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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12 월의 겨울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준영이 한숨을 흘렸다. 평소보다 차들이 많아 정체가
심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산타복을 입은 남자가 종을 흔드는 게 보였다.
“매번 미안하다.”
“…응.”
민석이 은근슬쩍 비꼬는 것도 이해는 됐다. 벌써 녀석 때문에 이게 몇 번째란 말인가. 최근에 둘 다 바쁘다 보니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오랜만의 데이트를 방해받았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또 쓸데없는 소리.”
민석은 농담인 듯 웃었지만, 속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준영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녀석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얼굴을 보기 전엔 귀여운 이웃집 남동생을 상상했었다. 준영의 말투에 애정이 담긴 것도 그렇고,
항상 녀석을 묘사할 때 귀여운 강아지처럼 얘길 했으니까.
그러다 처음 본 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추나 푸들이 아니라 셰퍼드나 시베리아 허스키 같은 대형견에
가까웠다. 제 키만큼 큰 키에 수영까지 해서 그런지 몸은 어지간한 성인보다 건장했으며 목소리 또한 변성기가
지난 건지 완벽한 중저음이었다.
실수인 척 테이블을 밀어 제 앞으로 음료를 쏟더니 태연하게 웃었고, 그러고 나서 준영이 돌아오자 돌변하여
안절부절못하더니 제게 죄송하다며 냅킨을 건네는 깜찍함을 선보였다. 처음엔 장난으로 치부했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 확실히 알게 됐다. 친한 형을 빼앗긴 데서 오는 단순한 질투심이 아니라는 걸.
“금방 올게.”
“데려다주라고까진 하지 마. 나 그럼 진짜 질투한다?”
“시끄러워.”
생긋 웃는 민석을 뒤로하고 준영이 차에서 내려 파출소 쪽으로 걸어갔다. 연말이고 주말이라 그런지 파출소 앞은
취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시비를 말리는 나이 많은 경찰이 그만 좀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깐 멈추는 것 같더니 그것도 잠시 또다시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교복을 입은 무리가 있었다. 정확히 한 명은 다른 교복을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같은 교복을 입고서, 한두 번이 아닌지 파출소가 제집이라도 되는 양 다들 편안해 보였다. 얼굴이
엉망인 것만 빼면.
“이도하.”
혼자 다른 교복을 입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남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올 줄 알았다는 얼굴로 씩 웃더니
손까지 들어 인사를 한다. 한 대 확 쥐어박을까 하다 간신히 참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상대편 아이들은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터져 씩씩대고 앉아 이쪽을 노려보는데 도하는 얼굴이 아주 멀쩡했다. 안
맞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렸을 텐데, 아쉽다고 해야 하나.
“…예.”
경찰관 한 명이 준영을 불렀고, 그쪽으로 갔더니 전후 사정을 설명해준다. 시비가 붙었고, 먼저 주먹을 휘두른
건 상대편이라고 했다. 미성년자라 훈방 조치되지만 자꾸 이런 일로 드나들어 좋을 게 없으니 아이에게 단단히
타이르라고 덧붙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취객 하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파출소 옆 기둥을 붙들고 토악질을 해댄다.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코트 주머니를 뒤지는데 라이터가 안 보인다.
은색의 지포 라이터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게 학생이 소지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이
자식이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 어느 것 하나 비싸지 않은 게 없었다. 말만 하면 다 사주고 다 들어주고,
막둥이라고 부모가 애지중지 키웠는데, 대체 왜? 어째서!
“따라와, 인마.”
귀를 잡은 채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출소 앞에서 때렸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저보다 큰 이 녀석이 다른 사람 눈에 아동처럼 보이진 않겠지만. 도하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딱히
반항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파, 좀 놓고 말해.”
“그래도 적당히 피했어야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한밤중에 여러 명을 상대로 싸움질이야? 제정신이야?”
“까불어.”
“인상 쓰지 마. 못생겨져.”
“왜.”
“형 차는?”
그제야 도하의 눈이 준영의 어깨 너머로 향한다. 아까부터 길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깜빡이를 켠 채 이쪽을
주시하는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차에 익숙한 남자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상대였다. 여전히 그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준영에게 물었다.
“둘이 여태 같이 있었어?”
“얼른 택시 잡아줄 테니까 들어가기나 해.”
“궁금해서.”
“알 거 없어.”
“친구라고 했잖아.”
“거짓말.”
“야.”
“저 사람 어디가 좋아?”
“도하야.”
“너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진 준영은 서둘러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택시비를 내밀었다. 가, 얼른. 도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준영이 억지로 주머니에 택시비를 쑤셔 넣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집에, 같이 가자.”
“이도하. 요즘 너무 까불어.”
“너 진짜 왜 이래!”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하며 고집을 부리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화를 냈다. 답답한 마음에 목에 두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든 다음 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아직 어린애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도하는
언젠가부터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아니, 저번 주 일만 생각해도 이미 한 발은 넘은 것 같았다. 멋대로 준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실수인 척 문지르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다.
“들어가. 더 얘기 안 할 거야.”
냉정하게 말하고 몸을 돌리니 더는 잡지 않는다. 차 안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민석이 보였다. 뒤통수로
날아드는 시선이 칼날처럼 따가웠다. 전 같으면 어떻게든 택시를 태워 보냈을 거다. 같이 가자고 끝까지 조르면
마지못해 갔을지도 모른다. 제게는 가족보다 더 애틋하고 귀여운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파출소로 이도하를 데리러 오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녀석이 자꾸 비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어쩌면 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차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내 마음을 모르느냐고, 울고 있을 것 같았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앉아 벨트를 끌어왔다. 일부러 앞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렸다.
“가자.”
“쟤 안 가는데?”
“놔둬.”
“됐어, 뭐하러.”
“가자, 얼른.”
“완전히 열 받은 거 같은데?”
“가자니까?”
흐음. 민석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핸들에 턱을 받치고 도하를 보며 실실 웃었다. 이러고 있으면 더 열
받으려나?
“김민석.”
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준영은 저를 보지도 그렇다고 앞에 있는 도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마를 손으로 짚고 있었다. 반쯤 내리깐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자기 화났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졌다.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앞에 버티고 선 꼬맹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순간 준영이 고개를 돌리며 하지 말라고 밀어냈고, 곧바로 그의 눈은 있는 대로
커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민석이 돌아보기도 전에 퍽! 엄청난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민석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앞 유리에 붙어 있던 벽돌이 주르르 밑으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유리는 처참할
정도로 금이 갔고, 여전히 도하는 서늘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봤다. 준영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민석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젠장.”
예전 같으면 따라갔을 것이다. 돌려세우고 녀석을 달래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곧 추운 겨울 어둠 속으로 녀석이 차츰 사라졌다.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아까부터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따가웠다.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열일곱 살의 꼬맹이 때문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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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씨. 짜증을 내며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찾았다. 하필 어젯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테이블 위에다 던져놨는지 후회가 됐다. 그냥 모른 척 자 버릴까 하다 시간을 확인했다. 대충 누군지 짐작됐기에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향했다.
[듣고 있어?]
“알았어. 이따 봐.”
양치질을 마치고 샤워부스로 향하는데도 녀석은 여전히 분기탱천이었다. 찬물을 틀어 뿌렸지만 쉽게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도하가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흠….”
“하아, 씨발….”
카메라 렌즈 안으로 도하의 상반신이 들어찼다. 신인배우라 다들 걱정하는 분위기였는데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도하는 각기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모 잡지사 기자와 그의 동료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가운데 선태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촬영장으로 오는
내내 툴툴거리길래 걱정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내고 있으니 기특하기만 했다. 잡지사 기자를 이쪽으로
부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어찌 기사를 안 좋게 써줄 수 있단 말인가.
잠깐 쉬었다 가실게요. 스태프의 말에 잠시 촬영을 멈추고 다들 막간의 휴식을 취했다. 도하가 선태를 발견하고
풀어진 셔츠를 여미며 다가오자 윤 기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제가요?”
“학창시절에 유망한 수영선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세요.”
“네. 원래는 수영선수가 꿈이었는데 어깨부상 때문에 오랫동안 쉬면서 관두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군대
다녀왔고요.”
“아, 군필이세요?”
“혹시 실연?”
“과찬이십니다.”
“저도 실은 영화를 봤고, 그 헤어지는 장면에서 연기라기보다 너무 실제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요. 강우가 극
중에선 고등학생이었는데 실제 고등학생 땐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인기가 무척 많으셨을 거 같은데요.”
“현재 소속사 없이 개인 활동을 하시는데요, 수많은 회사에서 러브콜이 들어간 걸로 저희가 알고 있거든요.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회사가 따로 있으신가요?”
“당연히 그래야죠.”
“감사합니다.”
“어떤 거요?”
선태가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윤 기자가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나서
도하가 촬영하는 쪽으로 향했다.
* * *
실은 첫 영화의 감독이었던 도하의 매형이 선태에게 은근슬쩍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처남인 도하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말썽을 부리고 다녔는지 합의금만으로 날린 게 집 한 채 값은 될 거라고 말이다.
“너 그러다 큰일 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한테 얻어맞은 애들이 막 인터넷에 까발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바로 고소 들어가.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아, 나 변호사는 있지?”
“대표님이 너 들어오래.”
“누나가? 나를 왜?”
“인마, 그래도 회사는 있어야지. 막말로 내가 혼자서 너 받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대표님이 너한테 나 붙여줄 때 이럴 거 전혀 예상 못 했냐?”
“없어.”
“없, 없어?”
“안 돼.”
아 진짜. 도하가 온갖 짜증을 내며 차창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선태의 말대로 애초에 누나가 나서서 도와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일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 때려치울까. 엄마 뜻대로 복학해서 얌전히 학교나 다닐까. 일단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문젠데. 밥도
먹어야 하고. 아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차를 끌고 올걸. 근처에 택시가 있던가.
어쩔까 궁리를 하며 창밖을 보는데 길옆 카페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짙은 회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는데 뒤통수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다. 키도 체격도 비슷하고 걸음걸이도 그랬다.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저, 저 미친놈!”
도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이쪽으로 들어갔는데.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쪽으로 가보니 옆 빌딩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지나 빌딩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고 퇴근 시간이 겹쳐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가 봤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계단
쪽도 다 살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새 위층으로 올라간 걸까. 여기서 기다리면 내려오려나. CCTV 라도 확인해달라고 할까. 그러다 놓쳐 버리면…?
사고회로가 꼬이며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뒤늦게 따라온 선태가 야단을 치려다 말고 멈칫했다. 도하는 얼이 빠져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여태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 한번 드는 법 없이 항상 당당했던 녀석인데, 어째서.
넋이 나간 얼굴로 건물 안을 연신 두리번거리던 도하는 결국 선태에게 어깨를 붙들렸다.
도하가 그제야 선태를 확인하고는 아, 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곧 무슨 생각인지 제 어깨를 붙든 선태의
손을 떼어내고 뒷걸음질 쳤다.
“먼저 가. 알았지?”
그러고 나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억지로 끌고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한번 고집부리면 누구보다 대책 없는 걸 알기 때문에 관두기로 했다.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도 곧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 밖으로 나와 버렸다.
* * *
“아니. 끊는다.”
하나씩 꺼내보니 별의별 게 다 나왔는데, 가장 많은 건 역시나 책이었다. 동화로 시작한 책 선물은 나중엔
소설로 바뀌었다. 책 한 권을 집어 표지를 넘겼다. 다음 장엔 직접 쓴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각각의 책마다 글씨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마지막은 항상 사랑한다고 끝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열일곱 생일부턴 그곳에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았다. 그 이유를 저도 알고 서준영도 알았다.
관계가 틀어진 건 서준영이 줄 수 있는 사랑과 이도하가 원하는 사랑이 서로 다른 것임을 깨달은 시점이었다.
도하는 어렸고, 이성이 감정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열여덟 생일에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 후로
서준영이 저를 차갑게 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 * *
오늘 일정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선태가 이 꼴을 봤다면 한 마디가 아니라 백 마디는 잔소리해댔을
테니까. 양치를 마친 후 입을 헹구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트레이닝복 가랑이 사이가 올라왔다.
입안에 거품을 헹구고 나서 바지를 벌려 안을 확인했다. 아플 정도로 들고 일어선 녀석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보통 아침에 발기하는 게 정상이라고 하지만 눈치도 없이 발딱발딱 일어서는 놈을 보니 오늘은 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놔두기로 했다. 맨날 손으로 해주니 감사한 것도 모르고, 제 주인의 심적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으니 좀 고생할 필요가 있었다.
식빵을 한 입 베어 무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침부터 누굴까, 테이블에 올려둔 전화를 흘깃 확인했더니
선태였다. 안 받으면 그만이지 했는데 끈질기게 울려댄다. 어제 일도 있고, 아무래도 오늘 소속사 건에 대해
마침표를 찍을 모양이었다.
[뭐야? 너 어디 아파?]
* * *
여자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조금 더 문을 연다. 음식을 하던 중이었는지 그녀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손엔 국자를 들고 있었다.
“네, 기억하시네요.”
전엔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가 대신 문을 열어줬었다. 자꾸 와서 옛 주인 앞으로 온 우편물을 찾으니 이상했는지
얼굴에 의심하는 기색이 더 짙어졌다.
“그 후로 다른 건요? 혹시 택배 같은 거라도요.”
“없어요.”
귀찮은 듯 대답하던 집주인 여자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 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만요, 안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더니 대답이 없자 짜증을 내며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문이 닫혔고 도하가 벽에 기대서서
여자를 기다렸다.
“여기. 전에 살던 사람 거 같은데요….”
남자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아, 다행이네요.”
[…엽세여.]
“민주 잘 있었니?”
[…….]
* * *
“왜 보자고 한 거야?”
“저기….”
민주와 도하가 동시에 쳐다보자 여자가 부끄러운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뒤쪽에 앉아 있던 친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 역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혹시… 배우 아니세요?”
“아닌데요.”
도하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자, 민주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저 뻔뻔한 새끼.
“괜찮습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여자가 한 번 더 죄송하다고 인사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간다. 친구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진짜 많이 닮았다는 둥, 목소리도 비슷하다는 둥. 의아함을 품은 그녀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도하가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대며 민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왜 그런 얼굴로 봐?”
“무슨 소리야?”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고, 민주는 짜증 섞인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평소와 달리 뜸을 들이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이쯤 되니 이 인간이 아침부터 저를 불러낸 이유가 슬슬 궁금해졌다.
“뭔데. 말해봐.”
“나 아까 준영이 형 봤어.”
풉.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그대로 내뿜었다. 사레까지 들려 캑캑거리자 도하가 냅킨을 집어 다정스레 건넨다.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나서 입가를 닦고 무슨 소리냐고 묻는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얼굴을 보며 도하가 팔짱을 낀 채로 혀로 앞니를 슥 훑었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뻔뻔한 서민주가 저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으니 민주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진짜 만난 건가. 속으론
별생각을 다 하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잘못 봤겠지.”
“거, 거짓말!”
“내가 언제?”
“봐봐, 눈이 더 커졌잖아. 입으론 구라를 치고 눈깔은 요동을 치고. 이야…, 난리다, 아주.”
“…졸려서 그래.”
도하가 씩 웃더니 찻잔을 들어 올린다. 민주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머리를 굴렸다. 진짜 만났다면 저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다짜고짜 찾아온 걸 보니 뭔가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준영이 서울에 들른다고 했던가. 아이 씨, 엄마한테 미리 물어라도 보고 올걸.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다 하는데 툭, 도하가 들고 있던 찻잔을 앞에 내려놓는다.
“진짜 아니라니까.”
“…뭔데.”
민주가 입을 벙긋거리다 그대로 닫아 버렸다. 더 대꾸해봤자 자기한테 불리할 거다. 어쨌든 이도하가 겉으론 웃고
있지만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 같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웃기지 마. 퍽 하면 놀리고, 어른들 몰래 꼬집고. 막말로 오빠가 내 친오빠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알아?”
민주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우리 민주란 말에 좆까지 말라는 말이 턱까지 올라온 걸 간신히 삼켰다. 어쨌든
저보다 오빠이지 않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테이블 위로 툭, 무언가 올라온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지갑이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제 쪽으로 슥 밀기까지
한다.
“뭐야, 이게?”
“그러니까, 이걸 왜.”
“뭘 쓰라고?”
한편 도하는 민주의 얼굴이 갈등으로 번지는 걸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서준영이 한국에 있는 건 사실이니
그걸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민주가 요즘 돈에 쪼들리는 걸 알았기에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그녀를 보며 도하가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손은 이제
지갑으로 움직였다.
잠깐, 민주가 한 박자 더 빨리 지갑을 채갔다. 도하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민주가 지갑을 꼭 쥔
채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모님도 그렇고 도하네 부모님까지 저한테 신신당부한 게 있었다.
“뭔데.”
“노코멘트.”
민주가 얄밉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제 죄책감을 좀 덜어줬다. 이도하는 자신이 아니었어도 사람을 다
동원해서라도 찾을 위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
“또 뭐.”
민주가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도하가 눈썹을 까닥 움직이고 입가에 미소를 띤다. 더 얘기해봤자 말이 안
통하니 그만하고 어디 있는지나 말하라면서. 잠시 고민하던 민주가 지갑을 주워 들었다.
“좋아, 주소는 지금 문자로 남길게. 그래야 증거가 남지. 오빠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놀림과 감탄을 섞어서 보내자 민주가 지갑을 가져가서 카드 하나를 빼갔다. 배우 타이틀을 떼더라도 일단 부잣집
아들이니 카드 한도는 많겠지. 양심에 조금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용돈을 끊어 버린 아빠 탓도
해보고, 너무 애타게 찾으니 딱해서라고 스스로 변명도 해봤다.
그런 다음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로 도하에게 주소를 전송했다. 딩동. 주소를 확인하는 도하의 낯빛이 슬쩍 굳는다.
전혀 의외라는 표정으로.
“…여기서 지낸다고?”
“어.”
“왜.”
“…오빠 군대 간 동안 일이 좀 있었어.”
“그게 뭔데.”
CH 2.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는
준영을 올려다봤다. 엄마를 따라 놀러 왔는데 준영은 시험기간이라고 그런지 아까부터 계속 책을 붙들고 있었다.
창을 등지고 앉은 탓인지 등 뒤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준영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반짝거렸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엄마가 사람 얼굴엔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치.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긴 하지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준영은 책에
집중하느라 오늘따라 말을 아꼈다.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준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 마, 간지러워.”
늦둥이인 민주는 자신의 친형제들보다 준영을 더 잘 따랐다. 정확히 말하면 준영은 민주에게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의 할아버지가 딸뻘인 여자와 바람이 나서 밖에서 낳은 혼외자였다.
할아버지는 제 자식이 아니니 보육원에 데려다주든 알아서 하라고 모른척했고, 준영은 한참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골칫거리가 되어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다들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 준영을
보듬어준 건 뜻밖에도 할머니였다. 남편이 지은 죄니 자기가 거둬들이는 게 맞다면서.
“형. 형은 여자 친구 있어?”
사각, 사각, 연필 소리가 멈췄다. 준영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하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눈매가 또렷하고 눈썹과 코로 이어지는 부분이 꽤 잘생겼다. 인물이 좋은 건 엄마를 닮은 걸까. 실제로
도하의 어머니는 꽤 미인이었다.
“여자 친구 없는데.”
“왜 없어?”
“도하는? 도하는 있어?”
“나는 없지.”
“왜 웃어?”
“도하 귀여워서.”
“멋있진 않아?”
“멋있지.”
“얼마큼?”
“엄청.”
“응?”
“도하야.”
“응.”
“남자끼린 결혼 못 해.”
“왜.”
“아니야.”
“도하 욕심쟁이.”
준영이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서준영 스토커, 어른들이 도하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가겠냐
싶었다. 사춘기에 들어서고, 여자 친구가 생기고 그러면 어느새 데면데면해질 텐데, 그때까진 이 귀여운 녀석의
사랑을 마음껏 받자고, 그렇게 여겼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 * *
“괜찮으세요?”
컵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책상에 앉아 수업받을 준비를 하던 이건이 주방을 향해 다가왔다.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준영이 자리에 앉으며 오지 말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갑자기?”
“등이 오싹해졌어.”
이건의 모친은 박씨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면서 치매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로 떠들 때마다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무서워?”
“무섭긴. 사나이가….”
너 뒤에! 준영이 갑자기 소리를 왁 지르자 이건이 화들짝 놀라서는 펄쩍 뛰어오르며 으악! 하고 양팔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그걸 보며 준영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키가 190cm 가까이 되고 골격도 다부진 녀석이 겁은
얼마나 많은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 알았어.”
“진짜예요. ”
“알았다니까.”
“…진짠데.”
볼멘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보며 준영이 얼른 앉기나 하라고 타박했다. 하루에 1 시간씩 공부를 봐주기로 했는데,
오늘은 늦게 온 덕분에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저번에 내준 숙제 다 해왔어?”
네. 이건이 자랑스럽게 페이지를 펼쳐 디민다. 빨간색 색연필을 꺼내 하나씩 채점하는데 앞에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살짝 들었더니 강이건이 문제집이 아닌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할 말 있어?”
동그라미 대신 지익, 빗금이 갔다. 그걸 보는 이건의 얼굴도 같이 구겨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딴청을 피우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부터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괜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뭔데. 말해봐.”
“그게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친구?”
“네….”
“아뇨. 그냥 친구요.”
“혼자 수업 듣는 거 심심해?”
“아뇨… 그게 아니라.”
“알아요. 제가 그럴 거 같아 보이세요?”
“그 친구랑 많이 친해?”
“그냥… 조금요.”
* * *
[강원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진녹색 표지판을 뒤로하고 검은색 승용차가 속력을 높였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도하였다. 한껏 멋을
낸 옷차림을 하고 머리를 왁스로 잘 손질해 올렸다. 달리는 와중에도 룸미러를 내려 얼굴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에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제 수명도 같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민주가 알려준
연락처대로 찾아가고 있긴 한데 거의 2 년 만에 보는 거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그래, 군대 가고 면회를 왔었다. 그전까진 저를 밀어내기만 하고, 쌀쌀맞게 굴더니 첫
면회를 왔을 땐 달랐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했으니까. 처음으로 입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기들도 모른다고. 더는 찾지 말라고. 그게 서준영을 위하는 거라고. 너를 피해서 도망친 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주인은 바뀌어 있었고,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손톱만 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일부러 숨기고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지내다 누나를 통해 영화에
출연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하다 보면 한 번은 보지 않을까. 소식은 듣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수락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좀 더 멋진 모습이면 저를 혹시나 한번 봐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도 있었다.
“우리 집에 갔어?”
“몰라도 돼.”
“아, 그게 오늘이구나?”
100 m 앞에서 춘천 방면으로 좌회전입니다. 이런 젠장. 도하가 내비게이션의 소리를 줄이기도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당황하는 선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진짜 이럴래?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긴지 몰라? 몸값을 바짝 올려도 모자랄 판국에 대체 춘천은 왜 가는데!
뭐 닭갈비 맛집 탐방이라도 가는 거야?]
[야 인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 * *
“오랜만이네?”
“형, 잘 지냈어요?”
왜 이렇게 추워. 산 아래라 그런 건가. 그러다 도하의 눈에 우편함이 포착됐다. 슬그머니 그쪽으로 가서 202
호라고 적힌 우편함 뚜껑을 열어 확인했다. 안에는 아무런 내용물도 없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서민주가
제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우선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통화하는 내용으로 봐선 학생이었고, 정확히 5 초 후 예상대로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출입구 쪽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키가 상당히 컸고, 이제 막 통화를 끝냈는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 중이었다. 그가 뒤늦게 입구에
서 있던 도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춰 섰다.
스스로 꽤 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출입구에 저만큼 큰 남자가 서 있으니 당황한 까닭이었다. 세련된 코트
차림에 한겨울에 선글라스를 끼고 이마와 코랑 입술만 보일 뿐인데도 꽤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네… 그런데요?”
“몇 층 사는데?”
“…누구신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
“진짠데.”
“…3 층에 사는데요….”
“3 층 몇 호?”
이건은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누구냐는 말에 대꾸도 없이 지 궁금한 것만 묻는다. 갑자기 며칠 전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도 끈질기게 굴길래 욕을 한 바가지 하고 끊었는데 친구가 옆에서
그런 말을 했다. 요즘은 그러면 직접 찾아와서 해코지하기도 한다고. 혹시 그런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부티가 나는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젊진 않아요….”
“그 사람 집에 있어?”
이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준영을 찾으러 온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어떤 남자가 한번 찾아왔었다. 둘이 큰 소리가 오갔고,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준영의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이건이 눈치를 보며 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아는 사이인가. 빠져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앞에 선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코와 입술만큼이나 인상적인 눈이었다. 위로 시원하게 뻗어 차갑게 빛나면서도 한
번 보면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그런 눈. 그런 얼굴.
“오랜만이에요, 형.”
“보고 싶었어요.”
이건의 눈이 커졌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강이건. 너 전화 가져왔지?”
“네? 네.”
“좀 빌려줘.”
이건이 입을 벌렸다.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 문 앞에 버티고 선 남자에게로 꽂혔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남자의
입술 끝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진짜 사채업자 같은 건가.
“감사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넌 어차피 말로 해선 안 갈 거잖아.”
준영이 대꾸도 없이 제 할 말 만하더니 그대로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아까와 똑같은 크기의 보폭과 걸음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타격을 받은 건 저뿐이다. 도하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보이지 않는 계단 위쪽을 노려봤다.
애초에 반겨줄 거란 기대도 안 했지만,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야. 고삐리.”
“너 어디 가?”
입을 벌리고 그걸 쳐다보는데 도하가 어슬렁거리면서 이건의 옆쪽으로 걸어와 어깨에 팔을 툭 걸친다. 놀라서
쳐다보는데 생긋 웃기까지 한다. 아까 준영을 원망스럽게 보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얼굴이었다.
“저, 저를요?”
이건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가면 추운데 버스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그렇다면 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본인도 분명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땐 받아들이는 것도
예의라고 준영이 가르쳤다. 저는 지금 그 교육을 성실히 이행할 뿐이고.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 봤을 때부터 놨으면서 이제야 허락을 구하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러면서
운전대를 잡은 도하를 한 번 쳐다봤다. 선생님이랑 대체 무슨 사일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남자의 얼굴은 미술실에서 보았던 조각상을 연상케 했다. 매끈한
피부도 그렇고 조각 같은 콧대도 그렇고.
“난 이도하. 너는?”
“강이건이요.”
“…감사합니다.”
친하냐고 묻는 말투가 묘하게 뾰족하게 느껴졌다. 착각일까, 옆모습을 흘깃 쳐다봤더니 얼굴은 또 웃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과외?”
“윤찬이는 또 누구야?”
“그럼 너만 과외받아?”
“네. 지금은요.”
“둘이서? 형네 집에서?”
“…네.”
“왜 자꾸 빤히 쳐다봐? 잘생겼어?”
이건이 흠칫 놀라 말을 버벅거렸다.
당황하는 이건을 보며 도하가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을 띠었다. 그래, 네 눈에도 내가 잘생겼지? 근사하지? 근데
왜 서준영만 그건 모를까. 남들 다 아는데, 씨발. 갑자기 기분이 널을 뛴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아주
풍선을 타고 살랑살랑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단 두 마디로 사람 기분을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네. 대단하다,
서준영.
“그러니까 음… 1 년 넘은 거 같아요.”
“혼자서?”
“네?”
“…네. 혼자 계세요.”
“그래, 잘 가. 또 보자.”
* * *
집으로 들어온 준영은 찬물로 연거푸 세수를 하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도하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가만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준영은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도하도 변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혼란스럽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그냥
안부차 온 거라고, 궁금해서 찾아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위안 삼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차라도 마시게 하고 보낼
걸 그랬나.
[보고 싶었어요.]
아 됐다. 관두자. 괜히 또 여지를 줬다가 전처럼 힘들어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소파로
가서 길게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천장이 들어왔다.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1
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면역력이 생겼을 거라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방송국
로비에서 쓰러진 날 알았다. 저는 사람들의 경멸 섞인 눈초리와 수군거림을 견뎌낼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는 걸.
그동안 무뎌진 게 아니라 악착같이 버티고 참았다는 걸.
언젠가 잊히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조금씩 그날의 악몽도 흐릿해졌다. 그럼에도 돌아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이곳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 더 복잡한 일은 만들지 말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해 나갔지만, 조금 전 보았던
그 상처 받은 얼굴은 쉽사리 지워지질 않았다.
* * *
“아들, 이제 오니?”
“엄마… 왜 왔어?”
“저녁은? 먹었어?”
“아니.”
“응.”
“힘들지 않았어?”
“너 그거 계속할 거야?”
“뭘.”
“연기.”
“글쎄.”
“엄마는 솔직히 안 했으면 좋겠어. 괜히 힘들기만 하고, 학교 복학하고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서 형이랑 같이 일
배우면 얼마나 좋아.”
도하가 대꾸하지 않고 드레스룸 쪽으로 움직이자 엄마가 그 뒤를 쫓았다. 도하는 엄마가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하는 게 이해는 됐다. 처음 큰누나가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 집안에선 말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누나가 우울증도 오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바람에 생각이 바뀌었다.
연출과 제작은 다른 영역이었는지 누나는 아버지의 지원을 밑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내놓으라는 제작사의
대표가 됐다. 거기다 든든한 남편까지 얻어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고마워요.”
“잠깐 바람 쐬러 다녀왔어.”
“…혼자서?”
“그럼 혼자 가지 뭐.”
“…애인이랑 같이 간 거 아니야?”
씻으러 들어가려고 셔츠를 하나씩 풀던 도하가 멈칫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평소와 달리 취조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슥 눈동자만 움직여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데 역시나 뭔가 있는 것 같다.
“…없어.”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삐치는데 엄마만 모르나 보다.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더니 요즘은 더 잘 삐치는 거 같다고
저번에 큰누나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걸 다 들었는데도, 끝까지 아빠 편을 드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저런 게
사랑인가 싶어 속으론 웃음이 났다.
“그래요, 뭐. 엄마만 좋으면 됐지.”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걸 본 도하가 얼른 티슈를 빼서 건네줬다.
모친은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번질세라 눈 밑을 조심스럽게 눌러가며 훌쩍였다.
“엄만 나 어릴 때도 그랬어. 드라마 보다가도 툭하면 울고, 아버지가 그러는데 연애할 때도 그랬다던데?”
새치름한 표정을 짓는 엄마가 소녀 같아서 도하가 피식 웃었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자식들에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늘 헌신적이었다. 아버지 또한 잘 삐치는 그것만 빼면 흠잡을 것 없는 사내였다.
덕분에 자식들도 그 성격을 물려받아 기본적으로 다정다감했고, 사랑을 베풀 줄 알았다. 도하 역시도 그랬다.
문제는 그게 한 사람에게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거겠지만.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그녀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구나, 어쩌면 좋아.
끄응. 그녀가 신음과 한숨을 동시에 쥐어짰다. 갑자기 두통이 오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서 작년 이맘때쯤 아버지가 선물로 끼워준 보석 반지가 반짝였다. 결혼 30 주년 선물이라고 했던가.
“…도하야. 아들.”
“너… 거기 갔구나?”
“어딜?”
그녀는 어디냐고 태연하게 묻는 아들의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매니저인 선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을
때도 설마 했는데, 오늘 낮에 춘천에 간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당장 준영의
집에 전화를 해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직접 확인해보기로 하고 도하에게 먼저 달려온 것이다.
“엄마.”
“아빠 알면 야단나.”
“이번엔 정말 때리시려나?”
옛 기억을 떠올린 도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양쪽 집에 알려지고 나서 발칵 뒤집혔었다.
그때 부친은 화가 나서 골프채까지 꺼내 들었었다. 하지만 집 안에 있던 아끼는 도자기를 다 때려 부쉈어도 결국
아들은 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모르지, 정말 팰지도.
“어쩌려고 그래, 진짜.”
“뭘 어째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엄마.”
“엄마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차피 친아들도 아니지 않으냐고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준영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가 문젠데.”
“준영이 너 안 좋아하잖아.”
“그래, 없지. 오히려 너 많이 예뻐하고 챙겨줬지. 반항하고 말썽부리고 다닐 때도 네 형보다 더 나서서 그랬던
거 엄마도 알아. 너무 고맙고 감사해. 그렇지만 준영이가 아니라잖아. 너 그냥 동생이라잖아. 아끼는
동생이라는데 왜 너 혼자 그래? 남들 다 아는 걸 왜 너만 몰라서 속 썩고 아파해. 엄마는 그게 너무 싫어.”
“도하야.”
“제발.”
도하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아팠다. 담담하게 죽을 것 같진
않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며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를 붙들고 죽을 거 같다고 살려달라고 엉엉 울던
그 모습이 한 번씩 떠오를 때마다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부탁이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은 다물어 버렸다. 포기하겠다고, 다신 찾아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어디로 튕겨 나갈지 모르는 게 제 아들인 걸 잘 알았다.
“…그래. 얼른 씻고 나와.”
* * *
“가만있어. 책이 잘 안 보여.”
“형은 책이 재미있어?”
“응.”
“왜?”
“도하도 책 좋아하잖아.”
“그럼 뭐가 좋은데?”
“축구.”
“축구 재미있어?”
의외라는 듯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아서 축구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치인다고
도하의 모친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했어?”
“아니. 한 번 더 찼어!”
이런. 그래서 재미있다고 한 거냐?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준인 축구교실에서 도하와 앙숙으로 지내는
사내아이였다. 도하를 자꾸 놀려 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니 알겠다고
대답은 잘한다.
“그리고 또 뭐가 재미있는데?”
“태권도.”
“왜.”
“형도 하니까.”
“또?”
도하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한다.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 고민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하는 수업을 하나씩 떠올리는 거 같았다.
“도하, 그럼 영어 해봐.”
거침없이 말하는 녀석을 보며 준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또? 하고 묻자 도하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조그마한
입술을 벙긋벙긋 움직인다.
“으이구.”
“아파.”
도하가 도망가려 머리를 빼길래 다시 꼭 붙들어서는 괴롭혔다. 조그만 녀석이 발버둥 치는 것도 귀엽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귀엽고, 모든 게 다 귀여웠다. 처음 태어난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담.
“옵빠아아아.”
“내려가자, 민주 왔다.”
“짜증 나. 서민주.”
“그런 말 하면 못써.”
야단을 쳤는데도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쿵쿵 발로 바닥을 찍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민주는 이미 계단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 도하까지 온 걸 보고 신이 나서는 양 주먹을 앞으로 모으고 발까지 동동 구른다. 준영이
계단을 내려가서 그런 민주의 뺨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괜찮아?”
도하가 재빨리 현관 쪽으로 도망쳤다. 슬쩍 돌아봤더니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어른들이 있으니
혼내지도 못하고 난감한 얼굴이었다.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 민주는 엉엉 울었고, 두 엄마는 민주를 달래느라
정신없었다.
준영의 시선을 피하며 화장실로 도망가려던 도하가 현관 앞에서 멈칫했다. 분명 들어올 때 제 신발을 준영의 신발
옆에다 뒀는데 이제 보니 민주의 신발이 그 옆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서 발로 퍽 차 버린 다음 제 신발을 나란히,
그것도 바싹 붙여 뒀다. 곧이어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 * *
연말이라 그런지 카페 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쪼오옥, 아이스티를 마시며 반짝이는 전구를
바라보던 도하의 눈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막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안을 둘러보던 그가 도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하다 왔는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독약 냄새가
옅게 풍겼다. 안 나올 줄 알았더니, 예상 밖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바쁘다고 끊으려고 했더니 병원으로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다고 협박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어디 한번
해보라고 윽박질렀겠지만, 앞에 앉아 있는 이 미친놈은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놈이었다.
“뭐냐, 너.”
후우. 민석이 자리에 앉자 도하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일단 전화로 불러내긴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준영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순순히 대답하면 그건 그것대로
열 받을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아니.”
“진짜?”
으흠. 도하가 콧소리를 내며 민석의 안색을 살폈다. 준영이 가장 오래 만났던 사람이 민석이다. 둘이 뭐가
그렇게 잘 맞았는지까진 상상하기 싫지만, 어쨌든 준영에 대해 그만큼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헤어진
다음에도 친구로 남았겠지.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헤어지고도 만났잖아요.”
“내가 왜.”
“확인해보게.”
“줘보라니까.”
자격이라…. 도하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늘어지듯 앉아 민석을 빤히 쳐다봤다. 민석은 태연한 얼굴로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연락이 왔을 때 얼핏 예상하긴 했지만, 아직도 서준영한테 목을 매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군대 다녀오고 대충 정리한 걸로 알았는데.
“더 할 말 없지?”
“흠.”
“끝 번호 3276 맞죠?”
“너….”
하. 민석이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눈을 부라리자 도하가 얄밉게 웃더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제대로
말할 생각이 좀 드시나?
“연락 안 한다며?”
“남이사. 하든 말든.”
“이혼했다. 됐냐.”
“거짓말.”
“믿든 안 믿든 네 마음이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서준영 찾아가서 아무것도 하지 마. 걔 너 아니어도 충분히
심사가 괴로운 애니까. 제발, 응?”
“뭐 때문에 괴로운데요?”
“알 것 없고.”
“야!”
“내가 뭘.”
“참나.”
“…….”
“아니라곤 안 하네?”
“아니야.”
“늦었어, 씨발.”
“…이 새끼가.”
“…….”
“하.”
민석이 질린다는 얼굴로 도하를 쳐다봤다.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제법 사내다워진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 꾹꾹
눌러놨던 그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치졸하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던, 서준영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제 눈엔 보였던 그것이, 그땐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찾아가서 뭐 하게. 매달리게?”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다. 원수처럼 여기던 저를 찾아온 걸 보니. 표정을 보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은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도하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인다. 당신 와이프한테 걸까? 아휴. 저 망할
새끼. 진짜 이혼했다니까.
CH 3.
“담배 한 갑도 같이 주세요.”
“28,000 입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캔 음료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한 남학생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추위를 막기엔 얇은
점퍼 위쪽으로 하얀 목이 드러났고 거기에 푸르스름한 멍 자국도 같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학생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낯선 이의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눈이 가늘게 늘어져 뾰족하니 올라갔다.
“손님, 카드 여기 있습니다.”
“다음에 만들게요.”
아까 살걸. 후회하며 동전이 있나 살피는데 칙, 소리와 함께 불 하나가 눈앞에서 당겨진다. 고개를 올려봤더니
낯익은 얼굴이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박동현이라는 사내였다. 준영이 이곳에 올 때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그런 듯했다.
“고맙습니다.”
아. 준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건네자 그가 잽싸게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지만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무릎 늘어난 추리닝을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백수다. 옷도 왜 하필 TV
드라마에 고시생들이 많이 입는 것과 같은 파란색 줄무늬 추리닝인 건지.
아이들은 못마땅한 듯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나서 재빨리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동현이 혀를 찼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학교 후배라는 것들이 말이야, 선배를 봐도 인사를 할 줄 모르고.”
“이 동네 애들인가 봐요?”
“…아.”
“아까 그 파란 점퍼 입은 애는 누구예요?”
“누구요?”
“아아, 연우.”
“잘 아세요?”
“걔도 유명하죠. 엄마가 걔 어릴 적에 도망가서 아버지랑 형이랑 살았는데 저 집도 조용할 날이 없어. 아버지가
사람은 착한데 술만 마시면 아주 애를 개 패듯 팬다니까. 쟤네 형도 맞고 자라더니, 몇 달 전에 집 나갔잖아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준영이 입 안에 있던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 점퍼 위로 보았던 시퍼런 멍 자국은 아버지한테 맞아서 생긴 걸까. 반항 가득하던 눈빛이 떠올라
입안이 썼다.
“그래요?”
치익, 준영이 담배를 비벼 껐다. 봉투를 들고 일어서니 동현이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선다. 아무래도 같이 갈
요량인가 보다.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뒀더니 역시나 따라온다. 묻지도 않은 말을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집에 오는 십 여분 동안 근래 동네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 * *
“물 다 끓었니?”
“네, 지금 부었어요.”
앉아. 수업이나 하게. 타박에 이건이 입을 삐죽이며 컵 하나를 준영의 앞에 놓아줬다. 준영이 머리를 털던
수건을 한쪽에 놓고 이건이 숙제로 풀어온 문제집을 제 앞쪽으로 끌어왔다.
“아파요.”
직. 빨간색 빗금에 이건의 미간에도 금이 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채점을 하던 준영이 툭 던지듯
묻는다.
“근데 왜 혼자 왔어?”
“네?”
“아.”
“송연우.”
“상관없다고 했는데.”
“그래도요….”
이건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공부 얘기를 꺼내자마자 병신이라고, 그런 거 너나 하라고 면박을 당했다고 어떻게
사실대로 말하겠는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데 준영이 슥 쳐다본다.
“왜 한숨이야. 딱밤 맞을 생각에 좋아서 그래?”
“아니요. 그냥….”
“앗싸, 딱밤 세 대.”
“…….”
“…선생님.”
“말해.”
“이건 제 친구 얘긴데요…”
“그럼 백 프로 자기 얘기더라?”
“아니에요!”
“친구의 친구가 집이 좀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도와주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해서요.
왜냐하면 걔가 자존심도 엄청 세고, 고집도 세고, 그리고 또….”
“강이건, 딱밤 네 대.”
“…듣고 계신 거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준영이 고개를 들고 이건을 쳐다봤다. 이건이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안
되겠죠?’라고 묻는 그를 보며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참나.”
준영이 채점하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득 궁금해져서 돈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간간이
아르바이트했단다. 학원 쉬는 날 피자 배달도 하고, 여름에 일손 도와서 모은 거라고. 낼모레면 고 3 인데 공부를
더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아르바이트라니. 나름 이 동네에선 학구열 높은 이건의 모친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안 받을 거예요.”
“왜.”
“몰라요. 걔는 제가 주는 건 다 싫어해요.”
“어째서.”
“…글쎄요. 내가 싫어 그럴 수도 있고.”
“네….”
꾹 입술을 깨무는 이건을 보며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낮에 편의점에서 보았던 아이를 떠올렸다. 낡은
초록색 점퍼에 깡마른 몸. 창백한 얼굴. 목에 퍼런 멍 자국. 이건이 그 앨 신경 쓰는 이유가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치 않는 도움을 주는 건 동정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사? 갑자기?”
“언제?”
“설마….”
“네?”
“선생님?”
“괜찮으세요?”
“기어코….”
“네?”
준영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도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다봤다. 준영을 발견했는지 환하게
미소 짓더니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뭐 해? 강이건. 얼른 와. 수업 마저 해야지.”
“지, 지금요?”
“왜. 무슨 문제 있어?”
이건이 쭈뼛거리고 와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은 감출 수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죄송해요.”
“뭐가.”
“신경 쓰지 마.”
“네?”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럼요?”
나 때문이지. 준영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사실이지 않은가. 도하가 저렇게까지 구는 건 순전히 저
때문이다. 이건이 아니었더라도 이사를 오고자 마음먹은 이상 옆에 빈 땅에 집을 지어서라도 그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강이건의 탓이 아니었다.
네? 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준영은 남은 채점에 집중할 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
채점까지 끝내자 준영이 펜을 내려놓고 나서 문제집을 다시 앞장으로 넘겼다. 틀린 문제부터 살펴볼 요량인 것
같았는데, 그런 준영을 보며 이건은 궁금한 게 생겼다. 저 밖에 있는 사내와 대체 무슨 사이인지를.
“그게 왜 궁금한데?”
“제가… 나가볼까요?”
“놔둬.”
“무슨 일이시죠?”
“예. 맞는데요.”
준영이 그대로 문을 닫고 이건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건은 왜 자신이 더 긴장한 표정인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 * *
어릴 때부터 조용하면 꼭 사고를 치던 녀석이 아니던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위층을 살피다가 책을 그대로 덮고
나서 머리맡에 올려뒀다. 아, 그만 생각하자.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인지,
아니면 10 여 분 전 먹었던 신경안정제가 효과를 나타내는 건지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그그그그그- 천장이 울렸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잠시 후 또다시 그그그그그- 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책상을 끄는 것도 그렇다고 망치질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묵직한 게 굴러가며 내는 소리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한번 거슬리기 시작한 소리는 더 집요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벌떡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아 침대에서
내려와 불을 켰다.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그그그그 소리가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다. 미간을 잔뜩 구기고 나서
얼굴을 문질렀다. 시간을 확인하니 11 시 30 분이다. 약 기운이고 뭐고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잠귀가 밝고 예민한데.
* * *
“…올 때가 됐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공을 굴리는데 똑똑,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약하게 들린다. 도하의 입가에 생긋
미소가 생겨났다. 급하게 볼링공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고 나서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대충 손에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시고 몸에도 적시고 나서 목에 수건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씻고 있었어?”
“네. 이제 씻고 자려고요. 이 밤중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도하는 팔 하나를 문에 짚고 서서는 하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부터 발기해 있던 녀석이 수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불뚝 솟아올라 있었다. 차라리 수건을 뚫고 보이면 서준영이 조금은 구미가 당기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슥 한 번 빨았다가 놓았다.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말하고 갈게. 너희 집에서 아까부터 들리는 그 정체 모를 소음 때문에 내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주의 좀 부탁할게.”
“이도하.”
“1 시간 동안 씻었다고?”
“대충 씻고, 반신욕하고, 누구 생각하면서 자위하고 났더니 시간이 금방 가던데요. 진짜예요. 안 믿기면
들어와서 확인하라니까. 아까 내가 싼 게 아직 씻겨 내려가지도 않았거든요.”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준영이 조금 전 짜증을 싹 지우고 나서 걱정스럽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이걸 말해야 하나 말해야 하나, 라고 운을 뗐다. 도하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무슨 수작이지?
“전에도 가끔 이상한 소리 들리곤 했거든. 사람들 말로는 빌라 들어서기 전에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네?”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준영이었다. 됐다며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돌아가려
하길래 도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 손을 준영이 가만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보기 좋게 자리 잡은 팔 근육과
잘 벌어진 어깨가 보였다. 그 모습이 낯설고 거북스러웠다.
“놔.”
“얘기 좀 해요.”
냉정하게 손을 떨쳐내더니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도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을
보고 얘길 나눈 건 좋은데 막상 얼굴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누가 잡아먹을까 봐 그러는지, 잠깐 들어와서 얘기
좀 하면 얼마나 좋아. 게다가 뜬금없이 귀신 이야기라니. 너무 귀엽잖아.
발소리가 멈추고 아래층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 뒤에도 도하는 한참이나 문을 닫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잠옷 사이로 드러난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젖꼭지를 엄지로 비비고 문지르자 서준영이 허리를
튕기며 자지러졌다. 그대로 입을 가져가 유두를 머금고 혀로 비비자 도하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제 입술을 빨게
한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꽃처럼 활짝 벌어지고 그 가운데 혀가 섞이며 중심은 점점 부풀어 올라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팽창했다. 도하가 바지를 내렸다. 서준영도 아까부터 발기한 채 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성기를 마주 잡고 문지르자 서준영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신음을 낸다.
“좋아요, 형? 응? 다리 좀 더 벌려봐요.”
준영이 다리를 벌리자 도하가 제 성기를 붙들고 도하의 구멍 입구에 맞추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니 준영이
입술을 깨물며 도하의 어깨를 붙든다.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서 도하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흐흐… 뚝.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던 도하가 멈칫했다. 시트에 엎드린 채 서준영 생각을 하며 한참 문지르던
와중이었는데 잠깐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잘못 들었나.
대체 무슨 일인가, 눈동자만 움직여 사태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깔깔깔 하고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전에도 가끔 이상한 소리 들리곤 했거든. 사람들 말로는 빌라 들어서기 전에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네?]
“아, 뭐야!”
* * *
머리맡에서 울리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끊어졌던 전화벨이
또다시 울린다. 인상을 팍 구긴 채로 일어난 도하가 손을 위로 뻗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너 어쩌려고 이래!]
제정신이냐고, 어쩌려고 거기에 갔느냐고, 엄마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느냐고,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퍼붓던 수화기 너머로 숨 고르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온다. 도화가 다시
전화기를 귀에 바싹 가져다 댔다.
“다 하신 거예요?”
[도하야. 아들.]
“죄송해요. 그렇지만 엄마가 나한테 늘 그랬잖아. 심장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뛰어가라고. 뛰다 보니 여기네.
어쩔 수 없었어.”
[그건 네 꿈에 관한 이야기였어. 이거와는 달라.]
[도하야.]
미쳤다. 정말 미쳤어.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쯤 가슴을 퍽퍽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다시 말하니, 잠시 정적이
찾아왔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네… 믿어주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알았어, 그럼. 뜻밖의 허락에 도하의 입꼬리가 수려하게 올라갔다.
[됐어. 이 망할 녀석.]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앞에 있던 거울에 얼굴이 비친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인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 짜증 나. 머리를 헝클고 나서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를 젖혔다.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창을 열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어디서 폴폴 풍겨왔기 때문이다. 누가 밑에서 똥이라도 싸는
건가 내려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널따랗게 펼쳐진 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뿐이었다.
지금쯤이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조용하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은 씻어야겠다.
씻고 움직이다 보면 좋은 묘책이 떠오르겠지.
* * *
이건의 외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 2 학년 때까지 경기도에서 살던 이건의 식구가 이곳으로 온 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기 때문이다. 이건의 모친은 외동딸이었고 자신이 아니면
챙길 사람 없는 어머니 때문에 늘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남편이 이곳으로 오자며 먼저 말을
꺼냈단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해했다.
“너는? 먹었어?”
고마워. 잘 먹을게. 도시락을 받아 드는데 이건이 안색을 살핀다. 어째 준영의 얼굴이 하루 새 까칠하게 변한 거
같았다. 준영은 모든 일에 털털한 편이었는데, 유독 잠을 이루는 걸 힘들어했다. 혹시 어젯밤 그 소리 때문인가
싶어 슬그머니 물었다.
“어제 4 층 아주머니 때문에 못 주무셨죠? 요즘 잠잠하더니 또 그러시더라고요.”
준영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4 층에 사는 중년 여성은 바람난 남편과 이혼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조울증이
심했다. 혼자 TV 를 보며 별거 아닌 거에도 소리 내 울거나 웃을 때가 많았다. 처음엔 이웃들도 힘들어했는데
그녀의 사정을 듣고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짠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건을 보며 준영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짜식. 기특해라. 그러다 이건의 어깨너머로
계단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했다. 언제 왔는지 도하가 거기에 서서 귀신보다 무서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뒤를 돌아보던 이건이 흠칫했다. 위층으로 이사 온 도하가 계단에 서서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움츠러드는데 준영이 그만 가보라고 한다. 이때다 싶어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재빨리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그랬는데 도하가 트레이닝복 바지에 양손을 찔러놓고 저를 뒤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이건이 걸음을 서두르려는데
뒤에서 ‘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도하가 입술을 슥 핥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가? 학교?”
“…네.”
“…어떤 거요?”
“뭐 줬냐니까.”
“김밥?”
“네. 엄마가 할머니 드린다고 쌌는데 선생님 것도 쌌거든요. 그래서 그거 가져다드리려고 들렀어요.”
“아. 그래?”
“네.”
도하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건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아까 계단에서 서늘하게 노려보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다정한 얼굴로 웃더니 혹시 학교에 버스를 타고 가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잘됐다고 좋아한다.
“…괜… 괜찮아요.”
“진짜 괜찮은데.”
“타라고.”
이를 끄득 물고 타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이건이 인상을 슬며시 찡그렸다. 그러면서 시선은 준영이 머무는 2
층으로 향했다. 저번처럼 또 선생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닐까, 걱정됐다. 대답 안 하면 들들 볶을 거
같은데.
산뜻하게 웃더니 빌라 쪽으로 들어갔다. 도하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건이 입술을 꾹 깨물고 고민에 빠졌다. 아
어쩌지. 하다 주머니에서 황급하게 동전 하나를 꺼냈다. 공중으로 튕겨 손으로 잡았다.
“저 자식이….”
“이도합니다.”
“없어요. 안 피워요.”
“세상에. 그 좋은 걸 왜.”
10 분 정도 그렇게 서 있다가 집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밟는데 문이 열린다. 놀라 돌아보니 준영이 집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다. 저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멈칫하더니 가만히 쳐다본다. 그렇게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준영이었다.
“뭐야, 너.”
“뭐가요?”
“아까부터 왜 계속 거기 서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미심쩍게 바라봤다. 그걸 보며 도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다니느냐고 벽이라도 타고 다녀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준영이 문을 닫는다.
말을 말자, 말을. 준영이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고, 위로 올라가려던 도하가 가만히 쳐다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아침부터 계단을 대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 건지.
“어, 준영 씨. 어디 가요?”
“둘이 아는 사인가?”
동현의 물음에 준영이 아니라고, 어제 처음 봤다고 딱 자른다. 도하가 이번엔 정말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저한테 뻔뻔하다고 하더니 어쩜 어제 처음 봤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속 쫓아가면서도 혹시나 남자가
둘의 대화를 들으면 준영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본 사이 많이 거짓말이 늘었어요.”
“왜 자꾸 따라와? 가.”
“열어줘요.”
준영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도하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하아,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손가락으로 ‘열어줭.’이라고 쓴다. 하아.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니 입술을 오므리고 제발이란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한참을 고민하던 준영이 결국 문을 열어주자 잔뜩 굳어있던 도하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보조석 문을
열고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올라타더니 안전띠를 잡아당겨 매고 나서 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출발해요.”
생긋 웃으니 준영이 한숨을 내쉬고 차를 출발시킨다. 운전대를 잡은 준영을 보며 도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어릴 적엔 운전하는 준영이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저도 어른이 되면 정말 멋진 차를 사서 준영을 태워주고
싶었다.
자신과 똑같이 멋지다 생각해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옛 생각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으니 준영이 슬쩍 쳐다봤다가
시선을 거둬간다. 차는 천천히 동아빌라를 벗어나 도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 * *
2 층 계단을 내려오던 준영이 멈칫했다. 모친인 미정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는데 경혜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도하의 어머니인 듯싶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자 소파에 앉아 있던 준영의 부친이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준영이 계단을 내려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정성껏 만든 간식이 놓여 있었다. 모친이
저를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데 통화하느라 잊어버린 듯했다.
“꼬맹이가 왜.”
“학교에 적응을 못한대요. 유치원 처음 다닐 때도 그러더니, 어제도 소변 참다가 바지에 실수했다고 연락이 와서
경혜가 놀라서 학교에 찾아갔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안 간다고 아침에도 떼를 쓰는 거 억지로 보내긴 했는데, 생각이 많은 거 같아요. 학교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왔다는데, 애 목소리가 팍 죽었어요. 계속 이런 상태면 어쩌나 걱정하더라고요.”
달그락, 준영이 컵을 집어 드는 소리에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모친이 몸을 돌려 다가왔다. 부친은 흘깃 한 번
볼 뿐 뭐라고 묻지 않았다.
10 여 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준영을 처음과 같은 눈으로 쳐다봤다. 곧 무심한 얼굴로 다시 신문을 본다.
그 시선을 피해 준영이 정수기 앞에 섰다. 익숙한 듯 익숙해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저를 볼 때마다 제 아버지의 부정을 확인하는 기분이 들 테니 반갑지 않은 게 당연했다.
크면서 스스로 다짐했던 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소리를 들어도 서운해하지 말자. 제 존재는 그런
거니까. 다가온 모친이 준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목이 말라서요.”
그녀가 웃더니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힘주어 꾹꾹 누른다. 준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아, 소리를 냈더니 그녀가
웃으며 이번엔 주먹으로 통통. 두드린다.
“…괜찮아요. 할 만해요.”
“먼저 주무세요.”
“네. 조금.”
“고 녀석이 한 까칠 하잖아. 초등학교 올라가서 환경도 바뀌고 해서 적응이 힘든가 봐. 유치원 졸업하면서
그나마 친하던 친구 둘은 다 외국으로 가 버렸으니까. 아무래도 더한 거지.”
“아….”
“넌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 해.”
“제가 낮에 잠깐 가볼까요?”
“뭐?”
“…괜찮겠어?”
하지만 키우면서 그런 우려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처음 문 앞에 버려져 있던 걸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어서 더 애착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 살 답지 않게 텅 비어 버린 눈동자도 그렇고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얼굴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알겠어요. 올라갈게요.”
으이구, 이번엔 엉덩이를 두드리려고 했고, 준영이 얼른 피해서는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신문을 보고 있던 제
아버지를 향해 ‘올라갈게요,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래.’라고
짧은 대답을 해주었다.
* * *
도하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친구들과 게임도 하고 그러면서 노는 중이었는데 도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1 시간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요의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가면 쉬가 나오지 않았다. 바뀌어 버린 환경도, 친구들도 제겐 다 어색하기만 했다.
“뭐야.”
이게 진짜. 녀석의 멱살을 잡는 순간 누군가 도하의 어깨를 붙들었다. 돌아보던 도하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가워 꽉 끌어안자 앞에 있던 삼총사가 후다닥 저쪽으로 도망쳐 버린다. 준영이 도하의 머리를 쓸고 나서 제
품에서 떼어냈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또 활짝 웃는다.
교복을 입은 다 큰 남학생이 복도를 걸어가니 주위에 있던 꼬마들이 모두 쳐다봤다. 도하는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경외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준영이 멋지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쉬 마려운 생각이 들어
비참하기도 하고. 그렇게 걸어서 간 곳은 교사용 화장실이었다.
“…싫어.”
“왜.”
“쉬가 안 나와.”
지익. 바지 지퍼를 내리고 고추를 꺼냈지만 어쩐 일인지 또 쉬가 나오질 않는다. 힘을 주느라 반듯한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끙, 신음을 흘리니 잠시 후 다 했느냐고 묻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형, 안 나와.”
“못 봤어. 아직 안 나와?”
“응. 안 나와.”
“내가 애야?”
부루퉁한 얼굴로 애냐고 따지는 모습은 더 귀엽다. 준영이 잠시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또 한 번 웃으면 이 자존심 센 꼬맹이는 성질을 내고 교실로 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내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았어, 형아 안 봐. 다른 데 보고 있어.”
CH 4.
도하가 준영을 보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에 타서부터 계속 저 혼자 떠들었고 서준영은
마치 제가 없는 사람인 양 운전만 하는 중이었다. 이럴 거면 왜 타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알아서 뭐 하게.”
콘돔을 넣고 글러브박스 뚜껑을 닫고 나서 의자 시트에 몸을 기댔다.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렇고 황량하게 변해 버린 들판과 뭘 짓고 있는 건지 한쪽을 깎아 벌거숭이가 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
“아니.”
“귀신 사는 거 진짜예요?”
얼마나 진지하게 묻는지 준영은 하마터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물론 자신이 먼저 귀신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믿다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도하는 좀 더 심각한 얼굴로 어디다 부적 같은
거라도 써야 하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걸 보니 어릴 적 혼자 자기 무섭다며 저를 붙들고 늘어지던 게
생각나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
“안 받아요?”
“가끔 해.”
“만나기도 해요?”
“…응.”
“만나서 뭐 하는데?”
“섹스?”
“너 군대 갔을 때 이혼했어.”
아. 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이혼했다던 말이 사실이었군. 시발. 빌어먹을. 젠장. 개자식.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댔다. 잘살라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군대에서 기도했는데, 옘병할. 설마 다시 만나는 건가. 아니면
만날 마음이 있는 건가.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끼익. 준영이 급하게 핸들을 틀어 한쪽에 차를 세웠다. 몸이 앞으로 휘청 쏠렸다가 멈춘다.
도하가 씩씩거리며 노려보자 준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받아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오지 말걸,
후회됐다. 확 여기서 내리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걸 듣는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충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가하니
잠시 머리가 아찔하고 눈앞이 휘청거렸다.
“너 뭐라고 했어?”
“말해보라니까.”
“…내려.”
“싫어. 안 내려요. 내가 틀린 말 한 거 없잖아요.”
“안 내려.”
“끌어내린다?”
“맘대로 해라.”
“아뇨. 보고 싶어서요.”
“아깐 바람 쐬러 왔다며.”
“하.”
“솔직히 제대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찾으러 다녔는지 알아요? 옛날에 살던 집부터 시작해서 다 뒤지고 다녔다고요.
그런 일 있었으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그랬으면….”
“그랬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까지 왔었단다. 서준영 성격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서
며칠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은 생각을 뒤로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가라앉은 도하의 목소리에 준영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끔 녀석은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젠 그래선 안 됐다. 더는 투정을 받아줄 나이도 아니었다.
“나 열여덟 살 때 따먹었잖아요.”
“형이 어린 나 덮친 거 기억 안 나요?”
준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와, 진짜. 사람이 기억을 이렇게 왜곡할 수도 있는 건가. 억울한 마음에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이번엔 도하가 당황한 표정을 했다. 어릴 적, 그러니까 열여덟 살에 술에 만취한 준영을 꼬드기고 달래서 첫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남들은 그때 이도하를 보고 놀 만큼 놀아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때까지 누구와 입맞춤도 제대로 한 적 없는 몸뚱이였다.
“그런 얘길 왜, 왜 하는데!”
“네가 먼저 꺼냈다.”
도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그치. 누가 쥐어짰나. 혼자 삽질하다 쌌지. 쪽팔림과 민망함에 옛 기억을
떠올리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괜히 창피해서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지가 야하게 생겨서 그런 걸, 나한테….”
하아,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흰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도하를
홱 노려본다. 도하가 안전띠를 붙들고선 애잔하게 웃었다. 내리라고 하면 나 진짜 여기서 운다. 하는 표정으로.
* * *
아니나 다를까 소각장 앞에 송연우가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들 없이
혼자서 웬일인가 싶었다. 깡마른 손가락 사이에 흰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이건이 그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었다. 온갖 것들이 다 쏟아졌다. 퉁퉁, 통을 두어
번 쳐서 안을 깨끗하게 비우고 돌아서는데 툭, 무언가 점퍼에 와서 맞고 떨어져 나간다.
“아 진짜. 하지 마라.”
“병신.”
연우의 노골적인 비난에 이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상담실 청소를 하게 된 건 얼마 전에 있었던 담배
사건 때문이었다. 학생 주임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교실을 뒤졌고, 태경의 사물함에서 담배가 나왔는데 그걸
이건에게 덮어씌운 거였다. 이건은 제 사물함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하려다 거기에 송연우가 얽혀 있다는 걸
알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학생 주임이 연우를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한 번 더 찍히면 가만 안 둔다고 저번에도
그러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병신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남이야 죽든 말든.”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애마냥 저를 붙들고 화내고
분풀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다면 그냥 놔두고 싶었다.
“그딴 거 해서 뭐 하게?”
“내놔라.”
“싫다.”
연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서운 기세로 다가온다. 이건이 흠칫 놀라선 담배를 쥔 손을 위로 뻗었다. 연우가
빼앗으려 팔을 뻗었지만, 무식하게 키만 큰 강이건의 손에 제 손이 닿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모양 빠지게
폴짝폴짝 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시발. 팔을 팍, 후려쳤는데도 강이건은 골격도 얼마나 튼튼한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놔라, 시발.”
“싫다고, 아 저리 가.”
티격태격하는데 뒤쪽에서 애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연우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눈을 부라렸다. 씩씩대고
금세 욕을 퍼부을 기세였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연우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온다. 어울리는 패거리들이었는데
거기엔 박태경도 있었다.
태경의 물음에 옆에 따라오던 아이들이 키득거리고 웃는다. 연우가 닥치라며 욕지거릴 했고, 이건은 들고 있던
담뱃갑을 구겨 버린 후 쓰레기통을 든 채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박태경이 먼저 와서는 이건의
어깨에 척 팔을 걸치고 친한 척을 해왔다.
이건이 제 어깨에 걸쳐진 태경의 팔을 끌어내리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대로 쓰레기통을 들고 교실 쪽으로
움직이는데 등 뒤로, 병신, 쪼다,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송연우의 따가운
시선이 거슬릴 뿐.
* * *
문제집과 참고서를 하나씩 살피던 준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도하는 오는 도중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그 후론
잠잠했다. 차에서 서점으로 올 때까지도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지금은 인문 서적코너 한쪽에 기대서서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꽤 심각한 표정으로 읽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는 거 보면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실제로 암기력이나 이해력도 꽤 우수한 편이었다.
문제는 커가면서 머릴 쓰지 않고 주먹 쓰는 날들이 많아졌다는 거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 중 하나가 도하에게 다가가더니 무어라고 말을 한다. 우려와는 달리 도하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 중 하나가 볼펜과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아무래도 사인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도하가 사인하고 나서 상냥하게 웃자, 여학생 둘도 서로 입을 가리며 웃더니 고개를 까닥하고 저쪽으로 이동했다.
가면서도 도하를 보며 한 번씩 손을 흔들었다.
“읽을 거야?”
“그럼 먹을까?”
“…같이 계산해주세요.”
“됐어. 이리 내. 내가 들면 돼.”
도하가 카트에 담기는 물건들을 눈으로 훑었다. 맥주가 열두 캔, 즉석조리 식품과 라면이 대부분이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대형마트는 어지간한 건 다 팔았다. 진열대에도 저렇게 싱싱한 채소와 고기들이 있는데
어째서 죄다 즉석요린지 모르겠다.
“딸기 안 먹잖아요?”
“먹어.”
“언제부터?”
“오늘부터.”
곰곰이 생각하던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생겨났다. 서준영은 딸기를 싫어할지 몰라도 저는 아니다. 그럼 혹시
저를 위해 산 걸까. 이럴 거면서 괜히 틱틱거리고 말이야.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데
준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마트 안에 있는 작은 빵 가게 앞이었다.
“빵 사게요?”
바로 옆으로 가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바람도 불어가며. 그러자 인상을 구기더니 검지로 이마를 떼민다.
떨어져. 왜 이렇게 붙는 건데.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옆으로 붙으려고 하자 준영이 식빵 쪽으로 움직이며
자리를 피했다.
“뭘요?”
“뭐 하는 거야.”
“거봐요. 안 들리죠?”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어. 서점에서 얌전히 책을
읽길래 웬일인가 싶어 끌고 온 건데. 얼른 장이나 보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생선판매대가 보인다. 거기에 오늘 들어왔는지 빛깔 좋은 고등어가 줄지어 진열돼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도하가 물었다.
“이도하.”
“네?”
“나한텐 네가 그래.”
“그래도 맛은 내가 제일 좋을걸!”
* * *
준영이 트렁크를 열어 마트에서 장본 물건들을 꺼내는 사이 도하가 그 옆으로 가서 박스를 들어 주려고 했다.
“됐어. 올라가.”
“강이건. 어디 가?”
“자. 딸기.”
너 주려고 산 거라고 할 때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건이 감사하다고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나서 집 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도하가 준영을 얄밉게 째려봤다.
“나 먹으라고 산 거 아니었어요?”
“널 왜 줘.”
“뭐 해, 지금?”
“올라갑니다, 올라가요.”
도하가 웃으며 상자를 들고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2 층까지 짐을 들고 올라와 문 앞에 섰는데 뒤따라온 준영이
카드 키를 입구에 가져다 댄다. 띠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준영이 현관문을 활짝 연 상태에서 도하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안에 가져다줄게요.”
“됐어. 주고 올라가.”
“고생했어. 잘 가.”
닫히는 문 사이로 발을 밀어 넣자 준영이 흠칫해서 쳐다본다. 도하가 최대한 애잔하고 비굴한 얼굴로 준영에게
물었다.
“안 돼.”
“왜요.”
준영이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상자에서 즉석밥 하나와 찌개를 꺼내 도하에게 안겨줬다. 얼결에 건네받은 도하가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아니, 진짜 너무하잖.”
쾅. 닫힌 문 앞에서 양손에 즉석밥과 찌개를 든 채로 도하가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나서 현관문을 발로 툭 한 번 찼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따지면서.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찰나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두어 계단 올라가던 도하의 얼굴이 그
소리에 맞춰 활착 꽃폈다. 그럼 그렇지. 서준영이 나한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서준영은 서준영이지.
“이도하.”
“왜요?”
“이거 가져가.”
“…….”
도하가 계단을 다시 내려와서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쳐다봤지만,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아. 인류의 재앙이라고 적힌 그 책을 보며 도하가 이를 앙다물었다. 이건
인류의 재앙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재앙이었다.
* * *
“너 숙제 다 했어?”
“이것만 보고 들어갈게요.”
그 말에 이건이 포크를 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에도 반찬 만들어 줬는데 그 앞에서 송연우가 안 받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봉투가 찢어져 바닥에 다 쏟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어쩐지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엔 대답하지 못했다. 연우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말만 걸면 병신이라고
욕을 해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옆에서 잠자코 TV 를 보고 있던 아빠가 끼어들었다.
“말해 뭐해. 준식이가 그러는데 며칠 전에도 연우 두들겨 패는 거 자기가 가서 말렸다던데. 하여튼 남의 새끼도
아니고 자기 새낀데 왜 그렇게 못살게 구나 몰라. 어휴.”
[네, 다음 소개할 사람은 얼마 전 개봉했던 ‘별 헤는 밤’에서 여주인공 민혜의 첫사랑으로 나왔던 배우죠.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등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여심을 사로잡는 완벽한 몸매까지. 몇몇 여배우들이 이상형으로 꼽으며 더 화제가 됐는데요, 배우 이도하
씨입니다.]
“너 이 시간에 어디 가?”
“선생님 댁에 다녀올게요!”
신발을 신고 후다닥 현관을 나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띵동, 인터폰을 누르니 잠시 후 안에서 준영이 나온다.
씻었는지 수건이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건이 입을 벙긋댔다.
“선생님 TV 요!”
“TV?”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면서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믿기지 않는 건 준영의 태도였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그래?’ 하고 묻더니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 반응에 이건이 입을 벌렸다.
“알고 계셨어요?”
“뭐가.”
“그 형 배우인 거!”
“응.”
“와, 선생님도 알고 계셨구나! 그럼 진짜 연예인 맞구나!”
“신기해?”
“알았으니 얼른 가서 숙제해.”
“네, 그럴게요.”
이건을 올려 보낸 준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TV 도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이 봤다는 걸 확인할 길은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거기에 이도하 이름 세 글자를 쓰니 프로필 사진과 함께 필모그래피가 나온다.
그리고 밑에 관련 기사들. 하나같이 기대되는 유망주라 평가했다. 도하가 연기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영화를
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일부러 찾아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도하는 제가 알던 도하가 아닌 거 같았다.
낯설었고, 신기했다.
“…다른 사람 같네.”
소리가 미약하게 들리긴 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공사현장도 아니고 집에서 이걸 끼고 있어야 한다니.
기막힌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사이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 *
“젠장, 글렀네.”
“형, 나야.”
“가야지.”
[언제 올 건데.]
“일이 끝나면?”
무슨 일이냐고, 대체 이 중요한 시점에 거긴 왜 간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던 와중에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주변을 둘러봤다. 흐흐흐흐, 흐흐흐흑, 누군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였다. 슬며시 인상을 구기고
방 안을 둘러보다 위층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위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듣고 있는 거야?]
[거봐! 안 듣고 딴짓했지?]
[연말에 시상식이 있는데 네가 남우 조연상 후보로 올라갔으니까, 일단 그날은 서울에 와야 한다고 알겠어?]
“…무슨 후보?”
[남, 우, 조, 연, 상!]
“나를? 왜?”
자포자기한 선태의 목소리에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라도 서준영이랑 잘되면 여기에 눌러살 생각이었고,
그럼 연기고 뭐고 다 관둘 건데.
[이 미친 자식이 진짜!]
괜히 등골이 오싹해져 주방까지 불을 켰다. 위에서 들리는 거 같긴 한데.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이번엔 큰누나다. 으으.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잔몹을 처리하고
나니 보스가 나타났다.
* * *
치익, 캔 하나를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데 기다렸다는 듯 인터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현관으로 가 밖을 내다보니 도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왜 또. 선뜻 문을 열지 않자 이번엔
똑똑, 두드린다. 서준영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하는 수없이 손잡이를 돌려 현관을 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화장실 좀 쓰면 안 돼요?”
“뭐.”
“나 쉬도 급한데.”
“…….”
“…….”
“알겠어요.”
도하가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눈으로 안을 한번 둘러봤다. 제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림이 단출했다. 거실엔 2 인용 소파와 책상, 책장이 전부였다. 식탁도 2 인용이었고 냉장고도 작았다.
진짜 혼자 사는구나.
슬쩍 안방을 들여다보려 하는데 준영이 방문을 먼저 닫아 버린다. 이야, 철벽 수비. 도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치사해라. 안 본다, 안 봐. 그러던 중에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가 들어왔다.
“술 먹고 있었어요?”
“알았어요.”
“옷 입고 씻을 순 없잖아요.”
“들어가서 벗어.”
“말 안 들을 거면 나가든가.”
“…들어가서 벗을게요.”
거기다 조금 전 보았던 서준영의 얼굴을 떠올리니 자극은 두 배가 됐다. 서준영을 욕실 벽에 세워두고 엉덩이를
벌린 채 박는 상상을 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욕실 벽을 짚은 채로 거품 묻은 손으로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질렀다. 찌걱찌걱, 자극적인 소리에 입에선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씨… 발.”
“윽… 서준영….”
냉장고에서 두 번째 맥주를 꺼내던 준영이 멈칫했다. 주방 옆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 대신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맥주를 집어 든 채로 거실 쪽으로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좀 더
뚜렷하게 들려온다.
씨발, 어쩌고 하는 소리와 함께 헉헉대는 소리가. 준영이 미간을 확 구기고 욕실을 노려봤다. 저 새끼 설마….
지금 내 욕실에서 자위하는 거야? 당장 달려가 문을 열고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냐고 야단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 진짜.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도하가 입을 만한 걸 찾으려 했다. 옷 핑계로 또 내려올 거 같아 없어도
버려도 될 만한 옷을 주려고 찾는데 등 뒤가 서늘하다. 구부렸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몸을 돌리니 언제 왔는지
도하가 제 뒤에 수건 한 장 걸치고는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팬티도 줘요.”
“…….”
“입던 거 없어요?”
“다 들었구나?”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도하가 옷은 입지도 않고 준영의 안방을 둘러봤다. 혼자 쓰는 게 분명한 싱글침대와 옷장,
작은 책상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위엔 준영이 어릴 적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다 입었으면 나오라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아직 입고 있어요.”
“고마워요. 이제 갈게요.”
“준영이 형.”
“…….”
“잘 자요.”
이 자식이 순순히 갈 녀석이 아닌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니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가족사진 옆에 무언가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종이로 된 게임 카드였다.
손으로 직접 그린 엉성한 그림 카드는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캐릭터였다. 카드를 뒤집자 반듯하게
쓴 손글씨가 나타났다.
준영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도하가 어릴 적 좋아하던 캐릭터였다. 잃어버렸다고 준영을
붙들고 엉엉 울길래 엉성한 그림 솜씨로 만들어 줬던 카드였다. 본래는 캐릭터 능력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제대로 아는 게 없어 대충 아무 말이나 적은 거였다.
그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심란한 얼굴로 보다가 그만 카드를 뒤집어 놓았다.
CH 5.
아침 일찍 일어난 도하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허공으로 양팔을 쭉 벌렸다. 옆을 보니 기다란 베개에 어제 준영에게
빌려 입은 옷이 입혀져 있었다. 누워 그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형, 잘 잤어요?
서준영이 쓰는 바디 샴푸를 썼더니 온몸에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베개를 껴안고 뒹굴뒹굴 구르다가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곱게 접혀 있는 준영의 팬티를 집어 펼쳐 들었다. 그것을 뺨에 문지르고 나서 옷을 입혀둔 베개
위에 같이 올려뒀다.
흐읍, 숨을 최대한 들이켜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일깨운다. 더불어 소똥 냄새도 함께. 며칠
맡았더니 이젠 익숙해져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허공에 뿌연 숨을 토해내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팔다리도 풀어주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가볍게 뛸 준비를 하는데, 저만치 앞에 누군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저처럼 운동을 하러 나온 건지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혹시나 준영인가 싶어 봤지만, 그보단 더 컸다.
이 빌라에 저만큼 큰놈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입가에 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아아.”
“어쭈. 저 자식이.”
도하도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큰길 쪽으로 뛰어가던 이건이 갑자기 논두렁으로 방향을 틀더니 미친 듯이
질주했다. 저번에 차 태워준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도망간 것도 그렇고, 딸기 주면서 눈에 레이저가 나오게
노려보던 것도 그렇고, 이 상황에서 둘이 마주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 뒤를 흘깃 돌아보니 도하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얼굴로 웃으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으아악, 이건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도망쳤다. 그래도 내가 중학교 때까지 육상을 했던 사람인데 아무렴 저
형보다 못 달릴까, 생각하는 순간 목에 팔이 턱 걸리며 몸이 뒤로 확 당겨졌다.
좋아서 그런다면서 왜 그렇게 무섭게 웃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너무 뛰었더니 심장이 벌렁벌렁 터질 것 같았다.
일단 호흡을 가다듬는데 도하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뭔데요?”
“너 돈 안 필요하냐?”
“무슨 돈이요?”
“알바요?”
“별거 없어. 너 과외 하러 밤에 가잖아. 그때 내가 가서 문 두드리면 얼른 뛰쳐나와서 네가 현관문 열어주면
돼.”
“네?”
“어렵지 않지?”
“…….”
“…해요…. 죄송해요.”
이건이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마주 선 도하가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얼마나 저를 노려보는지
이글이글 불꽃이 나오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걱정했는데 어쩐지 생각보다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앞서 걷던 도하가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섰다. 500 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크리스마스트리야?”
“형은 안 믿으시겠지만, 다 그렇게 믿으니까 동네서 나무에 대해 함부로 말하시면 안 돼요. 어른들 알면 큰일
나요.”
“…아.”
“난 또… 귀신인 줄 알고 존나 쫄았네.”
그 얘길 들은 이건이 슬며시 웃었다. 세상 무서울 거 없이 차갑게 생겨서는 귀신을 무서워한다니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스스럼없이 무서웠다고 표현하는 게 신기했다. 보통 센척하느라 속으로만 생각하던데.
물론, 자신도 그렇고.
“여어, 우린 진짜 닮은 게 많구나.”
이건이 괜히 들떠서는 그러게요, 형은 무서움 안 탈 거 같은데 의외라고 하자, 도하가 슬그머니 다가와 이건의
어깨에 다시 팔을 두른다. 이건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인 줄 알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니 도하가 생긋
웃었다.
이건이 말을 얼버무렸다.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배우랑 의형제 하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도하가 싫으냐고 묻는다.
“싫은 건 아니고요….”
“…도하… 히… 엉?”
“…….”
“이건아?”
* * *
준영이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데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연신 울려댄다. 손에 물기를 제거하고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엊그제 싸운 애인이다. 3 개월 정도 연애한 거 같은데, 처음 사귈 때는 서로 잘
맞을 거라 착각했다.
나이 서른 넘어 뜨거운 연애는 상상한 적 없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었는데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착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시로 전화를 해서 확인했고, 집요하게 굴었다. 슬슬 헤어질
때가 됐구나,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화장실을 나섰다. 그때 조연출인 창경이 다급하게
뛰어온다.
“감독님. 큰일 났어요.”
“왜.”
“원준 씨요. 오다가 사고 났나 봐요. 못 온다고….”
“진짜 사고래?”
젠장. 준영이 이마를 문질렀다.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지분이
가장 많은 주연 배우가 없는 마당에 리딩을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박원준을 꽂아주라고 은근히 압박을
넣었던 국장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가자.”
“괜찮으시겠어요?”
펑크란 소리에 창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저야 뭐 조연출 때부터 굴러서 이력이 났지만 조연출 1 년 차인
창경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동기들보다 힘들어했고, 많이 더딘 편이었다. 그런 녀석을 끌고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다 반기는 분위기였는데, 이젠 아주 대놓고 좋아하겠네.
“아. 선생님. 너무 죄송합니다. 박원준 씨가 오다가 사고가 났나 봐요. 지금 병원인데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리딩은 못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네요.”
이번엔 그 눈동자들이 준영을 향했다. 준영이 자리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 저를 찾는데
대체 누군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 앞에 서니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네가 서준영이니?”
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준영이 얻어맞은 오른쪽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가방에
달려 있던 귀금속에 긁혔는지 이마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놀라 여자를 보는데 여자가 다시 달려든다. 옆에
있던 조연출과 여자의 일행이 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는데 여자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악을 써댔다.
“세상에 어디 꼬실 놈이 없어서 내 아들을 꼬셔! 낼모레면 결혼할 애를 꼬시냐고 이 더러운 새끼야! 너 때문에
결혼도 안 한다잖아. 결혼도 없던 일로 하겠다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준영이 쓰라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으로 피가 들어가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친 듯 발광하며 악을
쓰는 중년 여성의 얼굴만 유독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더러운 새끼라고. 남의 집안 파탄 낸 새끼라고. 너
때문에 내 아들만 죽게 생겼다고.
“웬일이야. 서 감독 동성애자였대?”
그 소리들이 한데 뒤엉켜 제 몸뚱이를 갉아먹고 있었다. 발밑이 일그러지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도망쳐야 하는데 목소리들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갈 뿐이었다.
물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 소파로 비척비척 걸어가 축, 늘어졌다. 쉽사리 호흡이 진정되질 않았다. 약 기운이
퍼질 동안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뭐든 여기서 벗어날 다른 생각. 그러다 문득 어제 도하가 고등어 어쩌고
하던 얘기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었다.
“…네, 엄마.”
준영이 입을 다물었다. 모친이 할아버지라고 칭한 사람은 사실 저의 생물학적 아버지였다. 딸뻘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그래서 저를 이 서씨 집안에 들어오게 한 장본인.
[미안… 하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가족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준영은 항상 이방인이었고, 섞이지 못하는 기름 같은 존재였다. 덕분에 가슴에 오랫동안 올려두고 살았던 커다란
돌덩이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힘들면 안 와도 돼.]
“…갈게요. 힘들 게 뭐 있나요.”
“괜찮아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편의점에서 도시락 같은 거 사 먹지 말고. 귀찮아도 밥은 집에서 해먹어. 응?]
그 후로 한참이나 그녀의 걱정이 이어졌다. 통화 중에도 준영의 시선은 창밖으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투닥거리던 도하와 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친은 도하가 여기 온 걸 모르는 걸까. 목소리를 들으니 전혀
모르는 눈치긴 한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결국은 얘기를
꺼내지 못하였다.
* * *
조리사 아주머니께 무슨 말인가를 하더니 밥을 반이나 덜어내는 걸 보고 이건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저렇게
먹으니 계속 마르지. 식판을 든 연우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손등에 못 보던 피딱지가 자리 잡고 있다. 싸운
건지 아니면 맞다가 손으로 막은 건지 모르겠다.
“근데 거기 송연우도 있었대. 쟤 요즘 막 나가기로 작정했나 봐. 나중에 제대로 일 터지면 덮어쓰는 건 저지.
박태경이 뭐 의리 지킬 줄 아나. 안 그래?”
이건이 아무런 말 없이 밥알만 꼭꼭 씹어 삼켰다. 영훈이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연우랑
다 같이 친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연우가 멀어졌고, 이젠 남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친구로서 걱정도 되고
화도 나고 그런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
“어?”
“나랑?”
“응. 싫어?”
“뭐, 싫을 건 없지만….”
그치. 싫진 않다. 김유나처럼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먼저 학원을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싫어할 남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왜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느냐는 거였다. 혹시 누가 괴롭히나. 보디가드 같은 게
필요한가. 그렇다면 잘못 골랐는데. 가끔 덩치가 크단 이유로 그런 걸 부탁하는 친구가 있긴 했는데 알고 보면
이건은 싸움에 젬병이었다. 다행히 맷집은 좋아서 몇 대 맞아도 꿈쩍 안 하긴 하지만.
생긋 예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 쪽으로 간다. 친구들이 유나의 등을 두드렸고, 유나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넘기며 이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걸 보는 영훈과 우진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우어어 짐승처럼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리야?”
“김유나잖아.”
* * *
입술을 잘근거리다 무슨 생각에선지 집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대꾸가 없다. 다시
똑똑, 여러 번 두드렸더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나온다. 한 손엔 젓가락이 들려 있었는데 열린
문틈으로 라면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어쩐 일이야?”
“여기다 뭐 탔어?”
“…….”
“왜 또.”
“지금 라면 끓여요?”
“어.”
준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도하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는 왜 배웠겠어.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거지. 준영이 꿈쩍도 하지 않길래 이번엔 좀 더 몰입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더니 보다 못한
준영이 하는 수없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곧 문에서 손을 뗐고 도하가 그 틈을 열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도하가 이번엔 주방 안을 살폈다. 한쪽 서랍 위엔 인스턴트 음식들이 가득했다. 어휴. 증말.
속상한 마음에 살피는데 턱, 냄비가 자신의 앞에 놓인다.
“됐어. 너 먹어.”
“응.”
“흥.”
“뭐 하냐.”
“야. 면 다 불어터지잖아.”
“…….”
“……”
“필요 없어.”
“도하야.”
“네.”
“왜 부르고 말이 없어요.”
“뭐라고요?”
“아니.”
하. 도하가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와, 웬일로 순순히 문을 열어주더라니. 씨발. 망할 늙은 나무. 소원을
들어주려면 똑바로 들어 주든가 하지. 황망함에 웃기만 하니 준영이 끓고 있던 냄비의 불을 끄고 나서 도하의
앞자리로 옮겨온다.
준영은 아니라고 했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도하가 싫을 리 없었다. 어릴 때야 당연히 예뻤고, 커서도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예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끼는 동생으로서였지 한 번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녀석은 그걸 원하니 이 관계를 지속하는 일은 어려웠다.
“네가 나한테 주는 거 다 부담스러워. 관심도 애정도. 어느 한쪽이 부담 느낀다면 그건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
도하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더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사라졌다.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심장을 때렸다. 준영은 도하가 남기고 간 라면을 가만히 쳐다보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배고프다고
했는데…. 다 먹을 때까지만 좀 기다릴걸.
* * *
준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꽤 떨어진 곳에 화장실 표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녀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니면 자신이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때 도하가 재혁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이 형이랑 같이 가면 안 돼?
낯가림이 심한데 어쩐 일로 재혁에게 부탁하는 걸까. 마음에 들었나 싶어서 재혁을 쳐다보니 그는 선뜻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떨어진 곳에 가는 와중에도 도하는 어린아이처럼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3 학년인데 진짜 너 겁 많구나?”
그 말을 하자마자 도하는 시무룩한 얼굴로 옷자락을 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재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새끼가 소심하긴. 그래도, 귀엽긴 귀엽네. 하지만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서준영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런 혹이 자꾸 따라붙으면 진도를 빼기 힘들지 않은가.
뭐? 재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괜히 싫다고 했다가 녀석이 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마지못해 휴대폰을 건네줬다. 다른 거 건드리지 말고 게임만 해, 하고 게임까지 켜
주면서.
도하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잠잠했다. 재혁이
기다리는 동안 담배 하나를 피울까 하는데 도하가 생각보다 빨리 나오며 휴대폰을 재혁에게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뭐야, 왜 그래.”
“너.”
말을 하려던 준영이 도하를 살폈다. 도하는 어쩐 일인지 다른 쪽에 있는 염소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쭈그려
앉아 옆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라고 하는 중이었다. 준영이 자신의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
재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걸 본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준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재혁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하아. 준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도하를 불렀다. 도하가 한 손에 풀을 든 채로 천진난만한 얼굴로 일어섰다.
“도하야, 가자.”
* * *
끼익. 버스가 멈춰 섰고, 이건이 피곤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엔 커다란 쇼핑백이 하나 들려 있었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조용하다. 그때 저 멀리 논두렁 한가운데서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고라니 내려왔나.
“나. 잤어?”
[…왜 전화했어.]
“안 자면 잠깐 볼래?”
“집 앞이야.”
아 씨발. 수화기 너머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이 안을 다시 보니 미닫이문이 열리고 연우가 그 안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아저씨는?”
“꺼져, 병신아.”
몸을 돌려 들어가려는 연우를 이건이 급하게 붙들었다. 억지로 손에 들려주니 연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대로 쇼핑백을 바닥에 팽개쳐 버리더니 들어가려고 한다. 이건이 끝까지 쫓아가며 가방을 넘겨줬다.
“씨발! 안 받는다고!”
“하. 꼰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얻은 거 아니야. 나 주말에 잠깐 알바한 걸로 산 거야. 그러니까 입어. 지랄하지 말고, 좀.]
보내놓고 점퍼를 여미며 집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쯤 걷는데 저 멀리서 또 ‘우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고라니라도 내려온 건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
비명을 버럭 지르고 도망치려다 가까이 다가온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도하 형?
* * *
쪼오옥, 이건이 두유 하나를 뜯어 마시며 앞에 앉은 도하를 쳐다봤다. 그는 추위 속에서 얼마나 달렸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소주를 사더니 종이컵에 따라 벌컥벌컥 물 마시듯 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거의 두 병을 비웠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걸 이건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시간을
확인하니 10 시가 훌쩍 넘었다. 편의점도 11 시면 문을 닫을 텐데,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어야 하나.
이건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려고 하는데 도하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다. 쪼르륵 소주를 더 따르더니
꿀꺽꿀꺽 한입에 털어 넣고 제 입술을 슥 핥았다.
“무슨 일? 데이트?”
“아.”
“형은 왜 밖에 나와 계셨어요?”
이건이 곰곰이 생각하다 ‘아!’ 하는 표정을 했다. 제 아버지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위염?”
“……”
“아니면 식도염?”
“됐다. 닥쳐.”
“…네.”
도하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들고선 종이컵에 채웠다. 이건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빈속에 깡 소주만 먹는 게 마음에
걸려 지갑을 꺼냈다. 연우한테 다 주느라 돈이 얼마나 남았으려나. 뭐 안주라도 사다 주려고 하는데 앞에 앉은
도하가 빤히 보더니 웃는다.
“어떻게 아셨어요?”
도하가 피식 웃었다.
“너는 왜 그렇게 착하냐.”
“제가요? 저 안 착한데.”
“네?”
그 말에 이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선생님 얘기가 왜 나오지. 둘이 혹시 또 싸운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친척이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친구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곧 연우랑 제 사이를 떠올리곤 납득했다. 어쨌든 친한 사인데 둘이 오해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이건은 며칠 전 TV 서 본 도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려나. 불편해하지 않을까.
“…형.”
“응?”
“근데 형 배우 맞아요?”
“왜. 나 봤어?”
그 말에 도하가 이건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하던 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담스럽고
불편해한다면 내색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지금 강이건이 저한테 하는 것처럼.
“그래도 괜찮아요?”
응.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말하라고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준다는 말에 이건이 난색을 하며
웃었다. 그거까진 괜찮은데. 하지만 도하의 표정이 좋질 않아 차마 대놓고 거절할 순 없었다. 그저 나중에
기회를 봐서 해달란 말로 얼버무렸다.
“야 이건아.”
“네.”
“네가 볼 땐 나 어떠냐?”
“외모요?”
“뭐든, 다.”
“엄청 잘생겼죠.”
“성격은?”
이건의 두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 정 가운데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말했다간 이 자리에서 테이블과 같이 엎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성질이 더러워 보인단 얘기였다.
“좋, 좋아 보이세요.”
“더듬었어.”
“아니에요. 진짜 좋은 거, 같아요.”
“그래, 부담스러울 만해. 이해한다니까. 존나 어리지, 잘생겼지, 몸도 좋지, 성격, 뭐 이 정도면 됐지.
어떻게 사람이 완벽할 수가 있어. 충분히 이해해. 이해는 하는데 왜 받아들여지지가 않을까? 동생? 씨발, 동생
좋지. 근데 내가 지한테 언제 동생 시켜달라고 했어?”
혼잣말로 성토하는 도하를 보며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지. 멀쩡해 보였는데, 지금 주정하는 건가. 집에
가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도하가 또 저를 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야, 강이건.”
“네?”
“너는 좋겠다.”
“…왜요?”
“서준영이 예뻐해서.”
아. 이건이 슬며시 미간을 구긴다. 그건 아까 한 말인데. 취하긴 했나 보네. 자세히 보니 눈동자도 좀 빨갛고
풀린 거 같고. 그때 누군가 어깨를 짚어온다. 돌아봤더니 102 호에 사는 박동현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저 잠깐 도하 형이랑….”
“오, 3 층에 새로 이사 온 형제님!”
“근데 형은 어쩐 일이세요?”
“씨발, 나 잘려고 했는데 밖에서 고라니가 존나 울잖아. 너도 알지? 내가 신경 예민한 거. 그래서 공부고 뭐고
잠깐 접고서 맥주 하나 사려고 내려왔지.”
아. 이건이 도하를 쳐다봤다. 그거 고라니 아닌데. 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때
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절주절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기가 올랐고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형, 괜찮으세요?”
“…됐어, 인마. 혼자 할 거야.”
“괜찮으시겠어요?”
하아. 몇 개비를 더 피우고 나서 그대로 빌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밟고 하나씩 올라갔다. 발소리가 텅 빈 계단
안에 울렸다. 2 층 서준영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걸음이 멈췄다. 슬쩍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서준영… 문 좀 열어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 좀 열어봐. 나 좀 봐줘. 나 좀 좋아해 줘. 나 좀 사랑해줘.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CH 6.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웅성거리는 소린 어디서 들리는 걸까. 거실로
나오니 소리가 좀 더 커진다. 두리번대던 시선이 현관 앞에서 멈췄다. 대충 머리를 정돈하고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턱, 열리는 문 뒤로 무언가 걸린다. 문틈으로 놀란 이건의 얼굴이 보였다. 준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이건인 아침부터 여기 왜 있어? 근데 문이 왜 안 열려. 다시 안으로 당겼다. 퍽, 하고 여는데 무언가에
부딪히며 끄응, 하는 신음이 들린다.
“저 괜찮아요.”
정신 좀 들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건아 네가 좀 일으켜 세워줘. 조금 전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박에
알아챈 준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는데, 조금 전까지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며 이건의 놀란 얼굴 옆으로 누군가 힘겹게 기대 있는 게 보인다.
준영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하였다.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문을 확 열어젖히니 누군가가 뒤쪽에 더 서 있다가 억 소리를 지른다. 보니 이건뿐 아니라 그의 부친과 모친까지
내려와 있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제가 체온이랑 맥박 재봤는데 다행히 심각한 거 아니에요. 일단 의식도 있고, 체온도 많이 낮은 건 아니니까.
들어가서 몸 녹이고 따뜻한 물 좀 마시고 하면 괜찮을 거 같아요.”
준영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의 모친은 간호사였다. 지금은 시내의 작은 개인병원에서 일하지만,
아가씨 때는 서울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선생님이요?”
“아휴, 그러셨구나. 어쩐지, 연고도 없는데 젊은 총각이 이사 온 게 신기하더라니. 그럼 건이가 선생님 댁으로
좀 눕혀놓고 와.”
준영이 표정을 굳혔다. 다신 안 오겠다고 어제저녁에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가더니 술 취한 와중에도
그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가뜩이나 밤에 누워서 괜히 그렇게까지 했나 후회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콱 막힌 듯 답답해졌다.
“들어와서 자.”
“괜찮으시겠어요?”
이건의 부모님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위로 올라가고 나서 준영이 도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 따라 들어와. 버티길래 나중엔 손을 잡았는데 마치 얼음장처럼 찼다. 하는 짓을 보면 혼내고도 남았겠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을 보니 일단 달래서라도 안으로 들이자는 생각부터 들었다.
“들어와.”
“싫어요.”
“야.”
그렇게 현관문이 닫히고 도하를 거실까지 끌고 와 소파에 확 밀쳐뒀다. 커다란 덩치로 소파에 늘어지길래 그대로
두고 작은 방으로 가서 캠핑할 때 쓰던 전기담요를 찾아서 들고 왔다.
“마셔.”
“더 마셔.”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도하의 눈동자가 시커멓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제자리로 찾았다.
갑자기 도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풀면서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아우, 어지러워. 그러더니 담요를 머리끝까지
잡아당기고 나서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야!”
준영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담요를 들추거나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따지질 못했다. 취한 건가.
아니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도 혹시 진짜 어지러워서 그런 건 아닐까, 그
와중에도 걱정됐다. 다시 살피는데 도하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잠하다.
혹시나 진짜 잘못됐나 싶은 마음에 담요를 살짝 끌어내고 얼굴을 확인하니 조금 전보다 안색이 돌아오고 입술 색도
많이 나아졌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눈꺼풀 안쪽에서 눈알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너 일어나서 보자.”
* * *
준영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제 입술을 어루만지며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침이 됐는데 얼굴이 뭔가 묘하게
부자연스러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건의 모친에게 물었더니 찬 데서 자서 안면 마비가 온 것 같다고 했다.
어젯밤 도하가 그 사고를 치고 웃길래 혼낼 생각만 했지 그게 입이 돌아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괜히
저 때문인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얼결에 키스한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다가 두 가지 감정을 계속
반복하는 중이었다.
“침… 이요?”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영하면서 부상을 겪으며 치료를 많이 받았는데 그때 뜸과 침 치료도 겸했기 때문에
침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 마음을 준영이 눈치챘는지 더는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이 아빠 치료받던 한의원 어디지? 3 층 총각 거기 좀 가르쳐줘.”
어. 알았어. 잠깐만. 이건의 부친이 휴대전화에서 번호를 찾아낸다. 도하가 슬쩍 준영을 쳐다봤다. 어젯밤 제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던 입술을 문지르며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 달짝지근한 입술 맛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걸 보는 이건이 놀라서는 슬며시 준영의 옆으로 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 * *
도하가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여전히 왼쪽 입술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이 지긋한 한의사가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위로 밀며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살짝 마비가 왔네. 구안와사라고 하죠. 심하면 여기 눈도 안 감기고 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거예요. 침 좀
맞고,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돌아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되도록 스트레스는 받지 말고 얼굴엔 찬바람
맞지 않도록 하고.”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맞고 집에 가서 푹 쉬어.”
“강이건, 내 얼굴 많이 흉하냐?”
이건이 잠시 망설였다. 바늘을 꽂고 있으니 좀 웃기긴 했는데, 막상 얼굴은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아뇨. 잘 어울려요.”
“어울려? 이게?”
“뭐?”
“야!”
도하가 소리를 지르려다 침이 자극하는 바람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이 같이 표정을 구겼다. 이상하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말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듣기 좀 그런가. 돌려 말했어야 하나,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데 준영이 일단
차에 가서 기다리자며 이건의 등을 떠민다.
“서준영 씨 어디 가요, 나는 아파서 이러고 있는데.”
“꺼져, 이 새꺄.”
* * *
준영이 커다란 통에서 길쭉한 어묵 하나를 뽑아 들었다. 도하가 나올 때까지 근처 포장마차에서 분식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아침이야 도하가 나오면 가서 먹으면 되는 거고. 하지만 이건은 어묵을 손에 든 채
먹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뭐라고 했는데?”
“…그랬어?”
“네. 두 번이나.”
“아.”
이건이 어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서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도하는 평소보다
많이 웃었지만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어제 도하 형은 좀….”
“…?”
“울적해 보였어요.”
“…….”
준영이 놀리듯 하자 이건이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전 짝사랑이 뭔지 모른다. 해본 적도 없고, 딱히 누군갈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마음 아파본 적도 없으니까. 신경 쓰이는 사람은 있긴 하지만…. 그건…. 아, 갑자기 왜
송연우가 생각났을까.
“아뇨. 잠깐 딴생각했어요.”
“이건인 없어?”
“뭐가요?”
“좋아하는 사람.”
“선생님은 있으세요?”
“나도, 아직은.”
“네?”
“둘이 나 없을 때 비밀 얘기했죠?”
“아니. 그냥 네 욕했는데.”
“그러기예요?”
“뭐예요?”
“그렇다고 뭘 또 이런 걸.”
도하가 피식 웃었다. 제 목에 꼼꼼하게 담요를 둘러주는 준영의 손길이 좋기만 해서, 무릎담요가 무슨 모양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건이 애매하게 웃고 있었기에 그게 캐릭터 담요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괜찮아요.”
“난 준영 씨랑 있으면 뭐든 다 좋아요.”
걸어가던 이건의 눈에 맞은편에 서 있는 무리가 들어왔다. 그중엔 낯익은 초록색 점퍼도 있었다. 학교 가는 날이
아닌데도 교복을 입은 송연우였다.
그제야 이 근처가 그들이 자주 가는 당구장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아, 돌아갈걸. 마주치기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상함을 느낀 준영이 먼저 뒤를 돌아봤다.
“강이건. 뭐 해. 안 와?”
네? 가, 가요. 이건이 그들을 외면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야 강이건!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태경이 저를 쳐다보고 한쪽 손을 어깨높이로 흔들고 있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도하가 투덜거렸고 준영은 맞은편에 있는 아이들을 봤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봤던 아이도 있었다. 송연우라고
했나. 이건과 예전에 친했다던. 그중에 이건을 부른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그가 저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야?”
“그냥… 같은 반이요.”
“이도하.”
* * *
“집게 주고 너 먹어.”
질세라 이건도 장어를 입에 넣더니 으음, 하고 감탄을 내뱉는다. 살도 도톰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도하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다가 준영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도하 형. 제가 싸드릴게요!”
“강이건.”
“너 혹시 그 얘기 알아?”
이건이 쌈을 오므리다 말고 멈칫하더니 곰곰이 생각한다. 도하가 노려봤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싶었는데
이건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전래 동화냐고 묻는다. 집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어 대신 저 자식을 확
구워 버릴까 싶었지만, 일단은 미소로 응답하며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대답해주었다.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잠시만, 너네 먹고 있어.”
전화가 끊어졌지만, 준영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더니 귀에
대는 걸 봐선 조금 전 걸려온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듯 보였다. 도하가 가만히 쳐다보는데 이건이 장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근데 도하 형은 대학생이에요?”
“왜 고등학생 같아?”
“아, 아니에요.”
“…뭐… 비슷해요.”
“짜식. 더 먹어.”
“심리학.”
풉. 이건이 마시려던 사이다를 그대로 내뿜었다. 심, 심리학? 눈이 동그래져 쳐다보는데 도하가 장어를 집어
먹으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건이 빈 옆자리를 봤다. 준영이 있었으면 사실을 얘기해줬을 텐데.
진짠가.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는 재주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거 같은데.
“그렇구나…. 심리학이구나.”
“…네. 그러려고요.”
이건이 흠칫 놀라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생각하는데요?”
“장어가 더 먹고 싶다?”
“…….”
“아닌가. 그럼 사이다?”
“…….”
“콜란가?”
도하가 싱긋 웃는다. 거봐. 역시 전공을 잘 선택했어. 그러면서도 눈은 자꾸만 밖에서 통화하는 준영에게
옮겨갔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는 아닌 듯했다. 집 내놨다더니 혹시
부동산인가. 담배를 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누굴까.
* * *
샤워를 마친 도하가 욕실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아, 에, 이, 오, 우, 소리를 내어 입술을 움직였다.
마비가 온 근육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침을 맞았는데도 첫날이라 그런지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운동이나 할까 하다가 소파에 앉아 TV 를 틀었다. 채널을 하나씩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의학지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패널로 나온 사람 중 하나가 제가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뭐야?”
잘못 봤나 싶어 자세히 보는데 카메라가 이번에도 또 그를 비춘다. 확실히 김민석이 맞았다. 저번에 찾아갔을 때
엄청 바쁜 척하더니 방송 출연 중이었군. 하필 방송국도 서준영이 일하던 곳이네. 찝찝하게.
“잤어요?”
“무슨 얘기.”
“아까 병원에서 한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보호자가 옆에서 좀 지켜봐야 한다고.”
“언제?”
“형 나가고 나한테 얘기했어요. 도망치느라 못 들었죠?”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심각한 게 아니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찬바람 맞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뻔한 수작을 부리는 게 보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들은 적 없다고 하며 문을 닫으려고
하니 도하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잠깐, 잠깐만요.”
“치워. 닫는다.”
“잠깐만 얘기 좀 해요.”
“해, 그럼.”
“들어가서.”
“안 돼.”
“아 좀.”
“여기서 하라니까.”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도하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옆으로 휘청했다. 준영이 냉랭한 얼굴로 쳐다보자 이번엔
벽을 짚으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잠깐만요. 저 지금 좀 어지러워요. 숨도 안 쉬어지고, 눈도 잘 안 보이고,
후유증인가.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이건이라도 과외 하러 내려오면 좋겠는데.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고 갑자기 안쪽에서 띠리릭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준영의 못마땅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다. 도하가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대로
입술이 올라가지 않아 전처럼 예쁘진 않을 테니 나름 소리까지 에헤헤 하고 덧붙였다.
효과가 통한 걸까. 준영이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어놓고서 그대로 안으로 홱 사라진다. 으윽. 일어서는데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절뚝절뚝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가 현관 앞에 신발을 벗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할 얘기가 뭔데.”
“마시고 나가.”
“그러지 말고 좀.”
“좀 뭐어. 또 뭐어.”
“넌 위험인물이니까.”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니, 묻지 마.”
“그게 왜 궁금해.”
“그냥.”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민석이 이혼하고 1 년 정도가 됐고, 사실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긴 했었다.
그는 한 번씩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일 이후로 누굴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계속 거절하는 중이었다.
“몰라, 나도.”
“모른다니까.”
“야, 인마.”
“3 초 만에 싸고.”
“어, 알겠어. 네 말 무슨 뜻인지 아니까 그만 올라가. 나 진짜 피곤해. 어제도 너 때문에 잠 설쳤고, 오늘도
너 병원 데려가느라 쉬지도 못했어.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그냥 챙겨야 할
동생이란 뜻이야. 내 애인이 아니라.”
“이게….”
“입은 거짓말해도 혀는 거짓말 안 하거든요.”
“다물어.”
“나랑도 해요.”
“뭘.”
“섹스.”
“…….”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필요하다면요.”
“너만 상처받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하가 소파에서 내려와 준영의 손을 붙들고 꼭 움켜쥔다. 준영이 더는 뿌리치지
않고 그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바라봤다. 뭘 잘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표정에 비장함과 간절함, 애절함이 아주
골고루 섞여 볼만했다. 심란한 마음에 손을 빼내려고 했더니 꽉 쥔 채 놓지를 않는다. 여전히 저를 보면서 이젠
눈까지 벌겋게 변하기 시작한다.
“뭐야, 인마. 얼굴이 왜 그래?”
도하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코를 훌쩍 들이마신다. 후우, 심호흡하는데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준영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 뻔뻔하게 굴더니 갑자기 왜 이래.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고개를 돌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입술을 꾹 깨문다.
“…야. 이도하.”
고개를 드는데 보니 눈 주위가 빨갛게 짓물렀다. 당혹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눈만 끔벅거리고 보는데
도하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을 잇는다.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도하가 눈을 꾹 감는다. 한숨처럼 ‘제발요.’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해서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쓰고 바락바락 대드는 게 낫지. 준영이 후우,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당장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해본다고.”
“대신, 하나만 약속해. 만약 하게 된다면 섹스 방식은 내가 정해. 거기에 못 따라오면 그걸로 넌 아웃이야.
나한테 더 질척거리지 마.”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도하가 잠시 멍청한 표정을 했다. 섹스 방식이라니. 설마 셋이 하자거나, 여럿이 기차놀이
같은 거 하자는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늘이며 ‘설마 셋?’이라고 했더니 준영이 인상을 구긴다. 도하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약속 꼭 지켜.”
그러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도하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하는 건가 싶어서.”
아. 도하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 전까지 빨갛던 눈 주위는 어느새 말끔하게 정돈됐다. 그걸 보는
준영이 미심쩍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미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하가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 기운 빠져.”
“네. 그럴게요.”
그러겠다고 해놓고서 도하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준영이 그 시선을 받아치며
‘왜?’라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더니 또 일어서려다 말고 빤히 쳐다본다.
“왜.”
준영이 밀어낼 틈도 없이 쪽, 하고 입술 도장을 찍더니 잽싸게 현관으로 후다닥 튀어 나간다. 새벽엔 선수처럼
키스하더니 지금은 부끄러움 많은 십 대 소녀처럼 굴었다. 저 새끼 인격장애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는데 도하가 현관 앞에서 운동화를 신으며 생긋 웃는다.
“잘 자요, 준영 씨.”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도하가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현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울 것
같은 얼굴과 조금 전 본 웃는 얼굴이 겹쳐지며 속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무슨 할 말?”
태경을 중심으로 무리가 둘러싸고 이건을 먹잇감처럼 쳐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어휴. 이건이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을 대충 정리하고 의자까지 밀어 넣은 후 그들을 따라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니 아이들이 옆으로 흩어지며 이건을 바라봤다. 평소에 태경이 한 번씩 이건을 건드려 왔기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따라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 옥상이었다.
철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이건을 중심으로 뒤따라온 무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뭐하자는 거야 이게. 이건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태경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이건에게 다가온다. 치익, 불을 붙이고 후우, 하고 연기를
내뱉으니 콧속으로 매운 냄새가 확 밀려온다.
“뭐?”
“…너 여자 친구 있잖아.”
“그건 좀 곤란해.”
“뭐. 왜.”
“하. 이 새끼 봐라?”
“야, 강이건. 내가 부탁하니까 진짜 부탁처럼 들려? 씨발, 똥오줌 못 가리네? 내가 자리를 만들라면, 만드는
거고, 까라면 까는 거지. 좆밥 같은 새끼가 어디서 싫다 좋다 말대답을 해. 응?”
툭, 뒤로 밀려나던 이건의 등이 창고 벽에 닿았다. 태경이 벽을 손으로 짚으며 죽일듯한 눈으로 이건을 노려봤다.
저와 키와 체격이 비슷한 강이건을 이런 식으로 욕보이는 건 제힘을 과시하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다.
게다가 자신이 전부터 찍어뒀던 김유나가 저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면서 강이건한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 씨발!”
잡고 있던 멱살을 놓으며 태경이 엉거주춤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형.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박태경이 잘나가는 집 아들이라고 해도, 선배는 선배였다. 상윤이 몰려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그가 바지를 추켜올리며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다른 쪽으로 간다. 턱, 그리고 뒤이어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이젠 그리로 쏠렸다. 이건의 눈이 커졌다. 조용한 창고 안에서 연우가 점퍼를 입으면서
나오는 중이었다.
이건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사라지는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거기서 3 학년 선배랑
있었을까. 담배라면 밖에서 얼마든지 피웠을 텐데. 왜 나오면서 점퍼를 입었을까. 입술을 왜 훔쳤을까. 목덜미며
귀며 왜 그렇게 빨개져 있었을까.
CH 7.
달칵, 마우스를 클릭하자 노트북에 화면이 재생됐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뤄진 남자가 제 반 토막만 한 남자를
침대에 반으로 접고서 무지막지하게 애널을 쑤셔대는 영상이었다. 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섹스가 아니라 고문처럼 보였다. 다음 영상을 클릭하니 무릎에 엎어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린다.
무릎에 올라가 있던 남자가 대디, 대디,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걸 보고서 도하가 인상을 더 구겼다. 아버지한테
말 안 들어서 혼나는 건가.
서당개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상상 섹스 10 년인데 씨발 실전에서 못하면 그게 등신이지. 나가 죽어야지. 짝짝,
뺨을 치며 기운을 북돋아 준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마을엔
어둠이 찾아왔다.
그래, 지금이야. 두꺼운 점퍼를 꺼내 입고 한의사의 당부대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어쨌든 섹스할 때 비웃는
것처럼 보이면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도 모자라 목도리로 칭칭 감고 나서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그대로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나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 논두렁을 걷다가 마을 중간에 있는
500 년 묵은 보호수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그 앞엔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이 있었다.
도하가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나서 허리를 숙였다.
“나무님, 나무님. 저번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남은 인생을 제가 아주 착하고 성실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서준영이 이번에 저한테 넘어와서 저
없으면 못 살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고사를 지낼 때 많이 쓰는 시루떡이었다. 도하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나서 시루떡을 나무 아래로 슬쩍 밀어 넣었다. 마치 금품청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태였다.
“…거기서… 뭐 하세요?”
“아니던데….”
“친구네 잠깐 들르려고요.”
“알았어. 가, 얼른.”
“형은 안 가세요?”
“갈 거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꺼져.”
“진짜… 맛 간 거 아니야.”
* * *
하지만 그랬다간 연우 아버지가 강씨 할머니 댁까지 쫓아와 패악을 부릴 것 같았다. 아니라고 말한 후에 연우를
데리고 골목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연우가 그런 이건의 팔을 뿌리치고 한 발 물러선다.
“놔!”
악을 쓰면서도 몸을 휘청이는 거 보니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다. 옆으로 넘어지려는 그를 다시 붙드는데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반항했다.
“씨발, 놓으라고!”
“아우, 진짜!”
“아니네. 살았네.”
이건이 연우를 내려놓자마자 정강이로 발길질이 날아든다. 씨발, 병신, 찐따 새끼. 왜 업고 지랄이냐고 악을
쓰는 소리가 빌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인상을 쓰던 도하가 2 층을 올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불이
꺼져 있던 준영의 집에 불이 들어온다. 오오, 자고 있었는데 깼나 보다.
“놔둬, 새꺄. 사람이 소리도 지르고 그러는 거지. 응? 강이건 친구. 더 질러. 실컷 질러.”
“와. 눈깔 봐. 완전 살아 있는데?”
씨발. 왜 자꾸 비웃는데! 연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자 도하가 양손을 올리면서 싱긋
웃었다.
병신들. 연우가 이건과 도하를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 그대로 가려 했다. 하지만 이건은 끝까지 연우의 손을
붙들고 늘어지며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연우와 가지 말라고 말리는 이건 사이에서
도하는 턱을 받치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 너네 뭐 하는 거야.”
준영의 시선이 도하를 지나쳐 이건에게 닿았다가 그리고 엉망진창인 몰골의 연우에게 머문다. 옷은 진흙투성이에
엉망이었고,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짝 독이 오른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고슴도치를 연상시켰다. 가까이
오기만 해봐. 누구든 찔러 버릴 거야.
“선생님. 죄송해요. 친구 데려왔는데, 금방 들어갈 거예요.”
“어딜 들어가?”
“네? 아. 저희 집에요.”
“그런 모습으로?”
“됐어요. 싫어요.”
“나도 싫어요!”
“그래도 돼요?”
준영이 더는 말하기 싫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고, 이건이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씩씩대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악다구니를 써대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제 손을 꽉 쥐고 있는 이건의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때 도하가 이건과 연우를 막아섰다. 앞서가던 준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도하가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홱 던진다. 이건이 엉겁결에 받아 들고 보니 카드 키였다. 이걸 왜.
“뭐야? 쟤네 왜 안 들어와?”
“뭐?”
준영이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듣고 보니 저보다 도하네 집이 편하긴 할 거 같았다. 어쨌든 저는 나이 차이도
꽤 나고 하니 부담스러울 수 있지 않겠는가.
“넌 왜 안 올라가?”
“난 여기서 자야죠.”
“그게 그거잖아.”
도하가 괜히 아무도 없는데도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최대한 준영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형,
말고는 아무랑도 안 자요.’라고 속삭이니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냉큼 고개를 뒤로 떼어내고 나서
질색하는 표정을 했더니 도하가 생긋 웃었다.
“올라가라, 그냥.”
“하아.”
“…….”
준영이 곧 포기하고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려 카드 키를 가져다 대는데 도하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문이 열리며 환한 불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보는 도하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바로
천국의 불빛 아니던가.
* * *
이건은 방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봤더니 집에서 가져온 건지 구급상자를 열고 약을 고르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을 굳힌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됐어. 약은 무슨.”
퉁명스럽게 대답한 연우가 머리를 털어 말렸다. 방 안을 둘러보니 이 빌라와는 어울리지 않게 호화로운 방이었다.
대충 걸려 있는 옷들도 가구들도 한쪽에 아무렇게 벗어둔 손목시계도 그렇고. 그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이건이 옷자락을 툭 잡아당긴다.
“약 바르자.”
연우는 푹신한 침대에 앉아 몇 번 엉덩이를 튕기고 비싸 보이는 침구를 손으로 만지면서 무심한 얼굴로 이건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침대는 이게 뭐야. 어차피 부자면 침대도 큰 거 놓지. 연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이건의 까만 머리통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건은 집에 뭐가 있는지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약을 찾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이거 바르면 되는
건가. 갑자기 이건이 앉은 채로 몸을 돌렸고 연우는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흉 지니까 바르라고.”
그 말에 이건이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학교에선 쪽팔리니까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지랄지랄한 게 누군데. 어휴,
말을 말자. 대충 밴드를 꺼내 손에 붙여 주고 나서 이번엔 연고를 손끝에 찍어 발랐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니 연우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뺀다.
“뭐 하냐, 자꾸.”
“안 바른다고 했잖아.”
“그 얼굴로 학교 갈래?”
“냅둬, 씨발.”
아오. 진짜. 이건이 몸을 일으키며 연우의 턱을 한 손으로 붙들었다. 하지 말라며 얼굴을 흔드는데도 손힘이
얼마나 센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건이 그런 연우를 빤히 쳐다보며 손끝에 묻어 있던 멍 빠지는 연고를 살살
문질렀다.
“아파?”
“…아니.”
“왜 귀가 빨게.”
이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그 커다란 손을 팍 쳐내더니 침대 위로 냉큼 올라간다. 이건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뭐야. 기껏 연고 발라주고 있는데. 하여튼 성질머리 하난 더럽다니까. 손에 남아 있던 연고를 휴지에
닦고 나서 구급함에 남은 것들을 집어넣었다.
“…됐어. 꺼져.”
전보다 많이 말랐네. 아주 어릴 땐 조금 통통하고 귀여웠던 거 같은데. 얼굴도 뽀얘서 찹쌀떡 같고. 속상한
마음에 발밑에 있던 이불을 끌고 와서 허리춤까지 덮어줬다.
“간다. 잘 자.”
문을 열고 한 발 밖으로 나가는데 연우가 강이건, 하고 부른다. 이건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여전히 벽을
보고 누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는데 잠시 후 연우의 눅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건이 눈을 깜박이며 대꾸하지 않았다. 바지를 추켜올리던 3 학년 선배와 입술을 문지르던 연우. 그리고
친구들이 떠들던 소리들. 그 모든 게 뒤엉키며 머릿속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묻지 마.
“너도 자지 빨아줄까?”
“…….”
이건이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송연우가 저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욕을 하며 정신 차리라고 한 대 때려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잘
알아듣도록 말로 타일러야 하는 건지.
* * *
선명하게 자리 잡은 탄탄한 복근들을 보며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생겨났다. 아, 얼굴만 괜찮았으면 딱인데. 하필
중요한 시기에 입이 돌아가서. 그러고선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나무님. 나무님 이렇게 소원을 빨리
들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뭐 해요?”
“나 침대에서 잘 건데.”
그 말에 준영이 대놓고 인상을 쓴다. 어쩐지 이건의 친구에게 제집을 선뜻 내준 것부터가 수상했다.
도하는 어릴 적부터 가족이든 누구든 제 물건에 손대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학교에 입학해선 그것 때문에 종종
친구들과 트러블이 발생했다. 한 번은 제 필통을 자주 만진다는 친구의 손을 연필로 찔러서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이러지 마.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그게 오늘이라고 하진 않았어.”
“조만간?”
아, 진짜. 이건이 짜증을 내자 준영이 어깨를 으쓱하곤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하가 수건으로 아래만
가린 채로 베개를 챙겨 이불을 끌고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막 침대에 누우려던 준영이 보고선 인상을 구겼다.
“왜 들어와.”
“안 돼. 나가.”
침대 밑에 이불을 까니 준영이 한마디 더 하려다 관두었다. 대신 옷이나 입으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순간, 도하가
두르고 있던 수건을 확 걷어낸다. 발기할 대로 발기한 녀석이 위로 휘청 튀어 올랐다. 준영이 놀라 입을 벌리고
붕어처럼 빠끔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야, 이 미친.”
그러더니 바로 눕고 나서 이불을 배에만 덮는다. 혼자서 꺼덕이는 성기를 보며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노려봤다.
뭐 벗고 자건 입고 자건 자기네 집이면 상관없지만 여긴 제집이지 않은가. 어서 입으라고 한마디 더 하는데도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게 불이나 끄라며 투덜거린다. 확 쫓아내 버릴까 했지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더
우스울 것 같았다. 이도하가 노리는 게 그걸지도 모르고.
“안 돼.”
“다리도?”
“안 돼.”
“좆도?”
“닥치고 자라.”
“알았어요. 걱정 말고 자요.”
서준영 오래 굶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정신 차려. 한숨을 쉬고 나서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조용한 가운데
새근새근 도하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애처럼 조르고 징징거리더니 정말 자나 보네. 궁금한 마음에 침대 끝으로
몸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너 안 잤어?”
“자.”
“나가서 잘래?”
“미안해요. 잘 자요.”
저를 보고 씩 웃는데 목 가운데 울대가 움직인다. 그 옆으로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를 보고 준영이 얼굴을
문질렀다. 미쳤나. 왜 거길 의식해. 괜히 짜증이 솟아올라 그럼 자라고 해놓고 다시 몸을 돌리는데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형.”
“…왜.”
“다음엔 우리 진짜 안고 자요.”
* * *
몸을 뒤척이던 준영이 눈꺼풀을 스르르 올려 떴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 시였다. 새벽까지 잠을
설쳤더니 알람 맞춘 것도 못 들었군. 부스스 일어나 바닥을 보니 어젯밤 도하가 깔아두었던 이불이 보이지 않았다.
“안녕. 일어났어요?”
“뭐 해?”
“이게 다 뭐야?”
준영은 워낙 요리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도하가 그런 것들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이
기특하면서도 신기했었다.
“불 앞에 있으니까 더워서요.”
“그러다 기름 튀면 따갑다.”
도하가 볶음용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나서 채소를 집어넣고 볶기 시작했고, 준영이 다시 안방 쪽으로 가다
위층을 쳐다봤다. 조용하네. 강이건은 일어나서 학교에 잘 갔으려나. 연우라고 했던가. 얻어맞아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은 어릴 적 모친에게서 방치되다시피 자라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침대 위쪽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준영이 그쪽으로 가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김민석이라고 찍힌
세 글자에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행히 그는 인물도 언변도 괜찮았고 방송이 나간 직후 꽤 화제가 됐다고 했다. 선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따로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카페?”
아아,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라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민석과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영화를 한 번씩 볼
때마다 밥을 먹고 들르던 곳이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였는데 커피가 다른 곳보다 맛있어서 자주 찾아갔었다.
가끔 진한 커피가 당기는 날이면 한 번씩 생각나곤 했는데.
추억. 준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석은 요즘 들어 연락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니, 도하가 그를 찾아간
다음부터 더 많아진 것 같다. 준영이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가 이렇게 옛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준영은
어색해졌다.
[어디?]
민석에게 도하가 이곳에 왔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냐며 나중에 또 통화하자고, 아쉬운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준영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씻으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왔는지 도하가 한 손에 부엌칼을, 한 손에 파를 들고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인마!”
2 인용 식탁으로 가서 의자를 끌어내던 준영이 멈칫했다. 접시에 볶음밥이 담겨 있는데 모양이 하트다. 것도
모자라 케첩으로 작은 하트까지 위에 만들었다.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내 앉던 도하가 준영의 표정을 살폈다.
“감동했어요?”
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저를 들고서 하트의 정 가운데를 반으로 쫙 갈라 버렸더니 도하의 표정이 대번
일그러진다.
“그걸 왜 갈라요!”
“갈라야 밥을 먹지….”
이번엔 모시조개 국물을 떠서 먹었다. 도하의 말대로 시원했다. 누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는 게 꽤 오랜만이었다.
“맛이 어때요?”
“…괜찮아.”
“너는? 밥 안 먹어?”
“아냐. 같이 먹어.”
“거기 새우 들어갔잖아요.”
아. 준영이 접시에 담긴 밥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칵테일 새우도 들어가 있네. 이건 또 어디서 난거지.
냉동실에 자신이 모르는 게 대체 얼마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잠시 도하가 어릴 적부터 새우를 못
먹는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괜히 미안해져서는 접시를 제 쪽으로 쓱 끌고 왔다.
“그럼 새우 빼고 하지.”
“서준영 씨는 새우 좋아하잖아요.”
민망해서 한 소린데 도하가 웃기지 말라며 준영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손까지 꼽아가며 읊기 시작한다.
“서준영이 좋아하는 것들은 복숭아, 포도, 수박, 멜론, 새우, 장어, 불고기, 카레, 그리고 또….”
“그만해.”
“보라색, 가을, 숫자 3, 커피랑 허브티, 꽃차, 독립영화, 뮤지컬, 클래식, 박정원 작가, 아, 진짜 많네.
나만 빼고 다 좋아하는 것 같아.”
“너는 왜 빼.”
“넣어도 돼요?”
“…….”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응.”
“몇 번째로?”
“앞쪽에.”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손으론 우유가 든 머그잔을 쉴 새 없이 만지작댔다. 준영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컵을 챙긴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준영 앞에 놓아주었다.
“물도 마셔요.”
“그럼?”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도하가 얼른
밥이나 먹으라며 접시를 더 민다. 준영이 수저를 들어 하트의 가운데를 다시 가르려고 하니 도하가 형! 하고
소리를 높인다. 어휴, 할 수 없이 끝에서 한 입 떠 제 입으로 가져가니 맞은편에서 만족한 듯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준영이 프라이팬에 채소와 고기를 넣고 볶다가 뒤를 돌아봤다. 도하가 식탁에 앉아 발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자고 있는데 도하가 놀러 온 것이다. 엄마도 없이 혼자 왔길래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평창동 할머니 댁에 갔고, 저는 수영을 끝내고 기사 아저씨를 졸라서 여기로 놀러
왔다고 했다.
집안의 막내인 도하는 커갈수록 공부보단 운동을 좋아했다. 그래서 도하의 부모님은 아들 좋다는 것을 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골프를 그다음엔 테니스를 이젠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침 일하는 아주머니도 외출을 나갔고 준영은 오랜만에 본 도하를 위해 직접 볶음밥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 대충 재료들을 조합해서 썰어 넣고 이제 막 밥만 넣으면 될 차례였다.
“도하 수영 재미있어?”
“형 모기 물렸어?”
“어?”
“목에 모기 물렸어?”
아. 준영이 잠시 당황하는 얼굴을 하더니 목 부분을 손으로 감싸고 어,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보며 도하는 겨울에도 모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준영의 얼굴이 어딘지 빨갛다고 느꼈지만 불 앞에서
요리해 그런 거라고 여겼다.
준영이 다 만들어진 볶음밥을 접시에 덜고 있는데 2 층에서 민주가 내려오다 도하를 보고 인상을 찡그린다. 어릴
적 도하를 유독 잘 따르고 좋아하더니 언젠가부터 둘은 앙숙이 됐다.
헤헤. 민주가 준영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걸 보고서 도하의 눈에선 아까부터 레이저가 나오는 중이었다. 어릴
적엔 서민주가 부러웠다. 몸이 바뀌어서 서민주 대신 자신이 이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면
서준영과 맨날 볼 수 있으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엔 민주가 싫어졌다. 거기다 준영을 잘 따르고
애교까지 많아 애정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미움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거는 도하. 이건 민주.”
“민주는 손 닦았어?”
“바보.”
“도하, 너. 그럼 못써.”
도하가 입을 삐죽 내밀고 밥을 한 입 떴다.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며 먹는 모습을 보고 준영이 어떠냐고 물었다.
도하가 웃더니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엄청 맛있어. 형 최고. 그러더니 또 밥을 크게 한 입 떠서 먹는다.
“형 요리사 해도 될 것 같아.”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조금 뒤 도착한 민주가 자리에 와서 앉더니 수저를 든다. 준영이
민주를 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청 맛있다고 했으니 민주도 좋아하려나.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먹은 민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윽.
“오빠….”
“왜? 돌 같은 거 들었어?”
“이거 짜. 엄청 짜.”
으윽. 민주가 우는 얼굴을 하더니 입을 가리고 화장실 쪽으로 뛰어간다. 준영이 당황한 얼굴로 민주의 밥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곧바로 그는 민주와 같은 표정이 됐다. 아까 간을 볼 때 싱겁길래 소금을 많이 넣었더니….
“왜.”
“도하야, 먹지 마. 짜잖아.”
“난 괜찮은데?”
“먹지 말라니까.”
결국 접시를 빼앗아 싱크대 쪽으로 가져갔다. 어우, 이런 걸 애를 먹였으니. 자신을 탓하며 뭐 다른 걸 해줘야
하나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뒤에 앉아 있던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형.”
“왜?”
“혀 내밀어 봐.”
뜬금없는 부탁에 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혀를 내밀라니. 어릴 적 도하에게 혀를 내밀라고 하고 손으로
콕 찍던 장난을 친 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도하가 그냥 한번 내밀어
보라고 재촉한다.
“형은 키스 잘하겠다.”
준영은 잘못 들었나 싶어 ‘뭐?’ 하고 다시 물었다.
준영이 입술을 뻐금뻐금 붕어처럼 움직였다. 도하가 11 살이니까 뭐 키스를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자신도 과외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니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않는가. 하지만 마냥 아기 같던 도하한테서 키스란 말을
직접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복잡한 와중에 도하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 크면 형이랑 키스할래.”
* * *
[나 크면 형이랑 키스할래.]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하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오전에 침 맞으러 한의원 가는 길이었는데 준영이 같이
가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까지 엄청 들들 볶은 건 사실이지만.
“너 운전 제대로 해.”
그러더니 뭐가 즐거운지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른다. 준영이 그런 도하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릴 적 제게
볶음밥이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들고 아양을 떨던 그 꼬맹이의 모습이 어딘가 남아 있을까 해서.
“왜 그래요. 손 줘요.”
눈이다! 걱정하는 저와는 달리 도하는 아이처럼 좋아한다. 그걸 보니 옛 생각이 났다. 도하가 눈 오는 날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시절이. 눈사람을 만들 때 꼭 제 것과 준영의 것을 같이 만들어 붙여 놓던 일,
민주가 만든 눈사람을 발로 차서 울렸던 일, 그리고 스키 타러 가서 구르는 바람에 다리뼈에 금이 갔던 일,
한동안 다친 다리를 하고도 저를 찾아왔던 일.
“너 시계는?”
“아, 집 안에 빼뒀는데 안 보여서. 있겠지, 뭐. 그나저나 눈이 많이 오려나 본대요.”
도하의 말대로 조금씩 오던 눈은 어느새 하얗게 보일 정도로 내리는 중이었다. 와, 경치 끝내준다. 도하는
감탄했지만, 준영은 어쩐지 돌아올 일이 걱정됐다. 병원은 내일 가고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서 돌아가자고 할까
싶었지만, 도하의 들뜬 얼굴을 보니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 * *
혹시나 하고 뒷자리에 있던 아이에게 물으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몸을 홱 돌리는데 영훈과 우진이 앞에
서서 당황한 얼굴로 저를 쳐다본다. 중학교 때까지 꽤 친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선 사이가 서먹해져
있었다.
“강이건한테 할 말 있어서.”
교실로 들어가려던 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계단 쪽을 바라봤다. 미술실은 아래층 제일 구석진 곳에 있었다. 거길
강이건이 왜 갔을까. 주머니에서 손을 꼼지락대다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데 박태경 무리가 올라오는 게
보인다. 연우를 보더니 태경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닥쳐, 씨발 새끼야.”
“개새끼, 상윤 형 믿고 요즘 존나 기어오른다?”
연우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나서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위쪽에서 태경이 많이 컸다고 비죽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이러고 나서도 학교 끝나면 당구장이든 노래방이든 몰려다니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CH 8.
“안녕히 계세요.”
“통화 다 끝났어요?”
“응.”
“누구?”
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진료를 마치고 치료실로 가기 직전 제 모친에게도 연락이 왔었다.
눈이 많이 오는데 거긴 괜찮으냐고. 전국적으로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설마 두 분이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엄청나다, 진짜.”
도하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차 뒤 트렁크에서 커다란 우산을 꺼내왔다. 그것을 펼치고 나서 준영에게로
다가갔다.
“걸어서?”
“눈이 많이 와서 좋다고?”
“당연하죠. 그럼 뭐겠어요.”
“그냥 가.”
“왜요, 밥 먹고 가지.”
진짜요? 이러다 이박삼일 집에도 못 가고 둘이서 지내는 거 아냐. 도하가 입가에 스며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면서 저런, 하는 얼굴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무조건 외박인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 좀
하고 올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잘 만한 곳이 있나 두리번거리는데 저쪽에 일식집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가서
싱싱한 회에 따끈한 사케를 한잔 걸친 후에.
“흐흐.”
“뭐야, 왜 웃어?”
도하가 기어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준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괜히 켕기는
마음에 얼른 일식집 쪽을 가리켰다.
“너 수상해.”
“뭐가요.”
“왜 자꾸 나 술 먹으라고 해?”
“형이 술 좋아하니까.”
“그게 다야?”
“다겠어요?”
“뭐?”
“괜찮아. 비도 아니고.”
아. 도하가 감동 받은 얼굴로 준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자상할 수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오늘은
무조건 호텔 가겠구나. 여기다 술까지 한잔 걸치면 끝나는 거다.
“형.”
“응?”
“사케 많이 마셔요.”
“뭐? 왜?”
“추울 땐 사케니까.”
도하가 그것을 펼쳐 준영에게 건네주고 나서 외투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냈다. 준영이 메뉴를 고르는 동안
호텔을 검색하는데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근처에 호텔이 있긴 했다. 앗싸, 여기 가야지. 콘돔이랑 젤도 사야
하나. 차에 미리 사둘걸. 근데 괜히 혼자서 헛물켜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어젯밤 곱게 재워준 것도 그렇고,
올 때 차에서 분위기도 그렇고, 확실히 많이 풀어지긴 했단 말이야.
갖은 상상을 하며 호텔 위치를 재확인하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받지 않으니 끊어졌다가 다시 울린다. 앞에 앉은 준영까지 신경 쓰는 눈치였기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예 맞는데요. 누구세요.”
* * *
“선생님.”
이건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탁, 그때 운전석에서 도하가 내렸다. 이건이 쳐다보다 흠칫 몸을 떨었다.
도하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 닥치고, 비켜.”
도하가 이건을 옆으로 밀치고 나서 성큼성큼 파출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이 하얗게 질려 준영을
쳐다봤다. 딱 봐도 열 받은 거 같은데. 준영이 괜찮다며 이건의 어깨를 다독였다.
일식집에서 메뉴를 시키기도 전에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도하는 제 시계가 없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처음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다음엔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오는 길에 길바닥에 있는 눈을 다 녹여 버릴
기세였다.
“우리도 들어가자.”
“…네.”
이건을 데리고 파출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연우가 앉아 있었고, 지금 막 들어선 도하는 경찰과
대화 중이었다. 경찰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길 연우가 그 시계를 금은방에서 팔려고 했다고 했다.
금은방 주인은 처음에 보고 그 시계가 짝퉁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 진품인 걸 확인하고 슬쩍 떠봤단다. 200
만 원이면 되겠느냐고. 예상보다 비싼 금액에 놀랐는지 연우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고했단다. 그 열 배는 족히 더 나가는 시계를 200 만 원에 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경찰이 도하의 시계를 넘겨줬다. 도하가 그 시계를 내려다보고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풀어놓고 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생쥐 같은 놈이 물고 달아났네. 아니, 달아난 거까진 좋다 이 말이야, 뭐 그럴 수 있어. 근데 하필 그게
왜 오늘이야. 호텔까지 다 알아보고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왜 하필… 이를 까드득 갈면서 눈을 부라리며
연우를 노려보니 연우가 흠칫하고서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다.
“초범이긴 하지만 도난품 가격이 워낙 세서 경찰서로 인계될 거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입장에선 아직
학생이고 하니까, 가능하시면 선처를 좀 해주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뇨.”
“네?”
“아… 네.”
“사형 같은 건 못 시키죠?”
“네. 일단 그러세요.”
“무슨 얘기를요?”
“그냥 선처해줘.”
그 말에 도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싫어요.”
“애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에요.”
“도하야.”
“싫다고 몇 번을 얘기해요. 어린놈이 벌써 싹수가 노래가지고 남 물건이나 훔치고, 경찰서나 들락거리고 말이야.
저런 건 미래가 안 봐도 뻔하다니까.”
“왜 그러고 쳐다봐요?”
“저번에 우리 집 왔을 때 내 팬티 훔쳐 갔잖아.”
하… 하하. 도하가 입만 벌리고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끝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실은 입 돌아간
날 준영의 집에서 팬티 한 장을 훔쳐 나오긴 했다.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너무 귀엽게 생겨서. 그냥 저도
모르게 손이….
“무스으은.”
“했구나.”
“아직 안 했어요!”
“한 번만 봐줘라. 아직 어리잖아.”
“어리다고 다 봐줘야 해요? 게다가 오늘 저 새끼 때문에 내 계획이 완전히 틀어, 어어… 아무튼. 싫어요, 안
봐줘.”
“무슨 계획?”
도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몰라도 돼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서
도하를 쳐다봤다. 어쩐지 눈 많이 오니까 좋아하던 것부터 시작해 술 먹으라고 자꾸 권하던 것도 그렇고. 혼자
실실 쪼개던 것도….
“가긴 어딜 가요….”
“호텔 뭐 그런데?”
“아아뇨오.”
“그랬구나.”
“뭘 그랬구나예요. 아니라니까.”
“말을 하지.”
“했으면.”
“갔지.”
아. 도하가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준영을 쳐다봤다. 준영이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술까지 먹여가면서
데려가느냐고 말한다. 그냥 가자고 하면 갔을 거라는 말에 도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진짜?”
“어.”
“믿어도 돼요?”
“그렇다니까.”
“그럼 오늘…?”
“오늘은 안 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으니 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다. 도하가 한 대 맞은 얼굴로 아, 했다. 입으로도
하나. 뭐 해봤어야 알지. 씨이. 그래도 턱은 제대로 벌어져서 상관없을 거 같은데.
“이번 주 주말.”
“진짜예요?”
“응.”
알았어요. 약속. 도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준영이 거기에 걸어주고 도장까지 찍어준다. 일단은 달래고
구슬려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 어린 양을 빼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무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가 싶어서 일부러 오만상을 구기니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웃더니 파출소 안쪽을 향해 고갯짓한다.
경찰이 네? 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도하가 연우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꾹 눌러 잡으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진짜 주신 거 맞아요?”
“그럼 서로 오해가 있었던 거 같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송연우, 너 인마. 선물 받은 걸
그렇게 팔면 되겠어. 응?”
경찰은 다 알면서 속아주는 눈치였다.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하가 그런 연우의 뒷덜미를 낚아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일단. 넌 나가서 보자. 들리지 않게 이를 그득 갈고 나서 연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니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이건이 잽싸게 다가온다.
“도하 형. 진짜 죄송합니다.”
이건이 몇 번이나 사과하는데도 연우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틸 뿐이었다. 그러자 이건이 연우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사과드려, 얼른. 연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듯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다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도하가 웃고 있었다.
* * *
“그냥.”
“…….”
준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옛날이 아니지만 열다섯 살이란 나이가 적은 건 아니었다. 도하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도 나이에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말을 말자, 말을. 준영이 어이없게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추운 데 계속 서 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히터를 쐬니 졸음이 쏟아졌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다가 그대로 손을 뺐다. 담배 피우고 싶은데. 밖을 보니
어두컴컴해서 마땅히 세울 데도 없어 보였다.
“왜요.”
“아냐, 아무것도.”
“뭐야, 인마.”
“안 피운다니까.”
하지만 도하의 부는 제가 상상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제 모친이 고향 동생이라고 하여 도하의 모친과
친분이 없었다면 서로 만날 접점 같은 건 아예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방송국에서 있다 보면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으려나.
“너 그거 성추행이야, 인마.”
“진짜예요, 나 어릴 때 형 담배 피우는 거 보고 반해서 나도 피우기 시작했잖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준영이 인상을 찡그리고 도하를 쳐다봤다. 창가에 팔을 기대고서 몸을 완전히 이쪽으로 틀어
감상하는 모양새가 아주 볼만했다. 볼이 패도록 담배를 빨고 나서 차 안에 재떨이를 찾으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좋았어요. 그거 피울 때마다 형 생각나고. 형이랑 키스하는 기분도 들고. 다른 생각도 나고.”
“다른 생각 뭐?”
“말하면 화낼 거면서.”
“말하지 마, 그럼.”
“이 새끼가.”
“너 그 정도면 병이야.”
“그러니까. 아주 중증이지.”
준영이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도하가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준영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워낙 속도가 느려서 그런지 차가 멈추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멈춘 차 앞에는 고라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사슴이다!”
“고라니야.”
“무슨 차이지? 근데 왜 저기 앉아 있어요?”
“다쳤나?”
“나가지 마요.”
“왜.”
“공격하면 어떡해요?”
질색하는 표정을 보고 준영이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오만상을 쓰고 고라니를 무슨 외계 생물처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어릴 적 도하를 보는 거 같아 귀엽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도하는 동물을 싫어했다. 아니,
무서워했다. 저를 쫓아 동물원에 갈 때만 해도 내색하지 않아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참고 진지한 표정을 했다.
“뭐?”
기겁하더니 안 되겠는지 제 안전띠도 같이 푼다. 뒷자리에 벗어둔 외투를 집어 들더니 같이 내리려 했다.
“넌 왜 내려.”
“쟤가 형 물면 안 되잖아요.”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서준영이 고라니한테 봉변을 당하면 안 되지 않겠나. 그런데
고라니가 사람도 공격하나. 사슴은 원래 순한 동물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직접 보니
크기가 제법 큰 녀석이다.
도하가 정신을 차리고 고라니가 사라진 산 쪽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서준영을 꽉 끌어안고 매달리고
있었다. 머쓱한 마음에 팔을 놓아 버릴까 하다가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계속 끌어안고 있으니 준영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놔. 갔잖아.”
“그만해”
다시 매달리려 하기에 이마를 검지로 꾹 눌러 밀어냈다. 혼난다 진짜. 도하가 쯧, 혀를 차더니 곧 응석 부리던
표정을 싹 지웠다.
“아주 틈만 나면 수작이야.”
하하, 준영이 입만 위로 올려 이상한 웃음을 짓더니 정색을 하고 운전석으로 가 버린다. 도하가 입술을 씰룩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포기가 되질 않아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진짜 산장 비슷한 거라도 있나 해서.
“이거 먹어.”
“안 먹어?”
“추워서 손 빼기 싫어.”
그 말에 이건이 기막힌 표정을 했다. 이 웬수 같은 새끼. 붕어빵 하나를 빼내 입가에 대주니 또 가만히 쳐다본다.
먹어, 얼른. 재촉했더니 그제야 입을 벌렸다. 한숨을 내쉬며 입술 사이로 붕어빵을 물려 줬다.
막 학원을 들어가는 중이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전화가 와선 연우가 경찰한테 끌려가더라고 알려줬다. 경찰서
가서 자초지종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괜히 제가 데려가서 재우는 바람에 그런 사고가 났나 싶어
죄책감도 들었고, 준영과 도하에게 죽을 만큼 미안했으며, 이제 갈 데까지 가는구나 연우에게 조금은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뻔뻔스러운 태도에 이건이 기막힌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이 나서 붕어빵을
와구와구 뜯어 먹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대체 그걸 팔아서 뭘 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아저씨 무슨 빚 같은 거 있으셔?”
“알 거 없다고 했잖아.”
성질이 나서 두 번째 붕어빵을 와락 베어 무는데 누군가 이건의 어깨를 잡으며, 워!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건이
화들짝 놀라서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유나가 서 있었다. 빨간색 목도리를 하고 핑크색 털장갑을 끼고서.
응. 유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친구들이 빨리 안 오느냐고 성화다. 유나가 그들을 향해 코를
찡그리며 으휴, 하더니 이건을 향해 다시 밝게 웃는다.
“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난 또 이상하게 쳐다보길래.
“쟤랑 사귀어?”
“아아니.”
“사겨. 잘 어울리네.”
운동화로 바닥을 툭툭 찍으며 이야기하는데 말투가 어찌나 빈정거리는지 모른다. 사귀긴 뭘 사귀느냐고
얼버무렸더니 매섭게 노려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왜 이래, 진짜. 혹시 김유나 좋아하나. 그래서
자꾸 짜증 내는 건가. 한번 슬쩍 물어볼까 하는데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 * *
줄을 푸는데 녀석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라 한다. 푼 줄을 손에 쥐고서 몸을
일으키는데 출입구 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나온다. 운동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였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늘리면서 몸을 좌우로 비틀며 스트레칭을 하길래 그쪽으로 백설일 데리고 걸어갔다.
“형 일어나셨어요?”
도하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런 이건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니, 잘 못 잤어. 그러다 2 층을 한 번
올려다보며 눈을 흘겼다. 어제 오는 내내 차에서 분위기도 좋고 그래서 집에서 같이 와인이나 한잔 마시려고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돌변해서는 쌩하니 들어가 버린 것이다.
“뭘 자꾸 네가 죄송하대. 너 걔 따까리야?”
“…아니요.”
이건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건드리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자신이 먼저 피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대답이 없자 도하가 기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똥은 원래 지들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생각하지, 싫어서 피했다고 생각 안 해. 그러니까 한 번쯤은 얼마나 내가
너희를 싫어하고 있는지를 몸으로 격하게 보여주란 말이야.”
“근데요, 형. 저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고 상황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을
해서요.”
이건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자 쯧쯧, 도하가 혀를 차더니 걷기 시작했다. 이건도 백설이를 데리고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차가 다니는 곳은 눈이 녹았는데 논두렁은
눈이 그대로 쌓여 발이 푹푹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건이 무릎을 꿇더니 백설의 목줄을 풀었다. 그러자 백설이 눈밭을 마구 헤집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이건의 입가에도 미소가 생겨났다.
“귀여워.”
“쟤는 진돗개야?”
“그럼 어떤 거 좋아하세요?”
“서.”
“서?”
말해서 뭐해, 당연히 서준영이지.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이 곰 같은 녀석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뭐
생각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괜히 가서 준영에게 입을 잘못 놀리면 고스란히 제게 돌아올 게 아닌가.
가뜩이나 남들 눈에 예민한데.
“과외 선생님?”
역시 곰탱이다. 헤헤, 웃으며 너무 좋겠다고 말하는 이건을 보며 도하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니 망설일 것도 없이 술술 말을 꺼낸다.
“그렇게 잘해줬어?”
“네. 전에 제가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속상한 적 있었는데 그때는 샘이 엄마한테 말해서 잠도 재워주셨어요.
태블릿으로 영화도 보여주고.”
“간다.”
“벌써 가세요?”
도하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 쪽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이건이 백설이를 부르며 같이 놀아주는 소리가
들렸다. 홱 뒤돌아봤더니 눈밭에서 개랑 뛰어다니고 난리다. 다시 한번 이를 까드득 물었다. 다시 돌아가서
눈구덩이에 파묻어 버릴까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꾹 참아냈다.
* * *
준영이 몸을 뒤척였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눈이 부스스 떠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머리가
띵하고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방 밖에선 인터폰이 시끄럽게 울려 대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거운
걸음으로 나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창을 통해 확인하고 나서야 밖에 도하가 왔다는 걸 알았다.
“뭐야 아침부터.”
그걸 보는 도하의 눈이 커졌다.
“감기 걸렸어요?”
흥. 도하가 바구니를 식탁에 놓으면서 저를 안 들여보내 줘서 그런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준영의 안색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을 쒀 올 걸 그랬나. 일단 먹이고 병원을 데려가야겠다.
“사 왔어?”
“만들었죠.”
“사랑의 힘으로.”
그러면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준영에게 내민다. 하나만 먹어봐요. 준영이 그것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어디? 봐요.”
“이걸 먹었어요?”
“응. 새벽에.”
“날짜가 6 개월 전인데?”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니 준영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지르길래 가까이 다가가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동자가 위로 굴러가며 그런 도하의 손을 주시했다.
“열나?”
이마에 있던 손을 움직여 뺨으로 내려가니 얼른 고개를 뒤로 빼서 피한다. 도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손을 내리고 나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한쪽에 정리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먹는 건 힘들어 보였다.
“옷 입고 나와요. 병원 가게.”
그러지 말고 가요. 붙잡을 새도 없이 준영이 침대가 있는 안방 쪽으로 들어간다. 아이참. 뒤따라갔더니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져서는 이불을 끌어다 덮고 눕는다. 도하가 곁으로 가서 들여다보니 만사 다 귀찮은 표정이었다.
이 새끼가. 그거 가지고 또 뭔 짓 하려고. 준영이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관두었다.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머리를 툭, 베개에 파묻고선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다가 곧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진짜 졸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도하 님. 약사가 도하의 이름을 불렀다. 약국 한쪽에서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고르던 도하가 잠시만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약 봉투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콘돔과 젤이었다. 약사가 그걸 보며 물었다.
그때 꼬맹이 하나가 도하의 옆에서 알짱거린다. 네다섯 살 먹었으려나. 사탕을 쪽쪽거리면서 빤히 올려다보는데
눈이 왕방울만 한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동물은 싫어하지만, 애는 또 귀여워하는 도하라 아이를 보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여기요. 도하가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치고 나니 약사가 그걸 커다란 쇼핑백에 담아 주었다. 인사를 하고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다. 배고픈데 뭐라도 먹고 갈까 싶어 밥집을 찾는데 대신 꽃집이 눈에
들어온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는데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꽤 많았다. 썰렁하던 준영의
집이 생각나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가까이 다가가서 맡으니 향이 더 진해진다. 제 기억으로 서준영이 화분이나 꽃을 싫어하진 않았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으로 데이트하러 가는 것도 꽤 봤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데이트가 저랑 한 건 아니지만.
“한 다발 주세요.”
이 정도 드리면 될까요? 사장이 손으로 한 묶음을 만들어 보인다.
“네.”
“꽃병은 있으세요?”
“같이 드릴까요?”
“형, 오랜만.”
[나 또 혼자 떠드는 거니?]
선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리던 무리가 도하를
쳐다본다. 그중 한 명은 교복을 입었는데, 자세히 보니 강이건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지금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닌가. 교복을 입고 대낮에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정체가 뭔지 대충 알겠다.
삑, 하고 차에서 소리가 나자 무리가 우어어 하면서 저들끼리 수선을 떤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약과 꽃, 화병을
넣고 나서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는데 툭, 앞에 무언가 떨어진다. 보니 담배꽁초였다. 고개를 들고 봤더니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한 녀석이 낄낄대고 웃었다.
후우, 심호흡하고 나서 보조석에 놓인 콘돔과 젤을 바라봤다.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CH 9.
몸을 뒤척이던 준영이 머리끝까지 올렸던 이불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등이며 머리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후였다. 약을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푹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뭐 해?”
“일어났어요?”
분명 아침에 왔다가 나간 거 같은데 집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준영이 의구심을 품고 쳐다보는데 도하가 가스
불을 줄이고 앞치마에 대충 손을 닦으며 준영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같았다.
“문 열고.”
“내놔.”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봤더니 도하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젓느라 정신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프리지어 냄새가
풍겨온다. 그 은은한 향을 맡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나서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 * *
“아직도 멀었어요?”
도하의 물음에 앞자리에 앉은 미정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정의 큰아들인 준영의 면회를 가는
날이었는데, 도하가 어떻게 알았는지 일주일 전부터 저와 엄마인 경혜를 조르는 바람에 결국은 같이 가게 된
것이다.
“아직 멀었어요?”
창가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제 옆에 있는 꽃다발을 쳐다봤다. 준영을 만나는 기념으로 산 것이었다. 먹을 거야
어차피 미정이 준비했으니 저는 저 나름대로 선물을 하고 싶었다.
“다 왔다.”
미정의 경쾌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차가 군부대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차를 세우자마자 도하가
꽃을 챙겨 탁구공처럼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다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입구에 군복을 입은 무표정한 사내
두 명이 지키고 서 있다가 저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꽃을 살펴보던 도하는 빨간 장미보단 노란색 프리지어가 준영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밝은 노란색. 따뜻한 색. 다정한 색. 서준영 그 자체이지 않은가.
“혀엉!”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몸을 숙여 도하와 눈높이를 맞추고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에요. 힘들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아들을 데리고 테이블에 앉혔다. 주변에는 면회 온 가족들이 꽤 있었다. 도하가 팔을 뒤로 감추고서는
준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걸 본 경혜가 준영을 불렀다.
선물이요? 준영이 도하를 쳐다보니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군대 오는 날 얼마나 우는지 자신이 오히려
달래주느라 혼이 났는데, 그래도 오늘은 울지 않고 웃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꽃… 꽃이네?”
하하. 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형 닮아서 예쁘다니. 머쓱한 기분에
제 모친과 경혜를 쳐다봤더니 그녀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 준영아. 받아줘. 그거 산다고 아침부터 꽃집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늘따라 일찍 문 여는 꽃집도
없더라.”
고마워, 도하야. 준영이 눈을 맞추며 도하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노란색 꽃 사이로 보이는 도하의
얼굴이 꽃보다 더 활짝 폈다. 꽃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니 향긋한 내음에 마음 까지 들뜨는 것 같았다.
* * *
띵동, 이건이 준영의 집 인터폰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한 손엔 엄마가 챙겨준 오렌지와 함께 노트와
문제집이 든 가방이 들려 있었다. 도하가 오고 나서 정신이 없었고, 며칠 공부를 빼먹었더니 준영에게 어젯밤
문자가 왔다. 저번에 내준 숙제와 함께 몇 시까지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서 나온 건 준영이 아닌
도하였다.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서 있으니 도하가 저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훑는다.
“뭐야, 왜.”
“…네.”
“다음에 와.”
말은 다음에 오라고 했지만 얼굴은 완전 꺼지라는 표정이다. 연우 일로 아직도 화가 많이 났나. 이건이 머쓱한
얼굴로 코끝을 한 번 문지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는데 도하가 다시
이건을 부른다.
“야 강이건.”
이건이 돌아봤다.
“그냥 들어와.”
“아….”
이건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수학 잘하세요? 이렇게 물어봤다간 한 대 처맞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냐고 하길래 하는 수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정면에
놓인 책상에 못 보던 노란색 꽃이 보인다. 언제 사다 놓으셨지, 하고 집을 둘러보다가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너 뭐 마실래? 맥주?”
공부하러 온 놈한테 맥주를 권하는 모습에 이건이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마시겠다고
하니 도하가 맞은편 자리로 와서 의자를 끌어내 앉는다. 공부할 거 꺼내 봐.
“선생님은 어디 편찮으세요?”
“…네.”
도하가 이건의 문제집을 펼쳤다. 이건이 손으로 제가 숙제한 부분을 짚어줬다. 45 페이지부터라고 말해주니
도하가 그곳을 펼친다. 이건이 푼 문제를 빤히 들여다보던 도하가 제 눈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다음 장을
넘겨보고, 또 다음 장을 넘겨보더니 혀로 볼 안쪽을 슬슬 문지른다.
이건이 그 모습을 유심히 봤다. 혹시 보기완 다르게 엄청난 천재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문제집을
탁 덮는다.
“왜, 왜 그러세요?”
“네?”
도하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다시 문제집을 펼치더니 살펴본다. 인상을 쓰다가 또다시 책을 덮고서 고개를 젓는다.
안 되겠다. 진짜 모르겠어.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별로 놀랍진 않아서 괜찮다고 했더니 도하가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했다.
“네?”
“나 있을 때 오라고. 없을 때 오지 말고.”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그게 지금.”
“저도요?”
씩 웃더니 이건을 끌고서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준영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뭐야.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잠옷 단추가 두 개나 풀어진 게 보였다.
* * *
“됐어.”
“형도 그런 걱정 하세요?”
“당연하지.”
“인마.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남들보다 내가 근육이 워낙 많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도 많이 해.”
그렇구나. 이건이 신기하단 얼굴로 쳐다봤다. 그때 저 멀리서 낯익은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1 층에 사는
박동현이었다. 저 형은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면서 편의점에 올 때마다 보네.
“아 형 모르셨구나. 둘이 사귀잖아요.”
“둘이?”
“인마. 모르는 소리야. 우리 인생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데. 시험이야 언제든 또 보면 그만인 거고.”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동현이 의자 하나를 끌어내 앉았다. 볼 때마다 저한테 퉁명스럽게 굴던 도하가 어쩐지 커피를 들고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별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그건 어려운데.”
도하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뿐인가. 거기다 둘 다 남자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데 동현이 그 연상도
연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니까요.”
“개쓰레기 같은 새끼지.”
도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준영 씨라고 부른다니까. 서준영이라고 부르면
얻어터질까 봐 아직은 못 하겠고.
“귀엽다?”
“그렇지. 귀엽고 보살펴 주고 싶은 느낌이 들지. 그 느낌을 최대한 활용해서 끌어내는 거야. 그러다 갑자기 확
변해서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하잖아. 어 얘 의왼데? 이런 면도 있었네? 하면서 넘어간다니까.”
“이야.”
“튼 거지. 쉬운 말로 나가리.”
“그죠. 그건 나가리.”
“어릴 때?”
“…그렇죠.”
“왜요.”
“형, 가, 가시게요?”
“어. 갈래.”
“저랑 같이 가요.”
“갑자기 왜 저러지?”
“글쎄. 혹시 자기 얘긴가?”
“에? 설마요.”
“진짜 친구 얘기 같은데….”
“차라리 그게 낫겠다.”
“왜요?”
“…아.”
에이, 설마. 이건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하는 이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도하 본인 이야긴가.
그렇다면 말을 좀 조심할걸. 괜히 뒤늦은 후회가 됐다. 누군지 모르지만, 도하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난 미인이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 * *
[주말 약속 안 잊었죠?]
도하가 방바닥에 누워 입력창에 글자를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대로 지우고 나서 다시 글자를 입력했다.
휴대폰을 옆에다 놓고 모로 누워서 바닥에 귀를 가만히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들었나. 아픈 건 좀
나아졌나. 걱정도 되고, 아까 이건과 아래층 공무원 고시생이 한 말이 계속 생각나서 짜증도 좀 나고. 완전히
엎드려 손을 모으고 아래층을 향해 물었다.
“나 나가리 아니죠?”
이게 들리겠냐.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몸을 뒤집고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하고 있는데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손으로 가져와 확인하니 준영이었다.
* * *
밖으로 나와 집 안을 둘러보다가 주방에 시선이 머물렀다. 깔끔하게 정돈된 주방엔 도하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검은색 앞치마가 한쪽에 걸려 있었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실 욕실에서 도하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너!”
“어떻게 들어왔어?”
“몸은? 괜찮아요?”
“재주껏.”
“이 새끼.”
“이건이가?”
“뭐라고 하지 말아요. 내가 형 아픈데 연락이 안 된다고 혹시 쓰러졌을까 봐 걱정된다고 가르쳐달라고 했으니까.
근데 그 새끼 끝까지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뒤에서 내가 볼까 봐 손으로 가리고 비번 눌러서 들어왔다니까.
지독한 새끼.”
“…하아.”
준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도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이 신경 쓰여 이, 하고 웃어보라고 했더니 도하가
이, 입꼬리를 양쪽으로 활짝 올린다. 좀 괜찮아진 거 같았는데 그래도 아직 왼쪽이 덜 올라가는구나.
“떡이 있어?”
준영이 입을 달싹였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나. 말했다간 저 성질머리에 팔팔 뛸 것 같은데. 그래도 말하는 게
낫겠지.
“도하야.”
“참, 그때 말한 거 뭐였어요?”
“뭐가?”
뭐? 준영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 보니까 하긴
했다. 도하를 떼어낼 생각으로 일단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일단 내일
서울로 올라간다는 사실부터 알려야 하지 않을까.
“…….”
생각해보면 예전에 섹스 직전까지 갔었고, 며칠 전에도 키스도 했으니 이번에 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다음에 해준다고 하자 마음먹는데 때마침 인터폰이 울린다.
“누가 왔나 보네.”
“이건아. 어쩐 일이야?”
“…어. 괜찮아.”
실은 안 괜찮아. 들어와서 좀 놀다 가라고 붙들고 싶었지만, 이건은 학교에 가야 하므로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준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내가 학교까지 태워다줄까?”
그 말에 이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요?”
“얼른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건이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오던 이건이 흠칫 놀랐다. 도하가
앞치마를 한 채 국자를 들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다짜고짜
아래층 비밀번호 좀 가르쳐 달라길래 직접 눌러주고 간 건데.
설마 밥하려고 그랬던 건가. 신기하고 놀라서 쳐다보는데 도하가 눈을 더 뾰족하게 뜬다. 가뜩이나 인상이
차가운데 더 얼음장처럼 느껴졌다.
“대충?”
국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대답하면서도 이건을 죽일 듯 노려봤다. 국자로 팰까.
그랬다간 서준영이 쫓아내겠지.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망할 자식.
하지만 이건의 눈엔 그저 그 장면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하가 요리하는 것도 그렇지만, 준영의 말은 어쩜 저렇게
잘 들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저를 쳐다보는 눈이 점점 무섭게 변해간다. 뒤늦게
눈치채곤 쭈뼛쭈뼛 준영의 뒤쪽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 * *
점심시간이라 급식실로 들어가는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을 서 있던 이건의 눈에 안쪽에서 밥을 먹고
있는 유나와 친구들이 보였다. 유나가 먼저 손을 들어 알은척을 했고 뒤에 서 있던 영훈과 우진이 등을 찌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사귀긴 뭘 사귀어.”
차례가 된 이건이 식판을 집어 들었다. 밥을 푸는데 뒤에선 왜 안 사귀느냐고 난리다. 이건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얼마 전 유나가 사귀자고 먼저 말을 꺼내왔는데 자신이 거절했다는 걸. 그 말을 했다간 유나가 차인 게
되는데 사실대로 말하기도 난감했다.
“강이건, 밥 많이 먹어.”
유나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고 이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판을 내려놓고 밥을 뜨려는데
맞은편에 박태경 패거리들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박태경이 조금 전 유나가 저에게 살갑게 인사하는 걸 봤는지
눈에선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다.
“이거. 밥 먹고 먹으라고.”
오오, 영훈과 우진이 옆에서 소리를 냈고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유나가 사라지고 난 뒤에 이건이 밥을
한 수저 뜨는데 갑자기 제 앞으로 햄 하나가 툭 떨어진다. 이게 뭐야, 싶어 쳐다보는데 맞은편에 앉은 태경이
수저를 들고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영훈이 옆에서 보이지 않게 툭, 건드렸다.
“저 새끼 자꾸 왜 저러냐.”
“그러게. 학교 안 나왔나.”
“생각해보니 그러네.”
“걔 보건실 갔어.”
“왜?”
“나야 모르지.”
“나 잠깐 아래층 다녀올게.”
“왜. 어디 가.”
“같이 가, 인마.”
영훈이 어디 아프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대답한 후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어제 아저씨한테 심하게
맞았나. 그래서 몸살이라도 난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1 층으로 내려와 보건실 쪽으로 향했다.
문이 닫혔길래 밀고 들어갔더니 보건교사는 보이질 않았다. 여기 있다고 했는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커튼을 치고
누군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쪽으로 가서 커튼을 살짝 들추니 아니나 다를까 송연우였다.
“…뭐야.”
“약은? 보건 샘 어디 가셨어?”
“먹었어.”
“차라리 조퇴하지.”
연우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가 하니 긴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땀인지 뭔지에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얼굴이 더 처연해 보였다. 좀 닦아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난리 칠 거 같아 그냥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했다.
“…안 가.”
연우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안 간다고 쏘아붙이다 이건의 점퍼 주머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무언갈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이건이 제 주머니에 들어있는 우유를 확인하곤 그것을 꺼냈다.
“우유 줄까?”
“됐어.”
“아님 다른 거 사다 줄게. 빈속에 약 먹었지? 속 괜찮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말을 해도 꼭.”
이건이 입술을 샐쭉거리는데 연우의 눈은 여전히 우유에 꽂혀 있었다. 검은색 네임펜으로 강이건,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하트가 그려진 걸 보아 누군가에게 받은 모양이었다. 곰 같은 녀석은 글자가 적힌 것도 모르는
눈치다.
김유나일까. 남한테 받은 걸 잘도 주는구나. 그러다 제 처지가 눈앞에 우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먹어도
그만이고 남한테 줘 버려도 그만인.
* * *
아, 해요. 도하가 준영의 입가로 팝콘을 가져갔다. 준영이 그것을 보며 고개를 뒤로 움직였다.
“안 먹어.”
마지못해 입을 벌리니 그대로 쏙 집어넣는다. 아삭, 달콤한 캐러멜 향과 함께 팝콘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원래
영화 볼 때 뭘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오랜만에 먹은 팝콘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도하가 이번엔 몸을 바싹 제 쪽으로 붙이며 팝콘을 먹으라고 넣어준다. 귀에 대고 말하는 바람에 준영의 눈 밑이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다 들리니까 좀 떨어져서 말하라고 했더니 씩 웃고 나서 바로 떨어진다.
“형 혹시 나 나오는 영화 본 적 있어요?”
“…아니.”
“안 돼.”
그러다 입에 물고 있던 팝콘을 툭 떨어트렸다. 시작되는 분위기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거 제목이 뭐였더라. 둘이 영화 본다는 사실에 기뻐서 무슨 영화인지 살피지도 않은 게 문제였다.
“…형 이거 공포였어요?”
“몰랐어?”
아.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시작부터 비가 쏟아지고 흉가가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대놓고 무서운 걸 보여주겠다고 만든 영화였는지 스토리는 둘째 치고 시작부터 귀신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팝콘이고 뭐고 입맛이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때 갑자기 장롱문이 열리고 얼굴이 기괴하게 생긴 귀신이
튀어나오자 도하가 팝콘 통을 끌어안으며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턱을 받치고 지루한 얼굴로 영화를 보던
준영은 그 바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놓고 웃긴 뭐해 손등으로 슬쩍 입가를 가리는데 도하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준영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네가 골랐잖아.”
“손 줘.”
“이러면 됐지?”
도하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엔 잡는 걸로도 모자라 슬며시 깍지를 끼는데도 준영은 피하지 않고
받아줬다. 오호라. 들뜬 마음에 그 손을 꽉 마주 잡고선 영화를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실제로 귀신이 튀어나와
눈앞에 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 * *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기다리는데 자신들의 차례가 됐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요리를 주문했다. 도하는 준영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메뉴판을 보고 꽤 오랫동안 고민하자 도하는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라줬다. 대부분 나쁘지 않아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나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준영이 물티슈로 손을 닦는데 도하가 오른손만 닦고
왼손은 닦지 않는다. 그걸 보고 의아한 마음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형이랑 아까 손잡았잖아요. 안 닦고 집에 고대로 가져갈 거예요.”
“그러지 말고 닦지.”
“싫어요.”
그 말에 도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샐러드 중 준영이 좋아하는 것만 귀신같이 골라내서 접시에
덜어준다. 그걸 준영이 가만히 쳐다봤다. 여태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 이 정도까지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나마 근사치에 다다른 게 김민석이었다. 하지만 그도 도하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봤어.”
“난 또 내가 예뻐서 본 줄 알았지.”
“설마.”
“아이 좋아라.”
아마, 나이 차이가 덜 나고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면 그를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고민을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전에도 몇 번이나 생각한 거였다.
“부끄럽구나?”
“아니.”
도하가 작게 웃더니 샐러드를 더 덜어 준영의 접시에 놓아준다. 그러는 사이 카레와 난이 나왔다. 치킨이 들어간
매콤한 맛과 마늘과 양파가 들어간 달콤한 맛 두 가지를 주문했는데 둘 다 역시 준영의 취향이었다. 난을 찢어
카레에 찍어 먹던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골동품?”
“응. 형 좋아하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오래된 물품 등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왜 모으느냐고 했지만, 이상하게 도하는 그 취미가 멋지다고 해줬었다.
어릴 땐 그 말에 뿌듯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알았다. 이도하는 자신이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나 산에서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와도 멋있다고 해줄 사람이라는걸. 그런 생각을 하니 내일 약속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 준영이 슬쩍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뜨끔한 마음에 얼른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나서 물컵을 집어 들었다. 이쯤 돼서 말해야겠지. 왜 이렇게 입이 안 떨어질까.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하야, 있잖아, 내가 내일.”
준영이 물컵은 든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지 더 입이 붙어
버린다. 벌컥벌컥 물을 다 들이켜고 났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따 문자로 말해야겠다. 그게 낫겠어.
저 기대에 찬 얼굴을 보자니 도저히 안 되겠다.
CH 10.
연우가 점퍼를 턱 아래까지 올리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이 그 뒤를 가만히 따랐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보건실에 누워있던 연우는 점심에 봤을 때보다 조금 나아진 거 같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색이 좋질
않았다.
좀 챙겨주려고 말을 시켰더니 얼마나 난리를 치고 가라고 하는지 결국은 이렇게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또 한참을 있었다. 집에 가기 싫은 걸까. 하긴 나라도 그런 아버지라면 들어가기
싫겠다.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갈까, 고민하다가 모친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선뜻 그래도 된다는 답장이 왔다. 기쁜 마음에
얼른 정류장 쪽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연우가 돌아보고 이건인 걸 확인하더니 무심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알은척하지 말고 가.”
“내가 왜 너랑 친구야.”
이건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 옆에 앉았다. 친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
말싸움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살살 달래서 집에 데려가는 수밖에.
“…….”
“너는?”
뜬금없는 질문에 이건이 멍한 얼굴을 했다. ‘너는’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쳐다보니 연우가 슬쩍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너도 좋으냐고,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온 그 말이 끝내 나오지 못했다.
“됐어.”
툭하면 학교에 안 나오는 사람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소문엔 깡패들이랑도 어울린다고 하던데. 그랬기에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그를 만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이 그를 알아보고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송연우. 타.”
“타라고, 새끼야.”
연우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체념한 듯 일어서 상윤의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우야. 집에 가자.”
연우가 돌아봤고, 이건이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상윤이 데리고 가려는 데가 어딘지 모르지만 어쩐지 집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제집으로 데려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강이건? 너 그 손 놔라.”
“씨발. 못 알아들어?”
상윤이 반쯤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튕겨 버리더니 오토바이에서 막 내리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버스가 도착했고
이건이 연우를 끌고 그쪽으로 뛰었다.
“죄송해요. 오늘 병원 가야 해서요.”
“놔!”
이건도 당황해선 연우를 쳐다봤다. 버스 기사가 앞문을 열고 안 탈 거냐고 물었다. 이건이 그쪽을 향해 탈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선 다시 손을 잡으려고 하자 연우가 뒷걸음질한다. 이건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연우는 몸을 돌려 상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려 했다.
“학생 둘이요.”
삑.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닫힌다. 연우가 창밖을 바라봤다.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 상윤이 기막힌 얼굴로 둘을
노려봤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게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연우가 열이 받아서 홱 이건을 돌아보다 멈칫하고
제 팔을 내려다봤다. 제 뒷덜미를 무식하게 끌고 가던 손이 어느새 제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 이건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남학생 둘이 손을 잡고 있으니 이상해 보였는지 시선들이 날아든다. 얼른
놓아주자 연우가 귀가 새빨개져선 한 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자코 가던 이건이 곧 곤란한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야, 송연우….”
“…왜.”
“우리 버스 잘못 탔다.”
인상을 찡그리던 연우는 그만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터졌다. 이건은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우, 바보, 번호를
확인했어야지, 한다. 아까는 죽기 살기로 밀어 넣더니. 아무 생각 없었구만.
그러다 창밖에 서 있던 상윤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라 뒷목으로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려 강이건을 보니 정작
당사자는 버스 잘못 탄 것만 중요하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이건.”
“응?”
“괜찮아.”
“씨발.”
“병신.”
* * *
이건이 백설의 밥과 물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아, 숨을 내쉬니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곳곳에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백설이를 보니 추워서 움직이기 싫은 건지 집 안에 누워서 꼬리만 슬쩍슬쩍 흔든다. 산책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알았어. 그럼 오빠 혼자 운동 다녀올게.”
“도하 형.”
“여기서 뭐 하세요?”
“선생님은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어제 이건을 학교에 데려다줄 땐 짜증이 났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둘이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영화 보고 밥 먹고 드라이브까지 한 다음에 집에 왔으니 데이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서 헤어진 다음엔 연락도 하지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푹 쉬어야 얼른 낫지. 간신히 감기가
떨어졌는데 괜히 또 아프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까지도 잠자코 기다렸다. 준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아서. 하지만 정작 도하는 밤새 얼마나 설렜는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오늘 서울 가시겠네요?”
“하하.”
“왜, 왜 그러세요?”
도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준영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갔는데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순간 뒷골이 당기고 발밑으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도하야,
실은…. 어쩌고 얘기하길래 미루자는 말일까 봐 얼른 말을 돌렸는데. 원래 약속이 있었단 말이군.
* * *
“…여보세요.”
반대편에서 빡침이 느껴지는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룸미러를 내려 제 얼굴 상태를 확인하던 준영이 그 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다. 열 받은 게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예요?]
“다 떠들었어?”
“저 왔어요, 어머니.”
그녀가 아들의 짐을 건네받으며 안색을 살폈다. 며칠 전 목소리가 좋지 않았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번 내려가 볼까 하는 걸 남편이 쓴소리하며 말렸다. 다 큰 자식 뭘 그렇게 품 안에서 놓지를 못하느냐고.
그래서 제사 핑계로 얼굴이나 볼 겸 서둘러 올라오라고 한 것도 있었다. 그랬는데 실제로 보니 얼굴이 조금 야윈
거 같았다.
그건 돌아가신 할머니 덕이기도 했다. 그녀는 제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처음 거둔 사람이었고, 남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도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준영과 사이좋게 지낼 것을 당부했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지, 얼마나 가슴에 맺힌 한이 많은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항상 감사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넌 더 예뻐졌네.”
“민주 넌 그만 떠들고 가서 두부 좀 사와. 준영아,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쉬어.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준영이 2 층으로 올라가는데 민주가 쪼르르 따라 올라온다. 방으로 들어와 코트를 한쪽에 벗어두고 안을 둘러보니
제가 머무를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매일 쓸고 닦는지 올 때마다 책상 위는 먼지 하나 없었고, 침대도
가지런하니 정돈되어 있었다.
민주가 말하는 또라이가 도하인 건 누구나 다 알았다. 어릴 적엔 그래도 잘 따르고 도하를 좋아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또라이가 됐는지 모르겠다. 하긴, 오죽 괴롭혔어야지.
민주가 멋쩍게 웃었다. 엄마 몰래 학원비를 내야 하는데 그걸 감당할 수 없었고, 도하가 내민 카드에 혹해서
준영이 있는 곳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나중에 준영에게 연락해 이실직고했더니 준영이 학원비를 대신 내줬다.
도하 카드는 돌려주라면서.
민주는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미안해했지만, 준영은 괜찮다고 했다. 민주가 아니라도 한국에 있는 걸 안
이상 도하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를 찾아냈을 테니까.
준영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민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야, 두부!
“알았어.”
그녀가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들더니 방을 나갔다. 준영이 웃고 나서 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예전에 사용하던
책상을 손으로 만지다가 그 앞에 있는 여러 개의 액자로 시선이 이동했다. 대부분 가족사진이었는데, 그 틈에
도하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지금쯤이면 이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삭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화가 다시 울린다. 혹시 도하인가 싶어 봤더니 민석이다.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서울 올라왔어?]
“…어떻게 알았어?”
[10 시면 끝나나?]
“왜.”
공황장애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한 후 커피와 술을 끊었는데, 아직도 그렇다고 여기는 듯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봐서,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럼 이따 연락한다?]
“그래.”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결국 분통을 터트리며 사람들 앞에서 준영에게 모진 악담과 폭언을 퍼부었고, 그 때문인지
제사 때엔 통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너도 왔니?”
“…안녕하셨어요?”
“아니. 들어오기 전까진 좋았는데 너 보니까 갑자기 안녕 못 하려고 하네. 언니 쟤 어디 시골 내려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오는 줄 몰랐네?”
“준영아, 넌 올라가 있어. 그리고 아가씨. 내 아들이 내 집 오는데 아가씨가 그렇게 말할 건 아니죠. 오늘
아버님 기일인데 꼭 이런 소란 피워서 얼굴 붉힐 일 만들어야겠어요?”
분위기가 무겁다 못해 써늘해진다. 밤을 까던 아버지가 그만하라고 한마디 했지만 미정의 눈에선 불꽃이 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집안에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그녀였기에 시누라고 해서 눈치 보는 일은 없었다.
내 말이 틀렸니? 그녀의 시선이 준영에게 향했다. 차마 이름도 부르기 싫다는 듯. 그 모멸 가득한 눈빛에 준영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다. 밤을 까던 아버지가 그만하지 못하겠느냐고
한 소리 하고 나서야 막내 고모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도 없는 마당에 쟤를 왜 끼고 사냐는 말부터 시작해, 결국엔 재산 이야기까지. 돌아가신 조부가 자신의
부친에게 더 많은 재산을 남긴 걸 다른 형제들은 맏이라서가 아니라 준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미정이 그럴 거면 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간간이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리고. 준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오지 말걸. 누가 좋아한다고 여길 와서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됐다.
* * *
그때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얼음 컵을 들고 돌아서던 도하의 눈에 낯익은 점퍼가 보였다.
연우가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집어 들더니 이쪽으로 왔다. 도하를 봤는데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한번 슥
쳐다보더니 바로 계산대 쪽으로 간다. 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내고 계산하는 동안 기다렸다.
문 앞에 섰던 도하가 얼음 컵을 들고선 다시 계산대 쪽으로 돌아갔다.
“저기요, 사장님.”
편의점 의자를 끌어내서 앉은 다음 얼음이 담긴 컵 뚜껑을 벗겨냈다. 그대로 들어 입안에 얼음을 넣고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서준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은 이후로 한 통의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서민주한테라도 연락해 볼까.
처음엔 저를 속인 기분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나중엔 섹스고 뭐고 걱정이 앞섰다. 가뜩이나 친척들과 사이가
불편한데 거기서 마음고생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준영의 모친이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냥 오늘 오지, 뭐하러 잠은 또 자고 온다고 해서. 후우, 한숨을 내쉬는데 편의점 문이 열리고 송연우가 나온다.
물 부은 라면을 들고서 편의점 의자를 빼내 제 앞에 떡하니 앉아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입안에 얼음을
물고 있던 도하가 그걸 보며 짜증 나는 얼굴을 했다.
“그럼 집에 가서 처먹든가.”
“야. 송선우.”
연우는 제 이름을 잘못 불렀음에도 정정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면 엄청난 돌대가리거나 애초에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인간인 게 분명했다.
“왜요.”
“…….”
“너도 같이 패.”
연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라면을 문 채로 도하를 마주 봤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완전 진지하다.
도하는 마치 고급정보라도 알려주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같은 소릴 반복했다. 너도 똑같이 패라고.
“원래 폭력이란 게 중독이나 마찬가지야. 패면 팰수록 더 패고 싶거든. 상대가 나보다 나약하고 보호해줄 사람도
없으면 더더욱 그렇지 ”
연우가 눈을 부라린 채 면발을 기계적으로 씹었다. 확, 얼굴에 뱉어 버릴까 고민하면서.
“너 부모의 의무가 뭐야. 제대로 키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근데 너희 아버지가 그 의무를 다했어? 아니잖아.
그니까 너도 자식 노릇 할 필요 없어.”
“재수 없어.”
소리를 질렀지만 연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하가 그대로 일어나서 삼각김밥을 던졌고, 그게 정확히 연우의
뒤통수에 맞고 떨어졌다. 연우가 악, 비명을 지르면서 뒤돌아봤고, 제 머리에 맞은 게 조금 전 자신이 남기고 온
김밥인 걸 확인하고는 머리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하, 시발!”
김밥을 던졌는데 그가 그걸 단숨에 낚아챘다. 연우의 악다구니에도 도하는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그 김밥을
야구공처럼 툭, 툭 공중에 띄워 던지며 웃었다.
“어떻게 할 줄 아는 욕이 씨발이랑 병신밖에 없어. 양아치면 양아치답게 욕이라도 좀 다양하게 하든가. 아니면
깡이라도 있든가.”
이게 진짜. 참다못한 연우가 의자를 집어 들었다. 놀란 편의점 직원이 뛰쳐나오는데 동시에 도하가 발로 연우의
정강이를 찍었다. 연우가 몸이 휘청하며 쓰러지는 찰나 도하가 일어서며 의자를 빼앗고 그대로 연우의 목덜미를
잡아 찍어 누른 후 질질 끌고서 편의점 앞 작은 화단 쪽으로 걸어갔다.
지켜보던 편의점 직원이 기겁하고 말려야 하나 아니면 신고를 해야 하나 허둥대는데 저 멀리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오고 있던 이건이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처음엔 도하만 봤는데 뒤늦게 낯익은 점퍼를 입고 버둥거리는 누군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형!”
급하게 뛰어가니 도하가 그냥 가라고 손짓을 보낸다. 이건이 기가 찬 얼굴로 뭐 하는 짓이냐고 빽 소리를 지르고
도하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당겼다. 동시에 연우가 끌려 올라오며 숨통이 트였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캑캑댔다.
얼굴은 눈투성이에 코랑 눈 주위가 시뻘겠다.
그걸 보고 이건이 화가 나선 버럭 악을 썼다.
“야야, 나한테 화내지 마. 이 자식이 나한테 먼저 욕하고 편의점 의자로 때리려고 했어. 사장님도 보셨죠?”
이건이 당황해서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가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내는데 분을 못 이겨선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눈 주위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며칠 된 눈이라 결이 단단했고,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진짜 숨이
안 쉬어졌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도하가 인상을 슬며시 찡그렸다. 그 표정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둑놈, 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다시 덤벼들려 하기에 이건이 그런 연우를 간신히 떼어놓았다. 난장판이 된 편의점
앞을 직원이 정리하니 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선 그가 정리하는 걸 도운다.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를 뿌득뿌득 갈며 도하에게 덤비려 하기에 이건이 그런 연우를 끌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일단은 앉혀두고
책가방에서 휴지를 뽑아 연우의 얼굴을 닦아줬다. 아무리 연우가 잘못했다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눈 속에
처박다니. 가뜩이나 감기 앓은 지 얼마 안 된 애를. 도하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어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마저
뽑았다.
“괜찮아? 그러게 그 형을 왜 건드려?”
“그 새끼, 가만 안 둘 거야.”
“그러지 마. 너도 잘한 거 없어.”
“너… 맞았어?”
“맞긴 뭘 맞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게 더 수상쩍었다. 연우가 그대로 이건의 점퍼를 들어 올리고 맨살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 말라고 이건이 버티는데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둘이 옷을 걷네 마네 옥신각신하는데 뒤쪽에서 휘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봤더니 언제 왔는지 도하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찔러 넣고 둘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연애해?”
“놔, 씨발!”
연우가 휘두른 팔에 이건이 가슴께를 얻어맞고서 억하고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놀란 연우가 돌아봤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아파 보였기에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야….”
“누구야? 곽상윤이야?”
“지가 때려 놓고서.”
“장난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도하가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었다. 꼴값들을 해요. 잘 어울린다. 잘 놀아. 그러고
나선 집 쪽으로 걸어갔다. 기분도 좋지 않고 완전 엉망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보호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브세여?]
술에 취해 혀가 반쯤 말려들어 간 거 보니 기가 막혔다. 오늘 제사 아니었어?
“야. 너 집 아니야?”
[울 오빠 없어. 집 나갔어.]
“뭐?”
하소연인지 술주정인지 민주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곧 울먹울먹한다. 막내 고모가 와서 지랄했다고 어쩌고 하더니
그래서 준영이 결국은 제사 끝나고 바로 사라졌다면서. 듣고 있던 도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선 작게 신음을 내쉬었다.
“그럼? 어디 갔는데?”
[나야 모르지.]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젠장, 알았으면 보내지 말걸. 막내 고모가 누군지 알았다. 서준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장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준영을 향해 가감 없이 적대감을 드러내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술에 취해 막말을 퍼붓고,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을 줬던 것도.
* * *
“그만 마셔.”
“안주 먹여 줄까?”
“그런 짓 하지 마.”
결국 숨통이 조이는 기분에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는 길에 모친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친구도 만나고 기분 좀 풀라고. 미안하다고. 막내 고모가 오는 줄
알았다면 미리 알렸을 텐데.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당연한 말이어서 서운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차라리 그때 대문 앞에 버려진 자신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보육원이라도 보내 가족 없이 살게 했더라면, 지금보단 덜 아프지 않았을까.
“걔는 연락 왔어?”
“누구.”
“알면서.”
“그래서? 잤어?”
그 질문에 준영이 기가 막힌지 웃었다. 다짜고짜 잤느냐고 물으니 웃길 수밖에. 잠잠하다 싶더니 1 시간 전부터
전화가 진동했다. 아예 무음으로 해두고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비참한 심정으로 도하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취했어?”
“조금.”
“오늘 밤에 같이 있을래?”
그의 물음에 준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하 생각이 났다. 지금쯤 열 받아서 펄펄 뛰고 있으려나. 당장 쫓아오는
거 아니야. 그런다고 해도 놀라울 게 없었다. 실제로 예전에도 몇 번 그러지 않았나.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흔들리는구나?”
“받아줄 거야?”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또, 뭐? 민석이 물었지만, 이번에도 준영은 대답 대신 술잔을 택했다. 민석은 재촉하지 않고 안주를 집어 접시에
놓아주었다.
“거기서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서 더 그럴 거야. 올라와. 기석이 형도 너 기다리는 눈치더라. 국장도 다시 오라고
했다며. 뭐가 문제야.”
준영이 민석과 똑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팔을 대고 얼굴을 받쳤다.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는 걸 보니 꽤 취한
듯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준영아.”
소리는 들리는데 눈이 쉽게 떠지질 않았다. 고개를 몇 번 까닥까닥 움직이다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민석이
재빨리 그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선 가만히 바라봤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새어
나온다.
다른 손을 가져가 뺨을 만지는데도 꼼짝하질 않았다. 그러다 입술을 건드리니 저절로 벌어지며 빨간 혀가 보인다.
제 성기를 쥐고 요염한 얼굴로 핥던 옛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준영을 부축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민석이 준영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는 인사불성으로 취했다. 한 번씩
눈을 뜨긴 했지만 온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말릴 걸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된 마음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제 속을 까맣게 물들였다.
코트를 벗겨내는데 바닥으로 무언가 툭, 떨어진다. 휴대전화였다. 그것을 주워들고 코트를 한쪽에 걸어뒀다.
패턴이 잠겨 있지 않은 휴대전화 바탕화면엔 마흔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걸 눌러 확인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도하였다.
“지겨운 자식.”
그대로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놓고 나서 준영의 옆에 앉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주는데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 뺨을 만지고 입술을 만지고 그렇게 내려오던 손이 셔츠 단추를 매만졌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전화기를 가져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도하다. 지겹다 정말. 그냥 확 끊어 버릴까
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전에 카페에서 저를 협박했던 일이 괘씸하기도 했고, 서준영 마음을 흔들러 거기까지
내려간 거에 대해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여보세요?’ 하고 말하고 나서야 씨발, 하고 욕을
씹어뱉었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챈 것 같았다. 이상한 쾌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목소리에 느껴지는 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거 같아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같이 있어요?]
“지금 씻어.”
[거짓말.]
[잠깐만.]
“왜, 또.”
말을 시켜놓고서는 어쩐 일인지 대답이 없다. 뭐야, 이 자식. 휴대전화를 봤는데 아직 통화가 끊긴 게 아니었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낸다.
부탁한다는 말에 민석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제정신이 아닌 서준영의
단추를 풀던 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분했고 카페에서 저를
협박하던 이도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너 속을 모르겠다?”
하하. 민석이 기막힌 듯 웃으니 도하가 그럼 부탁한다고 하더니 먼저 툭 끊는다. 좀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전처럼 전화로 신음이라도 들려줘서 한 방 먹여 버릴까 싶었는데, 졸지에 저를 아주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어 놓고
전화를 끊다니.
* * *
끼익, 현관문을 열고 점퍼를 대충 걸친 채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잠시 준영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곧 몸을
돌려 1 층으로 내려왔다. 빌라를 빠져나와 주차장 한쪽에 있는 평상으로 걸어갔다.
외투를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저 멀리 산등성 위로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공기가 꽤 쌀쌀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지만, 서준영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셨다. 발밑 깡통에는 밤새 들락이며 피워댄
담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뱃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았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찾아간다고 해도,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서준영이 힘들 때 찾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절망했고, 둘이 이 시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에 또 절망했고, 서준영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에 마지막으로 절망했다.
그러다 나중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김민석이라면 적어도 오늘은 서준영을 위로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몸이든 뭐든,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은 마음을 추스르려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고 연신 몸을 적시는데도 춥기는커녕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몸이 뜨거웠다. 입술은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나중엔 피 맛이 났다. 더 있다간 진짜 안될 것 같아 대충 물기를 닦고선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넌 밸도 없어?]
후우,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깡통에 넣었다. 다시 담배를 꺼내는데 빌라 입구에서
강이건이 나온다. 새벽 운동을 하기 위한 건지 아니면 개밥을 챙겨주러 나온 건지 모르지만, 도하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아요?”
“그래 보여?”
“…아니요. 안 그래 보여요.”
기운 없이 웃으며 두 번째 담배를 깡통에 집어넣는다. 깡통 안을 확인한 이건이 인상을 구겼다. 거기엔 도하가
밤새 피운 걸로 보이는 담배꽁초가 한 무더기는 들어 있었다. 이걸 밤새 다 피운 거냐고 물었는데 도하가 대답
대신 얼굴을 문지른다.
“잠 못 잤어요?”
“…응.”
“왜요.”
“그냥.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그래야지.”
“들어간다.”
자리에서 일어선 도하가 그대로 빌라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2 층에서 3 층을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고 몸을 돌렸다. 서준영 집 앞으로 걸어가서는 202
호라고 호수가 적힌 걸 가만히 쳐다봤다.
더 가까이 가서 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주먹을 꽉
쥐였다가 펴면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주위가 빨갛게 변했다.
상상하지 말자. 상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상상하지 말자. 쿵, 쿵, 문에 머리를 찧고 있는데 뒤에서 ‘도하
형?’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몸을 돌려 보니 이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말 걸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고 나서 그대로 3 층으로 올라갔다.
CH 11.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8 시가 넘었다. 학원을 끝내고 준영에게 연락했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혹시 집에서 자는 건가. 평소 그가 좋아하던 가게에서 빵을 사서 집 앞까지 찾아왔다.
“늦지 않았어요?”
지잉.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도하가 벽에 기댄 채 갈색 빵 봉투를 내려 봤다.
고소한 빵 냄새에 군침 대신 목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와서 봤더니 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오피스텔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을 따라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초조함에 애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서준영은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걸 게이라고 부르거나 호모라고 비하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서준영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어릴 적 제게 할애하던 시간을 이젠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건 점점 참을 수 없어졌다.
지문 자국은 없었지만, 전에 서준영이 번호를 누르던 걸 떠올렸다. 일부러 외우려고 한 게 아니라 준영의
생일이어서 쉽게 기억해 냈을 뿐이었다. 꿀꺽.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잠금장치로 손을 가져갔다.
주위를 둘러본 다음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섯 자리를 누르고 나니 스르륵,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열리는 문틈으로 안쪽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형, 더, 더 해줘요.”
두 사람이 지르는 숨소리와 신음이 뒤엉켜 제 귓속을 송곳처럼 후벼댔다. 고통스러웠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우렛소리 같았다. 휘청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목구멍 아래쪽에서 뜨거운 불덩어리와 신물이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미친 듯 건물 입구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들려 있던 빵 봉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버티려 했지만 끝내 터지는 울음은 참진 못했다. 기어코 사람들 많은 인도 한복판에 주저앉아
꺽꺽 울음을 토해냈다.
* * *
끙,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전혀 모르는 장소다. 둘러보던 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낯익은
그림이었다. 예전에 민석과 베트남으로 여행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샀던 풍경화였다.
그제야 그곳이 민석의 집임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이불을 들치고 제 상태를 확인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긴
했지만, 어제 그 상태 그대로였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발에 무언가
물컹하고 밟힌다.
“너, 뭐야?”
“일어났어?”
아. 준영이 제 얼굴을 문질렀다. 어지간히 먹었구나. 인상을 쓰는데 민석이 일어나 앉더니 준영의 다리에 제
팔을 기대면서 올려다본다.
이도하랑 통화만 안 했어도 진짜 그랬을 거다. 망할 자식이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양심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일어나서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기분은
좋았다.
“목말라.”
그리고 도하에게 온 연락이…. 부재중 목록을 훑어보던 그가 잠시 숨을 멈췄다. 어라. 거의 마지막에 통화된 게
있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통화한 기억이 없는데.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눈앞으로
물컵이 불쑥 들어왔다.
“자, 마셔. 마시고 나가자. 해장국 사줄게, 어차피 내가 끓여주는 건 너 입맛에 안 맞잖아.”
아. 준영이 물컵을 든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갑자기 뭘 먹지도 않았는데 명치끝이 꽉 막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괜히 조금 화가 나선 민석을 올려다봤다.
“받지 말지 그랬어.”
“나한테도 기회 줘.”
“…….”
“미안.”
“…기다릴게.”
준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노란색 물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노란색을 보고 있으니 집에 꽂아둔
프리지어꽃이 생각났다. 예전에 그 꽃을 제게 건네주며 활짝 웃던 어린 도하와 훌쩍 커 버려 이젠 꼬맹이라 부를
수도 없는 어른이 된 도하의 얼굴이 동시에 겹치면서.
“준영아.”
응.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민석은 곧 침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준영이 제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줘야 하나,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낫겠지. 곧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 * *
이건이 빌라 밖으로 나와서 양팔을 쭈욱 위로 뻗었다. 몇 시간째 인터넷 강의를 듣느라 목이 뻣뻣하게 굳어 그걸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 상태로 옆으로 스트레칭을 하다 윽, 하고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얻어맞은 데가 아직도
욱신욱신 쑤셨다.
엄마한테 걸릴까 봐 파스도 붙이지 못하고 버티는데 맷집 좋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꽤 아팠다. 박태경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게 곽상윤이라더니 괜한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맞은 부위를 붙들고 끙, 신음을 내쉬며 평상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괜찮아. 멀리 안 갈 거야.”
“예진이? 순자 딸 예진이?”
제 외할머니 이름과 엄마의 이름까지 나오자 이건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동네가 작다 보니 다들 알고 지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건보다 더 기억력이 좋던 할아버지는 1 년 사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걸 보는 이건의 마음도
어쩐지 좋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세요.”
저도 언젠가 장가를 간다면 부인을 위해주고 꼭 알콩달콩 살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몸을 쭉 늘렸다. 그렇게 몇 번
움직이고 나니 허기가 졌다. 사춘기라 그런지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오세요?”
“응. 너 왜 나와 있어?”
“뭐예요?”
“감사합니다.”
그러다 이건의 시선이 준영의 반대편 손으로 간다. 거기엔 똑같은 상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혹시 도하 건가.
“그건 도하 형 주실 거예요?”
“…응. 왜?”
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은 자신이 새벽에 나와 있을 때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때도 산처럼 쌓여 있던
꽁초가 지금은 더 늘어났다면서, 못해도 세 갑은 넘게 피운 거 같다고 걱정했다.
“들어가자.”
“먼저 가세요. 전 편의점 갈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이 케이크 주셨으니 운동이나 더 하다 바로 들어갈게요.”
준영이 그러라고 대답하고 나서 빌라 안쪽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는데 위층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꽤 묵직한 게 여자는 아닌 듯했다.
“…어디 가?”
“…응.”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 도하가 전화했을 때 민석이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잔다고 하고 끊었다는데 그게 다였을지, 아니면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간 건지.
뚜벅, 뚜벅, 도하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준영의 앞에 마주 보고 선다. 살짝 상체를 구부리며 안색을
살피길래 준영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한 발 물렸다.
“…괜찮아요?”
“…뭐가.”
준영이 그제야 도하를 제대로 봤다. 도하는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눈빛은 한없이 약해졌고, 표정은 제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놔줘. 숨 막혀.”
도하가 옅게 웃더니 준영을 품 안에서 놓아줬다. 한걸음 떨어지더니 준영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건 내 호두과자?”
준영이 그것을 건네자 도하가 받아 들고는 코를 가져다 댔다. 딸기 케이크네? 하고 안을 보지도 않고 귀신같이
맞춘다. 준영은 생딸기는 별로 안 좋아하면서 이상하게 케이크에 올려진 딸기는 또 먹었다.
“잘 먹을게요.”
“어제 전화했었다며.”
“엄청 했죠.”
“안 잤어.”
“안 잤다고.”
도하가 픽 웃는다.
집으로 들어온 도하가 케이크를 좌식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
심장이 있는 제 왼쪽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조금 전 한 행동에 대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했어, 아주 잘한 거야. 잘 참았어.”
그렇게 위안하는 자신이 기가 막히고 씁쓸하면서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러다 잠이 쏟아져 소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밤새 설쳤더니 눈을 몇 번 깜박이지도 않았는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집으로 들어온 준영이 화병에 물을 갈아줬다. 꽃은 다행히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봉오리 몇 개가 더 피어나면서
처음보다 화사해졌다. 그걸 화병에 꽂아 놓고선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얼굴이 하루 새 초췌해지긴 했다. 가뜩이나 며칠 감기를 앓느라 살이 빠졌는데 거기에 더 보탰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예전엔 아파도 봐줄 만하더니, 나이 탓인가. 거울에 비친 제 상체를 보면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근육질은 아니어도 보기 좋게 매끈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냥 밋밋해 보였다.
머리를 감고, 샤워 타월로 몸을 닦고,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전화가 막 울리는 중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확인했더니 어머니였다. 아침에도 전화했고, 오는 길에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칠 않은
모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엄마.”
[집에 도착했어?]
탁하게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저 역시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셨나.
“네. 지금 와서 씻고 나왔어요.”
[많이 피곤하지?]
“괜찮아요.”
[준영아.]
“네.”
[어제 많이 속상했지?]
“…아니에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다음부턴 제사에 빠져도 돼. 다른 손주들은 일과 학업에 바빠서 못 오는데, 너만
참석한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더 욕심부렸어. 미안하다.]
자책하는 마음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속상한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거 같아 준영은
잠시 숨을 멈추고 수화기 건너편의 소리에 집중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곁에 있으면 안아드리는 건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마저 말리고 수건을 한쪽에 던져 놨다. 스킨을 바르고 나서 침대로 가 누웠다. 오늘따라 집 안은 더
고요했다.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서는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집중했다. 그 마음을 비웃듯 흔한 생활소음조차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7 시다. 평소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는데 허기도 느껴지질 않았다.
도하에게 준 케이크가 생각났다.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는 준영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같이 먹자고 사 온
건데. 아쉬운 마음에 몸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나서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9 시다. 뭐야. 그새 잠들었었네.
얼굴을 부비고 나서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도하의 이름이 찍힌 걸 확인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큼,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왜.”
“…아냐.”
“그런데?”
[안 열어주면 발로 차요?]
하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전화기를 든 채로 현관
앞까지 걸어가서 달칵, 문을 열어주니 문틈으로 케이크 상자가 나타난다. 그다음에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와 옷차림이 달라지고 얼굴도 물기가 묻어 뽀얀 걸 보니 막 씻고 나왔나 보다. 가뜩이나 야한 얼굴이 더
야하게 보여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잤구나?”
“…응.”
“아깐 안 잤다더니.”
집 안으로 들어온 도하가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선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영이 괜히
민망해선 목을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뭐 마실 거 줘?”
“왜.”
“말 안 해도 가져왔네.”
투덜거리면서 도하가 케이크를 꺼냈다. 오오, 예쁘네.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딸기 위에 장미 꽃잎으로 데커레이션을 했는데 거기에 금가루도 살짝 발라져 있었다. 그걸 금인지
확인하더니 손가락으로 크림을 떠서 입에 넣는다.
“맛있다.”
일어서는데 이번엔 손목을 붙들고 제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다시 소파에 앉아 버렸다. 놀라서 쳐다보는데 도하가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찍어 준영에게 내민다. 아, 해요. 준영이 고개를 뒤로 빼고 젓자 생긋 웃더니 하얀 크림을
제 혀 위에 올려놓는다.
“뭐 하는 거야?”
그러자 도하의 눈초리가 올라간다. 얼마나 살벌하게 째려보는지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였다. 눈빛은
네가 주말에 먼저 하자고 그러지 않았느냐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왜 이래, 진짜. 아까는 그렇게 쿨하게
굴더니.
도하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크림을 더 찍어 바르려 하기에 준영이 손가락을 세우며 경고를 보냈다. 하지 마.
그만해.
“아니.”
“인색하긴.”
“그래서?”
“콘돔도 없.”
“또, 뭐. 뭐 필요해요?”
준영이 손으로 입을 감쌌다. 빌어먹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까는 모른 척해서 서운했는데 막상 하자고
덤비니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자식 설마 저걸 다 쓰려고 가져온 건 아니겠지. 꿀꺽 침을 삼키고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움직였다.
“왜 자꾸 도망가요.”
“물. 물 좀 마시자.”
“부끄러워서 그래요?”
“부끄럽긴 뭘 부끄러워.”
“넌 그렇게까지 해서 하고 싶냐?”
당연하죠.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준영은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미쳤어. 미친 거야.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제 손이 종잇장에 베기만 해도 펄펄 뛰는 이도하가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나 사실 엠이야.”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엠이는 뭐야. 애미야 국이 짜다, 할 때 그 애미? 서준영은 남잔데.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준영이 남다른 성적 취향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다. 혹시 그 M?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고 나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거짓말.”
하. 도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준영이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을 좀 마시고 오겠다며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 쪽으로 도망쳤다. 이번엔 잡질 않는다. 대신 조금 전 했던 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그러면서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잠이 오겠어요?”
“뭘 용서해. 얼른 가. 나 잘 거야.”
침실 한가운데 멈춰선 준영의 어깨를 붙들어 저를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눈을 마주치니 준영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 제가 서준영에 대해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었다. 사귀던 남자들 숫자랑 직업까지
다 읊는데 그런 취향인 걸 몰랐다고? 이걸 믿어야 해?
“내 눈 똑바로 봐요.”
“보고 있어.”
하아, 이런 엠병할. 도하가 고개를 떨구자 준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힘들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위로하는 척 손을 뻗는데 도하가 고개를 갑자기 번쩍 든다.
“미쳤냐.”
“엠이라며!”
“자, 때려.”
“바지도 벗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준영은 느긋하게 침대에 엎드려서 팔로
베게까지 만들고 뺨을 뭉개고 있었다. 잘하면 잠도 잘 태세였다.
바지를 내릴까 했지만 그랬다간 진짜 성질을 낼 거 같아서 차마 그러진 못하고 엉덩이만 뚫어지게 노려봤다.
엎드린 상태인데도 엉덩이가 봉긋하게 솟아 있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때려요?”
“진짜 해요.”
“하세요. 안 말려요.”
큽. 준영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이도하 너무 귀엽다.
그때 등 뒤에서 당황한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요?”
“으으니.”
웃음을 참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한편 도하는 준영의 뒷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표정을 했다. 귀며
목덜미가 시뻘게져선 낑, 소리를 내는 거 보니 정말이구나 싶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도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아까부터 엉덩이만 자꾸 눈에 보여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서준영 자세도 그렇고, 더 해달라는 목소리와 손에 닿던 그 탱글탱글한
감촉마저…. 머릿속은 이미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벌려 제 것을 넣고 쑤셔대고 있었다.
“뭐 해? 안 내려와?”
“너 안 비켜!”
“3 초면 싸는 게 무슨 1 분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
도하가 하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압박하니 준영의 성기까지 시트에 같이 뭉개져 자극을 받았다. 배 아래쪽이
저릿저릿해져 당황해 저리 안 비키냐고 또 소리를 질렀지만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10 초 끝.”
“…….”
“진짜 아니에요. 형도 남자니까 알잖아? 못 믿어요?”
나가! 나가, 이 새끼야! 준영이 머리맡에 있던 걸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도하가 손으로 막더니 어느 순간엔
바지를 황급히 올리고 방 밖으로 도망갔다. 준영이 씩씩대다 제 손에 들린 걸 쳐다봤다. 도자기로 된
연필꽂이임을 알고선 흠칫 놀라 다시 내려놨다. 이걸로 던져서 애 머리를 깰 순 없지.
* * *
퍽, 발길질에 이건의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뒹구니 등 뒤로 냉기가 올라온다.
가뜩이나 며칠 전 맞은 게 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끙, 신음과 함께 일어서며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툭, 이건이 그 손을 쳐냈다.
이건이 뒤로 물러서며 인상을 구겼다. 자기가 안 참는다는 건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께 말한다고 한 거였는데,
갑자기 치라고 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진짜 때려도 되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꿀꺽꿀꺽, 연우가 무표정하게 마지막 한 모금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 나더니 태경을 마주 봤다. 갑자기 피식
웃더니 캔을 얼굴 높이로 들어 구긴다. 뭘 하나 싶어 봤더니 그걸 입에 물었다.
“이 미친 새끼. 왜 캔을 뜯어 먹고 지랄이야.”
하. 일부러 유유자적한 웃음을 지었지만 연우가 흐르는 피를 손바닥에 묻혀, 혀로 핥으면서 웃는 데선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말만 해. 네 좆도 이렇게 빨아서 씹어줄게, 개새끼야.”
“손수건 너 거야?”
“어. 왜?”
“양호실 가야 하나.”
분명히 피는 나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 검지를 입 안에 넣어 벌렸더니 연우가 인상을 팍 구기고 그 손을 사납게
쳐냈다.
“이 미친 새끼!”
“…왜에.”
“안 하면? 계속 처맞게?”
“꺼져. 교실 가서 잘 거야.”
CH 12.
준영이 소파에 앉아 책을 든 채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도하가 식탁 의자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찾아와 인사를 했다. 기가 막히면서도 저도 지은 죄가 있어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어쨌든 몇 번이나 거짓말하지 않았던가.
어젯밤엔 다 믿겠다며, 남의 엉덩이를 멋대로 농락하고 도망치더니 오늘은 또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실대로
말하라며 사람을 들들 볶았다. 하지만 준영은 여전히 생각이 많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진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하가 좀 포기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은 퀭하고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식탁 위에 올려둔
탁상달력을 챙겨 가지고 온다. 펜도 하나 챙기더니 그걸 들고 준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응. 너도 빌려줘?”
“뭐야, 이게?”
“내일 해요.”
응? 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뭘 해?
“섹스하자고요.”
“…괜찮겠어?”
“…….”
결의를 다지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애써 웃었다. 입술 끝은 경련이 날 것처럼 떨렸다. 설마 진짜 때리진 않겠지.
시선을 피하고 불안한 마음에 읽지도 않은 책장을 넘기는데 종이에 손가락이 슥 베고 말았다. 아. 손을 떼어내며
인상을 쓰자 도하의 눈이 커다래진다.
“…아냐. 괜찮아.”
“이도하! 너 또 내 팬티 훔쳐 가면 죽는다.”
“그 얘긴 그만해.”
“콱 뒈졌어요, 화병 나서.”
무슨 소리 하냐고 팔짝 뛰던 도하가 준영이 이까지 까드득 물자 나중엔 멋쩍게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팬티를 꺼냈다.
세탁해서 막 옷장에 집어넣은 건데, 대체 이걸 왜 가져 온 건지. 나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이 자식 혹시
이상한 성향 있는 거 아니야.
“내일 기대할게요.”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 * *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민석이 진료실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다가와 손님이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병원이라 더는 올 손님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개인적인 손님이냐고 물으니 간호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민석이 ‘얼굴이 왜요?’ 하고 묻자 그녀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해 보였다.
확실치 않다고 말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민석이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예인들도 수술하러 종종
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진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방송하면서 알게 된 사회자 정도면 모를까.
누굴까 의아해하며 들어서던 그가 제 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척 걸치고 있는 사내를 보고 인상을 확 구겼다.
저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도하였다. 도하가 손대신 발 하나를 들고 인사하듯 흔들었다.
“안녕, 김 선생님?”
하아. 민석이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밖으로 나가 간호사를 통해 끌어낼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도하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그대로 일어선다.
“너 여길 왜 왔어?”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벌써 치매 왔어요? 엊그제 나한테 그딴 식으로 굴었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나 너 보기 싫어. 그냥 가.”
후우, 민석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티슈를 뽑아 도하가 발을 올렸던 자리를 슥슥 닦아내곤
그 위에 손 소독제까지 뿌린다. 그런 다음 의자에 앉아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책상을 짚고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 좋게 웃었다.
“네, 그러죠.”
도하가 순순히 대답하더니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민석에게 슥 내민다. 민석이 그것을 흘깃 쳐다봤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종이다. 설마 이 자식 다신 서준영 만나지 말라는 각서라도 쓰라는 건가.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도하가 한쪽에서 펜을 꺼내 그 종이 위에 올려놓는다.
“써요.”
“각서?”
“그러니까 뭘.”
“체, 뭐?”
“체위. 인간이 성교나 여타 성행위를 하기 위해서, 또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세. 의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그걸 못 알아들어?”
“…….”
민석이 입을 벌린 채 벙긋댔다. 차라리 각서를 쓰라면 이해하겠는데, 체위라니. 그것도 저한테 와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입만 벌린 채 웃는데 도하가 이번엔 빨간색 펜을 꺼내서 놓아준다.
“너… 돌았어?”
“내가 할 말이 없다.”
“본인이 부끄러워해요.”
“진짜 이럴 거예요?”
“알았어요, 그럼.”
“내일 뵐게요.”
“응, 뭐?”
“그러기만 해. 바로 경찰 부를 테니까.”
“난 그럼 우리 엄마 불러야지.”
“너 진짜 이럴래?”
“설마 뭔지 몰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발 그냥 가, 좀!”
그럼, 안녕. 생긋 웃더니 몸을 돌려 나간다. 도하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던 민석이 들고 있던 볼펜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저를 놀리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준영이 받아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태도를 보니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된 건 맞는 듯 보였다.
후자일 가능성이 99%는 되는 것 같았다. 쯧,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는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려는데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확인하니 엄마였다.
“응, 엄마.”
[뭐 해? 저녁 먹어?]
“아직요, 왜요?”
[별일 없나 해서. 집에는 언제 올 거야? 아빠가 너 찾는데 엄마가 둘러대느라 힘들어 죽겠어. 어제도 그 근처
지나다 들러본다고 하는 거 내가 뜯어말렸다니까.]
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엄마가 얼마나 당황해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응… 그럴게요.”
엄마는 준영에 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일이 틀어져서 아들이 빨리 돌아오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왜, 또. 뭐.]
“차 번호 4429 맞죠?”
“실은… 내가 아까 말 안 한 게 있어요.”
[뭐, 너 지금 무슨 소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일 정도로 앞으로 튕겼고, 바로 세우는 순간, 민석의 자동차 보닛이 입을 쩍
벌린다. 차를 뒤로 빼서 확인하니 완전히 찌그러진 앞부분이 보였다. 그걸 보는 도하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나선 유유자적하게 차를 왼쪽으로 꺾어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 * *
퇴근하고 나오면서 차를 보고 인상이 구겨졌을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띠링. 한참을
울리던 전화가 끊어지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팔을 뻗어 확인하니 김민석이 보낸 메시지다.
“형, 어쩐 일이세요?”
“너 왜 여기 있어?”
“저 지금 수업받는 중이라….”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웬 꽃이에요? 받으셨어요?”
“준영이 형은.”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준영이 그대로 도하의 귀를 비틀어 잡았다. 도하가 몸부림을 치며 그 손을 떼어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파요!”
“먹고 있는 애를 왜 건드려?”
“너 이 새끼! 너도 한패지?”
“이도하. 그만해.”
“잘 먹었습니다….”
하아. 준영이 마지못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더 입씨름했다간 저만 지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올려 보냈다간 위에서 또 볼링공이나 굴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하가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저 자식 또 뭐 뒤지는 거 아냐.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 봤자 팬티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쫓아가서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준영이 엉거주춤 서 있는
연우에게 얼른 앉아서 더 먹으라고 했다.
“선생님. 도하 형 화난 거 아니에요?”
준영이 피자 하나를 더 뜯어 연우에게 건네준다. 연우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강이건이 오자고 해서 억지로 오긴
했지만, 다음부턴 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저를 챙겨주는 준영이 마냥 싫진 않았다. 제 형과
생김새가 좀 비슷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가 떠난 걸 원망한 적도 있지만 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하루에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그는 오죽했을까.
* * *
“도하야?”
으으응, 목소리에 투정이 잔뜩 섞여 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 사이로 연갈색 눈동자가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다시 깨울까 하다 그대로 놔두고 침대 위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도하야.”
“일어났으면 집에 가서 자.”
잔뜩 잠긴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대를 긁으며 소리를 냈다. 굳게 다물리는 입술에서 꽤 강인함이 느껴졌고, 그게
낯설어 저도 모르게 슬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더 자게 놔두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도하가 제 팔을
붙든다.
“눈 떠봐.”
억지로 눈을 뜨는데 잠이 가득하다. 준영을 쳐다보더니 푸스스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감고서 허리를 더 꽉
끌어안는다. 제 가슴팍에 비비는 얼굴 때문에 준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어깨를 밀어냈다. 그럴수록 힘이 어찌나
센지 떨어지는 대신 더 엉겨 붙었다.
“야 놔. 숨 막혀.”
“싫어. 떨어져.”
“까불지 말고 떨어져.”
“말 안 하면 내가 그냥 만진다?”
“싫다니까.”
“시끄러워. 닥쳐.”
사정사정하는 모습에 그냥 올라가라고 버럭 성질을 냈다.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곧 포기하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을 보니 솜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 * *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네. 이건이 휴대폰으로 불을 밝히고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옆에는 연우가 점퍼에 손을
집어넣은 채 코까지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밤이 되니 바람이 더 매서워졌고 두꺼운 점퍼를 입었음에도 꽤 추웠다.
“됐어. 괜찮아.”
“야, 괜찮아?”
“왜 떠밀고 지랄이야!”
아래로 내려와 옷에 묻은 지푸라기들을 털어주는데 연우가 또 만지지 말라고 난리다. 몸에 금가루를 처바른 것도
아닐 텐데 왜 저가 만지기만 하면 지랄인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연우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다가 윽, 하고 신음을 낸다.
“왜? 어디 다쳤어?”
“정말? 봐봐.”
“괜찮아?”
“괜찮아. 그냥 좀 삔 거 같아.”
연우가 쌩하니 걷는데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불편해 보인다. 이건이 연우의 앞쪽으로 불빛을 비추며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연우의 집 근처에 다다르게 됐다.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연우가 고개를 돌리고
이건을 바라봤다.
“이제 가. 집에 왔으니까.”
“됐어. 가라고.”
“아저씨 아직 안 주무시나?”
“아, 가라고.”
“너 때문에 다리 다쳤잖아!”
가지가지 한다 진짜. 연우가 노려보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집 쪽으로 간다. 이건이 그 뒤를 따랐다. 콜라를 너무
마셨나, 연우의 집은 화장실도 밖에 딸려 있었다. 그렇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연우가 집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린다.
“나 화장실 쓴다?”
“쓰든지 말든지.”
이건이 화장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불은 수명이 다했는지 한 번씩 깜박였다. 어둡고 좁은 화장실 안에서 소변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안쪽을 보니 반투명한 유리창에 아무런 그림자조차 비치질 않는다.
그랬는데 대답이 없다. 그림자도 사라졌고. 다시 부를까 하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집 안이 썰렁하다 못해 냉골이다. 보일러라도 좀 틀지. 속상한 마음에 어금니를 꾹 물었다가
연우의 방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연우가 제 발목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바지를 내린다. 이건이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해, 불러도 말도 없고.”
“깜짝이야. 왜 남의 집에 막 들어와?”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연우가 홱 돌아서 앉는다. 어후, 고집불통. 다리를 붙들고 제 쪽으로 당기니 몸이 같이
움직였다. 아, 놔. 다리를 빼려 하길래 그대로 붙들고 바지를 살짝 걷어 올렸더니 발목 부분이 뻘겋다. 살짝 삔
게 아닌 거 같은데….
“파스는 어딨는데.”
버럭 성질을 내는데 목이며 얼굴, 귀까지 시뻘겋다. 이건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제가 뭘 잘못했나 생각할
것도 없이 연우가 팔을 붙들고 끌어내려 한다.
“약 같은 거 없으니까 가라고!”
어휴 정말. 이건이 그 손을 떼어낼수록 점점 더 집요하게 굴면서 나가라고 난리다. 알았다고 일어서다가 송연우의
등 뒤로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이 커다래졌다. 연우 역시나 낌새를 알아채곤 몸을 돌렸다가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얼마나 취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제 아버지가 문 옆에 기대서서는 그런 둘을 보고
콧방귀를 끼었다.
“됐으니까 좀 가. 나 피곤해.”
“아, 잘 거라고!”
“짜증 내지 말고 좀!”
찬 바람을 맞으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얼른 가서 붕대를 가져오려고 집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처음엔 걸었고, 그다음엔 뛰었다. 논길을 따라 집 쪽으로 뛰어가다 보니 서랍 속에서 본 연우의
물건들과 그날 밤 도하의 집에서 연우가 제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고 있었다.
* * *
오늘이 화요일. 드디어 그날이 왔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와 보니 이건이
개집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백설이와 마주 보고 있었다. 사람이 개를 보는 게 아니라 개가 사람을 구경하는
모양새였다.
이건이 돌아보는데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도하가 그쪽으로 가며 마스크를 입까지 내렸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러면서 이건의 안색을 다시 한번 봤다. 이 자식, 무슨 일 있나. 더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붙잡았나. 곧 도하가 운동하기 위해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운동이
아니라 또 나무에 빌러 가는 거 같은데. 참 이상한 형이란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젯밤 일이 떠올라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붕대를 가져가 연우에게 감아주고 소염제도 주고 했는데 발목은 좀 괜찮으려나. 왜인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갔을
때 연우는 더 지랄하지도 난리 치지도 않았다. 술 취해 자는 아버지 옆에서 웅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매일
그렇게 지냈던 걸까. 괜히 마음이 쓰이고 코끝이 시큰해져서는 붕대를 감는 내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만 생각하자.”
“…….”
“설마…. 아, 아니야.”
“너 이 차는 또 뭐야.”
준영이 키를 들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예전 같으면 좋아서 운전대를 잡았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이 키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도하가 뒷좌석에 트렁크를 싣는 걸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저건 옷인가. 옷을 좋아하고 워낙 자주 갈아입으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준영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운전석으로 가서 타고 운전대를 잡았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갔다.
동네를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뭔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와서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으면.
내비게이션이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사이 도하의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도하가 인상을 구겼고,
준영이 그 모습을 흘깃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요.”
[이 미친 새끼가….]
[뭐?]
“끊는다, 만식아.”
뒤늦게 야! 고함이 들리는데 도하가 그대로 전화를 끊고서 매너모드로 바꾸고선 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운전대를 잡은 준영이 그런 도하를 흘깃 쳐다봤다.
“친구한테 뭐 그런 말을 해.”
“친한 친구야?”
준영은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도하는 어릴 때부터 저와 친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굉장히 비호의적이었다.
게다가 싫어하면서 통화까지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비게이션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게.”
“그거 옷이야?”
“가서 보면 알아요.”
“들어가요.”
“먼저 들어가.”
도망은 무슨. 준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진작에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아,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구나. 진짜 호텔에 왔어. 오랜만에 맡는 숙박업소 특유의 냄새에 잠시 멈칫했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더블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걸 보니 현실이 확 와 닿는다.
“어?”
“아니면 같이?”
“뭐야!”
“너… 그게 다 뭐야.”
맙소사. 준영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초도 있네. 설마 저건 분위기 내는 용인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그것들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단 씻고 나올게.”
CH 13.
준영이 둥그런 원형 욕조에 걸터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욕실 한편을 바라봤다. 거기엔 분홍색 목욕 가운이 걸려
있었다. 막 씻으려고 하는데 도하가 들어와서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그래도 첫날인데 기념하기 위해서 가운도
맞췄다고. 그걸 쳐다보는데 헛웃음이 터졌다.
물을 틀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왜 안 나와요? 준비 다 했어요?”
한참 뒤 결심을 굳히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어 한쪽에 걸어두고 나니 제 상체가 보였다.
도망갈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에 운동이라도 해둘걸, 뒤늦게 후회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바지마저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
머리를 감고 온몸을 닦고 나서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도하는 더는 보채질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대충 물기를 닦고 샤워 가운을 걸친 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침대에 뿌려진 건 아무래도 장미꽃잎처럼 보였다. 바닥에도 이것저것 펼쳐져 있었는데, 아까 여행용 가방에서 본
것들이었다. 도하는 침대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준영을 보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너… 이게 다 뭐야?”
채찍부터 시작해 검은색 몽둥이와 파리채 비슷하게 생긴 것까지는 아까 봤던 건데…. 그러다 마지막 물건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 시선을 알아챈 도하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무로 된 커다란 주걱이었다.
“뭐?”
“침대에 누워야죠.”
“너, 너 안 씻었잖아.”
“씻는 동안 튈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묶어놓게.”
“너… 날 못 믿어?”
“걱정 말아요. 시트도 내가 가져왔어요. 특별히 방수되는 걸로. 아무리 정액을 폭포처럼 쏟아부어도 호텔 시트엔
절대 안 묻어요. 그러니까 올라가요, 얼른.”
씩 웃으면서 말하는데 준영의 얼굴은 점점 희게 질려갔다. 마지못해 침대에 올라가서 천장을 보고 경직된 자세로
누웠더니 씻기 위해 제 가운을 챙기던 도하가 뭘 하는 거냐고 묻는다.
“…누웠잖아.”
“팔은 뒤로해요.”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팔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잠시 후 손목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진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치켜들던 준영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잠깐, 잠깐. 너 뭐 하는 거야?
철컥 소리와 함께 은색의 수갑이 손목에 채워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얼굴로 도하를 보는데
도하가 씩 웃는다.
“수갑은 내 취향 아니야.”
“미안. 내 취향이라.”
“뭐?”
“나 씻는 사이 도망갈까 봐 그래요.”
“야! 이거 당장 안 풀어?”
생긋 웃는 모습에 준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적당히 맞춰 주다가 빠질 생각이었는데 도하의
표정을 보니 뒷목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또 아닌 것도 같고.
“씻고 올게요.”
도하가 욕실로 사라지고 나서 준영은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 했지만, 벨트로 허리가 단단히 묶여 여의치 않았다.
차라리 손이라도 앞으로 묶여 있으면 해볼 만할 텐데 뒤로 묶인 탓에 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럼 얼른 하고 끝낼게요.”
수건을 옆으로 홱 집어 던지더니 바닥에 세팅해 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준영이 엎드린 채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뭘 하나 지켜봤다. 도하의 손이 채찍을 만졌다가 몽둥이를 만졌다가 하나씩 옆으로 옮겨갔다.
그러더니 표정이 심각해져선 입술을 꼭 깨문다.
아무리 봐도 이걸로 때리면 아프겠는데.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해서 준영은 속으론 조금 안도했다. 그래,
이도하가 날 때리진 않겠지. 아지랑이처럼 희망이 피어올랐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풀렸다.
준영이 망설일 것도 없이 ‘초.’라고 대답했다. 초로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왜 그걸로
때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 그래요?”
“어. 왜?”
“진짜 마니아구나.”
‘초가 어때서?’라고 묻기도 전에 도하가 한쪽에 올려둔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붙인다. 초에 불을 붙이는 걸 보고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거기다 불을 왜 붙여. 도하가 제 팔을 걷더니 초를 기울인다. 잠시 후 촛농이
피부에 떨어졌고, 대번 인상이 찌푸려졌다.
“뜨겁다. 진짜 괜찮겠어요?”
“어떤 거짓말?”
지익. 소리와 함께 준영의 뒤통수로 손길이 닿는다. 준영이 고개를 돌리는 사이 도하가 이제 막 뜯어낸 테이프로
준영의 입에 붙여 버렸다. 준영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읍읍, 소리를 냈다. 도하가 생긋 웃더니 준영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목덜미를 그리고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읍, 읍읍.”
제 가랑이 가운데를 한 번 손으로 만지더니 입술을 노골적으로 핥았다. 그러고 나선 발밑에 깔린 도구들을
쳐다봤다.
골라본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도하가 망설일 것도 없이 주걱을 집어 들었다. 내 생각엔 이게 괜찮겠어. 그것은
성인 남자 팔보다 좀 작은 길이었다.
“이건 내가 아끼는 것 중에 하나니까 우리에겐 의미도 있고, 지금 상황에도 딱 맞는 거 같아서 골라봤어요.
이름은 음…. 뭐가 좋을까….”
“그렇지. 사랑의 매가 좋겠다. 우리가 왜 애들 거짓말하면 사랑의 매로 다스리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지.”
“읍.”
“읍, 읍읍!”
준영이 다리를 움직였지만 엎드린 채 움직이는 다리는 무릎 아래만 까닥까닥하며 귀여운 모양이 될 뿐 아무런
위협도 되질 못했다. 그걸 보던 도하가 나직하게 웃다가 갑자기 준영의 엉덩이를 꽉 손으로 움켜쥔다.
“으으읍!”
“읍!”
그러더니 손목을 한 번 돌리고 나서 주걱을 단단하게 고쳐 잡는다.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하고 있는데
주걱으로 엉덩이를 톡, 건드린다. 그럼 그렇지 해서 표정이 풀어지는 순간 도하가 팔을 위로 치켜들었고,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준영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끅, 준영이 제대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주걱에 맞은 엉덩이는 빨개질 정도로 자국이 났고,
준영은 비명 대신 입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엉덩이만큼이나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홱 치켜들고 노려보는데
도하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읍읍!”
다시 한 번 때리려는데 준영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고 난리다. 도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쪽으로 다가와 준영의
입을 가리고 있던 테이프를 떼어냈다. 테이프가 떨어지는 순간 온갖 욕이 쏟아져 나왔다. 도하가 어릴 때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녀도 욕은 안 했던 것 같은데.
“…….”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에 준영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욱신대던 엉덩이도 수갑에 쓸려 아픈 손목도 지금은 그
감각이 조금 무뎌진 기분이었다. 도하가 눈을 느리게 끔벅일 때마다 곧 눈물이 쏟아지진 않을까, 그 생각이 들어
차라리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은 얄궂은
마음도 들었다.
낮은 도하의 목소리가 결국엔 잠기듯 갈라진다. 눈 주위는 점점 붉어졌고, 어두운 조명에 반사되는 갈색 눈동자엔
물기가 어렸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준영을 쳐다봤다. 패기 있게 사람을 패길래 이게 오늘 끝까지
가겠구나, 했는데….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준영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빨개진 코끝이 귀엽다고 느껴져 기가 막혔다. 맙소사, 하나님. 지금은 화를 낼 때인데 왜 이런
감정이 들게 하시나요. 싫다는데도 들러붙고, 지랄 맞을 정도로 제게 집착하는데도 제대로 떨쳐내지 못했던 건 이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안. 아프죠?”
“풀면 때리려고.”
“그럼 안 맞을 줄 알았어?”
아. 도하가 그제야 준영의 손목을 본다. 엉덩이에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준영이 아까 몸부림치느라 그랬는지
손목 부위가 시뻘겋다. 특별히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형사들이 직접 쓰는 수갑을 공수해온 건데.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엉덩이에 약 발라 줄까요?”
잠깐만 있어 봐요. 도하가 일어서더니 한쪽으로 간다. 그러더니 무언갈 툭, 하고 열어선 손바닥에 찍 하고 짠다.
그 소리에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경험이 꽤 많은 제가 듣기론 저건 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잠시 후
엉덩이로 차가운 무언가가 와서 닿는다.
“야, 너 그거 약 아니잖아.”
불길함을 느낀 준영이 수갑을 풀라고 협박했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 끝을 애널 입구에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 좁은 구멍을 벌리면서 들어가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거세게 저항하며 손가락을 밀어냈다.
“되게 예민하네….”
“닥치고, 빼.”
준영이 이를 까득 물었다. 손가락으로 안을 후벼대는 느낌에 아랫배가 저릿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몸이 한동안
남자랑 섹스를 안 해서 그런지 유독 더 예민해져 있었다. 어제 도하가 저를 깔아뭉갰을 때도 그러더니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지금은 머릿속이 자꾸만 하얘지려 했다.
“이도, 읏.”
긴 손가락이 안쪽에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자 하체가 들리며 엉덩이가 위로 솟았다. 준영이 이를 꾹 물고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버텼다. 곧 안을 살피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준영이 신음 대신 고개를 돌려 도하를
봤다. 철컥, 제 허리를 고정하고 있던 벨트가 풀렸고, 곧 몸이 홱 뒤집혔다. 뒤로 묶인 손은 이제 제 등에 깔려
버린 상태였다.
가운을 채 벗지도 않은 채 위쪽에 있던 베개를 끌어와 준영의 엉덩이를 들어 그 아래 받치게 한다.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만. 도하를 애타게 부르는데 도하가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그대로 준영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잡아 벌린다.
“야!”
준영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힘을 줘 오므리려고 했지만 이미 제 아랫도리는 훤하게 드러나 짐승의 먹잇감처럼
던져져 있었다. 하지 말라고 악을 써대며 발길질을 하다 퍽, 하고 도하의 턱에 한 대 맞았다. 윽. 준영이 흠칫
놀라선 움직임을 멈췄다. 도하가 고개를 돌리는데 입가가 터진 걸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도하는
화를 내는 대신 씩 웃는다.
“괜찮아요. 안 아파요.”
“너 죽여 버린다!”
사정할 거 같다고 말하기도 전에 성기에서 정액이 꿀럭꿀럭 새어 나왔다. 준영이 발끝을 세우며 허리를 치켜들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잘해, 이 새끼. 준영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맞닿은 하체로 딱딱하게 발기한 도하의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번 사정한 후 시들어 가던 제 성기 위에 꾹 눌러주니 갑자기 엉덩이가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도하가 낮은 소리로 웃더니 몸을 떼어낸다. 그러고 나서 준영의 몸을 살짝 뒤집은 후 손목에 채워진 수갑에다
작은 열쇠를 꽂았다. 이젠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달칵, 수갑에서 손을 빼내자마자 준영이
도하의 가운 앞쪽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이도하, 너!”
“하, 진짜….”
“알았, 읍.”
도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이 멱살을 쥔 채로 그대로 입술을 겹쳐 물었다. 도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벌어진 준영의 입술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혀뿌리를 핥으며 아랫도리를 뭉근하게 비벼 주자 애가
닳는지 준영이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팔을 위로 올려 도하의 목을 끌어안는다. 키스하느라 겹쳐진 도하의
얼굴로 점점 미소가 번졌다.
쪽, 쪽,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던 도하의 입술이 허리 아래 엉덩이 부위에서 멈췄다. 준영이 엎드린 채로 베개를
붙들고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머릿속에선 아까부터 혼돈의 대환장 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밀어냈어야 하는데, 어째서 엎드린 채 도하를 받아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이해고 나발이고 그동안 쌓인 욕정을 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어이없어하는 준영의 시선에 도하가 제길, 하고 욕을 내뱉었다. 억지로 반쯤 넣어봤는데 길이도 길이지만 얼마나
꽉 끼는지 그냥 했다간 하기도 전에 좆이 졸려 시꺼멓게 괴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빼고 할게요.”
“…안에다 하는 거 싫어.”
“사정 안 하고 바로 뺄게요.”
준영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허락의 뜻으로 알아들은 도하가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제 성기를 가져다
댔다. 젤을 얼마나 발랐는지 마치 설탕 시럽을 묻힌 것처럼 번들거렸다. 두툼한 귀두가 애널 입구를 억지로
벌리며 들어가자 준영이 몸을 굳히고 윽, 하고 신음을 냈다. 오랜만에 한 탓인지 아니면 커서 그런지 구멍을
풀어줬는데도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 아파.”
준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도하는 막무가내로 굴던 아까와는 다르게 준영이 아파하니 삽입하면서도 잠깐씩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더 감질나고 사람을 미치게 했다. 반쯤 들어 왔을 땐 그냥 자신이 엉덩이를
움직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괜찮아요?”
준영은 이번에도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끄덕였다. 목이랑 귀가 붉어져선 베개를 손으로 꽉 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뒤통수만 보고 있으니 조금 아쉬워졌다.
“형, 얼굴 보고 하고 싶어요.”
“싫어….”
“한 번만. 응?”
알았어요, 도하가 몸을 앞으로 숙여 준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맨몸으로 살이 닿으니 흥분이 배가 됐다. 삽입이
더 깊어졌는지 준영이 으응, 하는 소리를 삼키는 게 들렸다. 흥분한 얼굴 보고 싶은데. 박아 넣은 채로 귓바퀴를
혀로 핥아줬다. 목덜미에 코를 대고 체향을 맡으며 혀로 문지르고 앞니로 살짝 깨물고 하니 준영이 애가 닳는지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움직여, 응?”
“얼굴 보여주면.”
“야. 읏.”
“도하야, 얼른….”
“얼굴, 보여줘.”
“…해줘.”
“더.”
“해, 으읏.”
“…하… 더.”
“…제발, 아아.”
거의 감기기 직전이던 눈이 둥그렇게 켜졌다. 도하가 그 얼굴을 마구잡이로 빨고 핥으며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퍽, 퍽 살 부딪히는 소리에 준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신음을 악착같이 참아냈다.
우웁, 우웁, 준영이 다시 고개를 파묻으려 하길래 도하가 그대로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선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가 억지로 벌리고 쑤셔 넣었다. 입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하아, 아아아, 아아.”
퍽퍽, 퍽퍽, 애널 살을 짓이기며 성기가 거칠게 움직였다. 준영은 처음엔 통증과 쾌감으로 몸부림쳤다면 이젠
쾌감밖에 남아 있질 않아 울부짖었다. 치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치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엔 신음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하가 콱 위로 세게 박아 넣으며 숨을 멈췄다. 큭, 하고 억눌린 신음과 함께 등이며 허벅지 근육이
수축하는 게 느껴지더니 배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게 쏟아져 나왔다.
* * *
잠결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준영이 몸을 뒤척였다. 끙. 신음을 냈지만 전화는 끊길 줄 몰랐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올리는데 낯선 천장이 들어온다. 잠을 깨려 얼굴을 문지르기 위해 손을 드는데 아아, 신음이 저절로
터졌다.
겨우 팔 하나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을
둘러보니 호텔이 맞다.
그러고 나서 이불을 들쳤는데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 허벅지 사이에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과 빨간 장미
꽃잎이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었다. 하체 아래로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인상을 찡그리고 이불을 홱 다시 덮어
현실을 외면했다.
“…씨발.”
욕을 하는데 목소리가 보기 흉하게 갈라졌다. 큼, 큼, 아아, 목구멍 안쪽에 모래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따갑고
불편했다. 그때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울린다. 손을 위로 뻗어 확인하니 엄마였다.
* * *
도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준영의 모친인 미정이 주방 쪽에서 앞치마를 한 채로 나오며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형 집에 왔어요?”
학교 앞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준영은 주말이면 빼놓지 않고 본가에 와 머물렀다. 그럴 때마다 도하는 꼭 준영을
만나러 왔다.
미정은 음식을 하던 중이었는지 주방으로 돌아가며 도하에게 준영을 좀 깨워 달라고 당부했다. 도하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위로 올라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칫했다.
현관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금 떨어진 제 운동화를 준영의 운동화에 나란히 붙여 놓았다. 아직은 제 운동화가
조금 더 작았다. 그걸 보니 마음이 또 서러웠다. 준영의 오피스텔 앞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준영을
찾아오지 못했다. 가끔 통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준영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허리를 펴고 2 층으로 올라가서 준영의 방문 앞에 섰다. 잔다고 했으니 노크는 필요 없겠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역시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 자는 준영이 보인다. 한여름에도 이불은 꼭 덮고 자는
게 신기했다. 자신은 한겨울에도 이불이 거치적거려 싫은데.
어제도 그 남자랑 만났을까. 잤을까. 오피스텔에 듣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 엄마는 물론, 아버지와 큰
형까지 난리가 났었다.
속 편하게 자는 준영을 보고 있으니 미워지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준영이 남자를 좋아해서.
저도 남자니까 이렇게 옆에 있다가 어른이 되면 언젠가 서준영이 저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서.
그래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되면 아무도 못 만나게 해야지. 다른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나만 좋아하게. 어른이 되면 꼭. 차마 손을 덥석 만지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준영의 손을 살살 매만졌다.
달칵,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미정이 쟁반에 음료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도하가 태연하게 일어나며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이모, 주스예요?”
“왜요?”
“네, 그럴게요.”
* * *
“괜찮아요?”
준영이 제 코앞까지 다가온 도하의 이마를 밀어냈다. 좀 떨어져. 허리가 지끈하더니 그때부터 통증이 상당했다.
나갔다 돌아온 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준영이 자는 동안 씻고 먹을 것을 사러 갔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짐을 대충 정리하고 근처 병원에 왔다. 한곳에서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진료를 모두 보는
곳이었다. 접수하고 기다리는데 앞쪽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보였다. 그중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있던
할머니가 준영을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한 명은 아빠 닮고 한 명은 엄마 닮으면 그럴 수 있지.”
“그려? 둘이 형제야?”
듣고 있던 도하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네… 조금요”
“몇 살이나 많은데.”
“…열 살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인상을 팍 구기며 할아버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가 흠칫 놀라 쳐다보자
이번엔 심호흡까지 했다. 아무리 자신이 싸가지가 없기로 서니 노인네한테 대들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촌이라니!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이번엔 준영에게도 묻는다. 안 그래, 총각? 여태 잠자코 있던 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네,
맞아요, 하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도하가 더 성질을 냈다.
“동갑.”
“그, 그럼 할머니는요!”
“그래서 일찍 죽었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보란 듯 맞장구쳤다.
“그려, 잘 생각했어.”
“나 혼자 들어갈게.”
“아니에요. 같이 들어가요.”
“중환자 맞죠.”
그러지 마. 준영이 도하를 떼어내고 나서 진료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리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도하가 혼자 남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준영을 기다렸다. 앞에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젠 다른 얘기 중이었다.
잠시 후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나온다. 도하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니 간호사가 무언가를 건네줬다.
“네 감사합니다.”
도하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수납대로 가면서 준영의 허리를 붙들려고 하자 준영이 손을 떼어 놓는다.
“괜찮아요?”
“왜 나한테 화내요.”
“입 다물어.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러더니 손을 확 떼어내고 수납창구 쪽으로 걸어간다. 도하가 그 뒤를 쫓아갔다. 수납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물리치료실이 있었다. 침대 두 개가 마주 보게 된 구조였는데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아 누우니 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왔다.
“엎드리셔서 바지 살짝 내리세요.”
“네?”
“완전 빨간데요?”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많이 빨간데…. 어머, 어머, 이거… 이빨 자국 아닌가요? 혹시 뭐에 물리신 거예요?
개?”
준영이 그제야 맞은편 침대에 있는 도하를 노려봤다. 이 개같은. 도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괜히 치료실
안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씻으면서도 허리가 아파 몸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앞쪽으로 가슴에 키스 자국 몇 개가 전부라 그래도
목에 안 남겨 놓은 게 어디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주걱으로 제 엉덩일 후려치고 그것도 모자라
섹스하면서 몇 번이나 물고 빨던 게 떠올랐다. 나중엔 정말 뜯어먹을까 봐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던 것도.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올라온다. 누군가 하고 봤는데 낯선 차였다. 뭐지.
가까이 오는 걸 보니 운전대에 앉은 게 도하다. 눈이 커져 있는데 잠시 후 차가 빌라 입구에 멈춰 섰다.
도하가 먼저 운전석에서 후다닥 내리고 곧 보조석 문이 열리고 준영이 내리는데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허리를
한 손으로 짚은 모양새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너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어, 그냥.”
“운동하고 왔어.”
“어떻게 알았어?”
“괜찮아요?”
“괜찮아.”
“병원 다녀오셨어요?”
준영을 따라가던 이건이 걸음을 멈췄다.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렸기 때문이다. 연우인가 싶어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제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박태경이 툭하면 연락했기 때문이었다.
“강이건. 전화 왜 안 받아?”
“누군데. 누가 괴롭혀?”
“…아니요.”
말을 얼버무리니 도하가 혹시 그 도둑놈이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도둑놈은 연우를 가리키는 거였다. 이건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그런 녀석이라면 공부하자고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그런 녀석도 친구라고 편을 들다니. 도하는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곧바로 준영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준영은 벌써 집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매정하긴. 그 앞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뭐예요? 빨리 열어줘요.”
“올라가. 나 힘들어.”
“나중에 해.”
“너… 내 얼굴 안 보여?”
CH 14.
준영이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간호사 말대로 엉덩이는 붉은 자국이 곳곳에 있었고
위쪽으론 이빨 자국도 선명했다. 손을 뒤로해서 그 부분을 만지며 인상을 쓰는데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이도하가 제 엉덩이를 때리고 이빨로 짓씹던 그 장면이. 제 이름을 부르면서 저속한 말들을 쏟아붓던 게. 하여튼
이 자식은 섹스하면서도 입을 가만히 두질 못하지. 그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단전 아래가 뻐근해진다.
환상을 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서준영이란 인간에 대한 환상. 비겁하고 보잘것없고, 겁 많고 이기적인
인간인 걸 깨닫게 되면 용광로처럼 들끓던 그 감정들도 식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됐을까 머리맡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손을 뻗어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도하였다. 그냥 받지 말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뭐 해요?]
“누워 있어.”
[허리 괜찮아요?]
“…아까보단 나아.”
[엉덩이는?]
“…….”
[배는? 안 고파요?]
“뭐?”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리가 지끈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가 문을 여는데 누군가 문 옆에 쭈그려
앉은 모습이 보인다.
“접시만 두고 갔다며?”
준영이 한번 흘겨보고 나서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도하가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넣어 열고서 뒤따라 왔다.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가더니 빈 접시 두 개와 수저 물컵을 챙겨 테이블에 세팅했다. 손님용으로
장만했던 그것은 늘 강이건이 사용했는데, 며칠 동안은 도하가 쓰는 날이 더 많았다.
“새우 안 넣었지?”
“너희 집엔 없는 게 뭐야.”
“서준영.”
“재미없어.”
밥을 어느 정도 먹었을 때 도하가 뜬금없이 샴페인 얘기를 꺼냈다. 그 말에 준영이 영문 모르겠는 표정을 했다.
“무슨 축하?”
“오늘부터 우리 1 일이잖아요.”
“아이, 좋아.”
“무슨 1 일?”
“미쳤냐. 그런 걸 왜 너 혼자 정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수저를 접시에 올려놓고 나서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기절할
때까지 할 거 다 해놓고 남의 허리랑 엉덩이도 작살내 놓은 녀석이 버린다고 말하다니.
“너 양심이 없구나.”
“있을 거 같아요?”
하, 하긴. 너한테 양심을 바라는 건 개한테 뿔을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지. 자고로 있을 수 없는 소리였다.
섹스 횟수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지만 일곱 번이란 소리에 준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쓰레기통 안에 그 콘돔이
다 사용한 거 맞구나. 이 새끼. 이 짐승 같은 새끼. 준영이 인상을 쓰자 도하가 괜히 뜨끔해서는 아랫입술을 쓱
핥는다.
“…뭐?”
중간중간 기절하는 바람에 몰랐는데, 어쩐지 앞이고 뒤고 쓰라리고 따갑더라니. 허리 통증까지 겹쳐지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 화를 냈다.
“뭘”
“내가 3 초는 아니라는 걸. 정력이 존나 세다는 걸.”
“이 미친….”
도하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준영에게 물컵을 건넸다. 이거 마시고 진정해요. 준영이 그것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화가 나서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데도 도하는 앞에 앉아 활짝 웃는다.
“읽고 있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요.”
“아니.”
단칼에 거절당하자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밥을 먹고 어떻게든 자고 가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준영은 저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좀 쉬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대체 자신이 있으면 왜 못 쉬는 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안 돼.”
“누가 네 애인이야!”
“너.”
“뭐?”
“서준영.”
“한 번 잤다고 아주 맞먹어라.”
“안 궁금해.”
“싫어. 안 해. 가.”
“우와! 정답.”
“…….”
“그래도 가긴 싫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파에 다시 눕는다. 준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 같아선 소파에서 끌어 내리고
싶었지만 허리가 아프다 보니 그것도 쉽질 않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든 채 노려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멈칫했다. 제 모친이다. 낮에 받질 않아서 다시 건
모양이었다.
“왜 안 받아요?”
“…….”
“누군데? 김민석?”
“어머니.”
“죄송해요. 종일 정신없었어요.”
[별일 없는 거지?]
“…네.”
경혜란 이름이 나오자 준영의 시선이 소파로 향했다. 도하는 이제 책 읽기를 아예 관두고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셨어요?”
“네.”
[참, 거기 괜찮은 한의원 있니? 엄마가 한약 지어서 보낼까 하는데…. 예전에 너 진맥 봐둔 기록이 있긴 한데
그건 좀 오래된 거라서. 아니면 시간 날 때 올라올래?]
“괜찮아요. 저 몸 튼튼해요.”
“아니에요. 많이 나아졌어요.”
“그럴게요.”
“네?”
침묵이 3 초 정도 이어지더니 그녀가 아니라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말끝을 흐린다. 무슨 말인데 그러냐고 더
묻지 않았다. 혹시 도하에 관한 얘기일까. 경혜는 알고 있다던데, 들었을까.
“어머님?”
23 년을 이모라고 부르더니 갑자기 바뀌어 버린 호칭에 준영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도하가 책을 덮고
다가오더니 준영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 앉고는 팔을 뻗어 준영의 손을 잡는다. 빼내려고 했더니 오히려 제
쪽으로 잡아당겨 이번엔 두 손으로 폭 감싸 쥔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걱정하지 말라고요.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돼. 나처럼 단순하게 살아.”
그 말에 준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하는 모른다. 달랑 하나 쥐고 있는 걸 잃어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이
어떤 건지를. 그러면 녀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너 하나 쥐고 있는 거라고. 그 말까진 듣고 싶지 않아,
더는 얘기를 하지 않았더니 다시 슬그머니 손을 끌어간다. 이번엔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제 입술로 가져가선
손가락에 쪽 입을 맞춘다.
“뭐 해.”
“그러니까 더 기운 빠져.”
귀여운 협박에 준영이 인상을 찌푸리자 도하가 씩 웃는다.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매번 줄 하나에 의지해서 걷는
기분으로 살았었다. 그 줄을 양쪽으로 잡고 있는 사람은 제 가족뿐이었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그것을
놓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무서웠다.
“아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가락을 풀더니 꾹꾹 마사지하듯 눌러준다. 손가락이 연결되는 부위를 돌아가며 눌러주자
묘하게 시원했다. 나이 들었나. 굳이 빼지 않고 놔뒀더니 이번엔 손목까지 주물러준다.
“좋죠?”
“조금.”
“엉덩이도 해줄까.”
“집에 갈래?”
의중을 물어보려는 찰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젠장. 무시하려고 했지만 앞에 앉은 준영이 빤히
보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군가 하고 꺼내서 확인하는데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매니저 선태였다.
[이도하! 너 왜 내 말 씹어? 언제 올라올 거냐고 계속 묻는데 대꾸도 없고. 나 너 어디 있는지 알아. 찾아간다!
진짜 쫓아갈 거야!]
“잘 지냈어요?”
“왜?”
“취소하라니까.”
[미쳤어? 왜 자꾸 엉뚱한 소리야. 게다가 너 영화제의 들어왔어. 대박인 건 감독이 누군지 알아? 김석윤이야,
놀랐지?]
그는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도하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시상식이다 뭐다 가면 붙들릴 테고 그러면 본가에도 들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며칠은 준영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누구야? 너 뭐 사고 쳤어?”
준영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더 물을 눈치길래 얼른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서는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갑자기?”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데 도하가 생긋 웃더니 그대로 사라진다.
아깐 그렇게 쫓아도 안 가더니. 그러다 곧 정색하고 표정을 굳혔다. 안 갔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처럼 왜 속으로
투덜거렸나 싶어 괜히 민망해져 목덜미를 긁적이곤 곧 안방으로 들어갔다.
* * *
이건이 쓰레기통을 들고 뒤쪽으로 걸어가던 중에 멈칫했다. 그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 시간인데 저기서 담배를 피운다는 건 불량 학생일 확률이 높았다. 조금 있다가 올까, 고민하다
다시 돌아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 것 같아 일단은 그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대부분 3 학년이었고, 재수
없게도 곽상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이건을 발견하더니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어이, 강이건.”
이건이 한숨을 쉬며 제 점퍼를 내려다봤다.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는데 상윤과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댔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이건이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확인했다. 낯선 번호에 누굴까 생각하는데 손안에서
휴대전화가 쑥 빠져나간다. 앞에 선 상윤이 가져간 전화를 귀에 댔다. 이건이 팔을 뻗자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리 주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윤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이 새끼 과외도 받아? 덩치랑 얼굴만 보면
자신의 패거리와 어울리는 놈인데 과외란 말에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긴 저딴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것만
봐도 대충 어떤 놈인지 각이 나오네.
“안 가, 씨발아.”
그러자 상대방이 ‘뭐? 너 누구야?’ 하고 묻는다. 이건이 다시 전화를 달라고 하자 상윤이 몸을 피했다.
“알 거 없어 병신아, 끊는다.”
간신히 전화를 낚아채 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그제야 저장하지 않은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게 기억났다. 빌어먹을.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상윤을 쏘아봤다.
“왜 남의 전화를 막 받고 그러세요!”
“지금 내 몸에 손댔어?”
“형이 먼저 대셨잖아요.”
“놓지?”
더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손목을 놓아주자 열 받은 상윤이 그대로 주먹을 날려 배에 꽂았다. 윽. 방심하고
있던 이건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상윤이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아니요.”
이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상윤이 손을 떼어내고 그런 이건을 보며 비웃었다. 병신. 주위에 있던
사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이 맞은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챙겨 들었다.
“인사 안 하고 가?”
* * *
“이 새끼, 진짜 괴롭힘당하나.”
어제 아홉 번이라고 말했을 때 준영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냥 대충 예감으로 말한
건데. 다음엔 진짜로 세어볼까. 근데 언제 하지. 오늘 하자고 슬쩍 들이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옷을 입고 향이 좋은 스킨을 바른 후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내려갈 타이밍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TV 로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훌쩍 지나서야
준비한 물건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잤어요?”
도하가 내미는 상자를 보고 준영이 흠칫했다. 성인 무릎 정도 오는 길이의 상잔데 대체 뭘까. 트렁크 안에서
봤던 물건들이 떠오르며 갑자기 뒷골이 당겼다. 그대로 문을 닫을까 망설이는데 도하가 안 들여보내 줄 거냐고
채근한다.
“저건 뭐야?”
“뭐야!”
“치긴 뭘 쳐!”
아니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준영은 어젯밤 일이 생각나 치를 떨었다.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는데 도하가
그것을 들고 소파 쪽으로 가더니 그 위에 선반에 올려둔다. 미친 거 아니냐고, 그걸 왜 거기다 두느냐고
물었더니 턱을 꼿꼿하게 치켜들었다.
“형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날 밀어내고 싶을 때마다 보라고.”
“뭐야, 트리였어?”
“아쉬워하네?”
“아니거든.”
“시끄러워.”
“왜 내가 루돌프야?”
“예쁘죠?”
그러다 기억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생모의 손을 잡고 본가로 향하던 그날.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신나
하던 기억. 그리고 커다란 청록색 대문 앞에서 제 손을 놓고 돌아서는 냉정한 얼굴.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눈빛만큼이나 서늘한 말투. 진한 향수 냄새. 돌아서는 그녀를 붙들지 못했던 건 그 눈빛 때문이었다.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상하게 눈빛은 아직도 또렷했다. 그때까지 준영은 세상의 모든 엄마는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자식을 남 쳐다보듯 하는 줄 알았다.
반짝이는 구슬을 서글픈 얼굴로 보는데 도하가 바싹 옆으로 붙더니 허리로 손을 가져다 댄다. 그 손을 치워내지
않고 놔뒀더니 이젠 아예 밑으로 내려간다. 이 자식은 참 아무 때나 손을 놀리는구나 싶어 기가 막혔다.
“엉덩이 좀 괜찮아요?”
“안 괜찮아. 아파.”
무어냐고 묻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로 포장된 물건을 꺼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오늘 주고 싶어서 샀을 뿐이라고.
한번 뜯어보란 말에 준영이 포장을 풀었다. 손수건인가. 하지만 도하는 그런 로맨틱한 인간이 아니었다. 포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눈앞에서 펼치자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것은 앞부분만 간신히 가려지는 흰색
작스트랩이었다.
“이게….”
준영이 인상을 쓰고 도하를 빤히 쳐다보는데 팬티 훔쳐간 게 미안한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기대와 흥분이
뒤범벅된 노골적인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걸 집어 던졌다. 으, 소리를 내자 도하가 그것을 다시 집어 든다.
“사람 마음을 이런 식으로 패대기치나?”
“너나 입어.”
“나는 좆이 커서 불편해요.”
“이 새끼가. 나도 안 작아!”
“지금.”
“나 좀 보여 달라고.”
“미쳤어?”
“넌 살아 있잖아.”
“콱 죽어야겠네, 그럼.”
끝도 없는 말씨름에 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또 두통 온다. 이마를 짚고 안방으로 가려는데 도하가 팬티를
들고 따라오면서 한 번만 입어 보라고 사람을 들들 볶아댄다. 트리 설치해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대체 입은 걸 봐서 뭐 하게.”
도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준영이 나오질 않았고, 참다못한 도하가 욕실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직 멀었어요?”
“일단 나와봐요.”
준영이 나오는데 가운으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보이지 않는다. 들춰보려고 했더니 그 손을 탁 쳐낸다.
“내가 들게.”
도하가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인터넷에서 이 팬티를 보자마자 서준영이 생각났다. 호텔에서 입혀보고 싶었는데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마당에 순순히 입어주진 않을 것 같아 일단은 빼둔 거였다. 기대감에 쳐다보는데 잠시 후
가운 아래가 벌어진다. 그 위로 손바닥만 한 흰 팬티가 보이자 도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엉덩이도.”
준영이 한숨과 함께 뒤를 돌더니 가운을 올린다. 흰색과 남색이 섞인 밴드가 허리와 허벅지 바깥 부위를 사선으로
가렸을 뿐 엉덩이는 그대로 노출됐다. 키스 자국과 앞니로 문 자국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도하가
손바닥으로 제 입을 문질렀다. 아, 미치겠다. 하지만 더 감상할 새도 없이 준영이 가운을 휙 내리고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왜 또. 보여줬잖아.”
“박, 아니. 아주 살짝 비비기만 하면 안 돼요?”
“아니, 5 초만.”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도하가 제 바지와 팬티를 앞쪽만 내리곤 성기를 꺼내선 엉덩이골에 대고 문지른다.
24 시간 발기한 상태가 아닐까 의심이 됐다. 단단한 그것을 골 사이에 대고 문지르는데 준영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제일 힘든 순간은 어쩌다 고기를 먹을 때라고 했다. 자신이 딱 그 심정이다. 어젯밤
먹은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그런 상태. 허리가 아픈 것도 병원에서 그 망신을 당한 것도
잠시 잊고 도하가 하는 대로 못 이기는 척 내버려 뒀다.
“침대로 가서 할래요?”
“…5 초라며.”
그걸 보는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젤을 가져올까, 아니면 침을 묻힐까 고민하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띵동 하는 벨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침대에 머리를 박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
“뭐야.”
황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는 준영의 얼굴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제야 도하도 지금 밖에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씨발. 아까 문자라도 남길걸. 오늘은 수업 오지 말라고.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준영이
옷을 챙겨 들고 욕실 쪽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너 가서 문 열어줘.”
도하가 배에 달라붙기 직전인 제 성기를 손으로 쳤다. 녀석이 팅, 하고 앞뒤로 꺼덕꺼덕 인사하듯 움직였다.
준영이 못 본 척하더니 욕실로 홱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고 도하가 이를 뿌득 갈았다. 강이건. 이 망할 곰탱이
새끼.
* * *
정말 영문을 몰라서 물었을 뿐인데 도하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준영이 음료를 준비해선 이건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허리를 다쳤다고 하더니 걷는 모양이 아무래도 불편해 보였다.
“어. 살짝 뻐근해.”
“큰일 날 뻔하셨어요.”
“연우는.”
“바, 바쁜 일이 있나 봐요.”
사실은 오늘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통화도 못 했는데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준영이 음료를 건네면서
이건의 얼굴을 가만히 살핀다. 아까 현관 앞에서 처음 볼 때도 긴가민가했는데 가까이 보니 한쪽 얼굴이 아주
살짝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손자국이 난 것도 같은데.
“네?”
“얼굴, 맞은 거 아니야?”
“조심하지.”
“놀고 있다.”
소파에서 듣고 있던 도하가 둘 사이에 껴들었다. 아까 전화기 너머를 통해 들려오던 이건의 목소린 당황한
기색이었고,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고로 친구는 아니란 얘기였고, 아는 선배라고 해도 거짓말로 둘러대는 걸
보니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덩치도 커다란 게 맞고 다니고.”
“전혀요. 완전 쌩쌩한데.”
“그래도.”
알았어요, 그럼. 어쩐지 순순히 일어서더니 두 사람을 지나쳐 현관 쪽으로 간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오른쪽으로 홱 틀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길 왜 들어가느냐고 물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가서 끌어내기엔 이건이 있어 그것도 쉽지 않았다. 도하가 홧김에 어떤
말을 쏟아낼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고.
“근데, 선생님.”
“응?”
“왜?”
아. 준영은 그제야 녀석에게도 어엿한 직업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도 반백수처럼 하고 다니길래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저번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꽤 인지도도 올라가고 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일한단
얘기가 전혀 없네.
* * *
연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댔다. 수업을 끝내고 강이건은 편의점엘 간다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손에 검은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그걸 연우에게 건네준다. 연우가 받지 않고 쳐다만 봤더니 주머니에 있던
손을 억지로 빼내 들게 했다.
“안 먹어.”
“왜.”
“내가 거지야?”
“그럼.”
“뭐가.”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
“누구? 선생님?”
“어.”
“서른셋.”
“되게 좋게 봤나 보다?”
말투가 묘하게 빈정댄다. 이건이 연우의 앞쪽을 불을 비추느라 정신이 없어 그것에 대해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니까.”
“너 여기서 가. 나 혼자 갈 테니까.”
“어둡잖아.”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이건이 봉투를 내밀다가 멈칫한다. 그르르, 연우의 뒤쪽으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소리뿐 아니라 반짝이는 빛 두 개가 둘을 응시했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연우가 그걸 발견하곤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건이 그쪽으로 불빛을 움직이니 거기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둘을 보며 잔뜩 꼬리를 세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르, 목 안쪽으로 울리는 소리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누구네 집 개일까. 동네에선 못 보던 갠데.
이건이 연우의 손을 붙들고 제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내 뒤로 와.”
“송연우.”
다시 부르자 그제야 손이 움찔한다. 이건이 앞으로 나서며 연우를 제 뒤쪽으로 옮겨놨다. 지랄 맞은 성격에
이건의 손을 꼭 붙든 것만 봐도 얼마나 겁에 질린 건지 알 수 있었다. 손 대신 옷을 붙들게 했더니 그대로 잡고선
등 뒤에선 가늘게 숨을 토해낸다.
그 말에 이건이 애써 웃었다. 가라고 해서 말을 들으면 개가 아니고 사람일 텐데. 공포심 때문에 상황판단이
흐려진 건지 모르겠지만, 박태경 앞에서 깡통을 물어뜯던 그 패기는 어디 간 걸까, 조금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세히 보니 이빨을 드러내고 둘을 쳐다보는 개는 백설이와 같은 진돗개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말라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위협하는 소리를 내고 있긴 했지만 막상 녀석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불빛을 비추자 뒤로
물러서며 잔뜩 경계한다.
“가지 마. 물려.”
연우는 그래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동네에 들개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식은땀을 흘려야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들개 중 대부분은 집에서 기르던 녀석들이었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던. 그렇지만 지금은 버려진. 제 처지랑 비슷해 동병상련을 느끼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까스로 손을 떼어낸 이건이 천천히 몸을 숙이고 앞으로 다가가며
개와 눈을 맞췄다.
그르릉, 개는 여전히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일정 거리 떨어진 곳에서 이건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소시지를
내밀자 개가 제자리에서 킁킁, 냄새를 맡는다. 이건이 그것을 든 채로 가만히 있자 잠시 후 한 발 한 발 앞으로
옮겨오더니 허겁지겁 소시지를 베어 문다.
“자꾸 주지 마. 안 가잖아.”
이건이 휴대폰 불빛으로 다리 쪽을 살피는데 작은 상처가 보인다. 다친 건가. 큰 상처는 아니지만 일부러 누가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미간을 찡그리고 더 살피려는데 개가 낑, 소리를
낸다.
이건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연우는 긴장은 조금 풀어졌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여전히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건이 개의 목 아래쪽을 훑어주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웅성대는
목소리도. 여기로 도망친 거 같은데. 어디지? 잘 찾아봐. 씨발 어디로 간 거야.
“꺼져, 병신들아.”
이건이 봉투를 챙겨 일어섰다. 연우를 한 번 봤다가 불빛으로 그 뒤쪽을 비췄다. 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다리 쪽에 있던 담배 자국이 누구의 짓인지 알 거 같아 인상이 써졌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머지 뒤에 녀석들도 얼굴이 잔뜩 풀어진 게 어디서 어른들 몰래 퍼먹은 모양이었다.
“못 봤어.”
그들 중 하나가 강이건에게 오더니 랜턴을 얼굴에 똑바로 비추며 낄낄댄다. 눈이 풀린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마셨나
보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이건의 가슴팍을 쿡 쿡 찌른다. 이건이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그 강도가
거세졌다.
그걸 보는 연우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만해, 씹새끼야.”
“야, 씨발 밟아!”
“죽여!”
여러 개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머리며 등짝으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씨발. 연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발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무언가 제 몸을
단단하게 감싼다.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무식하게 힘만 센 강이건은 들은 척도 꿈쩍도 하질 않았다.
CH 15.
준영이 엎드려 눈을 끔뻑였다. 침대에 찜질팩을 올려놓고 그 위에 허리를 대고 누웠는데 도하가 가지도 않고 제
침대에 맘대로 올라와선 가뜩이나 비좁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옆으로 누워 말도 없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길래 결국엔 그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고 모른 척 천장만 쳐다봤다.
“가, 좀.”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죠.”
“힘들어. 허리 아파 죽겠어.”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재워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근데 왜 자꾸 아래로 내려가지?”
도하가 배 아래까지 내려간 손을 다시 올리더니 가슴을 토닥여준다. 준영이 그 손을 치워내니 이번엔 위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차라리 몸을 만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뒀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겨준다.
“원래 까맸어.”
“몰라도 돼.”
“그랬나.”
천장을 보며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는데 뺨으로 도하의 손이 닿는다.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더니 눈을
맞추고 나서 몸을 더 옆으로 바싹 붙였다.
“이젠 머릿속으로 나만 생각해요. 다 잊어버리고.”
“자꾸 인상 써서 여기 주름 생겼어요.”
“거짓말.”
“뭐 해?”
“팔베개해주게요.”
“하지 마.”
“치우고 베개 줘.”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준영이 제 베개를 가지러 일어나려다 관두곤 마지못해 머리에 힘을 빼고 누웠다. 하필 그곳이 팔뚝도 아니고
손목이라 도하가 투덜댔다.
“괜찮아.”
“응.”
“응.”
“뭘.”
준영이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라…. 속궁합이야 잘 맞았다. 저도 엊그제 한 행동이 있으니 그것까진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여전히 제게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자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보니 완전 까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희망은
있으니까 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준영이 대답 대신 맞추던 시선을 반쯤 내리깔았다. 싫다는 거절이 없었기에 도하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을
벌리며 꾹 다문 입술을 감쳐물고 부드럽게 빨아주니 제 팔을 베고 누운 목이 긴장으로 굳는 게 느껴진다.
혀로 입술 사이를 문지르는데 다문 입술이 좀처럼 열릴 생각을 않는다. 저번처럼 손가락이라도 넣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눈동자를 위로 올려 준영과 시선을 맞췄다.
“입 좀… 벌려 봐요.”
“뽀뽀만이라며….”
“살짝만. 응?”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조금 벌어지자 도하가 기다렸다는 듯 거기에 제 입술을 겹치고 혀를 밀어 넣는다. 준영은
똑같이 혀를 내밀진 않았지만. 도하의 입술이 제 입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도 않았다.
춥춥거리던 도하의 입술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준영의 턱으로 그리고 목덜미 쪽으로 움직이며 거기에 코를 깊숙하게
파묻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준영이 도하의 어깨를 붙들고 밀어냈다.
“…그만해.”
“냄새 좋다….”
“…자?”
“…아뇨.”
“그럼 뭐 하는데.”
“…좋아서요.”
“…좋아서 눈물 날 거 같아요.”
도하가 얼굴을 더 깊게 파묻으며 문지른다. 간질거리는 것보다 애끓는 마음이 느껴져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다른 행동을 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뒀더니 10 여 분 정도 있다간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들고 평소처럼 웃으면 농담을 했다.
* * *
아침 일찍 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던 도하가 빌라 입구 앞에서 멈칫했다.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개집 앞에 강이건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백설이 말고도 비슷한 흰색 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니 인기척을 느낀 이건이 먼저 돌아봤다. 얼굴엔 흰색 마스크를 쓰고서.
“그럼.”
무심한 얼굴로 그러냐며 제 갈 길을 가려던 도하가 다시 뒷걸음질 쳐 이건에게 와서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에
이건이 슬그머니 마스크를 위로 더 올린다.
“왜, 왜요?”
“맞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니긴. 이건이 막을 새도 없이 도하가 순식간에 마스크를 벗겨냈다. 얼굴에 멍은 없었는데 입가가 살짝 터졌다.
그걸 보는 도하가 쯧, 혀를 찼다. 설마 했는데 진짜 얻어터지고 다니는구나 싶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근데
언제 맞은 거지. 어젠 이 정돈 아니었는데.
“너 도둑놈한테 맞았어?”
“때리긴 했고?”
“…들죠, 그럼.”
도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이건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건은
또래보다 항상 키도 덩치도 컸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순한 성격 탓에 아이들이 한 번씩 시비를 걸어왔고 참다
참다 딱 한 번 맞대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같은 반 남학생 하나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상대방 부모에게 죄송하다고 빌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 뒤론 장난으로라도 아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늘 조심한다고 했더니 이젠 덩칫값 못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다 골병든다.”
우리 이건이가 나오면 꼭 뒤끝이 좋지 않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건 알았다. 이건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슬쩍 옆으로 떨어졌다.
“공, 공부해야죠.”
“과외도 계속하고?”
“…그렇죠.”
“그건 아닌데….”
도하가 말을 끝맺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건이 초조한 얼굴로 지켜봤다. 아니면 뭐란 말이지.
“네?”
“또, 왜 이러세요….”
“내가 너 내 친동생 같아서 그래. 외국도 보내주고 가이드도 붙여줄게. 가고 싶은 데 어디야? 원하면 데 말만 해.
혼자 가기 그러면 도둑놈이랑 같이 쌍으로 보내줄까? 한 달만 다녀와.”
* * *
막 잠에서 깬 준영이 얼굴을 부비고 나서 욕실로 향했다. 잠이 깨질 않아 세수하려고 거울을 봤다가 잔뜩 구겨진
제 미간을 보고선 멈칫했다. 자면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건지 도하 말대로 미간에 보일락 말락 한 주름이
생겼다. 손끝으로 꾹 눌러 문질렀지만,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거기다 앞머리까지 너무 길어서 뒤로
넘겼는데도 자꾸만 눈을 찌른다.
꽃병을 옆으로 좀 치워놓고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는데 언덕 아래쪽에서 도하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복 바지에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친 걸 보니 조깅하다 오는 길인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하는 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몸매 감상을 하는데 갑자기 도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본다. 흠칫 놀라고 당황해서 도망치듯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뭐야, 꼭 훔쳐본 것 같잖아.
괜히 기다린 것 같아 머쓱한 마음에 컵을 정리하고 안방으로 향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현관 쪽으로 가서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이건이 마스크를 낀 채 서 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이건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난 안 갖다 줘도 되는데….”
“…그게 아니라….”
말끝을 얼버무리는 이건의 등 뒤로 도하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려 준영이 쳐다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준영의 시선을 따라 이건도 같이 고개를 돌렸다가 도하를
발견했다. 아까는 저를 막 죽일 듯 노려보더니 지금은 또 태평하게 휴대폰에 빠져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더니 곧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이건이 대수롭지 않게 준영에게 통은 이따 수업할 때 가지러 온다고 말했고,
준영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이 등교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위층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하라니까. 뭐가 문제야.”
하아,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하다. 뭐지, 열 받아서 끊었나 싶어 확인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야.]
“왜요.”
[너 서준영이랑 잤어?]
[못 잤지?]
[장난해?]
“사장님 저 기억하세요?”
“애인한테 주실 건가요?”
“네.”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다. 조만간 애인이 될 테니 미리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원래 말하다 보면 이뤄진다고 했으니까. 뭐, 너무 늦게 이뤄진 감이 좀 있긴 하지만….
“네. 포장하지 마시고, 그냥 오다 주웠다는 느낌으로 말아서 주세요. 양은 저번에 샀던 꽃병에 꽂힐 정도로요.”
“감사합니다. 종종 올게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다음엔 옆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거침없이 저번에 콘돔이 있던 자리로 가서는 콘돔과
젤을 챙겨 들고 계산대로 갔다. 역시나 지난번 마주했던 중년 남성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도하를 한 번에
알아봤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거… 계산해 드려요?”
“…이게 제일 큰 건데….”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약사가 비타민 음료를 하나 챙겨 건넸다. 그것을 받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엔 콘돔 봉지를 한 손엔 꽃을 들고 있으니 세상이 다 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생글생글 웃으며 주차해둔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못 보던 무리가 오토바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장면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낯익은 모습에 잠시 기억을 더듬다 저번에 봤던 그 녀석들임을 알았다. 사람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안장을 하늘 높이 올린 파란색 오토바이를 보고 기억해냈다.
낄낄대는 녀석들 사이로 한 녀석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걸어온다. 도하가 그를 쳐다봤다. 어디서 봤지. 그제야
녀석의 교복 재킷을 보고 이건과 같은 학교라는 걸 알았다. 안에는 시커먼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덩치도 제법
있었다. 녀석이 거의 삭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내놔.”
패거리들이 낄낄대고 웃었고 상윤이 가랑이 사이를 붙들고 터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손으로 톡, 뜯어낸다.
그걸 보는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고, 곧바로 상윤이 꽃잎을 손끝에 쥐고, 후, 하고 날려 보내는
시늉을 했다.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걸 보는 도하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
“그러게 잘 좀 받지 그랬어요.”
“…….”
“주워요, 얼른.”
“오, 정말?”
하. 상윤이 가소롭다는 듯 웃자 도하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타서는 시동을 걸었다. 지잉 창문이 내려갔고, 서늘한
얼굴의 그가 상윤을 바라봤다.
“왜, 쫄았어?”
상윤이 제 아랫입술을 핥더니 비열하게 웃었다. 스포츠카도 아니고 SUV 차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개조한 제
오토바이를 따라잡긴 힘들었다.
도하가 대꾸도 없이 무심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룸미러로 뒤에 녀석들이 따라오기 시작하는 게 보이자 손을
뻗어 위쪽에 있던 블랙박스 연결 코드를 거칠게 뽑아 버렸다.
* * *
점점 속력을 높이던 도하가 룸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오토바이 여러 대가 따라오는 게 보였다. 한두대가 앞지르려
하길래 차선을 바꿔가며 길을 막았다. 녀석들도 독이 바짝 올랐는지 덩달아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고속도로 입구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차를 급하게 꺾었다. 공사 중 표시가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토바이들은 계속해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한참을 더 달리다 보니 앞쪽이 막혀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도로를 새로 만드는 중이었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공사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하가 시동을 켠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뒤쪽으로 걸어가니 오토바이가 쭉 막아선 상태였다. 그 가운데 곽상윤이
있었다. 몇 분 전 제 꽃을 망가트린 놈이었다. 서준영 집 거실에 꽂아둘 거였는데. 꽃말도 딱 마음에 들었고.
도하가 그대로 채를 상윤에게 던졌고 날아간 채를 피하려던 상윤이 중심을 못 잡고 오토바이와 함께 옆으로
기울었다. 다른 사내들이 말릴 새도 없이 도하가 뛰어가더니 넘어지는 오토바이를 밟고 날아서 상윤의 얼굴을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무식하게 패던 도하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조금 전 상윤이 피우다 떨어트린 담배를 주워 들었다. 다시 그에게로
가 머리채를 휘어잡아 누르고 나서 목 뒤에 불붙은 담배를 짓뭉갰다.
“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지켜보던 무리가 숨을 멈췄고, 도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뭉개진 담배를 옆으로 튕겨 버리고
나선 상윤의 고개를 들게 했다. 얼굴 반쪽은 피범벅이었는데, 입에선 꺽꺽대는 소리만 났다.
“너, 내가 얼굴 기억했다?”
* * *
“응.”
유나의 대답에 친구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지만 유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우유를 계산했다. 연우가 우유를
고르는 척하며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 새카맣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였다.
유나가 동전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순간 연우는 그것을 먼저 발로 밟았다. 그녀가 연우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발 좀 치워줄래, 라고 웃으면서 묻는 얼굴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난다. 뱃속에서 뭔가 꼬이고
짜증이 솟았다.
연우가 천천히 발을 치우자 유나가 동전을 주워 들고는 탁탁 털어서 제 주머니에다 넣는다. 더 마주할 것도 없이
옆에 있던 친구가 그런 유나를 탁 잡아채선 반대편으로 돌려세운다.
유나는 뭐가 즐거운지 계속 웃었다. 그 모습이 예쁘다고 느끼는 자신이 싫어서, 강이건이 똑같이 느낄까 봐 그건
더 싫어서,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결국 몸을 돌려 옥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 * *
“머리 많이 자라셨네요.”
“네.”
[갈색도 잘 어울렸는데.]
“염….”
“네?”
“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폰을 눌러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갑자기 조용하니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다. 이래저래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그러다 어젯밤 자고 간다는 걸 끝까지 내쫓아서 그거에 조금 삐친 건가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궁금해하며 쳐다보는데 여자가 연우의 손을 붙든다. 연우가 곧 그 손을 빼어내 햄버거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아, 준영이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이건에게 얼핏 듣기론 연우의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다가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혹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모친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본의 아니게 훔쳐본 기분이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연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중년 여성만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서 있는 중이었다.
* * *
준영이 룸미러를 내려 머리를 확인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를 보고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염색하긴
했는데, 약을 바르고 기다리면서 후회가 됐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어 바로 포기했지만. 다행히
짙은 갈색이라 그렇게 티는 안 나는 거 같은데.
“꼭 그 얘기해서 한 거 같잖아….”
괜히 머리를 한 번 헝클고선 룸미러를 내리다 저도 모르게 으억 비명을 질렀다. 도하가 바로 앞에 서서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놀래라. 가슴을 쓸며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도하가 제게
다가온다.
“왜 거기 서 있어? 사람 놀라게.”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괜히 귀가 화끈거려서는 딴청을 피우며 코트 주머니를 뒤져 전화를
찾는 시늉을 하는데 도하가 빤히 쳐다본다. 정확히는 머리에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형, 머리….”
“어?”
“잘랐어요?”
“어… 다듬었어.”
“…응.”
“올라가?”
“괜찮아요, 좀 쉬면 낫겠죠.”
“…그래.”
“들어가요.”
“…응.”
* * *
“무슨 일이에요?”
“뭐예요?”
“아프다며.”
도하가 그것을 받아 들고 안을 확인했다. 죽이었다. 고기랑 채소들이 들어간. 그걸 보는데 웃음이 터져 입술을
안쪽으로 꾹 물었다. 채소와 고기가 얼마나 큰지 죽이 아니라 카레나 짜장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 칼질을 이렇게 못할 수가 있다니.
“먹어. 간다.”
“어?”
“…알았어, 그럼.”
도하가 그 손을 놓아주고 나서 냄비를 들고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요. 준영이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눈이 커졌다. 저와 같은 집이 맞나 싶어서였다. 다른 공사를 한 건 아닌데 벽지부터 시작해 가구들이
전부 비싼 것들이다. TV 는 얼마나 큰지 벽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어릴 적 도하가 TV 를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제가 등 뒤에서 껴안고 뒤로 옮겨놓던 기억이 나서 잠시 웃음이 났다.
“TV 보다 눈 빠지겠다.”
도하가 웃더니 식탁으로 가서 냄비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다시 봐도 놀라운 비주얼이다. 가뜩이나 칼질도
못하는데 이걸 써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죽 안 먹어?”
“뭐?”
도하가 대꾸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더니 늘어지듯 눕는다. 가운이 벌어지면서 단단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준영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줬더니 이번엔 그 이불을 확 걷어찬다.
“더워요.”
걷느라 발을 움직이는 바람에 가운은 더 벌어졌고, 거의 성기 아래까지 드러났다. 괜히 민망해서 일부러 도하의
머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에 제 눈을 사로잡는 물건들이 있었다. 작은 책장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이
생일 때마다 선물했던 책과 그 밖의 여러 것들이었다. 저걸 다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눈을 떼지 못하는데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준영이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움직이느라 살짝 벌어진 가운 사이로 녀석의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선 곧 뚫고 나올 기세였다. 어쩐지 덫에 걸린 기분이다. 괜히 아침부터 저한테 데면데면하고 신경
쓰이게 하더니.
“…아파요. 엄청.”
“…토닥토닥 해줘요.”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더 멀쩡했다.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고, 혈색도 아주 좋았다.
한쪽 눈에 속쌍꺼풀이 얇게 생기긴 했지만, 그건 가끔 그러니 뭐.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도하가 그대로
눕더니 준영의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간다.
“얼른, 토닥토닥.”
준영이 기막힌 듯 웃다가 앉은 채로 성의 없이 가슴을 툭, 툭 두드렸다. 그랬더니 제 손으로 붙잡고 이렇게
하라며 토닥토닥 두드린다. 그 모양이 웃겨서 웃었더니 잠시 후 맞잡은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어디까지
하나 내버려 뒀더니 성기 있는데 가져가선 꾹 누른다. 준영이 인상을 썼다.
제 손에 딱딱하게 발기한 도하의 성기가 그대로 만져졌다. 도하가 아랫입술을 슬쩍 핥더니 준영의 손을 포갠
상태로 제 것을 만진다. 준영이 빼려고 했더니 깍지를 끼고서 놔주질 않는다.
“거짓말했지?”
“안 피하네?”
“….”
“…응.”
“솔직해라.”
“무거워. 비켜.”
“뭘.”
도하가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조금 더 밝은색을 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에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애초에 다 알고 있었군.
“이제 내가 조금 신경 쓰여요?”
“…글쎄.”
그 말에 도하가 웃으며 제 성기를 준영의 하체에 뭉근하게 비볐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의 바지 앞섶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섹스 한 번만 하고 내려가요.”
“…허리 아파.”
“날 믿지 말고 내 좆을 믿어요.”
검은색 눈동자에 맺힌 제 얼굴을 감상하다가 압박하고 있던 준영의 손목을 놓아줬다. 준영이 더는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있기에 팔을 위로 뻗어 서랍을 열고 무엇인가를 꺼냈다. 눈동자만 움직여 확인하던 준영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검은색 가죽끈이었다. 도하가 그걸 매만지면서 다시 준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손, 묶어줄까요?”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며칠 전 도하와 섹스할 때 수갑을 찼던 일이 처음엔 충격이었는데 묘하게 그
여운이 계속 남았다. 손목이 욱신거릴 때마다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욕구가 들끓는 느낌이었다.
차마 제 입으로 해달란 말을 못 하고 있으니 표정을 읽은 도하가 웃으면서 준영의 손목을 모아서는 가죽끈으로
아프지 않게 묶는다. 예쁘게 리본으로 마무리까지 짓고 나서 도하가 몸을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 준영을 다시 가만히 내려다봤다. 준영은 제가 쳐다볼 때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다.
아까 만지느라 셔츠를 들추는 바람에 한쪽이 올라가 맨살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불 좀 끄자.”
준영이 귀가 조금 빨개져선 웅얼거렸고 도하가 위쪽으로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환하던 방이
은은하게 가라앉은 주황색으로 바뀐다. 준영이 몸에 들어갔던 힘을 조금 풀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는 돌린
채였다. 도하가 얼굴을 같이 기울이며 그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나 좀 봐요.”
“…그냥 해.”
“부끄러워?”
“종일 나 신경 쓰였죠?”
준영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도하를 마주 봤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스레 웃었다. 쪽, 쪽, 콧등에 뺨에 입을 맞추더니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입술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빨다가 어깨에도 가슴 위쪽에도 한참을 그랬다. 더 내려와선
젖꼭지를 혀로 꾹 누르며 위로 올려주었고 동시에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팽팽하게 일어선 젖꼭지가 귀여워 손끝으로 비비고 혀로 다시 올려주고 몇 번을 그러다 아래쪽으로 내려와선
준영이 입고 있는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슬쩍 위를 봤더니 준영이 묶인 손으로 제 눈을 가리는 중이었다.
그대로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앞뒤로 움직여 주니 머리 위쪽에서 으음, 하는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고환 아래쪽까지 샅샅이 핥아주고 빨아주다가 입술을 허벅지 쪽으로 움직여 안쪽 살을 슬며시 깨무니 허벅지가
단단해지며 힘이 들어간다. 보드라운 살결을 손으로 한 번 쓸어주고 나서 몸을 다시 위쪽으로 움직였다.
빠듯하게 달라붙는 속살을 꾹꾹 눌러가며 안을 넓히고 풀어주자 준영이 한 번씩 허리를 들썩이며 움찔댔다.
신음이 샐까 봐 입술을 꾹 깨물고 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려 앞뒤로 왔다 갔다
반복하니 젤이 구멍 안에서 녹아 흘러나오며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젠장. 귀두로 그 부분을 문질러주면서 살살 달래다가 다시 꾹 눌렀더니 조금 전보단 수월하게 들어간다. 기둥을
잡은 채로 밀어 넣으면서 다시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선 허릿심을 이용해 뿌리까지 빈틈없이 쑤셔 넣었다.
“…아파요?”
“…….”
가뜩이나 방음도 안 되는 건물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가까스로 신음을 참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데 감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을 때였다. 마침 도하가 어떻게 알았는지 제 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리 와요.
준영이 팔을 위쪽으로 하며 도하의 가슴에 제 가슴을 포갰다. 묶인 팔을 머리 뒤로 걸고서 꽉 끌어안자 도하가
허리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 으음.”
“하아, 아.”
최대한 소리를 낮추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한편 도하는 준영이 귓가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신음을 내니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엔 느긋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점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위로 쳐대는 속도가 빨라졌다.
준영이 도무지 참지 못하고 우는 것처럼 흐으음 소리를 냈다. 도하가 허리를 빠르게 쳐대면서도 양손으로 준영의
얼굴을 붙들고 들어 제 눈을 보게 했다. 준영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다시 붙들어 고정시킨다.
몸이 아래위로 들썩이며 흔들렸고, 시야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야하게 웃는 도하의 얼굴이 유독 강하게
새겨졌다. 무서운 속도로 치대는 아래완 달리 제 뺨에 닿는 손과 입술은 이질감이 들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
CH 16.
이건과 연우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다. 다시 누르려고 하는데 위층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난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는데 도하가 막 내려오는 중이었다. 방금 씻었는지 머리엔 물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고, 티셔츠도 제대로 갖춰 입질 않아 내려오며 아래쪽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형….”
“왜 형이 키를 가지고 있어요?”
준영이 내려온다는 걸 억지로 앉혀놓고 대신 자신이 온 것이다. 섹스를 막 마치고 난 후라 그런지 얼굴도
달아오르고 눈빛이 더 야해진 거 같아 꼬맹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희 내일 올게요.”
“내가 대신 봐줄게.”
에? 이건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저번에 도하가 분명 그러지 않았나. 하나도 모르겠다고. 근데 어떻게
가르쳐주겠다는 건지. 그러면서 도하는 주방 쪽으로 갔다. 일단 문제를 풀고 있으라고 한 후 과일이라도 깎아줄
생각이었다.
이건과 연우가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꺼내는 동안 주방으로 간 도하는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곤 아연실색을 했다.
썰다가 만 양파와 당근이 있는 걸 보아 서준영이 제게 가져다준 죽이 여기서 탄생한 것으로 보였다.
“맞아? 누구한테?”
그 말에 연우가 콧방귀를 끼었다. 병신. 저녁에 노래방으로 오라고, 안 오면 죽이겠다고 하더니 연락이 없었던
이유가 있었구만. 어차피 연락이 왔어도 안 갔을 테지만, 꼴 좋다고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곽상윤이
얼마나 아이들을 괴롭히고 다녔던가. 저 혼자 힘센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배드민턴 채에 맞아서 실려 가다니.
“근데 누가 때렸대?”
말을 하던 이건이 갑자기 멈칫했다. 주방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도하는 뭘 하는지 칼을 들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차종이 도하가 끌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키도 크고. 연우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슬쩍 이건을 쳐다본다.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인간 아니야? 에이, 설마?
“이거 형이 했어요?”
“왜? 예뻐?”
“강이건, 너 내가 말한 거 생각해봤어?”
“…어떤 거요?”
“방학하면 외국 보내준다니까.”
그 말에 이건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분명 싫다고 했는데 왜 또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짜로
외국에 보내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른 척하고 딸기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피하는데 도하가 이번엔
연우를 찔러본다.
그러자 연우가 무슨 뜻인 줄 몰라 이건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건의 눈빛을 보니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하긴,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외국으로 보내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싫은데요.”
“넌 왜.”
연우가 사과를 문 채로 도하를 째려봤다. 갑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형은 말이다. 어릴 적에 굉장히 자기 주도적으로 살았어. 학교와 집도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고. 너네도 좀 그렇게 살란 말이야.”
듣고 있던 이건이 질색했다.
“형….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선생님 서울 가신대요?”
“사신다는데?”
“형이 그래?”
“네. 저번에… 그냥 여기서 먹고살 만한 일자리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가을엔
시내에 카페 자리도 알아보고 하셨는데….”
“카페?”
“북카페요….”
“미쳤어!”
도하가 버럭 소지를 지르자 이건과 연우가 흠칫한다. 준영이 여기 머무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싶었다. 이곳도
자세히 보면 살기 좋은데.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나쁘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자신은 그럴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서준영을 데리고 올라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농담이었겠지,
싶으면서도 어쩐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감춰지질 않았다.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이 창가 쪽을 한 번 쳐다봤다. 이 시간에 들어올 차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격한 도하의 반응에 아는 척을 할
수 없어 사과를 입에 물고 문제집을 푸는 척했다.
* * *
준영이 TV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바꿨다. 영화와 드라마를 번갈아 가며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보는
TV 는 낯설었다. 채널을 돌리는데 드라마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선배의 작품이었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 남자 주인공 캐스팅을 두고 골치를 썩인다고 하더니 일이 잘 풀렸나 보다.
대체 남자주인공이 누군가 싶어 보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린다. 고개가 저절로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도하가
장난하는 건가, 했는데 느낌이 어쩐지 싸하다. 모른 척할까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준영 씨… 왜 여기 있어요?”
“오랜만이에요. 혜윤 씨.”
“도하는요? 여기 사는 거 아니에요?”
혜윤이 먼저 소파에 앉았고 준영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제집이 아니니 차를 내주는 것 또한 어려웠다. 오늘
처음 온 거라 뭐가 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고….
“앉으세요. 제가 다 불편하네요.”
네. 준영이 자리에 앉는데 손목에 빨간 자국이 보인다. 그걸 보는 혜윤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서준영이 제 동생을 얼마나 피해 다녔는데. 모친에게 들어 위아래층으로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도하네
집에 있는 건 아무래도 수상했다.
“혹시… 준영 씨….”
“네?”
“…감금당한 건 아니죠?”
준영이 당황한 얼굴로 네? 하고 되물었다. 감금이란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설마 도하가
저를 여기다 감금시켰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다 문득 제 팔에 쓸린 자국을 보고선 묘하게 납득이 가선 슬그머니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 * *
혜윤이 운전석에 앉아 손목을 잡고 돌렸다. 옆자리엔 도하가 앉아서 미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애들을
공부시켜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보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 큰누나가 주로 몰고 다니던
승용차가 입구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준영과 혜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도하가 제 누나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
“이거. 읽어봐.”
도하가 그것을 본 체도 하지 않고 혜윤을 쳐다봤다.
“뭔데.”
도하가 종이뭉치를 내려다봤다. 시나리오였는데 앞쪽에 제목과 감독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선태가 전화로
말한 그 감독이었다. 꽤 유명했고 감독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나리오라고 도하를 꼭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단다.
“그럼.”
“뭐야, 이게!”
“내가 누나 고소한다!”
그 말엔 픽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나한테 진짜 왜 이래?”
“네가 돈이 될 만하니까.”
“야. 어리고 잘생긴 것도 한철이야. 사람은 능력이야, 능력. 너 능력 있어? 서준영 만나는 거 할아버지가
아시면 어떻게 될까. 너한테 증여해주신 재산 먼저 몰수할걸. 그때도 네가 지금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능력도 없고 빌빌거리는 어린놈을 누가 좋아해!”
“주인공이야?”
“상대역?”
“악역.”
“참 나. 다들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조심해서 가.”
혜윤이 준영에 대해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손목에 그 자국도 그렇고 설마 싶으면서도 다 큰 성인이 그렇게 갇혀
있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제 동생이 그 정도로 정신병자도 아니고.
도하가 대답이 없자 혜윤이 그대로 시동을 켜고 차를 후진시켜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운전을 험악하게 하는지 뒤늦게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자고 가라고 그럴 걸 했나 후회가 됐다.
서둘러 한층 더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갔더니 준영이 소파에 앉아 깍지를 낀 채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저를
돌아본다. 집으로 돌아갔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곤
걱정이 됐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들어가는데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혜윤 씨는.”
“갔어요.”
“나 때문에 많이 놀랐겠다.”
“그럼 다행이고….”
준영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아침 드라마서나 볼법한 것들을 읊어대며 자신의 누나를 악질 시누이쯤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조금 기가 찼다.
“대신?”
준영의 시선은 도하가 들고 있는 흰 종이뭉치로 꽂혔다. 뭐냐고 물었더니 도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쪽으로
치워 버린다. 대충 봤을 땐 시나리오였다. 아니나 다를까 팔을 뻗어 가져오니 제목과 감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혜윤이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해가 됐다.
앞부분을 읽던 준영이 고개를 들어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왜 안 해?”
“바빠지면 형 못 보잖아요.”
그 말에 준영이 피식 웃었다.
“왜 못 봐. 한 번씩 보면 되지.”
작은 북카페 같은 거라도 차려서 먹고 살 만큼만 벌면서 그렇게 사는 것. 누군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모른다. 직장이건 사업이건 편한 건 없다고 하겠지만 그만큼 올라가는 건 제게 부담이었고, 생각만으로도 숨
막히는 일이었다.
준영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도하가 그대로 준영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눕는다. 대본 때문에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아 그것을 손으로 거둬냈더니 저를 내려다보는 준영의 얼굴이 보였다.
“형 데리고 올라갈 생각 했는데….”
“응.”
준영이 순순히 대답하자 도하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손을 뻗어 준영의 턱을 만지고 뺨을 만지고 하는데도 준영은
그런 도하를 쳐다볼 뿐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해줘?”
“싫으면 말고.”
“그럼 나야 좋지.”
“나 더는 못 해. 허리 아파.”
“알았어요.”
“하아, 전화 왔어.”
도하가 입술을 겹치며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준영이 움찔한다. 아까 젖꼭지를 물고 빨아서 아픈데 이번엔
손끝으로 건드리고 누른다.
“아파. 더 못 한다니까.”
“안 한다며 거긴 왜 만져?”
* * *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그건 진짜 아니다.”
“병신.”
“형 나오셨어요?”
“어, 우리 이건이 인사도 잘하고 착하네. 인마, 송연우. 너는 애새끼가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어떻게 된
새끼가 선배를 보고 인사를 할 줄도 몰라.”
연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이자 동현이 그런 연우의 머리를 한 대 툭 치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물건을 사러 왔나 하고 봤더니 그게 아니라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연우가 조금 전 맞은
머리를 붙들고 계산대 앞에서 웃고 있는 그를 노려봤다.
“재수 없어.”
“맨날 나만 보면 지랄이야.”
그 말에 이건이 웃으면서도 편의점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맨날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동현이지만 편의점
아가씨와 눈을 마주치고 웃을 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사람의 얼굴까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연우의 말에 이건의 고개가 돌아갔다. 연우가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저를 쳐다보는 모습이 뭐가 되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긴 뭐 제가 송연우 마음에 든 적이 얼마나 있겠는가.
“왜 나한테 시비야?”
뜬금없이 김유나 얘길 하는 바람에 이건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유나가 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저는 지금 누군가를 사귈 마음이 없었고, 그건
유나에게도 충분히 말해둔 상태였다.
“나는 대학 가면 그때 사귈 거야.”
“안 사귄다고는 안 하네.”
“어?”
“잘 사귀라고. 예쁜 애랑.”
이건이 호빵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어금니로 빨대를 꾹, 꾹 짓씹으며 그런 이건을 째려봤다. 하지만
이건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빵 하나를 다 먹어치웠더니 연우가 맛있느냐고 묻는다. 이건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제 앞에 있던 호빵을 하나 집어 던졌다.
* * *
준영이 엎드린 채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벅지 중간에 팬티를 걸치고 다리를 벌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꽤
자극적이었다. 도하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잔뜩 짜 넣은 젤이 녹아서 성기가 번들거렸다. 일부러 감질나게
넣었다 뺐다 하니 준영이 애가 닳는지 손을 뒤로 뻗었다.
아깐 뽀뽀만 해줄 것처럼 하더니, 지금은 마음이 급한지 먼저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몸을 여기저기
만지는데도 처음처럼 거부감을 내비치거나 하진 않았다. 여전히 민망한 건지 시선은 자꾸 피하긴 했지만, 그거
빼면 며칠 만에 이룬 성과는 놀라웠다.
그러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열여덟 첫 섹스 때 자신이 제대로만 했더라면. 좀 더 어른스럽게 굴었다면 그때
관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형, 팔 뒤로 줘요.”
단번에 알아들은 준영이 망설일 것도 없이 양팔을 뒤로 뻗었다. 도하가 그 팔을 붙들고선 허리를 뒤로 뺐다가 콱,
하고 쑤셔 넣었다. 그러자 몸 전체가 요동을 친다. 아, 짧은 단발성 신음에 도하가 다시 한번 뒤로 뺐다가 짧고
빠르게 콱, 콱, 쑤셔 넣었다.
으으음, 준영이 신음을 참으며 내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방음이 안 되기 때문인지 준영은 소리를 어떻게든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걸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 또한 도하는 즐거웠다. 팔을 그대로 확 잡아당기니 준영의 몸이
딸려 올라온다.
계속해서 쳐대는데 준영이 흐흐응, 야릇한 신음을 내더니 갑자기 몸을 굳히고 파르르 떤다. 구멍이 조금 전보다
더 조여졌고 도하가 참지 못하고 준영의 어깨를 이로 꽉 물었다. 준영이 움찔거리며 사정을 하는 사이 도하가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숨을 골랐다.
준영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렸다. 붙들린 팔을 빼려고 했지만, 도하가 꽉 잡고 놔주질 않아 그럴 수 없었다.
“나, 하아, 사정했, 아아.”
퍽, 멈추고 있던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 올려치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 사정한 준영의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지르자 준영이 신음을 내지도 못하고 입을 벙긋댔다. 사정 직후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를
만지니 죽을 맛이었다.
준영은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제대로 신음을 내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파르르 몸을 떨면서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부들거렸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헐떡이는데 도하가 뒤에서 팔을 풀어주고 몸을 떼어낸다.
그러고 소파 아래로 내려와선 준영의 얼굴 앞에 섰다. 소파를 간신히 짚고 앉은 준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데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을 붙들고 저를 보게 만들었다. 초점이 풀린 준영의
눈에 도하가 제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 * *
관중들의 함성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막 중등부 결승이 시작됐고 뒤늦게 도착한 준영이 꽃다발을 들고
관중석 쪽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중고등부 경기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도하네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 타고 와서 괜찮았어요.”
그때 중등부 선수들이 하나둘씩 입장을 시작했고, 거기엔 도하가 있었다. 저지 점퍼를 턱 아래까지 올린 도하가
자리를 잡고 서선 무덤덤한 얼굴로 관중석을 한 번 돌아보다 제 부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준영을
보고서는 입이 활짝 벌어지더니 양손을 흔들었다. 그걸 보는 경혜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했다.
아직도 자기가 아기인 줄 아는 걸까. 애교 떨고 그러는 거 보면 아기까진 아니어도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출발 준비를 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도하가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으며 몸을 풀었다.
녀석은 열여섯 치고는 체격도 몸도 꽤 다부졌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도 체격적으로 우수한 조건이었다.
코치가 왜 그렇게 수영을 시켜야 한다고 안달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물안경을 내려쓴 도하가 자리에 서서 자세를 잡았고, 곧 출발 신호음과 함께 선수들이 동시에 입수했다. 처음
출발하고 몇 초는 잠영으로 움직였는데 전에도 느낀 거지만 마치 그 모습이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유연해 보였다.
턴을 할 때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자꾸만 눈이 전광판 숫자를 확인했다. 도하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질주했다. 옆에 있던 선수 하나가 마지막 속도를 올리며 따라붙었고 마지막엔 둘이 비슷하게
동시에 들어왔다.
삐- 경기 종류를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체육관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 시선이 전광판으로 쏠렸고 잠시
후 그곳 제일 위쪽에 도하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걸 보는 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하의 부모님 역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물에서 나온 도하에게 코치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고개를 돌리던 준영이 문득 제 옆에서 손뼉을 치던 미정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아주 잠깐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준영은 괜히
신경이 쓰여 더는 좋아라 할 수가 없었다.
준영이 운전대를 잡은 채 톡, 톡, 두드렸다. 경기관람을 마치고 도하네 식구와 저녁을 먹은 후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차가 여간 막히는 게 아니었다. 술을 한잔 걸친 아버지는 뒷자리에 앉아 몸을 기대 눈을
붙이고 있었고 보조석에 앉은 민주는 누구와 주고받는지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였다. 미정을 보니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말에 준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민주는 도하라면 언젠가부터 치를 떨었는데 도하가 유달리 그녀를 괴롭힌 걸
생각하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뒤에 있던 미정이 한마디 했고, 민주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까 찍은 사진을 확인하다가 입으로 헐,
이라고 소리를 낸다. 앞차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준영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그랬어?”
그 말에 준영이 흠칫해선 민주를 쳐다봤다. 어린 줄만 알았던 여동생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당혹스럽기만 했다.
민주가 제 휴대폰을 가져가면서 남들이 보면 아마 오빠랑 사귀는 줄 알았을 거라고 투덜댔다.
준영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데 갑자기 운전석 뒤에서 미정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가 구시렁댔고 준영은 두 모녀 사이에 껴드는 대신 운전대를 꾹 힘주어 잡았다. 조금 전 미정이 무섭다고
했던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태연한 척 표정을 애써 정리했지만, 룸미러로 잠깐 마주친 미정의 심기 불편한
눈빛을 보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 * *
이불을 걷어서 도하에게 걸쳐주니 잠결인데도 거기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잠시 웃고 나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들어가서 더 자.”
“언제 깼어요?”
“30 분 정도 됐어.”
“아니. 원래 자주 깨.”
그 말에 도하가 허리를 끌어안은 채 매달려 얼굴을 문지른다. 준영이 답답해서 떼어내려고 했는데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 큰 덩치로 소파에 웅크린 채 저한테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말 안 듣는 강아지 같았다. 아니,
개.
“바다 보러 갈래요?”
“뭐?”
“지금?”
“응.”
“싫어. 힘들어.”
준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도하는 모른 척하더니 얼른 씻으라며 안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의심이 들었다. 밥 먹으러 가는 거 맞는 거지?
* * *
빌라 입구 앞에서 도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늦게 내려오던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각각의
색을 띠던 동네가 온통 하얗게 뒤덮여 눈이 시릴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도 하늘에선 굵은 눈송이가 내리는
중이었다.
“젠장. 거의 재난 수준이네.”
“그러게. 새벽에 눈 조금 온다고 하더니.”
“망했어.”
“형, 얼른 가요.”
“어? 왜?”
“얼른 가요.”
“눈 쓸러 나오신 거였어요?”
뒤쪽에서 듣고 있던 도하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가 아니라 졸지에 눈을 쓸게 생겼다고
한탄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준영의 손으로 옮겨간 빗자루를 자신이 도로 가져온다.
“추워. 얼른 올라가.”
준영이 아옹다옹하며 할아버지의 빗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추운데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시라며 할아버지의 등을
떠미는 걸 보고서 도하가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봤다. 박씨 할아버지가 미안하다며 위층으로 올라가자 준영이
도하를 부르며 한쪽에 있는 넉가래를 가리켰다.
“알게 뭐야.”
“그러지 마.”
“그럴래?”
“그런다고 진짜 가?”
“가라며. 빈말이었어?”
“쳐다봐서 뭐 하라고.”
“몰랐어요? 난 형이 쳐다만 봐줘도 좋던데.”
“그래?”
준영이 도하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지 몰라 그런 거였는데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얼마나 좋으면.”
“그래서인 거 같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고 준영이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하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준영의
맨손을 보고서 급하게 차로 가더니 장갑 두 개를 챙겨왔다. 하나를 준영에게 주고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착용하고 눈을 다시 치웠다.
“아, 이 새끼 안 받네.”
“누구한테 하는데.”
“곰탱이요.”
“야 깨우지 마.”
“꼭 자는 애를 깨워야겠어?”
그러더니 도하가 한쪽에 쌓인 눈으로 가서는 쭈그리고 앉아 무언갈 한다. 준영이 빗자루를 들고 가서 봤더니 눈을
뭉치고 있었다. 거기다 눈을 모아 붙이고 붙이고 하더니 제법 크게 만들어선 바닥에 대고 굴린다.
“기다려 봐요, 내가 아주 멋진 눈사람 만들어 줄 테니까. 형은 이건이 나올 때까지 거기서 쉬다가 빗자루 주고
들어가요.”
“됐어, 인마.”
“이건이 나왔어?”
“형 왜 거짓말했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도하가 본 척도 안 하고 눈을 굴렸다.
“네?”
그걸 보면서 준영은 기특한 마음과 동시에 짠하기도 했다. 도하는 순식간에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서는 세워놓고
제 차로 가서 무언가를 한가득 들고 나왔다. 그걸 보는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호텔 방에서 트렁크
안에 들어 있던 몽둥이와 초, 당구공 그런 것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형 그게 다 뭐예요?”
“눈사람 만들 재료.”
빨간색 당구공으로 눈알을 박더니 몽둥이와 채찍으로 양팔을 만들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초를 아래쪽에 떡하니
꽂았다. 그걸 보고 준영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고 이건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좆이야….”
“…….”
“발기한 것처럼?”
“밤에 보면 진짜 무섭겠다.”
“그러니까. 대단하셔.”
“그랬어?”
말하지 않은 덴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는데 도하가 또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찾았더니 이미 언덕
쪽까지 내려가며 넉가래를 밀고 있었다. 요령 피울 줄 알았더니 열심히 하네.
기특해서 쳐다보다 눈사람을 보곤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코에 꽂았던 초가 다시 아래쪽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코 자리에 당구공이 하나 더 박혀 있었는데 하필 그것도 빨간색이라 눈사람은 아까보다 더 기괴해
보였다.
CH 17.
한참을 그렇게 돌고 돌아 선물을 고르는 와중에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교복 위에 점퍼를
입고 연우가 매장 앞에서 무언가를 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가 보는 건 마네킹에 걸린 회색 목도리였는데
매장직원이 나와서 뭘 물어보자 고개를 가로저어놓고도 한참이나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모르고 정신이 팔려있었다.
연우가 흠칫 놀라선 돌아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 곧 엉거주춤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를 밖에서 만나 놀랐는지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해 보였다. 그 모습에 준영이 연우가 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봤다. 연우의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던 걸까.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몸을 홱 돌려 반대로 가려 한다. 준영이 저도 모르게 그런 연우의 가방을 붙들었다.
그래도 밤에 저랑 같이 수업도 하고 하는데, 생판 남인 것처럼 인사만 하고 가니 조금 괘씸해졌다.
“어디 가?”
“…집에요.”
얼렁뚱땅 고개를 끄덕였고, 곧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
앉아 있으니 어색하기만 했는데 다행히도 준영이 계속 말을 걸어줬다.
“오늘 방학했어?”
“네.”
“아… 네.”
“네… 괜찮아요.”
“어머님… 맞아?”
“한 달 정도 됐어요.”
“그렇구나….”
“너한테는 잘된 거 아닌가?”
“가기로 한 거야?”
“아직… 모르겠어요.”
“왜?”
“이건인 알아?”
“…아직이요.”
“녀석이 알면 많이 서운하겠네.”
“…아닐걸요.”
“갈 거면 너무 늦게 말하진 마.”
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세팅하는 사이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길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강이건은 지금쯤 학원에 갔을까. 올겨울 몇
번이나 더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코끝이 아려왔다.
* * *
“어.”
그 말에 잠깐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춥다, 들어가자.”
“뭔데.”
“장 본 거 조금.”
“뭐야, 이게.”
“낼 여행 가려면 이 정도 챙겨 가야죠.”
“여행? 너 어디 가?”
“너라니. 우리 여행인데.”
상자를 들고 집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하가 냉장고 앞에서 채소와 과일을 정리하는 동안 준영은 다른
것들을 한쪽에 꺼내 확인했다. 구워 먹을 고기부터 시작해 온갖 채소들이 다 있었다.
“너 어디 펜션 예약했어?”
“비슷해요.”
비슷한 건 또 뭐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음식량이 아무리 봐도 너무 많다. 냉장고로도 모자라 김치 냉장고
빈칸까지 채워 넣을 정도니, 이건 하루 이틀 먹을 양이 아니었다. 준영이 혹시나 해서 며칠 묵는 거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가서 한 달 정도 묵을 생각인데.”
도하가 시무룩한 얼굴로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거 보니 준영도 더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집을 비워놓고 한 달간 다른 곳에서 지내는 건 어려웠다. 작년 겨울에도 며칠 집을 비웠다가
보일러 온수가 터져서 고생하지 않았던가.
“3 일.”
“왜 웃어, 갑자기?”
“뭐?”
“혼자 심심할 거 같으니까 송연우도 데리고 가는 걸로 하죠.”
준영은 도하가 처음으로 도둑놈도 송선우도 아닌, 연우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여행에
선뜻 데려가겠다는 속뜻이 궁금해졌다. 물론 애들 의향이 가장 중요한 거긴 하지만.
“진심이야?”
* * *
현관문이 열리고 도하가 들어왔다. 대충 저녁을 만들어 먹고 이건을 불러내 여행을 갈 거냐고 물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건은 준영이 간다는 말에 선뜻 간다고 했고, 연우한테는 자신이 따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아침 몇
시까지 오라고 말해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준영이 소파에 앉아 있다 막 일어나는 중이었다.
“이건이한테 말했어?”
“네, 간대요.”
“협박한 거 아니지?”
“연우.”
그러더니 막 가려는 준영을 붙들어 다시 소파로 끌고 간다. 잠깐만. 아직 가지 마요.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방에서 들어가서 잠시 후 작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걸 보며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저번에 봤던 그
속옷 사이즈의 상자였는데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심상치 않아 잠시 할 말을 잃고 쳐다보기만 하자 도하가 상자를
앞으로 내민다.
“받아요.”
“뭔데.”
“내 크리스마스 선물.”
“뭐?”
“형, 내 선물 샀어요?”
준영은 할 말을 잃었다.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을 다 돌아다니긴 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 하나
사긴 했는데, 본인 마음에 들지 그게 문제였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도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상자를
준영의 손에 쥐여 줬다. 그러고 나서 상체를 기울여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기대할게요.”
“너 혹시 무슨 도착증 있어?”
“무슨 도착증?”
“그거 그거잖아.”
“자고 갈래요?”
“…아니.”
“안 잡아먹을 테니 자고 가요. 내일 짐 챙기려면 형 도움도 필요해요.”
“좁아.”
“침대 가서 누울까요?”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하의 집에서 잠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생각보다 잘
지켜졌고, 덕분에 아침까지 푹 잘 수가 있었다.
* * *
“…선생님, 다 왔어요?”
준영이 도하를 쳐다봤다. 글쎄. 도하의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고 의아해졌다. 도로를 정비해 달라고 했다니. 한참을 그렇게 달리면서 옆쪽으로
계곡이 나타났다. 이런데 누가 살기는 하는 걸까. 펜션을 여기다 지어놓으면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장을 왜 그렇게 많이 봐왔는지 이해가 됐다. 근처에 마트는커녕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느냐고 다시
물으니 10 분 정도 더 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덜컹덜컹, 차가 흔들리며 몸도 같이 흔들렸고, 10 여 분쯤
달렸을까 커다란 나무가 드리워진 사이를 지나자 평지가 나타났다.
한쪽에 차를 주차해놓고 시동을 끄자 이건과 연우가 먼저 튀어 나간다. 준영이 차에서 내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건물은 사방이 통유리로 된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물이 따뜻해요!”
“여기 뭐야?”
“그게 아니라….”
준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봄이나 가을에 왔더라면 더 볼만했을 것 같긴 했다. 건물도 그냥
대충 지은 게 아니라, 꽤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언뜻 보이는 안에 가구들도 그렇고, 전시회처럼 꾸며진 실내도
그렇고. 한눈에 봐도 펜션은 아니었다.
“형. 여기 진짜 좋아요.”
그 말에 도하가 피식 웃었다.
“네. 완전 끝내줘요.”
“살고 싶어?”
“…진짜 도하 형이 팼나 봐.”
“근데 왜 때렸지?”
“깝치다 맞았겠지.”
이건은 걱정했지만 연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소문이 퍼졌는데도 곽상윤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었다.
고소하는 순간 자신이 얻어맞은 걸 인정하는 꼴이니 아마 먼저 고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몰래 뒤에서
나쁜 짓을 꾸미면 꾸밀 인간이지만.
“너희 짐 안 옮겨?”
등 뒤에서 도하가 갑자기 나타났고, 이건이 우억 비명을 질렀다. 도하가 왜 그러냐고 묻자 말을 얼버무렸다.
연우는 태연하게 짐을 들고 건물 쪽으로 움직였고, 이건이 도망치듯 짐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도하가 따라가선 문을 열어줬고,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구경하던 준영도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바닥과 벽은 다 대리석이었고, 천장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매달려 있었다.
이건이 그걸 넋을 놓고 쳐다봤다. 떨어질까 무서워 잠깐 인상을 썼다가 그대로 지나쳐 도하를 따라 주방으로
움직였다. 주방 쪽엔 밖으로 통하는 문이 따로 있었고, 그 앞에는 바비큐 구이를 할 수 있는 기계와 야외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
“팬티, 가져왔죠?”
* * *
“뒤진다.”
“깊어서 싫어.”
“그럼 이거 잡고 타.”
“애냐?”
“그러지 말고 내려와 봐. 물도 따뜻하고 완전 좋아. 추운데 수영하니 색다른 기분이야.”
이건이 손을 내밀었고 연우가 튜브와 이건을 번갈아 바라보다 마지못해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물이
제 턱까지 차올랐다. 물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고, 추워서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튜브에 팔을
걸치고 동동거리고 떠다니니 이건이 그 튜브를 앞에서 잡아당긴다.
“내가 태워줄게.”
그러자 이건이 저 멀리까지 헤엄쳐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잠수한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는데 잠시 후 제
다리 아래쪽에서 뭔가 닿는 느낌이 든다. 물속을 확인할 틈도 없이 가랑이 사이로 무언가 불쑥 들어왔다.
고기를 굽고 해물을 쪄 테이블에 올려놓던 도하가 창밖을 보며 웃었다. 식탁을 세팅하던 준영 역시 고개를
돌리더니 이건과 연우가 노는 걸 발견했다. 서로 목마까지 태워주고 웃으며 노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이 예전을 떠올리면서 슬쩍 웃자 도하가 해물을 큰 접시에 덜어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잠시 준영의
얼굴에서 아련함이 스치는 걸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저를 보는 마음이 정확히 어땠는지를.
“그때 어땠어요?”
“뭐가?”
음. 준영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도하는 굉장히 저돌적이었고, 막무가내였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땐 정말 뜨거운 불덩어리 같았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저도 같이 불타 버릴까 봐 무서웠다.
“모르겠어.”
“맨날 모르겠대.”
도하가 투덜거리며 다가오더니 준영의 어깨를 짚으며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창가를 등지고 서더니 준영의
엉덩이를 슬쩍 손으로 때리고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엉덩이를 맞을 때가 된 거지.”
“…아니.”
“…아니.”
“여전히 무서워요?”
준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하랑 있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랐다. 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문제에서 쉽게 헤어나오질 못했다.
도하가 철없이 군다고 해서 너까지 그러진 말라고, 제 모친이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속에 박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더는 맛있는 음식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모친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까.
딱, 도하가 다시 옆으로 오더니 눈앞에 손가락을 튕긴다. 그만 생각하란 뜻이었다. 쳐다보니 뒤를 한 번 봤다가
아이들 시선이 딴 데 팔려 있는 걸 확인하곤 얼른 준영의 뺨에 입술을 쪽 하고 누른다.
준영이 혹시나 싶어 돌아보려 하자 잽싸게 턱을 붙들고 입술을 겹쳐 문다. 밀어내려고 어깨를 붙들었더니 이번엔
손을 밑으로 내려 엉덩이를 꽉 움켜쥔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준영이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이건과 연우는 노느라 이쪽엔 관심도 없었다. 당황해선 도하를 피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너, 하지 마.”
“내가, 뭘.”
도하가 쫓아가며 못살게 괴롭혔다. 준영이 옆으로 움직이며 도망가다 의자에 툭 하고 정강이를 찧었고, 인상을
쓰며 상체를 구부렸다. 아, 씨. 도하가 가까이 와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아요?”
준영의 바지를 걷어 올리자 정강이가 드러났다. 방금 부딪친 부위가 빨갰다. 손으로 그 부위를 만지고 입을
가져가 호호, 하고 불어주니 준영이 민망한 얼굴로 다리를 뒤로 뺐다.
그 말에 준영은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집에서 오래 생활하고 바깥 활동과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런지 몸이
예전보다 굼떠진 것이 사실이니까. 괜히 찔려선 너도 나이 들어 보라고 핀잔을 줬지만 도하는 어쩐지 자신만큼
나이가 들어도 날아다닐 것 같았다.
“다 차렸으니 애들 부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입구 쪽으로 가더니 이건과 연우를 부른다. 산속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하고 와서 밥들 먹으라고 했더니 녀석들이 물 밖으로 나온다. 나오면서도 티격태격하더니 결국 이건이
잔디밭에 벌러덩 자빠졌다. 그걸 보고서 도하가 큭큭대고 웃었다.
“강이건 괜찮아?”
“아니요. 엄청 아파요. 근데 형은 되게 행복해 보이시네요.”
그 말에 이건이 조금은 감격한 표정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 저도 포함됐다고 생각하니 조금 뿌듯했다. 그래도
도하가 연예인 아닌가. 과연 활동하는지 그건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가보니 그 짧은
사이 별별 게 다 차려져 있었다.
“와, 진짜 맛있겠다.”
식탐 없는 연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준영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고, 자연스럽게 연우와 이건이
앉고 도하와 준영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도하가 술 하나를 따서 잔에 따라 주자 그걸 보며 이건이 표정을 굳혔다.
“형. 그거 혹시 술이에요?”
“우린 아직 어린데요.”
“열여덟이잖아.”
“그러니까요.”
도하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자 연우가 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간다. 보란 듯 꿀꺽꿀꺽 먹더니 입술을
한 번 핥기까지 한다. 샴페인이라 그런지 달고 음료수 같았다. 그걸 보던 이건이 인상을 찡그리자 도하가 잔을
채워준다.
도하가 제 이름을 성 빼고 부르자 연우가 질색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차라리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하고
나을 것 같았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채우자 이건이 준영을 쳐다봤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준영 앞에서
이걸 먹어도 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준영도 별생각 없는 듯 웃었다.
“괜찮아. 도수 낮아.”
이건이 사랑이란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고, 연우와 준영은 못 들은 척했고, 도하는 혼자 신나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맛있다. 이건 역시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어릴 적 뭣도 모르고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달고 맛있는 거 같았다. 자신이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게 특별히 더 맛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입맛을 다시자 준영이 보면서 웃는다.
“이건이 맛있어?”
“네, 완전.”
심상치 않음을 느낀 준영이 상자를 확인했다. 거기에 커플 젠가라고 적힌 걸 보고 덩달아 이건과 같은 표정이
됐다. 오롯이 도하 혼자 뭐가 좋은지 웃고 있었다.
“저 할래요.”
“3 대 1 이네. 해야겠네.”
준영이 곧 자포자기한 얼굴로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도하가 웃더니 나무블록을 가운데 쌓아놓고,
손가락을 한 번 풀어준다.
“그럼 커플을 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정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이건이랑 연우랑 하고 나랑 준영이 형이랑 하는
게 낫겠지?”
“나는 별로.”
준영이 대번 별로라고 하자 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연우도 꽤 불편한
기색이었다. 자기도 싫다면서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그러자 도하가 그런 연우를 보고 생긋 웃었다.
이건이 자긴 아무 상관 없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는 다르게 별생각 없는 이건을 향해 연우가 눈을 흘겼고
준영도 곧 포기한 채 시작하라고 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나니 도하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양주를
챙겨온다. 말릴 새도 없이 그걸 아주 작은 잔에 따르고선 가운데 올려놨다.
“미션 수행 못 하면 이거 마시기.”
“괜찮아요. 전 할래요.”
아니나 다를까 연우는 골드바를 노려보면서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중이었고, 잠시 망설이던 강이건 역시도
하겠다고 거들었다.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었다. 하지만 준영은 고민이 됐다. 어른이 돼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술을 먹이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상대방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연우한테 듣고 싶은 말 있어?”
“네. 이름 좀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맨날 저한테 욕해요. 병신이라고 하고.”
“상대방과 10 초간 눈 맞추기.”
“오오, 양호하네.”
도하가 얼른 하라고 하자 이건이 과일을 집어 먹으며 연우를 향해 돌아앉는다. 이건이 눈을 부릅뜨고 일부러 웃긴
표정을 짓자 준영도 덩달아 웃었다. 하지만 연우는 어쩐 일인지 쭈뼛거릴 뿐 제대로 돌아앉질 않았다.
“야, 빨리해.”
도하의 재촉에 연우가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이건과 눈이 마주했다. 일, 이, 삼, 도하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이건이 뭐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속쌍꺼풀이 있고 위로 살짝 올라가 매서워 보이기도 하는 눈이 웃으니 반달처럼
휘어졌다. 연우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도하가 바로 지적하고 나선다.
“피하면 벌주.”
“눈 가려워서 잠깐 그랬어요.”
그러더니 제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한다. 10 초가 끝나고 나서 이건은 무사히 넘어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연우는 어쩐 일인지 귀가 빨개져서는 대리석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도하가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돌렸다.
“상대방 귀에 5 초간 바람 불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이건은 깔깔대고 웃으며 좋아했다. 연우는 아직까지 귀가
빨개져선 그런 이건을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 도하가 준영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했다.
“이리 와요.”
“아, 그냥 술 마실래.”
준영이 인상을 쓰다가 마지못해 옆으로 가서 앉았다. 도하가 붙어 앉더니 귓가에 바싹 입술을 붙인다. 입술이
귓불에 닿자 준영이 흠칫해선 옆으로 도망가려 했고 도하가 그런 준영의 얼굴을 억지로 붙들었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데 준영의 표정이 오만상으로 구겨진다.
그걸 보며 이건이 좋아죽겠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연우도 이번엔 웃겼는지 입술을 꾹 누르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5 초가 끝나고 나서 도하가 잡고 있던 준영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새빨갛게 변한 준영의 얼굴을 보고서 도하가
배시시 웃었다.
“좋았어요?”
“닥쳐.”
준영이 제 귀를 문질렀다. 이건과 연우는 그저 이게 게임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준영은 그게
아니라 괜히 도하가 미워져 눈을 흘겼다. 다음 차례는 저였는데 뭘 뽑을지 긴장됐다.
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나무블록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건의 눈이 커졌고, 연우도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 싶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도하가 그걸 낚아채선 제 입에 털어 넣는다. 지켜보던 이건이 반칙이라고 하자 도하가 생긋 웃는다.
“흑기사야.”
그런 도하를 보며 준영이 씁쓸하게 웃었는데 이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준영이 도하에게 미안할 게 뭐가
있겠는가. 더 궁금해서 물을 새도 없이 다음 차례는 연우가 됐다. 조각들이 빠진 탑을 가만히 쳐다보던 연우가
그중에 하나를 빼냈다. 내용을 확인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연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술잔으로 손을 가져간다. 이건이 인상을 구겼다. 정말 없으면 아무나 대충 얘기하면
될 것을. 술잔이 입술에 닿자 연우가 넘기지 못하고 와락 인상을 쓴다. 아이들과 어울리며 맥주와 소주는 먹어본
적이 있지만, 양주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술을 잘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인상을 구기니
지켜보던 이건이 그 잔을 빼앗아간다.
“저도 연우 흑기사요.”
다시 이건의 차례가 됐고, 쌓아 올린 나무블록이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질 때까지 게임이 계속됐다. 각자 돌아가며
양주를 몇 잔씩 먹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우는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대답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그중에 반은 강이건이 흑기사를 자처하는 바람에 나중엔 둘 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온 준영이 욕실에서 세수하고 거울을 봤다. 술을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나와선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고 트렁크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뭐 해요? 씻었어요?”
“아니, 일단 짐 정리하느라.”
“다 치웠어?”
“진상들.”
“귀엽잖아.”
귀여운 협박에 준영이 웃음을 터트리고 그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도하가 그대로 쪽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덤벼든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던 준영이 카펫으로 넘어졌다. 비키라고 하는데도 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뺨이며
콧등이며 쉴새 없이 쪽쪽 거리면서 뽀뽀를 해댔다. 혀를 내밀어 턱이며 뺨을 마구 핥고 빨길래 준영이 그런
도하의 얼굴을 밀어냈다.
“씻고 와.”
“씻고 와서 해도 돼요?”
“그래서 뭐.”
“시끄러워. 애들 깨.”
그러면서 도하가 다시 준영의 뺨을 감싸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귀를 만져주고 한다. 손길이 닿으니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하품하며 멍한 표정을 하자 도하가 인상을 구기며 준영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
“어?”
도하가 준영의 빗장뼈 부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은근히 노골적인 표정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준영이 으, 하는
표정을 짓자 본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떠밀어 침실로 들여보낸다.
도하가 씻고서 흰색 가운을 입고 나왔다. 거실을 지나쳐 침실로 가는데 불빛 한점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씻었나 하고 들어가 보니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서 쥐죽은 듯 누워 있는 준영이 보였다.
입술을 벌리듯 꾹 힘주어 누르니 준영이 성기를 탁, 때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졸지에 성기를
얻어맞은 도하가 그대로 주저앉으며 억 신음을 냈다. 침대에 이마를 대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준영이 흠칫해선
괜찮으냐고 묻는다. 고개를 치켜드는데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배시시 웃는다.
“그러게 왜 자는 척을 해요.”
“오죽하면 그럴까?”
“섹스하기 싫어요?”
준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지. 도하는 여태 사귀었던 어떤 사람들보다 저를
쾌락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섹스를 끝내고 혼자 있을 때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가. 죄책감과 함께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려왔으니까.
준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하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다시 쪽쪽, 입을 맞추더니 준영의 목덜미에 제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샴푸 냄새는 달라졌지만, 준영에게서 나는 특유의 체향은 그대로였다.
“팬티? 입었어요?”
“만족해?”
그대로 양손을 뻗어 도하의 얼굴을 끌어당겨 제 입술을 포갰다. 도하가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 넣고 아래로는
준영의 성기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준영이 스스럼없이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무릎을 세우고 손을 내려 도하의
가운 끈을 풀고 어깨 뒤로 벗겨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자 그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어루만졌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지 몸이
뜨거웠다. 등 뒤로 손을 옮겨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하체를 밀착하게 했다. 그러자 도하가 어깨에 걸친 가운을
마저 벗으며 웃었다.
“세상에, 예뻐라.”
쪽, 그렇게 입술을 맞추고 나서 준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오늘따라 느긋하게 구는 도하와는 달리 준영은
진작부터 애가 닳아 아래를 들썩였다. 도하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손, 묶어요?”
“뒤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끄덕이자 도하가 준영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침대로 내려오더니 무언가를
가져온다. 준영이 뒤로 손을 모으고 눈을 반쯤 감고 기다리는데 잠시 후 목 안쪽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무언가
채워진다.
“뭐야, 이거?”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가 움직였다. 잠시 후 도하가 준영의 가운을 들추자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감싼 레이스 천이
들어왔다. 하아. 그 모습에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조금 놀려줄 마음으로 선물한 것도 있는데 막상
입은 모습을 직접 봤더니 하지도 않았는데 사정할 것 같았다.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더니 몸이 흠칫 굳는다. 다른 쪽 엉덩이도 움켜쥐고 흔드니 준영이 흐음, 하고 신음을 냈다.
“괜찮아요?”
“…응.”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종아리 위쪽에 자리를 잡고 상체를 숙였다. 준영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꽉 붙잡아
벌리곤 혀를 가져다 댔다. 애널 입구는 가느다란 팬티 끈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했는데 그 부위를 혀로 핥아주자
준영이 고개를 번쩍 들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혀끝으로 그 부분을 문지르며 레이스 천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핥았더니 준영도 애가 닳는지 묶인 손을 아래로
내려 도하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사정했다.
“얼른.”
지익, 레이스 속옷이 찢겨나가자 반쯤 감겨 있던 준영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도하가 완전히 벗은 채 속옷을 찢고
그 빈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애널을 핥았다. 준영이 시트를 꾹 쥐면서 얼굴을 파묻었다. 엉덩이를 쥔 손이 더
그악스러워졌고 축축한 혀가 입구를 건들 때마다 발끝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나머지 한 손으로 볼기를 움켜쥐고 비틀고 손가락으론 안쪽을 벌리고 쑤셔주자 준영이 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선
숨을 헐떡인다. 찌걱대는 소리와 준영이 신음을 참으며 내는 야릇한 소리가 섞여 가뜩이나 넓은 침실 안에 울렸다.
손가락으론 만족이 안 됐는지 준영이 더 해달라는 것처럼 엉덩이를 살짝 위로 들며 들썩이자 도하가 손가락을
빼내고선 위에 올라타 자리를 잡았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기둥을 잡고 입구에 맞추고 꾹 누르니
손가락보단 조금 더디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들어간다.
준영의 등줄기 부분이 경직되는 게 보여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어루만져 주다가 반쯤 들어갔을 때 그대로 어깨를
잡고 콱, 하고 쑤셔 넣자 몸을 파들거리면서 윽, 하고 신음을 크게 낸다.
그 상태로 준영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핥으며 천천히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빈틈없이 삽입된 채로 안에서
비벼지니 성기가 마치 애널 내벽에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아아, 아, 하체를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이 들어간 입안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세게, 응?”
도하가 준영이 차고 있는 목줄을 건드렸다. 손목과 연결돼 꽤 팽팽했는데 혹시라도 목이 조이는 건 아닐까 관계를
맺는 와중에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풀어주느냐 묻자 준영이 헐떡이며 고개를 젓는다.
몸에서 내려오며 뒤로 물러나자 준영이 고개를 돌려 아쉬운 표정을 했다. 한참 좋았는데 왜 빼는 거냐고 눈빛으로
애끓는 시선을 보내자 도하가 알아채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머뭇대던 준영이 그대로 무릎을 앞쪽으로 당기며 구부렸다. 팔이 묶인 상태라 한쪽 뺨과 어깨로만 바닥을
지탱했고 엉덩이는 자연스럽게 하늘로 올라간 모양이 됐다. 힘들어 다리를 다시 뻗으려고 하니 도하가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면 손가락이 들어와서 괴롭히고 손가락이 빠지면 혀가 들어오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아까부터 발기한 제 성기에선 프리컴이 뚝뚝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마저도 팬티 앞부분 레이스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찢어진 팬티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뒤에서 자리를 잡고
기둥을 쥔 채 입구에 대고 문질렀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곳에 귀두를 대고 꾹 누르자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짐승처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꾹 누르면서 허리를 붙들고 잡아당기니 점점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완전히 맞물린 상태가 됐다. 도하가 앞쪽으로
손을 뻗어 준영의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제발 빨리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오늘따라 하다 말다 애만 태우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하야, 제발.”
“하고 싶어요?”
“…응.”
“애원해 봐요….”
“해줘….”
“그건 명령이고.”
개자식. 준영이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린 소리에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앞쪽 준영의 성기만 만지작대고 있으니 준영이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해주세요….”
“주인님.”
“…….”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 계속해줘. 준영이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시트에 뺨이 쓸리고 한쪽 어깨로만 지탱하려니 몸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졌다. 그때 도하가 묶인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목을 감싸고
있던 줄이 당겨지며 준영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순간 구멍이 더할 나위 없이 좁혀지며 성기를 씹어먹을 듯
조여온다.
꺽, 꺽, 신음만 내는데 저번처럼 또다시 공포 같은 쾌감이 밀려온다. 준영이 발끝을 구부렸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위라곤 그곳뿐이었다. 꺽, 꺽,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몸을
휘저으며 마구 돌아다니고 이곳저곳에서 폭탄처럼 터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불타서 없어지는 것같이 뜨겁고 이대로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느껴졌다. 정액인지 뭔지 자꾸만
나오는데도 도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기계 같았다. 지치지 않고 쳐대는 바람에 결국 준영이 나중엔
제발 그만하라고 빌어야 했다.
* * *
잠결에 누군가 제 머리를 만지는 게 느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어느 부위가 아픈 건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그랬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나니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풍경이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준영이 누워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젠 정신없기도 하고 밖이 워낙 어두워 몰랐는데 침실 한쪽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몸을 움직여 침대를 내려가려는데 손목이 붙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눈을 떴는지 도하가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더 자….”
도하가 몸을 앞쪽으로 움직이더니 내려가려는 준영의 허리를 붙들고 다시 제품으로 끌어당긴다. 준영의 엉덩이로
단단하게 발기한 녀석의 성기가 닿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저건 24 시간 발기돼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무슨
약이라도 처먹고 있는 거든가. 이 자식 도핑테스트 같은 거 해봐야 하나.
“몸 괜찮아요?”
“…응….”
일부러 창피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도하가 고개를 들어 준영의 안색을 살피려 한다. 화났나 보려는 것
같았다. 준영이 그 얼굴을 슬쩍 밀어냈다. 쳐다보지 마.
“왜 그래요? 화났어?”
“쪽팔려서 그래.”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심장이 간지럽다. 그러자 도하가 이번엔 준영의 어깨에 쪽쪽,
가볍게 키스하더니 거기에 제 뺨을 문지른다.
“난 존나 좋았는데.”
“…….”
“어딜.”
준영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양평 근처에 바다가 있다고? 아무리 봐도 죄다 산뿐인데. 생각을 더 정리할 것도
없이 도하가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준영이 몸을 바로 뉘이며 그런 도하를 올려다봤다. 어제
그렇게 미친놈처럼 박아대더니 얼굴은 광이 나다 못해 꽃이 핀 것처럼 화사하다. 세상에. 이 자식 무슨 흡혈귀
아닐까.
“씻고, 출발해요.”
“힘들어 죽을 거 같아.”
CH 18.
어제 자신들이 머물던 2 층을 올려다보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누가 이렇게 밖에서 봤으면…. 아찔한 생각에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가, 어제 그 생각이 나서 화끈대는 뺨을 다시 문질렀다. 더 해달라고 보채는 음성, 도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던 제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니 어디 굴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응.”
“시트 뒤로 넘겨줘요?”
“아니. 아직 괜찮아.”
“출발해요?”
“…가.”
“자요. 가서 깨울게.”
“너도 졸리잖아.”
“난 괜찮아요. 말짱해.”
자요. 도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준영이 눈을 감았다. 못 잔 데다 육체적으로 혹사를 당해서 그런지 잠은
너무도 쉽게 쏟아졌다. 차가 비탈길을 내려가느라 한 번씩 요동치는데도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갔다.
음악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의식은 깨어났지만, 눈꺼풀은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몸을 뒤척이는데 온몸이 다 아프다. 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승용차 천장이었다.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더니 거기에 도하가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는데 잠이 덜 깨 그 모습이 흐릿했다. 벌써 시장에 다 온 건가. 금방 잠든 거 같은데.
몸을 일으키는데 아아, 신음이 저절로 터진다. 허리가 뻐근해 그곳을 손으로 짚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눈이 커졌다.
어라? 잘못 봤나. 얼굴을 다시 문지르고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다시 쳐다봤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눈이 더 크게 뜨여졌다. 통화하던 도하가 돌아보다 준영을 발견하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가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운전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뭐야?”
“응, 뭐가?”
“침 흘리고 잤어요.”
스읍. 준영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도하가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예뻐죽겠는 얼굴로 웃었지만, 준영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트를 간다더니 왜 여기 와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였지.
“뭐?”
“어차피 형이 오래 못 있는다고 해서, 그냥 하루만 묵고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애들은?”
“아, 내가 말 안 했나.”
“뭘.”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도하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강이건과 송연우를 그
산꼭대기에, 차가 없으면 오갈 수도 없는 그 산꼭대기에 버리고 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뭐야. 농담이지…?”
“아닌데.”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라니까.”
“내가 왜. 뭐하러.”
“야!”
“이 미친. 너 돌았어?”
“…뭐?”
도하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도하가 고용한 과외선생과 아이들을 한 달간 보살필 입주 도우미가
도착했을 것이다. 준영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하를 다그쳤다.
준영이 입을 벙긋댔다. 믿을 수 없어 차에서 내리는데 그때 이건이 모친이 빌라에서 나오다 준영을 발견하곤
반색을 하고 다가온다. 준영이 괜히 뜨끔해선 목폴라를 위쪽으로 끌어당기며 어색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오셨어요, 어머님.”
“…네?”
“실은 이건이가 최근에 마음을 못 잡아서 제가 신경이 쓰였거든요. 지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이들이랑 주먹다짐도
좀 하는 거 같고. 질 나쁜 친구들과 시비도 종종 붙는 거 같아서 내심 불안했는데, 한 달 동안 그 좋은 데서
먹고 자고 과외까지 시켜주신다고 하니까 제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 * *
“아, 뭐야.”
연우가 괜히 짜증을 내며 뒷목을 긁적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을 살피는데 한쪽이 전면 유리창이다.
해가 벌써 중천이었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휴대전화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연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도 침대에서 내려와 그런 연우의 뒤를 따랐다. 작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칫했다. 연우가 먼저 어? 하고 놀란 소리를 냈고 뒤에 있던 이건
역시나 어어? 하고 더 크게 소리를 냈다.
이건은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도하가 툭하면 저에게 여행을 권하던 것부터 시작해, 그가
나이에 맞지 않게 비싼 차와 시계를 찬다든지 하는 것들. 설마. 설마. 놀라서 연우를 잡아당겨 제 뒤에 세우고
앞으로 나서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누, 누구세요?”
그러자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깍지를 끼고 팔을 움직이자 양 손가락에서 뚜두둑, 뚜두둑, 뼈
맞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이 꿀꺽 침을 삼켰다. 뒤에 선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 * *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는데도 도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서 애들을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이것저것 고르던 도하가 준영에게 다가와서는 제 휴대폰을 내보였다. 거기엔 분홍색 끈 팬티가 있었는데
준영이 그걸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고 버럭 성질부터 냈다.
“뭐야, 이거!”
“이 미친.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와?”
그때 도하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쇼핑하던 도중이어서 도하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발신자에 강이건 세 글자가
뜬 걸 보고 쯧 혀를 차니 준영이 가까이 다가온다. 도하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을 켰다.
“잘 잤니? 지금 일어났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강이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는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이건이 조용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몇 초 뒤에 ‘네?’ 하고 되묻길래 도하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하도 과외를 포기 못 하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마어마하길래 자신이 신경 좀 썼다면서, 남들은
기숙학원도 들어가는데 너희는 둘만 지내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장난 아니라고 새끼야, 그리고 그분이 형 어릴 적 과외 쌤인데, 체격 좋으시지? 예전에 유도하시던 분이라 말
안 들으면 바로 들어서 던져 버린다. 그럴 땐 겁먹지 말고 최대한 힘을 빼. 안 그러면 허리뼈 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형!]
도하가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투로 대꾸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나서 이건에게 음성 파일을
하나 보냈다. 이건의 모친과 대화 도중 녹음을 했는데 아들이 공부한다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상황에서 살짝
녹취해 둔 거였다.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제 휴대전화가 무섭게 울린다. 받으려고 하니 도하가
가져가선 그대로 빼앗아 전원 버튼을 눌러 버렸다.
“뭐야?”
“이참에 번호 바꿀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영도 제대로 위치를 몰랐다. 가기 전에 도하가 하도 빙빙 돌아가는 바람에. 그럼에도
현관 쪽으로 가려고 하자 도하가 잽싸게 일어나선 팔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소파로 끌고 와 앉히고선 잔뜩 열이
받은 준영의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며 진정시킨다.
“그러지 마요. 애들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뭘 좋아해! 잔뜩 겁먹었는데.”
준영이 기막힌 얼굴을 했다. 윤 샘이라면 도하가 운동을 관두고 1 년 동안 과외를 해주던 사내였다. 어린 시절
촉망받던 유도선수였는데 부상으로 공부를 시작한 남자였고, 한때는 대치동과 목동 쪽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유능한 학원 강사였다.
그러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을 상대로 개인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 첫 타자가 도하였다. 도하는 운동을 관둔 후로
어찌나 말썽을 부리고 싸움질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수없이 많은 과외 선생을 숱하게 갈아치웠는데 유독 윤
샘만 살아남아선 결국 도하를 일류대학에 보냈다.
“지금 이게 눈에 들어와?”
* * *
“좆됐다, 좆됐어.”
“하, 도하 형. 진짜.”
연우가 빈정거렸고 그 말에 이건이 허무하게 웃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어젯밤 먹은 술로 머리가
멍했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다. 건물 안을 보니 아까 자신을 과외 선생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어디선가 가져온 커다란 책상을 거실 한쪽에 배치하는 중이었다. 그걸 보며 연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
“맞을걸.”
“어떻게 확신해?”
몇 번 묻길래 아니라고 잡아뗐는데. 엄마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동네가 좁아 그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으니 차라리 외딴곳에서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면서. 그 생각을 하니 전화를 해서 당장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우가 제 휴대전화를 꺼낸다. 번호를 누르려 하길래 이건이 그 전화를 붙들었다.
“뭐? 미쳤어?”
“연우야, 근데 어제….”
“어제 뭐?”
“병신, 싱겁긴.”
두 사람이 건물 쪽으로 가서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긴다. 식사가 다 됐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러잖아도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질 않아 속이 헛헛하던 참이었는데.
그러다 식탁 앞에서 둘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리석 식탁이라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어질
것 같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정도로 음식이 굉장히 많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도 맛있는 걸로만 골라서.
* * *
안방에서 나오던 준영이 도하를 슬쩍 쳐다봤다. 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였는데 그는 주방에서 술안주를 만들겠다며
아까부터 수선을 피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 외식이라도 하자는 걸 딱 잘라 거절했더니 집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자기 집인 것처럼 웃통을 벗고 트레이닝 복 바지에 앞치마만 두른 게 기가 막혔다. 옷이나 입으라고 했더니 뭐
어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
“아, 왜에.”
“좋아서 그래요.”
양심도 없지. 종일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욱신거려 죽겠는데 뭘 또 하자고 덤벼드는 건지 모르겠다. 양심이
없다며 째려보니 웃으며 슬며시 떨어져 다시 주방으로 간다. 그러더니 잠시 후 옴폭 팬 도자기 그릇에 무언가를
담아 들고 왔다.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접시에 조개가 한가득이다. 그러고 나서 와인 하나를 가져와 잔을 세팅했다. 술이 나오는 거
보니 아무래도 불길하다. 준영이 슬며시 일어서며 안방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맛있죠?”
“응.”
“다행이다.”
준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 자려는지 알고 도하가 잽싸게 팔부터 잡으려 한다.
“콘돔이랑 젤?”
“이 새끼가.”
머리에 온통 그 생각뿐이냐고 했더니 산뜻하게 웃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길래 더는 대꾸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방에서 막 나오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린다. 꺼내
봤는데 김민석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도하가 앉은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 조개를 먹던 도하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괜히 찔려서 휴대전화를 들고 안방 쪽으로 스르르 들어가 버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가니 민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쩐 일이야?”
“어…. 듣고 있어.”
“취했어?”
“…….”
“김민석.”
[잘 지내.]
“응…. 너도.”
전화가 끊어졌다.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주머니에서 넣고 돌아서서 다시 안방을 나왔다. 도하는 술을 다 다
비웠는지 잔을 채우는 중이었다. 자리로 가서 앉으니 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누구예요?”
“어?”
“김민석?”
대놓고 물으니 준영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더니 도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구나, 한다. 아까 통화할 때 눈치챈 거 같은데 쫓아와서 난리 피우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성탄절에 옛 애인이 전화도 하고, 우리 자기가 인기가 많네.”
“어차피 형은 이제 내 남자니까.”
“뭐예요?”
“선물.”
“받았잖아요, 어젯밤에.”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젯밤 레이스 팬티를 입고 밤새 정사를 벌이던 생각이 나서 괜히 귀가 뜨거워지고 목이
탔다. 얼른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생각나서 그냥 샀다고 풀어나 보라고 대답해줬다.
도하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쩍 웃는다. 넥타이를 들어 살피더니 입가에 미소가 점점 번졌다.
“예쁘다. 내 취항이네.”
“마음에 들면 다행이고.”
“멋있네.”
“하긴. 내가 뭔들 안 어울리겠어요.”
준영이 그 말엔 부정하지 않았다. 옷걸이가 좋고 인물이 잘났으니 아무거나 걸쳐놔도 근사한 건 사실이었다. 그에
비해 저는 보잘것없는 것 같았다. 도하가 서른이 되면 더 멋진 남자로 성장할 테지만 그때 제 나이는 마흔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심란해진다.
“선물해주고 왜 그런 표정인가요?”
“뭔, 뭔데.”
“열어 봐요.”
“지금 껴달라는 건 아니에요. 형이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고 혼란스러울지 알아요. 여태 나를 밀어냈던 세월이
있는데.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그때 되면 내 손가락에 직접 끼워줘요.”
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지금 끼워주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도하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더 얘기하지 않더니 잔을 다시 든다. 첫사랑과 단둘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그리고 첫 커플링. 물론 당장 받아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 * *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서 말하는데 목소리가 다 죽어간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공부를 종일 하느라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이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저녁 먹은 후로는 자유시간이 주어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하냐.”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건의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러더니 이어폰 하나를 빼서 제
귀에 꽂고 화면을 응시했다.
“뭐 보게?”
“이거 어때?”
“이건?”
“애냐?”
그러지 말고…. 연우가 손으로 영화 하나를 가리켰다. 공포였는데 19 금이라 이건이 슬쩍 인상을 썼다.
“이건 좀 그렇지.”
“무섭긴.”
이건이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클릭했다.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자 연우가 좀 더 이건의 옆에 붙어 앉았다. 몸이
닿았고, 두 사람은 다리를 모은 채 영화 보기에 집중했다. 천장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주인공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건이 몸을 움찔한다.
연우가 비웃으며 병신이라고 놀렸는데, 다음 장면도, 또 그다음 장면도 죄다 귀신뿐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귀신만 나올 수 있다니.
“계속, 봐?”
“보자. 재미있네.”
드드드드, 나무를 긁는 소리와 함께 이건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최대한 작게 떴다. 주인공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숙여 문 밑을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서 시뻘건 눈이 갑자기 확 튀어나왔다.
동시에 연우가 워! 하면서 이건을 놀라게 했고, 이건이 우아아악 발버둥을 치며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걸
보며 연우가 배를 잡고 굴러다니며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이건이 신음하며 일어나서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아, 왜 장난쳐?”
“겁은 졸라 많아요.”
“뭐야, 짜증 나게.”
“애들이 볼 건 아니지.”
“넌 어른이냐?”
“나도 안 봤어.”
“어, 유나야.”
[메리 크리스마스.]
“…고마워.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나를?”
[어. 왜? 곤란해?]
이건이 콧등을 긁적였다. 연우가 그 모습을 흘깃 봤다. 당분간 집에 못 갈 거 같다며, 학원도 빠져야 한다고
마치 애인에게 설명하듯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연우는 속으로 조금 짜증이 났다. 탁, 이어폰을 빼서
태블릿 위에 던지니 이건이 통화를 하다 고개를 돌려 연우를 쳐다본다.
[그럼 언제 오는데?]
얼결에 연우의 어깨를 붙들고 확 떼어내고 보니 연우가 고개를 팩 돌리고는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이건이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시 건다는 말도 못 하고 황급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 연우를 불렀다.
* * *
“왔어?”
준영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마주 본 채 섰다.
“어쩐 일이야?”
“…어. 많이 바빴어.”
투덜거리는 모습에 준영이 전처럼 웃지 못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바쁘다는 걸 티 내기 위해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여태 여유롭던 도하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는데 이제 키도 저와
비슷하다. 아니,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표정을 살피려 하기에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 내 눈 피해?”
짓궂은 말투로 물으며 웃는다. 전 같으면 조그마한 녀석이 애인이 뭔지 아느냐고, 아이 취급했을 텐데 이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어.”
준영이 그것을 자리에서 열어봤다. 꽤 고가의 시계였다.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서 그것을 도하에게 다시
건네줬다. 도하가 받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길래 억지로 쥐여 주고 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 시였다. 그대로 안방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도하가 사 온 화병은 또다시 비어 있었다. 제가 관리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생화가 그런 건지
꽃은 대부분 일주일도 가질 못하고 시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안방 쪽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추고, 작은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불을 켰다.
이사 오고 나선 찾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곳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상자에 담겨 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 다음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여니 별것이 다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도하가 제게 선물했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중 작은 상자 하나를 집어 들고 열었더니 유리가 박살
난 손목시계가 있다.
* * *
아침을 다 먹은 후 이건이 밖으로 나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물이 채워진 수영장을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수업하기 전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뭘 할까 고민 중이었다. 연우는 어젯밤 그러고 나서 여태 저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자려는 걸 흔들어서 뭐 하는 짓이냐고 타박했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덩달아 정신도 멍했다. 고개를 흔드는데 저 멀리 건물
옆쪽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게 보인다. 뭐야, 불이라도 난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바스락, 바스락 마른 잔디 밟는 소리에 연기가 곧 사라진다. 바로 코앞까지
가서야 그게 담배 연기라는 걸 깨달았다. 모퉁이를 돌자 송연우가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며 꽁초를 발로 비벼 끄는
중이었다.
연우가 뾰로통한 얼굴로 이건을 지나쳐 모퉁이를 돌아 수영장 쪽으로 걸어간다. 이건이 뒤를 쫓아가며 어젯밤
일에 대해 캐물었다.
“내가, 뭘.”
“…뽀뽀했잖아.”
“내가 언제!”
“다음부턴 그런 장난 하지 마. 그거 성추행이야.”
“씨발, 진짜 짜증 나게.”
“…내,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럴 리는 없겠지만….”
“…….”
“뭐?”
“…….”
“아니지?”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연우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 곰탱이 같은 새끼가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죽여 버릴 듯 노려보기만 하자 이건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한 번 더 ‘
아니지?’라고 묻길래 연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했다.
“미쳤어? 내가 너 같은 걸 왜 좋아해.”
연우가 그대로 뛰어 이건을 확 밀어 버렸다. 이건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수영장에 풍덩 빠졌고, 연우가 몸을 홱
돌려 건물 쪽으로 향했다.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씩씩대고 걷는데 눈이 시큰거리고 코가 아려왔다.
* * *
일어나는데 역시나 몸이 다 뻐근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도하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본다. 어쩐 일인지 눈이 빨갛다.
막 일어난 상태라 자기란 말에 화낼 기운도 없었다. 대체 뭘 하는지 궁금해 들여다봤더니 찌개가 끓고 있었고,
거기에 넣을 양파를 써는 중이었다. 그래서 눈이 빨갰구나. 여기 와서 음식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나와. 내가 할게.”
“더 자요.”
“…다 잤어.”
그러면서 준영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얼른 가서 씻으라며 마치 아이 취급하는 행동에 준영이 미간을
옴폭하게 구겼다. 손을 툭 쳐냈더니 이번엔 앞쪽을 건드리려고 한다. 팔뚝을 꼬집었더니 그제야 멈추고 배시시
웃는다.
“힘들면 내가 씻겨 줄까요?”
“아니.”
“원하면 말해요.”
“거절할게.”
띠릭,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바깥으로 밀었다. 혹시 이건의 부모님인가 싶어서 봤다가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제 모친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으니 미정이
미안하고 반가운 얼굴로 웃는다.
“…도하….”
“이모, 오셨어요?”
미정이 충격받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도하에게서 준영에게로 천천히 이동했다.
비난을 퍼붓는 것도 아닌데 준영은 그 시선이 송곳처럼 느껴져 더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정의 목소리는 침착함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준영이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넌 그만 올라가.”
“…들어오세요.”
하아. 미정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 같았다. 준영이 주방으로 가서 불을 끄고 대충
치우기 시작했다. 돌아봐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는 언제 온 거야?”
준영이 멈칫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미정을 마주 봤다. 그녀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엔 실망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았을 텐데, 어릴 적부터 준영은 그녀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한 달 안 됐어요….”
“여기, 살아?”
“…위층에요.”
“왜 말 안 했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생각해낸 것이 고작 차 이야기였다.
“…커피 드려요?”
“저번에 제사 때 와서 왜 말 안 했어?”
“…아니면 다른 것도 있어요.”
“준영아.”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를 끌어내 그녀의 맞은편에 가까이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다른
아들 같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할까. 상관하지 마시라고 할까. 아니면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할까. 도무지
답을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요.”
“엄마.”
“…죄송해요.”
그녀가 안 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도하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따끔하게 자신이 말을
했어야 한다면서. 준영이 더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목구멍이 뜨겁고 가슴 한가운데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천천히 아들을 돌아봤다. 죄인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야말로 숨이 턱 막혔다. 준영이 고개를
드는데 참담하면서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얼굴이다.
“저도 좋아해요….”
“…뭐?”
죄송해요. 준영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부정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하한테 더는 미안한
일을 만들기 싫었고, 이젠 상처 주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CH 19.
[그럼 언제 와요?]
메시지를 보내고 꽤 지났는데도 준영은 읽지도 답장도 없다. 그의 모친인 미정이 나타나고 나서 도하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한참 뒤 준영에게 메시지가 온 것이다. 모친을 서울까지 직접 바래다주고 오겠다고. 나중에
연락하겠노라고.
뒤늦게 후회를 하며 소파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민주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녀 또한 연락을 받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뛰는 심정으로 몇 차례 더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녹았다.
* * *
그녀는 처음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혹시 도하가 너에게 협박이라도 하더냐고 물었다. 혜윤은
감금당했냐고 물어보더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하와 저의 관계가 그렇구나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밖이야.”
[밖 어디요?]
[집에 가서 잘 거예요?]
[주소나 말해줘요.]
전화를 끊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진다. 눈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올겨울 눈이
참 많이도 오는구나 싶었다.
연말이라서 그런지 밤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20 분이 다 되어가도록 도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락하려는 찰나, 딸랑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고 도하가 뛰어 들어왔다.
“뭐 마실래?”
“글쎄, 뭐가 좋을까.”
“여기 커피 되게 맛있어.”
잠깐만 기다리고 한 후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줄 생각으로 계산대 쪽으로 가는데 다행히
도하는 일어나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아 얌전히 기다린다. 눈으론 여전히 자신의 안부를 살피는 중이었지만.
직원에게 주문하는 사이 손님 여러 명이 우르르 들어오며 갑자기 눈이 쏟아진다며 투덜댔다.
계산대 앞에 선 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하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 안 되니 애가 탔고,
오면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나중엔 사리판단이 흐려졌다. 하마터면 준영의 집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으니 말이다.
“식혀서 마셔.”
아까부터 주위에서 흘긋흘긋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잠시 고민하던 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하가 제 외투를 벗어 머리를 가려주려 하기에 준영이 질색하고 뜯어말렸다. 그러면서 도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동네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사람 많은 도심으로 나오니 도하의 외모가 더 눈에 띄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잘생겼다고 속닥이던 소리도 다 듣고 있었다.
도하가 차 안의 온도를 높이고 출발하는 동안 준영이 창밖을 내다봤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하얗게 뒤덮던 눈과
화려한 간판들 위로 쏟아지는 눈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꼭 붙어 걷는 연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도하를 돌아봤다.
전에 만나던 사람들은 준영이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예민한 성격을 알기에 그어진 선을 어지간해서
넘어오는 법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도 오지 말라고 하면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다들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뜬금없이 묻는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제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보조석 쪽으로
내밀었다.
준영이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 제 쪽으로 끌어와선 깍지를 낀 채 꼭 힘주어 잡았다. 도하가 여전히 앞만 본채로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끼익. 끼익,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차창에 눈들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차는 느리게 움직였고, 라디오에선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모든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느낀 건 옆에 도하가 있기 때문이란 걸 인정하기로 했다.
* * *
“…왜?”
“눈 맞았으니까 옷 벗어야죠.”
“…놀래라.”
“…아니었어?”
아, 진짜. 도하가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자 준영이 웃으며 외투를 벗어 건네준다. 제 외투와 함께 그것을 한쪽에
정리해 두고 나서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오면서 둘이 저녁을 먹긴 했는데 저와는 달리 준영은 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면서 준영을 보는데 여전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오는 내내 말이 없던 것도 그렇고. 어두운 표정도 그렇고.
안 되겠다 싶어서 욕실로 가서는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널따란 욕조가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에 들었다. 반신욕을 즐겨 하는 저를 위해 모친이 특별히 욕조를 신경 쓰겠다고 했는데 이사할 때 보니 아들
취향은 무시한 채 일본 노천탕 스타일로 해놓은 것이다.
“…어.”
“아까부터 왜 자꾸 나를 탐색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준영이 제 모친에게 갖는 감정은 보통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그런
효심이나 애정이 아니었다. 절박함.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저를 붙들고 있던 단 한 사람. 그것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았고, 도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도하가 허공에 대고 붙들고 막 흔드는 시늉을 하자 준영이 웃었다. 그 타이밍에 도하가 올라가지 않고 버티고서
고집을 부렸다면 아마 상황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악화됐을지 모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고
막장드라마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물을 마시러 가려고 하니 도하가 맥주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좋다고 대답했다.
주방으로 간 도하가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 두 개를 꺼내선 창가로 다시 향했다.
치익, 맥주 하나를 따서 준영에게 내미니 그가 흔쾌히 받아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꿀꺽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찌르르 울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물이 받아졌는지 도하가
욕실에서 준영을 불렀다.
준영이 반쯤 남은 맥주를 창가 앞에 내려놓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뿌연 수증기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던 준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욕실이 어지간한 방보다 더 컸는데 더
놀라운 건 도하가 욕조라고 부른 그것의 크기였다.
“…알았어. 씻고 나갈게.”
그래요, 그럼. 도하가 대답하고 나서도 가만히 쳐다본다.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안 나가느냐고 묻자 금세 풀이
죽는다. 표정을 보니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괜히 머쓱해져선 욕조 안 거품만 쳐다봤다.
“…뭐, 딱히.”
“내 생각엔 너무 넓은 거 같은데.”
“…글쎄.”
“…전혀.”
아 쫌. 도하가 투정을 부리자 준영이 나직하게 웃는다. 그 소리가 욕실에 잔잔하게 울려 더 듣기 좋았다. 나도
같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준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문지르고 옆구리를 쿡쿡 찔렀더니 기겁을 하고 옆으로
떨어진다.
도하가 나가고 나서 준영이 옷을 탈의했다. 한쪽에 벗어두고 간단히 샤워한 다음 탕 안에 들어갔다. 풍성한
거품과 달콤한 향이 몸에 감기니 저절로 늘어진다. 맥주 반 캔에 취할 리가 없는데도 마치 취하는 것 같았다.
저를 쳐다보던 모친의 표정. 마지막 집 앞에서 외면하고 돌아서던 뒷모습. 심란한 마음에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다시 천장을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몸을 세우고 고개를
돌려 봤더니 외투를 입고서 도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묻기도 전에 그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안 먹어도 돼.”
“저녁 잘 못 먹었잖아요.”
“괜찮아. 배 안 고파.”
“그래도.”
“너 배고파서 그런 거면 나 씻고 같이 나가자.”
“난 안 고파요.”
“좋아요?”
“귀찮게 안 한다며.”
“뽀뽀도 귀찮아요?”
어울리지 않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걸 보고서 준영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도하는 준영의 뺨에 어깨에 제 볼을 비비고 난리다. 나중엔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그
상태로 어깨를 양쪽으로 잡아 마사지하듯 주물러줬다.
“시원하죠?”
“어. 장난 아니다.”
“사귀는 거였어?”
“…들어올래?”
옷을 모두 벗고 안으로 들어간 도하가 양팔로 욕조 턱을 붙잡고 지탱하며 상체를 숙여 준영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부드럽게 혀가 얽혔다. 고개를 좌우로 바꿔가며 혀뿌리부터 눌러주고 핥아주자 준영이 손을 뻗어 도하의 허벅지를
더듬어 움직이다 이미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붙들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거품이 묻은 덕에 촉감이 더 부드러웠고 물에 젖어서 그런지 전보다 힘줄이 더 팽팽하게 들고 일어선 느낌이었다.
손바닥에 쓸리는 그 감촉이 좋아서 조금 힘을 주어 문지르자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며 미간을 슬며시 좁힌다.
가만히 있어도 서준영은 사람을 꼴리게 하는데 물에 젖은 모습으로 제 성기를 주무르며 올려다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애잔한 마음이 들어 뺨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니 가만히 보기만 하던 준영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빨아줘?”
“…억지로 해줄 필요 없어요.”
“싫으면 말고.”
준영이 살짝 입을 벌리자 도하가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제 성기를 쥐고서는 입가로 가져다 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슥 밀어 넣자 애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제 걸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았다.
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한 번 흔들어 털어 내고 나서는 준영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서 허리를 가볍게 살짝살짝
움직였다. 성기는 채 다 들어가지도 못했다. 도하가 그것을 꺼내서는 물기 어린 준영의 뺨에 대고 문질렀다.
속눈썹이 젖어서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더 색정적이었다.
손끝에 준영의 혀와 고른 치열, 입안 점막이 고스란히 만져진다. 혀나 성기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천천히 빼내서 타액이 잔뜩 묻은 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역시나 꿀처럼 달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준영의 고갯짓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혹시라도 목 안쪽이 다칠까 싶어 깊게는
찌르지 못했고, 손엔 자꾸 힘이 들어가는 걸 참느라 환장할 노릇이었다.
준영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도하는 이미 욕정을 꾹꾹 밟아 누르던 중이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제 성기를 빨던 입술을 정신없이 먹어 치우며 준영의 허리를 감쌌다.
욕정이 들끓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했다. 그렇게 일어선 상태로 끌어안고 키스하던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벽 쪽으로 움직였다.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리고 도하가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벽 쪽을 보게 돌려세웠다.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 하길래 스스로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극을 줬다. 그러면서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엉덩이 쪽에 가져다 댔다. 저와는 다르게 도하는 엉덩이도 근육인 것 같았다. 손톱을 박으며 꽉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도하가 어깨에 묻은 입술을 떼어내며 짧게 욕을 내뱉는다.
자국을 남길까 봐 준영이 하지 말라고 이마를 밀어내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뒤로 뺐다가 내리찍듯 쑤셔 넣는다.
허벅지가 엉덩이를 치는 소리가 음탕하게 울리는 가운데 쳐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철썩철썩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헐떡였다. 도하가 쳐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거리는데도 그는 인정사정없이 움직였다. 사정감이 몰려와서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고 준영이 제 성기를 쥐려고 하자 도하가 그 손을 붙들어 벽에 고정했다.
그만하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번엔 입술을 겹쳐 문다. 신음이 나오다 도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정도
신음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감각이 고통보단 쾌감으로 다가오니 더 괴로웠다.
눈이 빨갛게 짓무르며 눈물이 고였다. 그 와중에도 전립선만 고약할 정도로 찍어대는 도하가 미우면서도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만큼 좋았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자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혀를 내밀어 그
눈물을 핥는다.
* * *
[왜 또!]
여보세요? 이건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휴대전화를 플래시로 사용하는 모양인데. 차로도 한참
걸리는 길을 대체 무슨 수로 내려가겠다는 건가. 미치겠네, 정말. 외투를 챙겨 입고는 문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닌 지금쯤이면 주무실 시간이었고, 과외 선생은 저녁에 수업을 마친 후 약속이 있다고
나간 후였다. 몇 시간 뒤에 돌아온다고,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결국엔 사고를 친 연우를 원망하며 주방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 산행용 플래시 두 개가 보였다.
그것을 챙겨 들고서는 조심조심 현관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산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매서웠다.
점퍼를 여미며 플래시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하나를 챙겨 들고 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다시 전화를 거는데
이번엔 받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져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뛰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라 곳곳에 돌부리가 채여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연우라면 저보다 느리니 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플래시를 길 양쪽으로 비추는데 키가 커다란 나무가 늘어서 있다. 낮에 보는 나무는 크고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밤에 보는 나무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키가 커다란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승에서 온 사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대쪽은 계곡이었고, 겨울이라
물이 언 건지 아니면 마른 건지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걸음을 서두르는데 저 멀리 불빛 하나가
작게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 관두고는 조금 더 빨리 걸어가며 최대한 소리를 죽여 이름을 불렀다.
“송연우!”
제발 들었으면 싶은 마음에 불렀는데 불빛이 잠깐 멈추는 것 같다. 헐레벌떡 뛰어 내려가며 손전등을 그쪽으로
비추는데 저 멀리 불빛이 움직인다. 그런데 내려가는 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그제야 제 손전등
빛에도 연우의 모습이 들어온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마구 뛰어 올라오는 모습에 이건이 멈칫하고 나서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지?
“야, 왜 그래?”
하는데 연우가 ‘튀어!’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건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 담 넘다 학생주임한테 걸린 것도 아니고 이 산속에서 야밤에 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싶었는데, 연우가 코앞까지 와서 제 팔을 붙잡았다가 놓으며 악을 쓴다.
“튀라고, 새꺄!”
야, 이 새끼야! 고함을 치면서 멧돼지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몸통을 들이받았다. 멧돼지가 옆으로 밀리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강이건은 멧돼지와 함께 계곡 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꾸에엑 하는 소리가 들렸고 연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일어나는데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질 못했다. 기다시피
계곡 쪽으로 가서 플래시를 비췄지만 이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 * *
도하가 마스크 팩을 들고 사정을 하는데도 준영이 싫다고 인상을 찡그렸다. 욕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와서는 둘이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영화를 보기 위해 고르는 중이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마스크 팩을 들고 온
것이다.
싫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붙이더니 피부에 잘 붙으라고 꾹꾹 눌러주기까지 한다. 준영이 휴대폰으로 제 얼굴을
비춰봤다. 하얀 몽달귀신 같아서 다시 인상이 구겨졌다. 떼어내려고 했는데 도하가 째려보는 바람에 결국엔
포기했지만.
“여기 베고 누워요.”
준영이 됐다고 하려다 관두고 다리를 베고 눕자 도하가 허벅지에 힘을 준다. 왜 힘을 주느냐고 했더니 힘준 게
아니라 원래 근육이라 탄탄하다고 허세를 떠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리모컨을 들고 둘이 볼만한
영화를 고르는데 도하가 준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자꾸만 귀찮게 만진다.
“그만 좀 만져.”
“어떻게 팩을 붙이고 다 가렸는데도 잘생겼을까, 감탄하는 중이었어요.”
그 말에 준영은 기가 막혔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었다. 인물로 따지자면 도하가 훨씬 잘생겼으니까. 이젠
어린 티도 제법 벗었고, 곱상하던 얼굴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신 더 남자다워졌다.
“…그냥.”
“…응.”
“어?”
“하지 마.”
“공포는 패스.”
“무서워?”
그렇게 한참을 고르던 중 도하가 야한 영화를 하나 고른다. 포스터에 여자가 속옷만 입고 나왔는데 별점이 10 점
만점 중에 1 점이다. 제목 밑에 영화평이 나오는데 그것마저 최악이었다.
“이거 볼까요?”
“틀기만 해?”
“그럼 이거?”
“아깐 농담이었고.”
볼 거냐고 묻길래 이번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재생되는 동안 도하가 준영의 얼굴에서 팩을
떼어낸 다음 뺨을 톡톡 두드려 흡수시켜 준다. 양 손바닥으로 뺨을 꾹 누르며 뽀뽀를 하길래 준영이 미간을
옴폭하게 구겼다. 아까 욕실에서 입술을 물고 빠는 바람에 쓰라릴 정도였다.
“입술 헐겠다.”
그 말에 웃더니 이번에는 뺨과 콧등에 번갈아가며 쪽쪽, 난리다. 영화가 시작된 거 같은데 도하가 얼굴을 붙들고
놔주질 않으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 좀 보자며 어깨를 밀어내는데 테이블에 올려둔 전화가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도하가 잽싸게 일어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준영에게 건네다 말고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도하가 먼저 전화를 제 귀로 가져갔다.
“송연우, 왜.”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잠시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연우가 울면서 돼지 어쩌고 하는 게 들렸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 준영을 쳐다봤다. 그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하고 고함을 치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 * *
끼이익. 병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나서 준영과 도하가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준영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고 도하는 외투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상에서 제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준영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도하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라도 하나 있으면 피우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지금 당장 강이건을 패 죽인 다음 응급실이 아닌 영안실로 보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마에 작은 밴드를 붙이고서 준영을 보고 배시시 웃는 거 보니 아무래도 멀쩡해 보였다. 다가가는데 도하를
보더니 손까지 흔든다. 옆에 송연우도 있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시뻘겋게 퉁퉁 부어선 마치 붕어 같았다.
연우가 머뭇머뭇하는데 이건이 잠도 안 오고 산책할 겸 나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연우가 그런 이건을
쳐다보며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강이건이 멧돼지랑 같이 계곡 쪽으로 굴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돼지가
구르면서 꾸에엑 하고 멱따는 소리를 냈기에 강이건도 잘못된 줄 알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플래시를 들고 강이건을 찾으러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경사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비춰도 보이질 않았고 정신없이 119 에 연락을 하는 와중에 한쪽에 누워 있는 강이건을
발견했다.
처음엔 이름을 불렀는데 대꾸도 없고 눈도 뜨지 않으니 겁이 났다.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죽지 말라고 엉엉, 울면서 너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주접을 떨었다. 그때 이건이 으, 소리를
내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연우가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서 가끔 멧돼지 흔적을 보긴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앞을 가로막길래 성질대로 돌을 집어 던진 게 실수였다. 멧돼지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아직도
그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린 것 같았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하하. 씨발. 그게 그거지. 도하가 영혼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돼지 때문에 둘이 오붓하게 보내다
여기까지 불려 온 거란 말이지. 저 새끼가 그냥 멧돼지한테 물려갔어야 하는데. 못마땅하게 쳐다보니 이건이 괜히
움찔해서 눈치를 살핀다.
“좋을까, 그럼?”
“네?”
“네에?”
“잘 기억해 봐. 하나라도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돼. 정말 없는데 이러는 거면 내가 널 죽여 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그때 간호사가 오더니 보호자를 찾는다. 준영이 갔고,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갔다. 둘이 사라지고 나서 이건이
이번엔 연우를 봤다. 눈이 뻘겋게 부어서는 제가 알던 연우가 아닌 거 같았다.
“새로 사야겠다.”
“…전에 네가 사다 준 거 있잖아.”
밤인데도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빛을 내며 이글이글 타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미움받는
이유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애초에 거기다 가둔 건 도하였으면서.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잔뜩 화난 모습을 보니 그걸 따질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 * *
우와! 이건과 연우가 도하네 집으로 들어오며 감탄을 내질렀다. 밤도 늦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이곳으로
왔는데 자신들이 머물던 곳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넓고 깔끔하게 꾸며진 집을 보니 도하가 부자긴 부자구나
싶어 실감이 났다.
그래서 밤마다 말도 안 하고 저한테 냉랭하게 굴었던 건가. 그렇게 싫었으면 집에 가자고 말을 하지.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다 도하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눈이 뾰족하게 올라가서 살벌한 기세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연우도 마지못해 꾸벅 인사를 했다. 준영이 아이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한 후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하가 침대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서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준영이 슬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그
옆으로 다가갔다.
“명상하는 거야?”
“…나?”
“응, 서준영.”
허탈한 그 얼굴을 보며 준영이 이번엔 참지 못하고 소리까지 내서 웃었다. 정면을 바라보던 도하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휠 정도로 웃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고통받는데 그렇게 신이 나느냐고 묻는데도
준영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진짜 이럴 거예요?”
“아깐 잘생겼다며.”
* * *
괜찮나 확인하고 나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까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이 되질
않는지 쿵쾅거렸다. 물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거실에 트리가 켜져 있고 창가에 준영이
앉아 있다가 저를 돌아본다.
“안 잤어?”
그런 생각을 하다 맥주에 시선이 고정됐다. 한 모금 마시고 싶다. 그때 준영이 다시 돌아서 저를 본다. 연우가
허둥지둥하며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냉장고에 맥주 있으니까 마시고 싶으면 마셔.”
그 말에 연우가 다시 머쓱하게 웃는다. 괜히 뜨끔해선 머뭇거렸더니 준영이 일어나서 오더니 맥주를 직접 꺼내서
따준다. 치익,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왔고 연우가 그걸 들고 준영을 따라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눈치를 슬쩍 살피고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셨다. 목구멍이 싸르르 울리면서 정신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강이 흘렀고 건너편과 이쪽을 이어주는 다리가, 그리고 그 다리 아래로 예쁜
불빛들이 보였다.
하나를 연우의 앞에 놓아주고 나서 나머지 하나를 따서 입으로 가져가서 꿀꺽꿀꺽 마신다. 작은 불빛들이 그의
얼굴에서 반짝이며 부서졌다. 연우는 처음으로 준영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강이건이 말한 것처럼 잘생기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이건인 자?”
“…네. 근데 계속 끙끙거려요.”
“그래서 말인데요….”
“응?”
“그럼 내일 나랑 같이 갈래?”
“…네.”
잠시 생각하던 연우가 저번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못했어요. 준영은 서울에
있는 모친에게 가서 살 생각이면 이건에게도 미리 말을 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 했지만, 산속에서 둘이 붙어
지내는 와중에도 도무지 입은 떨어지질 않았다.
“술 못 마시는구나?”
“…네.”
준영이 자기도 그렇다며 웃는다. 연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그때는 웃고 있어도 사람이 좀 어두워 보였는데. 오늘 역시도 지쳐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빤히 쳐다보니 준영이 눈을 슬쩍 크게 뜬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응. 물어봐.”
하지만 선뜻 입은 떨어지질 않았고 시선은 바닥만 맴돌았다. 손은 자꾸만 맥주캔을 만지작댔다. 준영이 괜찮다고
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비슷해.”
“누가 먼저 좋아했어요?”
“기분이 어때요?”
“뭐가?”
준영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곧 관두었다. 당사자는 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 섣불리 얘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 잘 자.”
손을 흔들자 연우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서는 자신들이 머무는 방 쪽으로 향한다. 이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위로한답시고 기약 없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게 얼마나 몹쓸 짓인지 제가 경험하지
않았던가.
침묵은 금이 아니라 숨통을 조이는 쇠사슬 같았다.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도하가 있는 안방 쪽으로
향했다. 잠든 녀석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으면 어지러운 마음이 좀 정리될 것 같았다.
CH 20.
방으로 들어온 연우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갔다. 이건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벽 쪽을 향해 누워 자는 중이었다.
똑같은 자세로 누워서 그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취기가 오르니 조금 더 옆에 붙어서 자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갔다. 샴푸 냄새가 진하다.
“…강이건….”
허구한 날 병신이라고 부르다 이름을 부르니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눈도 화끈거리고 코끝도 시큰대고 괜히 감정이
복받쳐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대답 없는 그 뒤통수만 노려봤다.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묻던, 아니라고 하니 해맑게
웃으며 다행이라고 하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이 콱
멘다.
“…좋아해서 미안….”
* * *
도하의 옷차림을 본 선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아침부터 도하를 메이크업숍으로 의상실로 실어 나르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본 도하는 어쩐지 더 뺀질거리고 말을 들어먹질 않았다. 혜윤이 직접
오겠다는 거 자신이 컨트롤 하겠다며 시상식장에서 뵙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굴었는데 벌써 후회가 됐다.
어쩐지 머리 위로 검은색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도하는 전혀
엉뚱한 걸 입고 있었다. 셔츠야 흰색이니 다른 걸 입어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 와인색 넥타이는 뭔데.
“예뻐?”
아. 선태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도하가 선뜻 계약했다고 하길래 어쩐 일인가 싶었는데 도장을 몰래
찍었단 말에 그녀다운 짓을 했구나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누나라고 더 난리 치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인 거 보면, 우애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옷에 대해 더 잔소리할까 하다 관두었다. 왁스로 손질해 올린 포마드 머리에 슈트에 타이까지 매고 있으니 은근히
깐깐해 보이고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같은 남자가 봐도 섹시했기 때문이다. 그걸 노렸다면 성공했네.
그런 선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 잘 나온 거 몇 장을
추려 준영에게 바로 전송했다. 읽었다는 표시가 나타나는데도 바로 답장이 없길래 이번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에서 잔 다음 날 준영은 이건과 연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다 같이 갈 계획이었지만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차 키를 건네줬다.
준영은 모친의 얘기를 꺼내지도 내색하지도 않았지만 한 번씩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럴 때마다 도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것보다 집이 나을 것 같았다.
“사진 봤어요?”
[응. 지금 막 보는 중이었어.]
“아까 보냈는데.”
[…응.]
“한참 봤구나?”
[…응.]
“나 갈 때까지 그거 보고 있어요.”
[됐어. 그냥 와.]
도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걸 보고 한쪽에서 시간을 확인하던 선태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온다.
혜윤에게 내려온 지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랑 통화하거나 연애를 하는 거 같아도 놔두라고.
왜냐하면, 전에는 저렇게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 가식적으로 웃거나 사람을 비웃는
건 많이 봤지만. 무슨 얘길 하나 궁금해서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는데 도하가 얼른 복도를 통해 숍 안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린다.
선태가 한숨을 쉬고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생길이 훤하다고, 저 성질을 다
받아주고 어찌 사귀느냐고 얼굴도 보지 못한 상대에게 애도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지켜보던 도하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바람둥이군.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옆이
조용하다. 나갔나 싶어 봤더니 사내가 통화를 마쳤는지 팔짱을 끼고 저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직원?”
“아니요.”
“그럼 배우?”
“네.”
아, 남자가 그러냐며 입가에 비죽이는 미소를 건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적고 그걸
제 모친에게 보냈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려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통해 넥타이가 조금 틀어진 걸 발견했다.
도하가 남자의 다리를 봤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봤다. 그제야 이름이 생각났다. 양진우. 작년에 신인상을
받은 요즘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배우였고, 제가 받아서 살펴보던 시나리오에 주인공으로 낙점된 그 사내였다. 하.
이게 인연인가 악역인가.
“안녕하세요.”
“다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됐습니까?”
“됐습니까는 빼고.”
“네, 빼고. 그럼 이만 ”
“그거, 버릴 거 아니야?”
“아닌데요.”
“…….”
“왜? 싫어?”
빡, 도하가 그대로 양진우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악, 양진우가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휘청 물러났다.
그가 손을 떼어내는데 코피가 주르륵 흘러 흰색 와이셔츠를 적신다. 평소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양진우였고,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선 옆에 있던 장식용 화병을 집어 들었다.
“이 씹새끼! 너 이리 와!”
“그걸로 나 갈기면 너야말로 감당 못 할 텐데?”
* * *
준영이 감자 칼로 사과를 깎는 사이 이건은 테이블을 정리했다. 거치대에 세워둔 휴대폰에선 광고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영화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기에 그걸 함께 보려고 준영의 집에 들른 것이다. TV 가 있으면 좀 더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작했어?”
“아직요.”
이건이 사과 하나를 집어 준영에게 건넸다. 준영이 그것을 받아 들고 화면에 집중했다. 도하가 꼭 보라고 한 건
아니지만 아까 보내준 사진만 봐선 궁금하긴 했다. 머리를 내리면 확실히 그 나이 또래로 보였지만 올리면 꽤
성숙해 보여 다른 사람 같았다.
옆에선 이건이 사과를 우물우물하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마엔 아직 넘어져서 생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건에게 과외를 계속할 건지 아니면 연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건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건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공부야 집에서 해도 괜찮다면서.
“이건이 안 아까워?”
“네? 뭐가요?”
“시작한다.”
“응. 도하 맞네.”
적당히 얼굴에 웃음을 장착하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 있는 배우들 사이에서 도하는 지루해 죽겠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까지도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설마 시상식
내내 저러진 않겠지. 걱정하는 와중에 조금 전 본 도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왜 자신이 선물한 넥타이를 한 거지. 셔츠까지 같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시상식에선 나비넥타이를
매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매니저가 미리 귀띔했을 텐데도 저걸 하고 있다는 건, 본인이 고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다.
준영의 신경은 넥타이에서 도하의 얼굴로 옮겨갔다. 조연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름 꽤 알려진 배우들
사이에서 도하가 있으니 신기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상 가능성이 있으니 혜윤이 직접 찾아왔겠지.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호명된 후보들의 화면이 나란히 나온다. 그 사이에서도 인물로 꿀리지 않는구나
생각하는데 잠시 후 시상자가 들고 있던 봉투를 열고 펼친다. 슈트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내가 긴장을 고조시켰다.
“수상자는!”
“별 헤는 밤의 이도하 씨, 축하합니다.”
우와아아. 이건이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고, 준영이 괜히 뭉클해져선 코끝을 슥 문질렀다. 자식이
없지만 만약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뿌듯하고, 장하고. 그러는 사이 카메라가 도하를 단독으로 비췄다. 도하가
웃으며 일어섰다.
주변에서 다른 배우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깍듯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혜윤의
모습도 잠시 비쳤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는 배우들 못지않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가 일어나서 도하를 안아주며 토닥인다. 도하가 웃으며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곧 시상대 위로 향했다.
시상자로부터 상패와 꽃다발을 건네받고 나니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이 올라와 꽃을
건네준다. 그것을 받아 들고서는 도하가 마이크 앞에 섰다.
전체 샷으로 보니 아까보단 넥타이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젊고 잘생긴 CEO 같기도 하고. 그가 마이크
앞에 서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준영이 긴장해선 손을 맞잡고 꾹 힘을 줬다. 옆에 이건도 마찬가지였는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도하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게 가짜라는 걸 준영은 알았다. 지금 녀석이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다는
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일단은….”
마지막 인사까지 한 도하가 잠시 머뭇대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제까지 덤덤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사회자가 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고, 도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건 역시나 사과를 들고서 눈만 느리게 끔벅였다. 도하 형이 선생님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구나. 부러운
마음으로 옆에 있는 준영을 쳐다보는데 그는 목덜미와 귀가 빨개져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뭐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주방으로 후다닥 가 버린다.
“선생님 더 안 보세요?”
“…어. 나, 나는 됐어.”
어차피 사람들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도하는 톱스타도 아니었고, 게다가 친한 친구나 특별한 사람들을
말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마음을 다스리며 서 있는데 인기상 발표가 진행되는 중인지 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도하 형 또 나오는데요?”
차를 우려내던 준영이 그쪽을 쳐다봤다. 잠깐 화면에 나온 줄 알았는데 이건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 테이블 쪽으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이건의 말대로 휴대폰 화면에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여동생이나 누나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도하가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갔고, 사회자가 매끄럽게 다음 진행을 이어갔다.
이건은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준영은 의아하기만 했다. 자신이 아는 양진우랑 도하가 친해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은데. 양진우는 방송에서 보이는 착하고 신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업계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이 좋지 않았다.
부잣집 사모님을 스폰서로 잡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밤마다 클럽 시크릿룸에서 여자를 돌아가며
만난다는 소문까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건이 휴대폰을 들고서 뭘 검색하더니 이것 좀 보라며 난리다.
정작 언급을 한 당사자인 도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가 막혀 웃는데 카메라가 잠시 도하를 또 잡아준다.
초반 지루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입가에 저만 알아볼 수 있는 그 특유의 악마 같은 웃음이 진득하니 배어 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사고를 제대로 친 거 같은데. 불길한 예감에 굳어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네가 깡패야? 건달이야? 대체 양진우한테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길래 사람을 창고에 가둬?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옛날 버릇을 못 고치고 사고를 쳐! 그것도 네 까마득한 선배한테!]
수화기 건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길래 혹시나 끊어졌나 싶어 ‘여보세요?’ 하고 다시 불렀다. 그제야
그녀의 기막힌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고 했어?]
[…하아.]
“누나도 이해하지? 그리고 양진우네 소속사 대표랑 누나랑 친분 있다며. 잘 해결해줘. 그것도 소속사 능력이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대표님.”
야아아아! 폭발한 그녀가 악을 쓰길래 도하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기다렸단 듯 이번엔 김민석에게
전화가 온다. 하아, TV 한번 출연했다고 완전 인기 스타가 됐구나. 쯧, 혀를 차고 나서 전화를 받으니
상대방에서 후우, 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이도하, 너 죽고 싶지?]
“좋은 거 아니에요?”
[뭐?]
“앞으로 더 바빠질걸요. 손님도 늘어날 테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오겠네. 이야, 축하합니다.”
[이게 갚는 거냐?]
“아닌가 그럼?”
“진짠데. 남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네. 그리고 난 김 선생님이 한가한 거 같아서 바쁘게 해드리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래야 우리 자기한테 더는 전화 못 하지.”
[…….]
이번에도 역시 고함이 들리길래 그대로 끊고서 속도를 높였다. 아, 피곤하다. 집에 가지도 못했는데 피곤하고
지치고 다 하는구나. 그랬는데 끊자마자 이번엔 매니저인 선태 전화다. 아, 짜증 나! 결국 전화를 확 끄고서는
옆자리로 던져 버렸다.
* * *
준영이 전화를 들고 안절부절못하였다. 시상식도 끝나고 조금 있으면 새해가 밝아오는데 도하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으로 갈게요. 기다려요.]
문자 하나만 보내 놓고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라리 뒤풀이를 간다고 했으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렇게 대형
사고들을 저질러 놓고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꺼져 있다.
초조한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의 모친이 TV 를 봤을까? 도하의 부모님은? 다들
뭐라고 생각했을까. 잠잠한 제 전화기를 내려다보니 더 심란하다.
최악의 상상까지 하며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인터넷 기사를 뒤적였는데 포털 사이트에 양진우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연예인 이름으로 도배가 됐다. 기사를 찾아보니 아까와는 달리 어느 여배우의 파격적인
노출과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연예인 커플의 열애설이 특종기사로 떴다.
열리는 문틈으로 도하보다 붉은색 장미가 먼저 보였다. 첫날밤 침대에 깔린 장미가 생각나서 흠칫했더니 잠시 후
꽃다발 옆으로 도하의 잘생긴 얼굴이 나타난다. 머리를 넘기고 제가 준 넥타이를 한, TV 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걱정하던 자신이 무색할 정도로 도하는 한없이 밝아 보였다. 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준영이 고개를 젓고선 꽃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도하가 들어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도 그렇고 준영이
방송을 봤구나 싶어 그제야 슬슬 걱정됐다.
“방송… 봤어요?”
“응.”
도하가 준영을 따라가선 소파에 앉아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얼핏 화가 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서. 준영이 또 한숨을 내쉬었고 이번엔 도하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준영이 저를 향해 양손을 뻗어온다. 도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지, 갑자기
키스하려는 건가 싶어서. 순간 양쪽 귀가 붙들려선 앞뒤로 흔들렸다. 도하가 저로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준영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화내지 마, 무서워요.”
“무거워. 내려와.”
하, 준영은 그제야 뜬금없는 열애설 기사가 이해됐다. 물론 새해 첫날부터 심심치 않게 터지긴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기사가 나오고 나니 도하가 친 사고들은 자연스럽게 묻힌 형국이 됐으니 말이다.
도하가 고개를 들고선 준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솔직히 오면서 사고 친 것보다 그것 때문에 준영이 화났을까 봐
더 걱정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오긴 했는데 예상보단 화를 덜 내니 조금은 안도했다.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작게 끄덕였다. 저녁을 적게 먹었더니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도하가
고개를 쭉 빼고 준영의 양쪽 뺨에 쪽쪽, 그리고 마지막 입술까지 도장을 찍고 나서야 몸을 물렸다. 준영이
손등으로 슥 입술을 닦자 부리나케 와서는 다시 쪽쪽 입을 맞춘다.
“징그러워. 그만해.”
“떨어져.”
“아까 봤잖아.”
“그래도 더 보고 싶어요.”
준영이 마지못해 몸을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머리는 단정하게 올리고 제가 사준 셔츠와 넥타이를 맨 모습이 화면
속 도하 그대로였다. 잘생겼네. 잠시 속으로 감탄하는데 도하가 준영의 양손을 잡아 제 뺨으로 가져가 감싸게
한다.
준영의 몸이 떠밀려 등이 싱크대 쪽에 닿았고 입술이 이번엔 조금 더 깊게 포개진다. 준영이 눈을 감으며 도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호흡이 가빠질 만큼 서로 혀를 문지르고 타액을 섞고 나서야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도하가 아쉬운 얼굴로 더 하려고 덤벼드는 걸 준영이 손바닥으로 막아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도하가 사 온 케이크를 본 준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케이크 위에 사람모형의 장식이 있었는데 둘 다 남자였고,
어딘가 저와 도하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랑 신부처럼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모습으로.
주문 제작한 거냐고 물었더니 도하가 생긋 웃으며 눈치챘느냐고 좋아한다. 만드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건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고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고 와인을 잔에 따랐다.
“아, 해요.”
“얼른.”
준영이 아 하고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포도가 넘어간다. 어금니로 짓이기자 새큼한 과즙이 터져 입안에서 번졌다.
슬쩍 인상을 쓰니 도하가 보면서 웃는다.
“와인 마셔요.”
“이미 많이 마셨어.”
“더 마셔도 될 것 같은데.”
“집에선 연락 없어요?”
“정 신경 쓰이면 나랑 내일 같이 가볼래요?”
“글쎄.”
“막 때리면 내가 막아줄게요.”
“고마워요.”
“뭐가.”
“솔직히 나 그때 엄청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묻지도 못했어요. 불안하고 무섭고, 결국엔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까 봐. 시작도 전에 그냥 접자고 할까 봐. 차마 못 묻겠더라고.”
그 말에 준영이 풀어진 얼굴로 웃는다. 술에 취하니 도하가 아까부터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문을 열고
장미꽃과 얼굴을 빼꼼히 내밀던 때부터. 평소와 달리 자꾸 웃으니 도하가 그런 준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괜찮아요? 토할 거 같아요?”
“그게 아니라….”
“응?”
“같이 잘래?”
“어?”
“싫으면 말고….”
“다시 말해봐요.”
“뭘.”
“방금 한 말….”
준영이 말을 하는 대신 도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하가 그 손을 붙들자 그대로 힘주어 잡아당긴다.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자기 얼굴 앞까지 끌고 와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진짜 취했네.”
“근데… 나는 걱정돼.”
“뭐가요?”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준영이 더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도하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런
준영의 뺨을 어루만져 주고 머리를 쓸어 넘겨줬다. 눈가가 빨갛게 짓무르기 시작하는 걸 보니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미안. 진짜 미안.”
“뭐가 미안해요.”
“그냥 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못나게 굴어서. 제대로 표현해주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면목이 없다.”
술 먹으니 속내를 얘기하는 준영이 도하는 마음 아프면서도 짠하고 안쓰러웠다. 그대로 제 품 안으로 끌고 와 꽉
끌어안았다. 준영의 눈꺼풀이 평소와 달리 아주 느리게 열렸다 닫혔다 움직인다.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니
천천히 눈을 감는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에 제 얼굴을 부볐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볼이 평소와는 달리
뜨거웠다.
* * *
근데 아무리 떠올려도 반지는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안방에서 나오니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도하는 어느새
주방 앞에서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저 모습이 생소하기만 하더니 이젠 꽤 친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일어났어요?”
준영의 눈에 국자를 쥔 도하의 왼손이 먼저 들어왔다. 저와 똑같이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도 함께.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아니라….”
준영의 시선이 국이 아닌 손가락에 낀 반지에 닿은 것을 보고서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아아, 하는 표정을 했다.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도하가 억울하다며 오른손을 왼손 약지로 가져가서 반지를
빼내려 했다.
서운하단 투로 투덜거리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그 손을 붙들었다. 어차피 기억은 안 나는데 끼라고
했으니 꼈겠지 싶으면서도 여전히 살짝 미심쩍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빼라고 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도하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고 준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때 도하가 수저로 국을 떠서 호호 불더니
준영에게 간을 보라며 내민다. 맛을 봤더니 시원했고 간도 딱 맞았다.
“괜찮아요?”
응.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얼른 씻고 오라며 등을 떠민다. 준영이 반지에 대해 더 물을까 하다 관두고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 더 물어봤자 제가 손해일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돌아봤지만, 도하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여전히 주방 앞에 서서 음식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 * *
“왜 왔어?”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연우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안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이건이 고개를 내밀어 담벼락 안쪽을 살폈다. 마루
앞쪽에 어른 신발이 있는 걸 보니 연우의 아버지가 집에 있는 건 분명한데. 그러고 보니 최근엔 그가 연우를
때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뭔데.”
그걸 잠시 쳐다봤다가 고개를 들어 연우를 봤다. 조금 침울해 보이는 표정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는데. 뭐랄까,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하나. 눈치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오늘따라 연우는 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나, 서울 가.”
“뭐?”
“서울 간다고.”
“…왜? 놀러?”
“잘됐네….”
“그래서 언제 가는데.”
“…이따가…. 버스 타러 갈 거야.”
오늘 간다고? 이건이 더는 평온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데 안쪽에서 송연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왜.”
스르륵, 연우가 팔을 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집 쪽으로 향한다. 이건이 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 전화할게.”
서운하고 복잡한 마음에 오랫동안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보통 친구들 같으면 개새끼 소 새끼 욕을 하며 왜
미리 말을 안 했느냐고, 서운하다고 내색이라도 했을 텐데. 그날 밤 연우가 제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
누가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안쪽을 보는데 연우의 모습이 없다.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겠지. 싶은 마음에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집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CH 21.
그녀의 한숨 소리에 도하가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괜히 저 때문에 속을 썩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몰라. 어제 방송 봤으면 연락 오고도 남았을 텐데. 난 솔직히 네 아빠나 할아버지보다 미정 언니가 더 무섭다.]
어우, 머리야.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며칠 전 미정이 이곳에 들렀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는데 저 멀리 강이건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도하가 나중에 걸겠다며 통화를 끊고 나서 보니
이건이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다.
“어? 형 언제 오셨어요?”
이건이 가까이 와서는 어젯밤 도하를 잘 봤다면서, 형이 그렇게 선생님과 각별한지 몰랐다면서, 양진우랑도
친분이 있느냐면서 신기해했다. 그걸 보며 도하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사인을 받아다 주느냐고 물었다. 실상은
사인이 아니라 고소장을 받게 생겼지만.
“커플링이야. 너 이런 거 껴봤어?”
“몰라도 돼. 왜? 부러워?”
“아뇨. 전 대학 가면 사귈 거라서.”
“들어가시게요?”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중에야 열었을 때 회색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색도 촉감도 좋다. 기분이 이상해져 그것을
보다가 목도리를 들어 상자 안쪽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메모 한 장이 같이 들어있다. 그것을 들고
펼쳤다.
마지막 선물. 안녕. 그 글자들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뭐야. 꼭 안 볼 사람처럼. 너랑 내 우정이 그것밖에 안
됐냐. 서운해하다가 그날 밤 연우가 한 말이 떠올라 그것마저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에 가슴이 콕콕 쑤시고 저렸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고 나서 쪽지와 상자를 집어넣고 그 자리에
한참을 또 앉아 있었다. 그래도 가기 전에 연락은 하겠지, 얼굴은 한 번 더 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 * *
도하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준영은 창가 앞 의자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얼굴은 경직됐고
목소리도 가라앉은 걸 보아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인 거 같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길래 도하는 모른 척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 앞에 서서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통화 다 끝났어요?”
“응….”
“이모?”
그러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막내 고모가 제 모친에게 퍼붓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준영을 호적에
올린 걸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면서, 머리가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었다. 파양시켜야
한다면서.
파양이란 두 글자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고, 아직도 가끔 그날의 꿈을 꾸고 일어나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버려지는 것. 자신이 가장 겁내는 일. 서른이 넘어서도 무뎌지지 않은 일.
“괜찮아요?”
“나랑 같이 가요.”
“됐어. 혼자 가도 돼.”
“그럼 데려다줄게.”
고민하던 준영이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딱딱하게 경직돼 있던 도하의 입술 끝이 조금 풀어진다. 몸을 돌리던
준영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통화하면서 이건이 평상 쪽에 앉아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음. 준영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강이건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언덕을 막 뛰어
내려간다. 그걸 보며 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어디 가는 거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건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는데 도하가 몸을 돌려세워 저를 보게 만들었다.
“왜 이래.”
“나쁘지 않지.”
“하지 마. 진짜 무서워.”
준영은 대답 대신 걸음을 멈췄다. 나가서 걷고, 찬바람을 맞으면 머리가 비워지려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잠옷 바지를 갈아입으려 안방으로 들어가는 사이 도하가 제집에
다녀오겠다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 * *
이건이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쪽으로 뛰어갔다. 언제쯤 가는지 궁금해 연우에게 연락했더니 전화가 꺼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연우의 아버지에게 했는데 벌써 한참 전에 터미널에 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 진짜.”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터미널 안쪽을 샅샅이 살피는데 아무리 봐도 연우가 보이질 않는다. 몸을 돌려
입구 쪽부터 다시 찾아보려는데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사줬던 점퍼를 입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송연우가.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옆에 섰는데 사람이 온 것도
모르는지 연우는 고개를 떨군 채 미동조차 없다. 발로 툭, 운동화를 건드렸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본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커지더니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왔어?”
“뭐냐, 너.”
이건이 더 퍼부으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른 시간인데도 터미널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후우, 심호흡하고 나서 연우의 팥을 붙들었다. 연우가 인상을 쓰며 놓으라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대로 힘주어 잡아당기니 몸이 딸려온다.
“아, 씨발.”
“그럼 뭐가 중요한데.”
“전화는 왜 꺼놨어?”
“연우야… 송연우.”
“왜.”
“나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섰던 연우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을 마주 보는데 표정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왜 기뻤는지 모른다.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면 정말 비참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이런
모습이라도 보여줘서 고마웠다.
“내가 너 좋아해.”
“…연우야.”
“징그럽지? 소름 끼치지?”
이건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술만 벙긋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이해한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자신은 연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소름 돋고 징그럽단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받아줄 생각
또한 해본 적 없었다.
“…미안…. 나는 잘 모르겠어.”
“…….”
“진짜 미안.”
서울행 버스가 들어왔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연우가 홱 몸을 돌렸다. 이건이 다시 팔을 잡으려고 하자 거칠게
뿌리치더니 이건을 노려보며 여태 참았던 울분을 터트렸다.
악다구니를 쓰는데 울먹임도 같이 섞여 절규처럼 들렸다. 연우가 가방을 들고 빠르게 걷더니 나중엔 뛰어서
터미널 안쪽으로 사라진다. 이건이 충격받은 얼굴로 제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욱신대고
토할 것처럼 울렁였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가서 잡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보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뛰어갔을 때는 연우도, 연우가 탄 버스도 모두
떠난 뒤였다.
* * *
낮에 서울에 올라가려면 눈을 좀 붙여야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운동이나 하면서 마음을
비우잔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 은행나무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뭐 해? 꼴은 왜 그렇고?”
“…그냥. 나무 보고 있었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 나와 봤어요.”
“형도 못 주무셨어요?”
“어.”
“왜요?”
“몰라도 돼.”
이건과 도하가 나란히 서서 나무를 올려다봤다. 나무를 보던 도하는 새삼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서준영이랑 잘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 나무 신통하긴 하네. 옆을 보는데 이건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어둡다.
“강이건. 무슨 일 있어? 도둑놈이랑 싸웠냐?”
“연우 이제 여기 없어요.”
“왜. 어디 잡혀갔어?”
도하가 놀라 엄마가 있었느냐고 물었고, 이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우에게
전화하니 받지 않았고, 몇 시간 뒤에 걸었을 때는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설마 했는데 진짜 번호를 없앨 줄이야.
송연우의 행동력이 그렇게 빠른지 처음 알았다. 자신을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 마지막에 다른 대답을 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밤새 고민하다 보니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도 너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 밖으로 나왔고, 그렇게 걷다 보니 이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가 마을을 보호해주고 사람들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건은 빌어야 할 소원이 무엇인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다. 송연우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할까. 그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엔 어쩌지. 연우가 원하는
것을 저는 들어줄 수 있을까. 여전히 답을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제가요…? 왜요?”
“걔 때문에 피곤했잖아. 툭하면 사고 친 거 수습하고 다니고, 얻어맞고 다니고. 없으니 이젠 춤이라도 춰야지.”
기운 없는 목소리에 도하가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 이건의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보폭을 맞추며 이건의 표정을
살피는데 한없이 울적해 보인다. 춤을 추고 싶은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너 걔 좋아했냐?”
“그랬으면?”
“네?”
“말했으면, 네가 뭘 할 건데?”
“그냥, 잠이 안 와서 나온 거뿐이에요….”
“네?”
* * *
“가지 말까…?”
잠시 침묵하던 준영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도하는 예민해진 그의 신경을 좀 분산시키고자 아침에 있었던
일을 꺼내놨다. 준영에게 대충 들어 연우가 이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이가?”
“웬일이야. 네가 연우 편을 다 들고….”
“글쎄다.”
“운전대 잡아.”
“그 자기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왜요? 좋아 죽겠어요?”
깍지를 낀 손으로 준영의 허벅지 안쪽을 은근히 누르면서 문지르자 준영이 흠칫했다. 하지 말라고 타박하는데도
손장난은 그치질 않았다. 오히려 위쪽으로 움직여 이번엔 성기 쪽을 자극했고 참다못한 준영이 깍지를 풀고
도하의 손을 홱 내던졌다.
“예쁜 입술 다 망가지겠네.”
“도하야.”
“말해요.”
“손 다시 잡아줘.”
“같이 들어가요.”
“아니야… 혼자 다녀올게.”
도하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막상 앞에서 혼자 들여보내려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한 번 더 조를까 했지만,
준영의 완강한 표정을 보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응.”
“미안해요. 안 그럴게요.”
“다녀와요.”
“응….”
걱정스러운 마음에 시선은 대문 앞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1 분 지났을
뿐인데 10 년은 흐른 기분이다. 여차하면 들어갈 생각으로 안전띠를 풀고서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와 대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 * *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데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준영을 먼저 반겼다. 허리가 좋지 못한 모친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들렀는데 오늘이 그날인 듯싶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집에선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가 준영의 겉옷을 챙겨 받으며 주방 안쪽을 가리켰다.
준영이 애써 웃고서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말대로 미정은 큰 그릇에 무언가를 퍼 담고 있었다.
“…저 왔어요.”
그제야 미정이 뒤를 돌아보더니 왔느냐고 웃는다. 전과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경직된 표정에서 준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전 같으면 뭘 하시느냐고 가서 말이라도 붙였을 텐데 괜히 긴장해선 눈치를 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점심 전이지?”
“…네.”
그 말에 준영이 기가 막혀 웃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데 가서 쉬고 있으라고…. 얘기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됐어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아주머니는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가 물을 챙기는 사이 준영이 의자에 앉아 수저를 집어 들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해 도무지 뭘 넘길 기분이
아니었지만, 눈앞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마다할 순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수저로 갈비탕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밥을 먹고 반찬을 먹는 동안 그녀는 앞에서 챙겨주며 조곤조곤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해외에 나가 사는 다른 형제 얘기와 민주 얘기 그리고 요즘 취미로 수묵화를 그리러 다니는데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얘기까지.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에 준영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움직여 의무적으로 밥을 씹고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밑에 있는 도하가 신경 쓰였다. 어디 가서 밥이라도 챙겨 먹으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러는 사이 어느덧
밥그릇은 다 비워져 갔다.
미정이 그릇을 보며 한 그릇 더 주느냐고 물었고, 준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밥이 목구멍 아래까지
찬 기분이었다. 예민한 상태로 밥을 먹었더니 소화가 되질 않았고, 포만감을 넘어서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매실차 줄까?”
“…네.”
그녀가 매실차를 준비하는 동안 준영이 빈 그릇과 반찬들을 정리했다. 미정은 놔두라고 했지만 준영은 마지막
그릇까지 치운 다음에야 제 자리에 앉았다.
매실차를 타서 자리에 앉던 미정의 시선이 준영의 손가락에 잠시 머물렀다. 졸업 선물로 반지를 해준 적은 있지만
그 외 준영이 반지를 낀 건 처음 봤다. 전에 없던 그의 행동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상태란 뜻이었다. 이젠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다.
“도하랑 같이 왔어?”
“…네.”
“미안.”
찻잔에만 머물던 준영의 시선이 떨어져서 미정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잔을 들어 입에 한 번 대더니 곧바로
내려놓고 나서 어색하게 웃는다.
“엄마….”
미정이 입을 힘주어 꾹 물었다가 놓았다. 하지만 쉽사리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고 준영은 그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
“…죄송해요.”
“…….”
찻잔을 쥔 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미정이 마지막에 한 말은 자신의
속에 있는 벽을 툭 건드렸다. 손은 더는 찻잔을 취지 못했다. 손끝이 저리고 떨리는 기분에 감추려는데 미정이
그런 손을 쥐더니 꼭 감싼다.
“…죄송해요.”
“준영아.”
“…네.”
“나 네 엄마 맞지?”
준영이 고개를 들어 미정을 마주 봤다. 그녀의 눈이 아픔으로 젖어 들었다. 준영은 그제야 그녀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왜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살을 갉아먹었던가. 뒤늦게 죄송하고 후회가 돼선 목이
콱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거기서 도하 보는데 너무 괘씸하고… 배신감 들어서 그랬어.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건 네가 이해해줘. 대신 나도 널 더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해 볼게.”
“죄송해요.”
“물론, 엄마는 도하가 아니어도 괜찮지만.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건 내색 안 하기로
했어.”
“기왕 만나는 거… 좀 더 이해심 많고, 포용력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도하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차라리 나를 때려요!”
도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선 미정을 붙들고 혼내려면 저를 혼내려고 난동을 피웠기 때문이다. 처음엔 기가
막혀 하던 미정은 나중엔 어이가 없어 하며 웃어 버렸다.
운전대를 잡은 도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도 나오질 않아 벨을 누르고 들어갔는데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기에 혹시나 미정에게 야단을 맞아 그런 건가 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해 버린 것이다.
“……”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니고 뭔데.”
“아니야. 좋아하셔.”
준영이 씁쓸하게 웃자 도하가 인상을 슬며시 구긴다. 아무래도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았다. 어릴 땐 미정이 저를
퍽 예뻐했는데 아무래도 자기 아들 짝으론 별로라는 걸까. 젊고 돈도 많고 성격도 이만하면 됐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러게.”
“오늘 자고 갈 거야?”
“오붓하게 둘이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저번에 봤던 욕조 봤죠? 거기서 푹 담그고 스트레스 좀 풀고, 둘이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좋잖아?”
그래, 그럼. 준영이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자 도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음 같아선 같이 서울로 다시
돌아오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싫다고 한 마당에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바빠지면 얼굴 볼 일이
줄어들 테지만, 제 욕심 때문에 준영을 원하지도 않는 곳에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차는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차가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 한쪽에 주차하고 나니 도하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로 간다. 그것을 알아본 준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전에 봤던 여행용 트렁크였기 때문이다.
흠칫 놀라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부터 쳤다.
“뭐야!”
도하가 트렁크를 안으로 가져가더니 바닥에 두고 지퍼를 연다. 준영이 인상을 쓰며 그걸 왜 벌써 여느냐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트렁크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물건이 나온다. 와인과 작은 상자, 그리고 책 한 권
…. 도하가 그 책을 꺼내 들더니 준영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짠. 이거 기억해요?”
잠시 생각하던 준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하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자신이 선물해준 거였다. 어릴 적부터 생일
때마다 책을 사줬고 그 앞에는 늘 축하한다고. 사랑한다고 의무적으로 인사말을 적곤 했었다.
그리고 도하의 마음을 알게 된 열여덟 생일엔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뭘 적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말 한마디
하는 게 조심스러웠고, 신경 쓰였으므로. 그래서 책 앞장을 펼쳐놓고 한참을 앉아 있으면서도 생일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 적지 못하고 결국 그냥 책만 선물해야 했었다.
정색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그렇게 적었다간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일
듯 말 듯 찍힌 볼펜 자국에서 그 당시 자신이 고민하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책장을 덮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엔 트렁크에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건네준다.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뚜껑을 열었다가 인상이 저절로 확 구겨졌다. 조금 전 건네받은 책의 여운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목욕물 받을게요.”
“넥타이는 뭔데.”
대놓고 요구하는 바람에 준영은 입만 벙긋댔다. 어쩐지 불안하다 했어. 저번에 레이스 팬티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차마 그러겠다고 대답을 못 하는데 도하가 양손을 붙잡아 오며 눈썹을 축 아래로 늘어트린다.
“한 번마아안.”
조르는 듯한 말투에 준영이 울상을 했다. 모친과 마주 앉았을 때보다 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손을
슬그머니 떼어놓고 나니 도하가 이번엔 몸을 끌어안고 조른다. 나중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도하가 신나서 욕실로 물을 채우러 갔고 그 모습을 보던 준영의 시선은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싶었지만, 그 뒤 벌어질 후환이 두려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팬티를 집어 들어 펼치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게진다. 저번엔 엉덩이 가릴 천이라도 있더니 이젠 아예 뒤는 끝만 덜렁 있었다.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도하가 수건을 옆으로 홱 던지더니 이쪽으로 걸어온다. 녀석의 성기는 이미 발기해선 걸을
때마다 꺼덕꺼덕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니 잠시 말문이 막혀서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다 입었어요?”
“어차피 벗을 거 뭐하러.”
“그럼 난 왜 입혔어.”
“오늘 콘셉트라니까.”
“준영아, 날 봐야지.”
“반말하지 마.”
“너도 해.”
“…….”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그대로 준영의 입술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탕 안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입술은
더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혀로 핥고 문지르자 준영이 입을 살짝 벌리며 제 입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준다.
키스만으론 부족했다. 도하의 팔을 잡아끌어서 그대로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도하는 준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누우니 성기만 벌떡 일어선 모양이 기가 막혔다. 그대로 준영이 침대로 올라가선 도하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성기를 입에 물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니 준영이 최대한 안쪽까지 성기를 밀어 넣는 게 느껴진다. 도하의 허벅지를 붙잡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인다. 입안에 비벼지면서 꿀쩍 꿀쩍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같아선 지금 엎어놓고 하고 싶은데, 일단은 참기로 했다. 한참을 그러던 준영이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위쪽으로 올라온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준영의 희고 매끈한 살결이 보였다. 도하가 손을 그 안으로 집어넣고
가슴을 만졌다. 엄지로 바싹 곤두선 유두를 문질러주자 준영이 아랫입술을 핥는다. 그대로 제 몸에 다리를 벌리고
앉더니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골에 누르고 문질렀다.
준영이 아래를 문지르면서 도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는다. 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혀로 목을 핥고 뺨을
핥아주는 행동에 아랫배가 바싹 당겨지며 힘이 들어갔다. 늘 자신이 먼저였지 준영이 해준 적은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좋아?”
“죽겠어요.”
“죽진 말고.”
준영이 웃더니 손을 위로 뻗어 젤을 꺼냈다. 그것을 제 손에 짜선 뒤로 가져가더니 구멍에 대고 문지른다.
팬티를 벗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가려지는 부위는 거의 없었고 끈만 옆으로 치우면 됐기에.
“풀어줘야 할 텐데.”
“아니야….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귀두가 입구에 닿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준영은 아랫배가 당기고 밑이 벌어지는 고통에
어금니를 꾹 깨물어야 했다. 엉덩이를 내리는데 저절로 숨이 턱 막혀서 도하의 가슴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무린가 싶어, 잠시 멈칫하는데 도하가 넥타이를 붙잡고선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손을
뒤로 뻗어선 팬티가 한쪽으로 쏠린 준영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천천히 아래로 더 내린다.
“으음.”
“아파요?”
“조금…. 괜찮아.”
안 풀었더니 전보다 더 빡빡하니 속살이 달라붙으며 성기를 밖으로 밀어냈다. 뿌리가 닿을 정도로 삽입하고
나서야 준영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좀 빼요.”
“뺀 거야….”
“엄청 조여.”
그 말을 하며 도하가 양쪽으로 벌어진 셔츠를 걷어 삽입된 부위를 눈으로 확인했다. 발기한 준영의 성기는
레이스에 갇혀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이었고 아랫배 쪽은 제 성기 때문에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불룩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손을 뻗어 그 부위를 만지는데 준영이 제 손으로 도하의 손을 붙들어 깍지를 낀다. 천천히 앞뒤로 엉덩이를
문질러 주자 조금 전보다 더 내벽이 수축한다. 도하가 입술을 짓씹으며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준영이 그런 도하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항상 휘둘리는 편이었다면 지금은 도하가 흥분을 참는 게
보여서 그게 꽤 뿌듯하고 쾌감이 일었다. 저 역시 배 속에 들어온 성기가 전립선을 그대로 누르는 통에 몸이 달아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슴과 목을 핥으며 올라가서 입술 가까이에 닿자 살짝 벌어진 도하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심음이 새어
나왔다.
“후우, 아 진짜.”
“좋아?”
그 말에 준영이 웃자 아래가 더 조이고 도하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몸을 홱 뒤집어 준영을 자신의 아래로
깔아뭉갰다. 엇,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기가 반쯤 빠져나왔고, 준영이 다시 넣고 뭐 할 새도 없이 도하가 쿡,
위로 힘주어 쑤셔 넣는다. 준영이 억 신음을 삼키며 도하의 어깨를 손으로 세게 붙잡았다.
“아파.”
“그러게 왜 놀려.”
잔뜩 늘어지고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가 혀로 준영의 귓불을 핥으며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준영의
성기는 꽉 맞붙은 채 눌려 자극을 받았다.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같이 비벼지며 맑은 액을 토해 냈다.
그 상태로 도하가 귓불을 턱을 마구 핥고 빨았다.
거친 숨소리와는 다르게 도하의 아래는 아주 정중했다. 오히려 준영이 애가 닳아선 양다리를 벌려 허리를 감고
아래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조금 더 센 자극을 원했지만 도하는 오늘따라 자꾸만 느긋하게 굴어서 조바심을
일으켰다.
준영이 도하의 말대로 몸을 뒤집어 배를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뒤에서 도하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셔츠가 내려가며 엉덩이와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팬티는 성인용 사이트에서 산 건데 모델이 입은 것보다
서준영이 입은 게 천만 배는 더 잘 어울리고 예뻤다. 그대로 엉덩이를 움켜쥐니 몸을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입구에 쑤셔 넣으니 준영이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선 흐으음, 하는 비음 섞인 소리를 낸다.
조금 전 젤을 발라 축축하던 그곳을 침으로 범벅해 놓고 이젠 손가락을 넣어 앞뒤로 쑤셨다.
찌걱대는 음란한 소리와 함께 준영이 엎드린 채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며 박자를 마주 맞췄다. 그래도 만족이
되질 않는지 자꾸만 뒤로 손을 뻗어 도하의 팔을 만졌다.
“으음, 얼른.”
철썩, 도하가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세차게 내려쳤다. 아, 준영이 몸을 움찔거리자 넥타이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간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허리를 세우니 입고 있던 셔츠가 어깨 뒤로 넘어갔다.
등 뒤로 도하의 가슴이 바싹 밀착됐고 도하가 팔을 안쪽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쥐어짜듯 주무르고 젖꼭지를 꼬집고
비튼다. 준영이 팔을 뒤로 해선 도하의 양 허리를 감쌌다. 애널로만 자극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자극이
느껴지니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아프냐고 물으면서도 허리 짓은 여전히 난폭했다. 준영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만두지 말라고. 더 해달라고.
도하가 귀에 뺨에 마구 입술을 문지르더니 나중엔 목을 아예 물어뜯을 듯이 씹는다.
아릿한 통증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퍽퍽, 앞뒤로만 움직이던 성기는 점점 난폭해져 사방을 마구
찔러댔다. 전립선을 난도질하듯 문질러 대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준영은 제가 사정한 것도
모르고 헐떡이며 신음했다.
퍽퍽, 쉬지 않고 살이 부딪혔고 준영이 나중엔 그만하라며 사정을 했지만, 도하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CH 22.
어젯밤 정신없는 와중에도 도하는 수건을 따뜻하게 적셔와 제 몸을 닦고 잠옷까지 입혀줬다. 몸을 반으로 가를 듯
박아대던 그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해서 잠옷을 들춰봤더니 안쪽은 더 가관이다.
젖꼭지 부위에 키스 자국과 이빨 자국이 수두룩했다. 사람한테 잘못 물려도 죽는다던데. 그 부분을 슥 만지는데
다행히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아 안심됐다. 그렇게 돌아눕는데 허리도 욱신거리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다.
물론 할 때는 죽어도 모를 만큼 좋기야 하지만. 그러다 어젯밤 섹스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입술이 마른다.
슬쩍 혀로 입술을 핥고 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 도하가 막 현관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일어났어요? 더 자라고 내버려 둔 건데.”
“이건 좀 심했네.”
“누굴 놀려?”
그 말에 준영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말이라도 못하면. 도하가 얼른 식탁 의자를 끌어내더니 방석까지
깔아준다. 아플 테니 이거라도 깔고 앉으라면서. 그 배려가 얄미우면서도 고마워서 준영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건이 메일을 확인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전화도 완전히 번호가 사라졌고, 메일을 보냈지만 확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양손을 펴 얼굴을 파묻었다. 연우의 부친에게 물어보려고 잠깐 집에 들렀는데
그는 오늘도 여전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째깍째깍 탁상시계에 초침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따라가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돈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이마를 쿵쿵, 책상에 찧다가 다시 맥 풀린 놈마냥 머리만 대고 축 늘어져 있다가 그걸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이대로 더 있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차라리 밖에 나가 찬 바람이라도 쐴 요량이었다.
“뭐 해, 인마!”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이건이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우 아버지가 대낮부터 흠뻑
취해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며
송연우를 불러댔다.
맞은편 작은 방에서 곧바로 연우가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바지를 입고서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올 거 같았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집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연우의 부친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긴 한숨을 내쉬고 마루
아래로 내려와 운동화를 신었다.
그걸 보는데 목이 콱 막히고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울컥해선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괜히 눈만
빠르게 끔뻑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처음으로 연우가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그러면서도 정말 저를 잊으려고 하는구나. 홧김에 그러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서럽고 무서워졌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부터 명치 아래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준영이 창밖을 내다봤다. 어젯밤 너무 시달린 탓인지 출발하자마자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덧
제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운전하는데 옆에서 잠만 잔 거
같아 미안한 마음에 뺨을 문질렀다.
“나 잠깐 잤구나?”
차가 동네 좁은 길로 들어가는데 준영이 창에 얼굴을 바싹 대고는 무언갈 쳐다봤다. 도하가 속도를 줄이고 그쪽을
같이 바라봤다. 저 멀리 누군가 논두렁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게 누군지는 가까이에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를 멈춰 세우고 창을 내렸는데 ‘악!’ 하는 고함도 덩달아 들려온다. 준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고
도하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이 왜 저래?”
“강이건!”
준영이 이건을 부르려 했고 도하가 그대로 창문을 지잉, 올렸다. 다시 내리려 했더니 이젠 아예 잠가 버린다.
“놔둬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잖아.”
“너 보면 딱히 그것도 아니야.”
“나는 이미 초월한 거지.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했다고 할까. 배 속에 아마 내장보다 사리가 더 많을걸.”
준영이 눈을 흘겼고 도하는 곧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여전히 이건은 논을 미친 들소처럼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게 차를 몰아 빌라 앞에 세우고 나서야 준영은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없어요?”
“응. 없어졌네.”
도하가 우린 들어가자며 팔을 잡아끄는 순간이었다. 언덕 아래에서 조금 전까지 논두렁을 달리던 들소, 아니
강이건이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야, 저 체력으로 차라리 운동선수를 했으면 공부하는 것보다 더
효율성이 좋을 거 같은데.
“왜.”
“하지 마.”
“네?”
“그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는데 이건이 다시 도하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는다. 표정을 봤는데 비장함과 간절함이
뒤섞였다. 제발 좀 도와 달라는. 하지만 도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팔을 붙든 손을 툭 하고 다시 쳐
버렸다.
“놔.”
“형, 제발요.”
뒤돌아서는데 그때 2 층 창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얼굴을 내민다. 눈이 마주치자 ‘해결했어?’라는 눈빛을 보냈고
도하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강이건이 다시 부탁 좀 들어달라며 팔에 매달린다. 확 패버릴까
싶었지만, 서준영이 쳐다보고 있어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내가 흥신소야?”
“제발요, 형.”
“누굴 보살펴?”
이건이 말을 버벅거렸다.
“보, 보살핀다는 게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프신 거 같거나,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거 같거나, 하여튼
무슨 일이 생기면 형한테 바로바로 연락할게요. 형이랑 선생님은 친형제보다 더 막역한 사이니까요.”
일그러져 있던 도하의 얼굴이 슬며시 펴졌다. 이 새끼가 진짜 바보인 건지. 아니면 바보인 척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준영은 자신이 일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곳에 묶여 이렇게
사는 걸 원하진 않는다고 했다.
“흐음.”
“음.”
“무슨 사인이요?”
“계약서.”
도하가 그만하라며 짜증을 내고 나서 준영이 머무는 집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도하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이건은 의구심이 생겼다. 언제 비밀번호는 알게 된 거지. 처음 봤을 때 둘이 싸우는 거 같길래 사이가
나쁜가 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네.
* * *
“그래서? 들어주기로 했어?”
도하가 따뜻한 차를 건넸고 준영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이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 도하가 도와준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서 도하의 대본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당장 한 달 뒤면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데 도하의 대본은 깨끗하다 못해 손댄 흔적 하나 없었다.
“몇 번.”
둘 다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 과연 이 영화가 제대로 나올까 염려됐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래서 둘 다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됐다. 서로 죽이지 못해 대립하는 상황을 연출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다 진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면 큰일이겠지만.
“걱정 그만하고.”
“무거워.”
“형, 요즘 나 너무 불안해요.”
“왜?”
“그래?”
“이러다 갑자기 내일 막 나한테 빅엿 날리거나 할 건 아니죠? 쪽지 하나 남겨두고 사라진다든가.”
“나 자러 간다.”
“야, 놔.”
이 미친. 준영이 기겁하고 몸을 떼어내려고 하자 도하는 더 달아올라선 뒤에서 성기를 엉덩이에 대고 문지르며
귓가에 짙은 숨을 토해냈다.
“안 해요. 그냥 잠깐만.”
“또 하면 가만 안 둬.”
“그만.”
“할까?”
어느새 성기에선 맑은 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하가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준영이 사정감을
참으며 미간을 구겼다. 바지 때문에 손이 움직이는 게 불편했는지 도하가 갑자기 허겁지겁 준영의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 내린다. 졸지에 하체만 홀딱 벗겨진 준영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소파에 몸을 엎드리게 하고 올라타더니 제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선 성기를 엉덩이 골에 넣고선
압박하며 문지른다. 조금 전까지 도하의 손에 농락당하던 제 성기는 이제 가죽 소파에 문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아쉬운 감이 들어 손을 안쪽으로 집어넣어 성기를 만지려고 하자 도하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양쪽
팔을 뒤로 해서 모아 붙잡는다.
“잠깐, 만.”
“알았어요, 알았어.”
“알긴, 뭘 알아!”
“아프면 말해요.”
“아파.”
“시작도 안 했어요.”
준영이 입술을 깨물면서 욕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풀어줬다고는 하나 젤이 아니라 안은 금방 말랐고,
그래서 축축한 게 아니라 뻑뻑했다. 몇 번 뒤로 뺐다가 움직이니 그나마 경직됐던 내벽이 좀 풀려 움직이는 게
수월했다.
“키스, 아, 줘.”
잠시 후 도하의 입술이 포개졌다. 준영이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자꾸만
신음이 샜다. 방음이 잘되지 않아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도하가 짓궂게도 같은 곳만 계속 찍어대는 탓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아.”
소리를 죽이려 제 손등을 깨무니 도하가 그런 준영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몸을 바싹 밀착한다. 허리만 움직이며
추삽질을 계속했다. 준영이 헐떡이며 숨넘어가는 신음을 냈지만 도하의 손에 막혀 제대로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 * *
“치워…. 내가 가서 씻을 거야.”
“힘든데 누워 있어요.”
“고양이 쥐 생각해?”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준영은 정말 기운이 없는 건지 평소 같으면 난리를
피웠을 텐데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그렇게 허벅지 안쪽과 성기 부분과 엉덩이 사이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닦아준다. 그러다 구멍을 확인하고는 눈이 찌푸려졌다.
“부은 거 같아요.”
“호, 해줄까요?”
다를 게 뭐람. 준영이 이불을 감싼 채 반대편으로 힘겹게 몸을 돌리고 누웠다. 끄응,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걸
보니 정말 어디 하나 고장이 나긴 난 것 같았다. 도하가 그런 준영을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어깨를
슬쩍 만졌다.
“잘 거예요?”
“만지지 마. 진짜 피곤해.”
알았어요. 그럼 나 밑에서 잘게요. 시무룩하게 말하고 수건을 가져다 놓고 와서 보니 준영이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다. 눈치를 보며 살피던 도하가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몸을 준영에게 밀착해서 허리를 팔로 감고서 안으니 예상보단 아무 반응이 없다. 고개를 슬쩍 들고서 보는데 눈을
뜨고 있어서 흠칫 놀랐다. 팔을 거두려는데 준영이 그 팔을 붙들고선 제 몸에 다시 올려놓는다.
“그냥 자.”
“…괜찮아.”
도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대로 더 힘주어 제 쪽으로 꽉 끌어안는데도 준영은 불평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니 준영의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잘 자요. 인사를 하니 준영이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엉덩이를 툭 툭 두드렸다. 너도, 잘 자.
“한 번 더 할까?”
“…방금 소름 끼쳤다.”
“이런 게 참사랑이지.”
“으.”
“잘 자요, 우리 자기.”
쪽. 목덜미에 키스를 받으며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체온이 싫지 않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과는 달리 이상한 설렘으로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등 뒤에서 도하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걸 자장가 삼아 눈을 끔벅이다 보니 어느덧 저도 잠에 빠져들었다.
* * *
“손님 다 왔습니다.”
도하의 말로는 연우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점점 그 앞으로 다가갈수록 죄지은 놈마냥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요동을 쳤다. 전봇대 뒤에 몸을 감추고서 다시 심호흡한 후 고개만 삐죽 내밀어 편의점
쪽을 살폈다.
안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조끼를 입은 직원이 나온다. 그런데 연우가 아니다. 뭐지.
여기가 아닌가. 휴대폰으로 확인하니 분명 맞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누군가 오는 게
보였다. 연우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짧아져 있었다. 편의점 앞에 있던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남자가 연우를
보며 웃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이건이 미간을 좁힌 채 전봇대에 바싹 붙어 얼굴만 내밀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뭐지….”
“아….”
이건이 충격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상상만 했던 일이 벌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질 못했다.
“얼굴이 왜 그래?”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연우의 귀가 시뻘게지자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연우가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나서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고개를 쭉 빼고 밖을 내다봤다. 전봇대
뒤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아니, 여긴 왜 온 건데. 오만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서 터질 거 같은 와중에도 심장이 쿵쿵 미친 듯 발광하며 뛰기 시작했다. 후,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마음을 추스르는데 딸랑 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린다.
화들짝 놀라서 보니 손님이다. 정신을 차리고 계산대 쪽으로 가면서 다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강이건은 전봇대 뒤에 숨어 있었다. 들어온 손님이 우산 하나를 가져와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연우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어색하게 웃었다. 며칠 일했지만 싹싹하게 손님을
상대하는 건 제 성격상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래도 기껏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치기 싫어 최대한 예의 바르게
웃으며 손님에게 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쳤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그대로 나가서 우산을 펼쳐 들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게 보였다.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쏟아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이제 밖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강이건은 여전히 전봇대 뒤에 서 있었다.
“아….”
“지금 가세요?”
연우가 입을 달싹였다. 시선은 자꾸만 밖에 있는 전봇대 앞으로 움직였다. 여전히 강이건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저대로 얼어 죽을 작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걱정되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궁금했다. 왜 여기까지 저를
찾아왔는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온 건지. 그래, 마지막으로 이유나 듣자는 심정으로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뱉고선 안쪽에 가서 우산 하나를 챙겨 들었다.
“좋을 대로.”
“뭐 하냐, 여기서.”
“이거 쓰고 가.”
“…….”
“다신 오지 말고.”
“연우야….”
“…….”
한마디 쏘아붙이고선 돌아서는데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연우의 몸이 홱 돌아갔다, 이건이 우산은
내팽개치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연우가 지지 않고 같이 노려보자
이건이 아랫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았다.
악을 쓰는 연우를 보며 이건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도하에게 그런 부탁을 하기까지 이곳에 오기까지 기다리는
내내 소심한 저한테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서 안 보겠다고 하니
서운하고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커다란 파도처럼 저를 덮치고 있었다.
“아우, 진짜….”
“안 울어.”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연우가 짜증을 내며 이건을 끌고 전봇대 옆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택가 사이에 골목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연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건이 연우의 뺨을 붙들고선 그대로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을 거칠게
부비길래 연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건의 어깨를 밀쳐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귀와 뺨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심장이 미친 속도로 쿵쿵거렸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이건도 놀랐는지 같이 입만
벙긋댄다.
“뭐, 뭐 하냐 지금!”
“…해, 해보라며.”
“…어.”
“이 씨발…!”
“근데… 다시 해도 또 할 수 있을 거 같아….”
“…….”
* * *
“배고파요.”
그들을 쳐다보던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낯익은 얼굴 몇 명이 보였다. 짧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때 제 손에서 꽃을 빼앗아 간 그놈이다. 대가리 터진 덴 이제 멀쩡해졌네.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는데 그도 도하를 알아봤는지 담배를 문 채로 움찔해선 얼른 시선을 피한다.
주변에 있던 다른 무리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그걸 보며 준영이 도하에게 목소리를 낮췄다.
“쟤들이 왜 우릴 쳐다볼까?”
도하가 더 가까이 가자 그들은 마치 송사리 떼처럼 우르르 몰려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제게 머리를 얻어맞은
곽상윤이 한 번 돌아보길래 양 손가락으로 눈을 찍는 시늉을 했다. 담에 걸리면 눈깔 지져 버린다는 뜻이었는데,
녀석이 용케 알아들었는지 흠칫 놀라 몸을 홱 돌리더니 무리와 함께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한다.
메뉴가 나오는 동안 준영은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10 여 분이 지나서 들어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 만나고 온 부동산 사장이라고 했다. 계약할 경우 건물주가 가격을 좀 조정해줄 수 있다고 했다면서.
“꼭 그 자리여야 해요?”
“본 데 중엔 제일 낫던데. 왜? 별로야?”
“왜.”
너무나 솔직한 반응에 준영이 웃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도하가 더 못마땅한 표정을 한다.
이미 말은 다 해놓고서. 준영이 눈을 흘겼고 곧바로 주문한 밥과 반찬이 나왔다. 생선구이 정식이었는데, 도하가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먼저 바른다. 어릴 때도 젓가락질 하나는 딱 부러지게 하더니 커서도 여전히 그랬다. 그는
살을 발라 준영이 먹기 좋게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는 형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질색하는 표정과는 다르게 준영은 생선 살을 발라 도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도하가 웃으며 그것을 밥에
올려놓더니 한 입 크게 떠먹는다. 그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적 제가 챙겨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만 쳐다봐요.”
“왜.”
“부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어요.”
그 얘기를 꺼냈더니 도하가 질색하며 싫어한다. 어지간하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받아치더니 그 얘기에 성질을 내는
걸 보니 준영은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솔솔 생겨났다.
도하가 인상을 쓰자 준영이 손을 뻗어 도하의 손을 붙든다. 도하가 얄밉게 째려보다 시선이 준영의 네 번째
손가락에 닿았다. 어쩐 일인지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준영이 제 손가락을
쳐다봤다.
“반지 어디 갔어요?”
“아니 그걸 왜 빼요?”
“비누 껴서 잠깐 뺏어.”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슬쩍 호텔 얘기를 꺼냈다가 준영이 흘겨보며 퇴짜를 놓는 바람에 결국은 집으로 가기로
결정이 났다.
* * *
“또 빼기만 해요.”
그 말에 도하가 그럼 CCTV 도 없이 가게를 할 생각이었냐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준영이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매장 안에 책이 많으니 설치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CCTV 의 용도와 도하가 생각하는
용도는 전혀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하면 나야 더 좋고.”
그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기에 준영이 눈을 흘겼다. 도하가 옆자리로 팔을 뻗더니 준영을 향해 손짓한다.
여기 와서 누우라며. 준영이 가만히 쳐다만 보자 이번엔 팔을 잡아서 당긴다.
“얼르으은.”
“졸리면 자요.”
“…응.”
“안아줄까?”
“…응.”
“잘 자….”
도하가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준영의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더 꽉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이 내일 아침엔 머리를 덮을 만큼 쌓여
이곳에 둘만 갇혀 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 * *
감겼던 눈을 뜨니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 씨. 도하가 이불을 끌어 제 머리에다 덮다 말고 갑자기
이불을 들치고 옆을 쳐다봤다. 서준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누운 채로 혀엉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다. 손을
위로 뻗어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9 시가 넘었다.
어지간하면 준영보다 늦게 일어나는 법이 없는데 어젯밤은 준영의 얼굴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다 새벽에 잠이
들었더니 피곤했나 보다. 간만에 푹 잤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밖이 시끄러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밤새 많이도 왔네. 아니나 다를까 밑에선 준영이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고 있었고, 이건의 아버지도, 1 층 사는 고시생도 나와서 눈을 치우는 중이었다.
“형.”
하고 부르니 준영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곤란한 표정으로 눈짓을 하길래 도하가 영문을 몰라 눈썹을
치켜들었다. 왜. 하는 표정으로 보는데 곧바로 1 층 사는 동현이 고개를 들더니 도하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3 층 형제님 왜 거기 있어요?”
아. 도하는 그제야 자신이 준영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등 뒤로 준영이
얼른 닫으라는 신호를 보냈기에 못 들은 척 창문을 닫아 버렸다.
“아, 진짜.”
아예 모른 척하자니 밑에서 비질을 하는 준영이 마음에 걸렸다. 내려가서 대신할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다 창가
아래 책상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제가 준영에게 준 책이었다.
열여덟 살 생일에 선물 받았던, 앞장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책.
아니면….
[김민석이랑 다시 사귀기로 했다. 미안.]
“안 돼!”
“인생이 추울 때 너를 만나….”
아. 울컥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에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눈으로 그
글자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
“도하야.”
“…형.”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도 전에 도하의 등 뒤로 책 한 권이 펼쳐진 게 보인다. 아, 봤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보면 도하가 떠올랐다. 열여덟 생일엔 차마 그것을 들려줄 수
없었다.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지 몰라서. 아니, 자신이 그것을 읽을 때마다 도하를 떠올리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봤어?”
“고마워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
“알았어, 울진 마.”
도하가 준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허리를 껴안는다. 고마워요. 물기 가득한 그 목소리에 괜히 울컥해선 도하의
등을 토닥이고 어루만져줬다. 오랫동안 힘들게 해서, 진작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도하가 참던
울음을 터트린다. 결국엔 준영도 눈가가 빨갛게 붉어졌다.
외전.
[충무로의 라이징 스타죠. 콜드블러드에서 매력적인 악역으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도하 씨를
모시고 오늘 인터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도하 씨?]
[예.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영화는 성공리에 개봉을 마쳤고요, 성적도 꽤 좋은 편이라 만족하고
있습니다.]
능수능란하게 대답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길래
이어폰을 빼고 나가봤더니 이건이 와 있었다. 학원을 마치는 시간과 카페 문을 닫는 시간이 비슷하여 늘 함께
퇴근했기 때문이다. 이건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복 아랫부분을 잡아당기며 펄럭였다. 어지간히 더운
모양이었다.
“이건이 왔어?”
“네, 선생님. 밖에 엄청 더워요. 저 땀 좀 보세요.”
“시원한 음료 줄까?”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마지막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친다. 아르바이트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물론 도하는 못마땅해 죽으려고 하지만. 왜 여자가 아닌 남자를 뽑았느냐를 시작으로 나이가
너무 어린 거 같다고 온갖 트집을 잡아댔다.
카페를 차린 지 3 개월 정도가 됐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꽤 많았고 단골도 늘었다. 블로그나 SNS 에 예쁜 카페로
소개된 적도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를 지인이 도와줬는데 신경을 많이 쓴 효과를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부산하게 뒷정리를 하는데 마침 도하에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내일 아침에 일찍 간다며 뭐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 연락이었다. 서둘러 답장을 보내고 나서 정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 * *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 대시보드 화면에
악질사장이라고 뜬 걸 보고서 도하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니 너머에서 혜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디야.]
“왜.”
“그러니까 왜.”
“아, 짜증 나.”
[뭐야, 인마?]
“싫어.”
[야!]
도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화 촬영 끝나고 인터뷰에 화보 촬영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서준영 얼굴 못
본 지가 2 주일이 넘었다. 통화하고 싶어도 둘 다 낮에는 바빠서 힘들고 그나마 밤에 영상통화를 하긴 하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그것도 무리가 있었다.
혜윤의 협박에 도하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툭하면 서준영을 들먹이고 협박하는 바람에 기가 막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돈 없어요.”
“하긴, 네가 뭔들 있겠냐.”
“왜.”
[출발했어?]
“…응. 너는?”
[우리 이제 가려고]
“밤에 전화 왜 안 받았어?”
[언제?]
“구라면 죽는다.”
[너한테 왜 거짓말해. 진짜야. 못 믿겠으면 이따가 엄마한테 물어봐.]
순순히 대답하자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걸렸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이따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하가 흘깃 연우를 쳐다본다. 시선을 느낀 연우가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도하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도하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데 연우가 눈을 가늘게 늘이고 흘겨봤다. 집착의 아이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사돈
남 말 한다고 하면 한 대 얻어터지거나 그대로 밖으로 내동댕이치겠지. 항변하지 못하고 결국 입을 닫았다.
비탈진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 옆쪽으로 계곡이 나왔다. 천막이 늘어진 곳으로 백숙, 오리탕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더 위로 올라가다 보니 준영의 차가 눈에 띄었다. 그 뒤에 주차하고 나서 시동을 끄고 연우와
함께 내려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파란색 천막 아래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이건을 부르기도 전에 연우가 그곳을 향해 후다닥
뛰어간다. 그걸 보며 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네.
이건과 연우가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 도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준영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이스박스와 라면 그밖에 간단한 조리기구들이 보인다. 평상을 빌리면 이곳에서 취사도 가능하다더니.
“준영이 형 어디 갔어?”
식당이란 말에 고개가 자연스레 위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엔 가정집처럼 꾸며 놓은 식당이 두 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준영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도하가 언덕 아래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닥했다. 연우와 이건은 어느새 계곡 아래로 내려가 둘이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준영이 연우를 부르자 곧 돌아봤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서울로 올라간 연우는
이곳에 살 때보다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수다스러울 정돈 아니지만 전보다 말도 많아졌다.
“안녕하세요.”
준영의 옆에 있던 선재가 알은척을 했고 도하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양선재는 준영과
전공이 같았고, 방송국에 취직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고
도하는 그 점이 제일 못마땅했다.
인사를 한 선재가 아래쪽으로 먼저 내려가고 나서 준영이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흡연할 만한 장소를
찾아 뒤쪽 한적한 곳으로 가길래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갔다. 달칵,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몸을
돌리길래 도하가 선글라스를 벗어 앞 셔츠에 걸치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다 피웠어요?”
도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담배의 쌉쌀한 맛이 그대로 전해졌다. 2 주 만에 맛본 서준영 입술은 여전히 달았고,
맛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차를 몰고 집이든 어디든 둘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마음껏 뒹굴고
싶은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투정을 부리면서 준영의 손끝을 잡고 흔드는 바람에 준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보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도하가 출연했던 방송도 몇 번이나 다시 보기로 보고,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마치고
나면 영상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래도 직접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는 것만 하진 않았다.
“보고 싶었어.”
“핑계.”
“아니거든.”
“짜증 나….”
“이따 집에 가서 실컷 만져.”
그 말에 도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창고를 돌아 나오니 이건이 전화기를 막 꺼내던
참이었다. 그런 이건을 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다들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준영이 늘어지는 몸을 평상 위에 뉘었다. 무더운 7 월의 날씨였지만 산 밑이고 그늘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카페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동안 휴일도 없이 일하다 보니 얼마 만에 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 두 캔에 취기가 올라왔고 얼굴이 아까보다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도하가 얼음 잔을 건넸다. 어디서 얻어온 건지 모르지만 긴 유리컵 안에 얼음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건네받아 쭈욱 들이켜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아, 살겠다.”
“두 캔밖에 안 마셨어.”
도하가 준영의 달아오른 얼굴에 대고 손으로 부채질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니 준영이 그대로 다시 평상에
드러눕는다. 도하도 그 옆에 모로 누워서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준영을 내려다봤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애들은?”
“좋을 때다.”
“키스하고 싶다.”
“그러지 마. 너 이제 얼굴 다 팔렸어.”
준영은 그 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래도 전엔 도하랑 같이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나선 아니었다. 도하가 카페에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알아보기 바빴고 사인을 부탁했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노골적으로 변하는 손길에 누가
볼세라 그 손을 잡아서 바닥으로 내려놨다. 도하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몸을 더 바싹 밀착했다.
“더워.”
“집에 가서 실컷 안으라니까.”
“별거 다 해도 돼요?”
그 말에 준영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무섭다고 했더니 도하가 준영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내가 선물 사 왔어요.”
“나 내일 카페 나갈 거야.”
“내가 대신 나갈게요.”
“손님 다 쫓아내려고?”
“그것도 괜찮네.”
“미움받을까 봐 대답 안 할래.”
준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흘겼다. 도하가 몇 번 카페를 관뒀으면 하고 내비친 적이 있길래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진심이었나 보다.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일하느라 매달리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더는 그 얘기는
묻지 않았다.
* * *
연우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나서 침대에 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풍선껌 하나를 꺼내 씹다가 풍선을 크게
불어 터트렸다. 강이건은 집에 잠시 들르러 갔고 저만 도하네 집에 남겨져 있었다.
목록에 김유나가 있었다. 통화한 건 아니고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 같았다. 껌을 씹는 동작이 느려졌고, 이번엔
메시지 함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김유나랑 주고받은 메시지는 별다를 게 없었다. 여름방학 시간표를 공유하고,
숙제 얘기가 오고 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휴대전화를 얼른 책상에 올려두고 침대에 올라가 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문이 열리고 이건이 들어왔다. 눈만 슬쩍 들어 쳐다보니 접시에 수박을
잔뜩 썰어서 가져왔다.
“연우야. 수박 먹어.”
“…웬 수박?”
“지금은 생각 없어.”
연우는 안방 침대에 누워 에어컨을 틀고 이불로 다리만 덮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길래 그쪽으로 가서 고개를
쭈욱 빼고서 들여다보니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해?”
“응.”
“아저씨한테는 안 가 봐?”
“내일 잠깐 들를 거야.”
“…응.”
연우네 아버진 전처럼 술을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퍼먹지 않았다. 허구한 날 두드려 패던 아들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떠난 게 꽤 충격이었는지 갈수록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고, 매일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일도 하고 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분이 별로야?”
“아니, 왜.”
“왜 연락하냐고.”
“내가?”
퍽. 풍선이 크게 부풀었다가 터졌고 연우는 여전히 이건을 향해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건이
어색하게 웃자 이번엔 휴지에 껌을 싸서 뱉더니 그대로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다. 난 잘래.
“그럼 자. 나도 자러 간다.”
“여기서 자.”
“어?”
“왜. 싫어?”
“그건 좀….”
“내가 잡아먹어?”
“아, 씨발.”
“욕하지 말고.”
“야….”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에 이건이 고개를 돌려 연우를 쳐다봤다. 씻고 나와서 그런지 피부가 물기를 머금어 더
뽀송뽀송했다. 연우는 서울에 올라간 뒤로 마음이 편해서인지 여기 있을 때보다 얼굴도 훨씬 밝아지고, 편안해
보였다. 이건은 그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
“…….”
“왜 대답 안 해?”
이건이 잠시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를. 유나도 더는 저한테 관심이 없었는데 연우는 아직도 유나를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게 놀라웠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연우가 볼멘소리를 한다.
“아니… 그건 별로.”
“거봐.”
“같은 거야?”
“알았어.”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쉽게 그러겠다고 하니 꾹 다문 연우의 입가로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뺨과 목에
닿는 강이건의 팔뚝을 꾹 누르면서 괜히 눈을 마주쳤다.
“키스할래?”
이건이 대답도 하기 전에 연우가 이건의 뺨을 붙들고는 제 쪽으로 보게 하였다. 이건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연우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연우가 몸을 움직여 이건의 위로 올라가서 입술을 포갰다. 이건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꾹 다물어진
입술을 혀로 핥아주고 입술을 포갠 채로 문지르며 으응, 하는 신음을 내자 엉덩이 아래 깔린 이건의 성기가
꿈틀꿈틀 일어서며 발기하는 게 느껴진다. 슬쩍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연우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봤다.
“몸 만져줘.”
“뭐?”
“키스, 해줘.”
이번엔 이건이 빼지 않고 바로 연우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능숙한 키스가 아니라 치아가 닿고 혀가 마구잡이로
엉켰지만 그래도 황홀했다. 몸을 더듬는 이건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확히 10 분을 그러고 나니 이건은 칼같이 연우를 떼어내며 또다시 선비 같은 소리를 했다.
섹스는 성인이 된 후에 해도 괜찮다는 그 말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번에도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 * *
“재미있어요?”
“응.”
“나 심심해.”
스르륵 내려와 바닥에 앉으니 준영이 일어나 드라이기를 가져온다. 그것을 콘센트에 연결하고 나서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도하의 머리에 대고 말리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헝클었더니 머리가 부스스해졌고 갑자기 어릴 적
파마했을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손가락으로 빗겨주고 나서 드라이기를 끄니 도하가 다리에 몸을 기대고선
고개를 위로 젖혀서 준영에게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키스해줄래요?”
준영이 상체를 숙여 입술을 거꾸로 겹쳐 물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문질러지고 준영의 뺨을 만지던 손은
뒤통수로 가서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준영이 입술을 떼어내자 도하가 그대로 일어서더니 준영을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가선 뺨을 보듬었다. 키스도 하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자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얼굴 뚫어지겠어.”
“그랬어?”
“나도 뭐….”
“뭐, 뭐?”
“너 말고 나이 든 남자 누가 좋다고 해.”
입술을 겹치고 한참이나 키스를 나누던 중 도하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반짝인다.
“아니야. 넣어둬.”
잠시 후 밖에서 삑 소리가 나더니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러더니 곧바로 현관문이
다시 열리고 도하가 들어왔다. 아주 기를 쓰고 뛰어 올라왔구나. 손에 들린 건 역시나 제가 본 그 문제의
상자였다. 그냥 아까 불태워 버릴걸. 뒤늦게 후회를 하는데 도하가 그것을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본심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며 눈까지 찡긋하는데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걸 열어보지도 못하고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도하가 쪽, 키스를 날리고 안방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그 틈에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데 아까
봤던 그 옷이 맞다. 꺼내서 펼쳐 드니 기가 막혔다.
내려다보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나온다. 그걸 본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게 번졌다.
“와. 끝내준다.”
“사진 찍고 싶다.”
“죽여 버릴 거야.”
도하가 웃으며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입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준영은 아니라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근육 덩어리인 녀석이 이걸 입은 걸 보고서 제 눈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준영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테이블에 상체를 엎드렸다. 그러자 치마가 올라가며 엉덩이가 반이나 드러났고
레이스 팬티가 보이자 도하가 입술을 핥았다. 그대로 그 앞에 가서 앉아 엉덩이를 잡아 벌리니 준영이 이를 꾹
깨물면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도하가 혀를 내밀어 레이스 부위를 혀로 핥았다. 침을 잔뜩 묻히고
손으로 주무르는 사이 준영의 목과 귀는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손 묶어줘요?”
“아니, 괜찮아.”
그 말에 도하가 다시 엉덩이를 양쪽으로 붙잡고 혀를 가져갔다. 앞니로 슬쩍 깨물고 입술로 문지르다가 손끝으로
힘을 주어 팬티 가운데 부분을 찢었다. 찌익, 레이스 가운데가 벌어지며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번엔 그곳에 혀를 대고 문질렀다. 회음부를 핥다가 천천히 올라가 구멍에 혀끝을 문지르자 준영이 양팔에
얼굴을 파묻으며, 으응, 하는 신음을 낸다. 도하가 손가락으로 구멍 입구에 대고 꾸욱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빠듯하게 들어가자 준영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하체를 들썩였다. 볼기는 혀와 이로 괴롭히면서 구멍을
손가락으로 연신 쑤셔대니 죽을 맛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팔을 뒤로 뻗어 도하의 손을 붙들었다.
“왜요? 해줘요?”
“응.”
“제대로 안 들려.”
“…해줘….”
“입고 있는 옷이 뭔지 몰라요?”
도하가 볼기에 입술을 대고 말하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안쪽을 긁었다. 덕분에 준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인님, 아, 해, 해주세요….”
도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잘 들리지 않는다고 다시 시킬까 하다 정말 성질을 낼까 봐 포기하고
곧 손가락을 빼낸 다음 바지를 내려 제 성기를 꺼냈다. 잔뜩 부푼 성기에 침을 뱉고 나서 위아래로 문지르는데
준영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본다.
철썩, 도하가 그 엉덩이를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아, 준영이 신음하며 다시 엉덩이를
움직이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엉덩이를 때렸다. 금세 붉은 손자국이 난 엉덩이를 콱 움켜쥐고 벌리고선 그
안으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에 준영의 어깨며 등이 경직되는 게 보였다. 도하가 그대로 목 아래쪽 지퍼를
내리자 옷이 벌어지며 맨 등이 드러났다. 벌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척추를 따라 혀로 핥아 올라가자 구멍이
움찔거리며 더 수축한다.
“아파?”
준영이 다 찢어진 레이스 팬티를 허벅지에 걸친 채로 카펫 위에서 엉덩이만 치켜들고 헐떡였다. 그 뒤에서 도하가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개처럼 핥아댔다. 회음부를 혀로 핥아 올리고 고환을 입안에 넣고 굴리니 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양손을 끈으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다리가 점점 좁혀지니 도하가 허벅지를 잡고 옆으로
벌려 구멍이 훤히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혀로 주변을 핥아주니 준영이 눈이 풀려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성기를 쥐고 준영의 구멍 입구에 맞추니 준영이 천천히 엉덩이를 내린다. 압박감에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야금야금 잘도 먹어치우더니 결국 마지막까지 집어삼키고 나선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자극을 줬다.
도하가 손을 위로 뻗어 준영의 젖꼭지를 꼬집고 문질렀다. 빳빳하게 곤두선 젖꼭지를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붉다
못해 짓무르기 직전이었다.
“다리 세워 봐.”
준영이 굳혔던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세우자 도하가 준영의 허리를 잡고 위로 퍽, 하고 쳐올렸다. 아, 준영이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는데 성기에서 울컥하고 정액이 쏟아져 도하의 배를 적셨다.
그 상태로 허리를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준영이 마치 두더지처럼 몸이 통통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성기가 빠지기 직전 다시 허리를 잡아채 올려주고, 다시 잡아채 올려 쳐주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준영의
성기가 다시 발기를 시작했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찌걱찌걱하는 소리와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준영이
발끝에 힘을 주고 구멍을 더 좁혔다. 이미 사정한 데다 계속 안쪽에서 자극이 가해지니 배변감이 느껴지며 소변이
마려운 것처럼 또 다른 사정감이 휘몰아쳤다.
퍽퍽퍽, 철썩철썩, 퍽퍽, 퍽퍽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는데 간신히 신음을 죽이며 참던 준영이 으으응, 하는
울음소리를 내자 성기에서 물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구멍이 빨판처럼 쫙 달라붙으며 성기를 쥐어짰고 도하가 큭
신음을 내며 마지막으로 위로 올려치며 몸을 떨었다. 아,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는데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몸을 움찔거리고 떨어댄다.
도하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준영을 꽉 끌어안았다. 제 배를 적신 액체에 대해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준영이 구멍을 움찔거리며 도하의 어깨에 맥없이 풀썩 쓰러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제 구멍에 들어온 도하의
성기가 전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야.”
신음을 억지로 참느라 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에 도하가 잠시 애석한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대로
준영을 들어 움직인다.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구멍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크기에 준영이 설마 해서는 도하를 불렀다.
“씻으러 가는 거지…?”
“알았어요.”
도하가 상체를 숙이며 다급하게 입술을 찾아 물었다. 허리는 난폭하게 움직이면서 키스는 어찌나 다정하게 하는지,
그 와중에도 기가 찼다. 그렇게 두 번이나 더 사정하고 준영이 기절하기 직전에 도하가 웃으며 반지를 손에
끼워줬다. 낮에 반지 빼면 후회하게 해준다더니 그게 녀석이 앙갚음한 거란 걸 반지를 끼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 * *
밖으로 나오며 도하를 찾는데 보니 창가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비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한동안 날이 가물어 논이 쩍쩍 갈라지더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도하가 돌아보는데 입가에 미소가 반듯하게 걸린다. 가까이 다가오길래 준영이 소파로 가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엉덩이 또한 불에 덴 것처럼 화끈댔다. 아무래도 출근하긴 틀렸구나 생각하며 소파에 드러누우니 도하가
다가와선 바닥에 앉아 눈을 맞춘다.
“너 일부러 더 그랬지?”
눈을 가늘게 늘이고 노려보니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을 움직여 점점 위로 올라온다. 뒷목을 꾹꾹
주무르고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
그렇게 손은 움직이면서도 얼굴은 가만히 소파에 대고서 눈을 맞추고 쳐다만 봤다. 눈동자 속에 새겨 넣기라도 할
작정인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빗소리가 더 거세진다.
그 말에 도하가 질색할 줄 알았는데 선뜻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신김치가 넉넉할지 모르겠다고 걱정까지
하길래 준영이 입가에 작은 웃음을 만들었다.
“우리 도하 많이 너그러워졌네.”
“예쁘지?”
“어, 예뻐.”
“장난해, 너지.”
“야, 그건 좀….”
준영이 기겁하며 하지 말라고 몸을 비틀었고 도하가 잽싸게 소파로 올라가선 그런 준영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좁은 소파에 나란히 붙어서 누워 있으니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이 먼저 조금 더 자자며 눈을 감았고
도하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눈을 감은 채 준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