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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4. 파트너, 애인 그 사이에서의 방황(2)


5. 체포 완료
파트너를 구했는데 엄마 친구 아들이었습니다 3

지은이|복쩐쩐
일러스트|뒤안
타이포|MUI
펴낸이|권순남
펴낸곳|M 블루
발행일|2021. 8. 2.

ISBN|979-11-368-1620-7

대표전화|02-2091-0290
이메일|mblue_bl@mayabooks.co.kr
트위터|@m_novel_blue

Copyrightⓒ2021 복쩐쩐 & M BLUE


Illustration Copyrightⓒ2021 뒤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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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를 구했는데 엄마 친구 아들이었습니다
3
복쩐쩐
카펫이 깔린 호텔의 로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람난 애인을 잡으러 가는 것처럼 우서의
표정은 비장하다. 기가 죽으면 안 되니, 구두와 슈트까지 잘 차려입고 단정한 몸짓으로 카페로
향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따라왔다. 잘 꾸민 앳된 남자의 모습은 비장하면서도 어느
한 구석, 귀여운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카페의 문을 열자 향긋한 커피 향과 각종 베이커리류의 달달하고도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온다.
현악기의 선율이 흐르고 공기마저 상쾌한 것이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흘렀다. 딱 좋달까,
한눈판 파트너 덜미를 잡으러 가는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나비처럼 날아가 벌처럼 선보는 현장을 포착할 것이다.
마침 저 멀리 창가에 앉아 있는 서정혁이 보였다. 잘 차려입은 투 버튼 셋업 슈트에 머리까지
시원하게 넘긴 상태였다. 잘난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욱 뻔지르르하게 빛나고 날렵한
이목구비와 선들이 이곳의 분위기와도 무척 잘 어울렸다.
‘멋져 보이려고 잘 차려입고 왔다 이거지…….’
우서는 정혁이 잘 보이는 대각선 앞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정혁은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곧게 앉아 있었다. 무표정으로 상대의 얘기를 듣다가 글라스를
들어 물로 목을 축이기도 한다. 전혀 감흥 없는 얼굴로 티스푼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핸드폰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마치 제 연락을 기다리는 거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래도 절대 안 봐줄 거다.’
상대방은 서정혁과 마주 앉아 있었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딱 봐도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품위가 느껴져 오고 있었다.
슬쩍슬쩍 비치는 옆모습이 매력적이고 귀여웠다. 연노란색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있는데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고 애교 있어 보이기도 했다.
호호─ 하고 여자 웃음소리가 나긋하게 들려오는데, 정혁은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은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은 또 처음 봐 기분이
묘했다. 제 앞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여자의 지적인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그에 비해 방정맞고
시끄러우면서도 강단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데, 그러지 않으려 해도 소개팅 상대와 자꾸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우서의 곁으로 와 메뉴를 펼쳐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냉수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었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우서는 대각선의 테이블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손가락으로 음료 칸에서 아무거나 짚어 냈다.
“……이거 주세요.”
“네, 그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메뉴를 들고 사라지는 직원을 바라보다가 우서가 다시 정혁을 노려보았다.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아하니… 서정혁, 상대의 말을 어느 정도 경청하는 듯하면서도 별 흥미는 없는
것 같다.
예리하고도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져 왔는지, 정혁이 힐끗 눈을 굴려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점점 알 수 없는 묘한 섬뜩함으로 변해 간다. 눈썹이 꿈틀했고 헙, 하고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려진다. 눈이 커지면서 정혁은 대각선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번 매서운 눈빛을 한 우서와 눈이 마주쳤다. 정혁은 뜨억 하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맞은편 상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나 보다.
우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날 너무 물로 본 거다, 서정혁.
그런데 맞은편의 여자가 팔을 올리다가 그만 앞에 놓여 있던 잔을 쳤다. 물이 엎질러지고 그걸
보고 있던 서정혁은 손을 뻗어 순발력 좋게 물컵을 세웠다.
재빠르게 대처한 덕분에 테이블보를 적신 물의 양은 적었다. 정혁은 여자에게 냅킨을 챙겨
주고 직원을 불렀다.
그 후에 다시 건너편 자리를 바라보니 눈에서 쌍심지를 켜고 있는 우서가 있었다. 정혁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것은 자신이 좆 됐다는 걸 안 자의 표정이었다.
“…….”
그 잘난 얼굴을 잔뜩 노려보다가 우서는 목을 지익─ 긋는 제스처를 했다.
정혁은 대각선 방향을 힐끗거리면서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고 꾹꾹 깨물었다.
그런 정혁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안절부절못해하는 서정혁은 평소 쉽게 구경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좀 더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나고 있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메뉴판을 들고 사라졌던 직원이 트레이를 들고는 우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우서의 앞에 핑크빛의 곱디고운 음료를 내려놓는다. 잔 위로 높게 쌓아 올린 크림이
포슬포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체리 생크림 마카롱 파르페 맛있게 드십시오.”
엄청난 높이의 파르페에 우서의 눈이 점차 커진다. 체리며 망고며 온갖 열대 과일이 장식되어
음료의 높이를 충실히 높이고 있었다. 핑크색의 마카롱과 앙증맞은 데코픽까지 꽂혀 있었다.
“……체리… 파르페……?”
이게 뭐지. 아이 씨. 남자 혼자 앉아서는 이런 걸 먹고 있다니… 치욕스럽잖아……!
우서가 차마 손대지도 못하고 앞에 놓인 음료에 당황해하는 사이, 정혁은 저 멀리서 작게
웃었다. 아… 이게 아닌데. 졸지에 서정혁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우서의 얼굴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라 붉어졌다.
‘죽. 을. 래. 웃. 지. 마. 라.’
우서가 입을 벙긋거리며 정혁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해 주면서도
그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러고는 여자가 가방에서 무얼 꺼내는 틈에 우서를 향해서 잠깐이지 두 손을 차분히 모아
보여 주었다.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동작이었다.
‘절. 대. 안. 돼.’
나는 너를 처단할 것이다! 우서는 삿대질을 하면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혁은 그 입 모양을 힐끗 바라보다가 어서 빨리 음료를 먹으라는 듯이 턱짓했다.
‘못 먹을 줄 알고?’
우서가 티스푼으로 생크림을 푹푹 퍼먹고 체리 꼭지를 똑 따서 입에 넣었다. 정혁의 소개팅
자리 1 열에서 생방송으로 지켜보면서 먹는 파르페의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이야, 내 생에 처음 먹는 파르페를 녀석의 소개팅을 관람하며 먹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로웠다.
우서는 개탄하며 입술을 훑었다. 남아 있는 알갱이와 크림이 달고 상큼했다.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쓰디쓸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달달하니 맛만 좋았다. 딱 우서의 취향이었다.
정혁은 크림을 핥아 먹는 그 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나중에는 우서 쪽을 아예 대놓고 바라봤다.
우서는 얼음 알갱이와 핑크색의 음료를 입으로 떠먹고 계속해서 혀를 날름거리며 정혁을
게슴츠레 노려봤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한 번씩 훑어 내리며 감시했다.
그럴 때마다 정혁은 자꾸만 자리에서 움칠하며 조금씩 자세를 바꿨다.
‘눈치 보는 걸 보아하니 찔리긴 한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 둘은 작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도 따라서 묵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돌아 차분히 우서의 테이블을
지나쳐 이곳을 벗어났다.
우서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상대가 멀어져 가는데도 이상하게 서정혁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정혁에게서 별다른 호응이 없으니 이야기가 금방 끝이 난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집중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 빠르게 싫증이 난 걸 수도 있겠다.
통쾌하긴 했지만 고위급 간부의 손녀라고 했던가……? 직업과 연관된 상대인데, 녀석을 너무
못 살게 괴롭혔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우서의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정혁이 핸드폰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이 보낸 메신저를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우서야 나 보러 온 거야?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을 만큼 내가 너무 멋있고 탐이 나는 거지? 독점욕이 생길 만

농담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수법은 오늘 자신에게 통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정혁이 핸드폰을 보다가 피식 하고 웃는다. 우서가 찌릿, 하고 노려보니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또 불쌍한 척을 해 보였다.
진우서 너 화났지.

서정혁에게서 또다시 답이 왔다.

정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기다란 손가락으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이 하기 싫은데 너한테 자꾸 미안한 일이 생기네.

음… 이렇게 바로 사과해 버리니 할 말이 없다. 우서가 뭐라 답하면 좋을지 곰곰이 고민하는


틈에 똑똑, 하고 누군가가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 익숙한 까무잡잡하고 단단한 손등과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우서가 고개를 들었다.
매끈하고도 섹시한 남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눈웃음을 살포시 지으며
우서를 향해서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저기요, 잠깐 앉아도 될까요.”
상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혁은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우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 앉은 그를 바라봤다.
“뭐야. 짜증 나… 뭔데 이게.”
신경질적이면서도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해 지금은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그쪽이 너무 맘에 들어서요.”
“집에 갈 건데, 놔라?”
자신과 선이라도 보겠다는 건지, 어이없는 존댓말을 쓰며 서정혁은 계속해서 얘기를 걸어왔다.
정중한 말투긴 하나, 우서는 농담을 들어 줄 맘도 받아 줄 생각도 없었다. 도끼눈을 뜨고
냉랭히 대답했다.
“오늘 답답한 일이 있었는데 들어 보실래요.”
“…….”
그런데 그가 앞에 놓인 파르페를 가져가서는 우서가 빨아 먹었던 스푼을 들었다. 푹 퍼서 한입
떠먹고는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았다. 눈웃음을 흘리면서 말이다.
우서도 무언가 찌릿하게 자극이 왔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저 매력적인 상대가
파르페보다도 훨씬 더 달 거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저한테 애인이 있는데, 아직 부모님께는 얘기를 못 드렸거든요.”
그 애인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는 단언컨대 네 애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부모님께서 소개받으러 나가라 하시는데, 거기에 대고 애인이 있다 떳떳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왔죠.”
“거절했어야 됐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인사만 하고 헤어지려 했거든요, 근데 애인한테 들켜
버렸네요.”
“애인이 무척 화가 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혁이 턱을 괴고는 덤덤하게 우서에게 얼굴을 내밀면서 물어 왔다. 여유 있게 눈썹을
까딱하는 걸 보니, 결국 너는 나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아주 뻔뻔한 얼굴이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미친놈아.”
“그쪽이 잘 알 거 같아서요.”
“무릎 꿇고 열심히 사과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우서가 팔짱을 끼고 있다가 정혁을 향해서 쌀쌀맞게 대답했다. 무릎 꿇고 열심히 사과한다면
받아 줄 의향은 있었다.
물론 지금 이 복잡한 감정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자신과 서정혁, 섹스만 몇 번 했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고. 조금 전 녀석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나름의 합리화가 된다.
“그 사과 말이에요, 혹시 옷 벗고 해도 되나요?”
“미치셨어요……?”
정혁이 나른하게 웃으면서 물어 온다. 우서는 경악했다.
“근데 어떡하죠. 큰일이네요. 그쪽이랑 오늘 밤은 쭉 같이 있고 싶은데.”
“지조가 없으시네요.”
우서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서정혁이 좋아하는 지조를 핑계 삼아 한
번쯤은 이렇게 골려 주고 싶었었다.
“그쪽이 너무 섹시해서 조금 전에 지조나 의리 따위 개나 줘 버렸는데요.”
“애인분이 무척 빡치실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정혁은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그럼요. 마음이 바뀌었고요. 이젠 그쪽이랑 애인하고 싶어졌어요. 올라가실래요?”
저 능구렁이 같은 놈, 우서는 한참을 정혁을 노려보다가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이렇게
능글거리며 사과해 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없다. 마음이 스리슬쩍 풀리고 자꾸만 저 크고
넓은 손이 잡고 싶었다.
자존심이 무진장 상하긴 하는데… 슈트 차림의 섹시한 녀석이 앞에 서 있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은 배가 된다. 자꾸만 서정혁 앞에서 가슴이 쿵쾅거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혁 앞에서 반응하는 어쩔 수 없는 몸 때문에 우서도 결국 내민 손을
향해서 팔을 뻗었다.

***

“사과한다더니만 이게 뭐야……!”
“사과는 이따가 하고, 급한 거부터 해결해야지. 일에 항상 우선순위라는 게 있잖아.”
“아니……! 나 아직 안 씻었다구!!”
“그럼 씻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출장을 다녀와 씻지 못했다는 핑계로 정혁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우서는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오만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미쳤어? 옷도 안 벗고 어떻게 씻어……!”
탈의하지 않은 상태로 욕실에 끌려 와 결국은 월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스러운 호텔답게 시설은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고, 인테리어 또한 흰 대리석으로 된
깔끔하고도 클래식한 분위기였다.
정혁은 짓궂은 얼굴로 샤워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물이 화악 뿜어져 나오고 세찬
물줄기에 샤워기 아래 서 있던 우서의 옷이 젖어 들어갔다. 재킷은 룸에 들어왔을 때 벗어 던진
지 오래고, 그 안에 입고 있었던 흰 셔츠가 물을 흠뻑 먹어 살에 엉겨 붙었다.
“하─ 흡……!”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끝없는 물줄기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서는 어푸 하며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다시 눌러 샤워기의 물을 꺼야만 했다. 하지만 정혁이 다부진 손을
뻗어 단호하게 저지한다.
“왜, 찝찝해서 씻고 싶다며. 내가 씻겨 줄게. 파트너라면 그런 것쯤은 어렵지 않게 해 줄 수
있지.”
“야, 이, 서정… 흐아… 으읍, 너 이거 안 꺼……!?”
정혁은 그 와중에 우서의 팬츠의 버클을 풀어 벗겨 내고는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물먹은
바지가 철퍽 소리를 내며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결에 밀착된 까만 드로어즈를 잡아
내리자 탐스러운 엉덩이가 드러나고 성기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씻으면서 동시에 급한 용무도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
그야, 그딴 식으로 계산을 하면 이득이기는 하다만은… 이건 아니지!! 우서는 소리쳤다.
“으아……! 나 안 급하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정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움츠린 채로 젖어 들어가는
우서의 모습이 음심을 자극해 온다. 자신에게도 물줄기가 어느 정도 튀었지만 우서만큼은
아니었다. 셔츠가 젖어 버려 몸의 실루엣이 몽땅 드러나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유륜과 톡
튀어나온 유두까지 점차 점차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성기도 불거져 점차 윤곽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최근 우서는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랴, 출장에 다녀오느라 바빴고 자연스레 안달이 났다.
오늘은 진우서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정혁은 계속해서 씹어 먹고 물고 빨 계획이었다.
“내가 급해서 그래.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거든.”
정혁은 꺼떡거리는 기둥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물에 젖어 손바닥 안에서 더욱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린다. 우서가 물을 맞으며 작게 떨었다.
“흡… 미쳤냐고. 이거 안 놔……!? 하, 빨리 꺼!”
“그래그래. 우서야, 착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샤워기를 끌 생각은 없다. 정혁은 마주 보고 서서 입체감 있게 부푼
도톰한 가슴을 지분거렸다. 결국 우서는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피하기 위해 정혁의
품에 안겨 젖은 얼굴을 그의 셔츠에 비볐다.
“흐아… 진짜……!”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떨어지고 그것들은 결국 정혁의 가슴팍에 닿아 옷을 흠뻑
적셔 놓았다.
“우리 옷 다 마를 때까지 집에 못 가. 진우서, 너 오늘 외박이야.”
젖은 몸을 품에 가득 안고 있던 정혁이 우서를 월풀의 가장자리에 앉혔다. 판판한 곳에
엉덩이를 대고 욕조에 발을 담가 두고는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정혁이 그런 우서의
무릎을 잡아 옆으로 벌렸다.
“하… 미친놈아.”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쓸어내리다 말고 우서는 욕을 내뱉었다. 제 앞에서 가랑이 사이를
바라보고 있는 정혁의 어깨를 기겁하며 밀어냈다.
“그렇게 말하면서 왜 아래는 세우고 있는데.”
그렇지만 서정혁이 손바닥 밀치기 한 번에 쉽게 밀려날 그런 얄팍한 체구의 소유자는 아니다.
다리를 벌리는 손아귀 힘만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시발.”
젖은 속눈썹을 드리운 우서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고는 욕을 읊조렸다. 손바닥으로
가려 봤자다. 서정혁이 엄청 잘하니깐, 보자마자 음심이 자극되고 뱃속이 간질간질거려 참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껏 흥분한 제 성기 때문에 더 이상 숨길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우서야, 앞으로 출장 같은 거 가지 마. 너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하아…….”
정혁은 우서의 손을 치우고 그대로 무릎을 세우게 해 회음부를 꾸욱 눌렀다. 젖은 셔츠 한
장만 입고 다리를 벌려 신음을 내뱉고 있으니 야하기 짝이 없다.
다른 한 손으로는 미리 비치되어 있는 바디 워시에 손을 뻗었다. 뭉근하게 비비니 물과 닿아
거품이 탐스럽게 만들어졌다. 동시에 욕실에 달큼한 향이 퍼져 나간다.
“흐읏─”
그대로 거품을 내어 천천히 아래를 닦아 냈다. 제 손이 닿을 때마다 우서는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떨었다. 부드럽게 헹구어 내고는 잘 닫혀 있는 곳을 쓸어 냈다. 퍼뜩퍼뜩 튀는
우서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 손가락을 넣어 아래를 풀어 주자 금방 뜨거운 숨을 내뱉는 우서의
모습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하아─”
“출장 간 사이에 날 잊은 건… 아니지? 연락은 왜 안 받는 건데.”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색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귀와 볼과 눈가가 빨개지고 눈꼬리가 한없이
처져 가엾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아… 그건… 읍, 배터리가……. 아읏.”
“왜 말을 제대로 못 해, 우서야… 너 설마 딴 새끼랑 한눈판 거야?”
“읏, 그게 아니…….”
“혹시 내가 싫어졌어?”
정혁은 매달리는 듯 물었지만 여유 있는 태도로 우서를 괴롭혀 나갔다. 이렇게나 잘 다물려
있으니, 의심할 여지 없이 마음이 놓인다.
“후우… 너야말로 나 냅두고… 하…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고… 읏.”
“진우서, 너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니거든? 그냥 후… 파트너 관리차 말하는 거지! 그리고 하아… 아, 아… 네가 나만…
만난다고, 후… 했잖아!”
정혁은 허리를 숙여 그 은밀한 공간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대답을 하면서도 우서는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정혁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다른 한 팔로
저지했다. 그러고는 붉고 뻐끔거리는 공간을 점차 넓혀 가며 좀 더 깊숙이 탐했다.
우서의 반응이 귀여워 정혁은 손가락 두 개를 더 넣어 그 안을 빠르게 헤집고 자극해 갔다. 제
손을 오물조물 잘 빨아 먹는 것을 보아하니 우서는 저와 운명의 파트너가 맞다.
“맞아. 너한테만 세운다고 했지. 그래서 우서야, 나 아까 네 얼굴 볼 때 미리 세웠어. 칭찬해
줘.”
“하… 발정 난 놈.”
우서는 견딜 수 없는 감각 때문에 정혁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꽈악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
손끝이 파르륵─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야하게 신음을 흘리면서 누가 누구보고 발정이 났다고 하는 걸까. 정혁은 피식 웃었다.
“칭찬 고마워. 아, 정확히는 네가 혀로 생크림 핥을 때 섰던 거 같다.”
“또라이 같은 놈.”
잊지 못한다. 그 동그란 눈으로 말똥거리면서 저를 바라보다가 혀를 날름거려 붉고 반짝이는
입술을 핥았던 그 순간을. 다 큰 성인인데도 우서가 귀엽고도 천진난만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엄청난 색기까지 전해져서 도저히 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상대에게도 서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시할 만큼…….
오늘은 정말이지… 최악의 날일 거라 생각했었다. 정혁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나왔던
소개팅 자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진우서를 볼 시간도 부족한데… 이쯤이면 우서가 서울에 올라왔을 텐데… 하는 그런 조바심
넘치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쯤에 우서가 신기루처럼 제 앞에 나타났다.
비록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남아 있던 근심이고 걱정이고 모두 싹─
사라지는 홀가분한 경험을 했다. 벅찬 느낌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서 저를
구원해 준 사람, 자신이 쉴 품은 이곳이 맞았다.
“아, 아흣.”
“네 앞에서만 세웠어야 했는데, 공교롭게 다른 사람 앞에서 세워 버렸네… 근데 나 정말 너
보고 흥분한 게 맞아. 절대 의심 같은 거 하지 마.”
정혁은 우서가 항상 반응해 오던 지점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그러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어 손톱까지 세워 왔다. 다리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는 셔츠가
달라붙은 유두를 매만지고 꼬집었다. 손끝에 닿아 오는 면의 감촉과 볼록한 입체감이 좋았다.
“아, 아, 하아아…….”
우서는 탁해진 눈으로 정혁을 바라봤다. 매끈하게 생긴 섹시한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미 앞선 일들은 상관없어진 지 오래다. 위아래의 성감대가 계속해서
자극되자 황홀한 느낌과 전율이 계속해서 뱃속을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용서해 줄 거지?”
“흡─ 으읏─ 아, 아… 거기 좋아.”
그는 정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자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더한 쾌감을 원할 뿐이었다. 서정혁의 성기가 내벽을 타고 안으로 들어오면 더욱
만족스러울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우서의 몸이 녹진녹진하게 풀리며 온 신경이 한
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우서야… 넌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돼.”
“흐으… 하… 서정혁, 이제 그만…….”
정혁은 애원하는 우서를 바라보다가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바지의 버클을 빠르게
풀어냈다. 팬츠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지고 옷은 바닥에 고여 있던 물에 찰박이며 떨어졌다.
우서를 향한 소유욕을 멈출 수 없었다. 착실히 길들어 나만 찾고 나에게만 반응하기를 바란다.
이 정도의 감정은 정혁도 처음이었다. 진우서를 만나면 만날수록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고
있었다.
“빨리 대답해 봐, 진우서. 나만 만나겠다고.”
자신을 착실히 찾아와서는 이렇게 다리 벌리는 제 파트너를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다.
“아, 으으… 우리 사귀는 것도 아닌데 후우… 내가 누굴 만나든…….”
결국 원하는 대답은 우서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혁이 자신의 성기를 입구에 가져다
맞추며 동시에 그 요망한 입술을 삼켰다가 이를 세워 깨물었다. 빨갛게 잘 익은 통통한
아랫입술이 삼켜지고 한달음에 빨자 달달한 설탕의 맛과 향기로운 과육의 맛이 섞여 났다.
두 손이 스르륵 자신의 허리를 감아 왔다. 저절로 두 사람의 몸이 바싹 붙어져 온다. 선단과
구멍의 끝이 닿았다가 조금씩 떨어지며 끈적한 액이 늘어졌다가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니, 절대 안 돼. 다른 새끼 만나면…….”
정혁은 냉랭하게 우서를 내려다봤다. 그의 소유욕은 상상 그 이상임을 우서는 간과하고 있는
듯했다.
“아으읏, 아……!”
정혁은 그대로 힘 있게 성기를 안으로 쑤욱 집어넣었다. 우서의 고개가 꺾이고 허리가 바르르
떨며 전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은 저만을 착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뜨겁게 반응해
온다.
“후… 찢어 죽일 거야. 내가 핥아서 침 발라 놓고, 길들인 내 건데.”
“흐읏, 내가 왜… 네 거야… 아, 읏, 으응…….”
자신에게 몸이 꿰뚫린 채로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괘씸한 행동이지 않나. 잘 풀어진 아래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자 그 안에서 촘촘히 자신의 것을 감싸는 뜨거운 내벽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쫀득하게 옭아 붙어서는 성기를 놓아주지 않고 힘주어 물고 있었다.
“하아…….”
정혁은 간신히 성기를 빼내었다. 선단이 그 끝에 걸리자 그 모습이 마치 꼬챙이에 꿰인 듯해
보였다. 그는 응징하듯이 다시 거세게 박아 단숨에 뿌리까지 쳐올렸다.
“히이익─ 하읏……!”
우서는 숨도 못 쉬고 괴로워했다. 다리를 벌리고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렁그렁하게 정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도 채 다물지 못하고 간신히 얕은 신음들만 뱉어 내며 배 속 깊은 곳에서
헤집고 다니는 성기를 망연하게 느꼈다.
“그렇잖아… 우서야, 너 내 거 맞잖아. 대답해 봐.”
눈을 질끈 감고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정혁을 받아들인다. 대답 대신 우서는 황홀경에 빠져
신음을 뱉어 냈다. 정신없이 흔들리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긍정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얼마나, 흣, 좋아하는지 알면서… 후.”
정혁은 그렇게 거칠게 밀어붙였다. 우서가 반응하는 그 지점으로 계속해서 성기를 세게 박아
넣으니 발끝까지 바르르─ 떨려 온다.
“흐윽─ 아, 아, 아……!”
몸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몸이 젖혀질수록 성기 또한 배 속에 마구잡이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하… 그런 말을 해서는… 후, 안 되는 거잖아.”
정혁은 그 상태로 우서에게 추삽질을 거세게 시작했다. 뜨거운 증기가 살결에 닿아 오고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서가 반응하는 은밀한 성감을 향해서 허리
짓을 하자, 성기는 그대로 울컥울컥하고 쿠퍼액을 뱉어 냈다. 뱃가죽에 달라붙어 자신을
느끼고 그에 반응하는 몸이 미칠 듯 좋았다.
“아앗, 으응… 흐윽……!”
자신에게 충실한 몸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정혁은 계속해서 우서의 배 속을 드나들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욕실에 공명하며 울려 퍼졌다.
뒤로 꺾이는 허리를 받쳐 들어 가며 정혁은 우서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간질거리는 살결과
향긋한 살 내음이 쏟아져 내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왔다.
“하으, 으으… 아, 아읍…….”
우서의 앞섶을 매만지며 이를 세워 목을 물어뜯고 입술을 파묻어 키스했다. 강하게 흡입하고
입을 떼니 새빨간 자국이 손톱만치 만들어진 것이 보였다. 그 모양과 크기가 진우서와도 잘
어울려 만족스러웠다.
“너무 예뻐…….”
아래 깔려 신음하고 빨갛게 물들어 가는 제 파트너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정혁은 좀 더
힘주어 우서의 성기를 쓸어 올리며 자극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서의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오고 손 안에는 끈적하고 뜨거운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아… 하…….”
우서는 그렇게 몸에 힘을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정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좀 더 크게 허리
짓을 계속 이어 갔다.
“읏……!”
우서가 힘들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고개를 젓고 작게 저항했다. 다시 그의 앞섶이 부풀어
오르는 찰나에 결장 근처에서 정혁의 귀두가 쳐올렸다가 멈췄다.
“히윽… 으읏……!!”
뜨거운 것들이 배 속에 퍼져 나가고 정혁은 천천히 사정하며 성기를 꺼냈다. 주인을 잃고
오물거리던 구멍에서 진득하니 하얀 액체가 밀려 나오고 있었다. 그대로 구멍에서 뚝뚝 떨어져
흘러 그의 허벅다리와 종아리에 가 떨어진다.
“후…….”
제 정액을 간수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야한 몸이다. 정혁이 사랑스러운 눈을
하고는 그 몸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제 제 것만 잘 품고 있다면 정말 완벽하지 않을까.
점점 자신과 잘 맞아 가는 제 파트너가 무척이지 맘에 든다. 그게 진우서라 더 좋았다.

그는 욕실에서 우서의 몸을 꼼꼼히 씻어 낸 후에 타월에 감싸 물기를 닦아 주었다. 나른한지


우서는 반쯤 감긴 눈으로 끔뻑거리며 정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장 갔다 바로 왔으니 당연히
피곤할 테다.
“하… 너랑 이제 서울에 있는 모든 호텔 섭렵하겠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부드럽게 털어 주자 우서는 성가시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감았다. 물을 맞아 촉촉하게 젖은 뺨과 입술 때문인지 지금의 진우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탐스럽고 싱그럽게 보였다.
“우리 리조트도 갔었잖아. 지방 순회까지.”
정혁은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그 말에 우서가 피식, 하고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다.
그는 타월로 꽁꽁 동여맨 후에 우서의 몸을 안아 들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침구가 잘
정돈되어 있는 푹신한 침대 위에 내려놓자 우서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흠… 그러게. 으으… 우리 무슨 전국 투어라도 도는 건가.”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지.”
“흐, 말을 말자…….”
우서가 피곤하다는 듯이 몸을 늘어트렸다. 수마가 쏟아지는 듯 나른하게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래, 섹스에 집중해.”
하지만 정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오랜만의 재회이거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지금 막
전달받은 선물처럼 급하게 우서를 감싸고 있는 타월을 풀어 헤쳤다. 포장을 벗겨 내자 하얗고
깨끗한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울긋불긋한 키스 마크까지 새겨져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읏, 뭐야……! 너 설마… 또 하겠다는 거야?”
우서는 다급하게 타월을 붙잡았다. 하지만 얇은 천 쪼가리를 찢을 듯이 낚아채는 정혁의 손이
매서웠다. 그는 아직까지도 촉촉하게 열려 있는 우서의 비문에 바로 부풀어 오른 성기를 잘
맞춰 밀어 넣었다.
“아니, 아까 끝난 거 아니었냐고……!”
우서가 눈을 번쩍 뜨고는 경악했지만 정사는 다시 시작돼야 한다고 정혁의 짓궂은 얼굴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제 진우서한테 용서를 구해야지. 옷 벗고 무릎 꿇고 사과할 차례잖아.”
우서가 아연실색했다. 이건 아니다… 이런 사과 따위는 안 받아도 된단 말이다……!

***
『서울 시내에 마약을 유통해 오던 판매책이 무더기로 적발됐습니다. 마약을 소지, 판매하던
중간책이 덜미가 잡히며 유통 조직이 대대적으로 검거되고 있는데요, 경찰은 지금까지
국정원과 공조를 통해 중간 판매책 서른한 명을 구속했습니다.』

주말 오후 TV 를 보고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 중간에 끼어 나오는 뉴스가 우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커다란 규모의 조직까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될까 하는
염려 속에 경찰은 모든 상황을 대비해 대응할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음…….”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우서는 도망가는 피의자들을 검거하는 현장 영상들을 집중해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리모컨을 꽈악 쥐고서는 그 장면들을 생생히 눈에 담았다. 무장한
경찰들과 대치하는 범죄자들의 저항이 격했고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서정혁이 한창 열 올리고 있는 사건들이기도 했다. 저번에 발을 다쳤을 때도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고 했었던가… 해외 업자와 외국인들까지 해서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터지고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런 뉴스를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와는 관련 없다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서정혁 생각이 먼저 난다. 요즘 저런 게 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녀석이 걱정된다.
정혁의 안전과 건강이 염려된다.
아직 사귀는 게 아니라지만, 저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을 어떻게 무시할까. 흉흉한 범죄
소식이 전해져 올 때마다 걱정이 되어서는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무래도 녀석한테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그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우서는 소파에서 튕겨 나오듯이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진우서 너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해? 애들이랑 다 같이 만나서 술 한잔하자.


우서야 너 애인이라도 생겼어? 클럽 가잔 얘기를 안 해서 먼저 연락해 봤어.
“으음…….”
친구들의 연락인데 반갑지가 않다. 서정혁 만나느라 바빠서인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데면데면하다. 두 볼을 부풀리며 우서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는데, 다시 한번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화면 상단에는 기다리던 정혁의 메신저가 보였다.

우서야. 나 퇴근했어. 집으로 와. 부모님 없어.

“오예!”
우서는 뛰쳐나가듯 집을 나서다가 잊은 게 떠올랐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들어와 와인 냉장고
문을 열고 상사에게 선물 받았던 값나가는 술을 꺼냈다.
정혁의 부모님은 며칠 전부터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서정혁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의
집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부를 줄도 미리 눈치채고 있었지만
기뻤다. 한 손에는 와인병을 들고 편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왔는데 복도에 서 있던 누군가와 딱
마주친다.
“어……! 우서 오빠 안녕!”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슬아였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옆집 꼬마가 우서를 보고서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근데 오빠 어디 가요……? 슬아는 친구들이랑 비눗방울 놀이할 거야!”
해맑게 물어 오는 통에 우서도 함께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재밌겠네, 슬아야~ 오빠는 정혁이네 가져다줄 게 있어서……!”
떡치러 간다고 할 수는 없으니, 아이를 향해서 오른손에 그러쥐고 있던 와인병을 들어 올렸다.
“근데 우서 오빠, 이상해요!”
슬아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면서 무언가 수상하다는 듯이 표정을 달리했다.
“응? 뭐가?”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우서가 눈을 크게 뜨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정혁 오빠 집에 강아지 키우나 봐요! 근데 그 강아지가 아픈 거 같아. 맨날 낑낑거려요.”
“강아지……?”
“응, 슬아가 어제 들었어! 화장실에서 손 씻고 있는데 강아지가 아파했어요!”
뜨악─ 우서가 입을 벌리고는 경악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다 휘청였다. 어제라면
서정혁이랑 삘 받아서 화장실에서도 잠깐 혀를 섞고 애무를 했었다. 그때 환풍구를 통해서
소리가 새어 나간 건가 싶다.
“아하하… 슬아야, 걱정하지 마. 강아지 안 아프고 튼튼하대!”
억지로 웃지만 우서의 눈가가 파르르, 하고 떨렸다. 사실 슬아야. 무척 좋아하는 소리야… 하고
우서는 전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슬아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슬아, 근데 그 강아지 보고 싶어!”
슬아야… 그 미친개가 나란다? 우서가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는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근래 들어 정혁의 집에 너무 자주 간 모양이다. 조절해야겠다
싶어 반성하면서 모른 척 너스렐 떨었다. 아이와 작별 인사까지 나눈 뒤에 얼른 계단을
뛰어오른다. 두 칸씩 성큼성큼 말이다.
도어 록 비밀번호도 안 보고 칠 수 있을 만큼 정혁의 집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제 제집인
것처럼 우서는 편히 드나드는 중이었다.
정혁의 방으로 향하자 베이지색 톤의 가구와 벽지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 안에서 서정혁은 유니폼을 벗고 있었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면서 탈의하는 모습에 우서의
눈이 저절로 움직임을 따라간다.
“야, 서정혁. 대박 사건! 우리 슬아한테 들키게 생겼어……!”
우서는 조잘거리며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혁의 향이 물씬 풍겨 나오고 그의 체취
묻은 방이 좋았다. 우서는 자신의 얘기를 들어 보라며 급하다는 듯 다리도 팔랑팔랑
흔들어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혁이 셔츠를 하나씩 풀어 가면서 고개를 돌려 우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오랫동안 일을
하고 왔어서 그런지 조금 예민해진 날렵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게… 슬아가 내 신음을 들었나 봐. 이상한 소리가 난다더라. 그니까 내가 화장실에서는
하지 말라 했잖아.”
저 녀석 원래 저렇게 멋졌었던가. 우서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깨에
달린 계급장을 힘주어 떼어 내는데 손등의 힘줄과 핏줄이 불거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 세찬 심장 박동만 원상태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네가 제일 즐겨 놓고는. 그럼 앞으로는 넌 내 방에다가만 가둬 둬야겠네.”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넘겨 버린다. 그 여유가 재수 없기는
한데 저도 모르게 따라서 가벼이 여기게 된다. 어이없게도, 자신 또한 서정혁을 따라서 점점
배짱이 생겨나는 모양이었다.
“여튼 앞으로 조심하자고 하는 소리… 어? 뭐야… 너 또 어디서 다쳐 왔어?”
잘생긴 정혁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시선을 떨어트렸는데, 매끈한 가슴팍 언저리에 기다란
상흔이 있었다. 가늘고 길게 찢어져서는 그 위로는 핏자국이 굳은 채로 말라 있다.
“별거 아니야.”
정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상처를 흘끗 보고는 우서를 향해 눈썹을 씰룩이며 장난기
다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우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렇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건 진심 아니라는 거,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거다. 에휴, 우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거 아니긴……! 상처가 꽤 크잖아.”
“현장 나가서 좀 긁힌 거지.”
“이번에는 또 뭘로 긁혔는데.”
“사시미칼. 스치기만 해도 손가락 날아가는 그거.”
놀라서 얼굴이 굳고 우서가 두 눈을 깜박였다. 기다란 칼이 서정혁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진짜로……?”
힘든 일을 하는 녀석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사람이라는 생각에 우서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정혁은 그사이에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우서의 두 볼을 그러잡고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굴이 눌려 마치 찐빵처럼 돼서는 정혁을 바라보게 된다.
“진우서.”
그의 풀어진 유니폼 셔츠가 보이고 가슴팍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버클이 풀어져 유니폼
바지가 골반에 가 걸쳐 있다. 운동을 오래 해서 그런지 까무잡잡한 그의 몸이 군살 없이
탄탄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머, 머가…….”
우서는 볼이 붙잡힌 채로 불분명한 발음으로다가 대답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정혁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떨어지는 그의 머리칼과 그늘진 매력적인 얼굴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특히 짓궂어 보이는 얼굴 하며 반듯하고 날렵한 선을 가진 얼굴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왜, 내가 걱정이 돼?”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 그… 그니까, 인류애라는 게 있잖아.”
우서가 얼굴을 붉히면서 어물쩍 대답했다. 지금, 흔들리는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서정혁에게
들킨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이렇게 빠르게 녀석에게 빠져 버린 건…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다.
“나한테 가진 게 인류애뿐인 건 아니지? 네가 무슨 넬슨 만델라라도 되는 거야?”
우서가 눈을 굴려서 정혁의 노골적인 시선을 피해 버렸다. 대답하기 난감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머 약간의 애정도 있지.”
정혁이 엄지손가락을 쓸어 우서의 볼을 가볍게 훑었다. 그 나긋한 손길이 잘했다는 칭찬의
증표처럼 느껴져 왔다. 그가 피식─ 웃는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난 또, 우리 우서 노벨 평화상이라도 타는 줄 알았네.”
“비꼬지 마라? 너 근데… 다른 안전한 일은 없는 거야?”
“음… 내가 강력 팀 들어간 이유가 있는데 아는 선배가 날 스카웃했거든, 줄 잘 타면 진급 빨리
시켜 준다길래 오케이 했지.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후회 중이고.”
정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후회 중이라니,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음… 힘들어서?”
“아니, 체력은 별 상관이 없어. 너도 잘 알잖아. 나 밤새우고 와서 밤일해도 거뜬한 거.”
“음……?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 건지……. 우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무직이나 할 걸 그랬나 봐. 괜한 오기를 부렸어. 네 회사에 들어가서 진우서랑 마주 보고
일하고 점심 먹고 하면 소원이 없을 텐데.”
그 말에 우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진다. 아니 사춘기 소년도 아니건만, 의도가 뻔한 저런
작업 멘트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요동치는 건 왜일까. 요 며칠 서정혁이랑 붙어먹다 보니
자신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뭔 소리야… 엉뚱한 생각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해. 그러다 잘리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제대로 반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냉정하게 대답하니 정혁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번뜩이는 눈으로 봐서는 또 꼬투리 잡을 재밌는 장난이 떠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근데 그건 왜. 진우서 설마 너… 강력반 형사가 막 끌려? 도둑 때려잡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하는 그런 사람?”
멋있다는 말 취소다. 왜 얘기가 또 거기로 빠지는 건지, 입과 뇌가 좆에 기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서는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홱─ 치워 버렸다.
진지하고 설레던 무드도 다 깨져 버렸다. 우서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우서의 손을 잡아서는 뒤로 해 단단히 손목을
고정시킨다.
“야……! 뭐 하는 거야!!”
뒤편에서 딱딱한 물체가 닿더니 그대로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덜그럭한다. 우서가 경악했다. 헉, 설마……?
“네가 좋아하는 건 도둑 때려잡는 경찰인 거 같은데. 내 소중한 하나뿐인 파트너님 취향에
내가 또 맞춰 드려야지.”
“서정혁, 너 이거 안 풀어?!”
정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저 셔츠를 벗었다. 옷으로 가려져 있던 탄탄하고 근육질인 어깨와
팔뚝이 드러났다.
“우서야, 너는 이제 도둑이야. 음… 죄목은 서정혁 강제 추행으로 하자.”
억울하다! 강제 추행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게 강제 추행이었다.
우서는 두 손을 당겨 봤다. 하지만 수갑에 단단히 고정이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두 팔이
그대로 뒤로 묶여 완전히 사로잡힌 인질처럼 되어 버렸다.
“너는 나한테 잡히는 역할이고. 신음 소리 듣고 싶으니깐 묵비권 안 되고, 변호사 선임할 권리
따위 같은 건 없어.”
괴상하게 변해 버린 원칙도 억울하지만, 더 이상한 건 말이다, 지금 서정혁에게 잡히는 역할이
아니고… 정확히는…….
“내가 너한테 잡아먹히는 건 아니고?!”
벗어나려 팔목을 이리저리 비트는 우서를 보면서 정혁은 들켰다는 듯이 아쉽게 웃었다.
“흠… 잘 알고 있네, 진우서.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너 나한테서 영영 못 벗어나니깐.”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섬뜩해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왔다. 정혁은 그대로 우서의 셔츠의
단추를 톡, 톡 풀었다.
“빨리 풀어……! 읍─!”
그러고는 저항하는 우서의 입은 자신의 입술로 포개어 막아 버린다. 오늘도 손쉽게 진우서
체포 완료였다.
츄읍─
수갑에 묶인 채로 우서는 입을 벌려 밀려들어 오는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움직임에 맞춰
따라오다가도 벅찬 듯 다시 쌕쌕거리며 숨을 내뱉는다. 낑낑대며 제 혀를 좇는 모습이 귀여워
정혁은 으스러지게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입 안에 사탕이나 버터 같은 것을 한 움큼 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게
녹아내려서 질척거리며 제 입 안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렇게 뜨거운
손으로 볼을 쓰다듬다가 입술을 떼어 냈다.
춥─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가 끊기고, 반질거리는 입술을 벌리고 있던 우서가 달뜬 얼굴을 하고는
자신을 바라봤다. 볼과 눈 밑이 붉어져 있었다. 벌써 흥분해 나른해진 얼굴을 눈에 가득 담다가
정혁은 문득 책상 위에 올려 둔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서야 이건 또 뭐야, 이런 걸 준비해 왔어.”
정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와인을 집어 들고 호기롭게 바라보면서 눈썹을 씰룩했다. 라벨을 보니
한 병에도 7, 80 만 원을 호가하는 그런 술이었다. 우서는 손이 묶인 채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변명을 생각하는 저 조악한 모습 때문에 정혁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준비한 건 아니고, 어, 뭐… 집에 있더라고. 그… 너 좋아하면 마시든지.”
막상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감당이 안 된다는 얼굴이다. 제 앞에서만 솔직하지 못한 저 입이
요망했지만 무척이나 귀여웠다.
“샤토 와인을 나한테 주는 거야?”
정혁이 말도 안 된다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17 년산 라벨이면 꽤 값이 나간다는 건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준비했으면서 아닌 척 연기하는 모습도 씹어 먹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속아 주려 웃음을 꾹 참아 보지만 진우서의 행동이 어찌나 어색한지 입술을
씰룩이게 만들고 있었다.
“흐아, 이거나 빨리 풀어. 너 진짜 장난치지 마라? 나 손목 아프다고……!”
“아. 맞다, 우서야. 나 그러고 보니 열쇠를… 서에 두고 온 거 같은데.”
“뭐……?! 이 미친놈아! 거짓말 말고 빨리 풀라고!!”
우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더욱 격렬하게 반항했다. 제 성질에 못 이겨 발을 뻗으며
정혁에게 타격을 가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두 팔이 묶여 속박된 몸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겐 상대가 되질 않는다.
우서가 발버둥 칠수록 팔을 옥죄는 수갑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만 거세질 뿐이었다.
“진우서, 나 범인 검거하는 사람이라는 거 잊지 마. 열쇠 같은 걸 소지하고 다닐 리 없잖아.”
정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우서의 옆으로 물러서 발차기를 피했다. 사실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렇게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 되는 거였지만… 정혁에게 그런 것쯤은 안중에
없다. 바지춤에 들어 있는 수갑의 열쇠는 진우서에게 비밀로 하기로 한다.
“우서야, 그러지 말고 우리 사이좋게 한 잔씩 할까?”
“팔자 좋게 내가 그거 마시게 생겼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이것만 풀면… 너 진짜 죽어!”
정혁은 싱긋 웃고 바둥거리는 우서를 내려다봤다. 팔이 묶인 사람의 협박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정혁은 주방에서 잔과 오프너를 가지고 와 익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제대로 즐기러 가져온 술인데 이걸 빼놓기엔 섭했다.
“맞다, 넌 손을 못 쓰지. 그러면…….”
“으응……?”
그는 술병의 주둥이를 잡고 우서에게로 다가와 반달처럼 눈을 휘어 가며 웃었다. 지금 정혁은
앞섶 펼쳐진 셔츠 차림에, 한 손에는 병을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미친놈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그런 상태였는데, 더욱더 미친 소리를 해 온다.
“오늘 한번 제대로 놀아 보자.”
광기 어린 그런 말을 내뱉는다. 우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했다.
정혁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다가, 입가로 흐르는 걸 소매로 쓰윽─ 닦아 냈다. 그가 병을
탁자에 놓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점차 거리를 좁혀 우서에게로 다가왔다.
“뭐, 뭐야……!?”
발버둥 치며 뒤로 물러나 봤지만, 우서는 벽에 뒷머리를 콩 찧었다. 그가 침대 위로 기어 오듯
팔을 뻗어 다가오자 침대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으─ 흡……!”
그 뒤로는 입술 위로 말캉한 감각이 닿아 와 간질였다. 핏빛 술을 머금은 채로 정혁은 부드럽게
입을 맞춰 온다.
추읍─ 춥─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받아들이자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손이 뒤로 묶여서
우서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턱을 쓸어 오는 손길에 온몸이 경직되고 저절로 허리가 곧게
세워졌다. 하반신은 뻣뻣해져서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철이 덜그렁거리며 우서의 손목을 압박해 온다. 움직일 수가 없어 답답했지만
끙끙거리며 정혁의 입술을 받아 내는 것밖에는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흐으…….”
입술 그 틈새로 밀려들어 오는 달큼한 술에 목구멍을 열어 꼴깍이며 받아먹었다. 향기로운
과실주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지고 혀끝에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감돌았다.
정혁은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두 손으로 급하게 우서의 셔츠를 풀어냈다. 반쯤 열린 셔츠
사이로 희고 고운 살이 드러나자 두 손을 틈새로 집어넣어 가슴을 꽈악 움켜쥐었다.
“아, 읏─ 으응.”
희롱하듯 가슴팍에 손가락을 올려 두고는 유두를 간질이고 꼬집어 세운다. 빳빳해진 돌기는
볼록하게 입체감을 자아내고 점점 와인의 색을 닮아 가는 듯 새빨개졌다.
“하…….”
계속되는 키스로 춥─ 춥─ 하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뜨거운 숨을 뱉어 내는 우서를
바라보다가 정혁은 여유롭게 입술을 떼어 냈다.
눈은 살짝 풀려 있고 입은 헤 벌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핏빛 머금은
불그스름한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붉어진 젖꼭지와 탐스러운 몸이 와인의 영롱한 루비색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서야, 더 마시고 싶어?”
“…….”
대답은 없는데 고민 끝에 우서가 눈을 떨어트렸다. 자신을 마주하다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떨구지만 공들인 키스가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정해 오지 않고 있었다.
정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자신 또한 무척 만족스러웠으니까. 부드러운
손길로 우서의 옷들을 한 겹 한 겹 벗겨 냈다. 바지와 속옷까지 전부 다 끌어 내린 후에 정혁은
다시 병을 집어 들었다. 꼴깍꼴깍─ 하고 그의 커다란 목젖이 위아래로 울렸다.
우서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술이야말로 정말 환상적이었다.
“일어나, 우서야.”
우서의 몸을 끌어당겨 그를 일으켜 세웠다. 손이 묶여 있어서인지 휘청하면서도 그는 정혁이
이끄는 대로 따라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방 한가운데에 세워 두니 흰 몸과 새빨간 유두 그리고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제 방
풍경과는 들어맞지 않게 무척 색정적이었다.
정혁은 그 병을 들고 우서의 몸 위로 가 기울였다. 병의 입구에서 핏빛 보라색의 액체가 걸려
넘실대더니 금방 콸콸 쏟아져 내린다.
“아─ 이게……! 흡─ 뭐 하는 거야!”
우서는 눈을 꽈악 감았다. 머리끝에서 떨어져 척추를 타고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에서 기다란
줄기가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미안…… 손이 미끄러졌어.”
정혁이 웃으며 사과했다. 우서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와인 방울이 옆으로 튀고 그 자리에는 붉은 흔적이 피부에 새겨지듯 남았다. 우서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정혁을 노려본다.
“읍─ 너 분명, 일부러 그랬어! 으으… 내가 봤거든? 이 개자식아… 죽을래?”
저번에 물에 젖은 게 너무 섹시해서 와인도 쏟아 보았는데, 예상대로 진우서는 아름다웠고
청초했다. 물을 머금고 촉촉해지고 더 반들거리는 것이 꼭 윤이 나는 열매 같았다. 싱그럽게
반짝인다.
젖은 채로 바락바락 대드는 것도 제 취향이었다. 으르렁거릴 때마다 그의 뒤편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갑을 채운 것도 무척 잘한 일이었다.
“설마, 내가 일부러 그럴 리가 없잖아.”
“시이발……!”
바닥에 우서의 몸을 타고 흘러 고인 핏빛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의 발기한 성기 끝에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제 파트너는 저를 맞이할 준비가 완벽하게 된 듯했다.
“그런데 진우서는 젖어야 제맛이지. 그렇지 않아?”
너무 야하잖아. 향도 그렇고 맛도 최고임을 잘 안다. 와인에 푹 젖어 야릇하게 손이 묶여 있는
우서를 바라보며 정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제 품에서 녹아내리거든 무척 예쁘겠다.
“이게……!”
“잘 먹을게. 고마워, 우서야.”
정혁은 급히 자신의 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그대로 우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혀를 세워
돌기를 핥고 입술을 모아 도톰한 젖꼭지를 빨다가 이를 세워서 다시 그것들을 깨물었다. 춥─
춥─ 하는 질척이는 소리가 날수록 우서의 몸이 비틀렸다. 와인의 향기와 제 파트너의 달큼한
살 내음이 전해져 와 기분을 황홀케 한다.
“흣─! 으읏!”
우서의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새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발을 구를
때마다 바닥에 고인 와인 때문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뒤에 묶인 수갑 때문에 더 격렬히 몸부림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혁은 손을 뻗어 엉덩이를 그러쥐며 그 살을 만지고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어 할짝였다.
“아─ 달고 향기롭고… 맛있어.”
엉덩이 사이로 손을 뻗어 허벅지를 잡아당기자 곧게 서 있던 우서의 다리가 좀 더 벌어졌다.
그의 둔부가 개화하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주름진 부분이 닿아 올 것만 같아서
머릿속에는 쾌감이 피어올랐다.
“이제 뒤돌아봐.”
우서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달싹이지만, 정혁은 단단한 손으로 우서의
어깨를 잡아 뒤돌게 했다.
“흣─”
며칠간 공들여 풀어 놓아서 그런지 이미 부드럽게 풀어진 입구, 그 안으로 와인에 흠뻑 젖은
손가락을 넣었다. 저항 없이 쑤욱─ 들어간다.
“하으윽! 흐읍…….”
그런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게 아닌 모양인지, 우서가 자지러지며 울고 허리를 들썩였다.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구멍 안으로 넣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니 그의 입에서는 교태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흣. 아, 으응……!”
몇 번 들락날락하며 길을 넓힌 뒤에 허리띠와 바지 버클을 풀었다. 이제는 금방이지 풀려
버려서 붉고 뻐끔거리는 입구가 정혁을 맞이하듯 벌어졌다. 그 모습이 음욕을 불러일으킨다.
앞섶에 닿게 해 뭉근하게 비비니 그 몸에 묻었던 와인들이 정혁의 성기에 그대로 떨어져서
전해져 온다.
“후…….”
“아, 아, 흐읍.”
선단을 그의 입구에 맞추고 조금씩 추삽질을 시작하며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서의 신음은 좀 더 야릇해지고 요염해진다. 뒤로 묶인 팔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황홀경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아, 읏… 거기 좋아.”
그의 몸을 드나들고 그 안을 가르고 사정없이 쳐올리기 시작하니, 우서가 그대로 따라
흔들린다. 뒤로 묶인 손도 같이 흔들리는데 마치 이제는 저항하길 포기한 모습이었다. 수갑에
묶인 우서의 모습이 꽤 맘에 들었다. 부적절한 관계의 묘미가 이러한 건지, 정혁은 계속해서
정욕에 휩싸여 배 속을 세차게 드나들었다.
“아─ 서정혁. 으읏. 흣……!”
손을 앞으로 해 우서의 가슴을 그러모았다.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단단히 그 주변의
살들을 끌어당겼다. 두 손에 살이 잔뜩 모인다. 움켜쥐고 또 살살 풀어내며 그렇게 가슴을
함께 자극했다.
“아, 아, 앗─ 읍. 나 앞에.”
우서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정혁을 따라 흔들리면서도 다급하게 재촉해 왔다.
“후… 앞이 왜.”
점점 더 피치를 올려 그의 몸을 드나들자, 우서의 몸에 묻어 있던 술이 모두 바닥으로 가
떨어졌다. 와인에 몸을 담근 듯한 모습에 시각적인 자극이 더욱 흥분을 부추겼다.
“나… 흐으, 응, 아읏, 으읏.”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섹스하고 있었지만, 앞모습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발기한 성기가
꼿꼿하게 서서 그대로 뱃가죽에 가 달라붙어 있을 텐데… 뻣뻣하고 저릿한 그 감각이 무척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다.
“히익, 읏. 나 앞에 만져… 줘. 아윽.”
우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면서 정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서는 사정을 해 오지만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곧이곧대로 그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후… 만지고 있잖아.”
그 증거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우서가 고개를 저으면서 그곳이 아니라는 듯 세차게
도리질 쳤다. 와인에 젖은 머리칼이 흔들려 향기를 풍기고 계속해서 퍽─ 퍽─ 하며 치고
올리니 몸은 점점 녹진녹진 힘이 풀려 간다.
정혁의 쿠퍼액과 묻어 있던 와인이 구멍 사이로 삐쭉삐쭉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
애액들을 오물거리며 뱉어 내는 구멍이 야살스럽기 그지없었다.
“내 거 잘 품고 있으면, 그러면 만져 줄게.”
“흐읏. 아, 서… 정혁… 아읏, 아앗─!!”
우서가 고개를 뒤로 꺾고는 끅끅거리며 높은 비명들을 질렀다. 농염하게 부푼 가슴을
계속해서 자극하며 우서의 안을 마구 드나들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그 안에 뿌리까지
박아 깊숙한 곳에서 사정을 하고 우서를 놓아주었다.
“하아… 하…….”
우서가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려 버렸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린다. 그러다
결국 철퍽 하고 바닥에 고인 와인 위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뒤로는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 우서야… 잘 잡고 있었는데 미끄러졌어.”
“아아…….”
귀두 끝에서는 쿠퍼액이 꿀렁이며 새어 나오고 있지만 우서는 결국 사정하지 못했다.
새빨개진 성기는 터질 것같이 상당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후… 그대로 내 거 계속 품고 있어.”
정혁이 우서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뒤로 모으고 울음을 삼키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서
밉다는 듯이 올려다본다. 그렇지만 성기는 곧게 세우고 있어 더욱 음심을 자극해 왔다. 마르고
군살 없는 몸에 유두와 성기가 우뚝 솟아나 더욱 눈에 띄었다. 핥아 먹고 녹을 때까지 빨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져 줄까?”
제발이라고 애원하는 진우서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맘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아, 아. 빨리… 흣.”
무릎을 접어 자세를 낮추니 우서와 눈높이가 맞아 든다. 그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서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떨어졌다. 자신의 씨물을 가득 품고 있을 그
아름다운 몸이 사랑스러웠다.
“내 거 잘 품고 있으니까 너무 예쁘잖아. 보기 좋잖아. 이렇게 계속 품고 있어, 우서야.”
“……으응.”
우서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만족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혁은 배를 따라 손을 미끄러트리다가 우서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뒤로 묶인 손은
이제 더 이상 반항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순응하고 있는 듯했다.
“으읏─ 아, 아아, 좋아.”
뜨거운 숨을 뱉어 내고 그 열기와 함께 우서가 계속해서 신음했다. 기둥을 잡고 위아래로
조금씩 힘주어 움직이니 그가 허리를 배배 꼬고 몸을 가만두질 않는다.
“계속 힘주고 있어.”
그 말에 우서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허리를 들썩였다. 깔고 앉은 와인 때문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기도 했다.
“이제 내가 빼 줄 때까지 내 거 잘 품고 있는 거야.”
“흐읏, 으으, 아, 앗……!!”
우서의 눈에서 눈물이 세차게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면서 온몸을 바르작거리며
떨었다. 엄지로 귀두를 막고 사정하지 못하게 한 상태로 기둥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으응, 흣… 힉……!”
그리고 마침내 다리 사이로 정혁의 정액들이 퍼져 흘렀다. 붉은 액체 속에 우서가 품고 있던
점액질의 흰 정액이 점차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거라 생각해도 될까, 정혁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잘했다는 듯 너그러이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귀두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냈다. 투둑─ 소리와 함께 참았던
것들이 터져 나오고 우서는 다리를 바르작 하고 떨면서 정혁의 손에서 사정했다.
“흐읏, 흐으… 하아…….”
울음소리와 신음이 섞여 더욱 애타게 들려온다. 그대로 술과 눈물에 푹 젖은 몸을 꽈악 안아
들었다. 수갑을 찬 손이 힘없이 뒤로 툭 떨어져 내린다.
너는 배려 없이 하드하게 하는 걸 원한다 했으니, 네 취향대로 만족시켜 주어 절대로 날 잊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내 품에 안겨서만 느낄 수 있게, 제 파트너가 다른 사람은 찾지 못하게
그렇게 길들이고 싶었다.
우서를 보고 있노라면 소유욕이 저를 완전히 잡아먹어 버린다. 만약 널 못 가지면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진우서는 꼭 제 거여야만 했다.
“우서야, 사랑해.”
정혁은 이마에 키스하고 우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또 검지로 눈에 맺힌 눈물을
거두며 눈을 맞추고 호선을 그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울어서 부어 버린 눈 때문에 잘 떠지지 않아 시야가 흐릿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니


익숙지 않은 어둑한 방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곳은… 아, 맞다, 서정혁의 방이었다.
손이 묶여 섹스하고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자신은 지금 정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단단한
팔과 어깨가 자신을 포박하듯이 얽어매고 있다.
“일어났어……?”
이제 팔이 자유로운 것을 보아하니 수갑은 풀어 준 모양이다. 서정혁은 피곤하지 않은지 말간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아…….”
열쇠가 없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나 보다. 제 앞에서 저를 놀려 먹을 궁리만 하는 얄미운
녀석이다. 그런데 저 얼굴만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서는 잠에서 덜 깨 눈을 끔뻑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아랫배가 당겨 와 음심이 자극되고
몸이 꿈틀거렸다. 특히 녀석의 손길에 집중적으로 길든 유두와 성기가 말이다. 미움 가득 담아
바라보고만 있으니 서정혁은 용서하란 뜻으로 입술에 살짝 입 맞추고 꼬옥, 안아 왔다.
“우서야, 팔에는 자국이 조금 났는데 금방 없어질 거야. 미안, 묶여 있는 네가 너무 섹시해서 못
참았어.”
거기다가 이렇게 간지러운 짓을 해 오면 가슴까지 세차게 뛰어댄다. 속삭이면서 미안하다
말하는 건 반칙이었다. 녀석에게 안겨 있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엉망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내 건데 내 게 아닌 기분… 말이다. 내 맘대로 제어하거나 조절할 수 없고 서정혁이 하잔 대로
몸이 가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근데 나 언제 잤지.”
“우리 세 번째 했을 때, 쓰러져서는 기절하다시피 자던데.”
아, 그렇구나… 속삭이듯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정혁은 볼에도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쭉쭉 빨아 당겼다. 밀어내기도 힘들었다. 눈을 뜰 힘도 남아 있지 않아 그저 그의 품에
안기어 듣기 좋은 저음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근데… 지금 몇 시야?”
정말 시간을 알고 싶은 건 아니었고 정혁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듣고 싶어서였다. 그의
목소리가 엄청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가지 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좀 더 꽈악 끌어안는 통에 갑갑하지만 또 그게 내심 좋아서 우서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물었더니 눈치채고는 가지 말라 보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계속해서 더 안겨 있고 싶었다.
“우서야, 너도 내가 점점 좋아지지.”
“음…….”
“그렇게 내 매력에 빠져들면 되는 거야.”
별안간 이상한 소리를 해 온다. 우서가 인상을 구기고 잠긴 목소리로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차단해 버렸다.
“맘대로 착각하지 마라……?”
“날 좋아해 줘.”
정혁이 속삭이는 말들이 마치 주문처럼 들려와 몽롱한 정신이 더욱더 아득해진다. 아… 그
애절한 부탁에 다시 고민을 하게 된다. 눈을 감고 서정혁과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우리가 이대로 사귀게 되면… 행복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이렇게 주말에 같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거나, 서정혁이 해 주는 팔베개를 하면서 끌어안고 있거나. 혹은 지금처럼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몇 가닥 쥐었다가 놓으며 간질이거나.
그에게로 빠져들어서 나날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계속해서 들었다 놨다 하는
통에 우서는 안달이 나고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큼…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분명 좋아한다고 구애하는 쪽은 저쪽인데, 여유 없는 것은 우서 제 자신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괜한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다. 괜히 맘에도 없는 척 쌀쌀맞게 대꾸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혁은 덫을 쳐 놓고 기다리는 거미 같았다. 분명히 제가 그 덫에 걸려들 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후후, 하고 여유롭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이미 걸려든 걸 수도 있고… 손쓸 틈 없이 빠르게 마음으로 파고들어 와 버린 서정혁.
우서는 그의 단단한 품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이제는 그 없는 삶들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매일 몸을 섞고 있으니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몸은 자꾸 녀석을 찾는다.
저절로 머릿속까지 온통 서정혁으로 꽉 차 있었다.
“날 사랑해 주면… 그러면 나도 아낌없이 널 사랑할게.”
우서의 귀가 저도 모르게 쫑긋했다. 그 제안에 솔깃하고 혹하게 된다.
정혁이 손을 높이 뻗어 침대 위의 창문을 열었다. 꽃향기가 살랑살랑 풍겨 와 들어오고, 따뜻한
바람이 몸을 감싼다. 밤이 깊다. 그가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려 들고
있다.
“그럼 널 영원히 사랑할게.”
이대로 영원히 서정혁과 함께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 때문에
자꾸만 홀려 든다. 정말 우리가 계속해서 같이하거든…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미래도 나름대로
궁금했다.
정혁이 다시 우서를 힘 있게 꽈악 안았다. 애정과 집착 그 중간의 포옹이었다. 애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불안함과 함께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니까… 진우서, 너도 날 좋아해 줘.”
봄의 향기는 따뜻하고, 서정혁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 녀석과 쉬는 날에는 함께 놀러
가고 사랑한다 말해도 보고 또 기념일을 챙기는 그 간지러운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어색하고도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미래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녀석과 이런 간지러운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정혁은 이제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의미가 되어 버렸다.
“우서야, 진우서야…….”
그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낮아서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서는 정혁의 품에서
생각들을 꿰어 맞추다가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

“진우서, 왜 대답도 없이 잠드냐고.”


“아, 몰라. 피곤한 걸 어떡하냐구……!”
“좋아하면 좋아한다 말을 해야지. 뭔 답이 사골 우리는 것보다도 길어, 이 정도면 메주도
알아서 눈치껏 된장 됐겠어. 진우서 고백 한번 들으면 아주 구수하겠네.”
이곳은 서정혁의 집이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부모님들 몰래 위험천만한 파트너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정혁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속궁합도 무진장 잘 맞고 잘생기고 재밌기까지 한
데다가 직업 좋으니 빠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 하나가 마음에 걸려 자꾸만 정혁과 사귀는 것이 망설여진다. 그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문득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뿐 아니라 정혁의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배덕감을 느낄 것 같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참을성 없는 제 파트너는 우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애를 종용하며 졸라대는
중이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이상한 건 잘 알고 있다. 파트너는 그리 쉽게 결정해 놓고,
연인 하겠다는 그 결정은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건지… 당연히 이상할 법하다.
“재촉하지 마. 생각 중이라니깐?”
우서는 정혁을 노려보며 팔뚝을 밀어냈다. 아까부터 엉큼한 손이 허벅지며 가슴이며 자꾸
만지려 들었다. 얄미워서 손등을 한 대 찰싹 치기도 했다.
“아, 뭐 미루면 이자라도 나온대? 아니면 사은품이라도 준대? 참나.”
그는 출근 스케줄에 맞춰 외출복을 챙겨 입고 있었다. 정혁이 씁, 하고 맞은 곳을 문지르다가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그러고는 우서에게 넥타이를 건네주었다.
“아니, 넌 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아무랑 막 사귀냐?”
우서가 그걸 휙 낚아채듯 받아들면서 자연스럽게 정혁의 목에 넥타이를 매어 주었다.
손놀림이 한두 번 해 본 그런 솜씨가 아닌 듯 예사롭지가 않다.
매일 이렇게 놀러 오다 보니 어느샌가 실력이 늘었다. 매일 우서를 시켜 넥타이를 매게 한
보람을 느낀다. 정혁은 기특하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었다.
“내가 아무나야? 그리고 난 너랑 사귀는 게 최종 목적은 아니니까, 아직 안심하진 마.”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파트너 싫다고 사귀자고 애인하자 들들 볶더니 이젠 또 그게
아니다?”
우서가 황당하다는 듯이 얼굴을 올려다보니, 정혁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우서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맞붙었다가 떨어지고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리
대답한다.
“결혼해야지, 진우서랑.”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우서가 얼음이 되어 정혁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은 정말로
진심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허투루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정혁은 자신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발 앞서가는 녀석의 스피드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제야 좀 마음이 열리고 정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생각했더니 영원을 약속하잔다. 미칠 노릇이었다.
우서는 그 마음을 모른 체하며 장난인 양 그렇게 대충 넘겨 버리려 했다.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딴 말 하지 말라 했지. 난 진심이라고 믿는다니깐?”
그러자 정혁이 피식 웃었다. 귀와 볼을 시뻘겋게 붉혀 놓고 애써 아닌 척하는 우서의 화법과
대처가 귀여워서였다.
“오늘 좋은 하루 보내, 우서야.”
정혁은 진짜네 거짓이네 하며 굳이 덧붙여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 인사와 축복을
속삭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넥타이를 잘 맨 보상으로 우서의 이마에 또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정혁의 입술이 둥그런
이마에 폭신하게 붙었다가 떨어지고 그러한 행동에서 이미 정혁의 마음이 전달되어 와 심장이
거세게 뛰어댔다.
“내 기를 다 넣어서. 진우서 정시 퇴근 염원하고 있을게.”
우서는 맡은 연구 스케줄이 계속 미뤄지며 업무가 늘어나 퇴근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정혁이 그걸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얘기를 꺼냈다.
“흠. 너도 뭐… 조심하고. 괜히 일하다가 다치지나 말고.”
촘촘한 스케줄 때문에 정혁도 피곤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요즘 서정혁네 팀이
대대적으로 마약 단속에 나서며 오늘도 출근 복장이 평소와는 달랐다. 사복을 입고 잠복할
예정이라며 금융 회사의 샐러리맨인 양 그렇게 꾸며 입고 있었다.
서정혁은 몇 날 며칠을 잠복하고 대치하고 무척 애먹는 중이었다. 녀석의 성격상 힘들다고 티
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곁에서 보면 안쓰럽고 착잡할 뿐이었다.
“오늘 근무는 좀 위험해. 마약 제조하는 곳까지 급습할 예정이거든. 조직이 연루되어 있어서…
아마 연락도 잘 안 될 거 같고… 언제 올지도 모르겠다.”
“네가 무슨… 그런 일을 해……!?”
그 말을 듣고 놀란 우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뜻은 아니었고 정말 놀라서였다. 저번처럼
발등에 멍이라도 들어 오고 가슴팍에 상처라도 늘어서 온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정혁은
어깰 으쓱하며 대답했다.
“너, 나 무시하는 거 아니지?”
진짜 걱정된단 말이다. 이제 이런 일들을 한다고 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것을 보면
서정혁 제 사람 다 됐다. 우서는 아랫입술을 꾸욱 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니… 그… 조심하라고 여튼.”
“응, 나 너랑 떡치려면 몸 사려야지.”
시무룩해하는 우서 앞에서 정혁은 또 천연덕스레 질 낮은 농담을 했다. 기분 풀라며 살짝
눈치를 보다가 손을 뻗어 우서의 앞섶을 꾸욱 눌렀다.
“읍─!”
우서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찌릿, 하고 반응이 올 정도로 몸이 민감해져 버렸다.
서정혁이 모두 개조하고 공들여서 만들어 둔 탓이었다.
우서가 정혁의 손을 탁, 쳐 내고는 얄밉다는 듯이 그 손가락을 꽈악 쥐었다.
“무사히 오면 나랑 사귈 거냐?”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농담 뒤에 조건이 붙고 있었다. 우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퍽
애절한 구애를 해 온다. 그 말은 정말이지 장난기를 싹 뺀 진심 같아서 그의 심리를
읽으려다가 포기했다. 거절하려다가도 말았다. 서정혁 머릿속에 정말 저밖에 없는 것 같아서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완전히 항복이다.
멍청한 놈. 내가 그리도 좋더냐. 우서도 이젠 포기한 듯 바람 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지.”
“오케이……! 정력이 불끈불끈 솟네.”
정혁이 완전히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뼉을 치면서 기분 좋게 웃다가 개죽이가 되어
버렸다. 그의 표정 중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거 솟으면 일하는 데 불편하지 않냐?”
“넌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동기 부여인데?”
그렇게 대답하고는 정혁은 우서의 얼굴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출근길에 올랐다.

***

‘무사히 오면 나랑 사귀나?’
아까 말했던 그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우서는 자동으로 재생되는 정혁의 말을 곱씹었다.
“어, 어, 우서 씨……! 넘쳐요, 넘쳐!”
“네……? 헉……! 아… 죄송해요!”
실린더의 용액을 적정량 따른다는 것을 쪼르륵─ 하며 넣다가 결국 넘쳐 버리고 말았다.
우서는 실험 테이블을 적신 용액들을 얼른 닦아 냈다.
일을 하는 내내 서정혁에게서 전화도 카톡도 없었다.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녀석으로 인해서
우서는 뭐에 홀린 듯 자꾸 실수를 했다. 정신이 딴 데 팔려서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할 때까지도 정혁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실험을 끝내고 오피스 업무도 마친 뒤에
환복을 하고 카드를 찍고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동료를 마주쳤다.
“우서 씨, 오늘 무슨 일 있어? 아까 평소에 안 하던 실수까지 하고.”
“아… 오늘 컨디션이 안 좋나 봐요.”
거짓말로 변명도 해 보지만 사실 정혁이 걱정돼서였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진득이 잘 기다려
보기로 한다. 내게로 돌아올 녀석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번처럼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면 눈앞에 나타나 내게 키스하고 웃으면서 눈 맞춤해 줄 거라
믿고 있었다.
조금 이상했다. 앞으로 서정혁과 연애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돌풍이 불어오다가도 이미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담대해지고 차분해졌다. 기다려지고 설레고 많이 보고 싶다.
또 다가올 고백의 순간들을 상상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정혁에게서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봄비가 부슬부슬 쏟아지고 있었다.

***

퇴근길 인파를 뚫고 집으로 오는데 비가 제법 거세다. 오후서부터 시작된 세찬 빗줄기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침에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차에
여유분마저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 차를 주차하고 우서는 집을 향해서 뛰어왔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달려오는데 어느 순간 옆에서 우산이 불쑥 들이밀어져 씌워진다.
파란색 우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그 순간 마음속에는 기대감이 싹튼다.
“……!?”
주체할 수 없이 상기된 마음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 짓을 할 사람은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우서야, 우산 안 가지고 갔으면 아줌마랑 같이 쓰자……!”
그런데 우산의 주인은 서정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실망감보다 입꼬리가 사르르 올라간다.
반가운 얼굴이 우서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줌마……!”
정혁의 어머니였다. 곱고 아름답고 온화함이 얼굴에 묻어 나와 더욱 생기를 더하는 분이시다.
아줌마를 마주하고 있으니 배덕감이 차오르지만, 우서는 배시시 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음으로 때우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아주머니 손에 들린 우산과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여행 다녀오셨다면서요?”
“응, 코타키나발루 갔는데 거기 너무 좋더라. 다음에 정혁이랑 해서 다 같이 가자. 맞다, 내가
너희 집 선물도 사 왔는데, 우서 커피랑 차 좋아하니?”
“감사해요. 저도 좋아하고 특히 엄마가 엄청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며 걷다가 공동 현관으로 들어와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우산을
잘 털어 접었다.
나란히 서서 높은 층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슬며시 우서의 이름을 부르며 말끝을 흐린다.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우서야, 아줌마가 물어볼 게 있는데…….”
“네……? 어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순식간에 달라진 공기에 우서는 무척 긴장이 됐다.
나 설마 쟤네 집에서 뭐 잘못 놓고 왔나……? 청소는 철저히 했는데… 혹시 짚이는 게 있으신
건가 싶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그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혹시 정혁이 여자 친구 있니? 누가 생긴 모양인지 영 수상한데, 물어봐도 도통 말을 안 하네.”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우서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니, 아주머니의 얼굴도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우서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얘 카드 내역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죄다 호텔이더라고. 그것도 하룻밤에 몇백씩 하는 데서
긁었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탈력감이 들어왔다. 아이, 미친 새끼 그것 좀 제대로
간수 못 하냐……! 우서가 마음속으로 정혁을 마구마구 꾸짖었다.
이를 앙 물고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돈이 어디서 나서 매일 그렇게 스위트룸만 결제하는 건가
싶었다. 제게 잘 보이려고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카드를 긁어댔던 모양이다.
“그 사람, 혹시 우서 너도 아는 사람이니?”
그 말에 우서는 선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아주머니에게 겨우 대답을 했다.
“아하하, 그… 저는 잘 모르겠는데, 서정혁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하더라고요.”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아. 우리 아들이 보기보다 연약하고 순진한
면도 있거든.”
그 말을 들으면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데 우서의 입에서는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약은 개뿔… 하루에 다섯 번을 싸는데 연약? 아줌마가 아들을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았다. ‘댁네 아드님이 저를 따먹었고, 그다지 순진하지도 않던데요.’라고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걸 꾸욱 참고 우서는 뒷수습을 한다.
“걱정 마세요. 서정혁 알아서 잘하잖아요? 괜찮고 멋있는 사람으로 만나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접니다, 하하. 우서는 뒷말을 삼켜 내고 아주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작별 인사까지 나누고는 헤어졌다.
집으로 들어오는 도어 록을 누르는데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며 몸이 축 처졌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속이 복잡해져 간다. 문득 부모님들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싶었다.
어떻긴 어떻겠어, 당연히 난리가 나겠지.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져 간다.
둘 다 외모, 능력, 학벌, 집안 뭣 하나 빠지는 거 없다지만… 같은 걸 달고 있는 똑같은
성별인지라 보수적인 부모님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거다. 성별이 앞의 플러스
요인들을 싹 다 마이너스로 바꿀 만큼의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 관계를 들킨다면… 아주머니는 과연 지금처럼 저를 향해 계속 웃어 주실지 아니면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실지 걱정이 됐다. 물론 관계가 들통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만약
사귄다 해도 조금의 여지도 남겨서는 안 되겠다. 우서는 절대로 비밀을 들키거나, 진실이
드러나는 그런 일은 추호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연락을 해 두었는데, 정혁은 오늘 하루 종일 보낸 채팅에 대답도 없고


감감무소식이다.
“바쁜가……?”
괘씸한 나머지 아주머니가 말했던 ‘연약한 정혁’으로 이름을 변경해 뒀다. 핸드폰을 확인할
때마다 답이 없어 실망하기도 했지만 일이 바쁘겠거니 한다. 이젠 어느 정도의 믿음과 신뢰가
생겨서 이런 연락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서정혁은 자신에게로 다시 올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씻고 나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핸드폰으로 기사 여럿을 봤다.
「경찰 이태원 클럽 등지에서 최대 규모의 대치 중」
「과격한 저항으로 인해 부상자 총 9 명 발생」
“흐음…….”
딱히 할 게 없지만 정혁이 곁에 없으니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데도 흥미가 생겨나질
않는다. 걱정만 될 뿐. 그래서 우서는 팔을 베고 멀뚱히 천장을 바라봤다. 서정혁은
괜찮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즘에 손에 쥔 핸드폰에서 거세게 진동이 울렸다.

연약한 정혁

서정혁에게서 온 전화다. 우서는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이 빠르게 상체를 일으키고 핸드폰을


눌렀다. 괜한 초조함에 급하게 받아 드니 시끄러운 소리가 쏟아져 온다. 치지직─ 하는
파열음이 들린 후에야 정혁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였다.
─ 우서야.
제 이름을 불러 주니 뛸 듯이 기뻤다. 우서의 얼굴이 피어나듯 환해진다.
“서정혁……?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많이 바빠?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거야? 밤새우느라
힘들겠어……! 나는 퇴근해서 집이야.”
한꺼번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쏟아 냈다. 그러고는 너무 제 할 말만 한 건가 싶어서 살짝
후회했다가 정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 괜찮아, 별로 안 힘들어. 아… 조금 힘든 거 있다.
그런데 정혁이 별안간 힘들다는 얘기를 꺼낸다. 우서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이 널
그렇게 괴롭히는 건지 궁금하면서도 듣기에는 살짝 두려워 망설여졌다.
“응……? 그게 뭔데?”
─ 진우서 보고 싶은 거.
전화 너머로 낮게 웃으면서 우서가 관심을 가져 줘 기쁘다는 투로 얘기해 온다.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몰라 우서는 재차 눈만 깜빡였다.
이런 장난치는 말을 들으면 온몸이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자신도 마찬가지로
보고 싶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하지만 꾹 누르고는 정혁에게 괜히 핀잔을 줬다.
“좀만 참아. 금방 보잖아.”
─ 그래야지. 빨리 집으로 가고 싶네, 진우서가 기다리는 집으로.
뒤에서 누군가가 정혁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고, 주변이 시끄러운데도 그는 우서를
안심시키려 퍽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를 해 왔다.
“오늘 하루 종일 비 오는데 힘들겠어.”
정혁이 잠깐 웃고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서정혁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서
가슴이 아려 왔다. 정말 힘든 건 말하지 않는 녀석,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곰살맞게 구는 게 바로 서정혁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됐다.
─ 우서야, 보고 싶어.
그 말을 듣고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게 된다. 핸드폰을 쥔 손에 꽈악 힘을
주고 고민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정혁의 이름을 재차 호명했다.
그래서 우서도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반대편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못 들었나 싶어 우서가 한 번 더 크게
외쳤다.
“나도 서정혁, 너 보고 싶어……!”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정혁이 기쁨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그래, 얼른 갈게. 좀만 기다려.
“응.”
우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 내어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혁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통화가 마무리되고 나서도 우서는 한동안 잠에 들 수 없었다. 세차게 내리는 봄비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시간에도 피곤과 맞서고 추위에 떨며 일하고 있을 녀석이 걱정이 됐다.
하지만 우서는 오늘만 끝나면 정혁이 저를 찾아오리라 굳게 믿고 두 눈을 감았다. 그의 고백이
자꾸만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서정혁은 내게 어떤 존재였냐 하면…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기도 했고, 또 가까이 지내는
형제기도 했으며, 항상 같은 시기에 똑같은 관문을 넘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이제는 같이 배를
맞추는 연인이 되었다. 우서는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때 녀석과 같이 축구를 한 적이 있었다. 운동에 젬병이라 공을 차긴커녕 제 발에 걸려


자빠졌었다.
그러자 서정혁이 운동장 끝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와 우서를 일으켜 주고는 체육복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그러고는 업어서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왜 혼자 나자빠졌냐며 놀리고 비웃는
건 약 올랐지만… 녀석 없었다면 혼자 다친 발을 이끌고 절뚝이며 걸어왔지 않았을까.
힘도 넘치지. 저를 업었던 서정혁. 그때는 쪽팔리고 아프고 서러워서 녀석에게 고맙다 말하지
못하고 자존심만 상해했었다. 그렇게 키가 작고 짓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꿈에 나온다.
음, 맞다. 그런 적도 있었지.
중학교 때 저를 괴롭히는 애가 있었다. 귀엽게 생겼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툭툭 치고 깨물고
꼬집었다. 그게 못내 싫었지만 그 애가 운동을 해 체격이 다부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정혁이 제 팔뚝에 난 잇자국을 보고는 그 녀석에게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어
팼다. 그러고는 왜 맞고만 있냐며 저를 한심하게 여겼었는데…….
그때는 부모님까지 학교에 찾아올 정도로 일을 크게 키워서 녀석이 밉고 원망스러웠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참 기특한 짓을 한 거였다. 짧은 머리를 하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이 꿈에 보인다.
또 아파트에서 가까운 독서실을 다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수능을 앞두고 물건을 몽땅
도둑맞았던 적이 있었다. 사물함 자물쇠는 망가져 있고 그 안에 있던 문제집들을 다 잃어버려
발만 동동 굴렀었다.
마침 같은 독서실을 다니던 녀석이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다가 쓰레기 더미서 책을 찾아
왔다. 젖어 더러운 책들을 건네었을 때, 그동안 녀석이 숨기고 골탕 먹인 후에 가져다준 걸
거라 지레짐작하고 서정혁을 미워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녀석이 그렇게 야비한 짓까지 할 녀석은 아니었는데…….
교복을 입고 숨을 몰아쉬면서 무거운 문제집 뭉치를 건네던 녀석의 모습이 꿈에 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더랬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잊고 지내 왔다. 제게 짓궂었으나 또 저에게만큼은
항상 각별했던 녀석이다.

우서는 잠에서 깨 눈을 떴다. 토독─ 토독─ 빗방울이 창문을 때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녀석이 돌아오거든 사귀자 말할 것이다. 확신이 들었다.
“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밤잠을 설치고 있는데 핸드폰은 고요하기만 하다. 정혁에게서 연락이
없어 애가 탄다.
그런데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러웠다. 뭐지, 싶어 우서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방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을
바라봤다. 그토록 기다리던 너일까. 하지만 서정혁의 모습이 아닌 왜소한 체격이다.
아마도 그 모습은 엄마인 것 같았다. 아직은 캄캄한 새벽이다. 그런데 왜 엄마가 문을 벌컥
열고 서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서 우서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우서야, 일어나! 정혁이가……!”
우서의 엄마가 뱉은 그 이름에 털이 쭈뼛 선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서정혁이 왜?”
망설이다가 천천히 그 이름을 다시 꺼내었다. 네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입 안이 쓰고 혀끝이
저릿했다.
“정혁이가 일을 하다가 글쎄…….”
그런데 우서의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서정혁이 왜……?! 무슨 일 있대?”
우서가 부스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다가갔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불안정해서 우서도 덩달아 손이 떨려 왔다.
“다쳤대. 그것도 체포하려던 사람이 휘두른 칼에 찔려서…….”
세상이 무너진다. 미친 새끼야… 너 진짜…….
우서는 온몸에 탈력감을 느꼈다. 힘이 빠지고 당장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이 몸을 덮쳐 왔다.
“……많이 다쳤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묻지만 제발 아니라고, 괜찮다는 그 대답만이 나오길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엄마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는 눈물을 삼켜 냈다. 그 서러운 흐느낌에 우서는 이
상황이 제게 어떠한 시련과 끔찍한 고통을 가져다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정혁이 지금 의식이 없대. 수술해야 될지도 모른대…….”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린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서정혁 너 진짜… 무사히 돌아오기로 했잖아. 나랑 약속했잖아. 다시 돌아와서 나랑 사귀기로
했잖아…….

***

정신없이 집을 나와서 양말이며 옷이며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다. 우서는 우산도 없이


빗속에서 그대로 서서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느껴져 온다. 몸을
떨면서 비가 세차게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빗줄기는 굵었다. 하늘은 깜깜했고 안개가 자욱해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 길을 잃은 거 같은 느낌에 두 팔을 감싸서 몸을 웅크렸다. 서정혁이 다쳤다니,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때마침 차가 우서와 우서의 어머니 앞에 섰다. 정혁의 부모님은 새벽에 비보를 전해 듣고 놀란
나머지 아래층으로 도움을 청하러 왔던 거다. 항상 모든 일들을 함께해 왔기에 이 순간에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모양이다. 우서네 부모님도 병원까지 운전을 해 주겠다 흔쾌히 수락했다.
“저는… 못 할 거 같아요.”
친구였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동해 컨트롤이 힘들진 않았을 거다.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힘들었다. 믿기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벅찼다. 손이 떨려서 아버지도 그걸 보시더니
자신이 대신 운전대를 잡겠다고 했다.
서정혁, 내가 널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정혁의 부모님은
울음을 삼키시다가 탈진해 쓰러져서 흐느끼셨다.
그래서 우서는 저라도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울지 않기로 다짐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강인하게 마음먹으려 애쓰고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불안함이 자꾸 이 상황을 좀먹어 간다.
창에는 불이 꺼져 색을 잃은 도심의 모습이 비쳤다. 빗줄기는 세차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도로에서 이 모든 풍경이 우서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서정혁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며 아껴 주던 녀석의 얼굴
말이다. 모두 다 잘될 거라고 얘기해 주던 사람, 괜찮다며 항상 여유 있게 넘기던 그
행동들까지도 모두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젠 나한테서 네가 없는 삶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제발 서정혁, 버텨.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간절함을 다해서 기도하며 그렇게 우서는 정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원에 오니 밤이라 사람이 없고 고요하기만 하다. 응급차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려오고


로비는 적막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소독된 기구들의 냄새들이 대학 병원의 쓸쓸한
분위기를 말해 준다.
우서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내려 주고 주차장으로 향했고, 우서는 흉부 외상을 전문으로 하는
층으로 아주머니를 부축했다. 넓은 공간에 크게 울리는 발소리가 복도 끝까지 메아리친다.
무척 다급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한 발걸음이었다. 이 넓고 쓸쓸한 공간은 사람을
더욱 작고 슬프게 만든다.
“아이고… 우리 아들. 정혁이…….”
정혁의 어머니는 눈물로 계속 흐느끼면서 아들을 찾았다. 우서 또한 먼 곳을 바라보면서 눈을
꽈악 감았다.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저릿해서 숨도 못 쉴
것같이 힘들었다.
서정혁 너는 대체 언제쯤 나를 편하게 내버려 둘 거냐고, 말도 안 되지만 원망을 돌릴 곳이
없어 그를 탓해 본다. 수술실 앞까지 향하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과 마주했다.
“서정혁 환자분 보호자 되세요?”
“보호자만 따라오세요.”
그렇게 정혁의 부모님은 의료진들과 함께 분주히 사라졌다. 그들을 따라갈 수 없어서 애가
탄다. 수술실 앞에는 우서와 우서의 엄마만이 남아서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오기가 힘들었고 정신이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서 우서가 머리를 짚고 섰다. 안
그러면 이대로 저도 같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
엄마가 손을 잡아 오는데,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서는 이 자리에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복도와 수술실 그리고 대기 장소에는 의자들이 줄지어 있다. 간간이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절박한 모습이 우서의 눈에도 들어왔다. 지금이 얼마나
긴박한 순간인지를 깨닫게 된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안내하는 스크린 화면에는 ‘서정혁’이라는 이름이 떴다. 그게 심장을 쿵─
떨어지게 만든다. 견딜 수 없이 몰아닥치는 현실감에 우서는 눈을 꽈악 감았다. 이제는 정말
더는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다 어떻게 된 거니… 정혁이가 대체…….”
우서의 엄마도 넋두리하듯이 말도 안 된다며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데, 그 양이 적지 않다. 마치 제 자식처럼 아껴 왔어서 그런지 고통스러운 마음은
부모와 다를 게 없었다.
우서도 한숨을 쉬고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진짜 저 안에 있는 게 네가 맞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길, 이 모든 게 거짓이길 바랐다.
체력은 완벽하다며, 너 운동 신경 좋잖아. 그렇게 튼튼하고 허우대 좋으면서. 왜 이 말도 안
되는 벌어진 건지, 끔찍한 일이 왜 하필 서정혁에게 일어난 건지, 우서는 다시 한번 수술실로
향하는 문과 스크린을 바라봤다.
서정혁, 그 이름 옆에 있던 상태 표시가 ‘수술 중’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대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쌀 수밖에 없었다.
“서정혁, 너 진짜…….”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 분노가 우서를 덮쳐 왔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서정혁이
위험하다. 녀석이 크게 다쳐서 이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태임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서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앞에 섰다.
“서 팀장 보호자 되시는 분들입니까.”
손을 떼고 그들을 바라보니 흙먼지 자욱한 옷을 입은 채 지친 기색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비와 땀에 젖은 몰골의 남자 둘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선 다가온다. 우서와 우서 어머니가 하던
이야길 듣고는 주변에 서 있다가 그들 곁으로 와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던 거였다.
“아, 저희가… 가족은 아니고… 정혁이랑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사람들인데, 동료분들
맞으신가요.”
우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서 겨우 말을 꺼냈다.
“네, 저희는 서 팀장이랑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 김광일이라고 합니다.”
“저는 팀원 박성찬입니다.”
그중 가장 덩치 큰 남자가 짧게 묵례하고 인사했다. 우서가 그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정혁보다 훨씬 덩치 좋은 사람이 있고 그 옆으로는 마르고 작은 체구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정혁이 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서 경정님은 같이 오셨습니까.”
정혁의 아버지를 찾는 것 같았다.
“수술 동의하러 가셨는데… 그보다도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서 물었다. 동료고 이곳까지 따라온 자들이면
충분히 이 상황을 알 거라는 생각에 다급히 물어봤다.
그들이 별거 아니라고, 부상 정도가 가볍고 괜찮을 거라 그리 말해 주길 바라며 우서는 절박한
눈을 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그게…….”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얘기하길 주저하자, 덩치가 큰 남자가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대신 말을 이었다.
“후… 서 팀장은 아무 잘못 없고요, 약을 한 사람들이 많아 저항이 격해지다 보니 부상자도
많고 해 서 팀장은 조심 또 조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가 왜 다친 건지 알 수 없어서 우서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중에 과격하게 저항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흉기를 꺼내 들더니 이 녀석에게
달려들더라고요.”
남자는 왜소한 남자를 가리키면서 얘기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떠한 외상도 없었다. 그러면
그 일에 휘말려 정혁이 대신 다치기라도 한 건가, 우서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박 경장, 처음 들고 있던 흉기가 뭐였냐.”
“그… 쇠 파이프였죠.”
“후… 서 팀장이 일단 그 무기를 빼앗아 들고는 제압을 했는데, 후속 조치가 잘못됐지
말입니다. 제압이 되긴 했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그때 수갑을 제대로 잘 확인했어야 됐는데…….”
“야, 네가 여기 발령 난 지 3 개월도 안 됐는데 뭘 더 하겠냐. 에휴……. 서 팀장만 불쌍하지. 그
새끼가 수갑 풀고 달려들 줄 누가 알았어.”
“저 구하려고 하시다가…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수갑 확인만 잘했어도 그리고 소지품 확인만
잘했어도 이런 일은 없는 건데…….”
“범인이 서 팀장이 제일 힘 좋고 작전 잘 수행하니, 걔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
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있자니, 제압은 순조로웠으나 체포 과정 중에 수갑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서정혁이 결국 흉기에 찔린 것 같았다. 그 순간의 모습이 상상되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우서의 손이 덜덜 떨려 오고 있었다.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왜 서정혁을 칼에 찔릴 때까지 그냥 내버려 뒀냐고 그리 따져 묻고
싶었다. 그랬는데… 원망스럽게 쳐다보려고 해도 그 몰골들이 안쓰러워서 그럴 수는 없었다.
우서가 허망하게 정혁의 동료들을 바라봤다. 비에 젖었는데도 씻지 못해 초췌하고도 핼쑥한
얼굴이었다. 피와 땀에 젖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 준다.
“서 팀장님은 저만 믿고… 흐윽, 제가 잘 살폈어야 됐는데…….”
작은 체구의 남자가 울다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흐느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못 이겨
절망스러워하고 있었다.
누구 대신 나서서 다치고 그러는 건 서정혁 전문이다. 이 모든 게 다 서정혁다운 행동이라서
우서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라고 대신 다쳤을 서정혁이 아닐
테니, 우서는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억지로라도 꾹꾹 눌렀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서정혁 어떻대요.”
“그게… 복부로 흉기가 깊숙이 들어간 모양인 거 같은데… 폐에 손상이 있어서 지금은 위급한
상태라 합니다.”
덩치 큰 사람이 머리를 헝클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인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해 버린다.
우서가 벽에 등을 기대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이 무진장 떨려서 힘주어 주먹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제 몸이 제어되지 않고 있었다.
“위급한 거면… 얼마나 안 좋은 건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수술해 봐야 알 텐데… 저희도 잘 끝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외상은 잘은 모르는 분야지만, 폐에 손상이 있다는 것은 호흡 곤란으로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기도 했다.
“정혁이 그래도 잘 일어날 겁니다. 피를 토해 내는 데도 칼 든 남자를 제압하겠다고 그것까지
빼앗아 들고는 쓰러진 그런 녀석이니깐요.”
그 말을 듣고 있는데 가슴이 철렁한다.
“에휴, 서정혁이 이 미친 녀석. 지가 뭐라고…….”
탄식이 이어졌다.
다들 몰라서 하는 얘기일 테지만, 객혈이 상당하면 과다 출혈로 인해 안 좋은 상황이 일어날
확률도 꽤 높았다.
“후우…….”
이 모든 말이 듣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 모습이 상상되고 있었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했을 서정혁, 그 상황을 떠올리고 있으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정혁을 다치게 한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다. 정혁인 죄가 없었는데, 걔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데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해하려 했다.
서정혁. 서정혁. 너는 일어나야 돼.
우서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서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숙연해져서
모두들 고개를 떨군다.
감히 위로조차 쉽게 건넬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서정혁, 보란 듯이 회복해서 너를 찌른 사람을 벌주고 동료들에게 나 대신 원망의 말을 쏟아
줘. 왜 날 보호하지 못했냐 그렇게 큰소리를 쳐 줘.
그러고 나서 울고 계신 너희 부모님께 괜찮다고 말하며 안심도 시켜 드려야 해. 또 우리
부모님께도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얘기도 해야 하고.
그리고, 그리고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필요 없으니까, 잘 버텨 내서 일어나기만 해 줘.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어 나는.
너는 날 두고 절대로 죽어선 안 돼.

***

서정혁, 넌 항상 쓸데없는 정이 많다. 정의롭고 똑똑하고 용감하고 열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너를 좋아했는데, 그런 점이 너를 이렇게나 위험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침이 되도록 수술이 끝나지 않아 가족들 모두가 초조하게 대기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서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휴게실로 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상이 깊어서 수술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근육뿐 아니라 혈관과 폐에도 손상이
있어서 수술이 복잡하고 그에 따라 회복도 더딜 거라는 소견이 있었다. 지금 기흉과 혈흉이
심해 어떠한 것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 했다.
자신이 여기에 남아 있는다 해서 도움이 되는 건 없지만, 정혁을 두고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도 않았고 눈을 감아도 서정혁 걱정뿐이라 잠도 오지
않았다. 일상에서 정혁 하나만 틀어졌는데 모든 게 엉망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서정혁은 지금 고통과 싸우고 있다. 움직일 때마다 괴롭겠지. 수술도 버거울 것이다. 그 후의
부작용과 회복도 걱정이 되어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부장님, 제가 오늘 일이 있어서요…….”
휴가를 쓰겠다고 전화를 걸었는데 목소리가 사정없이 갈라지니, 상대편에서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진 사원, 음… 안 좋은 일인 건 알겠는데 무슨 일인지 사유를 써야 하니깐.
“아, 그게… 지인이 사고를 당했는데, 제가 밤새 병원에서 수술하는 걸 지켜서…….”
─ 음… 힘들었겠네. 그래, 친구나 친척인 건가?
관계를 물어 오니 다른 말로 둘러댈 수가 없었다. 친구지만. 친구라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서정혁은 제게 가족 그 이상일 테다.
“아뇨,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일단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사정을 말하고 끊었는데 얼떨떨하다. 제가 말하고도 왜 그렇게
얘기를 한 건지 당황스러워서 우서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봤다.
서정혁은 나한테 뭘까. 우서는 창밖으로 지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떠올려
봤다. 어느덧 봄은 다 가고 녹음이 울창하게 져 다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그렇게
우리 사랑은 봄에 꽃이 피어나듯 화르륵 타올랐다는 걸 깨닫는다.
정혁의 순간순간의 모습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제야 녀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자 그 모든 것들이 소중했고 행복했음을 알게 된다.
입 아프게 나를 좋아한다 반복하던 그 사람은 이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연인이 되지 못한 채로, 이대로 우리의 사랑을 끝낼 수는 없다. 정혁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전화 통화의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래야지. 빨리 집으로 가고 싶네, 진우서가 기다리는 집으로.’
‘우서야, 보고 싶어.’
‘무사히 오면 나랑 사귈 거냐?’’
미친놈아, 무사히 돌아온다며…….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정혁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연약한 정혁’으로 이름을 바꿔 놔 이것 때문에 부정을 탔나 싶어 후회를
했다. 우서는 빠르게 ‘강력한 정혁’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발 일어나, 이
멍청아…….
‘내가 3 개월 안으로 사귈 수 있게 노력할게.’
3 개월 안에 사귀겠다고 했던 정혁의 야심 찬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빨리 일어나야 사귀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서정혁.
무사히만 깨어나면 이제는 녀석을 후회 없이 좋아하겠다고 우서는 다짐했다.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날 거 같은 걸 억지로 참아 봤다.
조금 후회도 됐다. 좋아한다는 아니어도 그래도 좀 마음이 있다고는 말해 볼 걸 하면서 지난
일들을 자꾸만 되새겼다. 왜 그동안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낙담하다가도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네가 잘못될 거라는 그런 생각은 안 할 거다.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서정혁이어야만 한다. 나는 네가 굳세게 잘 이겨 내 줄 거라 생각한다. 네게는 항상
행운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널 믿는다.
지금 이 순간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대로 계속되어야만 해. 우서는 눈물을 삼키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다행히 다른 장기에는 치명적인 손상이 없고 응급 처치가 제때 이루어져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트를 넘기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경청하다가도 휘릭 넘어가는 종이
소리에 우서의 마음이 덩달아 철렁인다.
수술은 잘된 편이지만 쇼크가 심했고 출혈이 많아서 의식이 돌아오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했다. 며칠이 걸릴지 장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중환자실에서 계속 경과를 살펴보면서 환자를 체크해야 한다고 했다. 쇼크가 올 수도 있으니
마음을 놓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장장 17 시간에 걸친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우서는 가족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정혁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었다. 정혁의 부모님은 눈물로 밤을 새웠고 우서 또한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병실로 옮겨진 서정혁을 바라봤다. 붕대에 피가
많아 낯설고 또 겁이 난다.
다급하게 오고 가며 체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서는 정혁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틈으로 얼굴을 바라보는 수밖에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믿기지가 않는다.
“환자가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나중에 합병증이나 염증 반응이 있을 수도 있으니 좀 더 두고
지켜보죠.”
처음으로 보는 파리하고 창백한 네 얼굴이었다. 우서는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것을 겨우 삼켜
내며 정혁을 바라보았다. 원망과 슬픔, 그리고 안쓰러운 감정들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다행히 고비를 넘겨서 한시름 놓았다지만 깨어날 때까지 마음을 졸일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상처 있는 얼굴이 우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상체에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즈가 덕지덕지 감겨 있었고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
“우리 정혁이… 흐윽.”
“정혁이는 이겨 낼 거다. 우리 아들은 항상 그래 왔으니… 다들 좀만 더 힘냅시다.”
가족들 다 같이 입을 모아 괜찮을 거라 얘기했다. 나도 널 굳게 믿는다. 체력만큼은 대단하다
네 입으로 말했으니 잘 이겨 낼 거라 믿을 거다. 누워 있는 정혁을 바라보면서 우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우서는 정혁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하고 차갑고 거칠었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손에서 스르륵 풀려 나갔다.
“서정혁…….”
네가 다시 내 손을 세게 잡아 주고 나를 힘 있게 안아 줄 거라 믿는다. 눈을 뜨고 날 곧게 봐 줄
그날이 빨리 올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서는 정혁을 바라보며 그리되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
모두가 하루 종일 병원에 있을 수 없어, 우서의 아버지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곁에 남아
정혁의 부모님을 챙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서는 엄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우서의 어머니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정혁의 걱정에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었다.
우서는 불 꺼진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니
어둑어둑한 하늘에 새하얀 달이 떠 있었다. 얇고도 휘어짐이 극에 달하는 초승달이었다.
세차게 비가 내리던 어제의 궂은 날씨가 다 거짓이었다는 듯이 하늘은 맑고도 청명했다.
문득 예전에 서정혁과 베란다에서 설전을 벌였던 그때가 떠올렸다. 나한테 뜬금없이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었던가. 우서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자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사근히 불어왔다. 그에 맞춰 피곤한 눈을 살포시
감았다.
‘우서야.’
마치 정혁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우서는 고개를 돌려 위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 꺼진 집이 보일 뿐, 사람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듣고 싶은 대로 그렇게
제멋대로 정혁의 목소리를 상상해 냈을 뿐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그게 당연한 건데도 마음이 헛헛하고 섭섭해져 간다. 결국은 눈앞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왔다.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온통 아른아른하고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매일 그곳에서 있을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내게 매일 장난치고 시비를 걸며 영원히 나를
귀찮게 할 줄만 알았다.
‘나 라면 끓여 줘라.’
‘너 나 버렸다?’
‘그럼 이제 나 진짜 내 맘대로 한다?’
몸이 가면 마음도 움직인다면서 그런 쉬운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서정혁은 저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때 그
말을 아무 뜻 없이 툭 뱉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우서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둑─ 툭─
하고 떨어졌다.
“흐읍─”
크게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려 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잘 참아
왔는데, 근데 이제는 안 될 것만 같다. 소매로 벅벅 문질러 닦아 내 봐도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쳐 옷감을 축축하게 적셨다.
“흐윽…….”
우서는 결국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릎이 눈물을 따라서 동그랗게
젖어 간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그는 그 자리에서 숨죽여 울었다.
이제는 너 없으면 안 된다.
서정혁 빨리 일어나. 다른 사람은 못 만난다. 너여야만 한다. 매일 저를 향해서 조잘거리던
녀석이 곁에서 한순간 사라져 버리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무했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갑갑하고 앞으로 닥칠 일들이 무섭기도 했다.
너랑 있으면 그 어디든 즐거웠고, 너와 함께했을 때 가장 많이 웃었다. 또 너와 있을 때 내가
많이 자라났다. 기쁨, 슬픔, 질투. 네게 많은 감정을 배워서 이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서정혁…….”
최악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해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됐다. 그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에는 저는 아직 너무 미숙하다.
계속해서 아니라고 강인한 척을 해 보았지만, 단단하고 우직하게 이겨 내려 다짐을 했지만…
혹시 모를 그 최악의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서정혁, 우리를 포기하지 마.
다시 멀쩡하게 돌아와서 내 곁으로 돌아와 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다시 일상으로 데려가. 나한테 다시 와 줘.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 차라리 병원에 버티고 그의 곁에 남아 있을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의식이 없는 너라도, 그 모습이라도 보고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이렇게 흔적이 잔뜩
남은 곳에 혼자 남게 되니 괴로움은 배가 된다.
너무나도 쓸쓸했다. 이 도시가 다시 회색빛의 삭막한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그
품의 따뜻함을 알아 버려서, 정혁의 열정과 집념을 겪어 보아서 허전함은 우서를 좀먹어 간다.
그 짧은 새에 서정혁의 세상을 겪었고 그가 그리웠다. 우서는 그렇게 쪼그려 앉아 한참을
눈물로 그를 그렸다.
***

정혁이 의식을 잃은 지 닷새째였다. 위급한 상황은 어느 정도 넘겨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들이 번갈아 간호를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문병 온 사람들이 방문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작 서정혁은 깨어날 기미 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대로라면 지금쯤 깨어나야 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수술 경과 좋다잖아.”
우서는 애타 하는 엄마와 아주머니의 이야길 들으며 말없이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회사에서
퇴근해 바로 병원으로 오는 길이었다. 씻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서정혁이 깨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늘어나고
있다.
정혁의 부모님은 집에 갈 채비를 하면서도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박수와 똑똑, 수액 떨어지는 소리만이 병실을 채워 나간다.
우서도 가만히 누워 있는 정혁을 바라봤다. 오랜 잠에 빠진 것만 같은 얼굴이다. 눈두덩에
깃털이 가볍게 내려앉은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입술은 가지런하고 볼은 조금 핼쑥한
듯하지만 아직도 반듯하고 날렵해 보였다.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며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스르륵
눈을 뜨고는 자신을 보고 웃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우서는 셔츠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간호 복장으로다가 완벽하게
탈의한다. 겨우 며칠 했을 뿐인데도 이곳에 익숙해져 버린 게 못내 서러웠다. 병원에
적응할수록 몸이 축나는 것과 더불어 마음도 야위어 간다.
“우서야, 아줌마랑 아저씨가 밤에 다시 올게.”
“네, 엄마, 빨리 아줌마 아저씨 모시고 가. 쉬다 오세요. 여긴 걱정 마시고요.”
모두가 떠나 고요한 1 인실에서 우서는 정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침대에 팔꿈치를
올리고는 턱을 괸 채로 그 얼굴을 감상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낯설다.
처음으로 자신이 지켜 줘야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 고개를 빼고 정혁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바라봤다.
짙은 눈썹과 조금 팬 뺨에 생겨난 홈 그리고 단단한 턱선과 미끈하고 뾰족한 얼굴형까지 모두
다 그린 듯 유려했다. 저 입술과 이마와 뺨에 키스했던 그 순간들이 믿기지 않아서 헛것을
바라보듯 우서는 그렇게 멍하니 정혁을 지켜봤다. 눈을 감고 있어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병원에서 얘기해 준 대로라면 서정혁은 지금쯤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 근데 왜 이렇게 못
일어나는 걸까,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우서가 다친 복부의 상처 가까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닿지는 않았지만 그 고통을 어느 정도 느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흉터와 상흔이 깊게 남겠지. 정혁의 허리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에 우서가 탄식했다.
“후…….”
그리고 반들거리는 이마를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그에게 신호했다. 이제는 답답해서
혼자서라도 얘기를 해 봐야겠다.
“야.”
미동조차 없는 정혁을 향해서 우서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서정혁, 너 일어나면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그니깐 일어나라.”
그러고도 반응이 없나 빤히 바라봤다. 제 말에 곧장 대답할 거라는 희망이 무색하게 돌아오는
답은 고요함뿐이었다.
얼굴을 조심스레 만지고 머리칼을 쓰다듬고 하는데도 움직임이 없어 허무했다. 상처가 흉해도
징그러워도 다 괜찮으니깐, 눈을 떴으면 했다.
저를 귀찮게 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만져대고 괴롭히던 녀석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룰 정도로
가만두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자신을 옆에 두고도 이렇게 조용히 누워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닿는 곳마다 온기 없이 싸늘하기만 해 눈물이 핑 돌았다.
똑똑─
그 순간 병실 문에서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에는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우서가 의아함에 뒤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얼마 전에 봤었던 정혁의 직장 동료 두 사람이 서
있었다.
“……?”
눈물이 차오르던 눈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고 자리서 일어났다.
“음……?”
퇴근하고 문병을 온 모양인지 그들의 손에는 가방과 음료수 세트가 들려 있었다. 두 남자는
눈가가 벌게진 우서를 보고는 당황해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쭈뼛거리다가 병실로 들어온다.
“아, 저희는 저번에 만나 뵀었는데… 기억하시죠?”
“아, 들어오세요.”
우서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상대방들 또한 안심하고 얘기를 해 왔다.
“저희가 서 팀장 부모님 계실 때 동료들과 다 같이 오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녀석 얼굴 좀
봐야 맘이 편안할 것 같아서 퇴근하는 길에 들렀습니다.”
“다들 서 팀장님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서에게 악수를 청해 오고 준비해 온 것들은 건네어 줬다.
“여기 앉으세요.”
우서는 소파를 가리켰다. 자신은 정혁 옆자리의 간이 의자에 착석해 두 사람과 마주 보고 앉게
됐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했네요…
실례했습니다.”
“그나저나 서 팀장이랑은 무슨 사이이십니까.”
우서만이 곁에 남아 정혁을 간호하고 있으니 두 사람 모두 궁금한 점이 많은 듯했다. 누워
있는 정혁과 우서를 번갈아 보며 어딘가 닮은 곳이 있나 힐끔거리는 눈치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정혁과는 다르게 올망졸망한 느낌이 드는 남자는 정혁과 형제는커녕 친척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저는 서정혁이랑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어요. 같은 아파트 살아서 가족들끼리도 많이
친합니다.”
우서는 늘 하던 대로 자신을 정혁의 친구라 소개했다.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식으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그럼 서 팀장 애인도 아시겠네요.”
그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이 새로워 우서가 얼떨떨해하며 반문했다.
“애인이요……?”
“서 팀장이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있다고 했는데… 그 친구가 엄청 예쁘다고 매번
노래를 부르던걸요. 야, 성찬아. 너도 들었지.”
덩치 큰 남자가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며 재차 확인을 받으려 했다.
“그럼요, 서 팀장님이 입 아프도록 매일 말하셨는데 어떻게 까먹겠어요. 뭐라 했더라…
쪼그맣고 귀엽다고 했었죠, 아마.”
“그래, 그리고 몸매가 좋다고 뭐 그랬던 거 같은데…….”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우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누워 있는 사람을
상대로 따져 물을 수도 없지만 지금 저 얘기는 저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당장 병실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오랜 친구 사이였으니, 서 팀장 애인이랑도 아는 사이이실 것 같아서요.”
당연히 그럴 거란 듯이 확신에 찬 얼굴로 쳐다보길래, 우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그들에게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당신네들이 말한 쪼꼬미가
저입니다만…….”이라고 밝히면 어떠한 반응이 돌아올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아닌가? 정혁이 애인 모르시려나…….”
도저히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우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떨떠름하게 웃으니 동료들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상황을 넘겨짚었다. 그렇게 그들은 정혁의
상태를 살피고 한참을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우서는 문병 온 손님들에게 차를 타서 나눠 주기 위해 자리서 일어났다. 서정혁에게 팔불출
기질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설마 했는데 일하러 가서도 그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이거 한 잔씩 드세요.”
따뜻한 차를 나눠 주고는 우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호로롭
마시길래 우서도 따라서 마시는데 기막힌 소리가 들려왔다.
“야. 빨리 일어나라, 서정혁. 너 뭐 결혼할 사람 있다며.”
풉─ 우서가 마시던 차를 뱉었다.
“아이고, 괜찮습니까?”
“콜록, 으… 그 결혼할 사람이 누구… 혹시…….”
“그… 오래 만난 친구인, 서 팀장 애인 말하는 거죠.”
아주 동네방네 여기저기 다 얘기하고 다녔나 보다 저 녀석. 내가 언제 결혼을 한다고 했냐고…
…! 허언증이 있나 싶어서 누워 있는 애를 노려보는데 당연히 정혁에게서는 답은 없다.
그래서 우서가 하아, 하고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깨어나면 녀석의 입을
단단히 단속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흐흠,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는 아직 얘기가 안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뻘쭘해진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돌려 말해 보지만 그들은 우서가 뭘 모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서 팀장이 결혼해서 평생 같이 데리고 살 거라고 적어도 제 앞에서 100 번은
말했어요. 하도 난리를 쳐서는 저희가 아주 눈물겨운 순정이라고 놀리고 그랬는데 친구분이
저희보다도 뭘 모르시네요.”
피식피식 하며 웃는 게 우서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다.
“아, 아…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서가 억지로 웃으며 최대한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으려 얘기했다.
“저, 그… 서 팀장님한테 물어봤는데, 애 낳을 생각 있냐니깐 바로 얘기해 주시던데.”
“그 자식이 뭐래냐.”
뭐? 애까지……!? 말도 안 돼서 우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했다. 목이 무척 타서
차를 한입 더 꿀꺽 마셨다.
“애는 어려울 거 같긴 한데, 가능한 일이면 열댓 명 낳고 싶댔나 그랬을걸요. 와이프 닮은
애들로다가 낳는다고 하셨는데요.”
우서가 다시 한번 마시던 차를 푸웁─ 하고 뱉었다. 애는 무슨, 열댓 명은커녕 남자끼리 한
명도 가능할 리가 없잖아……!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얘기에 우서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아이고, 왜 이렇게 뱉으시는지…….”
덩치 큰 남자는 우서에게 휴지를 건네주면서 입가를 닦으라 권했다. 우서는 티슈로 흘린 차를
닦아 내고 옆에 누워 있는 서정혁을 흘깃 노려봤다. 당황스러워 미치겠다.
같은 성별끼리 애를 낳는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을 하고 자빠져 누워 있네. 우서가 정혁을 한참을 탐탁지 않게 흘겨보고 있는데 두 사람이
그의 상태를 걱정해 왔다.
“그나저나 서 팀장, 몸이 좀 어떻답니까.”
“아, 응급 처치가 좋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감사하다 얘기하고 싶었어요. 더 위험했을 수도
있었던 건데… 덕분이에요.”
“이 녀석이 다 배운 게 있는 모양입니다. 바로 지혈하면서 조치를 취하더라고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당황해했다. 비록 실수를 해 빌미를
제공했을지라도 모든 게 다 저 사람 탓이라 할 수도 없었고 다친 서정혁을 잘 살펴 주었다,
우서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병원에서는 이제 의식 찾을 때쯤 됐다고 하는데… 아직 일어날 기미가 없어 보여서
큰일이에요.”
“아이고, 뭐 다 개인차가 있는 거지 않겠습니까. 쯧, 서정혁 이 자식 끝까지 속 썩이네.”
“네, 수술은 잘됐다고 하니깐요, 그리고 경과도 좋고… 아직 못 깨어나서 그게 문제죠.”
“다 저 때문입니다. 서 팀장님 잘못되면 다 제 책임이에요.”
시무룩해하며 힘없이 어깰 늘어트리는 우서를 두고 체구가 작은 남자가 자책을 했다.
그렇지만 우서는 그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단단한 마음을 품고 얘기했다.
“서정혁, 잘못 안 돼요. 쟤 무조건 일어나요.”
“아…….”
“그렇게 약한 애 아니에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와서 잘 알거든요.”
그렇게나 나와 결혼이 하고 싶고 애를 낳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하며 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하는 녀석이다. 그러니깐 서정혁은 분명히 일어날 거다. 칼에 찔려서도 버텨
냈고 힘든 수술도 이겨 냈다. 자신에게 대단한 집착도 있는 사람이기에, 분명히 이뤄 낼 거라
생각했다. 우서는 믿고 있었다.
“그렇죠. 서정혁, 쟤 얼마나 강한 앤데요.”
“그럼요. 서 팀장님 건강하게 일어날 거예요.”
그들은 다 같이 침대에 누워 있는 정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네가 훌훌 털고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 서정혁, 너 지금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야. 이제는 우리 곁으로 와. 널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늦지 않게 나한테
와 줘.
곁에 있는 모든 풍경이 정적이어서, 그의 시간만 멈춘 듯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서가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정혁을 바라봤다. 그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주 긴긴 잠에 빠진 듯한 평화로운 모습으로 모두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는
녀석이었다.

***
정혁의 동료들은 자리를 지키다가 늦지 않게 돌아가고 우서 홀로 남아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밤에 다시 오신다 하던 정혁의 부모님은 우서에게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정혁의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우서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나 그들의 자랑이었던
서정혁이 이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다.
“네, 아주머니가 더는 안 아프셨으면 좋겠어요.”
애먹이지 말고,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이제는 일어났으면……. 우서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정혁을 힐끔 내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푸욱 숙였다. 바이탈 소리가 일정하고 밤이 되어
조용하던 병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네, 걱정 마세요. 부모님들이 힘내셔야 정혁이도 빨리 일어나죠. 얼른 주무세요, 아저씨.”
우서는 밤을 지키는 것만 같은 정혁의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손끝으로 살살 만지며
전화를 끊었다. 네가 일어난다면 네가 날 아무리 놀려도 그리고 나한테 아무리 야한 농담을
해도 그게 다 좋을 거 같다.
“야, 서정혁. 나 그거 몰랐다.”
대답은 없는데 혼자 하는 대화도 조금 익숙해지고 있다. 이 익숙함이 절대 당연한 일이 되지
않게 더는 자신을 혼자 두지 않았으면 했다. 정적과 침묵 사이에서 우서가 다시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하나 봐. 네가 다치니깐 되게 힘드네…….”
정혁의 굳은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으로 온기가 조금씩 전해지고 있었다. 정상의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가 느껴질 때마다 뛸 듯이 기쁘고 행복했다. 슬프고 힘들지만 우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네가 옆에 있을 때는 몰랐지. 나한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인 줄은.”
좋아한다 자각했지만 정혁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은 줄만 알았다.
매일 옆에 있어서 내일도 그리고 몇 년 뒤에도 항상 제 곁에 있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네 사랑과 내 마음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외의 것들을 걱정했다. 부모님이라든지
우리의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타인의 시선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네가 없다면 다른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지난 과거의 걱정들이 다 쓸데없는 것임을 이제 와 깨달았다.
더는 후회하기 싫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서정혁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우서가 후회하듯 또 반성하듯 천천히 이야길 꺼냈다.
“아니, 알았던 거 같은데 말 안 했어. 미안,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 줄게. 그니깐 빨리 일어나.”
서정혁이 깨어 있었다면 아마 기뻐 날뛸 그런 대답을 했는데도 녀석에게서는 답이 없다.
“그래. 까짓것 애도 뭐 열댓 명 만들어 보자.”
그 말은 진짜 100 프로 빈말이었다. 진심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허황된 얘기. 서정혁이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오기로 내뱉은 말.
“……?”
그런데 우서는 잡고 있던 손끝이 잠깐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그 미약한 힘이 기적 같아서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손과 정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느낀 이
감각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다가 애타게 그를 봤다.
“……서정혁?”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우서의 손을 좀 더 꽉 잡는다. 우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활짝 핀 얼굴로 정혁에게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섰다. 눈가가 미약하게 움직이더니 눈을
스르륵 떴다. 그러곤 눈이 부신지 몇 번을 감았다 떴다.
“…….”
“서정혁……! 너 정신이 들어?”
우서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의 표식들이 퍼져 나간다. 두 눈이 커다래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리다가도 동시에 어쩔 줄 몰라 굳어 버렸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정혁은 말없이 우서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럴 만했다. 긴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하는 데도 한참의
시간을 쏟았으니까.
“아……! 의사 쌤 불러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뭐부터 먼저 확인해야 될지 몰라 허둥지둥대는데 잡고 있던 손이 붙들렸다. 억센 힘은
아니었지만 그 악력 때문에 뒤돌아서던 우서가 다시 움찔하고는 정혁을 바라봤다.
“여기… 어디야?”
갈라진 목소리로 우서에게 작게 속삭이는데 그 목소리가 기적같이 들렸다. 정혁의 눈동자가
이곳저곳을 훑다가 다시 기운 없이 껌뻑이면서 우서를 바라본다. 막 낮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그는 무척이나 나른해 보였다.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레고 또 가슴이 미어질 듯 벅차올랐다.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샘솟고 금방 눈가에 대롱대롱 맺혔다.
“여기는 병원이고 너 일하다가 다쳐서 여기로 왔어.”
“아…….”
그는 짧게 탄식하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미간과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과거의 기억들이 그를 괴롭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괜찮아. 수술도 잘됐대. 금방 나을 거야.”
툭 치기라도 하면 눈물을 마구 떨굴 것 같을 정도로 감격해서, 우서는 눈물을 매달고도 닦을
줄을 모르고 먼저 정혁부터 안심시켰다.
그런 우서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이름을 불러 왔다.
“진우서.”
“으응. 왜?”
정혁의 입으로 다시 들은 제 이름, 기쁜 나머지 높은음으로 대답했다. 우서의 얼굴이 기쁨과
환희로 물들어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못 들을 거라 생각해 가슴이 찢어질 것같이
아팠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말도 안 되게 행복했다.
“근데… 후… 너 방금 뭐라 했어?”
“어……? 나?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 눈 감고 다 들었는데…….”
멍하니 생각해 보지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을 불러
올까라든지 어디 아픈 데 없냐 물은 것밖에는 없는데… 제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우서는 아까
했던 얘기를 다시 더듬더듬 떠올려 봤다. 정혁이 깨어난 기쁨에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깐?”
우서가 눈물을 매달고는 정혁을 바라보면서 무해하게 대답했다. 두 눈을 깜빡이면서 정혁을
바라보니 결국 맺혀 있던 눈물이 톡, 톡, 하고 뺨으로 굴러떨어졌다. 우서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잔뜩 달려 있었다.
뭐라 말했는지 고민해 본다. 정혁이 깨어나니 정신이 아득해져서 계속 얼떨떨하다. 그렇게
서정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 말이 있다.
‘그래. 까짓것 애도 뭐 열댓 명 만들어 보자.’
“어, 너 혹시… 들었어?”
우서는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정혁이 누워서는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진우서… 약속 지켜.”
저거 환자 아니다. 쟤 분명 일찍이 깨어 있었을 거다. 그리고 눈만 감고 내가 한 말들을 다 듣고
있었던 거 아닌가 싶었다. 어이가 없어서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고 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깨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우서가 다시금 평소대로 정혁을 향해서 소리쳤다.
“아, 진짜 서정혁……!!”
우서는 발을 구르면서 볼에 흐르는 눈물도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 냈다. 못 들을 줄 알고
숨김없이 본심을 말했던 건데 다시 생각해 보니 모두 다 창피했다.
짜증 난다. 적당히 말할 걸 싶었다. 이렇게 또다시 약점 잡힐 줄은 몰랐다. 서정혁은 이제
앞으로 저를 얼마나 놀려댈까, 상상할수록 미래가 암담하기도 했다.
기쁜데 복장이 터진다. 아주아주 다양한 감정이 우서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창피한데 기쁘다. 행복한데 짜증 난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애써 변명했다.
“서정혁, 너 그거… 환청이야. 아파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라고.”
“아닌데. 똑똑히 들었는데.”
이제는 눈물이 쏙 들어간 채로 정혁을 향해서 항변했다. 애를 낳겠다는 저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이 결국 정혁의 의식을 되찾게 한 것일까, 무슨 소환 마법 주문이라도 돼? 우서는 어이가
없어서 계속해서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에 침을 묻혔다.
“아니라니깐? 나 진짜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니 그…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은 진짠데
그러니깐 그게…….”
결국 우서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무얼 부정하고 또 무얼 긍정해야 될지 머리가
뒤죽박죽이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스스로가 짜증 나서 울상을 지으면서도 이 상황은
못내 기쁘기도 해서 입가가 씰룩이는 걸 반복했다. 정혁도 황당하다는 투로 웃었다.
“아… 존나 어지럽다. 지금.”
“아, 맞다. 빨리 가서 의사 쌤 불러올게.”
정신 차려야지 싶어 우서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들기며 서정혁에게 잡힌 반대쪽 손을
풀어내려 할 때였다.
“그게 아니고. 네가 나랑 애를 만든다고 하니깐. 어떻게 맨정신으로 버텨.”
“이게 진짜……!”
머리를 두들기던 손으로 우서가 곧장 정혁을 향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눈 깜짝 않는 서정혁은 더욱더 재수가 없었다. 칼을 맞고 나니
주먹은 별 위협도 안 되나 보다. 때릴 테면 그렇게 해 보라는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대 칠 거야? 환자한테? 나 지금 깨어났는데……?”
“몰라, 너 입이 너무 살았어. 아픈 거 거짓말이지, 나 집에 갈 거야.”
주먹을 내리고 그를 노려보다가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서정혁, 목은 다 쉬고
입은 살아서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로다가 농담을 뱉어 오니 기분이 더욱 이상했다.
“아, 진우서. 나 갑자기 아픈 거 같아. 배랑 머리랑 어… 여기저기 다 아파.”
갑자기 또 아프단다. 우서가 가방을 챙기려다가 정혁을 홱 노려봤다.
“말하기가 힘들고 자꾸 숨이 차.”
정혁은 계속해서 자신의 상태를 어필해 왔다. 아주 좋은 먹잇감을 겟한 자의 표정으로 그리
말하면 누가 믿어 주겠냐고! 분명 아프고 초췌한 게 맞긴 한데 의심이 들기도 했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쳤다는 건 지금 서정혁의 엄청난 무기다. 저의 발목을 칭칭 감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기도 했다. 후우, 하고 우서가 한숨을 쉬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깐만 기다려. 밖에다가 너 깨어났다고 말하고 올게.”
그런데 정혁이 대뜸 잡은 손에 힘을 줘 우서를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저지했다.
“나 괜찮으니깐… 잠깐만.”
“응?”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있어.”
“그래도…….”
갈라져 나오는 거친 목소리에 다시 또 그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정혁이 한마디를 툭 뱉을
때마다 감정이 마구 널뛰고 있었다.
“진우서 네 얼굴 더 보고 싶어… 못 본 지가 오래된 거 같아. 내가 너무 오래 잔 것 같아.”
그 말에 우서의 머리가 띵하게 아파 왔다. 낮게 깔린 메마른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니
마음이 이상하다. 저는 계속해서 누워 있는 정혁의 얼굴을 봤다지만 녀석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 긴장이 됐다.
“진찰부터 먼저…….”
“보고 싶었어, 우서야.”
정혁에게 그리웠던 존재라는 걸 실감하자 불에 덴 듯 얼굴이 홧홧하고 뜨거워졌다.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자꾸만 해 오는 그 고백들이 가슴을 세차게 뛰게 한다. 판단력은 흐려지고 눈앞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그런 말을 하면 기분이 정말 정말… 이상하잖아.
“…….”
우서는 정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날렵하고도 뾰족한 얼굴이 자신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고 반듯하고 곧게 뻗은 코와 단정한 입술 또한 강직하고 심지가
굳어 보인다. 그의 표정이 무척 진지해 지금 이 고백만큼은 절대로 가벼운 장난 따위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아프지만 변함없이 멋있는,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고, 더욱 사랑스러워 함께하고 싶은… 서정혁.
그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나도 보고 싶었어.”
우서도 결국은 입술을 달싹여 대답했다. 병실의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비치고 있었다.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화려한 이 도시 속에서,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병실의 조명 아래서 정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나랑 사귀는 건가.”
그의 눈이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일어나서
성급하게 꺼내는 말이 고작 그딴 거라니…….
의식을 차리고 나서도 저만 찾는 무서운 집착이다. 이 정도면 내가 졌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
말이다. 우서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게 아니면 나랑 애부터 먼저 낳고 싶은 거야?”
잠시도 슬퍼할 수 없게 정혁은 계속해서 실없는 농담을 툭툭 뱉었다. 제가 걱정되는지 잡은
손은 힘을 더욱 주어 진심이 전해지도록 애썼다.
“이 미친놈… 진짜 너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아, 죽다 살아난 사람을 다시 죽이겠다니, 진우서 너무 잔인한데.”
우서의 눈에서 또 눈물이 뭉글뭉글 차올랐다. 아무래도 눈에 병이라도 걸렸나 보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온다. 우서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정혁을 바라봤다.
흐릿하고 뿌옇게 보이는 풍경에서 정혁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흐윽─ 흡.”
왜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했지. 나 이과 나왔는데, 시나 소설 따위에 별 관심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몇 마디 얘기 때문에 자꾸만 벅찬 감정이 차고 넘쳐서 더 이상 감당이 되질 않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정혁이 재촉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서는 끄윽─ 끄윽─ 울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우서야, 이리 와.”
“흐으…….”
그제야 긴장이 풀린 우서가 눈물을 벅벅 닦으면서 정혁의 품으로 다가갔다. 눈앞이 흐릿하다.
그런데 정혁의 얼굴과 그의 손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제가 가야 할 곳은, 가서 머물러야 할
곳은 저곳이 맞다. 우서는 확신이 들었다.
다신 정혁의 품에 안기지 못할 줄 알았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하고 공포에 떨었는데,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서 그게 투두둑, 떨어져 정혁의 얼굴을 적셨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품,
그리고 익숙한 서정혁. 그에게 조심스레 가 안겼다.
정혁의 머리와 얼굴을 감싸고 꺼칠한 볼에 손을 올려서 그를 매만졌다. 그제야 실감 나는
서정혁이란 존재가 저의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손끝으로 전해져 와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주고 풍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혁이 우서의 어깨를 도닥였다. 울지 마. 울지 마, 진우서. 이렇게 귓가에 속삭여 주니 행복해
미칠 것만 같았다. 한밤중 병실에서 듣는 고백이 이렇게나 다디달 줄은 몰랐다.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감동으로 제 마음을 꽉 채워 줄 줄도 몰랐다.
창 너머 저 멀리 건물의 전광판에서 웃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들……. 정혁의 품에 안기니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의 만물들.
네가 내 곁에 없는 동안 계절이 어떻게 바뀌고 또 시간이 어느 정도로 흐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었다.
창밖에서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비가 흐드러지게 내리고 있다.
밝고 투명한 꽃잎이 밤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들이 팔랑이며 온 세상을 뒤덮는 순간 그의
고백이 들려왔다.
“사랑해, 우서야.”
서정혁이 돌아왔다. 완전히 제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너와 나.
후회 없이 사랑을 할 거다.

***

진찰과 검사를 받고 괜찮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무리하지 말고 이렇게 3 주간 입원을


하라는 얘기까지도. 부모님들이 와서 눈물의 재회를 하고 정혁도 부모님들께 걱정시켜
죄송하다며 얘기를 나눴다.
우서는 옆에서 감격적인 모습을 보고 다시 찔끔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는가, 그동안의 괴로움을 잘 느낄 수 있어서 더욱더 마음이 찌르르─ 하게 울렸다. 우서의
부모님들도 곁에서 함께 눈물을 훔치곤 했다.
하지만 정혁은 우서와 단둘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컨디션이 돌아오기 시작하며 이제
병간호는 필요 없으니 쉬시라며 기어코 제 부모님들을 병실에서 쫓아냈다.
손을 뒤로 뻗어 손등을 계속 쓸어내리는데 그 행동이 꽤 바쁘고 애타서 우서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혀 정혁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불효자.”
“남자는 자기 배우자랑 자식한테만 잘하면 된다 했어.”
“미친놈. 자식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 말에 우서가 곧장 날을 세운다. 요즘 우서는 자식이라는 소리에 예민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왜, 열댓 명 키우기 힘들면 좀 줄여 볼까? 대여섯 명 정도로?”
“즈응히 흐르그 했지.”
우서가 이를 악물고 화를 삭여 가며 얘기를 했다. 그러자 정혁이 뒤를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서정혁은 나라 살림에 이바지하고 싶은 큰 뜻이 있는 듯했다.
“아, 우서야. 답답하다. 빨리빨리 밀어 봐. 내가 무슨 노인도 아니고 이렇게 느려.”
“이게 무슨 바이크냐……? 속력을 내게?”
“좀 더 빨리.”
“이 씨─”
우서는 결국 정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휠체어를 조금 더 세게 밀었다. 덩치도 커서 무겁고
힘이 들어가 팔도 아팠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서정혁은 못 걷겠다면서 엄살을 부려댔다.
힘이 안 들어간다며 우서에게 부축을 해 달라 안겨 와서 겨우겨우 타협한 게 이 휠체어였다.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상처가 믿을 수 없게 빠르게 낫고 있단다. 그 속도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돼서 견줄 만한 게 없다 했다. 의사 선생님도 신기한 케이스라며 안경을
벗고 차트를 볼 정도였다.
서정혁은 어제부터 병실이 답답하다며 계속 투정을 부려댔다. 결국 녀석을 휠체어에 앉혀
두고 병원 10 층에 있는 테라스 정원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는데 정혁에게서 곰살맞은 칭찬이 들려온다.
“옳지, 잘한다.”
“하아, 힘들어.”
우서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정원의 문을 열고 나가자 바람이 화악─ 불어오는데 이제 더 이상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한 날씨였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둘이서 나란히 풍경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높다란 건물들과 줄지어 지나다니는 차들, 바쁜
도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소였다면 우리 둘도 저 안에 속해 있었을 텐데… 정혁과
한가로이 하루를 보내고 있어서인지 감회가 남달랐다.
이제 봄은 가고 여름의 향기가 물씬 느껴져 싱그럽고 상쾌하기도 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한 계절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들이마시는 공기가 이렇게 감사한 거라는 걸 그동안은
몰랐다.
“나 좀 일으켜 줘.”
“무리하지 마. 너 그러다가 덧날지도 모른다고 그랬잖아.”
우서의 부축을 받은 정혁이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통증을 느끼는 듯
표정이 좋지 않은데도 결국은 두 발을 땅에 디뎌 걷는 걸 해낸다. 우서가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건넸다.
“이렇게 다치면 뭐, 나라서 잘했다고 영웅으로 인정이라도 해 준대?”
“아픈데 잔소리까지 하고… 연인 사이에는 걱정만 해 주는 거야. 잔소리하려면 빨리
결혼하든가.”
그 말에 우서는 정혁을 쏘아보고 입을 다물었다. 결혼 얘긴 들을 때마다 소름 돋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 왜 이렇게 힘든 부서로 간 거야. 동료들 말 들어 보니깐 네 보직이 엄청 힘들고 바쁜
업무라던데. 바꾸면 안 되나……?”
대신 며칠 전부터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위험한 일이 앞으로 계속해서 닥칠 테니 최대한 피해서 안전한 일을 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직급이 높고 젊기에 지원한다면 충분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
“나 빨리 승진해서 너한테 멋진 남편 되려고.”
“웃기시네.”
“우리 애들한테도 멋진 아빠 돼야지.”
그 말이 농담인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염려하던 마음이 스르륵 허물어진다. 정혁의 얘기를
듣고 나니 걱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믿음이 생겨난다.
“우서야.”
정혁이 바로 앞에 서서 얼굴을 바라보다가 볼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나 칼 맞는 순간 네 얼굴부터 떠오르더라.”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눈을 깜빡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정혁을 바라봤다. 옥상의
정원에 마주 선 두 사람은 그렇게 타오르는 해를 받으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푹 꽂히는데 아픈 게 심상치가 않아. 그래서 아, 좆 됐다. 하고 기도부터 했지.”
노을이 비치는 정혁의 얼굴은 무척 붉어 보였다. 훤칠하니 멋있고 시원하니 매력 있는
모습이다. 살이 조금씩 올라서 윤이 나고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 의지하고 싶은 늠름한
외형이었다.
“하나님, 이 칼이 제 몸에 들어왔지만 제발 성기능에는 문제없게만 해 주세요. 저 절대로
절대로 이거 뺏어 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 우서 눈에서 눈물 안 흘리게 잘 데리고 살 테니깐요.
제발……!”
정혁은 기도하는 시늉을 하며 손까지 모으고 간절히 비는 연기를 했다. 그런 그를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우서가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이 씨, 너 이리 와.”
이 상황에도 농담하는 녀석이 미워서 손을 들어 이마를 콱 때렸다.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데
저를 두고 저렇게 태평해서는 안 된다.
“쓰읍─ 고마워, 진우서. 다친 덴 하나도 안 아프고 대신에 머리가 지끈거리네… 고통 돌려
막기 아주 좋아. 색시가 때려 주니깐 정신이 번쩍 드네. 내가 누구지 하고 요즘 좀
혼미했었는데.”
“미친놈.”
웬 또 색시 타령인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어서 우서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정혁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서정혁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아픈 사람을 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입이 살아난 녀석이라면 예외였다.
“근데 진우서, 우리 사귀는 거냐고. 빨리 대답해 줘.”
정혁의 뺨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저 녀석 쑥스러움을 타는 건 아닐 텐데…
분명히 아닐 텐데……. 왜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자 우서의 마음이 덩달아 두근거리고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것처럼 기분이 묘해져 간다. 우리가 10 대의 소년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고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녀석, 당당하고 멋지고 여유 있는 표정은 그대로인데 긴장한 티가 나서 그 모습이 우스웠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니 우서도 덩달아 긴장이 돼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아, 몰라. 어제도 좋아한다고 얘기했잖아.”
“확실히 말해 줘. 이제 파트너 아니고 정말 애인이 맞는 건지.”
“…….”
“나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전에 정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무사히 돌아오면 너 이제 나랑 사귀는 거냐.’
“너 이게 무사히야? 걱정 잔뜩 시켜 놓고 이게 무사히가 맞는 거냐고!”
또 언성이 높아졌다. 그 약속을 끝으로 정혁이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살아 돌아와서 너랑 멀쩡히 얘기하고 있으면 이게 무사한 거 아닌가. 그리고 너도 알겠다며,
그때 약속했던 말이랑 다르잖아.”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마른다. 그래서 한숨을
쉬는데 정혁은 여유 있게 반응을 즐겼다.
“후…….”
“존나 좋아해, 진우서. 내가 너 오랫동안 눈독 들여 왔어.”
우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서정혁이 얄미워서 크게
한숨을 쉬고 테라스 난간에 팔을 걸쳤다. 막상 하려니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조금 필요했다.
내 생에 서정혁에게 고백하는 순간이 오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잠시가 몇 초가 되고 또 몇 분이 된다. 정혁도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두고 턱을 괸
채로 저 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팔랑팔랑 날리는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굳세게 마음을 먹고 정혁의 이름을 불렀다.
“야.”
그러자 정혁이 턱을 괸 채로 옆을 돌아보고, 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말간 얼굴이 무슨 말을 할 거냐고 그리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깨어나거든
완전한 사랑을 할 거라 다짐했고, 솔직히… 지금의 서정혁이 무지 좋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에 이제는 말하려 했다. 후회 없이 말하고 싶었다.
“진우서… 있잖아. 나 솔직히 겁났다.”
그런데 정혁이 웃으면서 타이밍을 가로챈다. 그 말을 꺼내는 정혁의 표정이 무언가 쓸쓸해
보였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사라지고 황금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도시의 저녁과 밤의
경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정혁의 나지막한 고백도 이어져 온다.
“정말 깊숙하게 찔린 거 같은데, 이러다 영영 못 깨어나면 어떡하지. 그 생각 하니… 무서웠어.”
아름다운 서정혁, 그의 날렵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근데 무언가가 엄청 아쉬워. 내 눈이 감기고 정신이 아득한데도… 네 생각이 가장 먼저 났어.
내 눈앞에 네가 자꾸 아른거리더라.”
정혁이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 옆모습이 아름다워서 홀린 듯 바라보게 된다.
“그게 왜일까 계속해서 생각해 봤거든.”
무언가 떠올리듯이 눈썹을 찡그리던 정혁이 입술을 달싹이며 고백하듯 얘기했다.
“네가 회사 가고 혼자 병실에서 누워서는 내가 주로 낮에 하는 것들은 그런 거야. 명상.
지난날을 되돌아보지.”
“그래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뭘 느꼈는데.”
반대로 우서가 물었다.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네 생각들이 궁금해진다. 그러자 정혁이 눈을
뜨고는 턱을 괸 채로 다시 우서를 바라봤다. 손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환자복을
입어서인지 더욱 짓궂고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진지하다.
그래서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서정혁과 진우서, 지금 우리가 몇 살인지 대체 우린 여기서
무얼 하는 건지를 말이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또 지난주였던 것 같기도 하다. 너와 채팅 때문에
만났던 몇 달 전 같기도 하고 또 대학교 다니면서 아주 가끔씩 만났던 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너는 항상 이렇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서정혁은 항상 내 옆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그러고 보면 네 주변을 기웃거리긴 했어도 너한테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
“음… 그랬지.”
그냥 친구였고, 사실 친구라고 하기엔 어색한 관계였다. 서로 어정쩡한 라이벌과 지인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부모님들과 얽혀 있던 사이였다.
“난 학교 다닐 때 네가 참 부러웠어. 네 똑똑한 머리도 무심한 네 성격까지도. 근데 그건 그냥
또래끼리 갖는 경쟁의식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치부했었거든?”
정혁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힘들고 각 잡힌 조직 생활을 하는 데 이골이 나고 숨이 막히고. 누구 라인을 타네 누가 이번에
진급을 하네 이런 얘기 들으면서 또 경쟁은 시작되고.”
머리가 지끈지끈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흔들었다.
“근데 우연히 널 보는 순간엔 모든 마음이 가벼워져.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거 같아.”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고 노을을 받아 결 좋은 머리가 더욱 반짝여 우서의 시선 끝에서
아른아른댔다.
“그래서 나 특히 너한테 농담도 많이 하고 짓궂은 장난도 쳤었어.”
우서도 동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배 속이 칼로 후벼지는 순간에, 아 나 진우서한테 너무 실없는 사람으로만 기억되면 안
되는데, 한없이 가벼운 사람으로 남기 싫은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고 미어져 숨이 턱 막혔다. 노을빛 때문에 더욱 성숙해
보이는 정혁. 우리 언제 이렇게까지 자랐을까.
“그 후회가 너무 커서 미련이 남더라고.”
정혁을 바라보니 눈을 마주쳐 온다.
“내 진심을 전해야 하는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나란 사람 아직 다 못 보여 줬는데.”
“진우서가 정말 날 가볍게만 생각하고 재수 없다 그렇게만 기억하면 어떡하지.”
“나 아직 내 마음 반의반도 못 보여 줬는데.”
그가 고백하듯 나지막하게 얘기하고 마치 독백인 것처럼 우서를 향해서 속삭였다.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흘러와 귓가를 간질인다.
“우서야, 나는 너한테 지금 진심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를 따라서 우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하는 정혁의 말이 모두 다 이해가 됐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저도 똑같은 감정이었으니깐.
“넌 어때.”
우리는 어쩌면 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또 친구라는 틀 안에 서로를 가두고 감정을 꼭꼭 숨기고 눌러 왔던 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제는 후회 없이 얘기해야만 한다 생각했다.
“서정혁.”
“……응.”
정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사귀자.”
우서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투박하고 거칠고 이상하고 조금 모난 구석이 있는 그런
고백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랑 고백 따위를 내가 먼저 서정혁에게 할 줄은 몰랐다.
정혁의 얼굴이 점점 피어난다. 믿기지 않아 얼떨떨해하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입술을
혀로 축인다. 그러고는 저 멀리 노을을 한번 바라본 뒤에 주변을 돌아봤다.
미끈한 목선이 드러나고 정혁은 이곳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한 후에 감격한 얼굴로
행복하게 웃었다.
어린 날의 우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랑한다는 감정 앞에서는 원초적으로 돌아가
버려 그 외의 것은 보이지가 않는다. 단지 그 사람 그 자체가 사랑스러울 뿐.
“흡─”
정혁은 곧장 우서의 입술에 키스해 왔다. 도톰한 입술이 맞물리고 금세 혀끝이 닿아 왔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그의 어깨를 안고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며 꽈악 품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꽉 껴안아 주는 정혁의 손길에 마음이 단단해지고 풍요로워진다.
친구도 못 됐던 미숙한 사이서 얼떨결에 파트너가 되고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연인으로 한 단계
성장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던 인연을 그동안 모르고 무시해 왔던 것 같다. 마음이 벅차다.
모든 게 이제야 다 맞물리는 느낌. 태엽이 제대로 맞아 돌아가며 이 세상이 이제 다르게
보인다.
가슴이 벅차서 정혁의 입술을 더욱 세게 감쳐물었다. 혀가 섞여 오고 얽혀 오는데 말캉하고
따뜻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너와 이렇게 연이 닿아 만난 것에 모든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정말이지
아름다워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더 이상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충만한 행복을 깨닫게
된다.
입술을 맞추고 볼을 비비며 서로 행복하게 웃었다.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온 서정혁. 늦은 만큼,
돌아온 만큼 우리 사랑에는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
5. 체포 완료
퇴근하고 병원으로 오는 우서의 일상은 계속됐다. 정혁은 병원서 치료받으며 정상 컨디션을
회복해 갔는데, 하루에 두 번씩 붕대를 갈았고 항생제 따위의 주사도 여럿 맞았다.
낮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물리 치료를 하고 있다고도 전해 들었다. 직장에 가 있는 우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다만 빠르게 낫고 있고 이제는 멀쩡하게 거동 가능하다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좀 숙여 봐.”
제 애인은 왜 이렇게도 아이 같은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굳이 해 달라며
치덕거리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우서는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손바닥에 거품을
슥슥 내서 정혁의 머리칼에 비볐다.
“아, 거기도 시원하다… 좀 더 세게 문질러서…….”
유난히 깔끔을 떤다. 그것도 우서가 오면 더 그랬다. 그래서 우서는 정혁을 챙기느라 거지꼴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병원서 자다 일어나서 회사에 허겁지겁 가는 날이 많아졌고 집에 가 있는
시간도 잠깐이었거니와 그마저도 필요한 것들만 챙겨 나오곤 했다.
반면 서정혁은 병원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특히 옆 호실의 환자들이나 환자의 가족들 그리고
간호사들이 정혁을 꽤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우서는 무언가 찜찜했다. 여기서 더 멋있어지면 안 될 거 같다. 이제 조금씩 불안하다.
그래서 지금 서정혁 모르게 드라이를 대충대충 하는 중이었다.
“아, 뜨거워. 좀 성심성의껏 말려 줘라. 이제 나랑 사귀는데 어떻게 로맨틱한 건 하나도 없냐.”
머리를 말려 주다가 괘씸한 나머지 정혁의 등짝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아─!”
아무리 여기가 화장실 안이라지만 밖에는 정혁의 부모님이 있다. 다 듣고 계실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우서가 거울을 통해 정혁을 노려봤다.
“말조심 안 해? 나 진짜 너무 무섭단 말야……!”
진짜 저 입을 꿰매 버릴 수도 없고… 한숨을 쉬면서 우서가 휘적휘적 부드러운 머리를 비볐다.
스타일링 없이 엉터리로 말려 주니 통쾌해 기분이 좀 나아져 간다. 그러고 보니 정혁의 머리가
많이 길었다. 퍽퍽퍽 투박하게 손을 놀리는데 어느새 앞머리가 눈을 다 가릴 정도가 됐다.
“걱정 마. 안 들린다니깐? 그리고 알아서 좀 들으시고 우리 관계 눈치 좀 채셨으면 좋겠는데…
….”
“제발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우서가 정혁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때리고는 입단속을 시켰다. 그런데 녀석, 산발을 해도
멋있긴 하다. 머리카락 안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눈빛이 매력적이어서 멋지단 말이야…….
그래서 우서가 불안한 거였다.
“야, 서정혁. 너 근데 진짜 번호 안 준 거 맞지?”
“그렇대도. 몇 번을 말해.”
옆 병실에 입원한 환자의 가족들이 자꾸 먹을 걸 들고 우리 방에 오는 게 심상치 않아 그것도
단속하고 있었다.
흠…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서정혁이 제게 이렇게 집착하곤 했었는데……. 이제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고야 말았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우서는 이상하고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식혀 줘.”
제 애인은 요구 사항도 많았다. 침대 위로 탁상을 펼쳐 놓고 병원 밥을 올려 두었다. 이젠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정혁은 당연한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식판에는 미음 비슷한 쌀죽과
미소 된장국, 푹 삶아 무친 야채, 그리고 잘게 찢은 고기 조림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혼자 먹을 수 있잖아.”
“갑자기 숟가락을 들 수 없을 만큼 아픈 거 같아서…….”
평소에 멀쩡하던 서정혁은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엄살을 부려 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서가
대신 밥을 먹여 주고 수발을 들고 있었다.
“이젠 네가 직접 먹으라구.”
“알잖아. 나 이렇게 팔 들면 아파하는 거.”
그는 팔을 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겨 버리니 더욱 껄렁해지고
엄청 능글맞아 보였다. 경찰이었을 때의 각이 사라지니 이제 정말 다른 사람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전에 알던 누군가가 아닌 완전히 다른 호남형의 남자와 사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서가 호호 불어서 숟가락을 넘겨주니 정혁이 그 귀여운 짓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씩 웃는다. 그는 입을 살짝 벌려서 아─ 하고는 그 안을 가리켰다.
“…….”
먹여 달라는 거였다. 우서가 정색하고 그대로 숟가락을 내팽개쳐 버리려고 할 때였다.
저 뒤에서 앉아 계시던 정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뒤이어 고맙다는 말을 해 왔다.
“우리 우서가 이렇게나 정혁이 생각해 주는 줄 몰랐는데, 아줌마 정말 감동했어.”
맞다. 자꾸 부모님이 계신 걸 까먹는다. 정혁에게로 완전히 정신이 팔려 버려서 그 외의 것들을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다. 과한 스킨십이나 여지를 주는 말들은 없었는지 다시 생각해 봤다.
우리 둘이 이렇게 복작거리는 걸 보시고도 사이좋은 친구라 생각하시니 그것만큼은
천만다행이었다.
“요즘 부쩍 우서랑 정혁이 사이가 좋아진 거 같아.”
그 말에 우서가 조금 뜨끔하고 만다. 어버버 하다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수저가 흔들려서
소복이 쌓아 놓은 음식물이 식판 위로 후두두 떨어져 버렸다.
조금 전 오해 살 만한 짓은 안 했는지 생각해 보는데… 우리 너무 다정했나, 제가 너무 나댔나
싶었다. 아, 머리까지 말려 주는 건 좀 자제했어야 됐나… 후회가 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 보니 다 괜찮았던 거
같다.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정혁이 우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진우서, 뭐 해. 나 먹여 줘야지.”
그러고는 손에 잡힌 숟가락을 끌어당겼다. 그래서 정혁의 입에 쑤욱 들어가게 된다. 아, 안 돼
……! 내가 손수 밥을 먹여 준 꼴이 되잖아! 우서가 눈을 홉뜨고 경악했다. 정혁은 손등을 살짝
쓸면서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죽을 천천히 삼켰다. 아주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저희가 고비를 넘기고 서로의 소중함을 알았달까요.”
그러자 뒤에서 아하하─ 하고 정혁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정혁의 얘기를 농담으로
재밌게 들으시는 모양이지만… 우서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아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새파랗게
질렸다가 순식간에 다시 새빨갛게 변해 갔다.
붉으락푸르락하며 들고 있던 빈 숟가락으로 부모님 몰래 정혁의 뺨을 가볍게 쳤다.
‘하. 지. 마.’
눈으로 욕했다. 음성은 아니었어도 입 모양으로 정혁에게 그리 말을 했다. 아직까지 우리
관계는 부모님들께 비밀이다.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그런데 정혁은 개의치 않아 하며 볼에 붙은 풀떼기를 떼먹었다. 그리고 한 입 더 줘 보라며
저녁상을 향해 턱짓했다. 우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하고 밥을 푹─ 펐다. 그러면서 보란
듯이 싱긋 웃었다.
“정혁아, 입 다물고 밥 먹자. 우리.”
우리 며칠 전 약속도 했단 말이다. 부모님들 앞에서 절대로 티 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들켰다간 너랑 나 정말 끝장날 거라고. 나 그냥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거라 했더니 정혁도
오픈할 생각은 일절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믿었단 말이다!
“아, 우서가 주는 게 맛있네. 역시 우리 우서가 주는 건 다 맛있어.”
정혁은 그러면서 동시에 가슴과 사타구니 근처를 힐끗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결국은 우서가 반찬에 숟가락을 던져 퍽 소리 나게 내리꽂았다. 마지막
경고였다. 속으로는 온 세계의 각양각색의 욕들을 하며 날카롭게 시선을 쏘아 줬다.
정혁이 날아와 꽂힌 바람에 반동으로 흔들리고 있는 숟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왜 밥숟가락을 던져, 우서야.”
“미끄러진 것뿐이야. 네가 그만 먹고 싶어 하는 거 같길래.”
“설마. 네가 주는 건 아무리 줘도 부족하지가 않달까.”
“이─ 씨!”
주먹을 들어 올리다가 우서는 정혁의 부모님을 의식하고 겨우 화를 참아 냈다. 투닥거리며
어렵사리 식사도 마쳤고 아주머니 아저씨가 해 주시는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도 꽤 흘렀다.
밤이 깊어 가자 두 분은 집으로 돌아가실 채비를 했다.
정혁과 우서가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데 두 분이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아줌마는 우서한테 정혁이 맡기고 갈게. 고마워.”
“후… 서정혁이 말을 좀 안 듣긴 하지만 걱정 마시고 두 분 들어가서 쉬세요.”
“정혁아, 우서 말 잘 듣고, 이런 친구가 어딨니.”
아줌마는 농담 식으로 호호 하며 정혁을 나무랐다.
“우리 아들이 다친 건데 우서한테 면목이 없네.”
“아저씨, 그렇게 생각 마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깐요.”
“아이고. 우서가 그렇게 말해 주니깐 고맙네. 너희 엄마가 너 하도 병원에만 있어서 얼굴
까먹겠다며 안부 좀 전해 달라더라.”
쓰읍─ 집에 안 들어간 지 좀 오래되긴 했다. 아주머니가 말해 줘서 이제야 날짜를 헤아려
본다. 며칠 째더라… 한 3 일쯤 됐나, 들어가도 새벽에 옷만 가지고 나올 때가 많았다.
“아줌마가 미안하네, 우서도 쉬어야 될 텐데…….”
두 분이서 우서를 향해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다른 목소리가 떡하니 끼어들어
대답을 가로채 간다.
“아니에요, 우서 여기 있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내가 재밌게 해 주니깐 맨날 여기 오고 집에
안 가는 거잖아. 그렇지, 진우서?”
그렇게 묻고는 정혁이 입술을 비틀어 미소 지었다.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해, 누운 건지 앉아
있는 건지 기댄 건지 모를 어정쩡한 자세로다가 고개는 삐딱하게 하고선 거만히 말해 왔다.
“어……? 아하하─ 좋아하다마다요.”
하고 우서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아주머니 아저씨를 보면서 웃어 버렸다. 그 틈에
정혁은 뒤에서 손장난을 해 온다. 우서의 손을 바삐 간질이고 검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여기 남아서 매일 서정혁이랑 장난치다가 키스하며 밤을 보냈다. 부모님들께 이런 말을
들으니 배덕하다 못해 너무 죄송스러운데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닌 척하는
수밖에.
우서가 마르는 입술에 계속 침을 묻히고는 정혁이 잡아 오는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뒤에서 아예 굳세게 깍지를 껴 온다. 우서는 결국 몸으로 가려 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웃었다.
“그래도 우서한테 맡기면 걱정 하나도 없지.”
“우서면 정혁이 잘 케어해 줄 거라 생각해.”
“어머니 아버지, 집에 가셨다가 한참 뒤에 오셔도 돼요. 내일 꼭 안 오셔도 되고요.”
“아휴, 아들이 우리 생각을 많이 해 주네.”
그게 아니라고요, 아저씨! 그렇게 두 분은 두 사람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뒤돌아섰다. 정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에서 우서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주물렀다. 우서는 탁, 탁, 불손한 손을
쳐 냈다.
“아, 아저씨 아줌마. 제가 밑에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정혁의 손을 마구 뿌리치고 우서가 병실 문 앞까지 총총 나서려 했다.
“아니야, 우서 힘드니깐 나오지 마. 시간도 늦었고.”
아니요, 나가고 싶어요! 아줌마 아저씨……! 살려 줘!! 그런데 그렇게 저를 밀어 두고는 문이
턱, 닫혀 버린다.
“아…….”
이제 정말로 가셨다. 우서가 허망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배웅하느라 미소 짓고 있었던 그가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뒤돌았다. 그러고는 정혁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야, 서정혁……!”
깃도 없는 환자복을 한껏 끌어모아서 멱살을 쥐었다. 그러자 그 샤프하고 날렵한 얼굴이 코앞
가까이까지 딸려 온다. 정혁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무해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우서야. 이것 좀 놓고 말하지그래……?”
“들키면 어쩌려고 이렇게 장난을 쳐.”
“어쩌긴 뭘 어째. 날짜 잡는 거지 뭐.”
멱살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러자 정혁의 고개가 순순히 끌려 왔다. 그는 바로 앞에서
얼굴을 좀 더 들이밀었다가 턱을 들어 올려 우서의 입에 가벼이 입술을 맞췄다. 촉─ 하고
붙었다가 말캉한 입술이 떨어졌다.
“미쳤어?!”
기습 키스 당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우서가 멱살 쥐었던 손으로 가볍게 정혁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자 정혁이 한쪽 눈을 감고 인상을 찡그리면서 황당하다는 듯이 어깨까지
으쓱했다.
“안 들킨다니깐?”
“그러다 들키면?!”
부모님 나가신 지 30 초도 안 됐을 텐데, 이렇게 과감하게 행동하면 어떡하잔 거야?
“지금도 안 들켰잖아.”
“들킬 확률이 높아진 거지!”
말도 안 되는 궤변에 우서가 학을 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정혁이 멱살 쥔
한쪽 손을 붙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우서를 제 쪽으로 당긴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불퉁하게 대꾸했다.
“어째, 난 너랑 사귀고 매만 더 맞아.”
“맞을 짓을 하니까 그렇지.”
“그러지 말고 우서야, 이리 올라와.”
덥석 손을 잡고 우서를 침대 위로 끌어당기는데, 정혁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그 훤칠한
모습을 거부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서정혁은 병원에서 있으면서 더 멋있어졌다. 전에는 반듯하고 날카롭고 섹시한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풀어지니 끝도 없이 풀어져서는 이제는 한량에 동네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겉모습은 껄렁한 데다가 장난만 치고 야한 농담만 해 온다.
그런데 전의 모습보다도 이게 좀 더 끌리는 것이 이상할 노릇이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게
분명했다.
“우리 여행 갔을 때도 아무 탈 없었잖아. 곁에 있어도 부모님들은 잘 모르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의심하고 계실지도……!!”
“우리 관계 절대 모르신다니깐? 아까 못 봤어? 우리가 엄청 친한 줄 알잖아. 이 정도
스킨십쯤이야.”
그러고는 우서의 가슴에 손을 붙여 살을 그러모았다. 훌렁 티셔츠를 들어 올려 맨가슴을 보고
씨익 웃더니, 그 안으로 정혁이 얼굴을 파묻고 춥춥─ 하고 키스를 해댔다.
“흐, 그땐 그때고, 여긴 호텔 아니고 병원이야……!”
우서가 정혁의 얼굴을 밀어내고 옷을 끌어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힘을 줘 허리에
손을 단단히 감았다. 입술을 파묻고는 버틴다.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 어떻게 참아. 이건 정말 불가능이야. 나 그동안 많이 참았어. 요 며칠
도 닦는 기분이었다고.”
1 인실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그사이 옷이 스르륵 내려가 티셔츠가 정혁의 뒤통수에 가
걸렸다. 정혁이 완전히 제 품에 들어와 버렸다.
“도는 무슨……! 잘만 키스하고 계속 만져댔으면서……!”
“우서야, 나 지금 미칠 거 같아. 섹스 안 한 지가 벌써 며칠째야.”
“흐읏─.”
아, 느껴 버렸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와 우서는 당황해하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아냈다.
티셔츠가 들썩이고 그 안으로 머리통이 바쁘게 움직인다. 살과 가슴 그리고 유두를 할짝이면서
정혁은 끈질기게 애무를 해 왔다. 그러고는 티셔츠 안에서 슬쩍슬쩍 말아 올려 우서의 상의를
벗긴다.
우서는 정혁을 따라 일단 순순히 옷을 벗었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긴장이 풀리니 이제 남은 건 성욕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섹스 안 한 지 꽤 된 듯하다. 정혁이 다쳤던 기간까지 포함하면 수개월, 눈 뒤집어질 만한
기간이긴 했다.
“아냐, 서정혁 너 참을 수 있어. 그 정도 가지고 고자 안 돼.”
“아니? 두 달이면 심각한 거야.”
“너 의식 없을 때는 기간에서 빼야지.”
“그걸 왜 빼. 내 성 기능은 멀쩡했는데.”
저 말인즉슨 아파 누워 있었어도 자신과 하고 싶었단 얘기였다. 우서가 경악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돌았어? 이거 놔!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다 나은 게 아니고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같아. 내일
CT 를 좀 다시 찍어 보든가 하자.”
그런데도 정혁은 완강했다. 결국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우서는 침대 위로 올라와 버렸다.
정혁의 다리를 깔고 앉은 채로 바싹 얼굴을 마주했다.
“너랑 사귄다고 생각하니까 나 완전히 미쳐 버린 거 같아.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나.”
바로 눈앞에 훤칠하니 멋들어진 얼굴이 조금씩 움직이며 제 시선을 완전히 빼앗아 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우서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절하게도
얘기해 온다.
“아직도 꿈인 거 같아. 섹스하면 제대로 현실감이 느껴지려나.”
다른 한 손으로 우서의 가슴을 만지고 손가락 사이로는 젖꼭지를 살짝 비볐다. 그러고는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춰 오며 키스했다. 마주 댄 입술이 따뜻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웠다.
“진우서한테 간호받으니깐 존나 좋다.”
정혁이 입술을 간질이면서 속삭였다.
“그니깐 내 말 좀 들어라.”
“너무 좋아서 맨날 병원에 누워 있어도 되겠어.”
“돌았냐. 난 싫어.”
우서가 어깨를 퍽, 치고는 절대 거부했다. 정혁이 살짝 웃는데 이미 입술은 제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 벗은 몸을 보고 달아오른 모습이 우서의 음심을 자극했다. 왜 이렇게
녀석이 섹시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야 정말 정혁이 다 나았구나 싶어서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평범한 날은 예상하지도 못했었다. 웃으면서 농담을 하고 정혁을
타박하며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우서는 결국 덩치 큰 상체를 꼬옥
안았다.
***

“하아…….”
우서는 정혁의 무릎 위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살며시 눈을 뜨자 마주하고 있던 수려한
얼굴이 보인다. 정혁은 아랫입술을 살곰살곰 빨아내다가 간질이고는 놓아주었다.
정신없는 키스는 계속되었다. 목덜미에도 잔뜩 입을 비비다가 결국 우서의 턱에다가도 촙─ 촙
─ 소리 나게 입 맞췄다. 눈두덩, 콧볼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정혁은 입술을 묻고는
키스했다.
춥─ 춥─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제 거라고 각인을 새겨 놓듯이 세세하게 모든 부분에 흔적을 남겼다.
쇄골과 가슴까지 내려가서는 잔뜩 흡입하듯이 볼을 홀쭉히 해 빨아 당겼다.
“흐읏…….”
성감이 자극되어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우서가 신음하면 정혁이 고개를 들어
다시 키스를 해 입을 막아냈다.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소리를 단속하며
조심스럽게 키스하고 있었다.
우서를 끌어안고 정혁은 사랑스럽다는 눈을 하고서는 기꺼이 그렇게 바라봐 왔다. 자신을
아껴 주려 하는 게 느껴져서 행복했다.
우서도 그렇게 손가락을 놀려 정혁의 상의를 벗기려 했다. 그런데 그 손을 저지하고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조금 한숨을 쉬다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꺼내었다.
“흉이 심해.”
“…….”
그의 말 때문에 우서는 갈등했다. 그래도… 괜찮다. 다쳤더라도 서정혁은 그대로 서정혁일 뿐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다시 한번 그의 옷을 말아 올리려 하니 정혁이 힘주어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너한테 보여 주기 싫어서 그래.”
그래서 단단히 못 박아 줘야겠다 생각하고는 우서는 정혁의 눈을 바라보며 제 진심을 말했다.
“그런 거 가지고 싫어할 거였으면 너랑 시작도 안 했어.”
“후… 진우서 말 안 듣지.”
정혁이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우서를 바라보면서 작게 한숨 쉬었다.
“너야말로 나 안 믿는 거잖아.”
그 말을 듣고는 정혁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서정혁의 마음 충분히 이해는 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흉한 것을 보여 주기 싫을 테고, 상대의
반응이 어떨지 두렵기도 하니깐…….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 쉽사리 바뀔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서정혁에게 좋아한다는 고백도 안
했을 거다. 거기다가 녀석이랑 사귀겠다 결심하지도 않았을 거다. 우서는 그의 옷을 들추었다.
환자복을 벗기니 단단한 나신이 드러나고 여러 겹 감긴 붕대도 보였다. 그 위로는 피가 살짝
비치고 있었다.
붕대에 감겨 있는 상처는 어떨지 상상도 되질 않아, 우서는 다친 부위를 한참을 안쓰럽게
바라만 봤다.
“흉터… 평생 가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정혁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관망하는 태도였다. 그런 걸 왜 묻냐며 성가시다는 얼굴로
우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겸연쩍어하는 표정이었다.
“서정혁. 다쳐도 너고, 흉이 있어도 너니깐, 난 절대 흉측하다고 하지 않을게. 난 네 모습 다
좋아할 수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네가 충분히 속상해할 거 안다.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하는 상처일
텐데. 우서가 굳세게 결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온다면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었다.
지금이 그 얘기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빨리 나아, 서정혁.”
그리고 정혁의 입술에 키스했다. 살포시 맞닿았다가 부드럽게 맞물렸다 떨어졌다. 속상해할
정혁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우서가 용기를 냈다. 그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작게 웃는다.
“응, 네가 빨리해 주면 빨리 나을 거 같아.”
우서는 능글거리는 농담을 하는 정혁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어 탁 소리 나게 쳤다.
“아, 왜 때려.”
“계속 밝히기만 하는 거 보니깐 이미 다 나은 거 같아서 그런다, 왜.”
“아니라고. 무진장 아파서 못 움직이겠으니깐 네가 위에서 해 줘.”
우서는 한 번 더 정혁의 이마를 툭 쳐서 밀었다. 그런데 역시나 정혁이 한 수 위다. 거기다가
다친 걸로 약점을 잡아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는 그렇게 순순히 밀려나서 결국
침대 헤드에 가 기대었다.
“빨리.”
환자들이 쓰는 침대기에 기대앉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정혁은 상체를 비스듬히 하고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우서를 재촉해 왔다. 우서의 허리에서 천천히 손을 뗀다. 그리고 한 손은
머리 뒤로 받치고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우서 보고 알아서 해 보라는 식이었다. 혼자 풀고, 혼자 넣고, 흔들어서 사정을
시키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하고 사정까지 도달하는 모습을 관람하고 즐길 모양인 듯했다.
“후… 그건 좀…….”
우서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곤란해하자 정혁이 안 되겠는지 두 손으로 우서의 허리를 감아
제 몸을 향해 끌어당겼다. 정혁의 웃음소리가 살포시 들려왔다. 결국 그와 몸을 좀 더 가까이
붙여 허벅지에까지 올라가 앉게 됐다.
“네가 내 모든 모습을 좋아하는 만큼 나도 너의 모든 체위를 다 사랑할 수 있으니깐 빨리 해
줘.”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한다. 제 맘은 그게 아니었는데 저질스러운 언사로 변해 간
게 속상해서 우서가 눈가를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짜증 나게!”
“흥분하다가 분수를 싸도 좋고. 기절해 버려도 뭐… 다 좋아.”
“또라이 같은 놈아.”
“진짜야. 오히려 진우서한테 엄청나게 반할지도 모르겠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만해. 그렇게 말하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더 민망하잖아.”
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성기 사이즈와 그동안의 체력으로
봤을 때, 어쩌면… 기절은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서는 정혁이 이제 점차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는 것이 조금씩 두렵기 시작했다.
“빨리 해 줘.”
다시 한번 재촉해 온다. 다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정혁은 격하게 움직여서는 안 될 테다.
결국은 우서 혼자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병실이니 소리도 내선 안 되고… 상상하니
귀까지 달아올라 너무나도 뜨거워지는 듯했다.
“아, 알았다니깐. 그만 좀 재촉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랜만에 섹스하는 거라 긴장이 된다. 혼자 흥분시키고 흥분해서는
절제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니 눈앞이 아찔거렸다. 서정혁을 품었던 게 오래돼서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싶었다. 우서도 정혁과 섹스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요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사귀고 나서 섹스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마음이 연결된 만큼 얼른 몸도 하나가 되었으면 했다.
지금 장소가 적절치는 않았지만, 그동안 우서도 많이 참아 오긴 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인데
한 사람이 다쳤다는 것만으로 억지로 참고 또 참아 온 건 정말 고역이었으니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른하게 바라보고 있는 정혁의 모습을 보니 마지막 남은 이성이
간당간당하게 흔들리다가 툭 끊겨 버렸다.
“서정혁.”
“응.”
“너랑 사귀고 파트너 아닌, 연인으로 섹스할 수 있어서 좋아.”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그렇게 말하니깐 정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화사하게 웃었다.
“나도.”
“그럼… 불 좀 꺼 주면 안 될까.”
일단 저지르고 봤는데, 너무 창피했다. 우서의 애원과 같은 말에 정혁이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순순히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제발…….”
우서의 고개가 떨궈졌다. 정혁이 큭큭대다가는 침대 근처의 스위치를 눌렀다. 커튼까지 단단히
친 병실은 단숨에 암흑으로 바뀌었다. 어둠이 찾아옴과 동시에 그의 단단한 손이 우서의
골반을 잡고 앞뒤로 조금씩 흔들었다. 하반신이 흔들리며 옷을 입은 채로 성기가 서로 뭉근히
비벼지기 시작했다.
옷 위로 점점 탄력을 받아서 단단해지는 성기가 느껴져 온다. 자극 때문에 조금씩 달아올라
순식간에 빳빳해지고 있었다.
“으음…….”
입술을 맞추면서 하체를 계속 자극했다. 커질 대로 커진 그의 성기가 느껴지고 있다. 그렇게
정혁은 만족스럽게 입술을 물고서는 우서의 애무를 즐기고 있었다. 점차 달아올라 욕망에
잠식되어 가는 제 애인을 바라보다가 우서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마치 바지에서 난 소리가 아닌 것처럼 묵직한 소리였다.
바지 버클을 푸는 것, 그것보다도 좀 더 큰 소리였다.
이건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와 흡사했다.
우서가 저 스스로 반문했다. 아까 문을 잠갔던가?
그래, 분명히 잠그고 왔다. 그리고 한 번 더 확인해 봤었다. 이 짓을 들키면 안 되니깐 제대로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했다.
문이 고장 났었나?
저 뒤에서 갑자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헉……?!”
미치겠네! 너무 놀라서 우서가 정혁을 세게 끌어안았다. 맨가슴이 그대로 제 살에 찰싹
달라붙어 왔다. 의지하고 싶다거나 놓치고 싶지 않다거나 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별다른 뜻
없이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게 더 큰 화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두운 병실에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지고 우서는 정혁을 품에 안은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이 부셔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우서는 눈을 좀 더 가늘게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음……?”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이 상황 정말 좆 된 거란
거다. 간호사나 의사라면 이 병원에서 당장 쫓아낼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과 함께 낭패감과 오싹함이 몰려와 우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병실을 찾아온 불청객은 곧장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형광등을 켰다.
“……!”
이 방의 모든 것이 밝아졌다. 홉─ 하고 숨을 몰아쉬고 우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혁을
바라봤다. 눈을 크게 뜨고 서정혁과 시선을 마주했는데 눈에 들어온 녀석의 모습이 가관이다.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 붉게 물든 그의 목덜미와 가슴이 눈에 띄었다.
우서는 고개를 숙여 제 상체를 바라봤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제 몸도 훤히 드러나서는
엉망으로 깨물려 있었다. 불빛 아래서 보니 더욱 야살스럽고 문란해 보였다. 다행인 건 둘 다
아직 하의를 입고 있는 것 정도. 딱 그뿐이었다.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쿵쾅거리면서 뛰어대서 도무지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그런데 문 쪽을 바라보는 정혁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서정혁이 이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다. 마치 아주 좆 된 것만 같은 표정.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상황을 더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경직되는 그의 근육이 느껴져 왔다. 심지어 아래까지
빠르게 식는다. 크게 두꺼웠던 그 형체가 아래서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도대체 누군데 그러는 거지……? 우서도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무서움과 공포
그리고 약간의 궁금증과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헉……!”
문 앞에 있는 형체가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제 눈에 뭐가 씐 게 아니라면 저건… 한 사람이 아니었다. 차례로 그들의 모습이 망막에
맺히고 있었다. 차라리 시력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정확히 넷이었다.
아까 보았던 모습 그대로인 서정혁의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문 앞에 서 계셨다.
그리고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 옆에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엄마도 있었다는 거다.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놀라 서 계셨다. 그 뒤로는 키가 크고 체구가 좋은 자신의 아버지가 보였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져 충격과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계셨다.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모두 똑같았다. 못 볼 걸 본 듯한 경악스러운 표정.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거짓이길 바랐지만 한 치의 오차도 거짓도 없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부모님이
맞았다.
“……!!”
우서의 두 눈이 저절로 커져서는 동공이 확장되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시야는 또렷한데 눈앞은 아득해져만 간다. 동시에 엄청난 현기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
그것도 왜 하필… 이때 오실 게 뭐람! 하늘이 원망스럽고 비통하고 원통하고 제 처지가 처량
맞게 느껴졌다.
몇 분 전 저를 유혹해 오던 녀석을 지금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과감한 행동을 한 제 자신을 미쳤다, 돌았다며 책망해 보지만 지금 펼쳐진 모든 상황을
후회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 말인즉슨 망했다는 거다.
모든 가족이 총출동해서 두 사람의 진한 애무를 구경하게 된 상황이다. 우서는 결국 정혁의
품에 안긴 상태로 굳어 버렸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
하지만 건강한 몸뚱이는 전혀 그럴 조짐조차 없다. 지금 닥친 시련을 똑똑히, 아주 명백히 이겨
내려 하는 훌륭하고도 또렷한 정신 상태가 지속됐다.
정혁과 우서 그리고 부모님들까지 그들은 어버버하며 오랜 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한 공간에
있었다. 정적만 30 초가량 지속된 것 같다. 하지만 우서가 느끼기에 그 시간은 마치 1 억
광년과도 맞먹을 정도로 무수히 길었다. 숨이 꼴딱 넘어갈 정도였다.
“엄마야……!!!!!!”
그 적막을 깬 것은 우서와 오랜 시간 눈을 마주치고 있던 우서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이
부모 신분임을 망각하고 마구 소리쳤다. 해괴망측하다는 표정으로 경악하면서 입을 두 손으로
막고는 두 아들을 향해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뒤늦게 정혁의 어머니도 소리치며 두 사람을 향해서 삿대질을 했다. 아버지들은 못 본 걸 본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패닉인 상황에서 이거 대체 어찌 수습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제발 누가 좀 알려 줘. 아닌가. 전혀 주워 담을 수가 없는 수습 불가인
상태인 건가……?!
“서정혁?”
우서는 다급히 정혁을 바라보고 그와 눈을 마주해 표정을 읽어 내려 했다. 분명 이 녀석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 거다. 모종의 시선을 교환해 보지만 그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우서는 애절하게 정혁을 바라봤다. 너 정말 안 되겠니!? 혹시 모르잖아,
포기하지 말라고 서정혁! 너 위기 대처 능력 뛰어나잖아! 아무거나 기발한 변명을 생각해 보란
말이야……!!
우서가 잡고 있던 정혁의 어깨를 애처롭게 흔들었다. 하지만 정혁은 입술을 짓씹으며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우서를 보고 작게 속삭였다.
“진우서, 미안.”
시발.
안 들킨다면서! 안 들킨다고 네가 아까 그랬잖아! 우서가 속으로 외쳐 보지만 이제 와서 누굴
탓한다고 해 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탓을 할 수만 있다면 서정혁에게 모든 걸 돌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결국 원인을 찾자면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제 몸과 음탕한 생각만 하는
머리를 탓하는 게 제일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 엄마… 그게.”
아닌 척을 해 보려 우서가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이 상황은 모두 오해라고, 다 잘못된
거라고 변명이라도 하려 했다. 그런데 땅을 디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우서가 풀썩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으…….”
비련의 주인공처럼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아니, 왜 다리까지 말을 안 듣냐고……! 우서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얼른 일어났다.
그런데 버클이 풀려 있던 바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앗……! 우서는 골반까지 흘러내린
바지춤을 붙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정혁과 거리를 두었다. 그 모습이 더욱 수상함을
더한다.
“아니… 그게 그러니깐.”
이제 와 늦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보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우서는 두리번거리면서 자신의 상의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티셔츠가 보이지 않는다. 서정혁,
어디다 날려 먹은 거야? 서정혁을 돌아보니 그도 저와 마찬가지로 풀어 헤친 환자복을
부스럭거리며 여미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기가 차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짚으셨다.
충격과 공포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다가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엄마가 왜… 여기에…….”
결국 우서의 어머니가 아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손은 우서의 팔을 잡아채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저 높이 손바닥을 올렸다가 떨구어 우서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아악, 엄마!!! 엄마, 잠깐만!!!!!!”
살에 달라붙을 때마다 찰싹거리며 찰진 소리가 났다. 매 맞기에 민망한 나이 서른이다.
거기다가 손바닥으론 모자란 건지 들고 있던 가방으로도 우서를 마구 때렸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소지품이 날아가고 병실은 엉망진창, 아비규환이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진우서, 이놈 새끼야!!!”
“아니 엄마, 내 말 좀!!!”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저릿한 감촉이 맨살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눈물도 찔끔 났다. 하지만
아픔보다도 쪽팔림이 더 컸다. 거기다가 낭패감 그리고 후회감과 허탈함까지 밀려오니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은 감정이었다. 육체로 느껴지는 고통 따위는 전혀 느낄 수가 없는 정도였다.
“어머니……!!!”
우서가 엄마에게 무방비한 상태로 맞고 있으니, 정혁이 서둘러 침대에서 맨발로 뛰쳐
내려왔다. 그 와중에 우서를 덜 맞게 하기 위해서 등을 감싸 안고는 자세를 낮게 웅크렸다.
그러자 날아오는 매를 정혁과 동시에 맞게 된다. 등으로는 그의 맨살이 느껴져 와서인지 더욱
오싹했다. 커다란 등짝을 찰지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우서는 작게 신음했다.
“으윽…….”
우서는 속으로 엄청난 눈물을 흘렸다.
아… 이제 변명도 소용이 없는 거다. 서정혁이 이렇게 대신 맞아 주면 빼도 박도 못하잖아.
우서는 속으로 엄청나게 오열했다.
“너네 정말 뭐 하는 짓이야!!!”
정혁의 어머니도 가세해 팔을 걷어붙이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자신을 때리고 있는
엄마를 막고 있는 정혁을 때렸다. 서로 물리고 물려 버렸다. 제대로 꼬이고 꼬였다. 두 분이
정혁을 흠씬 두들겨 패다시피 해서 그 충격이 고스란히 우서에게도 전달되어 온다.
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치는 손은 묵직했다. 하지만 까무잡잡한 근육질의 팔과
가슴이 계속해서 우서를 보호했다. 손바닥이 내려앉을 때마다 감싸 안은 팔이 더욱 견고히
우서를 끌어안았다.
“흐읍…….”
그대로 혼절하고 싶은 순간인데… 곁에 녀석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서정혁, 우린 이제 너의 소원대로 평생 함께할지도 모르겠구나. 우서는 마구마구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라고 내가 너 키웠니!!!”
서정혁이 왜 부정을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에 둘러대기 잘하면서 왜……!! 왜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건지 그런 녀석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가 그대로 맞고 있어서 우서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퍽퍽 머리와 등짝을 맞는데 정신이 나갈 것같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등 뒤에서 아버지들까지
팔을 붙이고 가세하려 한다.
“흐으… 서정혁. 나… 무서워.”
아버지들이 다가오는 게 슬로 모션처럼 보이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동시에 저희에게로
무지막지하게 달려오는 것 같아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후… 괜찮아.”
그렇게 말해 주니 말도 안 되지만 이 상황을 왜인지 모르게 체념하게 되고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정혁이 더 굳세게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아저씨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우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서정혁 너 이 자식, 뭐 하는 짓이야!!”
정혁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빠져나와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서정혁에게 다가오는 아저씨의
앞을 우서가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정혁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제대로 지키고 섰다.
“후… 아저씨. 진정하세요! 정혁이 이러다 죽어요. 하… 얘 환자잖아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 섹스하려다가 걸린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을 모면하고 서정혁과 나, 살아남아야겠다.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넘겨봐야지.
그러자 분위기가 점차 차분해져서 부모님들께서도 조금씩 진정하는 듯했다. 들어 올렸던 팔이
다시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화를 삭이려고 씩씩대는 부모님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우서, 너 이리 와.”
우서의 어머니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우서의 팔을 덥석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팔을 잡아 이 병실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정혁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
그가 못 견디겠다는 듯 복부를 감싸 쥐다가 우서를 힐끗 보고 눈짓했다. 빨리 제 옆으로 와
서라는 얘기 같았다. 정혁은 계속해서 아픈 척을 하면서 비틀거리다가 우서에게로 조금씩
다가왔다.
“어, 어……! 그, 서정혁 너 괜찮아?”
우서는 결국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정혁을 끌어안은 채로 부축했다. 우서가 등을 감싸 안자
그가 팔꿈치로 톡, 건드렸다. 지금 연기 좋다며 계속하란 신호인 듯했다.
“아… 너무 아파. 죽을 거 같아, 우서야.”
이 녀석은 경찰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정혁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당장이지 쓰러질 사람처럼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의사 쌤이 말하길 지금쯤이면 많이 호전된
상태라 이제는 고통이 훨씬 덜할 거라 했었다. 그러니깐 저 녀석은 지금 쇼를 하고 있는
거였다. 아무래도 지금 연기는 대상감이었다.
우린 커플이고 콤비고 사귀는 사이니… 우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후… 시발. 이따위 거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선택지도 없고 어쩔 수가 없다. 어쨌든 녀석과 함께 살아남으려면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인 듯했다. 마음속으로는 낭패라며 울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를 걱정하는
연기를 시전했다.
“너 너무 많이 맞아서 수술한 데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러자 부모님들이 헉─ 하시며 우서의 말에 동요했다. 아버지들도 더 이상 아들들에게
달려들지 않았고 어머니들도 높게 들고 있던 손을 점차 내려놓으셨다.
“우서야, 나 진짜 너무 아파서 죽을 거 같아… 후…….”
“서정혁, 정신 차려! 너 또 쓰러지면 큰일 나……!”
정혁이 비틀거리고 다시 끙끙거리며 복부를 움켜쥐었다. 우서는 그런 정혁을 좀 더 단단히
안고 부축했다.
부모님들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차차 이성을 되찾고 계시는 모양인지
부모님들은 정혁과 우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안심하면서도 우서는 속으로 폭풍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우서의 부모님은 아들이 퇴근하고 곧장 병원에 들른다 하니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제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아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정혁의 문병도 갈 겸 해서 우서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병원으로 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정혁의 부모님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가 우서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는
로비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렇게 두 부모님들끼리 병원 1 층에서 다시 만난 후에 병실로 올라오게 된 거다. 평소였으면
병동에 출입하기 힘들었을 텐데 보호자가 있기에 우서의 부모님들도 쉽게 병실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또 하필이면 잠가 놓은 문고리가 망가져서 그 상황이 모두에게 발각되었고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이 부모님들께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거였다.
결국 안 풀리려니 모든 게 꼬여 버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어머니들은 아들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끙끙 앓다가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아버지들은 별말씀 없이 어머니들을 부축해 데리고 나가셨다. 거기다가 얼마간 시간이
지났는데도 두 사람의 핸드폰까지 무척이나 조용하다.
고요해서 더 불안했다.
두 사람은 허망하게 병원 침대에 앉아서 방금 있었던 일들을 상기해 봤다. 정혁이 쓰러져서
수술을 받았을 때처럼 네 분은 말을 잃으셨고 비통해하셨다. 지금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우서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불안해서 손톱도 잘근잘근 씹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서 제 앞에 앉아 있는 정혁을 바라봤다. 머리가 죄다 헝클어져 있는 게 방금 엄청난
소동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마구잡이로 때려 스치듯 맞았던 볼과 목이
시뻘겋고 팔뚝과 손등은 뜯겨서 피가 나고 있었다. 물론 우서도 정상은 아니었다. 자신도
두드려 맞았던 등짝이 너무 아팠다.
“서정혁… 우리 이거 뭐지……?”
“뭐긴 뭐야.”
“현실 맞아……?”
“그럼.”
정혁은 냉담했다. 차라리 꿈이라고 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견딜 수 없어 잠시라도 현실을
도피하려 하면 그가 다시 발목을 붙잡아다가 데리고 왔다. 그래서 다행히 우서는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착실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주 엿 같게도.
“원래 보통 이런 건 잘 안 들키지 않냐.”
“근데 들켰잖아.”
그건 맞다. 그래… 아슬아슬한 관계 같은 건 사실 영화, 드라마나 소설에서만 가능한가 보다.
우서가 정혁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리얼 현실이네.”
현실은 더욱 혹독하고 각박하며 얄짤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도 맞아서 감각이 없고 머리가 멍해졌다. 뇌진탕도 온 모양인지 울렁거리고 어질어질하다.
사실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지금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멘탈이 나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까부터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정혁이 입을 열었다.
“진우서.”
“응……?”
“어차피 잘된 일인 거 같아. 우서야, 우리 부모님들 설득하자.”
그가 고개를 굳세게 끄덕이면서 우서를 바라봐왔다. 두 눈이 너무 진지해서 숨이 턱 막혔다.
순간, 녀석이 말한 것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너무 충격적인 결심이라서
감히 되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려 봐도…….
“미친놈아… 너 미쳤어!?”
욕밖에 안 나온다. 결국 정혁의 환자복을 쥐고 멱살을 잡았다. 짤짤 흔드니 흔드는 대로
따라와 고개가 흔들렸다. 환자복이 한껏 구겨져 있는 상태인데 정혁은 우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잖아.”라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나도 안단 말이다! 하지만 우서의 부모님은 우서가 이성애자라 굳게 믿고 30
년간 자식을 키웠다. 거기다가 자신은 항상 비밀에 부치며 조심스레 애인을 만나고
다녔었는데, 그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속이 무척 쓰렸다.
부모님들께서 받으셨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되질 않는다. 죄송하기도 하고 또 면목이
정말 없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제 성향을 언젠가는 용기 내 말씀드려야겠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켜서 강제로 알려 드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다.
거기다가 각자의 부모님들이 정혁과 우서를 제 자식처럼 끔찍이 아껴 오셨다. 친자식뿐 아니라
믿었던 친조카뻘 되는 사람한테서까지 배신을 당한 것이니 그 충격은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일 거다. 얼마만큼 화가 나고 속에서 천불이 날지는 우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하지 말라 했지. 여기 병원이라고.”
“난 네가 문 잠근 줄 알았지.”
“아니, 그게 고장 난 줄은 몰랐다니깐?”
서로 남 탓을 하고 있는 아주 바람직한 커플이다. 이젠 이게 정상적인 관계인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친구로 지낸 지 어언 30 여 년, 서정혁과 갑자기 섹스 파트너가 됐다. 그런데 또 엉겁결에
녀석에게 휘말려 사귀게 됐다. 이제는 사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
속도만큼은 이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뒤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뭐 어차피 다 얘기드려야 됐던 거고, 널 계속 만나려면 필시 해야 됐던 일이야. 이렇게 돼서
유감이지만… 난 잘된 일이라 생각해.”
정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주 여유롭고도 동요 없는 차분한
눈빛으로다가 말하니 묘하게 설득이 되면서도… 전혀 납득은 되지 않고 있었다.
서정혁은 긴 고민 끝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우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뭐? 잘됐다고?”
어이없어서 기가 차고 코웃음에 비웃음까지 남발하게 된다. 우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정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우리의 방식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렇게 현장을 들켜서
범죄자처럼 이실직고하는 그런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최악이었다!
“우리 앞으로 쭉 만나다 보면 결국 부모님께 말씀드릴 날이 올 거 아냐.”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네 말대로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너랑 나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부모님들께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 평생 속일 거야? 난 그게 더 별로라 생각하는데.”
우서가 정혁의 말을 듣다가 잡고 있던 멱살을 스르륵 놓았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정혁을 만날 때마다 매번 거짓말을 하고 부모님들을 속이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긴
했다. 나중에 말한다면 더욱 배신감 들어 하실지도 모르겠다.
‘우서야, 우리 정혁이 만나는 사람 있니?’
‘아버지가 선보러 가라 해서 어쩔 수 없었어.’
정혁의 어머니가 호텔 비용 때문에 만나는 상대를 걱정하기도 했었고, 또 두 사람 혼사 문제
때문에 부모님들의 관심사가 애인 여부에 기울어 있는 것도 맞았다. 정혁의 선 자리도
알아보셨으니 말 다 했다.
그렇게 부모님들을 속여 가면서 정혁을 만날 때마다 마음에 짐을 얹은 듯 무겁고
불안했었는데, 이제 이렇게 강제 오픈해 버리니 한결 시원한 마음도 살짝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저질러 버리니 마음 한구석이 조금 편한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뵐 때마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에 항상 죄송스럽긴 했어.”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눈으로 괜찮다 말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니 묘한
안정감이 든다. 서정혁이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몇 대 맞은 거
빼고는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었다. 제 옆에는 정혁도 건강히 잘 있었다.
“그럼 진짜 잘된 건가……?”
“응, 충격은 크시겠지만, 다들 강하신 분들이니깐… 금방 이겨 내실 거야.”
그 말도 맞다. 그동안 제 부모님은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믿고 지지하고 따라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좀 힘드시겠지만 금방 저를 받아 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엄마 아빠 그런 일로 쓰러지고 밥 안 먹을 사람은 아니야. 심지어 나보고 독신으로
살아도 된다 했어. 그러니까 우리 엄마 아빠는 괜찮을 거 같아.”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너 예뻐하고 좋아하셨잖아. 너 같은 결혼 상대 데려오라고도
하셨고.”
“응, 그랬었지…….”
“분명 네 분 다 누그러지실 거라 생각해.”
조금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정혁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우서의
마음이 좀 더 편해진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뿌리째 흔들릴 줄 알았는데,
막상 또 그렇지도 않았다.
정혁이 굳세게 잡아 주고 또 자신을 도닥이면서 안정시켜 주니 그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멋있어
보였다. 두 사람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우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또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 근데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가 또.”
“나랑 진짜 계속 만날 거야? 진짜로 계속, 쭉?”
이제 연인이 되어 버렸으니 돌이킬 수가 없다. 그건 각오하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부모님들까지 알게 된 상황에서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 가볍게 사귀다가 가볍게
헤어지기란 이제는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정혁이 저를 쉽게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떠한 마음인 것인지 궁금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만나다가 이대로 헤어진다면 두 가족의 긴 연이 한순간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이 좋아해서 사귀기로 결정했지만 부모님들까지 얽히게 되니 얘기는 또
달라진다.
더욱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에 대한 책임도 더욱 커져 버렸다.
“응, 내가 말했잖아. 너랑 결혼할 거라고.”
그런데 정혁의 결연함이 대단해서 우서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으… 그거 진짜야?”
“넌 아닌가 봐? 그럼 나랑 뭐가 하고 싶은 건데.”
정혁이 한 손으로 우서의 볼을 잡아 눌렀다. 이러한 질문을 해서 얄밉다는 표식이기도 했다.
제대로 대답하란 듯이 꾸욱 누르니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그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춰
주고 다시 놓아 준다.
“아니, 뭐가 딱히 하고 싶은 건 없는데.”
“하고 싶은 거 없으면 그냥 나랑 결혼하자. 내가 잘해 줄게.”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대답하란 뜻이었다.
“응?”
“하자고, 결혼.”
“아니, 미친놈아.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될 일이야?”
우서가 발끈했다. 사귀는 것도 겨우 했는데 인생이 걸린 문제인 결혼을 이렇게 쉽게 하자고
하니 미친 건가 싶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끼리 결혼도 안 된단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정혁을 바라보며 우서가 얼굴을 찡그렸다.
“안 될 일도 없지.”
“또라이야, 이거 완전.”
제 연인을 자꾸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만, 우서는 머리 주위를 검지로 뱅뱅 돌리면서 정혁을
바라보았다.
“결혼 아니어도 나는 너랑 평생 같이 있기만 하면 돼. 언약, 종신 계약 다 받을게.”
우서의 입이 점차 떡 벌어져 갔다. 대단한 집념이다. 정말 얘라면 뭐든지 할 것 같았다. 저런
의지라면 심해 저 끝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해도 할 것 같고, 몇천 피트 상공에서 폐백을 하라고
해도 할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대체 뭐가 좋아서 이러는 건데.”
“말했잖아. 너 존나 예쁘다고, 섹시하고. 이유가 더 필요해? 작고 귀엽고. 뒤태 죽이고 엉덩이
예쁘고.”
“하,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소리 다 듣네.”
우서가 혀를 내밀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 쳤다. 이제 그만하란 뜻이었다. 그런데 정혁이
그 손바닥을 꽈악 잡아 깍지를 껴 왔다. 그러고는 약간의 고통을 주듯이 힘을 주어 우서를
결박시켰다.
“그리고 이제 내 사람인데. 다른 새낀 못 주지.”
“으읍…….”
누르는 힘이 상당해 고통스러웠다. 이제 보니 서정혁은 집착도 소유욕도 기준치 이상이었다.
아마 한동안은, 아니 어쩌면 평생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꿀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거야말로
종신 계약이자 속박이었다.
“그리고 너도잖아? 너 완전 내 사람인 거 티 나는데.”
“……?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이제 어딜 가도 나만 보일 테고, 내 생각만 날 거고, 내가 신경 쓰일 텐데. 또 널 움직이는
원동력이 나일 텐데… 근데 나랑 이도 저도 아닌 사이면 감당되겠어? 밤에 잠이나 오겠냐고.”
“아, 그건……!”
저 자신감, 재수 없긴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우서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사람 만날 생각도 안 들뿐더러 또 서정혁보다 좋고
멋있는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자신도 없었다.
“나만큼 섹스 잘하는 새끼 찾기 힘들걸.”
“시발…….”
인정하기 싫은데 그것도 완전 맞다.
“우서야, 우리 부모님들께 잘 말씀드리자.”
정혁이 굳세게 얘기하고는 우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하기가 자꾸만 망설여져서 혀를
날름거려 입술을 축이게 된다.
솔직히 서정혁의 정면 돌파는 멋있었다. 그 자리에서 변명하길 바라긴 했지만 우리의 관계를
두고 재고 따지는 짓을 하지 않아서 그 모습도 믿음직스러웠다.
정혁과 함께 간다면 뭐가 되든지 간에 저를 버리고 뒤통수를 칠 것 같진 않았다. 부모님들에게
맞을 때도 아픈 상처보다는 저를 먼저 보호했으니 그 마음씨도 인정하겠다. 우서는 고민하며
정혁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얘기해 보자.”
“응, 좋아.”
정혁이 살짝 떨리는 듯 심호흡하며 대답했다. 막상 우서가 마음을 정하니 되려 자신이 떨려
오는 모양이다. 우서는 정혁에게 힘을 모아 주기로 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이제 와 누구
탓을 하기에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부모님들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축복은 아니더라도, 거짓 없는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이 험난하고 무척 떨릴 것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둘이 같이 있으면 잘 헤쳐
나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보였다.
“너 나 배신 마라, 서정혁.”
혹시나 해서 던져 본 물음에.
“절대 배신 못 하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혁은 굳세게 대답한다.
“칼 얘긴 하지 마. 부정 타.”
얘기만 들어도 소름 돋는다. 우서가 손으로 그 입을 막아 버리자 정혁이 웃으면서 손바닥에
입술을 부닥치고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제야 떨리던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져 녹아내린다.
개죽이가 되는 정혁의 웃음은 여전히 멋있었다. 둘이 함께라면 뭐든지 괜찮을 것만 같았다.

***

정혁이 퇴원하는 날인데도 병실이 썰렁하다 못해 조용하기만 하다. 주말인데도 보호자며


아무도 마중하러 오지 않았다. 우서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푸욱─ 나온다.
“하아.”
“우서야, 갈까.”
정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실망하고 착잡해할 거라는
걸 안다. 그 맘을 헤아리자니 우서가 다 속상해져서는 한없이 눈꼬리가 처졌다.
“진우서, 나 퇴원하는데 안 기뻐? 내가 병실에 계속 누워 있었으면 좋겠어? 기운 좀 내지그래.”
“아, 기쁘긴 한데 기운이 안 나는 걸 어떡해.”
착잡하게 짐을 들고서는 정혁을 따라서 병실을 나섰다. 혹시나 해서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왔던 길도 뒤돌아보게 된다. 일부러 퇴원 시간까지 문자로 말씀드렸던 건데 부모님들은 오시지
않았다.
“이건 좀… 너무하시지 않냐.”
섭섭함을 표하는 우서의 말에 정혁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심심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네 분이 항상 한편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팀 먹어서 정면
승부해야지.”
“휴… 진짜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근데 생각해 봐. 우리 보고 사위 삼고 싶다, 듬직하다,
착실하다 하실 때는 언제고… 이렇게 나 몰라라 남처럼 대하실 줄은 정말 몰랐다고.”
아들들이 괘씸하더라도 정혁이 크게 수술을 하고 겨우 퇴원하는 거였다. 벌주는 거라지만
부모님들 너무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자에 답장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지 않나 싶어 아쉬움이
남았다.
우서도 그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사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날, 바로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열흘이 흘렀다.
죄송한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아들들이 벌써 서른이 됐다. 이제 부모님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연락을 안 받고 외면하는 게 능사는 아닌데 너무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운전해서 차를 타고 아파트로 왔다. 오는 길 내내 긴장했는데, 오랜만에 집에 오니 그
긴장감은 배가 된다. 우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제 아파트 동을 올려다보았다. 대략 20 층 정도
되는 높이의 건물이 무척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햇빛이 강렬해서 눈이 찌푸려지고 가면 안 될
곳만 같아 두려워졌다.
“으…….”
오르지 못할 높은 곳인 것처럼 겁이 나는데 정혁이 옆으로 다가와 손을 꽉 잡는다. 괜찮다고
심호흡하라는 듯이 후우─ 후─ 하면서 우서와 눈을 마주했다.
“진우서, 괜히 떨지 말고.”
“안 돼, 나 지금 너무 떨려. 토할 거 같아.”
발을 동동 구르자 그런 우서를 귀엽게 바라보면서 정혁이 되묻는다.
“뭐가 그렇게 떨리는데.”
“가서 엄마 아빠한테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괜히 찾아가선 뻥을 칠 수도 없고… 또
솔직하게 말했다간 저번처럼 맞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하, 이번에도 엄청 맞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우서는 너무 떨려서 아무 말이나 중얼중얼 내뱉는 중이었다. 무서우니깐 말이 많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저번에 병실에서 맞았던 일을 생각하니 벌써 등이 얼얼하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저번처럼 막아 줄 테니까.”
그게 뭐 대수냐며 정혁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까부터 별달리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
태평한 건지 느긋한 것이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지, 저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반대로 우서는 온갖 걱정을 사서 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악담을 제대로 쏟아부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얼굴을 안 보겠다고 그리 말하실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제 부모님이 아닌, 아저씨 아줌마의 얼굴을 보면 무서워 입도 벙긋 못 할 것만
같았다. 양가 부모님을 뵙는 건 예의를 차린 자리에서도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찾아가는 건 더더욱 떨리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서정혁에게 솔직하게 제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다. 부모님과 연이 끊길까
두렵다, 너희 부모님이 나를 보고 크게 실망할까 무섭다 말하면 그도 크게 걱정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괜히 이 분위기를 망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꽈악 물었다.
“진우서랑 있으니깐 그냥 존나 좋아. 그리고 난… 음, 나름 맞을 만하던데.”
“맞을 만? 엄청 아팠다고! 우리 엄마 손이 얼마나 매운데. 그리고 매 맞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서른씩 돼 가지고 엄마한테 맞으면 그게 얼마나 자존심이 깎이는지 알아?”
우서가 예민하게 구니 정혁이 걱정 말라는 듯 잡은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설마 또 때리시겠어? 저번에는 너무 놀라셔서 그러신 거겠지. 지금은 마음 잘 추스르셨을
거야.”
“……그럴까?”
“당연.”
“그렇겠지?”
불안감에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큼지막하게 포개진 정혁의 손이 있으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열흘 동안 병실에서 골똘히 생각해 봤다. 어떻게 말해야 부모님들이 덜 화를 내시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실지. 하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다가 결국
결전의 날이 오고 만 거다.
“응, 솔직하게 얘기하면 돼. 어려울 거 없지.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래. 그럼 나… 너희 부모님께도 내 마음 솔직히 말씀드릴게.”
“응,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어.”
정혁이 반대편 팔로 우서를 품에 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계속해서
떨리지 않는 척을 하지만, 안정을 되찾으려 하는 행동에 우서도 덩달아 긴장이 된다. 당연히
서정혁도 무진장 떨릴 거란 거 잘 안다.
그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지는 우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서는 좀 더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했다.
“가자.”
왜 내가 이런 일까지 겪어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혁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려면
한 번쯤은 넘어야만 하는 산 같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끼리 연애한다는 건 아직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니, 우리 둘이 계속 만나거든
앞으로 별의별 일들을 겪을 거란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남은 역경과 고난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지금부터 좀 더 마음 굳게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서는 결의에 찬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올라가자, 서정혁.”

11 층인 정혁의 집으로 향하니, 마침 기다렸다는 듯 부모님들은 한데 모여 계셨다. 정혁은 문제


될 것 없다는 식으로 평상시처럼 차분히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서도 쭈뼛거리다가 정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
하지만 우서는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자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 내야만 했다. 네
분이 한편인 것처럼 열 맞춰 나란히 앉아 계시니, 삼엄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긴장감과
공포감은 더욱더 고조된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아버지들은 팔짱을 끼고 계시고 어머니들은 머리를 짚고 계셨다. 모두들
싸늘한 표정이었는데 입가에 작은 웃음도 싹 다 지워 내셨다.
두 사람은 맞은편에 서서 저절로 네 분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눈썹이 하늘로 꽂혀 있는 것이
심기가 무척 안 좋으신 상태라는 건 잘 알겠다.
“저 무사히 퇴원했습니다.”
정혁이 먼저 운을 뗐다. 부모님들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춰서 말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 없이 분위기는 완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흐음…….”
“심려 끼쳐 드려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혁이 단단한 목소리로 얘기를 하니, 부모님들이 티는 나지 않지만 조금씩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탐탁지 않게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힘든 고비를 넘겼기에 얼굴은 연민과 걱정의
낯을 하고 있었다. 우서의 어머니가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정혁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그래, 정혁아. 다행이야. 어디 몸 아픈 데는 없고.”
괘씸한 자식들이지만 걱정이 되는지라 안부부터 묻는 우서의 엄마였다.
우서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제 엄마, 열흘 만에 무척
핼쑥해지고 야위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끙끙 앓고 끼니 거를 사람은 아닌데 아무래도
엄청난 충격이었나 보다. 우서가 안타까운 눈을 하고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혁이
단단한 목소리로 굳세게 대답했다.
“네, 이상은 없는데 병원서 한동안 무리하지 말라 하네요. 일단은 복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걱정해 주셔서 빨리 나았어요. 감사합니다.”
서정혁을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만, 왜 이렇게 죽을죄를 진 것처럼 마음이 무겁고 힘든
건지 모르겠다. 괜찮을 거라 정혁과 그리 얘기하고 왔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그래. 일단 둘 다 자리에 앉아 보거라.”
우서의 아버지가 착석을 권했다. 우서와 정혁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다정하고도 서로 잘 어울리는 모습에 네 분이 또 말을 잇지 못한다. 훤칠하고도
바람직하게 잘 큰 아들들이었다. 항상 말도 잘 듣고 별 탈 없이 커 왔던, 항상 부모님들의
자랑이 되었던 아들들이었다.
범죄도 아니었고,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단지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 하지만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이번 일을 더욱 충격적으로 느끼고 계신 듯했다.
우서는 들고 있던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쓰윽 눈치를 보았다. 도저히 편히 앉을 수가 없어서
익숙한 장소임에도 대역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혁도 따라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사죄의 상황이 된 상황에서 정혁의 어머니가 어렵사리 물음을 던진다.
“그래…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그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정혁은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하는 바람에 부모님들은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서도 그런 정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럽고 굳건해 보였다. 가타부타 부연 설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모습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납득을 끌어 오고 있었다.
“네. 어머니,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 우서 무척 좋아합니다.”
네 분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결국은 정혁에게서 우서로 옮겨 가게 된다.
대답을 요하는 분위기기에 우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요. 저도 정혁이 좋아해요.”
그러자 탄식이 이어져 오고 우서의 어머니는 다시 팔을 올려 관자놀이를 짚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지만 아들들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훨씬 더 실감을 하게 된 듯한 반응이었다. 침음
뒤에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어떻게 시작이 된 건지 모르겠네. 우린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는데.”
우서의 엄마가 묻는데 네 분의 시선이 따갑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그러니까
…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부모님들을 속이려던 건 아니었고 우리도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된 거라, 오해 사지 않을 만한 얘기를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몰라 고민이 거듭된다.
“아, 그게…….”
섹스 파트너를 구하려 했는데, 호텔서 어쩌다 보니 만난 상대가 서정혁이었다는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우서가 애꿎은 입술만 감쳐물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런데 그 틈을 정혁이 치고 들어간다.
“제가 예전부터 우서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 오랫동안 사랑해 왔고요. 어렵게
마음 확인해서 사귀는 중입니다. 비록 얼마 전에 안 좋은 모습 보여 드리긴 했지만 저희 가볍게
만나는 것은 아니니, 부모님들도 허락해 주세요.”
아주 청산유수다. 거기다가 목소리도 좋아서 묘하게 설득된다. 더 이상 갖다 붙일 말도
추가하거나 뺄 말도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우서 없으면 안 됩니다.”
다만 그 얘기를 들으며 우서는 입 안을 꽉 깨물었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만을
제대로 말하자고 했던 게 서정혁이었다.
내가 언제 널 오랫동안 좋아해 왔냐고, 우서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정혁을 노려보았다. 아주 소금이며 설탕이며 후추 깨소금 갖은 양념 다 쳐서 찰진 멘트를
만들어 내셨다. 우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가는데, 정혁은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당당히
마주쳐 왔다. 자기 잘했냐는 거만한 표정이다.
“우서야, 무슨 말 좀 해 봐. 진짜야?”
우서의 엄마가 정혁이 꺼낸 충격적인 말을 듣고는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서 손을 떨면서 입을
가렸다.
“엄마…….”
우서가 말을 못 하고 있으니 비통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고… 내 아들이 진짜…….”
저 자식이 말한 게 진실이 아니라서 말을 못 한 거였는데, 오해를 사 버리고 말았다. 부모님들
모두가 서정혁의 얘기가 진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크게 동요했다. 우서의 엄마가 쓰러지듯이
무너져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듯이 울었다.
“여보… 흐윽, 쟤네 정말 어떡하면 좋아.”
거기다 대고 이제 와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우서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정혁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미치겠다. 더 이상 수습도 안 된다. 엉덩이가 들썩이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우서와 정혁, 둘은
부모님들의 눈치를 봤다.
결국 어머니들 두 분이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돌렸다.
“여보, 나 쟤 못 보겠어. 빨리 나가라 해.”
파리를 쫓듯이 우서의 엄마가 우서에게 휘휘 손짓했다. 눈도 하나 마주치지 않고는 외면한
채로 내쫓김당하게 생겼다.
“하… 일단 보기 싫다. 둘 다 나가라.”
정혁의 아버지도 정혁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얘기했다. 정혁의 어머니도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고 우서의 아버지 또한 쓰러져 흐느끼는 부인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처량 맞게 복도로 쫓겨나 버렸다. 심지어 앉은 자리서
허겁지겁 나오느라 가방도 소지품도 다 두고 나와 버렸다.
차 키도 없고 지갑도 없고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지폐 몇 장이 전부라 더 허무했다.
우서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손을 뻗어 보지만 쿵─ 하고 현관문이 거세게 닫혀 버린다.
이렇게 금방 쫓겨날 줄은 몰랐다. 부모님들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모양이었다. 오늘 두
사람을 만나 어떻게든 회유해 보려 했던 것 같은데… 아들들이 이렇게나 결연하니 손도 못
쓰고 밖으로 내보낸 듯했다.
저번처럼 등짝을 맞지도 않았고 나쁜 말 듣지도 않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쫓겨난 게
께름칙해 우서는 기분이 찜찜했다.
정혁과 터덜터덜 걸어서 집 근처 공원까지 어찌어찌 오긴 했는데, 우리 이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다. 멍하다.
항상 부모님 그늘 아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지라 방향을 잃으니 모든 걸 다 잃은
기분이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 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야, 서정혁. 우리가 지금 서른 살이 맞냐?”
분수가 있고 아이들이 뛰놀고 있고 평화로운 풍경인데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현기증이 났다.
햇볕은 뜨겁고 그 아래 서 있는 우리 둘은 처량했다. 여유로운 도심 속, 주말의 오후를
만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정혁과 우서는 휑하니 남겨져 있다.
“글쎄, 심지어 나 환자잖아? 이렇게 쫓아내실 줄은 몰랐는데.”
정혁은 파란 하늘, 푸른 녹음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말을 꺼낸다. 그도 부모님들이 이렇게나
냉담한 반응을 보이실 줄은 예상치 못했던 건지,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들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난감함을 표했다.
“하, 환자? 너 부모님 앞에서 입을 잘만 놀리던데.”
맺힌 게 많다. 어디 감히 제 부모님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고 자빠진 건지, 우서가 바르작대면서
씩씩거리니 정혁이 그런 우서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마구 흩트려
놓았다. 화 풀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어이없게도 눈웃음을 사르르 짓는다.
“진우서, 우리 집도 쫓겨났겠다. 이제 자유의 몸인데 어디 갈까. 호텔?”
“아, 미친놈아. 넌 이 상황에서도……!”
정혁이 우서의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기어코 제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입
맞추고 놓아주었다. 말캉한 감촉이 잠시간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손바닥을 비벼
다시 우서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초조함을 숨기면서도 우서는 놓지 않겠다는 정혁의 다짐
담긴 행동이었다.
“네가 그렇게 축 처진 눈 하고 안쓰럽게 하고 있으면 내가 안 꼴리고 배겨?”
“으으… 미쳤냐고……!!”
우서가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저 멀리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들 빼고는 방금
행동을 볼 법한 사람들은 딱히 없는 듯했다.
“내가 내 거에 뽀뽀하겠다는데 왜. 누가 뭐래.”
정혁은 거만하게 그렇게 말해 왔다. 우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 완전 미친 거다.
인간의 탈을 쓰고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는 거였다.
“아… 일단 좀 앉자. 정신이 너무 없네.”
정혁이 끌어당기는 손을 잡고 나무 아래 벤치로 가 앉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털썩 주저앉게
된다. 집에 잠깐 다녀온 건데도 진이 다 빠졌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와서 우서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고 지나갔다. 가지는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뻗어져 나와 있었다. 덤불에 가려져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둘을
쉽게 볼 수는 없을 테다.
“아니 근데, 그런 멘트는 왜 한 건데? 무슨 세기의 사랑인 줄. 저 우서 없으면 안 됩니다?”
아까 했던 말투를 따라 하면서 우서가 정혁을 놀리는데, 서정혁답게 그런 작은 시비에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대신 다리를 길게 뻗었다가 다시 꼬고 앉아선 말한다.
“맞잖아. 세기의 사랑.”
허, 기가 막힌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둘 다 파트너 구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 몸이 가는 대로 만났고 그저
우연일 뿐이지,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운명이 있어.”
“내 진심 안 전해졌어?”
정혁이 대뜸 그렇게 말한다. 우서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진심?”
“우연이라도 제발 진우서 꼬실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매일 하늘에 빌었는데?”
정혁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천연덕스럽게 그리 말하니 녀석의 속셈에 더욱더 속아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우서가 벤치에 앉아 발을 마구 굴렀다.
“아아아……!!”
“호텔서 처음 만났을 때 엄청 기뻤는데. 너라서.”
“미친놈.”
“그때부터 난 너랑 결혼하려 했는데.”
“얼씨구.”
이제는 정말 그럴싸하게 들린다. 진짜인 걸까, 태도가 한결같으니 헷갈릴 정도다. 우서가
어이없게 웃었다. 정혁도 그 얼굴을 보더니 “진짜야.”라고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틀어 뺨에
살포시 키스해 왔다. 그는 벤치에 삐딱하게 기대앉아서는 우서를 바라봤다.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죄지은 것도 아니야.”
“알아, 안다구.”
“그래서 부모님이 뭐라 하시든, 안 흔들릴 수 있어. 난 너 포기 못 해.”
아까부터 바람에 이파리와 가지들이 흔들려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시원한 바람 때문인지
서정혁이 평소보다도 더욱 청량하게 보였다. 긴 머리칼도 흐트러져 눈가에 와 흔들리니 제가
반했던 그때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 다시 안 본다고 하시면?”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의 대답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걸까……? 우서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떤 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정혁의 솔직한 마음을 듣기엔 겁이 났다.
“너만 데리고 나가서 살아야지, 뭐.”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우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도 모르게 자신들의 관계를 안심하게
된다.
“너 그 말 진심 아니지? 부모님 들으시면 섭섭해하실 거야.”
나와 우리 관계를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자꾸만 마음이 이상하게 설레고 또
남겨진 부모님이 걱정됐다. 그 안쓰러운 얼굴들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지금 진지해. 부모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제 너 없음 안 돼.”
“…….”
“전에도 얘기했었잖아. 칼 맞을 때 네 생각밖에 안 났다고. 너랑 살아야지 후회 없는 삶이 될
거 같아.”
“응, 기억하고 있어.”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너랑 헤어지면 죽은 것만도 못한 데다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니까
그렇게는 못 살아.”
정혁이 덤덤하게 눈을 마주쳐 오고 진심을 다해서 고백해 왔다. 그렇게나 저를 좋아한다면야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이제야 완전하게 전해지는 진심에 우서의 코끝이 찡해져 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이 헤어지라고 해도 절대 나 포기하지 마, 진우서.”
“…….”
그 마법 같은 주문에 우서가 홀린 듯이 고개를 들어 정혁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나 죽이겠다 해도 발목 분지르겠다고 해도 의절하겠다고 해도 너야.”
과격했다. 무슨 사랑 고백이 이렇게나 살벌할까. 우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정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데 괜히 입술을 비집고 작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 고백 또한 서정혁다웠다.
그리고 저와 우리의 사랑을 두고서는 타협하고 계산하는 그런 비열한 짓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아서, 그래서 더욱 맘에 들었다. 적어도 앞으로 저를 두고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우서도 망설이다가 우물쭈물하며 얘기를 꺼냈다.
“그래. 그럼 음… 나 회사 잘려도, 늙어도 너 나 버리면 안 된다……?”
“우서야.”
“어?”
“나 그냥 너면 된다고.”
“…….”
그 말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미어지고 아프게 만들었다. 정혁은 손끝으로 우서의 이마와
관자놀이 그리고 볼을 간질이면서 쓰다듬었다.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손끝으로
조금씩 터치해 나가는데 닿는 곳이 전부 화끈거렸다.
“네가 뭐든 상황이 어쨌든, 내 선택은 너야.”
“응.”
“네가 우리 엄마 친구의 아들이든, 내 이웃이든 그리고 파트너이든 또 애인으로 만났든 간에,
너는 진우서고 나는 너 포기 안 해. 네가 뭐든 상관없어.”
“……고마워.”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우리 둘 운명인 것만 같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긴 할까. 태어나서 계속 같이 자라 오다가 결국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믿을 사람이.
그는 마치 우리 사이가 만나야만 했던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소중하고 우리의 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얘기해 주니, 진짜 그렇게 굳건히
믿을 수밖에 없다. 우서도 점차 이 관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어쩌면 서정혁 말대로, 정말 우리는 이렇게 사귀어야만 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그냥 너면 되는 거야. 그럼 난 그런 널 영원히 사랑할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코끝이 시려 온다. 우서가 다시 한번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걱정하지 마. 진우서, 넌 그냥 나한테로만 오면 돼.”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저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정혁은 웃음기 하나 없이 정말 진지하게
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매번 농담만 하고 자신을
놀리기 바빴던 서정혁인데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니 너무 쑥스러웠다. 그런데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져 간다.
우서는 고개를 더욱 세차게 끄덕였다. 오늘 하루 종일 불안하고 우울해서 흔들렸던 마음이
정혁에 의해 다잡힌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서 우서는 몇 번이고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나쁜 생각 말고 슬퍼도 말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네가 지금 뭘 가지고 있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마음이 불안하던 차에 이렇게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만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가 있어서 우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정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네가 올 곳 내 품 맞아.”
“그리고 난 너 행복하게 해 줄 거고.”
그는 우서의 두 눈을 곧게 바라보고는 그렇게 얘기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 안 놓을 거고, 시련이니 위기니 닥쳐온다 해도 너 포기 못 해.”
“……응.”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게 됐다. 부모님께 외면받아서 마음 둘 데 없이 불안하던 차에 이러한
얘기를 듣고 있으니 뭉클해져서는 제 감정이 감당이 되질 않는다.
“너도잖아.”
“맞아.”
정혁을 향해서 굳게 대답했다.
“문제없어. 우린 이대로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돼.”
그가 한쪽 팔을 뻗어서 우서를 품에 안았다. 옆에 바싹 붙어 정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오고 한적한 공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화롭고 모든 게 좋다. 풍족하다. 이 모든 사랑과 평화와 행복.
우서는 눈을 감고 이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정혁은 무조건 저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고 제가 어떤 사람이라도 말이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단단해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스스로가 그렇게 서정혁 품에서 깨어났다.
내게 이렇게 힘이 되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은 서정혁뿐이었다. 그 자체로도
사랑스럽고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 둘은 어떤 관계서 만나 어떻게 사귀게 되었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거다.
상황이니 환경이니 다 핑계일 뿐. 관계니 시간이니 다 소용없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 되는 것은 없다. 마음이 한결 편해져 우서가 웃었다.
“진우서, 항상 내 옆에 있어.”
“응, 좋아.”
우서도 굳건히 대답했다.
“그러면 나는 무서울 게 없어.”
“서정혁… 사랑해.”
무심히 툭 뱉었다. 그런데 정혁이 팔을 뻗어서 볼을 감싸 쥐고 우서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렇게 입술에 그가 키스해 오고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우서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는 눈앞에 드리워진 정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미친 사람 같았다. 부모에게 부정당하고 집에서 빈손으로 쫓겨났는데 이렇게 천하태평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을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앞으로의 미래가 무척 기대되고 더욱더 상상하고 싶어졌다. 우린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뭇잎 그늘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어 정혁을 더욱 빛나게 했다. 우린
이렇게 영원의 사랑을 맹세했다.

***

“아, 맞다. 우서야, 우리 갈 데가 있었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서정혁의 말을 믿고 우서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가지고 갈 짐도 없어서 한결 후련하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언제까지
한량처럼 동네를 이리저리 배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정혁이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타 서울의 외곽 쪽으로 향한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정혁과 함께라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2
0 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조금 한적한 동네의 낡은 집 앞이었다.
우서가 차에서 내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외관을 살폈다. 골목에 있는 단독주택인데, 이
골목에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집들과 마찬가지로 낡고 허물어진 곳이 많은 주택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어서 더욱 클래식했고 마치 버려진 집처럼 더럽기도 했다.
정혁도 이곳이 맞는지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어가 예스러운 까만 창살의 대문을 두들겼다. 초인종도 없고 더러운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는 곳이었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정혁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두 번째는 주먹을 쥐어 좀 더 세게 쾅쾅
내리쳤다. 두꺼운 손이 허술하게 잠겨 있는 대문을 부술 것만 같았다. 저 녀석, 성미가 급하다.
얼마 안 가 안쪽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의 잠금이 탁─ 하고 풀리더니
집주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대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손님을 급히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어……!”
우서가 짧게 외쳤다. 병원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우서와도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혁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쳤다고 하면서 우서 앞에서 몇 번이고 눈물을 보이던 여린 사람.
정혁의 동료 박성찬이었다.
“어……! 서 팀장님, 무사히 퇴원하셨습니까!!”
정혁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놀람, 걱정과 환희와 같은 온갖 감정들이 교차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하게 바라보다가 점점 울상을 짓는다.
“어, 뭐… 울지는 말고. 무사히는 아니지만, 여튼 퇴원은 했어.”
그렇게 말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성찬은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우서와 정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있었던 걸로 봐서는 정혁이 따로 약속을 잡거나 미리 언질을
하고 온 건 아닌 듯했다.
“너는 내가 병문안 오지 말라 했다고 진짜 끝까지 안 오냐.”
정혁이 짓궂게 놀리듯이 얘기하는데 성찬은 곤욕스러운지 뒷머리를 매만졌다. 서정혁, 아마 문
앞에서 시비 거는 걸로는 전 세계 1 등 먹을 녀석이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장난을 치는 것도
서정혁 버금가는 사람이 없을 듯했다.
“아니, 팀장님이 애인이랑 같이 있을 거니깐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두 그러시길래…….”
머쓱해하며 성찬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뒤에 서 있던 우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쪽팔리기도 하고
면목이 없었다. 이렇게 모난 짓을 하러 온 건 줄 알았으면 여기까지 쫓아오지 않았을 거였다.
“그래, 덕분에 좋았어. 뭐, 그건 잘했네.”
“팀장님도 몸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칭찬해 주니 그가 다시 편안하게 웃고 정혁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정적이 이어질 무렵 성찬이 먼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너 좀 나가 있어라.”
그 말에 우서 눈이 커져 휘둥그레지고 경악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남의 집을 갈취하려고
여기에 온 걸 줄이야. 말로만 경찰이지 이 새끼 순 깡패다.
“네?”
성찬도 놀라서는 반문하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우서를 쳐다봤다. 서정혁 하는 얘기가
진짜냐 묻는 것 같았는데 우서도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우리가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갈 데가 없거든?”
정혁이 볼을 긁적이면서 얘기했다.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없는 말이라는 걸 아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쩐 일로 쫓겨나셨는지…….”
그래, 보고도 믿기지는 않을 거다. 크게 수술하고 겨우 퇴원한 사람을 바로 쫓아내는 가족은
없을 테니깐.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내가 그거까지 설명해야 돼? 너의 생명의 은인인데?”
정혁이 인상을 쓰고는 위협적으로 얘기를 했다. 그러자 성찬이 쭈뼛거리면서 어찌할 줄 모르고
망설였다.
“일단은 들어오셔서 얘기를 좀…….”
“아이, 빨리 가라니깐.”
서정혁은 막무가내였다.
“저 갈 데 없는데요.”
“그럼 이 좁은 데서 셋이 살려고?”
정혁이 우서까지 옆에다가 끌어다 놓고는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구해 왔다.
“아, 두 분 여기 사시는 건 이미 확정된 건가요?”
“응. 이 주, 아니 한 달만 빌리자. 그리고 네가 왜 갈 데가 없어. 본가 근처라며.”
“서랑 2 시간 거린데요.”
“가깝네. 요즘 한 달 살기 같은 거 많이 하잖아. 너도 본가 한 달 살기 하고 오는 게 어때.”
정혁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온화하게 눈웃음 지으며 위협해 왔다.
“……넵.”
“그래, 고마워. 빨리 가.”
간단한 짐만 내주고 쫓아 버렸다. 그 집에 우서를 들여보낸 뒤 정혁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이 집을 강탈해 꿰차게 됐다.
서정혁과 함께라면 뭐든지 괜찮을 거 같다는 말은 취소다. 서정혁 옆에 있으니 공갈을 치는 한
패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뭐, 차라도 한잔 마실래?”
저 녀석 완전 집주인 다 됐다. 찬장이니 냉장고니 열어 보면서 뭐가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그 뻔뻔한 뒷모습을 보다가 우서가 어이없게 웃었다.
“여기가 네 집이냐?”
“응, 오늘부터 우리 보금자리야.”
“됐거든……?!”
“편히 지내도 돼, 진우서. 조금 누추하지만, 내가 얼른 돈 벌어서 더 좋은 데서 살게 해 줄게.”
“아주 눈물 나게 고맙다.”
우서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일단은 집을 둘러봤다. 물건도 없고 깔끔하고 깨끗했다. 밖에서
봤던 것보다 안은 더 넓고 쾌적했다.
“지내기는 좀 불편하고 낡았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단은 여기서 지내자.”
정혁은 마치 제집인 것처럼, 그리고 누추하지만 잘 있으라 말하는 집주인인 양 얘기를 해 온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겉으로 보기엔 낡았어도 안의 인테리어는 깨끗하고 청결했다.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살 곳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다가 우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이냐, 정신 차리자.
아니,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 집에 발을 들인 것부터가 잘못인데
자신마저도 미쳐 가 점점 서정혁을 닮아 가고 있었다.
“어디 보자. 화장실 깨끗하네. 오케이.”
맞다. 화장실도 무척 깔끔했다. 신축 같은 아늑하고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지만… 아니지, 우리
신혼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신 차려라, 진우서.
“오케이 같은 소리 하네. 무슨 검침 나왔어……?”
“여기 찬장에 과자 많다. 배고프면 꺼내 먹어, 우서야.”
정혁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열어 보고 뒤져 보면서 두리번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우서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살펴보는 척을 하며 집게손가락으로 우서의 티셔츠를
들쳤다. 그의 앞에서 젖꼭지가 휑하니 다 드러났다.
“여기도 좋네. 예쁘고.”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우서가 눈을 질끈 감고 옷을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정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미치겠다. 나 이제 앞으로 정말 어떡하면 좋냐고……!!

***

서정혁은 아직 회복 중이라, 복직하려거든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후배님의 집에서


지낸 지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도 차차 적응하고 있었다.
적응하고 있는 게 문제긴 했는데 각자 회사와 병원을 오가느라 집을 알아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날은 더워지고 부모님들께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새집을 알아보는
것은 계속 지지부진이다.
“우서야, 나 왔어.”
긴 팔다리를 휘적이며 들어오는 폼이 멋있었다. 정혁은 들어오자마자 우서에게 가볍게
키스하고는 끌어안은 뒤에 손을 씻었다. 그는 우서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주로 집에서 쉬거나
혼자 병원에 다녀오곤 했다.
“병원에서 뭐래?”
우서가 출근할 때는 정혁이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손 흔들고 마중을 나왔다. 슬리퍼 신은
채로 눈 밑까지 흘러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는 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백수 같은 놈인데 멋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퇴근할 때도 다시 마중 나와 있었다. 좀 더 멀끔한 차림으로 나와서 같이 장을 보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요즘 서정혁은 얇은 셔츠에 팬츠 차림으로 입고 다녔는데 단단하고 균형
있는 그의 몸의 굴곡이 드러나 그것도 좋았다.
“이제는 정말 다 나은 거 같대. 금방 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데.”
점심에는 여유롭게 통화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회사에 가 있는 동안은 애들처럼
메신저도 하고 소소하게 연애하듯이 즐기니 애틋해서 그것도 좋았다.
사실 우서는 정혁이 주는 현금만 조금씩 가지고 회사에 다니는 중이다. 비가 오면 비를 다 맞고
걸어 다니고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에게 치이며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어쩌면 전보다
초라해져 버린 일상이었다.
그런데 더 바랄 게 없달까. 세상 부귀영화 다 누리고 살고 싶었는데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정혁과 동거하는 기분이 들어 재밌었다. 이 삶이 전보다 더 괜찮은 느낌이다. 행복과
마음의 평화가 다 들어찬다. 서정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랬다.
“왜 그렇게 보냐?”
“응?”
“내가 너무 멋있나?”
“어… 어……?”
저도 모르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붉어졌다. 정혁은 그러한
반응을 구경하다가 우서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품에 꽈악 안았다. 아, 진우서 너무
귀여워, 하면서 제멋대로 멜로디를 붙여다가 흥얼거렸다.
“우서야, 저녁 뭐 먹을까.”
“글쎄. 뭐가 좋을까.”
더운데도 이렇게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정혁이 우서를 품에 안고는 뒤뚱뒤뚱 움직여
냉장고를 열어 봤다.
처음에는 ‘야, 미쳤어?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핀잔을 주곤 했지만 이제는
정말 제집처럼 쓰고 있다. 집이 작고 아담하긴 하나 정말 신혼 같고 기분은 이상하다.
“생명이랑 맞바꿔 줬는데 이 정도쯤이야. 박성찬이 다 쓰래. 괜찮대. 제집처럼 편히 있으라
했어.”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집주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지 싶다.
“서정혁, 넌 뭐 먹고 싶은데?”
“나?”
“응,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말해 뭐 해. 입 아프게. 먹고 싶은 건 맨날 똑같은데.”
“그게 뭔데?”
금시초문이다. 정혁이 매일매일 먹고 싶어 할 정도로 좋아하는 게 있었나 생각해 보는데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넌데.”
“어?”
정혁이 짓궂게 다가와서는 검지로 우서의 가슴을 꾸욱 눌렀다.
“너라고.”
우서가 그 손을 툭 쳐 냈는데도 정혁은 허리를 간질이고는 그대로 티셔츠를 훌렁 벗겨 냈다.
냉장고를 열어 보는 짓은 다 거짓이었던 거다. 그대로 우서를 품에 안고 방으로 한 발 한 발
차근히 밀어냈다.
두 사람은 빈방에 침구를 새로 사 넣고 침실로 쓰고 있었다. 우서를 그 위에 눕힌 뒤에 정혁은
춥춥춥 하면서 발목서부터 허벅지까지 키스를 해 왔다.
“흐읏… 아, 너 머리 잘라야겠다.”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우서가 정혁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그런데도 무시하고는
우서의 골반에까지 입술을 닿아 키스해 왔다. 간지러운 데다가 애무가 집요해서 손발이 모두
말려 들어갈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정혁이 눈을 힐끔 하고는 우서의 표정을 살핀 뒤에 살짝 미소 지었다.
“흣…….”
아래를 빨리면서 상대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은 몹시 이상한 느낌이었다. 같이 사니깐 이런
게 좋았다. 하고 싶을 때 하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지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어쩌면 너와 사귀고 나서 우리 둘이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삶을 원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혁을 보고 있노라면 그전과 완전히 다른, 삶이 풍족해진 느낌이었다.

“매일 해서 그런지 이제 안 풀어도 많이 부드러워졌어.”


“하아… 앗, 으윽……!”
눈을 꽈악 감고 쾌감을 즐기던 우서가 눈을 힐끗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이불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든 정혁의 머리통은 조심스레 아래를
풀어 주는 중이었다.
“서… 정혁… 으읏……!”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뜨겁고 습한 것이 성기를 핥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귀두
끝의 갈라진 부분에 혀를 뾰족하게 세워 간질이다가 다시 입 안의 여린 살들로 기둥을 조여
왔다. 동시에 손가락을 놀려 회음부와 입구를 풀어 주고 있었다. 중심부로 피가 쏠리며 우서는
들뜬 신음과 함께 연신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정혁아… 하아, 아… 나 더는… 못 참겠어…….”
그러자 그가 이불을 휙 들추고 눈을 마주해 오며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고개를 들어 우서를
보는 그 얼굴이 반듯했고 벗은 몸 때문에 넓은 어깨와 골격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성기를 입에
머금고 미소 지어서 그런지 더욱 야했다.
“흐으읏, 으윽… 이제, 읍… 넣어 줘…….”
그는 귀두를 감쳐물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저를 참게 내버려 둘지는 모르겠다.
우서는 손을 뻗어 정혁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손 틈으로 꽈악 쥐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
따위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손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은 안온했으나 욕정을
사그라들게 하긴커녕 더욱 부추겼다.
문을 살짝 열어 두어서 여름의 공기가 점차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몸에서는 조금씩 땀이 배어
나와 서로의 피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빈방에 침구를 사들여 침실로 쓰고 있었는데, 집주인의 방은 최대한 건들지 말고 이곳에서
지내기로 정혁과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 반경이 좁아 눈만 맞으면 섹스했고 눈 감을
때까지 계속 섹스했다.
“아, 아… 제발, 서정혁…….”
아래서는 끊임없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가지 않아 촉, 하며 뜨거운 숨과 함께
성기가 그의 입에서 튕겨 나왔다. 거칠게 드나들던 손가락도 쑤욱 빠져나간다. 결국 우서는
허리를 휘면서 몸을 떨었다. 내벽을 드나들던 거센 자극이 멈추고 그 자리에서는 대신 쾌감이
잔뜩 피어올랐다.
“하아, 아…….”
이불이 거둬지자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다친 이후로 격한 운동은 잘 하지 않았다지만, 한평생
좋았던 육체가 갑자기 어디로 증발되진 않는다. 잘 갈라져 단단한 배와 팔의 근육들이
미끈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리고 정혁은 곧바로 성기를 입구에 맞춰 왔다.
“그렇게 애원하면… 더 괴롭히고 싶잖아.”
정혁은 단단한 손으로 우서의 발목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입구에
귀두 끝을 살살 비볐다. 진득한 액체들이 맞붙었다가 찐득거리며 떨어지고 그것은 쾌감을
더욱 부추겼다.
“흐읏… 으…….”
“이제 알아서 내 거 먹으려고 달려드네.”
정혁은 신기하다는 듯이 비문을 내려다봤다. 상대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열렸다가 닫히는
경이로운 장면을 바라보는데, 제 성기가 닿으면 삼킬 듯이 벌어지는 게 놀라웠다.
“제 짝을 아는 모양이야… 신기해.”
“하아… 근데 서정혁, 나 몸이 좀 이상해…….”
우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까부터 한 템포 일찍 들떠 흥분하더니 결국은 머릿속이
하얘져서 점멸해 버린다. 몸은 홧홧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열이 올랐다. 아직 삽입
전이건만, 아래가 자꾸 간질거리고 화끈거리고 배 속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흥분하는 속도가
평소와 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 그게……. 진짜 하아, 아… 이상해.”
정혁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사용했던 젤 통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라벨을
유심히 바라봤다.
“음… 여기에 최음제가 섞여 있다는데……?”
“아, 어쩐지. 흐윽…….”
우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사이로는 눈물이 찔끔 나와 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셨다.
낭패였다. 가라앉을 기미는 없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제 몸은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다.
달떠서 호흡이 가빠지고 서둘러 정혁의 성기를 품지 않으면 숨이 꼴딱 넘어갈 것만 같은
지경까지 도달하는 중이었다.
“미안. 그걸 몰랐네.”
“아으읏…….”
정혁이 안타깝다는 듯이 눈을 늘어트리고 얘기해 왔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눈물 맺힌 우서를 바라보는 얼굴이 점점 더 짓궂게 변하고 있었다.
입꼬리도 슬슬 올라갔다.
“히익……!”
입구 근처에서 허리 짓 하던 정혁이 성기를 바로 입구에 맞춰 찔러 넣었다. 예고 없이 들어온
성기가 내벽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며 뿌리까지 곧게 삽입됐다.
“아흑……! 아……!!”
숨이 턱 막혀 우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몸에 힘을 주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제 안을 침범해
들어온 성기가 제 몸을 가를 듯 거침없었다. 마치 제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최음제가 섞인 젤 때문에 지금 제게로 찾아오는 고통이 빠르게 쾌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후… 잘 먹네. 이렇게 고파하는 줄은 몰랐는데…….”
저 녀석 진짜 몰랐을까. 인터넷에서 저걸 사들인 건 저 녀석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 뭉근히 휘젓고 돌아다니는 성기를 망연하게 느꼈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크게
받아들이게 돼 우서의 혀끝이 덜덜 떨려 왔다.
“힉, 너… 아, 앗… 거짓, 말… 하아…….”
“진우서 취향대로 달콤한 걸로 골랐는데. 하아… 그럼 오히려 잘된 거잖아?”
“으읏, 흐읍…… 하응……!”
“잘 느끼는 우서야, 오늘은 좀 더 재밌게 즐겨.”
정혁은 그대로 내벽을 가로질러 배 속을 거침없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퍽퍽 소리 나게 치고
올리며 우서의 성감을 꾸욱, 꾹 짚어 왔다. 매일같이 섹스한다지만 아직도 저 거대한 사이즈는
적응이 되질 않아 우서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정말 뚫어질 거 같았다. 배 속을 뚫고 나올 것같이 움직임이 거칠었다. 잘 풀어 주었어도 제
안이 다 망가질 것만 같았다. 정혁을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우서는 눈물을 흘렸다.
기쁨과 고통이 함께 찾아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으으… 흐읍, 으, 읍, 하…….”
정혁은 위에서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그의 멀끔하고 날렵한 얼굴이 우서의 눈에 꽉 들어차
정혁밖에 안 보였다. 등지고 있는 배경에서 다른 것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서정혁만이 제
세계에 가득 찬다.
머리가 살랑살랑 흩날리는 것이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정사가 너무 격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사람을 무척 설레고 가슴 저리게 만들었다.
서정혁은 이제 다친 곳이 정말 다 나은 듯싶었다. 몸이 불편하다면 이렇게 에너지 넘치는 섹스
따위는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제 위에서 열을 다해 섹스하는 정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 왜 그렇게 봐……?”
“아, 아냐……. 흐으, 읏, 좋… 좋아서.”
어느새 발딱 선 자신의 성기 끝에는 쿠퍼액이 맺혀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애액
같은 것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평소였다면 곧추선 성기를 손으로 풀어 줬을 정혁도 그
모습을 그저 귀엽다는 듯이 관망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뒤로 느껴 절정까지 완전히 도달하는 쾌감을 맛보여 주려 하는지 정혁은 점차 치고
올리는 데에 박차를 가했다. 이대로 쾌감의 끝까지 느끼고 싶다. 네 품 안에서면 뭐든 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내어 주고 싶을 만큼 황홀한 경험이었다.
눈앞의 모든 게 다 서정혁이다. 제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만큼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됐다.
“후…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는 그렇게 웃었다. 그 미소가 싱그럽고 아름다워 더욱 정신이 아찔해져 간다. 이제는
정혁밖에 안 보였다. 우리 둘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이어졌다.
“하아… 흡… 좀 더……! 으읏……!”
정혁은 그 뒤로도 힘있게 쳐올리며 우서의 안에서 추삽질을 이어 갔다. 얼굴은 가슴과 목에
묻고 쉼 없이 애무했다. 그 뒤로는 볼과 이마, 콧잔등에 키스했다.
이제는 입가에 다가와 붉어진 혀로 핥고 도톰한 입술로 빨아서 우서의 숨을 모조리 다 삼켜
먹는 중이었다. 얼굴 전체에 키스하고 하고 곳곳에 제 흔적을 남기고 나서야 성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으윽… 하, 아으응……!”
그곳에 닿아 오는 성기가 집요해 우서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정혁의 거친 숨과
땀방울이 우서의 배로 가 투둑─ 떨어졌다. 그는 무척이나 공들여 우서의 몸을 정성껏 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아주 깊은 곳으로 닿아 올 때마다 허리가 부서질 것처럼 전율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애액을 울컥울컥 내뱉던 제 성기가 결국 정액을 쏟아 냈다.
“하아… 하…….”
“후우…….”
뒤로 느껴 절정까지 달한 우서를 바라보던 정혁도 그의 몸 안에서 뜨겁게 사정했다. 뜨거운
손이 우서의 골반을 잡고 지그시 눌러 왔다. 성기는 그 안에서 천천히 반동하다가 빠져나왔다.
“하아…….”
배 속에 가득 찬 정액이 결국에는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탈력감에 우서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최음 성분이 남아 저를 저릿한 감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땀에 흠뻑 젖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다. 그렇게 늘어져 누워 있는데
정혁이 테이블서 티슈를 빼 들었다.
다리 사이 그리고 우서의 배와 가슴팍까지 튄 정액을 부드럽게 닦아 주고는 단단히 안아 왔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워 터질 것만 같은 신체가 겹쳐 있으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정혁은 우서의 볼에 뽀뽀하다가 왕─ 깨물고는 다시 입술에 입을 맞춰 왔다. 그리고 또 질세라
꽈악 안아 왔다. 힘주어 안으니 이러다가는 결국 그의 품에서 팡 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벅차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이 모든 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서야, 덥지.”
“응.”
“여기 에어컨이 없어서 어떡하지.”
땀 맺힌 뜨거운 몸이 식을 줄을 모르고 달라붙어 있다. 우서는 그의 등을 식혀 주려 작게 손을
뻗어 부채질해 보았다.
“우리 이참에 같이 살 집 구할까.”
우서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며 그리 말해 오고 있었다. 마치 청혼 같은 느낌에 가슴이
무척 떨려 온다.
우서는 그 말을 듣다가 피식 웃었다. 정혁의 상처 부위에 손을 살포시 얹고는 제 맘이 전해지길
속으로 바라 보았다. 나 또한 너와 함께 살고 싶다. 이렇게 매일 살을 맞대고 사랑을 속삭이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록볼록 튀어나온 외상 흉터가 손바닥으로 느껴져 왔다.
“서정혁… 고마워.”
“뭐가.”
“그냥 다.”
그가 살며시 웃었다.
“나도.”
네 이런 막무가내인 성격도 맘대로 밀어붙이고 멋대로 행동한 것도 다 고마웠다. 나를 좋아해
준 것 또한, 그리고 이렇게 행복을 느끼게 해 준 것도. 네가 고통을 참고 인내해 이겨 낸 것도
모두 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정혁과 단둘이 같이 살 생각은 해 본
적은 없지만, 너와 함께라면 무엇인들 좋지 않을까.
운명이든 우연이든, 네가 없었다면 끝내 다 못 이뤄 냈을 관계다.
“우리 한 번 더 하자.”
오늘은 정혁의 품에서 닳아 없어져도 좋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섹스하다가 타 죽어도 좋을 것
같았고 또 땀에 흠뻑 젖어서 헉헉댄다 해도 기쁠 것 같았다. 우서가 고개를 돌려 그 얼굴에
키스했다. 정혁의 혀와 입술이 자신을 반기며 뜨겁게 화답했다.

***

정혁과 우서는 집에서 뒹굴면서 게으른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업무에 치이느라 피곤했던
주중은 이제 안녕. 서정혁과 주말을 보내고 있으니 마음에는 평온함이 찾아온다.
다리 하나를 올려 저를 죽부인 안듯 껴안고 있는 서정혁이 불편하긴 했지만… 이 느낌이
이상하게 안락해 중독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단단한 몸에 꽉 끼어 있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떠서 내밀었다. 입 안으로 들어가는 걸 손 하나
까닥 않고도 얻어먹을 수 있는 삶은 나름 매력이 있다.
“자, 우서야. 초코 맛.”
“아…….”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정혁이 주는 아이스크림을 스푼째 입 안에 머금었다. 그런데 맛이
이상하다. 화─ 하게 퍼지는 시원한 느낌과 치약을 먹는 찜찜한 기분.
“으… 뭐야.”
“민트 초코.”
“너 일부러 그랬지……!!”
우서가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 지르니 정혁이 귓가에 대고 큭큭대며 웃었다. 사귄다고 해서
매번 로맨틱한 상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정혁은 예전처럼 저를 골려 먹기도 했다. 향기가
나는 풀은 싫다. 허브와 같은 민트 잎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가리켰다.
“어, 지금 죽을 거 같은데……? 빨리 해.”
“아, 응.”
입이 댓 발 나왔던 우서가 다시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화가 났냐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손을 바삐 놀려 열중했다.
“자. 진짜 초코 맛.”
밑을 힐끔 하고 숟가락에 봉긋하게 올라온 까만 아이스크림을 확인한 우서가 안심하고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불쑥 정혁의 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아, 진짜 이게 뭐 하는……!!”
정혁은 그대로 우서의 머리통을 잡고 볼을 와구 물어서 빨아 먹듯이 우물우물했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눈, 코, 입 여기저기에 키스하고 손을 놀려 신체 이곳저곳을 마구 주물렀다.
“으… 이거 놔아……!”
정혁은 우서의 볼을 입에 머금은 채로 고개를 젓는다. 요즘에 서정혁은 툭하면 온몸을 다
입으로 가져갔다. 볼이나 팔다리, 배 등등. 가슴이나 하반신은 말할 것도 없고. 더워서 조금
떨어져 있고 싶을 때도 있는데 당연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핥고 빨고 물고 놓아주질 않으니
서정혁 때문에 우서는 찜통에 들어간 만두라도 된 기분이었다.
“으아, 너 때문에 죽었잖아!”
결국 캐릭터의 HP 가 다해 게임이 끝났다. 우서가 손바닥으로 정혁을 짜증스레 밀쳐 내는데
그가 퐁─ 하고 입에서 볼을 놔주었다. 굉장히 높은 점수까지 도달했다가 죽어 버려서 분했다.
약이 올라 우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혁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이없게도 사르륵 화가 녹아내린다. 그의 매끈하고 샐쭉한 얼굴 때문에
입꼬리가 괜히 씰룩댔다.
“정말 나 때문이야……?”
흐음…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아이템을 너무 일찍 썼던 거 같기도 하다.
“아, 몰라……!”
“왜, 진우서. 말해 봐. 그게 정말 내 탓이냐고.”
“으으… 이것 좀 놓고 말해……!”
그 뒤로도 정혁은 우서의 머리통에 마구 키스하고 또 더욱 꽈악 안아 왔다. 녀석과 이렇게
사니깐 재밌긴 했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인데 그전에 느껴 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낀달까.
결국 우서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간지러움을 견뎌 냈다.
“우서야, 저녁에 뭐 먹을까.”
“으음… 나 닭볶음탕.”
“너 거기 들어간 감자 먹고 싶은 거지.”
“응, 맞아.”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오래 알고 지낸 탓에 합치자마자 서로에게 완벽하게 적응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걸 보고 천생연분이라 하나 보다. 우서가 흐뭇하게 웃었다.
같이 살면서 새로 깨닫게 된 건 정혁의 요리가 수준급이라는 사실이다. 설거지, 빨래 같은
살림은 뭐든 잘한다. 심지어 요리는 엄마가 해 주는 것보다 입에 잘 맞아서 탈이었다.
운동했던 녀석이라 그런지 부지런하고 힘도 잘 쓰고 거기다가 순발력도 좋아서 뭐든 착착
잘해 냈다. 거기다가 단체 생활도 자주 했던지라 항상 깔끔했고 매너가 좋았다.
그래서 부모님들께는 죄송스럽지만 이 생활 만족 만족 대만족이다!
밤에는 저를 즐겁게 해 주고 엄청난 체력으로 저를 챙겨서 살림까지 도맡아 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은 일절 나질 않고 편하기만 하다.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는 말이 정말 몸으로 와닿았다.
몸이 편하고 마음이 즐거우니 집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럼 마트 갈까. 오다가 카페도 들르자. 너 좋아하는 초코케이크 사러.”
장 보러 가는 것도 재밌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달달한 것도 많이 사 주고 또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 대화를 하다 보면 계속해서 웃게 되는
그런 삶의 낙도 있었다.
“어, 그래. 나 이것만 하고.”
우서는 다시 시작한 게임에 열중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그동안은 회사 다니고 일에 치여
사느라 몰랐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이렇게나 큰 재미를 주는지를. 정혁은 다시 옆에서 우서를
끌어안고 볼에 마구 뽀뽀했다.
촉─ 촙─ 쫍─ 소리가 거실에 반복해 울려 퍼졌다.
“집은 날 더워지기 전에 빨리 구하자. 나 복직하기 전이 적기야.”
“응응.”
게임에 집중해서 우서가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실 고민은 따로 있었다. 일로 바쁘다
핑계를 대며 집 알아보는 것을 미뤄 왔지만 조금 꺼려지는 게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모님들이었다. 정혁과 같이 살겠다고 얘기를 하자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실 것만 같았다. 사귀는 것과 동거는 완전히
다른 거니깐.
그러니 부모님들의 허락 없이 집을 구해 정혁과 동거했다가는… 정말 호적에서 파일 위험이
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들을 잃을 수 있다는 엄청난 위험을 안고 가는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고 갈 데가 없어 서로의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은 부모님들께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아 그건 싫었다. 우리 둘 무척 단단히 마음먹은 건데 저자세로 숙이고 집에 들어가면 어쩌면
… 정혁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래서 먼저 연락도 못 하고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을 수도 없다. 주인이 있는 집이니……. 대피 생활도 빨리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우서의 갈등이 계속된다. 우리 둘 이제 어쩌면 좋을까 싶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는데 핸드폰 화면이 바뀌더니 액정에 발신자의 이름이 떴다.

아버지

“헉……!”
우서는 너무 놀라 경기하며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다행히 소파에 가 떨어졌지만, 지잉─ 지잉
─ 하고 패브릭 위에서 마구 진동하는 핸드폰이 수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혁은 얼굴에
물음을 달고 우서를 바라봐 온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누군데 그래……?”
“우리 아빠. 왜 전화하셨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그래도 갑자기 전화가 오니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정혁도 소파에 던져진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표정이 굳어져
갔다.
“어떡해… 서정혁, 나 못 받겠어… 흐윽…….”
그때 집에서 쫓겨난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이 안 되다가 처음 온 전화였다. 그리고 반대로 두
사람도 연락드리기가 망설여져 일단은 전화나 문자를 보류하던 참이었다.
“내가 대신 받을까?”
정혁이 묻자 우서가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무섭고
두렵다 해도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와 만류가 심하다지만
정혁과 저의 관계는 무척이나 떳떳했다. 피하고 외면할 정도로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에게로 손을 내미니 정혁이 허리를 숙여 핸드폰을 주워 건네줬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우서는 용기 내어 화면을 터치하고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 우서냐.
“네, 아빠.”
목이 미어져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데 간신히 대답하며 정혁을 바라봤다. 그 또한
조마조마한 표정이라서 제가 더 긴장이 된다.
─ 정혁인 옆에 있냐.
“아… 네.”
서정혁은 왜 찾는 걸까 싶어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데 아빠의 얘기가 이어져 왔다.
─ 그래. 두 사람 오늘 저녁에 같이 집으로 오거라.
정혁도 핸드폰에 살짝 귀를 대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조금 표정을 달리했다. 나쁜
말이라도 나오면 어떨까 싶어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동요하며 눈썹을 씰룩인다. 우서가 오늘
시간 괜찮냐며 눈짓했다. 그러자 그도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저희 7 시에 갈게요.”
─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오늘, 피치 못하게 결전의 날이 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전화를 끊고 정혁을 비장하게
바라봤다. 그 또한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었는지 아무런 말 없이 우서의 표정을 살피고는 제
품에 그저 꽈악 안아 왔다.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는데… 서로에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물론 무서웠지만 우린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서는 정혁을 좀 더 품에 바싹 안았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데까지도 긴장이 돼서 다리가 후들거리며 다 떨릴 지경이었다.
긴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이곳까지 찾아오니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어댔다. 먹이가 될 걸 알면서도 호랑이굴에 머리를 들이민 기분이었다.
“후…….”
제집인데 도어 록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초인종을 눌러야 될지 감도 안 잡힌다. 모든
게 혼란스러워서 우서는 한 번 더 정혁의 손을 붙들고 꽉 쥐었다.
“잊지 마, 서정혁.”
“너도 잊지 마, 진우서.”
“아, 알았다니깐?”
전화를 받은 후에 이곳까지 오면서 서로 단단히 약속을 했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간에 흔들리지 않고, 회유하더라도 서로 배신하지 않기로 그렇게 얘기를 마쳤다.
하지만 역시나 불안하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나오실지 몰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까 했던 거 한 번만 더 하자.”
우서가 불안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정혁이 그 위에 손바닥을 포개었다. 정혁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우서가 재촉하며 발을 굴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바닥을 스치며 스캔, 복사, 도장을 차례로 찍었다.
서른인데도 아직도 이러고 논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랑 이렇게 하면 장난친다는 생각에
가볍게 여겼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녀석과 이렇게 유치하게 놀았던 자신으로서는 손장난이
대단한 맹세가 되곤 했다.
“아, 안 되겠어. 불안해. 한 번 더.”
“아니, 이게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돼?”
“그래도 결의를 다지면서 딱 한 번만 더 해.”
정혁이 조금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다시 내민 손바닥에 손바닥을 겹쳐 왔다. 쓸어내렸다가 쿵,
쿵, 주먹까지 부딪치고는 도장 찍듯이 손바닥에 주먹을 단단히 찍어 눌렀다.
“서정혁, 너 진짜로 다짐한 거다……? 나 버리면 안 돼.”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해.”
정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발 믿어 달라 그리 호소하는데, 서정혁을 안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떨림이 어느 정도 잦아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끼익─ 하고 옆집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옆에 사는 슬아였다. 아이가 빼꼼히
문을 열고 나와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걸 확인하고는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빠들 지금 뭐 해요……?!”
아이는 궁금해하면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깐 그게…….”
우서가 입술을 축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사이에 정혁이 치고 들어와
말을 가로챘다.
“슬아야, 안녕~ 우리가 뭐 하고 있냐면 우서 오빠가 패배를 인정한 거야.”
“패배요……?”
“응, 우서 오빠가 조금 전에 자기가 더 못생겼다고 인정을 했거든. 그래서 이제 앞으로 제일
잘생긴 오빠는 정혁 오빠가 됐어. 슬아도 좋지?”
“네……!!”
“그래, 고마워. 하이파이브.”
손뼉을 맞부딪치면서 두 사람은 우서를 두고 킬킬거리고 웃었다. 예전부터 슬아를 만나면
정혁과 우서는 누가 더 잘생겼네 마네 유치하게 싸우곤 했었다. 오늘부로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건가 싶었다. 잘들 놀고 있다. 우서가 어이없어서 발을 탁, 탁, 구르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흠, 흠 하고는 헛기침도 했다.
“그래도 슬아, 우서 오빠도 너무 좋아!”
순식간에 우서의 표정도 다시 환해진다. 얼굴을 펴고 슬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슬아야~”
“오빠들 둘 다 잘생겼어! 난 우서 오빠, 정혁 오빠 둘 다 좋아. 힘내, 파이팅!”
슬아는 꺄르륵 하고 웃다가 집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죽을래? 뭔 패배.”
우서가 정혁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는 잘못 없다며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설전이 꽤 소란스러웠던 모양이다. 디리링─ 하고 도어 록 해제되는 소리가 나더니 벌컥
하고는 문이 열렸다. 바로 제집의 현관문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서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서가 눈을 크게 뜨고 경직되어서는 뻣뻣하게 제 엄마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
막상 그 얼굴을 보니 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엄청 많이 연습했는데 다 까먹어 버렸다.
오랜만이라고 안부 인사를 건네야 될지 아니면 용서부터 구해야 될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굳어 있는데 제 엄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왔으면 들어오지그래.”
그 말에 우서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정혁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뜨거운 손, 이제 무서울 건
없다.
다시 찾아온 집에는 저번처럼 부모님들 네 분이 쪼르륵 앉아 계셨다. 아버지들은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계시고 어머니들도 각자 편한 자세로 방석 위에 앉아 계셨다. 이 불편한
공기와 이 경직된 분위기 하며 사람을 무척 긴장하게 만든다.
우서가 작게 심호흡하면서 부모님들 앞에 가 섰다. 정혁의 부모님들 그리고 제 부모님까지
모두 두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그래서 더욱더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묵직하고
답답해졌다.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앉을 자리에 방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서는 자리를 확인하고 그
위에 앉았다. 편하게 앉을 수는 없다. 죄스러우니 살포시 무릎을 꿇고서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정혁도 덩달아서 무릎을 꿇고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하실 말씀이…….”
우서가 그렇게 물으려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엄마가 입을 달싹이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내다가 말소리 대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고는 다시 망설이셨다. 이게 정말 맞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표정에 우서와 정혁 둘 다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어떤 중대한 얘기를 하려고 저희를 부른 건지 조마조마하면서도
궁금해져 간다.
“우서 엄마, 그래도 해야지 어떡하겠어.”
정혁의 어머니가 옆에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서는 우서의 엄마를 달랬다.
“그래 당신, 정했으니깐 빨리 애들한테도 말해야지.”
아버지도 거들면서 우서의 엄마를 회유했다. 그렇게 어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한 수 띄운 후,
다시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모두들 비장한 표정으로다가 정혁과 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서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정혁의 어머니, 아버지가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봐 온다. 두 사람
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른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마주해 오며 각오했다.
“우서 어머니, 애들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얘기를 하죠.”
옆에서 거드니 우서의 엄마가 입을 연다.
무슨 말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우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바지를 꽈악 움켜쥐었다.
헤어지라고 하든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으라고 하든 어쨌든 간에 정혁과는 떨어질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서정혁을 힐끔거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것도 있고 스캔 복사 도장을 얼마나 찍어댔는지 모른다. 현물 계약서는 없다지만 이
정도로 약속을 받아 냈으니 서정혁도 말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린다. 뭐든지 다 견뎌 낼 것이다.
서정혁도 괜찮다고 했다. 상처 안 받는다고 했다. 그러니깐… 어떤 말을 들어도 다 이겨 낼 수
있다. 인정할 것이고 수용할 것이다.
“후… 우서야, 정혁아. 힘든 결정이었지만… 엄마 아빠 받아들이기로 했어.”
“……?”
우서가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엄마를 바라봤다.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두 사람 허락할게.”
“……네에!?”
우서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올라가고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서는 무릎을 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말도 안 돼……. 우서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제 부모님이 진심을 말하고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솔한 표정이었다.
뭐야, 이 전개는 뭐냐고……! 이 속도감 뭐야!! 우서가 고개를 휙─ 돌려 정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혁도 어리둥절한 표정인데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씰룩대며 올라가 비죽비죽 웃음
짓고 있었다.
조금 전 모든 말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이건 완전히 예상을 깨 버린
발언이었다. 전혀 상상한 적 없어서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여하튼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
대답은 받아들이기가 조금 곤란하다.
“우서야, 정혁아. 엄마 아빠 고민 많이 했어.”
그 차분한 목소리에 우서가 더욱 혼란스럽게 저의 부모님들을 바라봤다. 정혁의 어머니와
우서의 아버지도 그에 맞춰 의견을 모으듯 차례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오랫동안 만나 왔다고 하니, 우리가 말린다고 해서 그만둘 사이도 아닌 것 같아
보이고… 또 둘이 잘 어울리기도 하니깐.”
“우서랑 정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거 생각하니깐, 엄마 아빠가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게
좋겠더라고.”
“얘들아, 많이 힘들었지?”
아니, 그건 아니다. 얘를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동정심을 받을 정도로 힘들지도 않았단
말이다. 우서가 살며시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막상 진실을 밝히려니 입이 딱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래 둘이… 그래도 나이가 있으니, 안정적으로 살길 바란다.”
“식은 내년에 올리고, 두 사람 차근히 같이 살 준비하거라.”
아버지들도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용기 내어 말을 꺼내셨다. 그 단단하고 묵직한 언사가
우서의 가슴에 와 쿵─ 하고 박힌다. 빼낼 수도 없이 아주 굳게 자리 잡게 됐다.
아, 이게 뭐야!!! 뭐냐고……!!!
벙쪄서 우서가 멍하니 제 부모님들과 정혁의 부모님 그리고 정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런데 별안간 정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90 도로 허리를 굽히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버님……! 우서 눈에서 눈물 안 나게 제가 잘 데리고 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사위.”
우서의 아버지가 감동받은 얼굴로 정혁을 올려다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서정혁 저 새끼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잠깐만, 아빠……? 저기 아빠, 사위라뇨……?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싶어서 우서가
단어를 곱씹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위라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인지 판단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서… 잘하는 건 별로 없지만 착하고 똑똑한 애니깐 잘 부탁해, 정혁아.”
엄마? 엄마……!! 우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정혁과 제
부모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혁을 따라서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으로 인해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조금
휘청거렸던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서정혁 옆으로 와 서서 그의 어깨를 톡, 톡 치고는 그를 회유하려 했다. 잘못된 건 정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은 다급해서 그의 팔을 잡고 잘잘 흔들게 된다.
“정혁이라 든든하네. 자랑스럽고.”
“우서가 겉으로 보기엔 씩씩해 보여도 외로움도 많이 타고 아직 애 같은 부분도 많아.
정혁이가 잘 보듬어 줘.”
“네, 우서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우서의 어깨를 꽈악
끌어안았다. 그 뒤에 자신의 옆구리에 턱 붙여 부모님들 앞에서 애정을 과시했다.
“우리 아들이 역시 믿음직스럽네.”
정혁의 부모님들도 호호 웃으시면서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셨다.
우서는 정혁에게 잡혀 어깨를 맞부딪치면서도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서정혁이 이상한 말을
꺼냈던 것 같다.
장인어른? 장모님?
다들 왜 이러는 거죠?
우서가 정신을 다잡고 말 한마디를 떼려 하자 정혁은 우서의 두 볼을 붙잡아 왔다. 그러고는
입에 뽀뽀를 박치기하듯이 해 왔다.
“읍─!!”
우서의 얼굴이 찌뿌되어서는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걸 놓으라며 정혁의 가슴과 어깨를 퍽퍽
쳤다. 동시에 부모님들은 남사스러운 장면에 고개를 좀 돌리고서는 헛기침을 하는데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입술이 잠시간 맞붙었다가 떨어지고 정혁도 우서를 놓아주며 헤살스럽게 웃었다.
“이─ 씨……!”
뭐냐고, 이 정신없는 와중에 서정혁은 또 엄청 멋있고 난리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싱그럽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순순한 웃음이 마치 아이 같았다.
이렇게나 기뻐하는 녀석의 표정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다. 꾸밈도 없었고 절제도 없이 그저
환히 웃고만 있었다.
“식은 둘이 좋을 대로 하고, 엄마 아빠는 잘 모르겠네. 그… 남자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부모님들도 쑥스러워하시면서도 두 아들끼리 잘 어울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계셨다. 결국
자리에 모인 모두가 무척이나 기쁘게 웃고 있다. 그렇지만 우서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보니 모두를 따라서 삐쭉삐쭉 어색하게 웃게 된다?
제 부모님들은 보수적이라 얼굴을 붉히고 계셨지만 아들들을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는
무척이나 깨어 있고 열려 있는 어른들이 확실했다.
녀석과 영원을 약속하긴 했는데 졸지에 영원한 피앙세가 되게 생겼다.
“그래도 집은 이 근처에 얻는 게 좋지 않을까? 직장도 가깝고 말이야.”
그럴 생각도 없고 아직 아무런 계획도 없는데 부모님들은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하고도
모자라서 우서와 정혁의 결혼을 등 떠밀었다.
“정혁아, 우서야. 엄마 아빠가 그동안 반대했다고 해서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라.”
“네, 그럼요.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저희 너무 기쁩니다.”
정혁이 대답하는데 우서는 혼란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파티의 기분을 내는 와중에
우서만 혼자 덩그러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두 사람 이제 합치면 우리들 이제 가족이고 사돈이겠네. 너무 잘됐어.”
그러면서 다섯이서 하하 호호─ 하며 웃고 좋은 분위기로 상황을 몰고 간다. 그 틈새에서
어이가 없는 우서만 허허… 하고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모두들 우서가 기뻐한다고 생각했는지 얼싸안고는 다 같이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좋긴 좋은데…….
서정혁이랑 안 헤어져서 좋긴 한데…….
그런데 이건 좀 갑작스럽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녀석과 파트너로 우연히 만나 우여곡절 끝에
섹스하고 엉겁결에 파트너가 됐다. 그런데 갑자기 애인이 되더니만 순식간에 동거인이
되어서는 이제 부부가 되라 한다.
자의는 맞지만 어쩐지 여기까지 급물살을 타고 떠밀려 온 듯한 느낌이었다.
우서는 패닉에 빠져서 눈 코 입의 구멍을 모두 확장한 뒤에 정혁을 바라봤다. 어안이 벙벙하다.
그런데 그는 우서를 향해서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사랑 가득 담아
바라보는 시선까지.
아, 그래. 뭐……. 서정혁이면 괜찮을 거 같다. 그 결혼이라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게
돼서 잘된 건 잘된 건가……? 싶다.
그래… 그, 영원을 약속했으니깐, 우리 둘.
뭐…….
저 잘난 녀석이랑 결혼…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주말에는 여행도 가고 또 평일에는 맛있는 저녁을 해
먹으며 소소하게 보내는 행복한 일상 같은 거 말이다.
그런 걸 이제 서정혁이랑 할 수 있게 됐다.
저기요.
여러분.
제가요… 그…….
파트너를 구했는데요…….
갑자기… 결혼하게 됐습니다만……?

『파트너를 구했는데 엄마 친구 아들이었습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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