이 속상한 표정을 지으니 김태신이 하, 하고 헛웃음을 친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

고 그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가에 삐뚜름하게 미소를 지었다 .

그의 입술 흉터를 볼 때마다 양호범이 떠오른다 . 저걸 찢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지 안 봐

도 훤하다. 분명 웃고 있었겠지.

“아니면 저를 납치해서, 형님이 원하시는 걸 양호범한테 달라고 하세요.”

김태신이 고개를 들었고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벗어나고 싶어요… 걔가 무서워서….”

김태신이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수현이 애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

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다. 양호범이 왔을 때 겁먹은 개새끼처럼 움츠러들지 않았던

가.

“근데 형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그 USB 말이에요…. 그거 되게 중요한 거예요?”

김태신의 얼굴에 흥미가 생긴다.

“왜.”

“아니, 내가 찾아 줄 수 있나 해서…. 원래 내가 가져오려던 거기도 했고.”

김태신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무슨 속셈이야? 아니 그것보다, 양호범이 준대?”

“아니. 몰래 빼 와야죠.”

김태신의 눈이 가늘어진다. 수현은 입술을 문지르며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가능할 거 같은데, 비용이 많이 발생할 거 같아서.”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너 방금 네 입으로 둘이 사귄다고 하지 않았어?”

수현이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마음까지 준 건 아니라.”

어이없어하는 김태신을 보며 수현은 진지하게 표정을 바꿨다.

“대신,”

수현이 손을 뻗어 김태신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인상을 버럭 쓰길래 그의 손을 뒤집어

그 위에 10 억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무기명 채권으로. 라고 덧붙이자 김태신의 뺨이 씰

룩 움직인다. 수현은 웃었다.

“생각 있으면 연락하세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김태신의 눈빛에선 동요가 내비쳐졌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양호범이 저를 데리고 있는 이유가 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깊어졌다. 사실이라면 모르지만, 만약 이용만 당하는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아예 한몫 챙겨 이곳에서 벗어나든가.


22 화

호범이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방이 여러 개였는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

리기도 했고,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지는 곳도 있었다. 제일 마지막 방 앞에서 구두를 벗

고 들어가니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우리 양 대표 왔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 늦으면 어때. 요즘 일하느라 바쁘다며. 회장님이 자네 몸 상할까 봐 걱정이 아주 많으

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법조인었고, 호범은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끔 그들의 자리에 참석

하고는 했다. 그들은 호범을 어릴 적부터 봐 왔기에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했다. 자리에 앉은 호범이 술을 받았다.

“요즘 잘나간다며. 리조트 인수했다지?”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 땅은 다 자네 차지가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호범이 술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돌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호범이 이곳에 들

어온 뒤부터 표정을 굳히고 앉아 있는. 다들 웃는 가운데 남자의 안색만은 영 별로였다 .

호범은 술병을 들었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서 검사님, 오랜만이네요.”

남자가 호범을 본다. 남자의 이름은 서민준이었고 평검사임에도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다음에 만날 땐 비서실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요?”

남자의 표정이 서늘해진다. 호범이 술병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끝끝내 잔을 들지

않았다. 호범은 결국, 손을 거두고 웃었다.

“제 잔은 받기 싫으신가 보네요.”

분위기가 싸해지자 김 부장이 나섰다.

“왜 이래, 둘 다. 좋게 좋게 화해하라고 부른 자리잖아. 이제 서 검사도 더는 자네 괴롭힐

일 없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서 검사?”

서민준이 쓰게 웃는다. 글쎄요. 두고 봐야 알겠죠. 라고 말하더니 그가 코트를 챙긴다. 담

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그가 방 밖으로 사라지자 이 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하여튼, 꼬장꼬장 젊은 사람이 융통성이 저렇게 없다니까. 양 대표, 자네가 이해해.”

호범은 웃었다.

“그래도 능력은 있잖습니까. 조만간 청와대 가실 분인데.”

듣고 있던 김 차장이 은근 흉을 보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게 어디 지 능력이야. 장인 줄 타고 올라간 거지.”

서민준의 장인은 야당의 국회의원으로 내년 대선 주자로 출마를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위를 비서실장으로 영입하는

것을 거론했다. 거기엔 서민준이 가진 인지도가 한몫했을 것이다. 검사 시절 내내 그는

올곧은 이미지로 여러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며 부패 척결에 힘썼고 , 덕분에 사람들로

부터 정의로운 검사라며 칭송받지 않았던가.

호범은 술을 한 잔 들이켜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둘이 싸우지 마. 그럼 내 입장 난처해져.”

김 부장이 농담을 했고 호범은 그 말에 웃었다.

“제가 감히 검사님하고 싸울 깜냥이 되나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는데 바람이 차다.

서민준은 연못가 근처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범이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니야. 늦지 않을 거야. 지은인? 자? 응. 당신도 먼저 자. 나 기다리지 말고. 그래. 이따

봐.”

통화를 마친 그가 돌아보다 호범을 발견하고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뭐야.”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금연 중이었네요.”

호범이 껌을 하나 까서 입에 넣고 민준에게 내밀었다 . 드실래요? 민준의 눈빛에 날이 선

다. 그는 대답 대신 그대로 호범을 지나치려 했다.

“서 검사님. 왜 모르는 척해요? 이영준이 가지고 있는 비자금 파일, 나한테 넘어온 거 뻔

히 알면서.”

서민준이 멈춰서 호범을 노려봤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와, 우리 검사님. 정치꾼 다 되셨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시고.”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오가는 가운데 호범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싱긋 웃었다.

“나 큰 거 바라는 거 아니에요. 전에도 말했잖습니까. 우리 영감 그만 괴롭히라고.”

노려보는 서민준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다. 호범은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한

뼘 정도 거리에서 서민준을 내려다보며 호범이 안타까운 표정을 한다.

“알잖아요? 영감, 그 나이에 빵 가면 오래 못 살아.”

서민준의 눈빛에 혐오감이 내비쳐졌다.

“누가 보면 네가 대단한 효잔 줄 알겠다?”

“나 정도면 효자 아닙니까.”

“웃기지마, 새끼야. 영감 잘못되면 너도 끈 떨어진 연 되니까 그런 거잖아. 노인네야 어

떻게 되든 말든 넌 상관없지?”

호범은 여전히 미소를 띠며 여유로웠다.

“그래서, 나한테 아무것도 넘겨줄 마음이 없으시다?”

“어. 내가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호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민준이 호범을 지나쳐

간다. 하지만 그는 얼마 못 가 멈췄고 돌아서서 호범을 불렀다.

“양 대표. 아니 양호범. 내가 검사 하면서 제일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글쎄요.”

“너하고 네 할아버지 감방 못 보낸 거. 그거.”

“저런.”

“덕분에 나는 법으로 안 된다는 게 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거든.”

그 말인즉슨 법이 아니라 다른 수를 써서 어떻게든 밟아 주겠다는 건가.

“기대해. 내가 어떤 선물을 들고 나타날지.”

서민준이 서늘한 표정으로 일갈한 뒤 돌아선다. 호범은 혀로 앞니를 긁었다.

아, 씨발 담배 땡겨.

금연 욕구와 살인 충동을 같이 누르려니 한계가 오는 거 같다.

“이봐요, 서 검사님.”

서민준이 돌아본다. 호범은 그를 향해 여유롭게 웃었다.

“나도 선물 하나 줄 것 있는데.”

“…….”

“기대하시라고. 존나 마음에 들 테니.”

서민준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기색이 내비쳐진다. 돌아서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호

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여전히 그쪽을 노려보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

린다. 윤 실장이다.

“예, 실장님.”

전화기 너머 윤 실장의 목소리가 조금 곤란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범의 얼굴

이 차츰 굳어졌다. 그는 어이없고 열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래서. 어디 있다고요?”

수현은 끊어진 휴대전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뭐지. 왜 갑자기 술을 먹자고 하는 거

지. 일을 마치고 씻고 널브러져 있는데 양호범에게 술을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호텔


에서 보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사적으로 만날 이유가 있나. 그러다 문득 며칠 전 낮에 김

태신을 만난 걸 떠올렸다.

설마.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하던 수현은 재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번호나왔어?]

바로 답장이 온다.

[아직. 생각보다 어렵네.]

[빨리 안될까?]

[기다려. 노력중이야.]

한숨을 내쉬며 휴대전화를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로비를 지나 회전문

을 통과하는데 정문 앞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다. 양호범이 탄 차다. 운전석 옆에 타야

하나 고민하는데 차 문이 열리면서 양호범이 나온다 .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다.

“자고 있는 걸 깨웠어요?”

“어? 아니.”

“올라가죠.”

“어딜?”

호범이 대답 대신 앞서간다. 수현은 그가 술을 마시자고 한 장소가 위층 펜트하우스라는

걸 뒤늦게야 이해했다. 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내내 호범은 말이 없었다 .

그에게서 미약하게 술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수현은 긴장했다. 왜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걸까. 이 새끼가 뭐 알아챈 건 아닐까.

머리를 굴려도 짐작 가는 구석이 없다. 22 층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말끔

하게 청소된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테이블에 세팅된 얼음과 안주는 낮에는 없던 것이

다.

양호범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던지고는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간다.

“깨끗하네. 생각보다 청소에 소질이 있나 봐요.”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이야.”

이어서 나온 호범의 손에 술과 잔이 들려 나온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술병에 눈이 갔다.

지금은 단종된 고가의 술이다. 호범은 수현의 잔에 얼음을 채운 뒤 도금된 술병의 뚜껑

을 땄다.

“오늘은 뭐 했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고?”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양호범의 개인 오피스텔에서 잔 이후로 부쩍

말투가 친근해진 기분이다. 술이 든 잔을 내밀기에 수현은 자신의 것을 들어 살짝 부딪

친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목 넘김이 다르다. 감탄하여 쳐다보니

호범이 웃는다.

“술 좋아해요?”

“나 병원에서 치료받았었어. 알코올 중독하고 약물 중독으로.”

호범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다. 수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몰랐어? 나에 대해서 조사했다며.”

“거기까진 몰랐지.”

“괜히 얘기했네.”

수현이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병원에선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말라고 하였는데 , 그게

어디 쉬운가. 약은 그래도 이제 안 먹으니까. 라고 스스로 위안을 했으나, 그게 언제까지

일지는 모를 일이다. 벼랑 끝에 내몰리면 또다시 손을 댈 수도 있고.

술을 마시는 동안 호범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팔뚝 위까지 접어 올린다. 수현은 잔을

입에 댄 채 눈으로는 그 모습을 훔쳐봤다. 첫 만남 때도 느낀 거지만 양호범은 팔이 정말

단단하고 예쁘게 생겼다. 움직일 때마다 근육 모양이 바뀌고 파랗게 돋아난 핏줄까지 더

해져 여간 섹시한 게 아니었다.

팔만 똑 잘라서 갖고 싶네. 자위할 때 쓰게.

술이 들어가니 긴장이 풀어진다. 수현은 슬리퍼를 벗고 소파 위에 올라가 웅크리고 술을

홀짝였다. 그걸 보며 호범이 피식 웃는다.

“며칠 동안 별일 없었어요?”
“딱히. 아, 너희 형이 또 여길 어지럽혔어. 내가 올 때까지 여자 둘하고 셋이서 헐벗고 있

더라.”

수현은 엊그제 있었던 일을 양호범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쳤다 . 그의 사촌 형이란 작자는

생각보다 자주 이곳을 이용했는데, 한 번도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엊그제는

뜻하지 않게 그 인간의 좆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

수현은 그걸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집안은 좆 큰 게 내력일지도 모른다고.

“이해해요. 그 인간이 약하고 씹질에 미쳐서 그래.”

“그런 거 같아….”

호범이 웃는다. 수현은 그의 웃는 얼굴이 꽤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하거나 인상을

쓰면 존나 무섭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잘생긴 얼굴임은 분명하다. 몸도 좋고. 어린 새끼

가 색기도 흐르고.

“너는 어때?”

수현의 질문에 호범이 눈만 들어 쳐다본다.

“너도 좋아하냐고. 씹질.”

그 말에 호범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어떨 거 같은데? 라고 물었고 수현은 음,

하고 잠시 생각하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23 화

“어릴 적 이야기 해 봐요.”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니 기분이 몽롱하다. 양호범은 여전히 처음 그 자세 그대로였다.

수현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릴 적?”

어릴 적이라 … .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고통인 시절. 아주 어릴 땐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살았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었고 , 가끔 찾아와 돈을 주고

갔는데, 그러고 나면 꼭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지의 행방을 물으며 행패를

부렸었다.

그때 수현은 천사 같던 엄마도 남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됐다. 그렇

게 엄마를 따라 하다 보니 수현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깜찍한

꼬마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돌아가셨어요?”

수현은 남은 술을 마저 따랐다. 음 … .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땐 늘 술에 취했던 거

같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꺼낼 수 없을 만큼 힘든 기억인데 , 그래도 털어놓고 나면 조

금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도 있었다.

수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처음 보는 놈들이 찾아왔었다고, 여느 때처럼 거짓말로

모면하려고 했는데, 그게 통하지 않는 놈들이었다고. 발로 밟히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정신을 차리니 아주 깊숙한 산이었어….”


“저런. 어린애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나쁜 새끼들이었네요.”

그 말에 수현은 어이없이 웃으며 호범을 쳐다봤다.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호범은 계

속해 보라며 손짓을 했고, 수현은 그날 있었던 일을 담담히 털어놨다. 엄마가 도망치라

고 해서, 도망쳤다고. 밤새 어두운 산길을 달리다 낭떠러지로 굴렀고, 정신을 차렸을 때

는 산골에 사는 어느 마음씨 좋은 부부가 저를 간호해 주고 있었다고.

“마음씨 좋은 부부?”

여태까지 듣고만 있던 양호범의 얼굴에 흥미가 생긴다 . 수현은 이번에 술 대신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아삭 베어 물었다. 새콤하다. 수현은 그 시절에 대해 떠올렸다. 부모를 대

신하여 저를 맡아 주었던 어느 산골 부부를….

“삼계탕집을 했는데, 착한 분들이었어.”

“그리고 또?”

씹고 있던 사과를 꿀꺽 삼켰다. 꿀처럼 달다. 갑자기 백설 공주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마

녀가 찾아와 달콤한 사과를 건넸을 때 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하고 그걸 덥석 먹어 버

렸을까. 멍청하게.

“그게 다야.”

호범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아직도 그 사람들하고 연락해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수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양호범의 눈빛을 뚫어지게 봤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나를 떠보는 거야?”

호범은 들고 있는 잔을 돌렸다. 얼음이 섞이며 달그닥 소리를 냈다.

“그쪽 살인 전과에 관해 묻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역시. 아는구나.

“그것 때문에 그들하고 인연을 끊은 건가 해서.”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비슷해.”

“그렇구나.”

“이제 그만 말할래. 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라.”

“억울하지 않아요?”

수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굳혔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으나 모든 걸

다 낱낱이 까발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양호범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정당방위였잖아. 그 집 딸을 강간하려던 나쁜 새끼를 붙잡다 우발적으로 찔렀지.”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양호범이 생각보다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갑자기

옛 기억이 휘몰아치듯 몰려오며 현기증이 일었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투를 챙

겨 들었다.

“나 취하는 거 같아. 갈래.”

“앉아요. 왜 감질나게 이야기를 하다 말아? 아직 재미있는 얘기가 더 남은 거 같은데.”

호범이 술잔을 든 손으로 소파를 가리킨다. 어째서일까. 분위기가 싸하다. 수현이 노려

보고 서 있자 호범이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 독한 술을 다 먹었는데도 얼굴색 하

나 변하지 않은 걸 보면 저게 인간이 맞나 싶다.

자리에 다시 앉으니 호범이 일어나 수현의 앞으로 온다. 그는 테이블에 걸터앉았고, 수

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전히 손에 있는 술잔을 한 번씩 움직이며. 할 말이 많

다는 표정으로.

수현은 직감했다. 이 새끼가 날 부른 건 그저 술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구나.

“그럼 이제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줄까 하는데.”

“…….”

“내가 백수현 애인이라는 소문이 돈다는데, 알고 있어요?”

양호범은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고, 수현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그 애인이라는 인간이 내 물건을 김태신한테 홀랑 갖다준다고

약속을 했다지 뭐야.”


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서니 호범이 고개를 들어

빤히 쳐다본다. 손끝이 떨려 왔다. 그 얘기를 어떻게 알았지. 김태신이 설마 꼰질렀나. 미

친 새끼가, 설마 그걸….

“아직 말하잖아. 앉아.”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모텔에서 김태신에게 붙들렸을 때 단번에 찾아온 이유가 위치

추적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초기화시키고 지랄을 떨었던 건데 . 불

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그 말에 호범이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다.

“하여튼, 벌구, 씨발.”

“…….”

“내가 그 새끼 밑으로 심어 둔 놈들만 여럿이야.”

등골이 오싹해진다. 정말 다 아는구나.

“왜. 이것도 김태신한테 가서 일러바칠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어져 떨어지질 않는다. 양호범을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

다. 수현은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물론 거짓말은 조금 보태서.

“만, 만난 건 맞거든. 근데 그건 붙잡혀서 무서워서 그랬어. 사람이 위급한 상황인데 무

슨 말인들 못 해.”

호범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다. 그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이 확 바뀐다.

수현은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양호범의 기세에 눌려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호범이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더니 손을 뻗는다. 수현이 인상을 썼다.

“때리기만 해. 가만 안 둬.”

호범의 커다란 손이 수현의 턱을 잡는다. 수현은 눈동자만 움직였다. 이 새끼가 왜 이래.

이러다 갑자기 후려치는 거 아니야. 바싹 긴장하고 있는데 양호범이 천천히 입을 벌렸

다.

“아, 해 봐.”
수현이 알아듣지 못하자 호범은 엄지로 수현의 아랫입술을 눌러 벌린다.

“벌리라고. 입이 얼마나 큰지 보게.”

기분이 나빠 손을 탁, 쳐 내니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소파에 털썩 앉는다 . 수현

은 그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양호범의 손이 허리춤으로 간다. 설마 했는

데 놈이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다.

열린 지퍼와 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놈이 지갑을 열어 무언가를 꺼낸다. 검은색

신용카드다. 놈은 눈앞에서 그걸 흔들더니 테이블에 툭 던졌다.

“네가 내 애인이라며. 잘 빨면 줄게.”

노려보고 서 있자 호범이 웃는다.

“자존심 상해?”

“…….”

“그 새끼한테 나 팔아서 받은 돈은 괜찮고, 내 자지 빨고 받는 건 자존심 상해?”

웃고 있었으나 양호범의 눈빛은 죽일 듯 서늘했다. 여태 웃고 농담을 받아 주던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같이 느껴진다 . 수현은 입술을 꽉 다물고 호범을 노려보다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달그닥. 얼음이 움직이는 소리.

숨 막힐 듯한 정적.

손을 뻗어 양호범의 속옷 안에서 성기를 꺼냈다. 발기가 덜 됐는데도 여전히 크다. 감싸

쥐고 문지르자 녀석이 점점 고개를 든다. 달그닥. 얼음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꿀꺽, 꿀

꺽, 술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곧 머리카락으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아 부드럽게 어루만

진다.

“언제까지 만지기만 할 건데. 입은 뒀다 뭐 하고.”

수현은 혀를 내밀어 양호범의 좆을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 술을 마시며 눈을 내리깔고

있던 양호범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 야차 같은 얼굴에서 흥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

을 수가 없었다. 수현은 오기가 생겼다. 기둥의 아랫부분을 혀로 핥아 올려 주자 좆이 꿈

틀거리고 움직이며 핏줄이 도드라진다.


수현은 양호범이 바라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려 좆을 물고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

다. 그런데 커도 너무 크다. 턱이 얼얼하니 빠져나갈 것 같다.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반만 넣은 채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머리 위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결국, 최대한 목구멍을 열어 안쪽 깊숙한 데까지 밀어 넣었다 . 귀두 부분이 목젖을 밀고

식도까지 건드리자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숨이 차다. 압박감에 목에 핏줄이 돋고 눈과 뺨 코끝

은 점점 빨갛게 변해 갔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에서 빼내려는데 양호범이 그대로 뒤

통수를 잡아서 누른다.

윽, 수현이 그의 허벅지를 붙들며 벗어나려 애를 썼다. 양호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

를 아래에서 위로 퍽, 쳐올렸다. 두툼한 좆이 목구멍을 찢을 기세로 찔러 댄다. 죽을 거

같아. 숨 막혀! 타액이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후우, 씨빨.”

호범은 수현의 머리채를 잡고 일어섰다. 그는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잊고 백수현의 얼굴

을 빤히 봤다. 기다란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나풀거렸고, 뺨과 귀 목덜미가 잘 익은 복숭

아처럼 붉게 물들었다. 수현을 내려다보던 호범의 눈빛에 쾌감이 번진다.

그는 마치 수현의 입이 구멍인 듯 거칠게 움직였다.

“얼굴, 씨발! 아주!”

미친 새끼. 그만! 수현이 머리를 뒤로 빼려 했으나 머리채가 먼저 잡혔다 . 주먹으로 양호

범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수현은 울면서 양호범

의 허벅지를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다 울컥, 뜨거운 정액이 흘러나와 목구멍을 적신다.

그리고 바로 좆이 쑥 빠져나갔다.

쿨럭, 쿨럭, 동시에 수현은 토할 것처럼 연신 기침하며 자리에 쓰러졌다. 겨우 숨을 몰아

쉬며 고개를 드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수현은 양호범을 노려봤다. 그는 물티슈로 손

을 닦아 내는 중이었다.
개새끼. 욕을 뱉자 양호범이 앞에 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손을 뻗는다 . 악에 받친 와

중에도 수현은 덜컥 겁이 났다. 이번엔 진짜 나를 죽이는 게 아닐까 하고 . 그런데 예상 밖

으로 엉망이 된 수현의 뺨과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히 넘겨 준다. 낯짝은 여전히 서늘하

다.

“그러니까. 왜 까불어. 응?”


24 화

호범은 아침부터 양 회장을 찾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근처에서는 우진이 다기에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만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확인하니 현금 서

비스를 받았다는 메시지가 뜬다. 백수현이다. 그는 호범이 준 카드로 물건을 사는 대신

돈을 뽑고 있었다.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백가 아들은 어때? 잘 지내?”

“아직은요. 한 번씩 병신 짓을 해서 문제지만.”

우진이 잔에 차를 채워 한 사람씩 건네줬다. 노인이 그것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고, 호범

은 입도 대지 않았다. 김우진은 늘 저런 표정이다.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숨기는 데 노련

했다. 남들은 애늙은이 같다고 하였으나 호범은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진은 겁먹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다. 하지만 호범은 알고 있다. 저

건 단순히 연기라는 걸. 저 순진한 얼굴 뒤에 다른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걸.

“정 데리고 있기 힘들면 이리 보내. 너 일하는데 괜히 신경 쓸 거 없다.”

아주 잠깐 우진의 얼굴에 기대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 호범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

한 듯 웃었다.

“봐서요.”

차를 마시며 짧은 대화를 나누고서 밖으로 나오는데 우진이 문밖까지 마중을 나온다. 차

에 올라타려던 호범은 그런 우진을 돌아봤다.


“김우영 들어왔어.”

우진은 알고 있는 듯 크게 반응은 하지 않았다.

“네, 형님.”

“만나고 싶으면 호텔로 와. 영감한테는 비밀로 하고.”

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 아직도 그 새끼 만나?”

우진의 표정이 확 굳는다. 우진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한번 돌아

봤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희게 느껴진다. 붉은 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이제 안 만나요.”

그럼 다행이고.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움직이는데 우진이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다. 호범은

작년 일을 떠올렸다. 작년, 그러니까 김우진이 열여덟일 때 스물 중반의 어떤 놈하고 호

텔로 들어가는 걸 딱 걸린 그 순간 말이다.

대학생이라던 놈은 미성년자인 우진을 따먹으려다 호범에게 걸려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때 김우진 표정이 가관이었는데. 귀신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할아버지한테는 제발 말하지 말라고 애원했었다. 그건 아마 연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하고 붙어먹는 사촌 동생을 생각하는데 문득 백수현의 얼굴이 겹쳐진다. 제 좆을 빨

때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핥으며 눈을 위로 치켜뜨던 모습. 작은 입에 좆

을 물고 힘겹게 머리를 움직이던 모습, 놓아 달라고 눈물범벅이 되어 울던 모습.

호범은 갈증이 이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한번 물었다가 놓으며 작게 욕을 씹어뱉었다.

“씨발. 담배 땡겨.”

이 모든 게 백수현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순간 다시 메시지가 온다.

띠링. 또다시 현금 서비스다.

헛웃음이 터졌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

“개새끼. 아주 거덜을 내 줄 거야.”

수현은 은행 현금 인출기 앞에 서서 나오는 족족 가방에 돈을 챙겨 담았다 . 그러다 기계

에 현금이 없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살짝 충격이었다. 통장에 잔액이 없다는 메시지는

수없이 봤으나 인출 기계에 현금이 없다는 메시지는 낯선 광경이다.

수현은 옆 칸으로 이동하려다 수상하게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결국, 밖으로 나와

다른 곳을 찾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카드에서 현금을 뽑다 보니 가방이 어느덧 두둑해

졌다.

혹시 몰라 가방을 등이 아닌 앞으로 짊어졌다. 무거워 어깨가 눌리는데도 기분이 좋다.

이런 거면 몇 번 더 해도 괜찮겠는데? 다음엔 그냥 내가 알아서 빨아 준다고 할까. 존나

속물 같은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어차피 인간은 다 속물

아닌가.

그렇게 뽑은 돈을 짊어지고 방문한 곳은 종로의 금은방이었다. 보석을 맞추러 온 신혼부

부부터 시작해 귀금속을 사러 온 손님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수현은 가방을 앞으로 멘

채 금을 구경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 하나가 다가와 수현을 보며 상냥하게 말을

건다.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을까요?”

수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금을 사고 싶어서요.”

“어떤 종류를 원하시는데요?”

“골드바도 좋은데, 아, 저기 두꺼비 있네. 혹시 저것보다 더 큰 거 있나요?”

직원이 영업용 미소를 활짝 짓는다. 그럼요. 하더니 안으로 들어간다. 수현은 유리 진열

대 안 금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현금도 좋지만 갖고 움직이기엔 아무래도

버거운 구석이 있다. 요즘 금 테크가 유행이라는데, 나도 이참에 금이나 쟁여 둬야지. 라


고 마음먹은 순간 딸랑,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두 명의 남자였는데 그들은 자연

스럽게 들어와 한 명은 수현의 오른쪽에 와서 서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에 자리를 잡았

다.

순간 수현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아, 여보세요? 엄마?”

몸을 돌려 그들 사이를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왼쪽에 있던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키는

작았으나 체격이 다부졌고 항공 점퍼에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밀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남부서 이정필 경장입니다.”

형사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인다. 수현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물

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여기서 얘기하긴 그렇고, 잠깐 나가시겠어요?”

괜히 소란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순순히 따라 나오니 남자가 수현을 데리고 안쪽 골목

으로 들어간다. 한 사람은 앞에 한 사람은 뒤에. 자연스럽게 포위하는 모양새가 됐다.

“선생님 신분증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왜요.”

“ 저희가 방금 제보 전화를 받았어요. 어떤 수상한 사람이 현금 인출기에서 현금을 다량

으로 가방에 담고 있다고 말입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거들었다.

“최근에 보이스 피싱범 쫓느라 이 지역을 순찰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신분증을 보여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은 카드 현금 서비스 받은 거예요.”

“본인 카드세요?”

“아니요.”
두 사람의 눈에 의심이 깃든다. 수현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는 사람인데, 친해요. 저한테 쓰라고 준 거니까 전화 걸어서 확인해 보세요.”

“일단 신분증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분증이 있긴 하지만 … . 지나가는 사람들 몇 명이 멈춰 서서

이곳을 주시한다. 수현은 지갑을 꺼냈고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젊은 형사가 조금 떨

어진 곳으로 걸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응, 응. 그래?

통화하며 그가 뒤를 한번 흘깃 돌아본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젊은 형사가

돌아왔고, 나이 든 형사의 귓가에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였다. 워낙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으나, 살인, 전과 어쩌고 떠드는 건 분명히 들었다.

“백수현 씨. 일단 저희하고 서로 가셔야겠습니다.”

수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아니라니까요. 카드 주인한테 전화 걸어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아니, 됐다. 제가 걸어 드릴게요. 걸어서 통화시켜 드리면 되는 거죠.

부랴부랴 양호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가 가도 받질 않는다.

또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의 표정은 점점 초조하게 변해 갔다. 빌어먹을. 카드

주인이 쓰라고 해서 쓴 것뿐인데 졸지에 도둑놈에 보이스 피싱범이 되게 생겼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름?”

“백수현이요.”

“나이는요?”

“스물여덟.”

“주민등록번호가….”

수현이 주민등록번호를 말하려고 하는데 시끄럽던 경찰서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양호범이 막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그는 검은색 슈

트를 입고, 부하 직원도 없이 혼자였는데, 존재감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에 충분하였다. 조서를 작성하던 형사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선다.

“아, 양호범 대표님 되십니까?”


“안녕하세요. 연락받고 왔습니다.”

“우선 여기 앉으세요.”

호범은 수현을 외면한 채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수현은 그런 호범을 노려봤다.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있는 백수현 씨가 오늘 양 대표님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았더라

고요. 본인 말로는 대표님이 직접 줬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일단 신고가 들어왔고 저희

가 확인을 해야 해서요.”

호범이 침묵하자 수현은 불안해졌다. 사실 어제 일 때문에 꼴 보기는 싫은데 지금 저를

구해 줄 인간은 양호범밖에 없었다.

“얼른 형사님한테 말해…. 네가 준 거 맞잖아.”

양호범이 그제야 수현을 본다.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걸고서.

“누구시더라?”

수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야….”

앞에 앉아 있던 형사가 끼어들었다. 여차하면 수현에게 수갑이라도 채울 기세다.

“아는 분 아닌가요? 카드도 주신 적 없고?”

억울하다. 수현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호범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간을 찡그린

다.

“글쎄요. 기억이 잘….”

하마터면 형사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수현은 이를 악물고 호범

을 노려봤다.

“너 이러려고 일부러 나한테 카드 줬지? 이 양아치 새끼야!”

“백수현 씨 진정하시고요. 그럼 양 대표님이 주신 게 아닌 거죠?”

“무슨 소리예요, 형사님. 어제 이 인간이 저한테 직접 줬다니까요!”

“조용히 하세요. 본인이 기억이 없다는데, 왜 난리를 칩니까.”

수현은 억울하여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형사님 왜 내 말은 안 믿어요? 이 인간이 나한테 지 좆 빨라고 시키고, 그 대가로 준 거라

니까!”

버럭 고함을 치니 순식간에 경찰서 안이 조용해진다 . 수현은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뒤

늦게 깨닫고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 씨발. 욕을 하며 자리에 앉는데 양호범이 돌아본

다.

“더 떠들어요. 동네방네 아주 광고를 해.”

“꺼져, 개새끼야!”

양호범이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형사님. 방금 들으셨죠? 꺼지라니 꺼지겠습니다. 법대로 엄하게 다스려 주세요.”

수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양호범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어이가 없고 분한 와

중에도 이 인간이 진짜 나를 집어 처넣으려고 하나 덜컥 걱정됐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데 양호범이 정말 가려고 발을 뗀다. 수현은 하는 수 없이 그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내려다보는 양호범의 표정에 즐거움이 한가득이다.

얄미운 새끼. 수현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잘못했어….”

양호범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 형사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방금 기억났습니다. 필요할 때 쓰라고 줬는데, 깜빡했네요.”

네? 형사는 황당한 얼굴로 양호범을 쳐다봤고 수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죽일 듯

한 표정으로 양호범을 노려봤다. 독사 같은 낯짝에다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

다. 수현은 붙들고 있던 양호범의 팔을 탁 놓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형사님. 저는 이제 가도 되죠?”

형사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말리지는 못한다. 밖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얼핏 비웃는 듯한 표정의 범죄자와 눈이 마주쳤다 . 그래, 실컷 웃어라, 씨발. 완전히 밖으

로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금방 양호범에게 따라잡혔다.

“같이 가요.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수현은 돌아보며 가방을 집어 던졌다.


“꺼져!”

호범은 가방을 잡아채서 다시 수현에게 던졌다.

“몇 푼이나 한다고 이걸 돌려줘. 그냥 가져요.”

수현은 입을 꼭 다물고 노려보다 그대로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걸어갔다. 그런데 앞쪽에

서 누군가 걸어온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수

현의 걸음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다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본 순간 너무 놀라 호흡이 멈췄다. 급하게 돌아 점퍼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뒤따라오던 호범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발을 떼는데 호범이 수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긴다.

“서민준 검사님. 여기서 뵙네요?”

서민준 이름 세 글자에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25 화

“정신이 드니?”

수현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형체의 사람을 보고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에 질

려 앉은 채로 발버둥을 치며 물러서는데, 뒤늦게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여자는 짧은 단발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고, 남자는 작업복 같은 옷에 피

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수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여자가 남

자를 나무랐다.

“거봐요. 당신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라고 했잖아. 애가 기겁을 하네.”

“당신 때문이겠지. 그 칼이나 치워.”

“너 이름이 뭐야? 산에는 어떻게 올라온 거야? 머리는 어때? 아프지 않아?”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옆에 놓여 있는 그릇이 눈에 띈다. 흰죽이 담겨

있었는데 고소한 냄새가 훅 풍겨 왔다. 눈치 빠른 여자가 죽 그릇을 들어 수현에게 내밀

었다.

“먹을래? 먹을 수 있겠어?”

수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작은 소반을 가져와 죽을 앞에 놓아 준다.

“거기 왜 있었는지 기억나? 부모님은? 부모님은 어디 계셔?”

“둬요. 배부터 채우게. 어린 게 얼마나 굶었는지 뱃가죽이 등에 붙었어.”

여자가 내민 수저를 받아 드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 그때 밖에서 엄마, 손님 오셨어요. 하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문밖을 내다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민준아, 잠깐 이리 와 봐.”
문이 열리고 방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키가 큰 남학생 하나가 교복을 입고 들어

왔는데, 방금 세수를 했는지 머리카락은 젖고 흰 피부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

다.

“네가 얘 밥 좀 먹여 줘. 손을 너무 떨어서 원.”

남학생이 앞에 앉는다. 왼쪽 가슴에는 초록색 명찰이 달려 있다. 서민준. 두 부부가 나가

고 수저를 든 민준이 뜨거운 죽을 살살 긁은 뒤에 호, 하고 입으로 불어 식힌다. 그러고

나서 그걸 수현의 입가로 디밀었다.

“아, 해.”

낯설어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더니 그가 대뜸 손을 뻗어 이마를 짚는다.

움찔, 뒤로 도망치니 그가 한숨을 내쉰다. 열은 없는데.

“아니면 다른 거 줄까?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고개를 저은 수현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제가 먹을게요.”

수현은 남자가 쥐여 준 수저를 들고 죽을 한 수저 떴다 .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입에 침

이 고인다. 덜덜 떨면서 한 입 떠서 입에 넣고, 그다음부터는 허겁지겁 퍼먹었다. 그러자

민준이 물을 챙겨 준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해.”

콜록, 콜록, 아니나 달라 목에 걸려 기침을 해 대니 그가 휴지를 가져와 입가를 닦아 준

다. 손길이 따뜻하다.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어떻게 됐을까. 아직 그곳에 있을까. 지

금이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 그런데 거기가 어디였더라. 눈물이 왈칵 차올라 코끝이 매

워졌다. 도저히 밥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아?”

울먹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야?”

“수현이요, 백수현….”

“몇 살인데?”
“열 살….”

그가 놓친 수저를 다시 손에 쥐여 주며 수현을 달랬다.

“수현이 강아지 좋아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는다.

“ 이거 먹고 형하고 밖에 나가 볼래? 우리 집에 강아지 있거든. 백구가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어.”

엄마가 생일에 강아지를 사 주겠다고 한 약속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약속은 매번 지켜

지지 않았다. 수현은 엄마도 아빠를 닮아 갈수록 거짓말이 늘어 간다고 생각했다. 엄마

생각을 하니 또다시 설움이 복받친다. 수현이 눈물을 매단 채 고개를 들었다.

민준이 눈 밑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얼른 먹어. 형하고 강아지 보러 가자.”

수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그들을 등진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뒤에서 서늘한 목소

리가 들려온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직원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잠깐 들렀습니다.”

뒤통수가 따갑다. 수현은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 쥐었다. 돌아선 호범이 수현의 어깨를

잡는다.

“그럼 나중에 뵙죠.”

고개를 푹 떨군 채 따라가는데 옆으로 서민준인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가 지나간다. 얼굴

을 최대한 모자 안으로 숨겼다. 그렇게 차에 탄 수현은 넋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

대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진다. 그걸 보며

양호범은 웃었다.

“좋다고 끌어안고 있을 땐 언제고.”

대꾸할 기운조차 없었다. 뻣뻣해진 목을 움직여 창밖을 내다보는데 저 멀리 경찰서로 들

어가는 입구에서 서민준이 담배를 물고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인다 . 수현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장은 죄를 지은 것처럼 정신없이 쿵쾅거렸다. 호범은 별다른

말이 없었고 고심 끝에 수현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까… 누구였어?”

호범이 운전대를 돌리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되물었다.

“누구요?”

“경찰서 앞에서 만난 사람.”

“서 검사?”

“잘 아는 사람이야?”

“안면만 트고 지내는 사이.”

수현은 어금니를 힘주어 바싹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

더는 묻기가 힘들어졌다. 호텔까지 오는 내내 호범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말할

기분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반쯤 넋이 나가 차에서 내리려는데 호범

이 가방을 집어 품에 안겨 준다.

“챙겨요. 내 좆 빨아 준 값인데.”

대꾸할 힘도 없었다. 가방을 들고 내리는데 호범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 그러

거나 말거나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숙소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그 앞에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수현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다 싫어진다 . 살면서 한 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한 적

은 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고개를 든 수현은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고 일어나 침대

로 갔다. 들고 있던 가방을 침대에 던져 놓으니 열린 지퍼 사이로 오만 원짜리 지폐가 삐

죽 얼굴을 내민다.

수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옷장을 열고 가방을 안쪽 깊숙이 숨겨 뒀다. 문을 닫으

려는데 옷장 구석에 손바닥보다 작은 비닐봉지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빼서 확인하


니 봉지 안에 말린 잎사귀가 들어 있다. 얼마 전 양호범의 사촌 형인 김우영이 수현에게

팁이랍시고 건네준.

가만히 생각하던 수현은 그것을 주머니에 챙겨 숙소를 나섰다 . 고통스럽다. 잠깐이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려면 혼자 힘으론 역부족이다. 인간은 행복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을 더 잘 기억하고 곱씹으니까.

그럴 땐 술과 약만큼 좋은 게 없다. 의사는 나쁘다고 하였으나, 햄버거나, 피자를 먹는다

고 해도 똑같은 얘길 했을 거다. 그래, 이건 햄버거 피자와 다를 게 없다. 스스로 합리화

시키며 밖으로 나와 프런트로 향했다.

직원에게 지갑을 두고 왔다는 핑계로 카드 키를 받았다. 펜트하우스에 손님이 오면 미리

연락이 오는데 오늘은 딱히 머무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다. 수현은 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왔다. 말끔하게 청소된 소파에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양호범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가서 술을 꺼내 왔다.

이깟 술 하나 없어졌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거다 . 수현은 독한 술을 골라 가져와 뚜껑

을 열었다.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데 목구멍에 불이 붙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입가

에 흐르는 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리모컨을 들고 TV 를 틀었다.

뉴스가 한창이다. 이번 선거에 누가 출마했고, 누가 유력하다느니 하는, 알고 싶지도 않

은 그런 이야기. 술이 들어가니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진다 . 이것 봐. 역시 좋다니까.

단숨에 한 잔을 비운 수현은 소파 아래 바닥으로 내려와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숙소에서 가져온 비닐봉지를 꺼내어 그것을 벌리고 코를 묻었다 . 특유의 풀 냄새가 훅

끼친다. 수현은 주변을 둘러보다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 오늘 양호범 카

드에서 빼낸 그 돈이다.

그 위에 말린 풀잎을 넣고 꾹꾹 눌러 말았다. 지폐가 뻣뻣하여 수월치 않다. 그러고 나서

마무리로 끝에 침을 발라 붙였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돈에 불을 붙여 보겠는가. 당장 만

원짜리 한 장 없어서 절절매던 게 엊그제였다.


씁쓸하게 웃으며 한쪽 끝을 물고 반대편에 불을 붙였다 . 매캐한 연기가 훅 올라온다. 흐

읍, 깊게 빨아들이니 풀 냄새와 함께 연기가 폐 깊숙한 곳으로 스며 들어온다 . 후, 허공에

연기를 내뿜으며 수현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술과 더해져 정신이 몽롱해지고 팔다리가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몸이 축 가라앉는다. 방

은 이제 대마 특유의 풀 냄새로 가득했다. 수현은 거의 끝까지 피운 그것을 먹다 남은 술

잔에 버리고 그대로 카펫에 드러누웠다. 눈앞이 아른거리고 호흡이 점점 느려진다. 마음

이 편안하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호범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얼굴이 굳었다.

같이 온 지인들 역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따라오다 그 옆에 멈춰 섰다.

“저게, 뭐야?”

누군가 진지하게 묻는다.

“범아. 너 사람 죽이고 안 치웠어?”

그들 사이를 가르고서 긴 머리에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뒤늦게 나타난다 . 그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수현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빤히 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고 감탄을 한다.

“누구야? 존나 잘생겼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가 수현의 가슴 위에 올라탄다 . 내 파트너는 오늘 얘야. 나머지

일행이 낄낄대며 걸어갔다. 야, 그거 시체 아니야? 죽었나 확인해 봐. 호범은 성큼성큼

가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호범은 백수현 가슴 위에 올라탄 여

자도 끌어냈다.

“다들 나가. 선약이 있는 걸 깜빡했어.”

일행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호범은 그들을 향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얼른.”
다들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내쫓겼다. 호범은 문을 닫은 뒤 천천히

백수현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셔츠는 말려 올라가 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술잔에는

피다 만 마리화나까지.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질 않는다.

야. 일어나.

발로 툭 찼는데도 쥐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호범은 이를 빠득 갈았다.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 들어서 침대에 눕히려고 어깨 안쪽으로 손을 넣는데 갑자기

팔이 쑥 들어온다.

피할 틈도 없이 멱살이 잡혔고 화를 내기도 전에 백수현의 입술이 호범의 입술을 집어삼

켰다. 입술을 떼고 얼굴을 굳히자 수현이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뜬다. 초점이 없는 눈동

자에 호범의 화난 얼굴이 맺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양팔을 뻗어 호범의 목을 끌어

안았다.
26 화

“씨발.”

호범이 험악한 얼굴로 수현의 머리채를 잡고 떼어 냈다. 눈을 반쯤 뜬 상황에서 백수현

이 히죽 웃는다. 그러더니 이번엔 목에 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뻗어 호범의 성기를 주무

른다. 호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야… 나하고 한번 할래?”

잠꼬대하듯 웅얼대는 목소리. 어이가 없어 그 손을 비틀어 쥐고 위로 끌어 올리자 수현

이 얼굴을 찡그린다. 아, 아파. 그 와중에도 호범의 손가락을 혀로 핥으며 두 다리로 호범

의 허리를 감고 비벼 왔다. 호범은 어이가 없어 노려봤고 수현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

다.

“한번 준다니까.”

호범은 꽉 쥐고 있던 백수현의 손을 놓았다. 그 손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 바지 위로 호범

의 성기를 문지른다. 호범 역시 술을 마신 데다 몇 주째 금욕을 한 상태였다 . 엊그제 백수

현 입에 넣고 쑤실 때도 나쁘지 않았다. 남자를 섹스 상대로 생각한 적은 없으나, 닥치면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몸뚱이도 하얗고 부드러워 봐 줄 만하다고. 지금 당장 성욕을 풀기엔

이 정도면 뭐. 좆이 발기하기 시작하자 수현이 행동을 멈추고 벨트를 풀려고 한다 . 하지

만 술에 취한 나머지 손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안 돼….”
또다시 웅얼거리길래 호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수현이 잡으려 팔을 뻗길래 그 손

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백수현의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가벼이 딸려 올라온다. 호범은 흐

느적거리는 수현의 어깨를 잡아채며 눈을 맞췄다.

“네가 먼저 꼬셨다.”

백수현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응.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

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걸까. 이 인간은 늘 이런 식으로 살아왔던 걸까. 뭐,

아무렴 어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다시 바지를 벗기려 하기에 호범은 일어서며 수현의 팔을 붙들고 일으켜 소파로 끌고 가

팽개쳤다. 술에 취한 백수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하기에 그대로 어깨를 눌러 납작 엎

드리게 했다. 수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만 움직여 뒤를 돌아봤다.

“뭐 하는 거야….”

“하자며.”

호범은 수현의 어깨를 누른 채 다른 손으로는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끌어 내렸다. 백수

현은 벗어나려고 꼼지락댔으나 힘에 눌려 결국 엉덩이만 까고 엎드린 자세가 됐다. 피부

가 희다. 엉덩이도 뽀얗고 동그랬다.

호범은 옆에 있던 쿠션 하나를 가져와 수현의 배 아래 받쳤다 . 엉덩이만 위로 들리며 삽

입하기 좋은 모양새가 된다. 수현은 불편한지 벗어나려 했고 호범은 그런 수현의 등을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할래….”

호범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며 피식 웃었다.

“넌 좆이 필요하고, 난 구멍이 필요하니까, 이 자세가 딱 좋아.”

수현이 개새끼, 하고 욕을 하길래 호범은 그의 뒤통수를 눌러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

읍, 백수현이 발을 버둥거리길래 그 위에 올라탔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한결 수월하

다. 막말로 백수현하고 내가 얼굴 맞대고 쪽쪽 빨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지이익 지퍼를 내리자 이미 팽팽하게 발기한 좆 때문에 속옷 앞쪽이 두둑하다 . 수현이

몸을 다시 움직이려 하기에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아. 놀랐는지 고개를 돌려 인상을

쓰길래 그러거나 말거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벌렸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복숭아 젤리를 연상시킨다 . 훤히 드러난 구멍

을 보는 호범의 눈동자에 짙은 욕망이 드리워졌다. 생각보다 더 나쁘진 않네. 백수현은

이제 체념한 듯 엎드린 채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퉤! 손에 침을 뱉은 호범은 제 좆을 잡고 문지른 뒤 백수현의 구멍에 댔다. 백수현이 허벅

지에 힘을 주며 몸을 움찔거린다. 예민한 반응이다. 귀두만 살짝 집어넣으려고 했을 뿐

인데도 밀어내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몸을 완전히 겹치자 수현이 가쁜 숨을 내쉬며 뒤

돌아봤다.

“무, 무거워….”

몸으로 압박한 채 하체를 움직여 구멍 끝에 걸린 좆을 안으로 쑤셔 넣었다 . 백수현의 고

개가 번쩍 들리고 눈과 입이 벌어진다. 여태 술과 약에 취해 멍한 표정이더니 벼락이라

도 맞은 얼굴이다.

“잠, 잠깐!”

수현이 뒤로 손을 뻗었으나 호범을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좁은 구멍은 좀처럼 벌어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범이 후, 호흡을 고르고 다시 집어넣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로 밀어내기 바쁘다. 수현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윽, 안 돼, 안 들어가!”

호범은 이를 갈며 수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들어가. 그러니까 힘 빼.”

“안 된, 아!”

“거봐, 들어가잖아.”

좁은 구멍을 강제로 벌리며 들어가자 수현이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손톱으로 소파를 긁

는다. 호범은 그 손을 붙잡은 채 허리에 힘을 줬다. 수현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입만 벌리고 헉, 헉, 숨을 토막 치며 내쉬었다.
“안 된,”

반쯤 들어간 것을 호범은 힘을 주어 단숨에 쑤셔 넣었다 . 헉. 수현이 숨을 삼키며 몸을 바

들바들 떨고 팔등에 이마를 묻고 어쩔 줄 몰라 한다. 하, 씨발. 호범은 이를 꽉 물고 숨을

골랐다. 여태 많은 섹스를 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 구멍에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정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현은 울먹이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빼… 진짜 아파….”

그 말에 호범은 코웃음을 쳤다.

“왜 이래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꽉 넣은 채로 위아래로 문질러 주니 수현이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꼭 말아 쥔다 . 그 와

중에 자극이 왔는지 삽입을 받으면서도 자기 좆을 소파에 문지른다. 새빨갛게 변한 귀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으응….”

신음이 듣기 좋다.

호범은 그대로 좆을 반 이상 빼냈다. 물고 있던 살들이 딸려 나오는 느낌이 생생하다. 자

신의 좆이 백수현의 엉덩이에 박혀 있다는 게 실감 난다. 빼기 무섭게 거칠게 들이박으

니 백수현이 자지러지며 몸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퍽, 퍽, 퍽,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자

수현이 기겁을 하고 왼팔을 뒤로 뻗어 호범을 밀어낸다.

“아, 잠깐, 너무, 빨, 아!”

“알았으니, 후, 기분 잡치지 말고, 입 좀, 다물어.”

아프다고 울면서 자꾸 도망가려 하기에 호범은 수현의 어깨 안쪽으로 팔을 감아 꽉 압박

하고 허리만 미친 듯이 움직여 박아 댔다. 살 부딪치는 소리와 백수현이 지르는 비명인

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호텔방을 가득 메웠다. 사정감이 몰려오기 시작한 호범은 속도

를 더 높이며 소파에 파묻고 있던 수현의 얼굴을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돌리게 했다.

물고 빨지 않겠다는 말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붉어진 수현의 귀를 인정사정없이 물어

뜯고 눈물로 얼룩진 뺨을 혀로 핥자 백수현이 나중엔 입술을 찾으려 혀를 내민다. 호범


은 입술 대신 손가락으로 그 안을 쑤셨다. 그러자 수현은 혀를 움직여 마치 오럴을 하듯

손가락을 핥는다.

호범은 손끝으로 백수현의 혀와 볼 안쪽 점막을 문질렀다. 구멍 안을 손으로 만지면 이

런 느낌이려나. 좁고, 축축하고, 따뜻하고. 그대로 이를 세워 백수현의 턱을 깨무는데 백

수현이 손가락을 문 채로 눈을 내리깔고 파르르 떨며 사정한다.

동시에 구멍이 조여들며 호범의 성기를 꽉 물어 조인다. 큭. 백수현의 엉덩이가 납작하

게 눌릴 정도로 힘주어 누르자 안에서 정액이 왈칵 쏟아진다. 백수현이 아랫입술을 깨물

며 허벅지를 오므린다. 축축하게 젖어 있던 백수현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눈동자가 뒤쪽

으로 움직였다.

호범이 손가락을 빼내자 수현은 타액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좋았어…?”

씨발, 첫마디가. 호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귓가에 대고, 예, 씨발. 좋아 죽을 뻔했

어요. 수현이 형. 하고 농담을 하자 수현이 기운 없이 웃는다.

“나도 좋았어… 형….”

형? 호범은 의아한 얼굴로 백수현을 내려다봤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수현은 잠꼬대

하는 사람처럼 계속 웅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좆을 쑥 빼자 구멍에서 정액이 주르

르 흘러내린다. 볼기 주변이 빨갛다. 괜히 갈증이 인다. 일어나 빈 잔에 술을 채우는 와중

에도 백수현의 잠꼬대는 이어졌다.

“그래도 이 자세는 싫어. 아프다고 했잖아….”

호범은 술병을 내려놓고 백수현을 돌아봤다.

“근데 아줌마 아저씨… 깼으면… 어쩌지… . 그러면… 안 되는데… . 내일 학교 갈 때… 나

시내에….”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며 검은 눈동자가 사라졌다. 동시에 호범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방금 백수현이 누구에게 말을 한 건지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데… . 정작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엎드린 채 잠이 들었는지 미동조차 않는다.


지퍼를 채우고, 술이 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백수현

을 바라봤다. 갈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짜증이 자리를 잡으려 한

다. 호감이 있어 한 섹스는 아니지만, 백수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줄 알고 했다는

것을 깨닫자 뭔가 자위용 도구로 이용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애초에 백수현은 좆을 원한 거고 저는 구멍이 필요했던 거니 , 기분 나쁘고 뭐고 할 필요

도 없는 일인데. 호범은 그대로 잔을 내려놓고 누워 있는 백수현을 두고 욕실로 걸어가

며 셔츠를 벗었다.

“씨발.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네.”


27 화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수현은 상황 파악을 하느라 미동조차 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곧 누워 있는 곳이 펜트하우스의 메인 침실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

제 프런트에 구라 치고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운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어느 순간에

필름이 뚝 끊겼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속이 울렁댄다. 아아, 죽겠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

나 앉는데 허리 아래로 익숙한 통증이 몰려온다. 수현은 이불을 걷고 제 아랫도리를 살

폈다. 이제 보니 속옷과 바지가 허벅지에 걸쳐져 내려가 있다.

그리고 셔츠 앞쪽과 바지에 말라붙은 정액까지.

누가 봐도 정사 후의 흔적이었다.

“뭐야.”

혹시 취해서 혼자 자위라도 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머릿속이 새하얗다. 보통 자위

를 해도 앞을 쓰지 뒤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애널이 화끈거린다는 건 누군가 거

길 쓰긴 썼다는 거다.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

써 오전 9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그동안 이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거실로 나오던 수현은 멈

칫했다. 양호범의 사촌 형 김우영이 담배를 물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다 . 그는 휴대

전화를 보는 중이었는데 일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뭘 보는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신음

소리가 사방에 퍼졌으니까. 그걸 들으니 어젯밤 있었던 기억이 조각난 파편처럼 떠오른

다.
[네가 먼저 꼬셨다.]

낮은 저음. 뒤늦게 수현을 본 김우영이 소파에서 일어선다 . 얼핏 비친 그의 휴대전화 화

면은 살색으로 난무했다. 그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수현을 보고 웃었다.

“자주 보네?”

저음의 목소리. 설마 하는 마음으로 수현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약쟁이답게 눈 아래가

퀭하고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 아니겠지? 하면서도 지

금 옆에 있는 게 이 인간밖에 없으니 의심은 짙어진다.

김우영은 휴대전화 화면을 수현이 볼 수 있도록 돌렸다 . 누군가의 섹스 장면이었는데,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였고, 각도로 보아 몰래 찍힌 것 같았다.

“돈 있는 놈들도 다 똑같아. 암만 고고한 척해도, 젊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

어젯밤 수현이 술을 마셨던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때 준 건 해 봤어? 어때?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상급이었는데.”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우영이 일어나서 곁으로 오더니 수현의 어깨에 팔을

걸친다. 남자가 피워 대는 담배 향에 독한 스킨 향이 뒤섞였다 .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

려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면 이런 것도 있어.”

그가 재킷 안으로 손을 넣더니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은 비닐봉지에 든 것은

쌀알 크기만큼 작은 분홍색의 알약이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보이며 악당처럼 웃었다.

“ 최근에 가장 핫한 거야. 내 친구가 만든 건데, 일본 애들도 아주 환장하고 덤벼들거든.

이거 먹고 섹스하잖아. 뽕은 저리 가라야. 정말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섹스가 가능하

다니까. 물론 구멍은 너덜너덜해지겠지만.”

김우영이 키득대며 수현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 그리고 약을 얼굴에 디민다.

어때? 생각 있어? 수현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약에 손을 대면 손목을 자르

겠다고 다짐해 놓고 어제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일을 치르지 않았던가 . 약이란 게 그

렇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면역이 생겨 자꾸만 더 강한 걸 원하다 보면 어느

새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다.


“원하면 그냥 줄게. 이것도 인연인데. 대신 범이한테는 비밀.”

수현이 어깨에 둘러 있던 김우영의 팔을 걷어 냈다 . 됐어요. 괜찮아요. 옆으로 떨어지니

김우영이 약을 집어넣으며 피식 웃는다. 아쉬워라.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닌데. 수

현은 그를 힐긋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여기 있었어요?”

김우영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어제? 나는 친구들하고 질펀하게 술을 마셨

는데. 아, 다행이다. 수현은 안도했다. 그래도 저 인간하고 엮이진 않았네. 그럼 진짜 혼

자서 자위라도 한 건가. 그래. 차라리 자위가 낫지.

그 순간 김우영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어젠 범이가 있었지.”

양호범?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럴 리 없다. 어제 프런트 직원을 통해 양호범이 이

곳에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오면 비서에게 미리 연락이 온다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쳐

다보는데 김우영이 서둘러 담배를 비벼 끄고 수현의 어깨 너머로 눈짓을 한다. 돌아보는

수현의 눈이 커졌다. 양호범이 씻고 나오는지 수건 하나만 걸친 채 머리를 털고 있었다.

“일어났네요. 속은. 괜찮아요?”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예, 씨발. 좋아 죽을 뻔했어요. 수현이 형.]

수현이 입을 벌린 채 그를 보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 아니다. 그럴 리 없어. 라

고 생각은 하면서도 심증은 점점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럼 난 간다. 범아, 말한 건 여기에 뒀어.”

김우영이 테이블에 서류 봉투 하나를 가리켰고 , 수현을 향해 손으로 재킷에 있는 약을

가리키며 입으로 뭐라고 한다. 필요하면 말해. 라고 하는 것 같은데. 가벼워 보이는 그의

행동은 볼수록 김우진과 형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김우영이 사라지고 뒤를 돌던

수현은 흠칫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어느덧 양호범이 코앞까지 왔다. 얼굴에 물기를 머금

은 채.

“왜… 왜?”
“비켜야 지나가죠.”

아… 수현이 옆으로 비키니 호범이 바로 뒤에 있던 서류 봉투를 집어 든다 . 그가 봉투를

벌려 안을 확인하는 동안 수현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등에서 용이 꿈틀거리며 입에

여의주를 물고 눈깔을 희번덕거린다.

아무리 살펴도 그의 몸에서 섹스의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아닌가. 안심하는

데 그가 서류를 정리하고 나서 돌아선다 . 수현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고 호범은

서류를 책상에 툭 던졌다.

“오후에 이거 본가에 가져다줘요.”

“내가?”

“그럼. 여기 또 누가 있나.”

아…. 청소만 시키는 줄 알았더니.

“설마 청소만 시키려고 데리고 왔을까.”

속내를 귀신같이 꿰뚫더니 차 키도 하나 건네준다.

“운전은 할 줄 알죠?”

“응….”

“주차장에 차 있으니까 일할 때는 그거 사용해요.”

일반 차도 아니고 수입차다. 차 키를 보며 수현은 고민했다. 괜히 찜찜함을 남겨 두느니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있잖아. 어제 말인데….”

양호범이 덤덤한 표정이라 수현은 안도했다.

역시 너는 아니구나.

그래도 확인은 하고 넘어가야지.

“내가… 너, 아니 양 사장하고… 그러니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적절한 단어를 찾는데 양호범이 담백하게 대답한다.

“했어요, 섹스.”
수현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양호범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마치 그게 아무 일 아니

라는 것처럼. 아, 씨발. 진짜 했구나. 그게 양호범 맞구나. 차라리 김우영이 아니라서 다

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김우영하고 하는 게 나았을까.

“표정이 또, 좆같네.”

수현은 경직된 얼굴을 풀고 최대한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네가 나를,”

“그럴 리가.”

“그럼 내가…?!”

놀라서 소리를 꽥 지르니 호범의 얼굴에 잠시 싸한 기운이 감돈다. 수현은 입을 다물었

다. 술에 만취하면 간혹 옆에 있는 아무나 붙들고 섹스하자고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양

호범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현은 최대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

려고 노력했다.

“피하지… 그랬어?”

그 말에 호범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짜고짜 끌어안고 지랄발광을 하는데 무슨 수로?”

“차라리… 패지.”

“아쉬운데 지금이라도 팰까요?”

수현은 바로 말을 바꿨다.

“미안하다 진짜. 내가 술버릇이 좀 더러워.”

하. 호범의 얼굴에 짜증이 깃든다.

수현은 자신이 한 말 중 무언가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없던 일로 하자.”

“…….”

“너도 그게 좋잖아. 설마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호범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누가 봐도 하룻밤 논 건데 시건방지게 의미 어쩌고 떠드니

가소롭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슬그머니 뒤로 한 발 물러섰다 . 물론 그가 가져

다주라는 서류도 챙겨서.

호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면 피해 보상이라도 할까? 난 카드는 없고 현금은 있는데. 네가 준 거.”

“…….”

호범이 말없이 노려보길래 수현은 뒷걸음질 치는 속도를 빨리했다.

“ 정말 미안하다. 다음에 또 그러면,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만약에 그러면 그

냥 나를 죽여.”

양호범이 정말 죽일 것처럼 쳐다보길래 수현은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

“걱정은 하지 말고. 나 보기보다 입 무거워.”

“…….”

“솔직히 그렇게 기억나는 섹스도 아니었어.”

호범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 그만 가 볼

게. 위험을 감지하고 호다닥 도망치듯 문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갑자기 쾅! 하고 문짝에 무언가 날아와 부딪친다.

아 씨발. 깜짝이야!

화들짝 뒤로 물러서자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수현은 애써 인사를 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양호범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28 화

운전대를 잡은 수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하필 자빠져 자도 양호범 새끼하고 자

냐. 물론 몸뚱이가 내 취향인 거는 맞지만… . 그러나 얼굴은 아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잘생긴 건 인정하나 굳이 따져야 한다면 수현은 조금 더 곱상하게 생긴 타입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몸에 특별히 자국이 없는 걸 보아 섹스랄 것도 없었을 거다 . 놈은 성욕을 해소하느라 움

직였을 테고, 저 역시 단순히 욕정만으로 놈을 덮쳤을 테니까 . 그래, 차라리. 잊어버리자.

양호범도 더 아는 척하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운전을 하는데 아까부터 차 한 대가 따라붙는다. 처음엔 기분 탓인가 생각했다.

일부러 직진 차선에서 급히 우회전하니 똑같이 쫓아온다. 수현은 도롯가 옆에 차를 세웠

다. 뒤따라오던 검은 차가 슥, 지나친다. 혹시 몰라 차의 번호를 외우는 것 또한 잊지 않

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꼬리가 따라붙은 걸까. 갑자기 목이 탄다. 수현은 차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다가 내려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생수를 하나 사고 거스름돈을 받은 뒤 나오는데

골목 쪽으로 교복을 입은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무심코 보다 그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안경으로 가리긴 했

지만 시커먼 사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 뭐야, 쟤가 왜 저기 있어. 생수 뚜껑

을 따며 살피는데 김우진이 담배를 문다. 얼씨구. 아이 하나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

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김우진은 본가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달랐다.

김우영 뭐라고 할 게 아니네.


어이없이 웃으며 돌아서 차에 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탁탁탁,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팔이 붙들렸고, 김우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황급히 뛰어온 듯 숨

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수현은 조금 당황하여 우진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뒤를 봤다. 일행으로 보이는 친구

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너희 집 가는 길이었어. 물 사러 편의점 온 건데 여기서 마주치네.”

“잘됐네요. 저도 집에 가려던 참인데, 태워 주세요.”

“그래, 그럼.”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자 김우진이 차에 타서 벨트를 맨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과 뽀얀

피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담배 냄새. 차에 타자 그는 가방을 열었고, 손에 무언가를 발

랐다. 그리고 껌을 하나 까서는 씹는다. 그걸 보니 양호범이 생각났다.

“그거 혹시 금연 껌이야?”

아니요. 냄새 없애려고요. 형도 하나 줄까요? 라고 묻기에 수현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

다. 껌이라면 양호범 때문에 질려서 쳐다보기도 싫다. 요즘 누가 껌 씹는 것만 봐도 치가

떨린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뭐… 그럭저럭.”

“연락 기다렸는데….”

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연락처를 알려 주겠다는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 그동안 너무 바빴어.”

우진은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따가 알려 주세요.”

“응.”

본가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수현은 청소가 얼마나 힘든 노동

인지를 김우진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 와중에 우진의 형 이야기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올 뻔했다. 어린 마음에 형이 한국에 들어와서 그러고 사는 줄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

어. 그래서 그 얘긴 굳이 하지 않았다.

“아까 걔들은 친구야?”

“네.”

“친해?”

김우진이 쳐다본다.

무슨 의도로 묻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친구 잘 골라서 사귀어. 네 나이 때 친구 잘못 만나 인생 망

친 애들 여럿 봤다. 그만큼 옆에 있는 사람도 중요해.”

말해 놓고도 꼰대 같은 발언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명심

할게요. 이렇게 보니 한 마리 순한 양이 따로 없다 . 차를 몰고 양 회장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 수현은 주차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고가의 수입차를 여러 대 발견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김우진이 한마디 한다.

“할아버지가 취미로 모으시는 것들이에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흔이 넘은 노인네가 취미로 저런 걸. 구경하는 사이 가드가

다가왔다. 그는 우진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수현에게 따라오라며 지시를 내렸다. 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옥은 처음 모습 그대로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 또한 계절을 비

껴간 듯 여전히 푸르렀다.

저 멀리 직원 하나가 다가온다. 수현은 그를 단숨에 알아봤다. 양호범에게 얻어터진 날

자신이 머리를 깨트렸던 바로 그 남자다 . 남자는 수현의 인사에도 딱딱한 표정이었다 .

은근 뒤끝이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따라 노인의 방 앞에 당도하자 수현은 살짝 긴장이 됐다 . 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

인이 보료에 앉아서 긴 담뱃대를 이용해 담배를 태우고 있다 . 한복까지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마치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저기에 상투까지 틀면 딱인데. 노인의 푸른색 한복에 달린 노란 호박이 눈길을 사로잡는

다. 자리에 앉으니 문이 닫혔고 같이 들어온 직원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 자리를 김우진

이 차지했다. 우진은 다기를 들고 와 양 회장과 백수현 사이에 앉았다.

“한 달 만인가.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어르신 덕분입니다.”

수현은 들고 온 봉투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거. 양호, 아니 양 대표가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우진이 우린 차를 한 잔씩 앞에 놓아 준다. 움직임 하나

하나 부잣집 도련님의 기품이 넘쳐흘렀다. 우진이 아니라 양호범이 앉아 있었다면, 얼마

나 이죽댔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우진이 인사

를 하고 물러난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수현은 오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저희 아버지는… 찾으셨어요?”

담뱃대를 문 양 회장의 입술에 주름이 생긴다 .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고, 수현은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사람 찾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 같은데 , 어째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 찾는 데 그렇게 쩔쩔매는 걸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예전에도 그랬다. 그 인간은 귀신같이 잘도 숨었지. 덕분에 대가는

부인과 어린 아들이 치러야 했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인이 안쪽 서랍에서 무

언가를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수현에게 건넨다.

“자네 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발견했네.”

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진 속에 있는 건 자신도 잘 아는 여자다. 기억 속 모습과는

다르게 쾌활해 보이는 미소가 인상적이다.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분명 죽은 어머니였다.

“자네가 엄마를 많이 닮았어.”


수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던 엄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 이 얼굴이다. 나를 보면서 도망치라고, 부디 살아 달라고 애원

하던. 눈시울이 뜨거워져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넣어 둬. 내가 자네 아버지를 잡아 죽이면, 그땐 어쩌려고 그러나.”

수현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얘긴 이미 끝난 거니 마음대로 하세요. 저한테는 죽고 없는 사람입니다.”

노인이 묘한 표정으로 찻잔을 집어 든다.

“그래. 부모도 자식을 버리는 세상이야. 자식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지. 나는 천륜이라

는 말이 참 싫어. 나를 괴롭게 하면 그게 어디 가족인가. 원수지. 끊어 낼 수 있는 건 끊어

내야 해. 비록 그게 내 혈육이라도.”

보통 노인네들이 그래도 부모인데, 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양 회장은 버려야 한다면 부

모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궁금하다. 양호범이 그의 기대를 저버

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그 의견에 변함이 없을런지 . 물론 양호범이 돈 많고 권력 짱짱

한 할아버지를 등질 일은 없겠지만.

“ 나는 가족이 별거라고 생각하지 않네. 배 아파 낳아 주고, 키워 주고 그런 것보다 이렇

게 인연 닿아 만나면 그거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말일세. 그러니 여기 일하는

모든 사람이 나한테는 가족이야. 나를 위해 일하고, 먹여 살리고 있으니.”

노인의 눈빛에서 그 말만은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니 자네도 나하고 가족이 되지 말란 법 있는가.”

수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보일 듯 말 듯 미소만 지을 뿐. 노인의 말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지할 곳이 생긴 건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 물론, 그건 자

신이 눈 밖에 나지 않고 잘 지낼 때의 얘기겠지만. 아버지를 찾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그

건 아직 모른다.

노인과 한참 대화를 나눈 뒤 수현은 밖으로 나왔다 . 그런데 마루 끝에 김우진이 앉아 있

다. 신발을 신고 있으니 우진이 일어나서 다가온다.

“이제 가는 거예요?”
“응.”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은근히 끈질긴 구석이 있다. 우진이 휴대전화를 주길래 거기에 제 번호를 입력하고 돌려

주자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치밀함까지 드러낸다. 왜 그 모습에서 양호범이 겹쳤을까.

“자주 연락해도 돼요?”

“그래. 상관없어.”

“호텔 근처에 찾아가도 되고?”

음. 수현은 생각했다. 왔다가 괜히 자기 형이라도 마주치면 그건 곤란하지 않은가 . 수현

이 쉽게 대답하지 않자 우진이 조금 서운한 표정을 한다.

“아무래도 좀 그렇겠죠?”

“ 바로 앞은 그렇고, 좀 떨어진 데서 만나자. 괜히 양 사장 보면 내가 너 꼬드겼다고 난리

친다.”

“꼬드겨요?”

“ 표현이 좀 그런가. 근데 너도 알잖아? 너희 사촌 형이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러니

나하고 있으면 득 될 거 없단 얘기야.”

우진은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수현은 웃고 나서 그에게 나중에 보자며 인사를 하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기어코 주차장까지 따라와서는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

를 지킨다.

문득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적 학교 가는 내내 언덕에서 지켜보던. 양 회장에게 받은 사

진을 꺼냈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수현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29 화

“ 주민등록은 말소됐다가 최근에 정정 신청을 한 모양입니다 . 양호범 집에 어떤 연유로

들어갔는지는 아직 모르겠고, 지금은 유한 호텔에서 직원으로 있습니다.”

“…….”

서민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말없이 쳐다봤다. 설마 했다. 경찰서에 양호범이 다녀갔고,

무슨 일인가 알아보던 와중에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왔다 . 그날 양호범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키가 컸고, 모자를 뒤집어써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

는데, 그게 백수현이었다니.

그는 종이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토해 냈다.

“검사님?”

“유한 호텔이라고 했죠?”

“예. 거기 객실관리팀에서 일한다고 하는데, 정식 직원은 아니고, 특별 채용이라나 뭐라

나.”

“알겠습니다. 혹시 다른 거 나오면 알려 주세요.”

예. 남자가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린다. 그가 사라진 뒤 서민준은 차를 몰아 서울 중심가

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있는 그곳은 몇 년 전 인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꽤 많이 터진 곳이었다.

얼마 전엔 위층에서 직원 하나가 죽었는데 병원에서는 낙상으로 인한 사고사로 처리됐

고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유가족의 뜻에 따라 화장이 끝난 상태였다. 맞은편에서 날아


온 총알에 직원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증거들이 모두 사라져 확인할 길이 없었

다.

그게 사실이라면 민준은 총을 쏜 놈을 붙잡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냐고 멱살을 잡고

싶었다. 죽이려면 양호범 그 새끼를 죽였어야지.

호텔이 가까워질수록 민준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그는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무턱대고 찾아오긴 하였으나 저

답지 않은 일 처리다. 이곳에 와 확인한들 뭐가 달라질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시동을 거

는데 저 멀리 누군가 걸어온다.

가까워질수록 그가 백수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 열여섯 살 때보다 키가 컸으나

눈길을 사로잡는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백수현이

차로 가서 시동을 켠다. 곧 백수현이 탄 흰색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서민준은 고민할 새도 없이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차를 운전하고 가는 내내 별생각이

다 든다. 왜 하필, 왜 지금, 백수현이 양호범과 엮인 걸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면서 양호범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도 선물 하나 줄 것 있는데.]

[기대하시라고. 존나 마음에 들 테니.]

서민준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아니겠지. 설마….

순간 흰색 차가 갑자기 직진 차선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간다. 서둘러 따라가다 신호를

위반했다. 그런데 갑자기 도롯가에 멈춘다. 민준은 혹시 들킬까 염려되어 백수현을 지나

쳤다.

눈치를 챈 걸까. 어릴 적에도 여러모로 예민했던 아이다.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백수현의 움직임을 살폈다. 잠시 후 백수현이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간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와 차에 올라탄다. 그대

로 유턴하길래 서민준 또한 황급히 차를 돌려 쫓았다.

하지만 신호가 바뀌며 간발의 차로 놓쳤고, 백수현은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멀어졌다.

빌어먹을.
민준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숨을 골랐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형. 형. 나는 형이 좋아. 정말… 좋아해.

이를 까득 물고 읊조렸다.

“아니야. 안 돼. 지금 나타나선 안 됐어.”

❖❖❖

수현은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을 살펴봤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풀은 키만큼 자라

있었고, 마당에는 작은 손수레에 잡동사니 고물이 한가득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시

커먼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아래에서 니야, 소리를 내며 침입자를 경계한다. 도저히

사람이 사는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고.”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낯선 남자가 서 있다. 낡고 더러워진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엔 비

닐봉지를 들고서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남자의 더러워진 옷을 따라 내려가다 잘린 왼

손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눈데 너메 집서 알짱대노.”

수현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집은 어떻게 찾아왔는데 워낙 어릴 때 기억이라

남자가 맞는지는 확신을 못 하겠다.

“혹시, 동….”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수현이 침을 꿀

꺽 삼켰다. 혹여 남자가 저를 공격하면 반격할 태세로. 그런데 다가온 남자가 뜻밖에도

수현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게 누꼬!”
남자의 눈에 놀라움이 번진다.

“니 수현이제? 광무 아들 백수현이!”

백광무의 아들인 자신을 남자가 기억해 냈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수현의 머리

부터 발끝까지 훑고 나서 되돌아왔다. 수현은 어색하게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딱 보이 느그 어매네. 순정이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우째 이래 똑같노.”

타인을 통해 듣는 엄마의 이름이 생소하다. 그래, 우리 엄마는 이름이 김순정이었지. 남

자는 한참 동안 아이고야, 세상에, 탄식만 했다. 어디에서 뭘 하고 사느냐고 여태 소식도

없다가 이제 나타났냐고.

“너거 아버지는 니 죽어삔 줄 알끼다. 이래 멀쩡한 줄도 모르고 마 미칭개이처럼 찾아댕

깄다 아이가.”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놓고서 왜.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게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남자는 마루로 수현을 이끌었다.

“여 앉아라.”

수현을 앉혀 놓고 남자가 낡은 소반을 펼친다 . 손님이 왔는데 내 줄 건 없고… . 그리고 조

금 전 들고 있던 봉지에서 막걸리를 꺼내 올려놓고 낡은 고물 냉장고를 열어 쉰 김치와

사발 두 개를 가져온다.

“그동안 우째 지냈노.”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 아버지 때문에 잡혀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남자가 사발에 막걸리를 채우고, 단숨에 들이켜더니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는다. 혼자 멀

뚱멀뚱 있기 민망하여 수현은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김치를 집었다.

그러자 남자가 껄껄대고 웃는다.

“니 얼라 때부터 저까치짓 모하는 거는 똑같네.”

남자는 수현의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는 형제 같은 사이였는데,

그나마 아버지가 어울리는 인간 중 가장 멀쩡했다 . 종종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대신해


쌀이며 먹을거리를 사다 놓아 주고 가기도 했고 , 수현이 맞고 온 날은 학교에 대신 찾아

가 따져 주기도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손가락이 잘려 돌아왔고, 남자도 한참을 보이지

않다가 왼손이 잘려 나타났다.

어린 마음에도 둘이 같은 날 누군가에게 손이 잘려 나간 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혹시… 아버지하고는 따로 연락하세요?”

남자가 다 마신 사발을 바닥에 탁탁, 털고 나서 인상을 쓰고 고개를 내젓는다.

“은지. 마카 다 연락 끊킨지 하매 억쑤로 됐다.”

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오면 소식을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온 건데.

한편으로는 그를 통해 자신의 소식이 아버지에게 흘러 들어가길 원했다. 자식이 살아 있

다는 걸 알면 얼굴은 한번 내비치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 후 일은 내 알 바 아니다. 맞아 죽든 말든. 나는 약속한 돈만 받으면 이곳을 떠날

테니까. 물론 그건 양 회장이 약속을 지킨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남자는 혼

자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남자는 백광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수년 전이라고 했다. 무슨 사업을 한다고 같이 하자

며 찾아왔더라고.

“너거 아버지 그 뱅이다, 뱅. 평생 가도 몬 고친다. 콱 뒈져 뿌리믄 고치겠지.”

살아는 있을까요? 수현은 차마 묻지 못했다. 남자의 푸념을 듣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꽤

흘러갔다. 수현은 지갑에서 현금을 넉넉하게 꺼내 남자의 옆에 놓아뒀다. 술 취한 남자

가 손을 내젓는다.

“어데. 치아라. 내 니한테 먼 면목으로 돈을 받노.”

“받으세요. 술은 좀 끊으시고요.”

“아… 됐다.”

수현은 미리 적어 둔 메모를 챙겨 남자에게 건넸다.

“아버지한테 연락 오면 전해 주세요. 제 연락처예요.”


남자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종이를 멀리하여 보더니 숫자를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

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그렇게 하께.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남자가 따라 일어

선다. 취기가 올랐는지 몸이 휘청인다. 그러면서 그는 기어코 돈을 돌려준다.

“수현아. 밥 굶지 말고 댕기래이. 나쁜 짓 하지 마래이.”

웃음이 났다. 평생을 나쁜 짓을 해 온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쓰게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나서는데 이미 해가 넘어가는 중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뺨을 훑고

지나갔다. 차 있는 곳까지 내려와 시동을 거는데 전화가 온다. 발신자가 양호범이다.

당분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지금.

쯧, 혀를 차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뭐 해요?]

목소리가 태연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잠깐… 누구 만나러 왔어.”

혹시 어딘가에서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주소 찍어 줄 테니까 이리 와요.]

“어?”

[술 먹어서 운전 못 해요.]

수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리 불러.”

대답이 없길래 보니 벌써 끊겼다. 무섭게 노려보던 얼굴이 생각나 잠깐 오한이 난다. 수

현은 욕을 한 뒤 담배를 빼 물었다. 바람에 겨울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독 시뻘겋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30 화

호텔에 차를 세워 두고 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클럽이었다 . 회원제로 운영

하는 클럽은 1 층과 2 층으로 나뉘었는데 직원의 안내를 받아 1 층으로 들어가니 바를 중

심으로 안쪽에는 직원들이 바깥에는 손님들이 앉아 대화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몇몇 여자가 수현을 훑으며 눈인사를 보낸다. 한눈에 봐도 꽤 미인들이다. 그

들을 지나쳐 2 층으로 올라가는데 곳곳에 화려한 그림들이 눈에 띈다. 양호범의 집에서

본 것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다. 같은 작가일까.

당도한 곳은 커다란 문 앞이었다. 포효하는 호랑이 모양의 문고리가 인상적인 . 그리고

그 옆으로 건장한 가드 둘이 지키고 서 있다 . 그들이 수현의 몸을 수색하려고 하자 데리

고 온 직원이 뭐라고 속삭인다.

몸수색 대신 바로 문이 열린다. 안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천장엔 풍선이 가득했고 테

이블엔 값비싼 양주와 샴페인이 있었으며 한쪽에 마련된 작은 풀장에서는 몸 좋은 남녀

들이 수영복만 입은 채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테이블 가운데 먹다 만 케이크가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의 생일인 듯했다.

수현의 등장으로 어수선하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때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여기까지 왔네.”

돌아보는 수현의 어깨 위로 팔 하나가 걸쳐진다 . 김우영이다. 그는 담배를 물고 술 냄새

를 폴폴 풍겼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이제 청소는 관두고 운전하는 거야?”


수현이 애써 웃었다. 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양호범이 없다.

“호범이 잠깐 통화하러 갔어. 기다려.”

때마침 어깨와 몸매가 드러나는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담배를 물고 샴페인을 들고 앞

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눈웃음을 쳤다.

“뉴페네? 나도 소개해 줘.”

“아, 여긴 박수현.”

백이라고 정정해 줄까 하다 관뒀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자신이 백수현이든 천수현이든

별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여자가 은근히 추파를 보내면서 나이를 묻는다. 수현이 스

물여덟이라고 대답하자 정말 그 나이가 맞냐고 놀란다.

“피부 봐. 완전 뽀얗다. 샵 어디 다녀요?”

샵은 무슨. 얼굴도 비누로 닦는데.

“근데 왜 낯이 익지?”

근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던 수현은 눈이 커졌다. 샛노란 머리에 화

려한 셔츠를 입고 담배를 문 남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다 . 파티에서 그날 밤 본 남자. 양

호범에게 칼을 맞았던 이영준. 놀라서 쳐다보는데 남자가 눈꼬리에 힘을 준다.

“흔한 얼굴은 아닌데.”

“그지. 흔한 얼굴은 아니지? 영준아. 너희 형 기획사에 남는 자리 있으면 하나 꽂아 줘라.

얼굴이 반반해서 꽤 먹힐 거 같지 않냐.”

“남녀 가리지 않고 좋아할 얼굴이긴 하네요.”

이영준의 눈빛에서 잠시 그날 밤 느꼈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수현은 찝찝한 마음을

감추고 애써 웃었다. 그때 안쪽에서 양호범이 나타난다. 그가 소파에 있던 재킷을 집어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가게?”

“어.”

“너무했다. 주인공이 빠지는 게 어딨어.”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진다. 기껏 왔는데 이러기냐, 일은 너 혼자 다 하는 거냐. 아, 뒤

늦게 수현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 양호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던 반쯤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 됐지? 하고 입만 웃고 나서 미련 없이 돌

아선다.

김우영이 급하게 직원에게 손짓을 하고 양호범의 뒤를 따른다.

수현도 그 뒤를 쫓아서 걸었다.

“인마. 형이 널 위해서 기껏 준비한 파틴데.”

“그래서 왔잖아.”

“왔으면 놀아야지. 젊은 나이에 그렇게 일에 파묻혀 살면 누가 알아주냐 . 막말로 재산은

어차피 다 네 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해. 나 같으면 앉아서 놀고먹겠다.”

그 말에 호범이 피식 웃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두고 보긴. 이미 기정사실 아니냐.”

그러자 호범이 걸음을 멈추고 우영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어딘가 싸하다. 우영은 영

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호범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모도 같은 생각이실까?”

김우영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또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바뀐다.

“야, 어머니는 원래 성격이 그렇잖아. 워낙 욕심도 많고. 너 저번에 그것 때문에 아직도

우리 어머니 미워하는 거 아니지? 뭐 내가 이런 얘기 한다고 네가 기분이 풀릴 것 같지는

않지만,”

김우영은 양호범을 따라가며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사촌지간에 그것도 손윗사람이 저렇

게까지 비위를 맞추나 싶을 만큼 김우영은 양호범에게 늘 저자세였다 . 똑같은 손주인데

왜…. 양호범이 친손주라?

그건 김우진의 말 속에서도 이미 느낀 바 있다.

[할아버지는 호범이 형이 사람을 죽여도 감싸 주실 분이세요.]


그건 양호범을 바라보던 노인의 애정 어린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성격이 저렇게 삐뚤

어진 데는 너무 오냐오냐해서 키운 탓도 한몫했으리라.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주

차장으로 내려왔는데 뒤따라온 직원이 양손으로 쇼핑백을 가득 들고 따라온다.

그때 양호범이 수현을 부른다.

“받아요.”

정신을 차리자 키가 휙 날아왔다. 잡아채고 보니 그가 눈짓으로 문을 가리킨다. 수현은

억지로 웃으며 뒷문을 열었다. 알아서 타지. 개새끼. 양호범이 탔고, 김우영은 직원과 함

께 차 트렁크에 선물을 실었다.

탁, 트렁크 문을 닫고 난 뒤 김우영은 수현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오늘 술 좀 마셨으니까 괜히 성질 건드리지 말고. 라는 이야기는 작게 귓속말로 일러 줬

다. 알겠다고 대답한 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대리운전으로 여러 종류의 차를 몰

아 본 덕분에 차를 다루는 일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능숙하게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 입구 쪽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

온다. 끽, 수현이 브레이크를 밟았고, 뒤에서 양호범이 씨발, 이라고 욕을 하는 소리가 작

게 들렸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여자는 짧은 원피스에 어깨에 재킷을 걸치고 한 손에는 번쩍이는 클

러치백을 들고 차로 뛰어왔다. 뭐야, 왜 저래.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뒷문을 덜컥 잡아

당긴다. 문이 열리지 않자 똑똑, 노크하고 다시 문을 잡아당기길래 수현은 호범을 바라

봤다.

아는 사람인가.

거울 속으로 보이는 양호범의 눈빛이 서늘하다.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야.

“열어 줘요.”

탁, 문을 열어 주자 여자가 뒷자리에 올라탄다. 진한 향수 냄새가 여자와 함께 안으로 밀

려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양호범이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주차


장을 나오면서 수현은 룸미러로 뒤를 흘깃 봤다. 여자가 호범의 몸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

“오빠. 왜 그냥 가? 오늘 나하고 있자니까.”

애교 섞인 목소리. 거울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여느 배우 뺨치게 아름다웠다 . 신호를 받

아 기다리는데 여자가 호범의 입술을 훔친다. 양호범은 딱히 여자를 밀어내거나 거절하

지 않았다. 수현은 되도록 뒤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운전에만 신경을 집중하는데 지이익, 하고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린다.

그게 무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호가 멈췄고 잠시 대기하는 동안 룸미러

로 양호범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춥, 춥 무언가를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속에서 양호범의 눈빛은 여전히 수현을 매섭게 쏘아보는 중이었다 . 대리운전할 때

가끔 뒤에서 별짓 다 하는 인간들을 많이 보았는데도 지금 광경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

다. 놈이 여자와 관계를 하는 걸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배신감도 조금 느꼈

고.

사실 배신감이란 표현도 우스웠다. 그것은 서로에게 믿음이 있는 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

는 감정 아닌가. 언제부터 저 인간하고 나 사이에 믿음이 있었다고.

신호가 바뀌고 차를 몰아가는 와중에도 애정 행각은 계속됐다. 여자의 가슴을 풀어 헤치

고 양호범은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이 치마 사이로 들어가자 여자는 고개를 젖

히며 신음을 흘렸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포르노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무엇 때문인지 수현은 손에 땀이 차고 속이 갑갑해졌다. 그렇게 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으

로 들어가자 양호범이 여자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다 . 입술이 침으로 번들거렸고 단정하

던 머리도 헝클어졌다. 난봉꾼 같은 모습으로 앞을 보며 피식 웃더니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벌어진 셔츠를 대충 채운다.

“문 안 열어 줘요?”
호범의 말에 수현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 뒷문을 열었다. 양호범이 나오고 여자가

이어서 한껏 말려 올라간 치마를 내리며 나온다 . 호범은 립스틱이 번진 여자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잘 가.”

여자의 눈이 커다래진다.

“뭐야? 여기서 그냥 가라고?”

“응.”

여자가 따질 것처럼 씩씩대더니 입을 다물고 토라진 표정을 한다. 양호범은 재킷을 들고

돌아서다가, 아,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돌아왔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

고 거기에서 수표 여러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수현에게 내밀었다. 수현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셔츠 앞주머니에 수표를 끼워 준다. 마치 팁을 주듯.

“오늘 수고했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 양호범이 돌아서서 간다. 흰 셔

츠와 목에 번진 붉은색 립스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여자는 금세 포기했는지 신경질을

내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양호범 개새끼 어쩌고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야에

서 사라진다.

수현은 주머니에서 양호범이 주고 간 수표를 꺼냈다 . 백만 원짜리. 팁치곤 과하네. 그걸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차에 올라탔다. 기분이 이상하다. 조금 전 양호범이 앉아 있던 뒷

좌석을 노려봤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기분이 나쁘다? 아니, 더럽다?

양호범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노린 거라면 제대로 해냈다.

기분이 존나 더러워졌으니까.
31 화

호텔로 돌아온 수현은 씻은 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댔다. 오랜만에 채팅 앱을

켜고 하룻밤 보낼 만한 사람이 있을까 찾는 중이었다 . 대화명을 입력하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토끼라고 입력하고 키와 체중을 적은 뒤 얼굴이 반만 나온 사진을 올려놨다.

그랬더니 쉴 새 없이 1:1 대화 신청이 들어온다.

씻고 나온 이윤철은 머리를 말리며 수현을 불렀다.

“저녁 먹었어?”

“네. 먹었어요.”

“오늘 대표님 심부름 다녀왔다더니, 낯빛이 안 좋네.”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피곤해서요.”

“앞에 나가서 한잔할래?”

“다음에요.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매니저의 장점은 치고 빠질 때를 안다는 거다 . 그는 더는 말을 붙이지 않고, 휴대전화로

인터넷 방송을 시청했다. 그의 취미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데 ,

가끔 후원한다고 돈을 보내기도 하는 것 같았다 . 수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수현은 휴대전화 키패드 위에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스물다섯이에요.]
연하는 취향이 아니라 채팅창을 나왔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말을 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법 말이 통한다. 어디냐고 물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수현은 입술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체온이 느끼고 싶다. 추워지면 외로움도 심해져 일회성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잦아졌다.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어릴 적 알고 지낸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고 와서부터

였는지, 양호범의 유사 섹스를 관람하고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보내줄 수 있어요?]

바로 사진 한 장이 날아온다. 웃통을 다 까고 근육질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찍은 모양새가

부담스럽다. 몸뚱이는 양호범이 더 낫네. 라고 생각하다가 인상을 썼다. 미쳤어? 왜 그

새끼하고 비교를 해.

아무리 봐도 취향이 아니라 나와서 새로운 상대를 물색했다. 그러다 한 사람을 알게 됐

다. 사진을 보내 달라는 말에 그는 눈 아래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 슈트를 입고, 입술이

도톰하고 예뻤으며 턱은 적당히 각이 졌다.

어차피 한 번이지만, 그래도 취향에 맞는 사람과 보내고 싶었다.

[만날래요?]

남자가 바로 응답이 온다.

[삽입가능?]

수현은 인상을 썼다.

양호범이 건드려 놔서 아직도 화끈거리고 아프다.

그 큰 걸로 쑤셨으니 아플 만도 하지.

[불가]

대답이 없다. 포기하나 싶어 나가려고 하는데 남자가 붙잡는다.

[어디서 볼까요?]

수현은 장소를 정하고 나서 채팅창을 닫았다. 일어나서 옷장을 뒤지니 매니저가 쳐다본

다.

“어디 가?”
“약속이요. 친구 만나려고.”

“여자?”

수현은 대답 대신 웃었다. 외투를 걸쳐 입고 호텔 밖으로 나오는데 바람이 차다 .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승차장 앞에서 기

다리는데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와서 선다. 선팅이 진하지 않아 사진 속 남자라는 것을 대

충 알아봤다. 아니나 달라 보조석 창이 열리면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토끼?”

아무 생각 없이 대화명을 토끼라고 했더니… . 수현은 차 문을 열고 탔다. 자연스럽게 벨

트를 매는 동안 남자가 수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30 대

중반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러고 쳐다보세요?”

“생각보다 기대 이상이라서.”

그래도 할 말은 다 한다. 그쪽도 나쁘지 않다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웃었다 . 깨끗한 피부

에 보조개가 있었고 깔끔한 회사원 느낌이었다.

“밥은 먹었어?”

남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이좋게 밥 먹을 사이는 아닌 거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가요. 샤워도 하고 왔는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화끈해서 좋네. 둘을 태운 승용차가 출발한다. 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여 어느 호텔 앞에 멈췄다. 주차하고 로비로 올라온 뒤에 수현이 체

크인하러 프런트로 갔다. 남자가 뒤쫓아 와 자기가 내겠다고 우기는 걸 한사코 마다했

다. 수현은 직원에게 당당히 양호범의 카드를 내밀었다. 이번엔 누가 잡으러 오진 않겠

지.

카드를 긁고 나서 영수증을 챙기는데 남자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예, 부장님 어쩌고 하

는 거 보니 회사 상사인가 보다. 예상보다 통화가 길어진다. 수현은 먼저 올라간다고 손

짓을 하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이 수현을 흘깃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8 층으로 가 방을 찾았다. 카드 키를 대니 문이 열린다. 입구에 키를 꽂

아 넣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아늑한 크기의 룸이고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다 . 수현은

습관적으로 바닥을 먼저 살폈다. 자신이 일하는 호텔에 비해 청소 상태가 별로다.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들어오자마자 청소를 점검하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이

런 게 바로 직업 정신인가. 수현은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하나 꺼냈다. 따개를 젖히고 입

으로 가져가 반 이상을 비웠다. 남자가 늦어진다. 혹시 도망간 건가. 그때 누군가 벨을 누

른다.

문을 열어 주자 남자가 조금은 상기되어 있는 얼굴로 웃는다.

“뛰어왔어요?”

“오래 기다리게 하면, 마음 바뀔까 봐.”

“내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뻔뻔스러운 말에도 남자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서른 중반이나 됐는데

도 꽤 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 하루뿐이겠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다짜고짜 수현에게 입술을 들이민다 .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밀고 들어왔

다. 남자는 수현의 셔츠를 잡아 뜯듯 성급히 풀기 시작했고 , 수현은 남자의 가슴팍을 슬

그머니 밀어냈다.

“성격 급하네.”

“아까, 차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못 참겠더라. 남자는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가 수현의 가슴을 빨았다 . 젖꼭지를 깨물고

혀로 핥아 주는 게 능숙하다. 이래서 나이 많은 놈이 좋다니까. 뭘 해도 평타는 치잖아.

으음, 신음을 삼키는데 남자가 수현을 데리고 침대로 가더니 눕힌다.

그러고 나서 수현의 바지와 속옷을 벗긴다. 수현은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보며 아랫입

술을 깨물었다. 좆을 꺼내 핥던 남자가 눈만 들어 위를 본다 . 왜 갑자기 양호범 얼굴이 겹

쳤을까. 그의 좆을 물고 빨아 주던 그때가.

“씨발….”

갑자기 욕을 하니 남자가 멈칫하고 수현을 본다.


“하, 하지 마?”

보기보다 소심하다. 수현은 애써 미소를 띤 채 계속하라고 손짓을 했다. 남자는 수현의

좆을 입에 물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키스만큼이나 오럴도 제법이다. 사정감이 몰려

와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위로 잡아당겼다. 남자가 흥분한 얼굴로 올라와 수현에게 키스

한다.

수현이 다리를 벌려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남자가 급하게 바지를 풀고 엉덩이까지 내려

좆을 꺼낸다. 삽입 대신 남자는 제 좆을 수현의 좆에 대고 문질렀다 . 두 개의 좆이 문질러

지며 질척대는 소리가 났다.

헉, 헉,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수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예, 씨발. 좋아 죽을 뻔했어요. 수현이 형.]

아아, 씨발, 왜 자꾸 떠오르고 지랄이야. 몰입하는 데 방해되게. 애써 지우려 할수록 그

얼굴이 선명해진다. 여자를 만지며 저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 입에 묻은 립스틱을 지

우며 가소롭다는 듯 웃던 얼굴. 아아, 개새끼. 저리 가. 저리 가, 이 씨발 놈아!

“꺼져, 씨발!”

소리를 빽 지르니 남자가 흠칫 놀라 허리 짓을 멈춘다 . 수현은 남자의 가슴을 떠밀고 자

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남자가 눈이 커져서는 수현의 안색을 살핀다 .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선 사정하지 못한 성기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갑자기, 왜…?”

“미안. 내가 오늘 도저히 할 기분이 아니라….”

남자가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바지를 추켜 입으려니 남자가 머

뭇머뭇한다. 보기보다 순하다. 여느 성질 고약한 놈 같으면 장난하느냐고 행패를 부리거

나 욕을 하든가 심하면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얼굴이라도 빌려주면 안 돼?”

처음엔 입을 빌려 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고민하던 수현이 승낙하자

마자 남자가 수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수현의 고개를 들게 한다 . 수현이 눈을 치

켜뜨고 쳐다보자 남자가 아랫입술을 빨며 욕망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너도 네가 예쁜 거 알지?”

보답이라도 하듯 예쁘게 웃자 남자가 좆을 문지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 아아, 아아, 남자

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숙였다 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더니 이내 수현의 얼

굴에 정액을 뿌린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휴지를 뽑아 수현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 준 뒤 쪽, 입을 맞췄다. 비릿한 밤꽃 향이 올라왔다. 익숙한 냄새지만 오늘따라 그

향마저 싫었다.
32 화

“직장이 이 근처야?”

남자가 물었고, 수현은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돈까지 낸 게 아쉬워 호텔에서

잤는데, 남자는 약속한 대로 수현에게 더는 섹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 대신 둘은 술을 마

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남자는 이런 만남이 처음이라며, 애인과 헤어지고 홧김에 나온 거라고, 사실 너하고 할

때 잠시지만 애인 생각을 했다고 양심 고백을 했다 . 수현은 그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왜 양호범이 내 애인도 아닌데 그 새끼 얼굴을 떠올렸을까, 의문을 품으면서.

아무튼 그렇게 술을 마시고 일어난 뒤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국밥으로 끼니를 때웠

다. 남자는 세심한 성격이었다. 붙어 있는 내내 수현을 배려했고, 말도 다정하게 했으니

까. 그래서 잠깐이지만 조금 더 연락하고 지내 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는 사이 수현을 태운 남자의 차가 호텔 근처에 멈춰 섰다.

“집이 이쪽이야?”

“근처예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수현이 내리려고 안전띠를 풀자 남자가 수현의 팔을 붙든다.

“연락해도 돼?”

조심스럽게 묻는 말투.

애인과 4 년을 사귀었으면 사람을 쉽게 만나는 타입은 아닐 것이다.

만약 만나게 되면 남자는 진지한 관계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즐거웠어요. 잘 가요.”
남자의 얼굴에 실망감이 내비쳐진다. 손을 떼어 내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잘 가.

혹시 필요하면 연락해. 기다릴게. 마지막까지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수현은 손

을 흔들고 차에서 내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출발하고 난 뒤 수현은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바람이 차서 코끝이 시리다. 담배

를 물고 외투를 여몄다. 멀어지는 차를 보다 돌아서는데 호텔 정문 앞에 누군가 서서 이

쪽을 보고 있다. 순간 걸음이 멈췄다.

양호범이 아침부터 왜 저기에. 그 옆으로는 윤 실장과 박태준도 함께다. 수현은 태연한

척 그쪽으로 걸어갔다. 양호범이 돌아서더니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 빌어먹을. 당분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는데, 하필 오늘 호텔에 나올 건 뭐람.

그러다 수현은 어젯밤 김우영이 차 트렁크에 실어 둔 양호범의 생일 선물을 떠올렸다.

“맞다. 그것도 가져다줘야 하지.”

호텔 안으로 들어오는데 매니저가 와서는 수현을 툭 치고 음흉하게 웃는다.

“외박?”

수현에게서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대길래 피했더니 매니저가 한마디 더 보탠다.

“호텔서 잤구나?”

그는 결국 샴푸 종류까지 맞췄고 수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즐거웠냐고, 나중에 얼

굴이나 보여 주라는 그에게 원나잇이라고, 그것도 남자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

다. 수현은 도망치듯 지하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셔츠에 남자의 스킨 냄새가 짙게

묻어 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수현은 어제 몰았던 양호범의 차로 가서 트렁

크를 열었다. 쇼핑백을 차례대로 꺼내 바닥에 놓는데 얼핏 봐도 죄다 명품이고 값비싼

것들이다. 양손으로 들어도 버거울 정도의 양이라 누굴 하나 더 데려왔어야 했나, 후회

됐다.

그것을 낑낑 들고 펜트 층으로 올라갔는데 앞을 지키고 있던 박태준이 거들면서 도와준

다. 문을 열고 선물들을 침실로 옮겨 놓는데도 양호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다. 오늘은 최대한 놈의 눈에 띄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 순간 양호범이 드레스 룸 쪽에

서 등장한다.

그는 셔츠의 손목 단추를 채우는 중이었다.

“뭐예요?”

수현은 시선을 선물로 내렸다.

“어제, 선물.”

양호범이 쇼핑백을 흘깃 보더니, 아아, 하고 반응한다. 그러더니 아무런 대꾸가 없다. 수

현은 도망치듯 침실에서 나와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설마 종일 이곳에 있진 않겠지. 그

나마 수영장에 들어가 있으면 당장은 양호범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거다 . 물이 빠진 수영

장으로 들어가 바지를 걷고 솔로 바닥을 닦는데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길래 모두 간 줄 알았다. 안도하며 열심히 청소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양호범이 나타난다. 아까 입고 있던 흰 셔츠는 어디 가고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다. 그의 사나운 인상과 어울려 흑표범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양호범은 손에 생수를 들고서 수현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솔로 바닥을 닦던 수현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뭐가요?”

“청소하는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내가 주인인데 어디에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수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맞는 소리지. 그래도 좀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숙

이고 속으로 투덜대며 바닥을 닦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퍽, 하고 떨어진다. 꽤 큰 충격에

수현은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물이 가득 든 생수병이 데구루루 바닥을

구른다. 조금 전까지 양호범이 들고 있던 그 병이다.

머리를 움켜쥔 채 벌떡 일어나 양호범을 노려보는데 그가 하찮은 걸 본다는 눈빛이다.

“미안. 손에서 미끄러져서.”


말도 안 된다. 포물선으로 떨어져야 가능한 거리였다. 개새끼.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차

마 뱉지 못했다. 수현은 후, 이를 악물고 병을 들어 수영장 턱에 올려놨다 . 양호범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고 수현은 그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미친 새끼, 왜 또 지랄이야. 맞은 머리를 문지르고 나서 나머지 청소를 하고 물을 틀어 놓

고 밖으로 나왔는데 양호범은 어디 가고 객실관리팀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 바닥에 있는

양탄자도 다 걷어져 있고, 못 보던 세제까지 갖다 놨길래 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이 이걸로 바닥 타일 다 닦으래요. 얼룩이 심하다고….”

직원이 되레 미안해하며 웃는다.

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바닥 어디요? 직원이 아래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더러 지금

100 평 가까이 되는 이 바닥을 세제로 다 닦으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 보는데 직원이 눈

치를 살피더니 위를 가리킨다. 위에도….

“타일 닦는 기계 있지 않아요? 그거 줘요.”

“고장 났어요….”

말도 안 돼. 며칠 전에도 사용하던 걸 봤는데 그게 왜 고장이 나 .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직원이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사라진다. 수현은 어이없는 얼굴로 전화를 꺼내 들었다 .

양호범의 번호를 찾아 누르려던 손이 더는 움직이질 못한다.

따지고 보면 양호범 입장에선 내가 일방적으로 덮쳤으니 열이 받을 만도 하다 . 그래서

이렇게 치졸하게 복수하는 건가. 씨발, 그러면 장단을 맞추질 말고 차라리 패든가. 자기

도 할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왜 지랄인데.

아아, 됐다. 생각하지 말자.

수현은 욕을 하며 바닥에 앉아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종일 쭈그리고 앉아 바닥만 닦

았더니 나중엔 종아리가 땅기고 일어설 때마다 머리가 핑, 현기증이 난다. 수현은 이마

를 붙들고 그대로 카펫 위에 드러누웠다.

어우, 씨발. 더는 못 하겠다. 어깻죽지가 빠져 몸통과 분리되는 기분이다. 그러면서 눈으

로는 바닥을 훑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지만 그것이 악몽 같은 청소의 시작이 될 거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현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봤다. 매니저는 미

안한 표정으로 조금 전 한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러니까 나더러 지금….

“청소를 다시 하라고요?”

“사장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대. 얼룩이 하나도 안 지워졌다고, 직접 말씀하시더라….”

수현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어제 종일 바닥을 쓸고 닦았더니 지금도 온몸이

뻐근하다. 오죽하면 숙소로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을까.

“너 혹시 사장님한테 뭐 잘못했냐?”

술 취해서 덮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데 생

각할수록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어느 회사에서 직원에게 청소를 이런 식으로 시키느냐

말이다. 이건 말 그대로 갈굼이지. 아, 머리를 쥐어뜯으니 매니저가 어깨를 두드린다.

“어쩌겠어. 오늘 하루만 힘내.”

“아, 양호범 개새끼.”

그러자 매니저가 펄쩍 뛴다.

“인마. 아무리 자리에 없어도 사장님한테, 너는 막, 그런 욕을.”

“없는 데서 뭔 소릴 못 해요. 양호범 그 씨발 놈. 나가 뒈지라 그래요.”

“야….”

수현은 닫힌 엘리베이터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통에 뇌 대신 근육만 든 새끼.”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아!”

수현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 좆같은 새끼. 누가 달랬어. 싫으면 하질 말든가. 씨발. 지도 좋아서 해 놓고, 지랄이야.

왜.”

매니저의 목소리가 이젠 미세하게 떨린다. 양호범이 그렇게 무서운 걸까.

“수, 수현아….”
“이름 부르지 마요. 지금 미쳐 버릴 지경이니까.”

“백수현.”

“ 부르지 말라니까요. 아아, 씨발. 나 열받아서 지금 환청 들리나 봐. 매니저님 목소리하

고 그 새끼 목소리하고 똑같아. 드디어 미친 건가, 하하. 나 정신 차리게 뺨 좀 때려 봐

요.”

돌아보며 뺨을 내밀던 수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언제 왔는지 양호범이 박태준과 함께

서 있다. 이런 젠장. 양호범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정말 양호범이었네. 매니저는 언제 튀

었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호범이 살벌하게 웃으며 눈짓

을 했다.

“타요. 올라가야죠.”
33 화

올라가는 내내 숨이 막혔다. 양호범은 말이 없었고, 그의 수하인 박태준 역시 입을 꾹 다

물고 있다. 방금 전 욕하는 걸 들었을까. 들었으면 또 어쩔 거야. 없는 데서는 임금님 욕

도 한다는데.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지

옥의 사자가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려요.”

마지못해 따라 들어가는데 호범이 다짜고짜 셔츠를 벗는다 . 수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보

는데 그가 벗은 셔츠를 수현에게 던진다 . 버려요. 순간 비릿한 냄새가 훅 끼친다. 그는 씻

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고,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셔츠를 들고 반대편 욕실로 가서 세면

대에 물을 틀고 셔츠를 담갔다. 아무리 돈이 썩어도 그렇지 멀쩡한 셔츠를….

어…?

물에 젖은 셔츠에서 시뻘건 핏물이 배어 나온다 . 비릿한 냄새의 정체를 이제 알겠다. 대

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아침부터 피를 뒤집어쓴 걸까 . 몸뚱이에 흉터 하나 없는 걸

보면 이건 양호범 피가 아니다.

대충 헹군 뒤 그것을 빨래 통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오는데 박태준이 무

언가를 들고 들어온다. 포장된 상태로 보아 정장인 듯했다. 청소하려고 움직이는데 박태

준이 수현을 부른다.

“백수현 씨.”

그는 들고 있던 것을 건네줬다.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오세요. 오늘은 저하고 갈 곳이 있습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돌아보니 양호범이 편한 차림으로 나온

다. 머리는 덜 마른 건지 물기가 젖어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가 다가왔

고, 수현은 긴장했다.

“오늘은 태준이하고 심부름 다녀와요.”

수현은 무심코 바닥을 봤다. 오늘까지 청소를 다시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청소는…?”

“내일 해요.”

수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욕을 한 것에 대해서도 양호범은 다그

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수현은 정장 케이스를 들고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 케이

스를 여는데 검정색 정장이 들어 있다.

옷을 벗고 바지를 입는데 사이즈를 잰 것처럼 딱 맞는다 . 셔츠를 입고 나서 단추를 채우

는 사이 똑똑, 노크와 함께 양호범이 혼자 들어온다. 조금 전 욕실에서 본 그의 피 묻은

셔츠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경계했다. 양호범은 수현을 지나쳐 넥타이를 수납해 둔 서랍

을 열더니 거기서 몇 개를 가져와 수현의 셔츠에 매치했다.

넥타이를 대고 거울을 보면서도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더

무섭다. 그가 푸른색과 붉은 계열의 넥타이를 대더니 푸른색으로 목에 둘러 준다. 수현

은 흠칫 놀라 그 손을 붙들었다.

“왜?”

“맬 줄 알아요?”

아, 넥타이 매 주려는 거구나. 순간 목 조르는 줄 알고 쫄았네.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손

을 거두니 호범이 넥타이를 둘러 능숙하게 매듭을 엮었다 . 나비넥타이는 지겹도록 많이

매 봤지만 이런 종류의 넥타이는 익숙하지 않았다. 턱 아래에서 양호범의 손가락이 움직

인다. 의외로 손가락이 길고 예쁘다. 이런 손으로 잘도 사람을 죽이는구나.

“어젯밤에 즐거웠어요?”
머릿속으로 그 한마디가 훅 가르고 들어온다. 수현은 어? 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양호범

을 쳐다봤다. 양호범은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다. 다시 넥타이를 푼다. 고작 넥타

이 하나 풀었을 뿐인데 옷이 벗겨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수현은 티 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뭐가.”

“나이 많은 남자. 저번에 김도한도 그렇고.”

틀린 말은 아니라 수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늘 나이 많은 남자

를 동경하고 좋아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애정 결핍일까. 아니면 그냥 타고나길 그

렇게 태어난 걸까. 호범이 매듭을 조이고 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잘 어울리네요.”

수현은 거울을 봤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모습이 낯설다. 양호범은 넥타이핀까지 해 준

다음 가운데 있는 진열대에서 서랍을 빼더니 시계를 고른다 . 그는 손을 달라고 하더니

시계를 하나씩 대봤다. 한눈에 봐도 고가의 시계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대체 어딜 심부름 보내길래 이렇게 꾸미나 해서 .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자꾸만….

“나 어디 접대 나가?”

대놓고 물으니 양호범이 눈을 들어 수현을 응시한다.

“접대해 본 적 있어요?”

“예전에. 잠깐 호스트바에서 일했어.”

“여자들 상대로?”

“응.”

양호범이 웃으며 묻는다.

“가능은 하나.”

“못 할 건 또 뭐야. 돈 벌려면 해야지.”


시계를 채워 준 호범이 뒤로 한 발 다시 물러나서 수현을 위아래로 훑는다 . 봐 줄 만하네.

수현은 거울을 봤다. 야, 말은 바로 해라. 이 정도면 봐 줄 만한 게 아니라 훌륭하잖아.

“무슨 일인지 말 안 해 줘?”

“태준이하고 같이 물건 배달하면 돼요.”

“뭔데? 혹시 약?”

“그건 김우영 취향이고. 내 취향은 그림.”

“그림?”

“괜히 입 털지 말고 선물만 전달하고 나와요. 어려울 거 없죠?”

아아, 생각했던 그런 건 아니구나. 고개를 끄덕이니 호범이 나가자며 눈짓을 한다. 돌아

선 그의 어깨를 수현은 눈으로 가늠했다. 넓기는 정말 더럽게 넓다. 저 어깨로 나를 안았

나. 아니 놈은 안지 않았을 거다. 장담하건대 욕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겠지.

밖으로 나오니 박태준이 대기 중이다. 수현은 그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검

은색 봉고가 대기 중이다. 수현은 보조석에 올라타 뒤를 흘깃 돌아봤다. 의자 뒤 트렁크

에 종이에 싸인 무언가 보인다. 양호범은 그게 그림이라고 했다. 연말도 다가오고 해서

지인들한테 나눠 주는 선물이라고.

가는 내내 박태준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수현이 묻는 말에 대답이 전부였다. 그렇게 첫

번째 도착한 곳은 도심의 한 주택이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태준이 종이에 싸인 그

림을 준다.

수현이 그림을 들었고 박태준이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앞치마를 한 여

자가 나온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반색하며 둘을 맞

이한다.

“오랜만이네요.”

“양 대표님이 보내셨습니다. 이미주 작가 그림입니다.”

여자가 입을 벌리고 쳐다본다.

“누구? 이미주?”

“예.”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내가 그 작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대. 하여튼 양 대표 센스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

까. 모르는 게 없어.”

그림을 애틋한 눈으로 보던 여자의 시선이 어느덧 수현에게 닿는다.

“못 보던 친구가 있네?”

“새로 왔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 봐.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그 말에 수현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믿을 만한. 내가 양호범한테 그런 사람은 아닌데. 하

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이곳에 보낸 것 자체가 의아하긴 하다. 보아하니 그림이 아니라

뇌물 같은데 내가 어디 가서 입이라도 나불거리면 어쩌려고.

“인물 좋네. 양 대표는 직원 채용할 때 얼굴 보고 뽑나 봐?”

여자가 수현을 빤히 본다.

호스트바에서 아줌마들 후릴 때 보여 주던 미소를 날리자 여자가 웃는다.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대표님이 회장님께 말씀 잘 전해 달라고 하셨습

니다.”

“그건 걱정 말고. 우리 그이가 양 대표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내가 더 잘 알잖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끝났다. 어려울 게 없었다. 정말 그림만 전해 주면 되는 거

구나. 그렇게 나와서 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엔 다른 작가였는데 수현은

그게 누군지 알지 못했다. 받는 사람의 반응이 좋은 걸 보면 인기가 많은 작가인 건 분명

해 보인다. 아니면 그림이 존나 비싸든가.

“저 그림 가격은 얼마 정도 해요?”

궁금해 물었더니 박태준은 입을 닫고 웃기만 한다. 수현도 더 묻진 않았다.

마지막 한 집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다. 주택 앞에 차를 세우고 그림을 꺼내는데 아이 하

나가 잔디밭에서 뒤뚱거리며 뛰어다니는 게 눈에 들어온다 . 뒤에서는 외국인 여자가 안


절부절못하며 아이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중년 여성이 홈드레스에 숄

을 걸치고 나온다.

“누구시죠?”

“양호범 대표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여자는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김선호 작가님 그림입니다.”

유명한 작가인지 여자의 눈이 살짝 커진다 . 그러더니 수현과 태준을 번갈아 보고 일단

들어오라며 안으로 안내한다. 수현이 거실 입구에 그림을 내려놓자 태준이 지금까지와

는 다르게 그 자리에서 그림의 포장지를 벗겨 냈다. 그림을 본 중년 부인이 입을 가린다.

“세상에. 이걸 어떻게 구했어.”

여자는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양 대표면, 그 종로 양 회장님, 손자분?”

“예. 맞습니다.”

이윽고 여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받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선뜻 거절하지 못한다. 수현은 태준이 여성과 대화하는 동안 집을 한번 둘러봤

다. 지금까지 봤던 다른 집들보다 실내가 검소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다 수현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가족 중 자신이 아는 얼굴이 있다.

놀라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엄마. 누가 왔어요?”

돌아보는 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 뒤로 조금 전 사진 속 그 남자가 서

있다. 숨이 턱 막힌다. 외면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남자도 수현을 알아봤고 마찬가지

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으니까.


34 화

검은 승합차가 도롯가에 급히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수현은 뛰쳐나와 상가 화장실

을 찾았다. 입을 틀어막고 빈칸에 들어가자마자 낮에 먹은 것들을 게워 냈다. 몇 번 토를

했는데도 구역질은 멈추지 않는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와 입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창백하

다. 아직도 조금 전 본 그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물기를 닦으며 나와 담배를 찾아 물었

다. 손이 덜덜 떨린다. 근처에 있던 박태준이 다가와 생수를 내민다.

“괜찮습니까?”

수현은 진이 빠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담배를 반도 태우지 못한 채 꺼 버리고 차에

올라탔는데 오한이 나고 머리가 무겁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곳에서 어떻게 빠져나

왔는지조차 모르겠다. 다행히 박태준은 더 묻지 않는다.

수현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놀란 서민준의 얼굴이 보인다. 과거 풋풋한

20 대 중반이었던 그는 어엿한 검사가 됐고, 결혼까지 해서 예쁜 부인과 아이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옛 기억에 잠겨 있다가 눈을 떠 보니 차가 어느덧 호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수현이 벨트를 푸는데도 박태준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안 내려요?”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따로 볼일이 있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 방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

다. 재킷을 벗을 기운도 없이 맥이 탁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

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그러다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기에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붙들고 위액을 쏟아 냈다. 자

리에서 일어서는데 눈앞이 핑 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정신을 차리려 옷을 벗고 샤워

기 앞으로 가 물을 틀었다.

찬물을 뒤집어쓰니 정신이 확 든다.

그 아래에서 오랫동안 서 있다가 수건으로 허리만 가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뜻밖의 손님

이 기다린다.

“씻었어요?”

수현은 그의 방문이 반갑지 않아 표정을 굳혔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시계는 테이

블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었다. 수현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입을 옷을 찾기 위해 서

랍을 뒤졌다. 허리를 구부리고 옷을 찾는데 다리 사이로 양호범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

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수건 아래를 빤히 보는 중이다.

수현은 셔츠를 들고 돌아서며 인상을 썼다.

“뭘 쳐다봐?”

“엉덩이. 보일락 말락 하길래.”

미친놈이. 남의 엉덩이는 왜 들여다봐. 가끔 양호범은 애새끼 같은 짓을 한다. 수현은 한

숨을 내쉬며 일단 티셔츠를 입어 상체를 가렸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에 있는 시계를 내

밀었다. 양호범은 그것을 받는 대신 양팔을 뒤로 짚고 침대에 아예 편안하게 앉았다 . 여

차하면 누울 자세다.

“속은 좀 어때요?”

수현은 그의 허벅지 위에 시계를 아무렇게나 올려놨다.

“여긴 왜 왔어?”

“아프다길래 와 봤어요. 속은. 괜찮아요?”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웃는 얼굴로 말하는 뉘앙스가 묘하다. 마치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 수현은 궁금했다.

양호범은 나에게 왜 이럴까. 최근 그의 행동들을 떠올리면 이상한 것들이 많다. 아무리

먼저 덮쳤다지만 거기에 왜 맞장구를 쳤을까. 어제는 왜 보란 듯 눈앞에서 여자하고 물

고 빨았을까. 남자하고 자고 온 날, 내 머리통에 왜 물병을 집어 던졌을까.

아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살짝 들려고 한다.

물론 아닐 확률이 한 95% 정도 되겠지만.

“나한테 할 말 있어요?”

물어보면 쪽팔림만 당할 거 같다. 수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휴

대전화가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하여 울리니 양호범이 전화

를 가져가려 한다. 수현은 낚아채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아버지의 연락은 아닐까,

싶어서.

양호범을 피해 구석으로 가는데 뒤통수에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진다.

“여보세요?”

상대가 말이 없다. 정말 아버진가. 그렇다 해도 양호범이 있으니 일단은 아닌 척할 생각

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수현이니?]

사람은 나이가 들면 목소리가 변한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나 보다.

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서 욕실 문만 노려봤다.

[아까 많이 놀랐지? 당황해서 인사할 겨를도 없었어.]

“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출소하고 사라져서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면회 온 그를 한 번인가는 만났고 그 이후로는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출소한 이후에는

도망치듯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김도한 그 개새끼를 만나서 이 지경이 된

거고. 문득 궁금해진다. 검사면 사람 찾는 거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정말 찾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던 걸까.


[지금 어디서 지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수현이 뒤를 돌아봤다. 양호범이 침대에 앉아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다. 나가 달라

고 손짓을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는데 들은 척도 않는다 . 결국 포기하고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다시 연락할게요.”

뚝, 전화를 끊고 돌아서니 양호범이 웃는다.

“어제 자빠져 잔 놈?”

수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되게 좋았나 보네. 또 연락하고.”

“나쁠 건 없었어.”

“난 그쪽 아버진 줄 알고 살짝 설렜는데.”

양호범이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어디서 죽은 게 아니라면 연락하겠지. 그래도 자식인데.”

듣고 있던 수현은 호범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나 실은 어제 아버지 지인 만나러 갔었어.”

“그랬어요?”

“ 내 연락처를 두고 왔어. 연락이 오면 너한테 가장 먼저 알릴 거야. 계약은 계약이고, 난

그 인간한테 아무런 정도 없으니까.”

양호범이 수현을 기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행이네요.”

수현은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 그러니까 앞으로 내 사생활에는 관심 꺼 줄래? 내가 남자를 만나 뒤를 대 주든 아니면

날밤을 새우든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호범은 여전히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이다. 도무지 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으니 더 불편하다. 수현은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만 가. 사장이 여기 와 있으면 다른 직원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호범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알았어요, 나갈게. 웬일인지 순순히 일어나 문

으로 걸어간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길래 수현은 바로 닫으려고 했다 . 순간 닫히는 문

을 양호범이 붙잡는다.

“아, 까먹은 게 있어서.”

수현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낮에 내 욕 했잖아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현이 당황한 듯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어?

“다른 직원이었으면 잘랐을 텐데, 백수현 씨니까 특별히 봐주려고.”

존나 고맙네. 수현은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로라도 고맙다

고 말하려는데 양호범이 말할 순서를 가로챈다.

“아침까지 시말서 써서 올려놔요.”

“뭐?”

“내 마음에 들 때까지.”

“…….”

어이없이 쳐다보자 호범이 쐐기를 박는다.

“그럼 푹 쉬어요. 나가서 걸레처럼 싸돌아다니지 말고.”

걸레란 말을 고기 씹듯 꼭꼭 씹으며 웃는다 . 이 새끼가! 수현은 욱해서 저도 모르게 멱살

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문이 닫힌다. 황급히 손을 빼자 이어서 문이

쾅 닫힌다. 자칫했으면 팔이 잘릴 뻔한 상황이었다.

열이 받아 문을 벌컥 여는데 양호범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쫓아가서 발로 걷어차고 싶은데,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후폭풍이 무섭다.

개새끼. 누구더러 걸레래.

노려보던 수현은 문을 쾅 닫았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왜 내려와서 지랄인지 모르겠다 .

저 새끼 혹시 나 좋아하나? 지금 그래서 시위하는 건가? 라고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오

한이 든다. 역시 그건 아니다.

침대로 왔는데 놈이 시계를 두고 갔다. 마침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온다.


[시간 날 때 꼭 연락해 줘.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서민준이다.

수현은 한참 고민하다 결심을 굳히고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어차피 길게 끌어 봐야 서

로 마음만 불편해진다. 이미 끝난 인연을 다시 시작할 이유는 없었다.

[이따가 만나요.]

메시지를 보내 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피로가 몰려온다. 빈속에 양호범 때문에 열받아

서 더 그런 건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현은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혹시나

하여 서민준의 이름을 검색하니 몇 가지 기사가 뜬다.

정의, 부패 척결, 국회의원 장인, 청와대로 가나?

이름을 검색하여 포털 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뜨는 것도 놀라운데, 국회의원 딸과 결혼했

고, 청와대로 갈 수도 있다는 건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 그냥 잘나가는 정도가 아니었

네.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조금 허탈하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사

람이 되었다는 게. 혹시나 하여 양호범과 서민준의 이름을 함께 검색하니 관련 기사 한

줄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양한 검색어를 입력해도 둘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서민준에게서 약속 장

소와 시간이 문자로 들어온다. 수현은 알겠다고 답을 보내 놓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최대한 좋아 보이는 옷을 골라 걸쳤다. 머리까지 손질하고 나니 창백한 것만 빼면 봐 줄

만하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양호범이 두고 간 손목시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문

앞까지 갔던 수현은 다시 돌아와 그것을 손목에 찼다.

그러고선 숙소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35 화

호범은 눈앞에 있는 그림을 바라봤다. 김선호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경매에 나온 것

을 꽤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그림 속에는 한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기도 중이었다.

작품명, 속죄.

“다시는 보내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윤 실장의 말에 호범은 피식 웃었다. 원래 서민준에게 그림을 보낼 계획 따위는 없었다 .

그저 백수현과 그를 만나게 하고 싶었을 뿐 .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수현이 반응을 보인다 . 그게 흥미로워 일부러 가서 자극했는데,

결과가 어찌 되려나…?

“백수현이 잘 해 줘야 할 텐데요. 그죠?”

“호텔에 연락해 보니 지금 나갔답니다. 사람 붙일까요?”

“두세요. 시계 차고 나갔을 겁니다.”

호범은 장담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백수현이 찬 시계에 도청 장치가 있다. 허영심이 있

으니 그걸 차고 나갔을 확률이 높다. 백수현은 여우같이 굴지만 맹탕인 구석이 있었고,

속물에다 성질머리가 더러우면서도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선 적당히 비위를 맞출 줄도

알았다. 거기다 결정적으로는 헤프고 엉덩이도 가볍지. 호범이 싫어하는 조건은 아주 골

고루 다 갖췄다.

호범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림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다 버리세요. 서 검사 손 탄 거, 내 집에 놓고 싶지 않아요.”


수억짜리 그림을 버리라는 말에도 윤 실장은 덤덤했다. 그가 그림을 챙겨 서재를 빠져나

간 뒤 호범은 책상에 놓여 있던 서류를 들고 책장 아래 문을 열었다 . 금고가 나온다. 그것

을 열자 서류와 다양한 종류의 USB 가 가득하다.

누군가의 약점이 담긴 것들.

그리고 거기엔 백수현이 훔쳤던 이레건설 비자금에 관한 파일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이게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서민준의 발목을 완전히 붙들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지금은 백수현이 꼭 필요하다. 부디 그가 히든카드가 되어 주길.

❖❖❖

수현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댔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그래

도 번듯하게 사는 모습까진 아니어도 잘산다는 티는 내고 싶었다 .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끝내자는 마음으로 택시에서 내려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이 일행이 있느냐고 묻는다.

“서민준 씨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밤이라 곳곳에 연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복도를 지나니 마지막에 밀실처럼 생긴 공간이 나타난다 . 직원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수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이 열리자 서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낮에 본 차림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각자 앞에 놓는다.

“식사는 잠시 후에 시킬게요. 일단 차부터,”

수현이 말을 가로챘다.

“차만 주세요. 식사는 됐습니다.”


민준이 수현을 보며 서운한 표정을 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저녁 먹어.”

“미안. 나는 낮부터 속이 좋지 않아서.”

민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사라진 공간에는

둘만 남게 됐다. 수현은 일부러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앉았다. 서민준을 보는 자신의 얼

굴에서 구김살이란 건 찾아볼 수 없게 표정도 한껏 연출하면서.

“오랜만이야, 형.”

“그러게. 오랜만이다. 아까는 인사할 경황이 없었어. 너무 놀라서….”

“괜찮아.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짧은 침묵. 답답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지 않았다. 수현은 앞에 놓인 컵

만 만지작대며 테이블 위만 쳐다봤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정신없었어. 일하느라 잠시 부산 내려가서 살기도 했고.”

“그랬구나…. 연락하지. 기다렸는데.”

수현은 말없이 웃었고 직원이 차를 가져와 잠시 대화가 중단됐다 . 다시 둘만 남게 된 상

황에서 수현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왜긴. 오랜만에 봐서 반갑고, 그래서 보자고 했지.”

서민준은 거짓말을 하면 눈을 자주 깜빡인다 .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른이 돼서 변한 건지 아니면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걱정할 필요 없어.”

서민준의 눈동자가 저를 직시한다. 저 눈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맑고 순수

하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 얘기 하러 나왔어.”

민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는다.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닌 것처럼.

“네가 왜 양 사장 밑에서 일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취직했어.”

“취직?”

“응. 당분간만.”

서민준은 경찰서에서 양호범을 만난 날,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에게 물어봤다. 그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고. 형사의 말에 따르면 백수현이 양호범 카드를 쓰며 오해가 생겼단

다. 그러면서 형사는 이상한 말을 했다. 둘 사이에 성적인 얘기가 오고 갔다면서. 농담인

지 진담인지 모르겠더라고.

“양 사장하고 개인적으로 친해?”

민준의 물음에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행이네.”

“그게 무슨 뜻이야?”

“부탁인데 가까이하지 마. 네가 왜 거기서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너한테 도움 될 게 없는

인간이야.”

둘 사이가 나쁘군. 수현은 짐작으로만 여겼던 게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 생각했다. 그러

나 양호범이 도움이 안 된다는 서민준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양호범은 김창남에게

진 사채를 갚아 줬고 옷과 휴대전화를 사 주고 , 카드도 주고, 이틀 전엔 팁으로 수백만 원

도 꽂아 줬지. 괴롭히면서도 사실 여러모로 봐주는 것도 많았다 . 물론 주고 나서 기분을

꼭 더럽게 했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형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거 같아.”

서민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그는 목이 타는 듯 차 대신 물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대

화의 주제를 바꾼다.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디에서 지내는지 묻기에 수현은 그에게 호텔

에서 지낸다고 털어놨다. 그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진다.

“머물 곳이 없으면 오피스텔 얻어 줄게.”

사람 팔자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월세 50 도 없어서 절절매다가 이젠 호텔 펜트하우스에

서도 자고, 오피스텔 얻어 준다는 놈까지 나타났으니.


“괜찮아. 형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신세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너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줄까 봐?”

입을 다무니 그가 끈질기게 제안을 한다.

“아니면 다른 일자리 구해 줄까?”

“지금도 좋아. 보수도 세고.”

“나는 솔직히 네가 그만뒀으면 좋겠어. 양호범은 위험한 놈이야.”

수현은 생각했다. 서민준이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에 대해. 역시 그것 때문이겠지. 혹시

라도 내가 양호범한테 말할까 봐. 그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까 봐. 하지만 이제 와 말한다

고 한들 믿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애초에 말할 생각이 없는 건데, 자꾸 들쑤시니 오히

려 마음이 삐딱해지려 한다.

“사실 양 사장한테 빚이 있어.”

빚이란 말에 서민준이 덤덤하게 묻는다.

“얼마나?”

“20 억.”

서민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수현은 더 심술이 부리고 싶어졌다.

“그거 갚아야 나갈 수 있어.”

“수현아.”

“응.”

“줄게. 그 돈.”

수현은 놀라 입을 벌렸다. 서민준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켰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많은 금액이라도 줄게. 그러니 나와. 거기 있으면 너 위험해.”

“…….”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 새끼는 더 악질이야.”

[사실 양 사장한테 빚이 있어.]

[얼마나?]

[20 억.]
호범은 차 뒷좌석에 앉아 이동하는 내내 녹음된 파일을 듣고 있었다 . 20 억이란 수현의

말에 그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벌구. 입만 열면 아주.”

앞에 앉은 태준이 룸미러로 호범의 표정을 잠시 살핀다. 하지만 그는 곧 운전에 집중했

다.

[줄게, 그 돈.]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 새끼는 더 악질이야.]

호범은 입으로 조금 전 그 말을 곱씹었다. 악질이라. 단어가 꽤 마음에 든다. 특히 서 검

사 같은 인간 입에서 나올 때는. 백수현과 서민준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흘러나왔다.

[늘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어. 이제라도 갚을 수 있게 해 줘.]

[부탁이다, 제발.]

눈물 나는 호소다. 백수현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진다.

[생각해 볼게.]

녹음된 백수현의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사람을 현혹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호범은 눈

을 감았다. 생각해 본다 … . 무엇을? 이후로 백수현은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았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화가 이어졌으나, 이렇다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헤어지는 과정까지 모두 녹음됐는데, 수현은 숙소로 돌아와 잠들 때까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지도 혼잣말도 하지 않은 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

을까. 호범은 그 속내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가는데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그들을 지나쳐 엘리

베이터 앞으로 향하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띈다 . 호범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성큼성큼 다가가 뒤에 서는데도 뭔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넋이 나가 있다.

그래서 은밀히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시말서 썼어요?”
백수현이 기겁을 하고 뒤를 돌아본다. 놀랐다가, 질색하고 욕을 하는 표정이 볼만하다.

호범은 싱긋 웃었다. 이상하게 저런 낯짝을 하면 더 괴롭혀 주고 싶단 말이지. 그걸 본인

도 알아챘다면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굴 텐데.


36 화

호범은 상단에 시말서라고 적힌 글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교묘하게 ㅁ을 ㅂ처럼

적어 시발서라고 쓴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놨다. 내용 역시 아주 기가 막힌다. 타일 청소

를 혼자서 하는 건 부당하다. 노예 수준으로 부려 먹고서 다음 날 또 청소하라고 해서 화

가 나서 욕을 했다. 없는 데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사장 욕이라고 못 할 게 뭐냐라고

쓰더니 나중엔 자기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어 못 배우고 어리석어 잘못을 저질렀다 .

그러니 한 번만 봐주면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 . 마음을 곱게 써서 부디 좋은

오너로 성장하길 바란다. 지금도 물론 훌륭하지만. 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적어

두기도 했다.

이건 반성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어 쳐다봤더니 백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허공 어디쯤을 쳐다보고 있다.

호범은 웃으며 종이를 툭 앞으로 둔다. 가져가요. 수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걸로

된 건가. 안도하는 표정.

“다시 써 와요.”

보기 좋게 그 얼굴이 일그러진다.

“뭐?”

“잘못을 뉘우치는 게 하나도 안 보여. 글에 진정성이 눈곱만큼도 없고. 심지어 틀린 글자

가,”

호범이 펜을 뽑아 글자에 체크를 한다. 여기, 여기, 이것도 틀렸어. 띄어쓰기는 아주 개판

이고. 그러더니 수현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씨발. 누가 보면 외국 살다 온 줄 알겠네.”

수현은 민망하여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많이 틀리지도 않았구만. 개새끼. 사람 무

안하게. 종이를 홱 낚아채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호범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싱긋 웃는

다.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써 오면, 퇴근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여기서 밤새 쓰라고 시킬 거

야. 나하고 다정하게 얼굴 맞대고 밤새우고 싶으면 그따위로 계속 써 오든가.”

수현은 그를 한번 노려보고 나서 돌아섰다. 양호범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입 모양으로 별

별 욕을 다 했다. 그렇게 청소를 시작하려다 주머니에 넣어 둔 손목시계가 뒤늦게 떠올

랐다. 양호범에게 다시 가서 그걸 건네주는데 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수현은 시

계를 책상 위에 올려 뒀다.

“어제 놓고 갔어.”

“가지라고 준 거예요. 차요.”

“싫어.”

서로 팽팽하게 눈싸움을 하는데 때마침 양호범에게 전화가 온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자

리에서 일어나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아닙니다. 그림은 마음에 드세요? 다행이네요. 어

쩌고 말을 하는 거 보니 그림을 선물받은 사람 중 하나인가 보다.

수현은 테이블에 놓아둔 그의 시계를 빤히 보다 돌아섰다. 원래 사람한테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양호범한테 뭘 받으면 개운치 않고 영 찝찝하단 말이지. 물론 시

계가 아깝긴 하지만.

미련을 버리고 침실 청소를 시작했다. 이젠 커버를 가는 것이 능숙하다. 깔끔하게 정돈

된 침실을 보자 만족스러워 미소가 흘러나온다. 의외로 청소가 적성에 맞는다. 진작 알

았다면 술집이 아니라 청소부로 일했을 텐데. 그러다 또다시 서민준 생각이 났다.

[거기 있으면 너 위험해.]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 새끼는 더 악질이야.]

[늘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어. 이제라도 갚을 수 있게 해 줘.]


헤어진 뒤에도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갔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좋았다. 푹

자고 내일 연락하라는. 그는 무슨 마음인 걸까. 혹시라도 내가 사실을 말할까 봐 두려운

걸까. 아니면 정말 그 일로 미안한 걸까. 그 마음은 모르겠지만, 양호범과 사이가 나쁜 건

확실히 알겠다.

그렇다면 양호범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오피스텔에서 술을 먹은 날 그는 수현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 그래

서 삼계탕집 부부 이야기를 해 줬었다. 처음 듣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런 거라면 얼마든

지 연기가 가능하다. 특히 양호범 같은 놈은.

만약에 양호범이 미리 알았다고 가정한다면, 백광무는? 그가 정말 물건을 훔쳐 가져가긴

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백광무는 다 거짓말이고, 서민준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내

가 이곳에 온 건 아닐까. 머릿속 시나리오는 어젯밤부터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뒤에서 양호범 목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돌아서며 표정을 바꿨다.

“시말서에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

양호범이 빤히 보더니 오라고 손짓을 한다. 저놈이 오라고 하면 무섭다. 수현은 마지못

해 그에게로 갔다. 기운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그가 손을 뻗는다 . 몸이 먼저 반응하

여 피했더니 턱을 붙들고서 반대편 손으로 눈 아래에서 무언가를 떼어 낸다.

“얼굴에 이걸 왜 붙이고 다녀요.”

봤더니 솜털이다. 베개나 이불에서 나온 건가. 얼굴에서 손이 떨어져 나갔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턱이 얼얼하다. 놈은 키도 크고, 손도 크고, 어깨도 넓고, 좆도 크고,

좆도 … . 저도 모르게 시선이 양호범 가랑이 사이에 가 닿았다 .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번

뜩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양호범이 수현을 보다 제 바지를 내려다본다.

“뭘 봤길래 표정이 그따위야.”

수현은 인상을 쓰며 코웃음을 쳤다. 보긴 뭘 봐. 아무것도 안 봤어. 하고 돌아서서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욕구불만인가. 왜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지. 차라리 퇴근하고 채


팅으로 남자나 만나러 나갈까. 그러다 침실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쇼핑백이 눈에 띈다 .

호범의 생일에 친구들이 준 선물이었다. 하나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저거 어디다 치워?”

양호범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뭔데요.”

“네 생일 선물.”

“버려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버리란 말에 수현은 침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양호범은 커피를

내리는 중이다. 한 잔 줘요? 라고 묻길래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도….

“진짜 버려?”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그래도 사 준 사람들 성의가 있는데….”

“걔들이 목적 없이 그걸 줬을까.”

웃고 떠드는 친구 사이인데도 믿음이 없는 걸까. 언제부터 양호범은 저랬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오피스텔에서 본 사진으로 짐작하건대 양호범은 어릴 적에도 그렇게 귀여운 아

이는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점이 조금은 부러웠다. 수현은 늘 믿다가 배신당하는

일이 잦았으니까. 그리고 그 시작은 아버지였다.

[수현아, 아빠 믿지?]

그가 습관처럼 뱉던 말.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결국 수현은 버려졌다. 그러고 보니 서

민준도 비슷한 말을 했었네. 예전에. 그러니까 그 사건이 터지고 직후에.

[나 믿지? 내가 어떻게든 노력해 볼게.]

입이 써진다.

[거기 있으면 너 위험해.]

[양호범 믿지 마. 그 새끼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악질이야.]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느새 양호범이 커피를 뽑아서 다가온다. 그러고선 커피를 턱 밑에

대 준다. 향이 좋다. 수현은 원두커피를 즐겨 먹지 않았다. 밤에 일하느라 잠을 깨려고 먹


는 건 대부분 싸구려 믹스커피였다. 향을 맡으려 숨을 들이마시니 호범이 웃으며 잔을

수현에게 넘겨줬다.

“마셔요. 정신 들게. 아침부터 넋이 나가 있어.”

“…….”

호범이 다시 커피를 내리러 간다. 수현은 컵을 들고 그 뒤를 쫓아갔다. 아예 몰랐으면 몰

랐지. 생일이 며칠 전이었는데, 입을 싹 닫고 넘어가기가 그렇다. 카드도 있는데 생색이

나 내야지. 수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양호범을 불렀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때 제정신이 아니라서 말을 못 했어.”

호범이 커피를 내리며 소리 없이 웃는다 . 미간과 콧대가 높아 서양인처럼 눈이 들어가

보인다. 매끈한 입술과 각진 턱은 어린 나이임에도 남자답게 느껴졌다.

“생일 선물 필요하면 말해. 사 줄게.”

호기롭게 얘기하니 양호범이 돌아본다.

“내 카드로?”

수현이 뻔뻔하게 웃었다. 물론. 네 카드로. 커피가 다 내려졌는데도 호범은 잔을 드는 대

신 아예 몸을 돌려 수현을 쳐다봤다.

“그럼 저녁에 밥 살래요?”

수현은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다시 뱉을 뻔했다. 밥?

양호범 표정을 보니 진심이다. 뭘 하나 사 주면 몰라도, 밥은… 좀….

“같이 씹질 할 친구는 많은데, 밥 먹을 친구는 마땅치 않아서.”

답지 않게 불쌍한 표정까지 한다. 그러니 더 무서워 거절을 못 하겠다. 밥이라…. 젓가락

질 못한다고 또 갈궈 대는 거 아니야.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난다. 그럼에도 호범은 기대

하는 눈치다. 수현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 먹자.”

“일 끝나고 퇴근 후에 봐요. 시말서는 책상에 올려놓고.”


수현은 인상을 썼다. 정말 다시 써야 하는 거냐고 따지는데 양호범이 들은 척도 하지 않

고 서재로 가 버린다. 아아, 젠장. 청소가 좀 줄어서 살 만하나 했더니, 사람 편한 꼴을 못

보는구나. 차라리 이따 밥 사 주면서 몰래 독약이라도 타 버릴까.


37 화

“이 정도면 됐겠지.”

수현은 작성한 시말서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 뒀다. 휴대전화로 맞춤법까지 검색해 가며

내용도 짜깁기했으니 이번엔 트집을 못 잡겠지. 나름대로 정성 가득한 시말서였다.

손을 탁탁, 턴 뒤 수현은 뿌듯한 표정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양호범은 점심 이후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괜히 밥을 사 준다고 했나 , 후회가 몰려왔다.

솔직히 양호범하고 나하고 얼굴 맞대고 앉아 밥 먹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기에 샤워하고 괜찮아 보이는 옷을 고르는데 전화가 온다. 처음 보

는 번호다. 전화를 받자 낯익으면서도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라고 묻자

상대가 빈정거렸다.

[아직 살아 있네?]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을까.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뺨을 문질렀다. 김태신하고 만나서

괜히 도발했다가 양호범한테 걸려서 그 수모를 당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김태신은 자

기 부하 중에 양호범 프락치가 있는 걸 알고 있을까.

“형님. 어쩐 일이세요?”

[생각 있으면 연락 달라며.]

수현은 침대에 다시 앉았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USB 를

가져다줄 테니 10 억을 달라고 놈에게 제안했었지. 놈의 마음을 읽을 순 없으나 지금 상

황에서 김태신과 한 번 더 엮였다가는 양호범한테 정말 죽는다. 수현은 입술을 꾹 깨물

며 시치미를 뗐다.
“무슨 얘길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너, 이 씨발!]

“연락하지 말아요. 차단합니다.”

툭, 끊고 나서 번호를 바로 차단했다. 김태신과 양호범을 아무리 저울질해 봐도 양호범

쪽으로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음이 아니라 돈이. 적어도 양호범은 당장 필요한 것들

을 제공해 주고 있지 않은가. 나도 사람인데 이렇게 받아먹고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지 .

물론, 양호범이 먼저 친다면 그땐 얘기가 전혀 달라지겠지만.

옷을 차려입은 수현은 머리를 손질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직원들 눈에 띌까, 호텔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양호범에게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근처 PC 방을 찾아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해 있는데 1 시간 정도 지나자 양호범에게 연락이 온다.

[10 분이면 도착해요.]

“알았어. 그 앞에서 만나.”

눈은 화면을 고정한 채 수현이 마우스와 손가락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계산을 하고 밖으

로 나오는데 날씨가 춥다. 외투를 두껍게 입고 올 걸 그랬나. 앞을 여민 채 반대편으로 건

너는데 익숙한 검은 차가 보인다. 아직 10 분이 안 된 거 같은데.

똑똑, 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린다.

“많이 기다렸어?”

호범은 일을 하다 온 차림새였다.

“아니요. 방금 왔어요.”

출발하자마자 수현은 그에게 길을 안내해 줬다. 저쪽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복잡한 골목

으로 들어간 차는 몇 번을 돌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가게 앞에서 멈췄다. 대부분 문을

닫거나 불이 꺼져 있는데 그곳만 아직 장사 중이다. 수현은 안전띠를 풀며 이야기했다.

“저래 봬도 맛은 좋아. 내 단골이거든.”

차에서 내리니 양호범이 순순히 따라 들어온다. 딸랑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오

늘따라 손님이 제법 있다. 덩치 좋은 가게 주인이 수현을 보더니 반색을 했다.

“이게 누구야. 정우 아니야?”


사장이 수현의 이름을 정우라고 불렀는데도 양호범은 궁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안녕하셨어요.”

“ 일 관뒀다며. 며칠 전에 가게 식구들 다녀갔어. 너 안 보여서 내가 얼마나 섭섭해했는

데.”

“그래서 왔잖아요. 이쪽은 새 직장 사장님.”

호범이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삼겹살집 사장이 흠칫하여 표정 관리를 못 한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더니 수현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너 무슨 위험한 일 하는 거 아

니지? 어디 잡혀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라고 묻는다.

수현은 호범을 돌아봤다.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아니에요. 호텔에서 일해요.”

“호텔?”

“유한 호텔.”

아, 나 거기 알아. 살짝 안심한 표정을 하더니 미소를 짓고 안으로 들어간다 . 수현이 구석

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양호범이 맞은편에 앉는다. 수현은 수저와 물을 따라 건네주며

술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소주 마실래?”

“그래요.”

선뜻 그러잔 말에 수현은 소주를 두 개 시켰다. 불판이 놓여지고 사장이 가져온 삼겹살

을 굽자 지글지글 기름이 흘러나오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수현은 소주를 따 사이다 컵에

반쯤 따른 뒤 양호범에게 한 잔, 그리고 나머지 한 잔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맛있게 먹어.”

호범이 픽 웃더니 잔을 든다. 툭 부딪치고 나서 수현은 술을 반 정도 들이켰다. 아, 인상

을 쓰니 양호범이 고추 하나를 된장에 찍어 내민다 . 안주요. 라고 하길래 수현은 흠칫했

다.

“왜. 그쪽이 좋아하는 고추잖아.”


이 새끼가 말을 해도. 한번 째려보고 손으로 받아 입에 물었다. 수현은 적당하게 익은 고

기를 뒤집어 자른 다음 양호범 앞에 놓아 줬다. 먹어. 그러고 나서 집게를 내려놓고 젓가

락을 들자 호범의 시선이 손가락에 꽂힌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수현은 눈으

로 경고했다.

“하지 마.”

“나중에 가르쳐 줄게요.”

“뭘.”

“젓가락질 제대로 하는 법.”

“필요 없어.”

다행히 삼겹살이 입에 맞는지 양호범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물론 덩치만 보면 뭐든

잘 먹을 거 같긴 했지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빈 술병이 늘어 가고 조금씩 취기가 올

라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호범은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작게

한숨도 내쉬면서. 뭐가 일이 틀어졌나. 밥을 먹으면서까지 놓지를 못하네.

술에 취하니 어지럽다. 수현은 정신을 차리려 손으로 양쪽 뺨을 툭툭 두드렸다. 푸흐, 하

고 나서 고개를 드니 양호범이 빤히 쳐다보는 중이다. 그는 반듯하던 셔츠의 단추도 풀

고 조금 편안해진 자세다. 술이 들어가니 너도 인간은 인간이구나 싶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신기해서요.”

“뭐가.”

“우리 둘이 여기서 밥 먹는 거.”

그 말에 수현도 동의했다. 파티에서 양호범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제 젖꼭지에 껌을

붙일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 취한 와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니

실실 웃음이 난다. 호범이 왜 웃냐고 묻길래 수현은 그날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내 젖꼭지에, 껌 붙였잖아. 갑자기 그거 생각났어.”

호범이 웃는 대신 그래요? 하고 물었다.

“나 그때 너 미친놈인 줄 알았잖아. 근데 알고 보니,”


수현이 말을 멈추자 호범이 궁금한지 쳐다본다. 수현은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을 하고 덧

붙였다.

“더 미친 새끼였어.”

호범은 그 말에 화를 내기보단 소리 없이 웃었다. 보통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는데

양호범은 오히려 더 과묵해진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고, 양호범도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는다. 양호범 역시 같은 마음인지 말투도 태도도 평소와 다르게 누그러졌

다.

“근데 너 담배는 왜 끊었어?”

“금연하고 영감한테 뭐 받기로 했어요.”

“뭔데.”

“땅.”

순순히 말을 해 주니 놀라운데 스케일에 더 놀랐다 . 보통 사람들 같으면 담배 끊으면 받

을 수 있는 선물이 한정적일 텐데. 땅이라니. 그가 땅을 받아서 무엇에 쓸지 궁금했다. 물

어봤더니 그것 역시 선뜻 말해 준다.

“할 수 있는 거야 많죠. 건물도 지을 수 있고, 여차하면 사람도 갖다 묻어도 되고.”

뒷말은 차라리 듣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수현이 인상을 쓰자 농담이라며 웃는다. 호범

의 잔이 벌써 비었다. 수현이 병을 들고 사장을 부르는데 호범이 그 팔을 잡는다.

“그만 마셔요.”

“왜.”

“지금 취했어.”

“아닌데에.”

“취했어. 얼굴 빨개. 목도 빨갛고.”

수현이 손바닥으로 뺨을 눌러 문질렀다. 피부가 찹쌀떡처럼 뭉그러지자 양호범이 어이

없이 쳐다본다. 수현은 보란 듯 더 눌렀다. 이러면 웃겨? 웃기지? 호범은 웃는 대신 수현

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옆으로 놨다.

“그럼 우리 집 가서 먹든가.”
어? 취한 와중에도 당황해하자 호범이 반쯤 남은 수현의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내려놓

는다. 이제 다 먹었으니 가요. 라고 말하며 재킷을 들고 일어선다. 왜 이렇게 서둘러. 수

현은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호범이 팔을 잡아끌

며 가게 주인에게 말한다.

“많이 취해서요. 차에 데려다주고 와서 제가 계산할게요.”

수현이 아니라고 내가 계산한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끌고 나온다. 그러더니 근처에

세워 둔 차로 가서 뒷좌석에 수현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뒤로 넘어간 수현이 버둥거리

며 일어나 앉는데 양호범 표정이 어딘가 서늘하다.

“백수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냉기가 흐른다. 수현은 순간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움츠러들었

다.

“여기서 나오지 마.”

무슨 소리야. 나오지 말라니. 그대로 문이 닫히며 잠긴다. 수현은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다시 계산하려는지 양호범이 삼겹살 가게로 들어간다. 아아. 내가 낸다니까. 어차피 그

카드가 양호범 거지만.

근데 왜 화난 거야. 생일 선물이라고 삼겹살 사 줘서 그러나. 소고기를 사 줬어야 했나.

취한 와중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게 안으로 들어간 양호

범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혹시 누구하고 시비라도 붙었나.

수현은 밖으로 나오지 말란 말을 어기고 뒷문을 열고 가게로 걸어갔다. 그런데 가까워질

수록 안이 시끄럽다. 비명도 들리는 거 같고. 갑자기 술이 확 깬다. 서둘러 가게 앞으로

간 수현은 유리문 안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문을 미는데 단단히 잠겼다. 흔들면서

주먹으로 두드리자 잠시 뒤 누군가 모습을 나타낸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양호범이다.

한 손엔 칼을 들고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38 화

눈앞의 광경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었다.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사람들 사이로 양호

범만 멀쩡했다. 가게 사장은 주방 뒤쪽으로 숨어 바들바들 떠는 중이었는데 호범이 칼을

가지고 그쪽으로 간다. 수현이 기겁하여 양호범을 붙드는데 선반 위에 칼을 올려 둔다.

“잘 썼습니다. 죄송해요. 피해보상은 저희 측에서 따로 할게요.”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태준아. 와서 치워. 위치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

짜 와서 치우란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상한 것처럼 그는 덤덤했다 . 술이고 나발이고

얼음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마냥 정신이 확 든다.

수현은 바닥에 끈적하게 흐르는 피를 보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봤다. 몸 곳

곳에서 피를 울컥울컥 쏟으며 바닥을 뒹굴고 기어 다니고 난리다 . 곁에는 선지 덩어리

같은 피가 흥건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치밀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 골목으로 들어가 먹은 걸 다

게워 내는데 누군가 와서 등을 두드린다. 돌아보니 양호범이다. 그가 손수건과 가게에서

들고나온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 사람을 난도질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덤덤했다.

“그러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피 냄새가 훅 끼친다. 다시 입을 틀어막는데 뒤에서 누군가 호범을 부른다 . 등을 두드리

던 호범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속이 좋지 않아 그대로 앉아 있다가 입을 헹구고 골목 밖

으로 나왔다.
가게 앞에 박태준이 와 있었는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봉고차가 서 있고 피를 흘

리며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잽싸게 트렁크에 싣는다. 정신을 못 차리고 끌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현은 낯익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모텔로 김태신이 잡으러 온 날 옥상에서 저

를 잡고 있던 남자 중에 하나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순간 김태신과 통화한 게 떠오른다. 수현은 경악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나

를 미행했나. 그래서 이곳으로 왔던 건가. 심장이 벌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박

태준과 이야기를 하던 양호범이 되돌아온다.

“가요.”

수현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딜.”

“우리 집 가서 2 차 하자며. 저 새끼들 때문에 술맛 다 떨어졌으니, 2 차는 내가 쏠게요.”

수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양호범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혹시 내

가 김태신과 내통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건 아닐까. 그를 따라 차로 가는 와중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술이 아니라 나도 같이 묻어 버리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선뜻 차에 올라타

지 못하겠다. 결국 양호범이 어깨를 누르고 등을 떠밀어서 차에 밀어 넣었다 . 그리고 운

전석에는 박태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 탔다.

“한남동으로 가.”

차가 이동하는 내내 피 냄새가 진동한다. 속이 좋지 않아 숨을 몰아쉬니 양호범이 뒷좌

석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하나 꺼내 준다. 더 마실래요?

하지만 물을 먹어도 속이 진정되는 게 아니라 더 날뛰었다. 차라리 먼저 고백할까.

“있잖아…. 양 사장.”

호범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쳐다본다.

“사실 내가 아까 김태신하고 통화했거든. 여기 오기 전에….”


호범은 말이 없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그걸 보니 덜컥 겁이

난다.

“그래서 왔나 봐. 미안. 내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 근데 내가 끌어들인 건 아니야. 나

도 진짜 몰랐어. 내가 미쳤다고 김태신하고 붙어먹겠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돈 얘

기 꺼낸 것도 갑자기 납치하고 협박하니까 엿 먹어 보라고 한 거지, 진심이 아니었어.”

“어울리지 않게 왜 변명을 하고 그래요.”

“너 무서워서.”

솔직하게 털어놓자 양호범이 웃는다. 뺨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알아요. 만약 한패였다면 아까 같이 죽여 버렸겠지.”

수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전까지만 해도 양호범이 죽인다고 하면 배 째라 하는 심정

이었는데 이젠 진짜 무섭다. 개새끼가 어떻게 사람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팔다리를 다

끊어 놓냐.

매니저 말이 떠올랐다. 호텔 인수 문제로 김태신 패거리가 쳐들어왔을 때 양호범이 얼마

나 짐승처럼 날뛰었는지.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없는 소릴 지어낸 게 아니구나 비로소

깨닫게 됐다.

한편으로는 조금 붙어서 만만하게 놀아 줬다고 내가 이놈을 너무 편하게 생각했구나, 정

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가운데 차는 한남동 주택 앞에 멈춰 섰

다. 전에 왔던 오피스텔이 아니다. 안쪽 통로를 이용해 들어가자 불이 켜진다. 계단을 오

르려는데 맥이 풀려 다리가 휘청댄다.

“술 깼어요?”

호범이 물었고 수현은 바닥을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얼굴 들어요. 누가 보면 내가 납치해서 데리고 가는 줄 알잖아.”

차마 다리가 풀렸다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 그렇게 양호범을 따라 계단을 오른 수현은

마당을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갔다. 주택은 전에 봤던 오피스텔보다 훨씬 넓고 인테리어

도 더 고급스러웠다. 거기가 집무실 느낌이라면, 이곳은 생활을 하기 위해 꾸며 놓은 곳

같았다.
양호범이 반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욕실은 저쪽에. 옷은 서랍 안에 있어요.”

그가 알려 준 곳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욕실인데도 수현이 살던 옥탑방보다 훨씬 크다.

욕실 가운데 반달 모양의 욕조가 있고 , TV 도 볼 수 있게 설치되어 있다. 구경하던 수현

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옷을 벗는데 냄새가 심하다. 그것을 옆으로 치워 놓고 새 칫솔이 있길래 치약을 짜서 입

에 물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 내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수현은 밖으로 나와 물기를 닦고 옷장을 열었다 . 예쁘게 접어 둔 여벌 옷과

새 속옷이 눈에 띈다. 속옷이야 그렇다 치지만 바지와 윗도리가 크다. 아니나 달라 셔츠

단추를 잠그고 나서 거울을 보니 모양새가 우습다.

발목을 한 번 접고 소매도 걷고 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양호범이 보이지 않는다. 수현은

거실 유리창 앞으로 갔다. 마당이 한눈에 보였는데 사람은 없고 사방에서 CCTV 의 빨간

불빛이 반짝인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돌아보니 어느덧 양호범이 씻고 나와 한 손에 셔츠를 들고

바지만 입고 돌아다닌다. 사람이 저렇게 어깨가 넓은 게 가능한 일인가. 동작에 따라 몸

의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저렇게 유지하려면 운동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걸

까.

호범이 셔츠를 입더니 수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옷을 접어 입은 수현을 아래부터 훑어

올라갔다.

“키가 작네요.”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178 이면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를 들을 키는 아니다 . 팔다리도

키에 비해 길면 길지 결코 짧은 건 아니었다. 맞는 옷을 주든가. 지가 무식하게 큰 건 생

각 안 하고. 하지만 수현은 아까 일이 떠올라 평소처럼 말대꾸할 수 없었다.

“술 더 마실 수 있겠어요?”

호범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서 다 깼어.”

“말은 바로 해요. 토해서 깬 거잖아.”

수현은 돌아서는 호범의 뒤통수에 대고 눈을 흘겼다. 누구 때문에 토했는데. 하지만 따

지고 보면 원인 제공은 자신이 한 거다. 거기서 밥을 먹자고 한 것도, 김태신과 통화하여

빌미를 제공한 것도 저니까. 뉘우치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양호범이 비싼 양주를 가져온

다. 오렌지도 함께. 그는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채웠다.

“이런 거 먹는 사람한테 내가 소주를 먹였으니.”

“소주도 좋아해요.”

툭, 잔을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속이 비어서 그런지 술이 들어가자마자 명치가 싸

하다. 그래도 비싼 술이라 그런지 맛은 좋다. 수현은 소파에서 흘러 내려와 바닥에 자리

를 잡고 앉았다. 오렌지를 까는데 기운이 빠져 손이 떨린다.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있던 호

범에게 오렌지를 내밀었다.

“이것 좀 까 줘.”

그걸 또 순순히 받아 껍질을 까서 돌려준다. 수현은 오렌지를 하나씩 분리해서 접시 위

에 올려놨다. 나란히 옆에 앉아서 술을 먹는 게 어색하여 TV 를 틀었는데 케이블 방송에

서 대선후보들 이야기가 한창이다.

패널들 입에서 서민준의 장인인 김현식 의원의 이름이 거론됐다 . 양호범은 어떤 표정일

까. 곁눈질로 확인했는데 아무런 동요가 없다. 씻고 나온 후라 앞머리에 물기가 묻어 있

었는데 이마를 가려 놓아 제법 그 나이로 보인다 . 속눈썹도 길고,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

다.

호범이 쳐다보길래 수현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왜요.”

수현은 입에 오렌지를 물고서 호범을 돌아봤다.

“뭐가.”

“자꾸 쳐다봤잖아. 할 말 있나 해서.”


TV 에서 대선 후보의 모습이 나온다. 시장에서 어묵을 먹고, 국밥을 먹고, 사람들과 악수

하고, 포옹하고, 수현은 화면을 가리키면서 말을 돌렸다.

“둘 중에 누구 뽑을 거야?”

때마침 머리가 반쯤 벗겨진 어느 교수라는 남자가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해 냈다.

[서민준 검사가 사임한다는 얘기가 자꾸 들려요 . 이게 뭘까요? 장인인 김현식 의원의 선

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서민준 검사

를 이용해서 지지율을 끌어올린다면 이번 선거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저는 이

렇게 봅니다.]

서민준 이야기에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제게 글자를 알려 주

던 남학생은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반면 양호범은 술잔을 들고 관심 없는 표정이

다. 삼겹살집에서 이미 꽤 많이 마셨음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다.

호범은 정면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얼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고.”

수현은 아랫입술을 적신 뒤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호범의 시선이 TV 에서 수현에게로 옮겨진다.

“그림 배달한 집 중에서… 서민준 검사라고 있었잖아.”

대놓고 서민준 이야기를 꺼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있다. 수현

은 고민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닌 서민준이 목적

이라면.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라면.

“둘이 친한 사이인가 궁금해서.”

“그림 가져다주면서 봤을 거 아니에요. 친해 보였어요?”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수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곤란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호범이 눈썹을 까닥 올린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서민준을?”

수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호범의 눈을 응시했다. 집요하게 보이는 연갈색 눈동자를.

“전에 얘기했었지. 나 구해 준 삼계탕집 부부 이야기.”

“기억나요.”

“그 집에 아들이 있었다고 했잖아. 나하고 형제처럼 지내던.”

양호범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했었지. 수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양호범이 쳐다보

길래 표정을 감췄다. 난 너한테 그 집 아들 얘긴 한 적이 없는데? 말이 없자 저를 빤히 응

시해 온다. 다음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그 아들이 서민준이야.”
39 화

“놀랍네요.”

“나도 많이 놀랐어. 세상이 진짜 좁아.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호범이 아예 몸을 돌려 앉는다.

“그래서요. 반가웠어요?”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범의 말이 이어졌다.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

“눈치챘을 거 아니에요. 나하고 사이 나쁘다는 거. 근데 이야기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수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 저번에 말했잖아. 내 사생활. 아니 엄밀히 따지면 내 성생활이지. 그것만 빼고 나는 너

에게 보고할 생각이야. 우리 아버지에 관한 거든, 뭐든. 너하고 나하고 계약했으니, 그래

야 하는 게 맞고.”

호범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수현을 꿰뚫듯 바라봤다. 묘하게 비협조적으로 굴더니

왜 태도를 바꾼 걸까, 의심하면서. 서민준이 고민 없이 빚을 갚아 준다고 해서? 설마 그

런 거면 지금 백수현은….

“사실 어제 서민준을 만났어. 널 무척 싫어하더라.”

“나도 서민준 싫어해요. 그래서?”

“너한테 빚이 있다고 하니, 갚아 준대. 오피스텔도 얻어 주고. 그리고,”


수현이 말을 멈춘다. 호범은 인내심을 갖고 수현에게 계속하라며 손짓을 했다 . 수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위로 뜬다. 호범은 저 얼굴을 기억했다. 섹스할 때 비슷한 표

정을 했지. 사람 감질나게.

“또?”

“알잖아? 나는 돈 때문에 아버지도 파는 놈이야. 그런데 그 많은 돈을 준다고 하는데 사

람이 어떻게 멀쩡하겠어?”

“결론은?”

수현은 작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

“내 몸값이 올랐어. 돈 더 줘.”

하, 하하. 결국, 그건가. 호범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서민준에 대해 숨길 줄

알았다. 가감 없이 서민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도 이 인간이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

다. 차라리 대놓고 돈 얘기라서 잘됐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괘씸한데 한 대 패야 하나.

호범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수현을 바라봤다. 아주 사랑스러워서 씹어 먹어 버릴 것 같

은 눈빛을 하고.

“그래서. 백수현 씨 몸값이 얼만데.”

수현은 고민할 것도 없이 손가락 2 개를 폈다. 호범이 그 손가락을 빤히 보다 선뜻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줄게. 수현은 순간 당황하여 거뒀다. 잠깐. 잠깐만. 그러더니 뒤를

돌아서 혼잣말로 중얼댄다. 씨발, 다섯 개를 펼 걸 그랬나.

호범이 어이가 없어 웃는 사이 돌아서는 수현의 손가락이 세 개로 바뀌었다.

“줄 거야?”

호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더 할 얘기 있어요?”

“10% 선불로 줘.”

“선불?”
“계약서에는 아버지를 잡으면 준다고 하긴 했는데 , 사실 그때 가서 말 바꾸고 나까지 담

그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물론, 좋은 옷도 사 주고, 카드도 주고 그런 건 고맙지만. 그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해.”

수현은 호범을 믿지 않는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돈이라도 쓰고 죽으면 덜 억울하겠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면서도 양호범이 과연 들어줄까, 고민하면서.

“그래요, 그럼. 줄게. 10%면 3 억이네. 현찰로? 아니면 코인?”

“무기명 채권으로.”

호범은 피식 웃었다.

“기다려요.”

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기다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이 일어나 드레스 룸 쪽으로 간

다. 그사이 수현은 잔을 내려놓고 그의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아직 마시지 않은 술

이 반이나 남았다.

잠시 후 뒤쪽에서 양호범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난다 . 얼핏 편지 봉투를 한 묶음 묶

어 놓은 것 같았는데 그것을 테이블에 툭 던졌다. 수현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

다. 천만 원짜리 채권이 묶음으로 되어 있다.

“세 봐요.”

이렇게 쉽게… . 아니, 그것보다 집에 이런 걸 보관하다니. 믿기지 않아 그것을 세 봤는데,

30 장. 3 억이 맞다.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린다. 말을 하기 전까지도 설마, 주겠어. 미친놈

이라고 무시하든가, 아니면 또 패든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여겼는데.

수현은 채권의 끝을 손톱으로 문질러 봤다. 가짜는 아니겠지.

“이, 이거 괜찮은 거 맞지? 너희 할아버지가 알면 나 죽이는 거 아니야?”

“들키면 나라고 멀쩡할까.”

그야말로 양 회장 모르게 준다는 소리다.

좋으면서도 심경 복잡한 얼굴을 하자 양호범이 진지하게 묻는다.

“이만하면 나한테 신뢰가 가?”


수현이 말없이 쳐다보자 호범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 수현은 그가 준 채권을 뒤로 감췄

다. 그러자 호범이 곁으로 오더니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나머지 손은 수현의 어깨를 잡아

시선을 맞춘다. 그의 스킨 향에 첫 섹스를 했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프다. 수현이 인상을 쓰자 호범이 웃는다.

“이제 우리 한 팀이네?”

“어, 어… 그래.”

어깨에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와 수현의 귓불을 만진다 . 피하려고 하니 이번엔 손등으로

뺨을 문지른다. 그의 손길에서 다정함이 아니라 섬뜩함을 느낀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이제부터 잘 생각해요. 배에 올라탄 건 백수현 씨 마음이지만, 내릴 땐 그게 아니거든.”

“난 배신할 생각 없어.”

뺨을 문지르던 손이 다시 귓불을 문지른다. 얼굴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야지. 나는 귀 자르는 거로 끝내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목소리는 달콤한데 내뱉는 건 뾰족한 창이다. 한 뼘 거리에 양호범의 입술이 있다. 그가

뿜어내는 특유의 페로몬 향과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동자가 음심을 자극했다. 수현

은 그대로 돌진해 양호범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춥, 한번 빨고서 떨어지는데 양호범의 얼굴이 화난 것처럼 변한다 . 수현은 아무 일 없다

는 듯 몸을 돌렸고 태연하게 술을 마셨다. 하, 옆에서 양호범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 소리

가 들린다. 수현은 오렌지를 하나 집어 입에 넣으려다 말고 다시 양호범을 쳐다봤다 . 양

호범은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중이다.

“나하고 한번 할래?”

대답이 없길래 수현은 바닥에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양호범 옆에 바싹.

“술 먹으니까 꼴려.”

“…….”

“네가 싫다고 하면, 나가서 적당한 사람 찾고.”


양호범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하, 씨발. 걸레 진짜. 라고 말을 하길래 수현은 그러거나 말

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으려고 돌아서는데 양호범이 팔을 잡는다. 내려다

보니 이건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입술을 비틀면서.

“저번처럼 아프다고 징징 짜면 죽여 버릴 거야.”

징징 짰는지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수현은 돌아서 양호범 무릎 앞으로 갔다. 양

호범이 술잔을 들고 쳐다보길래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엉

덩이에 닿은 허벅지가 돌처럼 단단하다. 호범의 술잔을 빼앗아 옆으로 놓고 키스를 하려

는데 호범이 이마를 손끝으로 눌러 막는다.

“섹스만 해.”

수현은 눈초리를 가늘게 늘였다.

“매몰차긴.”

그럼 다른 데는 빨아도 되는 거지? 수현은 입술을 호범의 귓가로 가져갔다. 혀로 그의 귓

바퀴를 핥으며 귓불을 앞니로 살짝 깨무는데 양호범은 미동조차 않는다 . 이게 사람인지

나무토막인지 모르겠다.

승부욕이 발동해 이번엔 엉덩이로 아래를 문질렀다. 목석같은 태도와는 달리 아래 깔려

있던 놈의 좆은 점점 딱딱하게 발기했다. 목과 턱을 핥다가 다시 얼굴을 마주 봤다. 수현

은 엉덩이를 앞뒤로 문지르며 호범을 보고 웃었다.

“어른의 섹스가 뭔지 알려 줄게, 꼬맹아.”

태연하던 호범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까분다? 그는 수현을 옆으로 넘어트려 소

파에 눕혔다. 졸지에 위치가 바뀌자 수현이 일어나려고 했고 호범은 그런 수현의 어깨를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수현은 웃으며 호범의 뺨을 만졌다.

“자존심 상했구나?”

그 손을 툭 치더니 호범이 서늘하게 웃는다.

“그런 걸로 상할 자존심은 아니라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수현의 바지와 속옷을 한 손으로 끌어 내렸다. 당황한 수현이

막으려 했으나 이미 무릎까지 내려가고 난 뒤였다. 순식간에 벗긴 바지를 옆으로 던지더

니 수현의 두 다리를 한 손으로 붙들어 가슴 쪽으로 누른다.

엉덩이가 들리고 구멍이 드러나자 호범이 그대로 좆을 가져다 댄다 . 아무 전희도 없는

삽입에 수현은 덜컥 겁이 나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냥 하게? 풀어 주지도 않, 윽.”

막무가내로 밀어 넣는데 구멍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 . 아! 움직이려 하였으

나 다리가 붙들려 발버둥을 칠 수도 없었다. 참지 못하고 쌍욕을 하자 호범이 내려다보

며 악마처럼 웃는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고 양호범을 노려봤다. 여기서 관두자니 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

아올랐다.

“진짜… 아파.”

“또 징징거리네. 이게 네가 말한 어른 섹스야?”

“개새끼야. 네 자지를 탓해.”

“그럼 관둘까?”

몸을 빼려 하기에 수현은 호범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살살 해 달라고 살살. 다정

하게.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냐. 라고 쏘아붙이니 호범이 붙들고 있던 다리를 놓아

준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수현이 다리를 벌리자 호범이 그 가운데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 . 구멍 끝에 걸쳐 있던 좆

이 다시 입구를 넓히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범의 상반신이 아래로 내려오자 수현은 그

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취했는데도 구멍을 넓히며 들어가는 감각이 생생하다. 그나마 처음보다 움직임이 부드

럽다.

“아….”
앓는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양호범의 다리에 문질렀다. 양호범이 이를 까득 무는 소리가

들린다. 씨발, 좁아서. 수현이 팔을 풀자 호범은 허리를 세우고 교합 부위를 내려다봤다.

좆은 아직 반도 채 들어가지 못했다.
40 화

“살살, 살, 윽!”

퍽, 반쯤 들어간 좆을 양호범이 예고도 없이 쑤셔 넣는 바람에 수현은 상체를 뒤틀며 어

쩔 줄 몰라 했다. 잠깐. 그렇게 갑자기 넣으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호범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남아 있던 좆이 완전히 삽입되며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호범은 수현의 머리 위쪽을 손으로 짚은 뒤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퍽, 퍽, 퍽, 멈추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못하고 신음과 함께 목구멍에 턱 걸린다. 엉덩이와

허리는 들리고 두 다리는 허공에서 흔들렸다. 이를 꽉 물고 허리를 치대는 양호범의 표

정은 섹스가 아니라, 어딘가 화가 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파, 으읏.”

단단한 몸통으로 누르니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 호범의 머리가 수현의 왼쪽 어깨 위

로 내려가며 삽입도 깊어진다. 하아, 간간이 숨소리에 욕설이 섞여 나온다. 씨발, 존나,

조이네. 하는 소리도 들리고, 배 속이 짓이겨지는 기분이다.

몸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취한 게 아니었다면 고통에 몸부림을 쳤을 텐데. 생

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좆이 커서 깊숙한 곳까지 건드려 주니 쾌감은 평소보다

배가 됐다. 수현은 입을 벌린 채 눈을 내리깔고, 헐떡였다.

“아, 아아, 아,”

그러다 갑자기 양호범이 수현의 어깨 아래로 손을 넣는다. 뭘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들

어 올리더니 소파에 앉는다. 졸지에 자세가 바뀌어 삽입한 채로 양호범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꼴이 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삼백안. 거칠게 오르내리는 어깨.

양호범의 헝클어진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짜릿하다. 수현은 그의 좆을 엉덩이에 넣은 채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고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욕망만이 들끓는다. 엉덩이를 들었

다 내렸다 하며 요분질을 치자 양호범의 눈 밑이 일그러진다.

수현은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붙들고서는 눈을 보면서 웃었다.

“좋아?”

하고 물었는데 양호범이 비죽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키스 대신 그의 뺨을 핥았

다. 소파에 기대 있던 호범의 손이 수현의 허리를 붙든다 . 그리고 동시에 아래에서 올려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와는 다른 강도로 자극이 온다 . 수현은 여유를 잃고 호범

을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 위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잠깐, 응? 아아! 아읏!”

“알았으니까, 힘 빼.”

개새끼. 내가 조이는 게 아니라 네 좆이 커서 구멍에 안 맞는 거야 . 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박을 때마다 몸이 튕겨 올라간다. 그럴수록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아래로 강하게 눌렀다.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 양호범의 어

깨를 빨다가 잇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물었다. 신음은 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마구

잡이로 흩어졌다.

사정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온몸에 전기를 맞은 것처럼 찌릿

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구멍은 저절로 더 좁아졌다 . 양호범이 하, 씨발. 하고 욕을

내뱉는 걸 들었는데 어느 순간 울컥, 정액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 멈추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놈이 기계처럼 아래에서 찍어 올린다 . 사정한 상태에

서 구멍을 쑤셔 대니 죽을 것 같다. 잠시, 만. 야. 잠깐. 그의 팔을 붙들었으나 소용없었다.

씨발. 있는 힘을 다해 어깨를 밀고 떨어지려 하는데 그대로 몸이 소파로 내던져진다.


앞으로 기어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붙들려 끌려간다. 동시에 호범이 등 뒤에 올라타 바로

퍽, 소리가 나게 좆을 쑤셔 넣었다. 뒤에서 들러붙어 짐승처럼 허리만 움직이는데 이러

다 구멍이 잘못될까 걱정이 들 정도다.

“야, 아아! 나 쌌, 아, 그만. 그만, 아읏.”

“씨발. 후, 하자고 덤빌 땐 언제고.”

소파에 좆이 눌려 막무가내로 비벼지니 다시 사정감이 몰려온다 . 귓가로 양호범의 숨소

리가 들리며 그날 밤 기억이 일부분 떠오르는 거 같기도 하다. 그때도 이렇게 무식하게

박았지. 자기 욕정만 채우느라 급급해서. 매너라고는 더럽게 없는 새끼.

하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쾌감은 평소와 다르게 더 날뛰었다 . 눈앞에 보이는 TV 화면에

서는 아직도 토론이 한창이다. 대선 어쩌고 하는 이야기와 함께, 시야가 몇 번이나 흐릿

해짐을 느꼈다. 그러는 와중에 양호범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움직이는 속도는 빨

라진다. 수현은 숨을 헐떡이며 입을 움직였다.

“안에 말고, 밖에, 밖에, 으응.”

퍽, 엉덩이를 짓누르며 양호범이 안에 울컥 정액을 쏟아 낸다. 이거 끝까지 개새끼네. 등

에 닿은 그의 가슴과 복부가 사정으로 인해 더욱 단단하게 수축했다. 수현은 거의 탈진

한 채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팔다리를 늘어트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등에 달라붙어 있던 양호범이 떨어져 나간

다. 수현은 가늘게 눈을 뜨고 있다가 가까스로 겨우 소파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입고 있

던 셔츠 밑단이 정액으로 범벅이다.

수건으로 대충 닦고 바지를 입는데 옆에서 양호범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앉아 있다 . 그

리고 무엇 때문인지 머리를 한 번씩 흔든다. 지켜보던 수현이 슬그머니 옆으로 갔다.

“어디 아파?”

돌아보는 호범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아, 씨발. 호범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

르고 일어나려고 하다가 주저앉는다. 호범이 수현을 응시한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눈꺼

풀에 거의 잠기기 직전이다. 초점을 맞추려는지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너….”
그가 갑자기 수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현이 재빨리 일어나 뒤로 피하자 호범이 같이

일어선다. 하지만 그는 다시 주저앉았고 그대로 소파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 널찍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힘겹게 눈을 뜨고 수현을 찾는 거 같았으나 그것은 그리 오

래가지 못했다. 수현은 천천히 그 앞으로 갔고, 의식을 잃어 가는 호범을 보며 입가에 안

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준다고 막 먹으면 어떡해. 응? 호범아.”

수현은 의식이 없는 호범을 보다 그의 텅 빈 술잔을 내려다봤다. 양호범의 사촌 형, 그러

니까 김우영이 필요한 약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해서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친척 집

에 소를 키우는데 가끔 미쳐 날뛰니 재울 수 있는 약을 달라고 하자 그는 마침 적당한 게

있다며 알약 두 개를 줬다. 이거 한 알이면 소가 아니라 더 큰 것도 한 방에 잠재운다고.

물론 소가 아니라 양호범이 먹고 잠들었지만. 수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불을 끌

어와 그런 호범에게 덮어 줬다.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리고 미동조차 않길래 그의 입술에

쪽 키스를 하고 웃었다.

“새끼가. 비싸게 굴고.”

그리고 서둘러 호범의 차 키에서 카드 키를 분리해 내고 채권을 챙겼다 . 외투를 걸쳐 입

고 밖으로 나오는데, CCTV 만 돌아가고 사람은 없다. 저녁에 급습을 당한 사람이 이렇게

태평할 수가. 나 같으면 사방에 경호원을 깔아 뒀을 텐데.

밖으로 나온 뒤 수현은 담배를 물고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술을 깨려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먹고 곧장 택시를 잡아 양호범의 오피스텔로 이동했다 . 40 분 만에 오피스

텔에 도착한 수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지고 온 카드 키를 댔다.

15 층에 불이 들어온다. 내려서 1508 호 앞으로 가 다시 카드를 대니 잠금이 해제되는 소

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던 집에 불이 켜

진다. 실내는 전과 다를 바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수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른쪽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 곧바로 양호범의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책상 위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눈에 띈다. 아버지의 무릎

에 앉은 양호범의 뚱한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났다.


역시 귀염성이 떨어져. 그대로 지나쳐 책장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재선에게 받은 비밀번호 8 자리가 적혀 있다. 그는 어젯밤 드디어 번호를 알아냈다고 신

나서 연락을 해 왔다.

사실 이걸 꼭 써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오늘 양호범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더 있다간 내 목숨이 위험하다.

수현은 심호흡하고 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제 금고를 확인하고 버튼만 누르면,

“어…?”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잠시 사태를 파악하느라 멍청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텅

빈 안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뭐지. 언제 치웠어. 당황하여 다른 문도 열고 책상 아래부터

시작해 서재를 다 뒤지는데 금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큰 걸 쉽게 옮겼을 리가 없는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금고가 있을 만한 곳을 다 훑

었다. 아래층까지 내려가 뒤져도 금고는커녕 비슷한 것도 없다 . 수현은 초조함을 애써

누른 채 얼굴을 문질렀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침대 매트도 들추고 냉장고 안까지 샅샅

이 살펴봤다.

“씨발….”

생각해. 어디에다 뒀을지 생각해 보란 말이야. 머리를 쥐어뜯던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수현은 흠칫하여 외투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양호범 세 글자가 적혀 있다. 믿기지 않아 다시 확인하니 양호범이 맞다. 김우

영 말로는 소도 먹이면 하루는 꼬박 잔다고 했는데….

수현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떼고 전화를 귀로 가져갔다 .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

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건너에서 들려오는 양호범의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양 사장 취해서 자길래, 호텔 왔어. 내가 잠자리가 바뀌면 잘 못 자거든.”


거짓말을 하는데 호범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 물

어뜯었다. 신경은 온통 수화기 너머로 집중됐다.

[거기 없어요.]

호범이 영문 모를 소릴 한다.

“응?”

[금고 거기 없다고. 괜한 짓 하지 말고 와요.]

“…….”

[1 시간 줄게.]

그러더니 뚝, 전화가 끊긴다. 수현은 휴대전화를 보며 안색이 질렸다. 씨발. 알고 있었구

나. 눈을 질끈 감고서 생각에 잠기던 수현은 결심을 굳힌 듯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그

러고는 호범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1 화

미쳤냐. 내가 너한테 돌아가게. 택시에서 내린 수현은 곧바로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

계단을 내려가는데 노숙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 그들을 지나쳐 물품 보관소 쪽으

로 걸음을 서둘렀다. 화면에 보관함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45 번 앞으로 가서 문을 잡아당

겼다.

검은색 배낭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방을 반쯤 꺼내 지퍼를 열자 현금이 가득

이다. 양호범의 신용카드로 뽑았던 바로 그 돈. 혹시 몰라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두길 잘했

다. 수현은 품에서 채권을 꺼내 가방 안에 넣은 뒤 그것을 챙겨 돌아섰다.

옷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지하철역에서 나와 근처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늦은 시간

이라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버스가 끊겨 남아 있는 것은 몇 개뿐이었

다. 가장 먼 여수행 티켓을 발권한 뒤 수현은 TV 를 시청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았

다.

시간이 흘러 양호범이 말한 1 시간을 훌쩍 넘겼다.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살

피게 된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수현을 태울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됐다 .

일어나 8 번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는데 이미 몇 사람이 대기 중이다.

수현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미처 지우지 못한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꺼 뒀던 휴대전화를 켜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휴대전화를 초기화시키려 하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들어온다.

양호범이다.
뒷목이 서늘해진다. 혹시 이곳에 온 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사진 하나가 첨부되었다. 병원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는데, 머리엔 붕대를 감고 호흡

기를 착용하고 누워 있다.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수현의 눈이 점점 커진다. 그

리고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도착한다.

[호흡기 떼기 전에 오는 게 좋을 거야.]

하… . 하하 … . 믿기지 않는 눈으로 수현은 사진을 확대했다. 늙고 주름이 많은 얼굴이긴

하지만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남자다. 자신의 아버지. 백광무. 그가 왜. 아니, 양호범이 어

떻게 그의 사진을….

혼란스럽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버지가 왜 잡혀 있는지가 아니다 . 거기 가면 내가

죽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수현은 결심을 굳히고 휴대전화를 초기화시켜 그대로 쓰레기

통에 던졌다.

마침 버스가 들어온다. 정차한 버스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탄다 . 수현은

구석진 맨 뒷자리에 앉아 심란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잠시 떠났던 운전기사가 돌아

와 출발하기 위해 문을 닫고 시동을 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현은 갈등했으나 곧 결론을 내렸다 . 더는 그 인간 때문에 피해받고

싶지 않다. 어차피 잡혀 오면 맞아 죽든 말든 상관 안 하려고 했다 . 그러니 지금은 떠나는

게 맞다.

❖❖❖

아. 호범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술에 뭘 탄 건지 깨어난 다음부터

두통이 가시질 않는다. 작게 한숨을 내쉬니 앞좌석에 있던 윤 실장이 돌아보며 걱정스러

운 투로 묻는다.

“괜찮으세요?”
“아니요. 대가리가 깨지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의문의 약 때문인지 백수현 때문인지 모르겠다. 실실 웃으면서 섹스하자고 덤벼 놓

고 뒤통수를 치고 튀어?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계

획이었을까. 생일 선물을 사 준다고 한 거? 아니면 식당에서 밥을 먹은 거? 혹시 김태신

한테 일부러 연락한 건가. 아니면 서민준 얘길 할 때부터?

“저 한심하죠?”

윤 실장에게 물으니 그가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이제 좀 사람 같습니다.”

그 말에 호범도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 자신의 뒤통수를 친 인간이 또 있던가 . 예쁘기만

한 병신이라고 너무 만만하게 본 게 실수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눈을 팔았다는 게

맞을 거다. 섹스 따위 하자고 했을 때 애초에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저답지 않은 선택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백수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백수현, 올까요?”

호범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자에 기대며 대답했다.

“올 겁니다. 어설프게 못 돼먹은 인간이라.”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덧 호텔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PH 층으로 올라가 문

을 열고 들어가는데 수영장 반투명 유리 안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 왔다 갔다

움직이던 그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손에 밀대를 든 백수현이다.

호범은 웃으며 윤 실장을 돌아봤다.

“거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호범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싹 사라졌다. 백수현은 호범을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

게 꾸벅 인사를 하고 청소를 마저 한다. 호범이 코앞까지 다가갔는데도 바닥만 닦고 있

다. 잠을 못 잤는지 얼굴이 퀭해서는.

고개를 드는데 의기소침한 표정이다. 그러면서 눈으로 거실 테이블을 가리킨다. 거기엔

검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너한테 받은 거 다 저 안에 있어.”
호범은 손목시계를 봤다.

“1 시간 줬는데, 12 시간 만에 나타났네요.”

풀 죽어 있던 수현은 눈빛에 날을 세우고 호범을 노려봤다.

“네가 먼저 나 속였잖아.”

“그래서.”

더 말할 것도 없이 수현은 주머니에서 흰색 봉투를 꺼내 양호범에게 내밀었다 . 호범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봉투 겉면을 훑는다. 사직서. 호범이 받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자

수현은 그걸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더는 너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 다 돌려줬으니까, 관둘 거야.”

“백광무는?”

호범의 말에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백광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그때 왜

엄마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는지. 내가 살아 있는 걸 정말 몰랐는지, 아니, 찾아보기는

했는지. 사진 속 상태로 보아 당장 대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마음대로 해. 죽이든 살리든.”

양동이에 청소 도구를 넣고서 나가려고 하는데 호범이 수현을 부른다.

기다려요. 줄 게 있어. 그가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무언가를 가지고 나온다. 노란 서

류 봉투. 쳐다만 보니 그것을 수현의 가슴팍에 안겨 주고 눈짓을 한다 . 나가요. 수현은 그

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보자마자 죽인다고 개지랄을 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지 더 무섭고 의심스러워졌다. 숙소로 돌아온 수

현은 짐을 먼저 챙기려다 관두고, 조금 전 양호범에게서 받은 봉투를 열었다.

종이가 한 장 딸려 나온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인데. 종이의 가장 윗부분에 있는 글자

가 수현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술서? ‘ 저는 0000 년 00 시 00 분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로 시작하는 글자는 낯이 익은 필체였다.

읽을수록 수현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가 보니 이미 백수현이 피해자인 정동철을 과도로 여러 차례 찌른 후였습니

다. 저는 말리려고 하다 손과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서둘러 119 에 신고를 하려 했지만,

백수현의 협박으로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수현이 경악했다. 종이를 잡은 손끝이 떨려 왔다. 이게 뭐야…? 그리고 아래 진술서를 쓴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현은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종이를 들고 있던 손에 힘

이 빠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진술서 마지막에 적힌 낯익은 이름.

수현은 휘몰아치는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숨만 몰아쉬었다.

눈알은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명치가 꽉 조여 온다.

[너한테 미안한 게 많다.]

설마 … 이런 뜻이었어? 믿기지 않아 다시 종이를 주워 들었다. 위조했다고 생각하기엔

필체가 서민준의 것과 너무 흡사하다. 자신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면서 수없이 반복하며

익힌 그의 필체.

수현은 괴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윤 실장이 나온다. 까닥 목 인사를 하는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양호

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첨벙. 수영장에서 물소리가 난다. 뛰쳐 들어가니 양호범이 잠영을 하여 유연하게 움직이

고 있었다. 야. 하고 불렀으나 들었을 리가 없다. 수현은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그를 불렀

다.

잠시 후 그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을 닦아 내며 싱긋 웃는다. 왔네?

수현은 복받쳐 오르는 울분을 꾹꾹 눌러 가며 호범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너 이거 조작했지?”

호범은 가까이 다가와 양팔을 수영장 턱에 엇갈고서 수현을 올려다봤다.

“그랬으면 좋겠나 봐요?”

“사실대로 말해.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다는 모르지만 이건 알지. 백수현을 처넣는 데 서민준이 일조한 거.”


수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정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믿고 싶었으나, 증거가 너무 확실하다.

악착같이 참았는데 결국 시야가 흐려진다.

“왜. 이제 좀 억울해졌어?”

닭똥 같은 눈물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씨발.

쪽팔려서 얼른 닦자 아래서 양호범이 올려다보며 안타깝게 웃는다.

“그러니까, 수현아. 왜 그런 새끼한테 마음을 줘.”


42 화

그날 삼계탕집을 운영하는 서 씨 부부는 인근에 사는 지인의 칠순 잔치라 그곳에 갔고,

집에는 수현과 서민준 그리고 서민준의 누나인 서윤경만 머물고 있었다 . 서윤경은 다니

던 직장을 관두고 올해 초부터 부모의 일을 돕고 있었으며 서민준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주말이면 내려와 생활했었다.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서민준은 서 씨 부부의 자랑이었다 . 아마 지금쯤 그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들 얘기를 한창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 수현은 그런 서민준이 대단했

고, 존경스러웠으며 한편으로 그 이상의 감정도 품고 있었다.

그날도 수현은 서민준에게 붙들려 수학 문제집을 푸는 중이었다.

“아니야. 여기, 틀렸잖아.”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질 않아 앞니로 손톱을 물어뜯으니 서민준이 손을 잡는다. 물어뜯

지 마. 말은 엄한데 눈빛은 따스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서민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형이 잘생겨서.”

당돌한 수현의 말에 서민준이 웃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솜털이 보송거리는 수

현의 귓불을 만졌다. 수현은 주인에게 예쁨받고 싶어 하는 고양이처럼 그의 손에 뺨을

문질렀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수현은 익숙한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입술이 닿았다가, 춥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다.


수현은 얼굴을 붉혔다. 서 씨가 알면 기함할 일을 둘은 1 년 전부터 눈을 피해 자행했다.

그 시작은 서민준이었다. 예쁘다. 수현아. 네가 너무 예뻐서 서울에 있으면서도 계속 네

생각을 했어. 졸업하면 서울로 데리고 갈게. 거기서 나하고 살자.

수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서로 웃으며 손을 잡고 만지작대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겨울바

람에 무언가 떨어진 건 줄 알았다. 이어서 들린 찢어질 듯한 비명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

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소리가 난 곳은 안채와 떨어져 있던 서윤경의 방이었다.

불이 꺼진 방으로 서민준이 뛰어들었고, 대뜸 고함을 치더니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뒤늦게 도착한 수현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두

명의 사람이 서로의 멱살과 팔을 붙든 채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 바닥에는 책과 컵 등이

떨어져서 뒹굴고 구석엔 윗옷을 풀어 헤친 서윤경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수현은 어떻게든 민준을 도우려 침입자의 뒤로 가서 붙들었다. 그러자 남자

가 팔을 크게 휘둘러 수현의 턱을 가격했다 . 윽, 얼굴을 잡고 쓰러진 사이 두 사람의 몸싸

움은 더더욱 격렬해져 이젠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하였다.

그때 남자의 주머니에서 칼 하나가 툭, 떨어진다.

먼저 발견한 건 서민준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칼을 쥐었고, 칼끝을 그대로 남자의 옆구

리에 찔러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어 서민준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이 졸리면서도 서민준은 다시 칼을 치켜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윤

경이 말리고 수현이 기어가서 붙들었으나 그의 힘을 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죽어 이 개새끼야!

칼이 이번엔 가슴에 꽂힌다. 아아악! 분노에 휩싸여 짐승처럼 악을 쓰는 서민준은 자신

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발악을 하던 남자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서민준을 조르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수현은 겁에 질린 채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수현은 서민준의 눈동자가 괴이하게

빛나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민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모습. 수현은


공포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고, 서윤경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울컥, 피를 토한 남자의 눈동자가 위로 점점 말려 올라간다 . 서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

며 죽어 가는 남자와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서서히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아,

하아, 차츰 그의 호흡이 느려지고 얼굴에는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민준이 왔니? 마당은 왜 이 모양이야?]

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잔치를 마치고 돌아온 서 씨 부부였다. 툭,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민준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나간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의 몸에서 미끄러

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내 말대로 해요, 형님.”

“그래도… 어떻게 그래.”

“ 아 답답하네. 수현이 쟤는 어려서 감형이 된다니까. 게다가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하면

판사도 많이 봐줘요. 우리가 탄원서 같은 것도 내 줄라니까. 막말로 부모도 모르는 애 주

워다 먹여 주고 입혀 줬으면, 이 정도 은혜는 갚아야지.”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그럼 어쩌시게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저대로 감옥 가게 둘 거예요, 예?”

그날 집으로 돌아온 건 서 씨 부부뿐만이 아니었다. 부부와 혈육처럼 지내던 이장도 함

께였다. 이장은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 백수현이 저지른 거로 마무리 짓자고 설득했다.

벽 뒤에 숨어 몰래 이야기를 듣던 수현은 마루에 앉아 있는 서민준을 바라봤다 . 그는 얼

굴에 피 칠갑을 하고 넋이 나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칼을

쥐며 생긴 상처로 인해 살점이 벌어져 피가 흘렀고, 서 씨 부인은 어떻게든 그 상처를 막

으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벽을 돌아 서 씨에게 갔다 . 수현을 본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

다.

“넌 왜 나왔어? 들어가.”

“아저씨….”
수현은 아직도 놀란 게 가라앉질 않아 입술이 덜덜 떨렸다.

“형, 형이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찔렀어요….”

서 씨의 눈이 커진다. 이장은 서 씨를 툭, 치고서는 눈짓을 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서 씨는 이내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침묵했고 이장이 다가와 수현의 팔을 붙들었다.

“ 어린 게 얼마나 놀랐겠어. 친누나 같은 애가 그런 꼴을 당하는데,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잖아. 수현아. 그렇지?”

수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이장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서 씨는 끝끝내 수현을 쳐다보지 못했다. 이장의 시선이 수현의 어

깨 뒤로 넘어간다.

“민준아. 정신 차려 이놈아. 조금 있으면 너희 큰아버지 와!”

수현은 뒤를 돌아봤다.

서민준의 총명하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수현은 그런 서민준을 향해 슬픈 얼굴로 웃었다.

걱정 마, 형. 형은 내가 지켜 줄게.

❖❖❖

“그러게 잘 좀 구슬려서 데리고 있지.”

“구슬려요? 볼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은 걸 할아버지가 부탁해서 간신히 참은 거였어

요.”

쯧쯧, 그놈의 성질머리.

양 회장의 핀잔에 호범은 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양 회장이 또 한 소리 한다.

“담배를 끊더니, 껌 중독이 됐구나.”


“보시기에 안 좋죠? 그냥 지금이라도 땅 주실래요?”

호범의 말에 양 회장은 콧방귀를 뀌며 뻔뻔한 놈이라고 흉을 봤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양 회장에게 호범은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남들 눈에야 호범이 그 나이답지 않게

일 처리를 하니 의젓하게 보일지 모르나, 제게는 아직 어린 손주였다.

양 회장은 호범을 다섯 살 때, 아들 부부가 사고로 죽은 다음에야 처음 만났다. 제 뜻을

거스른 아들이기에 인연을 끊고 살았고, 그래서 손주에게도 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

니었다.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닮은 손주를 보자 핏줄이 당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아이라면 내가 가진 걸 모두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호범은 그해 부모를 잃은 충격 때문인지 1 년 가까이 말을 하지 못했다. 양 회장은

애가 끓었다. 며느리를 닮아 손주 놈도 농아인 건 아닐까. 좋다는 병원이란 병원은 다 수

소문했고, 나중엔 중국에서 용하다는 침쟁이까지 데리고 왔었었다.

그러니 1 년 뒤 말이 트였을 때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 이후로 양 회장은 호범

이 제게 말대꾸를 하거나 버릇없이 구는 것 또한 그저 재롱처럼 느껴졌다.

“서민준이 그런 건 확실하대요?”

“당시 거기 파출소장이 서민준 큰아버지였어. 처음 출동한 것도 그 사람이고. 담당 형사

말로는 수상한 점이 있었대. 몸싸움한 흔적도 그렇고, 칼 쥔 놈은 백수현인데 서민준 손

이 찢어졌더래. 왜 칼 쓰는 놈들은 알잖아. 잘못 쥐면 어디가 베는지.”

호범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양 회장은 그런 호범을 향해 눈을 흘기고 말을 이어 갔다.

“ 근데 그 죽은 놈이 서울에 있는 집 자식이었던 게야 . 친구들하고 놀러 왔다가, 서민준

누나한테 딴마음을 품고 일을 치른 거지. 나중엔 담당 검사한테도 압박이 들어가고, 대

충 넘어갈 사건이 발칵 뒤집혔나 봐. 그 상황에서 서민준은 어떻게든 죄를 피하려 거짓

진술을 했을 테고.”

호범은 진술서에 적힌 내용을 상기했다.

“원래 시골이란 데가 그래.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놈들이니, 사건을 은폐하기 더 쉽지.”

호범은 찻잔을 바라봤다.


저를 보며 눈물을 뚝, 떨구던 백수현 얼굴이 잠깐 스치고 간다.

억울한 걸까? 분한 걸까?

“그러니 찾아서 데리고 와.”

“싫어요.”

“범아,”

호범의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 어디 있는지 몰라요. 관심도 없고. 아, 혹시 모르죠. 열 받는다고 서민준 찾아가서 칼로

쑤셨을지도.”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짜릿하다. 그래 주면 씨발, 백수현한테 좆이 아니라 더한 것도 내

줄 것 같다. 물론, 그 예쁘기만 한 병신이 그럴 배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 귀 하나 자르

는 것도 벌벌 떨면서 토악질을 하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었나.

그리고 영감의 우려와는 달리 백수현은 분명 돌아온다. 이미 맛봤지 않은가. 빚을 떠안

긴 옛 애인의 귀를 자르고, 비싼 시계를 차고, 좋은 옷을 입고, 돈을 손에 쥐고, 그것이 얼

마나 달콤한지를….

그러니 어디서 뒈진 게 아니라면 분명 돌아올 것이다.


43 화

“얼마예요?”

주인이 계산대에 있는 소주 열댓 병을 세더니 봉투에 나눠 담아 준다.

“집에서 파티라도 하나 보네.”

수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지갑을 열고 오만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주인이 잔돈을 거슬

러 준다. 이제 남은 돈은 기껏해야 싸구려 모텔에서 일주일 정도 묵을 수 있는 것이 전부

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돈 얼마라도 빼고 돌려줄걸 . 막상 돈이 궁해지니 자존심이고 뭐고

또 없어지려 한다. 참, 돈이란 놈이 얄궂다. 평생 돈이 없을 때는 모르겠더니 막상 큰돈을

손에 쥐고 있다가 사라지니 아쉽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하고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

서민준을 마주치고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

고, 술을 마신 뒤 나눈 대화를 통해 양호범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 그래서

약을 먹인 건데, 놈이 그렇게 빨리 깨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 수현은 숙소에서 꼬박 이틀을 앓았다. 오죽하면 매니저가 병원

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를 피웠을까. 이후 양호범은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수현

은 몸을 추스르고 옷가지만 챙겨 호텔을 나왔다.

검은 봉지에 소주를 가득 들고 남은 현금으로 근처에 있는 모텔을 찾았다. 일주일 치를

계산하는데 사장이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괜한 짓 하지 말라는 표정이다.


그에게 열쇠를 받아 2 층으로 올라가는데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바닥만 한 방에 붉은 2 인용 소파와 작은 TV 가 놓여 있다. 자신이 머물던 옥

탑방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수현은 외투를 벗고 소주 뚜껑을 비틀어 소파 아래 앉아 TV 를 켰다. 그는 습관적으로

TV 를 트는 버릇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가 일하러 가면 밤이 늦을 때까지 TV

를 켜 두었다. 친구도 없었다. 그건 서 씨 부부와 함께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습이 부

진한 데다 남의 집에 부모 없이 얹혀산다는 얘기가 돌면서 친구들은 자연스레 거리를 두

었다.

그래서 늘 TV 를 끼고 살았고 출소하고 사람들을 사귀고 만나면서도 그 버릇은 쉽게 고

쳐지지 않았다. 그런 수현을 보고 서민준은 뭐라고 했더라. TV 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

책을 가까이하라고 했었지.

당시에는 웃었는데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세상에 이만한 바보 천치가 또 어디 있단 말

인가. 이제라도 책을 읽으면 좀 똑똑해지려나. 수현은 깡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빈속

에 소주부터 넣으니 식도가 타들어 가는 거 같다.

TV 에서는 선거철이라 그런지 틀 때마다 보기 싫은 얼굴이 나왔다. 서민준의 장인이라

던 김현식 의원이 부인과 함께 선거 유세장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림

을 배달했을 때 봤던 중년 여성이다. 비싼 그림을 탐욕스럽게 쳐다보던 여자는 시장 상

인들을 향해 세상 둘도 없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어묵을 먹었다.

수현은 그들의 얼굴을 안주 삼아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 그렇게, 한 병, 두 병, 세 병을 빈

속에 마시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 TV 화면이 두 개로 보이고, 귀도 먹먹하고, 몸도

나른해졌다.

그 와중에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종이를 찾아냈다.

복사된 서민준의 진술서다.

앞은 건너뛰고 자신을 경악시킨 중간부터 다시 읽어내려갔다.


[피해자 정동철은 누나의 연인으로 저와도 얼굴을 아는 사이였습니다. 백수현은 평소에

도 서윤경을 이성적으로 좋아했는데 어렸기에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당시 재판에서 두렵고 떨려 검사와 판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죄를 인정하냐고 묻길래 연습한 대로 무조건 그렇다고 했고 , 할 말이 없냐고 해

서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 옆에 앉은 변호사 또한 체념한 듯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백수현은 강간범을 죽여 감옥에 간 게 아니라 , 질투심에 눈이 멀어 멀

쩡한 사람을 칼로 찌른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강간범은 불쌍한 피해자가 됐고.

서민준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간 건 자신의 선택이지만, 이건 아니었다. 서윤경을 짝사

랑하지도, 질투 때문에 살인하지도 않았다. 서민준은 왜 그런 진술을 했을까. 판사에게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쓴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도 없는 걸까.

이쯤 되니 1 년이면 나올 거라던 이장의 말과 달리 수현이 왜 그곳에서 몇 년을 지내야 했

는지 이해된다. 서민준이 아프다며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던 것도.

수현은 진술서를 구겨 버리고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을 누르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케이블 방송에서 오래된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노래가 우울하다. 수현은 이 노래

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떠나간 님이 그리워,

어쩌고 하는.

수현은 기억나지도 않는 가사를 죽은 엄마처럼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TV 를 껐다. 갑자

기 눈물이 고인다. 두 다리를 모아서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밖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 떠도는 소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아이들이 왁자지

껄 웃는 소리.

듣고 있으니 더 울적해져 다시 TV 를 틀었다. 외로운 것보단 차라리 바보가 될래. 갑자기

양호범 집에서 먹은 비싼 술이 떠오른다. 그리고 섹스 같지도 않았던 섹스. 개새끼. 존나

비싸게 굴고. 키스한다고 입술이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원나잇 하는 새끼

들도 입술을 냉큼 내어 준다. 지가 뭐라고.


그나저나 왜 여기까지 와서 그 새끼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

을 새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백광무를 이미 잡아 두고 있었으면서, 말로는 도

망치다 차에 치여 그렇게 됐다는데, 알 게 뭐야 지들이 그렇게 만든 건지.

사실 백광무를 그렇게 만든 게 양호범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

는 거지.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거지. 어릴 적부터 남자하고 붙어먹어

서? 아니면 남의 지갑에 손대서? 마약을 해서? 수시로 거짓말을 해서? 몸을 함부로 굴려

서?

수현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고 웅얼댔다.

“말해 봐요, 씨발.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어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응?”

말해 보라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니 옆방에서 누군가 벽을 쾅 치며 씨발, 조용히 하라며

고함을 친다. 수현은 그곳에 대고 들입다 소리를 꽥 질렀다. 너나 조용히 해! 개새끼야!

그러자 처음보다 더 큰 항의가 이어진다.

전세 냈냐, 얻다 대고 욕이야. 뒈지고 싶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씨발 기다려 너 내가 지

금 쫓아간다! 수현은 술병을 들고 낄낄 웃었다. 와라, 와. 병신아.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

네가 모르나 본데, 나는 말이야, 나는!

“나는 사람도 죽여 봤어!”

옆에서 말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진다. 술 취했나 봐. 그냥 둬. 수현은 허탈

하게 웃고 나서 지갑을 열어 비닐 봉투를 꺼냈다. 양호범에게 먹였던 약 중 하나가 남았

다. 이걸 두 개 다 먹였어야 했나. 하긴 먹였어도 금고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수현은 봉투를 열어 약을 꺼내 입에 넣고 물 대신 소주를 들이켰다. 소도 하루는 꼬박 재

운다고 했으니 난 2~3 일은 푹 자겠지. 아니면 아예 못 깨어나도 좋고. 천국에 가서 엄마

나 만나고 싶다. 근데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지은 죄가 많은데.

혼잣말을 웅얼대던 수현은 옆으로 푹 쓰러져 바닥에 모로 누웠다. TV 선반 아래로 무언

가 스스슥, 기어간다. 바퀴벌레인지 아니면 예전에 약을 끊고 금단 증상을 겪었던 것처

럼 헛것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TV 에서 나오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그 자리를 다른 목소리들이 채운다.


[수현아, 내가 너한테 미안한 게 많다.]

[수현아, 이 병신아. 너는 누굴 좋아하면 앞뒤 가릴 줄을 몰라. 멍청하긴.]

[왜. 이제 좀 억울해졌어?]

응… 억울해. 억울해 미치겠어….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억울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의식이 멀어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이대로 깨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억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슬픈 건지 눈물이 주르

륵 타고 흘러 더러운 카펫에, 뚝, 뚝, 떨어졌다.

❖❖❖

이봐요. 이봐요. 정신 차려 보라니까. 구급차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이봐요! 정신 차려!

짝, 누군가 뺨을 건든다.

아득히 가라앉아 있던 의식을 강제로 끌어 올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어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쩍도 안 해. 죽었나 봐.”

죽긴요.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요.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살집이 두둑하게 붙은 복스럽게 생긴 아주머니.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더니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유, 다행이다. 살았네, 살았어.”

수현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눈알이 말라 버린 것처럼 빡빡하다. 옆을 보니 웬 아저씨도 있다. 모텔비를 계산할 때 퉁

명스럽게 대꾸하던 사장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몸이 가눠지질 않는다. 휘청,

하고 옆으로 쓰러지니 아줌마가 수현을 붙든다.


“괜찮아요?”

아, 목이 따갑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수현은 머리를 간신히 추슬러 주변을 둘러봤

다. 여기저기 빈 술병이 뒹굴고 토한 흔적이 곳곳에 있었으며 창문을 가리고 있던 낡은

블라인드는 줄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목을 매 죽으려거든 딴 데 가서 죽지!”

남자가 호통을 친다.

수현은 놀란 얼굴로 남자를 봤다.

술을 먹고 자다가 깨고, 또 먹고, 또 자다가 깬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목을 맨 기억은 없

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철썩 치며 쏘아붙였다.

“ 아이고 이 양반이. 말을 해도. 살았으니 됐어. 학생. 병원 안 가 봐도 돼? 부모님 연락처

는? 집에 전화할 테니 휴대폰 좀 줘 봐요.”

연락할 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수현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려

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대체 얼마나 이 상태로 있었던 거지.

“3 일 동안 틀어박혀 있었어. 기억은 나? 내가 와 봤기에 망정이지.”

여자가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남자가 여자를 잡아 일으켰다.

“그만하고 우린 내려가. 이봐, 학생. 자네는 우선 씻고 내려와서 얘기해. 냄새가 어후,”

남자가 여자를 끌고 나간다. 혹여 또 나쁜 마음을 먹을까 망가진 블라인드를 챙겨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자기들

끼리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수현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 겨우 정신을 차려 테이블을 잡고 일

어서는데 다리가 휘청인다. 갓 태어난 송아지마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가 테이블

을 잡았다.

속이 쓰리다 못해 불에 달군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프다 . 기를 쓰고 일어서는데 뒤늦게

바지가 눅눅하게 젖은 게 느껴진다. 자면서 소변도 봤구나. 하, 하하. 어처구니가 없다.

주인 남자가 왜 그렇게 인상을 쓰며 코를 막았는지 알 것도 같다.


비틀거리고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꼴이 말이 아니다. 뺨은 쑥 패고, 눈은 푹 꺼지

고, 목에는 시뻘건 자국까지. 지저분해진 머리와 뺨을 문지르고 나서 세면대를 짚고서

물을 틀었다. 바싹 말라 버린 목을 수돗물로 채우고 나서 씻기 위해 옷을 벗었다. 오래된

욕실은 어금니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추웠다.

거기에 찬물을 틀고 머리부터 적시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한참 물을 뿌리고 나니

몸에서 뿌연 김이 피어오른다. 수현은 수건을 가져와 얼굴을 닦고 나서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제 몰골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꼴이 아주….”

볼만하네, 씨발.

수현은 밖으로 나오며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 부르터진 입술로 담배를 물었다.

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노을이 지느라 하늘이 빨갛다.

그걸 보는 수현의 눈동자는 차츰 분노와 증오로 잠식되어 갔다.


44 화

모텔에서 나온 수현은 편의점을 찾았다. 머리가 핑 돌고 속도 좋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

져 남은 돈을 털자 구겨진 천 원짜리와 오백 원짜리가 나온다 . 그걸 가지고 우선 편의점

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샀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허겁지겁 먹고 나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 수현은 오랫동

안 그곳에 앉아 정신이 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난 뒤에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탔다. 날

씨는 추웠으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은 따뜻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졸다 깨기를 반복하고 나니 어느덧 목적지 근처였다 .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골목을 돌자 양 회장의 자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차

장을 지나 대문으로 걸어가는데 근처에 있던 직원 하나가 수현을 멈춰 세운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니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수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

는다. 아무리 씻었다고는 하나 삼 일 밤낮을 술만 처먹고 거기다 목에는 시뻘건 줄 자국

까지 났으니 이상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양 회장님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시죠?”

“백수현이라고 하면 아실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남자가 가로막으며 인상을 쓴다. 여기 너 같은 놈들이 찾아오는

데가 아니야. 하는 표정이다. 그때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자 김우진이 교

복에 코트를 입고 뛰어온다. 숨을 몰아쉬는 그의 코끝이 추위에 빨갛게 물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연락도 안 되고… . 걱정돼서 호텔 앞까지 찾아갔는데 다들 모르겠다

고….”

“미안…. 그렇게 됐어.”

김우진의 눈이 거칠어진 얼굴과 목에 난 자국에 닿았다 . 복잡한 표정을 하더니 수현의

팔을 붙든다. 일단 들어가요. 할아버지 뵈러 온 거죠? 직원이 자연스레 길을 내주자 우진

이 그를 보고, 명찰을 본다.

“이 부장님. 사람 얼굴 하나 못 알아봐서 밖에다 세워 두시면 어떻게 합니까.”

은근 질책하는 말투다. 나이 많은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수현의 팔을 잡아끈다. 수현은 그런 우진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어리고,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 아버지

뻘 되는 직원에게 쓴소리할 줄도 알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 쪽으로 가는데 양 회장이 마루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다. 한복에

두툼한 털조끼를 걸치고, 긴 담뱃대를 문 모습이 어릴 적 동화에서 본 어느 양반집 영감

과 비슷하다. 그의 옆에는 전에도 본 비서라는 남자가 서 있었다. 수현은 양 회장에게 허

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쩐 일이야.”

노인은 비난이 아닌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한 말투였다.

“도망은 아니고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생각?”

“네.”

“우선 들어오게.”

수현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노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붉은 보료가 깔린 방이

었다. 처음 보는 장소라 둘러보는데 벽에 걸린 액자가 시선을 잡아끈다. 거기엔 노인과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양호범, 김우영, 김우진.


찍은 지 꽤 된 것 같은데 김우영은 자신이 알던 약쟁이가 아닌 듯 아주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김우진은 지금보다 아이 같았고, 그리고 양호범은… . 저 새끼는 저 때도 늙

었네. 수현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저 얼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앉아.”

수현은 양 회장 맞은편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비서가 나가고 잠시 뒤 우진이 다기를 들

고 나타난다. 이곳에 오면 그가 늘 차를 우려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구먼.”

수현은 쓰게 웃었다.

“그래. 범이에게 다 들었다지.”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원망하나. 내가 자네 아버지를 핑계로 자네를 속여서?”

“ 처음엔 당황하고 열받고 그랬는데, 지금은 상관없어요. 죽이든 말든 그건 마음대로 하

세요.”

“그 말인즉슨,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부리기 위한 인질은 될 수 없다?”

“네….”

“여기 찾아온 연유는?”

“새로운 계약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계약?”

수현은 우진을 바라봤다. 그는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동안 찻잔을 데우고 있었다. 마

치 이곳의 일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 시선을 알아채고 양 회장이 웃는다.

“말해도 되네.”

수현은 양 회장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양 회장은 얼마나 살까. 요즘 인간의

수명이 100 세라고 하는데 노인의 나이는 대략 80 세는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호범

이 다 물려받는 건가. 그 많은 재산을.

“원하시는 목적 이루게 해 드릴게요.”

“내가 원하는 거?”


“회장님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고, 서민준 검사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

“그걸 자네가 둘 다 이루게 해 주겠다?”

양 회장은 수현을 빤히 보며 침묵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증거도, 목격자도 없었다. 유일

한 목격자인 서윤경과 서 씨 부부는 해외에서 거주 중이었고, 만약 이곳에 있다 하여도

진실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백수현의 자백밖에 없다.

그 파장이 얼마나 셀지는 장담 못 한다. 서민준을 흔들기만 할지 아니면 그를 정말 바닥

까지 끌어내릴지. 자칫하다간 되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호범은 처음에 계

획을 듣고 반대하기도 했었고.

“서 검사를 상대할 묘책은 있고?”

“동영상 만들어 올게요.”

“동영상?”

“섹스 동영상.”

수현은 옆에 있던 우진의 움직임이 멈춘 걸 알아챘다. 노인의 주름진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위치로 돌아온다.

“서민준과 제가 무슨 사이였는지 아시잖아요.”

“그래. 그 집에서 일하던 직원이 입을 열더군. 둘이 낯부끄러운 짓을 하는 걸 봤다고. 사

장 내외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듣고 나서도 미심쩍어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수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둘이 집 근처 숲에서 물고 빨고 하는 걸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직원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입을 다물었고, 얼마 못 가 가게도 관두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양 회장이 그 사람을 찾아냈다는 게 더 신기했다.

“과연 그게 먹힐까. 자네를 경계할 텐데.”

“회장님이 생각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방송에라도 나가 떠벌리길 바라시

는 모양인데, 그러다 잘못되면요. 저만 병신 되는 게 아니라, 회장님한테도 타격이 갈 텐

데요.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이 낫지 않겠어요?”

요놈 보게. 양 회장은 웃으며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 치고. 그럼 자네가 원하는 건 뭔데.”

“ 제 몸값이 올랐으니 50 억 주세요. 물론 성공했을 때 얘기고, 못 하면 그땐 어떤 처분도

달게 받을게요.”

양 회장은 소리 없이 웃었다. 10 억 얘기를 하면서도 덜덜 떨고 눈치를 살피더니, 그새 배

포만 커졌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겠나?”

“아니요, 하나가 더 있는데….”

수현은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양호범이 회장님께 땅 받기로 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담배 끊는 조건으로.”

“자네한테 그 얘길 해?”

“네….”

“그래서?”

“그거, 김우진한테 주세요.”

쨍그랑, 김우진의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김우진이 그대로 정

지한 채 수현을 바라봤고, 이번엔 양 회장도 꽤 놀란 듯 보였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가고

입술이 오므라졌다.

“호범이한테 주기로 한 땅을, 우진이에게 줘라?”

“네.”

“이유는?”

“양호범 새끼, 엿 먹으라고요.”

조개처럼 다물려 있던 양 회장의 입술이 꿈틀하고 움직이더니 옆으로 벌어진다, 하, 하

하, 하하하,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 그는 몸까지 젖히며 웃었다 . 수현은 그의 웃음이 멎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우진은 옆에 있던 마른행주로 쏟아진 물을 황급히 닦고 있었

다.

“백 군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친구야. 자네 아버지보다 훨씬 재미있어.”

“주실 겁니까?”
“거절하고, 차라리 돈을 더 주겠다고 하면?”

“그건 저도 거절합니다.”

단호한 수현의 태도에 양 회장은 고민이 깊어졌다. 그 땅은 어린 시절 호범이 부모와 함

께 지내던 터이기도 했다. 집과 작업실, 그들이 단란하게 일구어 낸 밭. 아들이 사망한 뒤

양 회장은 그 땅을 사들였고, 최근 사실을 알게 된 양호범은 그것을 자신에게 주기를 원

했다.

죽은 부모에 대한 마음을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는데, 혹시 그리운 걸까.

자식이니 그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지만 , 만약 그것을 김우진에게 줬다는 걸 알게 되

면….

“자네, 범이 감당할 수 있겠나.”

수현은 고민할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바싹 마른 입술에 핏기가 맺혔다.

“뭐, 얻어터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

매니저는 수현을 쫓아다니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는데 입술이 터

져 피가 난다. 손등으로 대충 문지른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뒤

쫓아 온 매니저가 막 뽑아 온 티슈를 건넸다. 피 닦아.

“그 얼굴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래. 가서 쉬어. 다른 직원들 시키면 돼.”

“올라가겠다는 직원이 있어요?”

순간 매니저가 당황한다.

“없으면, 내, 내가 가지.”
“아, 됐어요. 말이나 더듬지 마세요.”

그래도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나쁘진 않네. 수현은 씩 웃고 나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한숨을 푹, 푹 내쉬는 매니저 얼굴이 보인다. 참 좋은

사람이다. 누구와는 달리.

PH 층에 도착해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 수현은 엉망이 된 풍경에 인상이 저절로 구

겨졌다. 개판이네, 아주. 청소하는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프

런트 직원의 말로는 양호범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역시나 침실에 누군가 널브러져 있다. 등짝에 연꽃이 활짝 핀 거 보니 누군지 안 봐도 알

겠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김우영의 입가에 피멍이 들었다. 얼굴은 왜 저래. 의아하게 쳐

다보던 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깨우면 짜증만 낼 테니 침실은 두고 거실을 먼저 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쓰레기봉투에 어

질러진 것을 담는데 콘돔에 정액이 흥건하다. 수현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봉투에

던졌다. 테이블에는 먹다 만 고급술이 놓여 있고, 아이스 버킷에는 얼음이 녹아 물로 변

해 있었다.

“그냥 돈이나 받을걸. 일은 괜히 한다고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는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김우영이 깨어났나. 저번처럼 또 좆

을 덜렁거리며 다닐까 싶어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데 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야.”

소름 끼치게 낮은 저음.

수현은 그대로 몸을 홱 돌렸다. 대뜸 눈앞으로 무언가 날아와 뺨을 후려쳤다. 퍽, 충격과

함께 몸이 소파 쪽으로 날아가 머리를 찧었다. 윽, 신음하며 맞은 얼굴을 잡고 일어나는

데 뺨이 얼얼하고 귀가 먹먹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양호범이 서 있었다.

앞니로 담배를 짓이겨 물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면서.

완전 악에 받친 얼굴로.

“너, 깜찍한 짓을 했더라?”


45 화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양호범의 눈이 지글지글 타오른다. 수현은 뱃속에서부터 쾌감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개새끼야. 내가 보고 싶었던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다. 기

쁨을 더 즐길 새도 없이 양호범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수현은 잽싸게 물이 든 아이스 버킷을 들어 호범의 얼굴에 끼얹었다 . 촥- 소리와 함께 양

호범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빨갛게 불붙어 있던 담배의 끝이 까맣게 변했다 . 젖은 담배

를 물고 수현을 노려보는 양호범의 눈빛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 씨발. 호범은 담배를 던져 버리고 수현에게 달려들어 목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퍽,

등 뒤로 강한 충격과 함께 커다란 손이 숨통을 조여 온다 . 더 힘을 주면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수현은 놓으라고 버둥거리는 대신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이며 웃었

다. 손에 더 힘이 실린다. 수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 양호범의 얼굴이 두

개로 겹치며 의식이 멀어지려던 찰나 김우영이 뛰어와 양호범의 팔과 어깨를 붙들었다.

“호범아, 인마! 그만해!”

저 약쟁이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러나 양호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정말 수현을 죽

일 기세로 목을 조여 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수현이 저항하지 않자 정신을 완전

히 잃기 전 양호범이 손을 놓는다.

콜록, 콜록, 수현은 밭은기침을 토해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나.”

수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호범을 바라봤다.


“영감한테 가서 네가 한 말 취소해. 그럼 살려 줄게.”

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옆에 선 김우영이 눈짓을 한다. 무슨 일인

지 모르나 일단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인 거 같았다 . 수현은 구겨진 셔츠를 아래로 당겨

편 다음 힘없이 웃었다. 그 얼굴이 양호범을 열받게 했음이 분명하다. 눈빛이 다시 살기

로 번뜩였으니까.

“웃어?”

“ 양 사장. 그런 부탁은, 정중하게 해야지. 이렇게 다짜고짜 목부터 조르면 내가 들어줄

마음이 생기겠냐, 이 애새끼야.”

애새끼란 말에 김우영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양호범은 서늘하게 웃었다.

“애새끼?”

“그래. 애새끼. 좆만 무식하게 커서는, 섹스도 존나게 못하고, 그냥 박을 줄만 알지. 너는

내가 자빠져 잔 새끼 중에 진짜 최악이야.”

흥분하지 않고 조곤조곤 비꼬니 김우영의 입이 쩍 하고 벌어진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 하던 그가 어찌나 놀랐는지 손으로 양호범과 백수현을 번갈아 가리키며 어버버

했다.

“뭐, 뭐야. 둘이, 둘이?!”

호범은 수현을 노려본 채 서늘하게 일갈했다. 입 다물어, 형. 그러고서 수현을 향해 위협

적으로 다가온다. 수현은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으로 경고했다.

“한 대만 더 때려. 너희 할아버지한테 이를 테니까.”

양호범이 같잖다는 얼굴로 웃는다.

“애새끼 운운하더니 백수현은 어른스러워서 영감한테 꼰질러?”

“이런 식이면 너한테 득 될 거 하나도 없어. 너하고 난, 이제 한배를 탄 사이잖아.”

“배를 탈지 부술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 어디서 건방을 떨어.”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했어.”


수현은 옆에 있던 쓰레기 봉지를 휘두르면서 냅다 침실 쪽으로 도망쳤다. 양호범이 욕을

하면서 쫓아오려고 하자 김우영이 필사적으로 말린다. 하지 마. 호범아. 사람 잡겠다.

“너 이리 안 와!”

양호범이 그답지 않게 고함을 쳤고, 수현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 얻다 대고 반말이야! 싸가지 없는 새끼야!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몇 그릇을 더 처먹

었어!”

“알았어요. 존댓말 해 줄게요. 이리 오시라고요. 백수현 씨!”

“꺼져, 병신아!”

그때 불쑥 낯선 음성이 둘의 싸움에 끼어든다. 대표님? 중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주

인공은 윤 실장이었다. 그는 이미 몇 차례 불렀는지 근처까지 와 있었다. 호범은 열이 받

아 뺨을 파르르 떨면서도 그가 나타나자 더는 수현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점심 약속, 취소할까요?”

윤 실장의 말에 호범은 수현을 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가야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

전히 수현을 죽일 듯 노려본다. 수현도 지지 않고 같이 눈에서 레이저를 쐈다. 팽팽한 신

경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양호범이 어금니를 꽉 물더니 돌아서서 나간다.

잠시 후 쾅!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수현은 다리가 풀려 휘청대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 존나 무서웠어. 방금 목숨 걸고 싸웠다. 장하다, 백수현.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잡고 시트를 벗겨 내고 있는데 뒤로 누군가 걸어온다. 짝, 짝, 박

수 소리와 함께.

“깡 죽인다. 백수현.”

수현은 김우영을 흘깃 봤다. 그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다.

“근데, 둘이 진짜,”

그가 섹스를 나타내는 손동작을 하더니, 했어? 하고 묻는다.

“아니요.”
“에이, 범이 표정은 아니었는데. 나 쟤 저렇게 빡친 거 거진 5 년 만에 봤어.”

5 년 전 그를 빡치게 한 건 누구였는지 궁금해졌다 . 멀쩡히 살아 있는지도. 그 와중에 김

우영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근데, 정말 그렇게 못해?”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지 욕구만 풀려고 박았으니까, 못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

었다.

“이상하다. 여자들 말은 다르던데. 존나 잘한다던데.”

김우영의 말에 수현은 살짝 빈정이 상했다. 개새끼. 그럴 줄 알았어. 여자들한테는 존나

잘해 주면서. 괜히 더 말하면 제 처지만 불쌍해지는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얼굴은 왜 그렇게 됐어요?”

김우영이 못 알아듣길래 입술을 가리키자 웃는다.

“이거?”

“네.”

“호범이한테 맞았어.”

수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너한테 약 준 거 걸렸거든.”

뜨끔하여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싹수없는 새끼라도 그렇지. 자기 사촌 형을 패

냐. 잘하면 땅 빼앗겼다고 할아버지도 패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완전 호로새낀데.

“양호범이 언제부터 소였어?”

죄송해요. 우물우물 사과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졸졸 쫓아오며 은밀하게 얘기했다.

“차라리 호랑이를 잡는다고 돌려 말했으면, 내가 더 센 걸 줬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그가 찡긋, 윙크한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정말 양호범 편

일까. 양 회장은 친손주와 외손주에 대한 차별이 꽤 큰 것 같았다. 겉으로 보면 김우영은

그것에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건 김우진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땅을 주느냐고 양 회장이 물었을 때 김우진은 뭐라고 했더라.

[주신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습니다.]


의외였다.

자기 사촌 형을 보며 겁을 먹어 떨던 녀석이 그런 말을.

거기다 주차장까지 배웅 나와 또 다른 말도 했었지.

[제가 이번엔 형을 제대로 도왔네요. 맞죠?]

처음엔 괜히 김우진을 끌어들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젠 녀석의 속내가 궁금하

다. 정말 나를 돕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음인가.

“왜 그런 눈으로 봐?”

“참, 속을 알 수 없는 형제구나, 싶어서요.”

김우영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으나 수현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끈질기게 따라붙던

김우영은 누군가와 연락하더니 옷을 갈아입고 사라졌다. 오전 내내 죽어라 청소만 했다.

청소의 장점은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다는 거다 . 그렇게 열심히 반 정도를 해치운 다음

에는 소파에 앉아 꿀같은 휴식을 취했다.

아까 졸린 목이 아직도 아프다.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양호범 욕을 하다가 소파에 잠깐

드러누웠다. 남이 싸질러 놓은 콘돔이나 치우는 신세지만, 그래도 여기가 훨씬 나았다.

말 걸어 주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도 않고.

❖❖❖

“양호범 측근에게 물어보니 아버지인 백광무 때문에 잡혀 왔답니다. 지금은 거기서 일을

하고 있고요.”

“빚은요?”

“양호범한테 따로 빚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서민준은 방금 막 면도하고 나온 턱을 쓸었다. 백수현은 양호범에게 20 억의 빚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알아본 바로는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했을까. 그날 대화를 곰곰이

되씹었다. 조금은 화난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백광무 행방은요.”

“불명입니다.”

백수현의 아버지 백광무는 양 회장에게 사기를 치고 간도 크게 그의 물건까지 훔쳤다 .

그가 훔친 물건은 손바닥만 한 불상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 반출된 걸 양 회장이 찾아내

개인 소장을 하였다고 들었다.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고.

서민준은 백수현의 아버지를 기억한다. 학창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다 근처에서

서성이는 그와 마주쳤다. 처음엔 백숙을 먹으러 온 손님인가 했는데 , 어머니와 대화를

엿듣고는 백수현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남루한 옷차림이었고, 불안해하며

주위를 살피던 것만 기억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돈 봉투를 쥐여 주고 떠났고, 이후로 단

한 번도 어린 아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 또한 백수현에게 아버지에 관

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서류를 한 장 넘기니 백수현의 사진이 나온다.

한때는 자신이 아꼈던 아이. 누가 봐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외모다. 가게에 온 손님들 또

한 모두 그의 외모에 대해 한마디씩 칭찬을 했었다. 곱상하게 생겨서, 나중에 여자깨나

울리고 살겠다고.

하지만 백수현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인 나를 좋아했었지. 아니, 정확히 말하

면 시작은 자신이 먼저였다. 어릴 적엔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커 갈수록 그

것에 대한 감정은 음욕으로 바뀌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척 귓불을 만지기도 하고, 장난을 치며 껴안기도 하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같이 잠을 자며 녀석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범하고 또 범했다 . 그런 자신

이 혐오스러워 일부러 여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서울에서 올라와 고등학교 동창들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식구

들이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부모님과 누나가 큰아버지 댁에서 자고 온다고 한 말이 떠

올랐다. 민준은 백수현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백수현은 이미 자

고 있었다. 더웠는지 셔츠를 배가 보이도록 걷어 올리고서.

순간 이성이 끊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에 백수현은 아프다고 울면서 저를 밀어냈다. 좋아서 그래. 네가 너무 좋아서. 형 받

아 주면 안 돼? 그러자 울면서도 저를 껴안았다. 흰 팔과 다리, 아찔할 정도로 풋풋하던

살냄새.

갑자기 목이 탄다.

더는 떠올리지 않으려 민준은 서류를 탁, 덮었다.

“더 알아보세요. 눈치 못 채게 사람도 붙이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남자가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을 빠져나간다. 서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눈앞에 청와대가 있다. 이 오피스텔은 장인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앞

으로 바빠질 텐데, 이곳이 낫지 않겠냐고.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준은 담배를 물고 불을 댕겼다.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시점이다. 남들은 정의의 검사

다 뭐다 떠들지만, 사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컸다. 보란 듯 성공하고 싶

고, 누구보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싶었다.

그래서 백수현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다. 죄책감은 있지만, 만약 그가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어떻게든 제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46 화

“수현아. 사는 게 참 그렇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이 엄청 가난했거든. 너 달동네 단칸

방 살아 봤냐. 손바닥만 한 방에서 다섯 식구가 모여서 잤어. 부모님 일 가시면 동생들은

배고프다고 울고, 그러면 내가 아랫동네 내려가서 빈 병을 주워다 그걸로 빵을 사 왔어 .

병 줍다가 같은 학교 친구들 만나면 어찌나 창피하던지. 당시 내 나이 고작 열 살이었다.

열 살이 뭘 알겠냐. 속으로는 먹고 싶은데 그놈들 먹는 것 보니 먹고 왔다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 명절에 동생들 모이면 그런 이야기 해. 가끔 예전이 그립다고. 근

데, 나는 싫어. 너무 힘들었거든. 싸장님, 여기 소주 하나 더!”

매니저는 아까부터 혀 꼬인 소리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수현은 그가 말하는 동안 잔에

술을 채우고 꼴깍꼴깍 들이켰다. 가게 주인이 소주를 주고 가면서, 서비스로 어묵탕도

내온다. 감사합니다. 매니저가 인사를 하다가, 쿵, 머리를 테이블에 받았고, 수현은 그 모

습이 우스워 낄낄댔다.

“정신 차려요, 매니저님.”

그는 좀비처럼 고개를 들더니 아직 나 안 취했어. 끄떡없어. 라고 이야기했다. 눈은 풀리

고 얼굴은 시뻘겋고, 셔츠 앞은 다 구겨지고. 누가 봐도 취했는데 안 취했다고 우기면 그

게 안 취한 게 되는 건가.

“인마.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불러. 형! 내가 너는 특별히 동생 대우해 줄게.”

그 말에 수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거짓말. 진영이하고 석준이도 다 형이라고 부른다던데?”

“걔들은 걔들이고. 나는 네가 차암, 그렇다.”


“뭐가 그래요.”

“짠해. 너 보고 있으면 그냥 짠하고 안쓰러워.”

참나. 수현은 어이없이 웃었다.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을 뿐인데

매니저는 저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지

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기만 했지, 매니저처럼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수현은 만약 자신에게도 형이 있다면 매니저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내가 네 형이야, 수현아.]

난데없이 서민준이 떠오른다. 양 회장한테 큰소리 뻥뻥 치기는 했는데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민준이 넘어올지는 더더욱 미지수고. 한 번씩 서민준도 다

른 사정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내가 뭔가 오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틈을 헤집고

들어온다. 그럴 리 없을 확률이 99%는 되는데도 여전히 손톱만큼의 믿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수현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마셔요, 여기서 먹고 우리 2 차 가요. 2 차.”

“그래, 가자 2 차! 노래방 어때?”

그때 매니저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에이, 우리 엄마,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보일러요? 그게 왜 안돼? 외출로 돌려놓은 거 아니에요? 차라리 영통으로 해요. 아니,

염통 말고, 영통, 영상통화.”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가 차근차근 설명한다. 가을에 돈 모은 걸로 부모님 집수리를 해

드렸다고 하였는데 새로 바꾼 보일러가 말썽인 듯싶었다. 그가 몇 번을 설명했는데도 나

이 많은 노모가 알아듣지 못했는지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요. 금방 갈 테니 기다려요.”

매니저는 통화를 마치며 수현을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냐. 수현아. 우리 엄마 보일러 안 된다고 난리다.”

수현은 얼른 가 보라며 손짓을 했다.

“아니면 같이 갈래? 가서 한잔하까?”


“됐어요. 이 시간에 남의 집 가는 건 민폐예요.”

“그런가.”

“빨리 가요. 연말이라 택시 잡기도 힘들어요.”

그가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려 하기에 수현이 말렸다 . 옥신각신하는 동안 그가 기어코

계산하더니 웃는다.

“인마. 형이 이런 것도 못 살까.”

그는 취해서 벌게진 얼굴로 옷을 챙겨 들었다.

“간다. 그만 먹고 들어가.”

“조심히 가세요.”

또 도망가지 말고. 적당히 먹어. 취해서 불타는 고구마 같은 얼굴로 잔소리를 하니까 웃

기다. 수현이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매니저가 사라지고 자리로 돌아온 수현은 혼자서

빈 잔을 채웠다. 안주로 어묵 국물을 후루릅, 마시는데 누군가 소리를 친다.

“눈 온다!”

정말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는 중이다. 벌써 첫눈이 오네. 이런 날 혼자 있으려니

살짝 외롭네. 친구라고 있는 놈들은 다들 일할 시간이라 불러낼 사람도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술을 드는데 벌써 바닥이 보인다. 수현은 손을 들어 가게 주인을 불렀다.

“사장님, 소주 하나 추가요!”

첫눈이다. 창으로 굵직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 차가 밀리기 시작

하자 호범은 창문을 반쯤 내리고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꼰대들 비위 맞

추느라 술을 많이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온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긴 후 은색 라이터의 뚜껑을 열자 맑은 소리를 낸다 . 그대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몇 달간의 금연은 엉뚱한 인간의 방해로 인하여 막을

내렸다. 담배를 피우게 된 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 땅을 빼앗긴 건 속이 쓰리

다 못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다.

[ 섹스도 존나게 못하고, 그냥 박을 줄만 알지. 너는 내가 자빠져 잔 새끼 중에 진짜 최악

이야.]
호범은 저도 모르게 담배 끝을 앞니로 꽉 깨물었다. 씨발.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열

이 받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며칠 잠수타더니 어디 가서 간땡이라도 꺼내 놓고 온

건가. 후, 뿌연 연기가 창밖으로 빠져나가 사라진다. 눈송이는 점점 굵어지는 듯하였다.

“라디오 틀까요?”

운전석에 앉은 박태준이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후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온다.

모 배우의 성관계를 촬영한 동영상이 퍼져 파문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다 . 꽤 잘나가는

배우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덕분에 굵직한 정치 이슈들은 순식간에 사람들

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순간 영감의 말이 떠올랐다.

[동영상 찍겠다고 하더구나. 나쁠 거 없다고 봐. 그거 터지면 서민준은 끝장이야.]

딱 저 다운 생각 아닌가. 자나 깨나 이놈 저놈한테 다리 벌릴 생각이나 하고 있고 . 그 인

간을 생각하니 또 화가 치민다. 호범은 창밖으로 담배를 던진 뒤 창문을 올렸다. 뒤로 기

대 뉴스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재킷 안쪽에 넣어 둔 전화가 진동한다 . 꺼내서 본 호범의

눈썹이 까닥 올라갔다. 백수현이다.

받지 않으려고 하다 이 인간이 무슨 개수작을 부리나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호로범 씨?]

잘못 들었나 싶어 네? 하고 물으니, 아닌가. 저장된 거는 호로범이라고 저장됐는데.

전화를 건 건 백수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용건을 전해 왔다.

[아무도 전화를 안 받아서요. 와서 데려가요. 전화 주인이 술이 많이 취해서, 울어.]

호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꾸 울어서 다른 손님들도 싫어하고, 아무튼 데려가요.]

“전화 잘못 거셨어요. 모르는 사람입니다.”

툭, 끊고 나니 박태준이 룸미러로 쳐다본다. 호범은 짜증 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눈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펑펑 쏟아졌다. 첫눈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다. 문 닫은 가게 앞

에 술 취해서 누워 있는 사람이 보인다. 이런 날 길바닥에서 자면 얼어 죽기 딱 좋겠군.


“얼어 죽든 말든.”

마침 반대편으로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쌩하니 지나간다. 그걸 지켜보던 호범

은 욕을 내뱉고 백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달라 조금 전 그 여자가 전화를 받는

다.

“거기 어딥니까.”

전화를 끊은 뒤 호범은 태준에게 차를 돌리라 지시했다. 호텔 근처가 아니라 왜 거기까

지 가서 술을 처먹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가는 내내 화

가 치밀어 올랐다. 영감은 때리지 말고 살살 달래서 잘 데리고 있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영감의 약속은 믿으나 백수현은 못 믿겠다. 앞서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생일 선물이라며 밥 먹자고 한 당일에.

“대표님. 저긴가 본데요?”

30 여 분을 달리니 길옆에 불 켜진 포장마차가 하나 나온다. 차에서 내리며 코트를 입자

태준이 트렁크에서 검은 장 우산을 꺼내 펼쳐 가져온다.

“기다리지 말고 가.”

“괜찮으시겠어요?”

얼마 전 습격으로 인해 그는 날이 선 상태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 호범은 박

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를 지나쳐 포장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비닐 안으로 사

람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포장마차 특유의 냄새가 훅 풍긴다. 가운데는 커다

란 기름 난로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느라 바빴다. 하

지만 어디에도 백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인심 좋게 생긴 사장이 호범을 맞이한다.

“아까 전화 받았던 사람입니다. 지인이 여기 있다고 해서요.”

사장이 아이고, 하고 탄식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백수현의 것으로 보이는 점퍼를 가져

나온다.
“질질 짜더니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돈이랑 잠바도 두고 사라졌어요.”

호범에게 잔돈을 넘겨주고 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많이 취했던데 어디서 잠든 거 아닌지 모르겠네. 눈도 오는데.”

마침 뒤쪽에 있던 손님이 사장을 불렀다. 예, 예, 갑니다.

호범은 포장마차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펼쳐 들었다. 걸어가며 백수현에게 연락하는데 아

무리 해도 받질 않는다. 금방 쌓인 눈은 걸을 때마다 뽀드득 비명을 질러댔고 , 갑작스러

운 폭설 때문인지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연결된 후에는,]

“미치겠네.”

불 꺼진 상점들을 하나둘 스쳐 가는데 골목 안쪽에 무리가 있는 게 눈에 띈다. 그냥 지나

치려던 호범은 싸한 느낌에 되돌아서 그쪽으로 갔다. 여러 명이 모여 낄낄대고 수군거린

다.

취했나 본데. 야, 지갑 있나 봐 봐. 아 씨발, 울잖아. 존나 잘생겼다. 짜증 나는데 칼로 얼

굴 살짝 그어 버릴까. 드르륵, 소리가 났고 호범은 걸음을 서둘렀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무리 중 하나가 돌아본다.

“뭐야, 씨발.”

가까이 다가가자 제법 덩치 있는 녀석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아저씨,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가요.”

아저씨란 말에 호범의 미간에 빗금이 쫙 생겼다. 아저씨? 다가온 놈의 머리채를 순식간

에 잡아 그대로 담벼락에 눌렀다. 악, 비명을 지르기에 얼굴을 짓이긴 채 앞으로 걸어갔

다. 한쪽 뺨이 벽에 갈리며 피가 흐르자 앞에 있던 놈들은 사색이 됐다.

호범은 붙잡고 있던 놈을 뒤로 팽개친 뒤 다른 놈들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 이리 와. 놈들

이 기겁하고 줄행랑을 친다. 돌아보니 얼굴이 뭉개진 놈도 사라진 후였다. 호범은 골목

안쪽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아니나 달라 백수현이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몸을 웅크린 채 흐느끼면서.

그 꼴이 보기 싫어 발로 툭, 어깨를 건드렸다.
“일어나요.”

꼼짝을 않는다.

“안 일어나면 간다?”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호범은 들고 있던 점퍼를 백수현의 몸 위에 던져 놓고 돌아섰다.

얼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한 발, 두 발, 멀어지는데 뒤에서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엄마….”

호범은 걸음을 멈췄다.

“가지 마… 엄마. 나도 데리고 가….”

엄마…. 엄마….

기억 속 지우고 싶었던 장면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명치가 답답해진다.

호범은 한숨을 내쉰 뒤 수현에게 되돌아갔다.


47 화

가만히 있어, 좀.

“아파아.”

호범은 수현을 택시 뒷좌석에 강제로 밀어 넣고 그 옆에 앉았다 . 한남동이요. 문을 탁, 닫

는데 기사가 뒤를 흘깃 돌아본다. 오늘 택시 잡기 힘들죠? 눈이 와서 택시가 없어요. 사

람 좋게 웃는 그에게 호범은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기사가 출발하려고 미터기를 켜는 순간 백수현이 반대편 문을 벌컥 열더니 갑자

기 뛰쳐나간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호범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뻗어 있으

면 데려가기 쉬운데, 아까부터 정신을 차리더니 미친놈 널뛰듯 사방을 뛰어다니는 게 아

닌가. 하, 저 알코올 중독자 새끼.

이를 갈며 앞을 노려보는데 기사가 뒤를 돌아본다.

“어떡해요? 기다려요?”

“기사님.”

“네?”

“차로 확 쳐 버리세요.”

네? 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길래 호범은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야,

백수현! 하고 부르는데 수현이 실실 웃으며 뒷걸음질을 친다. 잡아 봐! 나 잡아 봐! 거리

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수현을 흘깃댔다.


잡히면 죽여 버린다, 진짜. 걸음이 빨라지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백수현이 인도로 뛰어

올라가 달리기 시작했다. 저번에 술을 먹을 때 취했던 건 그저 애교였다 . 저 지랄 하는 줄

알았으면 그냥 얼어 죽게 내버려 뒀을 텐데.

그러다 얼마 못 가 눈길에 벌러덩 나자빠진다. 기가 찼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또다시

흐느껴 울고 있다. 이 정도면 조울증 아닌가.

호범은 뒷목을 잡아 꾹 눌렀다. 어릴 적 호범이 사고 칠 때마다 영감이 뒷목을 잡았고 , 그

때마다 쇼라고 생각했는데 일리 있는 행동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 그 벌을 지금 내

가 받고 있구나.

호범은 수현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다음 택시 승차장으로 끌고 갔다.

“아파아. 아파아.”

“아가리 다물어.”

그런데 아까 그 택시에 이미 다른 승객이 막 올라타는 중이다.

“하.”

호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자. 참아야 해. 화를 누르고 백수현을 데리고 승차장 의자에

눌러 앉혔다. 앉아서 다음 택시를 기다리는데 어째 잠잠하다. 뭘 하나 봤더니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렇게 지랄 발광을 하더니. 추운지 몸을 웅크리다가 호범을 쳐다본다.

“추워….”

어쩌라고.

“춥다.”

이내 호범에게 달라붙어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껴안는다. 호범은 체념했다. 빌

어먹을 택시도 안 오고, 박태준을 부를까. 고민했으나 금세 관두었다. 이 인간을 챙기는

꼴사나운 모습 따위를 부하 직원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애새끼처럼 싸우는 모습을

윤 실장한테 들킨 것만 해도 충분하다 싶어서.

백수현은 축 늘어져서는 자꾸 품으로 파고든다.

“어디 모텔에서… 쉬었다 갈래요?”


잠꼬대처럼 웅얼대는데 존댓말을 하는 거 보니 지가 누굴 껴안고 있는지도 모르나 보다.

서늘한 시선을 아래로 내려 머리통을 노려보는데 백수현이 매달린 채 고개를 치켜든다 .

눈을 가늘게 늘이면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는 것처럼.

“어디서 봤는데….”

호범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런. 벌써 나를 잊었어요? 서운해라.”

“내가 아는 사람하고 닮았는데….”

“그 사람 되게 잘생겼죠?”

맞장구를 쳐 주니 또 껴안는다. 잘생기긴 했는데 … . 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싸가지가 없

다고 덧붙인다. 호범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섹스도 존나 못해.”

인상을 쓰고 노려보니 한마디 더 보탠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 좆은 크더라.”

이 정도면 이 인간 정신 멀쩡한 거 아닌가 의심이 든다 . 손끝으로 턱을 치켜들고 얼굴을

보는데 잔뜩 풀어져서 헤헤, 하고 눈웃음을 친다. 얼굴은 눈물로 엉망인데 웃으니 병신

같다. 호범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눈이 그치고 십여 분이 더 지났을까, 저 멀리 택시 한 대가 온다.

택시가 정차하자마자 백수현을 뒷자리에 밀어 넣고 이번에도 도망칠까, 손목을 움켜쥐

었다.

“아파아.”

“한남동이요.”

택시가 출발하자 백수현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뺨을 문지른다 .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봤더니 손을 호범의 허벅지에 가져다 댄다. 호범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 손은 곧 바

지 위를 더듬으며 좆을 만졌다.

“섹스하고 싶어….”
기사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뒤를 흘깃 본다 . 호범은 백수현에게 섹스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패 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백수현이 자꾸 좆을 문지

르니 욕망이 꿈틀댄다. 백수현의 구멍에 넣고 움직이던 그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좋았어. 그래서 싫었고.

내버려 뒀다간 아예 벨트까지 풀고 하자고 덤빌 기세라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이번엔

팔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기대 눈을 감는다. 조용하다. 어느덧 백수현은 입을 벌린 채 새

근새근 잠이 들었다.

눈물로 젖은 속눈썹과 벌어진 붉은 입술을 응시하던 호범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봤다. 이미 발기한 녀석은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호범은 택시에서 잠든 백수현을 끌어내 어깨에 들쳐 멨다. 한 번에 어깨에 척 짊어지니

택시 기사가 감탄한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집에 불이 켜져 있다 . 안으로 들

어가자 역시나 강원댁이 주방에서 걸어 나온다. 그녀는 오십을 넘긴 나이로 호범이 어릴

적부터 봐 오던 사람이었다.

“세상에. 그게 뭐예요?”

“시체요.”

여자가 경악하며 정말 시체인지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 소파에 냅다 던져 놓으니 수현이

몸을 움직여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제법 아팠을 텐데도 꿈쩍 않는 걸 보니 정말 잠들

었나 보다. 한숨을 쉬며 노려보던 호범의 옆으로 강원댁이 지나갔다. 그녀는 수현의 얼

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예요?”

“도둑놈이요.”

“응?”

“있어요. 말하기도 싫어요.”

“별일이네요. 여기에 사람을 다 데리고 오고.”


그녀는 주방으로 가며 앞치마를 벗고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호범은 물을 마시려다 주방

에 큰 솥이 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여태 퇴근을 안 하고 있었나 했더니.

“곰국 끓여 놨어요.”

영감은 겨울이면 자주 곰국을 끓여 먹거나 소꼬리, 족 같은 것들을 고아 먹었다. 먹을 게

넘쳐 나는 시대에 어째서 동물의 꼬리나 발 같은 걸 먹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 하

지만 솔직히 말했다간 눈앞에 있는 강원댁이 속상한 표정을 지을 걸 알기에 호범은 애써

웃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술 먹지 말고요. 아침에 올게요. 잘 때 이불 꼭 덮고 자요. 그녀는 아직도 호범이 어린아

이인 줄 아나 보다. 매번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한 뒤 호범은 거실

로 돌아왔다. 백수현이 완전히 뻗어서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다.

그런 백수현을 놔두고 침실로 들어갔다. 저 인간을 챙기느라 꼴이 엉망이다. 더럽혀진

바지와 셔츠를 벗는데 좆이 아직도 발기 중이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머리부

터 적시는데 좆은 여전히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섹스도 존나게 못하고, 그냥 박을 줄만 알지.]

씨발. 여기서 자위까지 하면 백수현한테 지는 거다. 애써 무시하고 씻으려고 샴푸로 손

을 뻗는데 샤워 부스 밖으로 사람의 형체가 흐릿하게 움직인다.

호범은 본능적으로 앞에 있는 선반 아래로 손을 뻗었다 . 날이 선 칼이 쑥 딸려 나온다. 움

직이는 형체를 노려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백수현이 얼굴을 들이민다 . 호범은

황당한 표정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백수현이 안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니트를 밑에서부터 잡고 위로 끌어 올린다 .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버둥거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 쑥 잡아당기니 한 번에 벗겨지며

알몸이 드러난다. 목이 가려진 옷을 입고 있어 몰랐는데 자신이 만든 손자국 말고 가늘

고 붉은 자국이 하나 더 있다. 마치 목을 맨 흔적처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백수현이 가까이 와 호범의 얼굴 옆 벽을 손으로 빡 짚으며 눈에

힘을 줬다. 얼씨구.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니 아랫입술을 핥으며 묻는다.


“한번 할래?”

노려보던 호범은 칼을 바닥으로 던졌다. 손을 뻗어 물을 잠그고 나자 욕실이 고요해진

다. 이 인간 지금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 그러자 수현이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호범의 뺨을 만진다. 호범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사실 동하기

도 했고. 그래. 아무것도 아닌 섹스에 의미를 두지 말자.

입술이 다가오더니 스칠 듯 말 듯 하다 결국 아래로 내려간다. 가슴을 애무하더니 젖꼭

지를 입에 물고서 쭉쭉, 빤다. 그러다 앞니로 살짝 물길래 백수현의 뒷머리를 잡아 얼굴

을 떼어 냈다. 그는 침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야하게 웃은 뒤 손을

뻗었다.

“키스해 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은 수현을 일으켜 세워 벽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정

말 해 줄 거라고 예상 못 한 건지 백수현의 눈이 커진다. 호범은 단단한 허벅지를 수현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그의 좆을 압박했다. 붙어 있던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

온다. 목마른 사람처럼 입술을 게걸스럽게 탐하던 두 사람이 잠시 떨어졌다.

수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우리 범이, 키스는 잘하네?”

순간 호범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키스는?


48 화

수현은 호범이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몸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 양호범은

생각보다 키스를 잘했다. 개새끼. 이렇게 잘하면서 여자들한테만 해 주고 . 문득 그런 생

각이 들다가 속으로 웃었다. 호흡이 가빠지는 가운데 호범이 수현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깨문다.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아!”

그 자리를 혀로 핥더니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다. 살도 없는 가슴을 그러모아 꽉

쥐더니 젖꼭지를 노려본다. 그 시선에 저절로 좆이 서는 기분이었다. 호범의 눈이 수현

의 얼굴에 닿았다가 다시 젖꼭지로 옮겨 간다. 그는 엄지로 젖꼭지를 슥 밀어 올렸다.

“얼굴하고 딱 어울려.”

“무슨 뜻이야?”

호범이 싱긋 웃었다.

“천박해.”

뭐래. 이 개새끼가. 욕을 할 새도 없이 젖꼭지를 크게 한입에 베어 물었다. 얼마나 세게

빠는지 가슴이 저릿하다. 시선을 아래로 두니 턱을 움직이는 양호범의 얼굴이 내려다보

인다.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고 이목구비가 지독하게 색정적이다.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복부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굶주린 아이처럼 집요하다.

춥, 입술이 떨어져 나간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빨갛게 부풀었다. 그리고

이번엔 왼쪽으로 옮겨 가서 또 괴롭힌다. 아무래도 양호범은 나보다 내 젖꼭지에 더 애


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첫 섹스 때 가슴이라도 까 보이고 어

필 좀 할걸.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는데 호범이 일어서며 수현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이제 백수현 차례야.”

응? 겨우 그거 해 주고? 흘겨보며 가슴에 입술을 대는데 어깨를 누른다. 거기 아니야. 수

현이 눈을 치켜뜨고 위를 올려다봤다.

“불공평하잖아. 너는 왜 가슴이고 나는 좆이야.”

마지막에 좆이야, 하며 입을 벌리는데 귀두를 물려 준다. 좆 끝을 입에 문 채로 눈만 위로

움직여 놈을 노려봤다. 젖은 수현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호범이 웃었다. 술에 취해 착

각인지 모르겠으나 귓불을 만지고 눈꼬리를 훑어 주는 손길이 전보다는 확실히 다정하

다.

“왜냐하면, 나는 사내새끼 좆 빨아 줄 마음 없거든.”

그럼 뭐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의 좆을 빨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전처럼 무

식하게 박을 거 같아서 일단은 좆을 쥐고 위쪽으로 들었다 . 놈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디

밀고 고환을 핥으니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에는 힘이 들어

간다.

“씨발….”

뿌리부터 혀로 문지르며 올라온 뒤에는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귀두의 구멍을 쑤셨다. 그

러고 나서 입을 벌려 좆을 물었다. 양호범은 좆도 딱 자기처럼 생겼다. 크고, 단단하고,

핏줄이 툭툭 튀어나와서 이게 좆인지 흉기인지.

그걸 입에 물자 턱이 아플 정도로 벌어진다.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자 머리 위에서 들려

오는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졌다. 수현은 양손으로 호범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근육이 갈

라진 허벅지가 돌처럼 단단하다. 놈의 몸 어느 곳 하나 단단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 나오던 슈퍼맨 같았다. 현실은 조커지만.


목구멍을 열어 더 깊숙이 넣어 주니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 전처럼 무식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번엔 부드럽다. 그러다 그가 좆을 빼냈다. 긴장하고 있던 수현은 숨을 몰

아쉬었다. 양호범이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입술을 포개 온다.

죽어도 키스는 안 해 줄 것 같던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퍽 정성을 쏟는다. 수현은 그런

호범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매달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온다. 좆을 그의 허벅

지에 대고 문지르며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상복부에 한 번씩 통증이 이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 술을 너무

처먹었나. 하다가 토하진 않겠지. 양호범이 개지랄할 텐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범이

수현을 돌려세운다.

그는 벽을 짚게 한 다음 수현의 골반을 잡고 뒤로 잡아당겨 엉덩이에 대고 좆을 툭 , 툭 쳤

다. 퉤, 하고 손에 침을 뱉더니 애널에 대고 문지른다. 호범의 손이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양옆으로 벌렸다. 구멍이 훤히 드러났고 바로 삽입할 줄 알았는데, 조용하다.

갈증 나 벌겋게 익은 얼굴로 뒤를 흘깃 돌아봤더니 구멍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감상 중이시다. 수현은 마음이 급해져 그를 재촉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구멍이 예뻐서.”

수현이 히죽 웃었다.

“너 말고 다른 놈들도 똑같이 말했,”

순간 싸늘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아차, 싶어 말을 바꾸려고 하는데 호범이 한치의 자

비도 없이 콱 쑤셔 넣는다. 악! 수현이 앞을 제대로 짚지도 못하고 팔을 허우적댔다. 조금

전 충격으로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린다. 하, 씨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호범이 뒤로 뺐다가 다시 박는다.

철썩, 철썩, 물에 젖은 살 부딪치는 소리가 음탕하게 울려 퍼졌다.

“야! 아아! 아읏! 잠, 잠깐! 아!”

손으로 벽을 채 짚지도 못하고 샤워기 부분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퍽, 퍽, 퍽, 호범이

박을 때마다 그의 고환이 엉덩이를 치댔고 아래 뱃가죽은 불룩불룩 튀어나온다. 몸을 일


으키려 버둥대는데 호범이 어깨를 잡아당겨 품으로 끌어안는다 . 등 뒤에 단단하고 널찍

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양호범은 허리를 움직이면서 귓가에 말을 토막 쳐 뱉었다.

“그러게, 섹스 중에, 왜 다른 새끼, 얘길, 응? 씨발, 매너 없게.”

미친 새끼. 매너는 너도 없거, 아윽, 호범이 앞쪽으로 손을 뻗어 수현의 성기를 쥐고 엄지

끝으로 귀두를 쑤신다. 사정감이 몰려오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아! 아! 양 사장! 개

새끼야! 나 쌀 거 같아. 쌀 거 같아. 그럴수록 그는 귀두를 막고 뒤를 난폭할 정도로 쑤셔

댔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거리고 눈앞은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

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양호범이 목덜미를 세게 물어뜯는다 . 싸고 싶

어. 싸고 싶단 말이야. 좆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

가 아니었다. 해소하지 못한 사정감에 수현은 그의 팔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질질 흘렸

다.

“개새, 끼, 아아! 으흑! 씨, 발. 너, 으읏!”

호범은 수현의 입술을 빨고 뺨과 턱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았다. 하, 하아, 하아,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사정감이 극에 이르자 수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면서 컥, 컥, 댔다. 호범이 점점 스피드를 올린다. 철썩, 철썩, 철썩, 뱃가죽을 뚫어

버릴 정도로 강하게 움직이던 그가 갑자기 수현을 꽉 끌어안았다 . 엉덩이에 까슬까슬한

음모가 비벼졌다.

동시에 잡고 있던 수현의 좆을 놓아주며 검은색 욕실 바닥에 하얀색 정액이 울컥, 울컥

떨어졌다. 움찔거리고 사정을 마친 수현은 온몸의 진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다 .

그러자 호범이 허리를 끌어안아 받쳐 주더니 귓가에 속삭인다.

“이번에도 별로였어요?”

개새끼. 쿨한 척하더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그러나 수현은 호범을 비웃을 처지

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윗배의 통증이 극심해진다. 아아, 배를 감싸 쥐며 신음

하자 양호범이 좆을 쑥 뺀다. 허벅지로 정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앞으로 온 호범이 어깨를 잡고 안색을 살피는데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이

엄습해 온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배를 막 쑤시는 것 같다. 바닥에 주저앉으려 하자 호범

이 어깨를 붙든다. 낯빛을 확인하는 그의 표정이 어둡다. 수현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

를 쥐어짰다.

“내장, 찢어졌나 봐.”

술 때문인지 아니면 끔찍한 고통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하다. 호범이 백수현? 하고 부르

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그대로 혼절해 버렸으니까.

중간중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눈을 잠깐 떴을 때 구급차 안이었다. 사

이렌 소리가 들리고 낯선 얼굴들이 나타났다.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 중이란 말에 수현은

제일 먼저 의료보험이 걱정됐다. 20 대 초반에 그래도 보험료를 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

것마저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거의 약국을 이용하는 날이

많았다.

구급대원들이 배를 만지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여기 아프세요? 여기는요? 저녁은 뭐 드

셨어요? 어지럽진 않으세요? 술은 얼마나 드신 거예요? 대답할 기운도 없어 식은땀을 흘

리는데 구급대원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건 응급실 앞이었다.

간이침대에 누워 입구로 들어가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 보호자 분 일단 접수부

터 해 주세요. 보호자… . 나한테 보호자란 게 있었던가. 그때 뒤따라온 양호범이 접수대

쪽으로 향한다. 보호자냐는 병원 직원의 질문에 그가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저를 죽어

라 패던 인간이 보호자랍시고 나서니 우스웠다.

안쪽에 도착하자 의사와 간호사가 다가왔다. 그들이 구급대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술을

많이 마셨고,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고. 섹스 얘기는 모르는 건지 아예 꺼내질 않는다 .

수현은 대신 말해 주고 싶었다. 양호범이 섹스하다 내 장기를 찢어 놓은 것 같다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불현듯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신장이 떠올랐다.


혹시 그게 잘못된 건 아닐까. 제대로 치료받지 않아 안에서 썩고 있던 건 아닐까. 결국,

남은 신장마저 쓸 수 없게 되어 버린 건 아닐까 . 의사에게 묻고 싶었으나, 도무지 입이 떨

어지질 않았다.
49 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의식을 끌어 올리는 건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었다. 눈을 뜨자 밝

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눈앞이 온통 하얗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이상하다.

잘못을 많이 저질러서 천국에 올 리가 없을 텐데.

시야로 불쑥 얼굴이 하나 나타난다.

놈을 보고 그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 들어요?”

수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병원까지 실려 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

이 하나도 없다. 움직이려고 보니 팔에 주삿바늘도 꽂혀 있고, 옆에는 삑, 삑, 소리를 내

는 심전도 기계와 맹렬하게 수증기를 뿜어내는 가습기도 눈에 들어왔다. 누워 있는 곳은

병실인 것 같은데, 크기가 꽤 컸다.

“나 살아 있어?”

그 말에 호범이 픽 웃었다.

“아쉽게도요.”

“나쁜 새끼….”

“욕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수현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배를 더듬었다. 신장은 괜찮나. 옆구리 쪽에 흉터가 만져

진다. 더 째거나 꿰맨 흔적은 없는 거 같은데. 배 여기저기를 더듬는데 똑똑 노크와 함께

의사 세 명이 들어온다. 그 중 나이 든 의사가 호범을 향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우리 양 대표님. 오랜만 뵙네요. 회장님은 요즘 어떠세요. 윤 박사 말로는 혈압

이 살짝 높으시다고 하던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세요. 꾸준히 운동도 하고 계시고요.”

“맞아요. 연세 드실수록 근육량이 하루가 다르게 줄거든요. 회장님도 소싯적엔 운동하셨

던 분인데, 이젠 나이가 있으시니 별수 있나요. 근데 이렇게 보니 우리 대표님이 회장님

을 쏙 빼닮았네요. 골격이며 눈빛이 아주 판박이야.”

“그렇습니까?”

“얼마나 든든하고 뿌듯하시겠어요. 밥을 안 드셔도 배가 부를 겁니다. 그렇다고 정말 안

드시면 큰일이지만. 하하.”

남자는 수현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진료하러 온 건지, 양호범 비위를 맞추려고 온

건지 모르겠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직도 그의 관심은 양호범에게 꽂혔다. 불만

스럽게 쳐다보니 그제야 시선을 느끼고 수현에게 다가온다.

“백수현 씨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수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그러자 의사가 호범과 수현을 번갈아 본다.

“그런데 두 분 관계는…?”

수현이 불쑥 대답했다.

“지금까지 3 번 했어요. 처음 한 번은 입으로 했고.”

호범이 그대로 이불을 끌어 수현의 얼굴에 뒤집어씌우고 그 위를 손으로 눌렀다. 그러고

나서 의사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 신경 쓰지 마세요. 술이 아직 덜 깼어요. 수

현은 이불을 홱 걷고 호범을 째려봤다. 숨 막혀 죽을 뻔했잖아. 양호범이 슥 쳐다본다. 진

짜 죽여 버리기 전에 입 닥쳐. 하는 눈빛이다. 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풀었다.

수현은 눈을 뜨자마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기, 의사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제 신장은… 괜찮나요?”

의사의 주름진 눈이 살짝 커진다.

“신장이요?”

“콩팥.”

의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위경련이 있던 거지 신장은 멀쩡합니다. CT, 피 검사 모두 이상 없었고요.”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사실 하나밖에 없어서 조마조마했거든요.”

원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하나밖에 없다뇨?”

수현은 입을 달싹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 .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사

실대로 털어놨다.

“예전에… 누가 떼어 갔어요.”

원장의 입이 벌어진다. 그는 수현이 아닌 호범을 쳐다봤다. 눈빛에 의구심을 가득 품고

서. 자꾸 이상한 소릴 하니, 술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지 궁금한 표정

이다.

수현은 억울했다. 병원에서 제대로 확인한 건 맞을까. 배 속을 촬영했다면 콩팥이 하나

없다는 건 알았을 텐데. 그러자 원장이 뒤에 서 있던 의사한테 확인한다 . 의학용어라 제

대로 듣지 못하였는데, 젊은 의사가 곧장 대답한다.

“이상 없었습니다.”

수현이 자신의 환자복 아랫부분을 잡아 끌어 올리며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보여 줬다 .

원장이 가까이 와서 안경을 추켜올린다.

“여기. 이거 보이시죠? 수술한 흉터도 있는데.”

원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신장 이식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절개해

야 하거든요. 원장이 손으로 알려 준 크기는 수현의 흉터와 꽤 차이가 있었다. 수현은 어

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선 호범이 피식 웃는다.


“정 의심스러우면 내일 한 번 더 검사를 진행하도록 하죠.”

그러더니 호범에게 친구분이 술을 좀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술 냄새가… . 하하.

라고 말하더니 병실을 나간다. 수현은 억울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켜 자신의 배를 뚫어

지게 내려다봤다. 그럼 이건 뭐야.

“그렇게 노려보면 있던 콩팥이 없어져요?”

“이상하다… 분명히… 배를 가르고 뭘 꺼내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땐 마취약이 들어가고 얼마 후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제대로 뭘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의사가 손에 시

뻘건 뭉치를 들고 있어서 그게 제 콩팥인가 추측했을 뿐.

다급한 마음에 메스를 쥐어 휘둘렀고 비틀거리며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벌어진 상처를 틀어막고 뛰는데 시야가 점점 하얘졌고 길바닥

에 쓰러졌다가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고 신고했

다고 한다. 그 뒤로 경찰도 오고 이것저것 묻길래 수현은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게 마

지막으로 병원에 갔던 기억이다.

“와, 씨발…. 그럼 나 콩팥이 있었던 거야?”

옆에선 호범이 한심하게 쳐다본다. 뭐 이런 병신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이다 . 수현은 민망

해져 괜히 목덜미를 만지다 뒤늦게 기뻐서 웃었다 . 한편으로는 양호범이 알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말을 할 때 표정이 그래 보였으니까.

“양 사장. 넌 알고 있었지?”

호범은 대답 대신 비웃었고, 수현은 살짝 성질을 냈다.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해 주지!”

“ 딱 봐도 흉터가 너무 작단 생각 안 해 봤어요? 아니면 콩팥이라니까 정말 콩하고 팥만

한 줄 알았던가?”

수현은 순간 멍했다.

그러니까 콩팥이…. 작아서 콩팥이 아니구나.

혹여 무식함을 들킬세라 호범에게 따졌다.


“그래도. 미리 알았으면 좋았잖아. 남들한테 괜히 거짓말한 꼴이 됐네.”

“어차피 하는 말 중에 90 은 다 구라잖아요.”

수현은 눈을 흘기면서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야…. 90 까지는 아니야….”

한편으로는 사채 하는 새끼들이 돈 갚으라고 윽박지를 때마다 남은 것도 하나 떼 가라고

강짜를 부렸는데, 그때 떼어 갔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접 다 떨었으면 그만 누워요. 나 바로 출근해야 해.”

호범이 수현의 이마를 눌러 뒤로 눕힌다. 수현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 시다.

꽤 오랫동안 잤구나. 그런데 눕고 보니 이불이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팔을 뻗었으나 닫

질 않아 호범의 소매 깃을 잡고 당겼다.

“양 사장… 이불 좀 덮어 줘.”

호범이 이불을 끌어와 얼굴 아래까지 덮어 준다. 수현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우리, 이제 많이 친해진 거 같다. 그렇지?”

말이 없길래 이번엔 그의 팔을 붙들며 아양을 떨 듯 흔들었다.

“앞으로 뒤통수 안 때릴게. 그러니까, 서로 최선을 다하자.”

호범이 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 때리는 건가 싶어 움찔했는데, 입술을 만진다. 그리

고 근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다정하여 키스라도 하려는 건 줄 알고 수현은 입을 살짝

벌려 손끝을 깨물었다. 그랬더니 우악스럽게 입술을 꼬집어서 비튼다. 읍! 인상을 팍 쓰

니 호범이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일갈했다.

“어쩌지. 난 뒤끝이 길어서. 아직도 이 주둥이 보면 썰어 버리고 싶어 미치겠는데.”

찰싹, 그 손을 때리고 나서 수현은 꼬집힌 입술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파 죽겠네. 노려보

자 호범이 이불을 수현의 머리 꼭대기까지 덮고 얼굴을 꾹 누른다. 그만 떠들고 자요. 아

침에 사람 올 거야.

수현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홱 벗었다. 양호범은 이미 문 앞까지 걸어간 상태다.

“고마워.”

호범이 걸음을 멈췄으나 돌아보진 않았다.


“아까, 내 보호자라고 해 줘서 고맙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나간다. 새끼. 부끄러워하긴. 홀로 남은 병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수현은 손을 아래로 뻗어 배를 만졌다. 흉터를 만지는데 감격하여 마음이 벅

차오른다. 부모 복도 없고, 남자 복도 없고, 거기다 신장까지 없어서 우울했는데, 그래도

하나는 멀쩡하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

“이모 여기, 소주 하나 추가요.”

매니저가 떠난 뒤 수현은 소주 여러 병을 더 추가하였다. 서비스로 받은 어묵탕을 마시

고 있는데 재선에게 금고는 어찌 되었냐는 연락이 왔다. 어찌 되긴 뭘 어찌 돼. 좆됐지.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답장을 보내는데 취해서 글씨가 엉망이다.

수현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고,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 우진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멓?]

하고 메시지를 보내니 잠시 후 답장이 온다.

[네?]

[ㅇ진아 구금ㅎㄱ있ㄴ데]

글자가 엉망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력하려는데 이번엔 전화가 걸려 온다. 김우진이

었다. 여보세요, 받고 나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통화하러 밖으로 나온 듯하였다.

[어디예요?]

“포장마차.”

[술 많이 마셨어요?]

“어, 티가 나?”

[네. 목소리가 그런 거 같아서요. 혼자 있는 거예요?]


낌새를 보니 혼자라고 하면 올 것 같단 말이지.

수현은 호텔 직원들과 함께라며 둘러댔다. 아아, 그래요? 역시나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

리다.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했거든.”

[뭔데요?]

“호범이 새끼 약점 같은 거 없냐.”

대답이 없다.

우진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딘가 실망한 투다.

“잘 생각해 봐.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아니겠냐.”

[형.]

“응.”

[백전백승 한자로 쓰실 수는 있으세요?]

수현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야… 너 은근히 양호범하고 닮았다? 사실은 그 새끼 동생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형 적은 호범이 형이 아니잖아요.]

무심한 목소리였으나, 묘하게 날이 섰다. 역시 어린데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니까.

더 캐물을 것도 없이 우진이 말을 잇는다.

[형은 왜 그렇게 호범이 형한테 관심이 많아요?]

“관심이 아니라 싫어서 그래. 괴롭혀 주고 싶어서.”

[정말요?]

“응.”

또 말이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약점은 모르겠고, 호범이 형 동물 좋아해요.]

“동물 뭐, 호랑이?”

[강아지요. 어릴 적에 주인 없는 개들 떠돌아다니면 데리고 와서 챙기고 그랬어요.]


허. 믿기지 않는다. 사람은 패도 개는 패지 않는다 이건가. 다른 건 없냐고 물으니 모르겠

단다. 하긴, 김우진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지 . 수현은 이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

하여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나 들어가 봐야겠다. 사람들이 찾는다.”

[형….]

“응?”

[다음엔 나에 대해서 물어봐 줘요.]

“뭐?”

[끊을게요. 술 너무 먹지 마세요. 건강에 나빠요.]

잠시 멍하다. 그 와중에 목소리가 달콤하다. 귀여운 새끼. 누가 보면 애인하고 통화하는

줄 알겠네. 전화를 끊고 나서 수현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소주를 물컵에 반 이상 따랐다.

그리고 그걸 입으로 가져가서 단숨에 들이켰다. 탁, 테이블에 놓는데, 옆에서 어떤 여자

가 술에 취해서 훌쩍이고 운다. 같이 온 남자 일행이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한다. 엉엉, 울

기 시작하니 달래느라 진땀을 흘린다.

“길 잃은 개새끼라….”

무슨 생각인지 수현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포장마차 주인에게로 갔다.

“사장님. 많이 바쁘세요?”

“다 드셨어? 많이 취했네. 소주 3 병 값만 계산하면 돼. 나머진 아까 그분이 하고 갔어요.”

“그게 아니라, 제가 부탁이 있는데.”

수현은 주머니를 뒤져 누군가의 전화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걸 사장의 얼굴 앞에 디밀었

다.

“여기 전화해서 저 울고 있다고, 데리러 오라고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니 사장이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을 한다. 여자 친구야? 그래도 그

렇지 남자가 울면 여자가 좋아하나. 그리고 내가 바빠. 할 일이 태산이야. 그녀가 파전을

뒤집었고, 수현은 점퍼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빼냈다. 오만 원짜리 2 장을 앞치마에 살


며시 넣고 부탁 좀 할게요. 라고 얘길 했더니 그녀가 다 부쳐진 전을 접시에 담아서 수현

에게 건네준다.

“저기 끝에 갖다줘. 전화는 이리 주고.”

수현이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번호를 확인하는 그녀는 노안이 있는지 휴대전화를 멀리했다.

“근데 성이 호씨야? 호로범?”

“네.”

“아이고, 부모님이 너무했다.”

그녀가 전화를 시작했고 수현은 접시에 담긴 파전을 들고 끝에 테이블로 갔다 . 맛있게

드세요.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니 그녀가 휴대전화를 건네준다.

“남잔데?”

“온대요?”

“아니. 모르는 사람이래.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아… 그럼 그렇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다가 사장의 앞치마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오

만 원으로 시선이 갔다. 그녀가 알아챘는지 쑥 눌렀고, 노란색 지폐는 자취를 감춰 버린

다. 수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에이 씨, 역시 호락호락하질 않네.

남은 술을 안주도 없이 병나발을 불자 취기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알코올에 온몸이 지배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아, 정신을 차리려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데, 전화가 걸려

온다. 수현은 눈을 의심한 뒤 벌떡 일어나 포장마차 사장에게 뛰어갔다.

“사장님. 왔어요! 얼른, 얼른!”

사장이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연기를 아주 찰떡같이 한다. 아, 그래요. 얼른 와서 데

려가세요. 너무 울어서 보기가 딱해. 라고 말하자 수현은 허공에 주먹을 꽉 쥐었다. 사장

님 파이팅.

“됐지?”
“흐흐,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려는데 몸이 휘청 근처에 빈 테이블로 넘어간다. 우당탕, 의자가 함께 넘어갔

고 사장이 놀라서 일으켜 세운다. 아유, 그러게 작작 마시지. 수현이 멋쩍게 웃고 나서 자

리를 털고 일어섰다. 죄송해요. 너무 취해서.

안 되겠다. 양호범 오기 전에 찬 바람 맞으면서 정신 차려야지. 수현은 점퍼를 자리에 벗

어 두고 돌아섰다. 안쪽에서 음식을 만들던 사장은 어디 갔는지 없다 . 연기할 때 옆에서

추임새라도 넣어 주셔야 하는데. 설마 그사이에 양호범이 도착하진 않겠지.

수현은 장막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추위가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불쌍한 개처럼 보이

려면 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취해서 연기가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네. 차라

리 조금 걸을까. 발을 떼는데 몸이 자꾸 옆으로 움직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다.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여

기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긋거린다. 아무리 걸어도 길은 나오지 않고 막막하

다. 마치 산에 홀로 남겨진 그 날처럼.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어디선가 시커먼 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저를 뒤쫓아

올 것만 같다. 수현은 몸을 숨길 생각으로 구석진 곳으로 가 웅크리고 앉았다 . 하, 내쉬는

입김이 뿌옇게 공중에서 흩어진다.

뒤늦게 추위가 몰려오며 엄마 생각이 난다. 혼자 남겨진 엄마는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

나 고통스러웠을까. 역시 그날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 어떻게서든 엄마를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맞아 죽더라도 엄마 곁을 지켰어야 했다. 돌이라도 손에 쥐고 놈들과 싸

웠어야 했다.

아니, 더 파고들자면 나란 인간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엄마가 아빠하고 결혼할 일도 없었고, 그렇게 죽어 버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나만 없었다면. 나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울면 안 돼. 이따가 양호범 앞에서

울어야 하는데. 불쌍한 개새끼처럼 보이려면 이따가….


시야가 닫히고 엄마가 보인다. 예쁜 옷을 입고 나타나 수현을 다독여 준다. 꿈인지 현실

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차라리 이대로 나를 데려가 주면 안 되냐고 부탁했다 . 하지만

엄마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수현은 그것이 너무 서러워 펑펑 눈물을 쏟았다.


50 화

수현은 제산제 스틱의 점선 부분을 뜯은 다음 입에 넣고 쭈욱 짰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상복부의 통증은 한 번씩 사람을 괴롭혔다. 의사는 술과 담배, 자극

적인 음식은 피하라고 했는데 가장 중요한 걸 간과했다 . 바로 스트레스. 그리고 그 스트

레스를 주는 인간 목록 중에 추가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호범인 요즘 바쁜가 봐? 이쪽엔 코빼기도 안 비치네.”

김우영이 쫓아다니며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대로 양호범은 퇴원한 이후 계속 얼굴을 보

지 못했다. 괜찮으냐는 연락 한번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리팀에 따로 얘길 한 건지 끼니

마다 죽이 배달됐다. 죽을 가져다주는 직원의 표정은 참으로 못마땅해 보였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침실로 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 김우영이 펜트하우스에 머

무는 날이 전보다 많아졌다. 문제는 그가 머물고 나면 꼭 난장판이 되어 있다는 거다. 아

니나 달라 침구를 정리하는 와중에 묵직한 쇳덩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주우려고 허리를 굽힌 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갑이다.

집어서 들었는데 장난감이 아니다. 진짜임을 알고서는 김우영을 쳐다봤다.

“왜. 자기 취향이야?”

수갑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나서 입맛이 써진다.

옆에다 치워두는데 김우영이 담배 쥔 손으로 수현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건 호범이 짓이지?”


수현은 잇자국이 선명한 턱을 문질렀다. 섹스하면서 양호범이 턱 아래를 물었는데 그것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난리였다. 차라리 밴드라도 붙일걸. 사람들은 누군지 몰라도 화

끈한 여자 친구를 둬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며칠 앓아서 못 나오더니, 아주 질펀하게 놀았나 봐?”

김우영이 주먹 위에 손바닥을 탁, 탁, 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을 한다.

수현은 못 본 척 정리를 시작했다.

“전에 내가 준 건 어땠어? 해 봤어? 최상품이었는데.”

그가 입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가 뽁, 하고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든다. 일전에 줬

던 마리화나를 일컫는 듯했다. 대답하지 않자 이번엔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와 주머니에

서 무언가를 꺼내서 눈앞에 흔든다. 캡슐로 된 약이었다.

“새로 나온 거. 떡칠 때 술에 타서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어. 바로 하나님 영접할 수 있다

니까.”

약을 보던 수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유혹에 약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김우영과 괜히 엮이면 양호범한테 밉보이기만 할 것이다 .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양호범이다.

“사양할게요.”

돌아서 가는데 그가 쫓아온다.

“후유증도 없어.”

“싫어요. 예전에,”

수현은 말을 멈추고 우영을 돌아봤다. 그는 제발 한 알만 먹으라고 통 사정하는 눈빛이

다. 이 인간만 만나면 실험용 쥐가 되는 기분이었다. 꼭 새로운 약을 먹여서 효과를 확인

하려 하는.

“약 끊다가 뒈질 뻔했어요.”

“그러니 딱이지. 오히려 무서운 걸 아니까 쉽게 중독되지 않을 거 아니야.”

이게 무슨 개소리람. 수현은 가자미눈을 떴다.


“ 자꾸 그러면 양 사장한테 이를 거예요. 그럼 약보다 더 빨리 하나님 뵐 수 있을지도 모

르겠네요.”

김우영이 움찔하더니 냉큼 약을 집어넣었다.

“뭘 또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러면서 치료 전까지 먹었던 약이 뭔지, 얼마나 복용했는지 하는 것들을 꼬치꼬치 캐묻

는다. 만날 때 보면 김우영의 관심사는 약에 집중되어 있었다 . 그다음이 섹스려나. 그럼

양호범의 관심사는 뭐지.

“근데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얼마든지 물어봐.”

“양 사장은 여기 안 오면 뭐 하러 다녀요?”

“뭐 하다니. 일하지. 걔가 얼마나 바쁜데.”

“하는 일이 많아요?”

“몰랐어? 호텔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야. 가지고 있는 리조트도 몇 개고, 아! 최근엔 연예

기획사도 하나 만들었더라. 이유민 알지? SNS 스타로 떠서 존나 핫하잖아. 걔도 영입했

어. 호범이하고 잤는지는 모르겠네.”

“…….”

“자기도 한번 부탁해 봐. 청소하기엔 얼굴이 아깝지 않아?”

그 말은 한번 잤으니 그걸 빌미로 부탁을 하라는 뜻인가 보다 .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표

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벌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겠네요.”

“왜. 호범이가 자기한테 돈 안 써?”

“궁금해서 그래요. 나이도 젊은데 부럽기도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를 확인한 수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민준이다.

[저녁 같이 먹을까?]
저도 모르게 입이 굳게 닫혔다. 몇 시에? 라고 메시지를 보내 놓고 나니 김우영이 소리

없이 다가와 옆에 서 있다. 수현은 화들짝 놀라서 급히 화면을 닫고 안주머니에 넣었다 .

김우영이 음흉한 눈길을 보내며 웃는다.

“누군데 숨길까.”

수현은 대답하지 않고 청소기 전원 버튼을 켰다. 위잉- 소리가 나며 카펫 위를 문지르자

김우영이 옆에 와서 뭐라고 떠든다. 바람피우는 거 아니야? 어쩌고 하는 말에 어처구니

가 없어 못 들은 척했다. 대꾸하지 않고 청소에 열중하니 그가 재미없다며 시시하다고

가 버린다.

혼자 남은 수현은 휴대전화를 다시 꺼냈다.

[7 시. 전에 거기 어때?]

처음 만났던 그 레스토랑인가 보다. 직원의 태도로 보아 서민준은 그곳 단골인 듯하였

다. 알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심란하여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수현은 청

소기를 팽개치고 결국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일과를 마친 뒤 수현은 옷을 갈아입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지하 상점 앞에 멈

춰서서 모자 하나를 들고 거울을 보는데, 아니나 달라 뒤쪽으로 검은 점퍼에 검은색 야

구 모자를 쓴 남자가 다른 상점 앞에서 이쪽을 흘깃댄다.

누구지. 김태신의 부하인가. 아니면 양호범이 붙여 놓은 사람인가. 아니면 서민준? 의심

가는 인간이 하도 많아서 누군지 짐작도 못 하겠다. 일단 못 본 척 모자를 내려놓고 지하

철 승강장으로 움직였다.

사람들 뒤로 줄을 서 있는데 자신을 쫓던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선다. 이

어서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지하철이 도착하여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타기 시작했다 . 역시나 지하

철 안은 사람으로 미어터진다. 제일 나중에 타 문 앞에 바싹 붙어 있으니 잠시 뒤 출입문

이 닫힙니다. 라는 안내가 나온다.


치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기 직전 수현은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 문이 완전히 닫

히고 지하철이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저를 쫓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수현이 있는 칸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일이 틀어진 걸 알아챘는지 모

자를 거칠게 벗으며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수현은 보란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곧장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무래도 늦을 거 같다고 서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누군

가 어깨에 팔을 두른다. 동시에 옆구리에 섬뜩한 느낌이 온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김태

신이 찢어진 입을 혀로 핥으며 소름 끼치게 웃고 있었다.

“백수현. 내가 너를 직접 모시러 와야겠냐.”

인상을 쓰고 떨어지려고 하니 그가 칼끝을 더 들이민다. 수현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

고 놈을 봤다. 이미 한바탕 사람들이 떠나간 뒤라 승강장에는 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

김태신의 뒤로는 그의 부하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너하고 나, 아직 계산이 남았지?”

“글쎄요… 무슨 말인지… 잘….”

“옆구리에 숨구멍 뚫으면 기억이 날까?”

“형님은 말을 너무 무섭게 하셔, 하하.”

“웃지 마, 정들어. 아니다. 이참에 너하고 정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일단 위로 가자, 예쁜아. 그가 수현의 어깨를 꽉 붙들고 돌려세운다. 사람들이 계단을 막

내려오고 있었다. 옆에는 김태신이 앞뒤는 그의 부하들이 붙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이놈의 인생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 속으로 욕을 뱉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내내 수현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양호범이 있는 이상 김태신도 저를 함부로 건들지 못할 거라는 실

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 양호범한테 백수현은 꽤 쓸모 있는 존재 아니던가.

지상으로 나와 끌려가는데 검은색 세단 앞에 낯익은 남자가 서 있다. 마치 자신의 차인

것처럼 담배를 물고 기대서서.


김태신의 걸음이 도중에 멈췄다.

“저 새끼 여긴 또 어떻게….”

김태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를 빠득 간다. 수현은 뒤늦게 양호범이 심어 뒀다던 프락

치의 존재를 떠올렸다. 무심코 김태신 부하를 쳐다봤다. 둘 중 하난가. 아니면 다른 놈인

가. 사실을 알게 되면 김태신이 얼마나 펄쩍펄쩍 뛸지 궁금했다.

어느덧 양호범이 코앞까지 걸어왔다.

“왜 자꾸 김태신하고 붙어먹어요?”

말을 해도 꼭. 수현이 눈을 한번 흘기고 나서 움직이려고 하는데 김태신이 수현의 어깨

를 세게 누르며 칼끝에 더 힘을 준다. 수현은 옴짝달싹 못 하고 김태신에게 도로 붙들렸

다.

호범은 담배를 앞니로 꽉 문 채 김태신을 보며 웃었다 . 땅을 빼앗겨 자신의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던 날과 흡사하다. 수현은 그가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칼춤이라도 추게?”

김태신이 입술을 비틀었다.

“못 할 것도 없지.”

호범이 슈트의 단추를 풀고 활짝 벌렸다. 해봐, 어디. 주위의 시선이 하나둘 몰리기 시작

한다. 뭐야. 싸움 난 거야. 쳐다보지 마, 조폭인가 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

르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치열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예상외로 김태신이 먼저 물러섰다.

그는 쥐고 있던 칼을 허리춤에 숨기고 수현의 등을 확 떠밀어 양호범에게 보냈다.

“데려가.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양호범이 피식 웃자 김태신은 씨발새끼라고, 욕을 하며 자신의 차로 걸어간다. 김태신이

뒷자리에 타고 부하들이 앞자리에 앉은 순간 양호범이 돌아서 그쪽으로 성큼성큼 향한

다. 그는 뒷문을 벌컥 열고 순식간에 김태신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며 물고 있던 담배

를 목에 짓이겼다.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경악했다.


호범은 그대로 김태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 빡, 빡,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

께 차에서 그의 부하들이 뛰쳐나왔다. 몸부림을 치던 김태신이 축 늘어지자 호범은 차량

뒷좌석에 그를 던져 넣고 문을 탁, 닫았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피 묻은 손을 닦는다.

뛰쳐나온 김태신의 부하들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면서도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호범은

그들을 보고 서늘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그쪽으로 획 던졌다. 수현은 혹여 김태신이 밖으

로 뛰쳐나올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뒤늦게 차 안에서 김태신의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온다.

죽일 듯 노려보던 부하들이 차에 올라타더니 서둘러 출발했다.

차가 떠나자 양호범은 거침없이 걸어왔고, 수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가 일부러 만난 거 아니다!”

호범은 말없이 수현의 목덜미를 잡아채 검은색 승용차로 끌고갔다. 놓으라고 버둥대던

수현을 보조석에 쑤셔 넣더니 사납게 문을 닫는다. 하필이면 그때 서민준에게 연락이 온

다. 언제 도착하는지 묻는 메시지였다.

순간, 운전석에 앉은 양호범이 휴대전화를 낚아채 간다.

“서민준이네?”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으려니 숨이 턱 막힌다.

놈은 손등에 남은 피를 물티슈로 닦으며 욕을 했다. 쳐다보는 눈빛이 살벌하다.

“만나러 갈 땐 말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억울하다. 며칠째 보이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한 게 누군데.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하려 해도 조금 전 상황 때문에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 말하려고 했어! 근데 네가 요즘에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호범이 전화를 돌려줬다.

“전화는 뒀다가 국 끓여 먹으려고 했어요?”

이번엔 반대편 손을 뻗는다.

때릴까 봐 움찔하자 한 번 노려보더니 안전띠를 쭉 잡아당긴다.


철컥, 소리가 났고 그가 시동을 켰다.

“약속 장소 어디예요. 데려다줄게.”


51 화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수현은 양호범의 손등을 흘깃 봤다 . 피만 묻은 줄 알았더니 손등

도 까졌다. 야무지게 패더니. 혹시 밴드가 있나 싶어 앞에 있는 글로브박스를 여는데 신

문지에 감긴 칼이 눈에 들어온다. 수현은 질색하고 그것을 탁 닫았다.

“아까부터 뭘 찾아요?”

“밴드. 손등에 피나잖아.”

몰랐는지 제 손을 슥 보고 피식 웃는다. 됐어요. 두면 나아요.

길을 따로 알려 주지 않아도 양호범은 막힘없이 방향을 틀었다.

“죽은 잘 챙겨 먹었어요?”

설마 했는데, 진짜 양호범이 부탁해서 챙겨 준 거였구나.

“먹었어….”

“약은?”

“아직 남았어.”

“잘 챙겨 먹어요. 또 아프면 곤란하잖아.”

그 말에 수현이 내심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쳐다봤다.

“설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백수현이 튼튼해야 서 검사하고 떡도 치고, 영상도 찍을 테니.”

그럼 그렇지. 이 새끼. 눈을 흘기고 나서 앞을 보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호범은 조금

떨어진 곳 상점 앞에 주차한 뒤 콘솔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100 원짜리 동전만 한 검


은 물체였는데 그걸 들더니 수현을 머리부터 훑어 내려간다. 목이 가려지는 터틀넥에 오

버사이즈 코트를 입었더니 못마땅한 표정이다.

“옷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왜.”

“너무 애 같아서.”

누가 누구더러 애래. 수현은 목을 가리고 있던 니트를 아래로 끌어 내리고 아직 남아 있

는 멍과 양호범이 씹어 놓은 자국들을 확인시켜 주며 투덜댔다.

“내 꼴 좀 봐. 이걸 어떻게 내놓고 다녀.”

호범은 상처를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멍이 오래 가네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말투다. 그는 콘솔박스에서 꺼낸 검은 물체를 수현에게 건넸

다. 녹음기에요. 옷 안쪽에 달아요. 수현은 코트 안쪽 적당한 위치에 그것을 고정했다 . 카

메라는 없냐고 물으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낸다.

“손.”

순순히 내밀자 손목에 시계를 채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가지 당부.

“옆에 버튼 보이죠? 누르면 녹화돼요. 눈치 못 채게 해요. 또 대놓고 누르지 말고.”

시계를 보자 수현은 전에 서민준을 만나러 갈 때 양호범이 골라 준 시계가 떠올랐다 . 그

것도 이런 용도였을까. 어차피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놈이 나를 감시하려고 마음먹

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텐데.

“서민준이 오늘 떡 치자고 하면? 바로 찍어?”

그 말에 양호범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자신감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수현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입을 삐죽였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양호범은

서민준과 백수현의 섹스 영상을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안 봐도 뻔하다.

이 새끼는 자기 친구들을 불러 영상을 틀어 놓고 파티를 열겠지. 옆에 여자를 끼고.

씁쓸하게 웃는데 호범이 수현의 턱을 쥐고 눈을 마주친다.


“정신 차려요. 엉뚱한 생각 그만하고.”

마치 최면을 거는 것 같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어서 가 보라며 놓아준다. 문을 열

고 밖으로 나온 수현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돌아보니 양호범은 아직 그 자리에 차를 댄

채 서 있다. 선팅이 짙어 이쪽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길을 건너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데 전에 봤던 직원이 입구에서 안내를 도

와준다. 예약했어요. 서민준 씨요. 네, 알고 있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방의 위치는 전과 같았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서민준이 나타난다.

들어서던 수현은 멈칫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가 웃으며 수현을 반긴다. 하지만 룸 안에 있던 건 서민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오른

쪽엔 단발머리의 여자가 있었고, 그리고 왼쪽엔 눈이 왕방울만 한 여자아이가 한쪽 팔로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당황하여 들어가지 못하자 서민준이 일어나 웃으며 다가온다.

“놀랬구나. 미리 말해 줄걸.”

그는 수현의 팔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김서영이에요. 이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는 분명 가족사진에서 본 서민준의 처였다.

“아빠 누구야?”

의자에 앉아 있던 꼬마가 수현을 보면서 궁금해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전에 말했지. 아빠 동생. 수현이 삼촌.”

꼬마가 엉거주춤 배 위에 손을 대고 삼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더니 자기 아빠를 보

고 부끄러운지 배시시 웃는다. 당황한 수현은 침착하게 미소를 유지하며 아이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그리고 서민준의 처를 마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수현입니다. 같이 나오시는 줄 몰랐어요.”

“그래요? 난 수현 씨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수현은 자리에 앉으며 시선을 서민준에게로 옮겨 갔다 .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예전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정말 아끼는 동생을 만나 기쁜 사람처럼.

수현은 태연한 척하느라 뺨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 그런데 앞에 앉은 꼬마가 인형을

들고 테이블을 돌아 수현에게 온다. 옆에 의자를 끌어내느라 낑낑대길래 수현이 도와주

자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나는 삼촌 옆에 앉을래요.”

헤헤, 웃는 얼굴이 어릴 적 서민준을 많이 빼닮았다.

수현은 먹먹하고 서글퍼지는 기분을 애써 외면했다.

둘을 지켜보던 서민준이 메뉴판을 건네준다.

“ 전에 식사 못 하고 보낸 게 마음에 걸리더라. 이 사람이 집으로 초대하자고 했는데, 일

단 네 의견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옆에서 김서영이 끼어든다.

“아니면 봐서 2 차는 우리 집 가요.”

“그럴까? 김 집사님한테 안주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해야겠네.”

“내가 할게요. 잠시만요.”

수현이 사양할 틈도 없이 그녀가 싱긋 웃더니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혔고

아이와 서민준 수현 셋만이 남게 됐다. 수현은 서민준을 빤히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네. 둘이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었어?”

“집사람이 너 궁금해했어. 가끔 얘기했었거든.”

“뭐라고 했는데.”

“친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수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개새끼. 너는 친 동생하고 붙어먹냐. 애가 있어 차마 말은

못 하고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타는 속을 달랬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은이 수현의 팔을

잡고서 말을 걸어온다. 아니, 정확히는 들고 있는 토끼를 움직이면서.

“안녕. 나는 토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안녕. 나는 백수현. 만나서 반가워.”


“나도 반가워. 근데 넌 왜 혼자야? 엄마 아빠는 어딨어?”

수현은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어.

“죽었어.”

아이가 잠시 멈칫하고 수현을 보다 자기 아빠를 쳐다본다 . 마침 문이 열리며 서민준의

처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민준은 표정을 정리하고 자기 아내를 맞이했다.

“통화했어?”

“응. 수현 씨 이따가 우리 집 가요.”

그녀가 자리에 앉았고, 반대로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부터 뒤통수를 한 대 얻

어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정신이 멍했다. 속도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고. 죄송해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서둘러 일어나며 문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미소가 사라지고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온다.

복도를 걷는데 다리가 휘청인다. 수현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서 찬물을 틀었다.

얼굴에 홧홧한 열기가 올라온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연거푸 얼굴에 끼얹었다 . 푸, 푸, 그

러고 나서 거울을 보는데 언제 왔는지 서민준이 뒤에 서서 저를 쳐다보고 있다.

금세 자취를 감췄으나 분명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는 핸드 타월을 뜯어내 다정하게 수현에게 건넸다.

“괜찮아? 안색이 나빠 보여서 따라왔어.”

수현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은 뒤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서민준을 마주 보고 섰

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네.

“이럴 거면 왜 보자고 한 거야?”

“뭐?”

“나는 형이 무슨 생각으로 와이프와 애를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네.”

“아까 말했잖아. 너 소개해 주고 싶었다고.”

수현은 울컥 치밀어 오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눌렀다.

“순서가 틀린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가 먼저였어야지.”


“수현아.”

“왜. 내가 다 까발릴까 봐 무서웠어?”

“수현아.”

“ 계속 묻고 싶었어. 내 형량을 줄이려고 노력하긴 했어? 탄원서를 쓰긴 했던 거야? 출소

후에 정말 나를 찾은 건 맞아? 아니, 다 거짓말이었어. 정말 그랬으면 여태 못 찾았을 리

가 없잖아. 형한테 사람 찾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너는 그냥 나를 버린 거야.

아니야?”

어째서 진술서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적었냐고 . 어째서 가해자의 편을 들었냐고! 그 대

가로 무엇을 받았느냐고. 수많은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데 서민준이 억울하고 속상

한 표정을 한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수현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하, 하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 생각했다. 만약 서민준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무릎을 꿇고 어

떻게든 속죄하겠다고 말하면, 그때는… 어렵겠지만, 용서해 보겠노라고. 하지만 그는 자

신이 알던 서민준이 아니었다.

수현은 앞으로 성큼 다가가 불시에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입술을 집어삼켰다 . 돌발

행동에 서민준의 눈이 커진다.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고 안쪽을 끈적하게 훑으며 한

손으로는 좆을 움켜쥐자 움찔, 어깨를 떨며 수현을 사납게 밀친다.

수현은 뒤로 물러서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서민준의 표정이 무섭게 변한다. 하지만

수현은 그의 눈빛에서 억눌러 왔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 그걸 증명하듯 조금 전 만진

아랫도리가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든다.

수현은 얼굴과 그의 좆을 번갈아 보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다가갔다. 서민준이 어금니

를 꽉 물고 노려본다. 수현은 뱃속에서 쾌감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마치 김도한의 귀를

자를 때처럼. 서민준의 눈을 지그시 보며 수현은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형한테 바라는

거 없어. 다만,

“예전처럼 지내. 그거면 돼.”


“…….”

수현은 비틀어진 그의 넥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못 알아먹겠어? 다시 개처럼 붙어먹잔 얘기야.”

분노에 잠겨 있던 서민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요동친다.

이번엔 넥타이의 매듭 부분을 은근히 문지르며 예쁘게 웃었다.

“갈게. 오늘은 가족끼리 단란하게 보내. 나는 다른 약속이 생겼어.”


52 화

건물 밖으로 나온 수현은 빠르게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갔다. 분하고 화가 나서 눈물

이 쏟아지려 했다. 시큰대는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검은

차 한 대가 이쪽으로 온다.

설마 했는데, 정말 양호범이다. 집에 간 게 아니었어? 앞에 멈춰 서길래 멀뚱히 보고만

있으니 창문이 지잉 내려간다.

“안 타고 뭐 해요?”

수현은 뒤를 한번 돌아봤다. 혹 서민준이 나온 건 아닐까 싶어서. 가게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양 사장, 왜 안 갔어?”

“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밥 먹고, 가능하면 오늘 섹스까지 하

기로 한 거 아니었나.”

살짝 놀리면서 묻는 말투다. 그러다 수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수현은 울 뻔한 걸 들

킬세라 시선을 피했다. 출발하지 않고 있길래 어서 가라고 재촉을 했더니 양호범이 차를

출발시키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한다.

“뭘 하긴 했나 보네. 그 인간 스킨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아, 나는 또 운 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네.

“그 짧은 시간 동안 섹스한 건 아닐 테고, 뭐 했어요?”

수현은 대답 대신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호범에게 내밀었다 . 흘깃 보던 호범이 뭐예

요? 라고 묻길래 수현은 화면을 터치해 보여 줬다. 제대로 확인한 호범이 브레이크를 밟


는다. 끼이- 소리와 함께. 잠금 화면에는 단란한 가족사진이 있었다. 남자는 당연히 서민

준이었고.

빵- 갑자기 멈추니 뒤에서 클랙슨이 울리고 난리다.

호범은 일단 옆으로 차를 빼서 도롯가에 정차했다. 그러고 나서 수현을 돌아봤다.

“그거 혹시….”

“어.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호범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수현은 나름 변명을 했다.

“키스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움직였어.”

호범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 생각 없이 빼 오긴 했지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혹여 또 지랄하고 때릴까 싶어 여차하면 내려서 도망칠 생각으로 안전띠

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호범은 혀로 볼 안쪽을 슥, 문지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재주 좋네, 백수현. 만나자마자 키스까지 하고.”

아, 휴대전화 때문이 아니구나. 하긴 양호범도 오늘 키스까지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사실 수현도 그랬다. 밥이나 먹고 속내나 떠볼 생각이었는데, 그 인간이 열받게 하

는 바람에…. 하지만 덕분에 서민준이 흔들렸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다.

수현은 뿌듯한 표정으로 호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마. 이대로 가면 섹스도 금방이야.”

호범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고 수현은 손을 슬그머니 거뒀다. 어깨는 함부로 치는 게 아

니었는데. 만졌던 자리를 조심스럽게 털고서는 자세를 바로 하는데 호범의 시선이 휴대

전화로 옮겨 간다.

“그렇다고 그걸 가져와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빡대가리도 아니고.”

조금 억울했다. 그래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여기 중요한 게 있을지 누가 알아.”

“서민준한테 휴대전화가 그것뿐일까? 그 인간 성격에 퍽이나 중요한 걸 거기 뒀겠다.”

수현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짓다가 애써 수습했다.


“사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어.”

“무슨 생각?”

“어?”

“무슨 생각이냐고.”

“…….”

“거봐. 빡대가리 맞아.”

호범은 말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수현은 휴대전화를 봤다. 사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가끔, 아니 종종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데 정신과 의사는 충

동을 조절하는 뇌 부분에 이상이 생긴 거라고 그랬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아까 서민준 목을 먼저 졸랐겠

지. 이건 그냥 도둑놈 피가 흘러서 그런 것이다. 서민준의 휴대전화를 주머니 안쪽에 넣

는데 수현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수현아.]

벌써? 수현은 저도 모르게 뒤에 따라오는 차가 없는지를 살폈다. 수현의 행동이 이상했

는지 호범이 힐긋 본다.

“왜 전화했어?”

서민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 네가 가져갔어?]

“응.”

[왜…?]

“형 미워서….”

서민준이 말이 없다. 수현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나서 천천히 감정을 잡았다.

“나는 형이 만나자고 해서… 기뻤어. 미운 건 미운 거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어.”
말을 멈췄다. 감정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데 옆에서 호범이 기막힌 얼굴로 본다 . 뭐 어쩌

라고 하는 표정을 잠깐 짓고 나서 수현은 몰입을 위해 아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형은 보란 듯 식구들 데리고 나왔잖아… . 내가 언제 형 와이프하고 아이가 궁금하

다고 했어? 사람을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 내가 그동안 힘든 걸 어떻게 버텼는

데…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닭똥 같은 눈물이 뺨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온

다.

[수현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오해야.]

“거짓말하지 마. 형 나 경계했잖아. 내가 형한테 나쁜 짓 할까 봐… 계속 거리 뒀잖아. 그

래… 나 형 원망해… 미워해… . 그렇지만… 흑… 한 번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힘들

어도 형… 때문에 내가 버텼는데….”

흐느끼면서 우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그의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

려왔다. 미안하다. 만나서 얘기해. 너 감정 추스르면 연락해. 내가 그리로 갈게. 라고 하

더니 전화를 끊는다. 수현은 끊긴 전화를 확인하고 표정을 싹 바꾼 뒤 옷 소매로 고여 있

던 눈물을 슥슥, 닦았다.

옆을 보니 양호범이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왜.”

“아주….”

“감쪽같지?”

“어련하시겠어요.”

수현은 태연하게 씩 웃었다. 그러고 나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호범을 외면했다. 고여

있던 눈물을 손으로 정리하고 나서 씨발. 욕을 하며 코를 훌쩍였다.

호범은 그 모습을 빤히 봤다. 적어도 지금 백수현이 한 말이 모두 거짓이 아니란 것쯤은

알겠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즉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

씻고 나온 호범은 셔츠를 갈아입고 안쪽 진열장에서 술을 꺼낸 뒤 잔을 들고 거실 소파

로 갔다.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시계, 그리고 백수현에게 채워 준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

백수현은 저녁을 먹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곧장 호텔로 돌아갔다.

호범은 손목시계에서 메모리칩을 분리해 노트북에 연결했다. 파일이 하나 떴고 그것을

클릭하자 영상이 재생된다. 다소 흔들리긴 했으나 화질은 꽤 선명했다. 화면에 서민준과

그의 처, 그리고 어린 딸이 나온다. 웃음이 났다.

서민준 여우 같은 새끼. 백수현이 어쭙잖게 마음 약한 걸 알고 가족들을 무대에 세웠구

나.

역할에 충실하듯 그의 아내는 사람 좋게 백수현을 대했다.

[집사람이 너 궁금해했어. 가끔 얘기했었거든.]

[뭐라고 했는데.]

[친동생이나 다름없다고.]

호범은 잔에 술을 부은 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친동생하고 씹질하는 개새끼가 저기 있

었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화면을 응시하는데 백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는지 의자 끌

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뀐다.

영상이 흔들리고 벽으로 보이는 것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 이어서 화장실로 추정되는 장

소가 나타났다. 하아, 참았다 터트리는 숨소리가 처참한 심경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백

수현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세면대 앞에서 얼굴에 연신 물을 끼얹었다.

잠시 후 백수현이 돌아섰다. 화면이 바뀌며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수현과 서민

준. 호범은 자세를 바로 하고 화면에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손목시계에 내장된 카메라

가 화장실 거울을 비추는 중이다.

잔을 쥔 손을 소파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화면만 뚫어지게 노려봤다.

[순서가 틀린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가 먼저였어야지.]


[왜. 내가 다 까발릴까 봐 무서웠어?]

[계속 묻고 싶었어. 내 형량을 줄이려고 노력하긴 했어? 탄원서를 쓰긴 했던 거야? 출소

후에 나를 찾은 건 맞아? 아니, 다 거짓말이었어. 정말 그랬으면 여태 못 찾았을 리가 없

잖아. 형한테 사람 찾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너는 그냥 나를 버린 거야. 아니

야?]

따져 묻는 백수현의 목소리에서 절망감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민준의 대답.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백수현이 그대로 서민준을 당겨 키스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이 서민준의 좆을 더듬는다.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호범은 술잔을 힘주어 잡았다. 입술

이 떨어지고 가쁜 숨소리를 뚫고 백수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못 알아먹겠어? 다시 개처럼 붙어먹잔 얘기야.]

그리고 저녁 약속이 있다며 나가는 백수현. 화면은 거기에서 멈췄다. 호범은 영상을 앞

으로 되돌렸다. 백수현이 서민준과 키스를 하는 그 지점으로. 차에서 울면서 너 때문에

버텼다고 그리웠노라고 고백을 하던 모습과 오버랩된다.

노려보던 호범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화면을 덮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뒤 손

목시계와 녹음기를 쳐다봤다. 이 인간 심란하다고 술 처먹고 또 어디 가서 진상 짓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엉뚱한 놈한테 다리 벌릴 궁리나 하든가.

술을 더 마신 뒤 시간이 흘렀고 호범은 고민 끝에 휴대전화를 집어 백수현에게 연락했

다. 뒷수습하느라 골치 썩느니 차라리 미리 단속하잔 생각으로 . 신호가 가고 한참 뒤 수

현이 전화를 받는다. 무척 떠들썩한 가운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어디냐고 물을 새도 없이 방해꾼들이 끼어들었다 . 뭐야 수현이 애인이야. 오라고 해. 제

수씨 오세요. 얼굴 보고 싶어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오라고 해.

제수씨 오세요! 수현이 술 많이 먹고 있어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호범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백수현이 먼저 입을 연다.


[애인 아니고 양 사장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그리고 속닥이는 소리.

야 빨리 끊어. 얼른. 다들 죽은 척해. 쉿!

듣고 있던 호범의 미간이 꾸깃, 일그러졌다.

[양 사장. 왜 전화했어?]

“그냥 했어요. 바빠요?”

[어, 어….]

“그럼 끊어요.”

[어, 그래.]

하더니 미련 없이 툭, 끊는다.

휴대전화를 보면 호범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씨발. 누가 가고 싶다고 했어?”


53 화

“야, 너는 사장님 전화를 그렇게 막….”

수현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봤다. 사실 양호범이 전화를 해서 저도 당황했다. 저번에 뒤

통수치고 도망갔을 때 빼고는 먼저 연락한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은데. 대체 왜 한 거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슬슬 불안해진다.

“먹고, 죽자!”

누군가 잔을 들어 외쳤다. 수현도 거기에 동참하며 밀려드는 잡념들을 지워 버렸다. 오

늘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취해서 잠들고 싶다.

연말이지만 호텔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빴고 회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 그래서 친한 사람

들끼리 그나마 바쁘지 않은 요일을 골라 술을 먹기로 했다.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 기

분이 꿀꿀했던 수현은 차라리 사람들 속에 섞여 있자는 생각으로 나왔다. 막상 나와 보

니 즐겁고 또래들이 많아서 말도 잘 통하였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수현 씨는 사장님하고 어떤 관계야?”

수현은 생각했다.

둘 사이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답답했는지 옆에 직원이 나선다.

“소문엔, 선후배라던데. 그럼 같은 학교? 수현 씨도 K 대?”

K 대? 서울에 그 K 대? 삼겹살을 뒤집던 수현은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깜빡였다.

“선후배는 아닌가?”
“아니, 그것보다 방금 어디 대학이라고 했어요?”

“K 대. 왜?”

수현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양호범이… 거기 나왔어요?”

“몰랐어?”

맞은편에 보안팀 직원이 끼어들었다.

“1 학년 마치고 자퇴한 걸로 아는데요. 제 친구하고 동기잖아요.”

“그래도 나온 건 나온 거지.”

대부분이 알고 있는 듯하여 수현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 믿기지 않는

다. 그 머리통에 근육으로 꽉 찬 줄 알았는데. 혹시 학교에 기부금이라도 내고 입학한 건

아닐까. 겉모습만 보면 어디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갔을 거 같은데.

“하긴. 이른 나이에 적성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아. 돈도 많겠다, 뭐가 고민이야.”

매니저의 말에 수현은 어이가 없어 입만 벌려 웃었다. 뭐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술

이 확 깰 만큼 충격적이긴 하다. 한편으로는 양호범과 꽤 붙어 있음에도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생각할수록 대단하지 않아요? 처음에 너무 어린 사람이 사장이라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사실 대우로만 놓고 보면 전보다 훨씬 낫잖아요.”

“맞아. 처우는 좋아졌지. 급여도 그렇고.”

“인정. 일은 확실히 하는 것 같아. 데스크에 고객들 컴플레인도 많이 줄었다더라.”

“근데 카지노는 계속 운영할 생각인가. 저는 밤에 그쪽 내려가면 좀 무섭던데.”

“뭐가.”

“야쿠자 애들하고 삼합회 애들도 오잖아요.”

“소문을 믿어? 대부분 여행객이야.”

“아닐걸요. 전번에 제가 봤는데,”


수현은 거의 모르는 얘기다. 그래도 직원들은 때리지 않는 모양이네 . 직원들은 호범을

어려워하는 듯 보였으나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사장을 흉보기 마

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면 수현이 아는 사람이라 더 그럴 수도 있고.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제일 앞쪽에 있던 직원이 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고기를 뒤집던

수현은 돌아보다가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다른 이들 역시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다 .

다들 엉거주춤 일어서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누가 부른 거야. 수현이 너야? 수현 씨가 불렀어?

수현은 억울한 표정을 했다.

양호범이 입구에서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온다.

“사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백수현 씨가 오라고 메시지 보냈더라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수현에게 확 쏠린다. 수현은 억울해서 팔짝 뛰는 심정으로 호범을 쳐다

봤다. 호범은 눈썹을 까딱하더니 뻔뻔하게 웃는다 . 놀란 기색을 지우고 하나둘 회식에

참석한 사장을 반겼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에요. 여기 앉으세요.”

“이런 누추한 자리까지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오로지 수현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안 왔으면 하고 바라던 사람들 맞나 .

저도 같이 일어나서 아부에 동참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호범이 자연스레 수현의 옆에 자

리를 잡고 앉는다. 덕분에 자리가 한 칸씩 밀려났다. 불판에 고기를 본 양호범이 매니저

를 쳐다봤다.

“죄송해요.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눈치 없이 온 걸까요?”

“아유, 무슨 말씀을요. 저희야 황송할 따름이죠.”

“그런데 왜 삼겹살 드세요. 소고기 드시지.”

“에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회식하는 것도 아니고.”

“드세요. 제가 사겠습니다.”
“대표님도 참.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매니저의 능청에 호범이 근사하게 웃는다. 다들 좋다고 난리가 났다. 수현은 기가 막혔

다. 얼씨구, 잘하면 소고기에 영혼도 팔겠네. 불판이 바뀌고 핏기를 머금은 소고기가 올

라갔다.

수현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호범에게 조용하게 속삭였다.

“왜 왔어?”

“술 먹고 개 될까 봐 단속하러 왔어요.”

“누구? 나?”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이다. 얼마나 하찮게 쳐다보는지 수현은 입맛이 싹 사라졌다. 고기

대신 술을 입으로 가져가니 호범이 들리지 않게 잔소리를 한다.

“그만 처먹어요. 또 실려 가서 사람 엿 먹이지 말고.”

“약 미리 먹었어.”

“의사가 그러라고 처방해 준 약이 아닐 텐데?”

못 들은 척하니 잔을 채가서 자기가 마신다 . 그걸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호범에게 술을

따라 줬다. 사장님 제 술 받으세요. 호텔에 자주 나오세요. 사장님이 나오셔야 여직원들

이 좋아하죠. 가까이서 뵈니 더 잘생겼어요. 저 처음에 사장님 보고 배우인 줄 알았잖아

요.

아부와 아첨이 난무했지만 예상보다 양호범은 직원들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누군가 2 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소리쳤다. 대부분 동조하며 하나둘 옷을

챙겨 들었다. 신발을 신고 보니 양호범이 이미 계산을 마친 후였다.

수현은 밖으로 나와 호범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너는 이제 가….”

“왜 자꾸 가래요? 직원들 저렇게 좋아하는데.”

“야. 눈치 없는 사장이 젤 밥맛이야.”

어떻게든 보내려 하는데 매니저가 불쑥 나타난다.

“사장님 노래방 같이 가실 거죠?”


호범은 흔쾌히 승낙한다.

“그럼요. 가야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들이 양호범 주변으로 몰려든다. 진짜 가실 거예요? 사장님 노

래 잘 부르세요? 목소리 좋아서 노래도 잘하실 거 같아요. 이따가 불러 주세요. 꿔다 놓

은 보릿자루마냥 뒤로 떠밀린 수현은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뭐야…. 오지 말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2 차로 간 노래방은 방이 꽤 커서 여러 명이 앉기에 충분했다 . 황금색 조명 아래 디귿 모

양의 소파가 놓여 있고 가운데 유리 테이블에는 양주와 맥주, 안주가 세팅되어 있었다.

처음엔 호범의 눈치를 보면서 노래 부르기를 떠밀더니 한사람이 나와서 부르기 시작하

자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라 나중엔 탬버린 치고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 연말에 바빠 연

초에 시무식 겸 부서별로 나뉘어 회식을 하긴 하는데 그때마다 호범은 지배인한테 카드

만 주고 빠지는 편이어서 직원들과 이렇게 어울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수현이 일어나더니 맥주와 양주를 섞어 능숙하게 폭탄주를 제조한다 . 뒤늦게

호범은 수현이 술집에서 웨이터로 일한 경력을 떠올렸다 . 유리잔 안에서 술이 회오리처

럼 움직인다.

첫 번째 폭탄주를 수현은 호범에게 건네줬다.

“첫 잔은 우리 싸장님!”

다들 좋다고 박수 치고 난리다. 백수현은 취했는지 눈웃음을 흘린다. 티 나지 않게 노려

보던 호범은 그것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다 매니저가 비틀거리고 나가서 노래 선곡을 한

다. 평소 단정하던 매니저는 술에 취하니 흥을 돋우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자 이 노래 아는 사람, 나와서 뛰세요!”

직원 몇 명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길래 호범이 사람 좋게 웃으며 나가시라고 손짓을 했

다. 그러고 보니 백수현은 어느새 앞에서 마이크까지 쥐고 있다. 춤도 괴상망측하게 엇

박으로 추면서. 시간이 흘러도 수현은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섹스할 때나 잘 버티지, 라

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슬슬 가야 할 것 같은데 춤춘다고 지랄 발광을 하는 백수현을 두고 가자니 영 찜찜하다 .

지켜보던 호범은 짓궂게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을 촬영했다 . 내일 정신 차리고

이거 보면 수치스러울 거다.

괴롭혀 줄 심산이었는데 갑자기 수현이 입고 있던 니트 끝을 잡아서 위로 걷는다. 옷을

벗으려는 걸 알고 주위에서 여직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뒀다간 정말 벗을

기세라 호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서 백수현의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는 백수현이 휘청 몸도 가누지 못하더니 배시시 웃는다 . 호범은 마이크를 빼앗아

다른 직원에게 넘겨주고 자리로 돌아와 수현의 외투와 제 것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그

나마 멀쩡한 직원에게 백수현이 많이 취해서 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길 하고 카드를 준

뒤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어딜 가냐고, 벌써 가면 어쩌냐고, 원성이 뒤통수에 따라붙는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코

트를 입히는데 백수현이 팔을 정신없이 움직인다. 가만히 있으라고 쏘아붙여도 취해서

벌게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을 뿐이다.

“뭐가 그렇게 신나요? 자꾸 처웃게.”

“그냥….”

말끝을 흐리더니 머리가 툭, 가슴팍으로 떨어진다. 금방 씻고 나온 건지 머리에서 샴푸

냄새와 고기 냄새가 같이 난다. 작은 머리통을 빤히 내려다보는데 잠시 뒤 등이 떨리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범은 수현의 어깨를 잡아 얼굴을 확인했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낮에 서민준한테 하는 걸 보면 이것도 연기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데 수현이 입술을 달싹인다.

“억울해.”

“왜. 내가 끌고 나와서?”

“아니….”

“그럼?”
“서민준이….”

백수현의 입에서 서민준 이름이 나오자 호범은 입을 꾹 다물었다 . 이상하지. 왜 속이 부

글부글 끓을까. 그런데 백수현이 뜻하지 않은 말을 한다. 적어도 호범의 눈에 그것은 진

심으로 보였다.

“그 사람들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자꾸 그런 생각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바

보 같고… 그래서 짜증 나고….”

“…….”

“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 아예 못돼 처먹든가… 아니면 착하든가…

이도 저도 아니고 … 맨날 병신처럼 이용만 당하고 … 간쓸개 다 빼 주고… 씨발… . 이제

안 그럴 거야…. 몸은 줘도… 마음은 안 줄 거야….”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는다. 태연한 척하였고, 아무렇지도 않게

동영상을 찍겠다고 하였으나, 어쩌면 백수현 마음속에는 아직 서민준이 있는지 모르겠

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잡친다.

노려보던 호범은 이를 까득 물고 수현의 팔을 세게 잡았다.

“가요. 숙소에 데려다줄 테니까.”

“아파아.”

“알았으니까, 가자고.”

그러자 수현이 반대 손으로 호범의 팔을 잡는다.

“같이 있자….”

호범이 서늘한 눈빛으로 수현을 봤다.

울어서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연신 문지르더니 흐느끼며 이야기한다.

“오늘 혼자 있기 싫어…. 같이 있자….”

씨발. 내가 그 새끼 대용품도 아니고.

목 아래까지 올라온 그 말을 호범은 가까스로 누르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아무렴 어떠냐고. 이 인간하고 나 사이에 뭐가 있다고.

그냥 적당히 즐기다 때가 됐을 때 버리면 된다고.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짜증이 치솟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
54 화

눈을 떴을 때 수현은 낯선 장소에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두통과 함께 명치가 쓰

라리다. 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폈다. 전에 왔던 양호범의 자택이라는 것을 알

고는 눈이 커졌다.

왜 여기 있지 … . 기억을 더듬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고깃집으로 양호범이 왔고, 노래

방에 들어간 것까진 알겠는데… 거기까지. 다음은 블랙아웃이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엉덩이를 비롯하여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옷을 걷고 팔다리를 확인했지만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로 내려와 슬리

퍼를신는데 아이고 곡소리가 나왔다. 비척거리며 욕실로 가서 문을 열고 거울을 봤다 .

아, 얼굴을 확인한 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리는 까치집에 눈이 퉁퉁 부어 몰골이 말이 아니다 . 꼴이 왜 이래… . 혼잣말을 중얼대

며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거울로 엉덩이를 확인했다 . 엉덩이에 빨갛게 손자국이 선명하

다. 양호범 이 새끼,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섹스했으면 흔적이라도 있을 텐데. 의아함을 품고 밖으로 나오는데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설마 양호범이 날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나. 그럴 리 없겠지만, 양호범이

나체로 앞치마만 두른 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군침이 돈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

던 수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어났네요. 속은 괜찮아요?”

처음 보는 사람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성은 푸근한 인상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

다. 누구지. 양호범네 엄만가. 라고 생각하는데 맞은편 복도에서 양호범이 나타난다 . 회


색 운동복에 목에 수건을 두르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거 보니 운동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다. 수현은 눈치를 살피며 싱긋 웃었다.

“양 사장. 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

호범이 서늘한 표정으로 보더니 웃는다.

“덕분에요.”

무슨 뜻이지. 수현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제 진짜 했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보니 호범이 슥 다가온다. 운동복이 땀으로 젖은 걸 보아 아침부터 어지간히도 힘

을 썼나 보다. 하긴 이 근육을 다 유지하려면 앉아만 있는다고 되겠어.

호범은 휴대전화를 꺼냈고, 영상을 재생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슬그머니 와서 끼어

든다. 영상을 보는 수현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 배경이 노래방인 거 같았는데 수

현이 영상 속에서 음악에 맞춰 이상한 춤을 춘다. 흡사 팔다리가 빠져 덜렁거리는 인형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얼굴이 점점 구겨지는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푸흡.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

더니 수현을 쳐다본다.

“아이돌 같아요.”

쪽팔려서 억지로 웃는데 옷을 벗으려고까지 한다 . 그리고 화면이 끊겼다. 호범이 다음

화면으로 넘긴다. 이번엔 길에서 수현이 와하하, 웃으면서 막 뛰어간다. 나 잡아 봐! 잡아

봐라! 와하하.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쳐다보고, 양호범은 영상을 찍는 건지 꿈쩍도 안 하고. 그러다

철퍼덕 자빠져서 엉엉, 운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왔고 엎어져서 우는 백수현을 찍었

다. 그러다 또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가기 시작한다.

수현은 자신의 모습에 기가 막혀 점점 입이 벌어졌다.

호범이 영상을 멈추고 삐딱하게 웃었다.

“감상이 어떠신지.”

수현은 입을 벙긋대고 멈춰진 화면을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나, 맞아? 닮은 사람 아니고?”


“그럴 리가.”

“이상하다… 나 술 먹어도 주사는 없는데.”

“그래요? 이상하네. 내가 본 것만 몇 번인데.”

수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너도, 참… 잠깐 그런 걸 가지고… 영상까지 찍고… 고약하다….”

“잠깐? 2 시간이 잠깐이야?”

수현은 놀라서 쳐다봤다. 몸이 아픈 게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웃다가 울다가 정신병자처럼 아주 지랄 생쇼를 하는데, 죽여 버리고 싶더라고.”

호범이 이를 까득 물었다. 더 말해 줘야 해? 하는 표정이다.

수현은 죄인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손을 뻗어 화면을 닫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 눈

치를 보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주방으로 간다 . 얼른 씻고 나와요. 국 다 끓여 놨어요. 수현

이 침실로 다시 가려고 하는데 양호범이 쫓아온다. 수현은 목소리를 낮추고 호범에게 따

져 물었다.

“엉덩이도 네가 때렸지?”

“응.”

“왜.”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겠지.”

허, 수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다고 다 큰 성인 엉덩이를 때리냐. 내가 너

보다 형인데! 한편으로는 전처럼 죽을 때까지 패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그것에 비하

면 엉덩이는 양호한 편이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바지를 내려 엉덩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얼마나 팼는지 빨갛

게 익은 사과 같다. 개새끼. 만지니 역시나 아프다. 씻고 나오자 옷과 속옷이 앞에 놓여

있었다. 사이즈가 클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이번엔 딱 맞춘 듯하다.

그것을 입고 머리를 대충 말린 뒤 밖으로 나오자 식탁 위에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 아

침부터 먹기엔 부담스러운 양이긴 했지만, 냄새만큼은 식욕을 돋우기 충분했다.

“어서 앉아요.”
수현이 의자를 끌어내 앉으니 아주머니가 밥과 따뜻한 국을 앞에 놓아 준다.

“ 여기에 손님 데리고 온 건 거의 처음이라 . 내가 솜씨 좀 부려 봤어요. 참, 나는 김진미.

사람들이 강원댁이라고 불러요.”

여자는 이곳에서 일한 지 20 년이 넘었다고 말해 줬다. 그렇다면 양호범이 어릴 적부터

봤던 건가. 시간이 되면 그녀에게 양호범이 어릴 적부터 성질이 저 모양이었는지 꼭 물

어봐야겠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수저를 드는데 양호범이 건너편에서 나온다 . 편한 바지에 반 팔 차림이라

정장으로 가려져 있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거기다 앞머리가 젖은 채로 내려와 평소보

다 섹시한 느낌이 강하다. 수현은 밥 대신 양호범을 눈으로 씹어 먹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강원댁이 묻는다.

“어때요? 맛이 괜찮나요?”

수현은 호범을 보며 무심코 대답했다.

“네, 먹음직, 아니, 지금 먹으려고요.”

사실 입이 까끌하여 먹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차려 준 사람 성의가 있으니 먹는

시늉이라도 하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국을 떠 입에 넣는 순간 눈이 크게 뜨인다 . TV 에서

보면 연예인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과장된 표정을 짓는데 지금 자신이 딱 그러할 것이

다.

“완전 맛있어요!”

“복 지리예요. 찜도 먹어 봐요. 어르신 댁에서 키우는 한우인데, 육질이 부드러워요.”

수현은 젓가락을 들고 갈비찜을 집으려고 했다. 그런데 삐끗하여 고기가 식탁에 툭, 떨

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호범이 수현의 젓가락 쥔 손만 노려본다. 아아, 최대한 바르게 쥐

려고 했으나,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슬그머니 손으로 고기를 집어 밥그릇

위에 놓고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 빨았다.

“젓가락질 진짜,”

양호범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수현이 짜증을 냈다.


“그만해. 밥 먹는데 잔소리야. 그럼 포크로 먹을까.”

쏘아붙이고 저도 모르게 자세를 삐딱하게 앉는데 이번엔 그것마저 지적이다.

“똑바로 앉아서 먹어요.”

으으, 꼰대처럼. 수현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지켜보고 있던 강

원댁이 되게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아들이 처음으로 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와 비

슷하달까. 기분이 이상했다. 양호범이 이곳에 아무도 데려온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첫 번째가 저라는 사실이 조금 들뜨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호범은 수현을 드레스 룸으로 데려갔다. 백화점 쇼룸을 옮겨 놓은 것 같

은 드레스 룸에는 머리가 없이 상반신만 있는 마네킹도 있었다. 신기하여 쳐다보는데 호

범이 낯익은 가방 하나를 건네준다.

그걸 본 수현은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전에 열받아서 양호범한테 현금과 채권을

모두 돌려줬고, 돌아온 뒤에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 그걸 다

시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걸 받아도 되나.”

“싫으면 줘요.”

수현은 씩 웃고 나서 가방을 품에 안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정장 케이스를 내민다. 입

어요. 수현은 그것을 열어 확인했다. 비싼 슈트가 들어 있다. 양호범이 옷을 선물하면 다

음에는 꼭 안 좋은 일을 시킨다. 선뜻 내키지 않아 머뭇거렸다.

“나는 네가 옷 주면 겁나….”

“오늘은 심부름 아니고 선물.”

불현듯 몇 주 전 김도한 귀를 자르던 기억이 나서 오만상이 찌푸려진다. 됐다고 거절하

고 가려는데 호범이 팔을 잡아서 끌어당긴다. 셔츠를 꺼내어 수현에게 대보더니 벌써 넥

타이를 고르러 움직였다.

“이번엔 또 누구야?”

“맞춰 봐요.”

“힌트 줘.”
“무슨 힌트.”

“예를 들어 자지 사이즈라도 알려 주면,”

딱, 호범이 그대로 수현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긴다 . 아! 이마를 붙잡고 노려보자 그가 한

번 째려보더니 다시 안쪽으로 간다. 수현은 구시렁거리며 욕을 하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마네킹을 발견했다. 똑같이 상반신만 있는 건데 밑에 받침대는 부러져 있고 입고 있는

옷도 엉망이다.

호범이 돌아왔고, 수현은 마네킹을 가리키며 물었다.

“쟤는 왜 저렇게 됐어?”

호범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꺼냈다. 수현은 불길해졌다. 이번엔 또 뭐가 찍혔나 싶어

서. 아니나 달라 동영상을 틀고 수현에게 건네준다. 알아서 보란 뜻이었다. 안색이 점점

회색으로 변했다. 수현이 마네킹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갖은 추태를 다 부리고 있었다 .

끌어안고 비비는 것도 모자라 나중엔 눕혀 놓고 올라탄다. 그리고 호범에게 하는 말이.

[양 사장. 나 얘 마음에 들어. 우리 셋이 기차놀이 할래? 너는 나한테 박고, 나는 얘한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이 흔들리더니 어두워진다. 하지만 소리는 녹음됐다. 씨발. 어

쩌고 하는 양호범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철썩, 철썩, 철썩, 때리는 소리와 악! 하는 비

명 소리. 수현은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만졌다. 엉덩이가 빨개질 때까지 처맞은 이유

가 이거였구나. 씨발. 맞을 만했네….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끄고 조심스럽게 호범에게 돌려줬다 . 호범은 태연한 얼굴로 넥타

이를 옆으로 치우더니 수현의 잠옷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 내, 내가 할게. 손으로 막

으니 바로 거두어 내고 마저 푼다.

상의를 뒤로 넘기자 가슴이 드러난다. 호범은 가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마치, 첫 만남

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현이 어깨를 움츠리자 오른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더니 모아서

움켜쥐고 엄지로 젖꼭지를 문지른다. 수현은 그 손을 붙잡아 양호범을 쳐다봤다.

“뭐, 뭐야?”

“셋이 하자며.”
이젠 손톱으로 젖꼭지 가운데를 꾹 누른다. 아프고 찌릿하여 입술을 깨무니 양호범이 바

싹 붙어 서서 내려다본다. 올려다보던 수현은 뒤를 돌아 문을 확인했다. 혹시 밖으로 소

리가 들리는 거 아닐까 고민하는데 이번엔 젖꼭지를 꼬집어 비튼다.

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호범을 봤다.

“대답해요, 해, 말아?”

수현은 입을 달싹였다. 솔직히 동하긴 하다. 그러나 술 없이 맨정신에 양호범과 섹스한

적이 없어서 낯설고 이상하다.

“싫으면 관두고.”

손을 떼길래 수현은 급히 그 손을 잡고서 양호범을 올려다봤다 . 호범이 피식 웃는다. 한

쪽 입가에 보일락말락 보조개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웃으니 화낼 때보단 예쁘

네. 수현은 아랫입술을 핥고 호범의 목 뒤로 손을 뻗어 잡아당겼다.

“가슴, 빨아 줘.”
55 화

젖꼭지를 이로 긁는 감각이 섬뜩하다. 어깨를 밀어내도 양호범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가

슴을 세게 빨았다. 수현은 배 속이 저릿하여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꾸 문

밖으로 향했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며 참는데 호범이 일어나 수현의 손

목을 잡아채 안쪽으로 끌고 간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1 인용 소파와 스툴, 그리고 시계 진열대가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옷장을 옆으로 밀자 이번에도 문이 하나 나타난다 .

뭐지? 머릿속으로 ‘금고’ 두 글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안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켜자 어둡던 공간이 환해진다. 수현은 생경한 광경에 눈이 휘둥

그레졌다. 방 하나가 사진으로 가득 찼다. 벽에도 바닥에도. 대부분 흑백이었고, 얼굴을

촬영한 인물 사진이 많았다.

문을 닫자마자 호범이 팔을 엇갈아 입고 있던 셔츠를 단숨에 벗어 버린다. 단단하게 팽

창한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수현의 턱을 움켜쥐고 입술을

진하게 빨다가 놓아줬다.

“여긴 조용해서 괜찮죠?”

양호범은 무심한 듯 보여도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처럼. 보일 듯 말 듯 웃으니 다시

입술을 집어삼킨다. 수현은 손을 아래로 뻗어 그의 바지를 내린 뒤 좆을 속옷 밖으로 빼

냈다. 이미 발기하여 단단해진 좆을 잡고 위아래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선물이 이거였어?”
이거냐고 물으며 기둥을 꽉 쥐었더니 짙고 매끈한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호범은

중지와 약지를 수현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고 안을 휘저었다 . 쭙, 쭙, 좆을 물었을 때처럼

혀를 굴리자 호범의 눈에 욕망이 짙게 번진다.

그는 곧 수현을 벽으로 몰아가 돌려세운 뒤 바지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 나서 조금 전 입

을 쑤시던 손가락을 구멍에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수현은 벽에 바싹 엎드린 자세로 서 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풀어 주게?”

호범이 수현의 귓바퀴를 앞니로 깨문다. 아, 인상을 쓰자 그 부분을 핥다가 나중엔 귓구

멍에 혀를 넣는다. 아아, 수현은 눈을 감았다. 타액을 묻힌 중지와 약지가 주름진 구멍을

문지르다 꾹 힘을 주어 벌리고 들어온다. 벽에 이마를 대고 신음을 참는데 호범이 귓가

에 속삭인다.

“여기 방음 돼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을 돌려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는다 . 발끝에서부터 전기가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수현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야, 너, 아, 왜 이렇게, 능숙해?”

“무식하게 박기만 한다고 욕할 땐 언제고. 힘 빼요. 구멍 찢어져.”

안을 쑤시느라 찌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이번엔 손가락을 구부려 내벽을 긁어

내린다. 자지러지며 몸을 떨자 목덜미와 귓가에 입술을 문지른다. 좋아?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음습하다. 그러면서 한 손은 앞으로 뻗어 수현의 좆을 문질렀다. 찔끔찔끔 나

오기 시작한 쿠퍼액을 손끝에 바르더니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고 꾹 누른다. 앞뒤로 저며

지는 감각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씨발. 천박하게 엉덩이 흔드는 꼴 좀 봐.”

“개새끼야, 네가, 안에다… 손가락, 그만… 읏…!”

손가락이 쑥 빠져나간다. 그러고 나서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 볼기를 탁탁, 내리쳤다. 어

서 빨리 넣고 쑤셔 줬으면 하고 바라는데 양호범은 쉽게 삽입하지 않고 좆을 엉덩이에


문지르기만 한다. 수현은 속이 타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뭘 하나 했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감상 중이시다.

“너… 뭐 해?”

수현이 묻자 호범은 여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노래가 생각나서.”

“무, 무슨 노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어쩌고 하는 그 노래. 다음 가사가 빨가면 사과였었나?”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몸은 달아오르는데 놈이 바로 넣어 주지 않으니 애가 끓었

다. 수현은 손을 뒤로 뻗어 호범의 좆을 잡고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구멍에 넣으려고 하

는데 요지부동이다. 수현은 조급함에 인상을 썼다.

“안 할 거야?”

“넣어 주세요, 주인님. 해 봐요.”

수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양 사장. 너 그런 변태 같은 취미 있었냐.”

“없었는데 방금 생겼어요. 해 봐.”

수현은 쥐고 있는 호범의 좆을 노려봤다.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4 살이나 어린 새끼

한테. 고민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며 손에서 좆을 놓았다. 됐어. 안 해. 개새끼야. 하

고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는데 양호범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머뭇거리던 수현은 욕을 하고 돌아서서 양호범과 마주 봤다. 놈이 얄밉게 웃는다. 양아

치 새끼. 표정을 보니 진짜 해 주지 않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이를 까득 물고 돌아서

서 벽을 짚었다. 그리고 느으 즈세어, 즈인니임. 하고 억지로 말했다.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아, 수치스러워.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엉

덩이를 움켜쥐고 벌리더니 좆을 구멍에 대고 누른다. 벽을 짚은 손가락이 저절로 구부러

졌다. 아아, 천천히. 뒤로 손을 뻗어 호범의 허벅지를 붙잡는데 반쯤 들어간 좆이 단숨에

퍽, 하고 끝까지 들어온다.

“어흑!”
뱃가죽이 뚫리는 충격에 주저앉으려고 하자 호범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상체를

단단하게 받쳐 안는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손으로 수현의 좆을 쥐더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잠, 잠깐,”

“왜. 후, 주인님이 넣어 줬잖아.”

“아니, 아니. 너무 세게,”

퍽, 퍽, 퍽, 강도가 갑자기 세진다.

“세게? 응? 더 세게?”

수현은 입을 벌리고 도리질을 쳤다.

“씹, 그게, 아니, 흑!”

손으로 호범의 허벅지를 쥐어뜯었다. 망할 놈의 근육 덩어리는 손톱으로 찔러도 끄떡없

다. 이 새끼가 구멍을 풀어 줄 때부터 의심스럽긴 했다. 몸이 붙들려 정신이 없이 쑤셔지

는데 사정감이 몰려온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허벅지를 움츠리며 사정할 준비를 하자

호범이 엄지로 귀두를 누르며 막는다.

“후, 안돼, 아직.”

수현은 손을 뻗어 그것을 치우려 했다.

“나, 쌀, 야, 좀! 아아!”

이제 밖에서 누가 듣든 말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퍽, 퍽, 퍽, 퍽, 퍽,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눈앞은 흔들렸다. 싸고 싶은데 못 하고 있으니 다리가 덜덜 떨린다. 손을 뿌리

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흑, 눈물을 매단 채 돌아보니 호범이 뺨과 눈가를 혀로 핥는다.

더 울어 봐. 너 우는 거 보면, 씨발, 짜증 나는데, 존나 꼴려.

“개, 아아!”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전립선을 좆으로 누르는데 몸의 성감대란 성감대

를 모두 망치로 내리찍는 거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

뒤통수를 양호범의 어깨에 걸치고서 수현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파르르 떨기만 했다.
그때 양호범이 안쪽에 깊숙이 사정하며 쥐고 있던 좆을 놓아준다. 후두둑, 정액이 바닥

에 뿌려졌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수현은 움찔, 움찔 경련하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대롱대롱 양호범 팔에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 꼬락서니가 우습다.

탈진하여 개새끼라고 중얼중얼 욕을 하는데 양호범이 목덜미에 입술과 뺨을 문지른다.

놓으라고 팔을 휘두르자 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좆이 쑥 빠져나간다 . 벌어진 구멍을

오므리려 힘을 주어도 여전히 휑하다. 망가진 거 아니야? 손으로 더듬어 만지려는데 호

범이 돌려세우고 입술을 포개어 빤다. 키스는 절대 안 해 줄 것처럼 굴더니. 아주 맛이 들

렸구나.

춥, 비벼지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수현은 호범을 노려봤다.

“좋냐, 나이 많은 형한테 주인님 소리 들어서?”

피식 웃길래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정액이 흘러나와 허벅지를 타고 내려온다 .

하, 한숨을 내쉬니 호범이 손을 놓아준다. 여기 있어요. 닦을 거 가져올게. 바지를 추슬러

입고 그가 나간다. 등에는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혼자 남은 수현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면서 방 안을 둘러봤다. 자세히 보니 사진을

담은 액자에 이름이 적혀 있다. 양승택 … ? 낯이 익다 했는데 전에 양호범 오피스텔에서

본 이름과 같다. 친척인가?

주변을 살피던 수현은 액자 사이에 있는 장식장에서 카메라를 발견했다. 유리를 열어 카

메라를 꺼내 살피는데 렌즈에 금이 갔고, 끈에는 흐릿하지만, 진갈색의 얼룩이 묻어 있

다. 이거, 핏자국 아닌가….

자세히 보다가 뒤쪽 버튼을 누르자 뚜껑이 열린다. 최근엔 보기 힘든 필름 카메라였다.

양호범이 쓸 물건 같지는 않은데. 순간 카메라가 손에서 쑥 빠져나간다. 언제 왔는지 호

범이 서 있다. 그는 카메라를 제자리에 놓아뒀고, 적셔 온 수건과 가운을 수현에게 내밀

었다.

“닦아요.”

수현은 수건을 받으면서 조금 전 그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건 누구 거야?”
호범은 덤덤하게 말했다.

“아버지.”

의외다. 놈의 아버지에게 이런 취향이 있을 거라곤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디 계셔? 외국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어요. 나 다섯 살 때.”

수현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괜한 걸 물었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

고, 당연히 양호범 부모님이 살아 계신 줄 알았다. 미안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호범이 엉망이 된 수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덤덤하게 말한다.

“씻어요. 가려면 시간이 꽤 걸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양호범이 사라졌고 혼자 남은 수현은 사진으로 시선

을 옮겼다. 그럼 이건 유작인 건가. 여기서 아들놈이 섹스하는 걸 양호범 아버지가 귀신

이 되어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죄송합니다 … .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드님이 적극적으로 덤벼든 거지, 제가 작정하고

후린 게 아니에요.”
56 화

선물을 준다던 양호범은 중간에서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탔다. 그것은 터널 안에서 은밀한

작전처럼 이루어졌다. 도대체 어디 가길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2

시간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산속에 있는 요양병원이었다.

병원 앞쪽으로 호수가 있었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밖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수현은 양호범이 말해 주지 않아도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차가 주차장에서 멈췄고 호범이 수현을 돌아봤다.

“305 호. 들어가면 안내해 줄 거예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무슨 이유?”

“우리 부자를 만나게 하는 진짜 이유.”

호범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현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 오해했나 본데, 부자 상봉하라고 데려온 거 아니에요. 아들이 인질로 잡힌 걸 알면, 정

신을 좀 차릴까 해서 온 거지.”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양호범이 아버지와 저를 만나게 해 준 게 선의가 아닐까 오해했

다. 몸 좀 섞고, 전보다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해서 놈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하여 웃음이 났다.

“그 인간이 뭘 훔쳤는지 말해 줘.”

“직접 물어봐요. 어디다 숨겼는지 알아내면 더 좋고.”


수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직 못 찾은 거야?”

“말했잖아요. 도망치다 트럭에 받혔다니까. 지금은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상태

고.”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멍청한 인간. 도망가려면 제대로 도망칠 것이지. 그럼 백광무

가 훔쳐 간 그 물건은 회수가 안 된 건가. 대체 뭐길래. 하지만 양호범을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현이 안전띠를 풀자 호범이 팔을 잡더니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살짝 옆으로 움직인다.

“삐뚤어졌어요.”

젓가락만큼이나 그는 넥타이가 틀어진 것에도 집착했다. 강박증 그런 건가.

다녀올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산속이라 바람이 차다. 코트 앞을 여미며 병원 안

으로 들어가는데 입구 쪽에 미리 기다리던 직원이 다가와 백수현 씨 ? 하고 묻는다. 고개

를 끄덕이자 그가 따라오라며 앞서 걷는다.

밖의 풍경과 달리 병원 내부는 따뜻한 색감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 요양병원이라

더니 환자는 없고, 의료진과 간병인들만 눈에 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 층으로 가는 동

안 동행한 직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띵.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걷는데 이름이

적힌 문들이 나타난다.

병실은 대부분 혼자 사용하는 듯하였다. 305 호 앞에 도착하여 수현은 자연스럽게 문 오

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백광무의 이름이 아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름. 의아하

여 직원을 쳐다보는데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병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걸음이 점차 느려졌고, 숨이 답답해졌다. 삑, 삑, 삑, 규

칙적인 기계음과 산소 호흡기에서 나는 듯한 슉, 슉, 소리가 신경을 건드린다. 가로막고

있던 직원이 옆으로 물러서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붕대로 칭칭 감긴 몸뚱이와 머리.

수현은 더 다가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서서 그대로 멈췄다.

직원이 수현을 돌아보며 눈짓을 한다.


“오셔서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버님 맞는지.”

입을 다문 채 가까이 다가갔다. 근접하여 본 남자의 모습은 더 참담했다. 기억을 끄집어

내 젊은 시절의 그와 비교해 봤다. 예전보다 마르고 늙었으나 자신의 아버지 백광무가

맞다. 꾹꾹 눌러 왔던 울분이 터지려 한다.

후,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얼굴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맞네요….”

직원이 짧게 백광무의 상태를 설명한다.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긴 하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회복하기까지 얼마가 걸릴지는 장담

할 수 없다고. 신장이 하나 없다는 말도 해 줬다. 수현은 기가 찼다. 아들이나 아비나 어

쩌면 팔자가….

“면회 시간은 15 분입니다.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 주세요.”

직원이 나가고 난 뒤 수현은 혼자 남았다 . 살아 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울부짖겠는데

이런 꼴로 누워 있으니 화를 낼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 허탈하고 허무하고, 기운이 쪽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백광무의 가슴을 쳐다보기만 했다.

“차라리 어디 가서 죽지… 이 꼴로 나타날 거면….”

말을 하는데 목이 멘다.

죽은 엄마 생각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엄마 죽은 건 알아?”

대답할 리가 만무하다. 수현은 고개를 가슴 쪽으로 떨구었다. 씨발. 그날 그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저를 떠밀어 내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

크면서 여러 번 그곳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삽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비슷한 장소만 보

이면 무조건 땅을 팠다. 그러나 엄마의 유골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아픈 기억을 곱씹던 수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백광무

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고 있다. 게슴츠레하던 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점점 동공이 커진다. 삑, 삑, 삑, 기계에 표시되는 심박수가 조금씩 올라갔다.


수현은 기계와 백광무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백광무가 입을 벙긋댄다. 수현은 뒤를 돌

아봤다. 의사를 불러야 하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백광무가 손을 뻗는다. 마치 수

현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수현은 그 손을 외면한 채 백광무의 얼굴만 노려봤다.

백광무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계속 달싹이며 검지를 까닥까닥 움직인다 . 삑, 삑, 삑. 기

계음이 귓가를 괴롭혔다. 백광무의 입 모양을 주시하던 수현은 표정을 굳혔다. 입 모양

을 눈으로 읽는데, 어마, 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어마…? 설마, 엄마?

“우리 엄마?”

백광무가 대답 대신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우리 엄마 김순정?!”

눈을 또 깜빡인다. 수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살아 있어?”

이번엔 반응이 없다. 으, 으으. 백광무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수현은 목이 콱 메어 입

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었잖아. 죽은 걸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혹

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뒤늦게 아버지가 나타나 엄마를 구하고 둘이 몰래 숨

어 사는 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어떻

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진짜 죽었구나… 죽어 버렸어….

백광무가 손끝으로 수현의 손을 가리킨다. 손을 내려다보던 수현은 백광무가 무얼 하려

는지 알아챘다. 머뭇거리며 그의 손가락 끝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가 힘겹게 손가

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적는다.

1…?

숫자…? 그는 온 힘을 다해 숫자를 하나씩 적어 나갔다. 마지막 숫자를 적고 아들의 손끝

을 잡았으나 이내 미끄러져 침대로 팔이 툭, 떨어졌다. 다시 의식을 잃으려는지 눈꺼풀

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현은 다급하게 그를 붙들고 흔들었다.

“일어나. 아직 물어볼 게 남았단 말이야!”


백광무 대신 기계가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수현은 들끓기 시작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

다.

“일어나라고 씨발! 눈 떠!”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사람이 뛰쳐 들어온다. 백수현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직원이 수

현의 팔을 붙들었고, 수현은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백광무를 향해

악을 썼다.

“눈 떠! 제대로 말해! 나하고 엄마한테 제대로 사과하란 말이야!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네

가 죽인 거야! 차라리 죽지 그랬어! 왜 이제 나타나서 내 인생까지 망쳐! 엄마도 죽였으

면서 왜 내 인생까지! 왜! 왜에!”

목이 터져라 악을 썼으나 백광무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직원들이 수현을 밖으로 끌어

내고 의사가 달려와 백광무의 상태를 체크했다. 끌려 나와 복도 의자에 주저앉은 수현은

격해지는 감정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꺽꺽댔다.

괜찮아요? 심호흡하세요. 간호사가 다가와 팔을 붙든다. 수현은 그것을 뿌리치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내리치

는데도 바윗덩어리에 눌린 것처럼 호흡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백수현 씨. 뒤에서 직원이 쫓아온다. 저리 가라고 팔을 휘두르다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

끼고 몸이 휘청, 옆으로 넘어갔다.

순간 누군가 몸을 받쳐 안아 준다.

수현아. 백수현.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스킨 냄새.

숨 쉬어. 괜찮아. 숨 쉬어.

품에 안고서 등을 만져 주는 손길이 제법 다정하다.

개새끼. 섹스할 때도 좀 이렇게 해 주지.

그 와중에 우습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츰 시야와 호흡이 트인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자 사납지만 잘생긴 얼굴이 나타난다.


“괜찮아?”

욕정만 내비치던 눈에 처음으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57 화

수현은 수영장 청소를 하다 선베드 옆에서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반짝이는 금목걸이다. 순금은 아니지만, 펜던트의 크기가 제법 컸다. 아싸 득템. 주

머니에 챙기고 나서 뒷정리를 하려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 고개를 드니 입구에

김우영이 기대서 있다. 한 손엔 술병을 들고.

“청소 중이었어?”

그는 이제 막 일어난 듯 바지만 하나 걸치고 있었다 . 밤새 퍼마신 거 같은데, 눈 뜨자마자

맥주로 해장을 하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인간이다.

“네….”

“며칠 만에 보는데 얼굴이 왜 그래? 핼쑥해졌네?”

수현은 제 뺨을 문질렀다. 사실 아버지를 만나러 요양병원에 다녀온 뒤로 도통 잠을 이

루지 못했다. 백광무가 손바닥에 적어 준 다섯 개의 숫자가 무엇일까 . 곰곰이 생각해 봤

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서민준도 아

직 연락이 없다. 이래저래 거슬리는 일투성이다.

“잘 먹어야지. 양 대표는 너무 마른 애들 안 좋아해.”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능글맞게 웃는다. 못 들은 척 수영장을 정리한 뒤 밖으

로 나오자 김우영이 졸졸 쫓아온다.

“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둘이 떡치는 거 구경시켜 줄 수 있어?”


수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봤다.

김우영은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묻는 표정이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 양 대표가 남자하고 한다는 게.”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싫어, 무서워.”

정말 무서우면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양호범은 병원에 다녀온 뒤로 3 일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늘 그렇듯 먼저 연락을 하진 않

았다. 이러다 또 일이 생기면 나타나겠지. 양호범과 저 사이는 딱 그 정도다. 일이 생겨야

만나고 연락하는. 따지고 보면 앱으로 만나는 섹스 파트너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 그러

다 문득 양호범 부모님에 대해 궁금해졌다.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김우영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양 사장 부모님 보신 적 있어요?”

김우영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돌아가신 외삼촌?”

“네….”

“나는 못 봤지. 왜?”

“그냥요. 궁금해서….”

“범이가 부모님 얘길 해?”

말을 하지 않자 김우영이 술병 끝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면서 눈초리를 가늘게 늘인다.

“희한하네. 어지간해선 얘기 안 하는 녀석인데.”

“자세한 얘긴 안 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하고 절연하고 살다가 자동차 사고로 가셨지.”

절연이란 말에 수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김우영은 설명을 보탰다.

“외숙모, 그러니까 호범이 엄마가 농아였거든. 삼촌은 사진작가였고. 시골에 촬영 갔다

가 꽃집에서 일하던 아가씨하고 눈이 맞았대. 양씨들이 은근 로맨티시스트라니까.”

수현이 되물었다. 그래서요?


“뭘 그래서야. 우리 할아버지 성질 장난 아닌 거 알잖아. 아들이 예술 한답시고 돌아다닌

것도 못마땅했는데 며느릿감으로 말도 못 하는 처자를 데려왔으니 오죽했겠어. 결국, 둘

이 도망가서 애 낳고 살았는데 그 애가,”

“양호범?”

“응. 댁이 사랑하는 양 사장.”

“사랑은 무슨….”

“근데 왜 자빠져 자?”

수현이 입술을 씰룩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 자기도 맨날 이 여자 저 여자 바꿔 가며

자빠져 자면서.

“부모님 사고 났을 때 양호범도 거기 있었어요?”

김우영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 뒤집혀서 불타기 직전에 빠져나왔다고 들었어.”

“혼자서?”

“아니. 외삼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외숙모가 어린 아들 살리겠다고, 성치도 않은 몸

으로 깨진 유리창을 뜯고 밖으로 밀어냈다나 봐. 다리가 껴서 본인은 나오지 못했고.”

“…….”

“여자들 대단해. 그 와중에도 자식새끼 살리겠다고, 안 그래?”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죽은 엄마가 생각난다. 그래, 모성애란 대단한 거다. 죽

음 앞에서도 나보다 자식을 선택하게 하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 생

각은 다시 숫자로 이어졌다. 아버지가 알려 준 그 숫자는 대체 뭘까. 혹시 엄마가 살아 있

는 건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백광무를 찾아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묻고 싶다 . 엄마는

어디 있냐고. 만났냐고. 만약 죽었다면 지금은 어디 있느냐고.

머릿속이 복잡한데 김우영이 난데없이 끼어든다.

“이젠 내가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뭘요?”

“남자 구멍은 쪼이는 맛이 다르다는데, 진짜야?”


아아, 정말. 수현이 질색하는 표정을 하니 그가 능글맞게 웃는다.

“몰래 영상으로 찍어 올래? 내가 섭섭하지 않게 줄게.”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거래를 제안하길래 수현은 코웃음을 쳤다.

“ 잘 생각해. 양 대표 관심, 그거 길어야 한 달이야. 팽당하고 눈물 짜지 말고, 실속을 챙

겨.”

“팽당해도 눈물은 안 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장담하지 마. 다른 애들도 그러다 울면서 범이 바짓가랑이 붙잡더라.”

김우영이 웃으며 맥주를 흔든다. 불량 식품이 맛있다고 해서 그걸 밥으로 먹을 순 없는

거라고, 뒷말도 이어 붙인다. 은근히 사람을 긁는 재주가 있다. 수현을 돌아서며 입 모양

으로 욕을 하고 다른 쪽으로 갔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김우진이다. 저도 모르게

김우영의 눈치를 살피고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퇴근 언제 해요? 잠깐 볼래요?]

❖❖❖

수많은 인파 속에서 김우진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키가 훌쩍 큰 녀석은

평소에 쓰던 안경을 벗고 코트 차림이었는데, 전보다 꽤 성숙하게 느껴져 성인이라고 해

도 믿을 정도였다. 뭐, 열흘 뒤면 스무 살이 되긴 했지만.

다가가서 워, 하고 놀라게 해 주려는데 김우진이 먼저 홱 돌아본다. 되려 깜짝 놀라 팔을

휘저으며 넘어지려고 하자 우진이 어깨를 잡아 줬다.

“괜찮아요?”

“놀랐네. 나 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우진이 가게 유리창을 가리킨다. 아아, 비쳤구나. 수현은 제 어깨를 잡은 우진의 손을 봤

다. 우진이 슬그머니 손을 떼어 낸다. 추운 날씨 탓인지 귀와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웬일이야? 여기까지 오고?”

우진이 머뭇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민다 . 검은색 쇼핑백에는 유명 브랜드

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김우진이 그것을 손에 쥐여 준다.

“5 일 뒤에 크리스마스잖아요. 선물… 작은 거 하나 샀어요.”

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온지도 몰랐고, 선물을 받을지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괜찮아요. 대신, 오늘 저녁 같이 먹어요.”

고민하는 사이 우진이 손을 뻗는다. 움찔하자 그가 점퍼의 앞을 여며 준다. 좀 따뜻게 입

고 나오지 그랬어요. 추운데. 자기도 코트 하나만 입은 주제에 어른인 척 챙기는 모습이

귀여워 수현은 웃고 말았다.

“식당은 제가 골라도 돼요?”

“그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우진이 팔을 붙든다 . 가요. 양호범만큼은 아니지만 손이 크

다. 손가락도 예쁘고. 잠시 시선을 두다 택시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김우진한테서 전에 없던 향수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 꽤 신경을 쓰

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너무 대충하고 나온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생기려

했다.

연말이라 차가 막혔고,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서 청담동에 있는 한식 레스토랑 앞에 도

착했다.

“작년에 부모님하고 왔었는데 괜찮더라고요.”

들어가니 직원이 나와 인사를 한다. 현대식 인테리어에 등이나, 오브제 같은 것들은 전

통적인 문양 방식을 고수했다. 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대나무여서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 코스 요리였는데 메뉴에 사용


된 재료들이 낯선 것들이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샴페인까지 주문하고 나서 수현은 녀석

이 준 선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거 열어 봐도 돼?”

“네.”

리본이 묶인 상자를 꺼내어 열자 붉은색 카디건이 나온다. 촉감도 부드럽고 색도 고왔으

나 수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그것을 몸에 대봤다.

“어울려?”

“네. 형 피부가 하얘서 빨간색 잘 어울려요.”

수현은 배시시 웃었다. 사실 빨간색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예전 김도한하고 살 때 그

인간이 비슷한 종류의 니트를 선물한 적이 있다 . 너는 이 색이 잘 받아. 네가 이 색 입으

면 존나 사람 꼴리게 하는 거 알아? 라고 말하면서. 그러더니 그것만 입혀 놓고 몇 번을

박았지. 지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목이 따끔거리네. 물을 마시는데 김우진이 한마디 한다.

“예상은 했는데, 진짜 야하네요.”

풉, 하마터면 물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입가에 묻은 물을 냅킨으로 닦으며 수현이 애써

웃었다. 사실 김우진과는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안부나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을 털어놨지만, 한 번씩 이런 식으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려고 할 때면 수현

이 먼저 적당히 잘라 내곤 했다.

“다음에 저 만날 때 꼭 입고 와 줘요….”

어, 그, 그래. 어물쩍 대답하고 나니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직원이 샴페인을 가져와 잔을

채워 준다. 우진은 잔을 들어 수현에게 내밀었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잔을 부딪치고 나서 수현은 레스토랑 입구 쪽을 응시했다. 직원이 손

님을 응대하고 있었는데, 뒷모습이 양호범과 흡사하다. 저런 덩치는 흔치 않은데, 라고

생각한 순간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양호범이 분명했고, 혼

자가 아니라 여자와 함께였다. 그는 반대편 홀이 아닌 룸 쪽으로 향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수현의 낯빛을 발견하고 우진이 돌아본다.

다행히 녀석은 보지 못한 거 같았다.

“왜 그래요?”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면서도 눈은 양호범이 사라진 복도를 끈질기게 노려봤다.

낮에 김우영이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양 대표 관심, 그거 길어야 한 달이야. 팽당하고 눈물 짜지 말고, 실속을 챙겨.]

덕분에 조금 전까지 달던 샴페인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수현은 연 노란빛 샴페인을 빤히 바라보다 김우진을 불렀다.

“우진아.”

포크로 음식을 먹던 김우진이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우리 동맹 맺을까?”

“동맹이요?”

“응.”

“그걸로 제가 얻는 게 뭔데요?”

“음… 내가 돈 받으면 거하게 한몫 챙겨 줄게.”

우진은 포크를 내려놨고, 샴페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술을 삼킬 때마다 목울

대가 움직인다. 녀석은 잔을 한쪽으로 치운 뒤 느긋하게 웃었다.

“전 다른 거 원하는데. 그거 주면 생각해 볼게요.”

“다른 거, 뭐?”

우진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수현이 기대감을

품고 상체를 앞으로 내민 순간 김우진이 뒤통수를 잡아채 당긴다. 밀어낼 틈도 없이 녀

석에게 입술이 먹혀 버렸다.

놀라서 황급히 어깨를 밀어내자 춥,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와중에 입술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김우진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샴페인으로 입을 축였고 수현은 기막힌 표정

을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야, 너….”

그러다 뒤늦게 저 멀리 키가 큰 남자를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새끼,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거리가 먼데도 기운이 무시무시하다는 게 느껴져 얼른 고개를 떨구어 시선을 피했다. 저

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검은색 구두가 코앞에 있다 . 천천

히 고개를 들자 양호범이 서늘한 눈빛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 해요, 여기서.”
58 화

갑작스러운 양호범의 등장에 식은땀이 흐르는 거 같았다 . 키스하는 거 봤나. 못 봤겠지.

눈알을 굴리면서 눈치를 살피는데 양호범이 태연한 표정으로 옆에 서서 빤히 내려다본

다. 수현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다 보네?”

“그러니까요. 서울 참 좁아. 둘이 사석에서 밥 먹을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는데요?”

수현이 입을 다물고 웃기만 하자 호범은 시계를 확인했다 . 식사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라고 물었고 수현은 우진을 쳐다봤다. 우진은 눈을 내리깔고 감정 없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양호범을 볼 때면 늘 저런 식의 얼굴이다. 처음엔 양호범이 무서워서라고 생각

했는데 이젠 모르겠다.

“1 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잘됐네요. 끝나고 같이 가요.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김우진, 괜찮지?”

이번엔 화살이 김우진에게 날아간다. 접시를 보던 우진이 눈을 들어 양호범을 봤고, 고

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의 손이 수현의 어깨를 짚는다 . 힘

주어 꾹 한번 누르더니 맛있게 먹어요. 라고 매너 좋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자신의 룸

쪽으로 걸어간다.

수현은 참고 있던 숨을 하, 하고 터트렸다. 앞에 앉은 우진을 보는데 태평하게 나이프로

음식을 썰고 있다. 수현은 기가 찼다. 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남자하고 키스했

다는 것만으로도 우진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너, 왜 그랬어?”
우진은 침묵했고,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턴 그런 장난 하지 마.”

“장난 아니에요…. 형한테 허락 구하지 못한 건 죄송해요.”

“양호범이 봤으면 어쩌려고 그래?”

“호범이 형 알아요.”

“어?”

“저 남자 좋아하는 거 안다고요.”

태연하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하는 바람에 되레 할 말을 잃었다. 거기에 자신이 느

낀 것들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니 우진을 대하는 게 살짝 불편해진다. 물론 잘생

기고 귀여운 건 인정하지만….

아, 이놈의 인기. 내가 죄인이다, 죄인. 이러다 나 때문에 형제가 치고받고 싸우는 건 아

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우진이 다 썬 스테이크 접시를 수현의 것과 바꾸어 준다 . 이걸로

먹어요.

“우진아.”

“알았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과하는 걸 보니 화가 나려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래, 아직 어려

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혀가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오려고 하던데. 다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우진이 싱긋 웃더니 샴페인을 더 따라 준다.

그렇게 얹힐 것 같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양호범이 먼저 계산을 한 뒤였다 . 그는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는데 깍듯하게 대화가 오고 가는 걸 보니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여자를 보내고 나서 양호범이 다가와 다정한 시선으로 얼굴을 살폈다.

“많이 마셨어요?”

“아니…. 샴페인 몇 잔.”

“우진인요?”

“갔어. 붙잡았는데 택시 타고 가더라.”


따라와요. 양호범이 주차장 쪽으로 간다. 수현은 그 뒤를 쫓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

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칙, 칙, 부싯돌이 헛돌기만 하고 나오질 않는다 . 짜증

나서 몇 번 흔들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앞서가던 호범이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다가온다. 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불이 댕겨졌다. 담배 끝을 가져다 대고 깊게 빤 뒤 호범을 올려다봤다. 불빛에 얼굴이 일

렁거려 어딘가 더 음습해 보인다.

탁, 그는 라이터를 닫아 주머니에 챙겼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더니 수현의 뒤

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라이터 대신 담배 끝으로 불을 옮겨 붙인다 . 별것 아닌 사소

한 동작임에도 괜스레 몸이 긴장됐다. 호범은 담배를 문 채 손을 뻗어 수현의 입술을 만

졌다.

수현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다리 벌리는 것만큼 입술도 쉽게 내주는구나, 싶어서.”

아, 역시 봤구나. 수현은 그 손을 거둬 내고 시치미를 뚝 뗐다.

“빨리 가자. 춥다.”

담배를 비벼 끄고 도망치듯 차에 타려고 하는데 양호범이 뒷덜미를 낚아채 잡아당긴다 .

몸이 딸려 갔고 순식간에 호범이 입술을 집어삼켰다. 수현의 눈이 커졌다. 입술을 게걸

스럽게 탐하는데 뒷골이 섬뜩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 만큼 통증이 생겨났다.

주먹으로 양호범의 어깨를 내리쳐도 막무가내다. 겨우 떼어 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후드득 셔츠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놀라고 기가 막혀 쳐다보는데 호범이 피 묻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눈에 살기를 띠고 웃는다.

“조심해요. 나는 사촌 동생하고 구멍 동서 할 생각 없어.”

미친놈이 뭐래. 인상을 쓰고 저리 비키라며 주먹으로 어깨를 치고 나서 차에 올라탔다.

선바이저를 내려 확인하는데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른다 . 저거 진짜 돌은 새끼 아니

야? 콘솔박스를 열고 물티슈를 꺼내 상처 부위를 찍어 눌렀다.

잠시 뒤 담배를 다 피운 양호범이 운전석에 탄다.


“괜찮아요? 봐요. 피 많이 나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길래 손을 매몰차게 쳐 냈다.

“씨발. 병 주고 약 주냐.”

“그러니까 누가 어린놈한테 찝쩍거리래. 양심도 없지.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주제에.”

수현은 비웃었다.

“양 사장, 너 질투하지?”

호범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요?”

“뭐?”

“ 앞뒤 순서가 바뀌었잖아. 백수현이 내 사촌 동생 건드려서 열받아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아 …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런 건가. 씨발. 혼자 헛다리 짚었네. 양호범이 입

모양으로 병신이라고 말했고, 수현은 눈을 흘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경질이 나서 차

량 앞쪽을 발로 퍽, 한 번 걷어찼다.

“그래서 망가지겠어요? 더 차.”

다시 차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출발한다 . 가는 내내 수현은 입술을 몇 번이고 확인했

다. 다행히 피는 멈췄으나 입술이 조금씩 부어오르고 있었다. 씩씩대고 노려보는데도 양

호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차가 신호를 받아 멈췄고 호범의 시선이 수현

이 들고 있는 쇼핑백으로 옮겨 왔다.

“그건 뭐예요?”

성질이 나서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우진이한테 선물 받았어요?”

“입술 아파서 대답하기 힘들어. 말 시키지 마.”

선물 받은 옷에다 몹쓸 짓을 할까 봐 품에 꼭 끌어안고 창가 쪽으로 돌아누웠다 . 샴페인

이 달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취하네. 의자도 뜨끈뜨끈하니 잠이 쏟아진다. 수

현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호범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

“편하게 자요. 길이 막혀서 한참 걸려.”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는다. 자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

었고, 눈을 떴을 때는 호텔 앞이었다. 수현은 눈을 비비고 하품하다가 문득 자신의 품에

쇼핑백이 없는 걸 깨달았다. 놀라서 바닥을 보는데 역시나 없다. 뒷자리와 구석구석을

다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시선이 다다른 곳은 양호범이었다.

“야….”

“내려요, 얼른. 나 일하러 다시 가 봐야 해.”

수현이 기막힌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줘, 빨리.”

“뭘.”

“아까, 그거.”

호범이 뻔뻔하게 웃는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양호범의 의자 밑을 살피려고 얼굴을 그의 다리 사이로 디밀었다. 아무것도 없다. 고개

를 들려고 하는데 양호범이 그대로 뒤통수를 잡아 누른다 . 몸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

다. 녀석은 그악스러운 손길로 수현의 얼굴을 자기 좆에다 짓뭉갰다. 하, 머리 위에서 끈

적한 숨소리가 들리며 좆이 점점 단단해진다.

몸부림을 쳐 간신히 호범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얼굴은 시뻘게졌다.

“이!”

“왜. 한번 빨아 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

“시끄럽고,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똑똑, 그때 누군가 창을 두드린다. 언제 왔는지 차 밖에서 박태준이 서류를 들고 기다리

고 있다. 보아하니 양호범은 돌려줄 생각이 아예 없는 듯하다 . 하, 더 말씨름하기 싫어 욕

을 한번 퍼부은 뒤 차에서 내리는데 기어코 한마디를 더 한다.


“가서 자요.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수현은 보란 듯 가운뎃손가락을 쳐들었다. 이거나 먹어. 개새끼야. 박태준에게 꾸벅 인

사를 하고 호텔 안으로 씩씩대며 들어가는데 보안팀 직원이 수현을 부르며 뛰어온다.

“수현 씨.”

그러다 퉁퉁 부은 입술을 보더니 의아하게 묻는다.

“어디 다쳤어?”

“아니에요. 무슨 일이세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우편물을 내밀었다.

“이거, 매니저님한테 전해 줘. 누가 우리 방에 꽂아 뒀더라고.”

매니저인 이윤철은 오늘 야근조였다. 수현은 그의 우편물을 대신 챙겨 숙소 안으로 들어

왔다. 카드 회사에서 온 건가. 그것을 매니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옷을 벗으려다 동작을

멈췄다. 되돌아가서 조금 전 우편물을 집어 들었다. 주소 아래 우편 번호 다섯 자리가 시

선을 잡아끈다.

순간 머릿속을 망치로 땅! 내리치는 느낌을 받았다. 서둘러 자신의 침대로 가 서랍을 열

어 메모지를 꺼냈다. 거기엔 아버지가 알려 준 다섯 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급하게 인

터넷에 우편 번호 검색창을 열어 숫자를 적어 넣었다.

“1…7…”

마지막 숫자까지 적고 검색을 하자 여러 개의 주소가 뜬다. 제천…. 아버지의 고향. 맥박

이 빨라지고 심장이 요동친다. 혹시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화면을 아래로 내리

던 수현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한솔 추모공원?

아버지는 엄마 이야기를 꺼내고 숫자를 알려 줬다. 그렇다면 엄마와 연관된 곳일 가능성

이 크다. 돌아가셨다고 가정한다면 … .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당장 전화번호를 찾아

내어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다.

여러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수현은 모자를 눌러쓰고 백팩에 짐을 담아 숙소를 빠져나왔다.
59 화

“아후, 여기 맞아요?”

수현은 차창 밖을 내다봤다. 보이는 거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택시 기사는 질색하

는 표정을 하더니 바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현은 지갑에서 오만 원권 여러

장을 꺼내 기사에게 넘겨줬다.

“감사합니다.”

“괜찮겠어요?”

수현은 애써 웃었다. 내리기 무섭게 차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어두컴컴한 데 홀로 남

겨지니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낮에 올걸.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충동적으로 오긴

했는데, 돌아갈 땐 어떻게 가지? 늘 이게 문제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행동한 다

음에 생각하는 거.

어쨌든 왔으니 들어가 확인할 작정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뒤 백

팩에서 랜턴을 꺼내 불을 켰다.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자갈 밟는 소리가 음산

하다. 입구에 빛을 비추자 한솔 추모공원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예상대로 문이 굳게

잠겼다.

수현은 랜턴을 뒷주머니에 챙기고 뒤로 성큼성큼 물러섰다. 퉤! 손에 침을 뱉은 뒤 빠르

게 달려 담을 타고 매달렸고, 순식간에 안쪽으로 넘어갔다. 탁, 바닥에 착지하여 주변을

살피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건물에서 희미하게 불빛과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들킬

세라 몸을 낮추고 마당을 가로질러 납골당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 안으로 진입

하니 역시나 칸마다 유골함이 눈에 띈다. 함을 보호하는 유리 안으로 가족사진이며 고인

의 물건, 편지, 꽃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천천히 살피는데 아무리 봐도 엄마의 이름이 없다 . 예감이 틀린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수현의 눈에 문득 사진 하나가 들어온다. 수현은 그곳으로 가까이가 불빛을 비췄다. 사

진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크게 요동친다.

아버지인 백광무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 환하게 웃는 백광

무는 다른 사람 같았다. 목이 멨다. 천천히 빛을 위로 움직였다. 하얀색 유골함이 나타나

며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김순정.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진짜 죽어 버렸구나.

사망한 날짜를 눈으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그날이

다. 자신이 도망친 날. 정말 그날 죽어 버렸어. 백광무가 어떻게 그녀의 시신을 챙겼는지

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엄마는 이제 세상에 없다는 거다.

수현은 비통함에 잠겨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 쥐 죽은 듯 조용한 납골당 안엔 흐

느끼는 듯한 숨소리가 채워졌다. 어디선가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수현은 고개

를 파묻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수현에게로 빛이 쏟아진다.

“거기 누구요?”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 내고 일어서는데 빛과 한 남자가 나타

난다. 동시에 불이 탁, 켜지며 납골당 안이 대낮처럼 환해진다.

“당신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고함을 치는 남자는 여차하면 허리에 차고 있는 곤봉을 꺼낼 기세다 . 평소라면 그대로

튀었을 텐데,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수현은 맥이 빠진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엄마 찾으러 왔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큰일 낼 사람이네. 그렇다고 몰래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 CCTV 도 다 있는데. 얼

른 이리 나와요.”

수현을 발을 떼지 못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사진이 떠올랐다. 양 회장이 거래를 제안

하며 건네줬던 엄마의 하나뿐인 사진. 머뭇거리고 있자 남자가 다가온다.

“아, 거참. 나오라니까!”

“죄송한데, 사진만 놓고 가면 안 될까요? 저희 엄마 김순정 씨거든요. 저기 안에다 사진

만 넣고 갈게요.”

“이 사람이! 그런 건 낮에 와서 해야지. 지금 이 시간에 오면,”

남자가 말을 멈췄고, 가까이 와서 모자 아래 수현의 얼굴을 살폈다.

“너… 광무 형님 아들이니?”

낯선 이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놀라서 쳐다보자 남자가 재차 확인한다.

“아버지가 백광무 맞아?”

수현이 마스크를 내리자 험악하던 남자의 표정이 바뀐다 . 아이고, 참나. 이게 무슨 일이

야.

“이놈아. 나 못 알아보냐. 덕만이 삼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가 혀를 찼다.

“하긴, 너 어릴 때 봤는데, 기억하면 그게 이상하지. 내가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의 큰아

버지의… 아, 됐고. 16 촌 되는 사람이야.”

4 촌, 8 촌까지 들어 봤어도 16 촌은 뭐지. 민법상 8 촌 넘어가면 남이라던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는데 남자가 한숨을 내쉰다.

“그렇잖아도 네 아버지가 꼬박꼬박 오더니 올해는 안 와서 이상하다 , 생각했거든. 이 양

반이 무슨 사달이 났나 했는데, 네가 왔네.”

“…….”

“아버지는 잘 계시고?”

“아프세요….”

“어디가?”
“교통사고 당하셔서….”

“아이고. 조심하지. 많이 다쳤어?”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수현을 보고 아까 말한 사진 얘

기가 뭔지 묻는다. 수현은 지갑을 꺼냈고, 거기서 사진 한 장을 빼서 보여 줬다. 노안이

왔는지 남자가 사진을 멀찍이 보더니 눈을 가늘게 늘인다.

“형수 맞네…. 오래돼서 얼굴도 가물가물하네.”

엄마를 아는 남자가 낯설다. 남자는 이제 수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네가 엄마를 쏙 빼닮았어. 눈하고 입매가.”

“…….”

남자가 고민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말한다.

“여기서 조금 기다려. 문 열어 줄 테니까.”

수현은 천장에 달린 CCTV 를 힐긋 봤다. 그러자 남자가 헛 웃는다. 저거 가짜야. 시늉만

해 놓은 거. 그러고 나서 남자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골함 앞으로 가서 섰다.

남들은 생전에 쓰던 물건이다 뭐다 많은데, 엄마의 유골함 앞엔 아버지와 찍은 사진 하

나가 전부다. 목구멍이 먹먹해진다. 손에 쥔 엄마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데 잠시 뒤 남

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모서리에 있는 볼트를 풀고 압축기 같은 기구로 유리를 떼어 냈다. 유골함이 드

러났고 수현은 엄마의 사진을 아버지와 자신의 사진 옆에 세워 두려 했다. 하지만 종이

로 된 사진이 제대로 세워질 리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한다.

“있어 봐. 사무실에 빈 액자 남은 거 가져다줄게.”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자 남자가 다시 사라진다 . 혼자 남은 수현은 손을 뻗어 유골

함에 적힌 엄마의 이름을 매만졌다. 눈물이 핑 돈다. 울지 않으려 이를 꽉 물고 버티던 순

간 양호범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인간이 뭘 훔쳤는지 말해 줘.]

[직접 물어봐요. 어디다 숨겼는지 알아내면 더 좋고.]


수현은 납골당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액자를 찾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

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천장에 있는 CCTV 는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수현은

유골함을 밖으로 빼냈다. 뚜껑을 비틀어 열자 안쪽에 또 뚜껑이 나온다. 후, 심호흡한 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것을 열었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뼛가루가 없다.

대신 무언가 신문지에 싸여 있다. 당황한 수현은 유골함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

는 것이 상당히 묵직하다. 그것을 밖으로 꺼낸 뒤 가방에 챙기고, 남자가 오기 전 함을 제

자리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남자가 온다. 사진을 넣을 액자를 들고서.

“자. 여기. 이거면 충분하겠지?”

수현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액자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끼우는 동안 남

자가 옆에서 몰랐던 사실을 알려 준다. 백광무가 처음 이곳에 온 게 10 년이 훌쩍 넘었다

고. 근데 아들은 오지 않길래 이상하게 여겼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아까 신문지에 싸인 물건이 양 회장의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곳에 보

관한 시기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처음엔 유골이 있었단 뜻인가.

남자가 유리를 닫았고 수현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

“서울서 왔지? 가려면 한참 걸릴 텐데 여기 숙소서 자고 갈래?”

“아니에요…. 아침에 출근해야 해서 가 봐야 해요.”

“그래 그럼. 다음엔 낮에 와. 이렇게 도둑고양이마냥 밤에 와서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그럴게요.”

돌아서 나가려는데 남자가 수현을 붙든다 . 괜히 켕겨서 움찔하자 남자가 차 키를 꺼낸

다.

“아무래도 내가 시내까지 태워다 주는 게 낫겠어. 여기 차편이 영 별로라.”

그는 파란색 트럭으로 걸어가며 손짓했다 . 차를 얻어 타고 가는 동안 남자는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많이 다친 건지.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정신이 들거든 꼭

전화 한 통 해 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30 분 정도 달려 시내에 도착했고, 터미널 근처에서 내리게 됐다. 수현은 감사하

다며 돈을 쥐여 줬으나 그는 한사코 마다했다 . 남자를 떠나보낸 뒤 터미널로 들어가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몇 명 앉아 있다.

수현은 그들을 지나쳐 화장실로 갔고, 빈칸을 골라 들어가 메고 있던 백팩의 지퍼를 열

었다. 지익, 소리가 났고 이어서 손을 넣자 신문지에 감싼 것이 딸려 나온다 . 변기에 앉아

신문지를 벗겨 냈다. 손바닥만 한 물건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

그것은 작은 불상이었다. 백광무가 훔친 물건이 이거였나. 신문지를 아예 벗겨 내는데

검은 물체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수현은 그것을 주웠다. 비닐 안에 무언가 만져진다. 입

구를 벌려 내용물을 손바닥에 쏟자 알이 꽤 굵직한 큐빅이 수십 개 쏟아진다.

“뭐야…?”

인상을 구기고 큐빅을 하나 들고 형광등에 비춰 봤다 . 영롱한 빛이 반짝인다. 처음엔 큐

빅이라고 생각했는데, 볼수록 정교하게 컷팅된 것도 그렇고, 빛깔도 그렇고….

“설마….”

그때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취객인지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수현은

다급히 그것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심장이

들쑤셔 놓은 것처럼 쿵쾅거린다. 방금 보았던 반짝이는 물체가 눈앞에 아른댔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60 화

“호텔에서 나와 택시 탔답니다.”

“티 나지 않게 붙으라고 해.”

호범은 태블릿 속 영상을 노려봤다. 거기엔 며칠 전 요양병원에서 백수현과 그의 아버지

백광무의 모습이 찍혔다. 백광무는 가끔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의사 표시는 하지 못했

다. 그런데 이날 백광무가 백수현의 손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백수현이 움직였다. 미행하는 사람에 따르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멈춘 화면을 확대했으나, 화질이 깨져 정확한 것까

진 알 수 없었다. 대체 뭐라고 적었길래….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질 않는구나.”

헛웃음을 흘리던 그의 시선에 뒷좌석 의자 밑에 처박힌 쇼핑백이 들어온다. 호범은 그것

을 집어 안에 있는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붉은색 카디건이 나온다. 김우진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백수현에게 줬는지 모르나, 순수한 의도가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작년에 만나던 놈을 강제로 떼어 놨으니 그에 대한 보복이라도 할 작정인가. 아니면 정

말 백수현을 좋아하기라도 하나. 긴 한숨을 내쉬는데 차가 어느덧 본가에 도착한다. 이

늦은 밤 영감이 무엇 때문에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의 목소리가 굉장

히 기분 좋게 들렸다는 것이다.

다 늙어서 새로운 여자라도 만나는 건가. 설마 딸뻘인 여자는 아니겠지. 해괴망측한 상

상을 하며 차에서 내린 호범은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양 회장의 비서와 집안

일을 돕는 실장이 나와서 정중히 인사를 한다.


여느 때와 다르게 집 안의 불이 전부 켜져 있다. 이 시간에 손님이 왔단 뜻이다. 마침 저

멀리서 김우진이 나타난다. 여전히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오셨어요. 형님. 인사

를 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머리를 헝클어 놓고 꾹, 한번 눌렀다.

“까불지 마.”

김우진이 움찔했고 호범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 옆을 지나쳤다 . 녀석이 싫지 않다. 약에

빠져 사는 김우영보다야 훨씬 마음에 들었다. 대학 졸업하면 데리고 일을 가르쳐 볼 생

각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선을 넘는다면 혈육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최 비서와 직원 하나가 따라온다.

“귀한 손님이 오셨나 봐요?”

“들어가시면 압니다.”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미닫이문 여러 개를 통과했다. 이 시간에 응접실이 아닌 침실까지

들인 사람이 과연 누굴까. 궁금해하며 마지막 문을 여는 순간 호범은 멈출 수밖에 없었

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서 있자 보료 위에 앉아 차를 마시던 양 회장이 눈을 들어

쳐다본다.

“들어오지 않고 왜 그러고 서 있어.”

호범은 양 회장 맞은편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이놈아, 손님을 그렇게 노려봐서 되겠니.”

서민준이 왜 여기에….

안으로 들어서자 탁, 문이 닫히며 최 비서가 밖에서 사람들을 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 자

리에 앉으며 옆을 봤다. 찻상을 앞에 두고 서민준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호범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상상치도 못한 손님이 와 계셨네요.”

양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국화다. 양 회장은 반가운 손님이 올 때면 이 차

를 내오게 했다. 호범의 시선이 서민준 옆에 있는 금색 천으로 옮겨졌다 . 보따리에 싸인

물건은 선물 상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 검사가 범이 너하고 화해하고 싶다는구나. 그동안 오해가 있었다고.”


하, 호범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화해? 웃기는 소리다. 추측하건대 서민준은 알아냈을

것이다. 양 회장이 서민준과 백수현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냈고, 퇴직했지만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까지 포섭해 놓았다는 것을.

“우리 검사님이 왜 마음을 바꾸셨을까, 궁금하네요.”

여태 눈을 마주치지 않던 서민준이 그제야 돌아본다. 거칠어진 얼굴과 지친 눈빛을 보니

뱃속이 짜릿하다. 그 정도로 백수현의 존재가 무거웠던 걸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시

선이 오가자 양 회장이 끼어든다.

“원래, 화려한 도자기는 흠집이 나도 사람들이 잘 모르고 넘어가는 법이야 . 하지만 백자

는 그렇지 않아. 순결하고 고귀한 물건에 티끌만 한 흠집이 생기면 사람들이 그냥 넘어

가질 않거든. 안 그런가, 서 검사?”

서민준의 낯빛이 미묘하게 변한다. 듣고 있던 호범은 기가 차 웃었다. 백자 같은 소리 하

네. 씨발. 고결하고 깨끗한 새끼가 미성년자를 따먹냐 . 이제 와서 자기 죄가 밝혀질 거 같

으니 이 여우 같은 새끼가 선수를 치는구나.

마뜩잖게 노려보는데 서민준이 옆에 있는 보자기를 앞으로 밀며 입을 연다.

“제가 가지고 있던 전부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어떤 이유든 어르신과 손주분에 관한 이

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또한, 저희 장인어른과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

다.”

“허허, 됐네. 괜히 반대편 의원하고 만났다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죄인처럼 조아리고 있던 서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정치입니다. 배가 여러 척 있으면 훨씬 좋겠지요. 회장님

께서는 편하신 대로 이용하시면 그만입니다.”

양 회장이 흡족한 듯 웃는다.

“나는 서 검사가 무척 고지식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먼. 허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범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 미친 새끼. 올곧은 척은 혼자 다 하

더니 막상 위기에 몰리니 너도 다를 것 없구나 . 이 꼴을 백수현도 봐야 하는데. 지가 좋다


던 놈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라는 걸 알면, 손톱만큼 남아 있던 미련도 떨어져 나갈

테지. 속으로 실컷 비웃는데 양 회장이 호범을 부른다.

“범아.”

“말씀하세요.”

“이레건설 비자금 파일, 넘겨주거라.”

호범이 인상을 구겼다. 영감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백수현은 그저

미끼일 뿐이었고. 거역할 명분이 없다. 서민준은 부임하던 첫해부터 양 회장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번번이 윗선에서 압박이 가해져도 꿋꿋하게 버티며 언젠가는 양 회장

을 처넣을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서민준이 양 회장을 감옥에 보내지 못한 건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 힘. 그

러니까 양 회장만 한 권력이 없어서였지. 만에 하나 재수 없게 그의 장인인 김현식이 당

선되고, 힘이 그쪽으로 기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쉽네요. 백수현하고 자빠져 자는 거 구경이나 하려고 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민준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걘 전과자야. 그 말을 누가 믿어 줄까.”

하, 저렇게 뻔뻔할 수가. 이걸 녹음해서 백수현한테 들려줘? 상처받아서 펑펑 우는 꼴을

보기 싫으면서도 보고 싶다. 그 말간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면 묘하게 꼴린단 말이지.

“그렇게 당당하면 버티지 그랬어요. 뭐가 쫄려서 영감하고 손을 잡아?”

둘의 시선이 맹렬하게 부딪치자 양 회장이 손을 들어 제지한다.

“됐어. 좋은 자리에서 서로 기운 빼지 말게. 아까 서 검사가 말한 거, 그건 내가 알아서 하

도록 하지.”

호범의 시선이 양 회장에게 이동한다. 아까 말한 거 뭐?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양 회장이

담뱃대에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인 뒤 연기를 내뿜었다.

“별거 아니야. 서 검사가 백수현을 우리 쪽에서 정리해 줬으면 하는구나.”

씨발. 호범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고개를 홱 돌려 서민준을 쏘아보는데 그는

목석처럼 앉아 있다.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는 버리겠다?”

“범아.”

양 회장이 호범을 빤히 본다. 마치 속내를 꿰뚫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호범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영감은 알 것이다. 호범이 백수현을 집으로 데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게 모르게 그의 눈과 귀가 많았다. 전처럼 만나다 쉽게 끝낼 거라 여겼겠지. 그러니 모른

척했을 테고.

“네 아버지처럼 되진 마라. 그럼 이 할애비는 못 산다.”

노인네 입에서 아버지 얘기가 나오니 명치가 꽉 막히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네

아버지처럼 너도 할애비를 버릴 거냐.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여기서 휘둘리지 말자.

호범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었어요. 방금 그 얘긴 날이 밝으면 와서 마무리 지을게요.”

나가기 전 서민준을 봤다. 할 수 있다면 놈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서 죽여 버리고 싶

다. 어금니를 물고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삼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영감의 시선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선택하며 할아버지를 버렸다. 그래서 죽었

고, 엄마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백수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바보

같은 선택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영감의 뜻에 따르는 게 맞다.

알고 있다. 아는데도 왜….

밖으로 나오자 막혔던 숨이 트인다. 쫓아오는 최 비서를 물리고 담배를 찾는데 박태준이

다가온다. 그는 호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응.”

“백수현을….”

박태준은 대단히 송구한 표정이었다.

“놓쳤답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탔고 제천 터미널에서 내렸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모양입

니다. 우선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호범이 침묵하자 박태준이 말을 잇는다.

“날이 밝는 대로 주변 CCTV 부터 확보하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호범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차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둬.”

“네?”

“찾지 마.”

“하지만 이대로 도망가면,”

호범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박태준을 돌아봤다. 그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박태준이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호범은 차에 타기 전 본가를 향해 몸을 틀

었다. 오늘따라 불빛이 담을 넘어올 정도로 밝다. 양 회장과 서민준은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누고 있을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씁쓸함에 웃음만 새어 나온다.


61 화

자야 한다. 출근하려면 자야 해. 자야 하는데 … 아, 씨발. 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새벽에 도착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더 멀

쩡해진다. 에너지 드링크를 몇 사발 처먹은 기분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굳게 닫혀 있는 옷장을 노려봤다. 새벽이라 마땅히 이용할 물품보

관소를 찾지 못해 이곳까지 들고 왔는데,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저것 때문에 더 잠을 설

치나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으로 다가갔다.

가방을 열어 물건을 꺼내자 반짝이는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진짜 다이아면….”

상상만 했는데도 사정할 것처럼 짜릿하다 . 제대로 감정을 받아 보고 싶으나 믿고 맡길

데가 없다. 어쭙잖게 행동하다 저번처럼 또 신고당해 경찰서라도 잡혀가면 큰일이다. 이

럴 줄 알았으면 감방 동기들하고 연락이라도 하고 지낼걸. 거기에 장물 취급하던 인간도

있었던 거 같은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인터넷으로 다이아몬드와 큐빅의 차이를 검색했다 . 사진이 여러 개

나온다. 하나를 엄지와 검지로 쥐고 형광등에 비춰 가며 비교하고 또 비교했다. 아무리

봐도 큐빅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계속 들여다봤더니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다. 빌어먹을. 결국 다시 옷장을 열었다. 거

기엔 양호범에게 받은 현금과 채권을 담은 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빼고

다이아몬드로 추정되는 것을 안쪽에 깊숙이 숨겼다.


하루아침에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다 . 다이아몬드면 3 캐럿 정도 하는 크기이며 금액은

종류별로 다르지만 2~3 천만 원 정도 한다고 나와 있었다. 모두 30 개니까, 금액으로 따

지면….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입꼬리가 점점 말려 올라간다.

수현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옷장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침대에 눕는데 정신이 말똥말똥

하다. 눈앞에서 다이아몬드, 아니, 다이아몬드로 추정되는 그것이 아른거린다. 저게 진

짜 다이아몬드면 도망가서 충분히 먹고 살만큼은 생긴다.

물론, 서민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가능한

일일까, 불안해졌다. 사람들은 과연 내 말을 믿어 줄까. 나는 교도소에 간 경험이 있고,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이력도 있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이었던 적도 있고, 그동안 섹스를

나눴던 상대만 해도 여럿이다.

생각은 도망가는 쪽으로 점점 기울었다. 그러다 양호범 얼굴이 떠오른다. 만약 서민준

장인이 대통령이 되면 서민준도 막강한 권력이 생기는 건데 …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는

양호범을 그냥 놔둘까.

“아, 진짜….”

내가 왜 그 인간 걱정을 하고 있을까. 수현은 이불을 돌돌 말아 끌어안고 뒹굴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고 하필이면 호랑이한테 쫓기는 꿈을 꿨다 . 집

채만 한 백호였는데 가는 데마다 나타나서 이빨을 드러내며 수현을 위협하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꿈인 걸 알면서도 소름이 끼쳐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시계를 보

니 곧 있으면 출근할 시간이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속은 편할 것 같았다 . 수현은 느

릿느릿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는데 야근을 마친 매니저가 들어

온다.

“벌써 일어났네?”

“오셨어요….”

“얼굴이 왜 그래? 못 잤어?”


수현은 기운 없이 웃기만 했다. 매니저는 옷을 벗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유

튜브를 켜 자신이 구독하는 채널을 튼다. 그는 숙소에 오면 샤워를 하기 전 꼭 영상을 먼

저 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번엔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는다.

“우리 채리가 어디 아픈가 봐. 당분간 영상 업로드 못 한다네.”

채리는 그가 애정을 쏟는 채널의 강아지 이름이다. 생방송 때도 간식값으로 얼마나 후원

을 했는지 견주가 그의 아이디를 몇 번이나 언급했었다. 그가 주로 시청하는 건 먹방과

동물 영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녀석이 채리였다. 수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외로움에 TV 를 끼고 살던 것처럼 매니저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게 재미있어요?”

“어. 내 유일한 낙이야.”

“그러지 말고 형도 계정 하나 만들어서 방송하세요. 요즘은 너도나도 다 하는데.”

“방송은 아무나 하냐. 일단 얼굴이 받쳐 줘야 하고….”

매니저가 말을 멈추고 수현을 빤히 본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뺨을 문지르자 그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수현을 가리킨다.

“너, 해라. 딱이다. 너같이 생긴 애들은 앉아서 종이접기만 해도 구독자 수가 올라갈걸.”

허, 수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됐어요. 종이접기 누가 시청한다고. 나 같은 애가

무슨 방송을 해. 그랬다간 아마 예전에 쫓아다니던 빚쟁이들이 사방에서 몰려올걸. 이번

엔 콩팥을 진짜 빼앗길지도 모르지.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내 얼굴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을

까. 갑자기 사라져도 매니저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 적어도 개

죽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매니저가 자연스럽게 속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간다.

“수현아, 아침 먹고 올라가라. 굶지 말고.”

잔소리도 잊지 않으면서. 그에게 알았다고 대답한 뒤 수현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22 층

으로 향했다. 아침이고 뭐고 식욕을 잃은 지 오래다. 카드를 대고 펜트하우스의 문을 열

고 들어가는데 오늘따라 공기가 유독 무겁다.


테이블엔 빈 술병과 깨진 잔이 놓여 있고 핏방울도 떨어져 있다. 수현은 무언가 잘못되

었음을 직감했다. 혹시 김우영 이 인간이 어젯밤 여기서 피살된 건 아닐까 . 저도 모르게

창문을 보는데 깨진 흔적 없이 멀쩡하다.

조심스럽게 침실로 이동하는데 누군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있는 게 보인다. 남자

의 등에 용 한 마리가 꿈틀댔다. 양호범이 왜 여기에 … ? 수현이 일을 시작한 뒤로 그가

이곳에서 자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 자세히 보니 침구에 피가 묻어 있고 손에

도 피가 범벅이다.

혹시 시체가 있나 살피는데 팔이 붙들린다. 언제 일어났는지 양호범이 눈을 반쯤 뜨고서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잡힌 부위가 화끈거리는 거 같아 손을 슬그머니 빼내고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그러다 시체 대신 구석에서 낯익은 쇼핑백을 발견했다. 부리나케 그곳으

로 가서 꺼냈더니 우진에게 선물 받은 카디건이 맞다.

“좋아 죽네?”

양호범이 일어나 앉으며 비아냥거렸고 수현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 무시하고 청소를

하러 나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상처가 마음에 걸린다 . 수현은 되돌아와 퉁명스럽게 물었

다.

“손은 왜 그래?”

“유리에 베였어요.”

조심하지. 한숨을 내쉰 뒤 서랍에 있는 구급함을 들고 왔다. 침대에 앉아 상자를 열고 약

을 뒤적이자 양호범이 빤히 쳐다본다. 어젯밤 나갔다 온 걸 알고 있나. 미행이 붙었을까

봐 터미널에서 내려 요리조리 도망 다녔는데.

괜히 켕겨서 시선을 피하고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약 발라 줄게.”

어쩐 일인지 순순히 손을 내준다. 손바닥이 찢어져 살이 벌어진 것을 보자 저절로 인상

이 써졌다. 병원 가서 꿰매야 하는 거 아닌가. 아프지 않으냐고 묻는데도 대답이 없다. 소

독약을 바르는데 찍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독한 새끼.

“괜찮아?”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양호범이 무서울 때가 지금처럼 입을 처닫고 속을 알 수 없을 때

다. 불안함을 감추고 거즈를 반창고로 고정하는데 양호범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

쉰다. 아픈가 싶어 보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뻗쳐 귀여웠다.

이 덩치 큰 짐승 같은 놈이 귀엽게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미친 거 아닐까.

우선 손을 놓아준 뒤 너스레를 떨었다.

“됐어. 완벽해.”

약을 상자에 정리해 들고 일어서는데 양호범이 입을 연다.

“어제 새벽에 어디 다녀왔어요?”

하마터면 구급함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손에 힘이 들어간

다.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나 … .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납골당까

지 따라온 사람은 없었다. 수현은 구급함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엄마 보러… 납골당에 다녀왔어.”

호범이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세운다.

“그 시간에?”

“아버지가 알려 줬거든.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거기 있더라.”

“…….”

“믿지 못하겠으면 확인해도 좋아. 연락처 알려 줄게. 거기에 CCTV 도 있고,”

“난,”

호범이 말을 하려다 멈췄다. 수현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난, 뭐?”

“도망쳤다고 생각했어요.”

수현은 긴장을 지우고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었지. 하지만

어디를 가든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그게 진짜 다이아몬드인지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만 제발….

수현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움직였다.

양호범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예쁘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했잖아. 너하고 난 한배를 탔다고.”

호범이 손을 뻗어 수현의 얼굴을 감싸 쥔다. 수현은 거기에 제 뺨을 문질렀다. 눈을 천천

히 치켜뜨며 양호범을 지그시 바라봤다. 믿어 달라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뺨을 만지던

손이 이제 귀를 만지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준다.

“머리가 많이 자랐어요. 다듬어야겠다.”

다정한 듯 어딘가 싸한 말투다. 더 파악할 새도 없이 호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씻

으러 갈게요. 그가 욕실로 사라지자 혼자 남은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부

여잡았다. 어우, 잘했다. 잘 넘어갔어. 개새끼, 아닌 척하면서 미행을 붙이냐. 치사한 새

끼.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가 사라진 욕실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한편으로는 찜찜

했다. 사실대로 털어놨어야 했나. 근데 뭐라고 얘기해? 네 할아버지 물건 내가 가지고 있

는데 팔아치울 거라고? 아니면 반 나눠 준다고 설득해 볼까.

너무나도 멍청하고 어이없는 상상이다. 그때 띠링, 메시지가 도착한다. 아침부터 누굴

까.

처음엔 스팸이라고 생각해 무시하려 했는데 이어서 사진 한 장이 뜬다. 뭐야?

의아하게 보던 수현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찍은 게 아니었지만 서민준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배경은 분명….

양 회장의 자택이었다.
62 화

대체… 어째서… 누가… 왜?

의문은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수현은 침대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손톱을 딱, 딱, 소리가 나게 물어뜯었다. 서민준은 왜 늦은 시간 양 회장의 집을 방문

했을까. 그곳에서 어떤 얘기를 나눈 걸까. 양호범은 알고 있을까.

혹시 양 회장과 서민준이 손을 잡고, 나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로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이 사진을 보낸 걸까. 김우진? 양호범? 무엇 때문에? 위험을 알리려

고? 아니면 나를 가지고 놀기 위해? 김우진이면 모르지만 양호범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너무 과민하게 여기지 말자. 연말

이라 인사차 들렀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양 회장과 서민준이 서로 왕래할 정도로 돈독

한 사이였던가. 결국 다시 원점이다.

벽에 걸어 둔 시계의 초침 소리만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려온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

내는데 신경을 쓴 탓인지 갑자기 위가 쪼이며 통증이 생겨난다. 수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서랍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나서 전에 병원에서 타 온 위장약을 꺼내 짜 먹

었다.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난 뒤 휴대전화를 집었다 . 이렇게 속앓이하지 말고 차라리

직접 물어서 확인하자. 누구한테 먼저 걸지. 오랜 망설임 끝에 김우진의 연락처를 눌렀

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마 뒤 그가 전화를 받는다. 전과 다를 것 없는 목소리다.

[형, 어쩐 일이에요?]
태연한 말투에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했어…. 잘 지내나 궁금해서….”

[어디예요?]

“일 끝나고 숙소에 있지.”

[아직도…?]

아직도라니, 무슨 뜻이야.

[사진 보고 바로 도망갔을 줄 알았는데….]

아, 허공을 응시하던 수현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감쌌다 . 한 가닥 희망마저 뚝 끊

기는 느낌이다. 양호범이 아니었구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진다.

“그거… 네가 보낸 거였어?”

[네….]

“왜?”

[어제 서 검사가 이곳에 왔어요. 저는 그 자리에 없었고 할아버지하고 대화를 나누고 돌

아갔는데 무슨 얘길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요. 다만….]

우진은 말을 멈췄다. 수현은 조용히 기다렸고 침묵하던 우진이 말을 이어갔다.

[ 아침에 응접실에서 할아버지하고 최 비서님하고 말하는 걸 얼핏 들었는데 … . 다 잘된

것 같다고 … 서 검사가 우리 사람이 되면 나쁠 것 없다고 하셨어요 … . 그리고 마지막

에… 백수현만 잘 처리하면 문제 될 것 없다는 말도… 하셨고요.]

수현은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CCTV 영상 캡처해서 형에게 보낸 거예요….]

방금 약을 먹었음에도 속이 메슥거린다. 수현은 명치를 손으로 움켜쥔 채 우진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혹시… 양호범도… 거기 있었어?”

[네….]

“걔는… 뭐라고 했는데?”

김우진은 침묵했고, 수현은 초조해졌다.


“우진아.”

[동의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형… ? 괜찮아요? 라고 묻는 김우진의 목소

리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수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일이 이렇게 벌

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양 회장이 이용하고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

만, 그게 서민준과 손을 잡는 결과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 절망감과 배신감에 흰자위가

점점 붉어진다.

[형….]

“응….”

[지금이라도 도망가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도울게요….]

하, 하하. 웃음이 난다. 그 말을 하는 김우진에게 고마우면서도 이것마저도 이젠 의심이

들려고 한다. 김우진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를 좋아해서? 혹 다른 이유가

있다 해도 솔직하게 말해 줄 녀석이 아니었다.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정면에 있는 옷장을 응시했다 . 돈과 보석. 저걸 당장 처분하

여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쉽게 팔아치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 도망친

다고 해도 금방 잡힐 게 분명했다. 지금 나에겐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진아. 다시 연락할게. 알려 줘서 고마워.”

[언제든 전화 줘요. 기다릴게요.]

바보 같은 얘기다. 그도 양 회장의 손주다. 설령 진심이라고 해도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은

가. 통화를 마치고 나니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 양호범이 정말 그러겠다고 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의 눈빛에서 다른 감정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애정은

아니었다.

양호범에게 연락해 진실을 확인할까. 우습게도 두려웠다. 어제까지 보석을 들고 도망칠

까 고민했으면서 막상 양호범이 저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난다.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또한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방금 김우진과의 통화도 도청당한 건 아닐

까. 이젠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그때 예상치도 못하게 매니저가 들어온다.

수현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왜 벌써 와요?”

“차에 뭘 두고 왔는데, 키가 없어.”

“아….”

매니저는 수현을 힐긋 봤다.

“얼굴이 또 왜 그래? 일찍 퇴근했다더니 어디 아파?”

“아니에요….”

그러다 그는 수현이 짜 먹고 버린 위장약을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고 혀를 찼다. 아이고.

병원 가. 속이 계속 안 좋은 거야? 수현은 옅게 웃었다. 그러다 매니저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전화를 발견하고는 그를 불렀다.

“매니저님.”

키를 찾던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핀잔을 줬다.

“웬 님? 형이라고 불러, 인마.”

“형. 휴대전화 빌려주실 수 있어요? 통화할 데가 있는데.”

매니저는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고 패턴을 풀고 수현에게 건네준다. 수현은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매니저의 관심은 온통 차 키에 쏠려 있었다 . 외워

뒀던 숫자를 누르자 잠시 뒤 신호가 가기 시작한다. 이어서 수화기 너머에서 거칠고 쉰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형님. 저 백수현입니다.”

씨발. 이게 누구야. 어이없다는 듯 웃는 김태신의 반응에 수현은 침착하게 다음 말을 이

어갔다.

“ 단둘이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만납시다.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혼자 나오세

요.”

[이건 또 웬 개수작이냐? 양호범이 시켰어?]


“그런 거 아니에요. 나오시면 알아요.”

김태신은 말이 없었다. 며칠 전 양호범에게 얻어터졌으니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

수현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나오세요. 장담하는데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

호범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술 때문에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앞에 앉아 있던 박태준과 룸미러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

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번엔 창밖을 내다봤다. 일렬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눈에 띈다. 담배를 하나 태운 뒤

박태준을 불렀다.

“기다려. 잠깐이면 돼.”

박태준이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호범은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따라 걸었고 지하

1 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이 열리고 카지노 앞을 지나가는데 직원

몇 명이 알아보고 황급히 인사를 건넨다. 그들을 지나쳐 기숙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

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유독 조용하다. 지금쯤이면 주간 근무자들이 퇴근하여 쉬고 있을 시

간이다. 천천히 걸어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문 옆에 근무자의 이름이 시선을 잡아끈

다.

이윤철, 백수현.
이윤철은 야간 근무였고 안에는 백수현 혼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을 노려보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렸다. 하지만 차마 두드리지 못했다. 씨발.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이곳에

뭐 하러 왔을까.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남들 눈엔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 영감의 뜻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그

러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게 맞다. 맞는데…. 하,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어금

니를 질끈 물었다. 마음을 잡고 돌아서던 그때, 백수현이 앞에 서 있다.

호범은 한쪽 눈썹을 삐죽 치켜들었고, 백수현도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스토커처럼 왜 거기 서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묻는데 왜 안심이 되는 걸까 . 호범은 피식 웃다가 백수현 양손

에 가득 들린 쇼핑백을 발견했다.

“어디 다녀와요?”

수현은 손에 쥔 그것을 들어 호범에게 확인시켰다.

“쇼핑.”

“이 늦은 시간에?”

“물론 아까 끝났지. 택시가 안 잡혀서 한참 기다렸어.”

더 물을 것도 없이 백수현이 카드 키로 문을 연다 . 호범은 그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외투를 벗어 한쪽에 걸어 뒀다. 찬 바람으로 인해

빨개진 귀와 코끝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테이블 앞에 서 있는 호범에게

로 다가왔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야?”

말이 없자 가까이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양 사장, 술 마셨어?”

“조금.”

“조금은 무슨.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러더니 아침에 치료한 호범의 손을 확인했다.

“너야말로 알코올 중독 아니야? 술 마시면 상처 덧나는 거 알지?”


핀잔을 놓으면서도 쇼핑백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호범에게 건네준다 . 호범은 그것을 받

지 않고 보기만 했다.

“뭐예요?”

“선물. 낼모레가 크리스마스잖아.”

호범은 어이가 없었다. 참 속 편하다. 당장 자기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선물이

나 사러 갔다 오다니. 이러니까 예쁘기만 한 병신이라고 하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

는데 백수현이 헤헤, 웃으며 선물을 들이민다.

“ 어쨌든 네 덕분에 빚도 갚았고, 돈도 많이 받았는데 … . 모른 척 넘어가기가 그렇잖아.

한번 열어 봐.”

호범이 무심한 얼굴로 포장을 벗겨 내고 상자를 열었다. 버건디 색상의 목도리가 예쁘게

접혀 있다. 꺼내어 살피니 백수현이 옆으로 와서 조잘댄다.

“어때? 너는 검은 정장 많이 입으니까, 포인트로 색이 있는 목도리도 괜찮겠다 싶었어.”

“…….”

“예쁘지? 마음에 들어?”

호범의 시선이 뒤에 있던 나머지 쇼핑백으로 넘어간다.

“저건 누구 건데?”

그러자 수현이 해맑게 설명했다.

“매니저 형.”

얼핏 봐도 상자가 여러 개다. 호범은 마음에 안 드는 투로 되물었다. 그럼 저건?

“저건 우진이. 아, 김우영 씨 것도 하나 샀어.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자주 보는 사이니까 쏙

빼놓기가 그렇더라고. 이참에 신세 진 친구들 것도 샀고, 또….”

호범의 얼굴에 점차 짜증이 배어났다.

“설마 저게 다 목도리?”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범이 들고 있던 목도리를 상자에 홱 던지듯 놓고 뚜껑을 대충

덮었다. 수현이 왜 그러냐고 색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었고 , 호범은 어이가 없어서 대

답했다.
“씨발. 무슨 개업식 수건 돌리는 것도 아니고.”

“야… 그래도 네 거가 제일 비싼 거야.”

하, 그걸 말이라고. 인상을 쓰자 수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상자를 도로 가져가려 했다.

됐어. 싫으면 마. 다른 사람 주면 돼. 호범은 그것을 빼앗아 옆으로 대충 치웠다.

“됐어요. 선물로 준 거니까 받을게.”

수현은 줘도 지랄이라고 투덜대더니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유통기한을 확인

하고 건네주는데 후식으로 나오는 요구르트다. 대접할 건 없고, 이거라도 마셔. 손도 대

지 않고 있으니 테이블에 깍지를 낀 채 호범을 유심히 본다 . 오늘따라 유독 더 생글생글

웃는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호범은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말간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어 보인다 . 모

든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배신감에 치를 떨까. 아니면 살려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까. 그것도 아니면 이 꼴통이….

“너 무슨 걱정 있어?”

누가 누구더러 걱정이 있느냐고 묻는 건지. 사실 얼굴만 보면 지금 백수현 낯빛도 영 별

로다. 하긴 밤새 제천까지 가서 싸돌아다녔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호범은 시치미를 떼

고 물었다.

“그래 보여요?”

“응. 조금.”

호범은 턱이 딱딱해질 정도로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걱정이 있긴 한데, 곧 정리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수현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 다행이네. 호범은 수현에게 받은 선물을

챙겨 일어섰고, 수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

“늦었는데 가야죠. 왜, 나하고 다른 거 하고 싶어요?”

고민할 것도 없이 머리를 흔들자 호범이 웃는다.


“선물 고마워요.”

호범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 황급히 일어나 쫓아가던 수현은 그가 멈춰서는

바람에 어깨에 얼굴을 부딪쳤다. 아, 인상을 쓰니 양호범이 돌아본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문 잘 잠그고 자요.”

뜬금없는 말에 수현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내가 애야?”

“밤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간다. 잘 가. 라고 인사를 하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양호범의 뒷모습을 보다 수현은 한숨을 내쉰 뒤

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양호범이 돌아오지 않을까.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

지 않았다. 수현은 체념한 표정으로 침대로 가 매트리스 아래에서 구형 휴대전화를 꺼냈

다. 그것을 켜고 김태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비명과 신음이 겹쳐서 들

려왔다.

[어이, 백수현.]

아까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 가식적인 애정이 잔뜩 담겨 있다.

“찾아냈어요?”

[그래. 네 말대로 쥐새끼가 있더군. 그것도 여러 마리. 씨발. 하하.]

웃는 소리가 섬뜩하다. 야, 거기 말고, 이쪽 자르라고 병신 새끼야. 톱질 하나 제대로 못

해?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프락치를 심어 뒀다는 양호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을.

“제가 부탁드린 건요…?”

수현은 초조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고 다이아몬드를 확인했다. 백화점은 핑계였고 김태

신을 그곳에서 몰래 만났다. 양호범이 또 미행을 붙였을까,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

람들 속으로 섞여 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김태신을 만났고, 그에게 양호범이 프락치를 심어 뒀다는 것을 알리고 다이아몬

드를 하나 내주며 거래를 제안했다. 그것이 진짜 다이아몬드 인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축하해. 다이아몬드 맞아.]

하,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 이번엔 뒤통수 안 때려요. 형님이 도와주기만 하면 전부 드릴게

요.”

비명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양호범한테 찌르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형님은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확신에 찬 대답에 김태신이 비웃는다.

[무슨 근거로?]

“ 양호범한테 복수하고 싶잖아요. 형님이 가져야 할 것들을 걔가 다 빼앗아갔으니까. 그

래서 약점 잡으려고 저 물고 늘어졌다는 것도 알아요.”

[흠….]

“배신하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믿어 주세요.”

[근데 어쩌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이깟 다이아몬드가 아닌데.]

“그럼요…?”

[네가 보여 준 사진에 재미난 게 찍혔더라.]

그게 뭐지. 수현은 김태신에게 보여 준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에 찍힌 건 다이아몬드, 그리고 낡은 불상이 전부였다.

설마….

[맞아, 불상.]

당혹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자 김태신이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너 모르는구나?]

“뭘요…?”

김태신은 대답이 없다.


전화가 끊겼나 확인하는데 김태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이런 멍청이.]

수현은 서둘러 불상을 꺼내 눈으로 확인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

기였고 군데군데 색이 벗겨져 있었다. 사실 이걸 유골함에서 봤을 때 중요한 물건이라기

보단 아버지가 엄마의 안식을 위해 넣어 둔 게 아닐까, 라는 생각했었다.

“이거… 비싼 겁니까?”

이번에도 말이 없다. 아니, 말이 없어도 감으로 알겠다. 보물은 따로 있었구나. 혼란스러

운 표정으로 불상을 쳐다보는데 김태신이 속내를 알아채고 한마디 한다.

[꿈 깨. 그건 네가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내놓자마자 양 회장이 찾아낼걸.]

“…….”

수현은 불상을 힘주어 꽉 잡았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진 물건이라는 건가. 백광무 이

인간은 잘도 이런 걸 훔쳤구나. 애초에 그 인간이 이걸 훔치지 않았다면, 양 회장이 내 존

재를 알 수 없었을 테고 그럼 이곳까지 올 일도 없었다 . 이를 물고 노려보는데 김태신이

수현의 이름을 힘주어 부른다. 마치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옭아매려는 사람처럼.

[백수현.]

“…….”

[그것만 넘겨. 그러면,]

그는 한 박자 쉬고 다음 말을 이었다.

[무사히 외국으로 보내 줄게. 네가 원하는 나라 어디든.]


63 화

“어디든?”

[그래. 원하는 나라 어디든.]

시선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탁상 달력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서 날짜를 확인하던 수현은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왕이면 새로운 곳에 가서 새 마음으로 출발

을 하고 싶다.

“최대한 빨리 가능해요?”

김태신은 잠시 기다리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 한 명인데 언제 가능하

냐. 최대한 빨리 내보내 달라. 중요한 고객이다. 자신이 책임지겠다. 한참을 통화가 이어

지더니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틀 뒤. 어때?]

놀라서 눈이 커졌다.

“그렇게나 빨리요?”

[왜. 당장 가야 할 것처럼 굴더니.]

대답이 없자 김태신이 웃는다.

[백수현. 짱구 굴리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

“그럼 배 타고 어디로 가는 건데요?”

[중국으로 넘어간 다음에, 거기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거야. 우선 사진부터 찍어 보내.]

“사진은… 왜요?”

[새꺄, 여권은 있어야지. 넌 외국도 안 가 봤어?]


가 봤을 리가 없잖아. 제주도도 가 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그런 걸 김태신에게 말해 줄

이유는 없었다. 김태신은 정확한 약속 장소와 시간은 내일까지 문자로 알려 준다고 했

다. 파리 떼 꼬이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그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뒤 수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 온몸에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폴더

폰을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 놓고 일어서는데 명치가 또 뒤틀린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

었다. 종일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아무것도 먹질 못했더니 구역질까지 올라왔다.

“젠장….”

냉장고를 뒤져 위를 좀 진정시킬 음식이 뭐가 있을까 찾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

다. 이 시간에 누구지. 매니저라면 노크를 하고 찾아올 리가 없는데. 혹시 김태신? 경계

하며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누구세요? 조심스럽게 묻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리팀에서 왔는데요.]

수현이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내다봤다. 조리복을 입은 젊은 직원 하나가 쇼핑백을 들

고 서 있었다. 전에도 몇 번 죽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줄 때마다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

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안심한 뒤 문을 더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직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내밀었고 수현은 그것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양배추 죽이에요.”

“네?”

“대표님이 주방장님한테 직접 부탁하셨대요. 위염에 좋은 죽 만들어서 백수현 씨 갖다주

라고요.”

직원은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하더니 돌아서서 간다 .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호텔 직원

중 수현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대표 지인이라 편하게 놀

고 먹으며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인질로 잡힌 거나 마찬가진데.


문을 닫은 수현은 쇼핑백에서 죽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놨다. 양호범이 이걸 왜 가져다주

라고 했을까. 그러다 문득 쓰레기통에 시선이 옮겨 갔다. 먹고 버린 위장약 껍질이 눈에

띄었다. 설마 아까 왔을 때 봤나.

확실히 양호범은 생긴 것과 다르게 세심한 부분이 있었다.

[양호범도… 거기 있었어?]

[네….]

[걔는… 뭐라고 했는데?]

[동의했다고 알고 있어요.]

나를 없애는 데 동의했다면서 죽은 왜 보낸 거야 . 죽을 먹고 죽을 준비나 하라는 일종의

메시지 같은 건가. 식욕이 싹 사라진다. 여기다 뭘 탄 거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뚜껑을 여는데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 때문에 침이 먼저 고인다.

아, 모르겠다. 일단 먹자. 먹고 죽으면 때깔은 좋다잖아. 수저를 들고 한 입 뜨는데 주방

장이 신경을 쓴 건지 아니면 종일 굶은 탓인지 기가 막히게 맛이 좋다. 씁쓸한 웃음이 흘

러나왔다. 왜 이런 배려를 해서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

이틀. 김태신과 약속한 날까지 이틀이다.

하필 딱 크리스마스네.

적어도 양호범한테 잊지 못할 선물은 줄 수 있겠다.

❖❖❖

“김태신한테 심어 놓은 친구들 연락이 안 됩니다.”

“셋 다?”
“예.”

호범은 손에 쥔 은색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달칵, 탁, 달칵, 탁, 일정

하게 들리는 소리가 어느 순간 멈췄다. 김태신에게 심어 둔 놈들 셋이 전부 연락 두절이

다. 오늘따라 유독 거슬리던 백수현의 행동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호범의 시선이 테

이블 위에 있던 쇼핑백에 가서 닿았다. 백수현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오늘 김태신 동선 따 봐. 백수현이 갔던 백화점 CCTV 확인해 보고, 둘이 만났는지 알아

봐.”

“예.”

“백수현한테 애들 몇 명 붙였지?”

“지금은 둘입니다.”

둘이라…. 호범은 앞에 있는 술병의 뚜껑을 비틀어 땄다. 얼음이 없는 잔에 술을 채운 뒤

그것을 들고 박태준을 바라봤다.

“인원 늘려. 도망가는 데는 선수니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호범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해. 늦었다.”

“예, 쉬십시오. 대표님.”

호범은 안쪽으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박태준를 불렀다.

“태준아.”

자리를 뜨려던 박태준이 멈춰서 돌아봤다.

호범은 한참 말이 없었고 박태준은 그가 말을 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윤 실장 모르게 외국으로 사람 하나만 내보내자.”

태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윤 실장은 저와 더불어 양호범이 수족처럼 부리는 사

람이다. 박태준이 주로 외부의 일을 처리한다면 회사 내부의 일은 윤 실장이 관여했다.

윤 실장은 예전엔 양 회장의 사람이었다. 손주를 위해 자기 사람을 내준 것처럼 보였으

나, 덕분에 양 회장의 감시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누굽니까.”

호범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백수현.”

태준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반쯤 벌리다 다물었다 . 그 역시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은 알고 있었다. 엊그제 본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고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도. 그

래서 딴에는 백수현을 언제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릴까 기다리는 중이었다 . 그런데 처리

가 아니라 외국으로 내보내라니. 한마디로 도피를 시키겠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태준은 어떤 경우에도 호범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호범은 웃으며 그만 가도 좋다고 눈짓을 했다. 박태준이 인사를 하고 사라진 뒤 그는 술

잔을 쥔 채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수납장을 옆으로 밀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나타난다. 방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호범은 나무 의자를 끌어와 가운데 앉았다. 한쪽에 놓여 있는 낡은 카메라가 시선을 끈

다. 사고 당일 자동차는 절벽 아래로 굴러 불타 버렸고, 부모님은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의 카메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호범의 품으로 돌아왔다.

먹먹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외면했다 . 아버진 어머니와 결혼 후 시골에서

자리를 잡았고 사진 대신 농사와 닭을 키우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갔다 . 그러다 가

끔 쉬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 노인들의 일상을 담아 주곤 했었다.

그래서 이곳엔 유독 노인들의 사진이 많았다. 옛 기억을 지우고 호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얼마 전 백수현과 섹스를 나누던 곳이다. 그날 개처럼

붙어먹은 걸 떠올리니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며 목이 타들어 간다.

양 회장의 말을 거스를 순 없다. 죽여야 하는 이유도 충분하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죽이기 아깝다. 죽이고 싶지 않다. 온전한 모습으로 곁에 더 두고 싶다.

그 예쁜 몸뚱이하고 얼굴이 썩어 없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

“씨발. 미쳤지, 내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걸린 사진은 누군가의

그림자를 찍은 것이었다. 제목도 설명도 없었지만 호범은 그게 죽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다른 것에 비해 어딘가 어설픈 사진은 분명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는데 요리나 살림 솜씨는 훌륭했으나 사진에는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엉성한 사진과는 달리 아버지에 대한 애정만큼은 크게 느껴졌다.

걸려 있던 사진을 내리자 이번엔 금고가 하나 나타난다. 호범은 지문을 찍고 금고의 비

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안쪽에 메모리 칩과 USB 가 수십 개다. 대부분 누군가의 약

점이 담긴 것들이었다. 거기엔 낯이 익은 십자가 모형의 목걸이가 있었다. 호범은 그것

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리고 빤히 내려다봤다.

갑자기 튀어나와 이 작은 목걸이를 낚아채던 백수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 본가에

서 다시 만났을 때 짜릿하던 희열도. 목걸이를 분리하자 USB 가 나온다. 이레건설 비자

금 파일로 서민준의 장인인 김현식과 연관된 증거이기도 했다.

양 회장은 이것을 서민준에게 넘겨주길 원했지만, 호범은 생각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 볼까.”

짜증 나게 이놈 저놈 다 나눠 주긴 했지만.

금고 문을 닫고 사진을 원위치에 걸어 뒀다.

그리고는 사진 속 아버지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

잘하면 나도, 당신 꼴 나게 생겼어요.


64 화

하, 오늘도 역시나. 잔뜩 어지럽혀진 펜트하우스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 한

편으로는 이 짓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 걱정했던 것보다 청소가 적

성에 잘 맞아 그런가.

침실로 가는데 반투명한 창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댄다 . 짧은 순간이지만 양호범

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데 김우영이 나타난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머리는 부스스했

고, 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채였다.

“좋은 아침.”

그는 가볍게 인사하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냉장고로 걸어갔다. 다행히 오늘은 김우영 외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청소를 위해 침대 시트를 잡아당기는데 바닥에 툭,

무언가 떨어진다. 늘 있는 일이라 아무 거리낌 없이 줍던 수현은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던졌다.

“아, 씨발! 깜짝이야.”

던져 놓고 자세히 보니 긴 웨이브의 갈색 가발이었다 . 진짜 사람 머리카락인 줄 알고 식

겁했네.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김우영이 뒤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마음에 들어? 범이 취향은 아닌데.”

그와 거리를 두고 떨어진 다음 바닥에 있는 가발을 가리켰다.

“버릴 거죠?”

“갖고 싶으면 가져. 잘 어울리겠다.”

“네, 버릴게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벗겨 낸 시트와 함께 가발을 카트 쪽으로 옮겼다. 그러고 나서 어젯

밤 백화점에서 산 선물을 들고 돌아왔다. 상자를 내밀자 김우영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야?”

“내일이 크리스마스잖아요. 하나 샀어요.”

“내 선물을?”

김우영은 의외로 좋아하며 뭘 이런 걸 샀느냐고 상자를 열어 본다 . 그의 것은 회색 목도

리였는데 꺼내 펼치더니 소리까지 내며 감탄을 했다 . 양호범과는 대조적인 반응이라 조

금 뿌듯했다.

“이야. 세상에.”

“마음에 드세요?”

“아니. 별로. 완전 구려.”

표정을 보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수현은 입을 삐죽였다. 기껏 백화점에서 샀더

니. 이 집안 인간들은 선물 줘도 고마운 줄 몰라 . 갖기 싫으면 달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그

건 또 아닌지 금세 가져가서 목에 둘러 본다.

“어때? 어울려?”

라고 묻는데 수현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 생각보다 김우영은 회색이 안 어울리는구

나. 팬티만 입어 그렇다고 여기기엔 얼굴빛하고 목도리 색상이 전혀 맞질 않았다 . 이 정

도면 내가 안목이 더럽게 없는 건 아닐까. 하긴, 남자 보는 눈이 똥인데 물건 고르는 안목

이라고 있겠어.

“어, 어울려요.”

“거짓말. 눈빛이 막 흔들리잖아.”

“진짠데….”

“이거 범이가 알면 질투하는 거 아니야? 오해받는 건 싫은데.”

“양 사장도 줬어요.”

김우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그래? 어떤 거?”
“목도리요….”

아, 김우영이 탄식을 내뱉더니 혀를 차고 한마디 한다.

“무슨 개업식 떡도 아니고.”

이쯤 되니 두 사람이 사촌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어쩜 저렇게 밉살스럽게 말하는 것도

똑같을까. 적어도 김우진은 그러진 않겠지. 셋 중에 그나마 착하잖아. 물론 선물은 직접

전해 주지 못하겠지만….

“범이건 무슨 색이야?”

“붉은색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우영이 오만상을 찌푸린다.

“왜 그랬어. 걔 붉은색 존나 싫어하는데.”

“그래요…?”

목도리 색상에 관해서는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는데 . 이놈 저놈 다 준다고 하니 그게 불

만이었지.

“어쨌든 잘 쓸게. 고마워. 아, 그리고 오늘 청소 3 시까지 끝낼 수 있을까? 이브 파티를 여

기서 하기로 했는데 다섯 시부터 손님이 올 거거든. 세팅을 미리 해 놔야 할 것 같아서.”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수현도 준비할 게 많았으니까.

“네, 그럴게요!”

“자기도 심심하면 놀러 와. 좋은 친구들 많아. 소개해 줄게.”

“괜찮아요. 사양할래요.”

“아니면 나도 선물 하나 줄까? 기다려 봐.”

김우영이 속옷 차림으로 외투를 집어 든다. 수현은 그가 무엇을 꺼낼지를 예상했다. 아

니나 달라 손에 약이 딸려 나온다. 이리 가까이. 손짓하길래 갔더니 봉투를 내민다. 연노

랑 빛 약이 여러 알 들어 있다.

“이거면 어지간한 놈도 한 방에 재울 수 있어.”

수현은 그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저번에도 그랬으면서.

“소 말고, 호랑이도.”
김우영이 속삭이더니 씩 웃고 나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속을 알 수

가 없단 말이지. 수현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약 봉투를 뒷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

나중에 급히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쓰레기봉투를 끌고 거실로 이동하는데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들어온다.

양호범이다.

[모레 저녁에 시간 돼요?]

수현은 괜히 켕기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하필 왜 모레야. 안 된다고 하면 의심할지도

몰라 우선은 답장부터 했다.

[몇 시에?]

[저녁 8 시. 호텔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아침에 김태신에게 연락이 왔었다. 내일 밤 11 시까지 궁평항으로 오라고. 택시를 타고

항 근처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었다 . 근데 왜 모레 저녁이지. 어디 멀리

출장이라도 간 건가. 수현은 키패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알았어.]

답이 없다. 수현은 고민하다 글을 적었다.

[근데 나 오늘 서민준 잠깐 만나고 와도 될까?]

메시지를 보내고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전화가 울린다. 흠칫 놀라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서민준을 왜 만나는데.]

목소리가 살벌하다.

수현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 돌려주게. 계속 가지고 있으니 찜찜하잖아.”

[나한테 줘요. 내가 돌려줄 테니까.]

“됐어. 오늘 가야 해. 크리스마스 선물 줄 것도 있고.”

[설마 그 새끼 목도리도 샀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수현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 냈다 . 농담으로라도 그렇다고

하면 당장 쫓아올 기세다. 사실 서민준 얘기를 꺼내며 기대한 것도 있었다 . 양호범이 진

실을 말해 주지 않을까. 일이 틀어졌노라고. 이제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도리 대신 겁 좀 주려고. 집에 찾아가 볼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수현은 김우영이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낮추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 그게 왜 쓸데없는 짓이야. 나는 요즘 열이 받아서 잠도 안 와. 이렇게라도 해야 분이 풀

릴 거 같다니까. 서민준은 날 자빠트릴 생각이 없고, 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질 않

으니 별수 없잖아. 내 말이 틀려?”

후, 양호범의 빡친 숨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의 주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든

다. 대표님, 시간 됐습니다. 겹쳐서 안내 방송 같은 것도 나온다. 항공 어쩌고 하는. 수화

기 너머 소리에 귀를 바싹 기울이는데 호범이 수현을 부른다.

[아무튼 호텔에 꼼짝하지 말고 있어요. 다시 연락할게요.]

전화가 끊겼고, 수현은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선베드에 앉아 텅 빈 수영장을 응시했다.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해? 끝내 묻지 못했다. 믿음이 깊었다면 확인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서로에게 믿음이란 게 없었으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더는 미련을 갖지 말자.

❖❖❖

[숙소에 있어요?]
“응.”

씻고 나와 TV 를 시청하는데 양호범에게 또다시 연락이 왔다 . 서민준을 만나러 갔나 확

인하기 위한 거 같았다. 수현은 말해 주고 싶었다. 너희 둘이 짜고 나를 없애려는 걸 다

알고 있다고. 이번엔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거라고.

“너는 어딘데.”

[호텔에 들어왔어요.]

“언제 오는데?”

[모레 아침.]

모레 아침이면 수현은 떠나고 없을 거다. 수현은 태연하게 그러냐며, 올 때 선물이나 사

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속은 어때요? 괜찮아요?]

“어. 덕분에. 죽 고마웠어.”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수현은 점퍼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호텔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근처에 있던 보안 직원이 힐긋 쳐다본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때마침 눈

이 내린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게 내리는 눈은 꼭 그림 속 풍경 같았다 . 자신의 처지

도 잠시 잊고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봤다.

“여기 지금 눈 온다….”

[많이 와요?]

“응. 엄청 오는데?”

눈을 구경하는데 저 멀리 연인 둘이 신나서 뛰어가다 눈길에 자빠진다. 수현은 술 먹고

호범에게 행패를 부리던 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무심코 손목시계

를 봤다. 11 시 59 분이다.

[왜 말이 없어요?]

“12 시가 되길 기다리고 있어. 너한테 성탄절 인사하려고.”

[싱겁긴.]

“홍콩에 내가 준 목도리하고 갔어?”


[아니요.]

“너무 했다. 기껏 사 준 걸.”

[나한테만 준 거 아니잖아.]

“알았어. 나중에는 너한테만 줄게. 됐냐?”

둘 다 본심을 숨긴 채 다소 낯간지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통화하는 내내 양호범이 속으

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데 반대편 도로에서 낯선 차량

이 서 있는 게 눈에 띈다. 선팅이 짙어 자세히 보진 못했으나 누군가 앉아 수현을 쳐다보

는 느낌이었다.

수현은 못 본 척 시계를 확인했다. 12 시가 막 넘어가는 중이다.

“양 사장.”

[응.]

“메리 크리스마스.”

돌아오는 인사가 없다. 수현은 일부러 서운한 투로 이야기했다.

“너는 왜 안 해?”

[만나서 할게요. 줄 선물도 있고.]

선물이란 말에 수현은 담배를 문 채 미간을 찡그렸다. 선물이 뭐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라

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거라고 한다.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연인 사

이라면 달콤하게 들릴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존나 무섭다.

수현은 담배를 비벼 끈 뒤 입가에 애써 미소를 만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기대된다. 빨리 받고 싶어 죽겠어.”
65 화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수현은 손에 쥔 불상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

다. 이 작은 불상이 대체 뭐길래. 김태신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 반출된

걸 일본의 수집가가 경매에 내놨고, 그걸 양 회장이 사들였다는 거다. 어마어마한 가격

으로.

정확히 얼마인지 말을 해 주지 않았으나 다이아몬드를 과감하게 포기한 걸 보면 적어도

수십억은 훌쩍 넘는단 소리다. 수현은 더플백 두 개를 놓고 하나에는 불상과 다이아몬

드, 현금과 채권을, 나머지 하나에는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다음으로는 빠트린 게 없나 숙소 안을 둘러봤다. 두 달이 넘게 머문 곳이라 정이 들었는

지 막상 떠나려니 조금 서운하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씻어야 했던 옥탑방에 비하면 이곳

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같이 지내던 매니저 이윤철 또한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 친형처럼 대해 줬고 늘 친절

했다. 수현은 백화점에서 산 매니저의 목도리를 그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책상에 앉아

짧게 편지를 적었다.

[형. 그동안 잘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일이 있어 먼 곳으로 가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지내세요.]

편지를 선물 위에 붙여 놓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당황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씁쓸한 미소가 비집고 흘러나온다. 나의 인간관계

는 늘 이런 식이다.
수현은 폴더폰을 꺼내 김태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신호가 가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받는다.

[어이, 백수현. 벌써 출발한 거야?]

“아니에요. 짐 챙겼어요. 이제 출발하려고요.”

[눈 온다. 서둘러.]

“네….”

[마음 바뀐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요즘 단속이 심해서 오늘 아니면 기회 없단 것만 알아 둬.]

“알아요. 빨리 갈게요.”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수현은 전화를 끊은 뒤 크게 심호흡

했다. 그러고 나서 스마트폰을 꺼내 양호범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전에 뭐 하냐고 묻

는 문자 이후 더는 연락이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것을 주방으로 가져가 전자레인

지에 넣고 돌렸다.

잠시 뒤 스파크가 튀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수현은 망가진 휴대전화를 꺼내 욕실로 가져

가 변기 뚜껑을 열고 그곳에 처넣었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숙소에서

는 흡연이 금지되었으나 당장은 이거라도 없으면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욕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하나 다 태우고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

시간. 궁평항까지는 택시로 1 시간이 넘게 걸린다. 짐도 다 챙겼으니 이제 서둘러 나서기

만 하면 됐다.

❖❖❖
김태신은 차 뒷좌석에 앉은 채 창밖을 내다봤다. 항구 주변은 어둡고 쥐 죽은 듯 조용했

다. 아까부터 내리는 눈 때문에 제법 운치가 있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차의

히터가 뜨거운 바람을 뿜어냈다.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얼굴에서 짜증이 배어 나왔다.

“이 새끼는 11 시에 오랬다고 딱 시간 맞춰 오네. 융통성 없는 새끼.”

앞에 앉아 있던 부하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린다.

“형님 배고프십니까. 뭐라도 사 올까요?”

“됐어, 새꺄. 지금 밥이 넘어가겠냐. 잠시 후면 그 불상이 내 손에 넘어오는데.”

김태신의 눈빛이 비열하게 반짝였다. 양 회장이 도둑맞았다던 수백억짜리 불상을 어떻

게 백수현이 가졌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까지. 그런데 그걸 가져와

서 거래를 제안하다니. 이건 사자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은 꼴 아닌가. 한심하

여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박 선장한테 미리 말했지?”

“예. 배에서 애들 대기 중입니다.”

“버릴 때 적당히 잘라 버리라고 해. 재수 없게 시체라도 발견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걱정 마십시오. 잘게 다져서 버리라고 하겠습니다.”

부하의 말에 김태신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개새끼. 다진다는 표현을 쓰냐. 소름 끼치게.”

“죄송합니다, 형님.”

“아무튼, 신경 써. 이거 잘 끝내야 내 심기가 조금 편해질 것 같으니까.”

“저만 믿으세요.”

부하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친다. 김태신은 픽 웃고 나서 손에 든 백수현의 가짜 여권

을 넘겨 확인했다. 백수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곧 물고기 밥이 될 처

지라는 걸.
이것도 아량을 베푸는 거다. 양호범이 제 조직에 빨대를 꽂아 넣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덕분에 수족 같던 부하 셋을 직접 처리했다. 양호범이 놈들을 어떻

게 구슬렸는지 모르나 그들은 원래 김태신의 사람이었다.

너도 당해 봐. 네 사람을 빼앗기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열받을 양호범을 떠올리니 벌써 짜릿해진다.

아니면 바다에 던지기 전 백수현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놈에게 선물로 보낼까.

“형님.”

“응.”

“저기. 옵니다.”

태신은 여권을 덮고 정면을 바라봤다. 휘몰아치는 눈 속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한 손엔

커다란 더플백을 들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야구 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채. 백수

현은 불안한 듯 주변을 연신 살피다 김태신의 차를 발견하고는 멈춰 선다. 행색이 흡사

포식자에게 쫓기는 초식 동물 같다. 태신은 여권을 손바닥 위에 탁, 치고 나서 살벌하게

웃었다.

“가자, 준식아. 우리 호구님 오셨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부하가 우산을 펼친다. 뒤쪽 다른 차량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부하 넷이 더 있었다. 백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서서 이쪽을 보고 있다 .

오라고 손짓을 까닥하니 주변을 한번 살피고서 잰걸음으로 서둘러 다가온다 . 자신의 운

명을 까맣게 모른 채.

❖❖❖
공항을 나온 호범은 같이 출장을 다녀온 윤 실장을 따로 돌려보내고 미리 대기 중이던

다른 차에 올라탔다. 앞자리에는 박태준과 다른 부하가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반쯤

내려 담배를 물고 저 멀리 윤 실장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주시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해야 했는데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다 . 윤

실장 역시 호범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양 회장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데 태준이 태블릿을 하나 뒤로 넘겨준다 . 화면에 사진 하나가

나와 있다. 멀리서 찍은 모습이었고 얼굴을 꽁꽁 가렸지만, 백수현이 분명했다.

“10 분 전에 호텔에서 나와 택시 탔답니다. 저희 애들이 따라붙는 중이고요.”

백수현은 이틀 전 백화점에서 김태신을 만났다. 둘이 각자 다른 층에서 비상구로 들어가

는 장면이 CCTV 에 찍혔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

었다. 호범이 서둘러 귀국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 아침 홍콩에서 박태준에게 연락을 받았다. 김태신이 브로커를 통해 백수현의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고. 김태신은 예전에 부업으로 밀항 알선을 한 적이 있으니 백수현을 밀

항시킬 가능성도 충분했다.

호범은 창문을 닫고 밖을 내다봤다. 이틀 동안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다. 기온이

높고 제설 작업이 되어 있어 도로 상태가 양호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는 내내 박태준은 누군가와 통화했고 실시간으로 백수현의 위치를 보고 받았다 . 그렇

게 1 시간을 넘게 달리니 궁평항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간다 . 기가

찼다. 정말 밀항을 할 작정이었군.

눈빛이 차게 식었다. 기껏 마음을 돌리고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기분 엿 같게 만드는군.

하여튼 이 인간은 사람 빡치게 하는 재주는 도가 텄다니까. 거기다 믿을 사람이 없어서

김태신을 믿어? 애초에 김태신이 백수현을 도울 이유 따윈 없다. 밀항은 핑계고 물고기

밥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씨발. 믿을 놈을 믿어야지.”
갑자기 우스워졌다. 그럼 난 믿을 놈이고? 하긴 백수현한테는 김태신이나 나나 똑같은

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분명 얼마 전까지 도망칠 기미가 없었

는데 무엇 때문에 마음을 바꿨을까. 혹시, 서민준이 본가로 찾아온 걸 알고 있는 걸까.

생각이 많아질수록 짜증이 올라온다. 당장은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가두든가.

아니면 걷지도 못할 만큼 밤새 괴롭혀 주든가. 마침 차가 항구 근처에 도착해 안쪽으로

들어선다. 하얗게 쌓인 눈 너머 어둠 속에서 검은 차 여러 대가 서 있다.

차가 멈추고 태준이 내려 우산을 펼쳐 든다. 호범은 관두라고 손짓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틀 전 백수현에게 선물 받은 붉은색 목도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 걸을 때

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 위에 발자국이 선명해진다.

현장에는 방금 도착한 양호범의 수하들과 김태신 일당이 마주 보고 대치 중이었다. 그리

고 김태신의 앞에 백수현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 자주 입고 다니는 무릎까지 오는 오

버핏 점퍼에 야구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한 손엔 더플백을 들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

군 채.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태신이 먼저 호범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든다 . 어이, 양 대표 왔

네. 나 네 부하하고 얘기 중이었어. 느긋한 그의 태도를 보니 비위가 상한다. 오늘 저 새

끼를 그냥 찢어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백수현부터 조지고 난 후겠지만.

호범의 부하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그들이 재빠르게 흩어져 물러섰고 호범은 백수현의 등 뒤로 걸어갔다.

야, 백수현.

대답이 없다. 화가 나 단번에 거리를 좁혀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백수현이 돌아선다.

아니, 백수현이 아니다.

호범의 표정이 맹수처럼 돌변했다. 가리고 있던 야구 모자를 거칠게 벗겨 내니 낯선 남

자가 당황한 듯 움찔 떤다. 키와 체형이 백수현과 비슷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호

범은 살벌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너 뭐야.”

남자는 어렸고 한눈에 봐도 양아치의 냄새를 폴폴 풍겼다 . 기죽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빡 주고 있었으나 겁먹은 표정까진 숨기지 못했다.

“저… 돈 받고 심부름 온 건데요…. 여기 와서 편지 전해 주면 된다고 해서….”

편지? 의아한 표정으로 김태신을 봤다. 김태신은 이미 봤는지 약이 바싹 오른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남자는 쭈뼛쭈뼛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는데,

두려움 때문인지 손을 덜덜 떤다.

호범은 그것을 낚아채 펼쳤다.

[태신이 형님.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먼저 드린 다이아몬드는 병원비로 쓰셔야 할 것 같

아요. 왜냐하면, 양호범이 곧 형님을 찾아가서 개 패듯 팰 테니까요. 그리고 만약 거기에

양호범이 왔다면 대신 전해 주실래요. 앞으로 너하고는 죽어도 엮이기 싫으니 다시는 찾

지 말라고요. 그럼 건강히 잘 지내세요. (양호범한테는 안부 전해 주실 필요 없어요.)]

하, 씨발. 실소가 터졌다. 용암처럼 끓는 분노를 누르느라 뺨이 파르르 떨리고 가슴이 크

게 부풀었다. 뭐? 죽어도 엮이기 싫어? 다신 찾지 마? 이게 진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갈며 종이를 무참히 구기고 핏발 서린 눈으로 김태신을 노려봤다.

늘 뻔뻔하던 김태신이 난감하게 웃는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당했으니까.”


66 화

“이 근처에서 내려 주시면 돼요.”

“괜찮겠어? 아무것도 없는데.”

“네. 괜찮아요.”

주머니에서 지갑을 열어 현금을 꺼내는데 택시 기사가 불을 켜고 걱정스러운 듯 쳐다본

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 인적이 드문 야산까지 온 게 이상한 모양이다. 혹여 나쁜 마음이

라도 먹을까 걱정됐는지 그가 거스름돈과 함께 비타민 음료를 하나 손에 쥐여 줬다.

“나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하하, 그럴 리가요.”

“그래. 용기 잃지 말고. 요즘 세상에 남자가 여자 되는 게 뭔 흉도 아니고.”

수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네….”

“총각. 아니 아가씨. 기운 내서 열심히 살아. 화이팅.”

감사합니다. 잔돈을 챙기며 백팩을 메고 더플백을 손에 들었다 . 차에서 내리자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난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던 수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어두운 곳에서 차량의 라이트가 켜지며 차에서 누군가 내린다 .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백수현?”

수현은 코까지 가리고 있던 목도리를 아래로 내려 얼굴을 확인시켰다 . 남자가 기가 찬

듯 웃는다.
“뭐냐, 새꺄. 너 수술했냐?”

수현은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으며 일부러 새침하게 웃었다. 청소할 때 굴러다니던 여

성용 가발은 도주하는데 요긴하게 쓰였지만, 오해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다

행인 건 가발이 위화감 없이 꽤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 하긴 이 얼굴이면 뭘 뒤집어씌워

도 괜찮지.

수현은 가발을 벗고 눌려 있던 원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놨다.

“도망치느라 잠깐 쓴 거예요.”

“씨발. 놀래라.”

격한 반응에 수현은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똑같지.”

“재선이 형이 그러는데 형님 엄청 잘나가신다면서요.”

“잘나가긴.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지. 그나저나 넌 빵에서 나와 연락 한 번을 없더니,

이런 일로 전화를 하냐. 착실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착실하게 살려고요. 그래서 형님 도움이 필요해요.”

“하여튼. 여전히 입만 살았어.”

털털하게 웃는 남자는 김영택으로 수현이 소년 교도소에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였다. 수

현은 반반한 얼굴 덕에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짓궂은 놈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때 나서

서 도와준 게 김영택이었다. 그는 마약 밀매 조직의 말단으로 윗대가리의 죄를 모두 뒤

집어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에도 그는 커다란 덩치와 험악한 인상 때문에 도무지 10 대로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또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다.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데 그가 차 쪽을 향해 손짓

하고 곧 누군가 내린다. 머리를 빡빡 민 남자는 검정 클러치 백을 가지고 와 김영택에게

건넸다.

“확인해 봐.”
김영택이 가방을 내민다. 수현은 그것을 받아서 지퍼를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위

조여권이었다. 여권을 펼치자 숙소에서 찍어 보낸 사진이 붙어 있다 . 김태신도 여권을

만들어 뒀을까. 만약 내가 오늘 밤 김태신을 만났다면 그 여권이 저승으로 가는 데 쓰였

을지도 모른다. 수현은 여권을 넣고 차 키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근처에서 삑, 소리와

함께 불이 번쩍인다. 이어서 김영택의 설명이 이어진다.

“트렁크에 번호판 여분으로 넣었고,”

그리고 구형 폴더 폰도 하나 들어 있다. 차도 휴대전화도 대포일 가능성이 컸다.

“ 배는 다음 달 8 일 부산에서 출발해. 미리 연락 갈 거니까 얌전히 지내. 괜히 작별 인사

한답시고 여기저기 전화 걸지 말고.”

“더 빨리 출발하는 건 없어요?”

“없어. 요즘 단속 심해서 그나마 제일 빠른 거야.”

“네….”

“선금은?”

수현은 점퍼 안쪽에 손을 넣고 품에서 채권을 꺼냈다. 전에 양호범에게 몸값으로 10% 미

리 달라고 해서 받아 낸 무기명 채권이었다. 천만 원짜리 채권 열 장을 건네자 김영택이

그걸 부하에게 건네줬고, 그의 부하가 차로 들어간다. 실내등이 켜지고 차에 다른 사람

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아하여 쳐다보니 김영택이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사람 데려왔어. 우리도 확인은 해야지.”

아, 수현은 살짝 긴장했다. 설마 양호범이 위조 채권을 주진 않았겠지. 한참 안에서 작업

이 벌어지는 동안 김영택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밀항까지

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수현은 자세한 설명 대신 아버지가 크게 사고를 쳤다고 둘러댔

다. 상대가 종로의 양 회장이라는 것을 알면, 김영택이 내뺄지도 모르니까.

잠시 뒤 그의 부하가 차에서 나온다.

“형님. 맞습니다.”

속으로 안도하는데 김영택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메모지를 하나 준다.

“부산 갈 때까지 거기서 지내.”


종이에 적힌 주소는 충청북도 제천이었다. 뒤늦게 김영택이 저를 챙겨 주던 이유가 떠오

른다. 아버지와 고향이 같아서였다는 걸.

“조용히 머물긴 괜찮아. 사방이 숲이라 여차하면 도망치기도 쉽고.”

수현은 그것을 돌려줬다. 김영택은 분명 믿음직한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3 년 동안 감

방에서 지켜본 그는 나름의 의리도 있고 ,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 하지

만….

“죄송해요. 지낼 곳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김영택이 웃는다.

“너, 나 못 믿냐?”

“그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사람도 변할 수 있잖아요.”

“다 컸네, 백수현. 질질 짜기만 하는 애새낀 줄 알았더니.”

그 말에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10 년이나 지났어요. 낼모레면 서른입니다.”

“알았다, 인마. 그럼 여기서 찢어지자. 시간 끌어 봐야 피차 좋을 거 없으니까. 도착하면

문자 한 통 남기고.”

“네.”

“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틀어지면 연락 차단할 거야 . 그땐 부산항에 수양횟집이라

고 있어. 거기 가서 박 사장 찾아. 내 이름 대면 도와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가라. 몸조심하고.”

그가 차에 올라탔고 검은 차는 미련 없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수현

은 차 키를 들고 근처에 있는 낡은 승용차로 이동해 시동을 걸었다 . 짐을 실으려 트렁크

를 열었는데 김영택의 말대로 여분의 번호판이 여러 개 더 있다.

트렁크에 가방을 넣고 나서 운전석으로 가 내비게이션에 미리 외워 둔 주소를 입력했다.

목적지까지 3 시간 가까이 걸린다. 잘하면 내일 아침 전엔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출발하기 전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데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인다 . 자

세히 보니 고라니다. 녀석은 불빛에 정신이 팔려 꼼짝도 하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

었다.

순간 양호범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내일 아침 한국에 도착한다 . 혹시 소식을

들었을까. 미리 오진 않았을까. 만약 왔다면 김태신을 만나 어떤 표정을 했을까 . 편지를

조금 순화해서 쓸 걸 그랬나. 그러다 웃음이 났다. 아니겠지. 내가 뭐라고 홍콩에서 여기

까지 날아와. 어이없는 상상이다.

[만나서 할게요. 줄 선물도 있고.]

갑자기 궁금해지네. 선물 뭐였을까. 수현은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정면을 응시했다 . 고

라니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 멍청하긴. 빨리 도망가.

빠아앙- 클랙슨을 길게 울리자 고라니가 놀라 정신을 차리고 숲으로 달아난다.

수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더는.

머릿속에 얽혀 드는 생각들을 지워 내고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

호범은 김태신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벌써 죽여 없애 버렸을 것이다. 놈은 밑

바닥부터 악착같이 올라왔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미친개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싫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살려

둔 것이 후회됐다.

상황이 심각한 걸 알아챘는지 뒤쪽에서 그의 부하들이 더 나타난다. 대치하고 있는 와중

에도 김태신은 신이 난 사람처럼 웃었다. 그의 찢어진 입술이 유독 더 도드라져 보였다.

“양호범. 뒤통수 맞은 기분이 어때? 속 좀 쓰리겠네. 나야 없던 일로 하면 그만이지만.”


“없던 일? 누구 마음대로?”

“그럼 어쩌게. 여기서 한판 뜰까? 좋네, 씨발. 눈도 오는데.”

호범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꺼냈고 전화를 걸었다. 곧 그의 입에서 능숙하게 일본어가

흘러나온다. 실실 웃으며 듣고 있던 김태신의 안색이 굳어졌고 호범은 전화를 김태신에

게 내밀었다.

“바꿔 달래. 네 부인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낚아챈 김태신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 여자의 울음소리

와 함께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툭,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고 김태신은 불시에 허

리춤에서 회칼을 뽑았다. 이 개새끼가.

그의 부하들도 동시에 칼을 뽑았으나 호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분노에 찬 김태

신은 칼과 휴대전화를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 어떻게 알았어?”

“뭘. 너한테 일본인 부인과 아들이 있는 거?”

“닥쳐, 씹새끼야!”

김태신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에 칼을 휘둘렀고 호범은 여유 있게 칼날을 피했다. 그러고

나서 코앞까지 성큼 다가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김태신을 위협적으로 내려다봤

다. 평이한 말투와는 달리 눈빛은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 같았다.

“그러니까 태신아. 왜 사람을 밑바닥까지 보이게 만들어. 응? 내가 네 마누라하고 애새끼

있는 걸 몰라서 여태 그냥 뒀을까.”

김태신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비웃었다.

“너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정말 그 호모 새끼하고 붙어먹었냐?”

호범은 대꾸하는 대신 무심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 분 줄게. 조금 있으면 야쿠자 애들이 네 아들하고 부인 산 채로 묻을 거야.”

김태신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넌 죽어!”

“두고 보면 알겠네. 누가 죽을지.”


김태신은 칼을 쥔 채 부들부들 떨면서도 더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눈이 차츰 그치기 시작했다. 호범이 담배를 꺼내 물

자 옆에 있던 박태준이 다가와 불을 붙여 줬다.

후, 호범은 담배 연기를 김태신 얼굴에 길게 내뿜었다.

“시간 없어. 어떻게 할래?”

고집스럽게 버티던 김태신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백수현 데려와.”

김태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3 일 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정하고 튄 놈을 내가 무슨 수로!”

“산을 헤집든 바다로 들어가든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찾아와.”

“이 씨발!”

“1 분 남았어.”

김태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나서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칼을 원래 위치

에 숨긴 그는 호범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말해. 애하고 여자는 풀어 주라고.”

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호범은 그것을 김태

신에게 내밀었다. 김태신이 전화를 받으며 돌아선다. 괜찮아? 아니야. 별일 없어. 애 데

리고 집으로 가. 어찌나 평소 모습하고 다른지 지켜보던 호범은 기가 찼다. 남의 연애 사

업은 개박살을 내놓고 지는 가족을 챙기는 꼴이라니.

호범은 일본에 있는 상대에게 우선 모자를 풀어 주고, 당분간 감시를 하라는 지시를 내

렸다. 말을 알아듣고서 김태신의 눈빛에 살기가 드리워진다.

전화를 끊은 뒤 호범은 시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뭐 해. 움직여야지. 시간이 얼마 없어.”


김태신이 열받은 표정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욕을 내뱉었다. 호범은 피우던 담

배를 옆으로 튕기며 김태신에게 단호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곱게 데려와. 때리면 가만 안 둬.”

말을 마치고 돌아서 차로 향하는데 곧이어 김태신과 그의 부하들이 분풀이라도 하듯 난

폭하게 운전하여 항구를 빠져나간다. 박태준이 시동을 걸었고 호범은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 낸 뒤 목도리를 풀어 뒷자리에 던져 넣었다.

“태준아.”

“예, 대표님.”

“외국으로 가는 길 다 막고 브로커들한테 백수현 신상 돌려. 바로 튀진 못했을 거야.”

“알겠습니다.”

차에 탄 호범은 던져둔 목도리를 노려봤다. 간신히 눌렀던 분노가 다시 들끓기 시작한

다. 이러려고 선물을 줬나. 씨발, 이 인간은 사람 기만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후, 갑갑

함에 셔츠 윗단추를 풀며 태준을 불렀다.

“백수현 복역했던 교도소가 김천이라고 했었지.”

“예.”

“거기서 친했던 놈, 연락할 만한 놈 전부 찾아서 조져. 도움받았으면 일반인보단 그쪽 애

들 통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67 화

검은색 차는 어둡고 컴컴한 숲길을 뚫고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뒷좌석에는 오는 길

에 24 시간 식자재 마트에서 구매한 식료품들이 상자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덜컹, 차체

가 격하게 흔들리자 상자 하나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 돌아본 수현을 욕을 하며 속도를

줄였다.

[ 목적지를 벗어났습니다. 유턴하여 직진해 주십시오. 목적지를 벗어났습니다. 유턴하

여,]

수현은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드는 내비게이션을 껐다. 새벽이라고 하여도 해가 떠오르

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했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저수지가 하나 나타난다 . 밤

이라 물이 더욱 시커멓게 보여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수현은 알고 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걸. 적어도 귀신은 멀쩡한 사

람의 배를 가르고 콩팥을 떼어 가는 짓을 하지 않으니까.

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니 녹슬고 낡은 표지판 하나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방

치돼 있다. 수현은 그것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 100 여 미터를 더 진입하니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4 층 높이의 건물은 한눈에 봐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

았다.

수현은 널찍한 앞마당에 차를 세운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직 있네.”

우선은 차에서 내려 당장 필요한 것들을 챙긴 뒤 랜턴을 들고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 굳

게 닫힌 출입문 옆으로 해바라기 요양원이라고 적힌 간판 하나가 떨어져 뒹군다. 이곳은


예전에 사채업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 발견한 곳이었는데 , 길게는 아니어도 며칠 머물

장소로는 나쁘지 않았다.

몸으로 문을 밀자 입구에 커다란 괘종시계와 함께 대형 거울이 지키고 섰다. 부도가 나

서 버려진 건물이었는데 전에 왔을 때와 다르게 내부에 낙서며 잡동사니가 꽤 늘었다.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바닥에 툭, 무언가 채인다. 수현은 발아래 빛을 비췄다.

놋그릇과 쌀, 타다 만 향이 나뒹군다. 다른 곳을 자세히 비추니 구석에 오색천과 소주병,

거꾸로 꽂힌 식칼, 정체를 알 수 없는 썩은 것들이 굴러다닌다.

“굿이라도 한 건가.”

께름칙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중간 계단을 이용해 2 층으로 올

라가는데 탁, 탁, 발소리가 울린다. 그렇게 2 층에 당도하여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

다. 이번엔 어둠 속에서 빈 휠체어가 나타났다. 젠장. 해 뜨면 들어올 걸 그랬나.

수현은 잠시 멈췄다가 그것을 지나쳤다. 근처에 있던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더니 안

에는 침대 두 개가 놓여 있고 비교적 상태가 깨끗하다 . 다행이다. 여긴 그나마 괜찮네. 가

방과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초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곳곳을 밝혔다.

침낭을 창가 앞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밖을 내다보는데 무언가 나무 사이로 푸드득 날아

간다. 동이 트기 직전이라 세상이 푸르스름한 빛깔로 바뀌고 있었다. 수현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방을 둘러보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꽤 쓸 만하다. 먼지가 좀 쌓여 있긴 했지만, 아침에 털

어 내고 청소를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백수현은 원래부터

이런 곳이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근사한 침실과 포근한 이부자리가 아니라.

허공에 뿌옇게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다 담배를 끄고 침대 위에 침낭을 펼쳤다 . 밤새

차를 몰고 달렸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침낭 안에 몸을 집어넣고 지퍼를 잠그니 생각보다

따뜻하였다.

그런데 막상 누우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억지로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하던 그때

병실 출입문 위쪽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검은 물체가 슥 지나간다 . 잘못 봤나. 애써 외면

하는데 이어서 들리는 끼이익, 끼이익,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수현은 복도에 있던 낡은 휠체어를 떠올렸다. 두 눈을 부릅뜨고 문만 노려보는데 또다시

창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는 문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 머

리털이 쭈뼛 선다. 공포감에 휩싸이던 수현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침낭 밖으로 뛰쳐나와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자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다.

소주병을 위로 치켜들고 문고리를 잡는데 순간, 반대편으로 문이 벌컥 당겨지며 그 틈으

로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머리를 헝클어트린 남자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기괴

한 얼굴이었다.

“으악!”

수현은 너무 놀란 나머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짹짹, 새소리가 들려왔다. 귀는 열렸는데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라면 냄새가 풍긴다.

몸을 일으키는데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처음으로 수현의 눈에 띈 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후루룩, 면발을 입에 넣고 씹으며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묻는다.

“일어났네. 괜찮아?”

긴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수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젯밤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사람

과 매우 흡사하다. 귀신은 아니었군.

“당신 뭐야.”

남자는 대답 대신 라면을 먹느라 바빴다. 수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다가갔고 라

면을 빼앗았다. 남자가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던 면발을 후루룩 삼키더니 빤히 쳐

다본다.

“왜.”

“씨발. 뭔데 남의 음식을 허락도 없이 처먹어?”

남자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수현이 들고 있는 일회용 용기를 가리켰다.


“내가 아무리 그지 새끼라도 도둑질은 안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현은 컵라면을 확인했다 . 자세히 보니 라면이 아니라 우동이다.

어제 마트에서 산 것 중에 우동은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았고. 민망하여 돌려주니 남자

가 받아서 웃는다.

“ 새벽엔 미안했어. 여름에 하도 흉가 체험이다 뭐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걔들인 줄 알았

지 뭐야.”

입구에 타다 만 향이며 식칼 같은 것들이 왜 있는지 뒤늦게 이해가 됐다 . 국물까지 싹싹

비워 마신 남자가 끅 트림을 하더니 사용하고 난 나무젓가락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사발

면 그릇은 비닐봉지에 버린다. 수현은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노숙잔가. 그

렇다고 하기엔 차림새가 비교적 말끔하다. 쓰레기를 정리한 남자가 손짓으로 옆 방을 가

리켰다.

“ 나는 202 호, 옆방. 보다시피 갈 데 없는 처지라 여기 머물고 있어. 아, 말 놔도 되나. 나

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이미 놨으면서 뭘. 정말 노숙잔가 보다. 귀찮게 됐네. 혼자 조용히 지내다 갈 생각으로 온

건데.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나. 후회하는데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

다. 누군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였다.

“이웃 된 기념으로 하나 줄까?”

됐다고 그만 나가라고 손을 내저었더니 그가 웃고 나서 순순히 사라진다. 혼자 남게 된

수현은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경계

심을 풀고 자리로 돌아왔다. 혹시 몰라 접이식 나이프를 뒷주머니에 챙긴 뒤 백팩을 열

어 불상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여권과 휴대전화를 살폈다.

어젯밤 덜덜 떨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맥이 탁 풀린다 . 침대에 앉아 시계를 보니 아침 8

시다. 새소리 빼고는 모든 게 고요하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

가 뿌옇게 반짝였다. 침대에는 수현이 덮고 자던 침낭이 어지럽혀져 놓여 있었다.

깨어난 장소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동안 일들이 아주 오래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슬

슬 움직여 볼까. 수현은 김영택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


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기다렸다는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우선 배부터 채워야

할 것 같았다.

❖❖❖

“이재선. 30 세. 백수현하고 감방 동기고 출소하고 나서는 종로에 있는 아버지 가게에서

전자제품 수리하는 일을 하는 중입니다.”

호범은 담배를 문 채 태블릿에 있는 사진을 노려봤다. 백수현이 도망친 지 3 일째다. 그리

고 며칠 뒤면 해가 바뀐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네까짓 거 도망쳐야 내 손바닥 안이라

고. 어디 마음대로 달아나 보라고.

하지만 백수현은 그동안 병신 짓 하던 게 연기였나 싶을 정도로 도망치는데 용의주도했

다. 문자와 통화 내역을 다 뽑고, 주변 사람들을 찾아 족쳐도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 대포

폰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 또한 어디다 처리했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 어쩌면

자신의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준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배신감마저 느껴졌

다.

다음 장을 넘기자 풍채가 좋고 다부지게 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박태준의 설명이 이어졌

다.

“김영택. 32 세. 현재 밀수업을 하고 있고, 이재선, 백수현과는 같은 감방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백수현이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도움?”

“동기들 말로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확인된 바는 없다는 말을 박태준은 힘주어 말했다. 어떻게든 호범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

겠다는 태도였지만 그건 그것대로 짜증이 났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아니다. 관두자.

답지 않은 게 어디 박태준뿐인가.
호범은 담배 끝을 앞니로 씹으며 백수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 호텔에서 빠져나가

는 장면을 CCTV 로 찾았지만, 가발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어 시작부터 애를 먹

었다. 그가 탔던 택시를 추적하고, 등산로 근처에서 내려줬다는 운전기사의 말을 근거로

비슷한 시간대에 나오던 차량을 하나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탄다는 흔하디흔한 차종이었는데 그걸로 고속도로와 인적이 드

문 국도를 번갈아 가며 움직이더니 나중엔 번호판을 갈았는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물론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러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사람을 풀어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역의 숙소와 목욕탕, 찜질방, 피시방, 등을 이 잡듯 뒤

지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단서 또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잇새로 신음과 한숨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잡히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조금씩 애가 타들어 갔다.

내가 모르는 루트를 통해 외국으로 벌써 튄 건 아닐까. 그래서 다신 못 보는 것 아닐까.

분노가 사라진 자리엔 어느덧 불안과 초조함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영택은.”

“일 때문에 엊그제 중국으로 나간 모양입니다. 제가 일단 통화했는데, 김영택 본인 말로

는 백수현하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최근에 만난 적은 더더욱 없답니다 . 당일 행적은

지금 따로 알아보고 있고 입국하는 즉시,”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범이 그만하라고 손짓을 하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그는 양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 뒤 소파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일 문제라면 무슨 수를 쓰든 방법을 떠올릴 텐데, 이건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지명 수배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 내가 왜 그런 인간한테….

[양 사장.]

뻔뻔하게 웃으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던 낯짝이 떠오른다. 지금쯤 어딘가 숨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겠지. 아니면 그새 또 다른 놈하고 붙어먹든가. 원래 백수현은 천성이 그렇

다. 남자 없으면 못 살고 자기가 필요하면 아무 놈한테나 쉽게 다리를 벌리겠지 .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호범은 걷잡을 수 없이 치미는 분노에 눈을 뜨고 이를 갈았다.

씨발, 진짜. 잡히기만 해.

다리몽둥일 분질러 버릴 테니까.


68 화

종일 늘어지게 잠을 잔 수현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기도 끊기고

난방도 안 됐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지하수라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도망치

는 마당에 공짜로 잠자리가 제공되고 물까지 나오는 데는 흔치 않았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일회용 버너에 올려 둔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

그 옆에는 인스턴트 떡국 2 개가 있었다. 수현은 불을 끈 뒤 용기에 끓는 물을 붓고 뚜껑

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초가 하나 켜져 어둠을 밝

히고 있었다.

수현은 떡국을 들고 옆방을 노크했다. 곧 문이 열리고 얼굴이 퀭한 남자가 나온다. 첫날

수현을 놀라게 한 남자였다. 서로 많은 대화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며칠 머무는 동안

인사는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남자는 근처 석재 채취장에서 일용직으로 일을 한다고 했는데 보통 새벽에 나가 밤늦게

피곤함에 절어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는 몸살이 난 건지 밤새 끙끙 앓더니 얼굴이 반쪽

이 되었다. 처음에 남자를 노숙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빼면

행색이 남루하긴 하였어도 더럽거나 하진 않았다.

수현은 떡국 중 하나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먹어요. 늦었지만 오늘이 새해였어요.”

아, 남자가 초췌한 얼굴로 웃는다.

“고마워. 챙겨 줘서. 근데 몇 시야?”

“8 시.”
“이런. 내가 많이 잤구나. 들어와.”

수현은 떡국을 든 채 남자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캠핑용 전등이 어둠 속에서 빛났고 주

워 왔는지 낡은 의자와 작은 테이블, 찌그러진 냄비며 버너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리고 책도 여러 권 쌓여 있었는데 제목만 봐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수현은 자리를 잡고 앉아 주머니에서 팩 소주를 꺼냈다 . 남자에게 권하니 손을 내젓는

다. 술은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남자는 처음 우려와는 달리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였고 ,

수현에게 꼬치꼬치 묻는 법 또한 없었다.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가끔 남자의 코 고

는 소리는 수현의 방까지 들려왔다.

남자는 뚜껑을 젖히고 떡국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요즘은 떡국이 이렇게도 나오네.”

수현도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도망치면서 한 살을 먹으니 감개무량하다. 이제 스물아홉

이 됐다. 남들은 아홉수라고 하여 조심할 시기지만 수현은 그동안 하도 다사다난하게 지

내어 더 조심할 게 뭐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양호범 생각이 났다. 이제 스물다섯이군. 아직도 새파랗게 젊네. 여전히 그 얼굴

에 스물 중반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양호범은 수현을 쉽사리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

쯤 포기하고 다른 일에 매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차라리 그래 주면 고마울 텐데.

그때 어디선가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현은 흠칫하여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남자가 뒷주

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기이한 광경이다. 노숙자가 휴대전화라니.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일을 하고 있으니 노숙자는 아닌가.

그는 먹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머리를 빗어 정돈하고 전화를 받았다. 영상통화였

는지 남자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남자가 활짝 웃었다. 찬 바람에 트고 갈라진 얼굴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다.

“지윤이 밥 먹었어?”
[ 외할머니가 떡국 해 줘서 먹었어. 아빠 어디야? 왜 이렇게 어두워? 아빠는 떡국 먹었

어?]

수현은 국 대신 팩 소주에 빨대를 꽂고 남자를 흘깃 쳐다봤다 . 아이는 아빠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회사는 많이 바쁘냐.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봄에는

온다고 했다. 근데 수염은 왜 길렀냐. 얼굴이 늙은 거 같다. 아이는 수다스러웠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지윤아. 엄마는?”

[엄마는 일하러 가서 아직 안 왔어.]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미안함과 속상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카랑카랑한

노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전화세 많이 나온다! 끊어라. 아이는 어디론가 뛰어가는지 숨

소리가 거칠어지더니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빠. 언제 와? 보고 싶어.]

남자가 화면을 향해 애틋하게 웃었다.

“나중에. 나중에 갈 거야. 갈 때 지윤이 뭐 사다 줄까?”

[인형. 커다란 거.]

“그래, 커다란 인형 사서 갈게. 외할머니 걱정하시겠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

[그럼 끊을게.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전화가 끊겼다. 휴대전화를 빤히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에 물기가 어렸으나 잠시뿐이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수저

를 들었다.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수현은 소주를 쪽쪽 빨며 남자에게 물었다.

“딸이에요?”

“응….”

“근데 왜 떨어져 살아요?”

남자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한다.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노름했어요?”
남자가 고개를 젓는다. 수현 역시 짐작했다. 모든 걸 다 알 수 없지만, 남자의 언행이 망

나니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보증 섰나 보네.”

무심코 한 말에 남자는 부정하는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도망까지 친 거 보니 은행에서

빌린 건 분명 아닐 테고. 남자를 보니 백광무가 떠오른다. 그 인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

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다. 사정이 있다고 해서 누구든 사기를 치진 않는다 . 이 남자 또

한 아예 죄가 없다고는 못 하겠다. 멍청하게 당한 것도 죄라면 죄다. 자신이 김도한에게

속아 몸도 내주고 돈도 내줬던 것처럼.

수현은 더 묻지 않았고 남자도 이후로 말이 없었다 . 떡국을 다 먹은 후에 수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다음 새 팩 소주를 하나 주머니에 챙기고 귀중품이 든 가방을 짊어

졌다. 남자가 착해 보여도 사람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차다. 등엔 가방을 메고 손에는 팩 소주를 들고 쪽쪽 빨며 산책을

하는데 달이 참 밝았다. 잠깐 멈춰서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 달님. 부디 무사히 도망

칠 수 있게 해 주세요.

걷다 보니 자신이 세워 둔 차가 눈에 띈다. 요양원에 있던 파란색 비닐 포대로 덮어 놨는

데 바람에 한쪽이 뒤집혔다. 그것을 꼼꼼히 덮어 완전히 숨긴 뒤 랜턴을 들고 길을 따라

걸으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밀항까지 앞으로 일주일. 김영택에게 아직 연락은 없었다. 3 일 정도 더 이곳에 머물다 부

산에 내려갈 계획이다. 곧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복잡하면서도 설레었다. 어디

로 가지.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외국어라도 배워 둘걸 . 부산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여행

용 책자를 하나 살까.

고민에 휩싸이는데 저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점점 가까워진다. 수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야. 이 시간에 올 차가 없

는데.
어두운 숲 사이로 불빛이 나타나자 수현은 들고 있던 소주를 내팽개치고 황급히 요양원

을 향해 내달렸다. 급하게 2 층으로 올라와 촛불을 다 끄고 창을 통해 밖을 주시하는데 어

둠 속에서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불청객들은 흰색 SUV 차를 타고 왔는데 아무리 봐도 양호범이 보낸 사람들 같진 않았

다. 마침 남자가 방에서 나온다. 그는 곁으로 다가와 밖을 보더니 뭔가를 아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 또 왔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람들 누군데요?”

“딱 보니 흉가 체험하는 애들 같은데.”

수현은 그들을 자세히 봤다. 차에서 내리는데 인원은 총 4 명이었다. 대부분 어렸으며 그

중 나머지 한 명은 한복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소리가 들렸는데 자기들끼리 실랑이를

하는지 한복이 작네, 어쩌네, 정말 무당 같지 않으냐고 방울까지 흔들고 깔깔 웃는다.

“준비도 많이 했네.”

“여름에만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가끔 계절 안 따지고 오는 애들이 있어.”

“설마 여기까지 올라오진 않겠죠.”

“올걸. 저번 달에 그래서 내가 귀신 흉내 내고 쫓아냈거든.”

아, 수현은 첫날 남자가 자신을 놀라게 했던 걸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담배

를 나눠 피우며 맥주를 마셨다. 수현은 남자를 바라봤다. 몰골이 핼쑥한 그를 보고 있으

니 귀신 흉내를 내서 쫓으라고 등을 떠밀 수도 없었다 . 눈치를 챘는지 남자가 곤란한 듯

웃는다.

“어쩌지. 내가 오늘은 기운이 없어서…. 아니면 내려가서 잘 달래 볼까?”

보아하니 달랜다고 말을 알아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 이러다 괜히 영상에 얼굴 찍히면

안 되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랜턴의 빛을 최대한 줄이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의 문을 열자 캐비닛이 여러 개 놓여 있다 . 거기에서 환자복을 꺼냈다. 윗옷을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자 남자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뭐 하는 거야?”

수현은 대답 대신 자신의 방으로 가 도망칠 때 썼던 가발을 착용했다. 지켜보던 남자가

흠칫 놀란다.

“어때요? 귀신 같아요?”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웨이브가 너무… 예쁜데?”

에이 씨. 비싼 가발이라 다르긴 다른가 보네. 수현은 머리카락을 헝클어 얼굴을 다 가리

고 코만 나오게 한 뒤 남자를 옆방으로 떠밀었다.

“들어가 있어요. 내가 처리할게요.”

“괜찮겠어?”

수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연기가 또 내 전문이에요.”

문을 닫은 뒤 혼자 남은 수현은 복도 끝에서 휠체어를 끌고 와 앉은 뒤 뒤돌아서서 그들

을 기다렸다. 10 여 분이 지났을까. 아래층이 소란스럽더니 말소리가 가까워진다.

[우리 귀나 여러분. 저는 지금 홍천의 한 흉가에 왔습니다. 이곳이 원래는 요양원이었는

데요. 환자들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가고 원장이 목을 매달고 나서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

는다고 해요.]

수현은 피식 웃었다. 저 새끼도 나만큼 구라를 잘 치네.

[저 존나 무섭거든요. 보이시죠? 기계가 2 층을 향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일단 위

층부터 갈게요. 야야, 밀지 마.]

터벅, 터벅, 수현은 계단을 등지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그들을 기다렸다.

[2 층에서 신호가 굉장히 강하게 잡혀요. 와, 미쳤다. 지금 맥시멈까지 올라갔거든요. 여

러분도 보고 계시죠? 이 정도면 귀신 중에서도 악귀라고 할 수 있어요 . 인창아. 팥 준비

해, 팥! 나 존나 쫄려. 먼저 우측부터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우측에는,]


소리가 뚝, 멈추고 순식간에 공기가 싸해진다. 뭐야? 저거 뭐야? 수현이 앉아 있는 복도

바닥에 빛이 움직인다. 저거 휠체어 아니야? 야야, 잘 비춰 봐. 휠체어야? 씨발, 휠체어네.

쫄지 마. 쫄지 마. 그냥 휠체어야.

그들이 다시 발을 내딛는 순간 수현은 타고 있던 휠체어를 홱 돌렸다 . 얼굴에 빛이 쏟아

지고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들린다. 으악! 뭐야! 야 씨발 저거 뭔데! 수현은 기다렸다

는 듯 그들을 향해 눈을 까뒤집고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진해 나갔다. 으헤

헤헤헤!
69 화

[서민준 검사 사퇴. 정치 검찰 수순 밟나.]

양 회장은 들고 있는 신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해가 밝았고 서민준은 기다렸다는 듯

검찰에서 나와 장인인 김현식의 당에 입당해 선거 캠프에 합류했다. 사람들은 인물 좋고

정의감과 패기 넘치는 젊은 검사에 열광했고 덕분에 며칠 사이 김현식의 지지율이 상승

한 걸 볼 수 있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이무기가 되려 하는구나. 신문을 내려놓고 돋보기를 벗는데 노크와 함

께 최 비서가 등장한다. 그 뒤로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진 사내도 함께였다 . 남자는 양 회

장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회장님. 저는 김영택이라고 합니다. 제천 출신이고 지금은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양 회장은 담뱃대를 들었다. 옆에 있던 최 비서가 불을 붙였고 김영택이란 자는 아직도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번에 자네 도움이 컸다지.”

“아닙니다. 더 일찍 알았다면 제 손에서 처리했을 겁니다. 의도치 않게 회장님께 폐를 끼

쳐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양 회장은 소리 없이 웃었다. 백수현이 살기 위해 김영택을 찾아갔지만, 결과만 놓고 보

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김영택은 자신이 도와준 게 양 회장이 쫓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 양 회장 눈


밖에 난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그래서 의리 대신 자신의 조직을 보호하기로 결정을

내린 듯하였다.

“그래, 언제라고?”

“8 일 부산입니다. 맡겨 주시면 저희 쪽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둘이 동기라고 하던데, 괜찮겠어.”

떠보듯 물은 말에 김영택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진다 . 양 회장은 관상을 믿는 편이다. 사

람은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나타나는 법인데 김영택은 쉽게 배신할 것처

럼 보이진 않았다. 그의 이런 점이 백수현에게 믿음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상관없습니다.”

양 회장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자네가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그만 가 보게. 새해 댓바람부터 약장수가 내 집에 드나드는 거 반갑지 않아.”

기분이 나빴을 법한데도 김영택은 내색하지 않고 일어서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 그

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그를 양 회장이 불러 세웠다.

“내 손주 놈이 자네 찾고 있는 건 아나.”

“연락받았습니다.”

“마주치지 말게. 고놈이 어린데 성질머리가 대단해. 괜히 부딪쳐서 좋을 거 없어.”

예, 알겠습니다. 김영택이 사라지자 양 회장은 신문을 다시 집어 들고 최 비서를 불렀다.

“범이는 어쩌고 있어?”

“어제 호텔에서 묵었는데 지배인 말로는 새벽까지 술을 꽤 마신 모양입니다.”

양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백수현을 없애려는 건 서민준 때문만은 아니

다. 죽은 아들도 그랬다. 평생 속 한번 썩이는 일 없더니 뭔가에 홀린 듯 부모까지 등졌

다. 자신의 그늘에 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사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뿐인

손주를 위해서라도 불미스러운 싹은 애초에 제거하는 게 맞다.


❖❖❖

아, 눈을 뜨자마자 몰려드는 두통에 호범은 인상을 찡그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아무렇게

나 벗어 둔 티셔츠를 주워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엉망이 된 거실을 직원이 청소 중이다 .

뒷모습이 백수현과 매우 흡사하여 호범은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다가가 팔을 낚아챘다 .

돌려세워 확인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상대방도 꽤 놀란 듯 보였다.

호범은 미간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누구?”

“오, 오늘부터 여기 청소 맡게 된 직원입니다.”

“나 있을 땐 올라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서늘한 목소리에 직원이 곤란한 기색을 하더니 어딘가를 쳐다본다.

“그게, 바로 청소하라고 하셔서….”

더 물을 것도 없이 수영장 안쪽에 누군가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 . 김우영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수영장 문이 열리면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네? 괜찮아?”

호범은 잡고 있던 직원의 팔을 놓아주고 김우영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멋대로 사람 올려 보내지 마.”

“이 난장판을 어떻게 보고만 있어.”

호범은 어지럽혀진 방을 한번 둘러봤다. 김우영의 말마따나 개판이다. 술병이며 술잔은

깨져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었고 집기도 부서졌다. 뒤늦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베고

찢긴 상처로 인해 피딱지가 군데군데 생겼다.

호범은 청소를 하던 직원에게 오후에 올라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 직원이 서둘러 나가고

난 뒤 그는 냉장고로 가 생수를 꺼내 목부터 축이고 담배를 물었다. 어지럽혀진 가운데

서 라이터를 찾는데 김우영이 와서는 불을 붙여 준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호범은 대꾸하지 않고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직도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얼마나 처

마셨는지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같이 올라왔다 . 그러면서도 휴대전

화를 찾아 밤새 연락이 왔을까 확인부터 했다.

“너 이러는 이유 백수현 때문이야?”

“신경 꺼.”

“나도 아쉬워서 그래. 목도리가 이별 선물일 줄은 몰랐네.”

호범은 김우영이 하고 온 목도리를 노려봤다. 진짜 개업식 수건 마냥 이놈 저놈 많이도

나눠 줬다. 씨발, 아예 축 이별이라고 글자하고 날짜까지 새기지 그랬어 . 술이 덜 깬 와중

에도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잡으면 어쩔 거야? 죽일 거야?”

그 말을 무시한 채 옷을 모두 탈의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 찬물을 틀고 몸을 적시니 그나

마 정신이 든다. 백수현이 도망친 지 열흘째다. 김태신까지 족치면서 쫓고 있었으나 아

직 별다른 수확이 없다. 김영택인지 뭔지도 중국에서 돌아왔는데 그대로 잠수를 탔다.

초조함이 극에 다다르자 신경이 곤두서 며칠째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어제 지나칠

정도로 술을 마셨고, 그러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어졌다. 이 상태로 백수현

을 붙잡으면 다리 몽둥이가 아니라 정말 목이라도 비틀어 버릴 것 같은 심정이다. 찬물

에 꽤 오랫동안 몸을 맡기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데 김우영이 아직 거실 소파에 있다.

“그만 가.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김우영은 휴대전화에 빠져 있었고 호범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내려가란 말 못 들었어?”

김우영이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무시한 채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김우영이 황급히 다가와 앞을 가로막는다.

“범아, 너 내가 눈썰미가 얼마나 좋은지 알지?”

무슨 개소리냐고 할 틈도 없이 그가 휴대전화를 눈앞에 갖다 댄다.


“아무래도 백수현 귀신 된 거 같다.”

호범은 김우영을 한심한 표정으로 봤다.

“약 그만 처먹어.”

김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상을 보라며 재촉했다. 홍천 휠체어 귀신이라고 제목이 달

린 유튜브 동영상이었는데 조회 수가 백만이 넘어간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어둠 속

에서 무언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휠체어를 타고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람

이다. 이후에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화면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중간에 꺼진다.

김우영은 화면을 앞으로 돌려 휠체어 부분에서 정지했다.

“이게 지금 엄청 핫하거든.”

호범이 살벌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그래서. 나한테 흉가 체험 가자고? 형부터 귀신 만들어 줄까?”

“화내지 말고, 잘 봐 봐.”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둡기도 했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너 이서윤 알지? 모델. 걔가 나하고 여기서 떡친 날 이런 가발을 쓰고 왔거든. 비싼 거니

까 찾아 달라고 하더라. 근데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졌어. 백수현 도망칠 때 가발 쓰고 튀

었다며.”

호범은 수현이 도망칠 당시 찍힌 영상을 떠올렸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제법 비슷하

긴 하다. 그러나 비슷한 가발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시선이 영상 아

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는 영상을 캡처해 최대한 확대했다.

“얼굴을 보라니까. 왜 다리를 보고 있,”

김우영이 말을 멈추고 입으로 어어? 소리를 낸다.

호범은 이를 꽉 물고 박태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태준아. 너 당장 이쪽으로 와.”


❖❖❖

옆방 남자는 감기가 심한 건지 밤새 앓았고 아침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혹시 약

이 있나 찾아봤지만 몇 알 남지 않은 진통제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떠나고 싶었으

나 아픈 사람을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수현은 귀중품들을 챙긴 뒤에 차를 끌고 나섰다. 멀리 떨어진 시내로 이동해 차를 세워

두고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뒤 약국에 들러 여러 종류의 약을 구매했다. 그다음

에는 국밥집으로 이동했다. 국밥 포장을 부탁하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흙으로 엉망

이 된 자신의 운동화가 눈에 띈다.

운동화는 호텔에 취직하고 양호범에게 받았던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흙

투성이에 엉망이 됐다. 아무리 명품이면 뭐 해. 신발도 주인 팔자 따라가는구나. 괜히 씁

쓸해져 옆에서 휴지 몇 장을 뽑아 물을 묻힌 뒤 신발 겉면을 닦았다.

그렇게 포장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들은 해

장국과 함께 소주를 시키고 TV 를 틀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수현은 TV 에서 나

오는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네모난 화면 속에 서민준의 모습이 나타난다.

[한국당이 서민준 검사를 영입한 건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젊은 층의 표심을 잡겠다는

뜻이 아닌가 해석되고 있습니다. 한편 서민준 검사는 앞으로 힘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는데요.]

사퇴? 서민준이? 정말 검사를 그만두고 정치인이 됐구나. 수현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

다. 감히 너 같은 놈이 정의를 말해? 이를 악물고 매섭게 노려보는데 방금 들어온 손님들

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잘하면 김현식이 되겠네.”

“에이. 이번엔 어려워.”

“왜. 사위 덕분에 지지율도 올랐던데.”


“끝까지 가 봐야 알지. 저러다 뭐 하나 터지면 나가리되는 거야.”

마침 가게 사장이 포장된 음식을 들고나온다. 손님 순대국밥 두 개 나왔습니다. 수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두 명의 남자는 아직도 누구를 뽑느냐를 놓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2 만 원이에요. 포장이라 양은 더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지갑에서 5 만 원짜리를 꺼내 사장에게 건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모든 사람 눈에

서민준이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지.

“사장님. 사장님 보시기에도 서민준 검사가 정의로운 것 같아요?”

거스름돈을 내주던 사장이 피식 웃는다.

“나야 아나. 방송에서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입이 써졌다. 놈들은 원래 그렇다. 언론을 이용해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고 죄

지은 것도 덮을 수 있으며, 없던 정의도 만들어 낸다. 그러니 나처럼 개뿔도 없는 놈은 쥐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숨어 사는 게 맞다. 자고로 분수를 지키면 일찍 뒈질 일도 없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는데….

씨발, 그래도 열받는 건 어쩔 수 없네.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수현은 결국 가게 사장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믿지 마세요. 저 새끼 저거 다 구라니까.”


70 화

정의가 다 얼어 죽었다. 서민준 같은 놈을 두고 정의롭다고 얘길 하다니 . 씩씩대며 차로

걸어가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서 버스 정거장에 앉아 무언가를 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새끼들. 좋을 때네. 옆을 지나치는데 말소리가 들린다.

씨발. 존나 무서워. 닭살 돋은 거 보이지? 이거 진짜 귀신일까?

수현은 코웃음을 쳤다. 커 봐라.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걸 알게 될 테니.

“야, 이거 서곡리에 있는 요양원 맞지?”

“맞을걸. 전에 선호형도 거기 가서 술 먹었다는데.”

“애들 데리고 밤에 가 볼까?”

“병신아, 그러다 휠체어 귀신한테 끌려가.”

휠체어란 말에 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 코앞에서 빤히 내려다보니 앉

아 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든다.

“저희 교회 다녀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자기들끼리 키득대고 웃는다. 수현은 그들의 휴대전화를 확 빼

앗았다. 아, 씨발. 아저씨 뭐예요? 왜 남의 폰을 가져가는데. 덤벼들 것처럼 동시에 둘이

일어섰지만,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영상을 확인했다.

설마 했는데 이틀 전 자신이 휠체어에 앉아 생쇼를 하던 장면이 고스란히 찍혔다. 조회

수도 백만이 넘어갔고, 댓글도 수만이다. 낯빛은 하얗게 질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

요동쳤다. 이게 어떻게….

“아 짜증 나.”
남자애 중 하나가 휴대전화를 낚아채 가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려본다 . 수현은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쳐다봤다. 아이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외면한다. 수

현은 성큼 다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영상에 나온 것처럼 웃었다.

“으헤헤헤.”

아이들 표정이 가관이다. 겁을 먹었는지 멀찍이 물러섰고 수현은 심각해져 물었다.

“어때? 닮았어?”

“뭐가요…?”

“거기 나오는 귀신하고 나하고, 닮았냐고.”

아이들은 당황하면서도 영상을 한번 보고 수현을 본다 .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요. 수현은 안도하며 마스크를 다시 올렸다.

그래, 얼굴도 다 가렸고 어두운데 누가 나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수현은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그런 거 자꾸 보면 귀신 붙는다.”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친 새끼 아니야? 야, 얼굴 봤냐? 존나 잘생겼다. 그럼 뭐

해, 정신병자 새낀데. 신발도 구찌야. 씨발, 짭이지.

수현은 기가 차 웃었다. 멀리 간 다음에나 욕하든가. 다 들린다, 이 애새끼들아. 하여튼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김우진만 해도 의젓하고 어른스러운데. 그러고 보니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왔네. 목도리는 잘 받았을까.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선물을 주고 입까지 맞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실이면 너무 슬프잖아. 죄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놈들 천

지인데. 하나쯤은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덜 속상하지.

씁쓸하게 웃으며 차로 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데 정거장에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타는

게 보인다. 불안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재수 없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아

니, 알아보지 않더라도 노출이 된 이상 사람들의 방문은 이어질 거다. 그 생각을 하니 마

음이 조급해진다.
수현은 서둘러 요양원으로 돌아왔다. 차를 숨기는 대신 마당 한가운데 세워 두고 음식과

약을 챙겨 2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자신의 방에서 필요한 것들을 더플백에 챙긴 뒤 옆방

으로 갔는데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 작업복으로 입고 다니는 옷이 없는 걸 보아 아

픈데도 출근을 한 것 같았다.

수현은 포장해 온 국밥과 약을 한쪽 구석에 놓고서는 가방을 열어 현금을 꺼냈다. 오만

원권 다발을 남자의 식료품 상자 안에 숨겨 놓고 근처에 있던 볼펜과 노트를 찢어 메모

를 적었다.

[사정이 생겨 인사도 못 하고 갑니다. 돈은 그동안 챙겨 주신 보답입니다. 잘 지내세요.]

메모를 위에 올려놓은 다음에는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에 더 머물다간 위험해

질 수 있으니 차라리 부산으로 가자.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숲길을 빠르게 내려오는데 검

은 차 한 대가 저 멀리서 올라온다. 가만히 보니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다.

이대로 올라가면 요양원과 그 뒤로 농장뿐이었다. 짙게 선팅이 된 차량은 농장을 방문한

것 같진 않았고 흉가 체험을 하러 온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긴장하며 차를 옆으로

대고 비켜서는데 상대방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다.

수현은 긴장하여 핸들을 비틀어 잡았다. 서로 멈춰선 상황에서 보조석 문이 열리면서 키

가 큰 남자가 내린다. 그를 알아본 수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 며칠 만에 본

양호범의 얼굴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담배를 문 채 이쪽을 응시하는데 당장에라도 달려와 목을 조를 것 같은 표정이다. 머릿

속이 하얘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기어를 바꾸고 황급히 차를 후진했다 . 곧

그를 태운 차가 맹렬히 쫓아온다.

이대로 가면 막다른 길이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엉켰다. 어쩌지. 차를 버리고

산으로 도주할까. 하지만 저들을 따돌리는 건 쉽지 않을 거다. 후회가 몰려왔다. 애초에

숨어 있으면 될 일이었는데 괜히 병신같은 짓을 벌여 일만 키웠다.

자책하며 후진을 하던 중에 수현의 시야에 오른쪽 저수지가 들어온다. 며칠 한파가 몰려

왔고 얼음이 언 저수지는 산책하다 건널 수 있을 만큼 얼어 있었다 . 그리고 저수지 너머

에는 국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하나 나 있다.
갈등하던 수현은 차를 멈추고 그쪽으로 핸들을 틀어 속력을 냈다. 이판사판이다. 양호범

한테 잡혀 죽으나 저수지에 빠져 물귀신이 되나 . 차를 끌고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는데

뒤따라오던 양호범의 차가 저수지 입구에 멈췄다.

그래, 너희도 사람이니까 얼음이 깨질까 봐 겁나겠지. 이윽고 그의 부하가 차에서 뛰쳐

내렸는데 손에 기다란 막대를 들고 있다. 가만 보니 막대가 아니라 총이다. 미친 새끼들.

총을 가져왔어? 기함하여 돌아보는데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다.

영화처럼 총알이 빗발치며 날아올 줄 알고 쫄아서 몸을 낮추는데 트렁크에 탁, 하는 소

리가 나더니 그게 끝이다. 뭐야 비비탄이야? 개폼은 다 잡더니. 비웃으며 속도를 올리자

갑자기 쩍! 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벼락이 내리쳐 나무를 쪼갤 때처럼.

백미러로 보니 저수지 한가운데 크게 균열이 생겼다. 긴장하여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조

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직진했지만, 탈출을 코앞에 두고 차바퀴가 헛돌기 시작

했다.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아도 부웅, 하는 소리만 날 뿐 앞으로 더 나아가질 못한다.

얼음을 더 건드렸다간 차가 가라앉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건너편에 있던 양호범

이 얼음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온다. 뒷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끼쳤다. 위태롭게 갈

라진 얼음은 금방이라도 자동차와 양호범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애가 타들어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호흡

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차를 뒤로 움직였다가 가속 페달을 밟으니 다행히 앞으로 나아간

다. 양호범은 저수지 중간쯤 멈춰 섰는데 무척이나 화가 난 얼굴이었다.

저수지에서 멀어지자 그의 모습 또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수현은 가슴을 쓸어내

렸다. 우습게도 양호범이 얼음 위로 걸어올 때 두려움에 떨면서도 걱정을 했다 . 빠져 죽

으면 어쩌려고 거길 들어와. 아무튼 미친 새끼라니까!

동네 길을 따라 국도로 나온 뒤에는 최대한 속도를 올렸다.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안도감

에 담배를 꺼내 무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불을 붙인 뒤 옆에 놓아둔 가방을 뒤져 휴대전

화를 찾아냈고 전원을 켠 다음 김영택에게 연락했다.

잠시 후 김영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저예요.”
[그래, 수현아.]

같은 편인 사람과 통화하니 반가워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다.

“죄송해요. 제가 사정이 생겨서 지금 부산에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더 일찍 출발

하는 배 없을까요?”

김영택은 말이 없었고 수현은 초조해졌다.

“힘들겠죠?”

[내일 새벽에 나가는 배가 있긴 한데….]

예상외의 답변에 굳어 있던 수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일이요?”

[너 지금 어딘데.]

“강원도요. 부산엔 자정 전에 도착할 거 같아요.”

[그래 알았다. 내가 미리 말해 둘 테니. 전에 말했던 횟집으로 가서 박 사장 찾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김영택은 말이 없다. 끊어졌나 하고 봤더니 여전히 통화 중이다.

“형님?”

[조심히 내려가고.]

“네!”

통화가 끊겼고, 수현은 속도를 더 올렸다. 과속 카메라를 몇 개나 그냥 지나쳤는지 모르

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영택에게 딱지 요금도 함께 지불할걸.

한숨 돌리고 나니 피곤이 몰려오고 배도 고프다. 젠장. 도망치는 판국에 휴게소에 들려

속 편하게 밥을 사 먹을 수도 없어 가방을 뒤져 라면을 하나 꺼냈다 . 그것을 뜯어 입에 넣

고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오늘 밤만 버티면 된다. 오늘 밤만. 그럼 이 지긋지긋한 곳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양호범 얼굴이 몇 번이고 떠올랐다. 기분 탓일까. 살짝 야윈 거 같

은데. 이 인간 열받아서 잠도 못 자고 매일 밤 칼 갈고 있던 거 아니야 ? 양호범한테 맞아

죽을 뻔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저도 모르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잡히면 안 돼. 이번에 잡히면 진짜 죽는다.
71 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재탐색을 시작합니다.]

횟집의 위치를 확인한 뒤 지나치자 내비게이션 안내가 바뀐다 . 우회전을 하니 부산역이

나타난다. 예전에 사채업자들을 피하느라 기차를 타고 온 적이 있었는데 씁쓸하게 이번

에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수현은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짐을 꺼내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다. 가방을 빼내고 나서 트렁크를 닫는데 범퍼 아래에 무언가 붙어 있다.

그것은 검은 동전만 한 크기의 물체였고 빨간 불빛을 내며 규칙적으로 반짝였다.

이게 뭐야?

물체를 손으로 떼어 내서 살피다 불현듯 저수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양호범의 부

하가 총을 꺼내어 쏘았고 뒤에서 작은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었는데… . 표정이 굳었

다. 이거 폭탄인가? 그러나 정말 폭탄이라면 여태 멀쩡할 리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위치 추적기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설마 벌써 여기 도착한 건 아니겠지. 안절

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헤매는데 근처에 있던 차 한 대가 눈에 띈다. 이제 막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직전이다.

수현은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갔고 뒤로 지나가는 척하며 범퍼에 위치 추적기로 추정되

는 것을 부착했다. 곧이어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수현은 안도하며 근처에 있는 지

하상가 화장실로 가 옷을 모두 벗고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다음 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김영택에게서 연락이 온다.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두 칸씩 밟으며 수현은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가고 있어?]

“아직이요.”

[동생한테 말해 뒀으니 바로 찾아가. 딴 길로 새지 말고.]

마지막 계단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오던 수현은 급하게 몸을 숨겼다 . 장정들이 군데군데

지키고 서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도 비슷한 무리가 있다. 평범한 옷차

림을 하였으나 조폭 특유의 짧은 머리와 뿜어내는 분위기는 숨기지 못하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영택이 수현을 부른다.

[듣고 있는 거니?]

“형님. 아무래도 저 여기 온 거 놈들이 눈치챈 거 같아요.”

[양호범 말하는 거지? 나한테도 찾아왔었어.]

양호범이 김영택을 찾아갔다는 말에 수현은 숨이 턱 막혔다.

“만나셨어요…?”

[그래, 쉽게 물러나진 않겠더라.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내가 말한 곳으로 가. 거기에 가면

일단 널 보호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온다. 수현은 몸을 돌렸고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나중에

다시 걸게요. 급하게 통화를 마치고 길을 건너는데 차이나타운이라고 적힌 현판이 나타

난다. 밤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고 골목을 따라 붉은 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여 들어가자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며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먹은 거라곤 생라면 하

나뿐이라 허기가 졌다. 이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서둘러 번화가를

빠져나와 길을 건너려는데 반대편에도 덩치들이 모여 있다 . 놀랍게도 그중에 아는 얼굴

이 하나 있었다.

수현은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태신이 왜 여기에….


김태신이 손짓을 하자 주변에 모여 있던 남자들이 두세 명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진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서울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에 있어. 심장이 미친

듯 쿵쿵거리고 손끝이 차게 식었다.

이대로라면 김영택이 알려 준 횟집으로 가기도 전에 잡힐 확률이 높다. 두리번대던 수현

의 눈에 근처 모텔이 눈에 띈다. 꽤 깔끔하고 규모가 큰 곳이었다. 우선 잠잠해질 때까지

몸을 피해 있는 게 낫겠다 싶어 그쪽으로 도망쳤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호텔 비슷하게 프런트도 갖춰져 있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수현을

맞이한다. 저번처럼 창문으로 도주할 것을 대비하여 2 층을 선택한 뒤 현금으로 모텔비

를 지급하고 키를 챙겨 위로 올라갔다.

204 호 앞에서 키를 대자 문이 열린다. 방이 꽤 넓고 깨끗했으며 공기 청정기와 스타일

러, 컴퓨터도 갖춰져 있었다.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창가로 가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살피는데 여전히 그들이 보인다.

절망하는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자정까지 버티다 새벽

에 횟집으로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젠 배고픔도 느껴지질 않는다. 대신 술이 당긴

다. 수현은 가방을 열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팩 소주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았다.

그것을 입에 물고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았다. 자세히 보니 카메라가 내장된 일체형이다.

이참에 영상으로 유서라도 작성해 놓고 떠날까 . 어이가 없어 웃다가 점차 표정이 굳었

다.

나 이제 정말 어떻게 하지….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을까….

멍하니 앉아 있던 수현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컴퓨터를 켜고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화면

에 초췌한 얼굴이 나온다. 기분이 이상하다. 김도한이 약을 먹이고 아는 놈들에게 던져

준 뒤로 오랫동안 카메라만 봐도 울렁거렸었다.

옛 기억에 씁쓸하게 웃는데 화면에 그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호범은 검은색 승용차를 노려봤다. 부산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사람을 되는대로 풀었

고 서울에서 김태신도 내려보내 부산항 일대를 이 잡듯 뒤지는 중이었지만 백수현은 쉽

게 잡히질 않았다.
강원도에서 만났을 때 범퍼에 위치 추적기를 부착했는데, 달아나는 와중에도 번호판을

새것으로 갈았고 추적기까지 떼어 내 다른 차에 부착했다 . 덕분에 이곳에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백수현을 잡으면 아예 몸속에 칩을 심어 버릴까 , 하는 생각까지 하

게 됐다. 옆에선 부하들이 창문을 깨고 안을 수색했는데 먹다 버린 건지 생라면이 보조

석에 뒹군다. 그걸 보니 또 화가 난다. 기왕 처먹는 거 제대로 처먹지.

그 외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박태준이 내비게이션을 켜 최종 목적지를 확인한

뒤 양호범에게 보고했다.

“수양횟집이라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린다 . 십여 명의 장정들이 일사

불란하게 차에 올라타며 흩어졌고 호범 역시 차에 타 주차장을 나왔다. 무겁게 가라앉았

던 하늘에서 어느덧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처음 도망치던 날도 눈이더니, 오늘도 눈이

다.

그땐 놓쳤지만, 오늘은 반드시 잡는다.

하, 숨을 내쉬자 뽀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자정이 넘은 시각 모텔에서 나온 수현은 김

영택이 알려 준 횟집으로 향했다. 만약에 대비해 가방과 여권은 모텔에 둔 채. 다행히 자

신을 쫓던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점퍼 앞을 여미며 걷는데 저 멀리 수양횟집이라고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규

모의 횟집은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영업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주변을 연신 경계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나온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검은색 앞치마를 한 남자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남자가 이쪽을 빤

히 응시한다. 수현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댔다.

막상 이곳에 도착하니 걱정이 된다. 안전한 거 맞겠지. 믿을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아니

라고 해도 이제 와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다. 지금은 김영택을 믿어야 한다. 감방에서

몇 년 동안 봐 왔지 않은가. 그가 얼마나 의리 있는 사람인지를.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담배를 물고 위아래로 훑는다.


“백수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허스키하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으니 남자가

사람 좋게 웃는다. 그 모습이 어딘가 김영택을 닮아 안심이 됐다. 그가 따라오라며 손짓

을 했고, 수현은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팔을 꺾으며 몸을 짓누른다 . 윽. 몸부림을 쳤으나 엄청

난 힘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붙들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가만있어, 새꺄.”

수현은 생각했다.

그럴 리 없는데. 김영택이 배신할 리가 없는데.

살려 달라고 입을 벌리는 순간 목에 따끔, 통증이 생긴다. 혈관을 타고 무언가 삽입되는

느낌이 생생하다. 약물의 정체를 알 것 같았으나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의식이 흐릿해

지며 다리가 풀린다. 그러다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굴이 반반하네. 약 먹여서 적당히 굴리다 치우면 안 되나 . 찾는 손님이 꽤 많겠는데. 아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알았어요, 알았어. 형님 성질은 여전하십니다. 소리가 희미하게 들

리는데 눈앞은 여전히 깜깜하다.

몸은 물에 젖은 빨랫감처럼 축 늘어졌고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뒤늦게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지며 시야가 확보된다. 건물 내부였는데 공사 중인지 곳곳에 철근과

자재들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흔들자 옆에 있던 남자가 몸을 낮추며 뺨을 툭, 친다.

“정신 들어? 너 약이 잘 받네.”

“야. 걔 건드리지 마. 형님이 그냥 던지래.”

남자는 수현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웃었다.

“아까워라. 팔면 돈 좀 벌겠는데.”

남자가 얼굴을 탁 놓더니 일어선다. 수현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고개를 간신히 추켜올

렸다. 눈앞엔 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이 있었고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빨

간 불꽃 너머로 하얗게 눈발이 날린다.


수현은 자신이 고층 건물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을 해야 하는데 혀가 굳어진 것

처럼 입을 벌릴 때마다 침이 새 나온다. 이번엔 가게 앞에서 수현을 마중 나왔던 사람이

다가온다.

“아가. 영택이 형님이 미안하다고 전해 달란다. 너무 원망 말라고.”

그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보고 수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항에도 아랑곳하

지 않고 주삿바늘로 팔 안쪽을 찌른다. 약 때문에 다시 몽롱해지고 몸이 허공에 붕 뜬 느

낌이 든다.

“너는 약에 취해서 스스로 떨어져 죽은 거야.”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묶고 있던 줄이 풀리고 장정 둘이 수현을 양쪽에서 잡

아 일으킨다.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내어 벗어나려 했지만, 두 다리로 서는 것조차 힘겨웠

다.

질질 끌려 앞쪽으로 가니 부산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반짝이는 불빛들은 마치 크리스

마스트리에 붙어 있는 꼬마전구 같았다. 힘겹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흘러나

온다. 나는 왜 매번 병신처럼 당할까. 양호범에게 솔직히 털어놨어야 했나. 살려 달라고

빌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울면서 매달렸다면… 그랬다면….

“잘 가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등을 떠민다. 중심을 잃고 상체가 앞으로 무너졌지만 살

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 하는데 남자가 가슴을 탁 밀친다 . 그대

로 몸이 아래로 추락했고 수현은 죽을힘을 다해 외벽에 튀어나온 철근을 붙잡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건물 바깥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황이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위를 쳐다보는데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남자가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은근 독하네.”

수현은 그를 향해 간절하게 외쳤다.

“살…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른다. 그럴수록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생겨난다.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남자는 쭈그려 앉아 수현의 손등에 담뱃불을 지진다 .

치익, 살이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수현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며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형님! 살고 싶어요! 저 죽기 싫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요!”

눈물로 인해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살고 싶어. 제발. 누구든 살려 주세요. 부처님 하나님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고생만 존나게 하고. 무슨 팔자가 이래. 처음엔 애원하며 매달

렸고 이후에는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씨발!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알아! 나 죽으면 동영상 터지고 너희 다 좆되는 거야 ! 나 혼

자 안 죽어! 서민준! 양 회장! 김영택! 이 개새끼들! 가만 안 둬!”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악을 쓰자 남자가 낄낄 웃는다 .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 수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한계에 다다르고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주마등처럼 여러

사람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행복한 기억은 없고 죄다 배신했던 놈들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양호범이 있었다. 다른

놈들은 죽일 듯 미웠지만 양호범은 아니었다. 저수지에서 왜 그랬을까. 깨진 얼음 위를

걸어서 왜 나한테 오려고 했을까. 혹시 내가 물에 빠질까 걱정했던 건 아닐까. 뒤늦게 궁

금하였으나 이젠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엉엉 우는데 손아귀에 힘이 풀리며 미끄러진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 나

이제 엄마 만나러 가요. 멀쩡한 모습이 아니어도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 그런데 손이 완

전히 떨어져 나가는 순간 남자가 팔목을 잡아챈다.

헉. 숨을 멈추고 눈을 뜨는데 까마득한 아래가 내려다보인다 . 몸이 아직 매달려 있는 것

을 확인하고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어째서…?

팔을 잡은 이는 조금 전 그 남자가 아니다.

시야가 차츰 또렷해진다.

맹수의 눈빛을 한 사내가 얼굴에 피칠을 하고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잡았다, 백수현.”

씨발,
진짜 양호범이다.
72 화

죽음 앞에서 떠올린 얼굴이었는데, 막상 실제로 나타나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

피를 얼굴에 묻힌 얼굴은 마치 야차 같았다. 팔을 잡혀 끌어 올려진 뒤 수현은 도저히 일

어서지 못하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추위 탓인지, 약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양호범을 만난 두려움 때문인지 몸이 쉬지 않

고 떨린다. 뒤늦게야 자신이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엉망이 된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양호범의 부하들이 보디백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을 물건처럼 담고 있었다. 살아서 벗어나려는 누군가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더

니 아무렇지 않게 지퍼를 채운다. 그 살벌한 풍경에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코앞에 있는 검은색 구두가 신경에 거슬렸으나 고개를 들어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달칵, 치익, 라이터의 부싯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시선을 위로 움직였다.

양호범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는 몸을 굽히며 손을 뻗었고 수현은 저도 모르게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분명 구둣발이 날아오거나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 예상했는데… . 양호범의 표정이 어딘

가 이상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수현의 손을 잡아 담뱃불로 지진 상처를 확인

했다. 이어서 그의 부하가 손에 커다란 담요를 들고 와서 건네줬다 . 호범은 그것을 수현

의 몸에 두르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수현의 입에 물려 준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으나 기운이 모두 빠져 연기를 빨아들이는 행위조

차 힘겨웠다. 물고만 있으니 호범이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과 머리를 어루만진다.

“씨발. 꼴이 이게….”
화가 난 듯한 말투였으나 수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살았다. 양호범이 적어도 나를 죽

이진 않겠구나.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호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담요를 머리까

지 뒤집어씌우고 몸을 밀착했다.

스킨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온다. 그는 수현을 가볍게 안았다. 물고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

고, 바닥 곳곳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 그의 남은 부하들은 핏자국을

지우고 아비규환이 된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양호범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담요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하니 잠이 쏟아진다.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러다 양호범

이 빡쳐서 진짜로 죽일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비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의식은 멀어져갔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중간에 몇 번 깨어나긴 했

는데 모든 것이 불분명하여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따뜻한 무언가 이마에

닿았다가 뺨으로 옮겨 간다. 열은 좀 내렸네. 여자의 목소리. 겨우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여자는 예전에 양호범의 집에서 봤던 강원댁이다 . 수현은 자신의 손등

에 꽂힌 링거를 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자세를 바꿨다 . 그때 발목에 무언가

철컥, 하고 소리를 낸다. 자리에서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는 동시에 얼굴이 일그

러졌다.

“이게….”

더 물을 것도 없이 강원댁이 끼어들었다.

“다리 몽둥이 자르지 않을 걸 다행으로 알아.”

수현이 놀라서 쳐다보자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는다.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어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짐승도 아니고 발에 족쇄를… . 발을 움직일 때마다 쇠로 된 줄

이 소리를 낸다. 화장실은 어떻게 가라고 묶어 놨어. 그러다 자신의 몸이 씻겨 있고 옷도

갈아입혀 진 걸 알아차렸다. 혹시 강원댁이 그랬나, 싶어 쳐다봤더니 그녀가 웃는다.

“대표님이 직접 씻기고 갈아입혔어요. 엄청 깔끔떠는 사람인데 별일이라고 생각했죠.”

아, 바지에 오줌쌌는데… . 정신이 말짱해지니 수치스러움이 몰려온다. 그 와중에 머릿속

에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연실색한 수현은 주변을 정리하는 강원댁을 황급히

불렀다.

“여, 여사님. 죄송한데 휴대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전화요?”

“예, 제가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요.”

강원댁이 앞치마에서 전화를 빼 건네줬고 수현은 그것을 받아 즉시 인터넷 창을 열었다.

기사를 검색하고 이것저것 살피는데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만약

을 대비해 동영상을 찍었고 자신의 SNS 에 시간에 맞춰 올라가게끔 만들어 놨는데….

아이디를 입력하고 계정에 들어가니 업로드했던 동영상이 싹 사라졌다 . 꿈을 꾼 건가.

당시 소주를 두 팩 마시긴 했어도 취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강원

댁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동영상은 그렇다 치고 불상과 다이아몬드를 넣어 둔 가방을 모텔에 보관해 뒀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걸까. 다른 사람이 가져가진 않았겠지. 지금이라도 모텔에 연락해 사장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다 수현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족쇄를 바라봤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이 새끼 이상한 취향 있는 거 아니야. 발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고 무겁다.

수현은 강원댁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 답답해서 움직이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그녀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로 간다. 열쇠를 찾는 건가 했는데 밖에서 휠체어

를 끌고 온다. 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 이번엔 침대로 연결


된 족쇄의 끝부분에 카드 키를 대자 철컥 소리와 함께 분리된다 . 열쇠가 아니라 카드 키

로 작동한다는 것에 1 차로 놀랐고 그녀가 그걸 휠체어에 연결하는 것에 2 차로 놀랐다.

“뭐, 뭐 하세요?”

“당분간 이거 타고 움직이세요. 휠체어 좋아하신다면서요.”

“…….”

“대표님이 그러는데 별명이 휠체어 귀신이라고….”

“…….”

수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발목에 채워진 장치를 바라봤다 . 처음엔 쇠로 만든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이다. 그런데 모양이 낯이 익다. 이걸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 뒤늦게 성범죄자들이 발에 차고 다니는 그것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

는 걸 깨닫고 불쾌해져 인상을 찌푸렸다.

강원댁은 속도 모르고 사람 좋게 웃었다.

“휠체어에 타는 거 도와줄까요?”

“아니에요…. 갑자기 침대가 편해졌어요.”

그녀는 군말 없이 자물쇠를 도로 침대에 연결한 뒤 음식을 준비해 온다며 밖으로 나갔

다. 열린 문틈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눈에 띈다. 잠깐이었지만 위협적인 체구와

눈빛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보니 저녁 7 시다. 양호범은 이곳에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정신이

차려지니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 살려 달라고 울며 애원을 하던

모습과 죽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양호범.

믿었던 김영택마저 나를 배신했고 가장 위험한 인물일 거라고 여겼던 양호범이 나를 구

했다. 왜… . 어째서… . 생각이 많아지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담뱃불로 지져진 손등엔 정

사각형의 살 색 밴드가 붙어 있었다. 끝을 잡아당겨 떼어 내니 살이 짓물러 통증이 생긴

다.
원래대로 붙인 뒤 몸을 웅크리고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또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결에 강원댁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으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 더 잔다는

말에 그녀는 한 번 더 음식을 권했지만 수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부산까지 가서 모셔 와 놓고 왜 여기서 청승이야?”

호범은 대꾸하는 대신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비웠다. 어젯밤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평소보다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다. 김우영은 잔을 들고 맞은편으로 가서 앉아 호범의 표

정을 관찰했다. 두 눈에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뜻대로 안 돼?”

호범이 조소했다. 뜻대로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처음 백수현을 쫓을 때는 잡히면 죽

여 버리리라 마음먹었었다. 못해도 다리는 부러트려 놓겠다고. 그러다 저수지에서 백수

현을 맞닥뜨리는 순간 부질없는 마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음이 갈라지고 까닥하면 차가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차가 쏜살같이 멀어지고 혼자 저수지 한가운데 서 있을 때 비참함보단 백수현

이 무사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만나면 말하려고 했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고. 도망가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도와주겠다고. 그러나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던 백수현을 구해

주며 또다시 깨닫고 말았다. 백수현에게 양호범은 다른 놈들과 다를 바 없단 걸.

서울로 오는 내내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자신을 두려워하던 놈들

과 같은 눈빛, 같은 표정. 충격을 받은 건 아니다. 그동안 행실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

해가 된다. 그런데도 열이 받고 억울한 심정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술을 더 마시려는데 전화가 온다. 강원댁이다. 전화를 받자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밥을 먹지 않고 잠만 잔다고, 아무래도 호범이 와서 직접 보는 게 낫지 않겠

냐고. 호범은 한숨과 함께 말을 툭 내뱉었다.

“그냥 두세요. 굶어 죽든 말든.”


전화를 끊고 나서 술을 먹는데 김우영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 호범이 그런 김우영을 노려보다 술병을 들었다. 잔을 채웠지만 더는 마실 기분

이 아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기자 우영이 올려다보며 웃는다.

“거봐, 갈 거면서.”

입 다물라고 경고하고서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마침 매

니저 이윤철이 지나간다. 매니저를 부르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

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가까이서 술 냄새가 났을 법한데도 매니저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말이 선뜻 나

오지 않았다. 이윤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호범은 이를 한번 꽉 물었다

뗀 다음 입을 열었다.

“뭐, 좋아합니까?”

이윤철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저, 저요?”

“아니, 말고. 백수현이 좋아하는 음식.”


73 화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수현은 실내 공기가 몇 시간 전과 다르게 무거워졌음을 느끼고 몸

을 뒤척였다. 작은 수면 등이 켜져 있는 벽 쪽에 시커먼 그림자가 커다랗게 생겼다. 흠칫

하여 보다가 양호범인 것을 알아채고 저도 모르게 재빨리 눈을 감았다. 조용하다.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뜨고 보니 양호범이 1 인용 소파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겁이 나 재

빨리 눈을 감고서 쥐 죽은 듯 있었다.

“다 잤어요?”

끝까지 자는 척을 했더니 호범이 움직이는지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침실에

등이 켜지며 대낮처럼 환해진다. 수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어서 발소리가 가

까워지다가 멈춘다.

“열받게 하지 말고 일어나지.”

수현은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머쓱하게 웃었다.

“와, 왔어?”

호범은 서늘한 표정으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수현은 안절부절못하며 핑계를

댔다. 내가 너 일부러 엿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야. 너희 할아버지가 서민준하고 짜고 나

죽이라고 시켰다는 거 알아. 그래서 도망쳤어.

“자길 죽인다는데 남아 있으면 그게 미친놈이지…. 안 그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얘길 하는데 호범이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주워 든다. 수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수현이 모텔에 두고 온 가방이다. 호범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


방을 열더니 불상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혹여 그가 그걸 던지기라도 할까 봐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야야, 그거 막 그렇게,”

호범은 불상을 든 채 흔들었다.

“이것 때문에 도망친 건 아니고?”

수현은 침묵했다. 죽을까 봐 도망친 거긴 하지만 불상도 이유가 되긴 했다. 잠잠해지면

팔아서 나중에 한몫 거하게 챙기려는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걸 가지고 있으면 양

회장이 부친인 백광무를 죽이지 못하리란 생각도 조금은 했다.

호범은 불상을 옆에도 두고 이번엔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아니면 이거?”

젠장. 내 다이아몬드. 수현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고 양호범은 한숨을 쉬더니 의자

를 끌어와 앞에 앉았다. 수현의 시선은 그를 비켜 나가 테이블에 놓인 불상과 다이아몬

드에 닿고 있었다. 이렇게 눈앞에서 팔자 필 기회가 날아가는구나.

불상을 쳐다보고 있으니 호범이 얼굴을 잡아 저를 보게 한다. 눈이 마주쳤고 수현은 또

죄지은 놈처럼 시선을 피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발목을 묶어 놓은 거 보고 미친 변태 새

끼라고 욕을 퍼부으려고 했는데 막상 만나니 무섭다. 이제라도 마음이 바뀌어 저를 없애

려 들까 봐.

“내가, 무서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하여 쳐다보니 양호범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 어젯밤 건물

위에서 봤던 그 얼굴. 무엇 때문에 화나고 속상한 사람처럼 굴어?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양

호범 입술이 가까이 다가온다. 순식간에 혀가 안으로 침범하여 헤집었다 . 진한 알코올

냄새에 수현은 그의 어깨를 붙들고 밀쳐냈지만 양호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 정신없이 입술이 비벼지다 떨어져 나가고 호범이 재차 물었다.

“대답해. 내가 무서워?”

목소리가 살짝 격앙됐다. 수현은 숨을 몰아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시 키스

가 이어지고 호범이 침대 위로 올라온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거슬렸다. 키스하던 그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를 세워 목을 물길래 몸을 움츠리

자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진다. 손이 차다.

“잠깐, 양 사장, 흣,”

셔츠를 걷고 입으로 젖꼭지를 문다. 앞니로 긁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슴을 애

무하며 그는 손을 수현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어 좆을 쥐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수현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허리를 뒤틀었다. 잠깐. 멈추라고 애원

을 하는데 바지가 벗겨져 내려간다.

철컥, 눈 깜짝할 새 발을 묶고 있던 족쇄가 풀려나가고 호범은 바지를 옆으로 던진 뒤 그

대로 수현의 가랑이를 벌렸다. 설마 이대로 삽입하려는 건가. 나는 그럴 만한 몸 상태가

아닌데….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해도 이 인간은 들어 먹지 않을 거다 . 처음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어!”

수현은 놀라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어 아흑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양호범이 두 다리

를 붙잡아 벌리고 얼굴을 그사이에 파묻는다. 좆을 입으로 빨아 준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하여 팔을 휘저었다.

“뭐, 뭐하는 거야?”

쾌감이 머리를 후려쳤다. 양호범 같은 놈이 제 좆을 물고 빨아 주다니. 전에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현실은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아찔하다 . 춥, 춥 머리가 앞뒤로 움직일 때

마다 야릇한 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사정감이 몰려오기 시작하여 호범을 밀어냈다.

“그, 그만, 나 쌀, 아 씹,”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양호범의 입에 정액을 울컥, 쏟아 냈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고

르는데 양호범이 좆을 감싸고 남은 정액을 쥐어짜듯 쭉 밀어 올려 귀두 끝에 맺힌 걸 쪽

쪽 빤다.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데다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수현은 자지러지며 몸부림을 쳤다 .

양호범이 위로 올라와 얼굴 옆으로 손을 짚고 빤히 내려다봤다. 입술 옆에 정액이 묻은

걸 알기는 하는 걸까.
“말해 봐. 지금도 내가 무서워?”

아니. 존나 섹시해. 개새끼야.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당황하여 벙긋거리는데 집요하게 또 묻는다 . 수현은 고개를 저은 뒤 손을 뻗어 호범의

입술을 닦아 줬다. 정액 묻었어. 호범이 눈을 맞추며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누

른다. 낯간지러운 행동에 수현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호범은 손을 놓아준 뒤 침대 아래로 내려갔고 곧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왔다. 어색하여

그냥 달라고 했는데 기어코 다리를 벌려 구석구석 닦는다. 더 반항하려다 지은 죄가 있

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다.

다 씻긴 후에는 손수 바지까지 입혀 주더니 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안는다. 팔

로 목을 껴안았는데 스킨 냄새와 살냄새가 풍겨 온다. 방금 사정을 했음에도 욕정이 들

끓기 시작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호범은 수현은 거실로 데리고 나와 식탁 앞에 앉혀 뒀다 . 아까까지 있

던 직원들은 어디 가고 집 안엔 아무도 없이 썰렁하다.

그다음 무언가를 데워 가지고 왔다. 흰죽이었는데 쌀만 들어간 건 아닌지 코끝으로 고소

한 냄새가 스며든다. 사실 계속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은 상황이었다. 입에 침

이 먼저 고인다. 수저를 건네주길래 그것을 받아서 죽을 한 입 떴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속부터 채워요. 배고팠을 거 아니야.”

먹으면서도 눈치를 살폈다. 잡혀 왔으면 적어도 어디 한군데는 부러트릴 줄 알았는데 다

짜고짜 좆도 빨아 주고 잘해 주니까 좋으면서도 의심스럽다. 더불어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양호범이 모텔에서 가방을 가져온 거로 보아 동영상을 발견하고 지웠을 확

률도 높다.

“혹시… 동영상 네가 처리했어?”

호범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군. 수현은 입에 있던 죽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잘했어….”

어차피 홧김에 녹화된 영상이다. 중간엔 우느라 횡설수설했고, 인터넷에 공개됐어도 서

민준에게 타격이 될 리가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 관심받고 싶어서 지랄한다고 생각하겠

지. 힘이 없는 진실은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거짓으로 바뀌기도 하니까.

조금 전까지 고소하던 죽이 이젠 쓰다.

더는 먹지 못하고 있는데 양호범이 불쑥 질문을 한다.

“근데 내 얘긴 왜 안 했어요?”

수현이 수저를 든 채 호범을 응시했다.

“‘양 회장 하고 서민준하고 짜고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렇게 말했잖아. 근데 왜 내 얘

긴 쏙 빼놨냐고.”

가만히 있던 수현은 죽 대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 싶지 않았어.”

“왜.”

“그냥….”

“그러니까 왜.”

“이유 없는데.”

열받아서 식탁을 내리칠 줄 알았는데 양호범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 동시에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두리번대던 수현의 눈에 싱크대에 있는 쇼핑백이 들어온다. 겉면

에는 호텔 근처 매니저와 자주 가던 치킨 가게 상호가 적혀 있었다.

수현은 치킨에서 시선을 거두고 양호범을 바라봤다.

“저거… 네가 사 왔어?”

“응.”

“왜.”

“나도 이유 없어. 그냥.”


더 물으려다 관뒀더니 이번엔 치킨을 가져와 뜯어서 앞에 놓아 준다. 그걸 보며 수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

“치킨은 콜라하고 먹어야 하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장고에서 콜라도 가져온다. 그러더니 비닐장갑을 끼고 뼈에 붙은

살을 발라 접시에 놓아 준다. 맙소사.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데 … . 수현은 접시

에 쌓이는 살점과 호범을 번갈아 보며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정한 행동과는

다르게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74 화

거품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씻고서 밖으로 나오는데 몸이 노곤노곤하

게 풀린다.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이 꽤 많이 자라 눈을 찔렀다 . 도망치기 전에 잘랐어야

했는데. 내일은 나가서 머리를 자를까.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난 다음에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계속

도망치며 쪽잠을 자느라 힘들었는데 오래간만에 푹 잤더니 살 것 같았다. 물론 어제 건

물 벽에 매달려 기를 쓰느라 온몸이 다 아프긴 했지만….

넓은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러다니는데 발아래 침대에 묶어 둔 족쇄가 눈에 띈다. 아무

생각 없이 발로 그것을 툭툭 건드리다가 입술에 정액을 묻히고 있던 양호범 얼굴이 떠올

랐다. 급격히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며 피가 쏠린다.

젠장.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 . 근데 이 인간이 묘하게 달라졌

단 말이지. 혹시 내가 도망친 사이 심경의 변화라도 겪었나. 도무지 속을 모르겠네. 한편

으로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제까지 죽을 뻔하던 놈이 이젠 발정 난 짐승처럼 섹스 생각

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테이블을 쳐다봤다. 거기엔 양호범에게 받은 새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휴대폰을 또 사 준 거 보면 죽일 생각은 분명 아닌데 … . 그럼 나를 죽이지

않기로 양 회장하고 이미 얘기가 끝난 건가. 서민준은? 서민준은 또 어쩌고?

머리가 복잡하다. 우선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침실 밖으로 나오는데 양호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을 둘러보던 수현은

자연스럽게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고 잠긴 문을 벌컥 여는데 바로 코앞에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서 있다.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서 남자를 바라봤다. 집이 너무 조용해 사람이 없는 줄 알

았는데 … . 집 밖은 전과 다르게 환했고, 못 보던 장정들이 여럿 지키고 서 있었다. 앞에

있던 남자가 수현을 보며 물었다.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남자가 담배를 꺼내 건네준다. 그게 아니라 나가서 피우고 싶단 소리였는데 . 난감하게

웃었는데도 남자는 비켜날 생각을 않는다. 뒤늦게 남자가 자신을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

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달아나지 못하게 막는 거겠지.

양호범이 죽이지 않을 거란 기대가 살짝 무너졌다.

“담배는 안에서 피우셔도 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영혼 없는 미소를 짓고 나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

다. 한숨이 나온다. 설마 내일 아침 나를 본가로 끌고 갈 작정인가. 집도 넓은데 물어볼

사람은 하나 보이지도 않고.

답답한 마음에 집 안을 뒤지다 2 층으로 올라갔는데 제일 끝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가까이가 노크하려고 손을 드는데 말소리가 들려온다. 수현은 문에 가까이 귀를 댔다.

[다 정리해.]

“…….”

[응, 죽여.]

서늘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망설임 끝에 똑똑 노크를 하자 말소리가 끊긴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창가에 서서 통화를 하던 양호범이 돌아본다. 일하던 중인지 노트북이 펼쳐

져 있고 옆에는 서류도 꽤 쌓여 있었다. 맨날 사람만 패고 다닐 것 같이 생겨서 회사원처

럼 서류를 쌓아 놓고 일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되질 않는다.

“안 잤어요?”
“어…. 씻고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와.”

“재워 달라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집에서 담배 피워도 돼?”

“새삼스럽게 뭘 물어요. 전에도 피웠으면서.”

“그랬나. 왜 기억이 없지.”

입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시선은 양호범의 몸을 훑었다 . 적당히 풀어 헤친 셔츠와

근육 때문에 팽팽하게 당겨진 가슴 부위가 참으로 바람직하다. 일하느라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팔뚝도.

씨발. 백수현. 정신 차려. 이거 며칠 굶었다고 아주 발정 난 개가 됐네.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한쪽에 불상이 놓여 있다. 조금 전 양호범을 볼

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눈빛을 번뜩이자 양호

범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책상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다.

수현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안 훔쳐 가.”

“도둑놈 말을 어떻게 믿어.”

수현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저 불상의 가치가 궁금해졌다 . 양 회장이 그토록 찾아다닌

거 보면 꽤 비싼 물건이란 뜻인데….

“양 사장.”

“응.”

“그거 비싼 거야? 한 50 억쯤 하나?”

은근슬쩍 떠봤더니 양호범이 코웃음을 친다. 하긴 그렇게 비싼 건 아니겠지. 겉은 군데

군데 까지고 색도 바래고 부처님 표정도 영 비웃는 거 같아 개인적으로 이게 그만한 가

치가 있나 사실 볼 때마다 의구심이 들었었다.

순간 양호범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한다.

“열 배.”

“어?”
“50 억의 열 배라고.”

열 배면… ?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고 당장 달려들 것처럼 불상을

쳐다봤다. 열 배면 오, 오백억? 세상에 그럼 내가 지금까지 수백억짜리 불상을 가방에 쑤

셔 넣고 도망 다녔단 말이야? 이 귀하디귀한 걸!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뻗

는데 양호범이 손등을 탁, 친다. 그 와중에도 상처가 있는 곳을 교묘하게 피해서 때렸다.

아, 맞은 곳을 잡고 눈을 흘기자 양호범이 한마디 한다.

“아쉬워요?”

“말이라고 해? 존나 아쉽지. 오백억인 줄 알았으면 죽을힘을 다해 튀는 건데. 씨발, 동영

상은 왜 찍혀 가지고….”

욱해서 진심을 술술 털어놨더니 양호범이 비웃는다.

“왜. 잘 어울리던데. 이참에 아예 유튜버로 데뷔해요. 활동명 휠체어 귀신 어때? 내가 게

스트도 빵빵하게 지원해 줄게.”

놀리는 바람에 수현은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도 눈은 여전히 불상에 꽂혔다 . 한편으로는

부친인 백광무가 이렇게 비싼 걸 훔쳤다고 생각하니 경멸스럽던 인간이 조금은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서 있자 호범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더니 문

쪽으로 떠민다.

“더 할 말 없으면 가서 자요. 나 일해야 돼.”

“이 밤중에?”

“도망간 누구 잡으러 다니느라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거든.”

등 뒤로 바싹 붙으니 스킨 냄새가 풍긴다. 억누르고 있던 욕정이 다시 솟구쳤다. 슬쩍 고

개를 돌려 쳐다봤는데, 양호범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어 내려다본다 . 눈이 마주쳤고,

혹시나 하여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몸이 앞으로 떠밀린다.

“돌아온 거 환영해요. 물론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하고 서재 밖으로 완전히 밀어낸 뒤 싱긋 웃는다. 아침에 봐요. 탁, 문이 미련 없

이 닫혔고 얼결에 밖으로 쫓겨난 수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잡혀 오면


양호범이 눈이 돌아서 죽이거나 아니면 죽을 때까지 박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거라고 생

각했는데…. 이건 그사이 약이라도 처먹은 건지 쓸데없이 배려심이 늘어났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 그럼 그렇지, 네

가…. 수현은 보란 듯 눈웃음을 치며 최대한 예쁘게 미소 지었다.

“왜?”

“손에 밴드 갈아요. 잊어버리지 말고.”

“아.”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을 닫으려고 하길래 황급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막았다.

“야, 빨아 줘.”

양호범의 눈썹이 까닥 올라갔고 수현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손등에 밴드 붙여 달라고. 나는 손이 안 닿아.”

호범의 시선이 담뱃불에 지져진 오른손으로 옮겨 간다. 이 무슨 병신같은 소린가. 손이

안 닿다니. 수현은 꿋꿋하게 속상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사실 나, 잠이 안 와. 무섭기도 하고… . 어제 그 기억이 자꾸 나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

고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니까.”

만져 볼래? 손을 잡아끌어 왼쪽 가슴에 대고 꾹 눌렀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어 수현은 에

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양호범의 목을 끌어안고 기습적으로 입술을 덮치며 안으로 밀

고 들어갔다. 양호범은 순순히 받아 주었고 이내 서재 문이 닫혔다.

쭙,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수현은 가쁜 숨을 내쉬며 호범을 올려다봤다 . 확

실히 태도뿐 아니라 눈빛도 전과 달라졌다. 무엇이 널 변하게 했을까. 수현은 목을 끌어

안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양 사장.”

“응.”

“또 빨아 봐. 아까처럼.”
말하면서도 설마 했다. 닥치고 잠이나 처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쳐다보더니 키스

를 한다. 그러고 나서 손을 아래로 뻗어 수현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는다 . 좆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수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표정이 풀어졌다.

입술을 떨어트리고 이번엔 목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를 세워 물려고 하길래 긴장하여 움

츠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겁먹은 걸 들킨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려던 찰나

호범이 안으려고 한다.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아 수현은 그 팔을 잡아 제지했다.

“아니, 여기서 하라고. 무릎 꿇고.”

매서운 삼백안의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본다 . 순간 움찔하였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양호범이 나를….

“싫으면 말고….”

한발 물러섰더니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는다 . 체격이 배나 차이 나는 놈이 코앞

에서 이러고 있으니 희열이 느껴졌다. 이래서 옛날 왕들이 그렇게 신하들 무릎을 꿇렸나

보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고 있는데 양호범이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다.

수현은 호범의 뒤통수를 잡고 그대로 눌러 뺨에 좆을 문질렀다 . 사나운 호랑이의 눈이

위를 쳐다본다. 날카로운 눈빛과는 달리 몸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히 따른다 . 수현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티 나지 않게 감추며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이 새끼 이거, 나한테 빠졌구나.


75 화

호범은 수현을 서재 책상에 눕혀 다리를 벌리고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백수현 좆이 양호범 입으로 들락이는 장면이라니. 가끔 원나잇을

하면 상대방들은 수현에게 오럴이 서툴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얼굴이 잘생겨 빨아 주

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양호범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이가 닿고 서툴긴 했으나 잘생긴 얼굴이 덤으로 있으니

눈요기가 된다. 그러다 그의 오른쪽 눈썹 끝에 작은 흉터를 발견했다. 첫 만남에 찢긴 상

처. 당시를 회상하니 감회가 새롭다. 양호범이 나를 개 패듯 팰 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

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양호범이 눈을 들어 위를 본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황급히 머리를 떼어 내려고 하는데

안쪽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가슴을 들썩이던 수현은 곧 호범의 입에 정액을 뿜었

다. 파정을 맞은 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호범이 입에 머금고 있던 정액은 손

에 뱉어 수현의 구멍에 대고 문지른다.

두 다리를 모아 한쪽 어깨에 걸쳐서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주름진 입구를 꾹꾹 눌러 가

며 풀어 줬다. 이어서 손가락 두 개가 구멍을 벌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감각에 수현은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비틀었다.

“따뜻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을 돌려 안을 문지른다. 방금 사정의 여운도 잊고 또다시 발기

를 시작했다. 넣었다 뺐다 하며 안을 쑤실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짜고짜 쑤시던

전과 다르게 꽤 정성 들여 뒤를 풀어 줬지만, 오늘따라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서 박으라고 옷깃을 잡아당기며 보채자 피식 웃고 손가락을 쑥 빼낸다. 드디어 박는구

나. 이어질 쾌감을 알기에 벌써 몸이 뜨거워졌다. 호범은 수현의 다리를 책상 끄트머리

쪽으로 잡아당겼다.

달칵, 지이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양다리를 옆으로 벌려 세우고 구멍

이 더 잘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지퍼까지 내린 양호범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너 뭐 해?”

호범은 지퍼를 도로 채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요.”

어이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고분고분하게 말도 잘 듣고 무릎도 꿇고 좆도 빨아 주고 간

쓸개 다 빼 줄 것처럼 하더니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이 새끼 혹시 나

하고 밀당하자는 건가. 노려보던 수현은 누운 채로 발끝으로 호범의 가랑이를 꾹 눌렀

다. 아니나 달라 팽팽할 정도로 섰다.

“하기 싫다면서 얘는 커졌는데?”

“나는 원래 커요.”

“…….”

“누구하고는 달라서.”

이 새끼가. 나 안 작아. 평균 사이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데 정말 할 마음이 없

는 건지 소파로 가서는 털썩 앉아서 담배를 문다 . 어이가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구멍이

안쓰러울 정도로 놈의 태도는 단호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는데 이제 와서 관두겠다고? 멱살을 잡아서 끌어다 눕히고 위에

올라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 양호범이 단단히 빠졌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라 먼저 질척대는 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했다. 인상을 쓰고 쳐다보니 양호

범이 가까이 와서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려 준다.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길래 그 손을 '탁' 쳤다.

“장난해? 만지지 마.”


“하고 싶어요?”

양호범이 아니라 자신이 안달 내는 기분이라 짜증이 난다. 주도권을 빼앗긴 거 같아 빈

정거리며 대꾸했다.

“아니. 네 입에 쌌으니까 됐어. 그것도 영 별로였지만.”

“그런 것치곤 황홀해 죽던데.”

“웃기시네. 그거 다 연기야. 솔직히 말할까. 여태 내 좆 빨아 준 놈 중에 네가 제일 별로

야.”

“빨아 준 놈 누구? 사진 보니 자지는 내가 젤 크던데.”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현은 입을 벌렸다. 네가 사진을 어떻게 봤느냐고 따져 물으려다 뒤

늦게 양호범이 자신의 SNS 에서 동영상을 삭제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 말인즉슨 비밀번

호를 알고 접속했단 얘기고 거기에는 그동안 원나잇으로 만난 남자들과 주고받은 대화

와 사진들이 수두룩했다. 낯뜨거운 기억들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희게 질려 저도 모르게

버럭 쏘아붙였다.

“너, 너! 다 봤어?”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이거 미친놈이네.”

“미친놈은 백수현이지. 얼굴도 모르는 놈들한테 다리 벌린 사진도 보냈으면서.”

“…….”

“뭐라고 적었더라? 셋도 가능? 씨발, 기차놀이 어쩌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

“궁금해서 그러는데 엉덩이하고 젖꼭지 보정은 왜 했어요?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데.”

비꼬는 거야, 칭찬이야? 수치스러워 무덤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분이 팍 상하여 책상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는데 양호범이 가로막는다 .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봤더니 조금 더 가까이 밀착한다.

“왜. 아직도 놀릴 거리가 남았냐.”

열받아 쏘아붙였더니 빨갛게 익은 수현의 귓불을 만지며 웃는다.


“이젠 그런 거 하지 마요.”

“그런 거, 뭐.”

“헤프게 구는 거.”

“꺼져! 네가 무슨 상관인데.”

“경고하는데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둬.”

협박에 수현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시네. 나 잡아 왔을 때도 손 하나 까닥 못 하고 발만 묶어 둔 주제에.”

그 말에 호범이 삐딱하게 쳐다보더니 한쪽으로 가서 서랍을 연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왔다. 그걸 본 수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쇠톱이었는데, 군데군데 핏자국으로 추정

되는 것이 묻어 있었다. 호범은 톱날의 끝을 손톱으로 긁어 튕겼다.

“사실 난 어제 정말 썰어 버리고 싶었는데, 강원댁이 펄펄 뛰면서 말리더라고.”

“…….”

“평생 미움받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말래.”

수현은 비웃었다.

“구라치지 마.”

호범이 수현의 오른쪽 발목을 쥐고 위로 들었다 . 균형을 잃고 넘어가려고 하자 허리를

받쳐 안더니 눈으로 발목을 가리킨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발목에 작게 생채기가 났

다. 살짝 긁힌 자국 같았는데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선다.

호범은 다리를 놓아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자극하지 말아요. 이번엔 참았지만, 다음엔 아닐 수도 있어.”

쇠톱과 놈을 번갈아 보며 수현은 입만 벙긋댔다. 씨발, 농담이 아닌 거 같아 더 무섭다.

그러자 호범이 톱을 옆으로 치우더니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다정하게 시선을 맞춘다.

“약속해요.”

“내, 내가 왜. 네가 뭐라고….”

“해요, 얼른.”

“하면?”
“마저 해 줄게.”

수현은 입을 벙긋댔다. 존나 고맙다. 난 또 뭐 거창한 거라도 주는 줄 알았네. 꺼지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몸은 자꾸 달아오르고, 해 달라고 하자니 자존심은 또 상하고.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호범이 뺨을 만지며 볼을 슬쩍 꼬집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수현은 눈을 피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았어….”

“못 들었어요.”

“알았다고, 개새끼야.”

욕을 했더니 입꼬리가 올라가며 수현의 허리 아래를 감싸 번쩍 들어 올린다. 수현은 몸

의 균형이 흐트러져 황급히 양호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의를 벗은 채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안겨 있는데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애널로 뭉툭한 것이 와 닿는다 . 이미 젖어 있던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귀두의 압박감에 수현은 호범의 목에 매달린 채로 신음을 냈다. 몸이 아래로 살짝 미끄

러져 내려가며 좆이 끝까지 꽉 찼다. 호범은 방향을 틀어 서재를 나섰고 갑작스러운 행

동에 수현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어디, 아!”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안에서 좆이 전립선 근처를 짓뭉갠다 . 아아, 죽을 것 같아. 목에 얼

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더니 호범이 나지막하게 목을 울리며 웃는다.

“왜 그렇게 끙끙거려요?”

“그냥, 하, 여기서 하면 안 돼? 움직이니까, 읏….”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흥분하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엉덩이

를 더 조이니 호범이 이를 까득 물면서 욕을 씹어 내뱉는다. 거실로 내려왔는데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마당에서 개를 끌고 다니며 경비를 서는 직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현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양 사장. 밖에, 읏, 사람….”

“안 보여요.”
그 말을 증명하듯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거실을 가로질러 침

실로 들어가자마자 호범은 수현을 침대에 눕히며 곧바로 위로 올라탄다. 여전히 목을 끌

어안은 채로 허리를 움직이는데 들어왔다 나가는 움직임이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수현은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며 양호범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의 셔츠를 하나씩 풀고

어깨 뒤로 넘기니 단단한 근육질 몸이 드러난다. 손으로 그 몸을 더듬다가 양호범의 얼

굴을 바라봤다.

처음이다.

놈과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 보며 하는 섹스는.

여태까진 뒤에서 강간하듯 박아 댔었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잘생긴 미간이 살짝살짝 일그러진다. 일부러 힘을 주어 조이자 보

일 듯 말 듯 웃으며 입술을 포개어 온다. 혀가 안으로 들어와 정신없을 정도로 움직이다

춥,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 와중에도 호범은 수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약속, 지켜요.”
76 화

“식전부터 무슨 일이야?”

이미 보고를 받았을 텐데 양 회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곁에는 김

우진이 서 있었다.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대 양 회장이 서민준과 한패가 되었다고 백수현

에게 알려 준 사람은 김우진일 확률이 높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녀석은 전과 다르

게 머리 스타일도 옷차림새도 제법 어른 흉내를 냈다.

잠시 우진에게 닿았던 시선이 양 회장에게 움직였다.

“다 아시잖아요. 제가 왜 왔는지.”

보는 눈들이 많은 게 신경 쓰였는지 양 회장은 헛기침한 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범이 그 뒤를 따랐고 우진이 자연스럽게 빠져 가장 끝으로 물러섰다. 정원 길을 따라

걷는 동안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전부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다. 적어도 10 년 20 년씩 된 사람들. 양 회장은 그들을 직원이라기

보다 식구라고 여겼다.

“백수현은 어떻게 했니.”

“집에 모셔 놨어요.”

모셔 놨다는 표현이 거슬렸는지 양 회장이 돌아보며 인상을 쓴다 . 덕분에 그의 얼굴에

주름이 더 늘어났다.

“모셔 놔?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생각이 바뀌었어요.”

“바뀌어?”
“제가 데리고 살 거예요.”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던 양 회장이 입을 벌리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뒤

에 서 있는 우진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호범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놔두세요. 오늘은 이 얘기하러 온 거예요.”

양 회장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서민준은 어쩔 건데.”

“제 선에서 정리할게요. 할아버지한테 피해 가는 일 없게 할 테니 믿고 맡겨 주세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양 회장의 말이라면 어기지 않고 따랐던 호범이다 . 백수현을

처리하라고 했을 때도 거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죽이지는 못할망정 집에

들여앉혀? 같이 살겠다고?

양 회장의 눈빛에 점점 노기가 차기 시작했다.

“네 애비하고 똑같은 짓을 하는구나!”

죽은 아버지 이야기에 호범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달라요. 전 도망칠 생각도 없고, 빼앗길 생각도 없어요. 아버지보단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죠.”

내 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고, 건드린 자 또한 살려 두지 않는다. 뭐든 끝장을 보는 게 양

회장 성정이었다. 그리고 호범의 말대로 녀석은 아들보단 자신을 빼다 박았다. 제발 받

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제 아비와는 딴판이었다.

이대로 가면 집안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많다. 호범이 그동안 만났던 여자

들을 생각하면 길어 봐야 한 달이다. 마음은 결국 돌아서게 되어 있었다. 분노로 인해 한

껏 치켜 올라가 있던 양 회장의 어깨가 한숨과 함께 아래로 툭 떨어진다. 양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호범을 쳐다봤다.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대신 내 귀에 쓸데없는 얘기 들리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호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놈 얼굴이 그 모양이야.”


호범은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매우 감사합니다.”

양 회장은 혀를 차며 홱 돌아섰다.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 네놈 꼴을 보고 아침이 넘어갈지 모르겠다만.”

호범은 걸음을 떼려다 뒤를 한번 돌아봤다. 김우진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호범을 쳐다

보고 있다. 김우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강제로 떼어 놓았던 옛 애인을 생각할까. 아

니면 돌아온 백수현을 생각할까.

첫 번째면 상관이 없겠지만 두 번째면 이제 곤란하다. 전처럼 어린 동생의 장난으로 넘

기진 못할 것 같으니까.

“우진아.”

“네, 형님….”

“들어가자.”

“네.”

전과 다르게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

휠체어에 앉은 수현은 발에 채워진 족쇄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 양호범과

섹스 후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양호범은 보이지 않고 발에는 어김없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진심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 여러모로 시달려 근육이 결리고 아팠는데 차라리 잘됐구나 싶었다. 거실

로 나와 창밖을 보니 아직도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 커다란 개를 끌고 다녔고


훈련이 잘된 건지 말도 잘 들었다. 앉아서 그걸 구경하고 있으니 강원댁이 막 갈아 온 주

스를 가져와 건넨다.

“마셔요.”

“고맙습니다.”

강원댁은 수현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대표님도 참… 짓궂다니까….”

발에 이런 걸 채워 놨는데 짓궂다고 표현하다니. 하긴 전부터 느낀 건데 그녀는 양호범

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어젯밤 양호범이 했던 말이 사실인

지를….

“여사님. 저 물어볼 게 있어요.”

곁에서 창밖을 보던 강원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양호범이 제 발목 자르려고 했다는데….”

말끝을 흐리고 나서 얼굴을 살피는데 생전 처음 듣는 표정이다 . 그럼 그렇지. 이 새끼가

나 겁주려고 장난을 쳤구나. 괜히 쫄았네. 속으로 조금 안심하고 있는데 강원댁이 그제

야 아아, 하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낮춘다.

“저하고 박태준 씨하고 간신히 말렸잖아요.”

“…….”

“썰기 직전에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심장이 쿵쿵 뛴다니까요.”

수현은 할 말을 잃었고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입맛이 싹 사라진

다. 반쯤 남은 주스 컵을 넘겨주자 그녀가 그것을 챙겨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

을 보던 수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정말 자르려고 했네, 이 미친놈이. 나한테 완전히 넘어온 게 아닌가. 아니면 너무 좋아해

서 발목이라도 잘라 옆에 두겠다는 집착인가. 둘 중 무엇이 됐든 존나 무섭긴 마찬가지

다. 저도 모르게 발을 내려다봤다. 그나마 붙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창문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던 수현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파가 있는

곳으로 와 TV 를 틀었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선거에 관련된 뉴스와 함께 서민준 얼굴이

떡하니 나온다. 빌어먹을. 검찰직을 관둔 그는 제법 정치인처럼 느껴졌다.

욕을 하며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으나 집중할 수가 없었고 결국은 TV 를 껐다. 화가 난

다. 한국에 사는 동안은 서민준의 소식을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다 그의 장

인이 당선이라도 되는 날엔 더 자주 보겠지.

수현은 휠체어를 타고 침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낮은 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서 휴

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저장된 번호는 양호범 하나뿐이다. 양호범에게 어딜 갔느냐고 문

자를 넣어 볼까 하다 관두고 자신의 SNS 에 접속했다.

동영상은 물론 그동안 낯선 사내들과 주고받았던 디엠이 모두 삭제됐다. 진짜 다 봤군.

어지간한 일에는 뻔뻔했지만, 이번엔 그게 어렵다. 쪽팔림을 떨쳐 내기 위해 다른 걸 찾

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휠체어 귀신이라고 입력했다.

관련된 영상만 수십 개가 넘었고 원본의 조회 수도 이제 수백만을 넘어갔다. 댓글을 보

니 외국인도 합세하여 난리다. 진짜 귀신이네 아니네, 말들이 많은 가운데 요양원은 이

제 흉가 체험하는 놈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거지 아저씨 생각이 났다. 괜히 저 때문에 귀찮게 된 것 같아 미안해진다. 영상을

보다 보니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 콘텐츠가 참으로 다양했다. 평소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인터넷에 개인 방송을 위한 준비물들을 검색했다 . 생각만큼 어

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다 잘 나가는 개인 방송인들의 수익이 나온 기사를 봤는데 읽는

도중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많이 번단 말이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수현은 휴대전화를 앞쪽에 설치했다 . 서민준 같은 놈도 TV 에

나오는데 나라고 못 하리란 법은 없지. 카메라를 켜자 얼굴이 나온다. 여전히 카메라를

통해 보는 자신의 얼굴은 적응이 어렵다. 여러 가지 표정을 짓던 수현은 목을 가다듬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는 휠체어 귀신이야. 반가워. 내가 방송을 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음, 사람

들하고 소통하고 싶어서야. 그리고 내가 귀신이라는 오해도 풀고 싶었어. 그리고, 또… .

음….”

평소에는 거짓말이 술술 나왔는데 막상 녹화된다고 생각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

겠다. 수현은 정지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재생했다. 목소리는 좋지만, 시선은 엉망이다.

거기다 불안하여 쫓기는 사람처럼 몸뚱이와 손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 양호범이 모텔에

서 찍은 동영상을 지운 게 차라리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다시 휴대전화를 고정하고 이번엔 양손을 활기차게 흔들었다 . 안녕 친구들. 반가워요.

나는 휠체어 귀신이에요. 영상에서 날 본 적 있나요? 실제로 보니까 잘생겼다고? 하하,

고마워요. 평소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첫 방송이라 어색하지만 예쁘게 봐 주길 바랄게

요.

윙크하고 손가락으로 하트까지 날리고 나니 갑자기 현타가 와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

다. 하아, 씨발. 이건 아니야. 방금 그건 댕댕댕 유치원에 나오던 뚝딱이 아저씨 같았어 .

그냥 입 다물고 할 수 있는 걸 찾아볼까.

고민을 거듭하던 수현은 마음을 다잡고 재촬영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깨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 불길함에 홱 돌아보던 수현

은 아연실색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양호범이 문 앞에 기대서서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었

다.
77 화

“어, 언제 왔어?”

갑자기 나타난 양호범 때문에 수현은 화들짝 놀라 카메라를 껐다.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나. 왜 나는 양호범한테 늘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 쪽팔려서 굴이라도 있으

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점심 같이 먹으려고 서둘러 왔는데, 그새 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네요.”

뒤로 와서 서더니 어깨에 손을 얹고 꾹 힘주어 누른다 . 수현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려 양

호범을 쳐다봤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아 다행이다. 수현은 민망함에 휴대전화를

만지작댔다. 어차피 양호범이 알게 될 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 인터넷 방송할까?”

호범은 대답 대신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방향을 틀어 침실을 나섰다.

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 봐, 양 사장. 내가 찾아봤는데 그거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대.”

“얼마나.”

“음… 수십억?”

“벌면 어디다 쓰게?”

“노후 자금.”

“내가 있는데 왜 노후를 걱정해요?”


이번엔 멍청한 표정을 하고 호범을 돌아봤다. 내 노후가 너와 무슨 상관이야. 라고 물으

려다 한마디 들을 것 같아 관뒀다. 그러는 사이 휠체어가 어느덧 식탁 앞에 도착했다. 아

침엔 한식이더니 점심은 양식인 모양이다.

하얀 천을 씌운 식탁에는 꽃과 촛불까지 놓여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주방에는 못 보던 요리사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듯 행

동했다. 음식을 구경하던 수현은 족쇄가 채워진 발을 가볍게 흔들면서 항의했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이거 풀어 주면 안 돼?”

“그냥 먹어요. 칼질을 발로 하는 건 아니잖아.”

“언제까지 묶어 둘 거야.”

“봐서. 도망치지 않겠다 싶으면.”

“안 도망쳐.”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호범이 진심이냐고 묻는다 . 수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어젯밤 보았던 불상이 자꾸 떠오른다 . 아직 이 집 어딘가에 있으

려나. 오백억이라니. 그렇게 비싼 건 줄 알았으면 죽기 살기로 튀었을 거다.

가방에는 김우영이 호랑이도 재울 수 있는 것이라며 준 알약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여차

하면 그걸 양호범한테 먹이고 불상을 챙길까. 지금은 경비가 삼엄하여 불가능하겠지만,

기회를 엿보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약속 지켜요.]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던 그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 다시 한번 도망갔다가 잡히면 그

땐…. 앞에 앉은 호범이 칼을 들고 보란 듯 스테이크를 썬다. 시뻘건 살점이 벌어지며 육

즙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제 발목인 것 같은 착각에 수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머릿속에

서 불상을 싹 지웠다.

“백수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수현은 뜨끔하였으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아닌데.”
호범은 웃었고 다 썬 스테이크 접시를 수현의 것과 바꾸었다 .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고

기를 보고 있으니 조금 전 계획은 싹 사라지고 입에서 군침이 돈다 . 포크를 들어 한 점 찍

어 먹는데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맛이 기가 막혔다. 이런 걸 두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하는 건가. 여태 내가 먹었던 그

소고기는 다 뭐였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호범이 잔에 붉은색 와인을 채웠다. 쌉싸름했

지만 고기와 마시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비싼 거겠지. 엊그제까지 배고픔에 굶주

리며 생라면을 뜯어 먹었는데 하루아침에 신세가 바뀌었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봐요. 갑자기 방송이 왜 하고 싶어졌는지 궁금해.”

수현은 어쩌면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그럴만한 명분이 있다면 말이지.

“유명해지고 싶어.”

“왜.”

“그러면 나를 쉽게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단지 그런 이유로?”

“ 별거 아니란 투로 말하지 마. 나한테는 목숨이 걸린 문제야. 네가 나한테 흥미가 있는

동안은 나를 보호해 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효 기간이 있는 거잖아. 나도 내가 살

길은 미리 만들어 놔야지.”

끼익, 호범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고기가 아닌 접시와 마찰하며 미끄러진다. 식탁을 보

던 눈이 이젠 수현을 향했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와인을 입

으로 가져간다. 수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때릴 때와는 다르게 식사를 하거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

양호범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저와 다르게 자랐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수현은 허리를 세웠고 나이프를 힘주어 제대로 잡았다.

호범은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수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일부러 나 열받으라고 그러는 건지, 도저히 속을 모르겠다니까.”


호범은 더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는 백수현을 보니 적어도 열받으

라고 한 말은 아닌 듯하여서. 한편으로는 백수현이 저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

됐다. 관계라는 건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바뀔 순 없는 거다. 두 사람에겐 신뢰라는 걸

쌓을 시간조차 없었다.

“우선 먹어요. 잘 먹어야 방송인지 뭔지 그것도 하지.”

포크로 가니쉬를 누르던 수현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해도 돼?”

“하고 싶다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유효 기간 어쩌고 잘만 떠들더니 그런 건 왜 눈치를 봐.”

뒤늦게 수현은 호범이 무엇 때문에 짜증 나는 표정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너… 설마 그 말 했다고 삐졌어?”

호범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존나 삐졌어요.”

“덩칫값도 못 하고.”

호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쳤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네. 하나는 나잇값 못 하고 하나는 덩칫값 못 하고.”

커플이란 말에 수현은 멈칫해서 양호범을 쳐다봤다 . 정작 말한 사람은 별 의미를 두지

않는데 괜히 혼자 신경이 쓰여 목을 긁적였다.

“대신 아니다 싶으면 바로 관둬요.”

“별일이야 있겠어….”

“ 왜 없어? 백수현이 여기저기 사고치고 다닌 것만 해도 꽤 많잖아. 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다 까발려 봐. 볼만해지겠지.”

상상했는데 아직 현실이 아니라 그런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 . 그래서 저도 모르게 푸흐

하고 웃었다.
“나쁜 생각은 접어 둬. 그래도 구독자는 많을 거야. 나하고 잤던 애들이 찾아와서 좋아요

한 번씩만 눌러 줘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범이 이를 빠득 갈았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고기가 아니라

방정맞은 그 입을 썰겠다는 눈빛이다. 수현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다행

이다. 양호범이 하라고 허락해 줬으니.

사실 다른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과거의 백수현을 아는 사람이 나타날 테고 ,

그들 중엔 분명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백수현이 살인을

해서 감옥에 갔다 왔다든가 하는….

당시엔 이상할 만큼 사건이 조용히 묻혔다.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지금

은 다르다. 퍼지는 건 순식간이며 쉽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 사람들은 자극적인 뉴스에

환장한다. 그리고 그 일로 곤란해질 사람은 백수현뿐만이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그거였다. 달걀로 바위를 깨트릴 순 없어도 더럽힐 순 있겠지 . 서민준을 무

너트릴 수 없다면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질 작정이다. 사는 내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

럼 괴롭혀 줄 생각이다. 그 잘난 얼굴이 TV 에 나올 때마다 느낀 감정을 너도 한번 똑같

이 느껴 보라고.

물론 이런 계획을 양호범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서민준한테 복수하려는 생각이면 집어치우고.”

하마터면 씹고 있던 고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그건 아니라고 둘러

댔으나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뭐라고 변명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긴, 바보한테 말한다고 알아듣겠어. 은근히 고집이 세다니까.”

“그런 거 아니야….”

양호범이 말한 대로 백수현은 바보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서민준이다. 많은 사람의 신임

을 얻는 사람. 누구보다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 한 가정의 아버지이며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의 사위이기도 한. 재수 없으면 모든 비난의 화살을 수현이 온몸으로 맞아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원하면 해요.”


잘 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호범은 비교적 덤덤한 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내가 편들어 줄게.”

“…….”

“까부는 새끼 있으면 내가 다 죽여 버릴게.”

순간 울컥하여 목구멍이 콱 막힌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고 할 줄

알았다. 이제 그는 서민준과 한패가 아닌가. 수현이 벌이는 짓 때문에 양호범 입장이 난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같은 편이 되어 주겠다니. 예상치도 못한 말에 코끝이 찡

해졌다.

“양 사장.”

“왜요.”

“나 방금 너한테 반한 거 같아.”

무심결에 말해 놓고는 아차 싶어 황급히 손을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해. 취했나 봐.”

대답이 없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눈앞에서 양호범이 그림처럼 근사하게 웃는다.

귀가 뜨겁다.

뺨도 뜨겁고, 심장도 뜨거웠다.

그게 술 때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78 화

젠장. 사람이 너무 편하게 지내도 결코 좋은 게 아니구나 . 수현은 잡혀 온 지 일주일이 넘

었어도 여전히 집에서 감금 중이었다. 끼니마다 맛있는 밥이 나오고 따뜻한 물로 몸을

담그며 최신 영화를 얼마든지 보고 비싼 술을 먹을 수 있었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

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마당까지였고, 마당에서 걷는 것마저도 경호원의 감시를 받

아야 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양호범에게 따져 물었으나 돌아온 건

조금 더 참으라는 답이 전부였다.

침대에서 뒹굴던 수현은 머리맡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 카메라를 샀으나 울렁증 때

문에 당분간은 적응 기간을 갖기로 했다. 손을 뻗어 카메라를 잡은 뒤 어제 찍힌 영상을

확인하자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엉겨 붙어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나온다 . 엎드린 채 신음

을 내는 건 백수현이었고 위에서 어깨를 잡고 정신없이 박는 건 양호범이었다.

[천, 천천, 읏, 죽을 거, 같, 아아!]

[하, 씹!]

퍽, 퍽, 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자지러지는 신음을 듣고 있으니 슬슬 몸이 달아오른다.

화면을 앞으로 돌리자 전날 아침 찍어 둔 영상이 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백수현이었

다. 침실 내부가 나오고 침대를 비추자 엎드려 있는 양호범이 나타난다 . 그의 등에 커다

란 용 한 마리가 카메라를 집어삼킬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양 사장. 하고 부르자 호범이 잠에서 깬 얼굴로 돌아보더니 피식 웃고 손을 뻗는다. 이리

와요. 카메라는 내려놓고. 그는 촬영하는 것에 대해 딱히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 흔


들리던 화면이 침실 출입문에 고정됐다. 두 사람이 쪽, 쪽, 키스를 나누는 소리가 녹음되

었으나 호범이 전원을 끄는 바람에 화면은 거기서 정지했다.

수현은 예전에 약에 취해서 여러 놈한테 둘러싸여 윤간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당시엔 피가 거꾸로 솟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김도한이 죽

었을 때도 동정심 따윈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양호범과 찍은 영상은 거북하게 느껴지질 않고 웃음이 난다.

“제법 사귀는 사이 같잖아.”

물론 정식으로 사귄다는 말은 없었지만.

[내가 있는데 왜 노후를 걱정해요?]

그런 말 할 정도면 고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그거 프러포즈였었나. 하지만 그렇

다고 하기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크게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 에이, 모르겠다. 어

차피 김우영 말대로 양호범이 금방 질려서 내칠 수도 있으니 그때까진 여기서 목숨을 보

전하고 즐기면 되는 거다.

수현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양호범에게 외출하고 싶

다는 메시지를 2 시간 전에 보냈는데 대꾸가 없다. 빌어먹을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투덜

거리며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가방을 찾았다.

그 안에는 현금과 채권, 양호범에게 돌려받은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기왕 돌려주는

거 불상도 주지. 그건 양 회장한테 갖다줬을까. 아니면 아직 서재에 있을까. 틈날 때마다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간다.

수현은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서 작은 비닐을 꺼냈다 . 거기엔 연노랑 빛의 알약 여러 개

가 들어 있었다.

[호랑이도 재울 수 있는 약.]

김우영이 준 약을 버릴까 하다가 혹시 몰라 보관해 뒀다. 부디 쓸 일이 없길 바라지만 써

야 한다면 이번엔 제대로 사용할 작정이다. 그러고 난 다음엔 가방을 옷장에 넣고 1 인용

소파에 가 털썩 앉았다.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도 지루함은 사라지질 않는다.


심심하다. 이렇게 심심할 수는 없다.

문득 테이블에 메모지가 눈에 들어온다.

수현은 자세를 바로 했고 그것을 하나 뜯어 손으로 비행기를 접었다. 금세 완성된 비행

기를 휙, 허공에 날려 보낸 다음에는 또 메모지를 뜯었다. 이번엔 배를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 공부는 별로 못했지만, 종이접기에는 꽤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배가 다 만들어졌을 때쯤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가는 기억이 떠올랐다.

[너같이 생긴 애들은 앉아서 종이접기만 해도 구독자 수가 올라갈걸.]

매니저 이윤철이 흘러가듯 했던 말. 수현은 방금 접어 둔 배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

봤다. 그래, 꼭 말로 조져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종이접기에 집중하다 보면 카메라에 대

한 공포심도 수그러들지 않을까.

마침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울린다. 받자마자 수현은 반갑게 그를 불렀다.

“양 사장!”

[뭐 하고 있었어요.]

“내가 보낸 메시지 봤어?”

[일하느라 지금 봤어요. 미리 말하는데 외출 안 돼요. 당분간 참아요.]

그럴 줄 알았다.

실망하였으나 따져서 싸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대신 조금 전 떠오른 것에 관하여 설명했

다.

“나 좋은 생각이 났거든.”

수현은 카메라 울렁증도 극복하고 말도 적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

했다. 양호범은 조용했고 수현은 그가 못 들었나 싶어 재차 확인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했지만, 종이접기를 할 줄은 몰랐네.]

“별로야?”

[뭐, 옷 벗고 춤추는 것보단 낫다고 봐요.]


어제 농담으로 콘텐츠가 없다면 옷 벗고 춤이라도 출까 농담처럼 말했다가 뒈지게 욕을

처먹었는데 그 얘길 또 꺼내는 거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 조용해지니 그

의 목소리 외에 내비게이션 안내 소리가 희미하게 섞인다.

“어디가?”

[약속 있어서 잠깐 나왔어요.]

그러냐며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나서는 통화를 마쳤다 . 그러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종이접기에 관한 영상을 틀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메모지를 뜯어 하나씩 따라 하는데

예상한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역시 난 눈썰미하고 손재주가 있다니까. 다 완성한 뒤 얼굴을 그려 주고 얼룩무늬까지

넣어 주니 완벽한 호랑이가 완성됐다. 노란색 색종이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것을 들고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건 양호범 줘야겠다.”

❖❖❖

끊긴 전화를 보며 호범은 미간을 찡그렸다. 종이접기라 … . 옷 벗고 춤을 춘다고 했던 것

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종이접기라니. 그걸 누가 봐? 말리고 싶으나 원하는 대로 다 하라

고 했으니 입 다물어야겠지.

사실 백수현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냥 제가 주는 돈이나 펑펑 쓰면서 백수

처럼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

고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차가 지하에 도착하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다가와 문을 열어 준다. 호범은 차

에서 내렸고 그 뒤를 박태준이 따르려고 하자 남자가 제지한다.

“혼자 가셔야 합니다.”


호범은 피식 웃었다.

“씨발, 겁은. 누가 잡아먹을까 봐 그러나.”

태준에게 기다리라고 눈짓을 하고 남자를 따라 이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이 대리석으로 된 넓은 실내가 나타난다 . 그곳은 가정집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사무실도 아니었다.

안에서 대기하던 다른 직원이 탐지기를 들고 앞을 가로막았다. 호범이 양손을 들자 남자

가 탐지기로 몸을 훑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

그리고 그 너머로 전면이 통으로 된 유리창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호범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서민준 곁에 나란히 섰다 . 이어서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닫고 사라진다 . 호범은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청와

대가 작게 보인다. 웃음이 났다.

“쥐새끼처럼 여기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군요. 저길 가고 싶어서 말이야.”

서민준은 여전히 정면만 응시한 채 대꾸했다.

“용건이나 말해. 사람 긁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호범은 안주머니에서 USB 를 꺼내 서민준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선물.”

서민준은 눈으로만 그것을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이레건설 비자금 파일. 당신이 찾던 거.”

서민준의 눈빛이 달라진다.

“백수현은.”

“멀쩡히 살아 있어요.”

“그날 회장님과 한 약속은 분명 두 개였는데. 이 파일하고, 백수현.”

“어쩌죠.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거 하나뿐인데.”

하, 서민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장난해? 나는 그 조건으로 너희한테 장부 넘겨준 거였어.”

“그럼 장부 다시 돌려받든가.”
“…….”

“그건 싫은가 보네. 왜. 영감한테 벌써 선거 자금이라도 받은 건가.”

노려보던 서민준이 이를 갈며 비죽였다.

“ 이래서 깡패 새끼는 믿으면 안 된다니까. 난 회장님한테 분명 약속을 받았고, 넌 그걸

지킬 의무가 있어. 그러니 피곤하게 굴지 말고 당장 가서 백수현 없애 . 그게 네가 할 일이

야. 알았어?”

그 말에 호범이 피식 웃고 나서 창밖을 내다봤다. 바깥에는 작은 테라스가 하나 있었는

데 테이블 위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우리 검사님이 고민이 많았

던 모양이군.

호범은 창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태울게요. 검사님.”

서민준이 노려봤고 호범은 아차, 했다.

“깜빡했네. 이제 검사님 아니지. 서민준 씨.”

서민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호범이 문을 드르륵 열었다. 서민준이 짜증 섞인 표정

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호범이 그의 멱살을 낚아채 밖으로 끌어냈다 . 순식간에 몸이

테라스 난간으로 끌려가자 서민준이 주먹을 휘둘러 저항했다.

하지만 호범은 눈 깜짝할 새 그것을 피했고 오른손으로 서민준의 허리띠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잡아 난간 밖으로 던질 것처럼 내몰았다. 발이 바닥에서 뜨고

상체가 난간 밖으로 밀려 몸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서민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그 와중에도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소리를 낮춰 악을 쓴다. 그가 발버둥을 칠 때마다 몸

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호범은 악당처럼 웃으며 그런 서민준의 모습

을 보고 즐거워했다.

“왜. 저기 가고 싶어 했잖아. 이대로 던져 줄게.”

“이 씨발 새끼가!”

“화내고 욕하니까 이제 좀 사람 같네. 존나 점잖은 척 유난을 떨더니.”


“멍청한 짓 하지 마, 양호범!”

“셋 하면 던져요. 하나, 둘,”

서민준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

“씨발. 백수현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그 말에 호범은 서운한 표정을 했다.

“당신은 이해할 줄 알았는데.”

“…….”

“먹어 봤으니 알 것 아니야. 백수현이 얼마나 맛있는지.”

서민준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 일보 직전이다. 한번 건드려 본 건데 바로 반응이 오네. 이

새끼 아직 백수현한테 마음이 남아 있구나. 호범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잘 가요, 셋.”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잡고 있던 멱살을 놓으니 서민준의 상체가 뒤로 넘어간다. 그는 황

급히 호범의 팔에 매달렸다. 씨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얼마나

우스운지. 이 꼴을 혼자만 보는 게 아쉬웠다.

호범은 미끄러지는 팔을 잡아 그를 난간 안쪽으로 넘겨 왔다. 휘청거리던 서민준이 중심

을 잡더니 죽일 것처럼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른다.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아 주자 빡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갔다. 볼 안쪽이 얼얼하다. 혀로 훑자 피 맛이 느껴진다.

그것을 바닥에 퉤, 하고 뱉고 나서는 고개를 들어 서민준을 바라봤다. 서민준은 다리가

풀렸는지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곁에 있는 의자를 잡

는다. 여차하면 내려치겠다는 심산이다.

호범은 느긋한 미소를 띤 채 USB 를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걸로 끝냅시다.”

그리곤 서민준 셔츠 주머니에 USB 를 집어넣고 눈으로 경고했다.

“더는 찾지 말아요. 걔는 이젠 내 거야.”


79 화

담배를 태우러 나온 수현은 마당 한쪽에 놓여 있는 흔들의자를 찾았다. 나무로 만든 2 인

용 의자는 아무리 봐도 양호범의 취향 같지는 않았다. 그곳에 앉아 발을 구르자 그네가

앞뒤로 움직인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하늘을 봤다 . 오늘따라 유독 별

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그것을 감상하며 머릿속으로는 날짜를 계산했다. 열흘 후면 구정이다. 딱히 갈 곳이 있

는 건 아니었다. 이제까지 설날이나 추석에는 집에서 혼자 향을 피워 놓고 엄마의 제사

를 지냈었다.

양호범 말에 따르면 아버지인 백광무는 아직 차도가 없다고 한다. 평생 누워만 있을지,

내일 아침이라도 당장 깨어날지 의사 또한 모른다고. 분명 납골당에 처음부터 불상을 넣

어 둔 건 아닌 듯한데. 그를 다시 찾아가 볼까.

아니면 양호범한테 찾아 달라고 부탁할까. 놈은 나보다 능력이 훨씬 좋으니까 그런 것은

일도 아닐지 모르잖아. 지금은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 소원이라고 하면 들어줄지도 모른

다. 고민하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데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뭐 해요?”

화들짝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제 막 퇴근을 마친 양호범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앞에 서 있었다.

“날도 추운데 여기서 왜 청승을 떨어요?”


그러더니 수현이 물고 있던 담배를 가져가 옆에 빈 통에 집어넣는다. 정원을 밝히는 조

명 빛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입술이 왜… ? 저도 모르게 무심코 손을 뻗다가

뒤쪽에 있는 경비원들이 신경 쓰여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입술 왜 그래?”

호범은 곁에 앉았고 다짜고짜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묵직한 우디 향이 풍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경비원들이 한번 쳐다봤으나 잠시뿐이었다. 그들은 곧 몸을 돌려 이

곳을 외면했다. 그래도 수현은 신경이 쓰여 조심스럽게 어깨를 뺐다.

“아까 어떤 나쁜 새끼한테 맞았어요.”

수현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손등이나 다른 데는 멀쩡한 거 보니 일방적으로 맞은 모양인데 . 혹시 양 회장일까. 그러

면 이해된다. 죽이라는 놈을 살려서 집에 가둬 놨으니 노발대발했겠지.

더 다친 곳은 없나 자세히 살펴보는데 조명 때문인지 오늘따라 얼굴의 음영이 더 두드러

진다. 조상 중에 외국인이 있는 건 아닐까. 나이가 들었으나 양 회장도 인물이 좋은 걸 보

면 양호범이 잘생긴 건 아무래도 집안 내력인가 보다.

호범은 수현을 빤히 응시하며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렸다.

“아파요. 호- 해 줘요.”

수현은 질색하여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어?”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해 줄 수야 있지… 있는데…. 근데 너 누구한테 맞은 거야? 할아버지?”

말을 돌리자 호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민준.”

수현은 놀라 얼굴이 굳었고 호범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씹새끼가 백수현 살려 뒀다고 보자마자 막 욕하면서 때리잖아.”

“가만히 맞고 있었어?”
“별수 있나. 내가 약속을 어겼는데.”

수현은 속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민준한테 복수하면 양호범이 제대로 막아 줄 수 있

을까 걱정이 됐다. 생각보다 서민준 힘이 막강하긴 한 모양이구나. 그래도 그렇지 애를

때리냐. 씨발. 아무리 맷집이 좋아 보여도 하필 얼굴을…. 마음이 좋지를 않다.

“개새끼. 그렇다고 때리냐.”

그러니까. 내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하면서 또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이번엔

가만히 뒀다. 사실 덩치가 커서 때릴 데야 많지만 귀하게 자라서 개망나니 같은 놈인데

일방적으로 맞았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어.

속으로 서민준 욕을 하는데 양호범이 보일 듯 말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춥다. 들어가요.”

“벌써?”

“기분 나아졌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길래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겨울이라 말라 버린 잔디 위를

걷는데 바스락대는 소리가 난다. 근처에 있던 경호원들을 지나쳐 수현은 안으로 들어갔

다. 문이 열리자 맛있는 냄새가 풍겼고 강원댁이 앞치마를 두른 채 마중 나왔다 . 그녀는

인사를 하려다 호범의 얼굴을 보고 대번 인상을 찡그렸다.

“어머, 얼굴이 왜 그래요?”

“다쳤어요.”

세상에. 누가 이 잘생긴 얼굴을. 강원댁은 속상해 죽겠는 표정이다. 수현은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식탁으로 가서 앉으니 푸짐

하게 저녁이 차려져 있다.

이곳에 갇혀 있는 건 지겨웠으나 매끼 진수성찬으로 차려지는 식사는 볼 때마다 새로웠

다. 강원댁은 못 하는 요리가 없었는데 그중에 가장 맛이 있는 건 갈비찜이었다 . 태어나

서 그렇게 맛있는 갈비찜은 처음이었다. 돈이 없어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

던 걸 생각하면 이런 걸 호강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잘 먹겠습니다.”
양호범이 계속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식사를 함께하는 건 며칠만이었다 . 오늘은 그래도

덜 심심하겠네. 밥 먹고 집 밖으로 산책하러 나가자고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젓가

락으로 갈비를 집는데 갈비가 미끄러져 접시 밖으로 떨어진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호범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달라 양호범 시선이 이미 젓가락을

쥔 손가락에 꽂혀 있다. 또 잔소리할까 싶어 고기를 냉큼 집어서 옮기는데 호범이 수저

를 놓고 일어나서 곁으로 온다.

“너. 잔소리하지 마.”

손을 들어 경고하였으나 그는 곁에 앉았고 젓가락을 빼서 수현의 손에 제대로 쥐여 줬

다. 검지를 이렇게, 중지는 여기다. 이제 움직여 봐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데 여간 불편

한 게 아니다. 인상을 썼더니 곁에 앉아 음식을 집어서 수현의 밥그릇에 놓아 준다.

“기죽을 거 없어요. 내가 먹여 주면 돼.”

그 말에 더 기가 죽는다. 차라리 전처럼 빈정거리는 게 속은 편하겠다. 끝까지 인상을 풀

지 않자 갈비를 집어서 수현의 접시에 올려놨다 . 수현은 저도 모르게 강원댁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하고 저리 가. 혼자 먹을 수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이 갑자기 찡그리며 한쪽 뺨을 감싸 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맞은 데가 아파 음식을 삼키기가 힘들단다. 어금니가 흔들리는 거 같다는 말에 수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정도야? 조금 전 가라고 한 것도 잊고 걱정스럽게 보자 호범이 물

을 한 모금 먹더니 반찬을 집어 준다.

“그러니까 대신 많이 먹어요.”

차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올려 주는 족족 먹었더니 나중엔 배가 터질 지경이다. 양

호범은 정말 많이 아픈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꾸 얼굴을 만졌다 . 수현은 그 모든 게

다 저 때문인 것처럼 느껴져 속이 상했다.

❖❖❖
“음….”

호범은 수현이 만든 종이호랑이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인데? 침

실에는 백수현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잔뜩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종이접기

를 할 모양이군. 대체 이런 영상을 누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진심으로 망하길 바라는 바였다.

“잘 접었네요.”

수현은 으쓱해졌다.

“그치? 내가 도둑질만 잘하는지 알았는데, 의외로 이거에 소질이 있더라. 그래서 말인데

나 내일은 밖에 나가서 쇼핑하고 오면 안 될까? 답답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사야 할 것들

도 많아서 말이야.”

수현은 최대한 예쁜 표정을 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두 번 다신 도망치지 않겠다고 덧붙

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한참 생각하던 호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뜻밖의 허락에 수현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대신, 직원하고 가요. 아침에 차 보낼게요.”

“직원은 왜?”

“경호해 줄 사람.”

“잘생겼어?”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내뱉고 수현은 아차, 싶었다. 양호범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혀

로 볼 안쪽을 꾹 누르며 당장 죽여 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길래 수현은 얼른 손을 내저었

다.

“인상 펴. 농담이야.”

“백수현은 좆같은 농담을 참 잘해.”


호범이 손을 뻗었고 수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호범이 멈칫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길어진 수현의 앞머리를 넘겨 준다.

“나간 김에 머리도 다듬어요. 눈 자꾸 찌른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넘겨 주더니 뺨을 한번 슥 만지고 나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종이

호랑이를 눈앞에 디밀었다.

“선물 고마워요. 소중하게 간직할게.”

놈의 입에서 나온 ‘소중’ 이란 단어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확실히 변하기 변했구나.

좋으면서도 아직 적응이 쉽질 않다. 여전히 눈치를 보게 되고 한 번씩은 무서운 게 사실

이다. 좆을 빨아 줬다고 해서 호랑이가 고양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

호범은 수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또 딴생각하네?”

“아닌데.”

“했어, 방금.”

아무튼. 귀신이다. 이 새끼 무슨 신기 있는 거 아니야?

괜히 더 트집 잡히기 전에 호범의 등을 욕실 쪽으로 떠밀었다.

“얼른 씻어. 씻고 나와서 둘이 종이접기하자.”

욕실 앞으로 가면서 호범이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난 종이 말고 다른 거 접을 건데.”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거 뭐?

그러자 호범이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있어요. 그런 게.”
80 화

“입이 너무 작아.”

입이 작은 게 아니라 네 좆이 큰 거겠지. 최대한 벌렸음에도 움직일 때마다 치아에 표피

가 긁힌다. 그게 자극이 되었는지 내려다보는 양호범의 눈빛이 점점 흉포하게 변해 갔

다. 더 안쪽으로 집어넣으려 하길래 힘을 빼고 목구멍을 열었다. 전처럼 무식하게 쑤셔

넣지 않으려 참는 게 느껴졌다.

쑥, 좆이 빠져나가길래 눈을 들어 위를 봤다. 호범은 수현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으로

문질러 닦은 뒤 팔을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침대에 누워 손짓하길래 마저 빨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뒤를 돌게 하여 수현을 제 가슴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힌다 . 뭘 하려는 지 알

아챔과 동시에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움켜잡았다.

“엉덩이, 귀여워.”

뒤를 돌아보며 어이없이 웃자 호범이 다리를 잡아당긴다 . 엎드려요. 그대로 몸을 낮춰

자세를 잡고 양호범의 좆을 다시 입에 물었다 . 동시에 양호범이 혀로 수현의 엉덩이를

핥다가 아프지 않게 깨문다.

처음엔 입술이 회음부로 옮겨가서 당황스러웠는데 나중엔 구멍에 대고 문지른다. 내색

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무척 놀랐다. 더불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에 허벅지에

자꾸 힘이 들어가고 사정감이 몰려왔다.

단단한 복부에 좆을 문지르며 허리를 들썩이자 팔로 감싸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더니 다

음엔 손가락을 집어넣고 쑤신다. 잔뜩 구부려 안쪽을 긁어 주자 머릿속이 하얘진다. 혀


로 그 주변을 핥으며 손가락으로는 내벽을 찔러 대니 미칠 노릇이다. 수현은 좆을 빠는

것도 잊고 호범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이번엔 혀끝을 구멍에 가져다 댄다. 엉덩이를 벌리고 게걸스럽게 구멍을 빨고

핥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극에 몸서리가 쳐졌다 . 사정할 것 같아 헐떡이며 손을 뒤로

뻗어 팔을 잡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 정액이 쏟아진다. 수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축 늘

어졌다.

호범은 수현을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와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벌써 지쳤어요?”

수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다행이네. 이번엔 손을 아래로 내려 구멍을 더듬었다.

“여기. 젖어서 벌름거려.”

손을 떼더니 허리를 세우고 수현의 두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는 베개를 하나

가져와 수현의 허리 아래에 받치고는 삽입을 시도했다 . 풀어 주긴 했어도 크기가 워낙

커서 입구부터 쉽게 진입하질 못한다. 수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자신의 좆이 수현의 에널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호범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

다. 완전히 삽입하여 꾹 누르니 수현이 입을 벌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 호범의 손을 붙들

어 제 아랫배를 더듬게 했다.

“읏, 여기까지, 들어왔어.”

호범이 그 부위를 살짝 누르며 읊조렸다. 진짜네. 내 자지가 여기까지 들어갔어. 아무렇

지 않은 투로 말하였으나 눈빛은 욕망으로 번들댔다. 호범은 상체를 숙여 수현을 끌어안

았고 입을 맞추고 혀로 구석구석을 핥았다. 몸이 달아오른 수현은 두 다리로 호범의 허

리를 감쌌다. 입술이 떨어져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리자 호범이 수현의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그다음 빨개진 눈과 코끝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얼굴은 앞으로 나만. 응?”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착하다며 입술과 뺨에 쪽쪽 , 키스를 한다. 그리고 목

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조금씩 속도를 높인다. 숨이 뜨겁다. 퍽, 퍽, 퍽, 양호범이 체중을

실어 쳐 댈 때마다 트럭에 받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고 오히

려 쾌감을 부추겼다.

“아, 더, 더, 해 줘. 기분, 좋아… 하아….”

허리를 들썩이며 보채니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져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두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치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누른다.

덕분에 좆이 전립선을 자극했다.

“깊, 게는, 아흣.”

퍽, 체중을 실어 때려 박자 충격에 정액이 왈칵 쏟아진다. 수현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뒤

로 젖히며 넘어갔다. 호범은 반쯤 접힌 수현을 꼬챙이로 꿰듯 뒤로 뺐다가 단숨에 찔러

넣었다. 사정한 상태로 전립선을 짓뭉개니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덜덜 떨린다 . 수현은

침을 제대로 삼키지 못해 질질 흘리며 눈을 까뒤집고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잠, 아흑,”

“후, 역시 내 취향은, 이쪽이야.”

무릎이 어깨에 닿을 정도로 몸이 접힌 상태에서 구멍을 쑤셔 대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

다리가 후들거려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양호범이 좆을 또 손으로 문질러 강제로 발기시

킨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게 땀이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인 걸 깨달았다. 방금 사정을 마쳤

는데도 또다시 배 속이 찌릿찌릿하다. 그것은 사정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수현은

온몸이 오싹해져 호범의 팔을 잡으며 눈으로 애원했다.

그러자 호범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띤다.

“왜요. 또 쌀 것 같아?”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혀로 뺨과 눈 밑을 핥아 준다 . 싸요, 괜찮아. 앞뒤로 움직이는 대

신 박은 채로 위아래로 문지르자 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비벼졌다 . 이건 이것대로 더

죽을 맛이었다.
“…으흣….”

“왜 자꾸 울어. 괴롭히고 싶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로 확 뺐다가 뿌리까지 단번에 넣는다. 어흑, 씻기 전에 종이 말고

다른 걸 접을 거라더니 그게 뭔지 이제야 알겠다. 몸을 완전히 접은 상태로 꽉 껴안고 그

는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겨우 가라앉았던 그 감각이 배 속에서부터 다시 지글지글 올라온다 .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헉헉대고 몸부림을 치는데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튀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하얗게 변해 간다. 아흑, 수현은 비명 섞인 신음을 내지르며 호범의 등을 쥐어뜯었다.

울컥, 울컥, 뜨거운 액체가 배 위로 흘러내렸다. 동시에 구멍이 꽉 조였는지 양호범이 큭,

하는 신음과 함께 정액을 안에다 쏟아 낸다. 수현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여운에 양

호범을 끌어안고 몸을 움찔댔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호범이 상체를 일으키는데 표정이 묘하다 . 수현은 손을 뻗어 제

배를 더듬었다. 축축하다. 정액의 양치고는 상당히 많았다. 뒤늦게 그것이 무엇인지 깨

닫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씨….”

창피함을 느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호범이 수현을 도로 눕히더니 침대 시트로

둘둘 만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이대로 세탁기에 넣고 돌려야지.”

째려봤더니 가뿐하게 안아서 들고 입술에 쪽 입을 맞춘다 . 괜찮아요. 다 큰 어른이 오줌

쌀 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두 번째네. 이 정도면 오줌싸개라고 불러야 하나.

입 다물라고 손을 휘두르다 서민준한테 맞았다는 얼굴을 건드렸더니 아아 , 아픈 표정을

짓는다. 놀라서 괜찮으냐고 묻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수치스럽다. 욕실로 향하는

걸 보아 다행히 세탁기에 처넣을 생각은 아닌 듯하였다.


❖❖❖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눈을 뜬 건

오전 10 시가 넘어서였다. 출근하였는지 양호범은 보이지 않았고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가는데 허벅지와 허리, 엉치뼈 기타 등등 아프지 않은 데가 없

다.

욕실 거울로 상태를 확인한 수현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에 할 말을 잃었다 . 오늘

외출해야 하는데. 이 정도면 나가지 말란 소린가. 너덜너덜해진 젖꼭지를 내려다보며 한

숨을 내쉬다 씻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서 가운을 입고 머리를 말리던 수현은 침대 옆 협탁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

까이 가서 보니 신용 카드다. 양호범이 흘렸나. 제자리에 올려 두는데 휴대전화로 메시

지가 도착한다.

[침대 옆에 카드 뒀으니까 써요.]

멍한 표정을 짓다 상황을 파악하고 환하게 웃었다. 오오, 흘린 게 아니라 나한테 준 카드

였구나. 그러다 문득 몇 달 전 양호범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다가 보이스 피싱범으로

오해받아 신고당한 일을 기억해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 그땐 목적이 있어 카드를 줬다

면 이번엔 조금이라도 애정이 담겨 있으려나 . 어쨌든 받았으니 실컷 써 주마. 오늘 플렉

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 줄게.

다짐하며 뿌듯하게 웃고 밖으로 나오는데 못 보던 사람이 거실에 있다. 포니테일에 깔끔

한 정장 차림을 한 여자는 청소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자가 수현을 향해 정

중하게 인사를 한다. 엉겁결에 인사하고 주방으로 가니 강원댁이 음식을 준비 중이다.

“일어났어요? 몸은 어때요? 몸살 기운 있다면서요.”

양호범이 몸살이라고 둘러댔구나.

“네,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네요.”

“거실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아, 수현 씨 오늘 외출한다고 대표님이 불렀어요.”

“양 사장이요? 왜요?”

“저분하고 동행하시면 돼요. 새 경호원이에요.”

수현은 할 말을 잃고 뒤를 돌아 여자를 봤다. 여자는 거실 한쪽에 뒷짐을 지고 부동자세

로 서 있었는데 수현이 쳐다보자 살짝 미소를 띤 채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사태

를 파악하기도 전에 강원댁은 설명을 이어갔다.

“아, 밖에 경호원 한 명 더 대기하는데 그 사람도,”

“혹시 여자예요?”

“맞아요.”

“…….”

“그리고 운전기사도 새로 왔는데,”

“여자.”

강원댁은 손뼉을 치며 신기해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양 사장, 이 새끼.

아예 세상 남자는 다 없애지 그랬니.

수현은 호범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여자를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경호원 잘생겼냐고 물어봤을 때 죽일 듯 노려보더라.


81 화

“제가 들겠습니다.”

수현이 계산을 마치자마자 경호원 하나가 셔츠가 담긴 쇼핑백을 낚아채 갔다. 밖으로 나

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양옆으로 쇼핑백을 든 경호원을 끼고 있는 모습이 신

기한 모양이다. 수현 역시 신기했다. 이런 건 어디 재벌 집 자식들이 쇼핑할 때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는 여자에게 짐을 잔뜩 들게 하니 마음이 불편하여 반은 자

신이 들겠다고 나섰다.

“괜찮습니다. 이게 저희 일입니다.”

“무거우면 말씀하세요. 숙녀분들한테 이런 거 들게 하니까 제가 마음이 안 좋네요.”

말을 끝내고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윙크를 살짝 하였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 예전에 호스트바에서 일할 때 이렇게 하면 누나들은 다 쓰러지던데 . 민망해 괜히 딴

청을 피우는 사이 이번엔 시계 매장이 눈에 띈다.

양호범 선물도 사 갈까. 저번에 개업식 목도리 어쩌고 하면서 내내 불평을 하던 게 마음

에 걸린다. 물론 내 돈으로 사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그때와 지금 자신을 대하는 직

원들의 태도는 천지 차이였다. 수현은 백화점이 이렇게 친절한 곳인지 처음 알게 됐다.

가는 곳마다 어찌나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설명을 하는지 결국은 사지 말아야 할 것까지

사 버렸다.

뒤늦게 후회되어 몇 개는 반품할까 고민했지만 양호범이 실컷 쓰라고 줬으니 뜻대로 해

주는 게 인간 된 도리인 것 같았다.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니 붙어 있는 동안은 펑펑 써


줄 작정이었다. 저도 모르게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경호원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

다.

민망하여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계 매장으로 들어갔다. 호범에

게 줄 시계를 고르는데 금액이 상당하다. 몇 개를 선택한 뒤 경호원에게 어떤 게 낫느냐

고 물으니 둘이 같은 걸 지목한다. 꽤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수현이 보기에도 양호범에

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걸로 주세요. 계산을 위해 당당하게 카드를 내주고 직원에게 부가적인 설명을 듣는 동

안 나이가 좀 있는 직원이 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남자의 명찰 앞에는 점장이라

고 적혀 있었다.

“양 대표님 가족이신가요?”

아, 양호범을 아나. 혹시 카드 때문에 아는 건가. 기록이 남아 있나. 훔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별생각이 다 들었으나 괜히 티를 내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

다.

“형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미리 알려 주셨으면 제가 직접 응대했을 텐데요.”

남자가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굉장히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현

이 고객들에게 하던 표정과 흡사했다.

“ 대표님 잘 지내시죠? 가을까진 자주 오셨는데, 최근엔 뵌 적이 없네요. 저희 매장 들르

시면 제가 항상 도와드렸거든요.”

아, 그럼 이 남자한테 골라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보다. 지금이라도 바꿔 달라고 할까. 기

왕이면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 나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골라 주셨던 시계가 어떤 건데요? 한번 보여 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점장이 곤란한 미소를 짓는다.

“그건 여성용 시계라….”

수현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점장이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입가에 접대용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양호범한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김우영이 그러지 않았나. 생각보다 여자들한테 잘해 준다고. 물론 그 시기

가 짧아서 문제지만. 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카드를 쥐여 주었을까.

“하지만 양 대표님 취향을 잘 알고 있으니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기분이 팍 가라앉는다.

“아니에요.”

“네?”

“구매욕이 사라졌어요…. 결제는 취소해 주세요.”

점장은 자신이 무언가를 실수했나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수현은 그를 뒤로하고 카드를

돌려받았다. 나중에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기분이 영 별로다. 그 와중

에도 배가 고파진다. 수현은 경호원들을 봤다. 그들은 수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예

전에도 이런 식으로 경호를 해 줬던 일이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배고파요. 점심 먹으러 가요.”

밥을 핑계로 움직이는 동안 침울해진 기분을 수습했다. 내가 걔하고 평생 살 것도 아니

고, 이런 거로 기분 나빠 하지 말자. 적당히 붙어먹다가 떨어지면 그만이지. 덕분에 이렇

게 대접도 받고 얼마나 좋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위층 식당가로 들어서는데 마침 괜찮

은 파스타 집이 눈에 띈다.

“두분 파스타 괜찮으세요?”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하긴, 지금 봐선 뭘 먹는다고 해도 괜찮다고 할 것 같다. 수현은 더 묻는 것을 포기하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불편하시면 따로 앉아서 식사하셔도 돼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고개를 까닥하더니 옆으로 가 자리를 잡는다 . 조금 서운했

다. 그래도 3 시간을 넘게 붙어 다녔는데 밥 정도는 함께 먹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파스

타를 주문하여 기다리던 수현은 앞에 있는 검은 색 쇼핑 백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백광무에게 줄 카디건이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인간인 건 변함이 없으나

봄이 오기 전 정신이 든다면 입으라고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는 찾아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도 했다.

그다음은 휴대전화를 꺼내 양호범에게 메시지가 왔나 확인했다 . 역시나 아무것도 없다.

결제 내역을 문자로 받았을 텐데. 얼마를 쓰든 상관없다 이건가. 갑자기 카드의 한도가

궁금해진다. 이걸로 차를 사 볼까.

턱을 괴고 수입차 매장에 들어가 차를 구매하는 상상을 하는데 테이블에 그림자가 생긴

다. 벌써 음식이 나온 건가. 고개를 든 순간 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누구야?”

김태신이 눈앞에 서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입을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매

장 밖에서는 그의 부하들이 대기 중이었다 . 김태신이 맞은편 의자를 드륵 소리가 나게

끌어내어 앉으려는데 어느새 나타난 경호원이 의자를 탁 잡았다.

“누구십니까.”

김태신이 눈썹을 까닥 올리며 경호원을 노려봤다.

“뭐야? 백수현. 그새 여자로 갈아탔어?”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변을 살폈다. 밖에 서 있던 김태신의 부하들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형님. 잘 지내셨어요?”

넉살 좋게 김태신에게 인사를 하자 경호원이 둘을 번갈아 본다. 경계할 대상이 아닌가.

확인하는 중이었다. 수현은 테이블을 돌아 감태신에게 갔다.

“그러지 말고 나가서 얘기해요. 남의 영업장에서, 이건 아니잖아요. 사실 저도 형님한테

할 말이 많은데, 염치가 없어서 차마 연락을 못 드렸어요.”

김태신의 팔을 붙들어 밖으로 끌어내는데 우려와는 달리 순순히 응해 준다 . 뒤쪽으로는

계속 경호원들이 쫓아왔다. 괜히 휘말려서 경호원들까지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아 기다리

라고, 괜찮다고 말을 하고 하늘 공원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를 따라 문을 열고 야외로 나

왔다.
커다란 조형물 사이로 찬 바람이 쌩 불어온다.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김태신이 팔을 툭,

치우더니 수현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벽에다 밀어붙였다. 수현이 버둥거리자 그는

얼굴을 들이밀며 악당처럼 웃었다.

“앙큼한 새끼. 네가 감히 내 뒤통수를 쳐?”

“그게, 아니라, 컥! 이거, 놓!”

멱살을 움켜쥔 그의 손을 떼어 내려는 찰나 슥,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턱 아래로 시퍼런

칼날이 나타난다. 수현은 놀라서 쳐다봤고 김태신 역시 예기치 않은 상황에 옆을 바라봤

다. 거리를 두고 있던 경호원 중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나 칼을 김태신의 턱 아래 밀어 넣

은 것이다.

“하하. 씨발. 이건 뭐야.”

김태신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칼끝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언니. 이런 거 가지고 놀면 안 돼. 여자는 조신하게,”

말을 하는 도중 경호원이 칼 손잡이로 김태신의 관자놀이를 불시에 가격했다. 억, 김태

신이 신음하며 쓰러지자 그의 등 위로 빠르게 올라타더니 팔을 꺾어 제압한다 . 뒤에서

지켜보던 김태신의 부하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하지만 그 앞을 다른 경호원

이 막아서며 허리춤에서 삼단봉을 펼쳤다.

수현은 당황하여 누굴 먼저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젊은 커플은

살벌한 광경에 화들짝 놀라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

아 다급히 김태신을 깔고 앉은 경호원부터 말려서 떼어 냈다.

김태신이 비틀거리며 일어서 경호원을 죽일 듯 노려보는데 그녀가 재킷 한쪽을 벌린다 .

김태신이 멈칫했고 동시에 수현도 놀라 눈이 커졌다 . 재킷을 원위치시키긴 했지만 분명

그 안에 총이 들어 있었다.

“씨발. 나한테 그게 통할 줄 알아?”

김태신은 분노에 휩싸였지만 경호원은 밀랍 인형처럼 표정이 없었다 . 김태신이 더 도발

하면 정말 총을 쏠 기세라 수현은 덜컥 겁이 났다 . 팽팽하게 대치하던 그때 다행히 출입

문 쪽이 열리면서 백화점 보안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김태신은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고는 백수현에게 한발 다가온다. 경호원이 다시 막으

려 했고 수현은 그녀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했다.

“네 아버지가 백광무라며.”

예상하지도 못한 이름에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백광무가 그렇게 유명한 인간인가. 대

단하네. 속으로 비아냥거릴 새도 없이 김태신이 뒷말을 보탠다.

“병신 같은 새끼. 아무것도 모르고 양호범한테 좋다고 붙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뭘 모르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김태신을 바라보자 그는 한 발 더

가까이 와 속삭였다. 궁금하면 언제든 찾아와. 기다릴게. 그리고 돌아서며 경호원을 향

해 손가락으로 경고를 했다. 다음에 눈에 띄면 죽여 버린다는 손짓을 하더니 일행을 이

끌고 자리를 뜬다.

그들이 떠나자 보안팀 직원들이 와 자초지종을 물었고 수현은 그저 아는 사람과 오해가

있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괜찮으십니까?”

경호원 중 하나가 옆으로 와 안색을 살피길래 수현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

겨진 셔츠를 잡아당겨 펴는데 조금 전 김태신이 한 말이 머릿속에 자꾸만 맴돈다. 그가

사라진 쪽을 보며 생각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대체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82 화

퇴근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호범은 백수현이 1 시간 전에 올린 동영상을 시청했다. 낮

엔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더니 오후에는 영상을 촬영하여 올렸다고 연락이 왔다 . 영상을

보는데 긴장한 건지 카메라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꿋꿋하게 종이접기를 한다.

여기서 두 번, 이렇게 접어 주시면 돼요. 아셨죠?

어색한 말투에 웃음이 삐져나오려고 해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조회 수와 구독자 수는

예상대로 참담하였고, 댓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호범은 자신이 손수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실실 웃는데 앞에 있던 윤 실장이 흘깃 룸

미러로 쳐다본다.

“좋은 일 있으세요?”

호범은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윤 실장은 거기서 그

치지 않고 호범을 한번 떠보았다.

“백수현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태준이한테 듣기로는 자택에서 머물 예정이라고

하던데요.”

호범은 눈을 움직여 앞쪽을 흘깃 한번 보고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제가 데리고 살 거예요. 할아버지한테도 말씀드렸고요.”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그의 목소리에 고저가 없다. 사실 전엔 윤 실장이 양 회장의 사람이었다는 게 거슬리지

않았다. 호범을 위해 일하는 충직한 부하 직원이었고 그동안 누구보다 믿음직한 행동들

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백수현과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호범은 그에게 자꾸 숨기는 게 늘어났다. 그가 양

회장에게 백수현에 관한 일들을 허락도 없이 보고했던 걸 알게 된 뒤로는 사적인 대화는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제가 백수현 씨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실장님이 저하고 할아버지 사이에 양다리만 걸치지 않으신다면요.”

뼈가 있는 농담에 윤 실장도 소리 없이 웃는다 . 그는 아마 경고라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

다. 차가 집 근처에 다다랐고 내려서 가는 동안에 박태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오

늘 오전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경호원 말에 따르면 백수현이 누군가

와 마주쳤다고 하는데, 외모에 관한 설명을 들으니 그게 누군지 짐작이 갔다.

김태신 이 개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래서?”

[협박하는 걸 박 팀장이 제압한 모양입니다.]

호범은 어이없어 웃음이 터졌다. 그 꼴을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김태신이 경호원을 어

떤 식으로 도발했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놈은 기본적으로 여자를 무시했고, 제 아래로

깔보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런 놈이 여자한테 맞았으니 분을 못 이겨 앓아누워도 이상

할 게 없었다.

“다른 건?”

[현장에서 녹음된 파일이 있는데,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파일?”

[바로 보내겠습니다.]

곧바로 박태준으로부터 편집된 파일 하나가 도착한다 . 마당 한가운데 서서 그것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김태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버지가 백광무라며.]

[병신 같은 새끼. 아무것도 모르고 양호범한테 좋다고 붙어서는.]


호범은 녹음된 것을 한 번 더 재생했다. 다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백수현이 뭘 몰라? 백광무가 붙잡혀 요양병원에 있다는 거? 말없이 가만히 있으

니 박태준이 대표님? 하고 부른다.

“응.”

[따로 알아볼까요?]

호범은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하였다.

“아니, 됐어.”

백수현에 대한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백수현을 흔들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백수현 역시 김태신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강원댁이 먼저 나온다. 그녀는 원

래 근처에 살면서 출퇴근을 하였으나 백수현이 머물고부터는 이곳에 상주하였다.

“오셨어요, 늦으셨네요.”

“백수현은요?”

“침실에 있는데, 아까부터 뭘 하는지 시끄러워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강원댁이 저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인다 . 호범은 이 인간

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나 싶어서 침실로 향했다 . 문밖까지 두둥, 두둥, 음악 소리가 들려

온다. 조용히 문을 열다가 백수현이 테이블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조명을 켜 놓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알몸에 재킷만 걸친 것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가장 기가 막힌 건 여전히 형편없는 춤 솜씨

였다. 음악에 맞춰 몸을 꿀렁꿀렁 움직이며 손으로 입술부터 목, 가슴을 타고 차례대로

내려오는데 정말 못 봐 줄 정도로 가관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불을 켜자 백수현이 화들짝 놀라 멈춘다 . 동시에 음악도 함께 꺼 버

렸다.

“언, 언제 왔어?”

가까이 다가가 몰골을 살피는데 얼마나 췄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땀범벅이다.

“뭐 해요?”
“이거 요즘 유행하는 춤이거든. 구독자 많아지면 라이브 방송 때 추려고. 어때?”

눈빛에 기대감이 반짝인다. 어떠냐고 묻는 말에 호범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아랫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인간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웃게 하는구나. 물론 그게 나쁘

다는 건 아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귀엽잖아.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재킷을 벌려 젖꼭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물고 빨았는데도 잘

붙어 있네.

“종이접기하고 춤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인기 많아지면 요즘은 이런 거 다 해.”

호범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인기가 많을 때 얘기고.

“동영상 올라간 거 확인은 했어요?”

수현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직. 떨려서 못 봤어.”

“잘했네. 안 보는 게 나을 거야.”

“왜? 너 봤구나? 어때? 막 개떼처럼 몰려와서 악플 달았어?”

차라리 개떼처럼 몰려라도 왔으면 덜 웃길 텐데.

“꿈도 야무져.”

응? 영문을 몰라 쳐다보길래 호범은 미소를 띤 채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 그

러고 나서는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젖꼭지를 만지며 입술을 집어삼켰다 . 수현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침대 쪽으로 움직인다. 그대로 백수현을 눕히고 가슴을 더듬으며 더 진도

를 나가려고 하자 백수현이 어깨를 잡으며 입술을 뗐다.

“양 사장. 잠시만, 나 지금 땀범벅이라 씻고서,”

“좋은데, 왜.”

재킷을 벌리고 가슴을 빠는 바람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도로 침대에 누웠

다. 사실 낮에 백화점을 다녀오고 영상을 올린 뒤로 계속 심란하였는데, 양호범을 보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잡생각들이 날아가 버린다. 역시 김태신보다는 양호범을 믿는 게

낫겠지.
“나하고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네.”

응? 더 물을 것도 없이 호범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하체를 문지른다. 그의 좆이 바지 안

쪽에서 단단하게 발기하는 게 느껴졌다. 삽입이 아닌데도 흥분이 되어 허리를 들썩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덕분에 오늘 산 비싼 바지가 구겨졌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 손을 아래로 뻗어 호

범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려 그의 것을 손으로 만졌다. 위아래로 문질러 주니 눈빛이

짙게 가라앉는다.

“빨아 줄게. 위로 올라와.”

호범은 수현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늘 왜 이렇게 착하게 굴까?”

“카드 받았잖아. 너네 회사 나 때문에 망할지도 몰라.”

그 정도로 망하면 사업하지 말아야지. 호범은 여유 있게 웃으며 수현의 가슴께에 자리를

잡고 머리 뒤로 베개를 받쳤다. 수현은 고개가 들린 채 입을 벌렸다. 속옷 밖으로 꺼낸 양

호범의 좆은 이미 앞이 젖어 반질거렸다. 혀로 그것을 핥자 머리 위에서 신음을 억누르

는 소리가 들린다.

양호범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턱이 단단해지도록 이를 꽉 물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가

락을 수현의 입술 사이로 집어넣고 아랫니를 눌러 벌리게 했다. 입이 벌어지자 좆을 입

술에 문지르고 천천히 집어넣는다.

“후, 씨발.”

목구멍 안쪽까지 닿으니 호범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침

대의 헤드 부분을 잡고 나서 좆을 목 깊숙한 곳까지 닿도록 집어넣었다. 힘을 빼었으나

위협적인 크기에 숨이 턱 막힌다. 입술 옆으로 침을 흘리니 그것을 닦아 제 입에 넣고 쪽

빨아 먹는다.

수현은 빨개진 눈으로 양호범을 올려다봤다. 인상을 쓰며 허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존나

섹시하다. 끝까지 밀어 넣자 목 아래가 불룩하게 튀어나왔고 양호범은 그걸 손으로 만지

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임에 속도가 붙어 귀두가 목구멍을 짓이겼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엄청난 압박감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간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호범이 좆을 빼낸다. 동시에 막혔던 숨이 트이며 기침이 콜록콜록

새어 나왔다.

호범은 자신의 좆을 붙들고 앞뒤로 빠르게 문질렀고 수현은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채

고 혀를 내밀었다. 잠시 뒤 큭, 하는 신음과 함께 얼굴 전체에 정액이 뿌려진다. 입에 들

어간 정액을 삼키고 얼굴에 튄 것은 닦으려고 하는데 양호범이 손을 붙잡는다. 왜 그러

나 싶어 봤더니 빤히 내려다보며 웃는다.

“왜 웃어?”

섹스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그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좋아서.”

좋다는 말에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민망해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줬더니

입술을 귓가에 문지른다.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자 이번엔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다

른 구멍에도 넣고 싶어.
83 화

읏. 기어서 도망치던 수현은 호범에게 다리가 붙들렸다. 뒤에서 엉덩이를 움켜쥐더니 단

숨에 좆을 콱 쑤셔 넣는다. 덕분에 몸이 앞으로 밀리며 얼굴이 침대에 처박혔다. 퍽, 퍽,

거친 움직임에 신음은 미처 새어 나오지도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돌며 헐떡이기만 했다.

이미 안에다 한 번 사정을 하였기에 수현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호범을 돌아봤

다. 놈은 여전히 여유롭다. 저만 힘든 것 같아 얄미운 생각에 눈을 흘기는데 호범이 팔을

잡아당긴다.

몸이 저절로 끌려 올라갔고 등 뒤로 널찍한 가슴팍이 와 닿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

고 세게 빨길래 수현은 그의 머리를 막아 제지했다.

“나, 읏, 내일, 방, 송,”

“어차피 볼 사람 없어요.”

볼 사람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물어볼 새도 없이 양팔을 앞으로 뻗어 끌어안는다. 젖

꼭지를 비틀고 손톱으로 누르더니 나머지 한 손은 아래로 내려 수현의 좆을 쥐고 문질렀

다. 배가 찌릿하여 허벅지에 힘을 주니 조였는지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 퍽, 퍽, 퍽,

그의 단단한 근육이 엉덩이를 짓이길 때마다 쾌감이 배 속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좋아, 읏, 더, 더 해, 줘, 응?”

보채자 그대로 어깨를 눌러 침대에 엎드리게 한다. 힘이 워낙 세 한 번 박을 때마다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고 그때마다 허리를 잡아채 다시 콱! 배 속이 찢어질 것처럼 강하게 삽

입했다.
아아, 수현은 고통과 쾌감에 어쩔 줄 몰라 시트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사정감이

몰려오자 호범이 알아채고 좆을 잡아 귀두를 막는다. 잠, 잠깐, 아니, 하지 마. 손을 떼어

내려고 하였으나 힘으로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무너지자 양호범이 뒤에서 몸을 포갠다 . 두 배 가까이 큰 덩치 때

문에 바위에 깔리는 기분이 들었고 폐가 눌려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그다음 겨드

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꽉 끌어안고 허리만 빠르게 움직였다.

퍽퍽, 조금 전까지 양호범이 만지던 백수현의 좆은 이제 침대 시트와 고통스럽게 마찰하

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 한 채로 속절없이 박히고 있으니 눈앞이 점점 하얗게 변해 간다.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사정할 준비를 시작하는데 호범이 어깨를 강하게

이로 깨문다. 그게 자극이 되어 저도 모르게 울컥 사정했다.

“나, 싸, 아!”

호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예민해진 좆에서 아직 배출되지

못한 정액이 찔끔찔끔 흘렀다. 죽을 것 같아 이마를 침대에 대고 진저리를 치는데 호범

이 귓속에 신음을 퍼붓고 혀를 집어넣는다. 그러더니 나중엔 눈을 혀로 문지른다. 두려

움에 눈을 감아 버리자 눈꺼풀 위로 축축한 살덩이가 닿았다.

“후, 너는, 다 맛있어.”

미친 새끼가 뭐라고 떠드는 거야. 그래, 내가 좀 맛있긴 하지. 나하고 잔 놈들도 다 그렇

게 말하다가 나중엔 변하더라. 양호범은 그러지 않을까. 나한테 질려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갑자기 놈이 귀를 깨문다. 또 딴생각하네. 씨발.

욕을 하더니 더 미친 듯 박는다. 수현은 거의 탈진한 채로 숨만 헐떡였다. 침대는 부서질

듯 삐걱댔고, 정신은 점차 아득해졌다. 그러다 엉덩이가 납작해질 정도로 힘을 주어 누

르더니 울컥, 울컥, 안에다 마음껏 쏟아붓는다. 덩치가 크면 정액도 많은 건가. 두 번을

쌌는데도 아직도 더 쌀 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수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등 뒤로 포

개어 숨을 몰아쉬는 양호범이 뺨과 목에 키스를 퍼붓는다.

“괜찮아요?”

수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도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찢어지는 거 같다.


“아니. 무거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꽉 끌어안더니 반 바퀴 빙글 돈다 . 덕분에 수현은 몸이 뒤집혀 천장

을 보고 눕는 자세가 됐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더 물을 것도 없이 그가 허리를 위아래

로 천천히 움직인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회음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고스란히 느

껴졌다. 처음엔 정액을 빼 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현은 기함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야, 너, 너, 뭐 해?”

대답이 없다.

벗어나려 하자 상반신을 옭아매듯 끌어안는다.

“그, 그만, 읏!”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먹고도 더 달라고 조르네.”

“내가, 언, 하.”

“봐요. 지금도 내 자지 조이면서 안달 내잖아.”

나 죽을 거 같아, 이제 진짜 힘들어서 못 해.

앓는 소리를 내는데 알았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안 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

수현은 휴대전화를 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 조회수 8. 댓글은 1. 그래도 누가 댓

글을 달았네 싶어 확인하였는데 닉네임이 호로범이다 . 더 기막힌 건 댓글 내용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ㅋ’ 한 글자만 찍혀 있다. 씨, 뭐야. 기분 나쁘게.


아까 왜 피식피식 비웃었는지 이해가 됐다. 매니저는 내가 종이만 접어도 사람들이 난리

가 날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기분 좋아지라고 그냥 한 말이었나 보다. 얼굴이 더 자세

하게 나오게 찍을 걸 그랬나. 차라리 벗고 춤을 췄어야 했나.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침실 문이 열리고 호범이 손에 머그잔을 들고 나타난다 . 그는 소

파에 기대앉아 있는 수현에게 와서 그것을 내밀었다.

“마셔요.”

받아서 냄새를 맡는데 대추차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컵을 드는 손이 덜덜 떨린다.

우선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양호범을 쏘아봤다.

“양 사장. 너 내 영상에 댓글 달았어?”

“왜요. 고마워?”

“고맙겠냐.”

“감사는 집어치워요. 우리 사이에.”

말을 말자. 말을. 이래서 언제 서민준한테 복수하냐. 하긴 영상을 올린다고 해도 그 인간

이 쫄기나 할까 모르겠다. 이제 엄연한 정치인이 되셨는데. 차라리 양호범한테 없애 달

라고 부탁할까. 이 자식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잖아.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서민준이 제대로 벌을 받는 거였다. 살인 공소 시효도 폐지됐다는데,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서민준 똥줄 탈 정도로 유명해져서 괴롭힐 작정이었는데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양호범은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몇십 분 전까지 짐승처럼 섹스하던 사

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수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

하지 못했다.

“낮에 김태신 만났다면서요.”

아, 들었구나. 낮의 기억이 떠오르며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나 깜짝 놀랐잖아. 그 경호원 총도 가지고 있더라? 싸움 존나 잘하던데.”

“내가 시켰거든. 백수현 괴롭히는 놈 있으면 그냥 대가리를 갈겨 버리라고. 그리고 또,”


“또?”

“바람피우거든 둘 다 쏴 버리라고 했지.”

수현이 질겁을 하며 쳐다봤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제정신이야?”

“물론.”

“와, 집착 어쩔 거야. 내가 그렇게 좋아?”

말을 해 놓고도 우스웠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부정도 하지 않았다 .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좋았다. 집착이든 뭐든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물론 그 이상을 넘어가

면 힘들겠지만. 한편으로 김태신이 했던 말과 관련하여 물어볼까 고민했다. 그런데 양호

범이 선수를 친다.

“김태신이 헛소리 지껄였다면서요.”

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자세히 보고 받았구나. 그 일로 낮 동안 꽤 많은 고

민에 휩싸였다. 김태신은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는 것처럼 여지를 주었으나, 그게

진실인지 아니면 양호범과 이간질하고 저를 낚기 위한 미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믿진 않았어.”

변명처럼 이야기했더니 픽 웃는다.

“표정 보니 100%는 아니었나 보네.”

입을 다물었다.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궁금하긴 하다. 혹시 내가 양호범하고 핏줄을

나눈 사이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젠장 막장 드라마를 너무 봤나. 갑자기 생각이 그쪽

으로 흐르자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진다.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기도 하

고….

“씨발….”

얼결에 욕을 내뱉자 호범이 눈썹을 까딱 치킨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예요?”

수현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어.”


정말 그런 거면 어쩌지. 피붙이하고 붙어먹는 걸 근친이라고 하던가 .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진다. 그 와중에 살짝 짜릿한 건 내가 변태 새끼라서 그

런 걸까. 하,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보는데 호범이 눈으로 경고한다.

“괜히 김태신 구라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정신 차려요. 내가 뒷조사 안 했을 거 같아? 엉

뚱한 놈 말에 휘둘려서 나 또 뒤통수치면 이번엔 안 참아. 예쁘다고 봐주는 것도 한 번이

면 족해.”

세상에. 협박인데 고백처럼 들리는 거 보니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 어이가 없어 멍하

게 쳐다보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호범의 것이었다. 호범은 전화를 받으러 침대 쪽

으로 갔고, 수현은 다리를 모으고 소파에 올라앉아 대추차를 홀짝였다. 맛 좋네.

“말씀하세요.”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업무 전화가 아닌가. 컵을 입에 댄 채 눈으로는 양

호범을 주시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 수현을 한번 흘깃 보더니 몸

을 완전히 돌려 안쪽으로 들어간다.

싫어요. 거길 제가 왜 가요. 라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통화

가 길지는 않아 금방 나왔는데 표정은 여전히 좋지를 않다. 수현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

럽게 물었다.

“누구야?”

“영감.”

“왜…?”

“밥 먹자고.”

“다녀와….”

호범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수현 데리고 오래요.”

수현은 놀라 눈이 커졌다.

“나를?”

“서민준도 온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어제까지 저를 죽이려던 사람 둘이서 밥을 먹자고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거절했어?”

“당연하지. 거길 왜 가.”

수현은 잠시 고민한 뒤 결정을 내렸다.

“난 갈래….”

호범의 눈빛이 매서워졌고 수현은 그를 달랬다.

“피한다고 달라지진 않아. 가서 일단 만나 볼래.”

“그럴 필요 없어요.”

“괜찮아.”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길래 수현은 눈을 접어 싱긋 웃었다.

“네가 있잖아. 든든해.”

호범이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감싸 문지른다. 짜증 났나? 화내는 건가? 조심스럽게 분위

기를 살피는데 그가 손을 떼어 내고 나서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수현은 컵을 든 채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왜, 왜 또 무서운 표정인데.”

그러더니 수현이 들고 있던 컵을 빼앗아 한쪽으로 치우고 위로 올라탄다 . 몸이 소파에

눕혀졌고 시선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잔뜩 인상을 썼으나 그가 지금 흥분했다는 건 배에

닿은 감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 되겠다. 한 번 더 하자.”

얼굴을 보니 진심이다.

대체, 어디서 자극을 받아 꼴렸는지 수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84 화

“이게 누구야.”

매니저 이윤철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수현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목도리 하나 달랑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리더니, 연락도 안 되고.”

“죄송해요. 그럴 일이 있었어요.”

이윤철이 수현의 안색과 옷차림을 살폈다. 그는 얼마 전 호텔 대표가 자신에게 백수현이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대표가 갑자기 그런 걸 물어서 놀랐는데 편지

한 장을 달랑 써 놓고 사라졌던 수현이 나타나서 또 놀랐다.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친한 친구들조차 이 새끼가 또 사고 쳐서 잠수탔구나 , 라고 생각했다는데. 대

화하면서도 매니저의 시선은 한 번씩 호텔 정문 앞에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두 명

의 경호원에게 닿았다. 그는 몸을 돌리면서 수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감시당하는 거야?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해.”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시가 맞지만 보호의 목적이 더 크다고 하면 이윤철은

뭐라고 생각할까. 자기네 나이 어린 대표하고 내가 오늘 새벽까지도 침대에서 붙어먹었

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졌다.

“그것 말고, 다른 것 도와주세요.”

“다른 거?”
“위층에 김우영 씨 있으면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김우영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으나 이제 직원도 아니고 펜트하우스 담당도 아니니 전

처럼 함부로 들어갈 순 없었다.

“김우영 씨는 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음, 아직 자고 있을 텐데. 이윤철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우영은 양

대표의 형 아닌가. 종종 여자들을 데리고 펜트하우스를 난장판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

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데스크로 가 어딘가로 전화를 연결했고 수

현을 바라봤다. 살짝 경직된 표정이었는데 통화를 마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

왔다.

“깨어 있었나 봐. 올라오라네.”

“감사해요.”

“우리 사이에 뭘.”

이윤철이 수현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는 수현에게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했다 . 만약

형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에게 이따 보자는 인사를 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벨을 누르자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김우영이 나타난다 . 팬티 한

장만 걸친 그는 가운 앞섶을 풀어헤치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무척이나 반가운 듯한 태도다. 양호범에게 들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영상을 발견하고 양

호범한테 제보한 게 김우영이었다고. 이 인간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외국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을 텐데. 마음 같아선 한 대 패 주고 싶지만, 덩치로 보면 밀릴 게 분명하

여 관뒀다.

수현은 그가 양호범을 대하는 태도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애

매하게 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양호범 편에 선다. 핏줄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들어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청소하기 전이라 상태가 엉망이다. 그는 뒹구는 술병을 발

로 대충 치운 다음 소파에 앉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 위에 있

던 생수로 목을 축이며 수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신수가 훤해졌어?”

수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은 백화점에서 산 것들이었는데, 그는 한눈에 알

아봤다.

“ 요즘 양 대표 집에 산다며. 소문 다 났어. 양호범이 파티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게 집에 있는 우렁 각시 때문이라고.”

우렁 각시. 그게 뭐였더라. 어릴 적 동화책서 읽은 거 같긴 한데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는

다. 아무튼. 우렁이든 구렁이든 상관없었다. 오늘 김우영을 만나러 온 건 전혀 다른 이유

였으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고맙게도 김우영이 먼저 물어봐 준다.

“나한테 찾아온 용건은?”

소파에 기대 다리를 벌리고 앉는 바람에 가운이 벌어지고 그의 속옷 한가운데가 적나라

하게 드러났다. 한번 흘깃 보고 나서는 수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주변에 인터넷 방송 하는 사람 있어요?”

김우영이 고개를 갸웃한다. 인터넷 방송?

“제가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는데요… . 아무리 해도 구독자가 늘지를 않아서… 노하우 알

려 줄 사람이 필요해요. 편집도 구해야 하고.”

김우영은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그는 수현에게 대체 어떤 영상을 올리는 거냐고 물었고

수현은 며칠 동안 올린 영상들을 그에게 보여 줬다. 영상을 보는 김우영 표정이 일그러

지는가 싶더니 푸하하 하고 옆으로 쓰러지며 박장대소를 한다. 아무리 웃겨도 그렇지 저

렇게 대놓고 비웃을 일인가. 못마땅하게 쳐다보는데 그가 실컷 웃고 나서 배를 움켜쥐고

수현을 쳐다본다.

“아니, 이게 뭐야. 차라리 휠체어를 타지 그랬어?”

수현은 쭈뼛대다가 대답했다.


“보시면 아래, 휠체어 타고 가발 쓴 영상도 있어요.”

그에게 어제 올렸던 영상을 보여 주자 이번엔 바닥을 구를 기세다. 하도 조회 수가 안 나

오길래 휠체어 타고 귀신 흉내를 냈는데 반응이 싸늘했다 . 사람들한테 관종이라고 욕만

처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양병원에서 얼굴을 까고 당당하게 출연할걸. 그랬다면 지

금쯤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을지도 모르는데. 김우영은 웃음을 갈무리한 뒤 눈물을 훔치

는 시늉을 했다.

“와 씨, 존나 웃기다. 근래에 이렇게 웃어 본 건 처음이야. 고마워.”

“즐거움이라도 드렸다니 다행이네요….”

“근데 여기 계속 댓글 다는 얘는 누구야? 호로범? 이름 골때리네.”

수현은 흠칫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호로범? 호로범? 자꾸 입으로 되뇌면서도 김우영은

그게 양호범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 이해된다. 수현 역시 양호범이 영상마다

댓글을 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는 휴대전화를 돌려주고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

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부탁할까? 범이한테 말하면 당장 해결해 줄 텐데.”

수현은 쓰게 웃었다. 양호범은 뭘 해도 괜찮다고 하더니 막상 영상을 올리기 시작하니까

달갑지 않아 했다. 어제는 룩북인지 뭔지 옷 갈아입는 콘텐츠가 인기가 많다길래 그걸

해 볼까 이야기를 꺼냈다가 욕만 처먹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 얼마나 무섭게 노려보는지

두 번은 묻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김우영이 눈치채고 말을 꺼낸다.

“범이가 싫어하는구나?”

“아마도?”

“그럼 결론 났네. 관둬. 양 대표 옆에서 돈이나 펑펑 쓰고 누리고 살아 . 왜 쉬운 길을 놔두

고 개고생을 하려고 해?”

물론 그럼 몸이야 편하겠지. 하지만 사람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 방송하고

싶은 데는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유명해져서 서민준에게 엿 먹이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다. 수현은 양호범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될 거라 믿지 않는다. 양호범은 어렸고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좋아, 그럼. 인터넷 방송 말고, 다른 건 어때? 마침 나 아는 애가 신인 배우 하나 찾는데

자기한테 딱 맞을 거 같아서 말이지.”

배우란 말에 수현은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배우요? 제가?”

“왜. 안 내켜? 귀신 흉내 내는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

“나 같은 초짜를 누가….”

말끝을 흐리고 김우영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배우라는 게 아무나 막 할 수 있는

건가. 걱정하자 김우영은 일단 만날 기회를 줄 테니 한번 해 보라고, 잘되면 자기한테 한

턱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너 저번에 배우 하나 찾는다고 했지? 마침

적임자가 있는데 말이야. 노출? 가능할걸. 아, 글쎄 그건 좀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

수위가 높아? 어느 정도? 직접 삽입은 아닌 거지? 됐어, 그럼. 다행이네.

듣고 있던 수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혹시 AV 배우를 찾는 거 아니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듣고 있는데 마침 호범에게 메

시지가 도착한다. 낮부터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건 드문 일이라 반가웠다.

[저녁 약속 취소됐어요. 둘이 외식하러 가요.]

양호범 본가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취소됐다는 연락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양 회장과 서민준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명치에 음

식물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었는데.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는데 통화를 마친 김우영이 메모에 무언가를 적어서 건넨다.

흘려 쓴 글씨체는 약쟁이인 그와 딱 어울렸다.

“여기. 약속 잡고 찾아가 봐.”


❖❖❖

백수현에게 저녁 식사가 취소됐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호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

다. 그의 낯빛이 보기 드물게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태준을 향해 시

선을 옮겼다.

“확실해?”

“예, 김태신도 최근에 안 모양입니다. 그때 지시 내렸던 이상문이 김태신 고향 선배랍니

다.”

“영감은? 영감도 알고 있었어?”

“당시엔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은 알고 있단 뜻인가. 호범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노려봤다. 20 여 년 전 양

회장은 사람을 시켜 모 국회의원의 집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장부를 하나 빼냈다. 장부

가 폭로되며 한동안 나라가 시끄러웠고, 오래전 일이지만 호범도 그것에 관해서 알고 있

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양 회장의 사주를 받은 사람은 이상문이라

는 작자였는데, 정작 장부를 빼낸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손이 빨라 훔치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장부를 빼내고 돈을 얻는 대신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한다.

처가 죽임을 당했고, 아들은….

호범은 종이를 옆으로 넘겼다.

빛이 바랜 백광무의 가족사진이 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이게 진실이긴 할까. 양 회

장이 여태 몰랐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함정은 아닐까. 만

약 진실이라면, 이걸 어디까지 백수현에게 알려야 하나.

사진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변해 갔다.

“씨발. 뭐 이런 좆같은 일이….”


85 화

수현은 호텔에 들러 김우영을 만나고 난 다음 백광무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출발했다. 도

착하자마자 병원 관계자가 마중을 나온 걸 보니 양호범이 미리 연락을 넣은 것 같았다.

전과 다르게 달라진 대접에 수현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 하지만 그건 백광무를

보자마자 이내 사라졌다.

수현은 백광무의 머리맡에 며칠 전 백화점에서 산 카디건을 올려놓았다. 그는 늙고 마르

긴 했으나 보살핌을 잘 받아 비교적 깔끔한 모습이었다 . 의사 말에 따르면 가끔 눈을 떴

지만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가 살려고 일부러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 워낙 남 속이

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인간 아닌가. 수현은 가까이 다가갔고 백광무의 얼굴을 빤

히 내려다봤다.

얼굴을 보면 볼수록 도둑질하는 못된 버릇 빼고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다행이다.

엄마를 닮아 얼굴이라도 반반하니 양호범 같은 놈이 나한테 매달리지. 백광무를 닮아 박

색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깨어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엄마의 행방은 어떻게 된 걸까. 진짜 유골을 수습했

나. 아니면 애초에 모두 거짓말이었을까. 지금이라도 그 산을 더 파 봐야 하나. 상념에 빠

져 있는 동안에도 산소 호흡기에선 계속하여 쉬익, 쉬익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가 백광무라며.]

[병신 같은 새끼. 아무것도 모르고 양호범한테 좋다고 붙어서는.]


양호범은 무시하라고 했지만, 밥을 먹다가도 샤워하다가도 김태신이 했던 말이 한 번씩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대체 뭘? 개새끼가 말을 하려거든 끝까지 다 하지. 똥 싸다

만 것처럼 찝찝하게 만들고 있어. 처음엔 함정에 빠트리려는 농간이라고 여겼는데 시간

이 흐를수록 더 거슬렸다. 적어도 백광무가 의식이 있었다면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

“일어나 봐.”

저번처럼 눈을 뜨지 않을까 기대하며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과 다르게 면회 시

간이 훌쩍 지나도 수현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저물어 가

고 있었지만 백광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를 몇 시간 동

안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못 할 짓이었다.

수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백광무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더 올 일이 있을까. 원망스

러운 마음은 여전히 컸고, 그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눈물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 다만 죽

기 전 정신이 돌아와 엄마의 행방이라도 알려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작별 인사를 할 것도 없이 병실을 나서는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병원 밖은 해가 저물어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코트 앞을 여미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양호범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는데,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으려나.

걸음을 서두르는데 근처에 있던 검은색 승용차에서 누군가 내린다 . 처음엔 이곳을 찾아

온 방문객인 줄 알고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남자의 낯이 익다. 누군지 단번

에 알아봤고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데 상대방

역시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저 인간이 여길 어떻게 알았지. 내 뒤를 밟았나. 불쾌한 기

색을 하고 노려보자 서민준이 천천히 다가온다. 눈치 빠른 경호원이 나서서 가로막았다.

“누구십니까.”

경계심이 가득한 말투에 서민준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서민준입니다. 이 친구하고 아는 사이예요. 둘이서 얘기 나누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경호원이 수현을 본다. 서민준의 말이 맞는지 묻는 듯한 표정이다. 수현은 당장 이 인간

을 내 눈앞에서 치워 달라고 말을 하려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들어나 보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은 뒤로 물러났으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걸 잊지 않았다 . 그들도 그들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거라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서민준 또한 경호원을 의식하

진 않는 듯하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 저녁 약속을 취소했길래, 찾아온 거야.”

수현은 약속을 취소한 게 호범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그래서? 나를 미행했다고?”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으니까.”

뻔뻔한 태도에 수현은 기가 차서 웃었다.

“잘못 찾아왔네. 나는 형하고 할 얘기 없는데.”

“이 상황이 불편한 거 충분히 이해해.”

“이해했으면 가. 귀찮게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 줘. 난 오늘 너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했어.”

“뭘. 양 회장하고 작당하고 날 죽이려고 한 거?”

“오해야. 그런 적 없어.”

“웃기고 자빠졌네. 형이 오해라고 말하면 없던 일이 돼?”

“네가 직접 들은 게 아니잖아.”

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서민준을 노려봤다. 그래, 직접 들은 건 아니다. 김우진이 말해 준

거지. 김우진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서민준보다는 김우진

을 더 믿었다.

“됐고.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 앞으로 이렇게 찾아오지 마. 내가 뭐라도 터트릴까

봐 쫀 모양인데, 그러게 잘 살지 그랬어? 다시 만났을 때 진심으로 사과했으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잖아. 적어도 발뺌하고 날 병신 만들진 말았어야지.”


더는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대로 가려는데 서민준이 팔을 잡는다. 수현은

그 팔을 홱 뿌리치고 나서 그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서민준의 얼굴은 애통한 표정이다.

저 얼굴을 안다. 그날 사고가 터졌던 날도 저런 얼굴을 했었다. 그래서 깜빡 속아 넘어갔

고 대신 죄도 뒤집어썼지. 서민준이 한 발 더 다가왔고 수현은 손을 들어 그에게 경고했

다.

“가까이 오기만 해. 패 버릴 테니까.”

“수현아.”

“왜. 이제 내가 신경 쓰여? 좆도 없는 병신일 때는 무시가 되더니 양호범하고 같이 있으

니까 무시가 안 되지? 그러니까 네가 비겁한 새끼라는 거야.”

“알아. 나 비겁해. 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권력이란 게 그렇게 크게 와닿을 줄 몰랐

어. 어린 마음에 두려웠어. 무서웠어. 너는 나를 지키려고 그런 선택을 했는데, 나는 그러

질 못했어. 나는 내 가족들만 지켰어. 아버지하고 어머니… 누나를 지켜야 했어.”

“핑계 대지 마!”

“너한테 죽을죄를 지었다는 거 알아. 용서해 달라고 안 할게. 그렇지만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해. 혼란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결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

“좆까. 양호범도 그랬어.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양호범을 믿어? 걔가 너한테 과연 진실만 말했을까.”

그 말에 수현은 울컥하여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당연하지! 걔는 너 같은 새끼가 아니야!”

양호범 편을 들자 서민준 얼굴이 아주 볼만해진다. 교도소에서 매일 저 얼굴을 떠올렸었

다. 출소하여 도망치듯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내내 마음에 품고 살았다 .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하면서. 그러나 이젠 안다. 서민준이 얼마나 야비하고 비겁

한 인간인지를. 가족은 구실일 뿐 그는 애초에 수현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던 거다 . 몸

을 착취했고, 그다음은 시간을 빼앗아갔지.

“정말 미안해?”
서민준은 대답이 없었다.

“그럼 다 포기해. 국회의원인지 나발인지 포기하고 쥐 죽은 듯 살라고. 그렇게 하면 나도

네 진심을 믿어 줄게.”

“…….”

“TV 에 네 얼굴 나올 때마다 얼마나 구역질이 나는지 알아 ? 당장에라도 사람들 앞에서

다 까발리고 싶어 미치겠어. 근데 왜 못 했게? 알잖아. 나는 빵에도 다녀왔고, 몸이나 팔

던 놈이니까. 사람들은 나보다 너를 더 믿어 줄 테니까.”

“수현아.”

“보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달라. 나도 이젠 힘이란 게 생겼거든.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양

호범 때문에.”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얼굴을 보며 수현은 희열을 느꼈다.

“더 말하기 싫어. 갈게. 그리고 두 번 다신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 재수 없어.”

일부러 바닥에 퉤, 침까지 뱉고 돌아섰다.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가 조용하다.

통쾌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양호범도 원망해야지.”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와 발길을 잡는다. 씨발, 또 뭐라고 떠드는 거야. 뒤를 돌자 조금 전

까지 슬픔에 젖어 있던 그 얼굴이 아니다 . 눈빛엔 날이 섰고,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저럴 줄 알았다.

“왜. 양호범이 백광무 저렇게 만들어서? 그게 뭐. 도둑질하다 저 꼴이 된 걸 누굴 탓해!”

차갑게 쏘아붙이는데도 서민준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침묵한다. 무슨 꿍꿍인지 더 알

고 싶지도 않아 그대로 외면했다. 차에 막 오르려던 순간 머릿속에 김태신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맥락이 비슷했다.

수현은 차에 타지 못하고 결국 서민준을 돌아봤다.

그는 어느덧 왔던 길을 따라 자신의 차로 향하고 있었다.


86 화

[그렇게 따지면 양호범도 원망해야지.]

양호범을 원망해? 무엇 때문에? 설마 나하고 양호범이 진짜 핏줄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 더 있는 걸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핏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씨발.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말을 하다가 말아서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모르겠

다. 창에다 머리를 쿵 박자 보조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뒤를 한번 흘깃 돌아봤다.

“괜찮으세요?”

“아까, 대화한 거 있잖아요. 양호범한테 보고하실 거예요?”

경호원은 대답이 없다. 그렇다는 뜻일 거다. 수현을 보호하는 목적도 있지만 감시하는

목적도 있을 테니까.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관뒀다 .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서민준이 찾아온 걸 무슨 수로 막

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 수현은 계기판의 숫자를 확

인했다. 저녁 시간에 늦을 거 같으니 속력을 내나 보다 . 운전대를 잡은 경호원은 어마어

마하게 올라가는 숫자에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괜히 겁이 나서 안전띠를 단단히 조이고 창밖을 내다봤다.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

다. 히터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실내가 훈훈했다 . 복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잠이 쏟아졌

고, 잠깐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익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현은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을

문질렀다. 이곳은 수현이 몇 달 전까지 일을 다니던 가게 근처였다.


“여기서 만나요?”

“네. 이쪽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골목길로 들어간 차가 사각형 모형의 작은 건물 앞에서 멈췄다. r52 라고 글자가 적힌 음

식점이었는데 주차장에 차가 딱 두 대뿐이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자 CLOSE 라는

나무 팻말이 걸려 있다. 영업이 끝난 건가.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대는데 반대편에서 양

호범이 나온다.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생소했다.

“뭐야?”

“딱 맞춰 왔네요. 저기 창가 앞에 자리 보이죠? 거기 앉아요.”

그러더니 안으로 냉큼 들어간다. 당혹스러웠지만 창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신없

이 가게를 구경하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호범이 트레이에 무언가를 가

지고 왔다. 흰 셔츠에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모습이 꽤 섹시했다.

호범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 뒤쪽으로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하

고 인사를 하길래 수현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는 깔끔한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었는데,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지연입니다.”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모습이 꽤 당차고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수현은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은 뒤 그 손을 맞잡았다.

“백수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실물로 뵈니 더 미남이시네요.”

착각인가. 눈을 접어 웃는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양호범과 닮았다 . 손을 놓은 여자가 호

범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다. 뒷정리는 필요 없으니 문단속만 잘하고 가라고, 디저트하

고 차는 안쪽에 준비해 놨다고.

“그럼 나중에 봬요. 제가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더 대화를 나눌 것도 없이 여자는 인사를 마치고 나서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 둘만 남게

되자 호범은 앞치마를 풀고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수현은 창밖을 내다봤다. 조

금 전 나간 여자가 주차장에 있던 차로 향하는 중이었다.


“누구야?”

“여기 사장.”

호범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와인을 따는 중이었다 . 코르크를 비트는 팔뚝에 힘줄이

솟아난다. 첫 만남에도 팔뚝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었다. 한참 넋을 놓고 봤었지.

“많이 친한가 봐. 가게도 막 빌려주고.”

“사촌 누나예요.”

“사촌?”

“막내 고모 딸.”

그 말에 수현은 놀라서 물었다.

“그럼 김우영 씨하고 남매야?”

“김우영하고 김우진은 첫째 고모 자식이고. 지연이 누나는 셋째 고모.”

고모가 많구나. 그럼 사망한 양호범의 아버지가 막내인 걸까.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그

렇단다. 막내에 외아들. 양 회장이 양호범을 편애하는 이유를 알겠다. 원래 노인네들은

아들과 친손주에 환장하니까. 그깟 성별이 뭐 대수라고.

“그래도 사촌끼리 다 친한가 봐?”

“아닌 경우도 있어요.”

“아닌 경우?”

궁금하여 더 물으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호범이 전화를 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와인

을 따라 줬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쓴다. 장난친 거였어. 다신 안 그럴

게.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뭘 잘못, 뚝, 호범은 더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고

수현은 아무 생각 없이 얘기했다.

“방금 그거 누구야? 목소리가 김우영 씨하고 비슷하다?”

“맞아요, 김우영.”

수현은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봤고 호범은 잔을 부딪치더니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

꺽꿀꺽 탐스럽게 생긴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 마치 오럴을 해 줄 때처럼. 넋

이 나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곧 정신을 차렸다.


“김우영이 왜 너한테 소리를 질러?”

호범은 반쯤 남은 와인을 옆으로 치우고 수현에게 포크를 쥐여 줬다.

“그만 떠들고 먹어요. 내가 기껏 만들었는데 다 식겠다.”

“직접 만든 거야?”

“아니면 왜 여기서 먹자고 했겠어요.”

아아, 이거 연인끼리 음식 만들어 주는 그런 건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고 다정하다니

까. 사람 팰 때는 존나 무식하게 패면서. 이쯤 되니 양호범한테 얻어터졌던 일이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고 그가 원래부터 다정남이 아니었을까 콩 꺼풀이 씌워진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져 웃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너 김우영이 나한테 이상한 연락처 줬다고 팼냐?”

“헛소리하길래 가둬 버렸어요. 약을 덜 처먹으면 정신이 돌아오겠지.”

“어디다 가뒀는데.”

“알면. 가서 풀어 주게?”

“내가 왜. 김우영하고 친한 것도 아닌데.”

대답이 마음에 들어 호범은 피식 웃었다. 사실 백수현이 김우영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기분이 영 별로였다. 전부터 둘이 묘하게 친한 것 같아 불쾌했는데 거기다 김

우영이 오늘 불을 지핀 것이다. 그가 알려 줬다는 연락처는 게이 포르노를 찍는 놈들이

었고 영상을 일본에 수출해 돈을 버는 작자들이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도가 지나쳤고,

그것만으로도 창고에 가둘 이유는 충분했다.

“식어요. 얼른 먹어요

수현은 양호범이 음식을 직접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포크로 둘둘 말아 한

입 먹었는데 예상외로 맛이 기가 막히다.

“와, 맛있어.”

엄지손가락을 척 치키니 호범이 웃는다.

“이탈리아 가면 진짜 이런 거 파나?”

뜬금없는 질문에 스테이크를 썰어 앞에 놓아 주던 호범이 수현을 힐긋 쳐다본다.


“왜요. 가 보고 싶어?”

“응. 이태리 남자들이 그렇게 잘생겼대. 지나가는 애들이 다 모델이라고. 물론 나도 들은

얘기야.”

스테이크 대신 그 입을 썰어 버릴 거라고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째 조용하

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가 볼래요?”

수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외국 가고 싶어 했잖아. 가서 몇 년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표정이 진지하다. 그러고 보니 양호범은 아까부터 음식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

다.

“부산까지 쫓아와서 못 가게 잡더니, 이제 와서 왜.”

“그건 밀항이고. 절차 밟아서 정식으로 나갔다 오라고. 통역 가능한 사람도 붙여 줄게.”

“너는. 너는 여기 남고?”

호범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봐서. 따라가야지.”

농담이냐고 물었더니 진담이란다.

[그렇게 따지면 양호범도 원망해야지.]

[병신 같은 새끼. 아무것도 모르고 양호범한테 좋다고 붙어서는.]

수현은 포크를 내려놓았고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알싸한 맛이 혀끝에 맴돈다. 머릿속에

서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양사장 너… 뭘 알아냈구나?”

호범은 와인 잔의 아랫부분을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 술을 마시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준비 과정인 듯했다.

“혹시 너하고 나, 형제야? 우리 근친이야?”


개소리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더 꾹 다문다. 수현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양호범이 이렇게까지 나올 만한 일이 무얼까. 내가 양호범을 원망해야 할 일. 알아선 안

되는 일.

“설마….”

호범이 들고 있던 잔을 옆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을 떼는 것마저도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인다. 수현은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했고 호범은 천천히 말을 꺼냈

다. 영감이… 라고 하더니 곧바로 양 회장이라고 호칭을 정정한다.

“백수현 어머니 죽음하고 연관 있대.”

수현은 정지된 화면처럼 그대로 굳었다. 호범은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백광무가 아주

오래전 양 회장의 사주를 받아 일한 적이 있었다고. 그게 잘못되면서 반대편 조직이 백

광무 가족을 찾아 죽였고, 거기서 운 좋게 살아남은 게 백수현이라고.

“ 그런데 이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은 몰라. 연관됐던 사람들 대부분 행방불명

이거든.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수현은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 소리지.”

“…….”

“아니다. 한 명 있네. 백광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 사건이 튀어나왔을까. 전개가 뜬금없지 않은가. 일

단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을 마셨다. 팔을 움직이다 포크가 툭, 치이며 바닥에 떨어졌

고 그것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그러다 테이블 아래 양호범의 손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양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있었

다. 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손등엔 핏줄이 돋고 손가락은 으스러지기 직전이다. 정말이구

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수현은 포크를 주워 몸을 일으켰다.

“그 얘길 왜 해…. 숨길 수도 있었잖아.”
“종일 고민했어요. 이게 진실이면 나는 백수현한테 원수나 마찬가지인 거잖아.”

그러니까 왜 했냐고.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처음엔 놀라고 당혹스러워 크게 와닿지 않

았는데 차츰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실일까. 아니면 둘을 떼어 놓으려는 거짓말

일까. 끝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가게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수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식어 버린 파스타만 응시했

다. 역시 그때 도망쳐야 했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항상 결말이 좋지 않다 . 이번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알게 돼서….

“도망치지 마.”

정적을 깬 한마디에 수현은 고개를 들어 양호범을 바라봤다.

표정이 애처롭다. 내가 알던 양호범이 맞나 싶을 만큼.

“모든 게 사실이면 내가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그러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너무 절절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를 버리지 마, 백수현.”


87 화

“편하게 앉게.”

양 회장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난 잎을 정성스레 닦았다. 그의 앞에는 서민준이 자세를

고쳐 앉고 있었다. 이어서 직원이 다과를 내온 뒤 사라졌고 방에는 둘만 남게 됐다. 난을

한쪽에 밀어 둔 양 회장은 그것을 애틋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겨우내 속을 썩이더니 이제 상태가 나아졌어.”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민준을 향해 돌아앉았다.

“앞으로 잘 자랄 일만 남았네. 그렇지 않은가?”

양 회장은 찻잔을 들었다. 백수현이 서울을 떠난 지 열흘째다. 그는 요양병원에서 서민

준을 만나고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같은 날 양호범이 찾아와 물었다. 그 얘기가 사

실인지. 정말 양 회장이 백광무에게 일을 시켜 그의 부인과 아들이 잡혀갔는지를. 그랬

다면 왜 막아 주지 못했는지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하자 양호범은 한참 말이 없었다.

[정리할게요.]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러면서 더는 백수현의 행방을 찾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

라고 부탁했다. 약속만 지키면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처음엔 무슨 꿍꿍인가 했는데 그

러고 나서는 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며 일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다. 양 회장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자네 도움이 컸어. 그런 상투적인 게 먹힐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서민준은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양 회장에게 제안했을 때만 해도 그는 꽤 회의적인 반

응이었다. 그런 거짓말이 먹히겠냐고. 하지만 그것이 모두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

백광무가 중요한 물건을 훔친 것도 맞고, 그것 때문에 처와 아들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

도 맞으니까. 다만 양 회장의 심부름은 아니었을 뿐. 그래서 서민준은 김태신을 섭외해

밑밥을 깔고, 양호범에게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증거들을 흘렸다.

“ 그래도 안심하길 일러. 무슨 작당을 벌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당분간은 지켜

봐.”

“네,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어디 있다고 했지.”

“강릉에 있습니다.”

백수현이 왜 연고지도 아닌 강릉으로 갔는지는 모른다. 횟집에 취직한 그는 근처에 작은

원룸도 구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술과 먹을 걸 사서 원룸으로 돌아왔는데 사진으로 만

난 백수현은 꽤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술에 취해 가로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

은 애처롭기 그지없었으나 동시에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범이가 부탁한 것도 있고 하니 더는 건드리지 말게. 관심이 멀어지면 그때 처리해도 늦

지 않아. 물론 자네로서는 영 껄끄러울 테지만. 대신 선거 전에 자네 장인한테 통 크게 선

물하나 하도록 하지. 나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 말이야.”

서민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 장인인 김현식의 지지율이 무섭게

상승 중이다. 이대로 가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다 . 권력을 손에 쥐면 더는

양 회장 같은 인간에게 도움받지 않아도 된다. 그때까지다.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비

위를 맞추는 것도.

“그만 가 보게. 피곤하네.”

네, 회장님. 서민준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

오는데 김우진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다. 까닥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

더니 제 갈 길을 간다. 올 때마다 얼굴을 보는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 어리지

만 양호범과는 다른 의미로 재수가 없었다.


대문을 막 벗어나니 답답하던 숨이 트인다.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하는데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 전화가 진동한다. 백수현을 감시하는 사람에게 온 연락이었다.

[백수현 3 월 2 일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편도로 예약했습니다.]

일본? 민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왜? 뒤를 돌아 양 회장의 한옥

을 바라봤다. 이 사실은 양 회장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백수현이 어디든

떠나면 그는 좋아할 테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이면 더 금상첨화겠고.

민준은 메시지 창에서 백수현의 사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사람을 홀리는 얼굴

이다. 보고 있으면 저열한 바닥까지 드러내게 만드는 . 양호범은 너하고 다르다며 악을

쓰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휴대 전화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으며 묘하게 웃었다.

떠나기 전 작별 인사는 한번 하는 게 낫겠지.

❖❖❖

“대선까지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 다음 주부터는 이제 각 후보의 선거 운

동과 TV 토론이 진행됩니다.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과연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TV 에 나왔고 김현식 옆에 서민준이 잠깐 비친다 . 눈엣

가시가 사라졌으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겠지. 꼴 보기 싫어 채널을 바꾸었더니 근처

에 있던 손님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거 보는데 왜 돌리고 그래!”

수현은 흠칫하여 채널을 본래대로 해 놓았다 .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과하고 먹다 남은

매운탕 냄비에 남은 음식물을 쏟아붓고 있는데 8 번 테이블 벨이 울린다. 수현이 움직이

기도 전에 외국인 직원이 그쪽으로 가서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족히 열 명은 넘었고 단체로 관광을

온 건지 시끌벅적했다. 주말 저녁이라 가뜩이나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단체 손님까지 받

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몸이 힘든 게 훨씬 나았다.

2 시간을 쉬지도 않고 일을 하다 잠깐 숨을 돌리는 와중에 커플 하나가 들어온다 . 이미 1

차로 마신 건지 둘 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여자가 화장실을 가려고 하니 남

자가 어울리지 않게 어디 가느냐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양호범을 떠올렸다.

[나를 버리지 마, 백수현.]

누가 들었다면 프러포즈인 줄 알았을 거다. 이건 어려서 그런지 가끔 막무가내로 돌진한

다니까. 물론 그 점이 꽤 귀엽긴 하지만….

“백군아. 3 번 테이블에 소주 2 개.”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 수현을 부른다 . 부리나케 냉장고에서 소주 2 개를 챙겨

3 번 테이블로 갔다. 방금 그 커플이다. 여자가 수현을 쳐다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입가

에 미소를 띠고 감사합니다. 하고 말한다.

돌아서는데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알바 얼굴 보고 뽑나 봐. 잘생겼다. 그러자 남자가 불

만이 많은 투로 대꾸한다.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는데? 게이 아니야? 뜨끔하여 돌아봤더

니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한다. 여자가 그러지 말라며 남자의

팔을 잡고 말린다.

아무튼, 술만 먹으면 용감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손님인데 쥐어박을 수는 없어서

애써 미소만 지었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머물 것도 아니지 않은가 . 조용히 있다가 떠나

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나았다.

어느덧 폐점 시간이 가까워졌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손님들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서

둘러 뒷정리를 마치자 외국인 직원들은 무리 지어 떠났다 . 자기들끼리 외국어로 대화하

는 바람에 전부 알아듣진 못하였으나 술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가게 밖으로 나오는데 오늘따라 바람이 더 차다. 근처에 있던 상점 대부분은 불이 꺼졌

고 술에 취한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 해변에서 누군가 폭죽을 터트리는지

작은 불꽃이 밤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수현은 가게 뒤쪽에 세워 둔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사람 팔자는 참으로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까지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탔는데 , 지금은 녹이 슬고 바람이 빠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바람이 부는데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웠다. 다행히 묵

고 있는 원룸까지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 두고

원룸 건물로 들어가다 근처에 수상한 차를 발견했다. 검은색 수입 차량은 동네와 어울리

지 않는 것이었다.

누가 보낸 사람들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감시하려면 좀 성의라도 보이든가. 아주 대

놓고 하네. 어이없이 웃으며 3 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작은 크기의 원룸은 가전들이

옵션으로 딸린 곳이었고, 상태도 제법 양호했다. 서둘러 보일러를 켜고 옷을 벗어 의자

에 걸어 뒀다. 방이 냉골이다.

창문으로 가 커튼을 치고 습관처럼 들어오는 입구 신발장 위쪽에 칼을 하나 올려 뒀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한 것이긴 했지만 부디 쓸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그

러고 나서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땄고 식탁에 앉아 어제 올린 동영상을 확인했다.

열흘 동안 구독자와 조회 수가 꽤 많이 늘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댓글을 읽는데 반응이

비슷하다. 잘생겨서 본다. 종이접기도 잘생긴 사람이 하면 재미있을 수 있구나. 종이가

잘 안 보이는데 카메라를 얼굴에 더 가까이 비춰 달라 . 너무 별로네요. 내 마음속에 별로.

기타 등등.

그러다 어디에도 양호범의 흔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

다.
88 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나오는데 소파에 김우영이 앉아 있다. 그는 테이블에 세팅

되어 있던 술과 안주를 허락도 없이 먹고 있었는데 창고에 갇힌 뒤 약 기운이 빠져 눈이

퀭하고 사람이 지쳐 보였다.

“풀려났으면 곱게 있을 것이지. 여기까진 왜 찾아와?”

“보고 싶어서 왔지.”

김우영의 뻔뻔한 대답에 호범은 코웃음을 쳤다.

“저런. 나는 속이 후련했는데.”

김우영이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높이 들었다. 금단 증상 때문인지 잔을 잡은 손을 눈

에 띌 정도로 떨면서도 표정은 태연함을 유지했다.

“난 멀쩡해. 봐.”

“놀고 자빠졌네. 손을 그렇게 떨면서?”

김우영이 씩 웃으며 술을 단숨에 비운다. 그는 어린 시절 참으로 똑똑했고 수재 소리까

지 들으며 자랐다. 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만해도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는데

그런 그가 약에 절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만 가. 손님 오기로 했어.”

김우영은 아예 늘어져 테이블에 발을 걸쳤다.

“손님? 이 시간에?”

침묵하자 꼬치꼬치 캐묻는다.

“누군데. 백수현은 아닐 테고?”


백수현 이야기에 호범의 눈빛에 날이 섰다. 그걸 김우영도 알았을 텐데, 멈추지 않았다.

“ 생각할수록 열 받는단 말이야. 백수현한테 농담 한 번 했다고 날 거기 가둘 생각을 하

냐.”

“정말 농담이었어?”

“아무렴. 걔를 AV 영화에 출연시킬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내가 백수현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는데.”

아끼고 좋아해? 호범의 손에 있던 생수병이 구겨져도 김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헤어질 줄은 몰랐어. 네가 꽤 좋아했잖아.”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 호범은 김우영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김우영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무척 궁금했다. 둘 사이가 끝난 게 사실일까.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혼자 추리를 거듭해 나가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잠시 뒤 호텔 문이 열리고 긴 머리를 찰랑대는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 짧은 원피스 차

림에 예쁘장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는 김우영도 아는 사람이었다 . 여자가 김우영을 발

견하고 실망스럽다는 듯한 표정부터 짓는다.

“뭐야. 셋이 하자고 부른 거야?”

김우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예전에 호범이 잠깐 만나던 여자다. 끝난 게 틀림없군. 불

쌍하게 됐네, 백수현.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양호범한테 너무 마음 주지 말라고 했잖아.

더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여자가 부리나케 호범의 팔에 매달려 몸을 비비적댔다.

“엊그제 잘 들어갔어? 아침에 일어나니까 없어서 놀랐어.”

호범이 여자를 그대로 놔둔 채 김우영을 쳐다본다.

“이제 가. 나도 내 할 일이 있어.”

할 일을 얘기하며 눈짓으로 여자를 가리킨다. 김우영은 능글맞게 웃었다. 난 셋도 괜찮

은데. 라고 말하자 양호범 눈빛에 살기가 번뜩인다. 더 엉덩이를 뭉개고 있다간 양호범

이 사람을 시켜 쫓아낼 기세였기에 그는 마지못해 호텔을 나섰다.


김우영이 사라지고 나자 호범은 기다렸다는 듯 팔에 달라붙은 여자를 떼어 냈다 . 조금

전까지 눈웃음을 치던 여자 역시 입술을 샐쭉 내밀며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

았다.

“와 줘서 고마워.”

“구라치지 마. 그게 고마운 표정이야?”

호범이 가식적으로 웃자 여자가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사실 진심이든 아니든 여자는

상관없었다. 자신은 양호범이 시키는 대로 해 주고 대가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물론 발

설할 시엔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도 알기에 되도록 입을 다물 작정이다. 호범이 옷을 갈

아입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가 쪼르르 쫓아온다. 호범은 문을 닫으며 여자에게 손

으로 경고했다.

“거실에 있다가 1 시간 뒤에 가. 난 잘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 같이 잘래?”

“아니.”

단호한 태도에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남자 애인 생겼다더니 진짜였어?”

호범은 대꾸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밖에서 여자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잠잠해

진다. 그는 바지 하나만 걸친 채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 백수현이 어제 새로

올린 영상이 있는지 알람이 왔다. 구독자 1 만 돌파 기념? 상탈 종이접기?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백수현 얼굴이 나온다. 제가 1 만 구독자 돌파 기념으로 오늘은 상의를 탈의하고

종이접기를 하겠습니다.

영상을 보던 호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게 미쳤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슴없이 흰색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푼다 . 다 벗었는데 젖꼭지만

반창고로 가려서 가관이다. 그러고서 얌전하게 앉아 종이접기를 시작한다. 덕분에 조회

수와 댓글 수는 전보다 몇 배가 늘어났다.
호범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영상을 한참 노려보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음

악 소리가 들리고 여자가 소파에 앉아 양주를 마시며 셀카를 찍는 중이다. 호범이 나타

나자 여자가 돌아보며 묻는다.

“마음이 바뀐 거야?”

“너 차 끌고 왔지?”

여자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차는 왜? 라고 물었으나 호범은 이유는 말해 주지 않고

여자를 재촉했다.

“키 줘. 나하고 드라이브 가자.”

❖❖❖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따라 유독 손님도 없고 그것

때문인지 사장은 내내 신경질을 부렸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구석

에 숨어 담배를 찾는데 하필 라이터를 두고 왔다. 에이 씨.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가게

안에서 누군가 나온다. 터키에서 왔다는 외국인 직원이다.

“불 있어요?”

직원이 알아듣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준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500 원.”

그 말에 수현은 하하,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남자는 어디서 배웠는지 툭하면 아저씨 같은

농담을 하였다. 한국에서 오래 지낸 그와 의사소통을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데 다른 직원이 나와 수현을 부른다.

“사장님이 찾아.”
수현은 남아 있던 담배를 벽에 짓이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이 부산스럽고 사장은

입이 귀에 걸려 싱글벙글이다.

“백군아. 너 교동에 배달 좀 다녀와라.”

배달이란 말에 수현은 어리둥절했다. 종종 배달 주문이 들어오긴 했으나 그건 배달 대행

업체에서 하는 일이었지 가게 직원이 직접 배달을 나가는 일은 없었다.

“제가요…?”

“어, 너. 어떤 여자 손님이 전화 왔는데, 너를 콕 찍더라. 거기 잘생긴 오빠가 배달해 줬으

면 한대.”

“그 잘생긴 사람이 제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너 맞아. 네 성이 백씨인 것도 알더라.”

문득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업체에다 맡기시면 안 돼요?”

“인마. 회만 100 만 원어치 시켰는데 어떻게 그래. 부탁 좀 하자. 가서 세팅도 해 주고.”

회를 100 만 원어치 시켰다니까 더 수상하다. 수현이 내키지 않아 하니 사장은 달래기 바

쁘다.

내가 너 뽑을 때 얼굴 보고 뽑은 거 알지? 그 덕 좀 보자. 응? 낳기는 우리 엄마가 낳았는

데 왜 내 얼굴 덕을 횟집 사장이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상황도 아

니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서는 주방장이 회를 뜨느라 분주했고 밖

에서는 나머지 직원들이 포장하느라 바빴다. 준비를 마치자 사장이 손님 데리러 갈 때

쓰는 봉고차에 그것들을 때려 넣고 차 키를 들려 줬다.

운전석에 앉은 수현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 씨발. 더럽게 머네. 사장이 잘 다

녀오라고 배웅 나와 손까지 흔들어 준다. 취직한 후로 저렇게 상냥한 모습은 처음이다.

자본주의 노예 같으니라고. 운전하고 가는 내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목적지인

오피스텔에 도착해 회를 양손에 가득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405 호 앞에서 음식을 내려놓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찝

찝한 마음을 감추고 마지못해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예쁘게 생긴 여자가 얼

굴을 내밀었다. 수현은 짜증을 싹 지우고 접대용 미소를 탑재했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신 회 왔습니다.”

여자가 오호,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빤히 본다.

“생각보다 더 괜찮네.”

“네?”

“회요.”

먹지도 않고 맛이 괜찮은지 어떻게 알아. 의아하여 쳐다보는데 여자가 의미심장하게 웃

는다.

“들어와서 세팅까지 부탁드려요.”

빌어먹을. 사장 말 대로 세팅까지 해 줘야 하나 보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남자 구두가 있

다. 뭐지. 커플인가. 아니면…. 경계하며 주위를 한번 둘러봐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 수

현은 가지고 온 음식을 테이블 근처에 내려놨다.

“죄송한데, 손 닦고 해 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화장실 저쪽.”

여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불을 켜고 들어갔다. 세면대 물을 틀고 손을 닦는데 갑자

기 욕실 불이 탁 꺼진다. 수현은 긴장하여 문 쪽을 바라봤다. 어두운 가운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뒷주머니로 손을 움직였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접이식 칼이 만져진다. 여차

하면 뽑을 생각으로 문을 노려보던 그때 달칵 손잡이가 돌아간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대낮처럼 환하던 오피스텔 내부는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하여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계속 찝찝하더라. 앞에 누

군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수현은 칼을 뽑았다. 버튼을 누르자 칼날이 튀어나온다. 어둠 속

에서 상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걸 알아채고 칼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바로 손이 잡혔고 칼은 빼앗겨 바닥으로 버려졌다 . 순식간에 어깨가 붙들린

채 몸이 밀리는데 반항할 틈도 없이 입술이 포개진다. 당황하여 밀쳐 내는 순간 화장실

에 불이 탁 켜졌다. 수현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너… 여기 왜 왔어?”

물어 놓고도 누가 볼세라 밖을 내다봤다. 당분간 헤어진 척하기로 약속했는데. 호범은

대답 대신 백수현을 압박한 채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을 틀었다. 수현이 옷을 벗고 있는

그 장면이다. 호범은 영상을 눈앞에 들이밀며 이를 빠득 갈았다.

“씨발, 이딴 걸 올렸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89 화

그렇다고 여길 찾아오면 어떻게 해. 약속했잖아. 말을 끝맺자마자 호범이 키스하려 했고

수현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이 사납게 변하길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이러지 마. 얼

른 나가야 해. 감시당하고 있단 말이야. 물론 누가 감시하는지는 덧붙이지 않았다. 양호

범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10 분. 10 분이면 돼.”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입술을 집어삼키고 혀를 밀어 넣는다 . 갈증이 난 사람처럼

조급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양호범답지 않았다. 그래서 더 뱃속이 간질거렸다. 늘 여유만

만하게 굴더니 열흘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달려와 보채다니.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옷 속에 손을 넣어 피부를 더듬고 셔츠를 걷어 올려 가슴을 입

으로 애무한다. 하, 수현은 신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호범이 욕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수현은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 하게? 그가 위를 한번 힐긋 쳐다보더니 바지와 속

옷을 끌어 내려 좆을 혀로 문지른다. 읏, 젠장. 더는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양호범은 서슴없이 수현의 좆을 집어삼켰다. 아아, 입 속이 따뜻하다. 오랜만의 자극이

라 치아에 살짝 긁혔을 뿐인데도 사정감이 몰려온다. 수현은 신음이 새어 나갈까 봐 입

술을 꽉 깨물고서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좆이 들락일 때마다 호범의 매끄러운 뺨이

불룩 튀어나온다.
사정할 것 같은 와중에 호범이 좆을 입에서 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더니 바지 버

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다. 단단해진 놈의 좆이 머리를 내밀었다.

뭘 하려는지 깨닫고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진짜 못 해.”

“넣지 않을게. 대신,”

대신, 뭐?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수현의 한쪽 다리를 들어 허리에 올리고 좆을 마찰하여 문

지른다. 이제 막 발기한 것이 사정 직전의 것을 마구 눌러 대니 죽을 맛이다 . 입술을 게걸

스럽게 빨면서 호범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나 잡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편 다리를 든다 . 수현은 놀라서 급히 양호범의 목을 끌어안았

다. 그대로 삽입하듯 허리를 움직이자 등이 욕실 문에 쿵 , 쿵, 찧인다. 문짝이 덜거덩거리

며 흔들렸으나 밖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었다.

움직임이 거칠어지자 수현은 양호범의 허리를 두 다리로 단단히 옭아매고 목덜미에 얼

굴을 파묻었다. 머릿속이 차츰 하얘진다. 이대로 양호범과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이 간절해졌다.

“하아, 나, 읏!”

순간 정액을 분출하며 몸이 경련하듯 떨려 왔다. 숨을 몰아쉬는데 팔에 힘이 빠지는 것

을 알아채고 호범이 수현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의 셔츠 밑부분은 수현이 방금 사정한

정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호범은 수현의 어깨를 잡아 무릎을 꿇리고 좆을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입 벌려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자 좆을 잡고 빠르게 문지른다 . 인상을 쓰느라 미간이 패고, 턱이

단단해진다. 열흘 만에 봤는데 더 잘생겨졌네. 감탄할 새도 없이 얼굴에 정액이 뿌려지

며 비릿한 내음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양호범은 한 손으로 문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는 좆에 남아 있는 정액을 짜내며 욕을 씹어뱉었다.


정신을 차린 수현이 뺨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닦으려고 하자 호범이 붙잡아 일으킨다 .

그는 수건을 적셔 와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고 수현의 옷을 여며 줬다.

“너 이거 하려고 왔지?”

“아니.”

“그럼?”

“백수현이 딴짓할까 봐 몸으로 봉사하러 온 건데.”

기가 막혀 웃었다. 일하느라 바빠서 딴짓할 정신도 없다고 대꾸한 다음 시간을 확인했

다. 여기서 더 껴안고 뒹굴고 싶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 아쉬운 마음에 이번엔

수현이 먼저 호범의 얼굴을 붙들고 진하게 키스를 날렸다. 입술이 떨어지는데 한숨이 함

께 흘러나온다.

“간다.”

호범은 대답 대신 수현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줬다. 다음부터 옷 벗고 영상

올리지 말아요. 음란물로 신고할 거야. 웃겨서 가슴을 툭 치자 호범이 다시 키스하며 엉

겨 붙는다. 이러다 진짜 못 가. 간신히 떼어 내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는데 수현을 마중

나왔던 여자가 소파에 앉아 회를 맛있게 먹고 있다.

수현은 민망하여 고개를 돌린 채 빠르게 인사를 얼버무렸다.

“맛있게 드세요.”

그러자 여자가 회를 오물오물 씹으며 한마디 한다.

“맛있는 건 그쪽이 드신 거 같은데요.”

수현은 귀가 빨개져 도망치듯 운동화를 구겨 신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복도를 따라 엘리

베이터 쪽으로 가다 뒤를 한 번 더 돌아봤다 . 함께 있고 싶다. 발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

는다. 뒤숭숭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서둘러 아래로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때마침 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배달 잘했어?]

“네, 세팅까지 해 주고 왔어요.”

[고생했다. 돈은?]
아 … . 수현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차를 끼익 멈춰 세웠다. 두 눈을 질끈 감으니 사장이

재차 묻는다. 돈은 제대로 받았지? 수현은 들리지 않게 욕을 뱉고 나서 대답했다.

“네, 받았어요….”

통화를 마치자마자 핸들에 머리를 쿵 박았다. 어이없는 한숨과 웃음이 섞여 나온다. 혀

로 볼 안쪽을 긁자 여전히 정액 맛이 느껴진다. 사장에게 돈 대신 엉뚱한 걸 받았다고 차

마 얘기할 수가 없었다.

❖❖❖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호범은 뜻하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표정을 굳혔다 . 강원댁이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계속 기다렸어요.”

소파에는 김우진이 전과 다름없이 인형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 본가가 아닌 곳에서

그를 만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뭘까. 궁금하기도 하였으

나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지나가다 형님 뵈려고 들렀어요.”

강원댁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길래 우진을 데리고 서재로 갔다 . 강원댁

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본래 양 회장의 사람이었으니 이 일에 관해 양

회장이 추궁한다면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녀를 곤란하지 않게 하려

는 배려이기도 하였으니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서재로 가서 문을 닫으니 조용하다. 김우진은 서재에 꽂혀 있는 책에 관심을 두었다 . 눈

으로 책을 살피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앉아. 책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은 김우진이 호범을 빤히 쳐다본다.

“퇴근이 늦으셨네요.”

호범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놨다. 구겨진 셔츠 앞부분엔 백수현이 싸 놓은 정

액이 말라붙어 있었다. 여벌이 있음에도 굳이 갈아입지 않은 건 섹스의 아쉬움이 컸던

탓일 거다. 그는 술과 잔 두 개를 챙겨 우진의 맞은편 자리로 갔다.

“마실래?”

“괜찮아요. 술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요.”

“그럼 뭘 좋아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말에 우진이 입을 꾹 다문다. 김우영이 속내를 내비치는 스타일이라

면 김우진은 꽁꽁 감추는 타입이다. 어릴 적엔 그래도 그게 가늠이 됐는데, 크면서는 한

번씩 이 자식 배를 갈라 속을 알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호범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간 보지 말고 본론 말해.”

“수현이 형은 어디 있어요?”

호범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표정이라기보다 호범의 심

기를 건드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피식 웃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피우겠냐고 건네니 사양한다.

“그게 왜 궁금할까.”

“모르시면 제가 가르쳐 드리려고요.”

호범은 입을 꾹 다문 채 김우진을 응시했다. 우진은 머뭇거릴 것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강릉에 있대요. 횟집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호범이 목소리를 서늘하게 냈다.

“할아버지하고 서 검사가 하는 얘기 들었어요.”

“이런.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었단 말이지.”

“아니요.”
“그럼.”

김우진은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할아버지 방에 몰래 녹음기 설치했어요. 병풍 뒤에다가요.”

호범은 입을 벌린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김우진을 쳐다봤다 . 양 회장은 주로 본가에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이유는 도청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 게다가 수시로 자신의

방을 점검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새파랗게 어린 손주놈이 할아버지 방에다 도청 장

치를 심어 놨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호범은 물고 있던 담배를 짓씹으며 김우진

을 쳐다봤다.

“앙큼한 새끼.”

김우진은 표정에 변화가 없다. 호범은 그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

다. 그 녹음 파일에 무언가 중요한 게 들어 있는 거겠지.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우진은 입을 다문 채 앞에 놓인 술잔만 바라봤다. 다 까발려 놓고 긴장이 되는지 그제야

술을 반쯤 삼킨다. 독한지 인상을 쓰면서도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는다.

“저도 이제 성인이니까, 돈 벌고 싶어요.”

“형님한테 용돈이 받고 싶다?”

“아니요.”

“그럼. 내 지분이라도 떼어 줄까?”

“유한 호텔 넘겨주세요.”

호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인수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긴 했지만, 유한 호

텔은 호범에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발칙한 제안을 해 놓고도 김우진은 눈을

내리깔고 고고한 선비 같은 표정이다. 하, 하하. 뒤늦게 실소가 터졌다.

“재미있네.”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해요.”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다. 그게 호범은 퍽 마음에 들었다.

“주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네.”

막힘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습에 호범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김우진을 봤다. 똘똘한

녀석이기에 데려다 일을 가르칠 생각은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 방 먹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놓고 달라고 하는 걸 보면 그에 상응하는 중요한 걸 가지고 있단 뜻이겠지. 고

민하던 호범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거면 돼?”

라고 묻자 김우진이 새침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을 쥐어뜯는다 . 호텔도 뻔뻔하

게 달라고 해 놓고 이번엔 얼마나 더 큰 걸 내놓으라고 저런 표정인 건지 . 궁금하면서도

녀석이 어떤 걸 요구할지 이젠 기대가 된다.

“백수현….”

여태 이름 뒤에 꼬박꼬박 형이라고 붙이더니 백수현이란다 . 그리고 이어진 말은 호텔을

달라는 것보다 더 심기를 건드렸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90 화

“백수현을 아무 때나 만나서 뭘 하게?”

“그냥….”

“그냥?”

“밥 먹고… 영화 보고… 차도 마시고….”

듣고 있던 호범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턱을 치켜들었다. 호텔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귀엽다고 넘겨 줄 수 있었는데.

“그런 걸 남들은 데이트라고 하지.”

“그런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닐 거다. 녀석

이 만나던 놈과 호텔까지 들락인 걸 생각하면 남자하고 어떻게 붙어먹는지 안다는 뜻이

고, 백수현을 만나 영화만 보고 차만 마시진 않는다는 뜻일 테니까 . 이미 멋대로 입술을

훔쳤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알았어, 그럼.”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김우진이 동요한다. 호범은 말없이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툭

던져 놓고, 셔츠의 소매 부분을 말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이 주로 사람 팰 때

나 하는 준비 동작이란 걸 김우진도 알았을 것이다.

테이블을 돌아 우진에게 다가갔고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 하자 우진이 인상을 쓰며 그

손을 사납게 탁, 쳤다. 얌전한 얼굴과 다르게 손이 빠르고 타격이 정확하다. 호범은 고개


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김우진을 관찰했다. 겁을 먹은 것 같으면서도 여차하면 받아칠 기

세다.

“우진아.”

“…….”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네가 욕심내는 건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이해해.”

“…….”

“근데, 딱 하나.”

“…….”

“백수현은 안돼.”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살기가 느껴져 우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양호범이 돌아

서길래 긴장을 푸는데 갑자기 몸을 돌려 우진의 목덜미를 낚아챈다. 팔을 휘둘러 벗어날

틈도 없이 소파 팔걸이에 배가 눌린 채 엎드린 자세가 됐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놔요, 놓으라고!”

호범은 그대로 우진의 등을 누른 채 반대 손을 높이 치켰다가 엉덩이를 내려쳤다. 찰싹!

하는 소리에 입에서 윽, 하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우진은 고개만 움직여 뒤쪽에 있는 양

호범을 죽일 듯 노려봤다.

“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엉덩이를 가차 없이 갈긴다. 철썩, 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악

을 쓰며 몸을 들썩였지만, 호범은 봐주지 않았다. 연거푸 엉덩이를 갈겨 대는 바람에 우

진은 나중엔 열이 받아 욕을 내뱉었다. 씨발! 놔! 뭐 하는 거야! 그만해! 아픔보다 치욕스

러움이 더 커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개새끼야!”

호범은 즐거운 듯 웃었다.

“이제 좀 사람 같네.”
놓아주자마자 김우진이 몸을 일으켜 곧바로 달려든다 . 호범은 팔을 낚아채 목덜미를 잡

고 김우진의 얼굴을 소파에 짓이겼다. 덜 맞았구나? 목을 부러트릴 것처럼 손아귀에 힘

을 주니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겉은 단단해 보여도 미성년에서 막 벗어난 몸뚱인

호범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 한 번 더 까불면 엉덩이로 안 끝나.”

꾹 다문 입술을 분노로 파르르 떨면서도 김우진은 잘못했다는 말은 끝끝내 하지 않았다.

호범은 짓궂게 미소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

“백수현 연하 존나 싫어해.”

동시에 목을 놓아주자 몸을 벌떡 일으킨다. 헝클어진 머리를 사납게 넘기면서도 더는 달

려들지 않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호범은 뻔뻔하게 못을 박았다.

“물론, 나만 빼고.”

❖❖❖

세상에. 이게 뭐야. 수현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문질렀다. 옷 한번 벗었다고 며칠 만

에 댓글이 이렇게 늘어나나. 종이접기 얘긴 없고 댓글 10 개 중에서 9 개가 얼굴 얘기다.

병신 같은데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짜증 나. 이건 칭찬이야 욕이야. 다음에는 팬티만 입

고 춤출까. 그럼 진짜 대박 나겠는데.

그러다 양호범이 떠오른다. 한 번 더 벗으면 음란물로 신고 넣는다고 했었지 . 쯧, 혀를 차

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던져두고 창 앞에 서서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어제는 종일 굵

은 장대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꽤 맑다. 오후 내내 집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더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대충 얼굴과 머리를 만졌다 . 그다음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하여 위로 올라가며 치킨 냄새가 훅

풍긴다. 양호범이 다녀간 후 며칠 동안은 가게에 배달이 들어오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마음은 계속 서울에 가 있었다.

괜히 심란하여 자전거를 끌고 경포호로 출발했다 . 가끔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됐다. 사장 말로는 봄이면 이곳은 벚

꽃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고 하였다. 올해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기

회가 된다면 양호범과 함께 와 볼 생각이다.

페달을 힘껏 밟으니 고물 자전거가 빠르게 달려 나간다. 앞에 사람이 없는데 괜히 벨을

누르고 타는 도중에 일어서도 봤다. 어릴 적 학교에 자전거를 끌고 오는 친구들이 있었

는데 당시엔 무척 부러웠었다. 그러다 하루는 남몰래 자전거에 다리를 걸쳤고 같은 반

아이한테 걸려 도둑놈이라고 오명을 쓰기도 했었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다 보니 벌써 호수를 한 바퀴 다 돌았다 . 차가운 공기를 폐 속까지

깊게 들이마시고 나서 숨을 돌리며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비행기 표를 확인했다. 출발까지 3 일. 내일이면 가게도 끝이다. 사장은 관두겠다는

말에 시급을 더 올려 준다고 붙잡았으나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전화가 진동한다 . 사장이다. 쉬는 날인데

왜 연락했을까. 받자마자 그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버벅댄다.

[백군아. 너, 너 지금 어디야? 빨리 가게로 와.]

“왜요?”

[어떤 손님이 너 찾아. 빨리 와.]

목소리에서도 조급함이 느껴졌다. 사장이 말한 손님이 누군지 짐작됐다. 부디 그가 맞기

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니기를 바랐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수현은 담배를 끄고 자

전거에 올라탔다.
가게 근처에 다다르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앞에 서 있는 게 눈에 띈다 . 선팅이 짙어 안

은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한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자전거를 가게 옆 골목에 세워 두

고 문을 밀고 들어가던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

“아이고, 저기 왔네.”

사장이 반갑게 뛰쳐나온다. 수현은 그가 부산을 떠는 이유가 가게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서민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사장

은 중매쟁이처럼 나섰다.

“세상에. 우리 백군이 이런 귀하신 분하고 아는 사이라니. 진작 알았으면 더 잘해 줬을

텐데요. 하하.”

사장은 TV 에 김현식 의원이 나올 때 저 새끼는 관상이 딱 도둑놈 관상이라고, 정치하면

안 된다고 어제까지도 욕하던 사람이다. 당연히 반대당 의원을 지지했고, 김현식이 당선

되면 그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도 했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돌변하다니.

둘 다 마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자 사장이 끼어들었다.

“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거기가 제일 조용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벨 누르시고요.”

감사합니다. 서민준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사장이 부리나케 제일 끝 방으로 안내한다.

미닫이문을 닫고 들어서자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며 사장의 말처럼 조용했다 . 수현은 이

미 준비된 음식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비싼 회만 골라 시켰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불편해 시선

을 피하고 대신 옆에 있던 소주를 집어 들었다 . 뚜껑을 열고 컵에 가득 부으니 서민준이

쳐다본다. 그걸 단숨에 들이키자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서민준이 조용히 회를 수현의 앞쪽으로 밀어 준다. 그걸 먹지도 않고 두 번째 잔을 채웠

다.

“여기 왜 왔어? 나 비웃어 주려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또 이간질하게? 근데 어쩌지? 이미 양호범하고 쫑났는데?”


서민준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뭔데. 왜 왔는데.”

“미안해.”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수현은 어이가 없어 웃었고 서민준은 도무지 참지 못하겠는지 잔

에 술을 붓고 반쯤 들이킨다. 술에 약한 그였기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이런 말 너는 지겹겠지만….”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지 얼굴을 문지르고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

다가 내쉰다.

“나도 살려고 그랬어…. 그땐 가족들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럼 나는 뭐였는데. 나는 가족이 아니었어?”

서민준은 입을 다물었고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가족하고 누가 밤마다 붙어먹어.

“너 나오면 다 보상하려고 했어.”

“뭘로? 돈으로?”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거짓말. 다 핑계야.”

“그래…. 핑계야. 네가 숨었다고 해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았어야 했는데….”

서민준은 속상한 얼굴로 남은 술을 비웠고 이젠 목까지 빨개졌다.

“내가… 잘못했다.”

“참 빨리도 용서를 빈다.”

빈정거리며 웃자 서민준이 수현을 똑바로 응시한다.

“네 뜻대로 다 관둘게.”

예상치 못한 말에 수현은 멈칫했고 서민준은 말을 이어갔다.

“대신 선거 끝나면 그때, 응? 그때까지만 봐줘. 끝나면 알아서 내려올게.”

“…….”

“남은 삶은 너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게….”


표정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누가 봐도 진심이라고 여겼을 거다 . 예전에도 그랬다. 내가

널 구해 줄게. 어떻게든 나오게 할게. 지금 하고 똑같은 얼굴을 하고 수현을 달랬었다 . 밀

려드는 옛 기억에 입이 쓰다. 적대적이던 수현은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


91 화

“강릉에?”

“예.”

흰 종이 위에 붓으로 난을 그리고 있던 양 회장은 기가 찬 듯 웃었다. 백수현이 일본으로

떠나는 걸 서민준은 양 회장에게 숨겼다. 그런데 출국을 3 일 남겨 두고 서민준이 백수현

을 만나러 강릉에 갔다. 당분간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라는 양 회장의 말을 무시한 거나

다름없었다. 대체 거긴 왜 갔을까.

“비역질에 미치면 쉽게 헤어 나오질 못하는 모양이군.”

“바다로 나갈 배 한 척을 대기시켰답니다.”

양 회장은 고개를 들어 최 비서를 바라봤다. 난데없이 배 얘길 왜 하나 했는데 그의 표정

을 보니 알 것 같다.

“사람 보낼까요?”

양 회장은 붓을 다시 움직였다.

“알아서 처리하게 둬. 악연은 제 손으로 끊게 만들어야 뒤탈이 없지.”

“예, 알겠습니다.”

“범이는.”

“리조트 부지선정 때문에 어제 거제도 내려갔다가 오늘 올라온 거로 알고 있습니다.”

“거제도 간 건 확실해? 백수현 만난 건 아니고?”

“예. 윤 실장 말로는 일절 그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답니다.”


흠,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속이야 어떻든 표면적으로 양호범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 아비와는 달리 야망이 큰 녀석이니 금세 털고 일어서리라 믿었다.

“김우영 씨는 어떻게 할까요?”

김우영 이야기에 양 회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첫째 외손주인 김우영이 한국에 들어

왔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남들에겐 똑똑하고 잘났다고 자랑하였건만 이젠 과거형

이 됐다. 지금 그는 약물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김우영이 외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약물에 빠져 살았다는 걸 가족 모두가 숨겼다. 첫째

딸인 양연희는 이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버지인 양 회장에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

그 점이 괘씸하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지금까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치료받게 해. 언제까지 사람 구실 못 하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예.”

“망할 녀석. 기껏 외국 보내 놨더니 그딴 짓이나 하고 있고. 쯧.”

그나마 김우진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나이는 어려도 잇속에 밝고 눈치가 빨라 사업에

어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우진이 양호범을 대신할 순 없었다 . 조력자. 그 이상

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양 회장이 친손주, 그러니까 아들의 핏줄에게 갖는 애착은 보통 노

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양 회장은 붓을 내려놓고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림을 내려다봤다.

오늘 밤 백수현의 운명이 어찌 되려나.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는 건 죽여서 바다에 던지

겠다는 뜻이다. 이 소식을 과연 양호범은 알고 있을까. 아니면 백수현이 죽은 다음에나

알 수 있을까.

❖❖❖

“아이고, 그럼 오늘이 마지막인 건가?”


횟집 사장은 수현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백수현은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고 인사불성이었다. 민준은 비서에게 그를 부축하게 한 뒤 사장에게 봉투

를 건넸다.

“식사빕니다. 수현이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보살펴 주긴요. 백 군이 일을 잘해서 내가 득을 크게 봤지. 저번엔 얘한테 반한 여자 손

님이 회를 100 만 원어치를 시켰다니까요. 하하.”

“그랬군요.”

“아무튼. 백 군은 이런 형님이 있어 든든하겠어요. 왜 나한테 미리 말을 안 했을까. 그럼

내가 더 신경 써서 챙겨 줬을 텐데.”

사장의 너스레에 민준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차다. 비서는 수현을 옮겨 차 뒷자리에 실어 넣었다. 옆에 타 문을 닫자 수현의

몸이 민준에게로 쏠린다. 비서가 일으켜 세우려 하길래 됐다고 손짓을 하고 문을 닫았

다.

“으음.”

차가 출발하자 백수현은 잠꼬대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민준의 어깨에 뺨을 문

질렀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체취다. 참고 참아 왔던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

려 백수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술 때문에 발그레해진 뺨. 적당히 붉은 입술. 찡그릴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까지.

몇 번이고 안으며 눈에 새겨 넣었던 그 얼굴이다 . 입을 꾹 다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

안 차는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들어가 백수현이 사는 원룸 앞에 멈췄다.

가로등 밑에 차를 세우고 나서 비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막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주위는 한산했다.

“조 비서님. 몇 시였죠?”

“3 시에 출항합니다.”

“3 시라….”
민준은 수현이 머물던 원룸을 올려다봤다. 때마침 수현이 몸을 뒤척이며 민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팔이 다리 사이를 누르며 좆을 압박하자 그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 많은 양

은 아니지만 술을 먹은 터라 그도 자제력에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고민하던 민준은 앞에 앉은 비서를 불렀다.

“피곤하네요. 잠깐 눈 붙이고 내려오도록 하죠.”

비서가 알아듣고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고 백수현을 끌어낸다. 그는 수현의 옷을 뒤

져 소지품을 전부 빼냈다. 휴대전화부터 차고 있던 시계까지. 신발도 검사하려 하길래

민준은 비서를 제지하고 수현을 부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수현은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달라붙었다. 조 비서는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민준은 수현을 데리고 원룸으로 들어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 층에 도착해 미리 외워 둔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린다.

술에 취한 사람을 부축하려니 힘이 들어 신발을 벗길 새도 없이 백수현을 바닥에 눕혔

다. 민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방을 한번 둘러봤다 . 둘이 술을 마시는 동안 백수현

의 방은 사람을 시켜 정리했다. 덕분에 옵션으로 있던 전자제품과 가구, 백수현이 쓰던

카메라부터 시작해 잡동사니들은 모조리 폐기됐다.

남아 있는 건 싱크대와 그 위에 올려진 생수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뚜껑을 연 뒤 목

을 축이며 백수현에게 다가갔다. 쌕쌕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흰 피부가 드러난다.

때마침 백수현이 눈도 채 뜨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는다.

“무…물….”

옆에 앉아 들고 있던 물을 대주니 입을 벌린다. 그러나 물은 미처 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을 반쯤 뜨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표정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짝지근한 숨이 흘러나왔다. 서민준은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건드리자 입이 더 벌어진다. 그 안으로 검지

를 밀어 넣으니 애무하듯이 혀로 핥는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인내심이 뚝 끊기는 순간이었다. 민준은 수현의 입술을 그대로 삼

키며 달려들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고 두 사람은 바닥에 포개진 채 뒹굴었다 . 입술을 게

걸스럽게 탐하며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몸을 더듬었다.

예전보다 피부가 더 단단하면서 매끄러웠다. 젖꼭지를 꼬집자 입술 사이로 신음을 내며

허리를 들어 올려 성기를 민준의 허벅지에 노골적으로 문지른다. 입술을 떼자 수현은 민

준을 애타게 올려다봤다.

“혀엉….”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민준은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수현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서민준.”

민준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그래, 서민준이야. 잘 기억해. 네가 죽기 전에 마

지막으로 몸을 주는 사람은 양호범이 아니라 서민준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둬. 그래

야 저승에 가더라도 나를 잊지 않을 테니까.

그는 수현이 입고 있던 셔츠를 뜯어내듯 옆으로 벌리고 난 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세

게 빨았다.

“아아! 형, 좋아…. 더, 더 해줘. 읏!”

“좋아?”

“응…어릴 때 생각나… 형이 그때도…하아. 이렇게… 으읏…빨아 주고…거기…으음….”

몸이 전보다 더 예민해진 느낌이다. 어린 백수현도 좋았지만 닳고 닳은 백수현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재회하지 않았다면 너를 더 예뻐해 줄 시간이 많았을 텐데 . 가슴을 빨며

아래로 내려와 수현의 바지와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예쁘게 생긴 좆과 구멍을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다. 민준은 허리를 세워 자신의 바

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몸이 있는 대로 달아올라 뒤를 풀어 주고 뭐고 할 여유도

없었다. 백수현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좆을 꺼내 구멍에 가져다 대


고 허리를 밀어 올렸다. 좁은 구멍이 벌어지자 백수현은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팔을

휘젓는다.

하지만 입구가 좁아 좆이 한 번에 들어가질 못하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씨발. 손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은 뒤 좆에다 문지르고 다시 삽입하려 하자 백수현이 허벅지를 바싹 오

므려 붙인다. 민준은 무릎 사이에 손을 넣으며 달랬다.

“수현아. 다리 벌리자. 응?”

“혀엉… 나…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

첫 관계를 나눴던 미성년자 시절이 떠올라 흥분은 배가 됐다. 처음엔 부끄러워했고, 막

상 삽입하여 허리를 움직이니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아프다고 울었었다.

“뭐가 부끄러워?”

“보는 눈이… 많아서….”

민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많이 취했구나. 괜찮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때.

그러면 더 짜릿하지 않아? 살살 달래 가며 삽입하자 천천히 귀두부터 들어간다 . 좁은 구

멍이 좆을 꽉 무는 바람에 움직이기도 전에 쌀 것 같은 쾌감이 몰려왔다.

그때 난데없이 재킷 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외면하고 마저 집어넣으려고 하자

이번엔 초인종이 울리고 곧바로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린다. 씨발. 민준은 욕을 씹어뱉

으며 반쯤 넣은 좆을 빼고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벗어 뒀던 재킷으로 수현의 아랫도리를 덮은 뒤 그는 문으로 다가가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아래층에서 기다리던 조 비서가 올라왔다. 짜증 난 표정으로 문을 열자 그가

숨을 헐떡이며 곤란한 눈빛으로 민준을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대표님 그게, 저기….”

온갖 지저분하고 궂은일을 다 시켜도 묵묵히 하던 사람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민준의 어깨 너머 수현에게 향해졌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후려친

다. 민준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던 백수현이 어느새 일어나 바지

를 입고 있었다.
“수현아….”

민준은 수현의 표정을 살폈다. 완전히 깨어난 건가. 아니면…?

상황을 가늠하는 동안 수현이 천장에 달린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말했잖아. 보는 눈이 많다고.”

민준이 등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천장에 달린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아 조 비서를 돌아봤다. 그의 안

색은 여전히 창백하다.

민준은 억지로 웃으며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장난하지 마….”

수현은 구겨진 셔츠에 팔을 집어넣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고마워, 형. 덕분에 떡상했네.”


92 화

작은 구멍을 쑤실 때마다 백수현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 삽입한 뒤 앞쪽으로 손을 뻗어

배꼽 아래를 더듬으니 불룩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만져진다 . 그곳을 누르며 괴롭히자 매

트리스에 이마를 찧으며 신음을 냈다.

“거기, 흐읏, 누, 누르지,”

백수현은 과격한 섹스도 좋아했으나 이렇게 비벼 주는 것 또한 환장하였다. 그걸 증명하

듯 그의 좆에서는 아까부터 묽은 액이 묻어 나왔다. 손으로 귀두를 문질러 주며 일부러

애를 태우자 팔을 뒤로 뻗으며 보챈다.

“빨, 빨리…응?”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팔을 잡아당겨 상체를 끌어 올린 뒤 양손을 뒤로 잡아 결

박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백수현의 좆을 문질렀다 . 고개를 돌리기에 입술을 집어삼키

고 혀를 문지르자 미처 닿지 못한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호범은 수현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속도를 높였다 . 안쪽 깊숙한 곳까지

짓이기자 키스하는 것도 포기하고 이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만 헐떡인다. 동그란 뒤

통수를 호범의 어깨에 기댄 채 헉헉대던 백수현은 입술을 움직였다.

“나, 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호범은 결박하고 있던 손을 풀어 백수현을 다시 침대에 엎드리게 하

고 그 위에 몸을 포갰다. 난폭한 허리 짓에 좆은 방향을 잃고 배 속을 마구 찔러 댔고 백

수현은 시트를 쥐어뜯으며 울먹이고 신음했다.

“아읏!”
울컥, 사정하며 구멍이 확 조여든다. 큭, 호범은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짓뭉개며 백수현

을 꽉 끌어안고 안쪽 깊숙한 곳에 정액을 분출했다. 사정하느라 몸을 움찔거리던 백수현

이 축 늘어지며 매트에 얼굴을 파묻었고 호범은 그의 등 위에 엎드려 가쁜 숨만 몰아쉬

었다.

“무거워….”

그 말에 방향을 바꿔 옆으로 누우며 백수현을 꼭 끌어안았다. 천천히 넣었다 뺐다를 반

복하자 안에 들어가 있던 정액이 흘러나온다.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크기에 수현은 기겁

하고 호범의 허벅지를 잡았다.

“나, 나 죽을 거 같아….”

“안에 싼 것만 빼 줄게요.”

“그 소리만 몇 번째야.”

칭얼대길래 어깨에 춥, 입을 맞추고 살살 달래 가며 움직였다. 백수현은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엉덩이를 뒤로 빼 발정 난 짐승처럼 문지른다. 아무튼, 음탕하다니까.

젖꼭지를 손으로 비틀어 꼬집고는 호범은 좆을 뒤로 쑥 빼냈다.

주르륵, 남은 정액이 흘러나오자 수현이 인상을 쓰고 고개만 돌려 쳐다본다. 호범은 몸

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고 곧이어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왔다.

“양 사장.”

“응?”

“이러다 강릉 가기도 전에 몸살로 앓아눕겠다.”

호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가 수현의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정성스레

닦았다. 이후에는 땀으로 젖은 백수현의 머리를 넘겨 주고 붉어진 눈 밑을 어루만져 준

다.

“난 분명 싫다고 했어요.”

“그러지 말고 들어 봐.”

“싫어.”

단호한 태도에도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떨어지면 서민준은 나를 찾아올 거야. 그때 내가 놈을 잘 구슬려서 증거를 손에

넣을게.”

“어떻게 구슬릴 건데?”

“대화로…?”

호범은 코웃음을 쳤다.

“그 인간이 잘도 넘어가겠다.”

수현은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는 호범이 우려했던 것보다 자신의 부모와 양 회

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는 건지, 아니면 근

친만 아니면 괜찮다고 여기는 건지.

다만 서민준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엿을 먹이고 싶어 하였다.

“나를 한 번만 믿어 줘.”

호범은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하였고 수현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제발, 응?”

하는 수 없이 호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요.”

“약속?”

“말로 해서 안 되면 거기서 관둬.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쓸데없는 짓 뭐.”

“알잖아요. 내가 뭘 걱정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애써 웃었다. 야, 아무렴 내가 원수 같은 놈하고 붙어먹겠냐. 물

론 처음엔 그럴 계획이었지만 … . 그땐 미련이 있었고, 지금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

아. 진심이야. 주절주절 말을 길게 하자 호범이 고개를 들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 약속, 지켜요.”

전화를 들고 있던 호범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노트북을 노려봤다. 화면엔 서민준이 백

수현과 물고 빠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전화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실리고 꽉 다문 잇

새로 악에 받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도 난리다. 뭐야? 연출인 건가? 근데 왜 둘 다 남자야? 저 남자 낯

이 익은데? 누가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씨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데 박태준이

뛰어 들어온다.

호범은 전화를 내려놓고 분을 삭이느라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대표님.”

“서민준 누구하고 같이 내려갔지?”

“조진영 비서라고 측근 중에 하납니다.”

“그 인간한테 바로 알려. 영상 나오지 못하게 막고.”

“예, 알겠습니다.”

“백수현 주변에 윤 팀장 심어 놨지?”

“대기 중입니다.”

“즉시 가라고 해.”

“예.”

박태준이 사라지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다. 호범은 백수현과 서민준이 엉켜

서 키스하고 애무하는 장면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어 버렸

다. 그는 양손으로 테이블 끝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씨발, 백수현.”

더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진열장 쪽으로 내던지자 퍽 ! 유리창이 박살 나며 안

에 있던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호범은 양손으로 얼굴을 사납게 문질렀다. 이성적으

로 생각하자. 이성적으로. 화를 낼 게 아니라 백수현을 구하는 게 먼저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달래 봐도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
몸이 들썩이는 바람에 수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의식이

흐릿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베이지색 가죽 의자였다. 원룸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뒤 서민준 비서가 올라왔고 , 갑자기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

신의 입을 틀어막은 뒤로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손이 묶였고 입엔 테이프가 붙어 있었으며 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손목을 움직이는데 앞에서 서민준 목소리가 들려온

다.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하. 예, 예.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그가 씨발. 하고 작게 욕을 내뱉더니 좌석 사이로 뒤를 돌아본다. 옆으로 누

워 있던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서늘한 표정이 된다.

“깨어났네.”

수현은 입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서민준이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준비 많이 했는데 어쩌지.”

그는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누르더니 수현의 얼굴 앞에 보여 줬다. 굵직한 헤드라인

이 눈에 띈다. 성관계 유튜버, 전과자? 은혜를 원수로 갚다. 라고 적힌. 서민준은 차분하

게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29 세 백모 씨는 무직으로 과거 오갈 데 없는 그를 A 검사의 부모가 거둬 키우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A 검사의 누나인 B 씨를 짝사랑해 결국 그녀의 애인

을 살해했다. 이후 출소한 백 씨는 성매매와 절도, 사기 등의 범죄를 저지르다 당시 목격

자였던 A 검사에게 앙심을 품고 외모가 흡사한 사람을 섭외해 방송 중 성관계를 맺는 장

면을 연출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백 씨는 행방불명 상태이며 A 검사와 그의 가족

들은 백씨를 명예 훼손죄로 고소할 예정이다.”

수현은 눈을 부라리며 서민준을 쏘아봤다. 수현을 바라보는 서민준의 눈빛 역시 서늘하

기 그지없었다.

“어때? 내일 아침에 나갈 기산데. 마음에 들어?”


“…….”

“그러니까, 수현아. 죄짓고 살지 말았어야지.”

서민준의 표정에 너그러움 따윈 사라지진 오래였다. 그는 수현을 노려보다 정면을 향해

돌아앉은 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 와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들으신 대로에요. 불쌍한 친군데, 이

런 짓까지 벌일 줄은 몰랐네요.”

서민준의 목소리가 지친 듯 느껴졌다. 통화를 마친 그는 대시보드를 무자비하게 구둣발

로 걷어찼다. 씨발! 분이 사라지지 않는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고 그 틈에도 수현은

계속 손목을 마주 비벼 벗어날 준비를 시도했다.

그때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서민준을 불렀다.

“검사님.”

“왜요.”

“뒤에 차 한 대가 따라붙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쿵, 하는 충격에 차체가 흔들린다. 수현은 몸이 굴러 시트와 바닥 사이에

꼈다. 몸을 뒤집을 새도 없이 또다시 쿵, 하더니 이번엔 차가 한 바퀴 회전한다. 끼이이

익- 타이어가 바닥에 갈리며 차가 멈췄다.

짐짝처럼 뒹굴던 수현은 몸을 추스르고 숨을 골랐다 . 앞쪽에서 나지막한 신음과 욕설이

들려왔다.

“그대로 밀고 나가요.”

차가 출발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무언가에 걸린다. 가속 페달 밟는 소리와 함께 운전

석 남자가 검사님! 하고 외쳤고 누군가 둔기로 창문을 내리쳤다. 퍽, 처음엔 금이 가더니

두 번째 타격에는 와장창 박살이 나며 유리 파편이 안으로 쏟아졌다.

수현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밟아요. 밟아! 서민준의 고함에 부응, 부응,

같은 자리에서 바퀴만 돌던 차는 무언가를 밀어내고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어

서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쫓아! 잡아! 놓치지 마!


저 사람들은 누구지. 양호범이 보낸 걸까. 혹시 그 영상을 봤나. 당장 죽게 생긴 마당에도

그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서민준한테 복수할 기회는 영영 없어

진다. 그러니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죽으면 모두 헛수고다.

안간힘을 다해 줄을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자 차의 속도도 차츰 느려졌다.

“도착했습니다.”

묶여 있던 손목 하나가 쑥 빠져나온다.

“저기 세우겠습니다.”

수현은 손을 위로 뻗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당겼다 . 달칵, 잠겨 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

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차가 멈췄다. 재빨리 손을 뒤로 옮기고 쥐 죽은 듯 눈을 감았

다. 검사님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잠시 후 뒷좌석 문이 열린다. 남자가 수현의 한쪽 다리를 잡고 끌어 내리려 했고 순간 수

현은 반대편 발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발길질에 남자가 뒤로 나자빠지며

쓰러졌다. 수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섰다.

서민준과 눈이 마주쳤으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이윽고 차 밖으로 튀어나와 앞으로 달

렸다. 마취가 덜 풀려 다리가 휘청였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그러다 얼마 못

가 좌절하며 걸음을 멈췄다.

장정 여럿이 나타나 앞을 막아섰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얻어맞은 서민준의 비서가 피

묻은 입가를 훔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서민준은 끝까지 보조석에서 앉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점점 압박해 오는 양쪽을 번

갈아 보던 수현은 뒤를 돌아봤다. 배를 묶어 둔 바다가 보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성큼성

큼 다가오며 칼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섬뜩하다.

수현은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떼고 서민준이 앉아 있는 차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개새끼야! 내가 귀신 돼서 너 꼭 찾아갈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쪽에서 남자들이 달려든다.

동시에 수현은 방향을 틀어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93 화

물에 홀딱 젖어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만들어진다. 바다에 얼마나 있었던 걸까. 쉴 새 없

이 뿌연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추위에 몸이 떨려 이가 저절로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

다. 근처에 있는 여관까지 어떻게 찾아갔는지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 있던

작은 방에서 주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수현은 창문 앞으로 가서 섰다.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얼어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다.

“저, 저 기억하시죠?”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인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빤히 보다가 아아, 한다.

“이달 초에 달방 끊은 손님 맞지? 짐만 맡겨 두고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왜 이런 꼴로….”

주인은 수현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훑었다.

“바다에 빠졌수?”

“혹시 제 방 보조키 있을까요?”

“열쇠 잃어버렸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이 뒤로 돌아앉는다. 가만있어 봐. 201 호였든가. 그는 서랍에서 열

쇠 꾸러미를 꺼내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 어디 있더라. 201, 201…. 아, 여기 있네. 하나

를 빼더니 창문으로 내민다. 수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얼른 올라가요. 입술이 시퍼러네. 열쇠값은 나중에 내고.”


고맙다는 인사 대신 머리를 꾸벅 숙이고 계단으로 향했다. 한 발씩 내딛는 걸음이 납덩

이처럼 무겁다. 2 층까지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도중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 몸

을 이끌고 201 호 앞에 서서 방금 받은 열쇠를 구멍에 찔렀다.

뻑뻑한 열쇠를 넣고 여러 번 흔든 다음에야 겨우 문이 열렸다 . 수현은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욕실부터 들어갔다. 옷을 벗는데 몸이 굳어 관절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바지를 벗다가 다리가 걸려 앞으로 콰당 넘어졌고 그 채로 샤워기 아래로 기어가 온수를

틀었다. 곧 머리 위로 물이 쏟아진다. 처음엔 차가운 물이 나왔는데 그게 차갑다고 느껴

지질 않을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온수가 나왔고 어떻게든 몸을 녹이려 그 물을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그

러고 나서는 한참을 옹그리고 있었다. 한기는 가시지 않고 의식은 수면 아래로 자꾸 가

라앉는다.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으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새끼하고 붙어먹으면 죽여 버릴 거야.]

시퍼런 칼날이 목으로 날아온다. 수현은 헉, 하며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깐 잠이 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모르겠으나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그대로다 . 저도 모르게 조금 전 칼

에 찔린 목을 손으로 더듬었다. 젠장. 꿈 맞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선반에서 빳빳하다 못해 거칠어진 수

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고 이후에는 밖으로 나와 옷장을 열어 안쪽에 처박아 둔 더플백을

끄집어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상단에 올려진 이불을 끌어내 바닥에 대충 깔고 그 위로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 나머지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언제 빨았는지 이불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을 감고 1 시간 전 일을 상기했다. 바다에 빠져 배 아래로 몸을 숨겼을 때 갑자기 부두

위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다른 패거리가 나타난 건지 고함과 비명, 그리고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그들이 도로에서 창문을 깨부쉈던 자들이라고 확신했다.


양호범이 보낸 걸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씨발.

누가 신고했어. 얼른 타. 목소리가 뒤엉켰고 차의 엔진음이 들리더니 멀어진다. 잠잠해

지자 수현은 줄을 붙들고 위로 올라왔다. 더 오래 지체했다면 그대로 얼어 죽었을 것이

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에게 도움을 받은 날이었다.

[그 약속, 지켜요.]

양호범을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과 함께 두려워진다 . 지금쯤 눈이 뒤집혔을 텐데. 이쯤

되니 서민준이 아니라 양호범한테서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둘러대면 믿어 주려나.

대화 내내 서민준은 교묘하게 빠져나갔으며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 속상

한 마음은 알지만, 그날 집에 침입한 남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너였지 않느냐는 말에

는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원래 영악했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서 아

무것도 가진 것 없는 백수현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 물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는 장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믿어 줄지도 모를 일이고.

한참을 누워 있던 수현은 천천히 이불 밖으로 나왔다. 뻣뻣하게 굳었던 팔다리가 처음보

다 풀어진 기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젖은 바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바닥

에 펼쳐 놓고 바지를 뒤집으니 주머니 아랫부분이 검은 천으로 덧대어진 게 눈에 띈다.

손으로 천을 잡아 뜯었으나 꼼짝도 하질 않는다 . 더플백 안에서 칼을 꺼내어 윗부분을

쭉 찢었다. 손가락을 넣고 꼼지락거리니 잠시 후 검은색 물체가 딸려 나온다. 동전보다

살짝 큰 물건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그것을 연결했다.

곧 파일 하나가 떴고 클릭하자 서민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방수라고 비싸

게 받아먹더니 제값은 톡톡히 해냈구나. 거기엔 횟집에서 만났을 때부터 도망치기 직전

까지 대화가 모조리 녹음되어 있었다.

수현은 그것을 움켜쥐고는 이를 꽉 물었다. 이렇게 된 거 같이 지옥으로 간다. 그것을 가

방에 잘 챙겨 넣고 이번엔 옷가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비닐을 꺼냈다 . 전에 밀항하기 위

해 김영택에게 받은 여권과 최근에 구매한 대포폰이 담겨 있었다.


대포폰을 빼서 전원을 켜자 화면이 뜬다. 수현은 한참을 고민하다 밀항 업자의 연락처를

입력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본. 현금 5,000. 최대한 빨리.]

답장이 오지 않는다. 초조하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를 바라봤다. 그때 밖에서 쿵, 부서지

는 소리가 난다. 흠칫 몸을 떨었다. 옆방 남자가 술에 취했는지 쩌렁쩌렁 고함이 들려왔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답장이 도착했다.

[불가능.]

빌어먹을. 눈을 질끈 감았다. 이틀 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지만 절대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밀항을 하여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데. 수현은 얼굴을 벅벅 문

질렀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순 없다. 빠져나가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옮겨 간다. 머릿속에 딱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 선뜻 손이 움

직이질 않는다.

❖❖❖

[ 한편 어젯밤 서 검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음성 파일이 공개되며 파문이 일었는데요 . 경

찰은 현재 파일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백모 씨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당

은 근거 없는 소문으로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

으며 모함에 대해서도 철저히 대응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

에서 이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시민들의 관심 또한 주목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양 회장은 혀를 차며 리모컨을 들어 TV 를 껐다. 앞에 놓인 찻잔

을 드는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최 비서가 나타난다 . 맞은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

은 그를 보며 양 회장이 물었다.

“서민준은.”
“보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회장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 회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 만한 놈인 줄 알았는데, 욕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

치다니. 처음 동영상이 터졌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서민준을 믿었다 . 그가 여태 보여 온

모습들이 있지 않은가. 이튿날 바로 기사가 나갔고, 백수현은 은혜도 모르는 천하의 쓰

레기가 됐다. 거기까진 딱 좋았는데.

그런데 한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며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으로 당시 연관되었던 인물 하나가 인터뷰에 모습을 드러냈다 . 백수현이 억울하게 누명

을 쓴 거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고.

사람들의 의혹은 증폭됐다. 그럼 범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목격자가 서민준이라며.

그럼 서민준이 거짓말을 했단 건가. 양 회장은 방송에 나온 사람이 처음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라고 짐작했다. 은퇴하여 지방에 거주 중인 그를 즉시 찾았으나 누가 일부러

숨겨 줬다 싶을 만큼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더불어 어제 서민준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이 터진 거다 . 지지율이 조금씩 떨어지는

상황에 찬물을 끼얹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이대로 가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 모든

일이 백수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정작 당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범이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강원댁 말로는 퇴근하고 내내 집에 있답니다.”

“둘이 연락은 안 하고?”

“예.”

흠. 양 회장은 턱을 문질렀다. 이 모든 걸 백수현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호범

이 도운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둘이 따로 연락하진 않는다 ?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기가 찼

다. 다른 놈하고 붙어먹는 장면까지 공개된 마당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까.

“쯧. 얼빠진 놈.”


94 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툭 툭 물어뜯었다. 전화를 걸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얼마나 망설

였는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워 뒀던 번호를 누르

자 신호가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조용하다. 수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양 사장….”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윽박질러도 시원찮을 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더 무

서웠다. 그때 건물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 커

튼을 젖히고 내다봤다.

여러 명의 사내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주변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색 중이다 .

수현은 황급히 커튼을 닫고 쭈그려 앉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들리지 않

는다. 애가 타들어 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살려 줘.”

침묵 속에서 속도를 줄이라는 내비게이션의 경고음이 들려왔다.

“잘못했어….”

한숨을 쉬더니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야.]

“저번에 말했던 데. 여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전화가 뚝 끊긴다. 불을 끄고 구석에 몸을 숨겼다. 얼어붙었던 몸을

완전히 회복할 새도 없이 놈들에게 붙잡히게 생겼다 . 밖에서 저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무섭지만 양호범은 더 무서웠다. 그런데도 부른 건 도와줄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때마침 문밖이 소란스럽다. 쿵쿵 소리와 함께 여럿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뭐 하는 거냐

고, 당신들 누구냐고, 신고하기 전에 꺼지라고. 수현은 부리나케 일어나 창을 내다봤다.

수현이 머무는 여관으로 들이닥쳤는지 건물 아래 3 명의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창문으로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해 보여 포기하고 가방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어둠 속

에서 접이식 칼을 빼내 손에 쥐고는 밖의 동태를 살폈다.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지는 가

운데 이번엔 누군가 수현의 방을 두드린다. 쿵쿵, 문짝이 뜯겨 나갈 것만 같다. 칼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제발 그냥 가라. 다시 쿵쿵, 심장이 그것에 맞춰 심하게 박동한

다.

호흡을 멈춘 채 귀를 기울이는 순간 쾅! 하고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린다. 윽, 하는 신음이

잠깐 들렸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쪽만 노려보는데 손잡이가 덜컹거리며 문틈으로 무언가를 쑤셔 넣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쥐 죽은 듯 욕실 안쪽에 붙어 섰다. 달칵, 손잡이가 돌아가고 어둡던 방 안으로 불

빛이 쏟아지며 입구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 몸을 숨긴 채 상대가 이쪽으로

오길 기다렸다.

탁, 불이 켜졌고.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쯤 이

를 악물고 욕실 밖으로 튀어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휙, 머리를 움직여 가볍게 피한 남자

가 수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칼을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아…”

얼굴에 피 칠을 한 양호범이 서늘한 시선으로 수현을 내려다봤다. 그의 셔츠는 피로 범

벅이었고 손에 들린 칼에도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 기겁하여 뒤로 물러서려 하자

팔을 붙든 채 끌고 나가려 한다. 잡힌 팔목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잘, 잘못했어. 양 사장. 잠깐만!”

돌아보는 양호범의 얼굴에 분노가 잔뜩 서렸다.


“잔말 말고 따라와.”

“나, 짐, 짐 챙겨야 하는데….”

말을 하는 동시에 입구에 한 남자가 나타나 둘에게 달려들었다. 호범은 순식간에 남자를

제압하고 날카로운 칼로 목의 경동맥을 단숨에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남자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목을 붙들고 옆으로 쓰러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살풍경에 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에 취해 고함을 치던 옆방 남

자가 머리를 빼꼼히 내밀다 그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문을 닫아 버린다. 질질 끌려

아래로 내려오니 밑은 더 가관이었다.

1 층 계단 앞에 줄줄이 쓰러진 남자들을 양호범의 부하들이 옮겨 검은 봉고차에 짐처럼

싣고 있었다. 겁에 질린 여관 주인은 박태준과 따로 이야기 중이었는데, 대화의 내용은

모르겠으나 흰 봉투가 건네지는 걸 분명히 목격했다.

호범은 수현을 끌고 가 뒷좌석에 구겨 넣고 사납게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 그의 모습이 냉랭하다. 잠시 후 여관 밖으로 나온 그의 부하가 수현의 짐을 트렁크

에 싣는다.

탁, 트렁크 문이 닫히자마자 차가 출발한다.

수현은 멀어지는 여관을 보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운전석에 앉은 양호범 뒷모습

만 보였는데 뒤통수에서도 분노가 느껴졌다. 차는 금세 큰 도로로 빠져나갔고 수현은 입

을 꾹 다문 채 애꿎은 엄지손톱만 쥐어뜯었다.

“화났어?”

어렵게 꺼낸 말에 돌아온 건 침묵이다. 수현은 입술을 잘근댔다.

“변명 같겠지만 나도 방법이 없었어…. 약속 어겨서 미안….”

끼이익, 차가 도로 옆에 멈춰 선다. 수현은 놀라서 운전석을 봤다. 후, 양호범이 짧게 한

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운전석에서 내린다. 담배를 꺼내 물길래 화를 식히려는 줄 알았는

데 그대로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집어 던지더니 뒷좌석 문을 열려고 한다.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라 덜컥 겁이 나서 문을 잡고 버텼으나 소용없었다. 차 위쪽을 손

으로 짚고 안을 들여다보는 양호범의 눈빛은 사람을 죽일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예


쁘게 웃는다고 해서 모면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수현은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

았다.

“미안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이 안으로 들어와 수현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 몸이 미끄러지며

등이 시트에 닿았고 눈 깜짝할 새 바지와 속옷이 단번에 허벅지까지 끌려 내려갔다. 어

어, 말리려고 하자 그것을 벗겨 옆으로 던지더니 다리를 벌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마침 차 한 대가 옆으로 부응,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수현은 손을 뻗으며 그런 호범을 말

렸다. 여기서 하게? 잠깐만. 호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퍼를 내린 뒤 수현의 두 다리

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구멍에 좆을 맞췄다.

“야.”

어깨를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고 무식할 정도로 밀고 들어온다.

“지금 여기서, 윽!”

귀두만 들어간 좆을 단숨에 뿌리까지 집어넣자 수현은 충격에 입을 벌리고 파르르 떨었

다. 아무런 애무도 없이 쑤셔 대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다 . 씨발. 그만하라고 때리고

사정을 해도 소용없었다.

퍽, 퍽, 머리가 울릴 정도로 박으면서도 표정은 여전히 살벌하다 . 허리를 난폭하게 움직

이면서 나중에는 커다란 손으로 수현의 목을 감싼다. 손에 힘이 실리고 목이 졸리며 덜

컥 겁이 났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져 놓아 달라고 할퀴고 때리는 사이 시야는 아득

해졌다.

거의 기절하기 직전 그제야 놓아주며 입술을 포개고 사납게 물어뜯는다 . 아래를 쳐올릴

때마다 머리가 차에 닿자 뒷좌석 손잡이를 당기더니 문을 활짝 연다. 가로등도 없는 곳

에서 차 문을 다 열어 놓고 섹스하는 미친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점차 통증은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은 곧 서민준과의 찝찝했던

섹스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었다.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가며 고개가

뒤로 젖혀지자 밤하늘의 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쁘다.
시간이 그냥 여기서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점점 허리 짓이 과격해지다가 절정에 다

다르자 큭, 하는 신음과 함께 상체를 으스러지게 끌어안는다. 체중을 실어 강하게 누르

자 좆이 배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는 기분이다.

정액이 분출되어 흐르는 느낌마저 생생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호범은 고개를 들어 백

수현을 내려다봤다. 수현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을 뻗었다 . 처음엔 단순히

화가 났다고만 생각했는데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분노와 고통

이 뒤엉킨….

“미안하다….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되는 새끼라….”

호범의 눈빛에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슥, 몸을 뒤로 빼자 정액이 회음부를 타고 아래로

흐른다. 호범은 앞쪽으로 손을 뻗어 물티슈를 집었고 수현의 다리와 엉덩이를 말없이 닦

아 줬다. 누운 채 고개만 들어 그 장면을 보던 수현은 괜히 실없는 농담을 하였다.

“근데 너 되게 빨리 왔다. 서울에서 날아온 거야?”

호범이 물티슈를 앞으로 던지더니 벗겨 놓은 수현의 바지와 속옷을 건네고 뒷문을 닫는

다. 수현은 눈치를 살피다 옷을 챙겨 입고 자리에 앉았다 . 아래가 얼얼하고 졸렸던 목이

뻐근하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문지르다 룸 미러로 양호범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

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죄책감을 읽을 수 있었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호범을 보며 수현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우리 어디가?”

돌아온 건 짧은 대답이었다.

“부산.”
95 화

[대선에서 패배한 김현식 의원이 한 달여 만에 이명선 회장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는

데요. 이에 언론에선 김 의원의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습니

다. 김 의원은 서 검사에 대한 질문은 일절 받지 않겠다며 자리를 빠져나갔는데요 . 최근

이와 관련하여 청와대 게시판에는 당시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하는 청원이 올라와

반응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사건의 가해자였던 백 씨가 사망 처리됨에 따라 더는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 보고 있으며 이에 시민들은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가 아니

냐는 비난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한편 서 검사는 외부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허위 사실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처하겠다는 뜻

을 밝혔습니다.]

“뭐 잘한 게 있다고 법적으로 대응을 해.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그러니까요.”

“동영상하고 녹음 파일이 버젓이 있는데 발뺌하는 것 봐 . 저게 어디 보통 두꺼운 낯짝이

야.”

“당신 영상 봤어요?”

“나야 못 봤지. 근데 윤 씨는 봤대. 얼굴하고 목소리가 딱 그 검사더래.”

“어휴, 흉하게 그런 걸 왜 봐? 남자끼리, 징그러워.”

“미친놈이야. 처자식도 있으면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영상 올린 사람도 잘한 건 없어요. 그렇게 억울하면 법으로 승부를 봤어야지. 죽긴 왜

죽어.”
“법이 어디 없는 놈들 편인가. 죄다 있는 놈들한테나 유리하지.”

“진짜 자살한 건 맞나.”

“무슨 소리야.”

“저 검사 놈이 부산까지 쫓아가서 죽인 건 아닌가 해서.”

“에이, 설마.”

“없는 죄도 덮어씌웠는데 그런 짓이라고 못 할까.”

“아, 이거 사시게요? 여보, 그만 떠들고 손님 계산해 드려.”

꽃가게 주인이 멋쩍은 얼굴로 계산대에 올려진 흰색 국화와 선글라스를 낀 호범의 얼굴

을 번갈아 봤다. 3 만 원입니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꽃을 챙겨 나오는 동안에도 두 사람

은 뉴스에 관련하여 누가 잘잘못을 하였네 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꽃을 들고나오니 태준이 밖에서 기다리다 차의 뒷문을 열어 준다. 차에 타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수십 개의 비석이 일렬로 늘어선 걸 볼 수 있었다. 중간쯤 차를 세우

고 꽃다발을 챙겨 내렸다.

어느덧 추웠던 겨울이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사이 많은 것

이 변하고 바뀌었다. 천천히 걸어 중간에 있는 묘지 앞에 당도하니 조화가 꽂혀 있다. 선

글라스를 벗고 가지고 온 생화를 반대편에 꽂았다. 곁에서는 태준이 들고 있던 봉투에서

과일과 북어포, 박카스, 소주를 꺼내 대리석 위에 올렸다.

술과 박카스를 섞어 컵에 부은 다음 두 번 절을 하였다 . 남은 술을 묘지 주변에 뿌리고 나

서는 담배에 불을 붙여 음식 옆에 올려 두었다 . 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허공으로 퍼진다. 호범의 시선은 비석에 적힌 이름 세글자에 고정됐다.

김순정.

백수현을 낳은 여자.

[부탁이 있어. 엄마… 엄마 좀 찾아 줘…. 죽었으면… 어디 묻혔는지… 그것만이라도….]

백수현은 혹여 자신의 모친이 살아 있진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수

현이 산속으로 끌려가던 그날 밤 사망한 듯 보였다. 처음엔 백광무가 시신을 거두고 화

장해 제천에 있는 납골당에 보관하였는데 불상을 훔친 이후에는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김순정 아래 백수현의 이름 석 자가 눈에 띈다. 호범은 입을 꾹 다문 채 그것

을 바라봤다. 담배 끝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며 재가 됐다.

한참을 묘지 앞에 머물던 호범은 재킷에 꽂아 둔 선글라스를 쓰고 걸음을 옮겼다.

“가자. 약속 늦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바람이 분다.

도로 옆으로 늘어선 벚꽃이 하늘거리며 춤을 추더니 꽃잎이 흩날렸다.

[경포호에 벚꽃이 정말 예쁘대. 나중에 함께 보러 오자.]

아무래도 그 약속을 지키는 건 당분간 어려울 듯싶었다.

❖❖❖

한옥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래된 목련 나무가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매단 채 호범을

먼저 반겼다. 이 집이 지어졌을 때부터 있던 나무였는데 어릴 적엔 하얀색 꽃이 마치 주

먹밥 같다고 생각했다.

마당을 따라 걸어가니 반대편에서 김우진이 나타난다 . 씻고 나왔는지 머리엔 물기가 묻

어 있었다. 엉덩이를 맞은 게 꽤 수치스러웠는지 한동안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노려보

더니 지금은 전처럼 순한 양으로 돌아왔다.

“오셨어요, 형님.”

느지막이 키가 크는지 눈높이 아래 있던 녀석이 제법 위로 올라왔고, 몸도 전보다 다부

져졌다.

“운동하고 왔어?

“네.”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따라 걷자 오래된 나무 바닥이 뒤틀리며 소리를 낸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 다이닝 룸에 도착했고 요리를 담당하는 직원이 막 조리한 음식을 식탁 한가운

데 올려놓는 중이었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뒤늦게 쿵쿵쿵, 발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벌컥 열린다. 숨을 몰

아쉬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우영이었다. 약물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동태눈깔처

럼 퀭하던 몰골에 살도 붙고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그는 서둘러 앉으며 물부터 찾았다.

“더워. 무슨 4 월 날씨가 이래. 양 대표 넌 괜찮아?”

“응.”

“나만 더운가. 우진이 너는.”

“괜찮아요.”

김우진은 자신의 형인 김우영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여 거리를 두었다 . 그걸 김우

영 또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워낙 둘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니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직원이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마신 김우영이 손목에 찬 시계를 두 사람 앞에 흔들며 아

이처럼 자랑했다.

“어때? 어제 나온 신상인데, 쌔끈하지?”

호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우진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 김우영은 약을

끊은 대신 쇼핑에 중독된 건지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사들이고 똑같은 걸 몇 번씩 구매

하였다. 약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놔두긴 했으나 집에 가구보다 백화점에서 산 물건들이

더 많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는 점점 한심하게 느껴졌다.

“참, 양 대표 너도 며칠 전에 여기서 시계 샀다며. 선물할 거라고 매니저한테 그랬다는

데.”

태연하던 호범의 미간에 빗금이 생긴다.

“손목 가늘고 피부 하얀 사람한테 어울리는 시계 달라고 했다면서. 너 혹시,”


호범이 이를 꽉 물고 김우영을 노려봤다. 귀 아프니까 그 입 다물어. 김우영이 찔끔하여

입을 닫자 휴대전화를 보던 김우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 드륵,

때마침 문이 열리며 양 회장이 나타난다.

호범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 회장은 가운데 자리를 잡으며

세 사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하나씩 살펴봤다. 요즘 그의 낙은 셋을 불러 저녁을 먹는 것

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호범은 없던 소화 불량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다들 앉아.”

셋이 착석하자 직원이 뒤로 물러나 저만치 떨어진다.

“오늘 별일 없었고.”

“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대답했다. 식사하기 전 간략한 대화가 오고 갔다. 주로 오늘 뭘

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매번 뻔한 답을 하는데도 굳이 묻는 이유에 대해서는 궁금하

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외로운 건가. 차라리 고운 할머니라도 만나 손주들한테 관심을

좀 접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식사가 시작됐고 호범은 젓가락으로 소갈비를 집다가 백수현을 떠올렸다. 마지막 모습

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니 식욕이 싹 사라진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양 회장이 귀신

같이 알아채고 딴지를 건다.

“범이 넌 입맛이 없는 거야.”

호범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아주 멀쩡해요.

“오늘 일산 다녀왔다며.”

일일이 보고되는 자신의 스케줄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반박은 하지 않았다 . 양 회장에

게 약속하지 않았나. 백수현만 무사히 내보내 주면 어떤 것도 감수하겠다고. 그게 일주

일에 다섯 번 본가에서 얼굴을 보며 식사하고 대놓고 감시를 당하는 일이 될 줄은 몰랐

지만. 차라리 어디 한군데를 부러트리거나 자르는 게 속은 더 편할 것 같았다.

“잘하는 짓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놈 묘까지 쓰고, 쯧쯧.”


힐난하는 말투에 밥알이 입에서 돌처럼 굴러다닌다. 묵묵히 밥만 먹던 김우진의 눈빛이

다시 반짝인다. 그건 그것대로 호범의 심기를 건드렸다. 저 어린 양은 아직도 백수현을

잊지 못하고 있나 보다. 어디 있는지 그것까지 안다면 아주 볼만해지겠는걸.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던 그때 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가만히 응시하던 호범은 일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 실장이에요. 급한 전화라 잠깐 나가서 받고 올게요.”

양 회장이 손짓하길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왔다. 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

고 마당으로 가니 사방이 조용하다. 담벼락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담을 따라서 자라나는 나무에 초록색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잎을 만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음악이 들린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었고 봄 내음이 물씬 풍겨 왔다. 잠자코 상대방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호

범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96 화

끼이익- 차가 창고 앞에 멈춰서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장정 두 명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 하나가 거꾸로 매달렸고 그 아래는 투명 비닐이 넓게 깔려

있었다. 발이 묶여 매달린 남자는 서민준의 비서였고, 서민준이 강릉에 갈 때 동행했던

자로 측근 중 꽤 신임을 얻었으며 백수현과 서민준이 그 짓을 하는 걸 코앞에서 관람한

사람이기도 했다.

호범은 입구에서 양동이를 하나 가져다 남자의 머리 아래 두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

다.

“머리는 잘라서 여기다 담아. 처자식한테 보내게.”

조 비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악을 썼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 살려 주세요!”

호범은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그러게 왜 백수현 행방을 캐고 다녀요.”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서민준이 백수현 살아 있다고 해요?”

“저, 저는 모릅니다. 저는 단지 시키는 대로!”

호범이 쯧 혀를 차고서는 부하를 향하여 손짓했다 . 부하가 날이 번뜩이는 회칼을 들고

다가오자 조 비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 계속 똑같은 얘기만 하시니까 내가 할 말이 없네. 그럼 잘 가세요. 가족들한테는 대신

안부 전해 드릴게.”
아무 미련 없이 돌아서자 등 뒤로 비명이 들린다. 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

살려 주세요. 시키는 거면 뭐든 다 할게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그리니까 제발 목숨만

은! 목이 찢겨 나가는 절규에 호범은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칼날이 목에 닿아 핏물이 주르륵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다 . 조 비서는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과 콧물, 침을 거꾸로 쏟아 냈다. 호범은 물고 있던 담배를

옆으로 튕기고 천천히 조 비서의 앞으로 걸어갔다 . 목을 자르려 준비하던 직원이 뒤로

빠졌고 호범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뭐든 다 하겠다…?”

조 비서가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흐음. 호범은 턱을 문지르며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창고 안이 조용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조 비서를 빤히 바라봤다.

“조 비서님.”

“네….”

“아들이 운동하죠? 딸은 피아노 가르치고. 막내는 심장병이라고 했나?”

조 비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돈 많이 들겠어요. 예체능이 원래 그렇잖아. 거기다 아픈 애까지.”

“저, 저희 애들은 죄 없어요.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걔들은 아무것도,”

호범은 조 비서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이직할래요?”

조 비서가 거꾸로 매달린 채 입을 벌린다. 호범은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하여 남자의

얼굴을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내가 조 비서님 스카우트하려고 하는데.”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눈치 빠르다고 들었는데 아니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

“물론 찜찜한 거 알아요. 근데, 굳이 가라앉는 배에서 버틸 필요가 있나?”


“…….”

“ 이번에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당신이 목숨 바쳐 구할 만큼 괜찮은 놈이라고 느꼈어

요?”

“…….”

조 비서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생,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조 비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호범이 시간을 확인했다.

“30 초 줄 테니까 곰곰이 생각해 봐요.”

“네?”

“말하는 동안 10 초 지났어.”

조 비서가 눈을 질끈 감는다. 초침의 바늘이 30 초에 가까워졌을 때쯤 그가 눈을 뜨고 한

숨을 내쉬더니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범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부하들에게 그를 내려 주라고 손짓하자 즉시 여러 명이

모여 밧줄을 풀고 조 비서를 땅에 내려놓는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는 비틀거리며 중심

을 잡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박태준이 재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 비서 앞에 놓았다. 작은 상자

였는데 그게 무언지 가늠키 어려웠다. 조 비서의 시선이 상자에 닿았다가 호범에게 향한

다.

“열어 보세요.”

조 비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거기엔 작은 약병과 주사기가 들어 있었

다.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호범을 바라봤다.

“이걸… 어디에….”

“서민준 요즘 술 자주 먹죠? 운전은 조 비서님이 하시고.”

“네…”

“차에서 잘 때 팔에다 꽂으면 돼요. 쉽죠?”


조 비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저, 저보고 살인하라는 말씀인가요…?”

그 말에 호범은 헛웃었다.

“이봐요. 조 비서님. 내가 서민준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어. 근데 사람이 죽어서 죗값을

치르면 그게 무슨 죗값이야. 당한 놈만 씨발, 존나 열받는 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범은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하가 시커먼 가방을 들고 온다.

조 비서가 심란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곧 가방이 열리고 빼곡하게 쌓인 오만 원

권 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조 비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수고비. 애 셋 키우려면 돈 많이 들잖아요.”

갈등하던 조 비서의 눈빛에 욕망이 번지기 시작했고 호범은 산뜻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

을 내밀었다.

“입사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우리 잘해 봐요.”

❖❖❖

차를 타고 야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후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운전석에 앉은 박 팀장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는 매일 입던 검은 정장을 벗고 평범한 반바지에

반소매 차림이었는데 누가 봐도 경호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차를 세워 두고 야시장으로 걸어가는데 입구부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천막이

줄지어 늘어져 있고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그 아래를 밝혔다. 상점마다 파는 물건들이 가

지각색이었고 인종도 다양했다.


수현은 오랜만의 자유에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일본에 잠깐 머물다 이

곳으로 온 다음에는 거의 숙소에만 갇혀 있었는데 움직일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다 보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영과 마사지뿐이었다.

그래서 낮에 양호범에게 연락해 외출하고 싶다고 조르고 또 졸라서 허락을 받았다. 생각

보다 다양한 먹거리와 볼 것에 신이 나서 주변을 둘러보다 아이스크림을 발견하고 걸음

을 멈췄다. 박 팀장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드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영어로 주문을 하고 바트로 계산을 한다. 수현은 이곳에 와 가

장 후회한 게 영어를 배우지 않은 것이었다 . 박 팀장 말로는 양호범이 영어를 꽤 잘한다

고 하는데 나중에 가르쳐 달라고 할까.

양호범을 떠올리니 그리움에 기분이 살짝 가라앉는다 .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두 달째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지는 모른다. 곧 데리러 온다고 하였으나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옷을 파는 가게에 도착했다. 대부분 화려한 꽃

무늬의 옷들이 많았는데 영화에서 조폭이 자주 입고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양호범 하

나 사다 줄까. 질색할 얼굴을 떠올리니 벌써 신이 난다.

수현은 옷을 하나 꺼내 박 팀장에게 물어봤다.

“박 팀장님 이거 어때요? 양 사장한테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박 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는다. 글쎄요. 작을 거 같은데요. 때마침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는 어설픈 한국말을 섞어 가며 적극적으로 영업을 한다 . 우선 그걸 옆에다

올려 두고 또 다른 걸 골랐다.

“박 팀장님도 골라요. 하나 사 드릴게요.”

“아닙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가시지 말

고,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세요.”
수현이 얼른 가라고 손짓을 하자 그녀가 자리를 비운다. 혼자 남은 수현은 신나게 옷을

고르다가 화려함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큼 꽃이 많이 그려진 셔츠를 발견했다. 와, 이런

걸 입는 사람도 있나. 이거 입고 양호범 앞에서 춤추면 진저리 치겠는걸.

처음 고른 옷 위에 그것을 얹어 놓고 또다시 옷을 찾는데 누군가 옆으로 슥 지나간다. 그

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수현이 입으려고 골라 둔 셔츠를 홱 가지고 간다. 놀라서 보자 남

자는 벌써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뭐야. 저거. 당황하여 박 팀장을 찾았으나 화장실을 간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

다. 아, 진짜. 사장하고 눈이 마주쳤다. 사장이 영업용 미소를 띠고 웃는다. 젠장. 따지고

싶어도 말이 통해야 따지지.

억울해서 안쪽만 노려보고 있는데 옷을 빼앗아 간 남자가 잠시 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다. 말이 통하든 안 통하든 나오면 당차게 따질 생각이었다 . 그러나 남자를 마주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씨발, 더럽게 잘생겼네….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남자가 껌을 씹으며 뒷주머니에서 돈을 빼 주인에게 건네준다.

볼수록 눈이 참 인상적이다. 마치 고양이를 닮은 … ? 능숙하게 태국어로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빌어먹을. 내가 양호범 웃기려고 산 셔츠가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나도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은 아닌데….

그때 덩치 큰 남자가 안으로 쑥 밀고 들어온다. 웨이. 라고 부르는 소리에 셔츠를 빼앗아

간 남자가 돌아보며 이번엔 다른 언어로 말을 한다. 중국어? 힐긋대다 두 사람과 눈이 마

주쳤다. 둘 다 눈빛이 서늘하다. 그들은 가게를 나갔고 수현은 괜히 쫄아서 더 따지지도

못하고 입술만 삐죽였다.

젠장. 한숨을 내쉬고 다른 옷을 고르는 사이 시장 안쪽이 시끌벅적 소란스럽다. 비명과

고함이 섞여 들리는 가운데 자리를 비웠던 박 팀장이 급하게 뛰어오며 수현의 팔을 잡는

다.

“얼른 가세요.”

수현은 팔을 잡힌 채 미처 사지 못한 옷을 한 손에 들고 물었다.
“왜, 왜요?”

“총격 사건이에요. 방금 러시아인 하나가 피살당했어요.”

수현은 아연실색하여 들고 있던 옷을 제자리에 두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피살이라니. 당

혹스러우면서도 어디선가 저를 노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

진다. 그래서 처음 산 옷만 계산을 마치고는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97 화

[ 전직 검사가 오늘 새벽 자신의 차량에서 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 의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0.05 그램의 마약과 주사기를 발견했는데요 . 검사 결과 A

씨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 차량 안에서 한 차례 히로뽕을 투약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경찰은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A 씨를 입건하고 히로뽕 투약과 소지 경위 등에

대하여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호범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지금쯤 서민

준 쪽에서는 사건을 막느라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일이면 A 씨가 아니라 서민

준 이름 석 자가 대문짝만하게 실릴 거다.

“도착했습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눈앞에 요양병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 차에서 내리니 겨울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호수는 잔잔했고, 사방에 꽃이 만발하였으며 병원 뒤 동

산은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원장과 나이 젊은 의사가 마중을 나와 인사를 한다. 그들

과 함께 위층으로 향하는 동안 원장은 백광무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 아침에 깨

어났고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사고 당시 기억도 또렷하다는 말에 호범은 미간을 찡그리

며 혀를 찼다.

병실에 도착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 위에 한 남

자가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백광무 환자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백광무가 돌아본다 . 얼굴이 퀭했으나 눈빛은 제법 또렷하

였다.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은 사고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 아무리 봐도 백수현과 닮은 구

석이 없었다.

만약 백수현이 저 얼굴이었다면….

상상으로도 불쾌한 걸 보니 자신이 백수현을 좋아하는 데는 그 곱상한 얼굴이 어느 정도

한몫하였나 보다. 엄마를 닮아서 천만다행이군.

“컨디션 어떠세요? 미음은 좀 드셨어요?”

원장의 물음에 백광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옆에 있던 과장은 호범을 가리키며 친절

하게 설명을 보탰다.

“여기 계신 양 대표님이 환자분 그동안 돌봐 주셨어요. 병원비도 다 해결해 주셨고요.”

빤히 쳐다보던 백광무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침대에

서 벗어나려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였다. 간병인이 잽싸게 와서 그를 붙들었으나 공포

에 질린 얼굴은 감춰지질 않았다.

백광무는 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너, 너 그 깡패 새끼!”

호범에게 삿대질하며 깡패 새끼라고 하는 바람에 의사와 간병인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환자분 아직 정신이 덜 돌아왔나 본데요. 하하. 깡패라뇨. 이분은,”

백광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나 차로 쳤어요. 너 맞지?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호범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우려

했던 일이 벌어졌다. 사실 백광무를 차로 쳐 버릴 때만 해도 죽여 버릴 생각이었고, 입원

해 있을 때도 죽든 말든 상관없었었다.

그런데 백수현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됐느냐는 말

에 차마 직접 치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도망치다 받쳤다고 둘러댔었는데 … . 제기랄,

이렇게 무사히 깨어날 줄이야.

“잘못 보셨습니다.”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백광무가 성질을 낸다.

“잘못 보긴! 너 맞잖아. 나 때리고 욕도 하고 차로 친 놈이 바로 너잖아!”

씨발, 잘도 기억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나머지 사람

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백광무를 말리고 나섰지만 몇 달을 병상에서 누웠다가 일어난 사

람 같지 않게 힘이 장난이 아니다. 꽥꽥거리면서 지랄하는 걸 보니 백수현이 얼굴은 몰

라도 성질은 누굴 닮았는지 알겠다.

그러다 백광무 머리맡에 있는 옅은 노란빛의 카디건을 발견했다. 백수현이 사 두고 갔다

는 게 저건가. 그걸 집어서 백광무의 무릎 위에 올려 뒀다. 백광무가 흠칫하여 경계 어린

표정으로 쳐다봤고, 호범이 그의 벌어진 환자복 사이를 다정스레 여며 주며 싱긋 웃었

다.

“추운데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그래야 아드님도 만나죠.”

아들 이야기에 백광무의 분노가 수그러든다. 걔는 이제 안 와… . 혼잣말처럼 중얼대더니

고개를 떨구어 무릎 위에 올려진 카디건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범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도 백광무는 고

개를 들지 못하였다.

❖❖❖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마시던 수현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깨어났어…?”

[그래요. 헛소리는 하는데 의사 말로는 차차 나아질 거래요.]

“헛소리?”

[있어요. 그런 거.]

“…….”
[보고 싶어요?]

“아니. 너 같으면 그 인간이 보고 싶겠냐. 한국에 간다고 해도 만나고 싶진 않아.”

수화기 너머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말고 나.]

아, 수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콧등을 긁적였다. 당연히 보고 싶지. 함께 있을 때는 종종 도

망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떨어져서 타국에 와 있으니 양호범이 미치게 그립다 . 한숨을

내쉬며 옆에 놓아둔 맥주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양호범이 술을

마시느냐고 묻는다.

“한 캔째야.”

옆에서 듣고 있던 박 팀장이 수현의 발치에 수북하게 쌓인 빈 맥주 캔을 쳐다본다 . 민망

하여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박 팀장을 등지고 섰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지나

방으로 가서는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답답해서 옷을 벗으려고 한 손으로 전화를 붙들고 한 손으로 셔츠 아래를 잡았다. 쉽게

벗겨지지 않아 끙끙대자 수화기 너머에서 양호범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왜 이상한 소리를 내요. 사람 기분 뒤숭숭해지게.]

겨우 셔츠를 벗어 던진 수현은 덩달아 웃었다.

“내가 무슨 소리 냈는데.”

[섹스할 때 그러잖아. 낑낑대면서 앓는 소리 내고.]

“아니야.”

[맞아.]

아니라고 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영상통화 돼요?]

“지금?”

[응.]
잠시만 기다려. 통화를 영상으로 전환하자 화면에 호범의 얼굴이 나타난다 . 뒤에 책이

살짝 보이는 것으로 봐선 서재인 듯하였다. 가끔 영상으로 통화를 하는데도 여전히 어색

하다. 안녕,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자 화면 속에서 호범이 근사하게 웃는다.

[왜 벗고 있어요?]

“답답해서.”

[화면 더 아래로 내려봐요.]

수현은 장난을 치듯 화면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가 잽싸게 위로 올렸다. 양호범이 또 웃

는다.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었다.

수현은 침대로 올라가 옆에 있는 스탠드형 거치대에 휴대전화를 고정하고 화면을 뒤로

밀어 상반신이 모두 나오게 했다. 화면 속 호범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흥미로운 표정으

로 지켜본다.

그대로 손끝에 침을 묻히고 젖꼭지로 가져가 문지르면서 보란 듯 아랫입술을 핥았다. 으

음, 작게 신음을 내면서 허리를 살짝살짝 움직이자 호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차츰 사라

진다. 수현은 짓궂은 마음이 발동해 이번엔 한 손을 아래로 내려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성기를 붙들고 위아래로 문지르면서 입을 벌리고 화면을 응시하는데 양호범이 화난 사

람처럼 쳐다보고 있다.

[미치겠군….]

수현은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고 다리를 벌리 뒤 손가락을 구멍에 대고 꾹, 꾹 누르며 천

천히 밀어 넣었다. 아아,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들썩이다가 화면 속 호범과 눈이 마주

쳤다.

“양 사장. 얼굴 잘 비춰 봐.”

[지금 날 딸감으로 쓰고 있어요?]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이 자세히 나오게 비춘다. 화면으로 봐도 잘생겼네.

“아무 말이나, 해 줘.”

[밑에도 보여 주면.]
수현은 화면을 아래로 더 내린 다음 몸을 돌려 엎드렸다. 볼기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구

멍이 훤히 보이게 만들자 화면에서 씨발, 하고 뇌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서

지익, 하고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며 양호범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더 벌려.]

음습한 목소리에 발끝부터 전기가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노골적으로 더 벌리고서는

시트에 좆을 문질렀다.

[백수현은 구멍도 예뻐. 핥아 먹고 싶어.]

음란한 말에 배 속이 저릿해진다.

“넣어 줘. 빨리.”

하, 눈을 감고 양호범이 제 엉덩이에 좆을 쑤셔 넣는 장면을 상상했다. 커다란 귀두가 입

구를 벌리고 여린 살을 짓이기며 들어올 때 느껴지던 고통과 쾌락을 . 몸이 달구어지자

허리를 들썩이는 속도도 빨라진다. 수현은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자지러지는 신

음을 냈다.

“아, 아아, 범아, 더, 더!”

[후, 씨발.]

탁, 탁, 탁, 손으로 좆을 치대는 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아아, 진짜로 양호범 만나서 하

고 싶다. 안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섹스도 질펀하게 매일 하고 싶다 . 안에다 가득가득 싸

달라고 조르고 싶다.

“으읏”

그러다 절정을 맞이하여 시트에 정액을 토해 내며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팔에 힘이 빠

져 축 늘어트리고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몸을 간신히

뒤집어 화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통화가 종료됐다.

폰섹스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수현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뭐야. 어디 간 거야.
98 화

눈을 떴을 때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침대에서 내려와 비

척비척 밖으로 걸어 나오자 박 팀장이 거실 소파에서 차를 마시며 무언가를 보는 중이

다. 살금살금 접근하여 놀라게 해 주려 하는데 휴대전화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 어제 새벽 약물 복용으로 체포된 전직 검사 A 씨가 김현식 의원의 사위 서민준 씨라는

것이 언론에 공개되며 큰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현재 서 씨 측은 이 사실을 완강히 부인

하는 중이며 누군가의 고의적인 모함이라고 대응에 나섰습니다 . 이에 검찰이 어떻게 대

처할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입니다.]

놀라서 얼굴을 화면 앞으로 더 가까이 들이미는데 박 팀장이 알아채고 황급히 화면을 끈

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뭐예요,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뉴스 보느라….”

“서민준 검사가 입건됐대요?”

그녀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짓는다. 수현은 이곳에 와서 한국의 소식은 전혀 접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으며 지인들의 연락도 차단한 상태였다.

“진짜 마약 했대요?”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답니다.”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정말 끝도 없구나. 그래

도 마약까지 손댈 줄은 몰랐는데. 한편으로는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안겨 오던 서민준의 어린 딸이 떠올랐다 . 그 아이는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을까… . 심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솨, 하는 소리

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 그새 비가 쏟아진다.

“아, 비 오는 건 질색인데….”

“걱정 마세요. 금방 그칠 것 같습니다.”

괜한 사실을 알게 했다고 여기는 건지 박 팀장이 눈치를 살핀다. 수현은 괜찮다는 뜻으

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아, 식사하고 공용수영장 가도 돼요?”

박 팀장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시장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때문에 그녀의 신경

이 곤두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한국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숙소를 정

했고, 혹여라도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이곳에서 모든 걸 해결하길 원

했다.

“저하고 함께 가세요.”

겨우 허락을 받아 낸 수현은 조금 전 뉴스도 잊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서둘

러 침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

다.

어젯밤 감질났던 폰섹스를 마지막으로 양호범에게 연락이 없다 . 어디 딴 데 가서 풀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몇 달 전 양호범이 눈앞에서 여자하고 물고 빨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수현은 괜스레 성질이 나서 휴대전화를 침대에 홱 집어 던졌다.

“개새끼. 그러기만 해 봐라.”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하늘이 쨍하니 맑아졌다. 숙소로 돌

아와 수영복을 갈아입는데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형광색 짧은 반바지 수영복

만 달랑 입고 나타나자 박 팀장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그것만 입으시게요?”

“네. 이상해요?”

“윗옷은?”

“이대로 나가려고요.”

그녀가 마뜩잖아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양호범이 벗고 다니지 않게 감시 잘하라고 시켜

서겠지. 하지만 사람들 많은 수영장에 가면서도 꼭 그러고 싶진 않았다 . 밖으로 나와 노

란색 튜브를 챙겨 걷다 보니 커다란 공용수영장이 눈에 띈다.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수현은 파라솔 하나를 고르고 자리를 잡았다 . 가지고 온 선크림을 짜서 얼굴에 바르는

동안 박 팀장은 수영할 마음이 없는지 선베드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잡지를 펼쳤다. 그때

까무잡잡한 피부의 근육질 남자가 코앞으로 지나간다.

남자는 외국인이었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영복 하나만 걸쳤는데 덕분에 중요 부위가

유별나게 툭 튀어나왔다.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하이. 인사를 하길래 저도 똑같이 인사를 했다.

그런데 옆에 자리를 잡은 남자가 말을 건네 온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쳐다보고

만 있는데 때마침 박 팀장이 나선다. 짧은 문장이었으나 그녀의 어투는 굉장히 단호했

다.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박 팀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예요?”

“선크림 바르는 거 도와줄까 물었습니다.”

“왜요.”

“개수작이죠.”

단아한 얼굴로 개수작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실소가 터졌다 . 남자는 수영장에 들어가서

도 아쉬운 듯 계속 이쪽을 쳐다본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 죽일 놈의 인기. 외국인한테도 먹히는 얼굴이었어.”

실실 웃다가 박 팀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부정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외모이긴 하세요.”

뜻밖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이런 얘길 양호범한테 하면 비웃을 테지만. 생각

하니 또 보고 싶어지네. 휴대전화를 꺼내 전에 찍어 둔 사진을 봤다.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었지만 사진 속 양호범 표정이 매우 즐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현은 휴대폰을 멀리하여 박 팀장까지 나올 수 있게 화면에 담았다.

“박 팀장님 여기 봐요.”

그녀가 돌아보고 담담히 손가락으로 V 를 그려 준다. 찰칵, 화면에 두 사람이 동시에 담

겼다. 그걸 호범에게 전송하고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는 아침부터 수영. 너는 어제 그러고 연락도 없냐. 혼자 딸치다 디진 건 아니지?]

곧바로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뜨는데 기다려도 답장은 오질 않는다. 뭐야. 바쁜가.

아니면 어제 혼자 자위하는 모습이 너무 흉했나 . 나한테 정떨어졌나. 침울해져 귀여운

이모티콘을 날려도 여전히 답장이 없다.

수현은 호범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박 팀장에게 휴대전화를 맡겨 놓고는 선글라스

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영장 반대편은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었다.

간단히 준비 운동을 한 다음 튜브를 몸에 끼우고 물에 들어가 그쪽으로 헤엄쳤다.

그늘 밑에서 튜브에 몸을 축 늘어트린 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난데없이 튜브

가 흔들린다. 뭐야. 뒤를 봤더니 아까 수작을 걸던 외국인이다.

흰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길래 수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박 팀장이 어디 있

나 봤는데 그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통화 중이다. 수현은 머릿속으로 아는 단어를 최

대한 떠올렸다. 뻑큐, 섹스, 오마이 갓, 딥, 대디, 굿보이, 이런 거밖에 생각이 안 난다.

“아임… 아임 낫 솔로. 아이 해브 보이프렌드. 보이프렌드 이즈 베리베리 무서운… 씨발,

무서운이 영어로 뭐였지.”

“음?”

“보이프렌드, 음… 코리안 갱스터. 걸리면, 유 다이. 아임 다이. 오케이?”


손짓으로 열심히 목을 그어 가며 설명하는데 남자가 도저히 알아듣질 못한다. 수현은 욕

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 아무튼 난 너 관심 없어. 그러니까 자꾸 추파 던지지 마.

쏘리. 하고 손을 흔들고 물을 저으며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튜브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돌아보니 남자가 짓궂게 웃으며 튜브를 잡고 있다. 아, 이 새끼 진상이네. 꺼져가 영어로

뭐더라. 그런데 외국인이 손을 놓으며 위쪽을 쳐다본다. 이때다 싶어 도망가려는데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린다.

“즐거워요?”

고개를 들다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화로만 보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눈을 문질렀다. 양호범은 외국인을 향해 싸늘한 표정으로 얘기했고 외국인은 난감

하게 웃더니 양손을 위로 들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하고 멀어졌다.

“너… 너 어떻게 왔어?”

“비행기 타고 날아왔죠. 근데 다른 놈하고 시시덕대고 있네?”

수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야, 아니야! 내가 싫다고 했는데 쟤가 추근거렸어. 싫다고 거절해야 하는데 말이 통해야

지!”

반응이 없길래 수현은 억울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리 내가 엉덩이가 가벼워도 너

만난 다음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솔직히 잘생긴 애들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잠깐 쳐다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심이 있었던 건 절대 아니라고.

이실직고하니 호범이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오라고 손짓을 하길래 물을 저으며 코앞까지 갔다.

“보고 싶었어요.”

“어?”

“보고 싶었다고.”

화면으로만 보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니 심장이 두근댔다. 게다가 평소엔 잘 하

지도 않던 말을 대놓고 하다니.

“더워요? 얼굴이 빨갛게 익었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 꺼내 줘, 빨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잡아서 당긴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수현은 튜브를 내버려 둔 채 호범의 손을 잡고서 나무 뒤쪽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엉겁결에 따라온 호범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보다가 뒤늦게 수

영복을 확인하고 인상이 구겨진다.

“지금까지 이걸 입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이 호범을 나무에 밀치며 입술을 집어삼켰다. 혀가 얽히고 한참

키스가 이어졌다. 춥,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지자 수현은 호범의 가슴을 꽉 끌어안으

며 셔츠에 얼굴을 문질렀다.

“많이 보고 싶었어, 호범아.”


99 화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걷는데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숙소에 도착하자 호범은 문짝을 뜯어

버릴 것처럼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뺨을 붙들고 입술을 겹치며 침실로

이동했다. 호범은 수현을 침대로 밀친 다음 위로 올라왔고 수현은 손을 뻗어 호범의 셔

츠를 벗기려 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급해 자꾸 손이 미끄러진다. 하는 수 없이 잠시 입술

을 떼고 나서 물었다.

“셔츠 더 있지?”

“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손으로 셔츠를 잡아 벌렸다. 후드득, 단추가 뜯기어 벌어지고 잘

빠진 상체가 드러난다.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자 피부가 단단하게 팽창한다. 호범은

기가 찬 듯 웃었다.

“우리 애인 안 본 사이 과격해졌네.”

우리 애인이란 말에 수현은 얼굴이 또 발그스름해졌다 . 전에는 뻔뻔하게 넘길 수 있던

것도 이젠 신경 쓰이고 설레고 들뜨게 된다. 이런 거라면 장거리 연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처럼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싫지만….

호범이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지는 동안 수현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수영장 풍경을

바라봤다. 숙소 주변이 담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선 보이지 않겠지만 박 팀장이 나타나면

어쩌나 괜히 신경이 쓰였다.

커튼을 치려고 일어나는데 호범이 가슴을 눌러 도로 눕힌다.

“아무도 안 와요. 박 팀장 내일까지 다른 숙소에 머물라고 했어.”


아, 헤벌쭉 좋은 티를 냈더니 호범이 웃는다.

“대놓고 좋아하네?”

“밤새 섹스할 수 있단 소리잖아.”

“그럴 체력은 되고?”

체력 이야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전에도 여러 번 하다가 지쳐서 잠든 적이 있지 않은가 .

그러는 사이 호범은 수현이 입고 있는 수영복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물기가 남아 몸에

달라붙은 수영복이 잘 내려가질 않는지 인상을 쓴다.

다 벗긴 다음 옆으로 던지더니 수현의 다리 사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훤한 대낮에 알몸

을 드러내 놓고 있으니 살짝 부끄러워져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오금에 손을 넣어 옆

으로 벌리고 얼굴을 들이민다.

혀로 고환을 누르며 핥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까만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회음부를 타고 내려간 입술

이 이번엔 구멍을 빨고 혀를 넣어 쑤신다. 축축한 살덩이가 예민한 곳에 닿자 수현은 어

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아아!”

뒤만 빨아 줬을 뿐인데도 벌써 쌀 것 같다. 허리를 자꾸 들썩이자 호범이 고개를 들어 타

액이 묻은 입가를 훔치더니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젖을 만큼 젖어 손가락 두 개가 무리

없이 들어갔고, 앞뒤로 움직이며 좁은 곳을 벌려 주자 몸이 찌릿찌릿 감전되는 기분이었

다.

“여기쯤인가.”

손가락으로 전립선 부근을 건드리길래 수현은 머리를 들며 손을 뻗었다 . 아니, 하지 마,

거기, 싫어.

싫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으로 그 부분을 누른다. 흑, 입술을 깨물며 몸부림

치다 손을 아래로 뻗었다. 좆을 만지려 하는데 바로 제지하고 손가락으로 뒤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죽을 맛이다. 고개를 들어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호범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는다.
“하, 표정이 진짜.”

손가락을 쑥 빼더니 지퍼를 열고 좆을 꺼낸다. 이미 발기한 좆이 속옷 밖으로 휘청 튀어

올랐다. 기둥을 잡고 귀두를 구멍에 대고 문지르는데 감질이 난다 . 어서 넣어 달라고 다

리를 활짝 더 벌리자 그대로 밀착해 삽입을 시작한다. 뻐근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 괴롭혀 주려고 했는데, 하, 안 되겠다.”

“왜. 내가, 야해서?”

“응.”

“얼만큼?”

“먹어 치우고 싶을 만큼.”

수현은 큭큭 댔다. 진짜로 먹지는 마. 맛만 봐. 알았지? 농담에 호범이 목을 울리며 웃는

다. 좁던 안이 벌어지는 느낌에 배가 뭉근하게 아려 온다. 손을 밑으로 내려 아랫배를 더

듬다가 호범과 눈이 마주쳤다.

“호범아, 여기까지 들어왔어.”

평소에는 양 사장이라는 호칭이 입에 붙었는데 이름을 부르니 낯간지럽다 . 호칭 때문인

지 안에 들어간 좆이 꿈틀거리며 더 커졌다.

“계속 커져….”

이러다 배가 뚫리는 건 아니겠지. 무서운 상상할 틈도 없이 좆이 느긋하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수현은 안달이 나서 호범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 안아 줘. 호범이 상체를 숙

여 입을 맞추더니 가슴을 움켜쥐고 애무한다. 젖꼭지를 물고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

다 수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난데없이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창가

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가까워졌고 이 시간이면 늘 수영장을 청소하러 오는 직원들이

떠올랐다. 때마침 호범이 힘을 주어 안을 콱, 찌른다.

“아읏”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자 이번엔 수현의 뺨을 붙잡아 제 얼굴을 보게 했다.


“왜 딴생각해요?”

“그게, 아니라, 읏, 수영장 청소하러 사람들 올 시간인데.”

“오늘 여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어.”

“정말?”

“응. 그러니까 나한테 집중해.”

그의 말대로 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 움직이는 강도가 세지며 눈앞에

서 불꽃이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현은 호범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서는

목을 끌어안았다.

등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난다. 온도를 낮춘 에어컨과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 팬 하나로

열기를 식히는 건 역부족이었다. 강하게 움직이니 몸이 들썩이며 덩달아 침대도 끽, 끽,

소리를 낸다. 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갑자기 호범이 좆을 쑥 빼더니 수현의 몸을 뒤

집는다.

“엉덩이 들어요.”

엎드린 채 엉덩이만 들자 좆을 단번에 쑥 집어넣는다. 퍽, 하는 강한 반동에 몸이 앞으로

밀리니 곧바로 잡아채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움직인다 . 자세 때문에 삽입이 깊어졌고

넣을 때마다 배 속이 징, 징 울린다.

“아아!”

속도가 빨라질수록 몸이 앞뒤로 미친 듯이 흔들렸고 신음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추삽

질이 반복되면서 강한 쾌감과 함께 사정감이 몰려왔다.

“으흑, 좋, 좋아, 더, 더, 해 줘, 아!”

섹스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순간에 호범이 뒤에서 꽉 껴안으며 몸을 압박한다.

납작하게 눌려 아래만 쑤셔지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시야가 아찔해졌다.

“쌀, 쌀 것, 같, 윽.”

울컥, 울컥, 사정하였는데도 움직임은 멈추질 않고 더욱 과격해진다. 등과 맞닿은 가슴

이 땀으로 흥건하다. 죽을 맛이다. 잠깐 멈추라고 팔을 잡았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전

립선을 더 찍어 누른다.
“나, 아, 거기, 하, 하읏!”

이상한 감각에 허벅지에 힘을 주며 오므리자 호범이 이를 빠득 갈면서 욕을 내뱉는다 .

젠장, 힘 빼요. 너무 조이니까, 죽겠잖아. 습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하아, 하아, 숨소

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좆은 이제 방향을 잃고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견디다 못해 진저리를 치며 앞니로 시트를 물어뜯자 호범이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는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

처럼 뻣뻣해진다. 순간 요의와 함께 좆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충격에 몸을 바들바들 떠는데 호범이 안쪽 깊숙한 곳에 정액을 배출한다 . 수현은 쉬지

않고 움찔대다가 시체처럼 축 늘어져 눈만 겨우 뜬 상태가 됐다 . 숨을 고르던 호범이 옆

으로 내려와 수현의 얼굴을 확인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수현은 눈을 깜빡였다. 눈앞이 왜 흐릿하나 했는데 하는 도중 울었나 보다 . 손으로 문지

르려고 하니 호범이 붙잡고 대신 혀로 핥아 준다. 눈알을 먹어 치울 기세라 기겁하고 손

으로 얼굴을 밀어냈다. 그만.

“죽을 뻔했어….”

“좋아서?”

미친놈…. 하지만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하는 도중 몇 번이나 극락을 맛봤다. 꼼짝도 하

지 않고 있으니 호범이 수현을 안아서 옆으로 옮긴다 . 엎드려 있던 자리가 흠뻑 젖었다.

수현은 그것을 보며 욕을 뱉었다. 직원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

려온다.

시트를 전부 벗겨 낸 호범은 둘둘 말아 한쪽에 치운 뒤 축 늘어져 있는 수현을 번쩍 안았

다. 떨어질까 염려되어 목을 끌어안자 입술에 쪽, 키스하더니 욕실로 들어간다.

“나 지금 못 씻어…. 다리 풀렸어.”

“씻겨 줄게요. 한 번 더 하고 나서.”

수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이지? 라고 묻자 호범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장난치지 말라고 정색하자 오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장난인지 아닌지 잠시 후면 알겠죠.”

도망치려고 버둥대다 엉덩이를 찰싹 얻어맞았다.

괜히 도발하였구나,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이제 와 물릴 수는 없었다.


100 화

수현은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전의 무리한 섹스로 인해 움직일

때마다 꼬리뼈에서부터 찌릿찌릿 타고 올라온다. 그때 저 멀리서 호범이 병맥주를 들고

나타난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을 받으며 등장한 모습이 꽤 근사하다.

그는 수현이 야시장에서 산 셔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입었는데 우스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역시 깡패는 꽃무늰가. 거기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

때문에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왜 뚫어지게 봐요?”

“내가 연하하고 사귄다는 게 실감이 나서.”

호범은 자리에 앉으며 싱겁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까진 실감이 안 났나 보네?”

“어. 나 사실 처음에 네 나이 듣고 존나 놀랐잖아.”

“그래요?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여태 없었는데?”

“다들 죽기 싫어서 입 다문 거겠지.”

그렇구나. 호범이 웃으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간다. 수현은 함께 웃다가 노을이 지는 바

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며 장난을 친다. 아무

걱정 없는 풍경에 괜히 코끝이 시려 왔다. 살면서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날들이 얼마

나 있었던가. 매번 뒤통수 맞고, 얻어터지고 쫓기고, 그렇게 평생을 살다가 죽을 줄 알았

는데.

먹먹한 마음에 맥주 대신 앞에 앉은 양호범을 바라봤다.


“양 사장.”

“응.”

“고마워.”

“뭐가요?”

“전부다.”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양호범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놈의 사채를 갚느라

절절매고 있었을 거다. 엄마도 찾지 못했을 거고, 서민준이 저를 배신했다는 사실도 몰

랐을 것이며 철없는 시절 찍힌 동영상도 회수하지 못했을 거다. 그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이 겪었으나 그래도 결과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홀가분해졌다.

“ 너 만나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나는 없었을 거야.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

고.”

“눈물 나는 고백이네. 반지라도 사 올걸.”

호범의 말에 수현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러다 아침에 본 기사가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있잖아…. 서민준 마약으로 구속됐대.”

호범이 처음 듣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요?”

“너 몰랐어?”

“전혀.”

“나 아침에 뉴스 보고 깜짝 놀랐잖아. 사람이 진짜 바닥까지 내보이는구나 싶더라.”

호범은 말없이 웃었고, 수현은 더는 서민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제 인생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지우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소소한 일상이었지만, 그것마저도 행복했다.

대화 도중 바 안쪽에서 가수 하나가 통기타를 들고 등장한다. 자리에 앉은 그는 기타의

줄을 조정하더니 이어서 노래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감미롭다. 수현이 몸을 좌우로 움직

이며 박자를 맞추자 호범이 웃는다.


“이것 봐. 몸치라니까.”

“그래도 섹시하지?”

면박을 줄 줄 알았는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맥주를 비우자 호범은 곧바로 종

업원을 불러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종업원이 떠난 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이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 서울 가면 영어 배울 거야….”

“그래요. 내가 유능한 선생 붙여 줄게.”

“검정고시도 보고.”

“응.”

“ 앞으로 나쁜 짓 안 하고 착실하게 살고 싶어. 작은 가게 차려서 장사도 하고, 불우이웃

도 돕고.”

“응.”

수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나 언제 한국 갈 수 있어?”

호범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때가 되면.”

때가 되면… . 입 안에서 그 말을 반복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

곳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혼자 있는 건 아무래도 외롭다. 수현은 화제를 바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호범은 듣는 내내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 웃어 주었다. 그 사소한 반응에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댔다. 때마침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고 바다의 냄새가 코끝에 머

물다 사라진다. 시간이 흘러도 오늘 이 시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
잠에서 깬 수현은 몸이 꽁꽁 묶여 있는 기분에 눈을 떴다 . 겨드랑이 아래로 팔이 들어와

상반신을 감싸고 있고 다리도 엉켜서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겨우 팔을 풀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골이 띵하다.

어젯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바에서 마시고 돌아와서 숙소에서 또 마시고, 그러다 수

영장에서 눈이 맞아 섹스를 두 번이나 한 뒤로는 기억이 없다. 과한 섹스 탓에 허리도 아

프고 숙취에 두통까지 몰려온다. 이마를 짚던 수현은 눈앞에서 반짝이는 물체에 손을 아

래로 내렸다.

“어?”

왼쪽 약지손가락에 지금까지 없던 반지가 생겼다. 뭐야 이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지

를 보다가 아직 자는 호범을 돌아봤다. 이게 어디서 났지. 설마 … . 개 버릇 남 못 준다더

니 혹시 내가 술 취해서 훔친 거 아니야. 자세히 보니 백금 링에 가운데는 큐빅처럼 보이

는 게 매립되어 있다. 누가 봐도 커플 반지다. 양호범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자고 있어서

일단 반지를 빼서 빛에 비춰 봤다.

“그만 확인해요. 다이아몬드 맞아.”

소리가 나길래 봤더니 호범이 몸을 뒤집으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이거 네가 그랬어?”

“응.”

“언제 샀어?”

“앞으로 누가 추근대면 다른 얘기하지 말고 반지부터 보여 줘요.”

“커플 반지야?”

“응.”

“네 것은?”

호범이 손을 펼치니 똑같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수현은 좋아서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범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

왔다.
“나 태어나서 커플링 처음 샀어요.”

반지를 보며 웃던 수현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였다.

“나는 두 번,”

하다가 말을 멈추고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온화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양호범이

눈에 살기를 띠고 쳐다본다. 두 번? 이라고 되묻기에 수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흔

들었다.

“아니! 처음이야.”

호범이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수현은 흠칫하여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 그러자 손을

붙잡더니 수현의 눈앞에 들이민다.

“명심해요. 앞으로 이 손에 반지가 더 끼워질 일은 없을 거야.”

“어, 어. 당연하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딴짓하다 걸리면 제일 먼저 이 손가락을 자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야아, 너는 꼭 말을 무섭게… 알았어.”

대답한 후 수현은 조심스럽게 호범의 손을 붙들어 포갰다. 호범이 쳐다보길래 배시시 웃

으며 휴대전화를 켜고 카메라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 꼭 결혼사진 같네. 주책맞은 소리

를 하고 나서 휴대전화를 한쪽에 던져 놓고 호범의 입술을 기습적으로 훔쳤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을 연신 빨면서 뒤엉켜 구르는데 갑자기 호범이 시간을 확인하고 수현

을 떼 놓는다.

“그만. 나 비행기 시간 늦어요.”

아,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진다 . 어젯밤 언제

까지 여기서 있어야 하냐는 물음에 호범은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니 호범이 침대 밖으로 벗어난다.

“씻고 나올게요.”

그는 수현의 머리를 헝클어 놓고는 그대로 욕실로 사라졌다.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태

도에 살짝 속이 상했다. 보내기 싫다. 혼자 이곳에 있는 건 외롭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이렇게라도 얼굴 본 게 어디냐.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거실

로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런데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가 왔나

하고 봤더니 박 팀장이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었다.

“잘 주무셨어요?”

수현은 목에 난 흔적을 가리려 티셔츠의 윗부분을 황급히 끌어당겼다.

“네, 덕분에요.”

“대표님은요?”

“안에서 씻어요.”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갔고 수현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잠시 뒤 박 팀장이 나왔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준비 안 하세요?”

“다 했어요. 옷만 갈아입으면 돼요.”

“짐도 챙기셔야죠.”

“왜요?”

“그야, 한국에 가려면….”

듣고 있던 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오늘 같이 돌아갈

거라고 전달받았단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양호범이 저를 속였다는 걸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양 사장!”

가운을 두르고 있던 호범이 예상한 듯 웃는다. 수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 한국에 가는 거 맞느냐고 이제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응 , 짧게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좋아요?”

“어!”

호범은 흘러내린 수현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면 당분간은 여기보다 더 갑갑할 수 있어요. 외출도 어려울 거고.”


“괜찮아.”

“이제 백수현 이름으로 지낼 수도 없어.”

“상관없어. 나한테는 너 있잖아.”

그 말에 호범은 감정을 누르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엔 백수현을 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이른 건 아닐까. 과연 백수현을 위해 나은 선택일까. 하지

만 더 떨어져 있자니 제 마음이 견디질 못하겠다.

그는 먹먹해지는 기분에 수현을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진심이다.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고 원하게 될 줄 몰랐다. 욕심이란 걸 알지만 그런

데도 함께하고 싶다.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자 수현이 입을 벌린다 . 갑작스러운 키스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수현은 호범을 떼어 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우리 못 가는 거 아니야?”

호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껴안으며 입술을 들이밀었다.

“키스만.”

“차라리 비행시간을 미뤄.”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둘 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어서 둘은 서로의 옷을 벗기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는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디 이 행복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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