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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12 월의 겨울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준영이 한숨을 흘렸다. 평소보다 차들이 많아 정체가
심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산타복을 입은 남자가 종을 흔드는 게 보였다.

꼬마 하나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다 다시 돌아와 천 원짜리 한 장을 넣고선 부끄러운지 급하게 뛰어갔다.


뛰어가며 산타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해맑은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 짓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가 파출소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금 통에 돈을 집어넣던


사랑스러운 꼬마는 이제 저만큼 자라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후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니 운전석에 앉은
민석이 손을 잡아 온다.

“조금만 참아. 주말 밤이라 차가 많이 막히네.”

“매번 미안하다.”

“됐어, 어디 한두 번 일인가요. 대신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응.”

민석이 쉬지 않고 손을 만지작댔다. 그는 준영의 대학 동기였는데 처음엔 친구로 지내다 어느샌가 연인으로


발전했다. 먼저 다가온 것도, 만남을 주도해 나간 것도 그였다. 예전엔 자신이 남자와 사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제 성향을 알고는 있었지만 안다는 것과 그걸 실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근데 걔는 사춘기가 아직도 진행 중인가 봐?”

“모르겠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는 건 아니고?”

민석이 은근슬쩍 비꼬는 것도 이해는 됐다. 벌써 녀석 때문에 이게 몇 번째란 말인가. 최근에 둘 다 바쁘다 보니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오랜만의 데이트를 방해받았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말했잖아.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알아. 근데 가끔 나는 걔 보면 기분이 싸하단 말이야. 그게 과연 친한 형을 바라보는 눈빛이냐, 이 말이지.”

“또 쓸데없는 소리.”
민석은 농담인 듯 웃었지만, 속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준영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녀석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얼굴을 보기 전엔 귀여운 이웃집 남동생을 상상했었다. 준영의 말투에 애정이 담긴 것도 그렇고,
항상 녀석을 묘사할 때 귀여운 강아지처럼 얘길 했으니까.

그러다 처음 본 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추나 푸들이 아니라 셰퍼드나 시베리아 허스키 같은 대형견에
가까웠다. 제 키만큼 큰 키에 수영까지 해서 그런지 몸은 어지간한 성인보다 건장했으며 목소리 또한 변성기가
지난 건지 완벽한 중저음이었다.

거기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아끼는 동생이라니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셋이 같이 밥을 먹을 때만


해도 순한 양처럼 생글생글 웃던 녀석이 준영이 전화받으러 나간 사이 눈빛이 달라지면서 제게 삐딱하게 구는 걸
보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실수인 척 테이블을 밀어 제 앞으로 음료를 쏟더니 태연하게 웃었고, 그러고 나서 준영이 돌아오자 돌변하여
안절부절못하더니 제게 죄송하다며 냅킨을 건네는 깜찍함을 선보였다. 처음엔 장난으로 치부했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 확실히 알게 됐다. 친한 형을 빼앗긴 데서 오는 단순한 질투심이 아니라는 걸.

“장담하는데, 넌 몰라도 걔는 아닐걸.”

준영이 그만하라고 눈을 한 번 흘기는 사이 차가 조금씩 움직였다. 골목을 돌자 앞쪽에 저 멀리 파출소가 보였다.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나서 준영이 먼저 내렸다.

“금방 올게.”

“데려다주라고까진 하지 마. 나 그럼 진짜 질투한다?”

“시끄러워.”

생긋 웃는 민석을 뒤로하고 준영이 차에서 내려 파출소 쪽으로 걸어갔다. 연말이고 주말이라 그런지 파출소 앞은
취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시비를 말리는 나이 많은 경찰이 그만 좀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깐 멈추는 것 같더니 그것도 잠시 또다시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교복을 입은 무리가 있었다. 정확히 한 명은 다른 교복을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같은 교복을 입고서, 한두 번이 아닌지 파출소가 제집이라도 되는 양 다들 편안해 보였다. 얼굴이
엉망인 것만 빼면.

“이도하.”
혼자 다른 교복을 입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남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올 줄 알았다는 얼굴로 씩 웃더니
손까지 들어 인사를 한다. 한 대 확 쥐어박을까 하다 간신히 참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상대편 아이들은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터져 씩씩대고 앉아 이쪽을 노려보는데 도하는 얼굴이 아주 멀쩡했다. 안
맞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렸을 텐데, 아쉽다고 해야 하나.

“혹시 이도하 학생, 보호자 되십니까?”

“…예.”

경찰관 한 명이 준영을 불렀고, 그쪽으로 갔더니 전후 사정을 설명해준다. 시비가 붙었고, 먼저 주먹을 휘두른
건 상대편이라고 했다. 미성년자라 훈방 조치되지만 자꾸 이런 일로 드나들어 좋을 게 없으니 아이에게 단단히
타이르라고 덧붙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준영이 몸을 돌렸다. 도하는 가방을 막 챙겨 들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경찰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더니 파출소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간다. 싸웠다던 패거리들은
노려볼 뿐 더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취객 하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파출소 옆 기둥을 붙들고 토악질을 해댄다.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코트 주머니를 뒤지는데 라이터가 안 보인다.

차에 두고 온 건가 생각하는데 눈앞에 불이 댕겨졌다. 고개를 옆으로 움직이니 도하가 한 손을 외투에 찔러 넣은


채 나머지 다른 한 손으로 라이터를 제 턱 밑에 당당하게 받쳐 들고 있었다.

은색의 지포 라이터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게 학생이 소지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이
자식이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 어느 것 하나 비싸지 않은 게 없었다. 말만 하면 다 사주고 다 들어주고,
막둥이라고 부모가 애지중지 키웠는데, 대체 왜? 어째서!

울컥 화가 치밀어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그대로 구겨 버리고 손을 뻗어 녀석의 귀를 잡아챘다.

“따라와, 인마.”

귀를 잡은 채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출소 앞에서 때렸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저보다 큰 이 녀석이 다른 사람 눈에 아동처럼 보이진 않겠지만. 도하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딱히
반항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파, 좀 놓고 말해.”

파출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야 준영은 잡고 있던 귀를 놓았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꼬집혔던 탓인지


도하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생글생글 웃는다. 두들겨 맞았다간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너 몇 번째야, 이게?”

“아까 경찰 아저씨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쟤들이 시비를 먼저 걸었다잖아.”

“그래도 적당히 피했어야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한밤중에 여러 명을 상대로 싸움질이야? 제정신이야?”

그 말에 도하는 준영의 손을 끌어 제 뺨으로 가져가더니 애교 피우는 강아지처럼 문질렀다.

“화내지 마요, 준영 씨. 잘못했어요.”

준영이 그 손을 야멸차게 쳐내고 눈을 부라렸다. 이게 어디서 어릴 때나 써먹던 수법을.

“까불어.”

“인상 쓰지 마. 못생겨져.”

이번엔 손을 뻗어 준영의 미간을 문지른다. 추운 날씨에도 피부에 닿는 손은 따뜻했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에


준영이 그 손을 치워내고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피곤해. 말을 말자, 말을.

“택시 잡아줄 테니까 가.”

“왜.”

“뭘 왜야. 그럼 집에 안 들어갈 거야?”

“형 차는?”

“안 끌고 왔어. 끌고 왔어도 너랑 안 가.”

그제야 도하의 눈이 준영의 어깨 너머로 향한다. 아까부터 길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깜빡이를 켠 채 이쪽을
주시하는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차에 익숙한 남자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상대였다. 여전히 그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준영에게 물었다.

“둘이 여태 같이 있었어?”
“얼른 택시 잡아줄 테니까 들어가기나 해.”

“어디서 있다가 왔는데?”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해서.”

“알 거 없어.”

“형은 저 사람이랑 무슨 사이야?”

“친구라고 했잖아.”

“거짓말.”

“야.”

“저 사람 어디가 좋아?”

친구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도하야.”

“궁금해서 그래. 어디가 좋아?”

능글거리며 웃던 도하의 얼굴이 점점 울 것처럼 변해간다. 준영은 그 표정을 외면했다. 요즘 들어 녀석은 자꾸


이상한 짓을, 이상한 표정을 해 보였다. 이젠 그게 낯설었고, 무섭기까지 했다.

“차비 줄 테니까 얼른 가.”

“둘이 섹스도 해?”

이번엔 적잖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마냥 아기 같던 그 입에서 섹스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저더러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랑 둘이 섹스도 하냐고 묻는 그 태도가 더 충격이었다.

“너 지금….”

준영이 화를 내지도 못하고, 차마 더는 말을 잇지도 못하자 도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그냥 농담이었다고, 형이 당황하는 거 보니 더 이상하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준영은 서둘러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택시비를 내밀었다. 가, 얼른. 도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준영이 억지로 주머니에 택시비를 쑤셔 넣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그 말을 무시한 채 준영은 길가 쪽으로 나섰다. 다행히 저 멀리 택시가 오는 게 보였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려는데 몸이 뒤로 확 딸려간다. 뒤쪽에 있던 도하가 제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놀라 쳐다보니 조금 전까지 짓궂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 그 낯선 표정을 한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영이 제 팔을 잡은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예상과는 다르게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끈질기게 준영을 붙들었다.

“집에, 같이 가자.”

“이도하. 요즘 너무 까불어.”

“같이 가자, 나랑.”

“너 진짜 왜 이래!”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하며 고집을 부리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화를 냈다. 답답한 마음에 목에 두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든 다음 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아직 어린애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도하는
언젠가부터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아니, 저번 주 일만 생각해도 이미 한 발은 넘은 것 같았다. 멋대로 준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실수인 척 문지르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다.

최근 몇 달 사이 이유 없이 툴툴거리고, 지랄하고, 그러다 형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울고, 그랬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하지만 준영은 그 감정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모른 척해야 할 것 같았다. 며칠 전 내린
이른 첫눈처럼. 자연스레 녹아 없어지도록.

“들어가. 더 얘기 안 할 거야.”

냉정하게 말하고 몸을 돌리니 더는 잡지 않는다. 차 안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민석이 보였다. 뒤통수로
날아드는 시선이 칼날처럼 따가웠다. 전 같으면 어떻게든 택시를 태워 보냈을 거다. 같이 가자고 끝까지 조르면
마지못해 갔을지도 모른다. 제게는 가족보다 더 애틋하고 귀여운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파출소로 이도하를 데리러 오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녀석이 자꾸 비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어쩌면 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차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내 마음을 모르느냐고, 울고 있을 것 같았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앉아 벨트를 끌어왔다. 일부러 앞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렸다.

“가자.”

“쟤 안 가는데?”

“놔둬.”

“괜찮겠어? 신경 쓰이면 데려다줄까?”

“됐어, 뭐하러.”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고개를 드니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도로 쪽을


쳐다보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녀석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오가는 차들의 불빛 때문인지 상처받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는 것조차 힘겨웠다.

“가자, 얼른.”

“완전히 열 받은 거 같은데?”

“가자니까?”

흐음. 민석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핸들에 턱을 받치고 도하를 보며 실실 웃었다. 이러고 있으면 더 열
받으려나?

“장난하지 말고, 가.”

“왜? 귀엽잖아. 봐봐, 애인 빼앗긴 표정인데?”

“김민석.”

“알았어, 그만할게. 그만한다고.”

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준영은 저를 보지도 그렇다고 앞에 있는 도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마를 손으로 짚고 있었다. 반쯤 내리깐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자기 화났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졌다.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앞에 버티고 선 꼬맹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순간 준영이 고개를 돌리며 하지 말라고 밀어냈고, 곧바로 그의 눈은 있는 대로
커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민석이 돌아보기도 전에 퍽! 엄청난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민석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앞 유리에 붙어 있던 벽돌이 주르르 밑으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유리는 처참할
정도로 금이 갔고, 여전히 도하는 서늘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봤다. 준영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민석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젠장.”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준영이 먼저 붙들었다. 민석은 이를 까득 갈았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도하가 몸을 홱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저만치 가는데 팔을 들어 얼굴을 연신 닦는다.
우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전 같으면 따라갔을 것이다. 돌려세우고 녀석을 달래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곧 추운 겨울 어둠 속으로 녀석이 차츰 사라졌다.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아까부터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따가웠다.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열일곱 살의 꼬맹이 때문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v0CH 1.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도하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팔을 위로 뻗어 알람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이번엔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이 씨. 짜증을 내며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찾았다. 하필 어젯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테이블 위에다 던져놨는지 후회가 됐다. 그냥 모른 척 자 버릴까 하다 시간을 확인했다. 대충 누군지 짐작됐기에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향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인 선태였다. 저보다 일곱 살 많은 형이었는데,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서 누나가 같이 일하라고 붙여준 사람이었다. 이제 같이 일한 지 반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생각보다 꽤 잘
맞았다.

“…형, 이 시간에 전화는 좀 아니지 않아?”

[일어났어? 오늘 점심때부터 촬영 있는 거 알지? 상반신 탈의도 있으니까 아침 최대한 적게 먹어. 안 먹으면 더


좋고. 스튜디오가 거기서 멀지 않으니까 10 시까지 내가 데리러 갈게.]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던 도하가 인상을 구겼다. 지금 씻고 준비하면 바로 나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윗옷은 벗고 트레이닝복 바지 하나만 입고 잤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바지
앞섶이 불뚝 솟아올랐다. 쯧쯧, 불쌍한 녀석.

[듣고 있어?]

“알았어. 이따 봐.”

전화를 끊고 나서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신 다음 냉장고를


열었다. 샐러드로 대충 아침을 때우면 되겠군. 굶으면 성질이 나빠지니 되도록 뭘 조금이라도 먹고 가는 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욕실 앞으로 가 바지를 벗었다. 아까부터 빳빳하게 발기해 있던 성기가 휘청 위로 튀어 올라온다.


녀석을 툭 한 번 건드려 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으로 가서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돈해주고 칫솔을
집어 들었다.

양치질을 마치고 샤워부스로 향하는데도 녀석은 여전히 분기탱천이었다. 찬물을 틀어 뿌렸지만 쉽게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도하가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미안하다. 잘난 네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아침마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찬물을 계속 뿌릴수록 녀석은 더 기세등등해졌다. 물먹고 사는 수생식물도 아닌 주제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강직함이 꼭 제 주인을 닮았구나, 감탄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바디클렌저를 손바닥에
짰다.

손바닥을 마주 비벼 풍성하게 거품을 내서는 제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질렀다. 한껏 발기해 있던 녀석을 살살


달래주니 목 안쪽에서 짙은 신음이 올라온다.

“흠….”

눈을 감고 벽을 손으로 짚은 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정하고 깔끔한 얼굴에 속쌍꺼풀이 있는 갈색 눈.


활짝 웃을 때 한쪽만 들어가는 보조개.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마다 슬쩍 깨물던 입술. 그 입술을
벌려 제 것을 빨아주는 상상을 하니 단단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하아, 씨발….”

빠르게 치대다 보니 어느덧 사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카메라 렌즈 안으로 도하의 상반신이 들어찼다. 신인배우라 다들 걱정하는 분위기였는데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도하는 각기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셔츠를 풀고 카메라를 보며 짓궂은 얼굴로 웃을 땐 소년 같았고, 쌍꺼풀 없는 긴 눈으로 무표정하게 쳐다보면


다소 차가운 느낌을 풍기면서도 성적 매력을 뿜어냈다. 웃는 것과 아닌 것에 따라 분위기가 매우 다르니 매력이
많다고 사람들은 얘기했다.

촬영이 거듭될수록 주변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진작가는 좋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모 잡지사 기자와 그의 동료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가운데 선태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촬영장으로 오는
내내 툴툴거리길래 걱정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내고 있으니 기특하기만 했다. 잡지사 기자를 이쪽으로
부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어찌 기사를 안 좋게 써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어린 친군데 매력이 많네요. 인물도 좋고.”

윤 기자의 말에 선태가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 도하가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은 아니죠. 제 배우지만 흠잡을 데가 정말 하나도 없다니까요.”

“매니저님은 좋으시겠어요. 저런 배우랑 같이 일할 수 있어서.”

“당연하죠. 매일매일이 행복합니다. 하하.”

잠깐 쉬었다 가실게요. 스태프의 말에 잠시 촬영을 멈추고 다들 막간의 휴식을 취했다. 도하가 선태를 발견하고
풀어진 셔츠를 여미며 다가오자 윤 기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도하 씨. 엘 매거진의 윤혜주 기잡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도하가 그 손을 가볍게 잡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윤 기자가 앉으며 사진을 몇 장


찍고 시작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예. 그렇게 하세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같이 온 동료가 카메라에 도하의 모습을 담았다.

“일단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속 잡기가 힘든 분이라 어렵게 저희가 섭외했네요.”

“제가요?”

“모르셨어요? 요즘 충무로에서 떠오르는 핫한 신인이라고 불리는데요.”

“설마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금시초문인데요.”

도하의 농담에 윤 기자가 기분 좋게 웃자 옆에 선 선태가 그런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곧이어 차례대로


질문이 이어졌다. 최근에 도하가 출연한 영화가 꽤 반응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학창시절에 유망한 수영선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세요.”

“네. 원래는 수영선수가 꿈이었는데 어깨부상 때문에 오랫동안 쉬면서 관두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군대
다녀왔고요.”

“아, 군필이세요?”

“네. 대학 입학하고 나서 바로 갔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이유가 있을까요, 군대에 일찍 간 계기 말이에요.”

“글쎄요, 뭐 이런저런 이유로?”

“혹시 실연?”

그 말에 도하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이유가 됐죠. 짝사랑이었으니 실연도 아니지만요.”

“어머, 어떤 여성분이길래 도하 씨처럼 멋진 남성분이 혼자 좋아했을까요?”

“그러니까요. 지금쯤 땅 치고 후회하면 좋겠는데, 그분이 그럴 성격은 아니라서요. 혹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이번엔 윤 기자가 웃었다. 아무래도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요. 많은 분들이 영화에 나오는 강우란 인물을 굉장히 인상 깊게 보셨나 봐요.
여주인공의 첫사랑 역할로 잠시 나왔을 뿐인데 남주인공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렇게
말씀해주시거든요.”

“과찬이십니다.”

“저도 실은 영화를 봤고, 그 헤어지는 장면에서 연기라기보다 너무 실제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요. 강우가 극
중에선 고등학생이었는데 실제 고등학생 땐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인기가 무척 많으셨을 거 같은데요.”

“오늘 너무 좋은 말만 들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일단 인기라기보단 수영과 학업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누굴


만날 여유도 없었고요.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강우처럼 튀는 성격도 아니어서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던 것 같습니다.”

“믿어지지 않네요. 없는 듯 지내기 쉬운 외모는 아닐 텐데?”

“저희 부모님께서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외모는 그저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많은 분들이 저의


외모에 대해 칭찬하시곤 하는데 외모보단 제 가슴속에 담긴 열정과 노력을 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어린 나이신데 이렇게 생각이 깊을 수가 있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태가 팔짱을 낀 채 얼굴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도하가 오늘따라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현재 소속사 없이 개인 활동을 하시는데요, 수많은 회사에서 러브콜이 들어간 걸로 저희가 알고 있거든요.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회사가 따로 있으신가요?”

“글쎄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 봐서 시기가 되면 제대로 말씀드릴게요.”

“그렇군요. 그럼 그땐 저한테 먼저 연락 주시는 건가요?”

“당연히 그래야죠.”

“얼른 정해져서 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우리 도하 씨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다음 질문인데요, 아까 첫사랑 얘기해 주셨잖아요. 혹시 지금 만나는 분이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있다면 어떤 분인지도요.”

“인터뷰에 포함되는 내용인가요?”

“네 포함되어 있고, 제 사심도 살짝 들어간 질문입니다.”


윤 기자가 예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때 한쪽에서 촬영이 들어간다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가 나서며 일단
화보 촬영을 마치고 나서 인터뷰를 이어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윤 기자가 선뜻 그러라고 대답하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이따 뵐게요. 도하가 저만큼 멀어지자 선태가 윤 기자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윤 기자님. 아까 그 내용 말인데요.”

“어떤 거요?”

“짝사랑 얘기요. 땅 치고 후회한다 어쩐다 하는 그 부분이요. 좀 빼주실 수 있을까요? 배우다 보니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잖아요.”

선태가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윤 기자가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나서
도하가 촬영하는 쪽으로 향했다.

* * *

“인기라기보단 수영과 학업에 집중하느라 연애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던


것 같습니다?”

선태가 기가 막힌 듯 웃자 옆에 앉은 도하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거울을 살피며 머리를 매만졌다. 차가 제법 막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일 굶은 상태로 화보 촬영을 하느라 피곤한데 거기에 인터뷰까지 했더니 기가 다
빨릴 지경이었다.

“우리 배우님은 어쩌면 그렇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할까?”

“진짠데. 연애 한 번도 못 해봤다고 했잖아.”

“그거 말고 인마. 내가 박 감독님한테 들은 게 있는데?”

실은 첫 영화의 감독이었던 도하의 매형이 선태에게 은근슬쩍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처남인 도하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말썽을 부리고 다녔는지 합의금만으로 날린 게 집 한 채 값은 될 거라고 말이다.

“너 그러다 큰일 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한테 얻어맞은 애들이 막 인터넷에 까발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바로 고소 들어가.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아, 나 변호사는 있지?”

“말을 말자, 말을.”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집은 반대 방향인데 왜 이쪽으로 빠지는데?”

“대표님이 너 들어오래.”

“누나가? 나를 왜?”

“왜긴 왜야. 계약 때문에 그러는 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선태를 제게 붙여 준 게 큰누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사사건건 다 간섭하고 감시하려고 들 게 아닌가.

“그래서? 거기랑 하자고? 우리 누나랑?”

“남 밑에 들어가는 것보단 그래도 가족이 낫지. 들어온 것 중에 조건도 제일 낫고.”

“낫긴. 큰누나가 날 얼마나 부려 먹을지 몰라서 그래? 아마 살과 뼈도 모자라 골수까지 빨아먹을걸.”

“야. 아무리 그래도 누난데.”

“하여튼 난 싫어. 소속사 없이 해도 되잖아?”

“인마, 그래도 회사는 있어야지. 막말로 내가 혼자서 너 받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대표님이 너한테 나 붙여줄 때 이럴 거 전혀 예상 못 했냐?”

“어, 못 했어. 그리고 나 막 그렇게 잘나가고 싶은 마음 없어. 여차하면 때려치울 테니까, 형도 너무


욕심부리지 마.”

“와, 이 자식 봐. 이제 시작인데 벌써 때려치울 생각부터 하네. 너, 인마! 프로 근성도 없어?”

“없어.”

“없, 없어?”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런 거 없다고.”

“역시 금수저. 아쉬울 거 없으니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구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차 돌려. 나 오피스텔 가서 쉴 거야. 오늘 진짜 피곤해.”

“안 돼.”

아 진짜. 도하가 온갖 짜증을 내며 차창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선태의 말대로 애초에 누나가 나서서 도와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일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 때려치울까. 엄마 뜻대로 복학해서 얌전히 학교나 다닐까. 일단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문젠데. 밥도
먹어야 하고. 아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차를 끌고 올걸. 근처에 택시가 있던가.

어쩔까 궁리를 하며 창밖을 보는데 길옆 카페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짙은 회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는데 뒤통수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다. 키도 체격도 비슷하고 걸음걸이도 그랬다.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간 남자가 주문하려고 방향을 트는 순간 도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창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주문하느라 목도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물고
있던 입까지 벌어졌다.

그때 운전석에 있던 선태가 툭 팔을 건드렸다.

“좋게 생각해. 어쨌든 이 바닥에 발을 디뎠으면 정점은 한번 찍어 봐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너 이거 시작할


때 뭐라고 했어? 유명해져서 인정받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그 사람 만나게 되면….”

탁, 그때 보조석 문이 열렸다. 선태가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보니 도하가 어느새 문을 열고 막 내리는


중이었다. 야, 뭐야? 팔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밖으로 나가 인도 쪽으로 튀었으니까.

“저, 저 미친놈!”

끼익.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급정거했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창을 열고 욕을 해댔다. 선태가 기겁하며 차를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운전석에서 내려 확인했을 때 도하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도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이쪽으로 들어갔는데.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쪽으로 가보니 옆 빌딩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지나 빌딩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고 퇴근 시간이 겹쳐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가 봤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계단
쪽도 다 살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새 위층으로 올라간 걸까. 여기서 기다리면 내려오려나. CCTV 라도 확인해달라고 할까. 그러다 놓쳐 버리면…?
사고회로가 꼬이며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야, 인마. 너 어떻게 된 거야? 거기서 갑자기 뛰어내리면 어떡해. 위험하잖아!”

뒤늦게 따라온 선태가 야단을 치려다 말고 멈칫했다. 도하는 얼이 빠져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여태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 한번 드는 법 없이 항상 당당했던 녀석인데, 어째서.
넋이 나간 얼굴로 건물 안을 연신 두리번거리던 도하는 결국 선태에게 어깨를 붙들렸다.

“이도하. 정신 차려. 너 왜 이래?”

도하가 그제야 선태를 확인하고는 아, 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곧 무슨 생각인지 제 어깨를 붙든 선태의
손을 떼어내고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 형. 먼저 가. 나 잠깐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래.”

단번에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선태가 1 층 로비를 살폈다. 여기서 사람을 찾는다고? 누굴?

“먼저 가. 알았지?”

그러고 나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억지로 끌고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한번 고집부리면 누구보다 대책 없는 걸 알기 때문에 관두기로 했다.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도 곧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 밖으로 나와 버렸다.

* * *

도하가 맥주 캔을 따서 거실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전화가 울리길래 확인하니 친구인 승준이었다. 새벽 2


시에 전화를 걸었다는 건 술에 취했을 확률이 컸다. 받아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도하야, 지금 어댜? 왜 안 아, 인마!]

혀가 잔뜩 말려 들어간 거 보니 어지간히 취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모인다고 했었지. 옆에서 다른


녀석들이 왜 매번 약속을 어기느냐고 욕을 하고 난리다. 서로 바꿔달라고 하는 와중에 그나마 멀쩡한 지훈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야, 이도하. 살아는 있냐? 방금 들었지? 애들이 너 죽여 버린대.]


“너희끼리 놀아. 나는 바빠.”

[새끼 튕기긴. 여긴 물 겁나 좋아. 잠깐 나왔다 갈래?]

“아니. 끊는다.”

야, 잠깐만, 잠깐. 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으나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차피 듣고 있어 봤자 술주정이나


할 테지. 일을 시작하고 친구들을 못 본 지도 한참이 됐다. 딱히 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모이면 하는 얘기야 허구한 날 뻔했으니까.

전화를 끊고 맥주를 집어 들었다. 입으로 가져가 넘기니 목구멍이 찌르르 울렸다. 창가 앞에 앉아 밖을


내려다보니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강을 가로지르는 차들이 꽤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누군갈 만나러? 혼자 있는 게 더 실감이 나서 기분이 씁쓸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창가 끝에서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였다. 자신이 없던 날 모친이 와서 직접 설치해두고 간


것이었다. 자주 혼자 보낼 막내아들이 안쓰러웠는지 트리에 매달린 카드마다 좋은 글귀며 안부 인사를 적어 놓고
갔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트리 전구를 보고 있으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준영이 크리스마스와 생일 때마다 제게


써줬던 편지와 선물들 말이다.

맥주 캔을 자리에 놔두고 침실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서재로 만든 공간이었는데, 책은 많이 있었지만 생전 볼


일은 없었다. 서재 또한 순전히 모친의 취향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하니 떡하니 만들어 놓은 걸 어쩌겠는가.

몸을 숙여 책상 아래쪽에서 상자 두 개를 끌어냈다. 그걸 포개어 들고서 다시 거실로 나왔다. 아까 앉았던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상자를 열었다. 어릴 적부터 준영에게서 받은 선물이 그곳에 들어 있었다. 생일,
크리스마스, 입학, 기타 등등.

하나씩 꺼내보니 별의별 게 다 나왔는데, 가장 많은 건 역시나 책이었다. 동화로 시작한 책 선물은 나중엔
소설로 바뀌었다. 책 한 권을 집어 표지를 넘겼다. 다음 장엔 직접 쓴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각각의 책마다 글씨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마지막은 항상 사랑한다고 끝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열일곱 생일부턴 그곳에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았다. 그 이유를 저도 알고 서준영도 알았다.

관계가 틀어진 건 서준영이 줄 수 있는 사랑과 이도하가 원하는 사랑이 서로 다른 것임을 깨달은 시점이었다.
도하는 어렸고, 이성이 감정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열여덟 생일에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 후로
서준영이 저를 차갑게 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책을 한참 들여다보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열여덟 생일에 받았던 책에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은 줄


알았더니, 아주 작은 크기로 볼펜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걸 왜 이제 봤지. 매번 글자를 쓰던 그 자리였다. 뭘
쓰긴 쓸 모양이었던가 보군. 여기에 쓰일 글은 무엇이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늘 그를 만났더라면 물어볼 수 있었을까. 빌딩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안에서 서성였지만 결국 서준영을 만나진


못했다.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경비원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빌딩 밖으로 나왔다. 그랬음에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12 시가 넘어서까지 그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선태에게서 연락이 왔고,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손끝으로 종이 위에 찍힌 볼펜 자국을 어루만졌다. 울컥 감정이 복받쳤다. 책을 펼친 채로 얼굴을 묻고 그대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준영에게 풍기던 은은한 향이 맡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만 좋은 향이 났는데,
그게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야 자신이 서준영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좋으면 그 사람한테서 나만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난다는 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서준영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 * *

칫솔을 입에 문 채로 미간을 잔뜩 구겼다. 세면대 거울 속에 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맥주를 몇 캔이나


비웠는데도 잠은 쉽게 오질 않았고, 결국 아침까지 잠을 설친 탓에 얼굴은 엉망이 됐다.

오늘 일정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선태가 이 꼴을 봤다면 한 마디가 아니라 백 마디는 잔소리해댔을
테니까. 양치를 마친 후 입을 헹구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트레이닝복 가랑이 사이가 올라왔다.

입안에 거품을 헹구고 나서 바지를 벌려 안을 확인했다. 아플 정도로 들고 일어선 녀석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보통 아침에 발기하는 게 정상이라고 하지만 눈치도 없이 발딱발딱 일어서는 놈을 보니 오늘은 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놔두기로 했다. 맨날 손으로 해주니 감사한 것도 모르고, 제 주인의 심적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으니 좀 고생할 필요가 있었다.

욕실 밖으로 나와 창가에 늘어놓은 맥주 캔을 치우고 상자에서 꺼낸 선물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담았다. 그걸 다시


서재에 넣어두고 나와서 이번엔 주방으로 향했다. 일단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서 씻은 후 외출을 할 생각이었다.

식빵을 굽는 동안 냉장고를 열어 배달된 샐러드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작은 팬에 달걀을 깨트리고 프라이를


만들었다. 대충 만들어 접시에 담아 놓고 다 구워진 식빵을 챙겨 식탁으로 가져왔다.

식빵을 한 입 베어 무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침부터 누굴까, 테이블에 올려둔 전화를 흘깃 확인했더니
선태였다. 안 받으면 그만이지 했는데 끈질기게 울려댄다. 어제 일도 있고, 아무래도 오늘 소속사 건에 대해
마침표를 찍을 모양이었다.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귀로 가져갔다.

“콜록, 콜록, 여보세요?”

[뭐야? 너 어디 아파?]

“형, 나 죽겠어. 콜록, 어제부터 기침도 심하고, 어지럽고, 독감인가?”

[야야, 기다려. 나 지금 갈 테니까.]

“아냐. 오지 마. 괜히 형까지 옮으면 큰일이잖아. 이미 병원 다녀오고 약도 받아놨어. 오늘만 쉬면 나을 거


같으니까, 절대 오지 마. 알았지?”
그래도 오겠다는 걸 절대 안 된다며 말렸다. 진짜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몇 번이나 억지로 기침을 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이라 하루만 쉬면 낫는다 하는데도 선태는 걱정되는지 쉽게
전화를 끊지 못했다. 약을 먹었더니 너무 졸린다고 이만 자겠다고 핑계를 대고 나서 전화를 먼저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보며 도하가 식빵을 다시 집어 들었다.

“미안해요, 형. 근데 오늘은 내가 정말 갈 데가 있어서 그래.”

토스트를 한 입 더 먹으려다 말고 내려놓았다. 접시엔 입도 대지 않은 샐러드와 달걀이 그대로였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는데도 잠을 못 잔 탓인지 입이 까끌까끌해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우유로 대충 목을
축이고는 그릇들을 정리하고 나서 씻기 위해 욕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 * *

차를 아파트 단지 바깥쪽에 세워두고 나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익숙한 걸음으로 102 동을 찾아가서 맨 끝 쪽


입구 앞에 섰다. 거기서 10 여 분 정도 서성이니 노인 한 분이 와서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틈을 타 잽싸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서 601 호 우편함을 보니 텅 비었다. 손을 넣어 헤집어 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반송함도 뒤졌지만 찾는 건 나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 층으로 가 601 호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집주인 여자가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봤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여기 전주인 앞으로 온 우편물 있나 해서 찾으러 왔는데요.”

여자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조금 더 문을 연다. 음식을 하던 중이었는지 그녀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손엔 국자를 들고 있었다.

“혹시 전에도 한번 오시지 않았어요?”

의심스럽게 묻는 집주인을 보며 도하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하시네요.”
전엔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가 대신 문을 열어줬었다. 자꾸 와서 옛 주인 앞으로 온 우편물을 찾으니 이상했는지
얼굴에 의심하는 기색이 더 짙어졌다.

“그때도 없다고 했는데.”

“그 후로 다른 건요? 혹시 택배 같은 거라도요.”

“없어요.”

귀찮은 듯 대답하던 집주인 여자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 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만요, 안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더니 대답이 없자 짜증을 내며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문이 닫혔고 도하가 벽에 기대서서
여자를 기다렸다.

코트 속에 넣어둔 전화가 아까부터 진동했지만, 굳이 꺼내 확인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이번엔


여자의 남편인 듯한 남자가 나왔다. 자던 중이었는지 한겨울에도 반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다행히도 남자의 손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여기. 전에 살던 사람 거 같은데요….”

남자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한 이 주 됐나? 택배가 하나 왔는데 집 앞에 던져두고 갔더라고요. 근데 우리 아들놈이 확인도 안 하고 뜯었지


뭐예요. 책 한 권 달랑 들어 있던데, 위에 송장도 없어지고 찾으러도 안 오길래 일단 가지곤 있었어요. 맞나
확인해 보세요.”

도하가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남자의 말대로 거긴 다른 내용물은 없고 책 한 권뿐이었다. 책을 꺼낸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자가 박정원. 맨 뒷장을 펼쳐 확인하니 출간일이 얼마 전이다. 고로 이 작가의 신간이란
얘기였다.

“맞아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도하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네. 맞네요.”

“아,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 단지 밖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책을 쥔 채


휴대전화를 꺼냈다. 주소록에서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아내 곧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화기 건너편에서
잔뜩 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엽세여.]

“민주 잘 있었니?”

[…….]

“오빠가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반갑지 않은가 보네?”

아이 씨. 목소리를 알아듣고 바로 신경질을 내는 것 보니 역시 서민주다. 집 근처로 갈 테니 나오라는 말을 하고


나서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보조석 시트에 올려놨다.

…박정원. 서준영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 * *

민주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졸린 눈을 하고 맞은편에 앉은 도하를 쳐다봤다. 둥그런 뿔테안경을 쓴 그녀는 잠이 덜


깬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 있는데 이도하가 전화해서는 다짜고짜 집 앞 카페로 나오라고 한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끊어 버렸을 텐데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길래 하는 수 없이 나왔다. 막상 급하게 나오라던


도하는 평소와 같았다.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오랜만에 차 한잔 마시고 싶어서.”

“이 이른 시간에 차를 먹자고 나를 불렀다고?”

“지금 11 시야. 남들이 들으면 욕해. 애가 왜 이렇게 계획성 없이 살아?”


계획성 없이 산다는 말에 민주가 가자미눈을 했다.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옆자리에서 아까부터
슬쩍슬쩍 엿보던 여자가 테이블에서 일어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온다.

“저기….”

민주와 도하가 동시에 쳐다보자 여자가 부끄러운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뒤쪽에 앉아 있던 친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 역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혹시… 배우 아니세요?”

민주가 들리지 않게 오오 하는 입 모양을 해보았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으로 잠깐 나온 영화였는데 너도나도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한참을 실시간 검색어까지 올랐고 민주의 친구들도 아는 사이라고
했더니 소개해달라고 난리였다.

“아닌데요.”

도하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자, 민주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저 뻔뻔한 새끼.

“아, 많이 닮아서 그분인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여자가 한 번 더 죄송하다고 인사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간다. 친구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진짜 많이 닮았다는 둥, 목소리도 비슷하다는 둥. 의아함을 품은 그녀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도하가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대며 민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왜 그런 얼굴로 봐?”

혹시라도 여자들이 들을까 봐 민주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어쩜 사람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하냐.”


“괜히 너랑 스캔들이라도 퍼져 봐. 불편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넌데, 감당할 수 있겠어?”

“퍽이나 날 위해주는 척한다?”

“당연하지. 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약 팔지 마. 내가 그 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오늘은 좀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고, 민주는 짜증 섞인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평소와 달리 뜸을 들이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이쯤 되니 이 인간이 아침부터 저를 불러낸 이유가 슬슬 궁금해졌다.

“뭔데. 말해봐.”

“나 아까 준영이 형 봤어.”

풉.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그대로 내뿜었다. 사레까지 들려 캑캑거리자 도하가 냅킨을 집어 다정스레 건넨다.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나서 입가를 닦고 무슨 소리냐고 묻는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얼굴을 보며 도하가 팔짱을 낀 채로 혀로 앞니를 슥 훑었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뻔뻔한 서민주가 저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민주야. 왜 말을 안 했어? 오빠 깜짝 놀랐잖아.”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으니 민주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진짜 만난 건가. 속으론
별생각을 다 하는 게 보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우리 오빠가 여기 왜 있어?”

“그러니까. 여기가 외국도 아닌데. 그렇지?”

“…그러니까…. 잘못 봤겠지.”

“근데 어쩌지? 같이 얘기도 나눴는데.”


“웃기시네….”

“자긴 원래 외국에 간 적도 없다고 하던걸?”

불안한 얼굴로 커피잔을 만지작대던 민주의 손길이 뚝 멈췄다.

“거, 거짓말!”

“과연 그럴까. 근데 왜 우리 서민주 씨 눈동자가 아까부터 요동을 치지?”

“내가 언제?”

“봐봐, 눈이 더 커졌잖아. 입으론 구라를 치고 눈깔은 요동을 치고. 이야…, 난리다, 아주.”

“…졸려서 그래.”

“암요, 그러시겠죠. 원래 사람이 없는 말을 지어내면 졸음이 온다더라?”

“웃기네. 넌 그럼 맨날 처자고 있겠다?”

“이게, 오빠한테 너라니.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놔. 지금 말하면 정상참작 해줄게.”

도하가 씩 웃더니 찻잔을 들어 올린다. 민주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머리를 굴렸다. 진짜 만났다면 저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다짜고짜 찾아온 걸 보니 뭔가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준영이 서울에 들른다고 했던가. 아이 씨, 엄마한테 미리 물어라도 보고 올걸.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다 하는데 툭, 도하가 들고 있던 찻잔을 앞에 내려놓는다.

“그만 굴려.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진짜 아니라니까.”

“너희 식구 특징이 뭔 줄 알아?”

“…뭔데.”

“참 거짓말을 못해.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 너도 그렇고, 준영이 형도 그렇고.”

민주가 입을 벙긋거리다 그대로 닫아 버렸다. 더 대꾸해봤자 자기한테 불리할 거다. 어쨌든 이도하가 겉으론 웃고
있지만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 같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괜히 휴대폰을 꺼내 딴청을 피우는데 도하가 허리를 세우더니 몸을 앞쪽으로 바싹 기울인다. 테이블에 턱을


받치고선 저를 지긋이 쳐다보니 옆쪽 테이블에 있던 두 여자가 사귀는 사인가 보다고 속닥거리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민주가 질겁을 하고 몸을 뒤로 물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리 가라. 더 다가오면 폰으로 머리 찍어 버릴 거야.”

“어휴, 우리 민주. 말도 예쁘게 하네. 오빠가 너 어릴 때부터 진짜 좋아했던 거 알지?”

“웃기지 마. 퍽 하면 놀리고, 어른들 몰래 꼬집고. 막말로 오빠가 내 친오빠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알아?”

“저런… 그랬어? 오빠가 이제라도 사과를 해야겠네. 뭐로 하면 좋을까? 우리 민주 뭐 갖고 싶어? 말만 해.


오빠가 다 들어줄게.”

민주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우리 민주란 말에 좆까지 말라는 말이 턱까지 올라온 걸 간신히 삼켰다. 어쨌든
저보다 오빠이지 않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테이블 위로 툭, 무언가 올라온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지갑이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제 쪽으로 슥 밀기까지
한다.

“뭐야, 이게?”

“보면 몰라? 내 지갑이잖아.”

“그러니까, 이걸 왜.”

“거기서 마음에 드는 카드 꺼내 써.”

민주가 미간을 좁혔다.

“뭘 쓰라고?”

“카드. 신용카드든 현금 카드든 너 쓰고 싶은 만큼 가져다 쓰라고. 한도 빵빵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굳게 다문 민주의 입술 끝이 씰룩였다.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요동쳤다. 실은 요즘 집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는 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배우겠다고 몰래 휴학을 했다가 가족들에게 들켜 버렸고, 그것 때문에
용돈마저 끊긴 상황이었다.

친구들은 다들 여행이다 뭐다 난린데, 저만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유혹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해 보려 했지만 카드가 이미 저를 부르고 있었다. 민주야, 나를 데려가. 제발 데려가 줘.
이 카드면 학원도 등록할 수 있어.

한편 도하는 민주의 얼굴이 갈등으로 번지는 걸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서준영이 한국에 있는 건 사실이니
그걸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민주가 요즘 돈에 쪼들리는 걸 알았기에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그녀를 보며 도하가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손은 이제
지갑으로 움직였다.

“아니다, 됐다. 너도 곤란하겠지. 내가 괜히 부탁했네. 그렇지?”

잠깐, 민주가 한 박자 더 빨리 지갑을 채갔다. 도하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민주가 지갑을 꼭 쥔
채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모님도 그렇고 도하네 부모님까지 저한테 신신당부한 게 있었다.

제 오빠인 서준영이 외국에 간 걸로 해달라고. 도하가 와서 물어보거든 절대 모른다고 딱 잡아떼라고. 그래서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도하는 조용했다. 제대하고 영화 촬영이다 뭐다 바쁘게 살길래
이젠 포기했구나,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엄마한테 말하지 마. 내가 말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도하가 웃으며 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쉿. 절대 말 안 해. 믿어.

민주가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입술을 몇 번 더 달싹였다. 제 소중한 오빠를 돈에 팔아넘기는 거 같았지만 지금


저에겐 한 푼이 아쉬웠다. 이 와중에 도하가 내민 유혹이 너무 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말하기 전에,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우리 오빠 왜 찾으려고 그래? 설마 아직도… 좋아해?”

“노코멘트.”

“뭐야, 진짜.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어딨는지 말 안 해준다.”

“까불지 마. 나야 아쉬울 것 없어. 일단 한국에 있는 건 확인했으니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찾으면 돼. 그 전에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어 널 찾아온 것뿐이지, 방법을 못 찾아서 온 건 아니야. 다 알면서.”

민주가 얄밉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제 죄책감을 좀 덜어줬다. 이도하는 자신이 아니었어도 사람을 다
동원해서라도 찾을 위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

“또 뭐.”

“우리 오빠 찾아도 너무 괴롭히지 마.”

진심으로 부탁하는 모습에 도하가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거 알아? 네가 그렇게 준영이 형을 좋아하니 내가 어릴 때 널 못살게 괴롭힌 거야.”

“와 뻔뻔하다. 그걸 대놓고 실토하냐. 질투도 작작해야지, 그 정도면 병이야.”

“신경 꺼. 너한테 치료비 달라고 안 할 테니까.”

“하여튼 괴롭히지 말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의자에 등을 깊게 파묻으며 팔짱을 꼈다.

“그만하지. 자꾸 그러니까 조금 괴롭히고 싶어진다?”

민주가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도하가 눈썹을 까닥 움직이고 입가에 미소를 띤다. 더 얘기해봤자 말이 안
통하니 그만하고 어디 있는지나 말하라면서. 잠시 고민하던 민주가 지갑을 주워 들었다.

“좋아, 주소는 지금 문자로 남길게. 그래야 증거가 남지. 오빠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오. 보기보다 치밀한데?”

놀림과 감탄을 섞어서 보내자 민주가 지갑을 가져가서 카드 하나를 빼갔다. 배우 타이틀을 떼더라도 일단 부잣집
아들이니 카드 한도는 많겠지. 양심에 조금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용돈을 끊어 버린 아빠 탓도
해보고, 너무 애타게 찾으니 딱해서라고 스스로 변명도 해봤다.

그런 다음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로 도하에게 주소를 전송했다. 딩동. 주소를 확인하는 도하의 낯빛이 슬쩍 굳는다.
전혀 의외라는 표정으로.

“…여기서 지낸다고?”
“어.”

“왜.”

“…오빠 군대 간 동안 일이 좀 있었어.”

“그게 뭔데.”

“자세히는 몰라. 엄마도 얘길 안 해주니까.”

장난기 가득하던 도하의 눈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강원도로 시작하는 주소는 여태 제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주소 마지막에 붙은 빌라 이름을 소리 없이 읊조렸다. 동아 빌라. 201 호?

CH 2.

“도하야. 형아 괴롭히지 말고 나와. 조금 있으면 민주 올 시간이야.”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는
준영을 올려다봤다. 엄마를 따라 놀러 왔는데 준영은 시험기간이라고 그런지 아까부터 계속 책을 붙들고 있었다.

창을 등지고 앉은 탓인지 등 뒤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준영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반짝거렸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엄마가 사람 얼굴엔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형아, 언제까지 공부해야 돼?”

“도하야, 어쩌지? 형이 이거 중요한 시험이라 오늘은 못 놀아 줄 것 같은데.”

치.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긴 하지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준영은 책에
집중하느라 오늘따라 말을 아꼈다.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준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한여름이라 반바지를 입어 맨다리였는데, 흰 종아리를 보니 어린 마음에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흰 살결에 제 뺨을 대고 문지르니 머리 위에서 큭,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 마, 간지러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듣기 좋아 또다시 뺨을 다리에 가져다 댔다. 이번엔 책상 밑으로 손이 하나 들어오더니


도하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이, 말썽꾸러기. 얼른 나와.”

그 손을 잡고서 자꾸 장난을 치는데 문밖에서 엄마가 또 나오라고 성화다. 문 쪽을 향해 눈을 한 번 흘겨주는데


이번엔 또랑또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흘기는 대신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서민주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얼른 책상 밖으로 나와서는 문을 잠가 버렸다. 어린 마음에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냥 민주가 둘 사이에


껴드는 게 싫었다. 민주는 준영이 형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빠, 오빠 하면서 팔에 매달리는 것도 싫었고, 업어달라고 조르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준영이랑 같이 사는


게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저는 놀다가도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서민주는 밤낮으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뱃속이 뒤틀렸다.

늦둥이인 민주는 자신의 친형제들보다 준영을 더 잘 따랐다. 정확히 말하면 준영은 민주에게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의 할아버지가 딸뻘인 여자와 바람이 나서 밖에서 낳은 혼외자였다.

어느 날 여자가 도무지 키우지 못하겠다며 한겨울에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를 대문 앞에 버리고 도망쳤고


사실이 알려지며 집안이 발칵 뒤집혔었다. 할머니는 몸져누웠고 자식들은 창피하다며, 집안 망신이라고 숨기느라
바빴다.

할아버지는 제 자식이 아니니 보육원에 데려다주든 알아서 하라고 모른척했고, 준영은 한참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골칫거리가 되어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다들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 준영을
보듬어준 건 뜻밖에도 할머니였다. 남편이 지은 죄니 자기가 거둬들이는 게 맞다면서.

하지만 예순이 넘은 노인네가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민주 엄마가 자신이 키우겠노라고


나섰다. 그녀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민주 아빠에게 남들은 입양도 하는데 당신이랑 아버지가 같은 이
어린아이를 보육원에 버리고 편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좋은 일 많이 하고 살면 당신 자식들한테도 복이
있을 거라고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준영은 이 집안의 식구로 들어왔고, 민주에게 삼촌이 아닌 오빠가 되었다.

“형. 형은 여자 친구 있어?”

사각, 사각, 연필 소리가 멈췄다. 준영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하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눈매가 또렷하고 눈썹과 코로 이어지는 부분이 꽤 잘생겼다. 인물이 좋은 건 엄마를 닮은 걸까. 실제로
도하의 어머니는 꽤 미인이었다.

“여자 친구 없는데.”

“왜 없어?”
“도하는? 도하는 있어?”

“나는 없지.”

“왜. 유치원에 마음에 드는 친구 없어?”

“여자애들은 나 좋다고 난린데, 난 별로야.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

그 말에 준영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잘생겼다는 소릴 듣고 자라서 그런지 이 꼬맹이에게 자뻑


증세가 있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쳐다보며 웃으니 도하가 왜 그러냐고 묻는다.

“왜 웃어?”

“도하 귀여워서.”

“멋있진 않아?”

“멋있지.”

“얼마큼?”

“엄청.”

“그럼 크면 내가 형이랑 결혼해줄까?”

“응?”

준영의 눈이 커졌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다시 한 번 도하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요 귀여운 녀석. 도하는 그 행동에 괜히 기분이 뾰로통해졌다. 자긴 고심 끝에 말한 건데 준영은 영
웃겨 죽겠다는 얼굴이다.

“도하야.”

“응.”

“남자끼린 결혼 못 해.”

“왜.”

“결혼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야.”

“그럼 형도 크면 여자랑 결혼할 거야?”


준영은 잠깐 말이 없었다. 조금 시간을 두고서야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도하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다. 여자로 태어날걸.”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식어 버린 코코아 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더니 꼴깍꼴깍 마신다. 어릴 때부터 유독 저를 잘


따르고 애정을 주는 대상이 신기했다.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그런 사랑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 애틋했는지
모른다.

“그럼 형은 결혼하지 마. 나도 안 할 거야.”

“크면 생각이 달라질걸?”

“아니야.”

“그러지 말고 결혼해서 형 옆집에 사는 건 어때? 도하랑 도하 색시랑.”

“싫어. 둘이 같이 사는 거 아니면 다 싫어.”

“도하 욕심쟁이.”

준영이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서준영 스토커, 어른들이 도하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가겠냐
싶었다. 사춘기에 들어서고, 여자 친구가 생기고 그러면 어느새 데면데면해질 텐데, 그때까진 이 귀여운 녀석의
사랑을 마음껏 받자고, 그렇게 여겼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 * *

“괜찮으세요?”

컵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책상에 앉아 수업받을 준비를 하던 이건이 주방을 향해 다가왔다.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준영이 자리에 앉으며 오지 말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거기 있어. 손 벤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갑자기?”

“등이 오싹해졌어.”

그 말을 듣자마자 이건이 인상을 구겼다. 가뜩이나 5 층에 사는 박씨 할아버지가 이 건물에 아무래도 귀신이 사는


거 같다고 몇 번이나 그러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쓰려고 구해온 나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이건의 모친은 박씨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면서 치매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로 떠들 때마다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 선생님까지 왜 그래요?”

“왜? 무서워?”

“무섭긴. 사나이가….”

너 뒤에! 준영이 갑자기 소리를 왁 지르자 이건이 화들짝 놀라서는 펄쩍 뛰어오르며 으악! 하고 양팔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그걸 보며 준영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키가 190cm 가까이 되고 골격도 다부진 녀석이 겁은
얼마나 많은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건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준영이 얼른 수업이나 하게 앉으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앉아, 인마.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저 지금 쫀 거 아니에요. 소리 지르셔서 놀라서 그런 거지.”

“그래, 알았어.”

“진짜예요. ”

“알았다니까.”

“…진짠데.”

볼멘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보며 준영이 얼른 앉기나 하라고 타박했다. 하루에 1 시간씩 공부를 봐주기로 했는데,
오늘은 늦게 온 덕분에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 강이건은 그저 위층에 사는 학생이었다. 작년 무더운 여름날 빌라 앞 평상에 누워 수학 문제를 붙들고


끙끙대는 녀석을 도와준 게 과외를 시작한 계기였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잡생각을
떨치는 데 생각보다 도움이 됐다.
이건인 머리가 똑똑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우직하고 끈기가 있었다. 틀리거나 해도 좌절하는 법이 없었고,
묵묵히 열심히 하다 보니 당연히 성적도 올랐다. 아들 성적이 오른 게 기뻤는지 그의 부모는 감사의 표시로 꽤
많은 돈을 주려 했다. 물론 정중히 거절했지만.

애초에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돈 대신 소소한 먹거리들을 종종 챙겨줬는데, 오늘도 역시나


아들 편에 고구마를 한 바구니를 들려 보냈다.

따뜻한 차를 가져와 이건의 앞에 놓아주고는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저번에 내준 숙제 다 해왔어?”

네. 이건이 자랑스럽게 페이지를 펼쳐 디민다. 빨간색 색연필을 꺼내 하나씩 채점하는데 앞에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살짝 들었더니 강이건이 문제집이 아닌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할 말 있어?”

동그라미 대신 지익, 빗금이 갔다. 그걸 보는 이건의 얼굴도 같이 구겨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딴청을 피우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부터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괜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뭔데. 말해봐.”

“그… 며칠 전엔, 서울 왜 다녀오셨어요?”

딱 봐도 상관없는 얘기를 하는 게 보였다.

“친구 만나러. 왜.”

“아, 아뇨. 그냥.”

“그게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다시 뜸을 들이길래 느긋하게 기다렸더니 그제야 본론을 꺼낸다.


“…선생님, 혹시… 제 친구 데리고 와도 돼요?”

“친구?”

“네….”

“어떤 친구? 여자 친구?”

“아뇨. 그냥 친구요.”

“혼자 수업 듣는 거 심심해?”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건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양손을 잡고 꼼지락댔다. 준영이 마지막 정답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서 펜을


내려놨다. 강이건은 이제 테이블 위를 손톱으로 긁는 중이었다. 할 말이 태산 같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같이 공부할 거면 데리고 와. 나는 상관없으니까.”

준영이 먼저 마음을 알아채고 승낙하자 이건의 입이 활짝 벌어진다. 정말 그래도 돼요?

“대신 딴짓하거나 집중 못 하면 둘 다 아웃이야.”

“알아요. 제가 그럴 거 같아 보이세요?”

준영이 웃었다. 물론, 아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데다 인상까지 험악해서 남들이 볼 땐 노는 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강이건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녀석은 다른 누구보다 순진했고, 착했다. 가끔 너무
착해서 바보가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 친구랑 많이 친해?”

“그냥… 조금요.”

예전엔 많이 친했던 거 같은데…. 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더는 말을 하지 않는다. 준영 역시 캐묻지 않았다.


말이야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고, 어차피 저는 하나를 가르치든 둘을 가르치든 상관은 없었다.

그때 안방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업할 땐 무음으로 해두는데 컵을 깨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깜박했다.


이건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기를 들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은 덤덤했다.

잠시 후 전화가 끊기고 김민석이란 이름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잘 들어갔다고 연락 한 통이 없네. 시간 날 때 전화 줘.]

* * *

[강원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진녹색 표지판을 뒤로하고 검은색 승용차가 속력을 높였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도하였다. 한껏 멋을
낸 옷차림을 하고 머리를 왁스로 잘 손질해 올렸다. 달리는 와중에도 룸미러를 내려 얼굴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에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제 수명도 같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민주가 알려준
연락처대로 찾아가고 있긴 한데 거의 2 년 만에 보는 거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그래, 군대 가고 면회를 왔었다. 그전까진 저를 밀어내기만 하고, 쌀쌀맞게 굴더니 첫
면회를 왔을 땐 달랐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했으니까. 처음으로 입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찾아왔었는데, 마지막 봤을 땐 얼굴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걱정했더니 일이 힘들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전화 통화도 되질 않았고, 휴가 때마다 찾아가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렸지만,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제대하기 얼마 전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조감독 생활을 몇 년 하다 처음 연출을 맡았으니 바쁘겠구나,


이해하려 노력했다.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자고 마음을 먹은 탓에 치솟는 감정들을 가까스로 눌렀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나서야 그가 한국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혹시 탈영이라도 해 버릴까 봐 다들 쉬쉬했다는 걸.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자기들도 모른다고. 더는 찾지 말라고. 그게 서준영을 위하는 거라고. 너를 피해서 도망친 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주인은 바뀌어 있었고,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손톱만 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일부러 숨기고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지내다 누나를 통해 영화에
출연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하다 보면 한 번은 보지 않을까. 소식은 듣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수락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좀 더 멋진 모습이면 저를 혹시나 한번 봐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도 있었다.

그랬는데 뜻하지도 않은 곳에서 소식을 알게 됐다. 한국에 있었단다. 그걸 저만 몰랐단다. 그럼 지금까지 다들


저를 감쪽같이 속여왔단 건가. 부모님도, 형제들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마침 전화가 들어왔다. 선태 형이라고 뜬 이름을 보고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차 안에 쩌렁쩌렁


선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너 어디야? 왜 집에 없어?]

“우리 집에 갔어?”

[그래, 아프다는 애가 전화도 안 받고. 며칠 전부터 하는 행동이 하도 수상해서 내가 아침 일찍 왔는데, 이게 다


뭐야. 드레스룸은 난장판이 되어있고, 차도 끌고 나가고. 대체 어딜 간 거야?]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내가 네 매니전데 몰라도 돼? 너 오늘 나랑 같이 회사 들어가기로 한 거 잊었어?]

“아, 그게 오늘이구나?”

태연하게 묻자 선태가 환장하겠다며 소리를 지른다.

[오늘이구나? 오늘이구나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이 망할 놈아!]

100 m 앞에서 춘천 방면으로 좌회전입니다. 이런 젠장. 도하가 내비게이션의 소리를 줄이기도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당황하는 선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지금 그거 무슨 소리야? 지금 그거 내비게이션 아냐?]

“형이 잘못 들었어. 내 여자 친구야. 자기야, 조용히 좀 해줘. 지금 통화하잖아.”

춘천. 춘천 방면으로 좌회전입니다. 도하가 내비게이션을 야단치듯 툭 건드렸다. 좀 닥쳐라.

[너 진짜 이럴래?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긴지 몰라? 몸값을 바짝 올려도 모자랄 판국에 대체 춘천은 왜 가는데!
뭐 닭갈비 맛집 탐방이라도 가는 거야?]

“미안한데 내가 좀 바빠. 다녀와서 말해줄 테니 일단 기다려. 어차피 당장 급한 스케줄도 없잖아.”

[스케줄이 왜 없어? 당장 안 돌아와?]

차가 속도를 죽이며 좌측으로 빠졌다.


“미안. 나 진짜 급한 일이야.”

[야 인마!]

“고마워, 형은 나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사람은 쉽게 안 죽어. 걱정 마, 형. 끊는다.”

뚝. 종료 버튼을 누른 도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형. 닭갈비보다 중요한 게 거기 있어서.

그렇게 30 분 정도를 더 달리다 보니 잠시 후면 도착한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과연 이런 곳에 서준영이 있긴


한 걸까 의심이 들 만큼 보이는 거라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논밭뿐이었다. 일단 뭐 가보면 알겠지.

* * *

도하가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와 보니 5 층짜리 건물 옆에


동아빌라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는 바로 산이었다. 맞게 찾아오긴 한 거 같은데. 입구에 세워진
승용차와 오토바이를 보며 서준영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후우, 허공에 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진다. 차에 있을 땐 몰랐는데 나오니 제법 추웠다. 코트를


여미면서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홱 다시 몸을 돌려 차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차창에 제 모습을
비춰봤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었는지 모른다. 머리도 마찬가지고. 검게 선팅된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된 게 보여 심기가 불편해졌다. 양 손바닥으로 탁탁 뺨을 두드려 얼굴 근육을 풀어줬다.
그런 다음 부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아, 어색하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편한 표정을 지었다.

“형, 잘 지냈어요?”

이것도 좀 그래. 여어, 오랜만. 아, 씨발 오그라들잖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하아, 물건


팔러 왔냐. 너무 거래처 접대 멘튼데. 몇 번을 연습하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양손에 땀만 차올랐다.

아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자. 후우, 다시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저번 주에 이른


첫눈이 왔는데 그것이 아직도 녹지 않은 건지 그늘진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니 개집에 있던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저를 빤히 쳐다본다. 낯선 사람이 왔는데 짖지도


그렇다고 꼬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추운지 좁은 집 안에 콕 틀어박혀 눈으로만 도하를 주시했다.

녀석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빌라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문에 한 번 더 제 모습을 비춰보고는 긴장된 얼굴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혔지만 틈으로 칼바람이 쌩쌩 들어와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왜 이렇게 추워. 산 아래라 그런 건가. 그러다 도하의 눈에 우편함이 포착됐다. 슬그머니 그쪽으로 가서 202
호라고 적힌 우편함 뚜껑을 열어 확인했다. 안에는 아무런 내용물도 없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서민주가
제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우선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때 위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시고 나서 우편함에서 두어 발짝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누군가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한 사람이었는데 혼자 떠드는 걸로 봐선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같이 수업을 들어도 된대. 선생님이 허락하셨어.

통화하는 내용으로 봐선 학생이었고, 정확히 5 초 후 예상대로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출입구 쪽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키가 상당히 컸고, 이제 막 통화를 끝냈는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 중이었다. 그가 뒤늦게 입구에
서 있던 도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춰 섰다.

스스로 꽤 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출입구에 저만큼 큰 남자가 서 있으니 당황한 까닭이었다. 세련된 코트
차림에 한겨울에 선글라스를 끼고 이마와 코랑 입술만 보일 뿐인데도 꽤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슬쩍 피해서 가려고 하는데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앞을 척 가로막았다. 졸지에 길이 막힌 이건이


당황해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도하가 입술 끝이 위로 향하도록 웃었다.

“안녕, 학생. 여기 살아?”

“네… 그런데요?”

“몇 층 사는데?”

“…누구신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

“진짠데.”

“…3 층에 사는데요….”

“3 층 몇 호?”

이건은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누구냐는 말에 대꾸도 없이 지 궁금한 것만 묻는다. 갑자기 며칠 전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도 끈질기게 굴길래 욕을 한 바가지 하고 끊었는데 친구가 옆에서
그런 말을 했다. 요즘은 그러면 직접 찾아와서 해코지하기도 한다고. 혹시 그런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부티가 나는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너희 아래층에 젊은 남자 살지?”

젊은 남자라…. 이건이 눈을 위로 굴렸다. 바로 아래층엔 노부부가 살았고, 그 맞은편에 선생님인 준영이


살았으니, 이 남자가 말하는 건 혹시 준영인가. 그런데 선생님이 젊던가. 33 살이면 그렇게 젊진 않은 거 같은데.

“…젊진 않아요….”

순간 앞에 있는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씨발. 그 정도면


젊은 거지.’라고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에 이건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 나눴던 대화 중 어느
부분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안다면 좋겠지만, 저는 그만큼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그 사람 집에 있어?”

이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준영을 찾으러 온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어떤 남자가 한번 찾아왔었다. 둘이 큰 소리가 오갔고,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준영의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혹시 이 남자도 비슷한 경우인가.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봐선 누군가 내려오는 중이었다. 누군지 고개를 들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목소리가
먼저였으니까.

“강이건. 아직 안 가고 거기서 뭐 해? 약속 늦은 거 아니야?”

이건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채업자나 뭐 그런 거면 일단 선생님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과외도 공짜로


해주시고, 갈 때마다 맛있는 것도 챙겨주시는데. 그 생각을 하는데 걸음 소리가 우뚝 멈춘다. 이건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려온 준영이 멈춰 서서 놀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앞에 있는 낯선 남자였다. 준영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던 그였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건이 눈치를 보며 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아는 사이인가. 빠져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앞에 선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코와 입술만큼이나 인상적인 눈이었다. 위로 시원하게 뻗어 차갑게 빛나면서도 한
번 보면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그런 눈. 그런 얼굴.

“오랜만이에요, 형.”

컹, 컹, 문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들고양이라도 나타난 걸까. 잠시 후 개 짖는 소리는 멈췄지만 세


사람 사이엔 여전히 찬 냉기가 흘렀다. 숨 막힐 정도의 정적에 이건이 꿀꺽 침을 삼켰다. 하아. 등 뒤로 준영이
참았던 숨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앞에 선 남자의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보고 싶었어요.”

이건의 눈이 커졌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눈치껏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순간 팔이 먼저 붙들렸다. 돌아보니 준영이 제 팔을 붙들고서 앞에 있는 사내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당황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에서 가장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를 향해 웃고
농담하던 그 사람 좋은 서준영은 어디에도 없었다.

“강이건. 너 전화 가져왔지?”

“네? 네.”

“좀 빌려줘.”

이건이 주섬주섬 점퍼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제 팔을 아니 정확히는 제 팔을 붙든 준영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 안에서 혀가 움직이는 걸 보니 뭐가 퍽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를
건네자 준영이 그걸 가져가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거기 경찰서죠. 여기 상여리 동아빌란데요. 지금 빌라 안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 소란을


피워서요. 빨리 와주실 수 있습니까?”

이건이 입을 벌렸다.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 문 앞에 버티고 선 남자에게로 꽂혔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남자의
입술 끝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진짜 사채업자 같은 건가.
“감사합니다.”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이건에게 건네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자코 있던 도하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준영이 다시 출입구 쪽을 향해 돌아섰다. 도하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얼굴인지


모른다. 꿈에서도 한 번을 나타나지 않아 매정하다고 욕을 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예전보다 더 차가웠다.
눈빛이 그랬고, 말투도 그랬고, 보자마자 온몸으로 밀어내기부터 하니 차라리 꿈에 안 나타난 게 다행이었구나
싶었다.

“넌 어차피 말로 해선 안 갈 거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게 2 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할 짓이야?”

“이건인 약속 늦겠다. 얼른 가.”

준영이 대꾸도 없이 제 할 말 만하더니 그대로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아까와 똑같은 크기의 보폭과 걸음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타격을 받은 건 저뿐이다. 도하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보이지 않는 계단 위쪽을 노려봤다.
애초에 반겨줄 거란 기대도 안 했지만,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저는 보자마자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는데. 이대로 쫓아 올라가 따질까 했지만,


그랬다간 정말 다신 못 보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입술을 꾹 물고 버티는데 이건인지 뭔지 하는 꼬마가 눈치를
살피면서 입구 쪽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추스른 도하가 그런 이건의 뒤를 따라 빌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야. 고삐리.”

이건이 주위를 살폈다.

“뭘 두리번대? 여기 고삐리가 너밖에 더 있어?”


“…왜… 그러시는데요.”

“너 어디 가?”

이건이 눈을 끔벅였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걸까.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준영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피하는 게 낫겠다 싶어 얼른 돌아가려는데 삑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던 이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빌라 앞에 처음 보는 검은색 승용차가 서 있었다. 차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저 차가 어지간히 비싼 건 알겠다.

입을 벌리고 그걸 쳐다보는데 도하가 어슬렁거리면서 이건의 옆쪽으로 걸어와 어깨에 팔을 툭 걸친다. 놀라서
쳐다보는데 생긋 웃기까지 한다. 아까 준영을 원망스럽게 보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얼굴이었다.

“가는 데까지 내가 태워줄까?”

“저, 저를요?”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이건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가면 추운데 버스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그렇다면 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본인도 분명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땐 받아들이는 것도
예의라고 준영이 가르쳤다. 저는 지금 그 교육을 성실히 이행할 뿐이고.

근데 준영과 사이가 나빠 보이던데, 타도 될까.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리는데 남자가 제 등을 떠민다.


괜찮아. 얼른 타.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볼수록 차에서 광채가 난다. 문을 열고 보조석에 앉았는데 차가 넓은지
제 긴 다리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였다.

안전띠를 하니 부릉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가는데도 어찌나 승차감이 좋은지 스르르


미끄러지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의 차와 비교했을 때 너무도 확연한 차이가 났다.

연신 감탄하며 차 내부를 둘러보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하가 툭 말을 던졌다.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거 같으니 말 놔도 되지?”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 봤을 때부터 놨으면서 이제야 허락을 구하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러면서
운전대를 잡은 도하를 한 번 쳐다봤다. 선생님이랑 대체 무슨 사일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남자의 얼굴은 미술실에서 보았던 조각상을 연상케 했다. 매끈한
피부도 그렇고 조각 같은 콧대도 그렇고.
“난 이도하. 너는?”

“강이건이요.”

“강이건. 이름이 얼굴만큼 멋지네.”

“…감사합니다.”

“근데 아까 준영이 형이랑 잘 아는 거 같은데… 둘이 친해?”

친하냐고 묻는 말투가 묘하게 뾰족하게 느껴졌다. 착각일까, 옆모습을 흘깃 쳐다봤더니 얼굴은 또 웃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친한 건 아니고요… 과외선생님이세요.”

“과외?”

“네… 저랑 윤찬이랑 무료로 과외 해주고 계세요.”

“윤찬이는 또 누구야?”

“저희 옆집에 사는 앤데요, 얼마 전에 이사 갔어요.”

“그럼 너만 과외받아?”

“네. 지금은요.”

“둘이서? 형네 집에서?”

말끝이 올라가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투다. 괜히 차에 탔나.

“…네.”

흐음.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지금 준영이 형네 위층엔 누가 살아?”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아아. 그래? 저런. 안타까워하는 말투와는 다르게 얼굴에 미소가 확 번진다. 뺨이 팰 정도로 웃으니 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연예인인가. 진짜 잘생겼다. 감탄하며 보는데 도하가 저를 쳐다본다.

“왜 자꾸 빤히 쳐다봐? 잘생겼어?”

이건이 흠칫 놀라 말을 버벅거렸다.

“…네. 아, 아뇨. 아니, 그게… 아니란 건 아닌데요.”

당황하는 이건을 보며 도하가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을 띠었다. 그래, 네 눈에도 내가 잘생겼지? 근사하지? 근데
왜 서준영만 그건 모를까. 남들 다 아는데, 씨발. 갑자기 기분이 널을 뛴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아주
풍선을 타고 살랑살랑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단 두 마디로 사람 기분을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네. 대단하다,
서준영.

“준영이 형, 아니, 너네 과외선생님, 언제부터 거기 살았어?”

이건이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눈만 굴릴 뿐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게 아니라, 말을 해도 되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말해도 돼.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형이랑 원래는 친한데 오해가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음… 1 년 넘은 거 같아요.”

“혼자서?”

“네?”

“같이 사는 사람은 없고?”

“…네. 혼자 계세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어머님이 가끔 오시던데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어요….”

“아아, 그렇구나. 혼자란 말이지….”

“잠깐만요! 저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이건이 다급하게 외쳤다. 앞을 보니 비슷한 또래의 남학생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도하가 차를 세우자마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니 벨트를 풀고 후다닥 도망치듯 내려 버린다. 문을 닫기 전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는다.

도하가 그런 이건을 보며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가. 또 보자.”

* * *

집으로 들어온 준영은 찬물로 연거푸 세수를 하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도하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꾹 눌렀다. 거의 2 년 만에 보는 건가. 군대 있을 때 봤으니 그


정도 됐나 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안 본 사이 제법
사내다워지고, 눈빛도 짙어진 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에요.]

게다가 적응 안 되게 웬 존댓말. 수건을 한쪽에 내려놓고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알았을까. 대충 짐작 가는 인물이 있긴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된 이상 저대로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테니까.

가만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준영은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도하도 변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혼란스럽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그냥
안부차 온 거라고, 궁금해서 찾아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위안 삼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차라도 마시게 하고 보낼
걸 그랬나.

[보고 싶었어요.]

아 됐다. 관두자. 괜히 또 여지를 줬다가 전처럼 힘들어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소파로
가서 길게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천장이 들어왔다.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1
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는데, 막막하기만 하던 생활은 몇 달이 지나자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렇게 반년쯤 지나


선배에게 연락이 왔었다. 국장이 한번 봤으면 한다고.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고, 기껏 노력해서 쌓아 올린
것들이 아깝지도 않으냐고, 남들 눈 따위 신경 안 쓰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친이 저를 얼굴도 본


적 없는 친아버지 집 대문 앞에 버리고 간 순간부터, 매 순간 저를 벌레 보듯 하는 시선들과 마주해야 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면역력이 생겼을 거라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방송국
로비에서 쓰러진 날 알았다. 저는 사람들의 경멸 섞인 눈초리와 수군거림을 견뎌낼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는 걸.
그동안 무뎌진 게 아니라 악착같이 버티고 참았다는 걸.

언젠가 잊히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조금씩 그날의 악몽도 흐릿해졌다. 그럼에도 돌아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이곳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 더 복잡한 일은 만들지 말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해 나갔지만, 조금 전 보았던
그 상처 받은 얼굴은 쉽사리 지워지질 않았다.

* * *

카드 키를 대자 문이 열렸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도하가 멈칫했다. 아침에 없던 여성용 구두 한 켤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것도 없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이제 오니?”

아, 이런.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손님용 슬리퍼를 신고 앞치마를 두른 채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 모친이었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와 거기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진주 귀걸이를 한 그녀는 얼굴에 구김살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왔다. 상냥한 말투와 목소리는 누가 봐도 귀티가 나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이었다.

“엄마… 왜 왔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전화는 받지도 않고, 어디 갔다 왔어?”

“누가 보면 내가 실종된 줄 알겠네. 전화 몇 통 안 받았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또, 또 말 서운하게 한다. 그럼 걱정이 안 돼?”

그녀는 아들의 안색을 살피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파악하려 했다. 아무 일도 없다며 웃는 도하를


보고서야 안심하더니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그 뒤를 도하가 따랐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엄마가 해줄게. 얼른 씻고 나와.”

“됐어요, 생각 없어. 목말라서 물이나 한 잔 마시게.”

“그래도 먹어. 금방 차려줄게.”

더 마다했다간 서운하다 할 것 같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일단 씻고 나올게요.”

“아, 맞다. 엊그제 인터뷰했다며?”

“응.”

“힘들지 않았어?”

“힘들 게 뭐 있나. 그냥 하면 되는걸.”

“너 그거 계속할 거야?”

“뭘.”

“연기.”

“글쎄.”

“엄마는 솔직히 안 했으면 좋겠어. 괜히 힘들기만 하고, 학교 복학하고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서 형이랑 같이 일
배우면 얼마나 좋아.”

도하가 대꾸하지 않고 드레스룸 쪽으로 움직이자 엄마가 그 뒤를 쫓았다. 도하는 엄마가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하는 게 이해는 됐다. 처음 큰누나가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 집안에선 말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누나가 우울증도 오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바람에 생각이 바뀌었다.

워낙 개방적인 집안이라 부모님 둘 다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놔두자는 주의였지만, 누나가 정신과 약까지


먹는다는 걸 알게 되자 아버진 관두라고 야단이 났다. 결국 큰누나는 작품 몇 개를 말아먹고서야 감독이 아닌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연출과 제작은 다른 영역이었는지 누나는 아버지의 지원을 밑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내놓으라는 제작사의
대표가 됐다. 거기다 든든한 남편까지 얻어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일단 좀 더 해보게. 시작했는데, 당장 관두기도 그렇잖아.”

“알았어. 네가 좋다는데 더 얘기하면 잔소리 될 거 같으니까, 안 할게.”

“고마워요.”

“너 근데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엄마한테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엊그제도 선태 씨랑 같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며?”

도하가 인상을 썼다. 낌새를 보아하니 뭘 아는 거 같은데. 선태 형이 그새를 못 참고 말한 거 아닐까. 아니다,


그 전에 큰누나가 닦달을 해댔겠지. 사람을 들볶기 시작하면 얼마나 지독한지 어지간한 죄는 다 실토할 정도니까.

“잠깐 바람 쐬러 다녀왔어.”

“…혼자서?”

“그럼 혼자 가지 뭐.”

“…애인이랑 같이 간 거 아니야?”

“없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러신다.”

“왜에. 주변에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씻으러 들어가려고 셔츠를 하나씩 풀던 도하가 멈칫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평소와 달리 취조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슥 눈동자만 움직여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데 역시나 뭔가 있는 것 같다.

“…없어.”

“이상하네. 우리 아들 잘나서 좋다고 하는 사람 많을 거 같은데?”

“아버지 닮아서 성격이 이상하잖아.”

“어머 어머, 얘 좀 봐. 네 아빠 성격이 어때서. 가끔 잘 삐쳐서 그렇지 그것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어.”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삐치는데 엄마만 모르나 보다.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더니 요즘은 더 잘 삐치는 거 같다고
저번에 큰누나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걸 다 들었는데도, 끝까지 아빠 편을 드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저런 게
사랑인가 싶어 속으론 웃음이 났다.
“그래요, 뭐. 엄마만 좋으면 됐지.”

“그리고 너도 알잖아. 너희 아빠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텐 또 얼마나 잘했는지. 아들들보다 더 살뜰하게


굴어서 너희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외삼촌들 말고 너희 아빠만 찾은 거.”

또 그 얘기다. 백만 스물한 번쯤 들었으려나.

“알아요, 알아. 손 붙들고 우리 경혜 잘 부탁한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그러셨다면서.”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걸 본 도하가 얼른 티슈를 빼서 건네줬다.
모친은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번질세라 눈 밑을 조심스럽게 눌러가며 훌쩍였다.

“주책이야. 나이 들면 이래서 못 쓴다니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엄만 나 어릴 때도 그랬어. 드라마 보다가도 툭하면 울고, 아버지가 그러는데 연애할 때도 그랬다던데?”

“그 양반은 애한테 별 얘길 다 해.”

새치름한 표정을 짓는 엄마가 소녀 같아서 도하가 피식 웃었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자식들에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늘 헌신적이었다. 아버지 또한 잘 삐치는 그것만 빼면 흠잡을 것 없는 사내였다.

덕분에 자식들도 그 성격을 물려받아 기본적으로 다정다감했고, 사랑을 베풀 줄 알았다. 도하 역시도 그랬다.
문제는 그게 한 사람에게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거겠지만.

“그러니까 너도 장가가면 네 아빠처럼 색시한테 해야 돼. 장인어른 장모님한테도 잘해야 하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나요. 나는 결혼 안 한다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하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혹시 알아? 내가 준영이 형이랑 결혼할지?”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그녀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구나, 어쩌면 좋아.

기습공격에 성공한 도하가 씩 웃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외국 나간 사람이랑 결혼을 어떻게 하겠어. 안 그래?”

끄응. 그녀가 신음과 한숨을 동시에 쥐어짰다. 갑자기 두통이 오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서 작년 이맘때쯤 아버지가 선물로 끼워준 보석 반지가 반짝였다. 결혼 30 주년 선물이라고 했던가.

“근데 세상 진짜 좋아졌어. 외국도 차 타면 2 시간이면 가고.”

“…도하야. 아들.”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너… 거기 갔구나?”

“어딜?”

그녀는 어디냐고 태연하게 묻는 아들의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매니저인 선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을
때도 설마 했는데, 오늘 낮에 춘천에 간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당장 준영의
집에 전화를 해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직접 확인해보기로 하고 도하에게 먼저 달려온 것이다.

“어머 어머, 세상에. 갔구나, 갔어.”

그녀는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진짜 갔어? 가서 준영이 만났어?”

“엄마.”

“아빠 알면 야단나.”

“이번엔 정말 때리시려나?”

옛 기억을 떠올린 도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양쪽 집에 알려지고 나서 발칵 뒤집혔었다.
그때 부친은 화가 나서 골프채까지 꺼내 들었었다. 하지만 집 안에 있던 아끼는 도자기를 다 때려 부쉈어도 결국
아들은 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모르지, 정말 팰지도.
“어쩌려고 그래, 진짜.”

“뭘 어째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직은.’이라고 작게 덧붙였지만, 그녀는 충격으로 듣지 못한 듯했다. 계속 어떻게 하느냐고 말을 반복하는 걸


보면.

“너 그러지 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

“엄마.”

“엄만 너 여자 안 만나도 상관 안 해. 어릴 때부터 그랬어. 네가 다른 애들이랑 좀 달라서 네 아빠랑도 얘기했던


거야. 만약에 내 아들이 그렇다고 해도 이해해 주자고. 이건 사실이야. 너희 외할머니 걸고 약속할게.”

“엄마아.”

“근데 준영이는 안 돼. 차라리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

“왜. 미정이 이모 아들이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차피 친아들도 아니지 않으냐고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준영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가 문젠데.”

“준영이 너 안 좋아하잖아.”

그 말에 도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여유 있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결국 버티질


못하고 엄마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고, 그 사람도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서글펐다.

“너 싫다는 사람한테 그러고 싶어? 그거 사랑 아냐. 집착이야.”

“그건… 모르는 거지.”

“아냐. 너만 몰라. 너만 모르고 다 알아.”

“…형이… 나 싫다고 한 적은 없어.”

“그래, 없지. 오히려 너 많이 예뻐하고 챙겨줬지. 반항하고 말썽부리고 다닐 때도 네 형보다 더 나서서 그랬던
거 엄마도 알아. 너무 고맙고 감사해. 그렇지만 준영이가 아니라잖아. 너 그냥 동생이라잖아. 아끼는
동생이라는데 왜 너 혼자 그래? 남들 다 아는 걸 왜 너만 몰라서 속 썩고 아파해. 엄마는 그게 너무 싫어.”

“아…. 우리 어머니 오늘 작정하고 오셨네. 아들내미 뼈를 사정없이 때리네, 그냥.”

“도하야.”

“알았어요, 알았어. 그냥 간 거야. 가서 어떻게 사나, 얼굴만 보려고.”

“제발.”

“알았다니까요. 나도 몇 년 안 보고 살았더니, 생각보단 괜찮았어. 전처럼 그렇게 죽을 것 같진 않았다니까.”

도하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아팠다. 담담하게 죽을 것 같진
않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며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를 붙들고 죽을 거 같다고 살려달라고 엉엉 울던
그 모습이 한 번씩 떠오를 때마다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부탁이다.”

“나도 부탁이야. 이제 그만.”

“도하야…. 엄마 마음 좀 헤아려줘.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얘기해요. 나 머리 아프려고 그래.”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은 다물어 버렸다. 포기하겠다고, 다신 찾아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어디로 튕겨 나갈지 모르는 게 제 아들인 걸 잘 알았다.

“…알았어, 그럼. 그만할게.”

“씻고 나올게요. 밥 차려줘요. 갑자기 배고프네.”

“…그래. 얼른 씻고 나와.”

그녀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거실 쪽으로 향했다. 도하가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혹시나 밖에서 걱정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을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 한쪽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엄마가 한 말과 낮의 일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심장이 욱신댔다.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화끈거리는 눈을 문질렀다. 울음은 터질 것 같은데 입에선 허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한 방 먹었네.”

* * *

“도하야. 준영이 형 힘들어. 내려와.”

도하가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앉은 준영을 올려다봤다. 책을 읽고 있던 준영이 씩 웃고 나서 머리를 만져주더니


아래층을 향해 괜찮다고 말했다. 도하가 신이 나 엉덩이를 들썩이자 준영이 턱으로 도하의 동그랗고 새까만
머리통을 꾹 눌렀다.

“가만있어. 책이 잘 안 보여.”

“형은 책이 재미있어?”

“응.”

“왜?”

“도하도 책 좋아하잖아.”

“하나도 안 좋아. 엄마가 시켜서 읽는 거야.”

“그럼 뭐가 좋은데?”

“축구.”

“축구 재미있어?”

의외라는 듯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아서 축구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치인다고
도하의 모친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응. 어제 내가 공 대신 민준이 머리통 찼어.”

“…그래서? 사과했어?”

“아니. 한 번 더 찼어!”

이런. 그래서 재미있다고 한 거냐?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준인 축구교실에서 도하와 앙숙으로 지내는
사내아이였다. 도하를 자꾸 놀려 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니 알겠다고
대답은 잘한다.

“그리고 또 뭐가 재미있는데?”

“태권도.”

“왜.”

“형도 하니까.”

“또?”

도하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한다.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 고민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하는 수업을 하나씩 떠올리는 거 같았다.

“영어랑 중국어는 조금 재미있어.”

준영이 쓰게 웃었다. 아직 한국말도 서툰 일곱 살짜리한테 영어와 중국어라니. 제일 싫어하는 건 묻지 않았다.


아마 바이올린일 것이다. 툭하면 도망을 가서 숨는 바람에 선생이 그냥 돌아간 적도 있다고 도하의 모친이 제
모친에게 푸념하는 걸 들었었다.

“도하, 그럼 영어 해봐.”

“아이, 러브, 유.”

거침없이 말하는 녀석을 보며 준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또? 하고 묻자 도하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조그마한
입술을 벙긋벙긋 움직인다.

“워어, 아이, 니.”

풉. 너무 귀엽잖아. 준영이 도하의 머리를 다시 턱으로 꾹 누르고 나서 문질렀다.

“으이구.”
“아파.”

도하가 도망가려 머리를 빼길래 다시 꼭 붙들어서는 괴롭혔다. 조그만 녀석이 발버둥 치는 것도 귀엽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귀엽고, 모든 게 다 귀여웠다. 처음 태어난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담.

“옵빠아아아.”

그때 아래층에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코를 찡그리고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걸 보고 준영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두 살 어린 민주는 준영을 무척 따랐는데 도하는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준영아, 도하야, 내려와서 과일 먹어.”

준영이 제 무릎에 앉은 도하를 일으켜 세웠다.

“내려가자, 민주 왔다.”

“짜증 나. 서민주.”

“그런 말 하면 못써.”

야단을 쳤는데도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쿵쿵 발로 바닥을 찍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민주는 이미 계단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 도하까지 온 걸 보고 신이 나서는 양 주먹을 앞으로 모으고 발까지 동동 구른다. 준영이
계단을 내려가서 그런 민주의 뺨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우리 민주 유치원 다녀왔어?”

“옵빠. 이리 와 봐. 내가 유치원에서 만든 거 보여줄게!”

혀짧은 소리를 내며 자랑하는 민주를 향해 도하가 눈을 흘겼다. 다섯 살인 주제에 키가 일곱 살인 저와 맞먹었다.


물론 자신이 또래보다 많이 작은 거겠지만. 민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의 팔을 잡아끌며 제 가방 쪽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때 도하가 앞으로 척척 걸어나가더니 어른들 모르게 발을 걸었고, 민주가 꽈당 넘어졌다.

놀란 민주의 엄마와 도하의 엄마가 동시에 일어났다.


“어머, 민주야.”

“괜찮아?”

도하가 재빨리 현관 쪽으로 도망쳤다. 슬쩍 돌아봤더니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어른들이 있으니
혼내지도 못하고 난감한 얼굴이었다.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 민주는 엉엉 울었고, 두 엄마는 민주를 달래느라
정신없었다.

준영의 시선을 피하며 화장실로 도망가려던 도하가 현관 앞에서 멈칫했다. 분명 들어올 때 제 신발을 준영의 신발
옆에다 뒀는데 이제 보니 민주의 신발이 그 옆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서 발로 퍽 차 버린 다음 제 신발을 나란히,
그것도 바싹 붙여 뒀다. 곧이어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 * *

연말이라 그런지 카페 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쪼오옥, 아이스티를 마시며 반짝이는 전구를
바라보던 도하의 눈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막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안을 둘러보던 그가 도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하다 왔는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독약 냄새가
옅게 풍겼다. 안 나올 줄 알았더니, 예상 밖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하. 민석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짜증 섞인 얼굴로 도하를 바라봤다. 빨대를 입에 물고 히죽 웃는 상판을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한참 환자가 많은 시간이라 정신이 없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바쁘다고 끊으려고 했더니 병원으로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다고 협박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어디 한번
해보라고 윽박질렀겠지만, 앞에 앉아 있는 이 미친놈은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놈이었다.

“뭐냐, 너.”

“앉아요. 쳐다보려니 목 아파.”

후우. 민석이 자리에 앉자 도하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일단 전화로 불러내긴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준영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순순히 대답하면 그건 그것대로
열 받을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안부를 묻고 그래. 집어치우고 용건만 말해.”

“와 쌈빡해서 좋네.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혹시 준영이 형이랑 연락해요?”

“아니.”

“진짜?”

“내가 걔랑 연락을 왜 해. 헤어진 지가 언젠데.”

으흠. 도하가 콧소리를 내며 민석의 안색을 살폈다. 준영이 가장 오래 만났던 사람이 민석이다. 둘이 뭐가
그렇게 잘 맞았는지까진 상상하기 싫지만, 어쨌든 준영에 대해 그만큼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헤어진
다음에도 친구로 남았겠지.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헤어지고도 만났잖아요.”

“그랬는데, 결혼하곤 안 봤어.”

“그래요? 그럼 휴대폰 줘 봐요.”

“내가 왜.”

“확인해보게.”

“정신 나갔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줘보라니까.”

“말 잘라 먹는 거 봐라. 인마, 내가 네 친구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싸가지가 없어.”

“피차 마찬가지니까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해요, 서로 감정만 상하지. 근데 진짜 연락 안 해요?”

“안 해. 그리고 한다고 해도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데?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자격이라…. 도하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늘어지듯 앉아 민석을 빤히 쳐다봤다. 민석은 태연한 얼굴로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연락이 왔을 때 얼핏 예상하긴 했지만, 아직도 서준영한테 목을 매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군대 다녀오고 대충 정리한 걸로 알았는데.

“더 할 말 없지?”
“흠.”

더 마주하고 있어야 시간 낭비일 것 같아 먼저 간다며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도하가


무슨 생각인지 제 휴대전화를 꺼냈다.

“김민석 씨 와이프 연락처가….”

민석이 홱 돌아보며 인상을 굳혔다. 뭐?

“끝 번호 3276 맞죠?”

이번엔 안색이 파래졌다.

“너….”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이름 검색하니까 나오더라고요. 아는 지인 총동원해서 힘 좀 썼지.”

하. 민석이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눈을 부라리자 도하가 얄밉게 웃더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제대로
말할 생각이 좀 드시나?

“왜 이러냐 진짜. 걔 좀 그만 괴롭혀.”

“연락 안 한다며?”

“남이사. 하든 말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이를 까득 갈았다. 아깐 안 한다더니,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안 되지, 결혼도 했다면서.”

“이혼했다. 됐냐.”

“거짓말.”
“믿든 안 믿든 네 마음이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서준영 찾아가서 아무것도 하지 마. 걔 너 아니어도 충분히
심사가 괴로운 애니까. 제발, 응?”

“뭐 때문에 괴로운데요?”

“알 것 없고.”

“되게 비협조적이시다. 그럼 나도 똑같이 나올 수밖에 없지. 와이프 전화번호가….”

“야!”

“치사하지? 근데 당신도 그때 치사하게 굴었잖아?”

“내가 뭘.”

“기억 안 나? 댁 차 백미러 망가트리고, 타이어 펑크 내고, 못으로 긁고, 내가 한 짓인 것처럼


덮어씌웠으면서.”

“참나.”

“그것뿐인가? 둘이 섹스하면서 실수인 척 나한테 통화해서 소리도 들려줬잖아. 댁이 직접.”

“내가 너한테 뭐하러 그런 짓을 해?”

“나 미쳐서 날뛰는 꼴 보려고. 그래서 서준영한테서 완전히 떼어내려고.”

“…….”

“아니라곤 안 하네?”

“아니야.”

“늦었어, 씨발.”

“…이 새끼가.”

“근데 그때 내가 왜 말 안 했는지 알아?”

“…….”

“아니라고 했는데도 서준영이 나 안 믿고 네 말 믿어줄까 봐, 그게 무서워서.”

“하.”

“나는 그 정도로 서준영 좋아했어. 이런데도 나한테 자격이 없어?”

민석이 질린다는 얼굴로 도하를 쳐다봤다.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제법 사내다워진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 꾹꾹
눌러놨던 그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치졸하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던, 서준영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제 눈엔 보였던 그것이, 그땐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찾아가서 뭐 하게. 매달리게?”

“그건 알 거 없고. 왜 거기 숨었는지나 말해요. 그럼 나도 다시는 댁 안 찾아와.”

민석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게 아니라 왜 숨었는지를 묻는 거 보니 이미 찾아간 모양이었다.


저한테까지 와서 묻는 걸 보니 본인한테 직접 듣진 못한 모양이지만. 하긴 서준영 성격에 말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다. 원수처럼 여기던 저를 찾아온 걸 보니. 표정을 보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은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도하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인다. 당신 와이프한테 걸까? 아휴. 저 망할
새끼. 진짜 이혼했다니까.

“알았어. 말할 테니까 가서 내색이나 하지 마, 이 거머리 같은 새끼야.”

CH 3.

삑, 삑, 삑, 바코드가 찍힐 때마다 화면에 가격이 표시됐다. 맥주 몇 캔과 즉석식품이 대부분이었다.

“담배 한 갑도 같이 주세요.”

직원이 담배를 꺼내는 사이 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학생 셋이 들어왔다. 강이건과 같은 교복이었다. 준영이


그들을 슥 쳐다보고 나서 다시 계산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삑.

“28,000 입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영수증 주지 마세요. 카드를 넣고 계산이 될 때를 기다리는 사이


봉투를 열어 구매한 물건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때 뒤쪽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임 존나 얼탱이 없지 않냐. 딱 봐도 태경이 짓인데 그걸 또 믿어요, 븅신같이.”

“원래 눈치 없잖아. 근데 곰탱이 새끼 존나 빡친 건 아니겠지?”

“강이건이 빡쳐봤자지. 찐따 새끼가 어쩔 거야. 안 그래, 송연우?”


물건을 담던 준영의 손길이 멈칫했다. 강이건이란 이름이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건 아니겠지만, 이 좁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 다니는 강이건이 제가 알고 있는 강이건일 확률은 매우 높아 보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캔 음료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한 남학생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추위를 막기엔 얇은
점퍼 위쪽으로 하얀 목이 드러났고 거기에 푸르스름한 멍 자국도 같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학생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낯선 이의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눈이 가늘게 늘어져 뾰족하니 올라갔다.

“손님, 카드 여기 있습니다.”

아.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직원이 건네준 카드를 받아 지갑에 넣고 물건을 챙겨 들었다.

“저희 적립카드 아직 안 만드셨죠? 만드시면 결제액의 1%가 적립금으로 쌓이거든요.”

시골 마을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편의점 주인은 올 때마다 적립카드 이야기를 꺼냈다. 만든다고 해서 그 카드를


얼마나 쓸지 장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편의점은 거의 파리만 날렸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들게요.”

“그럼 다음에 꼭 만드세요. 모아뒀다 포인트로 쓰셔도 좋고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와 편의점 옆 등나무로 걸어갔다. 그곳 벤치에 앉아 검은 봉지 안에서 아까 산 담배 한


갑을 꺼냈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외투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는데 어쩐 일인지 보이질 않는다.

아까 살걸. 후회하며 동전이 있나 살피는데 칙, 소리와 함께 불 하나가 눈앞에서 당겨진다. 고개를 올려봤더니
낯익은 얼굴이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박동현이라는 사내였다. 준영이 이곳에 올 때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그런 듯했다.

“고맙습니다.”

쭉, 담배를 빨아 당기고 나니 그가 불을 거둬간다. 그러더니 이번엔 자신의 왼쪽 손바닥이 보이게 내밀었다.


쳐다보기만 하자 빙그레 미소까지 짓는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담배 하나만.”

아. 준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건네자 그가 잽싸게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지만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무릎 늘어난 추리닝을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백수다. 옷도 왜 하필 TV
드라마에 고시생들이 많이 입는 것과 같은 파란색 줄무늬 추리닝인 건지.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아까 봤던 학생들이 나왔다. 캔 하나씩을 들고 입에 욕을 달고서 이쪽을 흘깃


쳐다보자 동현이 그들을 향해 담배 쥔 손을 흔들었다.

“이것들아, 형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아이들은 못마땅한 듯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나서 재빨리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동현이 혀를 찼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학교 후배라는 것들이 말이야, 선배를 봐도 인사를 할 줄 모르고.”

“이 동네 애들인가 봐요?”

“아 모르세요? 유명한데. 꼴통 4 인방이라고. 한 새끼가 더 있는데, 걔는 오늘 없네. 그 새끼가 아주 양아치


중에 상 양아치거든요. 걔네 아버지가 여기 유진데 군의원 나갔다가 두 번이나 떨어졌잖아요.”

“…아.”

“옆 동네까지 소문이 파다해요. 애들 괴롭히고 패고 그래서 파출소도 몇 번 갔다 오고. 그래도 걔네 엄만 지


아들 잘났다고 떠들고 다니더라고. 하여튼 애새끼가 싹수없는 덴 다 이유가 있어. 부모가 그따구로 키웠으니
그렇지.”

준영이 궁금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까 그 파란 점퍼 입은 애는 누구예요?”

“누구요?”

“마르고, 얼굴 하얗던 남학생.”

“아아, 연우.”

“잘 아세요?”

“걔도 유명하죠. 엄마가 걔 어릴 적에 도망가서 아버지랑 형이랑 살았는데 저 집도 조용할 날이 없어. 아버지가
사람은 착한데 술만 마시면 아주 애를 개 패듯 팬다니까. 쟤네 형도 맞고 자라더니, 몇 달 전에 집 나갔잖아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준영이 입 안에 있던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 점퍼 위로 보았던 시퍼런 멍 자국은 아버지한테 맞아서 생긴 걸까. 반항 가득하던 눈빛이 떠올라
입안이 썼다.

“어릴 땐 강이건이랑 꽤 친했던 거 같은데. 우리 빌라도 종종 놀러 오고 했거든요. 근데 요즘은 안 오네. 가끔


둘이 붙어 있긴 하던데.”

“그래요?”

“말이 노는 거지 이건이 새끼가 완전 딱가리지. 덩치는 존나 큰 새끼가 연우한테는 쪽도 못 써요. 지 등치 반만


한 새끼가 뭐가 무섭다고. 어휴, 등신 쪼다.”

치익, 준영이 담배를 비벼 껐다. 봉투를 들고 일어서니 동현이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선다. 아무래도 같이 갈
요량인가 보다.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뒀더니 역시나 따라온다. 묻지도 않은 말을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집에 오는 십 여분 동안 근래 동네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 * *

커피포트에 담긴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머그잔 두 개에


녹차 티백 하나씩을 넣고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흘깃 싱크대 한쪽을 보니 채 먹지도 않고 버린 샌드위치 반
토막이 있었다. 그걸 보던 이건이 한숨을 내쉬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 막 씻은 준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중이었다.

“물 다 끓었니?”

“네, 지금 부었어요.”

“얼른 가지고 와. 수업하게.”

이건이 컵 두 개를 가져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선생님. 밥 좀 챙겨 드세요. 왜 맨날 인스턴트만 드세요?”

“우리 엄마도 안 하는 잔소릴 왜 네가 해.”

“걱정돼서 그렇죠. 이래서 남자는 장가를 가야 한다니까.”


“노인네 같은 소리 하지 마. 제 손으로 밥도 못 차려 먹는 놈은 원래 결혼도 하면 안 되는 거야.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하냐, 인마.”

앉아. 수업이나 하게. 타박에 이건이 입을 삐죽이며 컵 하나를 준영의 앞에 놓아줬다. 준영이 머리를 털던
수건을 한쪽에 놓고 이건이 숙제로 풀어온 문제집을 제 앞쪽으로 끌어왔다.

“오늘은 틀리면 딱밤 맞기.”

“아파요.”

“아프라고 때리지. 좋으라고 때릴까.”

“변태세요? 은근히 때리는 거 좋아한다니까.”

“그럴 수도 있고. 얼씨구, 벌써 하나 틀렸네.”

직. 빨간색 빗금에 이건의 미간에도 금이 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채점을 하던 준영이 툭 던지듯
묻는다.

“근데 왜 혼자 왔어?”

“네?”

“저번에 친구 데리고 온다며.”

“아.”

“이름이 뭐였지… 무슨 연우였는데.”

“송연우.”

“그래, 송연우. 걔는 왜 안 데리고 왔어?”

“그냥… 괜히 선생님께 피해드리는 거 같아서요. 염치도 없고요.”

“상관없다고 했는데.”

“그래도요….”

이건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공부 얘기를 꺼내자마자 병신이라고, 그런 거 너나 하라고 면박을 당했다고 어떻게
사실대로 말하겠는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데 준영이 슥 쳐다본다.
“왜 한숨이야. 딱밤 맞을 생각에 좋아서 그래?”

“아니요. 그냥….”

“앗싸, 딱밤 세 대.”

“…….”

말과는 다르게 전혀 신나지 않는 얼굴로 채점하고 있는 준영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입을 뗐다.

“…선생님.”

“말해.”

“이건 제 친구 얘긴데요…”

“그럼 백 프로 자기 얘기더라?”

“아니에요!”

“알았어, 아니야. 친구가 왜 어쨌는데.”

“친구의 친구가 집이 좀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도와주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해서요.
왜냐하면 걔가 자존심도 엄청 세고, 고집도 세고, 그리고 또….”

“강이건, 딱밤 네 대.”

“…듣고 계신 거죠?”

“응. 고집도 세고.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쌤한테 모은 돈을 드릴 테니까요… 걔를 좀 찾아가서… 그… 장학금이라고 해서… 그


애한테 전해주면 안 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준영이 고개를 들고 이건을 쳐다봤다. 이건이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안
되겠죠?’라고 묻는 그를 보며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친구 얘기라며. 근데 왜 돈을 네가 줘?”

“…아.”

“참나.”
준영이 채점하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득 궁금해져서 돈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간간이
아르바이트했단다. 학원 쉬는 날 피자 배달도 하고, 여름에 일손 도와서 모은 거라고. 낼모레면 고 3 인데 공부를
더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아르바이트라니. 나름 이 동네에선 학구열 높은 이건의 모친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그러지 말고 직접 전해줘. 정말 너를 친구로 생각하면 도움도 받겠지.”

“…안 받을 거예요.”

“왜.”

“몰라요. 걔는 제가 주는 건 다 싫어해요.”

“어째서.”

“…글쎄요. 내가 싫어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넌 마음이 쓰이고?”

“네….”

꾹 입술을 깨무는 이건을 보며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낮에 편의점에서 보았던 아이를 떠올렸다. 낡은
초록색 점퍼에 깡마른 몸. 창백한 얼굴. 목에 퍼런 멍 자국. 이건이 그 앨 신경 쓰는 이유가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치 않는 도움을 주는 건 동정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 네가 정 그렇게 신경 쓰이면 말이야.”

딱 잘라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에 긍정적인 대답을 들으니 이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바깥에서 덜컥, 덜컥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준영이 인상을 구기며 그쪽을
쳐다보니 이건이 뒤늦게 생각난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맞다. 오늘 위층에 이사 온대요.”

“…이사? 갑자기?”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앞집 나갔대요. 금방 팔렸다던데요.”

“언제?”

“어제 보고 갔나 봐요. 서울에서 남자 혼자 이사 오는데 뭐가 급한지 오늘 들어온다고 했대요. 소리 나는 거


보니 지금 오나 보다.”
준영이 펜을 든 채로 생각에 잠긴다. 신나게 떠들던 이건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빨간색 색연필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에 이끌리듯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왜 저러시지? 강이건 역시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반쯤 닫혀 있던 커튼을 모두 열고 밖을 내다보니 빌라


입구에 이삿짐 차가 도착해서 사다리를 막 올리는 중이었다. 이건이 목을 쭉 빼고 밖을 기웃거렸다.

“혼자 산다더니 짐이 많은가 봐요. 와 저기 런닝머신도 있네. 근데 이사 오는 사람은 왜 안 보이지?”

“설마….”

“네?”

그때 저 멀리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어? 저건! 차를 알아본


이건의 눈이 커졌고 반대로 준영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혼잣말을 중얼대는 그를
이건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선생님?”

잠시 후 차가 멈춰 서고 며칠 전 보았던 사내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저번처럼 정장이 아닌 편안한 외투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서. 이삿짐을 싣고 온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 준영의 얼굴이 못 볼 걸 본 듯 굳어졌다.

“괜찮으세요?”

“기어코….”

“네?”

“…저 미친놈이 여길….”

준영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도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다봤다. 준영을 발견했는지 환하게
미소 짓더니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저번에 왔던… 그분 맞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튼이 쳐지며 창이 가려졌다. 준영이 몸을 돌리더니 책상으로 걸어간다. 이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차를 태워다주며 또 보자고 하던 남자의 말을 상기했다. 위층이 비었다고 했을 때
볼이 패도록 웃던 남자의 옆모습도. 설마 여기에 이사 올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딱 봐도 준영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거 같은데. 괜히 자신이 그런 말을 흘려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이실직고할까, 고민하는데 준영이 아무렇지 않게 노트를 펼치고 이건을
바라본다.

“뭐 해? 강이건. 얼른 와. 수업 마저 해야지.”

“지, 지금요?”

“왜. 무슨 문제 있어?”

이건이 쭈뼛거리고 와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은 감출 수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죄송해요.”

“뭐가.”

“실은… 오늘 이사 온 사람 있잖아요. 저번에 저 태워다 줬거든요. 그때 제가 괜히 위층에 사람 안 산다고


쓸데없는 소리 했어요.”

준영이 쳐다보니 이건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사과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기특했다. 울상을 하고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알았다면 입도
벙긋 안 했을 거라고 변명을 한다. 아니, 애초에 차에 타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신경 쓰지 마.”

“네?”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럼요?”
나 때문이지. 준영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사실이지 않은가. 도하가 저렇게까지 구는 건 순전히 저
때문이다. 이건이 아니었더라도 이사를 오고자 마음먹은 이상 옆에 빈 땅에 집을 지어서라도 그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강이건의 탓이 아니었다.

“하여튼 넌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조만간 다시 이사 갈 테니까.”

네? 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준영은 남은 채점에 집중할 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
채점까지 끝내자 준영이 펜을 내려놓고 나서 문제집을 다시 앞장으로 넘겼다. 틀린 문제부터 살펴볼 요량인 것
같았는데, 그런 준영을 보며 이건은 궁금한 게 생겼다. 저 밖에 있는 사내와 대체 무슨 사이인지를.

“근데 그분은 선생님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그게 왜 궁금한데?”

“만약에 이상한 사람이면 제가 선생님을 지켜야죠.”

픽. 준영이 웃었다. 덩치로 보면 이건이 듬직한 건 맞지만, 제 눈엔 그저 아이 같았다. 어릴 적 도하가 무슨


말만 하면 형은 내가 지킨다고 하던 게 떠올라서 잠시 입술 끝이 얼어붙었다. 딱 그때 멈췄더라면 좋았을걸.
지금은 제일 위험한 녀석이 그 녀석 아닌가.

“허튼소리 말고 집중해. 여기, 이거 저번에 공식 외웠는데, 잊은 거야?”

준영은 이건이 틀린 수학 문제를 가리켰고 이건은 그가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라 좀 안심이 됐다.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데 밖은 여전히 이삿짐을 나르는 소리, 사다리차가 움직이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덜컹, 사다리차가
창밖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자를 통해 보였다. 하지만 준영은 그쪽으로 시선 한 번 내주지 않았다.

그때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이건이 먼저 현관 쪽을 쳐다봤다. 두 번째 띵동 소리와 함께 불길한


예감이 등 뒤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시간에 준영의 집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건의 모친이라면
전화를 했을 것이다.

휴일이라 택배가 오는 날도 아니었다. 조금 전 창밖에서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슥 준영의 눈치부터 살폈다. 준영은 펜을 쥔 채로 문제집을 노려보다 띵동, 세 번째 벨이 울리자 문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제가… 나가볼까요?”
“놔둬.”

준영이 직접 일어서더니 현관 쪽으로 향했다. 이건이 같이 일어서서는 그 뒤를 따랐다. 달칵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데 그 틈으로 낯선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파란색 조끼를 입고 왼편에 이름이 적혀 있는 남자는 밑에서
짐을 나르던 이삿짐센터 직원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아. 준영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5036 차주분 되시나요?”

“예. 맞는데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삿짐 상자 나르다 선생님 댁 차를 살짝 긁어서요. 티는 안 나는데 일단 확인은 해보셔야


할 것 같아서 올라왔습니다.”

준영은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차가 박살 난 것도 아닐 테고, 오래 끌고 다닌 녀석이라 자잘한 흠집도 많으니


괜찮다면서. 직원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밑에서 짐을 나르는
소리, 사람들 말소리, 그 와중에 도하의 목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준영이 그대로 문을 닫고 이건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건은 왜 자신이 더 긴장한 표정인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 * *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와 째깍째깍 벽에 걸어둔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릴 뿐 집 안은 고요하리만치 정적이


흘렀다. 준영이 흘깃 시간을 확인했다. 밥을 먹고 대충 치우고서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위층으로 시선이 갔다. 종일 뚝딱거리고 시끄럽더니 위층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폭풍 속의


고요라고 해야 하나. 처음 이사 온 걸 봤을 땐 기가 막혔고, 누가 문이나 열어주나 봐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종일 얼굴 한번 내비치질 않으니 불안은 점점 가중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용하면 꼭 사고를 치던 녀석이 아니던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위층을 살피다가 책을 그대로 덮고
나서 머리맡에 올려뒀다. 아, 그만 생각하자.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인지,
아니면 10 여 분 전 먹었던 신경안정제가 효과를 나타내는 건지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그그그그그- 천장이 울렸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잠시 후 또다시 그그그그그- 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책상을 끄는 것도 그렇다고 망치질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묵직한 게 굴러가며 내는 소리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한번 거슬리기 시작한 소리는 더 집요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벌떡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아 침대에서
내려와 불을 켰다.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그그그그 소리가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다. 미간을 잔뜩 구기고 나서
얼굴을 문질렀다. 시간을 확인하니 11 시 30 분이다. 약 기운이고 뭐고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잠귀가 밝고 예민한데.

서랍으로 가서 소음방지용 귀마개를 찾기 시작했다. 아래, 그 아래 서랍까지 모두 열었지만, 전에 사뒀던 게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멈췄다. 피곤함에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다시 침대에 가서 누우려는데 잠깐 멈춘 듯하던
소리가 다시 그그그그 울린다.

결국엔 위층을 노려보며 이를 까드득 물었다.

* * *

도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를 대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씻고 나서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채 허리에 흰색


타월 한 장만 걸쳤다. 벌써 1 시간째 이 짓을 하고 있었는데 아래층에선 별다른 기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고서 한쪽에 있던 볼링공을 가지고 와 반대편으로 데구루루 굴렸다. 묵직한 공이


굴러가며 약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낮이라면 묻힐 수도 있는 소리겠지만, 지금 시각이면 아래층에 그대로 전달될
것이 확실했다.

“…올 때가 됐는데….”

1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소식이 없으니 초조해졌다. 어차피 이사 오자마자 쫓아가 문 열어달라고 하면


문전박대당할 게 뻔했다. 좋게 받아줄 생각이었으면 그때 빌라 앞에서 그렇게 매정하게 쫓아내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공을 굴리는데 똑똑,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약하게 들린다. 도하의 입가에 생긋
미소가 생겨났다. 급하게 볼링공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고 나서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대충 손에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시고 몸에도 적시고 나서 목에 수건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유리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잔뜩 굳은 얼굴의 준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입가에 슬쩍 피어오르는 미소를


싹 지우고 나서 문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가고 열리는 문틈으로 준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편한 옷차림인 걸 보니 막 잠이 들었거나, 잘 준비를 하던 중인 것 같았다. 무표정하던 준영의 얼굴이 도하의


몰골을 보고 슬며시 일그러졌다. 거의 다 벗은 알몸으로 수건 한 장 걸치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인상을 찡그리자 도하가 반대로 생긋 웃는다.

“무슨 일이에요?”

“…씻고 있었어?”
“네. 이제 씻고 자려고요. 이 밤중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태연한 얼굴로 어쩐 일이냐고 묻는 도하를 보고 준영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도 눈이 한 번씩 녀석의


상체로 움직였다. 어릴 땐 또래보다 유독 키가 작고 허약했다. 키가 좀 크기 시작하면서 수영을 하긴 했지만,
마지막 봤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그 시선을 도하가 먹잇감을 노리는 시선으로 포착했다.

도하는 팔 하나를 문에 짚고 서서는 하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부터 발기해 있던 녀석이 수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불뚝 솟아올라 있었다. 차라리 수건을 뚫고 보이면 서준영이 조금은 구미가 당기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슥 한 번 빨았다가 놓았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같은데 잠깐 들어와요. 그러잖아도 인사하러 가려고 했는데, 이사하느라 내가 좀


바빴어요.”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말하고 갈게. 너희 집에서 아까부터 들리는 그 정체 모를 소음 때문에 내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주의 좀 부탁할게.”

“소음이요? 어떤 소음? 난 여태 씻었는데?”

“이도하.”

“못 믿겠으면 들어와서 확인해요.”

아니면 지금 보여줄까? 수건을 걷으려 하기에 준영이 인상을 버럭 구겼다. 그거 치우기만 해. 아주 죽여 버릴


테니까. 노려보자 손을 떼어내며 능청스럽게 웃는다.

“억울해 죽겠네. 확인시켜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면 나더러 어쩌란 건지.”

“1 시간 동안 씻었다고?”

“대충 씻고, 반신욕하고, 누구 생각하면서 자위하고 났더니 시간이 금방 가던데요. 진짜예요. 안 믿기면
들어와서 확인하라니까. 아까 내가 싼 게 아직 씻겨 내려가지도 않았거든요.”

준영이 피곤한 얼굴로 뺨을 문질렀다. 약 기운도 퍼져 죽겠는데, 더 얘기했다간 저만 지칠 것 같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도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내가 착각했나 보다.”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준영이 조금 전 짜증을 싹 지우고 나서 걱정스럽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이걸 말해야 하나 말해야 하나, 라고 운을 뗐다. 도하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무슨 수작이지?

“전에도 가끔 이상한 소리 들리곤 했거든. 사람들 말로는 빌라 들어서기 전에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네?”

도하의 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서준영 씨 귀엽네.

“믿든 안 믿든 네 맘이고. 혹시 모르지, 오늘 밤 너한테 인사하러 나타날지도.”

“잘됐네. 서준영 씨 닮으면 더 좋을 텐데. 밤새 안고 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준영이었다. 됐다며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돌아가려
하길래 도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 손을 준영이 가만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보기 좋게 자리 잡은 팔 근육과
잘 벌어진 어깨가 보였다. 그 모습이 낯설고 거북스러웠다.

“놔.”

“얘기 좀 해요.”

“할 얘기 없어. 네가 무슨 이유로 여기 이사 왔는지 알고 싶지 않아. 더는 말 안 할 테니 알아서 돌아가.”

냉정하게 손을 떨쳐내더니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도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을
보고 얘길 나눈 건 좋은데 막상 얼굴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누가 잡아먹을까 봐 그러는지, 잠깐 들어와서 얘기
좀 하면 얼마나 좋아. 게다가 뜬금없이 귀신 이야기라니. 너무 귀엽잖아.

발소리가 멈추고 아래층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 뒤에도 도하는 한참이나 문을 닫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뒤척거리던 도하가 눈을 감고 아까 보았던 준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살짝


흐트러진 모습에 저를 보며 눈을 흘기던 걸 떠올리니 아랫도리가 슬며시 들고 일어섰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침대 끝으로 가 누워 바닥을 내려다봤다. 방이 세 갠데 이 방이 제일 크니 서준영도 지금


이 아래서 자고 있겠지. 혹시 같은 자리에 누워 있을까. 뭘 입고 있을까. 추위를 많이 타니 다 벗고 자진 않겠지.
잠옷을 입었을까. 어떤 잠옷일까.
서준영이 좋아하는 보라색일까. 단추는 달렸을까. 그 단추를 하나씩 풀던 상상까지 하다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눈을 감고 그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손은 어느새 누워 있는 서준영의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 버리고 있었다.

잠옷 사이로 드러난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젖꼭지를 엄지로 비비고 문지르자 서준영이 허리를
튕기며 자지러졌다. 그대로 입을 가져가 유두를 머금고 혀로 비비자 도하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제 입술을 빨게
한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꽃처럼 활짝 벌어지고 그 가운데 혀가 섞이며 중심은 점점 부풀어 올라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팽창했다. 도하가 바지를 내렸다. 서준영도 아까부터 발기한 채 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성기를 마주 잡고 문지르자 서준영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신음을 낸다.

“좋아요, 형? 응? 다리 좀 더 벌려봐요.”

준영이 다리를 벌리자 도하가 제 성기를 붙들고 도하의 구멍 입구에 맞추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니 준영이
입술을 깨물며 도하의 어깨를 붙든다.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서 도하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아, 씨발. 아파하는 것도, 존나, 섹시해.”

[도하야, 으응, 그만.]

“괜찮아요. 후우, 기분 좋게, 해줄게요. 힘, 빼요.”

흐흐흐흐… 뚝.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던 도하가 멈칫했다. 시트에 엎드린 채 서준영 생각을 하며 한참 문지르던
와중이었는데 잠깐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잘못 들었나.

금세 다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성기를 시트에 마찰시키는데 조금 전 그 소리가 또다시 들린다. 흐흐흐… 흐흐흑….


흑흑… 엄마…. 엄마…. 도하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시트에 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흐느낌은 점점
짙어졌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 또한 점점 더 또렷해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눈동자만 움직여 사태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깔깔깔 하고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전에도 가끔 이상한 소리 들리곤 했거든. 사람들 말로는 빌라 들어서기 전에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네?]

준영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머리털이 삐쭉 곤두섰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머리맡에 책상 등을 켰다. 순간


저도 모르게 억 소리를 질렀다. 옷장 앞에 걸어둔 검은색 코트를 보고 흠칫 놀란 것이었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푸스스 식어 버렸다. 안방 불을 켜고 나서 방 안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뭐야, 씨발. 잘못 들었나. 다시 불을 끄고 침대로 와 눕는데 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뭐야!”

이번엔 자지러지며 깔깔 웃는다. 발작하듯 웃는 그 소리에 도하가 흠칫해선 방 안을 둘러봤다. 불을 끌 수도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결국 소리가 멈출 때까지 한참을 침대에 앉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 * *

머리맡에서 울리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끊어졌던 전화벨이
또다시 울린다. 인상을 팍 구긴 채로 일어난 도하가 손을 위로 뻗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엄마.’라고 적힌 두 글자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잠시 고민하는데


전화가 끊긴다.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집에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짐을 대충 챙겨 이사한 건데 아무래도
매니저인 선태보다 엄마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나 보다. 아니면 발견해서 즉시 가져다줬든가.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울렸기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귀로 가져갔다.

“안녕, 엄마. 좋은 아침.”

[너 어쩌려고 이래!]

어지간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는 그녀인데 받자마자 고함을 지르는 거 보니 정말 화가 났나 보다. 도하가


입가에 곤란한 미소를 띤 채 이마를 문질렀다. 전화기를 귀에서 살짝 떼고 나서 그녀의 화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제정신이냐고, 어쩌려고 거기에 갔느냐고, 엄마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느냐고,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퍼붓던 수화기 너머로 숨 고르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온다. 도화가 다시
전화기를 귀에 바싹 가져다 댔다.

“다 하신 거예요?”

[도하야. 아들.]

“죄송해요. 그렇지만 엄마가 나한테 늘 그랬잖아. 심장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뛰어가라고. 뛰다 보니 여기네.
어쩔 수 없었어.”
[그건 네 꿈에 관한 이야기였어. 이거와는 달라.]

“다르지 않아요. 서준영이 내 꿈이고 전부니까, 다를 거 없다고요.”

[도하야.]

“정말 안될 거 같으면 그땐 다 정리하고 올라갈게요. 마지막이에요. 이번에도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땐 나도


마음 정리할게요. 한 번만? 응? 나 한 번만 도와줘요.”

아유, 하느님. 하는 소리가 건너에서 들려온다.

“큰누나한테도 잘 말해줘요. 두 달, 아니 한 달만이라도 시간을 줘.”

미쳤다. 정말 미쳤어.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쯤 가슴을 퍽퍽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다시 말하니, 잠시 정적이
찾아왔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정말이지? 정말 마지막인 거지?]

“네… 믿어주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알았어, 그럼. 뜻밖의 허락에 도하의 입꼬리가 수려하게 올라갔다.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

[됐어. 이 망할 녀석.]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거든 연락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도하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한 달이라고 말을 해놨는데 지금 하는 거 보니 한 달은커녕 일 년이 걸려도
어려울 거 같았다. 일단 엄마는 설득해서 시간을 좀 벌어놨으니 뭐라도 해봐야겠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앞에 있던 거울에 얼굴이 비친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인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 짜증 나. 머리를 헝클고 나서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를 젖혔다.

일단 맑은 공기를 쐬면서 정신을 차리는 게 먼저였다. 그런 다음 방법을 모색해봐야지. 드르륵, 창을 열자 찬


공기가 확 밀려들어 온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아, 확실히 시골이라
그런지, 공기가 다르긴 다르네. 냄새가…. 똥 냄새가….
“아씨….”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창을 열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어디서 폴폴 풍겨왔기 때문이다. 누가 밑에서 똥이라도 싸는
건가 내려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널따랗게 펼쳐진 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창문을 닫고 나서 괜히 손에도 냄새가 밴 것 같아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를 댔다.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조용하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은 씻어야겠다.
씻고 움직이다 보면 좋은 묘책이 떠오르겠지.

* * *

인터폰 소리에 문을 열자 이건이 한 손에 작은 스테인리스 통을 들고 서 있었다. 학교에 가려던 중이었는지


교복에 점퍼를 입은 차림새였다. 이게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건이 그걸 불쑥 내밀었다.

“오늘 외할머니 어디 가신다고 엄마가 새벽부터 김밥 싸셨어요. 선생님도 좀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챙겨왔어요.”

이건의 외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 2 학년 때까지 경기도에서 살던 이건의 식구가 이곳으로 온 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기 때문이다. 이건의 모친은 외동딸이었고 자신이 아니면
챙길 사람 없는 어머니 때문에 늘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남편이 이곳으로 오자며 먼저 말을
꺼냈단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해했다.

“나까지 챙길 필요는 없는데.”

“드세요. 울 엄마 김밥 맛있는 거 아시잖아요.”

“너는? 먹었어?”

“네. 먹고 내려오는 길이에요. 좀 삐뚤어진 것도 있는데, 그건 아버지가 싼 거예요.”

고마워. 잘 먹을게. 도시락을 받아 드는데 이건이 안색을 살핀다. 어째 준영의 얼굴이 하루 새 까칠하게 변한 거
같았다. 준영은 모든 일에 털털한 편이었는데, 유독 잠을 이루는 걸 힘들어했다. 혹시 어젯밤 그 소리 때문인가
싶어 슬그머니 물었다.
“어제 4 층 아주머니 때문에 못 주무셨죠? 요즘 잠잠하더니 또 그러시더라고요.”

준영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4 층에 사는 중년 여성은 바람난 남편과 이혼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조울증이
심했다. 혼자 TV 를 보며 별거 아닌 거에도 소리 내 울거나 웃을 때가 많았다. 처음엔 이웃들도 힘들어했는데
그녀의 사정을 듣고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아빠가 가서 말한다는 거 제가 말렸어요…. 마음이 아프신 걸 이해해야지, 어쩌겠어요….”

짠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건을 보며 준영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짜식. 기특해라. 그러다 이건의 어깨너머로
계단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했다. 언제 왔는지 도하가 거기에 서서 귀신보다 무서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뒤를 돌아보던 이건이 흠칫했다. 위층으로 이사 온 도하가 계단에 서서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움츠러드는데 준영이 그만 가보라고 한다. 이때다 싶어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재빨리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그랬는데 도하가 트레이닝복 바지에 양손을 찔러놓고 저를 뒤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이건이 걸음을 서두르려는데
뒤에서 ‘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도하가 입술을 슥 핥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가? 학교?”

“…네.”

“우리 이건이 아까 준영이 형한테 뭐 준 거야?”

말투가 무섭도록 다정해서 하마터면 이건은 아침에 먹은 김밥을 게워낼 뻔했다.

“…어떤 거요?”

“통에 뭐 담아서 주고 칭찬받았잖아.”

아. 김밥을 말하는 건가. 근데 칭찬은 무슨 소리지. 혹시 아까 어깨 두드린 거 말하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김밥 줘서 칭찬한 건 아니었는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도하가 두 걸음 더 앞으로 다가온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니 그의 눈매가 이상할 만치 뾰족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뭐 줬냐니까.”

“김밥이요. 엄마가 싸주셔서.”

“김밥?”

“네. 엄마가 할머니 드린다고 쌌는데 선생님 것도 쌌거든요. 그래서 그거 가져다드리려고 들렀어요.”

“아. 그래?”

“네.”

도하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건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아까 계단에서 서늘하게 노려보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다정한 얼굴로 웃더니 혹시 학교에 버스를 타고 가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잘됐다고 좋아한다.

“차로 태워다 줄까?”

“…괜… 괜찮아요.”

“괜찮긴. 정류장까지 걸으려면 춥잖아. 나도 마트 가려고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타.”

“진짜 괜찮은데.”

“타라고.”

이를 끄득 물고 타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이건이 인상을 슬며시 찡그렸다. 그러면서 시선은 준영이 머무는 2
층으로 향했다. 저번처럼 또 선생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닐까, 걱정됐다. 대답 안 하면 들들 볶을 거
같은데.

“집에 가서 키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려. 우리 귀여운 이건이, 도망가면 형아가 맴매해준다?”

산뜻하게 웃더니 빌라 쪽으로 들어갔다. 도하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건이 입술을 꾹 깨물고 고민에 빠졌다. 아
어쩌지. 하다 주머니에서 황급하게 동전 하나를 꺼냈다. 공중으로 튕겨 손으로 잡았다.

앞이면 가고, 뒤면 기다린다. 손을 떼고 보니 뒤다. 그 동전을 확 뒤집은 다음 앞면을 만들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학교 가서 생각하자. 그대로 몸을 돌려 죽기 살기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하가 자동차 키를 들고 흥얼거리며 내려오다 입구에서 멈춰 섰다. 저 멀리 강이건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리는 게 보였다.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자전거를 탔다고 착각할 만한
속도였다. 기가 막혀 가만히 쳐다보다가 차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저 자식이….”

이를 까득 물고 이따 오면 괴롭혀줘야지 생각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파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가 부스스한 남자였다. 방금 막 깬 건지 눈이 퉁퉁 부어선 입가엔 하얀 침 자국이 묻어
있었다. 도하가 슬며시 인상을 찡그리는데 동현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트레이닝복 안으로 손을 넣어 배를
긁는다.

“아, 존나 춥네. 잠바라도 입고 나올걸.”

그대로 지나쳐 들어가려는데 동현이 도하를 부른다.

“어제 3 층에 이사 오신 분인가 봐요? 반가워요. 나는 여기 1 층 살아요.”

조금 전까지 배를 긁던 손을 내미는 걸 쳐다만 보자 동현이 머쓱하게 제 손을 거둬가더니 도하를 위아래로 훑는다.


그러더니 눈이 슬쩍 커진다. 오오? 명품 입었네. 그러고 보니 신고 나온 운동화도 점퍼도 다 비싼 거다.
짝퉁이라고 생각하기엔 태가 달랐다. 하긴 빌라 뒤쪽에 주차해놓은 차도 엄청 비싼 거였지. 있는 집 자식인 거
같은데 여긴 왜 온 거지.

“어차피 이웃사촌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박동현이라고 해요. 지금 공무원 고시 준비 중이고. 서른여덟.”

“이도합니다.”

“아아, 이도하. 내 이름이랑 비슷하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어요?”

“없어요. 안 피워요.”

“세상에. 그 좋은 걸 왜.”

도하가 동현을 한 번 슥 쳐다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동현이


혀를 쯧쯧 찼다. 젊은 놈이 싸가지가 없다고 구시렁대며 몸을 움츠렸다. 아, 추워. 들어갔다 나오기 귀찮은데
가서 담배를 가져와야 하나.
위층으로 올라온 도하가 준영의 문 앞에 섰다. 문에 귀를 바싹 대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조용하다. 문구멍으로 살펴도 보이는 게 없다. 한쪽 벽에 기대 잠시 고민했다. 문을 두드릴 것이냐
아니면 말 것이냐.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10 분 정도 그렇게 서 있다가 집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밟는데 문이 열린다. 놀라 돌아보니 준영이 집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다. 저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멈칫하더니 가만히 쳐다본다. 그렇게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준영이었다.

“뭐야, 너.”

“뭐가요?”

“아까부터 왜 계속 거기 서 있어?”

그 말에 도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보면 몰라요? 아까는 내려가는 길이었고 지금은 올라오는 길이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미심쩍게 바라봤다. 그걸 보며 도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다니느냐고 벽이라도 타고 다녀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준영이 문을 닫는다.

“누가 뭐래. 아무 말 안 했어.”

“거짓말. 방금 이상하게 쳐다봤으면서….”

“애초에 네가 여기 온 거부터가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요. 서준영 씨 때문에 온 거 아니고, 나도 머리 식히러 온 거니까 신경 끄십시오.”

말을 말자, 말을. 준영이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고, 위로 올라가려던 도하가 가만히 쳐다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아침부터 계단을 대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 건지.

속으로 꿍얼거리며 1 층까지 따라 내려오는데 아까 봤던 그 남자가 아직도 서 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체조를 하다가 두 사람을 보더니 손을 흔든다. 정확히는 이제 막 나타난 준영에게였지만.

“어, 준영 씨. 어디 가요?”

“네. 시내 서점에 다녀오게요.”


“아 서점 좋지. 책 냄새도 맡고. 아, 나 담배 하나만 빌려줄래요?”

준영이 점퍼에서 담배를 꺼내 동현에게 내밀었다. 불을 건넬 것도 없이 그가 자기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척 붙이고는 깊게 빨아 당긴다. 아, 역시 담배는 자고 일어나서 막 피우는 담배가 최고라면서 능청까지
떤다. 준영이 웃더니 그대로 동현을 지나쳤고, 도하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이 아는 사인가?”

동현의 물음에 준영이 아니라고, 어제 처음 봤다고 딱 자른다. 도하가 이번엔 정말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저한테 뻔뻔하다고 하더니 어쩜 어제 처음 봤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속 쫓아가면서도 혹시나 남자가
둘의 대화를 들으면 준영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본 사이 많이 거짓말이 늘었어요.”

“왜 자꾸 따라와? 가.”

“나는 분명 말했어요. 여기 그냥 바람 쐬고 싶고, 좀 쉬고 싶어서 온 것뿐이라고.”

“알았어. 그럼 쐐. 나 따라오지 말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바람 쐬러 왔다는 동생한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멈칫, 준영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도하가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계속 밀어붙여 봤자 역효과만 날 테고 지금


당장은 이렇게라도 곁에 붙어 있으면서 기회를 살피는 게 차라리 나을 거 같았다.

처음에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점점 자신이 쭈그러지는 거 같아 못마땅했지만 어쩌겠는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고 을인 것을. 자신의 부친이 좋아하는 노래 중에 그런 노래가 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딱 제 모습이었다. 왜 나는 서준영 앞에만 서면 쭈그러드는가. 준영은 진심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무시한 채


시동을 켜고 운전석에 앉을 뿐. 탕, 차 문이 닫히자 잠시 망설이던 도하가 보조석 문을 잡아당겼다.

달칵, 하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문은 꼼짝도 하질 않는다. 다시 한번 잡아당겼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새 잠갔어?


퉁퉁, 주먹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이쪽을 돌아보는 준영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열어줘요.”

준영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도하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하아,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손가락으로 ‘열어줭.’이라고 쓴다. 하아.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니 입술을 오므리고 제발이란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잘못하고 나면 꼭 저러더니. 저걸 10 년을 넘게 써먹네, 망할 자식이. 이젠 문고리를 잡고 흔들지도


이상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문 앞에 가만히 서서 저를 쳐다보기만 한다.

빌어먹을. 한참을 고민하던 준영이 결국 문을 열어주자 잔뜩 굳어있던 도하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보조석 문을
열고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올라타더니 안전띠를 잡아당겨 매고 나서 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출발해요.”

생긋 웃으니 준영이 한숨을 내쉬고 차를 출발시킨다. 운전대를 잡은 준영을 보며 도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어릴 적엔 운전하는 준영이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저도 어른이 되면 정말 멋진 차를 사서 준영을 태워주고
싶었다.

자신과 똑같이 멋지다 생각해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옛 생각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으니 준영이 슬쩍 쳐다봤다가
시선을 거둬간다. 차는 천천히 동아빌라를 벗어나 도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 * *

“어머, 저런. 어쩌니. 네가 신경 쓰이겠다. 그래. 경혜야. 그래 알았어. 끊을게.”

2 층 계단을 내려오던 준영이 멈칫했다. 모친인 미정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는데 경혜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도하의 어머니인 듯싶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자 소파에 앉아 있던 준영의 부친이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준영이 계단을 내려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정성껏 만든 간식이 놓여 있었다. 모친이
저를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데 통화하느라 잊어버린 듯했다.

“도하 때문에 경혜가 걱정이 많나 봐요.”

“꼬맹이가 왜.”

“학교에 적응을 못한대요. 유치원 처음 다닐 때도 그러더니, 어제도 소변 참다가 바지에 실수했다고 연락이 와서
경혜가 놀라서 학교에 찾아갔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걱정이 많겠네.”

“학교 안 간다고 아침에도 떼를 쓰는 거 억지로 보내긴 했는데, 생각이 많은 거 같아요. 학교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왔다는데, 애 목소리가 팍 죽었어요. 계속 이런 상태면 어쩌나 걱정하더라고요.”
달그락, 준영이 컵을 집어 드는 소리에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모친이 몸을 돌려 다가왔다. 부친은 흘깃 한 번
볼 뿐 뭐라고 묻지 않았다.

10 여 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준영을 처음과 같은 눈으로 쳐다봤다. 곧 무심한 얼굴로 다시 신문을 본다.
그 시선을 피해 준영이 정수기 앞에 섰다. 익숙한 듯 익숙해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저를 볼 때마다 제 아버지의 부정을 확인하는 기분이 들 테니 반갑지 않은 게 당연했다.
크면서 스스로 다짐했던 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소리를 들어도 서운해하지 말자. 제 존재는 그런
거니까. 다가온 모친이 준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준영아, 왜. 물 마시러 나온 거야?”

“…네. 목이 말라서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통화하느라 너 간식 담아놓고 깜빡했다. 얼른 올라가. 엄마가 가져다줄게.”

그녀가 웃더니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힘주어 꾹꾹 누른다. 준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아, 소리를 냈더니 그녀가
웃으며 이번엔 주먹으로 통통. 두드린다.

“힘들지? 조금만 더 하다 자자.”

“…괜찮아요. 할 만해요.”

“할 만하긴. 울 아들 잘생긴 얼굴에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왔는데.”

그 말에 준영이 옅게 웃어 보였다. 정작 다크서클이 내려온 건 그녀였다.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큰딸을 공부시켜


좋은 대학에 보냈고, 지금은 공부한다고 해외로 나간 상태다. 이제 준영의 차례였다. 큰딸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준영이 잠드는 시간까지 함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먼저 주무세요.”

“됐어. 엄마도 책 보다 잘래. 나이가 드는지 요즘 밤잠이 없어지더라.”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머리만 대면 잔다는 건, 누구보다 잠이 많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간식을 챙겨


위로 올라가려던 준영이 멈칫했다. 조금 전 도하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아들이 머뭇거리는 걸 눈치챈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왔다.
“도하, 적응 못한대요?”

“아아. 통화한 거 들었어?”

“네. 조금.”

“고 녀석이 한 까칠 하잖아. 초등학교 올라가서 환경도 바뀌고 해서 적응이 힘든가 봐. 유치원 졸업하면서
그나마 친하던 친구 둘은 다 외국으로 가 버렸으니까. 아무래도 더한 거지.”

“아….”

“넌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 해.”

잠시 머뭇거리던 준영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제가 낮에 잠깐 가볼까요?”

“뭐?”

“어차피 옆이고 하니까… 제가 점심에 맞춰서 잠깐 다녀올게요.”

“네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한창 바쁘고 정신없을 땐데.”

“도하 적응될 때까지만요. 설마 1 년 내내 그러진 않겠죠. 그래도 가서 좀 들여다보면 낫지 않을까 해서요.”

미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친인 경혜도 힘들어하는 일을 아직 어린 준영에게 떠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도하가 신기하리만치 어릴 적부터 준영을 따랐으니 막상 가면 좀 달라질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준영이 간식을 챙겨 들고 모친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내일 일단 가볼게요. 경혜 이모한테는 미리 좀 알려주세요. 괜히 낯선 사람 찾아가면 학교에서도 안 좋게


생각할 거 같아서요.”

“…괜찮겠어?”

“네. 일단 해볼게요.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죠.”

미정이 아들의 등을 다정스레 톡톡 두드렸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였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아무리 남편과 피가 섞였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배다른 시동생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여자의 아이인데.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

하지만 키우면서 그런 우려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처음 문 앞에 버려져 있던 걸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어서 더 애착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 살 답지 않게 텅 비어 버린 눈동자도 그렇고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얼굴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며칠 해보고 힘들면 관둬. 엄마는 도하가 아무리 예뻐도 너 힘든 건 싫어.”

“알겠어요. 올라갈게요.”

으이구, 이번엔 엉덩이를 두드리려고 했고, 준영이 얼른 피해서는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신문을 보고 있던 제
아버지를 향해 ‘올라갈게요,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래.’라고
짧은 대답을 해주었다.

* * *

도하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친구들과 게임도 하고 그러면서 노는 중이었는데 도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1 시간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요의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가면 쉬가 나오지 않았다. 바뀌어 버린 환경도, 친구들도 제겐 다 어색하기만 했다.

다시 한번 가볼까. 기사 아저씨가 학교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집에 다녀올까. 그런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남자애 세 명이 우르르 오더니 도하를 빙 둘러싼다. 그러더니 그중 키가 제일 큰 사내 녀석 하나가
손날을 만들어 도하의 머리에서 시작해 제 턱 아래까지 손으로 죽 선을 이어간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큭큭대고 웃는 걸 보고 도하의 눈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뭐야.”

“되게 작다, 오줌싸개.”

“오줌싸개라고 부르지 마. 맞는다.”

“오줌싸개를 오줌싸개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오늘은 안 쌌냐? 꼬맹아.”

이게 진짜. 녀석의 멱살을 잡는 순간 누군가 도하의 어깨를 붙들었다. 돌아보던 도하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생긋 웃는 준영을 보며 도하가 입을 활짝 벌려 웃었다. 요즘 들어 준영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집에 놀러 가도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형!”

반가워 꽉 끌어안자 앞에 있던 삼총사가 후다닥 저쪽으로 도망쳐 버린다. 준영이 도하의 머리를 쓸고 나서 제
품에서 떼어냈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또 활짝 웃는다.

“도하 오늘 화장실 갔어?”

화장실이란 말에 도하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준영이 못 갔느냐고 다시 묻는 거 보니 아무래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니 준영이 커다란 손으로 도하의 머리를 헝클고 나서 손을 잡고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교복을 입은 다 큰 남학생이 복도를 걸어가니 주위에 있던 꼬마들이 모두 쳐다봤다. 도하는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경외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준영이 멋지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쉬 마려운 생각이 들어
비참하기도 하고. 그렇게 걸어서 간 곳은 교사용 화장실이었다.

“형아가 선생님한테 허락받았으니까. 오늘은 여기 들어가서 쉬하자.”

“…싫어.”

“왜.”

“쉬가 안 나와.”

“아냐. 지금은 긴장해서 그래. 형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여기 들어가서 쉬 하고 와.”

잠시 망설이던 도하가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것도 있었고, 또 참다가 엊그제처럼 바지에


쉬하면 1 년 내내 오줌싸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지익. 바지 지퍼를 내리고 고추를 꺼냈지만 어쩐 일인지 또 쉬가 나오질 않는다. 힘을 주느라 반듯한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끙, 신음을 흘리니 잠시 후 다 했느냐고 묻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형, 안 나와.”

잠시 후 준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인상을 찡그리느라 복숭아 같은 양쪽 볼이 잔뜩 경직되어 있는 걸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하지만 도하는 준영이
볼세라 방향을 얼른 틀어 제 소중한 고추를 가렸다.
“보면 안 돼.”

“못 봤어. 아직 안 나와?”

“응. 안 나와.”

“그럼 형아가, 쉬- 해줄까?”

“내가 애야?”

부루퉁한 얼굴로 애냐고 따지는 모습은 더 귀엽다. 준영이 잠시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또 한 번 웃으면 이 자존심 센 꼬맹이는 성질을 내고 교실로 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내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형이 손잡아 줄까?”

이번엔 타박하지 않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뒤로 돌아앉아 손을 내미니 도하가 그 손을 꼭


움켜쥔다. 작은 키에 비해 손은 또 크고 손가락도 길쭉하니 예뻤다. 손을 잡고 준영이 입으로 쉬- 소리를 내자
이번엔 내가 애냐고 쏘아붙이지 않는다.

또 한 번 그러자 잠시 후 쪼르르르,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휴우, 작게 안도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돌아보면 안 돼. 쉬 다 하면 돌아봐야 해.”

“알았어, 형아 안 봐. 다른 데 보고 있어.”

돌아선 준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만연하게 번졌다.

CH 4.

“날씨 흐리네. 눈이 오려나.”

도하가 준영을 보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에 타서부터 계속 저 혼자 떠들었고 서준영은
마치 제가 없는 사람인 양 운전만 하는 중이었다. 이럴 거면 왜 타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괜히 머쓱한 마음에 아무 상관도 없는 글러브박스를 열어 살피는데 노트며 볼펜 등 잡다한 것들이 가득하다. 거길


뒤적이다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발견하고는 표정이 슬쩍 굳었다. 콘돔? 언제 사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차에
콘돔까지 챙겨 다닐 정도라니. 그걸 꺼내서 살피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준영이 슥 쳐다본다.
“집어넣어.”

“이건 언제 쓰려고 넣어둔 거예요?”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해서. 애인도 없는데 이걸 어디다 쓰나 싶어서.”

“애인 없다고 섹스도 못 하진 않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도하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고 다른 놈이랑


섹스하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 이거 남은 건 누구랑 쓸 거예요?”

“너는 아니니까 좋은 말 할 때 그냥 넣어둬. 자꾸 신경 건드리면 여기서 내리라고 할 테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넣어두죠.”

콘돔을 넣고 글러브박스 뚜껑을 닫고 나서 의자 시트에 몸을 기댔다.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렇고 황량하게 변해 버린 들판과 뭘 짓고 있는 건지 한쪽을 깎아 벌거숭이가 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왜 하필 이곳으로 왔어요? 조용해서?”

“…응.”

“하긴. 조용하긴 하네. 근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니.”

“귀신 사는 거 진짜예요?”

얼마나 진지하게 묻는지 준영은 하마터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물론 자신이 먼저 귀신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믿다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도하는 좀 더 심각한 얼굴로 어디다 부적 같은
거라도 써야 하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걸 보니 어릴 적 혼자 자기 무섭다며 저를 붙들고 늘어지던 게
생각나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

그때 준영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김민석이라고 발신자에 떠 있는 걸 확인하고 도하의 미간이 슬쩍 일그러졌다.


콘돔을 봤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 이름 석 자에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역시나 연락하고 있었구나.
결혼까지 했으면서 나쁜 놈.

“안 받아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도하가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할 말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술술 튀어나오던 말들이 하고자 마음먹는 순간부터는 왜 목구멍에서 막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이 아직도 연락하는 줄 몰랐어요.”

“가끔 해.”

“만나기도 해요?”

“…응.”

“만나서 뭐 하는데?”

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석을 만나서 딱히 하는 건 없었다. 그냥 사는 얘기 정도.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처럼 지냈다. 서로 잘 맞는 부분이 많아 가능했다. 민석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꽤 충격이었는데 아꼈던
사람인 만큼 축복해줬었다.

하지만 그는 1 년도 되지 않아, 아내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 그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방송국에서 그 일이 터지고 난 후엔 혹시 그것도 나 때문인가 자책하게 됐다. 그러면서는 민석을 만나는
것도 한동안 꺼렸었다.

“섹스?”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아니라고 안 하네? 그러고 싶어요? 그 자식은 결혼도 했다면서.”

“너 군대 갔을 때 이혼했어.”

아. 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이혼했다던 말이 사실이었군. 시발. 빌어먹을. 젠장. 개자식.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댔다. 잘살라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군대에서 기도했는데, 옘병할. 설마 다시 만나는 건가. 아니면
만날 마음이 있는 건가.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요.”

“다시 연애한다고 안 했어.”

“상관하지 말라면서요. 그게 그거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끼익. 준영이 급하게 핸들을 틀어 한쪽에 차를 세웠다. 몸이 앞으로 휘청 쏠렸다가 멈춘다.
도하가 씩씩거리며 노려보자 준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받아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오지 말걸,
후회됐다. 확 여기서 내리라고 할 수도 없고.

“조용히 가자. 응?”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요.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나 형이 여기 왜 내려왔는지 다 알아요. 애인


있는 남자 만나서 좆됐다며. 형은 모르고 만났으니 그렇다 쳐. 그런데 뭐 이번엔 한 번 갔다 온 놈을 만나?
돌았어요?”

그걸 듣는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충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가하니
잠시 머리가 아찔하고 눈앞이 휘청거렸다.

“너 뭐라고 했어?”

“내 말이 틀렸어요? 아니, 나같이 팔팔하고 잘생기고 어린놈이 좋다고 죽자 사자 매달리는데 왜 인생을 그런


놈들한테 허비해? 혹시 이상한 데서 쾌감 얻는 타입인가?”

도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데 준영은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말해보라니까.”

“넌 너무 어리고, 너무 팔팔해서 싫다. 됐냐?”

그 말에 도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와, 취향 진짜 특이하시네. 인정.”

“…내려.”
“싫어. 안 내려요. 내가 틀린 말 한 거 없잖아요.”

“더는 너랑 말다툼하기 싫으니까 내리라고.”

“안 내려.”

“끌어내린다?”

“맘대로 해라.”

“이게 진짜. 너 내 속 긁으려고 여기 왔어?”

“아뇨. 보고 싶어서요.”

“아깐 바람 쐬러 왔다며.”

“아닌 거 알면서 뭘 또 물어요. 설마 진짜 바람 쐬러 갈 데가 없어서 여길 왔겠어요?”

“하.”

“솔직히 제대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찾으러 다녔는지 알아요? 옛날에 살던 집부터 시작해서 다 뒤지고 다녔다고요.
그런 일 있었으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그랬으면….”

“그랬으면?”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처음 김민석에게 그 얘길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상대방 남자도 그


부모도 찾아가서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방송국 로비에서 쓰러졌다는 얘길 들었을 땐 정말 울고 싶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까지 왔었단다. 서준영 성격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서
며칠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은 생각을 뒤로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랬으면 혼자 아파하겐 안 두잖아.”

갑자기 가라앉은 도하의 목소리에 준영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끔 녀석은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젠 그래선 안 됐다. 더는 투정을 받아줄 나이도 아니었다.

“네가 내 곁에 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날 더 힘들게만 할 뿐이야. 지금처럼.”

“왜 힘든 줄 알아요? 스스로 마음을 인정 안 하니까. 원래 사람이 자기 부정이 심해지면 마음의 병도 생기고 막


그런 거거든요.”

“소설 쓰지 마. 넌 그냥 나한테 동생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럼 그땐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내가 뭘.”

“나 열여덟 살 때 따먹었잖아요.”

갑자기 튀어나온 과거 이야기에 준영이 기겁하고 도하를 쳐다봤다. 게다가 뭐? 따먹어?

“형이 어린 나 덮친 거 기억 안 나요?”

준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와, 진짜. 사람이 기억을 이렇게 왜곡할 수도 있는 건가. 억울한 마음에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말은 바로 하자. 술 먹고 정신없는 날, 네가 덮친 거다?”

“맞아요. 덮치긴 내가 덮쳤지. 그래도 어른이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어른이 왜 어른인데.”

“어차피 너 삽입도 안 하고 바로 쌌잖아!”

이번엔 도하가 당황한 표정을 했다. 어릴 적, 그러니까 열여덟 살에 술에 만취한 준영을 꼬드기고 달래서 첫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남들은 그때 이도하를 보고 놀 만큼 놀아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때까지 누구와 입맞춤도 제대로 한 적 없는 몸뚱이였다.

어릴 적부터 서준영이 제 마음에 꽉 들어차 있었기에 다른 사람과 뭘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날


서준영이랑 다른 진도를 뺄 것도 없이 다짜고짜 섹스부터 하게 된 것이다. 어린 마음에 철이 없었고, 너무
성급했다는 걸, 지금도 후회했다.

“그런 얘길 왜, 왜 하는데!”

“네가 먼저 꺼냈다.”

“아니 싼 건 싼 건데…. 내가 뭐 싸고 싶어서 쌌나.”

“그럼? 내가 뭐, 억지로 쥐어짰어?”

도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그치. 누가 쥐어짰나. 혼자 삽질하다 쌌지. 쪽팔림과 민망함에 옛 기억을
떠올리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괜히 창피해서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지가 야하게 생겨서 그런 걸, 나한테….”

탁, 준영이 그 소리에 벨트를 풀고 운전석 밖으로 내린다. 혹시 끌어내리려는 건가 싶어서 도하가 얼른 문을


잠그고선 안전띠를 단단히 붙들었다. 예상과 달리 준영은 코트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으로 가져가 불을 붙였다.

하아,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흰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도하를
홱 노려본다. 도하가 안전띠를 붙들고선 애잔하게 웃었다. 내리라고 하면 나 진짜 여기서 운다. 하는 표정으로.

준영은 그렇게 선 자리에서 담배 두 개를 태웠다. 괜히 속을 긁었나. 열 받게 했나 후회됐지만, 못할 말 한 것도


아니고 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운전석 문이 열리며 준영이 탄다. 도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미처 날아가지
못한 담배 향이 코끝으로 밀려온다.

“도착할 때까지 너, 한마디도 하지 마. 아니면 아무 데나 확 갖다 박아 버릴 테니까.”

도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말 가는 내내 도하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

이건이 쓰레기통을 들고 학교 뒤편 소각장 쪽으로 걸어갔다.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걸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가지고 온 쓰레기를 도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각장 앞에 송연우가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들 없이
혼자서 웬일인가 싶었다. 깡마른 손가락 사이에 흰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이건이 그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었다. 온갖 것들이 다 쏟아졌다. 퉁퉁, 통을 두어
번 쳐서 안을 깨끗하게 비우고 돌아서는데 툭, 무언가 점퍼에 와서 맞고 떨어져 나간다.

조금 전 연우가 피우고 있던 담배였다. 이건이 꽁초가 부딪쳤던 부위를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아 진짜. 하지 마라.”

“병신.”

연우의 노골적인 비난에 이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상담실 청소를 하게 된 건 얼마 전에 있었던 담배
사건 때문이었다. 학생 주임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교실을 뒤졌고, 태경의 사물함에서 담배가 나왔는데 그걸
이건에게 덮어씌운 거였다. 이건은 제 사물함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하려다 거기에 송연우가 얽혀 있다는 걸
알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학생 주임이 연우를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한 번 더 찍히면 가만 안 둔다고 저번에도
그러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병신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담배 좀 그만 피워. 그러다 일찍 죽어.”

“남이야 죽든 말든.”

“건우 형이 알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씨발.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새끼 얘긴 왜 하는데! 연우가 옆에 있던 깡통 하나를 집어 이건에게 던졌다. 퍽,


깡통이 점퍼에 맞고 그대로 옆으로 날아갔다. 이건이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맞은 자리를 털어냈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애마냥 저를 붙들고 화내고
분풀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다면 그냥 놔두고 싶었다.

쓰레기통을 챙겨 들고 그냥 가려던 이건이 멈칫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과외 얘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과외 진짜 안 할래? 되게 잘 가르쳐 주시는데. 돈도 안 내도 돼.”

“그딴 거 해서 뭐 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아니, 난 이게 좋아.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는 게.”

그러다 확 뒈져 버리면 더 좋고. 연우는 그 말을 덧붙이면서 발아래로 침을 ‘퉤!’ 뱉고 담배를 비벼 껐다.


낡은 초록색 점퍼 안쪽으로 보이는 흰색 목덜미에 퍼런 멍 자국이 이젠 노랗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연우가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사는 건 동네 사람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다.

형이 있을 땐 그래도 막아줬는데 형까지 사라지자 그 몫을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했다. 몇 번이나 제집으로


도망오라고 했지만, 오히려 매질이 시작되면 연우는 그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않았다. 정말 맞아 죽겠다는
게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담배를 꺼내 피우려고 하길래 그대로 손을 뻗어 빼앗았더니,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본다. 다른 데는


모르겠고,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는 어릴 적 그대로다. 어릴 적엔 강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살짝
다람쥐를 닮은 것도 같고. 물론 사실대로 얘기했다간 욕지거리가 날아올 테지만.

“내놔라.”

“싫다.”
연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서운 기세로 다가온다. 이건이 흠칫 놀라선 담배를 쥔 손을 위로 뻗었다. 연우가
빼앗으려 팔을 뻗었지만, 무식하게 키만 큰 강이건의 손에 제 손이 닿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모양 빠지게
폴짝폴짝 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시발. 팔을 팍, 후려쳤는데도 강이건은 골격도 얼마나 튼튼한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놔라, 시발.”

“싫다고, 아 저리 가.”

티격태격하는데 뒤쪽에서 애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연우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눈을 부라렸다. 씩씩대고
금세 욕을 퍼부을 기세였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연우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온다. 어울리는 패거리들이었는데
거기엔 박태경도 있었다.

강이건만큼이나 덩치가 큰 박태경은 항상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꽤 알아주는 유지였고,


군의원 선거에도 두 번이나 출마했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그 위세가 이 근방에선 꽤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박태경 또한 무서울 게 없었다.

“뭐야, 둘이 데이트 중이었냐?”

태경의 물음에 옆에 따라오던 아이들이 키득거리고 웃는다. 연우가 닥치라며 욕지거릴 했고, 이건은 들고 있던
담뱃갑을 구겨 버린 후 쓰레기통을 든 채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박태경이 먼저 와서는 이건의
어깨에 척 팔을 걸치고 친한 척을 해왔다.

“우리 이건이 나 때문에 청소하는구나. 미안해서 어쩌지. 선물이라도 하나 해줘야겠는데.”

이건이 제 어깨에 걸쳐진 태경의 팔을 끌어내리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대로 쓰레기통을 들고 교실 쪽으로
움직이는데 등 뒤로, 병신, 쪼다,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송연우의 따가운
시선이 거슬릴 뿐.

대체 뭐 때문에 저한테 저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분명 어릴 적만 해도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속마음도


털어놓고, 진심으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게 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점점
회한이 몰려왔다.

* * *
문제집과 참고서를 하나씩 살피던 준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도하는 오는 도중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그 후론
잠잠했다. 차에서 서점으로 올 때까지도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지금은 인문 서적코너 한쪽에 기대서서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꽤 심각한 표정으로 읽는 중이었다.

사람이 안 본 사이 변한 건지. 태어나서 이도하가 저렇게 책에 집중하는 건 여태 본적이 없는데. 도하 모친의


부탁으로 중학교, 고등학교 때 과외를 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얼마나 공부하기
싫어하는지를.

그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는 거 보면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실제로 암기력이나 이해력도 꽤 우수한 편이었다.
문제는 커가면서 머릴 쓰지 않고 주먹 쓰는 날들이 많아졌다는 거겠지만.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고 문제집을 한 권 챙겨 들었다. 진도가 끝난 이건에게 줄 것이었는데, 그렇게


두세 권 고르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도 도하는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책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옆쪽에서 책을 고르던 아가씨 둘이 도하를 흘깃하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혹시 알아봤나. 건너서 전해


듣기론 도하가 제대 후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처음엔 의외라고 생각했다.

도하는 어릴 적부터 남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건 운동선수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


때도 이미 꽤 많은 팬들이 있었는데, 그때도 팬서비스가 거지 같은 걸로 한참 입방아에 올랐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 중 하나가 도하에게 다가가더니 무어라고 말을 한다. 우려와는 달리 도하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 중 하나가 볼펜과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아무래도 사인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도하가 사인하고 나서 상냥하게 웃자, 여학생 둘도 서로 입을 가리며 웃더니 고개를 까닥하고 저쪽으로 이동했다.
가면서도 도하를 보며 한 번씩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도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녀석이 조금 전과 조금 다른 표정으로 웃더니 ‘


나가요?’ 하고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킨다. 아니라고 더 골라야 할 게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드니 군말 없이
책에 다시 집중한다.

준영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사람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안 본 사이 철이 들었는지.


어쩐지 조금 의젓해진 느낌이었다. 하긴, 스물셋이면 이제 의젓할 나이지. 그럼 서른셋은? 녀석의 나이를
떠올리니 갑자기 제 나이까지 실감이 나서 입안이 씁쓸해졌다.

도하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벌써 몇십 분째 이러고 있으니 미칠 것 같았다. 가뜩이나 책만 펴면 졸린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게르첸은 뭐고, 오가료프는 또 뭐지.

사람 이름인 것 같기도 한데…. 흘깃 눈동자만 움직여 보니 서준영이 이쪽을 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짜증을


얼른 지우고 나서 책에 열중하는 척 나름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아, 이건 진짜 연기대상감이다. 내용도 존나 재미없고 지루하고, 야한 건 한 장면도 안 나오고 시발. 그래도


아까 어떤 여자 둘이 저한테 와서 사인해달라고 하는 걸 봤으니 조금 놀랐겠지. 아, 차라리 많이 유명해진
다음에 찾아올걸. 그랬다면 서준영이 뻑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생각해 보면 서준영이 어디 그런 걸로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인가. 게다가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연예인이야


숱하게 봤을 텐데. 그래서 이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조금 서글퍼졌다.

그때, 계산대 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준영이 책을 다 골랐는지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저것 봐 저거. 가잔 소리도 안 하네. 들고 있던 책을 꽂아 넣고 다른 책 한 권을 골라 그쪽으로 갔다. 준영이
고른 건 죄다 참고서와 문제집뿐이다. 그 고삐리 거군.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해서 저도 모르게 이를 끄득 갈았다.
그 위에 보란 듯 제 책을 올려놓으니 준영이 쳐다본다.

“하나 사줘요. 지갑을 안 가져왔어.”

“읽을 거야?”

“그럼 먹을까?”

“…같이 계산해주세요.”

삑 소리와 함께 준영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직원이 책을 봉투에 담아 건네줬다. 준영이


그것 중 도하의 책을 꺼내 내민다. 자. 도하가 그 책을 받는 대신 준영이 들고 있는 봉투를 빼앗다시피 챙겨
들었다. 그러고 나서 제가 고른 책도 거기에 넣었다.

점원에서 인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키 줘요. 차에 책 가져다 놓고 올게요.”

태연하게 손을 내밀고 서자 준영이 손바닥을 빤히 쳐다본다. 어릴 적엔 제 손바닥 안에 올려두면 반도 안 차던


손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됐어. 이리 내. 내가 들면 돼.”

“들고 다니면 무겁잖아요.”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마트 가서 장도 대충 봐야 하는데, 책까지 가져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키를 건넸더니


얼른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추우니 먼저 마트에 들어가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어지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하가 카트에 담기는 물건들을 눈으로 훑었다. 맥주가 열두 캔, 즉석조리 식품과 라면이 대부분이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대형마트는 어지간한 건 다 팔았다. 진열대에도 저렇게 싱싱한 채소와 고기들이 있는데
어째서 죄다 즉석요린지 모르겠다.

하긴, 원래부터 음식을 못했는데 이젠 혼자 지내니 오죽할까. 어릴 때 준영이 제게 한 번씩 해주던 음식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구나, 깨닫게 된 게 그때였으니까. 어린 나이에도 그걸 참고 웃으면서
먹은 거 보면 서준영에 대한 자신의 애정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던 거다.
“왜 살이 빠졌나 했더니, 이런 걸 먹으니 살이 빠지죠.”

옆에서 투덜거렸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과일 판매대로 간다. 웬일인가 싶어 보는데 딸기가 있는 곳에 가더니 두


팩을 집어 든다.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준영이 과일을 먹긴 해도 딸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복숭아나 포도면
또 모를까. 그새 식성이 변한 걸까 생각했는데 그걸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카트에 집어넣었다.

“딸기 안 먹잖아요?”

“먹어.”

“언제부터?”

“오늘부터.”

곰곰이 생각하던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생겨났다. 서준영은 딸기를 싫어할지 몰라도 저는 아니다. 그럼 혹시
저를 위해 산 걸까. 이럴 거면서 괜히 틱틱거리고 말이야.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데
준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마트 안에 있는 작은 빵 가게 앞이었다.

“빵 사게요?”

바로 옆으로 가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바람도 불어가며. 그러자 인상을 구기더니 검지로 이마를 떼민다.
떨어져. 왜 이렇게 붙는 건데.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옆으로 붙으려고 하자 준영이 식빵 쪽으로 움직이며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식빵을 담고 이번엔 냉장 식품코너로 갔다. 도하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말을 붙였지만, 준영은, 응,


아니. 단답형의 대답만 할 뿐이었다. 우유를 고르는 준영의 등 뒤로 바싹 붙어 선 도하가 이번엔 목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골라요?”

준영이 인상을 쓰며 몸을 홱 돌렸다. 아까부터 슬쩍슬쩍 몸을 밀착하고 그냥 말해도 다 들리는데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바람을 불고 하는 꼴이 아무래도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모를 만큼 준영이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자기 입으로 바람 쐬러 왔다고 몇 시간 전에 떠들지 않았던가. 슬며시 인상을 쓰며 뒤로 한 발
물러서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마.”

“뭘요?”

“뒤로 떨어져서 얘기해. 다 들려.”

그러죠, 뭐. 도하가 한 발 뒤로 가더니 입을 벙긋거린다. 준영이 이번엔 더 심각하게 미간을 구겼다.

“뭐 하는 거야.”

“거봐요. 안 들리죠?”

“이게, 진짜.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안 들리는 거잖아.”

“했어요. 너무 멀어서 못 들은 거지.”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어. 서점에서 얌전히 책을
읽길래 웬일인가 싶어 끌고 온 건데. 얼른 장이나 보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생선판매대가 보인다. 거기에 오늘 들어왔는지 빛깔 좋은 고등어가 줄지어 진열돼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도하가 물었다.

“왜요? 고등어도 사게요?”

“이도하.”

“네?”

“넌 저 고등어 중에 어떤 고등어가 제일 마음에 들어?”

그 말에 도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뜬금없이 어떤 고등어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고등어가 마음에 들고 말고가 어딨어요. 다 똑같지.”

“나한텐 네가 그래.”

무슨 소리인지 몰라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저녁 반찬으로 고등어 먹잔 뜻은 아닌 줄


알겠다. 표정이 딱 그랬으니까.
“무슨 소리예요?”

준영이 다시 고등어를 봤다. 그리고 도하를 본다.

“널 보는 내 심정이 지금 네가 고등어를 보는 심정과 같아. 아무 느낌 없어. 그러니까 그만 수작 부리고 떨어져.


붙지 마. 알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트를 끌고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그걸 보는 도하가 하,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줄 알았어. 갑자기 고등어 얘기를 묻길래 혹시라도 오늘 저녁으로 구워 먹자는 줄 알았더니.
괜히 죄 없는 고등어를 노려봤다가, 앞서가는 서준영의 뒤통수를 노려봤다가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그래도 맛은 내가 제일 좋을걸!”

준영은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모퉁이를 돌아 눈앞에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 * *

준영이 트렁크를 열어 마트에서 장본 물건들을 꺼내는 사이 도하가 그 옆으로 가서 박스를 들어 주려고 했다.

“됐어. 올라가.”

달라니까요. 도하가 빼앗듯 그것을 챙겨 들고 나서 비닐 봉투까지 챙겨 빌라 쪽으로 향했다. 개집에 웅크리고


있던 흰색 개가 도하를 눈으로만 주시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쟤는 누굴 봐도 짓질 않네. 대체 왜
저기 있는 건지 의문이 드는 찰나 빌라 입구로 이건이 나오다가 도하를 발견하고는 멈칫한다.

슬금슬금 뒷걸음치는데 뒤쪽에 있던 준영이 그런 이건을 불렀다.

“강이건. 어디 가?”

“아뇨. 공부하다가 너무 졸려서 나왔는데….”


말끝을 흐리더니 도하를 피해 얼른 준영 쪽으로 도망간다. 도하가 이를 까득 갈았다. 저 자식이. 그때 준영이
잘됐다며 도하에게로 다가가 상자를 뒤적였다. 뭘 하나 지켜봤더니 거기에서 딸기 두 팩을 그대로 꺼내서
이건에게 건네준다.

“자. 딸기.”

와, 딸기다! 그걸 보는 이건의 입술이 활짝 올라갔다. 덩달아 도하의 눈초리도 함께.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딸기 진짜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싱글벙글 웃던 이건은 저를 죽을 듯 노려보는 도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준영의 옆으로 얼른 붙어 섰다. 그런


이건을 보며 도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므앗있게 먹어라. 너 즐려고 슨 그니까.”

너 주려고 산 거라고 할 때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건이 감사하다고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나서 집 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도하가 준영을 얄밉게 째려봤다.

“나 먹으라고 산 거 아니었어요?”

“널 왜 줘.”

“나도 딸기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랬어?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하나 정돈 사줄 수 있었는데.”

세상에. 강이건은 말 안 해도 사주면서 나는 콕 찍어 말해야 사준단 말인가. 이젠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되는


저런 핏덩이한테도 밀려나는 건가.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도하가 무슨 생각인지 표정을 고치고는 피식 웃었다. 그
시선은 이미 딸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닿아있었다. 딸기보다 더 맛있어 보이고, 달짝지근할 것 같은 서준영
입술에.

“됐어요. 난 다른 거 먹을 거야. 딸기보다 더 맛있고, 탐스러운 거. 살살 빨아먹어야지.”


그러더니 제 아랫입술을 한 번 진득하니 슥 핥는다.

“뭐 해, 지금?”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내가 뭘 했다고 느꼈다면 그건 서준영 씨 마음속에서 음란함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올라갈 거 아니면 장 본 거 줘.”

“올라갑니다, 올라가요.”

도하가 웃으며 상자를 들고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2 층까지 짐을 들고 올라와 문 앞에 섰는데 뒤따라온 준영이
카드 키를 입구에 가져다 댄다. 띠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준영이 현관문을 활짝 연 상태에서 도하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안에 가져다줄게요.”

“됐어. 주고 올라가.”

하. 도하가 기막힌 듯 웃었다. 책도 같이 사고, 장도 같이 보고 했으니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올 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선뜻 짐을 내주지 않자 준영이
이번엔 빼앗듯 가져간다. 도하가 버티려고 했으나 그랬다간 또 미운털만 박힐 것 같아 순순히 내주었다.

“고생했어. 잘 가.”

닫히는 문 사이로 발을 밀어 넣자 준영이 흠칫해서 쳐다본다. 도하가 최대한 애잔하고 비굴한 얼굴로 준영에게
물었다.

“배고픈데 밥만 얻어먹고 올라가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아깐 즉석식품 싫다며.”


“누가 싫다고 했어요. 몸에 좋지 않다는 거지. 그리고 집에 쌀도 없단 말이에요.”

준영이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상자에서 즉석밥 하나와 찌개를 꺼내 도하에게 안겨줬다. 얼결에 건네받은 도하가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됐지. 가서 먹어. 들어간다.”

“아니, 진짜 너무하잖.”

쾅. 닫힌 문 앞에서 양손에 즉석밥과 찌개를 든 채로 도하가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나서 현관문을 발로 툭 한 번 찼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따지면서.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찰나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두어 계단 올라가던 도하의 얼굴이 그
소리에 맞춰 활착 꽃폈다. 그럼 그렇지. 서준영이 나한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서준영은 서준영이지.

“이도하.”

밥 먹고 가라면 못 이기는 척 먹어줘야지. 집에 가서 와인 하나 가져올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케이크라도


하나 사는 건데.

“왜요?”

최대한 예쁘게 웃으면서 몸을 돌리는데 그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뭔가 싶어서 보니 아까 자신이 고른


책이다.

“이거 가져가.”

“…….”

“얼른, 받아. 나 팔 아파.”

도하가 계단을 다시 내려와서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쳐다봤지만,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아. 인류의 재앙이라고 적힌 그 책을 보며 도하가 이를 앙다물었다. 이건
인류의 재앙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재앙이었다.
* * *

“딸기가 달다.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했어?”

포크로 딸기 하나를 찍어 입에 넣던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러면서 눈은 TV 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한 주간의 연예소식을 정리해 방송하는 프로였는데,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너 숙제 다 했어?”

“이것만 보고 들어갈게요.”

“참, 내일 엄마가 반찬 만들어줄 테니까 연우네 좀 가져다주고 와.”

그 말에 이건이 포크를 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에도 반찬 만들어 줬는데 그 앞에서 송연우가 안 받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봉투가 찢어져 바닥에 다 쏟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어쩐지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연우 아버진 아직도 술 많이 드신다니?”

이번엔 대답하지 못했다. 연우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말만 걸면 병신이라고
욕을 해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옆에서 잠자코 TV 를 보고 있던 아빠가 끼어들었다.

“말해 뭐해. 준식이가 그러는데 며칠 전에도 연우 두들겨 패는 거 자기가 가서 말렸다던데. 하여튼 남의 새끼도
아니고 자기 새낀데 왜 그렇게 못살게 구나 몰라. 어휴.”

아빠의 푸념에 이건이 들고 있던 포크 끝을 꾹 깨물었다. 송연우의 멍 자국은 목에만 난 게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 성한 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체육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친구들 사이에선 말이
무성했다. 싸움질하다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버지한테 맞아서 그렇다고 하면 너무 참혹하지 않은가.

“지 엄마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쯧쯧.”


안타까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이건이 다시 딸기를 쿡. 찍었다. 연우도 딸기 좋아하는데. 남은 한 팩은 가져다줄까.
잠시 생각하는데 방송에서 연말을 맞아 내년에 기대되는 유망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보던 이건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네, 다음 소개할 사람은 얼마 전 개봉했던 ‘별 헤는 밤’에서 여주인공 민혜의 첫사랑으로 나왔던 배우죠.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등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여심을 사로잡는 완벽한 몸매까지. 몇몇 여배우들이 이상형으로 꼽으며 더 화제가 됐는데요, 배우 이도하
씨입니다.]

툭, 입에 물고 있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TV 화면에 집중했다. 혹시


동명이인인가. 하기엔 얼굴뿐 아니라 이름마저 똑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너 이 시간에 어디 가?”

“선생님 댁에 다녀올게요!”

신발을 신고 후다닥 현관을 나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띵동, 인터폰을 누르니 잠시 후 안에서 준영이 나온다.
씻었는지 수건이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건이 입을 벙긋댔다.

“천천히 말해. 괜찮아.”

“선생님 TV 요!”

“TV?”

“거기에 지금 301 호 형 나와요.”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면서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믿기지 않는 건 준영의 태도였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그래?’ 하고 묻더니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 반응에 이건이 입을 벌렸다.

“알고 계셨어요?”

“뭐가.”

“그 형 배우인 거!”

“응.”
“와, 선생님도 알고 계셨구나! 그럼 진짜 연예인 맞구나!”

“신기해?”

“저 연예인 처음 봐요! 완전 신기해요! 게다가 저 형은….”

이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준영이 ‘저 형은 뭐?’ 하고 물었지만 더는 얘기할 수 없었다. 솔직히 여기에


왔을 때만 해도 무슨 죄짓고 쫓기는 거 아닐까 그런 상상도 했었다. 하는 행동과 말투가 딱 날라리 같은 그런
사람이라.

그 말은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렀다. 그래도 마트까지 같이 다니는 거 보면 준영과 아예 사이가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굳이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신기했어요. 혹시 모르고 계셨을까 봐 알려드리려고 온 거예요.”

이건을 보며 준영이 피식 웃었다. 몸만 어른스럽지 애는 애인가 보다. TV 에 나오는 사람을 직접 봐서 신기해하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만 떠들고 얼른 올라가라고 퉁을 놨더니 그제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죄송해요. 너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뛰어 내려왔어요….”

“알았으니 얼른 가서 숙제해.”

“네, 그럴게요.”

이건을 올려 보낸 준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TV 도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이 봤다는 걸 확인할 길은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거기에 이도하 이름 세 글자를 쓰니 프로필 사진과 함께 필모그래피가 나온다.

그리고 밑에 관련 기사들. 하나같이 기대되는 유망주라 평가했다. 도하가 연기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영화를
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일부러 찾아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도하는 제가 알던 도하가 아닌 거 같았다.
낯설었고, 신기했다.

“…다른 사람 같네.”

기특한 마음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들어 인터넷에 뜬 기사들은 읽지 않고 그대로 창을 닫아


버렸다. 소파로 가서 앉아 낮에 샀던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책에 집중하려는데 구르르르, 또다시 천장에서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 기특하단 마음을 아주 잿가루로 만드는구나. 인상을 쓰며 위층을 올려다봤는데 기다렸다는 듯 거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구르르르 소리가 들려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고 낮에 사둔 귀마개를 귀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소리가 미약하게 들리긴 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공사현장도 아니고 집에서 이걸 끼고 있어야 한다니.
기막힌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사이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 *

이상하다. 왜 안 올라오지. 벌써 1 시간째 공을 굴렸지만 어쩐 일인지 준영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낮에 준영이 마트를 나와 문구점에 잠깐 들렀던 게 생각났다. 노트 두세 권과 함께 뭘 사길래 뭔가 했는데… 혹시
…?

“젠장, 글렀네.”

볼링공을 한쪽에 밀어 넣고 나서 식탁에 앉았다. 집 안을 둘러봤다. 이사 온 새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다. 이삿짐은 반도 가져오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운동기구라고 챙겨온 건 러닝머신이 전부였다.

운동이나 하다 잘까, 하고 일어서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혹시 아래층 준영인가. 생각하다 연락처도 안


가르쳐준 걸 깨닫고는 실망이 역력한 기색으로 휴대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인 선태였다.

“형, 나야.”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대답 대신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미안한 마음도 있어 잘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이번엔


한숨 소리가 더 짙어진다.

[덕분에 아주 자알 지내고 있어. 대표님한테 옴팡 깨져가면서.]

“미안해요. 올라가면 내가 다 보상해줄게.”

[보상 같은 소리 하네. 오긴 하는 거냐?]

“가야지.”

[언제 올 건데.]

“일이 끝나면?”
무슨 일이냐고, 대체 이 중요한 시점에 거긴 왜 간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던 와중에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주변을 둘러봤다. 흐흐흐흐, 흐흐흐흑, 누군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였다. 슬며시 인상을 구기고
방 안을 둘러보다 위층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위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듣고 있는 거야?]

선태의 물음에 도하가, 어, 하고 대답했다.

[그럼 말일에 올라오는 걸로 알고 있으마.]

그 말에 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무슨 소리야?

[거봐! 안 듣고 딴짓했지?]

“아냐, 잠깐 전화기를 놓쳤어.”

하아. 건너편에서 크게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선태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조금 전 했던 얘길 또박또박 다시


설명했다.

[연말에 시상식이 있는데 네가 남우 조연상 후보로 올라갔으니까, 일단 그날은 서울에 와야 한다고 알겠어?]

“…무슨 후보?”

[남, 우, 조, 연, 상!]

“나를? 왜?”

[그러게 말이다. 너 같은 놈을, 왜.]

자포자기한 선태의 목소리에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라도 서준영이랑 잘되면 여기에 눌러살 생각이었고,
그럼 연기고 뭐고 다 관둘 건데.

“다른 사람 주라고 해. 난 안 받아.”

[후보야, 인마. 아직 준 게 아니라.]


“하여튼. 아님 후보에서 빼라고 하든가. 거부한다고 해. 딴 애 주라고.”

[이 미친 자식이 진짜!]

“하여튼 난 분명히 말했다. 끊어, 형. 지금 귀신 나타났어. 무섭단 말이야.”

뭐? 선태가 더 물을 것도 없이 도하가 전화를 끊었다. 흐느낌은 이제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로 바뀌어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진짜 무섭게. 휴대전화를 들고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씻으려고 하니 다시 우는 소리가 들린다.

괜히 등골이 오싹해져 주방까지 불을 켰다. 위에서 들리는 거 같긴 한데.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이번엔 큰누나다. 으으.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잔몹을 처리하고
나니 보스가 나타났다.

후우, 심호흡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의 만류로 여태 잠잠했던 거 같은데 지금 전화한 거 보니 참을 만큼


참았다가 터진 모양이었다.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버럭 고함부터 들린다.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었는데도 얼마나
목청이 큰지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제정신이냐, 대체 왜 그 모양이냐 야단을 치는 와중에 욕실 등이 깜박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


전구에 불이 반짝하고 들어왔다. 이미 누나의 고함은 안 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준영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오디오에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사를 하며 제일 먼저


없앤 건 TV 였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이나 배우들을 볼 때마다 괴로운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시간이 흘러 조금 무뎌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치익, 캔 하나를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데 기다렸다는 듯 인터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현관으로 가 밖을 내다보니 도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왜 또. 선뜻 문을 열지 않자 이번엔
똑똑, 두드린다. 서준영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하는 수없이 손잡이를 돌려 현관을 열었다.

그는 아까 외출하고 온 복장 그대로였는데, 어쩐 일인지 꽤 곤란한 얼굴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화장실 좀 쓰면 안 돼요?”

“뭐.”

“씻으려고 하는데 욕실 문이 잠겼어요. 이사하면서 새 걸로 바꾼 건데 뭐가 안에서 고장이 났는지 열리질 않아요.


별짓을 다 했는데도 그래요.”

“가서 천천히 다시 해봐.”


그 말을 하며 문을 닫으려는데 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막는다. 준영이 미간을 구기며 쳐다보자 도하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했다. 아, 또. 슬쩍 외면하니 이번엔 끙끙, 소리까지
낸다.

“나 쉬도 급한데.”

“…….”

“설마 이 추운데 밖에 나가서 싸라고 할 건 아니죠?”

“…….”

“고추 얼어 터지면 형 탓이에요.”

그랬는데도 준영이 문을 잡고 버티자 이번엔 제발 한 번만 쓰게 해달라고 사정을 한다. 아, 젠장.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줬다.

“들어와서 얼른 사용하고 올라가.”

“알겠어요.”

도하가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눈으로 안을 한번 둘러봤다. 제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림이 단출했다. 거실엔 2 인용 소파와 책상, 책장이 전부였다. 식탁도 2 인용이었고 냉장고도 작았다.
진짜 혼자 사는구나.

슬쩍 안방을 들여다보려 하는데 준영이 방문을 먼저 닫아 버린다. 이야, 철벽 수비. 도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치사해라. 안 본다, 안 봐. 그러던 중에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가 들어왔다.

“술 먹고 있었어요?”

“그만 살펴보고 얼른 나가.”

“알았어요.”

대답과 함께 욕실 앞에서 옷을 벗길래 준영이 놀라 뭐 하느냐고 물었다.

“보면 몰라요? 씻으려면 벗어야죠.”


“여기서 벗게?”

“옷 입고 씻을 순 없잖아요.”

“들어가서 벗어.”

“나 참.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는 안중에도 없다면서요. 고등어라면서.”

“말 안 들을 거면 나가든가.”

“…들어가서 벗을게요.”

고등어라면서 벗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야. 투덜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가 보니 준영이 방금 씻고 나온 건지 바디


샴푸 냄새가 그득했다. 아, 달콤한 향. 그의 성격답게 깔끔한 욕실, 그리고 세면대에 놓여 있는 칫솔 하나. 그
칫솔을 가만히 쳐다보니 옛 생각이 났다.

예전 준영의 오피스텔에 연락도 없이 놀러 갔는데 준영 대신 다른 사람이 나온 걸 보고 충격받았던 날. 그의 집에


슬리퍼가 왜 두 개인지 욕실에 칫솔은 왜 두 개인지 애써 부정하던 것들이 그날 현실로 다가왔고 충격에 한참
힘들어했었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씁쓸하게 웃다가 걸치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 한쪽에 걸어뒀다.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고서는 온몸을 적셨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적시니 나른함이 몰려왔다. 이대로 씻고 여기서 잤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헛된 바람이었다.

행복한 상상을 멈추고 물을 잠근 후 한쪽에 걸어둔 샤워 타월을 꺼내 거품을 내고 몸에 문질렀다. 조금 전


서준영이 몸에 대고 문질렀을 걸 생각하니 단전 아래로 열기가 피어오른다.

거기다 조금 전 보았던 서준영의 얼굴을 떠올리니 자극은 두 배가 됐다. 서준영을 욕실 벽에 세워두고 엉덩이를
벌린 채 박는 상상을 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욕실 벽을 짚은 채로 거품 묻은 손으로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질렀다. 찌걱찌걱, 자극적인 소리에 입에선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씨… 발.”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성기와 손이 마찰하며 점점 음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젠 손이 아닌


허리를 움직였다. 상상 속의 서준영은 입을 벌린 채 저를 돌아보며 더 해달라고 애원하는 중이었다.

“윽… 서준영….”

픽, 흰색 정액이 벽에 튀었다. 양이 제법 많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으로 벽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흘러내리는 정액을 반대편 손으로 문질렀다. 마치 그게 서준영 몸이라도 되는 양. 그가 머무는 공간에
이렇게라도 제 흔적을 남겨 놓고 싶었다.
* * *

냉장고에서 두 번째 맥주를 꺼내던 준영이 멈칫했다. 주방 옆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 대신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맥주를 집어 든 채로 거실 쪽으로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좀 더
뚜렷하게 들려온다.

씨발, 어쩌고 하는 소리와 함께 헉헉대는 소리가. 준영이 미간을 확 구기고 욕실을 노려봤다. 저 새끼 설마….
지금 내 욕실에서 자위하는 거야? 당장 달려가 문을 열고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냐고 야단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손에 쥔 맥주캔을 꽉 움켜쥐고는 거실로 걸어갔다. 잠시 꺼뒀던 음악을 다시 틀고 나서 치익, 맥주 캔을 따서


마시는데 얼마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도하가 작은 수건으로 허리만 감싼 채
머리를 털고 나오는 중이었다.

“왜 그러고 나와. 옷은.”

“걸어뒀는데 떨어져서 다 젖었어요. 형 옷 좀 줘요.”

아. 진짜.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도하가 입을 만한 걸 찾으려 했다. 옷 핑계로 또 내려올 거 같아 없어도
버려도 될 만한 옷을 주려고 찾는데 등 뒤가 서늘하다. 구부렸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몸을 돌리니 언제 왔는지
도하가 제 뒤에 수건 한 장 걸치고는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팬티도 줘요.”

“야. 그냥 바지만 입어. 팬티는 무슨 팬티야.”

“바지에 불알 쓸리면 얼마나 따가운지 알아요?”

“…….”

준영이 이를 꾹 물고서 아래 서랍을 열어 도하에게 맞을 만한 추리닝 한 벌과 함께 작은 상자에 든 새 팬티를


건넸다. 그걸 받아 든 도하가 팬티를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입던 거 없어요?”

“멀쩡하게 새 거 있는데 왜 입던 걸 찾아. 왜? 욕실도 모자라 이젠 팬티에다 대고 딸딸이 치게?”


도하가 어, 하고 아주 잠깐 당황하는 표정을 하더니 생긋 웃는다. 것도 괜찮은데?

“다 들었구나?”

여기 방음 되게 안 되는구나. 난 참느라고 참으면서 한 건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꼴을 보니 아예 들으라고


거기서 그 짓을 했구나 싶어 기가 막혔다. 준영은 옷이나 입으라고 하고 그대로 안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도하가 옷은 입지도 않고 준영의 안방을 둘러봤다. 혼자 쓰는 게 분명한 싱글침대와 옷장,
작은 책상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위엔 준영이 어릴 적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다 입었으면 나오라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아직 입고 있어요.”

새 팬티를 꺼내 입고 바지와 티도 입고 나서 보니 책상 위에 막 세탁한 듯한 빨래가 개어져 있는 게 보였다. 맨


위에 검은색 팬티는 아마도 준영이 입던 것일지 모른다. 슬쩍 문 쪽을 한 번 쳐다봤다가 그걸 잽싸게 집어 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소파에 앉아 있던 준영이 이쪽을 돌아봤다.

“다 입었으면 가. 현관 앞에 네 옷 챙겨놨으니까 가져가. 그리고 그 옷은 어차피 안 입는 거니 갖든지 버리든지


하고.”

“고마워요. 이제 갈게요.”

현관 쪽으로 가는 도하의 뒷모습을 준영이 가만히 쳐다봤다. 제 옷을 입어서 그런지 팔도 다리도 살짝 짧은


느낌이었다. 안 가고 또 떼쓰고 수작 부리면 이걸 어찌 쫓아 올려 보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너무도 순순히
가겠다고 하니 저로선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서 돌아보길래 얼른 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아련하게
쳐다본다.

“준영이 형.”

종일 서준영 씨라고 부르더니 왜 갑자기 형이 됐는지 모르겠다.


“…왜.”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아요.”

“…….”

“잘 자요.”

대답도 하기 전 씩 웃더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준영이 맥주 캔을 손에 든 채로 문이 닫힌 다음에도 한참을


그곳을 바라봤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고 나니 집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마시려던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고, 이도하가 오고


며칠이 지났는데 팍삭 늙어 버린 기분이라고, 차라리 부동산에 집을 내놔 볼까 그런 생각까지 하는 찰나,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자식이 순순히 갈 녀석이 아닌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니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가족사진 옆에 무언가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종이로 된 게임 카드였다.

손으로 직접 그린 엉성한 그림 카드는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캐릭터였다. 카드를 뒤집자 반듯하게
쓴 손글씨가 나타났다.

[이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용기가 100 배 올라갑니다.]

준영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도하가 어릴 적 좋아하던 캐릭터였다. 잃어버렸다고 준영을
붙들고 엉엉 울길래 엉성한 그림 솜씨로 만들어 줬던 카드였다. 본래는 캐릭터 능력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제대로 아는 게 없어 대충 아무 말이나 적은 거였다.

그랬는데 그 밑에 자신이 적은 것이 아닌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도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심란한 얼굴로 보다가 그만 카드를 뒤집어 놓았다.

CH 5.

아침 일찍 일어난 도하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허공으로 양팔을 쭉 벌렸다. 옆을 보니 기다란 베개에 어제 준영에게
빌려 입은 옷이 입혀져 있었다. 누워 그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형, 잘 잤어요?
서준영이 쓰는 바디 샴푸를 썼더니 온몸에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베개를 껴안고 뒹굴뒹굴 구르다가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곱게 접혀 있는 준영의 팬티를 집어 펼쳐 들었다. 그것을 뺨에 문지르고 나서 옷을 입혀둔 베개
위에 같이 올려뒀다.

그러고 나서 욕실로 가 양치와 세수를 했다. 대충 밥을 먹고 나가서 뛸 생각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러닝머신을


하긴 했지만, 공원에서 조깅하던 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단백질 셰이크와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어 먹은 후 운동복 위에 얇은 점퍼를 하나 걸쳐 입었다.

헤드셋을 목에 걸고 운동화를 챙겨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 서준영네 현관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가. 아쉬운 마음에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게 보였다.

흐읍, 숨을 최대한 들이켜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일깨운다. 더불어 소똥 냄새도 함께. 며칠
맡았더니 이젠 익숙해져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허공에 뿌연 숨을 토해내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팔다리도 풀어주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가볍게 뛸 준비를 하는데, 저만치 앞에 누군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저처럼 운동을 하러 나온 건지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혹시나 준영인가 싶어 봤지만, 그보단 더 컸다.
이 빌라에 저만큼 큰놈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입가에 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아아.”

그 소리에 흠칫 이건이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보지 않고 조금 더 빨리 걷는다. 도하가 기막힌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야. 강이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부르자 이번엔 갑자기 막 달리기 시작한다.

“어쭈. 저 자식이.”

도하도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큰길 쪽으로 뛰어가던 이건이 갑자기 논두렁으로 방향을 틀더니 미친 듯이
질주했다. 저번에 차 태워준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도망간 것도 그렇고, 딸기 주면서 눈에 레이저가 나오게
노려보던 것도 그렇고, 이 상황에서 둘이 마주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 뒤를 흘깃 돌아보니 도하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얼굴로 웃으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으아악, 이건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도망쳤다. 그래도 내가 중학교 때까지 육상을 했던 사람인데 아무렴 저
형보다 못 달릴까, 생각하는 순간 목에 팔이 턱 걸리며 몸이 뒤로 확 당겨졌다.

억 비명을 지르는데 도하가 목에 팔을 두르고 나서 저를 질질 끌고 가려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고,


겨우 벗어나 보니 이번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다. 이건이 침을 꼴깍 삼키고 뒷걸음질 쳤다.

“또 튀면 저기 논바닥에 메다꽂아 버린다?”


“왜, 왜 그러세요, 저한테….”

“몰라서 물어? 좋아서 그러지.”

좋아서 그런다면서 왜 그렇게 무섭게 웃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너무 뛰었더니 심장이 벌렁벌렁 터질 것 같았다.
일단 호흡을 가다듬는데 도하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우리 이건이 왜 형만 보면 도망쳐? 응? 내가 잡아먹을까 봐 그래?”

“아뇨. 그게 아니라… 운동하는데 갑자기 쫓아오셔서… 놀래서….”

“보통 쫓아온다고 도망가진 않지. 그것도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사촌끼리. 안 그래?”

이건이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준영과 마트에서 장까지 보는 걸 보면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음을 좀 가다듬고 있는데 다가오던 도하가 방향을 틀더니 잠깐 대화 좀
하자면서 앞서 걷는다.

어쩔까 고민하던 이건이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무섭던 것도 잠시 엊그제 TV 에서 봤던 남자가 제 옆에 있는


게 신기했다. TV 속 인터뷰 화면에선 정말 사람 좋게 웃고 있었는데, 정말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인상이 달라 보였다. 이런 성격인 줄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자신이 이제 막 잘 나가기 시작하는 신인 배우의 비밀을 알아 버린 것 같아 좀 흥분되는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엄청 유명해지는 거 아냐. 사인이라도 받아둘까. TV 에서 봤다고 말하면 싫어하려나.
부담스러워하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도하가 걸음을 멈춰 섰다.

“야.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너 돈 안 필요하냐?”

뜬금없는 돈 얘기에 이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돈이라니.

“무슨 돈이요?”

“알바 안 할래? 존나 꿀알반데.”

“알바요?”
“별거 없어. 너 과외 하러 밤에 가잖아. 그때 내가 가서 문 두드리면 얼른 뛰쳐나와서 네가 현관문 열어주면
돼.”

“네?”

“어렵지 않지?”

“선생님한테 묻지도 않고요?”

“당연하지. 물으면 열어주지 말라고 할 텐데.”

이건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럼 열어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으니 도하가 이건의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두른다. 보통 친구들은 저보다 작아서 여태
이랬던 사람은 박태경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공손하고 정중하게 너한테 부탁하잖아. 응?”

“…일단 선생님이 허락하셔야… 제집도 아니고….”

“너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그냥 문 한번 열어주면 되는 걸 가지고.”

“융통성이랑 상관없는 거… 아닐까요? 돈 받고 그렇게 선생님께 피해드리는 건 도덕성의 문제라고 생각….”

“…….”

“…해요…. 죄송해요.”

이건이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마주 선 도하가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얼마나 저를 노려보는지
이글이글 불꽃이 나오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걱정했는데 어쩐지 생각보다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앞서 걷던 도하가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섰다. 500 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올려다보던 도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무 존나 무식하게 크네. 우리 이건이처럼.”

이건이 흠칫하고선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그의 시선을 따라 덩달아 나무를 올려다봤다. 어릴 땐 나무가 정말


산처럼 커 보였는데, 이제 제가 컸기 때문인지 그때만큼 거대해 보이진 않았다. 나무 밑으론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도 있었다.

“이건 동네 수호목이에요. 500 년도 더 넘었대요.”

“이렇게 오래된 걸 왜 놔둬. 베어 버리지.”

그 말에 이건이 화들짝 놀랐다. 마을 어른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이 나무가 동네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데, 베어 버리라니.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고. 이 나무가 잡신도 막아주고 소원도 들어준다고 했다. 자기가
저번에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이 나무에 소원을 빌었더니 찾아줬다면서.

그 말에 도하가 대놓고 비웃었다.

“이게 무슨 크리스마스트리야?”

“형은 안 믿으시겠지만, 다 그렇게 믿으니까 동네서 나무에 대해 함부로 말하시면 안 돼요. 어른들 알면 큰일
나요.”

“21 세기에 나무에 소원을 빌다니. 어메이징하네, 진짜.”

도하가 코웃음을 치며 나무를 지나치는데 돌탑 위에 있던 돌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도하의 발 앞으로 데구르르


굴러온다. 도하가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 나무를 봤다. 주워들고 나서 홱 하고 나무쪽으로 집어 던졌다.

“내 소원도 좀 들어줘요, 나무 씨?”

오늘은 서준영이랑 밥 좀 먹게 해달라고. 응?

스스로 생각해도 웃겨서 피식 웃고 가는데 이건이 그런 도하의 뒤를 따라갔다. 아까 따라올 땐 잡히면 죽일 거


같았는데 가는 내내 도하는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식구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소소한 것들을 물었다.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도하가 너만 알고 있으라는 식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야, 너 근데 우리 빌라에 귀신같은 거 나온다는 얘기 못 들었어?”

그 말에 이건이 화들짝 놀랐다. 저번부터 5 층 할아버지가 귀신 얘기를 하던데, 이 형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뭘 봤나 싶어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도하가 찜찜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그럼 그 울음소린 뭐야.”

그걸 보는 이건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혹시 여자 울음소리 들으셨어요?”

“너도 들었냐? 막 웃다가 울다가 미친년처럼.”

“그거 위층 아줌마예요. 약간 조울증이 있으셔서….”

“…아.”

“한참 안 그러시더니 요즘 또 그러세요. 몇 번 그러시면 잠잠해지시고요….”

“난 또… 귀신인 줄 알고 존나 쫄았네.”

그 얘길 들은 이건이 슬며시 웃었다. 세상 무서울 거 없이 차갑게 생겨서는 귀신을 무서워한다니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스스럼없이 무서웠다고 표현하는 게 신기했다. 보통 센척하느라 속으로만 생각하던데.
물론, 자신도 그렇고.

“형은 무서운 거 싫어하세요?”

“어. 존나 싫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귀신이랑 쥐야.”

그 말을 듣자마자 이건이 놀란 표정으로 정말이냐고 물었다. 실은 저도 귀신과 쥐를 무서워했다. 학교에 쥐가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거의 울 것처럼 도망치는 바람에 한동안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게 여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저도요, 저도 귀신이랑 쥐 진짜 싫어해요.”

“여어, 우린 진짜 닮은 게 많구나.”

이건이 괜히 들떠서는 그러게요, 형은 무서움 안 탈 거 같은데 의외라고 하자, 도하가 슬그머니 다가와 이건의
어깨에 다시 팔을 두른다. 이건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인 줄 알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니 도하가 생긋
웃었다.

“나는 이상하게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남 같지가 않더라?”


“…네?”

“너 형 없지? 나도 막내라 동생 없는데. 우리 의형제 할까?”

이건이 말을 얼버무렸다.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배우랑 의형제 하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도하가 싫으냐고 묻는다.

“싫은 건 아니고요….”

“좋아. 그럼 오늘부터 너랑 나랑 의형제다. 아이고, 우리 동생. 도하 형이라고 한번 불러볼래?”

“…도하… 히… 엉?”

“아유, 예쁘다. 우리 이건이, 형이 이따가 찾아가면, 문 열어줄 거지?”

“…….”

“이건아?”

“…아니 그게요…. 일단 선생님께 물어봐야….”

“고마워. 역시 동생이 최고다. 가자. 내가 편의점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도하의 팔에 목이 걸린 채로 이건이 질질 끌려가며 생각했다. 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다.

* * *

준영이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데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연신 울려댄다. 손에 물기를 제거하고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엊그제 싸운 애인이다. 3 개월 정도 연애한 거 같은데, 처음 사귈 때는 서로 잘
맞을 거라 착각했다.

나이 서른 넘어 뜨거운 연애는 상상한 적 없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었는데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착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시로 전화를 해서 확인했고, 집요하게 굴었다. 슬슬 헤어질
때가 됐구나,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화장실을 나섰다. 그때 조연출인 창경이 다급하게
뛰어온다.

“감독님. 큰일 났어요.”

“왜.”
“원준 씨요. 오다가 사고 났나 봐요. 못 온다고….”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감독이 되고 나서 처음 맡은 드라마였고, 오늘 첫 대본 리딩이라 아침부터 잠도


못 자고 출근을 했는데, 박원준이 저한테 똥을 안겨 준 것이다. 그것도 소속사 잘 만나 낙하산 타고 내려온
주제에.

“진짜 사고래?”

“매니저 말로는 그런데… 아시잖아요. 매번 그래서 구설수에 오른 거.”

젠장. 준영이 이마를 문질렀다.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지분이
가장 많은 주연 배우가 없는 마당에 리딩을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박원준을 꽂아주라고 은근히 압박을
넣었던 국장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가자.”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펑크 내?”

펑크란 소리에 창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저야 뭐 조연출 때부터 굴러서 이력이 났지만 조연출 1 년 차인
창경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동기들보다 힘들어했고, 많이 더딘 편이었다. 그런 녀석을 끌고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다 반기는 분위기였는데, 이젠 아주 대놓고 좋아하겠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회의실에 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준영이 안녕하십니까. 넉살 좋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제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나이 지긋한 배우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박선영이었는데
그녀는 준영이 조연출 시절부터 함께한 사람이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

“서 감독 어떻게 된 거야? 왜 주연 배우가 여태 안 와?”

“아. 선생님. 너무 죄송합니다. 박원준 씨가 오다가 사고가 났나 봐요. 지금 병원인데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리딩은 못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네요.”

“아니, 주연 배우도 없이 무슨 리딩을 해?”

“사고 맞아요? 아닐 텐데.”


이번엔 원준과 같이 연기한 적이 있는 젊은 배우가 나섰다. 그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준영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성난 그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 왔느냐는 둥,
처음부터 이런 식이면 어떻게 할 거냐는 둥,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준영이 두 번 손뼉을 치고 나서 그들의
시선을 제 쪽으로 움직였다.

“일단 없으니, 오늘은 대신 저라도 읽겠습니다.”

“그래. 차라리 자기가 해라. 인물도 서 감독이 더 낫네.”

선영의 농담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일단 안 온 걸 어쩌겠느냐고, 일단 올 때까지 맞춰나 보고 가자고


그녀가 설득하자 삭막해지던 분위기가 덕분에 조금 가라앉았다. 준영이 그녀를 보며 감사하다는 눈짓을 한 번
보내고 나서 대본을 펴 들었다.

꽤 인지도가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청률은 보장될 것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박원준도 낙하산에다


골칫덩어리인 했지만, 연기력은 나름 탄탄했다. 첫 작을 성공리에 마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원고 한 장을
넘기는 순간 회의실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탕, 문이 열리면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다.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들을 쳐다봤다. 누구냐고 물을 틈도 없이 그중 나이 지긋한 여성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 서준영이 누구야!”

이번엔 그 눈동자들이 준영을 향했다. 준영이 자리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 저를 찾는데
대체 누군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 앞에 서니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네가 서준영이니?”

“네. 제가 서준영입니다. 누구시죠?”

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준영이 얻어맞은 오른쪽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가방에
달려 있던 귀금속에 긁혔는지 이마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놀라 여자를 보는데 여자가 다시 달려든다. 옆에
있던 조연출과 여자의 일행이 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는데 여자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악을 써댔다.

“세상에 어디 꼬실 놈이 없어서 내 아들을 꼬셔! 낼모레면 결혼할 애를 꼬시냐고 이 더러운 새끼야! 너 때문에
결혼도 안 한다잖아. 결혼도 없던 일로 하겠다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준영이 쓰라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으로 피가 들어가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친 듯 발광하며 악을
쓰는 중년 여성의 얼굴만 유독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더러운 새끼라고. 남의 집안 파탄 낸 새끼라고. 너
때문에 내 아들만 죽게 생겼다고.

비명 같은 고함과 함께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야. 서 감독 동성애자였대?”

“저번에 여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우릴 감쪽같이 속인 거네.”

“그럴 수 있다고 쳐. 어떻게 결혼할 사람이랑 그런 짓을 해.”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최악이다.”

“내가 저 새끼 거만 떨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니까. 국장이 예뻐하면 뭘 해. 인성이 쓰레긴데.”

“서 피디. 너 좀 쉬고 와라. 쉬고 오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지 않겠니.”

그 소리들이 한데 뒤엉켜 제 몸뚱이를 갉아먹고 있었다. 발밑이 일그러지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도망쳐야 하는데 목소리들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갈 뿐이었다.

헉. 준영이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혼란스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저를 둘러싸고


비난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뒤에서 수군거리는 걸 스스로 못 견뎌 했을 뿐. 호흡을


가다듬어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서랍을 열어 그곳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약 하나를 뜯어내서는 그걸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컵을 들어


물을 따르는데 손이 덜덜 떨려 물이 양옆으로 흐른다. 진정하고 나서 입안에 약을 털어놓았다.

물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 소파로 비척비척 걸어가 축, 늘어졌다. 쉽사리 호흡이 진정되질 않았다. 약 기운이
퍼질 동안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뭐든 여기서 벗어날 다른 생각. 그러다 문득 어제 도하가 고등어 어쩌고
하던 얘기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었다.

점점 호흡이 진정되는 동안 몸이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살짝 멍해진다. 빌어먹을. 방금 일어났는데 또 자게 생겼군.


약 기운이 퍼지니 안정이 찾아왔다. 이대로 여기서 잠들 순 없으니 침대로 가는 게 낫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모른 척하려니 꽤 익숙한 목소리다. 힘겹게 일어나 거실 커튼을 열었더니 빌라 앞에 도하와 이건이


옥신각신하는 게 보였다. 뭐 때문인지 이건은 난감한 얼굴이었고, 도하가 실실 웃으면서 자꾸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저게 무슨 상황이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와중에 준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친이었다. 혹시 도하가 온 걸 아는 걸까.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가져갔다.

“…네, 엄마.”

[미안. 자는데 깨웠지?]

“아니에요. 일어나 있었어요.”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니?]

“…별일 없어요.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다음 주에 할아버지 기일이잖니. 너 오나 해서 말이야.]

준영이 입을 다물었다. 모친이 할아버지라고 칭한 사람은 사실 저의 생물학적 아버지였다. 딸뻘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그래서 저를 이 서씨 집안에 들어오게 한 장본인.

살아 있을 때 찾아가면 항상 냉랭하게 굴더니 병이 들고 나서도 그랬다. 그러더니 숨을 거두기 직전 준영을 따로


불렀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했다. 숨을 헐떡이며 손짓을 했고 준영은 죽음이 임박한 그의 입술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댔다.

[미안… 하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가족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준영은 항상 이방인이었고, 섞이지 못하는 기름 같은 존재였다. 덕분에 가슴에 오랫동안 올려두고 살았던 커다란
돌덩이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힘들면 안 와도 돼.]

“…갈게요. 힘들 게 뭐 있나요.”

안 간다고 하면 다른 친척들이 모친에게 입방아를 찧어댈지 모른다. 왜 방송국을 관뒀는지, 왜 지방으로


내려갔는지. 그러면서 그의 출생에 대한 언급도 분명 할 것이다. 생모가 어디 지역에서 아직도 술집을 하더라고.
그런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준영이 있다면 그런 티는 내지 못할 테니까.

[어디 아픈 덴 없지? 반찬은 떨어질 때 된 거 같은데, 뭐 만들어 보낼까?]

“괜찮아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편의점에서 도시락 같은 거 사 먹지 말고. 귀찮아도 밥은 집에서 해먹어. 응?]

“네. 그러고 있어요.”

그 후로 한참이나 그녀의 걱정이 이어졌다. 통화 중에도 준영의 시선은 창밖으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투닥거리던 도하와 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친은 도하가 여기 온 걸 모르는 걸까. 목소리를 들으니 전혀
모르는 눈치긴 한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결국은 얘기를
꺼내지 못하였다.

* * *

이건이 급식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태경의 패거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줄 서 있는 아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가더니 먼저 급식을 받았다. 거기엔 송연우도 있었다. 한 손은 점퍼에 꽂고 한 손은 급식 판을 챙겨 밥과
반찬을 담았다.

조리사 아주머니께 무슨 말인가를 하더니 밥을 반이나 덜어내는 걸 보고 이건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저렇게
먹으니 계속 마르지. 식판을 든 연우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손등에 못 보던 피딱지가 자리 잡고 있다. 싸운
건지 아니면 맞다가 손으로 막은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더 자주 때리더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어느새 자기


차례가 됐다. 친구들과 급식을 받아 창가 쪽으로 가서 앉았다. 연우의 패거리들은 제 앞쪽으로 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영훈이 햄을 옆으로 골라놨다. 햄 피망 볶음인데 햄을 골라내면 대체 뭘 먹는단 말인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먹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영훈이 가져가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젓가락으로 쿡쿡,
찍어서 제 식판으로 옮겨왔다.

그런 이건을 보며 영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야. 박태경 저 새끼 엊그제 당구장에서 옆 학교 애들이랑 한 판 떴나 봐. 아침부터 학주가 부르고 난리였더라.”

그래, 이건이 별 관심 없이 옮겨온 햄을 제 밥 위에 얹고서 한 입 푸욱 떠서 입에 넣었다. 박태경 싸우는 거야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하지만 제 신경을 거스른 건 영훈의 다음 말이었다.

“근데 거기 송연우도 있었대. 쟤 요즘 막 나가기로 작정했나 봐. 나중에 제대로 일 터지면 덮어쓰는 건 저지.
박태경이 뭐 의리 지킬 줄 아나. 안 그래?”

이건이 아무런 말 없이 밥알만 꼭꼭 씹어 삼켰다. 영훈이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연우랑
다 같이 친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연우가 멀어졌고, 이젠 남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친구로서 걱정도 되고
화도 나고 그런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지 말고 네가 붙들고 얘기 좀 해봐. 저러다 진짜 대형 사고 칠까 봐 겁난다니까. 아니면 쟤네 형한테 연락


안 돼? 건우 형도 너무하지. 자기만 살겠다고 튀는 게 어딨어. 연우 새끼도 좀 데려가든가, 씨발.”

결국, 영훈은 건우 형 이야기까지 꺼냈다. 송연우의 형이었고, 그래도 그가 있을 땐 연우는 지금처럼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밤에 집을 나가서 사라져 버린 날부터 연우가 매 맞는 날이 늘어났다. 영훈의 옆에 있던
우진이 그만하라고 툭 건드린다. 누구보다 속이 답답한 건 이건일 텐데, 왜 자꾸 그러냐면서.

탁, 말없이 밥만 씹어 먹던 이건의 맞은편에 음료 하나가 놓인다. 영훈이 옆구리를 툭, 쳤다. 이건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더니 머리를 한쪽으로 묶은 귀엽게 생긴 여학생 하나가 의자를 끌어내 막 앞에 앉는 중이었다.

“강이건. 오늘 수업 끝나고 뭐 해?”

이건이 입안 가득 씹고 있던 밥알과 햄을 꿀꺽 삼켰다. 여학생의 이름은 김유나였는데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다. 얼굴을 알게 된 건 한 달 전 학원을 옮기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이건은 유나가 저와 같은 학교란 것도
몰랐다.

“…왜.”

“학원 바로 갈 거지? 같이 갈래?”

“어?”

유나가 음료를 이건의 앞까지 쭈욱 밀었다. 그러면서 한 번 더 말한다. 이따 같이 가자고. 옆에 있던 영훈과


우진이 ‘오오.’ 하고 작게 소리를 내길래 이건이 눈만 끔벅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학원을 왜 같이 가야
하지.

“나랑?”

“응. 싫어?”

“뭐, 싫을 건 없지만….”

그치. 싫진 않다. 김유나처럼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먼저 학원을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싫어할 남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왜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느냐는 거였다. 혹시 누가 괴롭히나. 보디가드 같은 게
필요한가. 그렇다면 잘못 골랐는데. 가끔 덩치가 크단 이유로 그런 걸 부탁하는 친구가 있긴 했는데 알고 보면
이건은 싸움에 젬병이었다. 다행히 맷집은 좋아서 몇 대 맞아도 꿈쩍 안 하긴 하지만.

“그럼 끝나고 너네 반 앞으로 갈게. 점심 맛있게 먹어.”

생긋 예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 쪽으로 간다. 친구들이 유나의 등을 두드렸고, 유나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넘기며 이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걸 보는 영훈과 우진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우어어 짐승처럼 소리를
냈다.

“뭐야, 강이건. 이 새끼. 언제부터야! 응? 언제부터야!”

“…무슨 소리야?”

이건이 덤덤한 얼굴로 밥을 다시 퍼먹으니 영훈이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와 이 곰탱이 새끼. 지금 밥이 목구멍으로 처 넘어가? 이 상황에? 너 쟤가 누군지 몰라?”

“김유나잖아.”

“그러니까. 김유나잖아, 김유나! 백화고 여신 김유나!”

“이따 학원 같이 가게 되면 횡설수설하지 말고, 잘해. 아니면 형이 코치 좀 해줄까?”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그들을 떨쳐내며 투덜거렸다. 여자 친구도 없는 놈들이 코치는 무슨. 그때 저 멀리 앉아


있던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노려보며 비웃는 표정을 하더니 입술을 움직인다. 병신.

뭐야, 왜 그래. 어처구니없어하며 쳐다보는데 송연우가 채 비우지도 않은 식판을 들고 일어서 잔반수거함에


쏟아부었다. 양도 적은데 저걸 반도 안 먹고 버리네. 그러더니 급식실 앞에서 한 번 더 홱 돌아보고 이번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다.

이건이 수저를 든 채로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왜 저래?

* * *

점심을 먹고 대충 치운 후 도하가 식탁에 앉아 손에 든 와인을 바라봤다. 서준영이 좋아하는 와인이라 이사 올 때


따로 준비해온 건데 아직 전해주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줘야 하나, 암만해도 이따가 강이건이 과외 하면서 문을
안 열 것 같단 말이지. 곰 같은 자식이 은근 고집이 있단 말이야.

입술을 잘근거리다 무슨 생각에선지 집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대꾸가 없다. 다시
똑똑, 여러 번 두드렸더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나온다. 한 손엔 젓가락이 들려 있었는데 열린
문틈으로 라면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어쩐 일이야?”

도하가 와인을 내밀었다.

“이사 온 기념으로 사 왔는데, 정신없어서 깜빡했어요. 받아요.”

준영이 선뜻 받지 않고 의심 어린 눈초리로 와인을 쳐다봤다. 도하가 손에 들려주자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여기다 뭐 탔어?”

“타긴 뭘 타요. 내가 그런 개 쓰레기로 보여요?”

“…….”

“왜 대답을 안 해요. 그러니까 내가 진짜 쓰레기 같잖아요.”

준영이 역시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도하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뭐야, 진짜 그런 거였어?

“아무튼, 고마워, 잘 마실게.”

영혼 없는 인사와 함께 준영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도하가 그 사이로 발을 얼른 집어넣었다. 잠깐만요.

“왜 또.”

“지금 라면 끓여요?”

“어.”

“나 점심 안 먹었는데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싫어.”

“아 그러지 말고 좀. 아침부터 쫄쫄 굶었더니 배고파 죽겠단 말이에요.”

준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도하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는 왜 배웠겠어.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거지. 준영이 꿈쩍도 하지 않길래 이번엔 좀 더 몰입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더니 보다 못한
준영이 하는 수없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곧 문에서 손을 뗐고 도하가 그 틈을 열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오호라,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아침에 그 늙은 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었던 게 효과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준영은 곧바로 주방 옆 가스레인지로 가더니 냄비에서 끓고 있는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도하가 이번엔 주방 안을 살폈다. 한쪽 서랍 위엔 인스턴트 음식들이 가득했다. 어휴. 증말.
속상한 마음에 살피는데 턱, 냄비가 자신의 앞에 놓인다.

“먹어. 나는 다시 끓이면 돼.”

“먼저 먹어요. 배고플 텐데.”

“됐어. 너 먹어.”

“빨리 처먹고 빨리 꺼지란 거구나?”

“응.”

“흥.”

도하가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집어 들었다. 그런다고 누가 곱게 갈 줄 아나. 일부러 면발 하나를 젓가락 위에


간신히 올려놓고 후루루룩,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며 꼭꼭, 천천히 천천히 씹어 먹었다. 이러면 저녁때까지
먹겠지. 다른 냄비를 꺼내 물을 올리고 라면을 뜯던 준영이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뭐 하냐.”

“보면 몰라요. 먹고 있잖아요.”

“야. 면 다 불어터지잖아.”

“지가 터져봤자 라면이지. 내 속보다 더 터지겠어요?”

한마디 더 하려던 준영이 이를 끄득 물고 입을 다물었다. 물을 올려놓고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꺼내길래 도하가


얼른 목을 빼고 냉장고 안을 훔쳐봤다. 냉장고에 반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라면을 먹는지 모르겠다.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자는 생각인지라 도무지 준영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밥하기 귀찮아서 라면 먹고 있었어요?”

“…….”

“해달라고 하지. 나 요리 잘하는데.”

“……”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따가 저녁 와서 만들까요? 뭐 먹고 싶어요? 미리 말하면 재료 사 올게요.”

“필요 없어.”

“말해요. 맨날 사람이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살아요. 아니면 나가서 외식할래요?”

“도하야.”

“네.”

보글보글 두 번째 라면이 끓기 시작했다. 준영은 도하를 부른 후 잠시 말을 멈췄다. 도하 역시 면발을 젓가락에


걸기만 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부르고 말이 없어요.”

“나 아까 부동산에 집 내놨어. 조만간 다시 이사 갈 거야.”

걸려 있던 면발이 주르륵 흘러 다시 냄비로 들어갔다.

“뭐라고요?”

“집 내놨다고. 그러니까 너도 서울 올라가.”

도하가 이번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형도 서울로 간다는 뜻?”

“아니.”

“그럼? 나한테 알아서 꺼지란 뜻? 아니면 또 없어지겠단 뜻?”


“그래.”

하. 도하가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와, 웬일로 순순히 문을 열어주더라니. 씨발. 망할 늙은 나무. 소원을
들어주려면 똑바로 들어 주든가 하지. 황망함에 웃기만 하니 준영이 끓고 있던 냄비의 불을 끄고 나서 도하의
앞자리로 옮겨온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면을 입에 넣지 못했다. 도하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무심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라면을 쳐다보고 있는 서준영의 속을 도무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까지 날 밀어내요? 그렇게 싫어요?”

준영은 아니라고 했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도하가 싫을 리 없었다. 어릴 때야 당연히 예뻤고, 커서도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예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끼는 동생으로서였지 한 번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녀석은 그걸 원하니 이 관계를 지속하는 일은 어려웠다.

“네가 나한테 주는 거 다 부담스러워. 관심도 애정도. 어느 한쪽이 부담 느낀다면 그건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

도하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에도 비슷한 얘길 했었다. 네가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그래서 노력했었다. 거리를 두려고 했고, 다른 사람도 만나려고 했고, 잊어보려고도 했고, 근데 그게 안 되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후. 도하가 억눌린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영의 시선이 그런 도하를 따라
움직였다.

“알았어요. 안 올게. 안 온다고. 와서 치근거리지 않을 테니까 이사 가지 마요. 도망가지 마. 그냥 내가 다시


갈게. 됐지?”

도하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더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사라졌다.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심장을 때렸다. 준영은 도하가 남기고 간 라면을 가만히 쳐다보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배고프다고
했는데…. 다 먹을 때까지만 좀 기다릴걸.

* * *

“귀엽네. 근데 3 학년 맞아? 되게 작다?”


그 소리 하지 마. 준영이 옆에 있던 남자를 툭 건드렸다. 사귄 지 두 달 정도 된 남자의 이름은 재혁이었다.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됐는데 성격도 취미도 비슷한 점이 많아 사귀게 됐고, 의외로 잘 맞는 친구였다.

주말이라 둘이 뭘 할까 고민하는데 아침부터 도하에게 연락이 왔다. 언제 올 거냐고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길래


하는 수 없이 데이트에 데리고 나온 것이다.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전보다 보는 날이 줄어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도하는 놀이동산에 온 게 신난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준영을 본 게 좋은 건지 연신 방글방글 웃었다. 그걸 보며


준영이 재혁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3 학년이면 동물보단 게임을 좋아할 나인데
그래도 선뜻 따라온 걸 보고 아직 아기구나, 기쁜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 도하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렸다.

“형,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준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꽤 떨어진 곳에 화장실 표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녀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니면 자신이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때 도하가 재혁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이 형이랑 같이 가면 안 돼?

낯가림이 심한데 어쩐 일로 재혁에게 부탁하는 걸까. 마음에 들었나 싶어서 재혁을 쳐다보니 그는 선뜻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떨어진 곳에 가는 와중에도 도하는 어린아이처럼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3 학년인데 진짜 너 겁 많구나?”

살짝 놀리는 듯한 말투에 도하가 고개를 들어 재혁을 쳐다봤다. 조금 전 저를 보던 귀엽다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조금 짜증 섞인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얼굴을 도하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귀엽게 쳐다봤다.

“다음부턴 혼자 놀아. 알았어? 준영이 형 노는 데 따라오지 말고. 형도 너 자꾸 그러면 귀찮아해.”

그 말을 하자마자 도하는 시무룩한 얼굴로 옷자락을 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재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새끼가 소심하긴. 그래도, 귀엽긴 귀엽네. 하지만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서준영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런 혹이 자꾸 따라붙으면 진도를 빼기 힘들지 않은가.

화장실 앞으로 가던 도하가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형 저 무서워서 그러는데 휴대폰 빌려주면 안 돼요?”

뭐? 재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괜히 싫다고 했다가 녀석이 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마지못해 휴대폰을 건네줬다. 다른 거 건드리지 말고 게임만 해, 하고 게임까지 켜
주면서.

도하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잠잠했다. 재혁이
기다리는 동안 담배 하나를 피울까 하는데 도하가 생각보다 빨리 나오며 휴대폰을 재혁에게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재혁이 피식 웃었다. 새끼. 예의도 바르네.

“빨리 가자. 준영이 기다린다.”

재혁이 앞서 걸었고 도하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저 멀리서 혼자 서 있는 준영의 모습이 보였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재혁이 가서 말을 거는데 준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쳐다봐?”

재혁을 쳐다보는 준영의 시선이 어딘가 싸늘했다.

“뭐야, 왜 그래.”

“너.”

말을 하려던 준영이 도하를 살폈다. 도하는 어쩐 일인지 다른 쪽에 있는 염소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쭈그려
앉아 옆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라고 하는 중이었다. 준영이 자신의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
재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걸 본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야. 미안. 오늘은 못 만나. 나 친구랑 도서관 왔어.]

재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가져가 제 번호가 맞나 확인했다. 기가 막힌 얼굴로 이게 뭐냐고


오히려 물었다.
“그러니까, 뭘까?”

“야, 너 지금 나 오해하는 거야. 나 이런 거 보낸 적 없어.”

“네가 안 보내면 누가 보냈는데.”

순간 재혁이 한 대 맞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여전히 풀을 염소 입에 쿡 쿡 찔러주었다. 먹어, 얼른.


배고프지 않아? 많이 먹어야지. 설마 하면서도 그것 말고는 납득이 안됐다. 그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준영아. 나 진짜 아니거든. 그리고 아까 내가 화장실에서 저 꼬맹이한테 휴대폰 줬는데, 아무래도 저 녀석이


장난을.”

“야.”

준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재혁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하아. 준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도하를 불렀다. 도하가 한 손에 풀을 든 채로 천진난만한 얼굴로 일어섰다.

“도하야, 가자.”

“야, 진짜 아니라니까. 아까 쟤가 휴대폰 가지고 있었다고.”

“이 치졸한 새끼야. 그렇게 안 봤는데 어디 핑계 댈 게 없어서 애한테 덮어씌워?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마.”

하. 재혁이 기막힌 얼굴을 하는데 도하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준영이 그런 도하의 손을 낚아채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재혁은
차마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저만큼 가던 도하가 고개를 돌려 재혁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꾹 다물려 있던 입술 끝이 피식 올라간다.


재혁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지기도 전에 도하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병신.

* * *

끼익. 버스가 멈춰 섰고, 이건이 피곤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엔 커다란 쇼핑백이 하나 들려 있었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조용하다. 그때 저 멀리 논두렁 한가운데서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고라니 내려왔나.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밤 10 시였다. 드륵, 메시지가 도착했길래 보니 김유나다. 오늘 학원에 같이 가서


좋았다고, 내일도 같이 가겠느냐는 묻는 내용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선 벌써 둘이 사귀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아직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같은 반 여학생 하나가 제게 사귀자고 먼저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건은 너무 당황해서


싫다고 대놓고 말해 버렸고, 그 여학생이 눈물을 보이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꽤 곤욕을 치렀었다.

상처받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이 없을까. 아직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고민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연우의 집 근처에 다다랐다. 제 어깨까지 오는 담벼락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불은 환하게 켜
있는데 조용하다.

아직 집에 안 왔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 않더니


전화가 끊길 무렵 ‘여보세요?’ 하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 잤어?”

[…왜 전화했어.]

“안 자면 잠깐 볼래?”

[내일 학교에서 말해.]

“집 앞이야.”

아 씨발. 수화기 너머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이 안을 다시 보니 미닫이문이 열리고 연우가 그 안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정말 자려던 거였는지 옷이 편안한 복장이었다. 밖이라면 절대 입지 않을 곰돌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서


나오는 걸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어릴 땐 꽤 귀여웠는데. 끼이익, 낡은 대문이 열리고 연우가 나타났다.

“뭐야. 이 시간에. 돌았어?”

“아저씨는?”

“몰라. 아직도 안 들어왔어. 어디 가서 술 처먹고 자나 보지.”

안 들어오고 확 얼어 뒈지면 더 좋겠구만. 이건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오죽하면 그럴까 싶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연우가 도망치지 못하는 건 혼자 남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시간까지 불도
꺼놓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이건이 다짜고짜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연우의 눈동자가 거기에 가 닿았다.

“작은누나가 서울에서 보내줬는데, 나한텐 작아.”


연우가 그것을 받지 않고 가만히 쳐다봤다. 가끔 강이건은 이런 식으로 찾아와 무언갈 건네고 갔다. 누나가
사줘서, 엄마가 사줘서, 그것들은 신기하게도 연우에게 딱 맞춘 것 같았다. 그래서 짜증 났고, 싫었다. 차라리
진짜 얻어서 줬더라면 이것보단 덜 기분이 더러웠을지도 모른다.

“꺼져, 병신아.”

몸을 돌려 들어가려는 연우를 이건이 급하게 붙들었다. 억지로 손에 들려주니 연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대로 쇼핑백을 바닥에 팽개쳐 버리더니 들어가려고 한다. 이건이 끝까지 쫓아가며 가방을 넘겨줬다.

“씨발! 안 받는다고!”

연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이건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쇼핑백을 거의 떠넘기다시피 건네줬다.

“알았다고 알았어. 안 입을 거면 들어가서 버리든가 말든가 해. 거기 돈도 조금 넣었으니까.”

그 말에 연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등신아. 애들 삥 뜯지 말라고. 괜히 걸려서 정학 맞으면 너 진짜 학교도 못 다녀.”

“좆같은 학교 안 다니면 돼. 너나 존나 열심히 다니세요.”

“그래도 인마.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하. 꼰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하여튼 버리지 마. 나 진짜 화낸다. 간다. 얼른 들어가. 추워.”

그러더니 연우가 더 뭐랄 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문이 쾅 닫혔다. 이건이


돌아보니 연우가 기어코 쇼핑백을 한 곳에 팽개쳐놓고 들어가 버렸다. 어휴, 저 성깔머리. 가서 그것을 주워서는
대문 안쪽에 넣어두고서는 메시지를 보냈다.

[얻은 거 아니야. 나 주말에 잠깐 알바한 걸로 산 거야. 그러니까 입어. 지랄하지 말고, 좀.]
보내놓고 점퍼를 여미며 집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쯤 걷는데 저 멀리서 또 ‘우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고라니라도 내려온 건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건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씨발. 저, 저게, 뭐야. 아무리 봐도 고라니는 아니었다. 두 발로 뛰었고


다리도 훨씬 길었으며, 키도 저만했다. 기겁하고 뒷걸음질 치는데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오, 오지 마!”

비명을 버럭 지르고 도망치려다 가까이 다가온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도하 형?

* * *

쪼오옥, 이건이 두유 하나를 뜯어 마시며 앞에 앉은 도하를 쳐다봤다. 그는 추위 속에서 얼마나 달렸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소주를 사더니 종이컵에 따라 벌컥벌컥 물 마시듯 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거의 두 병을 비웠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걸 이건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시간을
확인하니 10 시가 훌쩍 넘었다. 편의점도 11 시면 문을 닫을 텐데,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어야 하나.

이건이 자꾸 시간을 확인하니 앞에 앉은 도하가 세 번째 소주를 까더니 잔에 따른다.

“야 고삐리 갈려면 가. 신경 쓰이게 앞에 앉아서 자꾸 시계 들여다보지 말고.”

“그, 그래도 돼요?”

이건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려고 하는데 도하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다. 쪼르륵 소주를 더 따르더니
꿀꺽꿀꺽 한입에 털어 넣고 제 입술을 슥 핥았다.

“괜찮아. 가. 취하면 집까지 기어가면 되니까. 기어가다 얼어 뒈지면 그만인 거고.”

자조 섞인 말에 이건이 엉거주춤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어쩐지 이대로 두고 갔다가 사고를 칠까 봐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추운 날 술에 취해 그냥 아무 데서나 퍼질러
잔다거나 하면 그것도 큰일이지 않은가.
“근데 넌 원래 이 시간에 오냐?”

“아뇨. 원래는 조금 더 일찍 오는데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요.”

“무슨 일? 데이트?”

“그런 건 아니고요. 친구 만나러요.”

“아.”

“형은 왜 밖에 나와 계셨어요?”

“속이 너무 뜨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목 아래서 불덩이가 막 지글지글 끓는 기분이었거든. 너 이런 증상이


뭔지 알아?”

이건이 곰곰이 생각하다 ‘아!’ 하는 표정을 했다. 제 아버지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위염?”

“……”

“아니면 식도염?”

“됐다. 닥쳐.”

“…네.”

도하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들고선 종이컵에 채웠다. 이건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빈속에 깡 소주만 먹는 게 마음에
걸려 지갑을 꺼냈다. 연우한테 다 주느라 돈이 얼마나 남았으려나. 뭐 안주라도 사다 주려고 하는데 앞에 앉은
도하가 빤히 보더니 웃는다.

“됐어, 관둬. 안주 안 먹어.”

이건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도하가 피식 웃었다.
“너는 왜 그렇게 착하냐.”

“제가요? 저 안 착한데.”

“아냐, 너 존나 착해. 그래서 서준영이 너 예뻐하나 보다.”

“네?”

“너는 예뻐하고 나는 조온나게 싫어하고. 짜증 나, 씨발.”

그 말에 이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선생님 얘기가 왜 나오지. 둘이 혹시 또 싸운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친척이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친구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곧 연우랑 제 사이를 떠올리곤 납득했다. 어쨌든 친한 사인데 둘이 오해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이건은 며칠 전 TV 서 본 도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려나. 불편해하지 않을까.

“…형.”

“응?”

“근데 형 배우 맞아요?”

“왜. 나 봤어?”

“TV 에 나온 거 봤어요. 연예 프로에 기대되는 유망주라고 해서 나오던데요.”

“아아, 그래. 근데 왜 이제야 아는 척해?”

“…형이 불편해하실까 봐요. 부담스럽게 하기 싫어서요….”

그 말에 도하가 이건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하던 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담스럽고
불편해한다면 내색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지금 강이건이 저한테 하는 것처럼.

“아냐, 인마. 안 불편해. 존나 티 팍팍 내도 돼. 나는 그런 거 좋아해.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 말고.”

“그래도 괜찮아요?”

응.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말하라고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준다는 말에 이건이 난색을 하며
웃었다. 그거까진 괜찮은데. 하지만 도하의 표정이 좋질 않아 차마 대놓고 거절할 순 없었다. 그저 나중에
기회를 봐서 해달란 말로 얼버무렸다.
“야 이건아.”

“네.”

“네가 볼 땐 나 어떠냐?”

뜬금없는 질문에 이건이 잠시 고민했다. 어떠냐니. 외모를 물어보는 건가.

“외모요?”

“뭐든, 다.”

“엄청 잘생겼죠.”

“새끼 보는 눈은 있어서. 또?”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성격은?”

이건의 두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 정 가운데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말했다간 이 자리에서 테이블과 같이 엎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성질이 더러워 보인단 얘기였다.

“좋, 좋아 보이세요.”

“더듬었어.”

“아니에요. 진짜 좋은 거, 같아요.”

너도 누구 닮아서 더럽게 거짓말 못하는구나. 도하가 한숨을 푸욱 내쉰 다음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빈속에


깡 소주만 넘기니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알도 뜨겁고 목구멍도 뜨겁고, 온몸이 다 뜨거웠다.

아까처럼 소릴 지르고 뛰면 좀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앞에 앉은 이건이 걱정되는지


괜찮으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담스러울 만해. 이해한다니까. 존나 어리지, 잘생겼지, 몸도 좋지, 성격, 뭐 이 정도면 됐지.
어떻게 사람이 완벽할 수가 있어. 충분히 이해해. 이해는 하는데 왜 받아들여지지가 않을까? 동생? 씨발, 동생
좋지. 근데 내가 지한테 언제 동생 시켜달라고 했어?”
혼잣말로 성토하는 도하를 보며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지. 멀쩡해 보였는데, 지금 주정하는 건가. 집에
가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도하가 또 저를 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야, 강이건.”

“네?”

“너는 좋겠다.”

“…왜요?”

“서준영이 예뻐해서.”

아. 이건이 슬며시 미간을 구긴다. 그건 아까 한 말인데. 취하긴 했나 보네. 자세히 보니 눈동자도 좀 빨갛고
풀린 거 같고. 그때 누군가 어깨를 짚어온다. 돌아봤더니 102 호에 사는 박동현이었다.

“너 뭐 하냐, 이 시간에 여기서.”

“안녕하세요, 형. 저 잠깐 도하 형이랑….”

도하? 하더니 동현의 시선이 앞에 있는 도하에게 이동한다.

“오, 3 층에 새로 이사 온 형제님!”

“근데 형은 어쩐 일이세요?”

“씨발, 나 잘려고 했는데 밖에서 고라니가 존나 울잖아. 너도 알지? 내가 신경 예민한 거. 그래서 공부고 뭐고
잠깐 접고서 맥주 하나 사려고 내려왔지.”

아. 이건이 도하를 쳐다봤다. 그거 고라니 아닌데. 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때
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절주절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기가 올랐고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어서는데 비틀거리자 이건이 그를 잽싸게 붙들었다.

“형, 괜찮으세요?”
“…됐어, 인마. 혼자 할 거야.”

도하가 그 손을 거두어내고 나서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취한 거 같더니 또 걷는 건 멀쩡하네. 이건이


얼른 책가방을 챙기고 나서 그 뒤를 따랐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동현이 어이없단 얼굴로 둘을 쳐다보며 지금
사람 왕따시키는 거냐고 물었지만, 누구 하나 대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내내 도하는 말이 없었다. 한 번씩 멈춰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긴 한숨을 내쉬고 또 걷다가


한숨 쉬고, 이건은 그럴 때마다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만만하고 뻔뻔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맥이 탁 풀린 모습이었다.

빌라 앞에 다다라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고 이건을 돌아봤다.

“나 잠깐 생각 좀 하다 올라갈 테니까 너 먼저 올라가.”

“괜찮으시겠어요?”

“응. 걸어오다 보니 술 깼어. 가.”

그럼 들어갈게요. 형도 얼른 들어가세요. 이건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서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 쪽으로 난


창에 불이 하나씩 들어왔다. 이건의 집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걸 보던 도하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조금 전 편의점에서 산 것이었다. 그걸 들고 평상 쪽으로 걸어갔다. 겨우 끊은 담배를 누구 때문에 다시 피우게
생겼네.

불을 붙이고 시선을 올려 준영의 집을 바라봤다.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잠이 들지 않았나 보다.


뭘 하고 있을까. 책을 읽는 중일까. 아니면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할까. 조금이라도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
나만큼은 아니라도 그래도 조금은 신경 쓰였으면 좋겠는데.

담배를 마저 피우고 나서 다른 한 개비를 더 꺼냈다. 허공에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창가에 언뜻 그림자가


비치더니 사라졌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 모습을 잡고 싶었다. 낮에 봤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안 보고 살긴
개뿔. 씨발, 지금도 이러는데 어떻게 안 보고 살아.

하아. 몇 개비를 더 피우고 나서 그대로 빌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밟고 하나씩 올라갔다. 발소리가 텅 빈 계단
안에 울렸다. 2 층 서준영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걸음이 멈췄다. 슬쩍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문에 손을 갖다 대길 여러 번 반복했지만 결국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문 옆에 주저앉았다. 안 피우던 담배까지


연달아 피워댔더니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도 서준영한테 미움받을까 문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서글펐다.

꾹 눈을 내리감고 머리를 벽에 기댔다.

“서준영… 문 좀 열어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 좀 열어봐. 나 좀 봐줘. 나 좀 좋아해 줘. 나 좀 사랑해줘.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CH 6.

웅성이는 소리에 준영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가까스로 올렸다. 꿈을 꾼 건가 했는데 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져


간다. 얼굴을 비비고 나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6 시다. 무슨 일이지. 가뜩이나 어제
도하와 있었던 일로 밤잠을 설치다 겨우 잠들었는데.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웅성거리는 소린 어디서 들리는 걸까. 거실로
나오니 소리가 좀 더 커진다. 두리번대던 시선이 현관 앞에서 멈췄다. 대충 머리를 정돈하고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턱, 열리는 문 뒤로 무언가 걸린다. 문틈으로 놀란 이건의 얼굴이 보였다. 준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이건인 아침부터 여기 왜 있어? 근데 문이 왜 안 열려. 다시 안으로 당겼다. 퍽, 하고 여는데 무언가에
부딪히며 끄응, 하는 신음이 들린다.

문 뒤에서 잠깐만요. 잠깐 열지 말아요. 하는 소리가 났다. 준영이 문을 닫은 채로 소리에 집중했다. 일어나요.


정신 들어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여보 잡아 봐요. 얼른. 문에 귀를 대고 대체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웅성거리는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괜찮아요.”

정신 좀 들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건아 네가 좀 일으켜 세워줘. 조금 전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박에
알아챈 준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는데, 조금 전까지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며 이건의 놀란 얼굴 옆으로 누군가 힘겹게 기대 있는 게 보인다.

준영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하였다.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문을 확 열어젖히니 누군가가 뒤쪽에 더 서 있다가 억 소리를 지른다. 보니 이건뿐 아니라 그의 부친과 모친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이고, 서 선생님 괜히 시끄러워서 나오셨나 보네.”

“안녕하세요, 건이 아버님. 죄송해요. 뒤에 계신 줄 모르고.”

“괜찮습니다. 하하, 저야 워낙 튼튼해서.”

“근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글쎄, 새로 이사 온 총각이 여기 문 앞에서 자고 있지 뭡니까. 내가 새벽에 물 뜨러 가다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얼어 죽을 뻔했다니까요.”
도하가 이건에게 기댄 채로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말하는데 알코올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온다. 준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보며 안색을 살폈다. 입술이 파리한 게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이건의 모친이 괜찮다고 만류한다.

“제가 체온이랑 맥박 재봤는데 다행히 심각한 거 아니에요. 일단 의식도 있고, 체온도 많이 낮은 건 아니니까.
들어가서 몸 녹이고 따뜻한 물 좀 마시고 하면 괜찮을 거 같아요.”

준영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의 모친은 간호사였다. 지금은 시내의 작은 개인병원에서 일하지만,
아가씨 때는 서울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아이고,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아니 허우대는 멀쩡한 총각이 왜 남의 집 앞에서 자고 난리야. 이건아, 네가


위층까지 좀 데려다줘라. 아니다, 그냥 우리 집에 데려가 눕혀. 술도 덜 깨서 몸 건사도 못할 거 같은데.”

“아니에요, 건이 아버님.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선생님이요?”

“예, 저 아는 동생이에요.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아휴, 그러셨구나. 어쩐지, 연고도 없는데 젊은 총각이 이사 온 게 신기하더라니. 그럼 건이가 선생님 댁으로
좀 눕혀놓고 와.”

이건이 부축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자 도하가 그 손을 뿌리치더니 버티고 섰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집에 가면 됩니다. 여긴 안 들어가요.”

준영이 표정을 굳혔다. 다신 안 오겠다고 어제저녁에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가더니 술 취한 와중에도
그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가뜩이나 밤에 누워서 괜히 그렇게까지 했나 후회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콱 막힌 듯 답답해졌다.

그런 도하의 팔을 준영이 붙들었다.

“들어와서 자.”

“…싫어요. 오지 말라며. 꺼지라며. 어디 가서 확 죽으라며!”


그 말에 도하를 뺀 세 사람의 시선이 준영에게 와서 콕 박힌다. 세상에 정말 그런 말을 했어요? 마치 질타를
하는 거 같아 준영이 이를 끄득 물었다. 이 자식이. 내가 언제 죽으라 그랬어. 지가 먼저 안 온다고 바락바락
대들었으면서.

“일단 들어와. 두 분 올라가세요. 건아 너도 올라가. 도하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게.”

“괜찮으시겠어요?”

“응. 올라가. 고맙다.”

이건의 부모님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위로 올라가고 나서 준영이 도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 따라 들어와. 버티길래 나중엔 손을 잡았는데 마치 얼음장처럼 찼다. 하는 짓을 보면 혼내고도 남았겠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을 보니 일단 달래서라도 안으로 들이자는 생각부터 들었다.

“들어와.”

“싫어요.”

“야.”

“아까 한 말 취소해요. 나한테 꺼지라고, 다시 도망가겠다고 한 거. 다 취소하라고요.”

이게 진짜. 준영이 이를 꽉 물고 노려보는데 도하도 버티고 서서 요지부동이다.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걸 다시 붙들어서는 안으로 잡아당겼다. 고집을 더 부리면 확 두들겨 패려고 했더니
이번엔 너무도 쉽게 현관으로 쑥 끌려 들어온다.

그렇게 현관문이 닫히고 도하를 거실까지 끌고 와 소파에 확 밀쳐뒀다. 커다란 덩치로 소파에 늘어지길래 그대로
두고 작은 방으로 가서 캠핑할 때 쓰던 전기담요를 찾아서 들고 왔다.

도하를 그 위에 앉히고 나서 점퍼를 벗기는데 손이 몸에 닿자 흐흐, 하고 웃는다. 이 새끼가. 노려봤더니 코를


찡긋하고 애교까지 떤다. 준영이 못 본 척하고 옷을 벗긴 다음에 두꺼운 담요를 꺼내와 몸에 덮어줬다.

그런 다음 작은 전기스토브를 꺼내 옆에 켜두고 주방으로 가서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컵에 따라 가지고 왔다.

“마셔.”

물을 마시기 위해 입을 벌리는 데 악을 쓰던 기세는 어디 가고 입술이 덜덜 떨린다. 그걸 보며 저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의 아버지가 그 시간 약수터를 가지 않았더라면, 더 늦게 발견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끙, 억눌린 숨을 쉬고 나서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도하가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옆에 내려놓는다. 확인했더니 물이 반도 채 비워지지 않았다.

“더 마셔.”

“…됐어요. 괜찮아지는 거 같아요.”

더 마시라니까. 준영이 컵을 집으려고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도하가 그 손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던 준영이 무게중심을 잃고 앞으로 몸이 확 기울어졌다. 순간 도하의 입술이 제 입술에 포개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술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밀어내려 다른 쪽 손을 어깨에


대자 그 손마저 결박한 채로 바닥에 눕히고 올라탄다. 입술 사이로 도하가 혀를 밀어 넣더니 부드럽게 움직였다.
준영의 눈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팔을 꽉 쥔 손과 얼음장 같은 입술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농밀한 움직임이었다. 아, 이 자식이 이렇게 키스를


잘했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혀 놀림이 점점 진해진다. 그때 도하의 팔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그 틈을 타고
준영이 팔을 빼내 도하의 어깨를 밀쳐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도하의 눈동자가 시커멓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제자리로 찾았다.

“너, 너 뭐야, 이 새꺄.”

갑자기 도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풀면서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아우, 어지러워. 그러더니 담요를 머리끝까지
잡아당기고 나서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야!”

준영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담요를 들추거나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따지질 못했다. 취한 건가.
아니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도 혹시 진짜 어지러워서 그런 건 아닐까, 그
와중에도 걱정됐다. 다시 살피는데 도하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잠하다.

혹시나 진짜 잘못됐나 싶은 마음에 담요를 살짝 끌어내고 얼굴을 확인하니 조금 전보다 안색이 돌아오고 입술 색도
많이 나아졌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눈꺼풀 안쪽에서 눈알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게다가 한쪽 입술을 삐죽 올리고 웃기까지 한다. 이 자식이, 지금 웃는 거야?


“야. 일어나. 너 멀쩡한 거 아니까 일어나라고.”

끙. 끙. 도하가 앓는 신음을 내며 몸을 움츠린다. 그냥 한 대 확 쥐어박을까 하다 결국 담요를 다시 홱


덮어주고는 일정 온도를 맞추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일어나서 보자.”

하지만 협박에도 도하의 입술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 * *

“어머, 돌아갔네. 돌아갔어.”

이건의 모친이 안타까운 얼굴로 도하를 쳐다봤다. 옆에 있는 이건의 부친 또한 혀를 쯧쯧 차는 중이었다. 준영과


이건의 표정도 다를 게 없었다. 도하가 손거울을 가져와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왼쪽 입꼬리가 위로 슬쩍 올라간
게 부자연스러웠다. 일부러 씨익 하고 웃는데 왼쪽만 근육이 잘 움직이질 않는다.

저런. 지켜보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탄식했다.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건 들었지만 설마


진짜 입이 돌아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위의 걱정과는 달리 도하는 거울 속 제 얼굴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입술과 뺨 쪽에 살짝 얼얼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준영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제 입술을 어루만지며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침이 됐는데 얼굴이 뭔가 묘하게
부자연스러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건의 모친에게 물었더니 찬 데서 자서 안면 마비가 온 것 같다고 했다.

어젯밤 도하가 그 사고를 치고 웃길래 혼낼 생각만 했지 그게 입이 돌아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괜히
저 때문인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얼결에 키스한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다가 두 가지 감정을 계속
반복하는 중이었다.

“일단 오전에 병원에 가봐요. 우리 이이도 작년에 스트레스 땜에 잠깐 그랬는데 몇 달 침 맞고 나니 낫더라고요.


이건 초기에 바로 갈수록 완치율도 높대요.”

“침… 이요?”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영하면서 부상을 겪으며 치료를 많이 받았는데 그때 뜸과 침 치료도 겸했기 때문에
침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 마음을 준영이 눈치챘는지 더는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이 아빠 치료받던 한의원 어디지? 3 층 총각 거기 좀 가르쳐줘.”

어. 알았어. 잠깐만. 이건의 부친이 휴대전화에서 번호를 찾아낸다. 도하가 슬쩍 준영을 쳐다봤다. 어젯밤 제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던 입술을 문지르며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 달짝지근한 입술 맛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걸 보는 이건이 놀라서는 슬며시 준영의 옆으로 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선생님 도하 형 머리도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지금 웃고 있어요.”

그 말에 준영이 도하를 보니 정말 혼자 실실 웃고 있다. 그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짙게


풍겨오던 알코올 냄새와 도하가 몸을 밀착할 때 풍겨오는 체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보고
있으니 자꾸 생각나 그냥 외면하고 등을 돌려 버렸다.

* * *

“이, 하면서 웃어보세요.”

도하가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여전히 왼쪽 입술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이 지긋한 한의사가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위로 밀며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살짝 마비가 왔네. 구안와사라고 하죠. 심하면 여기 눈도 안 감기고 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거예요. 침 좀
맞고,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돌아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되도록 스트레스는 받지 말고 얼굴엔 찬바람
맞지 않도록 하고.”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겨울엔 조심해야지, 이게 잘못하다간 큰일 난다니까. 젊고 잘생겼는데, 애인이 알면 속상하겠네.”

그 말에 도하가 눈동자만 움직여 준영을 쳐다봤다. 속상해요? 준영이 눈을 부라렸기에 얼른 시선을 피해 그 옆에


이건을 쳐다봤다. 저 자식은 왜 따라온 거야. 이건은 병원에 오는 내내 자신이 도하를 더 챙겼어야 했는데, 먼저
집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를 늘어놨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는지 모른다.

“일단 누우세요. 침 좀 놓을게요.”


아, 침 싫은데. 도하가 인상을 구기며 누웠다. 침은 얼굴에만 꽂는 게 아니라 머리부터 얼굴, 손과 발까지 다
꽂혔다. 배를 살짝 걷더니 거기에도 침을 놓는다. 근육이 탄탄한 도하의 배를 보며 이건이 우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 반응에 도하가 배에 더 힘을 주자 한의사가 힘주지 말라고 결국 잔소릴 했다.

준영이 고슴도치처럼 침을 맞고 있는 도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고 집에 가서 푹 쉬어.”

“미안해요. 어제 나 때문에 못 잤죠?”

준영이 도하를 노려봤다. 뻔뻔스럽게 저 때문에 못 잤느냐고 묻는 걸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이건이 옆에


있어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건은 뭐가 신기한지 준영이 침 맞는 걸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알아챈
도하가 이건을 불렀다.

“강이건, 내 얼굴 많이 흉하냐?”

이건이 잠시 망설였다. 바늘을 꽂고 있으니 좀 웃기긴 했는데, 막상 얼굴은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아뇨. 잘 어울려요.”

“어울려? 이게?”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형이 원래 약간 사람 비웃는 상이셔서….”

“뭐?”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게, 형이 잘 웃으시잖아요…. 그래서 어색하지 않달까….”

비웃음이 웃음으로 바뀌긴 했지만 이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중이었다. 큭. 듣고 있던 준영이


코웃음을 쳤다. 아침에 도하를 봤을 때 묘하게 위화감이 없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사람 비웃는 상이라는 이건의
기발한 표현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야!”

도하가 소리를 지르려다 침이 자극하는 바람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이 같이 표정을 구겼다. 이상하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말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듣기 좀 그런가. 돌려 말했어야 하나,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데 준영이 일단
차에 가서 기다리자며 이건의 등을 떠민다.
“서준영 씨 어디 가요, 나는 아파서 이러고 있는데.”

“다리는 멀쩡하잖아. 맞고 차로 와. 앞에 있을 테니까.”

“와, 그걸 못 기다려서 가냐.”

그러자 이건이 쭈뼛대며 앞으로 나섰다. 제, 제가 기다릴까요?

“꺼져, 이 새꺄.”

인상을 팍 구기고 노려보는데 머리에 맞은 침이 점점 아픈 것 같다. 저 나이 든 한의사를 믿어도 되는 걸까 순간


의심이 들었다. 어디 혈 자리 잘못 찌른 거 아냐. 왜 이렇게 아프냐고 물었지만, 준영은 그런 도하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결국엔 치료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도하가 허공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지루하게 시간이 가길 기다리다 문득 어제 맛본 준영의 입술


맛이 생각났다.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볼에 맞은 침 때문에 아팠지만 그래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 * *

준영이 커다란 통에서 길쭉한 어묵 하나를 뽑아 들었다. 도하가 나올 때까지 근처 포장마차에서 분식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아침이야 도하가 나오면 가서 먹으면 되는 거고. 하지만 이건은 어묵을 손에 든 채
먹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먹어, 얼른. 왜 그래.”

“제가 아까 말실수했나 봐요. 그냥 대답하지 말걸.”

“뭐? 비웃는 상?”

준영이 어묵을 한 입 베어 문 채로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옅은 웃음을 흘린다. 이건이 그 모습을 보며 곤란한


얼굴로 하지 말라고 말렸다. 아까 도하가 열 받은 것도 아마 준영이 웃는 바람에 더 그랬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준영이랑 같이 있으면 도하가 더 발끈하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다 저 때문인 거 같아요. 어제 편의점에서 도하 형 뭐 때문인지 열 받아서 혼자 소주 세 병 깠거든요.


그러더니 갑자기 저한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

“좋겠다고. 선생님이 저 예뻐해서.”

“…그랬어?”

“네. 두 번이나.”

“아.”

이건이 어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서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도하는 평소보다
많이 웃었지만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어제 도하 형은 좀….”

“…?”

“울적해 보였어요.”

“…….”

“제 느낌엔, 마음이 아픈 거 같기도 하고. 누굴 혼자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이건이 다 컸네. 그런 것도 알아?”

준영이 놀리듯 하자 이건이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전 짝사랑이 뭔지 모른다. 해본 적도 없고, 딱히 누군갈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마음 아파본 적도 없으니까. 신경 쓰이는 사람은 있긴 하지만…. 그건…. 아, 갑자기 왜
송연우가 생각났을까.

이건이 어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왜? 어묵에 뭐 들어있어?”

“아뇨. 잠깐 딴생각했어요.”

“이건인 없어?”

“뭐가요?”

“좋아하는 사람.”

“전 엄마 아빠요. 누나랑 형들도.”


“말고는?”

“선생님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도하 형도 조금 괜찮은 거 같고.”

놔뒀다간 동네 사람들 다 말할 기세였다. 그래서 준영이 웃었다.

“선생님은 있으세요?”

“나도, 아직은.”

“그럼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왜? 누구 소개해 주게?”

“저희 사촌 누나 진짜 예쁘고 되게 멋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경찰이에요.”

그 말에 준영이 나는, 음…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는데요?”

“비웃는 상만 아니면 돼.”

“네?”

이건이 무슨 말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뒤쪽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치사하게 나만 두고 둘이 거기서


어묵을 먹고 있느냐고 구시렁대는 소리에 이건이 뒤를 돌아봤다. 이제 막 한의원에서 나오는 도하의 모습을 보고
조금 전 준영이 말한 걸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제 머리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아예 놔두고 집에 가 버리지 그랬어요?”

도하가 다가와서는 어묵 통에서 어묵을 하나 빼려고 하길래 준영이 그 손을 붙들고 떼어냈다.

“밥 먹어. 우리도 막 가려던 참이었어.”

“둘이 나 없을 때 비밀 얘기했죠?”

“아니. 그냥 네 욕했는데.”
“그러기예요?”

“어, 그러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게 이리 와.”

아, 잠깐. 준영이 기다리라고 하더니 차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손에 무릎담요를 들고 나와 도하에게 내밀었다.


도하가 쳐다만 보자 그걸 펼쳐서 길게 접고는 목에 한 번 감더니 목도리처럼 얼굴까지 가려줬다.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예요?”

“아까 한의사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 찬바람 맞지 말라잖아.”

“그렇다고 뭘 또 이런 걸.”

도하가 피식 웃었다. 제 목에 꼼꼼하게 담요를 둘러주는 준영의 손길이 좋기만 해서, 무릎담요가 무슨 모양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건이 애매하게 웃고 있었기에 그게 캐릭터 담요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밥 먹으러 갈 동안만 매. 여기 근처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래.”

“괜찮아요.”

그러더니 저만치 떨어져 있던 이건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춰 준영에게 속삭였다.

“난 준영 씨랑 있으면 뭐든 다 좋아요.”

시끄러워. 준영이 담요 끝을 외투 안쪽으로 넣은 뒤 도하의 등을 떠밀었다.

이건이 그 뒤를 따라갔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두 사람이 은근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조금 신기했다. 처음에


왔을 때 준영이 차갑게 대하길래 무척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걸어가던 이건의 눈에 맞은편에 서 있는 무리가 들어왔다. 그중엔 낯익은 초록색 점퍼도 있었다. 학교 가는 날이
아닌데도 교복을 입은 송연우였다.

사준 옷을 안 입는다고 그렇게 지랄하더니, 진짜 안 입었군.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열 명 정도 되는 태경의 패거리들이 함께였다. 대낮부터 왜 여기에서 돌아다니는 거지.

그제야 이 근처가 그들이 자주 가는 당구장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아, 돌아갈걸. 마주치기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상함을 느낀 준영이 먼저 뒤를 돌아봤다.
“강이건. 뭐 해. 안 와?”

네? 가, 가요. 이건이 그들을 외면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야 강이건!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태경이 저를 쳐다보고 한쪽 손을 어깨높이로 흔들고 있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젠장. 한숨을 내쉬는데 앞서가던 준영과 도하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뭐 해, 인마. 안 와? 배고파 죽겠어.”

도하가 투덜거렸고 준영은 맞은편에 있는 아이들을 봤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봤던 아이도 있었다. 송연우라고
했나. 이건과 예전에 친했다던. 그중에 이건을 부른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그가 저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야?”

준영의 물음에 이건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같은 반이요.”

아이 씨, 친구도 아닌데 뭘. 도하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태경이 다시 이건을 크게 부른다. 이건이


쳐다보자 이번엔 강아지 부르듯 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연우를 뺀 옆에 있는 아이들이 시시덕거리고 웃었다.
자주 있는 일인 듯 이건이 짜증 섞인 얼굴로 쳐다보자 준영이 어깨를 툭 두드리면 살짝 미소 지었다.

“가자, 밥이나 먹으러.”

네. 이건이 몸을 돌리는 순간. 깡, 데구루루 빈 음료수 캔 하나가 이쪽으로 굴러온다. 조금 전 반대편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그것이 하필이면 도하의 발끝으로 툭, 굴러와 부딪혔다. 도하가 그것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건너편에 있는 태경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준영이 도하를 불렀다.


“도하야.”

도하가 대답 없이 굴러온 캔을 발로 꾸욱 밟았다. 캔이 찌그러졌고, 태경을 보는 도하의 눈이 점점 차가워졌다.


반대편에 있던 태경과 패거리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며 도하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준영이
이번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이도하.”

이번엔 도하도 고개를 돌렸다. 준영의 표정이 조금 엄해졌다. 밥 먹으러 가게 얼른 와. 하지만 그건 다른


뜻이기도 했다. 사고 치지 마. 도하가 나직하게 웃었다.

“알았어요. 가요. 간다고.”

바닥에 있던 음료 캔을 주워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넣었다. 자식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말이야.


분리수건 내가 또 잘하지. 맞은편에 있던 아이들이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 * *

종업원이 시뻘겋게 달구어진 숯불을 넣고 불판을 올린 후 양념이 되지 않은 손질한 장어 두 마리를 그 위에


올렸다. 초벌구이 해 먹기 좋게 잘린 장어를 보며 이건이 젓가락을 들고 군침을 흘렸다. 점심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백반을 먹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 횡재람.

준영이 집게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자 도하가 먼저 집게를 집어 들고 장어를 뒤집었다.

“금방 익겠다. 내가 할게요.”

“집게 주고 너 먹어.”

“됐어요. 맨날 인스턴트 먹지 말고 얼른 먹어요. 사람이 밥은 제대로 먹고 살아야지.”

눈치를 살피던 이건이 도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 저 집게 주세요. 제가 할게요.”


“됐어요, 넌 침이나 닦고 장어나 드세요.”

이건이 머쓱한 얼굴로 손을 거두고 나서 뺨을 문질렀다. 너무 티 냈나. 도하가 집게로 잘 익은 장어를 집어


준영과 이건의 쪽으로 옮겨놓았다. 준영이 젓가락으로 한 점을 집어 양념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질세라 이건도 장어를 입에 넣더니 으음, 하고 감탄을 내뱉는다. 살도 도톰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도하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다가 준영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나는 구워야 하니까 준영 씨가 나 쌈 좀 싸줘요.”

너무 자연스럽게 부탁하는 바람에 준영이 응, 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쌈을 집어 들다가 말고 멈칫했다. 구우면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지 않은가. 이러려고 냉큼 굽는다고 했군.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니 벌써 입을 벌리고 아,
하고 준비까지 하고 기다린다. 쌈을 든 채로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이건이 쌈 하나를 재빨리 가져와서는 장어를
그 위에 올렸다.

“도하 형. 제가 싸드릴게요!”

순간 도하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강이건.”

“네? 왜요? 마늘 넣으세요?”

“너 혹시 그 얘기 알아?”

“무슨 얘기요? 생강은요?”

“눈치 없어서 맞아 죽은 강씨 이야기.”

이건이 쌈을 오므리다 말고 멈칫하더니 곰곰이 생각한다. 도하가 노려봤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싶었는데
이건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전래 동화냐고 묻는다. 집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어 대신 저 자식을 확
구워 버릴까 싶었지만, 일단은 미소로 응답하며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대답해주었다.

“건아, 너 먹어. 쟤는 생마늘 싫어해.”


준영의 말에 이건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자칫했다간 또 싸준다고 할 기세였기에 도하가 먼저 몇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나 잘 먹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먹어. 알았니?”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준영이 그런 둘을 보며 피식 미소를 흘렸다. 둘이 성격만으로 보면 상극인데 은근 죽이 잘 맞고 형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가 손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준영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준영은 바로 받지 않고
뜸을 들였다. 집게를 들고 있던 도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지.

“잠시만, 너네 먹고 있어.”

전화가 끊어졌지만, 준영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더니 귀에
대는 걸 봐선 조금 전 걸려온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듯 보였다. 도하가 가만히 쳐다보는데 이건이 장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근데 도하 형은 대학생이에요?”

“왜 고등학생 같아?”

“그게 아니라, 학교 다니면 한창 바쁘실 때 아니에요? 아닌가. 지금 방학인가?”

“군대 다녀오고 나서 휴학했어.”

군대란 말에 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암만 봐도 군대 다녀온 사람 같지 않은데. 군대 다녀오면 철든다는


얘긴 미신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빤히 쳐다본다. 너 무슨 생각 하냐?

“아, 아니에요.”

“군복도 잘 어울리겠다. 그런 생각 했어?”

“…뭐… 비슷해요.”

“짜식. 더 먹어.”

도하가 두툼한 장어 두 개를 이건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나서 준영의 앞자리로 3 개를 옮겨놨다. 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이건이 장어를 입에 넣고 옆에 있던 사이다를 따라 입가로 가져갔다.

“그럼 전공은 뭐예요?”

“심리학.”

풉. 이건이 마시려던 사이다를 그대로 내뿜었다. 심, 심리학? 눈이 동그래져 쳐다보는데 도하가 장어를 집어
먹으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건이 빈 옆자리를 봤다. 준영이 있었으면 사실을 얘기해줬을 텐데.
진짠가.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는 재주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거 같은데.

“그렇구나…. 심리학이구나.”

“심리상담 같은 거 부탁하지 마. 짜증 나니까.”

“…네. 그러려고요.”

“그렇지만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어.”

이건이 흠칫 놀라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생각하는데요?”

“장어가 더 먹고 싶다?”

“…….”

“아닌가. 그럼 사이다?”

“…….”

“콜란가?”

“아니에요. 사이다가 더 먹고 싶긴 해요.”

도하가 싱긋 웃는다. 거봐. 역시 전공을 잘 선택했어. 그러면서도 눈은 자꾸만 밖에서 통화하는 준영에게
옮겨갔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는 아닌 듯했다. 집 내놨다더니 혹시
부동산인가. 담배를 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누굴까.

* * *
샤워를 마친 도하가 욕실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아, 에, 이, 오, 우, 소리를 내어 입술을 움직였다.
마비가 온 근육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침을 맞았는데도 첫날이라 그런지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장어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강이건을 먼저 올려 보내고 서준영 집에


들어가려고 수작을 부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3 층으로 올라오긴 했는데, 여전히 마음은 온통
아래층에 가 있었다.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마비가 온 왼쪽 뺨을 슥슥 문질렀다. 엄마가 알면 기함할 일이군. 욕실에서 나와


소파로 걸어갔다. 오피스텔에서 쓰던 물건을 그대로 들였더니 거실에 소파와 TV 러닝머신만으로도 공간이 가득
찼다.

운동이나 할까 하다가 소파에 앉아 TV 를 틀었다. 채널을 하나씩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의학지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패널로 나온 사람 중 하나가 제가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뭐야?”

잘못 봤나 싶어 자세히 보는데 카메라가 이번에도 또 그를 비춘다. 확실히 김민석이 맞았다. 저번에 찾아갔을 때
엄청 바쁜 척하더니 방송 출연 중이었군. 하필 방송국도 서준영이 일하던 곳이네. 찝찝하게.

[만나서 괴롭힐 생각하지 마.]

TV 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낯설고도 생소했다. 인물이 못난 편은 아니라 그런지 카메라도 그럭저럭 소화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다 틱, 전원 버튼을 눌러 꺼 버렸다. 톡, 톡 소파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나갔다.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가 2 층으로 내려갔다. 서준영 집


현관 앞에서 서성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도어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막
씻고 나온 건지 준영의 얼굴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잤어요?”

“아니, 씻고 나왔어. 무슨 일이야?”

“잠깐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요?”

“무슨 얘기.”

“아까 병원에서 한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보호자가 옆에서 좀 지켜봐야 한다고.”

“언제?”
“형 나가고 나한테 얘기했어요. 도망치느라 못 들었죠?”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심각한 게 아니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찬바람 맞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뻔한 수작을 부리는 게 보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들은 적 없다고 하며 문을 닫으려고
하니 도하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잠깐, 잠깐만요.”

“치워. 닫는다.”

“잠깐만 얘기 좀 해요.”

“해, 그럼.”

“들어가서.”

“안 돼.”

“아 좀.”

“여기서 하라니까.”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도하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옆으로 휘청했다. 준영이 냉랭한 얼굴로 쳐다보자 이번엔
벽을 짚으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잠깐만요. 저 지금 좀 어지러워요. 숨도 안 쉬어지고, 눈도 잘 안 보이고,
후유증인가.

쾅, 벽을 짚느라 손을 뺀 그사이에 순식간에 문이 닫혀 버렸다. 도하가 몸을 세우고 나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와, 진짜. 벽과 문 사이에 입술을 바싹 대고는 서준영 씨~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길래 몇 번 더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열어줄 때까지 여기서 버팁니다. 진짜예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진상 피우지 말고 꺼져.]


말을 해도 참. 예쁘게 하십니다. 휴대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로 찬
냉기가 올라온다. 아이 씨. 이런 데서 자니까 얼굴이 돌아갔지. 자세를 고쳐 쪼그려 앉고서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이건이라도 과외 하러 내려오면 좋겠는데.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고 갑자기 안쪽에서 띠리릭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준영의 못마땅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다. 도하가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대로
입술이 올라가지 않아 전처럼 예쁘진 않을 테니 나름 소리까지 에헤헤 하고 덧붙였다.

효과가 통한 걸까. 준영이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어놓고서 그대로 안으로 홱 사라진다. 으윽. 일어서는데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절뚝절뚝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가 현관 앞에 신발을 벗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준영이 찻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도하에게 줄 라벤더 차였다. 미운 건 미운 거고 얼른 얼굴이나 제대로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괜히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거 같아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었고. 차를 들고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할 얘기가 뭔데.”

“없어요. 그냥 들어오고 싶어서 핑계 댔어요.”

탁.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이 자식이.

“마시고 나가.”

“그러지 말고 좀.”

“좀 뭐어. 또 뭐어.”

신경질을 내는데도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조금 있으면 강이건 공부하러 올 거야. 오기 전에 가.”

“와. 너무하네. 걔는 막 들여보내 주고, 나는 사정을 해야 들여보내 주고.”

“넌 위험인물이니까.”

“왜 위험한데요. 형한테 키스해서? 섹스도 해달랄까 봐?”


“다물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니, 묻지 마.”

“김민석이랑 왜 아직도 연락해요?”

“그게 왜 궁금해.”

“그냥.”

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하가 민석에게 연락해서 만났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디 있는지


다 알고서 찾아왔더라는 민석의 말에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저번에 서울 올라온 적 있죠? 혹시 그 자식 만나느라 온 거였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해?”

“둘이 다시 만나기로 한 건가 해서. 그래서 나 못 받아주는 건가 해서.”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민석이 이혼하고 1 년 정도가 됐고, 사실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긴 했었다.
그는 한 번씩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일 이후로 누굴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계속 거절하는 중이었다.

“말 안 하는 거 보니 그 자식이 만나자고 하긴 했나 보네.”

“했는데, 싫다고 했어.”

“그럼 안 만날 거예요? 확실히?”

“몰라, 나도.”

“설마 고민 중이에요? 만날지 말지?”

“모른다니까.”

“확실히 얘길 하라고요. 왜 애매하게 말해서 사람을 빡치게 하는데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잖아.”

“그럼 지금 당장 생각해봐요. 만날 건지 말 건지.”

준영이 정색하고 쳐다봤다. 너 또라이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애인 있는 놈도 만나주고, 한 번 갔다 온 놈도 만나주고, 왜 나만 안 만나주는데!”

도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준영이 인상을 확 구겼다. 애인 있는 건 속여서 모르고 만난 거고 한 번 갔다 온 놈은


지금 만날 생각조차 없는데 왜 헛다리를 짚고 와서 지랄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를 꾹 물면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니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내가 뭐가 그렇게 부담스러운데요? 부모님이 아는 사이라? 그럼 내가 호적 파고 나올게.”

“야, 인마.”

“솔직히 우리 엄마도 내가 형한테 목매는 거 다 알아요. 형이 안 받아주니까 그런 거지. 둘이 사귄다고 해도


별말 안 할걸. 양쪽 집안끼리 너무 사이가 좋으니 그게 문제지, 그거 빼면 우리 문제 될 게 없다니까.
객관적으로 형이 봐도 나 괜찮지 않아요? 어리고, 키도 크고, 능력도 좋고, 잘생겼고, 부자에다, 또.”

“3 초 만에 싸고.”

그 말에 도하가 입을 벌린 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지고 자세도 쭈그러졌다.

“…몇 번을 말해요. 내가 그때는 너무 어렸다니까.”

“어, 알겠어. 네 말 무슨 뜻인지 아니까 그만 올라가. 나 진짜 피곤해. 어제도 너 때문에 잠 설쳤고, 오늘도
너 병원 데려가느라 쉬지도 못했어.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그냥 챙겨야 할
동생이란 뜻이야. 내 애인이 아니라.”

“애인하면서… 챙기면 되잖아.”

“그럴 마음이 안 생겨. 됐지?”

“그럼 키스할 때 눈은 왜 감았어!”

도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번엔 준영이 당황해서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새벽에는 잠깐 분위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긴 했는데. 어느 틈에 그걸 봤네. 망할 놈. 인상을 쓰고 그런 적 없다고 발뺌을 하자 도하가
눈초리를 위로 올린다.

“거짓말쟁이. 혀도 내밀다 말았으면서.”

“이게….”
“입은 거짓말해도 혀는 거짓말 안 하거든요.”

“다물어.”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기회를 줘요, 이혼남 쭉정이한테도 주는 기회를 왜 나한텐 안 주냐고!”

이건 돌림노래도 아니고, 왜 똑같은 노래를 계속 반복하는 건지 모르겠다. 준영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도하를 보니 낮에 한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고 최대한 안정을…
지금 보니 입이 더 올라간 거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나랑도 해요.”

“뭘.”

“섹스.”

“…….”

“몇 번 해서도 형이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땐 나도 그만할게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필요하다면요.”

“너만 상처받아.”

“이제 와서 왜 배려하는 척해요? 어차피 지금까지 존나게 받아서 더 받을 것도 없어요. 내 속은 이미 예전에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서 걸레가 됐다니까.”

하아. 준영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하와 30 분 정도 대화한 거 같은데 10 년은 팍삭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10 년 뒤면 이 녀석은 기껏해야 33 살인가. 43 에 33 이라. 지금과는 또 다른 느낌이겠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하가 소파에서 내려와 준영의 손을 붙들고 꼭 움켜쥔다. 준영이 더는 뿌리치지
않고 그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제발요. 나한테도 기회 좀 줘요. 응? 내가 진짜 잘할게. 힘내서.”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바라봤다. 뭘 잘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표정에 비장함과 간절함, 애절함이 아주
골고루 섞여 볼만했다. 심란한 마음에 손을 빼내려고 했더니 꽉 쥔 채 놓지를 않는다. 여전히 저를 보면서 이젠
눈까지 벌겋게 변하기 시작한다.
“뭐야, 인마. 얼굴이 왜 그래?”

도하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코를 훌쩍 들이마신다. 후우, 심호흡하는데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준영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 뻔뻔하게 굴더니 갑자기 왜 이래.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고개를 돌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입술을 꾹 깨문다.

준영이 할 말을 잃은 채 도하를 불렀다.

“…야. 이도하.”

고개를 드는데 보니 눈 주위가 빨갛게 짓물렀다. 당혹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눈만 끔벅거리고 보는데
도하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을 잇는다.

“제발요. 부탁 좀 할게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

“형이 자꾸 밀어내기만 하니까 내가 더 그런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혹시 알아요? 몇 번 자고 나서 생각했던


거랑 다르면… 형한테 마음이 뜰지…?”

준영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하가 무슨 심정으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


오죽하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도하가 눈을 꾹 감는다. 한숨처럼 ‘제발요.’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해서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쓰고 바락바락 대드는 게 낫지. 준영이 후우,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생각해볼게.”

도하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그의 눈빛에 잠시 이채가 감돌더니 사라진다. 준영이 자포자기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요?”
“당장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해본다고.”

“…그게 어디예요. 형. 고마워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 만약 하게 된다면 섹스 방식은 내가 정해. 거기에 못 따라오면 그걸로 넌 아웃이야.
나한테 더 질척거리지 마.”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도하가 잠시 멍청한 표정을 했다. 섹스 방식이라니. 설마 셋이 하자거나, 여럿이 기차놀이
같은 거 하자는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늘이며 ‘설마 셋?’이라고 했더니 준영이 인상을 구긴다. 도하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둘이만 하는 거면 난 뭐든 상관없어. 형이 내 콧구멍에 좆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받아줄 수 있어.”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약속 꼭 지켜.”

“네, 서준영 씨.”

그러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도하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하는 건가 싶어서.”

“하긴 뭘 해 인마. 강이건 올 때 됐다니까.”

아. 도하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 전까지 빨갛던 눈 주위는 어느새 말끔하게 정돈됐다. 그걸 보는
준영이 미심쩍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미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하가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날짜 정해서 알려줘요.”

“알았어. 가. 기운 빠져.”

“네. 그럴게요.”

그러겠다고 해놓고서 도하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준영이 그 시선을 받아치며
‘왜?’라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더니 또 일어서려다 말고 빤히 쳐다본다.
“왜.”

“어차피 생각해보기로 한 거 키스만 오늘 한 번 하면 안 돼요? 아니면 뽀뽀라도.”

“가라. 그냥. 없던 일로 하기 전에.”

네. 도하가 얼른 일어서더니 현관 쪽으로 두세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본다. 준영이 마중 나가는 것도 포기한 채


얼른 가라고 손짓을 했다. 제발 좀 가라. 응? 그냥 가. 그때 도하가 몸을 돌려 후다닥 오더니 찡그린 준영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준영이 밀어낼 틈도 없이 쪽, 하고 입술 도장을 찍더니 잽싸게 현관으로 후다닥 튀어 나간다. 새벽엔 선수처럼
키스하더니 지금은 부끄러움 많은 십 대 소녀처럼 굴었다. 저 새끼 인격장애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는데 도하가 현관 앞에서 운동화를 신으며 생긋 웃는다.

“잘 자요, 준영 씨.”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도하가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현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울 것
같은 얼굴과 조금 전 본 웃는 얼굴이 겹쳐지며 속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진짜 돌겠다. 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로 끄응, 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 * *

이건이 노트에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미처 다 하지 못해 그것을 하는 중이었는데


누군가 제 어깨를 탁하고 짚는다. 돌아보니 태경이 이를 한껏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이건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까닥 옆으로 한다.

“잠깐 보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무슨 할 말?”

“여기서 할 건 아니고. 잠깐 나와.”

태경을 중심으로 무리가 둘러싸고 이건을 먹잇감처럼 쳐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어휴. 이건이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을 대충 정리하고 의자까지 밀어 넣은 후 그들을 따라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니 아이들이 옆으로 흩어지며 이건을 바라봤다. 평소에 태경이 한 번씩 이건을 건드려 왔기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따라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 옥상이었다.

철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이건을 중심으로 뒤따라온 무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뭐하자는 거야 이게. 이건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태경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이건에게 다가온다. 치익, 불을 붙이고 후우, 하고 연기를
내뱉으니 콧속으로 매운 냄새가 확 밀려온다.

이건이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다. 아, 냄새.

“강이건. 너 김유나랑 학원 같이 다닌다며.”

어? 이건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제 길에서 부르는 걸 모르는 척 그냥 가 버려서 그것 때문에 또


시비 걸 작정인가 했는데 갑자기 김유나가 튀어나온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나 싶어 쳐다보는데 그가 반쯤
태운 담배를 옆으로 튕겨 버렸다.

“딴 건 아니고, 내가 걔한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네가 자리 한번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뭐?”

“아니. 만들어줘. 이번 주 토요일. 괜찮지?”

이건이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박태경이 저를 부른 건 다름 아닌 김유나 때문이었다. 근데 제가 알기에


박태경은 여자 친구가 있는 걸로 아는데. 것도 우리 학교 다니는 3 학년 누나랑 사귀는 걸로.

“…너 여자 친구 있잖아.”

“헤어졌어. 토요일 5 시 어때?”

“그건 좀 곤란해.”

“뭐. 왜.”

“나는 그런 얘기 할 정도로 유나랑 친하지도 않고, 일단 제일 중요한 게 유나 의견인데 물어봐야 하잖아.”

“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시발 놈아. 네가 노력 좀 해달라고.”

이건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가뜩이나 유나가 저와 학원을 같이 가자고 하고 학원에서도 퍽 친한 척을 하는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미련곰탱이에 둔탱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대하는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원을 같이 가는 것도 관둬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태경이 이런 부탁을 해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네가 직접 해. 난 그러기 싫어.”

“하. 이 새끼 봐라?”

툭, 태경이 이건의 어깨를 뒤로 밀쳤고, 이건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야, 강이건. 내가 부탁하니까 진짜 부탁처럼 들려? 씨발, 똥오줌 못 가리네? 내가 자리를 만들라면, 만드는
거고, 까라면 까는 거지. 좆밥 같은 새끼가 어디서 싫다 좋다 말대답을 해. 응?”

툭, 뒤로 밀려나던 이건의 등이 창고 벽에 닿았다. 태경이 벽을 손으로 짚으며 죽일듯한 눈으로 이건을 노려봤다.
저와 키와 체격이 비슷한 강이건을 이런 식으로 욕보이는 건 제힘을 과시하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다.
게다가 자신이 전부터 찍어뒀던 김유나가 저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면서 강이건한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말했다. 토요일 5 시.”

“나는 분명히 싫다고 했어.”

“이 씨발!”

태경이 이건의 멱살을 잡으며 주먹을 드는 순간 쾅, 바로 옆 창고 문이 열렸다. 아이들이 흠칫 놀라 쳐다보는데


거기서 3 학년 선배인 곽상윤이 나온다. 그는 소위 노는 무리 중에서도 꽤 알력행사를 하는 인물이었다.

잡고 있던 멱살을 놓으며 태경이 엉거주춤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형.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박태경이 잘나가는 집 아들이라고 해도, 선배는 선배였다. 상윤이 몰려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씨발, 새끼들. 존나 시끄럽네, 진짜. 여기가 니들 안마당이냐. 딴 데 가서 놀아 개새끼들아.”

그가 바지를 추켜올리며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다른 쪽으로 간다. 턱, 그리고 뒤이어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이젠 그리로 쏠렸다. 이건의 눈이 커졌다. 조용한 창고 안에서 연우가 점퍼를 입으면서
나오는 중이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귀까지 빨개졌지만, 표정만은 시큰둥했다. 이건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묻는 얼굴로.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연우가 그런 이건의 시선을
외면하더니 곧 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난 분명히 얘기했다. 강이건. 토요일 5 시다. 내 말 안 들으면 후회할 테니 두고 봐.”

이건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사라지는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거기서 3 학년 선배랑
있었을까. 담배라면 밖에서 얼마든지 피웠을 텐데. 왜 나오면서 점퍼를 입었을까. 입술을 왜 훔쳤을까. 목덜미며
귀며 왜 그렇게 빨개져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한데 뒤엉켜 머리를 어지럽혔다. 노려보던 태경이 ‘야, 이 새끼야’ 하고 어깨를 탁,


쳤지만 이건은 고개를 돌렸을 뿐 도무지 지금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CH 7.

달칵, 마우스를 클릭하자 노트북에 화면이 재생됐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뤄진 남자가 제 반 토막만 한 남자를
침대에 반으로 접고서 무지막지하게 애널을 쑤셔대는 영상이었다. 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섹스가 아니라 고문처럼 보였다. 다음 영상을 클릭하니 무릎에 엎어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린다.
무릎에 올라가 있던 남자가 대디, 대디,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걸 보고서 도하가 인상을 더 구겼다. 아버지한테
말 안 들어서 혼나는 건가.

서준영한테 대디라고 부르는 저를 상상해 보니 소름이 끼쳤다. 가뜩이나 나이 차가 나서 그것 때문에 저를 더


밀어내는데, 대디라고 부르면 아마 제 모가질 뜯어 버릴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조금 전 애널을 미친 듯
박아대던 그 커플이었다. 얘네, 뭐야.

몇 개를 더 살펴봤지만 영 마음에 끌리는 게 없었다. 창을 다 닫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곰곰이 생각했다. 여태


서준영과 상상 속에서 한 섹스를 따져보면 수백 수천 건은 될 것이다. 몽정하던 그때부터였으니까 한 10 년
됐으려나.

서당개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상상 섹스 10 년인데 씨발 실전에서 못하면 그게 등신이지. 나가 죽어야지. 짝짝,
뺨을 치며 기운을 북돋아 준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마을엔
어둠이 찾아왔다.

그래, 지금이야. 두꺼운 점퍼를 꺼내 입고 한의사의 당부대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어쨌든 섹스할 때 비웃는
것처럼 보이면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도 모자라 목도리로 칭칭 감고 나서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습관처럼 2 층 문 앞에 서서 잠깐 귀를 한 번 기울이고 나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빌라를 나와 논두렁을 걷는데 기온이 더 내려간 건지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바람이 매서웠다.

그대로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나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 논두렁을 걷다가 마을 중간에 있는
500 년 묵은 보호수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그 앞엔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이 있었다.

도하가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나서 허리를 숙였다.
“나무님, 나무님. 저번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남은 인생을 제가 아주 착하고 성실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서준영이 이번에 저한테 넘어와서 저
없으면 못 살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고사를 지낼 때 많이 쓰는 시루떡이었다. 도하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나서 시루떡을 나무 아래로 슬쩍 밀어 넣었다. 마치 금품청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태였다.

“제 성의입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부탁만 들어주시면,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요.”

눈을 꼭 감고 한 번 더 빌고 나서 몸을 돌리다 그만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언제 왔는지 이건이 저 멀리 서서


저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망해진 도하가 슬쩍 옆으로 움직여 발로 떡을 가렸다.

“뭐, 뭐야, 인마! 놀랬잖아.”

“…거기서… 뭐 하세요?”

“그냥 산책하다 잠깐 지나가는 길이었어.”

“아니던데….”

“아니긴 뭘 아니야. 얼른 가, 이 자식아.”

“그게 아니라 저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이상한 사람은 무슨. 근데 너는 왜 집도 아닌데 이쪽으로 가?”

“친구네 잠깐 들르려고요.”

“알았어. 가, 얼른.”

“형은 안 가세요?”

“갈 거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꺼져.”

이건이 무안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나무에다 대고 막 손을 빌면서 뭘 했던 거 같은데. 혹시 입이


돌아가면서 머리도 살짝 돈 게 아닐까. 잠시 걱정이 됐다. 내일 선생님한테라도 말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흘깃 돌아보니 도하가 다시 손을 비비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이건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졌다.

“진짜… 맛 간 거 아니야.”
* * *

“그만 좀 해요. 좀! 애 잡겠네, 진짜!”

연우네 집이 가까워질수록 소리도 가까워졌다. 이건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대문 쪽으로 뛰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연우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그가 입은 옷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연우에게 사줬던 그 점퍼였다.

그리고 젖은 바닥에 넝마처럼 뒹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연우였다. 옆집에 사는 조씨 아줌마가 연우 아버지를


붙들고 떼어놓는 중이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녀로선 황소같이 날뛰는 연우 아버지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가 다시 한번 엎드려 있는 연우를 향해 발길질을 날리는 순간 이건이 얼른 가서 연우를 감싸 안았다. 등에 발이


퍽, 하고 꽂혔지만, 점퍼가 두꺼운 탓인지 아니면 원래 맷집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만큼 아프진 않았다.

“연우. 일어나 봐. 응?”

연우를 일으켜 세우는데, 얼굴이며 옷이며 진흙 바닥에 굴러 엉망진창이었다.

“이건아! 얼른 데리고 가, 얼른.”

조씨 아줌마가 다급하게 소리쳤고, 연우 아버지의 목소리는 뭉개지면서도 서슬 퍼렜다.

“이 새끼, 너 이리 안 와? 방금 뭐라고 했어, 이 호로 새끼야! 이리 와. 네 소원대로 오늘 아주 죽여줄


테니까!”

독기 어린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뒤늦게 나온 앞집 강씨 할머니가 연우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어휴, 세상에. 망할 놈. 애를 허구한 날 잡네, 잡아. 할머니는 두 사람에게 집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연우 아버지가 강씨 할머니 댁까지 쫓아와 패악을 부릴 것 같았다. 아니라고 말한 후에 연우를
데리고 골목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연우가 그런 이건의 팔을 뿌리치고 한 발 물러선다.

“놔!”
악을 쓰면서도 몸을 휘청이는 거 보니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다. 옆으로 넘어지려는 그를 다시 붙드는데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반항했다.

“씨발, 놓으라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이건이 연우의 어깨너머를 보니 연우 아버지가 막 집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조씨 아저씨까지 나와 말리고 앞집


할머니마저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통 듣질 않았다. 이건이 다급한 마음에 연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자.”

“가긴 어딜 가, 씨발! 손잡지 말라니까!”

“아우, 진짜!”

술에 취한 연우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고 다급해진 이건이 그대로 연우를 안아 어깨에


둘러멨다. 놀란 연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가뜩이나 얻어맞느라 머리가 욱신거리는데 거꾸로 보이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어지러웠다.

그렇게 어깨에 멘 상태로 이건이 뛰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라고 욕을 하고 악을 쓰는 연우의 눈에 비틀거리며


뛰어오다 털썩 주저앉는 제 아버지가 보였다. 그럼에도 포기가 안 됐는지 그는 다시 일어나선 둘을 쫓아왔다.

이건은 논두렁길을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한 번씩 뒤를 돌아 연우 아버지를 살폈다. 저 멀리 오는 걸 보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빌라 입구까지 와서 돌아보니 더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입구 앞 평상에 누군가가 휴대폰을 보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도하였다.


언제 왔지. 아까 나무 앞에서 뭘 하고 있더니. 그가 돌아보다가 이건이 어깨에 둘러메고 온 걸 보고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그건. 시체야?”

그제야 이건의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내려달라고!

“아니네. 살았네.”
이건이 연우를 내려놓자마자 정강이로 발길질이 날아든다. 씨발, 병신, 찐따 새끼. 왜 업고 지랄이냐고 악을
쓰는 소리가 빌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인상을 쓰던 도하가 2 층을 올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불이
꺼져 있던 준영의 집에 불이 들어온다. 오오, 자고 있었는데 깼나 보다.

이건이 소리 지르지 말라며 연우의 입을 막으려 하자 도하가 말리고 나섰다.

“놔둬, 새꺄. 사람이 소리도 지르고 그러는 거지. 응? 강이건 친구. 더 질러. 실컷 질러.”

악을 쓰던 연우가 그런 도하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씨발. 뭐야. 그걸 보는 도하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생겨났다.

“와. 눈깔 봐. 완전 살아 있는데?”

“형, 하지 마세요. 얘가 지금 좀 아파요.”

“응. 아파 보여. 어디서 존나 처맞았네. 되게 아프겠다.”

씨발. 왜 자꾸 비웃는데! 연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자 도하가 양손을 올리면서 싱긋
웃었다.

“연우야. 오해야. 그건 이 형이 비웃는 게 아니라 얼굴에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래, 들었지?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말아 줄래? 형이 되게 털털해 보여도 곱게 자라서 내 몸에 손대면


질색하거든.”

병신들. 연우가 이건과 도하를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 그대로 가려 했다. 하지만 이건은 끝까지 연우의 손을
붙들고 늘어지며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연우와 가지 말라고 말리는 이건 사이에서
도하는 턱을 받치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출입구 문이 열리며 준영이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다.

“이 시간에 너네 뭐 하는 거야.”

준영의 시선이 도하를 지나쳐 이건에게 닿았다가 그리고 엉망진창인 몰골의 연우에게 머문다. 옷은 진흙투성이에
엉망이었고,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짝 독이 오른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고슴도치를 연상시켰다. 가까이
오기만 해봐. 누구든 찔러 버릴 거야.
“선생님. 죄송해요. 친구 데려왔는데, 금방 들어갈 거예요.”

“어딜 들어가?”

“네? 아. 저희 집에요.”

“그런 모습으로?”

“…예전에도 자주 왔어서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오늘 너희 누나네 식구도 오지 않았어?”

이건이 한 대 맞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춘천 시내에 사는 큰누나네가 한


번씩 오는데 저번에 가져가지 못한 김장김치를 가져간다고 오늘 매형과 아이들을 데리고 오후에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우가 손을 빼려 한다. 하지만 이건은 그 손을 놓지 않고 더 힘을 주어 잡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할 새도 없이 준영이 말을 꺼냈다.

“우리 집에서 재우든지. 어차피 방은 남으니까.”

준영의 말에 이건이 눈을 크게 떴다. 놀라기는 도하도 마찬가지였다. 듣고 있던 연우가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됐어요. 싫어요.”

이번엔 도하가 소리쳤다.

“나도 싫어요!”

“이도하 너는 빠지고, 이름이 연우던가. 이건인 네 친구 데리고 따라와.”

이건이 입술을 슬쩍 깨물며 도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돼요?”
준영이 더는 말하기 싫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고, 이건이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씩씩대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악다구니를 써대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제 손을 꽉 쥐고 있는 이건의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때 도하가 이건과 연우를 막아섰다. 앞서가던 준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도하가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홱 던진다. 이건이 엉겁결에 받아 들고 보니 카드 키였다. 이걸 왜.

“야. 우리 집 가서 자, 우리 집. 어차피 비는 건 마찬가지니까 상관없지?”

안쪽에 있던 준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오려 하길래 도하가 몸을 돌려 잽싸게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뭐야? 쟤네 왜 안 들어와?”

“우리 집 키 줬어요. 거기서 자라고.”

“뭐?”

도하가 준영의 등을 슬며시 떠밀었다.

“우리 준영 씨,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요. 한참 어린 애들한테 같이 자자고 하면 좋다고 하겠어요? 가뜩이나


애새끼 성격도 존나 삐뚤어진 거 같은데.”

“너, 이거 놔. 또 무슨 수작 부리려고 이래?”

“에헤이. 사람의 베푸는 마음을 수작으로 매도하다뇨. 얼른 올라가요. 애들 불편하게 하지 말고요.”

준영이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듣고 보니 저보다 도하네 집이 편하긴 할 거 같았다. 어쨌든 저는 나이 차이도
꽤 나고 하니 부담스러울 수 있지 않겠는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럼 그러라며 몸을 돌려 집 쪽으로 올라오는데 도하가 이건에게 뭐라고 얘기한 후 쫄래쫄래


계단을 따라 올라온다. 3 층으로 가려는 건가 싶어 놔뒀더니 준영의 집 앞에서 멈춰 서서 가만히 서 있는다.
준영이 돌아보며 물었다.

“넌 왜 안 올라가?”

“난 여기서 자야죠.”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네가 재운다며.”


“언제 내가 재운다고 했어요. 내 집에서 재운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

“달라요. 그리고 나는.”

도하가 괜히 아무도 없는데도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최대한 준영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형,
말고는 아무랑도 안 자요.’라고 속삭이니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냉큼 고개를 뒤로 떼어내고 나서
질색하는 표정을 했더니 도하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요. 나 추워요.”

“올라가라, 그냥.”

“진짜 이럴래요? 그냥 재워달라는 건데 너무하네. 내가 뭐 한다고 했어요. 혼자 과민반응이야.”

“하아.”

“그냥 밑에서 잘게요, 아님 소파서 자든가.”

“…….”

“얼른 문 좀 열어줘요. 추운 데 있었더니 입술이 다시 저릿저릿해요.”

준영이 곧 포기하고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려 카드 키를 가져다 대는데 도하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문이 열리며 환한 불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보는 도하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바로
천국의 불빛 아니던가.

* * *

연우가 씻고 나오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제 옷을 내려다봤다. 강이건이 집에서 옷을 가져다주었는데 제 누나가


입던 꽃무늬 트레이닝복을 가져온 것이다. 신경질을 냈더니 자기건 너무 커서 이게 나을 거라고 한마디 보태
사람을 더 열 받게 만들었다. 강이건 작은누나의 키가 176cm 인 걸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건은 방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봤더니 집에서 가져온 건지 구급상자를 열고 약을 고르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을 굳힌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반면 이건은 연우의 얼굴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깐 흙투성이라 몰랐는데 연우의 눈두덩에 멍이 시퍼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마 저 옷 속으로 보이지 않는 곳은 더할 테지. 그런 생각을 하니 명치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얼른 와서 앉아. 약 바르게.”

“됐어. 약은 무슨.”

퉁명스럽게 대답한 연우가 머리를 털어 말렸다. 방 안을 둘러보니 이 빌라와는 어울리지 않게 호화로운 방이었다.
대충 걸려 있는 옷들도 가구들도 한쪽에 아무렇게 벗어둔 손목시계도 그렇고. 그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이건이 옷자락을 툭 잡아당긴다.

“약 바르자.”

그 손을 툭 쳐내고선 침대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존나 꿈이 의사세요? 왜 이렇게 약 바르는 거에 집착해?”

연우는 푹신한 침대에 앉아 몇 번 엉덩이를 튕기고 비싸 보이는 침구를 손으로 만지면서 무심한 얼굴로 이건에게
물었다.

“야. 강이건 여기 집주인은 뭐 하는 사람이냐. 다 비싸 보이는 것들만 있네.”

그 말에 이건이 방 안을 둘러봤다. 처음 들어온 도하의 집은 제집과 같은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시골의 작은 빌라를 TV 에서 나오는 집처럼 꾸며놓은 걸 보고 입이 벌어졌다. 배우라서 돈이
많은가. 하지만 그는 직업과는 상관없이 잘 사는 집 아들처럼 보이긴 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존나 부잔가 보네.”

근데 침대는 이게 뭐야. 어차피 부자면 침대도 큰 거 놓지. 연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이건의 까만 머리통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건은 집에 뭐가 있는지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약을 찾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이거 바르면 되는
건가. 갑자기 이건이 앉은 채로 몸을 돌렸고 연우는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이건이 연고를 면봉에 짜서 연우의 손을 끌어왔다. 연우가 그 손을 뿌리치며 짜증을 냈다.


“아 됐다고. 넌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흉 지니까 바르라고.”

“됐다고. 새꺄. 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고 지랄이야.”

그 말에 이건이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학교에선 쪽팔리니까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지랄지랄한 게 누군데. 어휴,
말을 말자. 대충 밴드를 꺼내 손에 붙여 주고 나서 이번엔 연고를 손끝에 찍어 발랐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니 연우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뺀다.

“뭐 하냐, 자꾸.”

“안 바른다고 했잖아.”

“그 얼굴로 학교 갈래?”

“냅둬, 씨발.”

아오. 진짜. 이건이 몸을 일으키며 연우의 턱을 한 손으로 붙들었다. 하지 말라며 얼굴을 흔드는데도 손힘이
얼마나 센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건이 그런 연우를 빤히 쳐다보며 손끝에 묻어 있던 멍 빠지는 연고를 살살
문질렀다.

“아파?”

“…아니.”

“왜 귀가 빨게.”

이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그 커다란 손을 팍 쳐내더니 침대 위로 냉큼 올라간다. 이건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뭐야. 기껏 연고 발라주고 있는데. 하여튼 성질머리 하난 더럽다니까. 손에 남아 있던 연고를 휴지에
닦고 나서 구급함에 남은 것들을 집어넣었다.

“다른 데 아픈 데나 까진 데 있으면 말해. 더 발라줄게.”

“…됐어. 꺼져.”

이건이 머리를 흔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몰라 구급함을 창가 쪽 작은 테이블 옆에 올려놓는데 거기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1. 풀어준다. 2. 넣는다. 3. 흔든다.’라고 적힌 걸 보고 눈을 가늘게 늘였다.
도하가 적은 건가. 글씨는 또 되게 반듯하네. 근데 이게 뭐지. 무슨 요리 순서 같기도 하고. 뒷장을 봤지만,
딱히 적혀 있는 게 없다. 그걸 제자리에 놓고 나서 보니 벽 쪽으로 돌아누운 연우의 뒷모습이 보인다.

전보다 많이 말랐네. 아주 어릴 땐 조금 통통하고 귀여웠던 거 같은데. 얼굴도 뽀얘서 찹쌀떡 같고. 속상한
마음에 발밑에 있던 이불을 끌고 와서 허리춤까지 덮어줬다.

“간다. 잘 자.”

문을 열고 한 발 밖으로 나가는데 연우가 강이건, 하고 부른다. 이건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여전히 벽을
보고 누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는데 잠시 후 연우의 눅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창고에서 뭐 했는지 왜 안 물어?”

“…뭐?”

“아까 존나 궁금한 표정이었잖아. 왜 안 물어보냐고.”

이건이 눈을 깜박이며 대꾸하지 않았다. 바지를 추켜올리던 3 학년 선배와 입술을 문지르던 연우. 그리고
친구들이 떠들던 소리들. 그 모든 게 뒤엉키며 머릿속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묻지 마.

“자, 얼른. 내일 아침에 밥 가져다줄게.”

“너도 자지 빨아줄까?”

“…….”

“원하면 말해. 넌 돈 안 받고 해줄게. 저번에 준 것도 있으니까.”

이건이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송연우가 저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욕을 하며 정신 차리라고 한 대 때려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잘
알아듣도록 말로 타일러야 하는 건지.

지금 상태론 둘 다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자라…. 아침에 보자.”

그 한마디를 뱉고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병신 새끼.’라고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건이 연고를 발라주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연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지만 적어도 구급함이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 * *

도하가 욕조 난간을 양팔로 잡고 엎드리며 팔을 굽혔다 펴며 입으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풀어주고,


넣어주고, 흔들고, 풀어주고, 넣어주고, 흔들고. 어느 정도 되었을 때 동작을 멈추고 습기로 인해 뿌옇게 변해
버린 거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선명하게 자리 잡은 탄탄한 복근들을 보며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생겨났다. 아, 얼굴만 괜찮았으면 딱인데. 하필
중요한 시기에 입이 돌아가서. 그러고선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나무님. 나무님 이렇게 소원을 빨리
들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런 다음 후우,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혼잣말을 중얼댔다. 풀어주고, 넣어주고, 흔들고, 그래 이것만 기억하면


돼. 긴장할 거 없어. 쫄 거 없어. 설마 어릴 때처럼 넣지도 못하고 싸진 않겠지. 자위할 때 보면 아랫도리가
부실한 건 분명 아닌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수건 아래 감춰진 제 성기를 슬슬 달래듯 어루만져줬다.

“너 힘내야 해. 예전처럼 또 그러면 진짜 형아한테 혼난다. 몸에서 확 분리시켜 버릴 거야.”

아니면 서준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별 방법을 다 고심한 끝에 심호흡하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데 보니 준영이 거실에 막 이불을 펴는 중이었다. 도하가 멈칫하고 나서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뭐 해요?”

“보면 몰라? 너 이불 펴주잖아. 밑에 까는 게 마땅치를 않네. 불편할 거 같으면 소파에서 자.”

“나 침대에서 잘 건데.”

“침대는 싱글이야. 설마 나더러 밖에서 자란 거야?”

“무슨 말씀. 서준영 씨랑 같이 자겠단 소리죠.”

그 말에 준영이 대놓고 인상을 쓴다. 어쩐지 이건의 친구에게 제집을 선뜻 내준 것부터가 수상했다.

도하는 어릴 적부터 가족이든 누구든 제 물건에 손대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학교에 입학해선 그것 때문에 종종
친구들과 트러블이 발생했다. 한 번은 제 필통을 자주 만진다는 친구의 손을 연필로 찔러서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이러지 마.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그게 오늘이라고 하진 않았어.”

“대체 그 생각은 언제까지 할 건데요.”

“조만간?”

아, 진짜. 이건이 짜증을 내자 준영이 어깨를 으쓱하곤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하가 수건으로 아래만
가린 채로 베개를 챙겨 이불을 끌고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막 침대에 누우려던 준영이 보고선 인상을 구겼다.

“왜 들어와.”

“안 해요. 그냥 여기서 자기만 할게요.”

“안 돼. 나가.”

“누가 뭐 한다고 했어요. 그냥 밑에서 잔다고요.”

침대 밑에 이불을 까니 준영이 한마디 더 하려다 관두었다. 대신 옷이나 입으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순간, 도하가
두르고 있던 수건을 확 걷어낸다. 발기할 대로 발기한 녀석이 위로 휘청 튀어 올랐다. 준영이 놀라 입을 벌리고
붕어처럼 빠끔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야, 이 미친.”

그 말에 도하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원래 다 벗고 자요. 옷 입고 자면 숨이 막혀서 죽을 거 같거든요.”

그러더니 바로 눕고 나서 이불을 배에만 덮는다. 혼자서 꺼덕이는 성기를 보며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노려봤다.
뭐 벗고 자건 입고 자건 자기네 집이면 상관없지만 여긴 제집이지 않은가. 어서 입으라고 한마디 더 하는데도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게 불이나 끄라며 투덜거린다. 확 쫓아내 버릴까 했지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더
우스울 것 같았다. 이도하가 노리는 게 그걸지도 모르고.

불을 끄고 나서 수면 등을 켰다. 그리고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 누웠다.

“너 침대로 올라오면 진짜 죽는다.”


“손만 걸치는 것도 안 돼요?”

“안 돼.”

“다리도?”

“안 돼.”

“좆도?”

준영이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야 이 새끼야. 네 좆이 그렇게 커? 하고 보니 녀석이 홀딱 벗은 채로 누워


있는데, 굵고 두껍고. 크긴 크다. 씨발. 언제 저렇게 컸냐. 홱 이불을 덮으며 돌아누우니 등 뒤에서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았어요. 안 할게요. 자요. 미안해요.”

“나 잘 때 내 얼굴 보면서 딸쳐도 죽는다.”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고마워요, 알려줘서.”

“닥치고 자라.”

“알았어요. 걱정 말고 자요.”

준영이 벽에 바라보는 채로 눈을 감았다. 밑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곧 정적이 찾아온다. 눈을


감고 있는데 조금 전 보았던 도하의 알몸이 갑자기 떠올라서 눈이 번쩍 떠졌다. 괜히 눈을 벅벅 문질렀다.

서준영 오래 굶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정신 차려. 한숨을 쉬고 나서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조용한 가운데
새근새근 도하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애처럼 조르고 징징거리더니 정말 자나 보네. 궁금한 마음에 침대 끝으로
몸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까완 달리 이불을 덮고 몸을 옆으로 해서 자는 모습은 어릴 적과 많이 닮아 있었다. 비슷한 자세로 누워 그


얼굴을 감상했다. 눈 감고 있는 게 더 예쁘네. 그냥 귀여운 동생으로 남으면 안 될까, 도하야.

잠시 옛 생각에 옅은 웃음을 짓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저를 쳐다본다. 아, 깜짝이야. 놀란 준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너 안 잤어?”

“잠이 오겠어요?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는데.”

“그냥… 옛 생각 나서 봤어. 너 어릴 때 생각나서.”

“맞다. 그때 형이 우리 집에서 가끔 자면, 나 안아주고 토닥토닥 해주고 그랬는데.”


준영이 픽 웃었다. 어릴 적 맹랑한 꼬마였던 도하도 무서운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귀신이었다. 같이 자는
날이면 얼마나 제 품으로 파고드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꼭 안아줬던 거 같은데. 근데 왜 저렇게 징그럽게
자라서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도하를 쳐다봤다.

“자.”

“그때처럼 토닥여주면 안 돼요? 여기.”

손으로 콕 찍어 여기라고 말하며 제 성기를 툭 건드린다. 농담하는 목소리에 잠이 섞여 있으니 가뜩이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더 야릇하게 느껴졌다.

“나가서 잘래?”

“미안해요. 잘 자요.”

저를 보고 씩 웃는데 목 가운데 울대가 움직인다. 그 옆으로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를 보고 준영이 얼굴을
문질렀다. 미쳤나. 왜 거길 의식해. 괜히 짜증이 솟아올라 그럼 자라고 해놓고 다시 몸을 돌리는데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형.”

이번엔 돌아보지 않았다.

“…왜.”

“다음엔 우리 진짜 안고 자요.”

준영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보챔도 투덜거림도 들리지 않았지만, 괜히 기분이 뒤숭숭해져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침대 끝으로 가 도하가 자나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릴 적 보았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싶어선지 아니면 다른 모습인지. 이젠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 * *
몸을 뒤척이던 준영이 눈꺼풀을 스르르 올려 떴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 시였다. 새벽까지 잠을
설쳤더니 알람 맞춘 것도 못 들었군. 부스스 일어나 바닥을 보니 어젯밤 도하가 깔아두었던 이불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갔나 싶어 방을 둘러보는데 방 밖에서 무언가 툭닥툭닥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도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트레이닝복 바지 하나만 덜렁 입은 채, 도마에
무언가를 썰고 있었다. 집 안은 오래간만에 맡아 보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인기척을 느낀 도하가 뒤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안녕. 일어났어요?”

“뭐 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뚝배기에서 국이 끓는 중이었다. 슬쩍 보니 어디서 났는지


조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도하는 양파를 써는 중이었다. 그 옆에 잘 다져놓은 김치와 파도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집에 재료가 별로 없어서. 일단 있는 걸로 만들려고요. 김치볶음밥 괜찮죠? 냉동실에 조개 있길래 그걸로 국


끓이는 중이에요.”

준영이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이미 준영은 따라 나와 살고 있었는데 그때 한 번씩


제집에 놀러 오면 요리를 해줬다. 신기한 마음에 어디서 봤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다 나온다고
말했었다.

준영은 워낙 요리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도하가 그런 것들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이
기특하면서도 신기했었다.

“요리하는 건 좋은데… 왜 옷을 다 벗고 있어?”

“불 앞에 있으니까 더워서요.”

“그러다 기름 튀면 따갑다.”

“별걱정을. 얼른 가서 씻고 와요. 내가 맛있게 차려놓을게요.”

도하가 볶음용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나서 채소를 집어넣고 볶기 시작했고, 준영이 다시 안방 쪽으로 가다
위층을 쳐다봤다. 조용하네. 강이건은 일어나서 학교에 잘 갔으려나. 연우라고 했던가. 얻어맞아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은 어릴 적 모친에게서 방치되다시피 자라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침대 위쪽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준영이 그쪽으로 가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김민석이라고 찍힌
세 글자에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내가 자는데 깨운 건 아니지?]

“아냐. 일어나 있었어. 무슨 일이야?”

얼마 전 서울에 올라가 방송국에서 알던 선배 하나를 만났는데, 그가 각 분야의 의사들이 출연해 고민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형외과 의사 한 명이 부족한데 지금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란 말에 민석을 소개해 줬었다.

다행히 그는 인물도 언변도 괜찮았고 방송이 나간 직후 꽤 화제가 됐다고 했다. 선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따로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전에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있었잖아. 아침에 출근하다 보니까 문을 닫았더라.]

“카페?”

[응. 영화관 바로 앞에 있는, 네가 커피 맛있다고 좋아하던 그 집 말이야.]

아아,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라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민석과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영화를 한 번씩 볼
때마다 밥을 먹고 들르던 곳이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였는데 커피가 다른 곳보다 맛있어서 자주 찾아갔었다.
가끔 진한 커피가 당기는 날이면 한 번씩 생각나곤 했는데.

[막상 가게가 사라진 걸 보니 아쉽더라고. 우리 추억도 그렇게 사라지는 건가 해서.]

추억. 준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석은 요즘 들어 연락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니, 도하가 그를 찾아간
다음부터 더 많아진 것 같다. 준영이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가 이렇게 옛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준영은
어색해졌다.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누구 하나 나쁜 감정으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그렇게


이별이 찾아왔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랬는데 그는 이제 와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물론 맛있는 커피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쉬운 듯한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도하의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집어
의자에 걸어두는데 스킨 향이 진하게 난다. 베이비로션 냄새 풍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 녀석이 스킨을
썼더라.

“미안. 나 오전에 어디 가야 해서…. 준비해야 돼.”

[어디?]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민석에게 도하가 이곳에 왔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냐며 나중에 또 통화하자고, 아쉬운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준영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씻으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왔는지 도하가 한 손에 부엌칼을, 한 손에 파를 들고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인마!”

도하가 칼날로 파를 툭 건드렸다.

“파가 많길래 좀 다듬어 두려고요. 얼른 나와요. 밥 다 해놨어요.”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서 욕실로 들어왔다. 혹시 통화하는 거 들었으려나. 들으면 또 어때. 저랑 나랑 무슨


사이도 아닌데.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냐. 괜히 그딴 약속은 해 가지고. 세면대에 물을 틀고 푸, 푸, 세수하고
나서 물기를 닦은 후 밖으로 나왔다.

2 인용 식탁으로 가서 의자를 끌어내던 준영이 멈칫했다. 접시에 볶음밥이 담겨 있는데 모양이 하트다. 것도
모자라 케첩으로 작은 하트까지 위에 만들었다.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내 앉던 도하가 준영의 표정을 살폈다.

“감동했어요?”

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저를 들고서 하트의 정 가운데를 반으로 쫙 갈라 버렸더니 도하의 표정이 대번
일그러진다.

“그걸 왜 갈라요!”
“갈라야 밥을 먹지….”

“아니 옆에서 조금씩 떼어먹으면 되잖아요….”

“내가 지금 새 모이 먹냐? 떼먹긴 뭘 떼먹어.”

“그래도 하필 왜 거길 갈라? 불길하게.”

도하가 손을 뻗더니 제 수저로 밥을 옆으로 밀어 갈라진 하트를 이어 붙인다. 툭툭 두드려 마무리까지 한 다음


하트 아래쪽을 가리켜다. 여기서부터 먹으라고요, 여기서. 준영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수저로
마지못해 그쪽에서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모양은 그래도 맛은 꽤 좋았다.

“국도 먹어요. 시원해요.”

이번엔 모시조개 국물을 떠서 먹었다. 도하의 말대로 시원했다. 누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는 게 꽤 오랜만이었다.

“맛이 어때요?”

“…괜찮아.”

다행이다. 도하가 웃더니 저는 우유를 따라 마신다. 준영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너는? 밥 안 먹어?”

“쌀이 없어요. 그게 다예요.”

아. 준영이 수저를 든 채로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밥해 먹은 지 오래여서 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그 와중에 채소는 어디서 찾아냈나 보네. 대파는 이건이가 저번에 잔뜩 가져다준 걸 테고. 괜히 혼자
먹는 게 미안해져서 접시를 도하 쪽으로 밀었다.

“같이 먹어. 자.”

“됐어요. 서준영 씨 볶음밥 좋아하잖아요. 많이 먹어요.”

“아냐. 같이 먹어.”

“그거 먹으면 나 죽어요.”


“왜.”

“거기 새우 들어갔잖아요.”

아. 준영이 접시에 담긴 밥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칵테일 새우도 들어가 있네. 이건 또 어디서 난거지.
냉동실에 자신이 모르는 게 대체 얼마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잠시 도하가 어릴 적부터 새우를 못
먹는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괜히 미안해져서는 접시를 제 쪽으로 쓱 끌고 왔다.

“그럼 새우 빼고 하지.”

“서준영 씨는 새우 좋아하잖아요.”

“내가 무슨 새우를 좋아해.”

민망해서 한 소린데 도하가 웃기지 말라며 준영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손까지 꼽아가며 읊기 시작한다.

“서준영이 좋아하는 것들은 복숭아, 포도, 수박, 멜론, 새우, 장어, 불고기, 카레, 그리고 또….”

“그만해.”

“보라색, 가을, 숫자 3, 커피랑 허브티, 꽃차, 독립영화, 뮤지컬, 클래식, 박정원 작가, 아, 진짜 많네.
나만 빼고 다 좋아하는 것 같아.”

“너는 왜 빼.”

“넣어도 돼요?”

“…….”

준영이 대답하지 않자 도하가 입술을 씰룩였다. 저것 봐 꼭 중요한 순간에는 말을 안 하지.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내가 어릴 땐 거기에 나도 들어가 있었어요? 형이 좋아하는 것들에.”

“…응.”

“몇 번째로?”
“앞쪽에.”

“근데 왜 빠져나왔을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손으론 우유가 든 머그잔을 쉴 새 없이 만지작댔다. 준영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컵을 챙긴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준영 앞에 놓아주었다.

“물도 마셔요.”

“원하면 다시 넣어줄게. 맨 뒤도 괜찮다면.”

하지만 도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냥 궁금했었는데, 저번에 형이 한 말 들으니 조금 이해도 됐어요. 커서 변해 버린 내가 부담스럽고


무섭고, 그 기분… 솔직히 나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그럼 그렇구나 생각할게요. 하지만 난 새우나
포도 같은 존재로 형 옆에 있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그럼?”

“걔들은 없어도 살지만, 나는 그런 건 싫거든요. 서준영이 나 없으면 못 살 만큼 그렇게 만들어야지. 이제


나한테도 기회가 왔으니까.”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도하가 얼른
밥이나 먹으라며 접시를 더 민다. 준영이 수저를 들어 하트의 가운데를 다시 가르려고 하니 도하가 형! 하고
소리를 높인다. 어휴, 할 수 없이 끝에서 한 입 떠 제 입으로 가져가니 맞은편에서 만족한 듯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준영이 프라이팬에 채소와 고기를 넣고 볶다가 뒤를 돌아봤다. 도하가 식탁에 앉아 발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자고 있는데 도하가 놀러 온 것이다. 엄마도 없이 혼자 왔길래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평창동 할머니 댁에 갔고, 저는 수영을 끝내고 기사 아저씨를 졸라서 여기로 놀러
왔다고 했다.

집안의 막내인 도하는 커갈수록 공부보단 운동을 좋아했다. 그래서 도하의 부모님은 아들 좋다는 것을 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골프를 그다음엔 테니스를 이젠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침 일하는 아주머니도 외출을 나갔고 준영은 오랜만에 본 도하를 위해 직접 볶음밥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 대충 재료들을 조합해서 썰어 넣고 이제 막 밥만 넣으면 될 차례였다.

“도하 수영 재미있어?”

식탁에 앉아 준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서 시선이 준영의 목에 자꾸


머물렀다. 검은색 목폴라를 입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목과 옷의 경계로 빨간 자국이 보였기 때문이다.

“형 모기 물렸어?”

“어?”

“목에 모기 물렸어?”

아. 준영이 잠시 당황하는 얼굴을 하더니 목 부분을 손으로 감싸고 어,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보며 도하는 겨울에도 모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준영의 얼굴이 어딘지 빨갛다고 느꼈지만 불 앞에서
요리해 그런 거라고 여겼다.

준영이 다 만들어진 볶음밥을 접시에 덜고 있는데 2 층에서 민주가 내려오다 도하를 보고 인상을 찡그린다. 어릴
적 도하를 유독 잘 따르고 좋아하더니 언젠가부터 둘은 앙숙이 됐다.

“도하 오빠, 우리 집에 왜 왔어?”

“못난아.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준영이 형 보러 온 거지.”

민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도하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빠 나도 볶음밥 줘.”

“응. 우리 민주 것도 당연히 있어.”

헤헤. 민주가 준영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걸 보고서 도하의 눈에선 아까부터 레이저가 나오는 중이었다. 어릴
적엔 서민주가 부러웠다. 몸이 바뀌어서 서민주 대신 자신이 이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면
서준영과 맨날 볼 수 있으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엔 민주가 싫어졌다. 거기다 준영을 잘 따르고
애교까지 많아 애정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미움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거는 도하. 이건 민주.”

각자 볶음밥을 건네받은 두 사람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수저를 집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고만고만한 녀석


둘이 합창하듯 인사를 하니 준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민주는 손 닦았어?”

아, 민주가 제 손에 묻은 물감을 보고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조금 전까지 그림을 그리다 와서 손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의자에서 내려와 화장실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도하가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봤다.

“바보.”

“도하, 너. 그럼 못써.”

도하가 입을 삐죽 내밀고 밥을 한 입 떴다.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며 먹는 모습을 보고 준영이 어떠냐고 물었다.
도하가 웃더니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엄청 맛있어. 형 최고. 그러더니 또 밥을 크게 한 입 떠서 먹는다.

“천천히 먹어. 여기 물.”

“형 요리사 해도 될 것 같아.”

“진짜 그 정도야? 처음 만든 건데.”

“응. 나는 형이 만들어준 건 다 좋아. 진짜로.”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조금 뒤 도착한 민주가 자리에 와서 앉더니 수저를 든다. 준영이
민주를 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청 맛있다고 했으니 민주도 좋아하려나.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먹은 민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윽.

준영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이상해?

“오빠….”

“왜? 돌 같은 거 들었어?”

“이거 짜. 엄청 짜.”
으윽. 민주가 우는 얼굴을 하더니 입을 가리고 화장실 쪽으로 뛰어간다. 준영이 당황한 얼굴로 민주의 밥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곧바로 그는 민주와 같은 표정이 됐다. 아까 간을 볼 때 싱겁길래 소금을 많이 넣었더니….

어제 과음한 탓에 미각을 잃은 것인가. 입에 있던 밥을 손에 뱉어 버리고는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밥을 떠먹고 있었다. 그 접시를 빼앗으니 도하가 인상을 찌푸린다.

“왜.”

“도하야, 먹지 마. 짜잖아.”

“난 괜찮은데?”

“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먹어도 짠대.”

도하가 접시를 붙들고 버텼다. 난 괜찮아. 먹을 거야.

“먹지 말라니까.”

결국 접시를 빼앗아 싱크대 쪽으로 가져갔다. 어우, 이런 걸 애를 먹였으니. 자신을 탓하며 뭐 다른 걸 해줘야
하나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뒤에 앉아 있던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형.”

“왜?”

“혀 내밀어 봐.”

뜬금없는 부탁에 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혀를 내밀라니. 어릴 적 도하에게 혀를 내밀라고 하고 손으로
콕 찍던 장난을 친 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도하가 그냥 한번 내밀어
보라고 재촉한다.

준영이 아무 생각 없이 혀를 쭉 내밀었다. 도하가 더, 계속, 이라고 말해서 끝까지 내밀었더니 아아, 하고


이상한 탄식을 내뱉었다. 준영이 혀를 집어넣고 ‘왜?’ 하고 물으니 도하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형은 키스 잘하겠다.”
준영은 잘못 들었나 싶어 ‘뭐?’ 하고 다시 물었다.

“키스. 상욱이가 그러는데 혀가 길면 키스도 잘한대.”

준영이 입술을 뻐금뻐금 붕어처럼 움직였다. 도하가 11 살이니까 뭐 키스를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자신도 과외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니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않는가. 하지만 마냥 아기 같던 도하한테서 키스란 말을
직접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복잡한 와중에 도하가 한마디 덧붙였다.

“형이랑 키스할 사람… 부럽다.”

보통 또래 남자애들이라면 키스해봤느냐고 묻고, 그냥 부럽다고 하지 않나. 형이랑 키스할 사람이 부럽다는 건…


무슨 뜻이지. 준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데 도하가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수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혀로
슥 핥는다.

“나 크면 형이랑 키스할래.”

* * *

[나 크면 형이랑 키스할래.]

그 말을 떠올린 준영이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때 알아보고 싹을 확 잘랐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하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오전에 침 맞으러 한의원 가는 길이었는데 준영이 같이
가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까지 엄청 들들 볶은 건 사실이지만.

“그때 볶음밥 억지로 먹을 때부터 이상했어.”

“억지로라뇨. 난 진짜 맛있었다니까요. 내가 살면서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서준영 씨가 나한테 처음


해준 볶음밥. 그것도 다른 남자랑 뒹굴고 와서.”

준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도하가 커서도 몇 번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준영의 목 아래쪽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고. 그게 뭔지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됐다고. 그래서 그 볶음밥 먹던 날이 유독 기억난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볶음밥 보면 이상하게 눈물 나려고 하더라. 누구 때문에.”

“아침에도 울면서 만들었어?”

“짰죠? 그거 소금 아니고 내 눈물이야.”

준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시커멓게 가라앉은 걸 보니 뭐가 오긴 올 모양이었다.


눈 많이 오면 돌아올 때 힘든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데 제 손등에 따뜻한 온기가 포개진다. 고개를
돌려봤더니 도하가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한 손으로 제 손을 붙들어왔다.

“너 운전 제대로 해.”

“걱정 말아요. 다치게 안 해.”

그러더니 뭐가 즐거운지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른다. 준영이 그런 도하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릴 적 제게
볶음밥이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들고 아양을 떨던 그 꼬맹이의 모습이 어딘가 남아 있을까 해서.

이목구비는 비슷해서 그대로인데 더 단단해진 턱 선과 그 아래로 가운데 튀어나온 목울대는 전에 없던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느라 살짝살짝 움직이는 그것을 보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손을 슥 빼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손 줘요.”

“그냥 가. 손에서 땀나.”

그러지 말고. 도하가 손을 다시 뻗어 준영의 손을 끌어왔다. 꼭 쥔 채로 힘을 주는 바람에 준영이 빼내려고 해도


이젠 빼낼 수가 없었다. 더 투닥거리기 싫어 밖을 내다보는데 우려했던 대로 눈발이 날린다.

눈이다! 걱정하는 저와는 달리 도하는 아이처럼 좋아한다. 그걸 보니 옛 생각이 났다. 도하가 눈 오는 날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시절이. 눈사람을 만들 때 꼭 제 것과 준영의 것을 같이 만들어 붙여 놓던 일,
민주가 만든 눈사람을 발로 차서 울렸던 일, 그리고 스키 타러 가서 구르는 바람에 다리뼈에 금이 갔던 일,
한동안 다친 다리를 하고도 저를 찾아왔던 일.

그러다 문득 운전대를 잡은 도하의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맨날 차고 있던 메탈 소재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너 시계는?”
“아, 집 안에 빼뒀는데 안 보여서. 있겠지, 뭐. 그나저나 눈이 많이 오려나 본대요.”

도하의 말대로 조금씩 오던 눈은 어느새 하얗게 보일 정도로 내리는 중이었다. 와, 경치 끝내준다. 도하는
감탄했지만, 준영은 어쩐지 돌아올 일이 걱정됐다. 병원은 내일 가고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서 돌아가자고 할까
싶었지만, 도하의 들뜬 얼굴을 보니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 * *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연우가 점퍼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만지작댔다. 눈빛은 불안한


듯 이리저리 움직였고 다리는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니 눈이 펑펑 내리는
중이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질겅질겅 씹으며 마음을 좀 달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강이건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관두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와 2-4 반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에 있던 아이들이 저를 힐긋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교실


뒷문에 서서 안쪽을 보니 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씨발, 어디 간 거야.

혹시나 하고 뒷자리에 있던 아이에게 물으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몸을 홱 돌리는데 영훈과 우진이 앞에
서서 당황한 얼굴로 저를 쳐다본다. 중학교 때까지 꽤 친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선 사이가 서먹해져
있었다.

“송연우. 어쩐 일이냐. 우리 반엔.”

“강이건한테 할 말 있어서.”

“이건이? 별일이네. 걔 지금 미술실.”

옆에 있던 우진이 툭 친다. 그걸 왜 말해 새꺄. 분위기를 보니 어쩐지 이상하다. 연우가 둘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 지나쳐 제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서 그걸 왜 말하느냐, 어쩌느냐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가려던 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계단 쪽을 바라봤다. 미술실은 아래층 제일 구석진 곳에 있었다. 거길
강이건이 왜 갔을까. 주머니에서 손을 꼼지락대다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데 박태경 무리가 올라오는 게
보인다. 연우를 보더니 태경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야, 송연우, 어디 가. 또 옥상 가냐?”

“닥쳐, 씨발 새끼야.”
“개새끼, 상윤 형 믿고 요즘 존나 기어오른다?”

연우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나서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위쪽에서 태경이 많이 컸다고 비죽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이러고 나서도 학교 끝나면 당구장이든 노래방이든 몰려다니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복도 끝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이젠 하얗게 뒤덮여 아침에 봤던


그 풍경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저벅저벅. 천천히 미술실 앞쪽으로 가서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그러다 우뚝 걸음이 멈췄다. 안에 있는 사람은 강이건 혼자가 아니었다. 김유나도


함께였다. 강이건이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 위에 뭘 그리니 유나가 고개를 젓더니 그 손을 잡아 선을 그려준다.

연우가 턱을 움직이며 껌을 씹었다. 푸우, 풍선을 만들었다가 퍽 터져 버렸다.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었다.

“씨발. 존나 바퀴벌레 같네.”

쿵, 미술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서 몸을 홱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송연우!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마구 뛰어올라 제 교실로 들어갔다. 눈은 하염없이 쏟아져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덮어
버릴 것 같았다.

제 자리에 주저앉으며 점퍼 안에 넣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연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좆같다. 그냥 모든 게 다 좆같았다. 눈에 다 파묻혀 버렸으면 좋겠다. 저도,
허구한 날 폭력을 행사하는 제 아버지도. 그리고 이 좆같은 감정도.

<1 권 끝. 다음권에 계속>

CH 8.

도하가 뺨을 문지르며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마침 웬 나이 많은 할머니가 가뜩이나 하얀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덮고서 병원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준영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밖을 보니 전화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진료비를 수납하고 나서 한쪽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이도하 님. 여기 카드랑 영수증이요.”

계산을 마친 간호사가 혹시… 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도하가 네? 하고 되묻자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


아니에요. 아무것도.’라고 대답했다. 설마 연예인이 여기 와서 침 맞을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것도 입이
돌아가서.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준영이 전화를 끊고 막 담배를 비벼 끄는 중이었다.

“통화 다 끝났어요?”

“응.”

“누구?”

“엄마. 눈 많이 오니까 걱정돼서 전화하셨어.”

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진료를 마치고 치료실로 가기 직전 제 모친에게도 연락이 왔었다.
눈이 많이 오는데 거긴 괜찮으냐고. 전국적으로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설마 두 분이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서울에서 보는 눈과 여기서 보는 눈은 꽤 차이가 있었다. 일단 높다란 건물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탓인지 눈이 쌓이는 게 그대로 보이니 체감하는 것부터 차이가 났다. 눈을 왜 쏟아진다고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엄청나다, 진짜.”

도하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차 뒤 트렁크에서 커다란 우산을 꺼내왔다. 그것을 펼치고 나서 준영에게로
다가갔다.

“이리 와요, 밥 먹으러 가게.”

“걸어서?”

“근처에 주차할 데 없다면서요. 같이 걸어요.”

“눈 더 쌓이면 집에 가기도 힘들어. 가자.”

집에 가기 힘들다는 말에 도하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요오. 나는 좋은데?”

“눈이 많이 와서 좋다고?”

“당연하죠. 그럼 뭐겠어요.”

도하가 슬쩍 웃었다. 설마 눈이겠어요. 집에 안 가는 게 좋다는 거지. 이렇게 버티다 집에 못 가면 어디


호텔이나 그런데 가야지. 이 동넨 호텔 없나. 아니면 어디 모텔이라도.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잠잘 만한 곳을
찾으려 했지만 도통 보이는 게 없었다.

괜히 모텔 물어봤다간 지금 당장 집으로 가자고 할 게 뻔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준영의 팔을 잡아끌어 제 우산


속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리 와요, 얼른. 준영이 마지못해 그 속으로 들어갔다. 뽀드득뽀드득 걸을 때마다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저녁 뭐 먹죠? 형 좋아하는 고기 먹으러 갈까요? 아니면 일식?”

“그냥 가.”

“왜요, 밥 먹고 가지.”

“네가 몰라서 그래. 여기 눈 한번 오면 장난 아니야. 우리 동네 쪽은 제설도 잘 안 된단 말이야.”

진짜요? 이러다 이박삼일 집에도 못 가고 둘이서 지내는 거 아냐. 도하가 입가에 스며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면서 저런, 하는 얼굴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무조건 외박인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 좀
하고 올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잘 만한 곳이 있나 두리번거리는데 저쪽에 일식집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가서
싱싱한 회에 따끈한 사케를 한잔 걸친 후에.

“흐흐.”

“뭐야, 왜 웃어?”

“눈 오니까 좋아서요. 아직 나는 동심이 남아 있나 봐요.”

도하가 기어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준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괜히 켕기는
마음에 얼른 일식집 쪽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먹어요. 따뜻한 탕이랑 회도 먹고. 형 좋아하는 사케도 한잔하고.”


“차 끌고 왔는데, 무슨 술을 먹어.”

“누가 내가 먹는다고 했어요. 형 먹으라고요. 나는 안 먹어요.”

“너 수상해.”

“뭐가요.”

“왜 자꾸 나 술 먹으라고 해?”

“형이 술 좋아하니까.”

“그게 다야?”

“다겠어요?”

“뭐?”

“아니. 다라고요. 말이 헛나왔어요. 일단 가요. 아우 배고프다.”

도하가 준영의 등을 가볍게 떠밀다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와요. 계속 눈 맞잖아요.”

“괜찮아. 비도 아니고.”

손을 떼어내고 먼저 앞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도하가 가자미눈을 하고 째려봤다. 하여튼 틈을 안 주네. 입을


씰룩거리는데 준영이 갑자기 홱 돌아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도하의
목에 둘러준다. 입 부분을 꼼꼼하게 가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깜박했다. 너 얼굴에 바람 쐬면 안 되는데.”

아. 도하가 감동 받은 얼굴로 준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자상할 수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오늘은
무조건 호텔 가겠구나. 여기다 술까지 한잔 걸치면 끝나는 거다.

“형.”

“응?”

“사케 많이 마셔요.”
“뭐? 왜?”

“추울 땐 사케니까.”

생긋 웃고 어서 가자며 준영의 어깨를 슬쩍 붙들었다. 준영이 미심쩍게 쳐다보는 것도 잠시 둘은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일식당 안은 한산하기만 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종업원이 와서 메뉴판을
건네준다.

도하가 그것을 펼쳐 준영에게 건네주고 나서 외투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냈다. 준영이 메뉴를 고르는 동안
호텔을 검색하는데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근처에 호텔이 있긴 했다. 앗싸, 여기 가야지. 콘돔이랑 젤도 사야
하나. 차에 미리 사둘걸. 근데 괜히 혼자서 헛물켜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어젯밤 곱게 재워준 것도 그렇고,
올 때 차에서 분위기도 그렇고, 확실히 많이 풀어지긴 했단 말이야.

갖은 상상을 하며 호텔 위치를 재확인하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받지 않으니 끊어졌다가 다시 울린다. 앞에 앉은 준영까지 신경 쓰는 눈치였기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이도하 씨 휴대폰 맞습니까?]

“예 맞는데요. 누구세요.”

[여기 춘천 파출솝니다. 도난사건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도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 무슨 사건이요?

그때 마침 맞은편에 앉은 준영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은 준영이 어, 이건아. 대답하는 사이 전화를


받는 도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 * *

이건이 파출소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눈은 이미 그쳤고, 춥지 않은 날씨 탓인지 바닥은


어느새 엉망이 됐다.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비비며 다시 준영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데, 안으로 검은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점퍼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고 나서 그쪽으로 부랴부랴 갔다. 차가 한쪽에 주차되고 나서
보조석에서 준영이 먼저 내렸다.

“선생님.”

“어, 건아. 너 왜 여기 있어? 집에 안 갔어?”


“…네, 걱정돼서요.”

이건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탁, 그때 운전석에서 도하가 내렸다. 이건이 쳐다보다 흠칫 몸을 떨었다.
도하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니 뒷목이 서늘해졌다. 도하가 오면 죄송하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저라도 빌 작정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지금 빌었다간 두들겨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해보는 데까진 해봐야겠기에 얼른 도하에게로 가서는 앞을
가로막았다.

“도하 형. 진짜 죄송해요. 연우가 나쁜 애는 아니에요. 정말 나쁜 애는 아닌데요….”

“입 닥치고, 비켜.”

도하가 이건을 옆으로 밀치고 나서 성큼성큼 파출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이 하얗게 질려 준영을
쳐다봤다. 딱 봐도 열 받은 거 같은데. 준영이 괜찮다며 이건의 어깨를 다독였다.

일식집에서 메뉴를 시키기도 전에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도하는 제 시계가 없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처음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다음엔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오는 길에 길바닥에 있는 눈을 다 녹여 버릴
기세였다.

“우리도 들어가자.”

“…네.”

이건을 데리고 파출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연우가 앉아 있었고, 지금 막 들어선 도하는 경찰과
대화 중이었다. 경찰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길 연우가 그 시계를 금은방에서 팔려고 했다고 했다.

금은방 주인은 처음에 보고 그 시계가 짝퉁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 진품인 걸 확인하고 슬쩍 떠봤단다. 200
만 원이면 되겠느냐고. 예상보다 비싼 금액에 놀랐는지 연우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고했단다. 그 열 배는 족히 더 나가는 시계를 200 만 원에 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백화점 쪽에 알아봤더니 이게 VVIP 용으로 한정 수량만 들여왔다고 하더라고요. 시리얼 번호 다 확인했고,


그래서 이도하 씨한테 연락드렸습니다. 본인 시계, 맞나요?”

경찰이 도하의 시계를 넘겨줬다. 도하가 그 시계를 내려다보고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풀어놓고 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생쥐 같은 놈이 물고 달아났네. 아니, 달아난 거까진 좋다 이 말이야, 뭐 그럴 수 있어. 근데 하필 그게
왜 오늘이야. 호텔까지 다 알아보고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왜 하필… 이를 까드득 갈면서 눈을 부라리며
연우를 노려보니 연우가 흠칫하고서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다.

“저 친구 말로는 아는 형이 줬다고 하는데, 준 게 맞아요?”

“아니요. 저 새끼가 훔친 겁니다.”

“일단 진정하시고요. 신분증 주시고, 여기 조서 작성해 주시면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도하가 점퍼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빼서 경찰에게 건네줬다.

“처리는 어떻게 됩니까?”

“초범이긴 하지만 도난품 가격이 워낙 세서 경찰서로 인계될 거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입장에선 아직
학생이고 하니까, 가능하시면 선처를 좀 해주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뇨.”

“네?”

“무조건 엄벌에 처해주세요.”

“아… 네.”

“사형 같은 건 못 시키죠?”

네? 경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더니 슥 몸을 앞으로 내밀어 슬쩍 냄새를 맡는다. 혹시 어디서 술 먹다 온


건가 싶은 마음에. 곧 뒤쪽에 서 있던 준영이 걸어오더니 경찰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도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잠깐 너 나랑 얘기 좀 해. 경위님, 저희 요 앞에서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와도 될까요?”

“네. 일단 그러세요.”

“무슨 얘기를요?”

도하가 버티자 준영이 도하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문 앞에 서서 죄인처럼 서 있던 이건이 도하의 눈을 얼른


피했다. 밖으로 도하를 끌고 나온 준영이 안쪽 파출소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선처해줘.”
그 말에 도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싫어요.”

“애잖아.”

“애는 무슨. 열여덟 살이면 알 거 다 알아요. 잘못했으면 사람이 책임을 져야죠.”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에요.”

“도하야.”

“싫다고 몇 번을 얘기해요. 어린놈이 벌써 싹수가 노래가지고 남 물건이나 훔치고, 경찰서나 들락거리고 말이야.
저런 건 미래가 안 봐도 뻔하다니까.”

그 말에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 나서 도하를 쳐다봤다.

“왜 그러고 쳐다봐요?”

“내가 너 때문에 경찰서 들락거린 게 몇 번인가, 세는 중이었어.”

“그거랑 달라요. 갖다 붙이지 마요.”

“뭐가 달라.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너 신고할 거야.”

“무슨 신고를 해요?”

“저번에 우리 집 왔을 때 내 팬티 훔쳐 갔잖아.”

하… 하하. 도하가 입만 벌리고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끝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실은 입 돌아간
날 준영의 집에서 팬티 한 장을 훔쳐 나오긴 했다.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너무 귀엽게 생겨서. 그냥 저도
모르게 손이….

“그걸로 뭐 했어? 자위했어?”

“무스으은.”

“했구나.”
“아직 안 했어요!”

울컥해서 대답해놓고 입을 벙긋댔다. 절대도 아니고 아직 안 했다는 건 할 거라는 얘기랑 뭐가 다른가. 순간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니면 뭐로 좀 지져놓든가. 하아, 한숨을 내쉬니 준영이 한 발 더
다가와서 도하의 팔을 붙든다.

“한 번만 봐줘라. 아직 어리잖아.”

“어리다고 다 봐줘야 해요? 게다가 오늘 저 새끼 때문에 내 계획이 완전히 틀어, 어어… 아무튼. 싫어요, 안
봐줘.”

“무슨 계획?”

도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몰라도 돼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서
도하를 쳐다봤다. 어쩐지 눈 많이 오니까 좋아하던 것부터 시작해 술 먹으라고 자꾸 권하던 것도 그렇고. 혼자
실실 쪼개던 것도….

“혹시. 오늘 나랑 어디 가려고 그랬어?”

“가긴 어딜 가요….”

“호텔 뭐 그런데?”

“아아뇨오.”

“그랬구나.”

“뭘 그랬구나예요. 아니라니까.”

“말을 하지.”

“했으면.”

“갔지.”

아. 도하가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준영을 쳐다봤다. 준영이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술까지 먹여가면서
데려가느냐고 말한다. 그냥 가자고 하면 갔을 거라는 말에 도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지금 저 고삐리 새끼 빼낼라고 나한테 수 쓰는 거죠?”


“내가 왜 상관도 없는 애 때문에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

“…진짜?”

“어.”

“믿어도 돼요?”

“그렇다니까.”

“그럼 오늘…?”

“오늘은 안 돼.”

“이것 봐, 이거. 수 쓰는 거 맞다니까.”

“아니야, 인마. 너 몸도 안 좋고, 일단 입이나 나은 다음에….”

“하아. 입이 무슨 상관인데! 그걸 입으로 하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으니 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다. 도하가 한 대 맞은 얼굴로 아, 했다. 입으로도
하나. 뭐 해봤어야 알지. 씨이. 그래도 턱은 제대로 벌어져서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럼 언제요. 날짜 여기서 딱 정해요.”

“이번 주 주말.”

순간 도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바로 며칠 뒤잖아. 그렇게 빨리? 전혀 예상 못 했던 거라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예요?”

“응.”

알았어요. 약속. 도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준영이 거기에 걸어주고 도장까지 찍어준다. 일단은 달래고
구슬려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 어린 양을 빼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무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가 싶어서 일부러 오만상을 구기니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웃더니 파출소 안쪽을 향해 고갯짓한다.

“가서, 얼른 아니라고 해줘.”


도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파출소 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경찰이 이쪽으로 와서 조서를 좀 써달라고
하기에 도하가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에이, 무슨 조서예요. 아는 동생인데, 제가 장난 좀 쳤어요. 신분증 주세요.”

경찰이 네? 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도하가 연우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꾹 눌러 잡으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선우야, 인마. 너 가지라고 했더니, 그걸 왜 팔아. 하여튼 이 자식 말을 안 들어.”

연우가 질색하며 몸을 뒤로 빼는데, 경찰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이 친구 선우가 아니라 연운데요.”

“네. 그러니까 제가 연우라고 했잖아요.”

딱 봐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거 같은데, 뻔뻔하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하니 경찰이 기막힌


모양이었다.

“진짜 주신 거 맞아요?”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저희 할아버지 체면도 있는데.”

할아버지란 말에 경찰관이 슥 옆에 동료를 쳐다봤다. 아까 백화점 측과 통화를 하던 중에 이도하의 인적사항을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동료가 눈빛으로 그냥 얼른 보내라고 신호를 줬다.

“그럼 서로 오해가 있었던 거 같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송연우, 너 인마. 선물 받은 걸
그렇게 팔면 되겠어. 응?”

경찰은 다 알면서 속아주는 눈치였다.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하가 그런 연우의 뒷덜미를 낚아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일단. 넌 나가서 보자. 들리지 않게 이를 그득 갈고 나서 연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니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이건이 잽싸게 다가온다.

준영은 저 멀리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도하 형. 진짜 죄송합니다.”

이건이 몇 번이나 사과하는데도 연우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틸 뿐이었다. 그러자 이건이 연우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사과드려, 얼른. 연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듯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다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도하가 웃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어. 암, 그럴 수 있고말고. 아유, 이 귀여운 새끼들.”

입은 웃고 눈은 살벌하게 번뜩이는데 무섭다 못해 오금이 저렸다. 연우도 이건도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눈을 내리깔았다.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거리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고, 담배를 막 비벼 끈 준영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 * *

시내는 눈이 어느 정도 녹아 차량 통행에 문제가 없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산이 많아 그런지 눈이 제대로


녹지 않았고 그래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길이 미끄러우니 안심이 되질 않아 준영은 운전대를 자신이
잡았다. 시내로 나올 때 보니 도하의 운전 솜씨가 아주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제 얼굴을 쳐다보느라 이건
눈으로 운전하는 게 아니라 옆통수로 운전하는 거였다.

강이건과 송연우는 밥을 먹지 않고 돌아갔다. 정확히는 송연우가 안 먹겠다고 버텨 하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송연우를 보내기 전 준영은 그와 둘이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도하는 멀어서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연락처를 주는 건 똑똑히 목격했다.

“아까 강이건 친구한테 연락처 왜 줬어요?”

“그냥.”

“도와줄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한 건 아니죠?”


설마 해서 물었는데 준영이 대답하지 않았다. 도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번부터 자꾸
마음에 걸려 하더니, 기어코….

“밥이나 먹여서 보낼걸.”

“걔들이 우리랑 먹기 싫다잖아요. 입장 바꿔 생각해봐요, 가해자랑 피해자랑 같이 밥 먹는 게 애초에 말이 돼요?


지가 양심이 있다면 거절하는 게 맞는 거지.”

“…….”

“게다가 나이 차이도 있으니까 불편하겠죠.”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나랑 다섯 살. 형이랑 열다섯 살. 예전 같으면 형 아들뻘이네.”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준영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야. 누가 열다섯에 애를 낳아?”

“예전엔 다 그랬어요. 울 외할머니도 열여섯에 우리 엄마 낳았다고 하던데요.”

준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옛날이 아니지만 열다섯 살이란 나이가 적은 건 아니었다. 도하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도 나이에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열 살.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할 나이고, 사람의 외모도 성격도 바뀔 만큼 오랜 시간이 아닌가. 조금


심각해지는 표정을 보고서 도하가 피식 웃었다.

“걱정 말아요. 난 나이 많은 남자 엄청 좋아하니까.”

말을 말자, 말을. 준영이 어이없게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추운 데 계속 서 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히터를 쐬니 졸음이 쏟아졌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다가 그대로 손을 뺐다. 담배 피우고 싶은데. 밖을 보니
어두컴컴해서 마땅히 세울 데도 없어 보였다.

“왜요.”
“아냐, 아무것도.”

“담배 피우고 싶구나?”

어쩜 주머니만 뒤졌을 뿐인데 귀신같이 맞춘다.

“가서 피우면 돼.”

도하가 손을 준영의 코트 주머니에 뻗었다. 준영이 말릴 새도 없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가져갔다.

“뭐야, 인마.”

도하가 선루프 버튼을 누르고 나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쭈욱 빨아들이니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간다. 그것을 입가에 대주자 준영이 엉겁결에 받아 물었다.

“안 피운다니까.”

“그냥 피워요. 괜찮아.”

“너 나중에 차 냄새 뱄다고 나한테 지랄하지 마.”

“안 해. 그냥 피워. 이깟 차 얼마나 한다고.”

준영이 한쪽 눈썹을 올려 쳐다봤다. 이깟 차라니. 갑자기 담배 맛이 뚝 떨어지네. 저도 또래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지는 건 아니었다. 제 명의로 된 집도 있었고, 차도 있었고, 주식도 좀 있었고.

하지만 도하의 부는 제가 상상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제 모친이 고향 동생이라고 하여 도하의 모친과
친분이 없었다면 서로 만날 접점 같은 건 아예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방송국에서 있다 보면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으려나.

운전석 창을 열고 연기를 내뿜으니 졸음이 가시고 조금 살 것 같았다. 그 옆모습을 빤히 보던 도하가 입가에


웃음을 만들었다.

“우리 서준영 씨는 담배 피우는 것도 어쩜 그렇게 야해요?”

“너 그거 성추행이야, 인마.”
“진짜예요, 나 어릴 때 형 담배 피우는 거 보고 반해서 나도 피우기 시작했잖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준영이 인상을 찡그리고 도하를 쳐다봤다. 창가에 팔을 기대고서 몸을 완전히 이쪽으로 틀어
감상하는 모양새가 아주 볼만했다. 볼이 패도록 담배를 빨고 나서 차 안에 재떨이를 찾으니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꽁초를 밖에다 버리고 나서 창문을 닫았다.

“내가 죄인이네. 어린놈 담배나 피우게 만들고.”

“그래도 좋았어요. 그거 피울 때마다 형 생각나고. 형이랑 키스하는 기분도 들고. 다른 생각도 나고.”

“다른 생각 뭐?”

“말하면 화낼 거면서.”

“말하지 마, 그럼.”

“담배만큼 다른 것도 잘 빨까, 그런 생각?”

“이 새끼가.”

준영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쥔 채 나머지 손을 도하를 향해 뻗었다. 도하가 창가 쪽으로 몸을 웅크리며 얼른


피했다.

“너 그 정도면 병이야.”

“그러니까. 아주 중증이지.”

준영이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도하가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준영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워낙 속도가 느려서 그런지 차가 멈추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멈춘 차 앞에는 고라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사슴이다!”

도하가 소리를 질렀고 준영이 쯧 혀를 찼다.

“고라니야.”
“무슨 차이지? 근데 왜 저기 앉아 있어요?”

“다쳤나?”

준영이 비상등을 켰다. 안전띠를 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도하가 그런 준영의 팔을 붙들었다.

“나가지 마요.”

“왜.”

“공격하면 어떡해요?”

질색하는 표정을 보고 준영이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오만상을 쓰고 고라니를 무슨 외계 생물처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어릴 적 도하를 보는 거 같아 귀엽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도하는 동물을 싫어했다. 아니,
무서워했다. 저를 쫓아 동물원에 갈 때만 해도 내색하지 않아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참고 진지한 표정을 했다.

“가서 살펴볼 테니까, 갑자기 쟤가 공격하면 112 에 신고해. 알았어?”

“뭐?”

기겁하더니 안 되겠는지 제 안전띠도 같이 푼다. 뒷자리에 벗어둔 외투를 집어 들더니 같이 내리려 했다.

“넌 왜 내려.”

“쟤가 형 물면 안 되잖아요.”

“그럼 같이 내려서 볼래?”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서준영이 고라니한테 봉변을 당하면 안 되지 않겠나. 그런데
고라니가 사람도 공격하나. 사슴은 원래 순한 동물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직접 보니
크기가 제법 큰 녀석이다.

준영이 가까이 가서 살피려 하자 도하가 준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 나와 봐요. 내가 볼게.”


결국엔 준영을 제 뒤에 세워놓고 가까이 다가갔다. 빤히 저를 쳐다보는 고라니를 보니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어디 다쳤나 살피려고 고개를 약간 숙이는 순간 고라니가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순간 도하가 으악! 괴성을 지르고 뒤로 튕겨 나가 준영을 확 끌어안았다. 고라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옆 산 쪽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큭. 준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터져 버렸다.

도하가 정신을 차리고 고라니가 사라진 산 쪽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서준영을 꽉 끌어안고 매달리고
있었다. 머쓱한 마음에 팔을 놓아 버릴까 하다가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계속 끌어안고 있으니 준영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놔. 갔잖아.”

“놀라서 그래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그러면서 제 뺨을 준영의 목덜미에 은근슬쩍 문질렀다. 아, 좋다. 살결 부드러운 거 봐. 오늘 호텔에 갔어야


하는데 슬쩍 방향을 틀어 입술을 대려는데 준영이 기막히게 눈치채고 도하의 어깨를 밀어 제 몸에서 떼어낸다.

“그만해”

“조금만. 응? 놀라서 그런다니까.”

다시 매달리려 하기에 이마를 검지로 꾹 눌러 밀어냈다. 혼난다 진짜. 도하가 쯧, 혀를 차더니 곧 응석 부리던
표정을 싹 지웠다.

“놀랜 사람을 달래줄 생각은 못 하고. 매정하긴.”

“아주 틈만 나면 수작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호텔은 이미 틀렸고, 어디 산장 같은 데라도 찾아서 갈까?”

하하, 준영이 입만 위로 올려 이상한 웃음을 짓더니 정색을 하고 운전석으로 가 버린다. 도하가 입술을 씰룩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포기가 되질 않아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진짜 산장 비슷한 거라도 있나 해서.

하지만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과 달빛에 빛나는 눈밭뿐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고는 차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탔다. 준영이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 다시 느릿느릿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건이 붕어빵을 사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눈이 많이 오긴 했지만, 시내엔 거의 다 녹아 다행히


집으로 가는 덴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버스가 늦는 바람에 벌써 한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거 먹어.”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연우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도 않은 채 붕어빵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안 먹어?”

“추워서 손 빼기 싫어.”

그 말에 이건이 기막힌 표정을 했다. 이 웬수 같은 새끼. 붕어빵 하나를 빼내 입가에 대주니 또 가만히 쳐다본다.
먹어, 얼른. 재촉했더니 그제야 입을 벌렸다. 한숨을 내쉬며 입술 사이로 붕어빵을 물려 줬다.

“그러게 아까 도하 형 차 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아. 같이 밥도 먹고. 어휴.”

푸념을 늘어놓으니 연우가 붕어빵을 입에 문 채로 눈을 가자미처럼 하고 이건을 노려봤다. 그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자기가 뭘 잘했다고 성질인지. 오늘 학원에서 시험도 보는 날이었는데….

막 학원을 들어가는 중이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전화가 와선 연우가 경찰한테 끌려가더라고 알려줬다. 경찰서
가서 자초지종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괜히 제가 데려가서 재우는 바람에 그런 사고가 났나 싶어
죄책감도 들었고, 준영과 도하에게 죽을 만큼 미안했으며, 이제 갈 데까지 가는구나 연우에게 조금은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하냐. 너 도와준 사람한테.”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

뻔뻔스러운 태도에 이건이 기막힌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이 나서 붕어빵을
와구와구 뜯어 먹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대체 그걸 팔아서 뭘 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하나만 물어보자. 너 그 돈 받아서 뭐 하려고 했냐.”


“알 거 없어.”

“…아저씨 무슨 빚 같은 거 있으셔?”

“알 거 없다고 했잖아.”

“…그래, 말하지 마. 평생을 말하지 마.”

성질이 나서 두 번째 붕어빵을 와락 베어 무는데 누군가 이건의 어깨를 잡으며, 워!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건이
화들짝 놀라서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유나가 서 있었다. 빨간색 목도리를 하고 핑크색 털장갑을 끼고서.

“강이건 여기서 뭐 해. 너 오늘 학원 왜 안 왔어? 땡땡이야?”

“…어, 일이 좀 있어서. 이제 끝나고 가는 거야?”

응. 유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친구들이 빨리 안 오느냐고 성화다. 유나가 그들을 향해 코를
찡그리며 으휴, 하더니 이건을 향해 다시 밝게 웃는다.

“간다. 집에 가서 연락할 테니까 받아.”

어? 이건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나가 장갑 낀 손을 앙증맞게 흔들더니 친구들에게로 뛰어갔다. 그걸 보는 이건이


저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귀엽다.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송연우가 붕어빵을 입에 물고서 저를 세상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왜.”

연우의 입엔 이제 붕어빵이 없다. 먹었나 하고 봤더니 한쪽에 뱉어 버린 후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난 또 이상하게 쳐다보길래.

“쟤랑 사귀어?”
“아아니.”

“사겨. 잘 어울리네.”

운동화로 바닥을 툭툭 찍으며 이야기하는데 말투가 어찌나 빈정거리는지 모른다. 사귀긴 뭘 사귀느냐고
얼버무렸더니 매섭게 노려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왜 이래, 진짜. 혹시 김유나 좋아하나. 그래서
자꾸 짜증 내는 건가. 한번 슬쩍 물어볼까 하는데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잠깐이었지만 이건의 시선이 버스를 타기 위해 점퍼에서 빼낸 연우의 손에 닿았다. 어릴 때부터 유독 손과 입술이


잘 트더니 그건 커서도 변함이 없었다. 장갑이라도 하나 사서 끼든지 하지. 속상한 마음을 삭이며 버스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이미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차 있었다.

* * *

이건이 빌라 밖으로 나오자 옆에 있던 백설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진돗개의 이름은 백설이었는데 몸이 온통


하얘서 백설기 같다고 붙여준 이름이었다. 이 빌라에 온 지는 3 년 정도 됐는데 주로 이건이 밥을 챙겨주고
보살폈다.

바가지에 들고 온 사료를 한쪽에 붓고 밤새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게 변해 버린 물도 새 걸로 갈아줬다. 그러고


나서 안에 깔아 둔 이불이 춥진 않을까, 한번 살펴보는데 백설이 이건에게 자꾸 놀아달라고 매달리며 보챘다.

“알았어. 오빠랑 같이 산책가자.”

줄을 푸는데 녀석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라 한다. 푼 줄을 손에 쥐고서 몸을
일으키는데 출입구 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나온다. 운동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였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늘리면서 몸을 좌우로 비틀며 스트레칭을 하길래 그쪽으로 백설일 데리고 걸어갔다.

“형 일어나셨어요?”

도하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런 이건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니, 잘 못 잤어. 그러다 2 층을 한 번
올려다보며 눈을 흘겼다. 어제 오는 내내 차에서 분위기도 좋고 그래서 집에서 같이 와인이나 한잔 마시려고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돌변해서는 쌩하니 들어가 버린 것이다.

몇 번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렸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저는 집으로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연락해놓고 기다렸지만 잠들어 버린 건지 소용이 없었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연우가 원래 그런 애는 아닌데요…. 잠깐 뭐에 홀렸었나 봐요.”

“홀리긴 뭘 홀려. 친구라고 감싸주지 마. 딱 봐도 그런 애야. 싸가지도 존나 없고. 애새끼가 발랑 까져가지고.


혹시 너 걔한테 약점 잡힌 건 아니지? 어제도 보니까 설설 기더라?”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 게 아니라 연우가 사정도 좀 딱하고 해서….”

“딱하면? 남의 물건 막 훔쳐도 돼?”

“그건 당연히 아니죠. 정말 죄송합니다.”

“뭘 자꾸 네가 죄송하대. 너 걔 따까리야?”

“…아니요.”

“설마, 너… 애들한테 맞고 다니는 건 아니지?”

이건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건드리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자신이 먼저 피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대답이 없자 도하가 기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덩치가 아깝다, 인마.”

“…제가 원래 폭력을 싫어해요.”

“똥은 원래 지들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생각하지, 싫어서 피했다고 생각 안 해. 그러니까 한 번쯤은 얼마나 내가
너희를 싫어하고 있는지를 몸으로 격하게 보여주란 말이야.”

“근데요, 형. 저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고 상황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을
해서요.”

“놀고 자빠졌네. 어디 뭐 예수님 재림하셨어요?”

이건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자 쯧쯧, 도하가 혀를 차더니 걷기 시작했다. 이건도 백설이를 데리고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차가 다니는 곳은 눈이 녹았는데 논두렁은
눈이 그대로 쌓여 발이 푹푹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 진짜. 운동이고 뭐고 글렀네.”

이건이 무릎을 꿇더니 백설의 목줄을 풀었다. 그러자 백설이 눈밭을 마구 헤집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이건의 입가에도 미소가 생겨났다.
“귀여워.”

“쟤는 진돗개야?”

“네. 몇 년 전에 1 층 형이 어디서 데리고 왔어요. 그땐 완전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저렇게 컸어요. 귀엽죠?”

“별로. 난 원래 동물 그렇게 안 좋아해.”

“그럼 어떤 거 좋아하세요?”

“서.”

말을 하려던 도하가 멈칫했다.

“서?”

말해서 뭐해, 당연히 서준영이지.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이 곰 같은 녀석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뭐
생각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괜히 가서 준영에게 입을 잘못 놀리면 고스란히 제게 돌아올 게 아닌가.
가뜩이나 남들 눈에 예민한데.

“있어. 넌 말해도 몰라.”

“과외 선생님?”

어라? 곰이 재주를 부리네. 도하가 살짝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그런 도하의 표정을 보며 이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어쩐지. 저도 준영 쌤 너무 좋아요. 우리 큰 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전 누나밖에 없으니까요.”

역시 곰탱이다. 헤헤, 웃으며 너무 좋겠다고 말하는 이건을 보며 도하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니 망설일 것도 없이 술술 말을 꺼낸다.

“일단 되게 자상하시고요. 또 잘 챙겨주시고요. 아는 것도 많고, 가르쳐주는 것도 진짜 잘 가르쳐주세요. 저


그래서 등급도 올라서 우리 엄마도 샘 되게 좋아해요. 거기다가 맛있는 것도 잘 사주시고.”

“그렇게 잘해줬어?”
“네. 전에 제가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속상한 적 있었는데 그때는 샘이 엄마한테 말해서 잠도 재워주셨어요.
태블릿으로 영화도 보여주고.”

끄드득, 도하가 이를 갈았다.

“아무튼. 절 진짜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너무 좋아요.”

해맑게 웃으며 더 좋은 점이 없나 생각하던 이건이 사납게 변한 도하의 눈을 보고 흠칫 놀란다. 왜, 왜 그러지


갑자기. 몸이 안 좋은가. 찬바람 맞아서 얼굴이 더 나빠졌나. 괜찮으냐고 물을 새도 없이 도하가 먼저 몸을
돌렸다.

“간다.”

“벌써 가세요?”

“어. 집에서 뛸래. 갑자기 운동이고 나발이고 하기 싫어졌어.”

“그럼 저는 백설이 운동시키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도하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 쪽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이건이 백설이를 부르며 같이 놀아주는 소리가
들렸다. 홱 뒤돌아봤더니 눈밭에서 개랑 뛰어다니고 난리다. 다시 한번 이를 까드득 물었다. 다시 돌아가서
눈구덩이에 파묻어 버릴까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꾹 참아냈다.

* * *

준영이 몸을 뒤척였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눈이 부스스 떠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머리가
띵하고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방 밖에선 인터폰이 시끄럽게 울려 대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거운
걸음으로 나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창을 통해 확인하고 나서야 밖에 도하가 왔다는 걸 알았다.

문을 열어주니 문틈 사이로 도하의 생긋 웃는 얼굴이 보인다.

“뭐야 아침부터.”

“아침 만들었는데, 혼자 먹기 많아서 가져왔어요. 같이 먹어요.”


도하가 나무로 짠 바구니를 들어 보인다. 영화에서 보면 나들이 갈 때 들고 가던 그것과 흡사했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구해오는 걸까. 레이스가 달린 양산과 알록달록한 피크닉 담요까지 가져오지 왜.

어젯밤 집에 도착해서 같이 와인 먹자고 조르는 걸 컨디션도 좋지 않고 해서 올려 보냈는데, 기어코 아침부터


찾아온 걸 보니 기가 찼다. 문을 열어주는데 갑자기 재채기가 난다.

그걸 보는 도하의 눈이 커졌다.

“감기 걸렸어요?”

“…몸살 기운이 좀 있어.”

“그래서 우리 준영 씨가 어제 나 못 들어오게 했구나? 감기 걸릴까 봐. 나 그런 것도 모르고 서운해했잖아요.”

감동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길래 준영이 코웃음을 쳤다.

“찍어 붙이지 마. 그건 그냥 들여보내 주기 싫었던 거고.”

흥. 도하가 바구니를 식탁에 놓으면서 저를 안 들여보내 줘서 그런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준영의 안색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을 쒀 올 걸 그랬나. 일단 먹이고 병원을 데려가야겠다.

바구니에서 나온 건 샌드위치였다. 단호박을 쪄서 으깬 다음 거기에 견과류를 또 으깨서 섞은 거였다. 단호박은


이건의 아버지가 쪄먹으라고 두 개 가져다준 걸 활용했다.

준영이 다가와선 도하가 꺼내놓은 것들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했다.

“사 왔어?”

“만들었죠.”

“이걸 어떻게 만들어?”

“사랑의 힘으로.”

그러면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준영에게 내민다. 하나만 먹어봐요. 준영이 그것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따 먹을게. 나 지금 머리도 아파. 목도 다 부었고.”

“아플 때일수록 잘 먹어야 돼요. 약은 있어요?”


“어, 저번에 먹던 약 있어.”

“어디? 봐요.”

준영이 눈짓으로 식탁 위에 있는 약봉지를 가리켰다. 도하가 그것을 들고 살피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조제


날짜를 보니 반년도 더 된 약이었다.

“이걸 먹었어요?”

“응. 새벽에.”

“날짜가 6 개월 전인데?”

“괜찮아. 감기 증상이야 다 똑같은데 뭐. 게다가 어차피 밀봉되어있잖아.”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니 준영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지르길래 가까이 다가가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동자가 위로 굴러가며 그런 도하의 손을 주시했다.

“열나?”

“아니요. 근데 얼굴은 좀 꺼칠해 보여요.”

이마에 있던 손을 움직여 뺨으로 내려가니 얼른 고개를 뒤로 빼서 피한다. 도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손을 내리고 나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한쪽에 정리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먹는 건 힘들어 보였다.

“옷 입고 나와요. 병원 가게.”

“귀찮아. 게다가 약 먹었으니 됐어. 너 한의원이나 다녀와.”

그러지 말고 가요. 붙잡을 새도 없이 준영이 침대가 있는 안방 쪽으로 들어간다. 아이참. 뒤따라갔더니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져서는 이불을 끌어다 덮고 눕는다. 도하가 곁으로 가서 들여다보니 만사 다 귀찮은 표정이었다.

“그럼 어디 어디 아파요? 내가 약 지어올게요.”

“목도 아프고 코도 막히고, 머리도 아프고, 몸도 으슬거리고.”


준영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 보니 도하가 휴대폰을 켜고 제 목소리를 녹음하는 중이었다.

“야 그걸 못 외워서 녹음하냐. 대충 감기 증상 얘기해. 그럼 돼.”

도하가 웃으며 녹음을 마치고 나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아니라, 형 아프니까 목소리가 너무 섹시해요. 뒀다가 밤에 듣게. 혼자서.”

이 새끼가. 그거 가지고 또 뭔 짓 하려고. 준영이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관두었다.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머리를 툭, 베개에 파묻고선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다가 곧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진짜 졸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에 빠져들었다.

도하가 방바닥에 앉아 침대에 턱을 괴고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슬쩍


넘겨주는데도 미동조차 없다. 많이 아픈가. 속상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나서 약을 사러 가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 * *

이도하 님. 약사가 도하의 이름을 불렀다. 약국 한쪽에서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고르던 도하가 잠시만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약 봉투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콘돔과 젤이었다. 약사가 그걸 보며 물었다.

“같이 구매하실 건가요?”

“네. 이것도 같이 주시고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콘돔 제일 좋은 거 어떤 거예요? 껴도 안 낀 거 같고


그런 거요.”

지 딴엔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는데 작은 약국 안에 그 목소리가 안 들릴 리 없었다. 하필 소아과가 같이 딸린


건물이라 아이들 손님도 꽤 있었다.

남자 약사가 접대용 웃음을 지으며 ‘요즘은 다 잘 나와요. 이것도 괜찮고, 다른 것도 많이 사 가세요.’라고


말하자 도하가 안심한 얼굴로 흔쾌히 달라고 한다. 그러다가 박스에 적혀 있는 개수를 뒤늦게 확인했는지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3 개밖에 안 들었어요?”

“네, 손님. 저쪽에 다섯 개, 열 개 든 것도 있긴 합니다만.”

아. 도하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더니 다시 그리로 간다. 안 되는데. 열 번은 더 할 거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근처에 있던 아이의 엄마가 인상을 쓰며 아이의 귀를 틀어막았다. 도하가 콘돔 한 무더기를 들고 와선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같이 주세요. 그걸 보는 약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많이? 이 자식 어디 성매매
업소에서 나온 포주 같은 거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그때 꼬맹이 하나가 도하의 옆에서 알짱거린다. 네다섯 살 먹었으려나. 사탕을 쪽쪽거리면서 빤히 올려다보는데
눈이 왕방울만 한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동물은 싫어하지만, 애는 또 귀여워하는 도하라 아이를 보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그때 아이 엄마가 질겁을 하고 애를 데려간다. 도하가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는데 계산기를 다 두드린 약사가


말을 꺼낸다.

“모두 다 해서 127,000 입니다.”

여기요. 도하가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치고 나니 약사가 그걸 커다란 쇼핑백에 담아 주었다. 인사를 하고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다. 배고픈데 뭐라도 먹고 갈까 싶어 밥집을 찾는데 대신 꽃집이 눈에
들어온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는데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꽤 많았다. 썰렁하던 준영의
집이 생각나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꽃가게 주인이 앞치마를 두른 채 꽃 손질을 하고 있다가 도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작은 화분들을 구경하는데 꽃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도하의 눈에 주인이 들고 있는 프리지어가 보였다.
눈치 빠른 주인이 도하를 향해 꽃을 보여줬다.

“프리지어예요. 오늘 막 들어와서 싱싱해요.”

가까이 다가가서 맡으니 향이 더 진해진다. 제 기억으로 서준영이 화분이나 꽃을 싫어하진 않았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으로 데이트하러 가는 것도 꽤 봤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데이트가 저랑 한 건 아니지만.

“한 다발 주세요.”
이 정도 드리면 될까요? 사장이 손으로 한 묶음을 만들어 보인다.

“네.”

“꽃병은 있으세요?”

아. 도하가 기억을 더듬었다. 서준영 집에 꽃병이 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보질 못한 것 같다. 눈치 빠른


주인은 수완도 좋았다. 자기 가게에서 화병도 판다면서 몇 개를 보여준다. 그중에 투명한 화병이 제일 무난해
보였다.

“같이 드릴까요?”

“네. 깨지지 않게 잘 싸주세요.”

주인이 포장하는 동안 도하는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때 외투 속에 넣어둔 전화가 울렸다. 선태라고 쓴 이름을


보고 인상을 썼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가져갔다.

“형, 오랜만.”

[목소리가 아주 천하태평이구나. 난 너 때문에 똥줄이 타다 못해 말라 죽기 직전이다. 여기저기서 들볶이고


쪼이고, 내 명 못 채우고 죽으면 다 네 덕분인 줄 알아.]

그때 도하의 눈에 사장이 꽃을 정성스레 포장하는 게 보였다.

“사장님. 그냥 종이에 싸 주세요. 선물할 거 아니고 집에 꽂을 거예요.”

[너 내 말 안 듣는구나? 그리고 꽂긴 뭘 꽂아. 어디야, 지금?]

“꽃 사러 왔어. 감사합니다. 여기요.”

사장에게 카드를 건네주고 나서 계산을 마친 후 꽃과 유리 화병을 챙겨 꽃가게를 나왔다. 선태는 요즘 도하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는지 일일이 떠들어댔다. 대체 언제 올 생각이냐고 연말 시상식 전에 와야
한다고 또 그 소릴 한다.

도하가 알았다고 대충 둘러대며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제 차 뒤에 오토바이 3 대가 나란히 서 있고 5 명 정도 되는


젊은 남자애들이 차 주위에서 시시덕대는 게 보인다.

[나 또 혼자 떠드는 거니?]

“잠깐만. 끊어봐, 형.”

선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리던 무리가 도하를
쳐다본다. 그중 한 명은 교복을 입었는데, 자세히 보니 강이건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지금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닌가. 교복을 입고 대낮에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정체가 뭔지 대충 알겠다.

삑, 하고 차에서 소리가 나자 무리가 우어어 하면서 저들끼리 수선을 떤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약과 꽃, 화병을
넣고 나서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는데 툭, 앞에 무언가 떨어진다. 보니 담배꽁초였다. 고개를 들고 봤더니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한 녀석이 낄낄대고 웃었다.

“이거 형 차예요? 존나 멋있다. 이런 건 얼마 정도 해요?”

그 말을 들은 도하가 산뜻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같은 애들은 죽을 때까지 못 사. 몸뚱이에 있는 장기 다 꺼내 팔아도 안 돼.”

운전석 문을 열려는데 이번에도 담배꽁초가 날아온다. 이번엔 차에 탁, 맞고 불꽃이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도하가 이를 꾹 물었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상상이 펼쳐졌다. 팰까.

아니야. 주말까지 이틀 남았는데 오늘 사고 치면 거사는커녕 서준영한테 완전 팽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겨우


사이가 원만해졌는데, 사서 미운털을 박힐 순 없었다. 어금니를 꾹 물고 담배꽁초가 날아온 쪽을 쳐다보니 교복을
입은 그 녀석이다.

“아, 실수. 왜 거기로 날아갔지?”

뻔뻔하게 웃는 녀석을 보며 도하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괜찮아. 손가락이 병신이면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운전석 문을 열고 타는데 지들끼리 낄낄댄다. 들었냐, 졸라 센 척하는 거. 쫄아서 도망가는 거 아니야. 존나
인상은 더럽게 생겨서 별거 없네. 씨발, 차 렌트 아니야? 씨발.

도하가 문을 닫고 나서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꽉 다문 이 사이로 억눌린 숨이 샜다. 이대로 후진해서 확 다


대갈통을 밀어 버릴까. 그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안 돼. 도하야 너에겐 주말이 기다리고 있잖아.

후우, 심호흡하고 나서 보조석에 놓인 콘돔과 젤을 바라봤다.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CH 9.

몸을 뒤척이던 준영이 머리끝까지 올렸던 이불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등이며 머리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후였다. 약을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푹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안방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도하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검은색 앞치마까지 허리에 두르고서 국자를 입에 대는 중이었다.

“…뭐 해?”

도하가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돌아보며 인사했다.

“일어났어요?”

분명 아침에 왔다가 나간 거 같은데 집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준영이 의구심을 품고 쳐다보는데 도하가 가스
불을 줄이고 앞치마에 대충 손을 닦으며 준영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같았다.

“괜찮아요? 아, 속상해. 식은땀 봐.”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고 하길래 준영이 슬쩍 몸을 피했다.

“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문 열고.”

“그 말이 아니잖아. 키 없는데 어떻게 들어 왔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흔들었다. 키가 없긴 왜 없어요. 여기 있는데. 그걸
보자마자 준영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식탁 옆에 걸어둔 카드가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저건 어디선가 찾아낸
보조키가 분명했다.

“내놔.”

“왜? 내가 찾은 건데? 저 밑에서 굴러다니는 거, 형은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잖아요.”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치. 도하가 먹던 사탕을 빼앗기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서 하는 수 없이 키를 내밀었다. 준영이 그것을


챙겨 한쪽에 걸어뒀다. 식탁 위엔 못 보던 약 봉투가 있었다. 봤더니 도하가 제 이름으로 지어온 약이었다.

“죽 끓이고 있어요. 먹은 다음에, 약 먹어요.”

“…너 한의원은 갔다 왔어?”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내과에 사람이 너무 많아 한의원은 들리지 못했다. 약을 짓고 꽃을 사고 마트에


들러 전복과 쌀을 사다 보니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혹시 서준영이 깨서 혼자 아파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침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땀 많이 흘려서 찝찝할 텐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와요.”

도하가 준영의 어깨를 붙들어 안방 쪽으로 떠민다. 준영이 하는 수 없이 떠밀려 가다 말고 멈칫했다. 제 책상


위에 노란색 프리지어꽃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웬 꽃이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봤더니 도하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젓느라 정신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프리지어 냄새가
풍겨온다. 그 은은한 향을 맡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나서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 * *

“아직도 멀었어요?”

도하의 물음에 앞자리에 앉은 미정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정의 큰아들인 준영의 면회를 가는
날이었는데, 도하가 어떻게 알았는지 일주일 전부터 저와 엄마인 경혜를 조르는 바람에 결국은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반면 미정의 옆에 앉은 경혜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영이 군대 가던 날도 도하는 대성통곡을 하고 마치


애인 떠나보내는 사람처럼 울고불고 매달리더니 결국은 첫 면회까지 쫓아왔기 때문이다.

“누가 서준영 스토커 아니랄까 봐. 언니 진짜 미안해. 도하 때문에 내가 언니까지 귀찮게 하네.”

“아냐, 난 좋은데 뭘. 혼자 가려면 심심했는데 잘 됐지.”

“아직 멀었어요?”

듣고 있던 경혜가 뒷자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도하야 그만 물어. 벌써 몇 번째야.”

도하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창밖을 주시했다. 준영이 근무하는 곳은 강원도 화천이었다. 화천 시내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작은 길을 따라 차가 움직이는데 풍경이 비슷비슷해서 꼭 제자리를 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창가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제 옆에 있는 꽃다발을 쳐다봤다. 준영을 만나는 기념으로 산 것이었다. 먹을 거야
어차피 미정이 준비했으니 저는 저 나름대로 선물을 하고 싶었다.

“다 왔다.”

미정의 경쾌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차가 군부대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차를 세우자마자 도하가
꽃을 챙겨 탁구공처럼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다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입구에 군복을 입은 무표정한 사내
두 명이 지키고 서 있다가 저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아, 뭐야. 괜히 당황스러워 고개를 돌려 엄마를 찾는데 미정과 함께 싸 온 음식들을 내리는 중이었다.

“어머, 언니.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어. 누가 보면 아들 장가보내는 줄 알겠어.”

“야 그런 말 마. 우리 준영이 장가보낼 땐 이것보다 훨씬 더 해줘야지.”

“하여튼, 누가 아들 바보 아니랄까 봐.”


둘이 웃으며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도하가 제 손에 들린 꽃을 쳐다봤다. 프리지어. 꽃가게 주인은 도하에게
새빨간 장미를 권했다. 사실 그는 도하가 뭘 사든 관심 없었을 것이다. 형 군대 면회 가는데 꽃을 산다는 말에도
어처구니없어했으니까. 그땐 꽃이 아니라 꽃을 먹어치울 나이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면서, 자기라면 치킨을
사 갈 거라고 말했다.

꽃을 살펴보던 도하는 빨간 장미보단 노란색 프리지어가 준영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밝은 노란색. 따뜻한 색. 다정한 색. 서준영 그 자체이지 않은가.

꽃과 음식을 챙겨 면회장으로 가는 내내 도하는 긴장으로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어릴 적엔 준영을 오랜만에


보면 마냥 신나고 좋기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자신이 긴장하고 의식한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처럼. 심장이
평소와 달리 두근거렸다.

면회장에서 기다리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준영이 들어왔다. 생전 탈 것 같지 않던 흰 피부도 적당히 그을려


있었고 전보다 말랐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도하가 그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가서는 끌어안았다.

“혀엉!”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몸을 숙여 도하와 눈높이를 맞추고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엄마에게 온다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도하 얘긴 없었다. 깜짝 선물을 준비해갈 거라고 귀띔하길래 뭔가


궁금했는데 그게 도하였다니. 엄마의 센스에 그리고 오랜만에 본 도하가 반가워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모 오셨어요. 경혜와 제 모친인 미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하야, 이제 이모가 아들 좀 안아 봐도 될까?”

미정이 장난스럽게 묻자 도하가 머쓱하게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몇 달 만에 본 준영을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자주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군대를 보내고 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들은 제 배
속으로 낳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느냐고 했지만, 미정은 낳았든 낳지 않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안 본 새 너무 늠름해졌다. 얼굴도 좀 보자.”

그녀가 준영을 떼어내고 나서 얼굴을 살폈다.


“왜 야위었어. 많이 힘들어?”

“아니에요. 힘들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아들을 데리고 테이블에 앉혔다. 주변에는 면회 온 가족들이 꽤 있었다. 도하가 팔을 뒤로 감추고서는
준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걸 본 경혜가 준영을 불렀다.

“준영아. 도하가 너한테 줄 선물이 있대.”

선물이요? 준영이 도하를 쳐다보니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군대 오는 날 얼마나 우는지 자신이 오히려
달래주느라 혼이 났는데, 그래도 오늘은 울지 않고 웃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사이 키도 부쩍 자란 것 같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물 뭐야?’라고 물으니 도하가 감추고 있던 팔을


앞으로 짠! 하고 꺼낸다. 노란색 프리지어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예상치도 못한 선물에 준영이 눈만 깜빡였다.

“꽃… 꽃이네?”

“어, 예쁘지. 형 닮았지?”

하하. 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형 닮아서 예쁘다니. 머쓱한 기분에
제 모친과 경혜를 쳐다봤더니 그녀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 준영아. 받아줘. 그거 산다고 아침부터 꽃집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늘따라 일찍 문 여는 꽃집도
없더라.”

고마워, 도하야. 준영이 눈을 맞추며 도하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노란색 꽃 사이로 보이는 도하의
얼굴이 꽃보다 더 활짝 폈다. 꽃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니 향긋한 내음에 마음 까지 들뜨는 것 같았다.

이걸 들고 내무실로 가면 선임들에게 꽤 갈굼을 당할 것 같은 예감은 들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살면서


졸업식을 빼고 누군가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꽃다발이었다.

* * *

띵동, 이건이 준영의 집 인터폰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한 손엔 엄마가 챙겨준 오렌지와 함께 노트와
문제집이 든 가방이 들려 있었다. 도하가 오고 나서 정신이 없었고, 며칠 공부를 빼먹었더니 준영에게 어젯밤
문자가 왔다. 저번에 내준 숙제와 함께 몇 시까지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서 나온 건 준영이 아닌
도하였다.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서 있으니 도하가 저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훑는다.

“뭐야, 왜.”

“형이 왜 여기 계세요? 선생님은요.”

“준영이 형 지금 자. 공부하러 왔어?”

“…네.”

“다음에 와.”

말은 다음에 오라고 했지만 얼굴은 완전 꺼지라는 표정이다. 연우 일로 아직도 화가 많이 났나. 이건이 머쓱한
얼굴로 코끝을 한 번 문지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는데 도하가 다시
이건을 부른다.

“야 강이건.”

이건이 돌아봤다.

“그냥 들어와.”

“네? 선생님 주무신다면서요.”

도하가 잠시 생각했다. 만약 강이건을 돌려보내면 자신이 없을 때 와서 서준영이랑 둘이 수업을 할 텐데, 최대한


그런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강이건이 제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지 않나. 어릴 적 친동생 같던 자신이 서준영과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일단 들어와. 내가 봐줄게.”

네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자 도하가 눈을 부라렸다. 왜.

“아….”
이건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수학 잘하세요? 이렇게 물어봤다간 한 대 처맞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냐고 하길래 하는 수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정면에
놓인 책상에 못 보던 노란색 꽃이 보인다. 언제 사다 놓으셨지, 하고 집을 둘러보다가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너 뭐 마실래? 맥주?”

공부하러 온 놈한테 맥주를 권하는 모습에 이건이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마시겠다고
하니 도하가 맞은편 자리로 와서 의자를 끌어내 앉는다. 공부할 거 꺼내 봐.

“선생님은 어디 편찮으세요?”

이건이 문제집과 노트를 꺼내 문제집을 도하에게 건네줬다.

“응. 감기몸살 와서 약 먹고 자.”

“세상에. 괜히 그때 신경 쓰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알면 다음부턴 그런 일 만들지 마라.”

“…네.”

도하가 이건의 문제집을 펼쳤다. 이건이 손으로 제가 숙제한 부분을 짚어줬다. 45 페이지부터라고 말해주니
도하가 그곳을 펼친다. 이건이 푼 문제를 빤히 들여다보던 도하가 제 눈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다음 장을
넘겨보고, 또 다음 장을 넘겨보더니 혀로 볼 안쪽을 슬슬 문지른다.

이건이 그 모습을 유심히 봤다. 혹시 보기완 다르게 엄청난 천재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문제집을
탁 덮는다.

“왜, 왜 그러세요?”

“씨발! 하나도 없어.”

“네?”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이 새끼야.”


“아….”

도하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다시 문제집을 펼치더니 살펴본다. 인상을 쓰다가 또다시 책을 덮고서 고개를 젓는다.
안 되겠다. 진짜 모르겠어.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별로 놀랍진 않아서 괜찮다고 했더니 도하가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야. 나 대학은 어떻게 간 거지?”

글쎄요…. 이건이 입은 웃었지만, 속으론 정말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도하가 문제집을 이건에게 툭


던진다.

“그냥 나중에 준영이 형한테 물어봐. 나 있을 때 와서.”

“네?”

“나 있을 때 오라고. 없을 때 오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지. 왜 도하가 여기 있을 때 와야 하는 걸까. 사태파악을 하느라 눈을 끔뻑이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렸더니 준영이 나오는 중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 도하가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사람이 막 자다 일어났는데도 어쩜 저리 섹시할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앞 단추
벌어졌잖아?

“선생님 괜찮으세요?”

“응. 이건이 왔구나. 미안,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저번에 내준 거 해왔어?”

목소리도 가라앉아서 완전 야한데, 잠옷 셔츠에 앞 단추까지 벌어져 있으니 보는 사람은 완전 미칠 노릇이었다.

“아, 그게 지금.”

이건이 말을 하려는데 도하가 벌떡 일어서서는 이건의 어깨를 꾹 붙들었다.

“내가 다 봐줬어요. 채점도 해주고, 모르는 거 풀어주고. 그치 이건아?”


네? 이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준영이 보이지 않게 이를 드러내고 ‘맞지?’ 하고 다시
물었다. 이건이 흠칫해선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아요. 도하 형이 도와줬어요. 준영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진짜냐고 물었고 이건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 쉬어요. 저는 이건이랑 같이 편의점 가서 간식 사 먹을게요.”

“저도요?”

“응. 너도 같이 간다며. 얼른 일어나.”

이건이 입을 벙긋댔다. 아닌데. 나는 집에 갈 건데. 밥도 엄청 먹어서 간식 안 먹어도 되는데. 하지만 도하의


얼굴을 보니 차마 사실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빛만으로 진실을 말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하는 없는 말도
지어내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네. 저도 갈려고요, 지금.”

황급하게 문제집을 챙겨서 일어나니 도하가 제 목에 팔을 두르고서 준영에게 인사를 한다.

“죽 만들어 놨으니까 챙겨 먹고 쉬어요. 우리 방해 안 할게요.”

씩 웃더니 이건을 끌고서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준영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뭐야.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잠옷 단추가 두 개나 풀어진 게 보였다.

분명 잠들기 전에 잠갔는데 워낙 오래된 잠옷이라 단추 구멍이 느슨해졌나 보다. 그걸 대충 잠그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꽃이 든 화병 밑에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뭔가 싶어 갔더니 반듯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도하의 글씨였다. 그걸 읽고 저도 모르게 미간이 구겨졌다.

[그대는 나의 후리지아. 온화한 미소로 나를 후리는, 그대는 나의 후리지아.]

이 자식 약 빤 거 아냐? 어이없어하며 뒤집었더니 다른 메모가 있다.

[전복죽 냉장고에 따로 넣어놨어요. 약 잘 챙겨 먹어요. 아침에 올게요.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옆에 깨알처럼 하트도 그려 넣었다. 귀엽긴. 문득 고개를 들다 보니 창에 비친 제 모습이 웃고 있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메모지를 화병 아래에 다시 붙여놓고는 씻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 * *

도하가 컵라면을 편의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건에게 같이 먹겠느냐고 물었지만 이미


배가 부를 만큼 부른 그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도하가 젓가락으로 라면을 풀어 후루룩, 입에 넣었다. 종일 병원
다녀오고 죽 끓이고 정신없이 보내느라 제 끼니는 미처 챙기질 못했더니 허기가 졌다.

“제가 김치라도 사다 드릴까요?”

“됐어.”

면발을 건져 먹는 도하를 보니 추운 데서 먹다 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혹시 집에 라면이 없나 싶어서 물으니


그건 또 아니란다.

“바람도 쐴 겸 나오자고 했어. 집에서 먹고 늘어지면 다 그거 살로 가. 라면이 칼로리가 얼마나 높은 줄 알아?”

“형도 그런 걱정 하세요?”

“당연하지.”

“그런 걱정 안 하는 줄 알았어요. 몸이 되게 좋아서요.”

“인마.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남들보다 내가 근육이 워낙 많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도 많이 해.”

그렇구나. 이건이 신기하단 얼굴로 쳐다봤다. 그때 저 멀리서 낯익은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1 층에 사는
박동현이었다. 저 형은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면서 편의점에 올 때마다 보네.

이건이 인사를 건넸고 동현이 가까이 다가와서 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여어, 형제님들. 왜 여기서 컵라면으로 지지리 궁상을 떨고 계시나.”

“…도하 형이 저녁 안 먹었다고 해서 잠깐 왔어요.”

“우리 이건이 사교성 좋네. 새로 온 3 층 형제님이랑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그때 같이 술 먹으면서 친해진


거야?”
그 말에 이건이 화들짝 놀랐다. 그때 술 먹은 건 도하 혼자였지 저는 아니었다. 누가 들어서 오해라도 할까 싶어
정정해 주려는데 그가 들은 척도 안 하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가서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담배를 사더니
나오지 않고 한참이나 이야길 주고받는다.

다 먹은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리던 도하가 그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점원은 40 대 정도 되는 여자였는데, 이건의


말로는 편의점 사장의 누나라고 했다. 한 번씩 와서 남동생 대신 매장을 봐준다고 말이다. 근데 동현이 여자에게
검은 봉지에 든 무언가를 건네준다. 여자가 봉지 안을 들여다보더니 환하게 웃는 걸 보는 도하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뭐야, 저 양반. 지금 수작 거는 거야?”

“아 형 모르셨구나. 둘이 사귀잖아요.”

“둘이?”

“네, 원래 여기 편의점 하는 형이 동현이 형 어릴 때부터 친구거든요. 그래서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어릴


때부터 저 누나 좋아했나 봐요. 둘이 여덟 살 차이 나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여자분이 엄청 거절했는데 지금은
결국 사귀게 됐다 하더라고요.”

아. 도하가 입을 벌린 채 탄식을 내뱉었다. 제 경우랑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 공무원 준비생이지 할 일


없어 보이는 백수라고 생각했던 박동현이 갑자기 확 달라 보였다.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뤘다고 하니
제법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의 생각은 다른 듯하였다.

“그래도 시험은 붙고서 만나시지…. 직장 다니다 관두고 벌써 몇 년째 저러고 있으니까 1 층 할머니도 맨날


걱정하시던데….”

“인마. 모르는 소리야. 우리 인생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데. 시험이야 언제든 또 보면 그만인 거고.”

동현이 한참 얘기를 하는 거 같더니 밖으로 나온다. 마주 앉아 있는 도하와 이건에게 방금 편의점에서 들고 나온


따뜻한 음료를 하나씩 나눠준다. 도하는 커피였고, 이건은 꿀차였다. 그걸 받아 든 이건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동현이 의자 하나를 끌어내 앉았다. 볼 때마다 저한테 퉁명스럽게 굴던 도하가 어쩐지 커피를 들고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별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라고 하자 이건이 옆에서 거들었다.

“형이 저 누나랑 사귄다고 하니까 도하 형이 놀랐나 봐요.”

“그래? 왜 놀래? 나이 차 때문에?”

그 말에 도하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여덟 살은 많은 것도 아니라면서 저 아는 사람 이야기라며 은근슬쩍


제 이야기를 꺼냈다. 열 살 차이고 어릴 때부터 양쪽 집안이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라면서.

대충 사정 이야기를 다 들은 동현이 다리를 척 꼬더니 고개를 연신 갸웃한다.

“아, 그건 어려운데.”

이건도 동감했는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열 살에 양쪽 집안 식구들이 가족처럼 지내면… 좀 그럴 거 같은데.”

도하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뿐인가. 거기다 둘 다 남자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데 동현이 그 연상도
연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좋아… 할걸요. 잘 챙겨주고, 걱정해주고, 신경 써주고.”

“에이, 그건 친동생한테도 하잖아.”

“그러니까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도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준영과 저 사이는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주말에 호텔 가자고 했을 때 선뜻 그러자고 했지만 어찌 보면 그건 송연운지 뭔지 하는 그 도둑놈 때문에
내키지 않는데 받아들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것도 없던 일로 하자고 하진 않겠지.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하가 입을 다물고 있자 동현이 귤을 하나 까먹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막말로 친동생한테 그런 야리꾸리한 감정을 갖진 않아요. 물론 가끔 그런 애들이 있긴 있어. 그럼


뭐다?”

이건과 도하가 대답하지 않자 동현이 손가락을 딱 튕긴다.

“개쓰레기 같은 새끼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근데 아주 애기 때부터 그렇게 봤으면 친동생이나 다를 게 없다고. 쉽게 이성적인 호감을 갖긴 힘들다니까.


갖더라도 죄책감을 느낄 확률이 커요. 이게 연하보단 연상이 더 그래. 그래서 밀어내는 쪽도 거의 연상이야.”

듣고 있던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누나들을 떠올려 봐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반면 도하의 안색은 점점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이건이 예리한 질문을 했다.

“그럼 형은 안에 있는 누나랑 어떻게 사귀게 되셨나요?”

질문은 이건이 했는데 눈은 도하가 반짝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별거 없어. 원래 혜영 씨도 나한테 호감이 있었고.”

“혜영 씨라고 해요? 누나라고 안 하고?”

이건이 물었고 동현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인마. 원래 엄마엄마 하다 보면 엄마가 되는 거고 누나, 누나 하다 보면 진짜 누나가 되는 거야. 일단 호칭에서


정리를 해줘야 이게 좀 앞으로 나아가기 쉽단 말이지.”

도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준영 씨라고 부른다니까. 서준영이라고 부르면
얻어터질까 봐 아직은 못 하겠고.

“그러고 나서 연하의 장점과 의외의 면을 보여주는 거지.”

“연하의 장점이 뭔데요.”

“우리가 나보다 어린 애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귀엽다?”

“그렇지. 귀엽고 보살펴 주고 싶은 느낌이 들지. 그 느낌을 최대한 활용해서 끌어내는 거야. 그러다 갑자기 확
변해서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하잖아. 어 얘 의왼데? 이런 면도 있었네? 하면서 넘어간다니까.”

“이야.”

이건이 감탄을 했고 듣고 있던 도하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태 서준영한테 다 하던 거다. 애교도


부리고 아양도 떨다가. 또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번갈아 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이야길 꺼냈다.

“혹시 그렇게 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으면?”

“튼 거지. 쉬운 말로 나가리.”

“그죠. 그건 나가리.”

나가리. 도하가 충격받은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좀 얻으려면?”

음. 동현이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그 연상이 연하를 언제 가장 예뻐해요?”


도하가 입술을 오므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서준영이 저를 가장 예뻐한 건 그러니까… 아주 아기 때? 그래, 아주
어릴 땐 진짜 예뻐했던 거 같은데.

“어릴 때?”

“설마 똥오줌 못 가릴 때?”

“…그렇죠.”

“아, 안 되겠다. 그럼.”

“왜요.”

“예쁨받으려고 지금 와서 똥오줌 쌀 순 없잖아요. 다 큰 어른이.”

이건은 노트필기라도 할 자세로 경청하다가 맞은편에 앉은 도하를 보고 눈이 커졌다. 도하가 완전 낭패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커피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냐고 물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형, 가, 가시게요?”

“어. 갈래.”

“저랑 같이 가요.”

“아냐. 됐어. 그냥 갑자기 삶이 피곤해졌어.”

커피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집 쪽으로 성큼성큼 가 버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건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현이 도하가 두고 간 커피를 따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 혹시 자기 얘긴가?”

“에? 설마요.”

“모르는 거지. 그런 거라면 내가 실수했네. 어린싹을 짓밟았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왜? 얼굴 반반하면 짝사랑하지 말라는 법 있어?”

“진짜 친구 얘기 같은데….”

“차라리 그게 낫겠다.”

“왜요?”

“딱 들어도 희망이 없잖아.”

“…아.”

“갑자기 302 호 짠하네. 에으, 속상해.”

에이, 설마. 이건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하는 이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도하 본인 이야긴가.
그렇다면 말을 좀 조심할걸. 괜히 뒤늦은 후회가 됐다. 누군지 모르지만, 도하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난 미인이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 * *

[주말 약속 안 잊었죠?]

도하가 방바닥에 누워 입력창에 글자를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대로 지우고 나서 다시 글자를 입력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휴대전화를 옆에다 내려놨다. 집으로 돌아와 러닝머신을 1 시간 가까이 뛰고 나서


샤워를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고, 마음은 뒤숭숭했다. 하지만 준영에게 온 메시지는 따로 없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읽었다는 표시도 답장도 없고 그대로였다.

휴대폰을 옆에다 놓고 모로 누워서 바닥에 귀를 가만히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들었나. 아픈 건 좀
나아졌나. 걱정도 되고, 아까 이건과 아래층 공무원 고시생이 한 말이 계속 생각나서 짜증도 좀 나고. 완전히
엎드려 손을 모으고 아래층을 향해 물었다.

“나 나가리 아니죠?”
이게 들리겠냐.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몸을 뒤집고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하고 있는데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손으로 가져와 확인하니 준영이었다.

[덕분에 괜찮아졌어. 고맙다. 잘 자.]

흐음. 하트도 좋아한다는 말도 없었지만, 그래도 답장은 바로 해주네. 팔을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낮에 꽃을


보고 웃던 준영의 얼굴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제 입가에도 미소가 생겨났다. 다음엔 꽃이 아닌 저를 보고 좀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준영이 눈을 떴다. 어스름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침 7 시가 넘은 걸 확인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오래도 잤다.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와 집 안을 둘러보다가 주방에 시선이 머물렀다. 깔끔하게 정돈된 주방엔 도하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검은색 앞치마가 한쪽에 걸려 있었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실 욕실에서 도하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너!”

“일어났어요? 하도 안 일어나길래 깨워야 하나 걱정했네.”

“어떻게 들어왔어?”

“몸은? 괜찮아요?”

“아니, 여길 어떻게 들어왔냐고.”

“재주껏.”

“이 새끼.”

성질을 파르르 내자 배시시 웃는다. 아침부터 화내면 혈압 오른다면서 걱정까지 했다.

“강이건이 비밀번호 눌러줬어요. 걔한텐 비번도 가르쳐 줬더라? 짜증 나게.”

“이건이가?”
“뭐라고 하지 말아요. 내가 형 아픈데 연락이 안 된다고 혹시 쓰러졌을까 봐 걱정된다고 가르쳐달라고 했으니까.
근데 그 새끼 끝까지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뒤에서 내가 볼까 봐 손으로 가리고 비번 눌러서 들어왔다니까.
지독한 새끼.”

“…하아.”

“들어가서 더 자요. 밥해줄게요.”

준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도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이 신경 쓰여 이, 하고 웃어보라고 했더니 도하가
이, 입꼬리를 양쪽으로 활짝 올린다. 좀 괜찮아진 거 같았는데 그래도 아직 왼쪽이 덜 올라가는구나.

“밥은 됐으니까 한의원 가서 침이나 맞아.”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참, 아침으로 만둣국 해줄까요? 아까 이건이 어머님이 만두 빚었다고 좀


주셨어요. 떡은 냉동실에 있더라고요.”

“떡이 있어?”

“냉동실에 조금씩 포장해놨던데요.”

아. 준영은 그제야 모친이 반찬이며 뭐며 싸 들고 온 날을 기억해냈다. 사골도 얼려서 냉동실에 정리해두고,


떡도 그렇게 했다는 걸. 혼자 있는 아들이 굶을까 싶어서 그녀는 그러고도 수시로 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보냈다.
하지만 준영은 그것도 귀찮아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울 때가 종종 있었다.

갑자기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던 와중에 식탁 위에 있는 탁상달력이 보였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금요일이니까,


내일이 제사였던가. 아아.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도하를 보니 그는 냉동실을 열어 이것저것 살피는
중이었다.

준영이 입을 달싹였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나. 말했다간 저 성질머리에 팔팔 뛸 것 같은데. 그래도 말하는 게
낫겠지.

“도하야.”

“참, 그때 말한 거 뭐였어요?”

“뭐가?”

“형 성적 취향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잖아요. 그게 뭔데요. 알아야 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죠.”

뭐? 준영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 보니까 하긴
했다. 도하를 떼어낼 생각으로 일단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일단 내일
서울로 올라간다는 사실부터 알려야 하지 않을까.

“도하야 실은, 내가….”

도하가 갑자기 양손을 깍지 껴 모으더니 뺨 한쪽에 대고 꿈꾸는 소녀 같은 표정을 한다.

“실은 나, 너무 좋아서 며칠 동안 잠도 못 잔 거 있죠.”

“…….”

“어젠 꿈도 꿨다니까요. 아이참.”

이 새끼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준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며 입만 벙긋댔다. 할아버지 제사야. 나도


깜박했던 거라 미리 말을 못 했어. 하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괜히 그때 그런 약속은 해서.
이미 꺼낸 말이 있으니 안 된다고 자르기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예전에 섹스 직전까지 갔었고, 며칠 전에도 키스도 했으니 이번에 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다음에 해준다고 하자 마음먹는데 때마침 인터폰이 울린다.

준영이 기다렸다는 듯 도하를 피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왔나 보네.”

“열어주지 마요. 강이건일걸.”

아니나 다를까 문틈으로 이건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건아. 어쩐 일이야?”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까 도하 형이 많이 아프신 거 같다길래, 걱정돼서 학교 가다 잠깐 들렀어요.”

“…어. 괜찮아.”

실은 안 괜찮아. 들어와서 좀 놀다 가라고 붙들고 싶었지만, 이건은 학교에 가야 하므로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준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내가 학교까지 태워다줄까?”

그 말에 이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요?”

“어. 어차피 도하 병원도 들러야 하니까 가는 길에 태워줄게. 버스로 가는 것보단 훨씬 낫잖아.”

잠시 고민하던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얼른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건이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오던 이건이 흠칫 놀랐다. 도하가
앞치마를 한 채 국자를 들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다짜고짜
아래층 비밀번호 좀 가르쳐 달라길래 직접 눌러주고 간 건데.

설마 밥하려고 그랬던 건가. 신기하고 놀라서 쳐다보는데 도하가 눈을 더 뾰족하게 뜬다. 가뜩이나 인상이
차가운데 더 얼음장처럼 느껴졌다.

“쟤를 왜 데리고 들어와요?”

“도하야, 그냥 아침은 나가서 대충 먹자.”

“대충?”

“너 병원도 가야 하고, 나도 살 것도 있어서 그래.”

국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대답하면서도 이건을 죽일 듯 노려봤다. 국자로 팰까.
그랬다간 서준영이 쫓아내겠지.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망할 자식.

하지만 이건의 눈엔 그저 그 장면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하가 요리하는 것도 그렇지만, 준영의 말은 어쩜 저렇게
잘 들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저를 쳐다보는 눈이 점점 무섭게 변해간다. 뒤늦게
눈치채곤 쭈뼛쭈뼛 준영의 뒤쪽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 * *
점심시간이라 급식실로 들어가는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을 서 있던 이건의 눈에 안쪽에서 밥을 먹고
있는 유나와 친구들이 보였다. 유나가 먼저 손을 들어 알은척을 했고 뒤에 서 있던 영훈과 우진이 등을 찌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좋겠다. 사귀기로 한 거야?”

“사귀긴 뭘 사귀어.”

“아직 사귀잔 말도 안 했어? 인마. 그런 건 남자가 먼저 말해야지.”

차례가 된 이건이 식판을 집어 들었다. 밥을 푸는데 뒤에선 왜 안 사귀느냐고 난리다. 이건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얼마 전 유나가 사귀자고 먼저 말을 꺼내왔는데 자신이 거절했다는 걸. 그 말을 했다간 유나가 차인 게
되는데 사실대로 말하기도 난감했다.

차라리 애들한테는 반대로 말할까 고민하며 밥을 떠서는 창가 쪽 자리로 걸어갔다.

“강이건, 밥 많이 먹어.”

유나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고 이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판을 내려놓고 밥을 뜨려는데
맞은편에 박태경 패거리들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박태경이 조금 전 유나가 저에게 살갑게 인사하는 걸 봤는지
눈에선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다.

근데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연우가 없다. 눈으로 급식실 안을 훑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학교에 오지 않은


걸까.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녀도 학교는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제 책상
앞으로 딸기 우유 하나가 놓인다. 봤더니 유나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이거. 밥 먹고 먹으라고.”

오오, 영훈과 우진이 옆에서 소리를 냈고 이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유나가 사라지고 난 뒤에 이건이 밥을
한 수저 뜨는데 갑자기 제 앞으로 햄 하나가 툭 떨어진다. 이게 뭐야, 싶어 쳐다보는데 맞은편에 앉은 태경이
수저를 들고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영훈이 옆에서 보이지 않게 툭, 건드렸다.

“저 새끼 자꾸 왜 저러냐.”

“몰라, 내버려 둬.”

“아, 진짜 성질 같아선 한번.”


영훈의 말에 우진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성질대로 하다가 얻어터지지 말고 밥이나 먹어, 인마.”

“그런데 송연우는 왜 안 보이지?”

“그러게. 학교 안 나왔나.”

“걔 모르냐. 아파 뒤져도 학교는 나오는 애잖아. 꿀 발라 놓은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니 그러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건이 휴대폰을 꺼냈다. 5 분 전 연우에게 밥을 왜 안 먹느냐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었으면서도 답장이 없다. 무슨 일 있나, 걱정하면서 남은 밥을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고 나서 유나가 준 우유를 챙겨 식판을 들고 나오는데 저만치 연우와 친한 남학생 하나가 매점 앞에 서 있는


게 보인다. 가서는 알은척을 했더니 그가 이건을 향해 뚱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송연우 오늘 학교 안 나왔어?”

“걔 보건실 갔어.”

“왜?”

“나야 모르지.”

아. 이건이 더 물을 새도 없이 그는 제 필요한 것을 사 가지고 무리 쪽으로 향했다. 급식실 밖으로 나오니


영훈과 우진이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너도 마실 거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답한 후 교실로
올라가려다 멈췄다.

“나 잠깐 아래층 다녀올게.”

“왜. 어디 가.”

“같이 가, 인마.”

“아니, 양호실 좀 다녀오게. 먼저 가.”

영훈이 어디 아프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대답한 후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어제 아저씨한테 심하게
맞았나. 그래서 몸살이라도 난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1 층으로 내려와 보건실 쪽으로 향했다.

문이 닫혔길래 밀고 들어갔더니 보건교사는 보이질 않았다. 여기 있다고 했는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커튼을 치고
누군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쪽으로 가서 커튼을 살짝 들추니 아니나 다를까 송연우였다.

끙, 끙, 앓는 소릴 내며 몸을 웅크리길래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빨갛다. 숨소리도 거칠고 입술은


하얗게 마르다 못해 트고 갈라졌다. 혹시나 싶어 슬쩍 이마를 손끝으로 만져봤는데 뜨거웠다. 아. 열나네.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손을 떼어내고 뒤로 살짝 물러서니 연우가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뭐야.”

“너 아파? 열나는 거 같은데.”

이건이 제대로 이마를 짚어보려고 하자 연우가 그 손을 밀어낸다. 치워.

“약은? 보건 샘 어디 가셨어?”

“먹었어.”

“차라리 조퇴하지.”

연우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가 하니 긴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땀인지 뭔지에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얼굴이 더 처연해 보였다. 좀 닦아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난리 칠 거 같아 그냥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했다.

“끝나고 나랑 같이 병원 갈래? 아니면 지금 갈까? 요 앞에 내과 있잖아. 아직 점심시간 남았으니까 다녀오자.”

“…안 가.”

“그러지 말고 가자. 주사 맞고 하면 낫지 않겠어?”

연우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안 간다고 쏘아붙이다 이건의 점퍼 주머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무언갈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이건이 제 주머니에 들어있는 우유를 확인하곤 그것을 꺼냈다.

“우유 줄까?”

“됐어.”
“아님 다른 거 사다 줄게. 빈속에 약 먹었지? 속 괜찮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만 떠들고 가라고, 병신아.”

“말을 해도 꼭.”

이건이 입술을 샐쭉거리는데 연우의 눈은 여전히 우유에 꽂혀 있었다. 검은색 네임펜으로 강이건,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하트가 그려진 걸 보아 누군가에게 받은 모양이었다. 곰 같은 녀석은 글자가 적힌 것도 모르는
눈치다.

김유나일까. 남한테 받은 걸 잘도 주는구나. 그러다 제 처지가 눈앞에 우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먹어도
그만이고 남한테 줘 버려도 그만인.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짜증이 났다. 우유랑 비교하는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눈앞에 글자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그만 가라고 냉랭하게 말하고 나선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강이건은 점심시간이 끝나가도록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 * *

아, 해요. 도하가 준영의 입가로 팝콘을 가져갔다. 준영이 그것을 보며 고개를 뒤로 움직였다.

“안 먹어.”

“하나만 먹어봐요. 맛있어.”

마지못해 입을 벌리니 그대로 쏙 집어넣는다. 아삭, 달콤한 캐러멜 향과 함께 팝콘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원래
영화 볼 때 뭘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오랜만에 먹은 팝콘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영화는 시작 전 광고 상영을 하는 중이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나와 밥을 먹고 나서 돌아가려는데 도하가 영화관으로 끌고 온 것이다.

공황장애를 앓고 나서 밀폐된 공간에 가는 걸 꺼렸었다. 지하철이나 마트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특정 장소에서


유독 더 그랬다. 그래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이젠 나아져서 마트며 서점이며 가는 것이
괜찮았지만, 영화관은 꽤 오랜만이었다. 오는 내내 걱정했는데, 다행히 입구로 들어서고 자리를 잡는 동안에도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어 그러질 못했다. 기분을 맞춰주고 살살 달랜 다음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아는 감독의 영화였다. 사이가 나빴냐고 누가 묻는다면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서로
관심도 대화도 없던 사이였다.
“아, 하나 더 먹어요.”

도하가 이번엔 몸을 바싹 제 쪽으로 붙이며 팝콘을 먹으라고 넣어준다. 귀에 대고 말하는 바람에 준영의 눈 밑이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다 들리니까 좀 떨어져서 말하라고 했더니 씩 웃고 나서 바로 떨어진다.

“형 혹시 나 나오는 영화 본 적 있어요?”

“…아니.”

“나중에 봐요. 내가 봐도 진짜 멋있게 나와요.”

제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걸 보고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정작 당사자는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그러다 영화가 시작됐고, 도하가 다시 준영의 귓가로 입술을 바싹대곤 손을
잡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안 돼.”

도하가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좀 잡아주면 어때서. 다른 델 잡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선뜻 영화 보러


같이 와줬으니까 더는 투정 부리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에 집중하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그러다 입에 물고 있던 팝콘을 툭 떨어트렸다. 시작되는 분위기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거 제목이 뭐였더라. 둘이 영화 본다는 사실에 기뻐서 무슨 영화인지 살피지도 않은 게 문제였다.

다시 슥 준영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형 이거 공포였어요?”

“몰랐어?”

아. 도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시작부터 비가 쏟아지고 흉가가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대놓고 무서운 걸 보여주겠다고 만든 영화였는지 스토리는 둘째 치고 시작부터 귀신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팝콘이고 뭐고 입맛이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때 갑자기 장롱문이 열리고 얼굴이 기괴하게 생긴 귀신이
튀어나오자 도하가 팝콘 통을 끌어안으며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턱을 받치고 지루한 얼굴로 영화를 보던
준영은 그 바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놓고 웃긴 뭐해 손등으로 슬쩍 입가를 가리는데 도하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준영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귀신 나온다고 왜 말 안 했어요?”

“네가 골랐잖아.”

맞는 말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도하는 울상을 하고서 팝콘 통을 더 꽉 끌어안았다. 아, 진짜 싫은데.


그냥 눈 감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준영이 제 쪽으로 손바닥이 보이도록 내민다. 팝콘을 달라는 건가
싶어 팝콘 통에서 팝콘을 집어 놓아주었더니 그걸 다시 팝콘 통에 넣고 손을 내민다.

“손 줘.”

잘못 들었나 싶어 어? 하고 물었더니 주저할 것도 없이 도하의 손을 마주 잡은 채 끌어가선 팔걸이 위에


올려놓는다.

“이러면 됐지?”

도하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엔 잡는 걸로도 모자라 슬며시 깍지를 끼는데도 준영은 피하지 않고
받아줬다. 오호라. 들뜬 마음에 그 손을 꽉 마주 잡고선 영화를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실제로 귀신이 튀어나와
눈앞에 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팝콘을 집어 서준영의 입에 넣어주니 군말 않고 받아먹는다. 좋은 징조야. 이건 정말 좋은 징조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꾹꾹 눌렀다.

* * *

영화를 보고 차를 몰아간 곳은 춘천 외곽에 있는 인도 요리 전문점이었다. 도하가 맛집을 검색해서 찾은 거였는데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준영이 인도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실내 인테리어가 예쁘고 맛도 좋아
커플이 많이 찾는 곳이라길래 온 것도 있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기다리는데 자신들의 차례가 됐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요리를 주문했다. 도하는 준영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메뉴판을 보고 꽤 오랫동안 고민하자 도하는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라줬다. 대부분 나쁘지 않아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나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준영이 물티슈로 손을 닦는데 도하가 오른손만 닦고
왼손은 닦지 않는다. 그걸 보고 의아한 마음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형이랑 아까 손잡았잖아요. 안 닦고 집에 고대로 가져갈 거예요.”

“그러지 말고 닦지.”

“싫어요.”

“차라리 아예 잘라서 가. 나이프 달라고 해?”

“그것도 나쁘지 않죠. 손은 어차피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생긋 웃는 걸 보고 준영이 목을 움츠렸다. 갑자기 왜 오싹해지는 걸까. 설마 그 손으로 또 밤에 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묻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들 이목이 있어 차마 거기까진 이야길 꺼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론 내일 서울 간다는 얘길 언제 해야 하나 엿보고 있었다. 일단 밥은 먹여 놓고 말을 하는 게


낫겠지. 짐승도 굶기면 더 포악해지니 말이다. 마침 치킨 샐러드가 나온다. 도하가 그것을 집게로 집어 준영의
접시에 덜어줬다.

“아까 영화 보는데 자다가 천장에서 귀신이 내려왔잖아. 그때 나 진짜 무서웠어요.”

“그런 거 같더라. 내 손을 얼마나 잡고 쥐어짜던지, 뭉개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그 말에 도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샐러드 중 준영이 좋아하는 것만 귀신같이 골라내서 접시에
덜어준다. 그걸 준영이 가만히 쳐다봤다. 여태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 이 정도까지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나마 근사치에 다다른 게 김민석이었다. 하지만 그도 도하만큼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뭐 빼줘요?”

“아니. 그냥 봤어.”

“난 또 내가 예뻐서 본 줄 알았지.”

“설마.”

“빈말이라도 그렇다고 해주지.”

“응. 빈말이지만 예뻐서 봤어.”

“아이 좋아라.”

도하가 웃더니 채소와 치킨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준영은 그가 음식을 입에 넣고 턱을


움직이는 모습조차도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외모로 보자면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릴 적엔 그냥 예쁜
사내아이였다면 사춘기를 지나고부터는 선이 굵어지고 남성성이 더해지면서 누구나 한번 돌아볼 만큼 근사한
남자로 자랐다.

아마, 나이 차이가 덜 나고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면 그를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고민을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전에도 몇 번이나 생각한 거였다.

“이번엔 무슨 생각해요? 계속 내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음식 먹어. 내 얼굴 그만 보고.”

“부끄럽구나?”

“아니.”

도하가 작게 웃더니 샐러드를 더 덜어 준영의 접시에 놓아준다. 그러는 사이 카레와 난이 나왔다. 치킨이 들어간
매콤한 맛과 마늘과 양파가 들어간 달콤한 맛 두 가지를 주문했는데 둘 다 역시 준영의 취향이었다. 난을 찢어
카레에 찍어 먹던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먹은 다음에 근처에 골동품 파는 데 있거든요. 거기도 가볼래요?”

“골동품?”

“응. 형 좋아하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오래된 물품 등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왜 모으느냐고 했지만, 이상하게 도하는 그 취미가 멋지다고 해줬었다.

어릴 땐 그 말에 뿌듯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알았다. 이도하는 자신이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나 산에서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와도 멋있다고 해줄 사람이라는걸. 그런 생각을 하니 내일 약속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포크로 샐러드를 쿡 찍는데 마침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하니 어머니였다.

[아들, 내일 일찍 오면 안 되니? 얼굴 좀 오래 보게.]

아. 준영이 슬쩍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뜨끔한 마음에 얼른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나서 물컵을 집어 들었다. 이쯤 돼서 말해야겠지. 왜 이렇게 입이 안 떨어질까.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하야, 있잖아, 내가 내일.”

도하가 검지로 쉿! 입을 가리더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준영이 혹시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살짝


기대하며 쳐다보는데 도하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알아요. 형도 심란하겠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마요. 잘 준비할 테니까 형은 몸만 오면


돼요.”

준영이 물컵은 든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지 더 입이 붙어
버린다. 벌컥벌컥 물을 다 들이켜고 났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따 문자로 말해야겠다. 그게 낫겠어.
저 기대에 찬 얼굴을 보자니 도저히 안 되겠다.

CH 10.

연우가 점퍼를 턱 아래까지 올리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이 그 뒤를 가만히 따랐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보건실에 누워있던 연우는 점심에 봤을 때보다 조금 나아진 거 같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색이 좋질
않았다.

좀 챙겨주려고 말을 시켰더니 얼마나 난리를 치고 가라고 하는지 결국은 이렇게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또 한참을 있었다. 집에 가기 싫은 걸까. 하긴 나라도 그런 아버지라면 들어가기
싫겠다.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갈까, 고민하다가 모친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선뜻 그래도 된다는 답장이 왔다. 기쁜 마음에
얼른 정류장 쪽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연우가 돌아보고 이건인 걸 확인하더니 무심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까부터 왜 여기 계속 앉아 있어? 집에 안 갈 거야?”

“알은척하지 말고 가.”

“친구가 아픈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

그 말에 연우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봤다.

“내가 왜 너랑 친구야.”
이건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 옆에 앉았다. 친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
말싸움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살살 달래서 집에 데려가는 수밖에.

“오늘 우리 집 갈래? 저녁 먹고 엄마한테 영양제 좀 놔달라고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

“엄마한테도 허락받았어. 너 온다니까 좋아하셔. 아버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너는?”

뜬금없는 질문에 이건이 멍한 얼굴을 했다. ‘너는’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쳐다보니 연우가 슬쩍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너도 좋으냐고,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온 그 말이 끝내 나오지 못했다.

“됐어.”

“야, 사람이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너 설마 내가 너 싫은데 우리 집 억지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지?”

“됐다고. 더 말하지 마.”

참나. 내가 먼저 그랬나, 자기가 먼저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는. 이건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옆에서


구시렁거리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와 멈췄다. 3 학년 골칫덩어리인 곽상윤이었는데, 그는 하교 시간인데도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툭하면 학교에 안 나오는 사람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소문엔 깡패들이랑도 어울린다고 하던데. 그랬기에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그를 만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이 그를 알아보고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연우는 한 번 쳐다봤을 뿐 꼼짝도 하질 않았다.

“송연우. 타.”

그는 연우에게 어디 가느냐고 뭐 하느냐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타라고 했다. 그 말에 연우가 못 들은 척 발로


땅을 툭툭, 내리찍었다. 상윤이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이고 다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타라고, 새끼야.”
연우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체념한 듯 일어서 상윤의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순간 이건의 머릿속에 며칠 전 옥상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연우가 했던 말들.

[너도 자지 빨아 줄까? 특별히 돈 안 받을게.]

탁, 이건이 연우의 팔을 붙들었다. 동시에 상윤의 미간에 빗금이 사선으로 생겨났다.

“연우야. 집에 가자.”

연우가 돌아봤고, 이건이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상윤이 데리고 가려는 데가 어딘지 모르지만 어쩐지 집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제집으로 데려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상윤이 기막히다는 듯 웃더니 담배를 하나 빼 입에 물고 이건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가만히 쳐다봤다.

“강이건? 너 그 손 놔라.”

“죄송해요. 볼일 있으면 다음에 얘기하세요. 얘가 오늘 아파서요.”

“씨발. 못 알아들어?”

상윤이 반쯤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튕겨 버리더니 오토바이에서 막 내리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버스가 도착했고
이건이 연우를 끌고 그쪽으로 뛰었다.

“죄송해요. 오늘 병원 가야 해서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연우가 이건의 손을 떼어냈다.

“놔!”
이건도 당황해선 연우를 쳐다봤다. 버스 기사가 앞문을 열고 안 탈 거냐고 물었다. 이건이 그쪽을 향해 탈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선 다시 손을 잡으려고 하자 연우가 뒷걸음질한다. 이건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연우는 몸을 돌려 상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려 했다.

이번엔 손이 아닌 뒷덜미를 낚아챘다. 졸지에 뒤로 당겨진 연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돌아볼 새도 없이


강이건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버스에 끌고 가서는 그대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학생 둘이요.”

삑.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닫힌다. 연우가 창밖을 바라봤다.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 상윤이 기막힌 얼굴로 둘을
노려봤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게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연우가 열이 받아서 홱 이건을 돌아보다 멈칫하고
제 팔을 내려다봤다. 제 뒷덜미를 무식하게 끌고 가던 손이 어느새 제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창밖만 내다봤다. 연우가 손을 빼내려고 하자 더 힘을 준다.

“놔 이 새끼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쪽팔려.”

아. 이건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남학생 둘이 손을 잡고 있으니 이상해 보였는지 시선들이 날아든다. 얼른
놓아주자 연우가 귀가 새빨개져선 한 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자코 가던 이건이 곧 곤란한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야, 송연우….”

“…왜.”

“우리 버스 잘못 탔다.”

인상을 찡그리던 연우는 그만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터졌다. 이건은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우, 바보, 번호를
확인했어야지, 한다. 아까는 죽기 살기로 밀어 넣더니. 아무 생각 없었구만.

그러다 창밖에 서 있던 상윤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라 뒷목으로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려 강이건을 보니 정작
당사자는 버스 잘못 탄 것만 중요하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이건.”

“응?”

“너 월요일부터 곽상윤 피해 다녀. 알았어? 절대 마주치지 마.”


“난 상관없어.”

이건은 정말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뭐 때리면 몇 대 맞으면 그만인 거다.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새끼 진짜 악질이야.”

“괜찮아.”

그러더니 연우를 향해 씩 웃어 보인다. 그러다 곧 눈이 커져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야, 너 열 많이 나나 봐. 얼굴이 다 빨갛다. 얼른 집에 가자.”

“씨발.”

“왜, 그 정도로 아파? 심해?”

“병신.”

조금 전까지 걱정하더니 또 성질을 내며 병신이라고 욕을 한다. 이 새끼가 진짜 왜 이럴까. 이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사춘기라 그런가. 하지만 사춘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저로선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다. 이렇게 화냈다가 풀어졌다 반복하는 게 사춘기라면 그런 건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이건이 백설의 밥과 물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아, 숨을 내쉬니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곳곳에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백설이를 보니 추워서 움직이기 싫은 건지 집 안에 누워서 꼬리만 슬쩍슬쩍 흔든다. 산책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알았어. 그럼 오빠 혼자 운동 다녀올게.”

인사를 하고 나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길을 따라 논두렁 쪽으로 가며 연우의 집 쪽을 쳐다봤다. 어제 버스를


갈아타고서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연우는 끝까지 싫다고 거절했다. 혹시나 저번에 그 일 때문에 도하나
준영을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그런가 싶어 물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결국 집으로 들여보내고, 엄마가 지어다 준 약과 귤을 함께 챙겨서 집 앞에 놓고 돌아왔다. 연우의 아버진


다행히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멀쩡한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오랜만에 본다며 이건을 반갑게 맞았고,
연우를 챙겼다. 취했을 때와 같은 사람이란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 멀리 낯익은 사내가 은행나무 앞에 멈춰 서서 무언가를 하는 게 보인다. 집에 러닝머신도


있는데 아침마다 저러고 나와서 뛰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몸을 풀고 나서 그쪽으로
향했다.

도하는 역시나 손을 모으고 열심히 기도하는 중이었다. 저번에 잘못 본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어 그를


불렀다.

“도하 형.”

도하가 화들짝 놀라 이쪽을 돌아봤다. 얼굴 때문인지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가려서 눈만 보이는데도


잘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곧 그가 마스크를 턱으로 쭉 끌어내렸다.

“아, 깜짝이야. 놀랬잖아, 새꺄.”

“여기서 뭐 하세요?”

도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라면서 손을 휘휘 젓는다. 얼른 꺼져.

“선생님은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어제 이건을 학교에 데려다줄 땐 짜증이 났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둘이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영화 보고 밥 먹고 드라이브까지 한 다음에 집에 왔으니 데이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서 헤어진 다음엔 연락도 하지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푹 쉬어야 얼른 낫지. 간신히 감기가
떨어졌는데 괜히 또 아프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까지도 잠자코 기다렸다. 준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아서. 하지만 정작 도하는 밤새 얼마나 설렜는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오늘 서울 가시겠네요?”

응? 생각에 잠겨 들던 도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딜 가?

“서울이요. 오늘 할아버지 제사라고 했는데.”


그 말에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내가 알기에 오늘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요. 제사요. 오늘이라고 저번에 들었는데.”

“하하.”

“왜, 왜 그러세요?”

“아냐. 조용히 해. 너 잠깐만 거기 있어 봐.”

도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준영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갔는데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순간 뒷골이 당기고 발밑으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도하야,
실은…. 어쩌고 얘기하길래 미루자는 말일까 봐 얼른 말을 돌렸는데. 원래 약속이 있었단 말이군.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역시나 같은 메시지다.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이를 까득 무는


걸 보고 이건이 먼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괜히 불똥이 튈까 싶어 집 쪽으로 걸음을 서두르는데 등 뒤에서
으아악! 하고 비명 섞인 고함이 들린다.

흠칫 놀라서 돌아보니 도하가 짐승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 * *

본가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물론 벽 주위로 이미 여러 대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제일 뒤쪽에 차를 세우고


나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켰더니 메시지가 부리나케 들어온다. 이도하, 이도하, 이도하,
이도… 하아.

부재중 33 통. 하하.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이마를 문지르고 나서 메시지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마침 또 전화가


울린다. 34 번째 전화였다.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휴대전화를 들어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반대편에서 빡침이 느껴지는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룸미러를 내려 제 얼굴 상태를 확인하던 준영이 그 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다. 열 받은 게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예요?]

“미안. 나 제사라서 서울 왔어. 내일 가면서 연락할게.”

[내일? 오늘도 아니고 내이이일?]

“갈 때 뭐 사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호두과자?”

호두과자 같은 소리 하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골이 울린다. 준영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한 뼘 정도


떼어냈다. 목청이 얼마나 큰지 스피커마냥 쩌렁쩌렁 차 안에 울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둥,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정도가 있지, 진작 말했으면 어제 기대도 안 했을 거라는 둥 악다구니를 써대더니 조용해진다.

“다 떠들었어?”

[긴말 필요 없어요. 이따가 제사 끝나면 올라와요. 안 자고 기다릴 테니까.]

이럴 줄 알았어. 준영이 못 들은 척 끊으려고 했더니 또 난리다. 사람이 왜 그러냐는 둥, 자기랑 약속한 건


안중에도 없었냐는 둥, 차라리 얘길 하지 말지 그랬냐는 둥, 그 도둑 새끼 도와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둥.

아이고 머리야. 어제 말했으면 이 말을 면전에서 또 하고 또 하고 사람 탈진할 때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니 차라리 이렇게 전화로 하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모친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어디쯤 오느냐는 연락인 듯했다.

“도하야, 일단 끊어. 나 들어가야겠다.”

형! 악을 쓰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듣고 있을 처지도 아니라 그대로 끊고 차에서 내렸다. 뒷좌석 문을


열고 백화점에서 산 갈비와 이것저것을 챙겨 들고선 대문으로 걸어갔다. 남색으로 칠해진 철문을 바라보는 얼굴에
잠깐이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릴 적 이 집 앞에 버려진 기억이 떠오르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몇 번 심호흡하고 나서 인터폰을


누르고 나니 안쪽 문이 열리면서 제 모친이 앞치마를 한 채로 뛰어 나왔다.

“저 왔어요, 어머니.”

“아유, 준영아. 얼른 와. 그러잖아도 너 안 오길래 전화했어. 길은 막히지 않았어?”

“네, 이른 시간이라 괜찮았어요.”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그냥 오지.”

그녀가 아들의 짐을 건네받으며 안색을 살폈다. 며칠 전 목소리가 좋지 않았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번 내려가 볼까 하는 걸 남편이 쓴소리하며 말렸다. 다 큰 자식 뭘 그렇게 품 안에서 놓지를 못하느냐고.
그래서 제사 핑계로 얼굴이나 볼 겸 서둘러 올라오라고 한 것도 있었다. 그랬는데 실제로 보니 얼굴이 조금 야윈
거 같았다.

“어디 아팠어? 왜 살이 더 빠졌어?”

걱정을 늘어놓길래 최근 감기에 걸려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안부를 묻는 내내 도하의 얘길 꺼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하의 모친이 아는데 자신의 모친이 모르는 거 보면 도하 녀석이 어지간히도
입단속을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기름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미 다른 친척들도 모여


있었다. 준영이 들어서자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외면하거나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돌아가신 할머니 덕이기도 했다. 그녀는 제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처음 거둔 사람이었고, 남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도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준영과 사이좋게 지낼 것을 당부했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지, 얼마나 가슴에 맺힌 한이 많은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항상 감사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다들 형식이지만 인사를 건네왔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 작은방에서 민주가 뛰쳐나왔다. 늦잠 자다


일어났는지 평소와 달리 부스스했다. 오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더니 팔에 매달리고 난리다. 준영이 그런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그러자 미정이 딸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야 오빠 힘들어. 매달리지 마.”

“아파, 엄마.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더 잘생겨졌다.”

“넌 더 예뻐졌네.”

“민주 넌 그만 떠들고 가서 두부 좀 사와. 준영아,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쉬어.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아니에요. 내려와서 도울게요.”

준영이 2 층으로 올라가는데 민주가 쪼르르 따라 올라온다. 방으로 들어와 코트를 한쪽에 벗어두고 안을 둘러보니
제가 머무를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매일 쓸고 닦는지 올 때마다 책상 위는 먼지 하나 없었고, 침대도
가지런하니 정돈되어 있었다.

뒤따라온 민주가 문을 닫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오빠, 오빠. 또라이 아직도 거기 있어?”

민주가 말하는 또라이가 도하인 건 누구나 다 알았다. 어릴 적엔 그래도 잘 따르고 도하를 좋아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또라이가 됐는지 모르겠다. 하긴, 오죽 괴롭혔어야지.

“오빠한테 또라이가 뭐야. 그리고 너 도하 카드는 돌려줬어?”

민주가 멋쩍게 웃었다. 엄마 몰래 학원비를 내야 하는데 그걸 감당할 수 없었고, 도하가 내민 카드에 혹해서
준영이 있는 곳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나중에 준영에게 연락해 이실직고했더니 준영이 학원비를 대신 내줬다.
도하 카드는 돌려주라면서.

민주는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미안해했지만, 준영은 괜찮다고 했다. 민주가 아니라도 한국에 있는 걸 안
이상 도하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를 찾아냈을 테니까.

“그러잖아도 오빠한테 주려고 했어. 갖고 있으니까 나도 찝찝하고.”

“이따가 갈 때 줘. 그리고 너, 도하 거기 있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말 안 해. 말했다간 이도하가 나 죽여 버린대.”

그 말에 준영이 슬쩍 인상을 썼다. 그런 말을 했어?

“걔는 오빠한테는 착한 척 오지게 하지? 남들한테는 얼마나 싸가지 없는데.”

준영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민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야, 두부!

“아, 두부 사러 갔다 와야겠다. 오빠 뭐 먹을 거 사다 줄까?”

“아냐, 내려가 있어. 오빠 옷 갈아입고 같이 가줄게.”

“됐어, 쉬어. 내가 이런 거라도 해야지. 대신 이따가 나랑 놀아줘.”

“알았어.”
그녀가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들더니 방을 나갔다. 준영이 웃고 나서 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예전에 사용하던
책상을 손으로 만지다가 그 앞에 있는 여러 개의 액자로 시선이 이동했다. 대부분 가족사진이었는데, 그 틈에
도하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지금쯤이면 이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삭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화가 다시 울린다. 혹시 도하인가 싶어 봤더니 민석이다.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서울 올라왔어?]

“…어떻게 알았어?”

[오늘 너희 할아버지 제사잖아.]

준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찌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럼 그는 몇 년을 사귀었는데 그걸 기억 못


하겠느냐고 대답할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으니까.

[10 시면 끝나나?]

“왜.”

[잠깐 만나서 차나 한잔하게. 너 어차피 술은 힘들잖아.]

공황장애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한 후 커피와 술을 끊었는데, 아직도 그렇다고 여기는 듯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봐서,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럼 이따 연락한다?]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준영이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석을 만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헤어졌다고 하지만 친구처럼 지내기로 서로 합의가 됐지 않은가. 하지만 민석이 요즘 들어 제게 다시 시작하잔
뜻을 자꾸 내비치니 거기에 대해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끊어진 전화를 들고 있다가 메신저 창을 열어보니 도하에게 온 메시지가 있었다.


[어차피 간 거니까 마음 편하게 있다가 와요. 아까는 개지랄 떨어서 미안. 스트레스 주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내가 가서 혼내줄게.]

그렇게 야단을 치고 난리를 떨더니…. 못살아. 피식 웃고 나서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어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을 나서 1 층으로 향하는데 어쩐지 아까완 다르게 소란스럽다. 앙칼진 목소리에 준영이 흠칫 몸을 굳히고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모피를 두르고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여자가 현관 앞 거실에 서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준영의 막내


고모였다. 정확히는 저의 배다른 누이. 그녀 역시 집안의 막내였고 준영과는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다.
그리고 준영이 이 집으로 올 때 가장 많이 반대했고, 가장 많이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제 아버지가 바람피워 밖에서 낳은 자식이 집에 들어왔는데, 예뻐


보일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항상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다.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숨소리조차
조심하면서.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결국 분통을 터트리며 사람들 앞에서 준영에게 모진 악담과 폭언을 퍼부었고, 그 때문인지
제사 때엔 통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너도 왔니?”

벌레 보듯 하는 시선에 준영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아니. 들어오기 전까진 좋았는데 너 보니까 갑자기 안녕 못 하려고 하네. 언니 쟤 어디 시골 내려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오는 줄 몰랐네?”

직설적인 말투에 집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 오다 왔길래 무슨 이유인가 했는데 준영이 오지 않는 줄


알았나 보다. 다들 불편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미정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준영에게로 다가갔다.

“준영아, 넌 올라가 있어. 그리고 아가씨. 내 아들이 내 집 오는데 아가씨가 그렇게 말할 건 아니죠. 오늘
아버님 기일인데 꼭 이런 소란 피워서 얼굴 붉힐 일 만들어야겠어요?”

분위기가 무겁다 못해 써늘해진다. 밤을 까던 아버지가 그만하라고 한마디 했지만 미정의 눈에선 불꽃이 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집안에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그녀였기에 시누라고 해서 눈치 보는 일은 없었다.

막내 고모는 기막힌 듯 웃더니 들고 온 선물을 문 앞에 탁, 버리듯 내려놨다.


“언니 진짜 넉살 좋다. 도련님 될 뻔한 애를 아들, 아들, 그게 쉽게 돼요?”

“고모. 말을 너무 함부로 하네요?”

“내가 틀린 말 한 거 없잖아요. 솔직히 얼굴 붉힐 일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쟤잖아요.”

내 말이 틀렸니? 그녀의 시선이 준영에게 향했다. 차마 이름도 부르기 싫다는 듯. 그 모멸 가득한 눈빛에 준영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다. 밤을 까던 아버지가 그만하지 못하겠느냐고
한 소리 하고 나서야 막내 고모는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저 올라가 볼게요.”

준영이 몸을 돌려 계단을 통해 2 층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눈앞에 있는 건 더 분란만 일으키는 짓


같았다. 등 뒤로 모친과 막내 고모 사이에 언성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중간 다른 식구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방문을 닫았는데도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온다.

아버지도 없는 마당에 쟤를 왜 끼고 사냐는 말부터 시작해, 결국엔 재산 이야기까지. 돌아가신 조부가 자신의
부친에게 더 많은 재산을 남긴 걸 다른 형제들은 맏이라서가 아니라 준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미정이 그럴 거면 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간간이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리고. 준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오지 말걸. 누가 좋아한다고 여길 와서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됐다.

* * *

드륵, 아이스크림을 담아두는 냉장고 문이 열렸다. 도하가 한쪽에 쌓아둔 얼음이 든 음료 컵을 꺼내 들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저번에 봤던 1 층 사는 남자의 여자 친구는 없고, 오늘은 웬 젊은 남자가 있었다. 얼음을
계산대에 올려놓자 그가 한쪽을 가리키며 음료도 고르라고 말해주었다. 도하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냥 이것만 살게요.”

그때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얼음 컵을 들고 돌아서던 도하의 눈에 낯익은 점퍼가 보였다.
연우가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집어 들더니 이쪽으로 왔다. 도하를 봤는데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한번 슥
쳐다보더니 바로 계산대 쪽으로 간다. 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내고 계산하는 동안 기다렸다.
문 앞에 섰던 도하가 얼음 컵을 들고선 다시 계산대 쪽으로 돌아갔다.

“저기요, 사장님.”

계산하던 직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도하를 쳐다봤다. 네? 연우 역시나 옆에 와서 선 도하를 올려다봤다.

“이 새끼 오면 감시 잘하세요. 도둑질 엄청 잘하거든요. 혹시 뭐 없어진 거 있나 살펴보세요. 나도


당했다니까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도하가 까닥 인사를 하고 연우를 흘깃 쳐다봤다. 얼마나 눈을 뾰족하게 뜨고


저를 노려보는지 잘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한번 비웃어 주고는 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 의자를 끌어내서 앉은 다음 얼음이 담긴 컵 뚜껑을 벗겨냈다. 그대로 들어 입안에 얼음을 넣고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서준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은 이후로 한 통의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서민주한테라도 연락해 볼까.

처음엔 저를 속인 기분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나중엔 섹스고 뭐고 걱정이 앞섰다. 가뜩이나 친척들과 사이가
불편한데 거기서 마음고생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준영의 모친이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냥 오늘 오지, 뭐하러 잠은 또 자고 온다고 해서. 후우, 한숨을 내쉬는데 편의점 문이 열리고 송연우가 나온다.
물 부은 라면을 들고서 편의점 의자를 빼내 제 앞에 떡하니 앉아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입안에 얼음을
물고 있던 도하가 그걸 보며 짜증 나는 얼굴을 했다.

“야. 딴 데 가서 처먹어.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내 눈에 걸리적거리지 말고.”

“갈 데가 어딨어요. 안에 자리도 없는데.”

퉁명스럽게 쏘아대는 연우를 보며 도하가 눈을 찌푸렸다.

“그럼 집에 가서 처먹든가.”

연우가 입을 꾹 다물고 젓가락을 깠다. 아버지가 저녁부터 또 술을 퍼마시는 바람에 밥도 굶고 도망 나온 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게 같잖아 그냥 무시한 채 젓가락을 쪼개고 뚜껑을 열어 덜 익은 라면을 풀었다.

“내가 살다 살다 너처럼 뻔뻔한 애새끼는 처음 본다.”


“그래서 그때 사과드렸잖아요.”

“네, 하셨죠. 존나 영혼 없이 하길래 난 시체한테 사과받는 줄 알았잖아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새끼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닥치시고 라면이나 존나 많이 쳐드세요.”

도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여전히 서준영에게 연락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얼음을 다시 입에 털어


우적우적 씹었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 앉은 연우의 눈두덩에 멍 자국이 희미하게 있는 걸 발견했다. 저번에 봤을
때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얼핏 듣기론 아버지한테 맞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야. 송선우.”

연우는 제 이름을 잘못 불렀음에도 정정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면 엄청난 돌대가리거나 애초에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인간인 게 분명했다.

“왜요.”

“너네 아버지가 너 자주 패?”

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후루룩, 입안으로 넣었다. 덜 익은 거 같으면서도 고들거리는 게


맛이 꽤 괜찮았다. 다만 앞에 앉은 남자가 거지 같은 질문을 해서 기분은 잡쳤지만.

연우가 대답하지 않자 도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빤히 쳐다본다.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안 맞는 법 알려줄까?”

“…….”

“너도 같이 패.”

연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라면을 문 채로 도하를 마주 봤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완전 진지하다.
도하는 마치 고급정보라도 알려주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같은 소릴 반복했다. 너도 똑같이 패라고.

마지막에 실실 웃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긁을 작정으로 한 말인 것 같았다.

“원래 폭력이란 게 중독이나 마찬가지야. 패면 팰수록 더 패고 싶거든. 상대가 나보다 나약하고 보호해줄 사람도
없으면 더더욱 그렇지 ”
연우가 눈을 부라린 채 면발을 기계적으로 씹었다. 확, 얼굴에 뱉어 버릴까 고민하면서.

“너 부모의 의무가 뭐야. 제대로 키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근데 너희 아버지가 그 의무를 다했어? 아니잖아.
그니까 너도 자식 노릇 할 필요 없어.”

탁, 연우가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자 도하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했다.

“지금은 내 말이 존나 아니 꼽고 띠껍고 재수 없게 들리겠지.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새끼가 좆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고 내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을 거야. 물론, 인정. 근데 인마. 너 인생 포기하고 지금처럼 엉망진창으로
굴다간 나중에 진짜 똥 밭에 굴러. 뒤늦게 정신 차리고 나온다고 해도 네 몸에 밴 냄새는 쉽게 안 빠진다. 평생
꼬리표처럼 너 따라다닌다고. 알겠어?”

젓가락을 쥔 연우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도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하게 웃는다.

“알았어. 그만 째려봐. 눈깔 튀어나와서 국물에 말아 먹게 생겼네.”

짜증 나. 잘난 척하기는. 연우가 그대로 일어서더니 라면을 쓰레기통에 처박고선 몸을 홱 돌렸다. 의자에


껄렁하게 앉아 있는 도하를 노려보며 입술을 암팡지게 꼭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도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 한 거 없잖아?

“재수 없어.”

연우가 한마디 쏘아붙이더니 몸을 홱 돌려 간다. 도하의 눈에 연우가 남기고 간 삼각김밥이 들어왔다.

“야, 도둑놈. 김밥 가져가.”

소리를 질렀지만 연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하가 그대로 일어나서 삼각김밥을 던졌고, 그게 정확히 연우의
뒤통수에 맞고 떨어졌다. 연우가 악, 비명을 지르면서 뒤돌아봤고, 제 머리에 맞은 게 조금 전 자신이 남기고 온
김밥인 걸 확인하고는 머리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하, 시발!”

“인마. 그러게 잘 받지. 도둑질은 잘하면서 운동신경은 별로 없구나?”

이쯤 되면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버지 얘길 꺼낸 것도 그렇고, 훈계인 척하면서 아까부터 제 속을 박박 긁으려고


작정한 게 보였다. 연우가 이를 까득 물었다. 실실 쪼개고 있는 저 낯짝에 라면 국물을 부었어야 하는 건데.

삼각 김밥을 주워 그대로 들고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며 도하에게 다가갔다.

“씨발.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개새끼야!”

김밥을 던졌는데 그가 그걸 단숨에 낚아챘다. 연우의 악다구니에도 도하는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그 김밥을
야구공처럼 툭, 툭 공중에 띄워 던지며 웃었다.

“어떻게 할 줄 아는 욕이 씨발이랑 병신밖에 없어. 양아치면 양아치답게 욕이라도 좀 다양하게 하든가. 아니면
깡이라도 있든가.”

이게 진짜. 참다못한 연우가 의자를 집어 들었다. 놀란 편의점 직원이 뛰쳐나오는데 동시에 도하가 발로 연우의
정강이를 찍었다. 연우가 몸이 휘청하며 쓰러지는 찰나 도하가 일어서며 의자를 빼앗고 그대로 연우의 목덜미를
잡아 찍어 누른 후 질질 끌고서 편의점 앞 작은 화단 쪽으로 걸어갔다.

“씹새끼야! 놔! 이거 놓으라고 개새끼야!”

지켜보던 편의점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도하가 연우를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쌓여 있는 곳으로 끌고 간다.


그러더니 그대로 얼굴을 그곳에 눌러 버렸다. 연우가 버둥거리는데도 힘을 빼지 않았다.

지켜보던 편의점 직원이 기겁하고 말려야 하나 아니면 신고를 해야 하나 허둥대는데 저 멀리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오고 있던 이건이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처음엔 도하만 봤는데 뒤늦게 낯익은 점퍼를 입고 버둥거리는 누군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형!”

급하게 뛰어가니 도하가 그냥 가라고 손짓을 보낸다. 이건이 기가 찬 얼굴로 뭐 하는 짓이냐고 빽 소리를 지르고
도하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당겼다. 동시에 연우가 끌려 올라오며 숨통이 트였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캑캑댔다.
얼굴은 눈투성이에 코랑 눈 주위가 시뻘겠다.

그걸 보고 이건이 화가 나선 버럭 악을 썼다.

“형 미쳤어요! 애를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야야, 나한테 화내지 마. 이 자식이 나한테 먼저 욕하고 편의점 의자로 때리려고 했어. 사장님도 보셨죠?”

너무나 태평하게 웃으며 묻는 바람에 편의점 직원도 당황하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제가 봤을 때도


연우가 먼저 편의점 의자를 들고 때리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걸 보고 도하가 턱을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봤지?

이건이 당황해서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가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내는데 분을 못 이겨선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눈 주위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씨발, 개새끼, 씹, 새끼.”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며칠 된 눈이라 결이 단단했고,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진짜 숨이
안 쉬어졌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도하가 인상을 슬며시 찡그렸다. 그 표정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둑놈, 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다시 덤벼들려 하기에 이건이 그런 연우를 간신히 떼어놓았다. 난장판이 된 편의점
앞을 직원이 정리하니 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선 그가 정리하는 걸 도운다.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와는 180 도 다른 모습에 연우가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저 씹새끼, 가만, 안 둬.”

이를 뿌득뿌득 갈며 도하에게 덤비려 하기에 이건이 그런 연우를 끌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일단은 앉혀두고
책가방에서 휴지를 뽑아 연우의 얼굴을 닦아줬다. 아무리 연우가 잘못했다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눈 속에
처박다니. 가뜩이나 감기 앓은 지 얼마 안 된 애를. 도하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어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마저
뽑았다.
“괜찮아? 그러게 그 형을 왜 건드려?”

그 말에 연우가 홱 고개를 돌려 노려본다. 이를 까득 물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게 분하긴 분한 모양이었다.


그 눈빛에 이건이 달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았어. 화 풀어. 얘기 안 할게.”

“그 새끼, 가만 안 둘 거야.”

“그러지 마. 너도 잘한 거 없어.”

야, 너 지금 그 새끼 편드는 거야? 연우가 이건의 팔을 뿌리치고 나서 어깨를 밀쳤다. 이건이 윽, 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별로 세게 친 게 아닌데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아파하는 걸 보고 연우가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입술 끝이 터진 것도 그렇고 얼굴 한쪽이 빨갛게 부은 것도 그렇고.

얼굴을 살피는데 이건이 시선을 피한다.

“너… 맞았어?”

“맞긴 뭘 맞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게 더 수상쩍었다. 연우가 그대로 이건의 점퍼를 들어 올리고 맨살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 말라고 이건이 버티는데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둘이 옷을 걷네 마네 옥신각신하는데 뒤쪽에서 휘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봤더니 언제 왔는지 도하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찔러 넣고 둘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연애해?”

그 말에 연우가 발끈해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시 도하에게 달려들길래 이건이 그를 붙들고서는


잡아당겼다. 야, 그러지 마라니까.

“놔, 씨발!”

연우가 휘두른 팔에 이건이 가슴께를 얻어맞고서 억하고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놀란 연우가 돌아봤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아파 보였기에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야….”

“괜찮아. 윽, 잠깐 잘못 맞아서 그래.”

“누구야? 곽상윤이야?”

대충 넘겨짚었는데 이건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정류장에서 본 상윤의 서슬 퍼렇던 얼굴이 생각났다. 자주 가는


당구장과 노래방이 강이건 학원 근처에 있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연우가 이를 까득 물었다.
개새끼, 기어코….

“지가 때려 놓고서.”

“장난해?”

“아까 얼음판에서 애들이랑 장난치다 넘어졌어. 그래서 그래.”

“거짓말하지 마! 등신 새끼야. 곽상윤 그 새끼한테 맞은 거잖아!”

“야. 너는 내가 누구한테 맞을 사람으로 보여?”

“어. 존나 맞고 다닐 것처럼 보여!”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도하가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었다. 꼴값들을 해요. 잘 어울린다. 잘 놀아. 그러고
나선 집 쪽으로 걸어갔다. 기분도 좋지 않고 완전 엉망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보호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걸 올려다보는데 눈이 저절로 날카로워진다.

“정성껏 기도하고 떡까지 사다 바쳤는데 이딴 식으로 나오시겠다?”

확 베어 버릴 수도 없고.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무래도 느낌이 영 좋지


않단 말이야. 일단 서민주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신호가 가다가 거의 끊기기 직전에
쿵쿵대는 음악 소리와 함께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브세여?]
술에 취해 혀가 반쯤 말려들어 간 거 보니 기가 막혔다. 오늘 제사 아니었어?

“야. 너 집 아니야?”

[누구야. 아아, 또라이!]

“시끄럽고 준영이 형 바꿔.”

[울 오빠 없어. 집 나갔어.]

“뭐?”

[집 나갔다고! 나도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하소연인지 술주정인지 민주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곧 울먹울먹한다. 막내 고모가 와서 지랄했다고 어쩌고 하더니
그래서 준영이 결국은 제사 끝나고 바로 사라졌다면서. 듣고 있던 도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선 작게 신음을 내쉬었다.

“그럼? 어디 갔는데?”

[나야 모르지.]

“왜 그것도 몰라! 그러고도 네가 동생이야!”

[나도 속상한데 왜 나한테 짜증 내고 지랄이야!]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 안 속상한 줄 아느냐고, 또 울먹인다. 더 들을 것도 없이 도하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준영의 전화번호를 찾아내서 거는데 받질 않는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젠장, 알았으면 보내지 말걸. 막내 고모가 누군지 알았다. 서준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장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준영을 향해 가감 없이 적대감을 드러내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술에 취해 막말을 퍼붓고,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을 줬던 것도.

괜히 저를 피해 도망치느라 오늘 제사에 참석한 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자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 *

준영이 술잔을 비우니 앞에 앉은 민석이 그만 마시라고 잔을 빼앗아간다. 주량이 세지 않은 편인데 벌써 두 병


가까이 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일찍 연락이 왔길래 와봤더니 벌써 술 한 병을 혼자 비운 상태였다.
대충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만 했다. 사귈 때도 한 번씩 집안일로 힘들어했던 거 같은데, 자세히
말해주지 않으니 속속들이 알 순 없었다.

“그만 마셔.”

준영이 술잔을 가져와선 다시 채운다. 안주로 나온 회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안주 먹여 줄까?”

“그런 짓 하지 마.”

정색하는 준영을 보며 민석이 웃었다.

“적당히 마셔. 취하면 내가 데려간다?”

“걱정 마. 요즘 약도 끊고,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전날 밤에도 약을 먹었고,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비상약 하나를 더 먹었다. 그랬는데 그 일이


터지니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있다간 압사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모친을 생각해서 제사 때까진
참았다.

제사를 지내는 내내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제게 와 꽂혔다. 막내 고모는 가지 않고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방송국 로비에서 쓰러지던 그날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에게 죽을 만큼 미안하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저를 비참하게 하나 원망스러워졌다.

결국 숨통이 조이는 기분에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는 길에 모친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친구도 만나고 기분 좀 풀라고. 미안하다고. 막내 고모가 오는 줄
알았다면 미리 알렸을 텐데.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당연한 말이어서 서운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차라리 그때 대문 앞에 버려진 자신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보육원이라도 보내 가족 없이 살게 했더라면, 지금보단 덜 아프지 않았을까.

꿀꺽,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어느 정도 취한 건지 이젠 쓴맛도 느껴지질 않았다.

“걔는 연락 왔어?”

준영이 빈 잔을 다시 채우기도 전에 민석이 술병을 낚아채선 가져갔다. 반만 따라주고서는 여태 궁금하던 걸


그제야 물어왔다.

“누구.”

“알면서.”

준영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응. 왔어. 우리 위층으로.”

뭐? 민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준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잔을 비운다. 수저를 들어 회 대신


탕국물을 떠 마시는데 민석이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테이블에 팔을 대고 얼굴을 받친다.

“그래서? 잤어?”

그 질문에 준영이 기가 막힌지 웃었다. 다짜고짜 잤느냐고 물으니 웃길 수밖에. 잠잠하다 싶더니 1 시간 전부터
전화가 진동했다. 아예 무음으로 해두고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비참한 심정으로 도하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지르는데 민석이 앞에서 손을 흔든다.

“취했어?”

“조금.”

“오늘 밤에 같이 있을래?”

그의 물음에 준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하 생각이 났다. 지금쯤 열 받아서 펄펄 뛰고 있으려나. 당장 쫓아오는
거 아니야. 그런다고 해도 놀라울 게 없었다. 실제로 예전에도 몇 번 그러지 않았나.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흔들리는구나?”

턱을 괸 채 준영을 빤히 쳐다보던 민석이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누구한테?’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준영은


묻는 대신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민석도 더는 마시지 말라며 잔소리하지 않았다.

“받아줄 거야?”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민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곧 작게 한숨처럼 내쉬었다.

“예전엔 절대 아니라고 하더니, 마음이 바뀐 거야?”

준영이 잠시 생각하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어차피 이젠 걔도 성인인데 못 만날 건 또 뭔가 싶다가도, 부모님들


생각하고 그 자식 앞날 생각하면 열 살이나 많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싶어져…. 근데
막상 보면 또….”

또, 뭐? 민석이 물었지만, 이번에도 준영은 대답 대신 술잔을 택했다. 민석은 재촉하지 않고 안주를 집어 접시에
놓아주었다.

“거기서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서 더 그럴 거야. 올라와. 기석이 형도 너 기다리는 눈치더라. 국장도 다시 오라고
했다며. 뭐가 문제야.”

준영이 민석과 똑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팔을 대고 얼굴을 받쳤다.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는 걸 보니 꽤 취한
듯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글쎄. 뭐가 문젤까. 내가 문젠가.”

“준영아.”

민석이 손을 뻗어 준영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준영이 그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도하만큼이나 크고 손가락이


예뻤다. 전에 봤을 때 네 번째 손가락에 있던 반지는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도 누군가와 그런
반지를 나눠 낄 수 있을까.
느리게 눈을 끔뻑끔뻑하는데 취기가 확 올라온다.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귓속으로 달콤한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많이 취한 것 같다. 오늘 나랑 가자, 응?”

소리는 들리는데 눈이 쉽게 떠지질 않았다. 고개를 몇 번 까닥까닥 움직이다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민석이
재빨리 그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선 가만히 바라봤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새어
나온다.

다른 손을 가져가 뺨을 만지는데도 꼼짝하질 않았다. 그러다 입술을 건드리니 저절로 벌어지며 빨간 혀가 보인다.
제 성기를 쥐고 요염한 얼굴로 핥던 옛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까 준영이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뭐든 간에 상황이 제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일어서선 정신 잃은 준영을 부축했다. 잠꼬대처럼 어딜 가느냐고 묻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밖으로
나와 제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난 몰라, 분명 아까 데려간다고 말했어.

* * *

준영을 부축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민석이 준영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는 인사불성으로 취했다. 한 번씩
눈을 뜨긴 했지만 온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말릴 걸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된 마음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제 속을 까맣게 물들였다.

코트를 벗겨내는데 바닥으로 무언가 툭, 떨어진다. 휴대전화였다. 그것을 주워들고 코트를 한쪽에 걸어뒀다.
패턴이 잠겨 있지 않은 휴대전화 바탕화면엔 마흔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걸 눌러 확인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도하였다.

“지겨운 자식.”

그러면서 누워 있는 준영을 봤다. 전화가 온 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받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전에는


죽어도 아니라고 팔짝 뛰더니 흔들리느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 둘 사이가 전과는 달라진 걸까.

그대로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놓고 나서 준영의 옆에 앉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주는데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 뺨을 만지고 입술을 만지고 그렇게 내려오던 손이 셔츠 단추를 매만졌다.

톡, 첫 번째 단추를 풀고, 톡, 이어서 두 번째 단추를 푸니 벌어지는 셔츠 사이로 흰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민석이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유독 살결이 흰 탓에 섹스할 때도 금방 붉어지곤 했었는데, 몇 년 만에 본 속살은
여전히 그때처럼 희고 고왔다. 그 생각을 하니 꾹꾹 눌러놨던 욕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전히 잠든 준영의 얼굴을 보며 세 번째 단추를 톡, 하고 푸는데 침대 한쪽에 던져둔 전화기에 번쩍번쩍 불이
들어온다. 전화는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CCTV 의 붉은 점처럼 저를 감시하는 기분이 들어 더는
단추를 풀지 못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전화기를 가져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도하다. 지겹다 정말. 그냥 확 끊어 버릴까
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전에 카페에서 저를 협박했던 일이 괘씸하기도 했고, 서준영 마음을 흔들러 거기까지
내려간 거에 대해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여보세요?’ 하고 말하고 나서야 씨발, 하고 욕을
씹어뱉었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챈 것 같았다. 이상한 쾌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목소리에 느껴지는 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거 같아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준영이 찾는 거면 지금 못 받아. 내일 다시 해.”

[같이 있어요?]

“지금 씻어.”

[거짓말.]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맘이니까 알아서 하시고. 그만 끊는다.”

[잠깐만.]

“왜, 또.”

말을 시켜놓고서는 어쩐 일인지 대답이 없다. 뭐야, 이 자식. 휴대전화를 봤는데 아직 통화가 끊긴 게 아니었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낸다.

[오늘만 준영이 형 옆에 있어 줘요.]

하. 민석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으음. 준영이 속이 불편한지 인상을 쓰고 몸을 뒤척인다. 예상대로라면


이도하가 펄쩍펄쩍 뛰면서 소 새끼 말 새끼 온갖 동물 새끼는 다 찾으면서 손만 대보라고 지랄 발광을 해야 맞는
건데. 너무 어리둥절해서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물었다.

“왜 우리 꼬맹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까?”


[준영이 형 오늘 기분 안 좋으니까 혼자 두지 말라고요. 부탁할게요.]

부탁한다는 말에 민석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제정신이 아닌 서준영의
단추를 풀던 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분했고 카페에서 저를
협박하던 이도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너 속을 모르겠다?”

[피차 사귈 거 아니면 그런 거 알 필요 없잖아요. 부탁한 거나 들어줘요.]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야. 신경 꺼. 그리고 어른들끼리 할 일 있으니까 전화하지 마.”

어른들끼리 할 일이라고 콕 찝어 말한 건 열 좀 받으라는 뜻이었는데 도하의 목소린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다.


마치 듣고도 못 들은 사람처럼.

[그리고 아침에 해장국 챙겨줘요. 형 북엇국 그런 거 싫어해요. 매운 국물 들어간 걸로 육개장 같은 거 챙겨주면


돼요.]

서준영이 해장국으로 뭘 먹는진 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슬슬 열이 올라온다.

“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넌 밸도 없어?”

울컥해서 물었는데 돌아오는 목소리는 담담하다.

[없어요, 그런 거. 서준영한테 난 그런 거 없어.]

하하. 민석이 기막힌 듯 웃으니 도하가 그럼 부탁한다고 하더니 먼저 툭 끊는다. 좀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전처럼 전화로 신음이라도 들려줘서 한 방 먹여 버릴까 싶었는데, 졸지에 저를 아주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어 놓고
전화를 끊다니.

하하, 이 새끼. 민석이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었다.

* * *
끼익, 현관문을 열고 점퍼를 대충 걸친 채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잠시 준영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곧 몸을
돌려 1 층으로 내려왔다. 빌라를 빠져나와 주차장 한쪽에 있는 평상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에 집 안에 들어가 있던 백설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가 낯선 사람이 아닌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다시 집


안으로 몸을 숨긴다. 도하가 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곳에 머무르는 걸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외투를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저 멀리 산등성 위로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공기가 꽤 쌀쌀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지만, 서준영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셨다. 발밑 깡통에는 밤새 들락이며 피워댄
담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후우, 담배 연기를 공기 중에 흩뿌렸다. 담배 끝이 제 속만큼이나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젯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김민석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분하고 원통했다. 한편으로는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갔는지 준영이 원망스러웠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뱃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았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찾아간다고 해도,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서준영이 힘들 때 찾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절망했고, 둘이 이 시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에 또 절망했고, 서준영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에 마지막으로 절망했다.

그러다 나중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김민석이라면 적어도 오늘은 서준영을 위로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몸이든 뭐든,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은 마음을 추스르려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고 연신 몸을 적시는데도 춥기는커녕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몸이 뜨거웠다. 입술은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나중엔 피 맛이 났다. 더 있다간 진짜 안될 것 같아 대충 물기를 닦고선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바람을 쐬고 다시 집에 들어오고, 또다시 찬물을 틀고 몸을 적시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됐다.

[넌 밸도 없어?]

후우,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깡통에 넣었다. 다시 담배를 꺼내는데 빌라 입구에서
강이건이 나온다. 새벽 운동을 하기 위한 건지 아니면 개밥을 챙겨주러 나온 건지 모르지만, 도하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백설에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서는 도하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형, 여기서 뭐 하세요?”


가까이에서 본 도하의 얼굴은 꺼칠했으며 눈은 잠을 못 잔 건지 시뻘겋게 충혈됐고, 눈빛은 많이 지쳐 보였다.
어젯밤 송연우를 메다꽂을 때만 해도 솔직히 좀 마음으론 얄미웠었는데, 막상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보니 은근슬쩍
걱정됐다.

“괜찮아요?”

“그래 보여?”

“…아니요. 안 그래 보여요.”

기운 없이 웃으며 두 번째 담배를 깡통에 집어넣는다. 깡통 안을 확인한 이건이 인상을 구겼다. 거기엔 도하가
밤새 피운 걸로 보이는 담배꽁초가 한 무더기는 들어 있었다. 이걸 밤새 다 피운 거냐고 물었는데 도하가 대답
대신 얼굴을 문지른다.

“잠 못 잤어요?”

“…응.”

“왜요.”

“그냥.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혹시 연우 때문인가. 어제 열 받게 해서. 하지만 어제 본 도하의 얼굴은 너무 천하태평이었는데.

“지… 금이라도 들어가서 자요. 얼굴이 안 좋아요.”

“그래야지.”

평소 같으면 신경 끄고 꺼지라고 할 텐데 대답은 순순히 하면서도 일어서질 않는다. 그저 빌라로 들어오는 길


입구 쪽을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거기에 뭐라도 있나, 하고 저도 따라서 봤지만 보이는 건 푸르스름한
새벽하늘과 까치뿐이었다.

“들어간다.”

자리에서 일어선 도하가 그대로 빌라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2 층에서 3 층을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고 몸을 돌렸다. 서준영 집 앞으로 걸어가서는 202
호라고 호수가 적힌 걸 가만히 쳐다봤다.
더 가까이 가서 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주먹을 꽉
쥐였다가 펴면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주위가 빨갛게 변했다.

상상하지 말자. 상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상상하지 말자. 쿵, 쿵, 문에 머리를 찧고 있는데 뒤에서 ‘도하
형?’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몸을 돌려 보니 이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말 걸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고 나서 그대로 3 층으로 올라갔다.

CH 11.

모범택시 한 대가 오피스텔 입구에 멈춰 섰고 잠시 후 뒷문이 열리고 도하가 내렸다. 택시기사에게 건네받은


카드를 지갑에 넣고 오피스텔을 올려다봤다. 그의 손엔 종이로 된 갈색 빵 봉투가 들려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8 시가 넘었다. 학원을 끝내고 준영에게 연락했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혹시 집에서 자는 건가. 평소 그가 좋아하던 가게에서 빵을 사서 집 앞까지 찾아왔다.

인터폰을 누를까, 아니면 다시 전화해볼까 하는데 저 멀리서 흰색 차 한 대가 들어온다. 그걸 보는 도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락이 안 되던 준영이 그곳에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차를
세우고 한참이나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서 아는 척을 할까 하다 출입구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준영이 내려 이쪽으로 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차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슬쩍 내밀어 봤더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준영 혼자가 아니었다.

운전석에 있던 흰색 셔츠를 입은 남자와 함께였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서 벽에 가만히 기대 서 있는데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

“들어가서 차 마시고 가도 돼?”

“늦지 않았어요?”

“괜찮아. 어차피 회의도 내일로 미뤄졌는데 뭐.”

지잉.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도하가 벽에 기댄 채 갈색 빵 봉투를 내려 봤다.
고소한 빵 냄새에 군침 대신 목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와서 봤더니 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오피스텔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을 따라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초조함에 애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 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고 내리자 서준영의 집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 앞으로 가서 가만히


바라보다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누를까. 아니면 그냥 갈까.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 말소리와 함께 웃는 소리도 들리고 그러더니 조용하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다시 문을
쳐다봤다. 어쩐지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서준영은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걸 게이라고 부르거나 호모라고 비하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서준영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어릴 적 제게 할애하던 시간을 이젠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건 점점 참을 수 없어졌다.

지문 자국은 없었지만, 전에 서준영이 번호를 누르던 걸 떠올렸다. 일부러 외우려고 한 게 아니라 준영의
생일이어서 쉽게 기억해 냈을 뿐이었다. 꿀꺽.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잠금장치로 손을 가져갔다.

주위를 둘러본 다음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섯 자리를 누르고 나니 스르륵,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열리는 문틈으로 안쪽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는데 그 녀석이 자라 새끼를 낳은 적이 있었다. 그때 진통을 하면서 냈던 소리와


비슷하기도 했다. 멈춰. 집으로 돌아가. 머릿속 경고와는 달리 걸음은 이미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앓는 듯한 신음도 함께 들려왔다.

아프냐고 묻는 낯선 목소리에 준영이 간신히 말하는 소리도.

“아니, 형, 더, 더 해줘요.”

뚝, 도하는 현관 앞에서 더는 움직이질 못했다. 얼마 전 친구 승민이 집에 아무도 없다고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서 보여준 영상이 떠올랐다. 두 남녀가 헐벗고 뒹굴던. 나중에 애인이 생기면 다 하는 거라던. 꾸깃 손에
든 빵 봉투가 처참히 구겨졌다.

두 사람이 지르는 숨소리와 신음이 뒤엉켜 제 귓속을 송곳처럼 후벼댔다. 고통스러웠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우렛소리 같았다. 휘청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목구멍 아래쪽에서 뜨거운 불덩어리와 신물이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미친 듯 건물 입구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들려 있던 빵 봉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버티려 했지만 끝내 터지는 울음은 참진 못했다. 기어코 사람들 많은 인도 한복판에 주저앉아
꺽꺽 울음을 토해냈다.

서준영에 대한 제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도 확실하게 깨달은 날이었다.

* * *

준영이 몸을 뒤척였다. 끙, 신음을 내고 나서 눈을 뜨는데 낯선 천장이 보인다.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가 하다가 어젯밤 일이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스쳐 갔다. 김민석을 만나 술을 마신 것부터 시작해, 그만
마시라고 말리던 모습. 도하에게 끊임없이 오던 전화. 그리고 중간중간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제 모습들.

끙,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전혀 모르는 장소다. 둘러보던 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낯익은
그림이었다. 예전에 민석과 베트남으로 여행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샀던 풍경화였다.

그제야 그곳이 민석의 집임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이불을 들치고 제 상태를 확인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긴
했지만, 어제 그 상태 그대로였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발에 무언가
물컹하고 밟힌다.

윽, 하는 소리에 놀라서 발을 떼고 내려다보니 민석이 돌아누우며 가까스로 눈을 뜨는 중이었다. 캠핑할 때 쓰던


일인용 매트를 바닥에 펼치고서 그곳에 누워 있었다. 얼굴에 피곤함과 잠이 잔뜩 묻어 있는 걸 보고 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너, 뭐야?”

“일어났어?”

“…왜 거기서 자?”

“계속 속 안 좋아 뒤척이길래, 혹시 몰라서 여기서 지키다 잠들었어.”

아. 준영이 제 얼굴을 문질렀다. 어지간히 먹었구나. 인상을 쓰는데 민석이 일어나 앉더니 준영의 다리에 제
팔을 기대면서 올려다본다.

“잘 잤어? 술 먹더니 얼굴도 부었네. 못생겨졌어.”

“남 말하지 마. 네 꼴도 만만치 않아.”

둘이 마주 보며 어처구니없는 듯 웃다가 준영이 먼저 손을 뻗어 민석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줬다. 까치집 됐다. 그


손길에 민석이 애써 웃었다. 어젯밤 몇 번이나 시험에 들었는지 모른다. 그냥 할까.

이도하랑 통화만 안 했어도 진짜 그랬을 거다. 망할 자식이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양심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일어나서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기분은
좋았다.

“씻고 아침 먹으러 갈까?”

“목말라.”

끙차.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려, 물 가져다줄게. 방을 나서는 그를 보고 준영이 방 안을 둘러봤다.


하마터면 예전에 같이 잠깐 동거하던 집인 줄 착각할 뻔했다. 인테리어도 비슷했고, 놓여 있던 동양풍 소품들도.
취향이 참 한결같구나, 생각했다.
그대로 일어나 한쪽에 있는 제 휴대전화를 가져왔다. 어머니와 민주로부터 부재중 전화와 함께 메시지가 들어온
게 있었다. 괜찮으냐고, 밥은 먹었느냐고, 어제 친구네 있었던 거냐고, 묻는 걱정들.

그리고 도하에게 온 연락이…. 부재중 목록을 훑어보던 그가 잠시 숨을 멈췄다. 어라. 거의 마지막에 통화된 게
있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통화한 기억이 없는데.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눈앞으로
물컵이 불쑥 들어왔다.

“자, 마셔. 마시고 나가자. 해장국 사줄게, 어차피 내가 끓여주는 건 너 입맛에 안 맞잖아.”

준영이 물컵을 받아 들고 민석을 올려다봤다.

“어제 도하한테 전화 온 거 네가 받았어?”

민석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준영이 물컵을 든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갑자기 뭘 먹지도 않았는데 명치끝이 꽉 막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괜히 조금 화가 나선 민석을 올려다봤다.

“받지 말지 그랬어.”

“계속 울리길래 신경 쓰여서 받았어.”

“받아서 뭐라고 했는데.”

“별말 안 했어. 너 잔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잘 부탁한다더라.”

준영이 눈을 찌푸렸다. 못 믿는 표정을 하자 민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이라고 못 믿겠으면 본인에게


확인하라고 말이다. 준영이 달싹이던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다시 전화를 쳐다봤다. 약속을 어긴 것도 열 받을
텐데, 불난 집에 기름을 아주 쏟아부었으니 나중에 뭐라고 얘길 해야 하나.

“받아줄 거 아니면 확실히 해. 자꾸 그래 봤자 어린 양한테 상처만 줄 뿐이라고.”

그 말에 준영이 들고 있던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막힌 것처럼 따갑고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거 같더니


한 컵을 다 비우고 나니 좀 살만해졌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쉬니 민석이 더 떠다 주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일어서는데 민석이 그런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앉힌다.

준영이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응시했다. 여전히 저를 보는 눈은 따뜻했고, 다정했다. 결혼했었단 사실만 빼면


조금 전까지도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진한 눈빛이었다.

“나한테도 기회 줘.”

“…….”

“이런 부탁 염치없는 거 알아. 우리는 한 번 헤어졌고, 나는 결혼까지 했으니까. 그렇지만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해. 널 가장 기쁘게 할 사람도. 챙겨줄 사람도.”

준영은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지금 당장 말해달라는 거 아니야.”

준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물컵을 양손으로 꼭 쥔 채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

민석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무슨 뜻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성격 차이로 1 년도 되지 않아


이혼했고, 다시 서준영과 잘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했다. 둘이 사귀면서도 한 번씩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지만, 서준영은 항상 제게 돌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기다릴게.”

준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노란색 물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노란색을 보고 있으니 집에 꽂아둔
프리지어꽃이 생각났다. 예전에 그 꽃을 제게 건네주며 활짝 웃던 어린 도하와 훌쩍 커 버려 이젠 꼬맹이라 부를
수도 없는 어른이 된 도하의 얼굴이 동시에 겹치면서.

“네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 미안해.”

“준영아.”

“도하가 아니라도 너와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려워. 그 생각엔 변함없어.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난 이제 너 만날 수 없어.”
확실한 대답을 듣자 민석은 할 말을 잃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보고 사는 것보단 그래도 친구로라도
지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더 매달렸다간 서준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지내다 보면 다시 잘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곤 못하겠다.

“일단 씻어. 밥 먹으러 가자.”

응.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민석은 곧 침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준영이 제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줘야 하나,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낫겠지. 곧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 * *

이건이 빌라 밖으로 나와서 양팔을 쭈욱 위로 뻗었다. 몇 시간째 인터넷 강의를 듣느라 목이 뻣뻣하게 굳어 그걸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 상태로 옆으로 스트레칭을 하다 윽, 하고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얻어맞은 데가 아직도
욱신욱신 쑤셨다.

엄마한테 걸릴까 봐 파스도 붙이지 못하고 버티는데 맷집 좋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꽤 아팠다. 박태경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게 곽상윤이라더니 괜한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맞은 부위를 붙들고 끙, 신음을 내쉬며 평상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 빈 담뱃갑이 있었다. 누구 건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깡통 안에 들어 있는 담배꽁초는 새벽에 봤을


때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그때 봤을 때도 잠을 안 잤던 거 같은데. 설마 그 후에도 계속 나와서 피웠던 건가.

대체 무슨 일일까. 속상한 일이 생긴 건가. 연우를 눈에 처박고 종종 저를 괴롭히긴 했지만, 어울리지 않게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을 보니 조금은 딱한 마음이 들고 신경이 쓰였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돌아보니 5 층에 사는 박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오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전과 다르게 가끔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엄마 말에 따르면 치매 증세가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허리가
조금 굽긴 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할머니가 웃으며 받아준다.

“건이는 왜 나와 있어? 추운데.”

“공부하다가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어디 가세요?”


“응.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요 앞에 산책하러 가게.”

이건이 동네를 둘러봤다. 아직 곳곳에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운데 괜찮으시겠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기특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멀리 안 갈 거야.”

그때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쟤는 누구야. 창식이야?”

“아유, 영감. 3 층 사는 건이잖아요. 예진이 아들내미.”

“예진이? 순자 딸 예진이?”

“이 영감탱이. 순자 딸은 경원이고, 쟤는 저기 느티나무 집 꽃순이 외손주.”

제 외할머니 이름과 엄마의 이름까지 나오자 이건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동네가 작다 보니 다들 알고 지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건보다 더 기억력이 좋던 할아버지는 1 년 사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걸 보는 이건의 마음도
어쩐지 좋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세요.”

인사를 하니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팔을 붙들고선 길을 따라 내려간다. 가는 중간중간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목도리를 계속 여며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시켰다. 치매 노인에게 외로움보다 더 큰 독은 없다고 엄마가 그랬던 게
기억났다. 외로움이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예전부터 박 씨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애처가였다. 항상 할머니를 챙기던 그는 이제 아기가 되어


할머니의 챙김을 받았다. 반대로 무뚝뚝하던 할머니는 어느새 수다쟁이가 됐다. 나이 지긋한 노인 둘이 서로
의지하며 걷는 뒷모습을 보고 이건의 눈엔 애잔함이 감돌았다.

저도 언젠가 장가를 간다면 부인을 위해주고 꼭 알콩달콩 살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몸을 쭉 늘렸다. 그렇게 몇 번
움직이고 나니 허기가 졌다. 사춘기라 그런지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온 김에 편의점 가서 군것질거리나 좀 사 올까. 고민하는데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그


차가 잠시 두 노인 앞에 멈춰 섰다가 다시 이쪽을 향해 올라온다. 준영의 차였다. 언덕을 오른 차는 속도를
줄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이 항상 제 차를 세워두던 자리에다 주차하고 나서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건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오세요?”

“응. 너 왜 나와 있어?”

“공부하다 잠깐 나왔어요. 일찍 오셨네요?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요.”

“잠을 못 잤어. 자, 이거.”

준영이 이건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케이크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들러 산 거였다.

“뭐예요?”

“케이크. 가서 부모님이랑 먹어. 여기 맛있는 데야.”

“감사합니다.”

그러다 이건의 시선이 준영의 반대편 손으로 간다. 거기엔 똑같은 상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혹시 도하 건가.

“그건 도하 형 주실 거예요?”

“…응. 왜?”

“지금 잘 텐데. 밤새 안 자고 계속 들락날락했거든요.”

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은 자신이 새벽에 나와 있을 때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때도 산처럼 쌓여 있던
꽁초가 지금은 더 늘어났다면서, 못해도 세 갑은 넘게 피운 거 같다고 걱정했다.

“무슨 일 있나 봐요. 되게 힘들어 보였어요.”

꽉 다문 준영의 턱이 더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러냐며 애써 웃고 나서는 건물 위쪽을 쳐다봤다. 심란한 마음에


이건이 더 얘기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자.”
“먼저 가세요. 전 편의점 갈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이 케이크 주셨으니 운동이나 더 하다 바로 들어갈게요.”

준영이 그러라고 대답하고 나서 빌라 안쪽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는데 위층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꽤 묵직한 게 여자는 아닌 듯했다.

2 층 앞에 다다르니 아니나 다를까 도하가 막 3 층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려오던 그가 준영을 보고 계단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둘 사이에 시선이 얽히고 침묵이 이어졌다.

상자를 쥔 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쨌든 자신이 말하고 지키지 않은 게 있으니 일단 사과를 하긴


해야겠는데, 얼굴을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디 가?”

“잠깐 차에 다녀오려고요. 이제 와요?”

“…응.”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 도하가 전화했을 때 민석이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잔다고 하고 끊었다는데 그게 다였을지, 아니면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간 건지.

뚜벅, 뚜벅, 도하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준영의 앞에 마주 보고 선다. 살짝 상체를 구부리며 안색을
살피길래 준영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한 발 물렸다.

“…괜찮아요?”

“…뭐가.”

“어제 민주한테 들었어요. 속상한 일 있었다며.”

준영이 그제야 도하를 제대로 봤다. 도하는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눈빛은 한없이 약해졌고, 표정은 제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가지 말라고 내가 붙잡을걸. 많이 속상했죠?”

준영은 목이 콱 메는 기분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오는 내내 어떻게 구슬려서 잘 넘어가 볼까 생각만 했기에


보자마자 제 걱정부터 하는 도하를 보고 있으니 어젯밤 본가 거실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수치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입술을 깨물고 어색하게 웃는데 도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준영을 제품으로 끌어당긴다. 평소 같으면 놓으라고
난리 쳤을 텐데 준영은 그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괜히 속으로 삭여서 병나지 말고… 잊어버려요.”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리니 명치를 꽉 막고 있던 돌덩어리가 내려가며 울컥하고 뜨거운 게 위로 솟구친다.


준영이 감정을 추스르느라 눈을 감고 어금니를 꾹 물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어깨를 밀어내니 도하가 더 꽉
끌어안아 제 품에 가둬 버린다.

“다음부턴 가지 마요. 좋은 기억 남겨준 것도 없는 영감탱이 제사에 뭐하러 상처받아가면서 거길 가. 미정이


이모도 중요하지만… 난 형이 형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어.”

“…놔줘. 숨 막혀.”

도하가 옅게 웃더니 준영을 품 안에서 놓아줬다. 한걸음 떨어지더니 준영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건 내 호두과자?”

준영이 그것을 건네자 도하가 받아 들고는 코를 가져다 댔다. 딸기 케이크네? 하고 안을 보지도 않고 귀신같이
맞춘다. 준영은 생딸기는 별로 안 좋아하면서 이상하게 케이크에 올려진 딸기는 또 먹었다.

“잘 먹을게요.”

실은 같이 먹으려고 사 온 건데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제 전화했었다며.”

“엄청 했죠.”

“왜 안 물어봐. 어디서 잤는지.”

도하가 빤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한다.


“별로. 궁금하질 않네.”

준영이 더는 말이 없자 도하가 케이크를 들어 보였다.

“이거 잘 먹을게요. 피곤한데 얼른 들어가요.”

그러더니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섯 계단쯤 올라갔을 때 준영이 도하를 불러 세웠다.


도하가 고개만 돌려 준영을 내려다봤다.

“안 잤어.”

도하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변했고, 준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얘길 도하한테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잤다고.”

도하가 픽 웃는다.

“누가 뭐래요. 들어가서 얼른 씻고 쉬어요. 되게 피곤해 보여요.”

그러더니 곧 계단 위로 사라진다. 도하가 사라지고 난 뒤 준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화내고 난리 칠


줄 알았더니. 거기다 대고 괜히 찔려서 안 잤다고 실토하는 제 모습이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났다. 조금 전 꽉
안은 탓인지 온몸에서 도하의 스킨 향이 풍겼다.

손끝이 저린 기분이 들어 주먹을 꽉 쥐곤 카드 키를 찾기 위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발소리가 멈추고 위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문은 열었지만, 이상한 기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집으로 들어온 도하가 케이크를 좌식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
심장이 있는 제 왼쪽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조금 전 한 행동에 대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했어, 아주 잘한 거야. 잘 참았어.”

그러면서 케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 전 안 잤다고 먼저 얘기한 준영 때문에 기분이 살짝 풀어졌다. 진짜


잤어도 안 잤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게 어딘가 싶어서.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먼저 물어봤다간
되려 욕만 처먹었을 텐데.

그렇게 위안하는 자신이 기가 막히고 씁쓸하면서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러다 잠이 쏟아져 소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밤새 설쳤더니 눈을 몇 번 깜박이지도 않았는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집으로 들어온 준영이 화병에 물을 갈아줬다. 꽃은 다행히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봉오리 몇 개가 더 피어나면서
처음보다 화사해졌다. 그걸 화병에 꽂아 놓고선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얼굴이 하루 새 초췌해지긴 했다. 가뜩이나 며칠 감기를 앓느라 살이 빠졌는데 거기에 더 보탰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예전엔 아파도 봐줄 만하더니, 나이 탓인가. 거울에 비친 제 상체를 보면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근육질은 아니어도 보기 좋게 매끈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냥 밋밋해 보였다.

배에 힘을 주고 왕자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쉽게 될 리 없었다. 나이 든 티가 나는 걸까. 이건의 말로는 20 대


중후반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녀석은 인심이 워낙 후하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왜 갑자기 거울을 보며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어. 쯧, 한심스러운 마음에 혀를 차고는 그대로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틀어 머리부터 적셨다.

머리를 감고, 샤워 타월로 몸을 닦고,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전화가 막 울리는 중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확인했더니 어머니였다. 아침에도 전화했고, 오는 길에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칠 않은
모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엄마.”

[집에 도착했어?]

탁하게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저 역시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셨나.

“네. 지금 와서 씻고 나왔어요.”

[많이 피곤하지?]
“괜찮아요.”

[준영아.]

“네.”

[어제 많이 속상했지?]

목구멍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아니에요.”

[너 부르지 말걸, 괜히 얼굴 한번 보자고 내 욕심에 불렀구나 싶어서 밤새 잠이 안 오더라.]

“마음 쓰지 마세요. 막내 고모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다음부턴 제사에 빠져도 돼. 다른 손주들은 일과 학업에 바빠서 못 오는데, 너만
참석한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더 욕심부렸어. 미안하다.]

자책하는 마음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속상한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거 같아 준영은
잠시 숨을 멈추고 수화기 건너편의 소리에 집중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냐. 엄마가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그런 말씀 마세요. 저 진짜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미안해. 근데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그래….]

이젠 아예 울먹이는 목소리에 준영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제 걱정하지 말고 얼른 쉬세요. 많이 피곤하신 거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단 차분해졌다.


[너도 얼른 쉬어. 피곤할 텐데.]

“네, 그럴게요. 끊어요.”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곁에 있으면 안아드리는 건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마저 말리고 수건을 한쪽에 던져 놨다. 스킨을 바르고 나서 침대로 가 누웠다. 오늘따라 집 안은 더
고요했다.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서는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집중했다. 그 마음을 비웃듯 흔한 생활소음조차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7 시다. 평소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는데 허기도 느껴지질 않았다.

도하에게 준 케이크가 생각났다.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는 준영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같이 먹자고 사 온
건데. 아쉬운 마음에 몸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나서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9 시다. 뭐야. 그새 잠들었었네.
얼굴을 부비고 나서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도하의 이름이 찍힌 걸 확인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큼,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왜.”

[미안해요. 자는데 깨웠어요?]

“…아냐.”

[생각해보니까 아직 주말이 끝나질 않았네요.]

준영이 멍청한 얼굴로 응? 하고 물었다. 그러다 곧 도하와 약속했던 일이 떠올라 눈 밑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모른 척 쌩까지 말고 문 열어요. 앞이니까.]

준영이 숨을 멈추고 눈동자를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안 열어주면 발로 차요?]
하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전화기를 든 채로 현관
앞까지 걸어가서 달칵, 문을 열어주니 문틈으로 케이크 상자가 나타난다. 그다음에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와 옷차림이 달라지고 얼굴도 물기가 묻어 뽀얀 걸 보니 막 씻고 나왔나 보다. 가뜩이나 야한 얼굴이 더
야하게 보여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잤구나?”

“…응.”

“아깐 안 잤다더니.”

집 안으로 들어온 도하가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선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영이 괜히
민망해선 목을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뭐 마실 거 줘?”

“앉아 봐요, 좀.”

“왜.”

“어떻게 먼저 케이크 먹잔 소리도 안 해요?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고. 사람 애간장이나 태우고.”

아. 준영이 할 말을 잃었다. 아까 그러고 올라가길래 먼저 연락하기가 좀 그랬을 뿐인데. 저와 마찬가지로


도하도 좀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그랬는데… 기다렸구나.

“말 안 해도 가져왔네.”

“하여튼. 내가 안 움직이면 먼저 뭐 하자는 법이 없지.”

투덜거리면서 도하가 케이크를 꺼냈다. 오오, 예쁘네.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딸기 위에 장미 꽃잎으로 데커레이션을 했는데 거기에 금가루도 살짝 발라져 있었다. 그걸 금인지
확인하더니 손가락으로 크림을 떠서 입에 넣는다.

“맛있다.”

“그래? 포크랑 접시 가져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몸이 확 당겨진다. 놀라 쳐다보니 도하가 팔을 붙든 채 웃는다.

“뭐야? 장난치지 마.”

일어서는데 이번엔 손목을 붙들고 제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다시 소파에 앉아 버렸다. 놀라서 쳐다보는데 도하가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찍어 준영에게 내민다. 아, 해요. 준영이 고개를 뒤로 빼고 젓자 생긋 웃더니 하얀 크림을
제 혀 위에 올려놓는다.

먹는 건가 해서 놔뒀는데 올려놓은 채로 준영을 향해 에, 하고 내밀고 있다.

“뭐 하는 거야?”

고개를 까닥 움직이며 먹으라는 시늉을 하길래 준영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다시 일어서려고 하니 팔을


붙들고 놔주질 않는다. 망할 자식 힘만 세서는. 바로 코앞에서 혀를 내밀고 있으니 난감했다. 준영이 고개를
뒤로 빼며 저었다. 싫어.

그러자 도하의 눈초리가 올라간다. 얼마나 살벌하게 째려보는지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였다. 눈빛은
네가 주말에 먼저 하자고 그러지 않았느냐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왜 이래, 진짜. 아까는 그렇게 쿨하게
굴더니.

곱게 놔줄 생각은 아닌 거 같아 준영이 얼굴을 디밀고선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든 혀를 안 닿게 해서 크림을


가져올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결국 고개를 살짝 비틀어서 다시 각도를 잘 맞춰 혀로 슥 크림을
핥으며 제 입으로 가져왔다. 달짝지근한 생크림이 제 입안에서 맴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도하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크림을 더 찍어 바르려 하기에 준영이 손가락을 세우며 경고를 보냈다. 하지 마.
그만해.

“이거 좆에 바르면 거기도 빨아주나?”

“아니.”

“인색하긴.”

“너 케이크 먹으러 온 거 아니지?”

“아까 뭐 들었어요. 주말 안 끝났다니까.”

“그래서?”

“뭘 그래서야. 내가 형 먹으러 왔지, 아무렴 케이크 먹으러 왔겠어요?”


하. 준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이런 걸 모르고 아까 침대에 누워 한참 걱정했다니.

“근데 오늘은 나 정말 피곤해. 그리고 젤도 없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바지 주머니에서 젤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걸 보며 준영이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콘돔도 없.”

이번엔 콘돔을 꺼낸다. 하나, 두 개, 세 개, 뭐야, 이 새끼 대체 몇 개를 가져온 거야. 준영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바지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왔길래 대체 뭘 넣어왔나 했더니 그게 다 콘돔이었어? 기가 차서 쳐다보는데
도하가 고개를 치켜든다.

“또, 뭐. 뭐 필요해요?”

준영이 손으로 입을 감쌌다. 빌어먹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까는 모른 척해서 서운했는데 막상 하자고
덤비니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자식 설마 저걸 다 쓰려고 가져온 건 아니겠지. 꿀꺽 침을 삼키고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움직였다.

“더 없으면 침대에 가서 누워요. 내가 구석구석 빨아줄게요.”

그 말에 준영이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뻔뻔한 얼굴로 웃는 도하를 보니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물을 마신다는 핑계로 주방으로 가려는데 도하가 다시 붙들어 앉힌다.

“왜 자꾸 도망가요.”

“물. 물 좀 마시자.”

“부끄러워서 그래요?”

“부끄럽긴 뭘 부끄러워.”

“정 그러면 눈 가려줄게요. 나 아니라 딴 놈이라고 생각하든가.”


그 말을 들은 준영의 눈이 커졌다. 이 미친놈이 뭐래.

“넌 그렇게까지 해서 하고 싶냐?”

당연하죠.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준영은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미쳤어. 미친 거야.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제 손이 종잇장에 베기만 해도 펄펄 뛰는 이도하가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도하야, 나 솔직히 고백할게.”

“씨발, 김민석이랑 잤구나?”

준영이 이를 끄득 갈았다. 아까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자 도하가 바로 웃더니 그럼 말하라고 한다.

“나 사실 엠이야.”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엠이는 뭐야. 애미야 국이 짜다, 할 때 그 애미? 서준영은 남잔데.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준영이 남다른 성적 취향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다. 혹시 그 M?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고 나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거짓말.”

“…진짜야. 그래서 맞추기 힘들 거라 했잖아.”

하. 도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준영이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을 좀 마시고 오겠다며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 쪽으로 도망쳤다. 이번엔 잡질 않는다. 대신 조금 전 했던 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그러면서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준영은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도하의 눈치를 살폈다. 충격은 좀 받은 거 같았지만, 당장 하자고 덤빌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라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여유를 갖고자 거짓말까지 하긴
했는데, 점점 더 심각해지는 도하를 보고 있으니 괜한 소릴 한 건가 싶어 한편으론 마음이 좋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도하의 눈앞에다 대고 준영이 손을 흔들었다. 눈 뜨고 자는 거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데 반쯤 넋이 나가 있다. 케이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준영이 그것을 정리해 냉장고에 넣은 후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피곤한데 그만 올라가서 자.”

“잠이 오겠어요?”

“그럼 있다가 가든가. 난 들어간다. 운전했더니 피곤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는데 도하가 벌떡 일어나선 쫓아온다.

“사실대로 말해봐요. 나 농락하는 거죠? 애초에 그런 취향 따윈 없잖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게.”

“뭘 용서해. 얼른 가. 나 잘 거야.”

침실 한가운데 멈춰선 준영의 어깨를 붙들어 저를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눈을 마주치니 준영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 제가 서준영에 대해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었다. 사귀던 남자들 숫자랑 직업까지
다 읊는데 그런 취향인 걸 몰랐다고? 이걸 믿어야 해?

“내 눈 똑바로 봐요.”

“보고 있어.”

그러면서 눈동자가 왜 형광등을 쳐다보는 건데. 턱을 붙들어서는 제 눈과 마주치게 하자 입술 끝이 부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솔직히 말해봐요. 진짜 솔직히.”

“솔직히, 엠이야. 됐지?”

하아, 이런 엠병할. 도하가 고개를 떨구자 준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힘들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위로하는 척 손을 뻗는데 도하가 고개를 갑자기 번쩍 든다.

“그럼 바지 벗고 침대에 엎드려 봐요?”


놀란 준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엉?

“바지 벗고 엎드려 보라고요. 내가 엉덩이 때려볼 테니까.”

“미쳤냐.”

“엠이라며!”

“그게 막 때린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인마.”

“긴지 아닌지는 내가 확인할 테니까 일단 엎드리세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사람을 쪼아대는 모양새를 보니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다. 아까 계단 앞에서 어른스럽게


굴길래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럼 그렇지. 자포자기한 얼굴로 침대로 가서 철퍼덕 엎드렸다.

“자, 때려.”

“바지도 벗어요.”

“그냥 해. 이것도 많이 참아주는 거거든. 나 화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준영은 느긋하게 침대에 엎드려서 팔로
베게까지 만들고 뺨을 뭉개고 있었다. 잘하면 잠도 잘 태세였다.

바지를 내릴까 했지만 그랬다간 진짜 성질을 낼 거 같아서 차마 그러진 못하고 엉덩이만 뚫어지게 노려봤다.
엎드린 상태인데도 엉덩이가 봉긋하게 솟아 있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 그냥 박게 해달라고 사정해볼까. 입맛을 다시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곧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닫고 포기했다. 지금은 확인이 먼저였다.

“…때려요?”

묻는데 준영이 팔을 베고서 느긋하게 끄덕끄덕한다. 응. 도하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신체 중에 엉덩이가


그나마 고통을 덜 느끼는 부위라곤 하지만, 감히 제가 서준영을 때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좆으로 때리면 또 몰라도. 게다가 남들보다 손힘이 센데 괜찮으려나.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손만 들고 있으니
준영이 곧 돌아본다.
“자냐? 때린다며.”

“진짜 해요.”

“하세요. 안 말려요.”

도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온 힘을 다해 팔을 크게 휘둘렀으나 정작 엉덩이 앞에서 속도가 멈추더니 철썩도


아니고 찰싹도 아니고, 탁, 건드리는 수준으로 엉덩이를 터치한다. 그 당당하던 기백은 어디 가고.

큽. 준영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이도하 너무 귀엽다.
그때 등 뒤에서 당황한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요?”

“으으니.”

웃음을 참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한편 도하는 준영의 뒷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표정을 했다. 귀며
목덜미가 시뻘게져선 낑, 소리를 내는 거 보니 정말이구나 싶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후우, 준영이 심호흡한 다음 도하를 불렀다.

“더, 더 해줘, 도하야. 나 좋아.”

도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아까부터 엉덩이만 자꾸 눈에 보여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서준영 자세도 그렇고, 더 해달라는 목소리와 손에 닿던 그 탱글탱글한
감촉마저…. 머릿속은 이미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벌려 제 것을 넣고 쑤셔대고 있었다.

“알았어요. 믿을게요. 대신….”

준영이 흘깃 돌아봤다. 충격받아서 관두자고 할 줄 알았는데 선뜻 믿겠다고 하더니 침대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도하가 제 등 위에 몸을 포개고 엎드렸다. 졸지에 깔려 버리는 바람에 당황해
몸을 빼내려고 했더니 이번엔 팔을 앞쪽으로 뻗어 준영의 상체를 꽉 붙든다.

“뭐 해? 안 내려와?”

“잠깐만. 잠깐, 응?”


중저음의 목소리가 눅진하게 젖어 들면서 순간 엉덩이 뒤쪽으로 딱딱하게 발기한 녀석의 성기가 비벼지는 게
느껴졌다. 준영이 기겁하고 몸을 돌리려 했으나 이미 도하가 제 어깨를 감싸 안고 짓누르는 상태라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너 안 비켜!”

“하아, 알았어요. 1 분만. 응? 나 애태우게 했으니까, 이 정돈 봐줘요.”

“3 초면 싸는 게 무슨 1 분이야!”

“그때는 어렸다니까. 지금은 3 일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

“알았어, 알았다고요. 그럼 딱 20 초만.”

이게 정말. 몸을 들썩거렸지만, 키도 덩치도 상대적으로 도하가 더 큰지라 꿈쩍도 하질 않았다. 제 몸을 단단히


옭아맨 데다 벗어나려고 움직인 게 더 자극됐는지 녀석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얼마나 단단하게
발기했는지 성기 끝으로 교묘하게 골 사이를 짓이기는 바람에 준영이 한 번씩 몸을 움찔거렸다.

도하가 하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압박하니 준영의 성기까지 시트에 같이 뭉개져 자극을 받았다. 배 아래쪽이
저릿저릿해져 당황해 저리 안 비키냐고 또 소리를 질렀지만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이러면 나 진짜 화낸다!”

순간 녀석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한마디 더 하려는데 결박하던 제 몸을 풀어주곤 얼른 침대로 내려온다.

“10 초 끝.”

너, 이 자식! 준영이 벌떡 일어서며 베개를 집어 들다가 멈칫했다. 도하가 입고 있던 회색 트레이닝복 앞쪽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앞이 동전만 한 크기로 젖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당황해 입을 벙긋대자 도하가 제 밑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

“이거 싼 거 아니에요. 꼴려서 젖은 거지.”

“…….”
“진짜 아니에요. 형도 남자니까 알잖아? 못 믿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트레이닝복 바지를 밑으로 확 내리깐다. 순간 녀석의 성기가 위로 휘청 올라왔다.


눈앞에서 그렇게까지 가까이 본 건 처음이라 놀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땐 손가락만 하니 번데기 같아서
귀여웠는데, 어째서 나비가 아니라 대왕 버섯이 됐을까.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서고 귀두 끝이 젖어 번들거리는 그걸 보니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도하가 한 발


더 다가서더니 제 것을 손에 쥐고 살짝 흔들었다.

“왜 그렇게 넋 놓고 쳐다봐요? 내 좆 잘생겼죠? 혹시 빨아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지금 한번, 악!”

나가! 나가, 이 새끼야! 준영이 머리맡에 있던 걸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도하가 손으로 막더니 어느 순간엔
바지를 황급히 올리고 방 밖으로 도망갔다. 준영이 씩씩대다 제 손에 들린 걸 쳐다봤다. 도자기로 된
연필꽂이임을 알고선 흠칫 놀라 다시 내려놨다. 이걸로 던져서 애 머리를 깰 순 없지.

그래도 분이 안 풀려 씩씩대고 있는데 곧 다시 방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얼굴을 삐죽 내민다.

“내일 다시 올게요. 잘 자요. 사랑해요.”

연필꽂이 대신 베개를 집어 드니 문이 닫히고 눈앞에서 잽싸게 사라진다. 그걸 본 준영은 기가 막혀 웃었다.


화를 내선지 아니면 다른 이윤지 목 주위로 열기가 올라왔다. 조금 전 시트에 문대졌던 제 아랫도리마저 저릿해
골이 다 띵할 지경이었다.

* * *

퍽, 발길질에 이건의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뒹구니 등 뒤로 냉기가 올라온다.
가뜩이나 며칠 전 맞은 게 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끙, 신음과 함께 일어서며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앞에선 박태경과 그 무리가 저를 보며 낄낄대고 웃고 있었다. 한 손에 담배를 든 박태경이 그대로 걸어와선


이건의 어깨를 툭 밀쳤다.

“너 내 말이 우습지? 그때 뭐라고 했어. 5 시까지 김유나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었을까?”

“너야말로 뭘 들은 거야…. 그때 분명히 안 간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어깨를 툭, 툭 밀친다.

“씹새꺄.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네가 싫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데리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오케이?”

툭, 이건이 그 손을 쳐냈다.

“하지 마. 자꾸 나한테 폭력 쓰면 더는 참지 않아.”

그 말에 태경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에 있던 무리도 낄낄대고 비웃었다.

“안 참으면? 네가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치게? 때리게?”

태경이 제 머리를 이건의 가슴팍에 들이밀며 비아냥댔다.

“쳐봐, 쳐봐, 이 새끼야.”

이건이 뒤로 물러서며 인상을 구겼다. 자기가 안 참는다는 건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께 말한다고 한 거였는데,
갑자기 치라고 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진짜 때려도 되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러지 마. 난 폭력이 싫어. 그리고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어.”

태경이 앞니 사이에 담배를 끼고 악당처럼 웃었다.

“가서 일러. 일러 봐. 담탱이가 네 편 드는지 내 편 드는지 한번 보게.”

더 말해봤자 저만 손해일 거 같아 그냥 피해 버리려는데 태경이 그 앞을 다시 막아선다.


“에헤이. 어딜 가? 얘긴 끝내고 가야지.”

“더 할 얘기 없어. 난 너한테 유나를 소개해줄 마음이 없거든.”

“그러다 크게 후회할 텐데?”

“몇 번을 말해.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퍽, 다시 발길질이 날아들었고 이건이 벌러덩 넘어갔다. 맞은 배를 움켜잡고 누워 신음하는데 옥상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온다. 운동화가 낯이 익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자 둘러싸고 있던 태경과 그 무리도 함께 돌아봤다. 연우가 캔 음료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그걸 보고 태경이 담배를 옆으로 튕기며 입꼬리를 당겼다.

“어이, 송연우. 옥상엔 어쩐 일? 오늘은 또 누구 좆 빨러 왔냐?”

옆에 선 무리가 덩달아 낄낄댔다. 연우가 음료 캔을 들고 다가오자 무리는 양쪽으로 흩어진다. 그가 바닥에


뒹구는 이건을 확인하더니 눈 밑 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달칵, 음료를 따서 벌컥벌컥 마시는데 태경이 옆으로
와서 살살 긁어댔다.

“왜. 꼴에 또 친구라고 편들러 왔어? 너 쟤랑 중학교 때까지 베프였다며.”

꿀꺽꿀꺽, 연우가 무표정하게 마지막 한 모금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 나더니 태경을 마주 봤다. 갑자기 피식
웃더니 캔을 얼굴 높이로 들어 구긴다. 뭘 하나 싶어 봤더니 그걸 입에 물었다.

태경이 못마땅하게 보며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지만 연우는 대답 대신 구겨진 캔을 이로 물더니 흔들었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구겨진 캔은 마침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날카로운 캔 날에 베였는지
입에선 피가 스며 나와 뚝뚝, 떨어졌다.

보고 있던 이건이 놀라서 배를 잡고 벌떡 일어났다. 야! 태경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송연우는 가끔 미친


짓을 하는 걸로 유명했다. 다른 애들이 그를 건드리지 않았던 건 곽상윤 때문도 있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도 있었다. 지금처럼.

“이 미친 새끼. 왜 캔을 뜯어 먹고 지랄이야.”

하. 일부러 유유자적한 웃음을 지었지만 연우가 흐르는 피를 손바닥에 묻혀, 혀로 핥으면서 웃는 데선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말만 해. 네 좆도 이렇게 빨아서 씹어줄게, 개새끼야.”

저보다 한 뼘이나 더 큰 녀석을 향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협박을 한다. 등골이 오싹해진 태경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씨발. 그러고 나서 무리를 둘러보며 눈에 괜히 힘을 주었다. 그들도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한 대 패서 기를 팍 꺾어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곽상윤이 지랄을 해댈지도 모른다. 그딴 새끼는 한번 밟으면


그만이지만, 제 아버지가 한 번만 더 사고 쳤다간 호적에서 파 버린다고 난리 친 것이 얼마 전이라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야, 가자. 또라이 새끼 상대해봤자 나만 손해지.”

아이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옥상을 내려갔다. 쾅 옥상 문이 닫히고 나서 연우가 들고 있던 캔을


한쪽에 집어 던졌다. 이건이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낸 다음 연우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넌.”

연우의 시선은 강이건 대신 손수건에 꽂혔다.

“손수건 너 거야?”

“어. 왜?”

꽃무늬 손수건을 보고 연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건과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손에 피를


닦은 이건이 이번엔 연우의 입가를 살폈다. 아, 해봐. 얼마나 베었나 보게. 연우가 됐다고 인상을 쓰자 이건이
끈질기게 붙들며 아, 하라고 난리다.

마지못해 아, 하자 이건이 입안을 살핀다.

“양호실 가야 하나.”

분명히 피는 나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 검지를 입 안에 넣어 벌렸더니 연우가 인상을 팍 구기고 그 손을 사납게
쳐냈다.
“이 미친 새끼!”

“…왜에.”

“갑자기 입에다 손가락을 넣고 지랄이야.”

성질머리하고는. 그러면서도 저 때문에 그랬나 싶어 내심 신경이 쓰였다.

“미안. 근데 다음부턴 그런 짓 하지 마.”

“안 하면? 계속 처맞게?”

“선생님한테 말하면 돼.”

“병신이냐? 선생들이 네 편 들어줄 거 같아?”

그 말에 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태경을 편애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게


그가 가진 배경 때문이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고. 씁쓸함과 머쓱함에 괜히 코를 문지르는데 연우가 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어디 가? 양호실 가는 거야? 데려다줄게.”

따라가려는데 연우가 팩 돌아보며 성질을 낸다.

“꺼져. 교실 가서 잘 거야.”

문이 열리더니 연우가 곧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이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경이 저를 괴롭히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 상관없었지만, 연우가 괜히 어울리는 애들 눈 밖에 나서 곤란을 겪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물론
안 어울리면 제일 좋겠지만….

CH 12.

준영이 소파에 앉아 책을 든 채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도하가 식탁 의자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찾아와 인사를 했다. 기가 막히면서도 저도 지은 죄가 있어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어쨌든 몇 번이나 거짓말하지 않았던가.
어젯밤엔 다 믿겠다며, 남의 엉덩이를 멋대로 농락하고 도망치더니 오늘은 또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실대로
말하라며 사람을 들들 볶았다. 하지만 준영은 여전히 생각이 많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진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하가 좀 포기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머리 다 빠지겠다. 그만 뜯어.”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은 퀭하고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식탁 위에 올려둔
탁상달력을 챙겨 가지고 온다. 펜도 하나 챙기더니 그걸 들고 준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 읽어요? 나는 속이 타서 잿가루가 되기 일보 직전인데 지금 책이 눈에 들어와요?”

“응. 너도 빌려줘?”

책을 내밀자 도하가 눈을 위로 치켜뜬다.

“그만 째려보고 네 집으로 올라가. 나 쉬게.”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게다가 여태 쉬었으면서, 뭘 또 쉬어.”

그 말에 준영이 할 말을 잃었다. 할 일 없는 건 맞지. 여태 쉰 것도 맞고. 못 들은 척 책에 집중하는데 책과


얼굴 사이로 탁상달력이 불쑥 들어온다. 이게 뭔가 싶어 봤는데 내일 날짜에 동그라미가 쳐졌다. 게다가 별이
다섯 개나 그려져 있었다.

“뭐야, 이게?”

“내일 해요.”

응? 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뭘 해?

“섹스하자고요.”

“…괜찮겠어?”

“왜 내 걱정을 해요. 맞는 건 형인데.”


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치. 맞는 건 나지.

“네가 나한테 가학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그 말에 도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밤새 찾아보고 검색하고 영상까지 찾아보다 보니 점점 더 절망스러워졌다.


준영이 그런 취미가 있었다는 것도 충격인데 제 손으로 준영을 때리고 해야 한다니.

“그럼 일단 그냥 하고, 안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봐요.”

“그러면 흥분이 안 돼.”

“…….”

“넌 내가 흥분도 안 하는데 하고 싶어?”

도하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거봐. 이래서 안 된다고 한 거야.”

“알았어요. 그럼 제대로 할게요. 진짜 열심히 해볼게요. 믿고 맡겨 줘요.”

결의를 다지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애써 웃었다. 입술 끝은 경련이 날 것처럼 떨렸다. 설마 진짜 때리진 않겠지.
시선을 피하고 불안한 마음에 읽지도 않은 책장을 넘기는데 종이에 손가락이 슥 베고 말았다. 아. 손을 떼어내며
인상을 쓰자 도하의 눈이 커다래진다.

“왜요? 베었어요? 봐봐요. 피나요?”

보일 듯 말 듯 피가 나는 걸 보고 준영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냐. 괜찮아.”

“아, 속상해.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기다려요, 약 가져올게요.”


소파에서 일어서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뭘 해. 손가락 하나 가지고도 저러는데, 잘도
하겠다. 내심 안도하고 있는데 안방으로 들어간 도하가 나오질 않는다.

“이도하! 너 또 내 팬티 훔쳐 가면 죽는다.”

소리를 질렀더니 잠시 후 도하가 손에 연고를 들고 나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누구처럼 도둑놈인 줄 알아요?”

“이제부터 팬티 없어지면 넌 줄 알 거야.”

“안 훔쳐요, 안 훔쳐. 내 시계 훔쳐간 놈은 너그럽게 봐주면서 나는 왜 쥐 잡듯 하는데?”

“그 얘긴 그만해.”

“생각할수록 열 받아서 그래요! 그 자식 꺼내주려고 나한테 해준다고 뻥이나 치고.”

“언제는 이해한다며. 어제저녁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다독여 주던 이도하는 어디 갔나요?”

“콱 뒈졌어요, 화병 나서.”

그 말에 어처구니없어하며 웃는데 문득 불쑥 튀어나온 도하의 바지 주머니가 눈에 띈다. 그걸 보고 준영이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도하가 그 손을 부드럽게 잡고선 깍지를 낀다. 아, 우리 준영 씨. 손도 보드랍네.

그러자 준영이 손을 찰싹 쳐내고 다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내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주머니에 있는 거.”

무슨 소리 하냐고 팔짝 뛰던 도하가 준영이 이까지 까드득 물자 나중엔 멋쩍게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팬티를 꺼냈다.
세탁해서 막 옷장에 집어넣은 건데, 대체 이걸 왜 가져 온 건지. 나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이 자식 혹시
이상한 성향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걱정을 하는데 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서는 제게 머리를 기댄다.

“내일 기대할게요.”

“꺼져, 이 도둑놈아. 넌 송연우한테 뭐라고 할 거 하나도 없어.”


“같은 취급하지 마세요. 그 새낀 물욕으로 훔친 거고 난 성욕으로 훔친 거니까.”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부끄러울 건 또 뭐야, 우리 사이에. 능글맞게 웃더니 몸을 더 밀착한다. 아, 피곤한데 여기서 좀 자고 갈까.


하면서 준영의 허벅지를 은근히 만지며 베고 누우려 하길래 준영이 벌떡 일어나 가 버렸다. 졸지에 도하가 빈
소파에 철퍼덕 엎어졌다. 젠장.

“들어가서 쉰다. 잘 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안방으로 휙 들어가는 그를 보며 도하가 눈을 가자미처럼 찢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자요, 갈 거야! 나도 오늘은 갈 데 있어!”

* * *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민석이 진료실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다가와 손님이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병원이라 더는 올 손님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개인적인 손님이냐고 물으니 간호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친한 동생이라고 막무가내셨어요. 근데요, 얼굴이….”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민석이 ‘얼굴이 왜요?’ 하고 묻자 그녀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해 보였다.

“낯이 익은 거 같아서요. 연예인인가.”

확실치 않다고 말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민석이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예인들도 수술하러 종종
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진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방송하면서 알게 된 사회자 정도면 모를까.

누굴까 의아해하며 들어서던 그가 제 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척 걸치고 있는 사내를 보고 인상을 확 구겼다.
저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도하였다. 도하가 손대신 발 하나를 들고 인사하듯 흔들었다.
“안녕, 김 선생님?”

하아. 민석이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밖으로 나가 간호사를 통해 끌어낼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도하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그대로 일어선다.

“와서 앉아요, 할 말 있어.”

제 진료실마냥 앉으라고 손짓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다.

“너 여길 왜 왔어?”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벌써 치매 왔어요? 엊그제 나한테 그딴 식으로 굴었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나 너 보기 싫어. 그냥 가.”

“누군 좋아 죽겠어서 온 줄 아나. 시끄럽고 와서 좀 앉아 봐요.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왜 이래. 너 밸 없다며. 설마 지금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야?”

“내가 밸은 없는데 화는 많아. 그러니까 개지랄 떨기 전에 얼른 오세요.”

후우, 민석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티슈를 뽑아 도하가 발을 올렸던 자리를 슥슥 닦아내곤
그 위에 손 소독제까지 뿌린다. 그런 다음 의자에 앉아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책상을 짚고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 좋게 웃었다.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나는 그때 밤새 지옥을 오갔는데?”

“분명히 말하는데 아무 일 없었어. 그리고 있다고 해도 네가 여기까지 와서 난리 칠 일 아니야. 그러니까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

“네, 그러죠.”

도하가 순순히 대답하더니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민석에게 슥 내민다. 민석이 그것을 흘깃 쳐다봤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종이다. 설마 이 자식 다신 서준영 만나지 말라는 각서라도 쓰라는 건가.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도하가 한쪽에서 펜을 꺼내 그 종이 위에 올려놓는다.

“써요.”
“각서?”

“웬 각서? 됐고, 거기다 빠짐없이 적어요.”

“그러니까 뭘.”

“서준영이 좋아하는 체위.”

민석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라 그랬어, 지금?

“체, 뭐?”

“체위. 인간이 성교나 여타 성행위를 하기 위해서, 또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세. 의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그걸 못 알아들어?”

“…….”

“서준영이 좋아하는 거, 즐겨 하는 거. 아니면 하고 싶어 하는 거 뭐든, 다.”

민석이 입을 벌린 채 벙긋댔다. 차라리 각서를 쓰라면 이해하겠는데, 체위라니. 그것도 저한테 와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입만 벌린 채 웃는데 도하가 이번엔 빨간색 펜을 꺼내서 놓아준다.

“특별히 좋아하는 건 이색으로 적고.”

형광펜도 꺼내길래 그만두라고 이를 끄득 갈았다.

“너… 돌았어?”

“말짱하니까 얼른 적어요. 주의사항 같은 건 형광펜으로 좀 칠해주고.”

민석이 기막힌 얼굴로 볼펜을 홱 집어 던졌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지금 나한테 이걸 알려달라는 거야? 자존심 없어?”

“밸도 없는데 그거라고 있겠어요. 적으라니까.”

“와, 미치겠다. 진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민석이 기가 막힌다며 웃었다. 자기도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별별 인간을 다 겪어 봤다고
자부하는데….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다.

“차라리 서준영 만난 애들 다 찾아다니면서 적으라고 하지그래?”

빈정거림에도 도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이다.

“걔들이 서준영을 얼마나 알겠어요. 댁 빼고 제일 오래 만난 애가 5 개월인데, 그나마 그쪽이 제일 잘 알 거


아니에요.”

“내가 할 말이 없다.”

“물론, 다른 건 내가 댁보다 훨씬 더 잘 알죠. 근데 이것만 모르겠어서 그래요.”

“차라리 서준영한테 대놓고 물어봐.”

“본인이 부끄러워해요.”

큽, 본인한테 물어는 봤어? 민석이 코웃음을 치자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진짜 이럴 거예요?”

“너야말로 진짜 이러지 마. 너 이거 나한테 예의 아니야. 옛 애인한테 와서 좋아하는 섹스 체위를 적어달라니.


이거 준영이 욕보이는 거야. 알아?”

“알았어요, 그럼.”

도하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종이를 집어 책상에서 한 발 떨어진다. 이대로 물러나려는 건가 싶어 민석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쏘아봤다. 얼른 썩 꺼지라는 눈빛으로.

“내일 뵐게요.”

“응, 뭐?”

“내일부터 매일 아침 첫 손님으로 날 보게 될 거예요. 댁이 미치는지 내가 미치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잘


부탁드려요, 김 선생님?”
코를 찡긋하며 웃는 모습에 민석이 주먹을 불끈 움켜줬다.

“그러기만 해. 바로 경찰 부를 테니까.”

“난 그럼 우리 엄마 불러야지.”

민석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 당장 꺼지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 귀가 무서워 일단은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 진짜 이럴래?”

“그러지 말고 적어줘요.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면 홍보 사진도 찍어주고 정말 잘할게요.”

태도를 보니 안 해줬다간 진짜 아침마다 찾아올 기세다. 눈을 질끈 감고 후우, 심호흡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도하가 망설일 것도 없이 그 손 위에 종이를 건넨다. 받아 든 민석이 입술을 한 번 질끈 물었다가 볼펜을 들고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빼놓지 말고 적어요. 나 엿 존나 싫어하니까 그딴 거 줄 생각하지 말고.”

오래 걸릴 것도 없이 볼펜으로 몇 글자 적더니 그걸 다시 도하에게 내민다. 종이를 받아 내려다보던 도하의


이마가 꾸깃해졌다. 뭐야, 이게? 정상위. 기승위. 후배위?

“설마 뭔지 몰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진짜 이게 끝?”

“끝. 됐지? 가봐.”

도하가 입술을 슬쩍 물면서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특별히 빨아주면 흥분하는 부위라든가, 때리면 좋아하는 부위라든가, 그런 건?”

“빨든지 뱉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때리는 건 취향 아니니까 묻지 마시고요.”


“음…. 취향이 아니다?”

그렇단 말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종이를 곱게 접어 외투 주머니 속에 넣는다. 언제


협박했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민석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빨리 꺼져. 다신 오지 말고.”

“엊그제 같은 일만 만들지 않으면 서로 볼일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요. 참, 진료받은 거나 마찬가지니 앞에서


계산은 하고 갈게요.”

“제발 그냥 가, 좀!”

“오오, 연예인 디씨구나? 땡큐.”

그럼, 안녕. 생긋 웃더니 몸을 돌려 나간다. 도하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던 민석이 들고 있던 볼펜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저를 놀리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준영이 받아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태도를 보니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된 건 맞는 듯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하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차를 찾아서 운전석에 올라타곤 민석에게 받은


종이를 꺼냈다. 정상위. 기승위. 후배위? 아무리 봐도 김민석이 거짓말한 거 같진 않은데.

은근 귀하게 자란 데다 쫄보라 매일 찾아온다고 협박까지 했으니 절대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게다. 혀로 볼


안쪽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서준영이 그동안 제 성적 취향을 감췄거나 아니면 저를 골려주려고 일부러
그랬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99%는 되는 것 같았다. 쯧,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는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려는데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확인하니 엄마였다.

“응, 엄마.”

[뭐 해? 저녁 먹어?]

“아직요, 왜요?”

[별일 없나 해서. 집에는 언제 올 거야? 아빠가 너 찾는데 엄마가 둘러대느라 힘들어 죽겠어. 어제도 그 근처
지나다 들러본다고 하는 거 내가 뜯어말렸다니까.]
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엄마가 얼마나 당황해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할아버지도 너 보고 싶어 하셔. 어젠 엄마한테 전화 왔더라. 형도 누나도 안 찾는데 너는 궁금하신가 봐.


올라올 때 한번 얼굴이라도 비쳐. 알았지?]

“응… 그럴게요.”

엄마는 준영에 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일이 틀어져서 아들이 빨리 돌아오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다음에 통화해요. 나 바빠요.”

[응,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힘들면 아줌마라도 보내줄까?]

“괜찮다니까요. 엄마 아들이 어디서 밥 굶은 거 봤어?”

[그건 그래. 우리 아들 야무지지.]

“끊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응. 전화가 끊어지고 도하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올라온 거 본가 가서 하루 자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괜히 발목이 붙들릴 수 있기에 결국은 관두기로 했다.

차를 움직여 출구 쪽으로 가는데 눈에 거슬리는 차 한 대가 보인다. 전에 호텔커피숍에서 만날 때 김민석이 끌고


나온 차랑 비슷한 거 같은데. 그 차 앞에 멈춰 서서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 김민석 전화번호를 찾아
걸었더니 잠시 후 그가 받는다.

[왜, 또. 뭐.]

“차 번호 4429 맞죠?”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목소릴 들으니 맞군.

“실은… 내가 아까 말 안 한 게 있어요.”

[야. 바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끊어.]


“내가 밸이랑 자존심은 없는데, 뒤끝은 존나 많아.”

[뭐, 너 지금 무슨 소릴.]

민석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하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릉, 그릉,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 엔진


소리가 주차장 안에 울렸다. 그대로 출발하며 속도를 높였고 출구 표시를 따라 왼쪽으로 꺾었어야 할 도하의 차는
무섭게 돌진해 민석의 외제 차를 들이받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일 정도로 앞으로 튕겼고, 바로 세우는 순간, 민석의 자동차 보닛이 입을 쩍
벌린다. 차를 뒤로 빼서 확인하니 완전히 찌그러진 앞부분이 보였다. 그걸 보는 도하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나선 유유자적하게 차를 왼쪽으로 꺾어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 * *

흰색 SUV 차량 한 대가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운전대를 잡은 도하가 흘깃 보조석 쪽을 봤다. 휴대전화가


아까부터 울리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제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집에 들러 차를
바꿔서 나오면서 선태에게 차 수리 좀 부탁한다고 메시지를 보내놨는데 그것 때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김민석이었다.

퇴근하고 나오면서 차를 보고 인상이 구겨졌을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띠링. 한참을
울리던 전화가 끊어지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팔을 뻗어 확인하니 김민석이 보낸 메시지다.

[전화 받아. 너 이 새끼 가만 안 둬. 내가 너 고소한다.]

도하가 웃으며 흥얼흥얼 노래처럼 중얼댔다. 고소하세요~ 경찰서에서 뵙겠네요~ 전화를 다시 툭 던져 놓고


집으로 가기 위에 왼쪽으로 차를 틀었다. 좁은 비포장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빌라 입구가 보였다.

서준영이 머무는 2 층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는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슬쩍 굳었다. 아주 깜찍하게 나를


속이셨단 말이지. 주차하고 나서는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뒷좌석에 넣어둔 꽃다발과 샴페인을 꺼냈다.

오는 길에 연락했더니 저녁은 이미 먹었다고 했다. 어디냐고 묻길래 일이 있어 서울이라고 했더니 더는 묻지


않았다. 자고 오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그것을 챙겨 들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2 층 현관 멈춰 서서 왁스로 손질한 앞머리를 한 번 넘겨주고는 슥 아랫입술을 핥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나니


잠시 후 안에서 디리릭, 하고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꽃을 앞으로 들고서 활짝 웃을 준비를 하는데
열리는 문틈 사이로 강이건의 얼굴이 나타난다.

도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놀란 건 이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갑자기 사람 대신 꽃이 나타나다니.

“형, 어쩐 일이세요?”
“너 왜 여기 있어?”

“저 지금 수업받는 중이라….”

이건이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잠시 곤란한 표정을 한다. 도하가 그 표정을 읽고 나서 이건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에 못 보던 운동화가 하나 더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거실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또 구겨졌다.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좌식 테이블 앞에 앉아 피자를 입에 물고 있던 송연우가 도하를 보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만 까닥, 하고 인사를


한다. 아까 전화할 때만 해도 아무도 없는 거 같았는데. 짜증 섞인 마음에 안으로 들어서니 이건이 따라오며
묻는다.

“웬 꽃이에요? 받으셨어요?”

몰라도 돼. 꽃과 샴페인을 식탁에 올려놓고 나서 집 안을 둘러보는데 준영이 보이지 않는다. 피자 두 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것도 다 먹었는지, 몇 조각 남아 있질 않았다. 준영이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생각하면 둘이서 먹어 치웠단 얘긴데.

“준영이 형은.”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셨어요. 피자 소스 뜯다가 흘리셔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방 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나온다. 막 갈아입었는지 옷 아랫부분을 탁탁 잡아당기다가


도하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그런 준영을 노려보며 도하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피자를 먹고 있던 연우의 엉덩이를 티 나지 않게


툭 걷어찼다. 연우가 피자를 물고 눈을 부라리길래 살살 또 긁기 시작했다.
“야, 너 여기 왜 왔어? 오늘은 또 뭐 훔치러, 악!”

준영이 그대로 도하의 귀를 비틀어 잡았다. 도하가 몸부림을 치며 그 손을 떼어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파요!”

“먹고 있는 애를 왜 건드려?”

“형 잊었어요? 쟤 도둑놈이라니까. 얼마나 뻔뻔한지 엊그제는 나한테 편의점에서 의자도 집어 던지려고


했다니까요. 강이건 너도 봤지?”

이건이 입을 벙긋댔다. 연우가 의자를 집어 던지려고 한 건 맞지만, 전후 사정을 봤을 때 도하도 그렇게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저는 잘…. 하고 말끝을 흐렸더니 도하가
기막힌 얼굴을 한다.

“너 이 새끼! 너도 한패지?”

“이도하. 그만해.”

준영이 조금 화난 투로 나무라자 도하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이건은 그것 역시도 신기했다. 말 한마디로 저


미친개 같은 도하를 제압하다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올라가. 애들 먹다 체하겠다.”

도하가 곧 입을 꾹 다물고 제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더는 말하지 않겠단 뜻이었다. 그걸 본 연우가


휴지에 대충 손을 닦더니 옆에 있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무래도 도하와 마주치는 건 불편했다. 강이건이
반강제로 끌고 와서 온 것도 있었지만.

“잘 먹었습니다….”

입안에 있던 피자를 채 삼키지도 못하고 들릴 듯 말듯 인사를 하니 준영이 손짓하며 그냥 다시 앉으라고 한다.

“앉아, 연우야. 어차피 도하는 지금 올라갈 거야. 그렇지?”


도하를 쳐다봤더니 내가 왜? 하는 표정이다. 준영이 눈에서 레이저를 쐈다. 그 눈빛에 많은 설명이 담겨 있었다.
안 올라가면 약속이고 나발이고 없을 줄 알아. 도하의 시선이 준영에게서 연우에게로 이동했다. 이게 다 저
도둑놈 때문이야. 그리고 강이건 너도.

도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요. 입 닥치고 있을게요. 대신 안방에 들어가서 쉬어도 되죠?”

하아. 준영이 마지못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더 입씨름했다간 저만 지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올려 보냈다간 위에서 또 볼링공이나 굴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하가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저 자식 또 뭐 뒤지는 거 아냐.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 봤자 팬티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쫓아가서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준영이 엉거주춤 서 있는
연우에게 얼른 앉아서 더 먹으라고 했다.

“먹고 수학 좀 더 하다 가자. 응?”

이건이 자리에 앉으면서 안방 쪽을 흘깃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님. 도하 형 화난 거 아니에요?”

“놔둬. 놔두면 돼. 모른 척해. 너넨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준영이 피자 하나를 더 뜯어 연우에게 건네준다. 연우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강이건이 오자고 해서 억지로 오긴
했지만, 다음부턴 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저를 챙겨주는 준영이 마냥 싫진 않았다. 제 형과
생김새가 좀 비슷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가 떠난 걸 원망한 적도 있지만 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하루에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그는 오죽했을까.

피자를 한 입 베어먹는데 갑자기 왜 형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괜히 목구멍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어 애꿎은


콜라만 계속 들이켰다.

* * *

뒷정리를 마친 준영이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을 보내고 대충 치우고 나서 보니 안방에 있는 도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게임을 한다고 하더니 어째 아까부터 잠잠하다. 문손잡이를 잡고 잠시 머뭇댔다.
저번처럼 홀딱 벗고 자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안으로 들어서는데 도하는
다행히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왜 조용한가 했더니 자는 중이었는지 인기척에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추운가. 보일러 온도를 확인하니 그렇게 낮은 건 아니었다. 큰 키 탓인지 웅크렸는데도 싱글 침대가 꽉 차


보였다. 깨우려고 머리맡으로 가는데 도하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끙, 신음을 내며 몸을 더 웅크린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온 걸 보니 나쁜 꿈이라도 꾸는 듯 보였다. 어릴 때도 무서운 꿈을 자주 꿔서 도하의 모친이


한약도 지어 먹이고 했는데, 아직도 그러나.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도하를 깨웠다.

“도하야?”

으으응, 목소리에 투정이 잔뜩 섞여 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 사이로 연갈색 눈동자가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다시 깨울까 하다 그대로 놔두고 침대 위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짙은 검은색인데 눈동자는 신기할 만큼 예쁜 갈색이었다. 아기 때는 머리카락까지 갈색이어서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는데.

“도하야.”

다시 깨우는데 이번엔 눈을 뜨는 대신 팔을 뻗는다. 아까처럼 앓는 소리를 내진 않는 거 보니 어느 정도 잠은 깬


것 같았다.

“일어났으면 집에 가서 자.”

“잠깐만요. 나 무서운 꿈 꿨어요.”

잔뜩 잠긴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대를 긁으며 소리를 냈다. 굳게 다물리는 입술에서 꽤 강인함이 느껴졌고, 그게
낯설어 저도 모르게 슬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더 자게 놔두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도하가 제 팔을
붙든다.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힘이 가해졌고 순간 몸이 침대 위로 끌려 올라간다. 당황해서 버둥거릴 틈도 없이 그대로


도하가 허리를 껴안으며 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어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준영이 눈만 끔벅였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작이 딱 떨어진다. 혹시 이 녀석… 인상을 슬쩍


찡그리고 내려다보니 여전히 눈은 감은 채다.
“너 안 자지?”

“…무서워서 그래요. 잠깐 이렇게 있어요.”

“눈 떠봐.”

억지로 눈을 뜨는데 잠이 가득하다. 준영을 쳐다보더니 푸스스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감고서 허리를 더 꽉
끌어안는다. 제 가슴팍에 비비는 얼굴 때문에 준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어깨를 밀어냈다. 그럴수록 힘이 어찌나
센지 떨어지는 대신 더 엉겨 붙었다.

“야 놔. 숨 막혀.”

“…10 분. 아니, 5 분만.”

“싫어. 떨어져.”

“알았어, 알았어. 1 분. 됐죠?”

하아. 결국 준영이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뺐다. 도하는 끌어안은 채로 허벅지를 제 다리 사이로 은근히 밀어


넣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허벅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게 성기를 압박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슬쩍 허리를 뒤로 빼려 하니 위로 꾹 누르며 자극해온다. 준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도하를 밀어냈다. 하지만


도하는 준영을 놓는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자랑 오래 안 했죠? 형 섰어요….”

“까불지 말고 떨어져.”

“내가 빼줄까? 손으로 해 줄 테니 바지 벗어 봐요.”

준영이 잠시 갈등했다. 어제도 그러더니 제 성기는 약한 자극에도 쉽게 발기하고 있었다. 이건 도하를 보고


발정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게다가 요즘은 자위도 안
하지 않았던가.

“말 안 하면 내가 그냥 만진다?”

다리 사이에서 허벅지가 빠져나가는 대신 손이 바지 앞쪽으로 닿자 준영이 화들짝 놀라 그 손을 붙들었다. 눈이


풀린 걸 봐선 아무래도 더 놔뒀다간 오늘 일을 치를 기세였다. 억울하단 표정을 지은 도하가 왜에에, 하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

“너, 얼른 가. 올라가. 나 피곤해.”

“한 번만. 한 번만 만질게요. 1 분, 아니 10 초만.”

“싫다니까.”

“입은 싫다면서 좆은 발딱 서 가지고. 야하긴.”

“시끄러워. 닥쳐.”

“아니면 입으로 해줄까? 그것도 싫으면 형이 내 거 만져볼래?”

사정사정하는 모습에 그냥 올라가라고 버럭 성질을 냈다.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곧 포기하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을 보니 솜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하긴. 우리에겐 내일이 있으니까.”

잔뜩 들뜬 얼굴을 보며 준영이 몸을 움츠렸다. 잔말 말고 올라가라고 하니 도하가 그대로 몸을 돌려 벽을 보고


눕는다. 10 분만 자고 간다면서 버티더니 끝끝내 일어나질 않는다. 결국 준영은 포기한 채 거실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네. 이건이 휴대폰으로 불을 밝히고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옆에는 연우가 점퍼에 손을
집어넣은 채 코까지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밤이 되니 바람이 더 매서워졌고 두꺼운 점퍼를 입었음에도 꽤 추웠다.

그러다 논두렁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걷는 연우를 보며 이건이 한마디 했다.

“이쪽으로 더 붙어. 옆으로 굴러떨어진다.”

“됐어. 괜찮아.”

연우는 뭔가 심통이 난 것 같았다. 혼자 가겠다는 거 데려다준다고 우겨서 성질이 났나. 어릴 적엔 어두우면


혼자 다니지도 못하더니. 소화를 시킬 겸 겸사겸사 나온 것뿐인데 왜 저렇게 뾰로통한지 모르겠다.
“그러지 말고 더 오라고.”

팔을 잡아당기는데 연우가 그 손길을 홱 뿌리치느라 팔을 크게 휘젓는다. 동시에 균형이 무너지며 몸이 논두렁


아래로 갸우뚱했다. 이건이 잽싸게 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연우의 몸이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성인
남자 허리 정도밖에 안 되는 위치였지만 밝을 때 떨어지는 거랑 어두운 곳에서 구르는 건 확실히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달랐다.

“야, 괜찮아?”

얼른 불빛을 비췄더니 연우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본다. 어찌나 사납게 보이던지 이건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왜 떠밀고 지랄이야!”

“내가 밀었냐…. 네가 난리 치다 떨어진 거지. 어휴.”

아래로 내려와 옷에 묻은 지푸라기들을 털어주는데 연우가 또 만지지 말라고 난리다. 몸에 금가루를 처바른 것도
아닐 텐데 왜 저가 만지기만 하면 지랄인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연우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다가 윽, 하고 신음을 낸다.

“왜? 어디 다쳤어?”

“아씨. 다리 삐었나 봐.”

“정말? 봐봐.”

다리를 만지려고 했더니 그대로 뒤로 빼고 논두렁 위쪽으로 올라간다. 쩔뚝이면서도 잘 걷는 걸 보니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닌 듯싶었다. 얼른 쫓아 올라가서는 등에 묻은 남은 덤불을 떼어 내줬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좀 삔 거 같아.”

“어떡하냐. 걸을 수 있겠어. 내가 부축해줄까?”


“오버하지 마. 괜찮으니까.”

연우가 쌩하니 걷는데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불편해 보인다. 이건이 연우의 앞쪽으로 불빛을 비추며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연우의 집 근처에 다다르게 됐다.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연우가 고개를 돌리고
이건을 바라봤다.

“이제 가. 집에 왔으니까.”

“가서 약 발라. 아니면 내가 붕대로 좀 감아줄까? 나 그때 응급처치로 배운 적 있어서 그건 꽤 잘하는데.”

“됐어. 가라고.”

“아저씨 아직 안 주무시나?”

괜히 또 술 드시고 애를 때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목을 빼고 담장 너머를 들여다보려고 하니 연우가


이건의 등을 확 떠민다.

“아, 가라고.”

“알았다고. 괜히 짜증이야, 아까부터.”

“너 때문에 다리 다쳤잖아!”

“알았어, 알았어. 근데 나 화장실만 쓰고 가면 안 돼? 오줌 마려워서 그래.”

가지가지 한다 진짜. 연우가 노려보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집 쪽으로 간다. 이건이 그 뒤를 따랐다. 콜라를 너무
마셨나, 연우의 집은 화장실도 밖에 딸려 있었다. 그렇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연우가 집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린다.

“나 화장실 쓴다?”

“쓰든지 말든지.”

이건이 화장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불은 수명이 다했는지 한 번씩 깜박였다. 어둡고 좁은 화장실 안에서 소변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안쪽을 보니 반투명한 유리창에 아무런 그림자조차 비치질 않는다.

마루 밑을 살피니 신발이 하나뿐이다. 다행히 연우의 아버진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발 괜찮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 앞에서 연우를 불렀다.
“송연우.”

그랬는데 대답이 없다. 그림자도 사라졌고. 다시 부를까 하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집 안이 썰렁하다 못해 냉골이다. 보일러라도 좀 틀지. 속상한 마음에 어금니를 꾹 물었다가
연우의 방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연우가 제 발목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바지를 내린다. 이건이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해, 불러도 말도 없고.”

“깜짝이야. 왜 남의 집에 막 들어와?”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걱정했잖아. 다리 아파서 그래?”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연우가 홱 돌아서 앉는다. 어후, 고집불통. 다리를 붙들고 제 쪽으로 당기니 몸이 같이
움직였다. 아, 놔. 다리를 빼려 하길래 그대로 붙들고 바지를 살짝 걷어 올렸더니 발목 부분이 뻘겋다. 살짝 삔
게 아닌 거 같은데….

“야, 너는 이 정도였으면 아까 말을 하지….”

“파스 바르면 돼. 신경 끄고 가.”

“파스는 어딨는데.”

연우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 있겠지, 라고 얼버무렸더니 이건이 한숨을 쉬며 일어나서 안방 쪽으로


들어갔다. 안방은 술병이 뒹굴고 이불도 널브러져 엉망이었다. 그걸 보니 더 막막한 심정이 됐다. 그대로
서랍으로 가서 하나씩 열고 약이 있나 확인했다.

그러던 중 제일 아래 서랍 안쪽에 작은 상자가 있는 걸 발견했다. 보통 이런 데다 약을 넣어두긴 하던데. 그걸


빼서는 확인하던 이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기엔 약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딱지며, 작은 인형이며, 심지어는 여자애들이 쓰는 팔찌도. 그 반지를 기억해낸 이건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건 자신이 어릴 적 작은누나의 것을 가져다 연우에게 준 것이었다. 지금보다 사이가 훨씬 더 좋았던 어린 시절.
전학 와서 연우가 여자앤 줄 알았던 그때.

그때 등 뒤에서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나더니 이건의 몸이 뒤로 확 딸려간다. 아이 씨. 연우가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상자를 마구잡이로 닫더니 신경질적으로 서랍에 넣고 쿵 닫았다. 서랍을 붙들고 있었다면 손가락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왜 남의 서랍을 막 뒤지고 지랄이야, 병신아!”

버럭 성질을 내는데 목이며 얼굴, 귀까지 시뻘겋다. 이건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제가 뭘 잘못했나 생각할
것도 없이 연우가 팔을 붙들고 끌어내려 한다.

“짜증 나니까 나가. 빨리 나가라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건이 그 손을 떼어냈다.

“아, 알았어, 간다고 가. 왜 갑자기 성질이야. 약 찾는 중이었다니까.”

“약 같은 거 없으니까 가라고!”

어휴 정말. 이건이 그 손을 떼어낼수록 점점 더 집요하게 굴면서 나가라고 난리다. 알았다고 일어서다가 송연우의
등 뒤로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이 커다래졌다. 연우 역시나 낌새를 알아채곤 몸을 돌렸다가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얼마나 취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제 아버지가 문 옆에 기대서서는 그런 둘을 보고
콧방귀를 끼었다.

“씨부럴 놈들. 왜 싸우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는 비척비척 가더니 이불 위에 퍽 쓰러져 잠들었다. 곧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세상모르게 잠에 빠졌다.


연우가 짜증 섞인 얼굴로 제 방 쪽으로 가길래 이건이 그를 뒤쫓아 갔다.

“기다리고 있어. 우리 집에 붕대 있으니까 가져올게.”

“됐으니까 좀 가. 나 피곤해.”

“뛰어갔다 올 테니까 10 분만, 아니 20 분만 기다려.”

“아, 잘 거라고!”

“짜증 내지 말고 좀!”

이번엔 이건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버럭 냈다. 생전 화를 내지 않던 녀석이 화를 내자 연우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건은 모든 게 속상했다. 팅팅 부은 발목도 속상했고,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도,
술에 취한 아버지도. 그리고 서랍 속에 제가 준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연우도…. 그냥 모든 게 다 속상했다.

“…좀… 말하면 들어라. 애새끼가 왜 이렇게 고집이 세냐.”

한풀 꺾여서 푸념하듯이 말하는데 연우가 더는 말하지 않는다. 이건이 술 취해 잠든 연우의 아버지를 한 번


보고선 그대로 집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을 맞으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얼른 가서 붕대를 가져오려고 집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처음엔 걸었고, 그다음엔 뛰었다. 논길을 따라 집 쪽으로 뛰어가다 보니 서랍 속에서 본 연우의
물건들과 그날 밤 도하의 집에서 연우가 제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고 있었다.

[너도 자지 빨아줄까? 원하면 넌 그냥 해줄게.]

* * *

도하가 운동복을 챙겨 입고 마스크를 쓴 채로 집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다 준영의 집 앞에 멈춰 서선


가만히 귀를 댔다. 아직 자고 있나. 준영은 어젯밤 기어코 저를 위층으로 쫓아 올려 보냈다. 그냥 모른 척 좀
재워주지. 야속한 마음에 어리광도 피우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오늘이 화요일. 드디어 그날이 왔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와 보니 이건이
개집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백설이와 마주 보고 있었다. 사람이 개를 보는 게 아니라 개가 사람을 구경하는
모양새였다.

“강이건. 거기서 뭐 해?”

이건이 돌아보는데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도하가 그쪽으로 가며 마스크를 입까지 내렸다.

“어제 피자를 그렇게 처먹더니 얼굴은 왜 죽을상인데.”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건이 일어서더니 평상 쪽으로 간다. 점퍼에 손을 넣은 채 한숨을 또 푹 내쉬길래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갔다.


“야, 너는 방학 언제야?”

“크리스마스 끝나고 바로요.”

도하가 날짜를 계산했다. 그렇다면 다음 주 목요일이란 말인데….

“너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방학 동안 여행이나 다녀올래? 돈은 내가 줄게.”

네? 이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도하를 쳐다봤다. 갑자기 웬 여행. TV 에서 공짜로 여행 보내준답시고


이상한 물건을 배달시키거나 하기도 한다는데. 미심쩍은 얼굴로 도하의 위아래를 훑었다. 혹시 배우라서 돈이
많은 게 아니라, 그런 쪽으로….

“고, 고등학생이 공부해야지, 무슨 여행이에요!”

너무 격한 반응에 도하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왜 그렇게 정색을 하는 건데. 공부한답시고


서준영 집에 들락이는 바람에 준영이 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이참에 어디 확 보내려고 했더니. 쯧
혀를 차고 그럼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건의 안색을 다시 한번 봤다. 이 자식, 무슨 일 있나. 더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 인마. 더 자든가. 나 운동하러 간다.”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붙잡았나. 곧 도하가 운동하기 위해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운동이
아니라 또 나무에 빌러 가는 거 같은데. 참 이상한 형이란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젯밤 일이 떠올라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붕대를 가져가 연우에게 감아주고 소염제도 주고 했는데 발목은 좀 괜찮으려나. 왜인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갔을
때 연우는 더 지랄하지도 난리 치지도 않았다. 술 취해 자는 아버지 옆에서 웅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매일
그렇게 지냈던 걸까. 괜히 마음이 쓰이고 코끝이 시큰해져서는 붕대를 감는 내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만 생각하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도 아픈데 오늘은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릴까. 가방이라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학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던 준영이 심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 시다. 6 시에


도하와 만나 호텔로 가기로 했는데 얼마나 심란한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외투와
차 키를 챙겨 들고 현관으로 갔다. 일단 오늘은 피하자.

도하에게 욕을 먹어도 하는 수 없다.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 걸 어쩌겠는가. 자꾸 피한다는 거 자체가 이미


글러 먹은 거다. 급하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도하가 갈색 코트를 차려입은 채 화사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1 시간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나와요? 급했구나?”

준영이 입을 벙긋댔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던 거지. 시선을 내려 보니 도하의 옆엔 여행용 트렁크도


하나 놓여 있다. 저건 또 뭐고.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형이 튈까 봐 지키고 있느라고.”

“…….”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진짜 도망가려던 사람처럼?”

“설마…. 아, 아니야.”

“어차피 형도 다 준비한 거 같은데, 지금 가죠.”

도하가 손을 내밀었고 준영이 문을 붙든 채로 버티며 그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

“네. 안 일러요. 부끄러워서 그런 거면 나 먼저 내려갈게요.”

생긋 웃은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트렁크를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준영이 그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지금 도망쳤다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와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자포자기한 얼굴로 문을 닫고
내려와 보니 입구에 도하가 끌고 다니던 차 대신 낯선 차가 막고 서 있다.
준영이 사고 싶어 하던 모델이었는데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포기한 그 차였다.

도하가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자동차 키를 준영에게 던진다.

“형이 운전해요. 나는 옆에 탈게.”

“너 이 차는 또 뭐야.”

“원래 타던 차는 수리 맡겼어요. 잔고장이 좀 있어서.”

준영이 키를 들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예전 같으면 좋아서 운전대를 잡았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이 키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도하가 뒷좌석에 트렁크를 싣는 걸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저건 옷인가. 옷을 좋아하고 워낙 자주 갈아입으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얼른 타요. 뭐 해요.”

준영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운전석으로 가서 타고 운전대를 잡았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갔다.
동네를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뭔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와서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으면.

내비게이션이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사이 도하의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도하가 인상을 구겼고,
준영이 그 모습을 흘깃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요.”

그러고 나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성이 난


김민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너 내 차 어쩔 거야? 차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연락도 씹어?]

“어 만식이니.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뭐? 만식이? 너 미쳤어?]

“나는 잘 지내지. 너 애인한테 차였다며? 새끼, 안됐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너 무슨 개수작이야!]

“살다 보면 또 좋은 사람도 나타나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응. 그래.”


[너 내가 고소장 보낼 테니 각오하고 있어.]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보내. 됐어, 새꺄. 넣어둬.”

[이 미친 새끼가….]

“그래, 잘 지내고. 나는 아는 형이랑 지금 어디 가는 중이라 좀 바빠.”

[뭐?]

“너는 뭘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준영이 형 호텔 아직 멀었어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더는 욕설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하가 생긋 웃었다.

“끊는다, 만식아.”

뒤늦게 야! 고함이 들리는데 도하가 그대로 전화를 끊고서 매너모드로 바꾸고선 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운전대를 잡은 준영이 그런 도하를 흘깃 쳐다봤다.

“친구한테 뭐 그런 말을 해.”

“자꾸 물어보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해요. 이 새끼 끈질겨서 꼬치꼬치 궁금해하는 것도 많다니까.”

“친한 친구야?”

“그냥 조금. 아니, 사실은 존나 싫어요.”

준영은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도하는 어릴 때부터 저와 친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굉장히 비호의적이었다.
게다가 싫어하면서 통화까지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비게이션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전방에 목적지 주변입니다. 전방에 목적지 주변입니다.]

핸들을 쥔 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턴가 도하도 말이 없어지더니 계속 창밖만 내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수많은 의문과 의심이 드는 사이 어느새 눈앞에 호텔이
나타났다.
“오, 생각보다 좋네요.”

“그러게.”

둘은 또 말이 없어졌다. 주차장에 차를 멈추자 도하가 뒷자리에서 트렁크를 끌어 내렸다.

“그거 옷이야?”

“가서 보면 알아요.”

안내데스크에 가서 체크인을 한 다음 카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준영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서울에 있을 때에도 호텔 대신 거의 제집이나 상대방의 집에서
관계를 맺는 편이었다. 남들 눈을 피하기엔 그만한 게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8 층에 도착하고 나서 두 사람이 내려 복도를 걸었다. 5 성급 호텔은 아니지만 생각보단


깔끔하고 괜찮았다. 803 호 앞에 멈춰 섰고 카드 키를 가져다 대자 잠금장치가 풀어지며 문이 열린다. 도하가 그
문을 열고 준영을 보며 씩 웃었다.

“들어가요.”

“먼저 들어가.”

“먼저 들어가요. 도망갈까 봐 그래.”

도망은 무슨. 준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진작에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아,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구나. 진짜 호텔에 왔어. 오랜만에 맡는 숙박업소 특유의 냄새에 잠시 멈칫했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더블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걸 보니 현실이 확 와 닿는다.

“형이 먼저 씻을래요? 아니면 내가 먼저 씻을까?”

“어?”

“아니면 같이?”

준영이 눈을 일그러트렸다. 너 왜 이렇게 익숙해 보이냐. 막상 저는 다른 놈들이랑 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꼬맹이 때부터 알던 도하랑 이러고 있으니 어색하고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머뭇거리면서 입을 달싹이자 도하가
트렁크를 한쪽으로 끌어가선 잠금장치를 푼다. 옷을 꺼내는가 싶어 봤는데 트렁크가 열리는 순간 준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뭐야!”

저도 모르게 빽 비명을 지르고 나니 도하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올려다본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트렁크 안에는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채찍, 몽둥이, 수갑, 안대, 목줄, 당구공? 게다가 이상한 스타킹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니 도하가 후, 하고 심호흡을 한다.

“일단 씻고 나와서 골라요. 내가 잘 몰라서 준비는 다 해왔는데, 형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네.”

“너… 그게 다 뭐야.”

“원래 낚시랑 등산이랑 SM 의 공통점이 장비발이래요. 그래서 심사숙고해서 준비한 것들이에요.”

맙소사. 준영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초도 있네. 설마 저건 분위기 내는 용인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그것들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존나 열심히 해볼게요. 손이 까지고 좆이 까질 때까지.”

“…뭘 그렇게까지. 그냥 대충해, 대충….”

“아니, 나는 오늘 형을 꼭 만족시킬 거예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때리던 걸로 봐선 설마 싶으면서도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데 등줄기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욕실로 황급하게 들어갔다.

“일단 씻고 나올게.”

CH 13.

준영이 둥그런 원형 욕조에 걸터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욕실 한편을 바라봤다. 거기엔 분홍색 목욕 가운이 걸려
있었다. 막 씻으려고 하는데 도하가 들어와서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그래도 첫날인데 기념하기 위해서 가운도
맞췄다고. 그걸 쳐다보는데 헛웃음이 터졌다.
물을 틀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왜 안 나와요? 준비 다 했어요?”

준영이 문 쪽을 바라보며 곧 나갈 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옷을 벗지도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설마…. 진짜 때리진 못하겠지, 싶으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하긴 할 거 같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참 뒤 결심을 굳히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어 한쪽에 걸어두고 나니 제 상체가 보였다.
도망갈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에 운동이라도 해둘걸, 뒤늦게 후회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바지마저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

머리를 감고 온몸을 닦고 나서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도하는 더는 보채질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대충 물기를 닦고 샤워 가운을 걸친 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렇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실내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어두컴컴했다. 방 안을 밝히던 빛은 모두


사라지고 키가 큰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그 은은한 불빛 아래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멈춰 섰다.

침대에 뿌려진 건 아무래도 장미꽃잎처럼 보였다. 바닥에도 이것저것 펼쳐져 있었는데, 아까 여행용 가방에서 본
것들이었다. 도하는 침대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준영을 보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다 씻었어요? 가운 되게 잘 어울린다. 귀여워.”

“너… 이게 다 뭐야?”

“가운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죠?”

준영이 흠칫 놀라 가운을 여몄다. 씻고 안에 아무것도 안 입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침대에


깔린 꽃잎까진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바닥에 있는 것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채찍부터 시작해 검은색 몽둥이와 파리채 비슷하게 생긴 것까지는 아까 봤던 건데…. 그러다 마지막 물건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 시선을 알아챈 도하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무로 된 커다란 주걱이었다.

“이거 기억나요? 서준영 씨가 예전에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다녀오면서 사다 준 거잖아요. 여기 쓰여 있는 글자


보이죠?”

준영의 눈에 나무주걱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도하야, 사랑해.

“어릴 땐 날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하더니, 쯧.”


“너…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당연하지. 난 형이 준 건 하나도 안 버려. 물건이든 기억이든.”

준영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도하가 눈짓한다. 자 얼른 올라가서 누우세요.

“뭐?”

“침대에 누워야죠.”

“너, 너 안 씻었잖아.”

“씻는 동안 튈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묶어놓게.”

묶어 놓는다는 말에 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너… 날 못 믿어?”

“차라리 손만 잡고 자겠다는 오빠를 믿겠어요. 얼른 누워요.”

준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할까. 하지만 어제 그랬던 걸로 봐선 도하가 저를 때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릿속은 아까부터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주춤주춤 그쪽으로 가서
보는데 꽃잎도 제법 많다.

“이 꽃은 다 뭐야…. 이런 거 호텔에서 싫어해.”

“걱정 말아요. 시트도 내가 가져왔어요. 특별히 방수되는 걸로. 아무리 정액을 폭포처럼 쏟아부어도 호텔 시트엔
절대 안 묻어요. 그러니까 올라가요, 얼른.”

씩 웃으면서 말하는데 준영의 얼굴은 점점 희게 질려갔다. 마지못해 침대에 올라가서 천장을 보고 경직된 자세로
누웠더니 씻기 위해 제 가운을 챙기던 도하가 뭘 하는 거냐고 묻는다.
“…누웠잖아.”

“엎드려야죠. 한두 번 해봐요? 왜 이래, 초짜같이.”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뒤집었다. 초짜라는 말에 자존심에 금이 쩍 갔다. 망할 자식.

“팔은 뒤로해요.”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팔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잠시 후 손목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진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치켜들던 준영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잠깐, 잠깐. 너 뭐 하는 거야?

철컥 소리와 함께 은색의 수갑이 손목에 채워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얼굴로 도하를 보는데
도하가 씩 웃는다.

“이게 뭐야? 풀어.”

“원래 이런 거잖아요. 알면서.”

“수갑은 내 취향 아니야.”

“미안. 내 취향이라.”

“뭐?”

“나 씻는 사이 도망갈까 봐 그래요.”

그러더니 반대편으로 가서 무언가를 설치한다. 준영이 대체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봤더니 벨트 같은 걸로 이번엔


몸을 고정한다. 졸지에 침대에 묶여 버린 모양이 된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야! 이거 당장 안 풀어?”

“씻고 나올 때까지만 이러고 있어요. 나오면 풀어줄게요.”

“너 이거 정신병원에서 환자들 묶어놓을 때 쓰는 그거 아냐?”

그 말에 도하가 제 턱을 문질렀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하긴. 습관적인 거짓말도 병이긴 해요.”

생긋 웃는 모습에 준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적당히 맞춰 주다가 빠질 생각이었는데 도하의
표정을 보니 뒷목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또 아닌 것도 같고.

“씻고 올게요.”

도하가 욕실로 사라지고 나서 준영은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 했지만, 벨트로 허리가 단단히 묶여 여의치 않았다.
차라리 손이라도 앞으로 묶여 있으면 해볼 만할 텐데 뒤로 묶인 탓에 더 빠져나올 수 없었다.

저 미친놈. 그렇게 몸을 들썩이며 한참 동안 기운을 빼고 있는데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면서 뿌연 수증기가 확


밀려 나온다. 도하가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털고 나오는 중이었다. 핑크색 가운을 걸쳤는데도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았다.

“얼굴 왜 그렇게 빨개졌어요? 힘들어요?”

“어, 힘들어. 빨리 풀어.”

“그럼 얼른 하고 끝낼게요.”

수건을 옆으로 홱 집어 던지더니 바닥에 세팅해 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준영이 엎드린 채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뭘 하나 지켜봤다. 도하의 손이 채찍을 만졌다가 몽둥이를 만졌다가 하나씩 옆으로 옮겨갔다.
그러더니 표정이 심각해져선 입술을 꼭 깨문다.

아무리 봐도 이걸로 때리면 아프겠는데.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해서 준영은 속으론 조금 안도했다. 그래,
이도하가 날 때리진 않겠지. 아지랑이처럼 희망이 피어올랐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풀렸다.

“형이 골라 봐요. 어떤 게 괜찮아요?”

준영이 망설일 것도 없이 ‘초.’라고 대답했다. 초로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왜 그걸로
때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 그래요?”

“어. 왜?”

“진짜 마니아구나.”
‘초가 어때서?’라고 묻기도 전에 도하가 한쪽에 올려둔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붙인다. 초에 불을 붙이는 걸 보고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거기다 불을 왜 붙여. 도하가 제 팔을 걷더니 초를 기울인다. 잠시 후 촛농이
피부에 떨어졌고, 대번 인상이 찌푸려졌다.

“뜨겁다. 진짜 괜찮겠어요?”

준영이 입을 벙긋댔다. 때리는 게 아니라, 그런 용도였어? 이 자식 대체 어디서 알아보고 준비를 해온 거지.


갑자기 두려움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도무지 안 되겠어서 도하를
불렀다.

“도하야, 실은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어떤 거짓말?”

“나 엠 아니야. 그리고 나 너랑 섹스할 마음 아직은 없.”

지익. 소리와 함께 준영의 뒤통수로 손길이 닿는다. 준영이 고개를 돌리는 사이 도하가 이제 막 뜯어낸 테이프로
준영의 입에 붙여 버렸다. 준영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읍읍, 소리를 냈다. 도하가 생긋 웃더니 준영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목덜미를 그리고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쉿. 괜찮아요. 처음이지만 형 마음에 들게 잘할게요. 안심해요.”

“읍, 읍읍.”

“하아. 너무 기대하는 표정을 하니까 내가 다 떨리네. 벌써 좆도 섰어요.”

제 가랑이 가운데를 한 번 손으로 만지더니 입술을 노골적으로 핥았다. 그러고 나선 발밑에 깔린 도구들을
쳐다봤다.

“그럼 초는 집어치우고, 우리 준영이가 좋아할 만한 걸로 내가 한번 골라볼게요.”

골라본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도하가 망설일 것도 없이 주걱을 집어 들었다. 내 생각엔 이게 괜찮겠어. 그것은
성인 남자 팔보다 좀 작은 길이었다.
“이건 내가 아끼는 것 중에 하나니까 우리에겐 의미도 있고, 지금 상황에도 딱 맞는 거 같아서 골라봤어요.
이름은 음…. 뭐가 좋을까….”

준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도하를 노려봤다. ‘어차피 넌 나 못 때려.’ 하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렇지. 사랑의 매가 좋겠다. 우리가 왜 애들 거짓말하면 사랑의 매로 다스리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지.”

“읍.”

도하가 천천히 걸어 침대 옆에 선다. 손을 뻗어 준영의 가운 아래를 붙들어 위쪽으로 슥 끌어당긴다. 준영이


눈을 크게 뜨고 버둥댔지만 소용없었다. 곧 도하의 눈앞에 동그랗고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들어왔다. 도하가 그
엉덩이를 보며 다시 입맛을 다셨다.

“어쩜 이렇게 엉덩이도 예쁠까. 우리 준영인 안 예쁜 데가 없어. 툭하면 거짓말하는 입만 빼고. 여길 때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존나 아프면서도 왜 흥분이 될까요? 이래서 형이 이걸 하자고 했나 봐. 그죠?”

“읍, 읍읍!”

준영이 다리를 움직였지만 엎드린 채 움직이는 다리는 무릎 아래만 까닥까닥하며 귀여운 모양이 될 뿐 아무런
위협도 되질 못했다. 그걸 보던 도하가 나직하게 웃다가 갑자기 준영의 엉덩이를 꽉 손으로 움켜쥔다.

거친 손길에 준영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엉덩이에


축축하고 뜨끈한 살덩이가 와서 닿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최대한 돌렸는데 상체를 숙인 도하의 옆모습이 보였다.
제 엉덩이에 닿은 게 도하의 혀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으으읍!”

“미리 침 좀 발라놨어요. 아프지 말라고.”

“읍!”

“고맙단 인사는 나중에. 끝난 다음에.”

그러더니 손목을 한 번 돌리고 나서 주걱을 단단하게 고쳐 잡는다.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하고 있는데
주걱으로 엉덩이를 톡, 건드린다. 그럼 그렇지 해서 표정이 풀어지는 순간 도하가 팔을 위로 치켜들었고,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준영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끅, 준영이 제대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주걱에 맞은 엉덩이는 빨개질 정도로 자국이 났고,
준영은 비명 대신 입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엉덩이만큼이나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홱 치켜들고 노려보는데
도하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아아 씨발, 속상해 죽겠네. 많이 아프죠?”

“읍읍!”

준영이 비명처럼 질러대는 소리에 도하가 입을 틀어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힘내서 할게요. 파이팅.”

다시 한 번 때리려는데 준영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고 난리다. 도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쪽으로 다가와 준영의
입을 가리고 있던 테이프를 떼어냈다. 테이프가 떨어지는 순간 온갖 욕이 쏟아져 나왔다. 도하가 어릴 때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녀도 욕은 안 했던 것 같은데.

“…미친 새끼야! 이거 당장 풀어!”

씩씩대는 준영을 보고도 도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테이프를 붙였다. 쯧, 혀를 한번 차고는 준영이 더


떠들기도 전에 손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주걱을 고쳐 잡았다. 고개를 옆으로 꺾는데 두둑 소리가 난다.

“아직 반성을 못 하는 거 같으니, 제대로 한번 가 봅시다.”

철썩 소리에 준영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생겨났다. 귀와 목덜미까지 시뻘게지는 걸 보고 도하가 이를 꾹 물었다.


그대로 주걱을 든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준영의 엉덩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터질 정도로 때린 건 아니지만 제법 빨개진 걸 보니 마음이 아프다 못해 속상할 지경이었다. 입을 가져가서 호호,


하고 불어줬는데 준영이 뭐라고 읍읍대고 난리다. 아무리 봐도 고맙단 인사는 아니었다.

준영은 거의 녹초가 됐다. 처음 한 대 맞았을 때도 아팠지만 맞을수록 강도가 점점 더 세졌다. 미친놈, 당장


풀라며 아무리 악을 써도 들리는 건 테이프에 막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제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렇게
때리더니 지금은 입으로 또 불어주고 있지 않은가.

꼴을 보니 거짓말인 걸 진작부터 알고 있던 눈치였다. 어젠 때리지도 못하고 어리숙하게 굴길래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를 뿌득 가는데 도하가 주걱을 내려놓고 앞쪽으로 걸어와서는 바닥에 꿇어앉아 준영과 눈을 맞춘다.
준영이 그 얼굴을 가만히 노려봤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과 얼굴은 조금 전까지 저를 때리던 사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해 보였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더니 손을 뻗어 준영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우리 준영이 또 거짓말할래?”

“…….”

“말해봐. 거짓말할 거야? 안 할 거야?”

준영이 입을 꾹 다문 채 노려보기만 했다. 역시 다 알고 있었군. 애초에 속인 건 제 잘못이 크지만 다 알면서도


이 상황까지 몰고 온 도하를 보니 기가 찼다. 도하의 손은 이제 준영의 귀로 옮겨갔다. 그 손길은 조금 전
엉덩이를 때리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다정했다.

“말해보라니까, 응? 나한테 또 거짓말할 거야?”

준영이 노려보기만 하자 도하가 손을 거둬들인 다음 팔짱을 끼고 그 위에 제 얼굴을 얹는다. 슬쩍 웃으며 준영을


빤히 쳐다보는데 담담하다고만 생각했던 눈빛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준영은 숨이 막혔다.

“내가 크면 우리 사이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너는 도망치고 나는 쫓아가고.”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에 준영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욱신대던 엉덩이도 수갑에 쓸려 아픈 손목도 지금은 그
감각이 조금 무뎌진 기분이었다. 도하가 눈을 느리게 끔벅일 때마다 곧 눈물이 쏟아지진 않을까, 그 생각이 들어
차라리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은 얄궂은
마음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네가 제일 나빠. 내 마음 안 받아줄 거면,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지도 말지. 나 어릴 때부터 다


알았으면서 일 생기면 나타나고, 찾아가면 또 받아주고,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안 들어주고…. 그게
사람 얼마나 피 말리는 짓인지 모르지?”

준영이 이를 꽉 물었다. 도하가 털어놓는 속 얘긴 언제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특히 저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피하고 싶고 귀 막고 싶고 그런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이 묶여 귀를 막지도 못했다. 그 이유가
단순히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는 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여전히 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해. 진짜 받아줄 마음이 없는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

“나는, 너한테 정말 좋은 사람이 돼줄 수 있는데….”

낮은 도하의 목소리가 결국엔 잠기듯 갈라진다. 눈 주위는 점점 붉어졌고, 어두운 조명에 반사되는 갈색 눈동자엔
물기가 어렸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준영을 쳐다봤다. 패기 있게 사람을 패길래 이게 오늘 끝까지
가겠구나, 했는데….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준영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빨개진 코끝이 귀엽다고 느껴져 기가 막혔다. 맙소사, 하나님. 지금은 화를 낼 때인데 왜 이런
감정이 들게 하시나요. 싫다는데도 들러붙고, 지랄 맞을 정도로 제게 집착하는데도 제대로 떨쳐내지 못했던 건 이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가끔 곤혹스러울 만큼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그게 어릴 적 제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동생에 대한


애정인지 아니면 다른 건지 몰라 늘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준영이 입을 막은 상태라 가능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던


중 도하가 손을 뻗더니 준영의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낸다. 준영이 인상을 쓰자 테이프 붙었던 자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미안. 아프죠?”

준영이 노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하가 입술 끝을 올려 웃어 보인다.

“웃음이 나와? 웃겨, 이 상황이?”

“미안해요. 근데 자꾸 나한테 거짓말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망할 자식. 수갑이나 풀어.”

“풀면 때리려고.”

“그럼 안 맞을 줄 알았어?”

“싫어요. 이대로 뒀다가 기운 빠지면 풀어줄래.”

“야. 손목 쓸려 죽겠으니까, 얼른 풀라고.”

아. 도하가 그제야 준영의 손목을 본다. 엉덩이에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준영이 아까 몸부림치느라 그랬는지
손목 부위가 시뻘겋다. 특별히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형사들이 직접 쓰는 수갑을 공수해온 건데.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아래로 빨개진 엉덩이를 보고 있으니 이번엔 또 침이 고인다. 아, 맛있겠다. 아까 혀로 핥을 때 얼마나


살결이 보들보들한지 그대로 씹어먹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원래 성인 남자 살이 이렇게 매끈하고
야들야들한가, 아니면 서준영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아주 컸다.

“엉덩이에 약 발라 줄까요?”

“무슨 약을 발라? 병 주고 약 줘?”

잠깐만 있어 봐요. 도하가 일어서더니 한쪽으로 간다. 그러더니 무언갈 툭, 하고 열어선 손바닥에 찍 하고 짠다.
그 소리에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경험이 꽤 많은 제가 듣기론 저건 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잠시 후
엉덩이로 차가운 무언가가 와서 닿는다.

그 감각에 준영이 더 인상을 구겼다.

“야, 너 그거 약 아니잖아.”

“역시 유경험자라 소리만 들어도 아시네. 아무 거라도 좀 바르면 나을 거 같아서 그래요.”

손끝으로 양쪽 볼기 부분을 문지르는데 준영이 인상을 썼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왼쪽 볼기에서 오른쪽 볼기로


넘어갈 때 도하가 손가락으로 골 사이를 슥, 건드렸기 때문이다.

“수갑 풀어, 빨리.”

불길함을 느낀 준영이 수갑을 풀라고 협박했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 끝을 애널 입구에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 좁은 구멍을 벌리면서 들어가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거세게 저항하며 손가락을 밀어냈다.

욕을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준영의 입에선 읏, 하는 신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도하가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손가락을 안쪽으로 찔러 넣었다. 한 번씩 살짝 구부려 내벽을 누르자 치우라고 하면서도 끝에는 신음을
삼킨다.

“되게 예민하네….”

“치우, 아, 씨발. 야!”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형 지금 존나 섹시한 거 알아요? 구멍이 꼭 내 심장 같아요. 벌렁벌렁하는 게.”

“닥치고, 빼.”
준영이 이를 까득 물었다. 손가락으로 안을 후벼대는 느낌에 아랫배가 저릿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몸이 한동안
남자랑 섹스를 안 해서 그런지 유독 더 예민해져 있었다. 어제 도하가 저를 깔아뭉갰을 때도 그러더니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지금은 머릿속이 자꾸만 하얘지려 했다.

“이도, 읏.”

긴 손가락이 안쪽에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자 하체가 들리며 엉덩이가 위로 솟았다. 준영이 이를 꾹 물고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버텼다. 곧 안을 살피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준영이 신음 대신 고개를 돌려 도하를
봤다. 철컥, 제 허리를 고정하고 있던 벨트가 풀렸고, 곧 몸이 홱 뒤집혔다. 뒤로 묶인 손은 이제 제 등에 깔려
버린 상태였다.

“너 이 새끼. 수갑도 풀라고!”

도하가 대답 대신 제 가운을 풀었다. 벌어지는 가운 사이로 탄탄하고 보기 좋게 쪼개진 근육이 들어왔다. 이미


있는 대로 발기한 성기는 배를 향해 달라붙기 직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잠깐만. 잠깐, 도하야.”

“뒤에 팔 깔려서 아프죠? 미안.”

가운을 채 벗지도 않은 채 위쪽에 있던 베개를 끌어와 준영의 엉덩이를 들어 그 아래 받치게 한다.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만. 도하를 애타게 부르는데 도하가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그대로 준영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잡아 벌린다.

“야!”

준영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힘을 줘 오므리려고 했지만 이미 제 아랫도리는 훤하게 드러나 짐승의 먹잇감처럼
던져져 있었다. 하지 말라고 악을 써대며 발길질을 하다 퍽, 하고 도하의 턱에 한 대 맞았다. 윽. 준영이 흠칫
놀라선 움직임을 멈췄다. 도하가 고개를 돌리는데 입가가 터진 걸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도하는
화를 내는 대신 씩 웃는다.

“괜찮아요. 안 아파요.”

“이, 씨발… 너….”


그러면서 준영의 가랑이를 훤히 드러나도록 잡아 벌린다. 이번엔 아까보다 세게 잡아 양쪽으로 눌렀다. 훤히
드러난 다리 사이로 성기는 완전히 발기해선 귀두에선 투명한 액이 번들거렸다. 엉덩이까지 치켜든 상태라
구멍까지 고스란히 드러난 걸 보고 도하의 눈이 이글거렸다. 도하의 눈빛을 보고 준영이 기겁했다.

“너 죽여 버린다!”

“이왕 죽는 거 맛이나 보고 죽을게요.”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제 성기가 그대로 도하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준영이 흡, 숨을 삼키며 허리를 들썩였다.


뜨끈한 입안 점막이 성기를 감쌌다. 준영이 허리를 더 치켜들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씨발. 욕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속으로 삼켜졌다. 힘이 센 건지 아니면 어디 가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건지 입으로 그냥 어설프게 빠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오럴을 했다.

손이라도 자유로웠으면 어찌 해보겠는데, 빠는 힘이 강해질수록 하체의 힘도 빠져나갔다. 그래도 어릴 적엔


태권도 유소년 대회까지 나갈 정도로 체력도 좋았는데. 그래 이건 내가 나이 먹은 탓이 아니라, 저 자식이 너무
잘해서 그런 거라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춥, 춥,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발끝으로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아랫배가 당겨왔다. 성기를 한참 물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는데 사정감이 몰려온다. 준영이 허리를 들썩였다.

“도하야, 잠깐, 읏, 잠깐, 아아.”

사정할 거 같다고 말하기도 전에 성기에서 정액이 꿀럭꿀럭 새어 나왔다. 준영이 발끝을 세우며 허리를 치켜들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도하가 그것을 입에 머금었는데도 입가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손등으로 묻은 그것마저


남김없이 혀로 핥는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잠시 멈추고 나서 준영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천장을 봤다.
아래 있던 도하가 제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상체를 숙여 제게 시선을 맞춰왔다.

“형은 어떻게 맛없는 게 없어요.”

“…씨발… 이도하…. 씨발….”

왜 이렇게 잘해, 이 새끼. 준영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맞닿은 하체로 딱딱하게 발기한 도하의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번 사정한 후 시들어 가던 제 성기 위에 꾹 눌러주니 갑자기 엉덩이가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도하가 낮은 소리로 웃더니 몸을 떼어낸다. 그러고 나서 준영의 몸을 살짝 뒤집은 후 손목에 채워진 수갑에다
작은 열쇠를 꽂았다. 이젠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달칵, 수갑에서 손을 빼내자마자 준영이
도하의 가운 앞쪽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이도하, 너!”

“때릴 거면, 집에 가서 때리면 안 돼요…?”

“하, 진짜….”

준영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도하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붉게 변하려고 하는 눈 밑을 쓸어주고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도 넘겨 줬다. 그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아래쪽 녀석은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제 성기를
압박해댔다.

“너 여기에서 있었던 일로 나 협박하면 가만 안 둬.”

“알았, 읍.”

도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이 멱살을 쥔 채로 그대로 입술을 겹쳐 물었다. 도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벌어진 준영의 입술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혀뿌리를 핥으며 아랫도리를 뭉근하게 비벼 주자 애가
닳는지 준영이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팔을 위로 올려 도하의 목을 끌어안는다. 키스하느라 겹쳐진 도하의
얼굴로 점점 미소가 번졌다.

쪽, 쪽,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던 도하의 입술이 허리 아래 엉덩이 부위에서 멈췄다. 준영이 엎드린 채로 베개를
붙들고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머릿속에선 아까부터 혼돈의 대환장 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밀어냈어야 하는데, 어째서 엎드린 채 도하를 받아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이해고 나발이고 그동안 쌓인 욕정을 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지금 제 뒤에 있는 남자는 몸도 좋고, 어리고, 거시기도 크고, 잘생겼고, 정말 다 갖추지 않았던가. 동생이란


것만 빼면 정말 완벽한데, 실은 그게 제일 큰 문제다. 아, 모르겠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젓는데 등
뒤에서 찌익 하고 콘돔 찢는 소리가 들린다.

입술을 꾹 깨무는데 잠시 후 엉덩이 사이로 성기가 들어오는 대신 어? 하는 당황하는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도하가 콘돔을 제 성기에 끼우다가 멈추고 서선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바보가 혹시 콘돔을 못 끼우나 싶어 쳐다봤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거 왜 이렇게 작지? 들어가다 마는데…?”

“너… 사이즈 안 봤어?”


“콘돔도 사이즈 있어요?”

어이없어하는 준영의 시선에 도하가 제길, 하고 욕을 내뱉었다. 억지로 반쯤 넣어봤는데 길이도 길이지만 얼마나
꽉 끼는지 그냥 했다간 하기도 전에 좆이 졸려 시꺼멓게 괴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빼고 할게요.”

“…안에다 하는 거 싫어.”

“사정 안 하고 바로 뺄게요.”

준영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허락의 뜻으로 알아들은 도하가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제 성기를 가져다
댔다. 젤을 얼마나 발랐는지 마치 설탕 시럽을 묻힌 것처럼 번들거렸다. 두툼한 귀두가 애널 입구를 억지로
벌리며 들어가자 준영이 몸을 굳히고 윽, 하고 신음을 냈다. 오랜만에 한 탓인지 아니면 커서 그런지 구멍을
풀어줬는데도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 아파.”

그 말에 도하가 바로 멈추더니 허리를 뒤로 물리려고 한다.

“많이 아파? 빼요?”

준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도하는 막무가내로 굴던 아까와는 다르게 준영이 아파하니 삽입하면서도 잠깐씩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더 감질나고 사람을 미치게 했다. 반쯤 들어 왔을 땐 그냥 자신이 엉덩이를
움직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도하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손가락으로 느낄 때와는 전혀 다른 쾌감이었다. 서준영과


섹스하는 상상을 수백 수천 번 했지만, 그 어느 상상 속에서도 이렇게 황홀한 적은 없었다.

아, 씨발. 넣자마자 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론 그랬다간 서준영이 다신 저를 안 본다고 하겠지만. 평생 3


초라는 꼬리표와 함께. 엉덩이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는 제 좆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감상하다 뿌리만 남겨두고
모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준영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는데 상체부터 미세하게 떨리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준영은 이번에도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끄덕였다. 목이랑 귀가 붉어져선 베개를 손으로 꽉 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뒤통수만 보고 있으니 조금 아쉬워졌다.

“형, 얼굴 보고 하고 싶어요.”

“싫어….”

“한 번만. 응?”

“자꾸 조르면, 읏, 안 한다. 얼른 하고, 빼.”

알았어요, 도하가 몸을 앞으로 숙여 준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맨몸으로 살이 닿으니 흥분이 배가 됐다. 삽입이
더 깊어졌는지 준영이 으응, 하는 소리를 삼키는 게 들렸다. 흥분한 얼굴 보고 싶은데. 박아 넣은 채로 귓바퀴를
혀로 핥아줬다. 목덜미에 코를 대고 체향을 맡으며 혀로 문지르고 앞니로 살짝 깨물고 하니 준영이 애가 닳는지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움직여, 응?”

들릴 듯 말 듯 한 그 목소리에 도하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생겨났다.

“얼굴 보여주면.”

“야. 읏.”

꽉 맞물린 채로 위로 더 밀어 올리자 준영이 몸을 퍼득거린다. 녀석이 뭘 알고 하는 건 아니겠지만 성기로


아까부터 전립선 부분을 꾹 누르는 바람에 몸이 닳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씩 애널 속에서 꿈틀댈 때마다 제
성기도 같이 들고 일어섰다.

“도하야, 얼른….”

“얼굴, 보여줘.”

준영이 마지못해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공이 풀린 눈 밑은 붉었으며 살짝 벌린 입은


야하기만 한 게 아니라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도하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서준영, 존나 예쁘다.”

쪽, 뺨에 입을 맞추고 혀로 그 얼굴을 핥아댔다. 준영이 눈을 반쯤 뜬 채로 제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미


머릿속에선 동생이고 나발이고 하얗게 탈색되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제 위에 올라탄 이 녀석이
몸속에 돌아다니는 불덩어릴 잠재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고 싶어? 내가 해주면 좋겠어?”

응.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를 내며 준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하가 허벅지에 힘을 주고 더 꽉 위로 밀어


올리자 준영이 감질나는지 제 엉덩이를 움직인다.

“더, 애원해 봐.”

“…해줘.”

“더.”

“해, 으읏.”

“…하… 더.”

“…제발, 아아.”

하, 씨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제발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도하가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몸을 꽉 붙인 상태로 허리만 움직여 성기를 뒤로 뺏다가 앞으로 꽉 쑤셔 넣자 준영이 억, 하고 입을
벌린다.

거의 감기기 직전이던 눈이 둥그렇게 켜졌다. 도하가 그 얼굴을 마구잡이로 빨고 핥으며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퍽, 퍽 살 부딪히는 소리에 준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신음을 악착같이 참아냈다.

“그냥, 후우, 소리 내.”

우웁, 우웁, 준영이 다시 고개를 파묻으려 하길래 도하가 그대로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선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가 억지로 벌리고 쑤셔 넣었다. 입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하아, 아아아, 아아.”

“좋지? 서준영 하, 미치겠다, 존나 섹시해. 아, 씨발.”

“더, 더더, 더 해줘.”

퍽퍽, 퍽퍽, 애널 살을 짓이기며 성기가 거칠게 움직였다. 준영은 처음엔 통증과 쾌감으로 몸부림쳤다면 이젠
쾌감밖에 남아 있질 않아 울부짖었다. 치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에다, 안에다. 흐으응.”

“안에다 해줘? 응? 안에다 후, 해도 돼?”

준영이 거의 우는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도 돼. 아까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하가 주는 쾌감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그 어떤 사람과도 이렇게 흥분한 적이 없었다.
그게 금기에서 오는 쾌락인지 아니면 단순히 오랜만에 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점점 치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엔 신음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하가 콱 위로 세게 박아 넣으며 숨을 멈췄다. 큭, 하고 억눌린 신음과 함께 등이며 허벅지 근육이
수축하는 게 느껴지더니 배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게 쏟아져 나왔다.

* * *

잠결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준영이 몸을 뒤척였다. 끙. 신음을 냈지만 전화는 끊길 줄 몰랐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올리는데 낯선 천장이 들어온다. 잠을 깨려 얼굴을 문지르기 위해 손을 드는데 아아, 신음이 저절로
터졌다.

겨우 팔 하나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을
둘러보니 호텔이 맞다.

그러고 나서 이불을 들쳤는데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 허벅지 사이에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과 빨간 장미
꽃잎이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었다. 하체 아래로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인상을 찡그리고 이불을 홱 다시 덮어
현실을 외면했다.

손목엔 어젯밤 수갑으로 인해 생긴 벌건 자국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어젯밤 자신이 먼저


이도하를 잡아당겨 키스했고, 그런 다음에 몇 번을 했더라….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까진 기억나는데….
천장이 흔들리던 기억까진 나는데 그 뒤론 기억이 깜빡깜빡한다.

“…씨발.”
욕을 하는데 목소리가 보기 흉하게 갈라졌다. 큼, 큼, 아아, 목구멍 안쪽에 모래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따갑고
불편했다. 그때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울린다. 손을 위로 뻗어 확인하니 엄마였다.

차마 받을 엄두가 나질 않아 그대로 엎어놓고 나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놀라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잘못 봤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후 2 시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체크아웃할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도하가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것 같은데. 부끄러워서 도망친 건가 생각해보기로 했지만, 녀석


성격에 그건 아닌 듯싶었다. 괜히 어젯밤 일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려 뺨을 한 번 문지르고 나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허리가 찡, 하고 울리더니 윽, 하고 비명이 터진다. 갑자기 닥친 통증에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들어오던 도하가 저를 보며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 * *

도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준영의 모친인 미정이 주방 쪽에서 앞치마를 한 채로 나오며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어유, 우리 도하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조금 있으면 준영이 형만 해지겠다.”

미정이 도하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태어날 때부터 본 데다가 자주 만나 그런지 일 년에 한두 번씩 명절에만


보는 친조카들보다 도하가 더 살가웠다. 그녀의 말대로 도하는 수영을 시작하고 얼마 후부터 쑥쑥 자라더니
지금은 볼 때마다 키가 달라지고 있었다.

“형 집에 왔어요?”

학교 앞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준영은 주말이면 빼놓지 않고 본가에 와 머물렀다. 그럴 때마다 도하는 꼭 준영을
만나러 왔다.

“그럼. 근데 어제 친구들 모임 하느라고 늦었어. 지금 자고 있을걸.”

미정은 음식을 하던 중이었는지 주방으로 돌아가며 도하에게 준영을 좀 깨워 달라고 당부했다. 도하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위로 올라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칫했다.

현관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금 떨어진 제 운동화를 준영의 운동화에 나란히 붙여 놓았다. 아직은 제 운동화가
조금 더 작았다. 그걸 보니 마음이 또 서러웠다. 준영의 오피스텔 앞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준영을
찾아오지 못했다. 가끔 통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준영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허리를 펴고 2 층으로 올라가서 준영의 방문 앞에 섰다. 잔다고 했으니 노크는 필요 없겠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역시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 자는 준영이 보인다. 한여름에도 이불은 꼭 덮고 자는
게 신기했다. 자신은 한겨울에도 이불이 거치적거려 싫은데.

발소리를 죽여 그 앞으로 가서 보니 얼마나 푹 잠들었는지 누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조용히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올려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어제도 그 남자랑 만났을까. 잤을까. 오피스텔에 듣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 엄마는 물론, 아버지와 큰
형까지 난리가 났었다.

속 편하게 자는 준영을 보고 있으니 미워지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준영이 남자를 좋아해서.
저도 남자니까 이렇게 옆에 있다가 어른이 되면 언젠가 서준영이 저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서.

그래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되면 아무도 못 만나게 해야지. 다른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나만 좋아하게. 어른이 되면 꼭. 차마 손을 덥석 만지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준영의 손을 살살 매만졌다.

“…그땐… 나만 좋아해 줘. 형은 내 거니까.”

달칵,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미정이 쟁반에 음료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도하가 태연하게 일어나며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이모, 주스예요?”

그녀가 응, 주스, 하고 말끝을 흐렸다.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음료 컵을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요, 이모.


그녀는 더는 말하지 않고 도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음료를 입에 가져가던 도하가 물었다.

“왜요?”

그녀는 곧 혼란스럽던 표정을 정리하곤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아니야, 도하야. 형 깨워서 내려와. 이모가 맛있는 밥 해줄게.”

“네, 그럴게요.”

도하가 활짝 웃자 그녀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도하가 주스를 쭈우욱 들이켜고 나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다시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준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밥을 먹자고 깨워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독 저를 예뻐하는 할아버지가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 도하,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괜찮아요?”

준영이 제 코앞까지 다가온 도하의 이마를 밀어냈다. 좀 떨어져. 허리가 지끈하더니 그때부터 통증이 상당했다.
나갔다 돌아온 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준영이 자는 동안 씻고 먹을 것을 사러 갔었다.

병원에 가기 위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던 준영은 쓰레기통을 한번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거기엔 어제


도하가 작다며 뜯어 버린 콘돔과 그리고 뒤늦게 사이즈 맞는 것을 착용한 것 몇 개가 합쳐져 콘돔이 정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청소하러 누군가 들어왔을 때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룹섹스라도 한 줄 알고
신고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두 사람은 짐을 대충 정리하고 근처 병원에 왔다. 한곳에서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진료를 모두 보는
곳이었다. 접수하고 기다리는데 앞쪽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보였다. 그중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있던
할머니가 준영을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들은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준영이 대답 대신 애매하게 웃자 그 옆에 있던 할아버지도 할머니와 아는 사인 듯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 둘 다 훤칠하니 배우같이 생겼네. 형젠가?”

“형제는 아닌 거 같은데. 닮질 않았잖아.”

“한 명은 아빠 닮고 한 명은 엄마 닮으면 그럴 수 있지.”

“그려? 둘이 형제야?”
듣고 있던 도하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아, 그냥 형 동생 하는 사이구만. 그럼 저 옆에 곱게 생긴 총각이 나이는 더 많나?”

할아버지의 물음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요”

“몇 살이나 많은데.”

“…열 살이요.”

“예끼. 열 살이면 형이 아니라 삼촌뻘이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인상을 팍 구기며 할아버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가 흠칫 놀라 쳐다보자
이번엔 심호흡까지 했다. 아무리 자신이 싸가지가 없기로 서니 노인네한테 대들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촌이라니!

“무슨 삼촌이에요, 요즘은 남녀끼리도 열 살 차이는 많은 것도 아니에요.”

“젊은 총각이 노인네 같은 소릴 하네. 요즘은 열 살 차이 나면 도둑놈 소리 들어.”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이번엔 준영에게도 묻는다. 안 그래, 총각? 여태 잠자코 있던 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네,
맞아요, 하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도하가 더 성질을 냈다.

“그럼 할아버진 부인이랑 몇 살 차이 나세요!”

“동갑.”

도하가 당황해서 입을 벙긋댔다. 아, 동갑이시구나.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번엔 옆에 있는 할머니한테 화살을


돌렸다.

“그, 그럼 할머니는요!”

“나는 영감이 열네 살 많아.”


그 말에 의기양양해진 도하가 할아버지에게 따지듯 얘기했다.

“그것 봐요, 할아버지. 바로 옆에 열네 살 많으신 분도 있잖아요.”

하지만 곧 할머니의 입술 끝이 아래로 축 내려갔다.

“그래서 일찍 죽었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보란 듯 맞장구쳤다.

“나이 차가 많이 나면 그게 안 좋아. 나보다 일찍 죽으니까 말야.”

할머니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뿐인 줄 알아? 죽을 때까지도 지가 나보다 나이 좀 더 처먹었다고 을매나 괄시하고 속을 썩이든지. 다시


태어나면 난 그렇게 나이 많은 남자랑은 절대로 안 살아. 동갑이나 엇비슷해야 좋지.”

“그려, 잘 생각했어.”

두 사람이 이야길 주고받는 걸 보고서 꾹 다문 도하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옆에 앉은 준영을 보니 피곤한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이번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준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형이 죽으면 확 따라 죽을 테니까.”

준영이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으니 도하가 ‘자요?’ 하고 묻는다. 그때 간호사가 나와서 서준영 님, 하고


부른다. 그 소리에 준영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뚝, 허리를 손으로 짚고 제대로 펴지도
못하자 도하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나 혼자 들어갈게.”

“아니에요. 같이 들어가요.”

“야. 누가 보면 중환자인 줄 알아.”

“중환자 맞죠.”

그러지 마. 준영이 도하를 떼어내고 나서 진료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리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도하가 혼자 남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준영을 기다렸다. 앞에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젠 다른 얘기 중이었다.

잠시 후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나온다. 도하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니 간호사가 무언가를 건네줬다.

“수납하시고 아래층에 내려가시면 물리치료실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리치료 받으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도하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수납대로 가면서 준영의 허리를 붙들려고 하자 준영이 손을 떼어 놓는다.

“괜찮아요?”

“내가 괜찮아 보여?”

목소리를 낮춰 이를 빠득 가는 모습에 도하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왜 나한테 화내요.”

“몰라서 물어? 의사가 그러더라. 심한 운동하셨냐고. 근육이 놀라고 뭉쳤다고.”

그 말에 도하가 안타까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이 도하의 입술을 꼬집었다.

“입 다물어.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러더니 손을 확 떼어내고 수납창구 쪽으로 걸어간다. 도하가 그 뒤를 쫓아갔다. 수납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물리치료실이 있었다. 침대 두 개가 마주 보게 된 구조였는데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아 누우니 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왔다.

“엎드리셔서 바지 살짝 내리세요.”

네? 그 말에 도하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간호사가 전기치료기를 들고 그런 도하를 쳐다봤다. 준영 역시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치료하려면 이걸 엉덩이 위쪽과 허리 쪽에 붙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바지를 내려야 했다.

준영이 엎드려 바지를 살짝 내리는데 간호사가 둥그런 패치를 붙이려고 하다 말고 눈이 커진다.

“어머, 엉덩이 왜 이러세요?”

“네?”

“완전 빨간데요?”

그 말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준영이 번쩍 들고서 간호사를 돌아봤다. 그녀는 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많이 빨간데…. 어머, 어머, 이거… 이빨 자국 아닌가요? 혹시 뭐에 물리신 거예요?
개?”

준영이 그제야 맞은편 침대에 있는 도하를 노려봤다. 이 개같은. 도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괜히 치료실
안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씻으면서도 허리가 아파 몸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앞쪽으로 가슴에 키스 자국 몇 개가 전부라 그래도
목에 안 남겨 놓은 게 어디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주걱으로 제 엉덩일 후려치고 그것도 모자라
섹스하면서 몇 번이나 물고 빨던 게 떠올랐다. 나중엔 정말 뜯어먹을까 봐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던 것도.

간호사가 다시 한번 괜찮으냐고 물었고 준영이 귀까지 빨개져선 고개를 파묻고 끄덕였다. 그냥 더는 묻지 말고


얼른, 붙여주세요. 제발요.
* * *

이건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늘 과외 하는 날인데, 준영이 어디 가는 바람에 다음에 해야 할 거 같다고


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 낮에 학교에서 봤을 때도 쌩하더니…. 메시지를 읽은 흔적은 있는데
답장을 안 하는 거 보니 엊그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연우의 안방 서랍에 들어 있던 상자, 그 안에 있던 자신이 준 물건들. 왜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했을까.


원래 친구끼리도 그런 걸까. 송연우가 그렇게 꼼꼼한 성격도 아니고 어째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올라온다. 누군가 하고 봤는데 낯선 차였다. 뭐지.
가까이 오는 걸 보니 운전대에 앉은 게 도하다. 눈이 커져 있는데 잠시 후 차가 빌라 입구에 멈춰 섰다.

도하가 먼저 운전석에서 후다닥 내리고 곧 보조석 문이 열리고 준영이 내리는데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허리를
한 손으로 짚은 모양새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준영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너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저녁 먹고 잠깐 답답해서 나왔어요. 두 분이 어디 다녀오세요?”

“…어, 그냥.”

준영이 곤란한 표정을 하자 도하가 바로 대답했다.

“운동하고 왔어.”

“운동이요? 혹시 스키 타다 다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어?”

“아… 저희 작은 매형도 저번 주에 스키장 갔다가 굴러서 다리 삐었대요. 누나가 엄청 속상해하더라고요.”

“저런, 너희 부모님이 심려가 크시겠네.”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거 보고 준영이 티 나지 않게 눈을 흘겼다. 어제 거짓말했다고 제 엉덩이를


후려치던 게 생각나서였다. 엉덩이를 맞을 사람은 아무래도 제가 아니라 도하인 것 같았다.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올라 귀가 또 후끈해졌다. 저를 붙든 도하의 손을 떼어내고선 빌라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아요?”

“괜찮아.”

“병원 다녀오셨어요?”

“어. 지금 막 다녀오는 길.”

준영을 따라가던 이건이 걸음을 멈췄다.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렸기 때문이다. 연우인가 싶어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제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박태경이 툭하면 연락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유나 때문인 줄 알았는데 최근 며칠 동안 괴롭히는 게 더 심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곽상윤이 따로


얘기한 게 있는 것 같았다. 그 성격에 한번 때렸다고 해서 넘어가진 않을 줄 알았지만…. 그냥 모른 척할까
하는데 입구 앞에 서 있던 도하가 이건을 돌아본다.

“강이건. 전화 왜 안 받아?”

“그냥. 안 받아도 돼요….”

“누군데. 누가 괴롭혀?”

“…아니요.”

말을 얼버무리니 도하가 혹시 그 도둑놈이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도둑놈은 연우를 가리키는 거였다. 이건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그런 녀석이라면 공부하자고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그런 녀석도 친구라고 편을 들다니. 도하는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곧바로 준영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준영은 벌써 집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매정하긴. 그 앞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들어가기 위해 그대로 당기는데 턱, 하고 걸린다. 봤더니 중간에 기다란 잠금쇠가


걸려서는 문이 더는 열리지 않는다. 그 사이로 준영의 얼굴이 보였다. 도하가 그걸 보며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뭐예요? 빨리 열어줘요.”

“올라가. 나 힘들어.”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야죠. 저녁도 해줘야 하고.”

“치료받았더니 조금 나아. 알아서 차려 먹을 거야.”


“아직 못다 한 얘기도 있단 말이에요.”

“나중에 해.”

“나중에 언제요? 지금 이거 도망치는 거 같은데?”

“너… 내 얼굴 안 보여?”

준영이 제 눈 밑을 가리켰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그 밑은 어두웠다. 반면 도하는 갓 구운 맥반석 달걀처럼


빤질거렸다.

“잘 보여요. 여전히 예쁘고 잘생겼어요.”

이제 열어주려나 생각하는 찰나 준영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문을 닫았다. 잘 가, 라고 다행히 인사는


해줬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그것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닫힌 문틈으로 혀엉, 하고 불렀지만
묵묵부답이다.

닫힌 문을 보고 있으니 서운하면서도 어젯밤 제가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스스로 자책감이 들었다. 그냥 네


번만 하고 말걸…. 아니… 다섯 번만…. 아냐, 그래도 여섯 번은 해야…. 아, 몰라. 다시 혀엉, 하고
조그맣게 불렀지만 닫힌 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CH 14.

준영이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간호사 말대로 엉덩이는 붉은 자국이 곳곳에 있었고
위쪽으론 이빨 자국도 선명했다. 손을 뒤로해서 그 부분을 만지며 인상을 쓰는데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이도하가 제 엉덩이를 때리고 이빨로 짓씹던 그 장면이. 제 이름을 부르면서 저속한 말들을 쏟아붓던 게. 하여튼
이 자식은 섹스하면서도 입을 가만히 두질 못하지. 그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단전 아래가 뻐근해진다.

당황스러워 제 얼굴을 쳐다보니 귀가 빨갛다. 흥분하면 유독 귀가 빨개지는데 어제도 그랬을까. 막상 자신은


도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어떤 표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숨소리랑 목소리, 제 엉덩이를 그악스럽게
움켜쥐는 손길에서 그가 폭발하기 직전으로 흥분했다는 것만 느꼈을 뿐.

솔직히 하기 전까진 걱정스러웠는데, 막상 하니 속이 후련하면서 대신 복잡한 심경이 됐다. 끝까지 안 한다고


버텼어야 하나. 도하 말대로 이렇게 하다 보면 녀석도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환상을 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서준영이란 인간에 대한 환상. 비겁하고 보잘것없고, 겁 많고 이기적인
인간인 걸 깨닫게 되면 용광로처럼 들끓던 그 감정들도 식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정말 그걸 원하는 걸까.


“젠장.”

모르겠다. 거울 속에 제 모습을 더는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허리는 치료하고 나서 그런지 아까보다 움직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대로 침대에 올라가서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됐을까 머리맡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손을 뻗어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도하였다. 그냥 받지 말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뭐 해요?]

“누워 있어.”

[허리 괜찮아요?]

“…아까보단 나아.”

[엉덩이는?]

“…….”

[배는? 안 고파요?]

준영이 제 배를 문질렀다. 허리가 아파 대충 끼니를 때웠더니 허기가 좀 지는 것 같긴 했다. 근데 사실대로


말했다간 또 내려온다고 난리 칠 것 같아 아니라고 거짓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 형 집 앞에 오므라이스 만들어서 놔두고 왔거든요. 그거 가지고 들어가요.]

“뭐?”

[그냥 두기만 했어요. 가져가서 먹어요. 끊어요.]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리가 지끈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가 문을 여는데 누군가 문 옆에 쭈그려
앉은 모습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도하가 접시를 손에 받친 채로 앉아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열어주네요?”

자, 하고 오므라이스 접시를 준영에게 건네준다.

“접시만 두고 갔다며?”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준영이 할 말을 잃었다. 여는 순간 놀라지 않았던 건 도하가 거기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접시를 건네받았다. 접시가 얼마나 큰지 몰랐다. 거기에 담긴 오므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달걀 위에
케첩으로 하트를 그린 걸 보고 인상이 슬며시 구겨졌다.

“가져가는 김에 잘생긴 연하남도 덤으로 데리고 갈래요?”

준영이 한번 흘겨보고 나서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도하가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넣어 열고서 뒤따라 왔다.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가더니 빈 접시 두 개와 수저 물컵을 챙겨 테이블에 세팅했다. 손님용으로
장만했던 그것은 늘 강이건이 사용했는데, 며칠 동안은 도하가 쓰는 날이 더 많았다.

“새우 안 넣었지?”

“응. 대신, 아보카도 조금.”

준영이 기막혀 웃었다. 아보카도는 또 어디서 사다 놓은 건지 모르겠다.

“너희 집엔 없는 게 뭐야.”

“서준영.”

“재미없어.”

“진짠데. 제일 필요한 건데 없어.”

자, 도하가 오므라이스를 반 잘라 접시에 덜어 준영에게 건네준다. 그 모양이 얼마나 반듯한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는 요리사가 되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형이 원하면 할게요. 원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밥이나 먹고 올라가라고 했더니 도하가 못 들은 척 밥을 떠서 입에 넣는다. 준영


역시도 밥을 떠 입에 넣었다. 사 먹는 오므라이스보다 맛이 더 나았다. 진짜 요리사를 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색 앞치마도 꽤 잘 어울리고.

“샴페인 딸까요? 축하파티나 할 겸?”

밥을 어느 정도 먹었을 때 도하가 뜬금없이 샴페인 얘기를 꺼냈다. 그 말에 준영이 영문 모르겠는 표정을 했다.

“무슨 축하?”

“오늘부터 우리 1 일이잖아요.”

준영이 수저로 밥을 뜨다 말고 멈칫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도하를 봤더니 양손으로 꽃받침까지 만들어선


생글거리고 웃는다.

“아이, 좋아.”

“무슨 1 일?”

“그거. 애인 사귀면 날짜 계산하는 거.”

“미쳤냐. 그런 걸 왜 너 혼자 정해.”

“왜. 이번에도 날 또 따먹고 버리시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수저를 접시에 올려놓고 나서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기절할
때까지 할 거 다 해놓고 남의 허리랑 엉덩이도 작살내 놓은 녀석이 버린다고 말하다니.

“너 양심이 없구나.”

“있을 거 같아요?”
하, 하긴. 너한테 양심을 바라는 건 개한테 뿔을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지. 자고로 있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뭘 했다고 벌써 사귀는 얘기야.”

“설마. 일곱 번 했는데도 만족을 못 해요?”

섹스 횟수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지만 일곱 번이란 소리에 준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쓰레기통 안에 그 콘돔이
다 사용한 거 맞구나. 이 새끼. 이 짐승 같은 새끼. 준영이 인상을 쓰자 도하가 괜히 뜨끔해서는 아랫입술을 쓱
핥는다.

“미안해요. 정정할게요. 아홉 번.”

“…뭐?”

“왜 놀래요? 기억하는 거 아니었어요?”

중간중간 기절하는 바람에 몰랐는데, 어쩐지 앞이고 뒤고 쓰라리고 따갑더라니. 허리 통증까지 겹쳐지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 화를 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그 말에 도하가 억울하단 표정을 짓는다.

“나는 진짜 오럴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어요. 근데 형이 먼저 잡아당겨서 키스했잖아요.”

준영이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도 아니다. 도하는 어제 태도로 봤을 때 정말 오럴만 하고 끝낼 기세였는데


나중엔 자신이 달아올라 입술을 들이댔으니까. 눈을 뜬 순간부터 왜 그랬을까 자책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신
줄을 놓을 만큼 좋았다는 얘기였다. 차마 말을 못 하고 붕어처럼 입술만 달싹였더니 도하가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형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뭘”
“내가 3 초는 아니라는 걸. 정력이 존나 세다는 걸.”

“이 미친….”

도하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준영에게 물컵을 건넸다. 이거 마시고 진정해요. 준영이 그것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화가 나서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데도 도하는 앞에 앉아 활짝 웃는다.

괜히 민망해져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턱을 받친 채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온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식탁 밑으로 손을 감추고 주먹을 꼭 쥐어 버렸다.

준영이 안방에서 찻잔을 들고 나오는데 도하가 제 거실 소파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천장을 향해 책을 한 권 펼쳐


들고 읽는 중이었는데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까부터 페이지가 반대 방향으로 넘어갔다.

“올라가. 읽지도 않는 책 그만 들여다보고.”

“읽고 있어요.”

“줄 테니까 가져가서 읽어.”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책을 덮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아니면 내가 마사지해줄까요? 몸도 찌뿌둥할 텐데.”

“아니.”

단칼에 거절당하자 도하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밥을 먹고 어떻게든 자고 가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준영은 저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좀 쉬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대체 자신이 있으면 왜 못 쉬는 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없다고 생각하고 쉬어요.”

“그렇게 안 돼.”

“하긴 내가 존재감이 워낙 강해야지.”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불편해. 가.”


“싫어요. 애인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누가 네 애인이야!”

“너.”

“뭐?”

“서준영.”

“한 번 잤다고 아주 맞먹어라.”

“두 번 자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요?”

“안 궁금해.”

“그럼 형이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 3 개 맞추면 갈게요.”

“싫어. 안 해. 가.”

“우와! 정답.”

“…….”

“그래도 가긴 싫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파에 다시 눕는다. 준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 같아선 소파에서 끌어 내리고
싶었지만 허리가 아프다 보니 그것도 쉽질 않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든 채 노려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멈칫했다. 제 모친이다. 낮에 받질 않아서 다시 건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고 있는데 도하가 고개를 들고선 이쪽을 쳐다본다.

“왜 안 받아요?”

“…….”

“누군데? 김민석?”

목소리 끝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길래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입 다물고 있을게 받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얘기했지만, 도하도 신경이 쓰이는지 책을 보는 척하면서 이쪽을 자꾸 쳐다본다. 준영이
엄지손톱으로 다른 손끝을 꾹 누르고 나서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반대편 너머에서 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영아,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죄송해요. 종일 정신없었어요.”

[별일 없는 거지?]

“…네.”

제 모친이 가족처럼 여기는 이도하와 밤새 섹스를 하고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손끝을 누르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지만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는 밝기만 했다.

[경혜 이모랑 저녁 먹고 집에 가는 중이었어. 아침부터 만나서 쇼핑하고 뮤지컬 보고 그랬지.]

경혜란 이름이 나오자 준영의 시선이 소파로 향했다. 도하는 이제 책 읽기를 아예 관두고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셨어요?”

[응. 너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배우들이 다 근사하더라.]

“네.”

[참, 거기 괜찮은 한의원 있니? 엄마가 한약 지어서 보낼까 하는데…. 예전에 너 진맥 봐둔 기록이 있긴 한데
그건 좀 오래된 거라서. 아니면 시간 날 때 올라올래?]

“괜찮아요. 저 몸 튼튼해요.”

[튼튼하긴. 저번에 보니 얼굴이 많이 야위었던데. 아직도 사람 많은 데 가면 어지럽고 그래?]

“아니에요. 많이 나아졌어요.”

[너는 맨날 괜찮다고만 하니, 믿을 수가 없어.]

걱정 어린 잔소리에 준영이 옅게 웃었다. 그녀는 준영이 방송국에서 겪은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고 짐작은 하는 눈친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쓰러졌을까, 자신이 미처 신경을 덜 써서 그렇게 된 건
아닌가 계속 미안해했다.
[그럼 다음에 올라올 때 미리 말해줘. 엄마가 예약하게.]

“그럴게요.”

[아, 그리고 준영아.]

“네?”

침묵이 3 초 정도 이어지더니 그녀가 아니라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말끝을 흐린다. 무슨 말인데 그러냐고 더
묻지 않았다. 혹시 도하에 관한 얘기일까. 경혜는 알고 있다던데, 들었을까.

[그럼 밥 잘 챙겨 먹고. 다음에 다시 전화할게.]

“네, 그럴게요. 쉬세요.”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보며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괜히 신경이 쓰여


손에 쥔 전화기를 쉽게 놓지 못하였다. 다른 자식 같으면 무슨 말을 하려던 거냐고 한 번 더 물었겠지만, 자신은
그것마저도 어려웠다.

“어머님?”

23 년을 이모라고 부르더니 갑자기 바뀌어 버린 호칭에 준영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도하가 책을 덮고
다가오더니 준영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 앉고는 팔을 뻗어 준영의 손을 잡는다. 빼내려고 했더니 오히려 제
쪽으로 잡아당겨 이번엔 두 손으로 폭 감싸 쥔다.

“우리 자기 나만 믿어. 내가 자기 엄마든 우리 엄마든 다 해치울게.”

준영이 질색하고 그 손을 뿌리쳤다.

“해치우긴 뭘 해치워, 인마. 어디서 패륜아 같은 발언을 하고 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걱정하지 말라고요.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돼. 나처럼 단순하게 살아.”
그 말에 준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하는 모른다. 달랑 하나 쥐고 있는 걸 잃어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이
어떤 건지를. 그러면 녀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너 하나 쥐고 있는 거라고. 그 말까진 듣고 싶지 않아,
더는 얘기를 하지 않았더니 다시 슬그머니 손을 끌어간다. 이번엔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제 입술로 가져가선
손가락에 쪽 입을 맞춘다.

“뭐 해.”

“기운 내라고.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더 기운 빠져.”

“거짓말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주걱 가져올까?”

귀여운 협박에 준영이 인상을 찌푸리자 도하가 씩 웃는다.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매번 줄 하나에 의지해서 걷는
기분으로 살았었다. 그 줄을 양쪽으로 잡고 있는 사람은 제 가족뿐이었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그것을
놓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무서웠다.

사람을 사귀는 것 또한 수동적이었고 항상 거리를 뒀다. 선을 넘으려고 하면 밀어냈고 가차 없이 이별을 고했다.


신기하게도 김민석은 늘 그것을 지켰다. 그렇게 오래 만나는 동안에도 제 집안일이나 어린 시절에 관한 것들을 한
번도 캐묻질 않았다. 그래서 좋았고, 편했다.

반대로 자신의 모든 걸 다 아는 도하는 어려웠다. 녀석이 제가 밟고 있는 줄을 건들 때마다 두려웠다. 가족들이


그 줄을 놓아 버릴까 봐.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 혼자 남게 될까 봐.

그때 도하가 눈앞에 손가락을 딱, 딱, 두 번 튕겼고, 준영이 정신을 차렸다.

“나쁜 생각은 그만.”

표정만으로 귀신같이 알아채는 게 놀라웠다.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이번엔 깍지를 끼고 스트레칭 하듯 위로


꾹 눌러준다. 아, 인상을 썼지만 관절이 적당히 꺾이며 손가락 마디가 시원해졌다.

“아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가락을 풀더니 꾹꾹 마사지하듯 눌러준다. 손가락이 연결되는 부위를 돌아가며 눌러주자
묘하게 시원했다. 나이 들었나. 굳이 빼지 않고 놔뒀더니 이번엔 손목까지 주물러준다.

“좋죠?”
“조금.”

“엉덩이도 해줄까.”

“집에 갈래?”

“아유, 농담이에요, 반대편 손.”

준영이 기막힌 듯 웃으면서도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도하가 그 손을 똑같이 만져준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시선을 들어 저와 눈을 맞추고 웃어줬다. 같이 잤더니 다르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눈에 뭐가 씐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 만에 조금 달라진 기분이라 이상했다.

어제까진 분명 애 같기만 하고 그러더니. 슬그머니 손을 빼내 책상 아래로 감췄다. 이번엔 어쩐 일인지 순순히


놓아준다. 그런 준영의 태도를 보며 도하는 슬쩍 달력을 확인했다. 며칠 후에 성탄절인데 둘이 뭘 할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허리가 아파 어디 갈 수 있으려나.

의중을 물어보려는 찰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젠장. 무시하려고 했지만 앞에 앉은 준영이 빤히
보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군가 하고 꺼내서 확인하는데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매니저 선태였다.

김민석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이 인간 고소한다고 난리 치더니 잠잠하네. 사람


궁금해지게. 슬그머니 전화를 들고 식탁에서 일어나서 거실 창가 쪽으로 가는데 준영의 시선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게 느껴진다. 전화를 받자마자 반대편에선 난리가 났다.

[이도하! 너 왜 내 말 씹어? 언제 올라올 거냐고 계속 묻는데 대꾸도 없고. 나 너 어디 있는지 알아. 찾아간다!
진짜 쫓아갈 거야!]

“잘 지냈어요?”

[잘 지낼 거 같아? 너 다음 주가 시상식인데 어떡하려고 그래? 주최측에도 참석한다고 다 얘기해놨단 말이야.]

“왜?”

[네가 유력하다는데, 그럼 빼?]

“취소하라니까.”

[인마! 이게 무슨 중국요린 줄 알아? 네 맘대로 취소하게.]

“역시 우리 매니저님은 다르다니까. 고마워요.”

[미쳤어? 왜 자꾸 엉뚱한 소리야. 게다가 너 영화제의 들어왔어. 대박인 건 감독이 누군지 알아? 김석윤이야,
놀랐지?]

도하가 아무런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놀라워라.”

[아, 진짜. 하여튼 알아서 해. 너 이번에도 안 오면 다음엔 대표님 출동이야. 그땐 나도 네 편 못 들어줘.]

그는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도하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시상식이다 뭐다 가면 붙들릴 테고 그러면 본가에도 들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며칠은 준영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제 산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와중에 서울행이라니. 게다가 며칠 후엔 크리스마스지 않은가. 멀리


나가진 못하더라도 어디 좋은 데 가서 둘이 오붓하게 보내고 싶은데. 아, 근데 큰누나 오면 그것도 골친데.
복잡한 얼굴로 돌아서는데 준영이 수상쩍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누구야? 너 뭐 사고 쳤어?”

“사고는 무슨. 매니저 형인데, 푹 쉬다 오라고 해서요.”

준영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더 물을 눈치길래 얼른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서는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자야겠다. 형도 이제 쉬어야 하니까 저 갈게요.”

“갑자기?”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안 돼요. 형 허리 아프잖아요.”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데 도하가 생긋 웃더니 그대로 사라진다.
아깐 그렇게 쫓아도 안 가더니. 그러다 곧 정색하고 표정을 굳혔다. 안 갔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처럼 왜 속으로
투덜거렸나 싶어 괜히 민망해져 목덜미를 긁적이곤 곧 안방으로 들어갔다.

* * *

이건이 쓰레기통을 들고 뒤쪽으로 걸어가던 중에 멈칫했다. 그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 시간인데 저기서 담배를 피운다는 건 불량 학생일 확률이 높았다. 조금 있다가 올까, 고민하다
다시 돌아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 것 같아 일단은 그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대부분 3 학년이었고, 재수
없게도 곽상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이건을 발견하더니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어이, 강이건.”

상윤이 제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쓰레기통을 쏟아부으려다 말고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 제 가슴팍으로 팍 날아든다. 패딩에 흰 우유가 쏟아져 흘러내렸다. 그걸 보며 상윤이 쯧, 혀를 차더니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가래를 뱉었다.

“새꺄, 형이 주는 건데 잘 받아먹었어야지. 아깝게.”

이건이 한숨을 쉬며 제 점퍼를 내려다봤다.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는데 상윤과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댔다.

“손수건 봐라. 우리 이건이가 소녀였구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점퍼를 닦은 다음 쓰레기통을 챙겼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마시고요.”

그 말에 상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가 자리에서 침을 뱉고 나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건이 그것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담배를 피워 침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저게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
침을 아무 데나 뱉는 건 굉장히 더럽고 불쾌한 행동이었다.

상윤이 손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가와 이건을 노려봤다. 며칠 전 시내 학원 옆 골목에서 두들겨 팼는데도


맷집이 좋은 건지 아니면 깡이 좋은 건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할 말 있으면 하라는 게 참으로 귀엽기까지 했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이건이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확인했다. 낯선 번호에 누굴까 생각하는데 손안에서
휴대전화가 쑥 빠져나간다. 앞에 선 상윤이 가져간 전화를 귀에 댔다. 이건이 팔을 뻗자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리 주세요!”

상윤이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뒤로 피했다.


[강이건. 너 오늘 과외 하러 올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윤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이 새끼 과외도 받아? 덩치랑 얼굴만 보면
자신의 패거리와 어울리는 놈인데 과외란 말에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긴 저딴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것만
봐도 대충 어떤 놈인지 각이 나오네.

“안 가, 씨발아.”

그러자 상대방이 ‘뭐? 너 누구야?’ 하고 묻는다. 이건이 다시 전화를 달라고 하자 상윤이 몸을 피했다.

“알 거 없어 병신아, 끊는다.”

간신히 전화를 낚아채 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그제야 저장하지 않은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게 기억났다. 빌어먹을.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상윤을 쏘아봤다.

“왜 남의 전화를 막 받고 그러세요!”

“이 새끼 눈깔 뜨는 거 봐라? 넌 내가 좆같이 보이는구나?”

“전 좆같다고 한 적 없는데요. 저한테 자꾸 시비 거시니까 얘기하는.”

툭, 이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윤이 이건의 뺨을 건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진 그러더니 네 번째 칠 땐


고개가 돌아갈 만큼 세게 후려쳤다. 쫙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고, 이건이 그의 팔을 붙들어 제지했다.
그러자 상윤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생겨난다.

“지금 내 몸에 손댔어?”

“형이 먼저 대셨잖아요.”

시뻘게진 얼굴로 제 할 말을 다 하는 이건을 보며 상윤이 이를 까득 물었다.

“놓지?”
더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손목을 놓아주자 열 받은 상윤이 그대로 주먹을 날려 배에 꽂았다. 윽. 방심하고
있던 이건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상윤이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좀 놀아줬더니 재미있어? 내가 만만해 보여?”

“…아니요.”

“좋은 말로 할 때 잘해라. 응?”

이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상윤이 손을 떼어내고 그런 이건을 보며 비웃었다. 병신. 주위에 있던
사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이 맞은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챙겨 들었다.

“인사 안 하고 가?”

그 한마디에 돌아서선 상윤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쓰레기통을 들고 제 교실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가면서


바지와 점퍼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데 스스로 화도 나고 한심하면서도 싸운다고 뭐 달라지나 하는 생각을 하니 곧
모든 게 포기가 됐다.

* * *

도하가 끊어진 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안 가, 씨발아? 하지만 그건 강이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폰 달라고 옆에서 떠드는 게 강이건이겠지.

“이 새끼, 진짜 괴롭힘당하나.”

솔직히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그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 정도 나이 먹었으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남의 전화를 허락도 없이 바꿔 얼굴도 모르는 자신에게 욕을 한 상대에
대해선 조금 열이 뻗치긴 했다. 강이건네 학교 앞에 죽치고 있다가 찾아내서 살짝 때려줄까.

그러다 곧 그건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나이 먹고 사고 치면 서준영이 저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양아치도 아니고. 일단은 욕실에 들어가서 씻었다. 샤워 타월로 거품을 내서 몸을 닦는데 성기
부분이 살짝 쓰라리다.

어제 아홉 번이라고 말했을 때 준영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냥 대충 예감으로 말한
건데. 다음엔 진짜로 세어볼까. 근데 언제 하지. 오늘 하자고 슬쩍 들이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옷을 입고 향이 좋은 스킨을 바른 후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내려갈 타이밍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TV 로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훌쩍 지나서야
준비한 물건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 손으로 상자를 받쳐 들고 벨을 눌렀지만, 준영은 안에서 묵묵부답이었다. 어디 간 건가. 전화해볼까 하는데


뒤늦게 문이 열린다. 열리는 문틈으로 준영의 얼굴이 보였는데 어쩐지 푸석푸석해 보여 괜히 미안해졌다. 여전히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였다.

“잤어요?”

“아니. 책 봤어. 왜.”

“잠깐 들어갈게요. 이거 때문에.”

도하가 내미는 상자를 보고 준영이 흠칫했다. 성인 무릎 정도 오는 길이의 상잔데 대체 뭘까. 트렁크 안에서
봤던 물건들이 떠오르며 갑자기 뒷골이 당겼다. 그대로 문을 닫을까 망설이는데 도하가 안 들여보내 줄 거냐고
채근한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도하는 이때다 싶었는지 얼른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TV 하나 없는 집 안은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저번에 사다 둔 꽃은 말라서 버렸는지 화병은 텅 비었다. 낮에 꽃이라도 사
올걸, 뒤늦게 후회가 됐다. 들고 온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는데 준영의 시선은 여전히 그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저건 뭐야?”

아. 도하 소리 없이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나온 건 놀랍게도 설악산 나무주걱이었다. 그걸


보는 준영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져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무슨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요. 설마 나한테 또 구라 쳤어?”

“치긴 뭘 쳐!”

“아니죠? 아니어야 해요.”

아니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준영은 어젯밤 일이 생각나 치를 떨었다.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는데 도하가
그것을 들고 소파 쪽으로 가더니 그 위에 선반에 올려둔다. 미친 거 아니냐고, 그걸 왜 거기다 두느냐고
물었더니 턱을 꼿꼿하게 치켜들었다.
“형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날 밀어내고 싶을 때마다 보라고.”

“갑자기 더 밀어내고 싶어지는 건 알아?”

“이 주걱을 나한테 선물했을 때 그 마음을 항상 기억해요. 이도하를 사랑하는 마음.”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그건 그냥 판매하던 사람이 적어준 거였어.”

도하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자에서 다른 걸 꺼낸다. 이번엔 작은 트리다. 황금색 트리엔 앙증맞은 구슬 몇


개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아래 스위치를 켜자 불이 반짝반짝 들어온다. 그걸 보는 준영의 굳은 얼굴이 슬쩍
풀어졌다.

“뭐야, 트리였어?”

“아쉬워하네?”

“아니거든.”

“아쉬우면 말해요. 트리로 할 수 있는 플레이가 뭐 있나 생각해볼 테니까.”

“시끄러워.”

“산타 플레이 좋다. 형이 루돌프하고 내가 산타하고.”

“왜 내가 루돌프야?”

“그래야 내가 위에서 타고, 미친 듯이 흔들지.”

미친 소리 작작해. 준영이 가자미눈을 하자 도하가 씩 웃더니 그것을 책상 위 화병 옆에 올려둔다. 작은 트리


하나만으로도 집 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예쁘죠?”

준영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이맘때쯤이면 길에 널린 게 트리였고,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물들어 한 달 전부터 설레는 기분이었다. 최근엔 세상이 각박해진 건지 큰 쇼핑센터나 그런 곳이 아니면
트리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캐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기억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생모의 손을 잡고 본가로 향하던 그날.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신나
하던 기억. 그리고 커다란 청록색 대문 앞에서 제 손을 놓고 돌아서는 냉정한 얼굴.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눈빛만큼이나 서늘한 말투. 진한 향수 냄새. 돌아서는 그녀를 붙들지 못했던 건 그 눈빛 때문이었다.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상하게 눈빛은 아직도 또렷했다. 그때까지 준영은 세상의 모든 엄마는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자식을 남 쳐다보듯 하는 줄 알았다.

반짝이는 구슬을 서글픈 얼굴로 보는데 도하가 바싹 옆으로 붙더니 허리로 손을 가져다 댄다. 그 손을 치워내지
않고 놔뒀더니 이젠 아예 밑으로 내려간다. 이 자식은 참 아무 때나 손을 놀리는구나 싶어 기가 막혔다.

“엉덩이 좀 괜찮아요?”

“안 괜찮아. 아파.”

“참, 나 형한테 줄 거 있어요.”

무어냐고 묻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로 포장된 물건을 꺼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오늘 주고 싶어서 샀을 뿐이라고.

한번 뜯어보란 말에 준영이 포장을 풀었다. 손수건인가. 하지만 도하는 그런 로맨틱한 인간이 아니었다. 포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눈앞에서 펼치자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것은 앞부분만 간신히 가려지는 흰색
작스트랩이었다.

“이게….”

눈앞에 펼쳐진 속옷에 준영이 할 말을 잃었다. 어릴 적에 호기심에 게이 야동 같은 걸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배우들이 자주 입고 나오는 그 속옷이었다. 처음엔 운동선수용으로 개발된 거라고 하는데 이게 어쩌다 게이들의
핫 아이템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앞은 손바닥만 하게 성기만 가릴 정도의 크기였고 뒤는 허벅지와 엉덩이 라인에 밴드로만 되어 있어 엉덩이를 가릴


만한 천 쪼가리 하나 붙어 있질 않았다.

“형 엉덩이 아프니까 당분간 이거 입어요. 그때 내가 팬티 훔쳐간 거 미안해서 사과하는 뜻으로 샀어요.”

준영이 인상을 쓰고 도하를 빤히 쳐다보는데 팬티 훔쳐간 게 미안한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기대와 흥분이
뒤범벅된 노골적인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걸 집어 던졌다. 으, 소리를 내자 도하가 그것을 다시 집어 든다.
“사람 마음을 이런 식으로 패대기치나?”

“너나 입어.”

“나는 좆이 커서 불편해요.”

“이 새끼가. 나도 안 작아!”

“누가 작대? 왜 발끈하고 그래요. 사람 옹졸해 보이게.”

이게 정말. 준영이 이를 뿌득 갈았지만 딱히 더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녀석의 행동에 눈이 갔다. 자꾸


아랫입술을 핥는 거 보니 불안하다. 일단은 팬티를 빼앗아 한쪽에 던져두었다.

“알았어. 나중에 입을게.”

“지금.”

“지금 입어서 뭐 하라고.”

“나 좀 보여 달라고.”

“미쳤어?”

“잘 어울리나 보려고 해요.”

“입어 보고 말해줄게. 됐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것도 못 들어줘요? 고작 팬티 하나 입는걸.”

“넌 살아 있잖아.”

“콱 죽어야겠네, 그럼.”

끝도 없는 말씨름에 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또 두통 온다. 이마를 짚고 안방으로 가려는데 도하가 팬티를
들고 따라오면서 한 번만 입어 보라고 사람을 들들 볶아댄다. 트리 설치해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럼 내가 입혀줄까? 누워 봐요.”

“대체 입은 걸 봐서 뭐 하게.”

“그냥 보기만 할게요. 손 안 대.”

준영이 얼굴을 문질렀다. 거짓말한 죄는 이미 엉덩이로 다 받았는데, 왜 자꾸 이러니. 한편으론 그깟 팬티 하나


입어주는 게 뭔 대순가 싶기도 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한 번만 입어 주면 안 되느냐고 자꾸 조르길래 잠시
고민하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팬티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도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준영이 나오질 않았고, 참다못한 도하가 욕실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직 멀었어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준영이 상체만 삐죽 내밀었다. 다 벗고 있을 줄 알았더니 도하가 선물한 가운을 입고 있다.


왜 하필 분홍색 가운이냐고 하도 난리를 치길래 버릴 줄 알았더니 집에 걸어뒀나 보다.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얼른 나와 보라고 하는데 준영이 머뭇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일단 나와봐요.”

준영이 나오는데 가운으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보이지 않는다. 들춰보려고 했더니 그 손을 탁 쳐낸다.

“내가 들게.”

도하가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인터넷에서 이 팬티를 보자마자 서준영이 생각났다. 호텔에서 입혀보고 싶었는데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마당에 순순히 입어주진 않을 것 같아 일단은 빼둔 거였다. 기대감에 쳐다보는데 잠시 후
가운 아래가 벌어진다. 그 위로 손바닥만 한 흰 팬티가 보이자 도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엉덩이도.”

준영이 한숨과 함께 뒤를 돌더니 가운을 올린다. 흰색과 남색이 섞인 밴드가 허리와 허벅지 바깥 부위를 사선으로
가렸을 뿐 엉덩이는 그대로 노출됐다. 키스 자국과 앞니로 문 자국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도하가
손바닥으로 제 입을 문질렀다. 아, 미치겠다. 하지만 더 감상할 새도 없이 준영이 가운을 휙 내리고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아, 잠깐만, 형.”

“왜 또. 보여줬잖아.”
“박, 아니. 아주 살짝 비비기만 하면 안 돼요?”

뭘 비비느냐고 묻기도 전에 도하가 준영의 등 뒤로 바싹 붙더니 가운 아래로 손을 넣는다. 밴드 사이를 들추고


손가락을 넣는 행동에 준영이 인상을 쓰고 몸을 돌리려 했다.

“야, 잠깐만. 잠깐.”

“10 초만. 응?”

“그놈의 10 초 타령 지겹지도 않아? 비키라고.”

“아니, 5 초만.”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도하가 제 바지와 팬티를 앞쪽만 내리곤 성기를 꺼내선 엉덩이골에 대고 문지른다.
24 시간 발기한 상태가 아닐까 의심이 됐다. 단단한 그것을 골 사이에 대고 문지르는데 준영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제일 힘든 순간은 어쩌다 고기를 먹을 때라고 했다. 자신이 딱 그 심정이다. 어젯밤
먹은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그런 상태. 허리가 아픈 것도 병원에서 그 망신을 당한 것도
잠시 잊고 도하가 하는 대로 못 이기는 척 내버려 뒀다.

“침대로 가서 할래요?”

“…5 초라며.”

“아냐. 잘못 말했어. 5 천 초야.”

5 천 초는 또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몸이 떠밀려 침대로 갔다. 도하가 준영의 등을 눌러 침대에 상체만 걸친 채


엎드리게 했다. 덕분에 가운이 올라가고 엉덩이가 완전히 드러났다. 도하가 아직 붉은 자국이 남은 그 위에 제
성기를 들고 탁, 탁, 때리듯 했다.

“나무주걱보다, 이걸로 때리는 게 더 볼만하네.”

다시, 탁, 치더니 엉덩이에 대고 문질렀다가 천천히 이동해 골 사이에 넣고 손바닥으로 꾹 누른 다음 앞뒤로


허리를 움직인다. 삽입이 아닌데도 피부가 마찰 되며 꽤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귀두 앞쪽에선 벌써 말간 액이
흘러나와 번들거렸다.

구멍에다 쑤셔 넣고 싶다. 그래도 될까. 혹시나 싶어 몸을 살짝 뒤로 물리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구멍이


드러날 만큼 벌렸는데, 준영은 시트를 더 꽉 움켜쥘 뿐 하지 말라고 난리 치진 않는다.

그걸 보는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젤을 가져올까, 아니면 침을 묻힐까 고민하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띵동 하는 벨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침대에 머리를 박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

도하 역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황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는 준영의 얼굴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제야 도하도 지금 밖에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씨발. 아까 문자라도 남길걸. 오늘은 수업 오지 말라고.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준영이
옷을 챙겨 들고 욕실 쪽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너 가서 문 열어줘.”

“수업하게요? 나를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도하가 배에 달라붙기 직전인 제 성기를 손으로 쳤다. 녀석이 팅, 하고 앞뒤로 꺼덕꺼덕 인사하듯 움직였다.
준영이 못 본 척하더니 욕실로 홱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고 도하가 이를 뿌득 갈았다. 강이건. 이 망할 곰탱이
새끼.

* * *

이건이 흘깃 눈치를 살폈다. 오늘 과외 하러 와도 된다는 준영의 연락을 받고 오긴 했는데 어쩐 일인지 도하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저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는데 얼마나 무서운지 눈에서 불꽃이 튀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나 생각하다 낮에 소각장에서 일이
떠올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형… 아까는 죄송해요. 친구가 장난쳤어요.”

“네가 죄송해야 할 일이 그것뿐인 줄 알아?”


“네? 그럼… 뭐가 또…?”

정말 영문을 몰라서 물었을 뿐인데 도하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준영이 음료를 준비해선 이건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허리를 다쳤다고 하더니 걷는 모양이 아무래도 불편해 보였다.

“선생님 허리는 좀 괜찮으세요?”

“어. 살짝 뻐근해.”

“큰일 날 뻔하셨어요.”

“연우는.”

“바, 바쁜 일이 있나 봐요.”

사실은 오늘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통화도 못 했는데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준영이 음료를 건네면서
이건의 얼굴을 가만히 살핀다. 아까 현관 앞에서 처음 볼 때도 긴가민가했는데 가까이 보니 한쪽 얼굴이 아주
살짝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손자국이 난 것도 같은데.

“이건이 누구랑 싸웠어?”

“네?”

“얼굴, 맞은 거 아니야?”

이건이 제 뺨을 슥 가렸다. 뺨을 맞긴 했는데, 그게 부었나. 부모님이 오늘 모임에 가서 집에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자고 나면 좀 가라앉으려나.

“친구랑 장난치다… 부딪혔어요.”

“조심하지.”

“놀고 있다.”

소파에서 듣고 있던 도하가 둘 사이에 껴들었다. 아까 전화기 너머를 통해 들려오던 이건의 목소린 당황한
기색이었고,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고로 친구는 아니란 얘기였고, 아는 선배라고 해도 거짓말로 둘러대는 걸
보니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덩치도 커다란 게 맞고 다니고.”

“맞은 거 아니에요…. 진짜 장난치다 그랬어요.”

이건이 둘러대는 걸 보고 준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앉아 있는 도하를 쳐다봤다. 아직도 바지 앞이


팽팽하게 부풀었고, 더 있어 봤자 이건에게 시비만 걸 것 같아 차라리 집에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도하는 피곤하지 않아? 올라가 봐.”

“전혀요. 완전 쌩쌩한데.”

“그래도.”

알았어요, 그럼. 어쩐지 순순히 일어서더니 두 사람을 지나쳐 현관 쪽으로 간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오른쪽으로 홱 틀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길 왜 들어가느냐고 물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가서 끌어내기엔 이건이 있어 그것도 쉽지 않았다. 도하가 홧김에 어떤
말을 쏟아낼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고.

“근데, 선생님.”

“응?”

“도하 형은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왜?”

“배운데… 연기 활동은 전혀 안 하는 게 이상해서요….”

아. 준영은 그제야 녀석에게도 어엿한 직업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도 반백수처럼 하고 다니길래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저번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꽤 인지도도 올라가고 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일한단
얘기가 전혀 없네.

슬쩍 문 쪽을 봤는데 어쩐 일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이건이 후다닥 일어나 뛰쳐나가더니 현관 앞에서 문을 열어준다. 열리는 문틈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연우였다.

* * *
연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댔다. 수업을 끝내고 강이건은 편의점엘 간다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손에 검은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그걸 연우에게 건네준다. 연우가 받지 않고 쳐다만 봤더니 주머니에 있던
손을 억지로 빼내 들게 했다.

“가지고 가서 아침에 챙겨 먹고 와. 샌드위치랑 두유 샀어.”

연우가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건넸다.

“안 먹어.”

“왜.”

“내가 거지야?”

“말을 해도. 네가 거지라 내가 챙겨주는 걸로 보이냐.”

“그럼.”

“뭐가.”

“그럼 왜 자꾸 챙겨 주냐고 짜증 나게.”

이건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수업시간 내내 얌전히 잘 듣고 준영이 묻는 말에 다는 아니지만 반 정도는


대답도 하고 그러기에 좀 풀어졌나 했더니 뭐가 또 뒤틀렸는지 도무지 속을 모르겠다.

그러더니 또 팩하니 돌아서 가 버린다. 그냥 가게 둬 버릴까 하다가 괜히 걱정돼선 봉지를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저번처럼 논두렁 아래로 굴러갈까 봐 뒤에서 걸으며 불빛을 비추었다. 연우는 앞서가는 내내 제겐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이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냥 갔어. 집에 있으면 어차피 그 인간이 술 먹고 시비나 걸 테니까.”

“내일부터 빠지지 말고 와. 선생님이 그래도 된대.”

“근데 그 사람은 몇 살이야?”

“누구? 선생님?”

“어.”
“서른셋.”

“보기보다 나이가 많네.”

“어려 보이지? 나도 처음엔 이십 대 중후반 정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 피부도 되게 좋아 가까이서 봤는데 잡티도


없더라. 아는 것도 많고, 나한테 정말 잘해 주셔. 너도 더 지내면 준영 샘 정말 좋아하게, 될걸.”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장점을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연우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왜 그렇게 삐뚤게 생각해?”

“되게 좋게 봤나 보다?”

말투가 묘하게 빈정댄다. 이건이 연우의 앞쪽을 불을 비추느라 정신이 없어 그것에 대해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니까.”

뚝, 연우가 걸음을 멈췄고, 땅만 보고 걷던 이건이 하마터면 등에 몸을 부딪칠 뻔했다. 왜 그러나 싶어 불빛을


얼굴에 비쳤다가 흠칫 놀랐다. 얼굴이 뚱해서는 저를 째려보는데 조금 무서웠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쳐다봐.”

“너 여기서 가. 나 혼자 갈 테니까.”

“어둡잖아.”

“병신아. 내 폰으로 비추고 가면 돼. 네가 따라오는 게 더 걸리적거리고 불편해.”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이건이 봉투를 내밀다가 멈칫한다. 그르르, 연우의 뒤쪽으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소리뿐 아니라 반짝이는 빛 두 개가 둘을 응시했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연우가 그걸 발견하곤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건이 그쪽으로 불빛을 움직이니 거기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둘을 보며 잔뜩 꼬리를 세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르, 목 안쪽으로 울리는 소리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누구네 집 개일까. 동네에선 못 보던 갠데.
이건이 연우의 손을 붙들고 제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내 뒤로 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어릴 적 개에 옆구릴 물린 적이 있는데 살이 뜯긴 건 아니지만, 그


후로 개 공포증 비슷한 게 생겼다. 강아지가 저한테 달려들어도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런데 눈앞에 저리 큰
개가 있으니 겁에 질려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게 당연했다.

“송연우.”

다시 부르자 그제야 손이 움찔한다. 이건이 앞으로 나서며 연우를 제 뒤쪽으로 옮겨놨다. 지랄 맞은 성격에
이건의 손을 꼭 붙든 것만 봐도 얼마나 겁에 질린 건지 알 수 있었다. 손 대신 옷을 붙들게 했더니 그대로 잡고선
등 뒤에선 가늘게 숨을 토해낸다.

“야…. 가라고 해.”

그 말에 이건이 애써 웃었다. 가라고 해서 말을 들으면 개가 아니고 사람일 텐데. 공포심 때문에 상황판단이
흐려진 건지 모르겠지만, 박태경 앞에서 깡통을 물어뜯던 그 패기는 어디 간 걸까, 조금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세히 보니 이빨을 드러내고 둘을 쳐다보는 개는 백설이와 같은 진돗개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말라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위협하는 소리를 내고 있긴 했지만 막상 녀석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불빛을 비추자 뒤로
물러서며 잔뜩 경계한다.

녀석이 저를 저녁밥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지라도 무척 배가 고픈 상태임은 분명했다. 이건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소시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제 옷을 붙들고 있는 연우가 움찔거렸다.

소시지를 꺼내 들고 한 발 앞으로 가려고 하니 연우가 꼭 쥔 손을 놓지 않고 버틴다. 이건이 팔을 뒤로 뻗어 그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연우가 더 꽉 쥐며 뒤로 당긴다.

“가지 마. 물려.”

“괜찮아. 목줄을 보니까 집에서 기르던 갠가 봐.”

연우는 그래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동네에 들개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식은땀을 흘려야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들개 중 대부분은 집에서 기르던 녀석들이었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던. 그렇지만 지금은 버려진. 제 처지랑 비슷해 동병상련을 느끼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까스로 손을 떼어낸 이건이 천천히 몸을 숙이고 앞으로 다가가며
개와 눈을 맞췄다.

그르릉, 개는 여전히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일정 거리 떨어진 곳에서 이건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소시지를
내밀자 개가 제자리에서 킁킁, 냄새를 맡는다. 이건이 그것을 든 채로 가만히 있자 잠시 후 한 발 한 발 앞으로
옮겨오더니 허겁지겁 소시지를 베어 문다.

목줄에 이름표를 뗀 흔적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유기견으로 보였다. 순식간에 소시지를 먹어치운 개가 다시


이건을 본다. 아까보다 기세가 좀 누그러진 상태다. 이건이 두 번째 소시지를 까는 동안에도 녀석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것을 까서 앞으로 내밀자 녀석이 다시 급하게 씹어 삼켰다.

연우는 여전히 뒤에서 긴장 상태로 지켜봤다.

“자꾸 주지 마. 안 가잖아.”

“배가 많이 고픈가 본데.”

이건이 휴대폰 불빛으로 다리 쪽을 살피는데 작은 상처가 보인다. 다친 건가. 큰 상처는 아니지만 일부러 누가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미간을 찡그리고 더 살피려는데 개가 낑, 소리를
낸다.

“미안해서 어쩌지. 이게 마지막이야.”

낑.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소리를 내더니 주둥이를 이건의 다리에 대고 문지른다. 나오기 전


백설이를 한번 안아주고 왔는데 냄새가 밴 걸까. 그래서 경계심을 푼 건가. 가만히 뒀더니 이젠 고개를 들어
얼굴에다 비빈다.

“아냐, 진짜 없어. 미안.”

이건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연우는 긴장은 조금 풀어졌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여전히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건이 개의 목 아래쪽을 훑어주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웅성대는
목소리도. 여기로 도망친 거 같은데. 어디지? 잘 찾아봐. 씨발 어디로 간 거야.

목소리가 들리자 개가 화들짝 놀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에 서 있던 연우가 제게 달려드는 줄 알고 억 소리를


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곧 그 불빛이 이건과 연우를 향해 비춰줬다. 연우가 인상을 쓰며 얼굴을 가렸고,
이건도 마찬가지였다.

이건이 그쪽을 향해 휴대폰을 비추기도 전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경과 몇몇 녀석들이었다.


“뭐야, 강이건이랑 송연우잖아.”

“니들 여기서 뭐 하냐.”

씨발. 연우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서자 태경이 랜턴을 비추며 실소했다.

“송연우 왜 거기 누워 있었어? 강이건이랑 야심한 밤에 뭔 짓을 했냐.”

“꺼져, 병신들아.”

이건이 봉투를 챙겨 일어섰다. 연우를 한 번 봤다가 불빛으로 그 뒤쪽을 비췄다. 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다리 쪽에 있던 담배 자국이 누구의 짓인지 알 거 같아 인상이 써졌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머지 뒤에 녀석들도 얼굴이 잔뜩 풀어진 게 어디서 어른들 몰래 퍼먹은 모양이었다.

“야, 너네 여기로 개새끼 한 마리 간 거 못 봤어?”

“못 봤어.”

“씨발, 어디로 간 거야. 존나 빠르네.”

그들 중 하나가 강이건에게 오더니 랜턴을 얼굴에 똑바로 비추며 낄낄댄다. 눈이 풀린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마셨나
보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이건의 가슴팍을 쿡 쿡 찌른다. 이건이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그 강도가
거세졌다.

“야, 강이건 여기서 뭐 했냐고 새끼야. 송연우가 네 것도 빨아줬어?”

그걸 보는 연우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만해, 씹새끼야.”

그러자 랜턴 불빛이 이젠 연우를 향한다. 갑자기 밝은 빛이 시야로 쏟아지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연우가 팔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발길질이 날아왔다. 이건이 어찌할 새도 없이 연우의 몸이 휘청하더니
논두렁 아래로 떨어진다.
이건이 그런 연우를 잡아챘고 머리를 감싸 안고 논두렁으로 굴렀다.

“야, 씨발 밟아!”

“죽여!”

여러 개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머리며 등짝으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씨발. 연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발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무언가 제 몸을
단단하게 감싼다.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무식하게 힘만 센 강이건은 들은 척도 꿈쩍도 하질 않았다.

CH 15.

준영이 엎드려 눈을 끔뻑였다. 침대에 찜질팩을 올려놓고 그 위에 허리를 대고 누웠는데 도하가 가지도 않고 제
침대에 맘대로 올라와선 가뜩이나 비좁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옆으로 누워 말도 없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길래 결국엔 그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고 모른 척 천장만 쳐다봤다.

“가, 좀.”

그 말에 도하가 산뜻하게 웃었다.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죠.”

“힘들어. 허리 아파 죽겠어.”

“알았어요, 그럼. 더 안 괴롭힐게. 자요.”

가슴을 토닥토닥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준영을 향해 끈질기게 들러붙는다.

“옆에서 그렇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자.”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그럼 손이나 치우든가.”

“재워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근데 왜 자꾸 아래로 내려가지?”

도하가 배 아래까지 내려간 손을 다시 올리더니 가슴을 토닥여준다. 준영이 그 손을 치워내니 이번엔 위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차라리 몸을 만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뒀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겨준다.

“우리 준영 씨는 이마도 예쁘네. 머리카락도 되게 까맣고.”

“원래 까맸어.”

“알아요, 나도. 속도 까맣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몰라도 돼.”

“어쩌지? 되게 알고 싶고, 궁금한데.”

머리를 만지는 손이 잠시 멈췄다.

“예전에 했던 갈색도 잘 어울렸는데.”

준영이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갈색 머릴 언제 했더라, 기억을 더듬는데 도하가 먼저 이야기한다.

“대학교 3 학년 가을쯤에 했잖아요.”

“그랬나.”

“그때 사귀던 사람이 아마 회사원이었지. 검은 차 끌고 다니던. 키는 형이랑 비슷하고.”

준영이 기억을 더듬었다. 학생 때도 회사원들을 많이 사귀어서 그런지 누굴 말하는 건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워낙 연애 기간이 짧아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았다. 동갑도
한둘 있었지만, 연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지 기억이 안 나.”

천장을 보며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는데 뺨으로 도하의 손이 닿는다.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더니 눈을
맞추고 나서 몸을 더 옆으로 바싹 붙였다.
“이젠 머릿속으로 나만 생각해요. 다 잊어버리고.”

되게 느끼해. 그런 말 하지 마. 준영이 인상을 쓰자 도하가 미간 부분을 손으로 꾹 누른다.

“자꾸 인상 써서 여기 주름 생겼어요.”

“거짓말.”

“진짠데. 나중에 거울 봐 봐요.”

준영이 귀찮은 얼굴로 제 뺨에 붙어 있는 도하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도하가 더 꾹 누르면서 붕어처럼 입술을


만들었다. 붕어다, 붕어. 장난을 치자 준영이 하지 말라고 손을 떼어내려고 했는데 붙들고서 더 누른다. 하지
말라며 팔을 휘두르다 그만 도하의 명치를 퍽, 하고 때렸다.

악. 도하가 배를 붙들고선 앓는 소릴 내자 준영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파 죽겠네.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막 패요?”

“먼저 말 안 들은 건 너야. 초딩이냐?”

“형 볼 누르니까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요.”

“열 살이나 어린 너한테 귀엽단 소리 들으니 참으로 설레고 좋네.”

영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그 말에 도하가 웃더니 준영이 베고 있던 베개를 빼낸다.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 틈으로 제 팔을 집어넣었다.

“뭐 해?”

“팔베개해주게요.”

“하지 마.”

“왜요? 열 살이나 어린놈이 팔 베게 해주니까 설레고 좋아요?”

“치우고 베개 줘.”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준영이 제 베개를 가지러 일어나려다 관두곤 마지못해 머리에 힘을 빼고 누웠다. 하필 그곳이 팔뚝도 아니고
손목이라 도하가 투덜댔다.

“좀 더 나한테로 와요. 거기 베면 불편하지.”

“괜찮아.”

“이대로 끌어안으면 화낼 거죠?”

“응.”

“그럼 그냥 이러고 있을게요.”

“응.”

“근데 생각은 좀 해봤어요?”

“뭘.”

“맨 처음에 그랬잖아요. 섹스하고 나서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준영이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라…. 속궁합이야 잘 맞았다. 저도 엊그제 한 행동이 있으니 그것까진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여전히 제게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자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보니 완전 까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희망은
있으니까 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충분히 생각해봐요. 난 기다릴 테니. 23 년 기다렸는데 그걸 못 기다릴까.”

준영이 고개를 돌려 그런 도하를 봤다. 저를 빤히 보는 그 갈색 눈동자는 진심이었고, 애정이 가득했다.


껄렁거리는 말투완 다르게 너무나 올곧은 시선이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짜릿했다.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자 도하가 다시 뺨으로 손을 가져가 감싼다.

“팬티 보여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뽀뽀 한 번만 해줘요. 그럼 집에 갈게요.”

준영이 대답 대신 맞추던 시선을 반쯤 내리깔았다. 싫다는 거절이 없었기에 도하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을
벌리며 꾹 다문 입술을 감쳐물고 부드럽게 빨아주니 제 팔을 베고 누운 목이 긴장으로 굳는 게 느껴진다.
혀로 입술 사이를 문지르는데 다문 입술이 좀처럼 열릴 생각을 않는다. 저번처럼 손가락이라도 넣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눈동자를 위로 올려 준영과 시선을 맞췄다.

“입 좀… 벌려 봐요.”

“뽀뽀만이라며….”

“살짝만. 응?”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조금 벌어지자 도하가 기다렸다는 듯 거기에 제 입술을 겹치고 혀를 밀어 넣는다. 준영은
똑같이 혀를 내밀진 않았지만. 도하의 입술이 제 입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도 않았다.

춥춥거리던 도하의 입술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준영의 턱으로 그리고 목덜미 쪽으로 움직이며 거기에 코를 깊숙하게
파묻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준영이 도하의 어깨를 붙들고 밀어냈다.

“…그만해.”

“냄새 좋다….”

잠꼬대하듯 웅얼대는 목소리가 제 턱과 목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울리며 간지럽힌다. 더 밀어내지 않고 놔뒀더니


조용하다. 이상하길래 봤더니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없다.

“…자?”

“…아뇨.”

“그럼 뭐 하는데.”

“…좋아서요.”

웃음기가 묻었지만 어쩐지 벅찬 목소리였다.

“…좋아서 눈물 날 거 같아요.”

도하가 얼굴을 더 깊게 파묻으며 문지른다. 간질거리는 것보다 애끓는 마음이 느껴져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다른 행동을 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뒀더니 10 여 분 정도 있다간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들고 평소처럼 웃으면 농담을 했다.

하지만 준영은 오늘따라 유독 도하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것이 미안함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걸 애써


부정하진 않았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아침 일찍 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던 도하가 빌라 입구 앞에서 멈칫했다.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개집 앞에 강이건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백설이 말고도 비슷한 흰색 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니 인기척을 느낀 이건이 먼저 돌아봤다. 얼굴엔 흰색 마스크를 쓰고서.

“개가 왜 두 마리야? 새끼 낳았어?”

사료를 먹던 개가 슬쩍 눈을 들어 도하를 본다. 눈빛엔 경계심이 가득했고 겁을 먹고 있었다.

“에이, 형. 새낀데 이렇게 클 리가 있어요.”

“그럼.”

“근처에서 떠돌던 갠데, 어제 소시지 줬더니 아침에 여기 있더라고요. 목줄 보니까 주인 있는 거 같아요.”

무심한 얼굴로 그러냐며 제 갈 길을 가려던 도하가 다시 뒷걸음질 쳐 이건에게 와서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에
이건이 슬그머니 마스크를 위로 더 올린다.

“강이건 마스크 벗어 봐.”

“왜, 왜요?”

“맞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니긴. 이건이 막을 새도 없이 도하가 순식간에 마스크를 벗겨냈다. 얼굴에 멍은 없었는데 입가가 살짝 터졌다.
그걸 보는 도하가 쯧, 혀를 찼다. 설마 했는데 진짜 얻어터지고 다니는구나 싶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근데
언제 맞은 거지. 어젠 이 정돈 아니었는데.
“너 도둑놈한테 맞았어?”

“아니에요. 주세요, 얼른.”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의 손에 들린 마스크를 가져와 다시 착용했다. 엄마가 볼까 봐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하고 집에서도 쓰고 있는데,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박태경 패거리들이 발길질하는 걸 막다가 몇 대
맞았는데 나중엔 송연우가 제품에서 빠져나와 놈들을 붙들고 패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그걸 말리다가 또
얻어맞고, 그러다가 동네 어른 하나가 나타나서 야단을 치는 바람에 싸움은 흐지부지 종료됐다.

“잘하는 짓이다. 쥐어 터지고 다니고.”

“어쩔 수 없었어요. 상대 쪽이 워낙 많았어요.”

“때리긴 했고?”

“아뇨, 괜히 때리다 잘못되면 어떡해요. TV 에서 보면 실수로 사람 밀었는데 죽는 경우도 있고 그렇잖아요.”

“얻어맞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들죠, 그럼.”

도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이건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건은
또래보다 항상 키도 덩치도 컸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순한 성격 탓에 아이들이 한 번씩 시비를 걸어왔고 참다
참다 딱 한 번 맞대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같은 반 남학생 하나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상대방 부모에게 죄송하다고 빌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 뒤론 장난으로라도 아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늘 조심한다고 했더니 이젠 덩칫값 못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다 골병든다.”

도하가 혀를 차더니 갑자기 2 층을 한 번 올려다보고 나서 이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 이건이 며칠 뒤에 방학이지? 그때 뭐 해?”

우리 이건이가 나오면 꼭 뒤끝이 좋지 않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건 알았다. 이건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슬쩍 옆으로 떨어졌다.
“공, 공부해야죠.”

“과외도 계속하고?”

“…그렇죠.”

그러면서 눈치를 살폈다. 도하가 왜 갑자기 과외 얘기를 꺼내는 걸까. 혹시 준영이 제 과외 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어제 엄청 째려보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왜요…? 혹시 선생님이 저 가르치시는 거 힘들어하세요?”

“그건 아닌데….”

도하가 말을 끝맺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건이 초조한 얼굴로 지켜봤다. 아니면 뭐란 말이지.

“방학 동안 너 어디 놀러 갈래? 내가 외국 보내줄까?”

“네?”

“오케이, 방금 네라고 했어.”

“아뇨! 그게 아니잖아요. 제가 네? 했지, 언제 네, 했어요.”

“그게 그거지, 인마.”

갑자기 시작된 트집에 이건이 울상을 했다.

“또, 왜 이러세요….”

그러자 도하가 이건의 어깨를 붙들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얘기했다.

“내가 너 내 친동생 같아서 그래. 외국도 보내주고 가이드도 붙여줄게. 가고 싶은 데 어디야? 원하면 데 말만 해.
혼자 가기 그러면 도둑놈이랑 같이 쌍으로 보내줄까? 한 달만 다녀와.”

이건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저번에 TV 에서 보니 여행 보내주고 그 가방에 마약 같은 거 숨겨서 운반책으로


쓰던데. 아니면 장기 밀매 같은 것도 하고. 이건이 숨을 들이마시며 저도 모르게 양팔로 X 자를 만들어 제 상체를
가렸다. 이러지 마세요.

그걸 보는 도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야? 그 몸짓은? 뒤질래?”

“전… 괜찮아요. 공부도 해야 하고, 방학 때 준영 샘이 집중적으로 과외해 주기로 했어요.”

뭐? 집중적으로? 폭발하기 직전인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건이 사료 봉투를 챙겨 자리에서 얼른


일어섰다. 더 있다간 도하에게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는 핑계로 후다닥 집 쪽으로 도망쳤다.
등 뒤로 도하의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볼 엄두를 내진 못했다.

* * *

막 잠에서 깬 준영이 얼굴을 부비고 나서 욕실로 향했다. 잠이 깨질 않아 세수하려고 거울을 봤다가 잔뜩 구겨진
제 미간을 보고선 멈칫했다. 자면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건지 도하 말대로 미간에 보일락 말락 한 주름이
생겼다. 손끝으로 꾹 눌러 문질렀지만,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거기다 앞머리까지 너무 길어서 뒤로
넘겼는데도 자꾸만 눈을 찌른다.

“머리나 자르러 갈까.”

대충 세수를 하고 나서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커튼을 열기 위해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데 꽃병이 눈에 띈다.


꽃이 시들어 빼 버렸는데, 애초에 없었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이 거기 놓여 있으니 조금 허전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꽃을 사다 넣을 만큼 세심하진 않았다.

꽃병을 옆으로 좀 치워놓고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는데 언덕 아래쪽에서 도하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복 바지에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친 걸 보니 조깅하다 오는 길인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하는 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마당 쪽으로 와선 제자리에서 목을 좌우로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손을 깍지 낀 채로 하늘로 뻗어 쭈욱


늘려준다. 유전적인 것도 있겠지만 어릴 때부터 팔다리가 길쭉했고 수영을 해서 그런지 어깨도 상당히 넓었다.

저도 모르게 몸매 감상을 하는데 갑자기 도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본다. 흠칫 놀라고 당황해서 도망치듯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뭐야, 꼭 훔쳐본 것 같잖아.

몸을 돌려 곧 주방 쪽으로 갔다. 괜히 혼자 민망해져서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올라오다 잠깐 들리려나. 맨날


얻어먹는데 밥이라도 해서 먹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문밖은 조용하다.

괜히 기다린 것 같아 머쓱한 마음에 컵을 정리하고 안방으로 향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현관 쪽으로 가서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이건이 마스크를 낀 채 서 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이건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요. 오늘 동지라 엄마가 팥죽 쓰셨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

“난 안 갖다 줘도 되는데….”

“엄마가 꼭 갖다 드리래요. 물김치 담근 것도 하나 넣었으니 드셔 보세요.”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잘 먹을게. 근데 너, 감기 걸렸어?”

“…그게 아니라….”

말끝을 얼버무리는 이건의 등 뒤로 도하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려 준영이 쳐다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준영의 시선을 따라 이건도 같이 고개를 돌렸다가 도하를
발견했다. 아까는 저를 막 죽일 듯 노려보더니 지금은 또 태평하게 휴대폰에 빠져있다.

“도하 형. 문 앞에 팥죽 걸어뒀어요. 엄마가 만들었는데 드셔 보세요.”

도하가 슬쩍 한 번 보더니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손이 움직이는 걸 봐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더니 곧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이건이 대수롭지 않게 준영에게 통은 이따 수업할 때 가지러 온다고 말했고,
준영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이 등교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위층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준영이 위층을 바라봤다. 뭐야.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괜히 뺨을 슥 한 번 문지르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 * *

도하의 승용차가 산길을 지나 시내 쪽으로 달렸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아직 얼굴이 다 나은 게 아니라


한의원 가서 침을 맞아야 했고, 약국 가서 콘돔과 젤도 더 사고 나간 김에 장도 보고 할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서준영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허리도 아픈 데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란 걸 알았다.

여태 밀어붙이기만 했으니 적당히 놔줄 때라는 걸.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민석 세 글자를 보고 얼굴이 슬쩍


구겨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김 선생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 몰라서 물어? 너 내 차 어떻게 할 거야? 진짜 고소한다!]

“어머, 저번에 한다더니 아직도 안 했어요?”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래?]

“하라니까. 뭐가 문제야.”

하아,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하다. 뭐지, 열 받아서 끊었나 싶어 확인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변태처럼 숨소리만 내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끊어요.”

[야.]

“왜요.”

[너 서준영이랑 잤어?]

그럼 그렇지. 본론은 그거였구만.

“알면 김 선생님 마음만 아플 텐데.”

[못 잤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은 편할 테고.”

[장난해?]

“대답 안 합니다. 괜히 서준영한테 물어본답시고 연락하지 마요. 이제 네 남자 아니고 내 남자예요. 아셨죠?”

그러고 나서 더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렇게 시내로 들어와 한의원 쪽으로 가던 중 잠시 차를


멈춰 세웠다. 이 근처에 약국이랑 꽃가게가 같이 붙어 있었는데. 저번에 자신이 사다 놓은 프리지어가 다
시들었기 때문에 다른 꽃을 사다 꽂을 요량이었다. 준영이 말은 안 했지만,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여태 전화 한 통 없는 거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거 같았지만. 그래도 아침에 이건이랑 얘기하다 괜히 제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예상보단 더 희망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일단은 차를 길옆에 세워두고 꽃가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에 봤던 가게 주인이 인사를 건네온다.

“어서 오세요. 저번에 왔던 손님이시네?”

“사장님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어디 쉽게 잊힐 얼굴인가. 오늘은 뭐 사러 오셨을까?”

“꽃이요. 프리지어도 괜찮고요. 아니면 보고 있으면 막 기분 좋아지고, 그런 걸로 추천해주세요.”

“애인한테 주실 건가요?”

“네.”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다. 조만간 애인이 될 테니 미리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원래 말하다 보면 이뤄진다고 했으니까. 뭐, 너무 늦게 이뤄진 감이 좀 있긴 하지만….

“망고 튤립도 괜찮아요. 이게 꽃말이 사랑 고백, 영원한 애정, 이런 거라 연인분들이 아주 좋아하세요.”

그 말에 도하의 눈빛이 반짝였다. 딱 저를 위한 꽃 아닌가. 얼른 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저번처럼 그냥 주느냐고


묻는다.

“네. 포장하지 마시고, 그냥 오다 주웠다는 느낌으로 말아서 주세요. 양은 저번에 샀던 꽃병에 꽂힐 정도로요.”

주인이 웃더니 유리문을 열어 그 안에서 꽃을 한참을 신경 써 고른다. 그것을 모아 빈티지 느낌이 나는 갈색


종이에 둘둘 말았는데 꽃이 예뻐서 그런지 대충 말았는데도 그럴싸하게 보였다. 건네받아 향을 맡으니 은은한
듯하면서도 꽤 진했다.

“감사합니다. 종종 올게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다음엔 옆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거침없이 저번에 콘돔이 있던 자리로 가서는 콘돔과
젤을 챙겨 들고 계산대로 갔다. 역시나 지난번 마주했던 중년 남성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도하를 한 번에
알아봤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거… 계산해 드려요?”

“네. 그리고 약사님 이것보다 더 큰 건 없죠?”

“…이게 제일 큰 건데….”

아, 도하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럼 이거라도 주세요.

“그리고요. 저번에 사이즈 있는 거라고 왜 미리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약사가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자 도하가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개망신당했잖아요…. 물론 실력으로 만회하긴 했지만.”

약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개망신은 뭐고 실력은 또 뭐야.

“그래요? 작아도 별 차이 없어서 어지간한 사람은 다 맞을 텐데….”

“제가 어지간하질 않아서요.”

이번엔 흠칫했다. 그때 꽤 많이 사 가길래 어디 업소에서 온 포준가 했는데, 그걸 다 자기가 썼단 말인가.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그런 의문을 품고 쳐다보는데 도하가 상냥하게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약사가 비타민 음료를 하나 챙겨 건넸다. 그것을 받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엔 콘돔 봉지를 한 손엔 꽃을 들고 있으니 세상이 다 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생글생글 웃으며 주차해둔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못 보던 무리가 오토바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장면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낯익은 모습에 잠시 기억을 더듬다 저번에 봤던 그 녀석들임을 알았다. 사람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안장을 하늘 높이 올린 파란색 오토바이를 보고 기억해냈다.

가까이 다가가니 녀석들이 담배를 물고 낄낄 웃다가 도하를 보고선 눈이 슬쩍 커진다.

“어? 저번에 벤틀리, 그 형 아니야?”

“쩐다. 이것도 형 차예요?”

“야 씨발. 둘 다 렌트 아냐? 딱 보니 그러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낄낄대던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탄 채로 차 주변을 에워싼다.

“인증샷 찍어도 돼요?”

“안 되니까 그만 떠들고 꺼져.”

“와. 존나 가오 잡네. 그땐 무서워서 튀더니.”

“그러지 말고 인증샷 하나만 찍게 해줘요.”

낄낄대는 녀석들 사이로 한 녀석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걸어온다. 도하가 그를 쳐다봤다. 어디서 봤지. 그제야
녀석의 교복 재킷을 보고 이건과 같은 학교라는 걸 알았다. 안에는 시커먼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덩치도 제법
있었다. 녀석이 거의 삭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누가 타본대? 운전석에 한번 앉아서 사진이나 찍자는 거지.”

그러면서 도하의 외투 깃을 툭툭 털어낸다. 동시에 뒤에 있던 녀석들이 ‘오오, 곽상윤.’ 하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그 행동을 보고서 도하가 같잖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렇게 타고 싶으면 트렁크에 타. 내가 동네 한 바퀴는 돌아줄 수 있으니까.”

“씨발, 차 한 대 가지고 존나 빡빡하게 구네.”

도하가 어금니를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았다. 참자. 참아. 애써 무시하고 몸을 돌려 운전석 문을 잡아당겼는데


순간 손에 있던 꽃다발이 홱 하고 빠져나갔다. 고개를 돌리니 상윤이 꽃다발을 들고선 비죽비죽 웃고 있었다.

“꽃 좀 봐. 존나 로맨틱하시다. 누구 줄 거예요? 애인?”

“내놔.”

“와, 씨발 무섭네. 쫄아서 오줌 쌀 뻔했잖아.”

패거리들이 낄낄대고 웃었고 상윤이 가랑이 사이를 붙들고 터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손으로 톡, 뜯어낸다.
그걸 보는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고, 곧바로 상윤이 꽃잎을 손끝에 쥐고, 후, 하고 날려 보내는
시늉을 했다.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걸 보는 도하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 순간 이번엔 꽃다발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밤새 비가 온 건지 바닥은 젖어 엉망이었고, 조금 전 꽃집


사장이 신경 써서 고른 꽃은 쓰레기처럼 뒹굴었다. 그것도 모자라 상윤이 꽃을 발끝으로 툭 친다.

“아, 실수. 내가 손에 힘이 없어서.”

“…….”

“그러게 잘 좀 받지 그랬어요.”

“…….”

“주워요, 얼른.”

“야, 상윤아. 형님 운다, 그만해라.”

“그러게, 씨발. 사진 좀 찍게 해주지. 존나 비싸게 굴고 지랄이야.”

끙, 도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문질렀다. 아, 씨발. 화가 머리꼭지까지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제 손에 있던 꽃은 바닥에 엉망으로 뒹굴었고, 머릿속 회로는 고장 나서 파지직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변을 둘러봤더니 앞쪽으로 교통 카메라와 곳곳에 주차된 차들이 보였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들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원하면 타게 해줄게.”

“오, 정말?”

도하가 눈짓으로 뒤쪽에 있는 상윤의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그 고물 덩어리로 나 쫓아와 봐. 네가 앞지르면 이 차 너한테 그냥 줄 테니까.”

하. 상윤이 가소롭다는 듯 웃자 도하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타서는 시동을 걸었다. 지잉 창문이 내려갔고, 서늘한
얼굴의 그가 상윤을 바라봤다.

“왜, 쫄았어?”

상윤이 제 아랫입술을 핥더니 비열하게 웃었다. 스포츠카도 아니고 SUV 차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개조한 제
오토바이를 따라잡긴 힘들었다.

“좋아요, 먼저 출발하세요. 대신 우리 형님, 이따가 울기 없기?”

도하가 대꾸도 없이 무심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룸미러로 뒤에 녀석들이 따라오기 시작하는 게 보이자 손을
뻗어 위쪽에 있던 블랙박스 연결 코드를 거칠게 뽑아 버렸다.

* * *

점점 속력을 높이던 도하가 룸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오토바이 여러 대가 따라오는 게 보였다. 한두대가 앞지르려
하길래 차선을 바꿔가며 길을 막았다. 녀석들도 독이 바짝 올랐는지 덩달아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고속도로 입구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차를 급하게 꺾었다. 공사 중 표시가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토바이들은 계속해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한참을 더 달리다 보니 앞쪽이 막혀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도로를 새로 만드는 중이었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공사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차를 멈추고 서 있으니 곧 뒤따라온 오토바이 한 대가 앞쪽으로 질러와 끼익, 멈춰 선다. 그 오토바이에서 사내


하나가 내려 운전석으로 걸어오더니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웃었다. 뒤쪽에선 저들끼리 웃고 떠들며 담배를 꺼내
태우고 있었다.

도하가 시동을 켠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뒤쪽으로 걸어가니 오토바이가 쭉 막아선 상태였다. 그 가운데 곽상윤이
있었다. 몇 분 전 제 꽃을 망가트린 놈이었다. 서준영 집 거실에 꽂아둘 거였는데. 꽃말도 딱 마음에 들었고.

“씨발, 나 같으면 고속도로로 튀었겠다. 길 막힌 것도 모르고 병신처럼 여기로 오면 어떡해요.”

도하가 대꾸도 없이 차 뒤로 가서 트렁크 문을 열었다. 거길 뒤적이는데 패거리들이 무얼 하나 궁금해하는 눈치다.

“왜? 무기 찾으시게? 뭐 총이라도 숨겨 뒀어요?”

“우리 용돈 주려고 그러나? 형 돈 많아 보이는데 카드 좀 빌려주면 안 돼요?”

“야, 카드보단 현금이지. 나는 현금 줘요.”

낄낄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도하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검은색 가죽케이스를 지익 여니 거기 티타늄으로 된


테니스 채가 들어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끔 형이랑 테니스를 치러 다녔는데, 여기 오기 얼마 전까지도 사용하던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었고, 유명한 선수가 들었다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걸 들고 돌아서는데
상윤이 담배를 입에 물고 킥킥거리고 웃는다.

“와 씨발 존나 웃겨. 저거 뭐야? 배드민턴 채 아니야? 왜 그걸로 때, 아! 씨발!”

도하가 그대로 채를 상윤에게 던졌고 날아간 채를 피하려던 상윤이 중심을 못 잡고 오토바이와 함께 옆으로
기울었다. 다른 사내들이 말릴 새도 없이 도하가 뛰어가더니 넘어지는 오토바이를 밟고 날아서 상윤의 얼굴을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빡 소리와 함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놀란 패거리들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을 가격당한 상윤이


오토바이에서 몸을 빼내며 비틀거리고 일어서는데 코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진다.

급습을 당한 그가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조금 전 충격으로 눈앞이 어질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도하가 테니스 채를 순식간에 집어 들더니 상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걸 잡아 보려 했지만 이미 얼굴을 한 번 맞은 상태라 정신을 차리는 게 힘들었다. 얼굴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고, 눈앞에선 채가 날아다녔다. 몇 번이나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도하가 그 손을 붙들고는 그대로
뒤로 확 꺾는다.

우득 소리가 났고 상윤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튕기고 버둥거렸다.

“아아아악. 씨발! 씨바아알!”

지켜보던 다른 패거리들은 그 기세에 눌려 서로 눈치만 살폈다. 씨발, 어떡해. 네가 나서 봐. 야, 좀 말려 봐.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먼저 나서지 못했다. 무리의 리더 격인 상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그들은 얼이 빠진 상태였다.

무식하게 패던 도하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조금 전 상윤이 피우다 떨어트린 담배를 주워 들었다. 다시 그에게로
가 머리채를 휘어잡아 누르고 나서 목 뒤에 불붙은 담배를 짓뭉갰다.

“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지켜보던 무리가 숨을 멈췄고, 도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뭉개진 담배를 옆으로 튕겨 버리고
나선 상윤의 고개를 들게 했다. 얼굴 반쪽은 피범벅이었는데, 입에선 꺽꺽대는 소리만 났다.

뒤틀린 손목과 조금 전 담배로 지져진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피가 흘러내려 한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멀쩡한 눈에 도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까 꽃을 들고 팔불출처럼 웃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살기를 번뜩이면서도 표정은 너무나 태연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그였지만 졸지에 당한 무자비한 폭력과 그 살벌한 기세 앞에선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도하가 저를 보라는 것처럼 턱을 툭 건드린다. 가까스로 눈을
마주쳤더니 이번엔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너, 내가 얼굴 기억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건 분명 협박이었다. 기억하고 있으니 눈에 띄지 말라는. 그땐 목이 아니라


눈알을 지져 버리겠다는. 그러더니 잡고 있던 머리채를 확 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이들이 시선을 피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도하는 엉망으로 망가진 테니스 채를 집어 들고 묻어 있던 피를


탁, 탁, 털어냈다. 것도 모자라 물티슈를 꺼내서 꼼꼼하게 닦더니 차 트렁크에 다시 집어넣었다. 몇몇 패거리가
상윤을 부축하는 사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운전석에 올라타서는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연우가 매점에서 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오후에 갈 곳이 있어 조퇴해야 했고, 그래서 교무실에 찾아갔었는데


담임은 자포자기한 듯 대꾸도 없이 가라며 손짓만 보냈다. 만사 귀찮은 표정이었다. 연우의 입가가 터진 걸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연우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아 허기가 졌다. 빵을 집어 들고 우유를 뭘 살까 고르는데 제가 눈으로 먼저 찍어 놓은,


하나 남은 바나나 우유를 누군가 홱 하고 채간다. 아이 씨.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김유나가 체육복을 입고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머쓱해져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른 우유를


고르는 시늉을 했다. 그때 유나 옆에 있던 여학생 하나가 말을 꺼냈다.

“그거 강이건 주게?”

“응.”

“웬일. 차이고도 그러고 싶어?”

“싫다고 안 했어. 아직 누굴 만날 마음이 없다고 한 거지.”

유나의 대답에 친구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지만 유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우유를 계산했다. 연우가 우유를
고르는 척하며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 새카맣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였다.

특별히 환하게 웃는 것도 아닌데 사람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사랑받고 자란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긴 손가락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동전 하나가 굴러와 연우의 운동화에 부딪힌다.

유나가 동전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순간 연우는 그것을 먼저 발로 밟았다. 그녀가 연우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발 좀 치워줄래, 라고 웃으면서 묻는 얼굴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난다. 뱃속에서 뭔가 꼬이고
짜증이 솟았다.

“못 들었어? 발 좀 치워달라고 했는데.”

연우가 천천히 발을 치우자 유나가 동전을 주워 들고는 탁탁 털어서 제 주머니에다 넣는다. 더 마주할 것도 없이
옆에 있던 친구가 그런 유나를 탁 잡아채선 반대편으로 돌려세운다.

“쟤 건드리지 마. 박태경 친구야.”

라는 소리가 연우에게까지 들렸다. 돌아섰던 유나가 흘깃 연우를 쳐다봤다. 그게 뭐 어때서. 하는 눈빛이었다.


박태경이 저 애를 좋아한다고 했었나. 얼굴도 예쁜데 성격도 모난 곳 하나 없이 기죽질 않으니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알 것 같았다.

저완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빛과 어둠. 흑과 백. 공주님과 거지. 씁쓸한 기분에 픽 하고 웃고는


계산한 빵과 우유를 가지고 매점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1
학년 무리가 연우를 알아보곤 인사를 한다.

무시하고 지나쳐 옥상 난간으로 가서 빵을 베어 물었다. 아침부터 여태 걸렀는데도 전혀 맛있다고 느껴지질


않았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여 빵을 씹다가 밑을 봤는데 강이건이 서 있다. 영훈과 우진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고 휴대폰으로 무언갈 하는 중이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잠시 후 제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린다. 꺼내서 확인했더니 강이건이다.

[몸 괜찮아? 교실 갔더니 없던데.]

그 메시지를 보고 입가로 비죽 웃음이 샜다. 맞은 건 지가 젤 많이 맞았으면서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덩치는 커서 싸움은 존나 못하고. 얻어맞기나 하고. 그 와중에도 연우를 감싸는 바람에 더 얻어터진 것도 있었다.
저 아니면 누가 얻어맞을 줄 아나. 그런 병신 새끼들이 뭐가 무섭다고. 답장을 안 했더니 잠시 후 또 메시지가
온다.

[오늘 수업하러 올 거지?]

답장 대신 빵을 입에 물고서 가만히 밑을 내려다봤다. 제가 답장이 없자 답답했는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걸 보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그때 뒤쪽에서 김유나가 나타났다. 이건의 등 뒤에서 워, 하고
놀라게 하더니 화들짝 놀라자 깔깔대고 웃는다.
처음엔 당황하던 이건도 같이 웃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찡그리고 있더니. 하지만 조금 전까지 웃던 연우는
표정이 굳었다. 어금니를 꾹 물고 그 모습을 보다가 그냥 몸을 돌려 벽을 등지고 섰다. 빵을 먹는 속도가 여전히
느렸다. 가뜩이나 맛없는 빵이 더 맛없게 느껴져 도무지 먹지 못하고 결국엔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랬는데 또다시 메시지가 들어온다. 휴대폰을 꺼내는데 찬바람에 손이 굳어 슥 미끄러졌다. 다시 제대로 잡아


확인하는데 이건이 아니다. 광고 문자였다. 그 아래로 어젯밤 곽상윤에게 온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노래방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안 오면 죽여 버린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씨발. 몇 번 빨아줬다고 내가 지 애인이라도 된 줄 아나. 욕을 뱉고 나선 가볍게 무시한 채 지워 버렸다. 그러고


나선 슬쩍 고개를 돌려 옥상 아래를 다시 내려다봤다. 강이건과 김유나가 나란히 서서 걷는 게 보였다.

유나는 뭐가 즐거운지 계속 웃었다. 그 모습이 예쁘다고 느끼는 자신이 싫어서, 강이건이 똑같이 느낄까 봐 그건
더 싫어서,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결국 몸을 돌려 옥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 * *

준영이 미용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봤다. 머리 자르러 시내에 나와 자주 가는 미용실에 들렀는데 앞에


손님이 있어 한참을 기다린 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미용실은 시내에서도 꽤 큰 편이었는데 이건의 큰누나가
단골이라며 실력이 좋다고 소개해준 곳이었다.

“머리 많이 자라셨네요.”

“네.”

“전처럼 커트만 해드릴까요?”

아. 준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미용실 거울에 비친 제 머리를 슥슥 넘겨봤다. 옆에 앉은 남자를 보니 염색인지


파마를 하는 것인지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보였다.

[갈색도 잘 어울렸는데.]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가 미간에 주름이 생긴 걸 보고 다시 표정을 고쳤다.

“염….”

“네?”

“아니에요…. 그냥 커트만 해주세요.”


“이분 머리만 헹궈드리고 바로 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준영이 대답하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째 전화도 잠잠하다. 나올 때 보니 도하의 차가 없었다. 뒤늦게


오늘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폰을 눌러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갑자기 조용하니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다. 이래저래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그러다 어젯밤 자고 간다는 걸 끝까지 내쫓아서 그거에 조금 삐친 건가 생각이 들었다.

갈 때 표정이 어땠더라. 별로 화난 얼굴은 아니었는데. 아, 몰라.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잡생각을 털어냈다.


첫 관계 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미묘하게 무언가 바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괜히 제 얼굴이 보기 싫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맞은편 햄버거 가게 안쪽에 익숙한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송연우였는데 늘 입고 다니던 초록색 점퍼 대신 다른 점퍼를 입고서 고개를 떨군 채 햄버거만 먹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중년여성은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서 그런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지. 궁금해하며 쳐다보는데 여자가 연우의 손을 붙든다. 연우가 곧 그 손을 빼어내 햄버거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아, 준영이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이건에게 얼핏 듣기론 연우의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다가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혹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모친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때 연우가 햄버거를 베어 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골목길이라 작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준영이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우가 고개를 홱 돌려 저를 외면한다.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본의 아니게 훔쳐본 기분이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연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중년 여성만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서 있는 중이었다.

* * *

빌라 뒤쪽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보니 도하의 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나갔다 돌아온 모양이네. 뻔히 저도 허리


때문에 병원에 가는 걸 알 텐데 연락 한 번이 없었구나 생각하니 옹졸하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준영이 룸미러를 내려 머리를 확인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를 보고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염색하긴
했는데, 약을 바르고 기다리면서 후회가 됐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어 바로 포기했지만. 다행히
짙은 갈색이라 그렇게 티는 안 나는 거 같은데.

“꼭 그 얘기해서 한 거 같잖아….”
괜히 머리를 한 번 헝클고선 룸미러를 내리다 저도 모르게 으억 비명을 질렀다. 도하가 바로 앞에 서서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놀래라. 가슴을 쓸며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도하가 제게
다가온다.

“왜 거기 서 있어? 사람 놀라게.”

“나도 지금 왔어요. 집에 올라갔다가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잠깐 내려온 거예요. 근데 혼자서 거울 들여다보고


있길래 뭐 하나 하고 봤어요.”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괜히 귀가 화끈거려서는 딴청을 피우며 코트 주머니를 뒤져 전화를
찾는 시늉을 하는데 도하가 빤히 쳐다본다. 정확히는 머리에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형, 머리….”

“어?”

“잘랐어요?”

“어… 다듬었어.”

“아. 미용실 다녀왔구나. 병원도 다녀온 거예요?”

“…응.”

준영이 빌라 입구 쪽으로 가는데 도하가 그 뒤를 따라온다. 졸졸 쫓아오더니 2 층 앞에서 준영이 문을 여는 사이


잠시 멈칫했다가 곧 3 층으로 올라간다. 준영이 문을 열다가 멈추고 그런 도하를 바라봤다. 도하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요.

“올라가?”

“네. 몸살 기운 있어서 자려고요.”

준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지간해선 아픈 걸 본 적이 없는데.

“나간 김에 병원도 들렀다 오지.”

“괜찮아요, 좀 쉬면 낫겠죠.”

“…그래.”
“들어가요.”

“…응.”

그러더니 계단 위쪽으로 사라진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준영이 한 박자 늦게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섰는데 신발장 앞 거울에 제 모습이 비친다. 염색한 머리를 한 번 손으로 툭 털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괜히 했나. 너무 짙은 색으로 해서 티가 안 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냉장고를 여는데 제일 아래 칸에 채소가 있는 게


보인다. 도하가 요리한다고 최근에 사다 넣어둔 것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무슨 생각인지 열고서 양파와
당근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런저런 걸 다 떠나서 아프다는데 모른 척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죽이라도 쑤어다 줄 요량이었다. 쌀을 씻어


불리고 나서 더 넣을 게 있나 냉동실을 뒤적이는데 소고기 얼려둔 게 보인다. 그것을 꺼내서 해동시키고 휴대폰을
꺼내 죽 끓이는 걸 검색했다. 별로 어려울 건 없어 보이는데. 천천히 읽으며 숙지하고 하나씩 순서대로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 * *

씻고 나온 도하가 머리를 털어 말리고 난 후 준영에게 선물했던 분홍색 가운을 입고 아래층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7 시였다. 밥 먹었으려나, 내려가서 같이 먹자고 할까 하다 관두고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8 시가 넘으면 강이건이 오니 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곰탱이랑 도둑놈이 나타나면 또 쫓겨


올라오거나 해야 하니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집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아까 그렇게 아픈 척 연기를
했는데 신경은 좀 쓰이겠지.

슬쩍 옆에 있는 장식장에 제 얼굴을 비쳐 피부 상태를 확인하니 아픈 사람치곤 너무 광이 난다. 젠장. 타고난


미모는 숨길 수가 없네. 잠시 감탄을 하고 나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데 30 분쯤 지났을까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으로 가며 표정을 풀고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한 손엔 스테인리스 냄비를
들고서. 도하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 놀란 척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준영은 준영대로 도하가 입은 분홍색 가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저걸 왜 집에서 입고 있는 거지. 물론 저도


한 번씩 입긴 하지만. 괜히 그날 밤 있었던 일이 떠올라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두리번댔다.
“이거 먹어.”

“뭐예요?”

“아프다며.”

도하가 그것을 받아 들고 안을 확인했다. 죽이었다. 고기랑 채소들이 들어간. 그걸 보는데 웃음이 터져 입술을
안쪽으로 꾹 물었다. 채소와 고기가 얼마나 큰지 죽이 아니라 카레나 짜장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 칼질을 이렇게 못할 수가 있다니.

“무슨… 죽까지 만들어오고 그래요.”

“먹어. 간다.”

준영이 뻘쭘하게 건네주고 내려가려 하기에 도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어?”

“혼자 먹기가 좀 그래서요. 아프니 집 생각도 나고 엄마 생각도 나고.”

짙은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간다. 시무룩한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만 해도 운동도 가고 팔팔하더니 왜 갑자기 아파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뿌리치지 못하고 제 손목을 붙든 손을 내려다보며 망설였다.

“조금 있으면 이건이 오는데….”

“아직 1 시간 정도 남았잖아요. 그때까지만.”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나선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30 분 정도면 괜찮겠지.

“…알았어, 그럼.”

도하가 그 손을 놓아주고 나서 냄비를 들고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요. 준영이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눈이 커졌다. 저와 같은 집이 맞나 싶어서였다. 다른 공사를 한 건 아닌데 벽지부터 시작해 가구들이
전부 비싼 것들이다. TV 는 얼마나 큰지 벽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어릴 적 도하가 TV 를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제가 등 뒤에서 껴안고 뒤로 옮겨놓던 기억이 나서 잠시 웃음이 났다.

“TV 보다 눈 빠지겠다.”

도하가 웃더니 식탁으로 가서 냄비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다시 봐도 놀라운 비주얼이다. 가뜩이나 칼질도
못하는데 이걸 써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죽 먹다 울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슬쩍 찍어 맛을 봤는데, 역시나 짜다. 이건 미각의 문제인가,


실력의 문제인가. 대체 요리 솜씨는 세월이 가도 나아질 생각을 안 하는구나. 일단은 뚜껑을 덮어놓은 후
거실로 나가선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준영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왜? 죽 안 먹어?”

“너무 어지러워서요. 잠깐만 누워 있을게요.”

“그럴 거면 침대에 가서 누워.”

도하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좋은 생각이네요.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준영이 그런 도하를 불러 세웠다.

“그럼 자고 일어나서 챙겨 먹어. 갈게.”

“잠들 때까지만 있어 주면 안 돼요?”

“뭐?”

“아프니까 엄마 생각도 나고, 집 생각도 나고.”

어울리지 않게 자꾸 집과 엄마 타령을 하면서 잔뜩 기운 빠진 얼굴로 쳐다보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고 그쪽으로 갔다. 그제야 안방에 달린 잠금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
왜 이런 걸 달아 둔 걸까. 고민할 새도 없이 도하가 준영의 생일 네 자리를 누르니 문이 열린다. 갑자기 등 뒤가
오싹해졌다.

“왜 남의 생일을 비번으로 해뒀어?”

도하가 대꾸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더니 늘어지듯 눕는다. 가운이 벌어지면서 단단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준영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줬더니 이번엔 그 이불을 확 걷어찬다.

“더워요.”

걷느라 발을 움직이는 바람에 가운은 더 벌어졌고, 거의 성기 아래까지 드러났다. 괜히 민망해서 일부러 도하의
머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에 제 눈을 사로잡는 물건들이 있었다. 작은 책장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이
생일 때마다 선물했던 책과 그 밖의 여러 것들이었다. 저걸 다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눈을 떼지 못하는데
도하가 준영을 부른다.

“…나 잠들 때까지만 옆에 누워 있으면 안 돼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준영이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움직이느라 살짝 벌어진 가운 사이로 녀석의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선 곧 뚫고 나올 기세였다. 어쩐지 덫에 걸린 기분이다. 괜히 아침부터 저한테 데면데면하고 신경
쓰이게 하더니.

혀엉. 말끝을 늘이며 저를 향해 손을 뻗는 도하를 보고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안 아프지?”

“…아파요. 엄청.”

근데 왜 그렇게 섰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면 또 온갖 핑계를 댈 테지. 그냥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나을 거


같아 몸을 돌리는데 아프다던 도하가 잽싸게 그런 준영의 손목을 붙들었다. 준영이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뿌리칠까 잠시 망설이는데 도하가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하는 수 없이 끌려가다 보니 어느새 침대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토닥토닥 해줘요.”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더 멀쩡했다.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고, 혈색도 아주 좋았다.
한쪽 눈에 속쌍꺼풀이 얇게 생기긴 했지만, 그건 가끔 그러니 뭐.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도하가 그대로
눕더니 준영의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간다.

“얼른, 토닥토닥.”
준영이 기막힌 듯 웃다가 앉은 채로 성의 없이 가슴을 툭, 툭 두드렸다. 그랬더니 제 손으로 붙잡고 이렇게
하라며 토닥토닥 두드린다. 그 모양이 웃겨서 웃었더니 잠시 후 맞잡은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어디까지
하나 내버려 뒀더니 성기 있는데 가져가선 꾹 누른다. 준영이 인상을 썼다.

제 손에 딱딱하게 발기한 도하의 성기가 그대로 만져졌다. 도하가 아랫입술을 슬쩍 핥더니 준영의 손을 포갠
상태로 제 것을 만진다. 준영이 빼려고 했더니 깍지를 끼고서 놔주질 않는다.

“거짓말했지?”

“진짜 아파요. 열도 나는 것 같고.”

말을 하며 이제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제 것에 대고 준영의 손을 문지른다. 손바닥으로, 손가락 사이로


성기가 마구 비벼졌다. 힘줄 튀어나온 것까지 고스란히 느껴지자 준영이 몸을 흠칫 굳혔다. 하지만 손을 빼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도하가 깍지를 풀고 준영의 팔을 잡아당겨 제품으로 끌어당긴다. 침대에 눕혀 놓더니 몸 위로 올라와선 얼굴


양쪽으로 팔을 짚고 준영의 얼굴을 가까이 내려다봤다. 오늘 다듬은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는 손길이 여전히
다정했다.

“안 피하네?”

“….”

“지금 고민 중이죠? 받아줄까 밀어낼까?”

“…응.”

“솔직해라.”

“무거워. 비켜.”

“솔직해지는 김에 더 솔직하게 굴어요.”

“뭘.”

“나 때문에 머리색도 바꿨으면서.”

도하가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조금 더 밝은색을 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에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애초에 다 알고 있었군.

“자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원장님이 하라고 해서 했어.”


핑계를 대는 모습이 귀여워 생글생글 웃으며 그랬느냐고 놀렸다. 준영이 그런 도하를 밀어내려고 어깨를 붙들자
도하가 그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려 압박했다. 꾹 힘주어 못 움직이게 하자 준영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문다.

“이제 내가 조금 신경 쓰여요?”

“…글쎄.”

그 말에 도하가 웃으며 제 성기를 준영의 하체에 뭉근하게 비볐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의 바지 앞섶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 준영이는 몸만 솔직해.”

“내려와, 얼른. 조금 있으면 이건이랑 연우 와.”

“섹스 한 번만 하고 내려가요.”

“…허리 아파.”

“안 아프게 조심해서 할게요.”

“…널 어떻게 믿고.”

“날 믿지 말고 내 좆을 믿어요.”

간지럽게 웃더니 준영의 입술 옆에 쪽쪽 입을 맞춘다. 꽉 잡고 있던 손목이 움찔했다. 혀로 입술 주변을


핥아주고 입술을 가르자 준영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벌린다. 도하가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준영이 제
혀를 내밀어 같이 문질렀다.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준영의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맨살을 만지니 몸이 흠칫


떨린다.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준영을 다시 내려다봤다. 얼굴이 풀어져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다가 저를
쳐다본다.

검은색 눈동자에 맺힌 제 얼굴을 감상하다가 압박하고 있던 준영의 손목을 놓아줬다. 준영이 더는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있기에 팔을 위로 뻗어 서랍을 열고 무엇인가를 꺼냈다. 눈동자만 움직여 확인하던 준영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검은색 가죽끈이었다. 도하가 그걸 매만지면서 다시 준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손, 묶어줄까요?”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며칠 전 도하와 섹스할 때 수갑을 찼던 일이 처음엔 충격이었는데 묘하게 그
여운이 계속 남았다. 손목이 욱신거릴 때마다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욕구가 들끓는 느낌이었다.

차마 제 입으로 해달란 말을 못 하고 있으니 표정을 읽은 도하가 웃으면서 준영의 손목을 모아서는 가죽끈으로
아프지 않게 묶는다. 예쁘게 리본으로 마무리까지 짓고 나서 도하가 몸을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 준영을 다시 가만히 내려다봤다. 준영은 제가 쳐다볼 때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다.
아까 만지느라 셔츠를 들추는 바람에 한쪽이 올라가 맨살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셔츠 끝을 잡고 천천히 위로 더 올리니 준영이 고개를 돌린 상태로 아랫입술을 꾹 무는 게 보인다. 가슴 위까지


올리자 젖꼭지가 드러났다. 지난번엔 거의 정신 줄을 놓은 상태라 몸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훤하게 불을 켜놓고 내려다보고 있으니 당장에라도 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불 좀 끄자.”

준영이 귀가 조금 빨개져선 웅얼거렸고 도하가 위쪽으로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환하던 방이
은은하게 가라앉은 주황색으로 바뀐다. 준영이 몸에 들어갔던 힘을 조금 풀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는 돌린
채였다. 도하가 얼굴을 같이 기울이며 그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나 좀 봐요.”

“…그냥 해.”

“부끄러워?”

솔직히 부끄럽기보다 민망했다.

“종일 나 신경 쓰였죠?”

준영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도하를 마주 봤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스레 웃었다. 쪽, 쪽, 콧등에 뺨에 입을 맞추더니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입술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빨다가 어깨에도 가슴 위쪽에도 한참을 그랬다. 더 내려와선
젖꼭지를 혀로 꾹 누르며 위로 올려주었고 동시에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팽팽하게 일어선 젖꼭지가 귀여워 손끝으로 비비고 혀로 다시 올려주고 몇 번을 그러다 아래쪽으로 내려와선
준영이 입고 있는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슬쩍 위를 봤더니 준영이 묶인 손으로 제 눈을 가리는 중이었다.

그대로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앞뒤로 움직여 주니 머리 위쪽에서 으음, 하는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고환 아래쪽까지 샅샅이 핥아주고 빨아주다가 입술을 허벅지 쪽으로 움직여 안쪽 살을 슬며시 깨무니 허벅지가
단단해지며 힘이 들어간다. 보드라운 살결을 손으로 한 번 쓸어주고 나서 몸을 다시 위쪽으로 움직였다.

준영이 묶인 팔로 제 얼굴을 가리고서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게 보였다. 그대로 가운 앞을 풀고선 젤을 꺼내서


손바닥에 쭉 짜서 문질렀다. 이미 발기한 제 성기에 그걸 앞뒤로 문지르면서 골고루 묻혀주고, 손을 아래로 내려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고 구멍을 찾아서 천천히 손가락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빠듯하게 달라붙는 속살을 꾹꾹 눌러가며 안을 넓히고 풀어주자 준영이 한 번씩 허리를 들썩이며 움찔댔다.
신음이 샐까 봐 입술을 꾹 깨물고 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려 앞뒤로 왔다 갔다
반복하니 젤이 구멍 안에서 녹아 흘러나오며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어느 정도 풀어졌다 싶어 손가락을 빼고 준영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구멍에선 녹은 젤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대로 벌린 채로 제 성기를 입구에 맞추고 꾹 누르니 조금 전까지 풀어졌다고 생각한 애널이 놀랐는지
확 수축하며 입구를 조인다.

젠장. 귀두로 그 부분을 문질러주면서 살살 달래다가 다시 꾹 눌렀더니 조금 전보단 수월하게 들어간다. 기둥을
잡은 채로 밀어 넣으면서 다시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선 허릿심을 이용해 뿌리까지 빈틈없이 쑤셔 넣었다.

완전히 구멍 안으로 사라진 제 성기를 내려다보던 도하가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 작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준영의 다리를 제 어깨 위에 걸치고선 살짝 몸을 세우니 준영의 엉덩이가 들리며 결합 부위가
더 깊어졌다.

갑자기 허리도 배도 당기자 준영이 윽, 신음을 내며 팔을 앞쪽으로 뻗었다.

“읏, 잠깐, 너무 아, 읏.”

“…아파요?”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묶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도하가 어깨에 걸쳤던 다리를 내려놓고 몸을


낮춰서 포갰다. 그 상태로 껴안고 한 바퀴 뒤집자 졸지에 준영이 위에 올라앉은 모양새가 됐다. 균형을 잡으려
가슴을 손으로 짚으니 도하가 제 아래에서 슬쩍 웃는다.

“형 허리 아프니까 이 자세가 나을 거 같아요.”

“…….”

“움직여 봐요. 하고 싶은 대로.”

준영이 도하의 얼굴 대신 목 아래쪽을 쳐다봤다. 손은 묶인 채로 도하의 탄탄한 가슴팍을 짚고 있었고 제 엉덩이


안엔 녀석의 성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꽉 문 채로 엉덩이를 아래위로 비벼주자 안쪽에서 전립선이 뭉개지며
단전 아래가 뻐근해졌다.

가뜩이나 방음도 안 되는 건물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가까스로 신음을 참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데 감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을 때였다. 마침 도하가 어떻게 알았는지 제 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리 와요.
준영이 팔을 위쪽으로 하며 도하의 가슴에 제 가슴을 포갰다. 묶인 팔을 머리 뒤로 걸고서 꽉 끌어안자 도하가
허리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 으음.”

신음을 참으려 도하의 어깨 쪽에 입술을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구멍 안에서부터 점점 열이 퍼지더니 나중엔


그게 몸 전체를 돌아다니며 괴롭혔다. 못 참고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이며 박자를 맞췄다.

“하아, 아.”

최대한 소리를 낮추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한편 도하는 준영이 귓가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신음을 내니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엔 느긋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점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위로 쳐대는 속도가 빨라졌다.

준영이 도무지 참지 못하고 우는 것처럼 흐으음 소리를 냈다. 도하가 허리를 빠르게 쳐대면서도 양손으로 준영의
얼굴을 붙들고 들어 제 눈을 보게 했다. 준영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다시 붙들어 고정시킨다.

“…나, 봐요. 하아.”

준영의 검은색 눈동자는 반쯤 풀린 채로 갈 곳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눈을 맞추지 않으려 했지만 가만


놔둘 도하가 아니었다. 집요할 정도로 자길 보라고 채근하더니 나중엔 준영의 얼굴을 끌어가 눈 부위를 혀로
핥았다.

몸이 아래위로 들썩이며 흔들렸고, 시야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야하게 웃는 도하의 얼굴이 유독 강하게
새겨졌다. 무서운 속도로 치대는 아래완 달리 제 뺨에 닿는 손과 입술은 이질감이 들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

<2 권 끝. 다음권에 계속>

CH 16.

이건과 연우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다. 다시 누르려고 하는데 위층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난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는데 도하가 막 내려오는 중이었다. 방금 씻었는지 머리엔 물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고, 티셔츠도 제대로 갖춰 입질 않아 내려오며 아래쪽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형….”

이건이 부르자 도하가 웃으며 다가오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문에다 댔다. 삑,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돌아갔고 문을 잡아당기니 이건과 연우가 궁금한 표정으로 뒤에서 쳐다본다.

“왜 형이 키를 가지고 있어요?”

“준영이 형이 어디 가느라 나한테 맡기고 갔어.”

태연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자 이건과 연우가 따라 들어온다.

“멀리 가셨어요? 차는 있던데요.”

“아니야. 그렇게 멀진 않아.”

도하가 애써 웃었다. 마음 같아선 내일이고 뭐고 이제 과외는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서준영한테 제대로 혼날 테니 일단은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저 녀석들만 없었어도 두세 번은 더 하고 같이
끌어안고 자는 건데.

준영이 내려온다는 걸 억지로 앉혀놓고 대신 자신이 온 것이다. 섹스를 막 마치고 난 후라 그런지 얼굴도
달아오르고 눈빛이 더 야해진 거 같아 꼬맹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희 내일 올게요.”

이건의 말에 도하가 어차피 온 거 앉으라고 했다.

“내가 대신 봐줄게.”

에? 이건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저번에 도하가 분명 그러지 않았나. 하나도 모르겠다고. 근데 어떻게
가르쳐주겠다는 건지. 그러면서 도하는 주방 쪽으로 갔다. 일단 문제를 풀고 있으라고 한 후 과일이라도 깎아줄
생각이었다.

이건과 연우가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꺼내는 동안 주방으로 간 도하는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곤 아연실색을 했다.
썰다가 만 양파와 당근이 있는 걸 보아 서준영이 제게 가져다준 죽이 여기서 탄생한 것으로 보였다.

누가 보면 진수성찬이라도 만든 줄 알겠네. 못살아. 그것들을 정리하고 나서 냉장고를 열어 과일을 꺼냈다.


딸기를 씻고 사과를 깎는데 이건과 연우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들었어? 곽상윤 누구한테 맞아서 입원했대.”

“맞아? 누구한테?”

“같이 있던 애들이 봤는데 배드민턴 채로 심하게 맞았다는데.”

그 말에 연우가 콧방귀를 끼었다. 병신. 저녁에 노래방으로 오라고, 안 오면 죽이겠다고 하더니 연락이 없었던
이유가 있었구만. 어차피 연락이 왔어도 안 갔을 테지만, 꼴 좋다고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곽상윤이
얼마나 아이들을 괴롭히고 다녔던가. 저 혼자 힘센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배드민턴 채에 맞아서 실려 가다니.

“근데 누가 때렸대?”

“나도 모르겠어. 흰색 아우디 끌고, 키가 엄청 컸다는데….”

말을 하던 이건이 갑자기 멈칫했다. 주방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도하는 뭘 하는지 칼을 들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차종이 도하가 끌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키도 크고. 연우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슬쩍 이건을 쳐다본다.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인간 아니야? 에이, 설마?

잠시 후 도하가 깎아온 과일을 보고 이건과 연우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딸기는 둘째 치고 사과가 토끼


모양이었다. 이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준영이 과일을 깎을 때마다 감자 칼을 쓰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거 형이 했어요?”

“왜? 예뻐?”

“대단하다. 이걸 어떻게 하셨어요?”

“내가 못하는 게 있을 거 같아? 먹어, 얼른. 도둑놈, 너도 많이 먹어라.”

연우가 입술을 한 번 씰룩이고 나서 사과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아삭 베어 무는데 사과가 많이


달았다. 이건 역시나 딸기와 사과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도하가 이건에게 넌지시 말을 꺼낸다.

“강이건, 너 내가 말한 거 생각해봤어?”
“…어떤 거요?”

“방학하면 외국 보내준다니까.”

그 말에 이건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분명 싫다고 했는데 왜 또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짜로
외국에 보내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른 척하고 딸기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피하는데 도하가 이번엔
연우를 찔러본다.

“도둑놈 너는? 너도 싫어? 강이건이랑 외국 여행 갈래? 내가 비용 다 대줄게.”

그러자 연우가 무슨 뜻인 줄 몰라 이건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건의 눈빛을 보니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하긴,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외국으로 보내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싫은데요.”

“넌 왜.”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그럼 너네 학교 앞에 집 하나 얻어줄까? 거기서 둘이 살래? 과외선생도 붙여줄게. 준영이 형보다 더 잘


가르치고 예쁜 여자 선생님. 어때?”

둘 다 눈빛만 교환할 뿐 대답하지 않자 도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야, 이것들아. 너희도 이제 열여덟 살인데 언제까지 부모님이랑 살 생각이야?”

“열여덟 살이면 당연히… 부모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 아닌가요.”

이건의 말에 도하가 연우를 다시 지목했다.

“야 도둑놈 말해봐. 너네 아버지가 너 보호해줘?”

연우가 사과를 문 채로 도하를 째려봤다. 갑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형은 말이다. 어릴 적에 굉장히 자기 주도적으로 살았어. 학교와 집도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고. 너네도 좀 그렇게 살란 말이야.”

듣고 있던 이건이 질색했다.

“형….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요.”

도하가 이를 뿌득 갈자 이건이 얼른 사과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될 것 같자 도하는


이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너 준영이 형한테 너무 의지하지 마. 저러다 서울로 올라가면 어쩌려고 그래.”

“선생님 서울 가신대요?”

“그럼 여기서 평생 살까 봐?”

“사신다는데?”

그 말에 도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뭐? 하고 물었다. 이건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사실인 듯싶었다. 서준영이


애를 상대로 실없는 소릴 하진 않았을 테고.

“형이 그래?”

“네. 저번에… 그냥 여기서 먹고살 만한 일자리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가을엔
시내에 카페 자리도 알아보고 하셨는데….”

“카페?”

“북카페요….”

“미쳤어!”

도하가 버럭 소지를 지르자 이건과 연우가 흠칫한다. 준영이 여기 머무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싶었다. 이곳도
자세히 보면 살기 좋은데.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나쁘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자신은 그럴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서준영을 데리고 올라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농담이었겠지,
싶으면서도 어쩐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감춰지질 않았다.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이 창가 쪽을 한 번 쳐다봤다. 이 시간에 들어올 차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격한 도하의 반응에 아는 척을 할
수 없어 사과를 입에 물고 문제집을 푸는 척했다.

* * *

준영이 TV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바꿨다. 영화와 드라마를 번갈아 가며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보는
TV 는 낯설었다. 채널을 돌리는데 드라마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선배의 작품이었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 남자 주인공 캐스팅을 두고 골치를 썩인다고 하더니 일이 잘 풀렸나 보다.

대체 남자주인공이 누군가 싶어 보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린다. 고개가 저절로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도하가
장난하는 건가, 했는데 느낌이 어쩐지 싸하다. 모른 척할까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초인종이 울리길래 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뭐가 급했는지 문이 돌아가자마자 확 잡아당겼다. 준영이


당황해선 휘청하는데 문틈으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도하의 큰누나였다. 그녀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어?
하고 놀란 얼굴을 하더니 집 호수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준영을 쳐다본다.

“준영 씨… 왜 여기 있어요?”

준영 역시 놀라 말을 버벅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하의 큰누나는 저와 그리 친분이 많지 않았다. 어릴 적


주로 보던 도하와는 달리 어쩌다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에도 그녀는 참석하는 일이 드물었다. 굉장히 성격이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고 가족 중 도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만이에요. 혜윤 씨.”

“도하는요? 여기 사는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맞는데….”

준영이 애매하게 웃었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도하에게 전화를 해야 할 거 같은데. 휴대폰을


찾으려 주머니를 만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밑에 내려가서 데리고 오는 게 더 빠를까.

그러다 아까 섹스하고 나서 콘돔이랑 젤은 제대로 치웠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준영을 가만히 바라본다.

“잘됐네요. 도하는 안에 없는 거죠? 본 김에 할 얘기도 있는데 들어가서 저랑 잠깐 얘기 좀 나눠요.”


그래요. 준영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도망친다고 해결될 건 없었다. 그녀 또한 도하가
아닌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곤 했지만 어떤 건지 짐작은 어려웠다. 뭘까. 대체 뭐지. 뒤로 물러서니 그녀가 안으로
들어온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가는데 그녀가 뒤따라온다.

들어서던 혜윤은 안을 확인하고는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그 좋은 집을 놔두고 여기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그동안 제 연락을 피하고 씹은 걸 생각하면 보자마자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릴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혜윤이 먼저 소파에 앉았고 준영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제집이 아니니 차를 내주는 것 또한 어려웠다. 오늘
처음 온 거라 뭐가 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고….

그러자 혜윤도 어색한지 웃는다.

“앉으세요. 제가 다 불편하네요.”

네. 준영이 자리에 앉는데 손목에 빨간 자국이 보인다. 그걸 보는 혜윤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서준영이 제 동생을 얼마나 피해 다녔는데. 모친에게 들어 위아래층으로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도하네
집에 있는 건 아무래도 수상했다.

“혹시… 준영 씨….”

혜윤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고 준영이 그녀를 쳐다봤다.

“네?”

그녀가 괜히 주위를 살피더니 준영을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감금당한 건 아니죠?”

준영이 당황한 얼굴로 네? 하고 되물었다. 감금이란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설마 도하가
저를 여기다 감금시켰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다 문득 제 팔에 쓸린 자국을 보고선 묘하게 납득이 가선 슬그머니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요. 감금당하고 있다거나, 협박당하고 있나요? 혹시 집 안에 몰카라도 있어요? 지금 이거


찍히고 있는 건가요?”
그녀가 아닌 척 집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당황하는 준영을 향해 더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입술만 움직였다.

“내 말이 맞으면 손으로 동그라미를 작게 만들어 보세요.”

기가 막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디리릭, 하더니 벌컥 열린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 올라왔는지


도하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나타났다. 그러더니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 * *

혜윤이 운전석에 앉아 손목을 잡고 돌렸다. 옆자리엔 도하가 앉아서 미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애들을
공부시켜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보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 큰누나가 주로 몰고 다니던
승용차가 입구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준영과 혜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도하가 제 누나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

“나쁜 놈. 남자한테 눈이 멀어서 자기 누나고 뭐고 없이 그냥 막 패대기치네.”

“내가 언제 패대기쳤어. 그냥 끌고 나온 거지.”

“그게 그거지. 해코지할까 봐 눈알이 뒤집혀서는. 어휴, 엄마가 이런 걸 알려나 몰라.”

“그러게 왜 연락도 없이 와.”

“연락? 몇 번을 했는데 씹어 놓고 지금 연락이라고 했어?”

어찌나 쏘아붙이는지 도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연락을 먼저 무시하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받을 때마다


똑같은 소릴 하니 저로선 어쩔 수 없었다. 언제 올라올 거냐고 자꾸 묻는데, 거기에다 대고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저는 지금 당장 올라갈 마음이 없는데.

저도 잘한 건 없어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혜윤이 긴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선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도하에게 툭 던진 듯 건넨다.

“이거. 읽어봐.”
도하가 그것을 본 체도 하지 않고 혜윤을 쳐다봤다.

“뭔데.”

“야. 좀 들여다보고 나서 물어.”

도하가 종이뭉치를 내려다봤다. 시나리오였는데 앞쪽에 제목과 감독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선태가 전화로
말한 그 감독이었다. 꽤 유명했고 감독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나리오라고 도하를 꼭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단다.

“설마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왔어?”

“그럼.”

“와도 선태 형이 와야지, 이걸 누나가 왜 들고 와? 난 누나네 소속도 아닌데.”

그러자 혜윤이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툭 던진다. 그걸 펼쳐 확인하던 도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건 계약서였는데 저와 혜윤이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 간의 계약서였다. 잘못 봤나 싶어 다음 장을 넘겨봤는데
뒤에 제 이름 옆에 도장까지 찍혀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힌 얼굴로 혜윤을 쳐다봤다.

“뭐야, 이게!”

“집에 네 도장 굴러다니길래 내가 찍었어.”

“와, 이 아줌마 미쳤나 봐!”

하지만 혜윤은 운전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나 고소한다!”

그 말엔 픽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해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게.”

“나한테 진짜 왜 이래?”
“네가 돈이 될 만하니까.”

“어떻게 누나가 돼서 그런 말을 해. 동생을 완전 물건 취급하는구만.”

“넌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사고만 안 치면 내가 널 톱배우로 만들어줄게.”

“필요 없어, 누나. 난 서준영만 있으면 돼.”

“야. 어리고 잘생긴 것도 한철이야. 사람은 능력이야, 능력. 너 능력 있어? 서준영 만나는 거 할아버지가
아시면 어떻게 될까. 너한테 증여해주신 재산 먼저 몰수할걸. 그때도 네가 지금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능력도 없고 빌빌거리는 어린놈을 누가 좋아해!”

“할아버지 연세 많잖아. 설마 나보다 오래 사시겠어. 돌아가실 때까지만 비밀로 하면 돼.”

“어쩌면 호적에서 파일 소리만 할까. 시끄럽고, 시나리오 살펴보고 3 일 안으로 답장 줘. 네가 정말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러기엔 배역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

도하가 인상을 쓰며 받은 시나리오를 슥, 슥 넘겨봤다. 제목도 그렇고 로맨스는 아닌 거 같았다. 시작부터 사람


죽이는 것만 봐도 그렇고.

“주인공이야?”

“욕심도 많다. 주인공 상대역이야.”

“상대역?”

“악역.”

“누나. 악역이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주 딱이야. 너네 매형도 선태도 너 아는 사람은 다 동의하더라.”

“참 나. 다들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이제 내려. 나 갈 거니까.”

도하가 그것을 두고 내리려다 관두었다. 여기서 더 반항했다간 혜윤 성격에 집으로 안 가고 제집까지 다시 쫓아


올라와서 버틸 게 뻔했다. 준영이 있어서 그러고 싶진 않았다. 대충 못 이기는 척 그걸 챙겨서 차에서 내렸다.

“조심해서 가.”

“빈말이라도 자고 가라고 안 하지?”

“다신 오지 말고. 특히 연락도 없이 오는 거 진짜 매너 없는 행동이야.”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리고 너….”

혜윤이 준영에 대해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손목에 그 자국도 그렇고 설마 싶으면서도 다 큰 성인이 그렇게 갇혀
있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제 동생이 그 정도로 정신병자도 아니고.

“아니야. 선태한테 들었지? 시상식 날 맞춰서 올라와. 아니면 또 내려온다.”

도하가 대답이 없자 혜윤이 그대로 시동을 켜고 차를 후진시켜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운전을 험악하게 하는지 뒤늦게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자고 가라고 그럴 걸 했나 후회가 됐다.

손에 들린 시나리오와 계약서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걸 들고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다 준영의 집 앞에


멈췄다. 아까 누나를 데리고 나갈 때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는데, 집으로 왔을까. 벨을 눌렀더니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서둘러 한층 더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갔더니 준영이 소파에 앉아 깍지를 낀 채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저를
돌아본다. 집으로 돌아갔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곤
걱정이 됐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들어가는데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혜윤 씨는.”

“갔어요.”

“나 때문에 많이 놀랐겠다.”

“그런 걸로 놀랄 사람도 아니에요. 알면서.”

“그럼 다행이고….”

“형 괜찮아요? 우리 누나가 형한테 뭐라고 했어요? 나랑 헤어지래요? 돈 봉투 같은 거 던져주거나 한 건


아니죠?”

준영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아침 드라마서나 볼법한 것들을 읊어대며 자신의 누나를 악질 시누이쯤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조금 기가 찼다.

“그러지 않았어. 대신….”

“대신?”

“너한테 감금당했냐고 묻던데.”


준영이 씁쓸하게 웃더니 제 손목을 보여줬다. 아까 묶었던 손목 양쪽이 빨갛게 된 걸 보고서 도하가 슬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묶는다고 묶었는데, 준영이 발버둥 치느라 살이 더 쓸렸나 보다.

준영의 시선은 도하가 들고 있는 흰 종이뭉치로 꽂혔다. 뭐냐고 물었더니 도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쪽으로
치워 버린다. 대충 봤을 땐 시나리오였다. 아니나 다를까 팔을 뻗어 가져오니 제목과 감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혜윤이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해가 됐다.

“읽지 마요. 어차피 안 해.”

앞부분을 읽던 준영이 고개를 들어 도하를 쳐다봤다. 도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왜 안 해?”

“바빠지면 형 못 보잖아요.”

그 말에 준영이 피식 웃었다.

“왜 못 봐. 한 번씩 보면 되지.”

“나는 매일 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왜요. 나랑 같이 올라가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그 말에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건 제게 어려웠다.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제가 일하던 직장 근처만


가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북카페 같은 거라도 차려서 먹고 살 만큼만 벌면서 그렇게 사는 것. 누군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모른다. 직장이건 사업이건 편한 건 없다고 하겠지만 그만큼 올라가는 건 제게 부담이었고, 생각만으로도 숨
막히는 일이었다.

준영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도하가 그대로 준영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눕는다. 대본 때문에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아 그것을 손으로 거둬냈더니 저를 내려다보는 준영의 얼굴이 보였다.
“형 데리고 올라갈 생각 했는데….”

“…난 아직은 여기가 좋아.”

그 말에 도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더 안 보챌게. 대신 다음부터 그런 건 나도 미리 말해줘요. 강이건한테 듣게 하지 말고….”

“응.”

준영이 순순히 대답하자 도하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손을 뻗어 준영의 턱을 만지고 뺨을 만지고 하는데도 준영은
그런 도하를 쳐다볼 뿐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우리 서준영 씨, 왜 이렇게 착해졌담. 사람 간 쫄리게.”

“또 엉덩이 맞을까 봐.”

그 말에 도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술을 자꾸 만지작대니 준영이 그 손을 떼어내고 도하를


내려다본다. 짙은 눈썹 아래 쌍꺼풀 없이 길고 또렷한 눈매가 보인다. 반듯한 콧대도 그 아래 끝이 조금 올라간
입술도. 어디 하나 못난 구석이 없었다.

“꼭 키스해 줄 것처럼 쳐다보네?”

“…해줘?”

“이야, 엉덩이 맞는 게 진짜 무섭긴 한가 보다?”

“싫으면 말고.”

“그럼 나야 좋지.”

준영이 조금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는데 허리가 당겨 입술이 닿지 않는다. 아 이 자세에서 입 맞추는 건


어렵구나. 민망해져선 슬쩍 인상을 구겨졌더니 도하가 웃으며 일어나서 준영을 소파로 밀며 눕힌다. 졸지에 밑에
깔린 준영이 도하를 올려다봤다.

“나 더는 못 해. 허리 아파.”
“알았어요.”

도하가 뺨을 감싸고서 입술을 혀로 훔쳤다. 입술을 겹치자 준영이 팔을 위로 뻗어 도하의 목을 끌어안는다. 서로


혀가 문질러지고 숨결이 오갔다. 그때 도하의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준영이 도하의 뺨을
붙들고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전화 왔어.”

“괜찮아요. 쓸데없는 전화일 거예요.”

도하가 입술을 겹치며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준영이 움찔한다. 아까 젖꼭지를 물고 빨아서 아픈데 이번엔
손끝으로 건드리고 누른다.

“아파. 더 못 한다니까.”

“알았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안 한다며 거긴 왜 만져?”

“그냥 잘 붙어 있나 확인만 할게요.”

입은 안 한다고 했지만 손은 이제 자유자재로 옷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 *

이건이 편의점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까 도하는 무슨 급한 일인지 얼른 가라고 말한 후


집을 뛰쳐나갔다. 집에서 나오는 중에 도하네 집에서 뭔가 소란스런 소리가 났지만, 연우는 관심이 없는 듯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그래서 이건도 연우를 뒤따라왔다.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사서 앉아 있는데
아무리 해도 도하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선생님도 그렇고 도하 형도 전화를 안 받지.”

연우가 상관없다는 얼굴로 바나나 우유를 쭈우욱 빨아먹었다.


“신경 꺼.”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그래.”

“둘이 알아서 하게 놔둬.”

“그게 무슨 소리야?”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지 말라고.”

연애사란 말에 이건이 잘못 들었나 싶어 어? 하고 되물었다. 연애사라 함은 고로 남녀 간에 사귀는 사이를


말하지 않던가. 하지만 연우는 정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우유를 쪽쪽 빨면서 이건을
한심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에이, 그건 진짜 아니다.”

“병신.”

어이, 형제님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며 둘을 불렀다. 봤더니 1 층에 사는 동현이었다. 그가 운동복


차림으로 오면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우는 그를 보고 질색을 하였고 이건은 깍듯하게 일어나 인사를
했다.

“형 나오셨어요?”

“어, 우리 이건이 인사도 잘하고 착하네. 인마, 송연우. 너는 애새끼가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어떻게 된
새끼가 선배를 보고 인사를 할 줄도 몰라.”

연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이자 동현이 그런 연우의 머리를 한 대 툭 치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물건을 사러 왔나 하고 봤더니 그게 아니라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연우가 조금 전 맞은
머리를 붙들고 계산대 앞에서 웃고 있는 그를 노려봤다.

“재수 없어.”

“그러게 인사를 하지.”

“맨날 나만 보면 지랄이야.”

그 말에 이건이 웃으면서도 편의점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맨날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동현이지만 편의점
아가씨와 눈을 마주치고 웃을 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사람의 얼굴까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뭘 그렇게 쳐다봐. 부럽냐.”

연우의 말에 이건의 고개가 돌아갔다. 연우가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저를 쳐다보는 모습이 뭐가 되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긴 뭐 제가 송연우 마음에 든 적이 얼마나 있겠는가.

“왜 나한테 시비야?”

“너도 여친 사귀고 싶어? 그럼 김유나랑 사귀면 되겠네.”

뜬금없이 김유나 얘길 하는 바람에 이건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유나가 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저는 지금 누군가를 사귈 마음이 없었고, 그건
유나에게도 충분히 말해둔 상태였다.

“나는 대학 가면 그때 사귈 거야.”

“안 사귄다고는 안 하네.”

“어?”

“잘 사귀라고. 예쁜 애랑.”

이건이 호빵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어금니로 빨대를 꾹, 꾹 짓씹으며 그런 이건을 째려봤다. 하지만
이건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빵 하나를 다 먹어치웠더니 연우가 맛있느냐고 묻는다. 이건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제 앞에 있던 호빵을 하나 집어 던졌다.

“다 처먹어라, 이 곰탱이 새끼야.”

그러더니 홱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이건이 눈을 끔뻑였다. 왜 또 잘나가다 짜증이지? 물어볼 새도 없이 집


쪽으로 성큼성큼 가길래 호빵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 * *
준영이 엎드린 채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벅지 중간에 팬티를 걸치고 다리를 벌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꽤
자극적이었다. 도하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잔뜩 짜 넣은 젤이 녹아서 성기가 번들거렸다. 일부러 감질나게
넣었다 뺐다 하니 준영이 애가 닳는지 손을 뒤로 뻗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자꾸만 같은 짓을 반복하자 나중엔 고개를 들더니 뒤를 돌아본다.

“…야. 하아, 장난하지 마.”

아깐 뽀뽀만 해줄 것처럼 하더니, 지금은 마음이 급한지 먼저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몸을 여기저기
만지는데도 처음처럼 거부감을 내비치거나 하진 않았다. 여전히 민망한 건지 시선은 자꾸 피하긴 했지만, 그거
빼면 며칠 만에 이룬 성과는 놀라웠다.

그러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열여덟 첫 섹스 때 자신이 제대로만 했더라면. 좀 더 어른스럽게 굴었다면 그때
관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형, 팔 뒤로 줘요.”

단번에 알아들은 준영이 망설일 것도 없이 양팔을 뒤로 뻗었다. 도하가 그 팔을 붙들고선 허리를 뒤로 뺐다가 콱,
하고 쑤셔 넣었다. 그러자 몸 전체가 요동을 친다. 아, 짧은 단발성 신음에 도하가 다시 한번 뒤로 뺐다가 짧고
빠르게 콱, 콱, 쑤셔 넣었다.

으으음, 준영이 신음을 참으며 내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방음이 안 되기 때문인지 준영은 소리를 어떻게든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걸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 또한 도하는 즐거웠다. 팔을 그대로 확 잡아당기니 준영의 몸이
딸려 올라온다.

등에 가슴을 바싹 붙인 채로 한쪽 다리를 소파 아래로 내려 지탱하고서 속도를 높이니 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애썼다. 한 손은 양팔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은 앞으로 뻗어 가슴을 만지다가 위로
점점 올라가 목을 붙들었다.

목을 쥐고 살짝 조르는 느낌으로 힘을 쥐니 구멍이 더 확 조여든다. 도하가 나직하게 욕을 씹어 뱉었다.


서준영이 뭣도 모르고 자신에게 엠이라고 거짓말한 건 있겠지만, 확실히 가학적인 행위를 할 때 더 흥분하는 건
사실이었다.

손에 더 힘을 주니 입을 벌리고 헐떡이며 앓는 소릴 낸다. 그대로 목에 진하게 키스를 하고 살갗을 힘주어 빨면서


허리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퍽, 퍽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서준영이 신음을 참으려고 억, 억, 대는 소리,
젤이 녹아서 구멍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섞이며 미치게 듣기 좋았다.

계속해서 쳐대는데 준영이 흐흐응, 야릇한 신음을 내더니 갑자기 몸을 굳히고 파르르 떤다. 구멍이 조금 전보다
더 조여졌고 도하가 참지 못하고 준영의 어깨를 이로 꽉 물었다. 준영이 움찔거리며 사정을 하는 사이 도하가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숨을 골랐다.

준영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렸다. 붙들린 팔을 빼려고 했지만, 도하가 꽉 잡고 놔주질 않아 그럴 수 없었다.
“나, 하아, 사정했, 아아.”

퍽, 멈추고 있던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 올려치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 사정한 준영의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지르자 준영이 신음을 내지도 못하고 입을 벙긋댔다. 사정 직후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를
만지니 죽을 맛이었다.

놓으라고 말하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성기를 문지르는


박자에 맞춰 도하가 뒤에서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준영이 몸을 움찔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쾌감이 몰려왔다. 발끝에서부터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르르 올라오더니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눈앞에서
번쩍하고 불이 튀었다.

목이 졸린 것도 아닌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꺽, 꺽 신음을 냈다. 부들부들 떠는데


도하가 더 빠르게 구멍을 쑤시며 준영의 성기를 쥐고 마구 흔든다. 순간 울컥, 울컥, 준영의 성기에서 정액과는
다른 말간 액이 쏟아졌다.

준영은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제대로 신음을 내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파르르 몸을 떨면서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부들거렸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헐떡이는데 도하가 뒤에서 팔을 풀어주고 몸을 떼어낸다.

그러고 소파 아래로 내려와선 준영의 얼굴 앞에 섰다. 소파를 간신히 짚고 앉은 준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데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을 붙들고 저를 보게 만들었다. 초점이 풀린 준영의
눈에 도하가 제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뭘 하나 생각할 틈도 없이 눈앞에 희뿌연 정액이 울컥 쏟아져 제 얼굴에 뿌려진다. 눈꺼풀에 콧등에 하얀


정액으로 얼룩진 준영의 모습을 보고서 도하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 마지막 남은 정액까지 쥐어짜듯 하고 나서야
준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눈가는 벌겋게 부어올랐고, 넋이 나가 입을 벌린 채 제 정액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아서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턱을 붙들고 혀를 길게 내밀어 그 얼굴을 핥아줬다.

준영이 탈진한 상태인 와중에도 혀를 내밀기에 그 혀에 대고 문질렀다. 비릿한 정액 맛이 꿀처럼 달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는 사이 사정을 마친 도하의 성기가 또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 *

관중들의 함성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막 중등부 결승이 시작됐고 뒤늦게 도착한 준영이 꽃다발을 들고
관중석 쪽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중고등부 경기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도하네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꽃을 들고 그쪽으로 가는데 경혜가 먼저 준영을 발견하고 손짓을 보낸다. 미정 역시 아들이 온 걸 보곤 반가운


표정이었다.
“오느라 차 막히지 않았어?”

“지하철 타고 와서 괜찮았어요.”

“준영이 왔어? 졸업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안 와도 된다니까.”

“오고 싶어 왔겠어. 도하 녀석이 전화로 얼마나 들볶았을지 안 봐도 뻔하지.”

도하 아버지가 미안한 마음에 괜한 소리를 했고, 준영이 아니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도하랑 결승 가면 오겠다고 먼저 약속했었어요.”

그때 중등부 선수들이 하나둘씩 입장을 시작했고, 거기엔 도하가 있었다. 저지 점퍼를 턱 아래까지 올린 도하가
자리를 잡고 서선 무덤덤한 얼굴로 관중석을 한 번 돌아보다 제 부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준영을
보고서는 입이 활짝 벌어지더니 양손을 흔들었다. 그걸 보는 경혜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했다.

“어머, 어머. 쟤 좀 봐. 아까 지 엄마 봤을 때는 그냥 슥 쳐다보고 말더니 준영이 너 왔다고 표정이 싹


달라지는 것 좀 봐라. 세상에, 내 아들 맞니.”

그 말에 다들 웃었고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2 주일 전 도하를 만났는데 키는 이제 저만큼 커서 체격도 어른 같은


녀석이 얼마나 달라붙고 아직도 아이처럼 구는지 밖에서 곤란할 정도였다. 나중에 한마디 했더니 밥 먹는 내내
시무룩한 표정을 해 신경 쓰이게 했다.

아직도 자기가 아기인 줄 아는 걸까. 애교 떨고 그러는 거 보면 아기까진 아니어도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출발 준비를 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도하가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으며 몸을 풀었다.

녀석은 열여섯 치고는 체격도 몸도 꽤 다부졌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도 체격적으로 우수한 조건이었다.
코치가 왜 그렇게 수영을 시켜야 한다고 안달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물안경을 내려쓴 도하가 자리에 서서 자세를 잡았고, 곧 출발 신호음과 함께 선수들이 동시에 입수했다. 처음
출발하고 몇 초는 잠영으로 움직였는데 전에도 느낀 거지만 마치 그 모습이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유연해 보였다.

잠시 후 도하가 물 위로 솟더니 팔을 크게 휘저었다. 선수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준영이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경기에 집중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수영을 늦게 시작한 데다 전국에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모여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정작 당사자는 출발 전까지 별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턴을 할 때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자꾸만 눈이 전광판 숫자를 확인했다. 도하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질주했다. 옆에 있던 선수 하나가 마지막 속도를 올리며 따라붙었고 마지막엔 둘이 비슷하게
동시에 들어왔다.
삐- 경기 종류를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체육관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 시선이 전광판으로 쏠렸고 잠시
후 그곳 제일 위쪽에 도하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걸 보는 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하의 부모님 역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도하가 제 기록을 확인하고 나서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준영이 마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보이진 않을 테지만 잘했다고 입 모양으로 말해주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물에서 나온 도하에게 코치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고개를 돌리던 준영이 문득 제 옆에서 손뼉을 치던 미정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아주 잠깐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준영은 괜히
신경이 쓰여 더는 좋아라 할 수가 없었다.

준영이 운전대를 잡은 채 톡, 톡, 두드렸다. 경기관람을 마치고 도하네 식구와 저녁을 먹은 후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차가 여간 막히는 게 아니었다. 술을 한잔 걸친 아버지는 뒷자리에 앉아 몸을 기대 눈을
붙이고 있었고 보조석에 앉은 민주는 누구와 주고받는지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였다. 미정을 보니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민주가 준영을 불렀다.

“오빠, 또라이 사진 찍은 거 폰으로 보내줄까?”

그 말에 준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민주는 도하라면 언젠가부터 치를 떨었는데 도하가 유달리 그녀를 괴롭힌 걸
생각하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서민주. 너 오빠한테 또라이가 뭐야.”

뒤에 있던 미정이 한마디 했고, 민주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까 찍은 사진을 확인하다가 입으로 헐,
이라고 소리를 낸다. 앞차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준영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도하가 다른 사람이랑 찍은 건 완전 똥 씹은 얼굴인데, 오빠 오고 나서 찍은 사진은 모두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어.”

“그랬어?”

준영이 차가 멈춘 틈을 타서 민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건네준 휴대전화를 받아 아까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운동복을 입고 제 어깨를 감싸 안은 도하는 정말 입이 찢어져라 팔불출마냥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과 찍은 사진은 그것처럼 웃지 않았다.
“거봐, 오빠. 내 말이 맞지? 그리고 어떻게 메달을 자기 엄마 아빠한테 안 걸어주고 오빠한테 걸어줄 생각을
하냐, 경혜 이모 서운하게.”

“…정신없어서 그랬을 거야.”

“아니, 내가 볼 땐 이도하 게이야. 아무리 봐도 오빠 좋아한다니까.”

그 말에 준영이 흠칫해선 민주를 쳐다봤다. 어린 줄만 알았던 여동생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당혹스럽기만 했다.
민주가 제 휴대폰을 가져가면서 남들이 보면 아마 오빠랑 사귀는 줄 알았을 거라고 투덜댔다.

준영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데 갑자기 운전석 뒤에서 미정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 너,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무서운 소릴 하고 있어.”

“엄마는 왜 갑자기 화를 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잖아.”

“뭐가 말도 안 돼. 엄마도 같이 봤으면서 나한테 그래.”

민주가 구시렁댔고 준영은 두 모녀 사이에 껴드는 대신 운전대를 꾹 힘주어 잡았다. 조금 전 미정이 무섭다고
했던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태연한 척 표정을 애써 정리했지만, 룸미러로 잠깐 마주친 미정의 심기 불편한
눈빛을 보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 * *

뒤척이던 준영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어두웠고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 한 점 없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위쪽으로


뻗었지만 수면 등이 만져지질 않았다. 뒤늦게 제집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쯤에 등이 있었는데.

손을 더 더듬었더니 스위치가 만져졌다. 그걸 눌렀더니 머리맡에 작은 불이 하나 생겨났다. 그제야 제 옆에 자고


있는 도하가 보였다. 침대가 싱글이라 두 명이 자긴 좁았는데 끝자락에 몸만 겨우 걸친 채 웅크리고 이불도 덥지
않은 상태였다.

이불을 걷어서 도하에게 걸쳐주니 잠결인데도 거기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잠시 웃고 나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밖으로 나와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 시였다. 늘 이런 식으로 잠이 깨면 쉽게 잠들지 못하였다. 그걸 알기에


억지로 자려고 하진 않았다. 일단 물을 한 잔 마시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얼굴을 부비고 남아 있던 잠을
털어내고 기지개를 위로 켜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올려둔 시나리오가 들어온다.
그걸 들고 제일 첫 장을 넘겼다. 몇 장 넘기지 않았지만 스릴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다 보니 재미있어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30 분쯤 지났을까 안방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도하가 나온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비척거리고 집 안을 살피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준영을 발견하고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와선 허리를 끌어안는다.

“혀엉. 없어져서 놀랐잖아요.”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모습에 기가 막혀 웃다가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정돈해줬다.

“들어가서 더 자.”

“언제 깼어요?”

“30 분 정도 됐어.”

“왜요? 좁아서 불편했어요?”

“아니. 원래 자주 깨.”

그 말에 도하가 허리를 끌어안은 채 매달려 얼굴을 문지른다. 준영이 답답해서 떼어내려고 했는데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 큰 덩치로 소파에 웅크린 채 저한테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말 안 듣는 강아지 같았다. 아니,
개.

“…더 자라니까. 이따가 깨워줄게.”

도하가 대답이 없다. 자나 하고 봤더니 눈을 반쯤 뜨고선 뭔가를 생각 중이다. 그 앞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설마 눈 뜨고 자는 거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준영을 놓아주며 몸을 벌떡 일으켜 앉는다.

“바다 보러 갈래요?”

“뭐?”

“어차피 잠도 안 온다면서요. 여기서 바다까지 2 시간도 안 걸리던데. 가요.”

“지금?”

“응.”
“싫어. 힘들어.”

그 말에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준영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가면서 더 자요. 운전은 내가 할게.”

“어제 그렇게 하고도 힘들지 않아?”

“멀쩡해요. 오히려 얼굴에 광나는 거 안 보여요?”

준영이 눈을 흘겼다. 힘든 건 저뿐인 거 같았다. 도하는 어째 날이 갈수록 빤질빤질해지고 있었으니까. 보통


영화에서 보면 늙은 마귀가 젊은 기를 흡수해서 영생을 누리고 그 젊은 놈은 팍삭 늙어지던데. 물론 자신이 늙은
마귀는 아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이번엔 팔도 모자라 가까이 와선 허리를 끌어안아 강제로 일으키려 한다.

“얼른, 우리 준영이 얼른 씻으러 가자. 가서 해 뜨는 거 보고, 섹스해야지.”

그 말에 준영이 놀라서 뭐? 하고 묻자 도하가 흠칫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밥 먹자고요. 잠이 덜 깨서 헛소리한 거예요.”

준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도하는 모른 척하더니 얼른 씻으라며 안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의심이 들었다. 밥 먹으러 가는 거 맞는 거지?

* * *

빌라 입구 앞에서 도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늦게 내려오던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각각의
색을 띠던 동네가 온통 하얗게 뒤덮여 눈이 시릴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도 하늘에선 굵은 눈송이가 내리는
중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눈송이만 떨어지니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놀란 것도 잠시 도하가 준영을


쳐다보며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젠장. 거의 재난 수준이네.”
“그러게. 새벽에 눈 조금 온다고 하더니.”

“망했어.”

“잘됐다. 얼른 올라가서 쉬자.”

마침 귀찮았던 준영은 잽싸게 몸을 돌려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때 위에서 누군가 내려온다. 봤더니 5 층에 사는


할아버지다. 준영이 그를 향해 인사를 하고 한 번 본 적 있는 도하도 뒤늦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 장갑과 모자로
잔뜩 무장하고 나온 그를 보며 도하가 준영을 재촉했다.

“형, 얼른 가요.”

“어? 왜?”

두 사람이 올라가려는데 박씨 할아버지가 옆으로 가선 빗자루를 집어 든다. 노인임에도 체격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그가 빗자루를 들고 발목 위까지 쌓인 눈을 치우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가뜩이나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눈꺼풀이 더 축 늘어진 기분이었다.

도하가 못 본 척 준영을 잡아채며 속삭였다.

“얼른 가요.”

하지만 준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박씨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빗자루를 챙겨 들었다.

“눈 쓸러 나오신 거였어요?”

“응. 우리 할멈이 오전에 마을 회관 가야 하는데, 좀 치워놓을까 해서.”

뒤쪽에서 듣고 있던 도하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가 아니라 졸지에 눈을 쓸게 생겼다고
한탄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준영의 손으로 옮겨간 빗자루를 자신이 도로 가져온다.

“추워. 얼른 올라가.”

“아니에요. 주세요, 제가 할게요.”

“괜찮아. 시간 넉넉한 내가 쓸면 돼.”


“운동도 할 겸 저희가 할게요.”

준영이 아옹다옹하며 할아버지의 빗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추운데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시라며 할아버지의 등을
떠미는 걸 보고서 도하가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봤다. 박씨 할아버지가 미안하다며 위층으로 올라가자 준영이
도하를 부르며 한쪽에 있는 넉가래를 가리켰다.

“그만 쳐다보고 얼른 와서 치워.”

아, 그냥 가자니까. 도하가 투덜거리면서도 넉가래를 끌고 왔다. 바닥에 대고 쭈욱 밀자 눈이 옆으로 밀리며


땅이 드러났다. 빌라 입구 옆 개집에선 백설이가 제 다리를 베고 누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전에 강이건이 밥을
챙겨주던 그 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젠장. 바다를 가는 게 아니었어.”

“노인네 혼자 치워야 하잖아.”

“알게 뭐야.”

“그러지 마.”

준영이 본격적으로 마당을 쓸기 시작하자 도하가 넉가래를 밀며 준영 쪽으로 다가온다.

“형은 올라가요. 피곤하잖아. 내가 다 치워놓을게.”

“그럴래?”

준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빗자루를 건네주었고, 도하가 그걸 보며 슬며시 입을 삐죽였다.

“그런다고 진짜 가?”

“가라며. 빈말이었어?”

“빈말이 아니라 혼자 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그러죠. 그냥 저기 앉아서 나 쳐다보기라도 해요.”

“쳐다봐서 뭐 하라고.”
“몰랐어요? 난 형이 쳐다만 봐줘도 좋던데.”

“그래?”

“중학교 때 내가 커터칼로 손이 살짝 벤 적이 있는데 그때 형이 내 손에 약 발라주면서 입으로 불어주고 계속


봐주고 하니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준영이 도하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지 몰라 그런 거였는데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음엔 얼굴을 확 그을까. 그럼 지금처럼 좀 봐주려나.”

준영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고, 도하가 생긋 웃었다.

“감동했죠? 참사랑이구나, 이러고?”

“소름 끼쳤다, 방금.”

“얼마나 좋으면.”

“그래서인 거 같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고 준영이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하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준영의
맨손을 보고서 급하게 차로 가더니 장갑 두 개를 챙겨왔다. 하나를 준영에게 주고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착용하고 눈을 다시 치웠다.

하지만 마당이 넓어 둘이 치우기엔 역부족이었고, 도하가 무슨 생각인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눈을 쓸던


준영이 뭘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이 새끼 안 받네.”

“누구한테 하는데.”

“곰탱이요.”

곰탱이란 말에 준영이 생각할 것도 없이 위층을 올려다봤다. 지금 6 시고 이건은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도하에게 다가와선 하지 말라고 전화기를 빼앗으려는데 도하의 표정이 활짝 밝아진다.
“우리 이건이 뭐 해?”

“야 깨우지 마.”

“지금 마당으로 잠깐만 나와 봐. 백설이 없어졌어.”

전화를 툭 끊고 나서 도하가 생긋 웃었고 준영이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고개를 돌리니 집 안에 웅크린 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백설이가 보였다.

“꼭 자는 애를 깨워야겠어?”

“당연하죠. 제일 젊고 튼튼한 새낀데.”

그러더니 도하가 한쪽에 쌓인 눈으로 가서는 쭈그리고 앉아 무언갈 한다. 준영이 빗자루를 들고 가서 봤더니 눈을
뭉치고 있었다. 거기다 눈을 모아 붙이고 붙이고 하더니 제법 크게 만들어선 바닥에 대고 굴린다.

“너 눈 치우기 싫어서 시간 때우는 거지?”

“기다려 봐요, 내가 아주 멋진 눈사람 만들어 줄 테니까. 형은 이건이 나올 때까지 거기서 쉬다가 빗자루 주고
들어가요.”

“됐어, 인마.”

계속 비질을 하는데 마침 그때 빌라 입구 문이 열리면서 이건이 뛰어 내려온다. 막 잠에서 깼는지 머리는


까치집이었고 옷도 대충 걸쳐 입은 상태였다. 그가 급하게 백설이 집으로 가더니 안에 무사히 있는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이쪽으로 홱 돌렸다.

준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건이 나왔어?”

네, 선생님. 그러면서 이건이 씩씩거리며 도하에게 다가왔다.

“형 왜 거짓말했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도하가 본 척도 안 하고 눈을 굴렸다.

“나도 존나 놀랐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네?”

“치워, 빨리. 우리 둘이 여기서 뺑이치는데 넌 그 안에서 편하게 잠이 와?”

아. 이건이 그제야 둘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곧 민망해져선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자는 거 깨웠다고 더 지랄했을 텐데, 이건은 곧바로 제가 쓸 만한 걸 찾아와서는 그걸로 눈을 옆으로
치워냈다.

그걸 보면서 준영은 기특한 마음과 동시에 짠하기도 했다. 도하는 순식간에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서는 세워놓고
제 차로 가서 무언가를 한가득 들고 나왔다. 그걸 보는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호텔 방에서 트렁크
안에 들어 있던 몽둥이와 초, 당구공 그런 것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이건도 치우는 것을 잠시 관두고 눈사람 앞에 와서 신기하게 쳐다봤다.

“형 그게 다 뭐예요?”

“눈사람 만들 재료.”

빨간색 당구공으로 눈알을 박더니 몽둥이와 채찍으로 양팔을 만들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초를 아래쪽에 떡하니
꽂았다. 그걸 보고 준영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고 이건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형… 초를 왜 거기다 꽂았어요?”

“좆이야….”

“…….”

두 사람이 할 말을 잃고 서 있자 도하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번갈아 쳐다봤다. 준영은 그날 밤 일이 떠올라 제


귀가 다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알은 뻘겋고 팔엔 이상한 걸 꽂아뒀고 배엔 초까지 꽂혀 있는 눈사람은
귀여운 게 아니라 기괴했다.

“초를 거기다 꽂지 말고 좀 위에 꽂아.”


그러자 도하가 해맑게 준영을 향해 묻는다.

“발기한 것처럼?”

이 새끼가. 준영이 이를 까득 물며 초를 확 빼선 눈사람의 코에 꽂았다. 아래 꽂은 것보다 낫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상했다.

“밤에 보면 진짜 무섭겠다.”

이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준영도 어느 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 혼자만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기에 차마 부숴 버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따가 실수인 것처럼 차로 확 밀어서 뭉개 버릴까. 준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하가 다시 움직이며 열심히 눈을 치운다.

“근데 박씨 할아버진 안 나오셨어요? 원래 눈 많이 오면 제일 먼저 나오셔서 치우는데.”

“아까 나오셨다 들어가셨어.”

“할머니가 아침밥 드시고 꼭 마을회관에 놀러 가시는데, 눈 오면 못 가서 심심해하시니까 먼저 치우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대단하셔.”

“전요, 솔직히 나중에 결혼해도 그렇게까진 못할 거 같아요.”

그 말에 준영이 웃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시선이 도하에게 잠시 움직였다.

“근데요, 할아버지가 요즘 저 못 알아보시는 날이 부쩍 늘어난 거 같아요.”

“그랬어?”

“네. 기분이 좀… 슬펐어요.”

그 말을 하며 이건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할아버지가 저를 기억 못 하는 모습을 보니


속상했고, 제 부모님도 나중에 그런 날이 올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준영은 그런 이건을 보며 연우에 관해
물을까 하다 관두었다. 엄마를 만나는 거 같은데 이건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덴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는데 도하가 또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찾았더니 이미 언덕
쪽까지 내려가며 넉가래를 밀고 있었다. 요령 피울 줄 알았더니 열심히 하네.
기특해서 쳐다보다 눈사람을 보곤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코에 꽂았던 초가 다시 아래쪽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코 자리에 당구공이 하나 더 박혀 있었는데 하필 그것도 빨간색이라 눈사람은 아까보다 더 기괴해
보였다.

CH 17.

준영이 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돌아다녔지만, 마땅히 뭘 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이브고 이건과 연우에게 줄 선물은 샀는데, 도하에겐 뭘 해야 할지
고르질 못했다. 시계나 이런 건 녀석의 수준에 맞추려면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어지간한 건 다 있는 상대에게
선물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돌고 돌아 선물을 고르는 와중에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교복 위에 점퍼를
입고 연우가 매장 앞에서 무언가를 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가 보는 건 마네킹에 걸린 회색 목도리였는데
매장직원이 나와서 뭘 물어보자 고개를 가로저어놓고도 한참이나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모르고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

연우가 흠칫 놀라선 돌아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 곧 엉거주춤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를 밖에서 만나 놀랐는지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해 보였다. 그 모습에 준영이 연우가 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봤다. 연우의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던 걸까.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몸을 홱 돌려 반대로 가려 한다. 준영이 저도 모르게 그런 연우의 가방을 붙들었다.
그래도 밤에 저랑 같이 수업도 하고 하는데, 생판 남인 것처럼 인사만 하고 가니 조금 괘씸해졌다.

“어디 가?”

돌아보는 연우의 얼굴은 곤욕스러워 보였다.

“…집에요.”

“잘됐네. 나도 가려던 참인데. 저녁 먹고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연우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버스 타려면 한참을 또 걸어야 했고 그럴 바엔 얻어 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백화점 위층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던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엔 2 인분 가격인가 싶어 놀랐는데 1 인분


가격이란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뭘 고를지 몰라 고민하는데 준영이 몇 가지 메뉴를 짚어준다.

얼렁뚱땅 고개를 끄덕였고, 곧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
앉아 있으니 어색하기만 했는데 다행히도 준영이 계속 말을 걸어줬다.

“오늘 방학했어?”

“네.”

그렇구나. 저번에 봤던 걸 이야기해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아무래도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슬쩍


그날 이야기를 꺼냈다.

“저번에 밖에서 나 봤지? 미용실 앞에… 햄버거 가게.”

“아… 네.”

“실은 조금 궁금했거든. 물어봐도 돼?”

“네… 괜찮아요.”

“어머님… 맞아?”

연우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실은 한 달 전 엄마에게 연락이 왔었다.


얘기하는 도중에 그녀가 조금씩이지만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보낸 걸 듣게 됐다. 물론 그건 아버지 술값으로 모두
쓰였겠지만.

다 트고 갈라진 그녀의 손과 나이에 비해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지금까지 왜


버려뒀느냐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며 같이 살기를 원했다. 늦었지만 이제 와 엄마 노릇도 하고 남들처럼 대학도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기쁘진 않았다.

“언제부터 연락했던 거야?”

“한 달 정도 됐어요.”
“그렇구나….”

“…같이 서울에서 살재요. 엄마가.”

“너한테는 잘된 거 아닌가?”

연우가 대답 대신 또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죠.

“가기로 한 거야?”

“아직… 모르겠어요.”

“왜?”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고… 가서 적응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연우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것들은 핑계였다.

“이건인 알아?”

“…아직이요.”

“녀석이 알면 많이 서운하겠네.”

“…아닐걸요.”

연우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왜. 내가 볼 땐 이건이가 제일 서운해할 거 같은데. 너 많이 좋아하잖아.”

연우가 입을 달싹였다. 걔는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불쌍하게 생각해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것뿐이라고. 차라리 자신이 눈에서 안 보이면 강이건 인생도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신경 안 써도 되고,
괜히 엄한 놈들이 트집 잡는 일도 없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훨씬 나은 일이 아닐까
싶어졌다.

“갈 거면 너무 늦게 말하진 마.”
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세팅하는 사이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길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강이건은 지금쯤 학원에 갔을까. 올겨울 몇
번이나 더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코끝이 아려왔다.

* * *

승용차를 빌라 뒤 빈터에 주차하고 나서 준영이 차에서 내렸다. 아직 녹지 못한 눈이 곳곳에 쌓여 흙과 뒤엉켜


지저분했다. 봤더니 도하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 서울에 볼일이 있다며 올라가더니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연락도 없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언덕 아래쪽으로


차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해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도하였다. 한쪽에 차를 주차하더니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와 준영에게로 다가왔다.

준영이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깡통에 막 집어넣는 찰나였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요? 담배 피우러 나온 거예요?”

“어.”

“에이, 난 또 나 기다린 줄 알았지.”

그 말에 잠깐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춥다, 들어가자.”

“나 차에서 짐 나를 거 있는데 형이 좀 도와줘요.”

“뭔데.”

“장 본 거 조금.”

무슨 장을 얼마나 봤길래 도와달라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도하가 준영의 팔을 잡고 제 차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 트렁크 문이 열리고 나서 준영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 먹을 거며 식료품이 박스에 담겨 쌓여
있었다.

“뭐야, 이게.”
“낼 여행 가려면 이 정도 챙겨 가야죠.”

“여행? 너 어디 가?”

“너라니. 우리 여행인데.”

뭐? 준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저번에 여행 얘기 꺼내길래 봐서 가자고 하긴 했지만, 뚜렷하게


이야기가 오간 게 없어 그냥 넘어가나 보다 하고 있던 참이었다. 딱히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남는 게
시간이니 여행을 가면 좋기야 좋겠지만…. 근데 설레는 게 아니라 제 허리부터 걱정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는데 안 갈 건 아니죠?”

도하가 일단은 필요한 것만 꺼내 상자에 나눴다. 날씨가 추워 얼면 안 되는 것만 골라서 담고선 준영과 나눠


들었다. 준영이 그것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집에서 조용히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잔뜩 들뜬 도하의
얼굴을 보니 그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상자를 들고 집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하가 냉장고 앞에서 채소와 과일을 정리하는 동안 준영은 다른
것들을 한쪽에 꺼내 확인했다. 구워 먹을 고기부터 시작해 온갖 채소들이 다 있었다.

“너 어디 펜션 예약했어?”

“비슷해요.”

비슷한 건 또 뭐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음식량이 아무리 봐도 너무 많다. 냉장고로도 모자라 김치 냉장고
빈칸까지 채워 넣을 정도니, 이건 하루 이틀 먹을 양이 아니었다. 준영이 혹시나 해서 며칠 묵는 거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가서 한 달 정도 묵을 생각인데.”

한 달이란 말에 놀라서 쳐다보니 정작 본인은 아주 태연하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지금 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아니지만, 넌 다르잖아. 막상 며칠 후에 시상식도 가야 한다며.”

“그거야 갔다 오면 그만인 거고.”


정리를 마친 도하가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 준영이 지금 막 내린 커피를 도하에게 건네줬다. 일단 이거 마시고
다시 생각하라는 뜻으로. 하지만 도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한 달 동안 뭘 하면 좋을지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프로젝터랑 게임기도 가져갈까요? 심심한데.”

“한 달은 안 돼. 애들 공부도 봐줘야 하고.”

“나보다 걔들이 더 중요해요?”

“먼저 약속한 거잖아.”

“나는 형이 그럴 때마다 빼앗기는 기분 들어서 짜증 나요. 강이건이 착하고 좋은 애인 건 알겠는데 형이 자꾸


그렇게 챙기면 진짜 미워할지도 몰라요.”

도하가 시무룩한 얼굴로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거 보니 준영도 더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집을 비워놓고 한 달간 다른 곳에서 지내는 건 어려웠다. 작년 겨울에도 며칠 집을 비웠다가
보일러 온수가 터져서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럼 일단 며칠만 다녀오고 날 좀 풀리면 가자. 응?”

아예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었기에 도하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았어요, 그럼. 일주일만 다녀와요.”

“3 일.”

아, 진짜. 한 달이 왜 삼 일로 줄어든 건데.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도하의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 하나가 번뜩하고


떠올랐다. 잔뜩 구겨졌던 미간이 펴지며 입가에 웃음이 생겨난다. 그걸 본 준영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괜히
흠칫했다.

“왜 웃어, 갑자기?”

“생각해 보니 강이건도 데려가는 게 좋겠어요.”

“뭐?”
“혼자 심심할 거 같으니까 송연우도 데리고 가는 걸로 하죠.”

준영은 도하가 처음으로 도둑놈도 송선우도 아닌, 연우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여행에
선뜻 데려가겠다는 속뜻이 궁금해졌다. 물론 애들 의향이 가장 중요한 거긴 하지만.

“진심이야?”

“물론, 진심이죠. 애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래요. 깜찍하잖아.”

깜찍이란 말을 할 때 잠시 이가 빠득 갈린 거 같은데. 잘못 들었나.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니 미심쩍다 못해


불안하다. 손을 좀 닦겠다며 욕실로 들어가는 도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 * *

현관문이 열리고 도하가 들어왔다. 대충 저녁을 만들어 먹고 이건을 불러내 여행을 갈 거냐고 물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건은 준영이 간다는 말에 선뜻 간다고 했고, 연우한테는 자신이 따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아침 몇
시까지 오라고 말해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준영이 소파에 앉아 있다 막 일어나는 중이었다.

“이건이한테 말했어?”

“네, 간대요.”

“협박한 거 아니지?”

“와, 사람을 뭘로 보고. 그 자식 엄청 신났어요. 도둑놈한텐 지가 연락한대요.”

“연우.”

“그래요, 연우. 송연우.”

그러더니 막 가려는 준영을 붙들어 다시 소파로 끌고 간다. 잠깐만. 아직 가지 마요.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방에서 들어가서 잠시 후 작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걸 보며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저번에 봤던 그
속옷 사이즈의 상자였는데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심상치 않아 잠시 할 말을 잃고 쳐다보기만 하자 도하가 상자를
앞으로 내민다.

“받아요.”
“뭔데.”

“내 크리스마스 선물.”

“뭐?”

“형, 내 선물 샀어요?”

준영은 할 말을 잃었다.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을 다 돌아다니긴 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 하나
사긴 했는데, 본인 마음에 들지 그게 문제였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도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상자를
준영의 손에 쥐여 줬다. 그러고 나서 상체를 기울여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내일 밤에, 이거 입어요.”

뜨거운 입김에 준영이 흠칫 몸을 떨며 도하를 떠밀었다.

“기대할게요.”

“…혹시 팬티야? 저번에 그런 거?”

“팬티는 맞는데, 그거랑 조금 다른 거.”

“너 혹시 무슨 도착증 있어?”

“무슨 도착증?”

“왜 이렇게 팬티에 집착해?”

“아닌데. 난 팬티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팬티 입은 서준영 엉덩이에 집착하는 건데.”

“그거 그거잖아.”

“달라요. 그리고 형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샀으니까 꼭 입어야 해요. 입고 나 보여줘요.”

싫다고 거절했더니 거의 울상을 하고 애원한다. 한 번만 입어주면 다신 팬티의 팬 자도 안 꺼내겠다고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걸 받아 들었다. 이번엔 뭐지. 조금 다르다고 하니 적어도 엉덩이를 가릴 수 있는 천이라도
붙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했다.

“자고 갈래요?”

“…아니.”
“안 잡아먹을 테니 자고 가요. 내일 짐 챙기려면 형 도움도 필요해요.”

“시간 맞춰서 올라올게.”

“그냥 안고만 잘게요. 약속.”

더 대답할 것도 없이 그대로 껴안으며 옆으로 쓰러졌고 졸지에 둘은 소파에 누워 버렸다.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물귀신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포기하고 누워있으니 도하가 등
뒤에서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 냄새 좋다.

“좁아.”

“침대 가서 누울까요?”

“나는 내 집에서 자고 싶어.”

“그럼 나도 데리고 가요.”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이번엔 옆구리로 손을 넣어 꼬집는다. 자꾸 이럴 거냐고, 인색하게 굴지 말라면서 간지러움을 태우길래 준영이


견디지 못하고 기겁을 했다. 하지 말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어찌나 꽉 잡고 괴롭히는지 나중엔 거의 탈진해선
항복을 외쳐야 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하의 집에서 잠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생각보다 잘
지켜졌고, 덕분에 아침까지 푹 잘 수가 있었다.

* * *

준영이 뒤쪽을 흘깃 보니 이건과 연우는 피곤했는지 자는 중이었다. 아침에 짐을 챙겨 차에 싣는데 이건이 와서


거들고, 곧바로 연우가 도착했다. 솔직히 연우는 기대는 안 했는데 같이 가겠다고 하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넷은 짐을 챙겨 양평 쪽으로 출발했다. 짐을 많이 챙기길래 어디 멀리 땅끝마을이라도 가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나중엔 비포장도로로 달렸기 때문이다. 차가 덜컹거리니 뒤쪽에 있던 이건과 연우도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선생님, 다 왔어요?”
준영이 도하를 쳐다봤다. 글쎄. 도하의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아, 도로 좀 정비해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이 상태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고 의아해졌다. 도로를 정비해 달라고 했다니. 한참을 그렇게 달리면서 옆쪽으로
계곡이 나타났다. 이런데 누가 살기는 하는 걸까. 펜션을 여기다 지어놓으면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장을 왜 그렇게 많이 봐왔는지 이해가 됐다. 근처에 마트는커녕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느냐고 다시
물으니 10 분 정도 더 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덜컹덜컹, 차가 흔들리며 몸도 같이 흔들렸고, 10 여 분쯤
달렸을까 커다란 나무가 드리워진 사이를 지나자 평지가 나타났다.

준영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뒤에 있던 이건과 연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건이 우아아! 하고 비명


같은 감탄을 내질렀다. 다행히 평지 쪽은 잔디와 자갈로 조경해 놓아 차로 들어가는 게 훨씬 수월했다.

한쪽에 차를 주차해놓고 시동을 끄자 이건과 연우가 먼저 튀어 나간다. 준영이 차에서 내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건물은 사방이 통유리로 된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더 놀란 건 그 앞의 수영장이었다.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고,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물이 채워져 있었으며 뿌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이 먼저 그 안에 손을 담그더니 고개를 홱 돌린다.

“물이 따뜻해요!”

생전 내색하지 않던 연우도 덩달아 물에 손을 담그고 휘휘 저었다. 평지에 서서 내려다보니 산 아래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마을 하나가 작은 장난감처럼 내려다보였다. 한참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걸어선
내려갈 수 없는 거리였다. 마당에 잔디는 겨울이라 갈색이었지만, 조경도 그렇고 한두 해 공을 들인 게 아니었다.

“여기 뭐야?”

“왜요? 마음에 들어요? 사줄까?”

“그게 아니라….”

준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봄이나 가을에 왔더라면 더 볼만했을 것 같긴 했다. 건물도 그냥
대충 지은 게 아니라, 꽤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언뜻 보이는 안에 가구들도 그렇고, 전시회처럼 꾸며진 실내도
그렇고. 한눈에 봐도 펜션은 아니었다.

“큰누나가 한 번씩 와서 쉬다 가는데, 형이랑 온다니까 선뜻 내줬어요.”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혜윤이 다녀간 뒤로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함 같았다.
제 모친은 어제 연락이 와서 말일에 올 거냐고 물었다. 이제 그녀 빼곤 모두가 저와 도하의 관계를 아는 것 같아
점점 더 불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건과 연우는 벌써 저 멀리까지 가서 구경하느라 난리였다. 도하가 그들을 향해 와서 짐을 들고


가라고 소릴 지르자 쏜살같이 달려온다. 이건은 얼마나 들떴는지 가뜩이나 빨간 귀가 더 빨개진 거 같았다.

“형. 여기 진짜 좋아요.”

그 말에 도하가 피식 웃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네. 완전 끝내줘요.”

“살고 싶어?”

“네, 평생은 말고, 한 달만요!”

그 말에 도하가 웃으며 성탄절 소원으로 빌라고 얘기한다.

“일단, 장 본 거 꺼내서 안에 갖다 놔.”

도하가 차 키를 던져줬고, 이건이 그것을 받아 들고 차로 잽싸게 뛰어갔다. 트렁크 문을 열고 연우와 짐을 나눠


드는데 그때 이건의 눈에 무언가 들어온다. 연우도 동시에 봤는지 상자를 차에 걸쳐놓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엉망으로 구겨진 테니스 라켓을 가만히 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연우 역시 같은 생각


중이었는지 슬며시 인상이 구겨졌다. 이건이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도하를 한 번 봤다가 연우를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도하 형이 팼나 봐.”

“알게 뭐야. 그딴 새끼, 맞아도 싸지.”

“근데 왜 때렸지?”
“깝치다 맞았겠지.”

“곽상윤이 도하 형 고소하는 거 아니야?”

이건은 걱정했지만 연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소문이 퍼졌는데도 곽상윤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었다.
고소하는 순간 자신이 얻어맞은 걸 인정하는 꼴이니 아마 먼저 고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몰래 뒤에서
나쁜 짓을 꾸미면 꾸밀 인간이지만.

“너희 짐 안 옮겨?”

등 뒤에서 도하가 갑자기 나타났고, 이건이 우억 비명을 질렀다. 도하가 왜 그러냐고 묻자 말을 얼버무렸다.
연우는 태연하게 짐을 들고 건물 쪽으로 움직였고, 이건이 도망치듯 짐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도하가 따라가선 문을 열어줬고,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구경하던 준영도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바닥과 벽은 다 대리석이었고, 천장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매달려 있었다.

이건이 그걸 넋을 놓고 쳐다봤다. 떨어질까 무서워 잠깐 인상을 썼다가 그대로 지나쳐 도하를 따라 주방으로
움직였다. 주방 쪽엔 밖으로 통하는 문이 따로 있었고, 그 앞에는 바비큐 구이를 할 수 있는 기계와 야외
테이블이 있었다.

실내에 있는 긴 테이블에 그릇과 수저, 와인 잔이 세팅된 걸 보니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하가 냉장고를 열고 정리하는 동안 이건과 연우는 다른 짐을 챙기러 다시 차로 돌아갔다.

준영이 다가가 정리하는 걸 도우려고 하자 도하가 그를 만류했다.

“오느라 힘들었는데 올라가서 좀 쉬어요. 애들은 1 층에서 묵고 우린 2 층에서 잘 거예요.”

“우리?”

“응, 우리. 자기랑 나.”

그 말에 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일어서는데 도하가 제 손을 붙든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걸린다.

“팬티, 가져왔죠?”

준영이 대답 대신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 내용물은 확인도 안 하고 가져오긴


했는데, 벌써 걱정이 됐다.

“올라가서 쉬어요. 긴긴밤이 될 테니까”

“야…. 오늘은 아니야. 애들도 있잖아.”

“위층에 침실 따로 있는데 방음 끝내줘요. 누가 죽어도 모르니 그런 걱정은 말아요.”

준영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려갔다. 그 말뜻은 오늘 저를 죽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 온 게 과연


잘한 짓인가 싶어 기분이 아득해졌다. 입구에선 이건과 연우가 나머지 짐을 나르느라 분주하다. 차라리 그거라도
도울 생각으로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 * *

이건이 수영장 한가운데서 시체처럼 둥둥 떠서 움직였다. 연우가 수영복 위에 티를 입은 채 그 모습을 쳐다봤다.


담요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 추웠다. 도하가 자신들의 수영복도 다 준비해 줬는데 하필 삼각이라 팬티만
입은 기분이었고,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저와 달리 처음에 좀 민망해하던 이건은 이제 적응됐는지 신경 쓰지 않고 물놀이를 즐겼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건물 안에선 도하와 준영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놀러 왔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저희를 수영장에 놀게 하고 둘은
저녁을 준비 중이었다.

마주 보고 웃고 있으니 꼭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얼굴로 툭, 물이 튀겨졌다. 돌아보니 이건이


손끝으로 물을 튀기며 웃었다. 연우가 인상을 험악하게 쓰고 욕부터 내뱉었다.

“뒤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도 물에 들어와. 그러고 있으면 춥잖아.”

“깊어서 싫어.”

“아니야. 내 어깨까지밖에 안 와.”

그 말에 연우가 째려봤다. 강이건한테 어깨까지면 저한테는 목까지 잠기는데 그게 깊은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한마디 더 할까 하는데 이건이 저만치서 튜브를 하나 끌고 온다. 핑크색이었는데, 오리는 아닌 거 같았다.

“그럼 이거 잡고 타.”

“애냐?”
“그러지 말고 내려와 봐. 물도 따뜻하고 완전 좋아. 추운데 수영하니 색다른 기분이야.”

이건이 손을 내밀었고 연우가 튜브와 이건을 번갈아 바라보다 마지못해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물이
제 턱까지 차올랐다. 물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고, 추워서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튜브에 팔을
걸치고 동동거리고 떠다니니 이건이 그 튜브를 앞에서 잡아당긴다.

“내가 태워줄게.”

“아니. 나한테 신경 끄고 너 할 거나 해.”

그러자 이건이 저 멀리까지 헤엄쳐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잠수한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는데 잠시 후 제
다리 아래쪽에서 뭔가 닿는 느낌이 든다. 물속을 확인할 틈도 없이 가랑이 사이로 무언가 불쑥 들어왔다.

어어? 중심을 잡기도 전에 졸지에 몸이 물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악! 놀라서 몸이 휘청이는 바람에 이건의


머리채를 잡아 버렸고, 졸지에 머리채가 잡힌 이건이 같이 악 비명을 쓰며 휘청휘청 이리저리 움직였다.

“야, 놔놔, 아프잖아.”

“내려놔, 이 새끼야. 씨발, 안 내려놔?”

“아, 네가 먼저 놔야지, 내려놓지. 악! 머리털 다 뜯긴단 말이야. 아파아아!”

고기를 굽고 해물을 쪄 테이블에 올려놓던 도하가 창밖을 보며 웃었다. 식탁을 세팅하던 준영 역시 고개를
돌리더니 이건과 연우가 노는 걸 발견했다. 서로 목마까지 태워주고 웃으며 노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게 귀엽게 논다. 그렇지?”

“그러게요. 안 데리고 왔으면 어쩔 뻔했어.”

“너도 저만할 때가 있었는데.”

준영이 예전을 떠올리면서 슬쩍 웃자 도하가 해물을 큰 접시에 덜어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잠시 준영의
얼굴에서 아련함이 스치는 걸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저를 보는 마음이 정확히 어땠는지를.

“그때 어땠어요?”
“뭐가?”

“내가 어릴 때 형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매달릴 때, 무슨 마음이었는지 궁금해서요.”

음. 준영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도하는 굉장히 저돌적이었고, 막무가내였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땐 정말 뜨거운 불덩어리 같았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저도 같이 불타 버릴까 봐 무서웠다.

“모르겠어.”

“맨날 모르겠대.”

도하가 투덜거리며 다가오더니 준영의 어깨를 짚으며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창가를 등지고 서더니 준영의
엉덩이를 슬쩍 손으로 때리고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엉덩이를 맞을 때가 된 거지.”

“근데 진짜야. 그땐 아무 생각 없었어. 아니, 솔직히 무섭더라. 너랑 그러는 거 자체가 나한테는 죄를 짓는


것과 같았거든. 그래서 일부러 더 외면했어.”

“그래서 마음이 편했어요?”

“…아니.”

“그럼 지금은? 지금은 편해요?”

“…아니.”

“여전히 무서워요?”

준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하랑 있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랐다. 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문제에서 쉽게 헤어나오질 못했다.

도하가 철없이 군다고 해서 너까지 그러진 말라고, 제 모친이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속에 박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더는 맛있는 음식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모친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까.

딱, 도하가 다시 옆으로 오더니 눈앞에 손가락을 튕긴다. 그만 생각하란 뜻이었다. 쳐다보니 뒤를 한 번 봤다가
아이들 시선이 딴 데 팔려 있는 걸 확인하곤 얼른 준영의 뺨에 입술을 쪽 하고 누른다.

준영이 혹시나 싶어 돌아보려 하자 잽싸게 턱을 붙들고 입술을 겹쳐 문다. 밀어내려고 어깨를 붙들었더니 이번엔
손을 밑으로 내려 엉덩이를 꽉 움켜쥔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준영이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이건과 연우는 노느라 이쪽엔 관심도 없었다. 당황해선 도하를 피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너, 하지 마.”

“내가, 뭘.”

도하가 쫓아가며 못살게 괴롭혔다. 준영이 옆으로 움직이며 도망가다 의자에 툭 하고 정강이를 찧었고, 인상을
쓰며 상체를 구부렸다. 아, 씨. 도하가 가까이 와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준영의 바지를 걷어 올리자 정강이가 드러났다. 방금 부딪친 부위가 빨갰다. 손으로 그 부위를 만지고 입을
가져가 호호, 하고 불어주니 준영이 민망한 얼굴로 다리를 뒤로 뺐다.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러다 또 넘어져.”

“너만 괴롭히지 않으면 괜찮아.”

“왜 몸이 전보다 굼떠진 거 같지?”

그 말에 준영은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집에서 오래 생활하고 바깥 활동과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런지 몸이
예전보다 굼떠진 것이 사실이니까. 괜히 찔려선 너도 나이 들어 보라고 핀잔을 줬지만 도하는 어쩐지 자신만큼
나이가 들어도 날아다닐 것 같았다.

“다 차렸으니 애들 부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입구 쪽으로 가더니 이건과 연우를 부른다. 산속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하고 와서 밥들 먹으라고 했더니 녀석들이 물 밖으로 나온다. 나오면서도 티격태격하더니 결국 이건이
잔디밭에 벌러덩 자빠졌다. 그걸 보고서 도하가 큭큭대고 웃었다.

“강이건 괜찮아?”
“아니요. 엄청 아파요. 근데 형은 되게 행복해 보이시네요.”

“나쁠 건 또 뭐야.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데 와서, 맛있는 거 먹는데.”

그 말에 이건이 조금은 감격한 표정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 저도 포함됐다고 생각하니 조금 뿌듯했다. 그래도
도하가 연예인 아닌가. 과연 활동하는지 그건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가보니 그 짧은
사이 별별 게 다 차려져 있었다.

“이거 선생님이랑 형이 다 차린 거예요?”

“아니 반은 낮에 누가 만들어 놓고 간 거야. 그냥 데우기만 했어.”

“와, 진짜 맛있겠다.”

식탐 없는 연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준영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고, 자연스럽게 연우와 이건이
앉고 도하와 준영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도하가 술 하나를 따서 잔에 따라 주자 그걸 보며 이건이 표정을 굳혔다.

“형. 그거 혹시 술이에요?”

“어. 샴페인. 왜?”

“우린 아직 어린데요.”

“열여덟이잖아.”

“그러니까요.”

도하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자 연우가 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간다. 보란 듯 꿀꺽꿀꺽 먹더니 입술을
한 번 핥기까지 한다. 샴페인이라 그런지 달고 음료수 같았다. 그걸 보던 이건이 인상을 찡그리자 도하가 잔을
채워준다.

“괜찮아, 마셔. 음료수 같아. 그치 연우야?”

도하가 제 이름을 성 빼고 부르자 연우가 질색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차라리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하고
나을 것 같았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채우자 이건이 준영을 쳐다봤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준영 앞에서
이걸 먹어도 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준영도 별생각 없는 듯 웃었다.
“괜찮아. 도수 낮아.”

이건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잔을 채우자 도하가 제 잔을 들었다.

“우리의 우정과 사랑을 위해서.”

이건이 사랑이란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고, 연우와 준영은 못 들은 척했고, 도하는 혼자 신나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맛있다. 이건 역시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어릴 적 뭣도 모르고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달고 맛있는 거 같았다. 자신이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게 특별히 더 맛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입맛을 다시자 준영이 보면서 웃는다.

“이건이 맛있어?”

“네, 완전.”

이건이 연우를 쳐다봤다. 얼른 먹어보라고 할 새도 없이 연우가 남은 술을 비웠다. 그렇게 네 사람이 음식을


나눠 먹고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도하가 계속해서 술병을 내왔다. 달콤해서 음료 같아도 많이
마시니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어느 정도 밥도 먹고 배가 부르자 대충 정리를 시작했다. 이건과 연우가 나서서 자기들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지만, 도하는 어쩐 일인지 그것마저도 제가 자처하고 나섰다. 이건은 도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평소에 하는 언행을 볼 땐 손 하나 까닥 안 할 거 같은데, 음식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거기다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고. 어쩌면 저렇게 재주가 많지, 감탄하며 도하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나머지 세 사람이 뒷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도하가 설거지를 마쳤다. 다들 배가 불러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데 도하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언가를 들고 내려온다.

그의 손에 작은 상자가 하나 들려있었다. 상자를 먼저 발견한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설마, 저거 이상한 건


아니겠지. 도하가 그것을 테이블에 놓고 상자를 위로 올렸다. 다행히 이상한 건 아니었고 흔히 볼 수 있는
젠가였다.

“자,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젠가 타임.”

이건이 제일 꼭대기 나무블록 하나를 집어 들고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봤는데 거기에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다. 옆에 앉아 있던 연우도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기울이고 글자를
확인하더니 대번 인상을 구겼다.
[상대방 뺨에 뽀뽀하기.]

심상치 않음을 느낀 준영이 상자를 확인했다. 거기에 커플 젠가라고 적힌 걸 보고 덩달아 이건과 같은 표정이
됐다. 오롯이 도하 혼자 뭐가 좋은지 웃고 있었다.

“자, 이제 커플을 정해봅시다.”

커플이란 말에 도하를 뺀 나머지 세 사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들 하기 싫다고 하자 도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려놓는다. 작은 상자였는데 그걸 내려놓고 이기는 사람에게 주겠다며 뚜껑을 여는 순간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골드바가 들어 있었다. 이건이 진짜 금이 맞나 싶어 가까이 가서 확인하고 나서 연우를 쳐다봤다. 진짜 금이었다.


그걸 보는 준영이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네가 이런다고 할 거 같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어깨높이로 어정쩡하게 손을 들었다.

“저 할래요.”

도하가 빙긋 웃었다. 역시 도둑놈. 물욕이 아주 끝내준다니까. 이건도 잠시 준영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손을


든다. 저, 저도요. 혼자 남은 준영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짓자 도하가 한쪽 눈썹을 슥 올린다.

“3 대 1 이네. 해야겠네.”

준영이 곧 자포자기한 얼굴로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도하가 웃더니 나무블록을 가운데 쌓아놓고,
손가락을 한 번 풀어준다.

“그럼 커플을 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정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이건이랑 연우랑 하고 나랑 준영이 형이랑 하는
게 낫겠지?”

“나는 별로.”
준영이 대번 별로라고 하자 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연우도 꽤 불편한
기색이었다. 자기도 싫다면서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그러자 도하가 그런 연우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럼 송연우, 나랑 커플 할래? 볼에 뽀뽀도 하고.”

그러자 연우가 ‘아, 씨발!’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어디서 욕을.”

“…죄송해요. 너무 소름 끼쳐서 그랬어요.”

“거봐. 너도 싫지. 그러니까 그냥 강이건이랑 해. 난 준영이 형이랑 할게.”

이건이 자긴 아무 상관 없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는 다르게 별생각 없는 이건을 향해 연우가 눈을 흘겼고
준영도 곧 포기한 채 시작하라고 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나니 도하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양주를
챙겨온다. 말릴 새도 없이 그걸 아주 작은 잔에 따르고선 가운데 올려놨다.

“미션 수행 못 하면 이거 마시기.”

“야, 얘들은 미성년자잖아.”

“괜찮아요. 전 할래요.”

아니나 다를까 연우는 골드바를 노려보면서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중이었고, 잠시 망설이던 강이건 역시도
하겠다고 거들었다.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었다. 하지만 준영은 고민이 됐다. 어른이 돼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술을 먹이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하지만 저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놀러 가서 어른들 몰래 몇 번 술 먹고 다닌 걸 생각하면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너무 말리면 꼰대처럼 보일까 봐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러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게임이 시작됐고 이건이 먼저 나무블록 하나를 뽑았다. 그런 다음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돌렸다.

[상대방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건이 그걸 들고 연우를 쳐다봤다. 진짜 커플은 아니지만 연우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라. 연우가 앞에 놓인


과일 안주를 집어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었다.

“연우한테 듣고 싶은 말 있어?”
“네. 이름 좀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맨날 저한테 욕해요. 병신이라고 하고.”

마치 고자질을 하는 것처럼 준영에게 일러바치자 준영이 웃었고 연우가 이건을 향해 눈을 흘겼다. 네가 병신 짓을


하니 병신이라고 하는 거라고 둘이 또 티격태격한다. 도하가 그런 둘을 향해 시끄럽다고 하며 다음 사람 뽑으라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이번엔 연우가 뽑았다. 그걸 확인하는 연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건이
들여다보더니 제가 대신 읽는다.

“상대방과 10 초간 눈 맞추기.”

“오오, 양호하네.”

도하가 얼른 하라고 하자 이건이 과일을 집어 먹으며 연우를 향해 돌아앉는다. 이건이 눈을 부릅뜨고 일부러 웃긴
표정을 짓자 준영도 덩달아 웃었다. 하지만 연우는 어쩐 일인지 쭈뼛거릴 뿐 제대로 돌아앉질 않았다.

“야, 빨리해.”

도하의 재촉에 연우가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이건과 눈이 마주했다. 일, 이, 삼, 도하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이건이 뭐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속쌍꺼풀이 있고 위로 살짝 올라가 매서워 보이기도 하는 눈이 웃으니 반달처럼
휘어졌다. 연우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도하가 바로 지적하고 나선다.

“피하면 벌주.”

“눈 가려워서 잠깐 그랬어요.”

그러더니 제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한다. 10 초가 끝나고 나서 이건은 무사히 넘어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연우는 어쩐 일인지 귀가 빨개져서는 대리석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차례가 된 도하가 손끝으로 고른다. 그걸 보며 준영이 입을 꾹 다물고 쳐다봤다. 제발 평범한 게 나오기를.


눈 맞추기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긴장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데 도하가 아래쪽에서 하나를
뽑아 든다. 그걸 뽑아 아무도 안 보이게 저 혼자 읽더니 금세 입꼬리 한쪽이 피식 올라갔다.

준영은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져 얼른 몸을 기울이며 확인하려 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도하가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돌렸다.

“상대방 귀에 5 초간 바람 불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이건은 깔깔대고 웃으며 좋아했다. 연우는 아직까지 귀가
빨개져선 그런 이건을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 도하가 준영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했다.

“이리 와요.”

“아, 그냥 술 마실래.”

“먹어도 내가 먹는 거지, 형이 먹는 게 아니에요. 빨리 오라니까.”

준영이 인상을 쓰다가 마지못해 옆으로 가서 앉았다. 도하가 붙어 앉더니 귓가에 바싹 입술을 붙인다. 입술이
귓불에 닿자 준영이 흠칫해선 옆으로 도망가려 했고 도하가 그런 준영의 얼굴을 억지로 붙들었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데 준영의 표정이 오만상으로 구겨진다.

그걸 보며 이건이 좋아죽겠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연우도 이번엔 웃겼는지 입술을 꾹 누르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5 초가 끝나고 나서 도하가 잡고 있던 준영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새빨갛게 변한 준영의 얼굴을 보고서 도하가
배시시 웃었다.

“좋았어요?”

“닥쳐.”

준영이 제 귀를 문질렀다. 이건과 연우는 그저 이게 게임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준영은 그게
아니라 괜히 도하가 미워져 눈을 흘겼다. 다음 차례는 저였는데 뭘 뽑을지 긴장됐다.

차라리 파트너 한 대 쥐어박기 같은 게 있으면 좀 속이 후련할 거 같은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건지.


밑에서 하나 뽑아서 가져왔는데 그걸 보고 잠시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나 싶어 도하가 몸을 기울였다가 거기에
적힌 글자를 읽어줬다.

“상대방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은?”

준영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도하가 고개를 기울여 그런 준영을 쳐다본다.


“얼른 대답해요. 나한테 미안했던 순간 언제였어요?”

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나무블록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건의 눈이 커졌고, 연우도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 싶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도하가 그걸 낚아채선 제 입에 털어 넣는다. 지켜보던 이건이 반칙이라고 하자 도하가 생긋 웃는다.

“흑기사야.”

그런 도하를 보며 준영이 씁쓸하게 웃었는데 이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준영이 도하에게 미안할 게 뭐가
있겠는가. 더 궁금해서 물을 새도 없이 다음 차례는 연우가 됐다. 조각들이 빠진 탑을 가만히 쳐다보던 연우가
그중에 하나를 빼냈다. 내용을 확인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이건이 대신 읽었고 도하가 옆에서 거들었다.

“없다고 말하기 없기.”

연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술잔으로 손을 가져간다. 이건이 인상을 구겼다. 정말 없으면 아무나 대충 얘기하면
될 것을. 술잔이 입술에 닿자 연우가 넘기지 못하고 와락 인상을 쓴다. 아이들과 어울리며 맥주와 소주는 먹어본
적이 있지만, 양주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술을 잘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인상을 구기니
지켜보던 이건이 그 잔을 빼앗아간다.

“저도 연우 흑기사요.”

그러더니 그걸 훅, 입에 털어 넣고 얼굴이 시뻘게져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억. 그걸 보고 도하가 큭큭대고


웃으며 좋아했고 준영은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연우는 그런 이건을 보며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딸기 하나를 집어 슬쩍 건네줬다.

“이야, 그래도 딸기도 챙겨주네. 우리 서준영 씨는 나 아무것도 안 주던데.”


도하의 뼈 있는 농담에 준영이 티 나지 않게 눈을 흘겼고, 이건은 그것 역시도 농담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연우는 정말 두 사람이 연애하는구나 확신이 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는데. 오늘 둘이 붙어
있으니 분위기도 그렇고. 준영은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지만 도하는 꽤 많이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다시 이건의 차례가 됐고, 쌓아 올린 나무블록이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질 때까지 게임이 계속됐다. 각자 돌아가며
양주를 몇 잔씩 먹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우는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대답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그중에 반은 강이건이 흑기사를 자처하는 바람에 나중엔 둘 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보다 못한 준영이 이제 그만하자고 판을 엎고 나서야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온 준영이 욕실에서 세수하고 거울을 봤다. 술을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나와선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고 트렁크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도하가 선물이라고 준 상자였다. 열어서 확인하지 않아도 속옷인 걸 알 것 같아 그걸 그냥 트렁크 안쪽에


넣어두는데, 마침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하가 뒷정리를 마치고서 2 층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뭐 해요? 씻었어요?”

“아니, 일단 짐 정리하느라.”

도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먹고 놀고 게임을 하다 보니 1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연우는 생각보다 술이


약한지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널브러졌고, 이건 역시 연우의 흑기사를 한답시고 대신해서 먹더니 뻗어 버렸다.

두 녀석을 침대 위에 사이좋게 옮겨 놓고 나니 뒷정리할 것이 가득했다. 준영이 먹은 자리를 치우고 정리하는


동안 도하가 설거지와 나머지 뒷정리를 담당했다.

“다 치웠어?”

“네. 힘들어 죽겠네. 저것들을 부려 먹어야 하는데, 어린 것들이 술 먹고 뻗어 버리고.”

그 말에 준영이 웃었다. 연우는 술 몇 잔이 들어가자 평소와 다르게 잘 웃었다. 이건은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도하가 나중엔 닥치라고 핀잔을 주자 눈을 흘기더니 풀썩 쓰러져 잠들었다.

“진상들.”

“귀엽잖아.”

그 말에 도하가 가까이 오더니 준영의 뺨을 붙들고 저를 보게 만들었다. 준영 역시 술 몇 잔이 들어가서 그런지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나만 귀여워해요. 고삐리들 말고, 나만.”

귀여운 협박에 준영이 웃음을 터트리고 그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도하가 그대로 쪽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덤벼든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던 준영이 카펫으로 넘어졌다. 비키라고 하는데도 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뺨이며
콧등이며 쉴새 없이 쪽쪽 거리면서 뽀뽀를 해댔다. 혀를 내밀어 턱이며 뺨을 마구 핥고 빨길래 준영이 그런
도하의 얼굴을 밀어냈다.

“씻고 와.”

“씻고 와서 해도 돼요?”

그 말에 준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1, 2 층이 분리됐다고는 하지만 아래층에 있는 녀석들이 신경이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도하가 슬쩍 웃는다.

“아까 말했잖아요. 여기 방음 끝내준다니까.”

“그래서 뭐.”

“오늘 신음 소리 제대로 들려줘요.”

“시끄러워. 애들 깨.”

“안 깨요. 재들 아까 물놀이하고 그래서 더 피곤할걸요. 내일 점심까지는 푹 잘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면서 도하가 다시 준영의 뺨을 감싸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귀를 만져주고 한다. 손길이 닿으니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하품하며 멍한 표정을 하자 도하가 인상을 구기며 준영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

“잠들면 안 돼요. 얼른 가서 씻고 나한테 선물 줘요.”

“어?”

“모른 척하지 말고. 얼른.”


도하가 몸을 떼어내면서 준영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준영이 어울리지 않게 졸린다고 투정을
부리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그대로 준영의 옷 가방을 열어 살핀다. 말릴 새도 없이 어제 선물한 상자를
찾아내더니 그걸 준영에게 내밀었다.

“침실에 욕실 있거든요. 거기 가서 씻고 누워서 기다려요. 난 거실 욕실에서 씻고 얼른 갈게요.”

도하가 준영의 빗장뼈 부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은근히 노골적인 표정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준영이 으, 하는
표정을 짓자 본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떠밀어 침실로 들여보낸다.

“자면 안 돼요. 꼭 그거 입고 기다려요.”

다시 한 번 말하며 윙크까지 날리더니 침실을 빠져나간다.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보다 손에 든 상자 뚜껑을


열었다. 반투명 포장지에 싸여 있는 그것을 펼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속옷이었다. 흰색이었는데 아무래도 모양이
좀 이상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직접 꺼내 펼치는 순간 준영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팬티는 그냥 흰색이 아니라 앞뒤가


다 레이스였다. 놀라서 쳐다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걸 꾸깃꾸깃 접어서 상자에
쑤셔 넣고 나서 충격받은 얼굴로 욕실로 들어갔다.

도하가 씻고서 흰색 가운을 입고 나왔다. 거실을 지나쳐 침실로 가는데 불빛 한점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씻었나 하고 들어가 보니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서 쥐죽은 듯 누워 있는 준영이 보였다.

침실 역시 통유리창이라 밖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는데 달이 밝은 날이라 그런지 조명 없이도 침실 안은 어느 정도


물체가 식별될 정도였다. 그쪽으로 가서 머리맡 등을 하나 밝히고 보는데 준영이 눈을 꾹 감은 채로 미동조차
않는다.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키며 ‘형?’ 하고 소리죽여 불렀지만 역시 묵묵부답이다. 더 가까이 가선 그 앞에


꿇어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자기야?’ 하고 부르니 입술 끝이 미세하게 움찔한다.

오호라, 자는 척을 하시겠다. 너무 기가 막히고 귀여운 행동에 슬쩍 웃음이 나선 ‘아아, 자면 어쩔 수 없지.’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 앞에 서서 제 가운을 벌리고 이미 발기한 성기를 꺼내서 쥐곤 준영의
입술 근처로 가져가 귀두를 입술에 대고 문질렀다.

입술을 벌리듯 꾹 힘주어 누르니 준영이 성기를 탁, 때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졸지에 성기를
얻어맞은 도하가 그대로 주저앉으며 억 신음을 냈다. 침대에 이마를 대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준영이 흠칫해선
괜찮으냐고 묻는다. 고개를 치켜드는데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배시시 웃는다.

“역시 때리는 거 좋아한다니까.”


“이게 진짜.”

준영이 베고 있던 베개를 집어 들고 던지려 하자 도하가 얼른 침대로 올라와선 준영의 팔을 붙들고 몸 위로


잽싸게 올라탔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지독하게도 색정적이고 음습해서 준영은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시선을
피했다.

“그러게 왜 자는 척을 해요.”

“오죽하면 그럴까?”

“섹스하기 싫어요?”

준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지. 도하는 여태 사귀었던 어떤 사람들보다 저를
쾌락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섹스를 끝내고 혼자 있을 때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가. 죄책감과 함께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려왔으니까.

그게 또 도하에겐 미안했고. 그래서 아까 미안한 적이 언제였느냐고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도


많아서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지 미안한 게 없는 게 아니었다.

“대답 없으면 싫지 않다는 걸로 알게요.”

준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하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다시 쪽쪽, 입을 맞추더니 준영의 목덜미에 제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샴푸 냄새는 달라졌지만, 준영에게서 나는 특유의 체향은 그대로였다.

다시 한 번 같은 짓을 반복하니 준영이 눈을 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도하의 이런 행동들이 소유욕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 턱과 입술을 핥아주더니 다시 눈을 맞추고 내려다봤다.

“팬티? 입었어요?”

“…어디서 그런 걸 구해 왔어? 네 취향이야?”

“아니 난 원래 그런 취향 없었는데, 형 엉덩이에 입히면 진짜 예쁠 거 같아서. 입었어요?”

“변태 새끼. 넌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뭐 어때요. 우리 둘만 하는 건데. 남들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입었어요?”

준영이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올려 도하의 손을 붙들더니 아래로 끌어당긴다.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그


손을 붙들고 제 수면 가운 안으로 집어넣었다. 도하의 손끝에 그냥 천과는 다른 질감의 속옷이 만져졌다. 그것도
모자라 준영이 도하의 손을 붙든 채로 제 성기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만족해?”

“와, 직접 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네.”

이래서 좋다니까. 준영의 성기 위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물처럼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과 성기가


마찰하자 준영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술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장소라 그런지 평소보다 행동이
과감해졌다.

그대로 양손을 뻗어 도하의 얼굴을 끌어당겨 제 입술을 포갰다. 도하가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 넣고 아래로는
준영의 성기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준영이 스스럼없이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무릎을 세우고 손을 내려 도하의
가운 끈을 풀고 어깨 뒤로 벗겨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자 그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어루만졌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지 몸이
뜨거웠다. 등 뒤로 손을 옮겨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하체를 밀착하게 했다. 그러자 도하가 어깨에 걸친 가운을
마저 벗으며 웃었다.

“오늘 되게 적극적이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선물 주는 김에 확실하게 주려고.”

“세상에, 예뻐라.”

쪽, 그렇게 입술을 맞추고 나서 준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오늘따라 느긋하게 구는 도하와는 달리 준영은
진작부터 애가 닳아 아래를 들썩였다. 도하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손, 묶어요?”

준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끄덕이자 도하가 준영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침대로 내려오더니 무언가를
가져온다. 준영이 뒤로 손을 모으고 눈을 반쯤 감고 기다리는데 잠시 후 목 안쪽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무언가
채워진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 고개를 돌렸는데 목에 감긴 끈이 당겨지며 이번엔 손목에 채워졌다. 팔을 움직이려고 하니


목을 감고 있던 가죽 줄이 팽팽해졌다.

“뭐야, 이거?”

“아프거나 불편하면 말해요. 괜찮아요?”

괜찮으냐는 물음에 준영이 대답 대신 침묵했다. 도하가 긍정의 뜻으로 알아듣고 불을 한 단계 밝혔다. 조금


전보다 훤해진 침실 안에 준영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아랫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가 움직였다. 잠시 후 도하가 준영의 가운을 들추자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감싼 레이스 천이
들어왔다. 하아. 그 모습에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조금 놀려줄 마음으로 선물한 것도 있는데 막상
입은 모습을 직접 봤더니 하지도 않았는데 사정할 것 같았다.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더니 몸이 흠칫 굳는다. 다른 쪽 엉덩이도 움켜쥐고 흔드니 준영이 흐음, 하고 신음을 냈다.

“괜찮아요?”

“…응.”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종아리 위쪽에 자리를 잡고 상체를 숙였다. 준영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꽉 붙잡아
벌리곤 혀를 가져다 댔다. 애널 입구는 가느다란 팬티 끈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했는데 그 부위를 혀로 핥아주자
준영이 고개를 번쩍 들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혀끝으로 그 부분을 문지르며 레이스 천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핥았더니 준영도 애가 닳는지 묶인 손을 아래로
내려 도하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사정했다.

“얼른.”

지익, 레이스 속옷이 찢겨나가자 반쯤 감겨 있던 준영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도하가 완전히 벗은 채 속옷을 찢고
그 빈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애널을 핥았다. 준영이 시트를 꾹 쥐면서 얼굴을 파묻었다. 엉덩이를 쥔 손이 더
그악스러워졌고 축축한 혀가 입구를 건들 때마다 발끝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 그만하고… 이제… 으읏.”


애끓는 목소리에 도하가 입을 떼어내고 손가락을 가져갔다. 검지와 약지를 구멍에 대고 밀어 넣으니 적당히 풀린
안쪽은 무리 없이 손가락 두 개를 받아들인다. 끝까지 집어넣고서 앞뒤로 움직여 주니 준영이 움찔거리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머지 한 손으로 볼기를 움켜쥐고 비틀고 손가락으론 안쪽을 벌리고 쑤셔주자 준영이 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선
숨을 헐떡인다. 찌걱대는 소리와 준영이 신음을 참으며 내는 야릇한 소리가 섞여 가뜩이나 넓은 침실 안에 울렸다.

손가락으론 만족이 안 됐는지 준영이 더 해달라는 것처럼 엉덩이를 살짝 위로 들며 들썩이자 도하가 손가락을
빼내고선 위에 올라타 자리를 잡았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기둥을 잡고 입구에 맞추고 꾹 누르니
손가락보단 조금 더디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들어간다.

준영의 등줄기 부분이 경직되는 게 보여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어루만져 주다가 반쯤 들어갔을 때 그대로 어깨를
잡고 콱, 하고 쑤셔 넣자 몸을 파들거리면서 윽, 하고 신음을 크게 낸다.

등에 가슴을 겹치며 끌어안으니 준영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입을 벌린 채 헐떡였다. 눈동자는 잔뜩 풀려 있고


입술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벙긋댔다. 도하가 입술 안쪽으로 제 손가락을 넣으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혀를 움직여
그 손가락을 빨고 핥는다.

그 상태로 준영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핥으며 천천히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빈틈없이 삽입된 채로 안에서
비벼지니 성기가 마치 애널 내벽에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아아, 아, 하체를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이 들어간 입안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하가 손가락을 빼주니 눈동자를 움직여 도하가 있는 뒤쪽으로 보려 한다.

“…세게, 응?”

도하가 준영이 차고 있는 목줄을 건드렸다. 손목과 연결돼 꽤 팽팽했는데 혹시라도 목이 조이는 건 아닐까 관계를
맺는 와중에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풀어주느냐 묻자 준영이 헐떡이며 고개를 젓는다.

몸에서 내려오며 뒤로 물러나자 준영이 고개를 돌려 아쉬운 표정을 했다. 한참 좋았는데 왜 빼는 거냐고 눈빛으로
애끓는 시선을 보내자 도하가 알아채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릎 꿇고 엉덩이 위로 들어봐요. 잘 보이게.”

잠시 머뭇대던 준영이 그대로 무릎을 앞쪽으로 당기며 구부렸다. 팔이 묶인 상태라 한쪽 뺨과 어깨로만 바닥을
지탱했고 엉덩이는 자연스럽게 하늘로 올라간 모양이 됐다. 힘들어 다리를 다시 뻗으려고 하니 도하가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

아. 준영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움찔거렸다. 도하가 그 뒤에 자리를 잡고 허리를 세웠다.

“이제 엉덩이 내리면 맴매할 거야.”


볼기를 꽉 움켜쥐더니 그 위에 침을 뱉는다. 자신이 뱉은 침이 흘러내려 애널을 적시는 걸 보고 상체를 숙이며 그
부위를 핥았다. 혀를 뾰족하게 만들고서는 애널 안으로 집어넣으니 준영이 신음을 참지 못하며 엉덩이를 좌우로
움직인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면 손가락이 들어와서 괴롭히고 손가락이 빠지면 혀가 들어오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아까부터 발기한 제 성기에선 프리컴이 뚝뚝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마저도 팬티 앞부분 레이스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찢어진 팬티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뒤에서 자리를 잡고
기둥을 쥔 채 입구에 대고 문질렀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곳에 귀두를 대고 꾹 누르자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짐승처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꾹 누르면서 허리를 붙들고 잡아당기니 점점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완전히 맞물린 상태가 됐다. 도하가 앞쪽으로
손을 뻗어 준영의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제발 빨리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오늘따라 하다 말다 애만 태우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하야, 제발.”

“하고 싶어요?”

“…응.”

“애원해 봐요….”

“해줘….”

“그건 명령이고.”

개자식. 준영이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린 소리에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앞쪽 준영의 성기만 만지작대고 있으니 준영이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해주세요….”

“주인님.”

“…….”

“싫으면 말고.”

“…해주세요, 주인님. 으읏.”


님, 자가 끝나기 무섭게 도하가 골반 부분을 양손으로 붙들더니 갑자기 성기를 뒤로 쑥 뺐다가 앞으로 콱 쑤셔
박는다. 힘을 버티지 못하고 준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는 걸 다시 잡아채선 미친 듯이 박기 시작했다. 몸이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리며 준영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짧게 신음을 토막 쳐서 흘려보냈다.

“아, 아, 잠, 잠깐, 아, 아.”

“멈출까? 후우, 그만, 해?”

아니. 아니, 계속해줘. 준영이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시트에 뺨이 쓸리고 한쪽 어깨로만 지탱하려니 몸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졌다. 그때 도하가 묶인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목을 감싸고
있던 줄이 당겨지며 준영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순간 구멍이 더할 나위 없이 좁혀지며 성기를 씹어먹을 듯
조여온다.

도하가 아, 씨발. 욕을 내뱉으며 허리를 미친 듯이 움직였다. 철제로 된 더블 침대가 끼익. 끼익 소리를 냈고


방 안은 온통 음탕한 소리로 뒤범벅돼 마치 매음굴 같았다.

“도, 도하, 나, 사, 아, 아.”

손도 대지 않았는데 미칠 것 같은 쾌감에 그대로 사정을 해 버렸다. 몸이 흔들리니 정액이 분출되며 시트에


그림을 그리듯 흩뿌려졌다. 사정했다고 제발 멈추라고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꺽, 꺽, 신음만 내는데 저번처럼 또다시 공포 같은 쾌감이 밀려온다. 준영이 발끝을 구부렸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위라곤 그곳뿐이었다. 꺽, 꺽,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몸을
휘저으며 마구 돌아다니고 이곳저곳에서 폭탄처럼 터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불타서 없어지는 것같이 뜨겁고 이대로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느껴졌다. 정액인지 뭔지 자꾸만
나오는데도 도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기계 같았다. 지치지 않고 쳐대는 바람에 결국 준영이 나중엔
제발 그만하라고 빌어야 했다.

* * *

잠결에 누군가 제 머리를 만지는 게 느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어느 부위가 아픈 건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그랬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나니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풍경이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준영이 누워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젠 정신없기도 하고 밖이 워낙 어두워 몰랐는데 침실 한쪽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에 누군가의 팔이 감겨 있다. 슬쩍 침대 시트를 들치고 봤더니 도하가 제 몸에 팔과


다리를 감고 있었다. 둘 다 알몸이었고, 시트 안에서 풍기는 비릿한 정액 냄새가 코끝을 어지럽혔다.
어젯밤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쳤다고 자책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하의 팔을 걷어내고 품에서 벗어나 상체를
일으켰다.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어제 봤던 마을이 보였다. 누군가 밖에서 지켜볼 수 있는 높이도 아니지만,
훤히 드러난 공간에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정사를 벌인 걸 생각하니 괜히 도둑질하다 들킨 것마냥 귀가
뜨거워졌다.

몸을 움직여 침대를 내려가려는데 손목이 붙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눈을 떴는지 도하가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잠결이라 그런지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준영이 더 자라고 말을 하려는데 목이 따갑다. 큼, 한


번 가다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어젯밤 제가 한 말과 행동들이 떠올라서 도하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손을 잡아 뺐다.

“더 자….”

도하가 몸을 앞쪽으로 움직이더니 내려가려는 준영의 허리를 붙들고 다시 제품으로 끌어당긴다. 준영의 엉덩이로
단단하게 발기한 녀석의 성기가 닿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저건 24 시간 발기돼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무슨
약이라도 처먹고 있는 거든가. 이 자식 도핑테스트 같은 거 해봐야 하나.

“몸 괜찮아요?”

“…응….”

일부러 창피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도하가 고개를 들어 준영의 안색을 살피려 한다. 화났나 보려는 것
같았다. 준영이 그 얼굴을 슬쩍 밀어냈다. 쳐다보지 마.

“왜 그래요? 화났어?”

“쪽팔려서 그래.”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심장이 간지럽다. 그러자 도하가 이번엔 준영의 어깨에 쪽쪽,
가볍게 키스하더니 거기에 제 뺨을 문지른다.
“난 존나 좋았는데.”

“…….”

“우리 일찍 일어난 김에 나갔다 와요.”

“어딜.”

“아침 먹을 거 사러. 근처에 바다도 있고, 수산시장도 있어요.”

준영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양평 근처에 바다가 있다고? 아무리 봐도 죄다 산뿐인데. 생각을 더 정리할 것도
없이 도하가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준영이 몸을 바로 뉘이며 그런 도하를 올려다봤다. 어제
그렇게 미친놈처럼 박아대더니 얼굴은 광이 나다 못해 꽃이 핀 것처럼 화사하다. 세상에. 이 자식 무슨 흡혈귀
아닐까.

잠시 그런 상상을 하는데 도하가 상체를 숙여 준영의 뺨에 마구 뽀뽀를 한다.

“씻고, 출발해요.”

“힘들어 죽을 거 같아.”

“가면서 자요. 멀지 않으니까.”

준영이 망설이는데 도하가 얼른 가자며 보챈다. 젊은 놈이라 그런지 기운도 좋다. 더 잠이 오진 않을 거 같아


준영이 체념한 채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대충 씻고는 나가야 할 것 같아 먼저 가운을 주워 입었다.
허벅지부터 시작해 온몸이 당기고 아팠다.

그때 발끝에 다 찢어진 레이스 팬티가 밟힌다. 그걸 보니 다시 귀가 뜨거워지는 거 같아 얼른 집어 가운 주머니에


넣고는 욕실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CH 18.

준영이 차량 앞 좌석 거울을 내리고 목을 확인하니 붉은 자국이 흐릿하게 나 있는 게 보였다. 손목에도


마찬가지였다. 외투를 위로 당겨 그 자국을 감추고 나서 심란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도하는 뭘 하는지
아직 나오지 않아 먼저 차에 타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제 자신들이 머물던 2 층을 올려다보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누가 이렇게 밖에서 봤으면…. 아찔한 생각에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가, 어제 그 생각이 나서 화끈대는 뺨을 다시 문질렀다. 더 해달라고 보채는 음성, 도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던 제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니 어디 굴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줄이 당겨 목이 졸릴 때마다 쾌감이 두 배가 됐다는 걸.


“진짜 엠이었나….”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33 년 만에 처음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도하가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 괜히


뻘쭘해져서는 얼른 창 쪽으로 자세를 틀고 앉았다. 잠시 후 운전석 문이 열리고 도하가 탔다. 시동을 걸더니
뒤쪽으로 팔을 뻗어 담요 하나를 끌고 와 준영에게 꼼꼼하게 덮어준다.

“좀 자요. 가려면 30 분 정도 걸려요.”

“…응.”

“시트 뒤로 넘겨줘요?”

“아니. 아직 괜찮아.”

여전히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준영을 보고서 도하가 다정하게 웃었다.

“출발해요?”

“…가.”

시동을 켜고 도하의 승용차가 움직여 산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그런지 새벽에 본 숲은


음산하다 못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시선을 돌려 도하를 보니 운전대를 잡은 채 별다른 말이 없다. 시트가
데워지고 앞에선 따뜻한 히터가 틀어져 있으니 점점 잠이 쏟아진다. 깨려고 얼굴을 문질렀더니 도하가 손을 뻗어
그 손을 붙들었다.

“자요. 가서 깨울게.”

“너도 졸리잖아.”

“난 괜찮아요. 말짱해.”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말짱해 보였다. 씻고 나온 덕분에 더 빤질거리는 거 같아 조금 얄밉게 보이기까지 했다.


저를 보고 씩 웃는 얼굴을 더는 쳐다보지 못하고 창가 쪽을 보는데 시트가 뒤로 젖혀지며 몸도 같이 넘어갔다.

자요. 도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준영이 눈을 감았다. 못 잔 데다 육체적으로 혹사를 당해서 그런지 잠은
너무도 쉽게 쏟아졌다. 차가 비탈길을 내려가느라 한 번씩 요동치는데도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갔다.
음악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의식은 깨어났지만, 눈꺼풀은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몸을 뒤척이는데 온몸이 다 아프다. 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승용차 천장이었다.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더니 거기에 도하가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는데 잠이 덜 깨 그 모습이 흐릿했다. 벌써 시장에 다 온 건가. 금방 잠든 거 같은데.

몸을 일으키는데 아아, 신음이 저절로 터진다. 허리가 뻐근해 그곳을 손으로 짚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눈이 커졌다.
어라? 잘못 봤나. 얼굴을 다시 문지르고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다시 쳐다봤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눈이 더 크게 뜨여졌다. 통화하던 도하가 돌아보다 준영을 발견하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가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운전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일어났어요? 아까 도착했는데 너무 곤하게 자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준영이 대답 대신 창밖을 두리번댔다.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니고,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 자신이 사는


빌라 건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도하를 쳐다봤다.

“뭐야?”

“응, 뭐가?”

“왜 여기 와있어? 아니, 언제 온 거야?”

귀신에 홀린 것처럼 두리번댔다.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나, 아니면 이게 꿈인가 싶어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이 덜 깨서 그러고 있으니 도하가 쳐다보고 피식 웃는다.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준영의 입술 옆을
문질렀다.

“침 흘리고 잤어요.”

스읍. 준영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도하가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예뻐죽겠는 얼굴로 웃었지만, 준영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트를 간다더니 왜 여기 와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였지.

“이게 뭐냐니까. 애들은? 집에 왜 온 거야?”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어요.”

“뭐?”
“어차피 형이 오래 못 있는다고 해서, 그냥 하루만 묵고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 말에 준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이건과 연우는 어쩌고.

“애들은?”

“아, 내가 말 안 했나.”

“뭘.”

“이건이가 어제 그랬잖아요. 이런 데서 한 달 살고 싶다고. 그래서 놔두고 왔죠.”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도하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강이건과 송연우를 그
산꼭대기에, 차가 없으면 오갈 수도 없는 그 산꼭대기에 버리고 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뭐야. 농담이지…?”

“아닌데.”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라니까.”

그제야 이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달은 준영이 저도 모르게 미쳤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두리번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성년자 둘을
보호자도 없이 그 산꼭대기에 방치하는 게.

“너 이따가 갈 거지? 나 놀리려고 하는 거지?”

“내가 왜. 뭐하러.”

“야!”

“소리는 나랑 섹스할 때만 질러요. 아무 때나 막 지르지 말고.”

“이 미친. 너 돌았어?”

“강이건이 하도 과외에 목숨을 걸길래, 내가 한 달 동안 아주 질리게 받게 해주려고.”

“…뭐?”
도하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도하가 고용한 과외선생과 아이들을 한 달간 보살필 입주 도우미가
도착했을 것이다. 준영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하를 다그쳤다.

“빨리 차 돌려. 가서 애들 데려오게.”

“벌써 이건이네 부모님한테도 허락받았어요. 굉장히 좋아하시던데요.”

준영이 입을 벙긋댔다. 믿을 수 없어 차에서 내리는데 그때 이건이 모친이 빌라에서 나오다 준영을 발견하곤
반색을 하고 다가온다. 준영이 괜히 뜨끔해선 목폴라를 위쪽으로 끌어당기며 어색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오셨어요, 어머님.”

“어머, 선생님. 너무 감사해요.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네?”

“실은 이건이가 최근에 마음을 못 잡아서 제가 신경이 쓰였거든요. 지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이들이랑 주먹다짐도
좀 하는 거 같고. 질 나쁜 친구들과 시비도 종종 붙는 거 같아서 내심 불안했는데, 한 달 동안 그 좋은 데서
먹고 자고 과외까지 시켜주신다고 하니까 제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준영이 입을 벙긋댔다. 차 쪽을 보니 도하의 생긋 웃는 얼굴이 보였다. 이건의 모친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도하가 저를 팔아먹은 건 사실인 거
같지만.

너무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해대는 통에 준영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 일단 도하가 정말 그쪽으로 사람을


보냈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일 거 같았다.

* * *

으윽, 이건이 몸을 뒤척이다 앞에 있는 무언가에 팔다리를 척 걸치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집에서 늘 안고


자던 긴 베개가 있었는데 잠결에도 그것인 줄 알았다. 아이 씨. 작게 목소리가 들려와 베개가 아닌 걸 알고 눈을
떴을 때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코앞에 이제 막 눈을 뜬 연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이건을 보고 갑자기 눈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둘이 그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가 동시에 뒤로 확 물러나며 떨어졌다.

“아, 뭐야.”
연우가 괜히 짜증을 내며 뒷목을 긁적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을 살피는데 한쪽이 전면 유리창이다.
해가 벌써 중천이었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휴대전화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너, 왜 여기서 자?”

이건이 묻는 말에 연우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제 술 먹고 뻗어서 기억도 없는데.”

괜히 툴툴거리고 나서 다시 휴대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이건이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어젯밤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나질 않았다. 그때 방 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도하 형이랑 준영 샘 벌써 일어났나 보다.”

연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도 침대에서 내려와 그런 연우의 뒤를 따랐다. 작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칫했다. 연우가 먼저 어? 하고 놀란 소리를 냈고 뒤에 있던 이건
역시나 어어? 하고 더 크게 소리를 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청소기를 들고서 거실을 치우는 중이었다. 둘 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리는데 그때 주방 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온다. 연우와 이건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키가 190cm 정도 되는 남자가 검은색 양복을 입고 머리는 짧게 자른 채 둘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가 청소기를 끄고 주방 쪽으로 이동하는 사이 남자가 둘을 향해 느긋하게 팔자걸음으로 걸어왔다.

이건은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도하가 툭하면 저에게 여행을 권하던 것부터 시작해, 그가
나이에 맞지 않게 비싼 차와 시계를 찬다든지 하는 것들. 설마. 설마. 놀라서 연우를 잡아당겨 제 뒤에 세우고
앞으로 나서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누, 누구세요?”

그러자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깍지를 끼고 팔을 움직이자 양 손가락에서 뚜두둑, 뚜두둑, 뼈
맞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이 꿀꺽 침을 삼켰다. 뒤에 선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 * *

준영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는데도 도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서 애들을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이것저것 고르던 도하가 준영에게 다가와서는 제 휴대폰을 내보였다. 거기엔 분홍색 끈 팬티가 있었는데
준영이 그걸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고 버럭 성질부터 냈다.

“뭐야, 이거!”

“요거 어때요? 다음에 이거 입어 볼래요?”

“이 미친.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와?”

“별로구나? 그럼 특별히 원하는 색이나 디자인 있어요?”

“헛소리 그만하고, 애들 데려오라니까.”

그때 도하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쇼핑하던 도중이어서 도하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발신자에 강이건 세 글자가
뜬 걸 보고 쯧 혀를 차니 준영이 가까이 다가온다. 도하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을 켰다.

“잘 잤니? 지금 일어났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강이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는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형 어디 가셨어요? 여기 이상한 분들 왔어요. 빨리 오셔야 할 거 같아요.]

“응, 알았어, 한 달 뒤에 갈 테니까,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해.”

이건이 조용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몇 초 뒤에 ‘네?’ 하고 되묻길래 도하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하도 과외를 포기 못 하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마어마하길래 자신이 신경 좀 썼다면서, 남들은
기숙학원도 들어가는데 너희는 둘만 지내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수영장도 24 시간 개방이고 먹고 싶은 거 다 해줄 테니 마음껏 공부하고 오라고 말했지만, 준영이 볼 땐 그건


그저 놀리는 거 같았다.
[형 무슨 말씀이세요? 장난하지 말고 얼른 오세요.]

“장난 아니야. 어머님께 말씀 다 드렸어. 너 거기서 한 달 동안 특별과외 받는다니까 무척 좋아하시더라. 괜히


허튼소리 해서 상심시켜드리지 말고, 입 닥치고 수업이나 제대로 받아. 알았어?”

[형! 장난이 심하잖아요!]

“장난 아니라고 새끼야, 그리고 그분이 형 어릴 적 과외 쌤인데, 체격 좋으시지? 예전에 유도하시던 분이라 말
안 들으면 바로 들어서 던져 버린다. 그럴 땐 겁먹지 말고 최대한 힘을 빼. 안 그러면 허리뼈 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성질 더러우니까 개기지 말라고. 특히 도둑놈 조심 시켜라. 너는 내가 솔직히 걱정 안 되는데 그 새낀 심히


염려스럽다. 한 대 쥐어 터질 것 같아서. 그럼 끊는다. 형 바쁘니까 자꾸 전화하지 말고.”

[형!]

“알았어, 네 맘 다 알아. 고맙단 인사는 나중에. 이건이 파이팅.”

도하가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투로 대꾸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나서 이건에게 음성 파일을
하나 보냈다. 이건의 모친과 대화 도중 녹음을 했는데 아들이 공부한다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상황에서 살짝
녹취해 둔 거였다.

그걸 전송하고 나서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꿔 놨다.

“형, 형도 폰 꺼둬요. 한동안 시끄러울 테니.”

준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제 휴대전화가 무섭게 울린다. 받으려고 하니 도하가
가져가선 그대로 빼앗아 전원 버튼을 눌러 버렸다.

“뭐야?”

“이참에 번호 바꿀까?”

“너 진짜 미쳤어? 가서 애들 데려오라니까. 아니다. 내가 가서 데려올게. 그게 낫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영도 제대로 위치를 몰랐다. 가기 전에 도하가 하도 빙빙 돌아가는 바람에. 그럼에도
현관 쪽으로 가려고 하자 도하가 잽싸게 일어나선 팔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소파로 끌고 와 앉히고선 잔뜩 열이
받은 준영의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며 진정시킨다.
“그러지 마요. 애들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뭘 좋아해! 잔뜩 겁먹었는데.”

“윤 샘이 알아서 잘 케어해줄 거예요.”

준영이 기막힌 얼굴을 했다. 윤 샘이라면 도하가 운동을 관두고 1 년 동안 과외를 해주던 사내였다. 어린 시절
촉망받던 유도선수였는데 부상으로 공부를 시작한 남자였고, 한때는 대치동과 목동 쪽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유능한 학원 강사였다.

그러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을 상대로 개인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 첫 타자가 도하였다. 도하는 운동을 관둔 후로
어찌나 말썽을 부리고 싸움질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수없이 많은 과외 선생을 숱하게 갈아치웠는데 유독 윤
샘만 살아남아선 결국 도하를 일류대학에 보냈다.

“걔네 걱정하지 말고 이거 봐봐요? 핑크 싫으면 검은색 입을래요?”

도하가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다시 쇼핑몰 화면을 띄워 준영에게 내보였다. 성인용품을 파는 곳 같았는데 그것


말고도 밑으로 신기한 게 많았다. 트렁크에서 봤던 것들도 어젯밤에도 썼던 물건도 다 이곳에서 사들인 거였다.

“지금 이게 눈에 들어와?”

“애들이 얼마나 적응이 빠른데요. 며칠 거기서 살면 나중엔 안 온다고 지랄할걸요.”

“말을 말자. 말을.”

준영이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고개를 젓고 일어서려는데 도하가 다시 팔을 잡아당겨 소파에 앉힌다. 왜 또


그러냐며 짜증을 냈더니 팬티를 고르고 가라고 성화다. 준영이 참지 못하고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하나 집어
들어 머리를 후려치고 나서야 그놈의 팬티 타령을 멈출 수 있었다.

* * *

이건이 산 밑을 내려 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했다. 옆에 있는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자다가


날벼락이람.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주 작은 크기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기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려나. 둘이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좆됐다, 좆됐어.”
“하, 도하 형. 진짜.”

“그 인간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씨발, 저번에 사람 대가리 눈 속에다 파묻을 때부터 알아봤어!”

“어떻게 여기다 우릴 가둘 생각을 할 수 있냐.”

“그래도 존나 좋은 데다 가둬놨네. 창고가 아니라서 고맙다고 해야 되냐?”

연우가 빈정거렸고 그 말에 이건이 허무하게 웃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어젯밤 먹은 술로 머리가
멍했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다. 건물 안을 보니 아까 자신을 과외 선생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어디선가 가져온 커다란 책상을 거실 한쪽에 배치하는 중이었다. 그걸 보며 연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경찰에 신고하자.”

“…어?”

“아무래도 다 수상해. 저 인간이 선생인지 아닌지 알게 뭐야.”

“맞을걸.”

“어떻게 확신해?”

“아까 인터넷으로 확인했는데 유명한 분이 맞긴 하더라.”

“근데 와꾸가 왜 저래? 조폭이야, 뭐야.”

이건이 기운 빠진 얼굴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지금 제 처지와는 달리 도하가 보내준 음성 파일 속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나 밝았다. 최근에 자신이 박태경이나 곽상윤한테 얻어맞고 다닌 걸 감춘다고 감췄는데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몇 번 묻길래 아니라고 잡아뗐는데. 엄마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동네가 좁아 그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으니 차라리 외딴곳에서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면서. 그 생각을 하니 전화를 해서 당장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우가 제 휴대전화를 꺼낸다. 번호를 누르려 하길래 이건이 그 전화를 붙들었다.

“그냥… 여기서 며칠만 있어 볼까?”

“뭐? 미쳤어?”

“있어 보고 진짜 별로면, 그땐 내가 아빠한테 연락할게. 아니면 정말 경찰에 신고하든지.”


연우가 제 팔을 붙든 이건의 손을 쳐다보다가 슥 빼내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막말로 저야 여기 있다고
해서 찾을 사람도 없었다. 부친은 자신이 집을 며칠씩 비워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니까.

강이건이 문제였는데 본인이 먼저 며칠 묵겠다고 나서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하며 산 밑을 내려


보는데 이건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야, 근데 어제….”

“어제 뭐?”

첫사랑 물어봤을 때 왜 대답하지 않았을까. 없던 걸까. 아니면… 갑자기 연우의 서랍장 가득 들어 있던 제가 준


물건들이 떠올랐다. 연우가 왜 그러냐고 묻길래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병신, 싱겁긴.”

“일단 들어가자, 춥다.”

두 사람이 건물 쪽으로 가서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긴다. 식사가 다 됐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러잖아도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질 않아 속이 헛헛하던 참이었는데.

그러다 식탁 앞에서 둘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리석 식탁이라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어질
것 같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정도로 음식이 굉장히 많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도 맛있는 걸로만 골라서.

소갈비를 보고선 이건이 입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연우를 보니 먹을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눈이 커져


있다. 그때 과외 선생이 뒤쪽에서 다가와서 이건의 어깨를 짚었다. 손도 키만큼이나 큰 데다 그냥 살짝 얹었을
뿐인데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말 잘 듣고 까불지 말라던, 집어 던지면 힘부터 빼라던 도하의 말이 생각나 몸이 흠칫 굳었다.

* * *

안방에서 나오던 준영이 도하를 슬쩍 쳐다봤다. 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였는데 그는 주방에서 술안주를 만들겠다며
아까부터 수선을 피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 외식이라도 하자는 걸 딱 잘라 거절했더니 집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자기 집인 것처럼 웃통을 벗고 트레이닝 복 바지에 앞치마만 두른 게 기가 막혔다. 옷이나 입으라고 했더니 뭐
어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이제 올 사람도 없잖아요.”


생긋 웃는 그 모습을 보고 준영은 과외는 핑계고 이건이 자꾸 오는 게 못마땅해 거기다 가둬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뒷목을 잡고 서 있으니 도하가 저한테 와서는 허리를 껴안고 난리다. 좀 떨어지라고
했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 좋다. 당분간 여기서 먹고 자고 해야지.”

“뭐?”

그러면서 준영의 셔츠 위쪽 목이 드러난 부위를 손끝으로 살살 문지른다. 붉은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걸 보고


핥아주려고 입술을 들이밀었는데 준영이 먼저 손으로 막았다.

“야, 그만해. 그만.”

“아, 왜에.”

“눈만 마주치면 하려고 들어?”

“좋아서 그래요.”

양심도 없지. 종일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욱신거려 죽겠는데 뭘 또 하자고 덤벼드는 건지 모르겠다. 양심이
없다며 째려보니 웃으며 슬며시 떨어져 다시 주방으로 간다. 그러더니 잠시 후 옴폭 팬 도자기 그릇에 무언가를
담아 들고 왔다.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접시에 조개가 한가득이다. 그러고 나서 와인 하나를 가져와 잔을 세팅했다. 술이 나오는 거
보니 아무래도 불길하다. 준영이 슬며시 일어서며 안방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들어가서 잔다. 너 먹고 올라가.”

“진짜 안 할 테니까 오늘은 그냥 앉아요. 잠깐 할 얘기 있어서 그래요.”

그냥 하는 소린 아닌 것 같아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도하가 쇼핑백에 든 무언가를 들고 온다. 그걸 건네길래


준영이 선뜻 받지 못했다. 이번엔 또 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아까 도하가 쇼핑몰에서 보여주던 물건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열어 봐요.”


꺼내서 확인하니 나무로 된 상자다. 뚜껑을 열었더니 거기에 낱개로 포장된, 할머니들이 주로 먹는 우황청심환
같은 게 가득 들어 있었다.

“공진단인데 몸 부실한 덴 그게 좋대요. 그리고 연말 지나면 나랑 같이 운동해요. 몸이 너무 허약해졌어.”

준영이 그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거기엔 금박을 입힌 환 같은 게 들어 있었다. 크기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구슬만 했는데 한약 냄새가 확 풍기는 바람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잖아도 자신의 모친이 올라오면
한약 한 재 지어 먹자고 하던데.

“하나 먹어 봐요. 씹어서 삼키면 돼.”

준영이 진저리를 치고 환을 다시 케이스에 담았다. 나중에 먹는다고 둘러 말하고 나서 그걸 쇼핑백 안에


집어넣었다.

“한의원에 따로 부탁해서 주문한 거예요. 진짜 열심히 먹어야 해요.”

동물도 잡아먹기 전에 잘 먹인다는데. 이걸 먹이고 밤에 또 얼마나 저를 몰아붙이려고. 도하가 잔을 들어


내밀었고 준영이 제 잔을 잡고 살짝 부딪힌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맛을 잠시 음미한 후 안주로 만든 조개를 하나
집어 먹었다. 역시나 맛이 괜찮다. 음, 소리를 내자 도하가 생긋 웃는다.

“맛있죠?”

“응.”

“다행이다.”

그 말에 준영이 도하를 쳐다봤다. 저를 빤히 보고 웃는 걸 보고 안방에 넣어둔 선물 생각이 났다. 실은


백화점에서 선물을 고르고 골라 와이셔츠와 넥타이 하나를 사긴 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흰색이었지만 꽤
고가였고, 혹시 중요한 자리가 있으면 입으라고 산 거였다.

근데 막상 사고서 집으로 돌아오니 다른 걸 해줄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종일 고른 게 셔츠와 넥타이라니.


도하가 가지고 있는 옷 중 비싼 게 수두룩한 걸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주기가 망설여졌다.
“할 말 있어요?”

준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 자려는지 알고 도하가 잽싸게 팔부터 잡으려 한다.

“아니야. 잠깐 안방에서 뭐 좀 가지고 나오려고 그래.”

“콘돔이랑 젤?”

“이 새끼가.”

머리에 온통 그 생각뿐이냐고 했더니 산뜻하게 웃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길래 더는 대꾸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방에서 막 나오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린다. 꺼내
봤는데 김민석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도하가 앉은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 조개를 먹던 도하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괜히 찔려서 휴대전화를 들고 안방 쪽으로 스르르 들어가 버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가져가니 민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메리 크리스마스.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아니지?]

잔잔한 음악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늘어지게 들렸다. 술을 마신 건가. 아직 이른 시간인데.

“어쩐 일이야?”

[그냥 했어. 병원 식구들이랑 회식하고, 잠깐 너랑 다니던 바에 들러서 술 한잔 먹는데… 생각이 나더라고.]

준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잔뜩 묻었지만, 모른 척했다. 대답이 없자


반대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듣고 있어.”

[너랑 걷던 거리도 같이 술 한잔하던 바도, 다 그대론데…. 너만 없다.]

“취했어?”

[조금.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 보고 싶기도 하고.]


“민석아.”

[나 가끔 후회해.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말걸. 네 손 놓지 말걸. 끝까지


붙들고 있을걸.]

“…….”

[한편으로는 네가 날 많이 좋아했다면, 어떻게든 붙잡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나 솔직히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도,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겠다고 해서 사실 오기 부린 것도 있었거든. 애처럼.]

“김민석.”

[미안하다. 나 되게 질척거리지? 정말 미안.]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다른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밖에 있는 도하가 신경 쓰여 더 얘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만 마시고, 얼른 들어가.”

이젠 술을 먹고 전화하지 말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민석 역시 알아들었는지 모른다.


도하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는 게 그랬다.

[잘 지내.]

“응…. 너도.”

전화가 끊어졌다. 준영이 끊어진 전화를 주머니에서 넣고 돌아서서 다시 안방을 나왔다. 도하는 술을 다 다
비웠는지 잔을 채우는 중이었다. 자리로 가서 앉으니 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누구예요?”

“어?”

“김민석?”

대놓고 물으니 준영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더니 도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구나, 한다. 아까 통화할 때 눈치챈 거 같은데 쫓아와서 난리 피우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성탄절에 옛 애인이 전화도 하고, 우리 자기가 인기가 많네.”

웃으며 농담처럼 말하더니 와인 잔을 다시 기울인다. 준영이 잔을 들어 부딪히고 입으로 가져가며 저도 모르게


도하의 표정을 살폈다. 화났나, 싶어서.

“걱정 마세요. 나 그렇게 속 안 좁아. 뭐 이런 날 생각나서 연락할 수도 있지.”

“웬일이냐. 사람을 들들 볶을 줄 알았더니.”

“어차피 형은 이제 내 남자니까.”

잔 끝을 입에 대고 눈까지 휘며 씩 웃는데 준영이 흠칫했다. 들고 있던 술잔을 얼른 내려놓고서 가지고 나온


쇼핑백을 도하에게 건네줬다. 도하의 눈동자가 그곳으로 움직였다.

“뭐예요?”

“선물.”

“받았잖아요, 어젯밤에.”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젯밤 레이스 팬티를 입고 밤새 정사를 벌이던 생각이 나서 괜히 귀가 뜨거워지고 목이
탔다. 얼른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생각나서 그냥 샀다고 풀어나 보라고 대답해줬다.

상자를 열어서 확인하니 거기에 흰색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들어있었다.

“너 성인 되고 나서 축하해준 기억이 없는 거 같아서. 바로 군대 가 버렸고, 난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제대로


선물해줄 기회가 없었잖아.”

도하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쩍 웃는다. 넥타이를 들어 살피더니 입가에 미소가 점점 번졌다.

“예쁘다. 내 취항이네.”

“마음에 들면 다행이고.”

“지금 입어 볼까요? 오늘은 회사원 플레이?”


준영이 곧바로 인상을 쓰자 도하가 그 표정에 또다시 웃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재깍재깍 반응하는
표정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열 살이나 많은데 귀엽다고 하면 한 대 얻어맞을 거 같아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넥타이를 목 아래에 대고 어울리느냐고 물었더니 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멋있네.”

“하긴. 내가 뭔들 안 어울리겠어요.”

준영이 그 말엔 부정하지 않았다. 옷걸이가 좋고 인물이 잘났으니 아무거나 걸쳐놔도 근사한 건 사실이었다. 그에
비해 저는 보잘것없는 것 같았다. 도하가 서른이 되면 더 멋진 남자로 성장할 테지만 그때 제 나이는 마흔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심란해진다.

“선물해주고 왜 그런 표정인가요?”

“아니야. 잘 어울려서 감동하는 중이었어.”

“나도 형한테 줄 거 있는데.”

준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선물이라면 어제 줬지 않은가. 그 레이스 팬티. 물론 그게 누구를 위한 선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다가 공진단인지 뭔지 하는 이 한약도 줬고. 선물을 받았는데도 뭘 더 준다는 건지 불안해졌다.
어디서 또 이상한 걸 꺼낼까 싶어서.

“뭔, 뭔데.”

도하가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집어넣더니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는다. 저러면서 자기 고추 꺼내서


흔드는 거 아니야.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준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잠시 후 도하가 손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준영 쪽으로 밀었다.

준영이 그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열어 봐요.”

잠시 망설이던 준영이 상자를 들고 열었더니 백금으로 된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사이즈도 모양도 같았다.


누가 봐도 이건 커플링이었다.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도하가 잔을 다시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목이 타는 듯했다.
“…반지네?”

그러더니 다시 말이 없어진다. 도하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지금 껴달라는 건 아니에요. 형이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고 혼란스러울지 알아요. 여태 나를 밀어냈던 세월이
있는데.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그때 되면 내 손가락에 직접 끼워줘요.”

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지금 끼워주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도하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더 얘기하지 않더니 잔을 다시 든다. 첫사랑과 단둘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그리고 첫 커플링. 물론 당장 받아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랑 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서운할 법도 한데 농담까지 하며 다정하게 웃는 걸 보고 준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입을 꾹 다문 채 애써 웃다가 잔을 들었다. 쨍, 메리 크리스마스. 나도, 고마워.

* * *

이건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대는데 욕실 문이 열리고 연우가 씻고 나왔다. 옷을 가지고 들어간 건지 저와


달리 안에서부터 옷을 다 입은 채였다. 머리를 툭툭 털어 말리더니 젖은 채로 침대로 와선 풀썩 엎어졌다.

“머리는 말리고 와.”

“죽을 거 같아. 대가리 터지기 직전이야.”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서 말하는데 목소리가 다 죽어간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공부를 종일 하느라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이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저녁 먹은 후로는 자유시간이 주어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꽤 잘 가르치지 않아?”


그 말에 연우가 고개를 움직여 이건을 쳐다본다. 잘 가르치는지 못하는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힘은 더럽게 센
거 같았다. 아까 철제로 된 의자 다리가 좀 구부러진 걸 보고 한 손으로 펴는 걸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알루미늄인가 싶어서 안 볼 때 양손으로 구부려봤는데 꼼짝도 하질 않았다.

“공부고 뭐고 됐으니까 나는 집에 가고 싶다.”

그 말에 이건이 웃으며 침대 위쪽에 올려뒀던 태블릿을 꺼냈다. 주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용도였는데, 자기 전


영화나 볼까 해서였다. 새로 나온 영화 중 볼만한 걸 고르니 엎어져 있던 연우가 고개만 살짝 쳐들고 저를 부른다.

“뭐 하냐.”

“영화 보게. 같이 볼래?”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건의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러더니 이어폰 하나를 빼서 제
귀에 꽂고 화면을 응시했다.

“뭐 보게?”

“이거 어때?”

“존나 유치할 거 같아.”

“이건?”

“애냐?”

그러지 말고…. 연우가 손으로 영화 하나를 가리켰다. 공포였는데 19 금이라 이건이 슬쩍 인상을 썼다.

“이건 좀 그렇지.”

“어때, 야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무서워서 그래?”

“무섭긴.”

이건이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클릭했다.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자 연우가 좀 더 이건의 옆에 붙어 앉았다. 몸이
닿았고, 두 사람은 다리를 모은 채 영화 보기에 집중했다. 천장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주인공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건이 몸을 움찔한다.

연우가 비웃으며 병신이라고 놀렸는데, 다음 장면도, 또 그다음 장면도 죄다 귀신뿐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귀신만 나올 수 있다니.

“계속, 봐?”

“보자. 재미있네.”

드드드드, 나무를 긁는 소리와 함께 이건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최대한 작게 떴다. 주인공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숙여 문 밑을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서 시뻘건 눈이 갑자기 확 튀어나왔다.

동시에 연우가 워! 하면서 이건을 놀라게 했고, 이건이 우아아악 발버둥을 치며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걸
보며 연우가 배를 잡고 굴러다니며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이건이 신음하며 일어나서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아, 왜 장난쳐?”

“겁은 졸라 많아요.”

“네가 갑자기 소리 질러서 그런 거잖아.”

침대로 올라오며 인상을 벅벅 쓰고 자세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다시 꼈다. 그랬는데 뜬금없이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정사 장면이 나온다. 그냥 살짝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세세하게 나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연우를 보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잽싸게 손을 뻗어 연우의 눈을 가렸지만 이미 이어폰으로


남녀가 헐떡이는 신음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연우가 그 손을 툭 쳐냈다.

“뭐야, 짜증 나게.”

“애들이 볼 건 아니지.”

“넌 어른이냐?”

“나도 안 봤어.”

“그럼 뭐해, 씨발. 소리로 들었는데.”

티격태격하는데 이건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이건이 확인하고는 잠시 눈이 커졌다. 유나였는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연우는 화면을 보는 척했지만 발신자에 뜬 그 이름을 봐 버렸다. 이건이 이어폰을 빼더니
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어, 유나야.”

[메리 크리스마스.]

“…고마워.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뭐 해? 나 친구들이랑 놀러 나왔는데, 너 혹시 밖이면 잠깐 볼까 해서.]

“나를?”

[어. 왜? 곤란해?]

이건이 콧등을 긁적였다. 연우가 그 모습을 흘깃 봤다. 당분간 집에 못 갈 거 같다며, 학원도 빠져야 한다고
마치 애인에게 설명하듯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연우는 속으로 조금 짜증이 났다. 탁, 이어폰을 빼서
태블릿 위에 던지니 이건이 통화를 하다 고개를 돌려 연우를 쳐다본다.

[그럼 언제 오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연우가 고개를 기울여 자기 쪽으로 다가온다. 뭘 하는 건지 인지할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이건이 전화기를 든 채로 눈을 크게 떴다. 수화기 너머에서 강이건? 하고 부르는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얼결에 연우의 어깨를 붙들고 확 떼어내고 보니 연우가 고개를 팩 돌리고는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이건이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시 건다는 말도 못 하고 황급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 연우를 불렀다.

하지만 연우는 대답 대신 침대 시트를 머리끝까지 올려 버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

교복 위에 코트를 걸친 도하가 다리를 꼰 채 까닥까닥 움직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뿌옇게 올라왔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준영이 그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애인과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도하가
연락해온 것이다. 발소리에 도하는 고개를 들더니 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을 빼며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왔어?”
준영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마주 본 채 섰다.

“어쩐 일이야?”

“형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연락했는데 받지도 않고, 요즘 바빠?”

“…어. 많이 바빴어.”

“그래도 문자 정도는 해줄 수 있었잖아. 애정이 식은 거야? 너무해.”

투덜거리는 모습에 준영이 전처럼 웃지 못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바쁘다는 걸 티 내기 위해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여태 여유롭던 도하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는데 이제 키도 저와
비슷하다. 아니,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표정을 살피려 하기에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 내 눈 피해?”

“도하야. 형 바빠.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디 가는데. 애인 만나러?”

짓궂은 말투로 물으며 웃는다. 전 같으면 조그마한 녀석이 애인이 뭔지 아느냐고, 아이 취급했을 텐데 이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어.”

도하가 입을 꾹 다물고 저를 노려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항상 애정이 담겨 있었고, 사랑스럽게


쳐다봤지. 그게 친한 형을 보는 눈빛이 아니란 걸 이젠 알 것 같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 스스로 도하를
마냥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할 말 없으면 간다. 들어가.”

도하가 준영의 손을 붙들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쥐여 줬다.


작은 상자였다.
“저번에 아빠랑 여행 다녀오면서 형 생각나서 샀어. 크리스마스 선물.”

준영이 그것을 자리에서 열어봤다. 꽤 고가의 시계였다.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서 그것을 도하에게 다시
건네줬다. 도하가 받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길래 억지로 쥐여 주고 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물로 받기엔 너무 비싸. 약속 시간 다 돼서 가봐야 해. 간다.”

몸을 홱 돌리는데 순간 바닥에 탁, 하고 부딪히는 타격음이 들린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을 때 조금 전


도하에게 건네준 상자가 바닥에서 나뒹굴었고 그 안에 시계 또한 유리가 박살 나서 뒹굴었다. 준영이 놀라서 보자
도하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반대쪽으로 뛰어간다. 전 같으면 도하를 먼저 붙들었을 텐데, 차마 그러질 못했다.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 안은 조명 하나 없이 어둡기만 했다. 머리맡 수면 등을 켜고 살펴보니 도하가


침대 아래쪽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 게 보인다. 같이 자면서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침대가 좁아 자꾸 몸이
닿자 도저히 안 되겠다며 밑으로 내려간 것이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 시였다. 그대로 안방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도하가 사 온 화병은 또다시 비어 있었다. 제가 관리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생화가 그런 건지
꽃은 대부분 일주일도 가질 못하고 시들었다.

차라리 화초를 키워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하가 제게 준


반지였다. 상자를 집으려고 손을 뻗다가 멈칫하고 다시 거둬들였다. 열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안방 쪽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추고, 작은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불을 켰다.
이사 오고 나선 찾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곳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상자에 담겨 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 다음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여니 별것이 다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도하가 제게 선물했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중 작은 상자 하나를 집어 들고 열었더니 유리가 박살
난 손목시계가 있다.

깨진 시계를 한참 바라보다 상자를 다시 닫고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둔 다음 방 한쪽에 기대앉았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얼굴만
문질렀다. 그렇게 해가 뜨기 전까지도 그곳에서 나오질 못했다.

* * *

아침을 다 먹은 후 이건이 밖으로 나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물이 채워진 수영장을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수업하기 전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뭘 할까 고민 중이었다. 연우는 어젯밤 그러고 나서 여태 저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자려는 걸 흔들어서 뭐 하는 짓이냐고 타박했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덩달아 정신도 멍했다. 고개를 흔드는데 저 멀리 건물
옆쪽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게 보인다. 뭐야, 불이라도 난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바스락, 바스락 마른 잔디 밟는 소리에 연기가 곧 사라진다. 바로 코앞까지
가서야 그게 담배 연기라는 걸 깨달았다. 모퉁이를 돌자 송연우가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며 꽁초를 발로 비벼 끄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연우가 인상을 잔뜩 찡그렸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바닥에 침을 뱉는다.

“뭐야, 여기까지 와서 담배야?”

연우가 뾰로통한 얼굴로 이건을 지나쳐 모퉁이를 돌아 수영장 쪽으로 걸어간다. 이건이 뒤를 쫓아가며 어젯밤
일에 대해 캐물었다.

“야… 너 어제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뭘.”

이건이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뽀뽀했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가 홱 돌아서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봤다.

“내가 언제!”

거칠게 반박하는 바람에 이건은 기가 찼다. 그럼 자신이 꿈이라도 꿨단 말인가.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면 저도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자꾸 화를 내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그런 장난 하지 마. 그거 성추행이야.”

“꺼져.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그게 잘한 짓이란 말인가.


“그런 건 나중에 여친이랑 하는 거야. 아무나랑 막 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란 말에 연우가 눈에서 레이저를 쏘았고 이건이 움찔해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씨발, 진짜 짜증 나게.”

“…내,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렇게 열 받으면 너도 한번 해. 그럼 되잖아.”

“미쳤냐. 내가 왜 너한테 뽀뽀를 해!”

“못 할 건 또 뭐야. 왜? 나랑은 싫고 김유나랑 하게?”

갑자기 김유나 얘기를 꺼내니 더 당혹스러웠다. 왜 죄 없는 애를 툭하면 끌고 오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


전부터 궁금하던 걸 묻기로 했다. 설마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이런 식이면 그래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연우야, 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잠시 뜸을 들이자 연우는 노려보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건이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

“혹시나, 네가 날… 좋, 좋아하는 건 아니지?”

“뭐?”

“그러니까… 친구 말고… 남자 여자… 그런 것처럼….”

“…….”

“아니지?”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연우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 곰탱이 같은 새끼가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죽여 버릴 듯 노려보기만 하자 이건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한 번 더 ‘
아니지?’라고 묻길래 연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했다.
“미쳤어? 내가 너 같은 걸 왜 좋아해.”

그 말에 이건이 멈칫, 굳었다가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다행이다. 난 또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봐, 악!”

연우가 그대로 뛰어 이건을 확 밀어 버렸다. 이건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수영장에 풍덩 빠졌고, 연우가 몸을 홱
돌려 건물 쪽으로 향했다.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씩씩대고 걷는데 눈이 시큰거리고 코가 아려왔다.

등 뒤에서 이건이 미쳤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돌아서서 병신 새끼라고, 개새끼라고 온갖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울음이 먼저 터질 것 같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 * *

탁, 탁,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준영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 거실 테이블이 보였고 제 몸엔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새벽에 자면서 깼고 작은방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해가 뜰 때쯤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9 시가 넘었다.

일어나는데 역시나 몸이 다 뻐근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도하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본다. 어쩐 일인지 눈이 빨갛다.

“잘 잤어요? 우리 자기 안 일어나면 뽀뽀해주려고 했는데.”

막 일어난 상태라 자기란 말에 화낼 기운도 없었다. 대체 뭘 하는지 궁금해 들여다봤더니 찌개가 끓고 있었고,
거기에 넣을 양파를 써는 중이었다. 그래서 눈이 빨갰구나. 여기 와서 음식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나와. 내가 할게.”

그 말에 도하가 웃으며 칼을 내려놓고 헝클어진 준영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줬다.

“더 자요.”
“…다 잤어.”

“그럼 씻고 와요. 나오면 먹기 딱 좋게 만들어놓을게요.”

그러면서 준영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얼른 가서 씻으라며 마치 아이 취급하는 행동에 준영이 미간을
옴폭하게 구겼다. 손을 툭 쳐냈더니 이번엔 앞쪽을 건드리려고 한다. 팔뚝을 꼬집었더니 그제야 멈추고 배시시
웃는다.

“힘들면 내가 씻겨 줄까요?”

“아니.”

“원하면 말해요.”

“거절할게.”

다시 들러붙는 걸 떼어내고 욕실 쪽으로 가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칼을 잡던 도하가 흘깃 돌아봤다. 강이건도


제거했으니 이 아침에 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준영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현관 앞으로
걸어나갔다.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더 정리한 다음 문 앞에 섰다.

띠릭,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바깥으로 밀었다. 혹시 이건의 부모님인가 싶어서 봤다가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제 모친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으니 미정이
미안하고 반가운 얼굴로 웃는다.

“엄마가 너무 일찍 왔지? 너 잘까 봐 미리 연락 못 했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쩌지. 너무 당황해서 들어오란 말도 못 하고 문을 콱 붙들고 막고 서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예요?’ 하는. 미정의 눈이 커졌다. 준영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대로
문을 닫고 숨어 버리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미정의 얼굴은 차게 굳어졌다.

“…도하….”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떻게야 할지를 몰라 하는데 도하가 제 등 뒤에 와서 선다.

“이모, 오셨어요?”
미정이 충격받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도하에게서 준영에게로 천천히 이동했다.
비난을 퍼붓는 것도 아닌데 준영은 그 시선이 송곳처럼 느껴져 더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하, 오랜만에 보는구나.”

미정의 목소리는 침착함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준영이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넌 그만 올라가.”

대답이 없다. ‘얼른.’이라고 재촉하자 잠시 후, ‘그럴게요.’ 하는 짧은 대답이 들려온다. 순간이었지만 도하가


준영의 어깨를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으며 스쳐 지나갔다. 미정에게 나중에 뵙겠다고 인사까지 하며 여유 있게
웃었다. 당황하는 저와는 달리 도하는 무섭도록 덤덤해 보였다. 그가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집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준영이 그녀를 위해 길을 내줬다.

“…들어오세요.”

하아. 미정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 같았다. 준영이 주방으로 가서 불을 끄고 대충
치우기 시작했다. 돌아봐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는 언제 온 거야?”

준영이 멈칫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미정을 마주 봤다. 그녀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엔 실망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았을 텐데, 어릴 적부터 준영은 그녀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한 달 안 됐어요….”

“여기, 살아?”

“…위층에요.”

“왜 말 안 했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생각해낸 것이 고작 차 이야기였다.

“…커피 드려요?”

“저번에 제사 때 와서 왜 말 안 했어?”

“…아니면 다른 것도 있어요.”

“준영아.”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를 끌어내 그녀의 맞은편에 가까이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다른
아들 같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할까. 상관하지 마시라고 할까. 아니면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할까. 도무지
답을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요.”

“도하는 어려서 그렇다지만, 너까지 휩쓸리진 말아야지. 정신 못 차리고 왜 이래.”

“엄마.”

“저번에 경혜 만났는데 낌새가 이상하더라. 자꾸 날 떠보는 게. 그래서 오늘 온 거야. 오면서도 설마 했는데,


그랬는데 어떻게 엄마를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죄송해요.”

“왜 네가 죄송해. 도하가 문제잖아. 너 싫다는데도 자꾸 이러는 법이 어딨어. 이게 무슨 경우냐고.”

그녀가 안 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도하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따끔하게 자신이 말을
했어야 한다면서. 준영이 더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목구멍이 뜨겁고 가슴 한가운데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천천히 아들을 돌아봤다. 죄인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야말로 숨이 턱 막혔다. 준영이 고개를
드는데 참담하면서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얼굴이다.
“저도 좋아해요….”

“…뭐?”

“저도… 도하 좋아해요. 죄송해요, 엄마.”

죄송해요. 준영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부정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하한테 더는 미안한
일을 만들기 싫었고, 이젠 상처 주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CH 19.

[그럼 언제 와요?]

메시지를 보내고 꽤 지났는데도 준영은 읽지도 답장도 없다. 그의 모친인 미정이 나타나고 나서 도하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한참 뒤 준영에게 메시지가 온 것이다. 모친을 서울까지 직접 바래다주고 오겠다고. 나중에
연락하겠노라고.

밖을 내다봤더니 역시나 준영의 차는 그대로 있었다. 차를 두고 간 거면 올 때는 어떻게 오려는 거지. 신경


쓰이고 걱정돼서 전화를 한 번 더 했지만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나온다. 아, 아까 올라오지 말고 버틸걸.

뒤늦게 후회를 하며 소파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민주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녀 또한 연락을 받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뛰는 심정으로 몇 차례 더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녹았다.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외투를 집어 들고 그대로 뛰쳐나와 차를 몰았다. 평일이라 차가 많지 않았고, 올라가며 몇


차례 더 연락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속도를 내다보니 내비게이션에서 단속 구간이라며 경보음이
울린다. 카메라가 번쩍였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강원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근접하고 있었다.

* * *

준영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창가 쪽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켜니


도하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었다. 진작 연락을 해줬어야 하는데 모친과 함께 있어 그러질 못했다.

그녀는 처음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혹시 도하가 너에게 협박이라도 하더냐고 물었다. 혜윤은
감금당했냐고 물어보더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하와 저의 관계가 그렇구나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라고 하자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알겠다고, 그만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그대로


보낼 순 없어 따라나섰다.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다행히 그녀도 준영을 내치진 않았다.

운전하고 오는 내내 미정도 저도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 집 앞까지 가서야 그녀는 자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준영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서울 온 김에 친구를 만나러 가보겠다고 핑계를 댔다.
전 같았으면 내일 만나라며 붙잡았겠지만 그러질 않았다. 자꾸만 저를 외면하는 시선이 대놓고 퍼붓는 비난보다
더 따갑고 아팠다. 단 몇 시간 만에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칠 않아 짧은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돌아서야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 나왔고, 대충 눈에 익은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자주 가던 카페가 보였다.


무작정 내려서 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일단 도하에게 연락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먼저 전화가 걸려온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휴대전화를 귀로 가져다 댔다. 받자마자 어디냐는
목소리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지금 밖이야.”

[밖 어디요?]

“근처 카페. 차 마시고 있어.”

[집에 가서 잘 거예요?]

준영이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어 잠시 침묵하니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소나 말해줘요.]

“아니야. 이것만 마시고 들어갈 참이었어.”

[형네 집 근처예요. 어딘지 말해 줘요.]

준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전 같으면 왜 왔느냐고 뭐라 했겠지만, 도하의 목소릴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어서, 더는 오지 말라고 못 했다. 카페 이름을 불러주니 15 분 정도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진다. 눈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올겨울 눈이
참 많이도 오는구나 싶었다.

연말이라서 그런지 밤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20 분이 다 되어가도록 도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락하려는 찰나, 딸랑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고 도하가 뛰어 들어왔다.

머리에 하얀 눈을 달고서. 양쪽 귀가 빨갛게 얼어붙어선. 아, 그러고 보니 근처에 차 세울 데가 마땅치 않았구나.


그는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우선 준영의 안색부터 살폈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밖에 장난 아니에요. 주차할 데가 없어서 하마터면 도로 한가운데 세울 뻔했다니까.”


웃으며 농담하길래 일단 앉으라고 했더니 의자를 끌어내 앉으면서도 시선은 저한테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흘깃대는 게 보여 그만 쳐다보라고 했더니 그제야 잠시 시선을 거두어낸다.

“뭐 마실래?”

“글쎄, 뭐가 좋을까.”

“여기 커피 되게 맛있어.”

잠깐만 기다리고 한 후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줄 생각으로 계산대 쪽으로 가는데 다행히
도하는 일어나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아 얌전히 기다린다. 눈으론 여전히 자신의 안부를 살피는 중이었지만.
직원에게 주문하는 사이 손님 여러 명이 우르르 들어오며 갑자기 눈이 쏟아진다며 투덜댔다.

계산대 앞에 선 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하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 안 되니 애가 탔고,
오면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나중엔 사리판단이 흐려졌다. 하마터면 준영의 집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으니 말이다.

아마 마지막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직접 만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준영은 저한테 거짓말을 잘하니까.

얼굴은 덤덤해 보였지만 그 속은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막내 고모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을 퍼부을 때도 준영은 그랬으니까. 속은 썩어서 곪고 터져도 절대 내색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잘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준영이 커피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탁, 앞에 놓아주더니 마셔보라고 했고 도하가 그것을 집어 들고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아, 뜨거워.

“식혀서 마셔.”

커피를 마시는 대신 일단 내려놓고 준영을 다시 유심히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다


알면서도 나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서글퍼졌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눈이 제법
많이 온다. 집에 돌아가긴 글렀군.

시선을 돌리는데 준영이 제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딱, 손가락을


눈앞에 대고 튕기자 고개를 들고 옅게 웃는다. 바스러져 버릴 거 같은 그 미소는 불안감을 더 가중시켰다.

아까부터 주위에서 흘긋흘긋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잠시 고민하던 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는 그만 마시고, 우리 나가요.”


그럴까? 준영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눈이 그새 바닥에 살짝 쌓였다.
도하가 문을 잡아 주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를 댄 곳까진 좀 걸어야 하는데. 우산을 살 만한 곳이 있나
둘러보는데 준영이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선다.

“그냥 가자. 좀 맞으면 어때.”

“머리 벗겨져요. 산성비랑 다를 게 없다니까.”

도하가 제 외투를 벗어 머리를 가려주려 하기에 준영이 질색하고 뜯어말렸다. 그러면서 도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동네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사람 많은 도심으로 나오니 도하의 외모가 더 눈에 띄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잘생겼다고 속닥이던 소리도 다 듣고 있었다.

이상한 짓까지 해서 더 주목받고 싶지 않아 제발 그냥 가자고 재촉한 후에 차로 걸어갔다. 옷과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켰다. 연말인 데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도로는 정체가 시작됐다.

도하가 차 안의 온도를 높이고 출발하는 동안 준영이 창밖을 내다봤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하얗게 뒤덮던 눈과
화려한 간판들 위로 쏟아지는 눈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꼭 붙어 걷는 연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도하를 돌아봤다.

전에 만나던 사람들은 준영이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예민한 성격을 알기에 그어진 선을 어지간해서
넘어오는 법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도 오지 말라고 하면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다들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게 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외로웠다. 어쩌면 누구 하나쯤은 그 선을 넘어와 제 주위를 둘러싼 벽을 깨트려 주고


허물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길 원했는지도.

“바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도하가 뜬금없이 묻는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제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보조석 쪽으로
내밀었다.

“안 바쁘면 손 좀 잡아줘요. 형이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서 겁나 죽겠으니까.”

준영이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 제 쪽으로 끌어와선 깍지를 낀 채 꼭 힘주어 잡았다. 도하가 여전히 앞만 본채로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끼익. 끼익,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차창에 눈들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친에게 온 연락이 없나 확인했고 단 한 통도 없는 걸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들켜 버려 암담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홀가분했다. 도하를 보니 그
마음이 커졌다.

차는 느리게 움직였고, 라디오에선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모든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느낀 건 옆에 도하가 있기 때문이란 걸 인정하기로 했다.

* *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도하가 지갑에서 카드 키를 찾는데


보이질 않는지 잠시 후 지문을 가져다 댄다. 곧 문이 열렸고, 준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탁, 불을 켜고 발을
디디는데 바닥이 살짝 차다. 도하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슬리퍼를 챙겨 앞에 놓아주었다.

그걸 신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눈앞에 펼쳐진 집 안의 모습은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릴 적 도하네


집에 갈 때마다 눈에 띄던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꽤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회색으로 칠해진 벽엔 그림 몇 점 걸린 게 전부였고 소파와 TV 그리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 그 앞에


작은 트리 하나가 있었다.

창가 쪽으로 가니 아래로 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눈은 그쳤지만 길이 막히는지 다리 위엔 차들이 속도를 줄이며


느리게 오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욕실로 들어갔던 도하가 나오며 다가와선 준영의 외투를 벗기려 한다.

준영이 흠칫 놀라선 외투를 여미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왜?”

“눈 맞았으니까 옷 벗어야죠.”

“…놀래라.”

“놀라긴. 내가 아무 때나 하자고 막 덤벼드는 그런 미친놈인 줄 알아요?”

“…아니었어?”

아, 진짜. 도하가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자 준영이 웃으며 외투를 벗어 건네준다. 제 외투와 함께 그것을 한쪽에
정리해 두고 나서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오면서 둘이 저녁을 먹긴 했는데 저와는 달리 준영은 먹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이다.

맛있다며 도하에게 몇 번이나 음식을 집어 건네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입에 대질 않았다. 성격을 알기에 왜 안


먹느냐고 억지로 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뭐라도 만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를
열던 도하의 표정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거의 한 달을 비운 집에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있는 거라곤 전에 마시던 맥주뿐이었다. 과일이라도 좀 사


올 걸 그랬나. 그나마 냉동실엔 이것저것 있는 게 보인다. 대충 이거라도 활용해볼까.

고민하면서 준영을 보는데 여전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오는 내내 말이 없던 것도 그렇고. 어두운 표정도 그렇고.

안 되겠다 싶어서 욕실로 가서는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널따란 욕조가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에 들었다. 반신욕을 즐겨 하는 저를 위해 모친이 특별히 욕조를 신경 쓰겠다고 했는데 이사할 때 보니 아들
취향은 무시한 채 일본 노천탕 스타일로 해놓은 것이다.

제 취향은 대리석이지 나무 욕조가 아니었기에 기가 막혔다. 다 뜯어낼까 하다 놔뒀는데, 그것이 오늘 이렇게


쓰일 줄은 전혀 몰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에 물이 받아지며 금세 뿌연 김이 올라왔다. 밖으로 나오니 준영은
이제 창가 옆쪽으로 움직여 트리를 켜고 있었다.

“물 받는 중인데, 반신욕 할래요?”

“…어.”

도하가 다시 제 표정을 살피길래 준영이 아예 마주 보고 서서 물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나를 탐색해?”

“기분이 좀 어떤가 해서요.”

“…걱정하지 마. 생각보단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준영이 제 모친에게 갖는 감정은 보통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그런
효심이나 애정이 아니었다. 절박함.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저를 붙들고 있던 단 한 사람. 그것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았고, 도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까 혼자 두고 올라가지 말 걸 후회했어요. 내가 형 좋아하니까 인정해달라고, 이모 다리라도 붙들고


매달릴걸.”

도하가 허공에 대고 붙들고 막 흔드는 시늉을 하자 준영이 웃었다. 그 타이밍에 도하가 올라가지 않고 버티고서
고집을 부렸다면 아마 상황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악화됐을지 모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고
막장드라마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물을 마시러 가려고 하니 도하가 맥주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좋다고 대답했다.
주방으로 간 도하가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 두 개를 꺼내선 창가로 다시 향했다.

치익, 맥주 하나를 따서 준영에게 내미니 그가 흔쾌히 받아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꿀꺽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찌르르 울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물이 받아졌는지 도하가
욕실에서 준영을 불렀다.
준영이 반쯤 남은 맥주를 창가 앞에 내려놓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뿌연 수증기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던 준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욕실이 어지간한 방보다 더 컸는데 더
놀라운 건 도하가 욕조라고 부른 그것의 크기였다.

일본에 있는 노천탕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입욕제를 푼 건지 마치 솜사탕을 나무 그릇에 담아


놓은 것처럼 거품이 가득했다. 코끝으로 흘러오는 달큰한 향이 들어가기도 전에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서 푹 담가요. 여기 걸터앉으면 돼요. 머리는 이쪽으로 하고.”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씻고 나갈게.”

그래요, 그럼. 도하가 대답하고 나서도 가만히 쳐다본다.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안 나가느냐고 묻자 금세 풀이
죽는다. 표정을 보니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괜히 머쓱해져선 욕조 안 거품만 쳐다봤다.

“혼자 들어가기엔 너무 넓다고 생각 안 해요?”

“…뭐, 딱히.”

“내 생각엔 너무 넓은 거 같은데.”

“…글쎄.”

“에이, 아무리 봐도 넓은데.”

“…전혀.”

아 쫌. 도하가 투정을 부리자 준영이 나직하게 웃는다. 그 소리가 욕실에 잔잔하게 울려 더 듣기 좋았다. 나도
같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준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문지르고 옆구리를 쿡쿡 찔렀더니 기겁을 하고 옆으로
떨어진다.

그러자 도하가 슬쩍 웃더니 양손을 항복하듯 들어 보였다.

“농담. 오늘은 손 안 댈게요. 얼른 들어가서 푹 담가요. 너무 오래 있진 말고.”

준영이 귀가 빨개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정 원하면 같이 못 씻을 것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엔 둘이 탕 안에서


놀고 자신이 도하를 씻겨 주고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조금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도하가 나가고 나서 준영이 옷을 탈의했다. 한쪽에 벗어두고 간단히 샤워한 다음 탕 안에 들어갔다. 풍성한
거품과 달콤한 향이 몸에 감기니 저절로 늘어진다. 맥주 반 캔에 취할 리가 없는데도 마치 취하는 것 같았다.

욕조 중간 턱에 앉아서 몸을 담근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전히 물은 흘러나와 탕 안을 채우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를 쳐다보던 모친의 표정. 마지막 집 앞에서 외면하고 돌아서던 뒷모습. 심란한 마음에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다시 천장을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몸을 세우고 고개를
돌려 봤더니 외투를 입고서 도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묻기도 전에 그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봐도 먹을 만한 게 없어요. 잠깐 사러 나갔다 올게요.”

“안 먹어도 돼.”

“저녁 잘 못 먹었잖아요.”

“괜찮아. 배 안 고파.”

“그래도.”

준영은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식욕이고 뭐고 종일 입안에 모래가 든 것처럼 까끌까끌하였다. 이런 상태로


무언가를 먹으면 그대로 체할 걸 알기 때문에 더 먹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하지만 도하는 준영이 굶는 게 내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더 괜찮다고 하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너 배고파서 그런 거면 나 씻고 같이 나가자.”

“난 안 고파요.”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외투를 벗어 입구 쪽에 놓아두고 안으로 들어온다. 입고 있던 셔츠를 팔뚝이 보이도록


걷어 올리더니 욕조 난간을 짚고서 탕 안에 손을 담근다. 괜히 휘휘 저으면서 물 온도가 적당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준영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좋아요?”

“응. 따뜻해서 좋아.”

“그렇구나. 좋구나. 좋은 거구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며 준영이 모른 척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도하가 인상을 쓰고
제 쪽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쪽, 쪽, 관자놀이에서 시작한 뽀뽀가 입술 옆까지 내려오자 준영이 거품 묻은
손으로 도하의 뺨을 쿡 찔러 떨어트렸다.

“귀찮게 안 한다며.”

“뽀뽀도 귀찮아요?”

어울리지 않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걸 보고서 준영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도하는 준영의 뺨에 어깨에 제 볼을 비비고 난리다. 나중엔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그
상태로 어깨를 양쪽으로 잡아 마사지하듯 주물러줬다.

생각보다 시원해서 고개가 저절로 뒤로 젖혀졌고 그렇게 5 분 이상 받다 보니 입을 반쯤 벌리고 완전히 풀어졌다.

“시원하죠?”

“어. 장난 아니다.”

“지금 속으로 나랑 사귀길 잘했구나, 생각하죠?”

“사귀는 거였어?”

“이것 봐, 이것 봐. 중요한 순간에 꼭 이러더라?”

준영이 작게 웃자 도하가 준영의 귓불을 앞니로 깨물었다. 하지 말라며 인상을 쓰니 이젠 귓속으로 혀를 마구


집어넣는다. 기겁하면서 밀어내는데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앞으로 가선 젖꼭지를 만진다. 몇 번 문질러주니
따뜻한 물인데도 젖꼭지가 발딱 일어섰다.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입술을 겹쳐 물었다. 살도 없는 가슴 부위를 쥐어짜듯 손으로 움켜쥐고 비틀자


준영이 입술을 잠시 떼어내고 참고 있던 숨을 내쉰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귀며 목덜미가 벌게져선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도하의 아랫도리도 서서히 반응하고 있었다.

오늘 기분도 안 좋은 거 같아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아, 정욕을 주체 못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준영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니 여기서 더 해도 될까 잠시 고민하는 찰나였다. 준영이 물고
빨아 벌게진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들어올래?”

도하의 입꼬리가 기다렸단 듯 보기 좋게 올라갔다.


“원한다면.”

옷을 모두 벗고 안으로 들어간 도하가 양팔로 욕조 턱을 붙잡고 지탱하며 상체를 숙여 준영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부드럽게 혀가 얽혔다. 고개를 좌우로 바꿔가며 혀뿌리부터 눌러주고 핥아주자 준영이 손을 뻗어 도하의 허벅지를
더듬어 움직이다 이미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붙들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거품이 묻은 덕에 촉감이 더 부드러웠고 물에 젖어서 그런지 전보다 힘줄이 더 팽팽하게 들고 일어선 느낌이었다.
손바닥에 쓸리는 그 감촉이 좋아서 조금 힘을 주어 문지르자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며 미간을 슬며시 좁힌다.

가만히 있어도 서준영은 사람을 꼴리게 하는데 물에 젖은 모습으로 제 성기를 주무르며 올려다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애잔한 마음이 들어 뺨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니 가만히 보기만 하던 준영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빨아줘?”

도하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줄어든다. 여태 자신이 준영에게 오럴을 해준 적은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저 또한 바라지도 않았고. 막말로 뿌리치지 않고 받아주는 것도 황송해할 마당에 오럴이라니. 너무
감격스러워 쉽게 대답을 못 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억지로 해줄 필요 없어요.”

“싫으면 말고.”

아휴, 싫기는. 도하가 제 입가를 슥 문질렀다. 좋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여 준영은 기가 찼다. 제게


레이스 팬티를 입히고 손목을 묶고, 저번엔 얼굴에 정액까지 뿌려놓고서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다니.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싶어 쳐다봤지만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이라 거기다 대고 더 뭐라 말하진 못했다.

준영이 살짝 입을 벌리자 도하가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제 성기를 쥐고서는 입가로 가져다 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슥 밀어 넣자 애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제 걸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았다.

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한 번 흔들어 털어 내고 나서는 준영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서 허리를 가볍게 살짝살짝
움직였다. 성기는 채 다 들어가지도 못했다. 도하가 그것을 꺼내서는 물기 어린 준영의 뺨에 대고 문질렀다.
속눈썹이 젖어서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더 색정적이었다.

자꾸 뺨에 대고 문지르니 준영이 이번엔 손을 들어 기둥을 쥐고선 혀를 내밀어 밑을 핥는다. 뿌리 끝까지


핥아주고 입술로 가볍게 물며 자극을 주자 도하가 인상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감쳐물었다.
“혀, 내밀어 봐요.”

준영이 입을 벌리고 혀를 살짝 내밀자 도하가 제 성기 대신 손가락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준영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입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핥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마치 성기를 빠는 것처럼 행동했다.

손끝에 준영의 혀와 고른 치열, 입안 점막이 고스란히 만져진다. 혀나 성기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천천히 빼내서 타액이 잔뜩 묻은 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역시나 꿀처럼 달다.

손가락을 빼낸 그 자리에 이번엔 제 성기를 다시 쥐고 밀어 넣었다. 조금 전 넣은 것보다 쑥 들어가자 도하가


멈칫하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크기 때문에 다 들어가진 못했지만 꽤 깊숙이 들어갔기에 흥분보단 걱정이 앞섰다.

괜찮으냐고 물을 새도 없이 준영이 그 상태로 볼이 패일 정도로 진공상태로 만들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인다.


애널과는 또 다른 쾌감에 도하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금니를 꾹 물었다. 으, 짧고 낮은 신음을 내며 손이
준영의 뺨에서 뒤통수로 옮겨갔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준영의 고갯짓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혹시라도 목 안쪽이 다칠까 싶어 깊게는
찌르지 못했고, 손엔 자꾸 힘이 들어가는 걸 참느라 환장할 노릇이었다.

허리 짓이 거칠어지려고 할 때마다 도하가 망설이는 게 느껴졌고 우습게도 자신이 먼저 몸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뒤로 물려 성기를 입에서 빼냈다. 터질 정도로 팽창한 녀석을 붙잡고 앞뒤로 문지르자 도하가 입술을 짓씹는다.

준영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도하는 이미 욕정을 꾹꾹 밟아 누르던 중이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제 성기를 빨던 입술을 정신없이 먹어 치우며 준영의 허리를 감쌌다.

욕정이 들끓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했다. 그렇게 일어선 상태로 끌어안고 키스하던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벽 쪽으로 움직였다.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리고 도하가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벽 쪽을 보게 돌려세웠다.

눈치 빠른 준영이 돌아서며 제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는다.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이젠 슬쩍 벌려 애널 입구가


보이게 만들었다. 도하가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아, 미치겠네. 발기한 성기를 쥐고서 구멍 입구에 대고 문질렀다.

준영이 벽에 이마를 대고 숨을 잠시 멈추는 게 느껴진다. 그대로 꾸우욱 힘주어 안으로 밀어 넣자 어깨가 움찔


떨린다. 허리와 골반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넣고 나니 준영의 입에서 으음,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성기는 안을 꽉 채우다 못해 배가 뻐근할 정도였는데 한 번씩 꿈틀하고 움직일 때마다 등 뒤가 오싹해졌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어깨를 혀로 핥으며 팔을 앞쪽으로 움직여 몸을 더 꽉 결합했다.

이미 들어찬 상태에서 힘을 주니 흥분감이 더 커졌다. 크기 때문인지 할 때마다 전립선이 뭉근하게 눌렸는데 그


느낌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준영이 살짝 고개를 비틀어 도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 하길래 스스로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극을 줬다. 그러면서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엉덩이 쪽에 가져다 댔다. 저와는 다르게 도하는 엉덩이도 근육인 것 같았다. 손톱을 박으며 꽉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도하가 어깨에 묻은 입술을 떼어내며 짧게 욕을 내뱉는다.

“후우, 씨발. 미치겠다.”


“느낌, 좋아?”

도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쌀 것 같았다. 준영이 아랑곳하지 않고 제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였다. 도하가 어깨를 힘주어 빨면서 팔을 앞으로 뻗어 준영의 허리와 가슴을 움켜 안았다.

그러고 나서 허리를 세게 뒤로 뺐다가 콱 쑤셔 넣었다. 헉, 준영이 숨을 삼키며 입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껏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는 대로 마구 빨고 핥았다.

자국을 남길까 봐 준영이 하지 말라고 이마를 밀어내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뒤로 뺐다가 내리찍듯 쑤셔 넣는다.
허벅지가 엉덩이를 치는 소리가 음탕하게 울리는 가운데 쳐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도, 아아, 으으응, 천천, 아아.”

쭙, 쭙, 도하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며 대답 대신 목을 미친 듯 빨고 핥았다. 이미 붉은 자국이 올라오는 게


보였지만 멈추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빠는 것도 모자라 이로 물길래 준영이 기겁하고 떼어
내려고 했지만 나중엔 그 통증마저도 쾌락으로 다가왔다.

철썩철썩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 준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헐떡였다. 도하가 쳐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거리는데도 그는 인정사정없이 움직였다. 사정감이 몰려와서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고 준영이 제 성기를 쥐려고 하자 도하가 그 손을 붙들어 벽에 고정했다.

“잠깐, 도, 으응, 아아, 잠깐, 만. 나, 아아.”

도하가 한 손으론 준영의 손목을 압박하고 다른 손은 밑으로 내려 성기를 감싸 쥔 채 귀두 부분을 엄지로 꽉


틀어막았다. 준영의 눈이 커졌다.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고, 도하가 그곳을 틀어막고 있으니 사정감이
몰려오는데 정액은 제대로 배출되지 못했다.

그만하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번엔 입술을 겹쳐 문다. 신음이 나오다 도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정도
신음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감각이 고통보단 쾌감으로 다가오니 더 괴로웠다.

눈이 빨갛게 짓무르며 눈물이 고였다. 그 와중에도 전립선만 고약할 정도로 찍어대는 도하가 미우면서도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만큼 좋았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자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혀를 내밀어 그
눈물을 핥는다.

순간 앞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니 그제야 정액이 쏟아졌다. 욕조 타일에 하얗게 그 흔적을 남기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하가 무너지는 준영을 일으켜 세운 뒤 다시 입술을 감쳐문다. 입안에서 움직이는 혀는 지친 기색도
없이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준영이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서 있는데 도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귀 쪽으로 가져갔다.


“…사랑해요.”

준영이 순간 할 말을 잃고 도하를 바라봤다. 녀석에게 사랑한단 말을 들은 게 어릴 때부터 합치면 아마 수천 번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투정이었다면 이번엔 고백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숨을 고르는데 도하가 웃으며 다시 준영의 입술을 감쳐문다.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대답하진 못했지만 거기엔 나도, 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잠을 뒤척이던 이건이 갑자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상한 낌새에 손을 뻗어 수면 등을 켜고 보니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연우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간 건가 싶어 봤는데 욕실 문은 열려 있고 불도 꺼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잠든 지 채 1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몰래 담배라도 피우러 간 건가.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지던 평소와는 달리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전화기를 꺼내 연우에게 걸었는데, 한참이 가도 받질 않았다.

찜찜한 마음에 두 번째 했더니 거의 끊기기 직전에 통화가 이뤄졌다. 여보세요? 하고 부르는데 대답 대신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시 연우야? 하고 불렀다.

[야, 끊어. 나 지금 힘들어.]

“너, 어디야? 뭐 하는 거야?”

[집에 가는 중이다, 새꺄.]

그러더니 전화를 확 끊어 버린다. 이건이 그 말에 입을 쩍 벌리고 그대로 굳었다. 과외 수업하면서 연우는 내내


지루한 표정을 했고, 몇 번이나 딴짓하다 과외 선생에게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덩치와 무시무시한
인상에 반항은 못 했지만 잠들 때까지도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더니.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며 불을 켰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데 달이 떴다고는 하나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비춰오는 작은 불빛들이 전부였다. 다시 전화를 거는데 연우가 이번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왜 또!]

“너 어디야? 미쳤어? 당장 들어와.”

[그딴 수업 너나 실컷 받아. 나는 더는 짜증 나서 못 받겠으니까. 아 씨발, 앞이 안 보여. 끊어! 플래시 켜야


돼!]

여보세요? 이건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휴대전화를 플래시로 사용하는 모양인데. 차로도 한참
걸리는 길을 대체 무슨 수로 내려가겠다는 건가. 미치겠네, 정말. 외투를 챙겨 입고는 문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닌 지금쯤이면 주무실 시간이었고, 과외 선생은 저녁에 수업을 마친 후 약속이 있다고
나간 후였다. 몇 시간 뒤에 돌아온다고,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결국엔 사고를 친 연우를 원망하며 주방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 산행용 플래시 두 개가 보였다.
그것을 챙겨 들고서는 조심조심 현관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산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매서웠다.

점퍼를 여미며 플래시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하나를 챙겨 들고 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다시 전화를 거는데
이번엔 받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져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뛰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라 곳곳에 돌부리가 채여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연우라면 저보다 느리니 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플래시를 길 양쪽으로 비추는데 키가 커다란 나무가 늘어서 있다. 낮에 보는 나무는 크고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밤에 보는 나무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키가 커다란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승에서 온 사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대쪽은 계곡이었고, 겨울이라
물이 언 건지 아니면 마른 건지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걸음을 서두르는데 저 멀리 불빛 하나가
작게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 관두고는 조금 더 빨리 걸어가며 최대한 소리를 죽여 이름을 불렀다.

“송연우!”

제발 들었으면 싶은 마음에 불렀는데 불빛이 잠깐 멈추는 것 같다. 헐레벌떡 뛰어 내려가며 손전등을 그쪽으로
비추는데 저 멀리 불빛이 움직인다. 그런데 내려가는 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그제야 제 손전등
빛에도 연우의 모습이 들어온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마구 뛰어 올라오는 모습에 이건이 멈칫하고 나서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지?

“야, 왜 그래?”

하는데 연우가 ‘튀어!’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건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 담 넘다 학생주임한테 걸린 것도 아니고 이 산속에서 야밤에 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싶었는데, 연우가 코앞까지 와서 제 팔을 붙잡았다가 놓으며 악을 쓴다.
“튀라고, 새꺄!”

순간 뒤로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보인다. 처음엔 들개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오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건이 기겁하고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뛰어 올라갔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앞에 연우가 보이지 않았다. 다리


길이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연우보다 자신이 한 수 위였고, 그러니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아차 싶어 뒤를 도는 순간 악! 하는 비명이 들렸고 다급하게 손전등을 비추니 연우는 쓰러져 있고 멧돼지가


연우의 점퍼를 물고 흔드는 중이었다. 놀란 이건이 손전등을 쥔 채로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고함을 치면서 멧돼지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몸통을 들이받았다. 멧돼지가 옆으로 밀리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강이건은 멧돼지와 함께 계곡 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꾸에엑 하는 소리가 들렸고 연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일어나는데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질 못했다. 기다시피
계곡 쪽으로 가서 플래시를 비췄지만 이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 * *

“붙여 봐요, 얼른.”

도하가 마스크 팩을 들고 사정을 하는데도 준영이 싫다고 인상을 찡그렸다. 욕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와서는 둘이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영화를 보기 위해 고르는 중이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마스크 팩을 들고 온
것이다.

싫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붙이더니 피부에 잘 붙으라고 꾹꾹 눌러주기까지 한다. 준영이 휴대폰으로 제 얼굴을
비춰봤다. 하얀 몽달귀신 같아서 다시 인상이 구겨졌다. 떼어내려고 했는데 도하가 째려보는 바람에 결국엔
포기했지만.

도하도 하나 꺼내 붙이더니 그대로 준영의 옆에 앉아 제 허벅지를 탁탁 두드린다.

“여기 베고 누워요.”

준영이 됐다고 하려다 관두고 다리를 베고 눕자 도하가 허벅지에 힘을 준다. 왜 힘을 주느냐고 했더니 힘준 게
아니라 원래 근육이라 탄탄하다고 허세를 떠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리모컨을 들고 둘이 볼만한
영화를 고르는데 도하가 준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자꾸만 귀찮게 만진다.

“그만 좀 만져.”
“어떻게 팩을 붙이고 다 가렸는데도 잘생겼을까, 감탄하는 중이었어요.”

그 말에 준영은 기가 막혔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었다. 인물로 따지자면 도하가 훨씬 잘생겼으니까. 이젠
어린 티도 제법 벗었고, 곱상하던 얼굴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신 더 남자다워졌다.

콧대와 이마를 이어주는 부위가 또렷했고, 쌍꺼풀 없이 크고 긴 눈은 조금 차가워 보이면서도 웃으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국적이면서 또 동양적인 매력까지 겸비한 얼굴이었다. 속으로 잠시 감탄을 하는데 도하가
영화를 고르다 말고 저를 내려다본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그냥.”

“되게 사랑스럽게 쳐다보네?”

“…응.”

“어?”

준영이 모른 척 리모컨을 빼앗아 제가 영화를 골랐다. 도하는 눈을 한 번 끔벅이고 나서 조금 전 말을 생각하는


듯했다. 준영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방금 사랑스럽게 본 거냐고 물으니 못 들은 척 채널만 고른다. 얄미워서
옷 위로 젖꼭지를 꼬집으려고 했더니 기겁을 하고 그 손을 치웠다.

“하지 마.”

“얼른 말해요. 빨리.”

결국 준영이 항복했고, 둘은 이제 영화를 고르는 일에 집중했다. 한 손은 서로 깍지를 껴서 장난을 치고 나머지


다른 손으로는 영화를 골랐다. 그때 준영이 저거! 하고 가리킨다. 봤더니 공포여서 슬쩍 인상이 써졌다.

“공포는 패스.”

“무서워?”

“꿈에 나온다니까. 나 저번에 형이랑 공포영화 보고 불 켜고 잔 거 알아요?”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다며 도하가 진저리를 친다. 하필 그날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까지 우는 바람에 공포심은 두


배가 됐고, 밤새 욕실이랑 방 안의 불은 켜고 잠들어야 했다. 듣고 있던 준영이 겁도 많다며 놀렸지만, 한편으론
아직 아이 같은 면이 남아 있는 게 귀여웠다.

그렇게 한참을 고르던 중 도하가 야한 영화를 하나 고른다. 포스터에 여자가 속옷만 입고 나왔는데 별점이 10 점
만점 중에 1 점이다. 제목 밑에 영화평이 나오는데 그것마저 최악이었다.

“이거 볼까요?”

그 말에 준영이 인상을 구겼다.

“틀기만 해?”

도하가 아쉬운 듯 다른 걸 고르는데 준영이 그런 도하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도하가 제 입으로 다른 사람이랑


잔 적이 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말 다른 사람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걸까. 보통 남자라면 저런 영화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니 말이다. 그랬는데 이번에 고른 건 잔잔한 일본 영화다.

“그럼 이거?”

“취향이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아깐 농담이었고.”

볼 거냐고 묻길래 이번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재생되는 동안 도하가 준영의 얼굴에서 팩을
떼어낸 다음 뺨을 톡톡 두드려 흡수시켜 준다. 양 손바닥으로 뺨을 꾹 누르며 뽀뽀를 하길래 준영이 미간을
옴폭하게 구겼다. 아까 욕실에서 입술을 물고 빠는 바람에 쓰라릴 정도였다.

“입술 헐겠다.”

그 말에 웃더니 이번에는 뺨과 콧등에 번갈아가며 쪽쪽, 난리다. 영화가 시작된 거 같은데 도하가 얼굴을 붙들고
놔주질 않으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 좀 보자며 어깨를 밀어내는데 테이블에 올려둔 전화가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도하가 잽싸게 일어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준영에게 건네다 말고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인상이 대번 구겨졌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도하가 먼저 전화를 제 귀로 가져갔다.

“송연우, 왜.”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잠시 도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연우가 울면서 돼지 어쩌고 하는 게 들렸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 준영을 쳐다봤다. 그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하고 고함을 치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걸 지켜보는 도하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점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 *

끼이익. 병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나서 준영과 도하가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준영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고 도하는 외투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상에서 제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준영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도하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라도 하나 있으면 피우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지금 당장 강이건을 패 죽인 다음 응급실이 아닌 영안실로 보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를 끄득 물고서 들어가는데 아픈 사람들 천지다. 어릴 적 많이 와서 그런지 그 풍경이 익숙했다. 물론 맞아서


온 건 아니었고, 때려서 사과하러 끌려온 거였지만.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는데 저 멀리서 침대에 강이건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이마에 작은 밴드를 붙이고서 준영을 보고 배시시 웃는 거 보니 아무래도 멀쩡해 보였다. 다가가는데 도하를
보더니 손까지 흔든다. 옆에 송연우도 있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시뻘겋게 퉁퉁 부어선 마치 붕어 같았다.

제 시계를 훔치고 그렇게 구박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울기도 하는구나 싶어 놀라웠다.

“어쨌든 다행이다. 근데, 밤에 둘이 거긴 왜 간 거야?”

연우가 머뭇머뭇하는데 이건이 잠도 안 오고 산책할 겸 나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연우가 그런 이건을
쳐다보며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강이건이 멧돼지랑 같이 계곡 쪽으로 굴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돼지가
구르면서 꾸에엑 하고 멱따는 소리를 냈기에 강이건도 잘못된 줄 알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플래시를 들고 강이건을 찾으러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경사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비춰도 보이질 않았고 정신없이 119 에 연락을 하는 와중에 한쪽에 누워 있는 강이건을
발견했다.

처음엔 이름을 불렀는데 대꾸도 없고 눈도 뜨지 않으니 겁이 났다.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죽지 말라고 엉엉, 울면서 너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주접을 떨었다. 그때 이건이 으, 소리를
내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연우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기쁜 건 처음이었다. 누워 있는 이건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119 가 도착했고, 구급차를 타고 이곳으로 도착했다. 미성년자란 말에 보호자를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 제 휴대폰에 저장된 어른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당장 생각난 것이 준영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예상보다 빨리 준영과 도하가 도착했다. 알고 봤더니
서울에 있었단다.

“그러니까 돼지가 공격했다는 거야?”

“멧돼지요. 엄청 컸어요. 그렇지 연우야?”

연우가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서 가끔 멧돼지 흔적을 보긴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앞을 가로막길래 성질대로 돌을 집어 던진 게 실수였다. 멧돼지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아직도
그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린 것 같았다.

연우의 찢어진 점퍼를 보며 준영이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둘 다 큰일 날 뻔한 상황


아니던가. 애초에 그곳에 데려가지 말 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도하가 불쑥 셋의 대화에 껴들었다.

“그 돼지는 어떻게 됐는데.”

“연우가 그러는데 걔도 같이 기절했다가 나중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갔대요.”

“그러니까… 돼지가 너를 공격한 게 아니라 네가 돼지를 공격한 거네?”

“에이, 아니에요. 돼지가 연우를 공격했고, 제가 돼지를 공격한 거죠.”

하하. 씨발. 그게 그거지. 도하가 영혼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돼지 때문에 둘이 오붓하게 보내다
여기까지 불려 온 거란 말이지. 저 새끼가 그냥 멧돼지한테 물려갔어야 하는데. 못마땅하게 쳐다보니 이건이 괜히
움찔해서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도하 형. 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좋을까, 그럼?”

“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너한테 뭔가 큰 잘못을 했어?”

“네에?”
“잘 기억해 봐. 하나라도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돼. 정말 없는데 이러는 거면 내가 널 죽여 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생뚱맞은 소리에 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영을 바라봤다. 지금 도하가 제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어쩐지


준영이라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준영이 그런 이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 후 다리 밑으론 도하의 발을
툭 걷어찼다. 하지 마.

그때 간호사가 오더니 보호자를 찾는다. 준영이 갔고,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갔다. 둘이 사라지고 나서 이건이
이번엔 연우를 봤다. 눈이 뻘겋게 부어서는 제가 알던 연우가 아닌 거 같았다.

어릴 때 빼곤 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더 놀랐다. 의식이 흐릿하던 와중에도 무슨 소릴 들은 거 같은데.


좋아한다고, 죽지 말라고, 에이,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연우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다.

“너 눈 부으니까 진짜 웃기다. 완전 작아졌어.”

큭큭대고 웃는데도 연우는 별말이 없이 딴 데만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병신이라고 욕을 한 사발 퍼부을 텐데.


이건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손을 뻗어 연우의 점퍼를 붙들고 툭툭, 잡아당겼다. 다 뜯긴 점퍼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질 않았다.

“새로 사야겠다.”

“…전에 네가 사다 준 거 있잖아.”

“어차피 그거 입지도 않으면서.”

연우가 대꾸하지 않고 다 뜯겨나간 제 점퍼 밑단을 내려다봤다. 강이건이 저번에 집 앞에서 주고 간 점퍼는 실은


제 아버지가 입었다. 아까워서 입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 보니 홀랑 입고 나간 것이다.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말아 버렸지만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그때 의사를 만나러 간 준영이


돌아왔다. 도하는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별 이상 없으니 오늘 퇴원해도 된다고 했단다.

혹시라도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란 말도 잊지 않았다. 며칠 지켜봐야 한다는 말도.


그렇게 밖으로 나와 보니 도하가 차를 대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얼굴이 보였는데 이건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밤인데도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빛을 내며 이글이글 타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미움받는
이유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애초에 거기다 가둔 건 도하였으면서.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잔뜩 화난 모습을 보니 그걸 따질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 * *

우와! 이건과 연우가 도하네 집으로 들어오며 감탄을 내질렀다. 밤도 늦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이곳으로
왔는데 자신들이 머물던 곳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넓고 깔끔하게 꾸며진 집을 보니 도하가 부자긴 부자구나
싶어 실감이 났다.

처음 그곳에 버리고 갔을 땐 정말 화가 나고 부글부글 끓었는데, 막상 지내보니 수업받는 것도 할 만하고 음식도


맛있고 생각보단 지낼 만했다. 한 달 머무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도망친 걸 보니 연우는
전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밤마다 말도 안 하고 저한테 냉랭하게 굴었던 건가. 그렇게 싫었으면 집에 가자고 말을 하지.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다 도하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눈이 뾰족하게 올라가서 살벌한 기세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도하 형… 감사해요. 집까지 초대해주시고.”

그 말에 도하가 입술을 비틀며 웃더니 검지로 이건을 콕 찍었다. 그 입 다물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


외투를 벗지도 않고 안방으로 홱 들어가 버린다. 이건이 괜히 찔끔해서는 준영을 쳐다봤다.

준영이 사람 좋게 웃으며 둘이 잘 방과 욕실을 안내해줬다.

“도하가 몸살 기운이 있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너희는 얼른 자.”

“선생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감사했습니다.”

연우도 마지못해 꾸벅 인사를 했다. 준영이 아이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한 후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하가 침대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서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준영이 슬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그
옆으로 다가갔다.

“명상하는 거야?”

농담처럼 물었는데 도하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다. 이를 까드득 물길래 준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정말 열 받았나 보다. 하지만 애초에 거기다 가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화내지 말고 자자. 피곤하다.”


“나는요, 태어나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었거든요.”

“…나?”

“응, 서준영.”

그 말에 준영이 웃었다. 그러자 도하가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근데 하나 더 늘었어. 강이건, 저 새끼. 하아.”

허탈한 그 얼굴을 보며 준영이 이번엔 참지 못하고 소리까지 내서 웃었다. 정면을 바라보던 도하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휠 정도로 웃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고통받는데 그렇게 신이 나느냐고 묻는데도
준영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진짜 이럴 거예요?”

그만 웃으라며 준영의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밀고 몸 위로 올라갔다. 간지러움을 태울 생각이었는데 자세


때문인지 분위기가 묘해졌다. 도하가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가 놓으며 준영의 옆구리를 만지다 셔츠 안으로 속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애들 자면, 한 번 더 할까요?”

준영이 거절할 틈도 없이 손이 안으로 들어와선 가슴 쪽으로 올라온다. 그 손을 빼내려는데 도하가 다른 손으로


준영의 뺨과 입술을 다정하게 매만진다.

“어쩌면 이렇게 안 예쁜 데가 없을까.”

“아깐 잘생겼다며.”

“예쁘고, 잘생기고, 혼자 다 해.”

낯 뜨거운 말을 잘도 뱉는다며 이제 내려오라고 하는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도하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밖에서 수건이 없다고 말하는 이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도하가 튕기듯 준영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준영이 그런 도하를 다급하게 붙들고는 끌어당겨 입술을 겹쳐 물었다. 아무래도 지금 내보냈다간 이건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혹시 모르지. 멧돼지도 때려잡는 녀석인데, 둘이 붙으면 볼만할지도.

짧은 키스였지만 쪽 소리가 나게 떼어내자 조금 전 그 사납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준영이 웃고 나서


문 쪽을 향해 대답했다.

“금방 가져다줄게. 일단 씻어.”

도하가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당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쳐 물고 진하게


빤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길래 준영이 얼른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수건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안방에서
후다닥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날아왔지만 모른 척 문을 닫았다.

* * *

연우가 가만히 누워 이건의 등을 바라봤다. 씻고 약을 먹은 이건은 피곤했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졌지만 저는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이건이 잠결에 뒤척이며 끙, 소리를 낼 때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의사가 어지럽거나 토할 거 같으면 다시 오라고 했는데.

괜찮나 확인하고 나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까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이 되질
않는지 쿵쾅거렸다. 물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거실에 트리가 켜져 있고 창가에 준영이
앉아 있다가 저를 돌아본다.

“안 잤어?”

머쓱한 마음에 괜히 목을 긁적였다.

“네. 잠깐 물 마시러 나왔어요.”

“피곤할 텐데. 얼른 자.”

네. 연우가 대답하고 나서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물을 따라 마시다 말고 준영의 뒷모습을 흘깃 바라봤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휴대전화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맥주에 시선이 고정됐다. 한 모금 마시고 싶다. 그때 준영이 다시 돌아서 저를 본다. 연우가
허둥지둥하며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냉장고에 맥주 있으니까 마시고 싶으면 마셔.”

그 말에 연우가 다시 머쓱하게 웃는다. 괜히 뜨끔해선 머뭇거렸더니 준영이 일어나서 오더니 맥주를 직접 꺼내서
따준다. 치익,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왔고 연우가 그걸 들고 준영을 따라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트리에 걸쳐진 반짝이는 전구들이 창에 비춰 어두운데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제집에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준영과 도하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여태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됐다. 패거리들끼리 어울려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음담패설이나 하던 일상과는 전혀 달랐다.

눈치를 슬쩍 살피고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셨다. 목구멍이 싸르르 울리면서 정신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강이 흘렀고 건너편과 이쪽을 이어주는 다리가, 그리고 그 다리 아래로 예쁜
불빛들이 보였다.

늦은 시간인데도 차들이 오가는 게 신기했다. 자신의 동네에선 이 시간이면 다들 불 끄고 자는데. 가끔 술 취한


제 아버지가 행패를 부리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한 동네였다.

둘이 나란히 앉아 그렇게 말도 없이 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한 캔이 다 비워졌다. 준영이 마지막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가 들어가는지 알고 인사를 하려 하기에 앉아 있으라고 손짓을
하고 다시 냉장고로 가 맥주 두 캔을 꺼내왔다.

하나를 연우의 앞에 놓아주고 나서 나머지 하나를 따서 입으로 가져가서 꿀꺽꿀꺽 마신다. 작은 불빛들이 그의
얼굴에서 반짝이며 부서졌다. 연우는 처음으로 준영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강이건이 말한 것처럼 잘생기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술 먹였다고 신고하면 안 돼.”

그 말에 연우가 슬쩍 웃어 보였다. 유리창에 그런 제 모습이 비치는 걸 보곤 곧 인상을 굳혔지만. 준영과


비교하니 어쩐지 조금 초라해졌다. 준영이 그런 연우를 한 번 보고 나선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이건인 자?”

“…네. 근데 계속 끙끙거려요.”

“거기서 굴렀으니 아플 만도 하지.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응?”

“저는 집으로 돌아갈래요.”


연우의 말에 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이랑 통화할 때마다 걱정과는 달리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연우는 그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일단 강이건에게 아침에 의사를 묻더라도 연우는 제가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내일모레 시상식 때문에 도하는 여기 남고 저는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내일 나랑 같이 갈래?”

“…네.”

그러자, 그럼. 준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건이한테 얘기했어?”

잠시 생각하던 연우가 저번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못했어요. 준영은 서울에
있는 모친에게 가서 살 생각이면 이건에게도 미리 말을 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 했지만, 산속에서 둘이 붙어
지내는 와중에도 도무지 입은 떨어지질 않았다.

전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잘됐다며 기뻐할 것 같았으며 그 얼굴을 보면 참았던 감정들이 터질 것 같아


두려웠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가서 꿀꺽꿀꺽 비우고 나니 취기가 올라온다. 귀가
화끈거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술 못 마시는구나?”

“…네.”

준영이 자기도 그렇다며 웃는다. 연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그때는 웃고 있어도 사람이 좀 어두워 보였는데. 오늘 역시도 지쳐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빤히 쳐다보니 준영이 눈을 슬쩍 크게 뜬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연우가 잠시 망설이며 머뭇댔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물어봐.”
하지만 선뜻 입은 떨어지질 않았고 시선은 바닥만 맴돌았다. 손은 자꾸만 맥주캔을 만지작댔다. 준영이 괜찮다고
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둘이… 사귀나 궁금해서요.”

준영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둘이라고 하면 저와


도하를 말하는 걸 테고, 사귀는 건 아니라도 평범한 사이가 아니란 건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알아챘을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누가 먼저 좋아했어요?”

이번엔 준영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릴 적 분명 저는 도하를 꽤 좋아했다. 처음에는 제 모친에게 잘 보이려


도하나 민주를 더 챙긴 것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집에서 머물면서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커갈수록 도하가 사랑스러워 보인 건 사실이다. 물론 온전히 동생으로서였지만.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따지는 건 어려운 문젠데. 한참 고민을 하는데 연우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진다.

“기분이 어때요?”

“뭐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준영이 예전 제 감정에 대해 곰곰이 떠올려봤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도하가 저를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안고 싶고, 자고 싶다고 했을 때, 그때 기분이 어땠더라….

“처음엔 당황스럽지…. 도망가고 싶고, 자꾸 회피하게 되고.”

그렇구나. 도망가고 싶어지는구나. 연우가 혼잣말처럼 중얼대며 맥주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다 마신 캔을


구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작 두 캔뿐인데도 벌써 취기가 올라왔고 더 앉아 있다간 준영에게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서였다.
“…저 들어가서 잘게요.”

준영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곧 관두었다. 당사자는 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 섣불리 얘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 잘 자.”

손을 흔들자 연우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서는 자신들이 머무는 방 쪽으로 향한다. 이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위로한답시고 기약 없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게 얼마나 몹쓸 짓인지 제가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쩐지 맥주 맛이 더 쓴 기분이다. 전화를 꺼내 지금이라도 모친에게 온 연락이 있나 확인했지만 역시나 없다.


이대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내일이라도 찾아가서 이해해달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아무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할 놈이라고 욕을 한다든가 배신감에 치를 떤다든가.

침묵은 금이 아니라 숨통을 조이는 쇠사슬 같았다.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도하가 있는 안방 쪽으로
향했다. 잠든 녀석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으면 어지러운 마음이 좀 정리될 것 같았다.

CH 20.

방으로 들어온 연우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갔다. 이건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벽 쪽을 향해 누워 자는 중이었다.
똑같은 자세로 누워서 그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취기가 오르니 조금 더 옆에 붙어서 자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갔다. 샴푸 냄새가 진하다.

그게 강이건 냄새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더 맡고 싶어 고개를 좀 더 빼고 뒤통수 쪽으로 내밀었다.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가 머리카락을 만질까 하는데 이건이, 음, 소리를 낸다.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선 손을 거두고
얼른 천장을 향해 몸을 바로 뉘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조용하다. 고개만 슬쩍 돌려 봤더니 이건은 여전히 그대로다. 다시 모로 누워서 그


뒤통수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강이건….”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불렀지만 대꾸가 없다.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이건아.”

허구한 날 병신이라고 부르다 이름을 부르니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눈도 화끈거리고 코끝도 시큰대고 괜히 감정이
복받쳐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대답 없는 그 뒤통수만 노려봤다.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묻던, 아니라고 하니 해맑게
웃으며 다행이라고 하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이 콱
멘다.

후우,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도 감정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좋아해서 미안….”

결국 눈물이 쏟아져 베개로 흘러내린다. 혹시라도 깰까 싶어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꾹 틀어막은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좋아해서 미안해. 나 같은 게 널 좋아해서 정말 미안해. 뱉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시퍼런 피멍으로 새겨졌다.

* * *

도하의 옷차림을 본 선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아침부터 도하를 메이크업숍으로 의상실로 실어 나르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본 도하는 어쩐지 더 뺀질거리고 말을 들어먹질 않았다. 혜윤이 직접
오겠다는 거 자신이 컨트롤 하겠다며 시상식장에서 뵙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굴었는데 벌써 후회가 됐다.

어쩐지 머리 위로 검은색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도하는 전혀
엉뚱한 걸 입고 있었다. 셔츠야 흰색이니 다른 걸 입어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 와인색 넥타이는 뭔데.

“어디 면접 보러 가시나 봐요?”

“예뻐?”

“지금 예쁜 게 문제야? 시상식에 그러고 갈 건 아니지? 차라리 아예 매질 말든가.”

“아니, 난 이러고 갈 건데?”

“인마, 대표님 알면 난리나.”

“난리는 내가 피워야지. 남의 도장을 훔쳐다 계약서에 막 찍는 아줌만데.”

아. 선태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도하가 선뜻 계약했다고 하길래 어쩐 일인가 싶었는데 도장을 몰래
찍었단 말에 그녀다운 짓을 했구나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누나라고 더 난리 치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인 거 보면, 우애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옷에 대해 더 잔소리할까 하다 관두었다. 왁스로 손질해 올린 포마드 머리에 슈트에 타이까지 매고 있으니 은근히
깐깐해 보이고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같은 남자가 봐도 섹시했기 때문이다. 그걸 노렸다면 성공했네.

그런 선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 잘 나온 거 몇 장을
추려 준영에게 바로 전송했다. 읽었다는 표시가 나타나는데도 바로 답장이 없길래 이번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에서 잔 다음 날 준영은 이건과 연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다 같이 갈 계획이었지만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차 키를 건네줬다.

준영은 모친의 얘기를 꺼내지도 내색하지도 않았지만 한 번씩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럴 때마다 도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것보다 집이 나을 것 같았다.

“사진 봤어요?”

[응. 지금 막 보는 중이었어.]

“아까 보냈는데.”

[…응.]

“한참 봤구나?”

[…응.]

그 말에 도하가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짧게 대답하는 거 보니 옆에 누가 있나 보다. 강이건이겠지.


더 물어보면 괜히 민망해할 것 같아 보채지 않았다.

“나 갈 때까지 그거 보고 있어요.”

[뒤풀이하지 않아? 거기 들렀다 와.]

“됐어요. 갈 때 뭐 사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포장해서 가게.”

[됐어. 그냥 와.]

“알았어요. 그럼 끝나자마자 날아갈게요.”

도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걸 보고 한쪽에서 시간을 확인하던 선태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온다.
혜윤에게 내려온 지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랑 통화하거나 연애를 하는 거 같아도 놔두라고.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인데 괜히 여자 문제가 얽히면 어쩌느냐고 걱정했더니 혜윤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분명 여자랑 통화하는 건데. 그것도 꽤 깊은 사이인 것 같은.

왜냐하면, 전에는 저렇게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 가식적으로 웃거나 사람을 비웃는
건 많이 봤지만. 무슨 얘길 하나 궁금해서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는데 도하가 얼른 복도를 통해 숍 안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린다.

선태가 한숨을 쉬고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생길이 훤하다고, 저 성질을 다
받아주고 어찌 사귀느냐고 얼굴도 보지 못한 상대에게 애도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복도를 지나온 도하는 통화할 만한 곳을 찾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고


안에서 통화를 더 하다가 막 끊으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선태인가 싶어 돌아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낯이 익다 했는데 요즘 잘 나가는 남자 배우였다. 그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애인인 듯했다.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오늘은 좀 힘들어. 자기도 알잖아? 나야 물론 빠지고 우리 자기 보러 가고 싶지. 그랬어? 미안, 우리


애기 뭐 사줄까? 반지? 아, 수린아 잠시만. 매니저 전화 왔다. 금방 다시 걸게.”

애인한테 되게 다정하구나 싶었는데 곧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이어간다.

“어, 자기야. 우리 자기 나 보고 싶어서 했구나? 아, 뭐 그런 걸 보냈어. 아니야. 괜찮아. 차? 됐어, 차는


무슨. 아니, 나야 세단보단 스포츠카가 좋긴 하지만….”

지켜보던 도하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바람둥이군.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옆이
조용하다. 나갔나 싶어 봤더니 사내가 통화를 마쳤는지 팔짱을 끼고 저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직원?”

“아니요.”

“그럼 배우?”

“네.”

아, 남자가 그러냐며 입가에 비죽이는 미소를 건다.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적고 그걸
제 모친에게 보냈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려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통해 넥타이가 조금 틀어진 걸 발견했다.

제가 맸더니 모양이 아무래도 엉성하다. 어릴 적엔 모친이 해줬는데, 막상 커선 맬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서준영이 제게 넥타이 매주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곧 변질돼 서준영이 알몸으로 넥타이 하나만 한 채
제게 박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뒤에서 넥타이 줄을 잡아당기며 미친 듯 허리를 움직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음흉스런
웃음이 번졌다.

일단 밖으로 나가 다시 매달라고 해야겠군. 넥타이를 풀어 손에 챙겨 들고 막 나가려는데 남자가 다리를 정강이


높이로 들어 도하를 가로막는다. 도하가 쳐다보자 남자가 눈빛을 반짝였다. 도하는 머릿속 정보를 뒤져 남자를
떠올리려 애썼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히 유명하긴 한데.

“신인인 거 같은데, 선배 보고 인사할 줄도 모르네?”

도하가 남자의 다리를 봤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봤다. 그제야 이름이 생각났다. 양진우. 작년에 신인상을
받은 요즘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배우였고, 제가 받아서 살펴보던 시나리오에 주인공으로 낙점된 그 사내였다. 하.
이게 인연인가 악역인가.

도하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선배길래 인사를 한 건데 상대는 영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다시.”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딱 봐도 나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어지간히 꼰대 짓을 하려고 드네.


한 번 더 꾹 참고 이번엔 조금 더 깊숙하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야. 너는 목만 움직이고, 허리는 굽혀지질 않아?”

도하가 어금니를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으며 이번엔 허리도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됐습니까?”

“됐습니까는 빼고.”
“네, 빼고. 그럼 이만 ”

그대로 나가려는데 이번에도 또 발을 걸어 막는다.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싶어 봤더니 그가 손수건이


있느냐고 물었다. 살펴볼 것도 없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바로 도하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가리킨다.

“그거, 버릴 거 아니야?”

처음으로 도하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닌데요.”

“그러지 말고 줘봐. 내 구두 좀 닦게.”

“…….”

“왜? 싫어?”

양진우가 피식 웃더니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도하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쑥 빼간다. 구두를 신은 제 발을 의자


위에 턱 올려놓더니 넥타이를 가져가 닦으려 했고, 도하가 참지 못하고 무서운 얼굴로 양진우의 손을 비틀었다.
악, 양진우가 악을 쓰는 사이 넥타이를 빼앗아 한번 털고서는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양진우가 도하의 멱살을
붙잡고 확 하고 잡아당긴다.

“어린 새끼가 존나 싸가지 없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를 향해 도하가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놓으라고 하니 양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간다.

“안 놓으면? 때리게? 너 나 감당할 수 있겠.”

빡, 도하가 그대로 양진우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악, 양진우가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휘청 물러났다.
그가 손을 떼어내는데 코피가 주르륵 흘러 흰색 와이셔츠를 적신다. 평소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양진우였고,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선 옆에 있던 장식용 화병을 집어 들었다.

“이 씹새끼! 너 이리 와!”
“그걸로 나 갈기면 너야말로 감당 못 할 텐데?”

그건 내가 할 얘기다, 이 새끼야! 그가 화병을 휘두르자 도하가 가볍게 피하고 나서 머리채를 붙들고 무릎


뒤쪽을 걷어차 순식간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양진우는 일어나려고 했고 도하가 그대로 그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그가 풀썩하고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자 도하가 인상을 쓰더니 널브러진 그를 발로 툭 한 번 찼다.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선 쯧, 혀를 찼다.

“선배님, 그러게 왜 우리 자기가 사준 넥타이를 욕보이고 그래요. 사람 짜증 나게.”

마침 밖에서 선태가 준비 다 했느냐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이 인간을 어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도하의 얼굴 위로 악마 같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 * *

준영이 감자 칼로 사과를 깎는 사이 이건은 테이블을 정리했다. 거치대에 세워둔 휴대폰에선 광고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영화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기에 그걸 함께 보려고 준영의 집에 들른 것이다. TV 가 있으면 좀 더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준영이 깎은 사과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고 이건의 옆자리에 앉는다.

“시작했어?”

“아직요.”

이건이 사과 하나를 집어 준영에게 건넸다. 준영이 그것을 받아 들고 화면에 집중했다. 도하가 꼭 보라고 한 건
아니지만 아까 보내준 사진만 봐선 궁금하긴 했다. 머리를 내리면 확실히 그 나이 또래로 보였지만 올리면 꽤
성숙해 보여 다른 사람 같았다.

옆에선 이건이 사과를 우물우물하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마엔 아직 넘어져서 생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건에게 과외를 계속할 건지 아니면 연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건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건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공부야 집에서 해도 괜찮다면서.

“이건이 안 아까워?”

“네? 뭐가요?”

“한 달이라도 제대로 수업받았으면 꽤 도움 됐을 텐데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깝긴 하지만….

“괜찮아요. 연우 없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또….”

이건이 말을 하려다 만다. 또, 뭐? 하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그냥 웃음으로 무마해 버린다. 준영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이건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심란했다. 사실은 그날 밤에 잠든 게 아니었다.

연우가 울던 날. 제 등 뒤에 대고 좋아한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백하던 날.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상상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가 되니 더 암담했다.

흐느껴 우는 연우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그냥 울음이 그치길 기다려줬을 뿐. 그렇게


둘은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연우는 여태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였고.

“시작한다.”

둘은 나란히 붙어 앉아 손바닥만 한 화면에 집중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배우들이 나와 사회를 봤고 곧바로


축하공연도 이어졌다. 뮤지컬 배우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사이 카메라가 배우들이 앉아 있는 곳을 한 번씩
비췄다. 그때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건은 도하를 발견하고 신기해했다.

“선생님, 보셨어요? 방금 도하 형 지나갔죠?”

“응. 도하 맞네.”

“완전 지루한 얼굴인데요.”

적당히 얼굴에 웃음을 장착하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 있는 배우들 사이에서 도하는 지루해 죽겠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까지도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설마 시상식
내내 저러진 않겠지. 걱정하는 와중에 조금 전 본 도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왜 자신이 선물한 넥타이를 한 거지. 셔츠까지 같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시상식에선 나비넥타이를
매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매니저가 미리 귀띔했을 텐데도 저걸 하고 있다는 건, 본인이 고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다.

아, 이마를 짚으며 미리 말이라도 할 걸 후회가 됐다. 설마 저걸 그대로 입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는 사이


기다리던 남우 조연상 시상식이 시작됐다. 배우 이름이 하나씩 호명됐고, 사회자 입에서 도하가 출연했던 영화와
이름이 나오자 이건이 우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심각하게 보던 것도 잠시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귀여워 웃었다. 곧 화면에 도하가 출연한 장면과 함께 현재
얼굴이 나온다. 조금 전에 봤던 그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과하지 않을 정도로 보기 좋게 웃고 있었다.

준영의 신경은 넥타이에서 도하의 얼굴로 옮겨갔다. 조연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름 꽤 알려진 배우들
사이에서 도하가 있으니 신기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상 가능성이 있으니 혜윤이 직접 찾아왔겠지.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호명된 후보들의 화면이 나란히 나온다. 그 사이에서도 인물로 꿀리지 않는구나
생각하는데 잠시 후 시상자가 들고 있던 봉투를 열고 펼친다. 슈트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내가 긴장을 고조시켰다.

“수상자는!”

두두두두, 효과음과 함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집중하느라 준영과 이건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별 헤는 밤의 이도하 씨, 축하합니다.”

우와아아. 이건이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고, 준영이 괜히 뭉클해져선 코끝을 슥 문질렀다. 자식이
없지만 만약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뿌듯하고, 장하고. 그러는 사이 카메라가 도하를 단독으로 비췄다. 도하가
웃으며 일어섰다.

주변에서 다른 배우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깍듯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혜윤의
모습도 잠시 비쳤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는 배우들 못지않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가 일어나서 도하를 안아주며 토닥인다. 도하가 웃으며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곧 시상대 위로 향했다.
시상자로부터 상패와 꽃다발을 건네받고 나니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이 올라와 꽃을
건네준다. 그것을 받아 들고서는 도하가 마이크 앞에 섰다.

전체 샷으로 보니 아까보단 넥타이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젊고 잘생긴 CEO 같기도 하고. 그가 마이크
앞에 서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준영이 긴장해선 손을 맞잡고 꾹 힘을 줬다. 옆에 이건도 마찬가지였는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도하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게 가짜라는 걸 준영은 알았다. 지금 녀석이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다는
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일단은….”

긴장한 모습과는 달리 도하는 목소리 하나 떨지 않고 마치 외우기라도 한 듯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씩 나열했다.


가족과 함께 영화를 촬영했던 감독, 배우들, 소속사 대표인 혜윤과 매니저의 이름을 부르더니 나중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압구정 제일 성형외과에 계신 김민석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유능한 분이세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하고 사르르 웃는다. 준영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놀란 것도 놀란


건데, 저렇게 말하면 다들 도하가 성형했다고 생각할 게 아닌가. 지금 혜윤의 표정이 안 봐도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까지 한 도하가 잠시 머뭇대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제까지 덤덤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사회자가 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고, 도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준영이 사과를 한 입 물고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긴장하며 보는데


도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서준영 씨. 내가 많이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툭, 준영이 물고 있던 사과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도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나서


무대 아래쪽으로 향했다. 살짝 웃는 사회자의 얼굴이 보였고 곧 박수가 들렸다. 준영이 떨어진 사과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댔다.

이건 역시나 사과를 들고서 눈만 느리게 끔벅였다. 도하 형이 선생님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구나. 부러운
마음으로 옆에 있는 준영을 쳐다보는데 그는 목덜미와 귀가 빨개져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뭐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주방으로 후다닥 가 버린다.

“선생님 더 안 보세요?”

“…어. 나, 나는 됐어.”

허둥지둥하던 준영이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넋 나간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미친 거 아닌가. 저 사람 많은


데서 제 이름을 언급하면 어쩌잔 건지. 심장이 쿵쿵, 방망이질해댔다. 침착하자, 침착해.

어차피 사람들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도하는 톱스타도 아니었고, 게다가 친한 친구나 특별한 사람들을
말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마음을 다스리며 서 있는데 인기상 발표가 진행되는 중인지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되자 이건이 어? 하고 놀란 얼굴을 하더니 준영을 다급하게 찾았다.

“선생님! 도하 형 또 나오는데요?”
차를 우려내던 준영이 그쪽을 쳐다봤다. 잠깐 화면에 나온 줄 알았는데 이건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 테이블 쪽으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이건의 말대로 휴대폰 화면에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화면 아래쪽으로 인기상 ‘양진우’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 배우는 보이지 않았다. 준영도 아는 배우였다.


인기상은 여러 명이었는데 양진우의 차례가 되자 도하가 트로피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더니 애석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네, 일단 감사합니다. 진우 형이 치질이 심해지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제가 대리 수상하게 됐습니다. 대신


저한테 인사를 좀 전해달라고 했는데요, 일단 부모님과 가족들, 영화관계자분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스태프분들께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전해달랍니다. 제겐 너무 좋은 형이고, 또 인생에 멘토이기도 하여 이
수상이 한없이 기쁩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진우 형 많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세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내려가려던 도하가 갑자기 아! 하는 얼굴을 하더니 마이크 앞으로 다시 다가간다.

“제가 이걸 깜박했네요. 진우 형이 지금 방송을 보고 있을 김서연 양에게 정말 사랑한다고, 나한텐 당신뿐이라고


전해달랍니다. 그럼 전 이만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곧 작게 박수 소리가 들렸고, 김서연이 대체 누구냐고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는 배우들의


모습도 보였다. 준영이 굳어진 인상을 펴질 못했다.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기 배우가 공식 석상에서
여자 이름을 언급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동생이나 누나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도하가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갔고, 사회자가 매끄럽게 다음 진행을 이어갔다.

“와, 도하 형 인맥 쩐다! 양진우도 친한가 봐요!”

이건은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준영은 의아하기만 했다. 자신이 아는 양진우랑 도하가 친해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은데. 양진우는 방송에서 보이는 착하고 신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업계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이 좋지 않았다.

부잣집 사모님을 스폰서로 잡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밤마다 클럽 시크릿룸에서 여자를 돌아가며
만난다는 소문까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건이 휴대폰을 들고서 뭘 검색하더니 이것 좀 보라며 난리다.

그것을 훑어보던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털사이트에 뜬 실시간 검색어였는데, 1 위가 양진우 치질, 2 위가


양진우 애인, 3 위가 김서연, 4 위가 양진우 김서연…. 전부 다 양진우 얘기다. 그리고 8 위가 미소 성형외과
김민석?

정작 언급을 한 당사자인 도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가 막혀 웃는데 카메라가 잠시 도하를 또 잡아준다.
초반 지루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입가에 저만 알아볼 수 있는 그 특유의 악마 같은 웃음이 진득하니 배어 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사고를 제대로 친 거 같은데. 불길한 예감에 굳어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검은색 승용차가 속도를 높였다. 춘천 방향으로 빠져 달리는데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린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전화를 받았더니 받자마자 카랑카랑한 혜윤의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너 어디야! 지금 당장 이리로 안 와!]

“미안, 누나. 나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나왔어.”

[시끄러워! 일단 와서 얘기해. 와서, 네가 친 사고를 수습하든지 빌든지 하란 말이야, 이 자식아!]

“내가 왜. 누나가 소속사 대표잖아. 잘 수습해 봐.”

[네가 깡패야? 건달이야? 대체 양진우한테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길래 사람을 창고에 가둬?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옛날 버릇을 못 고치고 사고를 쳐! 그것도 네 까마득한 선배한테!]

“그 새끼가 내 넥타이를 모욕했어.”

수화기 건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길래 혹시나 끊어졌나 싶어 ‘여보세요?’ 하고 다시 불렀다. 그제야
그녀의 기막힌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고 했어?]

“걔가 먼저 준영이 형이 사준 넥타이를 모욕했다고.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하아.]

“누나도 이해하지? 그리고 양진우네 소속사 대표랑 누나랑 친분 있다며. 잘 해결해줘. 그것도 소속사 능력이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대표님.”

야아아아! 폭발한 그녀가 악을 쓰길래 도하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기다렸단 듯 이번엔 김민석에게
전화가 온다. 하아, TV 한번 출연했다고 완전 인기 스타가 됐구나. 쯧, 혀를 차고 나서 전화를 받으니
상대방에서 후우, 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이도하, 너 죽고 싶지?]

“용건만 말해요. 나 지금 슬슬 짜증 올라오려고 그러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너 때문에 지금 내 전화에 불이 났어! 알아?]

“좋은 거 아니에요?”

[뭐?]

“앞으로 더 바빠질걸요. 손님도 늘어날 테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오겠네. 이야, 축하합니다.”

[무슨 속셈이냐, 너.]

“속셈은 무슨. 내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잘되면 은혜 꼭 갚는다고.”

[이게 갚는 거냐?]

“아닌가 그럼?”

[솔직히 말해. 무슨 꿍꿍이야?]

“진짠데. 남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네. 그리고 난 김 선생님이 한가한 거 같아서 바쁘게 해드리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래야 우리 자기한테 더는 전화 못 하지.”

[…….]

“성탄절이나 무슨 기념일 날 괜히 술 처먹고 전화하지 말고, 이제 다른 인연을 찾아보세요. 김 선생님 정도면


서준영까진 아니어도 괜찮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부탁 아니고, 경고.”

[너 이 새끼…. 쿨한 척하더니, 뒤끝 있구나?]

“이봐요, 김 선생님. 서준영 같은 남자를 좋아하면서 어떻게 쿨할 수 있겠어. 다른 건 안 그러는데 서준영이


얽히면 더 그래. 그러니까 건들지 말고, 우리 서로 배려하며 살자고요. 아셨죠? 이만 끊어요.”

이번에도 역시 고함이 들리길래 그대로 끊고서 속도를 높였다. 아, 피곤하다. 집에 가지도 못했는데 피곤하고
지치고 다 하는구나. 그랬는데 끊자마자 이번엔 매니저인 선태 전화다. 아, 짜증 나! 결국 전화를 확 끄고서는
옆자리로 던져 버렸다.

* * *

준영이 전화를 들고 안절부절못하였다. 시상식도 끝나고 조금 있으면 새해가 밝아오는데 도하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으로 갈게요. 기다려요.]

문자 하나만 보내 놓고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라리 뒤풀이를 간다고 했으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렇게 대형
사고들을 저질러 놓고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꺼져 있다.

초조한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의 모친이 TV 를 봤을까? 도하의 부모님은? 다들
뭐라고 생각했을까. 잠잠한 제 전화기를 내려다보니 더 심란하다.

얼굴을 한번 문지르고 나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열고 마을 어귀 쪽을 쳐다보는데 들어오는 차가 없다.


마음이 바뀌어 뒤풀이에 간 건가. 아니면 혜윤에게 붙들려 혼나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양진우 소속사 대표한테
멱살 잡힌 거 아닐까.

최악의 상상까지 하며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인터넷 기사를 뒤적였는데 포털 사이트에 양진우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연예인 이름으로 도배가 됐다. 기사를 찾아보니 아까와는 달리 어느 여배우의 파격적인
노출과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연예인 커플의 열애설이 특종기사로 떴다.

그때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서 환한 불빛 두 개가 이쪽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도하가 이곳에 올 때 끌고 온 승용차가 곧 빌라 앞마당에 주차된다. 그러고 나서 도하가 운전석에서 내리고
보조석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손엔 꽃다발이었고 한 손엔 상자가 들린 걸 보아 케이크였다. 잠시 후 현관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준영이 커튼을 치고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까부터 주방에 틀어놨던 라디오에선 새해가 밝았다는 디제이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리는 문틈으로 도하보다 붉은색 장미가 먼저 보였다. 첫날밤 침대에 깔린 장미가 생각나서 흠칫했더니 잠시 후
꽃다발 옆으로 도하의 잘생긴 얼굴이 나타난다. 머리를 넘기고 제가 준 넥타이를 한, TV 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해피 뉴 이어. 내가 늦은 거 아니죠?”

준영이 그 꽃을 받지 않자 도하가 이번엔 케이크를 내보인다.

“표정이 왜 그래요?”

걱정하던 자신이 무색할 정도로 도하는 한없이 밝아 보였다. 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준영이 고개를 젓고선 꽃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도하가 들어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도 그렇고 준영이
방송을 봤구나 싶어 그제야 슬슬 걱정됐다.

“방송… 봤어요?”

“응.”
도하가 준영을 따라가선 소파에 앉아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얼핏 화가 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서. 준영이 또 한숨을 내쉬었고 이번엔 도하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

“내, 내가 잘못했나 보다. 그죠?”

그 말에 준영이 슬쩍 인상을 쓰고 나서 도하를 째려봤다. 도하가 흠칫했다. 제 이름을 말해서 화난 건가. 역시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김민석. 그거라면 저도 할 말이 있다. 백 프로 순수한 마음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말한 건 사실이니까. 물론, 저한테 좋은 마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준영이 저를 향해 양손을 뻗어온다. 도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지, 갑자기
키스하려는 건가 싶어서. 순간 양쪽 귀가 붙들려선 앞뒤로 흔들렸다. 도하가 저로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준영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사고를, 아주, 가지가지로, 쳐놓고, 뭐? 방송 봤느냐고? 그래 잘 봤다, 이 자식아!”

“아, 좀 놓고 말해요. 귀 떨어진다니까. 아아, 아파요, 아파!”

도하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준영을 뒤로 밀어 넘어트리고 몸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손은 귀를 붙든 채였지만


조금 전처럼 흔들거나 하는 건 아니라서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도하가 눈을 휘며 아양을 부리듯 웃으니 준영이
이를 다시 까득 문다.

“그렇게 웃어서 넘어갈 생각하지 마.”

“알았어요. 알겠어. 그러니 좀 놔 봐요. 나 진짜 아파.”

준영이 잡고 있던 귀를 놓아주었다. 홧김에 잡고 흔들긴 했지만 지금 보니 귀가 빨갛게 됐다. 슬쩍 인상을 쓰니


도하가 그 시선을 귀신같이 읽어내고선 준영의 뺨에 제 얼굴을 대고 문지른다.

“화내지 마, 무서워요.”

“무거워. 내려와.”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떨어져 있으니까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그래서 그런 대형 사고를 쳤어?”


“어차피 남들은 관심 없다니까. 그리고 누나가 알아서 수습했을 거예요. 남의 허락도 안 받고 계약서를 마음대로
위조했으면 그 정도 감수는 했어야지.”

하, 준영은 그제야 뜬금없는 열애설 기사가 이해됐다. 물론 새해 첫날부터 심심치 않게 터지긴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기사가 나오고 나니 도하가 친 사고들은 자연스럽게 묻힌 형국이 됐으니 말이다.

도하가 고개를 들고선 준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솔직히 오면서 사고 친 것보다 그것 때문에 준영이 화났을까 봐
더 걱정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오긴 했는데 예상보단 화를 덜 내니 조금은 안도했다.

“케이크 사 왔는데 먹을래요?”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작게 끄덕였다. 저녁을 적게 먹었더니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도하가
고개를 쭉 빼고 준영의 양쪽 뺨에 쪽쪽, 그리고 마지막 입술까지 도장을 찍고 나서야 몸을 물렸다. 준영이
손등으로 슥 입술을 닦자 부리나케 와서는 다시 쪽쪽 입을 맞춘다.

“닦기만 해. 계속할 거야.”

“징그러워. 그만해.”

도하가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울먹울먹하는 표정을 하자 준영이 질색했다. 조금 전 TV 에서


보던 그 남자답고 의젓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저런 모습이라니. 슬쩍 외면하고 주방 쪽으로 가는데 도하가
따라오면서 뒤에 엉겨 붙는다.

“떨어져.”

“좀 자세히 봐요. 얼굴 좀.”

“아까 봤잖아.”

“그래도 더 보고 싶어요.”

준영이 마지못해 몸을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머리는 단정하게 올리고 제가 사준 셔츠와 넥타이를 맨 모습이 화면
속 도하 그대로였다. 잘생겼네. 잠시 속으로 감탄하는데 도하가 준영의 양손을 잡아 제 뺨으로 가져가 감싸게
한다.

“얼른 예쁘다 해줘요. 이 모습 보여주려고 냉큼 달려온 거니까.”


준영이 가만히 있자 도하가 준영의 손을 붙든 채로 제 뺨에 대고 문지른다. 아이, 예쁘다. 미저리마냥
혼잣말까지 해가면서. 결국 준영이 참지 못하고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도하가 그런 준영의 입가에 대고
쪽, 입을 맞춘다.

준영의 몸이 떠밀려 등이 싱크대 쪽에 닿았고 입술이 이번엔 조금 더 깊게 포개진다. 준영이 눈을 감으며 도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호흡이 가빠질 만큼 서로 혀를 문지르고 타액을 섞고 나서야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도하가 아쉬운 얼굴로 더 하려고 덤벼드는 걸 준영이 손바닥으로 막아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도하가 사 온 케이크를 본 준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케이크 위에 사람모형의 장식이 있었는데 둘 다 남자였고,
어딘가 저와 도하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랑 신부처럼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모습으로.

주문 제작한 거냐고 물었더니 도하가 생긋 웃으며 눈치챘느냐고 좋아한다. 만드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건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고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고 와인을 잔에 따랐다.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떠서 입에 넣고 쨍, 와인 잔을 들어 부딪혔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와인 두 병을


비우고 나니 양쪽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준영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리게 껌벅였다. 술이 약해진 건지 조금만
마셔도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걸 보며 도하가 케이크에 있던 과일을 포크로 찍어선 준영에게 내밀었다.

“아, 해요.”

“내가 알아서 먹을게.”

“얼른.”

준영이 아 하고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포도가 넘어간다. 어금니로 짓이기자 새큼한 과즙이 터져 입안에서 번졌다.
슬쩍 인상을 쓰니 도하가 보면서 웃는다.

“와인 마셔요.”

“이미 많이 마셨어.”

“더 마셔도 될 것 같은데.”

“너, 나한테 왜 자꾸 술 권해?”

“요즘 통 못 자잖아요. 먹고 푹 자라고.”

준영이 포크를 든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친이 다녀간 뒤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고 오늘 밤도


그러면 수면제를 먹어볼 요량이었다. 낮에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병든 닭처럼 졸긴
싫었으니까.

“이모 다녀간 뒤로 형 힘들어하는 거 알아요. 그래서 오늘은 좀 푹 자라고 먹이는 거예요. 약 같은 거 먹지


말고.”

우리 집에 카메라 달아 놨어? 준영이 집 안을 살펴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도하가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데 저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미안하고, 괜히 부끄러워져서 그 마음을 달래려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도하가 이번엔 다른 과일을 하나 찍어 준영에게 건넸다.

“집에선 연락 없어요?”

준영이 과일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신경 쓰이면 나랑 내일 같이 가볼래요?”

“글쎄.”

“막 때리면 내가 막아줄게요.”

그 말에 준영이 보일 듯 말 듯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때리면 낫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도하는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해야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몰라 속상했다. 왜냐하면
저는 서준영이 아니니까. 그런 사실이 조금 서글펐다.

“신경 쓰지 마. 조만간 찾아가서 뵙고, 말씀드릴게….”

“고마워요.”

“뭐가.”

“솔직히 나 그때 엄청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묻지도 못했어요. 불안하고 무섭고, 결국엔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까 봐. 시작도 전에 그냥 접자고 할까 봐. 차마 못 묻겠더라고.”

준영이 의외라며 웃었다. 도하는 항상 저돌적이고 자신감 넘치지 않던가.


“내가 형에 관해선 얼마나 겁쟁인 줄 모르죠? 서준영 씨가 내 약점이라니까.”

그 말에 준영이 풀어진 얼굴로 웃는다. 술에 취하니 도하가 아까부터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문을 열고
장미꽃과 얼굴을 빼꼼히 내밀던 때부터. 평소와 달리 자꾸 웃으니 도하가 그런 준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 자기, 취했구나?”

준영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들어가서 잘래요? 이거 내가 치울게.”

도하가 잔을 옮겨 정리하려고 하는데 준영이 그 손을 붙잡는다. 도하가 잔을 쥔 채로 준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입술을 자꾸 움직이는 거 보니 속이 안 좋은가 싶어서 걱정됐다.

“괜찮아요? 토할 거 같아요?”

“그게 아니라….”

“응?”

“같이 잘래?”

“어?”

“들어가서 같이, 안고 잘래?”

술기운 때문인지 말투가 느릿느릿해졌지만 분명 먼저 안고 자자고 말했다. 생전 먼저 내색하는 법도 없고 도하가


건드려야 그제야 반응하더니 먼저 표현을 하고 웬일인가 싶어 감격하던 참이었다.

“싫으면 말고….”

“다시 말해봐요.”

“뭘.”

“방금 한 말….”
준영이 말을 하는 대신 도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하가 그 손을 붙들자 그대로 힘주어 잡아당긴다.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자기 얼굴 앞까지 끌고 와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왜요, 가까이 보니까 못생겼어?”

그 말에 준영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도하, 엄청 잘생겼어. TV 나오는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잘생겼더라.”

“진짜 취했네.”

“근데… 나는 걱정돼.”

“뭐가요?”

“그냥 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준영이 더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도하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런
준영의 뺨을 어루만져 주고 머리를 쓸어 넘겨줬다. 눈가가 빨갛게 짓무르기 시작하는 걸 보니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랬어요? 우리 서준영 씨가 많이 힘들었구나.”

“미안. 진짜 미안.”

“뭐가 미안해요.”

“그냥 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못나게 굴어서. 제대로 표현해주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면목이 없다.”

술 먹으니 속내를 얘기하는 준영이 도하는 마음 아프면서도 짠하고 안쓰러웠다. 그대로 제 품 안으로 끌고 와 꽉
끌어안았다. 준영의 눈꺼풀이 평소와 달리 아주 느리게 열렸다 닫혔다 움직인다.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니
천천히 눈을 감는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뺨에 제 얼굴을 부볐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볼이 평소와는 달리
뜨거웠다.

“그런 생각 안 해도 돼요. 내가 언제 그런 거 바란 적 있어요?”


계속해서 등을 쓸어 주고 토닥여주는데 조용하다. 고개를 돌려 봤더니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어깨와 다리를 받쳐 안아 들고서는 안방을 향해 움직였다. 침대에 눕혔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속눈썹에 물기가 젖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꼭 쥐니 술 취한 와중에도 힘을


주어 잡는다. 쪽, 거기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나서 한참 동안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 * *

끙, 준영이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을 때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드는데 뒷골이 울린다. 다시


베개에 파묻으며 아아, 신음을 내고 나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얼굴을 문지르는데 문득 피부에 낯선 물체의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 제 손가락이 맞는데.

손을 떼어내고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정확히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게 아닌가. 백금으로 된 은색 반지는 도하가 제게 선물했던 그 커플링이었다.

잠시 영문을 몰라 반지를 쳐다보며 어젯밤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이 이걸 왜 끼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별별 추리를 다 해봤지만 생각나는 건 없었다. 케이크를 먹던 기억, 도하가 안아줬던 거. 잠결에 도하가 제 옆에
누워 있던 거.

근데 아무리 떠올려도 반지는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안방에서 나오니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도하는 어느새
주방 앞에서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저 모습이 생소하기만 하더니 이젠 꽤 친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낀 도하가 국자를 한 손에 쥐고선 돌아봤다.

“일어났어요?”

준영의 눈에 국자를 쥔 도하의 왼손이 먼저 들어왔다. 저와 똑같이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도 함께.

“어떻게 된 거야?”

“더 자라고 안 깨웠어요. 콩나물국 괜찮죠? 북엇국 해주려고 봤더니 북어가 없네.”

“그게 아니라….”

준영의 시선이 국이 아닌 손가락에 낀 반지에 닿은 것을 보고서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아아, 하는 표정을 했다.

“내가 어젯밤에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도 형이 이걸 굳이 끼라고. 사람을 아주 들들 볶고 말이야.”


준영의 미간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그 표정을 보고서 도하가 곧바로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와, 뭐야. 기억 못 해요?”

“내가… 그랬다고? 네 손에 직접?”

“그럼 뭐, 내가 형 자는데 몰래 꼈을까 봐 그래요?”

준영이 눈을 가늘게 늘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도하가 억울하다며 오른손을 왼손 약지로 가져가서 반지를
빼내려 했다.

“아, 됐어요. 사람이 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해요. 끼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서운하단 투로 투덜거리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머쓱한 얼굴로 그 손을 붙들었다. 어차피 기억은 안 나는데 끼라고
했으니 꼈겠지 싶으면서도 여전히 살짝 미심쩍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빼라고 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냥 껴. 낀 걸 뭐하러 다시 빼.”

“됐어요. 나도 이러면서까지 끼고 싶진 않아요.”

“아니야 껴. 그러잖아도 끼자고 할 생각이었어.”

그 말에 도하가 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더니 그러느냐며 애써 담담한 척한다.

“알겠어요. 정 원한다면 그래야지. 별수 있나.”

도하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고 준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때 도하가 수저로 국을 떠서 호호 불더니
준영에게 간을 보라며 내민다. 맛을 봤더니 시원했고 간도 딱 맞았다.

“괜찮아요?”
응.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얼른 씻고 오라며 등을 떠민다. 준영이 반지에 대해 더 물을까 하다 관두고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 더 물어봤자 제가 손해일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돌아봤지만, 도하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여전히 주방 앞에 서서 음식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 * *

이건이 냄비를 든 채로 연우네 집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안쪽 문이 열리면서 연우가 체육복 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점퍼도 걸치지 않은 모습에 이건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안색이 좋지
못하다. 양평에서 마지막 날 밤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괜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비꼈다.

“왜 왔어?”

전과 다름없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이건이 들고 있던 냄비를 내밀었다.

“떡국. 엄마가 갖다 주라고. 물 붓고 끓이기만 하면 돼.”

연우가 그 냄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건의 얼굴을 보니 며칠 전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진 녀석답지 않게


말짱하다. 집으로 돌아와 저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조금
속상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연우가 냄비를 받아 들고 나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건이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입을 연다.

“잠깐만 기다려. 줄 거 있어.”

연우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안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이건이 고개를 내밀어 담벼락 안쪽을 살폈다. 마루
앞쪽에 어른 신발이 있는 걸 보니 연우의 아버지가 집에 있는 건 분명한데. 그러고 보니 최근엔 그가 연우를
때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대문이 열리면서 연우가 나온다.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서였다. 그걸 가져오더니


이건에게 내밀었다. 이건이 받지 않고 쳐다만 보자 좀 더 팔을 치켜든다.
“받아, 빨리.”

“…뭔데.”

“가서 열어보면 될 거 아니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이건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안을 보니 작은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선물


같았다. 이걸 왜 나한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연우가 아까부터 발끝으로 땅을 툭툭, 헤집는 게 보인다.

그걸 잠시 쳐다봤다가 고개를 들어 연우를 봤다. 조금 침울해 보이는 표정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는데. 뭐랄까,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하나. 눈치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오늘따라 연우는 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먼저 물어보려 했는데 연우의 입에선 예상치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 서울 가.”

이건이 눈만 느리게 끔벅였다.

“뭐?”

“서울 간다고.”

“…왜? 놀러?”

“아니. 엄마한테 연락 왔어. 같이 살자고. 그래서 가서 살기로 했어.”

아. 이건이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였다. 농담인가 싶어 봤지만 연우는 그런 장난을 할 애가 아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언제 연락한 거지. 그런 얘기 없었잖아. 최근에 온 건가. 머릿속으로 많은 물음표가 생겨났다.
그럼 대체 언제 가는 건데.

“잘됐네….”

그 말에 연우가 입을 꾹 다문 채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이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잘됐다고. 다행이라고. 툭, 땅바닥을 내리찍던 움직임이 멈추고 연우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어. 나한테는 잘된 거지.”


이건이 입가에 애써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연우가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축하할 일
아닌가. 그런데 속이 왜 이렇게 울렁거리고 답답하지.

“그래서 언제 가는데.”

“…이따가…. 버스 타러 갈 거야.”

오늘 간다고? 이건이 더는 평온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데 안쪽에서 송연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연우의 아버지였는데 오늘따라 목소리가 말짱해 보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가 깨어 있는 날은 드물었다.


그것도 멀쩡한 정신으로. 모든 게 낯설었다. 연우도. 연우 아버지도. 이건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절댔다.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미리 말은 좀 해주지.”

집 쪽을 돌아보던 연우가 다시 이건을 바라봤다. 울 것처럼 얼굴이 잠깐 일그러지는 듯했으나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들어가 봐야겠다. 나 짐 챙겨야 하거든. 잘 가.”

잠깐만. 돌아서는 팔을 낚아채자 연우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움직여 이건의 얼굴에 닿았다.

“왜.”

이건이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팔을 놓아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짐 잘 챙기라고. 빼먹지 말고.”

스르륵, 연우가 팔을 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집 쪽으로 향한다. 이건이 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 전화할게.”

연우가 잠시 걸음을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들어간다. 이건이 고개를 빼고 쳐다보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니 미닫이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반투명한 유리창으로 연우의 모습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진다.
이건이 조금 전 연우의 팔을 잡았던 제 손을 내려 봤다가 다시 안쪽을 들여다봤다.

“뭐야, 갑자기.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서운하고 복잡한 마음에 오랫동안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보통 친구들 같으면 개새끼 소 새끼 욕을 하며 왜
미리 말을 안 했느냐고, 서운하다고 내색이라도 했을 텐데. 그날 밤 연우가 제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

누가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안쪽을 보는데 연우의 모습이 없다.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겠지. 싶은 마음에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집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CH 21.

도하가 평상에 앉아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맞은편 쪽에 백설이는 밥을 먹는 중이었는데


그 옆엔 전에 한 번 봤던 떠돌이 진돗개가 백설이에게 얼굴을 비비고 난리였다.

그 모습을 잠시 봤다가 다시 수화기 너머 속 목소리에 집중했다. 자신의 모친이었는데 어젯밤 아버지와 함께 TV


를 보다가 아들이 나온 걸 보고 기뻐할 틈도 없이 대형 폭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까지 연락이 와서 준영이가 누구더냐고 묻는 통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면서. 잘 둘러대긴


했지만 당분간 시달릴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질 않더라고. 그러면서도 도하가 서울에 왔다가 인사도 없이 내려간 게
못내 서운한 눈치였다.

[하여튼 혜윤이한테는 엄마가 잘 얘기했어. 너도 누나한테 그러면 못써. 우애 있게 지내야지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근데 아빠는 뭐라셔.”

[물어서 뭐해. 가만 안 둔다고 난리지, 뭐. 근데 너희 아빠도 늙었는지 전처럼 그러진 않더라.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한숨 소리에 도하가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괜히 저 때문에 속을 썩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 혹시 준영이 형네 집에서 연락 안 왔어?”

[몰라. 어제 방송 봤으면 연락 오고도 남았을 텐데. 난 솔직히 네 아빠나 할아버지보다 미정 언니가 더 무섭다.]

어우, 머리야.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며칠 전 미정이 이곳에 들렀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는데 저 멀리 강이건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도하가 나중에 걸겠다며 통화를 끊고 나서 보니
이건이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다.

코앞까지 걸어오면서도 뭐에 넋이 나갔는지 도하가 앞에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강이건, 하고 부르니 그제야


평상 쪽을 향해 돌아보며 눈이 커진다.

“어? 형 언제 오셨어요?”

“넌 아침부터 왜 정신이 나가서 돌아다녀? 혹시 그때 굴러떨어지면서 머리 다친 거 아니야?”

“에이, 아니에요.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이건이 가까이 와서는 어젯밤 도하를 잘 봤다면서, 형이 그렇게 선생님과 각별한지 몰랐다면서, 양진우랑도
친분이 있느냐면서 신기해했다. 그걸 보며 도하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사인을 받아다 주느냐고 물었다. 실상은
사인이 아니라 고소장을 받게 생겼지만.

그러던 중 이건의 시선이 평상을 짚고 앉아 있는 도하의 손에 닿았다. 못 보던 반지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눈이 슬쩍 커졌다. 도하가 그 반지가 잘 보이게 펼쳐 보이며 웃었다.

“커플링이야. 너 이런 거 껴봤어?”

헐. 이건이 놀라서 반지와 도하를 쳐다봤다. 맨날 여기 박혀 있었는데 언제 애인을 만들었느냐며, 신기해한다.


도하가 쯧, 혀를 찼다. 눈치가 이렇게나 없어서야.

“근데 누구예요? 연예인? 아니면 일반인? 언제 사귄 거예요?”

“몰라도 돼. 왜? 부러워?”

“아뇨. 전 대학 가면 사귈 거라서.”

“넌 대학이 인생에 전부냐?”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죠. 지금보단 미래가 확실해질 테니까요.”

그 말에 도하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원래 인생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면서. 대학 가면 다를 줄 아느냐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슨 연애도 계획적으로 하느냐고 타박을 한다. 듣고 나서 곰곰이 되씹는 이건을
뒤로하고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시게요?”

“응. 너랑 있으면 내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더니 도하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혼자 남은 이건이 한숨을 쉬다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상자를 꺼내 열었는데 그냥 봐도 비싸 보이는 선물이다. 이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그런 걱정부터 앞서
차마 상자를 열지 못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중에야 열었을 때 회색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색도 촉감도 좋다. 기분이 이상해져 그것을
보다가 목도리를 들어 상자 안쪽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메모 한 장이 같이 들어있다. 그것을 들고
펼쳤다.

[너에겐 받기만 한 거 같아서 항상 미안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야. 맞고 다니지 말고 잘 지내.


안녕.]

마지막 선물. 안녕. 그 글자들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뭐야. 꼭 안 볼 사람처럼. 너랑 내 우정이 그것밖에 안
됐냐. 서운해하다가 그날 밤 연우가 한 말이 떠올라 그것마저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에 가슴이 콕콕 쑤시고 저렸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고 나서 쪽지와 상자를 집어넣고 그 자리에
한참을 또 앉아 있었다. 그래도 가기 전에 연락은 하겠지, 얼굴은 한 번 더 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 * *

도하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준영은 창가 앞 의자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얼굴은 경직됐고
목소리도 가라앉은 걸 보아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인 거 같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길래 도하는 모른 척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 앞에 서서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니에요, 갈게요. 네, 끊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도하가 안방에서 나와 준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짓고 있었다.

“통화 다 끝났어요?”

“응….”

“이모?”

“응. 주말에 오라고 하셔서.”

아. 도하가 더는 묻지 못했다. 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는데 연락 온 모친의


목소리는 비교적 담담했다. 새해인데 떡국은 먹었느냐고 물었고, 별일 없느냐고,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니까.

그러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막내 고모가 제 모친에게 퍼붓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준영을 호적에
올린 걸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면서, 머리가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었다. 파양시켜야
한다면서.

파양이란 두 글자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고, 아직도 가끔 그날의 꿈을 꾸고 일어나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버려지는 것. 자신이 가장 겁내는 일. 서른이 넘어서도 무뎌지지 않은 일.

“괜찮아요?”

도하가 손을 잡아 왔고,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랑 같이 가요.”

“됐어. 혼자 가도 돼.”

“그럼 데려다줄게.”

고민하던 준영이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딱딱하게 경직돼 있던 도하의 입술 끝이 조금 풀어진다. 몸을 돌리던
준영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통화하면서 이건이 평상 쪽에 앉아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그런데 이건인 왜 저러고 있어?”

도하가 준영의 어깨너머로 밖을 확인했다.


“몰라요. 아까도 표정이 별로던데요.”

음. 준영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강이건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언덕을 막 뛰어
내려간다. 그걸 보며 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어디 가는 거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건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는데 도하가 몸을 돌려세워 저를 보게 만들었다.

“나 봐요, 나. 강이건 말고.”

“왜 이래.”

준영이 웃으며 장난식으로 넘겼지만 도하의 얼굴은 나름 심각했다.

“나 말고 뭐든 3 초 이상 쳐다보지 마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무든. 그 뭐든 간에!”

그러지 마, 제발. 준영이 질리는 얼굴을 하자 도하가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부빈다.

“사랑해서 그래요. 사랑해서.”

“두 번 사랑했다간 감금도 시키겠다?”

“나쁘지 않지.”

“하지 마. 진짜 무서워.”

준영이 몸을 떼어내고 나서 주방 쪽으로 가자 도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지 말고 나가서 좀 걸을래요? 아니면 시내 나갔다 올까?”

준영은 대답 대신 걸음을 멈췄다. 나가서 걷고, 찬바람을 맞으면 머리가 비워지려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잠옷 바지를 갈아입으려 안방으로 들어가는 사이 도하가 제집에
다녀오겠다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 * *

이건이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쪽으로 뛰어갔다. 언제쯤 가는지 궁금해 연우에게 연락했더니 전화가 꺼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연우의 아버지에게 했는데 벌써 한참 전에 터미널에 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갈 줄 알았는데, 그냥 가 버리다니. 너무 황당하고 야속한 마음이 들어


부랴부랴 택시를 불렀다. 평소라면 택시를 불러도 자주 오지 않는데 운이 좋은 건지 부른지 10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터미널에 가는 내내 연우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나와 애가 타들어 갔다.

“아, 진짜.”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터미널 안쪽을 샅샅이 살피는데 아무리 봐도 연우가 보이질 않는다. 몸을 돌려
입구 쪽부터 다시 찾아보려는데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사줬던 점퍼를 입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송연우가.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옆에 섰는데 사람이 온 것도
모르는지 연우는 고개를 떨군 채 미동조차 없다. 발로 툭, 운동화를 건드렸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본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커지더니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왔어?”

“뭐냐, 너.”

조금 화가 나서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명히 가기 전에 말하라고 했는데.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인사도


할 생각이었는데. 도망치듯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니 화가 났다.

연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진 30 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강이건이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 안 보고 살 거라고 마음먹던 참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가슴이
또 먹먹해져 괜히 애꿎은 뺨만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사람이 어떻게 인사도 안 하고 가냐.”

“아까 했잖아…. 떡국 주러 왔을 때….”

그 말에 참고 있던 이건이 폭발하듯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인사야. 너 그때도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엄마한테 가게 됐으면 미리 말을 하든가. 당일 날
얘기하는 게 정상이냐? 내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돼? 우리 친구 아니었어?”

친구란 말에 연우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쪽팔리니까 소리치지 마.”

이건이 더 퍼부으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른 시간인데도 터미널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후우, 심호흡하고 나서 연우의 팥을 붙들었다. 연우가 인상을 쓰며 놓으라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대로 힘주어 잡아당기니 몸이 딸려온다.

“아, 씨발.”

욕을 하며 성질을 내는 걸 막무가내로 터미널 밖 인적이 드문 공터로 끌고 갔다. 가는 도중에도 악을 쓰고


놓으라고 난리를 피우긴 했지만, 폭력을 쓰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이건이 연우의 팔을 놓아주었다.

“미쳤냐? 왜 사람을 개처럼 질질 끌고 나오고 지랄이야!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넌 지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중요하냐?”

“그럼 뭐가 중요한데.”

이건이 할 말을 잃었다. 뭐가 중요하냐는 말에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까 분명히 제 입으로 잘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는 아버지한테 맞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싸우지도 않아도 되니까.

그랬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몰라 머리가 복잡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쳐다보니 연우가 더


무서운 기세로 노려본다. 그 얼굴을 보니 더 말문이 막힌다. 이건이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물었다.

“전화는 왜 꺼놨어?”

“남이야. 꺼놓든 말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나랑 아예 연락 안 하고 지내려고 한 거야? 이제 번호도 바꾸고…. 설마,


아니지?”
연우가 입을 꾹 다문 채 부정하지 않았다. 이대로 올라가는 즉시 연락처도 바꾸고 그렇게 강이건이랑 멀어질
생각이었다. 더는 마음 아프기 싫었고, 자신이 병신 짓 하는 것도 짜증 났으며 그로 인해 자책하는 것도
지겨웠으니까.

“연우야… 송연우.”

“그래. 올라가면 연락 다 끊으려고 했어.”

“왜.”

“여기서 살던 거 지긋지긋했으니까. 아빠란 인간한테 매일 얻어맞는 것도 지겹고, 돈 몇 푼 얻자고 마음에도


없는 새끼들 좆 빨아주던 것도 짜증 났고, 그리고….”

연우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어금니를 꾹 깨물고 시선을 피한다.

“그냥 다 짜증 나서 지우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이건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지우고 싶다니.

“나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섰던 연우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을 마주 보는데 표정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왜 기뻤는지 모른다.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면 정말 비참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이런
모습이라도 보여줘서 고마웠다.

“아무리 네가 눈치가 없다고 해도, 내가 널 친구로만 좋아하는 게 아니란 건 알잖아?”

담담한 목소리에 이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너 좋아해.”

“…연우야.”

“너 보면 키스하고 싶고, 자고 싶고, 돈 안 받고도 더한 것도 해주고 싶어.”


“송연우.”

“징그럽지? 소름 끼치지?”

이건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술만 벙긋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이해한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자신은 연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소름 돋고 징그럽단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받아줄 생각
또한 해본 적 없었다.

“…미안…. 나는 잘 모르겠어.”

“…….”

“진짜 미안.”

자꾸 미안하다고 하니 연우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힘주어 다문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더니 곧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눈알이 시큰댔다. 후우, 울지 않으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울어서 마지막 모습을 추하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를 떠올릴 때마다 구질구질하게 기억할 것 아닌가.

“됐어. 나는 이제 할 말 다 했으니까 갈게.”

“연락처 바꾸지 마. 전화할게.”

“아니. 하지 마. 죽어도 하지 마. 이젠 다신 너랑 볼일 없어.”

서울행 버스가 들어왔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연우가 홱 몸을 돌렸다. 이건이 다시 팔을 잡으려고 하자 거칠게
뿌리치더니 이건을 노려보며 여태 참았던 울분을 터트렸다.

“한 번만 더 붙잡아 봐! 그땐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야!”

악다구니를 쓰는데 울먹임도 같이 섞여 절규처럼 들렸다. 연우가 가방을 들고 빠르게 걷더니 나중엔 뛰어서
터미널 안쪽으로 사라진다. 이건이 충격받은 얼굴로 제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욱신대고
토할 것처럼 울렁였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가서 잡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보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뛰어갔을 때는 연우도, 연우가 탄 버스도 모두
떠난 뒤였다.
* * *

도하가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세상이 푸르스름한 빛에 잠겨 있었다. 어젯밤에도


준영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불과 2 시간 전쯤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저도 덩달아 잠이 오지 않아
밤을 홀랑 새운 것이다.

낮에 서울에 올라가려면 눈을 좀 붙여야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운동이나 하면서 마음을
비우잔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 은행나무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누군지는 가까이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동네에 저만큼 키가 큰 건 강이건밖에 없었으니까. 점퍼의


지퍼를 올리며 그쪽으로 뛰어가는데 이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가까이서 본 이건은 하루 새 팍삭 늙어 버린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깜짝이야. 난 이건이 아버님이 나오신 줄 알았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형.”

“여기서 뭐 해? 꼴은 왜 그렇고?”

“…그냥. 나무 보고 있었어요.”

“왜. 너도 여기다 소원 빌게?”

이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나와 봤어요.”

“집터가 안 좋나. 왜 이렇게 잠 못 자는 사람들이 많아.”

“형도 못 주무셨어요?”

“어.”

“왜요?”

“몰라도 돼.”

이건과 도하가 나란히 서서 나무를 올려다봤다. 나무를 보던 도하는 새삼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서준영이랑 잘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 나무 신통하긴 하네. 옆을 보는데 이건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어둡다.
“강이건. 무슨 일 있어? 도둑놈이랑 싸웠냐?”

“연우 이제 여기 없어요.”

“왜. 어디 잡혀갔어?”

“아뇨. 엄마한테 갔어요. 이제 서울에서 산대요.”

도하가 놀라 엄마가 있었느냐고 물었고, 이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우에게
전화하니 받지 않았고, 몇 시간 뒤에 걸었을 때는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설마 했는데 진짜 번호를 없앨 줄이야.
송연우의 행동력이 그렇게 빠른지 처음 알았다. 자신을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꺼져 있는 것과 번호가 아예 사라진 건


천지 차이로 달랐다. 송연우는 남들 다 하는 메신저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없으면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거라곤 메일 주소 하난데.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 마지막에 다른 대답을 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밤새 고민하다 보니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도 너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 밖으로 나왔고, 그렇게 걷다 보니 이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가 마을을 보호해주고 사람들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건은 빌어야 할 소원이 무엇인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다. 송연우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할까. 그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엔 어쩌지. 연우가 원하는
것을 저는 들어줄 수 있을까. 여전히 답을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니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간다.

“근데 송연우가 없어졌는데 네가 왜 죽을상을 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제가요…? 왜요?”

“걔 때문에 피곤했잖아. 툭하면 사고 친 거 수습하고 다니고, 얻어맞고 다니고. 없으니 이젠 춤이라도 춰야지.”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기운 없는 목소리에 도하가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 이건의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보폭을 맞추며 이건의 표정을
살피는데 한없이 울적해 보인다. 춤을 추고 싶은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너 걔 좋아했냐?”

우뚝. 이건이 걸음을 멈췄고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니긴. 완전 실연당한 표정인데, 뭘.”

“물론 친구로선 좋아했어요…. 지금 제가 화나는 건 왜 저한테 미리 말도 안 해줬느냐 하는 거예요.”

“그랬으면?”

“네?”

“말했으면, 네가 뭘 할 건데?”

이건이 입을 달싹였다. 도하의 말이 맞았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운할 일인 건 맞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괴로워하는 거 보면, 그게 정말 우정만으로 가능한가


싶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나온 거뿐이에요….”

“너도 엉덩이 좀 맞아야겠구나.”

“네?”

“하긴, 인생의 목표가 대학인 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관두자 관둬.”

도하가 귀찮은 얼굴로 손을 내젓더니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몸을 돌려 뒤쪽으로 뛰어간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운동이나 하겠다면서. 저만치 뛰어가는 도하를 보며 이건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것도 모자라 양손으로 쥐어뜯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백설이는 이제


친구가 생겨 이건에게 관심이 줄은 모양이었다. 송연우가 그렇게나 무서워하던 흰색 백구는 이제 이곳이 제집인
양 드나들었다.

연우 빼고 일상은 그대로였다. 단지 송연우 하나만 없어졌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텅 빈 것 같은지


모르겠다.

* * *

운전대를 잡은 도하가 옆을 보니 준영이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서울에 있는 본가에 가기 위해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 어젯밤 잠을 못 잔 탓인지 얼굴이 꺼칠했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눈을 좀 붙이라고 했지만, 준영은 잠이
오질 않는지 아까부터 창밖만 내다봤다.
“자요. 가면 깨울게요.”

“괜찮아.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이게 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그건 아니고. 준영은 대답 대신 애써 웃었다. 맞잡은 양손엔 자꾸 힘이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수가 빨라졌고 호흡하는 것도 불안해졌다. 혹시 몰라 주머니에 약을 챙겨 오긴 했는데….

“가지 말까…?”

도하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물었다. 아무래도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말 만해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차 돌리고.”

잠시 침묵하던 준영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도하는 예민해진 그의 신경을 좀 분산시키고자 아침에 있었던
일을 꺼내놨다. 준영에게 대충 들어 연우가 이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이가?”

“완전 죽상을 하고 있었어요. 송연우 걔도 참, 갈 거면 곱게 떠나지. 애한테 뭔 소리를 한 건지.”

“웬일이야. 네가 연우 편을 다 들고….”

“동병상련이랄까. 물론 지금은 처지가 완전히 다르지만.”

그 말에 준영이 나지막하게 웃자 도하가 슬며시 인상을 구긴다.

“왜 웃어요? 설마 나 아직도 혼자 삽질하는 중?”

“글쎄다.”

“와, 그럼 진짜 나 형 고소할 거야. 반지까지 끼워줘 놓고 이럴래요?”

준영이 도하의 손과 제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떠올려도 끼워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굳이 빼고 싶진


않았다. 도하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누군가와 반지를 나눠 낀 건 저도 처음이었다. 미묘한 기분에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도하가 팔을 뻗어 제 손을 잡는다. 깍지를 끼고 힘주어 잡으니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도
안정됐다.

“운전대 잡아.”

“운전은 한 손으로도 충분해요. 이 손은 우리 자기 거.”

“그 자기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왜요? 좋아 죽겠어요?”

“그냥 죽겠어서 그래.”

“그럼 오늘 밤엔 몸으로 죽여줄까요?”

깍지를 낀 손으로 준영의 허벅지 안쪽을 은근히 누르면서 문지르자 준영이 흠칫했다. 하지 말라고 타박하는데도
손장난은 그치질 않았다. 오히려 위쪽으로 움직여 이번엔 성기 쪽을 자극했고 참다못한 준영이 깍지를 풀고
도하의 손을 홱 내던졌다.

“너 이런 식으로 운전하면 나 내린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만할게. 너무 긴장해 있으니까 풀어주려고 장난 좀 쳤어요.”

그 말에 준영도 더는 뭐라고 나무라지 못했다. 티격태격하다 보니 조금 나아지긴 했으니까. 그러다 본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옥죄는 것처럼 조였다. 아랫입술을 자꾸 안쪽으로 말아 씹으니 도하가 하지 말라고 입술을
슥 건드린다.

“예쁜 입술 다 망가지겠네.”

“도하야.”

“말해요.”

“손 다시 잡아줘.”

도하가 군말 없이 손을 뻗어 아까와 마찬가지로 깍지를 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아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하는 사이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익숙한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군청색 철제 대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집을 올려다봤다.

“같이 들어가요.”

“아니야… 혼자 다녀올게.”

도하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막상 앞에서 혼자 들여보내려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한 번 더 조를까 했지만,
준영의 완강한 표정을 보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

“…응.”

“아니다. 30 분 정도 기다려서 연락 없으면 내가 들어갈게요.”

“네가 그러니까 더 떨려.”

“미안해요. 안 그럴게요.”

준영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문에 손을 댔다. 내리려는데 도하가 팔을 잡는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손을


꽉 잡은 채로 나머지 손을 뻗어 준영의 뺨을 어루만진다. 다정하게 웃으면서 눈빛으론 힘을 실어 줬다.

“다녀와요.”

“응….”

차에서 내려 대문 앞으로 걸어간 준영이 인터폰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들어가기 전 뒤를 한 번 돌아봤고


도하가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여태 태연함을 유지하던 도하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끝까지 따라간다고 우길 걸 그랬나. 어제


서민주한테 슬쩍 전화해 떠봤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시선은 대문 앞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1 분 지났을
뿐인데 10 년은 흐른 기분이다. 여차하면 들어갈 생각으로 안전띠를 풀고서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와 대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 * *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데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준영을 먼저 반겼다. 허리가 좋지 못한 모친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들렀는데 오늘이 그날인 듯싶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집에선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가 준영의 겉옷을 챙겨 받으며 주방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 봐요. 사모님이 아들 준다고 아침부터 음식을 얼마나 하셨는지 몰라요.”

준영이 애써 웃고서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말대로 미정은 큰 그릇에 무언가를 퍼 담고 있었다.

“…저 왔어요.”

그제야 미정이 뒤를 돌아보더니 왔느냐고 웃는다. 전과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경직된 표정에서 준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전 같으면 뭘 하시느냐고 가서 말이라도 붙였을 텐데 괜히 긴장해선 눈치를 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점심 전이지?”

“…네.”

“올라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네. 준영이 2 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민주는 외출했는지 2 층은 조용했고, 전과 다름없었다. 제


방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비틀다가 잠시 머뭇댔다. 혹시 안에 자신의 물건들이 모두 비워져 있진 않을까, 괜히
그런 불안감이 들어서.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문을 안쪽으로 밀었을 때 전과 다름없는 풍경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어서 잠시 얼굴을 문질러 감정을 추슬렀다.

안으로 들어와 외투를 벗어두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커튼을 젖혀 밖을 내다봤다. 도하의 차가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다른 데 가서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보다.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신호가 한 번 갔을
뿐인데 바로 전화를 받는다. 도하가 어떤 표정으로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을지 상상하니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나 올라가요?]

그 말에 준영이 기가 막혀 웃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데 가서 쉬고 있으라고…. 얘기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됐어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한 번 더 얘기할까 고민하다 관두고는 전화를 끊었다. 셔츠까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계단을 내려왔다. 여전히 음식 냄새가 진했다. 식탁 쪽으로 걸어가는데 미정만 있을 뿐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보이질 않는다.

“아주머니는요.”

“오늘 일찍 가시라고 했어.”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다 차려놨으니 먹기만 하면 돼.”

식탁 위에 음식은 모두 먹음직스러웠다. 게장과 갈비찜은 손질돼 있었고 뚝배기에 담긴 건 직접 고아서 만든


도가니탕이었다. 그녀가 밥을 떠서 준영의 앞에 놓아준다.

“저 혼자 먹기엔 많아요. 같이 드세요.”

“나는 먹었어. 얼른 앉아서 먹어.”

그녀가 물을 챙기는 사이 준영이 의자에 앉아 수저를 집어 들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해 도무지 뭘 넘길 기분이
아니었지만, 눈앞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마다할 순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수저로 갈비탕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밥을 먹고 반찬을 먹는 동안 그녀는 앞에서 챙겨주며 조곤조곤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해외에 나가 사는 다른 형제 얘기와 민주 얘기 그리고 요즘 취미로 수묵화를 그리러 다니는데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얘기까지.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에 준영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움직여 의무적으로 밥을 씹고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밑에 있는 도하가 신경 쓰였다. 어디 가서 밥이라도 챙겨 먹으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러는 사이 어느덧
밥그릇은 다 비워져 갔다.

미정이 그릇을 보며 한 그릇 더 주느냐고 물었고, 준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밥이 목구멍 아래까지
찬 기분이었다. 예민한 상태로 밥을 먹었더니 소화가 되질 않았고, 포만감을 넘어서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매실차 줄까?”

“…네.”

그녀가 매실차를 준비하는 동안 준영이 빈 그릇과 반찬들을 정리했다. 미정은 놔두라고 했지만 준영은 마지막
그릇까지 치운 다음에야 제 자리에 앉았다.

매실차를 타서 자리에 앉던 미정의 시선이 준영의 손가락에 잠시 머물렀다. 졸업 선물로 반지를 해준 적은 있지만
그 외 준영이 반지를 낀 건 처음 봤다. 전에 없던 그의 행동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상태란 뜻이었다. 이젠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다.

“도하랑 같이 왔어?”

“…네.”

그렇구나. 미정은 고개만 작게 끄덕일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준영이 차가 든 잔을 만지면서 아랫입술을 티 나지


않게 꾹 물었다. 주변 공기가 탁하게 느껴졌다. 음식 하느라 한껏 데워진 주방 탓인지 아니면 그냥 제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숨 쉬는 게 답답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찻잔만 내려다보며 마음을 추스르려 하는데
앞에서 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찻잔에만 머물던 준영의 시선이 떨어져서 미정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잔을 들어 입에 한 번 대더니 곧바로
내려놓고 나서 어색하게 웃는다.

“엄마가 미안. 그때 네가 나 데려다주고 계속 신경 쓰고 힘들어할 거 알면서도 먼저 전화 못 했어.”

“엄마….”

미정이 입을 힘주어 꾹 물었다가 놓았다. 하지만 쉽사리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고 준영은 그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네가 말 안 해줬지만, 회사 왜 관뒀는지… 알아.”


준영이 잇새로 억눌린 신음을 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실은, 그때 너 만나던 사람 어머니란 여자가… 집에까지 찾아왔었거든.”

이번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사로 찾아와 난리를 피운 것도 모자라 집에 찾아왔단 말인가. 근데 왜 여태


미정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거지. 복잡하고 놀란 마음에 할 말을 잃고 쳐다만 보니 미정이
씁쓸하게 웃는다.

“어렴풋하게… 네가 남들과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은 한 적 있었어. 근데 막상 그런 일이 생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놀라기도 했고, 솔직히 실망도 했고.”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그때.”

“알아. 내가 널 아는데 넌 다른 사람 가슴에 상처 주면서 그런 짓 할 애는 아니야. 엄마가 실망했다는 건… 모든


부모가 자식한테 거는 기대가 있잖아. 민주한테도 마찬가지고. 난 그래도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길 바랐거든.”

“…….”

“그래서 너한테 아는 척을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말을 못 했어. 네가 갑자기 춘천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더


그렇더라. 도망치는 거 같아서. 거기서 더 몰아붙이면 나한테서 완전히 떠날까 봐.”

“…죄송해요.”

“그래. 죄송해해. 보통 자식이라면 그래야 돼.”

“…….”

“대신… 주눅 들고 그러진 마. 미안한 마음은 알겠는데, 엄마 눈치 보고 남처럼 그러지 마, 준영아.”

찻잔을 쥔 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미정이 마지막에 한 말은 자신의
속에 있는 벽을 툭 건드렸다. 손은 더는 찻잔을 취지 못했다. 손끝이 저리고 떨리는 기분에 감추려는데 미정이
그런 손을 쥐더니 꼭 감싼다.

“엄마는 네가 그럴 때마다 너무 속상해.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고, 마음 아프고…. 남들은 자식 때문에 속


썩는다는데…. 너 키우면서 한 번도 싫다는 말도 내색도 안 하는 거 보면서 기특한 것보단 너무 마음 아팠어.”

“…죄송해요.”

“준영아.”
“…네.”

“나 네 엄마 맞지?”

준영이 고개를 들어 미정을 마주 봤다. 그녀의 눈이 아픔으로 젖어 들었다. 준영은 그제야 그녀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왜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살을 갉아먹었던가. 뒤늦게 죄송하고 후회가 돼선 목이
콱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거기서 도하 보는데 너무 괘씸하고… 배신감 들어서 그랬어.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건 네가 이해해줘. 대신 나도 널 더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해 볼게.”

준영이 결국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이 아려왔다.

“죄송해요.”

꽉 잡은 채 준영의 손을 토닥이던 그녀가 콧등을 찡그리더니 농담처럼 툭 던진다.

“물론, 엄마는 도하가 아니어도 괜찮지만.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건 내색 안 하기로
했어.”

그 말에 준영이 눈가가 빨개진 채로 나지막하게 웃었다.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어서 그냥


있는데 그녀가 혼잣말처럼 덧붙인다.

“기왕 만나는 거… 좀 더 이해심 많고, 포용력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도하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그 녀석이 좀 유별나잖아. 아쉬움이 잔뜩 깃든 채 말을 얼버무리는 그녀를 보며 준영이 웃으면서도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지만, 그 결심을 하기 전까지 저만큼이나 힘들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며칠 새 거칠어진 얼굴이, 잠을 못 이룬 듯 퀭한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인터폰이 울린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던 두 사람은 그 소리에 현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질 급하게 벨을 누르는 소리에 미정이 거실로 나가더니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준영이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 * *

“차라리 나를 때려요!”

준영이 도하 흉내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확히 30 분이 조금 넘자 도하가 참지 못하고 뛰어 올라온


것이다. 인터폰이 울렸을 때 설마 하면서도 얼굴이 보여 기절하는 줄 알았다. 미정도 기가 차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도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선 미정을 붙들고 혼내려면 저를 혼내려고 난동을 피웠기 때문이다. 처음엔 기가
막혀 하던 미정은 나중엔 어이가 없어 하며 웃어 버렸다.

운전대를 잡은 도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도 나오질 않아 벨을 누르고 들어갔는데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기에 혹시나 미정에게 야단을 맞아 그런 건가 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모가 싫어하는 거 같진 않던데. 그죠?”

“……”

“왜 대답을 안 해요? 싫대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니고 뭔데.”

“아니야. 좋아하셔.”

준영이 씁쓸하게 웃자 도하가 인상을 슬며시 구긴다. 아무래도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았다. 어릴 땐 미정이 저를
퍽 예뻐했는데 아무래도 자기 아들 짝으론 별로라는 걸까. 젊고 돈도 많고 성격도 이만하면 됐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래도 다행이네. 아주 나쁜 결과는 아니라.”

“그러게.”

“거봐요. 너무 걱정하지 말랬잖아.”

준영이 나지막하게 웃다 창밖을 보며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집 가는 방향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느냐고 했더니 도하가 ‘집.’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하지만 이곳은 강원도가 아닌
도하의 서울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 자고 갈 거야?”

“오붓하게 둘이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저번에 봤던 욕조 봤죠? 거기서 푹 담그고 스트레스 좀 풀고, 둘이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좋잖아?”

그래, 그럼. 준영이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자 도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음 같아선 같이 서울로 다시
돌아오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싫다고 한 마당에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바빠지면 얼굴 볼 일이
줄어들 테지만, 제 욕심 때문에 준영을 원하지도 않는 곳에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차는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차가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 한쪽에 주차하고 나니 도하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로 간다. 그것을 알아본 준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전에 봤던 여행용 트렁크였기 때문이다.
흠칫 놀라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부터 쳤다.

“뭐야!”

도하가 그것을 꺼내 들고서는 배시시 웃는다.

“차에 넣어둘 순 없어서 일단 위에 두려고요.”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턱, 가방을 내리고 트렁크 문을 닫고 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올라가는 내내


준영의 시선은 가방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카드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가방에 붙어
있었다.

“그만 좀 쳐다봐요. 자꾸 그렇게 보면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 거야.”

도하가 트렁크를 안으로 가져가더니 바닥에 두고 지퍼를 연다. 준영이 인상을 쓰며 그걸 왜 벌써 여느냐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트렁크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물건이 나온다. 와인과 작은 상자, 그리고 책 한 권
…. 도하가 그 책을 꺼내 들더니 준영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짠. 이거 기억해요?”
잠시 생각하던 준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하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자신이 선물해준 거였다. 어릴 적부터 생일
때마다 책을 사줬고 그 앞에는 늘 축하한다고. 사랑한다고 의무적으로 인사말을 적곤 했었다.

그리고 도하의 마음을 알게 된 열여덟 생일엔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뭘 적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말 한마디
하는 게 조심스러웠고, 신경 쓰였으므로. 그래서 책 앞장을 펼쳐놓고 한참을 앉아 있으면서도 생일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 적지 못하고 결국 그냥 책만 선물해야 했었다.

도하가 그 책을 내밀었고 준영이 받아 들고 나서 앞장을 펼쳐보니 역시나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았다.

“언제든지 좋으니 거기다 다시 적어줘요. 형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내 인생에서 꺼져, 이런 것도 돼?”

“같이 죽자는 거지, 지금?”

정색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그렇게 적었다간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일
듯 말 듯 찍힌 볼펜 자국에서 그 당시 자신이 고민하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책장을 덮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엔 트렁크에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건네준다.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뚜껑을 열었다가 인상이 저절로 확 구겨졌다. 조금 전 건네받은 책의 여운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 들어 있는 건 처음 보는 넥타이 하나와 흰색 팬티였다. 저번처럼 레이스였고, 장식도 더 화려해져 있었다.


준영의 기겁을 하고 상자를 확 덮어 버렸더니 도하가 그것을 슥 가져가선 눈을 한껏 접어 웃는다.

“목욕물 받을게요.”

“너, 너 이러자고 여기 오자고 했지?”

“집에선 방음 신경 쓰여서 마음껏 못하잖아요.”

“넥타이는 뭔데.”

“형이 셔츠에 이거 넥타이하고 팬티만 입고 있으면 내가 좋아 죽을 거 같아요. 한 번만 해줘요.”

대놓고 요구하는 바람에 준영은 입만 벙긋댔다. 어쩐지 불안하다 했어. 저번에 레이스 팬티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차마 그러겠다고 대답을 못 하는데 도하가 양손을 붙잡아 오며 눈썹을 축 아래로 늘어트린다.

“한 번마아안.”
조르는 듯한 말투에 준영이 울상을 했다. 모친과 마주 앉았을 때보다 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손을
슬그머니 떼어놓고 나니 도하가 이번엔 몸을 끌어안고 조른다. 나중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도하가 신나서 욕실로 물을 채우러 갔고 그 모습을 보던 준영의 시선은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싶었지만, 그 뒤 벌어질 후환이 두려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팬티를 집어 들어 펼치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게진다. 저번엔 엉덩이 가릴 천이라도 있더니 이젠 아예 뒤는 끝만 덜렁 있었다.

씻고 나온 준영이 물기를 닦고 나서 침대에 놓인 흰 셔츠를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다 가운을 벗고 그것을 입었다.


도하가 말한 대로 채 걸치지 않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나서 예쁘게 접혀 있는 팬티를 바라봤다.

이거 앞이 있긴 한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모양이 참 볼만했다. 맨정신에 입고 있으려니 무안해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저번처럼 술이라도 좀 취했으면 미친 척 입겠는데. 아, 욕실 쪽을 보니 도하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다리를 집어넣으며 위로 올리는데 감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취향 한번 진짜 끝내주네. 그동안 못 해준


마음에 미안하기도 해서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있긴 한데, 어째 갈수록 고약해지는 것 같았다. 나중엔 설마
세일러복이나 메이드복 같은 걸 입히진 않겠지.

괜히 뒤통수가 서늘해져선 침대에 앉아 시트를 끌어 제 몸을 덮으려 할 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나왔다. 가운도 입지 않은 채 알몸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말이다. 저는 이런 복장을 시켜놓고 자기는 옷 하나
입지 않은 게 기가 막혔다.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도하가 수건을 옆으로 홱 던지더니 이쪽으로 걸어온다. 녀석의 성기는 이미 발기해선 걸을
때마다 꺼덕꺼덕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니 잠시 말문이 막혀서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침대 앞까지 걸어온 도하가 준영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다 입었어요?”

“야, 옷이나 좀 입든가.”

“어차피 벗을 거 뭐하러.”

“그럼 난 왜 입혔어.”

“오늘 콘셉트라니까.”

그러면서 손을 아래로 내려 몇 개 잠겨 있지도 않은 셔츠 단추를 아래부터 차례로 풀어서 올라간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고 나선 준영의 턱을 손으로 받쳐 들게 했다. 시선을 내리깔면서 피하려고 하자 도하가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준영아, 날 봐야지.”
“반말하지 마.”

“너도 해.”

“…….”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그대로 준영의 입술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탕 안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입술은
더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혀로 핥고 문지르자 준영이 입을 살짝 벌리며 제 입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준다.

혀뿌리부터 문지르며 입천장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혀로 구석구석 애무해주자 준영이 천천히 눈을 올려 뜬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도하의 반쯤 내리깐 눈동자에 열이 들어차는 게 보였다.

키스만으론 부족했다. 도하의 팔을 잡아끌어서 그대로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도하는 준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누우니 성기만 벌떡 일어선 모양이 기가 막혔다. 그대로 준영이 침대로 올라가선 도하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성기를 입에 물었다.

여전히 버거운 크기였다. 최대한 목 안쪽까지 밀어 넣자 머리 위에서 하, 하고 끈적하게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하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 서준영이 해주는 오럴을 받는 게 두 번째였는데 할
때마다 천국을 오가는 것처럼 황홀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니 준영이 최대한 안쪽까지 성기를 밀어 넣는 게 느껴진다. 도하의 허벅지를 붙잡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인다. 입안에 비벼지면서 꿀쩍 꿀쩍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같아선 지금 엎어놓고 하고 싶은데, 일단은 참기로 했다. 한참을 그러던 준영이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위쪽으로 올라온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준영의 희고 매끈한 살결이 보였다. 도하가 손을 그 안으로 집어넣고
가슴을 만졌다. 엄지로 바싹 곤두선 유두를 문질러주자 준영이 아랫입술을 핥는다. 그대로 제 몸에 다리를 벌리고
앉더니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골에 누르고 문질렀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주려고.”

준영이 아래를 문지르면서 도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는다. 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혀로 목을 핥고 뺨을
핥아주는 행동에 아랫배가 바싹 당겨지며 힘이 들어갔다. 늘 자신이 먼저였지 준영이 해준 적은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좋아?”

“죽겠어요.”

“죽진 말고.”
준영이 웃더니 손을 위로 뻗어 젤을 꺼냈다. 그것을 제 손에 짜선 뒤로 가져가더니 구멍에 대고 문지른다.
팬티를 벗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가려지는 부위는 거의 없었고 끈만 옆으로 치우면 됐기에.

거추장스러워 벗을까도 했지만 도하가 원했기에 그냥 입은 채로 놔뒀다. 그리고 남은 젤을 도하의 성기에 잔뜩


문질렀다. 손바닥에 핏줄까지 새겨질 만큼 흥분해서 날뛰기 직전인 녀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풀어줘야 할 텐데.”

“아니야….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귀두가 입구에 닿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준영은 아랫배가 당기고 밑이 벌어지는 고통에
어금니를 꾹 깨물어야 했다. 엉덩이를 내리는데 저절로 숨이 턱 막혀서 도하의 가슴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무린가 싶어, 잠시 멈칫하는데 도하가 넥타이를 붙잡고선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손을
뒤로 뻗어선 팬티가 한쪽으로 쏠린 준영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천천히 아래로 더 내린다.

“으음.”

신음을 삼키니 잠시 멈칫하더니 준영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파요?”

“조금…. 괜찮아.”

안 풀었더니 전보다 더 빡빡하니 속살이 달라붙으며 성기를 밖으로 밀어냈다. 뿌리가 닿을 정도로 삽입하고
나서야 준영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좀 빼요.”

“뺀 거야….”

“엄청 조여.”

그 말을 하며 도하가 양쪽으로 벌어진 셔츠를 걷어 삽입된 부위를 눈으로 확인했다. 발기한 준영의 성기는
레이스에 갇혀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이었고 아랫배 쪽은 제 성기 때문에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불룩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손을 뻗어 그 부위를 만지는데 준영이 제 손으로 도하의 손을 붙들어 깍지를 낀다. 천천히 앞뒤로 엉덩이를
문질러 주자 조금 전보다 더 내벽이 수축한다. 도하가 입술을 짓씹으며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준영이 그런 도하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항상 휘둘리는 편이었다면 지금은 도하가 흥분을 참는 게
보여서 그게 꽤 뿌듯하고 쾌감이 일었다. 저 역시 배 속에 들어온 성기가 전립선을 그대로 누르는 통에 몸이 달아
죽을 것 같았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상체를 숙여 도하의 가슴을 혀로 핥아주니 배 속에 들어온 녀석이 조금 더 팽창하는 게


느껴진다. 아직도 커질 게 남아 있나, 이대로 배를 찢고 나오는 건 아닐까 살짝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그렇게 가슴과 목을 핥으며 올라가서 입술 가까이에 닿자 살짝 벌어진 도하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심음이 새어
나왔다.

“후우, 아 진짜.”

“좋아?”

“좋아. 존나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어요.”

그 말에 준영이 웃자 아래가 더 조이고 도하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몸을 홱 뒤집어 준영을 자신의 아래로
깔아뭉갰다. 엇,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기가 반쯤 빠져나왔고, 준영이 다시 넣고 뭐 할 새도 없이 도하가 쿡,
위로 힘주어 쑤셔 넣는다. 준영이 억 신음을 삼키며 도하의 어깨를 손으로 세게 붙잡았다.

“아파.”

“그러게 왜 놀려.”

잔뜩 늘어지고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가 혀로 준영의 귓불을 핥으며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준영의
성기는 꽉 맞붙은 채 눌려 자극을 받았다.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같이 비벼지며 맑은 액을 토해 냈다.
그 상태로 도하가 귓불을 턱을 마구 핥고 빨았다.

거친 숨소리와는 다르게 도하의 아래는 아주 정중했다. 오히려 준영이 애가 닳아선 양다리를 벌려 허리를 감고
아래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조금 더 센 자극을 원했지만 도하는 오늘따라 자꾸만 느긋하게 굴어서 조바심을
일으켰다.

“너, 아, 일부러 그래?”

그 말에 도하가 웃었고, 준영이 미간을 구겼다.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도하가 몸을 뒤로 물리더니 허리를


세우고 앉는다.
“엎드려 봐요.”

준영이 도하의 말대로 몸을 뒤집어 배를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뒤에서 도하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고, 야하게.”

야하게란 말에 준영은 귀가 뜨거워지는 거 같았다. 잠시 미동을 하지 않자 도하가 앞쪽으로 손을 뻗어 준영의


넥타이를 잡아챈다. 그걸 당기니 준영이 무릎을 꿇으며 엉덩이를 뒤로 빼고 상체를 납작하게 숙인다.

셔츠가 내려가며 엉덩이와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팬티는 성인용 사이트에서 산 건데 모델이 입은 것보다
서준영이 입은 게 천만 배는 더 잘 어울리고 예뻤다. 그대로 엉덩이를 움켜쥐니 몸을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입술을 벌려 엉덩이 한쪽을 아프지 않게 베어 물고 혀를 내밀어 다시 그 부위를 핥았다. 엉덩이골을 간신히 가린


끈을 잡아당겨 애널 입구가 보이도록 만들고 나서 그 부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입구에 쑤셔 넣으니 준영이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선 흐으음, 하는 비음 섞인 소리를 낸다.
조금 전 젤을 발라 축축하던 그곳을 침으로 범벅해 놓고 이젠 손가락을 넣어 앞뒤로 쑤셨다.

찌걱대는 음란한 소리와 함께 준영이 엎드린 채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며 박자를 마주 맞췄다. 그래도 만족이
되질 않는지 자꾸만 뒤로 손을 뻗어 도하의 팔을 만졌다.

“으음, 얼른.”

보채는 소리에 도하가 허리를 세우고 나서 자세를 잡았다. 이젠 저도 더 놀릴 인내심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대로 기둥을 잡고 입구에 맞추어 밀어 넣으니 무리 없이 들어간다. 움찔거리며 성기를 먹어치우는 구멍을
내려다보다 셔츠 밑부분을 붙들고 힘주어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퍽, 하고 쳐올리자 머리를 시트에 박고 있던 준영이, 억, 신음을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돌아보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서는 입을 벙긋댄다. 더 뭐라 할 것도 없이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나머지 다른 손으론
허리를 붙들고선 허리를 움직였다.

퍽, 퍽, 조금 전까지 애태우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거친 움직임이었다. 준영이 짐승처럼 엎드린 자세로 목을 뒤로


젖혔다. 넥타이 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목을 압박했다. 엉덩이를 들락이는 성기는 무섭도록 박아대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철썩, 도하가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세차게 내려쳤다. 아, 준영이 몸을 움찔거리자 넥타이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간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허리를 세우니 입고 있던 셔츠가 어깨 뒤로 넘어갔다.

등 뒤로 도하의 가슴이 바싹 밀착됐고 도하가 팔을 안쪽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쥐어짜듯 주무르고 젖꼭지를 꼬집고
비튼다. 준영이 팔을 뒤로 해선 도하의 양 허리를 감쌌다. 애널로만 자극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자극이
느껴지니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선 폭죽을 터트리는 것처럼 번쩍거렸고, 이젠 제가 입 밖으로 토해내는 게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으응, 으응, 아아.”

“아파, 하아, 그만해?”

아프냐고 물으면서도 허리 짓은 여전히 난폭했다. 준영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만두지 말라고. 더 해달라고.
도하가 귀에 뺨에 마구 입술을 문지르더니 나중엔 목을 아예 물어뜯을 듯이 씹는다.

아릿한 통증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퍽퍽, 앞뒤로만 움직이던 성기는 점점 난폭해져 사방을 마구
찔러댔다. 전립선을 난도질하듯 문질러 대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준영은 제가 사정한 것도
모르고 헐떡이며 신음했다.

도하가 쥐고 있던 넥타이 줄을 놓아주며 준영을 다시 엎드리게 등을 위에서 눌러 압박했다. 힘이 빠진 준영이


제대로 침대를 짚지도 못하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풀거렸다. 도하가 양손으로 어깨를 붙들더니 미친 듯
찍어대기 시작했다.

퍽퍽, 쉬지 않고 살이 부딪혔고 준영이 나중엔 그만하라며 사정을 했지만, 도하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CH 22.

거울을 보던 준영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제 목에 선명하게 난 뻘건 자국들은 마치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밤새 둘이 벗고 뒹굴다 보니 새벽녘쯤 정신을 잃다시피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땐 점심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어젯밤 정신없는 와중에도 도하는 수건을 따뜻하게 적셔와 제 몸을 닦고 잠옷까지 입혀줬다. 몸을 반으로 가를 듯
박아대던 그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해서 잠옷을 들춰봤더니 안쪽은 더 가관이다.

젖꼭지 부위에 키스 자국과 이빨 자국이 수두룩했다. 사람한테 잘못 물려도 죽는다던데. 그 부분을 슥 만지는데
다행히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아 안심됐다. 그렇게 돌아눕는데 허리도 욱신거리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다.

모친이 한약방에서 보약을 지어준다던데 차라리 그거라도 먹어볼까. 젊은 애인 놈이랑 사귀는 게 다 이런 건지


아니면 저 밖에 있는 도하 놈이 유난히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섹스하다간 제 명에 못 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슬쩍 들었다.

물론 할 때는 죽어도 모를 만큼 좋기야 하지만. 그러다 어젯밤 섹스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입술이 마른다.
슬쩍 혀로 입술을 핥고 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 도하가 막 현관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일어났어요? 더 자라고 내버려 둔 건데.”

생글생글 웃는 낯짝에선 오늘도 여전히 광이 났다. 내 기는 저 자식이 다 빨아 먹는 모양이네. 잠시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가 식탁으로 다가가는데 도하가 오더니 준영의 목에 자국들을 보며 인상을 구긴다.

“이건 좀 심했네.”

준영이 그 손을 탁, 치워내고선 가자미처럼 눈을 떴다.

“누굴 놀려?”

“그러게 왜 자극해요. 가만히 송장처럼 누워 있어도 야한 사람이 먼저 막 올라타고 그러는데 내가 돌하르방도


아니고 무슨 수로 배겨.”

그 말에 준영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말이라도 못하면. 도하가 얼른 식탁 의자를 끌어내더니 방석까지
깔아준다. 아플 테니 이거라도 깔고 앉으라면서. 그 배려가 얄미우면서도 고마워서 준영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건이 메일을 확인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전화도 완전히 번호가 사라졌고, 메일을 보냈지만 확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양손을 펴 얼굴을 파묻었다. 연우의 부친에게 물어보려고 잠깐 집에 들렀는데
그는 오늘도 여전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째깍째깍 탁상시계에 초침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따라가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돈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이마를 쿵쿵, 책상에 찧다가 다시 맥 풀린 놈마냥 머리만 대고 축 늘어져 있다가 그걸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이대로 더 있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차라리 밖에 나가 찬 바람이라도 쐴 요량이었다.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나중엔 연우네 집 앞까지 가서 담벼락 안을 들여다봤다.

“뭐 해, 인마!”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이건이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우 아버지가 대낮부터 흠뻑
취해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며
송연우를 불러댔다.

“이 개자식은 지 애비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네. 송연우! 야 이 새끼야!”

고래고래 악을 써도 집 안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이건이 그를 부축해 안방에 데리고 들어가자 그는 펼쳐진


이불 위로 쓰러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한 번 더 연우를 불렀고 이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안을
둘러봤다.

맞은편 작은 방에서 곧바로 연우가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바지를 입고서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올 거 같았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집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연우의 부친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긴 한숨을 내쉬고 마루
아래로 내려와 운동화를 신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려는데 한쪽 구석 깡통에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온 게 보인다. 그냥 지나치려던 이건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쪽에 갔다. 깡통 안을 들여다보던 이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거기엔 타다 남은 물건들이 있었는데 대충 봐도 그건 자신이 어릴 적 연우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었다. 막대를


하나 집어 그것을 뒤적였다. 거의 타 버린 종이 딱지부터 시작해 장난감 학용품. 그리고 편지.

그걸 보는데 목이 콱 막히고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울컥해선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괜히 눈만
빠르게 끔뻑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처음으로 연우가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그러면서도 정말 저를 잊으려고 하는구나. 홧김에 그러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서럽고 무서워졌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부터 명치 아래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 * *

덜컥, 차가 초등학교 앞에서 방지 턱을 넘자 잠을 자고 있던 준영이 눈을 떴다. 도하가 미간을 좁혔다. 조심해서


넘는다고 넘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준영이 창밖을 내다봤다. 어젯밤 너무 시달린 탓인지 출발하자마자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덧
제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운전하는데 옆에서 잠만 잔 거
같아 미안한 마음에 뺨을 문질렀다.

“나 잠깐 잤구나?”

“잠깐은 무슨. 완전 떡실신해서 침까지 흘리던데.”

준영이 입가를 문지르고 나서 도하의 말이 장난인 걸 알고 눈을 흘겼다.


“집에 가서 푹 자요. 오늘은 진짜 안 괴롭힐게.”

“잘 생각했어. 당분간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마.”

“안 괴롭힌다고 했지, 안 본다는 건 아니었어.”

“그게 그거잖아…. 어? 잠깐.”

차가 동네 좁은 길로 들어가는데 준영이 창에 얼굴을 바싹 대고는 무언갈 쳐다봤다. 도하가 속도를 줄이고 그쪽을
같이 바라봤다. 저 멀리 누군가 논두렁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게 누군지는 가까이에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를 멈춰 세우고 창을 내렸는데 ‘악!’ 하는 고함도 덩달아 들려온다. 준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고
도하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이 왜 저래?”

“저게 바로 인지 부조화의 결과인 거지.”

“강이건!”

준영이 이건을 부르려 했고 도하가 그대로 창문을 지잉, 올렸다. 다시 내리려 했더니 이젠 아예 잠가 버린다.

“놔둬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잖아.”

“너 보면 딱히 그것도 아니야.”

“나는 이미 초월한 거지.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했다고 할까. 배 속에 아마 내장보다 사리가 더 많을걸.”

준영이 눈을 흘겼고 도하는 곧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여전히 이건은 논을 미친 들소처럼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게 차를 몰아 빌라 앞에 세우고 나서야 준영은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마당 끝으로 가서 펜스 아래 논 쪽을 내려다보는데 이건이 보이질 않는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야. 찾으려는데


어느새 뒤로 다가온 도하가 준영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더니 같은 방향을 쳐다본다.

“없어요?”

“응. 없어졌네.”
도하가 우린 들어가자며 팔을 잡아끄는 순간이었다. 언덕 아래에서 조금 전까지 논두렁을 달리던 들소, 아니
강이건이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야, 저 체력으로 차라리 운동선수를 했으면 공부하는 것보다 더
효율성이 좋을 거 같은데.

이건이 무슨 생각인지 도하를 향해 뛰어오더니 앞에 멈춰 선다. 헉헉거리는데 얼마나 뛰었는지 코랑 귀는 빨간데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형,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이건이 숨을 몰아쉬며 도하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도하가 그 손을 툭 쳐낸다.

“더러워, 땀나는 손으로 만지지 마.”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아이 씨. 도하가 다시 뿌리치려고 하는데 준영이 얼른 가보라며 등을 슬쩍 미는 바람에 더 내치지 못했다.


그렇게 마지못해 평상 앞까지 끌려가서 뒤를 돌아보니 준영은 빌라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도하가 고개를 홱
돌려 강이건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리고 준영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왜.”

“형, 제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하지 마.”

“네?”

“귀찮으니까 나한테 부탁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아니, 그래도 뭔지 물어는 보셔야….”

“싫어, 이 새끼야. 넌 저번에 내가 해외여행 보내준다고 할 때 들어줬어?”

“그건….”

“거봐.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거야. 세상에 공짜 없다.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는데 이건이 다시 도하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는다. 표정을 봤는데 비장함과 간절함이
뒤섞였다. 제발 좀 도와 달라는. 하지만 도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팔을 붙든 손을 툭 하고 다시 쳐
버렸다.

“놔.”

“제발 부탁할게요. 이것만 들어주시면 제가 형이 원하는 거 뭐든 들어드릴게요.”


“아이고, 그런데 어쩌죠. 저 이제 강이건 씨한테 부탁할 게 없는데. 지금 인생이 존나 꿀맛이거든요.”

“형, 제발요.”

“나야말로 제발 부탁할게요. 꺼지세요. 응?”

뒤돌아서는데 그때 2 층 창문이 열리면서 준영이 얼굴을 내민다. 눈이 마주치자 ‘해결했어?’라는 눈빛을 보냈고
도하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강이건이 다시 부탁 좀 들어달라며 팔에 매달린다. 확 패버릴까
싶었지만, 서준영이 쳐다보고 있어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짧게 말해. 뭔데.”

“송연우 사는 데 주소 좀 알아봐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흥신소야?”

“제발요, 형.”

“못 해. 사람 찾는 게 장난인 줄 알아? 그리고 그거 다 불법이야. 됐지?”

“해주시면 제가 형 없을 때 선생님 잘 보살펴 드릴게요.”

그 말에 도하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간다.

“누굴 보살펴?”

이건이 말을 버벅거렸다.

“보, 보살핀다는 게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프신 거 같거나,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거 같거나, 하여튼
무슨 일이 생기면 형한테 바로바로 연락할게요. 형이랑 선생님은 친형제보다 더 막역한 사이니까요.”

일그러져 있던 도하의 얼굴이 슬며시 펴졌다. 이 새끼가 진짜 바보인 건지. 아니면 바보인 척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준영은 자신이 일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곳에 묶여 이렇게
사는 걸 원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혜윤이 하자고 했던 영화를 수락한 것도 있었다. 근데 막상 그렇게 되면 준영을 혼자 두는 게


염려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강이건이 제 수족이 돼준다고 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흐음.”

“그러니까 제발요. 형….”

“음.”

“더한 것도 하라면 할게요. 부탁 좀 들어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도하가 고개를 끄덕했다.

“오케이. 송연우 인적사항이랑 사진 하나 나한테 보내. 며칠 내로 알려줄게.”

그 말에 이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사람 찾는 거 어렵다고, 불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못


미더워서 정말이냐고 물었더니 도하가 이건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다.

“넌 사인할 준비나 해.”

“무슨 사인이요?”

“계약서.”

물론 앞에 노예란 말은 생략했지만, 어찌 보면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람 하나 찾아주고 알차게 부려 먹어야지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이건은 자기가 부탁해놓고도 걱정되는지 자꾸만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도하가 그만하라며 짜증을 내고 나서 준영이 머무는 집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도하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이건은 의구심이 생겼다. 언제 비밀번호는 알게 된 거지. 처음 봤을 때 둘이 싸우는 거 같길래 사이가
나쁜가 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네.

여전히 눈치 없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근데 아무리 봐도 둘 사이가 조금


이상하긴 하단 말이야. 설마… 하면서도 아니겠지 싶어 고개를 저었다.

* * *
“그래서? 들어주기로 했어?”

“지인한테 부탁했더니 알아보고 연락 준대요.”

도하가 따뜻한 차를 건넸고 준영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이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 도하가 도와준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서 도하의 대본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당장 한 달 뒤면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데 도하의 대본은 깨끗하다 못해 손댄 흔적 하나 없었다.

“너, 이거 읽기는 해?”

“몇 번.”

“촬영 시작하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헐렁해 보여도 막상 하면 존나 열심히 하니까.”

준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맨날 저만 졸졸 따라다니고 귀찮게 하느라 막상 일은 팽개쳐놓는 거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양진우를 그렇게 공식 석상에 대놓고 엿을 먹였는데 같이 일하게 됐다고
하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둘 다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 과연 이 영화가 제대로 나올까 염려됐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래서 둘 다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됐다. 서로 죽이지 못해 대립하는 상황을 연출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다 진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면 큰일이겠지만.

“걱정 그만하고.”

도하가 준영이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빼앗아 한쪽에 홱 던져놓고는 옆에 앉아 다리를 베고 눕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허벅지 안쪽으로 슥 밀어 넣는다.

“무거워.”

“형, 요즘 나 너무 불안해요.”

“왜?”

“모든 게 다 순조롭게 진행되니까 실감이 안 난다고 할까.”

“그래?”
“이러다 갑자기 내일 막 나한테 빅엿 날리거나 할 건 아니죠? 쪽지 하나 남겨두고 사라진다든가.”

준영이 눈을 슬며시 일그러트리며 그거 좋은 생각인데? 하고 짓궂게 웃었다. 도하가 벌떡 일어나선 웃음기 가득


묻은 그 얼굴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자 준영이 얼른 일어나서 도망가려 한다.

“나 자러 간다.”

도하가 그런 준영의 손을 붙들고선 제 쪽으로 잡아당기더니 다시 소파에 앉게 한 다음 그대로 끌어안아 드러눕는다.


준영은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도하가 팔다리로 몸을 감싸고 옭아매는 바람에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야, 놔.”

“같이 자요. 나 혼자 자기 무섭단 말이야.”

입은 애처럼 투정을 부리는데 엉덩이에 닿은 하체는 이미 불방망이처럼 솟아올라 꾹꾹 찔러댄다. 위아래가 따로


노는 것도 모자라 이젠 손이 바지 밴드를 벌려 안으로 들어온다. 순식간에 준영의 엉덩이를 움켜쥐더니
주물럭댄다.

이 미친. 준영이 기겁하고 몸을 떼어내려고 하자 도하는 더 달아올라선 뒤에서 성기를 엉덩이에 대고 문지르며
귓가에 짙은 숨을 토해냈다.

“안 해요. 그냥 잠깐만.”

“또 하면 가만 안 둬.”

“알았어요. 사람이 말을 무섭게 하고 그래.”

쪽, 뺨에 입을 맞추면서 바지 속에서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탱탱하고 매끈한 엉덩이의 감촉은 마치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물풍선 같았다. 세게 쥐면 터지려나. 꽉 움켜쥐고 비틀었더니 준영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도하의
손을 빼내려고 한다.

“그만.”

그때 도하의 눈에 준영의 목덜미에 난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이걸 가린다고 종일 목을 휘감는 터틀넥을 입고


있었는데. 꽃처럼 피어난 그것을 보고 있으니 소유욕과 욕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입술을 살짝 벌려 그 자국에 대고 오물오물하니 준영이 아, 하는 짧은 신음을 내다 얼른 삼켰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은 이제 앞으로 움직여 준영의 성기를 만졌다. 위아래로 문질러주자 잠시 후 맑은 액이 손바닥에 같이
묻어난다.

도하가 다시 한번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할까?”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도하의 팔을 꽉 붙들었다. 손톱을 세워 긁었는데, 그게 더 자극됐는지 팔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막상 붙어 있으니 또 몸이 달았다. 한참 혈기 왕성한 20 대
때도 이렇게 섹스에 열정적이진 않았던 거 같은데.

어느새 성기에선 맑은 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하가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준영이 사정감을
참으며 미간을 구겼다. 바지 때문에 손이 움직이는 게 불편했는지 도하가 갑자기 허겁지겁 준영의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 내린다. 졸지에 하체만 홀딱 벗겨진 준영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소파에 몸을 엎드리게 하고 올라타더니 제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선 성기를 엉덩이 골에 넣고선
압박하며 문지른다. 조금 전까지 도하의 손에 농락당하던 제 성기는 이제 가죽 소파에 문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아쉬운 감이 들어 손을 안쪽으로 집어넣어 성기를 만지려고 하자 도하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양쪽
팔을 뒤로 해서 모아 붙잡는다.

“잠깐, 만.”

“알았어요, 알았어.”

“알긴, 뭘 알아!”

버럭 성질을 내자 도하가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는 그 위에 침을 뱉는다. 끈적한 침이 골을 타고 내려가


애널을 적시자 그 위에 중지를 대고 꾹 쑤셔 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다 약지도 함께 집어넣으니 준영이
소파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손가락을 쑤셔 넣은 채로 앞뒤로 움직여주니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을 빼내고 나서 제 성기를


그러쥐었다. 이미 발기한 녀석은 핏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기둥을 붙들고 입구에 대고 누르니 준영의
어깨부터 허리까지 팽팽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아프면 말해요.”

“아파.”

“시작도 안 했어요.”
준영이 입술을 깨물면서 욕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풀어줬다고는 하나 젤이 아니라 안은 금방 말랐고,
그래서 축축한 게 아니라 뻑뻑했다. 몇 번 뒤로 뺐다가 움직이니 그나마 경직됐던 내벽이 좀 풀려 움직이는 게
수월했다.

퍽, 하고 쳐올릴 때마다 준영이 아, 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어제 그렇게 하고도 막상 몸을 섞으니 또다시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도하가 제 머리 옆으로 팔을 짚고선 하체를 유연하게 움직이는데 서서히 안쪽에서
열이 피어오른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시선을 위로 하니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하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키스, 아, 줘.”

잠시 후 도하의 입술이 포개졌다. 준영이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자꾸만
신음이 샜다. 방음이 잘되지 않아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도하가 짓궂게도 같은 곳만 계속 찍어대는 탓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아.”

소리를 죽이려 제 손등을 깨무니 도하가 그런 준영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몸을 바싹 밀착한다. 허리만 움직이며
추삽질을 계속했다. 준영이 헐떡이며 숨넘어가는 신음을 냈지만 도하의 손에 막혀 제대로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 * *

준영이 넋 나간 얼굴로 눈만 끔벅끔벅 움직이며 천장만 쳐다봤다. 거실에서 한 번 침실에서 두 번 더 정사를


치르고 나서야 간신히 누울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이틀 내내 격정적인 섹스를 했더니 몸뚱이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도하가 따뜻한 물수건을 적셔와선 준영의 몸을 닦아주려 했다.

“치워…. 내가 가서 씻을 거야.”

“힘든데 누워 있어요.”

“고양이 쥐 생각해?”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준영은 정말 기운이 없는 건지 평소 같으면 난리를
피웠을 텐데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그렇게 허벅지 안쪽과 성기 부분과 엉덩이 사이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닦아준다. 그러다 구멍을 확인하고는 눈이 찌푸려졌다.

“부은 거 같아요.”

“그렇게 하는데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호, 해줄까요?”

“아니. 뭐든 갖다 대기만 해. 죽여 버릴 거야.”

도하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준영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섹스하다 단명하고 말지.”

그 말에 도하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정기를 주는데, 왜 힘들어할까?”

“주는 거였어? 쪽쪽 뽑아 먹는 줄 알았는데.”

“내가 무슨 거머리 흡혈귀예요?”

다를 게 뭐람. 준영이 이불을 감싼 채 반대편으로 힘겹게 몸을 돌리고 누웠다. 끄응,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걸
보니 정말 어디 하나 고장이 나긴 난 것 같았다. 도하가 그런 준영을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어깨를
슬쩍 만졌다.

“잘 거예요?”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준영이 그 손을 쳐낼 땐 번개 같았다.

“만지지 마. 진짜 피곤해.”
알았어요. 그럼 나 밑에서 잘게요. 시무룩하게 말하고 수건을 가져다 놓고 와서 보니 준영이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다. 눈치를 보며 살피던 도하가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몸을 준영에게 밀착해서 허리를 팔로 감고서 안으니 예상보단 아무 반응이 없다. 고개를 슬쩍 들고서 보는데 눈을
뜨고 있어서 흠칫 놀랐다. 팔을 거두려는데 준영이 그 팔을 붙들고선 제 몸에 다시 올려놓는다.

“그냥 자.”

“불편하면 내려가서 잘게요.”

“…괜찮아.”

도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대로 더 힘주어 제 쪽으로 꽉 끌어안는데도 준영은 불평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니 준영의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잘 자요. 인사를 하니 준영이 손을 뒤로
뻗어 도하의 엉덩이를 툭 툭 두드렸다. 너도, 잘 자.

그때 도하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귓가에 속삭였다.

“한 번 더 할까?”

야. 진심으로 악에 받쳐서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렸기에 흠칫해선 아니라며 얼른 말을 바꾸고 준영을 꼭


끌어안았다. 자려던 준영은 이 상황이 기가 막혀서 웃었고, 곧바로 등 뒤에 매달려 있던 도하도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부턴 진짜 날짜 정해 놓고 해.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아.”

“괜찮아요. 형이 먼저 죽을 일은 없어. 나도 같이 죽을 거니까.”

“…방금 소름 끼쳤다.”

“이런 게 참사랑이지.”

“목숨은 나라를 위해서나 받쳐.”

“나한텐 당신이 나라고, 세상이야.”

“으.”

“잘 자요, 우리 자기.”

쪽. 목덜미에 키스를 받으며 준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체온이 싫지 않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과는 달리 이상한 설렘으로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등 뒤에서 도하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걸 자장가 삼아 눈을 끔벅이다 보니 어느덧 저도 잠에 빠져들었다.

* * *

“손님 다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건이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거스름돈을 받아 들고는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하늘이 짙게 가라앉아 금세 뭐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우산을 하나 살까, 고민하다 관두었다.

일단 휴대폰을 꺼내 길 찾기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도하가 알려준 주소를 입력했다. 약속대로 도하는 며칠 만에


주소를 찾아 제게 건네줬다. 그리고 계약서에 사인까지 받아갔다. 나중에 써먹는다고 했는데 이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연우를 찾을 생각으로 일단 서울로 오긴 했는데, 막상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니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의문이


들었다. 후, 심호흡하고 나서 휴대폰을 보며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데 저 멀리 편의점이 하나 보인다.

도하의 말로는 연우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점점 그 앞으로 다가갈수록 죄지은 놈마냥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요동을 쳤다. 전봇대 뒤에 몸을 감추고서 다시 심호흡한 후 고개만 삐죽 내밀어 편의점
쪽을 살폈다.

안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조끼를 입은 직원이 나온다. 그런데 연우가 아니다. 뭐지.
여기가 아닌가. 휴대폰으로 확인하니 분명 맞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누군가 오는 게
보였다. 연우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짧아져 있었다. 편의점 앞에 있던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남자가 연우를
보며 웃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이건이 미간을 좁힌 채 전봇대에 바싹 붙어 얼굴만 내밀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뭐지….”

곧 두 사람이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건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지나가던 여학생 두 명이 그런


이건을 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창피해서 끌어안고 있던 전봇대를 놓으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막상 가도 연우가 저를 반길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벽에 기대서서 발끝을 땅에 툭툭 내리찧으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서 있는데 발등으로 하얀 눈송이가 하나 떨어진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제법 굵은 눈송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린다. 올해 진짜 눈 많이 오는구나. 언덕을


오르는 몇몇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이건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연우가
그곳에서 나올까 봐. 열린 문틈으로 얼굴이나마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냥… 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눈이 제법 많이 온다. 점퍼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역시 아까


우산을 사둘걸. 매번 이런 식이다. 고민만 하다 후회하는.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괜히 서글픈 마음에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나서 편의점 쪽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억, 소리를 지를 뻔했다.


상자를 들고 나온 연우와 정면으로 시선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건이 너무 놀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허둥대는데 잠시 멈칫하던 연우가 상자를 한쪽에 두고 그대로 홱 몸을 돌려 들어가 버린다.

“아….”

이건이 충격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상상만 했던 일이 벌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질 못했다.

“얼굴이 왜 그래?”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연우의 귀가 시뻘게지자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연우가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나서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고개를 쭉 빼고 밖을 내다봤다. 전봇대
뒤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아니, 여긴 왜 온 건데. 오만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서 터질 거 같은 와중에도 심장이 쿵쿵 미친 듯 발광하며 뛰기 시작했다. 후,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마음을 추스르는데 딸랑 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린다.

화들짝 놀라서 보니 손님이다. 정신을 차리고 계산대 쪽으로 가면서 다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강이건은 전봇대 뒤에 숨어 있었다. 들어온 손님이 우산 하나를 가져와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갑자기 눈이 엄청 쏟아지네요. 올겨울은 눈 구경 원 없이 해봐요.”

연우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어색하게 웃었다. 며칠 일했지만 싹싹하게 손님을
상대하는 건 제 성격상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래도 기껏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치기 싫어 최대한 예의 바르게
웃으며 손님에게 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쳤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그대로 나가서 우산을 펼쳐 들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게 보였다.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쏟아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이제 밖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강이건은 여전히 전봇대 뒤에 서 있었다.

저 큰 덩치로 자기가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여튼, 저러니까 나한테 병신 소릴 듣지.


“벌써 집에 갈 걱정해?”

물건 정리를 마친 석진이 이제 막 갈 채비를 하며 물었다. 연우가 무슨 뜻인 줄 몰라 쳐다만 봤다.

“밖을 자꾸 내다보니까 말이야.”

“아….”

“창고 안쪽에 손님이 두고 간 우산 몇 개 있으니까 그거 쓰고 가.”

“지금 가세요?”

“아니, 10 분 정도 있다가. 왜?”

연우가 입을 달싹였다. 시선은 자꾸만 밖에 있는 전봇대 앞으로 움직였다. 여전히 강이건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저대로 얼어 죽을 작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걱정되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궁금했다. 왜 여기까지 저를
찾아왔는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온 건지. 그래, 마지막으로 이유나 듣자는 심정으로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뱉고선 안쪽에 가서 우산 하나를 챙겨 들었다.

“형, 저 이거 하나만 쓸게요.”

“좋을 대로.”

연우가 그것을 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을 펴고 걸으니 어느새 쌓인 눈 위로 제 발자국이 찍혔다.


뽀득, 소리가 예전처럼 기분 좋지 않았다. 전봇대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강이건이 얼굴을 삐죽 다시 내민다.

바로 코앞에서 연우가 온 것을 발견하고는 ‘억!’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연우가 우산을 든 채로 앞에 마주


보고 섰고 이건은 놀라 붕어처럼 입만 벙긋댔다.

“뭐 하냐, 여기서.”

이건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횡설수설했다.

“아니, 나는 그냥 네가 연락도 안 되고… 걱정도 되고 해서….”


연우가 들고 있던 우산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거 쓰고 가.”

“…….”

이건이 쳐다만 보고 있자 연우가 그것을 손에 억지로 쥐여주더니 얼굴을 바로 마주 본다.

“다신 오지 말고.”

“연우야….”

“너 진짜 병신이야? 내가 연락처까지 바꿨으면 무슨 뜻인 줄 몰라? 분명히 말했지. 다시 보면 죽여 버린다고!”

“…….”

“이제 꺼져. 알았어?”

한마디 쏘아붙이고선 돌아서는데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연우의 몸이 홱 돌아갔다, 이건이 우산은
내팽개치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연우가 지지 않고 같이 노려보자
이건이 아랫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누가 너 잘못했대. 내가 싫은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너 이제 보기 싫다고!”

악을 쓰는 연우를 보며 이건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도하에게 그런 부탁을 하기까지 이곳에 오기까지 기다리는
내내 소심한 저한테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서 안 보겠다고 하니
서운하고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커다란 파도처럼 저를 덮치고 있었다.

“아우, 진짜….”

말을 하려는데 목이 먼저 멘다. 눈알이 뜨겁더니 곧 새카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걸 보는 연우가 입을 쩍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이건이 어지간하면 우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 너 울어?”

이건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울어.”

이젠 목소리까지 잠기고 난리다. 이건이 아예 이젠 팔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한번 터진 감정은 도무지


추슬러지질 않았고 마치 고장 난 브레이크 같았다. 연우가 기막히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왜 울어! 남들이 보면 내가 때린 줄 알 거 아니야!”

그 말에 이건이 울컥해선 성질을 마구 냈다.

“씨발! 안 운다고! 안 울어!”

연우가 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너 씨발,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너는 맨날 하면서 나는 하면 안 되냐! 씨발! 씨발! 씨발, 송연우!”

“…이게 진짜, 돌았어?”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 네가 이상한지 내가 이상한지! 좋아하는 거 나는 알지도 못했는데, 지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더니 연락하지 말라고 그러고! 기껏 찾아왔더니 다시 가라고 하고! 나더러 어쩌라고 씨발!
어쩌라고!”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연우가 짜증을 내며 이건을 끌고 전봇대 옆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택가 사이에 골목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너 말은 바로 해. 어차피 내가 얘기했어도 우리 사이 달라지는 거 없었어. 근데 왜 내 탓을 하고 지랄이야,


사람 짜증 나게.”
“왜 없어? 네가 나한테 미리 말했으면 달랐겠지.”

그 말에 연우가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달랐다고? 어떻게? 너 내가 원하는 거 해줄 수 있어? 나한테 키스하고.”

연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건이 연우의 뺨을 붙들고선 그대로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을 거칠게
부비길래 연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건의 어깨를 밀쳐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귀와 뺨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심장이 미친 속도로 쿵쿵거렸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이건도 놀랐는지 같이 입만
벙긋댄다.

“뭐, 뭐 하냐 지금!”

“…해, 해보라며.”

“하. 너, 너 솔직히 말해봐! 홧김에 한 거지!”

“…어.”

“이 씨발…!”

“근데… 다시 해도 또 할 수 있을 거 같아….”

“…….”

“입술… 되게 부드럽다, 연우야.”

하, 연우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잔뜩 구겼다. 욕을 한바탕 퍼부어 줘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잔뜩


구겨진 얼굴과는 달리 귀며 뺨은 이제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앞에 선 강이건 역시 마찬가지로 얼굴이 토마토가
됐다. 머리와 어깨에 하얀 눈을 달고선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저를 보며 머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 *

텅 빈 가게 안을 준영이 살펴봤다. 카페가 있던 자리였는데 지금은 문을 닫은 지 꽤 됐다고 했다. 부동산 사장이


설명하는 와중에 도하가 옆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실내를 살펴봤다. 북카페 얘기했을 때 설마 했는데, 결국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것도 하필 대학교 앞에.

아 짜증 나. 그냥 서울로 올라가면 좋겠지만 본인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 더 얘기하고 싶진 않았다.


“잘 봤습니다.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가게를 나오며 부동산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둘은 차가 주차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준영이 근처


건물들을 둘러보는 사이 도하가 그런 준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배고파요.”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서 먹고 갈까?”

응. 도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뭘 먹을까 잠시 고민하는데 저 멀리 한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몇몇은 머리카락 색이 요란했는데 둥그렇게 모여 담배를 물고 있다가 이쪽을 쳐다본다.

그들을 쳐다보던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낯익은 얼굴 몇 명이 보였다. 짧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때 제 손에서 꽃을 빼앗아 간 그놈이다. 대가리 터진 덴 이제 멀쩡해졌네.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는데 그도 도하를 알아봤는지 담배를 문 채로 움찔해선 얼른 시선을 피한다.
주변에 있던 다른 무리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그걸 보며 준영이 도하에게 목소리를 낮췄다.

“쟤들이 왜 우릴 쳐다볼까?”

“괜히 눈 마주치지 마요. 요즘 애들 얼마나 무서운데.”

도하가 더 가까이 가자 그들은 마치 송사리 떼처럼 우르르 몰려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제게 머리를 얻어맞은
곽상윤이 한 번 돌아보길래 양 손가락으로 눈을 찍는 시늉을 했다. 담에 걸리면 눈깔 지져 버린다는 뜻이었는데,
녀석이 용케 알아들었는지 흠칫 놀라 몸을 홱 돌리더니 무리와 함께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걷다가 보니 식당이 나왔다. 생선 정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실내가 깔끔하고 방도 따로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 메뉴를 주문하고 앉았다. 방에는 커다란 창도 있어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구조였다.

메뉴가 나오는 동안 준영은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10 여 분이 지나서 들어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 만나고 온 부동산 사장이라고 했다. 계약할 경우 건물주가 가격을 좀 조정해줄 수 있다고 했다면서.

“꼭 그 자리여야 해요?”

“본 데 중엔 제일 낫던데. 왜? 별로야?”

“아니, 딱히 별로는 아닌데….”


“내가 일 시작하는 게 싫어?”

“솔직히 말하면 좋진 않아요.”

“왜.”

“이제 나도 바빠지는데, 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짜증 나.”

너무나 솔직한 반응에 준영이 웃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도하가 더 못마땅한 표정을 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집에 가둬놨으면 좋겠는데, 이거까지 말하면 형이 또 소름 끼친다고 할까 봐 관둘래요.”

이미 말은 다 해놓고서. 준영이 눈을 흘겼고 곧바로 주문한 밥과 반찬이 나왔다. 생선구이 정식이었는데, 도하가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먼저 바른다. 어릴 때도 젓가락질 하나는 딱 부러지게 하더니 커서도 여전히 그랬다. 그는
살을 발라 준영이 먹기 좋게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알아서 먹을게. 너 먹어.”

“나는 형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질색하는 표정과는 다르게 준영은 생선 살을 발라 도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도하가 웃으며 그것을 밥에
올려놓더니 한 입 크게 떠먹는다. 그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적 제가 챙겨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만 쳐다봐요.”

“왜.”

“부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어요.”

그 말에 웃던 준영은 문득 도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예민한 성격 탓에 학교에서 제대로 쉬를


하지 못해 고생했고 옆 학교에 다니던 자신이 찾아가서 손잡아 줬던 기억이.

그 얘기를 꺼냈더니 도하가 질색하며 싫어한다. 어지간하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받아치더니 그 얘기에 성질을 내는
걸 보니 준영은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솔솔 생겨났다.

“하지 마요, 진짜.”


“말만 해. 그때처럼 손잡아 줄게.”

도하가 인상을 쓰자 준영이 손을 뻗어 도하의 손을 붙든다. 도하가 얄밉게 째려보다 시선이 준영의 네 번째
손가락에 닿았다. 어쩐 일인지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준영이 제 손가락을
쳐다봤다.

“반지 어디 갔어요?”

“아. 손 닦고 욕실에 두고 왔다.”

“아니 그걸 왜 빼요?”

“비누 껴서 잠깐 뺏어.”

도하가 이를 까득 갈았기에 준영이 얼른 밥 위에 생선을 올려주면서 먹으라고 말을 돌렸다. 저번에도 잠깐 뺐다가


30 분 동안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밥을 먹으면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물을 마시던 준영이 창가 쪽을 바라보며 어? 하고 눈이 살짝 커진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봤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 도하가 인상을 구겼다. 나온 김에 데이트 좀 하려고 했더니 하필 눈이 올 건 뭐람.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슬쩍 호텔 얘기를 꺼냈다가 준영이 흘겨보며 퇴짜를 놓는 바람에 결국은 집으로 가기로
결정이 났다.

* * *

준영이 씻고 나와 보니 도하가 침대에 이미 자리를 잡고 누워 있는 중이었다. 집에 안 가느냐고 물었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얼른 와서 누우란 뜻이었다. 머리를 마저 말리고 나서 침대에
걸터앉으니 도하가 손을 끌어가서 반지를 확인한다.

“또 빼기만 해요.”

“반지가 아니고 족쇄냐.”

“나중에 가게 할 때도 꼭 끼고 일해요. 누가 물어보면 애인 있다고 하고. 괜히 얼버무리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 이상한 것들 꼬이게 하지 말고.”

“아예 CCTV 를 달아.”

그 말에 도하가 그럼 CCTV 도 없이 가게를 할 생각이었냐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준영이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매장 안에 책이 많으니 설치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CCTV 의 용도와 도하가 생각하는
용도는 전혀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카페고 뭐고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안 하면 나야 더 좋고.”

그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기에 준영이 눈을 흘겼다. 도하가 옆자리로 팔을 뻗더니 준영을 향해 손짓한다.
여기 와서 누우라며. 준영이 가만히 쳐다만 보자 이번엔 팔을 잡아서 당긴다.

“얼르으은.”

어울리지도 않게 아양을 피우는 바람에 준영이 기가 막혀 웃으며 그 팔을 베고 누웠다. 도하가 모로 누우며 그런


준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뺨을 만지고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스레 쓸어 넘겨줬다. 귀도
만지작대고 자꾸만 그러다 보니 준영은 나른해지면서 잠이 몰려왔다.

“졸리면 자요.”

“…응.”

“안아줄까?”

“…응.”

도하가 팔을 뻗어 준영을 제 품 쪽으로 끌어당긴다. 군말 없이 안겨서 자는 준영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잘 자라고 인사를 하니 준영이 고개를 슬쩍 들고서 도하의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고선
다시 품 안으로 파고든다.

“잘 자….”

도하가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준영의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더 꽉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이 내일 아침엔 머리를 덮을 만큼 쌓여
이곳에 둘만 갇혀 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 * *
감겼던 눈을 뜨니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 씨. 도하가 이불을 끌어 제 머리에다 덮다 말고 갑자기
이불을 들치고 옆을 쳐다봤다. 서준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누운 채로 혀엉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다. 손을
위로 뻗어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9 시가 넘었다.

어지간하면 준영보다 늦게 일어나는 법이 없는데 어젯밤은 준영의 얼굴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다 새벽에 잠이
들었더니 피곤했나 보다. 간만에 푹 잤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밖이 시끄러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밤새 많이도 왔네. 아니나 다를까 밑에선 준영이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고 있었고, 이건의 아버지도, 1 층 사는 고시생도 나와서 눈을 치우는 중이었다.

“형.”

하고 부르니 준영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곤란한 표정으로 눈짓을 하길래 도하가 영문을 몰라 눈썹을
치켜들었다. 왜. 하는 표정으로 보는데 곧바로 1 층 사는 동현이 고개를 들더니 도하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3 층 형제님 왜 거기 있어요?”

아. 도하는 그제야 자신이 준영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등 뒤로 준영이
얼른 닫으라는 신호를 보냈기에 못 들은 척 창문을 닫아 버렸다.

“아, 진짜.”

아예 모른 척하자니 밑에서 비질을 하는 준영이 마음에 걸렸다. 내려가서 대신할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다 창가
아래 책상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제가 준영에게 준 책이었다.
열여덟 살 생일에 선물 받았던, 앞장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책.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을 넘겨보던 도하가 흠칫 놀라 책을 탁 덮어 버렸다. 글씨가 적혀 있다. 잘못 봤나 싶어


앞을 슬쩍 넘겨 보는데 역시나 전에 없던 글자가 적혀 있다. 다급하게 옷을 마저 챙겨 입고 나서 책상 앞에 다시
섰다. 언제 적었지. 아니, 근데 이걸 왜 안 주고 가지고 있는 거야. 분명 적어서 달라고 했는데. 혹시….

[도저히 너랑은 못 사귀겠다. 이 팬티 변태야!]

아니면….
[김민석이랑 다시 사귀기로 했다. 미안.]

“안 돼!”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만으로도 열 받아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적당히 밀어붙일걸, 허리


아프다고 하는 거 좀 참을걸, 뒤늦게 후회됐다. 적어 놓고도 안 준거 보면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닌 거 같은데….

걱정 반 두려움 반 그리고 기대는 개미 콧구멍만큼 섞어서 책 앞장을 슬쩍 들어 올렸다. 실눈을 뜨고 보는데


글자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눈이 조금씩 커지며 뒤늦게 글자가 들어왔다. 주인만큼이나 반듯한 필체를 보며
잠시 숨을 멈췄다가 입술을 움직여 그것을 따라 읽었다.

“인생이 추울 때 너를 만나….”

아. 울컥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에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눈으로 그
글자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인생이 추울 때 너를 만나 나를 꽃으로 대해준 네가 고맙다.’

먹먹했다. 서준영만 보고 살아온 제 삶을 인정받는 것 같았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되뇌는데 안방


문이 열리고 준영이 들어온다. 그는 추위에 뺨과 귀가 빨개져선, 도하를 보자마자 투덜댔다.

“야, 너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아래층 사는 동현 씨 눈치 엄청 빠르단 말이야.”

“…….”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도하가 몸을 돌린다. 눈과 목덜미가 빨개져 있는 걸 보고 준영이 놀란


표정을 했다.

“도하야.”

“…형.”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도 전에 도하의 등 뒤로 책 한 권이 펼쳐진 게 보인다. 아, 봤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보면 도하가 떠올랐다. 열여덟 생일엔 차마 그것을 들려줄 수
없었다.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지 몰라서. 아니, 자신이 그것을 읽을 때마다 도하를 떠올리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봤어?”

도하가 눈물을 꾹꾹 참더니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누른다.

“고마워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

“알았어, 울진 마.”

“너무 좋아서 그래요.”

도하가 준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허리를 껴안는다. 고마워요. 물기 가득한 그 목소리에 괜히 울컥해선 도하의
등을 토닥이고 어루만져줬다. 오랫동안 힘들게 해서, 진작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도하가 참던
울음을 터트린다. 결국엔 준영도 눈가가 빨갛게 붉어졌다.

<끝. 외전이 이어집니다>

외전.

[충무로의 라이징 스타죠. 콜드블러드에서 매력적인 악역으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도하 씨를
모시고 오늘 인터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도하 씨?]

[안녕하세요. 이도합니다. 이색 시네마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화면 가득 도하의 얼굴이 나오자 보고 있던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퇴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왔다가 마침 도하가 나온다는 걸 알고선 잠시 짬을 내어 한쪽에 기대앉아 방송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화면 속 도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얼굴이 조금 편안해 보였다.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소시오패스인


악역이었고 그걸 소화하기 위해 체중도 감량하고 격투 장면이 많다 보니 막바지엔 얼굴이 조금 까칠해 보여
안타까웠는데.
[단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셨는데요. 요즘 근황이 어떤지 궁금해요. 영화 개봉하고 굉장히
바쁘셨을 거 같은데요.]

[예.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영화는 성공리에 개봉을 마쳤고요, 성적도 꽤 좋은 편이라 만족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관객분들이 주연 못지않게 돋보였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는데. 이 얘기는 첫 작인 별 헤는


밤에서도 굉장히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이번에도 역시 그러면서 확고하게 차세대 배우로서 자리를 잡았다는 평을
듣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과찬이시고요. 양진우 선배님과 비교되는 건 저로선 영광입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다 보니


같이 촬영하면서 많이 배웠고, 혹시 기회가 되면 다음 작품에서도 호흡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극 중에서 소시오패스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떤 분들을 귀신보다 무서웠다, 그런 얘길 하셨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실제 성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실제 성격은 겁이 많고요. 마음이 여린 편입니다. 그래서 연기지만 정말 힘들었고, 초반에 이걸 과연 제가 잘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과 걱정을 했던 거 같습니다.]

[이런 질문 좀 조심스러운데요. 두 분이 액션 장면을 촬영하다 양진우 씨가 몇 번 병원에 실려갔잖아요. 그래서


항간엔 두 분이 사이가 좋지 않다, 일부러 도하 씨가 양진우 씨를 때렸다. 이런 소문도 돌았어요. 혹시
들어보셨나요?]

[음…. 저희 영화에 액션 장면이 유독 많다 보니까 합을 맞췄다고 해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몰입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실제 현장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몇 번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진우 형 팬들이 저를 무척
미워하셨다고 하는데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렴 제가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 머리에 각목을 일부러 휘둘렀겠습니까. 하하.]

[그렇죠. 많은 분들이 극 중 도하 씨가 맡았던 윤태준이란 인물에 너무 몰입하셨던 거 같네요. 자, 다음은


차기작 질문인데요. 지금 여러 감독님께서 러브콜을 보낸 걸로 기사가 나갔어요, 혹시 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영화가 있다면 어떤 건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계획이 없고요. 아무래도 저 자신과 너무 다른 역을 하다 보니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많이 누적된 상태라서 당분간은 쉬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런 거니 팬분들도
양해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능수능란하게 대답하는 도하를 보며 준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길래
이어폰을 빼고 나가봤더니 이건이 와 있었다. 학원을 마치는 시간과 카페 문을 닫는 시간이 비슷하여 늘 함께
퇴근했기 때문이다. 이건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복 아랫부분을 잡아당기며 펄럭였다. 어지간히 더운
모양이었다.

“이건이 왔어?”
“네, 선생님. 밖에 엄청 더워요. 저 땀 좀 보세요.”

“시원한 음료 줄까?”

“괜찮아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준영이 카페 안을 둘러봤다. 마지막 봤던 손님들은 나갔는지 없었고 아르바이트생인 선재 혼자 테이블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한선재는 21 살이었고, 근처 대학에 다니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었다. 얼굴도 말끔하고,
친절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재야, 나머진 내가 할 테니 들어가.”

“아니에요. 이것만 마저 하면 끝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마지막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친다. 아르바이트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물론 도하는 못마땅해 죽으려고 하지만. 왜 여자가 아닌 남자를 뽑았느냐를 시작으로 나이가
너무 어린 거 같다고 온갖 트집을 잡아댔다.

카페를 차린 지 3 개월 정도가 됐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꽤 많았고 단골도 늘었다. 블로그나 SNS 에 예쁜 카페로
소개된 적도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를 지인이 도와줬는데 신경을 많이 쓴 효과를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부산하게 뒷정리를 하는데 마침 도하에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내일 아침에 일찍 간다며 뭐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 연락이었다. 서둘러 답장을 보내고 나서 정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 * *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 대시보드 화면에
악질사장이라고 뜬 걸 보고서 도하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니 너머에서 혜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디야.]

“왜.”

[어제 화보 촬영 끝나고 잠깐 들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왜.”

[어제 김상진 감독 만났어. 너한테 관심 많더라.]


“그래서?”

[뭘 그래서야. 차기작 같이하자는 거지. 톱배우들 다 제쳐 두고 너랑 하고 싶대. 서수혁 알지? 걔가 시놉 먼저


읽고서 탐냈는데 김 감독이 너랑 하고 싶다고 딱 못 박았다더라.]

“아, 짜증 나.”

[뭐야, 인마?]

“일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일 얘기야.”

[너 기회가 그리 흔하게 오는 줄 알아?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잔말 말고 내일 11 시까지 사무실로 와.


오전에 선태랑 미용실 다녀오는 거 잊지 말고.]

“싫어.”

[야!]

도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화 촬영 끝나고 인터뷰에 화보 촬영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서준영 얼굴 못
본 지가 2 주일이 넘었다. 통화하고 싶어도 둘 다 낮에는 바빠서 힘들고 그나마 밤에 영상통화를 하긴 하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그것도 무리가 있었다.

겨우 오늘은 저도 시간이 비고 서준영도 쉬는 날이라 얼굴 좀 보러 가는가 싶었는데.

“하여튼 안 가. 아니 못 가. 당분간 나 그냥 쉴 거야.”

[너 이런 식으로 할래? 나 준영 씨 찾아간다.]

혜윤의 협박에 도하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툭하면 서준영을 들먹이고 협박하는 바람에 기가 막혔다.

“그러기만 해. 진짜 의절할 거야.”

[너,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의절? 의절이라고 했어?]

“두말 안 해. 준영이 형 신경 쓰게 하지 마. 가뜩이나 가게 한다고 피곤한 사람한테.”

나 참. 반대편에서 혜윤의 기막혀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도하가 그만 끊는다며 종료 버튼을 툭, 하고 눌러 버렸다.


다시 전화가 오면 한마디 더 하려고 했는데, 전화 대신 메시지가 도착한다.

[3 일만 쉬고 올라와. 더 이상은 안 돼.]


으, 이 마녀. 도하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렇게 교차로를 지나 차를 오른쪽으로 꺾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속도를 줄이고 차를 세운 다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보조석 문이 열리면서 송연우가 홱 올라탄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그가 매고 있던 가방을 익숙하게 뒷좌석으로 던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5 분 늦었거든. 얻어 타는 주제에 투정은.”

쯧, 도하가 혀를 차고 차를 출발시켰다. 연우가 안전띠를 끌어내 매고서는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댔다. 그 모습을


도하가 흘깃 봤다. 한 번씩 춘천에 내려갈 때마다 시간이 맞으면 연우를 태우고 갔는데 그건 강이건의 부탁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준영까지 나서서 좀 해주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송연우의 기사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야, 너는 예의가 없어. 형님이 매번 거기까지 태워다주면 음료수라도 하나 사서 타든가.”

“돈 없어요.”

“하긴, 네가 뭔들 있겠냐.”

연우가 째려보는데 도하가 본 척도 하지 않고 차 속도를 높인다. 연우가 괜히 코를 훌쩍이고 나서 휴대폰으로


강이건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금 도하를 만났다고 곧 간다는 문자를 보내놓고 나니 곧바로 전화가 걸려온다.
강이건 이름 옆에 하트 표시가 달라진 둘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왜.”

[출발했어?]

“…응. 너는?”

[우리 이제 가려고]

“밤에 전화 왜 안 받았어?”

[언제?]

“10 시 좀 넘어서 했는데 안 받더라?”

[일찍 잤어. 피곤했거든.]

“구라면 죽는다.”
[너한테 왜 거짓말해. 진짜야. 못 믿겠으면 이따가 엄마한테 물어봐.]

순순히 대답하자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걸렸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이따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하가 흘깃 연우를 쳐다본다. 시선을 느낀 연우가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도하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야. 너 강이건 바람피울까 봐 의심하냐. 왜 그렇게 캐물어?”

“…그냥 물어본 건데요.”

“웃기시네. 완전 집착하는데 뭘. 너 그러지 마. 질려서 도망간다.”

도하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데 연우가 눈을 가늘게 늘이고 흘겨봤다. 집착의 아이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사돈
남 말 한다고 하면 한 대 얻어터지거나 그대로 밖으로 내동댕이치겠지. 항변하지 못하고 결국 입을 닫았다.

그렇게 차는 달려 어느덧 고속도로로 빠져 춘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탈진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 옆쪽으로 계곡이 나왔다. 천막이 늘어진 곳으로 백숙, 오리탕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더 위로 올라가다 보니 준영의 차가 눈에 띄었다. 그 뒤에 주차하고 나서 시동을 끄고 연우와
함께 내려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파란색 천막 아래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이건을 부르기도 전에 연우가 그곳을 향해 후다닥
뛰어간다. 그걸 보며 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네.

이건과 연우가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 도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준영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이스박스와 라면 그밖에 간단한 조리기구들이 보인다. 평상을 빌리면 이곳에서 취사도 가능하다더니.

“준영이 형 어디 갔어?”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잠깐 식당에 가셨어요.”

식당이란 말에 고개가 자연스레 위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엔 가정집처럼 꾸며 놓은 식당이 두 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준영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르바이트생인 양선재였는데 그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준영과 시시덕거리면서


웃었다. 선글라스 속 도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혀로 앞니를 슥 긁으며 슬쩍 치솟는 짜증을 꾹 누르는데 준영이
도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을 한다.
“일찍 왔네. 연우는?”

도하가 언덕 아래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닥했다. 연우와 이건은 어느새 계곡 아래로 내려가 둘이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준영이 연우를 부르자 곧 돌아봤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서울로 올라간 연우는
이곳에 살 때보다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수다스러울 정돈 아니지만 전보다 말도 많아졌다.

“안녕하세요.”

준영의 옆에 있던 선재가 알은척을 했고 도하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양선재는 준영과
전공이 같았고, 방송국에 취직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고
도하는 그 점이 제일 못마땅했다.

인사를 한 선재가 아래쪽으로 먼저 내려가고 나서 준영이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흡연할 만한 장소를
찾아 뒤쪽 한적한 곳으로 가길래 도하가 그 뒤를 따라갔다. 달칵,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몸을
돌리길래 도하가 선글라스를 벗어 앞 셔츠에 걸치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피곤하지 않아? 어제도 늦게까지 촬영했잖아.”

“괜찮아요. 모처럼 형이 카페 문 닫고 쉬는데 내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준영이 담배를 문 채로 웃었다. 어제 방송으로 본 도하와 지금 도하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요즘 스케줄이


빠듯한 걸 생각하면 괜히 오라고 했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매일같이 집으로 찾아오고 얼굴을 마주하고 살다가 2
주가 넘도록 보질 못하니 허전했다. 그래서 오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하루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도하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서 있는 곳 뒤쪽으로 작은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뒤론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자꾸 그곳을 쳐다보니 준영이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고개를 돌린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다 피웠어요?”

응. 대답할 틈도 없이 준영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쪽으로 끌고 갔다. 창고 뒤쪽으론 전부 산이었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준영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도하가 그대로 양 뺨을 부여잡더니 입술을 포갠다.

놀라 밀어낼 틈도 없이 입안으로 혀가 밀고 들어와서 헤집었다. 그러다 창고 앞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고 준영이


놀라서 황급히 밀어내자 도하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날씨도 더운 데다 잠깐의 키스로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준영이 창고 앞쪽을 한 번 살펴보고 나서 미간을 구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미쳤어?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도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담배의 쌉쌀한 맛이 그대로 전해졌다. 2 주 만에 맛본 서준영 입술은 여전히 달았고,
맛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차를 몰고 집이든 어디든 둘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마음껏 뒹굴고
싶은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투정을 부리면서 준영의 손끝을 잡고 흔드는 바람에 준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보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도하가 출연했던 방송도 몇 번이나 다시 보기로 보고,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마치고
나면 영상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래도 직접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는 것만 하진 않았다.

“보고 싶었어.”

“얼굴이 왜 저번보다 야위었어요? 일하는 거 힘들어요?”

“날씨 더우니까 살이 좀 빠지네.”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슬쩍 다가와선 몸에 손을 대려 하길래 준영이 얼른 떼어내고 나서 피했다. 도하가 손을 잡아채다가 눈빛이


일그러진다. 준영의 손에 있어야 할 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준영이 그 시선을 알아채고선 먼저 사실대로
얘기했다.

“계곡에서 놀다가 잃어버릴까 봐 미리 빼뒀어. 돌에 긁히는 것도 싫고.”

“핑계.”

“아니거든.”

“내가 분명히 저번에도 빼지 말라고, 한 번만 더 빼면 후회하게 해준다고 했는데?”

“진짜 아침까지 끼고 있었다니까. 못 믿겠으면 이건이한테 물어봐.”


그때 건물 앞쪽에서 이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셨지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준영과 도하를 찾고 있는 거
같았다. 도하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볼을 씰룩였다.

“짜증 나….”

“이따 집에 가서 실컷 만져.”

그 말에 도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창고를 돌아 나오니 이건이 전화기를 막 꺼내던
참이었다. 그런 이건을 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다들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숯에 불을 붙이고 나서 그릴을 고정하고 그 위에 소고기를 올리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훅


퍼진다.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내오고 자리를 잡아서 먹을 준비를 서둘렀다.

준영이 늘어지는 몸을 평상 위에 뉘었다. 무더운 7 월의 날씨였지만 산 밑이고 그늘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카페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동안 휴일도 없이 일하다 보니 얼마 만에 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 두 캔에 취기가 올라왔고 얼굴이 아까보다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도하가 얼음 잔을 건넸다. 어디서 얻어온 건지 모르지만 긴 유리컵 안에 얼음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건네받아 쭈욱 들이켜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아, 살겠다.”

“그러게 마시지 말라니까.”

“두 캔밖에 안 마셨어.”

도하가 준영의 달아오른 얼굴에 대고 손으로 부채질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니 준영이 그대로 다시 평상에
드러눕는다. 도하도 그 옆에 모로 누워서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준영을 내려다봤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애들은?”

“몰라요. 고기 잡는다고 아까 난리 치더니 없어졌어요.”

“좋을 때다.”

“좀 자요. 내가 이따가 깨워줄게.”


그러면서도 손으론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하길래 준영이 그 손을 끌어 제 가슴에 같이 올려놨다. 쿵쿵, 심장이
뛰는 게 고스란히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도하가 그 부위를 어루만졌다. 아랫입술을 슬며시 빨면서 눈만 움직여
주변을 살피는데 다들 물가에 내려간 건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몇 사람 있을 뿐.

“키스하고 싶다.”

“그러지 마. 너 이제 얼굴 다 팔렸어.”

준영은 그 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래도 전엔 도하랑 같이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나선 아니었다. 도하가 카페에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알아보기 바빴고 사인을 부탁했다.

아까 백숙을 주문하러 간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하의 이름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배우가 아니냐고 먼저


물었다. 이 산골에 사는 중년 부부까지 알아볼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구나 싶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평범한 연애는 이제 못 하겠구나,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노골적으로 변하는 손길에 누가
볼세라 그 손을 잡아서 바닥으로 내려놨다. 도하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몸을 더 바싹 밀착했다.

“더워.”

“이게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집에 가서 실컷 안으라니까.”

“별거 다 해도 돼요?”

그 말에 준영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무섭다고 했더니 도하가 준영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내가 선물 사 왔어요.”

그 말에 준영이 흠칫 떨었다. 누구를 위한 선물이냐고 물었더니 둘 다 위한 거란다. 이상한 팬티나 아니면 기타


비슷한 것들이겠지 싶어 인상이 구겨졌다. 도하가 깍지를 낀 상태로 엄지로 손바닥 안쪽을 꾹 누르면서 문질렀다.

“지금 눈 좀 붙여요. 오늘 긴긴밤이 될 테니까.”

“나 내일 카페 나갈 거야.”

“내가 대신 나갈게요.”
“손님 다 쫓아내려고?”

“그것도 괜찮네.”

“너 솔직히 말해봐. 나 망하길 바라지?”

“미움받을까 봐 대답 안 할래.”

준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흘겼다. 도하가 몇 번 카페를 관뒀으면 하고 내비친 적이 있길래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진심이었나 보다.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일하느라 매달리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더는 그 얘기는
묻지 않았다.

* * *

연우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나서 침대에 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풍선껌 하나를 꺼내 씹다가 풍선을 크게
불어 터트렸다. 강이건은 집에 잠시 들르러 갔고 저만 도하네 집에 남겨져 있었다.

리모컨을 들고 에어컨을 켜다가 잠시 멈칫했다. 책상에 놓인 다른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의


휴대전화였다. 괜히 방문 쪽을 한 번 쳐다봤다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패턴이 잠겨 있는 걸 능숙하게 풀어 통화목록과 메신저를 뒤졌다. 연우라고 적힌 제 이름이 제일 많았는데 그


옆에 하트가 표시된 걸 보고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깨물면서 웃었다. 목록을 아래로 주르륵 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목록에 김유나가 있었다. 통화한 건 아니고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 같았다. 껌을 씹는 동작이 느려졌고, 이번엔
메시지 함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김유나랑 주고받은 메시지는 별다를 게 없었다. 여름방학 시간표를 공유하고,
숙제 얘기가 오고 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휴대전화를 얼른 책상에 올려두고 침대에 올라가 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문이 열리고 이건이 들어왔다. 눈만 슬쩍 들어 쳐다보니 접시에 수박을
잔뜩 썰어서 가져왔다.

“연우야. 수박 먹어.”

“…웬 수박?”

“엄마가 잘라주셨어. 아래층에 반 주고 나머지 반은 너 먹으라고 가져왔어.”

“지금은 생각 없어.”

종일 계곡에서 소고기에 닭백숙까지 뜯었더니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이건이 그것을 도하네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 가운데 수박을 넣어 놓고 나서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연우가 한 번씩 이곳에 올 때마다 도하는 서슴없이 방을 내줬다. 까칠한 성격을 생각하면 꽤 의외였다. 조금
전만 해도 수박을 전해주며 고맙다고 했더니 좋은 밤 보내라고 인사까지 해주었다. 설마 둘 사이를 눈치챈 건가
싶어 뜨끔했지만, 도무지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연우는 안방 침대에 누워 에어컨을 틀고 이불로 다리만 덮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길래 그쪽으로 가서 고개를
쭈욱 빼고서 들여다보니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해?”

“응.”

“영화 볼까? 태블릿 가져왔는데. 아니면 거실에서 볼래? 도하 형네 TV 엄청 크잖아.”

연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건이 눈만 끔뻑였다. 분명 자신이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또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다
혹시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서 그러나 싶어 물었다.

“아저씨한테는 안 가 봐?”

“내일 잠깐 들를 거야.”

“…응.”

연우네 아버진 전처럼 술을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퍼먹지 않았다. 허구한 날 두드려 패던 아들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떠난 게 꽤 충격이었는지 갈수록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고, 매일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일도 하고 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분이 별로야?”

“아니, 왜.”

“그냥… 표정이 조금 안 좋은 거 같아서.”

잠시 생각하던 연우가 눈을 고양이처럼 치켜떴다. 이건이 괜히 흠칫해선 몸을 뒤로 물려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렇게 쳐다보는 거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뭘 또 잘못했나 본데.

“야. 너 왜 김유나랑 연락해?”


“어?”

“왜 연락하냐고.”

“내가?”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니었지만 자긴 모른다는 듯 ‘내가?’라고 물으니 연우는 슬슬 열이 올랐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보는데 이건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메시지를 주고받은 게 기억이 났는지 아, 하는 얼굴을 한다.

“그거 숙제 물어보느라고 연락한 거야.”

“너는 학원 친구가 김유나밖에 없어?”

“그건 아닌데, 영훈이나 우진인 다른 데 다니기도 하고…. 또… 유나가 공부도 잘하니까.”

퍽. 풍선이 크게 부풀었다가 터졌고 연우는 여전히 이건을 향해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건이
어색하게 웃자 이번엔 휴지에 껌을 싸서 뱉더니 그대로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다. 난 잘래.

이건이 당황해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자. 나도 자러 간다.”

그 말에 연우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내고 이건을 불렀다. 이건이 멈춰 서서 보니 이불을 내려 눈만 내놓은 채


손을 빼선 이리 오라고 까닥까닥한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이건이 가까이 다가가자 연우가 이불을 완전히 젖히고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서 자.”

“어?”

“왜. 싫어?”

이건이 입을 벙긋댔다. 싫은 건 아닌데…. 라고 말끝을 흐리면서도 선뜻 자겠다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연우가


서울에서 몇 번 올라올 때마다 둘이 잤는데 그때마다 자꾸만 몸을 만지는 바람에 아래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그건 좀….”
“내가 잡아먹어?”

“그건 아니지만 좀….”

“아, 씨발.”

“욕하지 말고.”

“알았어. 욕 안 할 테니까 잠깐 올라와서 팔베개만 해줘.”

이건이 잠시 고민하다 알았다고 하고 위로 올라갔다. 도하네 집에 있는 가구는 소파며 TV 며 다 컸는데 왜 침대는


싱글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바로 옆에 누워서 팔을 위쪽으로 뻗으니 연우가 냉큼 그 팔을 베고서 입가에
비로소 미소를 머금는다. 모로 누워서 빤히 쳐다보길래 이건이 괜히 입이 말라서는 혀로 입술을 적시고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야….”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에 이건이 고개를 돌려 연우를 쳐다봤다. 씻고 나와서 그런지 피부가 물기를 머금어 더
뽀송뽀송했다. 연우는 서울에 올라간 뒤로 마음이 편해서인지 여기 있을 때보다 얼굴도 훨씬 밝아지고, 편안해
보였다. 이건은 그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

“김유나랑 연락하지 마. 짜증 나니까.”

“…….”

“왜 대답 안 해?”

이건이 잠시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를. 유나도 더는 저한테 관심이 없었는데 연우는 아직도 유나를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게 놀라웠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연우가 볼멘소리를 한다.

“너는 내가 너 말고 다른 애랑 친하게 지내면 좋아?”

“나야 좋지. 너한테 친구가 생기면.”

이 병신이. 까득 연우가 매서운 눈초리로 이를 갈길래 이건이 흠칫했다.


“나 좋다고, 나랑 사귀자고 하는 거면? 그래도 좋아?”

이건이 눈을 끔벅였다. 연우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고 키스하는 상상을 하니 그건 또 싫었다.

“아니… 그건 별로.”

“거봐.”

“같은 거야?”

“어, 같은 거야.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알았어.”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쉽게 그러겠다고 하니 꾹 다문 연우의 입가로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뺨과 목에
닿는 강이건의 팔뚝을 꾹 누르면서 괜히 눈을 마주쳤다.

“키스할래?”

이건이 대답도 하기 전에 연우가 이건의 뺨을 붙들고는 제 쪽으로 보게 하였다. 이건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연우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벌써 몇 번째 이런 식이다. 저번에도 키스 좀 하고 진도 좀 나가려고 했더니 아직 우린 미성년자고 어쩌고 하면서


고리타분한 얘길 계속하는 바람에 화가 나선 귀를 깨물어 버렸다. 그때 물린 충격 때문인지 이건은 이번엔
미성년자 얘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연우가 몸을 움직여 이건의 위로 올라가서 입술을 포갰다. 이건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꾹 다물어진
입술을 혀로 핥아주고 입술을 포갠 채로 문지르며 으응, 하는 신음을 내자 엉덩이 아래 깔린 이건의 성기가
꿈틀꿈틀 일어서며 발기하는 게 느껴진다. 슬쩍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연우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봤다.

“몸 만져줘.”

“뭐?”

“하자고 안 할 테니까… 그냥 몸만 만져줘.”

이건이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들고 있으니 연우가 그 손을 잡아 제 셔츠 안으로 집어넣는다.


손바닥에 부드러운 피부가 와 닿자 이건이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을 내뱉었다. 매끈하고 군살 없는 허리를
만져주니 연우가 아랫입술을 다시 깨물었다가 놓으며 이건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키스, 해줘.”

이번엔 이건이 빼지 않고 바로 연우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능숙한 키스가 아니라 치아가 닿고 혀가 마구잡이로
엉켰지만 그래도 황홀했다. 몸을 더듬는 이건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연우가 손을 아래로 내려 이건의 성기를 만지자 이건이 몸을 흠칫 굳히는 게 느껴진다. 바지 위로 자꾸만


만져주니 제 입술을 빠는 힘이 거세진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 사이로 이건이 하아, 하고 숨을 토해내는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연우는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끝까지 가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확히 10 분을 그러고 나니 이건은 칼같이 연우를 떼어내며 또다시 선비 같은 소리를 했다.
섹스는 성인이 된 후에 해도 괜찮다는 그 말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번에도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 * *

씻고 나온 도하가 머리를 덜 말린 채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선 준영이 책을 보던 중이었는데 도하가 다가오자


옆으로 비켜나며 자리를 만들었다. 도하는 옆으로 바싹 붙어 앉아 준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선 책을 흘긋
들여다봤다.

“재미있어요?”

“응.”

“나 심심해.”

그 말에 준영이 웃으며 책을 덮고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책이 사라지자 그 자리로 도하가 파고들어서는 준영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머리카락이 젖은 걸 발견한 준영이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한쪽에 걸쳐둔 수건을 가져와
도하의 머리에 대고 문질렀다.

“머리 덜 말랐어. 일어나 봐 말려줄게.”

스르륵 내려와 바닥에 앉으니 준영이 일어나 드라이기를 가져온다. 그것을 콘센트에 연결하고 나서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도하의 머리에 대고 말리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헝클었더니 머리가 부스스해졌고 갑자기 어릴 적
파마했을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손가락으로 빗겨주고 나서 드라이기를 끄니 도하가 다리에 몸을 기대고선
고개를 위로 젖혀서 준영에게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키스해줄래요?”

준영이 상체를 숙여 입술을 거꾸로 겹쳐 물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문질러지고 준영의 뺨을 만지던 손은
뒤통수로 가서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준영이 입술을 떼어내자 도하가 그대로 일어서더니 준영을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가선 뺨을 보듬었다. 키스도 하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자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얼굴 뚫어지겠어.”

“그동안 못 본 거 다 보려고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그랬어?”

“그랬어라니. 몇 번이나 뛰어오고 싶었던 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형은 안 그랬어요?”

“나도 뭐….”

“뭐, 뭐?”

“보고 싶었어. 그래서 동영상도 찾아보고 그랬어.”

준영이 손을 위로 뻗어 도하의 뺨을 만지다 귀로 손이 옮겨갔다. 귓불을 가볍게 문질러주자 도하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무는 게 보인다.

“나 없다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 주고 그러지 마요.”

“야, 너는 사람을 뭘로 보고….”

“형은 믿는데 다른 놈들을 못 믿겠어서 그래.”

“너 말고 나이 든 남자 누가 좋다고 해.”

“왜. 내 눈엔 제일 잘생기고 사랑스러운데.”

입술을 겹치고 한참이나 키스를 나누던 중 도하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반짝인다.

“아, 선물. 차에 두고 왔다.”


그 말에 준영의 볼이 씰룩 경직됐다. 실은 아까 차 뒤에 상자가 있길래 슬쩍 열어 봤다가 그대로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모양에 하마터면 그대로 라이터로 불을 붙여 태워 버릴 뻔했다.

“됐어. 나중에 받을게.”

황급하게 말리는데 들어먹을 녀석이 아니다.

“왜요, 주고 싶어서 가져온 건데.”

“아니야. 넣어둬.”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 키를 챙겨 후다닥 현관 쪽으로 향했다. 말릴 새도 없이 신발을 신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얼마나 빠른지 붙잡고 뭐할 시간도 없었다. 누워 있던 준영이 몸을 일으키며 절망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 밤은 아주 긴긴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밖에서 삑 소리가 나더니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러더니 곧바로 현관문이
다시 열리고 도하가 들어왔다. 아주 기를 쓰고 뛰어 올라왔구나. 손에 들린 건 역시나 제가 본 그 문제의
상자였다. 그냥 아까 불태워 버릴걸. 뒤늦게 후회를 하는데 도하가 그것을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선물은 내 마음에 드는 걸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입은 걸 보고 내가 만족하고, 그다음엔 내가 열심히 해서 형이 만족하고.”

본심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며 눈까지 찡긋하는데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걸 열어보지도 못하고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도하가 쪽, 키스를 날리고 안방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그 틈에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데 아까
봤던 그 옷이 맞다. 꺼내서 펼쳐 드니 기가 막혔다.

치마는 얼마나 짧은지 엉덩이가 다 드러날 것 같았고 앞에 단추 또한 왜 있는지 영문을 모를 만큼 파여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고 안방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준영이 고개를 젓고 나서 셔츠를 위로 올렸다.

그래도 몇 번 했다고 처음처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저도 은근히 즐기는 것도 있어서 그냥


미친 척 그걸 입었다. 팬티를 입고 옷을 갖춰서 입는데 보니 역시나 엉덩이를 간신히 가리는 길이다. 맙소사.
흉하잖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도하가 나온다. 그걸 본 도하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게 번졌다.
“와. 끝내준다.”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다.”

“사진 찍고 싶다.”

“죽여 버릴 거야.”

도하가 웃으며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입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준영은 아니라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근육 덩어리인 녀석이 이걸 입은 걸 보고서 제 눈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테이블에 엎드려 봐요.”

준영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테이블에 상체를 엎드렸다. 그러자 치마가 올라가며 엉덩이가 반이나 드러났고
레이스 팬티가 보이자 도하가 입술을 핥았다. 그대로 그 앞에 가서 앉아 엉덩이를 잡아 벌리니 준영이 이를 꾹
깨물면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도하가 혀를 내밀어 레이스 부위를 혀로 핥았다. 침을 잔뜩 묻히고
손으로 주무르는 사이 준영의 목과 귀는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손 묶어줘요?”

“아니, 괜찮아.”

그 말에 도하가 다시 엉덩이를 양쪽으로 붙잡고 혀를 가져갔다. 앞니로 슬쩍 깨물고 입술로 문지르다가 손끝으로
힘을 주어 팬티 가운데 부분을 찢었다. 찌익, 레이스 가운데가 벌어지며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번엔 그곳에 혀를 대고 문질렀다. 회음부를 핥다가 천천히 올라가 구멍에 혀끝을 문지르자 준영이 양팔에
얼굴을 파묻으며, 으응, 하는 신음을 낸다. 도하가 손가락으로 구멍 입구에 대고 꾸욱 밀어 넣었다.

침이 묻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갔다. 간만에 섹스라 그런지 조금 빠듯한 감이 있었고,


손가락을 두 개로 늘리고, 세 개로, 그리고 나중엔 네 개로 늘려 안을 넓혀줬다.

손가락이 빠듯하게 들어가자 준영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하체를 들썩였다. 볼기는 혀와 이로 괴롭히면서 구멍을
손가락으로 연신 쑤셔대니 죽을 맛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팔을 뒤로 뻗어 도하의 손을 붙들었다.

“왜요? 해줘요?”

“응.”
“제대로 안 들려.”

“…해줘….”

“입고 있는 옷이 뭔지 몰라요?”

도하가 볼기에 입술을 대고 말하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안쪽을 긁었다. 덕분에 준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인님, 아, 해, 해주세요….”

도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잘 들리지 않는다고 다시 시킬까 하다 정말 성질을 낼까 봐 포기하고
곧 손가락을 빼낸 다음 바지를 내려 제 성기를 꺼냈다. 잔뜩 부푼 성기에 침을 뱉고 나서 위아래로 문지르는데
준영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본다.

잔뜩 붉어진 눈이며 벌어진 입술을 보고 있으니 간당간당하던 이성의 끈이 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둥을 쥐고 구멍 입구에 대고 둥글게 문지르는데 준영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흘린다. 곧바로 삽입하지 않고
자꾸 문지르기만 하니 애가 닳는지 스스로 허리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자꾸 뒤로 뺐다.

철썩, 도하가 그 엉덩이를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아, 준영이 신음하며 다시 엉덩이를
움직이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엉덩이를 때렸다. 금세 붉은 손자국이 난 엉덩이를 콱 움켜쥐고 벌리고선 그
안으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에 준영의 어깨며 등이 경직되는 게 보였다. 도하가 그대로 목 아래쪽 지퍼를
내리자 옷이 벌어지며 맨 등이 드러났다. 벌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척추를 따라 혀로 핥아 올라가자 구멍이
움찔거리며 더 수축한다.

그대로 꾹꾹 쑤셔주며 뿌리까지 집어넣고 나서 준영의 등에 제 가슴을 바싹 붙였다.

“아파?”

“아, 으응, 아니.”

꽉 맞물린 채로 더 힘주어 누르니 준영이 눈을 감으며 아, 하고 신음을 지른다. 1 층 사는 동현의 식구들이


피서를 갔다고는 하나 바로 위층엔 이건과 연우가 잠들어 있었다. 그 사실에 신음을 참으며 팔등에 입술을
파묻었다.

잠시 후 도하가 허리를 뒤로 움직였다가 천천히 다시 밀어 넣는다. 느긋한 속도로 밀어 넣었다 뺐다가 하니 안쪽


내벽에서 점점 열이 피어오르고 안달이 났다. 더 해달라고 손을 뒤로 뻗을 새도 없이 도하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아랫배를 감싸더니 그대로 귀두부터 뿌리까지 꽉 쑤셔 박는다.

철썩 살이 부딪히며 준영이 읍, 하고 제 팔등을 입술로 깨물었다. 관자놀이와 손등에 핏줄이 서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퍽퍽, 아래에서 세게 박아댈 때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거 같았다. 도하가
나머지 한 손을 목 안쪽으로 넣어 준영의 고개를 치켜들게 했다. 준영이 아랫입술을 꾹 한 번 물었다가 놓으며
도하를 흘깃 돌아봤다.

“다, 으응, 들려, 아, 아아.”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귀를 핥고 빨면서 속도를 높였다. 철썩철썩 신음보다 추삽질하며 내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준영이 자꾸만 입술을 말아 깨물길래 도하가 나중엔 그 입을 커다란 손으로 틀어막았다. 준영이 지르는
신음이 손바닥에 홧홧한 열기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준영이 다 찢어진 레이스 팬티를 허벅지에 걸친 채로 카펫 위에서 엉덩이만 치켜들고 헐떡였다. 그 뒤에서 도하가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개처럼 핥아댔다. 회음부를 혀로 핥아 올리고 고환을 입안에 넣고 굴리니 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양손을 끈으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다리가 점점 좁혀지니 도하가 허벅지를 잡고 옆으로
벌려 구멍이 훤히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혀로 주변을 핥아주니 준영이 눈이 풀려선
거친 숨을 토해냈다.

발기한 준영의 성기에선 맑은 액이 찔끔찔끔 새어 나와 카펫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도하가 손가락을 빼내고


그대로 바닥에 누운 후 준영을 끌어와 제 하반신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게 했다.

성기를 쥐고 준영의 구멍 입구에 맞추니 준영이 천천히 엉덩이를 내린다. 압박감에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야금야금 잘도 먹어치우더니 결국 마지막까지 집어삼키고 나선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자극을 줬다.

도하가 손을 위로 뻗어 준영의 젖꼭지를 꼬집고 문질렀다. 빳빳하게 곤두선 젖꼭지를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붉다
못해 짓무르기 직전이었다.

“젖꼭지도 주인 닮아서 존나 야해.”

준영이 그 말에 슬쩍 웃더니 허리를 앞뒤로 더 문지르며 제가 원하는 곳에 성기가 비벼지도록 유도했다. 아,


전립선 부위에 눌려 자극을 받자 그가 허리를 휘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으음, 하는 신음을 참았다. 도하가 살도
없는 가슴을 쥐어짜듯 몇 번 움켜쥐다가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다리 세워 봐.”

준영이 굳혔던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세우자 도하가 준영의 허리를 잡고 위로 퍽, 하고 쳐올렸다. 아, 준영이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는데 성기에서 울컥하고 정액이 쏟아져 도하의 배를 적셨다.
그 상태로 허리를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준영이 마치 두더지처럼 몸이 통통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성기가 빠지기 직전 다시 허리를 잡아채 올려주고, 다시 잡아채 올려 쳐주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준영의
성기가 다시 발기를 시작했다.

“잠깐, 도, 아아, 으으응, 잠깐만.”

도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찌걱찌걱하는 소리와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준영이
발끝에 힘을 주고 구멍을 더 좁혔다. 이미 사정한 데다 계속 안쪽에서 자극이 가해지니 배변감이 느껴지며 소변이
마려운 것처럼 또 다른 사정감이 휘몰아쳤다.

“아으응, 잠깐만, 야, 아아아응.”

“그냥, 싸요. 괜찮, 아. 후우.”

퍽퍽퍽, 철썩철썩, 퍽퍽, 퍽퍽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는데 간신히 신음을 죽이며 참던 준영이 으으응, 하는
울음소리를 내자 성기에서 물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구멍이 빨판처럼 쫙 달라붙으며 성기를 쥐어짰고 도하가 큭
신음을 내며 마지막으로 위로 올려치며 몸을 떨었다. 아,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는데 준영이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선 몸을 움찔거리고 떨어댄다.

도하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준영을 꽉 끌어안았다. 제 배를 적신 액체에 대해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준영이 구멍을 움찔거리며 도하의 어깨에 맥없이 풀썩 쓰러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제 구멍에 들어온 도하의
성기가 전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릴 것도 없이 등 뒤가 오싹해졌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숨을 헐떡이는데 도하가 급하게 다시 입술을


찾아와서 겹쳐 문다. 그러고 나서 그대로 준영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껴안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
준영이 엉겁결에 양다리로 도하의 다리를 휘감았다.

“…뭐야.”

신음을 억지로 참느라 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에 도하가 잠시 애석한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대로
준영을 들어 움직인다.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구멍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크기에 준영이 설마 해서는 도하를 불렀다.

“씻으러 가는 거지…?”

도하가 대답하지 않고 창가 앞 책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준영을 눕혔다. 놀란 얼굴로 말릴 새도 없이 성기가 다시


구멍 안을 들락이며 움직였다.

“나, 너무, 힘들어….”

“알았어요.”

이 자식은 맨날 알았다면서 들은 척도 안 한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찢어지는 거 같아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도하가 허리를 움직이면서 한 손으론 막 사정을 마치고 수그러들던 준영의 성기를 앞뒤로
문지른다.

탈수기에 넣고 쥐어짜지는 기분에 준영이 아랫입술을 물고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했지만 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앞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가 하길래 준영이 제풀에 지쳐선 아예 넋을 놓고
허공만 바라봤다. 천장이 흔들리고 구멍은 화끈거리는 와중에도 다시 열감이 피어오르더니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
간다.

도하가 상체를 숙이며 다급하게 입술을 찾아 물었다. 허리는 난폭하게 움직이면서 키스는 어찌나 다정하게 하는지,
그 와중에도 기가 찼다. 그렇게 두 번이나 더 사정하고 준영이 기절하기 직전에 도하가 웃으며 반지를 손에
끼워줬다. 낮에 반지 빼면 후회하게 해준다더니 그게 녀석이 앙갚음한 거란 걸 반지를 끼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 * *

후두둑, 후두둑,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준영이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정신은 아득했고, 몸은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아프고 쑤셨다. 간신히 눈을 뜨고 나서
잠을 깨려 손을 드는데 아고고, 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털썩 손을 기운 없이 내리고 나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는데 도하가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만 움직여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 시다. 아, 출근해야 하는데. 그렇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으니 생각만 할 뿐이었다.

10 여 분쯤 누워 있다가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디디는데


근육이 당기며 제 몸이 아닌 느낌이다. 부들부들 다리에 간신히 힘을 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오며 도하를 찾는데 보니 창가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비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한동안 날이 가물어 논이 쩍쩍 갈라지더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도하가 돌아보는데 입가에 미소가 반듯하게 걸린다. 가까이 다가오길래 준영이 소파로 가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엉덩이 또한 불에 덴 것처럼 화끈댔다. 아무래도 출근하긴 틀렸구나 생각하며 소파에 드러누우니 도하가
다가와선 바닥에 앉아 눈을 맞춘다.

헝클어진 준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스럽다. 어젯밤 폭군처럼 저를 몰아붙이더니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기가 막혀선 힘없이 웃었다. 도하가 손을 뻗어 준영의 허리를 살살 주물렀다.
“오늘 출근 못 하겠죠?”

“너 일부러 더 그랬지?”

“그러게 하루 쉬고 나랑 있어 준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왜 자꾸 튕겨서 화를 자초해요.”

눈을 가늘게 늘이고 노려보니 도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을 움직여 점점 위로 올라온다. 뒷목을 꾹꾹
주무르고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

그렇게 손은 움직이면서도 얼굴은 가만히 소파에 대고서 눈을 맞추고 쳐다만 봤다. 눈동자 속에 새겨 넣기라도 할
작정인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빗소리가 더 거세진다.

“비가 많이 오려나 보다.”

“그러게. 비도 오는데 우리 부침개 부쳐 먹을까요? 내가 해줄게.”

“좋아. 이건이랑 연우도 부르자.”

그 말에 도하가 질색할 줄 알았는데 선뜻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신김치가 넉넉할지 모르겠다고 걱정까지
하길래 준영이 입가에 작은 웃음을 만들었다.

“우리 도하 많이 너그러워졌네.”

“예쁘지?”

“어, 예뻐.”

“그럼 내가 좋아요, 강이건이 좋아요. 3 초 안에 대답해요.”

“장난해, 너지.”

“그럼 미정 이모랑 나 둘 중에선?”

“가족은 건드리지 마.”

“왜 이래. 나는 우리 부모님보다 형이 더 좋아.”

“야, 그건 좀….”

“못 믿네. 내 사랑이 그것밖에 안 돼요? 어제 덜 시달렸지?”

다그치니 준영이 귀를 틀어막고 등받이 쪽으로 몸을 돌린다. 나 좀 보라고 몇 번이나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엔 도하가 준영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간지러움을 태웠다.

준영이 기겁하며 하지 말라고 몸을 비틀었고 도하가 잽싸게 소파로 올라가선 그런 준영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좁은 소파에 나란히 붙어서 누워 있으니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이 먼저 조금 더 자자며 눈을 감았고
도하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눈을 감은 채 준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귓가로 심장 소리와 나직한 숨소리, 경쾌한 빗소리가 뒤섞여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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